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기쁨
길을 찾고 길을 걷는 길 안내자 박창희 교수가 ‘걷기’를 통해 얻은 흥미로운 인문학적 지식들과 그
가 직접 길을 걸으면서 얻은 경험들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에세이다. 단순히 걷는 것이 아니다.
두 발 밑에 있는 이 길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그 위를 지나간 사람은 누구인지 사색을 하며 걷
는 것이 지금 당신이 걷는 길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지름길일 것이다.
걷기의 기쁨
▣ Short Summary
이제 걷는다. 걷다 보면 산길은 살길이 되고, 산책(散策)은 산책(山冊)이 된다. 길을 걸으며 ‘아 행복
해!’, ‘너무 좋아!’라는 말이 그냥 흘러나오면 그 길은 좋은 길이다. 山冊! 내가 읽었던 책, 그 책 속의
인상적인 구절들이 줄줄이 불려 나온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은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行補)가 낫다.”(보약이나 음식보다 걷기가 몸에 더 좋다는 뜻)고 했고, 다산 정약용은
“걷는 것은 청복(淸福, 맑은 즐거움)”이라 했다. 아마도 이들은 보약을 따로 먹지 않았을 것 같다.
걷기는 철학의 본질을 터치한다. 프랑스 사상가 루소는 철학의 시작을 ‘발’이라고 했다. 발을 떼면서부
터 철학이 시작된다. 보이고 만져지는 모든 사물들이 물음을 준다. 철학은 물음이다. 루소는 산책자였
다. 그는 주로 혼자 걸었다.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이다. 걷기의 본질은 자유다. 내가 원할
때 마음대로 떠나고 돌아올 자유, 이리저리 거닐 자유, 루소는 마지막 저작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에서 “혼자 걷는 명상의 시간이야말로 하루 중에 내가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방해받는 일 없이 온전히
나 자신이 되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유일한 시간이다.”고 했다.
또한 독일의 니체는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철학을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1888년, 『우상
의 황혼』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앉아서 지내는 삶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악이다. 걷기를 통해 나오는
생각만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 니체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있다.”고 일갈한다.
금병 약수터에는 사시사철 약수가 찰찰 흐른다. 산신령이 흘려보내는 무공해 샘물이다. 아무리 더운
날도 이곳은 서늘하다. 듬성듬성한 산벚나무 군락지 속에 평상이 여러 개 놓여 있다. 지친 나그네여,
내게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평상에 앉아 잠깐 쉰다. 걸어온 길도 돌아본다. 잠시 쉬며 휴식(休
息)이란 한자를 뜯어본다. 휴식은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어, 스스로(自)의 마음(心)을 들여다보는’
형태다. 글이란 게 참 오묘하다. 하고 보니, 그동안 너무 바쁘게 달려온 것 같다. 걸어야 할 곳은 뛰었
고, 뛰어야 할 곳은 자동차를 타고 질주했다. 내 속의 질주 본능에 지금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걷기는 평등하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모두 자기 한 걸음, 내 한 걸음이다. 부
유한 산책자라도 가난한 산책자보다 유리한 점은 전혀 없다. 모두가 공평하게 자기 보폭만큼, 자기 생
각만큼, 걷고 놀고 뛰고 쉬는 것이다. 대중목욕탕에 가면 모두가 똑같은 벌거숭이가 되듯, 길에서는 모
두 보행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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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기쁨
걸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걷기만큼 쉬운 것이 없지만, 제대로 걷
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걸으면 감각이 깨어나고 머리가 맑아진다. 노폐물에 전 오장육부도 서서히
초기화된다. 잊힐 건 잊히고, 지울 건 지워진다. 머리가 가벼워지면 새로운 생각이 채워질 공간이 넓어
진다. 걷는다는 것은 살아 있음의 박동이다. 두둥, 두 발이 지구북을 두드린다. 심장이 뛴다. 살아 있
다. 걸어야겠다.
▣ 차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 나는 걷는다, 고로 행복하다!
산보와 산책/감춰둔 갈맷길/책 속의 길, 길 속의 책/눈앞의 모든 게 기적
1부 길 속의 길 - 걸으면 보이는 인문풍경
1장 위대한 ‘한 걸음’과 걸음마의 비밀
2장 ‘길’에 대한 상상과 몽상
3장 한국 문화 속에 녹아든 길
4장 걸음걸이 산책
5장 호모 비아루트(Homo Viator)
6장 길의 노래, 길 위의 시
7장 잔도(棧道), 벼랑길을 만든 사람
8장 돌아가는 길, 황천길
9장 독만권서(讀萬卷書)와 행만리로(行萬里路)
10장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와 퇴계 예던길
11장 유정천리/무정만리
12장 영혼의 순례길-오체투지
13장 줄리안 오피와 아모르파티
2부 길 위의 길 - 그곳이 걷고 싶다
1장 낙동강 하구길들
2장 회동수원지, 사색의 맛
3장 만덕고개와 길의 운명
4장 기장 칠암 붕장어마을 한 바퀴
5장 도심의 섬, 매축지마을 종(鐘)길
6장 서면 황금신발길의 추억
7장 금정산 금어동천(金魚洞天) 옛길
8장 구포나루~구포시장 역사 트래킹
9장 통도사 자장암 가는 길
10장 최치원 유랑루트
11장 황산도 나그네
12장 역사의 무지개, 이섭교를 걷다
13장 다대포 일몰부터 오륙도 일출까지… “밤새 걸으며 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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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기쁨
걷기의 기쁨
1부 길 속의 길 걸으면 보이는 인문풍경
위대한 ‘한 걸음’과 걸음마의 비밀
노모의 유모차: 시골에 계시는 노모의 무릎 관절이 계속 안 좋아지는가 보다. 얼마 전 전화에서는 그
심각성이 와락 다가왔다. 전화기 저편에서 노모의 아픔과 한숨이 교차하고 있었다. “인자 걸음도 못 걷
겠네. 무릎 연골이 다 닳았다 카네. 유모차도 소용없어. 쪼매마 걸어도 무릎뼈가 저거끼리 슥슥 부딪혀
아프니…. 여태껏 마이 써먹었지 뭐…. 약도 없다고 하고 죽어야 낫는 병이라….”
