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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by Casey,Riley 2022.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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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1. 야성의 시기
늘 코를 흘리고 다녔다. 콧물이 아니라 누렇고 차진 코여서 훌쩍거려도잘 들어가지 않았다. 나만 아니라 그때 아이들은 다들 그랬다. 어른들이아이들을 싸잡아서 코흘리개라고 부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여북해야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아이들에 대해 제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감기가 들지 않고는 절대로 코를 안 흘린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들뿐아니라 딴 아이도 안 흘렸다. 그래서 학교나 유치원 길 때 가슴에 손수건매다는 습관까지 없어져 버렸다. 나도 이제는 요즘 아이들이 코를 안흘리는 걸 이상해하는 대신 그땐 왜 그렇게 코를 흘렸는지를 이상하게여기게 되었다.
종이나 헝겊이 귀했다. 손수건 같은 게 이 세상에 있다는 것도 몰랐다.
코가 흘러서 입으로 들어갈 때쯤 되면 소매로 쓱 씻었다. 그래서 한겨울을나고 나면 소맷부리에 고약이 엉겨붙은 것처럼 새카만 더께가 앉았다.
등덩산같이 솜을 둔 저고리 하나면 겨울을 났다. 엄마가 동정을 갈아 줄때마다 소맷부리의 더께도 쓱쓱 비벼서 털어 내주건만도 그러했다.
아랫도리는 솜바지 위에다 어깨 허리가 달린 통치마를 입었다. 옷감은무명에다 울긋불긋 물을 들여 풀을 먹여 반들반들하게 다듬이질 한것이었다.
시골에서 물감은 아주 귀물이었다. 할아버지가 송도에서 사 오셨다. 내가태어난 고장은 개성에서 남서쪽으로 이십 리 가량 떨어진 개풍군 청교면묵송리 박적골이라는 이십 호가 채 안 되는 벽촌인데 마을 사람들은개성을 송도라고 불렀다. 어린 나에게 송도는 꿈의 고장이었다. 물감뿐아니라 고무신이나 참빗이나 금박댕기나 식칼이나 호미나 낫도 다 송도에가야만 살 수가 있었다.
딴 집에선 여자들이 송도에 다녔다. 우리 집에선 할아버지하고 삼촌들만송도에 다닐 수가 있었다. 그게 딴 집하고 우리 집하고의 차이였다. 여자가송도에 못 가는 집이 박적골에서 우리 집말고 또 한 집이 있었다. 두 집다 박가였고 서로 친척이었다. 그 밖에 집들은 홍가였고 그들끼리친척이었다. 근데도 마을 이름은 박적골이었다. 할아버지는 우리는양반이고 그들은 상것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양반 노릇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잘 모른다.
개성지방은 전통적으로 양반 따위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까할아버지는 독불장군이셨을 것이다. 할아버지 때문에 송도 나들이가자유롭지 못한 우리 집 여자들도 마음으로부터 할아버지에게 승복하고 산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할머니에게 양반이 뭐냐고 물어 보았더니 픽웃으시면서 "개 팔아 두 냥 반이란다."라고 대답하셨다. 할머니는 입이걸었다. 우스운 소리도 잘 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앞에선 설설 기는시늉을 했다. 할아버지는 집안 여자들을 송도에만 안 보낸 게 아니고논이나 밭에도 안 내보냈다. 그것도 딴 집과 우리 집의 다른 점이었다.
할아버지는 그것도 양반 노릇이라고 여기시는 듯했다.
박적골엔 이렇게 두 양반집과, 열여섯인가 열일곱 호의 양반 아닌 집이있었지만 지주와 소작인으로 나누어져 있진 않았다. 바위라고는 하나도없이 능선이 부드럽고 밋밋한 동산이 두 팔을 벌려 얼싸안은 듯한 동네는탁 트이고 벌이 넓었다. 넓은 벌 한가운데를 개울이 흐르고, 정지용의 시말마따나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은 아무 데나 있었다. 우리 집에서뒷간에 가려도 실개천을 건너야 했다. 실개천은 흐르다가 논을 만나면곧잘 웅덩이를 만들곤 했는데 우리는 그걸 군 우물이라고 해서 먹는우물과 구별했다. 지금 생각하니 소규모의 저수지가 아니었던가 싶다. 거의흉년이 들지 않는 넓은 농지는 다 우리 마을 사람들 소유였다. 땅을독차지한 집도 땅을 못 가진 집도 없었다. 다들 일 년 먹을 양식 걱정은안 해도 될 자작농들이었고 부지런했다.
그런 고장에서 여덟 살까지 자라는 동안 이 세상에 부자와 가난뱅이가따로 있다는 걸 알 기회가 없었다. 동무들과 손잡고 딴 동네를 가 볼기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넓은 앞벌로는 아무리 멀리 나가도 딴 마을이나오지 않았다. 뒷동산을 넘어야만 이웃마을이 나왔고, 이웃마을의 풍경도별로 신기할 게 없었다. 옆구리에 텃밭을 낀 집들이 산기슭에 안겨 있었고,넓은 벌을 풍성한 치맛자락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사는 줄만 알았다.
아무리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도 조선땅이고 조선 사람밖에 없는 줄알다가 처음 들은 딴 나라 이름은 덕국이었다. 아주 오랜 훗날에야 덕국이우리가 독일이라고 부르는 나라라는 걸 알게되었지만 그걸 모를 때도 내가들은 최초의 외국은 나에게 충분히 신비로웠다. 할아버지가 송도에서물감을 사 오시는 것은 대개 추석이나 설을 앞둔 무렵이었는데 "이건 덕국물감이다."라고 따로 꺼내 놓는 물감은 네모난 봉지에 들어 있었는데, 빨간물감에는 빨간 종이로 파란 물감에는 파란 종이로 표시가 돼 있었다.
우표딱지를 대각선으로 접은 것만한 세모난 표시는 빤들빤들하고 선명해서꼭 진한 꽃잎을 문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덕국 물감만보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건 아마도 내가 최초로 맡은 문명의 냄새,문화의 예감이었다.
우리 집 여자들은 할머니도 엄마도 숙모들도 다들 덕국 물감에는 사죽을못 썼다. 그걸 사 온 할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엄에 넘쳤고 그런할아버지에 대한 며느리들의 존경은 비굴과 아부에 가까웠다. 언제나며느리들이 시아버지를 마음으로부터 공경한 건 아니었다. 웃음거리로삼을 때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걸음이 재고, 화가 날 때는 무엄한 말로하면 방정맞다 싶을 정도였는데, 안채로 그렇게 급하게 들어오신다는 것은불호령이 떨어질 징조였다. 며느리들이 황황히 일손을 놓고 또 무슨벼락이 떨어지나 기다리는 순간에도 슬쩍슬쩍 농담들을 했다.
그런 농담은 우리 엄마가 제일 잘 했다. "여보게 부엌에서 밥이 타나보이."라고 엄마가 숙모 귀에 대고 소곤대면 숙모는 웃음을 참느라 사색이되곤 했다. 부엌에서 진짜 밥이 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건 주걱턱이라는할아버지의 별명과 관계가 있었다. 수염이 길게 자라지 못하고 고슬고슬엉겨붙어서 양간 튀어나온 듯한 턱을 더욱 밥주걱처럼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며느리들이 덕국물감을 사 오신 할아버지에게 표한 최대의 경의는 실은 할아버지의 인격과는 무관한, 요새말로 하면 외제선호 같은 게아니었을까.
나는 속으로도 것으로도 할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세 살 때아버지를 여읜 나에 대한 할아버지의 자애는 각별했다. 나를 볼 때의할아버지는 봉의 눈이 살짝 처지면서 그 안에서 뭔가가 자글자글 끓고있다는 것을 어린 마음에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마도 그건 애간장이녹도록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을 테지만 나는 중대한 약점이라도 잡은것처럼 여겼다. 아무리 고약한 짓을 해도 역성들어 주겠거니 믿었다.
할아버지를 믿고 일부러 말썽을 부리진 않았지만 안 계실 때는 현저하게풀이 죽었다.
언젠가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당신이 너무 오냐오냐하니까 째 버릇이저 모양이라고, 당신만 안 계시면 쟤가 얼마나 고분고분해지는지아시느냐고 타박을 하신 일이 있다. 그때 할아버지는 무섭게 화를 내셨다.
애가 믿는 데가 없어서 풀이 죽은 게 그렇게 보기 좋습디까? 으응, 그렇게보기 좋아, 하고 버럭 역정을 내시면서 할머니 면전에 삿대질까지 하셨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나들이가 잦으셨다. 송도뿐 아니라 친척이나 친구의대소사에 가족을 대표해서 빠지지 않고 참석하시는 듯했다. 늘 흰 옷만입으셨기 때문에 집안 여자들은 그 수발이 큰일이었다. 특히 버선을 기워대는 일이 여간 아니었을 것이다. 자다깨면 엄마와 숙모들이 흐릿한등잔불 밑에 둘러앉아 버선볼을 대면서 두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있었다. 할아버지 버선은 내가 종종 머리에 써 볼 정도로 컸다.
한번 출타하시면 며칠 만에 돌아오실 적도 있었지만 할아버지를기다리는 것은 어린 나에게 가장 큰 낙이었다. 사랑 마루는 울타리 없는바깥마당에 면해 있었다. 아래 윗간으로 나누어진 사랑채는 마루도 길어서가운뎃기둥이 있었다. 그 가운뎃기둥을 한 팔로 안거나 기대고 앉아있으면 동구 밖으로 난 달구지길이 저 멀리 산모롱이 아스라이 사라지는지점까지 바라볼 수가 있었다.
흰옷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초가지붕마다 뿜어올린 저녁연기가스멀스멀 먹물처럼 처져 길과 논밭과 수풀과 동산의 경계를 부드럽게 지워버려, 마침내 잿빛 하늘을 인 거대한 한덩어리가 되었을 때도 흰옷 입은사람이 산모롱이를 돌아오는 것은 잘 분간이 되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다들 흰옷을 입었다. 특히 송도 나들이를 갈 때는 때도 안 묻은고운 흰옷으로 호사를 했다. 그래도 나는 할아버지와 딴 사람이 헷갈리지않았다.
할아버지의 독특한 걸음걸이는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강렬한빛처럼 직통으로 나에게 와 박혔다. '우리 할아버지다!'라고 생각하자마자나는 총알처럼 동구 밖으로 내달았다. 단 한 번도 착각 같은 건 하지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열렬하게 매달린 할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은다듬이질이 잘 돼 늘 칼날처럼 차게 서슬이 서 있었다. 그리고 송도의냄새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곧 오냐,오냐, 내 새끼, 하면서 번쩍 안아 올렸고, 그의 품은 든든하고 입김은훈훈했다. 할아버지의 입김에선 언제나 술 냄새가 났다. 나는 할아버지의훈훈함과 함께 그 술 냄새 또한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내려놓고 나서 두루마기 주머니에서 먹을 것을주섬주섬 꺼내 손에 쥐어 주는 것을 잊으신 적이 없었다. 노란 편지봉투에싼 미라사탕 아니면 잔칫상에서 염치 불구하고 집어넣었음직한 약과나다식 따위였다. 그런 것들을 맛보느라 할아버지 손목을 놓고 깡충깡충앞장서 뛸 때는 얼마나 의기양양했던지, 집에 들어가면 할머니한테 눈꼴이시다는 핀잔을 들을 지경이었다. 할머니 눈엔 요새말로 백이 생긴 내가다소 밉살스러워도 보였으리라. 그러나 그때의 내 기분은 기다림의 성취감같은 것이었다.
기다림이 번번이 성취된 것은 아니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산모롱이에딴 사람만 나타나거나 아무도 안 나타날 적엔 서러움이 목구멍까지복받쳤다. 계절에 따라서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 때도 있었다. 안에서 몇번이나 부르러 나와도 막무가내였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청승떤다고 했다.
엄마는 청승 좀 작작 떨라고 혀를 찼고, 할머니는 머리를 쥐어박기도 했다.
할아버지한테 일러 줄 테다, 일러 줄 테다, 나는 이렇게 벼르면서 그 모든구박을 견디었다. 그러나 진짜로 이른 적은 없었다. 그건 그냥 기다리는재미였다.
기다리는 재미는 그 밖에도 또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시방 소리개고개까지 오셨으면 내 엄지손가락이 가운뎃손가락에 척척 붙어라,"안붙으면 "우리 할아버지가 시방 농바위 고개까지 오셨으면 내 엄지손가락이가운뎃손가락에 척척 붙어라."로 바꾸면 되었다. 내가 아는 고개나 내의이름은 많았지만 어디 있는지는 잘 몰랐기 때문에 아무 데나 붙는 게 안붙는 것보다는 나았다. 붙으면 그 자리로부터 할아버지를 몰래몰래 뒤쫓아고개를 넘고 벌을 지나고 내를 건넜다.
할아버지가 걷는 길은 깜깜한 밤일 적도 있었고 휘영청한 달밤일 적도있었다. 별빛밖에 없는 그믐밤일지라도 표표히 나부끼는 할아버지의두루마기 자락은 너무도 새하얗고 당당해서 놓칠 염려가 없었다. 걸음이빠른 할아버지는 순식간에 동구 밖까지 왔다. 나는 할아버지를 숨가쁘게뒤쫓아며 한편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산모롱이에 할아버지는 안나타나고 뒤쫓던 나는 제자리걸음만 하는 할아버지를 안타깝게 지켜보다가정신의 긴장이 몽롱하게 이완되곤 했다. 기다리다 지쳐 잠든 나를어른들이 안고 들어갈 때, 나는 반밖에 잠들지 않았으면서도 일부러곯아떨어진 시늉을 했다.
내 유년기의 기억의 첫 장을 꽉 채우다시피 한 기다림은 그리 오래 가지않았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뒷간에서 넘어지신 채 못 일어나고 고래고래소리를 질러 사람을 불렀다. 뒷간은 사랑채에서 세 벌이나 되는 댓돌을내려와 꽤 넓은 바깥마당을 가로질러 마당을 에워싼 뽕나무 밑을 지나실개천을 넘어 텃밭머리에 있었다. 누군가 지나가던 사람이 연통을 해서식구들이 온통 황황히 달려나가 할아버지를 간신히 사랑채에다 뉘었다.
동풍이라고 했고, 동풍은 못 낫는 병이라고 했다. 특히 뒷간에서 걸린동풍에는 약이 없다는 걸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그 시절의 선비가 흔히 그랬듯이 한방에 대한 소양이 상식이상이어서 자식들 약방문도 손수 내고, 약초를 수집해 환약 같은 걸만들어서 약장에 보관하고 있다가 동네에 급한 환자가 생기면 내주곤하셨건만 자신의 병에 대해선 일찌거니 단념하고 화만 냈다. 할머니는사랑에서 똥 요강을 가지고 나올 때마다 할아버지의 역마살을 비롯해 술좋아하고 친구 좋아한 것까지 온갖 비행을 중얼중얼 나열해 가며 꼴좋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다. 집안에 먹구름이 끼고, 특히 나는 죽지떨어진 새처럼 초라해졌다. 아버지를 여읜 것은 세 사 때라 아무 것도생각나지 않지만 할아버지가 동풍으로 무력해지신 걸 보는 것은 나에게 두번째의 아버지 상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엄마가 서울로 오빠 뒷바라지를 하러 떠났다.
오빠는 면소재지에 있는 사년제 소학교를 졸업하고 송도로 가서 이 년을더 다녀 그때 개정된 학제로 육년 동안의 초등교육 과정을 마쳤다.
숙부들은 다 사년제 소학교만 나왔는데도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학문을 한청년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오빠가 송도에서 이 년 더 배운 걸 굉장한고학력으로 여기셨다. 서울의 더 놓은 학교에 간다는 것은 집안 형편에도벅찼지만 장손에 대한 기대에도 어긋났다.
그때 두 숙부는 다 혼인을 해서 한집에서 같이 살았건만 이상하게도그때까지 자녀간에 소생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우리 남매를 장중보옥에비유하시곤 했는데 덜컥 동풍까지 걸리셨으니 장손이자 유일한 손자인오빠를 너른 세상으로 내보내기보다는 옆에 끼고 집안의 대를 잇고 선영을지킬 의무를 훈도하고 장가도 일찍 들이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어른들하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오빠를 서울의상업학교에 보냈다. 상업학교는 송도에도 있는데 서울에까지 보낸 것은엄마의 중대한 반란이었다. 그 사건으로 집안이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혼자 된 맏며느리가 아들 공부를 핑계로 시부모 모시는 걸 포기한다는것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인들의 심적 타격도 컸고무엇보다도 집안 망신이었다. 할아버지가 그 작은 동네에서나마 양반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양반의 체통에 어긋나지 않게 집안을 다스려야했다. 누가 알아 주건 말건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은 그 마을에서모범적으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몹시노했고 엄마는 의무를 포기한 대가로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자식을 어떡하든지 서울에서 길러야 되겠다는 것은 아무도 못말릴 엄마의 숨은 신앙이었다. 엄마는 우리가 도회지에서만 살았어도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엄마의 생각엔 나도 훗날 철들고 나서 동의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형제 중 가장 체격이 좋고 잔병 한 번 치른 일 없는 건강체였다고 한다.
그런 분이 어느 날 갑자기 복통으로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할아버지는당신의 약방문에 의한 생약 한약  등으로만 다스리고, 할머니는무당집에서 푸닥거리를 하는 사이에 마침내 기지사경에 이르렀다.
그때서야 엄마는 단호히 아버지를 달구지로 송도까지 싣고 갈 수가있었다. 이미 아버지의 맹장염은 복막염을 일으켜 뱃속 가득 고름이 찬것을 뒤늦게 수술을 했지만 항생제도 없을 때라 결국은 덧나서 죽음에이르렀다고 한다. 엄마가 그걸 팔자소관으로 돌리지 못하고 시골의무지몽매 탓으로 단정하고, 자식들이라도 어떡 하든 그 곳에서 빼내고자한 것은 처녀 적의 엄마의 서울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엄마의 친정 역시 시골이었지만 엄마의 외가 쪽은 서울에서 꽤 잘 살고있어서 박적골로 시집오기 전 처녀 시절의 한때를 서울에서 외사촌들과보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외사촌들은 진명 숙명등에 다니고있었는데 그게 무척 좋아보이고 부러웠었나 보다. 엄마는 통치마 입고구두 신고 신식교육받은 여자들을 휘뚜루신여성이라고 칭했고, 나도그렇게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어렸고 또 형편상 딸까지는엄두를 못 내고 우선 아들을 서울 학교에 집어넣고 자기도 뒷바라지를핑계로 맏며느리 자리를 훨훨 박차고 서울로 가 버렸다. 나는 할머니할아버지는 물론 숙모들까지 수군대며 엄마를 비난하는 소리를 듣지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밖에 없는 손녀여서 숙모들에게 상전 노릇을 톡톡히했고 할아버지의 반신불수와 엄마의 부재로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게되었다. 개성지방과 그 근교의 주거 양식의 특색으로는 바깥채를 낮고소박하게, 안채는 높고 정결하게 꾸미는 것과 함께 마당치레의 유난함을꼽을 수가 있다. 사랑채에 면한 바깥마당은 앞이 트이게 하고 양쪽에뽕나무나 빗자루를 만드는 댑싸리 나무로 둘러치고 함박꽃이나 국화를 몇그루 심는 정도지만 뒤란치레는 공이 들고 화려했다.
우리 집 뒤란도 한겨울 빼 놓고는 줄창 꽃을 볼 수 있는 작은 동산이요넉넉한 놀이터였다. 장독대도 뒤란에 있었고 터줏대감을 모신 터줏자리도뒤란에 있었다. 울타리는 개나리로 치고 열매 맛은 별로지만 꽃이 장한돌배나무와 개살구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고, 앵두나무가 여러 그루, 그리고바닥에선 딸기가 해마다 저절로 음침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개나리울타리 밑에선 꽈리가 지천으로 자랐고 장독대로 올라가는 둔덕은 층층의단은 만들어 일년초를 심도록 돼 있었다.
혼자 쓸쓸히 놀던 뒤란에 이제 동무들을 끌어들이거나 동무들하고 온동네를 휘젓고 다니거나 내 마음대로 였다. 할아버지가 무력해진 것은 곧집안의 법도에 구멍이 뚫린 거라는 것을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건만알아차리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누렸다. 하다못해 뒷간까지도 놀이터로만들었다. 할아버진가 뒷간에서 넘어져서 반신불수가 되셨기 때문에뒷간에서 넘어지면 어떡하나 겁을 먹은 것도 잠시고 뒷간은 내 유년기의추억어린 여러 놀이터 중에서도 가장 환상적인 놀이터였다.
우리 고장에 내려오는 뒷간 얘기는 다 도깨비 얘기였지만 무서운도깨비는 아니고 조금은 못나고 유쾌한 도깨비였다. 코가 막혀 냄새를 못맡는 도깨비가 뒷간에서 밤새도록 똥으로 조찰떡을 빚는다고 했다. 재를콩고물이나 팥고물인 줄 알고 맵시 있게 빚은 조찰떡을 재에다 굴리기를되풀이하면서도 아까워서 한 입도 맛을 안 보다가 새벽녘에 다 빚고 나서비로소 맛을 보고는 퉤퉤, 욕지기 하면서 홧김에 원상대로 휘젓고 간다는것이다. 만일 한창 그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기침을 안 하고 뒷간문을열면 도깨비는 들킨 게 무안해서 얼른 "조찰떡 한 개만 잡수." 하면서 그중에서 제일 큰 걸 내놓는데 안 먹으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것이었다.
도깨비 얘기 말고 이런 것도 있었다. 동짓날 팥죽을 맛있게 쑨 며느리가한 그릇 먹는 것만으로는 감질이 나서 식구 몰래 한 그릇을 더 퍼가지고뒷간으로 갔더란다. 며느리보다 앞서서 팥죽을 몰래 먹으려고 뒷간에 와있던 시아버지가 며느리가 들이닥치자 놀라서 팥죽 그릇을 얼른 머리에다썼다고 한다. 며느리 또한 임기응변으로 "아버님 팥죽 잡수세요." 하면서가져온 팥죽 대접을 앞으로 내밀자 시아버지 왈 "얘야, 난 팥죽을안먹어도 이렇게 팥죽 같은 땀이 흐르는구나." 했다는 것이다. 두 이야기는다 뒷간에 갈 때는 반드시 문 앞에서 인기척을 내라는 걸 훈계하기 위해어른들이 흔히 해 주던 얘기였다.
시골 뒷간에 대해 공포감부터 갖고 있는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구역질이날 소리지만 실제로 우리 고장 뒷간은 팥죽을 먹어도 좋을 만큼 청결했다.
칸살도 서너 칸은 되게 넓었고, 어른이 일을 보는 데는 한 켠에 나무로 된틀이 따로 있었지만 아이들은 땅바닥에 앉아서 보게 돼 있었다. 아이들이똥을 누는 헛간 같은 흙바닥은 뒤쪽이 낮아서 똥이 자연히 낮은 데로떨어지게 돼 있지만 깊지는 않았고, 그 낮은 곳은 아궁이의 재를 갖다버리는 곳을 겸하고 있었다. 물색없이 키만 큰 사람을 똥 친 막대라고하듯이 아주 긴 나무막대기 끝에 네모난 나무판자가 달린 똥 치는막대기가 준비돼 있어 아이들도 자기가 눈 것을 잿더미 속으로 밀어넣을수가 있었다. 뒷간의 그런 구조를 모르면 도깨비가 조찰떡에 콩고물팥고물을 묻힌 얘기도 물론 이해하지 못하리라.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조석으로 뒷간바닥을 쓸어 선명한 싸리빗자루자국을 내놓았다. 퇴비와 함께 인분을 거름으로 쓸 때였다. 농토에 비해인구가 적어 늘 인분이 달렸다. 뒷간에 재를 갖다 버리는 것도 인분을 안보이게 하려는 목적과 함께 인분의 거름으로서 효용가치와 분한을늘리려는 목적도 있었을 거이다.
어떤 때는 송도까지 나가서 인분을 사 오는 수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개성 깍쟁이들은 오줌 똥에다 물을 타서 똥 지게 수효를 늘려서 팔았다고욕들을 하곤 했다. 그렇게 욕하는 마을 사람 또한 개성 깍쟁이여서 마실갔다가도 오줌이 마려우면 제 집 밭머리에 와서 누지 남의 밭에 누는 법이없었다.
어려서 그런 계산까지 한 것은 아니건만도 뒷간에 갈 때는 동무들하고떼로 몰려서 갔다. 소꿉장난을 하다가 한 아이가 술래잡기를 할래? 하면우르르 따라 하듯이 누군가가 뒷간에 가자 하면 똥이 안 마려워도 다들따라가서 일제히 동그란 엉덩이를 까고 앉아 힘을 주곤 했다. 계집애들도치마 밑에 엉덩이를 쉽게 깔 수 있는 풍차비지를 입을 때였다. 대낮에도뒷간 속은 어둑시근해서 계집애들의 흰궁둥이가 뒷간 지붕의 덜 여문 박을으스름 달밤에 보는 것처럼 보얗고도 몽롱했다.
엉덩이는 깠지만 똥이 안 마려워도 손해날 것은 없었다. 줄느런히앉아서 똥을 누면서 하는 얘기는 왜 그렇게 재미가 있었는지, 가히환상적이었다. 옥수수 먹고 옥수수같이 생긴 똥을 누면서 갑순네 누렁이가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았는데 누렁이는 한 마리도 없고 검둥이하고흰둥이하고 흰 바탕에 검정 점이 박인 것밖에 없으니 참 이상하다는 따위하찮은 얘기가 그 어둑시근하고 격리된 고장에선 호들갑스러운 탄성을지르게도 하고, 옥시글옥시글 재미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뒷간에서는 잘생긴 똥을 많이 누는 게 수였다. 똥은더러운 것이 아니라 땅으로 돌아가 오이 호박이 주렁주렁 열게 하고,수박과 참외의 단물을 오르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본능적인 배설의 기쁨뿐 아니라 유익한 것을 생산하고 있다는 긍지까지맛볼 수가 있었다.
뒷간도 재미있지만 뒷간에서 너무 오래 있다 나왔을 때의 세상의아름다움은 유별났다. 텃밭 푸성귀와 풀숲과 나무와 실개천에서 반짝이는햇빛이 너무도 눈부시고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어 우리는 눈을 가느스름히뜨고 한숨을 쉬었다. 뭔가 금지된 쾌락에서 놓여난 기분마저 들었다. 훗날학생 입장 불가의 영화를 교복의 흰 깃을 안으로 구겨 넣고 보고 나와세상의 밝음과 낯섦에 접할 때마다 나는 유년기의 뒷간 체험이 되풀이되고있는 것처럼 느끼곤 했다.
그로부터 더 오랜 훗날 이상의 권태라는 수필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놀이기구라고는 없는 오륙 명의 시골 아이가 무얼가지고 어떻게 놀아야될지 몰라 돌멩이로 풀을 짓이기다가 곧 싫증이 나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벌리고 괜히 기성을 지르다가 맨 나중에는 나란히 앉아서 대변을 한무더기씩 누더라는 얘기였다. 이상은 그것을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창작유희라고 묘사해 놓고 있었다. 그런 설명이 없더라도 그의 뛰어난글솜씨 때문에 돌파구 없는 권태의 극치가 섬뜩하도록 실감되는 글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뼛속까지 서울내기인 이상의 감수성이 만들어낸 관념의 유희일 뿐 정말은 그렇지 않다. 시골 애들은 심심해서 어떻게살까 불쌍하게 여기는 건 서울내기들의 자유이지만 내가 심심하다는의식이 싹트고 거기 거의 짓눌리다시피 한 것은 서울로 오고 나서였다.
서울 아이들의 장난감보다 자연의 경이가 훨씬 더 유익한노리갯감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호들갑일 뿐, 그 또한 정말은아니다.
우리는 그냥 자연의 일부였다. 자연이 한시도 정지해 있지 않고 살아움직이고 변화하니까 우리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농사꾼이 곡식이나푸성귀를 씨 뿌리고, 싹트고 줄기 뻗고 꽃피고 열매 맺는 동안 제아무리부지런히 수고해 봤자 결코 그것들이 스스로 그렇게 돼 가는 부산함을앞지르지 못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삼시 밥 외의 군것질거리와소일거리를 스스로 산과 들에서 구했다. 삘기, 찔레순, 산딸기, 칡뿌리,메뿌리, 싱아, 밤 도토리가 지천이었고, 궁금한 입맛뿐 아니라 어른을기쁘게 하는 일거리도 많았다. 산나물이나 벗이 그러했다. 특히항아리버섯이나 싸리버섯은 어찌나 빨리 돋아나는지 우리가 돌아서면 땅밑에서 누가 손가락으로 쏘옥 밀어 올리는 것 같았다. 마을 도처에 흐르는실개천에서 물장구치며 놀 때도 누가 해진 체 하나만 가지고 나오면오도방정떨기 선수인 보리새우를 얼마든지 건져 올려 저녁의 된장국을구수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었다. 가지고 놀 것도 다 살아 있는것들이었다. 왕개미의 새큼한 똥구멍을 핥아 보다가 불개미떼들한테종아리를 뜯어먹히기도 했고, 잠자리를 잡아서 날씬한 꽁지를 자르고 대신더 긴 밀짚 고갱이를 꽂아서 날려 보내기도 했다.
풀로 각시를 만들어 쪽찌어 시집 보낼 때, 게 딱지로 솥을 걸로솔잎으로 국수 말고 새금풀로 김치를 담갔다. 마지막으로 쇠비름 뿌리를뽑아 열심히 "신랑 방에 불켜라. 각시 방에 불켜라." 주문을 외면서손가락으로 비벼서 새빨갛게 만들어서 등불을 밝혀 주었다. 가지고 놀것은 무궁무진했고 우리는 한번도 어제 놀던 걸 오늘 또 가지고 놀 필요가없었다.
뙤약볕에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실개천이 합쳐져서 냇물이 된 동구밖까지 원정을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만나는 소나기는 실로장관이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을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행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 치기 시작하나.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뛴다.
불안인지 환희인지 모를 것으로 터질 듯한 마음을 부채질하듯이 벌판의모든 곡식과 푸성귀와 풀들도 축 늘어졌던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웅성대며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미친 듯한환성을 지르며 비를 흠뻑 맞았고, 웅성대던 들판도 덩달아 환희의 춤을추었다. 그럴 때 우리는 너울대는 옥수수나무나 피마자 나무와 자신을구별할 수가 없었다. 환희 뿐 아니라 비애도 자연으로부터 왔다.
내가 최초로 맛본 비애의 기억은 앞뒤에 아무런 사건도 없이 외따로인채 다만 풍경만 있다. 엄마등에 업혀 있었다. 막내라 커서도 어른들에게 잘업혔으니 다섯 살때쯤이 아니었을까. 저녁 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듯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을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전한 비애였다.
그와 유사한 체험은 그 후에도 또 있었다. 바람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느껴지는 저녁나절 동무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올 때, 홍시빛깔의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이삭을바라볼 때의 비애를 무엇에 비길까.
그때만 해도 엄마 등에 업혔을 때하고는 달리 서러움을 적당히고조시키고 싶어 꾀까지 썼다. 어떡하면 저 수수이삭을 건들댐이 더슬프고 쓸쓸하게 보일까, 그 적당한 시점을 잡느라 키를 낮춰보기도 하고고개를 요리조리 돌려 보기도 하다가 풀숲에 아예 누워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가슴에 고인 슬픔이 눈물이 되어 흐르길 가만히 기다렸다.
할아버지가 동풍이 들어 집안이 우울하고 기강이 해이해진 동안은 나의전성시대였다. 할아버지가 정정하셨을 때 집안 여자들을 송도 나들이도들일도 안 시켰던 것처럼 내가 동무들과 어울려 싸돌아 다니는 것도질색이었다. 할아버지는 다행히 왼쪽 팔다리만 마비가 되었다. 동풍초기에는 출입을 못 하게 된 울화증으로 식구들을 들볶았지만 차츰 그불편한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 한도내에서 소일거리를 찾게 되었다.
그건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는 거였다. 우리 집 사랑이서당이 되었다. 숙부들이 사년제 소학교를 나온 걸 인근에서는 신학문을한 걸로 쳐 줄 만큼 개화가 더딘 고장이었기 때문에 한문을 진서라고 믿고숭상하는 풍조가 남아 있었다. 한글은 언문이라고 해서 낮게 쳤는데배우기가 쉽다는 것도 업신여기는 까닭 중의 하나였다.
할아버지의 서당은 잘 되었다. 박적골 사람들 뿐 아니라 고개 너머마을에서도 아들들을 우리 서당으로 보냈다. 사랑에선 온종일 글 읽는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괜히 잘난 척할 때보다 마을 사람들이우리 식구를 대하는 태도도 훨씬 달라졌다. 나는 노인들까지 나한테굽실댄다고 느낄 정도였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나도 사랑으로 불러 냈다. 나는 그날부터 천자문을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내 몫으로 준 천지문 책엔언문으로 토가 달려 있었다. 언문이 우리글인 한글이라는 것도 모를때였지만 나는 그때 이미 언문을 반쯤 깨친 상태였다. 엄마가 가르쳐주었는데 가르치는 방법이 매우 우격다짐이었다. 자기는 하룻밤새에배웠으니까 나도 그래야만 한다는 식이었다.
엄마는 동네 여자들의 편지를 도맡아 대필해 줄만큼 그 마을부녀자들중에서는 그래도 유식한 편이었다. 마을 부녀자들이 엄마한테 편지를 써달라고 오는 건 대개 밤늦은 시간이었다. 자다 깨서 흐릿한 등잔불 밑에서두루마리 종이를 풀어 가며 붓을 잡는 엄마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한사람씩 오기가 뭣해서 엄마가 한가한 시간을 타서 그렇게 한꺼번에 일을보러 오는 것 같았다.
엄마가 다 쓴 편지를 읽어 줄 때면 여자들은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기도 하고, 넋 나간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기도 했다. 그런 여자들한테둘러싸인 엄마의 표정은 딴 사람처럼 으리으리했고, 목소리는 장중했다.
그럴 때 나는 우리 엄마하고도 달라 보이고, 딴 여자들하고도 달라 보이는엄마가 두렵고 자랑스러워 가슴이 울렁거렸고 다음 날 아침에 깨면 꿈을꾼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는 자신이 언문을 읽고 쓸 수가 있기 때문에 마을에서그만큼 잘난 척을 할 수 있으면서도 언문의 내력에 대해선 여간무식하지가 않았다. 무식하다 못해 무지막지했다. 세종대왕이 만든글이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대왕이 뒷간에 앉아 뒤를 보는 동안문살을 보고 생각이 떠올라 당장에 만든 글자라는 것이었다.
글자모양이 문살을 대강 뜯어 맞출 수 있게 생겨서 그런 말이생겨났는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그렇게 쉬운 글을 깨치는 데 오래 걸리면바보 취급을 하려고 그걸 특별히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그런 줄 알다가 해방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글이 언문이 아니라자랑스러운 우리 한글이고 세종대왕과 학자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노심초사해서 만들었나를 알게 되었다.
금방깨치지 못하면 바보가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엄마가 써준가갸거겨를 줄줄 외기는 했지만 깨친 건 아니었다. 그걸 이용해서 어떻게뜻이 있는 낱말이나 문장을 만드나도 몰랐고, 그걸 시험해 볼 만한 읽을거리도 집안에 없었다. 엄마가 손수 베낀 이야기책이 안방에 여러 권있었지만 그건 한줄 한줄이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는 것처럼 흘려서 쓴것이어서 엄마가 또박또박 써준 가갸거겨하고는 생판 다른 나라 글자같았다. 깨치기는커녕 내 눈엔 단 한 자도 아는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가 서울 간 후 할머니가 때때로 "가에다 기역 하면 각, 니은 하면간." 하는 식으로 뚱겨 주시지 않았으면 그나마 아주 까먹었을 것이다.
엄마는 무슨 배짱인지 혹은 교만인지 아주 조금밖에 안 가르쳐 주고도 다알기를 바랐고, 또 그렇게 믿으려 들었다. 나로서는 깨쳤다기보다는 깨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중간하던 언문이 하늘 천, 따 지 하고할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천자문을 따라 읽으면서 비로소 문리가 텄다.
한자 밑에 붙은 언문 토가 바로 그 소리라는 걸 알게 되자, 한문보다 언문읽는 데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그건 일거양득이었다. 두 상이한 문자끼리 서로 커닝을 할 수가 있었기때문에 할아버지로부터는 한번 가르쳐 주면 안 잊어버리는 아이라는칭찬을 들을 수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장가 가게 생긴 다 큰 머슴애가글을 안 외워 왔다고 종아리를 치실 때도 나의 총명을 예로 들어 가면서호령을 하셨다. 나는 의기양양했지만 천자문 다음에 배우는 책에는 언문토가 없는 게 은근히 겁이 났다. 내 총명의 허구가 드러나고 말 테니까.
그러나 할아버지의 서당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동풍이드신 것이다. 이번 동풍은 뒷간에서 넘어지는 것 같은 극적 사건 없이왔는데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다운 마지막 위풍까지 꺾어 버린 참담한것이었다. 오른쪽 수족까지 떨려서 간신히 회복됐던 뒷간 출입도 못 하게되었고 수저질도 어줍어서 국 국물을 줄줄 흘리셨다. 말씀을 할 때도 침이흘러 그런 것들을 닦아 낼 베수건을 늘 무릎에 놓고 앉아 계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눌해졌지만 여전히 쨍쨍한 음성으로 나를 불러잔심부름을 시키거나 말벗을 삼으려 드셨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할아버지가 불쌍해서 안 보고 싶은데도, 우두커니 있다가 지치거나 울화가치밀면 나를 부르시는 것 같았다.
먹을 갈게 하고 편지를 쓰실 적도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아주 오래걸려서 삐뚤빼뚤한 필적을 남겼다. 도저히 누가 알아볼 것 같지 않은글씨여서 나는 속으로 나한테 먹을 갈게 하려고 일부러 심술을 부리고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받기도 하는 유일한분이셨다. 엄마나 오빠도 문안 편지를 올렸고 딴 데서 오는 편지도 꽤있었다.
자연히 우리 사랑은 사흘에 한 번씩 오는 우체부가 쉬어가는 장소였다.
전할 편지가 없을 때도 부칠 편지가 있나 하고 들렀다. 그 때는 편지 부칠일이 있으면 우체부한테 맡기면 되었다. 할아버지도 우체부를 기다리고반가워하고 붙들고 얘기시키기를 좋아했는데 이차로 동풍이 들고 나선더욱 그랬다.
우체부는 가방 속에 든 편지보다 여러 동네를 돌면서 보고 들은 소문이훨씬 더 풍부했다. 할아버지가 그를 쉬어 가라고 사랑 마루에 붙들어앉히면 나는 냉큼 안에다 연통을 해서 입맛 다실 걸 내오도록 했다. 그건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묵계 같은 거였다. 그런 나를 할아버지는 "요, 입의혀 같은 거." 하면서 예뻐하셨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베수건에 싸서 감춰 놓았던 삶은 밤이나 떡쪼가리같은 걸 상으로 주실 때는 정말 싫었다. 음식 국물과 침을 닦아 내는 데쓰는 베수건은 늘 눅눅하고 시척지근한 냄새가 났다.
심부름을 잘못해 꾸중을 들을 적도 있었다. 한번은 급한 소리로부르시기에 달려갔더니 화롯불이 사위어 담뱃불을 붙일 수가 없으니성냥을 켜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성냥불을 켜 본 적이 없었다.
며느리가 불씨를 꺼트리면 쫓겨날 정도의 옛날은 아니었지만 더울 때도 집어딘가에 화로가 있어서 성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다 남이켜는 걸 본 적은 있어도, 내가 직접 그걸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울상을 짓자 할아버지는 나더러는 성냥갑만 잡고 있으라고 하시곤당신이 성냥개비를 그으려고 하셨지만 손이 떨려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불쌍하던지 차마 바로 보기 민망했다. 딴 일도아니겠다 그까짓 담배 피우는 일 그쯤 해서 단념을 하셨으면 좋으련만이번에는 당신아 성냥갑을 잡고 있을 테니 나더러 성냥개비를 그어 보라고했다. 만일 내가 힘껏 그어 내 손끝에서 확 불이 일어나면 나는 그걸내던지고 말 것 같았다. 그러면 움직이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그냥 타 죽고 말 것이 아닌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나는 마치 내가그 일을 저지른 것처럼 공포에 질려 큰 소리로 울면서 사랑을 뛰쳐나왔다.
나는 그때 참 잘 우는 아이였다.
그러나 불에 대한 내 무섬증은 그럴 만한 내력이 있었다. 나는 그전부터불을 낼 뻔한 계집애란 소리를 들어 온 바가 있었다. 오빠가 개성에 있는북부 소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언젠가 집에 다니러 올 때 화경을 가지고 온적이 있었다. 까만 테를 두르고 손잡이가 달린 그 작은 화경은 아마 이과시간의 실습교재였을 것이다.
그 동그란 유리로 비춰 보면 오빠의 눈이 황소 눈깔처럼 커 보이기도하고, 내 손가락이 엄마 손가락처럼 굵어 보이기도 하는 걸 내가 하도재미나하니까 오빠는 더 신기한 걸 보여 주었다. 화경으로 햇빛을 모아종이를 태우는 게 왜 그렇게 신기했던지.
동그란 유리를 통과한 햇빛이 점점 도타워지고 오므라들면서 꼭 칠흑속에 숨은 고양이 눈깔처럼 요괴롭게 빛나다가, 마침내 종이에서 모락모락연기를 뿜어올리고, 구멍을 내고, 구멍이 실고추처럼 가늘고 새빨갛게종이를 먹어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동안 나는 숨이 막히고 배창자가쪼글쪼글 오그라들면서 오줌이 마려웠다.
그날 밤 나는 정말 오줌을 쌌다. 그래서 요즘도 나는 아이들이 불장난을하면 오줌 싼다는 항간의 속설을 믿는다. 거기까지는 기억이 선명한데 그후에 내가 불을 낼 뻔했다는 사건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어른들한테들은 얘기대로라면 추수하고 나서 이엉을 엮으려고 헛간에 쌓아 놓은 짚단사이에서 몰래 화경 장난을 하다가 그만 지푸라기에 불이 붙었다는것이다.
사랑 마루에서 대문을 중심으로 반대쪽은 마당에 널어 놓은 곡식이나고추 따위가 소나기를 만났을 때 얼른 거둬들일 수 있도록 지붕만 있고문은 없이 바깥으로 열린 헛간이었다. 불을 처음 발견한 이웃집새댁은마침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던 중이어서 이고 있던 물동이를 곧장쏟아부어 쉽게 불을 끌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하마터면 집을 태울 뻔한 불상사인데도 왜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져버렸는지, 내 기억력 중 특히 어릴 적 기억에서 자신이 있다가도 그대목에선 고개가 갸우뚱해지면서 어른들이 혹시 내 불장난을 막아 보려고꾸미거나 과장한 얘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된다. 그래도 불을 낼뻔한 계집애란 소리는 오랫동안 내 의식을 짓눌렀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성냥불 켜는 걸 두려워해서 불편 할 적도많았지만, 할아버지 담뱃불을 못 붙여 드렸을 때가 가장 슬펐다.
할아버지를 위해서 무언가 내 속의 한계 같은 걸 박차 보려고허둥대면서도 그렇게 안 되던 조바심과, 난 왜 이렇게 못났을까 싶은자기혐오 등, 복잡한 심리적 갈등까지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2. 아득한 서울
할아버지의 두 번째 동풍으로 집안엔 더욱 먹구름이 끼고 가세가 기우는걸 어린 마음에도 느낄 수가 있었다. 작은숙부 내외도 서울로 떠났다.
엄마에게 고무된 바가 컸다. 엄마가 먼저 서울을 개척했으니 과연잘나기는 잘난 엄마였다. 엄마를 괘씸하게만 여기던 어른들의 마음도 많이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건 누그러졌다기보다는 굽잡히고 있는 건지도몰랐다.
엄마는 지난 방학에도 교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오빠를 데리고 내려와방학을 보내는 동안 몹시 당당했고 오빠가 얼마나 들어가기 어려운공립학교에 들어갔나 은근히 자랑을 했다. 거기만 나오면 총독부나 부청에취직하는 건 문제도 없다고 했다.
우리 집안은 겨우 까막눈이나 면한 시골 선비 집안이었다. 부끄럽지만할아버지도 양반 타령만 유별났지 민족적 자부심이나 역사의식이 있는분은 못 되었다. 할아버지의 양반 노릇은 오직 우리보다 낮은 양반을무시하는 것이었고, 양반으로서의 책임감이 있다면 자식들 혼사를 맺을 때우리와 걸맞은 양반 중에서도 우리 하고 같은 노론 집안하고만 맺어야한다는 고집 정도였다. 남을 높이 보거나 우습게 볼 때 할아버지가 가장잘 하시는 말씀도 다 속여도 뼈다귀만은 못 속인다는 단정이었다.
이 정도의 알량한 양반 의식밖에 없었으니까 일본 관청이라도 관청에만다니면 벼슬인 줄 알고, 장손이 장차 집안을 일으킬 만큼 출세하는 꿈에부풀 수가 있었다. 할아버지까지 그 정도였으니 식구 중 누가 감히 출세가보장된 아들을 둔 엄마를 깔볼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작은숙부까지엄마를 언덕삼아 서울로 간 마당에.
그때까지도 두 숙부가 다 아이가 없었다. 막내숙부까지 떠나자 집안이더욱 횅해졌다. 그 집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지었다고 했다.
삼형제가 한집에서 양친부모 모시고 자식을 많이 낳아 길이길이 화목하고번성하자고 널찍널찍하고도 오밀조밀하게 지은 집이었다.
식구가 주니까 괜히 청승을 떨 만한 구석도 많아졌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사랑 마루 가운데 기둥에 오도카니 기대 앉아 하염없이 동구 밖을바라보는 것만큼 마음에 드는 청승떨기도 없었다. 그러고 있다가식구들한테 들키면 누구든지 내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을 알아주었다. 특히할머니는 황망히 당신의 품안에 포옥 싸안기부터 하면서 잠긴 소리로"불쌍한 내 새끼." 소리를 되뇌었다.
식구들은 내가 그러고 앉아 엄마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들이 그러니까 그런 것도 같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를 기다릴 때와 같은감미로운 설렘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기다림은 나로서는 처음 맛보는생소한 느낌이었다. "우리 엄마가 농바위 고개까지 왔으면 내엄지손가락이 가운뎃손가락에 척척 붙어라." 이런 점을 골백번 쳐 봤댔자들어맞지 않을 게 뻔한 기약 없는 기다림을 내가 하고 있다고 믿고 싶지도않았다. 그래서 누구 입에서라도 제가 엄마 생각이 나서 저렇게 풀이죽었단 소리만 나오면 발광을 하듯이 울어 댔다. 그러나 온몸으로아니라고 부정할수록 그건 점점 확실해졌다.
손가락점보다 더 강력한 게 통한 것처럼 어느 날 엄마가 홀연히나타났다. 방학 때도 아닌데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돌아온 엄마를보자 나는 무엇보다도 엄마도 나를 보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었다는 걸확인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엄마는 단지 내가 보고 싶어서 온게 아니라 서울로 데려가려고 왔다고 했다. "너도 서울 가서 학교에가야지." 엄마가 말했다. 나는 좋은지 싫은지 알 수가 없었다. 서울이란데를 동경한 것도 같지만 거기서 학교를 다닌다는 일은 상상해 보지않았다. 엄마의 의도를 안 할머니가 먼저 "세상에, 계집애를 소학교부터서울에서?" 하고 기함하는 소리를 내셨다. 다시 집안에 분란이 일어났다.
"네가 무슨 짓을 해서 서울서 돈을 얼마나 벌었기에 계집애를 다 서울서공부를 시키겠다는 게냐, 응? 누가 들을까 봐 겁난다."
할머니는 이런 막말까지 하셨다. 엄마가 아무런 대꾸도 안 하자 "느이아버님 저 모양 되셔 갖고 순전히 쟤 하나 들락날락하고 슬하에서고물고물하는 거 바라보는 낙으로 사신다. 그래도 네가 쟬 데려가야옳겠냐? 증말 너무한다 너무해."
이렇게 애걸로 바꾸어도 엄마의 마음이 돌아선 것 같지 않았다.
할머니는 작전을 바꾸어 나한테 종주먹을 댔다. "너 할미가 좋으냐?
에미가 좋으냐? 후딱 대답해봐, 요년아. 할미가 좋으면 엄마한테 할미하고살겠다고 말해. 후딱."
그럴 때 나는 "몰라, 몰라." 하고 우는 게 수였다. 어린 나이에 도무지이해할 수 없는 궁지였다. 어른 된 후에도 나는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좋으냐? 따위 질문을 어린애한테 하는 사람을 보면 싫은 생각이 들곤했다.
