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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탐험 [안 위공]

by Casey,Riley 202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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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탐험
안 위공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19세기 초엽까지도 아프리카 내륙지역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이었다. 그후 탐험가들은 각 지역을 답사하여 하천과 산세를 확인했고 다양한 동식물 군에 대한 연구목록을 작성했으며 아프리카인과도 유대를 다져 왔다. 그러나 불과 1세기 후에 이 땅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탐험가들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유럽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다.
 제1장 검은 대륙의 발견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바와 달리, 아프리카는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된 대륙이 아니었다. 이미 선사시대 이전부터 아프리카는 아시아, 유럽 대륙과 관계를 맺어 왔다. 중세 초에는 북쪽의 아랍인이 사하라 사막을 넘나들며 소금, 무기, 피륙 등을 싣고 와 금, 상아 그리고 흑인노예로 교환해 가는 대상무역이 성행했다. 당시 유명했던 이븐 바투타, 이븐 호칼 또는 알 이드리시와 같은 아랍 여행가의 기록은 지금도 아프리카 수단 지역에 대한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한편, 유럽인은 15세기 초부터 대서양 연안에 상업 전진기지를 건설하고 그들의 산업제품을 현지의 열대작물 또는 흑인노예와 교역하고 있었다. 16세기 초에 유럽인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 동쪽 해안까지 일주했는데, 그곳에는 이미 아랍 상인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지리적 상황이 내륙지방 진출에 걸림돌이 되다.
 오랫동안 아프리카에 관한 지식은 사막지역과 해안지대에 국한되었다. 그나마 대서양의 암초와 연안의 늪지대 때문에 연안으로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다. 탐험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요인은 적도지방의 열대 우림이었다.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되는 열대림이 빽빽이 늘어서 있는 사이로 관목숲이 촘촘히 얽혀 있어 정글도와 도끼를 휘둘러대지 않고서는 전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대륙 동부에는 중앙집권이 발달하고 통치체제가 잘 정비된 한국들이 막강하게 버티고 있던 반면 다른 지역에는 언어와 민족이 상이한 여러 정치세력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탐험가들이 아프리카의 '미개성'을 강조하기 위해 보편적인 양 과장했던 이러한 분열이 탐험가들의 진로를 방해하기도 했다.
 지형적 장애와 정치적 요인 이외에도 머리 없는 괴물, 반인반수, 식인풍습에 관한 뜬소문 등 탐험가의 모험심을 억제하는 어처구니없는 낭설도 많았다.
 18세기 말까지 실재하는 장애요인과 상상 속의 위험요소들은 탐험하고자 하는 유럽인의 의지를 좌절시켜 왔다. 그렇다면 유럽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지난 3세기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에 이루어진 교역은 노예무역으로, 이는 해안지대에 국한된 것이었다. 1790년에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유럽인은 2만 5, 000명에 달했는데 그중 2만 1, 000명이 희망봉에 거주했음을 볼 때 아프리카에 정착한 유럽인은 대부분 해안지대에 몰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때부터 점차적인 전환기를 맞이한 유럽과 아프리카의 관계는 향후 100년 동안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두 대륙의 접촉은 결국 아프리카의 식민지화로 귀결된다. 이 같은 역사발전의 주요 원인은 아프리카가 아닌 유럽 내부의 여러 가지 상황 변화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영국이 제일 먼저 아프리카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영국인은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투쟁은 물론 아프리카 내륙탐험에서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과학적 탐구와 지리적 호기심의 발동
 계몽주의 사상이 막 쇠퇴하기 시작할 무렵에 유럽에서는 탐험가뿐만이 아니라 일반시민들까지도 아프리카 지도상의 큰 공백지대에 대한 궁금증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의 지도제작자들은 대륙 내부의 지형에 관해 서만은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강줄기는 제멋대로 그려져 나일강과 니제르강이 그 상류에서 합류하는가 하면 콩고강이 해변의 조그만 하천으로 표시되기도 했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지식인들은 상상으로 제작된 이 같은 지도들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드디어 1788년 런던에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한 모임으로 아프리카 내륙탐험협회가 결성되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일명 아프리카협회로 불리는 이 새로운 단체는 소책자를 발행하여 "인류가 살고 있는 땅의 1/3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데다가 그 중에서도 특히 아프리카는 그 대부분 지역이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고 개탄했다. 드디어 아프리카에 대한 무지를 극복해야 할 인류의 수치로 자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로운 각성이 단순히 지리적인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유럽의 엘리트층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이제 겨우 태동기에 접어들었을 뿐인 인류학에까지 심취함으로써 그들의 지식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채우려 했다. 그리고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지식 축적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유럽인 사이에는 우주의 법칙을 깨달음으로써 인간의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프리카협회는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아프리카 탐험에서 얻을 수 있는 유용성에 대한 신념과 인산 지식의 확장이라는 목표를 천명했다.
 노예무역 폐지론의 대두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휴머니스트(humanist)를 중심으로 박애주의가 점차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태평양 지역 탐험가들이 '원시적'이라는 표현과 함께 소개하기 시작한 생소한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몇몇 유럽인은 이들 미개문명도 엄연한 사회적 융합의 결정체이며 하나의 문화로 인정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선량한 야만인'이라는 표현과 함께 머나먼 타국 문화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자리잡기 시작했고, 동시에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개회된' 여론이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산업자본가들은 노예제도다 노동의 자유에 기반한 근대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노예제도를 반대했으나 이러한 진취적 움직임 속에는 다른 진의가 숨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룩한 영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함으로써 경쟁국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자 하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면과 경제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영국의 유력 인사들은 '영국인마저 인간에 의한 인간의 매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분개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합법적이었던 노예무역을 비판하고 그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 영국인과 그에 동조하는 많은 유럽인들 사이에 아프리카 흑인에 과한 동정 어린 관심이 싹텄다. 마침내 1815년 빈 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노예폐지론을 주창했고, 그 결과 노예무역은 금지될 수 있었다. 이 같은 빈 회의의 성과는 그동안 계속되어 온 철학자들의 투쟁에 따른 것임은 사실이지만 이들 휴머니스트들은 실제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늘 제자리를 맴돌았다. 즉, 그들은 검은 대륙에 문명을 전파하여 그 혜택을 베풀고자 하면서 이를 받아들이게 될 사람들의 문화적 특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훗날 흑인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리빙스턴조차 그의 탐험목적을 "아프리카의 야만족이 문명국가의 대열에 설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데 있다. "고 설명하는 선의의 교만을 범했다. 아프리카인에 대한 유럽인의 이러한 경멸 어린 태도는 산업기술 반전상의 기술적 우위를 인종적인 우월로 비약시킨 그들의 그릇된 자만심에서 비롯되었다.
 유럽인 선교사의 활약
 18세기 이전에도 유럽인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기독교 전파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 주로 콩고와 앙골라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였으며 특히 활동적이었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주목할 만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마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한동안 선교사들은 아프리카인의 운명에서 관심을 돌렸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노예무역이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선교활동의 필요성을 재인식한 유럽 각국의 선교사들은 복음전파를 위해 다시 아프리카라는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노예무역금지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던 영국의 종교계는 아프리카를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간주했고, 이에 따라 많은 수의 영국인 선교사가 현지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각종 열병이 도사리는 죽음의 위협에도 현지 선교활동을 자원하는 성직자들의 숫자가 급증하게 된 것은 순수한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 다분히 물질적인 면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당시 영국의 경제성장은 종교활동에 많은 기부금을 제공하는 행위를 선행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했고 따라서 각 선교단체들의 재력이 급격히 신장되었다. 한 예로 영국 국교회 선교사업부의 연간수입은 1830년의 3만 파운드에서 1875년에는 15만 파운드로 무려 다섯 배나 성장했다.
 독일인 선교사들의 활약은 주로 중부 아프리카에 집중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로 크라프와 레프만을 들 수 있다. 1840년 몸바사에 도착한 이들은 현지 선교를 위해 성경을 스와힐리어로 번역하는가 하면, 당시의 유럽 지리학자들이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던 킬리만자로산과 케냐의 여러 눈 덮인 산들에 대해 최초로 기록을 남겼다.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기 시작했고, 이들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로 아프리카를 위해 일생을 바친 리빙스턴을 손꼽을 수 있다.
 유럽 상인의 열망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여전히 노예무역은 불법적으로 자행되었다. 그러나 지난 1세기 동안 그 규모는 현저히 감소되었기에 유럽 노예상인들은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일부 노예상인들은 국제적인 상업망을 형성할 수 있다면 아프리카에서 많은 수익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검은 대륙은 종려유, 의약용 고무, 비누 제조 원료 따위 진귀한 산물을 대략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또한 아프리카에는 유럽이 필요로 하는 많은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었다. 그 한 예로 리빙스턴은 수백 파운드가 나가는 기둥모양의 동괴를 카탕카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고 그의 탐험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당시 급속히 산업화를 추진중이던 유럽은 원료공급지로 아프리카를 주목했다.
 아프리카 내륙지방의 개척으로 이들 엄청난 자원을 소유할 수 있다는 기대는 당시 세계의 공업발전을 주도하던 영국에서 가장 강했다. 영국의 산업자본가들은 동시에 거대한 산업제
품 유통시장까지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프리카 전지역에 대한 타사와 현지주민들과의 유대강화가 선행되어야 했으므로 당시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이 아프리카 개척의 선두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아프리카 내륙지방의 개척은 겉으로 표방된 관대한 인도주의 정신보다는 이에 밀착된 상업적 실용주의에 의해 추진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이후, 탐험과 식민지 개척의 시대를 맞이하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에 진출했을 때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눈뜨기 시작했다. 즉, 아프리카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그들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여 줄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득과 함께 미래에 번영까지도 보장하리라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제 활발한 식민쟁탈전이 시작되었고 그 동안 민간단체들이 조달하던 탐험비용은 1880년부터는 각국 정부에 의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충당되었다. 드디어 군장교들이 탐험에 직접 나서면서부터 탐험 자체도 체계적인 군사작전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들 군인 탐험가들은 타국과의 경쟁에서 자국의 이익을 모호하고 국권을 수호하는 외교사절의 역할을 겸했는데, 미지의 땅을 개척하겠다는 지리적 호기심보다는 현지 부족대표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데 더욱 치중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는 탐험에 참가하는 모든 군인 탐험가에게 현지 부족국가의 왕과 친분을 돈독히 하여 그 지역을 보호령으로 만들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는 그들의 탐험이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식민지 확보에 그 목표를 두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 준다.
 아프리카 탐험의 다양한 목적은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모두 같은 머릿글자c로 시작되는 호기심(curiosity), 문명전파(civilization), 기독교화(christianization), 상업(commerce), 식민지 경영(colonization)으로 요약될 수 있다. 19세기 말 복합적인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의 관심은 미지의 대륙에서 선구자 역할을 해낸 탐험가의 모습 속에 구체화되어 있다.
 탐험가, 전형적 유럽인
 탐험가라는 단어에서, 둥글고 단단한 테가 달린 헬맷을 쓰고 극도의 피로감에 지쳤음에도 탐험대의 선두에 서서 용감히 전진하는 개척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맹수나 코끼리를 사냥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곤충과 모기에 시달리면서도, 탐험가는 결코 궁극적인 탐험목표를 단념하지 않는다. 활기차고 위풍당당하며 결연한 의지와 신중함을 지닌, 정열적이면서도 우수에 젖은 듯한 탐험가는 누구보다도 교활함을 증오하고 우유부단함을 배격하는 인물로 인식된다. 그러나 현실 속의 탐험가는 그보다 더욱 복합적인 인물로 역사적 상황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탐험가가 수행했던 사회적 기능은 바로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다른 미지의 세계를 소개하는 역할이었다. 즉, 탐험가는 그의 용기와 희생을 감수하는 타고난 자질로 아프리카라는 미지의 세계에 단독으로 접근하여 문명세계의 유일한 대표자로 군림하는 동시에 유럽으로 유입되는 모든 정보를 독점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이든 북아메리카인이든간에 거의 모든 탐험가들은 결과적으로 백인종이 타인종에 비해 우월하다는 그릇된 의식을 전파했다.
 한편, 탐험가들 중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 결별하기 위해 탐험에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 관습에 얽매인 19세기 사회, 특히 빅토리아 여왕 통치하의 편협한 영국 사회에 살던 몇몇 탐험가들은 자유스런 사회를 동경한 나머지, 자신을 조여 어는 진부한 사회규범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전혀 다른 세계인 아프리카로 탐험을 떠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리처드 버턴은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하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항상 들어왔으며, 늘 비유럽적인 문화에 심취해 있던 탓으로 영국에 크게 공헌한 탐험가로 칭송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변절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메어리 킹슬리 또한 그녀가 자라 온 극도로 규범화된 영국 사회에 대해 늘 불만을 표출해 왔고, 결국 자신의 조국을 탈출하여 열대 아프리카가 자신의 새로운 조국임을 천명하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였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가치규범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탐험가도 일반인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탐험가들은 낭만주의자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떤 이들은 아프리카가 지닌 이국정취나 신선함에 매료되어 아프리카를 서구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로 파악했다. 인간적 한계를 초월하고자 했던 어떤 이들은 아프리카 탐험을 통해 영적인 구원을 얻고자 했다. 탐험가들의 아프리카를 향한 막연한 동경은 미지의 땅이 간직한 신비로움에 기인한다. 유럽인의 상상 속에 아프리카는,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찬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대륙으로, 괴상한 인종이 사는 곳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탐험가들은 '검은 대륙'이나 '신비의 대륙'이라는 표현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환상이 공포를 가미함으로써 자신들의 업적을 한층 더 빛낼 수 있었다. 결국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탐험가들도 현실적이기보다는 환상적인 지각에 치우쳐 아프리카를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탐험가의 재창조물
 탐험을 성공으로 끝마친 탐험가는 서방세계에서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그가 발견해 기록, 정리한 아프리카의 강, 도시, 산들은 마치 그의 전리품인 듯 취급받는 게 보통이었다. 아프리카인이 이미 오래 전부터 그곳에 정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한 채, 탐험가들은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행성이라도 다녀온 듯 어느 산, 어느 강을 자신들이 사상 처음으로 발견, 정복했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동시에 그들은 현실적인 의미를 지닌 원지명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호수와 강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이리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원주민들이 '포효하는 연기(Mosioa tunya)'라고 부르던 잠베지강의 폭포는 리빙스턴이나 다녀온 후부터 빅토리아 폭포가 되고 말았다.
 유럽인은 관행적으로 자신들이 발견한 신개척지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는데, 이 같은 새로운 지명에는 자국에 대한 예속관계를 상징하는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빅토리아 폭포, 빅토리아 호, 앨버트호, 에드워드호, 조지호 등, 아프리카의 지명에서 영국 왕실의 인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스탠리의 예와 같이 탐험가가 자신이 개척한 지역에 본인의 이름을 붙이는 오만을 범하거나, 그 탐험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상대적인 겸손(?)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장이던 머치슨과 리폰의 이름이 아프리카 지도에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탐험가들은 스스로 조물주를 자칭하는 월권행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기록했다.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인 나일강은 신성한 대상이었으며 오랫동안 지리학적 신비로 남아 있었다. 나일강은 과연 어디에서 흘러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일강이 세상의 끝 또는 그 너머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탐험가들은 나일강의 신비를 벗길 수 있었다.
 