노모의 나이 올해 구십다섯. 오래도록 건강하게 잘 버티셨다. 팔순 고개 오르며 지팡이를 짚으셨고, 계
속 허리가 굽으시더니 유모차(보행 보조기)를 끌기 시작했다. 증손자가 타던 유모차다. 조금 불편해도
증손자 녀석들 똥 냄새, 젖 냄새, 땀 냄새가 배어 있어 정이 간다고 했다. 짐도 싣고 지팡이 역할도 하
니 유모차가 효자라면서.
유모차를 끌 때만 해도 어머니의 일상은 평온하게 돌아갔다. 유모차를 끌고 사부작사부작 마을 회관에
다니시고 집 주변 텃밭에서 가지나 고추도 따셨다. 연예인 송해가 사회자로 나오는 <KBS 전국노래자
랑>이 방송되면, “저 송해가 내랑 갑장이다. 저 영감은 뭘 먹었길래 저리 팔팔할꼬?”라며 농담까지 던
지셨다.
그러던 어머니가 무릎이 아파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처지가 돼 버렸다. 어머니의 무릎 상태는 의학용
어로 무릎연골연화증. 무릎뼈의 관절 연골(물렁뼈)이 닳아서 생기는 병증이다. 인터넷 지식 백과에 보
니, 가장 흔한 증상은 무릎 앞쪽이 뻐근하게 아픈 것이다. 무릎을 꿇거나 쪼그리고 앉으면 통증이 가
중된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나 체중이 실리는 활동을 하면 통증이 더 심해진다. 무릎 운동 시 관절에
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고, 때론 무릎이 붓기도 한다. 이게 심해지면 걷기가 불가능해진다.
‘걷기 힘들다’는 어머니에게 내가 해드린 말은 “무릎 달래 가며 조금만 걸으소~”였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이었다. 어머니에게 곧 걸을 수 없는 사태가 닥칠 것이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음대
로 걸을 수 없게 되면서 어머니는 날로 무기력해졌다. 유일한 안방 친구 TV를 보면서도 문밖의 유모차
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되 가지 못하고, 가되 닿지 못하는 답답함과 낭패감을 누가 알까. TV에 송
해가 나와도 웃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집에 외조카가 갓난아기(증손녀)를 업고 노모를 뵈러 찾아왔다. 아이는 갓 걸음마
를 배우는 중이었다. 뒤뚱거리며 걷는 아이를 보며 시골집에 모처럼 웃음꽃이 피어났다. 아장아장 걷
는 아이를 기꺼워하며 어머니가 말했다. “내 대신 니가 걷는구나, 아이고 우리 아가 장하대이!”
아기의 첫걸음마: 아기 키우는 재미 중 으뜸은 아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을 때’와 일어서서 ‘첫걸음을
뗐을 때’라고 한다. 아이들의 걸음마는 첫걸음의 첫걸음이다. 신선하고 경이롭다. 국가, 지역, 인종에 관
계없이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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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기쁨
한 생명이 태어나 약 6개월이 지나면 옹알이를 시작한다. ‘마~’ ‘바~’ 하며 옹알거리는 소리는, 태초에 인
류가 태어나 세상과 나누는 밀어다. 옹알이를 시작하며 아이는 눈을 맞추고, 누운 자세가 지겨울세라 몸
을 비튼다. 몸부림은 뒤집기로 이어지고 기는 동작으로 발전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척추를 세워 앉고
가까스로 일어서서 발만발만(발길이 가는 대로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가는 발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아이 귀한 시대, 집안 처조카가 낳은 아이를 통해 아기의 걸음마 과정을 유심히 살필 기회가 있었다.
토실토실 살찐 장딴지에 힘이 들어가 바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걸음마 보조기를 붙잡고 발걸음을 떼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이즈음의 아기는 머리털에서 발끝까지 전부 이쁘다. 아기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무
럭무럭 성장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처조카의 설명에 따르면, 갓난아기의 걸음마에서 걷기까지는 대략
여섯 단계를 거친다. 그 순서는 혼자 앉기 → 기기(배밀이, 사족 보행) → (소파 등을) 잡고 서기 → 잡
고 서서 옆으로 걷기 → 기구를 이용해 앞으로 걷기 → 혼자 걷기 순이다.
뭔가를 잡고 발을 떼려는 본격적인 걸음마 단계에 들어가면, 걸음마 보조기가 활용된다. 이때 점퍼루,
어라운드 위고 같은 기구가 쓰인다. 점퍼루는 아기가 발을 굴러 뛰면 통통 튀어 오르는 그네 같은 기
구로, 아기의 허리 힘과 다리 힘을 키워 준다. 어라운드 위고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놀이 테이
블이다.
