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II 부 인간의 이해
제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제2장 성과 사랑의 철학
제3장 더불어 사는 삶--동양의 지혜
@P85
제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개관
인간성에 대한 이론들은 일상의 삶의 문제에서부터 정치 경제적인 이념 체계에 이르기까지 밀접한 상호 연관을 가지면서 인간의 삶과 사회 관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탐구는 인간 삶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기본적이고도 합리적인 토대가 된다. 본 장에서 다루는 인간성에 대한 철학적 탐문은 특정의 이론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입장들을 분석 비판 평가함으로써 인간성에 대한 균형 있는 관점에 다가서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살펴볼 것은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본성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고전적인 사상가들이 이 입장에 속한다. 그리스 전통을 대표하는 플라톤은 우주와인간을 관통하는 조화와 질서의 본성으로서의 이성에 따르는 삶을 본성에 따르는 정의로운 삶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주의뿐만 아니라 경험주의 계열의 공리주의 또한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대한 신뢰를 갖고있다. 쾌락주의로 분류되는 공리주의가 이러한 입장으로 분류되는 데에는 공리주의가 인간의 사회적 특성으로서 이른바 효용의 원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마르크스의 입장 또한 인간의 합리적 본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전제하고 있다.
둘째는 인간의 이기적, 충동적 본성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근세 자연과학적 성과 특히 진화론의 등장과 함께 더욱 강화된 설득력을 행사하면서 오늘날 지배적인 인간관으로 자리잡았다. 이 입장에 속하는 사상가로서 고전으로는 고대 소피스트, 근세에 이르러서는 홉스를 대표적인 사상가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입장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을 통해 전통적인 이성주의적 인간관을 깨고 충동적 이기적, 공격적 인간관을 내세운다. 이러한 프로이트 인간 이해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더더욱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오늘날 욕망에 관한 철학적 탐구의 기초가 되고 있다.
@P86
(주제 토론)에서는 인간성에 관한 사르트르의 입장과 사회생물학의 입장이 소개된다. 이 두 입장은 전자가 비결정론을, 후자가 결정론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립적인 성격을 갖는다. 특히 신자의 사회생물학적 입장은 현대 분자 생물학의 발달에 힘입어 대두된 최근의 주장들로서 아직도 그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다 (읽기 자료)는 인간성의 그늘과 양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두 가지 다른 주제의 글들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증오 심리가 갖는 사회 관계적 측면과 생물학적 사실로는 해명하기 힘든 인간성 내부의 심오하고도 존귀한 측면 등을 함께 음미해 본다.
1. 기본강의: 인간 본성의 제 문제
1. 인간이해의 중대성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 자신에게 던져진 물음 중 가장 중대하고도 심각한 물음의 하나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 물음은 인간 역사가 존속하는 한 궁극적인 해답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물음은 결코 중단되거나 포기될 수 없는 물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기본적으로 그러한 도정 속에서 부단히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기획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될 실천적 자의식을 갖는 주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이냐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들은 시대와 민족, 역사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 왔고, 그에 따라 인간의 삶이 지닌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도 심지어는 대립적일 정도로까지 차이를 보여 왔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자체가 인생관, 세계관, 이데올로기 등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예술, 종교 등 삶의 제반 문제들의 성격과 해결책을 규정짓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고 이제 우리가 인간에 대해 철학적으로 살핀다는 것이 어떤 특정의 인간 이해에 다다르고자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철학적 작업과 마찬가지로, 다만 인간 삶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차원에서 인간 이해와 관련한 다양한 견해들을 비판적으로 탐구하고 음미하고 평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P87
2.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본성
2.1 고전 고대 사상
인간에 대한 견해들은 시대나 장소 그리고 입장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 온 인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도 고전적인 명제를 꼽으라면 다름 아닌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이른바 전통적인 인간관 즉 합리적, 이성적 인간관을 단적으로 대변해 왔다. 합리적, 이성적 인간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충동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이성에 따라 사는 삶이 행복하고 선한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인간이 사회 생활은 물론 도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른바 고전적인 고대 사상 대부분은 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신념 위에 서 있다 서양사상의 뿌리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Platen)사상이나 동양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선진 유가의 공자, 맹자사상은 그와 같은 인간관의 고전적인 뿌리로서 상당한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우선 자연파 인간을 분리하지 않는다. 자연은 조화와 질서를 갖추고 있는 영원한 것이며,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일부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의 조화와 질서의 원리가 다름 아닌 도이자 이성(nous)이다. 따라서 우주와 자연의 원리에 일치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것이고 선한 삶이며,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내 안에 존재한다. 원형이정이 천도의 원리라면, 인의예지는 그것에 상응하는 인간의 도리이며 천도지상 인의예지 음지재우, 우주를 조화로운 코스모스로 만든 우주 영혼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는 내 영혼(Psyche)의 본(paradeigma)이다. 특히 천성에서 부여받은 본성으로서 인은 본래 씨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장차 터져서 나무로 자라고 개화할 가능성을 내함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은 이미 이성에 따라 욕망(epithymia)을 다스리며 살아갈 수 있는 절제 능력(sophrosyne)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개인이나 사회나 그와 같이 천성에 일치하는 본성에 따라 조화와 질서를 갖춘 모습이 군자이자 정의로운(dikaios)사람이요, 덕이 지배하는 바른 사회이자 바른 국가다.
@P88
이러한 인간의 선성은 동양의 대승불교에서 극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불교는 모든 인간이 원대하고도 지고한 참된 실재이자 자연적 선성으로서 불성을 갖고 있으며 누구나 다 자기의 힘으로 그 불성을 깨달아(자정기의)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또한 플라톤의 전통을 이어받아 행복(eudaimonia)이란 다름 아닌 인간의 기능 중 가장 자연적 본성에 가까운 이성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고 그 기능의 습관적 발휘 능력이 곧 덕(arete)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성주의적 전통은 서양에서 스토아(Stoa)철학에 이르러 더더욱 철저해져서 자연 자체를 로고스(logos)와 일치시켜 자연학은 동시에 윤리학으로서, 공히 이성에 기초한 삶의 태도의 확립과 지혜의 도달을 목표로 하였다. 곧 자연의 로고스는 인생의 로고스이며, 그에 따라 인생의 목적은 자연의 로고스라는 지(지)를 갖는 것이자 그 지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부동심(apatheia)의 경지이다.
물론 이와 같은 고전적 고대 사상 즉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적 인간관이나 고대 선진 유가의 인간관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간 일반을 두루 포함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인간 일반에 대한 이해로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고대의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노예는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마소와 같은 존재였고 특히 플라톤은 비록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긴 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인간 종의 선천적 차별성에 기초한 우생학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인류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지 수 만년 이래 거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남성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너무도 당연시 여겨져 왔다. 예컨대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인간으로서 여성이 얼마나 오랫동안 열등한
존재로 여겨져 왔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P89
2.2 근세 이성주의
그러나 이와 같은 고전 고대의 이성주의적 인간관은 서양의 경우 16세기 르네상스를 거쳐 당시의 인문주의, 종교 개혁, 자연과학의 기초를 제공하였고, 나아가서 계몽주의 사조 및 근세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 전통에 뿌리가 되었다. 물론 이성적 존재로서 근세의 인간 개념은 고대 그리스적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지는 않았다. 즉 고대 그리스 사상에 의하면 인간 이성은 인간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본질로서 세계 이성과 동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면 인간의 주체적 자아 개념이 등장하고 자연과 인간, 주객의 분리가 진행됨으로써 그리스적 이성은 곧 인간 자아의 주체적 이성으로 치환된다.
근세 이성주의(rationalis)의 선구격인 데카르트(R. 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는 확실성의 기초가 더 이상 신적 존재가 아닌 (생각하는 나) 즉 이성적 사유주체로서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이었고, 보편적 도덕법의 존재 및 그 실천의 필연성을 논증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완성 가능성을 꿈꾼 칸트(I. Kant)의 도덕철학 또한 인간성 내부에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도덕적 자율 능력으로서 실천 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통해 성립 가능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동서양의 고전 고대 사상에서 근세 이성주의에 이르기까지 이성주의 전통 위에 서 있는 사상들은 대부분 인간의 합리적, 이성적 성격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갖고 있고, 그것의 존재와 근원에 대해서도 형이상학적으로건 종교적으로건 선천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특히 서양의 이성주의적 전통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적 성향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P90
2.3 공리주의
그러나 인간 본성이 합리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위한 적극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입장은, 이상에서처럼 이성주의 전통에서만 엿보이는 것은 아니다. 굳이 형이상학이나 종교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삶을 경험적으로 잘 헤아려 보면 인간이 그런 대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나음대로 사회를 잘 꾸려 나가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표명하는 대표적인 입장이 곧 철학사적으로 경험주의(empiricism)와 쾌락주의(hedonism) 전통으로 분류되고있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입장이다 공리주의에 의하면 우선 인간성이 선천적인지 아닌지,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 그것은 알 수도 확인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모두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멀리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성의 기본은 쾌락의 추구이다 이처럼 공리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간 심리에 대한 쾌락주의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공리주의의 이러한 출발은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공리주의적 이해가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심부터 생기게 한다. 왜냐하면 인간 각자의 쾌락 추구는 서로간에 상충하기 마련하고, 그 상충은 사람들 간에 이기적 갈등과 반목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주의 사상은 비록 쾌락을 행위 동기의 기초로 간주하고 있긴 할지라도 그 행위 과정에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특성이 깊숙히 매개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즉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되 쾌락을 늘리려는 자기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일으키면 그것이 나에게도 결코 쾌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구체적인 경험적 삶의 과정에서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비근한 예로, 기다리는 것이 힘들어 새치기를 하면 그때는 편해도 결국은 자기에게 해로 돌아오므로 결국 줄서는 것이 나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나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효용있는 것임을 인간이라면 경험적으로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성에는 이렇게 경험적으로 체득된 합리적 사회성의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P91
이렇게 터득한 원리가 곧 공리주의의 대성자 벤담(J. Benthal)이 말하는 효용의 원리 (the principle of utility)이다. 즉 벤담은 사회 협동체 내에서 인간성의 구조가 필연적으로 효용의 원리를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으므로 인간은 쾌락을 목적으로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으로 관계자의 쾌락까지 포함하는 공중적 쾌락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한, 사회 협동체 내에서 비록 서로가 쾌락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가능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그러한 인간 특성에 부합하는 가장 바람직한 사회적, 도덕적 선이다.
요컨대 쾌락 추구라는 이기적 행위를 긍정적으로 도덕적 행위 양태 속에 수용하고자 하는 벤담과 밀(J.S. Mill)의 공리주의 사상은 자유 방임적인 이기적 이윤 추구가 곧 국가적 부의 증대로 여겨졌던 당시 영국자본주의의 낙관적인 전개 상황에서 성립된 사상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초기 자본주의의 이러한 전개는 이내 사회적 빈부 격차의 심화와 그에 따른 갈등을 증폭시키면서 한계에 부딪치고 급기야 사회주의 사상을 태동하는 배경이 된다. 이렇게 보면 공리주의 인간관은 효용의 원리에서 보여지듯 벤담 자신이 살던 초기 자유방임주의 시대 영국인들이 누리고 있었던 사회경제적 안정을 기반으로 성립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공리주의는 자유주의(liberalism) 사상으로서 이기심의 공존 가능성을 기초지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사상인 까닭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주의 윤리 사상 대부분은 공리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2.4 마르크스주의
공리주의가 주장한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특성을 자유주의 사상이라는 범주 속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갖는 개인주의적 특성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타파를 주장하고 나선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물론 근세 사회주의 사상의 선구인 마르크스(K. Marx)는 인간성이란사회 관계의 변화와 맞물려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사회 관계와 무한한 어떤 고정적인 또는 선천적인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진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최초의 원시적인 사회 관계에서 리고 종국적으로 도래할 이상적 사회 관계에서 인간이 갖는 사회적 삶에 대한적극성과 합리성을 굳게 믿고 있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원초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인간성은 근본적으로 이웃에 대해 선하고 우애적이며 협동적이었다.
@P92
그러나 사회적 생산 관계에서 사적 소유의 발생이 그러한 인간성을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사적 소유는 개인에게 타인에 대한 사회적 지배를 발생시키고 개인은 그 지배를 통해 더욱 이웃을 해치게 되며 그 사적 소유의 증대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그 소외를 창출했다고 여겨지는 계층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 관계는 더더욱 배타적이고 경쟁적인 관계로 그리고 사회 관계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악순환 된다 그것의 가장 극대적인 모습이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모든 재화 및 생산 수단을 공유하는 사회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즉 마르크스는 그와 같은 공산적 사회 관계가 수립되면 사회 구성원 누구라도 그 공유된 생산 수단과 물적 생산물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됨에 따라 공동체적인 상부상조적, 협동적 본성이 고양되고, 나아가 인간 모두가 그 본성에 부합한 사회경제적 구조를 갖게 됨으로써 그들의 이웃과 아무런 갈등 없이 평등하게 최선의 자기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을 실현하는 이상사회가 정착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프로이트(S. Freud)에 의하면, 사적 소유욕은 인간이 갖는 본능적이고 근원적인 공격적 성향의 일부이므로, 그것을 변화시킨다 해도 그 근원적인 본능적 공격욕은 여전히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 본능은 사적 소유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소유 개념이 성립되지 않은 원시 시대부터 인간 내부에 본유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유아는 출생시 식욕, 성욕 등기본적인 생물학적 본능뿐만 아니라 호전적 공격욕도 함께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은 결코 사회 관계의 변화와 맞물려 형성된 것이 아니다. 요컨대 프로이트에 의하면 최소한 심리학적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견해는 인간성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낙관적인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
@P93
3. 인간의 충동적, 이기적 본성
3.1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본성을 갖는 존재라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매우 뿌리가 깊고, 특히나 동물적 존재와 차별되는 인간 고유의 존엄성과 품위를 근거 짓는 사상적 기초가 되어 왔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은 앞에서 살펴보았다시피 대부분 형이상학 내지 종교적인 관점에 기초하고 있는 까닭에 근세 자연과학의 발달 이후 과학적 실증주의 의식이 증대된 오늘날에 이르러선 그 설득력이 급속하게 퇴색하고 있다. 특히 인간 존재를 단지 여타 동물과 같은 진화 과정상의 동물적 존재로 위상지은 다윈(C. Darwin)의 진화론이 등장하면서부터 고전적인 관점들은 더더욱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다윈에 의하면 인간은 더 이상 신적인 존엄성을 나누어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여러 고전적인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으로서 하나 같이 주장해 온 빛나는 이성조차 더 이상 선천적인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닌 그저 동물적 특성으로서 진화 과정 속에서 자연 선택적으로 생겨난 것일 뿐이다.
@P94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동물들과 같이 동물적 특성을 공유하는,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충동적이며 공격적인 존재이다. 요컨대 인간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 고전적이고도 전통적인 인간 이해였다면, 인간성의 이기적, 충동적, 공격적 특성은 이제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오늘날 인간 이해의 기본 요체가 된다.
물론 고전 고대 시대는 물론 이성주의가 지배했던 근세에도 인간성에 대한 이기적, 충동적 측면을 주장한 사상이 있어 왔다. 이기적 행복론의 뿌리 또한 매우 깊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Gorgias)는 탐욕적 이기심이 오히려 자연에 부합하는 인간의 떳떳한 본성이라고 주장하였고, 나아가 트라시마코스(Trasymachos)는 정의롭게 살면 결과적으로 나는 손해만 보고 그저 강자나 남 좋은 일만 해 주는 꼴이므로, 내가 행복해지려면 철저히 내 이기심에 따라서만 행위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탐욕과 이기심을 본래적 본성의 타락이자 극복의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소피스트와는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종교적으로 기독교는 인간의 탐욕과 자만심의 근거이자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제거할 수 없는 인간성의 뿌리 깊은 근원으로서의 원죄를 내세웠다 특히 이러한 기독교적 인간관은 근세 자연과학적 인간관이 배태되기 이전까지 천여 년 동안서구의 인간관을 지배하여 왔다.
3.2 홉스
특히 근세에 이르러 이성주의적, 합리적 인간관이 득세하던 시절에 유물론적 입장에서 인간의 이기적, 공격적 본성을 주장한 홉스(T Hobbes)의 견해는 오늘날 개인주의 정치 사상과 직결되는 선구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우선 홉스에게서 인간은 원자와 같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운동하고 서로 충돌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곳에선 자기 보존의 충동만 있고 그에 따라 그 충동은 서로에 대한 위협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힘을 갖고자 하며, 그것은 자랑도 수치도 아닌 그저 필요하기 때문에 요구되는 본성이다. 개개인은 힘이나 교활성에 있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누구도 안전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이들이 처한 상황은 이들의 행위를 규제할 시민적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된다.
물론 홉스 또한 인간이 이성을 갖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홉스에게 있어서 이성은 욕망을 절제하거나 통제하는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보존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안전 보장의 추구를 보다 효과적으로 만드는 일종의 규제적 통찰이자 계산 능력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제 홉스는 이 영악한 이성적 규제력을 근거로 야만과 갈등으로부터 사회적 공존의 상태로의 전환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이성의 계산 능력을 통해 통제력 없는 자기 보존욕이 결국 모두의 자기 보존 자체를 위협하는 것임을 자각함으로써 사회조직의 강제적 질서 및 국가의 강력한 통치 권력 그리고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그들 자신들의 보존을 위한 사회 관계적 원리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홉스의 견해는 언뜻 군주제적인 절대 권력을 합리화하는 이론인 듯 보인다.
@p95
그러나 홉스의 국가에는 군주제가 의존하고 있는 몰 개인적 충성심과 희생적 헌신이 자리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홉스의 강권 국가는 강제가 아닌 철저히 계산된 개인들의 이기적인 자기 보존욕에 기초한 상호 계약의 산물로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홉스의 사상이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철저히 근세 사회 사상의 기초로서 개인주의와 사회 계약 사상에 기반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렇게 보면 개인들의 계산된 이기심들의 계약에 의해 간신히 결속된,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가장 강력한 통치력을 갖는 국가로 계약된 홉스의 국가는 내용적으로 개별적인 이기심의 총합을 반영할 뿐이다 요컨대 홉스에 의하면 그러한 이기적 개인들의 강권을 통한 상호 계약적 공존이야말로 이기적 인간 본성들의 사회화를 위한 최선의 길 즉 자연 상태로부터의 최대의 구제책이자 목표로서의 자기 보존의 실현이다.
사실상 인간의 이기적 본성과 그 구제책에 대한 홉스의 노골적인 견해는 그 이후 지배적인 사회 사상으로 제기된 자유 방임주의가 잉태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가히 예언자적인 간파였다고 평가될 수 있겠다.
