세종대왕 [박종화] 03
세종대왕3
박종화
함흥
아버지 태상왕은 공주의 깎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또다시 기막히고애운한,
아버지와 딸 사이의 이별을 나눈다.
태상왕의 행차가 떠날 때 경순공주는 절문 밖 동구 앞까지 나가서 아바마마를
작별하여 전송했다.
"아바마마, 그럼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함흥 가옵시면 몇 달이 되시올지 예측하
기 어렵습니다만은 소녀가 아까 아뢴 말씀을 잊지 마시옵소서. 용은 구름을 일으
키고 범은 바람을 부른다는 그 말씀이올시다. 삼가 다시 아뢰옵니다."
경순공주의 신신당부하는 말뜻을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으나, 태상왕 이
성계만은 잘 알아들었다.
"허 허 허, 노성해진 네 말을 잘 알아듣겠다. 과히 염려하지 마라"
태상왕은 연에 올라 세 번 네 번 공주와 작별하기를 아쉬워했다.
태상왕의 행차는 조촐하기 한량없었다.
절대로 거둥행차처럼 화려하게 차리지 말라고 송도서부터 엄명을 내린 때문에
그의 행차는 감사와 원의 행차만도 못했다.
별감 두어 사람, 나인 두어 명, 그리고 내시 서너 사람과 연을 메고 나가는 무
예청들뿐이었다.
태상왕의 행차는 양주로 가서 회암사에서 강비와 방석과 방번, 이제의 명복을
또 한 번 비는 재를 올리고 다음날은 연천 소요산에서 하루를 지낸 후에 안변석
왕사에 들렀다가 함흥으로 돌아갔다.
함흥 옛 집터에는 이성계가 임금이 되어 즉위한 이후 함흥 본궁을 화려장엄하
게 지어서 자기의 고향을 빛나게 했던 것이다.
태상왕 이성계는 함흥 본궁으로 들어가 행장을 풀었다.
함경감사 이하 각읍 수령들이 마중을 나오고 관북일대의 선비들의 환영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함흥 본궁의 전각 이름은 경흥전이라 이름했다.
이 집은 태상왕 이성계가 살던 옛 집터다. 정종 방과와 태종 방원이 다 이 집에
서 났던 것이다.
나라를 차지하여 경사가 일어났다 해서 전각 이름을 경흥전이라 했다.
함경감사가 있는 외에 함흥부윤이 있고 판관교수가 정치를 했다.
이전에는 여진이 살고 있는 곳이다. 고려 예종 2년에 범 같은 장수 윤관은 여진
족속을 추방한 후에 함주 대도독부를 설치하고 크게 성을 쌓았다.
다음해에는 고려에서 나약한 정책을 써서 여진한테 도로 되돌려주어버렸다.
그 뒤에 원의 땅이 되어 영흥에 예속되었던 것을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조정에 드나들면서 쌍성을 회복하고 고을 이름을 함주라 했던 것이다.
태상왕 이성계가 소년 때부터 고려조정에 벼슬하게 된 동기는 그의 아버지
가 쌍성을 회수하는 계획을 공민왕한테 건의한 연줄로 인해서 차차 고려조정
에 벼슬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남정북벌, 치먁자와 싸울 때마다 이기는 명장이 되었고, 명성이
혁혁했던 그는 마침내 고려조정의 명령을 거역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하는 친
명정책을 쓴 후에 창을 거꾸로 들고 고려조정을 붕괴시킨 후에 혁명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던 것이다.
함흥 북현에 성고나산이 있으니, 이 산이 함흥의 주산이다.
다시 그 북편 성관산이 있으니, 이 산이 함흥의 주산이다.
다시 그 북편 90리쯤 가서 기린산이란 명산이 있다.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올라
가 방자한 소리를 내어 떠들면 홀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나면서 앞뒤
를 분별할 수 없어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까닭에 사람들은 이 산에 오르기만
하면 무한 조심하고 공경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함흥부 동북편으로 45리쯤 가면 덕산이 있고, 다시 동편을 바라보면 20리쯤 되
는 곳에 운주산이 있다. 다시 그 동편 40리허에 우두산이 있고, 북편 40리허에
는 오봉산이 있다.
동편에는 70리를 가면 저 이름 높은 함관령이 하늘을 찔러 솟아 있고, 동북편으
로 73리쯤 가면 차유령이란 큰 재가 있는데, 차유령과 함관령과의 거리는 겨우
20리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북쪽으로 140리를 가면 저 유명한 부전고원의 부전령이 있다.
함흥 서편으로 25리쯤 가면 중봉산이 있고, 다시 45리를 가면 송동령이 있
고. 서북으로 90리를 가면 천불산이 있고, 북으로 110리를 가면 저 유명한 황초
령이된다. 기막한 첩첩산중 산악지대다.
함흥부에는 남으로 30리쯤 가면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에 맞닿은 창
해 바다가 사람의 마음을 흥그럽게 한다.
이 넓고 푸른 바다로 흘러내리는 강물은 다섯 개가 있다.
함흥부에서 서편으로 2리쯤 가면 성천강이 유유히 흘러서 동해 바다로 들어
간다.
이 성천강의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한 줄기는 갑산 땅 화기령에서 흘르들어오고,
한 줄기는 평안도 회천 땅에서 흘러내려서 흡란동이란 곳에서 합류가 되어 도
련포를 거쳐서 바다로 들어간다.
도련포란 포구는 옛적에는 도린포라고 불렀다. 함흥부 35리허에 있다.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이전 서북편 대장으로 여진족 납흡을 정벌할 때 이 포
구를 출발해서 출전했던 것이다.
함흥부 동편에서 8리쯤 가면 호련천이 있고 남쪽으로 30리쯤 가면 미진포가
있다. 다시 서편으로 18리를 가면 가을한내가 있었다.
강과 바다, 푸른 물줄기가 감도는 곳에 섬이 둘 있는데, 하나는 꽃섬이라 부
르고, 하나는 솔섬이라 부른다.
꽃섬은 함흥읍에서 45리 되는 곳에 있는데 대나무가 울창하고, 솔섬은 함흥부
동편85리허에 있는데 토지가 평평하고 넓어서 주위가 30리나 된다 해초를 무
진장으로 딸 수 있는 무인도이다.
중중첩첩한 산악지대만 바다가 있고 강이 흐르니, 산해진미가 풍부하다. 여기
에 평야 넓은 들이 한 곳 있으니 함흥평야다.
이곳은 이성계가 납흡과 싸워서 적장 세 사람을 일시에 관목 꽤듯하여 크게
성공한 전쟁터이기도 하다.
토산품으로는 실, 삼, 대, 그리고 화피와 인삼, 복령, 오미자, 송이, 황어, 전복
, 조개, 홍합, 고등어, 해삼, 은어, 비웃, 광어, 수어, 홍어, 방어, 삼치, 굴, 먹기 좋
은 생선을 갖추갖추 맛볼 수 있다.
다시 짐승의 털을 이용해서 쓸 수 있는 잘과 청서, 수달피가 흔해서 겨우살이
털옷으로 이용하기 좋다.
산바다 산성이 있으니, 모두 다 여진족속들이 쳐들어오면 막아내던 전쟁터다.
백운산성은 함흥읍에서 서편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고, 덕산고성은 함흥 동북편
48리허에 있고, 퇴조 고성은 동편으로 60리허에 있고 중봉고성은 함흥부 서편 27
리밖에 있고, 한당고성은 함흥 서편 40리허에 있고, 오로촌 고성은 함흥읍 북
편 35리쯤 되는 곳에 있다.
이쯤 하면 함흥의 지세를 짐작할 수 있다.
태상왕은 함흥에 들어가 감사와 군수들의 지영을 받으며 본궁인 경흥전에 올
라 하룻밤을 지냈다.
선조의 산을 찾기로 했다. 할아버지 선래가 묻혀 계신 의릉과 할머니 박씨의 무
덤인 순릉에 올라 절을 올렸다., 임금이 된 후에 처음으로 할아버지 무덤에 절
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개가 무량했다. 지금 자기는 임금이 아니라 태상왕이 되었다. 실권
은 아들 방원이한테 뺏기고 뒷방차지다. 마음이 서글프지 아니할 수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능침은 한 산판 안에 있으나 합장을 아니하고 봉분을 따
로 했으므로 아버지의 능침은 정릉이라 하고 어머니의 능침은 화릉이라 했다.
태상왕은 아버지의 능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나니 기쁘고도 슬프고, 좋고도
한심한 생각이 어울어져 일어나서 슬프고 기쁜 이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서 말
할 수 없었다.
이성계의 가슴에는 감구지회가 가득 찼다.
고조할아버지 이안사가 전라감영에서 살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애기를 산성별감
이란 자가 뺏어갔다.
이로 인해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고조할아버지 이안사는 산성별감을 찾아서 욕
을 한바탕 퍼부었다. 산성별감은 불같이 노해서, 군사를 풀어서 고조할아버지
를 잡으려 했다.
고조할아버지는 밤에 출가 도주를 하여 강원도 삼척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났다. 삼척 원으로 새로 부임된 사람은 전주서 싸웠던 바로
그 산성별감이었다. 큰일이었다.
고조할아버지느 다시 바다에 배를 띄우고 솔가도주를 해서 덕원으로 피했다.
이때 덕원군은 원나라의 영토였다. 몽고 사람들과 사귀어 다시 경흥에서 살다가
오천호의 장이 되는 원나라의 달로화지의 소임을 받았던 것이다.
이같이 하여 증조할아버지 행리의 대까지 원나라의 천호의 직책을 맡고 살아
왔다.
그러나 두만강 밖에서 또 하나 들어온 족속으로 천호 노릇을 하는 여진족들
은 증조할아버지 행리를 죽이려 했다.
행리는 할 수 엇밑이 아내 최씨와 함께 말을 달려 바닷가로 와서 경흥에서
남으로 40리 되는 적도로 피하여 도혈에 살았던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 생겼다. 증조 행리는 다시 덕원으로 돌아가 살았다. 행리는
덕원에서 또 다시 함흥으로 이사를 했다.
행리와 아니 최씨는 양양 낙산 관음사에서 기도를 올린 후에 할아버지 선래
를 낳았다.
나중에 자라서 장가를 박씨한테 들었다.
할아버지 춘과 박씨 사이에는 아버지 자춘을 낳았다.
자춘은 영흥 최씨에게 장가들었다.
처가가 있는 영흥에서 살다가 공민왕 때 쌍성을 탈환할 때 꾀를 내서 고려
에 바친 후에 그 공로로 고려조정에 벼슬을 하여 아들이 발신하는 터전을 만
들어 놓았던 것이다.
태상왕 이성계는 아버지 자춘의 무덤인 정릉과 어머니 최씨 무덤인 화릉에
올라 허배하고 나니 감창한 생각이 구름 일듯 일어났다. 눈물이 방울방울 옷자락
을 적시었다.
이성계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어디 나라의 임금이 될 것을 꿈에나 생각했던
가. 대대로 쫓기면서, 고국을 등지다시피 하여 윤락된 신세로 구명도생해서 삼
척으로, 덕원으로, 경흥에서 다시 경원으로, 함흥에서 또 영흥으로, 이같이 사대
오대를 헤매던 망명의 신세가 끝으로 조선국 삼천리 강산을 다스리는 제왕이
되었으니 기가 막힌 광영이다.
무궁무진한 감창한 생각을 금할 길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롭고 기쁘고 자랑스런 꿈도 이제는 벌써 일장춘몽이 되어 버
렸다. 임금이 되었다는 즐거운 꿈도 채 깨기도 전에 자기는 환과고독 홀아비의
신세가 되었고, 아들들은 임금의 자리를 겨누고 서로 싸워서 형이 아우를 죽이
고동생이 형을 죽이려 했다.
한 번쯤이라도 불행한 일이데 방원은 방번, 방석, 이제를 죽였고, 방간은 방원과
동복형제지만 서로들 칼을 빼어들고 덤벼들었다. 조카를 죽이고, 형을 귀양보
냈다.
자기는 임금의 자리를 뺏은 방원에게 상왕 방과를 통하여 방간을 놓아주라
했으나 방원의 신하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방간을 다시 전라도로 귀양보냈다.
아비의 말도 코웃음을 쳐 돌려보냈다. 이제는 삼천리 강산을 호령하던 자기의
위엄도 성금이 서지 아니했다. 아프다 할까, 분하다 할까 기가 막히도록 슬픈
일이다.
아버지 이자춘의 혼령이 무덤 속에서 꾸지람을 내리는 듯하다.
'어떻게 집안을 다스렸기에 그 따위로 다스려서 형제간에 윤기가 끊어지도록 만
들었냐? 자식을 버릇없이 가르쳐서 교만 방자한 마음을 있는 대로 다 부리게
만들어놓았구나.'
'아비의 말을 아니 듣는 불효자식은 없이해버려도 좋다.'
아버지 무덤에서는 이같은 꾸지람이 떨어지는 듯했다.
'모두 다 불초자의 욕심이 과한 탓이올시다. 하늘을 거슬렀습니다. 임금이 아니
될 것을 공연히 임금 노릇을 했습니다. 아무리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다 하나,
고려왕실을 계속해서 도와줄 것을, 쓸데없이 욕심을 내서 임금의 자리를 빼앗았
습니다. 왕씨네를 너무나 많이 죽였습니다. 소자는 왕씨들을 너무 만힝 죽이고,
정몽주며 두문동 칠십이인을 너무나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이 죄를 불초자는 오
늘 날 혹독하게 받고 있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 무덤 앞에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거짓없
는 참회를 드렸다.
늙은 태상왕은 슬프고 적적한 한을 안고 아버지 이자춘의 능에서 내려 옥교
를 타고 경흥전 본궁으로 돌아오려 할 때, 한때 군마를 거느린 군사가 능침 아래
홍살문 밖에 지영하고 있다가 한 사람의 갑옷투구한 대장이 어전에 나와 절
하고 뵙는다.
"신 안변부사 조사의 삼가 전하를 지영하오."
안변부사 조사의
'안변부사 조사의'라고 아뢰는 말을 듣는 태상왕 이성계의 용안에는 반가운
빛이 현연하게 나타났다.
"오오, 안변부사 조사의냐? 오랫동안 대해보지 못했구나. 이리 가까이 오너라."
태상왕은 반가운 정을 이길 수 없었다. 조사의를 손짓해 불렀다.
조사의는 옥교 앞으로 추창해 나갔다. 국궁재배하고 아뢴다.
"전하! 뵈온지 오래옵니다. 그러나 거둥행차가 어찌 이리 초초하십니가? 그리
고 나라의 군왕은 수도를 떠나서 백 리 밖으로 거둥을 아니하는 법이올시다.
무슨 까닭으로 이곳까지 행차를 하셨습니까? 이거, 변고올시다."
조사의는 아뢰는 말을 마치자, 이내 목이 메어 '흑흑' 느껴 울었다.
"모두 다 내 운수가 불길한 탓이로구나!"
태상왕은 옥교 위에서 흰 수염을 바람에 흩날리며 길게 한숨을 지었다.
"망극하오이다.."
조사의는 한 마디 하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태상왕은 조사의의 눈물 흘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감창한 회포를 더 한 번 느
꼈다. 잠시 후에 다시 묻는다.
"그래 너희들 집안 식구들은 다들 무고하게 지내고 있느냐?"
조사의는 목멘 목소리로 대답한다.
"네, 황공 감격하옵니다. 성상께옵서 두호해주시어 안변부사자리에 제수해주신
이래 동북면 일대의 지원을 받자와 모두 다 무사하게 지내옵니다. 수양산 그늘이
백 리까지 뻗쳤다는 격으로 모두 다 성상의 그늘로 태평하게 지내옵니다."
안변부사 조사의와 태상왕의 주고 받는 대화로 미루어 볼 때, 태상오아과 조사
의 사이는 임금과 신하라는 지위와 간격을 넘어서 더한층 친숙한 면이 있는
것을 짐직할 수 있었다.
조사의가 다시 아뢴다.
"전하, 소신이 전하를 호위하여 함흥 본궁까지 모시겠습니다."
"내 마음이 든든하다."
태상왕은 미소를 지어 간단히 대답했다.
무예청들이 어깨에 메어 모신 옥교가 홍살문 밖으로 나가자 조사의는 홍살
문밖에 나열해 있는 군사들에게 군령을 내렸다.
"태상왕 전하의 옥교를 향하여 군례를 드리라!"
군총들은 일제히 창과 칼을 내려 두 손으로 마주잡고 태상왕의 옥교를 향하
여 국궁배례를 드렸다.
"모두 다 안변부사 신이 거느린 군사올시다."
조사의가 아뢰었다.
태상왕은 고개를 끄덕여서 군례를 받았다.
태상왕이 군례를 받고 옥교가 움직이니, 조사의의 거느린 수천 군사들은 태상왕
옥교를 앞뒤로 호위하여 엄숙하게 대오를 지어 함흥 본궁으로 향했다. 태상왕은
오래간만에 군사들의 호위를 받았다.
태상왕은 송도서부터 모든 호위를 일부러 물리치고 거둥이 아니라 미행이라
고 고집하면서 한양, 양주, 연천, 철원을 거쳐서 이곳 함흥까지 왔던 것이다.
일부러 호위하는 의장을 물리친 것은 다섯째 아들 방원이 보기 싫고, 방원의 심
복들인 벼슬아치와 재상들의 감시를 받기 싫은 때문이었다.
그러나 함흥까지 금의환향을 하는 길이 막상 이같이 초초하고 쓸슬하게 되
니 마음엔 한심하고 고적한 생각이 들어 슬픔이 가득했다.
뜻밖에 안변부사 조사의가 군사를 거느려 호위해주니 마음이 든든함을 느꼈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태상왕의 젊은 왕비였던 강후의 조카가 된다. 방간의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방간은 방석의 원수를 갚아준다 하고 박포와 조사의를 움직여 함
께 방원을 공격했던 것이다.
방간이 쫓긴 후에 박포는 죽이고 조사의는 귀양을 보냈다가 태상왕의 간곡
한 당부로 정종이 태종한테 명해서 안변부사로 내보냈던 것이다.
이제 정종도 임금의 자리를 태종한테 내주어 뒷방차지가 되어 상왕으로 앉았고,
태상왕 이성계는 나라를 창업한 제일대 임금이건만 실권을 모두 다 아들 방원
한테 뺏긴 후에 초초한 행차로 고향인 함흥으로 찾아오는 것을 보니 조사의는
분함을 못이겨 가슴이 아프고 손이 떨렸다.
특별히 군사를 거느려 이모부뻘 되는 태상왕을 보호하려 온 것이다.
이날 태상왕이 함흥 본궁에 들자 안변부사 조사의는 삼군을 호령하여 함흥
본궁을 호위하고 태상왕을 모시는 일을 총지휘했다.
감사 이하 수령 방백들은 벌벌 떨면서 지공 하는 데 실수가 있을 까 주밀하
도록 공괘를 하니 함흥 천지는 새로 왕도가 된듯 저자와 거리가 풍성했다.
이날 저녁 조사의는 태상왕이 수라를 물리친 후에 조용히 침전으로 들어갔다.
지밀시녀도 멀리했다.
어전에 엎드렸다.
"신 조사의 조용히 전하께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
태조는 웃는 낯으로 대했다.
"말을 하라."
"원수를 갚아야 하겠습니다."
조사의는단도직입적으로 울화가 터지는 듯 목소리를 떨면서 아뢴다. 방 안은 조
용했다.
촛대꽂이엔 등심이 타는 듯 목소리를 떨면서 아뢴다. 방 안은 조용했다.
"무슨 원수를 갚는단 말이냐?"
"방원이를 임금의 자리에서 내쳐야 하겠습니다."
조사의의 불을 뿜는 듯한 음성이 또 떨어졌다.
방원을 임금의 자리에서 내 쳐야 하겠다는 조사의의 말을 듣는 태상왕 이성
계는 홀연 가만히 한숨을 지었다. 은빛 수염이 실 날리듯 푸르르 날렸다.
"내 자식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없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더니 이제는 너무나 방
약무인하다. 그러나 어찌하느냐. 이제는 내가 늙어서 아무런 힘도 없다. 도대체
내 명령이 서지를 않는 구나!"
태상왕의 음성은 애수가 어렸다.
조사의가 아뢴다.
"전하, 너무나 심약하신 말씀을 하시어서는 아니되십니다. 뜻과 마음을 굳세게
지니시옵소서."
"아무리 굳게 마음을 지니려 하나 일이 되어먹지 않는 것을 어찌하느냐. 모두
다 손발이 맞지 않는구나."
"손발이 맞도록 명령을 내리시면 됩니다. 후회하지 마십쇼."
"옛날의 내 심복들은 모두다 방원의 심복이 되어 버렸다. 정승도 그렇고, 대감
도 그렇고, 나한테는 지금 군사 한 명도 없다. 모두 다 방원의 세력으로 돌아
갔다. 파리는 냄새를 맡고 날아드는 법이다. 내가 세력이 없는 것을 알자 장
성과
대신들은 모두 다 방원의 신하가 되어 버렸다. 움치고 뛸 수가 없구나."
태상왕은 또다시 가만히 한숨을 짓는다.
"전하께 아뢰옵니다. 소신이 전하의 허락만 받는다면 곧 동북면의 군대를 모두
다 동원시키고 여기다가 여진의 군사를 합세하여 불륜한 방원을 한 칼에 무찌
르겠습니다. 허락해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을 딱 감고 있다.
경순공주의 생각이 났다. 모든일이 다 업원으로 된일이니 번민하고 한탄하지 말
고 송도로 돌아가시어 마음을 태평히 가지시고 여생을 마치라는 불제자 경순
공주의 구슬을 굴리는 듯한 말이 귓가에 쨍하며 들렸다.
"아아, 나한테는 인제는 기백이 없고나."
태상왕 이성계는 고요히 혼자 말하듯 탄식했다.
"전하! 전하께옵서는 아직도 늙지 아니하셨습니다. 칠십도 되지 아니하셨습니다.
보령이 이제 겨우 욱십칠 세시십니다. 왜 군왕의 자리를 내놓으십닉가. 다시
왕위에 나가시어 천하를 호령하시고 창생을 구하십시오. 저하의 한평생 사업은
모두 다 수포로 돌아가고 난신 적자가 나라를 차지해야만 합니까?"
조사의의 눈에서는 불이 붙는다.
"어미를 어미로 대접하지 아니하고 친동생을 죽이고 친형제를 죽이고 형님
인 왕을 협박하여 왕의 자리를 내놓게 하고 뭇 어진 신하들을 죽이는 방원이
한테 전하께서는 만세 후에 제사도 받지 못하실 것입니다."
조사의는 또 한 번 펄펄 뛰며 아뢴다.
조사의가 아뢰는 '만세 후에 제사도 받아 자시지 못한다' 는 말에 태상왕 이
성계의 늙은 눈에는 타는 듯 불길이 일어났다.
"신이 앞잡이가 되어서 태상왕 전하를 모시고 송도로 쳐들어가서 난신적자
를 내치고 세상을 바로잡아놓겠습니다. 상왕께옵서 탄생하신 함흥으로 금의환
향을 하셨는데, 문안하는 신하 한 명 보내지 않는 꽤심한 자가 어찌 만백성을
거느리는 임금의 자격을 갖겠습니까?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올시다."
안변부사 조사의의 아뢰는 말은 태상왕 이성계의 마음을 더한층 격하게 만들
었다. 태상왕은 생각 속에 잠겼다.
과연 말이지 방원이는 부효자이다. 설혹, 자기가 둘째 아들 상오아 정종을 통
해서 미행으로 가는 길이니 절대로 의장을 차리거나 번요하게 떠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더라도, 임금인 방원은 아들의 도리와 체면을 보아서라도 거둥할 때
쓰는 의장을 배치했어야만 도리가 서는 일이요, 다시 한 걸음을 양보해서 거둥
행차에 의장은 그만두더라도 양주와 연천에 문안하는 사람쯤은 보냈어야 할 일
이다. 그래야만 아들이 아버지를 봉양하는 도리다. 그러나 연천, 양주는 그만두
고 지금 수천 리 길 함흥에까지 도착이 되었건만, 방원은 한 사람의 조관을 보
내서 문안한 일이 없다.
실로 꽤씸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전하! 이미 방원과는 부자의 연을 끊어지셨습니다. 다시 더 아들이라고 생각
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쾌하게 승낙하시옵소서, 만약 전하께서 허락만 하신다
하오면 방석, 방번, 이제 방간의 모든 한과 원을 씻기 위해 송도로 쳐들어가서,
방원을 내치고 왕위를 다시 전하께 바치겠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마음이 괴로웠다. 자식한테 대하여 창부리를 겨눈다는 일은 비
록 불효자식이라 하나 차마 하지 못할 일어었다.
밉고 분한 마음이 가득 찼건만 얼른 허락을 내리지 못했다. 잠깐 고개를 수경
대답이 없다.
조사의는 태상왕의 심리를 잘 알아차렸다.
"신은 절대로 태상왕 전하께옵서 친정을 하시라는 것이 아니올시다. 전하께오서
는 가만히 이곳에 앉아만 계시면, 소신이 군사를 거느려 아닌자를 소탕하겠습니
다."
조사의는 결연히 자기의 굳은 뜻을 표명했다.
태상왕은 아직도 결단하는 태도를 정하지 못했다. 의연히 고개를 숙여 생각 속
에 파묻혀 대답이 없다.
다만 눈에는 무서운 불길 만이 일어난다.
"전하께오서 밤이나 낮이나 승하하신 왕후와 세자 방석을 생각하시어 천 번
만 번 재를 올리시어 연화대로 천도하려 하시나 그분들의 원통한 한은 하늘에
까지 뻗쳐 있습니다. 재올리는 것만으로 천도가 되지 아니합니다. 방원을 내쳐
서 원수를 갚아야만 그분들은 비로소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거리로 헤매는 원
귀한 신세를 면할 것입니다."
조사의의 말을 듣는 태상왕의 눈에는 머리 풀어 산발하고 거지의 모습이 되
어 맨발로 거리를 헤매는 아귀로 변한 강비와 방석, 방번, 이제는 가엾고 불쌍
한 모습이 떠올랐다.
소름이 전신에 쪽 기쳤다.
"모르겠다. 모든 일을 너에게 맡긴다!"
태상왕 이성계의 입에서는 마침내 한 마디 허락이 내렸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태상왕의 입에서 '모르겠다. 모든 일을 너에게 맡긴다!' 하
는 말이 떨어지자 기쁜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장중하게 일어나 태상왕께 향하여 군례를 드린다.
"그러하오면 신 안변부사 조사의는 하늘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땅도 두려워
하지 아니하는 세기에 교만한 아이 방원을 북을 올려 죄주겠습니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입니다."
어전에서 물러나온 안변부사 조사의는 아들 조홍과 강비의 친조카인 강현을
불렀다.
"국가에 대하여 중대한 일을 결정할 일이 있다. 나는 태상왕 전하의 분부를 받
아서 열읍 수령과 진장들을 소집한다. 즉각 함흥으로 집결시켜라."
조사의의 아들 조홍과 강비의 조카 강현은 모두 다 천년무사다. 아버지와 아저
씨를 따라다니는 젊은 비장들이다. 두 장수는 나는듯이 말을 달려 영흥부를 위시
하여 동북면의 군수와 영장들을 소집했다.
모든 군관들은 황사란, 손효종, 홍순, 김자량, 박양, 이자분, 김승, 임서균, 문중
첨, 한정, 금온, 배상충, 박부금 등 제제다사가 모여들었다. 모두 다 함흥과 동북
면에서 제각기 엄지손가락이 되어 고갯짓을 하는 머드러기 친구들이다.
조사의는 함흥부에 군막을 높이 치고 모든 소임들을 맞이했다.
모두 다 붉은 갓 남철릭에 화려한 군복을 입고, 천리준총을 타고 달려왔다.
조사의는 모든 장수들을 맞이하여 군막 안에 자리잡고 앉은 후에 여러 사람
을 향하여 묻는다.
"그대들은 나라의 국록을 먹는 사람들이오. 더구나 변방을 맡아 다스리는 한다
하는 명장들이오. 나라의 국방을 지키는 중대한 책임을 맡았을 뿐 아니라 하흥과
영흥과 그리고 또 동북면의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이오, 그가들은 이 나라의
창업지주이신 태상왕 전하께서 금의환향을 하시어 탄생하신 이곳에 어가를 멈
추셨는데 문안을 드려서 배알한 일이 있소?"
안변부사 조사의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던 호반들은 일제히 대답한다.
"태상왕 전하께서 금의 환향을 하시어 함흥으로 오셨다는 말씀을 소문으로
는 들어 알았소이다마는 중앙에서는 연락과 기별도 없고 감사한테서도 공식으
로 연통이 없으니 변지에 있는 일개 무관들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어전에 나
가 뵈오리까. 예법을 몰라 문후를 못드렸소이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여러 변지 장수들의 말을 듣자 얼굴빛을 엄숙히 하여 말
했다.
"옳은 말씀이요. 나는 여러분을 나무라지 아니하오. 일개 변지 장수들이 중앙의
지령이나 감사의 지시가 없이 어찌 감히 어전에 뵈겠다 하겠소."
안변부사 조사의는 청을 높여 다시 말을 계속한다.
"태상왕 전하를 경솔하게 모시게 한 죄는 중앙정부와 감사가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오. 일일이 개인으로 어전에 배알은 못하더라도 거둥하시는 행차에 지영
이라도 하라고 통문을 돌렸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 다 지난 일입니다. 이제
와서 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소. 오늘 나는 여러분을 어전에 인도하여 배알하는
영광을 갖게 하겠소이다. 여러분들은 다들 일어나 나를 따라오시오."
"황송한 광영입니다."
영장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조사의가 승하한 강후의 친정편 가까운 일가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개 변지 무고나들이 상감, 상감 중에도 창업지주로 태상왕인 천하명장이었던
이성계 어른을 지척지지에서 뵙는다는 일은 여간한 광영이 아니었다.
일행은 조사의를 앞에 세우고 함흥 본궁으로 말을 달렸다.
일행이 함흥 본궁 대문 앞 하마비 앞에서 말을 달려 대기하고 있을 때 조사
의는 바로 본궁 전각으로 들어가 내시한테 거래를 했다.
"함흥, 영흥을 위시하여 부사, 영장, 진관들이 전하 행차하신 이후 공식통지
를 받지 못하와 지영을 못드려 죽을 죄를 지었다 합니다. 이제 안변부사 조사
의의 인솔로 전하께 문후를 드리오니 특히 배알하는 광열을 주시옵소서."
내시는 곧 태상왕한테 안변부사의 아뢰는 말씀을 전했다.
적적하고 쓸쓸한 심경 속에 빠져 있던 태상왕은 영장들을데리고 온 조사의
의 행동을 가상타고 생각했다.
"들라 해라."
허락은 단번에 내렸다.
조사의는 수십 명 영장들을 거느리고 본궁 뜰 안에 나열해 엎드렸다.
"동북면 영장고 각읍 수령 현신이오."
내시가 큰 소리로 아뢰었다.
태상왕은 대청에 놓인 호피교의 위에 나타나 모든 장령들의 군례를 받았다.
여러 군관들은 내관의 지휘에 따라 국궁하고, 절하고, 다시 일어나 두 손길
로 등채를 잡고 군례를 드렸다.
모두 다 엄숙한 얼굴에 씩씩한 기상들이었다.
한바탕 말을 달려 하룻길에 천 리라도 행군을 할 날랜 모습들이다.
태상왕은 이들 호반의 얼굴을 보자 믿음직하고 든든한 생각이 났다.
"나라를 위하여 훌륭한 일을 많이 하라."
태상왕은 격려하는 말을 보냈다. 무관들의 만세 부르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
다.
군례를 드리고 만세를 높이 부르는 반열 속에는 강후의 친조카 강현과 조사
의의 아들 조홍도 섞여 있었다.
조사의는 강현을 반열에서 나오라 하여 어전에 인도했다.
"이 사람은 승하하옵신 강후마마의 조카 강현이올시다."
정남대장군
강현은 전상에 올라 태상왕께 절하여 뵈었다. 강비의 조카라는 말을 듣는 태상
왕은 왕후 생각이 불현듯 났다.
"네가 현이냐? 어렸을 때 보고 이제 보는구나. 이리 가까이 오너라."
태상왕은 어수로 강현의 손을 잡아 어루만진다. 감개가 무량했다.
"내가 너희들을 잘살게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네 아주머니가 죽더니 모두 다
풍비박산이 되었구나."
방석, 방번, 이제가 방원한테 죽은 후에 강씨네 일족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태상
왕의 가슴이 또 한 번 애운했다. 늙은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옆에 섰던 조사의가 아뢴다.
"이제 장령들을 데리고 물러가겠습니다."
태상왕은 강현의 손을 놓고 고개를 끄떡였다.
방원을 제거하기 위하여 송도로 쳐들어가라는 무언의 승낙이다.
조사의는 강현과 함께 어전에서 물러나 장령들을 거느리고 진중으로 돌아왔다.
드높게 쳐진 군막 안에는 군관들을 대접하는 산해진미를 벌여놓은 교자상이
폭을 연해 대어졌다.
"자아 여러분, 마시면서 이야기합시다. 지금 여러분들이 받으시는 음식은 태상
왕 전하께서 특별히 내리신 음식이고, 여러분 앞에 벌여 놓은 술잔은 전하께서
내리신 선온입니다. 귀한 어사주와 음식을 많이 드시기 바라오."
모든 사람들은 감격해서 술을 마시었다.
순배가 돌아 모두 거나했을 때 자사의는 자리에 일어나 모든 사람을 향하야
말한다.
"나는 태상왕 전하의 분부를 받아 참람되게 왕위에 오른 이방원을 토벌하기
로 했소이다. 이방원은 아우 세자를 죽이고, 아우 방번을 죽이고, 매부 이제를
죽이고, 아버지의 왕의 자리를 빼앗아 정종께 선위를 시키고, 다시 또 정종대
오아께 강요하여 스스로 세자가 되고, 그래도 부족하여 친형 방간과 싸워서 조카
맹종을 죽이고 동생을 내치고, 그래도 또 부족해서 상왕을 협박해서 강제로 왕위
를 내놓게 한후에 자기가 스스로 왕이 되었소이다. 그의 눈에는 형도 없고, 아우
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다만 있는 것은 욕심 한 가지뿐, 왕권을 차지하려는 추
한 맘뿐입니다. 지금 태상왕 전하께서 함흥으로 오신 것도 모든일이 불쾌하여
멀리 오신것입니다. 그러나 방원은 문안사 한 사람 아니 보냈소이다. 참으로
가증 가악하오. 나는 감연히 일어나 태상왕 전하를 모시고 방원을 무찔러 들어
가려 하오. 여러분, 나의 뜻이 옳다 하거든 내 뒤를 따르시오."
강비의 조카 강현이 소리치며 일어나 말한다.
"삼가 장군의 정의스런 뜻을 받들어 난신적자를 토발하겠소이다. 그리하여 태상
왕 전하를 다시 복위시켜 천하에 대의명분을 밝히겠소이다."
강현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영흥소윤 김권이 소리치며 일어났다.
"소장은 영흥, 함흥의 군대를 총동원하겠소이다."
김권의 말이 떨어지니 또 한 장수가 소리치며 나온다.
"소장은 정주, 선천, 철산, 용강 땅의 용맹스런 군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장군
의 명령은 곧 태상왕 전하의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령 일하에 전군을 휘동
하겠습니다."
모두들 누군가 하고 바라보니 정주목사 박관이다.
조사의는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칼 짚고 자리에 일어나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
한다.
"이제 여러 장군들의 마음이 천심에 감동되어 태상왕 전하를 복위하여 천하
의 대의를 밝히려 하니 아직도 이 땅에 의기가 남아 있다 하겠소이다. 나는 여
러분과 함께 불의를 응징하여 토벌하려니와 우리의 정의를 존경해서 행동을 함
께 하고자 원하는 이민족의 군대가 있소이다. 이 족속들은 비록 피는 다르다 할
지라도 전에 태상왕 전하를 도와서 왜구를 몰아냈던 여진족입니다. 전에 태상왕
전하를 도와드리던 퉁두란 장군의 후배들인 오드리와 오랑카이의 군사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같이 해서 막막 강병을 가졌으니 안주 청천강을 건너서 평양
성을 무찌르고 송도로 달려서 불의의 원흉을 쳐부수는 손바닥을 뒤집기보다도
더 용이한 일입니다."
모든 장수들은 일제히,
"좋소이다."
하고 소리쳤다.
안변부사 조소의는 다시 자리에 앉은 후에 또 한 번 발론한다.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전군을 총지휘할 총대장을 뽑아야 하겠소이다. 우리는
누구로 전군을 지휘하는 대장의 책임을 맡기는 것이 좋을지 여러분은 생각해
보십시오."
조사의는 만좌한 영장들의 얼굴을 면면이 살펴본다.
강비의 조카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한다.
"우리들 모두는 태상왕 전하의 늙마에 불우하신 것을 보고 항상 마음속으로
가엾은 생각을 금할 수 없었으나, 이 어려운 일, 불의를 응징하려는 이 큰일을
실천에 옮길 생각을 갖지 못했던 것이오. 다행히 하늘이 무심하지 아니하여 안변
부사는 태상왕께 이 일을 아뢰고 윤허를 맡은 후에 정의의 깃발을 천 리에
높이 날리게 되었으니 모두 다 조부사의 용단이라 생각하오. 조부사를 총대장으
로 추대하는 것이 옳겠소이다."
안변부사 조사의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자는 강현의 말이 떨어지자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론한다.
"좋습니다. 우리 안변부사 조사의 장군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자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오. 조부사는 각읍 수령이 태상왕 전하의 금의환향하신 것을 번영
히 알고도 무슨 까닭에 무엇이 무서워서 공문을 받지 아니했다 하여 한 사람
도 마중을 하지 아니한 이 판국에 군사를 거느리고, 태상왕 전하를 호위하여 동
북면일대 용렬한 신하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다음엔 함흥 본궁에까지 배
종하여 전하의 신변을 호위하였으니 과연 신하의 도리를 극진히 다했다 할 수
있소이다."
모든 사람들은,
"옳소."
하고 고함을 질렀다.
소리쳐 말하던 장수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뿐만 아니라 조부사는 다시 세상에 불충 불효부제한 난륜을 제거할 것을 품
달하여 이제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으니 실로 원통한 죽음을 한 충신열
사들은 지하에서 웃으면서 춤을 출 것이요, 밝은 정의는 해와 달과 함께 천상천
하에 빛을 다투리라고 생각하오. 이러하니 우리는 당연히 큰일을 애당초부터 주
선해서 일으킨 조부사를 우리의 총대장으로 추대하는 데 조그마한 이론이 있
을 까닭이 없소. 그러나 이 불의를 토멸하고 응징하는 우리 군대는 사사로운 군
대가 아닙니다. 물론 의기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일어난 우리들입니다만은 이 군
대는 태상왕전하의 군대입니다. 그리고 태상왕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 불순과 불
의를 토멸하는 장쾌하고 거룩한 군사행동입니다. 그러하니 대장을 추대하는 일
은 우리가 할것이 아니라 태상왕 전하께서 친히 군문에 납시어 금부은월의 절
월과 대장군의 인수를 조부사에게 내리시어 만군이 차탄하는 모습을 목도하시
고 전체 군인을 격려하시는 일이 지극히 합당할 줄로 아오."
모두들 바라보니 승녕부 당상관 정용수란 사람이다. 백수를 흩날리며 청산의 유
수같이 말하는 정용수의 태도는 마치 야읜 백학이 단구에서 청청한 울음을 뽑
는 듯했다.
정용수는 태상왕을 호위하여 송도서부터 한양, 양주, 연천을 거쳐서 내관과
궁녀와 함께 이곳까지 온 늙은 재상이었다.
원래 태상왕의 지극한 총행을 받던 재상이었으나 방원이 왕이 된 후에 그에
게 조정의 실권 있는 벼슬을 주지 아니하고 태상왕부 승녕부의 당상관 자리를
주어 권력 없는 신하가 되어버린 사람이다.
여러 장성들은 대장을 추대할 것이 아니라 태상왕 전하께서 친림해 계시니
전하께서 직접 대장의 절월과 인수를 내리어야 한다는 정용수의 말에 모두 다
고개를 숙여 옳다고 생각했다.
태상왕이 친히 대장의 절월을 주셔야 한다는 말에 안변부사 조사의는 더욱
어깨가 으쓱했다.
또 한 사람의 늙은 재상이 찬동한다.
"정당상관의 말씀이 옳습니다. 불의를 토멸하는 군사는 의병이 아닙니다. 당당
한 창업지주이신 태상왕 전하의 군대가되어야 언정이순합니다. 태상왕 전하께서
친히 대장군의 칭호와 절월을 내리셔야 합니다."
모두들 바라보니 역시 내시와 궁녀와 함께 송도서부터 태상왕을 모시고 내려온,
같은 벼슬을 한 승녕부 당상관 신효창이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두 재상의 말을 듣자, 천천히 여러 사관들을 둘러본다.
"두 분 재상의 말씀은 이치에 합당한 말씀일 뿐 아니라 우리 군대가 사병이
되어서는 아니되겠소. 정정당당한 왕사로서 불의를 응징하는 군사가 되어야 하겠
소이다."
조사의는 말을 마치고 한 번 좌중을 둘러본다.
모든 사람들은 조사의의 씩씩한 얼굴을 바라보며 존경하는 얼굴빛을 지었다.
조사의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여러분, 여러분은 위에 아뢰어 대장의 직책을 누구한테든 임명하시는 것이 좋
겠소이다. 내가 자수삭발 격으로 대장이 되겠다고 할 수는 없소이다. 누가 나
를 대신하여 위에 아뢰어줄 분이 계십니까?"
조사의의 말이 떨어지자 승녕부 당상관 정용수는 백수를 쓰다듬으며 정중한
말투로 말한다.
"늙은 이 몸이 시위소찬으로 국록만 먹고 있었소이다. 이번 중대한 일을 단행하
기 위하여 삼가 태상왕 전하께 아뢰어 안변부사 조사의로 대장군을 봉하시라
고 아뢰오리다."
정용수의 말에 이어 또 한 사람의 승녕부 당상관 신효창이 말한다.
"나도 어전에 들어가 잔하께 군문에 친림하시기를 건의하오리다."
모든 장성들은 든든하고 미덥게 생각했다.
두 재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함흥 본궁으로 들어가 어전에 엎드렸다.
"아뢰오. 충신 조사의는 전하를 위하여, 또는 돌아가신 왕후마마와 세자의 억울
한 혼령을 위하여 난류를 응징하는 정의의 군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하오
나, 이 군사가 사사로운 사병이 되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만약 사병이 된다
면 동북면에서부터 송도까지 쳐들어가는 도중 각 고을을 지날 때마다 크나큰
장애가 많을 것이니, 전하께오서는 이 점을 굽어살피시어 정정당당한 왕사가 되
게 하시고 총지휘하는 대장을 임명하시는 것이 좋을 줄 아뢰오."
태상왕 이성계는 귀를 기울여 한동안 정용수의 말을 듣고 있을 때 같은 당상
관 신효창이 어전에 들어와 또 아뢰었다.
"정용수의 아뢰는 말씀은 당연하오니 사기를 더욱 북돋워주시기 위하여 전하
께오서 군문에 친림하시어 조사의에게 대장군의 절월을 내려주시옵소서."
태상왕 이성계는 무엇인지 한동안 생각 속에 빠졌다.
한 식경이 지났다. 무한 고민을 한 모양이다.
"그리하리라."
태상왕은 마침내 친히 대장군의 절월을 조사의에게 내리기로 결정했다.
태상왕은 함흥 본궁에서 함흥부 관아로 친림했다.
승녕부 당상관 정용수와 신효창이 어가의 뒤를 따르고 내시와 궁녀들이 호위
해나갔다.
함흥부 앞에는 크게 진을 치고, 군사들이 어가를 맞이했다.
태상왕은 이날 군문에 거둥하는 의식에 따라 주립에 공작미를 꽂아 호수를
표시하고, 갓꼭지에 쌍옥로를 달고 누른 바탕에 붉은 소매를 단 비단 군복을 입
은 후에 동여매고 활 차고 칼 짚어 장중하게 누상에 올랐다.
조사의는 모든 대장과 수천 군사를 거느려 큰 소리로 영을 내려 태상왕께 군
례를 드린다.
태사왕 이성계는 미소를 용안에 띠고 장병들의 군례를 받는다.
미리 준비했던 대장의 절월과 인수를 승녕부 당상관 정용수와 신효창이 좌
우 옆에 서서 바친다.
태상왕은 어느덧 백발이었다. 흰 수염을 흩날리며 낭랑히 옥음을 내린다.
"안변부사 조사의로 정남대장군을 봉하여 군사를 거느려 불충 불효, 부제한 무
리를 토벌케 한다. 특별히 조사의에게 절월과 인수를 내리나니, 명을 어기는
자는 군법에 처하여 참하라!"
조사의는 대전을 향해 두 번 절하고 금부은월과 옥절을 받은 후에 다시 인수
를 받아 허리에 찼다.
만세 소리가 군중에 자지러지게 일어났다.
조사의는 어전에 나가 아뢴다.
"삼가 어명을 받들어 모든 불의를 토벌하고 전하를 모시어 태평성대를 이루
오리다."
조사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장병들은 또 한 번 만세를 불러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는 함흥을 중심으로 한 동북면은 송도 이남 남부에 대하여 완전히 적대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신하인 안변부사 조사의가 조선왕 이방원을 토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
는 것이 아니다.
태상왕 이성계가 불의의 아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으키는 정정당당한 군대
가 되었다.
태상왕은 절월을 준 후에 함흥 분궁으로 환궁하고 조사의는 곧 남으로 내려
가는 군대행동을 취했다.
여진군이 초모되고 마적의 떼도 합세되었다.
군사의 수는 나날이 불었다. 총수가 5만에 가까웠다.
조사의는 출동명령을 내렸다.
군기에 제를 지내고 북을 올려 행군하려 할 때 탐마가 급히 말을 달려 보한다.
"송도서 차사가 말을 달려 왔소이다."
"송도서 무슨 차사가 왔단 말이오?"
"왕명을 받들어 태상왕 전하께 문안을 드리려 왔다 합니다."
조사의는 당장 곧 송도에서 온 사신의 목을 베고 싶었다. 그러나 태상왕께 아니
알리고 처단할 수 없었다.
곧 함흥 본궁으로 달려갔다.
"송도에서 문안사신이 왔다 합니다."
문안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자 태상왕은 불같이 노했다.
한양, 양주, 연천을 거쳐서 함흥까지 오도록 여태껏 문안사를 한 사람도 보내
지 아니한 방원이 이제 뒤늦게 사신을 보내서 문안을 한다 하니 괘씸하기 짝
이 없는 일이다.
"불러들여라."
조사의는 군중에 영을 내려 송도에서 온 사신을 어전에 인도했다.
사신은 함흥에 당도하여 뜰 아래 엎드렸다.
함흥차사
태상왕 이성계는 노한 눈으로 차사를 굽어보며 묻는다.
"네가 누구냐?"
차사는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상감의 차사올시다. 왕전하께옵서는 삼가 태상왕 전하의 안간하옵시기를 축원
하시면서, 하루바삐 돌아오시기를 비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마치 방원을 직접 대해 보는 듯했다. 미웠다. 늙었으나 원
래 명궁이었다.
옆에 있는 활을 번쩍 들어 백우전을 메겼다.
화살은 부복해 있는 함흥차사의 머리를 쏘아 맞히었다.
사신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버렸다.
원래 태종 방원은 태상왕이 한양, 양주, 연천으로 미행을 나간다 하므로 곧
환궁할 줄 알고 문안사를 보내지 아니했던 것이다.
태상왕이 함흥으로 올라가서 돌아올 뜻이 없다는 보고를 받자, 태종은 깜짝 놀
랐다.
태상왕의 동정을 살필 겸 승지를 보내서 문후를 올렸던 것이다.
함흥차사는 영영 돌아오지 아니했다.
태종은 또 다시 승지 한 사람을 뽑아 보냈다.
여전히 태상왕은 함흥차사가 오는 족족 전과 같이 활을 쏘아 죽여버려싸.
함흥차사는 다섯 사람째 갔건만 영영 돌아오지 아니했다.
송도에서는 불길한 예감을 아니 가질 수 없었다.
죽여서 아니 돌아오는 것이 분명했다.
태종은 근심스러웠다. 만조백관들을 모아 의논했다.
"함흥으로 문안사를 보내기만 하면 영영 소식이 없고 돌아오지 아니하니, 이 어
이한 까닭인지 과인의 마임이 시히 불안하다. 어찌하면 좋을꼬?"
영의정 하윤이 아뢴다.
"태상왕께서 노하시어 차사가 가는 족족 죽이시나봅니다."
"누가 과인을 위하여 함흥으로 가서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려줄 사람은 없
겠는가?"
태종의 옥음은 애원하는 목소리다.
백관들은 고개를 숙여 묵묵히 대답이 없다. 가기만 하면 죽어서 시체도 돌아오
지 못하는 길을 자원할 사람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태종은 답답했다.
부왕 되는 태상왕이 노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 자신이 왕권을 잡기 위하여 여태껏 극한 투쟁을 해온 그 모든 사실은
아버지가 당연히 노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가 왕이 되었으니 아버지도 역시 자식인 자기한테 모든
과거사를 묻지 말고 풀어주었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래야만 집안꼴도 되고 나라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용이하게 자기를 용서해주지 아니한다.
크나큰 가정의 불화일 뿐 아니라, 백성들을 대해 보기가 진실로 부끄러웠다.
태종의 마음은 어두워졌다.
"그래 누가 가서 태상왕 전하의 마음이 돌아서시도록 할 사람이 없단 말인가?"
태종은 또 한 번 애원하는 말을 했다.
반열 속에서 한 사람의 늙은 재상이 부복해 아뢴다.
"소신이 비록 불민하오나 함흥올 말을 달려서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려서
송도로 환어하시게 하겠습니다."
모두 바라보니 판부사 박순이란 사람이다.
조정의 노재상으로 고려 때 태상왕과 함께 압록강까지 행군하여 오랑캐를 굴
복시킨 일도 있었다.
박순은 태상왕과 두터운 교분을 가진 옛 신하 중 한 사람이다.
태종은 박순의 자원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무한 기뻣으나, 이 훌륭한 노재상을
사지로 보내기가 아까웠다.
"경의 충심은 고맙소마는 늙어서 갈 수 있겠소?"
태종은 주저하고 허락을 내리지 아니했다.
박순은 다시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죽는 것은 신자의 도리올시다. 어려울 때 모면하려는 그
마음은 실로 야비한 생각이라 할 것입니다. 신의 몸이 함흥으로 가서 다행히 죽
지 아니한다면, 더욱 전하를 위하여 보답하겠습니다."
간곡하게 아뢰는 박순의 태도를 보자 태종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정 그러하다면 나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라."
박순은 조회를 파하고 어전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아들을 불러 말한다.
"내 평생에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맹세했더니 이제 그곳을 얻었다."
추연히 말을 마친 박순은 행리를 정돈한 후에 다시 궁궐로 들어가 태종께 하
직을 고한다.
"다녀오겠습니다."
태종은 가슴이 뻐근했다.
"나한테 할 말이 없는가?"
유언이라도 있으면 말하고 가라는 뜻이다.
"아무것도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명을 받들어 가는 일이 잘 순성되기만
바랄 뿐입니다."
"경의 처자가 넉넉지 못하게 사는 줄 과인은 다 알고 있소, 굶게 하지는 아니하
리다."
태종은 집 한 채와 쌀 백 석을 박순의 처자한테 내렸다.
박순은 관복을 벗어놓고, 일부러 갈건야복으로, 함흥으로 향하여 본궁 앞에
당도했다.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어미소 한 필과 새끼소 한 필을 친히 끌
고 가다가, 본궁 앞 개울가에서 송아지를 매어놓고, 박순은 어미소만 타고 본
궁 대문으로 가서 하마비 앞에서 소에세 내렸다.
본궁 정문을 지키고 있던 조사의의 보초는 박순을 향하여 누구인 것을 물었다.
"누구냐?"
갈건야복으로 선비 복색을 차린 박순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태상왕 전하의 옛 친구 박순이란 사람이외다."
보초는 눈을 부라리며 무뚝뚝하게 다시 물었다.
"옛 친구가 어찌해서 왔단 말요?"
"태상왕 전하께서 이곳에 계시단 말씀을 듣고 팔도강산의 산천 구경을 다니
다가 불현듯 뵙고 싶어서 왔소이다."
보초하던 군사는 나는 듯이 윗사람인 장교한테 연락하고 장교는 문밖에서 나
와서 박순의 행동을 한번 살핀 후에 대장 조사의한테 품했다.
"태상왕 전하의 옛 친구라 하면서 한 사람이 뵈우러 왔습니다. 어찌하오리까?
성명은 박순이라 합니다."
"박순이? 박순이는 처사가 아니다. 현재, 방원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다. 이
자도 똑같은 함흥차사가 되어 죽어갈 것이다. 잠깐 기다려라. 위에 아로니 후
에 처결하리라."
조사의는 곧 태상왕전으로 올랐다.
"아뢰옵니다. 송도서 차사가 한 명 또 왔습니다. 자기 자신은 차사라 하지 아니
합니다마는 암만 해도 수상합니다. 관복을 아니 입고 벼슬하지 않은 사람처럼 갈
건야복으로 차렸다 합니다. 산림처사라고 자칭하면서 예전에 전하의 심허하시는
친구라고 합니다. 성명을 물으니 박순이라 하옵는 바 박순은 현재 송도 조정에서
판부사 벼슬을 하고 있는 자올시다. 어찌하오리까? 군문에서 목을 베오리까?"
태상왕 이성계는 박순이란 말을 듣자 옛 생각이 일어났다. 나이도 비슷했다.
함께 늙어가는 옛 친구다.
태상왕은 문득 옛 친구 박순을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박순이라면 한번 만나봐도 좋겠다. 아직 목은 베지 말고 나한테로 인도하라."
조사의는 더 우길 수 없었다. 친히 국문 밖으로 나가서 박순을 어전으로 인도했
다.
박순은 어전에 올라 태상왕께 절을 올렸다.
태상왕은 박순의 손을 어수로 친히 잡아 일으켰다.
"순이 아닌가? 어떻게 멀리 함흥까지 왔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더니 반갑
기 그지없네."
"신도 오랫동안 전하를 뵙지 못하여 감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오서 대
궐을 떠나시어 이곳 함흥까지 오셨다는 소문을 듣잡고, 불현듯 뵙고 싶어 천리강
산을 멀다 아니하고 알현 하러 온 길이외다."
"경은 어디로 해서 오는가?"
"팔도강산을 유람하옵다가 전하께오서 이곳에 홀로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안연
히 앉아 있을 수 없사와 이같이 뵈우러 왔소이다."
태상왕은 방원의 사신으로 오지 아니하고 팔도강산을 유람하다가 뵈우러 왔
다는 옛 친구 박순의 말을 듣자 마음이 기뻤다.
"술상을 빨리 차려오너라. 군신의 의보다 옛 친구의 정리로 술잔을 쾌하게 들리
라."
태상왕은 궁녀에게 명했다. 이윽고 술상이 나왔다. 태상왕은 소매를 걷고 친
히 차어수로 술병을 잡아 옥잔에 술을 가득 부어 박순에게 권했다.
"자아 한 잔 들게나. 오늘은 군신의 예로 술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옛 친구를
대하는 정으로 술을 권하는 것이니 사양 말고 취토록 마시오보세."
"황감하여이다. 신이 먼저 전하께 한 잔을 올려야 할 터이온데, 전하께오서 먼
저 선온을 내리시니 왕은이 음숭하심을 갚을 길이 없소이다."
박순은 어사주를 두 손으로 받들어 돌아앉아 마신 후에 다시 무릎을 끊고 옥
병의 술을 따라 어전에 올렸다.
"전하께오서도 이 술을 젓수시고 만수무강하옵소서."
태상왕은 박순이 올리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오래간만에 경과 한자리를 했는데, 과인이 어찌 술을 사양하랴. 오늘은 특별히
경과 함께 취토록 마시리라."
태상왕은 말씀을 마치자 단번에 주욱 술잔을 비웠다.
술이 서너 순배 도니 정은 더한층 움직이고 태상왕의 심경은 점점 더 쓸쓸해
졌다.
태상왕 이성계의 머리속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일어난다.
강비의 생각, 방석의 생각, 방번의 생각, 방간의 생각, 공주의 생각이 났다.
그리고 송도에 있는 원수 같은 아들 방원의 생각도 났다.
함흥으로 쓸쓸하게 도망치듯 온 생각도 났다.
자식을 향하여 칼을 들이대라고 조사의한테 허락을 내려서 방금 출동준비를
하고 있는 이 불행하고 비참한 사실도 회상이 되었다.
감창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자아, 이번에는 경이 한잔 더 마셔야 하네."
태상왕은 거나하게 취기를 느끼면서 다시 또 한 잔 술을 따라 박순한테 권했다.
홀연, 바람결에 처량하게 구슬픈 소리가 들려웠다.
태상왕은 귀를 기울였다.
"어매애, 어매."
"우우음, 우메."
"어매애, 어매."
"우우음, 우매"
바람결에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는 몹시 태상왕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것이 무슨 소린가? 몹시 처량하이그려."
태상왕은 박순을 향하여 물었다.
박순은 일부러 입을 다물고 대답을 아니했다.
또다시 바람결에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매애, 어매애."
"우우음, 우매애."
바람이 높으니 송아지 울음소리는 더한층 처량하다.
태상왕은 박순에게 묻는다.
"저 소리가 무슨 소린가?"
박순은 비로소 대답한다.
"신이 타고 온 소올시다. 천리강산을 돌다가 어미소가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아
직 젖이 떨어지지 아니하와 어미소와 함께 데리고 다닙니다. 송아지를 개울 건너
편에 매고 어미소만 타고 왔더니 송아지가 어미를 부르는 소리가 저렇듯 간절
하고 어미소가 새끼를 생각하면서 저렇게 화답해 대답합니다 비록 짐승이라
하오나 어미와 자식 사이의 지극한 정리가 저렇듯 대단합니다. 모두 다 하늘 이
치올시다. 하늘 이치를 어찌 거역하오리까."
태상왕은 박순의 말을 듣자 눈을 들어 전각 밖을 내려본다.
탁 터진 벌판에 내가 흘러 있고 개울을 한가운데 두고 어미와 새끼는 떨어져
서 서로 바라보면서 구슬피 정을 울음으로 하소연하고 있다.
태상왕은 한동안 이 모양을 바라보다가 눈시울이 화끈했다.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순은 다시 더 말을 하지 아니했다.
밖에서는 송아지가 또 다시 울었다.
한동안 청에서 거닐던 태상왕은 박순에게 분부를 내렸다.
"송아지를 끌어다가 경이 타고 온 어미소 옆에 두라 이르게."
"황송하옵신 분부올시다. 신이 미거하와 대궐의 존엄한 생각만 하고 어미소만
데리고 왔습니다. 곧 마부한테 일러서 송아지를 데리고 오라하겠습니다."
박순은 태상왕의 마음이 비로소 움직여진 것을 짐작했다.
곧 본궁문 앞으로 나가서시자한테 송아지를 끌어다가 어미 곁에 두라 했다.
이때, 대장 조사의는 박순의 행동을 주시해보았다.
방원을 위하여 태상왕의 마음을 풍간하러 온 것임을 깨달았다.
만약 태상왕의 마음이 변해서 송도로 쳐들아가는 군사를 못가게 한다면 큰일
이라 생각했다.
곧 어전으로 들어갔다.
"박순의 목을 베어야 하겠습니다. 확실히 방원이 보낸 차사올시다. 일부러 송아
지와 소를 데리고 와서 성상의 마음을 어지러게 한 것입니다. 곧 목을 베어야 하
겠습니다."
태상왕은 빙긋 웃었다.
"옛 친구다.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심심한데 말벗이나 하겠다."
박순이 다시 돌아온 후에 태상왕은
"오래간만이니 경과 장기나 한 판 두세그려."
태상왕은 친히 장기판을 꺼냈다.
"황송하오이다. 모시고 두겠습니다."
박순은 태상왕의 비위를 맞추어 장기를 두었다.
해가 설핏했다.
"소신은 돌아가겠습니다."
박순은 장기판을 쓸었다.
"돌아간다니 어디로 간단 말인가?"
"사관으로 갔다가 내일 일찍 떠나야겠습니다."
"사관? 이사람아, 나를 버리고 사관으로 간단 말인가. 나하고 함께 있도록 하
세."
박순은 태상왕의 간곡하게 만류하는 것을 보자 못이기는 체, 슬몃 주저앉았다.
마음 속으로 '일이 차차 되어 간다' 하고 은근히 기뻐했다.
태상왕은 다시 장기판을 벌였다.
박순은 밤 늦도록 장기를 둔 후에 태상왕을 모시고 잤다.
그러나 박순은 상감인 방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비치지 아니했다.
이튿날이 되었다. 태상왕은 아침 수리를 든 후에 심심했다. 다시 박순을 불렀다.
"어제 장기는 경이 나한테 두 판이나 졌었네. 오늘도 심심하니 장기나 한 판 두
어보세."
"그랬습니다. 어제는 일부러 신이 전하께 두 판을 져드렸습니다. 오늘은 전하께
서 신한테 지셔야 합니다."
"그것은 그렇지 아니하이. 일부러 어떻게 진단 말인가. 좌우간 장기를 두어보기
로 하세."
태상왕과 옛 벗 박순은 껄껄 웃으며 다시 장기를 두기 시작했다.
임금과 신하는 한참 신명이 나서 '장군야', '멍군야' 소리를 치며 장기를 두고
있을 때 홀연 들보 위에서 '찍찍'하는 소리가 일어나면서 새까만 물건이 뚝 떨
어졌다.
태상왕과 박순의 시선은 일제히 물건이 떨어지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바라보니 생쥐 새끼 한마리가 죽어서 떨어졌다.
뒤미처 다시 찍찍거리는 소리가 일어나면서 커다란 어미쥐 한 마리가 사람들
이 앉아 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떨어져 죽은 새끼 쥐 앞으로 달려들었
다.
어미쥐는 죽은 새끼 앞으로 바싹 덤벼들어서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바라
보고 있었다. 바라만 보고 있을 뿐 아니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애절하게
울어 찍찍거렸다.
"찍찍, 찍찍찍-."
마치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여 처량하게 울어대는 사람들의 정 같았다.
"쥐도 미물이건만, 자식의 죽음을 슬퍼할 줄 아는구려-."
태상왕 이성계의 입에서는 무심코 한 마디가 떨어졌다.
박순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그러합니다. 미물도 그러하거든 황차 사람이겠습니까."
박순의 한 마디 말은 태상왕 이성계의 마음을 찔렀다.
태상왕의 마음은 더욱 흔들렸다.
이때 박순은 장기판을 거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이너 태상왕께 두번 절을
올린 후에 울면서 고한다.
"신의 목을 베어줍시오. 신은 전하를 속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무엇을 속였단 말인가?"
태상왕은 눈치를 챘다. 그러나 일부러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기실, 소신은 금상전하의 명을 받들어 전하를 모셔가려고 왔습니다. 어제 보신
바와 같이 송아지는 어미의 곁을 떨어지기 싫다 하여 그같이 처량스럽게 울었고,
지금 어미쥐는 새끼쥐의 죽음을 보고 저렇듯 애처롭게 몸부림치며 울고 있습
니다. 황차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 태어나서 천륜을 지키지 못하고 인정이 없다
면 그것은 사람의 구실을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박순은 말을 마치자 목이 메어 느껴 울었다.
어제, 송아지가 어미소를 불러 구슬피 울던 일과 오늘 어미쥐가 새끼 생쥐의 죽
음을 부고 애절해하는 꼴을 예들어 말하는 박순의 말을 듣자 태상왕의 마음
은 더한층 흔들렸다.
'방원이도 내 자식이다!'
태상왕은 마음 속으로 이같이 부르짖었다.
"태상왕 전하, 세자 방석도 태상왕 전하의 아드님이시고, 금상전하도 태상왕 전
하의 아드님이십니다. 지나간 불행한 일은 다 잊으십시오. 불길했던 과거사를
다시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손가락을 깨물어서 아니 아픈 손가락이 없습니
다 듣자오니, 전하께서는 조사의를 대장으로 삼아서 아드님이 되시는 금상전하를
토벌하라 하셨다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말이 되지 아니하는 일이올시다.
어미를 찾는 송아지의 마음은 간절합니다. 전하께서는 이 불쌍하고 가엾은 송아
지를 향해 칼을 뽑아 무찌르려 하십니까. 새끼쥐의 임종을 호곡해 우는 저 어
미쥐의 심경을 모르시겠습니까. 조사의가 군사를 거느려 금상전하를 토멸한 후에
전하께서 일평생 싸우시어 창업해놓으신 이씨왕국은 의연히 이씨왕국으로 계
속이 될 줄 아십니까? 기막힙니다. 전하께서는 춘추가 높으십니다. 이씨왕국은
마침내 조씨 왕국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미워도 자손이올시다. 금상전하를
토멸하시어서는 아니되십니다."
박순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목이 메어 간했다.
태상왕은 귀를 기울여 들었다. 과연 옳은 말이다. 자기는 이미 늙었다.
조사의의 말을 들어 방원에게 칼을 뽑으라 했으나 방원이 대신 조사의가 집
권하는 날 당장에는 그렇지 않겠지만 차츰차츰 그의 세력이 커질 때 이씨 왕
국이 조씨네 왕국으로 변해지기가 십상팔구다.
박순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박순은 태상왕이 생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눈치채었다.
박순은 다시 아뢴다.
"아내 얼굴이 추해서 보기 싫다 해도, 역시 아내올시다. 공방보다는 낫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패륜아라 하더라도 그래도 내 피를 받은 혈속이올시다. 황차 금상
전하께서는 기상이 전하 이상이십니다. 수성의 임금이 아니라, 창업의 임금이
올시다. 다른 생각을 하지 마시고 곧 송도로 환가하시옵소서."
태상왕은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방 안은 고요했다.
"전하! 송아지와 어미소의 지극한 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옵소서. 가사이다,
송도로."
태상왕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한숨이 '후'하고 입가에서 일어났다.
은빛 흰 수염이 가만히 흔들렸다.
"경의 말을 들어 곧 송도로 돌아가리라. 경은 먼저 떠나도록 하라."
"황공하오이다."
박순의 눈에선 감격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러하오면 전하께서는 꼭 환가하옵소서. 신은 송도로 돌아가 만 조정 신하한
테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박순은 기뼜다. 태상왕 전하께 하직을 고하고 소를 타고 송아지를 몰아 송도로
향하여 떠났다.
함흥차사가 살아서 송도로 돌아간다는 일은 희귀하기 짝 없는 노릇이었다.
함흥, 영흥, 북청 사람들은 모두 다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허, 참 별일 아닌가. 이번 차사는 죽이지 아니하고 그대로 돌려 보내니. 참말
희한한 일일세."
"판부사 박순은 태상왕 전하의 옛 친구라 하더니 정분을 보아서 죽이지 아니
하고 그대로 살려 보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친구란 과연 좋은 것이거든, 더구나 왕위에 나가기 전부터 가까운 친구라 하니
인정상 차마 죽일 수는 없겠지."
서북면 백성과 군사들은 모두 다 이같이 공론하고 있을 때 조사의는 돌연 태
상왕의 침전으로 들어섰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 조사의 급히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조사의의 얼굴빛은 긴장되어 있었다.
"무슨 의논할 말이 있느냐?"
태상왕은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물었다.
조사의는 정색하고 아뢴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박순을 그대로 돌려보내십니까?"
태상왕은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나의 옛 친구다. 어찌 차마 손을 대겠느냐."
조사의가 다시 아뢴다.
"전하께서는 박순의 간특한 꾀에 넘어가셨습니다. 박순은 전하의 굳은 결심을
흔들어놓기 위하여 일부러 소를 타고 송아지를 끌고 와서 어미 찾는 모습을
보여서 성상의 철석 같으신 마음을 흔들어놓았고, 쥐새끼의 죽은 모양을 뵈어서
늙으신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방원의 계획으로 모략을 꾸며
서시킨 노릇이올시다. 이 소식을 군사들이 듣자, 그들은 마음이 풀려서 이제는
송도로 쳐들어가는 군사행동을 중지한다는 풍설까지 자자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방원과 박순의 속임수에 넘어가버리고 마셨습니다. 앞으로 전하의 노
래하신 후의 일이 딱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악한 무리들의 화를 입으실 것입니
다. 주의하시옵소서. 그리하옵고 박순은 단연코 군법처치를 해야 합니다. 만약
전하께옵서 박순을 그대로 살려 보내신다 해도 이 조사의는 결단코 박순을
그대로 돌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난신적자의 신하인 박순의 목을 참형에 처
하겠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박순을 죽이겠다고 우겨대는 조사의의 말에 무어라고 대답
해야 좋을지 몰랐다. 강후의 친척인 조사의와 약속하고, 방원을 쳐부수려 하던
강경했던 태상왕의 마음은 아닌게 아니라 박순이 데리고 온 송아지의 울음소
리로 인하여 얼마쯤 풀어지기 시작했고, 두 번째 장기를 두다가 죽어가는 새끼쥐
를 바라보고 슬픈 표정으로 자식의 임종을 오열하는 어미쥐의 태도를 보자 더
한층 마음이 좋지 아니해서 박순에게 앞으로 환가할 것을 허락했던 것이다.
이제, 조사의의 말을 들으니 자기 자신은 창황중에 그대로 박순에게 넘어간 것
이 분명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이리도 못하고 저리도 할 수 없었다.
"박순한테 내가 넘어갈 리가 있느냐. 옛 친구의 우정을 막을 길 없어 그대로 살
려 보낸 것 뿐이다."
태상왕은 군색하게 대답했다.
"그러하오면 박순에게는 곧 포박명령을 내려서 군법시행을 하겠습니다."
조사의는 마지막으로 단을 내려 아뢴다.
태상왕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박순을 어서 송도로 가라고 해놓고 다시 군법시행을 한다는 것은 일에 대하
여 잘잘못은 고사해놓고라도, 너무나 사람을 대접하지 않은 처사라 생각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박순을 살려낼 도리는 없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박순이 하직을 고하고 떠난 시각은 이미 한나절이 지났다. 태상왕은 조사의에게
영을 내렸다.
"선전관을 불러라."
조사의는 군막에 영을 내려 선전관을 어전으로 불러들였다.
태상왕은 허리에 차고 있던 상방검을 끌렀다.
"이 칼로 박순을 쫑아가 죽여라. 만약 용홍강을 넘어갔거든 내버려두고 돌아오
너라."
조사의는 더이상 항의할수 없었다.
선전관은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상방검을 차고 박순의 뒤를 쫑았다.
이때 박순은 태상왕께 하직을 고하고 용흥강을 향하여 가다가 길에서 관격
이 되었다. 환약을 먹고 약을 달여 마시느라고 예정보다 휠씬 지체가 되었다.
선전관은 급히 말을 달려 용흥강 가에까지 당도했다.
이때 박순은 막 배를 타려는 찰나였다.
한 발은 배에 올려놓고 한 발은 땅에 붙이고 있었다.
선전관은 태상왕의 상방검을 번쩍 들어 박순의 허리를 쳤다.
박순의 몸은 두 동강이가 되어 반은 배 안으로 굴러 떨어지고 반은 땅에 떨
어졌다.
태상왕 이성계의 마음을 갖은 방법으로 돌려서 한 가닥 희망을 갖게 했던 박
순도 마침내 다시 돌아가지 못할 길을 걸었다.
죽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함흥차사는 이같이 하여 점점 더 그 수가 늘었다.
송도서 태상왕을 달래기 위하여 송아지를 끌고 간 박순의 허리가 끊어져 죽
었다는 소문은 동북면과 송도 서울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조사의는 박순의 허리를 짤라 군문에 훈시한 후에 의가가 자못 양양했다.
"자아, 동북면 모든 고을에 일어난 의병과 여진군으로 합세한 연합군은 송도로
향하여 진격을 개시한다. 모든 장수와 군사들은 군율을 엄숙하게 지켜서 정정당
당하게 싸우라."
조사의는 갑옷투구에 장창을 비껴들고 진문에 나가 훈령을 내린 후에 남으
로 향하여 진군을 했다.
아장에는 조홍, 김권이요, 부장에는 이자분, 한정이요, 좌편 별장에 정주 목
사 박관이요, 우편 별장에 경력 허형이요, 모사에 정용수, 신효창이었다.
별로이 여진마적 임파라실리는 여진 군사 2천명을 거느리고 조사의 군사의
뒤를 따랐다.
북소리, 징솔, 명금 취타의 요란한 음향은 백 리에 연했고, 기치 창검은 하늘을
가려서 햇빛이 무색했다.
열읍의 수령 방백들은 다투어 항복하면서 벌벌 떨면서 지공이 대단했다.
조사의의 대군은 고맹주로 향하여 위풍이 당당하게 나갔다.
아직 조사의한테 항복하지 아니한 원들은 봉수대에 봉화를 들어 송도 서울
에 급한 변을 고했다.
봉화는 산마다 일시에 들려졌다.
마치 산봉우리마다 줄불을 켠 듯 천 리에 뻗쳐 송도 송악산 상상봉에까지 켜
들어왔다.
송도 조정에서는 급한 난리가 난 것을 알리는 봉화를 보자 정승 판서 이하
만조 백관들은 깜짝 놀랐다.
함흥군과 송도의 대결
봉홧불이 켜져 들어온 방향을 보아 변이 난 곳은 함흥의 동북면이 분명했다.
함흥의 동북면이면, 지금 태상왕이 계신곳이 확실하다.
문안사신이 가는 족족 목을 잘라 죽여서 '함흥차사'라는 새 명사가 생겨나게
까지 한 태상왕 전하가 있는 곳이다.
태상왕 전하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세자 방석과 방번의 원수를 갚기 위하
여 쳐들어오는 것이 분명했다.
봉홧불을 바라보는 송도 백성들은 소설이 대단했다.
"난리가 나서 쳐들어오니 어찌하면 좋은가?"
"보통 난리가 아닐세. 부자간에 싸우는 난릴세. 우리한테는 상관이 없네."
"어찌해서 상관이 없단 말인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전쟁통에 백성들
이 결딴이 나니 큰일 아닌가."
"여진군까지 합세하여 쳐들어온다 하니 싸움이 어찌 될지 모르겠네."
촌 늙은이와 농부들은 봉홧불을 바라보며 걱정이 분분했다.
장사꾼과 여각에서도 쓴 입맛을 다시며 걱정했다.
임금 태종은 승지의 보고를 받자, 곧 문무백관을 전상으로 모아 급히 회의를 열
었다.
"봉홧불이 함흥에서부터 들려졌으니, 필연코 강비의 친척으로 함흥에 있는 자가
난을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삼군부 군사는 급히 출동준비를 하라."
태종은 엄숙한 명령을 내렸다.
삼군부는 급히 출동준비를 하라는 왕명이 내리니 영의정 하윤이 아뢴다.
"아직 반란군이 일어난 정체를 자세히 모를 뿐 아니오라, 변지에 일어난 작은
도적을 대항하기 위하여 삼군부의 병력을 기울여 싸운다는 일은 불가한가 아
뢰오. 전하께서 적당한 장수를 뽑아서 우선 들어오는 적의 예봉을 꺾는 것이 좋
을 듯합니다."
성미 급한 태종은 곧 삼군부의 군사를 총동원시키라 했으나 영의정 하윤의
말을 들으니 그럴 듯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마음을 돌려서 분부를 내렸다.
"영의정의 말이 그럴 듯하오. 그러하다면 아직 삼군부 군사가 움직일 것은 없
고, 박만으로 도순문사를 삼고, 박문숭으로 도진무사를 삼고, 허형으로 경력을 삼
고, 황길지로 의주부지사를 삼아서 오천 병마를 거느리고 동북면으로 나가서 반
란군을 소탕하게 하라."
태종의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승지는 분부를 받들어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에서는 새로 임명된 박만 이하 모든 장성들을 급히 불렀다.