그다음은 걸음마 보조기 활용 단계다. 이때 아이는 새 세상을 만난 듯 많이 나부댄다. 앞으로 밀고 가
는 보조기는 보통 바퀴 마찰력을 조절할 수 있어서 앞으로 쉽게 넘어지진 않는다. 보통 처음에는 아가
들이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기구를 밀면서 걷고, 바닥에 발바닥이 닿는 느낌이 낯설어 발뒤꿈
치를 들고 발레하듯이 걷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점차 자세를 곧게 세우고 발바닥을 온전히 바닥에 붙
이면 이족 보행 준비가 된 것이다. 일어서다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어느 순간, 아기가 멈칫 서고 휘청
거리다 첫 발걸음을 뗀다. 아이는 걷다가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행동 심리학에서는 걸음마를 뇌와 신체의 종합적인 발달이 이뤄 낸 결과로 본다. 걸음마와 함께 신체
변화가 시작되고 뇌가 발달한다. 신체에서 가장 큰 근육은 허벅지의 대퇴근이다. 이 부분은 뇌관과 연
결되어 있어 대뇌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걸음을 시작할 때 근육에서 나오는 신호가 뇌에 전달되
어 뇌간이 자극되고 각성 작용이 일어나면서 뇌를 발달시킨다는 것이다.
아기의 내장 기관도 이즈음 설정되어 정상 기능을 하게 된다. 아기가 누워 있거나 기어다닐 때와 달리,
걸음마를 시작하면 중력의 영향을 받아서 내장 기관들이 제 위치를 찾는다. 아직 말은 못한다 해도,
무의식 속에서 인지ㆍ인식 기능도 생긴다. 걸음마가 가져다주는 놀라운 변화다.
걸음마 단계를 지나면 아기는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한다. 두 발로 움직이면 두 손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므로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진다. 이동 능력이 커지면 행동반경이 더욱 넓어진다. 걸음마가 원활해
지면 아이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탐색하고 놀이 대상으로 여긴다. 닥치는 대로 만지고 던지기도 한다.
이때 아기는 호기심과 자발성을 기르고 신체적으로 부쩍 성숙한다.
직립 보행의 의미: 걸음마를 뗀 아이는 이제부터 걷는 존재가 된다. 직립(直立)! 똑바로 선다는 것은
세상을 바로 본다는 의미요, 세상을 읽는다는 뜻이다. 걷는 것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읽고 쓴다는 의
미다. 읽고 쓰기, 학습하는 인간은 걸음으로써 비로소 목표에 한걸음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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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기쁨
방에서 걸음마를 익힌 아기는 곧 바깥나들이를 준비한다. 걸음마를 뗀 아이에게 주는 생애 최초의 선
물은 신발이다. 아기용 신발은 흔히 보행기화로 불리는 양말신발이 있다. 아기 신발도 아기만큼 이쁘
다. 신발은 보통 할아버지나 할머니, 친지들이 선물한다.
새 신을 신고 처음으로 땅을 밟는 아이의 표정은 천진무구 그 자체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하는 동요 속의 달뜬 기분이랄까.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니, 어찌 설레
고 벅차지 않을쏜가. 신발을 신기면 아기는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나부댄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험하다 해도 아기에겐 모든 게 새로운 도전이다.
한번 걷기 시작하면 걷기는 곧장 일상이 된다. 걷기는 숨쉬기와 마찬가지로 본능적 생명 현상이다. 이
걷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매달렸던가? 삶의 진리와 지혜를 찾아 석가, 예수, 공자, 마호메트, 소크
라테스가 도(道)를 갈구하며 길을 걸었다. 동서양의 사상가, 정치가, 철학자, 작가 아니 인류 전체가
길에 매달려 길을 찾았다. 쉼 없이, 한량없이 걷다가 걷지 못할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다. 슬프
지만 어쩔 수 없다. 직립의 최후는 무립(無立), 무위(無爲)지만 그것이 세상의 순환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야외 나들이 땐 유모차가 빠지지 않는다. 신생아부터 서너 살 아기까지 유모차를 탄다. 유모차는 아기
에겐 세상 구경하는 무개차이고 어른들에겐 아이의 짐을 드는 편리한 수레다. 요즘은 휴대용 유모차가
인기다.
유모차의 쓰임새는 세대를 초월한다. 아이가 탔던 유모차를 나이 든 할머니들이 끌고 다닌다. 유모차
라도 끌 수 있으면 다행이다. 시골의 노모처럼, 관절이 다 닳아 걸을 수 없게 되면 유모차도 그림의 떡
이다. 물끄러미 바라만 봐야 하는 세상이 야속하지만, 노모는 그마저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걷지 못하
는 노모를 유모차에 태워 꽃구경 시켜 주고 싶다. 아직 걸을 수 있음에 무한히 감사하면서.
유정천리/무정만리
아버지의 막걸리: 트로트 가수 영탁이 부르는 <막걸리 한잔>은 시골 고향의 아버지를 생각나게 한다.
영탁의 목소리는 시원한 막걸리로 갈증을 씻는 듯한 통쾌함이 있다. ‘아빠처럼 살긴 싫다며/가슴에 대
못을 박던/못난 아들을 달래 주시며/따라주던 막걸리 한잔…’이라는 대목에선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어진다. 아버지는 산천이 되신지 오래다.