3.3 프로이트
그러나 본 절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인간성의 이기적, 공격적 측면에 대한 과학적 성격의 견해들은 진화론의 등장 이후 인간에 대한 동물적 이해가 증대되면서 급진전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그러한 견해들은 자신들의 과학적 근거들이 갖는 설득력에 힘입어 오늘날에 와선 인간성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에 기초하여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 프로이트(S. Freud)의 견해는 그러한 견해들 중 학문 전 분야에 걸쳐 가장 폭발력 있는 영향력을 끼친 대표적인 사상이다.
@P96
프로이트에게 있어 인간 본성의 가장 본질적인 것은 충동(libido)이다. 흔히 자아라고 여겨져 온 것은 현실계의 계속적인 영향에 의해 겉으로 드러난 무의식 속에 있는 충동의 발전적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진적인 발전 과정에서조차 충동 가운데 일부 자질만이 잠재 상태로 변이되어 자아 속에 흡수되는 것이고, 다른 자질은 여전히 본성의 핵심적 요소로서 충동 속에 변함 없이 존속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종래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원리로 알려진 의식적 자아(ego)는 사실 자주적인 행위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 내의 본능적인 공격적 충동 욕구인 이드(id)와 전통과 관습 도덕 및 부모로부터 영원한 내면적 무의식적 억압인 초자아(superego) 사이에서 그것들의 지시에 끌려 다니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인간 개념 즉 인간이란 합리적 목적을 위하여 성실하게 노력하는 지각 있는 존재라는 오래 된 신념은 극히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인간 이해에 불과하다. 의식의 세계가 마음의 세계 전체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물 위에 나타난 태산의 일각처럼 조그마한 것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무의식이 마음의 진짜 주인공이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한 대의 명분을 따라 행동하는 듯 보이나 그 한층 깊은 동기에는 어떤 동물적인 충동 특히 성적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소위 도덕적이라고 찬양을 받는 행위란 금지된 것을 어기는 것에 대해 가해지는 초자아로부터의 억압과 질책에 대한 무의식적 위장반응 즉 가장된 행위이다. 즉 도덕은 칸트가 주장하는 것 같은 어떤 선천적 원리에 근원을 둔 것이 아니라 충동적 삶의 욕망과 사회적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달된 사회 형성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른바 양심이란 것 역시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억압된 욕망들이 무의식에 살아남았다가 성인이 된 후 의식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저항 심리적 자기 공격성 즉 죄의식일 뿐이다. 요컨대 인간의 선천적이고 독립적이며 본능적인 기질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근원적인 자기 보존적 특성 즉 공격적 성향뿐이다.
인간의 본질을 의식적 자아가 아닌 무의식적 충동에서 찾은 이와 같은 프로이트의 인간관은 전통적인 이성주의적 인간관의 측면에서는 실로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이성에 기초한 고전적인 윤리 및 정치, 역사 사상 모두를 뿌리째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사상은 인간의 행위 동기 및 병리적 심리 특성을 진단하고 해명하는 심리학 이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과 사회 관계에 대한 설명 이론으로서 특히 이성과 권력 전통과 도덕의 이름으로 개인 및 사회에 가해진 억압 구조를 폭로하고 해명하는 철학적 사회 사상으로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으면서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물론 그가 인간의 행위 동기의 본질로서 주목한 성적 리비도는 아들러(A. Adler)를 비롯한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인간 의지의 능동성을 간과한 채 지나치게 병적 특성에 집착한 결과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이른바 정신분석학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자본주의적 경쟁 사회에서 인간 및 사회, 역사를 이해하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적, 심리학적 조류의 하나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p97
4.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현대
그러나 다윈의 인간 이해, 프로이트의 인간 이해가 오늘날 심대한 영향력을 갖고 발전하게 된 배경에는 20세기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지배력을 확대해 온 자본주의의 발달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의 내적 원리로서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적 삶 속에서의 공격적 탐욕성 그리고 그로부터 초래되는 인간 소외와 정신 분열은 프로이트의 인간 행동 및 삶에 대한 이해와 직결되면서,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삶의 억압 구조와 한계를 해명해 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 삶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의 내적 필연성을 뒷받침해 주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삶의 원리로 자리잡은 오늘날 이미 욕망을 부추기는 주체는 이른바 스타도 언론도 하물며 기업도 아니며 이들은 순진한 역할 대행자들 일뿐 진정한 주체는 자본주의의 생리이다. 오늘날 인간의 본성으로 너무도 당연시 받아들여지는 개인의 이기적 욕망과 탐욕성은 곧 자본의 탐욕적 공격성을 반영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 속에서 인간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자기 성취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개인 및 사회가 겪는 소외와 정신 분열의 양태 또한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생리의 필연적 반영임을 보여 주는 것이고, 나아가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가 본질적으로 정신 분열적 속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P98
이런 점에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최근의 논의는 유행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욕망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른바 프랑스 사상가 푸코(M. Foucault), 들뢰즈(G. Deleuze), 라캉(J, Lacan)의 주장이 관심을 끌고 그 배경 이론으로서 스피노자(B. Spinoza), 니체(F. Nietzsche), 쇼펜하우어(A. Schophenhauer)가 주목받는 것도, 그리고 새삼스럽게 동양의 노자와 장자가 다시 논의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가 삶의 문제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그와 같은 삶의 문제의 해결과 극복의 방향 또한 본성론적 논의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삶의 원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모색이 함께 수행됨으로써 가능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주제토론: 인간성은 자유인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1. 토론과제
다음의 글들은 인간성과 관련한 대조적인 입장을 보여 준다. 각 입장을 잘 읽고 그들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토론해 보자.
(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즉 실존으로서 인간 존재는 신이 창조한 것도 진화에 따라 생겨난 것도 아니며 또한 삶의 고정된 어떤 목표를 갖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진술도, 인간성에 관한 어떤 선천적인 결정론적 진술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순전하고도 무한대한 자유의 존재이다. 즉 인간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이외의 어떠한 가치 기준도 본유적으로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그 자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인지는 순전한 자유의 지평에서 바로 그 자신이 결정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폐쇄되어 있고 결정된 본성을 지닌 즉자 존재로서의 동물과는 달리 대자 존재로서 자의식을 갖고 무한정으로 열려진 세계와 직면해 있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 부조리하고 이 세계 내에서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스스로를 돌볼 수밖에 없는 불안하고 버림받은 내던져진 상태에 있다 이때 불안은 외부의 대상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동을 예견할 수 없음을 의식하는 데서 온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순전한 자유를 의식한다는 것은 곧 (무)에 대한 의식이고 그럼으로 해서 인간은 고통스럽다.
@P99
(나) 살아 있는 각 개체는 잠시 태어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이고, 자손 대대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전자뿐이다. 즉 생명체는 유전자로 하여금 더 많은 복사체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 준 매체로서의 형질이다. 따라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행동은 자기 보존을 목표로 하는 유전자의 명령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자신의 유전자를 재생산하는 기계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본성과 특징, 삶의 방식 모두가 생물학적 유전자에 의해 통제되고 결정된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컨대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를 연구해 보면 두 종의 유전 정보 사이의 차이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만 있다고 여겨져 온 집단을 위해 개체를 희생하는 이타적 행동 역시 그들 모두의 유전자 속에 있고 그 유전자 자신을 안전하게 재생산하려는 프로그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인 행위조차 사실은 종을 보존하려는 유전자의 이기적인 성향에 의해 지시를 받은 것이다. 유전자는 한 개체가 희생되더라도 종에게 유괴한 쪽으로 행위 하게끔 지시하는 정보를 갖는 쪽으로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윤리적 행위나 사회적 행위도 결국은 진화 과정에서 생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최근 분자 유전학적 성과에 의하면 상대를 희생시키면서 무한정 증식하려는 이기적 유전자나 공격성 유전자에 이어 동성애 유전자의 존재까지도 확인되고 있다.
인간이라는 종의 성적 차이와 특징 또한 유전적 특징에 의해 결정된다. 남성이 여성보다 능력 면에서 앞선다는 생각은 단지 문화적 편견이 아니라 뇌와 생식기의 구조 차이에서 비롯된 생물학적 사실이다. 실례로 생물의 암컷이 만들수 있는 자손의 수는 한계가 있는 반면 수컷에는 이런 한계가 없는데, 이 생식능력의 차이가 곧 수컷이 암컷을 착취하는 출발점이다. 요컨대, 인간성은 이미 생물학적 유전자에 의해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사회생물학자에 따르면 동물이든 인간이든 모든 행위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P100
2. 기본 논증과 비판
2.1 내용 분석
(가)의 글은 20세기 프랑스의 실존주의 사상가 사르트르(J.P. Sartre)의 인간관을 담고 있다. 그는 단적으로 무신론적, 비결정론적 인간관을 피력한다. 굳이 인간에게 정해진 본성이 있다면 인간은 자유로서의 본성을 갖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로운 만큼 불안하고 고독하다. 그리하여 인간은 때로는 자신이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종교는 그러한 도피의 대표적인 한 형태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기만 혹은 거짓 믿음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자기 기만으로부터 빠져나와 오히려 '무'를 정면으로 순전하게 응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유를 의식하고 모든 순간 새로운 혹은 다시 새로워진 선택을 감행해야 한다. 이것이 순전한 자유로서의 인간 행동 즉 의식의 활동이다. 그리고 정신 상황의 모든 면,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태도와 감정과 우리의 성격까지도 우리 자신에 의해 선택된 것임을 받아들여야 하고, 또한 그럼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순전한 책임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의 불안으로부터 도피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무에 직면하는 순전한 자유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이고 오히려 누려야할 인간의 조건이다.
한편 (나)의 글은 근세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룬 생물학적 성과에 기초하여 성립된 사회생물학의 기본 주장을 담고 있다. 월슨(E. Wilson)과 도킨스(R Dawns)는 이러한 사회생물학적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사회생물학은 '다윈의 이론에 입각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적 자연선택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자연선택설은 두 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다. 첫째, 같은 생물 종 내에서 개체들 사이에 생존 경쟁이 일어나고 환경에 잘 적응한 개체가 살아남는다. 둘째, 각 생물 종은 늘 새로운 변이를 만들어 내며 각 변이는 가능한 한 많은 자손을 퍼뜨리려 하는데, 이 가운데 특정한 변이만이 자연적으로 선택되어 더 많은 자손을 퍼뜨리고, 이 과정이 누적되어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의 진화과정 전체를 이끄는 기본 프로그램이 곧 유전자이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삶의 양태 모두는 이러한 유전자의 프로그램대로 먹고 살고 사랑하면서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도록 기획 결정된 것의 반영일 따름이다. 즉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이다. 그리고 그러한 반응 구조 일체가 생물학적 물리 현상인 한 그 모든 내용들은 궁극적으로 인지과학 내지 신경과학으로 분석이 가능하고 동시의 유전자의 작동 원리로 풀이될 수 있다.
@P101
이렇게 보면 (가)글과 (나)글은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인간관은 철저히 비결정론적 입장이고, 이른바 사회생물학적 입장은 생물학적 결정론 또는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의 사회생물학적 입장은, 오늘날 인문 사회파학의 발달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놀라운 진전을 보이고 있는 분자생물학 분야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개인주의 사상이 발달한 영미 쪽에서 인간 본성과 관련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입장으로저 현재 치열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입장이다. 따라서 비판과 토론은 주로 그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해 보기로 하자.
2.2 비판과 토론
2.2.1 사르트르의 입장
실존주의 자체가 20세기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서 나치즘과 파시즘을 비롯한 전체주의적 사상들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사조임을 고려하면, 사르트르가 왜 그와 같은 주장을 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사르트르가 주장한대로 인간성이 자유에 직면한 각 개인들의 선택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창출된다는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의 주체적 존엄성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하고자 한 시도라는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상 인간성과 관련한 20제기의 지성적 풍토는 프로이트류의 정신분석학에서나 스키너류의 행동주의 심리학 모두에게서 보여지듯, 이른바 과학주의의 이름으로 인간성에 관한 결정론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주의는 그 당시는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발달과 맞물려 인간의 물화와 비인간화 등 부정적인 영향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의 내면적 실존을 치열하고도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그로부터 인간의 고유하고도 진정한 모습을 되살리고자 한 사르트르의 주장은 실로 20세기 휴머니즘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었고, 특히 억압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그의 용기 있는 실천적 저항은 그야말로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P102
그러나 죽음조차도 지성으로 극복하기를 주창하는 사르트르적 인간의 엄격성과 치열함은 아무래도 평범한 일상의 인간 모두가 갖는, 가져야 할 성격으로 보기 힘들다 대자와 즉자의 절대적인 구분 또한 일상적 자아의 의식 상태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고립적이다. 물론 인간은 사르트르의 말대로 자기 내면과의 치열한 싸움을 긴장스럽게 유지하면서 고뇌하고 선택하고 결단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자아에 대한 긴장스런 통제력을 풀어 버리고 자연적인 힘 앞에 스스로를 열어 둘 때 그 이상으로 의미 있게 행위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인간 존재의 특성이다. 예컨대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적인 유유자적한 삶의 모습이라든지 불가적 해탈의 모습은 사르트르가 서 있는 불안하고 긴장스런 그러나 자유를 의식하는 그러한 인간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2.2.2 사회생물학
오늘날 분자생물학의 발달에 기초하여 인성론과 관련한 새롭고도 강력한 주장으로 대두되고 또 그만큼 그것을 둘러싼 논쟁 또한 치열한 것이 사회샘물학적 입장이다 우선 사회생물학적 관점은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전통적인 인본주의 관점 내지 기독교적 관점은 인간이 다른 동물을 도살하고 지배하는 일을 정당화해 왔으나, 인간이나 다른 동물이나 차이점이 없다고 보는 사회생물학의 견해는 일단 그러한 인간의 권리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생명 존중의 윤리를 강화할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은 자연 또는 생태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가 자연의 중심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일 뿐임을 일깨워 줌으로써, 탐욕적 삶의 부질없음은 물론 인간의 문명적 질서 역시 생태적 질서의 일부로서 다른 부분들과의 유기적인 고려 없이는 따로 유지될 수 없음을 과학적으로 깨닫게 해 줄 수도 있다. 나아가 사회생물학적 견해는 인간이 환경을 개발하고 훼손하기보다는 자연 앞에 겸허한 자세로 자연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오늘날의 생태학적 세계관의 과학적 근거가 될 수 있다.
@P103
둘째, 학문의 통합성 측면에서 사회생물학은 두 개의 문화(인문과학과 자연과학)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을 실현한다. 사회생물학은 하등 동물에서 고등 영장류와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유전자에서 개체, 사회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생물 사회의 진화와 조직화라는 모든 단계를 하나로 영어 통일적으로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인간 사회와 윤리 그리고 문화까지도 생물학적 기초에서 분석하고 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사회생물학적 입장은 인문 사회과학의 발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 나름의 놀라운 과학적 성과에 기초해서 인간과 사회에 관한 여러 가지 새롭고도 의미 있는 설명을 시도해 왔다. 예컨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라 믿어 왔던 언어나 사회 생활도 다른 동물 이를테면 침팬지 개미 벌, 새, 영양들의 세계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인간의 사회적 삶의 제반 양태에 관한 전통적인 관점 특히 플라톤류로 대표되는 본질주의적 관점이 갖는 관념성과 추상성의 한계를 넘어 그것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보다 설명력을 갖는 인간에 대한 과학적, 생물학적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다.
그러나 사회생물학은 그것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 이상으로 많은 문제점과 논쟁점을 갖고 있다. 첫째,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생물학적 원리로 설명 할 수는 없다 동물 사회에 대한 연구가 인간 사회와 그 기원을 알아내는 데 유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이 생물학적 진화 과정을 통해 출현했다고 해서 인간에 관한 학문이 생물학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사고를 지배하는 뇌의 작용에 관한 생물학적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그 사실이 사람들 간의 사고의 다양성과 그 각각이 갖는 의미를 설명해 주진 못한다. 오히려 생물학적 객관성이라는 미명 아래 극히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사실을 전체에 대한 설명으로 조급하게 일반화하려는 데 따르는 위험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둘째,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문화는 다른 동물 세계의 자연 선택적인 현상과는 다른 특성을 갖는다. 이를테면 동물 사이의 경쟁은 생존과 직결되지만 인간은 생존만을 위해 경쟁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실현을 위해서도 경쟁한다.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경제, 정치, 외교적인 복합적 요소들이 한데 얽혀서 일어나는 현상이지 단순한 생물학적 싸움이 아니다. 인간이 1.5 미터에서 2.0 미터 정도의 키를 갖는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실제 키가 얼마나 될지는 부모의 조건이나 영양 섭취와 같은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p104
셋째, 생물학적 결정론은 인간사회가 갖고 있는 복합적인 문제를 단순화시키면서 문제 자체를 해소시킬 위험도 있다. 사회생물학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마다 지위와 계급이 다르고,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것, 하물며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행위조차도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이른바 문화적 현상이라 불려지는 일체의 것을 생물학적 현상으로 치환시키는 환원주의(reductioNism)적 사고방식 위에 서 있다. 넷째, 사회생물학적 결정론에 따르자면 인간 사회의 변화는 유전자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인간의 유전 형질은 수만년 동안 변함 없이 호모 사피엔스의 것을 보존해 왔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인간 사회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유전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더욱이 만족이나 쾌락, 슬픔과 연민과 같은 인간의 감정이나 도덕적 행위는 생물학적 차원만으로는 설명할 수 만다. 그 속에는 그 시대와 사회가 부여하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사회생물학이 갖는 학문적 통합성과 관련해서도 문제가 있다 물론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학문 분과들을 통합하는 일은 필요하다. 각 분과가 제공하는 연구 성과의 도움을 받아 한 주제에 대해 좀더 명확하고 통일된 이해를 갖는 일은 의미 있다. 그러나 하나 하나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통일시키는 일은 그대로 두는 것만 못하다. 사회생물학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복합적 특성을 통합적 관점이라기보다는 단지 그들 자신의 생물학적 관점으로만 해소시켜 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위험성은 사회생물학적 관점이 갖는 이데올로기 정의에 있다 세상이 비열한 유전자들의 각축장이라면 '유전적으로 열등한 여성이 남성에게, 흑인이 백인에게 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거나, '범죄는 사회적 불평등 같은 환경보다는 유전적 결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과학적' 주장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범죄가 유전적 특질이라면 교화나 학습이 강조될 이유가 전연 없다. 더욱이 게놈 프로젝트 등을 통해 유전자의 내적 구조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에 따른 유전자의 임의적인 조작 가능성이 확보된 오늘날의 과학 수준에서 볼 때, 유전자 결정론은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한 심각한 사회 윤리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생물학은 계급주의, 인종차별 남녀 불평등 제국주의 등 온갖 정치적 불합리를 지지하는 이론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한계와 그로 인한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P105
아울러, 사회생물학의 입장이건 스키너(B. Skinner)류의 환경 결정론적인 입장이건, 인간성이 무엇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태도 자체는 상이한 지역, 상이한 종족들 간에 엄연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체적인 반대 사례들을 서로에 대해 갖고 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품성 및 지능이 어떤 특정 요소 하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태도 자체가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요컨대 무엇보다도 원론적인 측면에서 인간성과 관련한 제반 학문적 성과를 균형 있게 종합하면 인간성의 형성에는 단일한 하나의 요소만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학습, 본능과 유전 등 아주 복합적인 요인들이 공동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일한 것이든 복합적인 것이든 간에 인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요소들에 의해 인간의 품성 등이 완전히 결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판단하고 반성하며 숙고하는 주체적 힘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성의 형성에는 이러한 주체적 능력의 작용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결정적 요인만을 강조한다면 인간에게 그 자신의 선택에 대한 어떠한 도덕적 사회적 책임도 물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선택이란 그 개인이 택한 것이라기보다 그의 악한 품성을 만든 환경이라든지 선천적 유전자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판단하고 행동을 결단하는 개인의 주체적인 측면 그 자체가 이미 사회적 존재로서 간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임을 보여 준다.