빈청으로 물러나온 영의정 하윤과 도통사 이숙번은 동북면으로 출동하는 박
만 이하 여러 대장들을 어전에 인도하여 임금의 칙명을 받게 했다.
태종은 곤룡포 익선관으로 황금 용상에 높이앉아 출전하는 장수에게 분부를
내렸다.
"박만 듣거라. 지금 동북면에서 좀도독의 무리가 난동하여 봉화가 연달아 일어
난 것은 과인보다 국가의 간성의 책임을 맡은 그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필연코 벼슬이 떨어져 불평을 품은자들의 행동인 것이 분명하다. 그대들
에게 장군의 책임을 맡겨서 만오천의 병사를 주어 송도로 쳐들어오는 반란군
을 막게 한다. 그대들은 충성을 다하여 좋은 방략으로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물
리치라. 만약에 패한다면 군법에 처할 것이요, 승리를 거두어 국위를 빛나게
한다면 크나큰 상을 주어 그대들의 큰 공을 찬양하리라."
동북면 도순문사로 임명된 박만이 어전에 나가 아뢰었다.
"미신들에게 반란을 막는 총책을 내리시니 호아공 감읍하온 마음 깊이 폐부
에 새겨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장수된 자 다시 무슨 생각이 있으리까. 다만 적
이 소탕하여 한 번 죽어 나라에 갚을 뿐입니다."
동북면 도순문사 박만은 모든 장수를 대표하여 아뢴다.
태종은 황금 용상 위에서 친히 병부와 금부은월과 상방검과 옥절이며 인수
를 내렸다.
박만은 두 손으로 왕이 친히 내리는 모든 물건을 받고 옥좌를 향하여 사은숙
배를 드렸다.
박문숭, 허형 이하 아장들이 일제히 숙배를 드렸다.
어전에서 친히 금부은월과 병부며 옥절과 인수를 받는 박만은 사은숙배를 마
치고 물러나자 곧 궐무 밖으로 나와 장대에 올라서 만오천 병마의 사열을 받고
행동을 개시했다.
장수와 군사들의 의기는 양양했다. 북소리, 징소리, 소라 부는 소리는 천 리에
연했고, 기치 창검은 하늘을 가리어 동북으로 향하여 치달렸다.
강원도로 들어서서 철령 높은 재를 넘고 다시 함흥으로 향하여 깃발을 날렸다.
이때, 반란군 조사의의 대병은 여진의 군사와 마적의 떼와 합세하여 호호탕탕하
게 함흥 교외로 짓쳐 나왔다.
조사의의 반란군과 송도서 떠난 박만의 군사는 함흥평야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송도에서 만오천 명의 군사를 거느려 의기양양하게 짓쳐 나온 박만은 군사
를 정돈하여 진을 치고 '관군대장 동북면 도순문사 박만'이라 금글자로 크게
쓴 붉은 대장기를 진 문 앞에 늘인 후에, 까만 오추마 타고, 갑옷투구에 장창
을 비껴 들고, 반란군 대장을 꾸짖었다.
"네 어찌 무례하여 여진 오랑캐와 마적떼를 거느리고 감히 반란을 일으켰느냐,
부질없이 왕명을 받들어 나온 나의 군사를 대항하지 말고, 곧 항복하라."
태상왕 이성계의 승낙을 맡고 송도로 쳐들어가던 정남대장군 조사의는 송도
에서 올라온 태종의 대장 박만의꾸짖는 소리를 듣자 용대기를 앞세우고 천천히
진 앞에 나타났다. 용대기는 태상왕 이성계를 상징한 태상왕 전하의 기였다.
조사의는 황금 투구에 황금 갑옷을 입고 은안백마에 높이 앉아 언월도를 빼
어 들고 박만을 꾸짖는다.
"너는 도대체 어떤 놈이관데 감히 태상왕 전하의 친군의 출정하는 길을 막
느냐?"
조사의는 화경 같은 눈을 부릅떠 박만을 꾸짖었다.
박만이 조금도 겁나지 아니하고 조사의를 향하여 다시 꾸짖는다.
"나는 금상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쥐새끼 같은 너희들 도둑의 무리를 진압하
러 나온 도순문사 박만이다. 다행히 내 명에 복종하여 항복한다면 너의 목숨을
살려주리라."
조사의는 박만의 꾸짖는 말을 듣자, 급히 언월도를 뽑아들고 말을 달려 나오는
박만을 꾸짖는다.
"요망한 고양이 같은 앙큼한 도둑놈이 감히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고 우리
군사를 가리켜 반란군이라 하느냐? 나는 태상왕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 삼강오
륜을 모르고 오직 탐욕만 일삼는 불륜 불의 불효의 인물인 방원을 토벌하기로
한 것이다. 네가 어찌 방원의 부하로서 감히 관군이라 자칭하느냐. 관군대장은
네가 아니고, 내가 곧 관군대장이다. 너는 아버지 태상왕 전하를 내쫑고, 형님의
왕위를 협박하여 뺏고, 세자인 방석을 죽여서 스스로 세자가 되었고, 돌아간
어머니 왕후 강씨를 어머니로 대접하지 않은, 죄와 악이 하늘에 가득 찬 반역아
방원의 사사로운 군사다. 네 어찌 나라를 창업하신 태상왕의 군사인 우리를 반
란군이라 하느냐."
조사의는 박만을 호되게 꾸짖자, 말을 달리며 박만의 목을 취하려 했다.
박만은 비로소 조사의 군대가 홑벌 반란군이 아니라 태상왕의 명령으로 금상
전하를 토벌하러 내려오는 군대인 것을 알았다.
태상왕은 지금은 상왕이지만 왕위에 오르기 이전, 고려의 대장으로 있을 때부터
자기를 사랑하고 돌보아주었던 분이었다. 더구나 왕위에 오른 후에는 개국공신의
한 사람으로 후하게 대우해주는 은고를 입었던 것이다.
태상왕의 명령을 받들어 불륜 불효한 금상전하를 토벌하러 간다는 조사의의
설명을 듣자, 마음 한 귀퉁이가 뭉그러지는 듯한 마음을 느꼈다.
부풀어올랐던 패기가 슬몃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지금 조사의가 말한 대로 금상전하는 패기가 너무 벅차고 욕심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다.
아닌게 아니라 왕권을 잡기 위하여 그는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황소처
럼 날뛰었다.
그에게는 임금도 없고, 오륜도 안중에 없었다.
방원은 포은 정몽주 선생을 선죽교에서 철퇴로 갈겨서 죽게 한 사람이었다.
고려의 맹장이요, 원로대신인 최영 장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인 장본인도 바로
이성계가 아니라 이방원이었다.
목은 이색이 한강에서 배를 타고 여주강으로 내려갈 때 연자탄 여울에서 소
주를 마시다가 죽은 그 원인도 이성계가 아니라 이방원한테 있었다.
사람을 시켜서 소주에 독약을 넣어 죽게 했던 것이다.
모든 왕씨를 바다에 몰아넣어 죽여버린 일도 이성계보다 이방원이 중간에 들
어서 한 짓이다.
두문동 칠십이인을 불질러 죽게 한 사람도 이성계가 아니라 이방원이었다.
이같이 해서 방원은 자기 집안으로 왕권이 돌아오게 했고, 한번 왕권이 자기 집
안으로 돌아온 후에는 동생인 세자 방석을 죽였고, 아우 방번을 죽였고, 매부
이제를 죽였다.
다음엔 형님 정종의 세자가 되기를 강요했다. 다시 친형인 방간과 싸움을 해서
방간을 귀양보내고 조카 맹종을 죽였다.
다음엔 정종인 형님을 위협해서 선위를 하게 한 후에 지금은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지금 박만은 방원의 신하가 되었지만, 본시는 태상왕 이성계의 신하다.
아들들의 불목으로 인하여 우울한 마음을 안고 함흥 고향으로 쓸쓸하게 돌아
간 태상왕한테 동정이 가지 아니할 수 없는 심경이었다.
언월도를 비껴들고 쫑아드는 조사의를 대항하려던 힘이 슬몃 풀어져버렸다.
박만은 달려드는 조사의에게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칼을 거두고 잠깐 나의 묻는 말에 대답하라."
"무슨 말이냐?"
"네가 진정으로 태상왕 전하의 말씀을 받들어 송도로 토벌하러 가는 조사의냐?"
"내 어찌 헛소리를 하랴. 나의 대장기를 바라보아라!"
"깃발만 가지고 어찌 인정할 수 있느냐. 나에게 실지로 증거를 보여달라."
"그대가 진정 태상왕 전하의 군대라면 깨끗이 항복하리라. 나도 왕은을 많이 입
은 사라이다."
박만의 말을 듣는 조사의는 무한 기뻤다.
비껴든 언월도를 칼집에 꽂은 후에 아장을 돌아보며 분부했다.
"승녕부 당상이신 정용수와 신효창 두 분을 진문 앞으로 나오시게 하라."
조사의의 영이 떨어지니 아장은 급히 아문 안으로 말을 달렸다.
이윽고 태상왕을 모시고 함흥까지 따라갔던 두 사람의 원로대신이 나타났다.
박만이 바라보니 틀림없는 승녕부 당상관 정용수와 신효창이었다.
조사의는 두 사람의 원로를 향하여 읍한 후에 청해온 내력을 말했다.
"박이 비록 방원의 명을 받아 군사를 거느려 이곳까지 왔으나 우리 군사가
태상왕 전하의 군사인 것을 증명해달라 하므로 잠깐 두 분을 나오시라고 한
것입니다."
정용수가 조사의의 말을 듣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박만의 앞으로 나가 손
을 탁 잡았다.
"박장군, 이거 얼마만이오. 그 동안 태평하셨소. 우리는 함흥까지 태상왕 전하
를 모시고 왔지만, 장군은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소?"
노련한 재상 정용수는 넌짓 박만의 마음을 더듬어보았다.
"상감의 명을 받들어 반란군인 조사의의 군대를 토멸하러 왔소이다."
박만은 일부러 얼굴에 굳은 표정을 띠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원로재상 신효창은 백수를 바람에 흩날리며 간드러지게 웃어댔다.
"아하하. 고이치 아니한 일이오. 안변부사 조사의가 군사를 거느려 송도로 쳐들
어간다 하니, 송도서는 까닭도 모르고 조부사가 반란을 일으킨 줄 알기가 십상팔
구요. 그러나 반란이란 그리 쉽사리 일으킬 수가 없고, 함부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오. 조부사는 태상왕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불의무도한 방원을 토멸하러 내
려가는 당당한 왕사인 것을 당신은 아셔야 하오. 오늘 당신은 방원의 대장이 되
었고, 조사의는 태상왕 전하의 대장이 되었소이다. 그러나 자식이 어찌 아버
지를 향하여 칼을 들겠소. 방원이는 넉넉이 아버지 아니라. 어머니한테라도 칼
을 들 사람입니다. 그러나 박장군은 조장군을 향하여 칼을 들지 못하리다. 왜
냐하면 박장군은 불학무도한 불파천 불외지하는 방원의 장수가아니라, 일찍이는
태상왕 전하의 구신이었던 개국공신 박만이란 점을 잊어서는 아니되오. 어찌 차
마 당신이 태상왕 전하를 향하여 칼을 들겠소. 만약에 칼을 든다면 만고의 죄인
이지-."
"암 그렇고말고, 신하가 어찌 칼을 들어 태상왕 전하의 군사와 겨눌 수 있겠소."
옆에 있던 정용수가 한 마디 했다.
박만은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생각 속에 빠졌다.
"두 분께서는 박장군을 함흥 본궁으로 어전으로 인도해주십쇼."
조사의가 말했다.
"자아 그럼 박장군, 우리 태상왕 전하께 뵈우러 들어갑시다.
신효창은 박만의 손을 잡고 함흥 본궁으로 향했다.
본궁 안 태상왕이 행재소에는 벌써 내시와 궁녀를 통하여 태종 방원의 명을
받아 토벌하러 온 박만을 어전에 인도한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태상왕은 익선관에 관룡포를 입고, 용상 위에 높이 앉아서 들어오는 일행을 기
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뜰 아래서 내시의 못소리가 들렸다.
"승녕부 당상 정용수, 신효창과 정남대장군 조사의는 송도서 온 박만과 함께 알
현이요."
박만은 내시가 외치는 목소리 중에 함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직함을 불
렀으나 자기 한 사람만은 '송도서 온 박만'이라고 불러주는 말에 어쩐지 어깨가
좁아지는 듯 생각이 들었다.
태상왕한테는 일찍이 충성을 다했던 자기다. 지금 자기는 태상왕을 저버린 것이
아니다. 송도 조정에 남아서 벼슬하고 있게 되니 자연금상의 신하가 되고 그의
명령을 받들어 조사의를 토벌하러 온 것이다. 그러나 막상 와서 모든일을 살펴보
니 조사의는 반란군이 아니라 태상왕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군대다. 이제 태
상왕을 뵈러 들어가니 죄송하고 민망스럽기 짝이 없다.
짝이 없다는 것보다 몸둘 곳을 몰랐다.
태상왕은 용상에 걸터앉아 들어온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늙은 신하 승녕부 당상관 둘과 정남대장군 조사의가 사은을 올리 눠에 박만
이 네 번 절을 하여 예를 올렸다.
승녕부 당상 정용수가 아뢴다.
"개국공신이었던 박만이 알현이오."
태상왕 이성계는 날카로운 눈을 들어 박만을 굽어본다.
박만은 떨렸다.
"오랫동안 천안을 우러러뵙지 못하여 하정에 민망하옵더니 이제 지척지지에
서 옥체를 뫼시오니 기쁜 마음 그지없사옵니다."
태상왕은 위엄기 있는 얼굴로 묻는다.
"네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
박만은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조사의를 치기 위하여 상감의 명을 받들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왔다고 아뢸
수도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아뢰지 못했다. 부들부들 떨고만 엎드렸다.
"함흥에 오는 차사가 되어 왔느냐?"
태상왕의 옥음은 더한층 엄숙했다.
'차사'소리만 나오면 목이 달아나는 판이다. 박순도 허리가 끊어졌다 한다.
"아니올시다."
한 마디를 겨우 하고 또다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 어찌해서 왔느냐?"
태상왕의 옥음은 또 한 번 강하게 떨어졌다.
박만은 여전히 대답을 못했다.
승녕부 당상관들과 조사의는 일부러 거들어주지 아니했다. 톡톡히 혼좀 나보라
는 의도다.
"차사로 온 것도 아니고 공사로 온 것도 아니라면 네가 내 생각이 간절해서
보고 싶어서 찾아왔느냐/"
이번엔 태상왕의 목소리가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이럴수록 박만의 가슴은 쥐어짜지는 듯 괴로웠다.
박만의 마음은 무척 아팠다. 온몸에 진땀이 쭉 흘렀다.
승녕부 당상들과 조사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옆에서 거들어주지 아니했다.
"왜 대답이 없느냐?"
태상왕의 재촉이 떨어졌다. 대답을 해야 할 시각은 자꾸만 지나갔다.
박만의 가슴은 질식이 될 듯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무척 괴로웠다. 그러나 옆의 사람들은 여전히 한 마디 말도 거들어 주지 아니한
다.
차라리 다 털어놓고 숨김 없이 아뢰는 일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 정부의 명을 받들어 조사의의 군대를 토벌하러 왔사옵
니다."
"정부의 명을 받들어서 조사의의 군대를 토벌하러 왔다? 조사의의 군대는
내군대다. 네 이놈, 나를 치러 왔단 말이냐?"
태상왕은 큰 소리로 천둥같이 얼러댔다.
"송도서는 조사의의 군대가 반라늘 일으킨 줄 알고 있습니다. 제 어찌 그런 줄
알았으면, 태상왕 전하의 군대를 공격할 마음을 두었으리까.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저 죽여주십시오. 살피지 못했습니다. 목을베어주십시오."
박만은 목이 메었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며 하소연했다.
이때, 조사의는 박만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너는 군대를 거느려 태사왕 전하를 공격하러 온 불충 불의한 망유기극한 놈
이다. 당연히 네 목을 베어 천하에 조리돌릴 것이나 모르고 왔다 하니 특별히 생
각한다. 네가 만약 부하를 거느려 항복한다면 태상왕 전하께 아뢰어 특별히 네
목숨을 살려주리라."
조사의의 말을 들은 박만은 지옥에서 부처의 말을 듣는 듯했다.
"항복이라니, 여부가 있습니까. 아까도 생각이 있어 태상왕 전하의 군대라는 증
거를 보여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소인은 그저 태상왕 전하의 품안으로 돌아왔습
니다. 소인이 거느린 모든 군대를 장군한테 넘깁니다. 그리하옵고 소인은 선봉
이되어 송도로 말을 달리겠습니다."
조사의는 만족한 표정을 얼굴에 띠었다. 곧 태상왕께 아뢴다.
"박만으로 아장을 삼겠습니다. 특별히 윤허해주시옵소서."
태상왕은 고개를 끄떡였다.
조사의는 이같이 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송도서 온 큰 군사를 항
복받았다.
이같이 하여 반란군을 치러 갔던 박만은 완전히 태상왕 이성계의 편이 되어
버렸다.
물밀듯 쳐들어가는 함흥군
조사의는 박만의 군대를 항복받은 후에 대군을 휘동하여 나으로 내려갔다.
도순문사 박만이 태상왕의 편인 조사의한테 항복했다는 소식은나는 듯이 송도
에 알려졌다.
호군 김옥겸이 태종의 비밀한 영을 받들어 함흥으로 태상왕의 동정을 살피러
갔다가구사일생이 되어 겨우 목숨을 보전해 돌아와서 동북면 상태를 아뢰었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강비의 친척이온데 태사왕 전하의 마음을 움직여서 안변부
사 군사와 영흥부의 군사를 합동시켜가지고 호호탕탕 남으로 내려옵니다. 조사의
의 군사가 날래고 용맹스러운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뒤에는 또다시 여진의
군사 마적떼가 있습니다.
태종은 노기가 등등했다.
조사의란 놈이 기어코 반란을 일으켰고나. 천참만육할 놈이로구나.
태종은 주먹을 쥐어 부르르 떨었다.
여기다가 태상왕 전하의 허락하시는 말씀을 얻었으니, 함흥 영흥 동북면 일대
의 인심은 함빡 조사의한테로 돌아갔습니다.
아바마마께서 허락을 내려셨다? 무슨 허락을?
전하를 토벌하라 하셨습니다.
태종의 눈은 벌겋게 상기가 되었다.
나를 치라고?
예, 그러하오이다. 송도에 계신 전하를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태종 방원은 아찔한 현기를 느꼈다.
그리하와 안변 이북은 함빡 태상왕 전하의 명령에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조사
의의 군대는 곧 태상왕 전하의 군대올시다. 수령 방백들은 모두 다 그 편이 되었
습니다. 감사와 원들이 일제히 항복했습니다. 순문사로 어명을 받들어 나갔더 ㄴ
박만도 항복해버렸습니다. 처음에 조사의와 싸우다가 나중에 태상왕 전하를 뵙고
넙죽 엎드려 항복해버렸다고 합니다.
기막힌 일이로구나!
태종 방원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잠깐 고개를 숙여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태종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너는 어떻게 잡히지 아니하고 살아왔느냐?
처음에 안변으로 가서 조사의를 보니 그자는 무례하게 신을 욕했습니다. 전하
의 신하라고-그리고 무사를 시켜서 칼과 마패를 뺐었습니다. 신은 몰래 도망을
쳐서 함경도 문천으로 가보니 문천군수 박양은 소신을 흘겨보고 말도아니했습니
다. 벌써 모두 다 통문이 돌았습니다.
김옥겸은 숨이 차서 말을 잠깐 끊었다.
태종 방원은 갑갑했다. 어서 하회를 듣고 싶었다.
어서 다음 말을 해라.
옥겸이 다시 아뢴다.
그리하와 영풍으로 갔더니부사 한방이란 자는 육방관속을 시켜서 소신의 등을
밀어 옥 속에 가두어버렸습니다. 한 달 만에 옥을 뚫고 도망해 나왔습니다. 거지
행세를 하면서 함흥으로 나와서, 도순문사 박만은 도진무사 박문숭, 경력 허형,
의주부지사 황길지 등과 함께 조사의한테 항복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물러가거라.
태종은 김옥겸을 내보낸 후에 급히 영의정 하윤에게 입시령을 내렸다.
하윤은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어전으로 들어왔다.
조사의란 놈이 아바마마의 마음을 소란하게 움직여서, 송도로 대군을 몰아 온
다 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송도까지 내려오기 전에 막아 치우셔야 합니다.
조사의는 반란군의 칭호를 은폐하기 위하여 아바마마의 명령으로 나를 친다
하니 딱하지 아니하오. 만약 내가 응전을 한다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칼을 빼
어들고 싸우는 것이 되니 과연 창피하구려.
부자지간에 서로 칼을 빼어들었다는 후세의 조롱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
야 합니다. 싸워서 이기셔야 합니다.
차마 어찌 부자지간에 칼을 빼어들고 겨누겠소.
태종 이방원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만약 조사의의 군대가 송도를 함락하고 전하를 폐위한다 해도, 전하께서는 가
만히 앉아 계시겠습니까?
하는 수 없지, 어찌하오. 부자지간에 어찌 차마 칼을 빼어 겨누겠소.
하윤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쓸데 없는 체면을 생각하신다면 임금 노릇도 다 그만두시고 수양산으로 들어
가시어 백이 숙제모양으로 고사리나 캐어 잡수십시오. 그 뿐 아니라 전하께서 여
태껏 반평생을 두고 싸우셨던 모든 일이 다 수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전하께서
는 깊이 통촉하십쇼.
하윤의 말을 듣는 태종은 결연히 마음을 결정했다.
내시를 불렀다.
승정원으로 나가서 급히 도승지를 들라 하라.
내시는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도승지가 어전으로 추창해 들어왔다.
안변, 함흥, 영흥에서 역적 조사의가 반란군을 일으켜서 송도로 쳐들어온다 한
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엇바. 비변사에 영을 내려 삼군을 조직하게 하라.
삼가 봉행하겠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도승지에게 다시 영을 내렸다.
정승 하윤으로 판중추부사를 겸임케 하고, 조영무로 동북면과 강원, 충청, 전라,
경상 5도 도통사를 삼고, 이빈으로 서북면 도절제사를 삼고, 이천우로 안주도 도
절제사를 삼고, 김영렬로 동북면 강원도 도순무사를 삼고, 유양으로 황해도 도절
제사를 삼아 조사의를 대항케 하라.
비변사에서는 왕명에 의하여 곧 삼군을 출동시켰다.
새로 임명된 도통사 조영무는 안주도 도절제사 이천우, 도순무사 김영렬과 함께
삼군을 거느리고 서북 천리 길로 향했다.
형과 아우 사이의 치열한 정권 싸움은 마침내 아버지와 아들의 정권싸움으로
변해서 장차 무수한 생명을 잃게 하는 피비린내 나는 인생의 비극이 또 한 번
전개되는 것이다.
호호탕탕하게 올라가는 송도의 군사는 함경도 함흥에서 송도로 향하여 내려오
는 조사의의 군대와 평안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태사왕 이성계의 명령으로 정남대장군이 되어 소옫로 쳐들어오는 조사의의 군
대는 덕천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한편 태종 이벙원의 명을 받아 서북면으로 쳐들어가는 도절제사 이천우의 군대
는 자산에 진을 쳤고, 서북면 도절제사 이빈의 군대는 강동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천우는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 덕천에 있느 조사의의 군대를 단숨에 토벌시
킬 수 있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삼천 병사를 몰아 고맹주로 향했다.
조사의의 정탐병은 이천우의 군대행동을 나는 듯이 조사의한테 고했다.
송도서 쳐올라온 이천우의 군대는 삼천 병마를 이끌고 고맹주로 향했습니다.
정탐병이 말하는 고맹주라는 땅은 덕천으로 향하는 산협지대다.
조사의는 정탐병의 보고를 받자 마음 속으로 크게 기뻤다.
다시 나가서, 적의 행동을 유루 엇이 살펴서 신속하게 정찰하라.
조사의는 갑옷 입고 투구 쓰고 삼천 병마를 점검했다.
선봉대장은 조사의 자신이 되고 중군은 항복한 대장 박만이요, 후군은 영흥부사
김권을 임명시켰다.
군사들의 행동은 바람보다 숙했다.
이천우의 군대가 고맹주에 당도하기 이전에 미리 전쟁터를 정할 계획이다.
정남대장군 조사의는 친히 장대에 올라 군사들을 격려했다.
전쟁은 식속해야 한다. 우리 군대는 적병이 고맹주에 당도하기 이전, 먼저 가
서 길을 끊어야 할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하여 신속한 행동을 취하라. 승전하는
날 태상왕께 아뢰어 후한 상을 주리라.
모든 군사들은 태상왕께 아뢰어 후한 상을 준다는 말에 용기가 백배나 솟구쳤
다.
한낮이 겨워서 조사의의 군대는 벌써 고맹주에 당도했다.
고맹주는 첩첩산중에 깊은 오솔길이다. 조사의는 산악지대의 전후좌우를 살핀
후에 김권의 거느린 일천 병먀를 고맹주 좌편 산골에 매복시키고, 일천 병마는
우편 산골에 매복시켜서항복한 장수 박만이 지휘하게 하고, 일천 병마는 조사의
자신이 거느려 앞으로 나가며 전군에 영을 내렸다.
만약에 내가 적병을 유인해서 패하는 체 돌아오거든 좌우 양익의 복병은 일시
에 내달아 적을 포위하고 적장들을 폽가하라. 추호라도 영을 위반하는 자가 있다
면 군법시행을 하리라.
조사의의 영이 떨어지니 군대들은 일제히 움직여 좌우 산골 속으로 들어갔다.
큰길에 남은 군대는 조사의의 거느린 선봉뿐이었다.
조사의는 천천히 군사를 거느려 산골 어귀에 진을 치고 송도군이 오기만 기다
렸다.
안주도 도절제사 이천우는 급히 군사를 몰아 고맹주 산골 어귀에 당도했다. 앞
으로 벌써 조사의가 정남대장군의 큰 깃발을 바람에 펄펄 날리며 은안백마에 높
이 앉아 있었다.
이천우는 한번 급히 결전해볼 생각이 들었다.
네 이놈 조사의야, 국가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어찌 감히 반란군을 일으켜 인
심을 어지러게 하느냐. 나는 안주도 도절제사 이천ㅇ우다. 네 만약 싸우기 전에
항복한다면 특별히 위에 아뢰어 네 목숨을 사려 줄 것이다. 빨리 정남대장군의
기를 내리고 왕수 앞에 항복하라.
이천우의 호령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조사의는 장팔사모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
려 이천우의 앞으로 뛰어들며 준절하게 꾸짖는다.
우리는 반란군이 아니다. 임금을 참칭하는 불의무도한 방워을 응징하기 위하여
태상왕 전하의 조칙을 만들어 방워을 토멸하러 나가는 정남대장군의 군사다. 형
을 쫒고, 아비를 좆고, 동생을 죽이고, 조카를 죽인, 삼강오륜을 끊어버린 방워을
주륙하려는 군사다. 네 어찌 감히 태상왕 전하의 군사를 향하여 칼을 들려 하느
냐. 과연 난신적자로구나!
조사의는 말을 마치자, 창을 번쩍 들어 이천우를 찌르려 했다.
이천우와 조사의는 서로 어울려 싸운 지 십여 합에 승부가 나지 아니했다.
홀연 조사의는 힘이 모자라는 체 창을 거꾸로 들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조사의의 말 탄 군사들은 조사의가 달아나는 것을 보자 정남대장군의 깃발을
걷얻르고 뒤를 따랐다.
이 모양을 본 성급한 이천우는 장검을 휘두르며 달아나는 조사의의 뒤를 쫒는
다.
이놈 조사의! 네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승천입지를 할 테냐. 어디로 달아나
려 하느냐.
호통을 치면서 뒤를 쫒는다.
군사들은 대장 이천우의 뒤를 따라 고함치면서 물밀듯 산골 속으로 몰려들었다.
안주도 도절제사의 군사들이 거의 산골 속으로 반수 이상 들어섰을 때 별안간
등뒤에서 일성포향이 천지를 진동하면서 좌편에서 복병이 쏟아져 나오고 우편에
서 복병이 쏟아져 나왔다.
길은 끊어지고 갈 곳이 없었다.
죽을 힘을 다하여 피를 뿌리는 백병전이 일어났다.
출기불의로 나온 조사의의 복병들은 좌우의 양익을 벌려 이천우의 군사들을 포
위하기 시작했다.
이때 앞서 달아나던 조사의는 말머리를 급히 돌려 달아나는 군사를 휘동하여
바람처럼 돌격했다.
이천우의 군대는 함빡 포위망 속에 빠져서 죽는 자가 부지기수다.
조사의는 때를 놓치지 아니했다. 좌우 양익의 복병대장과 함께 이천우를 산 채
로 잡았다.
꽁꽁 결박지어 군문 앞에 묶어놓았다.
조사의는 목청을 가다듬어 이천우를 꾸짖는다.
네가 이제도 항복하지 않겠느냐?
이천우는 속수무책이었다.
항복하겠습니다.
너의 항복은 태상왕 전하께서 받으셔야 한다. 함흥 본궁으로 들어가 어전에 항
복을 아뢰어라.
조사의는 자기 군사의 위엄을 더한층 높이기 위하여 태상왕한테 직접 항복을
드리도록 했다.
조사의는 군사들에게 명하여 승전고를 올리고 이천우를 함거에 실어 태상왕 전
하의 거접하는 함흥 본궁으로 들어갔다.
태상왕 이성계는 승전고를 올리며 돌아오는 조사의의 군사를 바라보자 아들 방
원의 군사와 싸웠다는 구슬픈 사실도 잊어버리고 마음이 거뜬하게 가벼웠다.
이겼구나!
하는 기쁜 감정이 등골 속으로 찌르르 스며들었다.
마침내 칼을 뽑는 태종
승전고 북소리와 군사들의 환호성이 뜸하게 되자 조사의는 송도군 대장 이천우
를 섬돌 아래 결박지어끊리고 함흥 본궁으로 들어가 태상왕께 아뢰었다.
역적 방원의 대장 이천우를 산 채로 잡아 바치옵니다. 전하, 목을 베오리까?
어찌하오리까?
함흥에 오는 차사들도 목을 베었는데, 과인에게 칼을 들이댄 이천우를 살려줄
도리가 없다. 정남대장군은 과인의 명을 받들어 곧 참형에 처하라.
태상왕의 준엄한 분부에 의하여 이천우는 함흥 본궁 밖 형장으로 끌려나가 붉
은 옷 입은 망나니한테 목이 잘려졌다.
조사의의 군대는 용기가 백 배나 더 솟구쳤다.
도순문사 박만이 도진무사 박분숭, 경력 허형의 무리와 함께 항복한 지 며칠이
못되어 대군을 거느리고 함흥올 쳐들어온 송도군이 태반이나 죽은 후에 대장이
생금되어 목을 잘리게되니 조사의의 군사는 어깨가 더한층 으쓱해졌다.
이때 이천우와 좌우 양익이 되어 함흥으로 쳐올라가던 이빈이 거느린 군사는
강동에 있었다.
조사의는 다시 군사를 점고한 후에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태상왕 전하의 조칙을 받든 우리 군대는 천하무적이다. 대를 쪼개는 듯한, 승
승장구하는 기사으로 강동에 있는 이빈의 군대를 격파하라.
조사의의 군사는 평양 강동에 있는 이빈의 군사들마저 항복시키려고, 안주 청천
강으로 향하여 호호탕탕 내려갔다.
아직 항복하지 아니했던 평안군과 호아해도의 수령 방백들은 급히 파발마를 송
도로 달려 전투태세를 보고했다.
태상왕 전하의 명령으로 움직인 조사의의 군사는 고맹주에서 큰 싸움을 하여
이천우의 군사는 함몰되고, 이천우는 산 채로 잡혀 참형을 당했습니다. 지금, 조
사의의 대병은 안주 청천강을 건나 평양으로 내려오는 중, 강동에 있는 이빈의
군사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일이 급하옵기 장계로 고합니다.
각읍 수령들의 똑같은 장계는 요란한 파발마 방울 소리와 함게 송도로 치달리
고, 산마다 급한 것을 보하는 봉홧불은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연달아 연기와
불꽃을 뿜었다.
임금 이방원은 선발대로 보낸 이천우의 군사가 함몰되고 이천우는 생금이 되어
참형을 당했다는 급한 보고를 받자 결연히 뜻을 결정했다.
크나큰 위기였다. 비록 아버지 태상왕과 칼을 겨누어 승부를 결한다 할지라도
감연히 싸워서 이겨야 할 것이락고 마음 속으로 굳게 결정했다.
비록 후세에 자식이 아비를 향하여 칼을 겨누고 일어섰다는 추한 누명을 듣는
다 할지라도 자기는 싸워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체면과 도의만을 찾아지킨다면, 태종 자신이 여태껏 쌓아 올린 업적은
모두 다 수포로 돌아갈 뿐 아니라 자기는 아버지의 군사한테 참형을 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왕위에서 쫓겨나서 방간의 신세와 같이 멀고 먼 원악도로 산 송
장이 되어 귀양을 가지 아니하면 아니될 비참한 운명 속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
하다.
태종은 분명히 만조백관을 어전으로 불렀다.
영의정 이하 육조판서와 삼군부 장성들이 모여들었다.
이제 반란군 조사의는 맹랑하게도 고맹주에서 이천우의 군사를 함몰시키고 이
천우를 사로잡은 후에 목베어 죽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태상왕 전하의 명령으로
과인을 정복한다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민심을 혼란시키면서 안주
청천강을 넘어 평양으로 내려와 강동에 진치고 있는 이빈을 공격하는 듯하다. 과
인은 그대로 앉아서 바라볼 수 없다. 한 걸음 잘못하면 왕조창업의 근본대업이
뭉그러지고 말 것이다. 나는 차마 이씨의 국가가 조씨의 국가로 변하게 되는 것
을 볼 수가 없다. 나는 결연히 친정하기로 결정했다. 영의정 이하 모든 대신과
삼군부 장성들은 과연의 결연한 뜻을 받들어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게 하라.
영의정 이하 모든 신하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영의정 하윤이 군신을 대표하여 어전에 나가 아뢴다.
지당하신 분부올시다.
태종 이방원은 화경 같은 큰 눈을 떠서 다시 군신들을 바라본다.
지금 반란을 일으킨 조사의는 방석, 방번의 모후 되는 돌아간 강비의 족속들이
다. 이자는 내가 후하게 대접했건만 불쾌하게 마음을 먹고, 노망하시어 함흥까지
가신 태상왕 전하의 심약하신 마음을 흔들어 반란군을 친히 지휘하시는 것처럼
가장해 만들었다. 그러나 결코 이것은 태상왕 전하의 본뜻이 아니실 것이다. 모
르는 사람은 자식이 아비에게 칼을 뽑았다고 비판하리라. 그러나 나는 조사의의
군사를 치는 것이지, 결코 태상왕의 군사를 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신하들은 경
위를 알기 바란다.
태종 이방원은 엄숙히 선언했다.
화경 같은 큰 눈에 불을 뿜에 엄숙하게 선언하는 태종 이방원의 결연한 말을
듣자, 영의정 하윤은 또 다시 어전 가깝게 나가 태종의 뜻을 받들어 아뢴다.
반란군은 자기 위치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그같은 야비한 방책을 써서 백성들
의 마음을 선동시키려 한 것입니다. 빨리 정병을 일으키시어 난신적자를 토멸하
시옵소서.
영의정 하윤의 아뢰는 말이 떨어지자 태종은 곧 대장군을 임명시켰다.
승지는 가까이 와서 비망기를 받으라.
승정원 승지들은 왕의 좌우 옆으로 나가 시립했다.
붓을 들라.
승지들은 어전에 부복하여 붓을 들었다.
과인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나가게 되니 송도를 지킬 대신이 필요하다. 여흥부
원군 민제로 수성도통사를 삼고 권화로 도진무를 삼으라.
승지들은 어명을 받아 기록했다.
수성도통사 민제는 태종비 민씨의 아버지다.
다음엔 친정하는 장수들을 임명할 테다. 이거이로 좌도도통사를 삼고 이숙번으
로 도진무를 삼고, 민무질로 도병마사를 삼고, 이지, 곽충보, 이행, 한규로 조전절
제사를 삼으라.
승지는 명을 받들어 성명을 기록했다.
이중에 도병마사 민무질은 태종의 처남이다.
태종 이방원은 처가편이 본가편보다도 가장 미더운 모양이다.
송도를 지키는 수성대장의 중대한 책임은 장인한테 맡기고, 군사와 말을 조달하
는 긴한 책임은 처남한테 맡겼다.
나의 친정은 시각을 지체할수 없다. 내일 이른 아침 때 대군을 휘동하여 출발
하기로 한다. 모든 장수들의 임명하는 의식을 당장 실행하라.
승지는 즉석에서 첩지를 쓰고 상서원에서는 대장들의 절월과 인수며 금부은월
을 받들어 나갔다.
태종은 수성도통사 민제 이하 여러 장수에게 금도끼 은도끼에 옥절과 인뚱이를
친히 내렸다.
이튿날이 밝자 태종은 황금 투구에 황금 갑옷을 입고 금안장으로 꾸민 백마 위
에 높이 앉아 산호 채찍을 들어 대장과 군사를 지휘하여 행군을 개시하게 했다.
송도에서 떠나는 태종의 친정군은 십만 대병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의 꼴이 보기 싫어서 달아난 함흥으로 장차 대군을 몰아
친히 활시위를 당기려 했다.
울어 간하는 소년 왕자
태종 이방원이 금안백마에 높이 앉아 삼군부 장성들에게 호위되어 송도의 왕
궁인 경덕궁 궐문 밖으로 나가려 할 때, 홀연 전반 같은 머리채를 늘이고 붉은
강사포를 입은 소년 왕자 한 사람이 전하가 탄 백마 앞에 나타났다.
미목이 청수하고 걸음걸이가 의젓했다. 나이는 아홉살이 아니면 열 살쯤 되어
보였다. 키가 휠씬 크고, 어깨판이 떡 벌어졌다.
삼군부 장성들과 기치 창검을 든 어림 군사들은 소년 왕자를 바라보자 목례를
드리며 몸을 굽혀 길을 터주었다. 비록 나이는 십대 소년이지만 상당히 지체가
높은 공자 왕손인 듯했다.
소년 왕자는 의젓하게 걸음을 옮겨서 태종이 타고 있는 어승마 앞에 당도하자
땅에 엎드려 전하께 배를 드렸다.
삼군부 장성 이하 군졸들은 전하가 친정을 하러 멀리 함흥까지 나가게 되니, 왕
자가 전소을 하러 나온 줄 알았다.
마상에 높이 앉아 있는 태종의 눈에도, 문후를 드려서 배를 하는 왕자의 모습이
비쳤다. 전하 역시 왕자가 전송을 나온 것으로 알았다.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절하고 일어서는 왕자를 향하여 용안에 가득 미소를 띠고 분부를 내렸다.
오오, 제 가 나왔느냐!
네
소년 왕자는 두 손길을 마주잡고 대답했다.
전하는 다시 미소를 풍기며 귀엽다는 표정으로 왕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겠다. 여러 날 될 것 같다. 나 없는 동안에 부지
런하게 공부를 잘 해라. 그리고 네 동생들의 공부도 돌보아주고-.
태종은 차마 어린 아들에게 향하여 아버지가 일으킨 반란군에게 칼을 뽑아 소
탕하러 나간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냥을 나간다고 핑계를 댔다.
소년 왕자는 아버지가 사냥을 하러 나간다는 말이 거짓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궁녀들에게 이번 아버지의 거둥행차가 함흥에서 내려오는 할아버지의 군사를
쳐부수러 나가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어머니 모후한테서도 들어 알았다.
어머니 모후한테서도 들어 앉았다.
새벽에 외조부민제와 외숙인 민무질 장군한테도 아버지의 거둥하는 경위를 들
어 알고 있었다.
사산에 봉홧불이 켜지고 삼군부의 십만 대병이 움직이는 것을 생기 있는 푸른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사냥이 나가는 데 십만 대병이 움직일 까닭이 없고, 난리가 날 때 켜지는 봉화
가 산봉우리마다 푸른 연기를 뿜어 불길이 일어날 리가 없다.
소년 왕자는 아버지가 사냥을 나간다고 거짓말을 했을 때, 그리고 자기에게는
글공부를 잘 하라고 당부했을 때 마음이 무척 슬펐다.
소년 왕자의 총명하고 맑은 눈에는 이슬 같은 눈물이 새까만 눈동자 사이로 글
썽글썽 어렸다.
아바마마,소자를 속이지 마십쇼.
소년 왕자는 가만히 목멘 소리로 부왕의 용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앵도알을
머금은 듯한 붉은 입술이 슬픔을 머금어 비쭉했다.
태종 이방원은 어이가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속이다니.
소년 왕자는 눈물어린 눈으로 다시 부왕의 용안을 우러보았다. 무척 마음이 안
타까운 모양이었다.
잠시 땅을 굽어보다가 다시 아바마마의 용안을 바라보았다. 파란 눈에 동자가
반짝이고 빛을 뿜었다. 이내 뱉듯이 고했다.
소자는 아직 어립니다. 그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소년의 목소리는 쨍했다.
태종 이방원은 어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다 알다니, 무엇을 다 안단 말이냐?
함흥서, 할아버님께서 군사를 보내서아바마마를 토벌하라고하신 일을 다 알고
있습니다.
너 어디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었느냐?
소년 왕자는 새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아바마마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했다.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올시다. 사실이올시다. 그래서 아바마마께서는 지금 태
사왕 전하의 군사를 치러 함흥으로 행차하십니다. 소자를 속이지 마십쇼. 다 알
고 있습니다.
소년 왕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느냐? 잘못 안 소리다. 사냥을 가는 길이다.
아무리 패기 강한 태종이라 하나 아들 앞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
불행하고 명예스럽지 못한 일을 알리고 싶지 아니했다. 딱 잡아떼었다.
누구한테 들은 것이 아니올시다. 봉홧불이 산마다 켜졌습니다. 동북면, 태상왕
전하께서 계신 곳에서는 날마다 파발말이 방울을 소란스럽게 흔들고 뛰어들었습
니다. 아바마마의 문안사들은 가는 족족 죄없이 죽어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
바마마께서는 지금 십만 대병을 거느려 친정을 하시러 나서셨습니다. 사냥하시러
가는 길에 십만 대병을 움직이실 까닭이 없습니다. 이 모든 점을 미루어보아 아
바마마께서는 할아버지 태상왕의 군사를 치러 가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바마
마, 친정을 중지하옵소서.
소년 왕자는 목이 메어 간했다.
그는 누구한테 들었다고, 어떤 사람을 지적해서 말하지 아니했다. 슬기스럽게
봉홧불으 들어 말하고, 십만 대병을 동워하여 사냥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지적
했다. 아버지의 성격을 잘 아는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을 지적했다간 그 사람
의 목이 달아나게 될 것을 짐작하는 때문이다.
태종은 더 이상 어린 아들을 숨길 수 없었다.
용안이 잠시 북어졌다. 이내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소년 왕자를 굽어보며 말했
다.
사냥을 나간다고 말한 것은 어린 네가 놀랄까봐 그리 말한 것이다. 기실, 동북
면에서는 반란군이 일어났다. 강비마마의 조카 조사의란 자가 함흥에 계신 태상
왕 전하를 팔고 반란군을 일으켜서, 지금 송도로 쳐들어오고 있다. 그러하니 내
가 친히 나서서, 역적놈을 잡으러 나가는 것이다. 너는 조금도 근심하지 말고 어
서 들어가 공부나 해라.
태종은 비로소 어린 왕자에게 출병하는 까닭을 말했다.
소년 왕자는 귀기울여 듣고 두 손을 마주잡아 공손히 다시 고했다.
아버마마께서 친히 나가시는 일을 비로소 알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제왕의 몸은
태산교악같이 장중하십니다. 함부로 왕도를 떠나실 수 없습니다. 대장을 대신 보
내십시오.
어린 왕자는 너무나 숙성했다. 말소리가 장중했다.
아버지 태종은 미소를 짓지 아니할 수 없었다.
기특하다. 네 말이 옳다. 제왕이 함부러 왕도를 비워놓고 출정하지 않는 일을
나도 짐작한다. 그러나 이천우라는 대장에게 삼만군사를 주어보냈더니 용렬하게
고맹주에서 함몰이 되어버렸다. 그대로 앉아서 바라볼 수 없다. 대신과 의논한
후에 친정하기로 결연히 결심한 것이다. 그리 알고 너는 돌아가 안심하고 공부하
라.
소년 왕자는 다시 말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부왕께 고했다.
일군이 패했으면 이군을 보내시고, 이군이 패했으면 삼군을 보내실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친정하시는 일은 결코 불가합니다.
태종은 다시 용안에 화색을 띠어 말씀을 내렸다.
왕도가 공허한 것을 걱정해서 그리하느냐. 아무 염려 없다. 너의 외조부 민대
제학으로 수성대신을 삼았다. 안심하고 글공부를 하라.
소년 왕자의 얼굴은 어둡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자기의 진정한 뜻을 몰라주는
것이 답답했다. 다시 간곡하게 아뢴다.
아바마마, 소자는 왕도가 비게 되는 것을 근심해서 아뢰는 말씀이 아니올시다.
만약, 아바마마께서 이번에 친히 군사를 거느려 나가신다면 아바마마께서는 백대
의 죄인이 되십니다.
소년 왕자의 아뢰는 말은 너무나 대담했다.
좌우에 모시어 섰는 영의정 하윤 이하 모든 대신과 대장들은 깜짝 놀라는 표정
을 지었다.
태종 이방원의 용안에도 노기가 부풀어올랐다.
백대의 죄인이라니?
옥음이 거칠었다. 부리부리한 큰 눈에 화경같이 열기를 뿜으며 둥그렇게 떠졌
다.
예, 그렇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오늘 친정을 하신다면 아바마마께서는 백대의
불효자가 되십니다. 달리 대장을 보내시고 아바마마께서는 친정을 중지하십시
오!
소년 왕자의 아뢰는 소리는 더한층 야무지고 또렸했다.
태종은 열화 같은 목소리로 뱉듯이 말씀했다.
불효자가 된다. 어찌해서 불효자가 되느냐? 반란군을 일으켜 쳐들어오는 조사
의 놈을 치러 나가는데, 어찌해서 불효자가 된다 하느냐? 입을 닥쳐라. 함부러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방자하고 무엄하고나!
태종은 어린 왕자의 말하는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자기는 이일로 인해서
무한 번뢰를 느겼던 것이다. 영의정 하윤과도 여러 차례 의논하고 의논해서 이같
이 친정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들한테 굽히기 싫었다. 한번 자기의 위신을 떨쳐보는 것이다.
태종은 노기가 등등했다. 소년 왕자에게 무엄하고나 하고 호통을 쳐서 꾸짖은
후에 이내 말을 채질해 앞으로 나갔다. 만조백관과 대장들이 뒤를 따랐다.
소년 왕자는 어승마의 고삐를 휘어잡고 울며 간했다.
조사의의 반란군을 고엮하시지 말라 한 것이 아니올시다. 아바마마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시라 할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친정을 하신다면 태상왕께 칼을 빼
어드는 일이 됩니다. 천추만세 후에 아바마마께서는 무부 무군의 누명을 면치 못
하십니다.
왕자는 몸부림치며 말고삐에 매달렸다. 목이 메어 말을 이루지 못했다.
태종 이방원은 말머리에 매달려 몸부림치는 왕자를 꾸짖는다.
요망한 어린것이 무엇을 안다고 감히 출정하는 길을 어지럽게 하느냐. 빨리 물
러가라. 아니 물러가면 참형에 처하리라. 과인은 무부무군하다는 누명을 써도 좋
다! 과인이 만약 친정을 하지 아니한다면 과인이 창업한 이 나라 삼천리 강산은
이씨의 기업이 되지 아니하고 조가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빨리 길을 틔우라.
계속해서 어리광을 핀다면 군법시행을 하리라.
아바마마인 태종의 호통소리는 벼락불이 떨어지는 듯했다.
참형에 처해서 군법시행을 한다는 말에 옆에 있던 늙은 내시는 황겁했다. 급히
내전으로 뛰어들었다. 직접 중전께 고했다.
중전마마께 아뢰오. 큰일났습니다. 큰 왕자를 참형에 처한다 하십니다.
중전 민씨는 깜짝 놀랐다.
웬일이냐?
출정해 나가시는 길을 큰왕자께서 울면서 막으십니다. 그러하와 전하께서는 군
법시행을 하신다 합니다.
민비는 급히 옥교에 올랐다. 남편 되는 태종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아
들의 성정도 잘 알았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군법시행에 처할지도 몰랐다.
만조백관들이 모인 것을 알면서도 체면 불고하고 옥교를 몰았다.
멀리 바라보니 왕자는 어승마의 말고삐를 붙들고 늘어졌다.
왕후는 급했다.
빨리 몰아라.
무예청들은 풍우같이 몰았다. 어승마 지척지지에 옥교가 닿아졌다.
왕후 민씨는 급히 옥교에서 내렸다.
오아자 앞으로 가까이 갔다
말고삐를 붙들고 목메어 우는 왕자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제 야, 너무나 무엄하고나. 아바마마께 간해서 아니 들으시면 울며 물러가는 법
이다. 불경스럽게 어승마의 고삐를 잡는 법은 없느냐라.
왕비는 소년 왕자의 말고삐를 잡은 손을 풀었다.
황공무지하옵니다. 어미, 대신하여 죄를 받겠습니다. 어서 어가를 움직이옵소
서.
태종의 출정하는 금안백마는 비로소 앞으로 나갔다.
왕실의 어린 세 별
태조의 승낙을 받아 송도로 쳐들어오는 함흥군을 친히 공격하러 나가는 태종
을 울어 간한 소년 왕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곧 태종의 장자인 제 다.
태종 이방원과 왕후 민씨 사이에는 태종이 아직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아
들 사형제를 두었다.
큰아들은 제 요, 둘째 아들은 보 요, 셋째 아들은 도 요, 네째 아들은 종 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큰아들 제 는 태조가 고려왕실을 뺏아 임금이 된지 3년째 되는 갑술년에 났으
니, 태종이 조사의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함흥으로출병했을 때는 나이 아홉 살
이었다.
둘째 아들 보 는 태조 5년 병자에 났으니, 큰아들 제 보다 두 살이 아래다. 이때
도 의 나이는 여섯 살이 되었다.
네째 아들 종 은 나이 너무 어리니 강보에 싸인 아기였다.
철을 몰랐다.
이때 태종은 왕위에 오른 지 일천하고 나라일이 어수선해서 정신을 못차리던
때이므로 왕자들에게 아직 군호를 내리지 못했다.
큰아들 제 는 태조가 한양에 천도하기 이전에 송도에서 났으니 송도 태생이요,
둘째 아들 보 와 셋째 아들 도 는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해와 이듬해에 났으
니 한양 태생이었다.
큰아들 제 는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에 아버지가 정안군으로 있을 때 왕세
자인 삼촌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끔찍끔찍한 집안 싸움
을 목도해 보았다.
이때 제 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다섯 살에 입학을 해서 이때는 제법 글자를 쓸 줄 알고 글뜻을 어렴풋 알아들
으 때다.
할아버지는 임금의 자리를 내놓고 금강산으로 달아나고, 둘째아버지가 왕이 되
었다 했다. 뒤숭숭한 일이었다. 소년의 순진한 마음에 불안스런 생각을 갖게 됐
다.
웬일인지 둘째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천 년 만 년 살려고 정해논 한양 서울을 버
리고 실인심을 한 송도로 다시 돌아갔다.
진정 어수선 산란한 일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구슬픈 피비린내 나는 일이 집안에 일어났다.
한양에 머물러 있던 아버지는 별안간 군사를 거느리고 송도로 올라가더니, 셋째
숙부 방간과 큰 전쟁을 일으켜서 사촌형 맹종을 쏘아 죽였다 한다.
소년 제 의 가슴에는 씻지 못할 상처로 멍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아버지는 한양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송도로 불렀다. 아버지는
오아세자가 됐다고 했다.
아버지의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다.
호걸 웃음이 연해 터졌다. 용마루가 찌렁찌렁 울렸다.
소년 제 는 기쁠 것도 없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왕세자가 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을 때 아버지는 선위를 받아서 왕
이 되었다.
이때 궁중 안에서느 궁녀들 사이에 수군수군 뒷공론이 부산했다.
아버지를 추대하려고 대신들이 둘째아버지한테 왕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우겨댔
다는 둥, 아버지는 둘째아버지한테 문안을 들어갈 때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둘
째아버지를 흘겨봤다는 둥, 그래서 왕비인 둘째 어머니 김씨는 어서 임금의 자리
를 아버지한테 내주라고 졸랐다는 둥 별의별 소리가 다 많았다.
이때 둘째아버지는 아들들을 함빡 승려로 만들어 절로 보냈다. 방석, 방번이나
맹종 형처럼 비명횡사를 할까보아 호신책을 쓴 것이다.
제 는 중이 되어 간 사촌형들을 보고 싶었다.
한편으로 아버지의 처사를 불가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미 왕세자다. 둘째아버지 백세 후에는 으레 왕위에 나갈 터인데, 무
엇이 그리 조급해서 대신들을 시켜서 형님한테 왕위를 내놓으라고 하고 문안을
들어갈 때마다 눈을 흘려서 둘째아버지를 불안스럽게 만들었는가 하고 아버지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둘째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임금의 자리를 내줄 때 할아버지 태상왕께도 고하지
아니하고 왕위를 내주었다 한다. 할아버지가 아시면 또 한 번 크나큰 벼락 불덩
이가 떨어질 것이 무서운 때문이라고 했다.
과연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임금의 자리에 나갔다는 말을 듣고 역정이 크게 나
서 함흥올 달아나버렸다.
제 는 어린 마음에도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떡해먹을 집안이라고 한탄했다.
아니나다를까. 함흥차사 란 소리가 떠돌았다.
아버지의 문안사신이 가기만 하면 할아버지는 목을 자라 보낸다고 온 궁중이
소란하게 떠들어댔다.
박순이란 재상은 말을 잘 해서 살아서 돌아오다가 또다시 죽이라는 영이 내려
허리 반 동강이 잘라져서 뱃전을 걸치고 죽었다 한다. 소름이 쪽 끼치는 소리였
다.
아홉 살 된 왕자 제 는 궁녀들한테 이 비참한 소리를 듣고 밤에 잠이 오지 아
니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죽여 울었다.
하루는 난리가 났다고 온 궁중이 소란했다.
할아버지가 조가라는 대장을 앞세우고 여진군사까지 동원해서 아버지를 치러들
어온다고 야단이 났다.
이가라는 대장을 내보내서 막아낸다 하더니 불길한 소식이 들어왔다.
파발말은 요란하게 방울을 흔들어 뛰어들고 산마다 봉홧불은 푸른 연기를 뿜어
불길이 치솟았다.
송도 안이 발끈 뒤집혔다.
제 는 아우 보 와 도 와 함께 스승인 보덕한테 글공부를 하다가 궁금증이 나서
물었다.
봉홧불이 송악산에까지 켜지고 파발마 뛰닫는 소리가 요란하니 웬일입니까?
보덕은 간단하게 대답하고 입을 닫았다.
난리가 났는데도 글만 읽고 있으란 말요? 글도 중요하지만, 세상형편도 알아야
할 것 아니겠소.
아홉 살 된 제 는 까만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보덕에게 추궁해 물었다.
옆에 있던 보 는 일곱 살이었다. 난리가 나면 사람이 산더미같이 죽는 것을 알
았다. 눈을 깜박거리며 언니와 보덕의 주고받는 말을 지켜 듣고 있었다.
도 는 여섯 살이었다. 그저 무섭기만 했다. 두 손으러 얼굴을 가렸다.
보덕은 너무나 영리하고 똑똑한 제 의 질문에 기가 죽었다. 그러나 함부러 말했
다가는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그저, 소인은 모릅니다. 알 도리가 없습니다. 밤낮 책만 일고 있으니, 바깥 소문
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보덕은 손을 모아 싹싹 문지르고 있었다.
제 는 보덕의 태도가 너무나 야비하다고 생각했다. 썩은 선비의 나약한 태도가
분명했다.
보덕은 난리가 나서 죽게 되어도 손만 싹싹 비비고 있을 테요.
큰 소리로 외치고, 발길로 책을 박차고 일어섰다.
보 도 제 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도 는 언니들이 일어나니 덩달아서 일어났다.
보 는 화가 치밀어 나오는 제 한테 속삭였다.
언니, 상방궁녀한테 물어봅시다.
제 는 보 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네 말이 옳다 상방 궁녀한테로 가자.
제 와 보 와 도 는 왕자들의 뒷배를 거두는 상방궁녀한테로 들어갔다.
상방궁녀는 고려왕실에서 거행하고 있는 늙은 궁녀였다.
새로 왕국을 건설한 이성계는 궁중의 의식을 알 길이 없었다. 고려왕실에서 거
행하던 젊고 늙은 궁녀들 중에서 소원하는 궁녀들은 그대로 궁중에 두어서 모든
의식을 맡게 했던 것이다.
세 왕자는 저녁밥을 먹은 후에 늙은 상궁을 청했다.
제 가 먼저 물었다.
노상궁한테 물어볼 말이 있소.
해사하게 늙은 상궁을 둘러싸고 둥글게 원을 지어 앉았다.
큰왕자 제 가 수심에 싸인 얼굴로 싸인 얼굴로 늙은 상궁에게 물었다.
상궁! 난리가 났다고 파발말이 뛰어다니고, 산봉우리마다 봉홧불이 들려지는데,
나라가 소란하오. 무슨 소문을 들었소?
늙은 상궁은 큰왕자가 영민하고 똑똑한 것을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귀엽다고
생각했다. 제 가 항상 상궁, 상궁 하고 따르니 정도 들었다.
아기씨, 구중궁궐 깊숙한 지밀 속에 파묻혀 있는 소인네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모릅니다.
늙은 상궁은 여진히 주름진 눈시울에 싱글싱글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상궁, 그러지 말고 어서 대답해주오.
제 는 얼굴빛을 정색하고 졸랐다.
어서 들은 대로 이야기를 해주오.
둘째 왕자 보 도 졸랐다.
늙은 상궁은 하는 수 없다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함흥차사 이야기는 전에 말씀해서 까닭을 아셨지요?
제 와 보 는 고개를 그덕였다. 셋째 왕자 도 는 아직 판단을 내릴 나이가 아니
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상궁과 언니들의 주고받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늙은 상궁은 말을 계속했다.
일은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나기 이전에 강비마마의 소생이신 세자 방석을 상
감께서 처치하신 데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분이 부상견이 되었습니
다. 이 까닭에 이번에도 난리가난 것입니다.
늙은 상궁의 말을 듣자 큰왕자 제 의 얼굴에 어둔 그림자가 짙게 돌았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치러 군사를 거느리고 함흥서 송도로 내려오는
모양이로구려.
큰왕자 제 는 말을 마치자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죠.
이번엔 늙은 상궁의 얼굴빛도 침울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죽이려고 전쟁을 하는 판일세!
이번엔 둘째 보 가 말했다. 일곱살 먹은 보 도 형만큼 영리하고 똑똑했다. 여섯
살 먹은 셋째 도 는 무섭기만 했다. 언니 제 의 손을 바싹 잡고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늙은 상궁이 다시 해명을 한다.
태상왕 전하께서 친히 오시는 것이 아니고, 돌아간 강바마마의 친정편으로 조
카뻘 되는 안변부사 조사의란 이가 대장이 되어서 송도로 쳐들어온다 하오. 그래
서 정부에서는 조사의를 치라고 이천우를 보냈는데 단번에 패군이되어 죽었다
하오. 그래서 이번에는 상감마마께서 친정을 하러 나가신다 하오.
큰왕자 제 는 고개를 푹 숙였다. 수정같이 맑은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혼자
탄식조로 말했다.
아버지가 친정을 하시다니 말이되오. 아들이 어찌 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빼어
들 수 있소?
고려궁중에서 거행하던 늙은 상궁은 큰왕자 제 의 마음을 떠보고 싶었다.
상감께서 친정하시는 일은 태상왕께 칼을 빼시는 것이 아닙니다. 조사의를 토
벌하러 가시는 것입니다.
큰왕자 제 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되는 말요. 조사의가 혼자서 반란을 일으켰다면 전하께서 친정을 하셔도
좋쇼. 그러나 조사의는 일단 태상왕 전하의 명령을 받아서 송도로 내려오는 것
인, 전하께서 친정을 하신 다면 곧 전하의 아버지 태상왕 전하께 칼을 뽑아드는
격이 되오. 부자간의 도리로, 아바마마께서는 결코 친정을 해서는 아니되오!
그렇다면 조사의가 송도로 쳐들어와서 전하의 용상에 앉아도 좋단 말씀입니
까?
상궁은 해사하게 늙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반문했다. 마음 속으로 기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한 번 큰왕자의 마음을 떠보느라고이같이 말했다.
큰왕자 제 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아따, 늙은이 말이 참 답답하오. 조사의가 바보 숙맥이 아닌 담에 어찌 자기
자신이 용상에 올라 있겠소. 슬쩍 태상왕 전하를 다시 왕으로 모실 계획이 분명
하오. 그러하니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칼을 뽑는 불륜 불효가 되고 마오. 몇 번
을 패하더라도 다른 대장을 보내서 조사의를 토멸해야 하오.
일곱 살 먹은 둘째 왕자 보 와 여섯 살 먹은 셋째 왕자 도 도 어렴풋 난리의 형
편을 알아들었다. 언니 제 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늙은 상궁은 제 의 총명 영리한 말에 또 한 번 마음 속으로 놀랐다.
큰 아기씨의 말씀이 옳소. 전하께서 친정을 하신다면 과연 아버님한테 아드님
이 칼을 뽑는 격이 되겠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가?
늙은 상궁은 왕자 제 의 마음을 또 한 번 또보았다.
늙은 상궁은 항상 고려의 옛 임금을 사모했다.
어수선 산란한 이씨 왕실을 가소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총명 영리하고 때묻지 아니한 왕자 제 의 태도를 바라보니 떡갈나무는
싹틀 때부터 알아본다고 장래 사람다운 사람이 될 듯했다.
귀염스런 생각이 나서 이같이 마음을 떠보고 있었다.
큰왕자 제 는 상궁의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말을듣자, 고개를 수경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동안 후에 제 는 고개를 들었다.
소년다운 사기 없는 순진한 얼굴을 들어 물었다.
요사이 아바마마께서 총애한다는 젊은 상궁이 있다는 구려. 필시 상궁하고도
가까운 사이일 듯하오. 고려왕실에 함께 있었다 하오. 상궁이 한번 이 사람한테
말해서 아바마마께서 친히 가시지 못하도록 하면 어떠하겠소?
제 의 말을 듣자 늙은 상궁은 놀랐다.
이씨왕실에서는 처음으로 왕궁을 창설하고 보니 왕실 전반에 걸쳐서 의식과 예
절을 차릴 줄 몰랐다.
무식하고 무무하다는 조롱을 면하려고 고려왕실에서 거행하던 궁녀들을 원하는
사람이면 죽이지 아니하고 포섭해 썼다.
고려왕실의 궁녀는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 나라가 망할 때, 두문동 칠십여 인들
의 본을 떠서 자결해 죽은 여자가 많았다.
그러나 살려는 것은 생물의 본능이었다.
차마 자기 손으로 자기의 목숨을 끊기가 어려웠다. 살아서 이씨왕실에 시중을
드는 궁녀도 있고, 젊은 예쁜 나인도 있었다.
이들 궁녀는 태조와 왕비 강씨의 시중을 들었고, 다음에는 정종과 왕비 김씨를
모시었다.
제 의 아버지 정안군 이방원이 세자로 있다가 왕위에 나가 용상에 앉게 되니
고려에서 넘어온 궁녀들은 저절로 새 상감 이방원과 새 왕비 민씨의 시중을 들
게되었다.
이중에 젊고 아름다운, 자색이 뛰어난 궁녀가 한 사람 있었다. 이름을 앵도라
했다.
위인이 민첩하고 영리했다. 왕비 민씨는 지밀 침전에 두고 손발같이 부렸다.
태종 이방원은 앵도의 자색을 탐했다. 마침내 제왕의 위세를 빌려 앵도의 정조
를 유린한 후에 후궁으로 삼았다.
이 일을 알게 된 왕비 민씨는 질투하는 감정이 불을 뿜었다.
민왕후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방원이 세자 방석을 처치하러 대궐로 들어갈
때, 남편 이방원에게 어서 빨리 마음을 결단하라고 격려한 후에 갑옷을 입혀주고
투구를 씌워주어서 혁명을 일으키게 했던 장본인의 한 사람이었다.
정안군 이방원이 오늘날 왕위에 오르게 된것은 게염 많고 결단성이 강한 여장
부의 별명을 듣는 민비의 내조의 힘이 컸던 것이다.
태종이 자색있는 고려왕실의 젊은 궁녀를 후궁으로 삼게 되니 왕실 지밀엔 가
끔 풍파가 일기 시작했다.
왕궁 지밀에서는 상감 태종과 왕비 민씨가 가끔가끔 소리를 높여 다투었다.
국가가 아직도 안정이 되지 아니하고 백성들은 갈팡질팡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 이때, 상감은 궁녀들의 궁둥이만 따라다니면서 정신없이 세월을 보내고 계
시니 장차 어찌하잔 작정입니까?
여성답지 아니한 민왕후의 목소리는 우렁우렁 울렸다. 민왕후는 역시 함경도 함
흥 태생이었다.
내가 언제 궁녀들의 궁둥이를 따라다녔소? 왕후도 별소리를 다 하는구려.
태종 이방원은 벙긋벙긋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라니, 무슨 말씀요. 내가 부리던 앵도를 슬며시 뺏어다가 후궁을 삼아놓고
시치미를 뗀단 말씀요. 이것이 군왕의 체통입니까. 보시오, 나라꼴이 어찌 되어가
나? 아바마마께서는 함흥으로 가신 후에 문안사가 가기만 하면 ㄱ을 베어 죽
여서 함흥차사 라는 새로운 말이 세상에 생겨나게 된 이때, 상감께서는 호색을
해서 정신을 잃고 계시니 장차 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소. 계집질을 하기 위해
서 전하는 혁명을 일으키셨단 말씀요. 좀 생각해보시요.
기세 좋게 떠들어대는 왕비 앞에 태종은 변명할 도리가 없었다. 궁녀 앵도를 가
까이 한것은 사실이었다. 목소리를 나직하게 해서 대답했다.
남자가 첩실 하나쯤 두는 일은 예사인데, 더구나 임금이라는 지존의 자리에 있
으면서 후궁 한 명쯤 둔 것을 가지고 무엇이 그리 큰일났다고 이같이 떠들어대
오. 여자란 질투를 해서는 못쓰오. 예로부터 질투하는 여자는 칠거지악에 든다
했소. 왕후는 체통을 지키시오. 보통 사람과 다르오.
태종 이방원은 점잖게 의젓을 뺐다.
태종비 민씨는 불끈했다. 남자 같은 성격이었다.
누구를 타이르시오. 나도 그것쯤은 알고 있소. 그러나 앵도는 고려왕실에 충성
을 다했던 궁녀올시다. 고려왕실이 전하의 손에 망한 것을 보고 비수 같은 새파
란 칼날을 마음 속에 품었을 것입니다. 공연히 가까이하시다가 침실 안에 상서롭
지 못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오. 어서 앵도와 정을 끊으시오!
민왕후는 살기 가득 찬 눈으로 상감 태종을 흘겼다.
생각해보리다.
상감 태종은 숙녹피가 되어 대답했다.
왕과 왕비는 언성을 높여서 이같이 다투고 있을 때 큰오아자 제 와 둘째 왕자
보 와 셋째 왕자 도 는 저녁 문안을 들어왔다.
삼형제는 장지문을 열고 문안을 들어가려 하다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언성을 높
여 다투는 소리를 듣고 큰왕자는 아우들에게 손을 저어 발길을 멈추게 했다.
큰왕자는 아우들에게 발길을 멈추라고 제지한 후에 장지 밖에서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무척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라를 안정시켜서 백성들을 편앙ㄴ케 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궁녀 앵도를 사랑해서 후궁을 삼았다고 아버지를 논박하
는 소리다. 순진한 마음에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혁명을 일으켜서 창업을 한다고 한 것이 겨우 계집질을 하는 것이 막
상 가는 일이냐고 푸념했다. 역시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첩으로 삼은 후궁 앵도는 고려왕실을 섬기던 여자로서 항상
옛 임금을 생각해서 비수 같은 날카로운 마음을 품었을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과
연 그럴 듯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질투를 한다고 꾸짖는 아버지가 불쾌했다. 질투를 하는 여자는 칠거지
악에 든다고 아버지는 위협했다. 떠들어대면 내쫒는다는 말이다. 어머니를 동정
하고 싶은 생각이 구름 일듯 일어났다.
큰왕자의 마음과 같이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다만 셋째 왕자 도 는 아직 나이 여섯 살밖에 아니되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투고 소란을 떠는 싸움이 슬프기만 했다.
제 는 차마 더 서서 엿들을 수 없었다.
아우들에게 손짓을 해서 문안을 중지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리하여 큰왕자 제 와 둘째 왕자 보 는 아버지의 추잡한 정사를 알았다.
셋째 왕자 도 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전에 없이 어찌해서 저다지 홤고하지 못하
고 싸우나 하고 눈물을 머금었다.
큰왕자 제 와 둘째 왕자 보 는 슬펐다.
귀여워해주는 늙은 상궁에게로 갔다.
큰왕자는 조용히 늙은 상궁에게 물었다.
고려왕실에서 일하던 나인 중에 앵도라는 궁녀가 있소?
늙은 상궁은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후궁을 삼았다 하니 과연 그렇소?
상감마마께서 총애하십니다. 후궁을 봉하셨습니다.
늙은 상궁은 계속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큰왕자는 앵도가 아버지의 사랑하는 후궁이 된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싸우러 나가는 것을 앵도를 시켜서 막으라고 늙은 상궁에게 부탁해본
것이다.
늙은 상궁은 큰왕자가 고려 궁녀 앵도를 시켜서 아버지의 함흥 친정을 막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됩니다. 앵도는 아직 그러한 중대한 일에 입을 놀릴 자격이 없습니다. 뿐
만 아니라 왕후마마께서도 앵도가 대왕마마께 총행을 받는 일을 극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만약에 앵도가 입을 열어서 전하의 친정을 간했다 하는 이
사실을 왕후마마께서 아신다면 궁중에는 새삼 큰 풍파가 일어날 것입니다.
왕자 제 는 늙은 상궁의 말을 듣고보니 그럴 듯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군사를 향하여 직접 칼을 뽑아 피를 흘리고 활을 당겨 죽
게 하는 일을 피하게 해야 할 텐데 간해서 만류할 사람이 없었다. 조정대신들은
모두 아버지의 불의를 돕고 있다.
제 는 고개를 숙여 한동안 생각속에 빠져 있다.
홀연 머리를 들어 총기 있는 눈으로 늙은 상궁에게 물었다.
조사의가 아무리 대장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송도로 쳐들어온다해도 태상왕
의 명령을 받들어 내려오는 군사가 되니 말하자면 태사왕 전하의 군대지 조사의
의 군사라고는 할 수 없지 않소?
그렇습니다. 명분상 그렇습니다.
늙은 상궁의 얼굴빛도 근엄했다.
큰왕자는 다시 물었다.
태상왕의 군사를 반란군대라고는 할 수 없지 않소?
그렇습니다. 태상왕은 임금 중에도 최고의 왕이 되시니, 그분의 명령으로 움직
인 군대를 반란군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만 아드님을 치러 내려오는 토
벌군이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수는 있지만 아들이 아버
지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는 일은 천만고에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도의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늙은 상궁의 말을 듣자 큰왕자의 어린 가슴은 쥐어짜지는 듯 괴로웠다.
둘째 왕자 보 도 옆에서 형과 상궁의 주고받는 말을 듣고, 아버지의 행동이 좋
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셋째 왕자 도 는 명료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어찌하면 좋소? 치러 나가는 군사는 막지 못하더라도 아버지가 친히 나가시는
일은 막아야 할 텐데, 누구를 통해서 또 한단 말요. 앵도를 생각해보았는데 앵도
는 아직 입을 열 자격이 없다 하니 과연 딱한 일이로구려. 만약 아버지가 친정을
하신다면 아버지는 천추만대의 죄인이 되고 마는구려. 상궁, 어떠한 묘한 방법이
없겠소?
왕자 제 는 입술에 침이 말랐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버지가 몇백년, 몇천 년 뒤
에 죄인이 아니되게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죄인이 된다면 자기도 죄
인의 자식이 된다.
큰왕자는 죄인의 자식이 된다는 것은 천추만대 뒤에 자기가 또다시 더럽고 추
한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때가 묻지 아니한 순결무구한 소년왕자는 아버지가 저지르는 의롭지 못한 일을
어서 빨리 막아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늙은 상궁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시켜서 아버지가 친히 싸우러 나가시는 일을 간하게 하는 것
이 좋겠소? 조정대신들은 모두 다 아버지의 친정을 찬성하는 사람들뿐이고, 어찌
하면 좋겠소?
늙은 상궁은 얼굴빛을 화하게 해서 대답했다.
소인의 생각에는 어마마마께 아기씨가 간곡하게 말씀을 사뢰시어 친정하시는
일을 막게 하시는 일이 제일 가는 상책이라 생각하오.
큰왕자는 총명한 눈을 굴려 늙은 상궁을 바라보며 말한다.
요사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사이는 전보다 못한가봅니다. 자꾸 다투고 싸우시
는 모양인데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씀을 들어주실지 의심스럽소.
늘긍ㄴ 상궁은 소년 왕자의 총명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얼굴에 가득 미
소를 띠고 대답했다.
전하께서 궁인 앵도를 후궁으로 삼으신 일로 인해서 두 분께서 가끔 다투시는
일은 소인도 짐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왕비마마께서는 지존의 정배시고,
앵도는 일개 노리개감인 첩실입니다. 비록 소소한 일로 트적티적하신다 하시나
국가와 왕실의 중대한 일에 왕비전하의 바른 말씀을 어찌 귀담아듣지 아니하시
겠습니까. 두 말씀 마시고 왕비마마께 아뢰시어 상감께서 친히 전쟁터에 나가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큰왕자 제 는 그럴 듯하게 들었다.
둘째 왕자 보 도 늙은 상궁의 말이 옳다고 어린 마음이건만 판단을 내렸다. 다
만 셋째 왕자 도 만 아직 어리다. 무슨 일인지 판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어마마마를 뵈러 가자!
큰왕자는 아우 보 와 도 를 데리고 늙은 상궁을 작별한 후에 중전인 어마마마
의 처소로 향했다.
중전궁녀를 위시하여 어마마마 민씨는 반갑게 삼태성과 같은 귀여운 어린 아들
들을 맞이했다.
너희들이 한꺼번에 웬일이냐?
어머니는 팔을 벌려 세 아들을 껴안았다.
제 는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아우들과 함께 문안을 드리러 왔습니다.
큰왕자는 말을 마치자 어머니인 왕비 민씨께 넙죽 절을 드렸다.
둘째 왕자 보 와 셋째 왕자 도 도 언니 제 가 하는 대로 넙죽넙죽 절을 했다.
어머니의 마음은 대견하고 기여웠다. 세 왕자를 껴안아 무릎 위에 앉히고 머리
를 쓰다듬어 애무했다.
큰왕자 제 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 저희들 삼형제가 오늘 어마마마를 뵈우러 온 것은 문안도 드릴 겸
소회 있어 아뢰러 왔습니다.
왕비 민씨는 아들들이 벌써 철이 들기 시작해서 소회 있다느 말을 듣게 되니
미덥고 든든하고 귀여웠다.
오오, 너희들이 소회 있다 하니 이제는 제법들 자랐구나. 그래 무슨 할말이 있
느냐?
큰왕자가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에게 할아버지를 친히 공격하러 나가시는 일을 못하시도록 어마마마
께서 간해주십시오. 이 말씀을 드리려고 아우들과 함께 어마마마를 뵈우러 왔습
니다.
