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서울 [이관희]
내 마음의 서울
-1994 서울은 변하지 않았다-
내 마음의 서울은 오늘도 공포에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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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지금 서울에 와 있다. 년말 휴가를 이용하여 밀렸던 일들을 보기 위해 지난 3주동안 이곳에 와 있는 중이다.
나는 내일이면 다시 L.A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마지막으로 친구 한사람을 만나기 위해 방금 지하철 2번 순환선을 시계 방향 반대쪽으로 타고 역삼역이라는 데서 내렸다. 그리고 지금 만나러 가는 친구가 전화로 일러준 대로 '개포 세무서'라고 쓰여진 방향 표시판을 따라 지하도를 나와 땅 위로 고개를 내 밀었다. 그런데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지금 내가 동쪽을 향해 서 있는지 서쪽을 향해 서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서울에 머믈고 있는 지난 3주동안 나는 매일 같은 경험을 되풀이 하였다. 방향만 못 잡는게 아니었다. 동네 이름도 생판 낯 선 이름들 천지다. 방금 내가 지하철을 타고 와서 내린 역삼동이라는 동네 이름도 20년 전 내가 서울 살 때는 익히 들어 본 일이 없던 이름이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그때는 강남 이쪽 지역이 논밭 뿐이었는데 20년 사이에 대 도시가 들어앉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대로 서울은 과연 변해 있었다. 있던 길은 넓혀지고 없던 길은 새로 뚫렸으며 지난번 지날 때는 논밭 뿐이었던 곳에 어마어마한 신도시가 공용처럼 벌떡 일어나 앉아 있었다. 땅 위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땅 위를 파고 뒤엎고 하다가 그것도 모자라니까 땅 밑을 뚫고 들어가 사람들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두더쥐 처럼 땅 밑을 헤집고 다니며 살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머믈고 있는 지난 3주 동안에도 서울은 가는곳 마다 아직도 땅을 파내고 길을 딱고 굴을 뚫고 있었다. 가는곳 마다 고층 빌딩들이 벌떡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이마가 부딪칠 것 같고 텅 비어 있던 변두리 논밭은 며칠 사이에 아파트 단지로 변하여 꼭 도깨비 장난질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길을 묻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서울 시민 전체가 아침에 눈을 뜨면 밤 사이에 또다시 변한 도시 모습에 혀 부터 내 두른다. 나 처럼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에게 주민등록증을 가진 멀쩡한 서울 사람들이 수도 없이 길을 물었다. 그때 마다 '나도 모릅니다'라고 대답 하며 남 모르는 혼란스러움에 당황하면서 다시 한번 낯 선 서울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되곤 하였다.
그런데 서울 방문 2주쯤 되었을 때, 그동안 서울 거리를 발바닥에 물집이 집히도록 걷고 난 나는 문득 서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변했다고 느끼고 본 것은 서울의 겉모양이었을 뿐 사람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람이 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서울이 변 할 수 있겠는가?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첫 시내 뻐스를 탓을 때 나는 이미 20년전 내가 이민 가기 전의 서울로 되돌아 와 있었다. 20년 전에는 나 보다 훨씬 나이가 많던 뻐스 운전기사가 지금은 그 반대로 나 보다 나이가 훨씬 젊어졌다는 것 뿐 운전 솜씨는 그때 그대로 여전히 거칠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나에게는 그럴 수 없도록 친근하게 느껴지고 아, 비로소 내가 그리던 서울로 돌아왔구나 라고 느낄 수가 있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택시 운전기사도 나 보다 나이가 훨씬 젊어졌다는 것 뿐 옛날 처럼 자기 차니까 지금도 자기 맘대로 한다는 듯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합승 손님을 태우고 자동차 안의 라디오는 지 맘대로 찬넬을 이리 저리 바꾸기도 하고 볼륨도 지 맘대로였지만 그러나 마침 라디오에서는 요새 한참 뜨는 중이라는 미국 이민 갔던 어느 여가수의 립스틱 어쩌고 하는 귀 익은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이 하나도 낯 설지 않은 몸에 배었던 일들이라 새삼 옛정이 넘치도록 철철 되살아나 좋기만 하니 어쩌랴. 만약 뻐스 운전기사님들과 택시운전기사님들 마저 저 괴물스럽게 눈 앞을 우뚝 우뚝 가로막고 있는 [대우]라든가 [롯대] 건물들 처럼 낯 설게 변해 있었더라면 어떻할번 하였느냐 말이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으리라.