사회생물학의 견해를 둘러싼 논쟁은 조금 단순하게 보면 타고난 유전적 요인과 살아가면서 배우는 문화적 요인 가운데 어느 것이 인간의 본질을 더 잘 설명해 주는가를 둘러싼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나의 이익과 남의 이익이 부딪치는 상황을 자주 만난다. 대체로 나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도 남에게 이로운 행동을 해 본 적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내가 지하철에서 구걸하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건넸다고 하자. 내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불쌍한 사람을 도우려는 동정심 때문일까? 만일 동정심 때문이라면 다시 나에게는 왜 동정심이 있을까? 동정심이야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은 이타적 행동을 하게 만드는 동정심은 인간이 타고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한편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은 동정심은 내가 가정과 학교에서 배운 교육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동정심이 살아가면서 배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인간의 성격과 행동에서 유전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에 관해서는 어느 한쪽 견해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근거는 없다. 우리의 일상 경험과 이 문제에 관한 견해들이 낳을 사회적 결과도 어느 한쪽 견해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 어느 견해를 지지하는가에 따라 우리가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눈과 가치관이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어느 견해를 지지하는가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최소한 사회생물학은 그들 자신의 입장이 왜 선진 자본주의 진영인 영미권에서 주로 지지를 받는지에 대해서 매우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P106
3. 읽기 자료1: 인간성의 그늘-증오
나는 3년 전 존 월리엄 킹이 제임스 비어드 2세를 픽업 트럭 뒤에 매달고 약 5km를 달려서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때, 킹의 머리 속에는 과연 무슨 생각이 있었을지 궁금하다. 킹이 친구들과 함께 비어드를 그렇게 죽인 것은 비어드가 흑인이기 때문이었다.
킹은 법정에서도 비어드의 가족에게 뭔가 할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하자, 그들을 향해 히죽히죽 웃으면서 상스러운 말을 해댔다. 킹의 증오는 무엇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을까 상대방이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혹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런 사건을 저지른 사람들이 폭력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증오라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일까. 그 증오와 관련해서 우리가 하고 있는 역할은 또 무엇일까?
우리는 이런 종류의 범죄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형법에 '증오 범죄'라는 새로운 죄목을 추가했다.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은 1999년 8월에 증오 범죄 관련법들을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에는 존 매케인 상원 의원이 '증오'가 미국 땅에 독을 퍼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도 증오 범죄를 강조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전국 대중 매체 데이터 베이스인 넥시스를 검색한 결과 1985 년에 증오 범죄가 11건이었다. 그런데 1990 년까지 검색 범위를 넓히면 이 숫자는 1,000건 이상으로 늘어난다. 1999 년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 동안 증오 범죄를 언급한 기사는 7,000건이었다.
@p107
그러나 증오의 개념은 여전히 모호하다. 증오는 편견 완고함, 선입견, 분노, 타인에 대한 혐오감 등을 모두 합한 개념인가, 아니면 아주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의미하는가. 전자의 경우라면 증오에 대항해 싸우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돈키호테만큼이나 무모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증오에 대항해 싸우는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행동이 될 가능성이 크다.
1. (합리적인 이성) 명분 속 깊숙이 도사린 편견
증오는 어디에나 있다 인간은 항상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일반화해 버린다. 진화 과정에서 친구와 적이 누구인지 미리 아는 것은 단순히 철학적인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애국자들 중에서 외국인에 대해 한번도 혐오감을 품어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물론 증오는 편견보다 더 심각하고 어둡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증오와 편견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다른 민족이나 다른 인종에 대해 거의 악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교차로에서 어떤 차가 얌체처럼 자신의 차를 추월해 버리면, 우리는 그 차의 운전자가 여성이나 흑인일 경우 금방 증오한다 그리고 밤길을 걷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주위를 둘러보고 그 소리의 주인공이 흑인 남자가 아니라 백인 여자라는 것을
확인하면 우리는 금방 안도감을 느낀다.
잡지 '머큐리'의 편집장이었던 H.L. 멩켄은 지칠 줄 모르는 인종 차별주의자였다. 그는 "대화를 통해 분별력이나 판단력 비슷한 것을 흑인 여자의 머리 속에 넣어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흑인 여자들은 본질적으로 유치하며, 직접 경험을 하고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고 자신의 일기에 썼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상대의 인종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행동했으며, 인종 차별을 폐지하는 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자신의 잡지에 많은 흑인 작가들의 작품을 실었고, 그들을 위해 잡지의 발행인인 알프레드 크노프를 상대로 로비를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당시의 선구적인 흑인 작가 및 언론인들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증오에 관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멩켄은 과연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
@P108
2. 선입관, 혐오감, 분노, 억압된 감정에서 싹터
옛날에는 증오를 이해하기가 더 쉬웠다. 사르트르는 1946 년에 에세이 '반유대주의자와 유대인'을 썼을 때 반유대주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증오의 종류가 사랑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공포 때문에 생긴 증오가 있는가 하면 단순히 경멸 때문에 생긴 증오가 있고,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증오가 있는가 하면 권력이 없기 때문에 생긴 증오가 있다 또 복수심에서 생겨난 증오가 있는가 하면 부러움이 변해서 증오가 핀 것도 있다.
우리가 다양한 종류의 증오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 낸 현대적인 단어들 즉 성 차별주의, 인종 차별주의, 반유대주의, 동성애자 혐오증 같은 단어들은 사실 증오의 다양성을 전혀 표현하지 못한다. 이 단어들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증오의 대상인 희생자들의 신분뿐이다 이 단어들만 가지고는 가해자의 신분과 생각을 알 길이 없다. 이 단어들은 심지어 희생자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산주의와 그 이후의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이론에서 나온 말인 무슨 무슨 '주의'는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을 묘사하기보다는 권력 구조를 묘사하는데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마치 구조가 뭔가를 느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구조적 인종 차별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증오'는 그냥 단순한 명사일 뿐 증오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추상적인 단어가 현실화되어서 누군가가 실제로 가해자와 피해자로 변하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우리는 증오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의 본질이 매번 매우 다르며. 때로는 이들을 같은 뿌리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보지 않아야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은 별로 인기가 없는, 정당한 증오와 부당한 증오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을 예로 들어 보자. 르완다에서 80만 명의 투치족이 후투족 정권에 의해 살해당하자, 투치족은 이에 대한 복수로 수천 명의 후투족을 죽였다 이 경우 애당초 종족 말살을 획책한 가해자의 증오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그 끔찍한 증오를 이기고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증오는 정당화될 수 있다. 유대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독일인들에게 증오 외에 도대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P109
심리 치료사인 엘리자베스 영-브뢸은 자신의 책 7편견의 해부학7에서 증오를 세 가지로 구분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먼저 강박적인 증오는 나치의 경우처럼 소수가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환상 때문에 소수를 제거하려고 강박적으로 노력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증오하는 집단의 존재 자체가 위협적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증오하는 대상을 더러운 것 혹은 병든 것으로 보고 그들을 '정화'하거나 치료해야 한다고 말한다. 후투족이 투치족을 '바퀴벌레'라고 부르는 것이 좋은 예이다.
두 번째로 히스테리컬한 증오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과 좀더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브뢸은 히스테리컬한 편견을 가리켜 '어떤 사람이 자신이 억압하고 있는 금지된 성적 욕망과 성적으로 공격적인 욕망을 실현해 줄 사람으로 한 집단을 지명할 때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편견이라고 설명한다. 인종 차별주의자들 중 일부가 이 설명에 들어맞는다. 흑인을 증오하는 백인 중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성적인 선망과 신체적인 선망 때문에 증오심을 품게 된 사람들이 있다 백인 인종 차별주의자는 흑인을 대상으로 자신이 갈망하면서도 혐오하고 있는 성적인 자유와 육체적인 힘 등을 이상화한다. 그의 공상은 전혀 현실적 근거가 없을지라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들의 증오는 일종의 '애증'이며, 이것을 포함시키지 않고서는 미국의 남부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의 인도에서 성행하던 인종 차별주의를 이해할 수가 없다.
세 번째로 자기 애적인 증오는 성 차별주의이다. 영-브될의 설명에 의하면 성 차별주의는 많은 남성들이 여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는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성들은 많은 남성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그냥 무시당하거나 아예 평등한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은근히 친절한 척하는 남성들의 행동에는 대부분 억압되고 승화된 성적인 욕망이 섞여 있다.
물론 사람들 각자가 품고 있는 증오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예를 들어 성 차별주의자 중에도 여성을 너무나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성을 증오하는 히스테리컬한 성 차별주의자가 있다. 그런가 하면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예 인식하지 못하는 자기애적인 성 차별주의자가 있을 수 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 역시 강박적인 동시에 히스테리컬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 차별주의니 인종 차별주의니 하는 말들은 인간의 충동을 1차원적인 수준에서 파악하려는 조잡한 시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단어들의 뒤에 숨어 있는 이론들은 모든 것을 가해자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흔히 가해자로 인식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 예를 들어 백인 이성애자 남성은 순전히 피부색과 성적인 취향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결국 증오를 설명하기 위한 조잡한 접근 방법이 증오와 똑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P110
3. 증오의 피해자가 가해자 되는 경우 많아
무슨무슨주의에 입각해서 증오로 인한 현상을 보는 대신, 이를 인간 각자의 심리적인 반응으로 보기 시작하면, 증오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지 알 수 있다.
증오 범죄에 관한 미 연방 수사국(FBI)통계에 나타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예로 들어 보자. 1970 년대에 미국에서는 증오 범죄를 저지르는 흑인의 숫자가 백인의 숫자보다 세 배나 많았다 아내를 때리는 남성들 중에 어렸을 때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많은 것처럼, 증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증오의 대상이 되는 집단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증오의 피해자들이 증오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소외당하면서 느꼈던 고통과 분노가 쌓인 결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증오 범죄 관련자들은 오히려 증오의 피해자들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이미 증오의 피해를 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해자에게 느끼는 증오와 분노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기분을 더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법 앞에서 더욱 수상쩍은 존재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4. 영원히 근절시킬 수 없는 '사회의 그림자'
증오 범죄 관련법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증오 범죄가 다른 범죄에 비해 더욱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범죄는 실제로 피해를 본 피해자 한사람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증오 범죄가 증오의 대상이 되는 집단에 증오와 공포를 퍼뜨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에 공포와 놀라움을 퍼뜨리는 것은 다른 범죄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교회나 학교에 들어가서 무작정 총을 미아 대는 범죄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겨냥한 범죄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 이런 범죄는 사회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에 공포를 심어 주기 때문이다.
@p111
또한 어떤 집단에 대한 증오 때문에 저질러진 범죄가 개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한 증오 때문에 저질러진 범죄보다 더 심각하게 취급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자신의 애인이나 아내를 죽이는 것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흑인이나 동성애자를 죽이는 것 중, 어느 편에 더 많은 증오가 담겨 있을까?
점점 다양해지는 문화 속에서 증오를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유로운 국가에는 언제나 증오가 존재한다. 게다가 증오와 편견의 표현은 때로 사람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오히려 풀어 주는 역할을 한다.
증오를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은 증오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증오를 초월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상처를 입지 않는 사람이라면 가해자는 그에게 심리적인 상처를 입힐 도리가 없다. 인종 차별적인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가 되는 것은 그가 상대의 말을 자신의 인생과 인격에 대한 결정적인 정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증오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그저 극복될 수 있을 뿐이다. '동아일보' 2000. 2. 28. 특집기사, '뉴욕타임즈' 1999. 9.26. 기사.
3. 읽기 자료2: 순자 -예를 배워야 사람이 된다.
표면적으로 맹자와 순자가 차이를 보이는 학설은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그러나 맹자와 순자 사상의 차이점을 성선-성악설의 테두리에서 찾을 경우 이 두 사상가의 이론이 가진 근본적인 차이점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맹자가 '성'을 논할 때의 의미는 인간의 '도덕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순자가 말한 성은 신체의 '자연성'을 가리킨 것이다. 즉 신체가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본능적 욕구이다 맹자가 말하는 성은 순자의 개념으로 위에 해당한다. 위는 인위이므로 인간의 노력, 후천적으로 습득한 결과이다. 그러면 맹자와 순자 두 분 선생님을 모시고 가상으로 한번 토론을 해 보자.
@P112
학생: '성'이란 글자를 우리 학생들은 남성, 여성, 성교육, 이성 교제 등에서처럼 영어의 (sex)라는 단어와 같은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두 분께서는 '성'이란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맹자: 우리 유학자들은 음식과 남녀를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하고 성인도 이것을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음식 남녀를 줄여서 식색이라 하지. 학생의 말을 들으니 우리가 색이라고 한 것이 학생들이 이해하는 성과 비슷한 것 같구만. 내가 말하는 '성'이란 본성 즉 사람의 본래 그러한 성질을 뜻한다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 자연 상태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일세 잘 모르지만 영어로는 (nature)에 가깝지 않겠나?
순자: 내가 말하는 성도 맹 선생님 말씀과 같이 규정되네.
학생: 그런데 두 분은 어째서 성선설과 성악설로 반대 주장을 하셨습니까?
순자: 사람은 배가 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고 싶고, 피로하면 쉬고 싶어하네. 그것은 본래부터 갖고 있는 욕구이지. 그러나 사람이 사회 규범을 배워서 그 욕구를 조절하지 않고 그저 욕구가 하라는 대로 하면 악으로 빠지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라고 했지.
맹자: 순 선생은 사람의 신체적 측구를 본성으로 보고서 악하다고 했네. 나도 사람이 이목구비의 욕구에 휩쓸리면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사람에게는 동물과 다른 도덕이 있지 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 사람의 특징은 바로 '인의예지'의 도덕성이야, 그러니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
순자: 맹 선생님 말씀대로 사람은 도덕이 있기 때문에 동물과 다르네. 그러나 도덕은 사회 속에서 배운 것이지,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세.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성'이라 하지 않고 '위'라고 하지. 거짓, 위선이란 뜻이 아니고, 노력의 산물, 사회 문화 속에서 학습한 결과물이 란 뜻이지.
학생: 두 분이 모두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도덕에 두시는군요. 맹 선생님은 도덕성이 선천적이라 보시고, 순 선생님은 백지 상태에서 교육을 통하여 형성되는 것이라고 보시는 점이 차이입니다. 정말 우리는 나면서부터 인의예지를 가지고 있을까요?
@p113
맹자: 그럼. 물 속으로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누구나 뛰어가서 건지려는 마음이 생기지. 이 측은지심은 바로 인이라는 도덕성의 명백한 증거야. 측은지심이 없다면 사람도 아니지 사람이 죽어 가는데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학생: 그럼 아직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어린아이는 사람이 아니겠군요. 물 속으로 기어가는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는 그것을 보면서도 측은지심이 생기지 않을 것 같은데요.
순자: 학생은 아직 예의를 더 배워야 하겠군. 맹 선생님 말씀의 본뜻을 이해하려 노력해야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다니.
맹자: 순 선생,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마음도 사람의 본정에서 나온 것이지요. 시비지심은 지에서 나옵니다 젊은이들을 믿읍시다.
순자: 맹 선생님은 너무 낙관적이십니다. 맹 선생님 강의는 이미 사회 규범을 다 배웠지만 실천하지 않는 고등학생. 대학생들에게나 어울립니다. 초등학생들은 뭐가 옳은지도 잘 몰라요. 밀림에서 자란 어린 타잔이 학교에 지각하면 왜 나쁜지를 알겠습니까? 그대로 두면 사회 질서가 엉망이 됩니다.
맹자: 옳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믿어요. 요순 임금을 보십시오. 고대에 어디 문명이 발달하고 제대로 된 교육이나 예법이 있었습니까? 그렇지만 성인이 되셨지요. 공자는 어떤 환경에서 자랐습니까? 아무리 사회가 험악해져도 나는 인간의 착한 본성이 이것을 이겨 내리라고 믿습니다.
학생: 저는 순 선생님 이론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제 두 분 말씀을 들으니 더 판단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좀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순자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에 주목하였다. 맹자와 달리 성악설을 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은 성과 위의 결합이다. 즉 배우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자연성과 배워서 할 수 있는 사회성의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사회성은 예를 필요로 하고. 예를 배움으로써 인간의 사회성은 길러진다. 순자는 자연의 존재를 네 단계로 분류하였다.
물, 불 같은 무생물 = 기
풀, 나무 같은 식물 =기 +생
새, 짐승 같은 동물 =기 +생 +지
인간 = 기 + 생 +지 + 의
@114
여기에서 동물의 지능은 생존에 필요한 적응력으로, 생존에 유리한 것을 좇고 불리한 것을 피하는 지능이다. 인간은 옳은 일을 위하여 죽기도 하기 때문에 동물의 지능과는 차원이 다른 '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순자가 말하는 '의'는 맹자의 '수오지심: 자기의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남의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여기서 의는 예와 같은 뜻으로 사회적 역할에 대한 규정을 가리킨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살기 때문에 누구나 일정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 예와 의는 이것을 정해 둔 것이다.
순자는, 인간이 소보다 힘이 약하고 말보다 빠르지 않으며 호랑이보다 약하면서도 이것들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집단을 이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집단을 이루려면 분이 필요하다고 한다, 분은 분업 즉 역할의 분담이다. 이 역할 분담을 규정해 놓은 것이 예이다. 이 예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의이다. 예의는 인간의 사회성의 증거이며 이를 통하여 인간은 자연을 경영하고 문화를 이룩한다. 이렇듯 인간은 예의를 통하여 사회를 유지하며 사회 속에서 예의를 배우지 않고는 제대로 인간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순자는 '예'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또한 예의 전달에 필요한 교육과 '스승의 법도'를 중시하였다.