 제2장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고대로부터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긴 강 중에 하나인 나일강의 발원지에 관해 궁금해 왔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사막을 흘러 내려와 이집트의 젖줄을 이루고 있는 나일강은 찬란하고 매력적인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융성을 목격했다.
 고대문헌이 전하는 나일강에 관한 기록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이집트 나일강의 수원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집트 남부 아스완 상류에 있는 여섯 개의 폭포 때문에 항해가 불가능한데다, 강줄기가 북위 8도선에 위치한 수단 저지대의 늪지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강의 수원을 더듬어 도달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B. C. 5세기경 헤로도토스는 니제르강과 나일강이 한 줄기이며, 서아프리카에서 발원하여 차드호를 지나 이집트에 이른다고 믿었다. 그의 확신이 실제와 다르다고 밝혀진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지만 그 동안에 이 가설을 믿고 증명을 시도한 지리학자들도 상당수에 달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가 A. D. 2세기경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는 문헌들을 바탕으로 좀더 실제에 가까운 설을 내놓았다. 이에 기초가 된 문헌은 티레의 마리우스가 B. C. 1세기 말에 디오게네스의 아프리카 동부 해안 탐사 결과를 근거로 기록한 것이었다. 이들 선구자들의 기록을 참고자료로 해서 프톨레마이오스는 높고 눈덮인 산들과 원산이 표시된 지도를 작성했다. 지도에는 여러 산들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큰 호수들이 나일강에 최초로 물을 공급하는 장면과 이 강의 하류 쪽으로 또 다른 호수에서 발원하는 지류가 메로웨 지역에 이르러 본류에 합류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프랑스의 아프리카 전문가 위베르 드샹에 따지자면 '매우 의심스러운 발원지를 그리고 있는 이 지도'는 사람들의 기대와 정반대로, 19세기에 이루어졌던 탐험가들의 지리적 발견과도 일치하고 있다. 19세기에 이루어졌던 탐험가들의 지리적 발견과도 일치하고 있다. 사실상 고대 지리학자들은 나일강 상류 지형에 대한 기본적인 윤곽을 정확히 추측했다. 나일강 상류에 높은 산들과 여러 개의 호수가 있으며 강의 우측으로 하나의 큰 지류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일강이 중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는 백나일강과 에티오피아에서 발원하는 청나일강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디오게네스는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신 인도양의 연안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탐험가들은 디오게네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청나일강의 수원 발견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에서, 혹은 개인적 명성을 얻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일강 탐험을 시도했다. 그중 가장 먼저 탐험에 나선 것은 스코틀랜드 귀족 출신인 제임스 브루스로, 미지의 세계에 대해 강한 열정을 품고 있던 사람이었다.
 북아프리카 주재 영국 영사로 근무하던 브루스는 1770년에 나일강의 원천을 찾을 목적으로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이름)로 건너왔다. 그는 에티오피아어를 배우고 탐험용 관측장비 조작법을 습득했다. 그후 그는 홍해의 서쪽 해안을 통해 당시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에티오피아 왕국의 수도 곤다르에 도착했다. 잠시 네구스왕의 궁전에 머무르며 현지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낸 그는 티시사트강에 엄청난 양의 폭포수를 쏟아 붓는 화산호 타나호에 다다랐다. 나일강이 이 호수에서 발원한다고 확신한 브루스는 호수에 유입되는 리틀아베이강을 거슬러 올라가 그 수원에 다다른 뒤 나일강의 수원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실상 그가 발견한 것은 주요 지류인 청나일의 수원에 불과했다. 또한 16, 17세기에 걸쳐 프란시스코 알바레스와 페드로 파에스라는 두 명의 포르투갈인 예수회 신부들이 이미 그곳을 탐험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공훈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되고 말았다. 그러나 브루스는 선구자들의 업적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브루스는 선구자들의 업적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철저한 프로테스탄트였던 그는 로마의 꼭두각시 카톨릭 신부에게 엄청난 모멸감을 느꼈다. 그의 종교적 선입관은 국수주의적 색채를 띠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영국 국왕 조지 3세에게 자신의 '전리품'을 헌정한 후였으니 포르투갈인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에 더욱 분개했음은 당연하다. 탐험가 브루스는 그의 지리학적인 성취보다는 문학적, 인류학적인 측면에서 훌륭한 성과를 이루었다. 1790년에 출판된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라는 여행기에서 그는 에티오피아인의 생활과 풍습을 자세히 묘사했다. 표현기법에서 이국취향에 지나치게 심취해 있었다는 약점이 지적되지만, 그가 "인간의 본질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점은 주목할만하다. 출판 당시 그의 탐험기의 내용이 과장되거나 사실이 왜곡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에티오피아에 서식하는 동물과 식물을 그린 수많은 판화와 도해로 장식된 그의 여행기는 오늘날까지도 에티오피아 역사 연구에 관련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카이요의 이집트 탐험
 수단 분지 남쪽을 흐르는 나일강의 행로에 관해 궁금증을 갖고 있던 것은 유럽인만이 아니었다. 19세기 포에 이집트인도 나일강의 오랜 신비를 풀기 위해 강을 역류해 올라간 적이 있었다. 1820년과 1822년 사이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이집트 총독 모하메드 알리 파샤는 나일강 탐험대를 파견했고 이에 합류했던 프랑스인 카이요는 청나일이 나일강의 한 지류에 불과함을 확인했다. 그러나 탐험대는 곤도코로에서 더 이상 전진하기를 포기했고 결국 본류인 백나일의 근원은 수천 킬로미터 더 남쪽에 위치하리라는 추측만 남고 말았다.
 영국의 나일강 탐사 참여
 1850년대에 들어서 아프리카 동부 지역에 대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자 부심했다. 영국이 오만에 압력을 넣은 결과, 잔지바르가 오만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한 1856년 이래 그 섬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지리적 탐사가 세력확장에 선결요건임을 간파한 영국은 1857년에 영국 왕립지리학회와 외무성의 추천을 받아 두 명의 장교를 나일강 수원 탐사에 파견했다. 왕립지리학회는 1795년에 이미 서부 아프리카 니제르강 탐사에 스코츠맨 뭉고 파크를 파견한 적이 있는 아프리카협회의 후신이었다. 그러나 외무성의 개입으로, 이전에 시도되어 온 개인적 탐험과 앞으로 전개될 탐험은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이제 탐험은 민간차원이 아닌 엄연한 국가적 사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카이로에서 케이프타운까지'라는 구호 아래 본격 추진되기 시작한 영국 식민사업의 신호탄이었다. 두 명의 장교 존 해닝 스펙과 리처드 버턴은 모두 인도 주둔군에서 복무하던 장교로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임무에서 두각을 나타낸 적이 있었다. 이들은 왕립지리학회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버턴과 스펙의 제1차 탐험
 1857년 6월 16일, 스펙과 버턴은 잔지바르섬을 마주한 바가모요항을 출발했다. 이들 두 사람은 아랍 대상을 본떠 탐험대를 조직했다. 100여 명의 인부를 모집하여 통행세로 지불할 피륙, 유리구슬, 놋쇠줄 등을 운반하도록 하고 30여 명의 호위대를 동반했으며, 잔지바르 왕의 추천으로 후에 버턴의 오른팔 노릇을 하게 되는 사이드 빈살린이라는 아랍인을 안내인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탐험대의 출발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왕립지리학회와 외무성이 지원한 금액이 두 탐험가가 필요로 하는 인부 175명의 급료 총액에 미치지 못했던 탓으로 계획보다 적은 수의 짐꾼을 고용했다. 이처럼 짐꾼의 숫자가 턱없이 모자라 한 사람이 과중한 짐을 날라야 했고 이는 행군을 어렵게 했다. 게다가 날씨가 고르기 못해 출발이 늦어졌다.
 결국 탐험대는 아랍인이 노예와 상아의 수송을 위해 개척한 길을 따라 카제(오늘날 탄자니아의 바보라)까지 가는 데 134일이나 소비했다. 늪과 사막과 산을 통과하는 오랜 여정으로 두 유럽인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버턴이 '늪지대의 열병'이라 칭하던 말라리아에 감염된 자들은 들것에 실린 채로 카제에 도착해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한 아랍인이 버턴에게 냔자라 불리는 호수를 향해 북쪽으로 갈 것을 권했으나 탐험대는 이를 무시하고 서쪽으로 출발했다.
 1858년 2월 13일, 8개월 간의 여정 끝에 그들은 거대한 호수를 만났다. 바로 탕가니카호였고 그들은 이 호수를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이때 스펙은 눈의 염증으로 일시적인 시력장애를 일으켰고, 버턴은 혀에 난 종기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마침내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그들은 물이 배출되는 지점을 찾기 위해 탕가니카호 북단을 탐험했다. 그러나 루지지강은 호수에서 흘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 들어오는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으며, 스펙 역시 호수의 해발높이가 772m로 나일강의 수원이기에는 너무 낮다고 결론지울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탕가니카호가 나일강의 수원일 거라고 믿던 그들의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스펙의 단독 탐험 5월에 들어 탐험을 재개한 탐험대는 다시 카제에 도착했으나 스펙과 버턴의 관계는 이미 상당히 악화된 후였다. 오랜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려 온 그들은 상호 감정대립으로 불화가 잦았던 것이다. 이제 스펙은 단독으로 새로운 호수를 찾아 북쪽으로 떠나고, 혼자 남은 버턴은 건강을 회복하는 데 신경쓰면서 주면 지역에 대한 단편적 정보수집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1858년 8월 3일, am완자에 도착한 스펙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내륙해의 장관에 감격했다. 현지인이 냔자호로 부르던 면적 6만 8, 000평방미터에 달하는 아프리카 최대의 호수는 여왕의 영예를 기리는 뜻에서 빅토리아호로 개칭되었다. 곧바로 카제로 돌아온 스펙은 나일강의 수원을 확인했다고 선언했다. 직감에 불과했던 이 주장은 곧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이 무모한 선언을 반박할 자신이 없었던 버턴은 나일강의 상류는 킬리만자로산 근처에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굳힐 뿐이었다.
 1859년 2월, 동료에서 철천지원수 사이가 되어 버린 스펙과 버턴은 잔지바르에서 왕립지리학회에서 그의 발견을 공표했다. 고대로부터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던 만큼 그는 대단히 열광적으로 환호받았다. 한편, 버턴은 (중부 아프리카의 호수지대)라는 인류학적이고 지형학적인 내용을 수록한 책을 출판한 후 옛 동료인 스펙과 필사적인 논쟁을 계속해 나갔다.
 스펙의 제2차 원정
 스펙과 버턴 사이의 논쟁은 지리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유명한 탐험가들이 이 논쟁에 참여했는데 그중 리빙스턴은 버턴의 견해를 지지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펙은 상대편을 제압하는 유일한 방법은 호수의 재탐사뿐이라는 생각으로 당시 왕립지리학회의 회장이던 로드릭 머치슨 경으로부터 2, 000파운드의 지원금을 받아 재차 탐험에 나섰다.
 버턴과의 여행을 거울삼아 스펙은 인도 주둔군 장교 중에서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 제임스 오거스투스 그랜트를 탐험동료로 선발했다. 오거스투스 그랜트를 탐험동료로 선발했다. 지난번 탐험대 규모에 맞추어 176명의 짐꾼과 함께 출발했으나, 힘든 여정을 견디지 못한 대부분이 도중에 탈주해 버리고 18명만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1860년 10월에 잔지바르를 출발하여 지난번 탐험 때와 같은 경로를 통해 카제를 거쳐, 북서쪽으로 쿠테사왕이 통치하는 부간다 왕국과 접해 있는 빅토리아로까지 무사히 도착한 스펙과 그랜트는 곧 서로 헤어져 나름대로 원정에 나섰다. 호수 북쪽으로 진로를 잡은 그랜트는 강력한 중앙집권 조직을 갖춘 호반국가 부뇨로 왕국으로 향했고 스펙은 호수 연안을 따라 북북동 방향으로 나아갔다.
 1862년 7월 28일, 빅토리아호 북단에 도착한 스펙은 현지에서 말로만 듣던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폭포를 발견하면서 호수와 나일강의 접점을 확인했다. 빅토리아호가 나일강의 모태라는 스펙의 직감이 입증된 셈이었다. 스펙은 탐험을 주최한 왕립지리학회에 대한 성의 표시로써 새로 발견한 폭포에 학회 회장을 역임했던 리폰의 이름을 따서 리폰이라 이름붙였다.
 호수 주변 지역을 좀더 자세히 답사하고픈 욕망은 간절했으나 나일강 상류의 노예와 상아 무역항인 곤도코로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보급선 일정에 쫓겨 그는 추가탐사를 포기한 채 부뇨로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캄라시왕에게 억류되어 있던 그랜트와 상봉했다.
 남은 탐험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종단하여 카이로에 도착한 두 사람은 런던에 나일강에 관한 의문이 드디어 풀렸다는 내용을 전문으로 보냈다.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빅토리아호에 유입되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논쟁은 또다시 재개되었다. 1864년 9월 두 탐험가는 왕립지리학회에서 설명회를 개최하기로 했으나, 모임이 있기 전날 사냥에 참가했던 스펙은 돌발적인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뒤 스펙이 자살했다는 풍문이 나돌았고, 이로써 스펙의 주장은 리빙스턴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샀다.
 새뮤얼 베이커의 등장
 사실상 스펙과 그랜트의 탐험은 거대한 아프리카 중부 내륙에 관한 지리학적 수수께끼 극히 단편적인 해답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이들 두 탐험가는 귀환 도중에 영국인 새뮤얼 베이커와 그의 부인 플로렌스를 곤도코로에서 우연히 만났다.
 네 명의 영국인이 이집트 내륙 오지의 항구에서 극적으로 상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역시 인도 주둔군 장교였던 베이커는, 한때 스펙과 그랜트를 실종된 것으로 간주한 왕립지리학회로부터 요청받은 존 페테링 하르툼 주재 영국 총독의 주선으로 1863년에 현지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소형 증기선을 타고 곤도코로에 도착한 베이커 일행은 현지에서 빅토리아호 북서쪽에 제2의 호수인 루타 엔지게호가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희망에 부풀어 길을 떠났으나, 1년 만에 겨우 250km를 전진했을 뿐이었다. 전진속도를 빨리 하기 위해 노예무역 대상과 합류하기도 했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질 게 없었다. 키니네가 떨어져 열병에 시달려야 했고 식량도 부족했으며, 게다가 짐을 운반하는 데 필요한 동물들마저 죽어 갔다.
 또 다른 거대한 호수가 발견되어 지리학에 혼돈이 가중되다
 갖은 어려움 끝에 부뇨로 왕국의 수도 음룰리에 도착한 베이커 일행은 그들을 스펙의 형제로 인정한 국왕 캄라시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 억류되기도 했다. 캄라시왕이 그들이 모종의 정치적 음모를 계획하고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또한 왕은 통치권 내부에 분규가 일어날 경우 이들 이방인이 소유한 무기가 자신을 전복시키는 도구로 사용될 것을 두려워했다. 왕에게 비친 그들의 여행목적이 불분명했던 점은 양측 간의 문화적 괴리에도 원인이 있다. 20세기 초에 채취된 구전 설화는 캄라시왕의 의혹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물줄기만을 보기 위해 위험과 피로를 무릎쓰고 조국과 동포를 떠나온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므로 그는 이방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양측의 오해는 백인의 인종적 우월을 고집하던 베이커가 흑인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던 상황을 참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베이커와 캄라시왕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침내 서로 타협이 이루어졌고 베이커 일행은 소규모 대상을 이끌고 부뇨로 왕국을 떠나 서쪽으로 출발했다. 1864년 3월 14일, 드디어 백나일에 연결된 유명한 루타 엔지게호에 도착한 그들은 이 호수를 빅토리아 여왕의 작고한 부군의 이름을 따 앨버트호로 개칭했다.
 베이커는 이 호수를 백나일의 제2의 수원으로 추정했을 뿐, 그 검증을 위해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그것은 호수를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그것은 호수를 이웃하여 정확한 물의 배출지점을 확인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앨버트호의 발견은 도대체 나일강의 수원이 몇 개나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만 추가로 제기했을 뿐이었다.
 베이커 일행의 영국 귀환길 또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많은 짐꾼들이 탈주하여 곤경에 빠졌던 일행은 캄라시왕의 도움으로 무사히 하르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 카이로를 거쳐 수개월 만에 영국에 돌아온 그는 1866년에 (앨버트 난자)라는 탐험기를 출간했다. 이 책은 저자의 세밀한 관찰력과 훌륭한 문장력으로 모든 사물과 풍경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논조가 평소 저자의 신념처럼 흑인에 대한 무조건적 비방으로 일관되고 있어 많은 비판을 받는다. 중부 아프리카의 토속문화에 대해 놀랄만큼 적대적이었던 그는 자신의 그릇된 고정관념을 통해 호수 주변 지역의 주민을 원시적 야만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탐험가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은 베이커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작위를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으나, 그와 함께 탐험에 참여했던 플로렌스는 결혼을 해 정식 부인이 되었음에도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여왕의 윤리관으로는 혼전의 여성이 남자를 좇아 탐험에 나선다는 것이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비의 종말
 모든 탐험가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어려움은 각 지역의 복잡한 지형에 대한 전체적 윤곽을 단시일 내에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큰 호수의 경우, 이에 연결되어 있는 주변 하천들의 상호 연관구조를 알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며, 단순히 유입되는 하천과 배출되는 하천을 구별하는 것도 상당한 기간에 걸쳐 호수를 완전히 일주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스펙의 주장이 점차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도 몇 가지 의혹은 항상 존재했다. 백나일의 원천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빅토리아호의 상류를 좀더 세밀히 탐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과연 앨버트호가 제2의 수원일 것인가 하는 점도 의심스러웠다.
 1870년대에 접어들어 리빙스턴과 스탠리가 순차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모험에 
나서게 되었는데, 리빙스턴은 너무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탕가니카호 주변에서 큰 성과 없이 일생을 마친 반면, 스탠리는 1875년 5월에 리폰 폭포를 답사하여 스펙의 주장을 재확인하고 빅토리아호 주변 지역을 자세히 정리해 최초의 지도를 작성해 냈다. 이미 몇 해전에 현지체류를 통해 무테사왕과 친숙해진 후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더욱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스탠리는 무테사왕의 도움으로 에드워드호와 조지호를 발견하고 나아가 유명한 원산, 다시 말해 해발 5, 000m가 넘는 루웬조리 산지 정상의 만년설까지 확인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의 뛰어난 통찰력을 실증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일강의 근원은 20세기까지 계속된 현지탐사가 증명했던 것처럼 다수의 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것은 탕가니카호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르완다와 부룬디에서도 여러 개의 수원이 확인되고 있다. 나일강은 청나일과 여러 개의 호수를 끼고 있는 백나일의 지류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무엇보다도 이 엄청난 지리적 복잡성에 도전장을 던진 인간의 용기와 지혜는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를 탄생시킨 이 신성한 강의 근원을 알아내는 데 인간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에게 자연의 신비 앞에 무력하기만 한 인간의 본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방대하고 비옥한 아프리카 대륙이 그 신비의 베일을 벗고 유럽인의 경제생활에 유용한 상업시장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의 기록이 이 미지의 대륙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촉진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에서의 연구)
 제3장 리빙스턴의 남아프리카 탐험
 1840년에 런던 선교사협회는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던 남아프리카에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의사 겸 선교사 자격으로 파견했다.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가문에서 태어난 리빙스턴은 열 
살 때부터 직공으로 일해야 했다. 꽉 짜인 힘든 일과에도 독서와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는 글래스고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약학과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물일곱 나이로 아프리카에 첫발을 디딘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신성한 의무에 헌신하리라 결심했고 로버트 모팻 목사가 이미 교회를 세워 놓은 남아프리카의 쿠루만에 선교사업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모팻의 딸과 결혼한 리빙스턴은 수년 동안 보어인의 탄압에 저항하다가 결국 그들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쿠루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잠재해 있던 탐험가 기질을 발휘할 순간이었다. 독립심이 강한 그는 미개척지에서 선교활동을 하겠다고 자청했고, 가족을 동반해 보어인이 대이주 때 사용했던 수레를 타고 칼라하리 사막에 들어섰다. 1849년 7월, 사막을 통과한 그는 늪지대에 이르렀고, 8월 1일,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옹가미호를 발견하여 영국 왕립지리학회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성공에 힘입은 아마추어 탐험가 리빙스턴은 전문 탐험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홀로 탐험길에 오른 리빙스턴
 1851년부터 리빙스턴은 탐험에 나섰는데, 그중 온 가족을 동반했던 옹가미호 탐사는 마치 가족소풍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리빙스턴은 잠베지강 중류 콜롤로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족장인 세비투안의 지극한 배려로 주변지역을 탐사하고 1851년 6월에는 셰셰케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의 곁에는 여전히 가족이 함께 있었고 이미 아프리카에서 세 자녀를 출산한 부인 메어리는 또다시 임신중이었다. 그러나 여행중에 젖먹이를 하나 잃었고 게다가 한 아이는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리빙스턴은 가족의 안녕과 탐험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가족과 이별해야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가족을 케이프타운에 데리고가 영국행 배에 태워 보냈다. 떠나가는 가족들이 이별을 원했을리야 없지만,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정 생활까지 포기함으로써 아프리카에 대한 그의 강한 집념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리빙스턴은 장거리탐험에 나섰다. 그는 보어인 거주지역을 우회해 잠베지강에서 서부 해안까지 자그마치 1, 800km나 되는 통로를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다.
 최초의 대륙횡단, 잠베지강에서 서부 해안까지
 탐험은 콜롤로 왕국의 수도 리얀티(오늘날의 남미냐)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왕위에 올라 자국의 상업권을 확장하고자 했던 야심적인 세켈레투왕의 도움으로 리빙스턴은 소규모 탐험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그는 평소 신념대로 25명이라는 단촐한 인원으로 탐험대를 구성했지만, 식량과 소총, 육분의, 온도계, 나침반, 망원경 등 탐험기재는 물론, 설교할 때 성경 장면을 담은 그림을 투사하는 데 사용할 매직 랜턴(Magic lantern)까지 챙기는 등 모든 장비를 세심히 준비했다.
 1853년 리얀티를 출발한 탐험대는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갔다.
 탐험 초기에 배편을 이용하는 편안한 경로를 택했던 것은 리빙스턴이 말라리아를 앓았기 때문이다. 병중에도 그는 시간이 날 때바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탐험일기에 기록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이 기록은 훗날 여행기를 저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아프리카 식물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현지 약용식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집, 정리하고 자신에게 직접 실험해 본 후 결과를 기록했다. 더 이상 항해를 계속할 수 없자, 리빙스턴은 소를 탄 채로 탐험을 계속했다. 그러나 숨막히는 더위와 울창한 열대림으로 전진속도가 매우 더뎠다. 게다가 경유지 원주민과 마찰이 자주 일어나 늘 긴장이 감돌았고 많은 통행세를 물어야만 했다.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 도착
 1854년 5월 31일, 드디어 탐험대는 대서양에 도착했다. 피로에 지친 리빙스턴은 대원들과 함께 당시 상파울로 데 로안다로 알려진 포르투갈 식민지 루안다에서 3개월간 머물면서 원기를 회복했다. 이 기간을 이용해 그는 영국 왕립지리학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했고, 곧 같은 경로를 통해 잠베지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리빙스턴은 유럽에 대한 아프리카의 문호개방을 탐험의 첫째 목표로 내세우고 있었지만 그 역시 세속적 명예에 초연할 수는 없었다. 루안다를 출발할 때 독일계 포르투갈인 자연과학자가 탐험에 동참할 것을 제의했으나, 다른 유럽인을 탐험에 동반하면 자신에게 돌아올 영예가 반감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그의 명예욕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4, 000km를 행군하여 리얀티에 돌아왔다. 그러나 리빙스턴이 개척한 통로는 쓸모가 없었다. 이 통로를 따라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출하기에는 너무 멀었을 뿐 아니라 험난했기 때문이다.
 동아프리카 탐험
 남서부 지역에 대한 원정으로 아프리카에 관한 견문을 넓혔고 또 그 지방의 지도까지 작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륙의 심장부에까지 유럽의 상업과 기독교가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꿈꾸던 그에게, 이 정도의 빈약한 성과는 궁색한 자기위안에 불과했다.
 1855년 9월, 그는 다시 동족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 탐험에도 탐험대를 조직하는 데 세켈레투왕에게 도움을 받았다. 특히 왕은 그들이 통행세로 지불할 만큼 충분한 상아를 제공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잠베지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던 리빙스턴은 1855년 11월 17일, 10km전방에서 산불의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큰 폭포였다. 원주민들이 "포효하는 연기"라고 부르는 이 폭포를 그는 빅토리아 폭포로 명명하고 그 멋진 경치에 감격하여 근처 나무 기둥에 자기의 이름을 새기는 천진난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빅토리아 폭포를 출발한 뒤에는 전쟁과 노예상인들의 약탈이 들끓는 황폐한 지역을 지나게 되었다. 리빙스턴은 많은 통행료를 물어야 했고 적대감도 감수해야 했는데, 이것은 백인들이 벌인 노예무역에 따른 결과였다. 어떤 마을은 미리 우회해서 지날 수밖에 없었다.
 모잠비크 테테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해안거점에 도착했을 때 리빙스턴은 완전히 쇠진하여 들것의 신세를 져야 했다. 1856년 5월에야 비로소 인도양 연안의 켈리마네에 도착했다. 드디어 유럽인이 최초로 완전한 아프리카 횡단을 이룩한 셈이었다. 불행하게 동족을 따라 개척한 이번 통로는 서쪽으로 개척한 이전 통로보다 더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탐사는 남아프리카에 관련한 지식을 괄목할 만하게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금의환향
 여러 차례 탐험을 통해 유명세를 얻은 리빙스턴은 1856년 영국으로 귀환했을 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되었을 뿐 아니라 과학단체, 대학, 정치적인 사교모임 등에 초청되어 강연을 했고 갖가지 상장과 메달을 수여받았다.
 바쁜 가운데에도 그는 영국인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하고, 아프리카 문명을 전파하는 데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탐험기를 집필했다.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에서의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책은 나오자마자 7, 000부가 넘게 팔려 나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직접 탐험에 나서기는 주저하지만 타인의 모험담을 즐기는 영국인, 검은 대륙에 대한 지식의 부재로 고민하던 지리학자, 구원을 받아야 할 흑인 이교도들에게 관심을 쏟는 선교사, 새로운 시장 확보를 기대하는 무역업자, 그리고 탐험기에 묘사된 참담한 노예무역의 현실에 격분하는 휴머니스트 등, 거의 모든 계층의 독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리빙스턴과 노예무역
 탐험가들은 노예무역이 성행하고 있는 지역을 여행했다. 아프리카 서부 지역에서는 영국인이 공식적으로 노예무역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이 불법적인 '무역'이 계속 번창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지역을 탐험하면서 그 참상을 직접 목격했던 리빙스턴은, 당시 여론이 주장하던 일반적인 견해와 같이, 유럽이 아프리카로 진출하는 것만이 이 수치스런 거래를 근절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달리 매우 복잡했다. 당시 일부 흑인 부족들과 아랍 상인들은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서 노예무역을 주도하고 있었다. 백인이 한몫 거두는 경우도 있었는데, 특히 포르투갈인은 앙골라와 남동부 항구도시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어쨌든 리빙스턴의 절실한 현장묘사는 유럽인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걸음이 늦춰질 때마다 매를 맞고, 대열을 이탈하면 즉시 사살되는, 쇠사슬에 묶인 흑인 포로들의 죽음의 행렬은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나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탐험가들이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중부 아프리카를 탐험하기 위해서 노예상이 다니는 행로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리빙스턴은 결국 아프리카로 재출발하기로 결심했다.
 영국 정부와 여론에 힘입은 제2의 도전
 리빙스턴이 세속적인 런던 생활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던 그의 유명세는 그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외무성이 그에게 영사 직위를 부여하고 잠베지강 유역에 '문명전파'를 위한 전진기지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런던 선교사협회는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순수한 선교사업에만 전념할 것을 요구했는데, 당시 리빙스턴은 이 의무사항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협회에서 제명된 상태였으므로 외무성의 제안은 리빙스턴에게 지루한 도시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여행은 리빙스턴의 단독대는 아니었다. 1858년 함께 아프리카행 항해를 시작한 여섯 명의 동료 중에는 친동생과 화가 토머스 베인스도 끼여 있었다. 일곱 명의 영국인과 60여명의 인부로 구성된 이번 탐험은 전에 리빙스턴이 이끌었던 탐험과는 달리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조직 또한 꽉 짜여 있었다. 이 탐험을 통해 리빙스턴 일행은 그동안 포르투갈인 사이에 말로만 전해 오던 3만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니아사(오늘날의 말라위)호를 확인하고, 그때까지도 유럽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시리강과 로부마강의 항로를 개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면에서 이번 탐사는 실패작으로 평가받았다. 잠베지강을 항해가 불가능한 지역으로 판정했고 탐사지역에 선교사업을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리빙스턴은, 단독탐험에서는 놀라운 능률을 발휘할지 모르나 원정팀을 지휘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863년에 영국으로 소환된 리빙스턴은 잠시 그곳에 머물면서, 출간 전부터 화제를 뿌린 (잠베지강과 그 지류)라는 두 번째 탐험기를 출판했다. 그후 리빙스턴은, 당시 지대한 관심
사였던 나일강의 수원을 둘러싼 스펙과 버턴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욕심으로, 세 번째 아프리카행을 준비했다.
 탕가니카호 지역에서의 제3차 원정
 외무성으로부터 재정지원을 얻고 왕립지리학회의 찬조금을 받아 리빙스턴은 재정적 여유를 가지고 제3차 탐험에 나섰다. 1866년 1월, 로부마강 하구에 상륙한 그는 북서쪽의 니아사호를 거쳐 탕가니카호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전진하여 음웨루호와 이 호수에서 흘러 나오는 루알라바강을 발견했다. 이 지역을 나일강의 발상지로 추정한 그는 남쪽의 방외울루호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무렵 리빙스턴의 건강상태는 크게 악화되었는데, 약품상자마저 분실되었다. 따라서 그는 지리학적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탐험을 계속할 수가 없었고, 탕가니카 동쪽 연안 우지지로 철수했다. 그곳에서 기력을 회복한 리빙스턴은 루알라바강 유역을 탐사하고 그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고자 했으나, 냥궤(오늘날 자이르)지역 아랍 상인이 훼방을 놓아 다시 우지지로 되돌아와야 했다.
 "리빙스턴 박사, 맞습니까?"
 1871년까지 유럽인은 탐험가에게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일찍이 해변가로 되돌아온 리빙스턴 탐험대의 인부들은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대다수 유럽인은 그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노련한 안내인 수시, 추마, 제이콥 웨인라잇 등과 수년째 탐험을 계속하면서 항상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리빙스턴에게 '실종'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가 정기적으로 우지지와 해안도기를 왕래하는 아랍 상인에게 여러모로 의존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 있었다. 그의 확고한 노예무역 폐지론은 이들 노예상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게 마련이었고, 리빙스턴과 유럽 간의 접촉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이들이 결국 그의 우편물 송달을 중지했던 것이다.
 1871년 10월 30일, 우지지에서 하나의 감동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수시가 백인이 마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얼마 후 리빙스턴 앞에 나타난 사람은 몇 개월 전부터 실종된 그를 찾아다니던 헨리 모턴 스탠리였다.
 리빙스턴이 살아 있을 것을 확신한 (뉴욕 헤럴드)지의 고든 베넷 사장은 미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던 영국 웨일스 태생 스탠리를 아프리카에 파견했다. 일이 성공될 경우 신문사가 누릴 파격적인 선전효과를 기대한 일종의 상술에 불과한 처사였다. 그래도 엄청난 투자가 요구되는 만큼 집요한 성격으로 이 어려운 일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이에 스탠리가 선발되었던 것이다.
 베넷의 계산은 적중했다. 탕가니카 호숫가의 한 원주민 촌락에서 이제는 전설적인 장면이 되어 극적인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감동과 기쁨을 감추지 못한 스탠리가 리빙스턴 앞에서, 역사적인 순간과 대조를 이루는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더더욱 유명해진 한마디를 건넸다. "리빙스턴 박사, 맞습니까?"
 "그렇소.”
 선교사의 대답 또한 평범했다. 스탠리는 덤덤히 동원했고 3, 500km가 넘는 거리를 411일 만에 주파했다. 여기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스탠리가 다른 탐험가들과 달리 엄청난 재정지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베넷이 그에게 "1, 000파운드를 가지고 출발하지만 일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라도 같은 금액을 반복해서 지원하겠다. "고 한 약속과, 리빙스턴이 두 사람의 역사적인 해후 직전에 스탠리 일행을 보고, "아주 사치스런 상류층 여행자임에 틀림없다. "고 평가했던 사실로 스탠리 탐험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리빙스턴의 마지막 행로
 성격차에도 곧 친숙해진 두 사람은 노젓기에 동원된 인부 16명과 함께 한달 간에 걸친 탕가니카호 일주 항해에 나섰다. 버턴이 주장했던 것처럼 주지지강이 호수로 흘러드는 지입천에 불과함을 확인한 그들은 이 강이 나일강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1872년 3월, 카제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 헤어져야 했다. 스탠리는 귀환할 것을 재촉했지만 리빙스턴은 단독으로 방외울루호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마침 우기였기 때문에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고 방향감각을 잃고 길을 헤매기 일쑤였으며, 심한 빈혈증세로 시달렸다. 마지막까지도 그는, 콩고강의 상류에 불과한 루알라바강이 나일강과 하나의 동일한 수계에 속하는 것으로 확신했고, 결국 자신의 판단이 오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873년 5월 1일 아침 울랄라의 작은 마을(지금의 잠비아), 그의 흑인 동료들이 침대 맡에 무릎을 끓은 채 운명한 그를 발견했다. 그들은 시신을 잔지바르까지 운구했다. 이로써 리빙스턴은 마지막 대륙횡단을 달성한 셈이다. 그를 따르던 이들 아프리카인의 열정으로, 1874년 4월 영국 정부는 외로운 영웅의 국장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히 치렀다.
 끊이지 않는 명성
 항상 모든 지역에서 리빙스턴이 그 땅을 밟은 최초의 유럽인은 아니었다. 이미 16세기 초에 많은 포르투갈인이 잠베지강 유럽에 진출한 적이 있었는데도 이러한 사실이 일반대중은 물론 리빙스턴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들의 기록이 공개되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유명하게 만든 것일까 하는 의문을 한번쯤은 제기해 볼 만하다.
 우선, 그에 관한 연구들이 역사적 분석보다는 리빙스턴을 이상화한 전기적인 서술로 일관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리빙스턴의 탐험방식은 독특하면서도 동시에 어느 탐험가에게서나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매우 평범한 것이기도 했다. 흔히 그에 관한 말하기를 늘 아프리카인의 안녕을 위해 노력했고 무력 사용을 혐오했으며 항상 그의 동료, 인부, 하인에게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고 물론 그가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사냥을 할 때조차 무기의 사용을 거부했다는 식으로 그의 온화한 성격이 자주 과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다른 탐험가와 달리 흑인을 진심으로 존중했지만, 그의 시각 역시 백인 우월의식에 젖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선천적이기보다는 교육을 받았고 기독교를 믿는다는 면에 우월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점이 다르다 할 수 있다.
 리빙스턴이 명성을 누리는 또 다른 원인은 그의 인물됨됨이가 영국인, 나아가 유럽인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결국 '평범한 영웅'이었던 리빙스턴은 그가 구원하기를 바랐던 아프리카인과 그의 사명을 계속 수행해 줄 것을 기대했던 유럽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셈이다.
 그의 소원대로, 아프리카에서 죽음을 맞았을 때 리빙스턴은 이미 30년 남짓 아프리카 대륙을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건강을 해쳤고 가족을 잃었으며, 천직인 선교사업을 포기하는 등 아프리카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다. 그 결과가 좋았든 나빴든 간에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인의 지식을 크게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리빙스턴은 루알라바강을 항해해 내려간다는 것이 어리석은 모험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렇다. 내가 다시 모험을 한다면 최소한 200명의 소총수를 동반할 것이다. 사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백인이 읽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맡긴 채 나는 모험을 계속할 것이며 이 글을 계속 써 나갈 것이다. "스탠리(탐험일기)
 