왕비 민씨는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아직도 어리다고 생각했던 제 가 이같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서 숙성한 말을
꺼낼 줄 몰랐다.
왕비 자신도 이번 친정하는 일이 명예스럽지 못한 일인 줄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태상왕 전하의 위력을 빌려가지고 여진군사와 합세하여 쳐들어오는 막
막강병인 조사의의 군사를 쳐부수자면 남편인 상감히 친히 나가 군사를 지휘하
지 아니한다면 도저히 이겨낼 도리가 없다. 상감이 나가서 친히 군사를 움직인다
는 것과 대장만이 나가서 군사를 지휘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저편은 태상왕의 관록과 위엄을 빌려 나오는 것이니 우선 이 크나큰 위세와 명
분에 군사들은 기가 죽어서 활기를 다하여 싸우지 못하고 있다. 이 까딹에 먼저
막으러 나갔던 대장들은 일패도지가 되고 말았다.
태상왕 이성계의 위력을 대항할 사람은 오직 현재의 왕인 남편 이방원의 위력
만이 있을 뿐이다.
만 근들이 포탄이 떨어질 때는 만 근의 쇠방패로 막아내야만 한다. 천 근이나
이천근짜리 방패로는 막아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왕비 민씨는 남편이 서아우인 세자 방석을 처치하는 혁명군을 일으켰을 때 어
서 행동을 개시하라고 격려하는 말을 보내고 친히 갑옷투구를 남편에게 입혀주
었던 여장부이기에 아버지를 치러 나간다는 불명예그러운 일을 알면서도 일부러
만류하지 아니했다.
국가를 차지하고 권력을 잡으려면 작은 일에 구애돼서는 아니된다는 신념을 굳
게 가졌다.
그러기에 형제지간인 세자 방석을 집어치우라고 남편에게 갑주와 투구를 입혀
주었다.
친형인 방간과 친조카인 맹종과 송도에서 싸울 때, 어서어서 싸움에 이기라고
군사들에게 술을 담가 마시게 하고, 더운 밥을 지어주어서 뒷바라지를 해주었던
민씨였다.
이 사이 와서, 남편 되는 상감이 약간 미워졌다.
지분지분하게 고려왕실에서 거행했던 젊은 궁녀 앵도의 궁둥이를 따라다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추잡한 본능을 쏟아서 말도 아니하고 슬몃 후궁을 만들어
놓았다.
자기를 도와서 임금이 되게 한 공을 잊어버리고, 배신하느 행위를 취해서 딴여
자와 관계를 맺었다는 이 사실은 불쾌하기 짝 없는 노릇이다.
어려서부터 귀밑머리를 마주 푼 내외로서 일편단심 자기를 도와주어서 부자와
형제가 상극이 되어 피를 뿌리는 이 기막힌 고난을 겪고, 겨우 지금 왕의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아직도 모든 질서가 잡히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은 이때, 남
편은 자기를 사랑하던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 정욕의 제물이 되고 있다.
그것도 제범한 반가의 딸이나 순결한 처녀가 아니었다. 고려왕실에서 거행하던
일개 궁녀다. 더럽고 추잡하다고 생각했다. 상감의 손길이나 몸이 자기 몸에 닿
는 것도 추하고 징그러웠다.
이 까닭에 왕비 자신은 가끔가끔 상감과 다투고 싸웠다.
분하기 짝이 없다. 아직도 상감과 궁녀의 사이를 떼어놓지 못하고 있다.
이같이 속으로 왕실 지밀의 불화가 싹이 트기 시작했을 때 돌연 태상왕 전하는
함흥에서 조사의를 대장으로 하여 방석, 방번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남편 되는
왕을 치러 내려온다 했다.
송도에서는 대장을 보내서 조사의의 군사를 막으라 했다.
그러나 송도 군사는 단번에 패해버렸다.
남편인 상감은 친정을 하러 나간다 했다.
팔은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는 법은 없다.
아무리 고려의 궁녀 앵도 조건으로 인해서 남편이 밉기는 미웠으나 송도군이
앞으로도 다시 전멸이 된다면, 자기네들은 망하고 마는 것이다. 남편이 망하면,
왕비 자신도 존재가 없게 된다.
후궁 앵도 문제로 남편과 싸우는 일은 현실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 일이요,
조사의에게 패하게 된다면 시샘도 사랑싸움도 다 없어지는 죽음과 무가 남아 있
을 뿐이다.
이제는 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뽑는 남편을 도와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친정하는 군복을 마련해 짓고, 싸우러 나가는 남편의 승리를 위하여 밤마다
ㄱ두칠성을 향하여 정화수를 떠놓아 무운이 길하라고 빌고 있었다.
이러한 판에 어린 아들 삼형제는 어머니를 찾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당장 옳은 말을 하는 순진한 아들들에게 부자가 칼을 겨누어 싸워야
하는 부조리한 이 말을 옮기기 싫었다.
어름어름 말문을 버무려서 이 대답하기 어려운 장면을 넘기려 했다.
밖에서 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 알 수 있느냐. 나라일은 아버마마께서 혼자서
하시는 일이 아니고, 대신이며 대장들과 함께 의논해서 처리하시는 일이니 일개
아녀자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은 아직 나이 어리다. 어른들이 하시는 대
로 가만히 보고만 있거라. 그분들도 다 생각이 있을 것이다.
왕비 민씨는 큰왕자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타일렀다.
큰왕자는 어머니의 쓰다듬어주는 애무의 손길을 물리쳤다.
또렷하게 눈동자를 반짝여서 어마마마를 바라보며 아뢴다.
아무리 밖에서 하시는 일아라 할지라도 잚소 처리하시는 일이 있다면 어마마
마께서 간하셔야 합니다. 그래,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빼야 옳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저를 향하여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와 조상께 효도를
극진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글을 배우는 중에도 보자유친이라 했습니다 그래
아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빼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께서는 밖에서 하는 일이
니, 말씀으 하실 수 없다고만 하십니까?
아홉 살 먹은 큰왕자의 질문에 어머니 민씨는 말문이 막혔다. 일곱살 먹은 보
가 말했다.
어마마마, 형의 말이 옳소. 아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칼을 뽑는 법은 없소. 어마
마마가 아버지한테 일러주시오.
둘째 왕자 보 도 벌써 입학을 해서, 아들은 아버지한테 효도를 해서 잘 받들어
야 한다는 말을 글강 외우면서 귀에 젖도록 들었다.
사기없는 순진한 어린 왕자들이었다. 늙은 상궁과 형이 주고받던 대화를 들었
다. 자기도 한 마디 해서 형의 말에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뜻을 표하지 못했던 셋째 왕자 도 가
어머니를 향하여 말했다.
어마마마,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싸우면 두렵고 무섭소. 싸우지 말도록 해주오.
비로소 도 는 말문을 처음 열었다.
큰형이 간곡하게 주장하는 말을 이제서야 어렴풋 깨달은 모양이다. 어마마마의
품안에 안겨서 젖꼭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머니는 젖꼭지를 어루만지며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세째 도 의 머리를 쓰다듬
으며 미소를 지어 말했다.
네 동생은 네 살이건만 젖을 아니 먹는데 여섯 살이나 된 도 가 어미의 젖을
어루만지느냐. 아우 때문에 젖을 일찍 뺏겨서 어미의 젖이 그리운가보구나! 하하
하.
왕비 민씨는 젖꼭지를 어루만지는 도 가 무한 귀여웠다. 어떻게 어린 입에서 이
같은 말이 나오나 하고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었다.
셋째 왕자 도 는 네 동생은 네 살이건만 젖을 아니 먹는데 여섯 살이나 된 도
가 어미의 젖을 어루만지느냐. 아우 때문에 젖을 일찍 뺏겨서 어미의 젖이 그리
운가보구나! 하는 어마마마의 말씀을 듣고 얼굴이 이내 꼭두서니 진당홍물감ㅇ르
끼얹은 듯 무안에 취해서 빨갛게 물들었다. 어색한 듯 슬몃 어머니 무릎에서 내
려앉았다.
왕후가 말한 넷째 왕자는 나중에 성녕대군이 될 종 을 두고 한 말이다.
왕비 민씨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들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린이들의 마음을 풀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큰왕자 제 를 향하여 얼굴빛
을 부드럽게 하여 말했다.
너희들은 아바마마께서 친히 나가서 싸우시는 것이 할아버님과 칼을 겨누어
교봉하는 줄 알았나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안변부사 조사의란 자가 태
상왕 전하를 팔고 반란을 일으켜서 송도로 쳐내려온다는 것이다. 아바마마께서
친정하러 나가시는 것은 조사의를 치러 나가시는 것이지 결코 할아버님과 대결
을 하러 나가시는 것은 아니다. 이러하니 너희들은 안심하고 공부들이나 잘 하고
있거라.
제 는 어마마마의 말씀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다.
조사의가 할아버지를 팔고서 반란군을 일으켰거나, 할아버지의 명을 받들어서
아바마마를 치러 오거나, 할아버지께서 중간에 끼여드신 것은 사실입니다. 이편
에서는 정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쳐들어오는 군사를 막기는 막아야겠습니다. 그
러나 체면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입초시에 오르내리는 일도 생각해보아야 합니
다. 아바마마께서는 친히 나가시지 말고 달리 사람을 보내서 막아내게 하십시오.
어머니께서 만류해서 간해주십시오.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올시다. 천륜을 깨뜨
리는 일이올시다.
아홉 살 된 큰왕자의 얼굴빛은 제법 엄숙했다.
민씨 부인은 난처했다. 자기도 천륜이 깨지는 일인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인 상감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나가는 것과 대장을 보내서 토벌한
다는 것은 천양의 차가 있는 것이다.
군사들은 태상왕의 군사라는 위력에 눌려 있었다. 먼젓번의 패한 원인도 여기
있는 것이다.
태상왕의 위력을 대항할 마한 위력은 삼천리 강산 조선 천지에는 오직 한 사람
남편되는 상감이 있을 뿐이다.
다른 장수들을 보낸댔자 열번이면 열번, 백변이면 백번 패할 것이 분명했다.
우선 태상왕이란 금테를 두른 존칭에 눌리고 태상왕의 영웅적인 기상에 눌리고
만다.
방석을 쳐부숴 없앨 때도 남편 정안군이 뒤에 꿋꿋하게 서 있어서 장수들을 지
휘한 때문 그 크나크고 끔찍스런 혁명에 성공을 했던 것이다.
만약 그 당시, 정안군이 집 속에만 들어앉아 있고 이숙번 장군이나 민무구나 하
윤만을 앞세웠다면 세자의 자리를 뺏는 그 혁명은 성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자신은 남편의 소매를 끌어서, 갑옷을 입히고 투구를 씌워서 어서
어서 말을 타고 앞을 서라고, 고무하고 격려하지 아니했던가.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다.
왕실의 천륜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다. 이제 태상왕의 영을 받들어 송도로 쳐들
어오는 조사의의 군사를 상감이 친히 막아내지 않는다 해도 골육이 서로 다투었
다는 상서롭지 못한 누명은 씻을 길이 없다. 차라리 적극적인 태도를 최후까지
취해서 임금의 자리를 굳게 차지해서 패업을 이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의의 군사를 상감이 친히 나가 치지 않는 날은 다만 멸망이 있을 뿐
이다. 상감이 임금의 자리를 뺏기는 날은 민왕후 자신의 왕후 자리도 허와 무로
돌아가고 만다. 민왕후가 앵도의 일로 상감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다투는 일은
내외싸움에 불과한 것이요, 상감이 친히 나가 싸우는 일은 국가의 왕권이 좌우되
는 일이었다.
왕비 민씨는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의 바른 말이라 하나 왕권이 전복되는 이 일
에 찬성 할 수는 없었다. 결연히 큰왕자에게 말했다.
네 말도 일리는 있는 말이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 친정을 하시지 아니한다면,
아바마마께서는 왕의 자리에서 무러나야 한다. 물러나는 것만이 아니다. 아버지
는 죽음을 당하고 집안은 망하고야 만다. 내 입으로 아버지가 참형을 당하고 집
안이 망하는 이 일을 권고해서 막을 수는 없다!
민왕후는 결연히 입을 다물었다.
왕자 제 는 어머니의 공명을 받아서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군사를 치러 가는 불
의의 일을 막아보려한 일이 완전히 깨어진 것을 알았다. 더 어머니한테 말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큰왕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소자가 직접 아바마마께 간하겠습니다.
둘째, 셋째도 형의 뒤를 따랐다.
이같이 해서 큰왕자는 아우들을 공부하는 처소로 돌려보내고, 친정하러 나가는
아버지의 말고삐를 잡고서 울며 간했던 것이다.
함흥군을 친정하는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은 대의명분을 들어 간하는 왕자 제 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산호
채찍으로 금안백마의 말궁둥이를 갈겨 앞으로 나갔다. 왕자 제 는 울면서 처소로
돌아갔다.
송도에서 함흥군을 치러 떠나는 군사는 십만 대병이었다.
아들은 장치 송도 꼴이 보기 싫어서 함흥으로 향했던 태상왕의 이름을 빌려 자
가의 왕의 자리를 뺏으려는 조사의의 군사를 공격하기 위하여 대군을 움직인 것
이다.
행군하는 북소리와 종소리는 백 리에 연했고 기치 창검은 햇빛을 가려서 싸늘
하게 서리를 뿜었다.
아들 이방원의 북정군은 송도로 쳐내려오는 아버지 이성계의 남정군을 섬멸하
기 위하여 북으로 향했다.
이방원의 북정군은 송도를 떠나서 황해도 금천 고을 금교역 말 북편에 노숙을
한 후에 다음날 우봉 고을 원중포에 친정하는 대본영을 정했다.
이때, 태상왕 이성계의 명을 받들어 아들 이방원을 치러 내려오는 정남대장군
조사의의 군사는 아직 안주 청천강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북으로 올라가는 태종 이방원의 군사는 두 갈래로 길을 취했다.
함경도 함흥으로 쳐올라가는 군사는 조영무, 김영렬, 신극레가 거느려 철령을
넘어가고, 평안도 서북면으로 향하는 군사는 이숙번, 민무질이 거느려 안주로 향
하여 떠났다.
태종 이방원은 군사들이 금천에서 떠나기 전에 장수들에게 훈령을 내렸다.
동북면으로 향해서 출발하는 조영무는 함흥성과 영흥성 안으로는 군사를 들여
보내지 말라. 함흥에서 태사왕께서 계시니, 뒷날 태상왕을 공격했다는 누명을 듣
지 않도록 해라. 다만 함흥성 밖에 있어서 함흥군의 뒤꼭지를 누르게 하라.
평안도로 쳐올라가는 이숙번의 군사는 청천강을 넘지 말고 다만 강 이편에서
함흥군에 대하여 싸움만 돋우라. 절대로 강을 거넌가서는 아니된다. 때마침 겨울
이다. 모든 장수들은 겨울 기후를 이용하여 잘 싸워서 크나큰 승리를 거두어 돌
아오라.
이숙번과 조영무는 금천 대본영에서 호령을 내리는 태종의 명을 받들어 제각기
군례를 드린 후에 동북면과 서북면으로 길을 나누어 함흥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제각기 마병과 보병을 거느려 풍우같이 달렸다.
이때, 동짓달이건만 날씨는 따듯했다. 함경도로 올라간 도통사 조영무의 군사는
함흥성 밖 50리에 진을 쳐서 함흥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함흥성 밖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서북면 평안도로 향한 이숙번의 군사는 태종 이방원의 계책을 듣지 아
니했다.
동짓달이건만 날씨는 너무나 따듯해서 봄날과 같았다.
청천강을 대하여 적진의 진용을 바라보니, 활은 울고 팔뚝엔 피가 끊어 배겨날
수가 없었다.
이숙번은 20여 척의 배를 강상에 띄우고 밤을 타서 조사의의 군사를 공격하러
들어갔다.
조사의는 벌써 청천강변에 앉아서 태종 이방원의 군사가 쳐들어오는 것을 알았
다.
아장 김건에게 1천 군마를 주어 명령을 내렸다.
겨울날이 따듯해서 청천강 물은 아직도 얼지 아니했다. 이방원의 군대는 배를
띄워 우리 앞에 상륙할 것이다. 밤을 타서 강변에 1천 군말르 매복해놨다가 방원
의 군사가 다 건너오거든 불시에 납함하여, 배를 빼앗아 돌아가는 길을 끊게 하
라. 앞에서는 내가 친히 대군을 거느려 시살하리라.
분부대로 거행하오리다.
김건은 조사의가 주는 1천 군마를 거느리고 캄캄한 어둔 밤을 타서 강두리, 길
고 긴 둑 안에 매복하고 있었다.
밤은 점점 깊어들었다.
이숙번의 군사를 가득 실은 20여 척의 배는 청천강상에 떠 흘렀다. 달도 없는
그믐밤이었다. 희고 흰 밤중의 백광을 타고 배들은 삐걱삐걱 노젓는 소리를 내
면서 적막한 강심으로 흘렀다.
얼마 동안의 시각을 허비했다.
이숙번의 배들은 건너편 대안에 당도하게 되었다.
이숙번은 뱃머리에 서서 조용히 군사들에게 군령을 내렸다.
우리 군사는 적전상륙을 감행한 후에 시각을 지체치 말고 곧 야습을 개시할
것이다. 배를 내려 상륙할 때 극히 조용하고 질서있게 내리도록 하라. 만약, 적이
먼저 우리 동정을 안다면 큰일이다. 명령을 어겨서 떠들어대는 자가 있다면 참하
리라.
모든 군사들은 대장 이숙번의 명을 받아 엄숙하고 조용하게 뱃머리에서 내렸다.
이숙번의 군사들은 질서 있게 어둠 속에서 행동을 취했다.
온 군대가 배를 버리고 앞으로 앞으로 나갔을 때 별안간 강 언덕에서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면서 조사의의 아장 김건의 군사는 긴 창과 단검을 들고 뒤에서
덤벼들었다.
이숙번의 군사는 깜짝 놀랐다. 일제히 칼을 들어 등뒤에서 몰려드는 복병을 물
리치려 할 때 홀연 방포 일성이 어둔 밤하늘을 뒤 흔들면서 논틀 밭틀에서 함흥
군은 홍수 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이숙번의 군사는 완전히 함흥군에게 포위를 당했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웠으나 옴치고 뛸 수 없었다.
죽고 상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숙번은 크게 낭패했다.
단기로 적전을 뜷고 청천강변의 둑을 타고 말을 달려 달아났다.
이숙번의 군사는 대패했다. 이숙번의 뒤를 따라 달려오는 군사는 겨우 십여 명
밖에 되지 아니했다.
장수를 잃은 나머지 군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었다. 죽어 쓰러진 군사를 제하고
모조리 조사의의 함흥군한테 항복했다.
어느덧 밤이 드새고 동이 환하게 트기 시작했다. 이숙번이 강변을 둘러보니 20
척의 배까지 모조리 적군의 손에 불살라졌고, 멀리 동떨어진 곳에 조그만 거룻배
두 척이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숙번은 간담이 서늘했다. 하늘이 자기의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생각했다. 십여
명의 패잔병을 거느리고 거룻배에 몸을 던져 강 건너편으로 달려왔다.
이숙번의 대패한 소식은 우봉 원중포에 있는 이방원의 대본영에 보고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크게 놀랐다. 이숙번은 자기를 도와서 왕이 되게 했던, 첫손을
꼽을 만한 지략이 겸비된 제일급의 대장이었다.
이숙번이 패한 것을 보니 조사의의 용병하는 수단은 보통이 아닌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결연히 대본영을 청천강변으로 옮겨서 친히 조사의와 대결할 것을 결심했다.
곧 비변사 당상들을 불러 어전회의를 열었다.
대본영을 주재하는 태종 이방원은 비변사 당상들을 둘러보며 분부를 내렸다.
이숙번은 나라에 제일 가는 최고급의 장수다. 첫손을 꼽는 대장으로서 일개 반
장인 조사의한테 패했으니 놀랍고 딱한 일이다. 과인이 이미 친정을 결단하여 여
기까지 왔으니 몸소 일선인 안주까지 나가서 반란군을 쳐부숴 진압하리라. 비변
사 당상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친정하는 대본영에 따라온 영의정 하윤이 아뢰다.
원래 친정을 결심하시어 송도를 수성대장에게 맡기시고, 이곳까지 오셔서 대본
영을 설치하셨습니다. 전쟁에는 전방이 있고, 후방이 따로 있는 법이옵니다마는
대본영이 너무 후방에 있는 것도 불편합니다. 적은 아직도 청천강을 넘지 아니했
습니다. 평양이나 안주로 대본영을 옮기시는 일이 좋을 줄 아뢰요.
하윤은 대본영을 옮길 것을 찬성했다.
하윤의 말이 떨어지기, 정승 조준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뢴다.
대본영은 전하께서 전군을 통솔하시고,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최고의 기관이올
시다. 이번, 이숙번이 패한 원인과 대본영과 일선의 거리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서 출전하는 장수가 대본영의 지휘를 받지 못한 데서 일어난 일이라 생각됩니다.
대본영을 전선 가깝게 옮기시는 일이 옳은 줄로 아뢰오.
조준도 대본영을 전방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다.
조준의 뒤를 이어 좌의정 성석린이 아뢴다.
지금 대본영이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장수들은 군략의 통일을 취하지 못하
고 제각기 행동을 취해서 오늘 같은 참패를 당했습니다. 전하께서는 곧 북행하시
도록 하시옵소서.
변계량이 아뢴다.
송도에는 유도대장에 민제를 맡기셨으니, 후환이 없습니다. 병법에 군사행동은
신속해야 한다 했습니다. 빨리 대본영을 일선으로 옮기시어 군사행동이 빠르고
신속하도록 명령 계통을 세우십시오.
모든 비변사 당상들은 일제히 대본영을 일선으로 옮기는 일에 찬동했다.
태종 이방원은 곧 대군을 인솔하고 평양을 거쳐 안주에 당도했다.
십만 대병은 호호탕탕한 기세로 안주성 밖으로 홍수 밀듯 모려들었다.
청천강을 가운데로 두고 태종 이방원의 송도군과 태상왕 이성계의 명을 받은
조사의의 함흥군은 강을 격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여태껏 봄날같이 따듯했던 날씨는 별안간 서북풍이 강하게 불면서 얼음이 꽝꽝
얼고 혹한으로 일기가 변했다.
삭풍은 나뭇가지를 울리고 강추위는 옥동같아서 사람의 살을 에일 지경이었다.
푸른 빛을 뿜어 유유하게 흘러가던 청천강 물은 하룻밤 사이에 희고 흰 얼음판
이 되어 땡땡하게 얼부풀었다. 태종 이방원은 갑작스럽게 일기가 변해진 것을 바
라보고 가만히 손뼉을 치며 미소를 지어 기뻐했다.
한동안 후에 패해 돌아온 대장 이숙번을 불렀다.
일기가 갑자기 변해서 밤 사이에 청천강 물이 얼어붙었다. 경은 여기 대해서
용병할 계책을 생각해 본일이 있는가?
이숙번은 세자 방석을 쫒아낸 제이혁명 때, 자기를 도와준 일등공신어었다. 이
번에 패한 일을 불문에 부치고 이같이 은밀하게 물었다.
청천강상의 대접전
이숙번은 눈을 감고 한동안 생각하다가 천천히 대답을 올린다.
별안간 졸한이 되어 청천강 물이 얼어붙었습니다마는, 겉만 얼고 속은 배어 얼
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적을 유인한다면 크나큰 전과를 거두리라 생
각됩니다.
태종 이방원은 자기의 의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손을 들어 무릎을 쳤다.
옳다! 옳아! 좋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생각한 계책을 말해보라.
이숙번이 채 말씀을 올리기 전에 하윤이 아뢴다.
장계취계로 적군으 한꺼번에 몰살시킬 수 있습니다.
반적들을 단번에 몰살시킬 수 있다는 하윤의 아뢰는 말을 듣자, 태종 이방원의
입은 함박만큼 벌어졌다.
좋은 방책이 있다면 영상은 빨리 말해보오.
영의정 하윤은 옷깃을 바로잡고 대답한다.
조사의란 자가 성미가 불같이 급한 자올시다. 우리는 하늘의 기후와 사람의 성
정을 이용해서 싸우는 전략을 세운다면, 백전백승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성품과 천연의 기후를 빌려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하윤의 대답을 듣자, 태종 이하 모든 신하들은 귀를 기울여 하윤의 말을 기대했
다.
어서, 다음을 말해주오.
태종은 무릎을 밀었다.
이숙번 장군의 말대로 지금 강물은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찾아든 혹한으로 인
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자 이하의 깊은 강심은 얼지 아니했습니
다. 강물이 철렁출렁 흐러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가지 생각해볼 것은 얕은
여울목 천탄잉로시다. 강물 강물이라도 여울목은 수심이 얕은 곳이니, 꽁꽁 얼어
붙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용하면 됩니다. 얕은 여울목으로 군사르 보내서 싸
움을 돋우어보는 것입니다. 적장 조사의는 성미가 급한 자올시다. 불같이 노해서,
앞뒤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대강의 강심으로 물밀듯 몰아 나올 것입니다. 이때 우
리는 의연히 얕은 물목에서 싸움을 돋운다면 적은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뛰
어 달릴 것입니다. 이때 얼음은 수천만의 사람의 중량을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
다. 얼음은 꺼지고 적병들은 강심에 수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떠합니까, 이 계
교가? 이숙번 장군은 한번 이 계책을 써보십시오.
이숙번이 찬성하는 말을 보낸다.
영상 대감의 계교는 신출귀몰합니다. 소인 역시 이 생각이 있어서, 배어 얼지
아니한 청천강 물을 이용하여 적병을 격파하는 일이 좋겠다고 상감께 아뢰었씁
니다.
태종은 하윤, 이숙번 두 신하를 보라보며 마음이 흡족하다는 듯 웃음을 보였다.
묘한 계교다. 곧 실천해보기로 하라.
이날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승석 때가 되었다. 태종 이방원의 친정군 십만 대병
은 기치 창검을 벌여 세우고 북을 치며 위풍당당하게 청천강 하류를 향해 나갔
다. 일부러 낮을 피하고 어두컴컴한 밤을 타서 행군을 시작한 것이다.
좁은 안주 바닥에 십만 대병이 움직이니 기치 창검은 하늘 반 자락을 가렸고,
행군하는 소리와 북소리와 징소리는 얼부풀어오른 청천강 속의 고기떼를 놀라게
했다.
태종의 십만 대병은 청천강 하류의 얕은 물목으로 얼음을 타고 띠같이 나갔다.
큰 북소리가 두리둥둥 울리며 용대기가 펄펄 날리는 곳에 태종 이방원은 황금
갑옷에 황금 투구 쓰고, 금안백마에 높이 앉아 산호편을 번쩍 들어 반란군을 꾸
짖는다.
역적 조사의야, 이놈, 너는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은 수령 방백으로서 무엇이
부족하여 반란군을 일으켜서 나라를 소란케 하느냐. 너는 하늘이 무섭지도 아니
하냐. 목이 늘여서 천주를 받으라!
삼십을 겨우 넘어선 태종 이방원의 씩씩한 모습과 우렁찬 목소리는 얼부푼 강
상을 쨍쨍 울렸다.
태종의 꾸짖는 호통 소리가 떨어지자 조사의도 대안에 말을 달려 태종을 꾸짖
는다.
이미 태종 이방원에게 향하여 칼을 빼어든 조사의였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형제를 무력으로 죽이고, 부왕의 자리를 뺏어 참람되게 왕이 된 불효 부제한
난신적자야, 무슨 낯짝을 들고 고향인 함흥을 향해 쳐들어오느냐? 듣거라. 너는
몇 가지 큰 죄악을 범했다. 자식으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효성으로 받들지 못하고
한을 품어 함흥까지 오시게 했으니 너의 불효막심한 죄악의 하나요, 네 동생 이
방석은 부왕꼐서 국법에 의하여 정하신 세자인데도 불구하고 부왕전하의 어전에
서 죽였으니 네 죄가 둘이요, 그래도 부족해서 네 동생인 방번과 네 매부인 부마
이제를 부왕 앞에서 죽여서 피가 용상에까지 튀게 했으니 네 죄가 셋이요, 형님
되시는 대왕을 협박하여 왕의 자리를 내 놓게 했으니 네 죄가 넷이요, 부왕의 명
령도 없이 네가 스스로 세자가 되었으니 네 죄가 다섯이요, 강제로 선위를 받아
서 스스로 왕의 자리에 나갔으니 네 죄가 여섯이요, 네 형 방간을 귀양보내고 네
조카 맹종을 죽였으니 네 죄가 일곱이요, 부왕전하께서는 방간의 귀양을 풀어주
라고 명령을 내리셨건만 너는 응하지 아니했으니 네 죄가 여덟이요, 부왕이 화가
나서 함흥에 오신 지 여러 달 만에 면치레로 겨우 차사를 보냈으니 네 죄가 아
홉이요, 부왕전하께 칼으 빼어들고 십만 대병을 몰고왔으니 네 죄가 열이다.
조사의는 태종의 열가지 죄악을 들어 고래고래 꾸짖었다.
조사의는 태종을 성토해서 꾸짖는 소리도 태종 못지 않게 우렁찼다.
강과 산이 쩡쩡 울렸다.
조사의는 태종 이방원을 임금으로 대접하지 아니했다. 그의 아버지 이성계만을
군왕으로 생각한 때문이다.
무법천지로 꾸짖는 조사의의 말을 듣자 태종 이방원은 불같이 노했다.
그러나 태종은 순간 노기를 눌렀다.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려는 것이다. 태종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다시 조사의를 꾸짖는다.
요망스런 반적야, 네가 만약 용기가 있다면 강을 타고 건너오너라! 한번 쾌하
게 승부를 가려보기로 하자.
태종 이방원의 꾸짖는 말을 군호로 하여 이숙번은 화궁에 살을 메겨 가득히 활
줄을 당겼다.
화살은 소리치며 허공을 끊어 조사의의 은투구를 보기좋게 맞췄다.
원래 이숙번은 태조 이성계에 못지 아니한 명궁이었다.
조사의는 당황했다. 급히 왼손으로 투구에 꽂힌 화살을 뽑아 던졌다.
분기가 탱중했다. 자기편 군사들에게 위엄을 보이고 싶었다. 급히 말을 달려 강
심으로 띄어들었다.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다.
조사의는 평지같이 말을 달렸다.
이숙번은 조사의의 분을 돋워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활에 살을 메겼다.
흐르는 별같이 허공을 끊고 날으는 화살은 조사의의 가슴 한복판을 향하여 읭
소리를 치며 날았다.
조사의의 눈은 화경같이 빛났다.
잽싸게 날아드는 화살을 발견했다.
장창을 번쩍 들었다. 날아 들어오는 화살을 후려쳐 갈겼다.
살은 얼음판으로 떨어지고, 조사의의 분노는 상투 끝까지 솟구쳤다.
조사의는 활을 쏘는 이숙번을 죽이고 싶었다. 장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 이숙
번을 취하려 했다.
대안에 있던 조사의의 아장들은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박만, 김
관, 허형, 박관, 황길지, 조홍 등은 군사를 휘동하여 강심으로 몰려들었다.
함흥군의 대장 조사의를 응원하려는 것이다.
태종 이방원과 이숙번은 얕은 여울목에 십만 대병을 거느린 채 활과 쇠뇌를 어
지럽게 쏠 뿐, 강심으로는 들어가지 아니했다.
다만 적을 유인하여 공격할 뿐 강심으로는 뛰어들지 아니했다.
함흥군 대장 조사의는 마침내 이숙번이 서 있는 여울목으로 뛰어들었다. 장창을
번쩍 들어 이숙번을 찌르려 했다.
이숙번은 활을 내리고 급히 장창을 고나들고 쳐들어오는 조사의의 창을 막아냈
다.
이숙번과 조사의 두 장수의 무예는 난형난제다. 백중을 가리기 어려웠다.
찌르면 막고, 막으면 찔렀다.
양편 진에서는 박수갈채가 일어나면서 북소리, 징소리, 고함치는 환호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조사의와 이숙번은 백여합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아니했다.
말은 어흥 소리를 질러 허공으로 뛰닫고 창과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는 귓전을
쨍쨍 울렸다.
두 사람의 무예는 절정에 올랐다.
조사의가 탄 검은 오추마와 이숙번이 탄 흰 백설마는 공중에 높이 솟아 어우러
져 싸웠다. 마치 흰 무지개와 검은 무지개가 하늘 한복판에 솟아나서 스러졌다가
나타나고 나타났다가 스러지는 듯했다.
양편 진에서는 장수와 군사들이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았다. 태종 이방원도 두
장수의 백중을 가릴 수 없는 무예를 바라보고 마음 속으로 가만히 칭찬했다.
양편 진의 박수갈채와 환호하는 소리는 더한층 자지러졌다.
조사의의 군사들은 자기편 대장의 기막히도록 잘 싸우는 무예를 바라보고 강심
인 얼음 한복판 위에서 펄펄 뛰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너무나 좋아서 춤을 추구
소리를 질러 즐거운 비명을 올렸다.
이때, 돌연 강심에서 찡 하는 큰 음향과 함께 넓고 넓은 얼음장이 금이 가기 시
작했다.
뒤미쳐 얼음장이 쫙 갈라지면서 군사들은 우르르 강물로 빠지기 시작했다.
안주 청천강 강심 한복판은 태종 이방원이 미리 짐작한대로 얼음장이 두려빠졌
다.
조사의의 수만 군사가 요량없이 한꺼번에 치달렸으니 배어 얼지 아니한 얼음판
은 체중을 못이겨 꺼질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얼음장이 꺼지고 사람들은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돌연한 사태였다.
조사의의 군사들은 구원을 청하여 소리소리 지르면서 서로들 몸을 껴안고 허우
적거리며 강물 속으로 빠졌다.
울부짖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통곡하는 소리는 청천강상의 어룡들을 놀라게
했다.
아비규환하는 생지옥의 모습이 처참하게 벌어졌다.
조사의의 군사는 일세에 함몰이 되었다.
조사의는 뜻밖의 일을 당했다. 기가 막혔다.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조사의 뿐이 아니다. 그의 아장들도 눈이 뒤집혔다. 천지개벽을 당하는 듯했다
조사의와 아장들은 급히 말을 달려 군사들을 구하려 하였으나, 한두 사람이 아
니었다. 만 명, 이만 명의 군사를 일시에 구해낼 도리는 도저히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뛰어들려 했으나, 자신의 죽음이 두려웠다.
조사의와 아장들은 창과 칼을 두 손으로 불안은 채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군사들의 가여운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때를 놓치지 아니했다. 군중에 전령이 내렸다.
적장들을 모조리 산 채로 잡아서 결박지어라.
명령이 한 번 떨어지기 송도 군사들은 사면 팔방에서 말을 닫려 짓쳐 나왔다.
이숙번은 장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 조사의를 취했다.
조사의는 달아나려 하나 갈 길이 없었다. 앞에는 군사들이 빠져 죽은 얼음 꺼진
강심이요, 뒤에는 송도군이 철옹성을 이루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조사의는 진퇴유곡이 되었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갈 수도 없었다.
조사의의 눈은 캄캄했다. 만 가지 계획이 헛일이 되고 말았다.
조사의의 정신이 아찔했다.
이때, 이숙번은 조사의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자 급히 말고삐에 걸오논 오랏줄
을 풀었다.
줄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조사의의 갑주투구한 목을 얽었다
조사의는 마상에서 가로 떨어지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하늘은 착한 사람을 돌보지 아니하고 악한 자를 도와주는구나! 불효 불륜한 이
방원을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지 못하고 내가 도리어 먼저 죽는구나!
조사의는 말을 마치자 입을 토했다.
조사의의 아장들도 차례차례 묶였다.
함흥군과 송도군의 싸움은 결판이 나고 말았다.
얼어붙은 청천강 얼음판이 꺼진 것은 하늘이 태종 이방원을 도와준 것이요, 얼
음판을 이용한 태종의 슬기가 또한 이 싸움을 유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태종은 조사의 이하 항복한 반장 박만, 김권, 박관, 황길지, 허형, 박문숭과 조사
의의 아들 조홍을 묶어서 진 앞에 세우고 개가를 높이 불러, 송도로 돌아갈 준비
를 차렸다.
태종 이방원은 함흥으로 올라가서 아버지께 뵙고 싶었으나 만나면 서로들 겸연
쩍게 되겠으므로 그만두고 바로 송도로 갈 생각을 했다.
태종은 조용히 영의정 하윤을 불렀다.
이제 반란군도 평정을 했으니 함흥으로 올라가 태상왕께 뵙고 싶으나 노염을
살까 두렵소. 어찌하면 좋겠소?
평상시 같으면 여기까지 오셨으니 당연히 함흥으로 가시어 뵙는 일이 온당한
줄로 아뢰오. 그러나 지금 곧 반란군을 평정하시고 태사왕 전하를 찾아뵙기는 과
연 어색한 일인가 하오. 피차간 서먹서먹하실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일단 환도하
신 후에 따로 사람을 보내시어 모셔오도록 하시는 일이 좋을 듯합니다.
태종은 잠시 머리를 숙여 생각했다. 친정을 하지 마라고 울어서 간하던 왕자 제
의 생각이 났다. 백세 후에 누명을 쓰게 된다는 어린 왕자의 말이 귀에 쟁했다.
하윤을 향하여 다시 묻는다.
후세에, 비평이 있으면 어찌하오?
천하를 경륜하시는 전하로서는 현재를 생각하실 뿐, 백 년 후의 뒷공론을 생각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윤은 결연한 태도로 아뢰었다.
만약에 사람을 보냈다가 또다시 박순의 꼴이 되어, 함흥차사가 된다면 어찌하
오?
그때와 지금은 형편이 다릅니다. 박순이 갔을 때는 조사의가 반군을 거느려서
지휘하고 있을 때올시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시는 조사의 같은 반군이 일어나
지 못할 것입니다. 태상왕께서도 노래에 외로우실 것입니다. 조사의가 패한 소식
을 들으시면, 마음이 약해져서 더한층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시고 처량만 하실 것
입니다. 결국 돌아오실 것이니 아무런 염려도 마시옵소서.
앞으로 송도에서 사람을 보낸다면 어떤 사람을 보내야 성공이 되겠소?
하윤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고한다.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진심으로 움직일 만한 사람을 보내셔야 성공이 됩니다.
절대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을 보내시면 아니됩니다. 또다시 함흥차사가 될 우
려가 있습니다.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보내셔야 합니다.
태종의 사자 무학
태종은 무릎을 밀고 하윤에게 묻는다.
벼슬하지 않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을 구하면 되겠소?
극히 어렵습니다. 구하기 극난합니다.
태종은 한동안 침묵을 지켜 생각하다가 이어 하윤에게 다시 묻는다.
무학이 지금 어디 있다 합디까? 무학을 청해서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소?
무학대사는 한동안 양주 회암사에 있다가 지금은 용문산속에 들어가 있다 합
니다. 아마 꽤 늙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후한 폐백을 보내시어, 특별히
부르신다면 사양하지 않고 오리라 생각합니다.
하윤의 말을 듣자, 태종의 우울하고 답답하던 마음은 차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태종은 군사를 돌려 송도로 돌아왔다.
조사의의 일당을 순위부에 넘겨 문죄한 후에 조사의와 박만은 목을 베어 효수
하고, 반란군에 부동하여 태상왕을 복위시키려 했던 승녕부 당상 정용수와 신효
창은 멀고먼 원악도로 귀양을 보냈다.
조사의와 행동을 같이했던 여진 마적 임팔라실리는 요동부에 호송해서 명나라
관원에게 넘겨서 죄를 다스리게 했다.
이 난리통에 반란군에 가담했다 해서 역적으로 몰린 사람의 수효는 수천명이
넘었다.
태종은 반란군을 평정한 후에 정승 하윤의 말을 쫒아 무학을 찾아서 함흥으로
보내기로 했다.
먼저 하윤에게 후한 폐백을 받들어 용문산 용문사에 숨어 있다는 무학대사를
찾게 했다.
무학으 ㄴ정도전이 자기의 주장을 배제하고 경복궁을 북악아래 지은 후에 모든
일이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장차 나라에 골육 싸움이 벌어 질 것을 예측했다.
조정과 연을 끊고 양주 회암사에 몸을 피해 있다가 세자 방석의 난이 난 후에
다시 회암사에서 양근 용문사로 깊숙하게 들어가 있었다.
정승 하윤은 왕명을 받들어 무학을 용문산에서 찾았다.
정승이 왕명을 받들어 폐백을 가지고 친히 절간에 나와서 승려를 찾는 일은 전
무후무한 영광이었다.
무학대사는 오래간만에 정승 하윤을 대면했다.
하윤은 태종이 보내는 예물을 무학에게 전달한 후에 태종의 명소하는 뜻을 전
했다.
상감께서 왕사를 만난지 오래다 하시며 나를 보내서 잠시 소옫로 행차하시기
를 원하십니다. 노래에 출입이 어려우시겠지만, 상감께서 이같이 간청하시니 잠
깐 왕림하시는 것이 좋겠소이다.
이때 무학은 비록 산중에 있었으나, 방석의 난이 난 후에 또다시 방간의 난이
일어나고, 태상왕이 화가 나서 금강산을 거쳐 함흥으로 가고, 이것을 기화로 하
여 강비의 친척 되는 안변부사 조사의가 반군을 일으킨 것과 태종이 친정을 하
여 안주 청천강까지 군사를 몰고 나간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무학은 눈을 감고 대답 없이 한동안 앞일과 뒷일을 생각해보았다. 얼마 후에 천
천히 입을 열었다.
영상 대감께서 왕명을 받들어 친히 오시고, 성상께옵서 빈도를 부르시는데, 빈
도 비록 늙었다 하오나, 어찌 감히 사양하오리까. 곧 대감을 모시고 송경으로 가
오리다.
하윤은 기뻤다. 시각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무학대사와 함께 사인교를 몰아 송도
로 향했다.
하윤은 송도로 들어가 무학을 대궐로 인도했다.
태종은 무학의 알현을 받자 용상에서 일어나 어수를 들어 무학의 손을 잡았다.
항상 국사를 사모하는 마음 간절했더니, 이제 먼길에 나를 찾아주니 내 마음
사뭇 기쁘오.
항상 국사를 사모하는 마음 간절했더니, 이제 먼길에 나를 찾아주니 내 마음
사뭇 기쁘오.
무학은 정중하게 무릎을 끊어 합장하고 아뢰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일을 진시 하례하러 궐하에 나왔어야 할 터이온데 늙
은 병든 사문의 천한 몸이라 감히 주변을 내지 못했습니다. 뜻밖에 대신을 보내
시어 후한 폐백을 내려 하문 하시니, 천한 몸을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태종은 무학의 말을 듣자 기쁜 빛이 용안에 넘쳤다.
대사는 나라의 국사일 뿐 아니라, 이 나라의 창건을 예언했던 대덕입니다. 기
뿐 아니라 태상왕 전하의 스승입니다. 내 어찌 소홀하게 대접하리까.
태종을 말을 마치자 무학의 손을 이끌어 편안히 앉게 했다.
불감하여이다.
무학은 세 번 네 번 사양하고 편안히 앉지 아니했다.
태종은 내시에게 명을 내려 향다를 올리게 했다. 술 대신 차를 내어 고승을 대
접했다.
차가 나온 후에 태종은 정승 하윤만 남아 있게 하고 좌우를 물리쳤다.
국사한테 청할 일이 있소. 국사는 과인의 청을 들어주겠소?
무학은 상감의 청이 무슨 청인 것을 벌써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치미를 떼
고 물었다.
황공무지하오이다. 전하께서 빈도 같은 위인에게 무슨 청이 계시겠습니까. 너
무나 겸허하신 처분이올시다. 하교계시기를 바라옵니다.
태상왕 전하께서 지금 함흥에 계신 이은 국사도 아마 짐작하리다.
무학은 이 일을 모르는 듯 얼굴빛을 고치며 깜작 놀라는 표정을 했다.
어느 때 떠나셨습니까?
태종은 어색한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벌써 가신 지 일 년이 넘었소. 과연 국사는 모르리라. 양주에 있다가 용문사로
갔으니 알 수가 없으리다.
빈도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안변부사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킨 일도 몰랐으리다.
무학은 또 한 번 놀라는 얼굴빛을 지었다.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켰습니까? 놀랄 일이올시다. 세속을 피하여 부처를 모시
고 깊은 산중에 있으니, 세상 일을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태종은 다시 말을 꺼냈다.
조사의란 자가 돌아간 강비의 친정 족속인데 태상왕 전하께서 함흥에 계신 것
을 기화로 하여 태상왕 전하의 어명이라 칭탁하고 반역하는 무리를 모아 군사를
거느리고 송도로 쳐들어오려 했소. 과인은 가만히 앉아 볼 수 없어 안주까지 올
라가서 역도들을 무찔렀소.
놀라운 일이올시다.
무학은 놀라는 얼굴로 염주를 굴리며 관세음보살 을 불렀다.
과인은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항상 태상왕 전하께 문안사를 보냈소
이다. 그러나 보내는 족족 죽여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함흥차사 라는 새로운
말이 생겨나기까지 했소.
태종은 말을 마치자 길게 한숨을 지었다.
무학은 또다시 염주를 굴리며 이번엔 나무아미타불 을 불렀다.
그리해서 박순 이외에 여러 사람이 죽었소!
놀라운 일이올시다. 차사가 가는 족족 죽이시다니 끔찍스런 일이올시다. 아마
노염이 크셨나봅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놀랍고 두렵습니다.
무학은 이마에 염주 든 손을 얹었다.
과인이 대사를 오늘 청한 것은 이 일을 해결해 달라고 청한 것이오.
태종은 말을마치자, 또다시 한숨을 짓는다.
무학은 정중한 자세로 옷깃을 여미고 아뢴다.
어떻게 빈도가 감히 이 일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국사는 태상왕 전하를 도와서 건국할 것을 예언한 분입니다. 태상왕 전하께서
천만 사람의 말은 아니 들으셔도 국사의 말씀만은 들으실 것입니다. 늙으신 몸에
멀리 함흥까지 가시라고 하기 극히 미안쩍소만은 과인을 위하여, 또는 나라를 위
하여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리시도록 해주기 바라오.
태종의 옥음은 애원하는 듯 간곡했다.
무학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얼른 대답을 아니했다. 방 안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태종은 다시 무학에게 간곡한 옥음을 보냈다.
국사가 아니면 이 일을 풀어줄 사람이 없소, 국사! 한번 내 청을 들어주시오.
무학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아뢴다.
전하께서 아바마마이신 태사왕 전하를 사모하시어 환도하시도록 여러 차레 사
신을 보내신 일은 지극한 효심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태상왕 전하께 효성을
다하시지 못하셨습니다.
무학은 두려움 없이 또렷또렷 어전에 아뢰었다.
태종은 무색한 얼굴빛으로 대답한다.
과인은 아바마마께 대하여 지성으로 받들려는 마음 간절하건만 아바마마께서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아니하시니 미안쩍기 한량없소. 문안을 드리기 위하여 끊일
사이 없이 함흥오로 차사를 보냈으나 가는 족족 죽이시고 문안을 받지 아니하시
니 과연 기막힌 일이오. 오늘 국사를 청한 것은 국사의 언변과 힘을 빌려서 아바
마마의 환궁을 바라는 마음에서 국사를 청한 것이외다. 내 정성이 없는 것이 아
닙니다.
태종의 수로히를 듣자 무학은 눈을 번적 떴다. 화경같이 빛났다.
빈도가 전하께 효성이 부족하다고 말씀드린것은 전하께서 친히 함흥으로 가서
문안을 드리지 아니하신 것을 지적해서 아뢴 것입니다. 아바마마께 문안을 드리
는데, 비록 천 리 밖이라 하나 친히 가셔야 합니다. 사신을 보내시는 일은 불경
입니다.
태종은 무안한 얼굴빛을 지어 변명하는 말을 보낸다.
예로부터 군왕은 도성 백 리 밖을 오가지 않는다 하오. 혹시 나라에 변이 있을
까 하여 도성을 떠나지 않는 때문이오. 이러므로 과인이 친히 나가지 못했소이
다.
태종의 변명하는 말을 듣자 무학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한낱 변명하시는 말씀에 지나지 아니합니다.전하께서는 안주
청천강까지 친히 나가셨으면서, 왜 함흥에 가서 태사왕 전하를 뵙지 아니하고 돌
아오셨습니까? 반도를 도멸하신 후에는 당연히 함흥까지 올라가서 아바마마이ㅡ
무릎에 엎드려 통곡하여 우시면서 마음을 돌려 모시고 왔어야할 것입니다. 좋은
기회를 놓치셨습니다. 전하! 효성이 부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아바마마의 명을 받들어 반란 행동을 개시한 함흥군을 섬멸한 직후에 태상왕
전하를 뵙기가 미안쩍어서 그대로 돌아왔소이다.
태종은 말을 마치자 가만히 한숨을 짓는다.
무료한 기운이 한동안 방 안에 고요히 흘렀다.
옆에 모시어 있던 영의정 하윤이 자리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국사 무학한테 말
을 건넨다.
국사께 말씀드리오. 이제 지난 일을 가지고 가타부타 아뢴대야 소용이 없소이
다. 국사께서는 이제, 성상전하의 지극한 효성을 생각하시어 한번 함흥으로 올라
가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려주시기 바라오.
하윤은 왕을 대신하여 두 손을 모아 무학 앞에 짚고 간곡하게 청했다.
태종은 하윤의 말이 끝나자 다시 무학에게 부탁한다.
영상의 말대로 지난 일으 말한대야 별도리가 없을까 하오. 수고스럽지만 국사
는 나의 지성스런 뜻을 받아주기 바라오.
무학은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빈도는 아무런 말재주도 없습니다마는, 성상전하의 효심이 지극하시고, 영상의
부탁이 간절하시니, 곧 함흥으로 향하여 길을 떠나겠습니다. 그러나 일이 성공되
고 아니되었다는 것은 다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젖먹던 힘을 다하여 태상왕 전
하의 마음이 돌려지도록 해보겠습니다.
태종의 용안에는 기쁜 빛이 넘쳐 흘렀다.
과인이 지은 죄도 많소마는 이것은 모두 다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제왕의 부득
이한 일입니다. 대자대비한 불제자이신 국사는 과인의 충정을 알아주시기 바라
오.
무학은 그제서야 합장을 지어 미소를 띠고 대답한다.
왕천하는 임금의 태도와, 억조창생의 허물을 제도하는 부처의 자세는 근본으로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선과 악을 이 자리에서는 논란할 거리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좌우간 건국을 도왔던 빈도는 마지막으로 나라를 위하여 힘을 쓰겠습니
다. 전하와 태상왕 전하를 위해 다시 화합이 되도록 꾀해보겠습니다. 그러면 빈
도는 곧 어전에서 물러나 함흥으로 가겠습니다.
무학은 말을 마치자 다시 합장을 올리고, 탑전에서 물러난다.
영의정 하윤이 뒤따라 일어나고, 태종도 친히 옥좌에서 일어나 전각문 앞까지
나갔다.
태종은 가만히 무학한테 묻는다.
앞으로 국조는 어떠하리까?
오백 년은 무난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당시 대궐 터를 정할 때 빈도는 정도
전의 주장을 반대하여 아뢰었습니다. 적자인 장자보다 차자인 자손들이 국조를
번영케 할 것이올시다. 왜냐하면 경복궁의 우백호인 인왕산이 좌청룡인 낙산보다
높고 튼튼한 때문이올시다.
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꼭 태상왕 전하께서 환궁을 하시도록 해주시오.
태종은 또 한 번 당부한 후에 국사 무학의 손을 굳게 잡았다.
무학이 궐문 밖에 나가니 행차를 기다리고 있는 자비와 의장이 대단했다.
영의정 하윤은 궐문 밖으로 나가 무학을 전송했다.
그럼 국사는 노래에 괴로우시지만 함흥까지 행차하시어 태상왕 전하께서 곧
환경하시도록 일을 성공해주십시오.
무학은 합장하고 대답한다.
되도록 성상전하와 영상 대감의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하윤은 무학에게 평교자에 오르기를 청했다.
대신의 행차와 꼭같은 의장이었다. 평교자의 구종별배가 앞뒤로 늘어서고 좌우
편에는 일산까지 받든 시자가 대령하고 있었다.
무학은 의장을 사퇴했다.
빈도는 일필 청려만 있으면 족합니다. 호화찬란한 행차는 빈도의 분수에 넘치
는 일일 뿐 아니라 태상왕 전하의 의심을 산다면 도리어 일이 성사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자비와 의장은 상감께서 친히 의빈부에 분부를 내리시어 거행하신 것입니다.
성상의 지극하신 뜻을 받아들여, 강원 감영까지 행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천만에, 빈도는 중의 본색을 지켜야 합니다.
무학은 굳이 사양하고 한 필 나귀 등에 몸을 실어 함흥으로 향해 떠났다.
무학은 먹장삼에 한 필 나귀를 탔으나 가는 곳마다 수령 방백들이 공손하게 맞
아들이는 의례를 받았다.
태종은 고을마다 특명을 내려서 무학왕사의 가는 기릉ㄹ 평안하게 거행하라는
분부를 내린 때문이다.
무학은 십여 일 만에 함흥에 당도하여 본궁으로 가서 내시한테 태사왕을 뵙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때, 태상왕 이성계는 조사의의 혁명군이 태종의 친정으로 인해 안주 청천강에
서 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한 감정과 고독한 심사 속에 빠져 있었다.
불안한 감정은 태상왕 자신이 반란군 조사의한테 송도로 진격할 것을 허락한
때문에 앞으로의 일이 어찌 전개될까 하는 데서 일어난 감정이요, 고독한 마음은
안주까지 친정을 했다는 태종 방원이 자기를 찾아오지 아니한 것은 역시 아비를
아비로 대접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한 때문이다.
이같이 착잡한 심경 속에서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홀연 내시가 어전으
로 들어와 아뢰었다.
국사 무학이 뵙기를 청합니다.
무학이 왔단 말이냐?
예, 그러하오이다.
태상왕은 한편으로 무한 반갑고 한편으로 의심스러웠다.
또다시 태종의 명을 받들어 온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동행이 있더냐?
아니올시다. 혼자 나귀 한 필만 타고 왔습니다.
들어오라 해라
태상왕은 무학을 만나보기를 허락했다.
무학은 내시에게 인도되어 태상왕의 거처하는 침실로 들어왔다.
어전에 엎드려 절하고 다시 합장을 드린 후에 처량한 목소리로 고했다.
전하!
아아, 무학왕사!
태상왕도 감개무량했다.
무학왕사 라고 부르며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무학도 많이 늙었다. 깎은 머리는 은빛을 뿜어 하얗게 되고 이마엔 주름이 잡혔
다.
뿐만 아니라 이가 빠져서 볼이 오그라졌다.
무학이 바라보는 태사왕 이성께의 용안도 무척 늙었다. 그 좋고 환하던 젊은 때
얼굴은 형국만 남아 있을 뿐, 머리에는 서리가 내린 듯하고, 빛나던 봉의 눈은
주름진 이마와 불그러진 관골 속에 싸여 정기를 잃었다.
왕사도인제 많이 늙었구려.
그러하오이다. 사람은 한 번 왔다가 가는 법, 세월은 자꾸만 가라고 재촉해서
용모까지 변해갑니다. 공도는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전에 뵐 때
보다 많이 노래하셨습니다.
나 역시 가야지 별수가 있나. 결국은 가야 할 길을 공연히 살아 있어서 마음만
상하네그려. 이것이 아마 인생인가 하네. 그러나 왕사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
가?
태상왕의 반가워하던 얼굴빛은 금방 여름 하늘의 구름장 변하듯 했다.
얼굴에는 준엄한 기색이 떠돌았다.
양근 용문산에 칩복해 있다가 오대산 월정사로 참선을 하러 왔더니, 전하께옵
서 함흥에 주필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문안을 드린 지하도 오래옵기 한 필 나귀
에 늙은 몸을 실어 이곳까지 왔사옵니다.
무학의 말을 듣는 태상왕 이성계의 얼굴엔 아직도 엄한 빛이 풀리지 아니했다.
방원의 청을 들어 나를 달래려 온 것이 아닌가?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연전에 잠깐 뵈온 후에, 산에 숨어 있는 승려의 몸으로
조정 출입을 하는 일이 불길하다 생각하와, 일부러 용문산에 숨어 있어,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만약에 전하께옵서 이곳에 계신 줄 알았다면 벌써 와서 문안을 드
렸지, 한만하게 여직까지 있으리 있겠습니까?
진정인가?
진정 아니면 빈도가 어찌 전하를 속이오리까. 빈도가 언제 전하를 속인 일이
있습니까?
무학은 정색하고 태상왕을 바라뵈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비로소 엄한 얼굴이 풀리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옛 친구를 만나니 내 마음이 기쁘기 한량없네. 자아, 우리 적조했
던 회포를 풀기 위하여 곡차를 한 잔씩 마시는 것이 어떠한가?
전하께서 내리시는 곡차라면 사양치 않겠습니다.
무학은 쾌하게 대답했다.
태상왕은 내시에게 분부를 내렸다.
오랜만에 왕사를 만났다. 내 마음이 유쾌하구나. 궁녀에게 분부하여 빨리 곡차
를 올리라.
내시는 명을 받고 본궁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담박한 주안상이 궁녀의 손에 들려나왔다.
궁녀는 물러가고 태상왕과 무학 단 두 사람이 주안상을 대해 앉았다.
무학이 무릎을 끊고 황금빛 백일주를 금잔에 가득 부어 태상왕께 올렸다.
이 잔을 드시옵고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만수무강! 하하, 왕사가 나를 욕하는 소릴세그려. 칠십도 못되어도 속이 무궁무
진 상한 이 사람이 만 년을 산다면 해골도 남지 아니할 걸세. 괴로우니 어서어서
강비를 좆아 극락으로 가야 하겠네.
태상왕은 한탄하는 말을 마치자, 금잔에 가득 부은, 무학이 따라 올린 술을 단
숨에 쭉 마신다.
태상왕은 한 점 안주를 집은 후에 어수를 늘여 옥병을 잡고 무학 앞에 놓인 금
잔에 술을 따랐다
자아, 왕사도 곡차를 한 잔.
전하께서 주시는 선온이니 사양치 않고 마시겠습니다.
무학은 잔을 들어 술을 쭉 들이켰다.
서너 순배 술잔이 돌았다.
태상왕과 무학은 거나했다. 무학이 슬며시 새 화제를 꺼냈다.
그 동안 소승은 길이 막혀서 혼이 났습니다.
길이 막히다니 무슨 길이 막혔나?
양근 용문산에서 오대산으로 참선하러 갈 때 서울서 강원도로 군사가 쏟아져
올라오고 평안도 쪽으로도 군사가 나가는데 한편 소문에는 하흥과 안주에서 반
란군이 일어나서 평양과 송도로 쳐올라간다고 소설이 대단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왠일들이오니까?
태상왕 이성계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잠깐 침묵을 지켰다.
소문에는 조사의란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니 참말이오니까?
무학은 화경같이 빛나는 뉸으로 태상왕을 지켜보았다.
반란군 이란 말에 태상왕의 비위가 역겨웠다.
반란은 왜 반란야. 불의를 토멸하는 군사지.
뱉듯이 대답했다.
무학은 깜짝 놀라는 체했다.
불의를 치다니요? 송도조정을 치러 올라가는 군사가 어찌 불의를 치러 가는
군사입니까? 그렇다면 조정이 불의의 조정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불의의 조정이 되는 것이지.
얼근히 취한 태상왕은 용안에 자못 분개한 빛을 드러냈다.
무학은 태상왕의 격분해하는 모습을 보자, 금잔에 가득 술을 부어 올리며 말소
리를 낮추어 고한다.
전하께서 송도조정을 불의라 하신다면 스스로 용안에 침을 뱉으시는 것입니
다.
태상왕은 무학의 말을 듣고 잠자코 대답을 아니했다.
태상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떡였다.
또 듣자오니, 조사의는 군사를 일으킬 때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 송도를 치려
했다 하니 과연 전하께서 허락하신 일이 있사옵니까?
불의의 자식을 치라고 허락한 일이 있네.
태상왕 이성계의 용안에 다시 분기가 가득했다.
전하! 전하께서는 속으셨습니다.
무학은 대답했다. 태상왕 이성계를 향하여 속았다고 말했다.
속다니 말이 되나. 내가 왜 속았단 말인가?
태상왕은 눈을 크게 떠서 무학을 바라본다.
하마터면 이씨의 천하는 조씨의 천하가 될 뻔했습니다.
무학은 바른 말을 거침없이 했다.
태상왕은 말문이 막혔다. 대답이 없었다.
낙백한 조사의는 전하를 이용한 것입니다. 전하의 불평하시는 심정을 이용해서
송도조정을 공격하여 정부를 전복시킨 다음 말막음으로 대권을 잠깐 전하께 돌
린 후에 진짜 실권을 잡아 왕위를 찬탈할 흉심을 먹고 한 말이올시다. 전하께서
는 조사의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셨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
태상왕은 고개를 가로 흔들어 부정했다.
그럴리 없다고 하시는 말씀은 아직도 조사의를 밑으시는 말씀올시다마는 빈도
의 말씀을 들어보시옵소서. 전하께서 춘추가 높으신 후에, 만약 지금의 상감이
거세를 당해서, 이 세상에 아니 계신다면, 누가 대위에 나갈 자격을 가진 인물이
왕자 중에 있습니까? 결국 이씨의 창업하신 대업은 물거품같이 쓰러져버리고 조
씨의 국가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빈도가 공연히 말씀을 아뢰는 것이 아닙니다.
다행히 천우신조해서, 조사의는 상감의 군사한테 멸망을 당했습니다마는, 이 일
을 생각해볼 때, 등골에 소름이 쫙 끼칩니다.
태상왕은 무학의 두려움 없이 터놓고 아뢰는 말을 듣자 약간 마음이 흔들렸다.
잠자코 무학의 말을 듣고 있다.
나라의 정치는 임금 노릇을 잘 할 만한 사람이 정치를 잡아야 합니다. 정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전하께서는 정에 얽매이셨습니다. 돌아간 세
자의 생각이 극진하시어 이씨 창업의 큰일을 잊어버리셨습니다. 강비마마를 너무
생각하시어 제세안민하는 나라일을 잊어버리셨습니다. 전하! 한 집안의 조그마한
일도 너무 정에 기울어지면 바로잡기 어려운 법인데, 황차 한 나라를 다스리는
큰일이겠습니까?
태상왕은 묵묵히 대답이 없다. 무학이 다시 고한다.
빈도는 옛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전하께서 잠룡으로 계실 때, 빈도는 거울이
깨어지는 꿈을 풀어드렸고, 꽃이 떨어진 꿈을 해석해 드렸고, 닭이 우는 소리를
풀어드린 예언자올시다. 이러므로 감히 천위를 무릅쓰고 바른 말씀을 아룁니다.
빈도도 역시 함흥차사라고 생각하신다면, 박순이나 다른 차사처럼 목을 베어줍시
다.
무학은 더욱 대담하게 고했다.
왕사가 방원이가 보낸 차사라고 생각하지 않네.
이성계의 마음은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팔이 안으로 굽어지지 밖으로 굽어지지 않는 일은 전하께서도 짐작하실 것입
니다. 빈도는 창업하실 것을 예언한 사람이니 전하의 편이지, 결코 금상의 편이
아닝로시다. 그러나 전하의 의도를 생각해볼 때 금상이 왕위에 나가신 일은 하늘
이 도우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아, 생각해보십쇼. 이제, 이 나라에 인물이 타
성을 빼놓고 누가 있습니까? 빈도는 결코 누구의 청을 받들고 전하를 뵈오러 온
자가 아니올시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여 두게. 모두 다 알아들었네.
태상왕은 가만히 한숨을 쉬고 마시던 술잔을 내었다.
언제 떠나려 하나?
내일이라도 떠나려 합니다.
그렇게 속히.
오대산에서 그 동안 여러 날을 참선을 했습니다. 다시 종적 없이 명산대찰로
떠돌아다니겠습니다.
왕사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는가?
태상왕은 별안간 고독을 느꼈다.
외로우십니까? 전하께서는 한양이나 송도로 돌아가십쇼. 그곳에는 정릉이 계시
고 미워도 아드님이 계십니다. 공연히 이곳 함흥에서 마음과 넋을 괴롭게 하지
마시고, 남으로 내려가시오소서. 지난 일은 다 잊으십시오. 이것도 모두 다 팔자
요 업원이올시다. 원수같이 생각하셔도 결코 아드님이십니다. 이 아드님을 지팡
이로 해서 노후를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왕사 무학의 말을 듣는 태상왕 이성계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무학은 밤이 새도록 태상왕의 마음을 돌려놓고 이튿날 날이 밝자 작별을 고했
다.
빈도는 물러가겠습니다.
어디로 향하여 가려 하오?
정처가 없습니다. 가는 곳이 곧 빈도의 도량이올시다. 우리 나라는 가는 곳마
다 하늘이 높고 푸릅니다. 이러한 대자연 속에 대자대비하신 부처의 심오하신 뜻
을 더 공부하겠습니다.
무학의 거리낌없는 유유한 태도에 태상왕은 부러운 생각이 유연히 일어났다.
태상왕은 무학의 손을 덥석 잡고 한숨을 지으며 말한다.
나도, 애당초부터 불제자가 되어 거리낌없는 생활을 했더면 좋았을 것을, 공연
히 한평생을 전쟁 싸움으로 보냈고, 또다시 왕위에 올라서 구접을 떨면서 마음을
무한한 번뇌 속에 보내게 되었으니 후회막급이오. 왕사의 자유자재한 행동이 부
럽기 짝이 없소.
태상왕의 탄식을 듣자 무학은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전하께서는 모든 일을 체념하시옵소서. 공부할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하고 나라
를 다스릴 사람은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부처의 제자가 ㅗ딘
다 해도, 이 세상은 되어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저 대왕께서는 창업지주가 되
셨을 뿐, 다시 더 바라실 것이 없습니다. 모두 다 하늘의 섭리십니다. 앞으로 말
씀을 너그럽게 하시어 천하 일을 달관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만수무강하셨다가 천
명을 선종하시옵소서.
태상왕 이성계는 다시 가볍게 한숨을 짓는다.
어떻게 하면 세상 일을 달관하겠소?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선물로 한 마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달관이란 것은 다
른 것이 아니라 기쁜 일과 슬픈 일과 노여운 일과 즐거운 일로 인해서 일어나는
극한감정을 억제하는 일입니다. 전하! 이 억제하는 공부를 하십쇼. 이리하신다면
마음은 평안해지고 성수는 무강하실 것입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무학을 향하여 껄껄 웃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희로애락을 억제할 수 있겠소. 바로 산송장이 되었
다면 모르겠소마는 ... 하, 하, 하,
희로애락의 감정은 다른 곳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말하자면 모두 다 사람의 욕심에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기쁜 것도
욕심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슬픈 것도 자기를 표준해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성
나는 것도 그렇고, 즐겁다는 감정도 욕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욕심을
버린다면, 극한되는 감정으로 마음을 상할 까닭이 없습니다. 담담하고 청정하게
한평생을 지낼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러한 태도와 생활을 취하십시오.
무학은 태상왕을 향하여 부탁하는 말씀을 올린 후에 손을 모아 경건하게 합장
을 올렸다.
태상왕은 무학을 더 만류할 수 없었다.
전 밖까지 나가 전송했다.
무학은 섬돌 아래 내려, 또 한 번 합장을 올렸다.
전하! 꼭 송도로 돌아가시옵소서. 그리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버리십시오. 마지
막으로 다시 한 번 아뢰옵니다.
태상왕은 창연히 떠나가는 무학을 바라보면서 말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무학을 떠나보낸 후에 태상왕 이성계는 곧 마음을 정했다.
아들 방원이 임금 노릇을 하고 있는 송도로 가기를 결심했다.
조사의의 군사도 이제는 결딴이 나버리고 말았다.
데리고 왔던 늙은 재상 승녕부 당상 정용수는 안주 땅에서 방원이한테 잡혀서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함흥과 영흥에서 돌봐주던 감사와 목사들도 모조리 조사의와 행동을 같이했다
하여 아들 방원이 차례차례 잡아다가 군목에서 목을 베거나 그렇지아니하면 송
도 서울로 끌고가서 능지처참을 해 죽였다.
새로 부임된 감사와 원들은 태상왕인 자기를, 이 나라를 배판해놓은 창업지주인
자기를 경이원지했다.
감사가 새로 부인이 되어 왔건만 태상왕인 자기한테 알현도 하지 아니했다.
경이원지 라는 말은 너무나 점잖은 어휘다. 솔잎을 먹는 송충이 보듯 떼어버리
고 만다.
감사가 이러하니 그 아래 목사와 부사와 군수는 더구나 말할 나위도 없었다.
더한층 그 아래로 아전의 무리들, 이방, 호방, 예방, 형방, 병방, 공방들은 염량세
태를 바라보는 무리들이었다.
본궁 대문 앞에 그림자도 비치지 아니했다.
함흥과 영흥이 아무리 고향이라 하나 사고무친한 남의 고장보다 이제는 더 쓸
쓸했다.
무학의 말이 아니라도 이 고장에서 살아갈 도리가 없게 되었다.
아직 명색이 태상왕이라 해서 내시도 몇 사람 있고 궁녀도 몇 사람 있었다.
그러나 먹이고, 입히고, 체면을 유지시켜야 할 텐데 감사와 원이 돌봐주지 아니
하니 장차는 의식주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여기다가 이성계 자신은 이제 늙었다.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서 송도로 쳐들어가던 그 패기와 함은 약에 쓰려야 구
해볼 도리가 없다.
백발백중 버들잎을 꿰어 맞히던 그 활 솜씨도 줄어버렸다.
예전 같으면 동북면으로 치달려서 여진과 합세하여 백만 대병을 마련하여 송도
로 쳐들어가기는 여반장의 일이다. 그러나 엄두가 나지 아니했다.
이성계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노장은 무용이로구나!
이성계는 큰 소리로 탄식하고 몸을 뒤쳐 누웠다.
날이 밝았다. 태조는 내시와 궁녀를 불렀다.
너희들도 그 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 나는 오늘 송도로 갈 테니 함흥 본관과
함경감사에게 기별해서 차비를 차리게 하라.
함경감사와 함흥 본관은 태상왕이 송도로 환어하겠다는 소식을 듣자 기쁨을 이
길 수 없었다.
태상왕이 이 고장에서 떠나는 것은 마치 앓던 이가 빠지는 듯한 기쁜 소식이었
다.
거추장스럽고 모시기 거북한 모든 어려운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감사와 본관은 곧 사인교를 등대하고 궁녀와 내시들이 호행할 말을 준비해서
본궁에 대령시킨 후에 태상왕께 문후를 드렸다.
감사와 본관은 뜰 아래에서 아뢰었다.
송도로 환궁하신다는 분부를 듣잡고 옥교를 대령했사옵니다. 특히 호위하는 군
사를 배치하여 모시기를 하였으니 굽어 통촉하시기 바라오.
태상왕은 고개를 끄덕해 점두한 후에 함경감사에게 물었다.
송도에 나의 환궁한다는 기별을 보냈느냐?
아직 보내지 못했습니다.
곧 파발마를 띄우라. 저편에서는 미리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어가가 동하시기 전에 먼저 파발마를 띄우겠습니다.
감사는 곧 비장한테 영을 내렸다.
감영으로 달려가 태상왕 전하께옵서 환궁하신다는 일을 위에 아뢰게 하라.
비장은 곧 본궁 대문 앞에서 말을 달려 뛰고, 태상왕은 내시와 궁녀들의 부액을
받고 사인교 위에 올랐다.
궁녀와 내시들이 말을 타고 뒤를 쫒아 감사와 본관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어가
를 호송했다. 자기들의 관하까지 배종하려는 것이다.
앞에는 전도하는 취타와 용대기가 나가고 군사들은 어가를 앞뒤로 옹위했다.
그러나 말이 임금의 아버지 태상왕의 거둥행차지 시골 구석이라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함경도 백성들은 조사의가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송도로 쳐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라가 또 한번 뒤집혀지는 줄 알았더니 조사의의 군사가 임금 이방원한테 대패
하고 태상왕은 주먹맞은 감투가 되어 초초하게 아들한테로 돌아가는 것을 보자,
모두 다 탄식했다.
한동안은 서슬이 시퍼래서 사신이 오는 족족 함흥차사가 되어 죽어가더니 이
제는 할 수 없이 아들한테 돌아가는구나.
무학대사가 성공을 한 셈이지.
모두 다 이같이 탄식했다.
함흥에서 감사가 보낸 파발말은 송도를 향하여 요란하게 방울을 흔들어 비변사
로 달렸다.
태상왕 전하께옵서 환궁을 하십니다.
비변사에 있던 대신들은 곧 대궐로 들어가 태종에게 고했다.
태상왕 전하께서 환궁하신다 합니다. 지금 함흥서 떠나셨다 합니다.
태종은 반가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환궁을 하시기로 했단 말이냐, 무학의 힘이 컸구나!
태종은 우선 불효라는 낙인을 면하게 되어 기뻤다.
오시는 연도에는 감사와 수령한테 빨리 기별해서 지공에 유루가 없도록 하고,
곧 문안사를 보내라.
태종은 이같은 분부를 내릴 때 정원에서 승지가 급히 들어와 아뢴다.
무학왕사가 돌아왔습니다.
곧 들어오게 하라.
태종은 여러 차레 함흥차사를 보냈으나 가는 족족 죽어서 한 사람도 성공을 하
고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무학만은 태상왕의 마음을 돌려서 환궁하게 마련하
고 돌아왔으니, 무학을 신뢰하는 마음은 더한층 컸다.
이윽고 무학이 어전에 들어와 복명했다.
소승 무학이 다녀왔습니다. 태상왕께서는 근력이 강건하시옵고 곧 환궁하실 것
입니다. 그 동안 돌아오신다는 기별이 왔을 것입니다.
합장배례하고 아뢰는 무학을 바라보자 태종은 용상에서 일어나 무학을 맞이했
다.
먼길에 수고가 많았소. 그러지 아니해도 지금 막 감사한테 환궁하신다는 기별
이 왔소. 왕사의 수고가 과연 크오.
태종은 용안에 가득 미소를 띠고 무학을 위로했다.
소승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전하의 지극한 효심이 결국 태상왕 전하의 마
음을 돌리게 한 것뿐이옵니다. 이제는 소원하시는 모든 일이 성취되었으니 바라
옵건대 전하께서는 더욱더 효심을 다하시어 태상왕 전하의 나머지 세월을 안락
하게 모시옵소서. 이제 태상왕 전하처럼 외롭고 쓸쓸한 분이 이 세상에 드물 것
입니다. 깊이 통촉하시어 이점을 살피시옵소서. 아무리 효자가 백 명이 있다 해
도 한 사람 못난 아내만 못합니다. 옛글에 박박주도 승다탕이요, 추처악첩이 승
공방 이라 했습니다. 전하! 부디 소승의 말씀을 우습게 알지 마십시오. 지금 태상
왕 전하께서는 두 분 마마 다 아니 계시니, 무한 외로우십니다. 이러므로 노하시
기 잘 하시고 역정도 잘 내십니다. 환궁하시는 즉시, 어전 후궁을 가리시어 늙으
신 태상왕 전하의 외롭고 불편하신 점을 잘 살피시옵소서.
태종 이방원은 무학의 말을 듣자 황연히 깨달았다.
태종은 미연히 웃음을 용안에 띠고 무학을 바라보았다.
왕사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여 태상왕 전하께서 적막하지 않도록 하오
리다.
무학은 일어나 합장하고 재배하여 태종의 말씀을 찬양하는 뜻을 표했다.
태종은 은근히 무학에게 묻는다.
왕사, 어디로 가시려 하오? 가까이 경산에 있어 나의 혼미한 점을 가끔 깨우쳐
주시오.
태상왕 전하께도 소승의 가는 곳을 말씀드리지 아니했습니다. 불가의 행색은
정처가 없사옵니다. 그러하므로 예로부터 운수종적이라 했습니다. 다시 더 저의
가는 곳을 하문하지 마십쇼.