이현구, 김범춘, 우기동 지음, '박물관에서 꺼내온 철학 이야기', 우리교육, 1995, pp.53-58 참고
@p115
연습문제
1. 인간 이해의 중대성
1) 인간이 실천적 자의식을 갖는 주체적 존재란
2)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2.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본성
2.1 고전 고대 사상
1) 선진 유가의 인간관은?
2) 플라톤에게 있어 우주와 인간의 관계는?
3) 불가의 인간관은?
4) 스토아사상이 주장하는 부동심의 상태란?
5) 고대적 인간관의 근본 한계는?
6) 그리스적 이성주의와 근세 이성주의와의 차이점은
2.2 공리주의
1)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인간성의 기초는?
2) 벤담이 말하는 효용의 원리란?
3) 공리주의를 공중적 쾌락주의라 부르는 이유는?
3. 공리주의가 자본주의 윤리관의 기초가 된 이유는?
2.3 마르크스주의
1)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인간성 왜곡의 근본 원인은?
2)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이상 사회의 조건은?
3) 마르크스 인간관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판은?
3. 인간의 충동적 이기적 본성
3.1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
1) 인성론에 진화론이 끼친 영향은?
2) 고대 소피스트들의 행복관은?
3.2 홉스
1) 홉스의 인간관은?
2) 이성에 대한 홉스의 견해는?
3) 홉스의 사상이 개인주의와 사회 계약론과 깊은 연관을 갖는 이유는?
4) 홉스의 강권 국가와 군주제적 국가와의 차이점은?
3.3 프로이트
1) 프로이트는 전통적인 의식적 자아를 어떻게 평가하나?
2) 이드와 초자아의 의미는?
3) 양심과 도덕 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은?
4) 프로이트 인간론이 끼친 영향은?
5) 아들러의 프로이트 비판의 핵심은?
4.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연대
1) 프로이트 인성론과 자본주의의 관계는?
2) 자본주의적 인성론의 기본 핵심은?
3) 오늘날 욕망의 문제가 철학적 관심사가 된 이유는?
@P116
참고문헌
1. 스티븐슨 지음, 임철규 옳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일곱 가지이론), 종로서적, 1981.
인간성과 관련한 철학사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의 기본 주장과 문제점을 잘 정리 소개한 책. 분량도 많지 않고 문체도 어렵지 않아 서양의 인성론을 개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2. 한자경 지음, 자아의 연구. 서광사. 1997.
우리 나라 소장 학자인 저자가 근대 데카르트 이후 현대 라캉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들을 나름대로 잘 소화해서 의욕적으로 정리 소개한 책.
3. 남기영, 허우성 김수중, 점연교, 최점식 지음, 인간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7.
경희대 철학과 교수들인 저자들이 자신의 전공의 관점에서 인간론을 전개하고 상호 비평한 책. 책 말미의 상호 토론은 인간론에 대한 종합적이고 균형 있는 관점을 얻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P117
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우리들의 동양철학, 동녘, 1997.
우리 나라 진보적인 철학자들의 모임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소속 소장 연구자들이 동양철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쉽고도 깊이 있게 정리 해설한 책.
5. 김태희 지음, 벤덤의 공리주의 사상에 관한 연구, 세종출판사, 1996. 공리주의에 관해 우리 나라 학자가 저술한 몇 안 되는 본격적인 공리주의 사상 연구서 공리주의에 관한 심도 있는 이해에 도움이 되는 책.
6. 법륜 지음 인간 붇다. 그 위대한 삶과사상, 정토출판, 1990. 불교에 대한 틀에 박힌 이론서가 아니라 실천적 불교 운동에 앞장서 온 저자의 풍부하고 깊이 있는 사색이 생동감 있게 스며 있어 불교를 쉽고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
7. 김종철 지음,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삼인, 1990. 자본주의적 삶의 반인간화를 직시하고 오래 전부터 이미 농사 공동체를 통한 인간적 삶의 참된 연대를 제창한 김종철 교수가, 선구적 통찰력으로 진지하게 써 내려간 생태적 인간관.
@P119
제 2장 성과 사랑의 철학
개관
성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들 가운데 하나다. 성은 우리에게 어떤 의의가 있을까? 이 문제에 접근하려면 우선 성을 좁은 뜻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섹스, 사랑, 여성과 남성을 포함하는 넓은 뜻으로 이해하고, 이 세 가지 문제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섹스에 대한 견해는 결혼 안에서의 섹스, 사랑 있는 섹스, 사랑 없는 섹스등 크게 세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결혼 안에서의 섹스가 가부장제 사회의 전통적 견해라면, 사랑 있는 섹스는 결혼의 울타리에 얽매이지 않고 전통적 금기를 위반한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금기의 위반은 비난해야 할 일이 아니라 사람의 사물화를 막고 문명 발달의 새 동력을 얻는 길이다. 한편 사랑 기는 섹스는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내 몸에 대한 자기 도취적 사랑이 특징이고 사물을 기호로 소비하는 현대 사회가 요구하며 살아 있는 사랑을 죽은 기호로 취급하는 사물화 현상이다. 사랑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는 철학 관념은 플라토닉 러브다. 플라토닉 러브는 육체 관계를 배제한 정신적 사랑이라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으나, 사실은 육체 관계를 배제하지 않으며,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혜를 추구하며 길들이고 조율하는 사랑이다 플라토닉 러브는 정신적 사랑을 강조하면 섹스를 억압하는 금기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요즘 젊은 제대는 시시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플라토닉 러브에서 시작한 사랑에 대한 관념의 역사는 2,500 년을 넘어 이제 포르노그래피 등 사이버 에로스로까지 변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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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성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는 여성과 남성의 지위와 관계 또는 성 차별의 문제가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바랑직한 성 의식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담론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당론은 갈래가 여럿이지만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관점을 공통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에 속하는 내용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은 원칙 면에서 두 가지 길이 가능하다. 하나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해소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이 차이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은 둘 다 호모 사피엔스라고 보고 차이를 해소함으로써 바탕을 마련할 수도 있고 생물학적 성 차이를 악용하지 않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할수도 있다. 사람의 성은 그 밖의 동물에 비해 사회성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동물은 배란기에만 섹스하지만 사람은 아무 때나 섹스할 수 있고, 사랑은 '배타적 인정의 약속'이므로 나와 남의 사회 관계를 만드는 길이다. 사람의 성은 사회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 문제도 철학적으로는 바람직한 인정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바람직한 인정의 원칙은 "내가 남과 다른 점을 인정받으려면 남이 나와 다른 점부터 인정하라"는 것이며, 더 나아가 서로 인정해야 하는 나와 남은 여러가지 뜻에서 힘이 대등하지 않은 경우가 많으므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1. 기본강의: 성, 사랑, 페미니즘
1. 성과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성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들 가운데 하나다. 성은 원시인부터 원초적 본능이었고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문제였을 테니까 특별히 우리 시대의 화두라고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 개방 풍조가 우리보다 한참 앞선 미국조차 성 담론이 공공연해진 것은 겨우 반 세기 전부터다. 1940년대 후반에 나온 '킨제이 보고서'와 1950 년대 초에 창간된 '플레이보이'가 성 담론의 공론화를 주도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말론 브랜도,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이 섹스 이미지를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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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우리 나라에서는 성 담론의 공론화를 둘러싸고 심심치않게 논란이 벌어진다. TV에서 대사의 수위를 놓고 심하다는 반응과 괜찮다는 반응이 나누어지고. 영화에서 노출의 수위를 놓고 포르노냐 예술이냐는 논쟁이 일어나며, 청소년의 성 의식의 수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성 의식이 바람직한지는 개인에게 달린 문제이고 철학적 논의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은 하늘의 뜬구름을 잡는 학문이 아니라 시대의 쟁점을 붙잡고 씨름하는 학문이다. 성이 과연 우리 시대의 핵심 화두인지는 시간이 좀더 흘러야 분명해지겠지만 적어도 그 후보들 가운데 하나라면 철학도 성을 둘러싼 논쟁을 모른 체할 수는 없다.
성은 우리에게 어떤 의의가 있을까? 성의 핵심 기능은 자식 얻기이며 따라서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만 섹스를 허용해야 한다는 견해는. 유교 문화권 안에서 가부장제 사회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아직도 무시할수 없는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젊은 세대는 결혼과 상관없이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심지어 사랑하는 마음 없이 섹스를 즐길 수 있다는 태도도 드물지 않다. 이런 성 의식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에 대한 견해와 태도는 사랑 있는 섹스나 사랑 없는 섹스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사랑에 대한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숱하게 많은 유행가가 시도했지만 철학에서 대표적인 사랑으로 알려진 것은 플라토닉 러브(Platoniclove)다. 플라토닉 러브는 사전의 정의와 달리 육체 관계를 배제하지 않지만 좀더 깊은 뜻이 있다. 성이 현대인에게 지닌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섹스와 사랑이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여성과 남성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지위와 관계 또는 성 차별은 바람직한 성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여성과 남성의 문제는 페미니즘(feminism)이라 부르는 여성주의 또는 여성 해방 논의가 많이 다루고 있다. 따라서 성의 의의를 밝히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담론에도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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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 담론의 어제와 오늘
2.1 성
성은 무엇일까?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따르면 사람의 원초적 충동은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다. 에로스는 삶의 충동이고, 사랑과 섹스는 이 충동의 대표적 표현 방식이다. 타나토스는 죽음의 충동이고, 자살뿐 아니라 폭력, 살인 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극도에 이른 삶의 충동은 죽음의 충동과 다르지 않다. 섹스 막바지에 느끼는 오르가슴은 프랑스 말로 '작은 죽음(le petit mort)'이라 부른다.
사회는 원초적 충동의 표현을 무제한 허용하지 않는다 충동의 표현을 억압하는 것이 금기다. 금기는 법이나 관습으로 있을 수도 있고 내 마음 속에 규범으로 있을 수도 있다. 에로스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퍼진 것은 근친 상간의 금기이고, 타나토스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퍼진 것은 폭력과 살인의 금기다. 그러나 위반을 허용하지 않는 금기는 없고 어쩌면 금기는 위반하라고 있다. 살인의 금기가 있더라도 사람 죽이는 일은 일어난다. 우리 조상에게 섹스는 곧 자식 만들기 또는 남편의 배설이었고 그 이상은 금기였다. 금기의 위반은 쾌감을 불러 일으킨다.
금기를 위반하는 섹스는 비난받아야 할까?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사람의 섹스는 동물성이 기초이고 동물성 을 배격하는 것이 금기다. 그러나 사람은 금기를 위반하더라도 짐승으로 완전히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의 위반은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표현이 아무리 과감한 젊은이도 원숭이처럼 남들 보는 데서 섹스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금기를 위반하더라도 규칙이 있기 때문에 정글이 아니라 사회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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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타이유는 금기를 위반하는 섹스가 사람의 사물화를 막아 준다고 주장한다. 사람의 사물화란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물로 취급받는 현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직장에서는 아무리 따뜻한 정이 오가더라도 냉정하게 말하면 사람이 하나의 상품이다. 이런 뜻에서 사람은 대체로 일하는 곳에서 사물화한다. 사람의 이런 사물화는 돈이 강력하여 사람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람의 섹스 충동은 사물화할 수 있을까? 같은 논리에 따르면 사람이 이성이나 의지로 섹스 충동을 부정하고 죽일 수 있어야 이 충동은 사물화한다. 그러나 섹스 충동은 더러 부정하려 해 보지만 소용없다. 부정하고 부정해도 다시 고개를 쳐든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사람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사물화 하지만 금기를 위반하는 섹스를 통해 오히려 사물화를 어느 정도 극복한다. 문명은 그 동안 사람들이 섹스 충동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억압해 왔으나, 오히려 이런 억압을 어느 정도 푸는 것이 사람의 사물화를 막고 문명 발달의 새로운 동력을 얻는 길이다.
섹스에 대한 전통 관념은 결혼 안에서의 섹스(sex with in marriage)만 허용한다. 그러나 많은 젊은 세대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결혼의 울타리에 얽매이지 않고 성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랑 있는 섹스(sex with love)를 주장한다. 한편 요즘에는 사랑하는 마음을 시시하게 여기는 사랑 없는 섹스(sex without love) 도 있다.
사랑 없는 섹스는 감정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섹스다. 섹스에 감정을 섞는 것이 귀찮고 피곤하기 때문이다 내가 남과 감정을 교류하면 기쁘고 뿌듯할 수도 있지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감정을 섞어 자존심이 상할 가능성이 있다면 차라리 감정을 배제하겠다는 태도다.
그러나 사랑 없는 섹스는 아무 감정도 없는 섹스가 아니다. 이런 섹스는 깊이 보면 내 몸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다. 남의 감정, 남에 대한 내 감정은 무시하더라도 내 몸에 대한 내 감정은 포기하지 않는다. 내 몸에 대한 자기 도취적 사랑 곧 내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사랑 없는 섹스의 정체다.
왜 현대의 사랑 없는 섹스는 내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요구할까?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allrd)에 따르면 현대 소비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호는 몸이다. 소비 사회에서 몸은 경제면으로 사유 재산의 중요한 일부가 된다. 따라서 개인은 자기 몸을 재산으로 관리하고 조작하고 투자한다 또 몸은 심리 면으로 사회 지위를 표시하는 중요한 기호이므로 자기 도취적 숭배의 대상이 된다. 소비 사회에서 내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이 없는 사람, 운동이나 다이어트로 몸을 돌보고 가꾸지 않는 사람은 손가락질 받는다.
가장 아름다운 소비 기호로서 자기 도취적 사랑의 대상이 된 몸은 이윤을 낳는다. 소비 사회에서 수많은 상품은 고객을 얻기 위해 이 시대 최고의 유행의 상인 알몸을 이용한다. 사랑 없는 섹스 곧 내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만 있는 섹스는 몸을 가장 아름다운 기호로 소비하는 사회가 요구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이런 섹스와 사랑은 바타이유와 반대로 사람의 사물화 현상이다. 사람의 사물화란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물로 취급받는 현상이다. 소비 사회에서 사랑 없는 섹스는 나든 남이든 살아 있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죽은 사물 즉 기호로 취급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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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사랑
참사랑은 무엇일까? 생텍쥐페리(Saint-Exupery)는 '어린 왕자'에서 '사랑은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향연)은 플라톤(Platon)이 남긴 30여 개의 대화편 가운데 하나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대부분 소크라테스(Socrates)가 제자, 친구, 적대자 등과 어떤 주제를 놓고 벌인 논쟁을 기록한 것이다.
'향연'은 '에로스에 관해'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을 뜻하기도 하고 사랑을 뜻하기도 한다 .이 대화편은 비극 작가 아가톤이 연극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축하하러 모인 사람들이 에로스에 관해 돌아가며 한 마디씩 찬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어 보면 '플라토닉 러브'의 참뜻을 알 수 있다.
@p125
소크라테스는 뭔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대상을 욕구하는 것이고 욕구한다는 것은 지금 그 대상이 부족하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돈을 사랑하는 것은 돈을 욕구하는 것이고 이는 지금 나에게 돈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사랑의 중요한 대상 가운데 하나가 지혜다. 그리고 그리스 말은 '지혜(sophia)'와 '사랑하다(kilos)'를 더하면 '철학(philosophia)'이 된다. 따라서 플라토닉러브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며 따라서 함께 철학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어린 왕자'의 참사랑도 플라토닉 러브의 현대판이다. 여우와 어린 왕자는 처음부터 같은 쪽을 바라볼 수 없으니까 길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길들이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첫날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 매일 조금씩 가까이 연고 그 다음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시간 약속까지 하고 오라고 말한다. 플라토닉러브에서 길들이기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지혜를 얻기 위해 오랫동안 꾸준하고 치열하게 대화하는 과정이다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습을 바꾸고 조율하는 과정이다. 모두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연인은 오랫동안 만나고 같이 살고 티격태격하면서 생각과 행동을 조금씩 맞추어 간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은 플라토닉 러브를 시시하게 여긴다. 왜 그럴까? 플라토닉러브는 몸보다 마음과 지혜 사랑을 강조함으로 섹스가 억압하는 금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는 금기를 어길 때 강렬한 쾌감을 줄 수 있다 사회가 결혼 이전의 섹스를 금지한다면 이런 섹스 또는 이런 섹스에 대한 상상이 즐겁고.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관습이라면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재미있고. 몸과 몸을 접촉하는 섹스가 관행이라면 훔쳐보거나 혼자서 즐기는 행위가 짜릿하다.
플라토닉러브에서 시작한 사랑에 대한 관념의 역사는 2,500 년을 넘어 이제 사이버 에로스로까지 변모하고 있다. 온갖 포르노그래피가 사이버 공간을 떠돌아다니고 있으며, 채팅으로 나누는 섹스와 사이버 결혼 이야기도 심심치않게 들린다.
현대의 사랑 문화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첫눈에 불꽃이 일어나는 열정적 사랑이나 영혼의 빈 자리를 메우는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사람은 아직 많다. 그러나 열정이나 낭만을 시시하게 여기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이런 사람은 공통적으로 사랑에서 어떤 의미를 찾거나 따지는 일을 귀찮게 여기고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 과연 사랑은 아무 의미도 따질 수 없는 것일까?
@P126
2.3 페미니즘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여성의 권리 회복을 주장하는 페미니즘 담론은 갈래가 여럿이지만 대체로 이 명제를 공통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명제는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의 능력이 있고 남성에게 평균적으로 강한 근육이 있다는 생물학적 차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 명제가 주장하는 것은 생물학적 성과 다른 사회적 성이 있으며 생물학적 성 차이가 사회적 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생물학적 성은 보통 '섹스(sex)'라 부르고 사회적 성은 '젠더(gender)'라 부른다. 많은 사람이 입버릇처럼 쓰는 '남성답다'는 말은 '자신감', '책임감', '용기' 등을 상징하고, '여성답다'는 말은 '아름다움', '의존성', '다소곳함'등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런 항목을 가진 성은 생물학적 섹스가 아니라 사회가 만든 성이며 시대에 따라 변하는 젠더다.