소용없는 분란에 먼저 종지부를 찍은 건 엄마였다. 실상 엄마에겐 마냥그러고 있을 시간도 없었으리라. 엄마는 아무에게도 상의 안 하고, 심지어나한테도 안 물어 보고 내 머리를 빗겨 주는 척 하면서 싹둑 잘라 버렸다.
나는 그때까지 우리 동네 계집애들이 다 그랬듯이 종종머리를 땋고있었다.
종종머리란 계집애들이 댕기를 들여 길게 머리꼬랑이를 땋을 수 있게되기 전까지 빗는 머리로, 정수리로부터 머리칼을 바둑판처럼 나누어가닥가닥 땋다가 색실이나 헝겊오라기를 들여 끝마무리를 하는 머리였다.
손이 많이 가고 매일 손질해 주지 않으면 두억시니같이 돼 버리기 때문에머리만 봐도 집에서 위해 기르는 아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가 있었다.
내 머리는 고모가 시집가기 전서부터 취미 삼아 가꾸며 길들여 놓은 걸숙모가 이어받아 늘 단정하고 반들반들하게 빗겨 놓아, 난 그게 은근히자랑스러웠다. 어려서부터 혹시 누가 나한테 예쁘다든가 앙증맞다는소리를 하면 내 머리를 가지고 그러는구나, 알아차릴 만큼 내가 가진 것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거기도 했다.
그런 머리를 엄마는 싹둑 잘라 냈을 뿐 아니라 뒤를 높이 치깎고되통수를 허옇게 밀어 버렸다. 서울 애들은 다들 그런 머리를 하고 있다고엄마는 내가 앙탈할 새도 없이 윽박지르기부터 했다. "세상에, 망칙해라."
할머니도 벌린 입을 못 다물었고 나도 이마에서 일직선으로 자른앞머리보다 뒤통수의 허전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약했다. "알라리꼴라리, 누구누구는 뒤통수에도 얼굴이 달렸대요." 당시의 단발머리는 뒤를너무 높이 깎아 정말 뒤에도 얼굴이 달린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동무들의 놀림을 받으면서도 믿는 데가 있어서 그다지 기죽지 않았다.
"서울 아이들은 다 이런 머리를 하고 있단다. 너희들은 모르지만."
나는 재빨리 그것도 모르는 동무들을 얕잡고 있었다. 내 단발머리는할머니를 단념시켰을 뿐 아니라 내 마음도 시골에서 뜨게 했다. 어서엄마하고 떠나고 싶었다.
할아버지께 하직 인사를 드리러 사랑에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나를 바로보지 않고도 모든 걸 다 아시는 듯 "어허, 망칙한지고." 하고 한 번 크게꾸짖으셨다. 그러고는 쌈지를 뒤적여 오십전짜리 은전 한 닢을 던져주셨다. 이왕 주실 거 던져 주실 게 뭔가, 자존심이 상했지만 나는 장판을데구루루 구르는 은전을 손바닥으로 덮쳐서 꼭 쥐고 고맙습니다, 라고인사를 올렸다. 나의 굴욕감보다는 할아버지의 상심에 더 위로가 필요할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약한 마음을 내보이시면 울어 버릴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어서 물러가라고 역정을 내셨다.
엄마는 이렇게 어른들의 노여움을 살 짓만 했지만, 맏며느리에다 손귀한 집 장손의 엄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맨손으로 서울이라는 눈 감으면코 베어 간다는 대처에다 최초로 말뚝을 박은 담대한 여자였다. 어른들이미워하면서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밖에 싸 놓은 짐만 봐도 알 수가있었다. 사람까지 사서 곡식이랑 고춧가루랑 올망졸망한 자루들을 한 지게실어 놓고 있었다. 할머니도 나들이옷을 떨쳐입고 우리를 따라 나섰다.
개성까지의 이십 리 길은 멀고도 멀었다. 고개를 넘고 들을 지났다. 들과산이 있으면 마을도 있었다. 박적골보다 큰 마을도 있고 작은 마을도있었지만 마을이 앉은 자리나 집의 생김새가 비슷해서 조금도 낯설거나신기하지 않았다. 마을도 그냥 늘 봐 온 자연의 일부였다. 네 번째로당도한 고개가 마지막 고개인 농바위 고개라고 했는데 유난히 가팔랐다.
아마 다리가 아파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 고개만 넘으면 송도니까힘내라고 엄마가 말했다. 허위허위 숨을 몰아쉬는 나를 엄마가 뒤에서밀어 주었다. 입 속이 바싹 마르게 힘들여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발 아래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말로만 듣던 송도였다. 나는탄성을 질렀다.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길도 집도 왜 그렇게새하얗게만 보였던지. 나중에 안 것이지만 송도고보, 호수돈고녀를 비롯한신식의 큰 건물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지었고, 토지도 사질이어서 길이나바위가 유난히 흰게 개성 지방의 특징이었다. 사람이 저렇게도 살 수 있는거로구나, 나는 벌린 입을 못 다물고 구 인공적인 정연함과 정결함에 오직황홀한 눈길을 보냈다.
그때였다. 네모난 건물 한귀퉁이에서 눈부신 불덩이 같은 게 이글거리는게 내 눈을 쏘았다. 여태껏 내가 본 어떤 빛하고도 달랐다. 불길이치솟지는 않았지만 불길보다 더 강렬한 빛이었다. 나는 두려워하면서엄마에게 매달렸다. 엄마는 바보처럼 굴지 말라고, 저건 유리창에 햇빛이비친 거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해가 뭐하고 부딪쳐 박살이 난 것 같은빛이었다. 엄마는 내가 유리창을 못 알아듣자 송도나 서울 같은대처에서는 집집마다 유리로 들창을 만든다고 했다.
박적골 집에도 유리로 만든 게 있긴 있었다. 어른들은 정종병이라고했는데 유리로 된 투명한 병을 툇마루 밑에다 두고 석유초롱에서 석유를조금씩 덜어다 두는 데 썼다. 그렇게 비치는 걸로 들창을 만든 집에서사람이 살다니, 신기하고도 불안했다. 아까 송도를 처음 보고 느낀황홀감도 반은 실은 불안감이었다. 나는 농바위 고개 위에 서 있는 게아니라 전혀 이질적인 두 개의 세계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
미지의 세계에 덮어놓고 이끌리면서 한편 뒷걸음질치고 싶었다.
가슴이 두근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서평화와 조화가 깨지는 소리였고, 순응하던 삶에서 투쟁하는 삶으로 가는갈림길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두려움이었다.
내리막길은 쉬웠다. 중간에 육면체의 큰 바위들이 마치 장롱을 한 마리무려 놓은 것처럼 제멋대로 모여 있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농바위고개였다. 바위 사이에선 달콤한 약수까지 샘솟고 있었다. 기다란 돈궤처럼누워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샘물로 목을 축였다.
마침내 송도로 진입했다. 철길을 건너고 반듯한 기와집들이 붙어 있는골목길을 지났다. 길바닥이 딱딱하고 유리창이 달린 이층 삼층의 네모난집들이 늘어선 한길로 접어들었다. 처음 보는 것 천지였지만 기죽지 말고두리번거리지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그러했으므로.
송도 거리에서의 엄마의 당당함이 어딘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게 되레나더러 닮기를 바라는 본보기처럼 보였다. 만나는 계집애 마다 나처럼뒤통수를 하얗게 민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것도 엄마에 대한 존경심을불러일으켰다. 한 가닥으로 땋아 댕기를 들인 처녀들은 더러 있었지만종종머리 딴 계집애는 한번도 못 만났다.
드디어 당도한 개성역은 웅장하고 그 안은 복잡하고 시끌시끌 했다.
여기서 어른을 놓치면 어떻게 될까? 여태껏 한번도 할 필요가 없었던상상이어서 그 공포감은 더욱 낯설고도 생생했다. 엄마가 그 많은보따리를 개찰구 가까이 포개 놓고 표를 사러 가고 하는 동안 나는 엄마의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표를 내고 나가니까 엄청나게 큰사닥다리가 공중에 걸려 있었다. 엄마는 그게 구름다리라고 했다. 그와중에도 서울역의 구름다리는 여기 댈 것도 아니게 크고 복잡하다는 서울자랑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짐이 많은 우리에겐 여간 힘든 길이 아니었다. 엄마도 이고 들고,입장권을 사 가지고 따라온 할머니도 이고, 나도 뭔가를 들고 열심히뛰었다. 엄마가 뛰니까, 남들도 다 뛰었다. 나도 죽자꾸나 뛰었다. 유리창이많이 달린 엄청나게 큰 구렁이 같은 기차에 얼떨결에 올라탔다. 할머니도따라 올라와 짐을 선반위에 얹는 걸 도와 주고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내가 앉은 자리에 달린 유리창 밖에 섰다. 할머니가 뭐라고그러는 것 같았지만 잘 안 들렸다. 유리창 밖에는 전송하는 사람들이 참많았다. 그 중에서도 할머니는 제일 작고 초라해 보였다. 그 초라함이 나를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유리창이란 얼마나 신기한가. 할머니에게 안겨'아이고 내 새끼.' 하고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따라 울고 싶었다.
나는 온몸으로 유리창에 달라붙었다. 얼굴만 얼음장에 눌리듯 사정없이퍼졌을 뿐 한치도 할머니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기차는 크고 구슬픈소리를 내지르고 나서 움직였다. 전송객도 따라 움직이다가 점점 안보였다. 나는 할머니도 따라 움직였는지 그냥 서 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펑펑펑 눈물이 마구 나왔다. 눈물이 안 나오는데도 소리내어 운 적은많아도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나오는데 엉엉 소리를 내지 않기는 생전처음이었다. 가슴이 쪼개지는 것처럼 힘들었다.
마침내 서울이었다. 과연 개성역보다 몇 배나 더 넓고 복잡한구름다리를 우리 모녀는 맨 나중에 처져서 헉헉대며 올랐다. 많은 보따리때문이었다. 딴 사람들은 웬만한 짐도 빨간 모자 쓰고 곤색 양복 입은짐꾼한테 맡기는데 엄마는 우리 보따리를 죄다 한몸에 주렁주렁 매달고고약한 꿈 속에서처럼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주 오래 걸려서 표 받는 데를지나 역전에 너른 마당까지 나올 수가 있었다. 엄마는 그 한가운데다보따리를 쏟아붓듯이 내던지고 주저 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모이고 흩어지는 가운데 나도 얼이 빠져서 여기가 서울이라는 생각도 나지않았다.
각설이떼처럼 너덜너덜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지게꾼들이 우리 곁으로우르르 몰려왔다. 서로 우리 짐을 지겠다고 난리였다. 물어 보지도 않고 짐먼저 실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에도 박적골에서 개성역까지 나올때처럼 지게에 짐을 싣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자 살 것 같았다. 그러나엄마는 전차 타고 갈 거라고 그들을 물리쳤다.
기차의 한 토막보다도 짧고 파란 전차가 등에다 뿔을 달고 한길한가운데를 달리는 게 보였다. 뿔하고 공중에 걸린 줄하고 사이에서 파란불꽃이 튀는 걸 보니까 전차를 타는 게 호기심보다는 겁이 났다. 말만그렇게 하고 엄마가 마냥 그 자리에 퍼더버리고 앉아 있으니까 흩어졌던지게꾼이 다시 하나 둘 모여들었다.
엄마가 그 중 한 사람을 지목해서 흥정을 시작했다. 엄마가 어떤기준으로 그를 골라잡았는지 그건 나의 이해력 밖의 일이었다. 엄마는턱짓으로 길 건너를 가리키며 조오기 서대문 밖까지 가는 데 얼마냐고물었다. 그가 얼마라고 말하자 그렇게는 안 하겠다고 벌써 싣기 시작한짐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그럼 얼마나 주실 거냐고 그쪽에서 물었다. 서로한참 에누리를 하고 나서 마침내 우리 모녀는 보따리에서 해방되어지게꾼을 앞서갔다.
번잡하고 시끄럽고 더러운 거리를 지났다. 사람들이 입은 입성도,땅바닥도 꾀죄죄한 먼지 빛깔을 하고 있었다. 전차가 지나가는 큰네거리를 지나자 행인도 좀 줄고 길도 개성의 한길가 비슷해 졌다. 저만치길을 가로막고 큰 문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독립문이란다." 엄마가말했다. 뒤따라오던 지게꾼이 거진 다 왔느냐고 숨찬 소리로 물었다. "조금더 갑시다." 엄마의 얼굴에 느닷없이 비굴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아,조금이 어디냐니까요?" "조오기, 현저동..." 엄마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그는 그 자리에 딱 버티고 서더니 누굴 놀리냐고, 그 산꼭대기를 누가 그돈 받고 가냐고 눈을 부라렸다. 엄마도 지지 않고, 평지면 전차를 타고편안히 가지 뭣하러 전차값 몇 곱절이나 주고 품을 샀겠느냐고 따지고나서, 막걸리 값은 더 생각하고 있으니 어서 가자고 달래기 시작했다. 오늘재수 옴 붙었다고 투덜대면서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엄마 입에서현저동이라는 말이 떨어지고 나서 그는 눈에 띄게 불손해졌다. 우리를넘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도대체 현저동이 어딘데 저러는 걸까. 나는눈치로 감을 잡은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다.
줄기차게 우리를 따라오던 네 줄의 전찻길이 끊긴 지점에서 엄마는골목으로 접어들었고 골목은 곧 깎아지른 듯한 층층다리로 변했다. 집들도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이상한 동네였다. 층층다리 양쪽도 다 그런 집들이었다. 집집마다 널빤지로된 일각대문은 있으나마나 하게 살림살이를 거리로 발랑 드러내고 있었다.
오줌과 밥풀과 우거지가 한데 썩은 시궁창물까지 층층다리 양쪽가장자리의 파인 데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허위단심 꼭대기까지 올랐는데도 동네는 계속됐다. 사람들이 겨우비비고 지날 만한 실 같은 골목을 한참이나 더 꼬불대며 오르다가 다시 첫번째 층층다리보다 더 불규칙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나고 그 중간에비켜선 층층대 위의 초가집 앞에서 엄마는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그동네서도 초가집은 드물었다. 그 집이나마 우리 집이 아니었다. 엄마는 그집 문간방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작은 쪽마루가 달린 문간방은 옹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사슴, 거북,불로초 따위를 울긋불긋 원색으로 그린 종이로 싸발라 놓은 반닫이가유일한 세간이었다. 우리 집 여자들은 들일을 안 하니까 장에 걸레칠시간이 많아서 그랬겠지만, 시골집 윗목의 장롱들은 유난히 반질반질했다.
할머니가 시집 오실 때 해 가지고 오셨다는 삼층장은 백통 장식이 떨어져나가 문짝을 건성으로 붙여 놓았건만도 나뭇결은 깊고 은은한 윤기를지니고 있었다.
장롱이 있는 윗방 한 귀퉁이에 있는 배가 부르고 목이 긴 초병은 또얼마나 보기 좋았던가. 불투명한 청회색 병에 너무 오래 초만 담아 놓아서독한 신 기운이 배어 나와 얼룩이 진 게 자연스러운 무늬처럼 보였다.
뒤란의 터줏자리와 함께 윗방의 초병은 나에겐 신령한 무엇이었다.
약주술이나 막걸리 같은 게 남으면 거기다 부어서 초를 만드는 것같았는데 작은 나방이 날아 나올 때도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 집 초맛이동네에서 제일 간다고 그 초병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지만 누가 초를 좀달라고 하면 우리 초맛을 따라가면 어떡하냐고 안 주셨다. 아주 엄숙하게그렇게 말하셨기 때문에 인심이 나쁘단 생각은 안 들고 그 안에 신비한힘이 깃들여 있는 것처럼 여기곤 했다.
모가지가 긴 초병과 나뭇결이 고운 장롱과 이 조화롭던 윗방이 잃어버린낙원의 한 장면처럼 가슴 뭉클하게 떠올랐다. 천 년을 내려온 것처럼안정된 구도에 익숙해진 나의 심미안에 조약한 원색으로 처바른 반닫이는너무도 생급스러웠다.


3. 문 밖에서
"여기가 서울이야?" 나의 항의 섞인 물음에 엄마는 뜻밖에도 아니라고대답했다. "여기는 서울의 문 밖이란다. 느이 오래비가 이담에 취직해서 돈많이 벌면 우리도 그때 가선 버젓이 문 안에서 살아 보자꾸나."
엄마가 이렇게 좋은 말로 달랬다. 그날 밤 늦도록 창 밖으론 사람이외치는 소리가 가까워졌다가는 멀어지곤 했다. "만주나 호야 호오야."
뭘 사라는 소리 같았지만 그게 뭔지 엄마한테 물어 보지 않았다. 별로궁금하지 않았다.
시골집에서도 가끔 울 밖에서 들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잠을 깬 적이있었다. 그럴 때는 어른들도 깨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저놈의승냥이가 왜 또 내려왔나."
이렇게 중얼대며 할머니가 일어나 앉으실 적도 있었다. 승냥이한테 닭이물려 갈까 봐 근심이 되시는 것 같았다. 울음소리는 들었어도 한번도승냥이를 본 적은 없었다. 나는 다시 승냥이 울음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서울서 사는 법도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건실상 서울살이의 법도라기보다는 샛방살이의 법도였다. 눈뜨자마자 뒷간이어디냐고 묻는 나에게 엄마는 변소는 안집 식구들이 다 다녀나온 다음에가는 거라고 했다. 뒷간을 변소라고 한다는 것은 기차간에서 이미 배운바가 있고, 한 사람씩 밖에 못 들어가게 돼 있는 안집 변소도 어제 한 번다녀나오긴 했어도 똥마려운 것까지 안집한테 양보해야 된다는 건 그날처음 알았다.
엄마는 한술 더떠서 "너를 데려오면서 안집한테 얼마나 눈치가 보인줄아니? 방얻을 때 두 식구라고 했거든. 주인집도 네 또래들이 있으니까싫어할 것 같아서." 이러는 게 아닌가. 속일게 따로 있지, 어떻게 있는자식을 없는 척할 수 가 있을까. 그 잘난 우리 엄마가? 오냐 오냐떠받드는 대우만 받다가 갑자기 천덕꾸러기로 전락을 하고 보니 엄마가싫고 다시 보였다. 나야말로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한테일러바치고 할머니한테 구원을 청하고 싶었지만 두 분은 너무 멀었다.
"안집 애하곤 안 노는 게 수다. 까딱하단 애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
"안집 애가 뭐 먹을 땐 쳐다보지도 마라."
"안집 애가 기지고 노는 걸 탐내거나 만져 보지 마라."
"안집엔 들어가지 않을수록 좋다."
숫제 새끼줄로 발목을 매 기둥에 매달아 놓는 게 낫지. 도대체 나더러어쩌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내가 있어도 없는 아이처럼 굴길바라고 있었다. 박적골이 좁다라고 천방지축 망아지처럼 뛰놀던 여덟살짜리에게 그게 얼마나 못 할 노릇인지 엄마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셋방살이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교 갈날이 임박하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가 가난하니까 사는 건 문 밖에서 살아도 할 수 없지만학교는 문 안에 있는 좋은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다. 그건 이미 엄마가그렇게 다 정해 놓은 일이었다. 내 의견 같은 건 듣고 말고 할 것도없었다. 그 때는 국민학교도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시험을 쳐야만 들어갈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 학교나 제 맘대로 시험을 칠 수 있는 건아니어서, 지금의 학구제처럼 사는 동네에 따라 갈 수 있는 학교가 정해져있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엄마가 벌써 지금의 주민등록에 해당하는기류계를 사직동에 사는 친척집에 옮겨 놓은 뒤였다.
문 안에 있는, 엄마 마음에 드는 학교 중에서 다시 나의 통학거리를감안해서 골라잡은 학교가 매동국민학교였다. 현저동에서 그 학교엘가려면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인왕산 자락이었다. 현저동 중턱에서성터가 남아 있는 근처까지 더 올라가면 사직공원으로 통하는 꽤 평탄한길이 나 있었다. 길이 험하진 않았지만 거의 사람의 왕래가 없는 휑한길이고,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숲속에 문둥이들이 득시글댄다고알려져 있었다. 시험 칠 날이 임박해서 엄마는 나를 데리고 그 길을답사하면서 문둥이에 대해 세상에 떠도는 끔찍한 말을 일소에 부쳤다.
문둥이가 애들을 잡아다가 간을 째먹는다는 말을 믿지 마라. 그사람들도 우리하고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 차마 못 하는 건 그 사람들도못 한다. 있지도 않은 걸 만들어서 무서워하는 것처럼 바보는 없다. 문둥이같은 사람을 만나도 놀라지도 도망가지도 말고 천연스럽게만 굴어라. 좋은거고 나쁜 거고 한눈팔지 말고 앞만 보고 걷는 게 수다.
엄마의 말투는 늘 너무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차 있어서 정말 옳은소리도 우격다짐으로 들렸다. 나는 그게 싫었다. 그러나 문둥이 얘기를 할때는 엄마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래도 나는엄마가 타일러 준 여러 가지 중에서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나는 왠지문둥이를 만나는 게 겁나지 않았다. 학교길을 답사하고 나서 본격적으로시험공부가 시작됐다. 넌 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도 엄마는하루에도 몇 번씩 예상문제를 만들어 가지고 나를 못 살게 굴었다.
이름쓰기, 수세기, 시계 보기, 더하기, 빼기 따위였다.
다 잘 했지만 내가 제일 싫은 건 주소를 두 개 외는 거였다. 엄마가처음 가르쳐 준 주소는 마땅히 기류계를 옮긴 사직동 주소였다. 나는그까짓 거 금방 외웠다. 그걸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엄마는 갑자기 내가길을 잃었을 때 그 주소를 대면 큰일이다 싶었나 보다. 현저동 집 주소도외울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켰다. 번지에다 호수까지 달린 긴 거였지만나불나불 뭐든지 암기를 잘 할 나이였으니 그 또한 어려울 게 없었는데도엄마의 걱정은 좀 지나쳤다. 필시 주소를 속여서 입학원서를 낸 게 양심에걸리는 순박함 때문이었겠지만, 두 주소를 금방 외자 이번엔 또 시험을 칠때 헷갈려서 잘못 말할까봐 근심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순전히 당신이안심하기 위해 나를 들볶았다. 가만히 있다가 불시에 "너 어디 살지? 느이집 어디야? 넌 지금 길을 잃은 거다."
그러면 난 현저동 주소를 대야 했다. 반대로 "느이 집 어디냐? 넌 지금선생님 앞에서 시험을 치고 있는 거야."
이렇게 물어 보면 사직동의 가짜 주소를 대야 했다. 엄마는 내가 행여나이 두 개의 주소를 헷갈릴까 봐 전전긍긍했다. 나는 문제없이 안 헷갈릴텐데도 엄마가 자꾸 그러니까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죽이 돼 버렸다.
엄마의 기습적인 질문에 잘못 대답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엄마는 저 맹추한테 괜히 주소를 두 개씩 가르쳐 주었다고 들입다후회를 하면서, 시험 날짜까지 현저동 주소는 아주 잊어버리고 있으라고했다. 잊어버리란다고 잊어버려지는 게 아니었다. 엄마가 그럴수록 그주소는 내 머릿속에 늘어붙었다. 사직동 주소는 물론이고 서울에서 그후에 거친 수많은 집의 주소를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현저동 46번지418호란 내 최초의 주소는 여태껏 안 잊어버리고 있다.
시험에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주소 때문에 머릿속이고 암기력이고엉망이 된 채 시험 날짜가 됐다. 엄마가 박적골로 데리러 올 때 해 가지고온 연두색 수단 두루마기를 입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도 새로 깎고 시험을치러 갔다. 주소 같은 건 물어 보지도 않았다. 바둑알을 네 개와 세 개로따로 놓고 모두 몇 개냐고 물었고, 신사와 학생이 서 있는 그림과중절모와 학생모가 있는 그림을 각각 보여 주면서 각자에게 맞는 모자를골라 보라고 했다. 그리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그림을 놓고 지금 바람이어디서 어디로 불고 있느냐고도 물었다. 문제를 세 개 내줬는데 나는 그중에서 두 개밖에 못 맞혔다. 바람이 연기가 나부끼는 반대 방향으로분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엄마는 주소를 안 물어 봤단 소리에 일단 안심을 하고 나서, 그래도틀린 문제가 나오자 실망이 여간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고단정을 했으면 그만이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 두루마기 자락,운동장 깃대 맨 꼭대기에 꼿힌 일본 국기 등을 맹렬하게 손가락질하면서"시방 바람이 어디로 부냐? 응 어디로 불어? 시상에, 그것도 모르다니떨어져 싸다 싸."
이러면서 분해했다. 운동장이 엄청나게 넓고 주위에 인가가 없었던매동학교 운동장엔 그날따라 왜 그렇게 바람이 세찼던지, 그날 저녁에엄마는 오빠를 붙들고도 내가 떨어진 걸 분해했다. "뚜껑은 열어 봐야알죠."
소학교를 열 살이나 돼서 보내서 아직 중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나하고나이 차이가 많이 지는 오빠는 과묵하고 사려 깊었다.
합격이 됐나 안 됐나는 엽서로 통지가 오게 돼 있었다. 물론 사직동가짜 주소로 오든지 안 오든지 할 것이다. 엽서가 오고도 남을 만큼넉넉하게 기다리고 나서 엄마는 시험 보던 날처럼 나에게 수단 두루마기를입혀 가지고 사직동 친척 집으로 갔다. 주소 때문에 지긋지긋하던 집을나는 그때 처음 가 보았다. 가면서 엄마는 여기가 바로 문 안이라는 것을누누이 강조했다.
과연 현저동보다 훨씬 정돈되고 아늑한 동네였다. 무엇보다도 집이비탈에 붙어 있지 않고 평지에 자리잡은 게 마음에 들었다. 친척 집은길게 바깥채가 길로 면해 있고 안채는 중문 안에 따로 있었다. 바깥채도기와집이긴 한데 시골집의 사랑채하곤 딴판이었다. 너절하고 구질구질하고냄새가 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거긴 사랑채가 아니라 행랑채라고 했다.
행랑채에 딸린 골목 같은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행랑 어멈이 엄마를보자 반색을 하면서 일어섰다. "아씨, 좋으시겠어요, 아가씨가 붙었대요."
그러면서 연방 굽실거렸다. 우리가 아씨니 아가씨니 하는 높임말로대접받기도 처음이었지만 엄마가 그렇게 거만하게 구는 걸 보기도처음이었다. "웬 수선인가, 그까짓 소학교 붙은 걸 가지고."
엄마는 갑자기 도도하게 굴었다. 중문을 들어가니까 딴 세상 같았다어른어른 비치는 유리문이 달린 대청마루는 화강암 깨끗한 댓 돌 위에높이 솟아 있고, 정갈하게 비질한 마당가엔 수도꼭지와 양회로 싸바른네모난 물확이 보였다. 물통을 들고 따라 들어온 행랑 어멈이 물확에서넘치는 물을 길어 담았다.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꼭지가 제일 신기하고부러웠다.
현저동엔 수도 있는 집이 없었다. 집집마다 물을 사 먹거나 길어다먹었다. 그 높은 층층다리 밑 평지에 있는 공동수도에는 언제나 두 개씩짝을 지은 물통 행렬이 끝도 없이 줄 서고 있곤 했다. 물통들은 다생철통으로 만든 거고 물지게에 늘어진 쇠고리가 잘걸리도록 홈이 파인나무 손잡이가 달린 거였지만, 물장수 물통과 손수 길어 먹는 집 물통이달랐다. 직업적 물장수 물통은 석유초롱하고 같은 규격의 네모난 통이었고,손수 길어 먹는 집 물통은 물장수 물통의 갑절은 들어가게 생긴원통형이었다. 통의 크기에 관계없이 물값은 한 지게에 일 전씩이지만하루 아침에 몇십 집씩 물을 공급해야 하는 물장수는 될 수 있으면 힘을덜 들이고 싶었을 것이고 제 집 물은 같은 값이면 많이 가지고 싶었을것이다.
엄마도 물지게를 질 줄 몰라 하루 한 지게씩 물장수 물을 대 먹고있었다. 먹는 물만이 아니라 씻고 빠는 모든 걸 그 물 두 초롱에 의지해야했다. 서울 오고 나서 달포 남짓 동안에 셋방살이 법도 다음으로 많이들은 잔소리가 물 아껴 쓰는 법이었다. 세숫물 버리지 말고 거기다 발닦아라. 발 닦은 물 버리지 말고 거기다 걸레 빨아라. 걸레 빤 물도 버리지말고 놔 둬라. 이따가 마당 쓸 때 뿌릴 거니까. 이런 식이었다. 집 앞골목을 엄마는 마당이라고 했고 제 집 마당도 안 쓰는 동네 사람들을흉보기 위해서 엄마는 매일매일 마당을 쓸었다. 엄마가 아까워하면서 퍼준 내 세숫물이 만약 내 실수로 최종단계까지 못 가고 찍 버려지기라도한다면 엄마는 중대한 손재수라도 당한 것처럼 혀를 차곤 했다.
우리가 부엌으로 쓰는 대문간 한귀퉁이엔 물독이 땅에 묻혀 있었다.
물장수는 어스름 새벽에 왔다. 안집도 물장수 말을 먹으니까 누가 미리빗장을 때 놓는지 훔쳐 갈 것도 없는 집구석이니까 밤새도록 따놓고자는지 대문 여는 소리는 못 듣고 철썩 하고 독에 물 붓는 소리에 잠이깨곤 했다. 철썩, 철썩 하고 두 번 나는 물소리는 어떤 궁핍감보다도실감나게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두 바가지의 물로 하루를 살아야하다니, 물을 다 아껴야 한다는 건 시골선 상상도 못 했었다.
사랑마당과 뒷간이 있는 텃밭사이를 흐르는 개울은 뒤란 개나리 울타리밖을 휘돌아 내려오는 거였다. 뒤란은 또한 안방 머리 맡이기도 해서장마철엔 물소리가 콸콸 시끄럽게 들렸다. 보통 때는 조잘대는 것처럼유쾌하게 들릴 적도 있고, 졸졸졸 귀기울여도 들릴락 말락 할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물이 넘치거나 마른 적은 없었다. 겨울에도 가장자리만 얼고가운데는 쉬지 않고 흘렀다. 가장자리의 얼음장은 별의별 신기한 무늬로아롱거렸었다. 추운 줄도 모르고 환상적인 모양의 살얼음을 깨트려서 입속에 넣고 아삭거리면 핏줄까지 씻겨 내려가는 것처럼 상쾌했다.
먹는 물을 따로 엄마나 숙모가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우물에서 기어왔지만 놀다가 목마르면 개울물을 손바닥으로 길어 먹길 잘 했다. 빨래도거기서 하고 감자나 고구마도 거기서 깎고, 푸성귀도 거기서 씻었다. 물론뒷간에 갔다 오다 손도 거기서 닦았다. 무슨 짓을 해도 새 물이란 걸의심하지 않았으니까 더럽다는 생각도 없었다. 어디를 가나 물 흐르는소리가 따라다녔다.
물도 아껴야 한다는 걸 배우는 건 겨울에 더운물로 세수할 때뿐이었다.
큰 가마솥에다 한 솥씩 물을 데우면서도 대야로 하나 가득 물을 퍼내면야단을 맞았다. 그렇게 헤프게 세수해 버릇하다 죽으면 이담에 저승에서물을 대야로 하나씩 들여마시는 벌을 받는다고 좀 독한 야단이었다. 이불속에서 하루에 단 한 번 철썩하고 나는 물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내속에서도 물기가 말라, 명태가 말라 북어가 되듯이 나 아닌 다른 게 돼가는 것 같은 황당한 공포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수돗물이 콸콸 나오는 사직동 집 안주인은 엄마를 대모라고 부르면서반갑게 맞아 주었다. 엄마만큼 나이가 들어 보이는 데도 자주 고름이 달린미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나한테도 "아주머이 학교 붙어서 얼마나좋우." 하고 말을 놓지 않았다. 나중에 안 거지만 우리가 항렬이 높아 그여자가 엄마한테는 손자며느리뻘이 된다고 했다. 엄마는 하게를 했고, 그여자는 존대말을 했다. 그 여자는 행랑어멈을 불러 더운 점심을 지으라고이르고 학교에서 왔다는 입학 통지서를 엄마 앞에 꺼내 놓았다. 엄마는 그엽서를 쉰 떡 보듯 제대로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떨어지길 바랐는데붙었지 뭔가."
달갑잖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엄마가 왜 그렇게 속 다르고 겉 다르게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직동 친척은 펄쩍 뛰면서 그 동네서는유치원까지 나온 아이 중에서도 떨어진 애가 수두룩 하다고 나를 치켜세워주었다. 그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는, 그까짓거 떨어지면 공부할팔자가 아니거니 하고 시골로 내려 보내면 짐도 가벼워지고 여한도 없을것 같아 아무것도 안 가르쳐서 보냈는데도 붙었다고 또 한 번 속들여다뵈는 거짓말을 했다. 그 법석을 떨고도 마치 떨어지라고 고사라도지낸 듯한 표정을 짓는 엄마를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 보았다.
행랑 어멈이 반듯하게 점심상을 차려 들여왔다. 상에 하나 가득 놓인하얀 그릇들이 하나같이 뚜껑이 덮여 있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면 반찬은조끔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콩자반도 여남은 알갱이, 조개젓이나북어무침도 딱 한 젓가락씩이었다. 배가 고픈데도 밥맛이 나지 않았다. 그여자가 엄마한테 바느질거리를 한 보따리 싸 주었다. 그 집 바느질 뿐아니라 그 여자가 여기저기 엄마의 바느질 솜씨를 선전해 모아 놓은거였다. "자네 신세가 많네 그려." 엄마는 간단하게 인사치레를 하면서도당당하려고 애쓰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런 어른들 사이에서 비켜나있고 싶었지만, 엄마는 그 여자와 여러 말을 했다. "아이고 대모 그런 걱정마시고 제가 저번에 말씀 드린 거나 생각해 보시라니까요." "기생 바느질말인가? 그 짓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올해부터 식구랑 학비가 늘어날생각을 하니 더운밥 찬밥 가릴 형편도 못되네. 말이 난 김에 자네가그쪽에 연줄을 좀 터 주게." "대모, 잘 생각하셨어요. 말이야 바른 대로말이지, 여염집 바느질이 좀 까다로워요. 그것들은 맨 진솔 바느질에다입어서 편하고 동정 이나 맞으면 그만이지 깃이나 섶이 어떻게 생겨먹은게 잘 한 바느질인지도 분간을 못 한 대요. 타박 안 하고 품삯 후하면그만이지 망설일 게 뭐 있어요." "서울서 무슨 짓을 하길래 계집애까지데려다 공부를 시키냐는 시골 어른들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 어른들한테책잡힐 짓은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네." "아니, 기생질이라면 모를가. 기생바느질이 왜 책잡힐 일이래요?" "워낙 그런 양반들 아닌가." "염려 마세요.
못 할소리 하시면 제가 증인 설 테니까요." "천생 자네가 일거리를 알아봐줘야겠구면. 큰 덤터기 썼네." "오늘 가져가는 바느질 중에도 이 동네 사는소실 게 있거든요. 소실 근본이 다 그렇고 그렇잖아요. 기생 알음알이가많으니까 알아봐 달랠게요. 대모 바느질 솜씨를 마음에 들어하니까 잘 될거예요. 심부름은 행랑 어멈 시키면 되니까 대모가 기생 집까지 드나들진않아도 될 거예요."
어른들의 이런 뒷공론을 엿들은 덕에 합격 통지서 받은 날은 우울했다.
하나만 더 틀렸어도 떨어져서 엄마에게 그렇듯 어려운 짐을 지우진 않았을걸 후회가 됐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그전서부터도바느질품을 팔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반닫이 말고 작은 질화로와 반짇고리또한 방 안의 중요한 세간이었다. 한두 단씩 사다 때는 장작으로 겨우밥을 짓고 나서는 다 사위기 전에 얼른 화로에다 담고 인두로 꼭꼭 눌러놓앗다가 온종일 썼다. 인두질 안 하고는 바느질을 할 수 없었다.
기생 바느질을 하기 전에도 삯바느질로 들어오는 옷감들은 시골서 입던,무명에다 물감을 들인 것과는 댈 것도 아니게 부드럽고 고운 본견이었다.
엄마는 조각보에다 마름질하고 남은 예쁜 헝겊들을 가득 싸 놓고 있었다.
내가 심심해서 그런 걸 가지고 조각보 모으는 흉내라도 내려고 하면엄마는 질색을 하고 빼앗았다. 시골선 내 나이에 홈질이나 감침질 정도는다 했다. 제 치마 허리를 달 줄 아는 애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그까짓 건 배워서 뭐 하냐고 했다. "너는 공부를 많이 해서 신여성이 돼야한다."
오로지 이게 엄마의 신조였다. 나는 신여성이 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신여성이란 말은 개화기 때부터 생긴말이지만 엄마에겐 그때까지도 해득되지 못한, 그러나 매혹적인 그무엇이었다. 구식 여자들이 살아온 것과는 전혀 딴 운명을 살 수 있는가능성에 대한 엄마의 한 맺힌 매혹을 내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엄마의 피를 받고, 성질을 닮았는지는 모르지만 여자의 삶을 미처살아 보기 전이었다. 나에겐 당장의 자유가 더 아쉬웠다. 엄마는 안집애하고만 못 놀게 하는 게 아니라, 나가서 동네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것도질색이었다.
"너는 근지 있는 집 자식이다. 본데없이 자란 이 동네 아이들하고어울려 봤댔자 못된 물만 든다. 나가 놀지 마라."
엄마는 기생 바느질이나 하면서도 근지만 따졌다. 근지가 뭔지 잘은모르지만 신여성보다는 쉬웠다. 시골에서 행세깨나 하는 집안, 체면존중하면서 살아온 우리 집안의 생활방식을 말한다는 것 대강 눈치챌 수가있었다. 나도 내가 살던 생활방식이 그리웠고, 내가 이 동네 아이들하고는다르다는 느낌 때문에 그 뜻이 알기가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는왜 저럴까? 하고, 자기가 하는 일은 무조건 다 옳다고 믿는 엄마를 은근히한심하게 여길 꼬투리가 되기도 했다. 시골에 두고 온 우리의 뿌리와바탕을 자랑스러워할 때의 엄마는 시골 와서 식구들에게 자기의 서울사람됨을 은근히 과시하며 으스댈 때하고 똑같았기 때문이다. 시골선서울을 핑계로 으스대고, 서울선 시골을 핑계로 잘난 척할 수 있는 엄마의두 얼굴은 나를 혼란스럽게도 했지만, 나만 아는 엄마의 약점이기도 했다.
엄마가 나를 줄창 반짇고리 옆에 붙들어 두는 건 불가능했다.
삯바느질거리는 그치지 않았지만 다 된 걸 사직동 친척 집까지 가지고가는 것도 엄마의 일이었다. 행랑 어멈은 기생 집까지만 심부름을 해 주는것이지 현저동까지 와 주는 건 아니었다. 사직동 친척 집이 중간지점이었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그 친척의 신세가 태산 같다고 했다.
엄마가 없는 사이에 여덟 살 먹은 아이가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을 순없었다. 차츰 바깥 맛을 알게 되었다. 이웃엔 땜장이 집도 있고, 아버지는지게꾼이고 엄마는 체장수인 집도 있고, 굴뚝장이집도 있었다. 체장수엄마는 키가 작았다. 구멍이 굵은 어레미로부터 가는 체까지 이삼십 개는돼 보이는 체를 쳇바퀴에 달린 고리로 둥글게 이어서 양쪽 어깨에 걸고나갔다. 둥근 쳇바퀴를 다시 둥글게 연결한 무수한 동그라미 사이에파묻혀 그녀의 머리는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그 집 딸은 나보다 큰데학교에 안 다녔다.
체장수는 말없이 나가는데 굴뚝 장이는 대문간을 나설 때부터 징을쳤다. 그도 어깨에다 연장을 메고 다녔는데, 둘둘 말았다가 펼 수 있도록대나무를 길게 쪼갠 것이었다. 그 끝엔 사람 머리통만한 다박솔이 달려있었는데, 얼마나 여러 번 굴뚝에서 아궁이까지 드나들었는지솔이라기보다는 그을음 덩어리처럼 보였다. 굴뚝장이는 또 그 다박솔을 한줌 뚝 떼어다 붙인 것처럼 새카만 수염을 달고 있어 입이 잘 보이지않았다. 그래서 그가 입 대신 징을 사용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말고도 그 동네는 굴뚝장이가 잘 지나다녔는데 버젓이 입 달린굴뚝장이도 역시 말없이 징만 치고 다니는 게 참 이상해 보였다. 온통새까만 그들의 몸에서 놋쇠로 된 징은 유일하게 빛나는 물건이었다.
그들이 솜방망이 같은 걸로 치는 징소리는 공통적으로 은은하고도 여운이길었다. 아무도 조급하게 치지 않고 여운이 하늘까지 닿을 때까지기다렸다가 무디게 한 번씩 쳤다.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시골밭머리에서 가을바람에 너울대는 수수이삭을 바라보았을 때와 같은 비애를맛보곤 했다. 굴뚝장이 집엔 아이가 많았다. 그 밖에 뭘 해 먹고 사는지모르겠는 집 아이들도 골목에 나가면 많았다.
어느 날 어떤 아이가 나보고 "시골때기 꼴때기."라고 놀리자 다른아이들도 일제히 따라서 같은 소리를 합창했다. 나는 그 애들이 나를 놀릴수 있는 근거가 되는 시골이란 데와 그 애들이 현재 살고 있는 형편을비교하면서 참 별꼴 다 본다고 가소롭게 생각했다. 나도 어느 틈에 엄마의속들여다보이는 교만을 그대로 닮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애들 앞에서울긴 싫고 울지 않으려면 엄마한테 들은 근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시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뻔뻔스러워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럿이 모이면 괜히 나를 따돌리고 놀려먹고 하던 아이도 하나씩 만나면"노올자."라고 말을 시켰다. 서울 아이들의 노올자 소리는 참으로 듣기좋았다. 우리 시골 말은 어미가 좀 다를 뿐 억양은 서울 말과 거의같것만도 그렇게 달콤하고 감칠맛 있게 노올자 소리를 발음할 수는없었다. 그러나 노올자에 동의하고 동무가 됐다고 해서 할 만한 놀이가있는 건 아니었다. 사방치기를 할 만한 평지조차 없었다.
어느 날은 길에서 주운 석필 조각으로 땅바닥이나 남의 집 담벼락에다뭔가를 그리면서 같이 놀던 동무가 이상한 제안을 했다. 엉덩이를 까고앉아 서로의 성기를 땅바닥에다 그리는 일이었다. 왜 그런 기상천외의놀이를 했을까. 너무 심심해서였다. 좀 커서 공중변소 같은 데서 성기를비롯한 이상한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그때 생각이 나면서 호기심이나혐오감보다는 아아, 얼마나 심심했으면, 하고 안쓰러워지곤 했다.
우리는 서로 사생하듯이 성기를 그리다가 익숙해진 솜씨를 우리 집담벼락에까지 써먹다가 엄마한테 들켜 지독하게 얻어맞았다. 다시는 그아이하고 놀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지만 나는 다시 엄마 몰래 그 아이하고놀았다. 엄마는 나를 때리면서 그 아이 탓만 했다. 나는 그 아이하고 같이논 것이지 그 아이가 시키는 대로 한 게 결코 아니었다. 나는 매보다도 내동무뿐 아니라 동무네 부모까지 싸잡아 엄마한테 욕을 먹는 게 참을 수가없었다.
하루는 엄마 없는 사이에 몰래 그 아이하고 동네를 벗어났다. 그 애가끄는 대로 복잡한 골목과 층층다리를 지나 전차소리가 들리는 데까지 오자나는 갑자기 불안해져서 물었다.
"너 느이 집 주소 아니?"
"그까짓 건 알아서 뭐 하게?"
"집 잊어버릴까 봐."
"걱정마, 나만 놓치지마. 알았지?"
그러면서 그 아이가 나하고 어깨동무를 했다. 어깨동무도 시골선 못 해본 거였다. 나보다 한 뼘은 큰 아이하고 어깨동무를 하니까 마음이 저절로활발해졌다. 그 아이는 믿음직스러웠다. 엄마는 알지도 못하고 그 아이를못된 애 취급하고 아직도 노는지 가끔 물어 보곤 했다.
우리는 발을 맞춰 씩씩하게 걸었다. 전찻길을 건넜다. 너른 마당이나오고, 십 리나 되게 긴 붉은 담장이 너른 마당보다 한 단 높은 지대에바라보였다. 그 담장은 끝이 안 보이게 길기도 했지만 또한 높기도 해서담장 안에 무엇이 있는지 엿본다는 건 엄두도 안 났다.
담장을 둘러싸고 큰 길이 나 있고 너른 마당은 그 큰길보다 몇길아래여서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게 돼 있었다. 계단은 현저동집 올라가는계단보다 넓고 반듯하고 양쪽엔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홈이 파져 있었다.
아이들 궁둥이가 들어가기 알맞은 너비의 양회로 싸바른 홈은반들반들했다. 아이들이 여럿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나도 같이 간 동무와 신나게 미끄럼을 타고 놀았다. 얼마나 재미난지 해저무는 줄도 몰랐다. 여북해야 처음으로 서울 온 보람을 느낄 만큼, 시골에있었으면 맛보지 못했을 새로운 재미였다. 미끄러져 내려오기 위해선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오라가면 붉은 담장을 에워싼 큰길 건너로바로 높다란 철문이 보였다. 아무도 넘을 엄두를 못 낼 것처럼 높고도무섭게 생긴 철문이건만 양쪽에 칼 찬 순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내가순사를 보고 주춤할 때마다 내 동무는 안 잡아갈 테니 겁내지 말라고했지만, 미끄러져 내려올 때마다 순사가 덜미를 잡는 것처럼 등골이오싹오싹했는데 그 맛이 미끄럼 타는 재미를 더했다.
한번은 아무도 안 다니던 그 넓은 길을 휘돌아 한 무리의 이상한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게 보였다. 앞뒤를 칼 찬 순사가 지키는 그 행렬은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불그죽죽한 게 꼭 핏자국이 말라붙은 것같은 기분 나쁜 빛깔의 옷이었다. 가까이 보니 발에다 쇠사슬까지 차고있었다. 쇠사슬을 보자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내 동무도현저하게 두려워하는 얼굴이 되더니 발로 세 번 땅을 탕탕탕 구르고 나서침을 퉤 뱉었다. 그러곤 나더러도 빨리 지가 하는 대로 따라 하라고말했다. 그렇게 안하면 부정을 탄다는 것이었다. 나는 엉겁결에 따라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본 건 전중이고, 전중이를 봤으니까 부정을 탄 거고,부정을 탔으니까 그런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는 설명은 그 자리를 피해발리 집으로 오는 도중에 들었다. 전중이가 뭔지에 대해선 그 아이도 저높은 담장 안에 사는 나쁜 사람이라는 것 밖엔 몰랐다. 발목에서 철커덕소리를 내던 쇠사슬을 생각하면 그걸 본 것도 나쁜 짓 같은 생각이들었다. 동무가 가르쳐 준 대로 침도 뱉고 발도 굴렀지만 두렵고 께름칙한마음은 가시지 않아 엄마에게 전중이를 본 얘기를 했다. 미끄럼 재미에팔려 풍차바지 대신 엄마가 사준 신식 내복 궁둥이가 해지는 줄도몰랐다는 건 매맞을 짓이라는 각오가 돼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메리야스 해뜨린 것보다 감옥소 마당에서 논 걸 더큰일로 여기는 듯했다. 노발대발하고 나서 감옥소 앞동네에 사는 처지를장탄식하는 눈물까지 비치는 게 아닌가. 그러고 나서 다시 감옥소마당에서 놀면 당장 시골로 쫓아 버리겠다고 위협을 했다. 나는 다시는거기서 안 놀겠다고 맹세를 했다. 시골로 쫓겨 나는 건 무섭지 않았지만엄마가 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기가 셌다. 시어머니한테 같은 잔소리를 듣고도 숙모들은부뚜막에서 눈물을 짰지만 엄마는 웃기는 소리로 단박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딸을 감옥소 마당에서 놀릴 수밖에 없는 처지를 엄마가그렇게까지 수치스럽고 비참하게 여긴다는 것은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그아이하고 다시는 동무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고분고분하게 했다.
