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아내
악마의 아내
1
퍼시파의 드레스는 정말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저녁놀같이 빨간 드레스는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 조화를 이루어 불타는 것처럼 보였고, 옅은 금발을 한결 돋보이게 했다.
거기에 그녀의 반짝이는 암갈색의 눈은 말할 수없이 귀엽게 보였다.
래리 콘더민은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다가 퇴짜를 맞고 뾰루통해서 말했다.
"당신은 구식 숙녀가 아니잖소. 현대는 댄스나 키스는 당연한 예절이 아니오? 당신은 춤을 아주 잘 추던데, 키스도 잘하는지 보여 주어야 할 것 아니오, 퍼시파!"
정원을 산책하면서 래리는 또 퍼시파를 끌어안고 키스하려고 덤볐다. 퍼시파는 교묘하게 래리의 키스를 피했다.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와. 아아, 내것으로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당신의 후견인은 엄청난 부자가 아니면 절대로 당신을 놓아 주지 않을 생각이니 약오르는 이야기지! 안 그래요? 마커스는 당신을 젊은 남자에게는 보여 주려고도 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면서 저택에 초대한 부자 도박사들에게는 자랑을 하거든. 당신도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지요, 그 양반이 당신을 경매에 붙이려고 한다는 말을?"
마커스에 대한 소문은 그녀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몇 가지는 사실이고 몇 가지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마커스 스톤힐은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뒤로 사뭇 그녀를 돌보고 길러 준 사람이었다.
마커스가 퍼시파의 죽은 어머니인 데이지 파제트에게 줄곧 품고 있는 애정은 너무나 깊은 것이었다.
퍼시파를 기어이 재산가와 맺어 주려고 하는 것도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운 운명적인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것을 아는 이상, 퍼시파도 마커스에 대해서 투덜거릴 생각은 없었다.
퍼시파의 어머니는 여배우였으나 가난한 배우와 결혼하여 떠돌이 활동을 하다가 건강이 매우 나빠졌던 것이었다. 마커스는 아닌게아니라 빌로도 장갑을 낀 강철 같은 손으로 퍼시파를 엄격하게 돌봤으며, 그녀는 불만 같은 것은 없었다.
"내게 키스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마커스의 채찍을 맞기 싫으시다면."
그러자, 갑자기 래리는 얌전해졌다.
스톤힐 저택에서 다리를 절며 쫓겨난 가난한 구애자가 몇명이나 된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이었다.
래리는 퍼시파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지만 창피한 꼴을 당할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날 사랑해 주지 않겠어요?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요. 거기서는 몇 천 파운드만 있으면 상당한 땅을 살 수가 있대요. 그 정도는 우리 할머니한테 부탁하여 받을 수가 있어요. 어때요, 퍼시파?"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땅만 있으면 되나요?"
그러자, 저도 모르게 힘이 빠진 래리의 팔에서 퍼시파는 몸을 빼고 저택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택에서는 어마어마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저택의 주인 마커스는 본래 사업가였지만, 사업 따위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노름이야말로 그가 정열을 쏟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의 교제 상대는 일류 사업가들뿐이었다.
래리는 마지못해 슬슬 퍼시파의 뒤를 따라갔다.
퍼시파는 속으로 살며시 웃었다. 래리는 참 멋진 청년이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만일 래리를 사랑한다면 마커스가 뭐라고 하든 그녀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따라간다고 했을 것이다.
본래 퍼시파는 사랑이라는 것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다. 마커스의 교육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한번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행복보다는 아픔을 끌어안게 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커다란 홀에는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의 불빛이 넘치고 있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일어났을까?
아까까지도 춤을 추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몇 명씩 모여서 겁을 먹은 듯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퍼시파는 버드나무 아래에서 멈추었다.
키가 큰 남자가 자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구릿빛 인디언이거나 인간의 모습을 한 호랑이와도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가 이 남자를 소개받은 것은 마커스의 서재에서였다.
그가 돌아가는 모습을 이층 난간에 몸을 숨기며 바라보고 있었는데, 역시 지금처럼 소리도 없이 날렵한 맹수 같은 걸음걸이였다. 그 이튿날 마커스가 해준 이야기로는, 그 남자는 멕시코에서 왔으며 영국의 대지주 정도는 병아리로밖에 보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넓은 땅의 소유주라는 것이었다.
퍼시파가 그의 이름을 물은 것은 너무나 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이지 결코 호감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퍼시파의 후견인 마커스도 유순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으나, 그 사람은 너무나 다부지고 매서운 느낌을 주었다.
지금, 홀에 모여선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그 돈 디아브로 에스렐드 루이가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퍼시파는 그에 관해서 마커스와 주고받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악마 같은 분이군요. 틀림없이 그분의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돈 디아브로(악마)라는 이름을 붙였을 거예요."
마커스는 언제나처럼 빙그레 웃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무언가 이상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도대체 저 스페인 계 남자와 마커스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나 궁금했었다.
"그분과 노름을 하셨어요?"
"자, 퍼시파, 인간은 자기의 주인을 상대로는 노름을 하지 않는 법이야."
"아니, 아저씨에게도 주인이 다 있으세요?"
"신이나 악마는 인간의 주인이 아니겠어?"
그 이상한 대화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지금 퍼시파 앞에 서서 외국인답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이때의 대화야말로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것이 된 것이다.
"안 됐습니다, 세뇨리타 파제트. 당신의 후견인은 쓰러지셨습니다."
"뭐라구요? 그게 정말이에요?"
놀라서 뛰어가려고 하는 퍼시파를 힘센 손이 붙잡았다.
"아니, 당신이 가봐야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뇨리타. 심장의 발작입니다. 한순간에 치명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분이 숨졌다는 통고를 해드리는 역할을 맡은 것뿐입니다. 고인과 가장 가까왔던 당신에게 이 불행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요. 단 한 가지의 위안은 발작이 너무나 빨라서 괴로움이 없었다는 점이오. 마침 도박에서 이기고 막 트럼프를 놓았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분 옆에서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분은 미소를 띠고 있었어요, 세뇨리타 파제트."
"미소라니요? 웃으면서 돌아가셨단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세뇨리타. 그런 일도 더러는 있지요."
"하지만… 그런… 아니예요, 마커스 아저씨가 돌아가실 리가 없어요!"
퍼시파는 그 남자의 말뜻을 알게 되자 비명을 질렀다.
"오직 한 사람뿐인 소중한 분인데! 그분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몸인데! 아아, 아저씨! 아저씨!"
퍼시파는 다시 뛰어가려다가 돈의 손에 붙잡혀 그에게 안긴 채 어둠의 세계로 끌려간다고 느꼈다. 사실은 정신을 잃고 몇 시간이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귀여운 분, 현실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르신네는 이제 겨우 주무시게 된 겁니다. 겨우 세뇨리타 데이지와 같이 있게 된 거지요, 진정으로 사랑한 오직 한 분과. 그러니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이 세상에서는 맺어질 수 없었던 두 분이 이제 겨우 한몸이 된 것이라고."
문득 깨닫고 보니 퍼시파는 스톤힐 저택의 자기 침실에 뉘어져 있었다. 루크레치아가 두 팔로 안고 위로해 주고 있었다. 퍼시파의 어머니가 그녀를 낳은 지 며칠 만에 죽은 뒤로 지금까지 그녀를 길러 준 이탈리아 인 유모였다.
"아니, 루크레치아, 마커스 아저씨는 파티에 나갈 때까지도 기분이 좋았어… 드물게 기분도 쾌활하고… 마치 큰 도박에서 이긴 것 같았어. 기분이 언짢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 피렌체에서 쓰러졌을 때와는 달랐어. 아아, 루크레치아, 그때가 첫 발작이었지? 심장이 나쁜데도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았어. 정말 아저씨다운 일이지만…"
"어르신네는 아가씨에게 절대로 좋지 않은 기분을 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에요. 아가씨에게는 무지개만 보여 주고 싶으시고 데이지 양을 괴롭히는 무뢰한 따위는 절대로 맞이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데이지 양은 정말 아름다운 분이었어요. 하지만 자기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와 어르신네한테 찾아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어요. 어르신네는 그녀에게 거의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던 거예요. 내 말 알겠지요? 아가씨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예요. 스무 살의 어엿한 숙녀가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인생의 진실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하지만 루크레치아, 마커스 아저씨는 이제 겨우 마흔다섯 살이잖아요?"
퍼시파는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깊은 고독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커스 아저씨는 언제나 따뜻하게 나를 지켜 주었는데, 아버지 대신이었고, 선생이었고, 좋은 친구였는데, 우리 엄마를 잃어버려서 약간 비뚤어지게 되었지만 나에게는 깊은 애정을 쏟아 준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하면 이 슬픔을 견딜 수 있지? 난 무엇을 하면 좋아? 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스톤힐 집안은 모든 재산을 후손들에게만 물려주기 때문에 이 커다란 석조 저택도 마커스 조카의 것이 되고 말았다. 조카는 결혼했으며 어린아이도 있는데, 퍼시파를 집안 식구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있었다.
이십 년을 지내온 이 저택도 이제는 내 집이 아닌 것이었다.
"난… 내던져진 것만 같아. 나를 지켜 주던 든든한 성벽은 무너지고 혼자 남겨진 거야… 이런 비참한 느낌은 생전 처음이야. 루크레치아, 정말 참을 수가 없어."
그래도 퍼시파는 그 뒤의 며칠과 또 그동안 일어난 일은 그럭저럭 참을 수가 있었다. 마커스의 친척이 스톤힐 저택으로 들어와 장례에 관한 일을 모두 도맡아 진행시켰는데, 퍼시파는 입관식에 입회할 수조차 없게 했던 것이었다.
적당한 액수의 수표를 끊어 줄 테니 바로 나가 달라는 것이었다. 마치 그녀가 마커스의 정부라도 된다는 듯한 취급이었다.
이런 것 필요없어! 퍼시파는 수표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는 마커스가 사준 드레스를 여행가방에 챙겨 넣고 도서실의 벽에 걸린 어머니의 초상화를 떼어냈다. 그때 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도 받기 싫었다. 누구와도 이야기하기 싫었다. 손에 먼지도 묻어 있고…
하지만 전화 벨은 계속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퍼시파는 할수없이 가서 수화기를 집어들고, 울어서 갈라진 목소리로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확인 않고 말했다.
" 아무도 없어요, 집안 사람들은 모두 장례식에 갔으니까요."
"세뇨리타 파제트지요?"
"네, 파제트예요, 세뇨르. 대체 무슨 일이지요?"
"당신을 뵙고 싶습니다. 몇 분 뒤에 가겠습니다."
외국 사투리가 섞인 굵은 목소리였다. 멕시코에서 온 햇볕에 그을은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예요, 난 스톤힐 저택을 나가는 길이에요. 빨리 나가 달라고 하는 판이니…"
"거기에서 날 기다려 주십시오. 당신의 후견인에 관한 일을 말씀드려야 하고 그분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내게 한 이야기도 전해야 하니, 꼭 당신을 만나야 합니다. 그 일을 실행할 것을 희망하고 계셨습니다."
"당신과 마커스 아저씨가 나에 관한 일로 상의하신 일이 있다니, 상상이 안 되는군요. 마커스 아저씨가 노름을 하셨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인데요."
"난 노름을 하지 않습니다, 세뇨리타 파제트. 왜 그러십니까? 나를 만나는 것이 무섭습니까?"
"난 지금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가질 수가 없어요. 하지만 좋아요, 꼭 나를 만나시겠다면 오세요. 돌계단 있는 데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난 이제 이 집 사람이 아닌걸요."
퍼시파는 상복을 입고, 여행가방은 옆에 놓은 채 돌계단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초상화는 옆에다 기대 세워 놓고 있었다.
차가 미끄러져 들어와 돌계단 앞에 섰다.
문이 열리고 키가 큰 남자가 내렸다. 한치의 빈틈도 없는 회색 양복 차림이었다.
돌계단을 오르더니 가만히 서서 퍼시파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울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볼에는 눈물 자국이 있고, 손에는 초상화의 먼지가 묻어 있었다.
"어린아이같이 얼굴이 지저분해졌군."
돈은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퍼시파의 무릎 위에 놓았다.
"세뇨리타, 얼굴을 닦고 나와 함께 갑시다."
"내가 왜 당신과 같이 가요? 나에게 명령하다니 당신이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세요?"
돈 디아브로는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남자요."
무서운 쇼크도 견디어 왔던 퍼시파지만, 너무나 뜻밖의 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수건을 틀어쥐고 햇볕에 그을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마치 느닷없이 몰려든 어른들에게 마구 쥐어박혀 어쩔 줄 몰라하는 어린아이처럼 두려움에 찬 눈길이었다.
"무얼 그렇게 무서워합니까?"
돈은 선뜻 몸을 수그리고 가뿐하게 퍼시파를 두 팔로 안아서 차로 옮겨 좌석에 앉혔다. 그러더니 바로 되돌아가 여행가방과 초상화를 가져다 싣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두 팔로 그녀의 머리를 안아 자기의 회색 양복에 기대게 하여 실컷 울게 하는 것이었다.
"멕시코에는 이런 속담이 있어요. 포도주를 위한 때도 있고 물을 위한 때도 있다― 사람은 즐거울 때도 있고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는 의미요. 마음껏 울어요, 꼬마 아가씨.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서 이야기합시다."
남자와 여자로서? 거의 알지도 못하는 이 남자가 태연하게 결혼하겠다고 나서다니.
얼굴을 닦으니 새하얀 손수건에 먼지와 때가 묻어났다. 문득, 자기가 지독한 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싶었다. 앞으로는 거기서 잘 일도 없을 침실을 뛰쳐나올 때 너무 화가 나서 머리를 빗는 것도 잊어버렸으니, 나의 차림에 대해서 민감하던 마커스가 보았다면 얼마나 한심스러워 했을까?
"당신의 손수건을 버렸군요. 빨아서 돌려드리고 싶지만 스톤힐을 쫓겨났으니… 이상하지요, 스무 살이나 된 여자가 갑자기, 자기에겐 집이나 돈도 없고 접시를 닦을 줄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다니? 참으로 우스꽝스런 일인데, 난 웃을 기력조차 없어요. 지금쯤 마커스 아저씨의 관 위에는 흰 장미꽃이 얹혀질 텐데, 나는 가족이 아니니 따라갈 권리도 없다는 거예요. 루크레치아는 장례식에 따라가도 좋다고 했어요. 아저씨가 어렸을 때 돌봐 주었기 때문이라나요. 하지만 나는 아저씨에게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어요. 옛날부터 어른이었고 무엇이나 잘 알고 있을 것만 같아서."
퍼시파는 물끄러미 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돈 디아브로는 진지한 눈길로 퍼시파를 마주보고 있었으나, 도저히 그의 마음속을 엿볼 수는 없었다. 인디언의 피가 섞여 있는 것일까. 마치 고대 아즈테카 왕국의 전사와도 같은 얼굴이었다.
"난 정말 아저씨를 소중하게 생각해 왔어요.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기쁩니다."
돈 디아브로는 귀족적인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매력이 없는 부분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으나, 퍼시파는 이 사람이 무서웠다. 손수건을 손가락에 감으면서, 마음속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의 눈에서 눈길을 돌렸다.
"배도 고프겠습니다, 세뇨리타. 안 그래요? 아침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겠지요, 벌써 점심때가 가까와 오는데."
"시장기는 느끼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무엇이든 조금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여기서 좀 들도록 합시다."
돈은 시트 위에 도시락을 꺼내 놓았다. 튀긴 닭과 롤빵, 토마토와 샐러리, 거기에 포도주와 포도주 잔이 들어 있었다. 돈은 포도주를 따라 퍼시파에게 건네주었다.
"먼저 이것부터 한 모금 마셔요."
싫다는 말을 못할 정도로 강압적인 표정이었다. 돈은 퍼시파를 쳐다보고 잔을 치켜들며 말했다.
"건배, 세뇨리타. 포도주가 당신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주기를…"
퍼시파는 그를 이상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말을 따라 가벼운 식사를 하니 소풍이라도 하는 것 같은 즐거운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포도주는 최고품이었고 상당히 독했다. 조금 있으니 이 며칠 동안의 사건에서 생긴 날카로운 모서리가 깎이면서 약간은 견디기 쉬워진 느낌까지 드는 것이었다.
큼직한 딸기를 디저트로 먹고 난 퍼시파는 시트에 편안히 몸을 기댔다. 두 잔의 포도주로 머리가 멍멍해지고 고통이 가시면서 마음속까지 가벼워졌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난들 상관이 없다 싶었다. 이 오만한 돈은 나를 구슬리려고 들지 모르는데, 나를 지켜 주던 마커스 아저씨는 이제 이 세상에는 없었다.
퍼시파는 자기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 데이지를 닮은 것이었다. 마커스만한 남자를 일생 동안 사로잡고 놓아 주지 않았던 데이지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이어받고 있었다.
마커스는 어떤 상대와도 결혼할 수 있는 신분이었는데도 성직자의 딸만을 생각하며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그런데, 그녀는 가난하고 성실하지 못한 배우와 어울려서 도망을 쳤고, 무대 위에 서다가 병으로 쓰러져 돌이킬 수 없는 몸이 되어 마커스한테 돌아왔다― 마커스는 데이지를 여신처럼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퍼시파도 마커스를 신처럼 우러러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뭐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돈 디아브로? 전화는 그저 나를 끌어내기 위한 핑계였나요?"
"난 지금까지 한번도 핑계를 대본 일이 없습니다, 세뇨리타."
돈도 시트에 기대어 손가락으로 금 담배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담배를 피워도 괜찮지요?"
"물론이에요, 세뇨르. 난 피우지 않아요. 마커스 아저씨가 싫어했어요, 여자의 피부에 나쁘다고요. 주름살의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피부의 윤기를 빼앗는다나요. 아저씨는 내 어머니를 열렬하게 사랑하셨고, 내게도 언제나 어머니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일을 말해 주셨어요 어머니의 피부는 결코 색이 바래지 않는 장미꽃잎 같았다고요. 마커스 아저씨는 장미를 무척 좋아했어요."
거기서 퍼시파는 말을 끊고 한숨을 내쉬더니 이윽고 다시 계속했다.
"아저씨도 물론 때로는 가혹할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의 친척들처럼 지독하지는 않았어요. 글쎄, 그의 친척들은 나를 아저씨의 정부 취급을 하지 뭐예요, 난 그의 보호를 받는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몇 명은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하긴 아저씨는 그렇게 매력적이었고 뛰어난 도박사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분은 정말 나를 친딸처럼 사랑해 주셨어요."
"잘 알고 있습니다, 세뇨리타. 우리 스페인 계 사람들은 단번에 상대방의 속을 알아보지요. 안심하시오. 짧은 동안이었으나 나는 세뇨르 스톤힐을 무척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명석하고 두뇌회전도 빠르며, 자기 나름의 방식이었지만 무척 명예를 존중하는 분이었어요.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생각해요. 난 언제나 아저씨와 함께 있었어요. 외국에도 같이 여행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한번도 본 일이 없었고, 돈 디아브로라는 이름을 들은 일도 없었어요."
"우리는 내가 스톤힐 저택에 오기까지 한번도 만난 일이 없었습니다. 난 매우 중요한 용건을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만일 운명이 마커스를 데리고 가지 않았던들 그 자신의 입으로 당신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었을 겁니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겠습니까, 세뇨리타?"
"난 달리 갈 곳도 없는 몸이니…"
퍼시파는 가볍게 농담을 던지면서 말했다. 이런 때 아저씨는 언제나 눈을 번쩍였지.
"이야기는 듣기 좋아하는 편이에요, 세뇨르."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입니다, 세뇨리타. 멕시코에서 시작하여 영국에서 끝나가고 있는 길고 긴 이야깁니다.
어느날, 나는 새 말을 타고 내 영지를 달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말이 뱀에 놀라서 몸을 솟구는 바람에 나는 땅으로 곤두박질을 했습니다. 돌에 머리를 찧고 정신을 잃고 말았지요. 떨어지는 순간 차양 넓은 모자가 벗겨져 버렸던 모양이었습니다. 만일 멕시코의 강렬한 태양 밑에 그대로 한 시간만 있었더라면, 나는 열사병에 걸려서 어쩌면 시력까지 약해져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운좋게도 그때 포장마차가 지나갔습니다. 떠돌이 땜장이였지요. 새까맣게 햇볕에 그을고 허술한 차림새였기 때문에 그가 말을 할 때까지는 멕시코 사람인 줄만 알았어요. 놀랍게도 교육받은 세련된 영어로 말했습니다. 그 남자가 나를 마차 속으로 옮겨 햇살을 가려 주고 소중한 물로 내 머리를 적셔 주었습니다. 사실 생명을 구해 주었다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내 온전한 정신을 지켜 준 것은 틀림없었어요.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 남자는 몇 년간 무대에 선 적이 있었던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크게 성공은 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를 버리고 다른 남자한테 도망가 버리자 한밑천 잡기 위해 영국을 떠났다더군요. 페루, 아르헨티나 등지를 방랑하다가 멕시코로 들어서서 이곳 저곳에서 짐깐씩 일을 한 끝에 행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마솥, 특효약 등 가리지 않고 팔고 다니는 재미있는 남자였어요. 이야깃거리가 끝도 없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답답한 저택 생활이 따분해서 그 남자에게 같이 가자고 권했어요. 우리 집에 가서 만물 용달꾼노릇이라도 하지 않겠느냐고요. 남자는 동의했어요. 그는 몸이 좋지 않아서 적당한 곳에 서 자리를 잡으려던 참이었대요. 아까도 말한 것처럼, 남자는 교양이 있었어요. 우리는 저녁이 되면 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지냈습니다."
거기에서 돈은 말을 끊고 차분한 눈으로 퍼시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지, 세뇨리타, 당신은 어머니를 닮았어요. 아버지는 닮지 않았어요. 그 초라한 차림의 햇볕에 그을은 남자의 눈은 푸른색이었지만, 당신의 눈은 황금색에 가까운 갈색인걸."
퍼시파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돈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설마 멕시코에서 나의 아버지와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그랬었단 말이오, 세뇨리타 파제트."
돈은 벌써 퍼시파의 생각을 알아채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찰스 파제트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자리에 눕게 되자, 언제나 목에 걸고 있던 사진이 있는 목걸이를 내게 주었어요. 아름다운 여자였어요. 자기의 아내였던 여자라고 하더군요.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시켰다고 자기도 인정하고 있었어요. 그는 자기 아내가 더 좋은 남편이 되어 줄 남자한테 달아나 버린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자기 아내가 임신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며, 마커스 같으면 잘 돌봐 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찰스는 그대로 두기로 결심한 모양이었어요. 하지만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내게 부탁했어요. 만일 영국에 갈 기회가 있으면 스톤힐 저택을 찾아가 그 아이가 제대로 보살핌을 받고 있는지,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요. 그래서 나는 그 약속을 지킨 셈이지요. 몇 주일 전에 그 일로 이 나라에 왔으니까요."
돈은 담배를 창밖으로 내던지더니 호주머니에서 그 목걸이를 꺼냈다. 여러 나라의 태양빛에 색이 바랬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따뜻하게 웃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이 당신의 어머니요, 세뇨리타?"
"…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도 틀림없이 찰스예요. 하지만 믿을 수가 없어요, 세뇨르."
"믿으십시오. 운명의 장난입니다. 찰스는 당신을 마커스에게 맡겼고, 마커스는 다시 당신을 내게 맡겼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퍼시파는 가슴이 철렁하여 어머니 사진이 있는 목걸이를 틀어쥐었다.
"정확하게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세뇨리타. 굳이 멜로드라마 풍으로 말한다면 당신은 내 손 안에 있는 겁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마커스 아저씨뿐이에요."
"당신은 언제나 마커스가 시키는 대로만 해왔지요? 언제나 마커스의 희망에 따라 왔지요?"
"난 아저씨를 사랑하고 있었는걸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뒤로 나를 걱정해 준 사람은 오직 아저씨뿐이었어요. 물론 아저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어떤 말이라도 다 들어 왔어요. 그건 그분에 대한 나의 감사의 표시였는걸요… 글쎄, 친아버지는 무엇 하나 해준 것 없이 나를 고아원에 넣을 수밖에 없지 않았어요!"
"그랬겠지요."
돈은 가볍게 몸을 앞으로 내밀고 퍼시파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최면술이라도 거는 것처럼, 먹이에 덤벼들려고 하는 매의 눈초리였다.
퍼시파는 몸을 뒤로 젖혔다. 정말 생전 처음 공포심을 맛보았다.
"당신의 후견인은, 당신이 내 아내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스톤힐 저택을 찾아간 날 둘이서 이야기를 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마커스는 자기의 건강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장래를 제일 염려하고 있었어요. 의심이 됩니까, 세뇨리타? 당신은 마커스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오? 마커스가 당신에게 재산가 남편을 찾아줄 생각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만일 마커스가 살아 있다면, 내가 당신에게 청혼한 것을 기뻐한다고 당신에게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난 당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걸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지도 않고."
퍼시파는 시트의 한쪽 구석으로 쫓겨 갈라진 소리를 냈다. 울고 싶었다. 이 뻔뻔스런 남자를 할퀴고서라도 자유롭게 되고 싶었다. 그런데 이 외국인의 이상한 힘에 압도되어 꼼짝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돈 디아브로는 엄숙히 선언했다.
"세뇨리타, 멕시코에서는 서로 알게 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모두 결혼하면서부터 시작된단 말이오."
2
꿈같은 풍경인데도 퍼시파는 이 사실이 잠에서 깰 수 없는 악몽같이 생각되었다.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와 결혼해 버렸다는 생각이 가슴을 메웠다.
스톤힐 저택에서 가까운 성(聖) 앤 교회에서 거행된 결혼식은 기억조차 희미했다. 촛불과 장미, 사제의 가슴에 반짝이는 십자가, 의미도 모르는 라틴 어의 맹세, 순금의 반지 두 개― 하나는 자기 손에, 또 하나는 돈 디아브로의 손에… 그리고 정신없이 서두르던 자동차 여행, 소나기에 흐려진 공항의 불빛.
하지만 이곳 멕시코의 태양은 눈부시게 저택의 높은 벽에 내리쬐고, 벽을 덮은 새빨간 꽃송이들은 눈부셨다.
사랑의 성채― 만일 남편인 돈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텐데. 협곡을 발 아래로 내려다보며 우뚝 솟아 있는 저택은 퍼시파에게는 감옥과도 같았다. 눈부신 꽃이며 우거진 양치류며 폭포에 둘러싸인 감옥.
아센더 루이― 왕궁. 영내에 사는 몇백 명의 사람들은 저택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마치 중세의 영주에게 납치되어 온 느낌이었다. 마커스의 마지막 도박에 휘말려든 것같이.
"왜 왕궁이라고 부르지요?"
"조상 중에 아즈테카의 여사제(女司祭)가 있었소. 이 저택은 그 신전 위에 세워진 거요. 저 아래 골짜기에서 천 명이나 되는 아즈테카의 백성이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살해되었지요. 그런 끝에 스페인 귀족의 하나가 그 여사제에게 결혼을 강요했소. 결혼한 지 꼭 일 년이 되는 날, 여사제는 아기를 안고 벼랑 끝에서 몸을 던지려고 했소.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여사제는 아이를 덤불 밑에 남겨 두고 죽었어요. 자기가 낳긴 했지만, 그 아기는 스페인의 아이였으니까. 남편은 아기를 찾아냈고, 그 사내아이로부터 우리 가문이 시작된 셈이오. 케리 디스마(가장 사랑하는 사람)."
남편이 그렇게 스페인 어로 부를 때마다 퍼시파의 속에는 무언가 차가운 것이 스쳐 지나갔다. 영국에서는 아직 서먹서먹한 것이 있었다. 남편의 차림새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하지만 멕시코로 온 뒤부터 남편은 다른 일면을 보이기 시작했다― 몸에 딱 붙는 바지, 프릴이 달린 셔츠, 차양이 넓은 모자.
남편의 성격은 복잡했고 기분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것 같았다.
퍼시파는 남편을 속으로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돈 테블 나리. 어느 사이에 온 것일까. 남편이 바로 옆에 와서 서 있었다.
퍼시파는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어 협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골짜기는 온통 초록과 빨강으로 뒤덮여 있었다. 남편에게 여사제의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이 풍경이 퍼시파를 사로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식사 준비가 되었소. 음식이 식기 전에 들지 않으면 이 지방 제일가는 요리사가 내게 화를 내요."
"그런 일을 다 걱정하세요? 당신은 이 세상의 무슨 일에나 까딱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당신은 날 쇠처럼 단단하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옆으로 가면 겁을 먹는군. 당신의 부드러운 몸이 내 몸과 부딪쳐 상처가 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말이야. 영국에서도 당신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 나라에 데려와 보니 더욱 보기 드문 여인이군. 당신의 머리 빛깔은 백금 같아. 잔인한 정복자들이 백금을 캐느라고 얼마나 많은 멕시코 인을 땅속으로 몰아넣었던가."
"명부(冥府)의 왕 플루톤의 궁전이군요. 당신에게도 정복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잊진 않으셨겠지요, 디아브로?"
"그래. 그 피가 언제 밖으로 드러날지 알 수 없어요, 당신이 끝까지 나를 남편으로서가 아닌 남으로 대하게 되면 말이오. 자아, 여보, 식탁으로 갑시다. 요리도 멕시코의 것이오, 이 저택이나 내 마음처럼 말이오. 갑시다!"
한낮의 햇살은 너무나 따가와서 커다란 라임나무 그늘만이 조금 서늘했다. 거기에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바스켓 안에는 여러 가지 이국적인 과일과 함께 포도주도 들어 있었다.
남편이 의자를 끌어내 주었다. 퍼시파는 남편의 큰 키와 검은 피부를 새삼 강렬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마커스도 햇볕에 그을어 있었지만 이렇게 검지는 않았고, 키도 상당히 컸지만 이렇게 치솟은 느낌은 아니었다.
결혼식이 끝나자 바로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이것이 '집'에서의 첫 식사였다. 그리고 오늘, 진정한 의미에서 두 사람만의 생활이 시작되었음을 퍼시파는 깨닫게 되었다.
나는 마커스가 세상을 뜬 뒤에도 순종하여 그가 골라 놓은 남자와 결혼했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나머지 멍멍한 상대로 넋을 놓은 채 제단 앞에 고개를 숙여 버렸어.
"건배할까?"
남편이 포도주 잔을 내밀며 말했다.
"함께 잔을 비워요. 진실한 의미에서 이것이 우리 둘만의 첫 식사가 되는 거니까."
"저어, 알고 계시겠지만 난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 버렸어요. 내가 당신과 결혼하다니, 마커스 아저씨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머리가 어떻게 된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이제 와서 후회한들 때늦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지. 당신은 나의 아내이고, 나는 당신의 남편이오."
"하지만 그건 말뿐이에요! 이런 결혼은 무효로 할 수 있을 거예요. 글쎄, 우리는 아직 완전히 맺어진 것도 아니고…"
"그러나 곧 그렇게 돼요. 당신도 잔을 비워요. 우리는 서로 맹세로 맺어졌기 때문이오. 나는 당신을 떠나게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으니까, 사랑스런 사람. 우리는 카톨릭 교회에서 결혼했어. 당신의 손에는 내 반지가 끼워져 있어요. 계약을 상징하는 금반지와 에스렐드 루이 집안의 반지요. 피 묻은 역사를 간직한 루비란 말이오."
"나에게 겁을 주는 거예요?"
"나는 기꺼이 벌을 주겠소, 만일 당신이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한다면. 하지만 당신은 결코 멀리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미리 경고해 두겠소. 나의 영지는 끝도 없이 넓어요. 더구나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은 내 영민들뿐이오. 우리는 아직도 영국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몇천 킬로나 저쪽에 있는 것도 내 소유이니, 눈앞에 보이는 것이 모두 얼마나 될 것인지 생각이나 해봐요."
"당신은 정말 잔혹한 분이군요."
퍼시파는 눈을 떨구고 잔을 들었다, 여자 본능의 속삭임에 따라서. 상대방 남자가 두르고 있는 갑옷의 약점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싸워 봤자 이길 가망은 전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이 사람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가.