아버지가 영탁의 노래를 들었다면, ‘어허 좋다. 막걸리 한 되 받아 오너라’고 했을 것 같다. 술도가에서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 오며 몰래 홀짝거리며 맛보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아버지는 막걸리를 무지
좋아하셨다. 바깥에서 한잔 걸치시는 날엔 알 듯 모를 듯한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유정천리>란 유행가였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못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빛이 젖어드네.’
가사가 쉬우면서도 토속적 정서를 담고 있다. 못살아도, 외로워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애절함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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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기쁨
어릴 적, 시골집 토방에서 가끔씩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자형이나 친척들이 찾아오면 어머니는 집에
서 담근 농주를 내놓았다. 농주 원액은 막걸리보다 진하지만, 어머니는 거기에 물을 타서 들여놓곤 했
다. 농주와 물의 비율은 어머니가 결정했다. 그 비율은 술꾼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매번 달랐다. 우리
는 그것을 ‘인생 비율’이라고 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어머니가 어떻게 짧게 맛만 보고 인생 비율을
찾아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술꾼들은 물 탄 농주를 마시면서도 왜 물을 탔느냐고 묻지 않았
다. 어머니는 술자리가 시들해진다고 생각되면 다시 물의 비율을 낮춘 걸쭉한 농주를 내놓았다.
농주가 몇 순배 돌고 좌중이 불콰해지면 상다리 장단에 유행가가 흘러나왔는데, 노래 중에는 <유정천
리>가 빠지지 않았다. 교자상 모서리가 하얗게 벗겨지도록 쇠젓가락을 두드려 가며 밤 깊도록 놀던 풍
경이 아련하다.
<유정천리>의 2절은 끝이 없는 인생길을 노래한다.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누이동생 혜
숙이야 행복하게 살아다오/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은 몇 구비냐/유정천리 꽃이 피네 무정천리 눈
이 오네.”
가사의 마지막 ‘유정천리 꽃이 피네 무정천리 눈이 오네’라는 부분이 특히 시적이다. 유정천리는 정이
있는 고향, 무정천리는 정이 없는 고향을 뜻한다.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사이의 인생살이, 꽃 피는
날과 눈 오는 날의 행복과 시련이 가사에 담겨 있다. 민초들이 겪는 삶의 애환일 것이다.
4ㆍ19 혁명의 불쏘시개: 유행가인 <유정천리>는 원래 1959년에 제작된 남홍일의 영화 <유정천리>의
주제가였다. 반야월이 작사하고 김부해가 작곡하여 박재홍이 불러 크게 히트쳤으나, 한때 시국 상황에
휩쓸려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영화 <유정천리>의 줄거리는, 주인공이 감옥을 간 사이에 아내는 정부와 달아나 버렸고, 교도소에서
출옥한 주인공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아들을 만나 시골로 낙향한다는 평이한 내용이다. 모두가 화려하
고 멋지게 살려고 서울로 향하던 시절, 주인공은 힘들고 무정한 서울을 버리고 아들과 시골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때 이른 귀촌으로 볼 수 있다.
<유정천리>는 야당 지도자였던 유석 조병옥의 추모곡(개사)으로 불려지면서 금지곡으로 찍히기도 했다.
때는 자유당 말기인 1960년대 초, 이승만 대통령에 맞설 사실상 유일한 후보였던 조병옥은 1960년 1
월, 지병 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돌연 사망했다.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를 갈망한 사람들은 절망
하거나 심한 충격에 빠졌다.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야당 유력 후보가 사망했으니, 이승만의 당선은 따
논 당상이었다.
그러나 “이럴 수는 없다”는 기류가 번지면서, 조병옥을 추모하는 움직임이 점화되었다. 교회에서 추도
예배가 열리고 일부 상점들은 철시하고 추도에 동참했다. 조병옥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음모설도
돌았다. 그동안 짓밟혀 왔던 민초들의 울분이 조병옥 돌연 사망을 기화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대구에서 <유정천리>의 가사를 바꾼 개사곡이 만들어져 입소문을 타고 급속히 퍼져 나갔다. 많은 국
민들이 공감하면서 개사곡은 때 아닌 인기곡으로 둔갑했다. <유정천리> 개사 버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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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기쁨
(1절)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다/못살아도 나는 좋
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눈이 오네//(2절)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
하랴/춘삼월 십오일 조기선거 웬 말인가/천리만리 박사 죽음 웬 말인가/설움 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네.
가사 속의 해공은 1956년 대통령 선거 직전 급사한 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이며, 장면은 조병옥과
함께 출마한 야당 부통령 후보였고, 조 박사는 조병옥을 가리킨다.
<유정천리>의 유행으로 인해 민심은 반(反) 이승만 기류로 흘러갔다. 이 와중에 자유당의 3ㆍ15 부정
선거가 터졌다. 대중의 분노는 4ㆍ19 혁명으로 이어져 결국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 <
유정천리>가 4ㆍ19 혁명의 발발에 기여한 셈이다.
혁명의 성공으로 <유정천리>의 개사곡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자 신세기레코드는 이를 상업적으로 이어
가기 위해 정식 개사곡 음반을 제작했다. 박재홍이 노래한 <4ㆍ19와 유정천리>가 그것으로, 대중이
만든 개작 가사 두 절에 새로 한 절을 덧붙인 형태였다. 그러나 음반사의 기대와는 달리 이 음반은 이
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했다. 혁명 분위기에 편승한 상업 기획이란 점이 오히려 거부감을 낳았던 것이
다.