2
나는 서울에 머든 지난 3주동안 매일 전철을 타고 다녔다. 내가 20일 동안 머믈러있던 부천에서 의정부행 혹은 성북행 전철을 타고 종로까지 나오기도 하고 아니면 신도림 역에서 2호선을 북쪽 방향으로 갈아타고 신촌 쪽을 향해 가거나 아니면 남쪽 방향을 타고 잠실 쪽으로 가기도 하였다. 불광동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렌지 색갈의 3호선을 갈아탔고 왕십리를 가기 위해서는 용산에서 국철노선으로 갈아탔다.
전철은 언제나 붐볐다. 중간 역에서 탄 사람이 자리에 앉아 가기는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앉기는 커녕 서서 편히 가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저녁 어둠이 내린 후의 전철 안은 더 붐볐다. 따라서 노인이나 아기를 업은 부인이 그 시간에 전철을 타게되면 매우 고생을 하게 된다. 한번은 어떤 역에서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분이 전철에 올라오시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전철에 올라오시자 마자 사람들 속을 뚫고 내가 서 있는 바로 옆에 와 서시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그 할머니가 내가 서 있는 앞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자리 양보를 해 줄 것을 바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앞에는 그 할머니에게는 나이 든 아들뻘 쯤 되어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신사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고 그 사내 옆으로는 그 할머니에게 며느리 뻘 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으며 또 그 옆으로는 어떤 특정 종교를 나타내는 복장을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모두들 눈을 감고 있었다.
두 세 정거장 자리 양보를 받지 못한 채 쓰러질듯 불편한 자세로 가시던 할머니가 더 견딜 수가 없으셨던지 어떤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가리키며 그거 한장만 달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신문지는 해서 뭘 하려나 생각 했는데 그 사내가 신문지 한장을 빼 주자 그것을 받아든 할머니는 곧장 그것을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가는 사람들의 무릎 밑 땅바닥에 깔고 거기 털부덕 주저 않으시는 것이었다. 그래도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은 눈을 뜨지 않았다.
바로 그때, 아까 부터 내 등 뒤, 그러니까 내가 서 있는 반대쪽에서 한 두 사람이 웅성거리던 말 소리가 점 점 커지면서 내 귀에 까지 들려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울음 반 한숨 반 섞인 어떤 나이든 부인의 음성이었다.
"시상에 흐흐, 즈그들을 내가 으뜨기 키웠는디 흐흐, 늙은 에미 공영은 못혈망정 내가 으뜨기 번 돈이라꼬 흐흐, 그 돈을 빌려가 갔고 안 갚는댜 흐흐."
그러자 이때까지 그 나이 든 부인의 하소연에 맞장구를 쳐 주고 있던 옆 자리의 젊은 부인인 듯한 목소리가 그녀 역시 성질이 낫던지 내귀에 까지 말 소리가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쳐댔다.
"글씨, 할머니, 그렁께 그 자석놈들 전화 번홀 나헌티 달라 이말씸이요. 내가 그놈들 헌티 전활 혀서 더두 말구 딱 사흘이면 에미 헌티 빌려간 돈 갖다 갚도록 헐팅게 나 헌티 전화 번호만 가리켜 달아 이 말씸이요 잉."
그 젊은 아주머니가 그렇게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있던 승객들이 일제히 와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나도 웃을 수 밖에.
"근디, 워뜨키, 그것들이 그려두 내 자슥새끼들인디 흐, 내 섶해서 한잔 허기는 혓소만도 으뜨기 자슥들 헌티 그럴 수 있는감요."