"속으로 어떤 건배의 말을 생각하고 계세요? 내가 당신을 공경하고 당신을 따른다는 맹세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어요?"
"당신은 나를 공경하고 따르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퍼시파."
"어머나, 그러면 나에게 사랑의 맹세를 해달라고 청하실 필요도 없겠군요."
퍼시파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상대방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게서 모든 것을 다 끌어낸다 해도 한 가지만은 그럴 수 없는 게 있어요. 내 사랑이에요, 돈 디아브로."
"잘 말했소, 부인."
눈가에 비웃음이 번지며 돈은 잔을 들었다. 빨간 포도주가 한 가닥의 빛에 반짝였다.
"당신이 언제나 지금처럼 기운이 넘치기를 빌어요.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노여움에 반짝이도록 말이오. 난 내 보금자리에 얌전한 비둘기를 기르는 취미는 없으니까. 당신에게 건배하겠소. 내 아내여, 당신을 갖고 싶소!"
퍼시파는 심장이 꽉 죄어드는 듯했다. 도전하듯 잔을 들었다.
"나도 당신에게 건배하겠어요, 내가 당신을 찾게 되기 전에 죽게 되기를!"
"고마와."
돈 디아브로의 빈정거리는 표정은 퍼시파의 말 따위에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잔을 놓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음식을 권했다.
"적어도 이 요리는 맛이 뛰어나오. 그리고 이 저택도 그렇소. 이따가 안내할 테니 우리 같이 돌아봅시다. 당신의 눈으로 판단해 봐요. 설령 당신이 나에게는 감탄할 수 없을지라도 저택만은 눈부시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백 년 전에 세워진 뒤로 지금까지 아름다운 저택으로 만들기 위해 늘 손질을 해왔으니까."
즙을 듬뿍 친 연한 고기, 양념이 잘 된 소스, 조그만 감자와 작은 콘.
요 며칠 동안을 너무 큰 쇼크 때문에 제대로 식사도 하지 않아 아닌게아니라 시장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이제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분명히 깨닫고 보니, 자기의 젊음과 체력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강한 상대와 싸울 수조차 없을 것이었다.
오만한 남편의 옆얼굴 저쪽에 꽃으로 뒤덮인 아치가 서 있고, 그 밖으로 무어풍의 정원을 내다볼 수 있었다. 초록빛 대리석의 샘에서 물이 작은 폭포가 되어 아래 못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물과 태양의 마술로 거기에는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 무지개가 있었다.
어느 쪽으로 얼굴을 향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름다운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마커스같이 친한 친구가 아닌 무서운 적이었다. 목이 꽉 메고 눈이 따가와졌다. 퍼시파는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당신의 눈에 햇빛이 너무 강한가? 영국에서는 이렇게 아찔할 만큼 강한 햇빛은 본 일이 없겠지, 그곳에 사는 사람의 감정이나 마찬가지로 온화하니까. 멕시코의 태양 아래를 나다닐 때는 모자를 써야 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요. 이 고장의 밀짚 모자를 준비해 주겠소. 차양이 넓으니 당신의 흰 살을 보호해 줄 거요."
"내가 사탕무처럼 새빨개지고, 말라 비틀어진 양파같이 살갗이 벗겨지는 것을 무서워하세요? 만일 그러시다면 햇볕에 그을리도록 최선을 다하겠어요."
"햇살도, 햇볕에 타는 것도 당신에겐 기분좋은 것이 못 돼요. 어린아이 같은 말은 집어치워요. 만일 한번이라도 모자를 쓰지 않고 밖에 나가는 짓을 했다간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벌을 줄 테야, 난 분명히 약속하겠소. 당신은 아직 엉덩이를 두들겨 맞아본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만일 모자를 안 쓰고 산보를 나가거나 승마를 해보라구, 당신을 내 무릎 위에 엎어놓고 흰 살이 벌겋게 되도록 두들겨 줄 테니까. 나는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해. 어린아이 같은 짓을 했다간 어린아이가 받는 벌을 받아야 하니깐."
그때, 하인 하나가 돈 옆으로 다가와 귀엣말로 뭐라고 얘기했다. 퍼시파는 남 스페인으로 여행을 갔을 때 서투르게나마 스페인 어를 배웠지만, 그의 말은 방언인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돈이 일어서서 잠깐 실례하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스페인에서 구경하던 투우를 생각하고 있던 퍼시파는 흠칫했다. 날렵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편은 영락없는 투우사였다.
이 사람 같으면 두려움도 망설임도 후회도 없이 소에 깊숙이 칼을 박아 모래땅을 피로 물들이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후 바로 디저트가 나왔다. 파인애플과 파파야와 오렌지에 진한 우유를 담은 병이 곁들여 있었다. 잠시 평화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샘물 흐르는 소리, 호화로운 깃털을 가진 새들의 울음소리.
퍼시파는 몸이 굳어졌다. 보지 않아도 남편이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은 말없이 의자에 앉아 하인에게서 커피 잔을 받아들었다. 문득 불안감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남편은 누군가에게 몹시 심한 짓을 하고 왔을 것이 틀림없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돈은 퍼시파의 마음속을 눈치챈 것 같았다. 퍼시파는 숨을 삼켰다.
"그렇소. 내 영지에서 사람 하나를 몰아낸다는 달갑지 않은 의무를 치르고 온 거요. 마부인데, 내 말 한 필을 잘못 다루어 입에 상처를 냈소. 당신을 두고 나간 것은, 그 말이 성이 나서 마부한테 덤벼들어 그를 마굿간 구석으로 몰아붙였다고 했기 때문이오. 내버려 두었다면 그는 말의 발길에 채여 죽었을 거요. 함부로 다루면 말은 호랑이처럼 위험한 동물로 바뀌어 버리지."
"어마, 그래서 스페인에서는 소의 뿔로 말을 공격하게 하는 거예요? 함부로 다루어진 말은 위험한 동믈이 되어 피에 굶주린 구경꾼들을 기쁘게 해주는군요?"
돈은 흘끔 퍼시파를 쳐다보았을 뿐, 말없이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크림이나 설탕도 타지 않았다. 퍼시파는 자기 커피에 크림을 듬뿍 쳐서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처음으로 남편의 셔츠 어깨선이 길게 터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마부를 구하기 위해서, 날뛰는 말을 끌어낸 것은 돈 자신이었군.
"투우를 본 일이 있소?"
"네, 하지만 난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게 지독한 광경을 보고 좋아하는 관객도 싫고요. 스페인 같은 나라에서 왔으니 정복자들이 그토록 잔혹했던 것도 이상할 것이 없어요. 자기를 지킬 힘도 없는 인디언을 마구 죽여 대는 것은 즐거운 심심풀이였겠지요."
"인디언은 그렇게 무방비하지는 않았소. 상당히 지독한 고문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들이 좋아했던 방법의 하나는 포로인 스페인 병사에게 끓인 기름을 마시게 하는 거였소. 때로는 금을 녹여 퍼먹인 일도 있었던 것같소. 잔인성이라는 것은 거의 어느 나라 사람이나 마음속 밑바닥에 가지고 있는 거요."
"영국인에게는 도저히 라틴 계 사람들처럼 극단적인 잔인성이 있다곤 생각지 않아요. 당신 자신도 영국인은 온화한 성질이라고…"
"내가 한 말은 애정에 대해서요."
돈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가는 궐련에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짙은 향기의 연기를 뱉어냈다.
"그럼 당신은 당신의 후견인이 잔인하다고 생각한 일이 한 번도 없소, 당신을 내게 주었는데도? 감정적인 가치보다 물질적인 가치를 더 크게 보아, 애정이 넘치는 남편보다 돈 많은 남편을 골라 주는 바람에 당신은 당황한 것 같은데. 당신은 나와 결혼한 것도 마커스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서라고 했지 않소? 마커스의 마지막 희망에 따르기 위해서라고 말이오…"
"네, 난 마커스 아저씨의 희망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가 왜 그랬는지 생각해 보았어요. 아저씨는 나의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가 다른 여자에게는 마음을 줄 수 없었던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만일 그랬다면, 내가 사랑이란 것을 아예 느끼지 않는 것, 즉 사랑을 모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사랑을 모르면 그것을 잃어버리고 괴로와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저씨다운 생각이었어요. 그러니 결코 내게 잔인했다고 할 수는 없어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돈은 어깨를 추스르고 높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마커스는 멕시코에 대해서 알고 싶어했소. 그래서 내가 잘 알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 고장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지. 당신은 내가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는지조차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마, 당신에게 자기 것을 사랑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의심한 일은 없어요. 이 저택을, 넓은 풍요한 땅을 당신은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은 중세의 조상이 다시 태어난 분이에요. 가지고 싶은 것은 세상없어도 손에 넣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으며, 상대방 여자의 마음 따위는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걸요."
"그렇다면, 난 땅이나 건물이나 잘 자란 말이라면 사랑할 수 있지만, 당신의 후견인처럼 한 여자를 죽는 날까지 사랑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요?"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요."
퍼시파는 손등에 와서 앉은 무당벌레를 살며시 불었다. 무당벌레는 조그만 날개를 펼치고 다시 날아갔다. 퍼시파는 한숨을 쉬었다. 날개만 있으면 나도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을 텐데.
"마부는 어떻게 되었어요? 채찍으로 쳤어요? 당신의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어요. 마커스 아저씨도 한번은 나를 덮치려고 한 젊은이를 채찍으로 친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 그 점만은 아저씨와 공통성이 있겠군요."
"그 젊은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어? 그가 마음에 들었나? 당신이 유혹을 했었나?"
"아니예요! 그렇게 신문조로 묻는 게 아니예요. 내가 혹시 온전한 처녀가 아니라면 내던질 작정이지요? 스페인 계 남자들은 신부의 순결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한다고 하는데, 내가 순결하지 않고 더럽혀져 있다면 큰 웃음거리가 되겠군요."
"당신이 남자를 알았었다면 나도 그것을 눈치챘을 거요."
"당신은 한번도 잘못한 적이 없단 말이에요? 모든 것에 대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내게 웃는 얼굴이나 몸을 원한 남자가 당신 혼자뿐인 줄 아세요? 내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마커스 아저씨는 남자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더군요. 아름다운 젊은 여자를 보면 그들이 무엇을 바라게 되는가를 이야기해 주었어요. 남자는 매력적인 여자에게서 지성을 찾거나 하지 않는대요. 그저 순종과 의지가 약하기를 바랄 뿐이래요.
방학 때마다 우리는 기숙학교를 떠나서 유럽으로 여행을 하곤 했어요. 아저씨가 가르쳐 준 것은 좋은 그림이나 미술작품이나 음악이나 옛 건축에 대한 애정이었어요. 그리고 사물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이에요. 그랬기 때문에 젊은 남자들이 나에게 사랑을 속삭일 때, 정말로 그들이 바라는 것은 내게 치근거리면서 굴욕감 같은 것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러니, 당신이 내게 바라는 것이 티없는 몸이라면 안심하세요, 돈 디아브로. 나의 마음은 마커스 아저씨와 함께 땅속에 들어갔어요. 나의 사랑은 아저씨에게 다 바쳤으니까요. 당신은 그저 나의 빈껍데기를 잡으셨어요. 대리석상같이 거의 감정이 없어요. 당신은 석상을 안을 수는 있어도 여자를 손에 넣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러면, 내 힘으로는 당신의 마음을 도저히 여자답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당신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이고, 전혀 세상을 모른단 말이오. 난 당신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철이 든 나이였소, 꼬마 아가씨. 그리고 나는 도전을 받으면 뒷걸음질을 친 일이 없는 남자요. 대리석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없을지, 정말 재미있는 게임이겠군."
"그래서 만일 실패하신다면 당신은 나를 내보내 주시겠어요?"
"난 말이오, 지금까지 내것을 놓아 준 일이 한번도 없소, 부인."
"일생을 당신과 함께 지낼 수밖에 없다면 난 낯선 나라에서 병에라도 걸려 죽어 버리는 것이 낫겠어요!"
긴 침묵이 그 말을 뒤따랐다. 그것을 깬 것은 돈이 두 손으로 테이블을 꽝 두드린 소리였다. 식기들이 들썩거렸고 퍼시파의 신경이 찌르르 떨렸다.
"다시는 그런 소리를 입에 올리면 안 돼, 알았소? 이곳은 멕시코야. 그늘에는 옛 신들이 숨어서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단 말이오. 이 저택에 옛날부터 살고 있는 칼멘테이러에게 물어봐요― 옛 신들은 바른 소원보다는 죄많은 소원을 더 빨리 들어줘요. 바보 같은 인간! 누가 들으면 당신은 악마와 결혼한 줄 알겠소!"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해요. 당신 속에는 천사는 없어요. 검은 악마뿐이에요!"
이번에야말로 퍼시파는 돈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았다. 신부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말이었기 때문에 돈은 그녀에게 벌을 주려고 했다.
돈은 일어서서 테이블을 빙 돌아 긴 팔을 뻗어 퍼시파를 붙잡았다. 다짜고짜 힘으로 꽉 붙잡아 일으키더니 우람한 가슴에 와락 끌어안았다.
아픔과 무서움으로 몸을 떨면서 퍼시파는 버둥거렸다. 냅다 돈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하지만 돈은 노여움 말고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퍼시파의 머리칼을 움켜잡아 고개를 뒤로 발딱 젖히고 비명을 지르게 했다.
입술이 입술에 포개어졌다. 두 팔에 힘이 들어가고, 퍼시파의 몸은 뒤로 잡아 꺾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키스에서 벗어나려고 퍼시파는 몸을 뒤로 젖혔다.
이제 자기를 지켜 주는 마커스도 없었다. 상대방은 소년이 아니고 어른이었다. 더구나 나를 안을 권리까지 가진 남자였다. 퍼시파는 너무나 길고 긴 키스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돈은 어느 사이에 퍼시파를 저택 안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퍼시파는 너무나 화가 나서 남자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피가 흰 셔츠에 번져 나왔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기쁨과 보복을 당할 두려움이 한꺼번에 퍼시파를 덮쳤다.
"왜 이래요!"
힘을 다해 몸부림을 쳐도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디로 데리고 갈 참이에요?"
남자는 흘끔 퍼시파의 눈을 보고는 계단으로 끌고 올라갔다. 두 계단씩 한꺼번에 뛰어오르면서 번들거리는 눈빛을 한 남자를 보고, 퍼시파는 무서워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의 이마에 검은 머리가 헝클어져 내려와 있었다.
"남녀 관계를 모를 만큼 어린아이는 아니겠지?"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멍하니 정신을 잃다시피 한 퍼시파를 안아든 돈은 회랑을 가로질러 퍼시파의 침실로 향했다. 어젯밤에는 혼자 잤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그녀는 레이스의 침대 커버가 덮인 커다란 침대 위에 내던져졌다. 돈은 문으로 가더니 천천히 자물쇠를 잠갔다.
퍼시파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눈을 커다랗게 뜨고 돈을 쳐다보고 있었다. 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돈이 옆으로 오더니 자기 셔츠를 벗어 내던졌다. 퍼시파가 물어뜯은 이빨자국이 어깨에 뚜렷이 나 있었다. 돈은 침대 앞을 막고 서서 퍼시파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다운 그의 몸에 노여움이 가득차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돈이 팔을 뻗는 순간 퍼시파는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왜 이러지?"
돈이 히죽 웃었다.
"신부가 이렇게 신랑을 맞이하는 법도 있나!"
"당신같은 사람은 악마에게나 잡아먹혀요!"
퍼시파는 고개를 돌렸다. 돈은 그녀의 목에 입술을 댔다. 결혼이란 바로 이런 것이군! 그것은 말도, 환상의 반지도, 기도서도 아니고 바로 이런 폭행이군! 퍼시파는 확 얼굴을 잡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입가에 비웃음을 띤 디아브로가 말했다.
"아니, 악마가 난데, 자신을 어떻게 잡아먹어?"
3
몇 시간이 지났을까, 퍼시파는 자기 침대 속에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비단 시트를 몸에 감고 가만히 있으니 기억이 되살아났다. 문득 눈물이 치솟아올라 퍼시파는 비단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베개에서는 담배 냄새가 났다. 퍼시파는 마치 채찍으로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몸이 굳어졌다. 남자의 냄새. 온몸이 확 달아올랐다가 천천히 식어갔다. 마음에도 몸에도 아픔이 남아 있었다.
돈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고 소용이 없었다. 애원을 해도 손톱으로 할퀴어도 돈은 가차없이 맹세의 말을 실행하였고, 지금까지 퍼시파가 살고 있던 온화한 세계를 사정없이 무너뜨려 내던져 버렸다.
죽이고 싶었다. 단도만 있었다면 돈을 찔러 버렸을 텐데… 그랬더라면 지금 이렇게 떨 필요도 없는데. 낯선 땅과 사람들. 위안을 청할 사람도 하나 없었다.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퍼시파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아 가만히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르르 몸을 떨면서 상처받은 성난 짐승처럼 이를 갈았다.
"당신을 미워해요! 당신의 까만 눈도, 검은 마음도 미워해요!"
퍼시파는 소리내어 말하고 나이트 테이블의 스탠드를 켰다. 돈의 머리가 남겨 놓은 베개의 팬 곳, 여기에 돈이 누워 자기를 팔에 안고 있었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아, 다른 일을 생각해야지! 퍼시파는 침실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옷장과 화장대가 있고 야생동물인 라마 가죽의 깔개가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거울이 있는 벽이 보이고, 나사 커튼, 거울 앞의 갖가지 화장 도구 등, 관능적으로 꾸며진 방이었다. 정말 여자의 침실답게 꾸며진 방이었다. 남자가 딱딱한 분위기의 자기 방에서 이 방으로 들어설 때마다 관능이 자극을 받도록 꾸며 놓은 방― 황금의 새장이고 정욕의 감옥이었다.
깔개 위에는 찢겨진 퍼시파의 셔츠와 뒤집어진 바지며 란제리가 흩어져 있었다. 일어나서 옷을 입으려고 하는 자기와 아무와도 얼굴을 대하기 싫은 자기가 서로 다투었다.
'싫어, 싫어! 참을 수 없어! 그 사람과 얼굴을 마주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어. 나를 빼앗은 남자, 스스로 남편이라고 하고 있는, 사람다운 데라곤 조금도 없는 악마.'
귓가에서 속삭이던 그의 말이 되살아났다― 이제 난 당신의 남편이 된 거야, 귀여운 아가씨. 이제 당신은 내 아내야.
몸의 떨림이 아직 멎지도 않았는데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댜.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지다가 약간 마음이 놓였다. 늙은 하녀 칼멘테이러였다. 마실 것을 담은 쟁반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제 자존심 강하신 마님도 첫 수업을 받으신 셈이군요! 패션프루츠(시계풀의 열매)주스예요, 세뇨라. 달콤하고 차가운 것을 좋아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목이 바싹 말라 있었기 때문에 퍼시파는 잔을 받아들었다. 이 저택에서 오래 살아왔으며 사람들이 마녀라고 무서워하는 이 노파의 무례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고마와요, 마실 것을 갖다 주어서. 달리 아무것도 필요없으니 물러가 줘요."
"돌봐 드리러 들렀어요, 세뇨라. 정리가 끝나면 나가겠어요."
칼멘테이러는 바닥에서 셔츠와 바지를 집어들었다.
"셔츠는 이제 망가졌군요, 꽃 같은 옷이었는데. 하지만 여자는 바지 따위는 입는 게 아니예요, 진짜 남자의 집에서는요. 돈 디아브로가 하나에서 열까지 남자라는 것을 이제 아셨지요?"
그러고는 무엇이든지 다 안다는 듯이 킬킬 웃었다. 비웃는 듯한 저 눈매. 칼멘테이러는 침대로 다가와 주름투성이의 손으로 퍼시파의 팔을 만졌다. 하얀 보드라운 피부 위에는 돈의 손가락 자국이 시퍼런 멍이 되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무엇 때문에 당신같이 젊고 하얀 피부의 여자를 원하시는지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군요."
"그래요? 상처를 주고 괴롭히기 위해서겠지요,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사랑이라고요?"
노파는 비웃는 눈초리로 퍼시파를 바라보았다.
"사랑이 무엇이지요? 고양이새끼에게도, 꽃불이나 책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어요?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정열이 있어야지요… 싸움이 있어야 해요.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면 안 되는 거예요! 당신은 처녀였군요, 그렇지 않다면 그분이 결혼할 턱이 없는걸요. 주스는 맛이 있지요? 사랑받는 여자가 바라는 것은 세 가지예요― 찬 음료수와 샤워와 얼굴을 가리는 베일이에요. 그렇지요, 세뇨라? 나라고 뭐 청춘의 불길을 까맣게 잊어버린 늙은이는 아니예요."
"그 일은 이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퍼시파는 빈 잔을 쟁반 위에 놓았다. 노파의 얼굴에는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이 노파가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알게 된 이상, 그것은 저택 안에 쫙 퍼지고 말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고 섰어요? 이 나라에서는 저택 문에 첫날밤에는 시트를 걸어 놓는 풍습이라도 있단 말이에요, 사람들에게 온전한 신부를 맞이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칼멘테이러는 퍼시파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표정이 약간 누그러지면서 동정의 빛이 떠올랐다.
"영국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군요? 나처럼 늙은이가 침실에 들어와도 부끄러워하시니. 안심하세요, 세뇨라! 흥분하지 않아도 좋아요. 돈 디아브로가 나를 보내신 것은, 내가 그분 어머니를 돌봐 드렸기 때문이에요. 난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거무스름한 피부의 마님을 돌보고 있었어요. 이번에는 도련님의 금빛 마님을 돌보게 되었군요."
"아니, 필요없어요. 내 일은 내가 하겠어요. 당신의 도움 따위는 없어도 좋다고 돈에게 말해 줘요! 돈이나 당신도, 이 구역질나는 집안의 누구도 내 방에 들어오지 말라구요. 그리고 내가 그를 미워하고 있다구요. 돈의 자만심도 거만함도 잔인성도 질색이에요. 그가 눈을 뒤집고 차가운 땅에 나둥그러져 식어가는 꼴을 보고 싶다고 가서 말해 줘요!"
칼멘테이러는 비실비실 뒷걸음질을 치더니 가슴에 십자를 그었다.
"남편을 가진 아내는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게 아니예요. 나쁜 신이 그 말을 듣게 되면…"
"나에 관한 한 악마는 돈 자신이에요. 자아, 이제 나가 줘요. 날 혼자 있게 해줘요. 홍차 잎의 점이나 주술을 써서 날 저주하면 될 거 아니예요? 난 돈한테서 도망쳐 버리고 싶어요. 죽고 사는 건 문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 소리를 하면 못 써요, 세뇨라. 온 멕시코의 여자들이 모두 돈 디아브로의 여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호화로운 영주님이라고 불리는 분이란 말예요. 영지도 있고 권력도 있고, 게다가 열두 명의 여자라도 기쁘게 해줄 힘을 가지고 계세요. 그것을 혼자 독차지하게 되었으니 그런 명예가 어디에…"
"명예라구요? 모욕과 타락을 명예라구요? 내게 애정이 있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어요. 내가 불러일으킨 것은 돈의 짐승 같은 욕망뿐이에요― 멕시코의 여자들은 그런 것을 자랑으로 알아요? 그저 소유물처럼 주인의…"
더는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쓰일 뿐이라니, 지옥 그것이었다. 퍼시파는 노파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긴 머리칼로 얼굴을 가렸다.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덮쳐드는 돈의 입술을 피할 수조차 없던 지옥 같은 기억을 되씹었다.
"나가 줘요. 혼자 있게 해줘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겠지요, 세뇨라?"
"바보 같은 짓이라니요? 이보다 더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어요? 난 돈 데블과 결혼한 거예요!"
"이 창밖에는 발코니가 있어요. 이 저택의 여주인은 여러 가지 의미로 영리하다고 할 수 없군요. 발코니 아래 안뜰의 타일 바닥은 사랑이 없는 침대보다도 여자의 살에 더 딱딱하거든요. 당신의 하얀 몸이 짜부라지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 아니겠어요? 아무리 돈이 당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해도 그리 심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걱정할 것 없어요, 돈이 죽는 것을 볼 때까지는 그런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난 나가겠어요."
노파는 젊은 외국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 지친 것처럼 말했다.
"목욕과, 저녁식사의 의상을 위해서 하녀를 보내 드리면 조금은 기분이 풀리시겠지요?"
"내 걱정은 필요없어요, 난 내 일은 내가 해왔으니까. 당신의 주인에게 말해 줘요, 난 이 방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고요."
"알았어요, 세뇨라. 그것은 말씀드리겠어요. 하지만 또 한 가지는― 눈을 뒤집고 땅에 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싶다니, 너무나 끔찍한 말이 되어서."
"그분이 불쌍해요, 난 불쌍하지 않구요?"
잠깐 노파는 서 있다 방을 나가 문을 닫았다.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 그녀는 시트를 몸에 감고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욕실 한쪽 벽을 가득 차지한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겉으로는 어디에도 달라진 데가 없는 것 같았다. 머리칼이 헝클어지고 남편의 손톱 자국이 남아 있고 눈가에 거무스름한 테가 생겼을 뿐이었다. 달라진 것은 그녀의 마음속이었다. 잔인하게도 처녀성을 빼앗겨 버린 것이었다.
심장이 뜨끔했다. 아기가 생겼을지도 몰라― 돈의 아기가, 악마의 어린아이가. 사랑 대신 공포에서 생겨난 아이가.
퍼시파는 욕조에 몸을 담그었다. 초록빛 가루비누를 봉지의 반쯤 쏟아 넣고 거품 속에 파묻히며 몸을 스폰지로 힘껏 문질렀다. 돈의 냄새를 씻어 내듯이 돈이 새겨 놓은 자국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면… 다시 한번 처녀로 되돌아가 가지고 이 욕조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욕조에서 나와 몸을 닦았다. 언제나 이 굴욕을 잊을 수 있을까? 헝클어진 침대가 그대로 있었다. 아니, 결코 잊을 날은 없을 거야! 돈은 나를 빼앗았고, 앞으로도 계속 빼앗을 거야.
퍼시파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옷장으로 가서 기계적으로 드레스를 꺼내 보았다. 돈은 결혼식 전날, 런던의 고급 의상실로 퍼시파를 데리고 가 결혼 준비로 의상을 사주었던 것이었다. 고급 드래스며 코트와 구두, 그 밖에 자질구레한 액세서리까지도.
하지만 방에서 식사할 생각이므로 정장을 할 필요도 없었다. 스톤힐 저택에서 가지고 온 단순한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등의 지퍼를 올리려고 할 때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지퍼를 올려 줘요."
칼멘테이러가 보낸 하녀인 줄 알고 말을 걸었다. 하지만 퍼시파의 몸에 손을 대고 지퍼를 올려주는 것은 남자의 손이었다.
"이 저택에서 함께 보내는 첫날 밤이니 좀더 화려한 것을 입으라구. 내가 사준 드레스를 입어요, 다른 남자의 추억 따위가 서려 있지 않은 드레스 말이오."
"난 이 방에서 나가지 않겠어요. 칼멘테이러에게 당신한테 가서 전하도록 했는데요."
"그 전갈은 들었지만, 당신의 희망과 내 의사가 전혀 달라서 말이야."
돈은 퍼시파의 몸을 자기를 향해 돌려세웠다.
하얀 디너 재킷에 흰 프릴이 달린 셔츠, 단추나 커프스 버튼도 모두 비취였다. 마치 결혼의 축하연에나 나가는 차림이었다.
"난 당신과 호화로운 저녁식사를 같이 할 생각이 없어요. 혼자 있게 해줘요."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군. 그러지 말고 조금은 어른스럽게 행동하도록 가르쳐 주었을 텐데."
돈은 퍼시파의 턱을 무리하게 치켜들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지? 어지간히 하고 사정을 이해하면 어때, 퍼시파? 난 뭐 당신의 후견인이 되기 위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니까."
"당신이 결혼한 이유 따윈 잘 알고 있어요. 따뜻하게 해줄 마음이 없다는 것도요. 당신은 자기가 산 것을 이용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적어도 마커스 아저씨가 날 제대로 지켜온 것만은 아셨지요?"
"그건 알았어.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남자가 그렇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리단 말이야?"
"어째서 당신이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있어요. 당신은 오만하고 자기 위주고, 지금까지 한번도 누구의 반항을 받아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겨우 스무 살의 여자가 당신과 다툰다 해도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이길 수는 없으니까요. 처음으로 당신을 싫어한 여자를 끌어안고 즐길 수 있었다면 다행이겠는데요. 칼멘테이러가 그러던데, 이 근처의 여자들은 나 말고는 모두 당신을 호화로운 영주라고 부른다던데요."
"그럼 당신에게는 난 뭐지?"
"나에게는 그저 소유주예요. 당신은 완력으로 자기가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 모르는 남자예요. 당신은 자기의 매력에 자신이 없으시죠? 그래서 완력으로 따르게 했지요, 돈 디아브로?"
"말조심을 해야겠군, 퍼시파. 저녁식사에 대한 식욕보다 당신의 몸에 대한 욕망이 더 크다고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당신은 새침할 때보다 화를 내고 있을 때가 더 매력적이란 말이야. 그리고 난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눈꼽만큼도 구애받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다음 돈은 퍼시파의 드레스의 깃을 잡아 찢어 버렸다.
"당신이란 사람은 짐승이에요!"
새침하고 쌀쌀하게 대하자는 결심도 잊어버리고 퍼시파는 돈의 뺨을 갈기려고 했으나 돈은 잽싸게 그 손을 피하고 도리어 그녀의 손목을 꽉 죄었다.
"싸우고 싶다면 얼마든지 받아 주겠어, 퍼시파. 결과가 어떻게 될지 잘 알지? 그것이 바로 당신이 바라는 바인가?"
"그런 것을 바라느니 차라리 죽음을 바라겠어요. 난 당신이 미워요. 당신과 사는 것은 악마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아요!"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결코 인생이 따분하다고 느낄 필요가 없겠군."
돈은 퍼시파를 옷장 앞까지 밀고 가서 자기 손으로 초록빛의 레이스 드레스를 골라 건네주었다.
"이것을 입어요, 거부는 허락할 수 없소. 자아, 자기 손으로 입겠소, 아니면 내가 돕기를 바라오?"
퍼시파는 드레스를 낚아채고 서둘러 갈아입기 시작했다. 돈은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옷을 갈아입는 퍼시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퍼시파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까 그 일을 생각하고 있어!
"난 이런 색은 싫어요. 초록빛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아니, 어울려. 초록빛은 당신의 백금 같은 머리칼을 돋보이게 하고,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망울을 드러나게 해. 후크를 끼워 줄까?"
"아니, 괜찮아요. 내 손으로 할 수 있어요."
사실은 그것은 정말 멋있는 드레스였다. 다만 퍼시파는 자기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싫었던 것이었다. 돈이 사준 것은 무엇이건 좋아할 수가 없었다. 화장대를 향하고 화가 난 듯이 브러시로 머리를 빗었다.
"거기 있는 금빛 상자를 열고 물건을 꺼내 봐요."
퍼시파는 못 들은 체했다. 그러나 호기심이 움직였다. 상자는 멕시코의 골동품으로, 눈부신 물건이었다. 하지만 머리 모양을 신형으로 묶는 것에 정신을 모았다. 새초롬하게 턱을 치켜들고 싸움이라도 걸 것처럼 자기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돈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신경이 짜릿짜릿 떨리기 시작했다.
돈은 퍼시파의 뒤에 우뚝 섰다.
"상자를 열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고 싶을 것 아니야? 혹시 당신의 가슴을 무는 조그만 독사가 들어 있을지도 몰라."
"당신에게 그런 따뜻한 마음이 있겠어요. 아직도 나를 실컷 들볶지 못했는데?"
"바보 같군."
돈 디아브로는 두 손을 퍼시파의 허리에 대고 꽉 끌어당겼다.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었다. 그 손이 이번에는 애무하듯 어깨로 올라왔다.
"그게 그렇게 싫었어?"
물론 속삭임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온몸이 확 뜨거워지고 이대로 꺼져 없어지고 싶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요?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었어요. 칼멘 테이러한테도 들켰어요. 당신은 훈장을 준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난 이런 폭력에는 익숙하지 못해요. 하지만 이를 악물고 당신의 폭 력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 말이겠지요?"