남성다움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남성은 농경 사회에서는 훌륭한 농부이자 강인한 전사가 되어야 하지만, 산업 사회에서는 상품의 생산과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는 성실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 여성다움에 속하는 수동적 성격과 의존적 태도도 관습과 교육의 산물이다. 여성은 임신하고 출산하는 생식 능력 때문에 고대 농경 시대부터 생산 노동에 제한적으로만 참여했다. 이런 상황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하고 가정과 사회에서 성에 따른 각종 차별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믿음을 낳았다. 여성은 사춘기, 결혼, 어머니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 몸을 열등하게 받아들이고 남성에게 의존하는 수동적 역할에 만족하도록 길든다 가부장제는 원시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넘어오면서 출현했다. 원시 수렵 채집 사회에서 노동, 출산, 교육은 모두 성별 분업 없이 공동체 전체의 일에 속했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사회에서는 힘든 농사는 남성이 하고 집안 일과 아이 키우는 일은 여성이 나누어 하면서 생산 활동에서 주도권을 쥔 남성을 중심으로 가부장제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남성이 부양자가 되면서 여성의 노동은 부양자를 시중드는 노동으로 변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가족 임금 체계가 성립한 것은 가부장제를 더욱 강화했다. 가족 임금 체계란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번 돈으로 온 가족이 먹고 사는 것이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남녀 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일터에 나가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력이 발달하자 남성 노동자는 자기 노동만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데 충분한 임금을 요구했다. 그러자 남편을 보조하고
자식을 기르는 현모 양처가 여성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굳어졌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은 어떻게 이룩할 수 있을까? 대답은 페미니즘의 갈래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원칙 면에서는 두 가지 길이 가능하다. 하나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해소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이 차이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다.
@p127
여성과 남성의 평등은, 둘 다 호모 사피엔스라 보고 차이를 해소함으로써 바탕을 마련할 수도 있고, 생물학적 성의 차이를 악용하지 않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할 수도 있다. 두 길은 원칙이 다르기 때문에 중시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구체적 해결책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의 취업 문제에 대해 차이를 해소하자는 페미니즘은 군대 장교나 항공기 조종사처럼 금남의 영역을 무너뜨리는 일을 우선하겠지만, 차이를 살리자는 페미니즘은 교사나 프로그래머처럼 세심한 작업이 필요한 영역을 확보하는 일을 우선할 수도 있다.
3. 안정과 무시
대부분의 동물은 섹스하는 시기가 정해져 있지만, 사람의 섹스는 아무 때나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포유동물 암컷은 배란기가 되면 가슴 주위가 부풀어오르거나 질 주위의 색이 변하는 등 표시가 난다. 그러나 여성은 배란이 표시가 나지 않는다. 다른 동물처럼 배란이 표시가 나면 그때만 섹스를 해도 수정이 될 텐데 사람은 표시가 나지 않으니 수정을 하려면 아무 때나 섹스를 하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설명은 사람의 섹스가 지닌 특성을 모두 보여 주지 않는다.
사람은 수정의 확률을 따지면 한참 뒤떨어진 동물이다. 수정의 확률은 수정 횟수와 섹스 횟수의 비로 따지므로 배란이 표시가 나는 동물은 한 번 섹스로 수정할 확률이 사람보다 훨씬 높다. 사람의 섹스는 어떤 동물보다 수정이 힘들게 진화했다. 왜 이렇게 진화했을까?
사람의 섹스는 수정과 생식 외에 다른 기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능 을 보통 '즐긴다'는 말로 표현한다. 사람은 자식을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즐기려고 아무 때나 섹스한다. 그러나 즐긴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모든 섹스가 반드시 즐거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때로 섹스는 자존심이 상할수도 있고 바람 피우는 배우자의 섹스는 상상만 해도 역겹다.
@p128
즐긴다는 표현보다 사회 관계를 만든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사람의 섹스는 나와 남의 관계를 만드는 한 방법이다. 물론 섹스는 사회 관계를 강화할 수도 있고 약화할 수도 있다 남편의 바람 피우기는 남편과 애인의 관계를 강화하지만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약화한다. 그러나 사람의 섹스는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든다는 뜻에서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로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사랑은 '두 감정 사이의 배타적 인정을 약속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상대만 인정하려고 마음먹는다. "사랑해"는 거짓말이 아니라면 "적어도 이 순간은 너만을 인정하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아침에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말한 남편이 저녁에 숨겨둔 애인에게도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둘 다 진심일 수도 있다 배타적 인정의 약속은 감정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쉽게 흔들리는 갈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의 사랑이 인정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인정의 반대는 무시다. 남이 보기에는 아무리 못생긴 애인도 내 눈에 안경인 까닭은 내 감정이 그 사람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고, 바람피우는 배우자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까닭도 내 감정이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정과 무시는 기본적으로 나와 남의 관계 곧 사회 관계다. 따라서 사람의 사랑도 섹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의 섹스와 사랑이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왜 중요할까? 사랑의 섹스와 사랑은 사회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정체성(identity)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정체성이란 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다.
사람의 정체성은 인정과 무시를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인정과 무시는 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사람이 인정과 무시의 감정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남은 대개 부모다. 어린이는 누구나 자기 부모에게 극진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어린이는 대체로 젖을 땔 때 엄마의 무시를 처음 경험한다. 친구나 또래가 생기면 무시와 인정의 감정은 훨씬 더 강해지기 시작한다.
나말고 남이 있기 때문에 인정과 무시가 가능하고, 인정과 무시가 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사랑과 섹스에 대한 생각은 내가 남과 얽히고 설킨 관계망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p129
인정과 무시의 논리는 성 차별 문제로 확대할 수 있다. '관용'이라고 옮길 수 있는 프랑스 말 '톨레랑스(to1erance)'는 현실 문제에서 인정의 의의를 잘보여 준다. 톨레랑스란 "내가 남과 다른 점을 인정받으려면 남이 나와 다른 점부터 인정하라"는 것이다. 나의 튀는 행동이나 정치 이념을 인정받으려면 남의 행동이나 정치 이념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고 억압해서는 안 된다.
서로 인정해야 하는 나와 남은 여러 가지 뜻에서 힘이 대등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때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인정하는 것은 힘에 밀려서도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진짜 관용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백인과 흑인의 관계는 백인이 강한 자이므로 먼저 흑인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서로 대등하게 존중하려면 남성이 우선 여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톨레랑스 정신은 남성의 우월함을 전제하고 존중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짓이겨 놓은 상대에게서 받는 인정은 가짜다. 남성도 참된 인정을 받으려면 여성을 억눌러 놓아서는 안 된다. 톨레랑스의 목표는 내가 참된 인정을 받는 것이다.
2. 주제토론: 나의 성 의식은 어떠한가?
1. 토론과제
다음은 "나의 성 의식을 분석해 보라"는 주제로 대학생들이 쓴 보고서에서 뽑은 글들이다 이 글들을 잘 읽어 보면 우리가 성과 사랑에 관해 고민해야 할 거의 모든 문제가 들어 있다. 이 문제를 곰곰이 따져 보고 대학생의 의견에 찬반론을 펼치면서 성과 사랑에 대안 자신의 생각을 분석해 보자.
A. 나는 아직도 첫사랑 그것도 짝사랑을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었다. 전학 온 여학생을 보고는 첫눈에 반해 버렸다. 학교에서든 길에서든 그 여학생을 보면 가슴이 설레고 나도 모르게 흘깃흘깃 곁눈질했다 나는 지금 도 이런 감성을 간직하고 있다.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여성을 만나 평생 동안 한 사람만 사랑하며 살고 싶다.
@P130
B.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내가 자라 온 가부장제 사회가 물려 준 성 의식이 얼마나 족쇄인지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한 사람과 가능하면 평생 동안 섹스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의 윤리다 사랑과 섹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며 특히 여성에게는 지금보다 좀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 양육과 가사 노동만이 고스란히 여성의 몫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C. 나의 성 의식에는 어릴 때 본 포르노 잡지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부모님께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 보면서 섹스는 드러내 놓고 즐길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의식도 생겨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모두 섹스를 즐기면서도 쉬쉬하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 이젠 성 이야기도 좀더 공개적인 자리에 본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온갖 위선이 조금이나마 정화될 것이다.
D. 나이트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하룻밤 사랑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그때마다 호기심도 일어나지만 한편으로는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자유 분방한 성행위가 아직도 지탄받는 우리 사회에서는 머리로 이해한 이상만으로 살수는 없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분별 없는 정 행위는 만일 알려지면 남성보다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이런 커플의 경우 여성보다 남성이 더 무책임하다.
2. 논증과 비판
2.1 대학생들의 성 의식 분석
남은 나의 거울이다. 나 자신의 성 의식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남들의 성 의식에 대한 분석을 거울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성은 섹스로만 제한하지 말고 사랑과 성차별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넓게 이해해야 한다. 성, 사랑, 페미니즘에 관한 '기본 강의'를 바탕으로 위에 나온 네 대학생의 성 의식을 분석, 비판해 보자.
A. 사랑에 대한 이 학생의 감성은 첫눈에 불꽃이 일어나는 열정적 사랑이 나 영혼의 빈 자리를 메우는 낭만적 사랑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첫눈에 반한 감성을 간직하고 있고 유지하고 싶다는 말이 이런 성 의식을 증명한다 그리고 섹스에 대한 생각은 평생 한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것이므로 결혼 안에서의 섹스 와 가깝다.
이 학생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대체로 가정을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보조 장치로 보기 때문에 일부 일처제를 강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열정적 사랑이나 낭만적 사랑이 반드시 결흔 안에서의 섹스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그만한 열정과 사랑이면 결혼의 울타리를 개의치 않고 평생 사랑하는 한 사람과 섹스를 나눌 수도 있다.
@p131
B. 이 학생의 성 의식은 가부장제 윤리에 대한 반감이 바탕이다. 이 반감이 결혼 안에서의 섹스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좀더 자유로운 사랑과 섹스를 원한다. 자녀 양육과 가사 노동이 고스란히 여성 몫으로 돌아오는 데 대한 현실적 고려와 거부감도 이 학생이 전통적 성 의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사랑과 섹스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는 생각은 사랑과 섹스의 사회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면을 보인다. 사랑과 섹스는 사회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사자인 두 사람의 감정이 가장 중요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철저히 배제할 수도 없다. 많은 남녀가 가부장제의 폐해를 알면서도 전면적으로 거부하지 못하는 까닭은, 오랫동안 사회 관습으로 고착해 온 가부장제를 몇 사람의 힘으로 쉽게 뜯어고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더 온건한 대안을 모색할 필요도 있다.
C. 이 학생의 핵심 주장은 성에 대한 관심과 생각을 좀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포르노 잡지를 몰래 보던 자기의 모습과 성 이야기를 쉬쉬하는 남들의 모습이 모두 못마땅하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위선에 속한다.
성을 은밀하게 감추는 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금기이므로 이 학생의 주장은 바타이유의 주장과 비슷하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 사회의 위선을 정화하는 길이고 문화의 새 동력을 얻는 길이다. 성을 솔직하게 표현하자는 말이 곧 사랑 없는 섹스도 허용하자는 뜻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런 뜻이라면 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금기를 위반하는 섹스는 사람을 기호처럼 취급하는 사물화를 낳을 수도 있다.
@p132
D. 사랑 없는 섹스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이 학생은 결혼 안에서의 섹스나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할 것이다. 또 이상보다 현실을 더 중시하는 것으로 보아 이 학생은 가부장제 사회인 우리 현실에서는 결혼 안에서의 섹스 쪽으로 더 기울 듯하다.
그런데 이유가 흥미롭다. 이 학생은 사랑 없는 섹스가 여성에게 더 불리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남성 중심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이 때문에 여성에게 돌아올 더 큰 피해를 우려하고 있는 셈이다 여성의 권리를 회복하자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에 맞서지 않고 도피하려는 태도이므로 못마땅할 수 있지만, 여성을 노리개 취급하는 전통적 사고 방식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도 엿보인다.
@P132
2.2 나의 성 의식 분석
남들의 성 의식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나의 성 의식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기본 강의'에서 나온 몇 가지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나는 결혼 안에서의 섹스, 사랑 있는 섹스, 사랑 없는 섹스 가운데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 둘째, 나는 플라토닉러브에 대해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셋째,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동감하는가? 쉽게 한쪽으로 대답할 수 없는 문제도 있겠지만, 굳이 대답하라고 강요한다면 각자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한 서로 다른 답의 조합을 얻을 것이다.
"나는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하고 플라토닉러브에 찬성하고 페미니즘에 동감한다."
"나는사랑 없는 섹스를 지지하고 플라토닉러브에 반대하고 페미니즘에 동감한다."
"나는 결흔 안에서의 섹스를 지지하고 플라토닉러브에 찬성하고 페미니즘에 동감하지 않는다."
성 의식이 이 세 가지 조합 가운데 하나라면 적어도 일관성 면에서는 크게 나무랄 데가 없다.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하는 낭만파가 함께 지혜를 추구하는 플라토닉러브를 싫어하기는 힘들고, 가부장제에 반대하는 페미니즘도 거부하기 힘들다 내 몸에 대한 애착만 가진 사람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 모습을 조율하는 플라토닉러브를 좋아하기 어렵고, 여성과 남성이 서로 동등하게 대우하기를 요구하는 페미니즘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힘들다. 결혼 안에서의 섹스라는 전통적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이, 정신적 사랑으로 잘못 이해하거나 서로 모습을 조율하는 플라토닉러브에 반대하기 힘들고, 여성의 권리 회복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에 동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다른 조합도 가능하다.
@P133
"나는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하고 플라토닉 러브를 지지하지만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나는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하고 플라토닉 러브와 페미니즘에 모두 반대한다."
"나는 사랑 없는 섹스를 지치하고 플라토닉 러브에 반대하지만 페미니즘에 동감한다."
사람의 의식은 성 문제이든 다른 문제이든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예로 든 네 학생도 유심히 살펴보면 모순이 눈에 띈다.
A는 결혼 안에서의 섹스를 지지할 수도 있고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 할 수도 있다.
B는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면서도 사랑 없는 섹스로 남을 사물화할 가능성이 있다.
C는 사랑 있는 섹스와 사랑 없는 섹스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수 있다.
D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방황할 수 있다.
각자 분석해 본 성 의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 물음에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가장 솔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이 있는 것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인생은 모순을 느낄 수 없으면 공허한 자신감으로 병들기 쉽다.
중요한 것은 대답 자체가 아니라 그 이유다. 나의 성 의식이 설사 일관성 없는 대답들의 조합이더라도 또 나의 성 의식을 내가 잘 모르더라도 스스로 각 물음에 대한 답의 이유를 알려고 노력하고, 만일 답이 분명치 않다면 내가 나의 생각을 잘 모르는 이유를 알려고 노력하면 성 의식은 모양을 갖출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하고 플라토닉러브에 반대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하자. 내가 사랑 있는 섹스를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플라토닉러브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몸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지할 수 있고,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플라토닉러브에 반대 할 수 있다. 페미니즘에 대해 동감해야 할지 아닐지 잘 모르는 까닭은 페미니즘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이 부족하고 또 여성이 권리를 회복하면 솔직히 말해서 내 일자리가 위협받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릴다면 나의 성 의식은 결혼 안에서의 섹스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진보적이지만 여성의 권리 회복에 대해서는 현실을 고려하여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P134
이렇게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고 그 이유를 따져 보면 나의 애매하던 성의식도 차츰 분명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다음에는 과연 나의 성 의식은 이대로 바람직한지를 검토해야 한다. 이 검토는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 전체를 문제삼는 작업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을 수행하는 능력이 바로 철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3. 읽기자료: 사랑, 결혼, 가족
사랑은 무조건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자의식끼리의 배타적 담합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취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배타적 담합 그 자체다 그토록 쌀쌀맞던 그 여자가 이렇게 나에 대해 감탄하며 내 곁에 있다니 하고 감탄한다. 사랑하는 남녀는 상대방을 무조건 인정한다 결점까지도 매력으로 미화되어 있는 '이상적인' 상대에 대해서 사랑하는 남녀는 노예라도 될 듯한 헌신적인 마음이 된다. 긴장과 고독으로 움츠러들기만 했던 마음을 이렇게 풍요롭게 만든 사랑의 힘을 연인들은 또다시 감탄할 것이다.
@P135
그러나 자의식의 배타적 사랑은 헌신하되 지배하지 않는 성인이나 도사의 사랑과 다르다. 사랑하는 남녀의 헌신은 서로 지배하기 위한 전략이다. 절대적으로 헌신하고 절대적으로 지배한다는 전략이다. 상대의 전 존재를 붙잡아서 나를 인정하는 데 몰입하도록 하려는 저의가 헌신 뒤에 숨어 있다. 하지만 도취 상태가 계속되는 한 불순한 저의나 전략은 어떠한 헌신이라도 너끈히 감당해 낼 수 있는 풍요로운 마음에 가려져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얼마 가지 않아 사랑을 에워쌀 것이다. 현실은 우리를 깨우고 긴장시킨다 현실에 에워싸인 연인들 역시 도취 상태에서 깨어나 현실의 요구를 처리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긴장과 자기 단련을 요구하는 현실 앞에서면 사랑의 담합은 거추장스러운 질곡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전에 우리를 취하게 만들었던 현실과 배타적 담합 사이의 바로 그 거리가 우리를 초조하게 만든다. 헌신 행위 자체보다 그 뒤에 지배하려는 저의가 먼저 보인다. 상대가 매달리기라도 한다면 저만큼 달아나고 싶어진다 남자나 여자의 성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진부한 구조에 말려들고 만 것 같아 억울한 생각이 든다.
이런 저울질은 자의식 대 자의식의 관계에서 흔히 보는 행위다. 이제 감탄의 대상이던 사랑은 타인 대 타인의 극히 평범한 관계로 되돌아와 있는 것이다. 사랑이 도피적 담합이 아니라 현실 앞에서도 거듭나는 사랑으로 성숙할 수 있을 것인지 시험대에 올랐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녀의 경우 열병 같은 사랑이 식은 후에 냉정을 되찾아 독립한 개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남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남자와 여자를 독립된 개인으로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 속에 묶어 버리는 가정이란 틀이다. 여성은 우선 주부가 되어야 하고 남성은 우선 가장이 되어야 하는 가정이란 틀은 결혼한 남녀를 상보적인 의존 관계 속에 몰아넣는다. 사회 현실과 마주할 기회를 잃어버린 주부는 사사롭게 헌신하며 사랑에 집착할 것이고, 현실을 헤쳐 가야 하는 남편은 헌신만 취하되 사랑을 외면하려 할 것이 다.
남녀의 사랑이 압도적인 체험이 되게 하는 다른 요인은 억압되어 온 성욕이다. 성욕은 마땅히 충족되어야 할 생리적 욕구다. 그러나 고도 산업 사회의긴 교육 기간 때문에 젊은이들은 사춘기 이후 대학을 졸업해서 결혼할 때까지 오랫동안 성욕을 억압당한다. 억압된 성은 사랑의 환상을 키운다. 성욕이 억압을 벗기 위해서는 결국 성욕을 수렴하게 될 결혼과 가족이라는 구조가 왜곡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P136
가정은 사랑과 성을 수렴하는 제도 장치다. 사랑의 도피적 행태와 억눌려 우왕좌왕하던 성욕은 과도기의 방황을 끝내고 공인된 사생활의 공간에서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인가?
