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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Casey,Riley 2023. 5. 2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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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1397∼1450)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18년 왕위에 올랐다. 우리 역
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의 시대를 연 세종의 업적은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세종
임금의 업적 가운데 우리가 직접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한글을 만드신 일이다. 우리한
테 우리말이 있는데도 소리가 전혀 다른 중국 글 한자를 쓰고 있음이 못내 안타까워 우리
소리를 알맞게 쓸 수 있는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것이다. 그밖에 유학을 정리하고 과학 기술
을 발전시켰으며 음악까지 정리하였고, 불교의 이론도 그 시대에 정리되었다. 노비에서 정승
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사랑한 세종의 마음이 있었기에 그처럼 많은 일들을 어느 한쪽에 치
우치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고 뒷날의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1. 새벽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에게는 왕자가 많았다. 첫째 방우, 둘째 방과, 셋째 방의, 넷
째 방간, 다섯째 방원, 여섯째 방연, 일곱째 방번, 여덟째 방석 이렇게 모두 여덟 명이나 되
었다.
  이 가운데 여섯째 방연까지는 신의 왕후 한씨의 몸에서 태어났고, 나머지 두 왕자는 신덕
왕후 강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내 아들이 다음번 왕이 되도록 해야지.
  신덕 왕후는 자기가 낳지 않은 왕자가 다음 왕이 되면, 자기와 자기가 낳은 두 왕자가 위
태로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덕 왕후는 태조에게 간청했다.
   다른 왕자들은 이미 장성하여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사오나 우리 모자는 의지할 곳이
없사옵니다. 부디 만수 무강하시어 전하의 그늘에 살아갈 수 있다면 더 없는 복이 될 것이
옵니다. 부디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태조가 그 간청을 받아들여 막내왕자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래도 불안했다.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에 누구보다도 공이 컸던, 아니 사실 그의 힘으로 세웠다고도 할
수 있는 다섯째 왕자 방원의 가슴 속에 불타오르는 터질 듯한 야망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
다.
  신덕 왕후는 조선 왕조의 1등 공신이며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쥐고 있는 정도전·
남은·심효생 등에게 왕세자 방석의 보호를 부탁했다.
   정안군 방원이 경복궁 바로 옆 동네인 준수방에서 사병을 기르고 있다는데……. 그는 고
려 왕조를 무너뜨린 힘을 가진 사람이다. 아무래도 왕세자 방석이 불안하구나.
  신덕 왕후도 정도전도 남은도 모두 이렇게 생각했다. 조정의 다른 신하들도 방원의 존재
와 나라의 운명이 함께 눈앞에 떠오르는 것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신의 왕후가 낳은 여섯 왕자들을 없애자.
  이 계획은 쥐도 새도 모르게 착착 진행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태조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자 정도전 일파는 여섯 왕자들에
게 병문안마저 못하게 했다.
  성질이 불 같은 정안군 방원의 마음 속에서 불덩어리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러다간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마저도 못 볼지 모른다. 우리 형제들만 빼놓다니! 괘씸한
정도전 무리들.
  방원은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시려고요?
  아내 민씨 부인이 물었다. 방원의 얼굴에 짙게 떠오른 결의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궐로 가겠소.
  민씨 부인은 어린 원정을 품에 안은 채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원정은 그의 셋째 아들로,
바로 뒷날의 세종 대왕이다.
   가야 하오. 형님들도 지금 대궐에 있소. 염려 마오.
  방원은 아내의 팔에 안기어 곤하게 잠들어 있는 아들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생각
했다.
   오늘이 운명의 날이다. 만일 일이 잘못되면 이 어린 것은…….
  방원은 대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근정문 바깥에 닿았다. 셋째 형 방의, 넷째
형 방간이 그 곳에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데 배다른 동생 방번은 내전으로 들어가 병석에 누운 태조를 뵙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안의 그림자는 마냥 커져 갔다.
  그런데 보다 더 큰 불안은 그 조금 뒤에 닥쳤다. 내시가 나왔다.
   전하의 병세가 아주 위태하시옵니다. 모든 왕자님께선 곧 모두 들라는 어명이시옵니다.
   여섯 왕자들은 병실에 들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었던가?
  넷째 형 방간이 말했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이상합니다.
   형님들, 나를 따르시오.
  세 왕자는 영추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방원은 결심한 듯 비장한 얼굴로 발길을 돌렸
다.
  그 때, 준수방 동네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정안군 방원에게 충성을 바치는 그의 사
병들이었다.
  이거이·조영무·마천목·박포 등이 부하를 이끌로 달려왔다. 하윤도 멀리 진천 땅에서
달려왔고, 이숙번도 달려왔다.
  방원은 집으로 오는 길에 이숙번을 만났다.
   준비는 되었는가?
   염려 마십시오.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역사는 어둠 속에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방원을 따르는 충성스런 군사들이 이미
준수방과 대궐 둘레를 비롯하여 장안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숙번의 군사들은 정도전의 집으로 몰려갔다. 정도전은 집에 없었다. 사방으로 알아보았
다. 남은의 첩 집에서 주연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자정이 훨씬 지난 뒤였다.
  불화살이 날았다. 집은 곧 활활 불길을 내뿜었다. 정도전은 옆집으로 도망갔다가 잡혀 나
왔다.
   살려 주시오. 살려만 준다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소.
  정도전은 방원 앞에 엎드려 애원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이숙번의 칼이 허공을 가르는 순
간, 정도전의 목은 떨어져 땅바닥에 뒹굴었다.
  방원은 군사들을 궁궐로 끌고 갔다. 그는 정승 조준을 불렀다.
   들어가서 전하께 아뢰어 주오. 방석과 방번을 내보내 달라고…….
  조준이 병실로 들어가 아뢰었다.
  방석과 방번은 파랗게 질려 떨었다. 이성계는 어쩔 수 없는 사태에 이르렀음을 알고 세자
에게 말했다.
   방원은 너의 형이다. 죄 없는 아우들을 죽이기야 하겠느냐.
  이성계는 미소를 띠며 사랑하는 두 왕자를 내보냈다.
  두 왕자는 그 말에 다소 마음을 놓고 뜰로 나갔다.
  이숙번의 군사들은 날랜 표범처럼 뛰쳐나가 칼을 번뜩였다. 겁에 질린 두 왕자를 비명 한
마디 지를 새도 없이 베어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두 아들을 같은 아들의 손에 잃은 이성계는 불길 같은 분노를 터뜨리기 전에 먼
저 허망함을 느꼈다.
   권력이란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세상을 버리고 부처님께 불공이나 드리며 살리라.
  임금이 된 지 7년 만인 1398년 9월, 태조 이성계는 용상(임금이 앉는 자리)을 미련없이 버
리고 대궐을 떠났다.
  모두들 임금 자리는 방원이 차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원이 대뜸 용상을 차지하
지는 않았다.
  오히려 방원은 둘째 형인 방과를 임금 자리에 앉혔다. 그가 조선 왕조 제 2대 임금인 정
종이다. 정종은 힘없는 임금이었다. 방원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방원은 무장으로서도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글도 잘 했으며 머리 또한 뛰어났고
슬기로웠다.
  고려 시대에 그들 형제 가운데 과거를 보아 합격한 사람은 방원 하나뿐이었다.
  정종은 도읍을 송도(개성)로 다시 옮겼다. 한양(서울)이 형제를 죽인 장소라고 하여 옮긴
것이다.
  그 무렵, 방원의 넷째 형 회안군 방간이 은근히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방원이 신 방간을 해치려 하고 있습니다. 신은 정의를 위하여 출병하였습니다.
  방간은 정종에게 알리고 군사를 일으켰다.
  방원은 방간의 군대가 출동한다는 말을 듣고 하윤·이무 등에게 가슴아픈 출동 명령을 내
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송도 거리에서 양쪽 군사는 부딪쳤다. 방원의 군사가 큰 승리를 거두고, 아들 맹종을 잡아
토산 땅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제 더 이상 감히 방원에게 맞서려 하는 자는 없었다.
  1400년 11월 11일, 정종은 임금이 된 지 2년 반 만에 스스로 임금 자리를 방원에게 넘겨
주었다. 방원은 정종의 뒤를 이어 용상에 앉았다. 그가 바로 조선 왕조 제3대 임금 태종이
다. 그 때 원정(충녕 대군으로 세종대왕이 된다)의 나이 네 살, 태종은 서른네 살이었다. 세
자는 물론 맏왕자인 양녕 대군이었다.
  임금 자리에 앉은 태종은 몹시 걱정스러웠다.
   세자는 총명하긴 하나, 어째서 그렇게 책읽기를 싫어할까?
  한편, 셋째 아들 충녕 대군은 책에만 파묻혀 지냈으며 매우 슬기로웠다.
  태종이 즉위한 얼마 뒤, 온 나라를 태워 버릴 것 같은 가뭄이 밀어닥쳤다. 강물까지도 말
라 버려 누런 흙과 자갈이 드러났고, 논바닥은 한 자도 넘게 쩍쩍 갈라졌다.
  태종은 온 나라에 술을 담그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는  금주령 을 내렸다.
   아우를 죽이고 형과 싸운 임금이라 날이 가문다.
  방방곡곡에서 백성들이 원망하는 소리가 태종의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루 종일 그런 언짢은 기분에 시달린 태종은 저녁 무렵 목이 바싹바싹 타기 시작했다.
   술상을 차려라.
  태종의 명령으로 나인(궁녀)이 술상을 바쳤다. 태종은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술이 태종
의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만이 고요함을 깨뜨렸다.
   아바마마.
  어린 왕자 충녕 대군이 그 침묵을 깨뜨렸다.
   왜 그러느냐?
  태종은 물으며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아바마마께서 드시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잣술이다.
   잣술은 술이 아니옵니까?
   잣술도 술이지.
   백성들에게는 술을 못 마시게 하고 임금님은 술을 마셔도 되는 것이옵니까?
  태종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한참 동안 충녕을 바라보고 있던 태종은 느닷없이 너털웃음
을 터뜨렸다. 영특한 충녕 대군이 여간 귀엽지 않았던 것이다.
  이튿날 조회에서 태종은 말했다.
   금주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술을 마시는 것은 임금인 내가 모범을 보여 주
지 못했기 때문이오. 오늘부터는 과인(임금이 자기를 일컫는 말)도 술을 입에 대지 않겠소.
  신하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태종은 총명한 셋째 아들 충녕 대군의 슬기로운 말에 감동하여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자인 양녕 대군은 매 사냥을 즐기고, 언제나 매를 가지고 놀며 책은 거들떠보지
도 않았다. 개도 좋아했다.
  세자궁 마당에는 참새가 많이 날아와 놀고 있었다. 세자는 새를 잡아 보려고 궁리한 끝에
둥근 맷방석을 하나 구했다. 그 밑에 모이를 놓고 맷방석을 세운 막대기 끈을 길게 늘인 채
멀찍이 앉아 있다가, 새가 들어가면 줄을 잡아당겨 맷방석이 쓰러지면 새를 잡는 것이다.
  세자가 참새잡이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세자의 스승이 들어와 글을 읽었다. 세자는 정신
이 참새에게 가 있는 채 건성으로 책을 읽어 선생을 화나게 했다.
  그리고는 선생이 책을 읽는 틈에 몰래 빠져나와 매 소리를 내며 참새잡이에 정신을 빼앗
겼다.
   저런 양녕 대군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줄 수는 없다.
  그 때 태종에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셋째 아들 충녕 대군이었다. 늘 책상 앞에 앉아
정성들여 책을 읽는 모습을 생각하고 태종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밤새워 책을 읽으시니 혹 병이라도 나실까 염려되옵니다. 잠시 쉬라고 말씀드려도 곧 다
시 책을 드십니다.
  충녕 대군의 스승이 이렇게 걱정하던 소리도 귀에 들리는 듯하였다.
  드디어 태종은 가슴아픈 결심을 하고 어명을 내렸다.
   세자 양녕을 폐위시키고 충녕 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맏왕자님을 젖혀 놓고 아랫분으로 대(왕자리)를 이으심은 옳지 않은 일이옵니다.
  유명한 황희 정승과 여러 신하가 반대했으나 소용 없었다.
  양녕 대군은 하녀와 하인 몇 명을 거느리고 광나루를 건너 광주 땅으로 쫓겨났다.
  열심히 공부한 충녕 대군은 세자가 되었고, 당연히 임금 자리에 앉을 양녕 대군은 놀기만
좋아하여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 것이었다.
  양녕은 그제야 마음 속 깊이 뉘우쳤다.
   이 모든 것이 다 나의 죄. 누구를 원망하리. 충녕의 어진 정치만을 빌리라.