 제4장 밀림 속으로 1870년대까지 지리학적 탐험은 대호수 지역과 남아프리카로 국한되었고, 따라서 적도하의 방대한 열대우림 지역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콩고 분지로 지칭되는 이 지역은 지형적인 장애와 정치적인 이유로 다른 지역에 비해 접근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에 이 지역은 유럽 열강 사이에서 벌어진 식민지 쟁탈전의 주무대로 등장하게 되었다.
 캐머런의 검은 대륙 횡단
 스탠리가 리빙스턴과 극적 상봉을 이루었을 즈음,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도 나름대로 리빙스턴을 찾기 위한 탐험을 계획했는데, 이 모험을 자청하고 나선 인물이 영국 해군의 버니 러벳 캐머런 대위였다. 이미 잔지바르섬 주변의 노예무역 단속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캐머런은 유럽이 아프리카에 진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유력한 후견인의 추천을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캐머런의 단호함에 감복한 왕립지리학회는 그에게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1873년 1월 캐머런은 잔지바르에 도착하여, 수주일에 걸쳐 200명이나 되는 인부를 모집했으나, 원정 초기에 많은 인원이 탈주해 버리는 뜻밖의 고충을 겪었다. 인부를 충원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던 까닭에 출발 전에 임금을 지불하는 실수를 범했던 탓이다.
 W. E. 딜런과 세실 머피라는 두 영국인을 참여시켜 팀을 보완한 캐머런은 1873년 3월 23일 바가모요를 출발했다. 그러나 며칠이 태 지나가도 전에 물자조달의 어려움에 부딪히고 말았다. 터무니없이 높은 통행세와 식품가격을 지불할 화폐로 통용되던 옷감과 패류가 바닥날 지경이었다. 더욱이 영국인은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는데, 남아프리카 나탈에서 탐험대에 합류한 리빙스턴의 조카 로버트 모팻도 말라리아로 5월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 같은 곤경을 이겨내며 탐험대는 스펙과 머턴이 개척했던 길을 따라 강행군했다.
 리빙스턴의 사망에 따른 혼란
 캐머런은 카제에서 리빙스턴의 유해를 운구하는 흑인들을 만났다. 이제 더 이상 원정을 계속할 필요가 없었다. 탐험대의 향방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머피와 딜런은 귀국할 의사를 밝혔고, 캐머런은 혼자 탐험을 계속하겠다고 확고히 선언했다.
 1874년 2월 18일, 우지지에 도착한 캐머런은 한 아랍 상인으로부터 리빙스턴이 남긴 개인서류를 전해 받았다. 이로써 그는 앞으로 탐험에 실패하더라도 귀중한 자료를 영국에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다소 위안을 얻었다. 캐머린의 계획은 탕가니카호 서부 지역을 탐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지역은 위험하므로 시일이 다소 걸리더라도 대규모 탐험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변의 충고에 따라, 그는 우선 접근이 수월한 호수 남부 지역 탐사에 나섰다. 캐머런은 2개월 동안 고생한 끝에 각 지역의 해발고도까지 표시한 50만분의 1축척 지도를 완성했으며, 무엇보다도 탕가니카호가 우기에 많은 물을 콩고강 수계에 속하는 루쿠가강으로 배출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콩고 분지 이남으로 행로를 변경하다
 캐머런은 당초의 목적대로 루알라바강을 따라 내려가기 위해 다시 서쪽으로 출발했다. 1874년 8월 냥궤에 도착한 캐머런은, 그 지방 유력자인 아랍 상인 티브에게서 쓸데없는 모험을 포기히라는 충고를 들었다. 충고를 받아들인 그는 방대한 콩고 분지를 훗날 영국 관할하에 둘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제 모든 영광은 스탠리에게 넘어가게 된다. 어쨌든 티푸 티브의 사려 깊은 조언으로 캐머런은 냥궤 근처를 흐르는 루알라바강의 해발고도가 곤도코로의 나일강보다 낮고, 그 수량이 다섯 배나 되므로 그 강들은 결코 동일한 강일 수 없음을 증명하는 조촐한 성과는 거둘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키푸 키브의 도움을 얻은 캐머런은 서쪽으로 대륙을 횡단하기 위해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출발한 셈이었고, 도중에 무분별한 계획만큼이나 많은 시련을 겪었다. 대원들은 식량부족으로 기아선상을 헤매야 했고 캐머런도 괴혈병으로 고생했으며 원주민과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던 탓으로 불가피하게 흑인노예상과 행로를 같이하는 굴욕까지 감수해야 했다. 1875년 11월 7일, 드디어 앙골라 해안 벵겔라에 도착해 대륙횡단에 성공한 그는 적도 아프리카를 가로지른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그가 탈진한 인부들을 남겨 놓고 몇몇 측근과 합께 해안지역의 포르쿠갈인에게 구조를 청하러 가야 했다는 사실은 이 여행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는가를 단적으로 시사해 주는 일화이다.
 1876년 4월, 리버풀에 귀항한 캐머런은 과학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또한 그는 왕립지리학회로부터 상을 받았고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으며 빅토리아 여왕에게서는 작위를 수여 받는 영광을 누렸다.
 이번 탐험의 총경비는 1만 2, 000파운드에 달했는데 이를 충당하기 위해 왕립지리학회는 개인 기부금까지 끌어들여야 했다. 친구의 권유로 출간한 (아프리카를 횡단하여)를 통해, 캐머런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표현했고 직접 잔악상을 목격했던 노예무역을 비판했다.
 그의 업적이 과소평가할 만한 것이 아니며, 유럽 열강이 그가 발견한 지역에 즉각적인 관심을 표명했다는 사실로 판단해 볼 때, 캐머런이 다른 탐험가들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후대 사람들이 그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캐머런 자신이 과묵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스탠리의 화려한 영광 때분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탠리의 재등장과 콩고강 정복
 리빙스턴을 찾아 유명해진 스탠리가 루알라바강을 항해해 내려가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언론계의 거물인 (뉴욕 헤럴드)지 사장과 (데일리 텔레그래프)지 사장의 지원으로 그가 조직한 대규모 탐험대는 자그마치 360명의 인부로 구성되었고 13m에 달하는 탐험선 레이디 앨리스호를 분해하여 수송할 계획까지 갖추고 있었다.
 1874년 잔지바르를 출발한 탐험대가 대호수 지역에서 잠시 머문 후 탕가니카호 북서쪽으로 나아가 1876년 10월 냥궤에 도착했을 때는 스탠리를 따라 나섰던 세 명의 유럽인 중 프랭크 포콕만이 살아 남았다. 냥궤의 전진기지 아래쪽으로는 울창한 밀림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자신의 도전이 위기에 그는 점괘를 무시한 채 탐험을 계속하리라 다짐했다.
 티푸 티브와 계약을 체결한 스탠리는, 5, 000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식량과 무기를 보충받고 700명의 인부를 2개월 동안 고용할 권리 또한 보장받았다.
 1876년 11월 5일, 탐험대는 배를 타고 북쪽으로 강을 따라 항해했다. 분위기는 음산했고 수풀은 무서우리만큼 울창한데다가 강변의 식인종으로 일컬어지는 원주민들이 계속 공격해 왔다. 어느곳에서나 접대는 차갑게 마련이었는데, 이것은 원주민들이 탐험가를 위험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탐험대는 총을 함부로 쏘아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고, 어쩌다 매복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이번 탐험에서 총 32차에 걸쳐 전투가 치러졌다.
 스탠리 폭포와 스탠리풀
 냥궤를 출발한 후 수백 킬로미터를 지니도록 강은 계속 북쪽으로 흘렀다. 이에 모두 과연 이 강이 콩고강일까 하는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던 중 1877년 1월, 탐험대가 적도에 이르렀을 때 강이 갑자기 그 흐름을 서쪽으로 바꾸면서 스탠리의 예상이 적중했다. 눈앞에 거대한 폭포가 펼쳐졌고 스탠리는 그 폭포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2월에 접어든 어느 날, 한 족장으로부터 그 강이 바로 콩고강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의혹이 존재할 여지가 남지 않았다.
 그러나 겨우 그 긴 강의 반 정도를 주파했을 뿐, 계속해서 나타나 길을 막는 폭포의 급류에 휘말려 많은 대원이 익사했다. 3월에 접어들어 갑자기 강폭이 넓어져 호수에 도달한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 스탠리는 즉석에서 이를 '스탠리풀(pool)'이라 명명했다. 그 후 5개월 간 항해를 계속한 뒤 탐험대는 간신히 해안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 여행이 끝날 무렵 탐험대의 상황은 끔찍했다. 전체 인원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고 스탠리도 무기력한 상태에서 탐험일기를 가까스로 기록할 정도였다. 당시 탐험일기의 내용은 쌓인 피로를 불평하거나 자신을 엄습해 오는 나태를 비관한 것이었다. 게다가 대서양 연안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탐험대가 통행세 명목으로 제공하는 물품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전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인부들이 마을에서 음식을 훔치는 일까지 벌어졌고, 결국 원주민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877년 8월 4일, 한계상황에 직면했다. 스탠리는 보마에 척후조를 파견해 구원을 요청했다. 탐험대는 구조되었지만 대원들은 지쳐 죽어 가고 있었다. 생존자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이에 스탠리는 대원을 배에 실어 잔지바르로 귀환시켰다.
 스탠리도 늙고 여위었으며 우울해 보였다.
 스탠리의 이 '광기에 가까운 모험'은 열악한 상황에서 자그마치 1, 000일 간이나 계속되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그의 탐험기 (검은 대륙 횡단)에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탐험이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 이루어진 탐험 중에서 가장 처참했다는 사실은 역사에 기록할 만하다. 영국에 돌아온 스탠리는 크롬웰의 후송으로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여자와 결혼했다. 그의 결혼은 상류층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상류층은 '모험꾼'이, 그것도 사생아가 그들의 대열에 끼게 된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스탠리의 마지막 아프리카 원정
 스탠리가 활동을 재개한 것은 벨기에의 레오폴트 2세가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1876년에 설립한 국제아프리카협회와 인연을 맺으면서부터였다. 그리고 레오폴트 2세가 콩고강 좌안에 개인적인 왕국을 마련할 수 있던 것은 바로 스탠리 덕분이었다.
 콩고 분지 개발 사업을 계획하던 스탠리는 콩고강 탐험에 장애가 되던 폭포들을 우회하는 통로 건설을 추진했다. 그는 스탠리풀에 레오폴트빌을 개발했는데, 도시 이름에서 그의 개인숭배사상이 엿보인다. 내친김에 한걸음 더 나아가 레오폴트 2세의 모호를 받아들이도록 흑인 족장을 설득한 스탠리는 콩고 분지를 벨기에 보호령으로 만들 수 있었다.
 1879년과 1884년 사이에 콩고에서 추진한 대규모 공사는 그에게 '돌을 부수는 사람(Boula Matan')이라는 별명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아프리카 내륙의 부존자원이 무궁무진했던 만큼, 그 개발사업을 추진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금전적 이득이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1876년에서 1877년에 걸친 콩고강 탐험에서 스탠리가 챙긴 상아가 당시 시가로 5만 달러를 상회했다는 사실은 그가 콩고 분지 개발을 통해 개인적인 부를 엄청나게 축적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스탠리의 마지막 아프리카 탐험은 1887년과 1889년 사이에 대호수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마디스트 회교도 반란으로 앨버트호 근처에 대호수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마디스트 회교도 반란으로 앨버트호 근처에 격리된 이집트 정부 소속의 독일인 탐험가 메메트 에민 파샤의 구조에 나선 스탠리는 800명이 넘는 인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탐험대를 거느리고 잔지바르를 출발했다. 수개월 동안 허기진 인부들을 강행군시켜 탐험가를 찾아냈으나 그는 귀환을 거부했고, 이에 스탠리는 그에게 따라 나설 것을 설득해야 했다. 마지막 탐험을 기록한 (아프리카, 암흑의 대륙에서)를 펴낸 후, 스탠리는 영국 남부 서리에서 부인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
 프랑스의 식민사업 참여
 1880년경 콩고 유역 식민지 건설 사업으로 분주했던 스탠리는 이탈리아 귀족 태생 피에르 사보르냥 브라자를 선봉으로 한 프랑스의 야심적인 진출과 맞부딪쳤다. 1874년 프랑스에 귀화하기 전부터 프랑스 해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던 브라자는 친구인 중심부를 흐르는 오고웨강에 대한 탐사임무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1842년부터 프랑스인은 오고웨강 하류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강의 상류지역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 당시 식인종으로 간주되던 판족과 함께 거주하며 고릴라 사냥에 얽힌 기록을 남겨 유명해진, 다소 괴팍한 성품의 미국계 프랑스인 폴 뒤 샤이가 1850년대 초에 중부 아프리카를 여행했을 뿐이었다.
 1875년에 시작된 브라자의 탐험은 2년 간 계속되었다.
 그의 탐험대는 20명의 흑인 인부로 구성된 소규모 탐험대였지만 이를 통솔하는 세 명의 프랑스인이 의사, 군인, 자연과학자라는 상호보완적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탐험은 원활히 진행되었다. 오고웨강을 항해해 거슬러 올라간 그들은 이 강이 기대했던 바와 달리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통로로는 부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들은 더 이상 항해가 불가능한 지점에서 콩고강의 한 지류인 알리마강으로 방향을 바꿨으나 도중에 원주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들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고 철수를 택했는데, 이 같은 브라자의 인도주의는 콩고강 진출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고, 보든 영광은 스탠리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1880년 스탠리의 콩고강 탐험 소식을 접한 브라자는 프랑스 정부에 그 지역에 대한 정치적 침투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재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사실상 스탠리와 영국에 대해서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던 그는 자신의 귀화를 허락해 준 프랑스가 노예무역 금지투쟁을 비롯한 아프리카 개화를 위한 여러 가지 노력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그는 소규모 탐험대를 이끌고 오고웨강을 거쳐 스탠리풀 근처 콩고강 북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일행은 바테케족의 추장 마코코와 친선조약을 체결하고 그 지역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만들 수 있었다. 또한 마코코는 브라자에게 자국 영토의 일부를 할양하고 그에 대한 전적인 소유권까지 양도해 오늘날의 브라자빌이 설립되는 근거를 제공했다. 이 같은 호의에 대한 프랑스의 답례는 프랑스의 스탠히와 짧은 회합 후 브라자는 프랑스로 돌아와 자신이 체결한 조약을 비준시켰다. 1883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자신이 체결한 조약을 비준시켰다. 1883년,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오고웨강 주변 지형과 인종분포를 탐사하고 각자에 거점도시를 건설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아 다시 현지로 떠났다. 이제 프랑스도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1885년, 쥘 페리 식민성 장관이 베트남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사퇴한 뒤, 브라지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브라자가 내세운 인도주의적 식민정책은 프랑스에게 많은 호흥을 받아, 그는 프랑스령 콩고 총독으로 임명되어 1887년 현지로 파견되었다.
 여성 탐험가, 메어리 킹슬리
 남성만의 영역으로 간주되던 아프리카 탐험 역사에서 예외저인 인물로 메어리 헨리에타 킹슬리를 들 수 있다. 킹슬리는 1893년에 적도 아프리카로 출발했는데, 여행목적은 대영박물관을 위해 어류표본을 채집하고 아프리카의 종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1893년 7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제1차 탐험에서 킹슬리는 세네갈에서 앙골라에 이르는 해안지역을 두루 항해했다. 그 지역에서 그녀가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 곳은 가봉이 위치한 오고웨강 일대였고, 결국 그녀는 1894년 12월에서 1895년 11월까지의 제2차 원정 기간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독립심이 강한 그녀는 몇 명 되지 않는 인부들과 함께 오고웨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가 유고를 통해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렘브웨를 향해 행군을 계속했다. 외부의 재정지원 없이 본인의 작은 예산으로 여행을 꾸려 나가야 했던 킹슬리는 피륙, 럽주, 철제 낚시바늘 등을 상아나 박물관용 어류표본과 물물교환하는 지혜를 짜냈다. 여행이 끝나 갈무렵, 그녀는 새 등산로를 이용해 카메룬산 정상에 오른 후, 돌 틈에 자신이 왔다갔다고 기록한 카드를 남기는 재치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유명한 일화는 킹슬리의 명랑한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유머와 겸손한 자세를 잘 보여 준다. 킹슬리의 탐험기간은 짧았으나 탐험방식은 매우 독특했다. 그녀는 가벼운 장비로 여행했고 짐꾼들에게 자신을 실어 나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으며, 늪지대를 직접 헤엄쳐 건너는가 하면, 카누를 한 손으로 젓는 기술을 익혔고, 노천야숙을 마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조달되는 음식으로 만족했다. 차 마시는 일이 그녀의 유일한 사치였다.
 인종학의 선구자
 아마추어 인종학자로서 킹슬리는 가봉의 판족 마을에 머무르면서 토속문화에 대한 왜곡된 기존평가를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아프리카의 여러 풍습을 연구했는데,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다 선교사들과 대립을 빚은 적도 있다. 킹슬리는 모든 문화는 그 사회의 내적 응집력의 산물이라는 신념으로 유럽식의 윤리관에서 벗어나 아프
리카 문화의 근본을 이해하고자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 연구자세였다.
 1895년 말 영국 귀환 이전에 이미 그녀는 그동안 몇몇 신문사에 보낸 기고문을 통해 상당히 유명해져 있었다. 귀국 후 더 많은 정보를 원하는 독자들의 요구가 빗발치자, 킹슬리는 750페이지에 달하는 최초의 저술을 1897년에 발간했다. 그녀의 활동이 적도 아프리카에서 주로 이루어졌던 까닭에 (서아프리카 여행)이라는 제목은 부정확한 면이 있지만 이 책은 발간 첫해에 네 차례 중판을 거듭해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제2권 (서아프리카인 연구)가 속간되었다. 두 권의 인종학적인 저술을 통해 그녀는 아프리카 전문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킹슬리는 식민성 장관인 조지프 체임벌린의 개인고문 자격으로 인류학계의 권위자였던 타일러 경을 접견했으며, 스탠리, 키플링과 교분을 다질 수 있었다. 지명인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그녀는 겸손을 잃지 않았다. 39세 되던 해, 제2차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에 포로가 된 보어인을 돌보기 위해 간호원 자격으로 남아프리카로 건너간 킹슬리는 그곳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영국 지식인 계층에 반제국주의적인 경향이 확산되는 것을 콜레라의 전염에 비유할 정도로 철저한 제국주의자임을 자부했던 그녀는 좀더 능률적인 식민통치를 위해서는 아프리카 풍습에 걸맞은 현명한 식민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녀의 아프리카에 대한 겸허하고 애정 어린 연구자세는 체계적이고 논리적 수탈을 위한 가식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녀도 유럽주의의 한계를 초월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얼떨결에 아프리카 탐험에 도전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아프리카가 아마추어 탐험가들에게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탐험의 성공 여부는 선두에 서는 탐험가의 노련함에도 달려 있지만, 무엇보다도 짐꾼과 안내인의 능력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출발 전의 세밀한 준비작업은 출발 후의 지구력만큼이나 중요하다.
 제5장 탐험가의 세계
 모험심은 모든 탐험의 필요조건이지만 결코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우선 탐험가는 자신이 탐험하고자 하는 곳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 킹슬리는, 도서관을 뒤져 샤이, 브라자, 스탠리 등 선구자들이 남긴 기록을 빠짐없이 검토하는 한편, 여러 가지 지도를 면밀히 조사해 현지지형을 숙지하려는 치밀함을 보였다.
 또한 탐험가들은 관련당국과 활발한 접촉을 갖게 마련이며, 대부분 아프리카 현지로 떠날 때는 그곳에 주재하는 식민성 관리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추천장을 지니고 감으로써 총독이나 영사로부터 필요한 자원을 받게 된다. 아프리카에 도착한 탐험가는 먼저 탐험대의 인원을 확보해야 하는데, 킹슬리처럼 현장에서 지원자를 고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현지 모집대행업자의 도움을 받는다. 잔지바르에서 모집대행업을 벌인 이들은 주로 아랍 상인이었다.
 일차적인 필수품
 탐험 출발의 여러 가지 난관 중 하나가 준비물의 다양함이다. 탐험가들이 작성하는 준비물 목록에는 그야말로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이다.
 약품상자는 일 잘하는 짐꾼에게 맡겨지곤 했는데, 1860년대부터는 열병예방약으로 사용되던 키니네 외에도 모르핀, 연고, 강장제, 붕대, 알코올 등이 필수품으로 추가되었고, 여기에 현지 약용식물도 빠지지 않았다. 탐험 도중 약품이 떨어질 경우에는 현지에서 사용되는 민간치료6법에라도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캠핑 장비에는 놀랄만큼 많은 품목이 포함된다. 탐험가들중에는 대충 챙기자는 이도 있었지만 침대까지 싸 가겠다는 고집불통도 있었다. 텐트, 방수포, 담요, 매트, 베개, 모기장, 돗자리 등이 챙겨졌다. 그러나 흑인 인부들에게는 깔개가 지급되는 정도였다. 옷과 신발은 아무리 튼튼한 것이라도 자주 새것으로 갈아야 했고, 특히 버턴은 이를 대형 트렁크로 세 개나 준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열대기후에 적합한 옷감 중에 플라넬이 열병과 태양으로부터 몸을 보호해 준다 하여 인기가 좋았다.
 각종 연장은 숲 속에 길을 내거나 가교를 설치하는 데 쓰였을 뿐만 아니라 오두막이나 카누를 만드는 데도 쓰였다. 무기는 필수품이었고 식량은 모든 사태에 대비해 충분히 준비해야 했다. 소금, 양념, 차, 커피, 건어물, 고기통조림, 채소, 기름, 설탕은 물론이고, 원정 도중 식품조달이 여의치 않을 때를 대비해 비스킷도 준비했다.
 읽을 거리, 측정기구, 그리고...
 준비물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책이다. 킹슬리는 어류에 관한 전문서적을, 버턴은 다양한 종류의 책 20여 권을 지니고 있었다. 스탠리는 콩고강을 항해해 내려가면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었다고 하는데, 하루는 의심 많은 아프리카인이 그의 귀중한 탐험일기를 재앙을 초래하는 불길한 물건으로 보고 불에 태울 것을 요구하자 셰익스피어 책을 대신 불에 던져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는 탐험가들은 미술도구까지 챙겼다.
 또 다른 필수품으로 지형 측량과 방향 탐지에 필요한 측정기구가 있다. 크로노미터(chronometer), 해시계, 우량계, 나침반, 육분의, 온도계, 망원경, 직각자, 측연선 등이 일반적인 측정기구이다. 다른 준비물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위도, 경도, 높이, 수심 등을 조사해야 하는 탐험가들에게 측정기구는 그 무엇보다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역이나 통행세 지불에 필요한 물품을 들 수 있다. 이것이 준비물 중 가장 큰 부피를 차지했다. 그런 물품으로는 내륙의 원주민이 선호하는 옷감과 낚시바늘, 철사와 총기 등 산업제품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당시 화폐로 널리 통용되던 조개껍질도 포함되었다. 탐험장비와 보급품의 내용을 결정짓는 것은 탐험의 성격이었다. 예를 들면 킹슬리는 가볍게 짐을 꾸렸음에도 소지하고 있던 한 자루의 권총마저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원정에 필요한 재정 확보
 놀랍고도 다양한 탐험준비물을 볼 때 재정조달 문제가 탐험의 일차적인 관건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브루스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 아비시니아 탐험에 나서야 했는데, 18세기 말 이후부터는 많은 재정후원자들의 출현으로 경제적 여력이 없는 모험가도 아프리카 탐험에 나설 수 있었다. 여러 과학단체가 창설되고 이들 단체에서 탐험대를 조직해 파견하는 일도 잦아졌다. 이는 탐험가에게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런데 영국 왕립지리학회가 스펙, 리빙스턴과 캐머런의 탐험을 지원하여 아프리카 개척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던 것은 학회의 수입이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1850년대에 연간 1, 000파운드에 불과했던 학회의 수입이 1875년경에는 8, 000파운드로 무려 여덟 배나 성장을 기록했던 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몇몇 과학 전문잡지들도 탐험가에게 보조금을 지원하여 지리학적 탐사를 도왔는데, 프랑스의 (세계일주)지는 다수의 탐험기를 발간하기도 했다.
 민간차원의 재정지원에 또다시 정부차원의 지원이 보태졌다. 1860년대 이후 유럽 각국의 정부는 공식기관을 대리인으로 내세우고 지리학적 탐사에 투자를 시작했다.
 영국의 외무성이나 프랑스의 해군성이 활발한 지원활동을 벌인 것을 알 수 있다.
 탐험가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유리한 방법은 여러 경로의 지원을 종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운은 누렸던 이는 바로 에민 파샤를 '구원'하러 갔던 스탠리였다. 그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던 예산은 3만 3, 000파운드에 달해 탐험지원금에 관한 한 신기록을 수립했는데, 지원금 총액에서 실제로 지출된 금액은 80%정도였다. 항간에는 누가 이 막대한 금액을 조달했는가 하는 궁금증이 나돌았다. 전액의 반을 부담한 이집트 정부, 영국의 몇몇 귀족, 왕립지리학회, 신문구독자, 상공업자 등이 그 재정지원자였다.
 경비 사용 내역을 보면, 전체 예산의 4분의 1이 수송비로, 10분의 1이 인건비로, 무엇보다 큰 액수가 대양 횡단과 강에서의 항해비용으로 지출되었다. 그 밖에도 통행세, 보험료, 전보비, 치료비와 탐험 도중 사망한 인부의 가족에게 지급되는 보잘 것 없는 보상비가 포함되었다.
 탐험대내부의 계급조직 출발과 동시에 모든 탐험대원은 각기 다른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탐험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대원들 모두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었고, 그중 몇 명은 탐험가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탐험가를 직접적으로 보좌하는 제2의 인물이 있게 마련이지만 흑인이 이 임무를 부여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는 서양인의 인종차별적 사고방식이 탐험대 조직에도 반영된 결과였다. 계급 피라미드의 정상에는 당연히 백인이 위치하고 바로 밑에는 아랍인, 그리고 제일 밑바닥에는 흑인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흑인들이 책임이 따르는 직책을 전혀 맡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수백 명이 넘는 대규모 탐험대의 경우에는 전체가 몇 개의 분대로 나뉘었고 각각의 분대원을 지휘, 감독하는 임무가 종종 흑인들에게 부여되었다. 이들 흑인 분대장들은 거의 모두가 스와힐리어를 사용했고 이슬람 성향이 강한 문화권인 동부 해안 지역에 속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짐꾼, 뱃사공, 잡역부 등은 흑인의 몫이었으나 여기에도 부족 간의 차별이 존재해 어떤 부족은 짐꾼으로만 고용되는 등 임무의 전문화 현상까지 나타났다. 그 한 예로, 빅토리아호와 탕가니카호 중간 지역에 사는 냠웨지족은 맡은 임무에 충실한 것으로 알려져 노예 사냥과 상아 채취에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주변 지리에도 익숙해 탐험대의 안내인으로 고용되어 대호수 지역과 동부 해안에 위치한 바가모요항 간의 행로 개척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킹슬리가 가봉에서 노 잘 젓기로 유명한 길와족을 고용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원정대 내부에서의 임무 분담
 체체파리(tsetse)가 극성을 부리는 지역에서는 짐을 운반하는 동물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모든 짐을 인부들이 등에 메어 날라야 했다. 탐험대의 인적 구성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짐꾼들로, 전체 인원의 4분의 3을 웃돌곤 했다. 1874년, 스탠리는 인부를 모집하면서 증인 입회하에 지원자와 고용계약을 체결하는 노련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 내용은 4개월분의 급료를 선불로 지급하고 최상의 대우와 질병에 대한 치료를 보장하는 동시에 2년간의 의무복무를 약정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계약에 서명하고 나면 인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위치를 이탈하지 말아야 하며, 개인당 28~32kg에 달하는 짐을 지어 날라야 했다.
 탐험가는 짐꾼 이외에도 한두 명의 하인을 고용해 항상 곁에 두고 잔심부름을 시키고 식사준비를 맡도록 했다. 이들은 충성과 민첩성, 그리고 철저한 복종으로 탐험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대부분이 나이 어린 소년이었던 탓으로 '보이(boy)'로 호칭되었다. 보이는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하인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이에 비해 탐험가의 신변보호를 위해 고용되는 경호원은 좀더 나이가 든 축에 속했다. 요리사는 종종 탐험가들에게 음식솜씨가 형편없다고 불평을 사기도 했지만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다. 대원들의 사기는 음식맛에 따라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중요한 인물로서 의사소통을 책임지는 통역인이 있었다. 뛰어난 언어감각의 소유자였던 버턴처럼 혼자 힘으로 의사소통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극단적인 예외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탐험가는 아프리카 현지 언어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오랜 체류 후에도 단편적인 몇가지 의사표현만으로 만족해했다. 현지생활에 익숙해 있던 킹슬리도 가봉의 현지어가 무척 간단하다고 단언하는 경솔을 범했을 정도이다.
 스와힐리어가 동아프리카에서 기본적인 의사전달이였던 만큼 이 지역에서 활약하는 통역인은 스와힐리어를 기본으로 할 줄 알고 아랍어나 영어를 추가로 구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영어는 그저 단어를 혼합해 늘어놓는 수준에 불과했던 까닭에 종종 탐험가들의 악의 섞인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통역절차는 상당히 복잡했는데, 때로는 두 명의 통역인이 한꺼번에 동원되어 한 사람은 스와힐리어와 아랍어, 다른 사람은 아랍어와 영어를 맡아 대화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탐험가의 필요에 따라 포르투갈이나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현지인이 고용되었다.
 아프리카 발견에 공을 세운 아프리카인
 '발견'에 참여한 아프리카인의 공로는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 추마, 수시, 봄베이, 울레디 등의 이름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갔지만, 도널드 심프슨의 (검은 동반자들)에 잘 나타나 있듯이, 그들이 발휘했던 용기는 탐험가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탐험에 따르는 영광은 몽땅 유럽인 차지가 되었으며, 노잡이, 짐꾼, 척후병, 통역, 안내를 도맡은 흑인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잊혀져 갔다. 그들 중에는 유럽인 아마추어 탐험가는 비교도 안 될 전문탐험가의 자질을 갖춘 이가 많이 있었다.
 아프리카 흑인 중에는 오랜 동안 수차에 걸친 탐험에 계속 참가한 결과 그를 고용한 유럽인 탐험가보다도 훨씬 화려한 탐험경력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스탠리나 리빙스턴과 함께 여행했던 경력은 훌륭한 보증서 역할을 했으므로 이러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다른 탐험대에도 우선적으로 고용되곤 했다.
 특히 안내인의 경우, 아프리카에 처녀원정을 나온 탐험가일수록 선재 탐험가와 같이 일했던 안내인을 고용하여 그의 산 경험을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일단 소문이 나면 네 번에서 다섯 번까지 반복해서 탐험에 참여하는 경우도 흔했다. 노예 출신인 야오족 안내인 시디 무바릭 봄베이는 1857년에 스탠리, 1876년에는 캐머런과 함께 탐험했다. 역시 야오족으로 노예신분에서 해방된 추마도 리빙스턴 탐험대에 참가한 뒤로 탐험에 계속 동원되었으며 수시도 같은 경우였다.
 영국 왕립지리학회는 한때 유명했던 흑인들의 충성심과 노고를 치하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학회는 스펙의 원정 때 그를 도왔던 18명, 그리고 리빙스턴과 함께했던 흑인 동료 60명에게 메달을 수여했다. 몇몇에게는 종신연금이 지급되기도 했고, 안내인 생활을 청산한 봄베이는 1876년 이후 안정된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
 흑인들의 희생으로 얼룩진 여정
 탐험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만 이에 참여한 흑인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금전적인 면에서, 버턴의 탐험에 참여한 흑인의 연봉이 7~25달러에 불과했던 반면 버턴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아랍인 사이드 빈 살림에게는 500달러가 지급되었다는 사실은 아프리카인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가를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더욱 심각했던 점은 유럽인이 흑인을 다루는 무자비함으로, 스탠리의 난폭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흑인 인부의 사망률 또한 놀랄 만한 것으로 평소 때는 20%선에서 고온다습한 우기에는 50%에 달하기도 했다. 이토록 사망율이 높은 이유로는 일렬 횡대로 적과 맞서는 무모한 전투방식, 살인, 익사, 말라리아와 장티푸스 등의 열병, 이질, 괴혈병, 맹수의 공격, 과로, 영양실조 등을 들 수 있다. 유럽인도 질병의 위협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스탠리를 따라 콩고 탐험에 나섰던 영국인들의 죽음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들이 사망한 주요 원인은 무엇보다도 열병과 같은 질병이었다.
 배고픔 또한 모두에게 공통된 어려움이었다. 탐험가들은 식수와 식량 부족으로 근심했는데, 사냥이나 낚시 또는 행군 도중에 만나게 되는 현지주민들로부터 구입하는 방법 등으로 해결했다.
 이토록 어려운 상황에서 인부들의 빈번한 탈주는 그리 놀랄 만한 것은 아니라 하겠지만, 98명의 인부를 고용했던 버턴의 탐험대에서 55명이나 도중에 탈주했다는 사실은 다분히 충격적이다. 이러한 경우 탐험은 계속하기 위해서는 탈주로 발생하는 빈자리를 채울 인부를 각지에서 충원해야만 했는데, 이것은 탐험대에 여러 부족이 혼합되는 결과를 낳아 잦은 분규가 발생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전진속도는 예상보다 뒤쳐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탐험가들은 하루 평균 25km를 전진할 수 있으리라 계획하곤 했지만, 실제로 이를 주파하는 데는 여러 날이 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야생동물의 공격은 탐험대의 진행을 자주 방해하는 중요한 장애였다. 그리고 상식과 달리 맹수나 악어보다도 사실 모기가 더 무서운 적이었다. 모기를 혐오했던 킹슬리는 모기를 효과적으로 잡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세게 후려치는 것보다 손가락을 가만히 갖다 대고는 순간적으로 짓눌러야 한다.” 그녀는 늪지대를 수영해 건넌 후 목에 달라붙은 거머리를 떼어 내는 방법도 일러주었다.
 지식전파와 이데올로기의 확산
 탐험가들 대부분은 유럽으로 귀환하기 전에 이미 유명해져 있었고, 귀국 후에는 각종 행사에 초청되어 강연을 하고 지식인이나 여성인사의 모임에 참석하여 자신들의 모험담을 전하곤 했다. 몇 편의 기사 발표로 만족했던 브라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탐험기를 발견했고, 그중 몇몇은 각종 과학단체에 그들의 아프리카 탐험을 상징하는 물품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 한 예로 영국 왕립지리학회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는 킹슬리의 모자를 볼 수 있다. 탐험가들은 나름대로 다음 탐험에 재정적인 도움을 가져올 수 있는 자신의 명성 관리에 각별히 신경 쓰면서 지식층에게 미지의 대륙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전달했다. 독서를 통해 탐험을 즐기던 '실내 탐험가'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탐험기에 관한 한 몇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는 탐험기가 아프리카에 관한 정보 제공을 하는 유일한 창구역할을 하면서도 그 내용이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탐험기는 백인우월사상으로 점철한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다. 아프리카인의 모습은 항상 이 프리즘을 통해 왜곡되었고, 탐험가들 대부분이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업적이 야만인을 상대로 한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음을 강조하고자 노력했다. 결국 아프리카 흑인들은 게으르고 겁이 많으며 거짓말을 잘하는데다가 잔인하고 퇴폐적인 악덕의 화신으로 인식되었고, 규범과 질서로 정돈된 유럽 사회와 무질서와 방종이 난무하는 암흑사외로서의 아프리카가 대비되었다. 물론 에외를 인정하는 탐험가도 있었지만 그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 중에는 아프리카의 흑인사회를 도에 지나칠 정도로 비방하는 이들도 있었다. 베이커가 이들 부류의 대표격이었다고 한다면, 리빙스턴이나 킹슬리는 시대적인 착오에 덜 빠져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탐험문학의 한계
 어쨌든 탐험가는 식인종이 벌이는 축제장면을 읽고 전율을 느껴야만 만족하는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고, 광란에 가까운 흑인의 생활상을 묘사해서 독자들을 흥분시켜야만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자극적이고 허구적인 소재는 모든 탐험문학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등장했다. 다만 킹슬리의 글은 유머스런 표현을 담고 있으며, 다른 탐험가들의 그것은 애조를 띠거나 괴기스런 분위기에 포장되어 있음이 다를 뿐이다.
 탐험문학이 상호통일성을 갖는 것은 탐험작가 대부분이 선배들의 문학에 친숙해 있었다는 데 기인한다. 명백한 표절행위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들은 서로 강하게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정보의 내적 교환을 활발하게 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보 자체도 대부분 남의 얘기를 전하는 이차적인 자료에 불과했는가 하면 심지어는 세 단계 혹은 네 관계를 거쳐 온 풍문까지도 기정사실화하여 표현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탐험가들은 독자들로부터 각별한 시노리를 받게 마련이다. 이는 탐험가들의 이야기가 실제 현지체험에 근거하므로 독자들은 그 내용의 진실성과 고유성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미지의 대륙에 처음으로 다녀와 그곳 지역사정에 정통하고 훌륭한 지리적 업적까지 이룩했던 탐험가들이, 왜 상상 속에서 재구축된 아프리카의 허상을 대중에게 심어 주었을까?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다면 시대적인 편견에 대항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전달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오늘날의 상황은 과연 어떠한가?
 기록과 증언
 상이한 두 세계의 만남에 대한 탐험가, 재정 후원가, 언론인, 역사가, 영화제작자, 소설가의 다양한 견해 표명과 증언.
 탐험준비
 아프리카 탐험에는 현지에 대한 사전지식과 탐험대를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노련함이 필수 요건이다. 탐험가는 탐험계획을 수립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킹슬리는 먼저 여러 참고자료를 조사하고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라비아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버턴은 탐험대 조지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탐험의 동기
 1893년, 생애 처음으로 대여섯 달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5파운드 짜리 동전을 방금 받아 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나는 휴가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궁리했는데, 이때 나에게, "열대지방으로 가라. "고 속삭인 것은 바로 과학이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 열대지방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도를 폈다.
 말레이시아는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았고 비용도 아주 많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남아메리카나 서아프리카 중에서 선택하기로 했다. 에티오피아에 대한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하고 읽어 봤지만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결국 서아프리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나는 출발하기 전부터 '괴상한' 많은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내가 괴상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내가 조언을 구했던 많은 사람들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게 전해준 정보들은 내가 정보를 분류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음에도 머릿속에 혼란한 야기했을 뿐이다...
 우선 나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아프리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어떤 이들은 내게 이렇게 응수하기도 했다. "너는 그곳에 갈 수 없을 거야! 이미 알겠지만, 그곳에는 백인의 무덤, 시에라 레온(Sierra Leonre)이 있단 말이야.”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 지역은 위험한 곳이었다... 이번에는 의사에게 물어 볼 차례였다. 그들은 열성적으로 대답해 주었다. 세계 질병분포도를 보여 주면서, "그곳은 세계 질병분포도를 보여 주면서, "그곳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위생적인 곳입니다. "라고 일러주는 이도 있었다.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는 모양을 가진 나라들이 회색이나 노란색, 또는 누르스름한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나는 지도제작자의 예술적 감각이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시에라 레온의 북쪽부터 콩고강 남쪽에 이르는 지역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막연히나마 지도제작자가 검은색을 이용한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당신이라면 가지 않을 거예요.” 라고 내게 충고할 뿐이었다...
 내 이성은 서아프리카에 대해 떠도는 풍문에 불안을 느꼈지만, 내 감성은 이미 그곳으로 이끌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떠나기로 결정했다. 운 좋게도 그곳 해안지역에서 7년이나 살았다는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내 목적지에 거주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의견은 값진 것이었다. 그는 '죽음의 땅'에 오랜 동안 산 사람답지 않게 정상적인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내 계획을 들은 그가 이렇게 말했다. "서아프리카로 떠나기로 결심을 했더라도 가장 현명한 것은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고 당장에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계속 그 무분별한 행동을 고집한다면, 니제르 삼각주에 도착하기 전까지 2주일 동안 하루에 키니네 네알을 복용할 것과 그곳에 좋은 영구차를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
 1893년 8월 초, 나는 목적한 해안을 향해 처음으로 영국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 키니네를 수취한 지불로 조달받을 수 있었고, 한 친구는 신문 스크랩한 것을 두 장 보내 주었다. (작은 배 위에서의 1주일)이라고 제목 붙은 첫 번째 기사는, 내가 7주일이나 지내야 할 서아프리카행 증기선에 승선한 사람들과 동물들의 끔찍한 생활상이 묘사되어 있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지에서 오려 낸 두 번째 기사는 다호메(오늘날 베닌)에서의 일상적인 대화를 정리한 프랑스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싣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저는 빠져 죽어요!" "이 사람은 도둑이 아닐까?" "배가 뒤집힌다!" "일어서, 이 게으름뱅이들아!" 등등, 물음표와 느낌표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왜 이 사람을 아직도 매장하지 않고 있어?"라는 질문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대답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는 물신에게 죽음을 당했기 ㄸ문에 뼈만 남을 때까지 공기 중에 놔두어야 해!" 이 모든 것들이 현지에 가서 직접 그 물신을 조사하기 전까지 배에서 보내야만 하는 나를 위기소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선박회사 직원으로부터 서아프리카에서는 돌아오는 표를 발행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더욱더 불안한 마음으로, 런던을 출발해 리버풀로 향했다.
 메어리 킹슬리 (서아프리카 여행)
 탐험대의 인적구성
 중고메로를 떠나면서 나는 우리 일행을 쭉 둘러보았다. 그들을 소개하자면, 사이드 벤 셀림은 잔지바르의 아랍계 혼혈로서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왕명에 따라 원정대를 인도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에게는 네 명의 노예 이외에도 젊은 여자 할리마가 따려 있었다. 그가 이 여자노예를 자주 그로부터 돌려세우는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지나칠 정도로 비대한 몸집과 납작코가 그에게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는 까닭인 듯했다. 그리고 내가 한 달에 5달러씩 주고 빌려 온 아랍인의 노예였던 나의 하인 마부루키가 있다. 그는 황소 같은 외모를 가진 흑인으로 낮은 이마, 작은 눈, 밑에 퍼진 코, 육식동물처럼 힘센 근육이 돋보이는 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우리 일행 전체를 통틀어 가장 못생긴 동시에 가장 변변치 못했으면서도 몸치장에 대한 열정만은 끝이 없었다. 혐오스러운 성격에다가 게으르고, 버르장머리 없는 그는 지나치게 화가 나 있거나 오만에 빠져 있다가도 갑자기 의기소침하거나 무조건 복종하기 시작하는 야릇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와 같은 부족 출신인 봄베이는 한없이 오랜 동안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다가 비로소 자신으로 돌아오는 괴벽이 있기는 하지만 활동적이고 정직한 편이다.
 힌두족과 포르투갈계의 혼혈인 발렌타인과 가에타노는 어린 시절부터 영국령 인도의 부유한 주택단지에서 설거지꾼이나 어린이를 돌보는 하녀로 생활했던 하류계층 출신이었다...
 그러나 두 명 모두 그들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발렌타인은 현지어를 쉽게 습득하는 재주를 지녔고, 탐험용 시계와 온도계 사용법도 불과 여칠 안에 익힐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총명한 만큼 교활했으며, 카레소스를 잘 만드는 만큼 재봉솜씨 또한 좋았다. 마에타노는 환자를 주의 깊게 돌보는 자상함과 동시에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잔지바르의 왕은 우리의 생명과 물자의 안전을 책일 질 여덟 명의 벨루치족을 제공했다. 이들은 낡은 구식 소총과 카치 군도로 무장하고 있었고, 번쩍거리는 금속으로 장식된 힌두교 방패와 뾰족한 단검, 화약심지, 라이터, 화약과 탄환을 갖고 있었다...
 그 밖에도 람지 씨 소유로 내게 대여된 여덟 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그들은 통역일과 길안내 그리고 병사역할도 수행했다. 그들은 버릇이 없는데다 거만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식량 구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작업도 하지 않았고 짐꾼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그들의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이든 훔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헌정대의 짐꾼으로 제일 마지막 대열을 이루면서 그들 스스로의 표현으로도 당나귀들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35명의 우아냐무에지인들 또한 문제였다. 이 말라빠진 소년들도 통솔하기가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는 변덕이 죽 끓듯 했고, 나무상자 들기를 특히 싫어했다.
 나무상자가 장대 양끝에 하나씩 걸어 놓을 수 있을 만큼 가볍거나, 아니면 두 사람이 필요할 정도로 아주 무거워서 둘이서 양쪽을 잡고 운반하지 않는 한, 나무상자를 옮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리처드 버턴 (중부 아프리카의 호수지대)
 캠프출발의 어려움
 새벽 5시에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위기의 시간이 시작된다. 짐꾼들은 이른 아침에 떠나서 힘겨운 행군을 하겠다고 전날에 굳게 약속했으나, 이 차가운 아침에는 이미 전날 저녁에 그토록 더위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아니다. 어쩌면 대다수가 열병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목청을 높여 무엇이든지 반대하고 보자는 정신이 비뚤어진 게으름뱅이들뿐이다. 일단 꼼짝하지 않기로 결정이 되면, 그들은 발이나 손을 덥히기 위해 불씨 앞에 앉거나, 모자를 쓰고 빤히 당신을 쳐다보면서 담배만 피워댈 것이다. 모두의 의사가 이러하면 당신도 다시 텐트 속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만일 몇몇 분대가 그들에 동조하지 않는 경우라면 당신은 당신 편 인부들을 부추겨야 한다. 곧 쑥덕공론이 활기를 띠고 목소리들이 커지면서 도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짐을 꾸려라! 자 떠나자. 여행을!"
 피리, 북, 사냥나팔, 휘파람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한쪽에서는 "나는 당나귀요 소요 낙타이다. "라는 푸념이 이어진다.
 나와 측근 동료들은 힘이 있는 당나귀들이 있는 한 그 위에 올라탄다. 당나귀가 우리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만큼 지치면 두 짐꾼이 지는 긴 장대로 엮어 만든 들것으로 옮겨 탄다...
 모든 사람들의 출발준비가 완료되면 안내인이 일어서서 가장 가벼운 짐들 중의 하나인 그의 보따리를 찾아 멘다. 그가 가시에 찢긴 붉은 깃발을 들고 행군을 시작하면 북 치는 이가 뒤를 따른다. 안내인은 한가운데 구멍을 내 침대 시트를 뒤집어썼는데, 바람이 불면 시트자락이 멋지게 펄럭였다...
 원정대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에게 복종해야 하는데, 안내인은 대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출발시에 암양이나 염소를 선물한다. 그리고 그는 선물보다 몇 배 가는 이득을 빼낸다. 행군중이든, 야영지에서든 도살하는 모든 동물의 머리는 그에게 주어지며, 여행이 끝날 무렵에 오가는 모든 선물은 그의 전유물인 까닭이다. 탐험중일 때 누구라도 그의 앞을 지나가면 벌금을 내야 하는데, 주구였는지를 기억하기 위해서 안내인은 '범법자'의 화살을 하나 빼앗아 간직한다.
 원정대가 이동하기 시작하면 선두에는 가장 많은 짐을 지고 또 가장 자부심이 강한 상아 운반인들이 자리를 잡는다. 각각의 상아 끝의 한쪽에는 작은 종이 달려 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자신들의 짐이 매달려 있다. 이들 위로 옷감 짐꾼, 유리 장신구 짐꾼, 가벼운 짐을 진 짐꾼들이 순서대로 줄을 서는데, 가벼운 짐으로는 코뿔소, 이빨, 가죽, 소금, 담배, 철제 괭이 따위가 포함된다. 이 대열을 따라 걷고 있고, 여자들과 책 한 권 정도에 지나지 않는 작은 짐을 진 어린이들이 이들을 따른다. 마지막으로 당나귀들이 물소나 기린가죽으로 된 길마 위에 무거운 짐을 싣고 행렬의 끝을 이룬다.
 종교적인 주술사이며 동시에 의사와 제사장의 역할을 겸하는 음강가(Mganga)는 원정대의 감초이다. 이 신성한 이물은 그의 성스러운 직책 덕분으로 짐 중에서도 가장 가벼운 것을 맡는다. 그러나 그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다 그렇듯이 많이 먹으면서 조금 일하는 까닭에 섬세하고 부드러운 피부와 뚱뚱한 체격을 지니고 있다.
 일단 행군이 시작되면 시끄럽게 떠드는게 일반적인 심심풀이다. 북 치는 자, 짖어대는 자, 울부짖는 자, 새들의 울음소리나 맹수의 포효를 흉내내는 자, 구령을 붙이는 자... 이들이 서로 다투어 경쟁을 벌이고 이 모든 소리들이 한데 어울려 사방으로 메아리 쳐 나간다. 8시경 그늘진 장소나 연못을 발견하면 붉은 깃발과 사냥나팔 소리가 짧은 휴식을 알린다. 사람들은 짐들을 풀고, 눕거나 거닐거나 수다를 떨거나 마시고, 담배를 피우거나 숨막혀 한다.
 만약 행군이 정오까지 진행되면 대열은 지체되고 흩어질 뿐만 아니라 괴로워한다. 그 와중에 행군을 멈추게 되면 일단의 무리는 그늘을 찾아 수풀 속에 몸을 웅크리고 그사이에 아직도 기운이 있는 자들은 나무를 베며 쉴 곳을 만들기도 한다.
 밤을 지낼 거처가 준비되면 당나귀들에게서 짐을 벗기고, 불을 피우려 나무를 쌓고, 항아리는 물로 채워지고, 사람들은 저녁을 준비한다. 부엌하인들의 노랫소리와 곡식을 빻거나 껍질을 벗기는 소리, 또한 하인이 커피를-상당 부분은 그가 씹어 먹지만-가는 소리를 듣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이다. 삼각형으로 놓은 세 개의 점토덩어리는 더없이 좋은 풍로가 된다. 삼각형의 아궁이에 둘러앉아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은 그저 끓는 냄비만 보아도 신이난다.
 리처드 버턴 (중부 아프리카의 호수지대)
 탐험가와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모든 탐험가들에게 경이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그곳의 현실이 자기들의 상상과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다고 피력했다. 탐험가들의 저술에는 색다른 풍습, 왕족들의 호화스러움, 동물과 식물 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하며, 다양한 소재만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표현방식도 해학과 찬사, 동정과 오만 등 가지각색이었다.
 스탠리의 부간다 국왕 무테사에 대한 호감
 무테사가 내가 그에게 주었던 만큼의 관심을 나에게 보인 것은 그 역시 내가 그에 대해 가졌던 만큼의 호기심을 나에 대해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의 측근들에게 하는 얘기를 들어 번 결과, 그가 내게서 받은 인상은, 내가 스펙보다 더 젊고, 덜 크고, 더 옷을 잘 입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에게서 받은 인상은 인류애가 충만한 군주로서 그의 통치능력은 아프리카 중부 지역에서 유럽인이 50년 간 선교사업에 종사해도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무테사는 유럽이 부러워할 정도의 훌륭한 통치자이다. "라고 기록했다.
 내가 그를 이렇게 호평하게 된 것은 스펙이 그를 거만하고, 성 잘 내고 경박하고 잔인한 폭군으로 묘사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이 미개한 인간에게서 느낀 점은 그의 질문이나 논평이 놀라울 만큼 지적이고 성품이 조용하여 존경할 만큼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혀 내가 아프리카에서 만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지성인을 만난 셈이었다. 게다가 그를 보좌하는 신하들 역시 지적인데다가 품위를 갖추고 있어, 그는 외국인들이 연이어 방문하는 큰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있었고 그를 접견한 손님들도 한결같이 그를 칭찬할 뿐이었으므로 나만 유독 그를 좋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의 자유분방한 태도와 예의바른 말투, 진실된 어조는 비록 그가 권력을 쥐고 있는 왕이라 해도, 타인들의 품격을 존중하고 그들이 바라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할 줄 아는 고매한 성품 또한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아프리카 군주의 행실을 14년의 통치기간을 통해 발달을 완벽에 이른 교활한 위선쯤으로 간주할 흑인혐오주의자도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무테사가 유능한 정치인으로서 거짓말하는 재주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종종 그는 그의 솔직하고 개방적인 성격과 젊은이의 원기왕성함을 보여 준다. 그는 국가원수로서 지녀야 할 필수적인 교활함과 신중함이 아주 부족하지는 않지만, 그의 외교적인 수완에서는 유럽식 기교를 찾아볼 수 없다. 그가 나를 속인 건지 내가 속아 넘어갔는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나의 탐험일기에서 그와 가진 첫 회견후 3일 동안 작성된 부분을 찾아보았다.
 "무테사는 185cm정도 되는 큰 미를 갖고 있다. 그는 날씬한데다가 놀라우리만치 섬세한 적갈색 피부를 가졌다. 그의 지성적인 외모는 내게 고대 이집트 테베시의 거인석상과 카이로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조상들을 떠올리게 했다. 똑같이 두툼한 입술이지만, 그의 입술은 정중하고 품위 있는 얼굴표정과 그의 부족의 특성으로 보이는,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고 커다란 두 큰 눈이 뿜어 내는 이상한 아름다움으로 약간 비켜 올라간 듯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그는 소탈하게 우스갯소리를 하며 마음껏 웃었다. 그가 열광하는 문명이 논제가 되면, 그는 즉시 부인들과 산하들에게 대화내용을 통역해 들려주었다. 그들이 대개 스와힐리어를 이해하는데도... 