"당신을 대리석이라고 한 것은 누구였지? 대리석이라면 멍은 들지 않을 텐데."
"그럼 이것은 무엇이지요?"
손가락 자국이 난 팔을 가리켰다.
"문신이 차라리 낫겠어요."
돈은 그 팔을 잡고 멍 위에 입을 댔다.
"당신에게는 입김밖에는 불지 못하겠군, 꼬마 아가씨. 당신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살결은 처음 보았어. 반대로 난 얼마나 시커먼지, 이걸 좀 보라구."
"인디언 같군요. 결혼한 여자를 무리하게 빼앗는 것도 인디언 식이에요?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내를 깔아뭉개고 뒤흔들고 짓밟는 것도 그래요?"
돈은 목을 울리며 웃었다.
"당신은 깔개로 삼기에는 좀 약해, 꼬마 아가씨. 그리고 당신을 짓밟은 일은 없소."
"어마, 내가 하는 말의 뜻을 잘 아실 텐데 그러시네. 얼버무리지 마세요, 세뇨르."
"그럼 상자를 열어보는 것도 얼버무리지 말라구."
"어차피 액세서리겠지요? 내 봉사의 대가예요?"
"보라구, 당신은 지금 나한테 무얼 조르고 있어? 키스야, 엉덩이를 두들겨 달라는 거야? 난 알 수 없으니 당신이 택하라구."
"난 액세서리를 택하겠어요."
이국풍의 금세공으로 된 상자를 집어들었다.
"아즈테카의 물건인가요?"
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 자신이 아즈테카 전사의 청동상과도 같았다. 뚜껑을 연 퍼시파는 잠깐 숨이 멎는 듯했다. 보석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눈부실 줄이야!
다이아몬드의 날개, 에메랄드의 몸체, 순금의 머리, 보석으로 만든 잠자리는 눈부시게 반짝여서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퍼시파는 황홀해서 그 잠자리에 눈을 빼앗기고 있다가 돈의 목소리에 흠칫했다.
"어때, 곱지?"
"정말 고와요. 보석은 모두 진짜예요?"
"아니, 내가 당신한테 가짜를 선물할 것 같아? 저택 아래의 골짜기에서 사냥을 하는 나이 많은 인디언이 만든 거야. 그가 이 브로치를 팔아 달라고 가져왔을 때, 난 어떻게 이 보석을 손에 넣었는지 묻지도 않았어. 어디서 캤거나, 아니면 사람을 죽여서 손에 넣었을 거야. 막내딸의 결혼 지참금을 만든다고 나더러 사라는 거야. 전에 당신이 말한 것처럼 나는 내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좋아해. 그리고, 마음에 드는 것은 세상 없어도 손에 넣지 않고는 못 배 겨. 당신의 초록빛 드레스는 이 잠자리와 잘 어울릴 거야, 마치 정글에서 날아와 풀에 앉아 있는 것 같으니까. 이것을 가슴 위에 달라구."
왠지 그녀의 손이 떨렸다. 돈은 그것을 보고 자기 손으로 브로치를 달아 주었다. 그리고 그 손길이 퍼시파의 볼에 가볍게 스치면서 수수께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품안에서 아름다왔던 당신에게 주는 조그만 기념의 표시야, 당신은 내키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야. 이 잠자리의 모든 부분이 완벽한 것처럼 당신도 완벽했어. 잠자리가 날 때 마술적인 순간이 있듯 당신도 나의 피에 마술적인 순간을 주었어. 난 스톤힐 저택에서 당신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갖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지금 손에 넣었어. 그렇지?"
"네, 지금은 그렇지요, 돈 디아브로."
"내가 바라는 한 언제까지나 그래. 자아, 그러면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영지의 주요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소개하고 싶어. 모두들 당신을 보고 황홀해 할 거야. 당신에게는 아름다움과 위엄이 있으니까, 퍼시파. 하긴 날 물어뜯을 때는 예외지만."
퍼시파는 돈 디아브로와 나란히, 대리석과 주철로 만들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의 아름다운 홀에는 멕시코 인들이 많이 모여 글자 그대로 중세와 똑같은 정경을 이루고 있었다.
돈은 거기에 모여 있는 모든 멕시코 인의 영주였다. 그리고 고용주이고 대부였다. 멕시코 인들에게는 돈이 모든 것이었지만, 퍼시파에게 돈은 남편인 동시에 무서운 사람이었다.
4
저택은 퍼시파가 친숙하게 지내던 문명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서 외로이 높이 치솟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날 아침 돈이 도시로 구경을 나가자고 말했을 때, 퍼시파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하지만 도시는 무척 멀지 않아요?"
"매가 나는 것처럼 빠른 차를 몰고 가면 별로 시간이 안 걸려. 당신도 쇼핑을 하면서 물건을 사고 싶지 않소? 사탕, 레코드, 화장품, 잡지, 책, 향수… 여자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있소."
"퍽 관대하시군요, 세뇨르."
오 주일을 함께 살면서도 퍼시파는 돈을 남편답게 이름으로 부를 마음이 나지 않았다. 돈은 자기의 소유주일 뿐이었다. 그가 빼앗을 뿐이고, 퍼시파가 몸을 스스로 준 일은 한번도 없었다.
"당신에게 쇼핑을 하게 해주겠소."
돈은 검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마치 자기의 것이라는 듯이 퍼시파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밝은 노란색의 팔 없는 드레스에, 가슴에는 그 잠자리 브로치가 앉아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퍼시파가 언제나 잠자리 브로치를 달고 있는 것은 그것이 자기 마음의 심벌이었기 때문이었다. 도망치려는 소원― 브로치를 팔면 도망갈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가능성 때문이었다.
"어차피 나는 사업상 도시까지 나가야 해. 그러니 당신도 같이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내가 변호사를 만나는 동안 당신은 쇼핑을 하고 다니면 좋을 거요. 당신을 신용하고 있으니 도망치거나 하는 어리석은 생각은 아예 갖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미리 충고해 두지만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누구도 당신한테 차를 빌려 주지 않을 것이고, 가장 가까운 역까지 가는데도 언덕을 여러 개 넘어야 한단 말이오.
오늘의 나들이는 당신에게 베푸는 상이오.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 여자라면 무척 따분한 거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손만 대면 젊은 암사자처럼 으르렁거리거든. 내 눈을 후벼낼 것처럼 말이지. 그렇지, 그렇지, 좋은 생각이 났어, 퍼시파. 도시가 까운 바닷가에 가서 함께 헤엄치면 어떻겠어, 좋지?"
차가운 푸른 물에 몸이 감기는 것만 생각해도 아이처럼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부당한 벌을 받아온 아이가 조그만 친절조차 받을 수가 없게 된 것과 같았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아니, 그런 눈으로 나를 볼 필요는 없을 텐데. 그러고 있으니 마치 한 시간의 산책을 허락받은 죄수 같지 않소."
웃음이 번져 나왔다.
"물론 진심이고말고. 수영복은 가지고 있지?"
"가지고 온 것 같아요."
"그럼 가서 챙겨 와요. 그리고 내 수영 팬티도 갖다 줘요, 내 방 옷장 제일 아래 서랍에 있으니까. 그리고 목욕 수건도. 나는 앞뜰에 차를 내놓겠소."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퍼시파는 옷장에서 여행가방을 꺼냈다. 돈이 자기가 사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입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기 때문에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이었다.
여행가방을 열고 낯익은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스톤힐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제는 생생한 것이 아니고 잿빛으로 물든 우중충한 추억이었다.
셔츠나 드레스를 살며시 만져 보았다. 앨범이 있었다. 마커스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면서 찍었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멕시코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서의 잃어버린 꿈 같은 기억들…
여행가방 제일 밑바닥에 있는 수영복을 끄집어 냈다. 어두운 주황색의 원피스 수영복이었다. 마커스는 고풍스런 우아함을 좋아했으며 비키니는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수영복을 몸에 대보면서, 돈도 아마 비키니를 싫어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순간, 그저 살짝 몸을 가리기만 하는 대담한 비키니가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바닷가에는 많은 남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텐데, 그들 앞에 비키니를 입고 나타나면 돈은 얼마나 쇼크를 받을지 모른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는 보이지 않고 자기 혼자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스페인 사람의 피는 돈에게도 물론 흐르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도시에 데리고 가준다니 최대한 즐기고 오자. 아직 구경한 일도 없는 도시이니. 서둘러야겠군, 오만한 돈이 마음이 변해 혼자 갈지도 모르니까.
욕실로 들어가 커다란 수건을 집어들고 조금 망설인 끝에 돈의 침실로 들어갔다. 물론 들어간 일은 여러 번 있었으나 스스로 들어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때는 돈의 팔에 안겨 가기 일쑤였고, 계곡에 접해 낭떠러지가 내려다보이는 팔각형 창문 앞에 놓인 커다랗고 긴의자에 옮겨지곤 했었다. 긴의자의 부드러운 털의 촉감이며 창밖에 넘치던 달빛.
퍼시파는 긴의자를 안 보려고 하면서 보조가 되어 있는 장롱으로 다가갔다. 궐련의 내음과 언제나 그가 바르는 화장수 향기가 떠돌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검은 실크 실내복이 내던져져 있고, 침대 발치에는 승마용의 채찍이 있었다.
돈은 매일 아침 한바탕 말을 달린 뒤 사우나탕으로 들어가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리고는 실내복을 걸치고 헝클어진 머리의 소탈한 모습으로 퍼시파의 침실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침식사를 같이 하기 위해서.
제일 밑의 서랍에서 수영 팬티를 찾았다.
그런데 뜻밖의 물건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은제 사진틀에 들어 있는 여자의 컬러 사진이었다. 검은 머리에 제라늄 빛깔의 비단 가운을 입고 비단 부채를 펴 들고 있었다. 입가에 떠도는 웃음은 갓 피어난 빨간 장미처럼 남자의 마음을 자극할 것 같았다. 따뜻함이 풍기는 미모였다. 검은 눈망울, 나긋나긋한 몸매, 꽃의 아치 밑 안뜰의 기둥에 기대어 있는 모습은 스페인 여성, 바로 그것이었다. 온몸에서 발산하고 있는 여자의 매력…
퍼시파는 스페인의 미녀에게 눈을 빼앗긴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돈이 자기의 옷장 속에 숨겨 놓고 있는 추억의 사진이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이만저만 특별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도대체 그것 말고는 여자의 추억이 될 만한 물건은 무엇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세뇨라, 무엇을 그렇게 들여다보고 계세요?"
흠칫 돌아보니 문간에 칼멘테이러가 서 있었다. 마치 좋지 못한 일을 하다가 들킨 학생처럼 퍼시파는 꿀꺽 침을 삼켰다.
"주인님이 시켜서 수영 팬티를 가지러 왔어요. 이분 누군지 알고 있어요, 칼멘테이러? 참 아름다운 분이군요."
"마님도 알고 싶으세요?"
칼멘테이러는 천천히 퍼시파 옆으로 걸어와 함께 사진의 여자를 들여다보았다.
"상아 같은 발에서 비단 같은 머리칼까지 어디를 보나 진짜 스페인 여자지요? 이 눈을 좀 봐요, 인생의 기쁨과 사랑에 반짝이고 있어요. 돈 디아브로의 신부께서는 이 밝음, 이 정열, 이 매력이 부럽지 않으세요? 돈 디아브로가 사랑한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으세요?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도련님은 인종이 다른 하얀 피부의 여자를 구하셨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 바라보면 외면하는 여자를, 손으로 만지면 움츠리는 여자를, 정열을 쏟으면 그저 몸을 떠는 여자를 구하셨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러면 이분은 돈이 사랑한 여자예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돌아가셨어요, 세뇨라. 그런 뒤로 육 년 동안을 도련님은 웃음도 사랑도 잊어버리셨어요. 도련님을 위로해 드리는 것은 아무도 못하는 일이었어요. 아셨지요? 이분이 돌아가셨을 때, 도련님은 제일 좋아하던 말을 달리고 달려서 쓰러뜨려 버려 마침내 총을 머리에 대고 쏘아 없앨 수밖에 없었어요. 며칠 동안 누구와도 말하지 않았고, 이 여인을 매장할 때는 묘혈 속에 같이 뛰어들지 않을까 싶어 마음을 죄었지요."
노파는 약아빠진 눈에 희미한 악의를 드러내며 퍼시파를 쳐다보았다. 주름잡힌 거무스름한 얼굴에 비웃음이 스친 것 같았다.
"그토록 이분을 사랑한 뒤에 어떻게 당신을 사랑할 수가 있겠어요? 어떻게 당신을 아껴 줄 수가 있겠어요? 당신은 그저 주인님의 뒤를 이을 사내아이를 만드는 도구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당신의 몸을 찾는 거예요. 사진의 여인은 포도주와 벌꿀이고, 당신은 우유와 한 방울의 쓴 맥주예요. 나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어요. 당신도 아시겠지요, 세뇨라? 당신은 젊고 아름답고 건강하고 구김살없이 자란 것 같아요. 그럼요, 젊고 건강한 처녀는 귀여운 아기를 낳아 주고말고요. 도련님도 슬슬 후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래요, 마님 같은 신부는 엄격한 가정이나 수녀 학교에서 온 것이 틀림없어요. 하지만 뜨겁게 사랑할 여자는 천국이나 지옥에서 나타나,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 향기처럼 추억을 남기고 가는 법이에요."
칼멘테이러가 이야기를 마치자, 퍼시파는 사진을 원래 자리에 두고 방금 들은 이야기는 모두 사실임이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바로 돈의 방을 나왔다.
틀림없이 짜증을 내고 있을 거야. 서둘러 계단에 당도했다.
그때, 왜 아래 홀의 타일 위로 몸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이 스쳤는지 퍼시파는 알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온몸이 떨렸다. 퍼시파는 햇살 속의 안뜰을 단숨에 뛰어서 빠져 나가, 아들을 얻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 결혼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하여튼 도시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며 쇼핑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몸이 지칠 때까지 헤엄을 치고 싶었다.
"미안해요, 칼멘테이러가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늦었어요. 햇살이 뜨겁군요."
"이런 더위 속을 그렇게 뛰어오면 어떻게 해. 그리고 모자는 어떻게 했소? 모자가 없으면 나다닐 수가 없어요!"
"저어… 깜박 잊었어요. 상관없어요, 가게에서 사면 되니까요."
퍼시파는 숨이 차서 단숨에 지껄여대는 순간 몸이 비틀거렸다. 돈은 얼른 퍼시파를 붙들고 가만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척 마음이 들떠 있군. 꼭 새장 속에서 미친 듯이 퍼덕거리는 들새 같아. 도시에 나가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가?"
"네, 그래요! 만일 이렇게 숨돌리는 시간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나는 머리가 어떻게 될지도 몰라요. 이곳의 내 생활이 어떤 것인지 생각이나 해보셨어요? 밤이나 낮이나 당신이 지켜보면서 이것을 해라 저것을 입어라 잇달아 명령을 내리니, 난 당신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걸요! 당신이 내게 바라는 것은 그저…"
거기서 퍼시파는 말을 삼켰다. 자기 입으로 말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아프게 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칼멘테이러의 말만으로도 너무 마음이 아픈 지경이었다. 단지 아기를 낳게 하기 위해서라면 상대 여자를 사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남자의 정열적이고 잔혹한 의사뿐이니까.
"당신은 정말 귀여워, 정말이야."
돈은 문득 퍼시파의 이마에 키스했다.
"자아, 차를 타, 여보. 우리 딱딱한 공기는 몰아냅시다."
"당신이 운전하세요?"
"그럼."
돈은 빈정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정 그러기를 바란다면 뒷좌석에 앉아도 좋아. 나한테서 떨어져 있을 수 있으니까. 난 차를 세게 모니까 당신은 불안해질는지도 몰라. 도시로 나가자고만 해도 당신은 마음이 들떠 있으니까 말이야."
그 제안에 퍼시파는 안심이 되어 뒷좌석에 혼자 앉았다.
차가 고속도로로 들어설 무렵에는 이미 쿨러가 돌기 시작했고, 퍼시파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인생에 대한 사랑으로 눈을 빛내던 스페인 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차가 달리는 동안 퍼시파는 자주 눈앞에 앉아 있는 남편의 넓은 어깨와 단정한 머리칼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에는 괴로운 빛이 떠올랐다. 진정으로 남편은 여자를 사랑하기에는 너무나 무뚝뚝해서 여자의 감정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그러나 한번은 여자를 뜨겁게 사랑한 일이 있었군. 그리고 이 사람은 분명 인생에 단 한 사람의 여자밖에 사랑할 수 없는 타입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돈이 지금까지보다 인간답게 생각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일은, 돈 디아브로의 인생에서 자기가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히 알게 하는 아픔이기도 했다.
사랑도 받지 못하면서 여러 가지 감시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였다.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편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 생활은 남편으로부터 도망칠 수단을 찾아낼 때까지 줄곧 계속될 것이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지금까지보다 더 간절해졌다. 퍼시파는 살며시 잠자리 브로치 위에 손을 얹어보았다. 누구든 이것을 살 사람만 찾아낸다면, 남은 일은 남편의 사무실 큰 책상에서 몰래 여권을 빼내는 일뿐이다. 돈만 넉넉하게 준다면 남편의 영지 내에서라 할지라도 역까지 차로 데려다 줄 남자를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관광지에든 도착하기만 하면 그 다음은 걱정이 없었다. 아무리 돈이라 한들 이국인이나 유럽인 관광객들의 눈앞에서 나를 무리하게 끌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선인장이 띄엄띄엄 서 있을 뿐인 황량한 풍경이 계속되다가 이윽고 차는 도시의 교외로 들어섰다. 밝은 색채의 지붕이며 하얀 벽, 조그만 과수원, 빨래가 펄럭이는 뜰. 어린아이들이 가축과 함께 뛰어다니며 큰소리로 웃고 소리치며 장난하고 있었다. 어느 아이나 흙투성이였다.
퍼시파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돈이, 무엇이 그렇게 즐거우냐고 물었다.
"저 아이들을 좀 보세요. 어머니들은 도대체 어떻게 저 아이들을 씻겨 주고 있지요?"
"빨래 대야에 한꺼번에 몰아 넣고 미지근한 비눗물을 머리에서부터 들어붓지 뭐. 그리고 볕에 늘어놓고 말리는 거요. 귀엽지?"
"정말 귀여워요. 살결은 갈색 비단 같고 눈은 시원스럽구요. 깨끗이 씻고 나면 아마 커피색 천사로 보일 거예요."
"그렇지. 멕시코 아이들은 티없는 천진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감개 어린 목소리에 퍼시파는 흠칫했다. 그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돈은 자기가 진짜 바라는 것을 슬쩍 비치고 있는 것일까?
분명 칼멘테이러는 남자와 여자의 일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더구나 저택의 주인에 대해서는 모르는 일이 없을 것이다. 돈의 어머니를 섬겼고,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성장을 지켜보았으며, 그의 여자들을 눈여겨 보았고, 마침내 그 스페인 미인을 사랑하다가 잃어버린 것까지 소상하게 보아왔으니까.
"아이들을 좋아하세요, 세뇨르?"
"아이들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즐거워지지. 당신은 어때, 아이가 생긴다면, 내 아이가 생긴다면 기뻐하겠소?"
퍼시파의 심장은 뒤집힐 것 같았다. 백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손가락이 아팠다.
"악마의 아이를 낳았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여자가 있을까요?"
"당신은 이따금 남편한테 참으로 잔인한 말을 해주는군."
차는 도시 중심부로 들어서서 아름답고 넓은 광장에 멈췄다. 많은 자동차들이 늘어서 있고, 투구를 쓰고 말을 탄 석상이 당당한 모습으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광장을 가로질러 상점가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 도시의 웅성거림이었고, 오랜만에 듣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퍼시파는 문뜩, 자기가 너무나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을 느꼈다. 금발이나 하얀 살결도 유별난 빛깔이었다. 게다가 자기의 것이라는 듯이 팔을 끼고 걷는 돈 디아브로 역시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이분은 어째서 자기 나라의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을까? 역시 그 애인의 대신이 될 만한 여자를 찾을 수가 없어서, 아니면 그 스페인 계 미녀가 절대로 생각나지 않게 외국 여자를 결혼 상대로 택한 것일까?
아케이드가 있는 상점가 앞에서 돈이 발길을 멈추었다. 밝고 이국적인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드레스, 의류, 잡화, 액세서리, 음식물, 주방 기구, 과일…
"돈이 필요하겠지?"
돈은 지갑에서 새 지폐 뭉치를 꺼냈다.
"마음에 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사. 특히 햇볕을 가릴 모자를 잊지 말도록 해. 나는 이제부터 일이 두 시간 정도 걸릴 거요. 1시에 자동차 있는 데서 만나 식사를 하러 갑시다. 그런 뒤 바다로 나가기로 하지."
"네, 주인 나리."
퍼시파는 기운차게 대답하고 돈을 받았다. 무척 호기를 부린 액수였지만 누군가를 매수하여 도망을 치자면 아무래도 부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모자를 살까요? 꽃 장식이 달린 멋진 모자로요?"
"당신은 어떤 모자를 써도 어울려."
돈은 퍼시파의 턱을 손으로 받쳐 얼굴을 들게 했다.
"도망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 꼬마 아가씨. 나의 팔은 무척 길고, 자기 것은 결코 놓치는 법이 없으니까. 당신은 내 것이오. 그것을 잊지 않도록.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살이나 뼈, 노여움이나 두려움도 모두 내 것이란 말이오. 당신은 내 아내이고 세뇨라 에스렐드 루이란 말이오. 그만한 위엄을 가지고 행동함으로써, 얼굴 생김뿐 아니라 성격도 멋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해. 이 도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나를 알고 있으며 당신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소. 어떤 남자도 당신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먼저 말을 걸지 않는 한은. 당신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단 말이오. 내 말 잘 알았소?"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잘 알았어요, 세뇨르. 나는 착한 여자이니 주인 나리께서 중요한 일을 보시는 동안 시시한 것들을 보면서 즐기겠어요."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도전하는 듯한 눈길과 미심쩍은 듯한 눈길이 맞부딪쳤다. 문득 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빈정거리는 웃음을 띠었다.
"당신은 사람들 앞에서는 용감하군. 단둘이 있을 때도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퍼시파는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고, 붉어진 얼굴 때문에 자신이 싫어졌다.
"어마, 난 착하게 굴겠어요. 나 때문에 누가 당신에게 야단을 맞아서야 쓰겠어요? 난 당신의 힘과 잔인성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럼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해! "
돈은 퍼시파의 손을 잡고 키스했다.
"그러면 이만 헤어져요. 그럼, l시에 차 있는 데서."
"1시 정각이에요."
퍼시파는 늘씬한 돈 디아브로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 슈트가 몸에 착 달라붙어 있어서 혼잡한 사람들 속에서도 한결 두드러져 보였다.
가게는 원색으로 넘쳐 있었고, 말소리와 음식 내음이 가득차 있었다. 퍼시파는 영국에서라면 도저히 입을 용기가 나지 않을 요란스런 무늬의 실크 블라우스를 두 장 샀다. 이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는 차라리 강렬한 원색이 어울릴 것이다. 모자 가게에서 차양모를 샀다. 리본에 이상야릇한 과일 장식 두 개가 달려 있었다. 돈의 말에 반발해서 사긴 했지만, 사실 부끄러워서 이런 것을 쓰고 다닐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손에 들고 다니기로 했다. 바닷가에서라면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신기한 구경으로 금방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퍼시파는 보석가게를 보았다. 그녀는 발을 멈추고 생각했다. 가슴에 달려 있는 잠자리 브로치를 만지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게로 들어가 이 브로치의 값을 물어보기만 한다면 별로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만 해도 예산은 세울 수가 있을 텐데.
딱 결심이 서자 퍼시파는 서슴없이 가게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카운터에 있는 사람은 블론드에 체격 좋은 앵글로색슨 계의 젊은이였다. 상대방의 눈에도 놀랍다는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미국에서 오신 분이에요?"
"영국인이십니까? "
두 사람은 동시에 말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거리를 어정거리며 한 시간 동안을, 구릿빛의 살결과 검은 머리칼의 멕시코 인들과만 마주치던 퍼시파로서는 이 청년과의 만남이 신선했다.
"그럼 당신은 영국인이군요. 역시 틀림없어요. 그 목소리, 그 피부색. 아마 홍차도 좋아하시겠지요!"
"그래요. 하지만 이곳에서 영국의 홍차를 마실 수 있겠어요? 당신은 순수한 미국인이군요. 그 코에 걸린 발음, 기운찬 모습… 틀림없이 커피를 좋아하시겠지요!"
다시 한번 두 사람은 소리를 낮추어 웃었다. 같은 하얀 피부의 사람을 만나는데 굶주리고 자기네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에 갈증을 느끼던 사람들처럼.
"정말 오랜만이군요! 눈부신 놀라움이지요. 영국 출신 미녀가 이 가게로 들어오다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 더운 지방에서 보기만 해도 시원스런 모습이십니다. 당신은 환상입니까, 아니면 현실입니까?"
"현실의 존재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멕시코의 보석상에서 미국인 점원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생활을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지요. 우연히 헤매다 들어온 셈이오,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원래는 석유회사의 잠수부였습니다. 해저 석유를 찾고 있었지요. 어느날 물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공기색전증에 걸려 버렸어요. 그래서 이 가게를 하고 있는 친구가 한동안 날 고용해 주기로 했지요, 건강이 회복되고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요. 한번 잠수부가 되면 일생 동안 거기에 서 빠져 나올 수가 없어요. 비행기 조종사나 같아요. 사고를 만난 정도로 그만둘 수는 없었어요. 분명 광기지요."
"알 것 같아요. 하지만 무서웠지요?"
"사고 때는 의식도 없었으니까 그런 걸 몰랐어요. 지독한 꼴을 맛본 것은 그 뒤였지요."
청년은 순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매력적인 그의 얼굴은 금방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그럼 당신은 멕시코에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포도주와 황금의 나라로 휴가 여행을 오셨습니까?"
"난 이곳에 살고 있어요. 집은 여기에서 멀지만 오늘 아침 차를 타고 이 도시에 도착했어요. 쇼핑을 하고 식사를 하러요."
"당신 혼자서요?"
청년의 잿빛 눈은 퍼시파가 식사라고 말하는 순간 밝게 번쩍였다.
이 매력적인 청년과 식사를 같이 한다면 얼마나 멋이 있을까. 좀 유감스럽다는 듯이 퍼시파가 대답했다.
"남편과 같이 왔어요. 남편이 사업에 관해 상담하는 동안 나 혼자 쇼핑을 하고 다니는 길이에요. 이 모자를 샀어요."
"당신은 남의 아내로서는 너무나 젊게 보입니다. 여고생이 시집을 간다는 것은 멕시코 인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첨을 잘하시는군요. 고등학교를 나온 것은 옛날의 일이구요, 결혼한 지도 벌써 몇 주일이나 되는걸요."
"겨우 몇 주일? 그렇다면 아직 버젓한 신부는 못되었겠군요. 그런데 멕시코의 시장 속을 어정거리게 놓아 두다니, 당신의 주인은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나라도 당신에 대해 조심하겠어요. 멕시코 인은 금방 뜨거워진단 말이오. 누가 당신에게 손을 뻗치지 않을까 걱정이군요. 이렇게 예쁘게 생겼으니."
"남편은 무척 유명하기 때문에 나한테 손을 댈 사람은 없어요."
"아아, 그래요? 영국의 외교관이라도 됩니까, 거물급의?"
"아니예요. 남편은 멕시코 인인 돈이에요. 이 근처에서는 제일 가는 지주인 모양이에요. 만나신 일은 없어도 이름은 알지 모르겠군요, 돈 디아브로 에스렐드 루이라고 해요. 우린 그의 영지에 있는 엄청난 중세풍의 저택에 살고 있어요."
퍼시파는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
청년의 눈에 떠오른 것은 단순한 놀라움 이상의 감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카운터를 뛰어넘어서, 멕시코 인 남편으로부터 그녀를 구출해 낼 것 같은 기세였다.
"그 사람은 폭군이란 말이오. 이 근처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마침내 결혼했다는 소문이 나더니만, 하필 당신 같은 사람이 그와 결혼하다니! 당신은 장미원에서 애지중지 자란 느낌인데… 그의 몸에는 인디언의 피가 섞여 있다고 하던데. 도대체 어떻게 서로 알게 되었소? 그런 패들은 수녀 학교에서 곧장 신부를 맞아들인다고 들은 일이 있는데, 그렇게라도 된 거요?"
"꼭 맞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틀리진 않군요."
그렇게 말한 순간, 퍼시파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어지는 자신을 깨달았다― 돈에게 무리하게 결혼으로 끌려 든 일, 연애결혼이기는커녕 사는 방식도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생활이라는 것을. 그러나 퍼시파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여튼 난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내 사생활을 상담하기 위해서 이 가게에 들어선 것은 아니예요."
"난 길 하워드입니다. 로스앤젤레스 출신이고, 스페인 어도 상당히 할 수 있어요, 멕시코 보석상에서 근무할 정도로 말이오. 한번 결혼한 일이 있었지만 재미없게 돌아가 버렸지요. 내가 늘 집을 비우는 통에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이 가겠지요? 아내 로이스가 마침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버렸단 말이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나의 경력에는 아무 하자도 없어요. 당신이 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산다니 나는 앞으로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군요. 당신에게도 물론 이름은 있겠지요? 우리 격식을 차리는 것은 그만둡시다. 그게 낫겠지요? 세뇨라라는 호칭은 너무나 거리감을 느끼게 한단 말이오. 게다가 당신은 무척 젊지 않아요? 그 머리칼은 햇빛을 받으면 틀림없이 벌꿀 색이 되겠지요?"
청년이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퍼시파는 등을 돌리고 가게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 청년의 목소리는 돈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따뜻한 느낌이 감도는 싱싱한 목소리의 모국어를 듣는 것은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세뇨라라고 불러 달라고 고집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하지만, 설마 당신은 끝까지 고집하진 않겠지요?"
퍼시파는 어깨를 추슬렀다.
"글쎄요. 하긴 요즘은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겠지요. 난 퍼시파예요."
"다시 한번 말해 줄 수 없겠어요? 내가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군."
"퍼시파예요, 하워드 씨. 내 후견인은 고고학자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무척 좋아했어요, 좀 색다른 이름이긴 하지만."
"흔치 않은 이름이오, 퍼시파."
길은 감탄한 나머지 블론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오늘 아침 내가 잠이 깨었을 때, 페르세포네 그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어요? 더구나 그 사람의 결혼 상대가 명부(冥府)의 왕 플루톤을 매우 닮은 남자라니!"
길의 말이 너무나 틀림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퍼시파는 더 이상 이야기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브로치의 값을 물을 수도 없게 되었다. 이 미국 청년은 머리 회전이 너무 빨라서, 퍼시파가 브로치를 팔고 싶어하는 이유를 눈치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편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멕시코를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까지도.
퍼시파는 흘끔 보석을 아로새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것도 돈의 선물이었다.
"이제 가야겠군요, 하워드 씨. 남편은 참을성 있는 타입이 못 돼서요. 틀림없이 안달을 하며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어쨌든 이 고장에서 우리는 같은 객지 사람이니까요― 서로가 필요하지요, 말벗으로라도요."
"안녕."
퍼시파는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뛰기 시작했다.
5
돈의 차까지 뛰어온 퍼시파는 숨이 차 있었디. 흘금 차 안을 들여다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돈은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
그 순간 누군가가 어깨를 붙잡아 퍼시파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돈은 퍼시파의 헝클어진 머리칼이며 상기된 볼을 보고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마치 악마처럼 어떤 일도 모두 아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 하워드에 대해서만은 덮어 두고 싶었다.
"어디 난장판에라도 갔다온 것 같군. 도대체 그게 뭐요?"
"해를 가릴 모자를 사오라고 하셨지 않아요? 마음에 안 드세요, 세뇨르?"
퍼시파가 언제까지나 예의바른 말투로 이야기하는 것을 돈은 아직 한번도 나무란 일이 없었다. 지금도 그저 모자를 받아들고 오렌지빛 과일 모양의 장식을 손가락으로 튀겼다.