  세월은 흘러 태종 18년 7월 19일, 병 치료차 송도에 내려갔다가 한양으로 올라온 태종은
경회루에서 이명덕등 가까운 신하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내가 왕위에 오른 지 어느덧 열여덟 해가 되었소. 그러나 나의 덕이 모자란 탓인지 농사
도 잘 되지 않았고 과인은 병까지 얻었소. 이대로 백성들의 위에 앉아 나라를 다스리기가
민망스러우니 왕위를 왕세자(충녕 대군)에게 물려주려고 하오.
  너무나 뜻밖의 말에 신하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태종의 뜻은 굳었다.
  8월 8일, 세장궁으로 왕의 사자가 왔다. 뜻밖에도 옥새를 받들고 온 사자였다.
  붉게 타오르는 듯한 홍양산은 임금만이 쓰는 것이었다. 황양산 아래 충녕의 모습은 그 날
따라 더 뛰어나고 의젓해 보였다.
  드디어 태종 18년 8월 10일, 스물두 살 된 충녕 대군은 홍양산을 받쳐 쓰고 태종 앞으로
나아갔다.
  태종은 충녕 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엄숙히 말했다.
   여러 신하들은 들으오. 그리고 임금께서도 들으시오. 궁중의 권한을 모두 물려주되, 군사
에 관한 일만은 얼마 동안 내가 맡아 보겠으니 그리 아오.
   아하, 이것이었구나. 생각이 계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충녕 대군, 아니 이제는 임금이 된 세종은 그제야 전날의 의문을 풀 수 있었다.






















  2. 굳건한 기틀

  태종이 살아 있는 동안에 왕위를 물려준 것은 실은 깊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세종이 아무 탈 없이 온 나라를 이끌며 키워 가는 것을 지
켜 보고 싶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뒤에서 어려운 일들을 처리하여 주어 뒤탈을 없애고
싶었던 것이다.
  특별히 군사에 관한 일을 자신이 맡기로 한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군사를 지휘하는 일이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무관들을 잘 다루어 나라를 굳건히 지키는 것은 군의 힘이다.
  젊은 세종에게는 아직 이 일이 무척이나 힘에 벅찰 것이었다. 게다가 세종은 글에는 밝았
으나 군사에는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다. 태종은 군사의 힘을 왕이 완전히 잡을 수 있게 한
다음 세종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세종이 임금이 된 이듬해(1419년) 5월 13일, 태종은 세종과 함께 한강으로 나갔다.
   화포 쏘는 것을 구경하러 갑시다.
  화포란 대포를 말한다.
   펑, 펑!
  여러 병사들과 함께 화포 터지는 소리에 열중하여 있는데 파발(연락병)이 헐레벌떡 달려
와 놀라운 보고를 했다.
   황해도 연평에 왜적의 배 38척이 몰려왔사옵니다.
   뭣이라고? 왜적들이?
  태종의 눈썹이 찌푸러졌다.
  신라는 물론 고려 때에도 왜적들은 끊임없이 우리 나라의 남해안에 쳐들어와서 온갖 노략
질을 해 갔다.
  그런데 또 쳐들어온 것이었다.
   참을 수 없다.
  태종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바로 얼마 전인 단옷날, 충청 남도 서천군 비인현 도둔이라는 곳에 왜적의 배 약 50척이
나타나 우리 수군(해군)의 배에다 대포를 쏘아 댔다.
  수군 만호(부대장) 김성길이 우리 수군을 지휘했는데, 그 때 그는 술에 취해 있어서 제정
신이 아니었다.
  우리 수군은 비참하게 무너졌다.
  그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 아닌가. 태종의 양볼이 파르르 떨린 것은 당연했다.
  태종은 세종과 함께 급히 궁궐로 돌아왔다.
  곧바로 김효성을 경기·황해 조전 병마사(구원군 사령관)로 임명하여 연평으로 내려보냈
다.
  그리고 즉시 박은·이원·이영덕·조말생 등을 대궐로 불러들여 대마도 토벌에 대하여 이
야기를 꺼냈다.
   왜적이 많은 배를 몰고 바다로 나왔으니 대마도는 비어 있을 것이오. 이 틈에 그들의 소
굴을 쳐서 놀라 돌아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신하들은 대부분 반대했다.
   대마도의 주인이 해적이라는 증거도 없이 일본 땅을 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일본이
조선을 치는 구실이 될 뿐이옵니다. 그들이 돌아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치는 것이 좋은
줄 아옵니다.
  그러나 대쪽같이 곧은 성격을 지닌 태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쳤다.
   화가 될 일은 일찌감치 그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한다. 우리 수군은 곧바로 대마도를 들이
쳐서 그들의 처자식들을 볼모로 잡은 뒤, 거제도에서 기다렸다가 돌아오는 왜구들을 쳐서
무찌르라! 왜구의 배는 모두 불사르고, 지금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왜인의 배는 모조리 잡아
놓아라. 우리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라.
  드디어 결정은 내려졌다.
  이종무를 곧바로 삼군 도체찰사(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이종무가 거느린 토벌군 병
력은 다음과 같았다.
  1) 병선(군함) 227척.
  2) 군인 1만 7285명.
  3) 전 군인들이 65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
  제법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세종 원년 6월 9일, 태종은 대마도 토벌의 포고를 정식으로 내렸다.
  곧 이종무는 1만 7천여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거제도를 출발하여 대마도로 향했다.
  그 이튿날, 이종무는 우선 배 10여 척만을 거느리고 대마도 해안으로 다가갔다.
  이보다 앞선 5월 29일, 도체찰사 이종무는 우리 나라가 왜 대마도를 치지 않을 수 없는가
를 대마도주(대마도 영주)에게 알리고, 싸움보다는 평화적으로 예의를 갖추도록 타이르는 편
지를 보냈다.
  바닷가에 있던 왜구들은 이종무가 거느린 배 10여 척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노략질하러
나갔던 저희 배가 돌아오는 줄로 알았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 노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바닷가로 몰려나왔다.
  그러나 잇따라 병선단이 바다를 온통 돛으로 뒤덮으며 들이닥치자,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산으로 기어오르고 골짜기로 도망쳐 들어갔다.
  하지만 악독한 왜구 50여 명이 죽기를 무릅쓰고 맞서 싸웠다. 싸움이 될 턱이 없었다. 그
들은 우리 군사의 칼과 창에 찔러 전멸했다.
   온 섬 안을 샅샅이 뒤져 왜구를 무찔러라. 각 포구에 있는 배도 한 척도 남기지 말라.
  이종무 도체찰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 군사들은 섬 안과 포구로 흩어져 눈에 띄는 대로 왜구를 모조리 베고 집을 불살랐
다.
  우리가 이 때 거둔 전과는 다음과 같다.
  1) 불사른 배 129척.
  2) 목 벤 왜구 114명.
  3) 사로잡은 왜구 21명.
  4) 불사른 집 1939채.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고, 7월 3일 이종무는 당당히 대병단선을 이끌고 거제도로 개선했다.
  거제도에 닿자 곧 송유인이란 파발꾼을 한양으로 보냈다. 이종무는 말을 몰아 6일 밤중에
야 대궐에 닿았다.
  이종무는 왕 앞에 나아가 보고를 올렸다.
   우리 조선의 병선들은 당당히 거제도로 개선하였습니다. 단 한 척의 배도 부서지거나 가
라않지 않고 자랑스럽게 돌아왔습니다.
  대마도는 본디 우리 땅이었다. 경상도 계림(경주)에 딸려 있던 섬이었다. 그러나 워낙 땅
이 조그맣고 험하며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서 살지를 않았다.
  그러던 중, 왜인들 가운데 제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는 무리들이 그 곳에 모여들어
땅굴을 파고 살며 도둑질과 노략질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종무가 대마도에서 개선한 뒤 왜적이 또다시 조선의 바다에 나타났다.
   은혜를 모르는 괘씸한 녀석들.
  대마도주의 애걸로 병사들을 철수하여 돌아온 지 며칠도 안 되어 다시 왜구의 배 두 척이
충청도 안흥량 바다에서 노략질을 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대마도에 다시 토벌군을 보낼 것인지 화해를 할 것인지 오랫동안 의논
하였다. 결국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는 것으로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 내고, 왜적의
토벌 문제는 일단 마무리지었다.
  이 때는 군사에 대한 일은 태종이 맡아 보았으나 세종 역시 전혀 모른 체한 것이 아니었
으므로 대마도를 예속 시킨 것도 세종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세워졌을 때 죽음으로써 고려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신하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나라가 바뀐 뒤였으므로 이러한 선비들을 가두거나 죽여야 하겠지만, 죽이는 것만이 상책
은 아니었다.
   그들이 우리를 어쩌겠느냐. 조용히 책이나 벗삼아 지내게 해라.
  태종은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아 너그럽게 대했다.
  이렇듯 숨어 산 이들 가운데 길재라는 분이 있었다.
  야은(길재의 호) 길재는 조선에서 벼슬하기를 바라지 않아 고향 선산의 자기 집에 틀어박
혀 나오지 않았다.
  길재는 워낙 훌륭한 학자였으므로 그를 따르는 선비가 많았다. 그들은 조선에서 벼슬을
할까 마음먹다가도 길재 선생을 생각하고는 다시 숨어 버렸다.
   길재를 조정으로 불러들여야겠구나. 만약 길재가 벼슬을 하면 그를 따르던 많은 훌륭한
선비들도 생각이 달라질 터이니.
  태종은 임금으로 있는 동안 길재를 불러 벼슬 자리에 앉히려고 무척 애를 썼다.
   나는 고려의 녹을 먹은 사람이오. 어찌 고려를 멸망시킨 이씨 밑에 들어가서 신하 노릇
을 할 수 있겠소.
  길재의 절개는 대보다도 곧았다. 태종은 당장 잡아들이고 싶었으나 고려 유신들의 반발이
심할 것 같아 길재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길재를 불러들여도 새 나라에 힘이 될 것은 없습니다. 그냥 숨어 살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나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선을 섬기고 있는 고려의 유신들은 이렇게 말하며 태종이 길재를 불러들이는 것을 말렸
다.
  태종도 그들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길재는 고향에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다.
  태종 12년, 옛 고려 왕조의 사헌부(정치에 대해서 의논하고 나쁜 일을 바로 잡던 기관)에
서 벼슬을 하던 서견이 지은 시 한 수가 문제되었다.
  그 시는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것을 비꼬고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것을 찬양한
내용으로, 말하자면 조선 왕조에 대한 반역시였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 세 정승이 들고 일어났다. 그의 목을 베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자 태종이 말했다.
   고려 왕조의 신하가 고려 왕조를 못 잊는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 아니겠소. 서견의 시는
덮어 두고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에 대한 말을 꺼내지 마시오.
  신하들은 할 수 없이 입을 다물었으나, 다음 날 다시 태종을 찾아왔다.
   전하, 이는 서견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옵니다. 옛것에만 마음을 두어 새로운 것을 그
르다 하는 것은 그 사람됨을 고치기 어렵사옵고, 엄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또 그 같은 생각
을 가진 무리가 생겨날까 염려되옵니다.
   이씨 왕조의 시대에 서견의 시는 마땅히 벌을 받을 만한 것이오. 그러나 자기가 섬기던
나라를 생각하는 충성은 높이 사야 하오.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시오.
  태종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렇게 딱 잘라 말하였다. 그 뒤 다시는 서견에 대한 말이 나오
지 않았다.
  세종 원년, 끝내 절개를 굽히지 않던 길재가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고려 왕조에는 어진
신하오, 조선 왕조에는 죄인인 길재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선왕
인 태종의 뜻을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곧 호조(나라의 재산과 살림을 맡아 보던 곳)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길재 선생 댁에 쌀 열다섯 섬과 백지 100권을 보내서 장례식에 쓰도록 하오. 길재 선생
은 효도·충성·신의·예의·염치 등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소. 이러한 길재 선생을 모두 우
러러 받들어야 할 것이오.
  세종은 이렇듯 자기 왕실에 등을 돌린 사람에게까지 올바름을 옳다 하며 따뜻한 마음씨를
베풀었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세종을 왕세자로 삼을 때 황희라는 신하가 양녕 대군 편에 서서 강하
게 반대했다.
   셋째 왕자를 세자로 삼으심은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임금 자리를 이어받으실
분은 마땅히 맏 왕자님이셔야 하옵니다.
   옥좌란 만백성을 돌보아야 하는 자리요. 첫째냐 둘째냐를 따지기보다 나라와 백성을 위
하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겠소?
  태종은 이미 뜻을 굳혔으므로 이직과 황희의 반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들을
귀양보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해 5월에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 전 2월에 태종은
이직과 황희의 귀양살이를 풀어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나는 곧 죽는다. 내가 죽은 뒤 아직 젊은 왕 세종을 잘 모시어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도
울 수 있는 사람은 황희와 이직과 같은 곧은 신하이다.