 오늘 아침 7시경에 그는 경호원들, 시동들, 신화들, 피리불고 북치는 이들, 그에게 청원사항이 있는 자들, 게다가 집안의 200명이나 내게 함께 기도하러 갈 것을 요청했다. 나는 간단히 여행가방을 꺼내 세면을 마친 후 무장한 두 명의 경호원과 함께 호숫가에 있는 마당으로 합류했다. 왕은 그의 부인들에 둘러싸여 한가운데 있는 쇠로 된 걸상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나타나자 200여쌍의 축축하고 빛나는 눈들이 나에게로 집중되었고 나는 거기에 활짝 웃음으로 답했다. "자, 보시오. 스탠리, 내 부인들이 얼마나 당신을 흠모하고 있는지, 그래도 나는 질투하지 않소. 자, 이리 와서 앉으시오. "라고 무테사가 말했다.
 그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한 시동에게 명령을 내렸고, 튀듯이 달려간 시동은 지시대로 머치슨만의 작은 포구에서 화살처럼 생긴 적갈색 카누 40척을 꺼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이 색깔을 지나치게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색깔이 그들의 피부 색깔과 같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진짜 부간다족은 피부가 검은색은 아니고 무테사의 피부처럼 붉은빛이 도는, 그리고 이상하게도 섬세하고 부드러운 적갈색이기 때문이다. 오른쪽 어깨에서 발목까지 내려오는 그들의 전통복장도 적갈색이었는데, 그들의 전통복장도 적갈색이 그들의 국색일 거라고 추측했다.”
 스탠리 (검은 대륙 횡단)
 