"여보,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폭군도 아니고, 유머감각이 없는 것도 아니야. 당신이 이 바보스런 물건을 쓰고 싶으면 얼마든지 써요, 바닷가에서 말이오."
차를 몰고 해안의 멋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파라솔을 받친 테 이블들이 해수욕장 바로 옆에 늘어서 있었다. 새하얀 모래밭이 물가까지 이어져 있어 바다의 푸른색과 눈부신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퍼시파는 바다의 풍경이 너무나 황홀해서 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째서 오늘은 이렇게 놀러 데리고 나와 주었는가 하고. 그러나 테이블에 앉아 돈의 빈정거리는 눈길과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결혼한 지 한 달 넘게 지난 지금, 이 사람은 정말 자기가 바라는 것이 슬슬 얻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기 몸을 요구해 오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는 인정하지만, 사랑은 도대체 어떻게 관계되는 것일까? 어린아이는 사랑으로 태어나야지 아버지의 오만스런 욕망으로 태어나서는 안 돼.
퍼시파는 차가운 파인애플 주스의 잔을 틀어쥐면서 돈의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예전에는 결혼하여 아이가 생기면 마커스라는 이름을 짓겠다는 공상까지 했지만.
"그리고 다른 것은 또 무엇을 샀지?"
돈의 낭랑한 목소리가 퍼시파의 생각을 깨뜨렸다. 퍼시파는 깜짝 놀라 둥그래진 눈으로 돈을 쳐다보았다.
"저택에서 평상시에 입을 셔츠 두 개를 샀어요. 무늬가 눈에 확 띄어요."
"그것으로 내 눈을 끌려고 생각했소?"
"아뇨, 그저 평상복인걸요. 이곳 가게에는 밝은 색의 좋은 물건들이 가득차 있더군요. 당신네 나라 사람들은 손재주가 대단해요."
"대단하지. 그리고 지금은 당신의 나라 사람들이기도 해, 당신과 나는 일심동체야. 혹시 당신은 아직도 나한테서 도망치려는 꿈을 꾸고 있는 거요?"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눈에는 강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문득 독점욕을 얼굴에 나타내며 돈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
"일심동체란 말이오. 내 말 듣고 있는 거요?"
"듣고 있어요. 당신이 신경을 쓰는 건 몸치장에 관한 일뿐이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내 몸을 비단이나 보석으로 장식한 것을 보기 좋아하지 않아요? 당신의 살아 있는 소유물이 당신을 위해서 차리고 나서면 가슴이 설레는 모양이지요? 당신의 피에는 무어 인의 피도 조금 섞여 있지요? 만일 나에게 바람기가 있어 보이면 당신도 내 목을 죄어 죽이겠지요, 저 불쌍한 데스데모나처럼?"
"그 문제로 날 시험해 볼 생각은 집어치우라고 경고해 두겠어, 퍼시파. 당신의 말처럼 나는 아내의 미덕을 높이 산단 말이야. 그래서 당신이 순결하다는 것을 알던 순간은 내 생애 최고의 한순간이었어."
"나로서는 내 생애 최악의 순간이었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퍼시파의 눈은 증오심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괴물과 결혼해 버린 걸 분명하게 알게 된걸요!"
"아니, 당신은 날마다 내 별명을 하나씩 지어내며 살고 있군! 뭐,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힘도 안 들이고 잇달아 이름이 생각나는 모양이지? 하여튼 좋아, 적어도 정직하다는 것은 틀림이 없으니까. 사랑하는 체하고만 있는 여자의 달콤한 말보다는 낫군. 당신과 같이 있으면 내 입장을 오해하지 않게 되니까 말이야."
"그럴까요? 나 같으면 신용하지 않을 거예요. 조용한 물은 깊은 곳에서 흐른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영국인은 속이 깊다, 이 말이지? 빙산처럼 겉으로 보이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고."
돈 디아브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급사가 날라온 송어 요리에 손을 댔다. 레몬 즙을 뿌리고 후추를 조금 뿌리고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네, 그래요. 빙산은 위험한 경우도 있어요.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 호도 가라앉았으니까요. 그렇게도 힘과 미를 자랑했었는데."
"아무래도 당신은 단검을 비단에 싼다는 라틴 기질에 물들어 가는 것 같군. 라틴은 원래 무어와 같으며, 무어는 또 성서 시대와 이어져 있지. 이런 비유는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즐기는 표현 방식이지. 조심해, 퍼시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우리가 사는 방식을 그대로 따르게 된단 말이오."
"설마 그럴라구요!"
퍼시파는 남편의 말투에 온몸이 오싹해져서 되받아 말했다.
"잔인하고 자기 위주며 야심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 순 없어요. 단연코 사절하겠어요."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지? 당신은 한번이라도 내 마음속을 살피려고 애쓴 일이 있어? 내 가슴속에는 콘크리트 마음이 있을 뿐이라고 무턱대고 단정하고 덤비는 게 아니오?"
퍼시파는 얼굴을 번쩍 들었다. 돈은 빵에 버터를 바르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나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나는 그저 당신의 마음에 드는 생김새를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고삐를 싫어하는 암망아지처럼 다룰 수가 있을 거예요. 나의 소유주로서 모든 권리를 다 행사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내가 장차 당신이 하는 방식을 좋아하게 될 줄로 아신다면, 천만의 말씀이에요. 이건 당신이 잘 생각해 보셔야 할 일이에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그러나 난 당신한테 날 좋아해 달라고 부탁한 일은 한번도 없을 텐데. 이 송어는 맛이 어때, 최고지? 보라고, 난 이 송어를 좋아해서 뼈까지 모두 씹어 먹어요. 하지만 송어와 일생을 같이 보내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오."
다정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유머감각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퍼시파는 웃음을 삼켰다. 나를 재미있게 해주었다는 만족감 따위를 그에게 줄 게 뭐야!
"그러지 말고 좀 웃어요. 그렇지 않으면 숨이 막혀 버릴 거야. 한 달이나 넘게 같이 살았는데 당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아? 당신은 농담을 좋아해. 더구나 약간 일상적인 소탈한 농담을 말이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
"가르쳐 줘요, 세뇨르. 당신은 여자에 대해서는 권위자인걸요."
"그건 말이야, 당신은 여자다운 여자가 될 소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해. 그리고 이것은 내 의견인데, 북 유럽의 블론드 아가씨들의 특징이라고 생각해. 새침떼기 같고 얌전한 모습 뒤에는 조그만 열정이 있어서, 그것이 일단 타오르게 되면 어떤 억제나 분별력도 없이 몸을 싼 얼음도 모두 태워 없애 버리는 거야. '얼음의 처녀' 속에 있는 조그만 사랑의 불길처럼 신비로운 것도 없지 않을까?"
퍼시파는 빈정거리며 웃었다.
"사랑이라니요? 미움이라고 하신다면 겨냥이 어긋나지 않았을 텐데요. 지금까지 여자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본 일이 없으세요, 디아브로? 당신을 미워한다구요."
그런 뒤로는 무거운 침묵만이 계속되었다. 퍼시파는 무서운 것도 잊고, 돈이 잔을 깰 것처럼 틀어쥐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역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용감하군."
그 목소리에는 단둘이 있게 되면 혼을 내주겠다는 협박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퍼시파가 반항해 본들 육체적인 힘 앞에는 굴욕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퍼시파는 몇 번이나 돈을 악마라고 부르며 욕을 했던가. 그 말이 지금도 눈동자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러자 돈은 그 눈치를 알아채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무언의 비난을 받아 주는 듯했다.
"디저트론 무엇을 먹겠소? 당신은 물론 단것이 좋겠지?"
빈정대며 돈은 손가락을 튀겨 급사를 불렀다.
장미꽃잎을 띄운 물에 손가락을 씻으며 퍼시파는 문득, 가까운 테이블에서 세 명의 라틴계 여자가 돈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멋진 차림새로 보아 이 도시 관리들의 아내인가? 돈은 자기 외의 다른 여성에게는 성적 매력이 넘치는 남성인 것이 틀림없다. 한 여자가 겨우 돈의 시선을 잡았다.
드디어, 그녀는 남자를 유혹하는 눈짓을 보냈다. 아마 자기 남편에게 싫증을 느끼고 다른 남자와의 정사를 생각하고 있을 거야. 퍼시파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공공연하게 유혹의 눈짓을 받은 돈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를 지켜보았다. 돈도 가만히 여자를 되쳐다보고 있었다. 매우 쌀쌀한 눈매로.
문득 여자는 높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자기네 일행과의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녀가 얼굴을 붉힌 것을 보면 돈의 눈길이 그 여자에게 거리의 창녀나 된 것 같은 굴욕감을 준 모양이었다.
돈은 손을 뻗어 금반지를 낀 퍼시파의 손을 잡았다. 마치 이 여자야말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것이라고나 하듯이―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보내기는커녕 내가 손을 대기만 해도 몸을 부르르 떠는 이 여자야말로 내 것이라고.
"절대로 저기에 있는 여자들처럼 되지 말라구. 만일 그런 일이 있기만 하면 오델로와 데스데모나와 같은 비극이 반복될 테니 그런 줄 알라구."
"어마, 저 여자는 무척 매력적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라틴 계 미인의 전형적인 인물인 것 같은데요. 검은 눈망울, 복스런 살결, 남자를 유혹하는 표정이 아주 일품이에요. 놀랐어요, 세뇨르. 저 여자야말로 당신에게 맞는 타입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돈은 퍼시파의 손을 꽉 틀어쥐었다.
간신히 아픔을 참고 있을 때, 급사가 디저트를 가져와서 겨우 손을 뺄 수 있었다. 패션프루츠와 포도와 바나나 저민 것에 멕시코 특유의 풍미가 있는 크림을 끼얹은 것이었다. 정말 먹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맛이 좋았다. 퍼시파는 그 맛에 반해서 열심히 스푼을 움직였다.
"오늘은 식욕이 무척 좋군, 퍼시파. 바닷가의 공기 탓인가,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라도 있소?"
어떤 한 가지 일을 넌지시 빗대어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퍼시파는 당신의 아기를 낳으려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을 꼭 누르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체했다.
"난 크림이라면 사족을 못 써요. 나라고 뭐 식욕이 없겠어요? 당신의 탐욕과는 다르지만, 세뇨르."
"이거 한방 먹었는데. 당신의 혀는 보통 날카로운 게 아니군. 케이트라고 이름을 고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긴 이름은 지금의 것이 더 좋지만. 바로 당신처럼 보기 드문 이름이야."
"다시 말하면 운명적인 이름이다, 그 말씀이에요? 나는 페르세포네를 따라 이름지어지고 암흑의 왕과 결혼하고… 당신의 저택은 명부(冥府)를 닮지는 않았으나 나에게는 역시 그렇게 생각되어요."
"저택에 기쁨이 한 가지도 없단 말이야? 정원과 폭포, 안뜰이나 방에도 아름다움이나 기쁨이 없단 말이야? 스톤힐 저택보다는 눈이나 감각을 훨씬 즐겁게 해줄 텐데. 그곳은 우중충하고 침울하단 말이야."
"스톤힐은 내 집이었어요, 사랑하고 있었어요. 이 저택에 대해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요. 나에 관한한 금빛의 감옥인걸요."
"그러면 난 옥졸이란 말이야?"
돈은 디저트 접시를 치우러 온 급사에게 커피와 궐련을 주문했다. 돈이 궐련 케이스에서 궐련 한 개비를 뽑아 드는 것을 퍼시파는 지켜보고 있었다. 커피에는 봉봉의 접시가 곁들여 있었다.
"단것을 더 들라구, 당신에게는 먹음직스럽게 보이지 않아?"
"날 살찌게 만들고 싶어요? 스페인 계 남자들은 대개 뚱뚱한 부인을 좋아하는가요? 그 점에서도 난 실격이군요. 솔직하게 말하면 세뇨르, 당신이 어째서 나와 결혼했는지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난 당신에게 애정 같은 것도 갖지 않았고, 존경하고 있다고도 할 수 없는데요."
"존경이라고? 나는 당신에게, 당신이 당신의 후견인에게 가졌던 풋내나는 애정 따위는 부탁할 생각이 없어. 하지만 내 아내로서의 지위를 존경할 것은 분명하게 요구하겠어. 우리 두 사람만 있을 때는 당신이 어떻게 하든 별로 관계없어.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숙녀로서 행동해 주기를 부탁해. 날카로운 손톱이나 혀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그런 말이야. 도대체 마커스는 이 아름답고 젊은 아가씨의 후견인으로 적임자였는지 가끔 의심스러워질 때가 있어. 그는 홀아비였고, 더구나 그 집은 자주 도박판이 되었다고 들었으니 말이야. 당신에게 남장을 시키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야."
"차라리 남장을 시켜 주었더라면 좋을 뻔했어요. 도박사로 교육해 주었던들 당신의 말대로는 되지 않았을 텐데! 그랬어요, 마커스 아저씨는 도박이라면 밥을 먹는 것보다도 더 좋아했지만, 나에겐 절대로 자신의 도박열을 심어 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를 그쪽으로는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했어요."
"참으로 순진한 견해로군. 내가 보기에는, 마커스는 당신을 수고양이들을 끌어들이는 미끼인 귀여운 흰쥐로 썼던 거야. 아니, 만일 그 봉봉 접시를 사람들 앞에서 내게 던지고 싶다면 우리 단둘이 있게 될 때의 일을 단단히 각오해야 해."
"당신은… 진짜 악마예요!"
퍼시파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가셨다.
"하지만 마커스 아저씨의 추억에 등을 돌리게 만들려고 해도 소용없을 테니 그런 줄이나 아세요, 난 아저씨의 장점이나 결점을 환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두 가지 다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미울 뿐이에요. 그러니 당신의 장점 같은 것은 아예 눈에 띄지도 않는걸요. 하녀들에게는 아내에게보다 더 예의바른 것을 빼고는요!"
"큰소리를 내지 말라구!"
돈의 눈은 차가운 노여움으로 불타고 있었다. 퍼시파는 저택에서는 이런 때 주방으로 도망쳐 양파 자르기를 거드는 체하면서 눈물을 감출 수가 있었으나, 이 레스토랑에서는 꼼짝 못하게 되었다.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화장실로 뛰어든다면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퍼시파는 머리를 한번 흔들고 남편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만일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내를 바라고 있다면 유감스럽군요, 세뇨르. 난 독립된 하나의 인간이지 아이를 낳는 기계 같은 것은 아니니까요!"
마침내 말해 버리고 말았다.
오늘 아침 칼멘테이러와 이야기한 뒤로 사뭇 그 이야기가 가슴 속에서 콕콕 찔러대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실한 애정을 느끼지도 않는 남자의 후계자를 낳아 주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나의 인생도 이것으로 이제는 끝장이 난 거나 같지 뭐야.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이제 어지간히 해두라구. 말이 지나치군."
돈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급사를 불러 계산을 했다. 팁을 듬뿍 집어 주고는 퍼시파의 팔을 아플이만큼 꼭 잡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모래밭, 태양, 모든 것이 눈부셨다.
퍼시파의 눈에서는 눈물이 스며나왔다. 말없이 차를 향해 걸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줄만 알았는데, 돈은 수영복과 수건과 퍼시파의 이상야릇한 밀짚모자를 손에 들었다.
"바닷가는 무척 덥단 말이야."
"지금 돌아가지 않아요? 나는 집으로 돌아가도 상관없는데."
"어린아이 같은 말은 그만해. 이것을 써. 칼을 겨누다가 피를 조금 흘렸다고 내가 수영을 그만둘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야. 함께 바다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차에 앉아 있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구!"
돈은 성큼성큼 바닷가로 내려가는 돌계단으로 향했다. 퍼시파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 내음이 섞인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좋아! 지칠 때까지 헤엄쳐서 현실 같은 것은 잊고 말 테야!
바닷가로 내려가니 돈은 이미 비치 해트를 빌려 쓰고 있었다.
물가에 다채롭게 늘어선 탈의실. 이윽고 수영 팬티로 갈아입은 돈이 나타나 곧장 바다로 들어가더니 허리까지 물에 잠기자 힘차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젖은 팔이 구릿빛으로 태양에 번쩍이고 있었다.
퍼시파도 바로 뒤이어 탈의실로 들어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칼을 뒤로 묶었다. 맨발로 모래밭을 뛰어가 멋대로 뛰노는 잔물결에 몸을 내맡기자 처녀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즐거움을 느꼈다.
퍼시파는 어렸을 때부터 마커스에게 헤엄을 배웠으며 바다를 매우 좋아했다. 물결은 마음에 받은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퍼시파는 지금 이 순간의 기쁨 말고는 모든 것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편의 모습 따위는 찾지도 않았고, 혼자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퍼시파는 천천히 헤엄쳤다. 물은 미지근하지도 차지도 않았다. 배영으로 자세를 바꾸고는 이글거리는 태양이 눈부셔서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은 너무나 평화로왔다. 돈은 물에 빠져 버린 것이 아닐까?
호기심이 발동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머리는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종교의 신들에게 한 기도가 통한 것일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설렘이 가슴에 일었다. 그러자 무언가 커다란 물체가 깊은 바다 밑에서 덮쳐 왔다. 퍼시파는 비명을 질렀다. 우람한 팔뚝이 퍼시파를 껴안았다― 돈이었다.
"아무래도 이 바다는 우리 둘이 몽땅 전세낸 것 같군. 게으름뱅이들은 모두 낮잠 속에 빠져 들었어. 당신은 헤엄을 잘 치는군, 꼬마 아가씨. 헐떡거리지도 않고. 머리칼이 물에 젖어도 태연하군. 이렇게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고 즐기는 태도를 나의 품에서도 보여 주면 얼마나 좋아."
"난 당신이 물에 빠진 줄 알았어요, 내 소원이 이루어져서."
"정말 무서운 생각을 하는 아내도 있군. 여보, 당신은 그렇게 쉽게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아? 하여튼 내게는 인디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헤엄도 물고기처럼 잘 치고 채찍처럼 야무지단 말이야."
"상어 같다고 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저 바다의 악당처럼, 말없이 있다가 느닷없이 덤벼드는 날렵한 몸매를 가졌다구요."
"아까 비명을 지른 것은 나를 상어로 알았기 때문인가? 상어 녀석들은 산호초 저쪽에서나 물고기를 들추고 다니지, 이 해안 안으로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으니 안심해요. 이 해안은 깊고 투명해서 먼지 하나 없으니까 말이야. 여기엔 나도 힘을 보탠 거야. 해안과 바닷가는 해수욕에 적당한 상태로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률을 만드는 데 말이야. 몇 년 전에 이 지역에서 전염병이 발생했었는데, 그것도 해안이 더러웠던 탓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깨끗하고 안전하며 한가롭고 아름다워."
"훌륭하시군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힘을 다 써주시다니. 그 전염병은 지독한 것이었나요?"
"그렇지."
그렇게만 말하더니 돈은 8백 미터나 저쪽에서 백금색으로 반짝이는 바닷가를 가리켰다.
"우리 저기까지 경주해 볼까?"
"만일 내가 당신보다 빨리 헤엄치게 되면 당신의 자존심은 형편없이 구겨지는 게 아니겠어요?"
"글쎄, 어떨까? 시험해 보겠어?"
돈이 손을 놓은 순간 퍼시파는 전력을 다해 바닷가를 향해 헤엄쳤다.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다― 언제나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는데도 입맞춤으로 입을 막아 버리고 자기 멋대로 힘을 과시했다. 그러나 나도 그렇게 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싶어!
흘끔 옆을 바라보니, 돈은 힘도 들이지 않고 여유있게 헤엄을 치면서 흰 이빨을 드러내고 히죽 웃어 보였다. 마치 지금은 퍼시파의 속도에 맞추어 헤엄치고 있지만, 그럴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앞지를 수 있다는 듯이.
퍼시파는 울컥 화가 치밀어 물을 차서 돈의 얼굴에 끼얹었다. 그러나 그 여파로 물에 머리를 박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서 가라앉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무쇠 같은 손이 퍼시파를 붙잡더니 바닷가까지 단숨에 헤엄쳐 나갔다.
퍼시파를 모래 언덕에 끌어올린 돈은 그녀를 마치 익사체처럼 내 던졌다. 그러더니 맹렬한 스페인 어의 홍수를 퍼붓는 것이었다.
다행히 터져 나오려는 기침에 얼굴을 찌푸리며 온몸을 떨고 있는 퍼시파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바보 같으니."
겨우 영어로 돌아와 말을 끝냈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 같은 짓이나 하고 있다간 언젠가는 목숨을 잃기 십상이야. 어째서 어른이 되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
아닌게아니라 돈은 화를 낼 권리가 있구나 싶자, 더욱 노여움이 치미는 것이었다.
"당신은 무척 어른이시군요, 세뇨르. 이때까지 한번도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으셨단 말이에요? 하지만 정말 최고로 바보 같은 짓을 했어요. 나 같은 여자와 결혼했으니 말이에요. 낯선 나라로 끌고 와서는 싸울 힘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알고 멋대로 사람을 잡아 누르거나 내두르니, 난 당신의 그 거만한 태도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제 그런 이야기에도 슬슬 신물이 나는군."
돈은 몸에서 바닷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퍼시파 옆에 우뚝 서서 말했다.
"미워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쓰고 있어서 이젠 반응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되어 버렸다구."
"언제 반응을 느낀 일이 있었나요?"
"당신이 내게 하는 그런 무례한 행동을 나는 한번도 그 시늉조차 누구에게도 허락한 일이 없었어. 이젠 슬슬 그 벌컥 하는 당신의 성미도 고쳐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채찍으로 고칠 생각이에요, 마치 사람들이 암말을 조련하듯이?"
"당신에게 채찍을 쓸 필요는 없소, 꼬마 아가씨."
갑자기 돈은 누워 있는 퍼시파의 몸을 말타듯 타고 앉아 무릎을 꿇었다. 동물처럼 잽싼 움직임이었다. 퍼시파는 그에게 완전히 몸이 눌려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왜 이래요!"
돈이 히죽 웃었다.
"또 떠드는군. 아무도 당신을 도우러 오지 않아. 모두 낮잠에 빠져 있어. 이 바닷가에 당신과 나 단둘뿐이야. 비명을 지르거나 버둥거리거나 물어뜯거나 할퀴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지쳐서 항복이 빨라질 뿐이니까. 자아, 여보, 언제 나와 레슬링을 시작하자구. 밤에 있는 시합의 전초전이야."
"아아, 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빠져 버려요!"
퍼시파는 위를 보고 누운 채 처음으로 가만히 있었다. 돈이 몸을 엎드려 포개왔다. 퍼시파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돈의 입술이 목을 헤매고 다녔다.
"이런! 모래가 입에 들어왔어!"
순간 돈은 벌떡 일어나 퍼시파를 일으켜 주었다.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몸을 닦고 오라고 말했다.
"벌거벗은 여자처럼 좋은 것도 없으나, 모래와 히스테리만은 질색이야. 자아, 어서 가, 내 마음이 바뀌어 모래나 손톱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기 전에."
"정말 구역질나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돈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간 퍼시파는 내뱉듯 말했다.
탈의실로 들어가 빗장을 건 다음 샤워를 하고 몸을 닦았다.
마커스와 헤엄을 치고 나면 기분좋게 바닷가에서 쉬었는데, 지금은 고양이처럼 겁을 먹고 드레스를 입어야만 겨우 마음이 놓일 지경이었다.
구역질나는 사람! 일부러 그런 짓을 해서 나에게 겁을 주는 거야. 퍼시파는 머리를 빗어 뒤로 묶고 나서야 겨우 침착을 되찾고 탈의실을 나왔다. 돈은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한가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난 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아니, 여기에 있어, 바로 끝날 테니까."
돈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퍼시파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뜨겁던 햇살이 약간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문득 뒤를 돌아본 그녀는 흠칫 놀랐다. 돌계단을 내려오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청년은 한 손에 수영복을 들고 수건을 휘두르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블론드였다. 길인가? 안 돼요! 내 옆에 오지 말아요. 내게 말을 걸면 안 돼요, 날 보지 말고 가줘요!
"여어, 세뇨라! 여기서 만나다니 반갑군요!"
"안녕하세요, 하워드 씨. 밀물이 오기 전에 헤엄치러 오셨어요?"
"물론이지요. 내겐 지금이 하루 중에서 제일 좋은 때예요. 일은 끝났고, 밤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으니."
길은 곧장 퍼시파에게 걸어와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당신도 지금까지 헤엄친 것 같군. 바다의 요정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퍼시파는 목소리를 낮추고 눈짓으로 탈의실을 가리켰다.
"제발 부탁이에요. 그런 말씀 하시지 마세요. 주인이 알면…"
길은 윙크를 보냈다.
"아아, 그래요! 그럼 지금 스페인 주인 양반과 헤엄을 쳤군요. 불쌍하게 그렇게도 겁을 먹고 있어요? 본래가 그런 주인이요?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말만 해도 펄쩍 뛰면서 자기의 볼일만은 계속 보는 사람이군요. 당신으로서는 지옥이지 뭐요!"
"어서 가지 않으면 당신도 혼이 날 텐데요."
"아니, 당신이 원하면 가주고말고요, 나의 숙녀에겐. 하지만 꼭 다시 만나 줘요, 단둘이서."
"안 돼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 사람한테 들키기 전에 가세요."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탈의실의 문이 열리고 키 큰 남편이 나타났다. 회색 신사복 차림은 손에 수건과 수영복을 들고 있는데도 아주 까다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길은 돈을 흘끗 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어갔다. 마치 지나가다가 영국 아가씨가 혼자 있기 때문에 말을 걸었다는 모습을 하고서.
퍼시파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순간 두 사람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자신도 흠칫했다. 길 하워드에 대해서는 숨겨 두고 싶었던 것이었다. 여차하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저 녀석이 당신한테 치근거렸소?"
"아뇨, 그런 일 없었어요. 당신도 요즘 젊은이들이 어떤지 아시죠? 그저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당신을 낚으려고 했군. 왜 나를 부르지 않았지? 아니면 저 남자를 만나서 반가왔소, 멕시코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아요. 영국인이나 미국인이겠지요. 어쨌든 저 젊은이와 아무 일도 없었으니 그만두세요. 당신 아내로서의 평판을 떨어뜨린 것도 아니고 그럴 시간도 없었으니까."
"조심해요, 퍼시파."
돈은 퍼시파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나에게 보복을 하려는 행동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다른 남자를 이용해서 내 얼굴에 먹칠을 하려고 들거나 하면 안 된단 말이야.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당신의 단검에 가슴이 찔리는 것이 낫다구."
"여보, 유혹하지 마세요."
퍼시파는 돈의 강한 시선을 견디어 낼 수가 없어서 눈길을 돌렸다. 저녁 어스름 속에 조용한 바닷가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결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조용한 해면을 미끄려져 가는 어선… 문득 돈이 스페인의 시 한 귀절을 읊었다. 천천히 읊었기 때문에 퍼시파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불길이 사라질 때 재 속에 온기를 남긴다.
사랑이 식어갈 때 마음에 깊은 아픔을 남긴다.
해가 떨어지자 저녁놀이 아름답게 하늘을 물들였다.
퍼시파는 돈의 옷장 서랍에 있던 사진이 생각났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니 죽어간 사람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픈 거야.
두 사람은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길은 어디에서 우리를 보고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퍼시파는 돌계단에 하이힐의 뒷굽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러나 굵은 팔뚝이 뻗어와서 잡아 주었다.
"조심해요, 여보. 당신이 넘어져서 다치거나 하면 내 마음이 아파."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속으로 퍼시파는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렇겠지요. 영주님의 후사를 낳을 때까지는 몸을 다치거나 하면 곤란할 테니까.
6
돈 디아브로가 일 주일 가량 일 관계로 집을 떠나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퍼시파는 마음이 놓이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언제나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 있구나 싶자, 마치 휴가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내가 집을 비우는 것이 좋은 눈치 같군."
돈은 씁쓸하게 말했다.
아르헨티나로 날아가 같은 일에 종사하는 유력한 사람들과 쇠고기 거래에 관해 매듭지을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뭣하면 당신도 같이 가지 않겠소? 말도 몇 마리 살 생각인데, 한 마리는 당신 승마용으로 할 것이니 당신 손으로 고르면 어때?"
순간 여행의 유혹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돈에게서 자유로와질 수 있다는 유혹이 훨씬 컸다. 잘하면 길 하워도와의 우정을 두텁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계시는 동안 당신 차를 써도 좋아요, 세뇨르? 팬 페리스에게 도시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시골살이만 하다 보니 따분해서요. 부탁해요."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군, 퍼시파. 이렇게 되면 나도 다시 생각해야겠군. 당신을 일 주일 동안이나 집에 혼자 둬도 괜찮을까?"
"혼자라니요? 팬 페리스를 시켜 나를 따라다니게 하면서요."
"그렇지. 아직 물어보지 않았는데, 당신은 운전을 할 수 있소, 퍼시파?"
퍼시파는 돈의 의심스런 눈길을 견디어 냈다. 면허증은 따지 못했지만 운전은 마커스한테 배워서 할 줄 알았다. 혼자 운전해 본 일은 없지만 마커스가 옆에 앉아 도와 주어서 해본 일은 몇 번 있었다.
"아저씨는 자기 롤즈로이스를 여자가 부리도록 놓아 두는 사람이 아니예요. 내게 차를 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약속한 스물한 살의 생일이 오기 전에 세상을 떠나 버렸는걸요. 불쌍한 마커스 아저씨…"
"난 지금 편지를 써야 하는데."
돈은 벌떡 일어나서 살롱 문까지 가더니 뒤돌아보며 말했다.
"좋아, 그러는 게 좋다면 저택에 남아 있어. 어차피 당신은 내 친구들 앞에 나가도 행복한 체 해주지 않을 테니까. 팬 페리스에게는 당신이 시키면 언제든지 도시까지 차로 안내하도록 말해 두겠소. 단, 바보 같은 짓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알았소?"
"네, 세뇨르."
하지만 살롱을 나가 문을 닫을 때까지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돈의 검은 빌로도 스모크가 사라지자 비로소 퍼시파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만일 돈을 정말로 화나게 만들면 자기든 누구든간에 그는 악마처럼 보복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가 없는 사이에 운전수의 눈을 속여 차를 몰고 싶어질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한 짓을 가지고 팬 페리스에게 벌을 줄 만큼 돈은 불공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눈꼽만큼이라도 자유를 맛보게 되면 그 뒤에 오는 벌쯤은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이란 말은 우선 반려자나 보호자나 포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런데 돈에게 있는 것은 그저 육체에 대한 정열뿐이다. 돈은 나를 소유한 사람이지만, 그가 없는 꿈 같은 일 주일 동안은 내가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거야.
퍼시파는 미소를 띠었다. 돈 디아브로가 떠나는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며칠 뒤 어느날 아침, 돈은 퍼시파의 침실로 들어오더니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돈은 침대에 누워 있는 퍼시파에게 몸을 수그리고 귓가에다 속삭였다.
"내가 없으면 쓸쓸할 것이라고 생각해?"
그는 전날 밤 한밤중까지 이곳 영민의 집에서 말이 새끼를 낳는 것을 거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단정한 매무새와 활력이 넘치는 모습에서는 도저히 피곤한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퍼시파도 어젯저녁에 같이 가서, 망아지가 어렵게 태어나 비틀비틀 일어서서 어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렸던 것이었다.
"여보, 당신은 너무 아름다와. 지금 당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 당신의 눈은 벌꿀 빛깔이군. 내 손이 닿으면 부서질 것같이 섬세해 보여. 아니, 정말 내 손으로 부숴 버릴 테야, 만일 나를 배신하면 만이야. 다른 남자를 잠깐 쳐다보기만 해도 안 돼, 당신은 내 것이며 귀여운 '얼음의 처녀'니까. 당신을 혼자 두고 가고 싶지 않은데. 우리 같이 가자구!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날아가. 여행은 틀림없이 당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줄 거야. 난 알아."
"싫어요."
퍼시파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무의식적으로 돈의 손을 자기의 가슴에 끌어당겼다.