과인이 만류해도 아니 듣겠소?
황공하옵니다마는 아니됩니다. 태상왕께서는 소승이 전하의 명을 받들어 함흥
으로 간 것을 전혀 모르십니다. 만약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함흥으로 찾아간 것
을 아셨다면 소승 역시 함흥차사의 운명을 당했을 것입니다. 태상왕 전하께서 환
궁하시기 전에 소승은 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태종은 무학의 말을 들으니 그럴듯한 말이라 생각했다. 용안에 서운한 빛을 띠
고 말씀을 내린다.
억지로 고집해서 만류하지는 못하오마는 섭섭해 어찌하오. 나의 한 팔, 한 다
리가 없어지는 듯하구려.
화공무지하오이다. 기회 있으면 다시 용안을 우러러 뵙겠습니다.
떠나기 전에 나에게 두어 말씀 가르쳐주오. 이제는 왕실에 변고가 없으리까?
무학은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아무 일 없이 왕업이 태평하실 것입니다. 원래 연고가 있었던 것은 전하께옵서
풍운을 끼신 용이신 때문,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신 것이지 밖에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전하께옵서 대업을 맡으셨으니 모든 일은 안정되어 아무 풍
파도 없을 것이올시다.
무학의 말을 듣는 태종도 용안에 미소가 떠돌았다.
아닌게 아니라 왕실이 그 동안 불안했던 것은 자기가 임금의 대권을 잡기 위하
여 바람과 욕심을 일으켰던 것이다.
방석의 난도, 방간의 난도 그러했다. 자기가 내버려두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
을 것이다.
지금쯤 방석은 삼천리 강산을 다스리는 자기 자신이 앉은 용상에 있을 것이 분
명하다.
무학의 말이 확실히 옳다고 생각했다.
다시 왕사에게 물어볼 말이 있소. 왕도를 한양에 정해놓고도 상왕께서 송도로
다시 오신 때문, 마지못해서 이곳으로 왔는데, 어찌하면 좋으리까?
수도는 한양으로 옮기셔야 합니다. 이곳 송악은 이미 운수가 지났습니다.
무학은 태종은 향하여 수도를 처음 계획대로 한양으로 옮기라 주장했다.
무학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러하오나 정도전이 고집을 세워서 지은 경복궁에는 들지 마시고 따로 이궁
을 지어 드십시오.
경복궁에는 들지 말고 다시 이궁을 마련하여 들라는 말을 듣자 태종 이방원은
그럴 듯하게 생각되었다.
경복궁 대궐을 지은 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계모 강비가 급병으로 세상을 떠났
다. 그뿐 아니다. 자기 자신은 방석, 방번과 이제를 죽여서 선지피가 아버지가 앉
아 있는 용상에까지 뿌려졌다. 경복궁은 이러한 대궐 터다.
자기는 그 후에 현재 상왕인 형냄의 뒤를 따라서 송도로 온 후에(지금은 왕이
되었다) 아직 한양으로 다시 천도를 아니한 것도 이러한 지나간 일이 항상 머릿
속에 떠올라서 아직 한양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태종은 다시 무학에게 묻는다.
이궁을 마련한다면 어느 곳이 적당하겠소? 왕사는 한양에 수도를 정할 때 수
고를 많이 해서 한양 지세에 밝으니 좋은 곳을 말씀해주시오.
무학은 다시 합장하고 대답한다.
북악이 동편으로 향하여 활개를 활짝 벌린 곳에 우편은 종묘가 되고 그 뒤는
고려 때 이궁이었습니다. 고려의 이궁엔 좌편에 좋은 명당 자리가 있습니다. 이
곳에 대궐을 지으시어 거처하시옵소서. 터전이 폭 싸여서 아늑하고 남향판으로
전각을 앉힌다면 한양성의 중심이 되어 국조가 무궁할 것입니다.
임금은 덕이 있어야 합니다. 창덕궁이라 하십시오. 경복궁의 대구도 됩니다.
무학의 말을 듣는 태종의 입은 활짝 열렸다.
과연 그 이름 좋구려. 곧 이궁을 건축하고 창덕궁이라 하겠소. 그리고 고려 때
의 이궁을 중수할 계획인데 그 이름은 무어라 하면 좋겠소?
수강궁이라 하시어 상왕전하와 태상왕 전하께서 거처하시도록 하시는 것이 좋
겠습니다.
태종은 마음이 흡족했다. 무릎을 치며 무학을 칭찬한다.
왕사는 진정 나의 스승이오. 높은 가르침을 받아 잊지 않고 실행하리다.
그럼 소승은 인제 물러가겠습니다.
무학은 다시 합장을 올려 두 번 절한 후에 어전에서 물러났다. 태종은 무학의
은공을 갚으려 했다.
내시에게 명하여 폐백으로 비단 백 필을 전하라 했다.
그러나 무학은 사양하고 받지 아니했다.
태종은 의장을 갖추어 돌아가는 길을 빛나게 하라 했다.
무학은 역시 사퇴하고 죽장망혜로 표연히 금강산을 향해 떠났다.
태종은 더한층 무학의 높은 인격을 사모했다.
팔도 사찰에 영을 내려 무학대사가 나타나는 곳마다 국사로 대접을 하여 융숭
하게 받들라 했다.
화살로 아들을 겨누는 아버지
한편, 태상왕 이성계는 무학을 만나 만단정회를 푼 후에 아들 태종에 대한 모
든 불만을 풀어버리고 환궁할 것을 결심했다.
자비를 몰아 평양에까지 당도했다.
이때 태상왕이 행차하는 연변에는 함경감사와 평안감사를 위시하여 각읍 수령
들이 송도에 있는 상감 태종의 칙령을 받들어 성심성의를 다하여 지공이 대단했
다.
그러나 정작 송도에서는 아들 태종도 오지 아니하고 문안사 한 명도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버지 태조는 크게 노했다.
내가 함흥서 평양까지 왔는데 송도에서는 문안사 한 명도 아니 보낸단 말이
냐!
태상왕은 역정이 하늘 끝까지 뻗쳤다.
무학의 간곡하게 아뢰는 말을 듣고 마음을 돌렸던 태상왕은 또다시 아들 방원
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태상왕의 노기등등한 말씀을 듣자, 모시고 있던 내시들은 황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길이 멀어서, 문안사가 아직 도착이 되지 못했나봅니다.
시종자들은 태상왕의 노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이같이 아뢰었다.
적성이 없어서 그렇다. 정성이 없는 사람이 문안사를 보낼 생각이나 했겠느냐.
이성계는 더 한 번 호통을 질렀다. 울분한 마음을 호통으로 흩어버렸다.
왕의 문안사는 평양을 지난 후에야 겨우 당도했다.
태상왕은 늦게 온 문안사를 대하자, 다시 분을 터졌다. 문안을 받지 아니했다.
나는 문안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문안을 받지 아니하고 문안사를 내쫒았다.
송도서, 왕의 명을 받들고 온 문안사는 주먹맞은 감투가 되었다.
몇 번 다시, 내시를 통하여 왕의 문안을 받으라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도리가 없었다. 큰일이었다. 문안사는 급히 말을 달려 송도로 되돌아갔다.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바로 대궐로 들어갔다.
평양으로 갔던 문안사가 아뢰옵니다.
상감 이방원은 혼자 돌아오는 문안사를 보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너 어떻게 벌써 돌아왔느냐?
문안도 못드리고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상감 이방원은 깜짝 놀랐다.
문안을 못드렸다니 웬 말이냐, 문안을 받지 아니하시더란 말이냐?
함흥서 평양까지 내려오시도록 상감께서도 마중을 나오시지 아니하고, 문안사
도 겨우 평양까지 왔다고 크게 노하시어 영영 문안을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번
에도 목이 달아나는 줄 아았습니다.
상감 이방원도 열이 벌컥 났다.
송도서 평양이 사백 리 길이나 된다고 왜 말씀을 못드렸느냐!
문안사를 꾸짖었다.
문안사는 벌벌 떨었다.
말씀이 무어오니까. 덜미를 짚어 내쫓으셨습니다. 그저 소신의 목을 베어줍시
오.
상감 방원은 열이 치받쳤으나 한편으로 걱정스러웠다.
무학의 보고를 듣고 마음이 풀려서 환가하시는 줄 알았는데 문안사가 늦게 왔
다고 아니 만나보셨다 하니 또다시 탈이라고 생각했다.
태상왕 전하의 행차는 확실히 송도를 향해서 오시는 모양이더냐?
내시들의 말을 들으니 행차는 틀림없이 송도로 향하여 오시는 모양이옵니다.
좀더 동정을 살피고 올 것을 그랬구나.
문안사의 목은 자라목처럼 옴쓱 들어갔다. 떨면서 아뢴다.
함흥차사처럼 목을 베라고 하실까보아 어마 뜨거라 하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상감 이방원은 애꿎은 문안사만 꾸짖을 수 없었다.
물러가거라.
문안사는 진땀을 흘리고 한숨을 쉰 후에 살았구나 하고 물러갔다.
문안사가 물러간 후에 상감 방원은 정승 하윤에게 입시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윤은 부름을 받고 어전에 들어온 후에 상감에 말씀을 내리기 전에 먼저 아뢴
다.
듣자오니 평양까지 갔던 문안사가 그대로 허행을 하고 돌아왔다 합니다. 성심
이 미편하시겠습니다.
하윤의 아뢰는 말을 듣자 상감은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경의 말과 같이 과인의 마음이 심히 괴로웁소. 과인의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
니라 길이 멀어서 늦은 것을 이해해주지 아니하시니 민망하기 짝이 없소! 오늘
정승을 청한 것은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 의논하자는 것이오.
성상께옵서는 과히 염려 마시옵소서. 문안사의 목을 베지 아니한 것만 보아도
태상왕 전하의 심경은 많이 풀리셨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합니다. 전하께서
도 또다시 문안사를 계속해서 보내시옵소서. 이제는 조사의의 반란군도 평정이
되었으니 아무 다른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정승 하윤의 아뢰는 말을 듣는 상감의 용안엔 아직도 수심이 스러지지 아니했
다.
계속해서 문안사를 보낸다 해도 만나보시지 않는다면 딱한 일이 아니겠소.
꼭 만나보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드님 되시는 상감께서, 지성껏 문안사를
보내셨다는 것을 아시기만 하면 그만이올시다. 그저 오시는 도중에 계속해서 문
안사를 보내십시오.
경의 말이 옳소. 계속해서 문안사를 보내기로 합시다.
상감 방원은 승지를 불러, 문안사를 계속해서 보내라고 분부했다.
하윤은 다시 상감께 고한다.
태상왕 전하께서 성안에 듭시기 이전에 미리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요, 말을 해주오.
전하께서는 송도성 밖 삼십 리허에 환영문을 크게 세우신 후에 만조백관을 거
느리시고 친히 납시어, 맞이를 하셔야 합니다.
상감 방원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아무렴, 맞이를 해야지.
하윤이 다시 아뢴다.
환영하는 문을 세우실 때 아름드리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어 삼문을 세우십시
오. 이리하면 기둥이 넷이나 됩니다. 기둥마다 붉은 천을 감아서 찬란하게 만드
십시오.
한 번 쓰고 말 환영문을 궁궐문 세우듯 삼문을 만든다는 것은 너무 사치스런
일이 아니겠소.
사치스러워도 좋습니다. 아바마마의 환궁을 경축하는 뜻에서 좀 사치스러우면
어떳습니까. 두 말씀 마시고 굵은 나무로 기둥을 해서 삼문을 세우라고 분부를
내리십시오. 반드시 쓸 곳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때 가서 다시 아뢰겠습니
다.
상감 방원은 하윤의 슬기를 깊이 믿는 터이었다.
좌우간 경의 말대로 삼문을 세우라고 하리다.
상감 방원은 정원에 분부했다.
태상왕 전하께서 환궁을 하신다 하니 과인의 마음 기쁘기 한량없다. 송도성 밖
삼십 리허에 크게 환영문을 세우게 하라. 문은 웅장하게 삼문을 세우고 기둥은
아름드리 유주목을 쓰도록 하라.
정원 신하들은 너무나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간만에 태상왕을 맞이하
는 환영문이었다. 감히 반대하는 신하가 없었다. 상감의 분부를 따라 송도 동편
삼십 리허에 크게 환영문을 세웠다.
한편, 태상왕 이성계의 행차는 송도성 밖 오십 리허에 당도했다.
파발은 급히 말을 달려 정원에 고했다.
태상왕 전하의 행차가 지금 오십 리 밖에 당도했습니다.
정원 승지는 빈청에 있는 정승 하윤에게 이 뜻을 고하고 어전으로 들어가 상감
께 아뢰었다.
태상왕 전하의 행차가 지금 성 밖 오십 리허에 당도하셨다 합니다.
알겠다. 문무백관에게 알리고 곧 거둥준비를 차려라.
승지는 정원으로 나가 문무백관을 소집하고, 상감의 거둥차비를 차렸다.
이때, 정승 하윤이 급히 어전에 들어가 아뢴다.
시자를 물리쳐주시기 바라오,
하윤의 말을 듣자 태종은 전번에 하윤이 환영문을 세우라고 건의할 때, 나중에
다시 아뢸 일이 있다고 하던 말이 생각되었다. 곧 좌우를 물리쳤다.
하윤이 조용히 고한다.
태상왕께오서 지금 송도 오십 리허에 당도하셨다 하니 전하께서는 곧 거둥을
하셔야 합니다.
정원에 기별하여 만반준비를 차리라 하였소.
그렇다면, 지체 말고 곧 떠나셔야 합니다. 그리하옵고 일전에 따로 아뢰겠다던
말씀을 아뢰겠습니다.
어서, 말해주오.
태상왕 전하께서는 천하 명궁이십니다. 전하와 딱 마주쳐서 대면이 되신다면,
혹시 분기가 탱중하시어 전하께 화살을 겨누실는지 모릅니다. 이때, 전하께서는
맞이하시는 체하시다가 얼른 기둥 뒤로 피하십시오.
태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태종은 거둥령을 내렸다. 만조백관들이 궐문 밖에 모여서 태종이 나오기
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종은 지밀에서 익선관 곤룡포를 입어 왕복의 정장을 차리고 있었다.
이때, 왕자 제 가 보 와 도 두 아우를 거느리고 붉은 강사포를 입고 어전에 나
타났다.
태종은 시녀에게 옥대를 띠게 하고 있다가,왕자들을 바라보며 묻는다.
너희들, 웬일이냐?
큰왕자 제 는 두 손길을 마주잡고 아뢴다.
할배마마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듣잡고, 아우 둘과 함께 지영을 나가려고 왔습
니다.
너희들으 아직 어리니, 궁중에 있다가 문후를 올려도 좋다. 그대로 물러가 있
거라.
왕자 제 는 흑수정 같은 눈을 깜박이며 또렷하게 아뢴다.
할배께서 마음을 돌리시어 오래간만에 오시는데, 소자들이 비록 나이 아직 어
리다 하나, 어찌 감히 궁중에 앉아서 뵈오리까. 도리 아닌가 합니다. 아바마마를
모시고 성 밖까지 나가서 뵈오려 합니다.
태종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큰왕자 제 는 자기가 조사의의 함흥군을 치러 나갔
을 때 친정을 하지 말라고 간하던 왕자였다. 어린 아우들을 거느리고 나와서 오
래간만에 돌아오시는 할배 태상왕을 지영하겠다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마
음 속으로 영악하다고 생각했다.
너희들이 생각이 정 그러하다면 거둥행렬에 참여하여 교외까지 나가라.
태종은 비로소 허락을 내렸다.
내시들은 어명을 받들어 왕자들의 행렬을 문무백관들의 앞에 세워서 상감이 타
고 가는 옥교 뒤에 배종케 했다.
만조백괃들은 왕과 왕자의 뒤를 따라 송도성 밖으로 향했다.
백관들은 태종을 호위하여 송도성 삼십 리 밖으로 향했다.
백관들은 태종을 호위하여 송도성 삼십 리 밖으로 나갔다.
거둥행차는 삼십 리에 뻗쳤다. 며칠 전부터 시작했던 환영문은 크고 장엄하게
거리에 솟아 있었다.
태상왕 이성계의 행차는 아직 도착이 되지 아니했다.
태종은 황금 면류관에 붉은 곤룡포를 입고 손에는 백옥홀을 들어 환영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왕자 제 와 보 와 도 , 삼형제도 아버지 태종의 뒤에서 시립해서 태상왕의 행차
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들의 좌우편에는 정승 하윤을 위시하여 백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발이 급히 말을 달려왔다.
태상왕 전하의 환경하시는 행차가 지금 당도하십니다.
태종 이하 왕자와 만조백관들은 긴장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대취타 명금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태상왕의 행차는 환영문 앞에
당도했다.
태상왕 이성계의 모습이 나타났다.
태종은 환영문 밖에 나타난 태상왕을 향하여 절을 올리려 했을 때 과연 태상왕
의 용안에는 불같이 노한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돌연 태상왕은 화궁을 잡아다렸다.
살을 시위에 매겼다.
백우전 화살은 푸르르 울면서 태종을 향하여 날았다.
태종과 왕자들은 깜짝 놀랐다. 만조백관들의 간담이 콩알만큼 오그라졌다.
어린왕자들의 등에는 진땀이 쪽 흘렀다.
순간 태종은 얼른 몸을 피하여 환영문 기둥 뒤로 숨었다.
살은 소리쳐 울면서 태종이 피해 있는 기둥을 꽉 맞히었다.
백우전 흰 화살은 기둥에 푹 박혀 푸르르 떨었다.
왕자와 백관들의 간담은 또 한 번 싸늘하게 식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우르르 태종 앞으로 모여들었다.
정승 하윤은 상감 앞으로 모여드는 군신들에게 의젓하게 영을 내린다.
소란을 떨지 말고 제자리로 물러가라. 성상께서는 무사하시다. 만약, 무엄한 행
동을 취하는 자는 참하리라!
정승의 명령이 떨어지니 모든 군사들은 일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신하의 질서를 회복한 하윤은 다시 영을 내렸다.
백관들은 나와 행동을 같이하여 태상왕께 알현하라.
하윤은 말을 마치자 태상왕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정원 서리가 검은 복두에 푸른 옷을 입고, 박을 치며 국궁배례의 구호를 불렀
다.
왕자와 백관들은 일제히 구호에 따라 절을 올렸다.
이중에 소년 왕자 제 는 눈물을 머금고 배를 올렸다.
왕손과 백관들의 절을 받은 태상왕의 구겨진 마음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때 영의정 하윤은 태상왕의 어전으로 들어가 다시 절을 오리고 아뢰었다.
이제 태상왕 전하께서는 대내로 환어하시옵소서. 백관들은 전하의 환궁하심을
축하하기 위하여 환영연을 열기로 하였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계는 다시 돌아왔으니 별도리가 없었다.
거둥행차는 다시 왕의를 갖추어 송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앞에는 용대기가 나가
고 뒤를 이어 청룡, 황룡을 그린 기가 바람에 펄펄 날렸다.
용기 뒤에는 태상왕이 연을 타고 들어가고 그 뒤에는 태종의 연이 호위병들에
게 옹위되어 뒤를 따랐다.
다음에는 왕자 삼형제가 교자를 타고 들어가고 다음에는 영의정 하윤과 대장
이숙번을 선두로 하여 백관들의 행렬이 뒤를 이었다.
송도성 안에는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신이 가는 족족 하흥차사가 되어서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더니 이
제는 태상왕 전하가 마음을 돌려서 돌아오는 모양일세그려.
마음을 돌렸다? 허허, 죽은 사람들만 불쌍하이그려. 사신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이번에도 아니 돌아오려 한 것을 무학대사가 여러 가지로 달래서 돌아오게 된
모양일세.
아버지가 져야지 별수가 있나. 그렇지 아니하면, 나라는 망하는 것을!
앞날 일을 아직도 판단할 수 없네. 아까 문 밖에서는 태상왕이 상감을 활로 쏘
았다네. 기막힐 일 아닌가.
모두들 눈이 동그래졌다. 깜짝 놀라는 얼굴빛이었다.
태상왕이 상감을 쏘다니! 그래 어찌 되었단 말요?
상감은 미리 환영문을 세워서 준비하고 있다가 태상왕이 활을 들어 쏘는 것을
보고 얼른 몸을 기둥 뒤로 피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하오. 하하하.
소문을 들은 백성은 조롱하는 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송도 백성들은 이같이 주고받으며 돌아오는 이성계의 행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송도 경덕궁 큰 정전에는 크나큰 잔치가 벌어졌다.
아들 태종이 친히 아버지 태상왕 전하를 맞이하여 그의 만수무강을 축하하는
잔치였다.
두 자 가웃이나 넘도록 으리으리하게 유과와 생과며 당속과 어물들이 큰 상에
가득히 벌여 있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남면으로 향하여 큰 상을 받고 앉았고, 임금 이방원은 동면해
서 상을 받았다.
소년 왕손들은 북면해서 상을 받았다.
영의정 이하 만조백관들은 전각 앞에 드높게 차일을 치고 화려한 화문석 위에
서 사찬상을 받았다.
풍악 소리는 자지러지고 기생들의 춤은 갖은 묘기를 올려서 될 수 있는 대로
태상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에 노력했다.
잔치가 시작되면 상감 방원은 태상왕인 아버지한테 오래 살라고, 수를 빌어올리
는 헌작례가 있는 것이 오늘 잔치의 뜻깊은 행사의 하나였다.
잔치의 순서가 헌작례로 들어갈 때, 영의정 하윤은 전상에 올라 상감 방원의 앞
으로 가까이 갔다.
이따가 잔을 올리실 때 직접 올리시지 마시고 내관을 시켜서 중간에서 잔을
올리도록 하십쇼.
하윤은 소근소근 아뢰었다.
꾸지람을 하시면 어찌하오?
상감 방원이 가만이 물었다.
천만에, 꾸지람은 못하십니다. 종묘에 자사를 올릴 때도 제왕은 절만 하고 약
주는 븐드시 집사가 거행하는 법이올시다. 조금도 예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올시
다. 그저 전하께서는 배만 하시고, 잠깐 잔대를 잡았다가 내관에게 전하십시오.
신은 내관들에게 미리 지휘해두겠습니다.
과인이 친히 잔을 올리면, 더 정답지 아니하겠소?
그저 이따가 그렇게만 하십쇼.
하윤은 더 말을 아니하고 어전에서 물러나 우두머리 내관을 불렀다.
조금 있다가 상감께서는 헌작레를 올리실 테니 공사청은 집사가 되어 잔 올리
는 시중을 하오.
내관은 예법에 능통했다.
종묘에서 지내는 제례와 같이 헌작을 하라 하십니까?
아무렴 그렇지, 생사가 일반 아닌가. 상감께서는 막중하신 일국의 제왕이신, 당
연히 시중드는 집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종묘대제뿐 아니라 사사로운 민가에서도 잔을 올릴 때
는 반드시 집사가 올리는 법입니다.
옳지, 제사뿐인가. 민가에서 신부가 시부모께 폐백을 올리고 잔을 드릴 때도
반드시 수모나 중매가 신부한테서 잔을 받아서 약주를 올리는 것이 예법이거든.
하윤은 이같이 내관한테 주의를 주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헌작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상감 병원은 황금 왕관에 붉은 곤룡포르 입고 동향
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태상왕의 큰 상 앞으로 나갔다.
영의정 하윤은 지휘를 받은 내관들이 일제히 좌우편으로 갈라졌다.
상감 방원의 잔을 올리는 배석이 깔린 곳은 태상왕이 앉은 곳에서 반간통이나
떨어져 있었다.
상감 방원은 백옥홀을 잡고 배석 위에 당도하여 두 번 절하고 잔을 올린다.
좌우편으로 서 있는 내관들은 상감이 올리는 술잔을 받들어 태상왕께 드렸다.
비단결같이 고운 마음들
태상왕 이성계는 내관이 받들어 올리는 술잔을 아니 받을 수 없었다.
중간에서 내관이 받들어 올리는 술잔을 탄해서 꾸짖을 수 없었다.
예법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태상왕은 잔을 받아 상에 놓고 한숨을 한 번 길게 쉰다.
하늘이 도와주는 일이로구나!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다.
크게 탄식한 후에 용포 속에서 철퇴를 꺼내서 내던진다.
상감 방원이 친히 술잔을 받들어 올렸더라면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철퇴로
갈겨서 방석, 방번의 원수를 갚았을 것이다.
태상왕 이성계가 내던지는 철퇴를 바라보자 상감 방원 이하, 만조 백관들은 등
에 소름이 쪽 끼쳤다.
태상왕은 철퇴를 내던지자 이내 조선국왕의 어보인 황금인을 꺼내서 앞으로 내
던졌다.
네가 탐내는 것은 이것이로구나! 가져가거라.
자리에 가득한 군신의 시선이 태상왕이 내던진 찬란한 황금인으로 일제히 집중
되었다.
영의정 하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욕심의 화신인 상감 방원이지만 차마 아버지가 내던진 인뚱이를 얼른 잡지 못
한다.
하윤은 태상왕의 어전에 나가 산호만세를 부르고 아뢴다.
천지신명이 굽어보시는 아래 태상왕 전하께서는 상감에게 전국지보인 옥새를
내리셨습니다. 성상께서는 지극한 효심으로 거룩한 옥새를 받들어, 천 년 만 년
국조의 무궁을 빌면서 계계승승 자손한테 내리시어 이 백성과 이 국토를 번영케
하실 것입니다.
하윤은 하례하는 말씀을 태상왕께 아뢴 후에 황금인을 상감한테 전했다.
영의정 하윤을 통하여 황금 인뚱이를 받은 상감은 얼굴에 황공한 표정을 지으
며 찬란한 황금인을 받았다.
담이크고, 심술궂고, 욕심많은 상감 방원이건만, 인뚱이를 받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감 방원이 자리로 돌아오자, 백관들은 다시 산호만세를 부르고 큰 잔치를 파
했다.
태상왕은 전에 거처하던 왕궁으로 들어갔다.
궁녀와 내시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어 모시었으나, 그에게는 쓸쓸하고 외로
운 궁전이었다.
모든 것을 바라볼수록 강비의 생각이 더한층 간절하게 부풀어올랐다.
만 가지 감회가 소용돌이쳐 머리 안에 떠오를 때, 내시가 조용히 침실문을 열고
아뢴다.
상왕 내외분이 뵈우러 들어오십니다.
상왕은 둘째 아들 정종을 가리킨 것이다.
그는 동생한테 왕위를 전한 후에 두문불출하고 궁문 밖을 나가지 아니했다. 아
버지가 함흥까지 가시어, 여러 해 동안 돌아오지 아니하셨건만 함흥으로 가서 뵙
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아우인 상감 일파에서 쓸데없는 잡음을 일으킬까 염
려된 때문이다.
더구나 조사의의 반란군이 일어나는 그 판국에 부왕을 뵈러 간다는 것은 기름
위에 불을 지르는 격이 될 것이 분명했다.
상왕은 모든 일을 꽉 참고 있었다. 이번에도 아버지 태상왕이 환궁하신다 하니
자식된 도리에 당연히 멀리 나가서 마중을 해야 할 것이지만 역시 상감인 아우
일파들이 또 무슨 말거리를 만들어낼까 하여 공식 좌석에 참여하지 아니했다.
상왕 자신이 참여하기를 원하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저편인 상감 일파에서도
상왕의 자격으로 마중을 나오라고 전갈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상왕은 모든 공식행사가 끝난 후에 조용히 상왕비 김씨와 함께
오래간만에 태상왕 전하께 맞이인사를 하러 왔던 것이다.
상왕 내외분이 뵈러 들어오십니다.
하는 전갈을 받은 태상왕은 피곤한 몸을 자리에 뉘었다가 늙은 궁비의 부촉을
받으며 일어났다.
얌전하고 마음 착한 방과가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태상왕은 반가웠다.
어서 들어오라 일러라.
이윽고 상왕은 비와 함께 고요히 전상에 올라 태상왕의 침실로 향했다.
상왕은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지 아니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다. 비도 큰머
리를 하지 아니하고 민머리에 검소한 차림으로 옥색 토주 저고리에 남치마를 입
었다. 공식좌석에서 뵙는 예가 아니므로 평시에 입는 연복으로 뵙는 것이다.
이때 태상왕은 연치가 이미 칠십이 넘었다. 둘째 아들 상왕은 사십구 세요, 사
왕비는 오십이 넘었다.
그 잘생기고 화려했던 태상왕의 용안은 이마에 이미 주름이 짙었는데, 머리와
살쩍은 눈 같은 백발이었다.
상왕 역시 오십줄에 들어 있고, 상왕비는 상왕보다 두 살 위인 망륙의 연세다.
아바마마!
상왕은 태상왕께 향하여 곡배를 드렸다 이내 반가운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목에 메어 큰 소리로 아바마마를 부른다.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오, 상왕인가!
태상왕도 허파에서 터져나오는 반가운 음성을 내었다.
다음엔 상왕비가 늙은 나이지만 시아버님 되시는 태상왕께 날아갈 듯 절을 올
렸다.
유한정정한 부드러운 행동이 한 굽이 봄바람을 소슬한 궁전에 일으켰다.
잘 있었던가?
부왕인 태상왕은 미소를 풍기며 허리를 굽혀 상왕비 김씨의 절을 받았다.
많고 많은 자식과 며느리 중에 가장 총명하고 안사하고 마음이 곱고 착한 아들
과 며느리다.
이 두 내외는 법이 없이 살아도 아무 탈이 없을 내외였다.
조신하고 얌전한 상왕비의 눈매에도 이슬방울이 구슬같이 맺혔다.
상왕비는 남편인 상왕한테 아우 방원의 날카로운 눈길을 보고, 어서어서 왕위를
동생한테 내주라고 안상하게 권했던, 비단같이 마음이 고운 여자다.
조신하게 절을 올린 상왕비는 아바마마의 잘 있었던가? 하시는 부드러운 음성
에 나직이 대답한다.
저희들은 잘 있었습니다마는 아바마마께옵서는 객지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
습니까?
말을 마친 사왕비는 다시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야 팔자에 타고난 고생이다마는 너희들은 갇힌 몸같이 얼마나 울적했느냐?
태상왕도 그들의 심경을 잘 알고 있었다.
아바마마, 불초자의 죄를 용서해주십쇼. 한 번도 함흥에 올라가 문안도 드리지
못하고 오늘 또 환가하시는 기쁜 날에 공식으로 환영연에 참여치 못하온 죄를
용서해주십쇼.
아들 방과는 또 한 번 느껴 울었다.
나도 다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할 수 있느냐. 나는 활을
들어 방원이를 쏘았다. 그러나 방원이는 몸을 피하여 미리 준비한 환영문 기둥으
로 몸을 숨겼다. 또다시 환영잔치 때 요정을 내려 하여 철퇴를 소매 속에 준비했
던 것이다. 그러나 내관이 중간에서 헌작을 거행했으니 도리가 있느냐. 하늘이
시키는 노릇이다. 하는 수 없이 철퇴를 내던져버리고 황금 인뚱이를 내주었다.
상왕은 조용히 대답했다.
잘하셨습니다. 아바마마, 이제 또다시 무엇을 바라오리까. 다만 천추만대에 집
안에 더 어지러운 꼴이 전해지지 아니하고 아바마마의 심혈을 기울여 이룩하신
국가대업이 천 년 만 년 유지되어 이 땅의 백성들이 복되게 살기를 바랄 뿐이올
시다.
간곡하게 아뢰는 상왕의 말을 듣는 태상왕 이성계는 추연히 한숨을 쉬었다.
나는 너와 너의 형 방우를 볼 낯이 없다. 나는 공연히 일을 만들어서 천추만대
에 이신벌군한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독주만 마시고 죽은 너의 형은 앞으로 천
추만대에 꽃다운 이름을 전할 것이다. 사람이란 공연한 욕심에 얽매여, 이런 일
을 저지르고 마는 구나! 이제 나는 나이도 칠십이 되고보니, 한 사람 인간으로
뉘우치는 바가 많구나.
태상왕 이성계는 뜻맞는 아들 앞에서, 이같이 자기의 심경을 헤쳐 놓았다.
이제 지나간 일을 말씀하신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까 말씀 아뢴대로 상감
이 용렬한 사람이 아니오니, 나라와 백성을 잘 어거해서 다스릴 거시올시다. 아
바마마께서는 과히 염려 마시고 일을 다 맡겨 보십쇼. 그리고 만수무강하시어 이
나라가 잘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십쇼.
사왕은 조리 있게 태상왕의 마음을 위로하고 안돈시켰다.
나 역시 이제부터는 정치에는 간여하지 안니하려네. 먼저 간 사람들의 명복을
빌면서, 산과 물을 벗하여 지내려 하네.
태상왕은 적막한 심정을 쓸쓸한 웃음으로 흩어버렸다. 이날 저녁 수라는 상왕궁
에서 갸자에 실어 태상왕궁으로 날랐다.
무수한 궁녀들이 많건만 상왕비는 친히 수라상을 분별해 올리고, 따뜻하게 약주
석 잔을 따라 올렸다.
오랜만에 집안 식구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는구나!
술을 달게 받아 마시며 자기 마음을 스스로 위로했다.
이때 내시가 늙은 상궁한테 거래를 올린다.
상감마마께오서 태상왕마마의 수라를 받들기 위하여 후궁 두 사람을 바쳤습니
다. 아뢰어주시기 바라오.
늙은 상궁은 곧 어전으로 들어갔다.
태상왕이 마악 상왕비의 따라 올리는 약주를 자시고 안주를 집는 순간이었다.
늙은 상궁이 아뢴다.
상감께서 태상왕마마의 수라와 침소를 받들라 하와 후궁 두 사람을 간택하여
바친다 하옵니다. 불러들이오리까?
태상왕은 자기를 생각하여 후궁을 간택해 보냈다는 말을 듣자, 한편으론 기뻤으
나, 한편으로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방긋 웃으며 비꼬아 말했다.
이제 새삼 효자 노릇을 하려 하는구나. 진작 효자 노릇을 하지.
밖에서는 후궁 두 여자가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상궁은 민망했다.
어찌하오리까, 들어오라 이르리까?
그만두어라. 다 발게 상감의 효도를 받겠느냐.
태상왕은 강비를 싫어하는 상감 방원의 행동이 눈에 환하게 떠올랐다.
후궁을 들여보낸 것을 단번에 거절해 버렸다.
옆에서 반주를 따라 올리던 상왕비 김씨는 딱하기 그지없이 생각했다.
아바마마, 아까 상왕과 하시던 말씀 다 잊으셨습니까. 천명이라 하는 수 없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집안을 화평하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상왕이 아뢰었습
니다. 상감은 아바마마께옵서 환궁하신 후에 적막하고 쓸쓸해하실 것을 생각하여
특별히 후궁을 간택하여 두었다가 이제 환궁하시는 저녁에 시봉을 하게 한 것이
온데 아바마마께옵서 역정을 내시고 받지 아니하신다면 모처럼 효심을 기울였던
상감의 마음이 또다시 불안을 느낄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옵서 깊이 통촉하시어
불러들이옵소서.
상냥하고 어질고 착한 상왕비 김씨는 성음을 나직이 하여 아바마마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애를 썼다.
태상왕은 묵묵히 대답이 없다. 다만 저를 들어 안주를 자실 뿐이었다.
상왕이 감상을 하여 시립해 섰다가 아내인 김씨의 말씀이 끝나자 얼굴빛을 화
하게 하여 아뢴다.
이제는 왕실에 권력다툼을 할 사람도 없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춘추가 고래회
에 한 해를 더하셨습니다. 소자도 이제는 오십이올시다. 상감은 지금 한창 장년
인 삼십구 세올시다. 그로 하여금 나라일이나 잘 보도록 맡겨두어서 집안 일로
불안이 없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바마마, 자식의 향의하는 정
을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자식이란 본시 효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올시다.
태상왕은 상왕비와 상왕의 간곡하게 아뢰는 말에 감동이 되었다.
내 마음이 본시 좁은 사람은 아닌데, 공연히 격하게 나왔구나.
태상왕은 이제는 나이 늙은 탓인지 노하기도 하고 잘 하고 풀어지기도 잘했다.
상왕비 김씨는 놓치지 아니했다. 되도록 왕실의 싸움과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자는 심정에서였다.
아바마마, 후궁들로 간택되어 들어온 사람들은 사대부 집딸이 될 것이 분명합
니다. 남의 집 규수를 청상으로 만드는 일도 딱한 일이 아니옵까. 일부함원에 오
월비상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불러보시옵고 원망이 없도록 하시옵소서.
상왕비 김씨는 미소를 지어 아뢰었다.
태상왕은 마음에 드는 아들과 며느리의 극진한 효성에 감동되었다.
너희들 상왕 내외의 말을 들어 내 마음이 돌아섰다. 후궁으로 간택했다는 여인
들을 들어오라 해라.
태상왕은 마침내 늙은 상궁에게 영을 내렸다.
이윽고 상궁은 두 사람의 여인을 인도해 들어왔다. 태상왕이 바라보니 모두 다
나이 십팔 세 가량 된 처녀들이었다.
칠흑같이 윤이 나는 머리를 치렁치렁 땋아 늘어뜨렸다. 자줏빛 제비부리 댕기가
남스란치마 자락 위로 풍정 있게 흔들렸다.
한 여인은 해당화 한 송이가 이슬방울을 머금고 있는 듯했고, 한 여인은 백모란
꽃이 핀 듯 화려하면서도 청초했다.
상왕비는 무한 엽렵했다. 늙은 상궁에게 인도되어 부끄러워 고개를 못들고 섰는
두 여인을 향하여 나직이 말을 건넨다.
어전에 뵈어라.
두 여인은 상왕비의 명에 의하여 일시에 큰절을 태상왕께 드렸다.
상왕비는 두 여인을 이끌어 태상왕의 좌우편으로 갈라 앉혔다.
마침 수라 젓숫는 데 잘 들어왔구나. 약주를 한 잔씩 따라 올리도록 해라.
상왕비는 해당화꽃 같은 여인에게 황금 술병을 넘겨주었다.
여인은 어전에 놓인 황금 술잔을 들고 금병의 술을 기울여 남실나실 따랐다.
네 성이 무엇이며 누구의 딸이냐?
상왕비는 잔을 든 해당화 같은 처녕에게 물었다.
아비는 태학사 원상이옵니다.
아아, 글 잘 하는 태학사 원상이 너의 아버지냐?
상왕비는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 태상왕께 고했다.
글 잘하는 선비 태학사 원상의 딸이라 하옵니다.
태상왕도 늙은 눈을 들어 해당화 같은 아름다운 처녀를 바라보았다. 풍정있게
잘 생긴 아름다운 미인이 싫지 아니했다.
아까 상궁한테 노발대발하며 아니 받겠다고 하던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어허, 원상의 딸이란 말이냐. 해당화같이 곱게 생겼구나.
한 마디 하고 원처녀의 술을 받아 마시었다.
상왕은 옆에서 늙은 아버지의 호색하는 풍경을 미소하며 바라본다.
상왕비는 이번엔 오른편에 태상왕을 모시어 앉은 백모란꽃 같은 처녀한테 술병
을 넘겼다.
네 성은 무엇이지?
유가올시다.
무슨 유자냐?
버들유자올시다.
아버지의 이름은?
유학 유준이올시다.
벼슬은 아니했지만 선비 집안의 딸이로구나. 벌써 겉으로 보아도 외양들이 다
얌전하다.
상왕비는 한바탕 칭찬을 했다.
상왕비는 두 처녀를 칭찬한 후에 조용히 미소를 지어 다시 태상왕께 고한다.
유학 유준의 딸이라 합니다. 백모란같이 잘생겼습니다.
태상왕은 미소를 지어 백모란같이 잘 생긴 유처녀를 바라본다.
처녀 유씨는 상왕비가 넘겨준 황금 술병을 앞에 놓고 해당화같이 고운 처녀가
따라 올리고 난 빈 잔을 두 손으로 받들어 행주로 정하게 씻은 후에 술병을 들
어 조심성스럽게 따랐다.
황금 술병에서 풍풍 소리가 운치 있게 일어났다.
태상왕은 유처녀가 술잔을 바치기 전에 먼저 어수를 내밀어 잔을 받았다.
마음이 흥그러웠다.
오늘 며느리 덕에 두 미인한테 장가를 드는구나.
늙어도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는 인간의 어찌할수 없는 욕심이었다.
태상왕의 마음은 흠뻑 풀리기 시작했다.
태상왕은 활 잘 쏘는 신궁일 뿐 아니라 천하르 뒤흔들어 고려를 엎어놓은 맹장
이다.
나이 칠십이 넘어 칠십일 세이건만 아직도 정력은 강했다.
강비의 뜻밖의 죽음과 방석, 방번의 비명횡사 등 모든일로 인하여 근심 걱정에
파묻혀 칠팔 년 동안을 두고 만사에 뜻이 없어 홀아비생애로 우울하게 지냈던
그의 눈에 아름다운 두 처녀가 나타나고 보니 환하도록 새로운 봄뜻이 움직였다.
좌우 옆에서 권하는 대로 석잔씩 반주를 마시고 수라를 들었다.
상왕과 상왕비 김씨는 태상왕 전하의 마음이 풀린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소
리 없이 미소를 지어 감상을 하고 섰다가 수라상이 물려진 후에 문안을 올리고
돌아갔다.
이날 밤에 태상왕은 늙은 궁녀한테 영을 내렸다.
기왕 후궁으로 들여보낸 아이들이니 거두어두게 하라.
늙은 상궁은 태상왕의 영을 받은 후에 두 여인을 별처소로 인도했다.
밤이 깊은 후에 늙은 상궁은 다시 태상왕께 고했다.
오늘 밤 침전에는 누구로 받들어 모시게 하오리까?
태학사 원상의 딸로 입시시키라.
늙은 상궁은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어침인 침소에 해당화같이 아름다운 원상의
딸을 들여보냈다.
칠팔년의 세월과 울음과 한으로 보냈던 태상왕 이성계에게는 재봉촌의 봄빛이
찾아들었다.
사흘 신방을 치른 후에 늙은 상궁은 조용히 태상왕께 아뢴다.
오늘은 누구로 시침을 하오리까?
유학 유준의 딸로 입시케 하라.
이날 밤에 늙은 상궁은 백모란과 같은 유준의 딸로 모시게 했다.
푸른 꿈을 껴안은 아름다운 여인들은 제각기 일태가 있었다.
유준의 딸이 사흘 신방을 모신 후에 정승 하윤은 일부러 문안을 드리러 갔다.
임금 방원 자신이 문안을 드리러 가고 싶은 생각이었으나, 다시 태상왕의 노여
움을 살까 하여 하윤을 대신 들여보내서 태상왕의 뜻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정승 하윤이 태상왕궁으로 들어갈 때, 임금 방원은 상왕의 전갈을 받아 태상왕
이 자기의 보낸 후궁을 처음엔 거부했다가 나중엔 상왕 내외분의 권고를 들어
못이기는 체 받아들인 일을 짐작한 때문이다.
합문 밖에서 정승은 녹사를 시켜서 내시에게 거래를 드렸다.
영의정 하윤이 문후를 아뢴다 하오.
늙은 내시는 곧 녹사의 전갈을 받아 어전에 아뢴다.
영의정 하윤이 문후를 드린다 하오. 어찌하오리까?
들라 해라.
영의정 하윤은 태종의 심복 부하다. 전 같으면 태상왕은 코대답을 하고 단통 마
나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이 약간 풀린 모양이다. 들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윤은 내시한테 들어와는 전갈을 받자,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마음 속으로 생각
했다. 영웅호결도 아름다운 미인 앞에서 별수가 없구나! 하고 탄식했다.
함흥차사를 보낼 때 공연히 박순 등 남자를 보냈다고 후회했다.
하윤은 전상에 올라 태상왕께 곡배를 드렸다.
신 영의정 하윤 문후드리오.
태상왕은 전에 없이 미소를 지어 영의정 하윤을 바라보았다.
방석이 죽은 후에 태상왕의 앞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던 하윤이었다.
태상왕의 용안에 미소가 흐르는 것을 본 하윤은 더한층 마음이 안도되었다.
환궁하신 이후 자주 문후를 드리지 못하와 황공무지하오이다..
태상왕은 하윤의 문후를 받자 화창한 낯빛으로 대답했다.
나라의 만 가지 일을 보살피는 영상이 무슨 틈이 있겠소. 오늘 나같은 물외한
인을 찾아주니 내 마음이 기쁘오.
태상왕은 은빛 수염을 쓰다듬으며 화기를 띠어 대답했다.
자주 문후 올리지 못한 일을 주저치 아니하시고 이같이 분부를 내리시니 너그
러운 성은에 감읍할 뿐이옵니다.
하윤은 능란한 말솜씨로 바둑을 놓기 시작했다.
시임대신이 상왕과 태상왕을 자주 찾는다면 쓸데없는 뒷공론이 떠도는 법이오.
시임대신은 정체에 상관이 없는 태상왕을 자주 찾을 필요가 없소.
태상왕 이성계는 다소 미소를 지어 하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의 본능
태상왕의 부드럽게 내리는 말을 듣자, 하윤은 더한층 마음이 놓였다.
속으로 태상왕의 금도가 넓다고 생각했다.
하윤은 태상왕께 공손히 고했다. 또 한 번 태조의 뜻을 떠보려는 것이다.
상왕께서는 참으로 효자십니다. 항상 아버님 되시는 태상왕 전하의 강녕하시기
를 축수 발원하십니다. 그러한 중에 또한 우애도 대단하십니다. 아우님 되시는
상감을 극진히 사랑합십니다.
하윤은 바둑 한 점을 다시 두어서 태상왕의 의향을 더듬었다.
태상왕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하윤의 두는 바둑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태상왕궁의 두 분 후궁을 바친 일도 형제분께서 아버님 전하의 고적하
신 것을 염려하시와, 형제분이 의논하시고 들여보내신 것이올시다. 참말 전하께
서는 훌륭하신 효자들을 두셨습니다.
임금 방원만을 효자라고 했다면 태상왕은 단통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윤은
상왕인 정종을 메고 나와서 태종과 의논하고 후궁을 들여보낸 것이라 했다.
태상왕은 마음이 역하지 아니했다. 마음속으로 상왕 내외가 까닭이 있어서 내
가 싫다고 한 후궁을 자꾸 받아들이라고 한 것이구나! 하고 생각케 되었다.
태상왕은 형제들이 의논하고 후궁을 바쳤다는 하윤의 말을 듣자 체면에 잘했다
고 대답하기 난처했다. 다만 미소를 지어 침묵할 뿐이었다.
하윤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삼가 전하께 아뢰옵니다. 이번에 들이신 후궁은 모두다 반가의 귀여운 규수들
이올시다. 국법에 의하여 비빈의 칭호를 내리시고, 그들의 아버지에게도 영화로
운 벼슬을 주시는 일이 옳은가 합니다. 굽어 통촉이 계시기 바라옵니다.
하윤은 세 번째 바둑을 두었다.
칠팔 년 동안이나 늙은 홀아비 생활을 하다가 아름다운 두 여인을 만나 마음이
풀리기 시작한 태상왕에게 한 번 더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낚시를 던져
본 것이다.
태상왕은 하윤의 말을 듣자 입이 저절로 벙긋하고 벌어졌다.
과인은 뒷방차지가 된 사람이 아닌가. 왕도 아닌 과인이 비록 오래간만에 후궁
을 두었다 한들 어찌 귀인의 칭호를 봉할 수 있는가.
태상왕의 겸손해하는 말씀이 떨어지자, 하윤은 더한층 몸을 굽혀 어깨를 쭈그리
고 고한다.
황공하옵신 분부십니다. 임금 위에 상왕이 계시고, 상왕 위에 태상왕께서 계십
니다. 가장 높고 높으신 태상왕 전하의 비번에 대하여 어찌 궁호를 아니 봉할 수
있습니까. 중국 역대 제왕의 전례를 보더라도 상왕이나, 태상왕이 후궁을 두는
경우에는 반드시 칭호를 내리시는 것이 법전으로 되어 있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하윤의 말을 내심으로는 무한히 만족하게 생각했다.
어떤 칭호를 내리면 좋겠소?
전하께서는 이제 정궁이 아니 계십니다. 그러하오니, 두 분중에 한 분은 정궁
으로 모시어 비를 봉하시고 한 분은 후궁으로 삼으시어 궁주의 칭호를 내리시는
것이 예법에 합당한 줄로 아뢰오.
꼭 비와 빈에 봉해야 하는가?
꼭 봉하셔야 합니다. 어찌 평민도 아니신 일국의 태상왕 전하께서 속현을 아니
하실 수 있습니까. 만약 아니 봉하신다면 크게 체모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올시
다. 뿐만 아니라 상왕전하와 금상전하의 간곡하신 효심을 무시하시는 일이 됩니
다.
경들의 의향이 정 그러하다면 원상의 딸로 정궁을 삼아 성비의 칭호를 내리고,
유준의 딸로 후궁을 삼아, 정경궁주의 칭호를 내리라.
태상왕의 허락을 받은 하윤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가득했다.
정원에 기별하여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리하옵고 친정 부모들에게 내리
실 작품도 하교를 내려주시옵소서.
원상에게는 공조참의를 제수하고 유준에게는 내수사별좌를 주게 하라.
하윤이 태상왕의 마음을 흥그럽게 하기 위하여 정치적으로 둔 바둑은 마침내
훌륭한 성과를 내었다.
재봉춘이란 말이 있다. 두 번째 다시 봄을 만난다는 뜻이다. 늙고 우울하고 절
망적이던 태상왕 이성계는 젊은 여인 두 사람을 궁중에 들인 후에 마음이 봄날
같이 화창했다. 이런 중에 정승 하윤이 다시 비와 빈을 봉하자고 건의하니 마음
과 뜻은 활짝 부풀어올랐다.
공연히 좋고 즐거웠다. 칠십이 넘은 나이다. 강비도 죽고, 사랑하던 막내 방석도
죽었다.
권력도 자식에게 빼았겼다.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 생각했다.
슬픈 마음이 절벽 가에 서는 듯했는데 이제 다시 꽃 같은 젊은 원상의 딸과 유
준의 딸을 비빈으로 삼고 보니 비록 머리에는 백설이 가득 내린 듯했으나 마음
속에는 봄바람이 훈훈하게 일어났다.
그럼 소신은 빈청으로 물러가 모든 일을 지휘하겠습니다.
하윤이 배를 드리고 물러나니 태상왕은 또 하교를 내렸다.
영상의 건의에 따라 과인은 사궁 속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홀아비를 면하게
되었소.
황공무지하옵고 다시 감축하옵니다.
하윤은 한 마디를 더하고 어전에 물러나, 왕전하 방원의 본궁으로 들어갔다.
태종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영상 하윤을 인견했다.
하윤은 상감한테 문후를 드린 후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어 아뢰었다.
지금 태상왕 전하께 문후를 드리고 나오는 길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미소를 지어 묻는다.
그래 역정이 좀 풀리셨던가?
태상왕 전하께서는 마음이 매우 풀리셨습니다. 전하와 상왕전하께옵서, 태상왕
전하의 마음이 고적하실 것을 염려하시어 원상의 딸과 유준의 딸을 들여보내셨
으니, 세상 천하에 그러한 효자분이 또다시 어디 계시겠느냐고 아뢰었더니, 태상
왕 전하께서는 용안에 웃음을 가득히 띠시었씁니다. 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
입니다.
효자라고 해도 가만히 계시더란 말인가?
효자 소리에 태종의 입도 벙긋 벌어졌다.
가만히만 계신 것이 아니오라 용안에는 웃음빛이 가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
하옵고 더욱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두 분 비빈께 칭호를 봉
하시라 했더니 처음에는 사양을 하시다가 마침내 허락을 내리셨습니다. 원상의
딸로 성비를 봉하고, 유준의 딸로 정경궁주를 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원상
에게는 공조참의의 벼슬을 주고, 유준에게는 내수사별좌를 제수하라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태상왕 전하의 흥락해 하시는 이 틈을 타시어 더욱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효자의 도리올시다.
태종도 태상왕의 마음이 안개 걷힌 듯 개운하게 갰다는 말을 듣자 입가에 미소
가 떠돌았다.
영상이 많이 수고하였소.
영의정 하윤을 찬양한 후에, 승지를 불러 원상의 딸은 성비를 봉하고 유준의 딸
도 정경궁주의 첩지를 내리라 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칠십지년에 젊은 후비를 둘씩이나 맞이한 후에 아들과 함께
같은 궁중에 있기가 거북했다.
아직 정력은 강했다. 젊은 여인들을 둘씩이나 어거할 수 있는 몸으로 우두커니
대궐 뒷꼍에서 세월을 흘려 보내기는 싫었다.
나라 정사를 다스릴 정력도 넉넉했다.
그러나 이미 조사의의 죽음을 본 이후, 정치에 대한 일은 단념한지 오래다.
나라일은 그대로 태종한테 맡겨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무학의 말대로 집안도 태평하게 하고 나라도 평안케 하는 길이라 생각
했다.
태상왕은 늙은 내시에게 영을 내렸다.
송도에만 있기가 갑갑하다. 서울을 거쳐서 양주 근처의 수석을 찾아 놀겠다.
성비와 정경궁주를 데리고 갈 테니 간소한 차비를 차리게 하라.
태상왕부의 늙은 내시는 곧 상감께 태상왕의 뜻을 아뢰었다.
태상왕 마마께오서 성비와 정경궁주를 거느리시고 한양을 거쳐 양주로 가시어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시겠다 하십니다.
태종은 늙은 내시의 전갈을 받자 마음 소그로 요량해보았다.
전에 함흥올 갈 때는 연통도 없이 떠났다. 그러나 이제 비빈을 정한 후에는 방
향까지 정하여 알려주니 다행하다고 생각했다.
태종은 즉시 하윤을 청해 물었다.
태상왕께서 성비와 궁주 등 비빈과 함께 한양을 거쳐서 양주로 가시겠다 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윤이 조용히 대답한다.
가시겠다 하거든 만류하지 마시고 가시도록 하시옵소서. 태상왕 전하께서는 춘
추에 비하여 기력이 강건하십니다. 아무 하시는 일이 없이 송도에만 계시는 것이
무한 갑갑하실 것입니다. 간소하게 차비를 차려 드리시고 자유스럽게 가시도록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태종은 하윤의 말을 옳다고 생각했다.
곧 사복에 분부하여 태상왕의 거둥행차를 마련하라 했다.
며칠 후에 태상왕의 행차는 한양으로 향했다.
방석의 난이 일어난 후 태종이 정종의 뒤를 쫓아 송도로 가서 한양으로 돌아오
지 아니하니 한양은 아직도 한산했다.
한산한 한양성중에 태상왕의 행차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더구나 성비와 태
상왕의 연이 송기덕빛 군복을 입은 무예청들의 어깨에 매어 나오고 연옥색 저고
리에 남치마 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는 아름다운 궁녀들의 모습이 화려하니 쓸쓸
했던 한양성은 불시에 꽃밭을 이룬듯했다.
태상왕의 행차는 이번에도 먼저 강비의 능과 원찰이 있는 정동으로 향했다.
그는 사랑했던 옛날의 왕비의 무덤을 아니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불쌍하게 홀
과수가 된 경순공주를 아니 만날 수 없었다.
그는 한양성에 천만 년 동안 왕업을 누리기 위하여 정도전과 무학을 데리고 우
람하게 지은 경복궁에 들르기 전에 먼저 정동을 찾았다.
흥천사 뒤에 있는 자그마한 암자에서 태상왕 전하가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
일 먼저 반가워하는 것이 방석의 난에 비참하게 죽은 이제의 아내 경순공주였다.
아바마마가 함흥으로 가기 전 한양에 행차했을 때 만나뵈었으니, 벌써 삼 년 전
의 일이었다.
이 세상에 다만 한 사람 피가 섞여 있는 갸륵하고도 고마운 아버지다.
그뿐이랴. 이 아버지는 보통 아버지가 아니다. 천하의 패권을 주름잡던 아버지
였다. 고려천지를 엎어뜨리고 조선이란 새 나라를 창업해논 아버지다.
그러나 창업을 한 지 몇 해가 되지 못해서 다섯째 오라버니인 방원의 야수적인
욕심은 세자 방석을 죽이고 방석을 두둔했던 자기 남편까지 죽였다.
이리하여 아버지를 무궁무진한 회한 속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 중이 되려 하여 나오는 자기를 위로하면서 친히 가위를 들어 삼
단 같은 검은 머리를 잘라주었다.
흥천사로 나온 후에 아버지는 몸소 찾아와서 밤이 지새도록 자기와 함께 슬픈
운명을 울었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울면서 방석의 원수를 갚겠다 했다.
마음씨 고운 경순공주
아버지는 방간 오빠의 난 후에 방원을 처치하겠다는 생각은 더한층 굳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 해서 밤새도록 간했던 것이다.
그 뒤에 소문을 들으니 아버지는 함흥으로 간 후에 방원의 사신이 가기만 하면
목을 베어 죽였다 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돌아간 어머니 강비마마의 친척되는 조사의와 함께 혁명군을 일으켜서 안주 청
천강까지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방원은 아버지와 대결하기 위하여 호호탕탕 군사를 거느려 청천강상에
서 대결전을 해서 조사의의 혁명군을 대패시켰다는 것이다.
이 소식은 북쪽에서 난리 뒤에 내려온 승려들을 통해서 자세하게 들었다.
경순공주는 기가 찼다.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다.
그 후에 아버지는 송도로 돌아와서 성비한테 장가를 들어서 정궁을 삼고, 후궁
으로 또 한 명 정경궁주를 두었다는 송도 소식을 듣자, 공주는 노래의 아버지의
뒷배를 보아주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저으기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공주는 승려들한테 아버지가 흥천사로 오신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암자에서
큰재로 내려와 대기하고 있었다.
대취타 소리가 요란하게 동구를 흔들고, 태상왕의 연이 반공에 높이 떠서 재문
앞으로 들어섰을 때, 뒤에는 또 하나의 연과 옥교가 찬란한 구슬발을 늘이고 태
상왕의 연을 따랐다.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연과 옥교는 마치 어머니 강비가 살아 계실 때 아버지의
뒤를 따르던 그 모습과 방불했다.
공주의 눈이 환하도록 크게 떠졌다. 두 손을 모아 아버지와 후궁들의 옥교를 맞
이했다.
이때 태상왕 이성계도 불쌍하게 여승이 된 경순공주의 생각뿐이었다.
어느 곳에 경순공주가 있나 하고 눈을 들어 늘어서 있는 승려들을 살펴 보았다.
태상왕의 눈과 경순공주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오 공주!
승려들 틈에서 경순공주를 찾아낸 태상왕은 소리를 높여 공주를 불렀다.
시시 때때로 잊지 못하던 딸 공주였다.
함흥으로 떠난 이후 소식이 끊어졌고 여러 해 동안 대면해보지 못했던 공주다.
소리를 높여 반갑게 부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바마마!
공주도 연 위에서 자기를 부르는 아버지를 향하여 마주 불렀다.
늙은 태상왕과 젊은 승려인 공주는 마주 바라보면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태상왕은 연 위에서 무예청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자비를 멈추어라!
태상왕의 연이 주춤하고 멈췄다. 뒤에 따르던 후궁들의 연이 장기튀김으로 주춤
하고 멈췄다.
태상왕은 좌우에 말을 타고 온 궁녀들에게 분부했다.
빨리 내려서 공주를 부액해서 내 연에 오르게 하라. 대웅보전앞까지 함께 타고
들어가리라.
좌우에 모시었던 시녀들은 말에서 내려 머리 깎고 장삼 입은 공주의 앞으로 나
갔다.
공주마마, 위에서 연으로 모시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속히 연으로 오르시
옵소서.
무슨 소리냐. 내 어찌 감히 아바마마의 타신 연에 오를 수 있느냐. 나는 지난
날의 공주가 아니다. 이미 대궐을 하직하고 산문에 들어와 불제자가 된 지 오랜
몸이다. 한미한 승려의 몸으로 어찌 태상왕 전하의 연에 오를 수 있겠느냐. 못합
니다 고 이 뜻을 아뢰어라.
공주는 간곡한 말로 부액하려는 궁녀들을 물리쳤다.
연이 뜨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빨리 오리사이다.
아니된다. 나라에는 국법이 있다. 나는 이미 공주가 아니다. 이개 승려다. 비록
사시로 사친이라 하나, 아바마마는 지존이시다. 어찌 지존의 어연에 오를 수 있
느냐.
공주는 쌀쌀하게 물리쳤다.
새파랋게 깎은 머리에 검은 장삼을 입은 공주의 태깔은 처염하도록 예뼜다.
궁녀들은 하는 수 없었다. 무료하게 태상왕의 연 앞으로 나가 아뢰었다.
소인들이 아무리 어명을 전했사오나 공주마마께서는 이미 산문에 처해 있는
불제자라 하시며 아바마마와 연을 함께 타실 수 없다 하십니다.
태상왕은 결곡한 공주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는 수 없다. 뒤를 따르게 하라.
궁녀들은 다시 명을 받들어 공주 앞으로 나갔다.
정 그러하시다면 전하의 연 뒤를 따라서 걸어서 전각에 오르게 하십니다.
행차가 지나시면 천천히 따르리라.
공주는 고개를 끄덕여 조용하게 대답했다.
태상왕의 연은 다시 뜨기 시작했다. 성비와 궁주는 공주한테 미안했다. 옥교에
서 내려 공주와 함께 걸었다.
공주마마, 저는 성비올시다.
저는 전경궁주라 하옵니다.
그들은 공주와 함께 걸어가면서 자기 소개를 했다.
오오, 성비마마. 멀리서 말씀만 듣고 이제 뵈었습니다. 빈도가 만약 승이 되지
아니했더라면 어머니라고 불렀을 것을 이미 출가한 몸이오라, 대궐에서 떠난 까
닭에 이제야 존안을 우러러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경궁주도 이같이 늦게 뵈
니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공주의 말을 듣자, 성비와 궁주는 도리어 황송했다.
공주마마, 너무 겸손해하지 마시옵소서.
간단하게 인사를 보냈다.
성비와 정경궁주는 흑장삼 입은 공주를 양편에 부액하여 흥천사 일주문으로 올
랐다.
공주는 성비와 궁주에게 상냥스런 말소리로 아버지를 부탁했다.
이 몸은 전생에 죄가 많아 남편을 잃은 청상의 몸으로 궁중에 머물러 있기가
죄송하여 승려의 몸이 되어 어머니의 원찰인 이곳에서 한평생을 마치려고 결심
하였거니와 이제 두 분 마마는 후비 되신 지 일천하오나 노래하신 태상왕 전하
를 정성껏 모시어주기 바라오. 아바마마는 이제 칠십이 넘으셨습니다. 무엇보다
도 마음을 편안케 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두 분은 의좋게 사이좋게 지내면서 노
래하신 우리 아바마마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신다면 빈도는 그저 결초보은하오리
다.
황공하오이다. 공주마마께오서 부탁이 아니 계시더라도 저희들, 어찌 한만하게
방심하오리까. 깊이 가슴 속에 명심하여 새겨두겠나이다.
성비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첫째로 두 분이 한 남편을 모시는 일도 하늘이 정해주신 연분이요, 전세에 닦
아 놓은 덕으로 이리 된 것입니다. 다투지 말고 서로를 양보하고, 욕심을 눌러
화협하게 지낸다면 즐거운 일이 생기고 즐거운 일이 있는 곳에 태상왕 전하의
마음이 편하실 것입니다. 그저 부탁합니다. 사사로운 욕심과 질투를 버리고 한맘
한뜻이 되어 아바마마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리옵소서. 이 길이 두 분 마마의 큰
공덕이요, 우리 아버지를 오래 사시도록 해드리는 길이오이다.
공주는 또 한 번 당부했다.
부탁이 아니 계시니 저희 어찌 소홀하며 한만하오리까. 절대로 사사로운 욕심
과 투기를 부리지 않겠나이다.
공주는 성비와 궁주와 함께 태상왕의 연을 따라가면서 이같이 아바마마의 일을
부탁하고 전각으로 향하여 올랐다.
태상왕이 주지의 인도로 법당에 오르니, 공주는 성비와 궁주와 함께 태상왕의
뒤를 따라 법당에 올랐다.
좌우에 모신 시녀들은 태상왕을 대신하여 부처 앞에 향연을 사르고 늙은 주지
는 손수 북을 치면서 나무아미타볼 을 불렀다.
태상왕은 주지가 부르는 염불 소리에 맞춰 경건하겨 예불을 했다.
태상왕의 복장은 대례복으로 차렸다. 금구슬을 앞뒤로 늘인 면류관에 황금 용을
수놓은 곤룡포를 입었다.
부처에 대하여 가장 큰 경의를 표하는 예복이었다.
공주는 성비와 궁주를 인도하여 태상왕 뒷줄에서 예불을 하게 하고 스스로 목
탁을 잡아서 천상천하에 거늘고 있는 부처를 청했다.
모든 승려들은 범패를 높이 불러 부처를 예찬했다. 태상왕 전하가 친히 법당에
올라 예불을 하는 의식이었다. 목청을 높여서 신명이 나도록 가락을 넘겼다.
태상왕은 부처 앞에 네 번 절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부모은중경
주지는 금강경 을 읽어 인생과 부처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주지가 독경을 끝낸
후에 경순공주는 부모은중경 을 읽기 시작했다. 경순공주가 경쇠를 치면서 읽어
나가는 경은 알아듣기도 쉽거니와 글도 명문이었다. 구구절절 아들딸을 길러낸
어머니와 아버지의 은덕을 찬양하여 노래했다.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맑고 아름다운 음향으로 물 흐르듯 읽어내리는 공주의
목소리는 먼저 태상왕의 눈물을 자아내고 다음엔 성비와 궁주와 나인들을 울리
고야 만다.
어느 때 부처는 왕사성도위국 지수급고원에 대비구 삼만 팔천 사람과, 보살마
하살중을 데리고 계실 때 세존은 대중을 거느리고 남으로 가시다가 길가에 한
무더기 백골이 쌓여 있는 것을 보셨다. 이때 여래는 옥체를 땅에 던지시고 고골
을 향하여 예배를 하시었다. 아난과 대중들이 세존께 아뢰었다. 여래는 삼계의
크나큰 스승이시고 사생의 자부로서 중생의 존경을 받으시는 터이온데 어찌해서
말라빠진 백골에 절을 하십니까?
부처, 아난한테 말씀하신다. 네 바로 나의 으뜸 제자로서 출가한지 오래거늘
일을 넓게 알지 못하는구나. 저 한 무더기 백골은 전생에 나의 할아비의 것인지,
나의 할머니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하므로 나는 지금 예배를 할 것이다.
공주의 청아한 독경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굽이굽이 찔렀다.
부처는 다시 아난에 이르신다. 너는 이 백골더미를 둘로 나누라. 남자의 뼈는
희고 무겁고, 여자의 뼈는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이 묻는다. 남자는 이생에 있을
때 도포 입고 띠 띠고 모자 쓰고 신 신었어니, 곧 남자인 것을 알수 있고, 여자
는 분 바르고 연지 찍고 사향과 난초를 차서 교태를 나타내니 당장에 여자로 알
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백골이 된 후에 다 같은 뼈만 남았습니다. 어
떻게 남자의 뼈와 여자의 뼈를 구별할 수 있습니까? 아는 방법을 제자에게 가르
쳐주십시오.
태상왕은 공주의 경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더한층 움직였다. 귀를 기울여 경
건하게 듣고 있다.
부처, 아난에게 고한다. 남자는 살아 있을 때 절에 가서 경도 읽고, 부처께 절
하여 염불을 하니 뼈가 희고 무겁지만, 여자는 뜻이 방자하고 마음이 음탕한데다
가 자식을 낳으면 한 번 생산할 때 피를 서말 서 되를 흘려야 하고 아기에게 젖
을 먹이게 되면 여덟 섬 너 말이나 먹여야 하니 이 까닭에 뼈는 검고 가벼우니
라. 아난은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슬펐다. 오장이 쥐어짜지는 듯했다. 울면서
아뢴다. 어찌하면 어머니의 은덕을 갚사오리까?
공주는 경을 읽으며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태상왕의 눈에도 눈물이 이슬같이 맺혔다. 성비도 울고 모든 궁녀들도 눈물을
머금었다.
경순공주는 계속해서 은중경 을 읽는다.
부처, 아난에게 말씀하신다. 자세히 들으라.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어민, 열 달
동안 자식을 배고 있을 때 무한 신고를 하느니라.
독경 소리는 점점 더 가락을 맞추어 청아했다.
어미 자식을 배어 한 달이면 뱃속에 태덩이 가냘프고 약해서 마치 풀 끝에 이
슬 같아서 아침에 있다가 저물게 스러지기 쉽고 새벽에 있다가 낮에 스러지기
쉬우니라. 두 달이면 회태가 마치 차조기푸링 엉킨 것 같고, 석 달이 되면 흡사
히 피가 엉킨 것 같고, 넉 달이 되면 점점 사람의 모습을 지니게되고, 다섯달이
되면 어미 뱃속에 오포가 생기나니, 어떤 것이 오포냐 한다면 머리가 한 포가 ㅗ
디어 생기고, 두 팔이 합해서 두 포가 되고, 두 다리가 합해서 또 두 포가 되니
이리해서 다섯 포가 되느니라.
태상왕과 성비와 궁주를 위시하여 젊고 늙은 나인들은 신기한 얼굴빛을 지어
공주의 은중경 읽는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여섯 달이 되면, 아기 눈과 코와 입과 귀, 혀와 뜻의 여섯, 정기가 열리나니, 무
엇이 여섯 정기인가. 눈이 한 가지 정기요, 코가 두 가지 정기요, 입이 셋째 정기
요, 귀가 넷째 정기요, 혀가 말을 하는 다섯째 정기요, 뜻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창이 여섯째 정기니라.
공주는 계속해서 읽는다.
어미 뱃속에 일곱 달이 되면, 아기는 삼백육십 뼈마디가 생기고, 팔만 사천 털
구멍이 열리느니라. 여덟 달이 되면, 아기의 뜻과 지혜가 생겨나고, 아홉 개 구멍
이 열리느니라. 아기 아홉 달이 되면, 배 안에서 음식을 먹기 시작하나니, 복숭아
와 배, 마늘도 먹지 말고, 오곡만 먹으라. 어미 뱃속에 생것은 아래로 향하고, 익
은 것은 위로 향하여 뫼를 이룩하니, 이 산 이름이 셋이 있다. 수미산이라고도
부르고 업산이라고도 하고, 혈산이라고도 부른다. 이 산이 뭉그러져 한 줄기 피
가 되어 아기의 입으로 흘러드나니라. 열 달이 되면 아기 나오나니, 효자 아들은
두 손을 모아 어미를 해치지 아니하며 나오고, 오역의 자식들은 어미 배를 발로
걷어차고, 어미의 심간을 손으로 끌어잡고 어미의 환도뼈를 다리로 밟나니, 어미
는 마치 천개 칼로 뱃속을 에이는 듯, 이같은 아픔 속에서 이 몸을 낳았으니, 열
가지 은혜를 입었나니라.
모든 여인들은 감았던 눈이 개안이 되는 듯 황홀한 속에서 인생철학을 느꼈다.
어미 자식 낳는 날 오장육부가 다 쏟아지고 몸과 마음 기절이 될듯, 피흘러 양
과 소를 잡은 듯하다. 그러나 아기 울음소리 건실타 들으면 기쁜 마음 넘쳐서,
눈물이 나고 슬픈 마음 긴장에 사무치느니라.
태상왕을 위시하여 성비와 궁주와 모든 시녀들은 감동이 되지 아니 할 수 없었
다. 모두 다 눈물을 방울방울 흘렸다.
공주는 낭랑히 경을 읽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목탁을 치며 경을 읽고
경을 읽으며 목탁을 쳤다. 어머니 강비의 생각이 간절하게 난 모양이다.
태상왕 이성계도 옛날 옛적에 어머니가 자기를 낳고 기르던 생각을 했다. 뿐만
아니었다. 공주의 머리 깎고 낭랑하게 경 읽는 가련한 모습을 바라보자, 죽은 강
비의 생각도 간절했다.
성비와 궁주며, 모든 궁녀들도 제각기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했
다.
공주는 계속해서 은중경 을 읽는다.
부모의 은덕은 깊고도 중하다. 사랑이 그지없구나. 단 것은 먹이고 쓴것은 자
기가 자시면서 눈섭 한 번 찡그리지 아니하시네. 사랑이 지중하니 정을 참지 못
하고, 은혜 깊으니 도리어 슬프다. 다만, 아기를 배부르게 하고 자기는 주려도 말
을 듣지 아니하네.
공주의 경문 읽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아무리 악한 자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할수 없었다.
어미는 진 자리에 눕고 아기는 마른 자리에 뉘네. 두 젖으로 목마르고 주린 것
을 채워주고 깁소매로 바람과 추워를 가려주네. 귀여워 돌보며 잠 못이루고, 예
브고 아름다워 즐거움 그지없다. 다만 아기만이 평온하기 바라며 자기 자신의 편
안함을 구하지 아니한다.
듣는 사라들은 모두 다 착하고 어린 마음이 되어 솟아나는 눈물을 금할 길 없
었다.
공주는 경문을 계속해서 읽었다.
부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부모의 은덕을 갚고자 하거든, 부모 위하여 이
경을 써서 읽으며, 저지른 죄를 뉘우치라. 그리고 부모를 위하여 삼보를 공양하
며, 부모를 위하여 재계를 받으며, 부모를 위하여 시주하고 복을 닦으라. 이리하
면, 효자가 될 것이요, 그렇지 안니하면 지옥으로 가리라.
공주는 여기까지 읽고 경문을 덮었다. 조용히 부처 앞에 나가, 향을 사르고 절
한 후에 태상왕 전하 앞에 절을 올려 합장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먹장삼 입은 공주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네, 이 경문을 읽고 나를 위하여 뉘우쳐 마지아니하니, 나와 네어미는 너로 인
하여 지옥을 면하겠구나!
슬픈 얼굴빛을 지어 말했다.
경순공주는 눈을 거슴츠레 뜨고 아버지의 애무를 받으며 경쾌하게 대답했다.
아바마마, 이제 예불은 끝났습니다. 어마마마의 능침으로 오르사이다.
절차가 끝났느냐?
태상왕은 공주의 말을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늙은 주지가 앞에서 태상왕을 인도하고, 공주가 뒤를 따랐다.
성비와 궁주와 모든 궁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법당 아래는 아까 모시었던 연과 옥교가 대령되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능에 오르기 위하여 연에 올랐다.
선의 철학
태상왕은 연 위에서 경순공주를 굽어보며 묻는다.
"너는 타지 아니하려느냐?"
"아까도 아뢰었습니다마는, 소녀는 이제 공주가 아니올시다. 수도하는 일개 비
구니올시다. 어찌 감히 연에 오르오리까."
공주는 어진 눈매에 웃는 표정과 엄숙한 기상이 반반씩 어린 모습을 지어 조
용히 대답했다.
"네 고집도 대단하구나. 내가 고집이 세고, 콧대가 세니, 너도 고집이 대단하구
나. 나이 찬 자식의 고집을 어찌할 수 없구나! 하, 하, 하."
태상왕은 소리를 내어 드높게 웃었다. 뒤에 따르는 성비와 궁주며 모든 궁녀
들도 소리를 죽여 입을 가리고 웃었다.
태상왕의 연은 먼저 정릉으로 향하고 올랐다.
성비와 궁주는 자기들이 타고 온 가마에 공주를 오르라고 했다.
"공주마마, 저희들이 타고 온 가마는 어물이 아니올시다. 함께 오르사이다."
공주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 사양했다.
"타려면 아까 탔지, 사양했으리까. 저는 다만 수도하는 불제자올시다.능상쯤 오
르는데 탈 까닭이 없습니다. 그저 내버려두옵소서."
공주는 가마 타는 것을 또다시 거절했다.
성비와 궁주는 더 어찌할 길 없었다. 아까 절로 향했을 때와 같이 걸어서 능
상으로 향했다.
공주는 불안했다. 앞에 가는 무예통장을 손짓해 불렀다.