  이 때, 조정의 신하들은 반대했다. 특히 사간원(임금에게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을 아뢰는
곳)에서는 세종에게 강력하게 아뢰었다.
   이직은 상감마마께서 대통을 이으시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상왕마마(태종)의 뜻까지 어겨
벌을 받은 몸이옵니다.
  영의정 유정현도 그들을 불러들이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직은 상감마마께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했던 사람임을 기억하소서. 그가 조정에
다시 돌아온다 해도 상감께 충성을 보일지 두렵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잘라 말했다.
   상왕께서는 이직의 죄가 가벼우니 다시 불러들여 나라일을 맡게 하라고 말씀하시었소.
더욱이 지금은 인재가 필요하여 다시 부른 것뿐이오.
  이직이 부름을 받은 지 20일 뒤에 황희도 조정으로 불려와 벼슬을 돌려 받았다.
  그 때 태종은 병석에 누워 있었다. 황희가 벼슬을 다시 받은 지 사흘 만에 사간원에서는
이직 때와 마찬가지로 황희를 처벌하라는 글을 상왕에게 올리려고 했다.
  이것을 안 세종은 곧 명을 내렸다.
   상왕께 그 글을 읽어 드리지 말고 과인에게 바치라.
  사간원에서는 하는 수 없이 그 글을 세종 임금에게 바쳤다. 세종은 그 글을 읽고 아주 못
마땅하게 여겼다.
   상왕께서는, 황희는 죄는 본디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시었소. 그러니 황희
의 죄는 충성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없소. 그리고 이미 조정에 들어왔으니 죄목 없이
벌할 수는 없소.
  세종은 끝내 신하들의 상소(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듣지 않았다.
  황희와 이직은 이렇듯 세종의 총명한 보살핌을 받았고 또 그 왕의 은덕만큼 세종을 도와
정치를 옳게 이끌었다.
  황희 정승과 세종은 서른다섯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다. 황희 정승은 세종에게는 아버지
와 같은 나이였다.
  어느 날, 세종이 황희 정승에게 물었다.
   황 정승, 내가 들으니 황 정승께서는 개를 싫어한다면서요. 개란 귀여운 짐승이 아니오?
  황희는 대답했다.
   상감마마, 전들 사람에게 목숨까지 바치는 충직한 개를 싫어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개를 기르지 않으시오? 다른 신하들은 개를 여러 마리씩 기르는데.
   소신의 집에는 도둑이 들어도 훔쳐 갈 물건이 없어 도둑이 넘보지 않으니 개를 기를 필
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개에게 먹일 밥이 있으면 동냥하는 가난한 거지에게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개를 기르지 않는 것이옵니다.
  세종은 황희의 깊은 마음에 감탄했다.
  황희 정승은 아침에는 반찬 없는 밥, 저녁에는 죽을 먹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세종이 의
아하게 생각한다는 얘기를 듣고 황희 정승이 아뢰었다.
   소신은 나라에서 후한 녹을 받고 있사오나 죽을 먹는 것은 소신이 즐겨 하는 일이옵니
다. 소신이 먹을 것을 조금 덜 먹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군자의 도리로서, 소신의 마음
은 재물 많은 이보다 흐뭇하오니 심려 마시옵소서.
   황희 정승이야말로 성인과 다를 바 없구려.
  세종은 다시 한 번 마음 속으로 고개를 숙였다.
   황희에 비하면 나의 생활은 너무나 호화롭구나. 참으로 백성들에게 부끄러운 왕이로고!
  그 뒤 세종은 수라상(임금의 진지상)까지도 아주 검소하게 차리도록 명령했다 한다.
  언젠가 함경도에서 임금에게 사슴을 바쳤다. 사슴을 바친 것은 뜻이 있어서였다.
  공자가 쓴 책에, 나라가 평안할 때는 기린이라는 영특한 동물이 난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
로 기린과 비슷한 사슴을 보내니 궁궐 뜰에서 기르며 귀여워해 달라는 뜻이었다.
  세종을 위한 지극한 마음에서 귀한 사슴을 바친 것이지만 세종은 그 사슴을 받지 않았다.
   내가 어찌 사슴을 기르겠는가. 황희 정승은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 개도 기르지 않는
데, 내가 사슴을 기르며 세월을 보내서야 되겠는가.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사랑하며 벗하여
지내는 책이 있지 않느냐.
  또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세종 임금과 황희 정승의 인연은 정승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어졌다.
  황희 정승이 세상을 떠난 것은 아흔 살 때였다.
  그가 죽었을 때, 집에는 재산이라고는 한 푼도 없었다. 몇 대의 임금을 섬기며 높은 벼슬
을 했으면서도 시집 안 간 딸의 혼수감조차도 없었다.
  딸이 시집갈 때 입을 옷 한 벌도 없는 재상의 집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황희 정승의 부인은 정승이 숨을 거두려고 할 때 눈앞이 캄캄했다. 오래도록 함께 살아온
남편이 죽는 것도 서러웠지만, 막내딸을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시집갈 나이가 된 막내딸에게 마련해 줄 혼수감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인은
무심코 한탄했다.
   대감께서 살아 계실 때도 혼수감을 장만하지 못했는데 대감께서 돌아가시면 혼수감은 어
찌해야 좋겠습니까?
  그러자 황희 정승이 말했다.
   그것은 걱정 마오. 영남 땅의 광대 바우쇠가 다 마련해 줄 것이오.
  황희 정승은 뜻밖에도 엉뚱한 말을 했다.
   대감, 영남 광대가 무엇 때문에 우리 딸의 혼수감을 마련해 준답니까?
   그럴 일이 있소. 그러니 너무 염려 마시오.
  그런데 황희 정승의 딸과 약혼한 신랑 집도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신부의 옷을
마련해 주어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대문 앞이 시끄러워졌다.
  그 때 하인이 헐레벌떡 달려들어오며 소리쳤다.
   마님, 마님!
   웬 소란이냐?
   어떤 벼슬아치가 여러 하인에게 퍽 많은 짐을 지워 가지고 오는데, 그것이 아씨의 혼수
감이라고…….
  부인은 정신이 번쩍 들며 남편이 숨을 거두기 전에 한 말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쳤다.
   영남 광대 바우쇠…….
   어디서 보낸 짐이냐고 여쭈어 보아라.
  하인이 어마어마한 짐 앞에서 묻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느 분이 보내신 혼수감입니까?
   이조(벼슬아치를 임명하고 다루는 곳)에서 보낸 것이다. 상감마마께옵서 오늘 황공하옵게
도 황 정승의 막내딸이 시집갈 나이가 됐을 터인즉 공주마마와 똑같은 혼수감을 장만하여
보내라는 분부를 내리셔서 가지고 왔느니라. 안방마님은 계시느냐?
  이 말을 듣고 부인은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영남 광대 바우쇠가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뜻밖에 상감마마가 보낸 것이라 하니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웃지 못할 사연이 있었다.
  황 정승이 살아 있을 때, 경복궁 경회루에서 연회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
  조선 팔도에서 재주 있는 광대들이 뽑혀와 세종과 신하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영남 광대 바우쇠의 재주가 뛰어났다. 줄타기 재주를 부리는 광대였다.
  바우쇠는 공작 부채를 한 손에 펴 들고 줄 위에서 갑자기 야릇한 몸놀림을 하기 시작했
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바우쇠는 엉덩이를 한 번은 오른쪽으로, 한 번은 왼쪽으로 쑥 빼돌렸다. 이렇게 왼쪽 오른
쪽 번갈아 엉덩리를 빼돌리더니 손을 뒤로 돌려 엉덩이에 찬 명주 수건을 잡았다. 그러더니
수건으로 꼬리치는 흉내를 내며 여전히 엉덩이를 왼쪽 오른쪽으로 빼돌리는 것이었다.
   여봐라, 그 괴상한 춤은 무슨 춤이라고 하느냐?
  한 신하가 물었다. 그러자 바우쇠는 여전히 엉덩이를 흔들어 대며 대답했다.
   황 정승 댁 속곳춤입니다.
   뭐라고? 저런 고얀 녀석……. 그럼 그 춤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으렷다?
   물론 있습지요. 황 정승 댁에서 아침에는 밥, 점심은 굶고, 저녁에는 죽을 끓여 먹는 것
은 다 아시는 바이지만, 세상에서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마님과 따님의 남모를 설움이지요.
마님도 따님도 입을 것이 있어야 나다니죠. 그래서 속곳 한 벌을, 한 번은 마님이 이렇게 입
고 나가시고…….
  바우쇠는 엉덩이를 오른쪽으로 한 번 크게 빼돌렸다.
   한 번은 따님이 이렇게 입고 나가시고…….
  이번에는 왼쪽으로 엉덩이를 비쭉 빼돌렸다.
   마님이 이렇게 입고 나가시고……. 따님이 이렇게 입고 나가시니…….
  바우쇠는 엉덩이를 계속 오른쪽 왼쪽으로 빼돌리며 말했다. 웃음 소리가 뚝 그치고 연회
장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속곳 한 벌로 마님과 따님이 번갈아 입으시는 형편이니 따님의 혼수감이야 생각조차 할
수 있겠습니까요.
  세종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황희 정승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황희 정승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기 민망스러워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황희 정승은 천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친구처럼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은혜를 입었던 바우쇠가 황 정승의 사정을 보다못해 높은 사람들 앞에 알렸던 것이었다.
  황희 정승은 뒷날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바로 바우쇠가 속곳춤이라는 눈물겨운 익살
춤을 추던 일을 생각해 내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던 것이다.
  나중에야 이 이야기를 들은 황희 정승의 부인은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어려운
살림을 꾸려 오던 일들이 모두 떠올랐기 때문이다.
  부인은 그 때 비로소 황희 정승이 세상을 떠나며 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진 세종 임금은 그 때의 일을 잊지 않고 황희 정승의 딸에게 관심을 두었다가 혼수감을
보내 준 것이었다. 황희 정승의 막내딸에게 혼수감을 내린 세종은 마음이 무척 아팠다. 괴로
워하던 세종 임금은 드디어 왕명을 내렸다.
   결혼할 때를 맞았으면서도 혼수감이 없어 시집을 가지 못하는 처녀들에게 혼수를 장만하
여 주도록 하라.
  그야말로 백성들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내릴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나라의 돈에는 한정이 있는 법이고, 가난한 처녀는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가슴아
프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나, 효성이 지극하거나 재주 있는 처녀들 가운데 가난해서 시집 못
간 사람을 골라서 돕도록 했다.
  세종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정신을 가진 분이
었다.
  세종 때는 아직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한창 학문·법·예의·정치 등의
기반을 잡아 가던 때였다. 그러나 여러 지방 구석구석에서는 아직도 어지러운 일이 많이 일
어났으며 한양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 무렵, 죄를 지은 사람이 잡혀 오면 고을의 사또나 죄를 묻는 벼슬아치들은 먼저 호통
을 치며 매질부터 하기가 일쑤였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혹독한 매질로 목숨이 끊어질 줄이
나 알아라.
  벼락 떨어지듯 하는 호령 소리와 함께 나졸들이 죄수의 왼쪽과 오른쪽에 죽 늘어서서, 번
갈아 가며 뼈마디가 으스러지도록 무섭게 매질을 해 댔다.
  억울하게 잡힌 사람이라도 모진 매에 견뎌 내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헛소리를 지르기 일
쑤였다.
   네, 네, 제가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옥살이를 하거나 죽어 갔다.
  세종은 죄인에게 벌을 주는 것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떠한 행동이 법에
어긋나 벌을 받는지를 백성들에게 자세히 알려 주고 싶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백성들이 죄
를 짓지 않게 하는 데에 마음을 썼다.
  세종은 옥 안에 갇힌 죄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비록 죄인이라 해도 어쩔수 없어
죄를 지었지, 본디부터 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
린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이 고문을 받고 죽어 간다는 것이 자신의 살을 도려 내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지 않다. 내가 좀더 덕으로써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한 탓이 아니냐.
지은 죄가 밉지, 사람이야 불쌍한 한평생을 살다 가는 것을…….
  세종은 명령을 내렸다.
   죄수의 등을 때리지 말 것이며, 죄수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말지어
다.
  또한 세종은 옥에 갇힌 죄수들의 괴로움도 덜어 주려고 애썼다.
  이렇듯 세종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깊어 죄를 지은 사람에게조차 소홀하지 않았다.
  임금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세종은 이런 어명도 내렸다.
   온 나라 안의 효자·효부·열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정성을 다한 사람을 조사하여
보고하라.
  온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행실이 기록되어 보고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훌륭한 사람들만 가려서 뽑도록 하시오.
  세종은 곧 그 사람들에게 정문(그 행실을 표창하기 위해, 문 앞에 세워 준 붉은 문)을 세
워 주도록 명했다.








  3. 형제의 정

  양녕 대군은 세자 자리에서 내쫓겨 한강 건너 광주로 갔지만, 살아가는 데는 불편이 없었
다.