"시간을 주세요. 당신의 친구들을 만나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있어야 해요. 당신도 말했지 않아요, 내가 당신한테 홀딱 반한 체할 수는 없을 거라구요?"
굳어진 침묵이 계속되었다. 돈은 퍼시파가 위를 보도록 몸을 돌려 놓고 무리하게 자기 쪽으로 얼굴을 향하게 했다. 이제는 애무 같은 따뜻한 손길이 아니었다.
"그럼 하다못해 작별의 키스라도 해줘. 제대로 키스하는 거야!"
"좋아요."
퍼시파는 얌전하게 돈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 차가운 태도가 돈의 악마 같은 성격을 도발시킨 것일까. 키스는 거칠고 격렬한 것으로 바뀌어서 퍼시파의 입술에 아픔을 남겼다.
돈은 물끄러미 퍼시파를 내려다보았다. 떠나기 전에 퍼시파의 모든 것을 기억 속에 잡아 넣기라도 하려는 듯이.
돈은 퍼시파의 머리칼을 손으로 잡고 키스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퍼시파의 어깨에 키스했다. 퍼시파는 실크의 시트를 틀어쥐고 필사적으로 차가운 태도를 지키려고 애썼다.
돈은 일어섰다. 밤색 넥타이와 짙은 갈색 셔츠에 회색 슈트 차림이었다. 머리를 쓸어올리고 입술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안녕이라고는 하지만 헤어지는 것은 아니야, 퍼시파. 아무리 당신이 헤어지기를 바란다 해도 그것은 안 돼. 그리고 하다못해 비행기 여행의 안전이라도 빌어 주는 게 어때?"
비행기 여행! 그 말이 퍼시파의 가슴을 꿰뚫었다. 돈이 멀리 가서 떨어져 있는 동안에,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날아가 버릴 수단을 찾을 수는 없을까!
"아니면 비행기가 추락하기를 빌고 있어, 당신은?"
퍼시파가 미처 입을 열 겨를도 주지 않고 돈은 등을 홱 돌리고 문을 걸어갔다.
"옛 속담에도 악마는 자기를 돌볼 줄 안다고 했어. 그러니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이 되는 것을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아."
그런 말을 하고 돈은 방을 나가 버렸다.
퍼시파는 가만히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돈의 빈정거리던 대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문득 몸이 으스스 떨리기 시작했다. 퍼시파는 이불을 홱 젖히고 문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잔인한 생각을 가진 채 여행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어젯밤에 나는 땀으로 범벅이 된 돈의 셔츠를 보았지 않은가. 어린 짐승을 고통과 공포에서 건지기 위해서 열심히 싸우고 있었어. 나에 대한 태도야 어떻든 돈에게도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어.
"세뇨르…
하지만 홀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고, 소리만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차가 떠나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서 저택의 문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하여 퍼시파는 바라던 대로 자기자신의 주인이 된 것이었다.
침실을 둘러보았다. 처음으로 아침식사에 모습을 나타내는 돈이 없다는 것에 이상한 공허감이 느껴져 왠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껏 틀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할 때, 언제나와 같이 노크도 없이 칼멘테이러가 들어왔다. 하얀 동백꽃을 꽂은 항아리를 들고 있었지만, 그것은 침실에 들어오는 핑계에 지나지 않음이 뻔했다.
"한동안 쓸쓸하시겠어요, 세뇨라. 하지만 어르신네의 일이니 일 주일이건 이 주일이건 잊을 수 없을 만큼 큰 추억을 남겨 놓고 가셨겠지요. 당신도 함께 떠나시는 줄로 알았는데. 걱정이 안 되십니까, 세뇨라? 남 아메리카에서 귀여운 라틴 아가씨를 만나 고독을 위로받으실지도 모르는데요. 뭐니뭐니 해도 돈 디아브로는 남자 중의 남자가 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노파의 약간 독기 있는 수다는 끝없이 계속되었다― 남자옷 같은 바지 따위를 입고는 자신만만한 라틴 여자를 당해 낼 수 없다는 것, 여자도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멕시코에서도 손꼽히는 이 저택의 여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
화가 난 이 저택의 여주인이 나가라고 소리쳐도 노파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우유와 꿀같이 부드러운 부인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음에 불을 가지고 있다니, 그것도 좋은 일이라고도 말했다. 그렇지만 아이를 많이 낳는 스페인 여자같이는 결코 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칼멘테이러는 퍼시파가 몰랐던 여러 가지 일을 가르쳐 주었다. 먼저 퍼시파는 자기 아버지 묘소가 저택의 성당 뒤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돈에게는 앨버러드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떴으며, 같은 묘지에 잠들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충고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그분의 인간적인 면을 보셔야 합니다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악마가 되어 버리실지도 몰라요. 에스렌드 루이 집안의 남자들에게는 피 속에 조상의 잔인성이 조금 흐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영리한 여자라면, 어떻게 하면 잔인성을 따뜻함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알고 있을 거예요."
"따뜻해진다고? 해가 초록빛이 된다면 나도 기적을 믿겠어요."
<찰스 레녹 파제트
마흔다섯 살에 지상에서 천국으로 불려가다.>
얼마 뒤에 퍼시파는 아버지의 묘 앞에 무릎을 끓고 있었다. 칼멘테이러가 가지고 온 동백꽃을 바쳤다. 머리 위의 떡갈나무 잎 속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인간의 사랑과 미움 같은 것은 모른다는 듯이 어디까지나 밝은 소리로.
조국인 영국을 멀리 떠나, 퍼시파가 거의 생각한 일도 없던 핏줄인 아버지의 유체가 이곳에 잠들고 있었다. 한번도 만난 일이 없는 아버지의 묘 앞에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있다니.
이 아버지와 아버지 대신이 되어 주었던 마커스 아저씨가 퍼시파의 운명을 정해 버렸다. 아버지는 돈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또 마커스는 꼼짝 못할 상황 속에서 퍼시파를 돈의 손에 넘겨 주고 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다시 눈물이 솟았다. 자기에게 화를 내면서 퍼시파는 눈물을 닦았다.
동백꽃 한 송이를 꽃다발에서 뽑아 들고, 또 하나의 묘를 찾았다. 영영 만나볼 수 없게 된 시동생의 묘였다. 앨버러드 동생의 이름은 아즈테카의 전쟁 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형은 하필이면 아즈테카의 악마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일까?
퍼시파는 성당으로 들어섰다.
햇살이 가려져 서늘했으며, 갈고 닦은 제단에는 푸른 옷의 마돈나의 초상이 있었다. 성모의 맨발 아래에는 촛블이 하늘거리고 향내가 꽃냄새와 섞여 마음에 평화를 주었다.
퍼시파는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슬프고 착잡한 마음이 밝아지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십오 분 가량이나 성당의 아늑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을까.
성당을 나와 이제 돈 디아브로를 만날 걱정도 없이 저택의 부지를 둘러보고 다녔다. 무화과와 뽕나무 과수원에는 꿀벌들이 많은 꽃 사이를 날고 있었다.
향긋한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시며 자연의 기쁨에 젖다가, 문득 차가운 묘지 속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얼굴이 흐려졌다. 그들은 햇살 속에 흔들리는 꽃들과 낡은 분수, 보석처럼 반짝이는 폭포도 다시 볼 수 없는걸.
앞뜰에서 안뜰로 들어섰다.
포석을 깐 산책로를 따라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나비떼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측백나무가 초록빛 그늘을 드리운 곳에 타일로 덮인 벤치가 놓여 있었다. 퍼시파는 거기에 걸터앉아 겨우 아늑한 기분이 되어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저택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조상 대대로 정성을 기울여 갈고 닦아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알맞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퍼시파는 주위를 둘러보며 정말 자기가 이 저택의 여주인인가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숨을 삼켰다. 비로소 왜 마커스가 기꺼이 자기를 돈 디아브로 에스렐드 루이에게로 넘겨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마커스는 인간적 사랑은 마음의 아픔을 가져올 뿐이라고 퍼시파에게 가르쳐 줄 정도였으니, 그녀의 행복에 하나의 도박을 건 것 같았다. 아마 퍼시파가 저택에 대한 애정으로 해서 그 남편을 견디어 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백이나 흑으로 거는 것은 마커스 자신의 생활방식이었다. 트럼프 한 장, 주사위 한 개 식으로. 그리하여 행운이 미소하면 모든 것을 손에 넣는 격렬한 삶이었다.
퍼시파는 한숨을 쉬고 초록빛 덩굴손을 따서 입에 물었다. 돈이 자기의 금발을 입에 무는 것과 똑같은 행동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한 채.
그 뒤 며칠 동안을 퍼시파는 아름다운 저택을 즐기는 것으로 보냈다. 혼자 있게 되자 비로소 저택 여주인의 책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토록 넓은 영지에 많은 영민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 사람들의 생활도, 복지나 때로는 행복조차도, 돈과 그에 가까운 사람들, 특히 여주인인 자기의 어깨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팬 페리스의 눈을 속이고 차를 타는 따위는 생각할 마음이 없어졌다. 거기에 자신의 위태로운 운전 기술로 사고라도 일으키면 어쩌나 싶으니 더욱 그랬다.
어느날 아침, 여주인의 책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주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뛰어가 보니 멕시코 아가씨 둘이 엉겨붙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녀 하나가, 이 두 사람은 젊은 남자 하나를 놓고 다투는 거라고 퍼시파에게 보고했다. 시골 구석의 놈팡이가 두 아가씨와 모두 가까운 사이가 된 모양이었다.
한동안 바라보다가, 아가씨들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떨어질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퍼시파는 개수대로 걸어가 그릇으로 물을 떠서,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두 아가씨의 머리 위에 끼얹었다.
순간 노여운 외침은 놀란 비명소리로 바뀌고 두 아가씨는 멍한 표정으로 여주인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 집에서 이런 버릇없는 짓은 용서할 수 없어요."
퍼시파는 스페인 어로 천천히 말했다. 어떻게든지 두 사람에게 알아듣게 해주어야 했던 것이다.
"만일 주인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나 혼자 있으니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에게 분명히 말해 두겠어요. 또다시 주방에서 고양이처럼 아옹다옹했다간 둘 다 이 집에서 내쫓겠어."
한 아가씨는 울음을 터뜨리고, 다른 아가씨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리고는 말했다.
"또다시 로레타가 내 남자 친구에게 이상한 눈길을 보냈다간 단검으로 찔러 죽이겠어요. 그것이 그녀를 조용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바보 같은 소리 하는 게 아니야, 피랄. 그 젊은이가 그렇게 지조가 굳지 못하다면 다른 남자 친구를 찾는 것이 현명해. 남자 때문에 이렇게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야!"
"마님은 싸우시지 않는단 말씀이에요, 마님의 좋은 분이 다른 여자에게 유혹당해도?"
"좀더 자존심을 가져."
"자존심이라니요? 그것이 누구를 사랑하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여자는 자존심을 가져야 해, 그러지 않으면 쓰레기와 같게 돼."
"난 사랑을 정열을 취하겠어요, 마님."
멕시코 아가씨는 흰 이빨을 보이며 생긋 웃었다.
"당신은 멕시코 인이 아니니까 모르시지요? 내가 바라는 것은 손에 넣고 말겠어요. 싸움을 해서라도요. 절대로 놓치지 않겠어요. 만일 로레타가 다시 그 남자에게 눈길을 보냈다간 눈알을 도려내어 닭에게 던져 주겠어요!"
로레타는 울음소리를 더욱 크게 내면서 주방에서 뛰어나갔다. 피랄은 자랑스럽게 고개를 홱 젖히며 젖은 머리칼을 치켜올렸다. 하여튼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싸워서 빼앗은 셈이었다.
퍼시파는 속으로 이교도 아가씨에게 감탄했다.
"다시는 싸우면 안 돼. 싸우면 내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주방에서 나가려고 하던 퍼시파는 하녀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하녀들의 눈에는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여주인이 싸움을 제대로 심판한 것이 그녀들의 마음에 든 것이었다.
조그만 위기를 넘기자 퍼시파는 여주인의 역할에서 몇 시간 풀려나고 싶어져 팬 페리스에게 차를 준비하도록 명했다.
길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것을 생각하니 빨리 가고 싶었다.
방으로 들어가 공들여 치장을 했다. 앙고라의 드레스에 역시 핑크빛의 앙고라 크로시를 썼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품인 진주 목걸이와 진주 귀걸이를 맞추어 걸었다.
모자 빛깔보다 조금 짙게 입술연지를 칠하니 참으로 아름답고 세련된 모습이 되었다. 그저 쇼핑을 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너무나 요란스런 차림새인지도 몰랐다. 만일 칼멘테이러가 홀에 있다가 본다면, 왜 여주인이 저렇게 호화롭게 차려 입고 나가는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었다.
퍼시파는 핑크빛 장잡을 끼면서 새침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난 누구의 방해도 받을 필요가 없어.
태연스러운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홀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칼멘테이러의 모습을 본 순간 역시 긴장이 되었다. 그녀는 내가 어떤 차림을 하고 나가는지 보려고 버티고 있는 거야.
"바지를 안 입으셨군요, 세뇨라? 마치 어디 친구네 파티에라도 가시는 것처럼 차리셨군요."
"남편의 입장이 있잖아요? 대지주의 완벽한 아내로 보이지 않으면 안 돼요."
"잘 차리는 것과 완벽하다는 것이 같은 것일까요? 겉은 나무랄 데 없어도, 여자란 수녀가 아닌 다음에는 속으로 죄가 될 일을 생각하게 마련이에요."
"죄가 될 일이라니요? 도대체 내가 왜 그런 일을 생각한단 말이에요?"
"잘 아실 텐데요, 세뇨라. 오늘 아침 아씨를 홍차 잎으로 점쳐 봤더니, 죄를 들추는 손가락과 불꽃이 보였습니다요. 그것만으로도 이제 아시겠지요?"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둬."
퍼시파는 미소를 띠고 현관을 나섰다.
노파는 그저 한번 겁을 주는 거야. 밖에는 짙은 베이지색 제복을 입은 팬 페리스가 자동차를 대기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내로 들어서면 광장에 차를 세워 줘요, 쇼핑을 좀 할 테니까. 오늘은 드라이브하기에 좋은 날씨군요."
"네, 세뇨라."
운전수는 예의바르게 미소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저택의 인간들은 돈의 명령이 없어도 호랑이 눈을 하고 나를 지켜보고 있군, 돈의 명예가 자기네 명예라도 되는 양.
언제나 입는 바지 차림이 더 현명했을지도 몰라. 멕시코 인의 눈에는 바지와 남자 친구는 연결이 안 되는 모양이니. 하지만 무슨 불장난을 하려는 것도 아닌걸. 길과는 그저 허물 없는 대화를 즐기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멕시코를 떠나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비쳐서 탈출에 도움을 바라고 있음을 암시해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 시간 남짓 달린 뒤에 차는 광장에 들어섰다. 말을 탄 동상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에스렐드 루이 집안의 한 사람이라고 알게 된 저 엄격한 얼굴, 사람에게 명령하는 것 같은 저 분위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세뇨라? 저도 따라가서 짐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 시간 가량 걸릴 거예요. 따라올 건 없어요, 팬. 물건을 사기보다 외출을 즐기고 싶어서니까. 당신도 카페에서 무얼 마시고 있어요. 그렇지, 지금이 3시니까 4시에는 차로 돌아오겠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도망치려는 건 아니니까."
퍼시파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를 떠났다. 운전수가 자기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뒤따라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상점가 입구로 들어서다가 뒤돌아보고 안심했다. 팬 페리스는 여주인을 신용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보석가게 앞까지 오자 퍼시파는 문득 쑥스런 느낌이 들어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무얼 살 것인가를 정하기로 했다. 만일 길 이외의 다른 점원이 나올 경우에는 뻔뻔스럽게 하워드 씨를 불러 달라고 할 수는 도저히 없는 노릇이었다.
저 조그만 비취 시계 같으면 내 방의 책상 위에 놓으면 어울릴 것이었다. 누군가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운전수가 틀림없다 싶어 벌컥 성이 나서 뒤돌아보았다.
"이봐요, 개처럼 사람을 졸래졸래…"
그러나 그것은 팬 페리스가 아니었다. 길 하워드가 조금 의아스런 멋진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크림빛 데님 재킷과 갈색 바지에 연갈색의 셔츠 차림이었다.
"거리에 요정이 나타난 줄 알았습니다. 당신이 스포츠 용품점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어요. 난 테니스 라켓을 구경하고 있었지요. 뒤를 따라와 부인인지 아닌지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군요. 오늘 오후는 쉽니다. 최고로 멋있는 당신의 드레스를 보지 않았던들 우리는 엇갈릴 뻔했습니다!"
"난 시계를 사러 온 거예요."
길을 만나서 반가우면서도 상대방이 자기를 만나러 왔다고 단정하는 것이 짜증이 나서 퍼시파는 말했다.
"이 비취 시계를 사고 싶어서 안에 들어가 좀더 자세히 보려던 참이에요."
"낭비는 그만두십시오. 홍콩제인데 도저히 일급품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저택에는 그보다 더 훌륭한 시계가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그러고 보니 그 명부의 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인?"
"그분을 그렇게 말하면 못 써요."
"내 가죽을 벗겨 안장을 만들게 될 테니까요? 또 상담을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귀여운 분을 혼자 거리에서 어정거리게 놓아두고?"
귀여운 분이라고 말할 때 길의 눈이 번쩍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참으로 매력적이고 친절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퍼시파는 누구에게라도 조금 사랑을 받고 싶었다. 남편한테는 독점을 당하고 있을 뿐이지 사랑받고 있지는 못하니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은 나비처럼 날개를 팔랑이며 곁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길이 다정스럽게 싱긋 웃음을 띠자, 퍼시파는 그런 생각은 집어치우고 미소를 띠었다.
"주인은 사업차 떠났어요, 남 아메리카로요."
"그것 잘됐군.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면 걱정없어요! 그래서 당신은 그가 없는 동안 시내 구경을 나온 거지요, 시계를 사러요?"
"돈의 낭비라고 하신다면 시계는 사지 않겠어요, 하워드 씨."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날 길이라고 불러 주면 좋겠는데요. 하워드 씨라고 하면 좀 딱딱해요. 우리 둘은 오후 내내 자유로울 것이고, 같은 화제를 나누며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즐겁게 할 게 분명하니까요."
"무엇이든지 혼자 다 단정하시는군요. 난 당신을 만나 반가운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해둘 일이 있어요. 난 조그만 위안을 찾아 어정거리고 있는 고독한 유부녀가 아니예요. 그저 친구로서 이야기나 나누었으면 싶을 뿐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부인. 그러니 그렇게 딱딱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의 만남을 망쳐 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당신은 보기만 해도 진짜 숙녀라는 것을 알 수 있는걸요. 남편이 등을 돌리는 순간, 위안을 찾아 나서는 여자가 아니죠. 이제 됐지요? 홍차와 핫케이크가 있는 곳을 아는데, 같이 가겠소?"
"어마, 이 도시에 그런 꿈 같은 곳이 다 있어요?"
길은 한순간 망설이더니 퍼시파에게 한 발짝 다가서서 솔직한 잿빛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곳은 다름아닌 내 아파트요. 바로 저기요. 당신은 어미고양이가 물고 가는 새끼고양이처럼 안전할 것임을 보장하겠소, 절대로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요."
이번에는 퍼시파가 망설일 차례였다. 그때 경고의 소리가 들렸다. 마치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분명하게. 퍼시파는 저도 모르게 길의 팔에 매달렸다.
"가서 홍차를 들겠어요. 당신을 신용해요."
"그럼 됐어요. 자아, 가시겠습니까?"
"네, 그래요."
그때 땅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퍼시파는 속으로 겁 많은 자기를 나무랐다― 돈은 먼 나라에 가 있으니, 이 남자와 한 시간 정도 함께 보낸들 알 턱이 없어. 이렇게 무릎을 와들와들 떨 것도 없어.
7
길의 방은 원형의 안뜰을 안고 있는 듯한 라틴 풍의 건물 일층에 있었다. 천장이 높은 시원한 방이었다. 새하얀 벽에는 빨강과 초록의 표주박, 빨간 리본으로 장식한 기타와 재미있는 모양의 분재가 걸려 있었다.
길은 퍼시파에게 화려한 커버를 씌운 긴의자에 앉게 했다.
미국 담배가 들어 있는 케이스와 올빼미 모양의 은빛 라이터가 나란히 놓여 있는 낮은 테이블이 그 앞에 있었다.
바닥에는 밝은색의 화려한 융단이 깔려 있었다. 미소를 띠고 방을 둘러본 퍼시파가 말했다.
"잘 꾸며 놓으셨군요."
두려워하던 기분은 벌써 다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겨우 이삼 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팬 페리스에게 들키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퍼시파는 길을 바라보았다.
그는 푸른 드레스에 핑크빛 수에드 구두를 신은 퍼시파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나도 당신 같은 아내를 가졌다면 당신이 다른 남자와 차만 마셔도 벌컥 화를 낼 테니까요."
"그렇게 은근히 사람을 치켜세울 필요는 없어요. 옷 때문이에요. 옷이 날개라고 하지 않아요?"
"당신은 누더기를 입어도 아름답게 보일 겁니다. 자아, 차나 한잔 하시지요. 우유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레몬으로 하시겠어요?"
"우유를 부탁해요. 내가 하겠어요."
"아뇨, 당신은 거기 가만히 앉아서 장식품이나 되어 줘요. 그리고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를 것 아닙니까? 집이 좀 좁아 놔서 주방이 언제나 어질러져 있지요. 하지만 이 아파트는 중심가에서 가깝고 안뜰까지 달려 있습니다. 게다가 집주인이 마음이 좋아서 남자 방에 손님이 찾아와도 의심하고 들여다보거나 하지 않지요."
길은 방과 연결된 주방으로 들어갔다. 손님이라니, 틀림없이 젊은 여자겠군. 길은 매력적이고 남자답고, 보기만 해도 여자들이 어울리고 싶어할 타입인걸.
주방에서는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고 가볍고 쾌활한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길이 이혼을 경험한 사람이라니.
"손님은 많이 오세요?"
"이따금 식사에 초대하지요."
길은 홍차와 핫케익 접시를 담은 쟁반을 들고 방으로 돌아와 긴의자 앞의 테이블 위에 놓고, 맞은편에 커다란 쿠션을 놓고 걸터앉았다.
"당신은 앞으로 어머니가 되겠지요?"
그 말에 퍼시파는 저도 모르게 몸이 가늘게 떨렸다. 몸을 앞으로 내밀어 홍차를 잡으면서 몸의 떨림을 감추려고 했다.
"멋있군요, 마치 영국에 온 것 같아요. 홍차 냄새를 맡으며 이렇게 아늑한 방에 앉아 있으니까요."
"저택의 방은 무척 호화롭고 값비싼 물건으로 가득차 있지요?"
길은 부지런히 핫케익에 버터를 바르고 잼도 듬뿍 발랐다.
"당신은 그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젊은 여자들은 값비싸고 희귀한 물건에 둘러싸이면 누구나 행복감에 취하게 마련인데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난 돈 때문에 돈 디아브로와 결혼한 것이 아니예요."
고뇌의 빛이 희미하게 눈에 떠올랐다. 퍼시파는 길에게 차 잔을 건넸다.
"물론 저택은 아름다와요. 하지만 내게는 감옥이지 뭐예요."
"아니, 그렇다면 왜 결혼하게 되었소, 퍼시파? 당신이 그 남자를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무슨 깊은 까닭이 있었겠지요. 핫케이크에 잼을 바르세요. 난 딸기잼을 무척 좋아해서요."
"나도 그래요."
하지만 퍼시파는 지금 목이 마르기 때문에 찻잔을 손에 들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피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나에게 매우 소중했던 분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마침 그분이 나타났어요. 그때 난 집도 없고 갈 곳도 없고 무슨 직업적인 훈련 하나 받지 못했기 때문에, 결혼이야말로 몸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설득당해 버렸어요. 갑자기 차갑게 등을 돌린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아직까지 직면해 본 일도 없는 문제들로부터 몸을 지키는 수단은 결혼이라고요. 그때까지는 언제나 후견인이 잘 돌봐 주어서 편하게만 지냈기 때문에, 어느 사이에 난 후견인이 좋아하는 일만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돈 디아브로와 결혼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다는 것을 안 나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려들어 버렸어요. 마치 현실에 눈을 뜨기 싫은 몽유병자처럼요."
"하지만 당신은 금방 현실로 끌려나와 버렸지요, 안 그래요?"
몸을 앞으로 내민 그의 잿빛 눈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남자는 글자 그대로 도박장에서 당신을 채온 겁니다. 아름다운 당신을 보고, 유명인의 그림이나 진기한 도자기를 갖고 싶은 것처럼 당신을 손에 넣고 싶어졌던 거요, 그저 가만히 장식해 놓지 않은 건 다르지만. 그야말로 사랑이 없는 결혼이 아닙니까? 그 남자는 당신을 소유했어요. 당신은 명부의 왕 플루톤에게 유괴당한 페르세포네란 말이오."
"네, 마치 지어낸 이야기 같아서 믿기지 않겠지요. 요즘 세상에 나같이 결혼한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 사람은 글쎄 일부러 카톨릭 교회를 택해서 식을 올렸어요. 그러니 이혼할 생각은 전혀 없겠지요."
"그렇다면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가서 숨어 살 곳을 찾는 겁니다. 사랑도 하지 않는 남자와 지옥 같은 생활을 계속하면 안 된단 말이오. 그가 손가락으로 신호만 하면 당신은 몸을 바쳐야 하다니, 부도덕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 아니오."
퍼시파는 길의 격렬한 어조에 다소 어안이벙벙해졌다.
미국인은 신천지를 찾아온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청교도 정신을 발휘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아직 잘 몰랐기 때문에.
노여움에 번들거리던 길의 눈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퍼시파를 들여다보았다. 퍼시파로서는 길이 자기 문제에 그렇게 깊이 들어오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돈을 좀 많이 주면 멕시코에서 차로 데려다 줄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인 것이었다.
"그래 가지고서야 1세기는 뒤떨어져서 사는 것과 같지 않소. 한 남자가 봉건적인 위세로 온 나라에 군림하다니. 이 지방 주민들은 대개 그의 세력 밑에 있으니까 당신을 혼자 나다니게 해도 안전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도 자기의 의식주 생활을 내던지면서까지 당신이 도망치는 것을 도와 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로서는 나 같은 사람은 사람의 축에도 들지 않을 것 아니겠소? 그 바닷가에서 도마뱀이나 보듯이 날 바라본 녀석인걸요. 인디언의 피가 섞인 주제에 정말 오만불손해요!"
퍼시파는 입가를 일그러뜨린 길을 눈이 둥그래져서 바라보았다.
"그 사실은 알고 있었지요?"
"물론이에요. 자기 입으로 말해 준걸요."
"결혼하기 전에요?"
"아뇨, 멕시코에 와서요. 난 그런 일을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유별나게 두드러진 체격에 마치 조각한 것 같은 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였어요. 그건 별것 아니예요. 그 사람이 소유욕이 강하고 잔인한 것은 스페인 인의 피 탓이에요. 저택에도 인디언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매우 따뜻하고, 아이들을 귀여워하고 있어요."
"인디언은 어디까지나 인디언이란 말이오! 당신은 도대체 아무것도 모르는 게 탈이오. 그 멕시코 인이 당신에게 덫을 놓아 결혼한 것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군. 눈처럼 하얀 피부, 금발의 영국 아가씨를 활로 쏘아 떨어뜨린 거요. 그 자의 활 솜씨는 과연 부족의 우두머리 정도는 되고도 남음이 있죠. 정말 약고 영리한 인간이지!"
"그만둬요, 길! 그런 소리는 듣기 싫어요."
"당신에게 겁 줄 생각은 없어요. 당신이 돈 데블한테서 도망치겠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겠어요. 당신이 바라는 것도 그것이지요? 당신 같은 사람으로서는 그런 녀석과 산다는 것은 지옥이지 뭐요. 그 자가 나타나기까지는 당신은 남자 친구와 사랑놀이를 해본 일도 없었을 거요. 하물며 나이 많은 후견인이 붙어 있었으니."
"마커스 아저씨는 그렇게 노인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내가 의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더구나 나는 아저씨와 상대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분별없는 젊은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 일은 한번도 없었어요. 아저씨는 나에게 언제나 좋은 결혼을 시키고 싶어했어요."
"너무나 좋은 결혼이고말고! 재산이란 좋은 것이겠지. 만일 지갑을 꼭 틀어쥐고 있는 녀석만 없다면 말이오. 하여튼 당신은 사뭇 도망치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요?"
"네,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그런 것은 어떻게 되게 마련이오. 도대체 그런 남자에게 어떻게 애정을 가질 수 있겠어요? 불가능한 일이오! 뭐니뭐니 해도 인종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요. 나이도 당신보다 훨씬 많지 않아요? 미국에서는 당신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을 부자의 노리개라고 말하는데, 당신이 바로 그것이지 뭡니까! 왜냐하면 돈 데블은 굉장히 돈이 많고 당신은 정말 이만저만한 미인이 아니니까요!"
길은 몸을 앞으로 내밀어 퍼시파의 작은 손을 붙잡고 값진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이건 엄청난 것이군. 비싸게 팔릴 거요."
"이 반지를 팔 생각은 없어요. 그런다면 도둑이 되어 버리지 않겠어요? 이것은 에스렐드 루이 집안의 가보인걸요. 반지 안쪽에 라틴 어가 새겨져 있어요. 난 그 사람한테 받은 브로치를 팔려고 해요."
"아아, 나도 봤어요. 처음 만났을 때 옷에 달고 있었던 호화로운 잠자리지요? 알았어요, 그것 때문에 당신은 보석가게를 찾은 게 아니오?"
"돈이 필요할 때 팔면 얼마나 될까 물어볼 생각이었어요."
퍼시파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이가 내 여권을 꼭 움켜쥐고 있어요. 그것이 없으면 멀리 갈 수가 없고, 멕시코를 떠나지 못하면 붙들리고 말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일이 더 난처해져 버릴 거예요."
"더 난처해지다니, 무슨 뜻이지요? 그 자가 당신을 때리거나 한단 말이오?"
"더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될 거예요. 그 사람은 보통 약은 사람이 아니예요, 길. 때리거나 하는 야만스런 방법을 쓸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가 노려보기만 해도 몸이 떨린다, 그 말이오?"
"그런 셈이지요."
퍼시파는 눈길을 돌려 벽에 걸린 표주박을 보았다. 지금의 두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눈부신 빛깔이었다.
퍼시파는 길의 자유롭고 마음 편한 생활이 부러웠다. 틀림없이 가게에서도 의식주를 해결할 정도밖에는 일하지 않겠지. 그런데 나는 그때 무엇 때문에 그렇게 겁을 먹었던가? 도저히 일자리를 찾아 자립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아예 자신의 인생을 깨끗이 돈의 지배하에 내맡겨 버렸으니.
"여권을 어디 숨겨 두었는지 짐작은 갑니까?"
"자물쇠로 채워 놓은 책상 서랍에 있어요. 하지만 차마 그것을 꺼내 달라고는 할 수 없었어요, 내 계획을 눈치챌까 싶어서요."
"그렇다면 그 자가 당신의 마음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당신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조심을 하고 있단 말이지요? 정말 고약한 인간의 전형적인 타입이군. 그런 자들은, 여자는 인간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주제에 욕망은… 너무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은 피합시다. 당신이 난처해질 테니까, 퍼시파.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일이지요, 그렇지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에 관해서 길과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퍼시파는 벌떡 일어서서 안뜰로 통하는 오솔길로 향했다. 열어 놓은 문으로 오래된 샘물 둘레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장미와 카네이션의 향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기 멋대로의 생활을 누리다니, 길은 얼마나 행복할까.
"난 이 고장이 좋아요. 당신은 어때요, 길? 멕시코의 생활이 즐거워요?"
"네, 여러 가지 이점이 있지요. 미국보다 생활비도 적게 들고, 과일도 사시사철 흔하고, 옷도 가벼운 차림으로 지낼 수 있으니까요. 거기에다 언제나 빛나는 바다와 태양이 있어요."