할아버지가 시골서 동네 사람들은 상것들이라고 업신여긴 것보다 엄마는한술 더 떠서 바닥 상것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쌈박질이 그치지 않는 동네였다. 내외간에도 이년, 저놈하고 싸우다가나중엔 길거리로 싸움판을 옮겨 "아이고, 나 죽소. 이놈이 사람 잡네. 이동네엔 사람도 안 사나?" 하면서 동네 사람까지 참여를 시키려 들었다.
그럴 때 엄마는 인두판 위에서 기생 저고리의 간드러진 선을 자신 있게인두질하면서 "저런 바닥 상것들 봤나, 언제나 이 숭한 동네를 면할고."
나직하게 탄식하곤 했다. 엄마는 그럴 때, 우리야말로 겨우 기생들 덕에먹고 산다는 걸 잠시 깜박한 것일까.
엄마의 모순은 그뿐이 아니었다. 체장수네, 굴뚝장이네, 미장이네,땜장이네 등 동네 사람들을 대하는 엄마의 태도는 속으로는 무시하면서겉으로는 지나치게 예절발라, 깊은 상종은 안 하겠다는 게 은연중에나타났지만 그들보다 주금도 나을 것이 없는 물장수 한테만은 예외적으로굴었다.
물장수는 밤새도록 일하고 대낮에는 자는지 아무튼 밝은 날 그들을 본적이 없었다. 그들도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으니까, 손수 길어 먹는사람들의 긴 줄을 피해 능률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물장수 물을 대 먹는 집에서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일이 다달이 품삯 주는것말고 또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건 돌아가면서 저녁밥을 한 끼씩 먹이는일이었다. 단골이 차례로 먹이는 거니까 대개 한 달에 한 번 꼴로돌아왔다.
엄마는 그날 물장수를 완전히 상객 취급을 했다. 그전에도 엄마는물장수한테만은 바닥 상것이라는 소리를 안 했지만 상객 취급은 좀유난스러워 보였다. 물장수만은 하대하면 안 된다는 관례가 있는 것도아니라는 것은 안집에서 물장수 밥 먹이는 걸 봐도 알 수가 있었다.
일부러 잡곡을 많이 둔 밥을 고봉으로 퍼담고 짠지 쪼가리에다 된장뚝배기면 다였다. 그것도 마루나 방에 차려 주는 법이 없이 마당이나 부엌바닥에 거적을 깔고 먹였다.
엄마는 남이야 그러건 말건 장을 봐다가 이것저것 나물을 무치고 고소한기름냄새를 풍기며 부침질을 했다. 그 궁색한 살림에 고기가 다 들어왔다.
그러고는 이밥을 한 솥 지어서 큰 밥그릇에 푸는데, 아주 정확하게 밥그릇위에다 밥그릇을 하나 더 엎어 높은 것만큼 펐다. 그건 아마 아무도흉내낼 수 없는 엄마만의 솜씨일 듯 싶었다. 그렇게 차리려니 아침부터잔칫집 같은 기분이 났다.
하긴 시골집 가풍도 남을 툭하면 무시하긴 잘 했어도 음식 층하는질색이었다. 음식을 층하해서 먹이는 집치고 안 망하는 것 못 봤다는 식의심한 말로 할아버지가 안식구들을 경계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물장수 상을 오빠의 생일상보다 더 차린 다는 것도 뒤바뀐 것이긴하지만 음식 층하였다.
그렇게 잘 차린 상이면 우리가 부엌으로 쓰는 대문간에서 먹여도좋으련만 방에다 방석을 갈고 불러들여 물장수를 몸둘 바를 모르게 했다.
엄마도 마루쯤이 적당한 대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툇마루는 상도 놓을 수없이 좁았다. 늙수그레하지만 건강한 물장수가 들어앉으면 방 안이 가득찼다. 내외법이 지엄할 때였으므로 어린 눈에도 망측해 보였다. 밥뿐만아니라 뭐든지 푸짐하게 담은 반찬을 물장수는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그러면 엄마는 그 그릇들을 말끔히 비워 딴 그릇에 담아 목판에 받치고조각조각 모은 상보를 덮어서 그가 가져가게 했다. 물장수 상은 워낙그렇게 하는 거라고 했다. 배불리 먹고도 많이 남겨 갈 수 있도록 일부러그렇게 넉넉하게 장만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물장수는 황송해서 어쩔줄을 모르면서 물 많이 쓸 일이 생기면 미리 말해 달라고 했다. 거저로 한지게 더 부어 주겠다는 뜻인데 엄마는 안 그럴 게 뻔했다.
내가 보기에도 엄마는 물장수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쥐뿔도 없이거만하기만 한 엄마가 물장수만은 대등하게 대하는 것 이상이었다.
존경까지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여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나가 놀라는 엄마 말까지 곡해를 하고 방구석에서 꼼짝 않고 물장수가 밥먹는 걸 빤히 노려보았다. 나는 내 영역이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고생각했으므로 온몸으로 그 도전에 대항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내 의혹은 곧 풀렸다. 엄마가 무슨 말 끝엔가물장수를 존경할 뿐 아니라 부러워하고 있는 까닭을 말했다. 그는 물장수노릇해서 아들을 전문학교까지 보낸다고 했다.
"그 영감이 그래봬도 아들을 사각모까지 씌운 생각을 하면 난 절로우러러뵈더라."
그러면서 한숨을 쉬었다. 상고가 엄마가 죽도록 바늘품을 팔아 시킬 수있는 한계라는 게 그렇게 한심스러웠나 보다. 나는 이상한 의혹이 풀려홀가분했지만 한편 우리 엄마는 참 꿈도 크다고 딱한 생각이 들었다.
반찬 하나 안 남기고 깨끗이 먹어 치운 상을 보고 물장수는 상이라고말하는 걸 요새도 흔히 듣게 되는데, 그런 비유가 물장수는 워낙 먹성이좋은 데서 유래된 건지, 먹다 남은 걸 다 싸 가지고 가던 관습에서 유래된건지, 별것도 아닌 걸 궁금해하는 버릇이 있다. 그거야말로 나의 가장현저동 출신다운 의문인지도 모르겠다.


4. 동무 없는 아이
국민학교 입학식은 4월이었다. 나는 또 수단 두루마기를 입고 엄마손잡고 산을 넘어 학교에 갔다. 점잖은 동네 아이들이라 과연 우리 동네아이들하고는 달라 보였다. 예쁘장하고 깡똥한 양복으로 차려입은 애가대부분이었다. 학부형은 일 주일 동안만 따라 오라고 했다. 한 달 가량을교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에서 노래도 하고 유희도 하고 선생님 뒤를졸졸 따라다니면서 학교 시설물의 이름을 일본말로 익히는 연습도 했다.
제일 먼저 배운 일본말은 호안덴이었다. 호안덴은 운동장 우측 꽃나무를잘 가꾸어 놓은 화단 속에 있는 회색빛 작은 집이었다. 교문에 들어설 때,반드시 그쪽을 향해 절을 해야 하고 그 절은 선생님한테 하는 절보다 더많이 굽혀 몸을 직각으로 만드는 최경례라야 된다는 것도 배웠다. 그 집은창도 없고 문도 굳게 닫혀 있다가 경절날만 열렸다. 수없이 없이 식만있는 경절날이면 우리는 식을 하기 전에 먼저 황금빛 술이 달린 검정비로드 책상보로 장식한 단상으로부터 호안덴까지 양쪽으로 늘어서서기다렸다.
이윽고 까만 양복에 흰 장갑을 끼고 훈장까지 단 교장 선생님이 빛나는얼굴로 앞장을 서고 그 뒤로는 내빈이 몇 명 따라서 마침내 그 집 앞에이른다 그 엄엄한 행렬이 그 집으로 갈 때까지는 우리가 그냥 서 있어도되지만 그 집을 돌아나올 때는 벼락같이 "최경례."라는 구호가 떨어지고우리는 머리를 깊이 조아리고 그 높은 사람들의 구두 끝이나 겨우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나는 마치 시골집 터줏자리 속을 몰래 들여다볼 때처럼 옥죄는 마음으로살짝 머리를 들고 교장이 새카맣게 옻칠한 상자를 자기 논높이로 받들고걸어가는 걸 훔쳐 보았다. 식을 할 때 교장은 그 상자 안에 든 걸 펼쳐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그러니까 호안덴은 천황의 칙어를 넣어 두는 데였다. 천황의 칙어는일본말을 익힌 후에도 한마디도 못 알아듣게 어렵고 길었으며, 교장의식사는 더 길었다.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아이가 생길 정도로 지루한식이었지만 끝나면 모찌를 두 개씩 나누어 주었다. 그 재미로 주리 참듯영문 모를 식을 참아냈다.
호안덴 다음으로 우리가 곡 알아 둬야 할 일본말은 변소였다. 그리고선생님, 학교, 교실, 운동장, 동무, 몇 학년 몇 반 따위를 일본말로익히면서 한 달 동안을 운동장에서 선생님을 졸졸 따라 다녔다.
입학하자마자 조선말은 한마디도 못 쓰게 하고 눈에 보이는 사물과 행동을일본말로 반복해서 주입시켰다. 모든 사물이 거듭 태어났다. 나처럼일본말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하나도 없는 아이에겐 여간 힘든 시기가아니었다.
그러나 엄마는 글씨만 공부인 줄 알았다. "오늘도 글씬 안 썼냐?"하고물어 보고는 비싼 월사금 받고 아무것도 안 가르친다고 불만스러워했다.
월사금은 팔십 전이었다. 아이들은 거의 다 일원짜리 한 장하고저금통장하고 가지고 가서 거스름돈 이십전은 저금을 했다. 엄마는 팔십전씩만 주다가 내가 다달이 저금하는 아이들을 부러워하자 가금 구십 전씩줄 때도 있었다. 엄마가 월사금을 아까워한 동안은 그러나 선생님이조선말을 안 쓰고도 아이들을 통솔하고, 서로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가능할수 있도록 길들이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선생님은 예쁘고 향기로웠다. 엄마가 말하는 신여성이란 바로 저런여성이로구나, 딱 들어맞는 본보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누구나선생님을 따랐다. 운동장에서 반별로 우르르 몰려 다니는 동안 서로선생님 손을 잡으려고 아우성이었다. 예쁜 선생님은 마음씨도 고와어미닭을 종종종 따라 다니는 병아리 같은 아이들에게 그의 관심과 애정을공평하게 분배하려고 무척 신경을 썼다. 그래서 손 잡은 아이, 치마꼬리잡은 아이를 자주 바꾸어 멀리 있는 아이를 가까이 부르곤 했다.
왠지 나는 선생님의 그런 세심한 안배에도 끼지 못하고 늘 가장 자리에처져 있었다. 가장자리에선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잘 보였고 선생님이아무리 공평하려고 노력해도 선생님 손이나 치맛자락을 잡을 수 있는아이는 정해져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그런 애들은 대개 예쁘고똑똑하고 잘 까불었다. 시골이나 현저동에서 사귄 동무들하고는 다른 진짜서울 아이들이었다.
나는 중심부의 그런 애들을 입을 해 벌리고 침을 흘릴 정도로부러워하고 시기도 했지만 닮을 자신은 없었다. 사람에겐 누구나 죽었다살아나도 흉내 못 낼 것 같은 게 있는 법인데 나에겐 그게 집단의 중심이되는 것이었다.
교실에 들어와 교과서에서 제일 먼저 배운 건 "봄이 왔네, 봄이 왔네.
어디에 왔나? 산에 왔네, 들에도 왔네." 하는 일본말이었다. 교과서엔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노래로도 배웠다. 사직공원에선 이미 벚꽃이지고 있었고, 나는 매일 산을 넘어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진짜 산과진짜 봄에 갈증을 느꼈다.
내가 넘어 다니는 인왕산 자락에 쑥 하나 돋아나지 않았고, 바위가부스러진 것처럼 메마른 흙에선 겨우 아카시아가 악착같이 자라고 있었다.
아카시아는 우리 시골에선 한번도 못 보던 새로운 수종이어서 도무지 정이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나무 그늘에선 아무것도 자라고 잇지 않아 뻔한 길을 벗어나숲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유혹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산의 독특한향기도 없었고 새의 지저귐도 없었다. 문둥이도 만나지 못했다. 몰래나무를 해 가다 들킨 여자들은 틀림없이 현저동 여자들일 거라고생각하면서 나는 두려움과 수치감을 느꼈다.
통학길은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나를 문 안에 있는 학교에밀어 넣을 생각만 했지 같은 또래를 사귈 수 없는 게 얼마나 큰 불행감이된다는 걸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외로울 때마다 동무보다는 시골의뒷동산을 더 많이 그리워했다. 오래 가뭄이 든 것처럼 생기 없는 나무가듬성듬성 있을 뿐 맨땅을 드러낸 산이 너무도 이상했다.
나는 산도 들과 마찬가지로 무진장한 먹을 것을 생산한다고 믿었고,아이들하고 친한 먹을 것은 역시 나무 위보다는 그 그늘에 있다고 알고있었다. 우리 시골 동산엔 소나무도 잇었지만, 밤나무, 오리나무,도토리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등 갈잎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가을이면집집마다 겨울 땔감으로 마당에다 집채 만한 갈잎가리를 몇 동씩 만들어놓을 수가 있었다. 그래도 그 많은 잎들을 박박 긁어 내지는 못하는지해마다 쌓여 썩은 흙은 부드럽고 습기 차 온갖 풀과 나물과 버섯과 들꽃을키웠다. 물론 다 쓸 만한 풀만 자라는 건 아니었다.
뒷간 모퉁이에서 뒷동산으로 난 길엔 달개비가 쫙 깔려 있었다. 청아한아침이슬을 머금은 남빛 달개비꽃을 무참히 짓밟노라면 발은 저절로씻겨지고 상쾌한 환희가 수액처럼 땅에서 몸으로 옮아오게 돼 있다.
충동적인 기쁨에 겨워 달개비잎으로 피리를 만들면 여리고도 떨리는소리를 낸다.
그러나 동산으로 진입하기 전 등성이의 풀숲은 아이들 머리통이 겨우남실댈 만큼 극성스럽게 자랐다. 그런 풀숲에서 벗어 놓은 뱀의 허물을발견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허물도 있었지만, 혹시 산 속의신선이 내려왔다가 뒤가 마려워 끌러 놓은 허리띠가 아닐까 싶게 새하얀바탕에 무늬가 섬세한 허물도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 근처를 두릿두릿인적을 찾을 적도 있었다. 실상 신선이 살 만큼 거하거나 수려한 산도아니건만 그랬다.
일단 허물을 발견하면 집으로 걷어 가야 했다. 뱀 허물을 옷장 속에간직하면 재수가 좋다는 미신이 우리 마을엔 있었기 때문에 어른들한테산나물이나 버섯보다 더 환영을 받았다. 잘 자란 풀밭엔 으레 날카롭게날이 선 고약한 풀이 숨어 있게 마련이어서 뱀허물을 얻는 대신 종아리를난도질당하는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을 뒷동산은아기처럼 부드럽고 만만하면서도 신비와 생명력이 넘치고 있었다.
서울 아이들이 알기나 할까, 쫙 깔린 달개비꽃의 남색이 얼마나영롱하다는 걸. 그리고 달개비 이파리엔 얼마나 고운 소리가 숨어 있다는것을. 달개비 이파리의 도톰하고 반잘반질한 잎살을 손톱으로 조심스럽게긁어 내면 노방보다도 얇고 섬세한 잎맥만 남았다. 그 잎맥을 입술에서떨게 하면 소리가 나는데 나는 겨우 소리만 냈지만, 구슬픈 곡조를 붙일줄 아는 애도 있었다.
나는 숨넘어가는 늙은이처럼 헐벗고 정기 없는 산을 혼자서 매일 넘는메마른 고독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추억을 만들고, 서울 아이들이경멸할 구실을 찾았다. 사직공원에 벚꽃이 지고 나면 이윽고 온 산에비릿한 젖내를 풍기며 아카시아꽃이 피어났다. 아카시아꽃이 만개하자사내 아이들이 산에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냥질하듯 모질게 탐스러운가장귀를 꺾어서 꽃을 따 먹었다.
너무 큰 가장귀를 꺾으면 산림 감독이 뛰어나와 아이들 손목을 비틀어비명을 내지르게 했다. 그런 애들도 주로 못 사는 현저동 아이들이었다. 세끼 밥만으로는 온종일 입이 궁금할 나이이기도 했지만 감독한테 들켜서도망다니고 야단맞는 재미에 더 그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한바탕휩쓸고 지나가면 꽃들이 넝마처럼 시든 아카시아 가장귀가 여기저기널브러져 있었다.
아카시아꽃도 처음 보는 꽃이려니와 서울 아이들도 자연에서 곧장 먹을걸 취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꽃을 통해서였다. 잘 먹는 아이는 송이째들고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따 먹듯이 차례차례 맛있게 먹어 들어갔다.
나도 누가 볼세라 몰래 그 꽃을 한 송이 먹어 보았더니 비릿하고들척지근했다. 그리고는 헛구역질이 났다. 무언가로 입가심을 해야 들뜬비위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나는 불현 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 안에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 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그만일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상처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산 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나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초여름에 가정방문이 있었다. 엄마는 우리 남매에게 완벽한 정직을요구했고,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정직 교육에가장 역점을 두는 듯했다. 수신교과서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도 천황에대한 충성 다음이 정직이었다. 거짓말을 시킨 아이가 선생님에게 가장 큰수모를 받았다. 물건이나 돈을 주웠을 때 학교에선 선생님에게, 학교밖에서는 파출소에 갖다 주어야 한다는 것도 반복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엄마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엄마는 비웃는 것처럼 말했다.
"너는 떨어진 물건을 보고도 못 본 척해라. 줍긴 왜 주워. 떨어트린사람은 되짚어오게 마련이니까 그 사람이 찾아가게 그냥 놔두면 될걸.
잘난 척하고 싶은 사람이나 파출소나 선생님한테 갖다바치는 거란다."
아주 그럴 듯한 말이었지만 주인이 찾으러 오기 전에 딴 사람이 집어가면 어떻게 하냐고 당연한 걱정을 하면, 엄마는 그건 남의 것 가져가는사람의 잘못이니까 우리가 그것까지 상관할 거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엄마가 꿈꾼 건 황금보따리를 떨어트렸다가도 제자리에서 도로 찾을 수있는 이상 사회였을까? 아니면 선행의 이기주의였을까? 여기선 그게중요한 게 아니라, 정직의 완벽주의가 거짓말까지도 완벽하게 하려는 게문제였다.
엄마는 내 기류계를 가짜로 옮겨 원하는 학교에 집어넣었으면 그만이지,그걸 가정방문 때까지 밀고 나가려고 했다. 아마 중간에라도 탄로가 나면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촌사람다운 고지식한 우려 때문에 그런 거겠지만,나는 엄마의 그런 이중성에 맞장구치기가 지겨웠다. 그만하고 싶었다.
엄마는 학교 생활에 대해 뭘 너무 모르면서 그날 하루만 때우면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직동 방면을 도는 날은 미리 정해졌기때문에 엄마는 그날만 그집 안주인 노릇을 하기로 친척 집의 양해를구했다.
그날은 사직동 방면 아이들만 교실에 남아 있다가 선생님하고 같이하교를 했다. 그 애들은 이웃해 살거나 등하교길에 만나는 아이들이라서로 누구 집이 어디라는 것도 대강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가까운 순서로순번을 짜는데 나는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으로 처졌다. 교실에서도존재 없는 아이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다가 어떤 아이가 쟤는 우리동네서 처음 보는 아이라고 하자, 딴 아이들도 그래그래 하면서 나를이상한 눈으로 흘끗거렸다. 그 아이들과는 딴판인 내 촌스러운 복장이 그말 한마디로 이단시 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나는 재빨리 시골서 이사온 지 얼마 안돼서 그럴 거라고 꾸며 댔다.
그 고비는 그렇게 얼버무렸는데 맨 나중까지 남은 애가 우리 친척 집바로 이웃이었다. 그애는 영악하고 상냥하게 생긴 애였는데 내일서부터학교 갈 때 서로 불러서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안 돼, 우린 내일 모레또 이사 갈 거야."라고 거짓말에다 거짓말을 덧칠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친척 집 대청마루에 높이 앉아 선생님을 맞았고행랑 어멈이 화채를 은빛으로 닦은 놋쟁반에다 받쳐 내왔다. 그날을무사히 넘긴 엄마는 안도의 숨을 쉬었지만 친척 집 옆에 산다는 아이는나에게 오랫동안 화근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애 앞에서 기를 못 폈다. 그 애가 시키는 심부름은뭐든지 했다. 고무줄을 나더러는 잡고만 있게 하고 혼자서만 깡충깡충뛰어넘는 건 약과였다. 신을 괜히 벗어던지고 나보고 주워 오라고명령하면 별 수 없이 주워 왔다. 그 애는 그걸 즐겼고 아이들 사이에선내가 그 애의 꼬붕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 애가 정말 내가 주소를 속인 걸큰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군림한 건지, 내 자격지심으로 괜히주눅이 들었기 때문에 그 애한테 만만하게 보인 건지, 어느 것이먼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아이들 사회에서 그런 주종관계가 일단 성립되면 그걸뒤바꾸기는 쉽지 않다. 나는 학교 생활이 지옥 같았고, 집에 와도 심심해서몸이 비비 꼬였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자연히 우리 동네 학교 다니는아이들끼리만 몰려다녔다. 산까지 넘어 문 안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중뿔난 시골뜨기를 이단시했다.
매동학교로 넘어가는 방향 말고, 우리 동네가 뻗어올라간 쪽으로 비탈을더 올라가면 인가가 끝나고 바위산이 나온다. 사람들은 거기를 선바위라고했고 선바위에서 물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 오른쪽으로는 굿당이나오고 건너쪽엔 사람들이 신령한 바위라고 믿는 형제바위가 보였다.
형제바위는 누가 보기에도 신령해 보였다. 뒤에 있는 절벽과는 따로 두사람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형상의 거대한 바위였다.
그 앞에는 뭔가를 비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고, 굿당에 큰 굿이 들었을때도 거기다 먼저 고수레를 했기 때문에 그 앞엔 떡부스러기가 늘 널려있었다.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자지러진 풍악소리만 나면 엉덩춤을 추면서굿당으로 치닫는 게 취미랄까, 심심한 나날에 돌파구가 되었다.
나에겐 굿 구경은 신기한 게 아니라 익숙한 거였다. 박적골은 유명한무속의 본산인 덕물산과 멀지 않았다. 최영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고,거기서 삼 년에 한 번씩 타지방 무당까지 많이 모여서 하는 큰 굿은유명했다. 그런 전국적인 굿말고도 무당집이 많이 모여 있는 산이니까개성 부자들이 재수를 비는 크고 작은 굿이 그치지 않았다.
최영 장군이 생전에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가르쳤건 말건부자들은 최영 장군에게 돈 더 벌게 해 달라고 성대한 굿으로 아첨하고빌었다. 큰 굿이 든다는 소문은 상관없는 사람까지를 들쑤시는마력이있었다. 남자들이 장사하러 외지에 나가 있는 집이 많기 때문에무꾸리들도 잘 다녔다.
농가에서도 설 쇠고 나서 보름 안에 일 년 신수를 보러 가는 건기본이었다. 정확하게 담당구역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몇 개 동네에 한집씩 동네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건사해 줄 무당집이 있게 마련이었다.
박적골엔 무당집이 없었기 때문에 딴 동네까지 가야 했다.
새해에 신수점 보러 갈 때는 쌀을 두어 됫박씩 자루에 담아 이고 갔다.
서로 연통을 해서 같이 갔기 때문에 그만그만한 쌀자루를 인 여자들이부옇게 동구 밖으로 몰려나가는 걸 보면 무당집에 간다는 걸 알 수가있었다. 우리 집에선 할머니가 그 일을 담당했고 나는 해마다 따라다녔다.
무당집엔 아래윗방에 신수점 보러 온 여인네들이 꽉 들어차 있었고,무꾸리에 나오는 일 년 신수도 엇비슷했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무당이라 해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단순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할머니는 식구들 신수를 다 보고 나서 맨 꼴찌로 나를 넣었다. 오뉴월엔물가에 가지 말고 동지섣달엔 불을 조심하라는 따위 어느 아이한테나 할수 있는 소리를 했다.
어른들의 점괘 또한 특별한 사연이 있는 사람 아니면 심각하게 믿는 것같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랜만에 만난 타동네 사람들끼리 이야기꽃을피우는 게 더 신이 나 보였다. 무당짐은 여자들의 스트레스 해소와정보교환의 장이었고, 혼담이 오갈 때도 있었다. 자기 신수를 다 봤다고해서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초 무꾸리 끝에는 으레 떡국상이 나오게 돼 있었다. 무당집은 농사를안 짓기 때문에 정초에 들어온 쌀로 일 년의 기본양식을 삼는다니 그사례로 떡국을 대접할 만했다. 그러니까 거기는 나눔의 자리이기도 했다.
무당집 조랑이떡국은 유난히 맛있었다. 그 맛에 따라다녔다.
엄마는 내가 그런 데 따라 다니는 걸 말리진 않았지만 무당이나무꾸리에 대하서 매우 냉소적이었다. 할머니가 집에 와서 무꾸리에 나타난식구들 신수를 일러 줄 때도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할머니가 무당말만 믿고 일각을 다투는 아버지의 병을 푸닥거리로 고치려 한 데 대한엄마의 통한은 여간 집요하지 않았다. 잘 모르는 일을 아는 척하고덤볐다가 그르쳤을 때 흔히 쓰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도엄마가 말하면 가시가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나였다. 나는 무당에 대해 친밀감과 함께 외경심까지 갖고있었다. 딱 한 번 덕물산에 가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할머니를따라서였다. 우리뿐 아니라 동네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갔으니까 아마 몇년 만에 한 번씩 볼 수 있는 대제 때였을 것이다. 큰 곳이란 그 신명이며칠씩 계속되게 마련이지만 그 중에도 천명을 다하지 못한 최영 장군의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장군놀이는 어린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남겼다.
굿판 한가운데 거적을 깔고 그 위에다 물을 하나 가득 길어 담은물동이를 놓는다. 물동이에다 나무 뚜껑을 덮고는 그 위에다가 다시쌀자루를 놓고 쌀자루 위에다가 시퍼렇게 간 작두를 두 개 나란히올려놓는다. 그때가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작두의시퍼런 날을 떠올릴 때마다 휘황한 횃불에 괴기하게 번득였던 것처럼느끼곤 한다.
장군의 복색에 벙거지까지 쓴 무당이 버선을 벗는다. 늘 버선에옥죄여서 발가락이 겹쳐진 무당의 작고 흰 발바닥이 작두를 탄다.
나비처럼 자유롭고 무게 없이, 평행으로 선 작두날 위를 훨훨 난다. 그순간에는 풍악소리도 극도로 자지러져 마침내 정적의 경지에 이르고무당의 몸도 소멸하여 흰 나비 두 마리만 남는다. 그건 굿구경이라기보다는 내 생애를 통틀어 유일한 신비체험이었다. 단 한 번 본,이론으로는 설명할 길 없는 입신의 경지였다.
거기에 비하면 인왕산 굿당에서 본 서울 굿은 어린애 장난 같았다. 칼을휘두르는 무당은 있어도 칼 위에 올라타는 무당은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는 굿 구경을 좋아했다. 남색 쾌자 자락을 휘날리며 길길이뛴느 무당의 외씨 같은 버선 발을 보고 있노라면 아슬아슬하도록 팽팽한긴장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무당이 오색의 기를 휘휘말아 구경꾼들한테 내밀어 뽑게 하고공수를 주는 소리를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거짓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무당이 아무렇게나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희비가 엇갈리는 어른을속으로 은근히 딱하게 여겼으니, 그 점은 나도 모르게 엄마를 닮았다하겠다.
큰 굿이 들었을 때는 구경꾼에게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떡이나알록달록한 색사탕 같은 걸 노느매기해 줄 때도 있었다. 실은 그 기대가없었다면 굿 구경이 그렇게 신바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참 입이궁금할 나이였다. 삼시 밥을 주리진 않았지만 군것질할 만한 것이 전무한긴긴 여름날의 오후의 권태를 무엇에 비길까.
그러나 바로 그런 쏠쏠한 실속 때문에 굿 구경 또한 금지당하지 않으면안 되었다. 여름 교복은 흰 반소매 윗도리에 어깨허리가 달린 청색치마였는데, 어느 날 그 치마 앞에다 굿 음식을 받아 먹었다는 게 탄로가나고 말았다. 색사탕의 물이 들어 얼룩덜룩해 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형무소 앞마당에서 미끄럼 탄 것을 적발했을 때와 다름없이 화를내고 야단을 치고 나서, 이놈의 동네를 언제 면하냐는 그 판에 박은한탄을 또 했다. 엄마는 아마 맹자의 엄마처럼 당장에 여봐란 듯이 그동네를 뜨고 싶었겠지만 우린 맹자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 엄마는돈이 없었고, 나는 맹자보다 똑똑하게 굴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빌었고 곧 다른 소일거리를 찾아 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엄마의 바느질거리도 깨끼나 적삼으로 바뀌어 필히재봉틀이 있어야 했다. 재봉틀 살 돈이 있을리 없는 엄마는 그것까지사직동 친척의 신세를 지기로 했다. 우리를 학교에 보내고 나서 친척 집에가서 온종일 바느질을 하고 점심까지 신세를 지고 나서 저녁을 지으러부랴부랴 돌아오는 날이 계속 됐다.
일학년 수업은 왜 그렇게 금방 끝나는지 오정도 치기 전에 하학을 해서돌아와 어두컴컴한 셋방 구석에서 오도카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점심밥그릇을 보면 쓸쓸하고 쓸쓸한 분노가 치밀었다. 시골서 가져온 주먹만한내 놋바리는 방 안의 궁기와 어울리지 않게 늘 깊고 은밀하게 빛났다.
엄마는 어울리지 않는 짓 하는 데는 선수였다. 근지 있는 집 아이라는엄마의 세뇌가 먹혀들어갔는지 나도 동네 아이들이나 안집 아이들이뜨악했고, 그 애들 또한 즈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우습게 보고 타동네학교를 다니는 내가 눈꼴이 시었을 것이다. 해는 길고 집안에서고 집밖에서고 도무지 마음 붙일 데가 없었다.
딴 아이들은 그럴 때 뭘 하고 놀까? 나는 엄마의 세간과 오빠의 서랍을뒤졌다. 그리고 울긋불긋한 색종이로 싸바른 궤짝 속, 엄마의 버선갈피에서지갑을 찾아냈다. 그건 지갑이라기보다는 쌈지였다. 할아버지 쌈지는기름종이로 만든 거였는데 엄마의 쌈지는 헝겊으로 만든 거였다.
엄마는 나에게 콩나물이나 파 심부름을 시킬 때, 거기서 일 전짜리나 오전짜리를 꺼내 주었다. 나는 엄마가 거기다 돈을 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심심해서 세간을 뒤진 게 아니라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뒤진거였다. 엄마는 온종일 방을 비울 때나 지갑을 그렇게 깊이 찔러 넣지보통 때는 아무데나 굴렸고, 심부름하고 거스름돈을 가져와도 지갑에넣으렴, 하면 그만이지 자세히 챙겨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월사금이나 집세등 큰 돈 쓸 때나 꼬깃꼬깃한 지전까지 다 꺼내서 헤아려 보고, 꼭도둑맞은 것 같다니까, 하고 한숨을 쉬었지만 아무리 아껴 써도 모자라는씀씀이에 대한 탄식일 뿐 정말 누굴 의심해서가 아니리라는 것쯤을 알고있었다.
나는 쌈지 속에서 누런 일 전짜리를 한 닢 꺼냈다. 엄마의 허술한 돈관리를 아는지라 탄로가 날 걱정도 안 했지만 나쁜 짓이란 생각도 들지않았다. 비탈을 더 올라가 모퉁이집이 구멍가게였다. 내가 곧잘 심부름을다니는 평지의 반찬가게와는 달리 이 가게는 순전히 아이들 코묻은 돈을노리고 일 전에서 오 전짜리 군것질거리를 파는 가게였다. 거기서 뭘 사보는 게 나의 소원이었기 때문에 나는 곧장 그리로 갔다.
눈깔사탕이 일 전에 다섯 개였다. 시골서도 단것에 굶주리진 않았었다.
겨울에 곤 엿을 몇 달씩 두고 먹었고 조청이나 꿀 같은 것은 일 년 내내벽장 속에 두고 긴요할 때 썼다. 나는 서울 아이보다 더 새까맣게 썩은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건만도 할아버지가 송도 갔다 오실 때 사다주시는 과자나 사탕의 맛은 별미였다. 엿보다 세련된 단맛이라고나 할까,징건해지지 않아 자꾸자꾸 더 먹고 싶었다.
아물며 몇 달 만에 맛보는 단맛은 황홀했다. 다섯 알의 눈깔사탕으로하여 주체할 수 없이 심심하던 오후가 한없이 달콤하고 짜릿짜릿한 시간이되었다. 엄마는 하루 일 전씩 없어지는 걸 알아 보지 못했다. 나는 며칠에한 번씩은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오 전짜리도 집어 내게 되었다. 오전이면 훨씬 다양한 미각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집에 있을 때였는데 손님이 왔다. 더위가시작될 무렵이어서 아이스케키 장수가 그 비탈 동네에도 심심찮게 다녔다.
손님은 아무것도 못 사 온 걸 미안해하다가 아이스케키 장수 소리를듣더니 오 전짜리 한 닢 주면서 아이스케키를 사 오라고 했다. 다요?
엄마가 물으니까 손님은 우리도 하나씩 먹읍시다, 하면서 땀을 닦았다.
엄마는 내가 다섯 개나 된는 아이스케키를 제대로 간수할 수 없을 줄 알고냄비를 주었다. 냄비를 들고 뛰어나갔을 때는 장수는 온데간데 없었다.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불확실했다.
그렇다고 그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냄비를 들고 전차종점 쪽으로 뛰어내려갔다. 종점엔 큰 아이스케키 가게가 있다는 걸 알고있었다. 오 전어치를 사니까 덤까지 한 개 주었다. 그러나 오르막길은 쉽지않았다. 그 지긋지긋한 층층다리를 헉헉대며 오르는 동안도 뙤약볕은사정없이 내리쪼였다. 허덕이며 집에 당도했을 때는 아이스케키는 거의막대기만 남고 냄비 속엔 불그죽죽한 물만 고여 있었다. 손님이 기가막히다는 듯이 끌끌 혀를 찼다.
"아니, 너라도 빨아먹을 것이지, 어쩌자고 몽땅 물을 만들어 가지고오냐?"
손님이 한심해하는 말투에 엄마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우리 애는 그렇게 고지식하답니다."
엄마가 이렇게 철석같이 정직성을 믿는 딸이 매일 한 푼 두 푼 엄마의지갑을 축내고 있었다. 잘못한다는 죄의식조차 없이. 그러나 꼬리가 길면잡힌다던가. 당시의 구멍가게는 좌판 위에 줄느런히 늘어놓은 나무상자에다 사탕이나 과자를 종류별로 넣어 놓고 팔고 있었다. 일정규격의상자에는 유리로 된 뚜껑이 달려 있었는데 어느 날 나는 앞쪽에 있는유리를 손으로 짚고 안쪽에 있는 상자 뚜껑을 열려다가 그만 유리를깨트리고 말았다.
가게에 달린 껌껌한 방에 죽치고 앉아서 말없이 코묻은 돈을 챙기기만하지 한번도 손수 꺼내 준 적이 없는 무뚝뚝한 주인 남자는 내가 놀라서울상이 되어도 무표정한 채 어서 사탕이나 가지고 가라고 했다. 사탕은 안주고 돈만 받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탕을 가져가라니까 나는용서받은 줄 알고 얼른 그 자리에서 도망을 쳤다.
저녁때 엄마가 돌아와 문간에서 밥을 짓고 오빠는 방에서 공부를 하고있을 때였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엄마가 대꾸하는 소리도들렸다. 나는 어떤 예감으로 가슴에서 마구 콩콩 소리가 났다.
아니나다를까, 엄마가 나를 불렀다. 나게 보니 가겟집 남자가 마누라와아이들가지 데리고 엄마에게 삿대질을 하며 서 있었다. 그 집 식구들이 다행패를 부리기로 작정을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좀 큰 아이는테만 남은 상자 뚜껑을 들고 있었다.
네가 정말 깨트렸느냐고 엄마가 나에게 조용히 물었고 나는 고개를끄덕여 시인했다. 나는 유리를 깨트린 잘못보다 돈을 훔친게 탄로난 게 더무섭고 수치스러웠다. 수치감으로 정신이 다 아득해지면서 당장 죽고싶었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선선히 유리값을 물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정도로 끝냈으면 워낙 없이 살아 반 푼을 가지고도 사생결단을 하려 드는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점잖은 결말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오늘해 안으로 당장 유리를 끼워다 달라고 뻥뚫린 뚜껑을 놓고 가는 일가족의뒤통수를 향해 한마디하고 말았다.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겠네. 내 자식이 깨트린 유리 어련히 물어 줄까봐, 사내가 변변치 못하게 식솔까지 거느리고 와서 얻다 대고 행패야,행패가. 자식들 자알 가르친다. 자알 가르쳐."
엄마는 유리값 물어 주는 것보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부부가 합세해서나타난 게 더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들 또한 엄마가 들으라는 듯이 한말을 못 들은 척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조금은 머쓱해하면서 가던 그들이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서면서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사내가 먼저엄마의 멱살을 잡았고 엄마는 대항하지 않고 오빠를 불렀다. 엄마는 나도아들이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겠지만 사려 깊고 말수 적은 오빠는자기가 끼어들지 않고 이 싸움이 끝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구원 요청이 뛰어나온 오빠는 얼떨결에 우선 사나이를엄마로부터 뜯어 낸다는 것이 저만치 메다꽂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쪽여편네가 사내를 일으키면서 저 후레자식이 어른을 친다고 악을 썼다.
구경꾼이 더 많이 모이고 신이 난 여편네는 엄마에게 너는 자식 참 잘가르쳤다, 잘 가르쳤어라고 당장 앙갚음을 했고 엄마는 그때부터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오빠도 고개를 숙였고, 세 식구가 끽 소리도 못 하고먼저 철수함으로써 싸움은 어이없이 끝났다.
방으로 철수한 우리 식구는 침통한 심정으로 아직도 남은 가겟집여편네의 푸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 동안에 다음에 시킬거짓말을 준비했다. 엄마는 의당 돈이 어디서 나서 군것질을 했느냐고물을 테고, 그러면 길에서 주웠다고 대답할 작정이었다. 죽었으면 죽었지훔쳤다고는 말 못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는 나에게 군것질한 돈의 출처를 묻지 않았다. 엄마는 아주오랫동안 침울해했는데 그건 오빠가 후레자식이란 욕을 먹은 데 대한충격이었다. 엄마는 오빠에게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고 오빠도 엄마에게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려 죄송하다고 사죄 했다. 두 사람 다 입에 담지는않았지만 후레 자식 수리를 듣게 된 데 대한 사과였다.
엄마는 아들이 후레자식 소리를 들은 것을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왜그런 일이 생겼는가 자초지종을 따져 보는 것까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
덕택에 나는 엄마의 문초를 모면했다. 그날 당장만 모면한 게 아니라 다음날 전차 종점까지 가서 유리를 끼워 오면서도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고,영영 안 꺼냈다.
엄마는 빈틈없이 깐깐한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허술한 데가 있었다.
엄마가 셈이 바른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이나 막상 자신의 가난한돈지갑이 새는 것도 모르는 것이 엄마의 또 다른 면이었다. 나는지금가지도 엄마에게 그런 허술한 일면이 있었음을 감사하고 또한 그로인해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가 만일 그때 나를 의심하고 따지고 들었으면 어떡하든지 진상을규명했을 테고 그때 내가 맛볼 수밖에 없었을 수치감을 생각하면 지금도아찔하다. 나는 그 후 다시는 엄마 돈을 훔치지 않았다. 남의 물건에대해서도 마찬가지였고 엄마의 소원대로 지금까지 길에 떨어진 돈도 주운적이 없다.
하진 욕심이 날 만큼 큰 돈이나 물건이 떨어진 걸 본 적도 없긴 하지만,적은 돈을 아무런 갈등 없이 안 줍고 지날 때면 엄마를 생각하고 괜히웃음이 난다. 그것이 선행이란 생각 같은 건 물론 손톱만큼도 없다. 육친의손때 묻은 물건처럼 나만 아는 애착 반 싫증 반으로 어쩔 수 없이간직하게 된 습관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때 엄마가 내 도벽을 알아 내어 유난히 민감한 내수치심이 보호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민감하다는 건 깨어지기가쉽다는 뜻도 된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못된 애가 되었을 것이다. 하여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에 수없는 선악의갈림길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름내내 인왕산의 살벌함은 변하지 않았다. 계곡은 장마가 져야만 물이조금 흘렀고 굿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온통 암벽이었고, 오른쪽으로잡목숲이 좀 남아 있는 곳에선 어스름녘이면 개를 때려 잡는 처절한비명이 들리곤 했다. 사내애들은 그 소리만 들리면 눈빛을 번득이며 떼를지어 숲속으로 치닫곤 했는데, 개를 때려 잡기 위해 매단다는 나무도정해져 있었다. 그 나뭇가지엔 새끼줄이 매달려 있었고 주위엔 개를그스른 누릿한 냄새가 늘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가뜩이나 헐벗은 숲이무섭고 구역질이 났다.
더위가 심해지면서 진중한 오빠도 방에서 견디기가 힘든지 저녁만 먹고나면 내 손을 잡고 선바위까지 바람을 쐬러 올라갔다. 나는 그때가 가장즐거웠다. 선바위에 바람을 쐬러 나온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빠가 제일잘나 보이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오빠와의 친밀감을 과시하기 위해 멀리까지 가서 조리풀을 따다가오빠한테 붙들게 하고 조리를 엮었다. 조리풀을 뜯을 때마다 습관적으로먹을 만한 풀을 찾았지만, 선바위 주위 척박한 땅에는 모질고 억센잡풀밖에 자라지 않았다. 가끔 나는 손을 놓고 우리 시골의 그 많던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하염엾이 생각하곤 했다. 말수 적은 오빠도 내향수를 알아차리고는 여름방학이 며칠 안 남았다는 걸 손가락으로 헤아려보여 주곤 했다.
방학이 다섯 손가락 안으로 임박하고 나서 엄마는 나를 데리고야시장으로 나갔다. 영천서부터 서대문 네거리까지 밤이면 야시장이 섰다.
식칼이나 요강, 빗자루 등 일회용 잡화도 팔았지만 주로 포목전이 많았다.
차일을 치고 포목을 삼면에 커튼처럼 늘이고 파는 장수들은 입심도 좋아타령조로 외치는 소리가 흥을 돋웠고, 전깃불 빛에 보이는 옷감은하나같이 화려하고 하늘하늘해 보여 나는 반쯤 넋이 나갔다. 사람들도포목전 앞에 가장 와글와글 붐볐다.
엄마는 여러 가게에서 흥정을 하다가는 값이 안 맞아 그만두곤 했다.
나에게 내리닫이를 해 줄 모양이었다. 내 몸에 옷감을 대 볼때마다장수들은 참 잘 어울린다고 허풍을 떨었고 나는 가슴이 울렁거렸지만엄마의 흥정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겨우 흰 바탕에 남색 물방울무늬가 있는 자투리를 끊을 수가 있었다. 엄마는 꼭 내리닫이 할 만큼만끊으려고 했고, 야시장은 옷감을 피륙으로 갖다 넣지 않고 치마 저고리 한벌 단위로 떼어다 팔고 있었기 때문에 픙정이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고향에 돌아간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났다. 마음이 설레어 잠이 다 잘안 왔다. 일학년 첫 원족 때도 못 느껴 본 느낌이었다. 일학년 첫 원족은총독부 뒷마당으로 갔다. 총독부는 시골뜨기가 주눅들기에 충분한어마어마한 집이었다. 드넓은 뒤뜰에 당도한 우리는 담임 선생님으로부터그 안에서 절대로 하면 안 돼는 수많은 금기 사항을 반복해서 듣고 나서해산하자마자 따라온 엄마하고 점심을 먹었다. 담 대신 안이 훤히들여다보이는 드높은 쇠창살을 둘러치고 문마다 칼 찬 순사가 지키는 그큰 집이 바로 엄마가 장차 아들을 취직시키고 싶어하는 집이라는 걸확인하고 질린 것밖에는 아무런 기쁨도 없는 원족이었다.
엄마는 자로 내 키와 품을 대강 재서 옷감을 어설프게 마름질하고 나서다시 내 몸에 걸쳐 보고는 시침질을 했다. 그건 다음 날 친척 집재봉틀에서 그럴 듯한 내리닫이로 완성됐다. 요새말로 치면 원피스를우리는 그때 내리닫이라고 불렀다. 엄마의 바느질 솜씨는 소문이 나 기생바느질말고도 부잣집 혼인 바느질 일습이 들어온 적도 있었지만 양장바느질엔 자신이 없었나 보다. 자꾸 입혀 보고 앞뒤로 뜯어보며불안해했고 과히 어색하진 않다는 오빠의 인색한 평헤도 기뻐했다.
방학식날엔 선생님이 방학 동안에 시골에 가는 아이는 손들어 보라고했다. 방학 기간에도 두 차례의 소집일이 있는데 시골에 가는 아이는 미리신고하면 결석 처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비로소 방학을시골에서 지낼 수 있는 아이가 한반에 불과 두세 명밖에 없다는 걸알았고, 여름내 서울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토박이 서울 아이들한테마음으로부터 연민을 느꼈다. 너희들이 온종일 답답한 골목에서 공기나고무줄을 하다가 기껏 어른을 졸라 일 전씩 까먹는 동안 나는 모든 것이살아 숨쉬고 너울대는 들판에서 강아지처럼 뛰어놀 것이다.
내일이면 고개를 넘고 들을 지나고 개울을 건널 것이다. 풀과 들꽃과두엄 냄새가 어울린 공기를 마음껏 들이 마실 것이다. 상상만으로도초여름 첫새벽에 달개비가 깔린 푸른 길의 이슬을 맨발로 밟을 때처럼순수한 희열을 느꼈다. 그건 향수라기 보다는 짐승같은 굶주림이었고, 서울아이에 대한 최초의 우월감이었다. 서울 아이를 불쌍하게 여길 수 있다는것은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기분 좋아할것은 아니었다.
방학식날 통신부를 받았다. 1학년 1학기건만 6에서 10까지의 점수로성적을 표시할 때였다. 나는 평균은 8점이었지만 사사오입한 8인듯한 9가둘이고 나머지는 온통 7이었고 창가는 최하점인 6이었다. 엄마는 나한테공부하라고 성화한 적도 없고, 숙제 한번 제대로 봐 준 적이 없었다.
학군까지 어긴 극성 엄마이면서도 학교 보내는 것 외엔 공부에 따로신경을 써 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엄마가 내 통신부를 보고 기함을하게 놀란 걸 보면 무관심조차도 내 자식은 안 가르쳐도 잘 하려니 믿은엄마 식의 교만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런 식으로 내버려 둬도 오빠는 늘우등만 했고 시골 소학교에선 월반까지 한 일이 있다는 건 엄마의 큰자랑거리였다. 내 통신부를 본 엄마의 탄식은 특이했다.
"아이구머니, 이 망신을 어쩔꼬. 내 자식 통신부도 기러기가 날아갈 줄뉘 알았을꼬."
엄마가 7을 기러기라고 하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바느질 다니는 사직동친척 집 행랑 어멈 아들도 소학교엘 다니는데 공부를 곧잘 한다고 어멈이줄창 자랑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 아이 통신부를 본 적이있는데 모조리 7이었고 한문으로 흘려 쓴 7자가 나란히 늘어선 게 흡사기러기가 날아가는 형상이더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심각한 상황을웃음으로 눙치는 재주가 뛰어났지만, 그 아이 통신부의 기러기는 유머감각이라기보다는 내 자식만 제일로 치고 남의 자식을 얕잡아보기 잘 하는엄마의 교만의 좋은 예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걸 다 뉘우칠 만큼 엄마의낙담은 심각했다.
나는 엄마가 어른들 뵐 낯이 없어 시골로 안 가고 말 것처럼 말했을때에야 비로소 발버둥질치며 울었지만 잘못했단 생각 같은 건 안 들었다.
앞으로 잘 할 것 같은 자신도 없었다. 오빠가 가장 적절하게 엄마의 상한자존심을 위로했다. 국어, 산수가 9점이니 나머지는 좀 못 해도 상관없다고했다. 오빠의 이런 통신부 보는 법을 엄마는 여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창가나 체조, 도화 따위는 공부 못 하는 애나 잘 할 수 있는것으로 당장 비약을 시켰다.