  그러나 막 쫓겨났을 그 무렵에는 무척 두려워했다. 맏왕자를 임금 자리에 앉히는 것이 올
바른 일이라 하여 그를 떠받들고 반란을 일으키는 무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하여 내쫓았다
가 나중에 죽인 일이 역사상에는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도 언젠가는 사약을 내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밥맛마저 잃을 정도였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태종이 양녕을 불렀다.
   형제 사이의 우애를 잊지 말고 지내라. 상감(세종)께서는 천성이 어지시니 너를 정성껏
위해 줄 것이다.
  그 때부터 양녕은 자기 몸에 화가 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양녕 대군은 임금의 형으로서 동생을 상감이라 불러야 되는 자기 신세가 한스러웠
다. 그래서 좋아하던 술을 더욱 많이 마시게 되었다. 세종은 형님인 양녕 대군이 걱정되었
다.
   형님께서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큰일이다. 매일 술을 마시니 건강에도 좋지 않을뿐더러
남들 보기에도 딱한 일이다.
  어느 날, 양녕은 자기 시중꾼에게 말했다.
   늘 만나는 그 얼굴, 그 노랫소리, 그 춤이 이제는 싫어졌다. 옛날부터 평양의 감로주라는
술이 좋다는 소문이 있다. 평양에 한번 가 봐야겠다.
   대군마마께서는 나들이를 하시려면 반드시 상감마마의 허락이 있어야만 합니다. 상감마
마께서 허락하실 리가 없습니다.
  시중꾼의 이런 대답을 들었으나 양녕은 한번 평양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자 견딜 수 없어
서, 드디어 세종에게 평양으로 보내 달라고 청했다. 세종은 잠시 생각에 잠겨 대답하지 않았
다.
   상감마마, 제가 평양에 가서 무슨 일이라도 꾸밀까 봐 그러십니까?
  세종은 당황하여 대답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못마땅해하십니까?
  사실 세종 대왕은 양녕 대군이 평양에 가서 술타령을 하고 경솔한 행동을 할까 봐 걱정이
었다.
  양녕 대군이 술이 취해 하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그 말을 믿기보다 오히려 그의 사람됨
을 얕잡아 볼 것이 염려스러운 것이었다.
  세종은 한참 만에 이렇게 말했다.
   형님, 술만 드시지 않겠다면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양녕 대군은 불평했다.
   아니, 술 없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평양으로 놀러 가는데 술을 가까이하지 말라시
니 너무하십니다.
   형님께서 꼭 술을 드셔야 한다면 저는 허락해 드릴 수 없습니다.
  양녕 대군은 할 수 없이 약속했다.
   술은 가까이 하지 않고 평양 구경만 하고 올 테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꼭 약속하시지요? 좋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양녕 대군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떠났다. 술도 없는 객사의 밤은 쓸쓸할 뿐만 아
니라 너무나 허전했다. 이렇게 첫날 밤부터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니, 오랫동안 평양 구경을
하는 사이에 도저히 그 약속을 지켜 낼 것 같지 않았다.
  이튿날, 양녕 대군은 기묘한 명령을 내렸다. 평양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각 고을의 사또들
과 평안 감사에게 내린 것이다.
   내가 가는 길에 술상을 차려 올리는 사또에게는 엄한 벌을 내리겠다.
  각 고을 사또들은 이 명령을 듣고 그토록 술을 좋아하는 대군이 이제는 결심을 단단히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양녕 대군이 이런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는 말이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종 대왕은 가슴이 아팠다.
   그토록 좋아하시는 술이 없는 평양 구경이 형님께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세종은 양녕 대군이 가엾은 생각이 들어 평양 감영(관청)으로 비밀히 어명을 내렸다.
   평안도 감사는 양녕 대군께서 가시거든 어떻게든지 즐기시도록 하여라. 양녕 대군께서
술을 대접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다고 하니 이에 어긋나지 않게 재주껏 머리를 써서 맞
이하라. 그리하여 대군의 쓸쓸함을 풀어 드린다면 후한 상을 내리리라.
  평안 감사는 양녕 대군이 자기에게 술을 대접하지 말라는 명령을 먼저 내린 데다가 세종
임금의 분부가 있었으니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평안 감사가 이렇게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도 모르고 양녕 대군은 평양성으로 들어섰다.
  맨 처음 평양에 오고 싶었던 것은 소문난 평양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고 소문난 평양의
감로주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모란봉, 부벽루, 능라도의 능수버들…….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
질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였지만, 양녕 대군의 눈에는 잿빛의 죽은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았다.
   헛 참! 옛 고구려의 화려한 도읍이 이렇듯 쓸쓸하다니!
  양녕 대군은 자기가 내린 명령은 생각지도 않고 이렇게 투덜거렸다.
  평안 감사는 양녕 대군을 객사에 모셨다. 양녕 대군은 객사의 방문을 열어 놓고 앉아서
어두운 마당을 내려다보며 한숨지었다.
  양녕 대군이 허전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평안 감사가 하인에게 저녁상을 들려 가지고
들어왔다.
  이미 밖은 캄캄했다. 맛있는 갖가지 반찬이 가득 올려진 밥상이었다, 그러나 그 귀한 반찬
들도 양녕 대군의 구미를 돋우지 못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상 위에 하얀 사기 술병이 얹
혀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것은 술이 아니냐?
  양녕 대군은 속으로는 침이 꿀꺽꿀꺽 넘어갔으나 겉으로는 짐짓 펄쩍 뛰는 체했다.
   대군마마, 마마께서 술을 가까이 들이지 말라는 분부를 내리셨는데 어찌 감히 술을 올리
겠습니까, 하오나 대군마마께서는 천하의 호걸이신데 진지상에 술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허
전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생각다 못하여 술은 아니되 술  주  자가 붙은 감주를 상에 올렸
나이다.
  단술이야 어디 술인가. 그래도 지금 양녕의 기분으로서는 술  주  자란 말만으로도 귀가
솔깃했다.
   감주마저 금하라는 명령은 없으시기에…….
   허허, 감주야 어떠리요. 내 감사히 받아 술을 마시는 기분으로 마시리다.
   이 감주를 마시면 취한 기운이 돈다 하옵니다. 엿기름에도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 있
다고 하옵니다.
  평안 감사의 말에 양녕 대군은 술병의 단술을 한 잔이라도 남에게 주는 것이 아깝다는 듯
연거푸 들이마셨다.
  술병을 비우고 났을 때는 시라도 한 수 읊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거 꼭 술 취한 기분이구려.
   소신이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과연 감사의 말이 옳소.
  양녕은 단술 빛깔이 좀 이상한 것을 보고, 또한 엿기름에도 취한다는 감사의 말을 듣고는
단술에 술을 섞었음을 깨달았으나 모른 체했다.
   과연 영리한 감사로다. 내가 어쩔 수 없이 내린 명령을 꿰뚫어보고 이런 방법으로 술을
먹이는구나. 단술을 바친 것이니 누가 나무랄 까닭도 없지!
   그럼 편안히 주무십시오.
  평안 감사가 물러가고 나자, 양녕 대군은 취기가 올라 누구든지 좋으니 이야기가 하고 싶
어졌다.
  양녕은 그 날 저녁 어둑할 무렵, 이 객사로 돌아로 때 본 객사의 심부름꾼이 생각났다. 열
대여섯 살 정도의 무척 총명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 아이를 불러서 말벗이나 삼을까?
  양녕 대군은 대청으로 나가 환하게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그 때, 객사의 담 한쪽 구석이 무너져 있는 곳으로 시커먼 것이 후다닥 뛰어들어오는 바
람에 양녕 대군은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고양이였다. 무엇인가를 입에 물고 쏜살같이 무
너진 담으로 뛰어들어오더니 양녕 대군이 서 있는 마루 아래로 숨어 버렸다.
   망할 고양이 같으니!
  그런데 또다시 하얀 것이 하나, 고양이가 뛰어들어온 그 무너진 담에서 나왔다. 이번 것은
고양이보다 훨씬 커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이었다. 흰 옷 입은 여자였다. 더구나 아
직 애티가 나는 젊은 여자였다.
  여인은 담 구멍으로 정신없이 뛰어들어왔다가 양녕 대군이 대청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란 듯 그 자리에 장승처럼 멈춰 섰다.
  한 나라 임금의 형이 묵는 객사였다. 아녀자가 아니라도 담 구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까
닭이야 어떻든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더구나 한밤중에 과부들이나 입
는 하얀 소복을 입고 들어오다니! 뒤이어 객사를 지키던 나졸들이 들이닥쳤다.
   이 방정맞은 계집 같으니! 감히 이 곳이 어딘 줄 알고 밤중에 뛰어드느냐!
  벼락같이 소리치며 가련해 보이는 그 여자의 팔을 양쪽에서 잡고 양녕 대군 앞으로 질질
끌고 왔다. 양녕이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여인은 무척 아름다웠다. 심하게 꾸짖느 말을 할 수
가 없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런 짓을 했느냐?
  여인은 두려운 듯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 밤이 세상을 떠난 지아비(남편)의 제삿날이옵니다. 제사상에 얹으려고 준비한 닭고
리를 도둑고양이가 훔쳐 물고 달아나는 바람에 정신없이 뒤쫓다가 그만…….
  양녕 대군은 용서할 수 있는 구실이 생긴 것이 아주 기뻤다.
   듣고 보니 사정이 딱하구나. 용서해 주겠으니 어서 돌아가서 지아비 제사 지낼 준비나
해라.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는지요. 하늘 같으신 은혜 평생 동안 잊지 않고 기억하겠나이
다.
  양녕 대군은 여인을 용서했지만 허물어진 담장으로 여자를 들어오게 했으므로 평안 감사
를 나무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그 총명한 객사의 심부름꾼 소년이 양녕 대군 앞에 나와서 파랗게 질린 채 말했다.
   대군마마,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까의 그 과부는 쇤네의 누이옵니다. 만일 대군마마께서
평안 감사를 처벌하신다면, 뒷날 감사께서는 누이의 죄를 물어 누이에게 죽음이나 다름 없
는 큰 벌을 내릴 것이니 제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알았다, 그렇겠구나.
  양녕 대군은 감사를 용서할 수 있는 구실을 소년이 마련해 준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밤이 꽤 깊어서였다. 그 소년이 양녕 대군이 묵고 있는 방밖에 와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대군마마, 대군마마.
   누구냐?
   쇤네올시다. 누이에게 대군마마께서 두 번씩이나 용서해 주셨다는 말을 했더니 눈물을
흘리며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제사 음식을 가리시지 않는다면, 누이가 대군마마께 대접하겠
다고 합니다만…….
  이리하여 양녕 대군은 그 여인의 집으로 가서 대접을 받았다. 양녕 대군은 상감마마와의
약속을 어기고 술과 여인을 가까이하고 말았다. 이튿날 밤도 그 여인은 다시 찾아온 양녕
대군을 반가이 맞아 잘 대접하였다. 여인은 이마가 닿도록 절을 하며 말했다.
   대군마마, 죽을 죄를 지은 저를 다시 한 번 용서해 주시옵소서. 실은 저는 과부가 아니고
기생이옵니다.
   무엇이라고? 그렇다면 어젯밤 제사는?
  양녕 대군은 깜짝 놀랐다.
   모두가 꾸민 일이옵니다. 저는 기생 정향이옵니다. 그러나 대군마마를 모시는 데에는 부
끄러움이 없사옵니다. 황공하오나 이것이 모두 상감마마의 어명인 줄 아옵니다.
   무어라고, 상감의 어명이?
   그러하옵니다.
   그랬었구나, 아우가 그렇게 했구나! 아우는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아우에게 하나
도 도움 되는 것이 없구나. 아우야말로 훌륭한 임금이 될 것이다.
  양녕 대군은 아우인 상감을 잠시나마 원망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 뒤 양녕 대군은 정향을
버리지 않고 사랑했으며 방탕한 생활도 하지 않았다.








  4. 밤새도록 공부하는 임금님

  세종은 이렇듯 백성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만 극진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학문에 대해 더없이 큰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선비들을 몹시 아꼈다.
   집현전 이라는 기관에 젊고 훌륭한 학자들을 모아들여, 여러 가지 학문을 탐구하고 나라
를 바르게 다스리는 방법을 연구하게 했으며, 그 연구를 돕는 데 마음도 돈도 아끼지 않았
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가끔 요리상을 차려 주게 하고, 꿀 등 몸에 좋은 귀한 것을 내
렸다. 임금 스스로도 값비싼 것이라 하여 수라상에 올리지 못하게 하고 입에도 대지 않는
귀한 것들이었다.
  한편, 30명의 학자들을 둘로 나누어 번갈아 하루씩 걸러 가며 숙직하게 했다.