할머니라고 불리운 나이 든 부인이 그렇게 대답을 하자 다시 젊은 부인의 음성이 코메디 대사 처럼 건너온다.
"자슥은 무신 자슥이여, 부모 공양은 고사혀고 혼자 사는 늙은 에미가 공장에 나가 허리가 뿌러지게 번 돈을 빌려 가 갔고 안갚는기 그기 무신 자슥이냔 말이여 글씨. 할머니 처럼 그런 자석덜 옹야옹야 혀 준께 요새 아아들이 부모 알기를 우습게 안다 이 말씸이여."
바로 그때, 이 또한 웬 청천 벽력인가? 저쪽 아래 전철 다음 칸으로 이어지는 지점 쯤에서 난데없이 어떤 사내의 굵직한 음성이 차 안에다 대고 뜨거운 물이라도 한바가지 끼얹듯 훅 달려 든다.
"예수를 믿으라! 그렇치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다!"
사람들이 또한번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나는 이번엔 사람들이 어느편 소리에 웃음을 터트렸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중년의 전도인 남자도 왜 사람들이 웃는지 모르는 듯 복잡한 사람들 속을 뚫고 저쪽 다음 칸으로 옳겨가며 계속, "예수를 믿으라 그렇치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다" 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러나, 내 옆 땅 바닥에 앉아서 가고있는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사람은 아직 한사람도 없었다.
나는 아까 내 등 뒤에서 나던 그 늙은 어머니의 하소연 소리가 더 듣고 싶어 귀를 기우렸으나 그때 아까 저쪽 칸으로 건너간 줄 알았던 전도자의 목소리와 함께 웬 젊은 청년의 약간 취한듯한 목소리가 거칠게 섞여 들려와서 더 이상 할머니의 하소연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뭐시 워쩌고 워쪄? 이 양반 이거 안되겄네. 지옥엔 누가 누굴 맘대로 보낸다는 거여? 천당 갈팅게 믿으라고 혀도 믿을까 말까 헐틴디 워쩌고 워쪄? 지옥엘 간다고? 에끼 이 사람아, 예수가 원제 사람들 지옥에나 보낼려고 세상에 왔능가? 천당 보랠려고 온거시 아닝가 이말여? 그렁께 예수 믿고 천당 가자고 혈 것이제 지옥은 누구 맘대로 보낸다는 기여? 지옥 가고 안 가고는 예수가 알아서 혈 일이제 당신이 뭔디 사람들 보고 맨날 지옥 간다고 소리 치고 다니능가 내 말은 이말이여? 전돌 혈려믄 똑바루 혀얄거 아녀? 그러지 않아도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것는디 전철만 탓다혀면 맨날 지옥 간다는 공갈을 당하며 살아야 혀니 요새 그 뭐냐 스트레슨가 하는거, 당신 같은 사람들 땀시 배나 더 쌓인당께."
사람들이 또 한번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3
내가 서울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달려 간 곳은 남대문 시장이었다. 남대문 시장은 거의 완벽하게 20년전의 모습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변한것이 있다면 그때 보다 더 많은 물건들이 쌓여 있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만원 전철 속 처럼 몸을 서로 막 부벼대며 뚫고 지나 다니면서 물건을 사고 팔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나는 지금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순대를 길거리에 내 놓고 팔고 있는 순대장수 아주머니 앞에 쭈그러트리고 앉아 순대 한접시를 사 먹었다. 그것은, - - 그렇다. 그런 맛을 가리켜서 사람들이 꿀맛이라고 하는 바로 그런 맛이었다. L.A 한인촌에도 순대는 있다. 그러나 어찌 이 남대문 시장의 순대맛에 비하랴!
그런데 남대문 시장의 순대맛이 그렇게 좋았던 까닭은 그것이 서울 순대로 만들어진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순대장수 아주머니의 변함없는 얼굴 표정 때문이었다. 그것은 20년전 하고 꼭 같은 표정이었다. 20년전 그때 그대로 지금도 쭈글쭈글한 얼굴에 삶의 고달픈 이력서가 변함없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순대장수 아주머니의 쭈글쭈글한 이마의 주름살 속에 대학 다니는 아들들의 이력서가 있었고 그 아들들의 이력서 속에서 오늘날 세계의 상품시장에 진열되어 있는 <메이드인 코리아> 전자제품들과 자동차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 아닌가?