 버턴이 현지에서 경험한 우아냐무에지족의 생활
 이 땅의 주인 우아냐무지족은 근면하고 상업활동에 적극적인 탓으로 주변의 다른 부족들보다 실제적으로 우월하여 이 지역 주민의 전형적인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오징어 먹물에서 추출해 낸 것처럼 짙은 그들의 짙은 청갈색 피부는 남아프리카의 와히아오족의 피부와 비슷하며, 동아프리카 연안 부족들보다 덜 아랍적이며, 흑인종의 표본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들은 곱슬머리를 갖고 있으며 머리카락을 코르크 마개 따개 모양으로 여러 갈래 땋아서 고대 이집트인처럼 내려뜨리고 있다. 그들은 수염을 거의 기르지 않으며 기른다 하더라도 짧게 가꾼다. 그들 중 대부분은 속눈썹을 뽑아 냈다. 큰 키와 함께 건장한 체격을 가진 그들의 팔다리는 강인한 힘이 있어 보인다. 부족 내에서 마른 사람은 청소년과 환자뿐이고, 대부분은 자기들이 용감하며 장수하리라고 믿고 있다. 그들의 부족표시(clan-mark)는 눈썹 바깥쪽 끝에서 볼 중간까지, 때로는 아래턱까지 평행하게 내려오는 두 줄의 칼자국이다. 어떤 이들은 세 번째의 줄을 아마 한가운데부터 미간까지 긋는 경우도 있고 남자들은 여기에다 검은색으로, 여자들은 파란색으로 문신을 새긴다. 몇몇 멋쟁이들은 눈 바로 밑에 수직으로 된 줄무늬를 덧붙이기도 한다. 부족 전체가 아래 앞니 두 개를 뽑는데, 남자들은 윗니의 가운데 두 개를 더 뽑아 내고서는 만족해하기도 한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귀에 무거운 귀걸이를 해 귀를 늘어뜨린다...
 우아냐무에지족은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의례적인 격식을 거의 차리지 않는다. 여인들은 아기를 낳을 순간이 되면 정글 속으로 들어가는데, 몇 시간 후에는 등에 아기를 업고, 대부분의 경우 머리 위에는 나뭇짐을 이고 돌아온다...
 만일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으면 남편은 장인에게 그녀를 데려올 때 주었던 지참금의 반환을 요구한다. 그녀에게 태어나면 능력이 있는 부모들은 성대한 축하연을 베푼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속해 있고, 아버지는 아이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므로, 아이를 죽이거나 팔아 버려도 전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소년의 걸음마를 시작하면 그에게 가축을 돌보게 하고 네 살이 되면 활과 화살을 주고 그 사용법을 가르친다. 만 열살이 되는 해에는 양떼를 지키게 한다. 바로 이 때부터 그는 성인으로 간주되어 1평방미터의 담배밭을 경작하고 그가 주인이 될 오두막집의 건축을 꿈꾼다. 결국 부족내에서 그 나이에 자신의 일상적인 필요사항을 해결하지 못하는 어린이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여자아이들의 역할도 주목할 만하다. 일단 성숙하면 그들은 부모의 집을 나와 7명에서 12명 정도가 한데 모여 부모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들만의 오두막을 짓는다. 이곳에서 그들은 부모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남자 친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처녀, 총각의 교제는 자유로우나 한 가지 제한이 존재한다. 처녀가 임신하면 그녀에게 임신을 시킨 남자는 그녀와 결혼하여야만 하고 이를 어길 경우에는 벌금을 내야 한다. 만일 결혼을 앞둔 여자가 출산 도중 사망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남자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청년들은 여자를 데려올 지참금을 지불할 만한 능력을 갖추면 결혼하는데, 보통 소 한 마리에서 열마리에 상당하는 값을 치러야 한다. 부인은 남편의 전적인 소유물이다. 부인이 간통을 하면 남편은 그녀의 정부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며, 살림이 어려울 경우에는 부인을 팔아 버릴 수도 있다.
 야단법석으로 결혼식을 치른 후, 신랑은 신부의 집에 거처를 마련한다. 이때 장인의 오두막은 피하는 것이 원칙이다. 한편,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는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이다. 이 같은 풍습에 비춰 보면, 가족 간의 관계가 비교적 소원하다는 사실, 부부 사이에 최소한의 정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된다. 해안지방에서 피륙을 지고 돌아온 남편이 자기 부인에게 인디언천 한 조각도 주지 않는가 하면, 부인은 개인적 재산이 넉넉하다 하더라도 남편이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기도 한다. 가사노동은 분업이 이루어진 편으로, 남자들은 양떼나 가금 사육을 책임지고, 여자들은 밭일이나 정원일을 맡는다. 이들은 각자 자기의 담배밭을 가꾸는데, 이는 서로 담배를 빌려 주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리처드 버턴 (중부 아프리카의 호수지대)
 