파란만장의 사연을 겪은 <유정천리>는 요즘도 TV 가요 무대 같은 데서 단골 흘러간 노래로 불린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노래의 정신과 힘은 유정하다.
2부 길 위의 길 그곳이 걷고 싶다
낙동강 하구길들
말갈기 파도: 남해의 말떼가 달려온다. 쏴아아~ 백마떼다. 가야의 후예들이다. 낙동강 하구를 향해 일
제히 달려오는 백마떼. 파도와 함께 몰아치는 휘모리장단. 누가 채찍을 휘둘러 주오. 더 세게, 더 힘차
게! 바다가 일어서 강을 부른다. 목마른 자 목을 적시고, 답답한 자 말을 타라. 움츠린 자 일어서라!
석양 무렵,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서 본 허연 말갈기가 뇌리에 생생하다. 강과 바다의 내밀한 조우. 낙
동강 하굿둑이 열리는 시간과 썰물때가 만나 이루는 장엄한 풍경이다. 이른바 낙동강 하구의 말갈기
파도다.
눈앞에 펼쳐진 말갈기 파도를 보고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과 바다가 만나 생성-융합-창조되는
이 장면이야말로, 세계 어디에도 없을, 낙동강 하구 최고의 명장면이 아닐 텐가. 이 장면을 본 이후,
나는 낙동강 하구를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강과 바다의 단절: 낙동강 하구(河口)는 강의 입이자 강길이다. 이곳은 또한 강의 끝이다. 부산 사하구
하단동은 강끝 혹은 아래치, 끝치에 형성된 인간의 마을이다. 조선 후기 동래군 사천면 시절, 이 지역
은 상단(上端)과 하단(下端)으로 불렸다. 말이란 게 묘하다. 강의 입장에서 보면 하단이고, 바다의 입장
에서는 하구다. 낙동강 하구는 강의 끝이요, 바다의 시작이다. 거꾸로 말해도 된다. 낙동강 하구는 바
다의 끝이요 강의 시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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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기쁨
낙동강 하구에서 강과 바다가 뒤섞인다. 몸(현상)을 섞고 마음(본질)을 섞고 운명(철학)을 섞는다. 이게
본질이다. 강과 바다는 시작도 끝도 없다. 민족경전인 『천부경』에서 말하는 ‘일시무시(一始無始)요, 일
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다.
강과 바다, 밀물과 썰물, 민물과 짠물, 처음과 끝이 섞어져 새롭게 태어나는 자리가 기수역(汽水域)이
다. 기수역은 조수 간만으로 담수와 해수가 자연스럽게 섞여 염분 농도가 0.5‰~30‰를 유지하는 곳
이다. 퍼밀리(‰)는 천분율, 즉 1/1,000을 말한다. 보통 염도 0.5‰ 이하의 물은 담수, 30‰ 이상은
해수라고 한다.
기수역은 생태적으로 종 다양성 및 생산성이 높다. 수생 식물, 저서생물이 많아 물고기가 모이고, 그
먹잇감을 노리고 철새들이 찾아든다. 낙동강 하구를 융합과 창조의 플랫폼이라 말하는 것도 기수역의
생산성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다대포의 말갈기 파도는 낙동강 하구의 이색 콘텐츠 중 하나다.
그런데 1987년 이래 낙동강 하구는 막혀 있다. 개발의 물막이 낙동강 하굿둑 때문이다. 그 후유증은
30여 년간 지속되고 있다. 용수 확보와 주변 매립이라는 목전의 이익이 있었지만, 기수역 파괴에 따른
수질 오염과 생태계 파괴는 말할 수 없는 폐해를 가져왔다. 낙동강은 갇힌 채 인간이 수문 조작으로
허용하는 만큼만 흐르는 운명이 되었다. 강이 막히면서 뱃길마저 끊겼다.
어도(魚道)와 피시 로킹(Fish locking): 하굿둑이 들어선 후 강과 바다는 인위적 조작에 따라 제한적으로
열리고 닫힌다. 평상시엔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해 하루 두 차례 하굿둑 수문이 열린다. 수문이 열리
면 강물은 쏴아~ 함성을 내지르듯 바다로 뛰어든다. 바다도 기다렸다는 듯 강을 껴안는다. 말갈기 파
도는 강이 바다를 만나 부리는 일종의 요술이다.
하굿둑은 강과 바다를 오가며 산란하는 기수어종(회귀어종)들의 고향길을 막았다. 하굿둑 건설 이후
낙동강 하구에선 숭어ㆍ웅어ㆍ장어ㆍ연어 같은 회유성 어종과 재첩ㆍ갯지렁이 같은 저서생물이 대거
사라졌다고 한다. 어민들은 “흰줄납줄개ㆍ뱅어ㆍ줄꽁치ㆍ큰가시고기ㆍ쥐노래미 등 일부 어종은 아예
씨가 말랐다.”고 말했다.
하굿둑을 운영 관리하는 한국수자원공사는 물고기들의 소통을 위해 어도(魚道)를 설치하고 ‘피시 로킹
(Fish locking)’이란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어도는 하굿둑을 만들 때 좌우 두 군데에 고기가 다니게끔
만든 높이 3m, 너비 1.7m의 통로다. 상시 개방되는 건 아니고 이마저 염분 차단을 위해 하루 8시간
가량 폐쇄된다. 4대강 사업으로 건설된 명지 쪽의 우안 하굿둑에도 어도(견학 가능)가 설치돼 있다.