문득 그 순대장수 아주머니의 얼굴이 변하지 않은한 서울은 변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세상은 변하여 젊은 아내들은 물론 늙은 아내들도 은퇴한 남편을 향해 복수라도 하듯 이혼 소송장을 내 던지고 당당하게 집을 뛰쳐 나갈 수 있는 자유천지?가 되었지만 아직도 한국의 남대문 시장의 순대장수 아주머니들은 20년 전 이 자리를 살고 간 그때의 아주머니들과 조금도 변함이 없는 가난한 살림을 자기 십자가로 견고히 지고 인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머니, 미국에서 열두시간 비행기 타고 오면서 제일 먼저 생각한게 뭔지 아세요? 바로 이 순대맛이었어요."
나는 일어서면서 순대장수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순대맛 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남대문 시장통의 생존을 위한 벌거숭이 얼굴에서 아직도 이 땅의 방방곡곡에 변함없이 남아 있을 수 많은 이름 없는 어진 어머니들과 참 아내들의 얼굴들이 보고 싶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순대장수 아주머니 앞을 떠나 사람들 속을 뚫고 얼마동안 걷다가 길거리에 나와 호객을 하고 있는 어떤 청년의 가게에 들어가서 꼭 필요한 것도 아닌 가방 하나를 샀다.
"이거 얼맙니까?"
하고 물으니 만칠천원이라고 한다.
"그럼 저건 얼맙니까?"
하고 내가 다른 물건을 가리키며 물으니 그건 만 삼천원이라고 한다. 내가 먼저 가리켰던 가방을 도로 집으며,
"이걸로 만삼천원 합시다"
하고 20년만에 물건값을 대폭으로 깍아보았다. 청년이 "아이, 아저씨 안돼요. 만오천원 주세요."하고 먼저 말한 만칠천원에서 2천원을 깍아준다. 그러나 나도 지지않고, "그럼 만사천원 합시다."하고 천원을 더 깍았다. 그러자 그 청년은 "아이, 아저씨도 참 너무 하시네요" 하면서 물건을 싸 준다. 나는 만사천원을 내 주고 돌아서 나오며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 시장바닥에서 혼자 껄껄대며 웃었다.
아, 아, 서울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물건값을 흥정하며 사고 팔고 있는한 서울은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가난 때문에 생각지도 않았던 미국이민을 가서 9불99전 짜리 물건을 글자 그대로 1전한푼도 에누리 해 보지 못하고 매겨놓은 값 그대로 돈을 내고 사다 쓰면서 20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20년을 살고난 지금 나는 그 염병도 안 물어갈 9불99전에 숨통이 막혀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처음 미국갈 때 처럼 또 비행기 값을 외상으로 사서 모처럼 서울 나들이 길에 올랐던 것이다.
미국이란 어떤 곳이냐? 어떤 사람들은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고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라고 한다지만 나에게는 미국이란 9불99전짜리 물건을 1전한푼 에누리하지 못하고 사다써야만 되는 삶의 여유가 1전한푼 어치도 없는 지옥이라면 한국은 아직도 만칠천원 짜리 물건을 만사천원에 살 수 있을 만큼 삶의 여유가 넘치는 천국이다. 어떤 사람은 이 대목에서 "그건 당신이 속은 거야. 그물건은 실은 만이천원 짜리였거든. 당신은 이천원을 더 준거야. 뭐 알기나 하구 하는 소리냐?"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좋다. 한국 남대문 시장에서는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는다. 그러나 사랑이란 게 무엇인가? 사랑이란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고 사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일평생 <같이 살아내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물건값을 9불99전에서 한푼도 에누리 하지 않고 사다 쓰고 살듯이 사랑도 그런식으로 하기 때문에 조금만 삐끗해도 서로 속고 살기 싫다고 당장에 이혼소송장을 던지고 갈라서고 만다. 그결과 미국은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지구촌에서 가장 속지 않는 사랑천국이 되었는가? 아니다. 미국은 이혼천국에다 사랑 불모지의 사막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자기네들만 그런것이 아니라 같은 유행병을 온 세상에 퍼트려대고 있다. 사랑이란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으면서 일평생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서울 사람들은 아직도 남대문 시장에서 그렇게 알면서도 속고 몰라서도 속으며 물건값을 에누리 하는 동안 미운정 고운정 다 들어 한핏줄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누가 뭐래도 그렇게 여유있게 살줄 아는 사람들의 정(情)의 천국이요 사랑의 천국이다.