가정하면 우리는 자유, 행복, 사랑, 프라이버시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집 떠나면 고생이다"는 말도 있듯이 가정은 우리가 편안히 먹고 입고 자는 곳이다. 바깥에서 지친 우리의 심신이 마음놓고 될 수 있는 곳이다 가정에서 자녀는 사랑을 받으며 양육된다 메마르고 각박한 바깥 사회와는 달리, 가정에는 부부간의 깊은 유대와 희생을 무릅쓰는 자녀에 대한 사랑이 흐르고 있어 우리는 정서적으로 안정을 얻으며 바깥에서 느끼지 못하는 행복과 자유를 느낀다 이런 가정은 보호되어야 할 불가침의 사생활 공간이다. 가정을 파괴하는 파렴치범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의 의미를 깎아 내리거나 가족 구조를 비판하는 어떤 시도도 우리는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본다.
그런데 가정이 자유와 행복이 있는 쉼터이고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려면 여성이 주부가 되어 가정을 그렇게 가꾸어야 한다. 가정은 여성의 '키우고 보살피는' 노동이 생산한 서비스의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결혼한 여성의 일은 가정을 관리하는 가사 노동이다. 가사 노동은 주부의 밥벌이 노동인 셈이다. 가사 노동은 어떤 성격을 가질까? 가사 노동은 여성의 자기 실현 수준이나 대인관계의 폭을 어떻게 제약할까? 가사 노동은 여성을 자립케 하는가?
가사 노동은 가정을 가꾸는 노동이다. "가정은 일터가 아니므로 주부는 집에서 논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주부가 잠시 집을 비우는 것이 가족들한테 얼마나 큰 불편이고 혼란인가를 생각해 보면 가사 노동의 비중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 제품이 많이 보급되어 있지만 옷을 더 자주 빨아 입는다든지 더 영양가 있는 식단을 생각해야 한다든지 수험생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든지 생활의 품격이 더 높아졌으므로 가사 노동 시간은 줄지 않고 있다 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식사 간식 준비와 설거지에 약 네 시간, 청소에 약 한 시간, 빨래에 약 한 시간, 아이 돌보기와 자녀 교육에 약 두 시간, 장보기와 관공서 출입 등에 약 한 시간, 그밖에 남편과 웃어른 시중 등 가사 노동 시간은 약 열 시간 안팎이라고 한다.
가사 노동은 주부가 스스로 노동 과정 전체를 주관하며 가족 구성원이 직접 소비하는 서비스를 생산하기 때문에 일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노동이다. 가사 노동의 이러한 성격은 여성을 주부가 되도록 유혹한다. 사회적 노동은 무자비한 경쟁 속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갖은 합리화 과정에 시달리기 때문에, 나를 실현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노동은 가정에서나 가능하리라는 계산도 이를 거든다. 실제로 대다수 여성은 자발적으로 결혼해서 가정에 안주하는 길을 택한다.
@p137
아이를 키우는 일도 주부가 기쁨을 느끼며 몰입할 수 있는 노동이다. 아이를 가까이 대하면 우리는 꼭 내 자식이 아니더라도 이 무력한 존재에 대해 무한히 보호해 주고 싶은 감정과 애착을 느끼게 된다. 또 무력한 아이가 신체적, 지적으로 꼴을 갖춰 가는 과정을 탐욕스러울 정도의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며 즐길 수 있다. 아이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헌신하는 여성의 이러한 행태를 우리는 모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사 노동의 이런 면모를 두고 곧장 여성이 가사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의 자유와 행복을 누린다고 단정짓는다면 잘못이다. 가사 노동에 기쁘게 매달려 있는 주부의 입에서도 가끔 한숨이 나온다. 가사 노동은 사회적 생산영역 외부에 있는 노동이다. 남편의 소득 수준이 생계비에 못 미칠 때는 주부가 따로 일터에 나가 돈 버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듯이, 가사 노동은 돈을 버는 사회적 노동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상품의 형태로 생산된다. 상품들 중 일부를 차지하려면 돈을 벌어서 나도 상품 생산에 한몫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내가 돈을 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의 생산에 나도 한몫을 했다는 사회의 공식적인 인정을 뜻한다. 가사 노동이 돈 버는 노동이 아니라는 것은 가사 노동이 사회적으로 공로가 인정될 수 없는 사사로운 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아내가 집안 일을 해 준다면 남편은 돈을 벌어다 주는 것 아니냐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가사 노동의 사적이고 예속적인 지위는 곳곳에서 쉽게 확인된다. 가사 노동의 산물은 상품이 되어 바깥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일을 해도 일을 통해 인정을 주고받는 인간 관계가 쌓이지 않는다.
주부는 남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사 노동에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인정이기 때문이다. 남편한테는 주부의 시중이 필요하겠지만 주부한테는 남편의 사랑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인정을 얻어 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부터 자신이 단지 하인이 아니라는 인정을 얻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주부는 사사건건 사랑한다는 말에 집착을 보이며 사랑 타령을 하지 않을 수 없다.
@P139
주부는 남편과 자녀의 사랑에 기대어 자기 상실의 구조를 견뎌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듯하다. 남이 나를 보는 눈으로 내가 나 자신을 보듯이, 사회가 주부를 보는 눈으로 가족이 주부를 보고 주부가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주부는 사랑한다는 말의 공허한 울림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묘한 연민의 여운이 확실하게 감지될 것이다 남편과 자녀는 주부를 필요로 하지만, 주부의 존재는 가족을 긴장시키지 않으며 더 이상 존중받는 대등한 인격이 아니기 십상이다.
심지어 학대당하는 아내, 매 맞는 아내, 매 맞는 아이는 늘 우리 곁에 있다.
바깥에서는 '훌륭한 인격자'인 남편이 가정에서는 체면, 염치, 인내, 합리성 다 버리고 학대 행위나 폭력을 일삼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가정이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사생활 공간이고 아내가 사실상 사노예와 다를 바 없는 처지에 있다면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사태다.
여성은 사회로부터 격리 당한 채 키우고 보살피는 노동을 전담하면서 남성주도의 합리주의 문화와 분리된 독자적인 문화 자원을 축적할 수 있고 또 축적해 왔다. 이런 여성적 자원은 시류에 휩쓸려서 내팽개쳐 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류를 비판하는 소중한 도덕 자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투고 자기를 내세우는 자아가 아니라 키우고 돌보는 자아의 배양은 각박한 현대 사회에 새로운 피를 공급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주장이다 여성은 자기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원을 긍정하고 긍지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키워 주고 보살피는 관계만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 자라 버린 자녀에게 혹은 대화 상대가 아쉬운 배우자에게 키우고 보살피는 태도로만 일관한다면 도리어 상대방을 구속하는 질곡이다 노인들은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을 한다. 노인들 역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보살핌을 받기만 하기보다. 젊은이들과 겨루고 힘을 합치며 당당히 타인으로 마주서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남편들은 대화 상대를 원한다고 말한다. 시중들어 주는 대신에 부양해야 하고 사사건건 사랑을 확인하려는 아내가 아니라 독립해 있고 자기 세계를 가지며 말 건네고 싶은 아내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성장할수록 자녀 역시 키움과 보살핌의 대상이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도 언제나 감싸고 단 살필 수 만은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하되 자신에 대해 냉정해지고 싶다. 거리를 두고 재고 자극하고 관찰하기를 원한다. 얼굴 맞댄 더할 수 없이 가까운 가족 관계에서도 우리는 서로 대등한 타인이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이정원 지음, (사랑, 결혼, 가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삶과 철학),동녘, (1994. pp.83-108)에서 뽑고 줄임
연습문제
1. 성
1) 프로이트가 주장한 사람의 두 가지 원초적 충동은 무엇인가?
2) 금기를 위반하는 섹스에 대한 바타이유의 견해는 무엇인가?
3) '사랑 없는 섹스'의 특징은 무엇인가?
4) '사랑 없는 섹스'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견해는 무엇인가?
2. 사랑
1) (플라토닉 러브)의 참뜻은 무엇인가?
2) 어린 왕자의 참사랑이 (플라토닉 러브)의 현대판인 이유는 무엇인가?
3) 요즘 젊은 세대가 (플라토닉 러브)를 시시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3. 페미니즘
1) '젠더(gender)'의 의미는 무엇인가?
2)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항목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 근거 는 무엇인가?
3)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이룩하는 페미니즘의 두 갈래 원칙은 무엇인가?
4. 인정과 무시
1) 사람의 섹스가 사회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사람의 사랑이 사회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사람의 섹스와 사랑이 사회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왜 중요한가?
4) 인정과 무시의 논리를 성 차별 극복 문제에 적용하는 길은 무엇인가?
@P140
참고문헌
1. 조르주 바타이유지음, 조한경 옮김 (에로티즘), 민음사, 1989.
인간의 성이 지닌 특성을 금기의 위반으로 풀이한 책이다. 1부에서는 인간의 성은 금기의 위반이 특성이며 따라서 금기를 위반하는 에로티시즘은 매우 인간적인 행위라고 주장한다. 2부에서는 동물성에 기초하면서도 동물성을 배격하는 금기를 위반하는 에로티시즘이 인간의 사물화를 막아 준다고 주장한다 성 이야기를 공개적인 자리로 끌어 내어 성 의식을 개방하는데 이 바지 한 고전이다.
2.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소비의 사회, 문예출판사, 1992.
포스트모더니즘의 대가로 주목받는 보드리야르의 초기 대표작이다. 현대 사회는 상품의 생산보다 소비가 경제의 동력이 되는 소비 사회이며 이때 소비되는 것은 일정한 욕구를 채워 주는 상품의 사용 가치가 아니라 심리와 지위의 차이를 표현하는 기호 가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소비 사회 이론을 바탕으로 특히 3부 '대중 매체. 섹스, 여가'에서는 현대 사회의 성을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몸이 소비 사회의 가장 아름다운 기호이고, 현대인의 성 의식은 자기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이 핵심이며, 이런 나르시시즘만 있는 섹스는 사람의 사물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3. 플라톤지음, 최명관 옮김, '플라톤의 대화', 종로서적, 1981.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유명한 '변명', '향연' 등이 실려 있다. '향연'의 주제는 에로스지만 구체적 내용은 고대 그리스 시민들 사이에 유행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희극 작가, 의사, 비극 작가 등 향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나이 든 어른 남자와 소년이 몸과 마음을 교류하는 당시의 소년애 풍속을 제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변호한다 소크라테스도 소년애를 정당화하지만 그 이유가 단순히 몸을 나누기 때문이 아니라 지혜를 나누고 함께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토닉 러브의 원형과 본질이 지혜 사랑 곧 철학임을 이해할 수 있는 고전이다.
@P141
4. 볼프강 라트지음, 장혜경 옳김, '사랑 그 딜레마의 역사', 끌리오, 1999.
사랑의 형식과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모한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토닉러브부터 중세 기사도의 낭만적 사랑, 르네상스 시대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랑 바로크 시대의 과시와 장식으로 세속화한 사랑, 계몽주의 시대 시민 계급의 도덕적이면서도 성별 역할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사랑, 20세기 프로이트의 문명화한 성욕의 형태를 떤 사랑까지 사랑에도 역사가 있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21세기 사이버 에로스는 다루지 않았지만, 이런 새로운 사랑을 어떻게 전망하고 평가해야 할지를 생각하려면 사랑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하다.
5. 뤼스 이라가라이 지음, 박정오 옮김, '나, 너, 우리-차이의 문화를 위하여', 동문선, 1990.
성 차이를 기초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벨기에 여성학자의 책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 인간이고 따라서 인간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기성 이론들과 달리, 이리가라이는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여성의 긍정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남성과 다른 이 정체성을 제대로 살리는 데서 여성 권리 회복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남성과 다른 여성의 긍정적 정체성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으며, 아들은 자기가 어머니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 남을 지배하는 성격이 자라지만 딸은 남을 존중하는 성격 이 자란다는 점이다.
6. 이정원 지음, '사랑, 결혼, 가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삶과 철학', 동녀, 1994.
페미니즘 이론을 사랑, 결혼, 가사 노동 등 여성의 현실 문제에 적용하여 쓴 글이다. 읽기 자료는 이 글에서 주로 1, 2절을 요약 정리한 것이지만 3, 4절에는 가족의 역사와 여성 문제의 해결책도 실려 있다.
7. 앤소니 기든스 지음, 배은경, 황정미 옳김,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새물결, 1995.
연애와 결혼, 이성애, 가부장제 등 전통적 성 관행뿐 아니라 현대인의 일상적인 성 생활에서 나타나는 포르노그래피, 자위 행위, 바람피우기, 심지어 동성애, 섹스 중독, 성 도착증 등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이런 성 문화가 현대인의 정체성 추구에서 지닌 긍정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사랑하는 두 사람이 새로운 정체성을 협상해 가는 합류적 사랑과 민주주의적 친밀 관계 등 합리적 현대성에 기초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P142
8. 비디오 테이프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마이크 피기스), '너에게 나를 보낸다' (장선우), '바그다드 카페' (퍼시 아들론), '델마와 루이스' (리들리 스코트)
@p143
제 3장 더불어 사는 삶-동양의 지혜
개관
이 장에서는 중국 사상의 두 축을 이루는 유가 사상파 도가 사상을 비교 검토하면서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이며.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고 평화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역사적으로 권위를 갖고 있는 사상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그 의미를 검토해 보는 것은 우리 삶의 실천적 목표를 설정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대체적으로 볼 때 유가는 자연보다는 인간을 강조하고 다른 자연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성을 도덕성에서 찾으면서, 도덕적인 삶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이며, 개인들의 도덕적 각성을 통해서 사회가 갈등 없이 통합되리라는 전망을 가진다. 말하자면 유가 사상은 인문주의이며 도덕주의이다. 유가의 이념에 충실한 사람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신성한 도덕률을 잘 학습하고 그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단속하여 도덕적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인 사회에 대한 무한한 염려를 가지고 제상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순수한 유교적 지식인에게서 우리는 마치 '맑은 바람, 씻긴 달'과 같은 도덕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도덕이란 우리에게 항상 좋기만 했던 것인가. 과거 요지부동한 절대의 도덕률이라고 했던 것들이 근대 이후 수없이 폐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시대의 도덕적 타락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독해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방해해 묵는가가 역사적으로 반성되고 있다는 증거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단일한 가치 체계로 검열하려는 도덕의 시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권력이며, 그를 통해서 사회를 통합하려고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도가는 유가의 도덕적 지향이 얼마나 개인과 사회를 왜곡시켜 왔는지를 지적하면서 그 어긋남의 근원이 자연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 오만함에 있음을 역설한다. 도가적 삶이란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면서 잘잘못과 좋고 나쁨을 따지는 모든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서 마음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삶이다 삶을 질곡하는 모든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는 개인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가 원래의 평화적인 자연 질서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p144
이러한 유가와 도가 사상이 우리 삶에 그야말로 지혜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지혜롭게 반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외워서 그대로 입력시킨 체계는 이데올로기 이상이 될 수 없다. 유가 사상은 도가 사상에 의해서, 도가 사상은 유가 사상에 의해서 반성되어야 하며, 유가와 도가 사상 모두가 또 새로운 관점에 의해서 반성되어야 한다. '기본 강의'와 '주제 토론'의 서술을 읽으면서 그 속의 여러 관점을 통해 자기 반성의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지 고민해 보기 바란다.
1. 기본강의: 도덕 정신과 자유의 추구
1. 문제 제기
우리는 수많은 규범 속을 살아간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이른바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규범에 어긋나지 않도록 교육받는다. 그런 교육 과정을 잘 수행한 사람은 착하고 도덕적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는 규범에 어긋나는 일탈적인 행위의 욕구를 조절할수 있으며, 한사회의 질서를 보존하여 그 사회를 재생산하는 데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한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왜 규범을 지켜야 하며, 규범을 지키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남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만약 그가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 체계에 대한 심각한 반성 없이 사회적 처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주어진 도덕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이런 사람은 얼핏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도덕은 무엇보다도 내적 자발성과 신념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우선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한다. 왜 도덕적인 삶은 좋은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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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학교나 사회에서 권장하고 있는 도덕적 인간형을 보면 느낌이 어떤가. 말 잘 듣고, 자기를 앞세우기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모험과 광기보다는 일상파 이성에 익숙한 사람 딱히 이런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더라도 때로는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도덕은 이념과 구체적 규범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길들이려고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그야말로 생기 발랄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통합된 사회라도 개인의 욕망을 하나로 통합시키지는 못한다.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행동하는 인조 인간이 아닌 한 개인이 생각하는 것, 상상하는 것, 그의 느낌과 특수한 환경, 개인사적인 기억 등이 균일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기초하여 발동하는 촉망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 곧 자유에 대한 갈망과 도덕적 강제가 충돌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사실 욕망은 모든 실천의 동력이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도 도덕적으로 성장하려는 욕망이 작용한 결과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욕망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그에 상응해서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이 발전함에 따라 사회와 문화가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곧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을 도모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모든 외적 형식을 타파하는 것은 사회 발전의 중요한 조짐이다. 우리는 당대의 도덕률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자유로운 발전을 추구했던 사람이 인류사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하였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도덕이 이러한 삶의 운동을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용한다면 도덕적인 사람이 되라는 학교와 사회의 충고에 이런 반문을 던질 수 있다. 도덕적인 삶은 과연 좋은 삶인가.
더욱이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 규범이라는 것은 정말로 낡은 것이 많다. N 세대가 출현하고 사이버 세상이 확대되는 등 삶의 문화는 줄기차게 변화하고 있는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도덕 규범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좋은 인간 관계를 만드는 데 해악을 끼친다고 분명히 증명된 규범도 단지 그것이 역사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강제되기도 한다. 이런 도덕 규범을 지키는 것이 도덕적이라면, 도덕적인 삶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회의는 증폭된다.