"성비마마와 정경궁주를 빨리 자비에 올려 모시게 하라."
통장은 무예청들에게 전령을 내렸다.
성비와 궁주는 공주가 아니 타는데 자기들만이 탈 수가 없었다.
"아니옵니다. 공주마마께서 아니 타시니, 저희들이 탈 도리 없습니다.공주를 모
시고 걸어서
오르겠습니다."
"아니되십니다. 아까와 다릅니다. 태산같이 높은 구릉이올시다. 타시옵소서."
공주는 다시 타기를 권했으나, 성비와 궁주는 아니 타고 공주의 뒤를 따랐다.
공주는 완연히 불보살의 모습이었다. 검은 장삼에 석장을 짚고 청초하게 걸어
가는 모양은 마치 구름을 타고 연화일지를 손에 들고 가는 관음보살의 모습이었
다. 걸음도 빨랐다.
삽시간에 태상왕의 연 뒤를 따랐다. 궁녀와 내시들은 혀를 둘렀다.
홍살문이 뵈었다.
태산 같은 능침이 앞에 당도했다. 공주는 석장을 짚고 가볍게 올랐다.
그러나 성비와 궁주며 모든 궁녀들은 진땀을 빼고 숨이 터게 차서 겨우 능상
으로 올랐다. 공주는 날마다 어마마마의 능상에 오른 것이 일과였다.다리에 힘이
올랐다. 누구보다도 수월하게 올랐다.
태상왕은 강비의 푸른 능침을 바라보니 또다시 비창한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혼유석과 망주석이며,문무석과 십이간지의 석물들이 별여 있는 무덤 앞에 당
도하자 한숨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게 터져나왔다.
순간 태상왕의 눈앞에는 무덤이 뻐개지며 강비의 예쁜 얼굴이 나타났다. 방싯
웃음을 풍기며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아직도 백골이 아니었던가?"
태상왕 이성계는 혼자 웅얼거리며 이같이 환상 속에 잠겼다.
"안녕하셨습니까? 오래간만입니다"
강비가 살아 있을 때 그 차분하고 고운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그 동안 함흥에 계셨다죠? 아깝게 조사의는 성공을 못했답지요. 가엾게 죽었
습니다그려."
이렇게 묻는 소리도 들렸다.
무덤 속에서 나타난 강비의 아름다운 환상은 연옥색 자주 회장저고리에 남갑
사치마를 입었다.
자주 고름을 바람에 흩날리며 태상왕의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나오는 듯했다.
"당신의 조카 조사의의 말을 듣고 그대로 허락했다가 크나큰 무안을 당했소.
당신의 조카는 역적으로 몰려 죽었소!"
태상왕은 강비의 환상을 향하여 이같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목구명에서 말
이 나오지 아니했다.
"만사를 잊으십시오. 모두 다 허사올시다. 방석과 방번이 억울하게 죽은 일도
모두 다 잊으십시오. 하늘이 시키는 노릇입니다. 이제 저는 아이들과 함께 편안
히 극락에 있습니다. 항상 축원해주시고 재를 올려주셔서, 안혼정백이 되었습니
다. 신첩이 다 함께 데리고 있으니 이제는 만시름을 잊으십시오. 그리고 나라일
은 방원한테 그대로 맡기신 후에 산수간으로 두루 노시다가 만세 후에 다시 제
품안으로 돌아오십시오. 미소하여 기다리오리다."
태상왕에게 강비의 환영이 나직나직 아뢰는 고운 음성이 옥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 들려왔다.
태상왕은 능침 앞에 놓인 향합에서 향 한 줌을 집어 향로에 던졌다.
향연 한 줄기가 푸르게 고리를 그리며 허공으로 흩어진다.
스러지는 향연 사이로 강비의 아름다운 얼굴이 방긋 웃음을 풍겼다.
어질고 착한 누매가 향연 속에 또렷했다. 생시보다도 더한층 착하고 어질게
보였다.
극락세계 연화대에서 부처의 구제를 받고 있으니, 저렇듯 어질고 착하고 단정
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태상왕은 강비의 무덤 앞으로 걸어가서 버썩 그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울 느
꼈다.
"마사를 다 잊으리다. 도구나, 이제는 정치에는 손을 떼고, 한 사람의 야인이
되어 한평생을 마친 후에 마마를 따르오리다."
태상왕은 강비의 환상을 향하여 이같이 웅얼거렸다.
강비의 환상이 미소를 지어 태상왕 이성계의 밀어를 듣는 듯 했다.
태상왕의 귀에 또다시 강비의 옥음이 들리는 듯했다.
"끝으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배에 태워 물 속에 빠뜨려 죽게 한 수많은 수
중고혼 왕씨네들을 위하여 크게 수륙재를 열어, 원통한 귀신들을 천도하시고, 그
들의 혼령이 의지할 사당을 지어주십쇼. 그리고 포은 정몽주 선생도 사당을 지
어서 선비들로 제사를 지내게 하십쇼.
그는 왕씨의 충신이올시다. 그러나 앞으로 이 나라의 젊은 선비들이 그분의
충성을 본받아 나라의 일을 한다면 전하의 충신이 될 것입니다. 크게 표창하라
고 분부를 내리십시오.
그리고 두문동 칠십이인도 사당을 지어주시어 의지할 데 없는 무주고혼들을
위안시키고 그들의 장한 사적을 선비들이 본받게 하십쇼. 이리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은 크게 이씨왕조로 돌아올 뿐 아니라 이씨왕조를 위하여 살신성인 하는 충
신 열사가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부디부디 명심하여 처결하라고 조종에 이르시
옵소서."
강비의 환상은 향연속에서 이같이 계시를 주는 듯했다.
태상왕은 고개를 숙였다.
"내 비록 정치에 간여치 않기로 했으나 비의 말씀한 이 일은 주기 전에 꼭 시
행하오리다."
태상왕은 이같이 염하고 다시 능상을 바라본다.
향연이 스러지는 곳에 강비의 환상도 안개 슬 듯 스러져버리고 말았다.
태상왕 이성계는 너무나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넋을
잃고 우뚝섰다.
이때 공주가 먹장삼에 붉은 가사를 메고, 능상에 올라 능침을 향하여 네 번
큰절을 올리고 고요히 합장하여 묵념을 드린다.
태상왕의 눈에는 이제 강비의 환상도 보이지 아니했다.
다만, 옆에서 묵묵히 배례를 드리는 공주가 보일 뿐이다.
능침 아래는 성비와 궁주와 상궁과 나인이며, 많은 관원들이 나열해서 배를
드린다.
공주는 능 앞에 허배한 후에 아바마마가 우뚝 서 있는 앞으로 나갔다.
"아바마마, 앉으시옵소서. 재실에 앉으시는 것이 더 다정하실 것입니다."
"옳다. 좋은 소리다.네 말은 버릴 것이 없구나. 이제는 내가 임금이 아니다. 다
만 한 사람의 야인이다. 푸른 잔디밭에 앉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런 일이냐."
태상왕은 말을 마치자 털썩 잔디에 주저앉는다.
능침 제절 아래서 이 모양을 바라보는 늙은 상궁은 급히 무예통장에게 연통했
다.
"태상왕마마께서 잔디밭에 그대로 앉으셨소. 빨리 자리를 깔아드리시오."
상궁의 말을 듣는 무감은 급히 연 앞으로 나가서 화문석 자리를 걷어 능상으
로 올랐다.
무감이 화문석을 들고 태상왕께 고했다.
" 황공무지하오이다. 옥체에 습기가 범하옵니다. 자리에 앉으시옵소서."
태상왕은 손을 저어 대답한다.
"자리를 깔 필요가 없다. 푸른 잔디는 비단 자리보다 좋다. 염려말고 자리를
걷어 내려가거라."
무감은 더 권할 수 없었다. 자리를 걷어 물러났다.
"아바마마, 조용히 어마마마의 능침 앞에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오오, 무슨 말이 있느냐."
태상왕은 귀여운 딸의 얼굴을 미소를 지어 바라본다.
"재실에서 아뢰어야 온당할 것을 이목이 번다하여 이곳에서 아룁니다."
"어서 말을 해라."
"아바마마, 왜 소녀하고 지난해에 약속하신 일을 실행하지 아니하시고 딴일을
하셨습니까?"
공주의 음성은 더 한층 낮았다.
태상왕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무슨 약속을 어기었느냐? 그리고 또 내가 어떠한 딴일을 했더냐?"
태상왕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공주와 약속한 일이 생각나지 아니했다.
"아바마마, 왜 조사의가 반역하는 군사를 일으킬 때 어찌해서 승낙을 하셨습니
까? 다시 아뢰옵거니와 어마마마 능침 앞에서 말씀드립니다.조사의의 일을 승낙
하신 일은 어마마마께서 생존 하셨다 해도 반대하셨을 것입니다.."
태상왕은 깜짝 놀란다. 뜻밖이었다. 경순공주가 몇천 리 밖에서 이 일을 어찌
알았을까 하고 눈이 둥그렇게 크게 떠졌다.
"네 어찌 그 일을 아느냐?"
"온 나라가 소용돌이쳐 지냈는데 어찌 소녀가 그 일을 모르겠습니까. 그리하옵
고 오라버니께서 친정군을 거느리시고, 안주 청천강까지 가셨는데 어찌 그 일을
모르겠습니까."
태상왕은 묵묵히 대답이 없다.
"소녀는 부끄러워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무엇이 부끄러울 것이 있느냐?"
"어마마마와 작은 동생 방석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아바마마께서는 조사의를
대장으로 삼아서 동북면과 서북면으로 여진군들을 거느리고 송도로 쳐들어와서
방원 오라버니를 토벌한다 하고, 오라버니는 아버지를 쳐 무찌르기위하여
함흥으로 쳐들어간다고 소설이 대단했습니다. 정권다툼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칼
을 빼들고 서로 다툰다는 이 소식을 듣고 아바마마의 혈육을 받은 소녀로서, 비
록 배는 다르다 하나 방원 오라버니와 뼈를 같이 한 소녀로서 어찌 마음이 편할
리가 있습니까. 아바마마, 생각해 보옵소서."
공주의 목소리는 떨리는 듯했다. 공주는 말을 다시 계속했다.
" 형과 아우가 정권 다툼으로 서로 싸우고 서로 죽이던 그 일을 생각해 보아
도 몸에 소름이 쪽쪽 끼치고 얼굴이 달아서 남을 대해 볼 수 없었사온데, 이제
는 또다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칼을 빼어들고 서로를 역적 이라고 해놓았으니
부끄러움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태상왕은 잠자코 말이 없다. 조용히 눈을 감아 딸의 말을 귀기울여 들었다. 가
슴 한복판을 부드러운 솜방망이로 찌르는 듯했다. 인간다운 양심이 물결쳐 일어
났다.
공주는 다시 음성을 낮추어 태상왕께 고한다.
"백성들은 모두 다 이씨왕실을 손가락질했습니다. 삼강오륜이 끊어진 집안이
요, 도의와 도덕이 땅에 떨어진 이씨네라 했습니다. 등에 땀이 나지 아니하고 배
겨나겠습니까. 소녀는 몇 번이나 목숨을 끊어 죽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께서
소녀에게 죽어서는 아니된다고 계시를 내리셨습니다. 살아서 악을 소멸시키고,선
을 도와주는 것이 크나큰 불제자의 임무라 하셨습니다.
소녀는 부처의 계시를 받고 비로소 약간의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이리하와
다시 살아서 아바마마의 생각하시는 것을 바로잡을 결심을 했습니다."
공주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약간 흥분된 얼굴이다. 아름다운 두볼이며,호수
같은 맑은 눈에 분홍빛 홍훈이 돌았다.
" 이번 환도하실 때도 아바마마께서는 잘못하셨습니다. 오라버니 방원이 마중
을 나왔을 때 아바마마께서는 활을 들어오라비를 쏘셨다 합니다.다행히 조종에
꾀 있는 재상이 있어서 맞이하는 문에 중간 기둥을 세워서, 오라비가 죽음을 면
했다 합니다. 만약, 아바마마의 활 잘 쏘시는 솜씨로 기둥이 없어서 방원 오라비
가 목숨을 잃었던들 이 일은 어찌 되고 말았겠습니까?"
태상왕은 몹시 무안한 모양이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백성들은 이 소문을 듣고 비웃었다 합니다."
공주는 또 한 번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 뿐 아니라, 소녀는 또 한 가지 일을 보고 가슴이 더 한 번 아팠습니다."
"또 무엇이란 말이냐?"
태상왕은 무아한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며 묻는다.
"아바마마께서는 활로 방원 오라비를 쏘아 실패하신 후에 만조백관을 거느리
고 연회를 받으시는 환영잔치에 방원 오빠가 술을 드리는데, 중간에 내관을 사
이에 두고 잔을 올렸다 합니다. 그때 아바마마께서는 잔을 받으신 후에 소매 속
에서 철퇴를 꺼내서 앞에 내던지시면서 '하늘이 시키는 일이다, 어찌 할 수 없구
나.'하고 한탄 하셨다 합니다. 이 소리를 소문으로 듣고 제 마음이 어찌 아프지
아니했겠습니까. 오라버니편에서는 좋아서 일부러 이런 소문을 내느지 모르겠습
니다마는, 백성들이 바라볼 때 '아버지와 아들은 불상견의 원수로구나' 하고 고
개를 흔들어 아버지의 인격과 오라버니의 욕심많은 행동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형제의 윤리가 임금 자리 싸움으로 인하여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끊어졌고,
부자지간의 은정이 한두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끊어졌으니 소녀는 무슨 낯으로
사람을 대하오리까?"
경순공주의 눈에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눈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
다.
태상왕은 공주의 눈물을 보자 마음이 구슬펐다.
"네 말을 들으니, 나는 나이 칠십이 넘었건만 아직도 철이 안든 것 같구나."
태상왕은 추연히 한숨을 지었다.
공주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 머금은 눈으로 상긋 웃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아직도 선머슴마냥 젊으십니다.호호호."
"백발이 눈같이 희고 흰 수염이 한 자가 넘는데, 선머슴이라 하느냐,하하하"
"외양은 늙으셨으나, 마음은 젊으셨습니다. 그러하니, 조사의의 말씀도 들으시
고 활로 아들도 쏘시고 철퇴로 아들을 죽이려 하셨습니다. 아바마마는 생각과
마음이 하늘과 바다와 같이 넓고 넓으신 창업지주로 알았더니, 아직도 소년 장
군이신 그 모습이 남아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오이다. 남선북마로 왜적과 호병을 무찌르시던 아바마마가
아니시라, 이제는 임금 위에 상왕이 계시고, 상왕 위의 태상왕의 자리에 앉아 계
신 아바마마이십니다. 젊으셨을 때 그 마음을 잊으시고 모든 불평을 다 씻어버
리신 후에 이나라가 계계 승승 잘되기를 축원하시면서 한가히 해와 달을 보시며
만수무강하시기를 바라옵니다."
태상왕은 공주의 말을 듣자, 크나큰 회오와 인생에 대한 심욕이 너무나 지나
쳤던 것을 뉘우쳤다.
" 내, 너의 말을 깊이 폐부간에 새겨두리라. 너의 말과 태도는 과연 불제자의
큰 뜻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과연 불교의 힘은 크다 하겠다."
"아바마마, 소녀가 전에 간곡하게 부탁해 아뢴 일이 있었습니다.
일이 있는 것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아뢰었습니다. 인과응보를 쫓으시라
고 했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용의 모습이요, 범의 기상이라 했습니다.
구름은 용을 따라 일어나고 바람은 범이 움직이는 곳에 일어난다고 아뢰었습
니다.
아바마마께서 움직이시면 또 바람과 구름이 일어날 테니 모든 인과응보를 순
리로 받으시라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송도나 한양에 계시고 함흥에는 가시
지 말라고 아뢴 것이 아니오니까.
아바마마,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십시오. 함흥으로 가신 후에 반란이 일어났습
니다. 비가 왔습니다. 함흥차사라는 끔찍한 새로운 말이 생겨났고, 조사의의 난
리가 나서 부자가 서로 싸운다는 향기롭지 못한 말이 세상에 가득했고, 그로 인
하여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올시다.
그리하옵고 아바마마께서는 무면도강동격이 되셨습니다. 무슨 낯으로 오라비
를 대하셨습니까.
어떻게 만조백관들을 대하셨습니까. 그래도 아바마마께서는 활을 쏘아 아들을
죽이려 하셨고,
철퇴로 잔 드리는 아들을 범하려 하셨습니다. 기막힌 일이 아니옵니까. 모두 다
소녀의 동하시지
말라는 말씀을 아니 들으신 때문입니다."
경순공주의 얼굴엔 범치 못할 기상이 드러났다.
태상왕은 경순공주의 조리 있게 아뢰는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았다.
"너는 과연 나의 스승이다. 좋은 딸을 두어 내 마음이 흡족하다.
모두 다 네가 부처의 큰 감화를 받은 때문이다. 마음으로 위대한 불력에 감사
할 뿐이다."
태상왕은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진시으로 공주의 말과 태도가 이제는 훌륭한
철인의
경지에까지 나간 것을 감탄해 마지아니했다.
공주의 깎은 머리와 흑장삼은 그의 조촐한 얼굴과 함께 더욱 빛을 뿜는 듯했
다. 다시 붉은
입술을 열어 태상왕께 고한다.
"아바마마, 오라비 방원을 미워하는 품은 아바마마보다 소녀가 더 합니다. 열
곱절, 백 곱절
더합니다. 오라비는 소녀의 하늘같은 남편을 죽였습니다. 소녀와어미를 같이한
동복형제를
둘씩이나 죽였습니다. 아마 소녀까지도 죽여 없애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것
입니다. 이곳
어마마마의 능침을 아바마마께서 화려하게 꾸미시고 흥천사원찰을 웅장하게 지
으신 것도 모르면
모르되 방원 오라비는 무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소녀가
청상과부의 몸이
되어 머리 깎아 중이 되어 멀리 아바마마의 곁을 떨어져 있는 것도 방원 오라비
때문이올시다.
방원 오라비는 소녀를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생활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공의 세계
로
던져버렸습니다.
아니올시다. 공과 무가 아니라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져버리게 했습니다. 그
러하니 소녀는
방원 오라비와 함께 하늘을 같이하여 머리에 일 수 없고, 땅을 함께 해서 서 있
을 수 없는
존재올시다. 그러나 소녀는 불제자가 된후에 주름진 마음을 펴보려고 노력했습
니다. 원망절정에서
무한대의 푸른 하늘을 응시해보았습니다.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오라비를 용
서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오라비는 아바마마의 아드님이십니다.소녀
하고는 뼈를
같이했습니다. 어찌합니까. 끊을래야 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그
의 성격에 따라서
무한대한 욕심을 억제하는 사람이 있고 한없는 욕심을 그대로 발동시키지 않고
는 못배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방원 오라버니는 무한대한 욕심을 억제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아바마마, 이 점을 생각하시어 이제는 방원 오라비의 모든 잘못을
풀어주시고 다만
이 나라 이 강토에 사는 모든 백성들, 푸르고 창창한 백성들이 시들지 않고 잘
살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바마마, 이 나라는 아바마마나 방원 오라비의 독점물이 아니옵니다.
아바마마나 방원
오라비의 사사로운 재산이 아니옵니다. 모든 창생의 나라요, 만백성들의 것입니
다. 아바마마와
방원 오라비가 상극이 되어 다투시는 날 나라는 피폐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
고 맙니다. 깊이
통촉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순공주의 아뢰는 말은 곧 성자의 경지에 들어 있는 관음보살의 계시였다.
말소리마다 향기가 돌고 선의 진리가 은은히 여운을 풍겼다.
더구나 흑장삼에 백팔염주를 늘이고 도란도란 조용하게 아뢰는 그 태도는 인
간 이상의 신묘한
자세다.
태상왕 이성계는 마음 속으로 깊이 감탄했다.
"너의 말은 마치 남해관음보살으 갸륵한 말씀을 듣는 듯하고나. 마디마디 옳은
소리다. 나도
이제는 마음을 씻고, 지나간 모든 잘못을 뉘우친다. 앞으로 모든 일을 방원한테
맡기고, 한가로운
마음으로 산수간에 놀면서 하늘이 주시는 천수를 조용히 마치리라."
태상왕은 모든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앞으로 깨끗하고 청정한 마음을 가
져서 한가롭게
여생을 마치겠다고 따님 공조 앞에 술회했다.
경순공주는 태상왕께 다시 아뢴다.
" 아바마마, 다시는 조사의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아바마마의 마음을 흔들어놓
는다 할지라도
절대로 응하지 마시옵소서. 이런 일이 더 한층 아바마마의 판단하시는 머리를
어저럽게 하는
일이옵니다."
공주는 더 한 번 못을 박아서 고한다.
"염려하지 마라. 너의 말을 명심하리라."
아버지의 쾌한 승낙을 받은 공주의 볼에는 불그레 화기가 떠돌았다. 안심이
된다는 듯 고요히
미소를 던졌다.
"자아, 그만 재실로 내려가자."
태상왕은 아까 처음 능상으로 오를 때와는 훨씬 다른 가벼운 심경으로 재실을
향하고
내려갔다.
아까 무덤 앞에서 보이던 강비의 환상도 이제는 보이지 아니했다.
임금인 방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마음도 풀리기 시작했다.
태상왕이 연에 오르자, 경순공주는 어마마마 능침을 향하여 향을 살라 혼령을
위로한 후에 두
번 절하고 능상에서 물러나 아바마마의 뒤를 쫓았다.
성비와 궁주는 제절 아래서 모든 궁비들고 함께 능상을 향하여 예를 올린 후
에 태상왕과
공주의 뒤를 따랐다.
시종하는 관원들도 천천히 뒤를 따랐다.
이날 밤에 공주는 암자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재실에서 성비와 궁주와 함께 아
바마마를 모시고
지내기로 했다.
"하도 아바마마를 못모시었습니다. 오늘 하룻밤만 아바마마를 모시고 재실에서
드새겠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며칠이나 묵으시겠습니까?"
공주는 미소를 띠고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암자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나와 함께 지내려 하느냐. 내 마음이 든든하
고 푸짐하다. 네가
만약 계속해서 재실에 유한다면 나는 물외한인이다. 일이 없는 사람 아니냐. 네
가 묵을 때까지
있기로 하겠다."
아버지 태상왕은 새삼 다시 딸이 귀여웠다. 부드러운 말로 공주를 애무했다.
공주는 더한층 아버지의 부성애를 느꼈다. 미소를 지어 방긋 웃으며 대답한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꽃같이 활짝 핀 명랑한 웃음이었다.
"아바마마, 출가한 불제자의 몸으로 하루 동안인 단 하룻밤만 사친을 위하여
효성을
다하겠습니다. 단 하루 올시다. 더 이상은 모실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나와 함께 있으면 부처님께서 벌을 주시느냐? 허,허,허."
태상왕은 허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공주는 웃음을 스러뜨리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다시 태상왕께 고한다.
"벌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의 굳센 의지를 굽히지 아니하려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정한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사람의 지조가 아니올시다. 소녀는 한평생 어마마마와 남편의 명
복을 빌다가
그들의 곁으로 돌아가 편아히 잠들려 합니다. 이것이 한평생의 대원이올시다."
태상왕은 딸에게 대한 연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다시 궁으로 돌아가기로 하자꾸나. 이제는 세월이 흘렀다. 시름과 번뇌도 엷
어지고......."
태상왕은 한숨을 지으며 공주에게 권했다.
공주는 고개를 살몃 가로 흔들었다.
재실에 켜놓은 옥등잔 불빛이 새파랗게 깎은 공주의 머리 위로 비쳤다.
먹장삼 어깨에 걸쳐 있는 자줏빛 가사가 불빛에 비쳐서 더한층 광을 뿜었다.
"아바마마, 다시는 그런 분부를 내리지 마시옵소서. 이 몸으 머리는 애당초 부
처님이나,
보살님이 깎아주신 머리가 아니올시다. 아바마마의 어수로 깎아주신 머리올시다.
소녀의 앞길을
가엾고 불쌍하게 생각하시어, 삼단 같은 머리를 아바마마께서 잘라주신 머리올
시다.
만약 그때 아바마마께서 저로 하여금 불제자가 되게 아니하셨던들 소녀는 벌
써 사람의 구실을
못하고 실성한 여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결을 해서 죽었을
것입니다."
공주는 말을 계속한다.
"오늘날 소녀의 정신과 육체를 유지하여 살아온 힘은 다만 승려가 되어 부처
께 의지한
덕입니다 이제 소녀는 부처를 배반하고 궁으로 돌아가 아바마마를 모시고 부귀
영화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저 불효막심한 자식이올시다마는 그대로 한평생을 불제자로 마치게
해주십시오."
공주는 말을 마치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불빛에 반사되는 이슬방울 같은 눈물은 새파랗게 깎은 머리와 먹장삼으로 해
서 더한층
애련했다.
태상왕은 마치 선보살이 눈물을 머금어, 애처롭게 하소연하는 듯한 감각을 느
꼈다.
딸이 아니라, 곧 남해관음보살이 자기 앞에 나타나서 인생으 무상과 불력의
큰 힘을 호소하는
듯 생각되었다.
태상왕의 마음은 경건한 불제자의 경지로 돌어갔다.
"좋다. 너의 굳은 결심을 억지로 꺾지 아니하련다. 다시 대궐로 돌아오지 말고
부처의 제자가
되어 창생을 널리 구제하면서, 너의 마음과 몸을 더한층 조촐케 하라. 이것이 곧
너의 어마마마의
영을 위로 하는 길이요, 너의 남편이 억울하게 마친 세상을 네가 대신 빛나게
하는 길이다. 공주,
너는 하룻밤만 네 말대로 나와 함께 지내고 내일은 도로 암자로 돌아가거라."
"아바마마께서는 어마마마의 능침에 며칠이나 더 유하시렵니까?"
"너의 불법을 더 방해하지 아니하련다. 너와 함께 이 밤을 너으 엄마를 위하여
지킨 후에
내일은 양주로 떠나려 한다. 회암사에 들러서 재를 올리고, 대자연의 경치가 좋
은 송산과
풍양이며 연천 소요산으로 왕래하면서 여생을 보내기로 하겠다."
"상감께서 다시 한양으로 오신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같이 된다면 아바마
마께옵서 양주나
연천으로 왕래하시기가 더욱 편하실 것 입니다. 더구나 한양은 소녀가 있는 곳
이오니, 아바마마를
가끔 만나뵙게 될 것입니다. 대궐로 들어가시지 아니하와도 마음에 든든하겠습
니다."
경순공주는 눈물을 거두고 명랑한 웃음을 보였다.
절에서는 태상왕 전하를 위하여 깨끗한 소찬이 나왔다.
더구나 이번 행차에는 새로 태상왕의 배필이 된 성비와 정경궁주가 배행을 온
까닭에 새로운
시주가 많았다.
흥천사 주지는 처음은 성비와 궁주의 수명자수를 비는 재를 올려서 그들의 시
주한 공을
갚았다.
태상왕 전하께 바친 밤참 수라가 물려진 후에 재실 협방에는 공주와 성비와
정경궁주를
대접하는 담담하고 향기 높은 소밤참이 나왔다.
소전골에 소만두, 표고탕에 더덕구이, 도라지 생채에 튀각과 다시마탕, 녹두채
에 자옥채,
고비나물, 취나물에 송이구이, 숙수버섯에 꾀꼬리버섯, 갖은 정성을 들여서 맛있
게 차린
소음식상이 궁중음식과 다른 순수한 소찬으로만 나와서 두 궁인의 미각을 놀래
주었다.
성비는 소찬 음식을 맛있게 자시면서, 공주를 향하여 치사하는 말을 보낸다.
"난생 처음으로 이같은 소찬을 대합니다. 향기가 높고 담백해서 오히려 기름진
음식보다
낫습니다. 느끼하지 아니하고 담박해서 좋습니다."
"음식은 담박해야만 많이 먹습니다. 용미봉탕이 좋다 하나 한두 끼 먹으면 싫
증이 나는
법입니다."
공주가 미소를 지어 조용히 대답한다.
"고기 먹는 사람보다, 소찬을 먹는 사람이 도리어 장수한다 합니다. 그러기에
절간에 도를 닦고
계신 고승 대덕들이 모두 다 장수를 하지 아니합니까. 그것은 음식이 담박해서
기름이지지 않는
까닭이올시다."
"사람이 오래 살려면 옥심을 누르면 수를 한다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욕심
으로 시작해서
옥심으로 끝을 맺어서 결국은 망해버리고 맙니다. 욕심을 피지 않는 사람은 담
담한 음식을
즐기고, 욕심이 강한 사람은 기름기 많은 고기를 즐깁니다. 채소를 즐기는 사람
은 욕심을 부리지
아니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하니 정신이 쇄락해서, 저절로 장수하게
된다 합니다.
산중에 도를 닦고 있는 대덕 고승들이 항용 구십 세 이상씩 장수하는 것은 이러
한 까닭이라
합니다."
공주의 말을 듣는 모든 여인들은 모두 다 새로운 계시를 받는 듯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모두 다 헛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공주는 성비와 궁주를 바라보며 인생의 진리를 말했다.
공주는 소전골 국물을 술질해 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성비와 궁주께 청할 말씀이 있습니다."
성비와 궁주는 공주가 청할 말이 있다 하자, 너무나 감격했다. 두 여인은 치마
를 쓸고
대답했다.
"황공하신 분부올시다. 공주마마께서 저희들한테 청할 말씀이 계시다니 말이
됩니까? 모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전들 어찌 두 분께 청할 일 없으리까. 들어주시기 바랍
니다. "
공주는 다시 얼굴빛을 화하게 하며 대답했다.
"말씀해보십쇼. 무슨 일이오니까?"
성비가 물었다.
"이제 빈도는 공주가 아니라 절간에 있는 불제자올시다. 그러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아바마마를 잊을 수 없습니다."
공주의 목소리는 새삼 구슬펐다. 성비와 궁주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듣고 있
다.
"아바마마께서 참말이지 만년에 가엾도록 쓸쓸하고 호젓하게 지내셨습니다. 우
리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진심으로 아바마마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물론 궁중엔 시녀들이 있어서 그 어른을 받들어 모시었습니다마는
아바마마마의
마음이 편아하시도록, 가려운 곳을 긁어드리도록 받들어 모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제
두 분께서 우리 아버지를 받들어 드리게 되었으니 이런 기쁜 일이 또다시 있을
수 없습니다."
공주의 말을 듣자 궁주가 몸을 피하며 대답한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성비마마나 소인이 어찌 태상왕 전하의 뒷 배를 유감이
없도록
보아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지극한 정성을 다하려 합니다.
용렬하와
진선진미치 못할까 하와 두렵습니다."
"두 분께서는 나의 서모이십니다. 어머니가 돌아가 아니 계신 빈소는 어머니께
청을 하듯 두
분께 청을 합니다. 두 분께서는 한 몸 한 뜻이 돼서 우리 불쌍한 아버지를 오래
오래 사시도록
모시어주기 바랍니다."
공주의 부탁이 하도 정중하니 두 여인은 얼른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성비와 정경공주는 눔을 내리 깔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한 동안 후에 성비는 눈을 들어 공주를 바라보고 고한다.
"공주마마의 뜻깊은 말씀을 저히들은 얼른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태상왕 전
하의 만세 향수는
공주마마나 저희들이 다 함께 소원하는 바올시다. 무슨 분부인지 깨닫지 못하겠
나이다. "
"성비 말씀은 잘 알아듣겠습니다. 너무나 돌연한 말씀을 꺼내서 얼른 못알아들
으셨나 봅니다.
아까 소찬을 먹으면서 욕심을 없애면 오래 장수한다는 이야기가 나서 아바마마
를 위한 마음에서
돌연 이같은 생각이 났습니다. 두 분께서는 비록 두 몸이시나 한 몸이 되시어
서로 시새고
질투하지 마시고 아바마마를 받드시어 그 분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십시오. 이같
이 하신다면
아바마마께서는 착하신 두 분의 힘을 받아서 백세향수를 하실 것입니다. 그저,
자리 쌈을 해서
다투지 말고 화하게 지내달라는 부탁이올시다. "
성비와 정경공주는 비로소 공주의 뜻을 알았다.
정경공주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야 공주마마의 청하신다는 참뜻을 알았습니다. 욕심을 부려서 질투하고
시샘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그려. 호, 호, 호, 저희들은 비록 젊은 나이올시다마는 투가하고 시샘
하는 일은 이미
단념했습니다. 태상왕 전하의 춘추는 이미 칠순이 넘으셨고 저희들의 나이 겨우
이십밖에
아니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이미 희생이 된 것으로 각오하고 궁중에 들어왔습니
다. 칠십 넘은
노인한테 무슨 희망이 있다고 성비나, 소인이 샘을 내고 질투를 하겠습니까? 이
간질을 치고
베개송사를 하겠습니까? 저희들은 이미 대궐에 들어온 후에 서로를 의논했습니
다. 표고죽은
마시고 소전골을 먹듯 담담하게 욕심을 내지 않고 지내기로 했습니다. 생각해보
십시오. 저희들이
지금 태상왕 전하를 모시고 수태로 아들을 낳겠습니까, 딸을 낳겠습니까? 틀린
노릇입니다. 모든
욕심과 싸움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법인데 무엇 때문에 싸움을 하겠습니까? 공주
마마, 이 점만은
안심하십시오. 하하하."
정경공주의 말하는 소리를 듣자 성비도 목청을 높여서 깔깔 웃었다.
흑장삼에 붉은 가사를 멘 경순공주도 미소를 머금어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
다. 공주는 미소를
머금고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그런 심경이시라면 다시 더 말씀을 드릴 것이 없습니다. 다행이올
시다. 그렇다ㅕ
앞으로 아바마마의 마음을 더한층 편안케 해드리기 위하여 상감이 태상왕부로
또다시 후궁을
바친다 해도 두 분께서는 태연히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실 텝니까?"
공주는 상글거려 웃으며 성비와 궁주를 바라보았다.
정경공주는 거침없이 말한다.
"성비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마는 소인은 아무 자극도 받지 않을 것
입니다. 샘을
낸다는 일은 공주마마께서 아까 말씀하신 대로 욕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욕
심이 움직여질
대상이 없는데, 질투와 시샘이 일어날 까닭이 만무합니다. 아무리 소인보다 자태
가 더 고운
후궁이 또 들어온다 하더라도 소인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성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경궁주의 목소리는 걸걸하고 쾌활했다.
안존한 성비는 배시시 웃으며 궁주의 말에 대답한다.
"나 역시 궁주와 같은 생각을 가졌소. 태상왕 전하께서 젊으신 분이라면 혹시
질투를 할는지
모르겠소마는 이제 다 늙으신 분인데 후궁을 다시 삼천궁녀를 두신들 무슨 샘이
나겠소. 하하하."
"자아, 그렇다면 공주마마께서는 저희 두 사람한테 대해서는 턱 마음을 놓십
쇼."
"고맙소이다. 그저 아바마마께서 오래오래 사시도록 마음을 편안케 해주십시
오."
공주는 또 한 번 부탁했다.
그러나 성비와 정경궁주의 얼굴에는 한 줄기 쓸쓸하고 어둔 빛이 감돌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이튿날 태상왕 이성계는 능침에 다시 올라 창연히 강비 무덤을 둘러보아 작별
을 한 후에
성비와 정경궁주와 함께 예정한 대로 양주로 향했다.
경순공주는 흥천사 동구 밖까지 나와서 태상왕의 행차를 전송한다.
"아바마마, 안녕히!"
공주는 한 마디 하고 태상왕을 우러러 본다. 바람에 흩날리는 태상왕의 백수
가 그의 마음을
더한층 아프게 했다.
"공주야, 잘 있거라. 다녀서 오리다. 대궐에는 네가 아니 온다 하니, 내가 양주
에 있는 동안
회암사나 소요산으로 가끔가끔 놀러오너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소요산과 회안사는 예로부터 도승들의 도통하던 곳
이라 합니다.
틈을 타서 문안을 드리러 가겠습니다."
공주는 발길을 돌려 성비와 정경궁주의 앞으로 나갔다.
연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좀더 이야기하고 싶었소. 그러나 길이 총총하니 어찌할 수 없구려. 부디 내
말씀을 저버리지
마시오. 가엾은 우리 아버지의 노래도 부탁 합니다."
"염려 맙시다. 저희들은 담담여수하게 지내렵니다. 질투를 하지 않겠습니다. 마
음을 놓십시오. "
성비와 정경궁주는 공주의 손을 잡고 말했다.
성비와 정경궁주는 공주한테 고개숙여 다정하게 인사하고 태상왕의 뒤를 따랐
다.
궁녀와 백관들도 태상왕뒤를 따랐다.
태상왕 이성계는 경복궁은 바라보지도 아니했다. 정이 떨어진 때문이다. 그 지
긋지긋한, 세자
방석이 죽은 그 궁궐을 바라보기도 싫었다.
태상왕은 동소문턱에 당도하자 영을 내렸다.
"백관과 궁인들은 송도서부터 나를 배종하느라고 많이 고단하겠다. 이제부터는
한양 신도의
동소문 밖이다. 모든 공식절차를 폐지하는 것이 좋다. 의장대들은 흩어져 돌아가
게 하라.
태상왕이 이같이 분부했다고 상감한테 고하면 상감도 꾸지람을 아니하니라."
태상왕는 공식행렬을 풀었다. 백관과 궁인들은 태상왕의 분부에 따라 공식 행
차를 중지하고
태상왕의 만세를 불러 송도로 돌아간다.
태상왕은 성비와 궁주와 함께 양주 회암사로 향했다.
사흘 동안 묵은 후에 강비와 방석의 외로운 혼을 위하여 재를 올린 후에 주지
를 불렀다.
"이 근처에 산천이 수려하여 경치를 상줄 만한 곳이 있느나?"
"양주 땅에 경치 좋은 곳으로는 불암산, 수락산,도봉산이 다 경치 좋은 곳이올
시다마는 또다시
한 군데 소요산이 있습니다. 신라 때 원효대사가 이곳 굴속에서 득도했다는 곳
으로 폭포가
떨어져서 비류직하삼천척은 못되옵니다마는 눈을 뿜는 듯 여름 한철 더위를 잊
을 만하옵고,
기암절벽을 이룬 무수한 봉우리는 마치 그 형태가 금강산 한 귀퉁이를 떼다놓은
듯하와 세상에서
브르기를 소금강이라 하옵니다. 여기다가 또 세단풍이 타는 듯이 고와서 마치
설악산과 내금강의
만폭동 단풍을 연상케 하옵니다. 단풍의 고운품은 내금강을 제쳐놓고는 다시 그
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양주 땅에 그런 절경이 있더란 말이냐?"
금강산을 밟아보고 설악산과 오대산을 찾아본 태상왕은 천하절승 금강산과 오
대산의 모습이
눈에 아물거렸다.
나라의 정사를 내던진 후 세상만사에 뜻이 없는 태상왕은 정릉에서 공주의 말
을 들은 후에는
더한층 진세인간의 세상에서 초탈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이번에도 양주 회암사에서, 돌아간 강비와 방석들의 큰 재를 올려서 그들의
명복을 빈 후에
모든 속세를 작별하고 금강산이나 설악산, 오대산으로 들어가 산과 물을 벗삼아
호연한 기사을
기르면서 남은 세월을 마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공주가 간곡하게 부탁한 것과 같이 또다시 금강산이나 오대산으로 들
어간다면, 둘째,
셋째 조사의가 또 나오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록 둘째, 셋째 조사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임금 방원과 그들의 신
하들은 또다시
자기의 일거일동을 의심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공연히 또다시 그들 집권자의 의심을 살 까닭이 없다고 생각
했다.
태상왕은 금강산과 오대산에 갈 것을 단념하고 양주 근처의 아름다운 경치를
주지한테 물었던
것이다.
"소요산이 소금강의 명칭을 가졌더란 말이냐. 과연 등하불명이로구나. 내일 이
른 아침에
소요산으로 향할 테니 주지는 앞을 서서 인도하라."
"삼가 성지를 받들어 소요산으로 인도하오리다."
주지는 손을 모아 대답했다.
태상왕은 이튿날 주지를 앞세우고 성비와 정경궁주와 함께 소요산으로 향했
다.
태상왕이 소요산을 바라보니 과연 주지의 말대로 금강산 한 귀퉁이를 그대로
고스란히 옮겨논
기막힌 절경이었다. 봉우리마다 푸르다 못해 남빛으로 찬란한데 시시각각 햇빛
을 받아 산 얼굴이
아름답게 변해갔다.
폭포는 내리질리고 안개와 구름은 산골짜기에 일어나서 찬기운을 뿜었다.
한양의 삼각산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불암산이나 수락산 따위에 비 할 바가
아니다.
태상왕은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했다.
"한양 근교의 삼각산을 빼놓고 이같은 명산이 있는 것을 몰랐구나.
애를 써 금강산에 가지 않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산다운 산을 바라볼 수 있구
나."
태상왕은 말을 마치자 주지를 앞세우고 소요산 상봉으로 천천히 올랐다.
멀리 보개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구름밖에 솟아 있다.
태상왕은 손으로 보개산을 가리킨다.
"저 산이 보개산이 아니냐?"
"네,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소요산은 보개산맥이로구나. 보개산 산맥이 떨어져서 이리 구불 저
리 구불 창공을
헤쳐가며 굼실거려 내리다가 여기 우뚝 솟아서 소요산이 되었구나. 과연 명산의
정기를 받지
아니하고 이같은 금강산의 한 귀퉁이를 배판할 수 있느냐."
"예, 그러하오이다. 소요산은 보개산맥이옵고, 보개산은 한때 삼한 천지를 진동
하던 궁예장군이
말을 달려 천군만마를 호령하던 곳이옵니다."
"그렇지. 신라의 왕자로서 북원양길한테 투신했다가 마침내 큰 뜻을 품고 후고
구려를 일으켜서
왕건 태조가 고려를 건설할 때까지 큰소리로 삼국을 흔들어놓던 그 궁예로구나."
"예, 그러하옵니다. 궁예 역시 천하의 영웅이었습니다마는 덕을 닦지 못하고
마음이 너무나
조급해서 마침내 크나큰 대업이 왕건 태조한테로 돌아갔습니다.
왕씨네는 덕을 많이 끼친 임금들이올시다."
주지는 무심코 말을 해놓고 스스로 깜짝 놀란다.
'공연히 말을 함부로 했구나.'
얼는 혀끝을 깨물었다.
그러나 말은 벌써 입 밖으로 나갔다.
거두려야 거둘 수가 없었다. 슬며시 태상왕의 눈치를 살폈다.
왕건 태조가 건국한 고려를 엎어놓은 태상왕 앞에서 왕건 태조와 그 자손을
예찬했으니,
주지는 태상왕의 심경이 어찌 돌아갈지 마음이 불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상왕 이성계의 얼굴빛은 변하지 아니했다.
주지는 태상왕의 용안에 조금도 격한 빛이 없는 것을 보자 비로소 안심이 되
었다.
가만히 숨을 내쉰다. 겁에 질려서 막힌 숨이 한꺼번에 쏟어져 나왔다.
두군거리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태상왕은 태연히 대답한다.
"왕건 태조는 무한 너그러웠던 분이지. 마음은 하늘과 같이 넓고 덕을 많이 쌓
놓았던 분이거든.
그래서 통일삼한을 하는 데 신라 경순왕이 무혈양국을 하지 아니했던가. 그뿐인
가, 항복한
경순왕한테는 자기 딸 낙랑공주를 하가 시켜서 부마까지 삼았거든. 과연 왕건
태조는
관후장자지."
이번엔 태상왕이 말을 마치자, 가볍게 한숨을 쉰다.
용안에는 초연한 빛이 감돌았다.
왕건 태조의 너그럽고 후하고 착한 데 비하여, 자기는 너무나 잔인하고 악착
스럽고 사람을
의심했던 모든 일을 아프게 뉘우치는 일이 현연했다.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포은 선생을 철퇴로 때려 죽이고, 두문동 칠십이인의
집단지인 두문동에
불을 지르고, 왕씨란 왕씨는 모조리 배에 실어다가 바닷속에 수장 해버렸다.
대부분의 일은 아들 방원과 신하들이 한 짓이지만 그 책임은 전부 자기 자신
이 져야만 한다.
너무나 참혹한 짓이었다. 오늘날 이씨왕실에 골육상쟁이 되는 불쾌한 일들은
너무 지나치도록
왕씨를 박해한 그 보복이 자기 당대에 이같이 정신의 고통을 주는 것이라 생각
했다.
가벼운 한숨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름으로 화해 나온 것이다.
태상왕은 모든 죄악을 씻고 싶은 생각이 더한층 간절했다.
"이 좋은 명산이 좋은 절이 없으니 한스런 일이다."
태상왕 이성계는 수려한 봉우리와 높은 언덕을 바라보며 혼자말을 했다.
"절이야 있습지요. 아까도 말씀한 대로 원효대사가 도를 닦던 석굴도 있사옵
고, 저편 상상봉에
오르면 조그마한 암자도 있습니다."
"암자 하나를 가지고 많은 대중을 용납할 수 있느냐. 크나큰 도량을 한 채 지
을 만한 곳이다."
"절을 한 채 이룩하시는 일은 만대까지 빛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뜻이올
시다."
회암사 주지는 소요산에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역시 불제자였다.
태상왕이 소요산에 절을 한 채 짓느다 하는데, 손을 모아 찬성하는 뜻을 표했
다.
태상왕은 곧 늙은 내시에게 영을 내렸다.
"송도에 기별해서 빨리 대목과 석수와 미장이를 보내라 일러라. 이곳에 소요사
를 지으리라.
경개가 매우 좋다. 나는 이곳을 떠날 맘이 없다. 내가 거처할 처소도 한 채 마련
하라 일러라."
늙은 내시는 태상왕의 어명을 받들고 송도로 말을 달렸다.
송도에서 태종은 늙은 내시를 통하여 태상왕이 소요산에 절을 짓고 당신이 거
처할 별궁을
짓겠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정승 하윤을 불러 의논했다.
"태상왕께옵서 한양 정릉과 양주 회암사를 거쳐 지금 소요산에 유하시는 중에
내시를 보내시오
소요산에 절을 짓고 별궁을 마련하겠다고 목수와 미장이를 보내라 하시니 어찌
하면 좋겠소?"
하윤은 태종의 하문을 받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이제는 되었습니다. 빨리 나라 편수와 재목을 보내시어 절과 행궁을 이룩하도
록 하옵시오."
하윤이 아뢰는 말을 듣자 태종은 미소를 풍기며 묻는다.
"목수와 석수며 미장이는 태상왕 전하의 분부대로 곧 보내려니와 아까 경이
말하기를 이제는
되었다 하니 대체 무슨 뜻인지 자세히 말해주오. 무엇이 되었단 말이오?"
"국가의 경사올시다. 태상왕 전하의 마음이 이제는 가라앉으셨습니다. 마음이
적막하고
울적하시어 혹시 함흥이나 동북면으로 가시겠다하면 또 큰일이온데, 가까운 소
요산에서
거처하시겠다 하니 이만 다행한 일이 없습니다. 시각을 지체 하지 마시고 빨리
재목과 도편수를
소요산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경의 뜻은 내 뜻과 꼭 맞소. 이 어른께서 만약 또다시 함흥이나 동북면으로
가신다면, 둘째,
셋째 조사의가 나올 테니, 말은 아니했으나 마음 속으로는 무한 걱정되었는데,
이제 다행히
소요산에 계시겠다 하시니 천만다해이오."
태종은 마음이 흐뭇했다.
곧 승지를 불러 모든 일을 지휘하라 분부를 내린다.
"태상왕께서 소요산에 절을 건축하시고, 행궁을 세운다 하시니 빨리 선공감에
기별하여 도편수
이하 일등 목수들을 소요산으로 보내고 모든 재목과 물역을 수송시키라."
승지는 상감의 명을 받들어 선공감에 통지하고, 선공감에서는 일등가는 도편
수와 젊은
장인들을 데리고 소요산으로 향했다.
소요사오 행궁은 아드님이 되는 태종이 태상왕 전하인 아버지를 위하여 처음으
로 정성을 다하여
짓는 역사다.
목수와 석수와 기와장이는 모두 다 일등 가는 선수요, 나르는 목재와 석재는
재물과 힘을
아끼지 아니하고 일등품으로 실어 나르는 재료들이다.
소요사와 행궁 역사는 시작한 지 석달이 채 못되어 찬란한 단청이 구름밖에
아득히 솟은
전각을 이루었다.
부처는 공주를 생각해서 관음보살의 황금 소상을 모시었다.
태상왕은 소요사와 행궁이 완성된 후에 곧 늙은 내시를 한양 정릉 흥천사로
보내서 공주를
청했다.
태상왕 전하가 새로 소요산에 소요사를 이룩하고 절 아래는 또다시 당신이 거
처하실 행궁을
지었다는 소식을 들은 공주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바마마께서 소요사를 지으시고, 행궁까지 마련하셨더란 말이오? 기쁘기 한
량없소."
공주는 늙은 내시를 향하여 미소를 지어 물었다.
늙은 내시는 공손히 고한다.
"공주마마와 작별하시고 회암사를 거쳐 소요산으로 가신 후에 산천 경개를 둘
러보시고 곧 절과
행궁을 조성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두 군데 큰 역사가 이같이 빨리 된 것
은 모두 다
공주마마께옵서 부처의 힘을 움직이시어 이같이 속하게 조성된 것이라 생각합니
다.!"
늙은 내시의 말을 듣는 공주는 방긋이 미소를 풍겼다.
"가신 지 석 달이 채 못됐느데 어쩌면 역사가 그같이 완성되었더란 말이오. 과
연 고마운
일이로구려."
"모두 다 하늘이 돕고 부처께서 호응하시어, 그리 빨리 된 듯합니다.상감께서
도 태상왕
전하께서 소요산에 절을 조성 하시고 별궁을 건축하신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시
각을 지체치
아니하시고 대목과 석수며 미장이들, 일등 편수와 재목을 보내시어 이같이 불일
성지로
되었습니다. 이제는 부자분께서도 합심이 되시어 나라일이 잘 되려나봅니다."
"그렇지. 어서 두 분께서 합심이 되시고 화해가 되셔야지. 그래야만 집안일도
되고 나라일도
되지. 고맙고 갸륵한 일이오."
공주는 말을 마치자 눈을 감고 합장을 했다.
어질고 착한 관세음보살을 염하여 더욱더 갈등이 없기를 축원했다.
"태상왕마마께서 오늘 해 안으로 공주마마를 모시라는 분부십니다. 만약 늦게
모시면 소인이
벌을 당합니다. 속히 가사이다."
경순공주는 암자에서 새로 지은 장삼을 바꿔 입고 자줏빛 금란가사를 어깨에
걸친 후에 한 필
푸른 나귀를 타고 내시와 함께 소요산으로 향했다.
공주는 별란 이후에 처음 세상 구경을 했다.
대궐에서와 어머니의 원찰인 흥천사 이외에는 대해보지 못했던 광경이 번화하
게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공주는 깊은 불력을 얻었다. 조금도 속세에 나타나는 사물에 대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했다.
아리따운 묘령의 청상과부건만 마음은 흥천사 법당에 부처와 함께 있을때나
매일반이었다.
공주는 저녁 연기가 자진 안개 돌 듯 산허리에 감돌 때에서야 새로지은 소요
산 행궁에
당도했다.
경순공주의 행차가 행궁에 당도했다는 기별을 듣자 모든 시녀와 무수리들이며
내시들은 동구
밖까지 쫓아나왔다.
푸른 송림이 윤을 뿜어 솔향기가 그윽한 속에 일좌행궁이 학의 날개를 벌린
듯 반공에
솟았는데 단청을 칠하지 아니한 흰재목으로만 세워놓은 소박하고 깨끗한 건축은
더한층 아름답게
보였다.
"단청을 아니 칠했구려."
공주는 늙은 상궁을 향하여 말을 건넨다.
"상감께서는 대목 편수한테 화려하게 단청을 칠하라고 분부를 내리셨으나 태
상왕 전하께옵서
일부러 단청을 칠하지 말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단청은 관음보살을 모신 소
요사에만 칠하라
하셨습니다. "
경순공주는 아바마마의 깊은 뜻을 짐작해 알 수 있었다. 검소한 뜻을 아드님
되시는 상감한테
보이자는 마음이라 생각했다.
태상왕 전하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같이 소생된 것은 결국 아드님 되는
태종을 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풀린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이 가라앉게 되면 왕실이 태평하게 될 것이고, 왕실이
태평하면 나라는
부강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공주는 마음이 기뻤다.
"고마우신 일이오."
공주는 가볍게 한숨을 지으면서 상궁을 향하여 대답했다.
모든 업원과 원수를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뿐
이었다.
공주의 일행이 행궁문 앞에 당도했을 때 궁녀들의 연통을 받은 성비와 정경궁
주는 행문 밖까지
나가 공주를 맞이했다.
"공주마마!"
성비와 정경궁주는 팔을 좌우편에서 한 팔씩 붙들고 반갑게 인사를 올린다.
공주도 반가웠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두 후궁한테 치사를 보낸다.
"그래, 그 동안 아바마마를 모시느라고 얼마나들 수고를 많이 하셨소. 그리고
또 관음보살을
모시는 소요사를 짓고 아바마마께옵서 거처하실 행궁을 짓느라고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소."
공주는 한 손으로 성비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정경궁주의 손을 잡아 다정
하게 묻는다.
"저희들이야 아무 힘쓴 일이 없사옵니다. 이번에는 송도에서 상감께옵소 정성
을 다하시어
아버님의 뜻을 받드셨습니다. 태상왕 전하께서도 아드님이 되시는 상감의 효성
을 무리치지
아니하시고 아름답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러하니 아래에 있는 저희들의 마음도,
흠뻑
편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공주마마께옵서 아바마마의 마음을 불도의 힘으로
돌려드리신
덕택이올시다."
두 비빈은 공주의 높은 덕을 칭송했다.
"천만의 말씀이오이다. 모두 다 두 분 마마가 아바마마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
린 보람입니다."
공주와 두 비빈이 행궁 안으로 들어섰을 때 태상왕은 분합 안까지 나와 공주
를 맞이한다.
오직 하나로 생각하는 귀한 따님이다. 검은 장삼에 자주 가사를 어깨에 메고
비빈들과 함께
들어오는 공주의 모습을 바라보자, 태상왕은 반갑고 기뻤다.
"공주 오느냐?"
태상왕은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큰 소리로 공주를 맞는다.
공주는 은실 같은 수염을 늘이고 자기를 반갑게 부르는 아버지의 용안을 바라
뵙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오직 이 세상에 희망을 붙인 한 분의 혈육이었다.
몸은 서울 정릉 어머니의 원찰인 흥천사에 있으나, 마음은 자나깨나 아바마마
에게 있는 그
아버지다.
만나뵌 지는 몇 달이 되지 아니했으나 뵙고 싶은 마음은 일각이 삼추 같았다.
공주는 눈을 끔뻑해서 글썽거리는 눈물을 누선속으로 숨어들게 한 후에 달음
질치듯 걸음을
빨리 해서 전상으로 올랐다.
"아바마마, 그동안 옥체 안강하셨습니까?"
섬섬옥수를 들어 큰절을 올린 후에 다시 합장을 하고 무릎을 꿇어 아뢴다.
태상왕은 공주의 절을 받은 후에 다정한 눈매로 묻는다. 어린 공주같으면 덥
석 껴안아 뺨을
대고 묻고 싶었으나, 이미 장성해서 출가한 공주다.
껴안아 애무하지 못하는 체면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나는 잘 있었다마는 네 몸은 태평했느냐?"
"아바마마께옵서 염려해주신 덕택으로 소녀는 관음보살을 모시옵고 무사하게
지냈사옵니다.
아바마마, 그동안 큰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소요사를 새로 지으시고 또다시 관음
보살을
조성하셨을 뿐 아니라 행궁까지 건축하시느라고 얼마나 진념하셨습니까?"
"소요사는 실상이즉 부처님보다 너를 위하여 지었다. 대궐로 돌아가자 하니 돌
아가지는
아니하고, 나는 네가 보고 싶어서 이곳에 소요사를 지은 것이다. 너는 한평생을
불제자로
마치겠다 주장하니, 대궐은 지어도 소용이 없고, 내가 있을 행궁 옆에 소요사를
지어서 가끔 가끔
너를 청하려는 계획이다. 그리해서 부처님 중에도 네가 받드는 관음보살을 조성
해서 이곳에
모시었다. 알겠느냐, 나의 뜻을?"
"아바마마, 감축하옵니다."
공주는 공손히 대답했다.
"너는 정릉 흥천사에서 죽은 어머니만 위로하지 말고 때때로 소요사에 나와서
살았있는 아비도
위로해주어야 한다. 이제 나는 늙었다. 내가 믿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다."
태상왕인 아버지의 말씀은 슬펐다. 공주의 검은 속눈썹에 진주 같은 구슬이
광채를 뿜어
방울방울 솟았다.
공주는 흑장삼에 소매 속에 눈빛 같은 흰 수건을 꺼내서 속눈썹에 엉킨 이슬
방울을 꼭꼭
눌렀다.
"아바마마, 감축하옵니다."
공주는 눈물어린 눈을 손수건으로 닦고 다시 한 번 아버지 태상왕을 향하여
감사한 말씀을
고했다.
"자아, 일어나서 새로 지은 행궁 구경을 해라."
태상왕은 공주의 소매를 끌었따. 공주는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태상왕 이성계는 친히 공주에게 행궁 구경을 시켰다.
그중 큰 방으로 향했다.
"이것이 내가 거처해야 할 방이다."
냠향 창에 서상방으로 앉힌 방이다. 세 간이 훨씬 넘었다.
사간방 뒤에 방이 둘이 붙어 있었다.
"이 방은 성비의 방이고 이 방은 정경궁주의 방이다."
태상왕은 일일이 손을 들으 가리킨다.
"늙은 사람한테 젊은 여자들이 소용있느냐마는 늙고보니 수족이 둔하고 옷을
입는 데도
입혀주는 사람이 필요하구나. 그러하니, 대궐제도 모양으로 큰전 옆에 협방을 둔
것이다."
태상왕은 웃으면서 변명하듯 말했다.
공주가 조신하게 대답한다.
"그러하옵니다. 노래하실수록 좌우에서 부축해 드리는 사람이 필요하옵니다.
소녀도 다 알고
있사옵니다. 불초녀가 아바마마께 효성을 다 바치지 못하는 것이 한이옵니다."
"네가 어찌 이루 다 내 일을 보아주겠느냐. 아무리 딸이라 해도 시킬일이 따로
있지 아니하냐."
"그러하옵니다."
"모르는 사람은 늙은 내가 후궁을 가까이 한다고 웃으리라마는 결코 딴욕심이
있어서 그리하는
것은 아니다."
"아옵니다. 소녀도."
공주는 잠깐 얼굴을 붉히며 대답한다.
태상왕은 다시 청마루를 건너 동편으로 향했다.
"이 방은 공주 네가 쓰도록 마련해둔 것이다. 대궐로 친다면 동온돌이 되는 것
이다. 내가
정궁이 있다면 당연히 이 방을 그한테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 어머니가
아니 계시니
네가 쓰도록 해라. "
아버지 태상왕의 다정한 말씀에 공주의 눈에는 또다시 안개가 서렸다.
"외람되옵니다. 제 어찌 동온돌을 쓰오리까. 아바마마의 향의하여 주신 뜻은
감격하옵니다마는
삼가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이곳이 대궐이라면 혹시 군말들을 할지 모르지만, 이곳은 대궐이 아니다. 임
시로 내가
거처하는 행궁이다. 공연히 내 뜻을 어겨서 나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지 말라."
공주는 아버니 태상왕의 지극하신 향의에 또 한 번 감동하지 아니 할 수 없었
다.
"이따가 성비와 정경궁주와 의논한 후에 다시 아뢰겠습니다."
"두말 말래두 그러는구나."
태상왕은 꾸짖듯 공주에게 하교를 내렸다.
태상왕은 공주에게 두루 이른 후에 소요사롤 발길을 옮겼다.
"아뢰옵니다, 아바마마께."
"무슨 물을 말이 있느냐?"
"행궁 말씀이올시다."
"말을 해라."
"단청을 칠하지 아니하셨으니 어찌한 일인지 궁금하여이다."
"소명한 네가 어찌 내 뜻을 모르느냐?"
"저기 보이는 소요사에는 단청을 칠하시고, 같은 때 지으신 행궁에는 단청칠을
아니하셨으니,
미련한 생각에 해득치 못하겠습니다."
부처는 불왕이다. 그리고 절은 부처의 거처하는 정궁이다.
그뿐 아니라 부처를 위하여 절을 건축하고 부처를 조성한 것은 나의 지성으로
모신 것이다.
그러하니 단청칠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행궁은 대궐이 아니다.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이다.
임시로 생활할 곳에 단청칠을 한다는 것은 사치스런 일이다. 황차 나는 현재 임
금이 아니고
태상왕이다. 태상왕으로 있어서 어찌 사치를 할까보냐. 나라의 재정은 나의 개인
의 재물이 아니고
백성들의 재물이다. 내가 어찌 백성들의 재물을 사용해서 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느냐."
경순공주는 태상왕께 손을 모아 합장을 올렸다.
"갸륵하신 향의시옵니다.아바마마의 성스러우신 뜻을 백성들이 안다면 얼마나
기뻐하오리까.
또한 아바마마의 높으신 성의를 송도에 있는 상감이나 백관들이 안다면 얼마나
황공 송구해
하오리까. 앞으로 이제 이씨 왕실은 무궁무진한 복덕을 누리옵고 백성들은 격양
가를 불러 성덕을
노래하오리다."
태상왕 이성계는 묵묵히 대답이 없다.
태상왕과 공주는 새로 조성이 된 소요사 법당에 올랐다.
아담스런 전각이었다. 단 위에는 황금으로 도금해 입힌 관음보살이 미소를 풍
겨 다정히 앉았다.
경순공주를 보고 가만히 웃음을 보내는 듯했다.
공주는 새로 조성된 황금 관음보살상 앞에 무릎을 꿇어 향을 사른후에 두 번
큰 절을 올려
예불을 하고 손을 모아 합장을하여 부처를 염했다.
공주는 새로 조성된 소요사 관음보살께 마음으로의 혼을 보내는 것이다.
부처의 영혼과 공주의 넋이 한 줄 보이지 아니하는 아득한 심령의 선을 이루
어 경건하게 소리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처음으로 조성되신 관세음보살님께 뵈옵니다. 이 나라의 왕비였던 강후의 딸
인
경순공주올시다. 굽어 통촉이 계시옵소서.'
공주는 마음으로 새로 조성된 관음보살한테 자기의 신원을 밝혔다.
공주의 마음으로 보내는 소리 없는 하소연을 듣는 관음보살은 향연이 자욱한
속의 공주를
향하여 미소를 풍기면서 대답을 내리는 듯하다.
'오오, 네가 경순공주냐. 어머니와 아버지한테는 지성스런 효녀요, 남편한테는
천하에 짝을
구하기 드문 열녀로구나. 그리고 모든 죄악이 가득 찬 사람들을 크나큰 도량으
로 용서해주고
구해내서 대불의 높고 크신 뜻을 받들려 하는 네 마음 갸륵하다.'
관음보살은 향연 속에서 가만가만 입술을 열어 공주에게 계시를 내리는 듯하
다.
공주는 눈물어린 눈으로 다시 한 번 관세음보살을 우러러 뵙는다.
자상하게 웃음을 풍기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바라보니 흡사 어마마마인 강비의
모습과 같았다.
마치 어머니가 생전에 자애스런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며 도란도란 말씀을 내
리는 듯했다.
공주는 소요사에 새로 조성된 관음보살이 아버지의 대원을 받아서, 어머니 강
비의 모습을
나타내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더욱 관음보살께 친절감을 느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큰 뜻을 본받아 소녀에게는 아무런 불편도 없습니다.
욕심도 없습니다.
그저 깨끗한 일편빙심으로 이 세상에서 선한 일만 하다가 어마마마와 남편의 뒤
를 따라
부처님께서 옹호해주시는 극락으로 가기 소원이올시다.'
공주는 다시 계속해서 염한다.
'그리하옵고 , 그저 이씨왕실에 다시 화기가 돌아서 나라와 백성이 편안히 살
기 소원이올시다.'
공주는 지성으로 염했다.
옆에서 태상왕도 공주가 하는 대로 배례를 드렸다.
태상왕과 공주의 뒤를 따라 전에 오른 성비와 정경궁주도 공주를 따라 다 함
께 향을 살라
예불을 올렸다. 법당 아래 종루에서는 청아한 경쇠 소리와 은은한 종소리가 예
불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청정한 세계로 이끌어 놓는다.
모두들 무념무상의 경지로 이끌려 들어가는 듯했다.
깨끗한 수정이요 티없는 옥과 같은 말고 맑은 정서가 관음보살의 미소와 함께
전각 안에 감돌
뿐이었다.
이윽고 분향이 끝나자 공주는 먼저 가사를 바로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상왕과 두 비빈도 합장을 올리고 부처 앞에서 물러섰다.
공주는 태상왕의 귀에 입술을 옮겼다.
"아바마마, 새로 조성해 모신 관음보살은 마치 어마마마의 혼령이 보살의 몸에
엉키신
듯합니다. 미소하시는 저 높으신 자세를 보시옵소서. 마치 어마마마께옵서 생시
에 인자하신
웃음을 소리 없이 던지시는 듯하옵니다."
태상왕은 공주의 소곤거리는 말을 듣고 번쩍 고개를 돌려 관음보살을 바라본
다.
아직도 다 스러지지 아니한 그윽한 향연 속에 당정히 앉으신 관세음보살의 황
금소상은 과연
강후의 젊었을 때 아름다운 그 모습 같았다.
새로 조성해 모신 후에 태상왕은 여러 차례 관음보살을 바라보고 배례를 드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태껏 사랑하던 아내 강비의 모습과 같은 것을 발견해본 적
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공주의 속삭이는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자세히 바라보니 영락없
는 강후의
모습이었다.
태상왕은 오히려 깜짝 놀랐다.
'왕비!'
하고 한 번 부르짖고 싶었다.
공주는 다시 속삭인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어머님께 향하신 지극한 정성과 사랑이 한점으로 엉키고
모여서,
성스러우신 관음보살님께옵서, 어마마마의 모습을 나타내시어 아바마마의 마음
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드리나봅니다."
공주의 말을 듣고 태상왕은 그럴 듯하게 생각되었다.
"과연 이상한 일이다. 새로 불상을 조성한 후에 나는 여러 차례 예불을 드렸으
나, 오늘 같은 그
모습을 뵌 일이 없는데, 아마 너의 지성이 하도 갸륵해서 부처께서는 잠깐 너의
어머니 모습을
빌려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냐."
태상왕의 용안에는 감격한 표정이 넘쳐 흘렀다.
공주가 다시 고했다.
"잠깐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부터 아바마마의 안정에 비치시는 관세음보살은
언제나
어마마마의 모습으로 뵈어서 아바마마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고 편안하게 해드릴
것입니다.
어마마마의 육신은 한양성중 정르에 누워 계시지만 혼령은 필시 소요사에 계시
리라 생각됩니다."
공주는 말을 마치며 전각에서 물러난다.
태상왕도 전각에서 내린다.
두 비빈이 왕을 부액해 모시었다.
태상왕은 신기하다 생각했다. 법당에서 내리며 공주한테 조용히 묻는다.
"네가 염불을 올려서 관세음보살께 어마마마의 영혼을 넣어드린 것이 아니
냐?"
공주는 미소하여 대답한다.
"소녀가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 관음보살께 입혼을 시켜 드리오리까. 황공하옵
신 분부이오이다.
다만 아바마마께서 부처를 조성하신 그 공덕을 가상하게 생각하시어 보살께서는
아바마마를
욕심이 없으신 맑은 세계로 이끄시느라고 어마마마의 어지실 때의 모습을 보여
드린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소요사에 오래오래 머무르시어 더한층 마음을 맑게
가시옵소서."
태상왕은 마음이 설레었다.
"그렇다면 흥천사 원찰에 모신 관음보살상은 어찌해서 너의 어마마마의 모습
을 보여주지
아니하시느냐?"
태상왕은 의아해서 물었다.
아버지의 묻는 말을 듣자 공주는 흑장삼 붉은 가사에 명모를 반짝이며 볼에
가득 웃음을 지어
대답한다.
"아바마마, 그것도 모르시옵니까? 호호, 흥천사를 지으실 대 아바마마께서는
태상왕이 아니시고
한 나라를 주름잡으시며 삼천리 강산을 호령하시던 제왕이셨습니다. 아바마마께
옵서는 친히
흥천사를 지으신 것이 아니라 백관에게 영을 내리시고 내시를 시켜서 우람하고
큰 흥천사를 짓게
하셨습니다. 위엄하신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삼천리 강산의 좋은 재목과 넓고
큰 석재는 구름
뫼듯 정릉으로 들어왔습니다. 황금대불을 조성하라고 하시는 나라의 재물을 아
끼지 아니하고
장엄하고 우람하신 부처의 소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셨습니다.
또다시 한 번 종을 만들라는 영을 내리시니 천하에 제일 가는 영종을 흥천사
에 만들어
달았습니다. 정성을 아니 드리신 것은 아니오나 흥천사 원찰은 모두 다 명령과
위력으로
이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는 제왕의 위력을 좋아하시지 아니합니다. 부처
님은 임금 되는
태자의 자리도 헌신짝 버리시듯 하시고 설산고행을 하시어 기막힌 수도 끝에 석
가모니불이 되신
겁니다.
그러하니 호화로운 제왕의 권력으로 명령을하여 지어진 흥천사보다도 모든
부처들은 아바마마께옵서 아무런 권력도 없이 힘없는 태상왕으로 정성껏 친히
건축하신 이
소요사를 더한층 마음에 들어 하실 것입니다."
공주는 말을 계속한다.
"그리하옵고, 부처의 소상도 권력과 재력으로 신하를 시키시어 조성하신 부처
가 아니라 친히
감독하시어 봉안하신 부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더한층 아바마마의 정성을 마음
깊이 아름답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공주의 도란도란 아뢰는 말을 듣는 태상왕은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너의 말도 그럴 듯하다."
태상왕은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권력과 위엄으로 사람을 누르고 사람을 짓밟으려 하는 것은 속된 생각이란 것
을 새삼
깨달아본다.
"아바마마, 관음보살께옵서 어머님의 미소하시는 모습을 옮겨서 나타내시는 일
을
아시겠습니까?"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짐작하거든 어리석은 나의 마음을 열어다오."
"흥천사에는 서가모니불이 주불 이십니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 손수 조성하신
부처는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러기에 흥천사의 법당은 대웅보전이옵고 소요사의 법당은
관음전이옵니다.
석가보니불은 남성으로 표현되신 부처이시고 관음보살은 여성으로 표현된 부처
이십니다.
이러하니 관음보살은 어마마마의 미소를 아바마마께 표현시키어 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태상왕은 공주의 말을 듣고 황연히 모든 말을 깨달았다.
"네 말을 들으니 모두 다 그럴 듯하구나. 그 동안 불경을 많이 읽은 너의 노력
을 짐작해
알겠다."
태상왕은 따님이 한없이 귀여웠다. 또 한 번 감탄했다.
"이제는 아바마마께서 모든 근심 걱정을 다 잊으시고 교요히 소요산 행궁에
거처하시면서
내생의 좋은 일을 닦으시어 마음 편안히 세월을 보내시면서 만수 무강하옵소서."
"내가 이곳 소요사를 건축하고 행궁을 지은 것도 실상 네 말같이 모든 속세의
인연을 다
끊어버리자는 것이다."
태상왕은 술몃 한숨을 쉬었다. 평생을 지냈던 몇 가지 일이 주마등같이 달린
다.
공주와 성비와 정경궁주는 태상왕의 뒤에 따르며 소요사에서 행궁을 향하고
내려간다.
소요사 관음전 처마끝에서 바람에 따라 일어나는 풍경소리는 유난히도 맑았
다. 맑고 깨끗한
대기는 아청 물감을 만리 창공에 물들여논 듯 아름다웠다.
공주는 선으로 지향해 돌아가는 아버지를 보자 마음이 대견하고 거뜬했다.
공주 자신도 마음도 가벼웠다. 어깨와 몸이 거뜬하다. 맑은 바람이 가슴을 시
원하게 해준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결에 서리찬 깊은 가을이 찾아왔던 모
양이다.
소요산 온 덩어리가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다.
누른 것은 은행잎이요, 붉은 것은 감나무 잎이 아니면 단풍잎이다.
여기다가 푸른 잦나무가 붉고 누른 잎새 속에 우뚝 서 재각기 자태를 나타낸
다.
푸른 청송, 붉은 단풍, 누른 황엽이 함께 어우러져서 만첩 청산에 만간들이 비
단 필을 풀어
산기슭마다 휘감아논 듯했다.
"아바마마, 저 경치를 좀 보시옵소서. 산이 소금강이라 하더니 과연 헛 말이
아니올시다.
아바마마의 행궁은 천하절경이올시다."
성비와 정경공주가 공주의 말씀을 듣고 고개를 들어 소요산 전경을 바라본다.
햇빛은 때마침 석양판인데, 누르고 푸르고 붉은 잎새들의 빛깔도 좋지마는 햇
빛에 반사된 푸른
봉우리는 더한층 검고 푸르고 신비스럽게 엄숙했다.
단ㅍ 빛깔과 푸른 봉우리는 넘오가는 햇빛을 받아 산 얼굴이 시시때때로 변해
진다.
태상왕은 바윗돌에 털썩 주저앉았다.
"과연 천하절경이다. 더구나 낙조에 비쳐지는 저 산 얼굴은 경치가 좋은 것보
다도 무섭고
신비스럽구나."
"산 얼굴은 엄숙하고 신비스런 뿐 아니라 시시 때때로 변합니다."
공주도 대자연의 조화에 탄복했다.
성비와 정경궁주도 금수강산 속에 파묻힌 대자연의 신비를 탄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하, 저 산 얼굴! 검었다, 푸르렀다 하는 저 산봉우리 위에 흰구름장이 둥둥
떠서 갑니다.
마치 선녀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듯합니다."
태상왕은 공주와 성비와 정경궁주의 말을 듣자 다시 한 번 단풍과 산 얼굴을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짓고 탄식한다.
"보아라. 청솔은 마치 방원이 같고, 단풍은 흡사 나 같고나. 흰구름 자락은 너
희들 같고, 시시
때때로 변해지는 산 얼굴은 신이 묏부리를 통해서 우리들 사람한테 계시를 주는
듯하고나."
태상왕의 말을 듣자 공주도 마음이 처량했다.
"그러하옵니다. 말씀 내리신 대로 솔직하게 아뢴다면 단풍은 아바마마 같사옵
고, 낙랑장송 푸른
송백은 마치 상감 같사옵니다. 그리하옵고 변해지는 산 얼굴은 신이 묵시를 내
리는 듯하옵니다."
"세상이란 그렇구나. 공성신퇴란 말이 옳은 말이다. 늙으면 다 소용이 없는 것
이다.영웅호걸도
아차하면 모두 다 가는구나."
태상왕은 새삼 인생의 무상을 느낀다.
공주는 아바마마의 허탈된 마음을 잘 짐작했다.
한 마디로 위로하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불사약을 구하고 승로반을 받들게 했던 한공무
도 하는 수
없었습니다."
공주는 잠깐 태상왕의 용안을 살폈다. 아버지의 마음을 상할까 염려한 때문이
다.
태상왕의 용안은 처량한 모습이었다. 공주는 더 이상 말씀을 아니하려 했다.
태상왕은 공주에게 재촉한다.
"어서 다음을 말해 보아라."
"아바마마의 마음이 처량하실까 하와 이만 말씀을 줄이겠습니다"
"관계치 않다. 어서 말을 계속해라."
공주는 입을 다문 채 주저했다.
"어서 말을 해라. 인생은 다 그런 것을."
"그럼 다시 말씀을 계속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말을 해다오."