4
지난 3주동안 내가 가장 많이 가 본 곳은 남대문 시장 다음으로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을지서적 그리고 종로서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 갈 때 마다 놀라게 되곤 하였다. 왜냐면 갈때 마다 그 넓은 책방 안이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종로서적은 2층 3층 4층으로 두 사람이 겨우 어께를 스치며 올라가고 내려 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고 교보문고는 광화문 네거리 땅 밑에 있었으며 영풍문고는 종각지하도 밑에, 그리고 을지문고는 을지로 입구 지하도에 있었는데 모두가 다 언제 가 보아도 사람들이 개미떼 같이 올라가고 내려 가거나 땅 밑으로 들어가거나 나오 고 있었다. 그런대 내가 놀란 진짜 이유는 그 대부분의 개미떼 같은 사람들이 거의 다 중학생 정도의 나이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점이었다.
책방에는 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보문고 같은 곳에는 한쪽 옆에 즉석요리 식당도 있어서 주로 미국식 햄버거와 쌘드위치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곳은 언제나 학생들로 가득차서 빈 자리가 없었다. 나는 처음 그 모양을 보는 순간 나의 어린 시절 소나무 냄새가 나던 송진껌과 입천장을 벗겨내곤 하던 딱딱한 눈깔 사탕이 생각났다. 나는 마치 그 배고프던 시절의 웬수라도 갚는 심정이었을까, 햄버거 하나를 사서 앉을 자리도 없어 아이들 사이를 어정거리고 걸어 다니면서 다 먹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한없이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참 좋구나 아이들아. 너희들은 놀아도 책방에서 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너희들 아빠 엄마는 놀 곳이 없어서 폭탄으로 움푹 파인 산등성이에서 파편 쪼가리를 주워 가지고 놀았단다. 그런데도 인생에서 책 읽는 일이 제일 소중한 일인줄 알아서 허리품 팔아 번 돈 가지고 이렇게 큰 책방도 지어 놓고 너희들이 놀아도 책 옆에서 놀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책 옆에서 놀며 자란 너희들이 어른이 되면 이 나라에는 다시는 도둑놈 소리 듣는 대통령들이 나오지 않는 바른 나라가 될 수 있겠지.)
5
서울은 가는곳 마다 음식점 술집, 술집 음식점 디스코장, 음식점 술집 다방 노래방, 하는 식으로 음식점과 술집 천지다. 서울 어디엔가는 먹자골목이라는 곳도 따로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서울은 거리 전체가 다 먹자골목이요 마시자 골목인 것 같다.
내가 서울에 머믈러 있는 동안 만난 사람들은 나를 손님대접 한다고 고급호텔 레스토랑이나 특정 메뉴 전문 식당으로 데려갔지만 나는 그곳을 나와 혼자가 되면 명동입구 전철역 계단 앞 길거리에서 초라한 노년의 남자가 구워 파는 붕어빵도 사먹고 날이 어두워지면 불을 밝히고 들어서는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혹은 시장 한복판 길거리에서 우동도 사먹으며 순대도 사 먹었다. 혹은 뒷골목 허줄한 분식점에 찾아 들어가 고기만두도 사 먹고 순 옛날식으로 한다는 짜장면도 사 먹어 보았다.