"거기에 라틴 아가씨들까지 있지요.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여자들이 많죠, 까만 머리칼에 커다란 갈색 눈을 한?"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그 여자들이 서른 살 가량 되면 어떻게 되는지 본 일이 있어요?"
길이 다가와서 오솔길에 서 있는 퍼시파 바로 뒤에 섰다.
"당신 같은 여인은 예순 살이 되어도 아름다울 거요, 날씬하고 화사한 몸매 그대로."
"우리 센티멘탈해지지 말아요, 길."
몸이 굳어지면서 퍼시파는 가볍게 말했다.
아무래도 자기 발로 길의 아파트까지 따라온 것이 꺼림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행한 아내가 남편보다 좀 사근사근하고 소탈한 외간 남자에게 위안을 바라고 있다고 그가 생각한다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남편과 감정적인 연결은 없어도, 입장이 이렇게 난처하게 되었으니 길과는 역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싶었다.
"이 멕시코에도 한두 명의 여자 친구는 있지요? 당신은 혼자 지내기를 좋아하는 타입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런대로 한두 사람은 드나들고 있지요. 하지만 아내 로이스와 헤어진 뒤로는 누구와도 사이가 깊어지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어요. 그녀를 정말 좋아했었으니까요. 산타모니카의 클럽에서 가수 생활을 했었는데, 로이스는 나와의 방랑생활을 싫어했어요. 그런데 이제 좀 안정이 되고 보니 가정을 이룰 아내가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더군요."
"불쌍한 길."
퍼시파는 문간에 얽혀 있는 덩굴에 손을 뻗어 보랏빛의 꽃을 만지작거렸다.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고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는 나라― 하지만 퍼시파에게는 마치 감옥 속에 갇힌 생활이었다.
"불쌍한 페르세포네."
길은 두 손을 가냘픈 그녀의 어깨에 살며시 얹었다.
"페르세포네를 위로하러 오는 기사가 있었던가요, 모든 점에서 피부가 거무스름한 영주와는 다른 기사가…?"
"글쎄요?"
살짝 미소를 띠고 길의 손에서 벗어나 퍼시파는 안뜰로 걸어나갔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숨이 막힐 정도로 날씨가 무더웠다. 저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보았다. 활짝 개어 있던 푸른 하늘이 어느 사이에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태양이 녹아서 스며든 것처럼.
"폭풍이 몰려오는 것이 아닐까요?"
퍼시파는 놀라서 길을 돌아보았다. 어서 돌아가야 하는데 멕시코에서는 비가 왔다 하면 폭포처럼 퍼붓는다고 들은 일이 있었다. 소나기 속에 차를 몰고 가자면 신경이 지쳐 버릴 것이다. 게다가 돌아가는 길에는 사막지대가 있어서, 바위며 모래땅이 드러난 가운데 선인장의 기괴한 덤불이 흩어져 있을 뿐인데.
길은 한동안 하늘을 쳐다보더니 모양 좋은 눈썹을 찌푸렸다.
"벌써 어두워졌군. 이제 생각이 나는데, 시장에 있던 노인이 대지가 투덜거리고 있다고 했었지. 비가 필요해지면 그렇게 알린다는군요. 만일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이 쩍쩍 갈라져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사람들을 삼켜 버린다고 해요."
퍼시파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길, 나 돌아가야겠어요. 4시까지는 차에 돌아가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운전수가 걱정해요. 게다가 억수같이 쏟아진다면 비가 오기 전에 떠나야지요. 폭우 속을 운전하기는 힘들 것이고, 나를 태우고 가자면 팬 페리스도 더욱 불안할 테니까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돈이 운전수를 야단친다는 말이오?"
길은 퍼시파의 몸을 붙잡고 홱 돌려 자기를 향하게 했다. 굳어진 퍼시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길의 눈에도 폭풍의 번득임이 있었다.
"그 멕시코 인도 당신에게라면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이렇게 아름다운걸. 그 멕시코 인의 거무스름한 피부 밑에…"
"아니예요, 그이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이 말하는 뜻으로는요."
퍼시파는 야무지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돈은 한번도 사랑을 화제에 올린 일이 없고, 그저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선언했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길은 모르지만, 남편은 어떤 여자에게― 그 여자를 매장하던 날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했을 만큼 사뭇 마음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돈 디아브로는 그저 나를 소유하고 있을 뿐이에요. 독점욕이 강한 성격이니까 자기의 소유물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면 불같이 화를 내요. 난 가겠어요, 가지 않으면 안 돼요. 차는 잘 마셨어요. 그리고 내 고민을 들어주어서 정말 고마와요… 길, 나를 가게 해줘요! 난 가야 해요."
"가게 해드리고말고, 당신이 또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해준다면요."
길은 퍼시파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당신은 새끼고양이처럼 연약하니까 귀여워해 줘야지요. 돈은 당신의 목덜미를 틀어잡기 때문에 당신이 손톱으로 할퀴는 겁니다.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퍼시파, 난 젊은 여인에게 관능적인 즐거움을 주는 데 그리 서투르지 않아요."
길의 손은 애무하듯 천천히 그녀의 허리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당신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누군가를 가지는 것은 그 자에게 보복하는 멋진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 같은 사람을 가지는 것 말이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잘 알지 않아요? 만일 내가 다른 남자와 불의를 저지른 것을 알면요."
길은 히죽 웃었다.
"하지만 들킬 염려는 전혀 없어요. 당신은 너무 순진하군요. 지금의 우리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 함께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당신은 시에스타(낮잠) 시간에 이 거리에 왔어요. 멕시코 인이 시에스타 중에 깨어 있는 것은 악마나 지진을 만났을 때 정도인걸요. 그러니 그 점을 잘 이용하면…"
"아니예요, 난 돈이나 돈의 엄청난 명예에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니예요. 다만 나 자신의 명예를 생각할 뿐이예요. 당신도 말했잖아요, 길? 난 어리석은 정사를 바라는 성격이 아니라구요. 그 말은 틀림없어요, 난 그렇게 뻔뻔스런 싸구려 여자가 아니예요. 그렇게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아니, 이거 뜻밖의 말을 듣는군! 내가 바윗덩어리처럼 매력이 없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군."
"어마, 그런 뜻이 아니예요! 당신은 매력이 있어요, 길.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하지만 정사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예요― 내가 바라는 것은 자유로와지는 것뿐이에요."
퍼시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꽥 하고 비명을 지르며 길의 가슴에 쓰러졌다. 땅이 발밑에서 기울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상하고 오싹 소름이 끼치는 진동이 덮쳐 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심했다.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은 채 단단한 안뜰 돌바닥에 내던져졌다.
"지진이다!"
길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은 순간, 뾰족한 돌부리에 이마를 부딪쳐 퍼시파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어둠 속으로 끌려가 버렸다.
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 푹신한 침대 위에 뉘어져 있었다.
이마 위에 얼음 주머니가 놓여 있어 욱신거리는 아픔을 덜어 주고 있었다. 비명소리를 내며 무리하게 뜬 눈앞에 조그만 불빛이 보였다. 방안이 뱅글뱅글 돌아 한동안 초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조그만 불빛은 램프라는 것을 알았다.
하얀 천장에 비치는 커다란 그림자는 자기에게 몸을 수그리고 있는 남자의 그림자였다. 퍼시파가 몸을 꿈틀거리자 남자는 바싹 다가와 들여다보고 얼음주머니를 뒤쪽으로 밀어냈다.
"퍼시파, 좀 어때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당신은 너무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어요!"
램프의 불빛에 비친 씩씩한 얼굴을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햇볕에 그을어 있었지만 검지는 않았다.
"길이군요! 지금 여기가 어디예요?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상당히 큰 지진이 있었어요. 당신이 이마를 찧어 내가 안으로 옮겨 왔어요. 기분이 어때요, 퍼시파? 너무 세게 부딪쳐서 벌써 두 시간 이상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어요. 의사를 부르기 위해서 뛰어나가려고 하는데 당신의 신음소리와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어요. 많이 아파요?"
"아파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일어나려고 했다. 순간 방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해서 퍼시파는 다시 베개에 쓰러졌다.
"머리가… 머리가 아프고 눈이 돌아요, 길. 그리고 어두워요!"
"퍼시파, 램프를 켰어요."
흠칫 놀란 목소리였다.
"내가 보이지요, 제대로 보여요?"
"네."
퍼시파는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하얀 벽, 옷장, 램프의 불길에 흔들리는 그림자.
"지금 밤이군요, 길. 나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데!"
다시 한번 무리하게 일어나려고 하자, 길이 그녀를 베개에 도로 뉘었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퍼시파. 이마를 찧으면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키는 수가 자주 있어요. 자아, 기분을 편안하게 가져요. 지진은 이제 멈췄으니까. 봐요, 빗소리가 들리지요?"
퍼시파는 마지못해 몸을 뉘었다. 얇은 커튼을 통해서 세차게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쇠붙이로 된 손길로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비가 와서 열기를 식혀 주었으니 다행이었지, 그러지 않았으면 엄청난 대지진이 되어 큰 피해가 생겼을지도 몰라요. 비가 몇 시간 쏟아지면 이 안뜰도 꽃이 가득 피게 될 겁니다. 멋있는 일이 아닙니까!"
"정말 멋있어요. 당신과 함께 여기에 몇 시간을 갇혀 지내게 되다니. 아아, 이 머리는 왜 이래! 당나귀 발길에 챈 것 같군요."
"마비된 것보다 훨씬 낫지요."
길은 한 팔을 퍼시파에게 돌리고 목에 얼음주머니를 갖다 댔다.
"봐요, 기분이 괜찮지요?"
"으응."
아닌게아니라 기분이 좋아졌으나, 신경을 가라앉혀 주었으면 싶었다.
"당신 탓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난 팬 페리스가 걱정이에요. 그리고 저택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까요."
"틀림없이 이 폭우로 발이 묶인 줄 알겠지요, 뭐. 귀여운 마님,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실 것은 없어요. 자아,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있어요. 아무리 엄한 당신의 주인이라도 자연현상 때문에 이렇게 된 당신을 탓할 수야 있겠어요? 자연의 힘까지 우리 편이 되어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해주었는데 당신의 주인도 뭐라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하룻밤이라니요?"
오싹 소름이 끼치는 눈으로 길을 쳐다보았다. 길은 한심스럽다는 듯 웃었다.
"또 그런 눈을 하는군, 마치 내가 탕아나 되는 것처럼. 당신의 인생에 깊이 관련된 남자들은 둘 다 자기네보다 젊은 남자에게는 적대감을 갖도록 가르친 모양이군. 그것은 잘못된 일이오, 안 그래요?"
길은 놀리듯 말했다.
퍼시파가 크게 다친 것이 아니라는 데 대한 안도감과 단둘이 폭우 속에 갇혀 있다는 소년 같은 승리감 비슷한 기분이 뒤섞여서 그는 웃음을 띠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일로 말다툼하고 싶지 않아요. 마치 내가 당신에게 웃게 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내가 걱정하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서 무어라고 변명하면 좋을 것인가 하는 일이에요."
"사실대로 말하면 되지 않아요? 지진과 폭우를 피해서 하룻밤 묵을 수밖에 없었다구요, 숙소를 제공해 준 집에서 그 집 주인과."
"보세요, 그렇게 되면 진실은 아무 소용도 없어요. 하여튼 나는 당신과 단둘이 여기에 있은걸요. 그 말을 듣고 의심을 안할 줄 아세요? 하룻밤 내내 같이 있었던 사람의 이름이며 주소며 신분을 미주알고주알 캐어물을 것 아니예요? 불을 보듯 분명해요!"
"하지만 당신의 주인은 남 아메리카에 가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니 즉시 신문할 수도 없을 것이고,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는 당신의 죄의식도 희미해져서 악의 없는 거짓말이 진실성을 띠게 될 테니, 그럭저럭 넘어가게 될 겁니다. 숙소 사람은 친절했지만, 이마를 세게 찧는 바람에 현기증이 심해서 이름을 묻는 것조차 생각지 못했다고 하면 될 거요. 기억하는 것이라면 안뜰이 딸린 집이라는 것뿐이라구요. 이 근처에는 이런 집이 수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이마를 세게 부딪친 것으로 주인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면 사실 같은 것은 얼버무려지게 마련이오. 당신은 여자가 아니겠소, 퍼시파! 어떤 여자에게도 여배우의 소질은 조금씩 있는 법이오. 자아, 이것으로 브랜디를 마실 기분은 나겠지요? 그러면 기분이 가라앉고 말끔해질 거요."
"난 커피가 좋겠어요."
퍼시파는 백과 구두를 찾았다. 하지만 그것이 길의 시선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길은 뿌루퉁해서 말했다.
"당신을 취하게 해서 유혹할 생각 따윈 없어요. 여자가 싫어해서야 재미도 없단 말이오. 게다가 내가 옆에 있으면 당신은 주인이 무서워서 벌벌 떨 테니까요."
길은 좀 어린아이같이 찌푸린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눈썹을 찌푸린 돈의 거무스름한 얼굴에 비하면 마치 나뭇가지를 스쳐가는 미풍처럼 담백했다. 분명 길은 여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성격이며, 무리하게 상대방의 반응을 끌어내기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그의 결혼이 파탄된 것도 이런 태도 때문이었겠지. 로이스를 무리하게 자기 생활에 맞추어 가게 하려고 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길을 가게 했기 때문에 그녀가 곧장 다른 남자의 품안으로 뛰어들게 만들어 버린 거야.
퍼시파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길은 매력적이지만 좀 허영이 있군. 여자들이 사랑을 청해 오기만을 기다리고 싸워서 빼앗으려는 각오가 없어. 하지만 돈과 같은 성격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다면 오늘밤은 너무나 위험한걸.
"뭘 히죽히죽 웃고 있어요?"
"당신은 참 멋있는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어요. 여자가 남편 이외의 남자와 밤을 지내야 한다면 언제든지 당신을 추천하겠어요. 정말이에요, 당신은 여자를 밝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난 마침 브랜디보다는 커피가 마시고 싶었을 뿐이에요."
"알았어요."
길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장난스럽게 퍼시파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금발은 헝클어져 있었고 얼음주머니 때문에 조금 젖어 있었다. 이마 왼쪽에는 푸르스름한 멍이 들어 있었고, 구겨지고 더러워진 드레스와 턱에는 상처 자국이 나 있었다.
"혹시 당신과 싸운다고 해도 당신은 너무나 눈부셔. 그러니 내게 위험한 남자가 아니라고 말해 줘도, 난 도저히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돈 데블과 비교해서 얌전한 남자란 뜻이오?"
"온 세계 남자의 반은 우리 주인보다 훨씬 따뜻한 성격일 거라고 생각해요. 주인에게는 스페인 인이 피를 보기 위해 천천히 투우장으로 걸어들어가는 성격― 잔인성이 있어요. 거의 숙명이라 할 수 있는 그 감정은 미국인이나 영국인은 갖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이는 세상이 어떻게 되건 다 불태워 버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질이에요. 앵글로색슨보다 훨씬 깊이 원죄를 믿고 있는걸요."
"최후의 심판이 있는 이상, 미래의 희망이 없기 때문에 현세를 뜨겁게 살아라, 너 죄많은 자여!"
"아마 그런 셈이겠지요. 불쌍한 데스데모나는 겨우 한 장의 손수건 때문에 목이 죄어졌던 거예요. 그러니 내가 매력적인 미국인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지낸 것을 돈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어쨌든 내게 매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니 반갑군."
길은 살며시 퍼시파의 얼굴에 손을 댔다.
"불쌍한 아가씨, 돈이 돌아오기 전에 도망쳐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어요."
"먼저 여권을 손에 넣어야 해요. 하지만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물론 그럴 수 있고말고요. 망치로 책상의 자물쇠를 부수면 돼요."
"내가 하는 말은, 그분한테서 도망칠 수 있는가 어떤가 하는 일이에요. 이 지방 대부분의 땅은 우리 주인의 것이고, 철도의 주식도 상당히 가지고 있을 거예요. 난 이따금 이렇게 생각해요. 비록 영국까지 도망을 간다 해도 주인은 나를 찾아내어 억지로 끌고서라도 다시 멕시코로 데려오지 않을까 하고요.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 상대로 택한걸요. 에스렐드 루이 집안에 소속되었다는 말이에요. 내게는 이미 나 자신의 운명은 없어요. 주인에게, 주인의 미래 계획에 묶여 있을 뿐이에요."
만일 돈의 눈앞에서 돌에 걸려 넘어졌다면 돈이 얼마나 걱정할 것인지 퍼시파는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돈이 뒤를 이을 아들을 갖고 싶기 때문에 하는 걱정이겠지. 그러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인지 아닌지 벌써 의사의 진료를 마쳤을 것이었다. 밖에서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돈은 반드시 의사를 불러댔을 것이 틀림없다.
현기증이 덮쳐 와 퍼시파는 눈을 감았다. 뱅글뱅글 방이 돌면서, 어두컴컴한 길의 침실에서 어느 새 저택의 사치스런 자기 방으로― 우람한 구릿빛의 팔에 안기어 있는 것 같았다. 꼭 안기어 있었지만 조용한 가슴속의 정확하게 고동치고 있는 심장 속으로는 결코 그를 들여놓지 않은 채. 먹이를 손에 넣은 호랑이처럼 그는 퍼시파를 꼭 붙잡고 있었으며, 퍼시파는 돈을 깨우지 않으려고 가만히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퍼시파?"
살며시 퍼시파의 어깨를 흔드는 손길.
"퍼시파, 괜찮아요?"
어딘지 어색한 손길에 퍼시파는 조그만 신음소리를 내고 눈을 깜박거리며 떴다.
"괜찮아요, 지쳤을 뿐이에요."
"그럼 커피를 가져올까요?"
"네, 부탁해요."
하지만 길이 돌아오기도 전에 퍼시파는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비가 완전히 개고 아침 햇살이 방안 가득히 비쳐들 때까지.
8
테라스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마침 돈을 태운 은색의 차가 모습을 나타냈다. 퍼시파는 저도 모르게 난간을 움켜쥐었다.
오랜만에 귀가한 돈은 이것저것 물을 것이며, 운전수 팬 페리스는 거기에 대답하고 있을 것이었다. 당연히 지난 주에 일어났던 지진 사건도 화제에 오를 것이었다.
그녀는 운전수가 그날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남편에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니 벼랑 끝에서 한 발짝을 내딛는 것처럼 아찔했다.
차체는 번쩍번쩍 햇빛을 반사하며 속도를 내어 아치형의 작은 길로 사라졌다가, 에스렐드 루이 가문의 문장을 새긴 커다란 철문을 지나 안뜰에 나타나더니 멈추었다. 활짝 열린 문에서 긴 다리가 밖으로 뻗어나왔다. 퍼시파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낯익은 거무스름한 얼굴, 갈색 슈트에 싸인 늘씬하고 건장한 몸, 태양빛이 반짝이는 안뜰의 타일 바닥에 길게 뻗은 그림자.
높이높이 치솟은 석조의 이 저택에는 그 토대의 일부에 아즈테카 신전의 초석이 섞여 있다고 한다. 마치 돈의 피에 조상의 잔혹성과 이교도의 신비가 섞여 있는 것처럼.
그의 민첩한 피가 가르쳐 준 것일까. 그때 돈은 흘끔 위를 쳐다보고 새까만 눈망울이 퍼시파의 눈길을 잡았지만, 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러더니 돈은 눈에 희미한 빈정거림을 번득이며 퍼시파를 향해 깊숙이 절을 하는 것이었다. 햇살이 머리칼에 번쩍여 마치 정복자의 투구를 장식하는 깃과 같았다. 숱이 많고 매끄러운 감촉이 문득 되살아나 손가락 끝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돈이 귀가한 이상, 그는 또 옆방 문으로 내 침실에 드나들 것이다. 소리도 없이 날렵하게 비쿠냐(야생 라마)의 모커 융단을 가로질러, 실내복을 벗어 던지고 내가 몸을 가리고 있는 이불을 확 걷어치울 거야…
퍼시파는 돈이 오기를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숙한 아내답게 현관에 나가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현관에서는 칼멘테이러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띠고, 퍼시파가 지진이 일어났던 날 밤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지 들어보려고 기다리고 있을 테지.
"마귀 같은 노파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퍼시파는 진심으로 이 노파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돈을 독차지하고 싶어하는 것도, 필사적으로 돈의 명예를 지키려고 하는 것도, 같은 라틴 인이고 게다가 소녀 때부터 저택에서 살며 쭉 그를 섬겨 왔기 때문일 것이었다.
만일 돈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세상없어도 영국 아가씨여야 한다면, 어쨌든 돈은 '남자 중의 남자'이므로 노파도 납득할 것이다. 하지만 노파는 이번 퍼시파의 선택에는 찬성할 이유가 없으므로, 검은 뱀처럼 두 사람을 떼어 놓을 격심한 대립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돈은 다른 영주들처럼 라틴 인 애인을 거느리게 되고 영국 아가씨를 보기좋게 골탕먹일 수 있을 것이다.
칼멘테이러는 퍼시파가 교만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 의사를 결정할 권리를 가지는 것은 남자뿐이고, 여자는 조심스러워야 하며 남자 눈에 띈 것을 기뻐해야 한다고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비참한 꼴이 되는 퍼시파를 보고 싶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퍼시파는 여기에 남아 돈과 단둘이 인사를 나누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살구색 드레스를 입고 퍼시파는 이 재회에 몸이 굳어져 있었다. 프릴이 달린 시폰 드레스는 그녀의 살빛에도, 가냘픈 목덜미를 드러내는 머리 모양에도 잘 어울렸다. 입술연지를 조금 바르고 향수를 약간 뿌렸을 뿐 화장다운 화장은 하지 않았다.
돈은 열흘 동안이나 내 곁을 떠나 있었는걸. 쓸쓸한 심정이었다면 그날 밤의 일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살며시 관자놀이를 만져 보았다. 상처는 많이 나았지만 돈은 자기 소유물에 상처가 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 성격일 것이라 싶었다. 금이 간 포도주 잔을 싫어하듯이, 상처가 난 여자는 매우 싫어할 것이 틀림없었다. 완벽한 것만이 돈의 눈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퍼시파는 등나무 의자에 걸터앉아서 태연한 듯한 표정으로 다리를 포갰다. 그러나 명치 근처에서 신경이 쿡쿡 쑤시는 것을 느꼈다. 다시 가까이에 돈이 있다고 생각하니 차분히 그를 마주볼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았다. 돈은 내 몸을 구석구석 훑어보고 애무도 없이 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었다.
라임 그린의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태양을 향해 눈을 감았다. 돈이 왔을 때 졸린 시늉을 할 생각이었다. 돈이 저택에 돌아와도 뭐 하나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처럼.
매미조차도 조는 열대의 오후에 정적이 찾아들고 있었다. 벽을 뒤덮은 프랜지파니의 신비로운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신전의 꽃, 그리고 사랑의 꽃.
퍼시파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돈이 귀국하기 전에 멕시코에서 도망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여권을 손에 넣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날 밤, 책상에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기를 빌면서 퍼시파는 돈의 사무실 앞에 섰었다. 그러나 놀랍고 화나게도 아예 방문에 자물쇠가 잠겨 있어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설 수조차 없었다.
그는 내가 여권을 찾아내려고 하지나 않을까 의심하고 손을 쓴 것이 분명해. 문을 꽝꽝 두드리고 큰소리를 지르며 발로 마구 걷어차고 싶었다. 나를 죄인으로 다룰 뿐 아니라 신용할 수 없는 어린아이 취급을 하다니. 하지만 여권만 손에 넣으면 도망을 갈 생각으로 있다고 그가 의심하는 것은 틀림없다…
손이 저절로 프랜지파니 쪽으로 움직여 가서 조그만 별 부스러기 같은 꽃을 잔인하게 비벼 으깨었다.
무의식적으로 돈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몸이 굳어져 그대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림자가 눈꺼풀 위에 떨어지고, 돈이 바로 가까이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돈은 한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
악마 같은 인내로 내가 겉으로 꾸민 냉정을 잃기를 기다리고 있군. 긴 침묵에 신경이 지쳐 왔다. 더 이상 기묘한 비웃음의 눈길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돈은 퍼시파가 잠이 깨어 있는 것도, 이것이 의지의 싸움이라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퍼시파는 마음속 밑바닥까지 꿰뚫어보는 돈의 자력있는 시선을 분명하게 느끼고, 그가 손가락 하나 댄 것도 아닌데 눈을 뜨게 되었다. 돈은 어둠의 세계에 싸여 있어서 눈의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태양을 등지고 서 있기 때문이었다.
돈은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먼저 입을 떼어야지. 무슨 말을 해야지. 돈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건네기는 비교적 쉬웠다.
"잘 다녀오셨어요?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아요."
돈은 거친 말을 다루는 인디언처럼 햇볕에 그을어 있었다.
"일은 잘 되셨어요? 재산이 더 불어나겠지요?"
속으로 자기의 경박한 말에 만족하였다. 그러나 금방 몸이 움츠러들고 말았다. 갑자기 돈이 상체를 수그려 퍼시파의 손목을 잡아 일으키고는 뚫어지게 표정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퍼시파는 새침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고 도전하듯이 돈을 되쏘아보았다. 나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미리 변명을 할 생각도 없었다.
"퍼시파, 비행기가 추락이라도 해서 내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아 실망이겠지?"
천천히 말하면서 돈은 프랜지파니의 내음이 배어 있는 그녀의 손을 입술로 가져갔다. 하나하나의 손가락에 입술이 기어다녔다. 콧방울이 씰룩이더니 돈은 갑자기 퍼시파의 손바닥을 자기 얼굴에 대고 체온으로 더 강해진 꽃내음을 가슴 가득 들이마셨다.
"단 한 시간이라도 쓸쓸하게 느꼈기를 바라는 것은 뻔뻔스러울까?"
손바닥 속에서 돈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그리운 감각이었다. 이 뜨거운 감각이 짜릿한 전율이 되어 몸안에 퍼져 흐르기 전에 퍼시파는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돈은 와락 퍼시파의 허리를 잡더니 가뿐하게 끌어당겨 버렸다.
걸을 때도, 말을 탈 때도, 방으로 들어올 때조차 돈은 생명력이 넘치고 온몸을 알맞게 조절하는 느낌이었는데, 이 난폭한 한순간만은, 겨우 일이 초 동안이지만 돈의 뒷덜미에서 발끝까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전율이 스치는 것을 퍼시파는 눈치챘다. 돈은 퍼시파를 꼭 끌어안고 얇은 시폰 드레스를 통해서 가냘픈 육체를 구석구석 감상하는 것 같았다.
돈의 우람한 가슴에 끌어안기면서 퍼시파는 자기가 돈의 생각대로의 틀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찰흙처럼, 돈이 생각하는 대로의 틀에 끼워 넣어져서 나는 장차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돈의 일부가 되어 버릴 것이다…
"싫어요!"
홱 얼굴을 돌렸다. 누구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이 사람의 힘에 꺾일 게 뭐야. 더구나 나에게 대해서는 그 힘에, 거친 정열이 섞인 욕망까지 더해진다. 그리고 정열을 눈부신 것으로 바꾸는 저 사랑의 번득임도 없이 그저 어둡고 비밀스런 곳으로 몰고가 버릴 뿐이었다.
"싫어요, 당신에게 키스할 수 없어요."
마치 갈등을 고백하는 듯한 말투였다. 돈이 주는 것은 정열밖에 없다. 나는 그런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야, 그것만으로는 싫어.
"그럼 나에게 키스 못할 이유라도 있어, 퍼시파?"
돈은 커다란 손으로 퍼시파의 턱을 잡고 무리하게 자기를 정면으로 쳐다보게 만들었다. 그의 검은 눈망울에는 뜨거운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슨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라도 있소? 자기 스스로가 부끄러울 만한 일이라도 일어났었소? 자아, 왜 고백하지 않지? 도대체 무슨 일을 했소? 값진 유리 그릇이라도 깼소, 아니면 식당의 페르샤 융단에 잉크라도 쏟았소?"
돈은 퍼시파를 비웃었다. 사실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고 약은 심문자같이 굴었다. 증오에 불타면서 퍼시파는 돈에게 손톱을 세웠다. 그러나 뼈가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겨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얼굴까지 손을 가져갈 수가 없었다.
"당신은 팬 페리스를 다그쳤죠? 그래서 그 일을 냄새 맡은 거예요. 그날 밤 난 시내에 나가서 하룻밤을 묵은걸요. 나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랬는데, 왜 당신은 지금 화를 펄펄 내고 계시죠?"
"아니, 그렇게 격렬하고 강한 감정이었다, 그런 말이야? 당신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고? 그날 밤의 일이 그렇게 컸어?"
악마와도 같은 형상을 하고 말했다. 그를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낀 일은 처음이었다. 퍼시파는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길에 대해서 알고 있었군! 도대체 돈이 어떻게 해서 그것을 알았을까?
그 다음날 아침에 택시를 부를 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었다. 길이 근무처에서 전화로 불러 주었고, 퍼시파는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날 본 사람은 없었다. 그때 퍼시파는 갑자기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분명 누군가가 광장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시내에서 빠져 나온 것만 안심이 되어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날 아침 한 남자가 광장에 있었다. 깡마르고 얼굴색이 안 좋은 멕시코 인으로 산적같이 수염을 기르고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퍼시파는 가만히 남편을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잡고 있어―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거야. 변명할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이렇게 되면 변명할 수밖에 없어. 돈의 표정은 마치 퍼시파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팬 페리스에게 이미 들으셨지요, 내가 시내에 나갔던 날 지진이 있었다는 것은?"
될수록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야 집에 돌아온 일도요? 그래서 당신은 내가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다고 믿고 계시지요?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어요, 세뇨르. 정말예요. 물론 쇼핑하려고 갔었어요. 멋있는 정원을 낀 집들이 늘어선 모퉁이를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려서 난 무서워서 가까운 어느 안뜰로 뛰어들었어요. 거기에서 쓰러지면서 이마를 돌부리에 찧고 의식을 잃었어요, 세뇨르. 그 집 사람들은 참 친절해서 밤새도록 날 간호해 주었어요. 게다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통에 어떻게 밖으로 나올 수가 있어야지요. 이것이 진상의 전부예요."
"아아, 물론 지진도 사실이고, 상처도 사실이고말고."
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퍼시파의 이마를 힐끗 보았다.
"당신은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그것은 하인들도 보았으니 말이야. 그러나 하인들이 보거나 듣지 못한 일이 있단 말이야. 당신은 그날 밤 내내 미국 청년과 함께 있었어. 보라구, 얼굴에도 딱 씌어 있군. 이제 생각이 나는 모양이지! 그 녀석은 시내에서 일하고 있지? 금발이고, 계집아이들이 좋아할 반반한 얼굴을 하고, 더구나 속 편한 생활을 하고 있어. 우리가 한번 바닷가에서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당신은 거짓말을 했지? 낯선 사람인 듯한 시늉을 하고 있더니, 그때 다시 만날 약속을 했었나. 내가 등을 돌리자마자 바로 만나자고? 그 녀석의 품안에 있는 것이 내 팔에 안기는 것보다 훨씬 좋단 말이야, 퍼시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난 벌써 짐작하고 있었어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면서 숨이 멎을 것처럼 죄어대고 있는 두 팔에서 벗어나려고 격심하게 버둥거렸다.
"한데 길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지요? 온 시내에 당신의 스파이가 쫙 깔려 있어요? 분명 그날 아침 어슬렁거리는 남자 하나를 보긴 했지만…"
"기가 막히게 매력적인 길 하워드에게 위안받은 이튿날 아침 말이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세요!"
냉혹하고 어두운 얼굴에 대해 퍼시파는 눈을 감았다. 문득, 돈이 두 손으로 자기의 목뼈를 부러뜨린들 별수는 없다 싶었다. 그녀는 조용하게 고통이 오기를 기다렸다. 돈은 얼마든지 냉혹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
길 하워드는 날 무척 좋아했고 나와 정사를 가지고 싶어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이상의 깊은 관계를 가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길은 돈이 이미 손에 넣은 것 내 육체나 깨끗한 머리칼이나 차갑게 빛나는 아름다운 용모를 좋아할 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것을 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걸! 퍼시파는 머리를 번쩍 뒤로 젖혔다. 마치 목을 내밀듯이. 생각한 그대로 돈은 두 손으로 그녀의 가냘픈 하얀 목을 붙잡았다. 노려보는 검은 눈이 위험스런 빛을 띠고 있었다.
