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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한 켤레

Casey,Riley 2023. 5. 2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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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한 켤레
류 시 화

신발을 사야만 했다. 인도는 날이 너무  더워 한국에서 신고 간 신발을 더  이상 신을 수가 
없었다. 며칠을 미룬 끝에 나는 특별히 올드 델리의 바자르(시장)로 가서 마음에 드는 슬리
퍼 한 켤레를 샀다 둥근 끈에 엄지 발가락을 끼워 신는 단순하고 편리한 신발이었다. 

종이에 싼 새 신발을 가방에 넣고 서 나는 서둘러  시장을 빠져나왔다. 북인도 올드 델리의 
시장은 인산인해로 유명한 곳이다. 그리고 사람들 대부분이 맨발이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구두와 운동화들 이 인도인의 맨발을 점령해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인
도는 맨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인도 뭄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맨 먼저 눈
길을 끈 것도 여자 청소부들의 맨 발이었다.

그러나 역사상 신발을 최초로 발명한 나라가 인도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전설에 의하
면 아주 옛날에, 그러니까 신발이라는 물건이 전혀 이 지구별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 인도의 
한 왕이 똑똑한 신하를 불러 말했다. 

"여보게, 똑똑한 신하여, 길에는 돌이  많고 사금파리 같은 것도 떨어져  있어 걸어다니기가 
힘이 드네. 사 람들이 발을 다치지 않고 편하게 다 닐 수  있도록 세상의 땅바닥을 전부 양
탄자 같은 것으로 덮어버리면 어떻겠나?" 

왕들은 대개 이처럼 무모하다. 하지만 그 똑똑한 신하는 정말로 똑똑했기 때문에 가만히 어
리석은 왕을 설득시켰다. 

"왕이시여 . 대지를 전부 페르시아 양탄자로 덮어버린다면 꽃과 무우들도 싹이 틀  수 없고, 
지렁이와 개미 같은 미물도 생존이 불가능하답니다. 더구나 소와 당나귀들이 여기저기 오줌
을 싸고 다니면 무슨 수로 그 많은 양탄자를 세 탁하겠습니까?" 

왕이 그것도 그럴 법한 얘기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똑똑한 신하가 다시 말했다.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발바닥을 양탄자 같은 것으로 감싸면 어떻겠습니까? 자연
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위대하신 전하" 

위대하신 전하께서는 곧바로 인도 전역에 신발 포고령을 내렸고,  그렇게 해서 나이키와 프
로스펙스에 이 르는 신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점
심을 먹을 생각으로 찬드너 초크 시장 근처의 한 노천 식당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열심히 차파티를 부치고 있는 어린 종업원도 맨발이고, 종업원을 감시하고 서 있는 늙은 주
인도 맨발이긴 마찬가지였다. 팔찌를 스무 개나 끼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 손님도 맨발
이었다. 나 혼자만 신발을 신고 있고. 가방 속엔 새로 산 슬리퍼까지 들어 있었다. 

내가 테이 블에 앉아 바나나 라시 (요구르트처럼 생긴 것에 바나나를  잘 라 넣은 것)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치 킨 카레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때 였다. 한 떼의 손님들이 우르르 식
당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흰수염 기른 노인도  있고, 고깔모자 같은 두건을 쓴 남자도  있었
다. 테이블이 모자라 그들은 내 앞에도 앉고 옆에도 앉았다. 

시장했던 터라 치킨 카레를 열심히 먹고 있을 때였다.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뒤돌아보니, 아
니나다를까 고깔모자의 인도인이 새로 산 내 신 발을 신고 황급히 달아나고 있었다 기가 막
힐 노릇이었다. 내가 밥을 먹고 있는 틈을 타 어느새 가방을 뒤져 신발을 꺼내 신은 것이다. 
소유 개념 이 불분명한 이 나라사람들에게 이미 몇 차례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얼
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를 쫓아갔다 신발 도둑은 다리가 긴 내게 금방 덜미가 잡혔다. 
어려서부터 다리가 길어 타조라는 별명을 가진 나였다. 나는 그 인도인이 소유에 관한 철학
적 이고 복잡한 논리를 늘어놓기 전 에 얼른 신발부터 빼앗았다. 