나는 나를 손님대접 한다고 데리고 간 고급 레스토랑에서 둘이서 고기 몇점 집어먹었을 뿐인데 3만원이나 5만원을 내는 것을 보았었다. 그러나 내가 혼자서 찾아간 분식점이나 길거리 포장마차에서는 2천원이나 3천원만 내면 무엇이든지 맛있고 배 부르게 먹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싸구려 음식들만 골라서 먹고 다닌 까닭은 그것이 값이 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손님 대접을 받아 끌려간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청년들이나 예쁜 아가씨들이 깍듯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며 시중을 들어 주었는데도 아무도 음식을 먹고 나오면서 잘먹었다고 인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시장 한복판에서 단돈 3천원 짜리 순대 한접시를 먹고 일어서는 노동자 아저씨는 물론 그보다 더 싼 단돈 천원 짜리 라면을 먹고 일어나 나가는 실직자 같아 보이는 중년 사내 까지도 하나 같이 다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가는 모양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들의 고생스럽지만 착하기만한 얼굴들을 보고 싶어서 자꾸 자꾸 더 싸구려 음식점만 찾게 되었고 나도 다 먹고 일어나 나오면서 큰 소리로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음식점 주인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서울은 변하지 않았다. 저 착하디 착한 이땅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남아 있는한 서울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6
이곳에 머므는 동안 해가 바뀌고 새해 첫날이 되었다. 마침 일요일이었다. 나는 주일 예배도 드리고 사람들을 만나 인사도 하기 위하여 다시 서울 거리에 나갔다. 나는 집 앞에서 택시를 탔다. 나는 택시에 자리를 잡고 앉자, "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하고 운전기사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것은 20년동안 미국에 살면서 몸에 밴 습관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어저께 까지 그렇게 안하무인이던 택시기사님 께서 내가 '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하고 인사를 드리자 그렇게 까지 수줍고 그렇게 까지 황송해 할 수가 없었다. 택시 운전 기사는 어쩔줄 몰라하며 "아, 녜, - - 손님 께서도 - - 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차를 얼마나 곱게 운전을 하는지 나는 마치 L.A. 내 집에서 나 자신이 운전하는 내 차를 타고 가는 느낌이었다.
그날 아침 그 택시운전기사의 생각지 않았던 반응이 하도 신통하여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조금만 차를 타야 할 핑게가 생기면 일부러 꼭 택시를 불러 타고 그때 마다 아침에 집을 나올 때 처럼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택시 운전기사를 향해 "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하고 인사부터 하였다.
아, 아, 그런데 참으로, 정말 참으로 신통하게도 그날 하루 종일 나의 신년 인사를 받은 서울의 택시운전기사님들은 한 사람도 빼 놓지 않고 모두가 다 그날 아침의 첫 택시 운전기사 처럼 그렇게 수줍고 그렇게 겸손하고 그렇게 친절하고 그렇게 신사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비로소 서울에 도착하여 전철을 타고 다니기 시작한 이틀 후엔가 전철 안 벽에 붙어있던 각종 광고들 가운데서 본 어떤 광고 문안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 광고문에는 예쁜 어린 딸 아이가 그려져 있는 그림과 함께 "이런 것만은 안 보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그 밑으로는 "어른들은 왜 줄을 서지 않을까? 어른들은 왜 아무데나 침을 뱉을까? 어른들은 왜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울까? 어른들은 왜 고맙다는 인사말을 안할까?" 등등의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어른들은 왜 줄을 서지 않을까?