  고생시키기 위해 숙직시키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학문이나 어려운 문제를 연구하는 데는
한밤중의 조용한 시간이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구를 하는 만큼 그만한 대우도 해
주었다. 판서(지금의 장관)급의 높은 벼슬아치도 부러워했을 정도였다.
   집현전 학자들은 우리보다도 상감마마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며 호강한다.
  그러나 어진 임금 아래 어진 신하라고, 판서급의 높은 벼슬아치들도 그것을 흐뭇하게 생
각했다.
  숙직날의 학자들은 세종의 뜻을 받들어 졸음을 쫓아 가면서 연구에 열중했다. 그런데 잠
을 참는 것은 학자들 뿐이 아니었다. 세종도 잠을 자지 않았다.
  숙직하는 집현전 학자들을 생각해서였다.
  어느 겨울 밤이었다. 날씨가 몹시 추웠으므로 세종은 집현전 숙직방이 걱정되었다. 학자들
이 춥지 않을까 해서였다.
  세종은 명령했다.
   집현전에 가 보고 오너라. 학자들이 추위에 떨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얼마 뒤 세종은 보고를 들었다.
   신숙주가 아직도 책을 읽고 있사옵니다.
   추워하지 않더냐?
   몹시 추운지 가끔 손을 비벼 가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세종은 신숙주가 아직 자지 않고 책을 본다는 말에 자신도 책을 읽었다. 신숙주가 잠이
든 다음에야 책을 덮고 잠자리에 들 작정이었다.
   이제는 신숙주도 잠들었으리라.
  한참 동안 책을 읽다가 다시 신하를 보내 보았다.
   아직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세종 대왕은 놀랐다.
   허허, 이 늦은 시각까지 책을 읽는단 말인가. 그의 몸이 상할까 염려로구나.
  첫닭이 울었다. 벌써 새벽녘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세종은 사람을 보냈다.
   첫닭이 울었으니 이제는 잠들었으리라, 하루 종일 책을 보고 밤새껏 또 보았으니 틀림없
이 이제는 잠이 들었을 것이다. 가 보고 오너라.
  신하는 다시 다녀와서 보고해다. 비로소 방의 불이 꺼졌다는 것이었다.
   새벽녘이면 방이 몹시 추울 것이다. 이것을 가져다 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덮어
주고 오너라.
  세종은 추위를 막기 위해 솜을 두툼히 넣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주었다. 아침이 되어 신
숙주는 곤한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이것이 무언가?
  몸 위에 걸쳐져 있는 옷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상감마마의 어의가 아닌가!
  신숙주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성은을 어찌 갚을꼬?
  임금이 추위를 막기 위해서 입으시는 어의를 덮어 준 것도 감격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감사한 것은 자기가 첫닭이 울 때야 잠들었는데 잠든 뒤 살그머니 덮어 주신 상감
의 은혜였다. 임금도 그 때까지 잠들지 않고 줄곧 자기가 책 읽는 것을 지켜 보았다는 것
아닌가.
   어지신 임금을 모시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신하의 복이로다. 학자들을 이렇듯 사랑하여 주
시니 더 힘을 기울여 학문 연구에 힘써야 하겠다. 더욱이 늘 학문에 대해 올바른 자세를 잃
지 않으시니 임금께 배울 것들 뿐이로다.
  그 뒤, 신숙주는 나라를 위하고 세종을 받들어 모시는 데 있는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 무렵, 세종은 큰 공을 세운 태조(이성계)의 일을 어떻게든 후세에 전해야겠다고 생각했
다.
   고려 우왕 6년 9월, 왜구들이 떼를 지어 경상도와 전라도로 몰려든 적이 있었다. 태조 대
왕께서는 왜구를 치셔서 크게 전공을 세우셨다. 그 때 태조 대왕의 공을 직접 눈으로 본 노
인들이 많을 것이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흩어져 사는 그러한 노인들을 일일이 찾아보고, 그
일에 대해 자세히 적어 올리도록 하라.
  세종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 낸 태조의 공을 하나도 남김없이 후세에 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쪽 오랑캐를 무찌른 전공도 모두 기록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용비어천가 이다.
  세종은 태조가 왜구와 오랑캐를 용감하게 무찌른 사실을 널리 알려서, 아직도 남쪽 바다
에서 날뛰는 왜구와 북쪽에서 날뛰는 오랑캐를 막기에 밤낮으로 애쓰는 신하들을 격려하여
힘을 북돋아 주려고 했다.
   용비어천가 가 다 만들어지기까지는 오륙 년이나 걸렸다. 자료를 모으는 데 날짜가 꽤 걸
렸던 것이다.
  세종은  용비어천가 를 지을 무렵 무척 고생했다. 병 때문이었다. 임금이 된 뒤, 모든 것을
신하에게만 맡기고 편히 지냈으면 얻지 않았을 병인지도 모른다.
  틈만 있으면 책을 읽고 나라일을 맡아 하고, 어찌 해야 백성들이 편히 살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조금도 몸과 마음을 쉬지 않는 탓에 병이 난 것이었다.
  조례(아침 인사)를 왕이 직접 받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병 때문에 왕세자
(뒷날의 문종)가 대신 신하들의 조례를 받도록 했다.
   과인인 조례를 받을 때 쓰는 음악을 세자의 조례 때에도 연주하게 하라.
  세종의 이 명령에 신하들이 반대했다.
   상감마마의 조례 때에만 쓰는 음악을 세자마마의 조례 때에 쓸 수는 없는 줄로 아뢰오.
   과인이 병 때문에 나라일을 볼 수가 없어 세자에게 대신 시키는 것이니, 과인에게 하듯
세자에게도 시행하도록 하라.
  세종은 신하의 말을 물리치고 세자의 위신을 세워 주었다.
  세종은 몸이 불편하면서도 아픔을 참아 가며 나라일을 살피려 하였으므로 신하들은 잠시
요양하실 것을 간곡히 아뢰었다.
  그러나 세종은 잠시도 대궐의 정전(정치를 하는 곳)과 편전(임금이 평소 지내는 곳)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세종은 신하들의 간청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이천의 온천으로 요양하러 떠났다.
세자도 임금을 따라갔다.
  신하들은, 고려의 왕조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국 곳곳에 많이 있음을 우려하여 군졸들을
많이 거느리고 가야 된다고 말했다.
   나라를 지키는 군사도 모자라는 형편인데 내가 군사를 많이 데리고 갈 수는 없소. 목숨
은 하늘에 달린 것, 백성들 가운데 내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
를 당할 것이요, 덕은 없으나마 내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바란다면 홀몸으로 가도 화를
당하지 않을 것이오.
  세종은 굳이 말하지 않았으나 군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가면 백성들에게 폐가 될까 보아
그렇게 한 것이다.
  세종이 이렇듯 질병과 싸워 가면서 나라일을 보는 동안  용비어천가 가 완성되었다.
  세종은  용비어천가 를 지음에 있어 글로써뿐만 아니라 곡조를 붙여서 음악으로 연주할 수
도 있고 노래로도 부를 수 있게 했다.
  세종은 힘들고 놀랍고 벅찬 일들을 여러 가지로 많이 했다. 그런 일들 가운데 하나가 바
로 음악에 대한 것이다. 세종과 함께 음악에 온갖 힘을 다 기울인 사람이 바로 박연이다.
  박연은 처음부터 음악에 대한 일에만 힘을 쏟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약재의 질이 좋
은가 나쁜가를 연구했다.
  우리 나라에서 나는 약재와 중국의 약재를 연구하여 어느 나라의 약재로 만든 약이 병에
잘 듣는가를 연구 조사하는 일이었다.
  박연의 조사 보고서를 보고 감탄한 세종은 명령했다.
   앞으로 모든 약방문(약의 처방)은 박연의 보고대로 하라.
  박연이 음악에 대해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였다.
  세종은 예전에 읽은 중국의  예기 라는 책에 있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음악과 예절은 서로 따로따로 나누어질 수 없다.
  음악은 귀를 즐겁게 하고 술자리 등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절,
바로 그것과 같다는 말이다.
  세종은 이  예기  속에 있는 정신을 그대로 본받고, 또 그 정신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
주려고 생각했다.
   예절과 음악을 함께 지니면 덕이 있다고 한다. 덕이란 다시 말해서 예절과 음악이 몸에
배어 있음을 말한다.
  이렇듯 세종은 음악을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악학궤범 이라는 우리 나라의 음악책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 때 음악을 맡은 사람은 박연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박연이 한 일은 밑거름 정도의
일이었다. 그가 한 일은 세종대왕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박연은 오로지 세종 대왕을 받
들어서 도왔을 뿐이었다.
  음악을 정리해야 할 까닭이 또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고려 시대의 음악이 너무나 잡다
했기 때문이다.
  우선 열두 가지 음을 정하는 데 기준이 될 악기를 만들게 되었다.  황종율관 이라는 악기
인데, 박연은 이것을 만드는 데 성공하자, 이번에는  석경 이라는 악기를 만들었다.
  석경은 아무 돌로나 만들 수는 없으며 경석이라는 돌이어야만 소리가 아름답게 난다. 박
연은 이 돌을 찾아 나라 안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경기도 남양 땅에서 경석을 발견했
다.
  박연은 다 만든 석경을 궁궐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세종에게 처음으로 그 소리를 들려
주었다.
  세종은 소리를 다 듣고 나서 물었다.
   이 악기는 나무랄 데가 없으나 다만 굳이 한 가지 흠을 들자면 이칙의 소리(아홉째 소
리)가 조금 높은 것 같소. 그것은 어찌 된 일이오?
  이것이 웬일인가! 그렇게 정성들여 만들었는데 돌을 다듬을 때 그어 놓은 먹줄의 한 부분
이 아직 돌에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과연 상감마마의 음악에 대한 능력은 대단하시구나!
  그래서 먹줄이 그어진 곳까지 다시 다듬자 음계가 맞는 소리가 났다.
  세종 13년(1431) 1월 1일, 세종은 근정전에서 여러 신하들의 새해 인사를 받았다. 그 자리
에서 처음으로, 우리 나라 사람의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진 음악이 연주되었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도 우리만의 독창적인 음악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음악은 중국에도
자랑할 만한 뛰어난 것이었다.
  한 나라의 힘은 뭐니뭐니 해도 그 나라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나라의 돈은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기도 하고 나라가 가진 재산에서 만들어 내기도 한
다.
  나라일을 하는 벼슬아치도 논밭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만큼 힘도 세어지는 법이다.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가 고려의 장군일 때 일이다.
   고려에서 권력을 잡고 대대로 벼슬을 해 온 사람들은 나라에서 준 논밭과 자기의 높은
벼슬을 이용하여 모은 재산이 많아 지나치게 편한 생활을 하는 반면, 가난한 백성들은 너무
나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이성계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토지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계와 뜻이 맞는 조준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 뜻에 찬성하는 신하들도 많았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집안들도 만만치 않아서 토지 개혁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성계와 조준은 그들에게 찬성하는 무리들과 함께 실력을 쓰기 시작하였
다.
  우선 땅문서를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땅문서가 있는 이상, 제 것이라고 우기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려 공양왕 2년, 한여름이 지나가고 한가위도 지난 9월에 드디어 나라의 땅문
서, 개인의 땅문서 등을 모조리 송도(개성) 거리에 내다 놓고 불을 질러 버렸다.
   나라가 망하는구나, 저 자들을 당해 낼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공양왕은 검은 연기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나 왕명이 내려진 것도 아니므로, 고려 왕실이 아직 있는 이상, 땅문서를 불살랐다고
해서 당장에 토지 개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토지 제도가 이렇게 어지러울 때 이성계는 고려를 쓰러뜨리고 조선 왕조를 세웠다.
  사정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토지 개혁을 주장하던 이성계였지만 자기가 나라의 임금이 되고 보니, 고려의 토지 제도
를 그대로 두는 것이 편리할 것 같았다.
  왜냐 하면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힘이 컸던 공신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
다.
   토지 제도는 고려 때의 것을 그대로 따른다.
  그리하여 토지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태조(이성계)·정종·태종의 세 임금을 거쳐 오는 동안 너무나 많은 땅을 공신들에게 나
누어 주었기 때문에, 세종 대왕 때에 이르자 남은 토지로는 군사들의 양식과 벼슬아치들의
녹을 주기에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세종 대왕은 온 백성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토지 제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윽고 토지 제도를 개혁할 결심을 굳혔다.
  세종은 이 어려운 일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기관을 하나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제 상정소(논밭에 대한 제도를 자세히 정하는 기관)라는 것을 두어 토지 개혁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하려는데, 네가 맡아 해 보거라.
  세종은 일이 너무 중대하므로 둘째 왕자 진양 대군(뒤의 수양 대군; 세조)에게 전제 상정
소의 책임을 맡도록 명했다.