 메어리 킹슬리와 악어의 접견
 악어가 물 속 깊이 헤엄을 치거나 모래톱에 턱을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을 때, 당신은 증기선 위에서 이 광경을 즐기면서 아름다운 펜을 들어 친구에게 별다른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주는 강한 감동을 전할 수 있다. 반면에, 당신이 망그로브숲 한가운데서 카누에 타고 있는데, 마침 물고기가 많이 모이는 밀물에 밀려 악어가 잠에서 깨어나 진흙탕에서 일어난다면 상황은 흥미진진해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위급상황에서 당신은 다시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악어들은 십중팔구 카누를 뒤집어 당신을 물로 끌어들이고 만다. 나는 그런 위험에 빠져 나갈 때면 배가 고립되어 강물에 합류할 수 없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강으로 배를 끌어내기 위해서 배 밖으로 내려와서는 안 된다. 불안정한 진흙 바닥이 내려와서는 안 된다. 불안정한 진흙 바닥이 첫발을 디딘 순간부터 당신을 깊숙이 빨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운이 따르는 경우, 먼 훗날, 그 늪이 바짝 말랐을 때, 후대의 지질학자가 화석으로 굳은 당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2만년 후에 이름을 남기길 원하거나 과학의 발전을 위해 박물관의 전시품 신세가 되기를 꿈꾼다면, 주저할 필요 없이 그 '숭고한' 목적을 위해 고약한 냄새가 나는 진흙 속으로 뛰어내려라. 그러나 당신이 나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용감하지 못한 성격이라면 밀물 때까지 카누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나타나는 악어나 파리의 출현에 마음 졸이며...
 이 끔찍한 사건은 내게 두 번이나 일어났고 그때마다 더 이상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곤 했다. 두 번째에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표현대로 '힘센 도마뱀'이 내가 눈치채지 못한 상태에서 선미에 앞발을 올려 놓았고, 나는 배가 뒤집히는 것을 막기 위해 급히 선수로 물러나며 카누의 노로 주둥이에 일격을 가했다. 그 녀석이 물러서자 나는 녀석의 공격을 따돌리기 위해 수심이 깊은 강 가운데로 노를 저어 나갔다. 그후 더 이상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적은 24m정도 크기였는데 이 정도 길이는 그리 놀랄 만한 것은아니다. 물론 내가 사살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죽은 악어의 길이를 자주 재 볼 기회가 있었는데, 4. 5m~5. 5m, 어떤 것은 6. 3m까지 나가는 것도 있었다. 나를 공격했던 녀석은 난폭하고 제멋대로 자란 어린 건달이었으리라.
 메어리 킹슬리(서아프리카 여행)
 