@p146
그렇지만 인간은 모여 살게 되어 있고, 모여 살수밖에 없다. 열악한 육체적 조건을 지닌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를 조직할 수밖에 없다. 사회를 조직한다는 것은 인간 관계의 질서를 잡는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질서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자신의 자유로운 욕구 실현을 강조하고 질서의 구축을 위한 사회적 의무를 도외시한다면 어떻게 사회를 조직할 수 있겠는가. 사회를 조직하는 여러 체계 중에서도 도덕 체계는 가장 세련된 것이다. 도덕은 자율성에 기초하므로 외적 강제와 폭력에 의거하지 않는 사회의 자율적 조직화는 도덕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급격한 사회 변동의 여러 방향 속에 혹시 인류를 파멸로 이끌 어떤 사악한 힘이 존재한다면 그 힘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오랫동안 유효한 것으로 용인되었던 도덕적 권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도덕은 역시 필요한 것인가. 도대체 인간의 자유로운 욕구 실현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 도덕이란 없는 것인가.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도덕적 의무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가. 자유에의 욕망, 개인과 사회의 발전, 도덕은 어떻게 관계 맺는 것이 바람직한가. 유가와 도가사상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2. 문제의 분석--유가와 도가
2. 1 도덕적 삶이 좋은 이유--유가의 입장
우선 위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문제 곧 왜 도덕적인 삶은 좋은 삶인가에 대한 유가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유가는 사람이 동물과는 다른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수긍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사람은 단세포 동물과 다른 것만큼이나 동물과도 다르고,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가는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인간의 질적 규정성 곧 본질을 도덕성에서 찾는다. 순자의 견해를 약간 각색해서 설명하자면, 모든 사물은 기 곧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생명은 세포로 구성된 존재에만 있고, 의식 현상은 동물 이상에서 발견되지만 도덕적 행위는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다. 다른 존재에는 없고 나에게만 있는 것이 나를 질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므로 도덕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p147
이것은 하나의 관점이다. 실제로는 도덕성 이외에도 인간을 질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요소는 얼마든지 많다. 종교적으로는 영성을 가진 영혼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고, 근대 철학에서는 합리적 이성을 거론할 수도 있겠고, 사회생물학에서는 생물학적 특징을 중시할 테고, 사회철학에서는 노동 같은 사회적 특성을 강조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성이 정말로 인간의 본질인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일단 하나의 관점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이러한 유가의 관점은 순자보다도 맹자의 성선설적 전통에서 더 강하게 드러난다고 알려져 있지만 순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도덕성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왜 도덕적인 삶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기초적인 답변이 마련된다. 자신의 본질로 복귀하는 것, 곧 참다운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물론 여기에는 본질적 상태가 바람직한 것으로 규정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므로 동양의 법가 사상이나 서양의 마키아벨리즘 같이 인간을 비관적으로 파악하는 경우에는 본질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본래성으로부터 벗어나서 합리적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실천적 목표가 된다). 자신의 본질에서 이탈하는 것을 소외라 하고. 소외가 항상 현실로서 주어진다면 본질로 복귀하는 것은 소외의 극복이 되고 주어진 현실을 발전시키는 방법이 된다. 말하자면 유가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감으로써 선하디 선한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삶의 참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한 셈이다 이러한 도덕적인 삶 곧 인간이 가야할 길,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 다니는 길이 말 그대로 유가의 도이다.
이러한 기초적 답변에 유가의 세계관을 덧붙이면 도덕적인 삶이 왜 좋은 삶인가에 대한 좀더 거창한 답변이 나온다. 유가는 우리를 둘러싼 우주 자연을 평화롭고 생명력이 가득한 유기체로 파악한다 이것은 사실 유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양 사상의 공통된 전제이다. 가령 부는 바람이나 따듯한 햇살, 흐르는 시냇물, 푸르른 잎사귀 등 동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숲 속의 고요함, 어두운 밤 하늘, 차가운 바위, 떨어지는 이파리같이 운동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도 동양은 생명력을 감지한다. 유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유가사상에서 좀 독특한 것은 그러한 생명력이야말로 선한 것 중에 선한 것이라는 점이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유가는 우주 자연의 생명력을 어질다거나 성실하다고 표현한다 곧 유가에서 우주자연은 지극히 선한 것 즉 최고선이다.
@p148
유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우주 자연의 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모습을 닮는다. 다시 말해서 인간도 우주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 속성을 보존하고 태어난다. 우주 자연에 깃든 생명력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이 된다. 그것이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선하다. (동물도 그런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본질을 발휘하여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저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주 자연의 도덕성, 생명력을 살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무릇 만물은 이러한 우주 자연의 생명력에 힘입어 생장하므로 인간의 도덕적인 삶은 만물을 길러 내는 천지의 사업에 동참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천지와 함께 우주를 떠받치는 세 기둥이 될 수 있으며 그 생명력이 사회적으로 전파되면 태평한 세상이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인 삶은 좋은 삶이다 도덕을 매개로 우주 자연의 무궁한 생명력을 향유함으로써 참 즐거움을 얻는 것,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좋은 삶 아닌가.
그렇지만 유가 사상에 대해서 이렇게 물어 보자. 다 좋다. 하지만 도덕적인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가 이에 대한 유가의 답은 한마디로 "예의법도에 따라 사는 것이 도덕적인 삶이다"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예의법도 곧 예란 옛 성인이 뛰어난 도덕적 성찰로 우주 자연의 생명력, 그 본질로서 도덕성을 반영하여 만들어 놓은 인간 행위의 구체적 절목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그러한 성찰을 할 수 있지만 보통 인간들이란 아무래도 반성력이 그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곧잘 엉뚱한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위험스러운 길을 택하기보다는 안전하게 옛 성인들의 길을 따르라는 것이 유가의 권유이다.
@p149
그래서 유가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자율성보다는 규범의 준수를 강조하는 사상이 된다. 이것은 유가의 도덕적 실천에 자율성이 완전히 결여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의 실천은 모름지기 그 실천에 대한 자율적 동의가 전제되어야 마술적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 유가의 생각이다. 하지만 유가는 그것이 어떤 권위로부터도 자유로운 충분히 자율적 상태에서 나왔느냐가 아니라 이미 규정된 규범에 합치하는가 여부에 따라 행위의 정당성을 판명한다. 그리고 이 정당성의 판명은 곧바로 권위화되어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계기로 기능한다. 공자의 개인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가사상이 동아시아에서 봉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오랫동안 역할 했던 것도 결국 유가가 봉건적 인간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예를 그토록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을 염두에 두면 모든 권위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도가가 왜 유가를 비판하였는지 알 수 있다.
2. 2 도덕적 삶을 비판하는 이유-도가의 입장
보통 은자로 불리는 도가의 사상가들이 왜 세상을 등지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이 특정한 지대 상황이나 자신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하등의 고려 없이 순전히 삶의 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 철학자의 사색의 결과인지, 아니면 흔히 이야기하듯이 춘추 전국 시대라는 대혼란기의 정치 투쟁에서 낙오하여 현실로 화려하게 복귀할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세련된 지식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인지, 그도 아니면 이 두 가지 상황이 교묘하게 맞아 떨어진 결과인지를 확인해 주는 뚜렷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역사적인 태도는--다소 실증사학적인 태도이기는 해도--이런 사실에 대해서 무엇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유가가 무너져 버린 옛날의 제도를 아쉬워하고 그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도가는 그들을 조롱하였고, 공동체적인 질서를 수립하고 인문 정신을 발양하기보다는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고 자연주의적 삶이라고 할 만한 것을 권장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개인이 자유를 얻고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인간의 편협한 안목으로 세상을 질서 짓는 일이었는데, 도가가 보기에 이러한 잘못이 자행되는 근저에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해가 있었다. 그들은 곧잘 인간개체의 물리량이 우주 전체의 물리량에 비해 얼마나 작은가를 비유함으로써 인간의 왜소함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가령 장자는 이 넓은 우주에 비교할 때 인간이란 좀 극적으로 표현해서 세상의 한 구석에 불과한 어떤 강가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 꼬리의 털에 붙은 벌레의 알보다도 미미한 존재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 개체의 물리량의 작음이 아니라 개체의 정신과 육체, 나아가 사회 전체의 왜소함이었고, 그에 대비되는 우주 자연의 위대함이었다.
@p150
그래서 우리가 공정한 시각을 가지려고 한다면 자연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점은 논쟁을 종식시키는 객관적 관점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회의를 통해서도 강조된다. 예컨대 갑과 을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싸우고 있을 때 누가 옳은가를 판단하려면 제3의 인물이 필요하지만, 그도 역시 특정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일 뿐이므로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고, 논쟁은 영원히 종식되지 않는다. 다른 관점이 있을 뿐 절대적으로 옳은 견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 연구 방법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일부의 사람들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현대 사상(주로 포스트 모더니즘) 의 상대주의적 진리관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어쨌든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는 것은 인간--아직 덜 떨어진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기는 해도-의 중요한 특징이며, 그에 비해 자연은 아무것도 고집하지 않으면서도 조화로운 전체를 이룬다.
이렇게 자연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게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미인의 그림자에 놀라 달아나는 숲 속의 사슴을 보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자연 변화의 대단한 파노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러한 시각 전환의 종착역은 세상에는 아무런 우열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만물이 모두 같다는 것 곧 제물이다. 그리고 그 심리적 효과는 마음 속의 자유와 평화이다. 모든 것이 같다면 보다 나아지려고 집착할 것도 없고, 뭔가 대단한 일을 하려고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생각을 바꾸는 것뿐이었다. 도가는 이렇게 사는 삶을 자연을 따르는 삶이라 하였고, 그에 반대되는 삶을 허상을 좇는 거짓된 삶, 따라서 고통스럽고 부자유스러울 수밖에 없는 삶이라고 하였다.
@p151
헛되이 사람들을 고통과 부자유 속에 빠뜨리는 대표적인 것이 도덕이었다. 도덕은 사물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거슬러 인위적인 기준으로 생각의 우열과 행동의 시비를 가르고, 교묘하게 '좋은 삶'을 강요함으로써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덕은 아무래도 개개인의 다양한 욕망을 모두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도덕은 항상 규범화되어 현실로 주어지는데, 역사가 보여 주듯이 도덕 규범이란 언제나 기존의 인간 관계를 반영할 뿐이다. 인간들이 모여 살면서 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조건에 따라 구체적인 인간 관계가 발생하면 그 인간 관계를 형식화하고 일반화하여 도덕 규범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시대를 앞서 나가는 도덕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거의 인간 관계란 대체로 불평등하고 비합리적이다. 지금도 그런데 옛날에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 관계를 반영하는 도덕 규범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지배 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유효한 무기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억압이다. 요컨대 도덕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래서 도가는 보다 자유로운 삶을 위해 도덕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큰 도가 사라지자 인의가 나타났다." 이것이 도가가 도덕적인 삶을 비판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도가에는 도덕이 없는가. 있다면 있다고 할 수 있다. 도가의 사상을 처음으로 우리에게 체계화된 형태로 알려 준 노자의 책 이름은 원래 도덕경이다. 말하자면 도가도 무엇이 좋은 삶인가를 말하였고, 그에 대비되는 나쁜 삶도 이야기하였다. 넓은 의미에서는 가치란 '좋은 것'이므로 도가도 특정한 가치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고, 그러한 가치의 실현을 촉구하는 도덕철학 체계를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가를 포함한 대부분의 도덕철학(도덕 형이상학) 은 무엇인가 요지부동한 궁극적인 것이 있고, 그것으로 다가감은 좋은 일이며, 도덕은 그것에 다가가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이론적 패턴을 가지고 있는데, 도가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먼 이야기이다. 당장은 도가가 도덕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에 대항하는 사상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도가의 도덕이 유가의 도덕에 대항하고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도가가 어떤 특정한 가치 체계에 틀지어진 삶이 아니라 거칠 것 없이 소요하는 삶을 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도가의 강점은 현실의 질서에 대한 강한 부정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거니와, 유가의 도덕이 가고 새로운 도덕이 출현하면 도가는 설령 그것이 좀더 자유주의적이더라도 그것을 부정할 것이다. 요컨대 도가의 자연을 따르는 삶이란 도덕적 권고라기보다는 항상 있게 마련인 현실의 질서를 비판하고 부정할 이론적 토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가의 '도덕'은 규범화되지 않았으며, 어떤 면에서는 영원히 규범화될 수 없다.
@p152
그러므로 도덕을 포함한 우리의 삶의 형식 일반이 이데올로기적임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도가의 사상에 동의할 수 있다. 새로운 삶의 형식은 구각을 파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건설되므로 주어진 삶의 틀에 안주하는 일상인이 아니라 창조적 개인으로 살아갈 생각이 있는 사람도 도가의 사상에 동의할 수 있다. 또한 건전한 유가라면 자신의 사상을 도가를 통해서 반성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는 도가식 사고 방식은 참으로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하지만 도가로 어떤 세계를 이를 수 있겠는가. 부정의 정신 충만한 도가는 질서를 파괴하는 데는 좋은 도구이지만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도구로는 약하다. 도가의 자연주의적 관점은 인문 문화의 병폐를 반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인간이 문화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가의 우주적 상상력은 우리의 안목을 확장하여 기존의 세계상에 안주하지 않도록 해 주지만, 그로부터 전망 있는 새로운 세계상을 명료하게 그리기는 어렵다. 질서를 깼으면 이제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 그 새로운 질서가 설령 우리의 자유를 다시 제한한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질서가 세워져야 그에 대한 새로운 부정이 나타나 개인과 사회가 더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이성적 건설 작업은 아마도 도가 사상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도가가 좀더 보편적인 철학 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이며, 도가의 치명적 약점이기도 하다.
@p152
3. 종합 고찰: 동양의 참 지혜
이제 결론을 내자. 앞의 문제 제기에서 우리는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은 도덕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지, 또 인간의 욕망, 개인과 사회의 발전, 도덕은 어떻게 관계 맺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생각해 보자고 하였다 일단 도덕이 객관화되어 규범으로서 주어지면 인간의 욕망과 십중 팔구 충돌하게 되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 충돌을 모면하는 유력한 방법은 도덕의 객관화 방식이 일방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곧 각 개인이 자율적 도덕률을 형성하여 그것을 타인의 것과 공정하고 자유롭게 교환하는 가운데에서 도덕이 객관화되어야 한다. 이때의 자율적 도덕률은 개인의 욕망에 여과되어 형성되는 것이므로, 만약 이렇게 도덕이 객관화된다면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과 도덕이 충돌하지 않는 상태를 상정할 수 있다.
이러한 도덕의 객관화 과정에는 당연히 일련의 조정 국면이 수반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타인의 욕망에 여과된 그의 도덕률이 나의 도덕률과 충돌을 일으켜 반성이 진행되고, 그 반성이 나의 욕망에 새로운 자극을 주며, 자극된 욕망에 의해 나의 도덕률이 수정되어 타인에게 전해지고, 타인도 그와 유사한 과정을 겪으면서 상호의 도덕률이 수렴해 가는 국면이 될 것이다. 이때 나에게 질서잡힌 도덕률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충돌이 없으니까 반성도 있을 수 없고, 기존의 도덕률을 부정하며 끝없이 발전하려는 욕망이 없다면 새로운 도덕률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실 유가와 도가 사상에 대한 검토가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유가는 질서를 잡고 도가는 그것을 깨부수면서 개인과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다. 단 유가는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도가의 부정을 받아들여 정말로 인륜적인 세상을 향해 끝없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준비를 해야 하며, 도가는 어떤 이념으로도 발전하려는 개인의 욕망을 한계 지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유가와 도가는 투쟁하면서도 상호 협력하는 우리의 두 유산이 될 것이다.
@p154
그래서 동양의 참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유가의 어떤 것이나 도가의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유가와 도가가 하나의 문화 속에 잘 융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유가도 있고 도가도 있다. 공자냐 노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자와 노자를 어떻게 넘나들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도덕인가 자유인가?
1. 토론 과제
아래에 두 개의 글이 주어져 있다 두 개의 글을 읽고 어떤 글이 더 마음이 드는지를 선택하고, 그 글의 입장에서 다른 글을 비판해 보도록 하자. 자기 논리가 갖추어지면 다른 글을 선택한 사람과 토론해 보자. 그리고 이 두 글의 장점을 종합할 수 있는 어떤 논리가 있는지를 모색해 보자.
1) 새벽에 일어나기 싫은 때 이런 생각을 네 가슴 속에 명기하라. "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러 일어난다"고. 그것을 위하여 내가 태어났고, 그 때문에 내가 세상에 나온 일을 하러 가는 것을 그래도 불평한단 말인가 또는 이불 속에서 기분 좋게 자고 몸을 따뜻하게 한다는 이 일을 위하여 내가 만들어졌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이 더 즐겁다"고? 그러면 너는 쾌락을 위해 만들어졌단 말인가. 작은 식물, 작은 새, 개미, 거미, 꿀벌, 이들이 모두 제각기 자기의 일을 부지런히 하고 질서 정연한 우주를 이루는 데 자기 몫을 하고 있는 이치를 생각하라. 그래도 너는 사람으로서의 일을 하기 싫단 말인가. "그러나 좀 쉬는 것도 필요하다"고?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은 휴식도 제한하고 음식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p155
... 우선 네가 어떤 사람의 배신과 망은을 나무랄 때는 네 자신에게 생각을 돌리라. 왜냐하면 네가 친절을 베풀었을 때 너는 그 이상의 무엇을 바라겠는가. 네가 네 본성대로 어떤 일을 했으면 그만 아닌가. 그 일에 대한 보상을 바란단 말인가. 마치 눈이 보는 값을 달라 하고 다리가 걷는 값을 달라 하는 듯이 말이다. 이것들이 자기의 특정한 일을 하도록 만들어졌고, 각자의 생김새대로 그 일을 함으로써 완전히 자기 본분을 다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역시 본래 남을 위하도록 만들어졌으니 일반의 복리를 위하는 은인으로서 행동했다면 그 일을 위하여 자기가 마련된 바를 하고 자기의 본분을 지킨 것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 우스 지음, (성찰록)
2) 백 년이란 사람 목숨의 최대 한계여서 백 년을 사는 사람은 천에 하나도 안 된다. 설사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어려서 안기어 있던 때로부터 늙어 힘없는 때까지가 거의 그 반을 차지할 것이고, 밤에 잠잘 때의 활동이 끝난 시간과 낮에 깨어 있을 적에 헛되이 잃는 시간이 또 거의 그 반을 차지할 것이다. 아프고 병들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자기를 잃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시간이 또 거의 그 반은 될 것이다. 십수 년 동안을 헤아려 보건대 즐겁게 자득하면서 조그마한 걱정도 없는 때는 한시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살면서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무엇을 즐겨야 하는가?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을 입어야 하고 음악과 미인을 즐겨야 한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을 항상 만족스럽게 구비할 수는 없고, 좋은 음악과 미인을 언제나 데리고 놀 수도 없다 그리고는 또 형벌과 상에 의하여 행동이 금하여지기도 하고 권면되기도 하며, 명예와 법에 의하여 나아가게도 되고 물러나게도 된다. 황망히 한때의 헛된 명예를 다투고 그저 죽은 뒤에 남는 영화를 도모하여 우물쭈물 귀와 눈으로 듣고 보는 것을 삼가고 몸과 뜻의 옳고 그름에 전전긍긍하면서 공연히 좋은 시절의 지극한 즐거움을 잃고 한시라도 자기 멋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이것이 형틀에 매어 있는 중죄수와 무엇이 다른가?