   하연·박종우·정인지 등 유능한 신하들을 거느리고 일을 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
다.
  그래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신하들이 한곳에 모여 일을 시작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 냈다.
  즉, 나라의 토지에는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이 있다. 그러므로 땅을 넓이로만 따져서 세를
물게 하면 메마른 땅을 가진 사람은 굶게 되고, 기름진 땅을 가진 사람은 쌀이 남게 된다.
따라서 현재 토지 제도는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 점을 먼저 공평하게 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이런 보고를 받은 세종은 곧 토지 등급을 6등급으로 나누도록 했다. 그리고 곡식이 거두
어들여진 양과, 얼마만큼 잘 여물었나에 따라 다시 6등급으로 나누어 참작하기로 했다. 이
참작의 비율을 10푼으로 했다.
  이러한 제도를 만들어 놓기는 했으나 실제로 실행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
다.
  곡식의 등급을 심사하는 그 지방의 사또가 공평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농사짓는 백성
에게 영향이 왔다.
  사또가 자기에게 돈을 바쳤거나 친한 사람에게는 세금을 적게 내는 등급을 정해 줄 수 있
었기 때문이다. 혹 미운 사람이 있다면 세금을 많이내도록 등급을 정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조정에서는 직접 벼슬아치를 각 고을로 보내어 자세히 조사하게 하였다.
  세종은 백성들이 새로 일군 논도 있을 것이고 나라에 알리지 않고 갖고 있는 토지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도 낱낱이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명했다.
  드디어 세종의 끈질긴 노력으로 그 결과는 너무나 놀랍게 나타났다.
  태종 4년 무렵의 논밭의 총 넓이는 92만 2477결이었다.
  그런데 세종 때에는 161만 9257결이었다. 70만 결 가까이나 논밭이 많아진 것이다. 한결에
곡식이 100섬이 나니까 계산해 보면 엄청난 숫자이다.
  또 태종 4년에 받아들인 곡식은, 위에서 말한 논밭의 넓이에서 어림잡아 보면 185만 5천
섬인데 세종 때에는 330만 섬이나 되었다.
  백성들도 편히 살 수 있게 되고, 나라의 창고도 이만큼 부자가 되었으니 세종이 얼마나
어렵고 큰일을 했는지 알고 남음이 있다.
  세종은 토지를 정리하고 세를 거두어 들이는 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농사짓는 법을 발달
시키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늘과 땅의 이치에 맞도록 농사를 짓고, 또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자연이 지닌 힘을 많
이 이용하면, 쌀 한 말 나던 땅에서 두 말도 거두어들일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니 백성들을
깨우쳐 농사짓는 법을 바꾸도록 힘쓰시오.
  세종은 일을 맡은 신하에게 이렇게 이른 뒤, 스스로도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연구했
다.
   농사집요 · 사시찬요 라는 농사에 관한 책이 있었으나 그것은 중국 농사 책이었다.
   땅에 씨앗을 뿌려 거두어들이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나, 중국의 농사법이 우리 나라의
농사에도 알맞다고는 볼 수 없소. 우리 나라 땅에 알맞는 농사법이 있을 것이오. 그러한 책
을 써서 펴내도록 하오.
  세종은 정초 등에게 명하여서 우리 나라에 맞는 농사책을 쓰도록 했다.
  세종은 농사 책 쓰는 일을 정초에게만 맡기지 않고 직접 참여하여 힘을 기울였다.
  신하들을 모아 놓고 농사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또한 같은 넓이의
땅에서 더욱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각 지방으로도 사람을 보내어 수많은 자료를 모았고 그 결과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그 동안의 노력이 큰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 책이  농사직설 이다.
  세종은  농사직설 을 펴낸 뒤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그 책에 따라서 농사를 짓도록 고을
수령들이 백성을 잘 지도하라고 명령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농사이다. 지금 나라에서는 우리 나라의 경험
많고 곡식을 많이 거두어들이는 농민들에게 물어서  농사직설 이라는 책을 펴냈다. 농민들이
정신이나 힘을 딴 곳에 쓰지 않고 농사에만 힘을 쓰고 때를 맞추어 농사를 지어 나간다면
날씨가 고르지 않아도 굶주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궁궐 안에서 농사짓는 시험을
해 보았더니, 가물어도 곡식이 말라 죽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또 잘 자란 농작물은 사람의
힘으로 가뭄에서 지켜 낼 수가 있었다.  농사직설 에서도 말했듯이 일찍 때를 잘 맞추라 하
였으니 고을 수령들은 잘 새겨듣고 농민들을 가르쳐 이끌도록 하라. 그러나 때가 너무 이르
면 오히려 자라는 데 해로울 수도 있으니  농사직설 에 따르도록 하라.
  이렇듯 세종은 농사에 대해 힘썼고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가 관심을 두었던  수차 에
대해서는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수차에 대해 처음 알려진 것은 세종 11년,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박서생이 일본에서 돌아
와 세종에게 올린 글에서였다.
  세종은 가뭄이 들면 농민들이 일일이 물을 퍼서 논밭에 붓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면 편리
하게 물을 댈 수 있을까 궁리하던 참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수차를 만들어 농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우리 조선에서도
우리에게 알맞은 수차를 연구, 개발하여 농민들을 돕도록 하라.
  곧 세종의 명에 따라 김신이 수차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 끝에 만들어진 수차의 모형을
박서생이 세종에게 바쳤다. 그리하여 온 나라에 그것을 보급시켰다.
  그러나 80명, 때로는 100명이 매달려 수차를 하루종일 돌렸으나 겨우 1무(30평)밖에 물을
대지 못했다. 그나마도 물이 새어 버렸다.
  신하들은, 수차가 제구실을 못하여 백성들이 오히려 더 힘들게 일한다고 세종에게 아뢰었
다.
   내 그다지도 수차에 힘을 기울였건만, 도리어 백성들에게 수고를 끼치는 겨로가를 낳았
다니……. 어쩔 수 없구려.
  세종은 그토록 노력했으나 끝내 백성들의 생각에 맡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차를 없애기를 바라는 고을은 없애도록 하라. 그러나 그대로 쓰겠다는 고을은 쓰도록
하라.
  세종이 애를 썼으나 실패한 것은 오직 수차뿐이었다. 수차는 실패했지만 농사일을 지도하
는 것은 임금 된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세종은 농사를 보다 잘 지을 수 있도
록 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5. 한 치라도 우리 땅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와 오랑캐와의 역사를 더듬어 보자.
  이성계의 조상인 이안사는 본래 함길도 덕원이란 고을에 살았다.
  그런데 원나라로부터 지방 수령으로 임명받아 경흥 고을에서 30리쯤 떨어진 알동이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어찌나 고을을 잘 다스렸던지 동북 지방 사람들은 원나라 벼슬을 하는 이안사를 무
척 존경했다.
  그러나 오랑캐들이 자주 쳐들어와서 집을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여 덕원으로 옮겼다.
  세종은  용비어천가 에서 그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했다.
  덕원에서 다시 경흥 고을로 옮겼는데, 여기에서 아들 이행리에게 자기의 벼슬 자리를 물
려주었다. 그런데 오랑캐들은 이행리를 습격하여 죽이려고 했다.
  이행리는 재빨리 달아나 바닷가에 이르렀다. 넘실거리는 푸른 바닷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뒤에서는 오랑캐 무리가 말을 달려 쫓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넘실거리던 푸른 바닷물이 갑자기 줄어들더니 얕아진 것이다. 저
만큼 바다 가운데에 섬이 보였다.  적도 이다.
   아,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이행리는 적도로 건너갔다. 오랑캐들이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얕아졌던 바닷물
이 갑자기 불어나서 검푸르게 출렁거렸다.
  오랑캐들은 발을 동동 굴렀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행리는 이렇듯 곤욕을 당했으나 그 아들 이춘은 이행리와 달랐다.
  어느 날 밤, 이춘은 꿈 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보았다.
   나는 이 고을 남쪽에 있는 못에 사는 백룡인데, 흑룡이 와서 내가 사는 연못 속의 굴을
뺏으려 하니 나를 구해 주오.
  다음 날 밤 꿈에도 그 신선이 나타났다.
   제발 나의 부탁을 들어 주시오.
  신선은 사정하다시피 말했다.
  두 번씩이나 똑같은 꿈을 꾸게 되자, 이춘은 이 꿈이 심상치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
었다.
  다음 날, 이춘은 활을 메고 남쪽 연못으로 갔다.
  가 보니 기둥처럼 치솟은 물줄기 속에서 하얀 비늘과 검은 비늘이 번뜩였다. 불길이 물기
둥 속에서 번개처럼 번쩍거렸다.
  이춘은 활시위에 화살을 걸어 흑룡을 겨누어 쏘아 죽였다. 이춘은 밝은 마음으로 돌아왔
다.
  그 날 밤 꿈에 그 신선이 다시 나타났다.
   고맙소. 앞으로 그대 자손에게 크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신선은 자손에게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알려 주지 않은 채 사라져 버렸다.
  다음 날, 이춘이 그 연못으로 가 보니 그가 죽인 흑룡의 피가 연못을 온통 시뻘겋게 물들
이고 있었다.
   연못의 물이 이렇게 붉게 물들었으니 이제부터 이 연못을 적지(붉은 연못)라고 부르자.
  얼마 뒤에 이춘은 신선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흑룡은 바로 오랑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흑룡을 쏘아 죽인 이춘은 오랑캐와 여러 번 싸
워 모두 물리쳤다. 그리고 그 아들 이자춘도 오랑캐와 싸워 번번이 물리쳤다.
  그러나 오랑캐는 한두 무리가 아니었다. 계속 국경을 넘어 들어와서는 우리 백성들을 못
살게 굴었다.
  이자춘의 둘째 아들 이성계는 활쏘기가 뛰어나 고려 공민왕 5년(1356)에 벼슬길에 올라
오랑캐를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1361년에 북쪽에서 쳐들어온 홍건적에게 빼앗겼던 송도(개성)를 되찾고 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1363년에 원나라가 침입하자 동북면 병마사(사령관)가 되어 적을 무찌르고 원나
라의 동녕부까지 멀리 쳐들어가 공을 세웠다.
  그러한 공로를 발판으로 삼은 이성계는 뒤에 새 나라 조선을 세우고  처음 왕 태조의 자
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 10년에도 큰 사건이 있었다.
  오랑캐 대군이 몰래 국경을 넘어와 함길도 지방 병마사를 죽인 일이었다.
  그 때 태종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조연 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두만강 부근에 사는 오랑캐
들을 무찌르도록 했다.
  조연 장군은 오랑캐 마을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그런데 그 일이 오랑캐들을 더욱 사납
게 만들었다.
  태종도, 세종도, 오랑캐를 막아 내는 일이 왕실과 백성의 큰 일로 여겼다.
   다른 곳도 아니요, 우리 조상이 터를 닦은 고향이다. 이 고향 땅이 오랑캐의 발에 짓밟혀
서야 되겠는가!
  세종 4년(1422) 10월, 북쪽의 날씨는 몹시 추웠다. 오랑캐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자 또 쳐
들어왔는데 그 보고는 7일 뒤에야 조정에 올라왔다.
   아니, 오랑캐가 또 침범했단 말인가? 어서 조정에서 병사들을 보내어 막아야 하리라.
  세종은 곧 신하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그 때 신하들은 세종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오랑캐는 함길도에 있는 우리 군사만으로도 넉넉히 막아 낼 것이옵니다.
   한양에 있는 군대를 일부러 그 곳에 보낼 필요는 없사옵니다.
  신하들의 말에 세종은 대답했다.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군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오. 대장 한 사람이 용맹한가, 비겁
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오.
  세종은 군사에 대해서도 이토록 잘 알고 있었다. 곧 김호성 장군을 구원대 대장으로 임명
하고 용감한 장병 스물세 명을 뽑아 거느리고 경원 땅으로 떠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그 뒤에도 오랑캐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20명이나
30명씩 좀도둑처럼 몰래 들어와서 양식을 빼앗아가는 데는 이만저만 골치아픈 일이 아니었
다.
  세종은 오랑캐의 노략질을 뿌리뽑을 궁리를 했다.
   강 건너 오랑캐의 본거지를 칠 수밖에 없다. 피저 강가에 떼지어 살고 있는 곳을 쳐서 화
근을 뿌리채 뽑아야 한다.
  세종은 명을 내렸다.
   군사 1만 명을 내도록 하라.
  그리고 세종은 피저 강의 오랑캐를 치기 전에 미리 첩자를 들여보내서 강은 어디에 있고,
산길은 어디가 험하며, 산은 어느 산이 높은가 등을 조사하게 했다. 조사가 끝나자 세종은
명을 내렸다.
   오랑캐를 쳐라.
  이 일이 있은 뒤 세종은 너무나 많은 일에 시달렸으므로 건강을 유지할 수가 없어 온양
온천으로 정양하려 떠났다.
