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얼굴
낯익은 얼굴
이관희
금강산도 낯익은 얼굴들과 같이 봐야 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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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처음 왔을 때의 일이었다.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하는데 여권 검사를 하는 공항 여직원의 얼굴이 여간 혼란스럽지가 않았다. 얼굴색은 틀림없이 까무잡잡한데 그러나 분명 흑인은 아니었다. 크고 시원하게 열린 그녀의 눈망울은 보통 서양 백인여자의 것 그대로 였지만 반듯하기는 하지만 어딘가 둔탁한 느낌이 드는 그녀의 입술은 또한 분명 서양여자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이 여자의 본래 국적은 어디란 말인가?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낯 선 얼굴을 대하는 일에 아주 서툰 것 같다. 오랫동안 단일 민족으로 살아온 탓일 것이다. 거기다가 대원군 할아버지께서 나라의 문을 꽝꽝 닫아걸고 외국하고 장사를 안하는 바람에 더하였을 것이다.
그런 우리가 70년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불어닥친 미국 이민 바람에 휩쓸려 이 땅에 와 떨어지고 보니 눈이 휘둥그래질 수 밖에. 특별히 우리들이 모시고 온 늙으신 어머님들은 눈앞이 혼란스럽고 무서워서 문밖 출입조차 꺼리신다. 하얀색이면 하얀색, 까만색이면 까만색으로 색깔이라도 한두 가지로 분명하게 구별이 되어야지 이건 온통 대하는 얼굴마다 총천연색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한국 사람처럼 얼굴 모양이 적당히 둥굴넓적하면서 척 안정된 모양새가 못되고 너무 아래위로 길다든지 혹은 환상적이라 할 정도로 엉뚱하게 크기만한 얼굴을 대할 때는 정말 눈앞이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한국에 살 때 거리에 나가기를 좋아하였었다. 공연히 명동에도 나가고 남대문 시장에도 들러 무슨 볼일이나 있는 것 처럼 돌아다녔었다. 그 까닭은 낯익은 얼굴들이 좋아서였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다 내 얼굴 처럼 적당하게 둥굴 넓적하면서 화난 사람 모양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게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란 걸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말 한마디만 붙여보면 금방 어디서 그렇게 풍부한 웃음이 쏟아져 나오는지 정이 철철 넘쳤었다. 이것이 한국사람이다.
나는 미국 와서 공장에서 일 할 때 너 화났느냐는 소리를 너무나 많이 들었다. 나중에는 그말 때문에 정말로 화가 날 정도였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사람들이 나보고 그럴만도 하였다. 내가 입술을 꾹 다물고 일에 열중해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화난 모습이니까.
한국 사람은 여자들이라도 혼자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화난 표정의 얼굴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무슨 결심이나 단단히 한 듯 입술을 꼭 다물고 눈을 바짝 치켜뜨고 걷는 모양이 꼭 부부쌈 하러 가는 사람 같다. 그러나 그런 여자를 붙들어 놓고 말 한마디만 물어보라. 아! 갑자기 천사가 된다. 그 매력에 안 넘어갈 남자란 없다.
특별히 한국여인의 눈빛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미국에 와서 살다보니 더욱 그 눈빛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것은 마치 나만이 아는 보석과도 같다. 한국여인의 눈동자에는 언제 어디서 누구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아도 샘물 처럼 넘치는 정이 가득 가득 고여 있다. 한국여인들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샘물 같은 그 마음의 정을 한국인 특유의 수줍음이라는 눈빛으로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발산하고 있다. 그것은 꽃향기와도 같다. 그런데 그 꽃들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한국여인의 눈빛에서는 모란꽃 향기가 나고 어떤 한국여인의 눈빛에서는 가을의 국화꽃 같은 향내가 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여인의 눈빛에서는 하늘나라 가신 내 어머니의 눈빛을 볼 수 있고 또 어떤 여인의 눈빛에서는 지금은 늙어 버린 내 어린 시절의 정답던 누나의 눈빛도 볼 수 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가난하여 배는 고팠지만 거리에만 나가면 언제든지 이토록 사랑스런 한국의 어머니들의 눈빛, 누이들의 눈빛, 그리고 연인들의 눈빛을 흠뻑 먹고 돌아올 수 있어서 마음은 늘 배 부르게 살 수 있었다
사람은 정으로 산다. 그런데 정은 낯익은 얼굴에서라야 생기는 법이다. 사람은 낯익은 얼굴이라야 서로 사랑도 하게 된다. 생전 보지도 못하던 청춘남녀가 갑자기 로미오와 줄리엣 같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되는 법은 없다. 그래서 연애의 상대를 보게되면 백 퍼센트 주위에서 자주 대하고 살던 사람이다. 처녀들이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나>라는 노래를 즐겨 부르지만 그럴 것 없다. 산 넘어 남촌에 누가 살든 그가 아무리 잘생긴 왕자라도 나하고 낯이 설면 사랑이 안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평생 낯익은 얼굴들에 둘러싸여 살 수 있는 행복보다 더한 행복이 세상에 없다. 이 말을 못 믿을 사람 있으면 무인도에 가서 배를 깨트려 버리고 석달만 혼자 살아보라.
나는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여간 마음이 쓸쓸하지 않았다. 보이는 얼굴마다 낯선 얼굴이라 마음에 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꼭 사막 가운데 혼자 버려진 것 같은 고독을 이 수많은 인종들의 군중 가운데서 느껴야 되었었다. 미인이란 어떤 사람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낯익은 얼굴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미국에 와서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서 영화를 통해 보던 그 늘씬해 보이던 미국여자들이 미국에 와서 실제로 보니 전혀 그렇치가 않았다. 팔뚝에는 털이 숭숭 나고 눈은 영화에서 보던 것 보다 훨씬 더 크고 동굴 처럼 한참 쑥 들러가 있었다. 거기다가 키 마저 구척이라서 한참 올려다 봐야 되었고 그래서 모두가 텔레비전에서 귀신영화 돌려주는 엘비라 라는 여자같이 느껴졌었다. 도무지 하나도 예뻐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길거리에서 동양여자라도 발견하게 되면 아, 어찌나 눈앞이 반가워지는지! 금방 달려가 뭐라고 말을 붙여보고 싶고 그러면 금방 정이 철철 쏟아질 것 같았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 게 되었는데 그 까닭은 순전히 낯익은 얼굴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미인이란 어떤 사람이냐. 아니, 사람이 곱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그것은 얼굴 생김새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슴속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곧 정을 두고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마음의 정이 고운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정이 나와 통하는 사람, 눈빛만 부딪쳐도 사랑이 익는 사람, 그 사람이 고운 사람이요 미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낯익은 얼굴의 사람이다.
사람이 평생 낯익은 얼굴들에 둘러싸여 살 수 있는 행복을 무엇에다 비길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에 금강산도 낯익은 얼굴들과 같이 봐야 명산이라는 말을 보태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