‘피시 로킹’은 하굿둑 갑문(통선문)에서 시행하는 어류 이동 프로그램이다. 하굿둑에는 관리용 배가 다
니도록 만든 대형 갑문(길이 50m, 폭 9m)이 있다. 매년 2~5월 실뱀장어들은 산란기가 되면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낙동강 하구로 밀려든다. 실뱀장어들은 하굿둑 갑문의 피시 로킹 프로그램을 통해 낙동강
으로 이동한다.
피시 로킹은 먼저 갑문의 쪽문을 통해 강물을 채우고 강쪽의 쪽문을 닫은 다음, 바다쪽의 쪽문을 열어
수위를 맞춘다. 이때 실뱀장어들이 강물 냄새를 맡고 밀려들어 온다. 같은 방식으로 강물을 채워 실뱀
장어를 회유하게 하면 끝난다. 한 사이클에 약 3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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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기쁨
피시 로킹은 하굿둑이 가져온 웃지 못할 소극이다. 담수가 그리운 물고기들은 인간에게 잡힐 것을 뻔
히(?) 알고도 갑문으로 돌진한다. 하굿둑 물고기들의 굴욕이다. 언제부터 우리 인간이 물고기를 길들이
고 길렀던가!
환경부는 몇 년 전부터 하굿둑 개방 실증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하굿둑 개방 시 염분이 미치는 거리
와 농도 등을 체크하는 실험이다. 여기엔 식수원 및 농공업 용수 확보, 서낙동강의 수질 개선, 생태계
의 복원 문제 등이 얽혀 완전 개방까지는 갈 길이 멀다. 몇 차례 실증 실험 과정에서 연어 등 사라졌
던 기수어종이 나타난 것은 고무적이다.
하굿둑 개방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하굿둑이란 구시대의 장애물이 열려 실뱀장어 같은 회
귀어종들이 인간 눈치를 보지 않고 산란길에 올라 장성하여 돌아오는 일상을 그려본다.
둔치와 흙길: 부산에서 걷기 좋은 흙길이 가장 많은 곳은? 산을 제외하면 낙동강 하구의 둔치가 으뜸
으로 꼽힌다. 둔치는 강이나 호수의 가장자리나 둔덕진 곳을 말한다. 고수부지(高水敷地)라는 어려운
한자말을 제치고 훌륭하게 부활한 우리말이다.
낙동강 하구는 둔치 천국이다. 화명ㆍ대저ㆍ삼락ㆍ맥도 둔치에 더해 하중도 성격인 을숙도까지 무려 5
개다. 이들 둔치의 총면적은 약 14.57㎢(441만 평). 전 세계적으로 이런 자연 자산은 찾기 어렵다. 공
원이 절대 부족한 부산으로선 낙동강으로부터 선물을 한아름 받아 안은 셈이다.
이들 둔치와 둑방에 산책로 또는 맛깔진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2012년 10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
관해 엮은 문화 생태 탐방로는 낙동강 하구의 대표적인 탐방로다. 코스는 을숙도 에코센터~을숙도 문
화회관~맥도생태공원~낙동대교(횡단)~삼락강변공원~구포역~구포나루까지다. 총 길이는 22km, 도보
로 약 6시간이 소요된다.
어디를 걸어도 흙길이 많다는 것은 확실한 자랑거리다. 흙길을 걸으면 그 자체로 힐링이 된다. 밟기
아까운 흙길에선 신발을 벗어도 좋겠다. 걷다가 운 좋게 철새 군무나 해 질 녘 노을을 만날 수도 있다.
감성적인 코스를 원한다면, 삼락공원의 버들길이나 맹꽁이길, 맥도의 가시연꽃 관찰 데크, 화명의 메
타세쿼이아 길, 을숙도 에코센터 앞 습지 탐방로를 추천하고 싶다.
물길과 뱃길: 낙동강 하구는 가야 시대 때 해상별국(海上別國)이라 불린 곳이다. 인도 아유타국 출신의
허황옥이 가야에 와서 김수로왕과 함께 세운 특이한 나라라는 뜻이다. 가야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해상 실크로드를 건설했다. 당시엔 해수면이 지금보다 5~6m 높았다고 한다. 김해 봉황대 일대는 국
제 무역항이었다. 그곳에 낙동강 중ㆍ상류로 통하는 뱃길과 중국ㆍ왜ㆍ낙랑을 잇는 뱃길이 열려 있었
다. 뱃길은 고대 가야를 풀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다.
그 후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낙동강 하구 삼각주가 생겨났고, 수로와 천태만상의 모래톱 사이로 다시
뱃길과 나루터가 만들어진다. 하단나루와 구포나루, 동원진나루 그리고 서낙동강의 불암나루, 북섬나
루, 해창나루, 신노전나루, 명지나루 등은 수운 시대 잘나가던 나루들이다. 이들 나루는 도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바람처럼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젠 배도, 뱃사공도, 뱃길도 모두 추억이 되었다.