 인간과 인간은 늘 서로에게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리빙스턴.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백인은 식인귀나 악마로 통한다. 내가 어떤 마을 근처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낙네들은 문틈으로 살며시 내다보다가 내가 다가가자 문을 닫아 버리고 오두막집 안으로 숨었다. 나를 만난 어린이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면서 발작을 일으키듯 심한 경기를 나타냈다. 그동안 노예상인들에게서 받았던 공포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왜 개들마저 사나운 맹수라도 만난 양, 꼬리를 다리 사이에 감추고 내빼는 것일까?...
 백인이 흑인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비쳐지고 있음을 확인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유럽인이 한 번도 발을 들여넣지 않은 마을에 들어갈라치면, 우리를 맨 처음 목격한 어린이가, 런던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미라가 살아 나오는 것을 보기라도 한 듯 겁에 질려 도망치곤 한다. 아이의 비명에 놀라 뛰어나온 아이의 어머니도 급히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개도 꼬리를 다리 사이에 감추고 미친 듯이 도망가고, 닭들은 병아리들을 내버려둔 채 요란스레 지붕으로 뛰쳐오른다. 조금 전까지도 그토록 평온했던 마을은 공포와 소란으로 뒤죽박죽되어 버리는데, 이 상황은 우리와 동행한 잠베지족이 웃으면서 백인은 흑인을 잡아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시킬 때까지 계속된다. 이곳에서는 농담이 심각한 언변보다 더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잠베지강과 그 지류)
 
 흑인vs. 백인, 새뮤얼 베이커의 관점
 밀림이 아름다운 꽃과 날카로운 가시를 동시에 가지고 있듯이, 흑인은 좋은 성격과 나쁜 성격을 무질서하게 드러낸다. 다분히 충동적인 그들은 신중히 행동하는 경우가 드물다. 탐험가가 자주 깜짝 놀라는 것은 그들이 완전히 얼빠진 상태에 있다가도 갑자기 열정적인 감정표현을 하는 경우이다. 아프리카 원시인들을 오랫동안 경험한 후에, 나는 그들을 전혀 가망이 없는 종족이라고 밀어붙이는 것은, 그들의 지적 능력과 백인의 지적 능력을 비교하는 일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임을 깨달았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흑인에게는 이성조차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현실은 불행한 일이다. 흑인의 본질적인 가치에 관련해 제기된 견해가 이처럼 다양하다는 사실은 흑인의 속성이 보여 주는 다양성을 입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백인과 흑인이 동일한 법 아래에서 동일한 통치를 받는다면, 흑인은 자루 속에 들어 있는송곳과 같은 존재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일반사람들의 생각이다. 마치 말과 노새를 함께수레에 달아매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려는 것을 동일하게 다루려 하는 시도가 백안시하는 짓이며, 흑인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아프리카인은 야만상태에서는 어떤 모습이겠는가? 물론 저급한 모습이지만, 나는 만약 백인이 마찬가지 상황에 처했다면 더욱 가관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흑인은 인간 본성에 자리잡은 사악한 열정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교묘한 악덕은 찾아볼 수 없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세상을 지배하고 부족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데-우리의 유럽도 결국 마찬가지가 아닌가?-이것은 족장이 지배하는 다른 부족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흑인들이 다른 부족을 노예로 부리지만, 우리 유럽인이나 무론, 미국인이 이 제도를 폐지한 것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흑인들이 무감각하고 배은망덕함이 없는가? 그들은 교활하고 거짓말을 잘한다고 하지만, 유럽인은 언제나 성실하고 솔직하기만한가?
 왜 흑인은 백인과 동등하지 않은가? 신체적으로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없다. 과연 흑인이 지적인 면에서 유럽인에 비해 열등한가? 나는 어린 시절에는 흑인이 백인보다 월등하기까지 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지적인 면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흑인은 지적인 진보 없이 육체만 성인이 되고 만다.
 좋은 선생 밑에서 본능을 억제하는 지혜를 갖춘다면 흑인도 뛰어난 자질을 소유한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흑인을 영국인처럼 훈련시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주의가 따른다. 흑인은 분별 없이 문명의 악덕들을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천부적인 덕성은 '백인'이 되고자 하는 시점부터 파괴될 것이다.
 새뮤얼 베이커(동부 아프리카 탐험가 문학선)에서
 
 구원자로서의 리빙스턴
 잠시 후에 한 무리의 노예 행렬이 테네 지방으로 가기 위해 마을을 통과할 것이라고 음바메가 전했다. '우리가 과연 개입할 필요가 있는가'하는 주제를 가지고 열띤 토의가 벌어졌다. 다소 값나가는 우리의 개인 휴대품들이 모두 테네의 주민들 수중에 있었으므로, 만일 우리가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면 그 대신 우리의 물건과 정부에서 지원한 원정용 장비까지도 빼앗길 것이 뻔했다. 우리의 탐험 덕분에 노예사냥꾼들은 예전에는 감히 접근하지 못했던 곳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나가면서 전쟁을 선동하여 포로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또한 인간사냥꾼들은 자신들의 목표 달성에 우리의 원정이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포르투갈 정부가 우리에게 부여한, 기필코 실행해야 할 선교임무를 공공연히 반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노고를 악용하는 이 가증스런 상거래를 중단시킬 것을 결심했다.
 우리가 통보받은 지 불과 몇 분이 되지 않아, 남자, 여자, 어린아이들이 사슬에 묶인 채 뱀처럼 구부러진 행렬을 이루며 언덕을 지나 마을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총으로 무장하고 맵시 있게 행장을 한, 포르투갈인의 앞잡이인 흑인 경비원들이 앞과 뒤, 그리고 측면으로 호위하면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양철로 된 기다란 나팔로 즐거운 곡조로 뽑고 있었는데, 모두 마치 고귀한 업적을 이룬 양 자랑하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곧 우리를 발견한 그들은 황급히 서둘러 숲 속으로 달아났다.
 인솔대장만이 맨 앞의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그와 악수를 했는데 그는 옛 테테 지역 사령관의 노예였다.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우리가 묻는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하도록 유도했다... 노예들의 출처에 관한 질문에 그는 모든 노예들을 샀다고 대답했으나 곧이어 같은 질문을 받은 노예들은 네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말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묶어 놓은 줄은 끊기가 쉬웠지만, 남자들을 풀어 주기는 무척 어불쌍한 남자 포로들의 목은 길이가 약 2m정도 되는 나무줄기의 두 갈래로 벌어진 가지 사이에 끼워진 채였고 가지 사이는 철끈으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운 좋게도 일행이던 카톨릭 주교가 톱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풀어 줄 수 있었다. 우리는 여인들에게 그들이 머리에 이고 온 밀가루를 끓여 아이들과 먹으라고 말했다. 처음에 그녀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너무나 뜻밖에 일어난 일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다시 지시를 하지 여인들은 재빨리 불을 피웠고, 밤낮으로 괴롭힌 저주스런 나뭇가지와 밧줄을 태웠다.
 이제 겨우 다섯 살인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어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한 소년이 그 나이에 걸맞는 순진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를 풀어 주고 먹을 것도 준 당신들은 누구죠? 어디서 왔죠?"
 전날, 두 여인이 끈을 풀려 하다가 처형당했단다. 그것은 만일 도망치려고 하면 똑같이 처형될것이라는 경고였다. 그리고 한 불행한 아이엄마는 아이를 업는데 방해가 되는 짐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곧장 그녀의 불쌍한 아이가 총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고, 피곤에 지쳐 대열을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던 한 남자는 참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인간성이 상실된 극단적인 이윤 추구가 이런 살인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끔찍한 상거래에서는 인명에 대한 멸시와 피에 대한 갈증이 이성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리빙스턴 (잠베지강과 그 지류)
 
 식민지 경영
 식민사업을 공공연히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탐험가들은 검은 대륙의 무한한 개발가능성을 역설하여 유럽 열강의 대륙 침투를 유발했다는 간접적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탐험 초기의 선구자들 가운데에는 오로지 상품교역만을 목적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1870년대 이후부터는 식민지 경영이라는 목적이 탐험가의 열정을 사로잡았다.
 브라자와 마코코의 협상
 마코코의 거처에서 원주민 대표들과 회합을 가졌다. 나는 그들에게 백인들이 부락을건설하는 목적은 그와 동시에 도로를 건설하여 도로를 통해 이곳으로 유럽의 상품이 들어오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마을이 강가에 설치되어야 하는 이유는 백인들이 화력으로 움직이는 카누를 타고 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다시 출발할때가 되었다. 내가 가지고 온 걱정이 슬그머니 밀려왔다. 어쩌나 하는 걱정이 슬그머니 밀려왔다. 나는 아직도 남아 있는 상당히 긴 여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선물을 하지 못한다고 유감을 표현하면서 마코코에게 목걸이와 거울, 그리고 좋은 옷감 18발을 선사했다. 만족한 마코코는 대가로 유럽 옷감 50발과 그 나라의 옷감 300조각을 주었다.
 그후 9월 10일, 내가 출발하는 날, 마코코는 이웃의 모든 추장들을 모아 놓소 그들의 면전에서 나의 손을 응간스쿠모의 손에 쥐어 주며 그에게 말했다. "우리를 보러 왔던 백인을 이제 당신에게 부탁하오. 이 백인이 해야 할 모든 일을 끝마쳤을 때, 그가 강을 통해 응쿠나에 가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그를 안내하도록 하고 만일 육지로 해서 가고자 하면 당신이 그를 이리로 데려오시오.” 그리고 나서 나를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우리에게 우호적인 말을 건네러 이곳에 왔고, 우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우리가 백인에 관해 소문으로 알고 있던 모든 백인들 역시 환영받을 것이고, 만일 그들이 원한다면 이 마을에 정착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나를 마을 어귀까지 안내했고, 나를 포옹한 후 돌아갔다...
 며칠후, 오방기족 추장 열 두명이 평화교섭을 하기 위해 왔다. 그들 중 두 명의 유력한 추장이 따로 큰 구멍을 파고는 화약과 총알과 총을 그 속에넣었다. 나도 탄약통을 그곳에 버렸다. 이윽고 구덩이가 메워졌고 그렇게 해서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콩고와 알리마가 목격한 유혈사태 이후에, 스탠리의 나 같은 유럽인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성취해야 할 첫 번째 임무를 평화 회복이었는데, 나는 비교적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나와 아방코 사이에서 진행된 협상이 만족스런 결과를 볼 수 있었으므로, 내가 응쿠나에 갈 때, 상거래를 위해 응쿠나에 주재하고 있던 다른 추장들에게 일의 진전상황을 알리기 위해, 아방코의 한 주장이 나와 동행하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10월 1일에 나는응쿠나에 도착했고, 마코코가 내게 부여한 권한 덕분에 나는 모든 추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아프리카의 두 번째 프랑스 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나는 말라민 하시를 새로운 기지의 임시대장으로 임명했고, 그를 모든 추장들에게 소개했다.
 브라자의 편지 헨리 브룬스빅의 (탐험가 브라자)에서
 
 캐머런의 낙관주의... 열대 아프리카에서는 모든 수송이 인간의 등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이는 막대한 인력의 낭비이다. 이 노동력이 토지 경작이나 수출용 작물 채취 등에 동원된다면 훨씬 더 큰 가치를 창출할 것이다.
 상아는 부진장한 물품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이 주요 수출품목의 위치를 언제까지고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나치고 무분별한 코끼리 사냥은 벌써 그 결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코끼리떼를 만나기가 어렵지 않던 지역에서조차 지나친 남획으로 오늘날에는 더 이상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만일 가까운 장애에 상아가 바닥날 것을 예견한다면, 또 적법한 상거래가 아프리카 대륙에 문명을 전달할 수 있는 토산품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복받은 대륙의 식물, 광물 자원은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다. 이 풍요로움을 개발하는 데 토착민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개척자들의 노고는 단시일 내에 거대한 부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 앞서 효과적인 교통수단이 확보되어야 한다...
 노예무역에 맞서 싸우는 선교사들의 노고는 상업이 발달로 밑받침되는 경우에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를 위하여 무역업자들과 선교사들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서로 경쟁을 일삼는 대신에 상호협조해야 한다. 도로가 건설되면 선교사들이 도로를 따라 진출할 것이고, 이들이 들어가 정착하여 그 지방이 거주 가능함을 증명하면, 이제부터는 모든 번영의 기회가 무역업자들에게 부여된다...
 나는 조약 체결이나 구입의 방법을 통해 잔지마르왕으로부터 우선 몸바사와 잦은 항구를 하나 확보할 것을 제안한다. 이 항구를 기점으로 우냔옘베를 거쳐 빅토리아호나 남쪽의 수고고호 방향으로 자선을 내면서 탕가니카호로 향하는 철도가 건설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철도의 건설비용은 킬로미터당 약 700파운드 정도로 예상된다... 어느 누구도 아프리카 부족장들이 갖고 있는 그들의 백성에 대한 통지권을 양도 불가의 권리로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아프리카인의 우리의 합리적인 통치방식을 거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통치권은 야만과 독단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전제군주는 한마디 명령으로 한 인간을 즉결처형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교통로의 개통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거래를 억제할 것이고, 합법적인 무역질서의 수립은 노예무역에 완전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캐머런 (동아프리카 탐험가 문학선)에서
 