"그렇고말고, 당신의 목을 부러뜨려 주겠어."
오싹 소름이 끼치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내가 어떻게 그 미국인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지 가르쳐 주겠어, 호기심 때문에 안달이 나서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당신은 따뜻하게 마중도 나오지 않았어. 그래서 사무실로 들어가, 내가 없는 동안에 온 편지를 훑어보았어. 많은 편지 속에서 눈길을 끈 것은 형편 없는 오자투성이의 편지였어. 호기심에 봉투를 뜯어 보니, 전에 내 마굿간에서 일하던 남자한테서 온 것이었어. 그 녀석은 이렇게 썼어― 내 아내가 시내의 보석가게에서 일하는 길 하워드란 미국인과 잔 일이 있다고 말이야. 당신네 두 사람이 가게 가까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뒤를 따라 가 보았더니, 큰길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하워드의 아파트로 들어가더래. 그때는 당신이 다른 보석을 보러 거기까지 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거야. 이튿날 아침 거리의 광장에서 또 당신을 보았다, 그 말이야. 즉 녀석의 말로는 두 사람은 한몸이 되었다는 거야.
이런 기회를 잡은 그 녀석은 생각한 거야, 내가 바람 피우는 아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싫다면 그만한 돈을 치러야 한다고 말이야. 보라구, 퍼시파, 힘든 일을 하고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남자가 그런 편지를 보면 얼마나 타격을 받게 되는지 알기나 해? 정말 기분좋은 환영이군! 키스 같은 것보다 훨씬 나아. 안 그래?"
퍼시파는 겁을 먹고 돈을 쳐다볼 뿐이었다.
"협박이군요? 그 남자가, 나를 본 그 남자가 협박을 해왔어요? 수염이 나고 깡마른 그 남자가요? 아아, 정말 속상해 죽겠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세뇨르. 난 길하고 자지 않았어요! 아파트를 나오려고 했을 때, 지진을 만나 땅 위에 내던져져 이마를 다쳤어요. 길은 나를 돌봐 주었어요. 그런데 폭우가 쏟아졌어요! 그러니 길의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지 뭐예요. 길은 내게 손도 대지 않았어요! 그랬다 해도 내가 그대로 내버려 두었겠어요? 난 그런 여자가 아니예요. 그건 누구보다도 당신이 잘 아시지 않아요? 세상에 내가…"
"응, 알고말고."
퍼시파의 목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돈은 고개를 수그리고 그녀에게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떼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아름다운 꽃처럼 반쯤 벌어진 퍼시파의 입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길의 아파트에는 뭐하러 갔었지, 퍼시파? 길은 젊고 기운이 넘치는 남자란 말이야. 여자가 꿀같이 달콤한 눈에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입술을 하고 남자를 따라가면, 정열에 넘쳐서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하는 것으로 남자가 생각해도 어쩔 수 없잖아? 그 녀석이 당신에게 손은 내밀지 않았다 해도, 그 녀석이 애를 태우는 꼴을 보고 당신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걸? 사실은 그 녀석이 덤벼드는 것을 피하려다가 걸려서 넘어진 것이 아니오?"
퍼시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그 점은 맹세코 길 탓이 아니예요. 길은 친절하게 해주었을 뿐이에요, 이마를 씻어 주고 하면서요. 그는 완벽한 신사였어요."
"알았습니다."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길이 차가운 얼음의 처녀를 붙잡기는 했으나, 손도 대기 전에 당신이 몸을 뒤로 뺀 셈이군. 정말 용기있는 남자야, 당신도 인정하듯이!"
돈의 눈에 쓴웃음이 떠돌고 있었다.
퍼시파도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그 비열한 편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지요? 그 마부는 당신에게 보복을 하려고 나를 미끼로 삼을지도 모르지 않아요."
"그렇지."
돈이 겨우 퍼시파에게서 두 손을 뗐다. 하얀 제복의 하인이 음료를 얹은 쟁반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하인은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의 테이블 위에 그것을 놓았다. 돈이 마실 것을 만들기 시작하자 퍼시파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돈이 협박을 받다니, 쇼크였다. 더구나 완전히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으니…
"생갈리애를 들겠소?"
쟁반 위에 루비 빛깔의 생갈리애의 주전자가 있었다. 포도주와 꼬냑에 저민 과일과 시나몬을 넣고 소다수를 탔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스페인 풍의 음료수였다. 더운 날에는 더욱 맛이 있을 것이다. 퍼시파는 비로소 자기의 목이 마름을 느꼈다.
"네, 부탁해요."
수그린 이마 밑으로 남편을 쳐다보며 말했다. 협박장 때문에 불같이 화를 낼 만도 한데 남편은 지금 태연하게 퍼시파에게 생갈리애를 따라 주고 자기가 마실 것도 만들고 있었다.
"이것으로 당신의 초조한 신경도 가라앉을 거야."
돈은 옆의 등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천천히 다리를 뻗으며 말했다.
"고마와요."
차가운 음료수를 음미하며 마셨다.
"하지만 어떻게 하실 생각이지요, 세뇨르? 그 편지에 대해서 그저 모른 체할 수만도 없지 않아요!"
"글쎄, 그 야비한 자식을 만나 감옥에 처넣겠다고 협박을 해야겠군. 마침 그 녀석에 관해서 한두 가지 알고 있는 일도 있고, 경찰에 잘 아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야. 그 악당도 거기까지 각오하고 덤빈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소문만 나도 상처를 받게 돼요. 그의 말을 믿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 그의 요구를 거절하시면 그는 틀림없이 사람들에게 지껄일 거예요."
"나한테서는 돈 한푼 받아낼 수 없어. 공갈에 돈을 내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거야. 당신은 방금 가책받을 일은 없었다고 분명하게 맹세했고, 나도 당신을 잘못 보았다고 생각되지 않아. 남편인 나도 당신을 안을 때는 언제나 강간하는 기분이 드는걸. 당신은 그만큼 본질적으로 정숙하다는 생각을 난 부정할 수 없어. 깨끗한 말은 못되지만, 내 뜻은 알겠지?"
"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비록…"
"퍼시파, 우리는 이 문제로 여러 번 다투었기 때문에 싫증이 나고 있어. 당신은 나를 미워하고 있어! 그렇지? 당신은 자기 의사에도 없는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나는 언제나 당신의 의사를 거스르고 당신을 품에 안게 되지. 그러니 당신의 인내는 성인과도 같고, 난 언제나 악마에 가까운 존재가 되고 있어. 안 그래? 생갈리애의 맛이 어때, 달콤하고 차갑지?"
"좋아요."
돈이 자기를 빗대어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어땠어요, 즐거웠어요?"
"말을 많이 탔지. 남 아메리카의 목동들이 조련한 말은 정말 좋았어. 당신에게도 주려고 암말을 망아지와 함께 사왔어. 아름다운 말이야. 배로 실어 오니까 이삼 주가 지나야 도착할 거야."
이삼 주가 지나야라니! 비위가 뒤집힐 것 같았다. 돈의 말투로는 두 사람 사이가 어떤 상황에 있든 이 결혼 생활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라는 말 같았다.
"왜 그러지? 당신은 말타기를 좋아하고, 보기 드문 말을 독차지할 수 있어. 비단같이 새까맣단 말이야, 퍼시파. 당신의 하얀 피부가 더욱 돋보일 거야.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프릴이 달린 라틴 풍의 드레스도 잘 어울리지만."
검은 눈이 퍼시파의 발등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다시 목덜미로 서서히 훑어 올라갔다. 퍼시파는 벌떡 일어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열심히 누르고 있었다. 열흘 간의 독신 생활을 보낸 뒤에 돈이 쏟아 놓을 거칠고 격렬한 정열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은, 돈은 다른 여자의 품안에서는 조금도 정열을 불태우는 것 같지 않은 것이었다, 마치 퍼시파가 길 하워드의 포옹에서 편안함을 찾아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돈은 내 혈관의 구석구석까지 피를 치닫게 할 만큼 지금도 나에게 욕망을 가지고 있어. 심장이 쿵쿵 뛰고 금방이라도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았다. 두 손으로 차가운 생갈리애 잔을 꼭 틀어쥐었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 않는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남편이 돌아온 것과 협박장이 날아든 것이 얽혀서 자기를 약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러니 만일 돈이 두 팔로 자기를 번쩍 안아들어 어둠침침하고 담배 냄새가 스며 있는 그의 침실로 데리고 간다 해도, 이제는 다른 때처럼 버둥거리고 저항할 힘도 없게 되어 버린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돈은 라이터로 궐련에 불을 당겼다.
"지금은 당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니까. 기분을 편안하게 가져, 퍼시파. 나는 담배나 피우고, 정열적인 연인 같은 행동은 하지 않을 테니까. 나에 대한 당신의 쌀쌀한 혐오감은 나의 기분에 따라 내 피를 활활 불태우기도 하고 차갑게 식혀 주기도 하지."
돈은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고 의자 쿠션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는 테라스로 나오기 전에 저고리를 벗었기 때문에 줄 무늬가 든 갈색 비단 셔츠 바람이었다. 돈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크림빛 넥타이를 늦추었다.
다른 남자가 그랬다면 무심히 넘길 동작도 돈이 그렇게 하면 금방 관능적인 위험이 느껴지니 웬일일까? 퍼시파는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돈이 방으로 들어오기만 해도 공기가 팽팽해져 버린다, 돈이 가진 무슨 자력과 같은 것이 작용이나 하듯이.
소년 시절에 돈은 아마 넓은 초원을 기운차게 뛰어다니는 짐승처럼 난폭했고 엉뚱한 일만 저지르고 다녔던 것이 아닐까? 돈이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는 그의 부모에게도 그 소년은 역시 두통거리가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그를 악마라고 이름지었다. 굉장히 거친 아들이었던 모양이었다.
혹은 그런 돈의 어머니인 사람이니까, 자신이 야성적이고 아름다운 여자였으므로 성인다운 데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아들을 자랑으로 생각했을까? 그럴지도 몰라. 칼멘테이러나 하녀들이 그를 무엇보다도 진짜 남자로, 무서움을 모르는 남자로 찬양하는 걸 보아도 알 수 있어. 지배받기 좋아하며, 냉대받지 않는 한 모든 것을 남자에게 내주어 버리는 특성은 라틴 여자들의 골수에 박힌 성질인 모양이었다.
퍼시파는 멕시코에서의 복잡한 생활에 한숨이 나왔다. 마커스가 자기를 위해서 꾸며 주었던 옛날 식의 단순한 생활은 이제 다시는 맛볼 수가 없었다.
무엇이나 다 꿰뚫어볼 듯한 눈길로 돈은 나른한 표정의 퍼시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퍼시파를 암호랑이처럼 다루어 주면서도 기어이 날카로운 발톱을 뽑아 버리려고 결심한 소유주 겸 조련사의 눈길로.
돈은 서른두 살이었다. 한창 나이에 결혼한 셈이지만 그래도 몇 명의 여자쯤은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완벽한 사랑은 하나뿐이었다 할지라도.
난 그에게 있어서 막간의 여자와 같은 거야. 다른 여자들과 피부색이 다른 데다가 그에게 차갑게 대하기 때문에 도리어 위대한 세뇨르의 욕망을 돋구고 있을 뿐이야.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애정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오래갈 리가 없어.
사랑이 없는 미래에 몸을 내맡기느냐, 아니면 어떻게 교묘한 수법을 생각해 내어 국경을 넘어갈 수 있는 여권을 손에 넣느냐, 취할 길은 둘 중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다.
퍼시파는 흠칫했다. 돈이 몸을 앞으로 내밀고 거무스름한 손으로 퍼시파의 손목을 잡은 것이다.
"당신의 눈에는 괴로움이 넘쳐 있어. 마음이 편안하지도 채워지지도 않은 것 같아. 당신은 이곳을 새장처럼 느끼고 있어. 언제나 내가 손에 채찍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 모양이야. 당신은 이곳에서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단 말이야, 퍼시파?"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요."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완전한 영국인이에요. 그러니 태양에 퍼석퍼석 말라 있는 당신의 땅에서는 도저히 뿌리를 내릴 수 없어요, 세뇨르. 외국인이고 영국인이며, 쌀쌀맞고 한 조각 정열도 없는 상대에게 당신이 왜 집착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라틴 여인을 부인으로 거느리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요? 황홀해질 텐데요, 당신의 지배에도 당신의… 당신의…"
"입으로 말할 수 없소, 겨우 네 글자의 말인데?"
"당신의 Lust(정욕)에도요."
비웃는 얼굴을 노려보면서 퍼시파는 내뱉듯이 말했다. 돈의 손길이 그녀의 허벅지에 와서 천천히 미끄러지자 희미하게 몸이 떨렸다. 돈은 새하얀 이빨을 보이며 싱긋 웃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깜짝 놀랄 일이 생길 거야, 퍼시파. 지금은 그저 남 아메리카의 기념품이라고 말해 두겠어. 그것 때문에 난 이틀 동안 일부러 리마까지 갔다온 거야, 당신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고. 당신은 어떻게 나올지 짐작도 못할 여자인걸. 만지면 보드라운데 이해하기엔 너무 딱딱해."
돈은 가만히 손을 놓았다. 손의 무게가 감각을 또렷이 남겨 놓았다. 그것은 그녀가 돈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낙인보다 더 뚜렷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점심은 여기에서 먹고 싶은데."
돈은 궐련의 불을 비벼 꼈다.
"착한 아씨가 주문해 주지 않겠어? 그동안 나는 샤워를 한바탕 하고 옷을 갈아입겠어. 스테이크와 머스크멜론이 좋겠다고 전해 줘. 그리고 카디스 산의 빨간 포도주와 치즈, 찐득찐득한 스페인 산 치즈와 올리브를 먼저 먹겠다고."
"알았습니다. 어르신네."
퍼시파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남편의 가늘게 뜬 눈에 비웃음 같은 야릇한 번득임이 떠오른 것을 보자, 얼른 일어서서 프릴의 옷자락을 펄럭이며 도망쳐 버렸다. 반은 소녀처럼 당황하고 반은 남편의 몸에 타오르는 욕망을 느낀 아내처럼 마음이 동요되면서. 퍼시파는 안뜰로 통하는 나선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돈의 너털웃음이 언제까지나 뒤쫓아오는 것 같았다.
돈은 새우빛 비단 셔츠에 딱 붙는 검은 바지를 입고 점심을 먹으러 테라스로 나왔다. 차가운 샤워를 하자 기분이 상쾌해진 것 같았다. 퍼시파도 요리인을 만난 뒤에 세일러 스타일의 곤색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있었다. 머리는 뒤로 모아 가죽끈으로 묶고 입술연지도 다 닦아냈다. 돈이 냅킨을 펴면서 눈썹을 꿈틀하고 치켜올렸다.
"아니, 왜 또 그런 충충한 옷으로 갈아입었지, 여보? 당신의 얕은 마음속을 환히 들여다보는 데는 천리안도 필요없어. 사내아이 같은 옷을 입어 남편의 정열을 식힐 속셈이지만, 당신의 날씬한 몸의 매력을 숨기자면 스페인의 갑옷 정도는 입어야 할걸. 저택의 낡은 쪽 아래채에서 몇 번 본 일이 있지? 한번 그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당신을 괴롭힐 것은 쥐새끼밖에 없겠군."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분이에요, 세뇨르. 쥐라면 내가 비명을 지를 줄 아세요?"
"천만의 말씀. 참 이상한 일이지만 당신은 남편에 대해서만 비명을 지르지."
돈은 멜론에 설탕을 조금 뿌려서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돈은 어쩐지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남모르는 즐거움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참 맛있는 스테이크군. 남자들은 아무리 좋은 요리라도 다른 집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놓고 즐길 수가 없어. 정말 자기 집보다 더 좋은 곳은 없어. 포도주를 좀더 들겠어, 퍼시파?"
"조금만 주세요, 세뇨르."
"포도주가 좋지? 내가 스페인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어? 언젠가 그 유서 깊은 나라로 함께 가보자구."
"어마, 나도 스페인에 가본 일이 있어요. 마커스 아저씨가 이 년전에 데려가 주었어요."
"후견인과 가는 것과 남편과 가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어? 나와 같이 가야 진짜 스페인을 볼 수 있어. 여행객들에게는 금지되어 있어서 구경할 수 없는 것들을 말이야. 이베리아의 해안을 따라 친척도 몇 집 있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야. 담을 둘러친 안뜰이 얼마나 로맨틱하며 얼마나 사우다데에 가득차 있는가를."
"사우다데요? 그게 정확하게 말하면 무슨 뜻이죠? 스페인 말은 가끔 그렇던데, 그 말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어요?"
"우리 스페인 사람이나 알지. 그 말은 노스탤지어, 꿈, 희미한 추억이라는 그런 뜻이야. 이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동경 속에 있는 것이라고밖에 번역할 수 없어. 현실이 내리쬐는 태양이라면 사우다데는 은은한 달빛이야. 달빛이 사람을 속이듯이 추억도 사람을 속여.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만 말이야. 스페인 사람으로서는 사우다데는 다시 없는 고뇌이자 환희이기도 해. 사우다데가 없으면, 혹은 그것을 느낄 수 없으면 로맨스조차도 아픔과 매력을 잃게 되지."
"당신이 현실과 동떨어진 덧없는 것을 믿는다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어요. 당신에겐 로맨틱한 분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는걸요."
"그것은 다시 말하면 당신이 한번도 나를 알아보려고 한 일이 없다는 이야기야."
"아니예요!"
고개를 흔들고 반론을 펴려고 한 순간, 돈의 침실 옷장 서랍 속에 있던 사진이 생각났다. 먼 옛날에 죽어 버린 어느 여자에 대한 사우다데. 말이 입 속에서 스러져 버렸다. 물론 돈의 말이 옳았어. 난 돈의 내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돈이 내게 주는 것은 그저 다부지고 눈부신 육체 속에 숨어 있는 정열뿐인걸.
돈에게도 누구에게 나누어 줄 자기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건 내가 낳을지 모를 어린아이에게 주기 위해서 따로 두었을 거야. 돈은 여자에 대한 소유욕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이를 더 사랑하는 사람임이 틀림없어. 비록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냉혹한 일면이 있기는 하나, 동시에 라틴 사람다운, 어린아이에 대한 애정도 가지고 있으니― 몸은 바로 옆에,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음을 괴로와하면서도 보호자로서 남편의 마음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난 손톱처럼 딱딱한 인간이고 달빛이나 혼의 마술을 절대 감지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었지? 응, 아마 당신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지. 혼은 잡을 길이 없는 것이고, 지금 눈앞에 아름다운 머리를 태양에 반짝이며 앉아 있는 당신을 바라보면서 현실의 쾌락을 맛보고 있는 것은 남자로서의 나의 현실적인 쪽이니까… 당신에 대해서 말하겠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눈을 깜박거리지? 결혼한 지 두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부끄러워?"
"부끄럼이 없어지자면 여러 해가 걸릴 거예요. 당신의 눈초리나 말하는 법은 특별하거든요. 지금까지 내가 익숙해 온 것과는 전혀 딴판이에요."
"딴판이어야지. 스페인 인 남편하고 사는 것이 영국인 후견인과 사는 것과 같아서야 되겠어?"
"글쎄요, 마커스 아저씨는 나를 지켜 주었지만, 당신은 나를 소유할 뿐이에요. 당신은 아저씨와 달리 나의 마음엔 전혀 관심이 없지요, 세뇨르?"
"나는 달라, 퍼시파. 그저 재미있는 책이나 그림에 대한 이야기나 하기 위해서 당신과 결혼했다면 나는 얼마나 불쌍한 남자가 되겠어. 당신은 그것을 바란단 말이야? 그것은 결혼생활로서도 자연스럽지 못할 뿐 아니라, 아내의 침실에서 따돌려진 남편이라는 것은 부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는 거야. 영국에서 만났을 때 당신은 내가 열두 살이나 위라고 해서 예순 살의 노인처럼 행동할 줄 알았지?"
"난 그런 일은 한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어요."
퍼시파는 눈길을 떨구었다. 화제가 이런 쪽으로 돌아가면 언제나 칼을 몸에 들이대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그때 너무 큰 쇼크를 받았다는 것은 당신도 아실 거예요, 세뇨르. 당신은 그 틈을 노렸던 거예요. 만일 당신의 프로포즈를 깊이 생각할 시간이 있었던들 난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마커스 아저씨가 당신을 나의 남편으로서 인정했다고 하신 말씀, 정말로 정직했다고 하실 수 있어요?"
"나는 악덕이 많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미덕도 있어. 그 미덕의 하나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 난 스톤힐 저택에서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 그래서 당신의 후견인에게 결혼을 신청했더니, 그 파티에서 돌아올 때 그는 내 신청을 받아들이도록 당신한테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어. 마커스는 내가 땅이며 저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기가 죽으면 자기의 땅도 집도 조카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가 무엇보다도 염려한 것은 자기가 죽은 뒤의 당신의 처신 문제였어. 그렇기 때문에 마커스는 나에게 될수록 당신한테 따뜻하게 해주라고 부탁까지 했어. 당신은 요즘 세상의 아가씨들과는 달리 온실의 꽃처럼 성장했다고 경고까지 해주었어."
"하지만 당신은 그 경고를 무시하셨어요."
"내가? 당신의 후견인이 깜박 잊고 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야. 당신은 혀가 날카로와 남자와 말다툼을 하는 버릇이 있다는 걸 말이야. 나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못해. 당신이 겉보기처럼 귀여운 천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들 거기에 맞추어서 당신을 다루었을 거야. 나도 평범한 사람이니까 말이야. 당신은 날 돈 데블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칼멘테이러한테서 들으셨지요? 그녀는 자주 내 주위를 살피고 다니면서 걸핏하면 당신한테 일러바쳐요. 내 편은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 나의 영국인다운 얼굴 생김이나 사고방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분명히 라틴 인 여주인을 바라고 있어요, 세뇨르. 도대체 당신은 왜 같은 나라 아가씨와 결혼하지 않았지요?"
"왜라니, 이미 당신과 결혼했는걸."
"그 말투는 나나 마찬가지로 당신도 후회하고 계신 것 같군요."
"그것 정말이니?"
난데없이 어디서 그런 목소리가 날아왔다.
"너희들 단둘이 있을 때는 항상 이렇게 지내는 거니?"
퍼시파와 돈은 거의 동시에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큰소리로 외치며 돈이 벌떡 일어섰다.
"그럼 벌써 우리 내막을 알아채셨군요! 단둘이 있을 때 우리가 사랑의 새처럼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다는 것도 눈치채셨지요?"
"디아브로, 사랑의 새도 새장에 같이 넣어 보아라. 죽을 때까지 서로 부리로 쪼아대는걸."
머리를 아름답게 빗어올리고 검정 일색의 차림을 한 조그만 몸매의 여자가 두 사람이 한창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테라스에 나타난 것이다.
퍼시파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여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돈은 마드레시타라고 불렀지… 돈의 가까운 친척은 모두 세상을 뜬 줄 알았는데.
돈이 이야기하던 깜짝 놀랄 일이란 바로 이 완벽한 노부인의 등장이란 말인가? 이분은 함께 차를 타고 왔는데, 돈이 빈정거리며 절을 해보이자 내가 테라스 안쪽으로 도망을 쳤기 때문에 못 본 것이었다.
이렇게 돈의 가까운 친척을 만나는 것은 쇼크가 아닐 수 없었다. 말다툼하는 것을 들켜 버렸으니,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납득시킬 길이 없었다.
"할머니, 제 아내를 소개합니다. 영국인이라 걱정이라고 말씀하신 여자입니다. 과연 그렇지요― 소금과 후춧가루를 같은 냄비에 섞어 놓은 것 같다고 하셨지요?"
"응, 디아브로, 내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기품 있는 부인은 가만히 퍼시파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무척 매력적이군. 너를 만나보니 디아브로가 왜 스페인 인의 양식을 내던져 버렸는지 알 만하다. 소금과 후추는 완전히 섞일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풍미를 빚어낼 것으로 생각되는데. 자아, 내게 키스해 주지 않겠니?"
퍼시파는 테이블을 돌아가서 할머니의 보드라운 볼에 키스했다.
"전 할머니를 뵙게 되어 반가와요, 세뇨라.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돈 디아브로가 할머니를 저택에 모시고 온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마 너를 깜짝 놀라게 할 작정이었을 거야."
노부인은 조금 장난스런 미소를 띠고, 손자가 당겨 주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나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을 테지. 너를 젊고 피부가 희고 세상물정을 모르는 여자라고는 말했지만 눈부신 미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자아, 앉지 그래. 아니, 떨고 있지 않아?"
"네, 그래요."
퍼시파는 슬쩍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태연한 얼굴에서는 무엇 하나 알아낼 수 없었다. 퍼시파는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돈, 나와 결혼한 이유를 뭐라고 하셨지요?
"앉으라구, 퍼시파."
돈은 한 손을 퍼시파에게 대고 의자에 앉혔다. 그도 할머니 앞에서는 퍼시파를 틀어잡거나 하지 않고 바로 손을 떼었다. 하지만 퍼시파는 이상하게도 도리어 자기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아 끌고 싶은 격렬한 충동을 느꼈다.
9
이른 아침의 맑은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시며 퍼시파는 혼자서 이슬이 맺힌 상쾌한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어제는 뜻밖의 하루였다. 돈의 외할머니가 되는 호아키나 카라리스 부인에게 소개된 뒤 한동안 어색한 대화를 예의바르게 계속했다. 그런 뒤 돈이 외할머니의 팔을 잡고 몇 년 만에 찾아온 저택을 안내하러 나가자, 퍼시파는 혼자 남았다.
저녁식사는 셋이서 함께 들었는데, 할머니는 피곤하다며 돈의 부축을 받아 일찍 침실로 돌아갔다. 퍼시파는 홀에서 돈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왠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침대에 들어서도 몸을 굳히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잠을 방해하러 나타나지도 않았다. 잠이 잘 오지 않아서 한밤중에도 몇 번이나 눈을 떴고, 날이 샐 무렵에는 완전히 깨어 버렸다. 그리고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이끌려 정원으로 나온 것이었다.
아침 이슬이 내려앉은 풀잎, 금빛의 꽃받침을 단 백합꽃, 꿀맛에 취해 날개를 팔랑이는 꽃잎 위의 나비, 퍼시파는 이 화려한 자연의 조화를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발을 내딛었다.
성당 쪽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들리는 종소리에 끌려가듯 걷기 시작한 순간, 나비도 휙 날아올라 화려한 날개를 자랑하듯 퍼시파의 앞을 스쳐 날아갔다. 마치 나무에 에워싸인 성당으로 안내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문이 조금 열려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문득 몸이 움찔했다. 돈이 마돈나 상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빨갛게 타는 촛불, 제단을 장식한 백장미. 그렇게 자부심이 강한 머리를 수그린 채 퍼시파가 들여다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발목이 사슬에 묶인 것처럼 퍼시파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두커니 서서 처음으로 보는 남편의 진지한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뿐이었다.
신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은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지고 싶은 것은 서슴없이 빼앗을 뿐이지 절대로 기도 같은 것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되자, 퍼시파는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나무들 사이를 빠져 나가, 돈이 집을 비운 동안 아침식사를 들던 안뜰로 나왔다. 부채꼴을 한 의자에 앉아 젊은 하녀가 커피를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퍼시파는 손을 뻗어 책상 가를 만지다가 얼른 손을 뗐다. 손가락 끝에 피가 스며나와 있었다. 왜 장미에는 가시가 있어서 함부로 찌르는가? 마치 인생의 장미에도 수많은 가시가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것처럼.
퍼시파는 손가락의 피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째서 돈은 옆방의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게 되었는가?
남 아메리카에 있을 때도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열흘 동안이나 혼자서 지내 왔으면서도 완전히 나를 무시하다니. 할머니가 저택에 계시기 때문에 삼가는 것일까? 그 점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조그만 제단 앞에 서 있던 돈의 모습이 확연히 눈앞에 떠올랐다. 장미의 짙은 향기까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여자의 살결처럼 하얀, 추억의… 사랑의 장미.
퍼시파는 문득 숨을 삼켰다. 할머니가 저택에 왔기 때문에 옛날 이야기가 오고갔으며, 그래서 그 여인의 죽음이 돈을 절망의 밑바닥으로 떨어뜨린 것일까? 그 라틴 계 미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
그랬을 거야. 할머니와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돈은 어젯밤에 나와 얼굴을 대할 마음이 나지 않았던 거야. 그 여인이 이 저택에 있었을 때의 일이, 그 여인의 아름다움이, 웃음소리가, 레이스의 부채 너머로 엿보듯 유혹하듯 쳐다보던 눈길이 돈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거야.
돈의 외할머니는 다른 주변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그가 영국인 아내를 갖는 데 반대했다고 하지 않는가. 노부인은 분명 예의바르기는 하지만 조금도 다정한 데가 없었다. 앞으로 같이 지낼 나날을 생각하고 퍼시파는 저도 모르게 입에 물고 있던 손가락을 깨물었다.
돈의 외할머니는 나의 거동을 하나하나 눈여겨 보고 매무새를 꼼꼼하게 뜯어보고는 의견을 말할 것이며, 돈에 대한 태도가 돼먹지 못하고 쌀쌀하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다.
"그런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조그맣게 소리내어 말했다.
"세상없어도 여기를 빠져 나가야지! "
그때 안뜰에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퍼시파는 일어서서 무심코 나무 그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돈이기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고 있었으나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할머니였다.
라틴 계 특유의 조용한, 이편이 당황해 버릴 것 같은 태도였다.
"잘 잤니, 퍼시파?"
그 목소리는 나무랄 데 없이 은근했으나 쌀쌀했다. 비단 스치는 소리를 내고 다이아몬드를 번쩍이며 노부인은 안뜰을 가로질러 천천히 다가왔다. 의상이나 예의도 참으로 고풍스럽고 우아했다. 분명 손자며느리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퍼시파는 가라앉은 기분을 느끼며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돈과 결혼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뇌까린 말을 엿들어 버린 이 스페인 할머니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꼭 누르면서. 노부인으로서도 손자며느리를 만나보기 위해서 멀리 이 아센더 루이로 손자를 따라왔는데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할머니."
퍼시파는 영어로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이곳에 온 지 두 달 만에 스페인 어는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스페인 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사용인들에 대해서 뿐이고 돈이 스페인 어로 말을 걸어와도 반드시 영어로 대답하곤 했다.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을 분명하게 주장할 생각으로.
하지만 돈은 퍼시파가 이미 스페인 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펠다나 베크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침실로 들어온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 멕스코 인 자매는 남자 친구 때문에 늘 서로 아옹다옹하고 있어서 이따금 퍼시파에게 조언을 청하러 왔었다. 이미 결혼한 여자로서 남녀 관계에 대해서 자기네가 모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런 때는 돈은 매우 재미있어하며 악마 같은 검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침대의 기둥에 기대어 말하는 것이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너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싶었지."
할머니가 얘기를 시작했다.
"베크라는 아가씨가, 네가 틀림없이 여기에서 아침식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해서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어. 다른 때는 난 이렇게 일찍 일어나지 않는단다. 신문을 손에 들고 침대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를 끌어낼 만큼 너는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도록 해준다고 생각해도 좋은 거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어 반가와요."
마음에 든 손자며느리로서 받아들여지기는 애당초 틀린 노릇이라 이 노부인 앞에서 편한 마음이 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말했다.
퍼시파는 할머니를 위해서 테이블 의자를 끌어냈다. 할머니는 노인답게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어제의 긴 여행으로 이 늙은 몸이 조금 불편하구나. 자, 너도 앉으려무나, 내가 올려다보지 않아도 되게… 라틴 계 아가씨에 비하면 무척 키가 크군. 하긴 디아브로와 나란히 서 있으면 별로 커 보이지 않겠지만 말이야. 디아브로 같은 체격의 남자가 이 에스렐드 루이 집안에는 가끔 태어난단다. 오랜 옛날에 아즈테카의 피가 에스렐드 집안으로 섞여 들어왔기 때문이지. 그 무렵의 귀족은 모두 커서 영민들 앞에서 위세를 떨쳤다는구나. 너도 디아브로의 속에 정말 순수한 라틴 인다운 불길이 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니?"