우리 남매가 통신부를 받아 온 날이기도 하고 다음 날이 시골 가는날이기도 해서 밤 늦게 작은숙부 내외가 찾아왔다. 그때도 엄마는 조금도기죽지 않고 내 통신부를 내보이며 오빠한테 배운 통신부 보는 법에다살을 붙여 설명했다. 창가나 체조 점수 잘 받는 아이치고 공부 잘 하는아이 못 봤다는 식이었다. 못 된 것은 조상 탓이라고, 나는 그 후 지금까지음치 신세를 못 면한 걸 엄마 탓으로 여기고 있다.
숙부 내외는 엄마의 강변에 무조건 동의했다. 같은 서울에 사는 유일한집안이고, 또 당시의 풍습으로는 아버지 없는 조카자식에 대해서는아버지의 형제가 아버지와 동등한 책임을 느낄 때라, 두 집은 늘 서로왕래하고 염려하고 의논하며 살았었다. 숙부네는 소생이 없었기 때문에 두집 가느이 이런 관계는 의무를 넘어서는 전국스러운 우애였다.
숙부네는 염천교 너머 봉래동에 살았는데 숙부는 일본인 생선 도매상의배달꾼으로 나가고 숙모는 잡화 도매상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물건의전표를 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숙부한테서는 늘 생선냄새가 나고막노동꾼 티가 박여 가는 데 비해, 쪽을 갈라 히사시가미(앞머리와 살쩍을쑥 내밀게 빗은 머리모양)를 하고 살짝 화장도 해서 날로 하이칼라가 돼가는 숙모는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엄마가 숙모의 직장에 가 본 적도 있었다. 엄청나게 큰 창고 같은 건물안에는 물건이 가득 든 상자들이 산적해 있었고, 등에 상표가 붙은 일본하오리 비슷한 윗도리를 걸친 소년들이 여럿 일하고 있었다. 숙모도 치마저고리 위에다 푸른 사무복을 입고 소년들을 군자를 붙여 부르면서이것저것 지시하는 게 여간 그럴 듯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숙모가 맨 처음 들어간 데는 일본집 식모였다고한다. 숙모가 식모 살 동안은 숙부도 생선 도매상 얼음 창고 위다락방에서 자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일본말도 곧잘 하고눈썰미도 있는 숙모는 불과 몇 달 안에 주인의 신용을 얻어 주인이경영하는 잡화 도매상을 일을 보게 해 비로소 부부가 합쳐 살 수 있게 된것이었다.
숙부 내외가 같이 노는 날을 잡아 우리 식구를 다 초대해서 고기니생선이니 푸짐하게 먹여 준 적도 몇 번 있었는데 차린 걸로 봐서는 돈을잘 버는 것 같았지만 사는 환경은 우리 집만도 못한 것 같았다. 셋방만십여 가구가 양쪽으로 길게 붙은 골목 같은 마당은 하늘을 함석으로가려서 생전 볕이 들지 않았고 바닥은 울퉁불퉁하고도 습했다.
막다른 집처럼 맨 끄트머리에 있는 숙부네까지 가려면 여간 조심하지않고는 구정물이 고인 웅덩이를 밟기 일수였다. 현저동처럼 물이 귀하지않은지는 몰라도 더 비위생적인 동네였다. 엄마는 사대문 안을 일률적으로문 안이라고 부르며 문 안만 사람 살 동네처럼 여기고, 언젠가는 문 안에살아 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문 안에도 이런 빈민굴은 있었다.
마침내 개성역이었다. 엄마는 여름 교복을 산뜻하게 차려입은 아들과물방울 무늬 내리닫이로 양장을 한 딸을 자랑스럽게 앞세우고 역에내렸다. 할머니와 큰숙부 내외가 다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안아 보고 나서 등을 들이대면서 자꾸만 업히라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ㄷ.
고향 산천은 온통 푸르고 싱그러웠다. 고개를 넘고 들꽃을 꺾고 개울물에땀을 닦으며 여름내 서울을 못 벗어날 서울 아이들은 참 불쌍하다고생각했다. 들판의 싱아도 여전히 지천이었지만 이미 쇠서 먹을 만하지는않았다.
그러나 텃밭에는 먹을 게 한창일 때였다. 당장 따서 쪄낸 옥수수의감미를 무엇에 비길까. 더위가 퍼지기 전 이른 아침 이슬이 고인 풍성한이파리 밑에 수줍게 누워 있는 애호박의 날씬하고도 요염한 자태를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또 어떻고, 못생긴 걸 호박에 비기는 건 아무것도모르는 도시 사람들이 지어 낸 말이다 늙은 호박에 비한 거라고 해도 그건불공평하다. 사람도 의당 늙은이하고 비교해야 할진대 사람의 노후가 늙은호박만큼만 넉넉하고 쓸모 있다면 누가 늙음을 두려워하랴.
어른들은 한창 바쁠 때였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윗도리를안 입거나 아예 고추까지 내 놓고 사는 아이들의 맹꽁이처럼 부른 배 위로참외 국물이 줄줄 흘러, 그 위로 파리가 성가시게 엉겨 붙으면 개울로풍덩 뛰어들면 그만이었다. 우리 집 뒷간 가는 길에 건너야 하는 실개천은뛰어들 만큼 깊지는 않았지만 개울가에 당개나리가 한창이었다. 뒤란안팎의 살구나무, 앵두나무, 돌배나무가 다 꽃이 진 뒤여서  주황색 꽃잎에자주색 점이 박인 당개나리의 만개 상태가 유난히 화려해 보였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반가웠고, 나를 가장 반겨 주신 분은 역시할아버지였다. 사랑의 할아버지는 반 년 전보다 훨씬 더 고적하고 추비해보였다. 불수가 된 왼쪽 뺨이 깎아지른 듯이 야위고 가끔 경련까지 일고있었다. 오십 전짜리 은화를 던져 줄 때만큼의 노여움도 남아 있지 않은할아버지가 불쌍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빠를 따라 절을 하면서 방학동안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지성껏 해야지 하고 별렀다.
그해 여름 방학에 처음으로 사촌 동생을 보았다. 여동생이었다. 시골집을지키고 있는 큰 숙모가 낳았으니까 숙모가 배부른 것도 보았을 테고삼십을 넘은 후의 초산이었으니 그전에 어른들이 기뻐하면서도 순산을바라는 소리도 꽤 했으련만 어떻게 된 게 내 기억으로는 사전 지식 없이돌연 동생이 태어난 걸로 돼 있다.
밤이었는데 옆에 아무도 없어서 깼는지 두런두런하는 기색에 눈을떴는지, 아무튼 잠이 달아나고 보니 안방이 아니고 건넌방이었고, 곁에아무도 없었다. 할머니 옆으로 가려고 마루로 나가니까 안방에 불이켜졌기에 문을 열었더니 어서 문 닫으라고 엄마는 뒷손질을 하고 할머니는대야에서 뭔가를 주무르고 계셨다. 나는 잠이 덜 깬 소리로 할머니 닭잡아? 하고 물었다. 엄마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나를 내몰아 건넌방으로돌아와 다시 잠이 들었다.
쇠고기, 돼지고기는 설하고 추석 때나 썼고 생일이나 손님이 왔을 때는닭을 잡았기 때문에 닭 잡는 것은 어려서부터 봐 왔다. 아무리그렇기로서니 아기를 씻기려면 의당 우는 소리도 났으련만 어떻게 닭을잡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 때 나의 기상천외한 물음은 두고두고 어른들의웃음거리가 되었다.
오랜만에 아기가 생기니까 집안이 훨씬 활기 있어졌다. 조그만 목숨하나가 집안에 드리운 죽음과 우환의 어둑신한 그림자를 몰아 내고 밝은웃음을 가져왔다. 할아버지도 기뻐하시면서 '서'자 항렬자에다 '밝을명'자를 넣어 명서라고 이름을 지으셨고, 대문에 써 붙이는'산후기부정'이라는 방도 떨리는 필적으로 손수 쓰셨다. 우리 고장에선해산집에 금줄을 거는 대신 이렇게 방을 써 붙였다.
이웃이나 친척으로부터 이왕 낳을 거 아들이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고섭섭해하는 소리가 나와도 아기집이 열린 것만도 고맙지, 더 바라면죄받는다고 완곡하게 윽박지르셨다. 나도 아기 근처를 맴도느라고 거의나가 놀지 않았다.
같이 놀던 동무들을 만나도 그전 같지가 않았다. 엄마가 애써 만들어붙인 서울 태도 동무들과의 사이를 서먹하게 했지만 문제는 내마음이었다. 나는 서울 생활 반 년 만에 벌써 내가 시골 아이들과는 격이다른 것처럼 느꼈고, 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려 했으니 그 애들 보기에얼마나 눈꼴이 시었을까.
그해 겨울 방학 때의 귀향은 한층 가관이었다. 겨울 교복은 따로 없었고될 수 있으면 곤색 가운을 입도록 했다. 나는 검정 치마 저고리 위에다두루마기 대신 가운을 입고 한쪽 어깨에다 스케이트를 메고 귀향을 했다.
오빠가 언제부터 스케이트를 탔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상을 타 온 걸 본적도 있었고 창경원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걸 구경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이 하는 운동 중 가장 낯설지 않은 운동이긴 했지만나는 그걸 하고 싶어한 적도 그걸 신어 본 적도 없었다. 엄마는 그걸어디서 얻어 왔는지 나에게 신겨 보고는 발에 꼭 맞으니 시골 가서 논에서타면 되겠다고 했다. 발에 잘 맞기는 했지만 그걸 신고는 방바닥에 따로설 수도 없었다. 엄마는 방에서는 못 서도 얼음판에서는 다 타게 돼있다고 했다. 나는 오빠가 여러 사람들과 섞여 유연하게 스케이트를 타는걸 본 경험이 있는지라 아마 그런 신발만 신으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거로구나 여겼다.
무엇보다도 시골 아이들은 한번도 구경한 적이 없는 신발을 여봐란 듯이메고 귀향할 일이 마음에 들었다. 엄마와 이심전심으로 죽이 맞았달까,서울 문 밖에서 궁색하기 짝이 없이 사는 주제에 시골 가면 어떡하든 뻐길궁리부터 했다. 모녀가 합심해 여름엔 내리닫이로, 겨울엔 스케이트로어렵사리 금의환향의 꿈을 엉군 일은 지금 생각해도 무슨 코미디 같다스케이트를 시골 동무들이 부러워했는지 신기해했는지는 생각 나지않지만 충분한 구경거리는 되었으리라. 그때만 해도 겨울이 지금보다 훨씬추웠다. 귀향한 다음 날로 즉시 매끄럽게 얼어붙은 논으로 그걸 가지고나갔다. 썰매를 타고 있던 아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지켜보는앞에서 그걸 신고 끈을 매는 데까지는 잘 됐지만 저절로 타질 리가없었다. 일어섰단 넘어지고 일어섰단 넘어지기만을 되풀이했다. 타고나기를무디게 타고난 운동 신경에다가 뭔가 보여 줘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까지겹친 내 몸짓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던지 아이들은 웃지도 못했다. 다행히사랑에서 할아버지가 내다보고 계셔서 곧 그악몽 같은 스케이트 쇼에서놓여날 수가 있었다.
그 논은 우리 논은 아니었지만 바로 우리 사랑마당에서 실개천과 동구밖으로 통하는 달구지길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언제부턴지 할아버지는창호지에다 작은 유릿조각을 붙여 놓고 바깥을 내다보는 걸 취미로 삼고계셨다. 내 이상한 몸짓을 본 할아버지는 안에다 대고 고래고래 악을쓰셔서 그 사실을 알리고 나를 당장 사랑으로 잡아들이도록 했다.
할아버지는 연유도 묻지 않고 다짜고짜 그 긴 장죽으로 내 정수리를세차게 내리치시면서 호통을 치셨다.
"아니 계집애가 집안 망신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무슨 흉내를 못내하필이면 덕물산 무당의 작두춤 흉내를 내느냐?"
나는 정수리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아프면서도 복받치는 웃음을 참기가어려웠다. 나는 그때 이미 스케이트가 뭔지도 모르고 고작 덕물산 무당의작두춤이 상상력의 한계인 할아버지를 경멸 할 수 있을 만큼 앙큼해져있었다. 그러나 그 후 오늘날까지 다시는 스케이트라는 걸 신어 본 적도배웠으면 해 본 적도 없다. 처음 얼음판에 섰을 때, 이건 안 되겠구나 싶어당황스럽고 부끄러웠던 느낌이 평생 갔다.
그 사건 빼고는 겨울 방학도 여름 방학 못지않게 즐거웠다. 여름에태어난 사촌 동생은 한창 예쁠 때였고, 할아버지 명령으로 양력 과세를했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이 지천이었다. 양력 정초를 일본 설, 음력 정초는조선 설이라고 부를 때였다. 일제는 물론 일본 설을 권장했고, 조선 설엔학교나 관공서가 평일과 마찬가지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직 단속까지는안 할 때였다. 도시에선 더러 이중 과세도 했지만 시골에선 일본 설날이어느 날인지도 모르고 지냈다.
시골의 설 기간은 유난히 길었다. 설빔 바느질로부터 시작해서 엿 고고두부하고 몇 집이 어울려 돼지 잡고 편수 빚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준비기간과, 설날 차례 지내고부터 대보름까지 세배, 성묘, 덕담, 새해 무꾸리,연령, 성별에 맞는 각종 높이 등 먹고 마시고 즐기고 화합하는 기간을합치면 거의 달포는 걸렸다. 일 년 중 가장 길고도 느긋한 농사꾼의 축제기간이었다.
할아버지가 일본 설을 쇠면서까지 방학 기간과 설 기간을 일치시키고자한 것은 손자들이 빠진 설을 무의미하게 여긴 애틋한 손자 사랑때문이었을테지만 그전부터도 할아버지는 양력이 더 옳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할아버지한테는 누가 부쳐 주는 건지 측후소에서 나온 책력이 해마다왔다. 거기엔 음력, 양력뿐 아니라 이십사 절기, 일진, 월건 등이 나와 있어달력도 귀한 때라 마을 사람들이 장 담그는 날, 고사 지내는 날, 먼 길떠나는 날 등을 할아버지한테 물으러 왔다.
심지어 올겨울 추위가 심할까 견딜 만할까, 장마가 질까 가물까등도책력을 보고 예언하시곤 했다. 특히 반신불수가 되신 후엔 책력 들추어보는 걸 취미처럼 일삼으시더니 마침내 어떤 깨달음에 이르신 듯했다.
음력을 안 쓰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농사꾼들의 일반적인 상식이 옳지않다고 여기시자 그걸 참지 못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마을 사람들을계도하려 드셨다.
"아니, 입춘이 섣달에 들었다, 정월에 들었나 물으러 올 게 뭐 있나?
양력으로 치면 해마다 같은 날인데, 생각해 보게나 절기가 딱 정해져있어서 밤낮의 길이가 같거나, 밤이 제일 길거나, 낮이 제일 긴 날이해마다 같은 날로 정해진 달력이 옳겠나, 그게 해마다 들쭉날쭉하다가툭하면 윤달이 한 달씩이나 드는 달력이 옳겠나? 아무리 왜놈의 것이라도옳은 건 옳다고 해야지, 왜놈이 흰 것을 희다고 했다고 해서 우리는검다고 우겨야 옳겠나?"
이렇게 답답히 여기시고 흥분하셨지만 이십사 절기가 정해져 있는것보다 해마다 달라지는데 따라 여러 가지 증후를 예견하는 묘미에익숙해진 농민들에겐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로서는 스스로 터득한유일한 개화사상이었지만 일본 설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의 벽을허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 설은 그 후 마을 공동체이서소외된 독불장군의 설이 되고 말았다.
돼지도 두 박씨 집이 어울려서 한 마리를 잡았는데 직접 잡는 일은마을에서 사람을 사서 시켰다. 섣달 그믐께의 얼어붙은 밤, 안마당에서뒤란으로 돌아가는 머릿방 모퉁이에 불을 환히 밝히고, 장정들이웅성거리고, 이어서 돼지 목따는 소리가 처절하게 들렸다. 엿을 고느라후끈후끈한 안방 이불 속에서 나는 죽어 가는 돼지가 불쌍하단 생각보다는창호지에 너울대는 불빛과 일꾼들의 활기찬 목소리와 어우러진 돼지목따는 소리에서 흥겨운 축제 분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돼지 잡는 걸 직접 목격한 오빠는 돼지고기도 순대도 일체 입에대지 않아 어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오빠는 장손이자 유일한 아들손자였다. 오빠가 입에 대지 않는 음식은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차린의의를 잃고 말았다. 할아버진 사내가 그렇게 심약해서 무엇에 쓸 거냐고몹시 언짢아하시다가 억지로라도 먹이라고 역정을 내셨다. 심지어는 나를지목하시면서 손자와 손녀가 바뀌었더라면, 하는 억지 말씀까지 하셨다.
그건 오빠에게뿐 아니라 나에게도 상처가 되는 심한 말씀이었다.
차례지낼 때 탕에만 겨우 쇠고기를 쓰고 편수나 누름적, 녹두지짐 등돼지고기 안 들어가는 음식이 거의 없는지라 오빠에겐 따로 게장이나왔다. 나는 오빠가 숟가락, 젓가락을 다 동원해 깨끗이 파 먹은 게딱지를물려받아 그 안에다 게장 간장을 조금만 치고 밥을 비벼도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었다. 나는 전에도 할아버지 상에서 곧잘 그 짓을 했었다. 아무것도안 남아 있는 게딱지라 해도 그 안에다 비벼 먹으면 밥그릇에다 비벼 먹는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게는 전국적으로 파주 게가 유명하다지만 우리 고장 게 맛도 그에못지않았다. 민물게는 씨가 말라 게장 맛을 모르는 요새 사람하고는 안통하는 얘기지만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먹어 본 음식 중에서 가장 잊을수 없는 진미를 대라면 서슴지 않고 게장을 대리라. 논에서 벼가 누렇게익을 무렵이면 암게는 딱지 속에 고약처럼 검은 장이 꽉 찬다. 이때 담아오래 삭혔다 먹는 게장 맛은 아무리 극찬을 해도 모자라 열이 먹다 아홉이죽어도 모르는 맛이라는 좀 야만적인 표현을 써야만 성에 찬다.
오빠가 돼지고기를 못 먹게 된 사건은 할아버지 심기를 오래도록불편하게 했다. 장손으로서 못 미덥게까지 여기신 듯했다. 방학이 끝나고돌아올 때 사내자식은 이러저러해야 된다는 훈계를 길고도 간절하게하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담임 선생님 갖다 드리라고 깨강정을 한 보따리싸 주셨다.
우리 고장의 설 음식 중 엿을 고아 강정을 만든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튀밥이나 볶은콩, 땅콩 따위로 만든 강정은 생긴 것도 두루뭉실하고먹음직스럽게 만들어 주로 아이들 주전부리거리로 썼지만, 흰깨와흑임자를 따로따로 볶아 만든 깨강정은 얇고 모양도 긴 마름모로반듯반듯하고 일정하게 썬 공든 것이어서 주로 손님상에나 올렸다. 그런깨강정을 싸 주시면서 이건 만들 때부터 우리 담임 선생님을 염두에 두고특별히 정성들여 만든 거라고 하셨다.
그라나 나는 속알맹이는 어찌 됐든지 간에 누렇고 꾸깃꾸깃한 양회봉지종이에다가 노끈으로 싸맨 그 보따리를 선생님한테 갖다 드릴 일이난감했다. 선생님은 변소에도 안 갈 것처럼 여길 때였다. 예쁘고 상냥한선생님 둘레에는 늘 아이들이 어미닭 곁의 병아리처럼 모여들어어떡하든지 손을 잡아 보려고 암투를 벌였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미소와손길을 공평하게 분배하려고 애쎴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런 공평한 애정의 분배에서조차 처음부터 제외된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 촌스러운 보따리로 나를 알리는것보다는 선생님이 내 이름도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은 존재 없는 아이의소외감과 열등감에 안주하는 게 훨씬 속편했다. 나는 학교 갈 때 강정보따리를 가져가긴 했지만 선생님한테 드리진 않았다. 하교길에 양지바른사직공원에 아이들을 불러모아 그 달고도 고소한 깨강정을 다 나눠 먹어없애 버렸다.
그 보따리를 감쪽같이 없애 버리긴 아주 쉬웠다. 만만해 보이는 한두아이한테 먼저 맛을 보이고 나서 더 먹고 싶은 사람은 여기 붙으라고놀리면서 숨차게 사직공원까지 달려가는 기분이 껍질을 깨고 날아오르는것만치나 상쾌했다. 별안간 비굴하게 구는 아이를 일부러 못 본 척하고도하고 촌스러워 보이는 아이한테 더 주기도 했다. 그 일을 기회로 친한애가 생긴 건 아니지만, 서울 애들을 거느려 본 것 같은 기분과 한께 나를알아주지 않는 선생님한테 복수한 것 같은 느낌까지를 맛보았다. 그러나뒷맛은 말할 수 없이 쓸쓸했다.
초가을부터 엄마가 다시 집에서 삯바느질을 하기 시작한 게 큰 위안이되었다. 집에 가면 엄마가 방에 있겠거니 생각만 해도 산을 넘는 발걸음에힘이 났다. 엄마한테 들어오는 바느질거리는 거의 노랑 빨강 분홍 자주초록 남색 등 곱고 진한 비단이어서 우중충한 방 안을 딴 세상처럼화려하게 만들었다. 겨울 방학이 지나고 음력 설이 임박해지자 밤을 새도모자랄 만큼 바느질거리가 밀렸다. 그럴 때 엄마는 자신의 시름도 달랠 겸잠도 쫓을 겸 옛날 얘기 하나 해 줄까 하고 나에게 말을 시켰다.
엄마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할멈 할멈 떡하나 주면 안잡아먹지, 혹 팔아먹은 얘기, 단 방귀장수 얘기, 콩쥐 팥쥐, 장화 홍련 등은할머니한테도 여러 번 들은 거였지만 엄마한테 들으면 새 맛이 났다.
엄마는 그 밖에도 모르는 이야기가 없었다. 박씨부인전, 사씨남정기,구운몽, 수호지, 삼국지 등 내 나이엔 어려운 이야기까지 엄마는 내 수준에맞게 꾸며서 이야기하는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도 박씨 부인전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몇 번씩 졸라서 또듣고 또 듣곤 했다. 처음엔 심심풀이 삼아 자진해서 해 주던 이야기에내가 흠뻑 빠지자 엄마는 "이야기를 바치면 가난하다는데." 하고 걱정을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다시 이야기 보따리를 풀곤 했다.
세상에 우리 엄마만큼 삼국지를 재미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있을까? 엄마가 "옛다 조조야, 칼 받아라." 하면서 그 동작까지 흉내내느라바느질하던 손을 높이 쳐들었을 때 엄마의 손 끝에서 번쩍이는 바늘 빛은칼빛 못지않게 섬뜩하고도 찬란했고, 나는 장검을 휘둘러도 시원치 않을우리 엄마가 겨우 바느질 품밖에 못 파는 게 안타까워 가슴 속에 짜릿하니전율이 일곤했다.
가장 궁핍했던 시절 엄마의 이야기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된것은 사실이나 나쁜 영향도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소학교 다니는 동안동무 없이도 심각한 불행감 없이 그 외톨이 상태를 거의 즐기다시피했는데 그건 내 머릿속에 잔뜩 들어 있는 이야기가 나에게 그런 건방진능력을 준 것이 아니었을까.
훗날 돌이켜보며 해 본 공 없는 생각이다. 육 년 동안 서울에서는드물게 산을 넘어 통학을 하면서도 무섭다거나 심심하다는 생각이 조금도안 들었고 어쩌다 길동무가 생기는 경우도 서로 무슨 말이든지 해야 할 것같은 부담감이 귀찮아서 혼자 다니는 걸 그 중 편하고 자유롭게 여겼다.
어린 나이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도 이야기에서 촉발된 공상하는 재미때문이었는데 그 또한 정상적인 정서 발달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5. 괴불마당 집
오빠가 드디어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다. 할아버지와 엄마의 소원대로총독부에 취직이 된 것이었다. 그보다 앞서 혼자 짓는 농사를 벅차해하던시골의 큰숙부가 면서기로 취직을 했다. 텃밭만 남기고 몇십 석 정도의논은 소작을 주었다. 마을에 소작만 부쳐 먹는 밭이 따로 있었던 것은아니고 우리 정도의 농토를 가진 자작농 중 일손이 넉넉한 집에 부탁하여부쳐 먹도록 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보다 더 배웠다 자부하고, 툭하면 마을 사람들을상것들이라고 무시하고 싶어하는 할아버지의 양반의식이란 것도 실은얼마나 비루한 것이었던지, 자손이 총독부고 면사무소고 그저 관청에취직한 것만 대견해하셨다. 내 나라야 어느 지경에 가 있든지 간에 땅파먹는 것보다는 붓대 몰려 먹고 사는 걸 더 낫게 치고, 이왕 붓대를놀리려면 관청에서 놀리는 걸 더 높이 여긴 걸 보면, 양반의식 중에서선비 정신은 빼 버리고 아전근성같이 고약한 것만 남아난 게 우리 집안의소위 근지가 아니었나 싶다.
숙부가 면서기로 취직하는 데도 백이 필요했는데 백이 돼 준 분은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이었다. 그분의 아버지는 역사책에도나오는 나라 팔아먹은 문서에 도장 찍은 역적이라 그분도 일본의 작위까지가지고 있었다. 면서기 정도에는 과람한 백이었고, 면서기 정도를 출세라고생각하는 할아버지이고 보니 그분에게 설설기는 건 차마 눈뜨고 못 볼정도였다.
그분이 시골에 내려오는 일이 어쩌다가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같은항렬의 친척을 마치 신하가 상전 대하듯 했고, 분수에 넘치는 최상급의대접을 하기 위해 여자들을 며칠 전부터 들들 볶아댔다. 여북해야할머니는 며느리들한테 그놈의 자작 영감이 일 년에 두 번만 내려왔다간우리들 다 콩가루 되고 말지 싶다고 농담을 하시곤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천격스러운 하치 양반 집안에서 총독부에 취직이된 자식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엄마가 더욱 당당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오빠는 반 년 만에 총독부를 그만두었다. 오빠의 다음 취직 자리는와타나베 철공소라는 일인의 개인 회사였다.
엄마는 철공소라는 소리에 대경실색을 했다. 기껏 공부를 시켜 놓았더니대장간이 웬 말이냐는 것이었다. 오빠는 그 회사가 큰 대장간과 다름없는건 사실이나 자기는 사무직이고 총독부보다 월급도 배가 넘는다고 엄마를위로했다. 엄마는 할아버지나 시골 사람들한테 회사 다닌다고 말하지 행여철공소 소리를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당부하면 총독부에 대한 미련을 못버렸다.
오빠가 철공소에서 처음으로 타 온 상여금이 백몇십 원이었다. 서울사는 작은 숙부네까지 함께 모여 우리는 가슴이 울렁이며 푸르스름한 백원짜리를 돌아가며 구경을 했다. 숙부 내외는 어쨌는지 모르지만 엄마와나는 생전 처음 보는 백 원짜리였다. 자루 같은 걸 어깨에 멘 복스럽게생긴 노인 그림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진지하게 그게 쌀자루일까돈자루일까 궁금하게 여겼다.
오빠는 엄마가 삯바느질을 그만두고 편히 지내길 바랐지만 엄마는 집 살때까지는 안 그만두겠다고 선언을 했다. 사십여 원의 월급과 백 원이 넘는상여금으로 앞당겨진 엄마의 집 살 꿈은 총독부를 그만둔 서운함을달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삯바느질은 여전히 밀렸지만, 간간이 틈을내서 집을 보러 다니는 게 엄마의 취미였다.
집을 보러 갈 때 엄마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표정도 거만하게 꾸몄다.
돈도 없이 연습삼아 보러 다니는 거니까 복덕방한테 그런 속사정을 들킬것 같은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분수에 넘치는 큰 집을보러 다니는 것 같진 않았지만 문 안의 점잖은 주택가를 골라 다니는것만은 확실했다. 가끔 문 안과 문 밖의 현격한 집값의 차이를 한탄하곤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집을 사게 되는 날이 곧 현저동을 면하는날이거니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집을 너무 일찍 샀고, 역시 현저동이었다. 차근차근 집 살계획을 세우던 엄마가 별안간 무리를 해서 집을 사게 된 것은 순전히 나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주인 집 아이하고 노는 게 질색이었지만 이태씩한 집에서 살면서 무슨 원수가 졌어도 전혀 상종을 안 하고 살 수는 없는일이었다. 더군다나 아이들 세계엔 그 나름의 끄는 힘이랄까 친화감이있는데다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심보까지 있어서 은근히 친한사이었다.
골목에서 석필을 가지고 뭔가를 그리면서 놀다가 싸움이 붙었는데 마침퇴근하던 오빠가 보고 싸움을 말리려고 했지만 나는 든든한 백이 생긴김에 그 애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는 게 얼굴을 할퀴었고 드디어 아이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고 말았다.
내가 동네 아이를 할퀴거나 꼬집은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삐쩍마르고 허약해 보인다는 열등감 때문이었는지 싸우다가 몸싸움만 됐다하면 나도 모르게 손톱을 사용했다. 남한테 맞으면 대신 한 대 쥐어박고말지 제발 손톱 자국만은 내지 말라고 엄마가 누누이 타일렀건만 또 그짓을 하고 만 것이다.
주인 집 여자에게는 자기 자식 얼굴에 손톱 자국 난 것도 분했지만,평소 누구하고 잘 어울릴 줄 모르는 아이가 툭하면 그런 해코지를 하니요새말로 하면 심각한 문제아로 보였을 것이다. 엄마한테 나중에 무슨꼴을 보려고 자식을 그 따위로 가르치느냐고 동정어린 악담을 했다. 그걸옆에서 보고도 안 말렸다고 오빠까지 싸잡아 욕을 먹었다.
엄마는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어떡하든 밀고 나가는 강한 성격인데다가교만하기도 해서 안집식구를 은근히 경멸하고 있었다. 안집의 여러 식구의관계는 복잡해서 첩도 있고 전실 자식도 있었다. 수입이 일정치 않은가난뱅이 주제에 씀씀이가 헤픈 것도 엄마는 기회 있을 때마다 비웃었다.
가끔 주인 집 여자가 엄마한테 돈을 꾸러 올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여자 앞에서는 흔쾌히 꿔 주고 나서 가고 나면 중얼중얼 욕을 했다.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지. 쌀이나 장작이 떨어졌다면 돈을 꿔서라도사야지만, 암 사야구말구. 그렇지만 어떻게 소증난다고 곰국거리 사게 돈을꿔 달래누. 내가 세 사는 죄로 꿔 줬지. 딴 집 여편네가 그 따위수작했다간 망신을 줘서 보내지 안 꿔 준다."
아마 곰국거리 사게 돈을 꿔 달란 모양이었다. 이렇게 얕보던 여자한테천금 같은 자식들이 욕을 먹고 훈계까지 당했으니 엄마 심정이오죽했을까. 그러나 엄마는 우리 남매는 별로 야단치지 않았고 주인 여자욕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나는 더 무서웠다.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같았다. 그후 현저동에 처음으로 집을 산 경위를 경제정의 지에 소상하게소개한 것이 있어 여기 그 중 몇 대목을 인용한다.
다음 날 어머니는 당장 집을 사러 나섰고, 며칠 안 돼 정말 집을계약하고 말았다. 같은 빈촌의 더 꼭대기의 여섯 칸짜리 작은 집이었지만,어디 가서 도둑질을 하지 않은 바에야 우리가 집을 산다는 건 있을 수없는 일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동안 어머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머니는 그 동안 정말 도둑질을 한 것이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그나마 먼저 서울에 자리잡았고 해서 시골 사람들이심심찮게 드나들었다. 마침 그 중 한 사람이 서울서 장사를 시작해보겠다고 땅을 팔아 목돈을 만들어 가지고 와 며칠 우리 지에서 신세를지다가 시골 그의 집에 일이 생겨 어머니에게 그 돈을 맡기고 내려간사이에 그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는 남의 돈을 슬쩍유용해서 집을 계약한 것이었다. 일부터 저질러 놓고 나서야 시골조부모님과 숙부한테 자초지종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 급히 땅도 좀 팔고급전을 끌어대는 등 우선 남의 돈을 메우는 데 힘을 합쳤기 때문에 남에게손해도 안 입히고 망신도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한동안 어머니는 집안 어른들과 동기간 앞에서 죽어지내야했고, 내가 보기에도 어머니는 참 이상한 분이었다. 어쩜 우리 엄마가 그럴수가 있을까. (중략) 그때만 해도 어머니를 도덕적으로 완벽한 분이라고여길 때였으므로 어머니가 죄인처럼 굴던 상황은 동심에 심한 혼란을가져왔다. 굶주린 자식을 위해 찬밥을 훔친 거나 다름없는 비장하고맹목적인 모성애였다는 걸 이해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다.
어머니의 성품으로 보아 광기에 가까운 용단과 차마 견디기 힘든 곤욕을치르고 서울에 최초로 장만한 내 집은 그대로 기와집이었다. 여섯 칸짜리집에 방이 세 개나 되고도 부엌과 마루와 대문간을 갖추고 있었으니 이모든 구색이 공평하게 한 칸씩이었다. 어찌나 반지빠른 자투리 땅에다지은 집인지 명색만 있는 마당은 삼각형이었고 축대가 높았다.
그때나 이때나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날품팔이꾼에게 집 치장을 기대할순 없는 일이나 전 주인이 땜장이고 식구가 많던 그 집의 형편은 더 심한편이었다. 빈대가 없으면 서울 집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집집마다빈대가 들끓을 때였지만 언제 적에 도배를 했는지 찌들고 해진 벽지에빈틈없이 찍힌 빈대 핏자국은 정말 끔찍했다. 오빠니 내가 뜨악해하건말건 어머니는 급한 돈 문제가 해결되자 신바람이 나서 온 집안의 문짝을다 떼어 내어 양잿물로 닦고 기둥과 서까래까지 손닿는 데는 온통양잿물로 닦아냈다.
어머니 말로는 집이 뼈대가 좋기 때문에 좀 험하게 쓴 것은 문제가 되지않는다는 것이었다. 뼈대란 기둥과 서까래가 얼마나 실하냐를 뜻했다. 과연몇날 며칠을 쓸고 닦고 도배하고 나니 한결 집 꼴이 되어가긴 했지만어머니가 왜 오직 뼈대 하나만 보고 그 귀살스러운 집을 샀나를 이해한것은 나중이었다. 우리 몫의 약간의 토지를 처분한 것 말고 숙부한테신세진 것은 그 집을 은행에 저당을 잡혀서 갚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서민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금융기관은 금융조합이었다.
융자 신청을 하고 나면 조합에서 감정하는 사람을 내보내 그만한 액수를융자해 줘도 되나를 감정토록 하는데 그 사람은 나오도록 규정된 날틀림없이 나왔고, 어머니는 그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정방문 오는 날처럼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렸다.
감정인은 어머니의 예상대로 과연 도배 장판보다는 뼈대를 주의 깊게보았고, 어머니에게 얼마나 융자 받고 싶은가를 물었다. 어머니는 이만한집이면 팔백 원은 받을 만하지 않겠느냐고 되레 배짱을 부렸고, 그는 아무말도 아무런 언질도 안 주고 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고,냉수 한 모금 담배 한 대 대접하지도 않았고 굽실대거나 아부하지도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곧 팔백 원의 융자가 나왔고 어머니는 그걸로 모든문제를 깨끗이 해결할 수가 있었지만 융자에 대해 특별히 고마워하거나운이 좋았다고 여기는 것 같진 않았다. 당시 그 정도의 서민 금융혜택은절차만 밟으면 누구나 쉽게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였다.
그때 어머니는 현저동 꼭대기에 그 여섯 칸짜리 기와집을 천오백 원에사서 반이 조금 넘는 팔백 원을 융자 받은 것이었다. 금융조합에 아는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머니에게 남다른 교제술이 있었던 것도아니다. 관청이나 파출소 앞에선 괜히 안색이 조금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관청이나 파출소 앞에선 괜히 안색이 조금 달라지는 평범한 촌부에 지나지않았따. 그런 촌부가 은행문은 겁없이 두드릴 수가 있었고, 원하는 만큼의혜택도 받아 낼 수가 있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건만 남들이 안 믿어 줄까 봐 걱정이 되는 건 무슨까닭일까? 아마 해방 후에 비뚤어진 금융 풍토 때문에 융자라면 특혜나특권 등 비리 아니면 남다른 수완이 있어야만 인연이 닿는다는 우리모두의 선입관을 의식해서일 것이다.
면서기나 동서기만 되어도 반말을 일삼던 하급관리들, 멀리서 그번쩍거리는 칼빛만 보아도 오금이 저려 죄 없이도 뺑소니칠 궁리부터 하던순사들, 쇠사슬을 발목에 찬 죄수들을 짐승처럼 잔혹하게 다루던 간수들,살기와 오기가 충천하던 일본 병정들, 가정 방문 와서 일본말을 한마디도못 하는 어머니를 야만인 보듯 경멸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본인선생 등등, 유년기와 소녀기의 의식을 짓누르던 일제의 지긋지긋한 악몽을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그러나 그때뿐 아니라 그 후에도 어머니가 집을 늘려 갈 때 손쉽게도움을 받곤 했던 금융기관만은 그 지겨운 관료주의와 별도로 생각이되어서 거의 적의가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일제시대 때 은행문이 낮았기때문에 함부로 꾸어 쓰고 갚지 못하여 얼떨결에 재산을 수탈당하는 주요한원인이 된 사실을 묵과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는 그 집을 괴불마당 집이라고 불렀다. 마당이 괴불처럼 세모였기때문이다. 우리는 다 같이 그 집에 만족했고 또한 사랑했다. 오빠는건넌방을 혼자 쓸 수가 있었고 문간방은 세를 주었다. 기역자 집의 양끝인 건넌방과 대문간을 직선으로 이으면 마당이 삼각형이 된다. 집이들어앉지 않은 삼각형의 한쪽 변은 높은 축대고 축대 밑은 그 아랫집뒤꼍이었다. 엄마는 축대 밑에 있는 집의 양해를 구하고는 우리 마당을추녀처럼 그 뒤란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늘어난 마당을 꽃밭으로 만들었다.
밑의 집에선 뒤꼍에 지붕이 생겼다고 좋아하고 나는 꽃밭을 가질 수가있어서 좋았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널빤지를 깔로 흙을 부은 꽃밭에서도 분꽃과금잔화가 어찌나 잘 퍼졌는지 볼 만했다. 가을에 고사도 푸짐하게 지내이웃과 넉넉히 나누어 먹었다. 세 살던 집보다 더 꼭대기였지만 엄마는이사 간 동네를 마음에 들어했다. 나가 놀지 말란 소리도 안 했다. 엄마가진저리를 치면서 싫어한 것은 안집 사람과 안집의 사는 방법이었지 동네사람 다는 아니었나 보다.
괴불마당 집 바로 앞집은 구장 집이었는데 집도 반듯하고 화초를 많이길렀다. 특히 옥잠화가 여러 분이어서 꽃이 피어날 어스름녘이면 감미로운향기가 우리 집까지 끼쳐 왔다. 골목이 좁고 다들 대문을 열어 놓고 살때였으니까. 우리는 그 집을 구장 집이라 부르지 않고 옥잠화 집이라고불렀다. 그 집에 나보다 두 살 위인 언니도 있어서 옥잠화 알뿌리를 몇번씩 우리한테 찢어 주었지만 우리 집에선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우리다음 집은 일각대문 집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옥잠화 집하고도 일각대문집하고도 친했다.
방세도 들어오고 오빠가 월급도 많이 타 와 엄마는 삯바느질을 덜 했다.
오빠 몰래 꼭 엄마의 솜씨를 원하는 사람한테만 해 주는 것 같았다.
오빠는 효성이 지극해서 엄마가 남의 바느질하는 것만 보면 슬픈 얼굴로골을 냈다. 내 집에서 산다는 것과 월급을 타서 한 달을 설계하고식구끼리 서로 화목한 것이 얼마나 좋다는 게 어린 마음에도 느껴졌다.
비록 현저동은 못 면했지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도시 생활에적응하고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 시기였다.
방학을 하기가 무섭게 시골에 내려가는 건 전과 다름없었다. 귀향을앞두고는 가슴이 설레고 방학 내내 서울서 지낼 수밖에 없는 서울내기들을참 안됐다고 여기는 것도 여전했다. 그러나 시골에 눌러 살라면 못 살 것같았다. 침침한 등잔불이 제일 갑갑했다. 개학해서 서울로 돌아올 때면대낮 같은 전깃불이 반가워 고향의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을 때 못지않은기쁨을 맛보았다.
취직한 오빠는 방학 동안 서울에 혼자남아 숙부네서 출퇴근을 했다.
숙부는 험한 고생 끝에 남대문통에 자기 가게를 가질 만큼 돈을 모았다.
그래서 우리가 집 살 때도 적지 않은 돈을 돌려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생선 도매상에 다닐 때의 연줄인지 숙부가 처음 시작한 장사는 얼음장사였다. 깨끗한 식료품상이 밀집한 상가에 있는 숙부네 얼음 가게는 늘바쁘고 활기가 넘쳤다.
숙부네 놀러 갈 수 있다는 것도 서울 생활의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숙부네는 그때까지도 아이가 없어서 우리 남매에 대한 애정이 극진했다.
방학해서 시골 갈 때도 먼저 숙부한테 통신부를 보이고 칭찬도 받고 기차안에서 먹을 것도 듬뿍 받았다. 내 성적은 삼사 학년이 될 때까지중간에서 약간 처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숙부 또한 국어 산수만 잘 하면창가나 체조는 못 할수록 좋다는 엄마의 통신부 보는 법을 무조건 따랐기때문에 조금도 기죽을 필요가 없었다. 숙부네 가면 귀여움을 받을 수 있는것도 좋았지만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이 반반씩 섞인 상가의 독특한분위기가 현저동과는 딴 세상 같은 것도 마음에 끌렸다. 숙부네 가게는 큰얼음 창고가 있었고 그때만 해도 아주 귀한 전화도 가지고 있었다.
겨울에는 숯도 팔았지만 그 상가에선 '고리야상'으로 통했다.
숙부네가 서울서 장사로 성공했단 소리는 실제보다 과장되게 시골에알려진 듯했다. 장삿길을 터 보려고, 혹은 남의 상점에 고용살이라도들어가 보려고 숙부를 믿고 상경하는 고향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숙부로부터 장장한 숙부의 입지전을 들어야 했다. 무작정상경해서 일본인 생선 도매상 얼음 창고 위 다락방에서 겨울을 나면서고생한 이야기였다. 숙부가 그런 사람들한테 실컷 으스댄 것밖에 그다지큰 도움을 준 것 같지는 않고, 또 그럴 처지도 못 됐건만 숙부네 집에항상 시골 사람들 발길이 그치지 않았던 것은 숙부네 상점이 바로 경성역코앞이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은 그런 연줄로 숙부는 고향 마을 소년을 한 사람 부리게 되었는데자기의 입지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소년을 훈련시키려 들었다. 자기가 당한것처럼 얼음 창고 천장에다 다락방을 들이고 소년을 기거하게 했다.
그러나 깔끔하고 상냥한 숙모가 꾸며 놓은 다락방은 내가 보기엔 여간근사하지 않았다. 한창 이층집을 동경할 때였다.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야하는 게 이층집 기분이 났다. 바닥에 다다미가 깔린 것까지 그럴 듯해보였다. 나는 어쩌면 막연히 일본식 생활 방식을 동경하고 있었는지도모르겠다.
그 다락방에서 나는 처음으로 만화책을 접하게 되었다. 일본 사무라이가칼싸움하는 만화였는데 숙부한테 들키자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나뿐아니라 소년까지 불러다가 야학 갈 공부 한다기에 밤늦도록 전깃불을 켜놓고 있어도 봐 주었더니 이 따위 못된 책을 보느라고 전기값을축냈더냐고 만화책으로 소년의 빡빡머리를 탁탁 때리며 야단을 쳤다. 나는소년에게 괜히 미안했고 읽다만 만화책의 재미도 여간 감질이 나지않았다. 덮어놓고 못된 짓 취급을 당하니까 더욱 그 재미를 잊을 수가없었다.
오랫동안 만화 속의 그림이 눈에 삼삼하고 다음 줄거리가 궁금해서 어디가서 훔칠 수 있는 거라면 훔쳐서라도 마저 보고 싶었다. 요즈음 세상의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얘기나 내가 교과서 외의 읽을 거리를 접해 본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 집이 가난한 탓도 있었지만 동무들 중에도동화책 같은 걸 가지고 있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
엄마는 당신의 이야기 재주로 딸을 이야기를 좋아하도록 길들여만 놓고,의당 그 다음에 나타날 욕구에 대해서는 전혀 무책임했다. 학기 초에 새교과서를 받으면 국어나 수신 책을 뒤져서 미리 재미있는 얘기를 골라놨다가 심심할 때면 소리를 높여 읽고 또 읽는 게 기껏 내 나름의 갈증의해소 방법이었다. 큰 소리로 책을 읽고 있으면 엄마는 내가 공부하는 줄알고 좋아했다. 그러면 나는 혀를 낼름대며 엄마를 속여먹고 있다는 묘한쾌감을 맛보곤 했다.
오빠 방엔 얼마 안 되는 오빠의 책이 따로 있었지만 거의가 조선말로 된소설책이어서 나는 조금도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조선말을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내 또래는 아주드물었다. 나는 그런 드문 아이 중의 하나였지만, 그걸 긍지로 여기기엔나는 너무 철이 없었다.
시골서 어렸을 때 배운 거니까 잊어버릴 법도 한데 안 잊어버린 것은한글을 써먹을 기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인데 나는 그 기회가 돌아오는 게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그 기회란 시골에 계신 조부모님께 문안 편지를쓰는 일이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마음으로부터 좋아했다. 나에게고향과 조부모님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한덩어리였다. 만약 고향에그분들이 안 계신다면 일 년에 두 차례의 귀향이 그렇게 가슴 설레는희열일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분들이 박적골 아닌 딴 데 계신다면그분들이 그렇게 그리울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반신불수인 것까지도 박적골의 터줏대감답다고생각했다. 방학이 가까워 오면 할아버지의 침에 절어 시척지근한 냄새가밴 베수건에 싸 둔 곶감이나 밤 따위가 다 절절히 그리워지곤 했다. 그건먹고 싶다는 것하고는 달랐다. 핏빛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건들대는수수이삭을 보고 싶은 것과 같은 감미롭고도 쓸쓸한 정서였다. 할아버지화로에 불이 꺼졌을 때 누가 담뱃불 붙이는 걸 도와 드릴까. 사촌 동생은아직 어리고. 아아, 이번 방학에 내려가면 할아버지 말씀대로 입의 혀처럼심부름을 잘 해야지. 내가 쓰고 싶은 편지는 그런 내 마음을 나타내는것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내 마음대로 편지를 쓰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엄마는 편지에는 일정한 틀이 있다고 믿고 있었고 거기에 어긋나는 편지를딴 사람도 아닌 웃어른에게 드린다는 건 말도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불러앉히고 마치 받아쓰기처럼 편지를 쓰게했다.
편지는 늘 비슷한 말로 시작했다. "할아버님 전 상사리. 할아버님 기체후일향만강하옵시고..." 대강 이런 식이었다. 항렬 순서로 온 집안 식구안부를 다 묻고 나서 이쪽도 하념하옵신 덕택으로 몸 성히 잘 있다는 것을식구마다 따로 아뢰고 나서, 다시 춘하추동 계절에 따라 말만 약간 바꾸어,일기가 이만저만 불순한 계절에 행여 옥체 미령하실까 봐 문안 여쭙는다는사연으로 끝맺게 돼 있었다.
나는 이런 받아쓰기가 어찌나 따분하고 재미가 없는지 쓸 때마다 몸이비비 꼬이고 조선글만 쓸 줄 몰랐다면 이런 고역을 안치르는 건데 하는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조선글의 유일한 씀씀이가 이렇게지겹기만 한 나머지 조선말로 된 읽을 거리에도 관심이 없었다. 으레재미없고 따분하려니 했다.
이차대전을 맞은 것도 괴불마당 집에서였다. 일본 사람들은대동아전쟁이라고 했다. 무언지도 모르고 신이 났다. 우리는 그전부터 이미호전적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일본은 벌써부터 지나사변이라 부르는전쟁(중일전쟁)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중국을 '짱골라' 장개석을'쇼오가이세끼'라고 부르면서 덮어놓고 무시할 때였다. 아침에 운동장에서조회를 할 때마다 황국신민의 맹세를 하고 나서 군가 행진곡에 발을 맞춰교실에 들어갈 때면 괜히 피가 뜨거워지곤 했는데 그건 뭔가를 무찌르고용약해야 할 것 같은 호전적인 정열이었다.