그것도 불안해 아예 그 자리에서  신고 있던 허시파피 신발을 벗고  새 신발로 갈아신었다. 
이 정도면 그가 아무리 교 묘한 말솜씨를 가진 자라해도 신발을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 인
도인들 은 남의 물건을 가져가고도 걸핏하 면 '이 세상에  영원히 내 거 란 없는 것 이여!' 
하고 허풍을 떨기 일쑤였다. 

나는 허시파피 신발을 인도인의 얼굴 앞에 흔들며 일장 훈시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영 원한 소유란 없다고 해도 남의 신발 을 그렇게 함부로 훔쳐가선 안된다. 게다
가 헌 신발이라면 내가 말도 안  한다 이제 막사서 한번도 신지 않은  신발을 가져가다니 . 
그게 영적 인 인 도인으로서 할 짓인가. 

나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많아 보 이는 그  인도인 남자는 내 영어를 전 혀 못  알아듣는지 
지방 사투리로 따 따부따 말이 많았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뿐더러 도둑 
질하다 들킨 주제에 대드는 것이 얄 미워 허시파피 신 발짝으로 잔뜩 위 협을 했다. 남자는 
신경 질적 인 웃음을 웃더니 오히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
는 건 나였 다. 나는 신발 도둑과  더 이상 장광설 을 늘어놓기 싫어 치킨  카레도 먹다 만 
채 그 자리를 떴다. 내가 멀리 사 라질 때까지도 그 도둑은 계속해서 뭐 라고 떠들어 댔다. 
정 말 무례하고 인간성이 형편없는 인도인이었다. 

릭샤(세발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 아오면서도 나는 분을 참지 못해 씩 씩 거 렸다. 입술  두
꺼운 릭샤 운전수 가 내 손에 들린 허시파피를 힐끔거리는 것도 못마땅해 나는 운전이나 잘 
하라고 구박을 했다. 

그날 오후. 나는 뉴델리 기 차역 맞 은편에 있는 파할간지의 싸구려 여관으로 돌아왔다.  허
시파피를 신문 지에 싸서 잘 모셔 둔 뒤, 우선 공동  세면장에 가서 시원한 물로 샤워를 했
다. 아열대의 더위 와. 시장통의 먼 지와, 신발  도둑이 안겨준 불쾌감까지 말끔히 씻어버렸
다. 이제부턴 슬 리퍼를 신고 다닐 것이기 때문에 더 자주 발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슬
리퍼를 신으니 목욕을 하기도 더 편했다.

철썩철썩 슬리퍼 소리를 내며 방 으로 돌아온 나는 수첩을 꺼내려고 가방을 열었다. 그곳에 
누런 종이에 싼 어떤 물건이 들어 있었다 뭔가 하고 열어 보니  새로 산 슬리퍼 였다. 나는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내 발을 내 려다보았다. 

똑같은 모양의 슬리퍼가 그곳에 있었다. 아니, 그럼 이것은 그 인도인 남자의 슬리퍼? 

나는 너무도 당황스럽고 창피해서 그만 침대에 얼굴을 묻고  쓰러지고 말았다. 용서를 빌기
에도 이젠 너무 늦었다. 무례하고 인간성이 형편없 는 건  그 인도인이 아니라 나였던 것이
다. 백주 대낮에 남이 신고 있는 신 발을 막무가내로 가로채다니 그것도 허시파피 신발짝으
로 위협까지 해 가면서.

난데없이 신발 도둑으로 몰린 그 인도인 남자가 깨우쳐준 몇 가지 사실. 

1. 세상에는 자기가 도둑이면서 남을 도둑으로 모는 사람이  많다. 2.남이 가진 것을 쳐다보
기 전에 자기가 가진 것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면 틀림없이 자기에게도 새 신발 이 있을 것
이다. 3. 자기가 가진 믿음과 확신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선 안된다. 그것은 언제라도 틀릴 
수가 있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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