  우리 나라의 동북쪽 끝은 두만강이 감싸듯 흐르고 있다. 오랑캐들은 겨울에 강이 얼면 두
만강을 넘어서 경원땅에 들어와 제멋대로 노략질을 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세종에게 아뢰었다.
   지금 오랑캐들이 경원 땅에 들어와서 제멋대로 날뛰고 있사옵니다. 차라리 용성(지금의
유성)까지 국경을 뒤로 물리어 지키는 게 좋을까 하옵니다.
  이 말을 듣고 세종은 벌컥 화를 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신하들의 말에 귀를 잘 기
울이는 임금이었으나 그 말에는 크게 화를 냈다.
   우리 조상들께서 지키시던 땅인데 어찌 한 치라도 버릴 수 있겠소!
  그리하여 세종은 김종서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함길도로 가서 그 곳의 사정을 자세히 살핀 뒤 보고하오. 석막 땅에다 영북진을 두는 것
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하오.
  김종서 장군은 즉시 함길도의 동북쪽 먼 끝까지 가서 그 곳 사정을 자세히 살핀 뒤 보고
를 올렸다.
   대대로 내려오면서 임금님께서는 나라가 처음 이룩된 땅을 중히 여겨야만 하는데, 선조
께서 터전을 닦으신 땅을 버리고 나라가 이룩된 곳을 버린다면 어찌 후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 말은 세종의 뜻에 그대로 맞는 말이었다. 세종은 생각했다.
   김종서야말로 위를 공경하고 아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김종서는 이어서 아뢰었다.
   두만강을 경계로 삼으면 조상이 나라를 이룩한 땅을 다시 찾는 의로움이 있고, 두만강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에 편리한 이점이 있사옵니다. 또한 그 곳 백성들
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도 성을 쌓을 수 있으며 오랑캐들도 기세가 꺾일 것이옵니다.
  김종서는 오직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종에게 진심으로 간청했다.
   회령 땅과 경원 땅에는 이미 백성들이 성을 쌓았으니 더 말할 것이 없고, 이제 용성과
종성의 두 곳에만 성을 쌓으면 아무 근심이 없을 듯하옵니다. 소신을 믿으시어 동북 지방에
육진(6개의 성)을 개척하라는 분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러나 조정의 반대파들은 여전히 김종서의 의견을 헐뜯었다.
   김종서는 지금 젊은 혈기에 지나친 공을 세우려 서두르고 있는 것이옵니다.
  신하들은 김종서의 생각이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이렇게 아뢰는 것이기는 하나 또 다른 이
유도 있었다.
  세종이 높은 벼슬 자리에 있는 자신들의 의견은 젖혀두고 김종서의 의견만을 믿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반대파의 의견을 물리치고 그 곳 방어에 대해서 김종서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고
뒷받침을 힘껏 해 주었다.
  모든 것을 어질게 보는 세종이 오로지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종성·온성·경흥·경원·회령·부령 등에 김종서는 굳건한 진(6진)을 설치했다. 세종 31
년(1449)에 부령부를 마지막으로 설치했으니, 실로 오랜 세월이 걸린 일이었다.
  김종서가 세종의 명령을 받들고 동북 지방으로 떠난 것이 세종 16년이었으니, 햇수로 16
년이나 걸린 큰 공사였다.
  16년 동안 김종서는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들의 숱한 모략을 계속 받아 가며 북녘의 차디
찬 바람에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면서 이 커다란 일을 해낸 것이었다.
  김종서는 군사들에게 엄격한 장군이면서 또한 인자한 아버지 같기도 했다.
  군사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5척의 그 조그만 몸 어디에서 천지를 뒤흔들 듯한 그런 위엄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우리 장군께서 명령을 내리실 때는 산도 강도 흔들릴 정도이다.
  김종서는 군율을 어기는 군사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날뛰는 오랑캐를 살려 보내지 않았다.
   큰 호랑이 같다. 그가 버티고 있는 이상, 우리는 이제 꼼짝도 못 한다.
  오랑캐들까지 김종서 장군을 큰 호랑이라고 부르며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러면서도 한솥 밥을 먹고 사는 군사들에게는 인자한 아버지와 같았다.
  김종서는 술자리를 베풀 때는 장군이고 군졸이고 가리지 않고 누구나 마음껏 먹고 마시며
놀게 했다.
  어느 날, 김종서는 부하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한 잔, 두 잔, 술이 돌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무르익어가는데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딱!  하고 술단지를 깨뜨렸다.
  술이 좌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앗! 어느 녀석이냐!
  그 자리에 있던 김종서의 부하들은 새파랗게 질려서 벌떡 일어섰다.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오기도 어려운 장군의 술자리에 감히 누가
화살을 날릴 수 있단 말인가.
  활을 쏜 사람을 잡으려고 부하들이 설쳐 대자 김종서는 태연히 손에 들었던 술잔을 죽 들
이마시고 나서 소리쳤다.
   시끄럽다. 모두 앉아라!
   장군님, 적병이 아닙니다. 적병은 감히 장군의 술자리 가까이도 못 옵니다. 우리 군사 가
운데 엄청난 마음을 품은 반역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하들은 다시 그 자를 찾으려고 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김종서는 그 조그만 몸집 어느 구석에서 그렇게 큰 소리가 나오는가 싶을 만큼 버럭 소리
를 질렀다.
  그제야 부하들은 조용해졌다.
   장군님, 이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장군님과 나라에 대한 큰 반역입니다. 잡아 내
야 합니다.
   잘 안다. 염려 마라. 화살 한 대쯤에 놀라는 장군이 어찌 나라를 지켜 낼 수 있겠느냐.
화살을 쏜 자는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자이다. 그런 자
때문에 충성스러운 너희들이 수고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 자를 찾아 내서 벌을 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자도 내 뜻을 알아서 나를 따라 줄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부하들은 김종서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김종서는 고생과 위험 속에서 오랑캐와 싸워 가면서 16년에 걸쳐 기어이 육진을 이룩해
놓았던 것이다.
  오랑캐들은 두만강을 넘어 들어와도 발붙일 땅이 없어지고 말았다. 여러 곳에 자리잡은
우리의 진에서 언제든지 군사가 쏟아져 나와 단번에 무찔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여섯 진 위에는 큰 호랑이같이 용맹스러운 김종서 장군이 버티고 있었으니 누
가 덤빌 수 있으랴.
  이젠 백성들도 편히 살 수 있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의 반대를 16년 동안이나 억누르면서 김종서의 말을 믿고 뒷받침해 준 세종
임금의 힘이 아니었던들, 마천령 너머의 땅은 오랑캐의 터전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6. 하늘의 과학

   농사를 잘 지어야만 나라가 평안해지고 백성들이 잘 살게 된다. 그 농사에 있어 무엇보
다도 중요한 것은 하늘이다. 물도 하늘에서 주는 것이고, 햇빛도 하늘의 해님이 주는 것이
다. 하늘의 법칙을 알게 되면 그것을 농사와 일상 생활에 효과 있게 이용하여 잘 살고 편리
하게 지낼 수 있게 된다.
  세종은 고려 때부터 힘써 온 천문과 기상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백성들이 잘 이용하도
록 할 결심을 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달력을 틀림없게 만들어야 하오.
  세종은 신하들에게 연구하도록 이르고 스스로도 산수공부를 시작했다. 달력뿐 아니라 땅
을 재는 데도, 또 다리를 놓고 집을 짓고 탑이나 성을 쌓는 데에도 산수는 무엇보다도 먼저
배워야 할 학문이었다. 그래서 고등 수학이라고 할 수 있는  산학계몽 을 세종은 밤새워 공
부하고 천문에 대한 지식도 익혔다. 또한 김한과 김자안두 학자를 불러 명령했다.
   너희는 명나라에 가서 산수를 배워 오너라.
  두 사람은 명나라에 갔다.
  세종은 달력을 완전히 만드는 한편, 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교묘한 물시계를 만들어
냈다.
  김돈과 김조에게 그 물시계를 만드는 일을 맡기고 몸소 그 일에 깊은 관심을 두어 완성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자격루 라고 하는 물시계는 물로 돌아가는 완전한 자동 시계였는데, 흠경각이라는 전각
안에 설치했다.
  이 물시계는 전각 안에 설치했으므로 백성들이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세종은 백성들이 언제나 시각을 알아 살아가기에 편리하도록 할 생각으로 명령했
다.
   해시계를 만들어 백성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두어 시각을 알 수 있도록 하라.
   앙부일구 라는 해시계가 만들어졌다. 지금의 광화문 근처에 하나를 만들어 놓고 오가는
백성이 보도록 했으며, 또 종묘 앞에도 만들어 놓았다.
   앙부일구 는 둥그런 모양의 시계였다. 그 속에 바늘이 비스듬하게 북쪽을 향해 서 있다.
  햇빛이 쏟아지면 그 바늘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것이 시각을 표시한 곳에 떨어지게 되었
다.
  시각은 12지신(쥐·소·호랑이 등 짐승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어 글자를 모르는 사람도
알 수 있다. 이 해 시계를 보고 세종은 매우 기뻐했으나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신통하기는 하지만, 해가 진 뒤나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사용할 수 없구나.
  세종은 밤이건 낯이건 언제나 시각을 알 수 있는 시계를 만들도록 다시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시계가 밤낮으로 쓸 수 있는  일성정시의 였다. 일성정시의는 별이
자리를 옮기는 데 따라서 밤 시각도 알게 만든 시계이다.
  세종 14년(1432) 초가을, 세종은 강연에서 예문관 제학의 벼슬에 있던 정인지에게 명령했
다.
   경은 달력에 대한 일도 해 보았으니 정초와 함께 중국 책에 씌어 있는 것을 연구하여,
북극을 정확히 잴 수 있는 의표를 만들도록 하오.
  정인지는 곧 중추원의 벼슬아치 이천과 함께 이 일을 시작했고, 정초도 관계하여 구리로
북극을 측량할 수 있는 의표를 만들었다.
  이것이  간의(혼천의) 라는 것인데, 처음부터 구리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나무로 모형을
만들어 실제로 북극을 재어 본 결과, 정확하게 측정이 되므로 다시 구리로 만들게 된 것이
다.
  또 사람이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작은 간의도 만들게 하였다.
  세종이 하늘에 대해 이토록 커다란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하늘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좌우하기 때문이었다. 땀 흘려 지은 농사를 풍년이 들게도 하고 흉년이 들게도 하는 하늘을
잘 알고 싶었던 것이다.
  세종이 하늘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관상감(관상대)의 벼슬아치들도 밤낮으로
하늘에 대해 연구해야 했다.
  그들은 멀리 제주도 한라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하늘을 쳐다보며 해와 달·별 등을 살폈
다. 금강산의 일출봉에도 올라갔고, 강화도 마니산에도 올라가서 연구했다.
  세종은 호조(인구·식량·경제에 대한 일을 맡아 보던 곳) 판서에게 명하여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알 수 있도록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 를 만들라고 했다.
  이 역시 농사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쇠를 녹여서 만든 그릇이 곧 연구되었다. 대단히 간단한 이치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이 새지 않도록 만들어진 그 그릇 속의 물을 자로 재어, 비가 얼마
나 왔는지 그 양을 알아 내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이것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빗물의 양을 재는 기구였다.
  그 때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비가 얼마나 오는지 그 양이 알고 싶었으나 측우기를 만
들지 못했다.
   측우기를 만들어 팔도에 나누어 주어, 각 지방에 내리는 비의 양을 알아내도록 하라.
  세종은 농사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강우량도 재도록 명
령하였다.
  비의 양을 바로 재면 강둑을 쌓거나 물꼬를 내는 데 대단히 편리하다. 그리고 어느 달, 어
느 날, 어느 곳에 비가 많이 내리고, 한 해를 통틀어서 어느 지방이 비가 가장 많이 오는지
를 알 수 있다.
  세종은 또한 나라를 지키는 데나 농사를 짓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짐승인 소와 말
의 병을 고치는  우마의방 이라는 의약책도 펴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나는 한약재로 고칠 수 있는 병은 중국의 약재를 쓰지 말라고 명령
했으니, 이토록 무역면에까지 신경을 썼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조선을 잘 사는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피나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7. 아아, 한글!

  세종은 몸이 불편한데도 자리에 누우려 하지 않았다. 말은 하되 글을 몰라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백성들이 불쌍했다.
   백성들에겐 배우려고 해도 배울 힘이 없다. 어려운 한문은 배우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농사일을 내던져야만 한문을 배울 수 있으니 어찌 엄두라도 내겠는가. 백성들에게
쉽게 익혀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글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세종은 눈 뜬 장님 같은 백성들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깨우쳐 주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한글 을 만들게 된 까닭이다.