"역발산 기개세하던 초패왕도 운이 다하니 사랑하는 애인 우희를 불러서 술잔
을 들어
비분강개하면서 '우야, 우야, 어찌할꼬'하고 이별주를 들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는 행복하십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상감같은 아드님을 두시고 그
아드님의 기상이
푸른 솔, 낙락장송 같이 훤칠하니 아바마마의 사업을 더한층 빛나게 할 것입니
다. 그 위
아바마마께서는 그저 단풍으로 곱게곱게 붉으십시오. 저희들은 흰구름장같이 깨
끗하게 왔다가,
깨끗하게 가겠습니다."
옆에 있는 성비와 정경궁주는 태상왕과 공주 두 분이 주고받는 대화를 알 까
닭이 없었다.
"날이 차옵니다. 행궁으로 어서 내려가사이다."
성비가 간곡하게 아뢴다.
공주도 비로소 처량한 마음 속에서 새 정신이 들었다.
"아바마마, 청솔한테 모든 일을 맡기시고 성비와 정경궁주를 잘 보호하시면서
여생을 즐겁게
하옵소서. 소녀도 항상 아바마마의 곁에 모시면서 소요산과 정릉 사이로 왔다갔
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비의 말대로 산골이 선선합니다. 행궁으로 내려가사이다."
공주는 태상왕을 재촉해 모시고 행궁으로 내려갔다.
"너는 흠뻑 나의 뒤를 돌보다가 정릉으로 돌아가거라. 이곳에도 부처를 모시었
으니 도를
닦아라."
"아바마마의 말씀을 삼가 받들겠습니다."
공주는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이날 밤 공주는 성비와 정경궁주와 함께 태상
왕의 수라상을
장만했다.
절에서 올리는 수라상이었다. 육종을 쓰지 아니했다. 송이로 국을 끓이고 표고
로 잡채를
만들었다. 두부로 적을 굽고 , 자옥채를 삶아 나물을 했다.
도라지 생채에 튀각이 태상왕의 구미를 돋웠다.
때마침 가을이었다. 밤을 밥 위에 얹어 쪄서 밤밥을 수라상에 올렸다.
계절이 시월 보름이었다. 달빛이 휘영청 행궁에 가득히 비쳤다.
태상왕은 공주가 올리는 수라상을 달빛 아래 받으며 오래간만에 즐거웠다.
"달빛 아래 산채로 밥을 먹으니, 달빛이 산채에 스며들어 달로 찬을 하는 듯하
구나!"
태상왕은 오래간만에 즐거웠다.
한편, 태종은 송도에서 소요사와 행궁을 짓는 목재와 석재며 대목 석수들을
소요산으로 치송한
후에 백관을 불러 하교를 내렸다.
"한양에 새 도읍터를 정해서 경복궁을 지었고, 사대문과 성을 싼후에 다시 창
덕궁까지 지어
낙성이 되었으니, 불가불 다시 천도를 아니할 수 없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
가?"
신하들은 모두 다 고려에서 벼슬하던 사람이었다.
태조때 한양에 천도한 일이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다 송도에 살림하는 근거를
두었고,
한양보다 송도에 더 정이 많이 들었ㄷ. 송도에서 떠나기 싫었다.
이조판서인 문관 한 사람이 어전에 나와 아뢴다.
"한양은 태상왕께옵서 정도하신 곳이오나, 마땅치 아니한 일이 많이 생겼습니
다. 그리하와
상왕께서 재위시에 송도로 돌아오신지 벌써 여러 해올시다. 백성들로 모두 다
한양보다 송도를
그리워합니다. 아무리 도성과 궁궐을 건축하셨다 하오나, 봄과 가을 한가 한때,
이궁으로 쓰시고,
완전히 천도하시는 것은 보류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문관의 뒤를 이어 훈련대장인 무관이 아뢴다.
"지금 아뢴 이조판서의 말은 크게 도리어 어긋납니다. 한양 서울에는 태상왕께
옵서 이미
궁실을 건축하시고 종묘와 사직까지 그곳에 모시었습니다. 예로부터 나라 예법
에 종묘와 사직을
받들어 모신 곳이 곧 수도올시다. 국가의 군와되는 이가 어찌 종묘와 사직을 떨
어져서 있을 수
있습니까. 불편한 일 있사오니 속히 새 도읍인 한양으로 옮기시는 일이좋을 듯
합니다."
조정공론은 천도하자는 사람과 송도에서 그대로 머물러 살자는 사람과, 두 갈
래 의견으로
갈라졌다. 의논은 용이하게 결정이 되지 아니한다.
태종은 영의정 하윤한테 묻는다.
"영상의 뜻은 어떠하오?"
영의정 하윤이 부복해 아뢴다.
"한양에는 이미 종묘사직을 모셨을 뿐 아니라 태상왕께옵서 정도하신 곳입니
다. 백성과
신하들은 고향이 그리워서 한양으로 가기를 주저 하옵니다마는 나라를 새로 창
건하신 오늘날
모든 희망과 생활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한양으로 가시는 것이 가합한 줄로 아
뢰오.
그리하옵고 한양에는 이미 창덕궁이 낙성되었사오니 전하께서 창덕궁을 사용
하신다면 마음
편안하실 것입니다."
영의정 하윤의 의견은 만 근의 무게가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곧 재결을 내린다.
"사람의 의견이란 구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을 내리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이 달 안으로
한양에 돌아가기로 한다. 모든 신하들은 그리 알고 백성을 지도하라."
군신들은 고개를 숙여 숙연히 태종의 명을 받들었다.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태종은 한 달 안에 천도를 끝내려던 것을 석 달이 넘어서 끝을 냈다.
이것은 태종 5년 을유의 일이었다. 태조 5년 병자에 처음으로 도읍을 ㅎ양에
옮겼다가 별안간
왕비 강씨가 경복궁에서 승하했고, 삼년상이 끝나는 해에 방석과 방번에 태종
한테 화를 당하고
방과 정종이 왕위에 나가자 내란이 일어났던 경복궁에 살 마음이 없었다.
고향인 송도가 그리워서 정종은 상왕인 태조를 모시고 즉위하뎐 해 3월에 송
도로 다시 내려갔
고, 다음해 경진년에는 태종과 방간의 싸움이 송도에서 벌어져서, 태종은 이내
세자가 되었다가
다음해 왕위에 나가고 정종을 상왕으로, 태조를 태상왕으로 봉해서 무한한 파
란과 곡절을 겪은
후에 이번에 다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으니, 한양 천도는 햇수로 10년
만에 완전한 도읍
으로 정해진 것이다.
이때 태종 이방원의 나이는 한창 연부역강한 39세였다.
태종은 대궐을 경복궁으로 정하지 아니하고 새로 신축한 창덕궁으로 정했다.
경복궁에는 왕비 강씨가 천도 직후에 별안간 세상을 떠났을 뿐 아니라, 부마
이제를 죽였고. 방
석, 방번을 죽였고, 정도전과 남은도이 대궐 안에서 역적으로 몰려 죽은 옛 기억
이 새롭고 불쾌했
던 때문이다.
천도가 끝난 후에 영의정 하윤이 어전에 아뢰었다.
"영의정 신 하윤은 삼가 어전에 아뢰오, 이제 정부는 한양으로 돌아와, 완전
히 천도를 마쳤고
나라는 차차 질서가 잡힙니다. 전하께서는 앞으로 국태민안을 이루어 천 년 사
직을 튼튼하게 하
실 때라 생각합니다."
하윤의 아뢰는 말은 장중하고 여운이 있었다.
태종은 마음이 기뻤다. 용안에 가득 화한 기운과 웃음빛을 띠고 묻는다.
"영상의 말은 심히 아름답소. 어찌하면 국태민안한 태평세월을 이루고 천 년
만 년 이나라를
부강케 하겠소?"
"모든 법과 문명을 질서 있게 지키시어 백성들을 예와 의로 인도하신다면 이
나라에 화기가 가
득 차오리다. 이같이 하자면 전하께옵서 먼저 솔선수범을 하셔야 할 것 입니다."
하윤의 아뢰는 말씀은 더욱 간곡하고 부드러웠다.
"내가 먼저 무엇을 백성들한테 수범시키면 되겠소?"
태종은 다시 미소를 지어 물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효로써 백성들한테 모범을 보여주셔야 하겠습니다."
하윤의 한 마디 말은 태종 이방원의 가슴을 형상 없는 새파란 칼끝으로 도려
내는 듯했다.
태종의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가 되었다. 효도를 다하라는 하윤의 말에 크게
가책을 느낀 때문
이다. 태종은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얼굴이 또 한 번 화끈하고 달았다.
과연 자기는 큰 죄를 지었다. 아버지한테는 줄곧 불효자의 행동을 했다. 형
제들한테도 우애를
다하지 못했다. 우애만 다하지 못 할 뿐이 아니다. 형제를 죽여서 골육상잔을 했
다.
부자와 형제지간이 불목했던 것뿐이 아니다. 세상의 어진이들을 너무나 많이
죽였다. 고려의 이
름 높은 재상이요 충신이라 할 수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선죽교에서 철퇴
로 때려 죽인 것도
장본인은 자기다.
고려의 명장이요, 충신인 최영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것도 그 장본인은 자기
였다.
우왕과 창왕과 공양왕을 폐위시켜버린 후에 귀양길에서 죽인 일도, 남들이
알기에는 아버지 태
조가 한 짓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인즉 자기가 우겨대서 한 짓이다.
그뿐인가, 두문동에서 고려의 뜻있는 선비 칠십이인을 불살라 죽인 것도 자
기가 앞장을 서서
한 짓이다.
그뿐이 아니다. 동두문동에서 고려의 무사 사십팔인을 없이 해버린 일도 자기
가 관여한 일이다.
또다시 왕씨네가 반동을 일으킬까 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고 꾀
어낸 후에 배에 실
어서 바닷속에 몰아넣어 왕씨네를 몰살시켜버린 일도 자기의 짓이었다.
이 모든 죄악을 생각할 때 자기는 만고에 그 짝을 볼 수 없는 악의 극치요,
악의 화신이다.
태종 이방원은 다시 더 한 번 지난 일을 생각해본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고향인 함흥으로 갔을 때 계모인 강비의 친척 조사의의
말을 듣고 송도정
벌을 개시했다.
이때 자기는 앉아서 죽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보낸 함흥군을 향하여 감연히
칼을 빼어들고 일
어섰다.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 안주 청천강까지 건너갔다.
만일 그때 아버지 태조가 늙었기에 망정이지 선봉대장이 되어 친히 나왔더라
면, 자기는 아버지
를 향하여 칼을 겨누고, 아버지를 향하여 화살을 쏘아았을 것이다.
아버지도 딱한 아버지였다. 하모흥에서 돌아왔을 때 성 밖 십리허에 나가서
맞이하는 아들 자
기를 활을 들어 쏘아 죽이려 했다.
그뿐인가, 만조백관들이 모인 환영연 잔치 자리에서 철퇴로 자기의 머리를
갈기려 했다가 잔
올리는 거리가 너무나 멀어서 철퇴를 내던지고 탄식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버지를 원망할 수는 없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속담과 같이
곱지 않게 한 장본인은 모두 다 자기다. 자기가 극약의 잘못을 저지른 때문에
아버지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이같이 자기 자신의 죄상을 반성했을 때 얼굴이 쉴 사이 없이
화끈화끈 달아올
랐다.
순간, 태종은 고요히 한숨을 짓는다.
자기가한 짓은 옳거나, 그르거나 모구 다 나라를 잘 다스려보자는 큰 뜻으로
그같이 한 것이었
다.
만약 자기가 그 일을 그같이 하지 아니했다면 나라꼴은 결딴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서 죄
없는 창생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유리하여 떠다니는 가엾은 민생이 될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이렇기에 고려왕실을 뒤엎었고 임금 노릇 하려는 동생과 형을 배격한 것이다.
천하 일을 하는 사람은 집안 일을 돌보지 아니한다.
'그렇다! 위천ㅎ는 불고가사요, 대인불구소절이다.'
태종은 이같이 생각했을 때 마음이 조금씩 안돈되는 듯했다.
하윤은 총명 영리한 재상이었다.
벌써 태종의 눈치를 챘다.
"큰 사업을 하시려면 작은 일에 구애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태 하신 일들은 큰 사업
을 하시기 위하여 모든 예의를 돌보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질서가 잡히고 어느 만
큼 뜻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그러하니, 전하께서는 먼저 효로써 백성을 지도하셔야 하고 효로써
지도하시려면 솔선궁행을 하셔야 합니다."
하윤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태종은 다시 묻는다.
"지금 태상왕 전하께서는 소요산 행궁에 계십니다. 먼저 친림하시어 환도하신 연유를 고하시고
아무리 태상왕이시라 할지라도, 현재 군와의 아버지이시므로 모든 정사를 정승으로 하여금 품하
여 처결하도록 하옵소서. 이리하신다면 태상왕 전하의 마음도 흠뻑돌리시고 전하의 효도도 백성
들의 모범이 되실 것입니다."
"경의 말은 나의 어둡고 캄캄했던 마음을 등불같이 밝혀주었소."
태종은 고마웠다. 하윤의 손을 덥석 잡았다.
며칠 후였다. 태종은 곧 소요산 행궁으로 아버지인 태상왕께 문안 을 드리러 가는 간소한 거둥
령을 내렸다.
만조백관은 따르지 아니하고 호위를 맡은 자비관들과 삼정승만 따랐다.
내시와 승지가 말을 달려 소요산 행궁으로 향했다.
"상감께옵서 태상왕 전하께 문안을 드리러 오십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깜짝 놀랐다. 아들을 용서하고 싶은 생각은 공주의 설교로 인하여 마음이 많
이 돌았으나 아직도 석연치 아니한 생각이 가슴에 남아 있었다.
"새삼, 문안이 웬일이야?"
태상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옆에 있던 경순공주가 나직한 목소리로 아뢴다.
"정을 막지 마시옵소서. 남의 정이라도 막아서는 아니되는데, 황차 자손의 정을 어찌 막으려 하
십니까. 이제는 화한 덕으로 임하시어 이 나라를 복되게 하옵소서."
태항와은 어진 따님의 말씀을 타박줄 수 없었다.
"오면, 만나리라."
내시와 승지는 말을 달려 한양으로 뛰었다.
"문안을 받으신다 합니다."
영의정 하윤은 곧 태종을 모시고 소요산으로 향했다.
상감의 거둥행차가 소요산 행궁에 당도했을 때, 공주는 슬몃 정릉으로 돌아갔다.
태종은 정승 하윤과 함께 행궁문 앞 하마돌앞에서 말을 버렸다.
먼저 행궁을 살펴보았다. 단청도 아니 올렸다. 주란화각이 아닌 여염집 모양으로 검소한 백옥이
아담하게 지어졌다.
태종은 먼저 아바마마의 검소한 뜻을 알았다.
마음 속으로 크나큰 감격을 느꼈다.
역시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이같이 검소하게 행궁을 지우셨구나 하고
탄복했다.
태종은 아바마마의 이 어진 마음과 착한 행공이 경순공주로 인해서 이같이 된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아바맘께서 연로해가시니 마음이 휠씬 풀려져서 당신의 마음을 넓게 가지시어 자기의 지나간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당신께서도 조용히 여생을 마치기 위하여 이같이 소요상에 행궁을 지으
시고, 무한정한 물자와 인력을 대어드렸건만, 행궁을 이같이 검소하게 니으셨을 뿐 아니라 문안사
를 보내는 족족 함흥차사가 되게 하여 다시는 천일을 대할 수 없게 했던 모든 일을 청산해버리시
고, 흔연히 자기의 문안을 받겠다고 하교를 내리셨구나. 정승 하윤이 말한 대로 이제부터 자기는
지극한 효도를 다해야 하겠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역시 사람이었다.
사람 이상의 사람도 아니요, 사람이하의 인물도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아니했다. 의심이 들었다.
"전에 올라 문안을 드릴 때 아무런 방비가 없어도 좋겠소?"
정승 하윤은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아니하셔도 좋습니다. 이번엔 기둥을 세울 필요도 없고 내시가 잔을 올리
게 할 까닭도 없습니다. 태상솽 전하의 앞으로 바싹 가셔도 좋습니다. 그저 문안 절을 올리시고,
한양으로 다시 오신 일을 보고드리십시오."
태종은 반신반의 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아니했다.
"아무 일 없겠지?"
"염려 마십쇼. 이제는 겁운이 다 지나갔습니다."
"어떻게 겁운이 지나간 것을 아오?"
태종은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아니했다.
"태상왕께서는 소요산에 행궁만 지으신 것이 아니오라 소요사라는 절을 지으시고 관음보살을
조성해 모시었습니다. 흔천사는 강후마마의 원찰이지만 소요사는 당신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절이
라 할것입니다. 태상왕 전하께서는 이제 머리는 아니 깎으셨으나 불제자가 되신 듯합니다. 불제자
가 되신 몸으로 불행한 일을 다시 하실 리 만무합니다. 전하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태종은 하윤의 아뢰는 말을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잠자코 행궁안으로 들어섰다. 하윤이 태종께 고한다.
"문안을 올리시고 한양으로 다시 오신 말씀을 고하신 후에 이곳에 의정부를 둔다고 말씀을 아
뢰십시오."
태종의 눈이 둥그렇게 떠진다.
"의정부는 삼정승이 나라일을 의논하는 곳인데 한양에 두지 아니하고 이곳에 둔다면 정치를 어
찌하잔 말요?"
태종은 의아했다. 하윤에게 물었다.
"별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효도입니다."
태종은 더욱 의아했다.
"그것이 효도라니, 의정부와 나의 효도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요?"
한양에는 진짜 의정부를 두고, 이곳양주에는 가짜 의정부를 두면 됩니다."
"영상은 별스런 말도 다하오. 의정부의 진짜 가짜가 어떻게 있을 수 있소?"
"한양에는 전하께서 대신들과 나라일을 의논하시는 의정부를 두시고, 이곳 양주 땅에는 대신들
이 한 달에 두세번씩 나와서 태상왕 전하께 '나라일을 잭해주십쇼' 하고 아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한 의정부는 두어서 무엇하겠소?"
하윤은 껄껄 웃었다. 그는 개국공신일 뿐 아니라 방석을 세자의 자리에 쫓아낸 태종 이방원의
중흥공신이요, 은인이다. 가끔 임금 앞이건만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전하께서는 하나만 아시고 둘은 모르십니다. 글쎄, 그것이 효도라고 아뢰지 아니했습니까?"
태종은 얼굴을 붉혔다. 화가 불끈 일어났다.
"가짜 의정부를 두는 것이 어이 효도란 말이오.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니 불효자의 행동이 아
니겠소."
"전하, 세상 일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효도 중에 두 가지 효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음식과
의복을 잘 드려서 맛이게 자시도록 하는 효도가 있고,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효도가 있
습니다. 가짜 의정부를 양주에 두면 태상왕의 마음이 즐거우실 것입니다."
양주 땅에 의정부
하윤의 말을 들은 태종은 비로소 황연히 깨달았다.
"정승의 말씀을 비로소 알아듣겠소. 그러면 양주에도 의정부를 주기로 합시다."
"태상왕 전하께 문안을 드리신 후에 태상왕 전하께도 이 뜻을 아뢰어둡시오."
태종은 하윤과 말을 마친 후에 곧 행궁 전각으로 올랐다.
하윤은 행궁 아래채에 대기하고 있었다. 장차 태종의 문안이 끝나면 대신의 자격으로 문후
를 올릴 작정이다.
내관과 상궁들이 전사에 오르는 태종을 태상왕의 거처하는 큰방으로 인도했다.
방에 들어서니, 늙은 상궁이 조용한 음성으로 태상왕께 아뢴다.
"상감 문안드리오."
좌우 옆에서 젊은 상궁들은 늙은 상궁의 아뢰는 말씀이 채 떨어지기 전에 태상왕 전하를
부액해 드렸다.
아무리 아들이라 하나 상감이고보니 조체를 보아서 태상왕은 아들 방원을 맞이했다.
태상왕은 잠시 자리에 일어나서 상감 방원을 바라보고 다시 안석에 기대 앉았다.
이제 태상왕의 얼굴빛을 전과 달랐다.
환영문 앞에서 활을 당겨 쏘던 때와 환영연 자리에서 철퇴를 꺼내던 그 노한 얼굴이 아니
다.
표정이 없는 듯한 얼굴빛이었으나 노한 기운과 역한 기상이 없는 무드러운 안색이었다.
태종은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고 공손히 절을 올렸다.
태상왕 이성계도 잠깐 허리를 굽혀 답례를 올렸다.
태종은 절을 올린 후에 금포옥대에 두 손을 모아 잠깐 태상왕의 용안을 바라뵙고 아뢴다.
"행궁에 단청을 칠하라고 감역에 일렀사온데, 단청칠을 안했습니다그려."
태상왕은 부드럽게 대답한다.
"대궐이 아니고 행궁인데 지나친 사치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오."
이제는 태종이 왕위에 나간 것을 사랑하는 딸 경순공주의 말을 들어 그대로 인덩하는 모양
이다.
"아바마마의 검소하신 덕을 온 날의 벼슬아치와 백성들은 마음 속 깊이 느낄 것이옵니다."
태상왕은 묵묵히 대답이 없다.
"그 동안 소자는 다시 한양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환도했습니다."
태상왕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의정부를 이곳 양주 땅에 두기로 삼정승이 합의를 보았습니다."
"의정부를 이곳에 두다니?"
태상왕은 눈을 번쩍 떠서 상감을 바라보며 묻는다.
"크고 작은 국사에 대하여 아바마마의 재가를 맡아서 처리하려 하옵니다. 그리하와 행궁 가
까운 양주 땅에 의정부를 두기로 했습니다.
태상왕은 상감 태종의 아뢰는 말씀을 듣고 고개를 가로 흔든다.
"의정부는 수도 한양에 있어야 하오. 어찌 삼정승의 회의처를 양주 땅에 두겠소 불편하고
좁은 양주 땅에 의정부를 둔다는 것은 알지못할 말이요. 번거롭고 부질없는 짓을 하지 마오.
정승들의 회의처인 의정부가 나온다면 육조아문(六曹衙門)도 나와야 할 것 아닌가."
"의정부만 나오고 육조는 아니 나오기로 했습니다."
"불편해서 어찌하려고..."
"이미 대신들이 결정했습니다."
"모를 일이로다!"
태상왕은 마땅치 않게 여겼다.
말씀이 끝난후에 태종은 문안을 마치고 나왔다.
뒤를 이어 창 앞에서 내시가 고한다.
"영의정 하윤 문후드리오.?
태상왕은 마음이 풀렸다. 비로소 조정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들 방원을 왕으로 인정했으니 그의 신하인 영의정 하윤을 아니 만나볼 수 없게 되었다.
비록 하윤이 방원을 도와서 모든 험악한 일을 한 장본인이라 하나 방원을 왕으로 인정한
이상 하윤을 정승으로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역시 경순공주의 대자대비한 선의 철학이 커다란 효력을 나타냈다.
"들라 해라!"
태조는 영의정 하윤의 문안드리는 것을 허락했다.
하윤은 내시에게 인도를 받아 전각 장지 밖으로 들어서서 공손하게 곡배(曲拜)를 드렸다.
절을 올리며 웅얼거렸다.
"신 영의정 하윤 문후드리오."
태상와은 의젓하게 대답하며 앉은 채 허리를 굽혔다.
"영의정이 멀리 와서 찾아주니 고적했던 내 마음이 매우 기쁘오."
"신 하윤이 너무나 불민하와 태상왕 전하께 자주 문후를 드리지 못했으니 그 죄 태산보다
크옵니다. 넓게 통촉해주시기 바라옵니다."
"내가 항상 멀리 있었으니 어느 하가에 나를 찾겠소."
태상왕 이성계는 비로소 처음 미소를 지어 하윤의 말에 대답했다.
"태상왕 전하께옵서 멀리 함흥에서 돌아오시어 가까운 양주 땅에 계시니 신하와 백성들은
부모가 가까이 계신 듯 모두 다 마음이 안정되어 국운이 융창하다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멀리 있으나 가까이 있으나 이제는 늙어 무용지물이 되었소. 국가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오."
"황공하옵신 분부올시다. 전하께옵서 직접 만 가지 일을 총말하시지 아니하시더라도 항상
뒤에 앉으시어 모든 일을 보살펴주셔야 합니다."
하윤은 은근하게 다시 아뢰었다.
태조 이성계는 하윤에게 사양하는 말을 보낸다.
"노장은 다 무용 아닌가.?
하윤이 다시 간곡하게 아뢴다.
"아니올시다. 큰일은 전하께서 살펴주서야 합니다. 아무리 넒으신 상감이 계시다 하나, 모든
경험이 어찌 성덕이 높으신 태상왕 전하를 따르오리까. 자손만대의 크나큰 업적을 위하여 큰
도움을 내려주시옵소서. 영의정 신 이하 만백성의 소원이올시다."
하윤은 능란한 말솜씨로 태상왕의 비위를 맞추었다.
누구나 칭찬하고 존경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이다.
'영의정 이하 만백성의 원' 이란 말에 태상왕 이성계의 마음은 더한층 풀어졌다.
태상왕의 눈치를 본 하윤은 다시 말을 게속해 아뢴다.
"상감께서 친히 태상왕 전하께 아뢰었을 줄 압니다. 그간, 상감께서는 송도에서 종묘사직이
계신 한양으로 완전히 천도를 하셨습니다."
"아까, 들어서 알았소."
"상감께서는 태상왕 전하의 성의를 받들어서 한양 천도를 단행하신 것입니다."
'기와 정해논 도읍터니 잘했다고 생각하오. 송도는 정이 들어서 좋은 것 같지만, 기실은 지
덕이 쇠해서, 왕도를 계승할 곳이 못되오."
태상왕의 마음은 점점더 풀어졌다. 흡연히 웃으며, 하윤을 향하여 대답했다.
하윤은 능청스럽게 태상왕 이성계의 비유를 맞추려고 한다.
"태상왕 전하께 또 한가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태상왕의 대답은 더욱 흐뭇했다.
"의정부를 이곳 양주에 두기로 했습니다. "
"아까 상감한테도 들렀습니다마는 불가하다고 생각하오. 의정부는 영의정이 나라일을 의논
하고 결정하는 중대한 곳인데 반드시 수도 한양에 두어야 하오. 편벽된 시골에 둔다는 것은
극히 불가하오. 상감의 말을 들으면 영의정이 주장했다 하니 어찌 그런 불편한 생각을 했단
말이오."
하윤운 목소리를 더욱 부드럽게 하여 다시 간곡하게 아뢴다.
"상감께옵서는 신이 주장하여 의정부를 양주땅에 두자고 한 것같이 아뢰었사오나 기실은
상감께옵서 주장하신 것이올시다."
"글쎄, 무슨 필요로 의정부를 양주 땅에 둔단 말이오. 공연한 짓이지.'
"그것은 삼감의 지극한 효성에서 생각하신 것이니 그대로 윤허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효심이라니?"
"중대한 국가대사를 처리할 때 태상왕 전하께 품달하옵고 일을 결정하기 위하여 의정부를
양주두자는 것입니다. 아바마마의 명령없이는 크나큰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겠다는 갸
륵한 성지에서 나온 것이올시다. 상감께서는 이같이 항상 전하를 잊지 못하시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마음속으로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르겠소. 맘대로 하라 이르오."
"그러하니 상감께서는 부왕전하의 뜻을 받드는 진정한 효자십니다. 이런 일을 미루어볼 때
앞으로 나라의 운수는 크게 떨치리라 믿습니다."
"정 그렇다면 영상은 상감을 잘 도외서 이 나라를 태산반석과 같이 육성시켜주기 바라오."
태상왕 이성계는 이제 완전히 아들 태종과 영의정한테 모든 일을 다 함께 떠맡겨버릴 수밖
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하오면 곧 의정부를 양주 땅에 두게 하겠습니다."
하윤은 배례를 드리고 물러갔다.
양주 땅에는 간소한 재목으로 의정부가 세워졌다.
하윤과 조준들은 태상왕의 재가를 맡기 위하여 번을 갈아 소요산에 문안을 드리고 의정부
에서 간단한 회의를 했다.
오늘날까지 의정부라는 땅 이름이 양주에 있는 것은 여기서 시작된것이다.
태상왕은 태종의 문안과 영의정 하윤의 문후를 소요산 행궁에서 받은 후에 의정부를 양주
땅에 설치하는 것을 묵인했다.
그러나 사실인즉 모든 정치적 일은 아들 태종에게 맡겨버렸따. 태상왕의 의욕은 이제 몸과
함께 늙었다.
인생의 거센 풍파와 흘러가는 헤월은 고려 천지를 뒤흔들고 조선이란 새 나라를 창건한 한
시절의 영웅호걸 이성계를 이같이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성계는 이제 아무런 욕심도 없었다.
의정부로 대신들이 나와서 나라일을 품하면 그는 언제나 '상감하고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
는 말씀을 내릴 뿐이었다.
양주에 있는 의정부는 하윤의 생각대로 형식적인 의정부에 지나지 아니했다.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면, 두 달에 한 번씩 대신들이 양주 의정부로 와서 태상왕께 문후를
드리고 여러 가지 나라일을 종합해서 아뢴 후에 '좋다' 하는 말씀을 듣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례다.
태상왕은 죽은 후의 일이 걱정이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땅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연의
사실이다.
자기가 죽으면, 아들 태종은 물론 좋은 곳을 가려서 장사를 지내줄것은 분명하지만, 아들
태종이 하는 일이 아직도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산소를 쓰는 데는 우선 지리에 바락아야 하는 것이다. 아들은 보통 사람과 달라서 제왕의 지
위에 있으니, 자기 백세 후에 장사를 지낸다면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풍수를 청해서 능을 봉
할 것은 잘 알고 있으나 암만 해도 풍수에 대한 지식은 아들 태종이 자기만 같지 못할 것 같
다.
그뿐 아니었다. 방금 풍수학을 공부한 지사와 승려들이 아무리 많다 하지만 고려 태조의 대
궐 터를 잡아준 도선대사나 한양 정도에 참여했던 무학대사의 공부에 따라갈 만한 사람이 있
지 아니했다.
도선대사는 벌써 수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청해도 올수가 없지만 무학대사는 아
직도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죽었다면 그의 제자들이 입적했다는 희소식으로 무학이 살아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
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생각이 불현듯 났다.
때마침 한양 정릉에 있던 경순공주가 소요산 행궁으로 문후를 드리러 왔다.
태상왕은 반갑게 따님을 맞이했다.
"그 동안 아무 탈이 없었느냐?"
"부처님의 은덕으로 별탈 없이 지내옵니다."
경순곤주는 여전히 승려의 복색으로 문후를 드리러 왔다.
"너의 어머님 능침도 다 안녕하시냐?"
태상왕은 옛 아내 강비의 산소도 무고하냐고 물었다.
"부처님이 호위해주시는 불력으로 아무 별고 없이 백골이 편안하십니다."
공주는 고개를 숙여 나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러지 아니해도 너 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무학을 찾아서
공주는 고개를 숙여 나직이 대답한다.
"며칠 전부터 온다는 것이 늦어사옵니다."
공주는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아바마마를 바라뵈었다.
"너는 절에 있으니 혹시 무학대사의 소식을 들었느냐? 입적이나 되지 아니했는지 모르
겠구나."
"금강산에 있다 하옵니다."
"금강산에 아직 살아 있다 하더냐?"
"흥천사에 드나듣는 객승들의 말에 의하면 금강산에서 참선하고 있사온데, 기력이 전만
못하다 합니다. 무학대사를 만나보시려 하십니까? 용이치 아니하리라 생각됩니다."
"탈것을 모내서 처해오면 되지않겠느냐?"
"무학은 청해서 무엇하십니까?"
"글쎄, 만나보고 의논할 일이 있구나."
태상왕의 얼굴엔 쓸쓸한 웃음이 그늘을 지며 떠돌았다.
"무학대사도 꽤 늙었을 것입니다."
공주는 한 마디 하고 다시 태상왕의 용안을 살핀다.
"나의 만년유택을 의논해볼까 한다."
태상왕 이성계는 말을 마티며 추연히 한숨을 지었다.
공주의 가슴이 새삼 아팠다. 무어라고 아버지 말씀에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잠깐 침묵을 지켰다.
"아무리 늙었더라도 내가 청하면 올라오겠지."
"아바마마, 소녀가 아바마마의 만년유택을 정하시는 데 안연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소녀가 금강산으로 가서 무학대사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태상왕은 깜짝 놀란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무한 기뻤다.
"네가 어찌 여자의 몸으로 금상산엘 가겠느냐?"
"소녀는 이미 출가한 몸이올시다. 중의 모으로 금강산에 들어가는 일은 당연한 노릇이올
시다. 더구나 아바마마의 만년유택을 정하시는 일에 소녀가 어찌 아니 가오리까."
태상왕은 기뻤다.
"그렇다면 너의 정성을 막지 아니하리라. 나를 대신하여 무학을 청해오너라."
공주는 곧 소요사에 예불을 올린 후에 태상왕 소속의 내시와 궁녀들을 거느리고, 금강산
표훈사에 들러 무학대사의 소식을 물었다.
무학대사는 내금강 금장암에서 참선하고 있다 했다.
경순공주는 내시와 궁녀와 함께 내금강의 금장암을 찾았다.
과연무학은 금장암에 있었다.
공주는 상좌 중에게 전달을 보냈다.
"흥천사에 있는 경순공주가 아바마마의 분부를 받자와 국사를 뵈오러 왔다 전하오."
상좌 중은 곧 이뜻을 무학대사에게 전했다.
무학은 깜짝 놀랐다.
경순공주가 멀고먼 금강산까지 국가에 무슨 큰일이 또 일어났구나 하고 궁금하게 생각
했다.
무학은상좌 중에게 분부를 내렸다.
"곧 방장으로 모셔들이게 하라."
참선하고 앉았던 무학대사는 옷깃을 단정히 여미고 상좌한테 분부를 내렸다. 나이일흔아
홉 살, 내년이면 팔십 고령이다. 아직도 목소리는 단정하고 얼굴에는 청수한 기운이 돌았
다.
공주는 무학한테 합장하여 예를 올렸다.
내시와 궁녀들도 대사한테 예를 올렸다.
무학대사는 공주한테 묻는다.
"공주마마, 웬일이시오니까? 멀고먼 이곳까지 친히 오시니 반드시 하십니까? 혹씨 국가
에 무슨 일이 있지 아니합니까?"
무학대사는 궁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아바마마께서도 안녕하시고 국가에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안심하옵소서."
공주는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무학도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다시 말을 꺼냈다.
"하도 덴 가슴이라 궁금해서 아뢴 것이올시다. 국가가 태평하고 태상왕 전하께서 강녕하
시다 하니, 이만 대행이 없습니다."
무학대사는 다시 합장을 올렸다.
"소승이 이곳에 온 것은 이바마마께옵서 국사님을 모시고 오라 하시어 이같이 온 길이
올시다."
"빈도를 부르시옵니까?" 성은은 감격하오나, 나이 이미 팔십에 가까운지라, 행보하기가
어렵습니다."
무학은 간단하게 거절했다.
공주는 무학의 거절하는 말을 듣자, 다시 합장하여 절을 올리고 간곡하게 간청했다.
"높으신 춘추에 행차를 하시자 하와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마는 아바마마께서는 지금
양주에서 국사 오시기를 고대하시어 일각이 삼추같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태상왕이 양주에 계시다는 말을 듣자, 무학대사의 눈이 둥그래진다.
"태상왕 전하께서 지금 양주에 계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예, 그러합니다. 소풍차 행재소에 계십니다."
"공주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함흥에서 올라가신 지 오래셨는데, 지금도 상감과 의가 좋
지 오래셨는데, 지금도 상감과 의가 좋지 아니하십니까?"
무학대사는 늙은 누네 정기를 담뿍 모아 경순공주한테 물었다.
"아니올시다. 처음엔 얼마 동안 마땅치 않게 생각하셨습니다마는 지금은 부처님의 힘으로 아바
마마의 마음을 돌리시게 했습니다."
"불력으로?"
무학의 주름진 얼굴에는 경이와 환희의 빛이 서로 어울려 물결쳐 흘렀다.
"네, 그러하오이다."
무학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
"누가 불력으로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리시게 했습니까?"
"부끄럽습니다마는 소승이 송도에서 정릉으로 오신 아바마마를 모시고 인생의 무상과 선의 철
학을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과거를 다 뉘우치시고 또 현재의 상감과의 불화를 다 씻어버리신 후
에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큰 뜻을 본받아시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양주 소요산 아래 송요사를
지어서 관음보살을 모시고 그 아래는 또다시 소요산 행궁을 건축하시어 지금 거처하고 계십니다.
이제 아바마마께서도 칠십이 넘으신 고령이올시다. 마음 약해지시어 선한 길을 밟으시려고 마음
을 기울이십니다."
공주의 말씀을 듣느 무학대사는 별안간 입이 벙글벙글 벌어졌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공주마마, 과연 잘하셨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가장 슬픈 하늘을 머리에 이시고, 몸둘 곳 없는
땅을 밟으셨으면서도 능히 큰 슬픔과 큰 괴로울을 초월하시고 다시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돌리게
하셨으니, 이씨조선은 앞으로 크게 여망이 있을 것입니다. 감축합니다. 모두 다 성현 같으신 공주
께서 이씨조선의 무궁무진한 복록을 마련하신것이라 하겠습니다."
무학대사는 팔십에 가까운 높은 나이건만 저럼은 경순공주를 향하여 경건하게 합장을 올렸다.
공주는 노장 스님의 합장을 받자 몸둘 곳을 몰랐다. 얼굴을 붉혀 마주 합장하여 답례를 보내면
서 불감한 뜻을 표했다.
"소승이 연천한 여자의 몸으로 어찌 감히 국사의 칭송을 받사오리까. 황공무지하여이다."
"도를 깨닫고 사람의 마음을 착한 길로 인도하는 데 늙고 젊은 한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공
주마마, 과연 고맙습니다. 빈도는 왕실을 위하는 것보다 한 사람 선한 일을 하는 그분에게 감
사한 말씀을 아니 보낼 수 없습니다. 태상왕 전하의 마음을 그만큼 돌리셨다 하니 그런 다행
이 없습니다마는 상감의 의향은 지금 어떠하시오니까?"
무학대사는 태종의 마음은 어찌 되었느냐고 공주한테 물었다.
"상감은 원래 탐권욕 한 가지로 죄악을 많이 저지르신 분입니다. 권력을 잡으려는 그것 한가지
로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부자지간과 형제지간에 많은 죄악을 저지르신 분입니다. 그러나 이
제는 당신의 소원대로 모든 권력이 자신의 손아귀로 돌아갔으니 만족한 느낌을 간직하고 계실 것
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욕망대로 만족한 욕망을 채웠을 때 마음은 한결 부드러워지고 착해지는
법이올시다. 그러하니 이제는 아바마마께 효도를 해보려고 노력하는 눈히올시다."
무학대사는 공주의 말을 듣고 소리높여 껄껄 웃는다.
"그렇지, 그렇지 공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사람은 얼마쯤 자기 만족을 느끼게 되면 선한 데로
돌아가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마음은 본시 착한 것인데 물건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악
한 일도 감행하는 것이 아니오니까."
무학은 공주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흐뭇했다. 미소를 지어 공주를 바라본다.
"상감께서는 이번 아바마마께서 소요사를 지으시고 소요산 행궁을 건축하시는 데 크게 감동이
되시어 건공감을 부르시어 팔도에 일등 가는 편수들로 절과 행궁을 짓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몇 달이 안가서 행궁과 소요사가 완성되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무학대사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잠깐 한숨을 짓는다.
"그뿐이 아닙니다. 상감은 친히 소요산 행궁으로 납시어 아바마마께 문안을 드리고 영의정 하
윤과 의논하시어 양주에다가 의정부를 두시어 나라일을 품달하게 마련하셨습니다.'
"양주에다가 의정부까지 두셨습니까? 참 갸륵한 일입니다. 아바마마의 마음을 편안케 해 드리
려고 애를 쓰셨습니다그려."
무학은 또한번 감탄했다.
"그래, 양주 의정부로 대신들이 나가서 국사를 의논하고 태상왕 전하의 재가를 받습니까?"
무학 대사는 얼굴에 깊은 빛을 띠고 공주한테 물었다.
"영의정 하윤 이하 좌우 정승이 의정부로 한 달에 한 번 씩 나와서 국사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는 사양하시고 대신의 의견을 매양 상감한테 아뢰어 처결하라 하시는 모양이올시다.
처음에는 의정부를 둘것 없다고 반대하셨스니다마는 이제는 형식상으로 대신만 만나보십니다. "
"좋은 일이올시다. 그래야 나라가 되는 법이올시다. 아버지는 아드님 상감한테 미루시고 아드님
은 아버님 되시는 태상왕께 품달하도록 하시니 두 분 사이의 서로 양보하시는 이 아름다운 덕은
넉넉히 전날 불화하셨던 잡음을 씻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정승의 꾀일 것입니다. 하 하
하 유쾌한 일입니다. 나라가 잘될 것입니다."
무학은 어깨를 놓치지 아니했다.
"사부님께 아룁니다. 아바마마께서 사부님을 만나보시겠다 하시는 일은 아마 살아 평생, 마지막
소원이실 것입니다. 아무리 노경에 출입하시기가 어렵다 하시나, 교자를 타시고 양주로 가시어 아
바마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공주의 목소리는 바로 곧 간절히 애원하는 음성이다. '마지막 소원' 이란 공주의 말에 무학대사
의 마음은 서글픈 감정이 물결쳐 흘렀다.
"공주마마,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오. 마지막이라니---."
"만년유택을 정하려 하시는 길이니, 어째 마지막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는 아바마마
도 늙으시고, 사부께서도 노래하셨습니다. 아직까지 두 분께옵서 기력이 강건하시다 하나, 언제
어느 때, 모두 다 입적을 하실는지 모르옵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는 해몽을 해주시고 국도까지
정해주신 은덕이 계십니다. 마지막 원을 드러 만년유택을 정해주시기 간절하게 비옵니다. 아바마
마의 마지막 소원이기도 합니다마는 소승의 태산같이 바라는 이 마음을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공주의 초롱거리는 눈에는 눈물이 이슬처럼 맺혀 글썽거렸다.
무학대사는 잠깐 동안 무엇을 생각하다가 허락을 했다.
"공주를 모시고 가오리다."
공주는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앵도 같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곧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이튿날 날이 바락자 무학대사는 검은 장삼에 만수가사를 어깨에 메고 석장을 든 후에 팔십에
가까운 늙은 몸을 교자 위에 실어 금장암을 나섰다.
뒤에는 경순공주가 여승의 몸으로 가마를 타고 뒤따르고 그 뒤에는 상궁 두 여자와 내시 두 사
람이 말을 타고 따랐다.
태상왕이 금강산에 있는 무학대사를 공주를 시켜 청해간다는 소식은 단번에 수령 방백한테 퍼
졌다.
지나는 곳마다 무학대사와 공주를 대접하는 찬수 범절과 지공이 놀라웠다.
무학대사가 소요산 행궁에 당도하니, 태상왕의 마음은 한량없이 좋았다.
태상왕 이성계는 마루 끝까지 나가 무학대사를 맞아들였다.
"국사, 그 동안 무양 하셨소?"
태상왕은 덥석 무학의 손을 잡았다.
무학은 전에 올라 합장을 드렸다.
"전하! 그 동안 강녕하셨다는 말씀을 공주마마께 듣자옵고 얼마나 기쁜지 몰랐사옵니다. 그러하
옵고 이곳 소요산에 소요사를 짓고 관세음보살을 봉안하셨다 하니 불도의 마음이 어찌 기쁜지 모
르겠습니다. 감축하여이다."
태상왕은 무학을 오래간만에 대해보니, 얼굴과 태도가 전에 비해많이 달라졌다. 자기 자신도 저
만큼 늙었으려니 하고 생각해보니 한심스럽기도 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제는 국사도 많이 늙었구려---."
태상왕은 무학을 바라보며 탄식조로 말했다.
"산골에서 입산수도를 하는 까닭에 속세인간의 근심 있고 시름하는 생활보다는 마음이 편하여
덜 늙는다 하옵지만, 어찌하오리까. 하늘 이치가 사람으로 불로장생은 못하도록 마련해놓았습
니다. 이런 까닭에 한무제의 승로반도 소용이 없고, 삼신산에서 캔다는 불로초도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늙어지면 죽는 것이 천도입니다. 황송한 말씀이오나 전하께옵서도 함흥에서 뵐
때보다 많이 노래하셨습니다."
"국사의 말이 옳소. 늙어면 가는 것이지, 하하. 모두 다 가는 것이지. 옛일을 돌아보니 한바탕
꿈이로구려!"
"전하의 말씀이 옳소이다. 인생이란 일장춘몽이올시다. 왕후장상는 이 길로 가고 마는 법이올시
다."
무학은 말을 잠깐 그쳤다가 다시 계속한다.
"전하께서는 국가를 위하여 많은 사업을 하시고 공성신퇴하시니, 빈도 같은 승려보다는 그래도
많은 빛을 세상에 남기셨습니다. 하하하."
무학은 호방하게 한 번 웃었다.
"천만에, 사업을 많이 했다 한들 무엇하오. 세상에 나같이 고생을 하고 마음을 썩게 하였으면서
도 장차 내가 죽은 후에 욕과 비방이 빗발치듯 쏟아질 것을 생각하니, 내가 왜 왕의 자리에 나갔
던지 모르겠소. 후회막급이오. 그러나 대사는 맑고 맑은 대자연 청정세계에서 한평생 몸을 깨끗이
닦아서 착하고 어진 길로 사람을 구제했으니, 사후에 연화대로 갈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늙
은 뒤에는 아무런 번민이 없을 테니 그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소. 과연 부럽기 짝이 없소."
무학은 태상왕의 말씀을 듣자, 한층 더 소리를 드높여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것이 모두 다인생입니다. 번민이 있는 사람이 있으므로 불도가 시작되었고, 욕심
이 과한 까닭에 이것을 경계하는 유학의 삼강오륜도 윤리로 나타났습니다. 모두 다 하늘의 조
화올시다."
이때 행궁 내주에서는 무학대사를 위하여 소찬이 들어왔다.
특히 태상왕의 명령으로 공주가 감상을 하여 태상왕 전한와 겸상반을 차려서 들여왔다.
경순공주는 궁녀를 시켜서 무학대사와 태상왕이 앉은 사이에 상을 놓았다.
"스님께서 매우 시장하실 것입니다. 아바마마의 어명을 받들어 소찬으로 겸상반을 받들어
올렸습니다. 많이 들어주십시오."
공주는 친히 무학대사의 밥주발과 소찬 뚜껑을 차레차례 열었다.
"황감하여이다. 소승이 어찌 감히 전하와 겸상반을 받자오리까. 불감하여이다.
무학은 겸상을 사양했다.
태상왕은 숟가락을 들며 무학에게 술을 들기를 권했다.
"의는 형제 같고, 가르쳐주는 말씀은 스승이로구려. 이러므로 과인은 항상 당신을 국사로 대
접하오. 어찌해서 신이라고 자처해 부르오. 자아 국사, 사양치 말고 들기로 합시다."
태상왕은 무학을 타일러서 소찬을 들기 시작했다.
공주가 다수를 친히 내왔다. 식사가 끝난 후에 태상왕은 다시 무학에게 말을 건넨다.
"국사, 과인이 국사를 청한 것은 나의 해골을 묻을 만년유택을 정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욕심인지 모르겠소이다. 죄는 되지 아니하겠습니까? 허허허."
"욕심은 역시 욕심이십니다. 그러나 그것까지 죄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하."
무학은 소리를 높여 크게 웃었다.
태상왕은 빙긋 웃으며 무학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큰 죄가 아니라면, 국사는 나를 위하여 잠깐 수고를 해주시오."
"공주마마께 모든 일을 들어서 알았습니다. 빈도 같은 승려는 죽은 후의 일은 생각도 아니
합니다. 수장을 지내건, 화장을 지내건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는
국가의 원수이십니다. 자고로 풍수설이 없다면 모르되 지금까지 전해오는 이상, 국가의 백년
대계를 위하여 만년유택을 아니 보시고 정할 수 없습니다. 처음, 소승은 아니 오려 했습니다
마는 공주마마의 크나큰 효성에 감동되어 마지막으로 전하를 위하여 천 년 좋은 유택을 상보
아 드릴 것을 결심했습니다. 내일 일찍 동가하실 수 있겠습니다?"
무학은 태상왕을 우러러본다.
"국사가 천 리 길에 와서 나의 해골 묻을 터를 지정해주는데 내가 어찌 따라가지 아니하겠소.
아침 아니라 새벽에라도 국사를 따라가리다."
"그러하시다면 거창한 거둥행렬은 폐지하시고 단기로 전하만 모시고 가겠습니다."
옆에 있던 공주가 아뢴다.
"다른 사람은 다 안가도 저는 아바마마를 모시고 꼭 가야 하겠습니다. 만년유택을 정해두시는
치표를 알아두아야 하겠습니다."
"공주마마의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전하의 만세 후에 치표를 자리를 알아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태상왕 이성계의 생각에도 번잡스럽게 한양의 정부 대신들이나 태종한테 묏자리를 구하러 간다
고 반포하기가 싫었다.
"공주의 뜻이 정 그렇다면 함께 가리라."
공주는 기뻤다.
"타실 것은 교자로 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하옵고 내관 한명과 찬수를맡은 궁녀 한 명쯤
배행해서 모시고 가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제 국사나 나나, 모두 다 늙었구나. 말을 타는 것보다 교자 세채를 준비시켜라. 너도 타야
할 것 아니냐. 그리고 네 말대로 행궁내관 한 명과 궁녀 한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다."
공주는 곧 아바마마의 명을 받들어 밖으로 나갔다.
태상왕은 다시 무학에게 말했다.
"묏자리를 구하러 간마면 방향을 정해야 하지 않겠소. 어느 쪽으로 가는 것이 좋겠소?"
"글세 올시다."
무학대사는 잠깐 눈을 감았다.
"국사는 천하를 두루 살핀 사람이라 좋은 자리가 어디어디 있는 곳을 잠작할 것이나 방향을 정
해놓고 가는 것이 좋겠소."
이성계와 무학의 종착역의 대화
무학이 대답해 아뢴다.
"신승이 일찍이 한양에 도읍터를 찾아다닐 때, 산이란 산은 거의 빠뜨리지 아니하고 다 보았습
니다. 이러하므로 지금도 한양 부근의 산과 들은 아직도 눈에 환합니다. 도성 서편보다 동편이 나
을듯합니다. 양주 검암산으로 어가를 모시라 하겠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공주가 나타났다.
"만반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공주가 아뢰자, 태상왕이 말했다.
"자아, 그럼 떠나기로 하자!"
공주는 태상왕께 옷을 갈아입혀 드렸다.
미복으로 차려서 갓과 창의로 갈아입은 태상왕은 무학과 함께 일어났다.
공주가 뒤에 따르고 내시 한 명과 찬수를 받든 궁녀 한 명이 공주의 뒤를 따랐다.
태상왕은 교자 위에 올라 영을 내렸다.
"검암산으로 향해 가자."
교자를 어깨에 맨 무예청들은 비로서 방향을 알았다.
"검암산이면 한양 도성 밖 이십 리허에 있습니다. 한양편을 바라보고 들어가야 합니다."
"통장의 말이 옳소. 이곳에서 가자면 서울을 바라보고 가다가 창동에서 중랑개 다리를 지나서
동편으로 나가면 되오."
무학은 통장의 말을 받아 자세히 지세를 가르쳐주었다.
날씨는 좋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바람도 잔잔했다. 춥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계절이었다.
간단한 태상왕 이성계의 행차는 감사와 원들도 모르게 양주 검암산으로 향하여 달렸다.
일행은 반나절 만에 양주 검암산에 당도하였다.
푸르고 윤 흐르는 일좌청산이 탁 트인 청자빛 하늘 아래 그윽한 영기를 품었다.
태상왕과 무학은 교자에서 내려서 공주와 함께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공주와 궁녀는 태상왕을 부액해 오르고 내관은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무학대사를 부축했다.
일행이 검안산 상봉에 오르자, 무학은 석장을 높이 들어 산세를 설명한다.
"전하 이 산은 소승이 전하의 만년유택을 위하여 마음 속에 간직했던 곳입니다."
무학의 말에 태상왕 이성계는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허허, 국사의 나를 생각하는 지극한 정성을 나는 무엇으로 다 갚아야 한단 말요. 어느 때 보아
두었소?"
태상왕은 합장하고 아뢴다.
"한양을 배판한 후에 즉시 봐두었습니다. 전하! 소승의 생각에는 지종을 한결같이 하려 했습니
다. 처음 전하의 잠룡하시던 시절에 왕이 되실 것을 예언하였고, 한양 대궐 터를 정하는 데 참획
했던 소승으로 어찌 대왕전하의 만년유택을 생각해보지 아니했겠습니까. 이리하여 한양도성 백
리 이내를 두루 물색해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해서 천부금탕인 대명당을 찾아냈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듣자, 더한층 기뻤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내가 대사를 청해온 일은 하늘이 시킨 일이라 하겠소. 과연 고맙소."
"소승은 '비기'를 써서 아드님 되시는 상감께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소승도 이제는 나이 늙어
서 여년이 얼마 남지 아니했습니다. 아마 전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글로 써
서 아드님되시는 상감께 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공주마마의 지극하신 효성에 감동되어 소승
이 전하 앞에 친히 이 명당자리를 설명해드리게 되니, 소승 역시 기쁨을 금하 수 없을 뿐 아나라,
'복인봉길지'란 옛글과 같이 이 땅을 차지하시는 전하의 복력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저하께 드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무학은 벙싯벙싯 웃으며 자기가 일찍부터 태상왕 이성계를 위하여 이 자리를 자아둔 것을 털어
놓고 이야기했다.
옆에서 무학의 말을 듣고 있던 경순공주는 합장을 하여 무학에게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의 아바마마를 위하시는 갸륵하신 그 심경은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사옵니다. 소녀
는 무슨 정성으로 사부님의 은공을 갚으오리까. 이생에서 못다 갚사오면 저승에 가서라도 결초보
은 하오리다."
공주의 푸른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샘솟듯 넘쳐 흘렀다.
무학은 공주의 지성어린 눈물을 보자, 더한층 감동이 되었다.
"공주마마, 딴말씀 마시옵소서. 소승이 어찌 은공을 받기 위하여 미리 자리를 정해두었으리까.
국가의 천 년 앞길을 위하여 마음으로 정해놨던 것입니다. 아예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은 하지도
마십쇼."
태상왕이 옆에서 무학한테 말한다.
"아까 국사가 말씀하시기를 도성 백 리 안에서 명당을 찾아보았다 하는데, 하필 백 리 안에서
만 산소 자리를 찾아보았소? 삼천리 강산이 모두 다 우리 땅인데."
무학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지당하신 말씀이올시다. 보천지하가 막비왕토라고, 넓고 넓은 하늘 아래 땅은 모두 다 전하의
땅 아닌 곳이 없습니다."
무학은 잠깐 말을 끊었다.
무학은 말을 계속한다.
"그러나 능묘를 도성 백 리 안에 두는 것은 다 까닭이 있어 그리하는 것입니다. 한번 능을 모
신 후에 그 자손 되시는 임금은 자주 능침을 찾아서 전배를 드려야 하는데 임금의 몸은 소중한고
로 백 리 넘는 먼길에는 거둥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은 나라의 수도인 서울을 함부로 비우
지 말라니느 까닭이올시다. 그러므로 장차 자손이신 상감의 장래 일을 생각하여 백 리 이내에서
만 능자리를 살핀 것이올시다.
태상왕은 무학대사의 말을 듣자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공주도 듣지못했던 일을 얻
어들었다고 기뻐했다.
무학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러므로 소승이 이 자리를 택한 것은 한양에서 겨우 이십 리밖에 아니되는 때문이올시다. 그
러하오니 삼천리 강산 속에 이러한 명당자리는 단지 이곳 한 자리밖에 없습니다."
태상왕과 공주는 무학대사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더한층 기뻤다. '삼천리 강산 속에 단 한 군데
있는 명당 자리'라는 말에 마음이 흥락했다.
"함흥에 계신 나의 할아버님 능침에 비하여 어떠하오?"
"도조전하나 환조전하의 능침에 비할 바가 아니올시다. 도조전하나 환조전하의 능침은 제왕이
되실 한두 분이 나오실 명당 자리올시다. 그러나 검암산 이 자리는 제왕이 되실 분이 백자천손으
로 나오실 곳입니다. 두 말씀 마십쇼. 조선에 제일 가는 훌륭한 명당 자리올시다."
무학대사는 말을 마치자 석장을 높이 들어 산봉우리를 가리킨다.
"검암산 이 산의 큰 조종은 장백산, 곧 백두산이올시다.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된 용줄기는 굼틀
굼틀 이천여 리를 휘돌어서 철령까지 온 후에 한 줄기가 다시 꺾여서, 서편으로 향하여 수백 리
를 달리다가, 우뚝 큰 영이 솟았습니다. 이 영을 백운치라 합니다. 이 산줄기는 다시 남편으로 백
여 리를 달려서 양주 땅에 들어와 남으로 행해 앉았으니, 이것이 바로 검암산이올시다. 어떻습니
까? 천부금탕이 아니오니까."
태상왕과 경순공주는 홀린 듯 넋을 잃고 무학대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무학은 더욱 신명이 났다.
"자아 전하, 안산을 바라보십쇼. 푸른 산이 첩첩하게 구름에 싸여서, 이편을 향하여 휩싸돌면서
조하를 하는 듯합니다. 먼 산은 담채를 풀어논 듯하고 가까운 산은 글자 그대로 푸른 묏부리 청
장이올시다. 모두 다 이 산소 자리를 향하여 두 손을 마주잡고 절을 하는 듯합니다."
무학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산 하나가 굽어들어서 절을 해도 좋다 하는데 원산 근산이 첩첩하게 이편을 향하여 절을 합니
다. 여기다가 앞에는 중랑천 물이 이 산을 싸안고 감돌아 흐릅니다. 수기가 윤을 뿜어 만년불패지
지올시다."
"과연 산천이 수려하고 밝고도 아름답구려."
태상왕은 먼 산과 가까운 경치를 바라보며 칭찬했다.
무학은 더욱 신이 났다.
"자아 보십쇼. 멀고 가까운 산이 첩첩하게 둘러샀으니 지가서에 말한, 삼천분대는 견공자지혼이
요, 팔백연화는 야왕손지장이라 한 것입니다. 삼천명이나 되는 궁녀들이 공자의 넋을 끌고 팔백
명이나 되는 후궁들은 왕손의 간장을 녹인다는 뜻이올시다. 이러하니 이 자리에 능침을 정하신
후에는 이씨왕손은 계계승승 길이 번창할 것입니다. 그러하옵고, 이편 능침을 봉할 산 자체를 본
다면, 단봉서우의 형국이올시다. 좌청룡, 우백호가 분명한 중에, 앞에는 달의 형국인 산이 있고,
또다시 그 앞에는 북과 같은 산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네모진 방산이 있습니다. 이른바 서우망월
이면 청삼이 출자천가요, 단봉이 함서면 자조반어제궐이란 것입니다. 물소 형국을 한 산에 달 같
은 모양을 한 산을 바라보며 푸른 옷을 입은 선관이 나오는 격이요, 북과 같고 조서와 비슷한 산
형상이 단봉형인 산 앞에 나타나면 붉은 간지로 쓴 조칙이 대궐에서 내린다는 것입니다. 자아 보
십쇼. 이 산자체의 형국이 바로 서우형이올시다. 과연, 만대의 제왕이 계계승승하실 땅이올시다."
"참말 그렇구려. 이제 자세히 산세를 살펴보니, 국사의 말과 똑같구려."
태상왕 이성계는 감격했다. 너무나 좋아서 탄식하는 소리가 또 나왔다.
무학은 태상왕의 감격해하는 말씀을 듣자 단을 내려 권한다.
"자아, 두말 마시고 이곳으로 전하의 만년유택을 정하십시오."
"좋소, 국사의 말씀대로 하오리다."
태상왕은 쾌하게 승낙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제, 혈 자리를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이리 내려오십쇼. 산 자체가 아무리 좋다 하나
혈을 찾아서 형국을 만들지 아니하면 헛일이올시다."
무학은 말을 마치자 석장을 짚고, 산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태상왕도 청려장을 짚고 무학의 뒤를 좇았다. 궁녀와 내시들도 따랐다.
무학은 산을 타고 휘돌아 내렸다.
한 줄기 언덕이 기운차게 내룡의 형국을 이루어 굼실굼실 꼬리를 치며 내려가다가 바닥이 평편
하게 열린 곳에 당도하자 펄썩 주저앉았다.
"자아, 여기가 혈이올시다. 혈 중에도 기막힌 정혈이올시다."
태상왕은 '정혈'이란 말에 당길심이 있었다. 무학대사의 혈 가리키는 곳을 주시떠했다.
"어떻습니까? 바람도 아니 불고 아늑한 곳입니다."
"참말 바람이 없구려."
"보십쇼. 산 너머와 저편 언덕에는 지금 풍세가 한창 높습니다. 저기 저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십쇼. 그러나 이곳에는 바람이 한점도 오지 아니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이른바 장풍향양지
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이란 것은 땅속에 몸을 감추어 장사지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장사지내
는 일은 곧 감추는 것이나 매한가지올시다. 그러므로 장은 장으로 통합니다. 바람이 아니 들고 따
뜻하고 다양한 곳에 신체를 묻는다면 백골이 편안하여 아무탈이 없고, 바람이 높게 들고, 땅속에
물이 가득 차고, 추워서 겨울에 얼부풀면 백골이 얼고, 여름엔 시궁창 속에 빠져 있게 됩니다. 이
러하니 그 넋이 불안할 것은 정한 일 아닙니까. 망자의 넋이 불안하면 그 집안과 그 자손이 잘될
까닭이 있습니까. 전하, 생각해 보십쇼. 이치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과연 국사의 말씀을 들으니, 이제 나도 자리를 짐작하겠소."
"자아, 그럼 바로 이 자리에 치표를 해두십시오. 그리하여 전하의 만세 후에 이곳으로 모시도록
하십쇼."
공주는 내관을 돌아보며 분별했다.
"동리에 기별해서 지체 말고 일꾼들을 올려보내게 하라."
내관은 걸음을 빨리 하여 산 아래로 내려갔다.
무학은 다시 태상왕께 고한다.
"아까, 산마루에서 보시던 그때보다 멀고 가까운 데 있는 앞산들이 더한층 다정하게 휩싸주지
아나합니까?"
"참말, 그렇구려!"
"풍수의 조화란 이런 것이올시다."
옆에서 바라보던 경순공주도 미소를 띠어 감탄한다.
이윽고 동리에서 내관의 지휘를 받아 장정들이 괭이와 삽과 가래를 가지고 올라왔다.
무학은 다시 태상왕께 고한다.
"전하, 이 산 이름은 검암산이옵고, 내를 건너 우편으로 마주 바라뵈는 산은 망우리 망우산이올
시다. 감암산을 껴안고 흘러가는 내 이름은 중랑개인데. 이 물은 한강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갑
니다. 지금 빈도가 대왕을 모시고 정혈자리는 계좌정향입니다. 정맘향은 아니올시다. 이 자리에
치표를 하시옵서서."
태상왕은 마음이 흡족해서 대답한다.
"산소 자리는 남향판이 제일이지."
"어디 산소 자리뿐입니까? 사람이 사는 집터도 남향판이 제일입니다. 그러므로 복있는 사람이
라야 남향 대청에 남향 대문을 앉히고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죽어서도 따
뜻한 남향판에 묻히기를 소원합니다."
"자아, 그럼 이곳에 치표를 해서, 역사를 하게 하라."
태상왕 이성계는 내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무학은 친히 석장을 짚고, 둥글게 원을 그려 치표 자리를 표시했다.
"분금은 꼭 계좌정향으로 해야 합니다."
무학은 공주한테 당부했다.
"잘 알겠습니다."
"아시기만 하셔도 아니됩니다. 적어두십시오. 태상왕 전하께서는 황송한 말씀이오나 아무리 기
억해두신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소승도 내일 세상을 떠날지 모레 죽을지 늙은 사람의 일은 예
측하기 어렵습니다. 공주마마께서 잘 적어두셨다가 일후에 상감께 전달하도록 하십시오."
무학대사는 유언하듯 공주한테 말했다.
"염려 마시옵소서. 사부님의 말씀을 명심해서 기록해두오리다."
"그리하옵고 다시 아룁니다. 분묘를 모신 남쪽 제절은 사방 이십일척의 내토성을 만들어서 떼
풀을 입혀 사성을 쌓으십쇼. 넓이만 정해주시면 산역으로 사람들이 다 잘 알 것입니다."
공주는 필낭을 열어 붓과 수묵통을 꺼내놓고 무학이 적으라는 대목을 간지에 일일이 적었다.
무학대사는 다시 말을 잇는다.
"제절을 만든 후에는 비스듬히 구릉을 이루면서 넓고 넓게 평지를 만들어서 순전이 길고 멀도
록 하십시오. 순전이란 것은 사람의 얼굴로 친다면, 입술 앞이란 말이올시다. 이 순전이 길고 넓
어야만 자손이 번성하고 백자천손을 둔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공주가 조용히 대답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죽은 후의 일을 환하게 보는 듯했다. 벙글벙글 웃었따. 그러나 웃는 모습은 구
슬펐다.
무학대사는 또다시 말했다.
"태상왕 전하의 백세 후에 능침을 조성하시어 재궁을 모신뒤에 능침 앞에서는 화표를 세우시
고, 문관의 모습과 무관의 형태를 화강석으로 조각해서 두 쌍씩 세우고 장명등에는 대를 받쳐두
십쇼. 그리고 석등에는 항상 불을 켜놓아야 합니다. 항상 광명을 보자는 것이지요. 다음엔 혼유석
을 좋은 돌로 택하시어 장방향으로 큼직하게 놓아두십시오."
"혼유석이란 무엇인가?"
태상왕 이성계는 처음 듣는 소리다. 무학에게 물었다.
"혼유석이란 것은 죽은 사람의 혼이 노는 곳입니다. 흔히 민간에서 무덤 앞에 놓고 제수 음식
을 차려놓는 제상으로 알기가 쉽습니다마는 이것은 상돌이 아니올시다. 제왕의 혼령이 노시는 곳
이라 해서 능침에서는 혼유석이라 부릅니다."
공주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네."
하고 대답했다. 태상왕은 감탄했다.
"아하, 제왕가에서는 상석을 혼유석이라 부르는구먼."
"민간의 상돌이 곧 혼유석이 아니올시다. 모양이 약간 비슷할 뿐 전혀 다른 것이올시다."
무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후에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러하옵고 또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장엄하고 둥그렇게 봉해진 능침이 이룩된 후에는 화강
석으로 팔각 또는 십육각을 쳐서 난간을 만들어서 조화와 미를 더하게 하시면 더한층 훌륭합니
다. 그리고 봉분 밑은 돌을 곱게 담어서 대를 모으십시오. 이것은 예장이라 해서 대신부터는 돌로
대를 쌓는 것입니다. 알아들어셨습니까?"
"알겠습니다."
공주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대답했다.
"다음에는 십이간지의 물형을 돌로 조각해서, 능침 난간밖에 알맞게 간격을 두어 배치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능의 방향을 알게 하자는 것입니다.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의
동물 형상을 그대로 조각해서 배열합니다. 자는 쥐의 형국을 조각한 것이요, 축은 소의 형상을 조
각한 것이요, 인은 범, 묘는 토끼, 진은 용의 형상입니다. 사는 뱀이구, 오는 말입니다. 미는 양이
고, 신은 잔나비, 곧 원숭이올시다. 유는 닭이요, 술은 개요, 해는 돼지올시다. 이같이 동물들의 형
국을 돌로 다듬고 조각해서 전후 좌우로 배치시킵니다. 이것이 능침에 석등을 세우는 관례요 예
법입니다. 그러한 후에는 곡장을 쌓고 능침을 보호합니다. 이것이 왕가에서 인산때 취하실 일의
하나올시다."
무학대사는 주밀하게 공주한테 일러준다.
공주는 효녀였다. 일일이 붓을 들어 적었다.
공주가 적기를 다하자, 무학은 다시 공주에게 말한다.
"또 한 가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능상에 모든 설치를 다 하신 후에는 정자각과 비각을 능침
아래 건조하여야 합니다."
"절차도 많소."
태상왕은 태연히 웃으며 탄식하듯 말했다.
무학은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절차가 참 많습니다. 이것이 인생에 대하여 마지막 가는 예요, 또 이러한 예법과 절차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만물중에 가장 귀하다는 것이 아닙니까. 말하자면 찬란한 문물제도입니다."
"정자각이란 무엇입니까?"
경순공주는 맑은 눈을 반짝이며 무학대사한테 묻는다.
"정자각이란 것은 집 형상이 고무래 정자같이 되었다고 해서 정자각이라 합니다. 말하자면, 정
자 모양으로 집을 진 것이란 말이지요. 횡 일곱 간, 혹은 아홉 간 집을 짓고, 종으로 가로 지은
집 중에 연달아서 네다섯 간 집을 짓습니다. 이것이 곧 정자각이지요. 가로 지은 집에는 산상의
능침을 바라보아, 제상을 배설해놓습니다. 상감께서 능침에 나오시어 전배하고 봉심하실 때라든
지, 제사를 지내실 때는 무덤 앞에서, 제를 지내시지 아니하고 정자각에서 지내시는 것입니다. 여
염집으로 말한다면, 곧 제청이 되는 것이올시다. 그리고 종으로 달아서 지은 집은 상감께서 드나
드는 출입구가 됩니다. 말하자면 복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제청이라기보다도 제각이로구나."
태상왕이 곁에서 말참견을 했다.
"그러하옵니다. 태상왕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면, 정자각을 지은 후에는 또 다른 비각을 지어야 합니다그려."
"그렇습니다. 비각은 비석을 세워두는 집입니다. 여기 태상왕 전하께옵서 이어해 계신데에 말씀
을 올리기 황송하오나, 글 잘 하는 문신을 시키시어 태상왕 전하의 한평생 지내신 크나큰 공적을
저술해서 글씨 잘 쓰는 명필로 글을 쓰게 한 후에 다시 이것을 비석에 옮겨 새겨서 천추만세, 뒷
사람들한테 높은 업적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올시다. 이것을 신도비라 부릅지요. 신이 왕래하는 그
길 앞에 세웠다 해서 신도비라 합니다. 그리비각은 빗돌을 보호하기 위하여 집을 지어서, 그 안에
비를 세워두는 것입니다. 빗돌을 그대로 둔다면 풍마우세해서 비석이 상하므로 이것을 막기 위해
서 비각을 짓는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경순공주는 간지에 비각 세울 것을 적는다.
"다음엔 또 한 가지, 격을 차릴 것이 있습니다."
"말씁해주시는 끝에 다 일러주십시오."
경순공주는 붓을 잡은 채 무학대사의 말 나오기를 기다린다.
무학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다음에는 능으로 들어가는 동구밖에 홍살문을 세웁니다. 홍살문은 문에 기와를 덮지 아니하고,
순전히 나무로만 만듭니다. 두 기둥을 세우고 위에는 도리를 얹고, 그 위에는 나무로 살같이 만들
어 십여 개를 세웁니다. 그리고 문에는 붉은 칠을 합니다. 그래서 홍살문이라 합니다."
경순공주는 무학을 향하여 다시 묻는다.
"홍살문은 어찌해서 세우는 것입니까?"
"그것은 잡인을 금하려 하는 까닭에 홍살문을 세우는 것입니다. 능침 수백 보밖에 홍살문을 세
워서 사람들에게 이곳에 신성한 능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건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주 끝까지 말씀해주십쇼."
경순공주는 무학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다음에는 홍살문밖에 재실을 지으셔야 합니다."
경순공주는 붓을 들어 간지에 '재실'이라고 적었다.
"재실은 크게 살림집으로 짓는데 안체와 바깥채를 구별해 짓습니다. 안채는 능침을 지키는 능
참봉의 살림집이고 바깥채는 상감께서 거둥을 하셨을 때 이곳에 임어하시어 쉬시기도 하시고 수
라도 젓수시고 의대도 제복으로 갈아입으시는 곳입니다. 그러하니 말하자면 재실은 민간으로 친
다면 묘지기 집이지요. 하하하. 그런 까닭에 홍살문서부터 능침 안에 있는 정자각, 비각들은 모두
다 제왕의 집이므로 붉고 푸른 단청칠을 해서 화려하게 만들지만, 재실만은 난청칠을 아니하고
민가처럼 흰 나무를 그대로 두어서 채색칠을 아니합니다."
무학은 말을 마치자 가볍게 숨을 쉰다.
"또 알려주실 말씀은 없습니까?"
경순공주는 다시 무학대사를 바라본다.
"인제는 능침에 대한 모든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일깨워드릴
일이 남았습니다. 이것은 더욱 명심하실일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일이란 말을 듣자 공주는 다시 붓을 잡는다.
무학대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백 년 후에는 이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납니다."
무학대사의 큰 난리가 일어난다는 말에 모두 다 얼굴빛이 변해진다.
"큰 난리가 난다니, 웬 소리요?"
태상왕은 깜짝 놀란다. 마음에 불안한 생각이 물결처럼 일어난다.
경순공주의 눈도 둥그렇게 떠졌다. 곁에 태상왕을 모시어 섬기던 상궁이며 내관이며, 대전별감
들의 얼굴에도 현저한 빛이 드러났다.
무학대사는 높다는 사람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손을 저어 말한다.
"과히 놀라지 마십쇼. 전하와 공주마마께서도 마음을 진정하시고 빈도의 말씀을 들어보십쇼.
난리가 지금 난다는 것이 아니라 이백 년후에 나는 것이니 그다지 놀라실 것은 없습니다. 그때
가서 우리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해골까지 썩어서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러나 관심을 아니 둘 수는 없습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큰일이니까요."
무학대사는 말을 마치자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일이 달렸다는 무학의 말에 태상왕은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할 수 없었
다. 용안엔 여전히 놀라운 표정을 짓고 무학에게 묻는다.
"아무리 죽어서 세상 일을 모르게 되고 해골이 삭아서 재가 되는 이백 년 후의 일이라 하나,
지금은 살아서 국사의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할 수 없구려. 이것이 아마 살아 있
는 이상 아니 끌릴 수는 없는 인정인가보오. 그래 이백 년 후에 어떠한 난이 일어나겠소?"
"내란이 아니라, 외환입니다. 밖에서 적이 침범해 들어와서, 십 년 가까운 큰 전쟁이 일어날 것
입니다. 그러나 국운은 확실히 오백 년 이상을 넘어가게 되니, 비록 십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전하의 후손은 계속 왕위에 나가실 터이니 큰 염려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십 년 가까
운 전쟁통에 사람들은 기막힌 고생을 많이 당해야 될 것입니다."
경순공주가 묻는다.
"앞으로 이백 년 후에 일어날 이 난리로 인해서 지금 치표해두는 아바마마의 산릉은 아무 탈이
없겠습니까?"
"네, 공주마마. 잘 하문하셨습니다. 그때 가서 큰 난이 일어나게 되면, 잠시 삼천리 강산에 적이
충만할 것입니다. 사람이 무척 죽고 서울 도성 안은 텅 비어서 적병들의 소굴이 되고 말 것입니
다. 대왕마마의 만년유택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방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학대사의 말을 듣자 태상왕과 경순공주는 비로소 황연히 깨닫는다.
무학대사가 능을 조성하는 분별을 하다가 이백 년 후에 난리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그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경순공주는 손을 모아 무학대사한테 합장을 올린다.
"사부님께서 아바마마를 위하시어 멀리 생각하시는 높고 갸륵한 그 뜻을 비로소 짐작하겠습니
다. 사부님, 그렇다면 좋은 방도를 밝게 가르쳐주시옵소서."
공주는 지극한 정성이 넘쳐 흐르는 태도로 무학대사를 향하여 아바마마의 능침이 무사하도록
해달라고 간곡하게 청했다.
"공주마마, 앞으로 이백 년 후에 태상왕 전하 능침에 적병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려면,
꼭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무학은 석장을 짚고 공주를 향하여 말한다.
공주의 눈이 초롱거려 빛난다.