"분명히 영국 남자와는 달라요."
퍼시파는 둥근 테이블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테이블 저쪽에는 데이지며 장미며 글라디올러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둑이 보여서, 언제나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길 앞에 앉아 있으니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다르다면 무엇 때문에 넌 스페인 사람과 결혼했니?"
할머니의 솔직한 질문에 퍼시파는, 돈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할머니에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았다. 할머니는 두 사람이 보통의 남녀처럼 만나 구애하고 순서를 제대로 밟아 결혼한 것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퍼시파는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사실을 모두 털어놓고 싶은 불 같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분은 추억과 환상에 기대어 살고 있는 나이 많은 분이다. 더구나 돈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있다― 자기의 피를 이어받았고 태어날 때 팔에 안은 손자였으니. 돈과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단단히 이어져 있으니 외국 여자 따위가 그 공감과 이해의 줄을 끊을 수 있을 턱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줄을 끊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랑은 너무나 덧없지만 동시에 너무나 귀중한 것이므로 퍼시파 자신이 환멸의 괴로움을 맛보게 해서는 안 된다 싶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어요."
머뭇거리면서 퍼시파가 말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결혼했어요."
"그래서 지금 넌 그처럼 서둘렀던 걸 후회하고 있니? 디아브로는 이상적인 결혼이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난 그것을 곧이들을 만큼 노망하지는 않았어. 그 아이는 도전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은 사내니까 잇달아 아이나 낳고 말 대답 한마디 못하는 여자와 무사평온한 인생을 보낼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난 잘 알고 있어. 넌 석류 같은 사람이구나. 겉보기에는 퍽 귀엽게 생겼지만 딱딱한 껍데기가 있고, 더구나 남자의 이빨 사이에 끼이는 씨를 가득 품고 있는걸. 내 생각이 틀림없어. 디아브로는 너의 껍데기를 벗겨 튼튼하고 새하얀 이빨로 그 씨를 깨물려고 도전하고 있는 거야."
할머니는 온화하게 웃더니 손을 내밀어 반지를 낀 퍼시파의 손을 잡아 꼭 쥐었다.
"너를 멕시코까지 오게 한 건 디아브로의 재산이었니? 유럽 여자들은 퍽 계산속이 빠르다던데. 미국 여자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지만, 현실의 물질을 소유하기를 사랑의 선물을 받기보다 더 중하게 안다는구나. 난 이따금 생각하는데, 북쪽 여자들은 남쪽 여자들이 아직도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을 갑자기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지조 말이야. 몸도 마음도 혼도 말이야. 북쪽 여자들은 몸은 내주지만 쌀쌀해. 그리고 마음은 냉동실에 넣어 놓은 채야. 혹시 너도 그런 여자는 아니냐?"
"아니예요, 저는 절대로 재산을 목표로 결혼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벌컥 성이 나서 말했다.
"아무리 할머니라도 그렇게 말씀하실 권리는…"
"어머나, 있고말고. 디아브로를 사랑하고 그 아이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고 싶은 건 할머니의 권리가 아니니. 너도 알고 있겠지? 그 아이는 지금까지 행복하지를 못했어. 몇 년 전에 그 아이의 인생을 어둡게 짓이겨 버린 사건이 일어났었어. 그랬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멕시코까지 찾아왔단다. 이젠 옛날의 슬픈 추억을 묻어 버릴 수 있게 되었는지, 아니면 뒤틀린 나무로밖에 자랄 수 없는 검은 씨처럼 바람에 날려 다니는 것인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디아브로는 너에게 과거의 얘기를 해주지 않더냐?"
"지금까지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 알고 있어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니?"
할머니는 고뇌를 띤 암갈색의 눈으로 가만히 퍼시파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떠도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아름다움은, 정열과 노여움과 달콤한 슬픔에 익숙해진 모양 좋은 입술에 잘 어울리고 있었다.
"칼멘테이러가 어떤 일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이곳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칼멘테이러는 모르는 게 없어요. 그녀는 제가 라틴 계가 아니기 때문에 저에게 대한 반감을 가지고 일부러 한두 가지 비밀을 가르쳐 주었어요, 육 년 전에 있었던 돈의 불행을 말예요. 돈은 저와 결혼은 했지만, 저처럼 후회하고 있어요. 안 그런 체해 봐야 헛일이에요. 우리가 어제 말다툼하는 걸 들으셨지요?"
"응, 들었어."
"할머니께서 쇼크를 받으셨다면 죄송해요."
"난 별로 놀라지 않았다. 네가 영국인이라고 디아브로한테 들은 순산, 오래된 적끼리 싸움터에서 만났다는 것을 금방 알았거든. 그런 결혼이 잘되어 나가자면 이만저만한 사랑과 관용이 없어서는 안 되지."
"그리고 지금 잘되어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아신 셈이군요."
퍼시파는 시선을 떨구었다. 도마뱀 한 마리가 입에 나비의 날개를 물고 안뜰 타일 위를 쪼르르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오싹 몸이 떨렸다. 아까 돈이 추억에 젖어 있던 그 성당까지 날 안내해 주었던 나비가 아닐까?
돈은 천국을 잃어버리고 지옥에 살고 있었군.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 사랑이 없는 냉랭한 생활이거나, 아니면 벌컥하기 쉬운 사람끼리 격심한 말이나 주고받으며 상처를 주는 생활이거나. 사랑도 싸움도 웃어 넘길 수 있지만 미움은 반감과 고통을 남길 뿐이다.
"음, 아침식사가 왔구나."
할머니가 말했다.
"오늘 아침엔 나도 식욕이 나는구나. 다른 때는 점심때가 가까와서야 식사를 하는데. 무엇을 가져왔니?"
젊은 하녀는 돈의 할머니에게 생기 있는 미소를 보이며 음식을 덮은 하얀 냅킨을 벗겼다. 계란을 듬뿍 넣은, 햄과 향초가 든 톨티자와 갓 구운 빵 등이 있었고, 은주전자의 주둥이에서 향기 짙은 커피의 김이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의 눈이 빛났다.
"모두 맛있게 생겼구나! 이제야 알겠다, 퍼시파. 네가 안뜰에서 아침식사를 드는 이유를. 이렇게 잘 차려 오는걸. 하인들의 감사 표시로구나, 무거운 쟁반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 사람이 있던 무렵에는…"
거기서 할머니는 문득 말을 끊고 조그만 은접시의 뚜껑을 열었다. 잘게 저민 오렌지 위에 신선한 딸기가 얹혀 있었다.
"정말 좋아,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대개는 롤빵과 살구예요, 이따금 무화과를 내오는 때도 있지만요. 오늘은 할머님께서 오셨으니 특별이에요."
"나으리께서도 오늘은 아침식사를 이 정원에서 함께 드십니까?"
빈 쟁반을 가지고 떠나기 전에 하녀가 물었다.
"그런 것 같지 않던데… 말을 타고 계시는지도 몰라. 아까 새벽에 보았을 때 승마바지와 부츠를 신고 계셨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퍼시파는 주전자를 집어들었다. 성당에서 본 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침 햇살이 부츠 끝에 비쳐들고 있었다. 돈의 말은 모두 성질이 거칠어서, 그것을 타자면 힘이 들 텐데도 그는 결코 박차를 다는 법이 없었다.
먼 옛날 죽음의 신이 돈의 사랑하는 여인의 눈을 영원히 감게 했을 때의 이야기로는, 돈은 애마의 숨이 끊어지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고 칼멘테이러는 말했었다. 지금도 역시 좋아하는 사타나스에 올라 대초원을 질주하고 있겠지.
"그이의 커피를 준비해 놓아요, 아마 한 시간 뒤에는 돌아오실 테니까."
"네, 부인. 그럼 친천히 드십시오."
하녀는 플레어 치마를 펄럭이며 떠났다.
"너 정말 스페인 말을 잘하게 되었구나."
톨티자에 후춧가루를 뿌리면서 할머니가 말했다.
"디아브로한테 배웠니?"
"특별히 누구한테 배운 건 아니예요. 저절로 알게 되었어요. 여기에 오기 전에 조금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크림을 치시겠어요, 할머니?"
"고마와. 조금 전에 너는 날 할머니라 불러 주었지? 그게 훨씬 낫구나, 딱딱하지 않고. 디아브로는 너를 뭐라고 부르니? 우리 라틴 사람은 애칭으로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너의 이름은 색다르고 길지 않니? 순수한 영국인의 이름도 아니고."
"네, 신화에서 딴 거예요. 저의 후견인이 지어 주셨어요. 그분은 젊었을 때 고전학자 지망생이었어요. 작가가 될 생각도 했지만 달리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유명한 도박사였어요. 돈이 이야기해 드리지 않았어요?"
"그 아이는 차차 이야기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지."
할머니는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보기처럼 맛도 있군. 그럼 디아브로는 널 뭐라고 부르니? 네가 싫지 않다면 나도 널 그렇게 불렀으면 좋겠는네."
"돈은 지금까지 한번도 제 이름을 줄여서 부른 일이 없었어요."
퍼시파는 스스로도 놀라면서 말했다.
"아마 제 이름이 마음에 든 것 같아요, 아니면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마음에 들었든지."
"글쎄, 어느 쪽인지 모르겠구나."
할머니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순간 그 표정이 돈과 영락없이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빈정거리는 유머도, 퍼시파가 진지해지면 놀리는 버릇도 똑같았다.
"물론 이야기는 아시겠지만, 명부의 왕이 페르세포네라는 아가씨를 신부로 맞이했어요. 페르세포네는 반 년은 명부에서 살아야 하고 반 년 동안만 가족한테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어요."
"하지만 넌 가족이 없다던데… 퍼시파."
할머니의 눈에는 이미 미소가 없었다.
"그리고 넌 그애의 세계에서 떠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일을 했다간 그애는 너를 되찾아올 거야."
"마치 인도의 아내처럼요?"
"그렇지, 아내처럼 말이다, 어리석은 아이처럼이 아니라. 디아브로가 너를 가두어 놓는 것도 아니고, 저택 안에서는 자유롭지 않니? 어디든지 가고 싶은 곳은 갈 수 있지? 하지만 이 지방에는 자기 아내를 그애보다 훨씬 가혹하게 다루는 남자들도 있단다. 그야 디아브로도 결점은 있겠지. 하지만 여자에 대해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 그 아이는 사실 여자의 용모나 감촉을 좋아하지. 하지만 여자는 그저 아이를 낳는 도구일 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너도 그 점에 대해서 알고 있니? 아니면 너무나 쑥맥이라 진짜 남자와 결혼했으면서도 그것조차 모르고 있는 거냐?"
갑자기 할머니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지고 비웃음이 깃들였다. 표 정까지도 퍼시파를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디아브로한테서 네가 젊다고는 들었지만, 난 네가 이렇게 어린 여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그것은 너무 지나친 말씀이에요!"
마치 뺨이라도 한대 맞은 느낌이었다.
"전 잘 알고 있어요. 높은 지위와 권력 있는 돈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멕시코까지 따라왔지만, 그이가 나에게 정말로 바라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경멸하는 손짓으로 할머니는 손가락을 튕겨 딱 하는 소리를 냈다. 반지가 반짝하고 햇빛에 빛났다.
"돈은 여자를 아이 낳는 도구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머니께서는 말씀하셨지만, 돈이 내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아이를 낳는 일뿐이에요."
눈물이 복받치면서 말이 막혔다.
"넓은 영지와 수많은 가축과 멕시코 사용인이 가득차 있는 농장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고 싶을 뿐이에요. 돈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문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아기를 만드는 데 사랑 같은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돈의 욕망을 불타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이제 그만두지 못하겠니!"
노했을 때의 돈과 영락없이 똑같은 손짓으로 할머니는 나이프를 쨍그랑 소리나게 접시 위에 놓았다.
"내 손자를 그렇게 말하다니, 너는 너무나 뻔뻔스럽구나. 도대체 그 아이는 널 어디에서 주워 온 거냐? 여자들이 남자의 말씨를 쓰는 영국의 어느 부둣가에서라도 데려온 거냐?"
퍼시파의 볼에 핏기가 확 몰려왔다. 냉정이나 위엄을 잃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남편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신부의 역할을 불만없이 해내기를 기대하다니, 너무 심한 일이었다. 저택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자기를 경멸하는 노부인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하녀들만은 자기에게 친근감을 보여 주지만, 그것도 나를 진심으로 여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난 어르신네의 규방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사용인들은 모두 무슨 중대한 일이 일어나면 어르신네한테 뛰어갔다. 주방에서 불이 나도, 아이가 마굿간의 문에서 떨어져도 그랬다. 멕시코 인은 금방 당황하지만, 자기네 머리 위에 무슨 사고가 떨어지면 여주인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먼저 주인한테 달려간다. 내가 그런 이름뿐인 여주인노릇을 할 게 뭐야.
퍼시파는 느닷없이 의자를 뒤로 확 밀어내고 벌떡 일어섰다. 얼굴은 창백하고, 크게 뜬 눈은 고통의 샘물처럼 황금색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난 그이의 아이 따위는 갖고 싶지 않아요. 아이를 낳느니 차라리 발코니에서 몸을 내던져 버리는 것이 낫겠어요!"
퍼시파의 목소리가 안뜰에 쩌렁쩌렁 울린 순간, 거무스름한 손길이 드리운 발을 옆으로 확 열어젖히며 부츠와 승마바지 차림의 그가 나타났다. 그 거친 불행한 고함소리를 그가 들었다는 것이 그의 얼굴에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채찍으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그가 맛보았으리라는 것은 씁쓸하게 일그러진 입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시야에 돈의 모습이 잡히자 퍼시파는 핵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방의 복도로 이어지는 바깥 계단을 향해 달렸다, 분노의 화신 같은 무시무시한 얼굴에 더럭 겁이 나서.
저택을 나갈 생각이었다. 세상없어도 이 집을 떠날 작정이었다. 할머니가 와 있으니 돈도 차마 퍼시파를 그녀의 의사를 거스르고 부리하게 붙잡아 둘 수는 없겠지. 두 사람 다 그렇게까지 야만스럽고 잔인하다고 할 수는 없을 거야.
계단까지 뛰어왔다. 돈이 자기가 한 말을 들어 버린 이상 그에게 붙잡히는 것이 무서웠다. 공포가 몰아대는 대로 계단을 뛰어올랐다.
"퍼시파!"
뒤에서 큰소리가 울렸다.
"바보 같은 짓은 집어치워, 목뼈가 부러진다구!"
순간, 망설이기는 했으나 멈추지는 않았다. 돈이 뒤쫓아왔다. 만일 붙들리는 날에는… 싫어! 퍼시파는 소리를 지르며 회랑을 따라 도망쳤다. 안뜰의 타일에 부츠의 굽소리가 울었다. 겨우 옥내의 복도로 통하는 아치형의 입구에 당도했다. 땀이 솟아나 비단 셔츠가 찐득거리며 몸에 달라붙었다.
꼭 한번 뒤를 돌아보았을 때, 돈의 모습은 정말 무서웠다. 마치 여신 레아를 뒤쫓는 군신(軍神) 마르스와도 같이 거무스름하고 소름끼치는 모습이었다. 퍼시파를 크게 벌하려는 것처럼 노여움에 불타는 표정이었다― 내가 한 말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거야.
흐느끼면서 자기 방에 당도하자 거칠게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하지만 방문을 힘껏 닫아 보았자 아무 데도 안전하게 숨을 곳이 없었다. 돈은 자기 방으로 해서 두 사람의 방을 연결하는 문을 통해 들어와서 붙잡을 것이다.
아아, 하나님! 내가 왜 할머니께 그런 말을 했습니까! 돈은 결코 나를 용서해 주지 않을 거야, 내가 한 말은 할머니께 커다란 충격이었을걸. 이 세상에서 할머니의 마지막 희망은 아센더 루이에서 증손자의 얼굴을 보는 일일 테니. 집안의 번영이 계속되는 것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낙일 테니.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로 도망치면 좋을까. 방 저편에 열려 있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 문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발코니로 통해 있었다. 밖이 더 안전할 거야. 돈도 햇빛 아래서라면 저주의 말을 하지도 않고, 어쩌면 나를 내보내 줄지도 몰라. 그렇지 않으면 이 저주스런 결혼 때문에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거나, 돈이 내 목뼈를 부러뜨리고 말 거야.
유리문으로 해서 발코니로 나가려는 순간 돈의 방과 연결된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마치 운명처럼 그가 모습을 나타냈다.
돈의 얼굴을 보자마자 퍼시파는 모든 것을 단념했다.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의 남자를 상대로 어떻게 냉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남편이 맛본 고통과 분노는 이제 그가 퍼시파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밖에 해소될 길이 없을 것이다.
퍼시파는 홱 몸을 돌려 발코니의 난간 쪽으로 뛰어갔다. 막다른 곳까지 쫓겨 달아날 길을 잃은 짐승처럼 난간에 달라붙어 비명을 질렀다. 남편의 노한 손길이 퍼시파를 붙잡고 퍼시파의 입에서 처음으로 자기의 이름이 나오도록 했다. 죽음 앞에 있는 여자의, 혹은 출산을 하는 여자의 외침과도 같은 비명소리였다.
그러고는 퍼시파의 시야는 온통 남편의 거무스름한 얼굴로 뒤덮였다. 남편은 무턱대고 퍼시파를 난간에서 잡아 떼어 와락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런 짓은 안 돼!"
격정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잘 알아듣지 못하도록 갈라진 목소리였다.
"다시는 이 저택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없어!"
그대로 돈은 퍼시파를 끌고 침실로 들어갔다.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퍼시파는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침대에 퍼시파를 뉘고 돈도 옆에 비스듬히 누웠다.
"당신은 그렇게도 내가 싫어? 나하고 사느니 차라리 돌을 깐 정원에 몸을 던지겠다는 생각이야?"
퍼시파는 돈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너무 겁을 먹고 맥이 풀려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자기가 우람한 몸에 짓눌려 있고, 폭풍의 밤같이 새까만 눈이 자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돈은 입을 다물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흐느낌이 가라앉고 눈물이 마르자 비로소 퍼시파는 말을 시작했다.
돌을 깐 정원에 몸을 내던지다니? 내가 발코니를 뛰어넘어 저 단단한 돌 위에 곤두박질을 한다구? 몸이 깨지고 이제 햇빛도 달빛도 모르게 되다니, 그리고 미움이나 사랑도…
"난 그럴 생각이 아니었어요…"
퍼시파는 고개를 크게 저었다.
"그렇지 않았어요. 당신이 너무나 무서웠는데, 달리 어디 도망칠 데가 있어야지요."
"무섭다고?"
돈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번득였다.
"네, 내 말을 듣고 당신이 불같이 화를 낸 것처럼 보였어요. 아아, 왜 나를 내보내 주지 않지요? 나를 붙잡아 보았자 무슨 만족을 얻을 수 있어요? 글쎄 난… 당신은 새디스트는 아니지만 소유욕이 골수까지 스며 있기 때문에 오직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나를 갖기를 바라는 거예요, 내게 아기를 낳게 하기 위해서요."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라고?"
빈정거리듯 주름이 입가에 잡혔다.
"귀여운 바보 아가씨, 내가 여자에게 바라는 것이 그저 아이를 낳는 것뿐이라면 아이 잘 낳고 인정 많은 멕시코 아가씨와 결혼할 것이지 뭣 때문에 영국 아가씨와 결혼했겠어? 멕시코 여자라면 행복에 취해 가능하면 해마다라도 임신을 해줄 텐데. 내가 당신과 결혼한 이유는 하나님과 악마밖에 모르겠지만, 그것은 안뜰의 돌 위에 몸을 내던질 만큼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란 말이야."
고뇌가 남편의 얼굴을 스쳤다. 문득 한 손을 들어 살며시 퍼시파의 얼굴을 만졌다. 그의 손길은 볼에서 목으로, 목에서 어깨로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거기서 멈추었다.
"지난날 나는 한 여자가 저기에서 뼈를 부러뜨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단 말이야. 그러니 당신한테 약속하겠어, 퍼시파. 그토록 내 집에서 나가고 싶다면 이제 절대로 붙잡지 않겠다고."
분명 남편의 목소리는 들렸지만, 마음은 조금도 자유롭게 되었다는 기쁨으로 고동치지 않았다. 그보다는 나가도 좋다고 하기 전에 한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여자가 그렇게 죽었어요?"
퍼시파는 거의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랬지."
깊은 한숨이 남편의 가슴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그는 자기의 몸무게 때문에 퍼시파가 짜부라질 것같이 된 것을 비로소 깨달았는지 살며시 몸을 뗐다.
순간, 남편으로부터 쌀쌀하게 내던져진 느낌이 퍼시파를 엄습했다. 돈에게 매달리어 다시 한번 힘껏 끌어안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그림자조차도 두 사람 사이엔 스며들 수 없을 만큼 서로 몸을 꼭 붙이고 있고 싶었다.
마음의 떨림이 너무나 날카로와서 거의 아픔을 느낄 정도였다. 퍼시파는 힘껏 레이스 침대 커버를 틀어쥐었다. 돈을 갖고 싶어, 디아브로를 갖고 싶어, 사랑받고 있건 말건 당신을 갖고 싶어.
문득 자기도 이제 어른이 된 느낌이 들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끼던 일도 지금 같아선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가 그렇게 무서운 죽음을 맞이했었다면, 그때 남편은 얼마나 괴로와했을까. 문득 생생하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분은 어째서 그런 짓을 했지요? 왜 그런 일을 해서 당신을 괴롭혔지요, 당신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요?"
"물론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녀는 앨버러드의 죽음으로 나를 책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어."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결코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더구나 퍼시파한테는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마음에 다지고 있었던 것처럼 망설이는 듯이.
"그럼 그 여자는 당신의 동생을 더 사랑하고 있었어요?"
"물론이고말고."
돈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언제나의 수수께끼 같은 모습이 아니라 괴로운 곤혹스러움을 보이면서.
"내가 아무리 그녀를 사랑한들 나는 뒷전이고, 동생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단 말이야. 내게도 어머니지만, 그녀에게 둘째아들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아름답고, 언제 보아도 자기를 닮아서 그를 보는 것만도 큰 즐거움이었어. 늘씬한 키, 어머니를 닮은 커다란 눈, 그리고 태평스러운 기질이었지. 동생은 어머니의 천사였고, 나는 어머니의 악마였어. 그런데 동생과 내가 식인상어가 숨어 있는 모래 벌판에 다녀온 뒤로 동생이 유행성 소아마비에 걸리자, 그 악마는 어머니에게 현실의 악마가 되어 버린 거야. 상어가 해안에 나타나 젊은 어부의 두 다리를 물어 찢었을 때, 같이 가서 상어를 죽이자고 한 것은 내가 아닌 앨버러드였지만. 어머니는 당연히 내가 반대해서 앨버러드를 가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는 거야. 하지만 그렇게 했더라도 상어가 동생한테 덤벼들어 동생도 어부와 같은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나도 같이 갈 수밖에 없었어. 우리는 철촉을 단 인디언 화살로 그 괴물을 해치웠지. 그러자 온 도시가 축제같이 소동을 벌였고, 사람들이 우리의 상어 퇴치를 축하해 주었는데…"
거기서 돈은 말을 끊었다. 슬픔에 짓눌린 눈을 퍼시파에게 향하고 있었다.
퍼시파는 조용히 누운 채 남편의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남편은 그 여자를 '내 어머니'라고 불렀지― 안도의 기쁨에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칼멘테이러는 사진의 여자가 남편의 애인인 것처럼 슬쩍 꾸며댔지… 실제로는 돈의 어머니인데!
"그 무렵 바다는 오염되어 있어서 바닷가에는 썩은 고기를 먹는 하이에나가 나다닐 정도였어. 그래서 마침 폴리오가 발생하고 있었지. 그런 속을 앨버러드와 나는 상어를 쫓아 두 시간 이상이나 헤엄쳐 다녔던 거야. 며칠이 지나자 동생의 몸에서 지독한 증상이 나타났어. 금속의 인공 허파를 멕시코 시티에서 가져왔지만 아무런 보람도 없었어. 나의 매력적인 동생은 참으로 좋은 녀석이었고, 인생은 그때부터였는데, 이미 숨쉴 기운도 없이 질식해서 죽어갔던 거야. 어머니는 한 발짝도 동생 옆을 떠날 줄을 모르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 동생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어.
그가 죽은 뒤 내게 도저히 잊지 못할 말을 했어― 죽은 것이 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나는 악마의 화신이라고. 그리고 내가 앨버러드를 저 오염된 바다로 끌어들였다고 말이야. 나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하게 탄탄한 강철 같은 남자였으므로 폴리오 따위에는 까딱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앨버러드는 성격이 밝은 녀석이었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기 때문에 병마가 달라붙어 버렸던 거야."
다시 길고 안쓰러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남편을 꼭 안고서 위로해 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남편을 악마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주위의 상황으로 마지못해 그렇게 된 것뿐인데, 어머니의 자살까지 자기 탓이라고 자신을 책망하고 고민하다니.
"동생의 장례식날 저녁때의 일이었지. 마침 태양이 마지막 빛을 발하며 아름다움 속에 가라앉을 무렵이었어. 어머니의 비명을 듣고 맨처음 달려간 것은 나였어. 그것은 육 년 전의 일이었는데, 그 뒤 아센더 루이는 오랫동안 어둠에 갇힌 저택이 되었어. 그러던 어느날 나는 찰스 파제트를 만났던 거야. 그는 나에게 당신 어머니 사진을 보여 주며, 만일 내가 영국에 가는 일이 있으면 자기 딸이 가난하거나 고난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고 죽었어. 그리고 나는 후견인을 잃은 당신이 가난과 고통에 빠질 것은 뻔하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은 나의 인생에 다시 빛을 가져다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
남편은 흰 레이스의 침대 커버 위에 헝클어진 옆은 금발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은 씁쓸한 괴로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거기에는 퍼시파를 여유있게 대하려는 마음과 지금까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정열적으로 끌어안으려는 마음 사이의 격렬한 갈등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퍼시파에게 기쁨을 주기보다 헛된 저항만 불러일으켰던 그 거센 정열과 의.
그러나 남편이 지금까지 자기에게 준 것이 비록 정열뿐이라 해도, 지금의 퍼시파로서는 그것을 원할 만큼 남편에 대한 사랑에 불타고 있었다. 퍼시파는 스스로 남편에게 몸을 붙이고 입술을 그의 탄탄한 볼에 밀어붙였다. 돈은 꼼짝도 하지 않고 퍼시파가 주는 첫 키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남편은 거친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 거친 소리였기 때문에 퍼시파는 움츠리면서 몸을 뗐다.
"나를 불쌍하게 생각지 말라구! 당신의 연민 따위는 필요도 없어! 당신은 아직도 철이 안 들었어?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몰라?"
"난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퍼시파는 눈꺼풀을 부지런히 깜박거렸다. 남편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자신을 위해서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것은 겨우 네 글자의 말이 아니겠어요? 하지만 목에 걸려서 나오지를 않아요."
"그렇고말고. 당신은 언제나 미움이라는 말을 하기가 훨씬 쉬웠어. 그러니 당신이 언젠가는 또 하나의 말을 속삭여 주리라는 어리석은 희망을 나는 한번도 가져본 일이 없어."
"속삭이다니요?"
눈을 크게 뜨고 돈을 쳐다보았다.
"그 말이 언젠가는 내 입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하지만 그건 무척 지독한 말인데."
"지독한 말이라니?"
돈은 퍼시파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윽고 쓴웃음을 띠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말이 있는가 하면 전혀 말하지 않는 것처럼 되는 말이 있어. 그리고 두 말은 모두 머리글자가 L로 시작되지. 정욕밖에 당신에게 갖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짐승만도 못하고 감정을 갖지 못한 야만인처럼 말이야? 나의 멍청이 같은 꼬마 아가씨, 난 당신에게 천국의 기쁨을 주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당신은 아무래도 지옥의 괴로움밖에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난 어떠냐 하면 남 아메리카로 떠나기 전에도 내가 느끼는 감정의 얼마쯤은 당신도 느끼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얼마나 잘못 생각했었는지를 깨달았어."
남편은 한숨을 내쉬면서 한 손으로 자기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늘 아침엔 너무나 서두르는 바람에 수염도 깎지 못했어. 하지만 어머니의 생일이니 성당에 가서 장미를 바쳐야겠어. 어때, 꼬마 아가씨,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지?"
"난 당신을 보았어요, 디아브로. 오늘 아침 성당에서 촛불과 장미에 에워싸여 서 있는 당신을요. 어쩐지 무척 쓸쓸해 보였어요. 난 당신이 쓸쓸하다면 이 집을 나가지 않겠어요. 어마, 부탁이에요. 화내지 마세요. 또 소리지르지 말아요."
남편이 화를 내거나 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퍼시파는 다짜고짜 두 팔을 남편의 목에 감고 온몸을 밀어붙이며 말했다.
"난 당신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예요, 세뇨르. 지금까지의 내 어리석음을 슬퍼하고 있을 뿐이에요. 당신이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에 나는 생각했어요. 당신은 다만 자기의 어린아이를 원하기 때문에 나에게 욕망을 가진다구요.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어린아이뿐이라구요. 하지만 정말로 그래요, 디아브로? 그것뿐이에요?"
"절대로 그것뿐이 아니야. 하나님께 맹세해도 좋아!"
뜻밖에 남편은 와락 퍼시파를 껴안고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두 팔을 죄어댔다.
"나는 어떻게든 당신이 날 사랑하게 만들고 싶었어. 여보,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든 후로는 당신을 끌어안을 때마다 내가 어떻게 되어 버리지 않나 싶었어. 절대로 당신을 놓치기 싫었어. 하지만 내가 한동안 집을 비우면 당신도 쓸쓸한 느낌을 갖지 않을까 생각했지. 어땠어, 여보? 한순간이나마 나처럼 쓸쓸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어? 아침 햇살에 춤추는 당신의 머리칼이나 저녁 식탁에서 촛불에 비치는 당신의 눈을 볼 수 없어서 난 얼마나 외로왔는지 몰라. 나를 사랑해 달라고 당신에게 강요하고 싶었어. 하지만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나 같은 남자에게는 그런 인내가 강요된다는 것을."
남편의 품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누운 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스치며 지나갔다. 퍼시파는 두 팔에 힘을 가하여 돈의 따뜻한 살에 자기의 몸을 꼭 밀어붙였다.
"당신은 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지만, 한번도 내게 말씀해 주신 일이 없었어요.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구요."
"난 어리석었어. 당신이 이제 겨우 소녀티를 벗어났을까 말았을까 한 것을 잊어버리고 성숙한 여자로 다루어 버렸던 거야. 난 당신이 너무 좋아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을 육체로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당신에게 겁을 주었을 뿐이었지. 지금도 무서워, 어때? 사실대로 말해 봐!"
"아뇨."
퍼시파는 떨리는 목소리로 웃었다.
"역시 무섭기도 하고 무섭지 않기도 하고, 둘 다 사실이에요, 디아브로. 언제든지 당신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심장이 멎을 만큼 날 놀라게 하는걸요. 하지만 당신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 분명히 알면 무슨 일이라도 참을 수 있어요, 무슨 일이든지요!"
"이것은 어때?"
남편은 머리를 수그리고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럼 이것은?"
이번에는 격렬한 힘이 담긴 남편의 입맞춤이 온몸을 꿰뚫는 것 같았다. 퍼시파는 두 팔을 돈의 목덜미에 감고 힘껏 끌어안았다. 그때 침실의 문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어마, 또 내가 안 좋은 시간에 온 것 같구나."
남편과 아내는 동시에 돌아보고 문 옆에 서 있는 조그만 몸매의 우아한 부인에게 방긋 웃음을 보냈다.
"할머니, 어서 들어오십시오."
돈이 공손하게 말했다.
"사랑스런 디아브로, 나라고 나가야 할 때를 모르는 줄 아니?"
할머니도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띠었다. 문득 그녀의 눈에 따뜻한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은 안녕, 그럼 이따가 보자."
침실의 문이 할머니의 등뒤에서 조용히 닫혔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