태고적 사람들은 삶이 잠시 오는 것임을 알았고, 죽음은 잠시 가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마음을 따라 움직이면서 자연을 어기지 않았으니, 그가 좋아하는 것은 몸의 즐거움에 합당한 것이어서 그것을 피해 가지 않았고 명예를 좇아 행동하지 않았다. 본성에 따라 노닐면서 만물이 좋아하는 바를 거스르지 않았으며, 죽은 뒤의 명예는 취하지 않았다. (열자) (양주편)
@p156
2. 기본 논증과 비판
위에서 주어진 첫 번째 글은 유럽 고대의 스토아 학파 사상을 대표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의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소크라테스의 삶과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논(Zenon) 이 세운 학파로, 삶의 진정한 행복은 도덕적인 삶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위의 글에서도 나타나 있지만, 그들은 세계를 질서가 잘 짜여진 사물들의 배열 장소로 파악하면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영혼이며, 영혼에 합치되는 삶이 인간다운 삶이고, 영혼에 합치되는 삶이란 세계의 영혼으로서 신의 섭리에 따르는 삶이라고 하였다. 신이 로고스 곧 이성으로 표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도 이성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이때 이성은 자유롭게 생각하는 정신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세계의 질서 속에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잘 알아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잘 짜여진 세계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욕망의 절제가 필요하며, 욕망의 절제를 통해 도덕적 자기 사명을 완수할 때 내면의 평정이 찾아오고 인생의 참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 학파의 주장이다.
위의 글에서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그러한 일을 행함으로써 다른 동물들이 그러하듯이 사람도 질서정연한 우주상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육체적 쾌락이나 물질적 욕구에 대한 견해는 대단히 부정적이어서 자연은 그러한 것에 대한 무분별한 추구를 제한하고 있다고 본다 욕망의 절제와 남을 위한 희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였다는 도덕적 자부심이며, 도덕적 자부심을 갖는 것이야말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생각을 이 글은 보여 준다.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논리는 유가사상과 대부분 일치한다.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스토아 학파가 질서가 잘 짜여진 세계의 근거로 신을 내세우는 데 비해, 유가는 자연 자체가 이미 질서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주어진 자신의 본분을 다함으로써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질서가 이세상에 구현된다는 생각은 유가의 정명론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정명론은 공자가 말한 것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명분을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론이다. 명분은 '... 답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잘 알려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하라"는 말은 명분론이 어떤 실천을 권장하고 있는지 잘 보여 준다. 임금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임금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신하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신하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면 군신 관계는 도덕적으로 편제되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군주가 하늘을 대신하여 신하들을 다스리는 것이 자연적 질서로 주어져 있는 한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자연적 질서를 세상에 구축하는 길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각각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명분은 구체적으로 예에 의해서 규정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고에서는 신하가 신하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 가령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동이 된다.
@p157
모든 사람이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명분에 충실한 삶을 산다면 사실 세계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질서는 이미 주어져 있고. 명분의 실천에 의해서 질서는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질서가 잘 짜여진 세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고 이야기되는 질서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그 질서를 준수하는 것은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가령 군신 관계라는 정치 질서를 준수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렇지만 위와 같은 생각에서는 군신 관계의 철폐를 위한 실천이 비도덕적 인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이러한 유가의 명분론적 사고 혹은 스토아 사상에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주어진 명분이나 본분에 다하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도덕적 아름다움이 있다. 하지만 갈등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갈등을 낳는 사회적 모순을 도외시하면서 주어진 사회 질서를 준수하고, 내면의 평정을 찾기 위해 자연적으로 분출하는 자신의 욕망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것을 일정한 도덕률에 얽어매는 것은 오히려 더 심각한 무질서를 낳기 마련이다. 아직까지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의 사회는 계속 변화 발전해야 하고, 변화를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를 거부해야 하며, 변화를 위한 실천의 근저에는 자유롭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있다. 그런 면에서 실로 사회의 변화를 낳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나 스토아 학파는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항상 욕망의 절제를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질서로 세계를 편제하려는 생각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질서가 궁극적으로 도덕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옳다. 발전을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일관된 세계상을 갖고 새로운 질서를 부식시키려는 노력도 필요하며, 그 질서는 정치적, 경제적 강제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고 자율성의 토대 위에서 '인륜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도가가 그런 것처럼. 요즘 유행하는 자유주의에도 대안적 세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가나 자유주의에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기에 충분한 면이 있는 것처럼, 유가나 스토아 학파의 도덕이 그대로 현실의 도덕률이 되어서는 곤란하지만 그 정신은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면을 가지고 있다.
@p158
두 번째 글은 '열자'라는 책 속에 들어 있는 한 편의 글이다. '열자'는 '노자'나 '장자'와 마찬가지로 도가 사상을 대표하는 책이다. 이 글이 담겨 있는 편명은 '양주편'인데, 양주는 적어도 맹자에 의해서 알려진 양주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이다. 맹자는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더라도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양주의 이러한 태도를 위아론이라고 한다. 양주에 대한 맹자의 평가에는 양주를 의도적으로 폄하하려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기는 하지만, 유가 전통을 계승하는 맹자의 눈에 그렇게 볼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양주는 도가의 선구자이다. '묵자'나 '한비자' 같은 다른 중국의 고전을 보면 그는 생명을 중시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그는 생명의 자유로운 느낌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귀하다고 하는 것도 내 생명의 즐거움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면 귀하지 않게 생각하였고, 세상에서 옳다고 하는 것도 자신에게 옳지 않으면 싫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노자나 장자와 마찬가지로 도덕이나 명예에 대한 추구를 거부한다. 그것은 나의 자유로운 생명을 구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더라도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른바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 도덕 군자의 안목으로 해석된 이로움이고 권력자의 입장에서 본 이로움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맹자의 길은 그가 보기에는 허구였고, 양주는 그러한 허구를 위해서 내 생명을 구속하고 희생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양주는 자명한 즐거움으로서 몸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위의 글에서도 그는 옛날의 성인들이 몸의 즐거움에 합당한 것을 추구하였다고 말하였다. 사실 행복은 소극적으로는 고통의 부재이고, 적극적으로는 즐거움이 충만한 상태이다. 단지 많은 윤리학설은 몸의 즐거움은 참 즐거움이 아니고, 어떤 숭고한 가치에 부합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향유되는 정신적 즐거움이야말로 참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해 왔을 뿐이다. 하지만 몸의 즐거움만큼 자명한 것은 없다. 유가의 도덕률을 실천함으로써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여자와 같이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움의 느낌을 준다. 도덕은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사악한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그에 대한 죄의식을 불어넣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몸의 즐거움의 자명성을 반증한다.
@p159
자명한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덕이나 명예 같은 허구적인 가치 체계와 그것이 불어넣은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위의 글에서 말하는 '형틀에 묶인 죄수의 삶'이다. 아울러 양주는 자연에는 그러한 구속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구속 없는 자유로운 생명의 즐거움, 그것이 만물이 좋아하는 바이고 자연을 따르는 삶이었다.
이렇게 이 글은 앞의 글과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 준다. 정말로 인간다운 것은 주어진 도덕률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욕구에 따라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쾌락은 찬양되고, 절제는 비판된다.
그렇지만 자연적 본성에 기초한 인간의 삶이 서로 화해를 누리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자연은 평화가 아니라 투쟁 상태에 있다. 두뇌가 발달하지 않은 동물은 충동을 조절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충동에 입각해서 행동하기 마련이거니와, 서로 다른 개체의 충동이 동시에 만족될 수 없을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란 그저 상대방의 힘의 우위를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자리를 피하거나 아니면 힘의 우위를 확인하기 위해 싸움을 시작하는 것뿐이다. 힘에 의한 지배가 관철되기는 자연이나 사회나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인간 사회는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로 힘에 의한 지배와 자연적 투쟁 상태를 종식시키려고 하지만 자연에는 그러한 노력조차 경주되지 않는다. 이성을 통해서 충동과 욕망을 통제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아닌가.
물론 도덕은 일단 이데올로기로서 다가온다. 하지만 양주는 이데올로기가 억압의 장치이자 동시에 자기 계발의 계기가 된다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억압하지만 동시에 그를 발전시키는 매개가 된다. 가령 어린아이에게 망태 할아버지가 있다는 의식을 심어 주고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는 말로 어린아이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그 말이 허구라는 것을 곧 깨닫는다. 그것을 깨달으면 그와 유사한 유치한 말에는 잘 안 속는다. 어린아이의 자의식이 그만큼 발전한 것이다. 그 뒤에는 이제 좀더 세련된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어른의 말을 잘 들어야 착하다고 칭찬 받는다는 따위가 그것이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갈 나이쯤 되면 무작정 그렇게 말하는 것도 잘 안 통한다. 어린아이는 "왜 어른들 말만 들어야돼? 우리는 마음이 없어?"라고 반문한다. 그만큼 어린아이는 성장해 있다. 이렇게 사람은 체계로서 이데올로기가 주어지고 그것을 비판하면서 어린아이는 점점 더 성장해 간다. 체계로서 이데올로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비판과 반성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발전도 불가능하다.
@p160
그러므로 도덕이 이데올로기라는 사실 때문에 도덕 자체를 거부하고 자연적 삶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일종의 퇴행이다. 현실의 도덕이 이데올로기라면 그것을 비판하고 반성하면서 좀더 발전된 도덕을 세우고, 다시 그것을 반성하는 식의 과정이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참고로 하여 앞의 두 글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반성하면서 서로 토론해 보자.
3 읽기 자료: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
나의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을 깊이 생각해 볼 때, 나는 이 두 측면이 이성적이고도 실천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발견하게 된다. 나는 타인들의 존재와 삶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본성이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들의 본성과 모든 점에 있어서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인간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인간들이 지은 옷을 입으며, 인간들이 세운 집에서 산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생각하는 것 전부가 인간의 덕택이다. 그리고 나는 의사 소통을 하려고 인간이 창조해 낸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만일 나의 사고하는 능력이 말을 사용할 줄 모른다면, 나는 실제로 무엇이 될까? 그렇다면 나는 틀림없이 말 못하는 고등 동물에 불과한 가련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 안에서 내가 동물보다 더 누리고 있는 이점을 알고 있다. 만일 어떤 개인이 태어나자마자 버려진다면, 그는 육체적인 면이나 본능적인 면에 있어서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동물의 상태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해 볼 수는 있으나 도저히 그런 것을 가정할 수는 없다.
인간인 한, 나는 단지 개체적인 피조물로서 존재할 뿐 아니라 나 자신이 커다란 인간 공동체의 한 구성원임을 깨닫는다
@p161
바로 이 사실을 아는 데 나의 가치가 있다. 나의 감정과 생각, 행위가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 즉 공동체와 그 발전이라는 목적을 향할 때만 실제적으로 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회적인 태도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선하다' 거나 혹은 '악하다' 라고 판단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원초적인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사회에 주어진 물질적, 정신적, 도덕적 여건 안에서 수많은 세대를 통해 이어져 온, 창조적 자질을 타고난 몇몇 사람들의 예외적인 역할을 분간해 낼 줄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 어느 날 처음으로 불을 사용하고 또 농작물을 경작하며 증기 기관차를 발명 한 것은 어떤 한 인간 즉 창조적인 개인이었다.
고독한 인간은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가치를 오직 홀로 생각하고 홀로 창조해 낸다. 그렇듯이 한 인간은 새로운 도덕적 규율들을 만들어 내고 사회적 삶을 변화시킨다. 창조적인 한 인격체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도덕적 진보가 완전히 그 자신의 독립성에 달려 있기 때문에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회는 의사 소통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인간 존재처럼 냉혹한 실패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이중적인 맥락을 통해서 사회의 건강도를 진단한다. 사회는 공동체와 깊숙히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개인들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고대 문명과 유럽 문화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때 꽃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미 중세 시대가 죽었고 시대에 뒤떨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노예가 해방되고 마침내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국가와 사회와 한 인간의 창조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리의 지구는 과거와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엄청난 인구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유럽의 경우 1세기 전보다 거주자가 3배 가량이 더 늘어났다. 그러나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창조적인 인격체의 수는 감소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발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대신 과학의 발달로 인한 각종 첨단 기계의 등장이 부분적으로 창조적인 개인의 역할을 대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분명히 첨단 기술적인 분야 안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과학적 세계의 불안정한 상태 속에서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다.
천재가 사라졌음은 예술의 세계에서도 두드러진다. 회화와 음악은 변질되었고, 인간들은 감수성을 상실해 간다. 이제 정치적 지도자는 없고, 시인들은 자기의 자주적인 독립성과 도덕적 권리의 필요성을 경시한다. 이렇게 가치의 바탕을 상실한 제도들이나--소위 민주주의적이고 공동체적 기구라고 말하는--의회 기구들은 현재 수많은 나라에서 그 타락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독재의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개인에 대한 존중심과 사회적인 도덕성이 빈사 상태이거나 이미 죽었기 때문에 독재가 용인되는 것이다. 지금은 신문지상의 논평을 통해 광적이고 판단력이 없는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살상을 하거나 살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군대에 지원할 각오를 가지게끔 부채질할 수 있다. 그렇게 악의를 품은 인간들이 자기의 비열한 목적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개개인의 인격과 위엄은 강요된 군사적 의무에 의해서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손상되었고, 우리의 문명화된 인간성은 이러한 암적 요소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재앙을 우려하는 예언자들이 우리 문명의 거대한 몰락을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요한계시록을 풀이하는 미래학자들의 부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보다 나은 미래를 믿기 때문에 오히려 나의 희망을 정당화시키려고 한다.
@p162
오늘날의 이런 타락 현상은 인간들이 자기 존재를 위해 경제와 기술의 급격한 발전을 이용하여 전쟁을 광범위하게 벌이고 있음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인류는 인간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 가능성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경제와 기술의 발전은 노동량을 감소시켰고, 인간 공동체의 요구를 더욱 빨리 만족시켜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반강제적이다 시피한 노동의 과학적인 분배는 개인의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시대를 해석할 내일의 역사가를 상상해 본다. 그들 역사가들은 사회적 질병의 징후로서 생산 수단의 갑작스런 발전과 교체에 의해 가속화된 생산성의 엄청난 증가 현상을 그 고통스런 증거로서 제시할 것이다. 그러면서 전진하고 있는 인류를 재인식하게 될 것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지음,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한겨레출판사, 1996.
@p163
연습문제
1. 문제 제기
1) 욕망의 의미를 설명하시오
2) 욕망과 도덕 이 충돌하는 이유는?
2. 문제의 분석--유가와 도가
1) 도덕적인 삶은 왜 좋은 삶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유가 사상의 입장에서 답하시오.
2) 유가 사상이 봉건 사회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서술하시오.
3) 도가의 유가 사상 비판이 어떤 면에서 정당성을 지니는지에 대해 서술하시오.
4) 도가사상이 우리 현실에서 지니는 의의와 한계에 대해 서술하시오.
5)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라는 주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6) 도가의 상대주의 인식론이 지니는 장단점에 대해 서술하시오.
7) 도가의 자연주의가 환경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서술하시오.
3. 종합 고찰
1) 우리 시대의 구체적인 도덕 규범 하나를 예로 들어, 도덕적 상황의 개선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지를 서술하시오.
2) 욕망의 자유로운 실현과 도덕은 충돌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쓰시오.
3) 유가와 도가 사상을 어떻게 계승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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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막스 베버 지음, 이상율 울김, '유교와 도교', 문예출판사, 1990.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가 유교와 도교의 사회학적 함축을 분석한 책, 베버는 이 책에서 유교와 도교가 근대 사회의 발전을 어떻게 저해하게 되었는가를 고찰하였다. 원래는 저자의 '종교사회학 논집'에 들어있는 논문이지만 따로 책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내려진 유교와 도교에 대한 베버의 평가는 중국의 종교, 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기까지 거의 50년 동안 서양 학계의 시각을 대변하였다.
2. 풍우란 지음, 정인재 옮김 '중국철학사', 까치, 1999.
근현대 중국의 지성사에서 커다란 지위를 차지하는 풍우란이 1930년대에 저술한 잘 알려진 중국 철학사 입문서. 원래 서양인들에게 중국 철학을 소개하기 위해서 영역 출판된 책으로, 지금 미국의 중국학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중국 철학에 입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책의 요약본이 오랫동안 정통적인 중국 철학사 교과서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나중에 풍우란은 중국 철학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여 새로운 중국 철학사를 저술하지만, 이 책이 오히려 중국 철학사에 대한 풍우란의 본면목을 보여 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3. 죠셉 니담 지음, (중국의 과학과 문명 2, 3), 을유문화사, 1985.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 죠셉 니담이 중국인 연구자의 힘을 빌어 저술한 '중국의 과학 문명' 시리즈의 사상사 부분에 해당하는 책. 중국의 과학사, 문명사 연구를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지만, 사상사 연구에서도 동양의 자연관을 유기체론으로 파악하는 등 참고해야 할 관점이 적지 않다. 치밀한 자료 조사와 객관적 서술로도 이름이 높으며,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이 책이 나왔을 때 '지난 10년간 케임브리지 대학이 낳은 최대의 역사적 저작'이라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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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택후 지음, (미의 역정), 동문선, 1991.
중국 사회과학원 교수이자 현대 중국의 지성을 대변하는 이택후가 원시 사회부터 명, 청에 이르기까지 중국적 미감의 역사적 전개를 일별한 책.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화적 상상력과 자유로운 몽상에 기초한 도가의 미감과 인문 도덕 정신에 기초한 유가의 미감이 중국의 구체적 역사를 계기로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나갔는가를 고찰한다. 유가와 도가 사상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이다.
5. 벤자민 슈월츠 지음, 나성 옮김,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 살림, 1996.
미국 하버드대의 석좌 교수로 현재 미국의 중국학계에서 부동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슈월츠의 책. 이 책에서 슈월츠는 중국의 종교, 철학에 대한 베버나 죠셉 레벤슨의 부정적인 평가를 극복하고 중국의 고대 사상이 중국문화 및 중국인의 삶에 어떻게 역동적으로 작용해 왔는가를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미국에서는 중국 사상에 입문하는 사람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6. 김교빈, 이현구 지음, '동양철학 에세이', 동녘, 1993.
비교적 젊은 연구자인 공저자들이 일반 독자들이 흥미를 가지고 동양철학에 접할 수 있도록 안내한 대중적인 교양서. 이 책에서 저자는 동양철학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 몇 가지를 지적하면서 동양철학의 언급들이 어떻게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다가가 있는지를 밝히려고 노력한다. 어느덧 동양철학에 대한 잘 알려진 입문서로 자리잡았다.
7. 김용옥지음, '노자와21세기', 통나무, 1999.
우리 나라에 동양학의 새 바람을 몰고 온 저자가 노자 사상을 통해서 새로운 세기의 발전적 전망을 모색한 책. 최근에 대중적 관점을 모았던 TV강의의 교재로도 쓰인 바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노자 사상의 보편적 가치를 확인하면서 그것이 왜 새로운 세기에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연구사적 의미를 폄하하는 시각이 많지만 대중적 성가만으로도 일독을 권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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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이해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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