"적병이 능침 안에 발을 못들여놓을 방법이 있다면, 곧 가르쳐주시옵소서. 상감과 조정에 대대
로 전해서 적의 진흙발길이 능침에 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겠소이다. 어떤 방법이오니까?"
태상왕도 관심이 컸다. 무학이 말한다.
"함경도 함흥에는 갈대가 많이 납니다. 서울 부근에도 갈대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함흥에서 나
는 갈대같이 기운차고 씩씩하고 무성하지 못합니다."
무학이 말하는 갈대 소리에 태상왕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별안간 갈대 이야기는 왜 하오?"
"다 까닭이 있습니다. 들어보십쇼."
무학은 눈을 찡긋해 웃고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러나 함흥 갈대는 태상왕 전하께서도 소시 때부터 보시어 잘 아시겠지만 키가 한 길이 넘
고, 대가 실합니다. 꽃이 피면 그야말로 천하장관이지요. 그대로 서리가 온 듯 하얗습니다."
"함흥 갈대야말로 갈대 중의 왕이지. 한양 부근의 갈대에 견줄 것이 아니거든!"
태상왕은 무학의 말에 맞중구를 쳤다. 이백 년 후의 적병의 발길이 산상 능침 안에 못들어오도
록 만들어놓겠다면서 무학대사는 갈대 타령을 하고 있으니 싱겁기 한량없다.
공주는 까만 눈동자를 깜박이면서 무학에게 다시 묻는다.
"이백 년 후의 아바마마의 능침에, 적의 진흙발길이 못들어도록 하신다면서 함흥 갈대 말씀을
하시니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하하하 공주마마, 그러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빈도가 실지로 갈대의 효능을 가르쳐드릴 터이
니 잠깐만 기다리십쇼."
무학은 산상에서 사면을 둘러보다가 번쩍 석장을 들어 중랑개 앞에 질펀하게 열ㄹ진 한 곳을
가리켰다.
이때 해는 석양으로 기울기 시작해서 서편 산에는 붉은 낙조가 ㅏ란하게 비쳤다.
"자아, 저 질펀하게 탁 틘 개울 옆을 바라보십쇼. 경치가 어떻습니까?"
무학대사는 일부러 '경치'라고 말했다.
공주와 태상왕은 무학대사가 가리키는 석장 끝을 바라본다.
질펀한 갈대밭에는 눈같이 흰 갈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서 바람에 흔들거리는데 마침 서산
낙일 떨어지는 낙조의 찬란한 홍광을 받아서 십만 대병의 서리 같은 창과 칼이 햇빛을 받아 번쩍
거리는 듯했다.
"좋다!"
태상왕은 손뼉을 치면서 큰 소리를 내어 감탄했다.
"좋습지요?"
무학은 태상왕의 용안을 바라보며 벙글벙글 웃는다.
"참, 좋구려!"
태상왕은 또한 미소를 지었따.
공주는 아직도 까닭을 몰랐다. 다만 눈에, 눈같이 흰 갈대꽃이 일망무제 아름다운 경치를 이룬
것으로만 보였다.
더구나 무학대사는 아까 '자아, 저 질펀하게 탁 틘 개울 옆을 바라보십쇼. 경치가 어떻습니까?'
하고 경치타령을 한 때문에 공주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름답게 눈같이 흰 갈대꽃의 장관이 비쳐
질 뿐이다.
공주는 어리둥절하며, 한동안 아바마마와 무학의 감탄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무학한테
묻는다.
"머리가 둔한 탓인지 갈대와 적병과의 관계가 어찌 되는 것을 모르겠습니다."
공주의 말을 듣는 태상왕은 껄껄 웃었다.
"그럴 것이다. 너는 규중 처녀로 곱게 자라나다가 이내 시집을 갔으니 ㄱㄴ사와 전쟁에 대한
일을 알 리가 없을 것이다. 자아, 보아라. 저기 저 갈대꽃은 멀리서 보면 마치 천병만마의 군사들
이 서리 같은 창검을 들고 호위하고 서 있는 것 같단 말이다. 그러하니, 무학대사는 함흥에 있는
좋은 갈대를 이곳으로 옮겨 심어서 산릉을 갈대로 덮어둔다면 이백 년 후에 설혹 적병이 침범해
들어온다고 해도 이곳에는 감히 가깝게 오지 못할 것이란 말이다. 이것은 병법에, 의심스런 의병
을 두어서 적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단 방법의 하나이다."
아버지 태상왕의 설명하는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있던 공주는 비로소 황연히 깨달았다.
"이제야 비로소 사부님의 깊으신 뜻을 알았습니다. 잊지 말고 능침을 모신 후에는 꼭 함흥 갈
대를 서울로 올려가다 심도록 하겠습니다."
"인력이 많이 들 거야."
태상왕이 탄식조로 말했다.
무학은 또 한 번 껄껄 웃었다.
"함흥서부터 이천 리나 되는 길에 갈풀을 운반해오자면 미소바리에 실어와야 할 테니 사람의
힘만이 아니고 말과 소도 수백 피 내지 수천 필이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방법이 있
지요."
무학은 또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좋은 방법이라니 어떻게 인력과 마소를 과히 움직이지 아니하고 간단하게 갈대를 함흥서부터
한양까지 옮겨올 방법이 있단 말인가?"
"네, 그러합니다."
무학은 여전히 빙긋 웃고 대답했다.
태상왕은 힘을 과히 아니 들이고 함흥 갈대를 한양으로 운반해 올 수 있다는 무학의 말에, 마
음이 바싹 당겼다.
"어떤 방법을 쓰면 인력과 우마의 힘을 과히 들이지 아니하고 함흥 갈대를 고스란히 한양까지
운반해올 수 있겠소?"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무학은 힘 안들이고 수월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만만한 모양이다.
"어쩐 그리 대답이 너무나 간단하오. 떼 대신 갈대로만 캐온다면, 적어도 몇십만 장은 가져야
이 근처를 갈대로 덮을 텐데, 국사는 너무나 수월하게 대답하는구려."
"소승이 비록 불민하오나 어찌 계획과 자신이 없이 아롸겠습니까. 확실히 함흥 갈대를 하룻밤
하루 낮에 번개치는 한양으로 운반해올 자신이 있습니다."
희한한 소리다. 무학은 하룻밤 하루 낮에 함흥 갈대를 한양으로 옮겨올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하룻밤 하루 낮에 번개치듯 운반해올 자신이 있단 말요? 과연 대단한 수단이구려. 어디 한번
방법을 들어봅시다."
"어렵지 아니합니다. 함경감사와 강원감사와 경기감사한테 한 말씀만 내리시면 됩니다."
"한 말씀이라니?"
태조는 무학에게 물었다.
"삼도 감사한테, 함흥 갈대를 한양까지 옮길 터인데 소바리와 마바리에 실리지 말고, 한간통마
다 사람 한 명씩을 세워서 팔밀이로 나르라고 분부를 내리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함흥서부터 사
람들은 경기도까지 한 간에 한 사람씩 섰을 것이고, 이같이 해서 사람들이 삼도에 쭉 늘어선다면
하룻밤 하루 낮에 갈대는 번개치듯 이곳 산릉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무학의 말을 듣는 태상왕 이성계는 무릎을 쳤다.
"과연 국사다운 슬기외다."
여페서 듣고 있던 경순공주는 태상왕과 무학의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자, 비로서 모든 뜻을 알
아들었다.
태상왕은 공주를 향하여 말씀했다.
"적는 김에 갈대 옮기는 방법도 적바림해두어라."
경순공주는 아바마마의 명을 받아 함흥서 갈대 옮기는 방법을 적다가 홀연 생각이 났다.
태상왕을 향하여 샛별 같은 눈을 반짝이며 아뢴다.
"아바마마께 불효막심한 말씀을 한 마디 아뢰겠습니다."
"네가 불효될 일을 할 리가 있느냐.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해보아라!"
"지극히 황송하오나 이백 년 후의 일을 방비하기 위하여 지금 의논들을 하시는 모양인데, 이백
년까지 자손이 착하고 어질어서 부조가 내리신 유지를 잘 받드는 자손도 있고, 불행해서 그렇지
못한 자손도 있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하니 다시들 좀 생각하셔야 할것입니다."
태상왕의 옆에서 공주의 말씀을 듣고 섰던 무학대사는 공주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옳습니다. 공주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산릉을 자리잡는 모든일이며 갈대를 옮기는 방법을
오늘 소승이 아무리 소상하게 적어둔다해도 어진 자손들은 잘 보관했다가 유지대로 봉행하겠지
만, 혹시 정성이 부족하든지 뜻밖의 일이 생겨서 방법과 지시를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면 아무리 글발로 적어둔다 해도, 헛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경순공주의 말씀도 옳습니다."
태상왕도 무학의 설명하는 말을 듣자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따님 공주를 귀엽게 바라본다.
"네 말도 옳은 말이다."
공주는 까만 눈을 반짝인다.
"아바마마와 스님께 아룁니다. 자식의 도리에 이런 말씀을 아뢰기 극히 황공하오나 아바마마의
만년유택을 꾸미는 것은 아바마마께옵서 친히 보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스님께옵서
계신 김에 분금을 놓는 치표 자리도 단김에 아주 산릉을 이루어 능침을 보해두는 것이 어떠하겠
습니까? 다만 정자각, 비각, 문무석, 혼유석, 장명등, 십이간지 김승들의 조각만 만세 후에 조성하
기로 하고."
무학은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좋습니다. 공주마마의 말씀이 가장 지당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묻힐 땅을 내 손으로 역사를 하란 말이냐. 하하하."
태상왕은 말을 마치자 드높게 웃었다. 허파에서 터져나오는 허무를 느끼는 가락 높은 웃음소리
다. 그러나 자기의 묻힐 땅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인생의 황혼길로 쓸쓸
하게 걸어가는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일도 되는 것이다.
역시 욕심이다.
"그렇다면, 아주 겉으로 무덤도 만들어놓고, 함흥에 있는 갈대도 곧 옮겨오기로 합시다. 인생은
무상한 것, 언제 또다시 국사를 만날 수 있겠소. 국사가 하산한 김에 모든 일을 아주 끝마쳐봅시
다 그려, 하하하."
태상왕 또 한 번 가락 높은 웃음을 껄걸 웃었다.
"그러면 지금 불러온 동네 일꾼들만 가지고는 일이 아니됩니다. 빨리 한양으로 사신을 보내서
정승 하윤을 명소하옵소서."
"스승님 말씀이 옳습니다."
경순공주도 정승 부르는 것을 찬성했다.
태상왕은 늙은 내시한테 영을 내렸다.
"너는 곧 한양으로 들어가 정승 하윤을 불러라. 나는 이곳에서 국사와 공주와 함께 불가불 며
칠 더 유할 수밖에 없다."
늙은 내시는 태상왕의 영을 받들어 급히 한양으로 말을 달렸다.
태상왕과 공주와 무학대사는 내관을 한양성중으로 들여보낸 후에 곧 검암산 아래 구리면으로
내려왔다.
동네 백성의 집들이 발끈 뒤집혔다.
태상왕 전하가 국사와 공주와 함께 민가로 왕림하셨으니 동네 백성들은 어찌 지공해야 할지 당
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장은 풍헌의 집으로 달음질치고 한편 약정의 집으로 기별을 보냈다.
이장과 풍헌이 갓을 쓰고 동구로 나와서 태상왕 전하께 배알을 하고 일행을 사랑방이 있는, 동
네에서 제일가는 부유한 집으로 모신흐에 사람을 띄워 양주목사한테 기별했다.
양주목사는 경기감사한테 고하고 경기감사는 조정에 기별했다.
다시 급히 말을 달려 망우리를 지나 검암산으로 달렸다.
한산하기 짝 없던 검암산 아래 있는 양주 구리면은 별안간 열뇨했다.
양주목사가 태상왕께 문안을 드리러 나오고, 한양에서는 정승 하윤이 태상왕 전하의 명소를 받
고 파초선을 받아 벽제를 치면서 동구 안으로 들어섰다.
근기의 수도를 보호하고 있는 제일 가는 양주목사 한 사람만 움직여도 위의와 길호사가 대단해
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되는 판인데 황차 더한층 높은 경기감사가 오고 그 위에 또
영의정이 나오게 되니 온 고을과 동리는 번화하기 짝이 없었다.
구리면 한 동네는 말할 것도 없고 양주 일판이 뜨르르 했다.
양주목사와 경기감사가 어전에 나가 문후를 올린 후에 영의정의 행차가 동구 안에 당도되어 전
하 앞에 부복했다.
"돌연 미복으로 행차한 때문, 기별을 받지 못하와 죄송하기 짝이 없사옵니다. 굽어 통촉이 계시
기 바라오."
하윤은 정부를 대표해서 백배사죄를 드렸다.
태상왕 이성계는 용안에 웃음을 머금어 대답한다.
"거둥을 하면 번폐스러워서 알리지 않기로 했는데 어제 부득이 정승을 아니 부를 수 없어 청했
더니, 양주목사와 경기감사까지 움직였으니 도리어 백성들한테 미안하기 짝이 없소."
태상왕 이성계는 진심으로 안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공하신 처분이올시다. 삼천리 조선 땅이 다 전하의 왕토올시다. 전하께서 이곳으로 오시라면
오시겠습니까. 백성들은 황공 감격하와 일대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분부는 거두시는 것
이 가합한 줄 아뢰오."
정승 하윤은 부복하여 은근히 대답을 올렸다.
하윤의 말이 끝나자 태상왕 이성계는 다시 하윤을 향하여 분부를 내린다.
"내가 오늘 정승을 청한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나의 백년유택을 의논해서 정하려는 것이오."
정중하게 말하는 태상왕의 용안에는 추연한 빛이 감돌았다.
"예, 성려를 짐작해 알겠습니다. 어디 좋은 곳을 정하셨습니까?"
정승 하윤이 방다닥에 손을 지고 대답해 아뢴다.
"무학국사를 청하여 양주 검암산 아래 좋은 묘자리를 한 곳 정하였소. 정승은 풍수에 대하여
깊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니 함께 올라가 풍수를 의논해봅시다."
"소신이 감히 무엇을 아오리까. 국사가 이미 좋다 했다면 다시 더 간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국
사는 당금에 있어서 천하의 제일인자올시다."
하윤의 말을 듣는 무학대사는 노안에 웃음을 띠어 말한다.
"하정승 대감께서는 문학뿐 아니라 지가서에도 깊은 공부를 하셨습니다. 수고스럽습니다마는
한번 살펴주기 바라오."
"원래 만년유택은 추호만큼도 미흡한 점이 없도록 결정해야 됩니다. 한 번 큰 역사를 일으킨
후에 다시 변동하기는 극히 소중한 일이오니 소신이 비록 잘 알지 못하오나 치표할 자리를 한번
우러러 배관하겠습니다."
"자아, 그럼 함께 산으로 오르기로 합시다."
태상왕은 말을 마치자 친히 앞장을 서 일어났다. 하윤이 고한다.
"전하께옵서는 앉아 계시옵소서. 옥체 피곤하시옵니다."
"천만에, 나보다 나이 많은 국사를 금강산에서 청해왔는데 내 어찌 피로하다 하겠소. 더구나 나
를 위하여 여러 사람들이 수고하는데 내 어찌 관심치 아니하겠소."
다시 더 태상왕을 만류할 사람은 없었다.
태상왕은 연을 타고 산으로 올랐다.
경순공주가 머리 깎고 장삼 입은 여승의 복색으로 어가 앞에 나타났다. 가만한 음성으로 태상
왕께 아뢴다.
"소녀는 정승이 있으니 산상에 아니 오ㄹ습니다. 아까 무학국사가 부르시고, 소녀가 받아 써서
적바림했던 기록을 아바마마께 바치오니 이대로 능상을 꾸미라고 분부를 내리옵소서."
공주는 말을 마치자 소매 속에 적바림한 발기를 꺼내서 태상왕께 올린다.
태상왕도 공주의 심경을 짐작해 알았다. 공주는 이간남자인 정승 하윤을 대할 필요도 없지만,
하윤의 꾀로 남편 이제를 죽였으므로 원수간이 된 사람이다.
하윤은 이숙번과 함께 방원을 도와서 방석, 방번, 이제를 해친 장본이었다.
"그렇게 하라."
아무리 불제자라고 하나 하윤을 대해보기 싫어하는 경순공주의 심정을 아버지 태상왕은 잘 알
고 있기 때문이다.
경순공주가 태상왕께 능침 꾸밀 발기를 바치고 어가 앞에서 물러난 후에, 일행은 산에 올라 무
학이 잡은 치표 자리앞에 나타났다.
"어떠하오?"
태상왕은 정승 하윤에게 묻는다.
하윤은 대답 없이 치표 자리에서 거슬러 올라가, 산을 타기 시작했다.
한 식경이 지난 후에 하윤는 다시 내룡을 타고 내렸다.
"둘이 있을 수 없는 천하의 대지올시다."
하윤의 얼굴에는 감탄하는 빛이 흘렀다. 계속해서 말한다.
"무학국사가 잡은 터이오니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태상왕의 얼굴엔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아 그럼 이곳을 나의 만년유택으로 정할 작정이오. 영의정도 찬성하니 나의 마음이 가볍소."
"찬성뿐이 아닙니다. 앞장서서 꼭 쓰시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아직 국사가 살아 있고, 영상이 나와 있는 이 기회를 타서 내일부터라도 산역을 시작할
작정이오. 내 눈으로 나의 묻힐 땅을 보자는 것이지, 하하하."
태상왕은 하윤을 향해 드높게 웃었다.
"옛 어른들은 그렇게들 하셨습니다. 내일아리도 곧 산역을 하시라고 상감께 아뢰겠습니다."
내일이라도 곧 산역을 시작하도록 상감께 아뢰겠다는 말을 듣고 태상왕은 더욱 만족했다.
태상왕은 곁에 있는 무학국사를 돌아보면서 정승 하윤에게 분부를 내린다.
"그렇다면 정승은 오늘로 곧 서울로 들어가서 무든 주비를 차리오. 나는 무학국사와 함께 이곳
에 있어서 산역하는 일을 구경하겠소. 이번에 무학국사가 산으로 들어간다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니, 아주 무학국사를 모신김에 산역을 끝낼 작정이오."
"성의를 짐작하겠습니다. 곧 봉명하와 내일부터라도 손을 대겠습니다."
하윤은 말을 마치자 태상왕과 무학국사와 함께 산에서 내려 임시로 정해논 행재소로 돌아온 후
에 곧 한양으로 향하여 대궐로 들어가 상감을 뵈었다.
태종은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하윤을 입대시켰다.
"태상왕 전하께서 무슨 하명이 계시어 정승을 부르셨소?"
하윤이 태상왕의 소명을 받아 간 후에 태종은 무한 궁금했던 것이다.
하윤은 숙배를 올린 후에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고 아뢴다.
"태상왕 전하께서는 전하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과인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시다니 무슨 좋은 일을 하셨소?"
"양주 검암산 아래에 기가 막히도록 좋은 대지를 정해놓으셨다는데, 소신이 소명을 받자와 간
심하오니 과연 참 천하대지올시다."
태종은 아버님 되시는 태상왕 전하가 만년유택을 정했다는 말을 듣고, 늙으면 산소 자리까지
정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제 아바마마는 무한 부드러운 아버지가 되었다.
자기를 죽이려 하지도 아니했다. 자기를 원망하지도 아니했다. 방석과 방번을 생각하지 않는 것
은 아니지만 이제 자기를 원수같이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모든 옛날을 체념한 모양이다. 이것이 피와 갈과 뼈가 같은 부자간의 골육의 정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태상왕 전하께서 만년유택을 정하셨다는데 내가 어찌 편안하게 말만 듣고 앉아 있겠소. 내일
이라도 곧 봉심하러 나가야 겠소."
하윤은 태종의 말씀을 듣고 감격했다. 속으로 이제는 이씨 집안도 되어가는구나 하고 흡족한
생각이 들었다.
"전하께옵서 그같이 생각하시니, 만백성은 전하의 효심을 찬양할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옵서 친
림하시어 산릉 역사를 시작하신다 하오면 태상왕 전하도 기뻐하시려니와 전하의 효심은 온 나라
의 백성들이 칭송할 것입니다."
하윤의 아뢰는 말씀을 듣고 태종은 만열의 느낌을 가졌다.
"내일 일찍이 거둥령을 놓아 곧 봉심학로 정승이 정원에 영을 내리오."
하윤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몸을 굽혀 국궁하고 이뢴다.
"민초들이 모두 다 감격할 것입니다. 봉심뿐이 아닙니다. 이미 정해논 천하대지이오니 친히 역
사를 시작하옵소서."
"아직, 아바마마께옵서 생존해 계신데, 자식으로서 산릉 역사를 시작한다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
고 미안스런 일이 아니겠소?"
하윤이 다시 아뢴다.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올시다. 생존해 계시는 중에 만년유택을 완성하는 일은 도리어 부모
의 마음을 위안해드리는 일이옵니다. 정성스럽게 산릉을 봉하는 일을 목도해서 보시도록 하는 일
이니 태상왕 전하께서는 크게 안심이 되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내일 정승과 함께 양주로 나가서 태상왕 전하께 문안도 드릴 겸 곧 산역을 개시하
도록 합시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선공감에 기별하여 모든 장인들에게 대기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정승 하윤이 곡배를 드리고 어전에서 물러나려 할 때, 태종은 다시 하윤을 불렀다.
"경에게 다시 한 마디 물어볼 일이 있소. 아까 경이 말하기를, 태상왕 전하께서는 전하를 위하
여 좋은 일을 하셨다고 말한 일이 있소. 나는 아직껏 경의 말뜻을 터득하지 못하겠소. 태상왕 전
하께옵서 친히 산릉을 정하시는 일이 과인한테 무슨 좋은 일이 된다는 말씀이오?"
태종은 간곡하게 하윤에게 물었다. 태종의 묻는 말씀을 듣자, 정승 하윤은 또 한 번 부복해 아
뢴다.
"태상왕 전하께서 만년유택을 정하신 천하대지는 태상왕 전하의 백세 후의 백골을 편안케 할
뿐 아니라, 자손 백대의 국가 기업을 튼튼하게 할 명당 자리올시다. 그러므로 소신은 태상왕 전하
께서는 좋은 일을 하셨다고 아까 아뢴 것이올시다."
하윤의 말을 듣는 태종은 용안에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말하자면 크게 발복할 땅이란 말이로구려."
"발복할 정도가 아닙니다. 이 능을 모신 후에 전하의 자손은 오백여 년의 기업을 계승하실 땅
입니다. 그리하옵고 몇 해 아니 가서 왕실에는 대성인이 한 분 나타나실 것입니다."
태종은 하윤이 지가서에 대하여 밝은 것을 잘 안다. 더구나, 무학이 능지를 잡았다 하니 더 생
각할 나위가 없었다.
왕실에 큰 성인이 나온다는 말에 태종은 입이 저절로 활짝 벌어졌다.
"큰 성인이 나온다?"
"그러하오이다."
"알겠소. 오백여 년의 기업은 튼튼하겠구려."
"그러합니다. 고려왕실보다도 연조가 더할 것입니다."
"다른 재앙은 없겠소?"
"이백 년 후에 칠년국난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겁기가 스러진 후에는 다시 태평세월이 될 것입
니다."
태종은 욕심이 움직였다. 무릎을 내밀어 다시 하윤에게 묻는다.
"겁기를 예방할 수는 없겠소?"
"천기운기에 정해진 것을 어찌 감히 인력으로 막겠습니까. 만약 겁기를 막는다고 딴재주를 부
리다가는 도리어 큰 해를 당할 것입니다. 하늘이 정한 수를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가 없습니
다."
"알아듣겠소. 내일 일찍 동가하기로 합시다."
하윤은 어전에서 물러나 빈청으로 향했다.
"선공감에 기별하여 석수와 목수와 미장이를 등대시키고 백관에게 영을 내려 양주행차에 배종
할 태세를 취하라."
정원에서는 밤을 도와 거둥준비에 바쁘고 선공감은 장인들을 밤새도록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
서, 양주로 향할 길짐을 싸게 했다.
날이 밝자, 태종은 백관을 거느려 양주 검암산 태상왕의 행재소로 향하여 나갔다.
태종은 태상왕께 절할여 뵙고 문안을 들ㅆ다.
산릉 역사를 하러 정승 하윤만 나올 줄 알았던 태상왕은 상감이 나올줄은 생각하지 아니했다.
"어찌해 나왔소?"
오래간만에 아버지가 아들 상감한테 건네는 대화였다.
"아바마마께옵서 만년유택을 정하시어, 산릉 역사를 하시겠다 하니 소자가 어찌 편안히 앉아
있으로리까. 문안 겸 봉심하러 나왔습니다."
태종은 간곡하게 아뢴다.
태상왕은 '방원이도 역시 자식은 자식이로구나!' 하고 마음 속으로 깊이 느꼈다.
태상왕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여 태종이 아뢰는 말씀에 대답하고 곁에 모시어 서 있는 무학대사
한테 분부했다.
"상감이 나왔으니 국사는 정승과 함께 산에 올라 역사할 곳을 가르쳐주오."
무학은 태상왕 전하의 명을 받고 태종의 앞으로 나가 문후를 드린다.
"소승 무학은 삼가 전하께 알현드리오."
무학은 허리를 굽혀 합장했다.
"국사를 대한 지 과연 오래요. 금강산에 드시어 맑은 덕을 닦는다는 말씀 듣고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였소. 이번에 또다시 아바마마를 위하시어 이같이 왕림하셨으니, 과인은 무어라고 국사의
은공을 치하하리까. 감사한 마음 이루 말씀드릴 길 없소."
태종은 무학대사한테 존대하는 말을 써서 깍듯이 국사 대접을 했다.
"깊고 깊은 두 분 전하의 돌보아주시는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사오리까. 그저, 왕은에 감복할
뿐이옵니다. 지난번에 태상왕 전하께옵서 친히 공주마마를 금강산까지 보내시어 빈도를 부르시니
소승이 비록 노쇠하였으나, 어찌 왕명을 어기오리까? 만년유택을 소승의 손으로 정해드리고 나니
어깨가 사뭇 가볍습니다. 전하께옵서는 효심이 두터우사, 이같이 능침 일로 동가까지 하시니, 소
승은 감읍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무학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합장을 올렸다.
전 밖에서 하윤이 내시를 통하여 상감께 아뢴다.
"무학국사를 대동하시고 친히 산상에 올라, 치표하는 것을 간심하시고 환궁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오."
태종은 내시의 아뢰는 말을 듣고 무학을 돌아본다.
"국사, 아바마마의 만년유택을 정하신 것을 간심하겠소이다. 앞서서 지시해주시기 바라오."
무학과 태종은 태상왕께 배례를 드린 후에 산상으로 올랐다.
태종은 검암산에 당도하여 무학이 지적하는 치표 자리를 바라보았다. 과연 훌륭한 명당 자리다.
산은 첩첩 욱여들고, 물은 굽이굽이 다정하게 윤기를 뿜어 흘렀다.
정승 하윤을 통하여 지덕을 들었던 곳이다. 다시 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역사를 시작하오."
태종은 장중하게 한 마디 허락을 하윤에게 내렸다.
산역은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시작되었다.
광중을 파고 능침을 짜기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서수가 문무석과 장명등이며 혼유석을 다듬기 시작하고, 한편에서는 목수가 정자각
이며 비각 지을 재목을 깎았다.
함경감사한테는 팔밀이로 급히 갈대를 올기라는 기별을 했다.
갈대는 함경도 이천 리 길에서 줄을 지어 옮겨졌다.
함흥서부터 한간통에 한 사람씩 열을 지어 서 있는 사람들은 함경, 강원, 경기 삼도 백성들로서
고을마다 늘어섰다.
사람의 수는 십만 명이 넘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조금도 힘이 들지 아니했다.
갈대풀을 받아 넘기기만 하면 그만이다.
갈대는 순식간에 지체없이 넘겨졌다.
양주 검암산 아래서 이 모양을 바라보는 태상왕은 만족한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정승 하윤과
무학국사를 향하여 말한다.
"무학국사의 깊고 넓은 포부는 늙는 것이 아깝소. 함흥서 갈대를 옮기겠다 하기에, 나는 마음으
로 무한 걱정했더니, 오늘 이같이 수월하게 일이 될 줄은 과연 몰랐소."
태상왕은 무학국사의 슬기로운 머리를 감탄했다. 늙는 것이 아깝다고 말한다.
"제일 좋은 것은 백성들의 원성이 없어서 좋습니다. 아무리 창업지주이신 태상왕 전하의 만년
유택을 꾸미기 위하여 옮기는 갈대라 하나, 함흥서부터 마바리와 소바리에 실어온다면 사람의 힘
이 얼마나 소비되며, 비용인들 오죽 나겠습니까. 기막힌 슬기올시다."
하윤도 무학국사를 칭찬했다.
"전쟁 때, 군사들이 식량을 운반할 때라든지, 새로운 병기를 군사들한테 나누어줄 땐 이 방법을
쓴다면 사반공배가 됩니다. 병가에서도 항상 주의하면서 이 방법을 쓰시기 바랍니다."
무학이 웃으며 말한다.
태상왕은 또 한번 무학을 칭찬한다.
"내가 젊었을 때, 바다 도적과 산골 도적을 막아 싸웠소. 그때 이 방법을 썼더라면 얼마나 일이
더 간편했겠소. 앞으로는 비변사에 말해서 이 방법을 쓰라 하겠소."
멀리 토성 밖에서 갈대풀을 옮기는 광경을 바라보는 경순공주도 미소를 띠어 감탄했다.
함흥서부터 쏜살같이 몰려드는 갈대는 저녁때가 채 못되어서 건원릉 안에 뿌듯하게 심어졌다.
낙조를 받는 저녁 언덕은 마치 천군만마의 군졸들이 서리 같은 칼과 창을 뽑아들고 질서정연하게
능침을 호위하고 있는 듯했다.
이백 년 뒤에. 왜적들이 쳐들어 왔다가 갈대꽃을 바라보고, 능상으로 범해 오르지 못하는 그 모
습이 눈앞에 환하게 나타났다.
무척 안심이 되었다. 아바마마의 만년유택에 털끝만한 유감이 없게 된 것이 무한 기뻤다. 단지
한 분 남아 있는 아바마마, 이분의 백 년 후의 해골이 아무 장해도 받지 않고 무사하게 지나게
되기만 소원이었다.
경순공주는 어머니 강비의 능침도 아바마마의 만세 후에는 이곳으로 합장을 해 모셨으면 얼마
나 좋으랴 하고 생각했다.
갈대풀까지 옮겨지는 것을 본 태상왕은 이제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은 후에 묻혀질
땅까지 정해놨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멀리 안산을 바라본다. 무학과 함께 산소 자리를 정한 후에 열 번 스무 번 바라보던 안산이다.
산천이 명미하고 앉은 자리가 반듯해서 단정하다. 이성계는 자기가 묻힐 산소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만일 자기가 묻힐 이 산소 자리에 아무런 변동이 없다면, 자기 자신의 해골은 날마다 밤마다
그리고 또 그 다음날, 그 다음날, 십 년, 백 년까지 시시 때때로 대해보고 있을 그 안산이다.
태상왕은 건너편 안산에 올라 이편을 바라보고 싶었다.
태상왕은 역사를 살피고 있는 무학과 하윤을 불렀다.
"국사, 하정승과 함께 이리 가까이 오시오."
무학은 하윤과 함께 어전으로 갔다.
"무슨 하교하실 말씀이 계시오니까?"
태상왕 이성계는 손으로 멀리 안산을 가리켰다.
"이미 산역도 시작되었고 세상에서 나의 할 일은 이제 다한 것 같소. 저기 저 안산에 올라 이
편을 바라본 후에 모든 세상 번뇌를 씻으려 하오. 국사는 수고스럽겠지만 하정승과 함께 등반해
서 안산으로 올라가봅시다."
무학은 생각했다.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구나'하고 탄식했다.
"안산에 오르셔서 이편 산세를 다시 한 번 살피려 하십니까? 좋습니다. 모시고 가겠습니다."
무학은 말을 마치자, 석장을 짚고 앞으로 나섰다. 하윤도 태상왕의 뒤를 따랐다.
내관과 나인들이 태상왕의 어전에 나타났다.
"옥교를 타옵소서."
"안산까지 몇 리나 되느냐?"
"오 리도 채 못되옵고 삼 마장쯤 된다 하더이다."
"그래, 삼 마장쯤 되는 것을 타서 무얼 하느냐. 젊었을 때는 몇백리도 걸었는데 삼 마장쯤 되는
곳을 타고 갈 것이 있느냐. 걸어가기로 하자."
태상왕 이성계는 말을 마치자 무학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건원릉의 안산은 바로 지척의 눈앞에 있었다.
무학이 먼저 오르고 태상왕이 뒤따르고, 하윤이 맨뒤에 올랐다.
이때 날은 청명하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맞은편 검암산 아래 역사를 하는 건원릉 자리가 그림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산에는 서기가 뻗치고 무덤을 조성하는 분상 자리에는 양지가 발라서 양기가 모락모락 안개 일
듯 일었다.
저편에서 이편 안산을 바라보니, 그림보다 더 아르다웠는데, 이편에서 저편 능침 자리를 바라보
니, 더한층 아름답고 묘했다. 천하의 절경일 뿐 아니라 양기와 복기가 소복하게 쌓여서 감돌았다.
여기다가 함흥에서 팔밀이로 옮겨온 갈대꽃은 천병만마가 능침 전체를 보호하여 서리 같은 검극
이 능상을 휩싸안았다.
"좋다!"
정승 하윤이 무심고 큰 소리로 산릉을 바라보면서 무릎을 친다.
"좋은가?"
태상와 이성계의 입이 벙글벙글 벌어지며 하윤에게 묻는다.
하윤은 비로소 태상와의 어전인 것을 깨달았다.
"황공무지하오이다. 너무나 좋아서 어전인 것도 잊어버리고 큰 소리를 질러 무릎을 쳤사오니
죄당만사올시다."
"정승은 별소리를 다 하는구려. 좋은 것은 좋다 하고 나쁜 것은 나쁘다 하는 것이 무슨 허물이
된단 말이오. 자아, 산세가 저러하니 오백 년은 가겠지."
"오백 년이 무엇입니까? 육칙백 년은 갑니다."
"사람의 해골이 오륙백 년만 가면 다 삭아서 재같이 되렷다!"
"삼백 년만 되면 흙과 같이 됩니다. 그러하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올시다."
무학이 대답한다.
"그렇다면, 나는 몇백 년 후에도 별일 없이 해골마저 탈이 없겠구려."
"그러하옵니다. 잠깐 횡액수가 계실까 하여 함흥 갈대를 옮겼으니 이제는 앞으로 횡액수도 없
을 것입니다. 아주 마음을 놓십쇼. 백팔번뇌를 잊으시란 말씀입니다."
무학이 또 대답한다.
"여보, 국사!"
태상왕은 무학의 얼굴을 바라본다.
"말씀하옵소서."
"모든 일이 잘되어서 좋은데, 한 가지 원이 있소."
태상왕 이성계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는 듯 애원조로 들렸다.
"무슨 원이오니까?"
무학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다.
"나의 무덤을 쌍광으로 파서 돌아간 강후와 해골이 함께 지내기로 하면 어떠하겠소?"
무학은 얼른 대답하기 어려웠다. 주저하고 있을 때, 정승 하윤이 말을 부드럽게 하여 고한다.
"좋은 일이기는 합니다마는 이 산은 단장지지올시다. 쌍광은 불가합니다."
앞일을 바라보는 하윤이었다. 금상인 상감이 태상왕과 강후를 함께 장사지내지 아니할 것을 잘
아는 때문이다.
뿐만아니었다. 만약 쌍광을 파서 치표한다면 당장 태종 이방원은 반대를 할 것이 분명했다.
하윤은 또다시 일이 없도록 만들기 위하여, 이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단장지지라는 판정을 내
렸다.
하윤의 말을 들은 태상왕은 무학을 다시 바라본다.
"확실히 단장지지인가?"
무학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승이다. 태종과 강후 사이가 사후까지 불목인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예, 그러하오이다. 단장지지올시다."
무학은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죄가 되지 않을 것을 잘 아는 때문이다.
태상왕은 하는 수 없었다. 강비와 함께 묻힐 것을 단념했다.
"이 동리 이름을 무엇이라 하느냐?"
"망우리라 합니다."
"망우리라니, 무슨 뜻이냐?"
"잊을 망자, 근심 우자, 근심을 잊어버리는 곳이라 해서 망우리라 합니다."
"이애, 그 이름 좋구나, 근심을 잊은 동리라, 만 가지 시름을 다 잊어버린다는 말이구나!"
태상왕은 덥석 무학의 손을 잡았다.
"어찌하면 이곳 동리 이름까지 나의 심정과 부합이 되오. 옛날 일을 아는 성인이 내가 저편에
산소 자리를 정하고 이편으로 건너와서, 근심 걱정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망우
리라고 이름을 지어둔 것이 아니겠소?"
태상왕 이성계의 늙은 눈에는 경이의 빛이 가득 찼다.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길흉화복은 모두 다 하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이 전하에게
삼천리 강산의 주인이 되게 하셨으니 어찌 전하의 만년유택을 마련해놓지 않으셨겠습니까. 반드
시 복된 땅을 마련해놓으시어 유종의 아름다움을 두시게 한 것 같습니다. 어찌 치하하지 아니하
오리까. 모두 다 천의올시다."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있는 태상왕은 대견하고 좋았다.
온 얼굴에 가득 밝은 웃음빛이 떠돌았다.
"여보 국사! 산소 자리는 국사가 잡아주었지, 언제 하느님께서 잡아주셨더란 말씀요. 공연한 괘
사를 떨지 마오, 하하하."
무학이 대답한다.
"아니올시다. 미욱한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소승이 석장을 짚고 산을 타 자리를 잡았으니까 소
승더러 잡았다고들 할 것이올시다. 그러나 모두 다 하늘이 시키신 것이올시다. 하느님께서는 신령
스런 계시로 소승도 모르는 사이에 소승을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하니 망우리라는 이
동리의 이름도 벌써 몇백 년 전에, 하느님께서 슬기로운 사람의 입을 빌려서 전하께서 오늘 오실
것을 미리 집작하고 망우리라는 이름을 짓게 하신 것입니다. 아마 도서대사쯤이 하느님의 명을
받아서 이 동리의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하옵니다. 복인봉기지란 말 그대로 아무리 좋은 땅을 찾는다 해도 하늘이 주지 않는 바에
댜 어찌합니다. 사람의 지혜와 힘만으로는 도저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승 하윤도 무학의 말씀이 옳다고 주장했다.
"전하! 이제는 만 가지 시름을 모두 다 잊으시고 안한하게 덕을 닦으시며 왕생극락을 하시도록
하십쇼. 나라일은 아드님이 되시는 금상마마께 다 맡기시고-."
무학의 말을 듣자,이성계는청을 높여 껄걸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하하, 만 가지 시름을 다 잊으란 말인가? 인생은 시름과 걱정, 근심과 생각, 괴롭고 즐거움,
그 맛으로 사느 법인데, 국사와 정승은 나에게 시름과 걱정을 거두라 하니, 그만 인세에서 아주
자리를 뜨란 말이 아니겠소. 하하하. 할 일 다 했으니, 어서 죽으란 말이지, 하하하."
"황고무지하옵니다. 그런 뜻으로 아뢴 말씀이 아니올시다. 그저, 청담한 생활을 하시면, 더욱 수
를 하시어 오래오래 사실 것입니다."
무학도 태상왕을 따라 일어나면서 아뢴다.
태상왕은 여전히 웃으며 무학의 말을 받는다.
"나는 욕심을 버린 지 이미 오래요, 국사도 들어서 알았겠지만, 나는 함흥에서 동아온 후에 대
궐에 있지 아니하고 시골 촌락으로 돌아다녔소. 정치에 대한 모든 욕심을 끊고 불법을 믿으면서
절을 조성하였소, 전에는 모르지만 이 사이는 전혀 정치에 욕심이 없어서 산수간으로만 돌아다니
고 있소. 이보다 어찌 더 청담한 생활을 하겠소. 과연 내 자랑이 아니라 나는 모든 욕심을 누르고
지금 맑고 맑은 촌부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소. 하하하."
"전하! 전하께서 청담한 생활을 하시자면 이것 참 아뢰옵기 극히 황송하옵니다마는 감히 아룁
니다. 아직도 머십니다. 우선 전하의 지금 그 웃으시는 소리가 지독하게 물욕에 얽매이신 웃음소
리십니다."
웃음소리 자체가 물욕에 얽매었다는 무학의 말을 듣는 태상왕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얼굴에 지
었다.
이성계는 앞을 서서 걸어가면서 무학에게 묻는다.
"웃음소리가 물욕에 얽매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웃음 가락 속에 어떻게 물욕이
섞였단 말요?"
"지금 전하께서 드높게 웃으시는 그 웃음 가락은 좋아서 웃으시는 웃음 가락이 아니올시다. 즐
거워서 웃으시는 그 웃음 가락도 아니올시다. 태연히 화기를 띠어 웃으시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저주하고 허무에 반항하는, 말하자면 허파에서 터져나오는 공허한 웃음소리십니다. 그러하니 이것
은 무한대의 욕심을 무한대로 다 채울 하다가 되지 아니하니 반은 저주하고 반은 자학하는 웃음
가락이십니다. 이런고로 소승은 전하의 웃음 가락에 아직도 욕심이 엉켜 있는 웃음소리라고 단을
내렸습니다. 무관심한데 저주와 자학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러하니 저주와 자학은 곧 욕심에
서 생기는 것이요, 전하께서는 아직도 물욕을 다 청산하시지 못하셨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듣고 황연히 깨달았다.
"국사의 말씀을듣고보니 내 웃음 소에는 과연 약간의 불만과 불평이 있었소."
"그것 보십쇼. 대왕께서는 그저 덮어놓고 물욕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지 못하도록 더 공부를 하
셔야 합니다."
무학은 또 한 번 태상왕 이성계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충간한다.
"단단히 죄를 받는구려. 공연히 나는 나라를 다슬보겠다고 압록강 밖 위화도에서 회군한 죄로
이같은 정신의 단련을 받는구려. ㅗ두다 욕심의 과정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이성계는 한숨을 길게 쉬며 산을 타고 걸어간다.
"전하께 또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무학은 고고한 늙은 얼굴에 방긋 미소를 띠고 말한다.
"말씀해주오."
"전하께서는 아까 쌍광을 미리 만들어놨으면 좋겠다고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그랬지. 국사는 단광짜리밖에 못되니 쌍광을 만들어서는 아니된다고 말했던 것이오."
"그랬지. 국사는 단광짜리밖에 못되니 쌍광을 만들어서는 아니된다고 말했던 것이오."
"그랬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쌍광을 만들어서 강비마마의백골이라도 한데 계시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욕심이십니다. 이 욕심을 버리십시오. 그래야만 모든 시름을 잊으시고 망우리 건너편 산에
묻히시는 시름 없는 몸이 되십니다."
"그것이 어디 욕심인가? 인정이지. 정과욕심은 구별이 돼야 하지 않겠소."
"정과 욕심은 붙어 다니는 것이올시다. 정에 움직이는 것을 곧 욕심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람
쳐놓고 정이 없을 수야 있겠습니까마는 크게 깨달은 사람은 정을 눌러서 과욕의 경지로 가는 것
이올시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남자와 여자가 내외로 지내다가 죽은 후에 한구덩이로 들어가겠다는 소원
이 무슨 허물이며 무슨 욕심이 되겠소. 국사의 말씀은 너무 지나친 듯하오."
태상왕은 욕심이 아니라고 반발했다.
무락은 또 한 번 웃고 대답한다.
"사람이 죽어지면 혼은 천상으로 흩어지고 남는 것은 살과 뼈뿐이올시다. 백골이 만약 정을 안
다면 소승도 두 분이 쌍광중을 이루하시는 것을 말리지 않겠습니다마는, 소용없는 곳에 공연히
마음을 두시어 일부러 번뇌를 장만하시니 이것도 또한 만 가지 시름을 잊으시는 청담한 생활이
아니올시다. 삼가야 됩니다. 모든 겁연을 끊으시어 시름을 잊으시옵소서."
옆에서 무학의 말을 듣고 있던 하윤은 마음 속으로 기뻤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무학이 대
변해주었다. 태종한테 돌아가 무학의 쌍광을 막는 데의 공을 칭찬해주리라 생각했다.
이때 붉게 타오르는 서산 낙조는 망우리 일판을 당홍빛으로 물들여놓아 화려하고도 장엄했다.
망우리 산 밖으로는 한강 물이 유유하게 흘러간다.
"만사를 잊으리라, 모든 시름과 원한을 다 잊으리라."
태상왕은 가만히 노래를 부르며 망우리 고개를 바라보며 산을 타고 내려간다.
고개 아래로 내려가는 태상왕 이성계의 머리에는 '삼국지' 첫머리에 실려 있는 노래가 생각났
다.
굼실굼실 흘러서
동으로 가는 긴 강물,
낭화 물거품이
영웅들의 시비 성패
다 씻어갔네.
머리를 들어 돌이켜보니
어허, 모두 다 공이로다.
푸른 산은 예와 같이
의연히 있네.
몇 번이나 석양빛이
붉었다가 꺼졌더냐.
백발이 성성한
어부와 초부한이
가을달 봄바람을
언제나 바라보며
한 병 막걸리로
기쁠사 서로 만나
고금의 허다한 일
소담 속에 붙여보네.
기막히게 인생의 진리를 노래한 시다.
동편으로 흘러가는 강물은 영웅들의 잘하고 못한 일이며, 성공하고 실패한 일을 강물의 물거품
처럼 다 씻어 흘러가버린다. 자기가 했다는 제왕의 사업이란 것도 고개를 돌려 생각해보면 한줌
물거품이 디어 스러져버리고 말 것이다. 허무하기 짝이 없다.
포은 정몽주도 공연히 죽었다. 선배였던 최영 장군도 역적으로 몰아 죽였으나, 그들의 의기는
도리어 자기 자신인 이성계보다도 천추만대에 이름을 높이 전하게 되었다. 그뿐인가. 왕씨를 바닷
속에 몰아넣어 죽인 일이며 두문동 칠십이인들의 숨어 사는 곳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인 일들, 모
두 다 못난 짓만 쫓아다니면서 골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계속해서 일어난 집안 싸움들. 자기 자신이 한 일이 아니요, 아들들이 한 짓이라 하
나 그 근본을 따져본다면 자기가 정권을 잡기 위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한 까닭에 집안 속에서도
천만가지 일이 이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산을 타고 망우리 고개에서 내려오다가 펄썩 푸른 잔디밭에 주저앉는다.
한강 물이 산을 껴안고 유유히 동으로 흘러간다. 영락없는 '삼국지' 노래 속의 동으로 흘러가는
그 강물과 정경이 흡사하다.
강물이 흰 물결을 뿜어 낭화를 일으킨다. 자기의 여태껏 해온 사업을 물거품이 다 씻어가지고
흘러가는 것 같다.
강물에 배 한 척이 떠내려간다. 술병이 보인다.
두 사람이 껄걸 웃으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영락없이 '삼국지' 노래의 고금의 크고 작은 일을 웃으며 이야기하는 초부와 어부와 같다.
이성계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또 한 번 청을 높여 곤곤장강동서수의 노래를 높이 불러본다.
울적한 심정을 이 노래에 붙여 씻어버리려는 것이다.
무학과 하윤이 고개를 숙여 태상왕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굼실굼실 흘러서
동으로 가는 긴 강물,
낭화 물거품이
영웅들의 시비 성패
다 씻어갔네.'
태상왕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받아 무학이 뒤를 잇는다.
'머리를 들어 돌이켜보니
어허, 모두 다 공이로다.
푸른 산은 예와 같이
의연히 있네.
몇 번이나 석양빛이
붉었다가 꺼졌더냐.'
무학의 받는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 정승 하윤도 신명이 났다.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는 모양
이다.
청을 높여 다음 가락을 불러본다.
'백발이 성성한
어부와 초부한이
가을달 봄바람을
언제나 바라보며
한 병 막걸리로
기쁠사 서로 만나
고금의 허다한 일
소담 속에 붙여보네.'
임금과 국사와 신하 세 사람은 인생에 대한 감창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흠뻑 노래를 불러 평생사업의 허무를 노랫가락에 붙여본다. 눈에 비치는 모든 광경이 바로 지
금 노래를 부르는 그 광경이었다.
청산은 의연히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데, 석양은 연분홍빛을 뿜어 금방 꺼지려 했다.
띠 같은 강물은 허연 물거품을 뿜어 유유하게 흘러간다.
정승도 소용없고 임금도 별수없다.
모두 다 한 사업이 강물에 씻겨간다. 오직 무학의 팔자만이 가장 제일 가는 상팔자인 듯싶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노래를 끝낸 후에 무학을 바라본다.
"우리 세 사람이 모였는데, 지나간 한평생의 사업은 세 사람이 다 각각 다르구려."
"그러합니다."
무학이 미소를 풍겨 대합한다.
"그러합니다. 하하하."
무학은 소리를 높여 껄걸 웃었다. 이성계는 껄걸 웃는 무학을 탄하지도 아니했다. 계속해서 말
을 잇는다.
"여기 정승 하윤이 있지만 정승은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에 있어, 음양을 가음하여 하늘 뜻을 좇
고, 백성을 편아케 하는 일이 정승의 큰 책임인데, 얼마나 정승의 책임을 했는지 모르겠소."
태상왕 이성계의 말씀을 듣는 하윤은 얼굴이 붉어졌다.
무학은 옆에서 또 한 번 소리를 높여 껄걸 웃는다.
"하하하."
태상앙은 무학의 웃음 가락이 호방해 높건만, 역시 탄하지 아니하고 다음 말을 계속했다.
"다만 여기 앉아 있는 세 사람 중에 오직 헛일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무학국사 한 사람뿐이구
려."
무학의 호방하게 웃던 얼굴이 뭉그러지며 눈이 둥그래진다.
"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어찌 헛된 일을 아니했겠습니까. 여태까지 한 일이 저 역시 헛일
이었습니다. 공연히 과찬하시는 말씀은 내리지 마시옵소서."
무학은 호탕한 웃음 가락을 거두고 경건하게 흑장삼 옷깃을 여몄다.
이성계는 말을 계속한다.
"세상만사가 모두 다 허무요 공인 것을 다 느끼고, 일찍 세상을 등지고 입산수도하여 모든 사
람들에게 물욕을 버리게하고 대자대비한 생각을 머리와 마음 속에 깊이 넣어주었으니 어찌 각자
라 아니하겠소. 제왕의 사업이나 정승의 사업은 모두 다 한줌 흘러가는 물거품이 되어 스러져버
리는 것이지만 국사의 일평생 사업은 사람을 천 사람, 만 사람 어리석은 곳에서 건져내고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어서 깨끗한 연화대가 아니면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인도하였으니 얼마나 그
사업이 보람있는 사업이라 하겠소. 국사의 사업은 공와 무를 일찍이 깨닫고 진과 유로 걸음을 걸
어나간 사업이니, 참으로 본받을 만한 사업입니다. 내 일찍 불가의 제자 못된 것을 오늘날 후회하
오."
태상왕 이성계는 말을 마치자 한숨을 지었다.
무학은 고고하고 청수한 얼굴에 경건한 빛을 띠어 대답한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빈도의 해온 일이나 여태껏 걸어온 길도 또 한 참을 이룩하지 못했습니
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의 뿌리를 다 제거시키지 못하고 모든 선의 행동을 더 밝고 넓게 인
도하지 못하고 미미한 헛된 이름만 남긴채 그대로 공수로 돌아가게 되니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
세상을 이별하고 육신과 뼈를 태워버린 후에 천상에 올라 석가여래를 대해 뵐 때 세상에서 무엇
을 했느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아뢸 길이 없습니다. 사람 몇 사람을 불도로 인도했다 해서 큰일
을 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불경 몇 권을 줄줄 외웠다고 해서 각자가 되었다고 자랑해 말할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에 처해 있어 헛된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더구나 죄 중에 큰 죄올시다. 빈
도 역시 불도의 조박만 수박 겉핥기로 핥았을 뿐, 그대로 세상을 떠나는 죄 많은 인간이올시다.
역시 물거품마냥 흘러가는 허무맹랑한 신세올시다. 하하하."
무학은 말을 마치자 또 한 번 호방하고 허탈하고, 허무한 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무학의 웃음소리는 해 저문 청산에 메아리지어 귀기를 일으킨다.
서편 하늘로 꺼져 넘어가는 붉은 놀도 취한 듯 껄걸 웃는 듯했다. 하늘도 웃고 땅도 웃는 듯했
다. 강물도 웃고 냇물도 웃는 듯했다.
강과 산 대자연뿐이 아니다. 산에 있는 나무도 웃고 가지에 앉은 새도 웃었다.
태상왕 이성계와 무학대사와 하윤의 등판에 가볍게 소름이 찍 끼친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태상왕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향하여 다시 말을 꺼낸다.
"내 언제, 국사한테 꼭 한 번 물어보려고 벼르기만 하고 여태껏 묻지 못했소. 앞으로 국사를 어
느 때 또다시 대할는지 예측하지 어렵구려. 이 기회에 나의 답답한 가슴을 풀어보고 싶소."
"네, 그러하오이다. 소승도 이제는 천한 나이 연륜을 더하와 노쇠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공주마마의 지극한 정성이 아니셨다면, 제 어찌 감히 한양 출입할 생각을 꿈엔들 먹었으리까. 그
저 공주마마의 지성과 태상왕 전하의 만년유택을 정하신다 하므로 마지막 정성을 위하여 이같이
온 길이올시다. 이제, 한번 상안을 우러러뵈온 후에는 앞으로 다시 어느 때 뵈올지 기약이 묘연합
니다."
무학은 얼굴에 창연한 빛을 띠어 대답한다.
"그러하오. 언제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지 섭섭하기 한량없소.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지 국사가
입적을 먼저 할지, 하늘의 섭리를 어찌 우리가 알겠소. 내가 국사한테 묻고자 하는 말은, 국사가
안변 설봉산 토굴 속에서 수도하고 있고 내가 아직 젊어서 포의로 있을 때, 나는 괴상한 꿈을 꾸
고 국사를 찾아서 해몽을 청한 일이 있었소. 만일 그때, 국사가 그 해몽을 아니 해주었다면 나는
공연히 오늘날 물거품과 같은 사업을 아니했을 것 아니겠소."
이성계는 잠깐 한숨을 짓고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때 나는 왕후장상이 될 욕심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서 입산수도를 했더라면 얼마나 이 세상
에 밝고 좋은 일을 많이 했겠소? 대사는 다 알면서도 좋은 길로 나를 인도하지 아니하고 욕심을
일으키는 길을 나에게 깨우쳐주어서 오늘날 내 자신이 후회를 하도록 만들었으니 나의 한평생을
국사는 오평생을 하게 한 것이나 매일반이오. 어찌해서 나를 보고 왕이 된다는 해몽을 해서 쓸데
없는 욕심을 부채질해주었소?"
귀를 기울여 태상왕 이성계의 술화를 듣던 무학대사는 다시 드높게 호방한 웃음을 웃는다.
"하하하. 그때 해몽해드린 그 일을 말씀이오니까? 무너진 집에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지고 나
오셨으니 왕자가 분명하고, 닭의 울음소리를 들어셨으니 고귀요 하는 뜻이고, 꽃이 떨어진 것을
보셨으니 열매가 열 것이 확실하고, 거을이 깨진 것을 꿈꾸셨으니 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한번 세
상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해몽해드린 그 때 말씀이오니까. 그것은 사실 그것을 그대로 말씀해드
린 그것뿐입니다. 왕천하를 하시고 아니하시는 것은 전하의 생각이시지, 소승의 알바가 아니올시
다. 하하하."
무학이 드높게 웃으며 이성계가 임금 노릇을 할 것은 자기 알 바가 아니라는 말을 듣자, 태상
왕은 다시 무학한테 말을 꺼낸다.
"불가의 궁극에 가는 목적은 어질고 착한 길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원칙이라 생각하오. 그때
만일 국사가 나를 불도로 인도하셨다면 좋았을 것을 한탄하는 말씀이외다."
무학은 다시 웃는다.
"임금 노릇을 한다고 사람이 다 악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 노릇을 한다고 사업이 모두 다
공이요, 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세상을 바로잡고, 탁한 세상을 맑게 하고, 도덕이 떨어져
서 금수같이 되는 사람들을 예와 의로써 인도하고, 가난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굶주리고 헐
벗은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입히고 잘살게 하고, 무식한 백성들을 문명한 학문으로 지도해 나간다
면, 이 일이 어찌 허와 무로 돌아가는 일입니까. 이같이 큰 사업을 하는 일이 곧 정치올시다. 욕
심이 붙는 것은 그 사람의 인품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허심탄회해서 다만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기르고 문명한 곳으로 이끌어 나가게 하는 그 일에만 충실한 제왕이라면 결코 그 사업은
나무꾼이나 고기잡이들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갸륵한 고담이 될 것입니다. 그러하니 성상께서는
왕이 되시는 해몽을 해드린 소승을 꾸지람하지 말아주십쇼."
무학의 얼굴빛은 엄숙하게 변해간다. 무학의 뒤를 받아 하윤이 말한다.
"그러하오이다. 국사의 말씀이 옳습니다. 왕 노릇을 한다고 모두다 나쁜 것만이 아니고 정치를
한다고 다 그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러하므로 제세안민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의 근본 목적은 추악한 세상을 밝게 하고 명랑한 세상으로 만들고 어지러운 세파에 헤
매는 백성들을 편안케 해주는 것이 정치의 태도이다."
하윤은 잠깐 숨을 돌렸다가 말을 계속한다.
"이러므로 포악한 걸왕을 내친 은의 탕왕과, 주왕을 내쫓은 주무왕을 어진 임금이라 하지 않습
니까? 이들은 다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기 위하여 신하로서 악한 임금을 내치고 나라를 새로 건
국한 분들입니다. 이들의 크나큰 사업이 어찌 한줌 물거품이 되어 흘러가버리고 말겠습니까. 청사
에 길이 그 업적은 빛나고 있습니다. 전하, 공연히 쓸데없는 상심을 마시옵소서. 전하께서는 마치
탕왕이나 무왕 같은 큰 사업을 하셨습니다. 조금도 마음을 괴롭게 하시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는
너무나 정에 기울어지셨습니다."
"아전인수지, 하하하. 내 논 물꼬에 물대기야."
태상왕은 하윤의 말을 듣고 웃으며 탄식했다.
무학이 뒤를 받는다.
"하정승의 말씀이 옳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다 부처가 되고 중이 된다면 이 세상의 정치는 누
가 합니까? 말하자면 백성을 위하여 정치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그 고비에 달렸습니다. 전하,
자아 이제는 만사를 잊으시옵소서."
만사를 잊으라는 무학의 말에 태상왕 이성계는 작대기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는 황혼의 어둠빛이 산과 들에 가득했다.
논둑 밭둑 사이로 산을 향하여 올라오는 내관과 궁녀의 일행이 마주쳤다.
상궁이 태상왕의 어전에 나가 아뢴다.
"공주마마께옵서 친히 수라를 만드시옵고, 진어하시기를 고대하고 계시옵니다."
"저녁밥을 먹으라 하느냐? 오늘은 소요산 행궁으로 가려 했더니, 산에 올라 이야기가 많아서
그만 날이 저물었구나. 공주가 손수 수라를 차렸다 하니 하룻밤을 더 묵고 내일 떠나기로 하리
라."
태상왕은 내시아 궁녀에게 분부를 내린 후에 무학과 하정승을 바라본다.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검암산 아래 동리로 가서 하룻밤을 더 지내고 가기로 합시다. 마침
공주가 무학대사를 전송해 보내는 소찬을 차렸다 하니 공주의 정성스런 뜻도 받아줄 겸."
"황감하여이다."
무학은 합장을 올려 사례하면서 태상왕의 뒤를 따랐다.
일행이 자리잡았던 민가로 들어가니 수라상은 벌써 나오기 시작했다.
공주는 태상왕의 말씀대로 무학대사를 위하여 순수한 소찬으로 음식을 차렸다.
말은 비록 소찬이라 하나 고기보다도 맛이 좋은 진미다.
술은 단술을 쓰고 국은 표고국이요, 산채로는 자옥채, 도랏채, 느티나무침, 모기채에 송이구이까
지 있고 소전골에는 밤, 대추, 은행, 실백으로 웃기를 하고 두부구이에 산중귀물을 모조리 양념으
로 주물러서 밑반찬을 해놓았다.
태상왕은 일부러 독상을 차지하지 아니하고, 정승 하윤까지 합쳐서 세 겸상을 보라고 분부를
내렸던 것이다.
파격의 은전이었다.
무학대사와 정승 하윤은 황공 감격했다. 몇 번이나 사양했으나 태상왕은 자리에 같이 앉게 하
여 저녁 수라를 들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시장한 판에 소음식을 맛있게 자신 후에 태상왕은 장지 아랫간에 눕고 무학대사와
하정승은 장지 윗가에 앉아 있었다.
밤이 점점 깊어가건만 태상왕은 감회가 무량해서 잠이 얼른 오지 아니했다.
몇 번인지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았으나 눈은 점점 말똥거리고 잠은 오지 아니했다. 장지 윗간
을 향하여 무학을 불러본다.
"국사, 주무시오?"
"아니올시다. 자지 않고 누워만 있습니다."
"하정승은?"
"아마 고단한 모양이올시다. 약간 코를 골며 잠을 잡니다."
태상왕과 무학은 장지를 격하여 말을 주고받는다.
"여보, 무학국사. 내가 마지막 또 물어볼 말이 있소."
태상왕 이성계는 장지 윗간을 향하여 무학에게 묻는다.
"무슨 말씀이오니까?"
"앞으로 이백 년 후에 왜적이 들어와서 큰 난리가 일어난다고 국사가 아까 말을 했소이다. 그
리하여 능침에도 변괴가 있을 테니 함흥서 갈대를 옮겨서 심으라 하지 아니했소? 그래서 이곳에
갈대를 옮겨 심은 것이 아니겠소?"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무런 변고도 없겠소?"
"큰 변고는 없습니다."
"내란 같은 것 말이오. 말하자면 골육지변 같은 것 말이오."
"허허, 전하! 모두 다 잊으시라 하지 아니했습니까? 이제는 시름마시라고 이 동리 이름이 망우
리라는 동리라는 말씀까지 아뢰지 아니했습니까. 이제는 그만 모두 다 잊어버리시지요."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을 어찌하오. 뒷일이 걱정이 되는 구려."
"그것이 다 욕심입니다. 만사가 공인 것을 아시고도 그러하십니까. '삼국지'의 곤곤장강동서수의
시를 읊으시고도 그러하십니까. 사람이 세상에 났다가 스러진 후에는 만사가 다 물거품인데 무엇
을 자꾸 그러십니까. 그저, 수류운귀올시다. 물같이 흘러가고 구름처럼 돌아갑니다."
욕심 때문, 다 그렇다는 말에 태상왕은 주름잡힌 얼굴이 무안에 취한 듯 벌개진다.
무학은 민련의 정을 이길 수 없었다.
미소를 머금고 태상왕의 무안에 취한 얼굴을 바라본다.
"하도 뒷일을 궁금해하시니 천기를 잠깐 누설하겠습니다."
천기를 잠깐 누설하겠다는 무학의 말에, 옆에서 자던 정승 하윤의 귀가 번쩍 떠졌다. 정신을 모
아, 무학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나 하고 귀를 기울이며 일어나 앉는다.
태상왕 전하도 고개를 번쩍 든다. 궁금한 마음이 더한층 간절했다.
무학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백 년 후에 왜적이 이 땅 삼천리 강산을 짓밟을 때까지 이 나라는 큰일이 없겠습니다만은
약간의 골치 아픈 일이 대궐 지밀 안에서 일어날 것 같습니다. 방석 세자나, 방번 왕자에 방간 왕
자 같은 참혹한 일은 일어나지 아니할 것이올시다마는 불과 몇 해 이내에 국가에는 큰 사건이 또
한 번 일어납니다. 그것은 큰왕자가 왕위에 나가지 않는 까닭에 풍파가 일어납니다. 그 후에는 태
평성대가 계속될 것입니다."
"큰 왕자가 왕위에 나가지 못한다?"
"예, 그러하옵니다. 언제나 이 나라에서는 큰왕자가 왕권을 잡지 못합니다. 나라뿐이 아니라 민
간에서도 큰집보다 둘째집이나, 셋째집이 잘될 것입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실
때, 소승은 죽은 정도전하고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인왕산은 지손이 되는 격이요, 낙산은 장손이
되는 격인데, 인왕산은 낙산보다도 몇 갑절 높고 굳셉니다. 이러하니 장손은 항상 차손한테 왕위
를 뺏기고 맙니다. 아무리 백 번 천 번 장손으로 왕세자를 삼는다 해도 결국은 왕위에 나가지 못
하게 됩니다."
장손이 왕위에 나가지 못한다는 무학의 말을 듣는 태상왕은 입맛이 씁쓸했다.
"장손이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그렇습니다."
태상왕은 무학의 단을 내리는 말에 더한층 마음이 좋지 아니했다.
"그렇다면, 그것도 큰일이구려. 잘난 사람은 왕이 못되고, 못난 사람만 왕이 된다면 또한 큰일
이 아니겠소."
무학은 고고하고 청담한 얼굴에 미소를 띠어 대답한다.
"사람이란 잘나고 못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세가 만들어주고 아랫사람이 받들
어주면 됩니다. 이 세상에는 특별히 잘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못난 사람이 있는 것
이 아닙니다. 과히 염려 마십시오. 이번에 닥쳐올 왕위계승 문제는 비록 장자가 왕위에 나가지 않
는다 해도, 피비린내 나는 집안 싸움은 나지 아니할것입니다."
태상왕과 정승 하윤은 귀를 기울여 무학의 말을 주의해 듣는다.
"싸움이 나지 아니한다? 듣던 중 다행한 소리로구려. 싸움이 나지 아니하고 큰아들이 다음 아
우한테 왕위를 넘겨준단 말이오?"
"네 그러하옵니다. 아마 이 일은 소승이나, 태상왕 전하께옵서는 목도해 볼 수 없습니다마는 저
기 앉아 있는 하정승은 앞으로 다 보고 있을 것입니다. 전하의 왕실에는 가끔 가다가 성인이 나
타납니다. 다음번에 나타나실 분들은 큰아드님이나 작은아드님이나 모두 다 성인입니다. 이런 까
닭에 서로 왕위를 양보하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없단 말씀입니다."
"성인이 두 분씩이나 나오신다니, 이런 기쁘고 감축할 데가 또다시 어디 있겠습니까? 국가를
위하여 경사스런 일이올시다."
정승 하윤이 합장을 하여 말했다.
"어진 사람들이 나와서 형제간에 서로 왕위를 양보한다면 그런 다행한 일이 어디 또 있겠소?
나의 가슴이 이제야 비로소 진정이 되는구려."
"전하, 안심하옵소서. 성인의 형제들이 나와 서로 왕위를 사양하는 때문에 국운은 앞으로 이백
여 년의 승평세월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백여 년의 승평세월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연후에 잠깐 왜적의 침략이 있고 다시 삼백여 년의 대운을 유지하게 됩니
다. 이것이 모두 다 왕실의 두 분 성인이 나타나신 음덕이올시다."
무학대사는 눈을 감고 염주를 굴리며 대답한다.
염주는 항상 부처를 염하는 구슬이지만, 무학은 천수까지도 헤아려보는 모양이다.
"국사!"
태상왕 이성계는 장지 아랫간에서 큰 소리로 무학을 불렀다.
"하문하옵소서."
"아까, 국사는 왕실에 가끔 성인이 난다 했으니, 아까 말한 다음세대 이외에 우리 집안에 어느
때 또다시 성인이 나오겠소?"
이성계의 묻는 말에 무학은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전하! 아직도 그걸 모르십니까?"
무학은 태상왕에게 반문했다.
"모르니 묻는 것이 아니겠소. 다음 세대에 나타난다는 성인을 ㅃ놓고 언제 어느 때 또 성인이
나타난다는 말씀이오?"
이성계는 진지한 얼굴빛으로 무학한테 다시 묻는다.
정승 하윤도 무학의 입에서 어떤 말이 떨어지나 하고 무학의 입술만을 바라본다.
"성인은 지금도 두 분씩이나 계십니다."
뜻밖이다. 무학은 지금도 성인이 두 분씩이나 있다고 말했다. 하윤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어리둥절했다.
"성인이 우리 집에 지금 두 사람이나 있단 말씀이오?"
이성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다.
"예, 그렇습니다."
무학은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정승 하윤은 무학의 말을 듣자, 마음 속으로 생각해본다.
'저자가 첨을 올리는구나. 성인이 두 사람이나 있다 하는 것은 아마 태상왕과 상감을 말하는 것
이 아닌가. 임금한테 아첨하기 위하여 두 사람씩이나 있다고 첨을 해 올려서 치켜세우는 것이 아
닌가?'
하윤은 이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태상왕 이성계도 마음 속으로 생각해본다.
'왕실 속에 현존한 사람으로 성인이 있다면, 듣기 좋게 말하기 위해서 나를 성인이라 말하려 하
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또 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무학의 입이 조용히 열린다.
"큰왕자이신 진안대군 방우 어른께서 성인이십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깜짝 놀랐다.
"진안대군이 성인이란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진안대군이 성인이 된다는 까닭을 말씀해보오."
태상왕 이성계는 다시 무학에게 묻는다.
"몸을 피해서 산천으로 방랑하다가 왕위에 오르기 싫어서 소주를 자시고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그분이 착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일부러 왕 노릇을 하고 싶어서 피를 뿌려서 사람을 상하고 하
는데, 이분은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골육상쟁하는 참혹한 비바람을 피하여 세상 인연을
끊었으니 얼마나 그 인품이 갸륵한 분입니까?"
정승 하윤과 태상왕은 황연히 깨달았다.
"그럼 또 한사람의 성인은 누구요?"
"상왕이십니다."
무학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태상왕?"
이성계는 태상왕으로 잘못 알아들었다.
"아니올시다. 태상왕이 아니라 상왕이십니다. 둘째분이십니다. 이분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골육
상쟁의 피비린내 나는 일은 용이하게 가라앉았고 또다시 나라꼴이 수월하게 자리잡혔습니다. 참
말로 고마운 일이올시다. 남들은 피를 흘리면서 임금의 자리를 내놓으셨으니 얼마나 어진 성인이
십니까."
태상왕과 정승 하윤은 무학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렇지. 성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 둘째야말로 참말 성인이지. 아비한테 효성스럽고,
동기간에 우애 깊고, 거북한 일은 절대로 아니하고, 그러면 성인이지, 하하하."
태상왕은 전부터 둘째 아들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으로 타인을 향하여 껄걸 웃으며 둘째 아들
방과의 칭찬을 했다.
"그러하옵니다. 상왕전하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성인이십니다. 지금 상감께서도, 상왕전하의
어진 덕에 감복하셨습니다."
하윤의 방과를 칭찬하는 말을 듣고 있던 무학이 뒤를 받쳐 말씀을 올린다.
"소승은 첫째분이신 진안대국보다도 상왕이신 방과 전하의 덕이 더 크시다고 생각합니다. 힘
아니 들이고 저절로 돌아올 제왕의 자리를 박차버리시고 돌아가신 첫째분의 용기와 덕행도 무던
하시지만 왕실을 버리지 아니하시면서 형제간과 부자간의 의리를 지키시면서, 괴로울 때는 세자
노릇을 하시고 또다시 왕위에 나가시어 모든 일을 어루만져놓으시고 태평세월엔 동생한테 왕의
자리를 넘겨주셨으니, 이런 분이 역대 제왕 중에 몇 분이나 되십니까? 더럽고 추하다 하여 몸을
피해버린 진안대군보다 어려운 곳으로 뛰어들어서 모든 일을 무사하게 만드신 둘째분의 공적이
실로 크다고 생각됩니다."
하윤이 다시 말한다.
"국초에 일어난 모든 왕실의 불화를 막아버리고 진압시켜주신 공로는 과연 잊을 수 없습니다.
이분한테 성현의 칭호를 아니 올릴 수 없습니다."
하윤의 말이 떨어지니 태상왕 이성계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무학에게 묻는다.
"우리 집안에 어진 사람이 둘씩이나 있고, 또다시 어진 자손들이 둘씩이나 나와서 나라가 잘되
겠다 하니 내 마음이 무한 기쁘오. 그러나 국사한테 물어볼 말이 있소."
"네, 말씀하십쇼."
"나는 성인이 못되겠소? 하하하."
태상왕은 껄걸 웃는다.
무학도 따라 웃는다.
하윤도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하하하, 전하께서는 욕심도 많으십니다. 한편으로는 창업지주가 되시고 한편으로는 성인이 되
시려 하십니까. 과연 욕심이 너무 대단하십니다. 창업지주는 숱하게 사람을 많이 죽여야 창업지주
가 되는 것이요, 성인은 착하고 어질고 관후하고 청렴결백해야만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칼과 철
퇴와 활과 창으로 사람을 많이 죽이신 전하께서 어떻게 성인이 되시겠다고 하십니까. 부자가 되
려면 어질지 못하다 했는데, 황차 혁명을 일으키신 제왕으로 성인이 되자 하십니까. 하하하, 하늘
은 맘대로 두 가지 칭호를 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차엉ㅂ지주는 창업지주의 업무가 있
고 성인은 성인으로의 천품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지. 성인이 될 수 없지. 하하하."
태상왕은 허파가 터질 듯 소리를 높여 웃는다.
꿈같이 흘러간 한평생을 스스로 조롱하는 듯한 허탈된 웃음소리다.
그럭저럭 날이 밝았다. 일행은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망우리 동산을 떠났다.
망우리에서 떠나기는 같은 시각이었으나 향해 가는 방향은 제각기 다르다. 경순공주는 태상왕
을 모시고 양주 소요산 행궁으로 가야 하고, 무학대사는 금강산으로 가야하고, 정승 하윤은 한양
성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말 워낭소리와 말 울음소리는 새벽 바람을 싸늘하게 끊었다.
태상왕과 경순공주 및 무학대사의 얼굴에는 감창한 빛이 떠돌았다.
경순공주가 먼저 무학대사의 앞에 나타났다.
"국사님, 높으신 춘추에 어려운 출입을 하시어 아바마마의 만년유택을 정해주셨으니 국사님의
은혜는 백골난망이올시다. 소승이 금강산까지 모셔드려야 할 터인데 아바마마를 모시고 가므로
뜻같이 못하오니 용서해주십시오."
공주는 공손히 무학한테 합장을 올렸다.
무학대사도 답례하는 합장을 공주한테 보낸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금지옥엽의 몸으로 어찌 다시 금강산에 행차하시겠습니까. 그저 공주마
마, 하루바삐 성불이 되시어, 제세안민을 하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무학의 열반
공주의 작별인사가 끝나자, 무학은 태상왕 이성계의 앞으로 나갔다.
"전하! 그럼 소승은 금강산으로 물러갑니다. 이제는 다시 전하를 뵐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언
젠가 가까운 장래에 이 무학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전하 앞에 들릴 것이올시다. 전하께서는
그때 소승을 위하여 석왕사에 재를 올려줍시오. 그리하시면, 소승은 극락으로 갈 것입니다."
무학의 말은 구슬펐다.
"사람의 수명 장단을 누가 미리 알겠소,. 내가 먼저 죽을 지 국사가 먼저 입적이 될지 어찌 알
겠소.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이 한 번 이별한 후에는 다시 만날 기약이 아득하니 감창한 마음을 실
로 금할 수 없소."
태상왕 이성계는 창연히 무학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하윤이 무학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국사, 이번에 태상왕 전하의 명당을 잡아주신 공로는 한양에 도읍을 잡아주신 공로보다 못지
아니한 큰일을 하셨다고 생각하오. 한양에 돌아가서 국사의 큰 공을 상감께 아뢰오리다."
"상감께 알현하시거든, 오백 년 동아능 ㄴ국운이 유지되어 태평할 것이라고 이뢰시오. 그리하고
너무나 욕심을 부리지 마시도록 하정승이 잘 보필하시오."