낙동강 하구에 뱃길이 복원될 수 있을까? 간단한 질문 같지만, 이에 대해 누구도 명쾌하게 답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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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기쁨
는 게 현실이다. 가능성은 있다. 뱃길 복원을 바라는 열망이 모여 ‘낙동강 생태 탐방선’이 뜬 것은 그
나마 의미 있는 성과다.
낙동강 하구의 풍성한 수자원과 자연ㆍ인문 자산은 뱃길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더욱 키운다. 기수역 연
안 사주(Barrier islands)에 소형 생태 탐방선을 띄울 수 있고, 명지 포구에서 출발해 도요ㆍ백합등ㆍ진
우도 등 모래톱 투어 프로그램도 짤 수 있다. 자연과 함께하는 문화 체험과 생태 관광은 21세기 지속
가능한 사회로 가는 길과 통한다.
낙동강 하구 신(新)해상별국은 꿈같은 얘기가 아니다. 관건은 강과 바다의 소통, 물길을 틔워 배를 띄
우는 것이다. 배가 다니면 잊혀진 뱃노래도 불려지지 않겠는가. 낙동강 하구 고디꾼(돛단배에 고딧줄
을 걸어 강변에서 잡아당기는 뱃사람)들이 불렀다는 ‘고딧줄 노래’가 떠오른다.
‘이여이여차 이여이여차/이여차이여 이 카라가 이여차/잘못하면 이여차/부산 간다 이여차….’
고딧줄을 당기면 실뱀장어가 춤을 추고 말갈기 파도에 황포돛배가 돌아올까.
낙동강 하구의 길들은 온전한 소통을 꿈꾼다. 강과 바다가 자연스럽게 만나 몸을 섞고, 물고기들이 자
유롭게 왕래하며, 새들이 나는 하늘길 아래에 사람들이 행복하게 걷는 풍경을 그려 본다.
서면 황금신발길의 추억
고무 공장의 순이들: 고무 공장의 순이들을 ‘공순이’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시골에서 돈 벌러 도시
로 올라온 열다섯, 열여섯의 앳된 순이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억센 순이도 있었다. 월급을
타면 먼저 곗돈을 붓고 생활비 뺀 나머지는 모두 시골로 부쳤다. 시골로 간 돈은 동생의 학비가 되고,
부모님의 잡비가 되고 살림의 밑천이 되었다.
부산 서면의 신발 공장과 고무 공장 굴뚝엔 밤낮없이 시커멓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열악한 노
동 환경 속에서 공순이들은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해 가며 신발을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신발은
‘한국 최고’였고, ‘세계 최고’였다. 아~ 그때 그 순이들, 공순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부산 부산진구 부암동 진양 사거리. 운동화인지, 구두인지 모를 커다란 신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조형물 주위에 안내석이 두 개다. 후면의 안내석에는 ‘더 큰 걸음으로’란 제목이 붙었다. ‘대한민국의
경제 부흥을 이끌었던 부산의 신발 사업, 부산진구가 그 중심이었음을 뒤돌아보며 더 큰 걸음으로 우
리의 희망찬 미래를 기약하는 의지의 표상을 여기에 세운다’(2015. 3. 11. 부산진구)
측면의 안내석은 ‘위대한 여성의 힘으로’이다. 2020년 초 부산 진구 여성단체협의회가 ‘부산 신발 산업
여성 노동자들이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주역이었음’을 기억하자는 뜻에서 세운 기념석이다.
이곳은 옛 진양고무 자리다. 부산 신발 산업의 터전이랄까. 옛 공장은 가뭇없고 고층 빌딩과 관공서(부
산진구청), 아파트가 즐비하다. 그냥 떠나보내기가 아쉬웠던지, 부산진구는 옛 진양고무에서 서면중학
교~부암 철길마을 굴다리~서면문화로까지를 ‘근대 산업유산 추억길~황금신발길’(약 1.5km)이라 이름
붙여 길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철길마을과 ‘굴다리슈퍼’: 1963년 설립된 진양고무(진양화학)는 ‘진양(進洋)’, ‘왕자표’ 같은 브랜드로 전
국적 명성을 떨쳤다. 깜장(검정) 고무신이 특히 인기였다. 진양고무는 1970년대 수출 붐을 타고 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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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기쁨
장했다.
한때 부산은 신발 왕국이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 부산에서만 약 5만 명이 신발 산업에 종사했다. 종
업원 1만 명 이상인 대형 신발 회사가 국제상사, 진양고무 등 4곳이었다. 1980년대 말까지 한국 수출
품목 중 신발은 상위 5위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었다. 신발 산업의 상승 곡선은 90년대 들어 중국과
동남아 등지의 저가 경쟁에 밀려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 나이키 등의 OEM(주문자 상
표 부착) 생산으로 또 한 번 타격을 입는다. 신발은 사양화 길을 걷고, 당국은 신발의 쇠락을 지켜보기
만 한다.
부산진구가 ‘근대산업유산 추억길’을 낸 것은 옛 신발 산업의 영화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해 보자는 취
지였다. 자원을 조사하고 스토리에 텔링의 옷을 입히자, 제법 쏠쏠한 얘깃거리들이 생겼다. 벽화를 그
려 넣고 안내판을 세우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길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황금신발상에서 철길 굴다리 쪽으로 걸어가면 서면 근대산업유산 스토리텔링 벽화가 나타난다. 진양고
무, 태화고무, 삼화고무 등 신발 공장들과 럭키치약(락희화학) 같은 옛날 상품들이 지난 산업화 시대를
불러낸다. 진양의 깜장 고무신도 희끄무레 보인다. 모두가 없이 살던 시절, 명절 때 어머니가 사 주신
깜장 고무신 한 켤레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이었다.