  한자를 우리 나라에서 쓰기 시작한 것은 삼국 시대부터였다. 그러나 한자로는 우리말의
음을 그대로 나타낼 길이 없었으므로 신라의 설총 같은 학자는  이두 라는 것을 연구해 우리
말을 한자로 쓰는 방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한자의 음이 근본적으로 우리말의 바탕과 달라
정확하게 나타낼 수가 없었다.
  세종은 정인지·성삼문·신숙주·최항·박팽년·이개 등의 뛰어난 학자들에게 한글 연구
를 명령했다.
  한글의 글자 모양을 연구할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독특하고 쓰기 쉽고 배우기 쉽고 숫자가 적어야 한다…….
  머릿속으로 이런 말을 마치 주문 외듯이 하며 온 힘을 다해 애쓰던 학자 하나가 생각다
못해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참고가 될 만한 것이 없을까?
  그 때 눈에 띈 것이 문이었다. 우리 나라의 문은 가로와 세로로 균형 있게 짠 문살이 있
다.
   가로, 세로, 가로, 세로…….
  학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살은 가로 간 것과 세로 간 것밖에 없는데, 그 모양의 밑부
분을 따서 그대로 그려 보니까 참으로 여러 가지 모양이 나타났다.  ㄱ 으로 그릴 수 있고,
 ㄴ 으로 그릴 수 있으며  ㄷ ,  ㄹ ,  ㅁ ,  ㅂ 으로도 그릴 수 있었다.
   옳지, 이것이다!
  그 학자는 문고리의 동그란 모양  ㅇ 까지 본떠서 자음 모음의 모양을 만들어 냈다 한다.
  이처럼 한글이 문살 모양에서 나왔다고 전해지기도 하나, 사실은 다음과 같은 과학적인
이치에 의하여 오묘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1) 엄쏘리  ㄱ 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형상.
  2) 헛소리  ㄴ 은 혀가 입의 위천장에 올라가 붙는 형상.
  3) 입술소리  ㅁ 은 입구(口)자의 형상.
  4) 잇소리  ㅅ 은 이의 형상.
  5) 목소리  ㅇ 은 목구멍의 형상.
  6) 반혓소리  ㄹ 은 혀의 형상.
  7) 반잇소리  △ 은 이의 형상(지금은 없어졌다).
  8) ㄱ-ㅋ, ㄴ-ㄷ·ㅌ, ㅁ-ㅂ·ㅍ, ㅅ-ㅈ·ㅊ, ㅇ-ㆆ·ㅎ 등에서, 뒤의 소리들은 앞의 다섯
소리에 획을 더하거나, 획을 더한 데다가 점을 찍어 소리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이렇게 혀와 입, 그리고 목의 움직임을 연구하여 가장 간단한 모양으로 익히기 쉽게 만든
뛰어난 글자가 바로 한글인 것이다.
  이 때가 세종 25년(1443) 12월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었
다. 그 3년 동안 이 놀라운 우리 글자는 온갖 수난을 겪어야 했다.
  세종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시골로 갈 때, 다른 많은 중요한 책과 서류 대신 한글 연구에
관한 것만 가져갈 정도의 정성으로 만든 그 한글을 반대하고 나선 신하가 나타났기 때문이
다.
  한글, 그 당시에는  백성을 깨우치는 바른 글 이라는 뜻의  훈민정음 이라 불린 우리 글에
대해 학자이며 집현전의 부제학인 최만리가, 다음해인 1444년에 반대의 상소문을 세종에게
올린 것이 시초였다.
  최만리는 한글을  언문 (거짓글)이라고 하며 그 사용을 반대했다. 중국의 한자를 그대로 쓰
자는 주장이었다.
  직접 반대하고 나서지 않은 신하들 가운데에도 한글에 대해 의심쩍은 생각을 품은 사람들
이 많았다.
  한문만이 참다운 글이요, 훈민정음은 거짓 글이니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러나 세종은 그와 같은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대궐안에 정음청을 두고 다음과 같이 명
령했다.
   훈민정음에 대해 더 연구하는 한편, 한문으로 된 책은 훈민정음(한글)으로 그 글자의 음
과 뜻을 밝히고 글 전부를 우리말로 옮겨라.
  이러한 훈민정음이 세종의 어명으로 반포된 것은 1446년 9월 3일(양력 10월 9일)이었다.
  훈민정음의 반포가 늦어진 것은 최만리 등의 반대도 있었지만, 좀더 연구를 하기 위해서
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이  동국정운 이다. 이것은 훈민정음의 글자를 이용하여 한자
의 음을 밝힌 책이다.
  한글의 첫 수난은 최만리 들의 반대였고, 두 번째의 보다 큰 수난은 세조 때 있었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다. 세종을 도와 농사 등 여러 방면에서 큰 일을 했고, 훈민정
음 사업에서는  석보상절 을 쓰는 등, 한글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이 세조가 한
글을 배척하고 쓰지 못하게 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까닭이 있다.
  세종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세자인 문종이 임금이 되었고, 문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어린 아들이며 세종의 손자인 단종이 열두살로 임금이 되
었다.
   이 나라가 어린 조카 단종으로 인하여 흔들린다면 조상에 대해 어찌 고개를 들 수 있겠
는가.
  이렇게 생각한 수양 대군은 단종 임금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기가 용상에 앉
았다. 그가 바로 세조이다.
  어린 단종은 강원도 영월 땅으로 귀양갔다가, 뒤에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악독한 수양 대군!
   나라를 빼앗은 도둑!
   어린 조카를 죽인 야차(악마)
  이렇게 한글로 쓴, 임금에 대한 욕설이 거리에 나붙었다. 세조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드
디어 가혹한 어명을 내렸다.
   백성들은 훈민정음을 쓰지 말라!
  뿐만이 아니었다. 한글로 된 책이란 책은 모조리 찾아내어 불살라 버렸다. 한글의 큰 수난
이었다.
  그러나 한글로 된 책을 한 권도 남김 없이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고, 더구나 춘추
관(시정 기록을 맡은 관아)이 가지고 있는  세종실록 (세종 임금 때의 일을 적은 역사)에 씌
어 있는 것까지 세조가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글은 이어져 오늘날 우리는 훌륭한 우리 한글의 우수함을 세계에 자랑할 수 있
게 된 것이다.
  세종은 임금이 되면서 백성이 잘 살 수 있도록 힘 쓸 뿐 아니라 나라의 장래에 대해 생각
했다.
   무슨 일이든지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질 수는 없다. 연구에 연구를 계속해서 국가 백
년의 기틀을 잡을 수 있는 제도와 문화, 법 등을 만들어야 한다.
  세종 2년에는 즉위 때부터 생각해 온 대로 문신 가운데서 나이도 젊고 재주가 뛰어난 사
람들을 뽑아 집현전 학자를 삼았다.
  집현전은 왕명을 받들어서, 나라의 정치 등 모든 방면의 학문적인 일을 다루었다.
  이 집현전에서 세종 임금 때에 해낸 일은 상당히 많았다.
  효행록 (효자·효녀·효손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을 만듦.
  음악의 악보를 정리하여 책으로 엮음.
   향약집성방 (우리 나라에서 나는 약재와 약에 대한 책)을 만듦.
   강목통삼 에 실린 일식 현상 계산.
  중국 역사를 책으로 펴내게 함.
   치평요람 을 만듦.
  한문 책을 훈민정음올 옮김.
   동국정운 을 만듦.
  사서를 우리 나라의 훈민정음으로 번역할 것을 명함.
   역대병요 를 만듦.
  지도의 제작을 명함.
  집현전은 세종 때 나라 정치의 자문 기관이었고, 국가의 여러 제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법
과 학문의 연구 기관으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했다.
  또한 집현전의 학자들은, 세종 임금의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잘 받들어 몸을 아
끼지 않고 충성하였다.
  세종은 충성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연구를 윟나 모든 시설이 부
족하지 않도록 갖추어 주었다.
  온 나라 안에서 책을 모아들여 엄청난 양의 책을 집현전 학자들에게 구해 주었다. 그리고
학자들은 다른 일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힘을 기울일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리하여 15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치평요람 이 5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집현전에서 엮어 낸 책 중에서  치평요람 은 우리 나라가 옛날부터 어떻게 흥하고 어떻게
망하여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를 엮은 책이다. 그리고  역대병요 는 군사의 무기와 전투의
전략·전술에 대한 책이다.
  이렇게 많은 책들을 찍는 데 필요한 것은 활자였다.
  활자는 금속으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금속활자가 고려 시대에 이미 연구되어
쓰여 왔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책을 많이 찍어 낼 수도 없었다. 왜냐 하면 밀
랍을 글자판에 깔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새로 연구된 활자는, 글자를 심는 판과 활자의 밑이 서로 평평해서 꽉 들어맞아 밀랍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세종 임금이 직접 연구해 낸 것이었다.
  이와 같이 금속 활자의 기술도 자연히 뒤따라서 연구개량되었으며 그밖에 얻은 것이 또
있었다.
  금속을 처리하려니 야금술(쇠붙이와 금·은을 다루는 기술)이 따라 발달되었다.
  또 책을 전보다 많이 찍게 되니 나라에서는 백성들에게서 종이를 많이 사들여야만 했다.
따라서 백성들의 종이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세종 임금은 주자공(금속을 끓여 부어 활자나 무기를 만드는 사람)의 대우를 아주 잘 해
주었다.
  주자공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부인과 자식에게까지도 녹을 주었다. 아무런 근심없이 주
자소의 일만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주자소에서는 활자뿐 아니라 들만 있으면 어떤 금속 물건이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따
라서 무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세종은 무기가 나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만큼 주자소를 보호
해 주었던 것이다.
  그 무렵 중국은, 우리 나라의 이렇듯 발달된 금속 활자와 금속 자판와 의한 인쇄술을 따
르지 못하고, 나무를 그 재료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하느님도 무심하다고 할까.
  이렇듯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밤잠마저 잊어 가며 애를 쓴
세종 임금은 건강이 매우 나빴다.
  세종 임금은 젊어서 이미 머리카락이 희어졌다고 한다.
  머리가 희어진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으나, 병이 심해져 지방의 이름난 온천으로 자주 치
료를 하러 가야만 했다.
  그런데 세종 30년, 세종 임금과 신하들과의 사이에 전에 없던 큰 충돌이 일어났다.
  문제의 씨앗이 된 것은 대궐 안에 불당을 짓겠다는 세종 임금의 말이었다.
  도승지 이사철과 부승지 이계전 등이 반대했다.
   전하, 궁궐 안에 불당을 세우시고 중들을 드나들게 하시는 것은 해괴한 일이옵니다. 그만
두시옵소서.
  세종은 그들의 반대를 물리쳤다.
   내가 불당을 세우려는 것은 오로지 조상을 위함이니 다시는 여러 말 하지 마오.
  마침내 영의정인 황희 정승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그야말로 온 대궐이 떠들썩했다.
   안 되오. 불당은 조상을 위해 꼭 세워야만 하오.
  세종 임금의 뜻은 굳었다. 아무튼 임금과 신하 사이의 커다란 입씨름이 계속되었으나 기
어이 불당은 서고 말았다. 세종 30년(1448) 12월의 일이었다.
  이룩된 불당은 무척 호화로웠다. 금과 구슬, 울긋불긋한 단청, 붉은 비단, 향나무, 금불상,
그리고 또 옥으로 만든 불상 등 세종 임금은 정성을 다 기울여서 불당을 만들었다.
  두 해 뒤인 세종 32년(1450) 1월, 세종 임금의 병은 점점 심해져 갔다. 눈병에다가 양쪽
다리가 쑤셔 아픔은 견딜 수 없을 정도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몹시 찼다.
   배천 온천으로 휴양을 가시옵소서.
  신하들이 조심스럽게 아뢰었으나 병이 너무 심해 온천 치료를 하러 떠날 수조차 없었다.
  1월 10일, 왕세자는 신하들에게 일렀다.
   상감마마께 아뢸 일을 글로 써서 올리면 무척 피곤하실 테니 아뢸 일이 있으면 말로 아
뢰시오.
  다음 달 2월 14일, 세종 임금은 그 날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날 밀려 있던 모든 서류를
살펴보았다. 하나하나 거침없이 따져 가면서 살폈다.
   이제 병이 나으시려는가?
  왕자들도 신하들도 얼굴 표정이 밝아졌으며,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사흘 뒤인 2월 17일, 건강한 듯 나라일을 보던 세종 임금은 영음 대군(세종 임금
의 여덟째 아들)의 집 별채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왕의 나이 쉰네 살 때였다.
  큰 별은 마침내 꿈에도 잊지 못하던 나라와 백성을 왕자와 신하에게 맡긴 채 부처님의 나
라로 가신 것이다.
  우리 나라 역사에 엄청나게 큰 공적을 남기고 빛나던 별은, 만백성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러나 그 큰 별의 얼은 우리 배달 민족의 가슴 속에 영원
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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