일행은 연연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제각기 길을 떠났다.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하여 태상왕 이성계를 감동시키고, 양주 망우리 건너편 검암산 아래 건원
릉 자리를 잡아주고 다시 금강산 금장암으로 들어간 무학대사는 가을 구월이 되자, 시름시름 앓
기 시작했다.
병상에 누운지 열흘 되는 구월 십일 새벽, 돌연 눈을 감아 세상을 떠났다.
무학대사의 법명은 자초요, 무학은 그의 호였다.
그가 거처하던 곳을 계월헌이라 했다.
밝은 달빛과 쉴 사이 없이 흘러가는 냇물이 좋았던 것이다.
무학의 속성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는 본시 경상남도 합천 삼기 사람 박인일의 아들이었다.
열여덟 살 때, 경상북도 예천 용문산에 있는 용문사에 들어가, 혜명스님과 법장스님의 제자가
되었고 공민왕 2년에는 원으로 가서 지공과 혜근한테 불경을 물었다.
지공화상은 원나라의 명승이요, 혜근은 고려의 명승이었다.
혜근이 고려로 돌아와 왕사가 되어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송광사에 거주하게 되니 무학은 혜근
의 수제자의 자격으로 그의 의발을 받았다.
혜근이 양주 회천면에 있는 회암사로 옮긴 후에 무학을 불러 수제자로 삼았으나 무학은 사양하
고 받지 아니했다.
이때, 무학은 고려의 대운이 기울어질 것을 미리 짐작하고 몸을 안변 석왕사 토굴 속에 숨겼다
가 이성계의 꿈을 풀어주었다.
이성계가 왕위에 나가니 무학은 일약 왕사가 외었고, 계유년 정월에는 이성계와 함께 한양 도
읍터를 정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왕상 무학을 대접하는 성의는 대단했다.
그에게 왕사의 칭호를 더하고 회암사를 중수하여 그를 거처케 했다.
그러나 무학은 골육의 집안 싸움이 일어나는 불상사의 꼴이 보기 싫었다. 몸을 피하고 양평 용
문산에 있는 용문사롤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다.
태종 이방원이 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나간 후에 이성계는 함흥으로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아니
하고, 사신이 가는 족족 죽여서 함흥차사가 되어 시체로 돌아오게 되었다.
태종은 간곡하게 무학을 청하여 함흥으로 가서 태조 이성계의 마음을 돌려놓게 했다.
무학은 금강산 금장암으로 들어가 참선을 하고 있을 때, 경순공주는 그를 찾았다.
지성스런 공주의 청으로 그는 태상왕 이성계의 신위지지를 잡아주고 갈대를 함흥에서 옮겨서,
앞으로 왜적이 쳐들어올 때 무기와 같이 보여서 미리 능침을 보호하는 태세를 취하게 했다.
무학은 이같이 해서, 태조 이성계의 한평생을 보호하고 지도해주었다.
슬픈 부음이 들리니 나라에서는 후한 부의를 내리고 유골을 회암사에 안치하니, 이때 무학은
팔십 세에 한 살이 모자라는 칠십구세였다.
당신의 만년유택까지 자리를 잡아논 태상왕 이성계는 사랑하는 딸 경순공주와 함께 양주 소요
산으로 돌아갔다.
가을 바람이 소슬한 어느날 금강산에서는 상좌 중 한 사람이 경순공주께 뵙기를 청했다.
경순공주는 금강산에서 상좌가 왔다는 말을 듣고, 무학대사가 보낸 사람인 줄 알고 시각을 지
체하지 아니하고 만나보았다.
"금장암에서 왔소?"
"예, 그렇습니다."
"국사는 안녕하신가?"
공주는 먼저 무학대사의 안부를 물었다.
상좌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공주께 고했다.
"국사께옵서는 지난 구월 열흘날 세상을 버리시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상좌의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공주는 깜짝 놀랐다. 그의 나이 팔십에 가까웠으나 이같이 속하게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다.
"국상께서 입적을 하셨단 말씀요? 이 나라의 큰 빛이 스러지셨구려."
공주의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샘솟듯 흘렀다.
상좌는 품안에서 간지 한 장을 꺼내서 공주에게 바쳤다.
"소승이 오늘 공주마마를 뵈오러 온 것은, 국사 스승의 열반하신 일을 알릴 겸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왔습니다."
"국사께서 유언이 계셨소?"
"아니올시다. 유언이 아니라 유지올시다. 입적하시기 직전에 이 유지를 전달해 드리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상좌는 말을 마치자 눈보다 흰 간지 봉투를 공주에게 바쳤다.
공주는 급히 간지 봉투를 뜯었다.
먹글씨로 쓴 무학대사의 필적이 나타났다.
'무자년 오월엔 늙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고 기축년 이월엔 정릉이 옮겨진다. 덕을 닦고 몸을 보
존하여 크게 사랑하고 크게 슬퍼하가. 그리하여 이 세상의 업원을 머릿속에 두지마오.'
공주는 무학의 유지를 받아 읽었다.
간지를 쥔 공주의 손길이 바들바들 떨렸다.
유지라기보다는 예언이었다. 늙은 용이란 태상왕 아바마마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고, 무자년은
앞으로 삼 년밖에 남지 아니했다.
삼 년 뒤 오월달에는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 분명했다.
다음 구절은 기축년 이월에 정릉이 이장된다는 뜻이다. 공주는 가만히 간지를 든 채 눈을 감았
다.
기축년이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다음해 일이다.
그럴 듯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주의 친어머니 강비의 유해를 모신 능침은 바로 한양도성 안 서소문 안과 남대문사이 정동에
모시었다.
능침뿐만 아니다. 원찰로 모신 흥천사도 나라의 수도 도성 안에 있다.
이 정릉을 이룩하고 이 절을 건축할 때, 아버지 태상왕은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왕비이기 때문,
서울 한양으로 천도한 지 얼마 아니되어, 이 구슬픈 아내를 이별하는 일을 당한 때문, 궁궐에서
가까운 왕비의 능과 원찰을 지어서 하루에도 아침 저녁으로 몇 번씩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감인 태종은 세자 방석의 왕위계승 문제로 해서 자기 어머니 강비와 원수였
다.
상감 방원이 아직껏 정릉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은 아바마마께서 생존해 계신 때문이다.
만약 아바마마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만 하면 반드시 이장 문제가 머리를 들고 일어날 것은
분명한 노릇이다.
아바마마의 소상을 지낸 후에 정릉은 반드시 천장이 되고 말 것이다.
공주는 가슴이 앞ㅆ다.
무학은 공주의 가슴아파할 일을 먼저 짐작하고 덕을 닦고 몸을 보존해서, 대자대비하여 세상
업원을 염두에 두지 말라 햇다.
공주는 마음이 흔들렸다. 어마마마의 능을 파헤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을까 하고 가만히 생
각해본다.
그러나 또다시 한편으로 생각해본다. 아바마마께서 정해놓으신 능침을 파헤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시려는 오빠의 마음은 일국으 제왕이면서 너무나 어린아이 장난 같다고 생각했다.
평상시에 왕위다툼으로 보기 싫었던 계모의 무덤을 도성 안에 있다는 것을 핑계로 파헤쳐서 딴
곳으로 이장한다는 것은 치졸하고 어리석은 수작이라 생각했다.
불가의 덖을 닦는 안목으로 볼 때 너무나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주는 무학국사의 대자대비하는 큰 뜻을 환하게 깨닫게 되었다.
'못난 수작이다.'
경순공주는 마음 속으로 장차 앞날에 일어날 오라버니 방원의 행동을 속으로 비웃으면서 한편
울음이 복받칠 것 같았다.
그러나 겉으로 미소를 풍겼다.
'국사께서 최후까지 소승을 돌봐주시는 마음 깊이깊이 간직하오리다.'
공주는 무학이 보낸 유지를 소매 속에 간직한 후에 태상왕께 들어가 무학대사의 열반을 아뢰었
다.
공주는 태상와이 크게 놀라실 줄 알면서도 그의 죽음을 아니 고할 수 없었다.
태상왕은 깜짝 놀랐다. 무학은 태상왕한테 있어 다만 한 사람인 지기의 벗이었다.
이제 제왕의 권리를 내놓은 태상왕 이성계는 만조백관도 다 자기 사람이 아니엇다.
이 세상에 아무 욕심이 없는 무학만이 진정한 친구였다.
"무학이 죽었단 말이냐!"
태상왕은 크나큰 충격을 느꼈다. 이성계는 한 마디 말을 마치고 멀거니 공주를 바라본다.
공주는 어떤 말씀을 올려서 아바마마를 위로해드려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놀란 아버지의 마음을 안정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송에 아바마마께서 향의한 그의 덕을 생각하시어 조정에 기별하시어 국사의 예러 후하게 장
사지내주옵소서."
공주는 간곡하게 아뢰었다.
"불가의 큰 스승이니 유해를 다비에 붙여서 화장으로 모시겠구나!"
"그러할 것이옵니다."
"뜨거워서 어찌하나!"
태상왕은 혼자서 탄식한다. 그는 정이 움직엿다.
슬픈 중에도 공주가 대답한다.
"이미 열반이 되셨는데 뜨거운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삼혼칠백은 벌써 연화대 극락세계고 가
셨고, 육신은 나무와 돌과 같아서 아무런 감각도 없을 것입니다. 공연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대로 뜨거우니, 서늘하니 하고 추상해보는 것뿐입니다."
"그야 그렇지!"
태상왕은 허무한 한탄을 또 한 번 후에 늙은 내시를 불렀다.
"너는 금강산에서 온 상좌 중과 함께 말을 달려 한양으로 들어가 국사 무학이 열반한 일을 조
정에 알려라. 후한 부의를 내리게 하고 유해를 다비에 붙인 후에는 양주 회암사에 부도를 세워서
그의 공적과 학문에 대한 일을 조각하여 천추만대에 그의 사업을 밝히게 하라. 그리고 화장한 후
에는 반드시 사리가 나올 것이다. 합에 넣어 봉안케 하라."
내시는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금강산에서 온 상좌와 함께 한양으로 말을 달렸다.
태종 이방원도 무학구사의 열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랏다.
무학은 태종한테도 큰 공로가 있었다.
함흥차사로 사신이 가서 돌아오지 못했을 때 태종은 무학을 보내서 태상왕의 마음을 돌리게 했
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으 정승 하윤을 불렀다.
"아까운 사람을 한 사람 잃엇소. 비록 유학과 학문의 계통이 다르다 하나 훌륭한 인격이 있는
사람을 잃었구려. 정원과 사찰에 영을 내려 국사의 예로 거룩한 장사를 지내게 하오."
영의정 하윤은 상감의 명령을 받았다. 극진하게 무학의 장례를 치러야 할 것을 결정했다.
비록 학문의 길이 다르다 하나 태조가 왕위에 나갈 것을 예언하여 민심을 크게 북돋아주었을
뿐 아니라, 나라가 새로 배판된 ㅜ에도 원만하고 둥글게 태조와 태종을 화합하게 만든 큰 공을
잊을 수 없었다.
하윤은 상감과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그의 유골을 회암사에 안치했다.
공주는 성질이 소명한 사람이었다. 몇 해 후에 정릉을 이전하게 된다는 무학의 예언을 태상왕
께 영영 말씀드리지 아니했다.
공연히 아바마마의 마음을 상할까 열며한 까닭이다.
무학의 부도탑을 양주 회암사에 세운 후에 태상왕은 따뜻한 날을 가려서 공주와 함께 무학의
부도를 보러 갔다.
그러나 공적을 가득히 새겨논 무학의 부도는 한 조각의 돌일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 광채 빛나는 화경 같은 눈이며 세 치 이상 뻗쳐진 수미와 검버섯이 돋은 고다한 얼굴에 부
드러운 철인의 미소를 던져서 사람을 감화시키던 그 훌륭한 모습은 다시 찾을 길이 없었다.
"사람이 한번 가면 철인거사나, 왕후장상이 모두 다 소용없는 노릇이로구나."
태상왕은 공주를 향하여 탄식했다.
무학이 세상을 떠나 열반에 든 후부터 태상왕 이성계는 항상 마음이 즐겁지 아니했다.
이 소식은 상감인 태종의 귀로 들어갔다.
"요사이 궁녀들편에 들으니, 태상왕 전하게서는 무학국사가 세상을 떠난 후에 항상 우울한 표
정을 지으시고 잡수시는 것도 전만 못하시다니 자식의 도리에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소. 전하의
마음을 어떠한 방식으로 위로해드리면 좋겠소?"
태종은 이제 모든 정권을 잡아 제왕이 되고보니, 아바마마께 효성을 다하고 싶은 생각이 울연
히 일어났다. 모든 불길하고 불행했던 과거의 악몽을 청산해버리고 새로 사람다운 아들의 길을
밟고 싶었다.
하윤은 상감의 심경을 짐작했다. 공손히 대답했다.
"태상왕 전하의 춘추는 무학대사보다 여덟 해 아래인 칠십일 세십니다. 비슷한 연세의 지기하
던 벗을 잃으셨으니, 쓸쓸하신 마음은 당연하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소신의 생각에는 천하명창인
명기들을 뽑으시어, 전하의 마음을 위로해드리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태종은 하윤의 말을 듣자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경이 나의 뜻을 받들어 명기 중에 명창을 뽑아서 행구으로 내보내도록 하오."
하윤은 곧 빈청으로 나가서 장악원 제조를 불렀다.
"태상왕 전하의 노후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기생 십여 명을 뽑
으려 하니, 장악원에 이런 애들이 있겠소?"
무학의 열반과 태조 이성계
장악원 제조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 대답한다.
"있습니다. 김해 명기에 칠점선이란 기생이 있습니다. 노래와 춤이 당세에 제일입니다. 이 애를
천거합니다. 먼저 대감께서 가무를 시험해보신 후에 태상께 바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윤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어명이신데, 내가 어찌 가무를 혼자 시험하겠소. 상감께 아뢴 후에 회보하리다."
하윤은 장악ㅇ 제조를 돌려보낸 후에 곧 어전으로 들어갔다.
태종은 하윤을 불러들였다.
"명기가 있던가?"
"장악원 제조를 불러서 물어보았습니다. 김해 명기에 칠점선이 있다 합니다. 노래와 춤이 당금
에 제일이라 합니다. 소신더러 재주를 시험해보라 했으나, 전하께서 친히 한번 시험해보신 후에
태상왕 전하께 바치는 것이 좋을 듯하와 분부를 받자와 회답하겠다 했습니다."
태종은 용안에 가득 웃음빛을 띠었다.
"경의 의사가 그렇다면 한번 취재를 보는 것도 좋겠소."
영의정 하윤은 곧 빈청으로 나가 장악원 제조한테 기별을 내렸다.
"전하께옵서 친히 칠점선의 가무를 구경해보시겠다고 하명이 내리셨으니, 제조는 곧 칠점선을
대내로 입시케 하라."
"삼가 봉행하겠습니다."
장악원 제조는 복명하고 곧 장악원으로 나갔다.
칠점선은 영흥 명기 소춘풍과 함께 당대의 명기였다.
소춘풍은 이제 나이 사십이 넘어서 노기 축에 들었으나, 칠점선은 여자의 나이로 한창인 이십
오 세의 좋은 나이였다.
칠점선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큰 영광이었다.
제조의 분부를 받자, 칠점선은 화관 몽두리에 기생의 예복을 입고 판교를 탄 후에 말 타고 입
궐하는 장악원 제조의 뒤를 따라 대궐로 들어갓다.
어전 용상 앞에는 넓고 넓은 마루판에 화탄자를 깔아놓고 다시 그 위에는 강화 화문석을 보기
좋게 놓았다.
장고와 북이며, 해금, 퉁소, 필률, 거문고, 가야금, 양금, 당비파 등 삼현육각이 벌여져 있과, 악
기 앞에는 장악원 악공들이 푸른 옷, 붉은 옷에 검은 사모를 쓰고 전하의 듭시기를 기다리고 있
었다.
이윽고 영의정 하윤은 내시에게 인도되어 장악원 제조와 김해 명기 칠점선을 거느려 들어오고,
조금 있다가 전하는 상궁과 나인들의 옹위를 받아 왕후 민씨와 함께 용상에 올랐다.
김해 명기 칠점선은 용상에 오른 전하와 왕후에게 화관 몽두리 정장으로 큰절을 올렸다.
먼저 전하의 안목에 들었다. 얼굴은 동편 하늘에 달덩어리가 떠오르는 듯 환했다.
태종은 미소를 풍기며 칠점선을 향하여 묻는다.
"네가 김해 명기 칠점선이냐?"
전하의 옥음은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칠점선은 잠깐 고개를 들어 용상을 우러러보면서 대답한다.
"네, 그러하옵니다. 천한 이름이 칠점선이옵니다."
"네가 가무에 능하다니 한번 보여줄 수 있느냐?"
"일생일대의 광영이올시다. 능통치 못하오나 감히 천한 재주를 시험해보겠습니다."
칠점선은 어전에서 일어섰다. 장악원 제조는 옷깃을 바로잡고 칠점선에게 명을 내린다.
"먼저 춤을 추어 취재를 보시도록 해라."
칠점선은 제조의 말이 떨어지자, 푸른 당의 소매 끝에 달린 눈같이 흰 한삼 자락을 번쩍 들었
다.
장악원 악사장이 검은 사모에 푸른 관복을 입고 박을 잡아 쳤다.
'딱!" 하는 박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삼현육각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일시에 일어났다.
칠점선의 눈같이 흰 한삼 자락이 번쩍 들려지며 왼편 어깨가 으쓱했다. 다음엔 반대편 어깨가
으쓱했다.
푸른 당의 허리에 감은 금박 대홍대가 흔들리면서 외씨 같은 흰 버선이 남치마 자락을 멋지게
차면서 몸을 으쓱 들었다. 어깻짓 몸짓 허리짓에 풍악과 함께 어우러지는 칠점선의 춤은 천의무
봉의 옷자락이 벽공을 박차는 듯한 자태다.
전하는 손뼉을 치고 민비는 미소를 풍겼다.
춤은 자지러진 삼현육각 소리와 함께 온 궁중을 봄빛으로 화하게 했다.
"잘 춘다!"
전하의 찬사가 내렸다.
음악은 그쳐지고 춤은 멎었다.
칠점선은 춤가락을 멈춘 후에 용상 앞 어전으로 나가 왕전하와 민비께 곱게 절을 올렸다.
"묘하다!"
전하의 웃음이 또 한 번 용안에 물결쳤다.
우선 춤에 합격이 된 것이다.
"어떠하옵니까?"
영의정 하윤이 금관조복을 입은 채 웃음빛을 얼굴에 머금고 용상을 향하여 아뢴다.
"제법 가락을 맞춰 출 줄 아는 춤이로구려. 다음엔 노래를 시험해 보오."
하정승은 장악원 제조한테 눈짓을 했다.
장악원 제조는 어전에 배례를 마치고 뒷걸음쳐 물러나는 칠점선에게 다시 지시를 내린다.
"노래를 불러보랍시는 어명이 내리셨다. 좋은 가사를 불러보도록 해라."
칠점선은 남치마 자락을 휩싸 조용히 앉았다.
청 좋은 노랫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훈전 달 밝은 밤에 팔원팔 개다리시고 오현금 탄이성에 해오민지온혜로다. 우리도 성주 모시
고 동락태평하리라.'
노랫소리와 악기 소리는 푸른 하늘을 흔드는 듯하고 한데 어우러지는 멋전 해조에 대궐 마당
잔디밭에 서 있던 한 쌍의 백학은 우줄우줄 춤을 추었다.
장고와 검누고 소리는 칠점선의 노랫소리와 함께 멈추어졌다.
전하는 크게 기뻤다.
영의정 하윤한테 분부를 내린다.
"경은 칠점선을 데리고 양주 행궁으로 가서, 태상왕 전하께 뵙게 한 후에 궁중에 거두어두시고
행락하시도록 아뢰라."
영을 내린 후 칠점선에게 비단과 피륙을 후하게 내렸다.
태종대왕의 어전에서 물러난 하윤은 장악원 제조 이하 악공들을 거느리고 양주 소요산 아래 있
는 행궁으로 향했다.
영의정 하윤은 내관을 통하여 먼저 태상왕께 뵙기를 청했다.
태상왕은 곧 하윤을 인견했다.
"국사가 다단할 텐데 경이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가?"
"상감의 명을 받들어 문후를 드리러 왔습니다."
"정원에는 아무 별일이 없는가?"
"성덕이 높으시니 아무 별일이 없사옵고 백성들은 격양가를 높이 부르옵니다."
태상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때 내관이 달덩어리같이 환한 기생을 데리고 들어와 아뢴다.
"영의정이 데리고 온 기생이올시다. 삼가 어전에 뵙게 하옵니다."
태상왕 이성계의 늙은 눈이 둥그래졌다.
"영의정이 기생을 데리고 나오다니 무슨 말인가? 웬 기생을 데리고 왔단 말인가?"
태상왕은 영의정 하윤을 바라보며 물엇다.
하윤이 부복해 아뢴다.
"상감께옵서 태상왕 전하의 노래를 위로하시기 위하여 천하명기 칠점선을 뽑아서 바치시는 것
입니다."
태상왕은 귀로 하윤의 아뢰는 말을 들으면서 눈으로 칠점선을 바라본다.
어글어글한 눈에 코는 큼직했다. 이미가 약간 좁은 듯했으나, 과히 좁은 편은 아니었다.
두 볼엔 광대뼈가 약간 솟은 듯했으나, 턱은 너부룩해서 얼굴 전체를 받쳐주었다.
오사바사한 미인은 아니지만 중천에 떠오르는 달덩이모양 환한 얼굴이었다.
늙어도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공연히 설레어지고 기쁜 것이 사람들의 상정인 모양이다.
칠점선과 이성계
칠점선을 바라보는 칠십 노인 이성계는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늙은 나한테 젊은 기생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당치 않은 짓일세."
하윤이 공손히 아횐다.
"상감께옵서 전하께 색을 취하시라고 바치는 것이 아니올시다. 노래에 적적하시고 심심하실 테
니, 가사를 들으시고 춤을 보시어 소견하시라는 양지지효, 곧 뜻을 편안케 해드리자는 효심에서
나오신 것이올시다. 상감께옵서 이 뜻을 소신한테 하문하시옵기 소신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습니
다. 음식으로써 효성을 다하려는 효도보다 뜻을 편안케 하는 효도는 증자가 계실 뿐이옵니다. 살
피시옵소서."
태상왕은 비로소 칠점선을 영의정 하윤이 대동하고 온 뜻을 알았다. 묵묵히 대답이 없다.
싫다는 표정은 아니다.
하윤은 뜰에 서 있는 장악관 제조한테 영을 내린다.
"태상왕 전하 어전에서 칠점선의 가사와 춤을 시험하라."
제조는 곧 악공들에게 지휘를 내렸다.
행궁은 대궐보다 전각이 좁았다. 지휘를 받은 악공들은 넓은 뜰에 멍석을 깔고 삼현육각을 ㅏ
뢰기 시작했다.
칠점선은 태상왕께 절을 올린 후에 뜰 아래 내려 멍석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태상왕은 호피 교의를 타고 마루청 앞에 걸터앉아 칠점선의 춤과 노래를 굽어본다.
때마침 경순공주가 한양 정릉 흥천사에서 태상왕께 문후를 드리러 내려왔다.
행궁 내전 협문 앞에서 태상와의 후궁인 성비와 정경궁주와 함께 칠점선의 가무를 구경하고 있
었다.
칠점선은 장악원 제조를 통해서 자기의 노래와 춤을 상감이 시험한 것은 태상왕 전하의 후궁을
삼기 위하여 취해진 것임을 짐작해 알았다.
젊은 계집의 몸으로 칠십이 넘은 태상왕 전하의 후궁이 되는 것은 그다지 행복스런 일은 아니
지마는 일개 천한 기생의 몸으로 궁주로 발탁이 되어 후궁이 된다는 것은 보통 용이하게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육감적인 인생의 본능은 만족시킬 수 없으나 부귀영화로는 제일 가는 일이라 생
각했다.
칠점선은 갖은 재주를 다하여 춤을 추고 가사를 부르고 시조를 노래하고 잡가를 불렀다.
한창 가무가 자지러진 절정에 올랐을 때 행궁 대문간이 소란하여지면서 가자들이 들어오기 시
작했다.
검은 벙거지에 검은 더그레를 입은 군인들이 교군 바탕같이 만든 나무판 가자에 음식을 고배해
서 가득 싣고 연락부절 들어왔다. 대전 내시와 대전별감들이 어전에 국궁하고 아뢴다.
"한양에서 상감마마와 왕후마마의 명을 받들어 왔사옵니다."
태상왕 이성계는 만족한 웃음을 띠고 묻는다.
"어떤 명을 받들어 왔느냐?"
"태상왕 전하께옵서 칠점선의 가무를 취재해 보시옵는 중 흥을 돋우어드리라고 소두를 받들어
나가라 하시어 갸자 열 틀을 바치옵니다."
흥이 도도한 판에 음식과 술을 아들한테 받게 된 태상왕의 마음은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애들 썼다. 곧 음식을 올리게 하라."
태상왕은 아들이 올리는 수라상을 아름답게 받으면서 마음 속으로, '이제는 네 마음이 돌았구
나. 제법 아비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기쁘게 생각했다.
영의정 하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태상왕과 상감의 사이를 더욱 화하게 만들어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삼가 아룁니다. 진정으로 상감의 효심은 참말 지극하십니다. 양지지효에 양지지효를 겹하셨습
니다. 입맛을 기르는 효성과 뜻을 순하시게 하는 효성을 다 겸하셨습니다."
정승 하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태종의 효도를 칭송했다.
한양 서울 왕궁에서 나온 갸자에 실은 음식은 곧 교자상으로 옮겨 태상왕 전하 앞에 진설되었
다.
산해진미의 음식들이 두 자 석 자씩 높고 낮게 고배돠어 괴어졌다.
태상와이께 수라상이 올려지니 칠점선은 노래와 춤을 그치고 어전으로 올라 술을 따랐다.
전항의 특별한 어명으로 영의정 하윤이 배석하고 앉아 있었다.
칠점선은 황금 술잔에 가득히 용안육주를 따라 태상왕 전하께 올리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
를 불러 수를 빌었다.
'요지에 봄이 드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삼천 년 맺은 열매 옥합에 담았으니, 진실로 이 잔 잡으
시면 만수무강하오리다.'
오래 살라는 만수무강이란 축원은 누구나 다 듣기 좋아하는 소리다.
태상왕의 입이 방긋 벌어졌다.
금잔에 따라 올린 술을 단숨에 진어했다.
칠점선은 태상왕이 잔을 채 내려놓기 전에 부드러운 육회를 황금저로 집어서 입에 넣었다.
태상왕은 칠점선의 영리한 태도에 더한층 귀여움을 느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칠점선이라 하옵니다."
"칠점선, 허허. 네 몸에 혹시 점이 일곱 개가 있느냐?"
칠점선은 얼굴을 붉혔다.
"예, 그러하옵니다. 아랫배와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일곱 개씩 있사옵니다."
"어허, 귀골이로구나."
세상을 버리는 태상왕 이성계
태상왕은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영의정 하윤이 아뢴다.
"전하께옵서 어떻게 칠점선의 몸에 점이 있는 것을 아셨습니까?"
태상왕은 껄걸 웃으며 대답했다.
"이름이 칠점선이라 하니 부모가 그의 이름을 지을 때 반드시 까닭이 있어 지었을 것이 아닌
가. 칠점선이라 하니 몸에 점 일곱 개가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아니한가. 하하하."
"과연 성상전하의 슬기 높으신 판단은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태상왕은 이날 밤에 칠점선으로 시침을 명했다.
과연 몸에는 일곱 개 점이 있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연분이라 생각했다.
다음날 칠점선에게는 화의공주의 칭호를 내렸다.
칠점선은 일개 천한 기생의 몸으로 일약 태상왕의 후궁이 되었다.
태상와은 칠십이 넘은 고령이지만 아직도 젊은이를 능가했다.
소요산 아래 행궁에는 성비를 위시하여 정경궁주와 칠점선 후궁들이 봄빛을 자랑했다.
태상왕은 칠점선에게 더욱 정을 붙였다.
경순공주는 아버지의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제일 기뻤다.
날마다 소요사 법당에서 관음보살한테 축원을 드리면서 아버지의 장수하시기를 발원했다.
태상왕은 이제는 과거의 영웅이 아니었다.
모든 권력을 아들 이방원이한테 빼앗긴 한 사람의 촌 늙은이 호호야가 되어버렸다. 칠점선의
노래를 듣고, 칠점선의 춤을 보는 것이 유일한 행락이었다.
결국 인생의 본능인 여성의 품안으로 다시 돌아가버렸다.
태상왕은 칠점선을 밤마다 애무했다.
어느날 밤이었다. 칠점선과 자릭를 같이하고 지냈던 이성게는 돌연 동풍이 되었다. 인사불성이
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도 뜨지 못했다. 말도 하지 못했다.
칠점선은 밤이 깊었으니 전의도 청할 수 없었다.
몸에 지녔던 산삼청심환을 급히 꺼내서 더운 물에 개어 입에 흘렸다.
약간 숨을 돌린 태상왕은 눈을 한 번 떠본 후에,
"강비!"
하고 칠점선의 손을 잡앗다. 칠점선을 강비로 안 모양이다.
태상왕 이성계는 죽을 때까지 애인이요, 사랑하는 아내였던 방석의 어머니 강비를 잊을 수 없
었던 것이다.
칠점선은 행구이에 있는 성비와 궁주를 깨워서 여러 사람이 병을 구원했다.
날이 밝자, 급히 내관을 달려 보냈다. 전의가 쫓아왔다.
태상왕의 환후는 위독한 중태였다. 시골 구석에선 약을 살 수 없었다.
전의는 급히 서울 한양으로 달려가 상감 태종한테 알리고 곧 태상왕을 창덕궁 광연루로 옮겼
다.
그러나 태상왕 이성계는 약석이 효험이 없었다. 태종 팔년 오월 이십사일에 승하하니 춘추가
칠십사 세였다. 대궐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어머니 원찰에서 곡지통하는 경순공주의 슬픈 울음소
리는 귀신도 눈물을 뿌려 슬퍼할 지경이었다.
태상왕의 능침은 무학과 태상왕 자신이 정해놓은 야주 망우리 건너편 검암산 아래로 결정하고
석 달 만에 장사지냈다.
능 이름은 건원릉이라 했다. 한 세상을 주름잡던 영웅 이성계는 이제 푸른 산에 한줌 흙을 보
태주고 오늘날 오백 년까지 건원릉에 무양히 누워 있다.
임진왜란 대 왜병들은 서울 한양으로 쳐들어와 능마다 쫓아다니며 파고 헤쳤건만 건원릉에는
마치 갈대들이 검극처럼 석양에 빛을 뿜어 번쩍였다.
왜병들은 칼과 창을 가진 군사들이 겹겹이 진을 치고 있는 줄 착각했다. 무서워서 감히 능상에
오르지 못했다.
경순공주는 울먹이면서 아버지 인산을 먼 발치에서 바라본 후에 원수 같은 전실 오라버니 태종
을 만나보지 아니하고 영영 행방을 감추어버렸다.
혹은 금강산 속으로 들어갔다고도 하고, 혹은 제주 한라산 속으로 피했다고 하기도 했다.
태상왕이 돌아간 다음해에 태종은 한양 도성 안 정동에 있는 강비의 무덤을 양주 사하리로 옮
겼다. 지금으미 서울 성북구 정릉동이 곧 당시의 양주 땅 사하리다.
태상왕과 경순공주는 강비의 무덤이 또 한 번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지 아니하고 한 분은 세상
을 떠났고 한 사람은 종적을 감추었다.
경순공주는 태상왕이 생존해 있을 때 무학과 함께 건원릉 자리를 잡았다.
그때, 무학은 경순공주에게 태상왕 만세 후에는 강비의 정릉이 반드시 이장이 될 것이라는 예
언을 했었다.
그때, 공주의 온몸에는 소름이 쪽 끼쳤다.
아우 방석과 방번까지 죽인 태종이 또다시 자기 어머니의 무덤까지 파헤쳐서 다른 곳으로 이장
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자비한 사람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는 이 잔인하고 포악한 행동을 막을 자신이 없었다.
부처의 자비스런 설법으로 아버지를 달래서 부자지간의 옭혀진 마음을 얼마쯤 풀어놓아서 아버
지가 방원을 향하여 활을 쏜 후에는 아무러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
나버렸다.
그러나 아버지가 승하한 후에 방원이 계모인 강비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에 대해서는 자기로서
는 도저히 막을 힘이 없는 것을 잘 각오하고 있었다.
막을 힘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태종 방원은 방석의 친누이요, 이제의 아내였던 자기 자신을 죽
일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 태상왕이 돌아간 후에 경순공주는 발붙일 땅이 없었다.
어머니 강비의 능에 올라 마지막 통곡을 올린 후에 변성명을 하고 구름과 물 사이로 숨어버렸
다. 이후에 경순공주의 종적을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성계의 승하와 왕손들의 모습
이때 태조 이성계가 돌연 동풍이 되어 세상을 떠났을 때, 큰손자 '제' 는 15세요, 둘째 '보' 는
13세됴, 셋째 '도' 는 12세 였다.
이제는 모두 다 또렷이 사물을 판단할 줄 아는 소년들이 되었다.
이중에 큰왕자 '제' 를,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옮아와서 궁중과 정부의 모든 질서를 정돈할 때
큰아들이라는 전통을 지켜서 모후 되는 민씨와 대신들과 의논한 후에 세자로 책봉했다.
태종 이방원의 백세 후에 왕이 될 자격을 가졌다.
이때 왕자 '제'는 어린 나이건만 왕세자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했다.
할아버지가 전조의 모든 충신과 의로운 선비들을 모조리 죽이고 신하로서 임금을 쳤다는 누명
이 달갑지 않은 때문이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크고 깊게 작용을 했다. 삼강오륜을 강조
하는 선생의 강론을 들었을 뿐 아니라 사서오경을 읽을수록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경멸하는 생각
은 더욱 깊었다.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며 도은 이숭인의 절개 높은 행적을 들을 때마다 등에서는 찬땀이 흘
렀다.
세자부인 선생들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녹을 먹는 신하이면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한테 굽히
지 아니한 그들을 예찬하고 존경했다. 결국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의롭지 못하고 착하지 못한 악
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착하지 못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둔 것이 면난스럽기 짝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서 또렷하게 철이 날수록 어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혐오의 감정은 더한층 높아가
기만 했다.
의리와 지조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음에는 왕실인 집안 싸움이 더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을 죽였다. 다음엔 방번을 죽였다. 또 매부 이제를 죽였다.
그나 그뿐인가, 또다시 싸움은 벌어져서 바로 손위 동복형인 방간과 전쟁을 하고 조카 맹종을
죽였다.
이 일만 해도 오히려 참겠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칼을 빼어들고 부자가 전쟁을 해서 대결
을 했다. 할아버지는 함흥에서 조사의를 앞장세워서 사신이 갈 때마다 함흥차사를 만들면서 아버
지를 무찔러 들어오고, 아버지는 칼을 빼어들고 군사 십만 명을 거느려서 청천강까지 올라가 할
아버지의 앞잡이인 조사의와 결사적으로 다투었다. 부자싸움도 유만부동이지, 이같이 적과 적이
되어 죄 없는 백성과 군사들만 죽여버렸다. 기막힐 일이다.
그나 그뿐인가, 할아버지는 아버지한테 패해서 하는 수 없이 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환영문에
서 아버지를 향하여 활을 당겼다. 살은 소리치며 날아서 아버지의 명치를 맞히려 할 순간 아버지
는 몸을 급히 피해서 기둥 뒤로 숨어버렸다.
만약 이때아버지의 행동이 조금만 둔해더라면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화살 한대에 영결종천이 되
고 말았을 것이다.
만조백관이며, 구경하는 백성들이 삼주 오겹 늘어서 있는 곳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와 같
은 추태를 저질렀다.
도대체 임금 노릇이 무엇이기길래 이같은 만행을 저지른단 말인가?
왕자 '제'는 세자가 되기 이전에 동생 '보'와 함께 왕손의 자격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오랜만
에 천 리 함흥길에서 돌아오는 할아버지를 맞이하러 나갔던 것이다.
이리해서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가슴에 독약을 바른 화살을 쏘는 광경을 목도해 본 순진무구한
소년 목격자였다.
깜짝 놀랐다. 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고 쏘는가? 가슴이 덜렁했다. 간 줄기와 염통
이 뚝 떨어지는 듯했다. 정신까지 아찔했던 것이다.
모두 다 왕권을 다투는 싸움이었다. 더럽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임금의 자리에 앉고 싶어서 이복동생인 방석을 죽였다는 일은 어릴 때 말로만
들어서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직접 목격해보니 기가 막혔다.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생을 죽인 아버지도 나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아들을 쏘아 죽이려 한 할아버지도 사
람이 아니다.
소년의 가슴에는 기막힌 상처를 입었다.
그들의 피를 받아서 아들이 되고 손자가 된 것이 부끄러웠다.
어색한 환영의식이 끝난 후에 왕자 '제'는 '보'와 함께 풀기 없이 왕자들의 처소로 돌아
왔다.
'보'도 '제'를 따라 할아버지를 지영하느라고 문 밖으로 나갔다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쏘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두 살 아래인 '보'는 그저 놀랍기만 했다.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서 언니되는
'제'가 고려때부터 궁중에서 거행하던 궁녀와 함께 고려때 충신들의 일이며 방석 방간의
난리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귀기울여 듣기는 했으나 '제'보다 두살 아래였다. 심각하게
머리속에 들어가지 아니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려고 활을 쏘는 것을 목격해보니 무섭고 놀
라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끝이 싸늘했다.
언니'제'의 손을 잡고 억지로 의식을 마친 후에 언니와 함께 가마를 타고 돌아왔다.
웃옷도 풀지 아니하고 '제'한테 물었다.
"언니, 아까 할아버지가 아버지한테 활을 쏘는 것을 보았소?"
"보았다."
'제'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왜 쏘았소?"
"죽이려고 쏘았지."
"아버지가 어떻게 자식을 쏘아 죽이오."
"그러기에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다."
'제'는 뱉듯이 대답했다.
"도데체 왜들 그러오?"
"서로 임금자리 싸움을 하느라고 그렇단다. 너는 임금 노릇 하기를 소원하지 마라."
"언니가 있는데 내가 왜 임금이 되나?"
"나는 더러워서 임금노릇 하지 않겠다."
고 '제'는 소리 높여 대답하고 빨간 어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같이 해서 소년 '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불신임하기 시작하고, '보'는 쉽지 않으나
어렴풋 회의를 느꼈다.
그러나 샜째인 '도'는 '보'보다는 한살이 아래였다.
아직 나이 어리다. 함흥서 돌아오는 할아버지의 지영을 나가지 아니했고 따라서 아버지
가 아들한테 활을 쏘는 불행한 광경을 목격해보지도 아니했다.
태조 이성계는 함흥에서 송도로 돌아왔으나 그래도 마음이 흡족하지 아니했다. 모든 것
이 보기 싫어 양주 소요산으로 나가버리고 태종 이방원은 마음늬 여유가 생겼다. 이만하면
집안 일은 안정되었다고 생각했다.
왕실에 대하여 외면하고 있는 송도 땅을 떠나서 한양으로 정부를 옮겼다.
종묘와 사직에 봉고제를 지낸 후에 정부의 부서를 정돈했다.
이때 사간원 대사간 황희는 태종에게 고했다.
"전하께서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시어 정부의 질서를 정돈하시고 종묘와 사직에 봉고하
는 제례를 치르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시정의 만백성이 모두 다 안도함을 얻어 맡은 바 업
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소신의 생각에는 미흡한 일이 한 가지 있사옵니다."
백성들이 안도해서 업에 종사한다는 말을 듣자 임금 태종은 마음이 흡족했다.호협하게
소리를 높여 웃으며 묻는다.
"경의 미흡하다는 일은 어떠한 일인가?"
"나라에는 국본이 튼튼하게 정해져야 합니다. 국가의 모든 질서가 다 정해졌사오나, 천
추만세 뒤에 전하의 업적을 계승할 세자를 아직 정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속히
왕세자를 책봉하시옵소서."
황희는 다음 대에 왕권싸움이 또 일어날까 염려한 때문이다.
임금 이방원은 다시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과인의 나이 아직도 삼십여 세인데 벌써 무슨 뒤를 이을 세자 생각을 하란 말인다."
황희는 얼굴빛을 바로하여 정색하고 아뢴다.
"전하께옵서 비록 춘추방성하시다 하오나 국가에는 국본이 굳게 정해져야 합니다. 이것
은 만고의 철칙이요, 동서의 제국이다 그러하옵니다. 춘추의 부강하신 것만을 생각하실 것
이 아니옵니다."
태종은 자기가 방석을 내쫓으려고 혁명을 일으키던 생각이 났다. 지금 자기의 아들은 상
당히 많다.
왕후 민씨인 정비의 몸에만도 사형제요, 후궁의 몸에서도 칠팔 명이나 된다. 자신의 나
이는 아직도 젊다. 앞으로 또다시 몇 형제를 더 둘지 모를 일이다. 자기처럼 형제싸움이
나서 또다시 골육상쟁하면 곤란하 일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세자는 일찍 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머릿속에 아들들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제'가 떠오르고 '보'가 보였다. '도'의 얼굴도 보였다. 서자들의 얼굴도 나타났다.
이윽고 태종은 침묵을 깨뜨리고 황희한테 묻는다.
"지금 과인은 황후의 몸에 사형제가 있고, 후궁의 몸에도 칠팔 명의 아들이 있다. 경의
생각에는 누구로 세자를 봉하는 것이 좋다 생각하는가?"
황희는 장중한 목소리로 고한다.
"전하께서는 세자책봉에 대하여 어찌 왕자 많은 것을 생각하십니까? 이러하신 생각이
국본을 어지럽게 하고 혼란을 일으키는 장본이 되옵니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당연히 장
자가 태자와 세자가 되는 법이올시다."
황희는 엄숙한 태도로 말을 마치자 입술을 한일자로 힘차게 닫았다.
"좋은 말이다. 대신과 내전에 의논하여 정하리라. 그러나 생각해본 일이 있다. 콘왕자가
세자 재목이 못될 때는 왕자 중에서 영특한 인물을 택해서 세자를 봉하는 일이 또한 온당
하지 아니한가?"
황희는 고개 가로 흔든다.
"전하의 큰왕자는 영특하고 똑똑하십니다. 넉넉히 삼천리 강산의 만백성들을 복되게 할
인물이올시다. 다시 지의하지 마시고 속히 국본을 정하옵소서."
"잘 생각해서 처리하리라."
태종은 장중하게 권하는 황희의 말을 어름어름 대답하고 용상에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
었다.
이때 태종은 아직 세자를 책봉할 생각이 없었다.
혁명을 함께 일으켜 사생을 같이하자고 굳게 약속한 정실 민씨 이외에 왕위에 오른 후
에는 기생 가희아를 궁중에 떼어들여서 후궁을 삼아서 아들 '비'를 낳았고, 민비의 시중드
는 시녀 신씨를 건드려서 아들 '인'을 낳고, 또다시 그 몸에서 아들 '정'을 낳고, 또다시 그
몸에서 아들 '농'을 낳고, 고려 궁인 안ㅆ의 몸에서 아들 '지'를, 궁녀 최씨의 몸에서 아들
'택'을 낳고, 다시 최씨의 몸에서 아들 '간'을 낳고, 선빈 안씨의 몸에서 아들 '이'를 낳으니,
왕비 민씨 소생 사형제 이외에도 서자가 팔형제다. 이밖에 적출 소생으로 공주가 넷에 서
출소생으로 옹주 열셋, 합쳐 딸이 열일곱 명, 아들 12형제에 딸 17명을 합하면 모두 29남
매, 한 명이 모자라는 30명이다.
아직 사십 미만의 임금이었다. 이 식으로 따져본다면 앞으로 몇십명을 더 낳을지 모른
다.
장래의 나라일을 걱정하는 대사간 황희는 또다시 다음 대에도 왕의 자리를 둘러싸고 골
육상잔하는 참담한 비극이 일어날 것을 근심했다.
태조 이성계 때, 골육상잔이 일어난 원인은 큰아들로 세자를 삼지 아니하고 계비 소생인
방석으로 세자를 삼은 데 원인이 된 것이다.
만약에 태종이 후궁한테 고혹이 되어 장자로 세자를 삼지 않고 서자로 세자를 봉한다면
이것은 전철을 또 한 번 되풀이 하는 셈이 된다.
두 번째 왕실에 골육상잔이 일어난다면 나라는 결딴이 나고 말 것이다.
나라를 지성으로 생각하는 황희는 앞일을 생각해서 이같이 충간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진심으로 대사간 황희의 충간을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그는 따로 생각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세자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아들은 큰아들 '제'도
아니요, 둘째 아들 '보'도 아니요, 셋째 아들 '도'도 아니었다. 가장 침혹된 후궁이 있었다. 기생 출
신인 가희아의 아들 '비'를 마음 속에로 생각하고 있었다.
태종은 대사간 황희와 약속한 말을 이행사지 아니했다. 세자 봉하는 일을 대신과 의논하지도
아니했다. 더구나 왕비 민씨하고는 말머리도 꺼내보지 아니했다.
이러한 때 아버지 태상왕의 상을 당했다.
대궐 안은 벅적거렸다. 슬픔과 수운속에 싸였다는 것보다 그대로 관례적인 치상 준비에 바빴다.
태상왕 이성계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는 이는 상왕인 정종이 있을 뿐이었다.
뼈가 아프도록 슬퍼할 사람은 강비와 경순 공주였다. 그러나 강비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
고 경순 공주는 원수인 전실 오라버니가 두려워서 대궐 안에는 발길을 들여 놓자 아니했다.
상감 태종은 마음속으로 슬픈 충격을 조금도 느끼지 아니했다. 비록 부자지간이라하나 골육 상
잔을 해서 정이 떨어진지 오래다. 정이 없는데 슬픈 감정이 복받쳐 올리 만무했다. 그러나 임금이
었다. 체통은 지켜야 했다 .
발상거애 하는 날 마음에 없는 슬픔을 우렁찬 목소리로 '애고애고'하고 통곡해 울었다.
발상거애는 초상중에 첫번째 치르는 의식이었다.
먼저 혼을 부르는 초혼 의식은 상감을 위시하여 상왕과 왕손이며 종척과 내명부가 둘러서고 합
문 밖에는 대신들이 모여 선 후에 태상왕 이성계의 용포를 흔들어 고복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때 만약 고복을 세 번 불러서 태상왕이 도로 살아나면 좋지마는 그렇지 아니하면 아주 영영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울음을 터뜨려 통곡을 하고 천아성을 불러 천하에 죽음을 반포하는 것이
다. 이것이 발상거애다.
이때 큰 왕손 '제'와 둘째 왕손 '보'와 셋째 왕손 '도'도 태상왕의 초혼을 부르는 의식에 참여했
다. 세 왕자 뿐이 아니다. 서손인 '비'를 위시하여 소년 왕손과 손녀들 29명이 일제히 상왕 정종과
상감 태종 뒤에 시립해서 초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관이 창덕궁 광연루 용마루에 올라 용포 자락을 뒤흔들며 구슬픈 소리로 혼을 불렀다.
"해동 조선국 태상왕 이단 전하 고복"
이단은 이성계가 조선국왕이 된 후의 이름이었다.
내관은 용포를 뒤흔들며 똑같은 소리로 고복을 세 번 불렀다.
그러나 혼은 잠잠하고 돌아오지 아니했다.
영영 죽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다.
울음소리가 악머구리 끓듯 일제히 터졌다.
큰 왕손 '제'는 고개를 들고 악머구리떼같이 울어대는 모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먼저 둘째아버지 상왕의 모습과 아버지 상감의 통곡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둘째아버지는 그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질 듯 호곡해 울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모든 지나간 세월 속에 흘려버렸던 옛 일을 생각해서 허탈이 되
어 엉엉 울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애고애고'하고 굽이를 꺾어 힘차고 청 좋게 울었다. 눈물 한 방울 나오
지 아니하건만 겉으로는 슬펐다. 가짜 울음이 분명했다.
왕자 '제'는 둘째 아버지와 아버지의 울음을 비교해 보았다.
둘째아버지의 슬퍼하는 모습은 창자 속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울음이요, 상감인 아버지
의 울음은 허장성세를 울려서 체면만은 지키자는 울음이었다.
'제'는 둘째아버지인 상왕보다 아버지인 상감이 골육의 정으로 더 한층 가깝건만, 둘째아
버지의 애통하는 정경은 동정하고 싶고 아버지의 허장성세로 마디를 꺽어 우는 모습에는
혐오의 감정이 일어났다.
마음 속으로 슬펐다.
'왜 순수하지 못하고 이중인격을 갖는 것일까?'
'슬프지 아니하면 아니 울어도 좋다. 눈물도 나오지 않는 울음을 왜 저리 울고 있을까?'
'차라리 의젓하게 서서 고복을 부르는 초혼 의식을 마치는 것이 대인 군자의 도리가 아
닐까?'
'제'는 여기까지 생각했을때 마당을 향하여 침을 뱉었다.
가식이 싫었다.
악머구리 끓듯하는 울음 속에 '제'는 끄덕도 아니하고 태연히 서서 모든 사람의 우는 모
습을 둘러보았다.
자기 동생은 어쩌는가 눈을 들어 살펴보았다.
'보'도 울고 '도'도 울었다. '비'도 울었다.
스물 여덟의 왕손과 손녀들이 일제히 울었다.
아버지 상감이 우는 데로 '애고애고'하고 울었다.
눈물 한점 흘리지 아니하고 묵청을 내서 엉엉 울었다.
'제'는 불쾌했다. 스물 여덟의 동생들 앞으로 뛰어가서 왜 가짜 울음을 우느냐고 볼치를
갈기고 싶었다. 또다시 한 곳을 바라보았다. 처절하게 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상왕의 후궁이었던 성비와 정경공주의 울음이었다. 세류같은 가는 몸에 허리가 끊어잘
듯 몸부림을 치며 호곡해 운다.
진정에서 솟아나는 슬픈 통곡 소리다.
'제'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섬겼던 늙은 남편이 돌아갔
으니 당연히 울어야만 할 진정한 슬픔이라 생각했다.
'제'는 여전히 눈물 한 점 흘리지 아니하고 초혼을 부르는 고복 의식을 마쳤다.
성복제와 인산
'제'는 초혼하는 의식을 마치고 자기 처소로 돌아왔다.
'보'와 '도'도 따라서 들어왔다.
큰형 '제'는 불쾌한 얼굴로 아울들을 바라보며 뱉듯이 물었다.
"너희들은 왜 가짜 울음을 울었느냐?"
"가짜울음이라뇨?"
'보'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반문했다.
"태상왕 전하의 초혼을 부를 때 가짜 울음을 왜 울었느냐 말이다."
"가짜 울음을 운 일이 없소. 남들이 울고 있으니 나도 울어야 하는 줄 알고 그대로 따라
서 엉엉 울었소. 가짜 울음을 운 저이 없소."
'보'는 천지난만하게 대답했다.
"바보로구나! 울음은 슬퍼야 저절로 터져나오는 것이 아니냐. 슬프지도 않은데 남이 운
다고 따라서 울었으니 바보요, 얼빠진 사람이다. 사람이 안팎이 다르면 아니된다. 양심을
속이면 아니된다!"
'제'는 동생 '보'를 타박주면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는 어찌했소?"
'보'가 다시 물었다.
"눈물이 아니나오는 것을 어찌하느냐. 슬퍼야 눈물이 나오고, 눈물이 나와야 울지 않느
냐. 슬프지 않은데 공연히 허탕으로 우는 것은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나는
태상왕 할아버지께 정이 들지 아니해서 한 방울 눈물도 나오지 아니했다. 슬프지 아니한데
어떻게 우느냐. 가짜로 우는 사람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짜로 '애고애고' 하
고 겉으로 우는 사람들의 창자 속을 환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참말 가관들이더라."
이때 '제'의 말을 한동안 귀기울여 듣고 있던 '도'가 상긋상긋 얼굴에 웃음을 펴고 말했
다.
"저는 가짜 울음을 울지 안했습니다. 진정으로 슬퍼서 울었습니다."
총명스런 까만 눈에 광채를 뿜어 말했다.
"네가 진짜로 슬퍼서 울었단 말이냐?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던데"
"아니올시다. 고개를 숙이고 울었으니 형님께서 눈물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많이 흘리지
는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슬퍼서 울었습니다."
'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가 진정으로 슬퍼서 울었다? 할아버지한테 한 번 안겨보지 못했던 네가 무엇이 슬퍼
서 진정으로 울었단 말이냐?"
'제'는 큼직한 눈을 번쩍 떠서 '도'의 얼굴을 쏘았다.
"안겨보지는 못했지마는 할아보지올시다. 할아버지가 영영 다시 오지 못할 길로 떠나셨
는데 어째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눈물이 조금 나오고 또다시 구슬픈 생각이 나서 엉
엉 울었습니다."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한 할아버지, 충신을 죽인 할아버지, 자식의 명치 끝을 향하여 화
살을 겨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무엇이 슬펐단 말이냐?"
'제'는 화가 뻗쳤다. 웃옷을 활활 벗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니합니다. 할아버지가 아니 계시면 아버지가 어찌 생겨났겠습니까? 좋
든 나쁘든 내 할아버지올시;다. 더구나 나라를 건국한 할아버지올시다. 그래서 진심으로 슬
퍼서 울었습니다."
핏줄이 흘러서 진정으로 슬펐다는 '도'의 말을 듣자, 큰 왕자'제'는 흥분한 말투로 비꼬아
대답한다.
"너는 과영 참 효자요 효손이로구나. 진정으로 슬퍼서 울었다면 나는 타박 하지 아니한
다. 그러나 진정으로 슬퍼서 운 사람이 몇이나 있었느냐말이다. 가짜 울음을 꺼이꺼이 우
는 사람들의 꼴이 보기 싫어서 너희들도 가짜 울음을 울었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제'는 말을 마치자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말이 없이 형과 아우의 주고받는 수작을 듣고 있던 '보'가 말을 한다.
"'도'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합니다. 아마 나도 남을 따라서 운 것이 아니라 핏줄이
캥겨서 슬퍼서 울었나 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주관없이 말참견을 하는 보의 말에 '제'는 화증이 벌컥 났
다.
"너는 목낭청이냐? 주책 좀 작작 떨고 입을 닥쳐라."
큰 형의 위세에 눌린 '보'는 자라목 오그리듯 목을 움츠렸다.
'도'가 영채도는 눈을 들어 '제'를 향하여 말했다.
"사람이 큰일을 하려면 칭찬도 듣고 욕도 먹는 법이올시다."
'도'는 말을 마치자 미소를 짓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제'는 야무지게 말하는 '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
나 부아가 끓었다. 또 다시 큰소리로 떠들었다.
"욕을 먹어도 유만 부동이다. 쓰러지는 고려조정을 휘어 잡아서 조선이란 나라를 개국한
일은 좋다. 그러나 왜 어진 사람과 착한 사람과 의리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렸느냔 말
이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잡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는 것은 사람치고 싫어할 사람
은 없다. 그러나 동생을 죽이고 형을 죽이고 조카를 죽이고까지 임금의 자리에 나간 이 일
은 마음에 쾌한 일이 아니다. 이러기에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갔다 해도 슬픈 감정이 일어
나지 아니한다. 그러니 울음이 나오지 아니했다. 더구나 부자지간에 원수같이 지내던 전하
께서, 통곡을 하고 거탈로 몸부림치는 모양을 보니 세상일이 가소롭기 짝이 없다. 왜, 사람
이 옳게 살지 못하고 허례허식을 위해서 이중인격을 갖느냐 말이다. 효자 노릇을 한다면
진정으로 효자 노릇을 해야한다. 죽은 후에 이면치레로 꺼이꺼이 울지말고, 살아서 진심으
로 그 아버지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어야한다!"
"임금 노릇을 하자면, 의식도 필요한가 합니다."
'도'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대답하다.
"듣기 싫다! 물러가거라."
'제'는 소리쳐서 동생들을 흘겼다.
'보'와 '도'는 머쓱해서 물러났다.
사람이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에는 성복제를 지내게 마련이다. 성복날부터는 죽은이의
은공을 생각해서 거상 옷을ㄹ 입기 시작하는 것은 왕가나 사가나 매일반이다.
거상을 입는 옷은 말할 것도 없이 죄인의 옷이라 해서 추한 베로 옷을 만들어 입는 것
이 상례요, 죽은 사람과의 가깝고 먼 촌수를 따져서 차등이 있게 입도록 마련되었다. 아들
은 삼 년을 입어야 하고 손자도 중복인이라 해서 돌을 입어야 한다.
국상이 나면 임금은 부모와 같다 해서, 대신 이하벼슬아치는 말할 나위도 없고, 조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평민ㅏ지도 백립에 베옷을 입는 것이 이 나라 왕조의 풍속이었다.
대궐 안에서는 상옷을 짓느라고 법석댔다.
상왕과 상감을 위시하여 상왕비와 왕비며, 왕자, 왕손에 비빈 등 첩들이 모두 다 복을
입어야 하니 어마어마하고 대단했다. 뿐인가, 여기다가 삼천궁녀도 모두 다 거상을 업어야
했다.
상의원에서는 삼사쳔 명의 상궁과 침비들이 거상옷을 짓느라고 꼬박 밤을 새웠다. 상옷
을 입는 데는 옷만이 아니다. 수질, 요질에, 굴건도 만들어야했다.
특별히 상왕전하와 왕전하와 왕손들의 상옷은 상의원의 일등 가는 상궁들이 마름질을
해서 지었다.
성복제 전날 밤이 되었다. 상의원에서는 상옷들을 백지에 싼의대상자에 근봉을 박아서
각전으로 봉송했다.
상의원 나인은 큰왕자 '제'가 있는 전각으로 올라서, 왕자 소속의 늙은 나인을 통해서 상
옷을 올렸다.
늙은 나인은 웃는 낯으로 상의원 나인한테 애썼다고 치사하고 상옷상자를 큰왕자 앞에
놓았다.
"무엔가?"
"상의원에서 상복을 가져왔습니다. 내일이 성복제올시다. 입으시고 곡반에 나가셔야 합
니다."
'제'는 검다 희다 말이 없이 발길을 옮겨서, 혼자 거처하는 침실고 들어갔다.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고 생각속에 빠졌다.
혼자말로 웅얼댔다.
'슬프지도 아니한데 상복을 입는다......'
'제'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세상에는 슬프지도 아니한데 꺼이꺼이 우는 상제놈들이 많으렷다!'
'슬프기는커녕 아비 죽은 것이 좋아서 마음 곳으로는 무척 기쁘면서도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애고애고 하고 우는 자도 이으렷다!'
옆방에 있던 상궁이 깜짝 놀랐다. 급히 장지문을 열고 뛰어들어갔다.
'제'는 눈을 딱 감고 입을 다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외마디 소리를 치시니 웬일이십니까?"
'제'는 대답 없이 몸을 뒤쳐 누웠다.
'제'는 괴로웠다. 고민 속에 빠졌다. 슬프지도 아니한 성복제에 나가서 혓 울음을 운
다는 일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만약 자기가 나가서 헛울음을 운다면, 양심 없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괴롭기 한량없었다.
늙은 나인은 대답 없이 얼굴을 찌푸리고 누워 있는 '제'를 근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몸이 괴로운 모양이다. 손을 들어 '제'의 이마에 얹었다.
마음이 괴로운 탓인지, 이마가 화끈했다.
"에구머니나, 몸이 더우시네. 감기가 드셨나, 약을 잡숴야겠습니다. 전의를 부르오리까?"
'제'는 늙은 나인의 손길을 뿌리쳤다.
"듣기 싫어. 왜 이리 수선을 떠나."
눈을 딱 부릅뜨고 고함쳐 꾸짖었다.
"그대로 계시면 아니됩니다. 감기가 드셨나봅니다. 어서 약을 달여 젓수셔야 하겠습니다.
"
"내 일은 내가 알아 할 테니 나가라구!"
'제'는 또 한 번 되게 소리쳤다.
늙은 나인은 머쓱해서 물러났다.
장지문이 소리 없이 닫혀졌다.
혼자 누운 '제'는 홀연 미소를 머금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있다고 호들갑을 떠는 늙은 나인의 말에 홀연 암시를 받았다.
입가에 안심하는 미소를 머금고 잠 속에 들었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궁중은 새벽부터 벅적거렸다. 내시들은 넓고 넓은 중정을 청소하느
라고 분주했다. 물을 뿌리고 황토를 했다. 전각앞에 하늘을 가려 드높게 차일을 쳤다.
빈전 앞에는 제상이 배설되고 숙수들은 생과유과를 위시하여 가지각색의 제수를 제상
위에 진설했다.
열간 들이 제상 앞에는 소연 천장이 깔려지고 곡반은 내곡반, 외곡반으로 구분되었다.
내곡반은 상감과 왕비 민씨를 위시햐여 상왕과 상왕비에 왕자 왕손들이 내명복을 해서
거상 옷을 입고 제례를 지내는 곳이요, 되곡반은 삼정승 육조판서를 위시하여 종척들이 상
옷을 입고 곡을 하는 곳이다.
황사초롱과 청사초롱은 바람에 흩날리고 청동사자 큰 화로엔 향연이 향기를 뿜어 뜰 안
에 가득했다.
성복제를 지낸 시각은 하낮인 오시였다.
오시에는 이 나라의 최고 집권자인 상감 이방원이 왕비 민씨와 함께 모든 왕자들을 거
느리고 굴건제복을 입고 나타나서 그 아버지 빈전 앞에서 '복을 입었습니다' 하고 무축단
현으로 술 산 잔을 올린 후에 애통애절한 슬픈 울음을 한바탕 울부짖는, 인생 마지막 길의
애끊이는 제사다.
사시가 되었다. 장차 성복제를 지낼 시각은 한 시각밖에 남지 아니했다.
왕자 '제'의 처소로 대전에서 기별이 나왔다.
"성복제를 오늘 오시에 거행한다 하십니다. 큰왕자 이하 모든 왕자는 빠짐없이 상복을
입으시고 내곡반으로 참여하시라는 분부십니다."
대전내시는 늙은 상궁에게 전갈을 전하고 돌아갔다.
늙은 궁녀는 이 뜻을 '제'한테 고했다.
"오늘이 성복야?"
'제'는 한마디를 남긴 후에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각이 한 시각밖에 남지 아니했습니다. 차차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소세를 하시옵소
서."
늙은 궁녀는 일변 세숫물을 떠올리고, 일변 상의원에서 지어 올린 상복 상자를 내려놓았
다.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제'는 홀연 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왜 이리 수선이냐. 상복 상자를 저리 치워라. 나는 성복제에 참여 하지 않겠다!"
늙은 궁녀는 깜짝 놀랐다. 아기씨는 장손이었다. 장손이 성복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
은 말이 되지 않는다.
궁중에 여론이 일어날 ㅣ것이다. 간밤에 아기씨는 외마디 소리를 질러서 몸이 불편한 모
양이었다. 그러나 성복제는 상중제례에 첫째번가는 복을 입는 제사다. 큰왕자가 제사에 빠
진다면 큰일이었다. '제'의 기색을 살피어 다시 물었다.
"간밤에 심기가 불편하시더니 아직도 미령하십니까? 그러나 성복제에 장손이 빠지면 아
니됩니다. 아무리 불편하시더라도 잠깐 참례를 하셨다가 돌아오셔야 합니다."
"시끄럽다. 웬 잔소리냐. 나는 성복제에 나가지 않는다."
늙은 궁녀는 더 말을 붙여볼 수 없었다. 머쓱해서 물러났다.
대전에서 내시가 또 나왔다.
"모시러 나왔습니다. 상복은 다 입으셨습니까?"
늙은 궁녀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몸이 불편하신가봅니다. 성복제 참례를 못하실 듯합니다. 아까부터 말씀을 여쭈었으나
미령하셔서 못나가실 듯하다 하십니다."
대전내시는 깜짝 놀랐다.
"미령하시다니 웬일입니까? 전하와 비전하께서는 상복을 입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둘째 왕자며 셋째 왕자가 다 들어와 계십니다. 뵙고 가야 하겠습니다."
늙은 궁녀는 당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잠깐 들어가 아뢰고 나오겠습니다."
궁녀는 말을 마치고 침실로 들어갔다.
"대전내시가 전하의 어명을 받들고 모시러 나왔습니다. 미령해서 못들어가신다 했더니
잠깐 뵙고 가겠다 합니다."
'제'는 화가 벌컥 났다.
"아파서 못가겠다 하는데, 왜들 이리 귀찮게 구느냐. 만나볼 것 없다. 못참례한다고 아뢰
라고 해라."
늙은 궁녀는 다시 더 권할 도리가 없었다. 대전내시한테 말을 옮겼다.
"편치 않아서 성복제에 참례치 못하시겠다 합니다. 만나볼 것 없이 그대로 들어가 대전
께 아뢰라 하십니다."
대전내시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급히 발길을 돌려 대전으로 들어갔다.
이때, 태종은 굴건제복에 상장 막대를 짚고 왕비와 왕자들과 함께 큰왕자 '제'가 들어오
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나갔던 내시가 돌아오는 것을 보자, 성급하게 물
었다.
"어찌 되었느냐? 왜 혼자 들어오느냐?"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 큰왕자께서는 성복제에 참례를 못하시게 되었습니다."
"무어야, 성복제에 참례를 못하겠다? 웬 까닭이냐?"
태종은 화가 벌컥 났다. 옥음이 높았다.
"체후 미령하신가 합니다. 몸이 불편해서 제례에 참여치 못하시겠다는 분부를 내리셨습
니다."
"어디가 아프단 말이냐?"
태종의 안정이 화경같이 떠졌다.
왕비 민씨는 깜짝 놀랐다.
"뵙고 왔느냐?"
"궁전의 전갈만 듣고 왔습니다. 뵙고 오려 했으나 그대로 말씀만 드리라 하셔서 뵙지는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태종은 요사이 '제'가 차차 나이를 먹어갈수록 행동이 이상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글공부
도 하려 들지 아니했다.
해동청 보라매를 길러서 몰이꾼을 데리고 사냥하기를 좋아했다. 할아버지 태상왕 전하께
환후중에도 문안을 드리지 않은 것은 예사요, 자기한테도 가끔 조석 문안을 궐하는 것이
예사다. 그러나 소문을 들으면 둘째아버지 상왕전하께는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궐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태종은 마음 속으로 불쾌했다. '제'가 철이 들수록 자기와 태상왕을 존경하지 않는 것을 눈치채
었다. 태상왕과 자기가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향기롭지 못한 처사를 한 것을 '제'가 어느덧 느낀
모양이다.
한편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태종은 '제'가 오늘 성복제에 병탈을 하고 참여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마음에서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왈칵 화증이 일어났다.
"몸이 아파? 꾀병이 아니냐?"
태종은 상장 막대로 말루청을 두드리며 뜰 아래에서 아뢰는 대전내시에게 호통을 쳤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지난번 발상거애를 하신 후에 애통하신 충격을 느끼시어 병환이 나셨나봅
니다."
대전내시는 손을 싹싹 비비며 임기응변으로 거짓말을 해서 아뢰었다.
"애통! 저 혼자만 채통했단 말이냐!"
태종은 또 한 번 진노를 보자 모든 시립했던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왕후 민씨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왕자 '보'와 '도'를 돌아보았다.
"너희들이 나가서 좀 보고 돌아오너라."
'보'와 '도'는 왕후의 분부를 받고 걸음을 빨리 하여 형의 처소로 향했다.
늙은 궁녀의 마중을 받으며 '제'의 처소로 들어갔다.
'제'는 상복 상자를 옆에 놓아둔 채 눈을 딱 감고 누워 있었다. 무척 마음 속으로 고민하고 있
는 모양이었다.
아우들이 찾아온 것을 알면서도 '제'는 눈도 떠보지 않고 누워 있었다. '도'는 어떻게 말을 붙여
보아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었다. 셋째 '도'가 '제'의 옆으로 가까이 갔다.
"언니, 어디가 아프시오?"
'도'는 일변 말을 하고 일변 '제'의 이마를 짚었다.
이마는 서늘했다. '제'는 눈을 번쩍떴다. "아프지않다.! 누가 아프다고 하더냐."
'제'는 소리를 꽥 질렀다.
'도'는 잠깐 모색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얼굴에 화한 빛을 띠고 부드럽게 말했다.
"대전 내시가 들어와서 편치않다 하갈래 어마마마의 뜻을 받들어 저희들이 나왔습니다."
"내시놈도 쓸개빠진 놈이다. 내가 언제 아프다고 했느냐. 성복제에 참여하지 못 한다고 했지."
'제'는 벳듯이 말을 마음속을 털었다.
'도'는 한동안 사이를 두었다. '제'의 몸에 손을 얹었다.
"언니 그러지말고 들어갑시다. 성복제 시간이 얼마남지 아니했습니다.어마마마께서 언니의 말씀
을 들으시고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초조하게 기다리십니다."
'제'는 자기 몸에 ㅇ힌 '도'의 손을 뿌리쳤다.
"참여하기 싫다는 왜 그다지 끄느냐. 아무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나 에통한 마음이 없는
데 왜 내가 성복제에 참여해서 꺼이꺼이 우느냐.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는데 가짜 울음은 도저히
울수가 없다고 초혼제 때도 너희들한테 말하지 아니했느냐. 내가 양심상 가짜 울음을 울수
없는것도 한가지 원인이다마는 원수처럼 부자가 서로를 죽이려고 싸우다가 이제 와서 것
치례로 체면을 지키느라고 꺼이꺼이 까이까이 우는 꼴이 메스꺼워서 성복제에 참여치 못
하겠다."
'제'의 몸에는 열이 올랐다. 입에는 거품을 뿜었다.
'도'는 상긋 웃었다. '제'가 뿌리치는 손길을 다시 '제'의 몸에 얹히며 달래본다.
"언니의 말씀은 진정 올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언니께서는 장손이시며 장자이십니다.
그리고 여염집의 장손아니고 왕실의 장손이십니다. 비록 마음에 흡족치 못한다 하드라도
왕실의 처면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언니 살피시옵소서."
'제'는 벌떡일어나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그래, 왕실은 불의와 불륜과 허위의 팔박을 쓰고 지내야 한다 말이냐! 나는 이면 치례
로 거상을 잇는 성복제에는 아니나간다!"
'보'와 '도'는 아무리 형을 달래도 응하지 아니할것을 알았다. 성복제의 시각은 더욱 더
가까워졌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보'가 '도'에게 물었다.
"대전에 돌아가 전하께 무어라고 대답하면 좋으냐?"
"몸이 아파서 열이 있고 괴로와 하므로 데리고 오지 못했다고 아뢰면 그만입니다."
'도'는 어린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침착하고 태연했다.
"어찌 차마 전하를 속일 수 있느냐. 나중에 탄로가 되면 어찌 하느냐?"
'보'는 불안했다.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도'는 얼굴빛을 고치지 아니하고 한 살 차이나는 형에게 태연히 대답했다.
"탄로 나는 일은 나중의 일이고 우선 노하시는 전하의 화증을 가라앉혀 드려야합니
다."
두 형제는 대전에 올라 상복 입은 전하의 앞으로 나갔다.
'도'가 공손히 알뢴다.
"형은 몸살이 난 모양이올시다. 열이있고 몸이 부었습니다. 바람을 쐐면 촉상이 될듯
합니다. 소자가 성복제에 참여하지 않느것이 좋다고 당부하고 돌아왔습니다."
'도'는 또렷또렷 아뢰었다.
"진정으로 아프면 하는 수 없구나. 모두들 곡반으로 나가자."
태종은 상장막대를 짚고 곡반으로 발길을 옮겼다.
큰 아들이 열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장 싶여되는 이는 왕후 민씨였다. 태종의 뒤를
따라 발길을 옮기면서 조용히 '도'한테 분부를 내렸다.
"너는 내의원에 분별해서 형의 약을 다려 먹이도록 해라."
자모의 아들을 사랑하는 지정었다.
'도'는 머리가 민첩했다.
"염려마십쇼. 아까 형의 처소에서 대전에서 들어올 때 소자는 전의 한테 당부해서 형
의 약을 짓어 바치라 했습니다."
'도'는 어머의 근심을 덜기위해 또 한번 거짓말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마마마나 전하
께서 직접 내국에 분부를 내려서 전의가 형을 진찰한 후에 꽤병이 탈로 난다면 큰일
이라 생각한때문이다.
옆에 따라 가는 '도'는 아우의 두번씩이나 하는 거짓말이 너무나 대담한다고 생각했
다.
흘깃 눈을 들어 '도'를 바라보며 혀끗을 입술 사이로 내밀고 고개로 움추렸다.
내고반 성복제를 올리는 제상 앞에는 굴건제복으로 차린 상왕전하가 가장 침통한 슬픈 표정으
로 상장 막대를 짚고 상감이 임어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향은 큰왕자 '제'가 궐석을 한체 우측 반헌으로 상감이 올려 시작되었다.
상감의 울음소리는 웅장한 '에고' 소리로 내외곡반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진짜로 몸부림을 쳐서 혼절이 되도록 슬피 우는 이는 상왕 정종이 있을 뿐 이었다.
왕실의 장사는 석 달만에 지내는 것이 통례다.
성복제를 치른 후에 이성계가 우학과 함께 정한 망우리고개 넘어 검암산 아래 높다란 상판에는
삼릉 도감이 앉아서 치산을 하고 릉이름 건원릉이라고 했다.
석 달후에 빙전에서는 대행 태종의 유해가 권원릉으로 향해 나갔다.
의장은 한양성 십리에 뼈쳤다.
한성 탄윤과 예조판서와 병조 판서가 한방, 예당, 병당이 되어 앞을 서나가고, '지인제운 응천조
통 광훈영명 성문신무 정의광덕 대행대왕' 이란 시호를 금글자로 쓴 붉은 명정이 바람에 펄럭거
리며 상복을 입은 장정들의 손에 들려 나왔다.
아름답고 좋은 뜻을 가진 글자를 모조리 모아서 붙인 시호다.
방상시가 팔박을 쓰고 나가고 대로 만든 죽산마가 나갔다.
삼천 궁녀들이 너울을 쓰고 말을 탄후에 에고에고 하는 여인들 특유의 소름끼치는 울음을 굽이
를 꺽어 울면서 나갔다. 소위 곡비의 울음인것이다. 소여가 나가고 대여가 나갔다.
소여는 부거다. 허탕으로 나가는 상여요 대여는 진짜 이성계의 제궁을 모신 상여다.
운군들이 붉은 방망이를 세로 가로 우물정자를 만들어 겹겹이 메고 여사군들은 겹겹이 명으로
줄을 늘려 집부를 해서 끌었다.
소여, 대여는 금도끼, 은도끼며 금망치, 은망치, 수정궁, 용대기, 청사초롱, 황사초롱, 왕등, 백저
등으로 휩싸 나갔다. 그 밖으로는 군인들이 두겹, 세겹을 옹위해 나갔다.
왕이 살았을 때 거동 행차와 같은 것이다.
다음엔 상주인 태종 이방원이 굴건제복에 상장을 앞에 놓고 초연을 타고 뒤에 따르고 다음엔
상왕 이방과가 역시 소연으로 뒤를 따랐다. 아무리 상왕이요, 중경대왕이라고 하나, 현제 임금이
아닌 때문에 태종 이방원의 뒤를 따라 나가는 것이다.
다음에는 왕손들의 차례다. 그러나 의연히 큰 왕손'제'의 모습은 보이지 아니했다.
'보'가 소교를 타고 나가고 '도'가 뒤를 따랐다. 그 뒤에는 무수한 서왕손들이 뒤를 따라랐다.
다음엔 백관들이 차기에 따라서 굴건제복을 입고 말을 타고 나가기로하고 천담복으로 행렬에
참여하기로 했다.
혼교의 뒤를 따르는 차비관은 살아서 배종하는 형식을 취하느라고 평상시의 모대를 했다.
왕자'제'의 모습은 인산 때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