두 굴다리 사이로 접어들면 부암동 철길마을이다. 소주방과 경북슈퍼, 태림이네 밥집, 제일고추방앗간,
궁전떡방 등 정겨운 상호들을 지나 걷노라면 서면중학교 뒷골목이다 서면중 정문 앞에 ‘굴다리슈퍼’가
있다. 현 자리에서 35년을 버티었다는 가게다. 슈퍼에 들어가니 ‘중고 TV 삽니다/수리는 안 합니다’라
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요즘 중고 TV가 어디 있나’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웃거나 말거나 주인은
TV 보느라 정신이 없다.
부암동 철길마을은 철도로 흥하고 철도로 망한 동네다. 부암1동 8ㆍ10ㆍ11통 일원은 흔히 ‘철(鐵)의
삼각지’라 불린다. 철길이 세 가닥이다. 북쪽에 경전선(부전~마산), 남동쪽에 동해남부선(부산진역~포
항), 남서쪽에 가야선(사상~범일)이 지난다. 자나 깨나 철길 위 기차 소리다. 철길로 인한 소음과 진동
이 일상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굴다리를 지난다. 높이 제한 2.6m, 탑차나 앰뷸런스, 이삿짐 차는 이곳에 못 들어온다. 주민들의 불편
이 눈에 보인다. 주민들은 세간 살림을 2.6m에 맞춘 채 살아왔다고 했다. 굴다리 안은 낮인데도 어둑
하다. 빛과 어둠, 과거와 현재, 이쪽저쪽이 교차한다. 이 굴다리를 경계로 이쪽(서면중)은 부암1동, 저
쪽은 부전1동이다. 덜컹덜컹 반복되는 일상, 나아질 듯 나아지지 않는 날들을 달래며 주민들은 오늘도
고단한 굴다리를 지나 서면으로 나간다.
서면 문화로에 봉홧불을: ‘굴다리슈퍼’의 굴다리를 빠져나오자, 동해선 철길 옹벽을 따라 예쁜 오솔길이
나 있다.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 섰고, 벽을 타고 담쟁이가 철길로 기어오른다. 걷는 맛이 있다고 생각
하는데 길이 끝나고 서면 문화로가 기다린다. 이곳의 굴다리는 부전천교라 불린다. 굴다리 앞에 장승
과 황령산 봉수대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봉수대를 왜 도심 복판에 앉혔을까. 누군가 불을 지피고 연기를 피우라, 세상을 깨어 있게 하라는 뜻
이겠다. 봉수는 평상시에 일거(一炬, 연통 하나에 연기가 피어남),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이거,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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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기쁨
해안에 근접하면 삼거, 우리 군선에 다가서면 사거, 상륙하여 접전하면 오거를 올렸다. 그런데 봉수도,
봉수꾼도 없지 않은가.
봉수대 조형물 맞은편에 굴다리 카페가 보인다. 지역의 문인, 예술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예주인(藝酒
人)의 집’이다. 출판 기념회나 시화전 같은 문화 행사가 가끔씩 열린다. 부전천교 굴다리는 이 굴다리
카페가 있어 쓸쓸하지 않다.
서면 문화로는 부전천교 굴다리에서 도시 철도 2호선 서면역 9번 출구까지 약 550m 이어진다. 영광도
서 앞 거리 풍경이 바뀌었다. 부산진구는 2018년 ‘서면 문화로 고전 입히기’ 사업을 통해 장신구, 전통
혼례, 한옥, 옥새, 장승, 청사초롱 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상징 조형물을 설치했다. 부전천 복개 도
로엔 실개천과 분수를 만들어 물의 이미지를 되살리고, 거리 곳곳에 시(詩) 의자도 대거 들여놨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이육사, 「광야」중)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낙화」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천상병, 「귀천」중)
서면문화로는 주로 중장년층이 즐겨 찾는 장소다. 젊은층이 모이는 옛 태화백화점 쪽의 서면 1번가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영광도서는 이 거리의 랜드마크다. 1968년 5월 문을 연 영광도서는 부산의 최
대, 최고 서점으로, 시민들의 변함없는 약속 장소다. 부산의 책 문화뿐만 아니라 전국 지방 서점의 굳
건한 보루라는 것도 영광도서의 자랑이다. 입고 도서가 50만여 종, 없는 책이 거의 없다. 2018년 말
기존 위치에 17층 규모의 새 서점 건물을 지었다. 지하 2층부터 지상 4층까지 서점으로 사용하고 그
윗층은 병원, 금융 점포 등이 입점했다. 건물을 새로 지어 산뜻하긴 한데 예전보다 운치가 덜하다. 크
고 높은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닌가 싶다.
영광도서 앞 분수대에 옛 부산탑 모형이 설치돼 있다. 부산탑은 1963년 1월 부산직할시 승격을 기념
해 서면교차로에 세워졌던 탑. 1981년 지하철 공사로 철거되었고, 잔해는 부산박물관의 유물이 되었다.
부산탑 모형은 1/10 크기라 거의 실감이 안 난다. 가끔씩 버스킹 팀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지만,
길손들은 제 갈 길 바쁘다. 서면문화로에는 언제쯤 ‘문화의 봉수’가 활활 피어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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