어른들이 줄 설 줄을 몰라서 줄을 서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늙은 어머니 같은 할머니가 코 앞 땅바닥에 주저 앉아 가고 있는데도 못 본 척 눈을 감고 있던 사람들이 다 양심에 털이 난 사람들이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20년전 보다 오히려 더 난폭하게 운전하는 뻐스 운전기사들이 차에 태운 것이 짐짝이 아닌 사람인줄을 몰라서 그렇게 난폭하게 운전하는 것도 아니었고 택시 기사들도 그만한 교양이 없어서 손님들을 사람이 아닌 단돈 몇천원 짜리로 안하무인 대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렇다. 다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이 말은 몇천번을 다시 해도 모자란다. 현대 자동차 몇대 외국에 내다 팔고 삼성, 대우 전자제품 몇대씩 팔아서 돈을 좀 벌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런 얘기들은 아직도 저 까마득한 하늘 만큼이나 높은 몇몇 <특권층>들의 얘기이고 여전히 어리고 가난하기만한 이땅의 대다수 무지렁이 같은 <백성들>은 지금도 살 공간이 모자라고 기 펴고 살 기회가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나마 우물쭈물 하다가는 그 모자란 차례 마저도 오지 않기 때문에 전철을 갈아 타기 위해서는 그렇게 땅굴 속을 아침 부터 군사훈련이라도 받듯 뛰어 들어갔다 뛰어나왔다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안하면 전철을 못 타고 그렇게 안하면 그나마 직장에서도 오래 목줄을 부지 할 수가 없으니까! - - -
그런 그들 옆을 오늘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외쳐대는 공포의 전도자들만이 좁을 통로를 뚫고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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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포 세무서]라고 씌어진 방향을 따라 땅 속에서 고개를 내 밀었다. 나는내가 지금 어느 방향으로 서 있는지 동서남북을 분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옛날 처럼 변함 없는 서울의 그 밤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내일이면 나는 L.A.로 돌아가야 된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그것이 내것이고 그것이 우리 것이고 그것이 내 살붙이며 내 핏줄이기때문에 그저 좋고 정이 깊기만한 이 거리를 떠나 나는 또다시 저 낯 설고 삭막한 사막의 도시로 돌아가야지만 된다.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난 미국 생활 20년은 나에게는 유배생활이나 하나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정말로 조금도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남은 생애 동안이나마 말이라도 우리나라 말로 시원하게 하며 살고 싶다. 숨통이나마 노랑내가 아닌 김치냄새에 다시 푹 젖어 살고 싶다. 무엇 보다도 눈 앞이 낯 설지 않은 삶을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다. 20년을 살았는데도 낯 설기만한 L.A.의 하늘과 땅은 나에게는 20년이 아니라 영원히 낯 설 것만 같다. 나는 저렇게 낯 선 하늘에도 하나님이 계실까 생각 할 때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함박눈이내리고 있는 이 서울의 저 잿빛 하늘은 얼마나 얼마나 나에게 낯 익은 하늘인가.
그런 울적한 심정으로 목사인 친구를 만자자 나는 대뜸 무슨 화풀이라도 하듯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마구 쏟아 부었다.
"이목사는 전철을 타고 다녀 보는가?
이목사는 남대문 시장에 종종 가 보는가?
이목사는 교보문고에 가 보는가?
이목사는 베스트셀러를 읽어보는가?
이목사는 T.V. 드라마를 보는가?
이목사는 파고다 공원에 가 보는가?
이목사는 매일 일간신문을 보는가?
이목사는 대중잡지를 보는가?
이목사는 시중에 나도는 영화구경을 해 보는가?
이목사는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 먹어 보는가?
이목사는 대중가요를 듣는가? 그걸 따라 불러 보는가?
이목사는 신촌과 방배동과 종각 뒷골목을 가 보는가?
이목사는 밤거리의 화려한 네인싸인 뒷골목을 가 보는가?
이목사는 달동네에 가 보는가?
이목사는 달동네 구멍가게에서 밍밍한 음료수를 사 마셔 보는가?
이목사는 남대문 시장에서 순대를 사 먹는가? - -
이목사는 천원짜리 라면으로 점심을 때워 본 일 있는가? "
바로 그때 나는 어떤 하나의 굉음을 들었다. 그것은 전철이 지나가는 요란한 소리였다. 아니 그 전철 안의 잡다한 소음이었다. 아니 더 분명하게는 저 공포의 전도자의 음성이었다.
"예수를 믿으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다!"
내 마음의 서울은 오늘도 공포에 떨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