 리빙스턴의 사명
 아프리카 대륙의 토착민 사회는 미개한 상태에서 간신히 몇 발자국 벗어났을 뿐, 그 상태에서 정지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조상이 이룩한 발명이나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철과 구리를 다루는 방법, 면으로 실을 짜고 직물을 만드는 방법, 그리고 바구니, 토기, 낚시바늘, 그물, 칼, 바늘, 무기 따위 그들의 제조품은 오랜 세월이 이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쓰던 것과 유사하다. 우리가 이룩한 과학적 진보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런 정신적 침체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어느새 옛날 중국인이 입에 담던 어투로 다른 인종에 대해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중국인은 몇 가지 중요한 발견에서 우리를 수세기 앞질렀다. 그들은 자석의 특성을 알았고, 화약, 인쇄술, 도자기를 창조하고 비단을 제조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앞선 문학과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후로 그들의 천재성은 거기서 멈추었고, 그 자손들은 선조들의 발명에서 구체적인 결실을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다른 아시아 민족 역시 우리에게 면과 설탕, 물시계와 해시계를 전해 주었다.
 아랍인은 대수와 체스 게임, 커피와 차, 알코올과 강철 등을 전수해 주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인과 마찬가지로 중국인, 일본인, 아랍인, 다른 아시아인은, 지적 활동과 발명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비천한 모방에만 급급했기에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침체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선진 세력을 추월한 우리의 창조력이 쇠진하여 다시 우리의 진보가 정지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나는 내가 탐험한 지역들을 노예상인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걸린다... 나는 나의 여행기 출판이 끝나는 즉시 다시 영국을 떠날 것이다...
 나는 포르투갈 영지의 북쪽 지역에 들어가서, 기네만에서 아주 좋은 성과를 올렸던 체제를 그곳에 도입할 생각이다.
 이 방법대로라면 합법적인 무역과 선교사업이 힘을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이번에는 로부마강이나 델가도곶의 북쪽으로 흘러 볼 생각이다. 그리고 방금 전에 언급한 문제를 계속 염두에 두면서 나는 니아사호의 북쪽 연안 탐사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곳에서 물이 어떻게 분할되어 흐르는가를 알기 위해 탕가니카호 남쪽에도 접근할 것이다.
 스펙과 그랜트의 위업을 뒤업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단지 그들의 발견을 확고히 다지고 싶을 뿐이다.
 리빙스턴 (잠베지강과 그 지류)
 
 탐험가에 대한 평가
 탐험가에 대한 평가와 탐험에 관련된 사료의 정리 방식은 세월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다. 대탐험시대에 작성된 자료는 으레 찬사로 가득 차 있게 마련인데, 영웅의 언행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은 조심스럽게 삭제되곤 했다. 아직도 환상의 베일에 가려 있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탐험가들의 역할과 행동을 좀더 비평적인 시작에서 분석하고자 노력한다.
 리빙스턴에 대한 호평
 근자의 여행가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바로 리빙스턴 박사이다.
 이 용감한 탐험가는 30년 전부터 거의 쉬지 않고 남아프리카를 돌아다녔고, 그 결과 프랑스보다 몇 배나 더 방대한 땅에 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다. 선교사는 보기 드문 정열과 자선을 베푸는 숭고한 정신을 겸비한 순례여행가로서 이 과업을 거의 혼자서 완수했다.
 이 뛰어난 인물에게 집중되는 강한 관심은 바로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사람들은 그의 인물됨됨이에서 금세기 최고의 탐험가의 모습뿐만 아니라, 고대의 선인에 비길수 있는 곧은 정신과 흠잡을 데 없는 최고의 명예를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리빙스턴은 겉보기에는 약간 거칠어 보이지만 확고하면서도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솔직함과 정직성이 스코틀랜드의 유복한 농부의 얼굴 같은 그의 외모에 자연스레 나타나 있다. 그의 말에는 결코 허세가 없으며, 정성이 깃들여 있는 그의 글은 무거우면서도 간결하여 서투른 기교나 미사여구가 담겨 있을 여지가 없다. 남아프리카와 니아사호 탐험을 기록한 그의 저서에는 흘러넘치는 진실과 함께 특별한 기교없이 쓰여 있다. 그의 증언이 다른 것은, 모호함을 싫어하고 정직성만이 인간의 참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의 작가정신 때문이다.
 리빙스턴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전하는 이야기의 완벽한 독특성은 그의 선조로부터 유래하는 전통적인 명예이다.
 (일뤼스트라지시옹)지 1872년
 
 소설속에 재현된 스펙과 버턴의 논쟁
 "나는 그 호수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나일강의 주요한 수원임을 전적으로 확신했습니다. 물론 물증이 없는 추측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온도 측정으로 내 짐작이 옳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곧 이 발견이 순전히 나의 공훈이라는 점을 아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스펙이 말문을 열었다. 버턴은 조용히 있었지만 무언가 말을 해야 당연히 원전대의 공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던 그는 스펙이 오로지 자신만의 공적이라고 단언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잭, 나는 당신의 개인적 성공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버턴이 입을 열었다.
 "온도 측정 결과 이 호수의 고도는 약 1, 200m였으므로, 나는 내가 옳았음을 확신했습니다. 바로 그 호수가 진정한 나일강의 수원인 것입니다.”
 스펙이 다시 한 번 확언했다.
 "호수 주변에서 살고 있는 아랍인의 증언이 그 증거입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한 결과, 이 내해의 북단이 위도상 4~5도 북쪽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버턴은 무화과를 먹고 나서 차를 한 모금을 마셨다.
 "잭, 그보다 20년 전에 지금은 사망한 모하메드 알리 피샤가 발견했던 원정대가 북위 3도 22분 지점에 이르렀던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주장이 옳다면, 그들은 이미 냔자호의 내부로 80km나 배를 타고 들어갔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이집트인은 그 호수에 대해서는 듣지조차 못했으니 이상한 일 아닙니까?"
 "어쨌든 내가 말하는 나일강의 수원은 바로 거기요.”
 버턴은 동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찻잔을 내려 놓았다. 스펙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당신은 아랍어를 하지 못하잖아요.” 버턴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봄베이를 통역관으로 썼나요? 당신은 그의 아랍어 실력이 형편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잘못 이해된 점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 생각을 확신하오.”
 윌리엄 해리슨 (버턴과 스펙)
 
 킹슬리의 기억을 찾아
 가봉에서의 여행 내내 나는 선조 때부터 구전되는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메어리 킹슬리에 관해 무언가를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전해 내려오는 얘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고, 게다가 킹슬리의 체류는 그리 오래 전의 일이 결코 아니었으며, 뱃사공이나 짐꾼의 후손들이 100년 전에 혼자서 여행하던 그 호기심 많은 백인 여자에 대하여 전혀 모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과 부족들이 그동안 이합집산을 거듭해 온 결과, 숲속에 옛날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촌락 주민들은 더 이상 선조들이 살던 마을에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최근 수십년 동안 사람들이 거주했을 아콩조에서라면, 누군가가 킹슬리를 기억하고 있어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행운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다.
 피에르는 일말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나를, 한때는 아콩조에 살았고 현재는 리브레빌에서 사는 앙드레라는 아주 늙은 노인에게 인도했다. ... 내 질문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 여인에 대해 들어 본 기억이 없소. 만일 내 집의 누군가가 그녀를 알았다면, 나도 역시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오. 그 시절에는 백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거든.” 그의 부인이 덧붙였다. "확실히 누군가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그녀와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 틀림없이 그들의 애들에게 그녀에 대해 얘기해 주었을거예요. 분명히 누군가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틀림없이 킹슬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결국 나는 다른 사람에게 그 임무를 넘겨야 했다.
 캐롤린 알렉산더 (메마른 계절)
 
 아프리카인 사학자의 리빙스턴 평가
 19세기의 아프리카인에게 리빙스턴은 그저 스쳐 지나간 유럽인에 불과하다. 그가 아프리카에서 아들과 부인을 잃었고, 그 자신도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는 등 많은 희생을 치렀음은 확실하지만, ...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역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식민지 건설의 기나긴 역사의 한 단편에 불과하다. 그의 아프리카에 대한 관용과 통찰력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가 남긴 이데올로기적인 현실 왜곡에 따른 후유중은 심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엘리키아 음보콜로 (남아프리카 탐험사)서문
 
 재정 후원가
 갖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정부와 과학단체들은 단순한 후원자의 수준을 넘어, 탐험을 기획하고 그 진행을 주시하며 성공적인 결과가 나왔을 때는 이에 대한 포상까지도 담당하는 탐험사업의 실제적인 주도 세력이었다. 그 결과, 탐험가의 명성도 명실상부한 '후견인'인 이들 기관과의 관계에 따라 죄우되기 쉬웠다.
 1864년 제임스 그랜트 대위에 대한 메달 수여식에서 낭독한 연설문(발췌)
 왕립지리학회 회장 로드릭 머치슨 경의 치사
 "학회에서 원정대장 스펙 대위와 당신을 접견한 지 벌써 11개월이 경과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동아프리카를 개척하면서 당신의 동료가 이미 발견했던 호수에 백나일이 흘러 들어간다는 사실을 밝혀 낸 데 대하여 노고를 치하한 바 있습니다. 스펙 대위는 이미 곤도코로에 도착해서 빅토토리아 냔자 호수를 발견한 공로로 메달을 수여받았고, 오늘 우리는 당신에게 같은 메달을 수여함으로써 당신들이 이 지역에서 최소로 수행한 대원정에 대한 우리의 시노리를 재확인하고자 합니다. 당신이 탐험에서 귀환했던 당시에는 그해의 메달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 수여되었던 관계로 오늘에서야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에 이탈리아의 왕이 당신과 다재다능한 당신의 탐험대장에세 '오노르 아닐로(Honor a Nilo)'라는 상당한 영예가 담긴 메달을 수여했음은 우리에게도 큰 영광이 아닐수 없습니다. 먼 이국땅을 탐험하고 돌아온 탐험가에게 메달을 수여한다는 것은 내 자신에게도 무한한 영광입니다. 이제 당신에게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수여하는 이 메달을 전달함으로써 우리 왕립지리하과 회원들은 당신의 귀중한 동료인 스펙애위에 대한 보상만으로 만족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본인은 또한 당신이 젊은 장교 시절에 역전의 용사로서, 심한 부상을 극복하고 루크나우의 구조에 나섰던 헤이블록의 후위로 활약하여 인도인의 반란을 진압해 낸 용맹성을 치하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빅토리아 치하에 십자훈장만큼이나 소중한 가치가 담겨 있는 이 메달을 받아 주시기 자랍니다. "
 그랜트 대위의 답사
 "머치슨경, 그리고 회원 여러분!
 최근 아프리카 체류중에 왕립지리학회에서 만장일치로 제가 올해의 금메달 수상자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이 제게 무한한 기쁨이었음을 전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명예를 받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성원을 아끼지 않던 학회로부터 이 메달을 받았다는 사실은 제가 죽는 날까지 고이 간직할 이 영광을 한층 더 빛나게 합니다. 아직도 저는 여러분들이 제게 보여 준 호의에 몸둘 바를 모르고 있을뿐더러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뿐더러 전혀 감사의 준비가 안 되어 있던 만큼 어떻게 감사의 말을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들이 부여한 영광에 비해 약소하기만 한 저의 답사를 관대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
 왕립지리학회 회보 1864
 
 리빙스턴의 장례식
 리빙스턴의 유해는 1874년 4월 1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중부 아프리카 사막에서 맹수를 사냥하러 현지에 들렀을 때, 리빙스턴을 접견한 적이 있는 토머스 스틸 경과리빙스턴의 오랜 친구 W. E. 웨브, 리빙스턴과 함께 응가미호를 발견한 대사냥꾼 오스웰, 잠베지강 원정에 참여했던 자연과학자 커크 박사가 관포의 네끝을 잡았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쉐레 고원 지역의 선교사 윌러, 리빙스턴을 찾기 위한 첫 번째 원정대의 지휘자 영, 우거지에서 리빙스턴을 발견했던 헨리 스탠리, 흑인 수행원 대표 제이콥 웨인라잇 등이 따랐으며, 네 명의 자녀들과 두 누이, 그의 형수, 딸을 쿠루만과 결혼시킨 모팻 경 등이 계속 뒤를 이었다. 그뒤에 다시 스코틀랜드의 변호관 서더랜드 공작, 섀프트베리 경과 호턴 경, 바틀 경 형제 등, 저명인사들이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고 왕립지리학회 회원들과 많은 영국 학자들이 뒤따랐다.
 화관과 휘장을 걷어 내고 묘지에 관을 내리자 주석찬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나타났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1813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블랜타이어에서 태어남, 라나크 백작, 중부 아프리카 일랄라에서 1873년 5월 1일 서거.”
 (세계일주)지 1875년
 
 리빙스턴을 찾아서
 1869년 10월 16일, 발렌스에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마드리드에 있었다. 아침 10시에 자코포가 전보를 가져왔다. "파리에서 만납시다. 중요한 일.” 전보의 발신인은 (뉴욕 헤럴드)지 사장 제임스 고든 베넷 2세였다.
 마드리드를 3시에 출발했으나 바욘에서 정차가 길어지는 바람에 다음날 밤에야 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곧장 그랜드 호텔에 가서 베넷 씨 방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방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베넷은 침대에 있었다.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스탠리입니다.”
 "아, 그래요, 앉으시지요. 당신에게 중요한 임무가 있소.”
 그는 실내복을 벗어 던지며 활달하게 발했다.
 "리빙스턴이 어디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시오?"
 "모르겠습니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시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요.”
 "나는 그가 살아 있고 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나는 그를 찾으러 당신을 보내기로 했소.”
 "여행 경비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선 2만 5, 000프랑을 가지고 출발하시오. 동이 떨어지면 그 액수만큼 다시 지급될 것이고, 세 번째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그러니 반드시 리빙스턴을 찾으란 말이오.”
 "당장 떠나야 합니까?"
 "아니오, 일단 수에즈 운하 개통식에 참석한 뒤 거기서부터 나일강을 따라 올라가시오. 베이커 씨가 이집트 고원지대를 향해 떠났다는 소리를 들었소. 가능한 한 그의 원정에 대해 많은 정보를 입수하시오. 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관광객들에게 흥미가 갈 만한 모든 것을 기록해 두시오. 그리고 나중에 나일강 하류 지역에 관한 실제적인 관광안내서를 한 권 써 보시오.
 구경거리가 될 만한 관광지를 소개하고 그 구경거리를 즐기는 방법까지도 기록되어 있는 안내서를 말이오. 그후에 당신은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까지 가는 게 좋겠소. ... 그리고 나서 곧장 페르시아를 지나서 인도에 다다르면 당신은 페르시아국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인도에서 리빙스턴을 찾아 나서는 배를 타시오. 이때 어쩌면 그가 잔지바르로 귀환하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않다면 바로 내륙으로 들어가서 그를 찾도록 하시오. 그가 탐험 도중에 이룩한 발견에도 신경 쓰고, 만약 그가 죽었다면 그 증거를 가져오시오. 자. 이젠 돌아가시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안녕히 계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 나오면서 나 또한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스탠리 (리빙스턴을 찾아서)
 
 레오폴트2세를 위한 스탠리의 활약
 1878년 1월 오랜 원정을 마감하고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는, 원정대가 그토록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콩고강 유역으로 그해가 다 가기 전에 다시 탐험을 떠날 준비를 하게 될 것을 꿈속에서조차 생각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특급열차를 타고 마르세유역에 내렸을 때, 나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2세가 파견한 사절 두 사람의 영접을 받았다. 두 시간 남짓, 그들은 왕이 아프리카 경여에 관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나를 그 계획에 참여시킬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내가 겪은 고통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내가 그 제안에 얼마나 마음이 내켜 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의 야심찬 계획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인정하고, 아무도 그의 좋은 의도에 반대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만이 가득한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단지 나는 그 원정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필요한 정보와 탐험용 물자 준비에 대한 충고는 언제든지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벨기에 왕의 사절 두 사람에게 설명했듯이 나는 그러한 원정대를 지휘하기에는 너무나 피곤하고 쇠약해진 상태였다. 아마 여섯 달쯤 후에는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오로지 잠과 휴식만을 갈망했을 뿐이다....
 1878년 11월 초, 나는 브뤼셀 왕궁에 초대되었다. 약속된 시간에 나는 그곳에 와 있던 영국, 독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 각국의 저명한 사업가들을 만났고 곧 그들과 함께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몇 분 후에 이 모임의 목적이 밝혀졌다. 그것은 콩고강과 그 유역의 개발방법을 연구하자는 것이었다. 모두가 콩고강의 항해 가능 구간이 몇 킬로미터나 되는지, 또 회의적인 현지 부족장들에게 어떤 상업적인 혜택을 얻어낼 수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만일 현지인이 백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식할 경우, 상품 운반을 위해 그 지도자들에게 이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식할 경우, 상품 운반을 위해 그 지도자들에게 납부해야 할 세금은 얼마인지, 유럽산 옷감과 교환할 수 있는 현지 토산품은 무엇이고 또 스탠리풀까지 철도를 건설하는 데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쉬웠지만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에 대한 질문도 많았다. 결국 기금을 조성하여 직접 현지조사를 수행할 원정대를 파견하자는 결정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콩고강 상류 지역 연구위원회'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2만 파운드의 기금이 즉석에서 모금되었다.
 스탠리 (콩고와 자유국가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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