짱골라한테는 줄창 이기고 있다고만 들어서 적으로는 시시했다. 우리는우리도 모르게 더 큰 적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쇼오가이세끼에다 '루스벧또, 짜아찌루'가 무찔러야 할 악의 괴수로추가되고, 매일매일 승전의 소식이 전해졌다. "깨어졌다 싱가폴, 물러서라영국아." 하는 노래를 조선의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가 불러 단박 유행을시켰고, 남양군도를 하나하나 함락시킨 걸 뽐내고 자축하기 위해 밤엔등불 행렬이 장안을 누볐다. 고무가 무진장 나는 남양군도가 다 일본땅이됐다고 전국의 국민학생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거저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자랑 끝에 불붙는다고 그 후 얼마 안 돼 쌀이 배급제가 되더니운동화와 고무신까지 배급제가 되었다. 쌀은 식구에 따라 배급통장을만들어 주었지만 고무신은 애국반을 통해 한 반에 한 두 켤레씩 나오면제비를 뽑아서 차례를 정했다. 반상회 때마다 꽝밖에 못 뽑고 나서 엄마는우리는 제비에는 소질이 없나 보다고 한탄을 하곤 했다. 생활 필수품이하루하루 귀해졌다.
창씨개명령은 그보다 앞서 내렸는데 살기가 각박해지면서 그 강제성도심해져 더욱 시국을 흉흉하게 했다. 우리는 창씨를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그것만은 안 된다고 완강하게나오셨기 때문이다. 호주의 권한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남대문통에서장사하는 숙부는 성을 안 갈아서 장사가 잘 안 된다는 식으로 할아버지를원망했다. 엄마는 엄마대로 오빠의 사회 생활이나 내 학교 생활에 지장이있을까 봐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이키시길 고대했다.
사오학년 이 년 연속해서 담임이 일본 사람이었다. 엄마는 자주 나에게그 일본 선생이 너 성 안 갈았다고 뭐라지 않더냐고 물어보곤 했다. 내가그런 일 없다고 하면 엄마는 네가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왜 구박을 안하겠느냐고 당신 편한 대로 넘겨짚곤 했다. 내가 운수가 좋아 좋은선생님을 만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한 반에 창씨 안 한 애가 서너 명밖에안 남았을 때도 그런 애들을 선생님이 특별히 구박하거나 무언의 압박을가한 것 같은 기억은 전혀 없다.
불령선인으로 낙인이 찍힌 특별한 집안이라면 모를까, 우리네 같은 보통집안 사정은 대개 비슷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단시일내에 창씨가그렇게 급속히 확산됐던 것은 너무 내 경험 위주로만 생각하는 건지는몰라도 아직까지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다. 박적골 사람들도 두 박씨집만 빼고 나머지 홍씨들은 초기에 일찌거니 도쿠야마로 성을 갈았다.
성을 안 갈아서 실질적인 불이익이 우려되는 건 면서기인 큰숙부련만,면서기 정도의 관직도 출세한 것처럼 여기는 할아버지가 창씨 문제에있어서만은 이상하도록 줏대 있게 구셨다.
그게 할아버지의 모순이라면 음력 설만이 조선 설이라고 온갖 장애를무릅쓰고 지켜 나가면서도 성 가는 건, 알아서 간 건 마을 사람들의모순일 터였다. 우리 엄마도 물론 알아서 기는 대표적인 케이스였지만나는 그와는 좀 다른 까닭으로 역시 창씨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내이름을 일본말로 부르면 '보쿠엔쇼'가 되는데 비상시국이 되면서방공연습을 매일같이 했는데 방공연습을 일본 말로 하면 '보쿠엔슈'가되었다. 발음이 비슷해서 방공연습 때마다 아이들이 나를 놀렸다.
창씨개명을 하면 한자를 음으로 읽지 않고 뜻으로 읽게 되는데 하나코니하루에니 하는 여자 이름이 그렇게 듣기 좋고 부러울 수가 없었다.
집에서도 일본말로 생활한다고 자랑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 애의엄마는 대개 젊고 멋쟁이였다. 우리 처지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얘기였다.
엄마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쓸개 빠진 것들이라고 격분을 했다.
학부형회가 있으면 엄마는 꼭 참석을 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일인이고학부형이 일본말을 모르는 경우에는 반장을 불러서 통역을 시켰다. 일본인선생님 앞에 풀을 세게 먹인 뻣뻣한 무명옷을 뻗쳐입고, 쪽에 흑각 비녀를꽂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꼬마 통역에 대한 배려라곤 조금도 없이 당신하고 싶은 말을 엄숙하게 하고 있는 엄마를 바라본다는 것은 고문처럼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엄마의 개인적인 자존이었을 뿐 민족의식과는상관이 없지 않았나 싶다. 왜냐 하면 엄마는 창씨 안 한 게 자식들에게행여 어떤 불이익이 되어 돌아올까 봐만 지나치게 걱정했을 뿐, 만약에불이익이나 박해를 받을 경우 자식들이 떳떳하게 견딜 수 있도록 도와 줄준비가 돼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바라는 자식의 출세도 물론일제의 그늘 아래에서의 일일 뿐 조선이 자주적인 운명에 대한 바늘구멍만한 예감도 갖고 있지 않은 범용한 아낙에 지나지 않았다.


6. 할아버지와 할머니학부형회 때마다 엄마가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도 창피해 죽겠는데어느 날 수업 중에 엄마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그리고 고무신도 벗지 않고교실문을 드르륵 열었다. 일본인 남자 선생님이 담임할 때였는데 엄마는마치 그가 일본인이라는 걸 모르는 것처럼 예절 바른 어려운 조선말로시골의 조부님이 위독하다는 전보가 와서 딸애를 데리러 왔다는 뜻의 말을했다.
선생님도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챘는지 반장한테 시키지 않고 나를불러 통역을 시켰다. 나는 그때 엄마가 쓴 장엄하기까지 한 고급의우리말을 그대로 옮길 수 없는 게 억울하고 초조한 나머지 울상이 되어형편없는 통역을 했다. 아무튼 뜻은 전달이 됐으므로 선생님은 어서가라고 허락을 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 경황 중에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경우 장례를 치르는동안은 결석 처리를 하지 않는 게 교칙인 줄 아는데 그게 맞지요? 하는확인까지 통역을 시키고서야 내 손을 잡고 교실을 물러났다. 엄마는 시골갈 준비를 다 해 가지고 학교에 들렀는지라 나는 책가방을 멘 채경성역으로 직행을 해 기다리고 있던 오빠와 숙부 숙모와 합류했다.
방학 대 귀향할 때는 토성행 완행 열차를 탔었는데 그날 처음으로신의주행 급행 열차를 탔다. 기차는 한번도 안 쉬고 달리다가 처음으로개성역에 잠시 정차했다. 깜깜한 밤이었지만 우리 다섯 식구는 쉬지 않고이십 리 길을 달려갔다.
사랑에 불이 환하고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할아버지는 의식은 없지만아직 생존해 계신다고 했다. 세 번째 동풍이어서 다들 임종을 각오하고있었다. 사랑에 모인 사람들이 나는 어리다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나도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할아버지를 뵙는 게 무서웠기 때문에 얼른 그자리를 피했다.
안채에도 불을 밝히고 아무도 자는 사람이 없었지만 나는 깊은 잠에빠졌고 곡하는 소리에 깨어났다. 새벽녘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소리를 듣고도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오일장을 치르는 동안 당시의풍습에 따라 한시도 곡이 그치지 않았지만 호상답게 집안 분위기가침울하지는 않았다.
박적골 사람들은 물론 인근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까지 안동하고 와상가에서 침식을 해결했고, 그 비상시국에 그런 일을 넉넉하게 치렀기때문에 모두 돌아간 분의 복을 기리고 부러워했다. 다 할아버지를 끝까지모신 큰숙부 덕이었다. 막상 큰일을 당하니까 서울 가서 돈도 벌고 출세도한 걸로 알려진 작은숙부나 오빠보다도 면서기의 세도가 더 빛을발휘했다. 그 때 큰숙부는 면의 총무부장이었다.
상 중에 할아버지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 이는 오빠였다. 오빠는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애통이 지나쳐 한때 몸을 다 해쳐 엄마의애간장을 태웠다고 한다. 내가 세 살 때였으므로 내 기억 속에 아버지의죽음은 없다.
이번에도 오빠가 맏상주였으므로 오빠는 굴건제복을 했다. 지금 오빠는늠름한 청년이지만 아버지의 상 중에서 열 살 남짓한 소년이 굴건제복을하고 서럽게 울었을 생각을 하면 나는 그런 일이 나와는 상관없는오빠만의 운명인 양 애틋한 슬픔을 느꼈다. 그건 오빠의 약하고 여린 면에대한 연민이었다. 집에서 집은 돼지고기를 끝내 못 먹고만 오빠를어른들이 걱정하던 생각까지 나면서 나도 비슷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출상하는 날은 선산이 가깝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만장의 행렬이 집앞에서 산까지 연달았다. 상여도 그렇고 서울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호사스러운 광경이었다. 당시의 풍습이 그러했는지, 우리 집안만의가풍이었는지 안상제들은 상여채를 부여잡고 서럽게 울기만 하다가슬그머니 물러나고 장지까지 따라가지 않았다.
숨이 넘어간 후에 오히려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고, 복잡하고도 밑도끝도 없는 절차와 격식으로 닷새 동안의 시간을 밤낮없이 지배하던 유해가떠난 후의 공허함은 많은 뒤치다꺼리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안상제들을 어쩔 줄을 모르게 만들었다. 채울 길 없는 공허감은 어린마음에도 크나큰 공포감으로 다가왔다. 툭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절박한 상황에서 엄마가 느닷없이 나에게 모진 말을 했다.
"툭하면 울기 잘 하는 년이 어쩌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눈물 한방울을 안 흘리냐 안 흘리길? 저깐 년을 그렇게 귀애하시다니. 기르던강아지라도 그만큼 귀애했으면 며칠 끼니라도 굶겠다. 그저 딸년이고손녀는 계집애 기르는 일은 말짱 헛일이라니까."
엄마는 말만 그렇게 모질게 했을 뿐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눈길도 오만정이 다 떨어진 것처럼 뜨악하고 냉랭했다. 그때부터 나는 울기 시작했다.
정신이 가물가물하고 온몸이 탈진할 때까지 몸부림을 치며 통곡을 했다.
할머니와 숙모들은 내가 그 동안 참았던 설움을 폭발시킨 줄 알고, 속모르는 말을 한 엄마를 나무라며 나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분명한 것은 그때의 내 울음은 슬픔 때문이 아니라모욕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내 마음의 정곡을 찌른 것도아니었다. 나는 비록 상 중에 울진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오래 할아버지를여읜 상실감과 할아버지에 대한 자잘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진을남기지 않은 할아버지 신관의 섬세한 부분까지, 그리고 다들 잊어버린사소한 버릇이나 일화까지를 어른이 되고 시집 간 후에도 기억하고 있어서기억력 좋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그게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 마루엔 서까래로부터 삼으로 탄탄하게 꼰 새끼줄 굵기의 줄이사람들이 붙들고 오르내리기 알맞은 높이에 늘어져 있었다. 동풍이 들기전에도 할아버지는 그 줄을 가볍게 잡고 오르내리셨지만 일차 동풍 후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뒷간이나 마당 출입이 가능했던 시기엔 그 줄에매달려 다리를 부들부들 떠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줄은 거기 늘어져 있었고 나는 방학에귀향할 적마다 멀리서도 텅 빈 사랑채에 늘어져 있는 그 줄만 눈에 띄면심장에 균열이 가는 것처럼 가슴에 진한 아픔이 왔다. 그래서 오래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달려가듯이 제일 먼저 그 줄을 향해 달려가어루만져 보곤 했다. 할아버지의 손때에 절어 그 줄은 찐득찐득했고 그게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자주 그 줄에 매달려 할아버지 품에안겼을 때와 같은 감동을 맛보곤 했지만, 그 짓을 누가 눈치챌세라은밀하게 하곤 했다.
전쟁이 점점 불리해지면서 방공연습도 잦아지고 처음으로 몸빼라는 걸교복처럼 의무적으로 입게 되었다. 학교에서 하라는 건 어기면 큰일나는줄 아는 엄마인지라 곧 검정물을 들인 광목을 끊어다가 몸빼를 손수만들어 주었지만 입혀 보고는 한탄을 금하지 못했다.
"시상에, 왜놈 훈도시만 망칙한 줄 알았더니 여자 가랭이 드러나는 꼴은더 못 봐 주겠네. 더 살면 무슨 꼴을 볼꼬."
엄마가 일본 풍습을 얕잡는 것 중에 복식이 제일 유별났다. 옛날에맨발에다 겨우 아랫도리만 기저귀 같은 천으로 가리고 살던 일인이 조선에와서 그들에게 알맞은 옷과 신발 짓는 법을 하교해 달라고 애걸하여 옷은우리의 상복을, 신발은 우리의 도마를 가르쳐 준 게 지금의 일본 하오리와게다짝이 됐단 얘기를 엄마는 역사적 사실처럼 우리에게 얘기해 주곤했다.
그건 마치 세종대왕이 문살에서 힌트를 얻어 하룻밤새에 한글을만들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역사적 사실처럼 믿는 것만큼이나 아무도못 말릴 엄마의 고정관념이었다. 밤이 이슥한 한여름의 남대문통이나본정통에는 아직도 훈도시만 차고 어슬렁거리는 일인이 있는 것까지도엄마는 우리가 상복이나마 의복을 하교해 주기 전의 풍습이 남아 있는 산고증처럼 얘기하곤 했다.
그러나 엄마의 반일 감정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됐다. 할아버지 장례를치르고 상경하자마자 엄마는 오빠와 숙부에게 우리도 창씨개명을 하자고재촉했다. 그건 나도 은근히 바라는 바였고 또 으레 그럴 수 있으려니했다. 그러나 이번엔 오빠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여태껏도 견뎌 왔는데 좀더 견뎌 보자는 것이었다. 좀 더 견뎌 보자는 것은 그때의 비상시국의어떤 끝장을 바라보는 말 같아서 좀 섬뜩하게 들렸다.
오빠의 태도도 평소의 심약한 오빠답지 않게 강경하고 어딘지 비장해보였다. 나는 어려서 그러했겠지만 꽤 잘난 엄마도 일본을 미워하고얕잡기는 잘 했어도 일본의 끝장은 곧 우리의 끝장이란 생각에 굳어져있어 일본의 끝장이 우리에게 새로운 갈림길을 열어 주리라는 생각 같은건 꿈에도 안 해 본 듯했다.
엄마보다 더 놀란 건 작은숙부였다. 창씨를 안 하고 일본인 상가에서장사 해먹기는 앞으로 점점 쌀의 뉘처럼 껄끄러워지리라고 하소연했다.
오빠는 정 그러면 숙부네가 따로 분가해서 성을 가는 게 어떻겠느냐는제안을 했다. 할아버지 다음으로 오빠가 호주를 승계했고 그때만 해도호주의 권한이 막강했다. 오빠의 이 새로운 제안은 숙부를 노엽게도슬프게도 했다. 내가 자식이 없어도 느이 남매를 친자식이나 다름없이여겨 섭섭한 줄 몰랐거늘 호적을 파 가라는 수모를 당하다니, 하면서탄식했고 엄마가 중간에서 사죄와 화해를 시키느라 쩔쩔맸다.
성을 안 갈아서 곤란하기는 작은숙부보다는 말단 공무원인 시골의큰숙부가 더 했으련만 역시 오빠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엄마는엄마대로 생전 어른 석이라고는 썩일 줄 모르던 오빠가 왜 별안간 객쩍은자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번도 뜻이 안 맞아 본 일이 없는 세집이 창씨 문제로 처음으로옥신각신했다. 그러나 다들 오빠의 뜻을 따르기로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진걸 보면 숙부들은 그래도 오빠의 주장을 단순한 객기로만 보진 않은듯하다.
나는 처음으로 오빠를 딴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대한 묘한긍지를 느꼈다. 나야말로 무엇을 알아서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속물의세계에서 별안간 우뚝 솟은 어떤 정신의 높이를 본 것 같은 환각이었다.
그런 건방진 느낌은 그 무렵 왕성해진 독서 체험과도 무관하지 않을듯하다.
오학년 때였는데 처음으로 친한 친구가 생겼다. 전학생이었는데선생님이 나하고 짝을 시켰다. 전학해 온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동안 마음이 순한 아이하고 짝을 시키는 게 선생님들의 공통된버릇이었다. 나는 반에서 존재 없는 아이여서 아무 일에도 뽑힌 적이없건만 그런 일엔 단골로 뽑혔다. 나는 속으로 모욕감을 느꼈지만 드러내놓고 싫은 눈치도 못 했다. 나는 내가 착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는 걸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바라는 유일한 기대를 배반할 용기가 없어그런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애는 성만 일본 식으로 갈고 이름은복순이라는 촌스러운 본명 그대로였다. 생긴 것도 촌스럽고 의복도 남루한편이었다.
그 애하고 짝이 된 첫 시간에 배운 국어가 도서관에 대한 거였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출해서 읽고 반납하는 과정이 자세히 나오는데선생님은 너희들도 실제로 도서관을 한 번 이용해 보면 좋은 경험이 될거라고 도서관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근면해서 성공한 이야기가 나오면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고 했고, 정직에대해서 나오면 정직이야말로 가장 가치있는 도덕이라고 강조하는 것과마찬가지로 그런가 보다 들어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 촌스러운 복순이가 다음 일요일날 같이 도서관에 가보자고나를 꼬였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공립도서관의 위치를 잘 들어 두었는데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국어책에 나온 대로 거기서 보고 싶은 책을실컷 빌려 보면 얼마나 신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애는 책보는 재미에대해 나보다 뭔가를 더 알고 있었다. 그 애에 비해 나는 처녀지와 다름이없었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도서관은 지금의 롯데 백화점 자리였다. 그때그 도서관을 우리는 공립도서관이라고도 했고 총독부 도서관이라고도했다. 해방 되고 나서 국립도서관이 된 바로 그 건물이었다. 일요일날 같이가기로 하고 먼저 그 애 집을 알아 놓기로 했다.
그 애 집은 누상동이었다. 문 안에도 그런 집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초가집 추녀가 어찌나 낮게 땅으로 드리웠는지 문자 그대로 기어들어가고기어나오게 생긴 집이었다. 평지라 수돗물이 나오는 것만 빼면 우리집보다 훨씬 못했다. 삼남매에다 부모님 할머님까지 여섯 식구가코딱지만한 방 두 칸에서 기거한다는 것도 안 돼 모였다. 게다가 하나밖에없는 남동생은 온종일 침을 흘리며 외마디소리를 지르는 박약아였고,엄마는 홧김에 그렇게 됐는지 시어머니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줄담배를피우고 있었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도 구김살없이 명랑한 그 애가불쌍하면서도 존경스러웠다. 그 애는 손수 부엌에 들어가 감자 껍질을몽당 숟가락으로 박박 벗기더니 쪄서 나에게 대접했다. 그런 꾸밈없는태도도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나에게도 드디어 동무가생겼다는 걸 느꼈다. 그때까지 놀 애가 아주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내 우정에 대한 갈망을 채워 준 건 그 애가 처음이었다.
도서관 가는 게 학교 숙제라고 했더니 단박 엄마의 허락이 떨어 졌다.
공일날 아침, 그 애네 집에서부터 도서관까지의 길은 나에게 멀고도낯설었다. 그 애도 처음이어서 겁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길을 물어간신히 당도한 곳은 아이들이 만만하게 이용할 수 있게 생긴 건물이아니었다. 붉은 벽돌 건물엔 권위주의적인 정적이 감돌고 있었고 감히어디로 어떻게 들어가 책을 비리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 지 도무지 감을잡을 수가 없었다.
안에 충충하게 고여 있는 어둡고도 서늘한 정적을 훔쳐보는 것조차두려워서 가슴을 졸이며 열려 있는 문을 이 문 저 문 조심스럽게 엿보고다니는데 정복을 입은 수위가 달려왔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하는데 내 동무는 또박또박 교과서에서 배운 도서관이용법을 직접 해 보려고 왔노라고 말했다. 당장 몰아 낼 듯이 눈을부라리며 달려온 수위였지만 내 동무의 똑똑함에는 감동을 한 듯했다. "허,고것들 참." 하면서 이 도서관에는 아이들 열람실이 없으니 딴 도서관엘가 보라고 했다.
수위 아저씨가 가르쳐 준 딴 도서관은 거기서 가까웠다. 지금의조선호텔 정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부립도서관이었다. 해방 후엔 서울대치대도 됐다가 여러 번 용도가 바뀌었지만 그때는 총독부도서관 다음으로큰 도서관이었다. 그 도서관 역시 우리 같은 촌뜨기가 만만하게 이용할 수있을 것 같지 않게 당당하고 음침한 분위기의 건물이었지만 아이들열람실은 본관에서 따로 떨어진 단층의 학교 교실만한 별관이었다.
들어가는 데 아무런 수속 절차가 필요없었고 아저씨 한 사람이선생님처럼 앞의 책상에 앉아 있고 아저씨 뒷면 벽이 온통 책장이었는데아무나 자유롭게 꺼내다 볼 수 있는 개가식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것같은 열람을 위한 수속 절차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제 집 서가의책처럼 마음대로 꺼내다 보고 재미 없으면 갖다 꽂고 딴 책을 가져오기를아무리 자주 되풀이해도 그만이었다. 실제로 읽지는 않고 그렇게촐싹거리가만 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저씨는 어린이들을 향해 앉아 있을뿐 이래라 저래라 말이 없었다. 그 또한 온종일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곳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꿔 본 별천지였다.
그날 처음 빌려 본 책이 아아, 무정이라는 제목으로 아동용으로 쉽게간추려진 레 미제라블이었다. 물론 일본말이었고 삽화가 이루 말할 수없이 아름다워 읽는 재미에다 황홀감을 더해 주었다. 간추려졌다고는하지만 상당한 두께의 책이어서 도서관을 닫을 시간까지 속독을 했는데도다 읽지 못했다. 대출은 허락되지 않았다. 못다 읽은 책을 그냥 놓고 와야하는 심정은 내 혼을 거기다 반 넘게 남겨 놓고 오는 것 같았다. 숙부네다락방에서 만화책을 빼앗겼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그것과는 댈 것도아니게 허전했다. 미칠 것 같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내 동무가 읽은건 소공녀였고 끝까지 다 읽었다고 했다. 우리는 몹시 흥분해서 서로가읽은 책 얘기를 주고 받았고 다음 공일에도 또 가자고 약속했다.
엄마는 내가 공일날마다 도서관에 가는 것을 덮어놓고 기특해 했고오빠는 내가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동화책을 읽으러 간다는 걸알았지만 도서관에 비치된 책에 대해 신뢰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말리지않았다. 그날 이후 공일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씩 읽는 건 내 어린날의 찬란한 빛이 되었고, 복순이와 나는 더욱 단짝이 되었다.
매일 밤 꿈에서 왕이 되는 행복한 거지와, 매일 밤 꿈에서 거지가 되지않으면 안 되는 불행한 왕 얘기도 그때 읽었고, 복순이가 먼저 읽은소공녀도 물론 따라 읽었다. 소공녀 세라도 하녀로 전락한 후 어느때부터인가 문득 밤마다 그의 귀가를 기다리는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과훈훈한 난로를 꿈처럼 경험하게 된다. 나에게 부립도서관의 어린이열람실은 바로 그런 꿈의 세계였다.
내 꿈의 세계 창 밖엔 미루나무들이 어린이 열람실의 단층 건물 보다훨씬 크게 자라 여름이면 그 잎이 무수한 은화가 매달린 것처럼 강렬하게빛났고, 겨울이면 차가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힘찬 가지가 감화력을지닌 위대한 의지처럼 보였다. 책을 읽는 재미는 어쩌면 책 속에 있지않고 책 밖에 있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창 밖의 하늘이나 녹음을 보면줄창 봐 온 범상한 그것들하곤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사물의 그러한낯섦에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
육학년이 되자 상급학교 입시준비가 요새 같지는 않았어도 담임도무서운 선생님이 맡게 되었고 정규수업이 끝난 후에도 남아서 늦게까지공부도 하고 시험도 쳤다. 그러나 복순이하고 나는 여전히 일요일이면도서관에 가서 책 읽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숙제도 많이 내주었지만토요일날 둘이서 같이 후딱후딱 해치웠다. 복순이와 나는 늘 붙어다녀선생님이나 반 애들이 다 알아주는 단짝이 되었다. 복순이는 공부도 아주잘 했다. 나도 복순이와 단짝이 된 후 성적이 좀 올랐다. 단짝을 잃고 싶지않은 마음이 되레 단짝과의 경쟁의식이 되지 않았나 싶다.
사학년 때부터 원족이 수학여행으로 바뀌는 건 모든 국민학교의 정해진관례였다. 사학년 땐 인천, 오학년 땐 수원, 육학년 땐 개성으로,목적지까지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여행이라지만 자고 오는 건 아니고단지 기차를 타고 갔다 온다는 걸로 그렇게 불렀다. 나는 우리 고향으로수학여행을 가는 게 싫고 은근히 근심이 되었다. 개성에 대해 다 알아서시들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실상 개성은 귀향할 때마다 거치는 고장일 뿐변변히 구경한 적은 없었다. 내가 걱정이 되는 건 엄마가 미리 편지를 해놨기 때문에 할머니나 숙모가 마중을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우리는 식구들이 고향에 오갈 때마다 역까지 전송하고 마중하는 게유난스러웠다. 방학 때 시골 가는 것도 오빠를 숙부네 맡기고까지 꼭엄마가 데리고 가고 오건만도 양쪽 숙부 숙모들의 떠들썩한 전송과 마중을받았다. 나는 나이 들수록 그게 싫었다. 작은집, 큰집 사이가 딴 집의한식구끼리보다 더 강하고 끈끈하게 엉켜 사는 것도 마땅찮았고 엄마나할머니가 나를 마냥 어린애 취급하는 것도 싫었다.
개성 가는 표를 사려면 같은 경의선인 봉천행 표 파는 데 바로 옆에줄을 서곤 했다. 개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비슷했는지아닌지까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덮어놓고 일찍 나가서 오래 줄 서서기다리는 걸 고달픈 운명처럼 감수할 때였다. 가까이서 바라본 봉천으로가는 여객은 국내 여객하고는 전혀 달라 보였다. 이불 보따리 등 짐이많았고, 바가지가 올망졸망 매달린 보따리에 기대어 조는 노인네가 있는가하면 개떡이나 조밥 따위를 펼쳐 놓고 아귀아귀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남녀노소가 고루 섞인 솔가해서 떠나는 일가족이 많아 시끄럽고구질구질했다.
봉천은 우리 나라 지도에는 없는 땅이었다. 하룻밤 하루 낮도 더 걸리는먼 만주땅이라고 했다. 봉천은 내가 아는 외국 땅 이름 중 유일하게 내가한 발자국만 옆으로 비켜서면 도달할 수 있는 고장이었다. "호텐, 호텐유키"하고 봉천행 개찰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그 줄이 웅성거리면 나는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 무질서한 행렬로 슬쩍 끼여들어 가족들의보호로부터 행방불명이 돼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미지의고장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다만 가출의 꿈이었다. 이렇다 할 까닭도 없이그냥 가족들의 간섭이 지긋지긋할 때였다. 그럴수록 복순이하고의 우정은점점 더 배타적으로 돼 갔다.
개성으로 수학여행 떠나는 날 엄마는 경성역까지 배웅을 나와서 혹시개성역에 누가 마중을 안 나오더라도 너무 섭섭해하지 말고 잘 놀다오라고 타이르고 들어갔다. 제발 아무도 안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꼭 나올 것 같아 마음이 영 개운치 않은 채 기차가 개성역에 도착했다.
육학년은 총 다섯 반이었다. 개성역 앞 광장에 반끼리 줄을 서서 인원점검을 할 때였다. "완서야, 완서야." 하고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났다. 저만치서 할머니가 무법자처럼 아이들 사이를 마구 헤집고 다니면서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숙모도 아니고 할머니였다. 어찌나 창피한지 잠시꺼질 수 있는 거라면 꺼지고 싶었다.
할머니는 풀을 세게 먹여 다듬은 옥양목 치마 저고리를 뻗쳐 입고머리에는 베 보자기에 싼 커다란 임을 이고 있었다. 수치감과 분노로화끈해진 얼굴을 깊이 숙이고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복순이의손을 꼭 붙들었다. 내 조선말 이름은 복순이밖에 누가 알랴 싶었다.
할머니한텐 좀 안됐지만 눈 딱 감고, 귀먹은 셈치고 이 고비를 넘기자,그런 속셈이었다.
그러나 웬걸,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이 애 저 애 붙들고 물어 봐도소용이 없자 할머니는 어디서 배워 왔는지 이번엔 일본말로 내 이름을부르기 시작했다. 그건 아무도 못 알아들을 혀 꼬부라진 어눌한 소리에불과했지만 나는 더는 참지 못했다. 할머니한테 그 어려운 발음을 시킨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진저리가 쳐졌다. 그럴 땐 우는 게 유일한 내재주였다. 나는 "할머니!"하면서 그 뻣뻣한 치마폭으로 달려들어 서럽게울기 시작했다. 할머니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내새끼." 하면서 연방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치 오랫동안 몇천 리 밖에 떨어져 지낸 손녀와할머니처럼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우리를 구경했다.
할머니가 베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엔 다시 작은 보따리가 세 개 들어있었다. 송편이었다. 필경 며느리를 닦달질 해 밤새 빚어 새벽에 쪄 가지고달려오신 듯 말랑한 송편에서 솔내와 참기름내가 물씬 났다.
그러나 나는 오직 아이들 보기에 창피하단 생각밖에 없었다. 어서 그고역스러운 시간을 면하고 싶었다. 흐트러진 열을 바로 세우려는 선생님의호루라기 소리가 나자 할머니는 한 보따리는 선생님 드리고, 한 보따리는서울로 가지고 가서 작은집과 나누어 먹고, 또 한 보따리는 아이들하고나누어 먹으라고 송편이 세 보따리인 까닭을 설명해 주고 비로소 작별을아쉬워했다.
다행이 그때 우리 담임 선생님은 다리를 삐어서 여행에 따라오지 못하고딴 반 선생님이 우리를 인솔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혹시담임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싶어할까 봐 그 얘기를 재빨리 할머니 귀에속삭이고는 어서 가시라고 밀어 냈다. 그리고 할머니가 저만치 떨어져서우리가 정렬하여 차례로 역 광장을 떠날 때까지 지켜보는 걸 의식하며참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행이 복순이가 말없이 나에게 덧붙여진 짐을같이 들어 주었다.
만월대, 선죽교 등 정해진 코스를 도는 동안 내내 우울했다. 점심을 먹을때 나는 그 송편을 아무하고도 나누어 먹지 않았다. 물론 선생님한테드리지도 않았다. 다 큰 나이라 내가 할머니를 창피하게 여긴 데 대해반성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할머니를 창피하게 여기는마음하나로 그렇게 우울하다는 건 정확하지 않았다. 나는 왜 이럴까 싶은반성과 우리 집안은 왜 이럴까 반발하는 마음이 반반씩이었다. 친족간의끈끈한 유대감과 과보호가 점차 나를 옥죄는 것 같아 그게 참을 수 없이짜증스러웠다.
밤에 도착한 경성역엔 또 오빠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오빠에게 송편보따리를 인계할 때까지 꾸준하게 그걸 같이 들어 주고 내 배배 꼬인심보를 이해해 준 복순이에게도 단 한 개의 송편도 맛뵈지 않았다. 오빠와나는 먼저 남대문통 작은 숙부네에 들러서 송편 보따리를 끌러 두 집이공평하게 노느매기를 하면서, 작은 숙부 내외가 큰 숙모의 노고와 솜씨를찬양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국민학교 마지막 수학여행은 이렇게우울하게 끝났다.


7. 오빠와 엄마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졌다. 조선 청년에대한 지원병제가 징병제도로 바뀌었다. 오빠는 징병엔 걸리지 않을나이였지만 징용이라는 노무 동원제도가 따로 있어 언제 징집이 될지모르는 형편이었다. 엄마는 오빠가 총독부에만 그냥 다녔어도 징용에는 안걸리는 건데 하면서 아쉬워했다. 오빠는 와타나베 철공소가 군수품 공장이됐으니까 징용 걱정은 말라고 엄마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오빠 자신이그걸 다행스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 조선에서 제일 먼저 지원병으로 나가 전사한 이인석이라는상등병을 영웅 취급하여 그의 일대기를 일본의 창극 비슷한 나니와부시로엮은 게 있었는데,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일에 혈안이되고부터는 그게 매일같이 방송이 되었다. 오빠는 그 소리만 나오면질색을 하고 꺼 버리라고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곤 했다.
이학기부터는 아무래도 입시공부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다리를 몹시 삐어 집에서 쉬는 동안도 반장과 긴밀히 연락하여시험문제를 내주고 채점을 해서 보내고 체벌까지도 하달을 하였다. 조선선생님이었고 아기가 하나 딸린 부인이어서 엄마는 여간 마음에 들어하지않았다. 그때만 해도 조선인 선생까지도 일본말을 모르는 학부형하고상담할 때는 통역을 내세우는 짓을 더러 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고 상대해주는 것만으로도 엄마의 호감을 살 만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하는 체벌은 매우 독특하고 혐오스러운것이었다. 육학년 다섯 반 중 두 반이 여자 반이었는데, 우리의 성적을올릴 의도였겠지만 선생님은 끊임없이 다른 반과의 경쟁의식을 부추겼다.
일제고사 성적이 그 반보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자기 점수에 상관없이전체가 벌을 받았는데 선생님은 손끝하나 까딱 안 하고 우리에게 가혹한체벌을 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건 짝끼리 서로 마주 보고 서서상대방 뺨을 선생님이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때리게 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끼리 때리면 살살 때릴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살살 때리는기미가 보이면 선생님이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고 너희들이 그런 잔꾀를부리면 마냥 때리게 할 거라고 위협을 하기도 했지만, 내가 때리는것보다는 상대방이 더 아프게 때리고 있다는 느낌은 피할 길이 없었고,그렇게 되면 억울해서라도 상대방보다 더 세게 때리고 싶어진다. 생각해보라. 열서너 살밖에 안 된 계집애들이 마주보고 서서 서로의 증오심을무진장 상승시켜 가며 꽃 같은 뺨이 시뻘겋게 부풀어오르도록 사매질을하는 광경을. 그거야말로 구원의 여지가 없는 지옥도였다.
복순이와 나는 성적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해서 성적 순으로 앉을 때나키 순으로 앉을 때나 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도 별수없이 이야만적인 증오심에 씌어 점점 강도가 높게 서로의 뺨을 때렸다. 어느고비를 지나면 누가 더 아프게 때리나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고 우리의 그짓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비인간적인 채찍을 우리의 배후에느낄 뿐이었다. 선생님의 그만 소리가 떨어지고 나면 우리의 증오심은 곧수치심으로 변해 서로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생각하기도 싫은끔찍한 체벌이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여태껏 만나 본 어떤선생님보다도 수더분하여 마음에 든다고 했지만 그런 분이 왜 우리로하여금 그 나이에 그런 짐승의 시간을 갖게 했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엄마는 나의 경기고녀에 보내고 싶어했다. 원하면 못 갈 것도 없다는담임 선생님의 말이 화근이 되었다. 나는 육 년 동안 한번도 우등을 한적이 없었고, 내가 생각해도 처음부터 경기고녀감으로 선생님이 지목한아이들의 실력에 내 성적은 못 미쳤다. 엄마도 그걸 눈치 못 챘을 리가없었다. 욕심은 있어도 모험을 마다하지 않을 만한 배짱은 없는 엄마였다.
그러자니 엄마에겐 욕심을 낮출 만한 구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엄마는오빠에게 창씨만 했어도 경기고녀를 보낼 수 있을 텐데 창씨 안 한 게암만 해도 걸린다고 엉뚱한 원망을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창씨문제가 다시 재연됐다.
엄마는 당신 생각에 확신을 얻기 위해 선생님하고도 그 문제를의논했다. 선생님은 그런 규정은 없지만 공립학교니까 혹시 동점인 경우불리할지도 모른다는 정도로 자기 의견을 말했을 뿐 결정적인 회답은피했건만도 엄마에겐 충분한 구실이 되었다. 나는 뻔히 억지인 줄 알면서오빠를 괴롭히는 엄마가 싫었고 엄마의 성화를 의연하게 견디는 오빠가존경스러웠다. 잘은 모르지만 엄마나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신념을가진 오빠를 나라도 도와 줘야 할 것처럼 느꼈다.
나는 엄마를 설득해서 숙명고녀에 지원했다. 그때만 해도 선생님이성적에 따라 정해 주는 학교는 참고가 될 뿔 각자의 취향과 형편에 따른자유 재량권이 존중될 때였다. 복순이가 경기고녀에 지원한 것도 내가경기를 피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였다. 너무 붙어다녀 지쳤다고나 할까,요새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져 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 애도 우리가헤어져야 한다는 데 동감이었다. 센티한 소녀소설에 감염된 우리는 편지로더 많은 사연을 주고받기로 하고 건방지게도 이별을 모의했다.
엄마는 내가 숙명에 원서를 낸 후에도 여전히 창씨 안 한 걱정을 했고하나 덧붙여서 신체검사에 떨어질 걱정까지 했다. 나는 엄마의 이런걱정을 들으며 엄마가 벌써부터 만약에 불합격했을 때의 구실을 마련하고있다는 걸 느꼈다. 꿈에도 실력이 모자라서 떨어졌다고는 말하고 싶지않은 엄마였다. 어디서 알아 냈는지 엄마는 몸무게가 얼마 이상이 안 되면불합격시킨다는 불확실한 정보를 입수해 가지고 내 체중을 빨리 늘리려고갖은 애를 썼다.
나는 강단은 있었으나 굉장히 말라깽이였다. 복순이는 키는 나하고비슷했지만 얼굴이 둥글고 몸이 뚱뚱해 반에서 별명이 '오타후쿠'였다.
우리는 늘 붙어다녔고 또 네것 내것 없이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선생님까지도 복순이한테 네 살 좀 재한테 나눠 주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엄마가 성화한다고 체질적으로 없는 살이 별안간 찔리 만무했다.
신체검사날 엄마는 내 속옷에다가 은반지 등 무게 나갈 만한 것들을여기저기 찔러 넣어 주었다. 그러나 입시날 엿이나 찰밥을 먹이는, 그때도누구나 하는 비방에는 초연한 엄마였다. 만약 엄마가 그런 미신적비법에도 극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복받친다.
복순이도 나도 무난히 합격을 했다. 입시가 졸업 전에 있었기 때문에합격하고 나서도 학교는 그대로 다녔는데 선생님은 수업은 건성으로 하고신파극 본 얘기도 해 주고 지금의 성교육 비슷한 얘기도 해 주었다.
합격한 아이는 틈을 내어 신사참배를 하란 얘기도 했다. 입시를 앞두고는합격을 빌기 위해 단체로 신사참배를 했었다.
어느 날 복순이가 우리 둘이서 신사참배를 가자고 했다. 아무리선생님이 한 번 일러 준 거라 해도 그건 기발한 제안이었다. 선생님이지나가는 말로 한 것까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가 융통성없는 모범생이었던 것도 아니었고, 도서관을 찾아갈 때 같은 호기심이신사에 대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두말 없이 동의했고 복순이가참으로 적절한 생각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졸업식날이 며칠 안 남았을 때였다.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각기 다른학교를 지원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고 그냥 헤어질 순 없다고 생각하고있었다. 우리에겐 어떤 형태로든 간에 이별의 의식이 필요했다. 그러나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어쩔 줄을 모르긴 둘 다 마찬가지였다. 마음껏센티해져서 어른 흉내를 낼 만한 나만의 방을 가지고 있지 않기는복순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겨우 생각해낸 집 밖의 장소가신사였던 것이다.
하필 그날 진눈깨비가 왔다. 3월인데도 지금의 한겨울 못지 않게 춥고바람 부는 날이었다. 조선 신궁 올라가는 그 높고 높은 계단에 사람의그림자라곤 거의 없었다. 우리는 질척하게 쌓인 눈속에 운동화가 푹푹빠져 양말을 적시고 발끝이 얼어붙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 높은층층다리를, 누구한테 심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씩씩대며 돌파를 했다.
신궁 앞까지의 자갈이 깔린 길도 아무도 밟지 않은 눈으로 평평해 보였다.
우리는 신궁 쪽은 흘끗 한 번 쳐다만 보고 경성신사가 가는 쪽의 완만한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계절이 좋을 때 그 길은 연인들의 산책로로유명했다. 우리 사이에 요새말로 무드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거기를생각해 낸 것도 아마 그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워낙 날씨가 험해 지나가는 사람도 만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뭔가 풀어야 할 응어리가 있는 것처럼 느꼈지만 끝내 풀지 못하고일본 사람들만이 사는 남산정에 이르렀고, 저만치 길 건너로 본정통에 한집 두 집 불이 들어오는 걸 바라보았다.
눈물이 날 것처럼 참담한 고행길이었다. 둘이 만났다 하면 그렇게도죽이 잘 맞아 온종일 수다를 떨어도 미진했었는데 그날은 거의 말을 하지않았다. 그리고 아주 뜨악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서로 마음이 어긋나고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그걸 어떻든지 만회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날 든 감기로 졸업식날까지 학교를 쉬었다.
그 동안에 복순이는 한번도 문병을 와 주지 않았고, 오빠가 한 번 입학축하로 양식을 사 주겠다며 화신백화점에 데리고 갔다. 오빠로서도 상당히멋을 부린 생각이었겠지만 나도 양식집에 가 보긴 그날이 생전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때 벌써 일본사람들이 총후라고 부르는 일반민간인의 생활은 궁핍할 대로 궁핍해졌을 때였다. 화신백화점 사층인가오층에 있는 양식부에 한 번 들어가기 위해 아래층에서부터 온종일 줄을서야만 했다.
오빠가 나를 데리고 나갈 때 엄마는 나더러 오라비 잘 둔 덕으로 별호강을 다 한다고 말했지만 막상 당해 보니 하나도 호강하는 기분이 안났다. 그 줄에도 새치기가 있었다는 것과, 오랜 기다림 끝에 당도한 식당의깨끗한 식탁보와, 접시에 담은 국물과, 주먹만한 빵 두 개가 생각날 뿐정작 주메뉴가 뭐였는지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졸업식날은 우리 식구는 물론 숙부네까지 다 왔다. 복순이는 우등상도타고 개근상도 탔지만 나는 아무 상도 못 탔다. 우리 식구는 그것 때문에섭섭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의 요지부동한 지론에 의하면창가하고 체조를 못 하니까 우등상 안 주는 건 당연하고, 세상에 공부를얼마나 잘 했으면 창씨도 안 했는데 그 좋은 학교를 붙었겠느냐는것이었다. 엄마가 경기에 미련을 못 버렸을 때는 경기가 '그 좋은 학교'
였지만 일단 숙명으로 정하고 합격하고 나서는 숙명이 '그 좋은 학교'가 돼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울했고 나에게 딸린 가족이 많은 것까지 창피하고부아가 났다. 복순이는 아버지 혼자만 와 있는 게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없었다.
졸업식이 끝나자 단체로 또 신사참배를 하고 헤어진다는 것이었다.
복순이와 나는 낭패스러운 눈길을 교환했다. 나는 그 애가 나하고 같은심정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치른 의식이 모독당한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우리가 갔던 날과 며칠 상간이었지만 봄기운이완연한 화창한 날씨였다. 졸업할 때까지도 우리는 짝이었기 때문에 같이손잡고 필운동에서 남산 꼭대기까지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허우적댔던 진눈깨비는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 사이는 더욱 뜨악해져 있었다. 나는 내 느낌이 질투와열등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참담했다. 복순이와 나는그렇게 헤어졌다. 해방 후 그 애가 학교를 중퇴하고 시골 국민학교선생님이 되어 나를 찾아올 때까지 우리는 편지 한 통이 없이 지냈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옹졸한 심보에 대해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는대목이다.
여고로 진학하면서 비로소 인왕산 자락을 넘어서 통학하는 일을 면하고전차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울의 헐벗은 산에 정을 붙이지못했지만 육 년을 한결 같이 걸어다닌 산길이었다. 사월의 벚꽃, 오월의아카시아, 겨울의 설경 등이 그립게 회상 되고 서울 아이들이 좀처럼 누릴수 없는 혜택 받은 통학길이었다고 회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육 년 동안을줄창 혼자 다녔다는 것은 내 성격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생각한다.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은 법을 터득했다고나 할까. 지금도걸어가건 무엇을 타고 가건 간에 어디를 가고 오는 길에 누가 옆에 있으면그가 무척 친해서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혼자인것만 못하다.
상급학교에 가니까 등하교길을 꼭 짝지어 다니는 짝궁들이 정해져있어서 한쪽이 청소를 하거나 해서 늦는 경우는 기다렸다가 같이 가 주는등 혼자 다니는 걸 불행하게 여기는 애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나는 그반대로 동행이 생길 기회도 일부러 피했다. 그렇다고 어디서나 혼자 있는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고, 다만 나다닐 때 혼자인 게 편할 뿐 아니라그걸 즐기는 편이고, 그 동안을 방심, 한눈팔기, 공상, 구상, 관찰 등 내나름으로 무척 달콤하게 써먹고 있다는 것은 국민학교 때 길들여진 버릇이아닌가 생각한다.
여고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시국은 이미 일제 말기였다. 정규 수업을며칠 받아 보지도 못하고 우리는 군수품 산업에 동원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전에 두 시간 수업을 받고 나면 교실이 곧장 공장으로 변했다.
군복에 단추를 다는 작업도 했지만 가장 오래 지속된 작업은 운모작업이었다. 육각, 오각, 사각 등으로 각이 진 반투명의 운모조각은 얇게벗겨지길 잘 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상자로 하나씩 운모를 받아다가 끝이뾰족한 칼로 얇게 박리를 시키는 일이었다.
그걸 어디다 쓰는지는 누가 알려 주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떠도는 말로는 비행기 유리창에 쓴다고도 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유리창으로만 된 비행기가 있다면 모를 까 비행기 동체를 만들 물자가있을지도 의심스러운 때, 우리가 일할 운모는 마냥 공급이 되었다.
대포알을 만든다고 집집의 놋그릇까지 다 걷어 갈 때였다. 궁핍이 극도로달했고 혹독하게 추운 날 솔방울을 줍는 일에 동원되어 신촌 어딘가의산을 헤매다가 언 밥을 덜덜 떨며 먹은 적도 있다. 솔방울은 좀처럼찾아지지 않았고, 도처에 껍질까지 벗겨 가 죽어 버린 나무들을 보고사람보다 더욱 헐벗고 피폐해진 국토를 느낄 수가 있었다.
방공 연습도 자주 했고, 우리 학교의 대피 장소는 기숙사 지하의 석탄도저장해 두고 아궁이도 있는 데였다. 한 번 거기 들어갔다 나오면 콧구멍이새까매졌다. 연습이 아닌 진짜 공습 경보가 날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집으로 보냈는데 아직도 현저동에 살고 있는 나는 혼자서 집까지 뛰는동안 도중에서 죽을 듯한 공포감을 맛보곤 했다. 책가방 없이 등교할 수있는 날도 반드시 휴대 해야하는 게 구급낭이었다. 구급낭 속엔 아주초라한 구급약과 함께 부상을 당했을 때 지혈을 시킬 수 있는 삼각건이들어있었고, 각자의 성명, 주소, 혈액형 등이 명기되어 있었다. 삼각건 매는법도 되풀이해서 교습을 받았지만 실제 상황에서 그게 유효하리라고는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동경, 대판 등이 공습으로 처참하게 파괴됐단 소식은 신문에도 났지만풍문으로 더 적나라하게 전해졌다. 그렇게 전해지는 소식은 일본 당국을유언비어라는 죄목까지 만들어 놓고 단속을 했다. 엄마는 어디서 들었는지미국이 조선을 폭격을 안 할 거라고 자신있게 말하곤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가 사색이 돼 있었다. 드디어오빠에게 징용 영장이 나온 것이었다. 와타나베 철공소가 군수 공장이됐기 때문에 지용은 안 나가도 된다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엄마는오빠를 어디로 도망시키고 우리 식구도 다 야반도주를 하자고 했다.
엄마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와타나베 철공소만 철석같이 믿고있었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배급 통장 없이는 어디 가서 밥 한끼 제대로 얻어먹을 수 없는 각박한세상이었다. 제일 만만한 건 박적골이었지만 어디에나 버젓이 명기된본적지가 피신처일 수는 없었다. 지금 같으면 재까닥 전화로 의논을했겠지만 일각이 여삼추로 오빠가 들어올 때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근수공장이라 매일같이 야근을 하는 오빠는 자정이 가까워서나들어왔다. 엄마는 불안을 용케 감추고 오빠가 저녁 밥을 다 먹고 난 후에비로소 지용 영장을 내 놓았다. 오빠는 염려 말라고만 말하고 무덤덤하게잠자리에 들었다. 어른한테 절대로 걱정을 안 시키는 오빠의 습관적인말투인지 정말 그렇게 자신이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건엄마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도망을 가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그 밤을밝혔다.
다음 날 오빠는 회사에서 증명서를 떼 주어 다 잘 됐다고만 말했고사흘째 되는 날이 징집에 응해야 하는 기한인데, 평상시와 다름없이출근을 하고도 별탈이 없었으니 정식으로 모면이 되긴 된 모양이었다.
엄마는 두고두고 와타나베 철공소의 위력에 감격을 하면서 성도 안 간고집쟁이를 그 일본 사장이 뭐가 이뻐서 봐 줬을까 신통해하곤 했다.
엄마의 생각은 뒤죽박죽이었다. 등화 관제로 전깃불을 끄고 깜깜한 방에죽치고 앉았을 때는 폭격을 맞아 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일본 놈들 폭삭망하는 꼴이나 좀 봤으면 좋겠다고 폭언을 해서 누가 들을까 봐 겁나게하다가도 아들이 일본인한테 잘 보이고 중하게 쓰인다는 것은 또 그렇게자랑스러워할 수가 없었다. 남들한테도 자랑을 하고 싶겠지만 워낙 때가때니만치 참고 있는 거였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이름을 들은 것도 방공 연습이나 진짜 공습경보로일찌거니 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을 때 엄마가 옛날 얘기처럼 해 준비현실적인 정보를 통해서 였다. 김일성은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하는장순데 기운이 장사일 뿐 아니라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에 험준한 산길도천릿길을 간다고 했고, 이승만은 미국서 독립운동하는 학식 높은 선빈데조선 땅은 절대로 폭격을 안 할 테니 안심하라고 방송도 하고 비행기에서삐라도 뿌린다고 했다. 왜놈들이 미국 비행기만 왔다 하면 우리를방공호로 처넣는 게 우리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비행기에서 그런삐라가 떨어지는 걸 못보게 하려고 그런다고도 했다. 왜놈들이 그런삐라를 보면 얼마나 약이 오를까 하면서 장난꾸러기처럼 웃을 때면 나는엄마가 나보다도 어린 친구처럼 만만해지곤 했다. 엄마는 이렇게 그런중대한 얘기를 전혀 심각하지 않게 재담처럼 했기 때문에 당시 우리가처한 단칸방 속에서의 암흑에는 위안이 됐지만, 시대적인 암흑에 어떤빛이나 용기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게 결국은 우리 엄마의 한계였다.
그러나 오빠는 달랐다. 우리는 오빠가 징용도 빠질 수 있는 회사에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격해서 오빠가 고민스러워하는 문제를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오빠가 선반 기술자를 한 사람 취직시켜준 일이있었다. 오빠보다 나이도 많고 처자식이 딸려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지용 영장이 나왔을 때 회사에서는 그를 위해 징용을 면제해 줄 만한 증명서류를 해 주는 걸 거부했다. 오빠는 그것 때문에 사장하고 옥신각신한모양이었다. 심지어는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 순서로 따지자면 나보다는그 기술자가 우선인데 나는 되고 그가 안되는 까닭이 뭐냐고까지 따진모양이었다. 그 기술자는 지용을 나가면서도 그로 인해 오빠에게 고맙다는인사를 와 그런 얘기를 해서 우리도 알게 되었다. 엄마가 기가 막혀 한것은 당연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자기 보신도 언제 어떻게 될지모르는 판국에 남 걱정 해 주려고 자기 보신까지 위태롭게 하려는 오빠가딱하고 유치해 보이기까지 했다. 오빠가 하루하루 회사에 나가는 게물가에 어린애 내보내는 것처럼 안심이 안 되는 날이 계속됐다.
식량 배급은 줄고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콩깻묵까지 섞여 나와 엄마의시골 나들이가 잦아졌다. 쌀을 얻으로 거는 것이었다. 시골집은 숙부가면서기여서 일정량의 공출만 내면 억울하기 수탈을 당하는 일을 면할 수가있었다. 그러나 식량 수탈에는 대가 면서기들이 앞장서야 했으니 숙부는그만큼 원성의 대상이었을 듯 했다. 오빠가 아무리 자기가 누리는 작은특권에 고민해 봤댔자였다. 결국은 시골에서 숙부가 누리는 치사한 특권에빌붙어 굶주림을 면하고 있었다.
1944년 겨울방학에 귀향했을 때는 박적골 사정도 매우 흉흉했다. 순사와면서기가 합동을 해서 식량을 뒤지러 나오는데 그때는 온 동네가 발칵뒤집혔다. 우선 그들이 들고 다니는 기구가 무기보다 더 섬뜩했다. 긴 장대끝에 창같이 생긴 날카로운 쇠붙이를 꽂고 다니면서 그걸로 천장, 아궁이,볏짚단, 갈잎가리 등을 마구 찔러 보았다. 우리 마을은 아니었지만 이웃마을에서 갈잎가리 속에 숨었던 소녀가 그 창 끝에 옆구리를 찔렸다는소문은 너무도 끔찍해 백주의 악몽이었다..
소녀가 거기 숨은 까닭은 정신대 때문이었다. 마침 그보다 며칠 전에 딴마을에서 우물에서 물을 긷던 소녀를 일본 순사가 정신대로 끌고 간 일이있었다는 소문을 들은 소녀의 부모가 동구 밖에 양복 입은 사람들이나타나니까 지레 겁을 먹고 딸을 거기다 감춘 것이었다. 사람을 빼앗기는건 먹을 걸 빼앗기는 것보다 더 무서웠고 사람과 먹을 걸 한꺼번에빼앗기는 세상은 보나마나 말세였다.
말세의 징후가 도처에 비죽거리고 있었다. 나하고 동갑내기를 멀리 시집보낸 소꿉 동무 엄마가 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내 나이에 시집을가다니. 그때 나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그러나 시골에선 조혼이유행이었다. 극도의 식량난으로 딸 가진 집에서 한 식구라도 덜고 싶은데정신대 문제까지 겹치니 하루빨리 치우는게 수였고, 아들 가진 집에선병정 내보내기 전에 손이라도 받아 놓고 싶어했으니까.
시골 숙부네가 심한 수탈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면서기라는알량한 벼슬 덕이었는데 그 방법이 알고 보면 매우 치사했다. 면의총무부장이니까 직접 뒤지러 다니지는 않았지만 뒤지러 다니는 일선 공출독려반원들을 만단 면서기와 주재서 순사로 구성돼 있어 그들이 슬쩍눈감아 주는 거였다. 그렇다고 우리 집만 그냥 통과하는 건 아니었고,도리어 딴 집보다 더 여기저기를 찔러 보고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정작 쌀독은 그냥 지나쳐 주었다. 순전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식이었다. 이런 우리의 특권을 눈치 못 챌 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날강도들이 달려들기 전에 황급히 우리 집 울타리 너머로 쌀자루를 넘겨주었다가 나중에 찾아가면서 제사에 쓸 쌀이었다고 변명하는 이웄도있었다.
그런 판국이니 숙부네라고 식량이 넉넉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큰숙부는우리에게 주는 걸 최우선으로 쳤기 때문에 우리는 시골집 건 다 우리 건줄 알면서 자랐다. 남보기에는 별로 많은 농토는 아니지만 오빠가 의당이어받아야 할 장손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겠으니,그보다는 큰숙부는 아버지 없는 우리에게 아버지 노릇을 대신 해야 된다는의무감에 철저한 분이었다. 끝내 자기 자식을 낳아 보지 못한작은숙부에게서 내가 느낀게 친아버지나 다름없는 자애였다면 좀 늦긴했지만 자기 자식을 사남매나 둔 큰숙부에게서 느낀 건 아버지의 권위와의무였다.
그러나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고 아무리 마음대로 퍼 올 수있는 쌀이 독독이 있다고 해도 운반을 해 오지 않으면 우리 입에 들어갈수가 없는데 운반이 쉽지 않았다. 순사가 쌀을 뒤지러 다니는 것은농가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기차 속에서의 단속은 더욱 극악스러웠다. 야미장수 단속반이 수시로 기차간을 돌면서 수상한 보따리는 뒤져 보고 찔러보고 했다. 들키면 망신당하고 빼앗기는 건 물론이었다. 그들도 사람인지라그리고 명색이 야미장수 단속인지라 몇 됫박 안 되는 쌀은 팔아먹을 게아니라 식구들 먹을 거라고 사정하면 봐 주었기 때문에 엄마는 조금씩날라왔고 그러자니 차비는 차비대로 들고 감질만 났다. 엄마도 차츰대담해져 옷보따리에뿐 아니라 배에도 쌀을 차고 다니게 되어 나는 엄마가시골 가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졸이곤 했다. 후방 경제를교란시킨다고 해서 암거래 단속이 심했고 특히 쌀 암거래를 혹독하게다스렸지만 그럴수록 수법도 교묘해져 입은 옷 속에다 쌀 서너 말 정도는거뜬하게 누벼 넣고 다니는 야미장수도 있다는 소문이었다.
시골서는 그런 고생 하지 말고 차라리 정당하게 반출증을 내서 갖다먹으라고 했지만 오빠가 질색이었다. 시골에 농토가 있는 지주에게는반출증이라는 걸 내주어 일정량의 쌀을 서울에 들여오는 걸 허락했지만 그대신 배급을 탈 수가 없었다. 오빠는 우리가 무슨 지주라고 그들이 주는쌀을 마다하고 시골 쌀을 축내느냐는 것이었다. 오빠의 말을 옳았지만오빠는 엄마 덕에 콩깻묵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딸이라고 음식 차별을 해 본 적이 없는 엄마가 그 비상시국 때만은 오빠밥은 따로 지었다. 콩깻묵 냄새가 워낙 흉해서 같이 지어서 가려 푸기조차싫었던 것이다. 콩깻묵 둔 밥은 엄마하고 나하고 먹었지만 물론 거기에도층하가 있었다. 밥그릇 위는 비슷하게 섞인 것 같아도 밑으로 들어갈수록엄마 밥에서는 콩깻묵이 더 많이 나왔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콩깻묵만은 정말 먹기가 싫었기 때문에 모른 척했다.
엄마가 절대로 아들딸을 음식 층하 안 하는 것은 숙모들 사이에서도유별난 걸로 알려져 있었다. 그만큼 남자와 여자는 기를 때부터 차별을두어서 기르는 게 예사로운 시대였다. 여북하면 숙모들로부터 딸을 그렇게길러서 나중에 어떻게 시집을 보내시려고 그러느냐는 핀잔을 다들었겠는가.
그러면 엄마는 "나는 내 딸 입만 가지고 시집 보내려네."라고천연덕스럽게 말하곤 했다. 엄마는 정말로 내가 시집가기 전까지 엄마의그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딸일수록 맛있는 걸로 이밧을 높여 놔야음식을 맛있게 만들 수 있지 먹어 보지 않은 음식은 결코 맛있게 만들 수없다는 엄마의 생각은 "입병난 며느리는 써도 눈병난 며느리는 못쓴다."는 지독한 말이 아직도 유용하던 당시로서는 너무도 파격적이었다.
오죽해야 나는 시집갈 때까지도 숙모들로부터 "쟤는 입만 가지고 시집갈아이니까."라는 다소 빈정거리는 투의 별명을 들어야 했다.


8. 고향의 봄
오빠가 와타나베 철공소를 그만두었다. 자기는 징용에 빠지고 자기가취직시켜 준 기술자는 징용에서 못 빼낸 사건은 기어코 회사를 그만두는데까지 이르렀다. 고향에 내려가 이 꼴 저 꼴 안 보고 농사나 짓겠다고했다. 자기가 사무직이면서도 기술직이 사무직에 비해 차별 대우 받는것을 참지 못하고 밥줄을 걸고까지 저항하고 고민한 오빠를 아무도이해하지 못했다. 때가 어느 때인가. 각자가 자기 보신책에 수단 방법을가리지 않아도 살아남을까 말까 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행위는 얼핏보기에는 정의감 같으면서 실은 도피였다. 오빠는 국방복 입고 각반 치고징 박은 군화 신고 군수 공장에 다니는 일을 못 견디어 했다. 그러나시골의 큰숙부가 면의 노무부장이 되지만 않았어도 오빠가 그렇게 선선히신분이 보장되는 직장을 그만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면의 노무부장이란면민 중 노동력이 될 만한 장정을 징용이나 보국대로 뽑아들이는 일을관장하는 부서였다. 숙부의 그늘을 믿는 마음이 그러한 용단을 내리게했다면 그건 용기가 아니라 응석일 터였다.
마침 경성에 소개령이 내렸을 무렵이었다. 공습과 식량난을 핑계로경성부민들을 시골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그렇게 불렀다. 사람뿐 아니라일부 도심의 집들을 강제로 헐어 내고 큰 길을 만든 것도 바로 그소개령에 의해서였다. 정말 서울도 동경처럼 불바다가 되려나, 아니면 식량반이빙 끊겨 굶어 죽으려나 내남없이 전전긍긍할 무렵이어서 되레 엄마의충격을 최소한으로 죽일 수가 있었다.
그렇잖아도 시골의 숙부로부터 우리도 소개를 해서 내려오는 게어떻겠느냐의 기별이 종종 오고 있는 터였고, 무엇보다도 엄마는 우리가밥줄이 끊어져 낙향하는 신세로 마을 사람들에게 비칠 염려가 없다는 것이중요했다. 그럴 만도 했다. 엄마가 어떻게 자리잡은 서울이가. 금의환향은아니라도 시국 탓이라도 하면서 귀향하고 싶었을 것이다.
서울의 작은 숙부도 얼음 도매상은 거의 폐업상태였다. 얼음도사치품이었기 때문에 가게 안에는 숯과 장작이나 몇 단 놔 두고 썰렁하게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상업적 감각이 뛰어난 숙부는 벌써부터'야미도리히키꾼'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통제경제와 물자난은필연적으로 귀한 물자의 암거래를 유발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지하경제로 높은 이익을 남기는 장사꾼을 그렇게 불렀다. 아버지와다름없는 숙부네의 이런 숨은 경제력도 오빠가 아니꼬운 직장을 선뜻그만둘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숙부네도 우리와 함께 소개를하겠다고 했다. 벌써부터 가게를 걷어치울 구실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몰래 사람을 만나서 수군대고 기차로 지방을 오르락내리락하면 되는야미장수가 꼭 서울에 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 모든 일이 내가 이학년으로 진학할 무렵에 일어났고, 해방되기 반 년전쯤이었다. 소개로 시골 가는 학생은 전학도 편리하게 돼 있었다.
학무국에 가서 소개하는 고장과 그 고장의 학교 중 가고 싶은 학교만신고하면 되었다. 나는 개성의 호수돈고녀를 신청했고 괴불마당 집도팔려고 내 놓았다. 박적골에서 개성까지 통학을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집만팔리면 개성 시내에다 집을 하나 장만해서 숙부네와 같이 쓰자고 합의를보았다. 야미장수라도 상업 활동을 하려면 대처에 근거를 두어야겠기에 두집 다 아주 박적골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오빠는 엄마가 까무러치지 않을 정도로 뜸을 들여 가며 충격을 주었다.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했다. "그럼, 네가 연애를 걸었다구?"그런 표현은나도 듣기 싫었지만 오빠도 듣기 싫었던 모양이다. 눈살을 찌푸리며 왜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느냐고 했다.
지금이야 연애도 못 건다면 바보취급을 하는 데 있어서 남녀차별이없지만, 그때만 해도 엄마는 아들이 잠깐 실수로 연애를 거는 건 몰라도오죽한 여자가 남자가 집적댄다고 거기 걸려들었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고있었다. 연애를 거는 것과 바람이 나는 걸 같이 취급해서 종종 우리한테처신하는 법을 가르쳐 왔기 때문에 엄마의 그런 말투는 단박 상대방여자에 대한 멸시로 들렸다.
그러나 엄마 입장에서 보면 오빠의 공손치 못한 태도가 그 여자에 대한역성으로 들렸을 것이다. 효자 아들로 자타가 공인하는 오빠에 대한배신감으로 엄마는 눈물까지 보였고 오빠는 자신의 불공을 빌고 또빌었으나 여자를 한 번 보기만 해 달라는 간청을 철회하진 않았다. "내가졌다. 보기만 하는 거다. 본다고 색시 얼굴이 닳을 것도 아니고 내 체면이깎일 것도 아니고."하는 선까지 양보를 했다.
그러나 선을 보러 가라는 곳이 하필이면 적십자병원 입원실이었다. 집이팔려 짐을 쌀 때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전학 수속이 끝나학교도 안 가고 있을 때여서 엄마하고 같이 가기로 했다. 집에서적십자병원까지는 지척이었지만 나는 미지의 문을 여는 것처럼 흥분해있었고 엄마는 한꺼번에 밀어닥친 일에 지쳐 보였다. 여자는 넓고 정결한특실에 들어 있었고 왜 입원했는지 모르게 멀쩡했다. 미리 오빠로부터연락을 받은 듯 그 여자는 우리를 어머님과 작은 아씨로 불렀다. 어디가아파서 입원까지 했느냐고 엄마가 물었고 그 여자는 감기로 입원을 했는데다 나았다고 했다. 암만 해도 석연치가 않았다.
오빠는 우리가 시골 가기 전에 만나려면 병실로 찾아가야 된다고만 하고그 여자가 무슨 병으로 입원했는지에 대해선 우물쭈물 했기 때문에 곧퇴원할 수 없는 수술을 받았으려니 했었다. 그래서 병원까지 가는 동안도엄마는 연애 거는 여자도 마땅찮은 데 더군다나 몸에 칼자국 있는 여자를내 집에 들일 수는 없다고 벼르곤 했다. 몸에 칼자국이 있을 것 같지도않았거니와 상당한 미인이었다. 어디가 특별나게 예쁘다기보다는 요새말로하면 세련됐다고나 할까. 풍기는 분위기에 우리가 봐 온 어떤 여자하고도다른 멋이 있었다.
나는 엄마도 그 여자에게 끌리는 한편 꿀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안됐지만 엄마가 또 지겠구나 생각했다. 나는 가벼운 질투를 느꼈지만동경하는 마음 또한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도 반쯤은 이 혼사를 반대할수 없다고 체념한 듯했다.
오는 길에 엄마는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으면서 오빠의 사직 이후 연달아일어난 사건들이 며칠 만에 일어났나를 헤아려 보고는 깊은 한숨을쉬었다. 서울에 애면글면 말뚝을 박은 일이며 외아들에 대한 기대와자랑이 온통 허망한 눈치였다. 그날 밤 엄마는 오빠에게 그 여자가 무슨병으로 입원했느냐고 따졌다. 오빠는 그여자가 엄마 보기에 어떻더냐부터얘기해 달라고 했다.
"널 호릴만 하더라."
엄마는 악을 썼다. 오빠는 그 여자가 늑막염으로 입원을 했는데 다 나아곧 퇴원을 할 거라고 했다.
"아아, 예서 더 무슨 소리를 들을꼬."
엄마는 신음했지만 침착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그 여자의 환경을따졌다. 천안에 딸만 넷 있는 집 막내딸이라고 했다. 명문 여고 출신이라는것밖에는 엄마를 실망시키는 조건 뿐이었다. 양친은 생존해 계시지만넉넉한 집안도 아니라고 했다. 꼬치꼬치 따진 끝에 특실에 입원시킨 것도오빠의 도움이 컸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새록새록 실망과 분노를거듭하면서도 엄마는 오빠와 그 여자를 갈라놓을 자신이 점점 없어지는 것같았다. 나하고 단둘이 되었을 때 엄마는 나에게 "늑막염이라고 다 폐병이되는 건 아니겠지?"하면서 한 가닥 위안을 구했다. 늑막염은 대개폐결핵으로 진행하고 결핵은 패가망신하는 무서운 병으로 인식되어 있을때였다.
그런 와중에 나는 다니던 학교에 인사를 갈 경황도 없이 개성으로이사를 했고, 며칠 만에 학무국으로부터 호수돈으로 등교하라는 통지가나와 저절로 전학이 되었다. 오빠는 서울이 처졌고 그 여자는 완쾌해서퇴원을 해 고향으로 내려가 몸보신 중이라고 했다.
우리가 개성에 새로 장만한 집은 농바위고개 밑 남산동에 있었다.
박적골을 자주 드나들 것을 고려해 거기다 산 것 같았다. 호수돈고녀하고도 별로 멀지 않았다. 엄마하고 처음 등교한 호수돈고녀는 지대가노고 화강암이 장중하고도 아름다운 교사에다가 마당이 넓고 녹지대가많았다. 마침 벚꽃이 만발해 별천지 같았다. 그러나 왠지 내가 장차 다닐학교라는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가뜩이나 붙임성도 없는데다가 우리학교라는 생각까지 없으니까 꽁하니 입다물고 옆에 앉은 짝의 얼굴도변변히 거들떠보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나에게 불어닥친환경의 변화가 분하고 억울해서 툭하면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열흘쯤 다니고 나서 감기를 핑계로 며칠 결석을 했다. 분명히 꾀병을앓을 작정이었는데 계속해서 미열이 있었다. 가까운 병원에 갔더니도립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 보라고 했다. 엄마는 그때부터 지나친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도립병원에서 찍어 본 엑스레이 결과는폐침윤이라고 했다. 폐 소리만 듣고도 질겁을 한 엄마는 혹시 폐병이 되는병은 아니냐고 했고 요양을 잘못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의사의 대답을얻어 냈다.
나는 한약 보따리를 싸들고 박적골로 보내졌다. 엄마는 오빠가 좋아하는여자가 혹시 폐병이 되면 어쩌나 하는 숨은 걱정을 엉뚱하게 나에게다발산을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 하면 그 동안 감기 한 번 안앓아 봤을 리도 없거니와 배탈, 학질, 횟배등 더 나쁜 병을 앓을 때도 결석한 번을 제대로 못 해 봤기 때문이다. 죽을 병이 들지 않은 바에야 학교를결석하면 큰일나는 줄 알았다. 세상에 나서 엑스레이를 찍어 본 것도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아무튼 옳다꾸나 하고 박적골로 갔다.
박적골의 봄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처음 알았다. 서울로 간 후 그계절에 내려와 보는 게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는 천방지축 어린나이였고 이제는 한창 감수성이 피어날 열다섯 소녀였다. 나는 동무 없이혼자서 몽유병자처럼 산과 들을 누볐다. 올망졸망 어린 사촌 동생들을거느리고 산나물을 억수로 많이 해온 적도 있었다. 박적골 여자들처럼종댕이(종다래끼)를 옆구리에 차고 다니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게책가방보다 훨씬 나에게 어울렸다. 엄마가 아무리 애써도 나는 공부할팔자가 아닌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나에게 쏟은 엄마의 정성과소망을 헛되게 하는 건 참 안되었지만 나는 다시 학교에 갈 생각이없었다.
그러나 산골짜기에서는 은방울꽃의 군생지를 발견했을 때는 그리움으로가슴이 아렸다. 혼자서 산길을 헤매다가 나도 모르게 음습한 골짜기로들어가게 되었다.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진하면서도 고상한, 환각이 아닌가싶게 비현실적인 향기에 이끌려서였다. 그늘진 평평한 골짜기에그림으로만 본 은방울꽃이 쫙 깔려 있었다. 아니 꽃이 깔려 있다기보다는그 풍성하고 잘생긴 잎이 깔려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밥풀만한 크기의작은 종이 조롱조롱 맺힌 것 같은 흰 끛은 입 사이에 수줍게 고개를숙이고 있었지만 앙큼하도록 농밀한 꿀 샘을 가지고 있었다.
은방울꽃은 숙명의 교화였다. 가슴에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던 배지도은방울꽃을 도안한 거였고, 교가도 은방울 꽃의 수줍음과 향기를 찬양한내용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하도 각박한 시대에 입학을 해서 그런지 살아있는 은방울꽃을 본 적은 없었다. 관념적으로 모호하게 미화됐던은방울꽃의 실체를 발견한 날은 온종일 이상하게 우울하고 마음이 아팠다.
장차 이 세상은 어찌 될 것이며 나는 어찌 될 것인가. 내가 지금의 이상태에서 완벽한 기쁨을 느끼는것은 이 상태가 영속되지 않을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막연하게지만 자연과 행복하게 일치된 것 같은자신을 믿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겼고, 나의 중요한 일부를 서울에 남겨놓고 온 것처럼 느꼈다.
우리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개성으로 소개해 온 작은 숙부도 며칠에 한번씩은 박적골에 와서 지내다 갔다. 처음엔 우리가 남산동에 산 집에 가있다가 곧 셋방을 얻어서 따로 났다. 오빠는 원하던 여자와의 혼담이정식으로 급진전이 돼 예식날을 받아 놓고 있었다. 세 사람이 들어오는데숙부네가 같이 있으면 거북할 것 같다고 미리 따로 난 것이었다.
야미장수로 돈을 굴리는 데 이골이 난 숙부라 집 같은 거 사는 데 돈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숙부가 박적골에 올 때는 야미장수를 한탕 하고오는 길이라 기분이 매우 좋을 때였다.
나도 숙부가 오는 날이 가장 신났다. 그 시절의 보통 아이들이아버지하고 친한 것보다 우리는 훨씬 더 친했다. 요새 친한 부녀간처럼스스럼없이 어리광도 부리고 귀여움도 받았다. 가끔 속으로 만약작은숙부에게도 아이가 생기면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생겨나지도 않은아이에게 은밀한 질투를 다 느낄 지경이었다.
그 숙부의 취미는 고기잡이였다. 낚시질을 하는 게 아니라 그물을던져서 잡았는데 숙부가 광문을 열고 어깨에 그물을 메면 나는 으레종댕이를 들고 신이 나서 따라라나섰다. 저수지까지는 십 리가 넘었지만거기까지 안 가더라도 그물을 던질 만한 웅덩이가 개울은 도처에 있었다.
숙부가 수면을 향해 그물을 힘차게 던지는 모습은 그렇게 멋있어 보일수가 없엇다.
우리 고장 말로 그런 그물을 죙이 그물이라고 했는데 공중에서 넓은원을 그리면서 퍼지고 나서 수면을 덮치면서 무겁게 침몰해 갔다. 그물의원주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무거운 추가 달려 있어서 덮친 수면 아래물고기들을 쓸어 모으면서 숙부가 끈을 당기는 대로 오므라들었다. 조여진그물 안에서 비늘을 번득이며 요동치는 물고기를 종댕이에 주워 담을 때면심장이 터질 듯한 희열을 느꼈다. 가끔 재수 나쁘게 물 속에 잠겨 있던나뭇등걸 같은 것에 그물이 걸려 숙부가 헤엄쳐 들어가 찢긴 그물을가까스로 빼 올적도 있었지만,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뱀장어가 잡힐 적도있었다.
뱀장어란 놈은 여간 힘이 세지 않았다. 길길이 날뛰어 내가 종댕이에간수하는 건 불가능 했다. 한번은 꽤 큰 뱀장어가 잡힌 적이 있는데어찌나 무섭게 날뛰는지 숙부는 그놈을 바위에다 패대기 치고 도롤 머리를짓이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자 그대로 사투였다.
뱀장어만 잡히면 숙부는 이건 네 몫이라고 하면서도 투망질을 그만두고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살아 있을 때 뼈를 바르고 소금을 뿌려 굽기위해서였다. 날씨가 하루하루 더워 오는데도 부엌에는 늘 불화로가 있었다.
그 위에다 석쇠를 얹고 뼈를 발라낸 뱀장어에다 굵은 소금만 훌훌 뿌려서구워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한창 기름이 올랐을 때의 뱀장어는구워지면서도 맹렬한 불꽃을 일으켰다. 사촌들이 달려들어도 삼촌은 나만먹이고 싶어했다. 그때 나는 폐가 나빠 요양 중인 아이로 돼 있었으므로.
나는 어려서부터 강단이 있단 소리는 들어 왔어도 늘 기운이 좀 없는편이어서 스스로를 건강하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해 봄부터 여름에 걸쳐서 박적골에서 보낼 때는 삶의환희랄까, 내 몸에 싱그러운 물이 오르는 것 같은 건강에 기쁨을 만끽할때였다. 하필 그럴 때 병자 취급을 당하는 기분은 묘했다. 그러나 다나았다고 떨치고 일어날 마음은 없었다. 호수돈에 다시 가기가 싫었다.
나의 병자 취급은 어쩌면 엄마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나를 박적골로 요양만 보내 놓고 오빠의 결혼준비로 정신이없었다. 외아들의 외며느리 보는 일이니 경사 중의 경사라 힘닿는 데까지잘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더욱 경황이 없어하곤 했다.
"뭘 하려도 손이 예가 뇌고 제가 뇌고, 뭘 사러 가도 뭘 사러 나왔더라정신이 아뜩해지면서 근심만이 가득해지니 이러고도 이 혼사를 해야되는지 모르겠네."
이렇게 숙모들한테 하소연하며 한숨짓는 엄마를 보면 나도 막연히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숙모들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형님 생각이 정 그러시면 지금이라도 작파를 하시지 그러세요. 아, 아들가진 쪽이 좋다는게 뭐예요. 남자야 연애 좀 건 게 뭐가 흉이 된다고그렇게 호락호락 승낙을 하시고 나서."
"내가 이 혼인 말려서 남의 딸 하나 망쳐 놓는 거라면 내가 왜 처음부터죽기 살기로 안 말렸겠나. 나도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인데 보아 하니 내아들 먼저 잡게 생긴 걸 어쩌겠나? 다 가운이지 뭐 하필 그런 병추기가있는 것도 가운이지만, 누가 아나 또 내 식구가 당할 재앙을 남의 식구가대신 때워 줄지."
엄마의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어쩜 우리 엄마가 저럴 수가 있을까, 자식사랑의 잔혹한 이기심에 어안이 벙벙해지곤 했다. 나는 병원에서 처음올켓감을 보고 느낀 호감과 아련한 동경심을 그냥 간직하고 있었다. 말은그렇게 해도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원래 자식이좋아하는 것은 다 따라서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오빠가 고른규수도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허약할지도 모른다는 한 가지 흠이 유난히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엄마의 근심 때문에 나는 거의 잊혀진 채 받아놓은 날이 다가왔다. 어찌나 급하게들 볶아쳤는지 신부쪽에서도 장롱을목수한테 맞췄는데 그날까지 될지 말지 하니 며칠 늦게 보내더라도 양해해달라는 기별이 다 왔다.
서울에서 신식으로 예식을 올리고 다시 박적골에서 구식 혼례와 잔치를하기로 했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나 할까, 오빠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신부를 한껏 화려하게, 그리고 격식을 고루 갖추어 맞고 싶어했다. 나는요양 중이라는 핑계로 서울까지는 안 가고 시골에서 대대적인 잔치준비를하는 걸 구경만 했다.
1945년 초여름이었다. 해방을 두어 달 앞둔 어려운 시기였지만 개성에서성적 잘 하기로 이름난 머리 어멈을 불러다가 개성지방의 전통적인신부차림을 재현했다. 화관을 쓴 올케 언니는 누구나 숨을 죽이도록아름다웠다. 피부가 창백한 듯하면서도 볼과 입술에 장밋빛 혈색이 돌아화관의 화려함을 무색하게 했다. 오빠는 의기양양해서 입을 다물 줄을몰랐다. 하객에게는 신부가 자랑스럽고, 신부와 후행에게는 개성 풍습이자랑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그때 화관을 쓴 올케 언니에게서 받은 황홀한 인상을 오랫동안잊지 못하고 있다가 훗날 미망을 쓸 때 여주인공 혼례장면에서 울거먹은바가 있다. 혼례를 치르고 신행까지 다녀온 신혼 부부는 남산동 집에정착했다. 올케는 정말 옷보따리만 가져오고 장도 못 가져왔다. 운송 등제반 사정이 극도로 어려울 때였다. 세상이야 어찌 됐든지 간에 오빠와올케는 신혼 재미에 푹 빠져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엄마는 아직도 새며느리의 건강이 못 미더워 될 수 있으면 편하게 해 주려고 남산동집보다는 박적고렝 더 많이 와 있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유난히 길고 화평스러운여름날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어디 가셨는지 안 보이고 엄마와 두 숙모가모처럼 박적골 집에 다 모여 있었다. 점심으로는 메밀 칼싹두기를 해 먹고난 후였다. 삼동서가 주거니 받거니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큰 함지박만한것도 있고 작은 반병두리만한 것도 있었다.
그때 우리 시골에선 종이로 그릇 만드는 게 크게 유행했다. 책이건창호지 뜯은 거건 한지로 된 거면 무엇이든지 재료가 되었다. 맹물에 오래담가 놓는 건지 양잿물 같은 걸 섞은 물에 담가 높은 건지, 아무튼 헌한지가 하얗게 될 때까지 담가 놓았다가 꼭 짜서 걸쭉하게 쑨 풀물과 함께절구에다 잘 찧은 게 재료였다. 그렇게 찧어서 찰흙처럼 찐득찐득해진 걸집에 있는 큰 함지박이나 작은 동고리짝 같은 기존의 그릇 위에 적당한두께로 입히기도 하고, 혹은 본없이 손으로 자유롭게 빚기도 해서 말리면그릇 모양이 된다. 거기다가 치자물을 들이고 콩댐을 해서 잘 길을 들이면견고하고도 미려한 그릇이 된다. 솜씨에 따라서는 깜짝 놀랄 만큼기발하고도 쓸모 있는 그릇이 나오기도 했다. 서로 솜씨 자랑을 하면서마른 곡식이나 씨앗, 강정 등을 넣어 두는 데 유용하게 썼다.
그걸 본 시골집의 큰숙모가 옳다꾸나 하고 사랑 골방 속에 있는할아버지의 서책을 다 꺼내 물에 담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골방 하나 가득 남기신 고서 때문에 우리는마을에서 제일 많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그릇부자가 된 셈이었다. 그걸부러워하는 마을 사람들에겐 더러 나누어 주기도 해 가며 삼동서가 그릇을만드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하고도 행복해 보였다. 눈썰미가 있는작은 숙모는 끌자국이 그냥 남아 있는 큰 나무 함지박 속에다 그 재료를알맞은 부께로 발라 갔다. 아마 그 투박한 끌자국이 그대로 옮아붙기를바라고 하는 일일 터였다. 큰숙모는 작은 동고리짝 겉에다가 그 종이 풀을입혔다. 엄마는 아무런 본 없이 그냥 만들려다가 자꾸 실패를 하면서 주로입담으로 한 몫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책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주로 할아버지 얘기였다. 거의험담이었지만 충분히 애정이 어린 거여서 듣기 싫진 않았다. 날도 새기 전꼭두새벽에 엄엄한 큰 기침과 나막신소리를 내면서 안뜰로 들어서실 때자지러지게 놀란 새색시 적 얘기며, 며느리 귀애하신답시고 상에 고깃국이오르는 날은 수염이 빠졌던 고깃국을 조금 남겨 상머리에서 시중들던며느리에게 얼른 마시라고 독촉할 적에 안 마실 수도 마실 수도 없었던얘기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말끝마다 허리를 잡고 웃느라 그릇 만드는건 건성이었다.
괜히 조마조마하던 오빠의 결혼을 잘 치른 후의 안도감과 허탈감,그리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이 불안한 시국을 의식 안 할 수 없는감질나는  평화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반평생의 며느리 노릇을짓누르던 권위주의로부터의 당돌하고도 상쾌한 해방감 때문이었을까, 나는다만 구경꾼에 불과했건만도 그 장면은 어제 떠올려도 선명하고도 정겹다.
먼 훗날, 신문 같은 데에 시골 선비집에서 귀중한 자료가 될 만한고서나 국보적 가치가 있는 문헌이 발견됐단 소식이 나면 엄마는 "그때우리가 참 무지막지한 짓을 했지." 하면서 계면쩍게 웃곤 했다. 할아버지책 중에도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었지 않나 하는 후회의 뜻이겠으나 나는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장서를 무시해서가 아니라문헌의 가치도 중요하겠지만 그 때 며느리들의 누린 해방감도 그에못지않게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그들이 내 눈에어린애처럼 자유롭고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이 티 없는귀여움으로 인상에 남기는 쉽지 않다. 고서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릇도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엄마와 숙모들이 요새말로 스트레스를 풀고 나서맛본 건강한 즐거움은 죽는 날까지 그분들의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박적골 집의 마지막 평화였다. 엄마는개성으로 오빠 내외가 사는 걸 가 보고 오면 근심스러운 듯이 말하곤했다.
"사돈집에선 여태 세간도 안 보내면서 웬 보약은 그렇게 자꾸 지어보내는지. 신접살림집에서 한약 냄새가 떠날 날이 없으니..."
"형님은 시어머니 노릇도 참 별나게도 하세요. 오랜만에 가셨으면편안하게 앉아서 효도나 받을 것이지 웬 냄새는 그리 밭고 다니셨을까."
숙모들은 이렇게 엄마의 신경과민 탓으로 돌렸지만 나는 엄마의 눈은 못속이는 무엇인가가 올케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련히 느끼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방학 중이었다. 나는 너무 건강했기 때문에 여름 방학이끝나면 도저히 학교에 안 가겠다고 할 면목이 없을 것 같아 초조했다. 내나름으로 뭔가 중대한 결단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지만 그게 쉽지가않았다.
그러나 개학하기 전에 일본이 망하고 우리는 해방이 되었다. 박적골에일본이 망한 사실이 알려진 건 8월 15일보다 사나흘 후였다. 16일날에도평상시와 다름없이 면사무소에 출근한 숙부가 그날도 그 다음 날도 집에안 들어오긴 했지만 그건 늘있는 일이었다. 그때 숙부는 면 소재지가까이에 소실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었지만 숙부는 극구 부인했고 면의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하급 관청이정신없이 들볶일 때였으므로 숙부 말도 그럴싸했고 무엇보다도 그런문제라면 가장 민감해야 할 숙모가 태평이었으므로 아무도 걱정하지않았다


9. 패대기쳐진 문패
우리가 일본이 망했다는 걸 안 것은 느닷없이 한 떼의 청년들이몽둥이를 들고 우리 집으로 쳐들어오고 나서였다. 그들은 저희들끼리만희희낙락 우쭐대면서 우지끈뚝딱 우리 집 세간이며 문짝을 때려 부수기시작했다. 우리 마을 청년도 한두 명 섞여 있는 듯 했지만 거의 모르는얼굴들이었다.
그러나 그 고장 토박이인 큰숙모는 거의 다 안면이 있는 듯 자네들이별안간 환장을 했나,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영문이나 좀 알자고 몸을사시나무 떨 듯하면서도 의젓하게 호령을 했다. 앞으로 나서진 못하고뒤에 처졌던 박적골 청년이 잠시 파해 있는게 좋을 듯하다면서 일본이망하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됐다는 걸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박적골에선 우리 집이 친일파 집으로 몰려 분풀이를 당하고 있는것이었다.
벌써 몇 마을 째 돌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청년들은 그렇게 이마을 저마을을 돌면서 세를 불렸고 자기 마을 친일파 집을 때려 부술 때는 그마을 청년은 나서지 않고 뒤에서 구경만 했다. 몇십년을 내리 한 우물을먹으며 경조사를 같이 해 온 의리였다. 하필 그때 오빠도 개성에서박적골에 당도했다. 세상이 헤까닥 바뀌었는데 박적골 쪽에선 아무런소식도 없는지라 걱정도 되고 기쁨도 나누고 싶고 해서 달려온모양이었다. 때려부수고 있던 청년 중에는 오빠한테 반갑게 인사를 하는이도 있었다. 그러나 아는 얼굴이 약간 머쓱해한다고 해서 끝날 일이아니었다. 그들은 의기가 충천했고 신들린 것 같았다. 튼튼한 대문짝까지우지끈 깨부수고 난 청년 중의 하나가 문패를 떼서 패대기를 쳤다. 내가어려서부터 익히 봐 온 할아버지의 문패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나서도 그 문패는 여전히 붙어 있었고, 숙부도 오빠도 그 옆이나 밑에다른 문패를 추가하지 않았다.
나는 뭐라고 목청껏 악을 쓰며 그 청년을 향해 돌진했다. 할아버지서책으로 그릇을 만드는 걸 볼 때는 재미만 있었는데 문패를 패대기치는건 왜 그렇게 참을 수가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난생 처음 보는 폭력의장면이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고 사생결단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고생각했다. 아마 오빠만 아니었다면 누구 한 사람 물어뜯기라도 하고 나서기함을 하고 나자빠졌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어렸을 때이긴 하지만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성깔 때문에 기함을 한 일이 더러 있었다.
오빠가 나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집 뒤를 돌아 뒷동산에 올랐다. 숙모와할머니가 땅을 치며 통곡을 하고, 청년 중의 상당수는 고정하시라고그들을 달래느라 쩔쩔매는 걸로 봐서 사람을 해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끌려가면서도 그들에게 정중하게 어른들의 안전을 부탁하는오빠가 너무 바보 같고 어수룩해 보여서 기가 막혔다. 나는 뒷동산에끌려가서도 오빠에게 마구 대들었다. 우리가 어째서 친일파냐? 우리는창씨개명도 안 했지 않느냐, 똥 뭍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도 분수가있지, 도쿠야마, 아라이, 기무라 들이 뭐가 잘났다고 감히 반남 박씨 집을때려부수느냐는 게 내 항변의 대강의 요지였다.
오빠는 노한 청년들이 제풀에 물러날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우리 집이망가지는 걸 바라보면서 한편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우리 집이 망가지는걸 바라보면서 한편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내 생각이 옳지 않다는 걸알아듣게 하려고 애썼다. 내가 막무가내로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했기때문에 오빠가 하도 여러 말을 해서 자세한 것은 생각나지 않지만,도쿠야마, 아라이 들이 당한 건 박해요 수난이요 치욕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편안히 특혜를 누려왔다는 요지였다. 오빠는 그게 너무도 부끄러워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했다. 저렇게라도 분풀이를 당했으니까 마을 청년보기가 덜 부끄러울 것 같다고도 했다.
나는 이윽고 조용하고 비통해졌다. 오빠한테 설득을 당해서가 아니라헛된 분노 끝에 오는 허탈감 때문에 그랬고,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 집때문에도 그러했다. 우리는 그 집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오빠가 내 속을알아차렸는지 실컷 울다가 내려가자고 했다.
그날 우리 집이 당한 것은 깊은 원한이 사무친 조직적인폭력이라기보다는 갑자기 억압이 풀리면서 억눌렸던 힘들이 그렇게 분출한일종의 축제행사였던 듯하다. 몇 마을을 더 돌고 나서 제풀에 진정이되었고 망가진 문짝과 세간살이들이 다시 몸담고 살 수 있을 만큼수습되기까지는 마을사람들의 위로와 협조가 컸다. 청년단이니 자위대니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정치적인 색깔이 사람들의 심성을 혼란스럽게하기 전의 일이다.
숙부는 소문대로 소실의 집에서 세상의 변화를 관망하다 돌아와 그지경이 된 집안 꼴을 보고는 몇 달 전에 노무부장만 안 됐더라도 이런일까지는 안 당했을 걸 하고 말했다. 그 자리는 악명 높은 자리였지만피할 길이 없었다고 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후회나 하고있는 숙부보다는 문짝에 못이라도 하나 쳐주는 마을 사람들이 훨씬 더의지가 되었다. 붓대로 먹고 살던 이가 그걸 못 하게 되면 무능력자나다름이 없었다.
박적골 집에 불화의 기운이 돌고 나쁜 일은 엎친 데 덮친다고 올케가기어코 각혈을 했다. 오빠가 올케를 데리고 서울로 갔다. 엄마와 나는남산동 집도 비워 둘 수가 없고, 다시 서울로 이사갈 준비도 해야겠기에급히 개성으로 돌아왔다. 셋방을 얻어 임시 거처를 마련했던 작은숙부네는 거칠 것이 없어 오빠 뒤미처 서울로 떠났다. 작은 숙부는장사하기 좋은 세상이 될 것 같다면서 돈벌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엄마는 오빠와 올케가 황급히 떠난 남산동 집을 치우면서 말끝마다한숨이요 눈물이었다. 세간은 그때까지도 안 들어와서 신혼 살림다운아기자기한 볼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럴싸해서 그런지 쫓기는사람들이 잠시 몸을 숨겼다가 도망친 자리처럼 두서없이 어수선한 가운데두 사람의 절박한 마음이 잡힐 듯 했다. 그리고 구메구메 나오느니 그저한약 생악 등 약보따리였다. 한 뼘도 넘게 큰 지네 말린 것도 징그러워죽겠는데 거기서 다시 벌레가 난 것을 수습할 때 엄마는 얼굴색이바래면서 손을 덜덜 떨었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아들을 길렀단 말인가."
한숨짓는 엄마를 보면서 나도 오빠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빠는누구보다도 올케의 병세에 대해 잘알고 있었을 텐데 병을 고쳐 가지고결혼을 할 생각은 안 하고 꼭 무엇에 쫓기듯이 그 병에는 가장 해롭다는결혼 먼저 서두를 게 뭐였을까? 엄마도 나도 그 까닭은 끝내 모르고말았지만 세상의 누가 돌연 젊음을 엄습하는 운명적이고도 무분별한정열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본인도 아마 숨기고 싶어서가 아니라설명할 수가 없어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성에 처음 주둔한 외국군대는 미군이었다. 그들이 주둔할 때 구경을나가 보고 그 자유분방한 행진에 놀랐다. 껌을 쩌덕쩌덕 씹기도 하고여자들에게 눈도 찡긋찡긋하고 어린이를 번쩍 안아 보기도 했다. 도대체군기라는 게 없는 군대 같았다. 한길 가마다 담벼락마다 벽보가 붙기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자유니 민주주의니 인민이니 하는 말은생전 처음 들어 보는 경이로운 말이었다. 친일파 매국노를 처단하자는구호도 많았고 누구누구 절대지지, 누구누구 결사반대라는 의사표시도난무했다.
올케는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집이 팔리는 대로 발리서울로 올라오라는 기별이 왔다. 엄마가 한 번 서울 다녀와서 더욱서둘렀다. 올케의 친정 어머니가 와서 간호를 하고 있는데 연로해서 차마못 보겠고 우리 식군데 우리가 간호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엄마는 오빠가 너무 올케 가까이 붙어서 애를 태우는 것도 물론 불안했을것이다. 우리가 올케 문제에 만 골몰해 있는 동안 작은 숙부는 혼란기의서울에서 마음껏 수완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자기는 아는 일본 사람가옥을 한 채 접수해서 살게 됐으니 우리가 집 사는 데 보태 줄 수가 있을것 같다면서 헐값에라도 남산동 집을 팔고 어서 올라오라고 재촉이성화같았다. 집이 팔릴 무렵이었다.
개성에 미군이 들어온 건 삼팔선을 잘못 그어서 그렇게 된 거라면서느닷없이 미군이 철수하고 소련군이 주둔을 했다. 미군이 진주하기전부터도 개성엔 미군이 들어올지 소련군이 들어올지 예측을 할 수가 없을만큼 삼팔선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고 있다면서 과연 어느쪽이 들어오는게 유리할까 흥미롭게 예상도 하고 논쟁도 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지만삼팔선이란 추상적인 선이 현실적으로 어떤 구속력을 갖게 될지는 아무도몰랐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미군은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소련군이주둔을 하자 세상이 갑자기 흉흉해졌다.
다와이라는 말이 유행을 하면서 시장이 다와이를 당했다, 밭의 채소도다와이를 당했다, 여자들까지 다와이를 당했다고 난리였다. 외국 살마들은우리 나라 여자의 얼굴만 보고는 늙고 젊고를 분별 못 해 늙은 여자까지겁탈을 한다고도 했고 시계만 보면 빼앗아 차는지라 어떤 군인은팔목에서부터 팔뚝까지 열 개도 넘는 시계를 차고 다닌다고도 했다.
엄마는 워낙 근심이 많아서 그러했겠지만 그런 공포 분위기에 대체로무관심했다. 너무들 오도방정을 떤다는 식으로 말했다. 집에서 철길이가까웠다. 철길을 타고 걸어서 북쪽에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의행렬이 날마다 그 수효를 더해갔다. 아직 삼팔선 통행이 자유로울 때여서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이북 사람도 생겨나기 전이었으니까, 지용이나가난에 쫓겨 만주 등지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길어었다. 소련군이 진주하고 나서는 웬일인지 개성에서 남으로 가는기차는 끊긴 상태여서 그렇게 걸을 수밖에 없는 거였다. 개성까지도 운수좋으면 타고 여의치 않으면 걸어서 온 듯 모두 지치고 배고파 보였다.
철도편이 엉망이 돼 있었다. 서울 가려면 봉동역까지 걸어가서 기차를타야 한다고 했다. 지용이나 징병으로 남편이나 아들을 빼앗긴 가족들이철길에 나와 온종일 지나가는 사람을 살펴보기도 하고 붙들고 어디서 언제떠나 오나를 묻기도 하는 광경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밀려오는군중 속에는 일본인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말을 붙였다가 일본 사람인걸 알면 고생해 싸다고 욕을 하거나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그때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는 우리 동포들이 고생이 쫓겨가는 일본사람의 고생에 배하면 조금이라도 덜한 건 아니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니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처음으로 우리말로 된 소설을 읽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오빠방에 있는책 중 우리말로 된 소설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생겼다. 내 또래들이 거의한글을 모를 때였다. 급히 배우느라 야단들이었 만 나는 벌써부터 알고있어서 그 무렵 쏟아져 나오는 벽보다 삐라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는 데묘한 쾌감과 자부심을 느꼈다. 제 나라 글을 알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대한 자부심이 우리 문학에 대한 최초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제목에 이끌려 이광수의 사랑을 읽고 나서 같은 작가의 단종애사를읽었다. 박화성의 백화도 읽고, 최서해의 탈출기도 읽었다. 제목은잊어버렸지만 강경애의 단편도 읽었다. 단종애사와 강경애의 단편에 가장큰 충격을 받았다. 단종애사를 읽고는 잠을 못 잤고, 강경애의 단편을일고는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지만 비위가 덧나 며칠 밥맛을잃었다. 부스럼이 잔뜩 난 아이의 머리에다 약이라고 발라 주는 게 결국나중에는 머리에서 온통 구더기가 들끓게 되는 얘기인데, 나도 살갗을데면 당장 된장이나 발라주는 환경에서 자랐건만도 징그럽고 끔찍해서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때까지의 독서가 내가 발붙이고 사는 현실에서 붕 떠올라 공상의세계에 몰입하는 재미였다면 새로운 독서 체험은 현실을 지긋지긋하도록바로 보게 하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단종애사는 소설이지만 나는고스란히 사실로 받아들였고, 우리 역사를 좀더 깊이 계통적으로 알고싶다는 관심의 단서가 되었다.
그후 학교에서 정식으로 국사를 배우게 되었고 어른이 된 후에도개인적인 취미로 저자에 따라 사관이 다른 몇 종류의 역사책에 접할기회가 있었지만, 그때 그때 흥미본위로 잡다하게 취한 지식은 전혀두서가 없어 꼭 정리를 안 하고 함부로 쳐 넣은 서랍처럼 아무짝에도쓸모없는 그야말로 잡식에 머물러 있다. 그나마도 세종 대에서 세조대까지를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곤 하는데 그런 착각은순전히 단종애사에 근거하고 있지 않나 싶다.
감수성과 기억력이 함께 왕성할 때 입력된 것들이 개인의 정신사에미치는 영향이 이렇듯 결정적이라는 걸 생각할 때, 나의 그런 시기를문화적 환경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너무도 척박했었다는 게 여간억울하지가 않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밑바닥 가난 속에서도 드물게사랑과 이성이 조화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이었다고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강경애의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
아침 저녁 차렵이불을 끌어당겨야 할 만큼 여름이 물러나고 나서 비로소엄마하고 나는 개성을 뜰 수가 있었다. 여전히 개성에는 소련군이주둔하고 있어서 개성역에는 서울가는 기차가 없었다. 서울 가려면봉동역에 가서 타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장단까지는 가야 한다는 사람도있었다. 다 풍문이었고 확실한 건 개성역엔 남쪽으로 가는 기차는 없다는사실 하나뿐이었다. 봉동역까지는 이십 리였지만 장단역까지는 오십 리길이었다. 당장 필요한 것만 해도 엄마도 나도 이고 지고 해도 모자랄판이었지만 몇십리 길을 걸을 각오를 해야 했으니 욕심은 금물이었다.
다행히 우리 집을 산 사람이 식구가 단출해 우리 세간을 당분간 맡아주기로 했다. 봉동역까지 가려면 야다리를 건너야 했다.
고려가 전성을 누릴 때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 교역을 하러 드나들어약대(낙타)를 매놓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는 야다리는 개성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다리였다. 개성서 자란 사람치고 야다리 밑에서주워 온 아이라는 놀림이나 꾸지람을 듣고 자라지 않은 이는 별반없으리라. 어려서부터 워낙 울길 잘 한 까닭도 있었지만, 내가 어려서어른들한테 가장 많이 들은 구박도 저 계집애는 야다리 밑에서 얻어왔나보다는 소리였다. 우리말고도 이고 지고 야다리 쪽으로 이동하는 군중이길을 메우고 있었다. 원래 서울 왕래가 반번하던 고장이 그 길이 막히고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야다리 이쪽엔 소련군이, 저쪽엔 미군이 보초를서고 있었다.
그러나 통행을 제한하거나 검문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흉흉한 소문때문에 머리를 구질구질한 수건으로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가는 젊은여자도 있었지만 겉보기에 소련군이나 미군이나 다 같이 갈색 머리에노르스름한 눈을 하고 있었고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야다리 한가운데도삼팔선이라고 추정할 만한 선이 그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새끼줄 한 오라기 쳐 있지 않았다.
삼팔선 무서운 건 전혀 모를 때지만 군인을 괜히 무서워하는 버릇은일제 잔재인지라, 죄진 일 없이도 가슴을 두근대며 경직된 표정으로 양국군인 앞을 통과했다. 아무런 표지도 없었지만 사람들이 다들 봉동역에집결해 있기에 우리도 장단역까지 갈 것 없이 거기서 기다리기로 했다.
참을성 있게 마냥 기다렸다. 기차표 파는 데도 없어서 마음대로 철길로나가 서 있었다.
드디어 기차가 남으로부터 왔고 우리는 일제히 달려들었다. 출입문보다창으로 타는 사람이 더 많았다. 닫힌 창은 유리를 부수었고 이미 많은유리창이 부서져 있었다. 엄마가 나를 들어 유리창을 통해 안으로밀어넣었고 누군가 안에서 끌어당겨 주었다. 나도 밖에 남은 엄마를필사적으로 도와 안으로 끌어들였다. 자리를 잡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기차 속은 너무도 난장판이었다. 유리창도 성한 데가 없었지만 의자도망가지고 뒤틀린 건 연일 이런 혼잡을 견디었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의자를 싼 우단 헝겊을 여기저기 예리한 면도칼로 도려 내어 더러운내용물이 꾸역꾸역 꿰져 나오고 엉성한 골조까지 모이는 건 도무지 이해가되지 않았다. 그 혼란 중에도 이것이 해방이냐고 비분강개하는 사람도있었다.
기차는 아무데서나 쉬면서 아주 오래 걸려서 서울에 도착했다. 신촌 좀지나 서울역에 도착하기 전에 남들이 다 내리기에 우리도 내렸다.
서울역에서 내리면 혹시 표를 안 산 게 문제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더 미리 내리지 않았나 싶다.
한강로의 적산가옥에 든 작은 숙부네에다 우선 짐을 풀었다. 올케언니는 다행히 많이 좋아져서 몸보신만 잘 하면 된다고 병원에서 퇴원을권유해 천안에 있는 친정에 내려가 있는 중이었다. 올케 언니를위해서라도 우리가 살 집을 결정하는 게 급했다. 숙부네는 늘 동경하던이층집이었지만 도무지 정이 붙지 않고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했다.
일본 사람들이 쓰던 물건이나 가옥은 다 국가에 귀속될 적신이니 행여 돈주고 사고 팔거나 연고권을 주장하지 말고 고스란히 버리고 가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건 신문 사설이나 군정청의 경고문을 통해 너무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거기 산다는 게 위법행위처럼 창피하고 싫었다. 오빠는더했고 그게 작은 숙부와 우리의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적산가옥은 약삭빠른 사람들이 다 차지해서 그로 인해서울의 집값이 가장 쌀 때였다. 우리는 개성 집 판 손에다 작은숙부가보태 준 돈을 합해 당시에도 서울서 가장 집값이 비싸다는 광화문 근처신문로에다 집을 샀다. 엄마가 그렇게도 소원하던 문 안 사람이 된것이었다. 지대만 좋을 뿐 아니라 새로 지은 반들반들하고도 반듯한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그때로서는 드물게 목욕탕까지 있는 집이었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집다운 집을 장만한 것은 올케 언니와의 행복한생활을 아직도 단념 못 하는 오빠의 새신랑다운 허영도 있었을 것 같다.
엄마는 열심히 신방을 꾸미고 며느리 올 날을 기다리고 나는 숙명고녀에복학을 했다. 그냥 결석했다 출석한 것처럼 아무런 문제 없이받아들여졌고 출석부에도 내 이름이 그냥 남아 있었다. 여름 방학 동안에해방이 됐기 때문에 고향이 이북인 아이들 중엔 아직 안 돌아온 아이들이많았고 그런 아이들의 자리는 계속 비원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그동안에 나에게 일어난 일의 부피와 세월의 부피를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내가 겨우 한 학기 동안 결석하고 돌아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인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안보이는 건 당연했지만 일본어를 가르치던 국어 선생님이 그냥 우리말의국어 선생님으로 눌러앉아 있는 건 잘 이해가 안 됐다. 우리가 입학할 때학제로는 중학교에 해당하는 기간을 고등학교라고 불렀는데 고등학교이학년짜리가 가갸거겨부터 배우느라 법석이었다. 선생님들한테 야단을맞아 가면서도 어려운 의사소통은 으레 일본말이 튀어나왔고 교과서 외의읽을 거리는 거의 일본의 소설류 아니면 일본말로 된 번역물이었다.
나도 신문로 집에서 처음으로 문학전집을 한 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신조사에서 나온 서른여덟 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은 내가 갖기를꿈꾸던 책이었다. 어느 날 오빠가 나를 위해 그걸 들여 놔 주었는데 물론일본 사람이 버리고 간 헌 책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헐값으로 팔거나버리고 간 착들이 일용잡화와 함께 길거리 노점에 범람할 깨였다. 아무리책이 흔해졌다고 해도 그 문학전집이 내 것이 됐다는 것은 꿈만 같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불어넣어진 생각인지 그 전집은 처음부터 끝까지모조리 독하를 해야 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상당히 부담스럽기도 했다. 쿠오 바디스나 몽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것은깨가 쏟아지게 재미가 있었지만 신곡이나 파우스트는 그런 맹목적사명감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못 읽겠는, 난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억지로 읽은 걸 결코 잘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슨 뜻인지 이해도못 하고 하여튼 읽긴 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는 안 읽었고, 누가그런 걸 좋다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알고 그럴까 열등감 반 의심반으로 받아들이니 말이다.
세계문학전집을 갖게 되고 나서 뒤미처 톨스토이 전집도 갖게 되었다.
역시 오빠가 헌 책방에서 보고 사다 주었는데 갈색표지의 장정이 하도엄숙하여 도저히 읽어 낼 것 같지 않은 인상부터 받았다. 그러나 안나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 톨스토이의 중요한 장편들은 그 후오랫동안에 걸쳐서이긴 하지만 여러 번 거듭해서 읽고 또 읽은 나에게매우 중요한 문학이 되었다.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그렇고, 어려워서 잘이해가 안 돼도 그렇고 한 번 읽은 걸 또 읽는 성질은 아닌데 그것들만이예외였던 것은 처음엔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 되면서도 뭔가 있긴 있는 것같아 또 읽다가 차츰 재미를 느끼게 되고 무엇보다도 성격 묘사의 묘미에최초로 매료당했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금 우울해진 집안분위기도 집중적으로 독서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이 되었다.
엄마와 오빠가 그렇게 정성을 다해 올케 언니를 맞을 준비를 했음에도불구하고 올케가 신문로 집에서 새색시 흉내라도 내 본 것은 한 달도 안됐다. 올케 친정에선 그때까지도 세간을 보내오지 않았다. 엄마는 약간남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드러내 놓고 그런 눈치를 보이진않았다. 불길한 것이긴 하지만 짚이는 게 있어서 꾹 참고 있었는데 그러길참 잘한 일이라고 엄마는 훗날 말하곤 했다. 올케의 친정에서는 우리보다딸의 병세를 훨씬 더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고, 잘못됐을 경우 올케의유물이 너무 많은 것도 안 좋다는 생각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올케는 다시세브란스병원에 입원을 했고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어느 날 새벽 통곡소리에 깨어났다. 병원에서는 마음대로 울지 못하다가대문간을 들어서자마자 통곡을 터뜨린 엄마와 올케의 친정어머니였다.
올케의 친정 어머니는 실컷 울 자리를 찾아 사돈집까지 따라온 것이었으니그 통곡의 처절함은 말해 무엇하랴. 나도 대강은 예상하고 있었지만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팠다. 그 나이에 어떻게 죽을 수가 있을까.
내가 몸담은 사랑이 충만한 세계가 깊이 모를 나락으로 함몰돼 가는 듯한공포를 맛보았다.
그들이 결혼한 지 일 연도 안된 해방된 지 이듬해 봄이었다. 그 동안오빠와 엄마는 눈물겹도록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오빠의건강을 생각해서 엄마한테 어쩌자고 두 내외를 떼어 놓지 않고 모자가같이 엎드러져 그 유난을 떠느냐고 염려도 하고 비난도 하는 소리가높았다. 그러면 엄마는 애저녁에 못 떼어 놓고 이왕 우리 식구 된 거, 내자식에게 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해 주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올케도눈을 감기 전에 그걸 엄마에게 깊이깊이 감사하고 떠났다고 한다.
엄마의 그런 면은 나도 전혀 예상 못 한 새로운 면이었고, 엄마를존경스럽고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한편 꽤 철난 후까지도 폐결핵을 동경하고 미화하는 버릇을 못 버린 것은올케가 그런 유별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고 폐결핵을앓는 남자와 열렬한 사랑을 해 보고 시은 게 내가 사춘기에 꿈꾼 사랑의예감이었다.


10. 암중모색
사춘기에 오빠의 열렬하고도 헌신적인 연애를 지켜봤음에도 불구하고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사랑을 하는것일까? 하는 문제는 나에게 꽉 잠긴 문저쪽 암흑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성문제에 있어서 그러했다. 그건 일찍이 홀로 된 엄마 밑에서 자라 엄마아빠가 서로 금실 좋게 지내고 동생도 태어나고 하는 걸 일상적으로경험할 기회가 없었을 뿐 아니라, 내 앞에서 누가 조금이라도 성적인암시가 들어 있는 소리를 하면 어린애 앞에서 무슨 소리냐고 질색을 하는엄마의 유난스러운 순결교육 때문이기도 했다.
그 무렵까지도 한가족이나 다름없이 좋은 일 궂은 일은 물론 물질까지도공유해 온 두 숙부들 또한 우리 앞에서 숙모들을 대하는 태도는데면데면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숙부들의 그런 태도가 홀로 된 형수를휘한 당시의 법도에 맞는 배려였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된 후였지만아기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성관계가 있어야 된다는 걸 안 건 꽤일찍부터였다고 생각한다. 기억할 만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고 어려서흔히 본 짐승의 암수 관계와 조숙한 시골동무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아진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태어났다는 건인정하기가 싫었고 숙부들에게도 그런 생활이 있다는 건 상상도 하기가싫었다.
나는 요새도 가끔 내가 유난히 운동신경이 둔하고 노래를 못 하는 것을,엄마가 체조나 창가를 못 하는 걸 되레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적이 있다. 그와 비슷한 핑계가 될 지도 모르지만, 사춘기에 성적인상상이나 심지어는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알고 있다는 것조차 속으로몹시 부끄러워하고 자책한 것은 엄마가 나를 성적으로는 마냥 어린애이길바랐기 대문이 아니가 싶다.
큰숙부가 소실을 두었다는 소문은 해방이 되고 나서 드디어 표면화됐다.
숙부보다 열 살이나 연상의 과부라고 했다. 면소재지에서 박적골까지 오는사이에 있는 외딴 마을에서 딸 하나를 데리고 혼자 된 과부와 숙부가가까워진 까닭은 이해가 되었다. 일제 시대의 시골 면의 총무부장이나노무부장은 혼자 사는 과부가 제법 의지할 만한 벼슬이어서 그쪽에서 먼저유혹을 했으리라고 다들 생각했고, 숙모는 한술 더 떠서 그 과부를측은하게 여기는 도량까지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간단하지가 않았다.
해방이 되자 숙부는 당연히 면사무소에 더 이상 나갈 수가 없는실직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농사를 짓기에는 마을 공동체로부터입은 피해 의식이 너무도 컸다. 마을 사람들한테 친일파로 몰려 대대로내려오는 집이 그 지경을 당한 후에도 숙모는 금방 그 사람들에게 집수리를 맡길 만큼 이웃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숙부는 끝내 박적골에 정을못 붙이고 겉돌았다. 그렇다고 빤한 시골에서 그 과부한테 가 있는 것도아니었다. 벌어놓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겠다 그나마 세도라고 부리던면서기 자리도 쫓겨났겠다 과부가 더 이상 숙부를 가까이할 까닭은 없는것처럼 보였다. 숙모도 숙부가 직업이 없어진 건 안됐지만 소실이 저절로떨어져 나가게 된 것 때문에 속으로야 어찌 고소하게 여기는 마음이없었겠는가.
그러나 땅도 좀 있고 돈도 쏠쏠하게 굴리던 과부는 소문이 시끄러운시골을 떠나 개성에다 조그마한 집을 장만하고 숙부의 공공연한 소실이되었다. 남자의 덕을 보기 위해 소실이 됐다고 생각 할 때는 한껏너그럽던 사람들이 남자를 부양하면서까지 소실이 된 데 대해서는경악했고 분개하고 욕하느라 집안이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시끄러워졌다. 그 여자에게 쏟아지는 집안내의 온갖 원색적인 욕설과망측한 억측의 소리를 얻어들으며, 나도 은밀히 불어나는 나의 불결한상상력에 소스라치곤 했다.
그러나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과감히 자기 정체를 드러낸 그 여자는시일이 지나면서 점점 더 노골적으로 소실로서의 지위를 확보해 갔다.
숙부가 그 집을 떠나지 않으니 누구나 숙부를 만나려면 그 집까지 가야했고, 그 여자는 우선 그런 까닭으로 자기 집에 들르는 사람들은대접하기를 극진하게 해서 인심은 얻기 시작했다. 시일이 좀 지나자할머니 생신 때 같은 큰일에는 박적골까지 나타나 물질적으로나육체적으로나 육례를 갖춘 며느리들의 갑절은 되게 효도를 해서 할머니마음에까지 들게 되었다. 첩며느리는 꽃방석에 앉힌다는 옛말 그르지 않은사태가 우리 집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다. 자연히 숙모와 할머니사이엔 불화의 기운이 감돌았다.
박적골 집이 이렇게 피폐해진 후에도 나는 방학 때마다 귀향을 거르지않았다. 해방 후 미군이 들어왔다 소련군이 들어왔다 한동안업치락뒤치락하던 개성은 결국 삼팔선 이남으로 확정이 되어 왕래가자유스러웠다. 할머니가 생존해 계시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방학 동안을 쭉서울서 보낸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엄마가 따라 다니는 것은 면할수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방학이 가까워 질 때마다 가슴이 뛰놀던 버릇은여전했다. 그건 나의 심신의 중요한 리듬이었다. 박적골이야말로 내 생기의젖줄이었다.
그러나 어느 틈에 고역스러운 의무가 한 새로 생겼는데 그건 개성역에내리면 우선 숙부네 소실 집을 거쳐서 박적골까지 가야 되는 것이었다.
할머니도 그러길 바라셨고 그 여자에 대해선 입에 올리는 것조차 자존심상해하는 엄마조차 거기를 거쳐야만 숙부를 뵐 수 있으니까 별수없지않느냐는 식이었다. 심지어는 숙모까지도 투기와 의무를 엄연히 구별해서자기 자식들도 가끔 그리로 보내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게 하는모양이었다.
경우 바른 할머니를 자기 편으로 만든 숙부의 소실이니만치 시집식구에게 잘 하는게 유난스러웠다. 내가 가도 버선발로 뛰어나와 동지섣달꽃 본듯이 호들갑스럽게 반겼고, 뛰어난 음식솜씨로 아첨했다. 그럴수록나는 요사스러운 데라곤 손톱만큼도 없이 다만 진국스럽기한 숙모에 대한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여자에겐 쌀쌀하게 굴어야 한다고 마음을도사려먹곤 했다.
그러나 한편 그 여자가 싫으면서도 야릇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가없었다. 그여자하고 같이 있을 때 숙부는 내가 아는 근엄하기만 한숙부하고 전혀 달라 보였다. 그여자 앞에서 숙부는 딴 사람처럼흐늑흐늑해 보였고 숙부는 자신이 그꼴이 된걸 부끄러워하기보다는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제주로 숙부를 저렇게 흐늑흐늑하게길들였을까? 금실 좋은 부부의 모습을 모르고 자란 나에게 숙부와그여자와의 깨가 쏟아지는 장면은 불길하고도 문란한 상상력을 자극했고,그 집을 벗어난 후에도 뭔가 크게 오염된것처럼 께적지근한 자기협오감에사로잡히곤 했다.
삼학년 때던가 사학년 때였다. 기차가 장시간 여연착을 했다. 해방되고나서 열차 사정이 엉망이 된게 몇 년 후까지도 바로잡아지지 않은 채였다.
연발착은 다반사였고 겨울에도 난방은커녕 유리창은 다 깨지고 껍데기를벗겨가 골조만 남은 의자에 앉아서 덜덜 떨면서 여행하기 일쑤였다.
그날의 연착은 좀 심한 편이어서 어둑어둑해서 내렸으니 혼자서 시골길이십리 길을 가는 건 무리였다. 그덜 때는 개성 시내에 자고 갈 만한 집이있다는게 여간 든든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숙부가 으레 나를박적골까지 데려다 주려니 하면서 그 여자네로 갔다. 물론 저녁을 잘대접받고 나서였는데 숙부는 나를 데려다 줄 생각도 안했고, 그 여자도으레 내가 자고 가려니 했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자기 딸이 혼자 자는 뒷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득부득나를 안방에 재우려고 했다. 그렇게 하는게 나에 대한 극상의 대우라고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그여자의 딸하고 같이 자는것도 내키지 않았지만그 여자하고 숙부하고 자는 방에서 같이 잠자는 데에는 거의 공포감을느꼈다. 그건 어쩌면 강렬한 호기심일 수도 있었다. 나는 내 호기심이수치스러웠기 때문에 되레 그 방에서 같이 자는 걸 아무렇지도 않아하는것처럼 꾸몄다.
내 자리를 맨 아랫목에 깔고, 조금 떨어져서 숙부와 그여자가 한자리에들었다. 불을 끈 후에도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깊은 잠을 위장했다.
그러나 내 촉각은 낱낱이 곤드서고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남자와 여자가저지르는 어떤 일을 보게 되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알게됨으로써 내가 더럽혀질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알고 싶었다. 그러나 두사람은 시시덕대며 얘기만 했다. 숙부는 주로 듣기만 하는 편이었다.
시골서 행세께나 하는 집이 망한 내력이 그날의 화제였다. 딴 걸기다리는 마음 때문에 지루하게 듣다가 나도 서서히 그 이야기에 빨려들게되었다. 그 집엔 인물이빼어나고 성미가 차갑고 도도하기로 소문난청상과부 며느리가 있었는데, 그 며느리가 머슴하고 정을 통해 애를 낳고,결국은 그 일이 그집안의 패가망신을 가져온 얘기였다. 아주 복잡한줄거리를 그 여자는 소상하고도 흥미진진하게 얘기했다. 그 여자는 맨나중에 "그 얼음장 같은 여자가 어드렇게 그 두엄더미만도 못한무지랭이하고 붙어먹었을까?"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오랫동안 킬킬댔다.
그여자는 그 대목을 어찌나 육감적으로 말했던지 나는 징그러워서진저리가 쳐졌다.
그날 밤 그 여자와 숙부 사이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때로는사춘기 소녀의 상상력이 무르익는 중년의 실생활보다 더 외설스러울 수도있다. 나는 숙부와 그 여자가 먼저 잠든 후까지도 잠을 못이루고얼음장같은 미인과 두엄더미만도 못한 무지랭이를 느닷없이 한 운명으로떠다민 이상한 힘에 대해 전율했다. 어쩌면 그건 아직도 깜깜하기만 한미지의 세계에서 최초로 감지한 불가사의한 정욕의 눈이 아니었을까. 나는그날 밤 엿들은 이야기를 오랫동안 잊지 못했고 그후 몇십 년 후 내 소설중 가장 긴 장편 미망을 쓰는 데 중요한 모티브로 삼았다.
그 시기는 내적으로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나에게 매우 힘겨운 시기였다.
가정 환경도 그렇고 시국도 그랬다.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도처에범람했지만 별안간 그 눈부신 걸 바로 보기엔 우리가 눈을 뜬지 불과 얼마안 돼 있었다.
학교에 자치회라는 게 생겼다. 어떻게 해서 그런 분위기가 조성됐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툭하면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학생회를 했다.
바깥 세상이 좌우익의 대립의 날로 치열해지면서 아무개 절대지지,누구누구 절대반대란는 정치적 구호와 시위가 매일같이 교차되는 데 발을맞춰 우리는 어떤 선생님은 친일파이나까 내쫓아야 한다든가 어떤선생님은 사임하면 안된다든가 하는 걸 학생회에서 결정하려 들었다.
우리는 그때 자유와 민주주의라는걸 학생에게 무한한 권리가 있는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수업도 거부하고 강당에 전교생이 모여서 찬반양쪽으로 갈라져 열띤 토론을 벌이는 날이 많았다.
해방 후 대부분의 학교 재단이 이북에 있어서 여러 가지 재정적 곤란을겪고 있는 학교 사정은 조금도 고려 안 하고 철없이혼란만 조성한셈이지만 그 나름으로 우리에겐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다수결로무엇을 결정하기 전에 격력한 토론을 벌이곤 했는데 그때 논리적으로  말잘 하는 상급생 언니가 돋보였고, 같은 학년 중에도 자기 의견으로 남의생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애도 나타났다.
새로운 교장 선생님이 오시게 되었을때도 우리는 학생회를 했고, 어떻게그렇게 되었는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새 교장 선생님을 거부하고 전 교장선생님을  지지해야 된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러나 그건우리의 권한 밖의 인사 문제였으니 새 교장 선생님은 예정대로 취임을했다. 우리는 취임식을 거행하는 강당에 가지 않고 교실에서 버티는 걸로끝까지 반항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근래의 대학생 시위와 비슷한 짓을 하지 않았나 싶다.
새 교장 선생님은 노련하게 혼미한 학교 분위기를 일긴 시켰고 휼륭한선생님을 여러 분 모셔와 일제시대와는 전혀 다른 황홀한 수업을 받을기회를 우리에게 주어 우리의 주장이 옳지 않았다는 걸 충분하게입증했다. 학내의 혼란기는 이렇게 비교적 짧게 끝났다. 그동안 내가학생회에서 발언 한번 제대로 한 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수의편에서 박수 치고 손들고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시기가 내 성장기의 매듭처럼 회상되는 것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내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기 사작한 시토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상그때 우리가 날 뛴것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닌, 학교 재단문제일 수도,미 군정이 밀가루나 드롭스처럼 흥청망청 쏟아부은 자유와 민주주의를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앓는 배탈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혼란을 좌익과 우익, 진보와 반동의 대립이라는이념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 들었고, 내가 박수치고 역성들어 줘야할 편은 좌익이라는 생각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건 말끝마다 절재지지아니면 결사반대가 붙은 당신의 말버릇에서도 짐작할수 있듯이 너나 없이어느 한쪽 이념에 붙지 않으면 불안한 해방 후의 사회상 탓도 있었지만 그중에도 하필 좌익었다는 건 오빠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그렇다고 오빠가 나에게 의식화교육을 시킨 건 아니다. 오빠는어려서부터 머리가 좋은 걸로 소문이 나 있었고 용모가 준수하고 말수가적고 우애가 깊었다. 게다가 장손이었으니까 자연히 집안내에서떠받들어졌다. 이런 오빠는 나에게 큰 백이었을 뿐 아니라 무조건추종하고 싶은 우상이었다. 여북해야 오빠의 첫사랑이 결핵을 앓았으므로나도 결핵환자와 사랑을 하여야겠다고 생각했겠는가.
올케가 죽은 후 오빠는 더욱 말수가 적고 우울한 성격으로 변했다. 나는그런 것까지 멋있게 보였고, 숙부들을 위시해 속물들만 모여 있는 것 같은우리 집안 내에서 유일하게 정신적인 높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빠의 높은 생각을 나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은 마음과 어떤 것이든이해하고 흉내내고 싶은 마음이 감지한 게 오빠의 사사의 빛깔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빠가 사들인 책이 맨 그런 책이었으므로 그 중 쉬운것만 빼다 읽어도 감화 받기엔 충분했다. 얄팍한 팜플랫 종류는 쉬울 뿐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선동시키는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생각나는걸로는 프랑스에서 공산주의 운동가가 된 어떤부두노농자 이야기가 있다. 그는 부두에서 하역에 종사하는 평범한노동자였는데 하루는 밀가루를 육지에다 내리는 게 아니라 바다에갖다버리는 일을 하게 된다. 임금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라 해도 굶주림에허덕이는 빈민들이 무수한데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수없어 고민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 밀값이하락하는 걸 우려한 자본자들이 그런 방법으로 곡물의 양을 감소시켜 높은곡물가를 유지하려는 계획임을 알게 된다. 자본주의란 바로 빈민들이야굶건 말건 이윤추구만이 최상목표라는 걸 깨달은 그 부두 노동자는그때부터 자본가에게 치를 떨며 유능한 공산혁명가로 바뀐다는 이야기가마치 이세상에 대한 새로운 개안처럼 찬란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렇게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가 있을 수가 있을까? 나는 내가그걸 깨우친 데 기쁨을 느꼈고 그걸로 세상만사를 재는 잣대를 삼으려고들었다. 그러나 오빠가 그런 선동적인 팜플렛만 읽는 건 아닐 터였다.
오빠는 식구들이 상처한 아픔을 다치지않게 하려고 가만히 내 버려 두는사이에 점점 더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갔다. 낯선 사람들을 한 방씩불러들여 수군수군 모임을 갖는가 하면 어디론지 우르르 몰려가기도 했다.
어떤때는 이승만 박사나 당시의 수도청장, 치안국장 등을 격렬하게원색적으로 비난하는 표어를 여럿이 모여 앉아 쓰다가 밤에 몰래 전봇대나남의 집 담벼락에 붙이는 짓을 하기도 했다. 아침에 학교 가다가 그런불온삐라 중 오빠의 필적을 발견하고는 역시 오빠의 사상은 내 생각과틀림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기쁜 건 아니었다. 나는 오빠 정도면 당연히거물급이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욕지거리나 써 가지고 밤에몰래 풀칠을 하고 다녔을 오빠를 상상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 있어 오빠는 꽤 거물급이 체포된 데 이어피해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엄마가 울고불고 작은숙부한테 구원을 청했고,작은숙부가 어디다 어떻게 청을 넣었는지 집에 들어와 자도 된다는연락이왔다. 그때부터 엄마와 오빠의 끈질긴 갈등이 시작되었다.  엄마는원래 자식들이 좋아하는 거나 옳다고 여기는 건 무조건 따라 하는분이었다. 내가 집에서 무심히 학교 얘기를 하다가 어떤 선생님이나친구를 좋게 말하면 엄마도 덩달아서 좋아해서 이름까지 기억해 주었고,반대로 누구를 욕하거나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면 그러는 게 아니라고타이르기는커녕 나보다 더 열렬하게 미워했다. 그런 엄마이고 보니 오빠가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동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빨갱이 짓에 한해서는 집안 망치고 제몸 망친다는 일관된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가 이해하는 빨갱이 짓의 초보는 이승만박사를 반대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거기 까지는 이해하고 동조할아량이 있다는 것을 늘 강조했다.
"나도 이승만 박사는 싫다. 그렇지만 일생을 독립운동만 한 어른이니한번 대통령 해먹게 눈감아 줘야지 어떡하니? 빨갱이들은 어쩌면 그렇게의리가 없냐? 하긴 에미 에비도 몰라보는 어머니동무, 아버지동무한다니까." 이런식의 설득과 한탄에 오빠는 다만 쓸쓸하게 웃을 뿐 쓰다달다 말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엄마 입에서 에미를 동무라고 불러도좋으니 말이나 좀 시원히 했으면 좋겠다는 한탄이 다 나왔을까.
그때도 빨갱이 짓 하다 붙들려 들어가면 모진 고문을 당하고 병신되기도 십상이라는 게 거의 상식처럼 돼있었다. 엄마는 자나깨나 손찌검한 번 안하고 기른 아들이 감옥소에 들어가고 모진 고문으로 반죽음을당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수상한 친구들이 드나들면 수군거리는 게 질색이었고 모든 잘못을 그 친구들 탓으로 돌리면서 그들하고 오빠를 떼어놓기만 하면 오빠가 정신을 차리려리 믿는 것 같았다.
한번은 형사가 신문로 집에 그런 친구 중의 한 사람을 찾아온 사건을기화로 엄마는 갑자기 그 집을 팔기로 결심을 했다. 오빠가 생활을 돌보지않아 숙부의 도움으로 살림을 꾸릴때라 집을 줄여 돈암동으로 이사를했다. 마침 돈암동 전찻길 가에 살림집이 딸린 큰 가게터가 하나 나왔는데숙부가 그걸 사고 싶어하던 중이었다. 이것 저것 브로커 노릇을 하던숙부가 세상이 조금씩 안정되는 것과 발을 맞추어 안전한 장사를 해보려는 것 같았다.
엄만는 집을 줄이고 남은 돈을 자청해서 거기다 보태고 조금이라도떳떳하게 생활비를 받으려고 했다. 누울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고 오빠가국학대학 야간부에입학을 했다. 숙부도 엄마도 오빠를 대학 공부 못 시킨걸 안타까워하던 터라 주간의 좀더 나은 대학에 가기를 권했다. 어느정도믿어도 될 얘긴지 모르지만 숙부는 전통깊은 사립대학에 돈을 쓰고 자리를다 마련해 놓은 것처럼 서둘렀다. 한창 대학 가는 일이 유행처럼번질때였고 우리 학교에서도 졸업이 아직 멀었는데 대학으로 가는 아이도심심찮게 생겨났으니 그 정도는 가능한 얘기였을 것이다. 이렇듯 숙부와엄마가 오빠의 대학 진학을 대환영했던 것은 학벌보다도 좌익운동으로부터발을 뺄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빠의 속셈은 어른들의 그런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해방과 함께 당연히 고조된 우리 것을 알아야겠다는 분위기에 힘입어 교양정도를 목적으로 그 학교를 선택한 것이지 좌익운동에서 발을 뺄 생각이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였다. 하긴 대학의 좌익조직이 더 막강할때였으니까 엄마가 오빠의 대학 진학에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것은 뭘너무 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는 돈암동 집에서도 안정을 못하고 6.25가 날때까지 거의 일년에 한번꼴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신문로 집에서처럼 우리집이 불온한모의의 아지트가 됐다고 판단되는 즉시 엄마는 치를 떨며 발작적으로이사를 결심했고, 어떤 때는 집에 있는 세간이를 그냥 놔 둔채 야반도주를해서 숙부네와 합쳐서 산적도 있다. 아마 오빠가 그들이 좋아하는투쟁경력이라는 걸 정직하게 쓴다면 엄마와의 투쟁경력이 가장 찬란할것이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나는 어쩔수 없이 오빠가 하는 일을 지지하고성원하는 마음과 엄마를 딱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같이 가질 수밖에없었다. 학제가 바뀌어 사년제 여자 고등학교가 육년제 여자중학교가되었다. 중학교를 다니다는게 지루했던지 재학 중에 시집을 가는 애도생기고 앞서 말했듯이 대학으로 빠져나가는 애도 생겼다. 과도기여서그랬는지 입학할 때의 약속이 사년제였기 때문인지 수단껏 대학으로 가면그런대로 학력을 인정해 주었다. 학년 말도 해방되던 달을 기준삼고 구미선진국의 본을 따 8월달로 변경이 된 지 오래였다.
우리 학교에도 민청조직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삼학년 때였다. 내가어떻게 돼서 그 조직의 눈에 들고 포섭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별로친하지 않은 아이로부터 독서회에 나와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나는즉각 그 뜻을 알아차렸고 약간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주저하지 않고응낙했다. 모임이 있는 아지트를 찾아가는 방법 등이 뭔가 비빌을 갖고싶은 욕망을 충족시켜주었지만 거기서 돌아가며 읽는 책이나 토론하는주제는 나를 최초로 사로잡은 팜플렛 지식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실망이 컷지만 나도 드디어 오빠의 동지가 됐다는 만족감으로 뿌듯했다.
메이 데이가 돌아왔다. 메이 데이 행사를 좌익에선 남산에서, 우익에선서울 운동장에서 따로따로 편갈라 하는데, 우리는 학교를 결석하고남산에서 하는 메이 데이 행사에 꼭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학교를결석하고까지 남산에 갈것인가는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엄마 때문에도그랬지만 나는 좌익이고 우익이고를 막론하고 집회나 시위, 구호 외치는것 따위가 싫었다. 그러나 독서회가 있을때마다 가장 가혹한 비판의대상이 되는게 이런 개인주의적 경향에 대해서였기 때문에 나도 언제가는극복해야 할 내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학교를 빼먹고 남산으로 갔다. 노동자와 학생의 인력을최대한으로 동원한 굉장한 집회였다. 온종일 선창자를 따라 격렬한 구호를외쳤고 인민가요를 한도 없이 따라 불렀다. 저녁에 파김치가 돼서 귀가한나는 엄마의 추궁을 당해 낼수가 없어서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엄마의낙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계집애가 유치장 들어가면 어떤 일을당할지 알기나 하느냐고 어디서 얻어들은 소리인지 온갖 끔찍한 소리를다해서 나에게 잔뜩 겁을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학교 가는 걸 한사코말렸다. 학교에다 전화를 걸어 줄 테니 어제부터 아팠던 걸로 하고 며칠결석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겁한 일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엄마의애원을 뿌리치지 못했다.
결석을 하고 뒤로 알아본 결과 메이 데이 날 결석을 한 아이는 일제히교무실로 불려가 남산에 갔나 안갔나 조사를 받고, 갔다온 것이 알려지면굉장한 꾸지람을 듣고 학부형까지 불려가 용서를 빌어야 했던 모양이다.
딴 학교에서는 경찰에 넘기기도 했는데 다행이 우리학교에서는 학내문제로 온건하게 처리한 것이 그정도였다. 아무도 내가 간 것을고해바치지 않아 사나흘 후에 학교에 가니 아무런 문책도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일이 두고두고 부끄러웠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때얼마나 비겁하게 보였을까, 생각만해도 자신이 협오스러웠다. 메이 데이건에 대해선 선생님으로부터 아무런 의심도 안 받았을 뿐아니라 반친구들도 내가 그런 데 갔으려니 여기는 애가 없었다 그건 내가 평소너무도 고지식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이고 생각되어 나는 나의 철저한이중성에도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후 민청조직이 와해된 건지 나만따돌렸는지 다시는 접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정환경이 안정되지 않아서인지 학교 생활도 거의 건성으로했다. 그나이에 한창 관심 있어하고 고민이나 기쁨의 원인이 되는 교우관계에도시들해서 그 시절 누구하고 어떻게 친했었는지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책읽기가 유일한 위안이었고 이념 서적에서 차츰 해방 후에 나온 우리문학으로 취항을 옮겨갔지만 내가 사보는게 아니고 오빠의 서가에서뽑다가 보는 것이기 때문에 오빠의 영향력을 못 벗어난 것었다. 오빠는문예지도 좌익계 문학단체인 문학가동맹에서 나오는 [문학]만 보았고사들이는 딴 책도 선호하는 기준이 이념편향적이었다.
그 무렵 얻어 본 신간 중 김동석이란 평론가의 수필집이었던지평론집이었던지 분명치 않은 산문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문장이 어찌나명쾌하던지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일본말 소설에 먼저 맛들인 감각으로아직도 우리말로 된 책 읽기가 답답할때였다. 그중에서도 춘향전 해설을둘러싸고 누구하고 논쟁을 벌인 대목은 매우 흥미가 있었고 공감이되었다. 춘향전이 널리 사랑받는 생명력은 춘향의 절개에 있다는 주장을반박하고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두하기 전 변학도의 잔치 자리에서쓴시"금준 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요는 만성고라."야말로 춘향전의참생명이라는 논조가 그럴듯했다.
그러나 역시 오빠의 책이니만치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쓰여진
평론집이었던 듯하다. 김동석이란 이름은 6.25동란 이후 지워진채 다시는만나지 못했다. 근래에 해빙기를 맞아 지워진 이름들과 그들이 남긴작품이 거의 복원되는 걸 보고 그의 글도 있나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아직못 만난 걸 보면 그때 내가 생각한 것만큼 대단한 평론가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6.25전까지 돈암동에서만 세 번 이사를 다녔는데 아마 삼선교근처에 살 때가 오빠가 가장 깊숙이 좌익운동에 투신했을 때가 아닌가싶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뿐이다. 시대적으로도 남로당이 가장 활발하게지하운동을 조종할 때였고 오빠의 태도도 그때는 도무지 우리 식구 같지가않을 정도로 정신이 완전히 딴 데 사로 잡혀 있었다. 밤에 누가 찾아오면도망갈 길까지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집엔 분명 부엌에 뒷문이 있었는데 뒷문 밖은 옆집과의 사잇담이 있는좁은 골목이었다. 겨우 사람 하나 비비고 나갈 만한 골목은 그 끝이 길로면한 높은 벽돌담이었고, 반대로 가면 딴집 뒤꼍을 여러번 통과해, 정당한길로 가면 한참 걸릴 우리 집과는 반대쪽 동네에 다다르게 돼 있었다.
오빠가 도망을 간다면 그길을 택할게 뻔해 가끔 엄마는 여러 집의 뒤꼍이연결된 그 어두운 미로에 혹시 장애물은 없나 살펴보곤 했다. 그리고"이집에 이길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누." 하면서 대견해 했다. 오빠를위해선 어쩌면 상당히 유리한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년도 안돼서별안간 뜬 것은 다행이랄까 오빠 때문만이 아니였다.
그집은 방이 우리 식구 수효보다 많아 넷이나 되었다. 돈도 아쉽고 해서문간방을 세를 주면서 엄마는 오빠 때문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그러나고르고 골라 세를 준 사람이 지내고 보니 오빠를 닮은 사람이었다. 별로살기가 어려워 보이지도 않으면서 바깥 남자는 직업이 없었고 시일이지나자 그 방에서 수상한 사람들이 모여 모의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즉각 엄마는 그집도 빨갱이 집이라는걸 알아차렸다. 그 무렵 오빠가 우리집을 아지트로 제공하는 일은 없어졌는데 교대로 문간방이 아지트가되었으니 엄마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오빠하고는 전혀 관계 없는일이었지만 엄마는 집터 탓까지 하면서 한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동병상련 같은 마음도 있어서 내보낼 생각은 안 한 것 같다.
엄마는 그 집 걱정까지 떠맡아서 불안해 했다. 그리고 얼마안 있다 경찰이우리집을 에워싸고 그 남자를 잡아갔다. 그때 놀란 엄마는 마치 시골서염병이 돌 때, 그병으로 온 식구가 몰사한 집을 마을 사람들이 태워없애듯이 발작적으로 우리 집을 버리고 숙부네로 들어갔다. 집이팔릴때까지 그 집엔 그 남자의 식구들이 남아 있기로 했다. 그 남자에겐아내와 남매가 딸려 있었다.

11 그 전날 밤의 평화돈암교 가까운 전찻길 가에 가게터가 달린 숙부네는 안채로 넓어서 양쪽집을 합쳐 봐야 다섯 명에 불과한 식구가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나는 독방까지 쓸 수가 있었다. 거기사는 동안 오빠의 혼담이 무르익었다.
오빠를 지하운동에서 손떼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그전부터도집안내에선 엄마가 아들의 재혼을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이 많았었다.
엄마라고 왜 그런 생각이 없었을까만 누구보다도 아들에 대해서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안 먹혀들어갈 일은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선보는 것조차 한번도 말을 안 들어 주던 오빠가 연줄연줄로 세겹의사돈쯤 되는 규수를 친척 집에서 우연히 본 후, 그 색시라면 어떻겠냐고누가 한번 지나가는 말삼아 물어 본걸 솔깃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오빠가 나더러 한번 봐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선을 보이고 있다는 눈치를보이지 말라는 어려운 부탁이어서 규수가 들고나는 시간에 그집 근처에잠복해 있다가 얼핏 볼 수 가 있었다. 참 구차스러운 방법이었지만 나는오빠가 나한테 먼저보라고 한 게 어쩌나 기쁘던지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했다. 예쁘진 않았지만 지적인 인상이었고 전체적으로 여자답다기보다는늠름해 보였다. 나는 내가 본 인상을 그대로 말했고 오빠는 여간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삼선교 집에 남아 있던 문간방 식구들도 시골의시가로 내려가서 집을 비워 놓으니까 팔리는 게 더디다고 근심들을 했다.
그래도 그 집이 팔리고 새로 돈암동 종점 쪽으로 이사할 동안이 오빠가 그여자하고 충분히 교제할 수 있는 기간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숙부네를나와 이사하면서 새 식구를 맞아들였다.
중학교 오학년이 되면서 반을 문과, 이과, 가사과로 나누었다. 입학할때도 세반을 뽑았기 때문에 각각 한 반씩이었다.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생각해 보지 않고 문과를 택했다. 습관적인 독서 버릇 때문에 문과를 가장편하게 여겼을 뿐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방면에 소질이 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예전 학제같으면 졸업하고 전문학교 갈 때였으니까 웬만큼은 싹수가 보일 때였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나는 되레 문학소녀적인 기질이 두드러지는 애를보면 나는 절대로 될 수 없을 것 갈은 이질감을 느꼈다.
문과 담임은 새로 부임해 온 박노갑 선생님이 되었는데 소설가라고했다. 소설은 많이 읽었지만 소설가의 실물을 보는건 처음이었다. 마침그때 우리 집에서 구독하고 있는 일간신문에 그분의 소설이 연재되고있어서 정말 소설가는 소설가로구나 싶어 약간 흥분까지 되었다. 오빠의서가를 뒤져 문학가동맹 기관지인 문학에도 그분 단편이 실린 걸 보고그분의 빛깔을 알아 버린 것 같은 친말감과 연민까지 느낀 것도 유별난오빠를 둔 덕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입시를 위한 준비교육은 전혀없어서 문과에선 꽤 여러 시간을 문학이니 창작이니 하는 시간에 할애하고있었다. 그분이 국어뿐 아니라 그런 시간까지 담당을 했다.
그 무렵에 그분의 40년이라는 장편도 출간이 되었다. 가능한 한 그런것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지만, 그분의 작품으로부터 영향받은 바는 그리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참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읽는 데불과했다. 그러나 창작시간의 그분의 문장지도는 매우 엄격했고 나도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주었다. 그분이 가장싫어하는 것은 '아아!'니'오오!'니 하는 투의 감탄사가 많이 들어가는 감상과잉의 문장이었다. 그걸 어찌나 싫어하는지 그분이 그런 글을 야단칠때는 그분 살갗에 닭살이 돋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옆에서 느낄 정도였다.
당연히 남의 느낌이나 표현을 빌려다 써먹은 미사여구도 질색을 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센티한 미사여구를 적절하게 구사하면 다들 그걸문학에 소질이 있다고 말했고, 그런 재간이 있는 애를 문학소녀라고 불러왔기 때문에 선생의 그런 문장 지도법은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문학소녀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할 수가 있었고, 나도소질이 있을 것 같은 자기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처음으로 좋아하는선생님을 갖게 되었다. 그분은 눈이 맑고 크고 엄격한 인상이었지만웃으면 금방 그 엄격함이 허물어지면서 어린애 같은 표정이 되었다.
겨울엔 주로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좋은 감이 아니라 옥양목에 검정물감을 들인 검소한 것이었다. 한문도 가르쳤는데 흥에 겨워 한시를낭랑한 목소리로 읊을 적에는 그 검정 두루마기가 참 잘 어울렸다.
문과에는 문학이나 예능 방면으로 가고 싶어하는 애들 말고도 공부는대강하고 놀고 싶어하는 애도 많이 모여서 분위기가 참 자유스럽고재미있었다. 책상의 배치를 가운데는 둘씩 짝을 지어 앉히고 양쪽창가에는 짝 없이 외줄로 앉혔는데 나는 운동장 쪽 창가에 짝 없이 앉게되었다. 자연히 앞뒤로 친하게 되었는데 훗날 나보다 훨씰 먼저 등단해문명을 날린 한말숙, 서울음대 교수가 된 이경숙, 나, 그러고 소설도썼지만 번역을 더 많이 한 김종숙이 앞뒤로 나란히 앉아서 죽이 잘 맞아수업시간에 못된 장난도 많이 했다.
누가 하나 읽을 만한 소설책을 가져오면 수업시간에도 교과서는건성으로 펴 놓고 그것만 읽다가 선생님이 무얼 시키면 딴청을 해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때그때 떠오른 기발한 생각을 쪽지에 적어돌리고 회답을 받는 데 시간 가는 줄 모르기도 했다. 한 말숙이가 자기집에 있는 아크타카와 전집을 한 권 한 권 빼와 돌려 읽으며 굉장히흥분을 했었는데 뭘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는 조금도 생각나지 않는다.
김종숙이는 그때 자기 집이 종로서관을 했다. 지금의 종로서적의 전신이바로 그 애네 집 거였다. 걔한테서 그 무렵의 순수 문예지인 문예도 빌려보고 신간 서적도 빌려 보았다. 지금처럼 신간이 많이 나올 때도아니었건만 종로서관에 들를 때마다 그 많은 책이 다 그 애 거만 같아서여간 부럽지가 않았다. 또 그때마다 그 애 할아버지가 매장 한가운데서감시꾼 노릇을 하고 서 계신 게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는지, 지금돌이켜보니 훔칠 기회를 엿봤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때도종로서관 하면 서울에서 제일 큰 책방이었는데도 온 집안이 총동원이 돼서팔기도 하고 경리도 보고 감시도 하는 가족경영체제였다.
겉으로는 착실한 모범생처럼 굴면서 싫어하는 수업시간에 딴 짓 하는버릇말고 또 하나의 고양한 장기는 학생입장불가의 영화관 출입하기였다.
돈암동의 동도극장은 프로가 갈릴 때마다 놓치지 않고 가는 단골이었다.
숙부네 가게가 바로 동도극장에서 비스듬히 건너편에 있었는데 가게유리창이나 벽에다 극장 포스터를 붙이는 대가로 표를 주고 갔다. 숙부는그걸 나한테 넘겨 주기도 하고 같이 가자고 꾀기도 했다. 동도극장이단골이란 건 엄마에게도 반 친구들에게도 비밀이었지만, 따로친구들하고도 곧잘 극장출입을 했다. 어둠 속에서 교복의 흰 깃은 단박눈에 띄게 돼 있어서 날쌔게 안으로 구겨 넣고 시치미떼고 앉았다고 누가학생인걸 모를까마는 세상을 감쪽같이 속여먹은 것 같은 쾌감을 맛보곤했다.
한번은 김종숙하고 수업을 빼먹고 화신 오층에 있는 영화관엘 갔다.
선생님이 안 나오시거나 사정이 생기면 그 시간은 결과라고 예고가 되는데두 시간 내리 결과인 날이었다. 마침 보고 싶은 영화가 화신 영화관에들어와 있다고 해서 그 시간에 갔다 오자는데 둘의 마음이 일치했다.
예감이 웅성대는 신비한 어둠 속으로 은근 슬쩍 숨어들어가 흰 깃을안으로 구겨 넣고 앉았노라면 언제나 가슴이 뛰어놀게 마련이지만 수업을빼먹고 그러고 있는 맛은 더욱 진진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왜 그렇게 정전이 자주 되는지 재미있을 만하면 화면이꺼지고 사방에서 휘파람소리가 나곤 했다. 해방되고 나서 북쪽으로부터의송전이 끊기고 극도로 나빠졌던 전기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는 게 그모양이었다. 늘 당하는 일이 그날은 좀 심했다. 여북해야 극장측에서무대에다 촛불을 켜 놓고 가수를 불러다 가극 비슷한 짓을 다 시키면서관객을 달래려 들었다. 우리는 그래도 끈질기게 기다려 하여튼 영화를 한바퀴 다 보고 나서야 극장을 물러났다. 둘 다 시계도 없어 시간 가는 줄몰랐지만 설마 밖이 벌써 어두워 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서둘러 학교로 돌아갔다. 지척인데도 뛰는 가슴 때문에 헐레벌떡 당도한교실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깨끗이 청소까지 끝난 교실엔 두 사람의책가방만이 나란히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따. 엄명과 함께 우리 두 사람의이름이 적혀 있었다. 교무실로 부랴부랴 내려갔으나 선생님들도 다 퇴근한후였다. 수업시간에 영화관에 간 배짱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날 안으로담임 선생님을 못만나고 집으로 가면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그런고지식함은 김종숙도 마찬가지여서 숙직 선생님을 찾아갔다. 어떻게든지선생님댁을 알고 싶어하는 우리를 위해 숙직 선생님이 교사들의 신상 카드철을 꺼내다가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자택의 주소 뿐 아니라 약도까지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박노갑 선생님이 현저동에 산다는 걸알았다. 가슴이뭉클하면서 말할 수 없는 친애감을 느꼈다. 숙직 선생님도 현저동에 대해뭘 좀 아는지 이런 약도 가지고 찾을 수 있는 동네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약도를 보면서 벌써 대강 짐작이 갔다. 찾을 자신이 있었지만종숙이한테는 그런 내색을 안하고 그냥 가 보자고만 했다. 왠지 그 동네에대해 아는 척하기가 싫었다. 수치감 같은 것하고는 달랐다. 찾기가생각처럼 쉽지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전차가 다닐때라 영천까지는 쉽게 갔지만 집 찾는 덴 과연 오래 걸렸다. 그 동안 많이변해 있었고 밤이라 가뜩이나 복잡한 골목이 더 꼬여 보였다. 나는종숙이한테 생전 처음 와 보는 동네처럼 굴면서 혹시 그 애가 그 동네를흉볼까 봐 조마조마했다.
선생님 댁을 찾았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아직 안 들어오셨다고했다. 선생님 댁은 아주 조그만 일각대문 집이어서 대문 밖에서도 그구차한 살림형편이 다 들여다 보였다. 사모님한테 찾아온 뜻을 전하면서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 걸 느꼈다. 그날 엄마한테는늦게 온 걸 야단맞았지만 다음 날 아침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는뭘 그까짓 일로 집까지 찾아 왔었느냐고 관대하게 넘어갔다. 그러나 나는그 후 선생님과 나와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성립된 것처럼 느꼈고 그건현저동을 공유한 데서 오는 연대감이었다.
조카가 생겼다. 오빠에게 아들이 생겨난 것이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그건 대단한 경사였다. 작은숙부는 친손자가 태어난 것 이상으로 좋아서어쩔 줄을 몰라했다. 올케 언니가 복덩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첫아들을낳았다고 해서만이 아니었다. 올케 언니가 들어온 후 줄창 집안을억누르던 그 전전긍긍한 불안감이 많이 가셨는데 그건 오빠가지하운동에서 손을 떼었기 때문이 아니라 올케가 엄마처럼 법석을 떨거나극성을 부리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 했기 때문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있었다.
올케는 오빠가 하는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한편 오빠가 잊고 지내는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일깨우기를 게을리하지않았다. 밥도 안 굶어 보고 쌀 중한 걸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노동으로 밥 벌어 본 경험도 없이 어떻게 노동자를 위할 줄 알겠느냐는소리도 힘 안 들이고 툭툭 잘 했다. 언니의 화법은 특이했다. 옆에서 듣는사람 속까지 시원하게 해 주면서도 오빠의 자존심을 긁는 신랄함이 없이다만 구수했다. 오빠가 언니를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어한 것도 아마이성간의 직감으로 그런 소질을 감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때가마침 오빠에게 얼마나 충고와 위안이 필요한 시기였던가도 알 것 같았다.
오빠는 조직으로부터 멀어졌을 뿐 아니라 보도연맹까지 든 눈치였다.
그리고 구파발 지나 고양군 신도면에 있는 고양중학교 국어 선생으로취직을 했다. 취직을 하기 위해 보도연맹에 들었는지 취직하고 나서들었는지 그 전후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심리적이었든 실제적이었든간에 그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었다고 생각된다.
마침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나서 일 년을 바라볼무렵이었다. 좌익을 탄압하는 정도가 아니라 근절을 신생 독립국가의 기본방침으로 삼고 있었다. 골수 공산주의자는 삼팔선을 넘어 월북을 하거나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오빠처럼 이상주의적인 얼치기빨갱이에겐 보도연맹이라는 퇴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오빠가 회유에의해서 거기 들게 되었는지 강압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자만아무튼 집안식구하고 의논하고 결정한 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안건 오빠의 술주정을 통해서였다.
비록 취중일망정 오빠는 전에 없이 유치하고 졸렬하게 굴었다. 엉엉소리내어 울면서 마치 엄마 때문에 좌익운동에서 발을 빼고 엄마 보란듯이 보도연맹에도 가입한 것처럼 모든 것을 엄마 탓으로 돌렸다. 엄마는이렇게 온갖 주접을 다 떨다 잠든 아들을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생전안 하던 술 처먹고 우는 버릇을 왜 했을꼬"라는 말밖에 안 했다. 아들이자는 머리맡도 지나가 본 적이 없는 엄마로서는 그 정도만 해도 큰 욕을한 셈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본인보다도 엄마가 더 전향의 후유증 같은걸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후에도 엄마는 두고두고 오빠 몰래 그 일을 심란해했다. 오빠가 하는일을 그만두게 하려고 집요하게 극성을 떨 때하고는 딴판으로 문득문득후회하는 기색이랄까 미련 같은 눈치까지 보인 적도 있었다. 자식의안전을 위해 법에서 금하는 불온한 사상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식이 위험을무릅쓰고 하는 일이니만치 뭔가 위대한 일이라고 믿고 싶은, 가장 우리엄마다운 이중성이었을까? 아니면 엄마도 임의로 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때문이었을까?
하여튼 엄마의 태도는 뜻밖이었다. 나는 이런 엄마를 보고 당시의유행어를 빌려 우리 엄마야말로 수박 빨갱이였다고 버릇없이 놀려 먹곤했지만 엄마는 꽤 오래도록 남몰래 외롭게 전향의 후유증을 앓았다. 그런엄마가 내가 보기에는 오빠가 하는 일을 쌍지팡이를 들고 말릴 때보다 더지겨웠다. 모성애도 이념투쟁의 영향을 받으면 이렇게 악몽이 되고 만다.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더러운 시대였다.
오빠가 취직한 중학교가 있는 시골은 지금은 전철도 통하는 서울시내가됐지만 40년대 말의 교통사정으로 매일 통근은 무리였다. 학교 근처에서하숙을 하면서 집에는 일 주일에 한 번 자전거로 토요일 오후에 왔다가월요일 새벽에 떠났다. 그때 그 학교는 농업학교가 아니었는데도 딸린논밭이 꽤 있어서 월급날이면 현금과 함께 한 달 양식으로 충분한 쌀을주었다. 월급날이면 오빠는 쌀자루를 자랑스럽게 자전거 꽁무니에 싣고왔다. 덤으로 감자나 고구마가 딸려 있을 적도 있었다. 생활비 중에서양식값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을 때라 살림이 단박 안정되기 시작했고,생활인으로 떳떳해진 오빠는 차츰 어두은 그림자를 씻고 평범한가장으로서의 관록이 붙어 갔다.
토요일날 귀가하면 오빠는 허둥대며 목욕탕 먼저 다녀왔다. 우리가올케를 맞으면서 이사 간 집은 신안탕이라는 목욕탕 바로 뒷집이었다.
그러나 목욕탕이 가까워서라기보다는 멀리 구파발서부터 서울 장안 먼지를다 뒤집어쓰고 온몸으로 아기를 안을 수 없다는, 유별난 자식사랑 때문에그렇게 목욕을 급하게 구는 거였다. 그러고는 헐렁하고 편한 옷으로갈아입고 아기하고 놀기 시작하고, 올케 언니는 부엌에서 지글지글 고소한기름냄새를 풍기며 음식을 만들었다. 오빠는 아기에게 깊이깊이 매혹당해정신이 없었고, 올케는 이런 부자의 모습에 황홀한 눈길을 보냈다. 나는그런 세 식구의 모습에 소외감 비슷한 걸 느꼈지만 심술이 날 정도는아니었다.
나 역시 오래간만에 돌아온 우리 집안의 평화가 기분 좋았다. 마치쾌적할 정도로 데워진 물에 몸이 반쯤 잠긴 것처럼 나른하게 퍼지는 듯한기쁨을 맛보곤 했다. 엄마만이 계속해서 좀 이상했다. 가장 다행스러워해야할 엄마가 그렇지 않았다. 아직도 무슨 발작처럼 오빠가 이미 청산한 것에대한 미련을 나타낼 적이 있었다. 오빠가 타 온 쌀을 뒤주에 부으면서도어두운 얼굴로 "목구멍이 포도청이지."하면서 한숨을 쉬곤 했다. 마치오빠에게 딸린 가족의 생계 걱정만 안 시켰어도 전향을 안 했을 걸 하고아쉬워 하는 투였다. 오빠의 술주정이 가시가 되어 계속 따끔거리는 걸까,아니면 해방 후 처음으로 맛보는 가족끼리의 평화와 자립이 너무도 대견해뭔가를 막연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엄마 스스로도 그걸 느끼는 듯가끔 나한테까지 오빠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야, 말이야 바른대로 말이지, 요새야말로 느이 오래비가 공산당질 바로하는 것 아니냐? 한 달 내낸 뼛골 빠지게 뇌동해서 처자식 밥 안 굶기면그게 공산당이지 더 어떻게 공산당질을 잘 하냐 잘 하길."
그럴 때 엄마는 나한테 말하는게 아니라 오빠의 전향을 지켜보고 있는어떤 음산한 시선을 향해 변명을 하고 있는게 아니가 싶게 열성스럽고조금은 비굴하게 굴었다. 엄마가 노농을 뇌동, 노동자를 뇌동자라고 부를때의 발음은 특이했다. 엄마는 흠잡을 나위 없이 고운 표준말을 쓰는분이었는데도 오빠가 좌익운동을 하고부터 그 발음만은 그렇게 귀에거슬리게 했으니까, 그건 말투라기보다도 의도적인 거였다. 그래서남로당을 말할 때도 꼭꼭 뇌동당이라고 '뇌' 소리에다 듣기 싫게 오금을박았다.
그러나 엄마가 오빠의 사상에 기를 쓰고 간섭한 것은 단지 그게위법이기 때문이었지 공산주의나 공산당에 대해서 뭘 알아서가 아니었던듯하다. 공산주의에 대한 엄마의 단순 소박한 지식은 오히려 상당히호의적이 거였다. 엄마가 오빠보다 더 전향에 대해  떳떳지 못해 한것도그런 섣부른 호의하고 무관하지 않았고, 그래서 엄마에겐 전향을 전적으로변절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엄마는 아들이 쫓겨다니는 위법자인것도 견딜 수가 없었지만 변절자라는 것은 더욱 꺼림칙했을 것이다.
엄마가 발작적으로 이사를 다닌 것도 어떡하든 변절자는 낙인만은 찍히지않고, 그쪽 조직과의 접선을 끊게 해 보려는 엄마 나름의 약은 꾀였을 뿐범법을 두려워하는 것만큼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변절 얘기가 나오니까 생각나는 게 있다. 그로부터 사십년이 지난근래의 일이지만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의 몇 년간을 다친 다리 때문에바깥 출입을 못하고 집 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셨지만절에도 못 다니고 텔레비전하고 독서가 유일한 낙이어서 우리 집에 와계실 동안은 책이 많은걸 좋아하셨다. 내가 카톨릭에 입교하고 나서는쉽게 풀이한 성경 이야기나 신앙에 도움이 될 만한 명상집 같은 것도 즐겨읽으셨다. 읽고 나서는 참 좋더라고 칭찬도 하고 머리맡에 두고되풀이해서 읽으시는 책도 있는지라 한번은 개종을 하시는 게 어떻겠냐고여쭤 본 적이 있다. 나뿐 아니라 손자 손부가 다 카톨릭 입교한지 오래고그때마다 한번도 반대하신 적이 없는 엄마였기 때문에 나의 이런 권고는되레 때 늦은 감이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의외로 안색에 단박 불쾌한 빛을 드러내면서 나를꾸짖으셨다. 자기가 삼십에 과부가 됐을망정 누구한테도 장차 일부종사를어찌할까 싶은 걱정이나 의심은 물론 동정도 받아 본적이 없거늘딸자식한테 별 해괴 망칙한 소리를 듣는다는 진노였다. 나는 개종과일부종사의 엉뚱한 비유 때문에 그만 웃음이 복받치고 말았지만, 곧 입을다물었고, 불현듯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옛날 일이 생각났다. 그 옛날 오빠가어렵게 획득한 오붓하고 화평한 가정의 단란에 음흉하게 잠복해 있다가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던 것도 바로 저런 자랑스럽고도유구한 정조관념의 뿌리였구나하고.
그러고 나서 다시는 엄마의 개종을 권할 엄둘르 낸 적이 없건만 엄마또한 그 후 다시는 내 앞에서 기독교 계통의 책을 보는 모습을 보이지않았다. 불교를 믿으면서 예수교 책에 흥미를 갖는게 자식한테 처신을잃는 짓이라고 생각하시는게 뻔했다. 참으로 지겨운 엄마였다, 그러나육친이란 싫어하는 면을 더 닮게 마련인가. 엄마가 자식한테일수록 처신을잃는 짓을 극도로 경계했듯이 나 또한 엄마한테 처신을 잃지 않으려고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 내가 엄마한테 가장 처신을 잃는 일이라고생각한 것은 낸가 쓴 책을 엄마가 읽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우리 집에 오시기 전에 제일 먼저 준비하는게 내책을 서가 제일 높은 층에다 책등이 안 보이도록 반대로 꽂아 놓는일이었다. 엄마 또한 내 서재에 들어와 이것저것 읽을 만 한 책을고르시며서 어쩌다 한 번 쯤은 "네가 책을 여러 권 썼다는데 다 어딨냐?"
라고 물을 법도 하건만 전혀 안 그러셨다. 그렇다고 엄마가 다른 경로를통해 내 책을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아주 없는 것도아니었건만, 나는 어머니 생전에 한번도 정식으로 내 책을 헌정한 적이없다. 노출증 환자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다 까발려 보일 수 잇는 내치부를 엄마에게만은 보이기 싫었다는 게 말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쓴 걸 어떡하든지 엄마 눈에 안 띄게 하려는 단속이 신문연재를 할때만은 여의치 않았다. 그럴 때는 서로 모르는 척하는 게 수였고,우리 모녀는 약속 없이도 그런 눈치는 잘 통했다. 한번은 동아일본가에연재가 끝나고 나서 어떤 잡지사에서 나하고 우리엄마하고 같이 인터뷰를하겠다고 졸랐다. 고사하다가 그 기자하고는 너무 박절하게 굴 수만도없는 사이여서 우선 엄마에게 양해를 구해 보라고 발뺌을 했다. 쉽지는않앗지만 허락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때 친정집은 화곡동이어서 내가기자하고 같이 화곡동으로 갔다.
엄마는 처음 당하는 인터뷰건만 썩 잘 받아넘기셔서 나는 속으로 연간자랑스럽지가 않았다. 인터뷰 마무리 단계에서 기자가 따님이 쓰는 신문연재소설을 혹시 읽으셨냐는 질문을 했다. '우리도 그 신문을 보니까요."
엄마는 즉시 도도하게 표정을 가다듬으면서 결코 소설 때문에 그 신문을본 건 아니라는 것부터 강조했다. 나는 역시 엄마답다고 속으로 쓴웃음을지었다. 기자는 그 소설을 읽는 소감을 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심장이죄여들었다. 비평가한테 무슨 소리를 들어도 그다지 기분이 좋아질 줄도나빠질 줄도 모르는 심장을 타고난 내가 말이다. 다음 엄마 입에서 떨어진소리는 싸늘하고도 간략했다.
"원 그것도 소설이라고 썼는지."
나의 죄여들었던 심장이 퍼지면서 얼굴이 모닥불을 담아부은 것처럼달아올랐다. 그 후에도 엄마의 그 차가운 평은 문득문득 나에게 상처가되었다. 그러 때마다 나는 결코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만은 삼가리라고다짐하는 것으로 엄마에 대한 앙심을 달랬다.
한참 옆길로 샜던 얘기를 다시 돈암동, 목욕탕 뒷골목집에서 살던시절로 되돌려야겠다.  내가 보기에는 엄마가 가끔 보이는 신경불안증세는 터무니없는 거였다. 불안해할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빠는 비로소 제곬을 찾은 거였다 오빠에게도 현저동 시절이 깊은 인상을 남겼으리라는 건이해가 되었다. 오빠는 현저동 출신이라는 티를 내고 싶어했고 그들에게진 빚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싶어했다. 그들 편에 서야겠다는 순진한정의감 때문에 쉽사리 공산주의 사상에 공감할 수 있었겠지만 행동을하기엔 너무도 허약하고 사치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오빠는 현저동사람들이 콩깻묵도 실컷 못먹고 죽을 쑤어 먹을 때 동생의 입학축하로양식을 사 먹이려 들었고, 폐를 앓는 애인을 특실에 입원시켰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자기 자식에게 어찌 안정을 주고 싶지않았겠는가. 그가 몸담았던 조직에서 소시민 근성이라고 매도하는안정일망정. 나는 이렇게 엄마뿐 아니라 오빠의 심정의 변화까지도 손금보듯이 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꼈다. 세상 경험은 없이 한참건방지기만 할 나이였다. 오빠가 전향을 하고 우리 집안의 평화가 돌아온것은 내가 중학교 6학년 때 지금으로치면 고3때였으니까.
1950년, 나는 열아홉 살에서 스무살이 되었고, 황금 같은 고3시절은그해에 한해서 9개월밖에 안 됐다. 3월 말에 학년을 끝내고 4월에 학기초이던 일제시대의 학제가 해방이 된 8월을 기준으로 구미의 제도처럼8월에 학년을 끝내고 9월에 새 학기를 시작하도록 바꾼 것이 49년까지통용됐었다. 그걸 원래대로 3월 학기 말로 환원시키지 위한 과도조치로50년도에는 학기를 3개월 단축해서 5월로 하기로 했는데 그때 마침졸업반이어서 5월 졸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아마 우리 나라에 신식교육제도가 들어오고 유일한 경우였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행운이었던가는 엄동설한에 들어 있는 입시와, 꼭 을씨년스러운 늦추위가끼는 요즈음 입학과 졸업을 볼 때마다 느끼곤 한다.
그해 5월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때는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아무꽃이나 피어난 시대가 아니었다. 오직 5월만이 잎도 꽃처럼 피어날 때였고,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계절이었다. 교정에 꽃내음이 그득했고벌들이 윙윙댔다. 나는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합친 도합 12년간의 교육기간중 처음으로 우등상이라는걸 받으면서 졸업을 했다. 엄마는 물론 오빠,올케, 숙부, 숙모가 다 졸업식에 참석해 축하를 해 주었고 나는 속으로기고만장했다.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거뜬히 합격한 뒤였다. 지금의인문대와 자연대를 합쳐서 그때는 문리대라고 했는데 실용적인 것을선호하는 풍조는 전쟁 후에 생겨났고, 그때까지만 해도 일제잔재랄까,순수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승할 때라 문리대는 '대학의 대학'이 라고자처하며 기고만장할 때였다.
힘 안 들이고 합격을 하고 보니 머리가 붕 뜨는것처럼 교만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여학교에선 대학에 자원하는 비율이 높지않아서였는지 입시를 위한 수업이라는 게 따로 없었다. 모의고사를 두어번 본 것 빼고는 각자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가 알아서 한수험공부는 종로서관 집 딸이 김종숙한테 예상문제집을 빌려 본 것이전부였다. 꽤 두꺼운 문제집이었는데 아마 지질이 형편없는 갱지여서 더욱부피가 나갔을 것이다. 나말고도 뒤에 기다리는 아이가 있어서 사나흘집중적으로 보았다, 마치 소설책 돌리듯이 돌리고 난 책을 그 후에 다시책방에 갖다 팔았는지 어쨌는지 그 뒷일까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마음씨좋은 친구 덕으로 그 책을 한 권 떼고 나니까 배운 것이 정리가 된기분이었다. 그때 우리집 형편이 그런 책이 필요하다면 못 사 줄 형편은아니었는데도 안 사 달란 것은 시험공부 안하는 것처럼 굴다가 쓰윽합격해 보이겠다는 유치한 허영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학시험은 4월 말경이었는데, 그때가 또한 문리대 근처가 가장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지금은 마로니에 공원으로 변하고 개천도복개되었지만 그때는 동숭동 초입부터 이화동까지 길게 대학천이 흐르고대학천을 향해 개나리가 눈부시게 늘어져 있고 마당에선 벚꽃이 어지럽게흩날리고, 마로니에가 움트고 있었다. 전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일 시절이라입학원서 낼때나 시험 칠 때나 문리대 정문을 빠져나오면 곧장 길을 건너의대 정문을 지나 대학병원 정문으로 해서 원남동으로 나가 전차를 탔다.
의대와 대학병원이 연결된 길이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스무 살에 꿀수 있는 온갖 황홀한 꿈 때문에 그 길이 그렇게 좋았던지,그 길의 나무와 꽃과 풀과 훈풍이 그렇게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는지, 그길은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매혹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렇다. 그 계절에 나를 매혹시킨 것은 자유에의 예감이었다. 중학생에서대학생이 된다는 것도 온갖 금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지만 나는엄마로부터의 자유까지를 이미 예비해 놓고 있었다. 시집이나 가면 또모를까, 처녀시절에 엄마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꿈이나 꿔 봤을까.
아니 꿈도 안 꿔 봤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건 내 꿈 속의 꿈, 가장 내밀한욕망이었다. 그것이 현실이 되어 바로 목전에 예비돼 있었다. 그 엄청난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가, 악용, 선용, 남용, 절제 아무거나 다매혹적이었다, 앞으로는 모든 것을 그것과 더불어 공모하리라. 그꿈이야말로 장미와 라일락과 모란을 피게 하는 5월의 햇빛보다 더찬란했다.  엄마로부터 놓여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 날 갑자기 왔다.
50년 봄, 언제나처럼 시골 학교에서 주말에 자전거로 돌아온 오빠가 좀긴장되게 피곤해했다. 그때 올케는 두 번째 아이가 생겼는지 입덧이한창이었다. 연년생을 낳을 모양이었다. 아무리 손이 귀한 집안이라 해도돌 안에 들어서 아우는 엄마에게도 아기에게도 다 같이 못 할 노릇이었다.
가장이 시골 학교 선생이 됐다고 온 식구가 마음을 합해 행복해하던 때가엊그저께건만 벌써 식구가 느는 것 외엔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따분한 생활에 지친 기미를 우리는 서로 감추지 못했다. 그날 저녁상을받고 나서 오빠가 지나가는 말처럼 운을 떼었다.
"학교 사택이 한 채 날 것 같아요. 우리 집 보다 널찍하고 텃밭까지딸려 있어서 소일거리도 될 것 같긴 한데."
그러면서 흐린 말끝을 엄마가 잽싸게 낚아챘다.
"우리가 들고 싶으면 들 수도 있단 말이지? 그 사택인지 관사에."
옆에서 나는 오빠가 사택이라고 말한 걸 관사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엄마때문에 웃음이 났지만 현실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은요. 곧 비는데 신청자가 없으니까요. 교장이 오늘 저에게 의향을물어 보길래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잊어버리세요."
"가자, 우리."
"예?"
너무도 간단하고 단호한 결정에 식구들이다들 숟갈질을 멈추고 엄마의입만 쳐다보았다.
"하숙밥을 삼년만 먹으면 뼛속이 다 빈다더니 삼 년은커녕 반 년만에벌써 애비꼴이 못쓰게 돼 은근히 애가 닳던 참이다. 에미도 그렇지, 젊은내외가 그게 할 노릇이냐."
"그렇지만 어머니, 쟤는 어떡하구요?"
오빠가 나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대학교만 붙고 나면 작은집에서 다니도록 하지 뭐. 서로 좋아할 걸아마."
엄마가 숙부네하고 의논도 하기 전에 서로 좋아할 거라고 단정을 할만큼 작은숙부, 숙모는 나를 친딸처럼 사랑했고 나역시 그들을 따랐다.
아들이고 딸이고 낳아 본 적도 없는 작은숙부는 한때 시골 형님의 딸을데려다 길러 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큰숙부는 일남 삼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 년 남짓 갖은 정성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엄마와 시골을못 잊어해 결국은 돌려 보내야만 했다. 그때의 상심을 바로 이웃에서지켜보았는지라 나라도 잘 해 드리려고 애썼고, 그분들 역시 너 밖에없다는 식으로 나에게 정성을 쏟았었다. 그러나 장차 작은집에서 학교를다니게 될 지도 모른다는걸 알았을때 속으로 뛸둣이 기뻤던 것은 숙질간의그런 유별난 관계하곤 무관했다. 엄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대해서만 생각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숙부네는 내 방까지 있었다. 한때 우리 식구가 다 들어가 살때도 나한테따로 독방을 주었었는데 우리집에선 아직도 엄마하고 한방을 쓰고 있었다.
남아도는 방이 있는데도 장작값을 아끼느라 비워 놓았고 여름에라도 그방을 혼자 쓰고 싶었지만 엄마가 섭섭해할 것 같아 먼저 말을 못 꺼냈다.
같은 이유로 내가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걸 얼마나 기뻐하고있다는 걸 엄마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매우 조심조심했다. 그러니까아무리 잘 해줘도 작은집을 내 가족으로 여기진 않았었나 보다. 대학합격과 자유는 내가 쥔 양손의 떡이었지만 결코 하나만 먹을 수는 없도록돼있었다. 차선이라고는 없는 선택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시험 날짜까지아슬아슬하게 긴장을 유지 할 수가 있었다. 엄마는 그말이 나자마자우리가 이사 갈 집을 가 보고 싶어했다. 그날도 나도 엄마하고 동행을했는데 전차로 영천 종점까지 가서 거기서 구파발까지 가는 시외버스를탔다.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동안도 오래 걸렸거니와 구파발에서고양중학까지 걸어 들어가는 거리도 만만치가 않았다. 봄 가뭄이 계속되고있어 황톳길은 풀썩풀썩 먼지가 심하게 났다. 나는 단박 촌스럽게 변한 내검정 운동화를 내려다보면서 오빠에게 형헌할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 그집은 이미 비어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신병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된선생님의 세간만 일부 남아 있을 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썩 좋은인상은 아니었는데도 엄마는 집은 보는 둥 마는 둥 먼저 텃밭으로들어갔다.
한참이나 밭고랑에 쭈구리고 앉았기에 나는 엄마가 거기서 오줌을 누는줄 알고 일부러 딴데를 보았다. 한참 있다가 돌아다보았더니 어린애처럼흙을 주무르고 있었다. 나하고 시선이 마주치자 감자꽃처럼 초라하고계면쩍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난 하루라도 빨리 여기 살고 싶구나. 땅이어쩌면 이렇게 거냐? 세상에 이좋은 땅을 이대로 놀리다니." 햇볕이졸리도록 따스운 봄날이었다.
딴 밭에서는 푸성귀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이는데 그 밭만은 놀고있었다. 나는 주말마다 그 밭에다 고추, 상추, 오이, 호박, 참깨, 들깨, 온갖푸성귀를 심고 그 너울대는 초록의 한가운데서 김을 매고 있을 엄마를향해 손을 번쩍 들고 달음박질해 귀가할 내 장차의 모습을 상상하고가슴이 울렁거렸다. 텃밭이 거기 있음으로써 그건 귀가가 아니라 귀향이될 터였다. 다시 귀향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은 자유의 예감못지않게 감동스러웠다. 새로운 고향은 앞으로 내가 누리게 될 자유와기막힌 균형이 될 수 있으리라.
마침 그 무렵 우리는 박적골 고향을 잃으려 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나서 집을 겉돌기 시작한 큰숙부는 그후에도 박적골이 영 뜨악한지 개성시내에 있는 소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 집안 형편이 눈에 띄게 기울고있었다. 게다가 아이들 교육문제도 있고 해서 오빠와 작은 숙부는 이참에고향을 뜨게 해서 서울서 새출발을 시키도록 뜻을 모아 이미 구체적인데까지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엄마는 돈암동 집을 복덕방에 전세로내놓았다. 그리고 분주하게 이사 준비를 했다. 오빠는 여름 방학에 하고싶어했으나 엄마는 여름엔 밭에서 따 온 상추쌈으로 점심을 먹지 않으면큰일날 것처럼 서둘러댔다. 꼭 무엇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이사만 한다면무슨 발작처럼 생기가 나는 것도 여전했다.
"엄마는 이사가 취민가봐." 이젠 쫓길 것도 없건만 안정된 지 일 년남짓해서 다시 이삿짐을 싸고 싶어하는 엄마를 나는 이렇게 빈정댔다.
오로지 이사에만 정신이 팔려서 나를 작은집에 떼어놓게 된것에 대해선조금도 신경을 안 쓰는 엄마가 다소 야속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엄마는 스르르 풀이 죽으면서 아득한 표정으로"자고로 죽을 수에 이사한단다."
하고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아직도 쫓기고 있었다. 엄마는좌익조직으로부터 헛되게 도망을 다녔듯이 이번에 전향한 후환으로부터의도피를 시도 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전전긍긍하는 것을 전혀 터무니없는 일종의 신경불안 증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 이사야말로 가장성공적인 치료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새롭게 전개될생활에 대한 예감에 충만한 특별히 아름다운 5월이었다. 그러나 하필1950년의 5월이었다. 남달리 명철한 엄마도 환멸을 예비하지 않고 마냥마음을 부풀린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해 6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12 찬란한 예감
5월이 학년 말이었으나 당연히 6월 초에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문리대는 그해에는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중순경에 입학식을 했다. 자연히강의도 며칠 못 듣고 25일이 되었다. 집은 그 동안에 전세를 들 만한마땅한 사람이 생겨서 계약도 중도금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작은집의내방도 도배를 새로 했고, 학교 사택도 언제든지 이사할 수 있도록 대강의수리와 도배를 끝마치고 엄마가 받아 놓은 손 없는 날만 기다리는중이었다. 언제나처럼 주말에 돌아온 오빠와 나는 서로 나눠 가질 책을분류했다.
인민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듣긴 했지만전에도 38선 충돌이 잦았고 그때마다 국군이 잘 물리쳐왔기 때문에 그저그런가 보다 했다. 설사 전하고는 다른 전면전이 된다고 해도 우리가시골로 들어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겪은 지 얼마 안되는 이차대전의 경험에 미루어 다분히 이기적인생각이었지만, 전쟁이 날수록 시골로 가길 참 잘 했다고 야비다리를피우면서 살 수 있을지언정 후회할 까닭이 없었다. 그때까지 이승만정부가 장담해 온, 만약 전쟁이 나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점심은평양에서 저녁은 압록강에서 먹으리라는 선전을 그대로 믿은 건 아니라해도 세뇌 효과는 무시 못 했다. 최악의 경우라해도 다만 몇 발자국이라도38선 이북에서 밀었다 당겼다 하는 장기전이 되려니 했다.
다음 날 오빠는 새벽같이 학교로 출근했고, 나는 동숭동 문리대로등교했다. 등교하면서 가로수를 꺾어서 철모와 군용차를 시퍼렇게위장하고 미아리고개 쪽으로 이동하는 국군을 보고 비로소 섬뜩한 전쟁의현장감을 느꼈으나 남들이 하는 대로 씩씩하게 박수도 치고 만세도불렀다. 오전 강의가 끝나고 누군가가 양주동 선생님 강의를 도강하러가자고 했다. 도강이란 말도 대학생이 된 기분을 쾌적하게 자극했지만,유명한 학자의 실물을 본다는 건 더욱 신나는 일이있다. 도강은아니었지만 입학하고 얼마 안 있다 들은 가람 이병기 선생님의강의시간에도 그렇게 설랬었는데 역시 유명한 분을 적접 뵙는다 게자랑스러웠을 뿐 그분의 학문이나 업적에 대해 뭘 좀 알고 있는 건아니었다.
고명한 학자나 명사가 지금처럼 대중 앞에 모습이나 목소리를 드러낼기회가 없는 문자 그대로 상아탑에 갇혀 있을 때였다. 그러니 그분들을구경한다는 것만으로도 가히 도취할 만한 대학생의 특권이었다, 그때도양주동 선생님의 인기는 대단해서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맨뒤에 끼어 서서 해학과 유식을 폭포수처럼 토해 내며 강단을 자유자재로누비는 선생님의 강의에 황홀한 눈길을 보냈는데, 간간이 강의실 유리창이들들들 울릴만큼 포소리가 가까워질 적이 있었다. 작달막하지만 몸매가다부진 그분이 그 소리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강의를 계속하는 게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학길은 아침과 좀 달랐다. 여전히 미아리고개 쪽으로 군대가이동하는 걸 볼 수 있었지만 용감해 보이기보다는 비장해 보였고 환송하는시민의 태도 또한 불안하고 어설퍼 보였다. 그날 밤새도록 엄마가구시렁대면서 이럴 때는 식구가 같이 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소리를 하고또 했다. 나도 오빠가 걱정되긴 마찬가지여서 더욱 엄마가 그러는게 듣기싫었고, 진작 독방을 갖지 못한게 짜증스러웠다.
다음 날 아침에는 포소리가 미아리고개 너머에서 쏘는 것처럼 가까이들렸다. 그러나 긴급 뉴스는 국군이 인민군을 거의 다 섬멸한 것처럼말하면서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기를 당부했다. 그러면 그렇지하고 학교로 향했다. 미아리고개로 뻗은 돈암동 전찻길로 달구지에가재도구를 실은 피난민이 꾸역꾸역 넘어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들에게시민들이 뭔가를 물러보는 걸 순경이 말리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그래도이사람 저사람의 입을 통해 그들이 의정부에서 피난 오는 길이라는 걸 알수가 있었다. 피난민을 눈으로 보고서야 덜컥 겁이 났지만, 설마 순수한양민은 아니겠지, 아만 지레 겁을 먹은 악덕지주나 좌익탄압에 앞장섰던경찰 가족쯤 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꿈에도 인민군이쳐들어오는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나의 그런 견해는 다분히 좌경사상에서영향받은 바가 없지 않았다.  학교에서의 강의 없이 여학생에겐 귀가조치가 취해졌고, 남학생들은 따로 학도호국단 명의로 북진통일을다짐하는 궐기대회를 여는 것 같았다. 나는 호국단 간부들이 목청껏결의문을 읽고 구호를 선창하는 걸 옆에서 잠시 지켜보았지만 거의 위로가되지 못했다.
귀가길은 시시각각으로 촉박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고, 간단없는포소리에 행인들은 무작정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빠일이갑자기 걱정되어 집을 향해 뛰었다. 그 동안 오빠가 돌아와 있기를 간절히바랐으나 엄마가 문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걸 보니 아직 소식이 없는 것같았다. 엄마는 나를 보자 "어서 피난을 가얄 텐데."라고 혼잣말을중얼거렸다. 절박하다 못해 멍해진 엄마의 시선이 기분 나빴다. 부엌에선올케가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칭얼대는 데도 모르는 척하고 임신한 지여덟 달이 꽉 찬 올케가 어깨로 숨을 쉬면서 커다란 나무주걱으로누룻누룻해진 쌀을 하염없이 젓고 있는걸 보자 나를 벌컥 화가 났다.
"언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예요?"
"보면 몰라요? 미숫가루 만들고 있잖아요."
언니는 나보다 더 화가 난 목소리로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마루끝에한눈에 엄마의 솜씨라는 걸 알게 하는 광목배낭이 불룩하게 나자빠져있었다. 엄마가 시켜서 마지못해 하는 노릇이라는게 뻔하건만 나는 올케의손에서 나무주걱을 빼앗으며 물었다.
"그몸으로 피난을 갈 작정이유?" "어떡해요? 내쫓으시면 가는 척이라도해야죠. 그나저나 오빠가 와야지 내쫓기든지 말든지 하죠,"
엄청난 굉음이 들리고 이어서 산봉우리가 하나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여운에 집의 분합문 유리가 들들들 오래도록 공명했다. 엄마가 대문간에서뛰어들어오면서 어서 미숫가루를 담으라고 자루를 벌렸다.
"아직 빻지도 않았잖아요?"
"빻을 새가 어딨냐? 한 움큼씩 집어 먹으려면 안 빻는게 나아."
엄마가 우리가 성의 없이 볶아 갈색으로 탄 쌀을 야단도 치지 않고급하게 자루에다 처넣기에 오빠가 저만치 오는 걸 보고 뛰어들어온 줄알았다. 올케도 곧 내쫓길 줄 알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오빠만 피난시키자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게 뭐 그렇게 급하냐? 느이 오래비도 안 왔는데."
엄마도 얼떨결에 부린 자신의 경망이 어처구니없는지 낭패스럽게 웃으며다시 대문간으로 나갔다. 그날 밤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숙부네가게에는 전화가 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물론 숙부네 쪽에서도온종일 학교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밤늦게 숙부네가 우리 집으로피난을 왔다. 미아리고개로 통하는 대로변보다는 아늑한 주택가가안전하게 느껴진 까닭도 있고, 여럿이 뭉쳐 있으면 서로 의지가 돼 덜무서울 듯싶어서였다.
그러나 큰집 작은집까지 뭉쳐 있을수록 오빠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느껴졌다. 포탄이 서울 하늘을 가르고 있다는 걸 느끼고부터 우리는 방속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을 못 했다. 대포나 폭탄 파편이 솜은 잘못 뚫는다는 일제 말기에 얻어들은 어설픈 지식 때문에 땀을 흘리면서도그러고 있는 거였다. 숙부는 솜이불 속에서도 열심히 라디오를 들었다.
그리고 위로가 될만한 뉴스가 나오면 즉시 우리에게 전해 주곤 했다.
그 밤을 견디는 태도가 삼촌하고 엄마하고 그렇게 대조적일수가 없었다.
엄마는 우리가 무슨 소리를 해도 솜이불을 뒤집어쓰지도 않았고 방에도들어오지 않았다. 안마당과 대문 밖을 서성이면서 꼬박 밖에서 그 밤을보냈다. 바깥 동정을 살피는 것도 이젠 오빠를 기다려서가 아니라지나가는 사람이나 동네 사람들의 동정에서 뭔가를 알아 내려는 것같았다. 허둥지둥 피난 나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더니 지금은 좀뜸해졌다든가, 가면 어디로 갈거냐고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사람도있더라는 얘기를 방안에 있는 식구들에게 전해 주었다. 바깥에 인적이아주 끊기고부터는 마루 끝에 꼼짝 않고 앉아서 포탄이 쌔앵 공기를가르는 소리와 명중해서 폭발하는 소리를 가지고 마치 전문가처럼자신있게 전선의 위치를 짐작하기도 했다. 엄마도 숙부처럼 자신의 추측을우리에게 보고해서 동의를 구하려 했고 엄마의 보고와 숙부의 보고는번번이 상반됐다.
우리는 두 사람이 말하는 전황을 다 믿지 못했고 위로 받지도 못했다.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싸움구경처럼 황당할 뿐이었다. 낮엔 그렇게허둥대던 엄마가 너무 침착하게 담대하게 구는 것도 어쩐지 보기가싫었다. 새벽녘에 전쟁의 소음이 한결 가라앉자 숙부는 이제 좀 마음이놓인다는 듯이 우리더러 한숨자자며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대통령이 수도 서울은 꼬옥 사수한다고 국민한테철썩같이 약속을 했으니까."
이러면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숙부를 엄마는 딱하다는 듯이바라보면서 말했다.
"서방님도 참, 늙은이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날이 밝자 숙부와 숙모는 오늘은 상점을 열 수 있을 것도 같다며 집으로떠났다. 우리도 다들 밖이 조용해진 걸 전쟁이 진정된 것과 같이 생각했기때문에 붙들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헐레벌떡 되돌아온 숙부는몹시 얼뜬 목소리로 밤사이에 세상이 바뀐걸 알려주었다. 엄마의 안색이하얗게 변했다. "어쩔꼬, 이를어쩔꼬," 헛소리처럼 탄식하는 엄마의 손을잡으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숙부는 그런 엄마가 잘 이해가 안되는모양이었다. 싱글대며 농담을 다 했다.
"아 형수님이야 무슨 걱정이유. 툭하면 겁 없이 이승만박사 욕도 잘하시더니만 잘 됐지 뭐 그래요."
그리고 우리한테도 빨리 나가 보라고 했다. 길가에 인민군을 환영하는인파가 적지 않다고 했다. 엄마가 굳은 표정으로 못 나가게 했다. 대통령이남기 목소리를 곧이 곧대로 믿던 숙부는 이미 바람 부는 대로 살 각오가돼있는 반면 같은 대통령을 그렇게 못마땅해하던 엄마는 되레 새 세상에심함 낯가림을 하고 있었다. 오빠 때문에 그러는 줄은 알지만 좀 지나친것 같았다. 전향한 게 투쟁경력에 흠이 되긴 하겠지만 설마 정상을참작해주겠지 하는 치사한 생각을 난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정말로 더럽고 치사했다. 나는 바뀐 세상에 대해 숙부처럼바람 부는 대로 살지, 정도가 아니라 좀더 적극적이고 희망적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빠의 투쟁경력과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나의 일시적인동조를 상기함으로써 더욱 생생하졌다. 나는 오빠의 투쟁능력에 대해서만생각했다. 그리고 엄마가 두려워하는 것은 전향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전향에서 또 한 번 전향하게될지도 모르는 사태였다.
엄마는 혼자 나가서 세상이 바뀐 걸  확인하고 들어와서는 숫제안암천이 흐르는 개천가 큰길까지 나가 오빠를 기다렸다. 개천가에선성북경찰서 뒤뜰이 곧바로 바라보였다. 인민군이 경찰서를 접수하고 벌써반동을 잡아들이는 것 같다고 엄마가 치를 떨며 말했다. 오빠를 눈이빠지게 기다리다 들어온 엄마는 눈에 정기가 하나도 없이 흐릿하게 풀려보였다. 오빠에겐 그런일이 일어나지는 않을테니 걱정 말라고, 오빠는인제부터 뜻을 펴고 살수 있을 거라고 나는 엄마를 위로했다. 그건 나의희망사항이기도 했다.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냐?"
엄마는 딸을 노골적으로 능멸하는 투로 말했다. 또 그놈의 정조관념인가. 정말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엄마였다. 하늘의 해와 달처럼명명백백하고도 오직 두 개밖에 없는 이데올로기말고 따로 신봉할게 있는엄마가 우스꽝스러워보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다 나타난 오빠보다 더우스꽝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아마 오빠를 바뀐 세상으로부터감쪽같이 감춰둘 요량으로 그렇게 기다렸을 것이다. 아예 집엔 들이지않고 숙부네나 외가로 빼돌릴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필 오빠가기다리다 지친 엄마가 자시 집에 들어온 사이에 돌아왔다. 그건 마치분꽃이나 나팔꽃 봉오리가, 지키고 있던 어린이가 잠시 한눈을 팔고 있는사이에 피는 것처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오빠는 일생일대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귀가했다. 설사엄마의 계획대로 지키고 있던 길목에서 만났다고 해도 사태는 조금도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빠는 거의 한 트럭분은 됨직한 죄수들을거느리고 들어왔다. 죄수라고 했지만 머리를 빡빡깎고 죄수복을 입고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그들의 표정은 훈장을 주렁주렁 단개선장군보다 더 당당하게 위엄과 영광에 넘치고 있었다. 그들에 비해평상복을 입은 오빠가 되레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이해못하는 사람처럼 멍하니 무표정했다. 그들 중 하나가 댓돌 아래서 역시표정이 바랜 채 우두망찰하고 서 있는 엄마를 사뿐히 안아올려 좌정을시키고 큰절을 하자 모두 따라했다. 엄마도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 그의손을잡고 그간의 고생을 위로했지만 한번 바랜 핏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한테 먼저 큰 절을 올린 이는 우리가 삼선교 집에서 살 때 문간방에세들어 살다가 바로 우리 집에서 잡혀간 바로 그 사내였다. 오빠도 그때는조직생활을 할 때였기 때문에 비록 횡적인 관련은 없지만 그의 정체를간파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체포된 후 남은 가족에게 우리가 그다지야박하게 굴질 않은걸, 아내한테 듣고 옥중에서도 늘 감사하고 있었다고한다.
28일 아침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대는 제일 먼저 갇힌 사상범들을해방시켰고, 갈아입을 옷도 없었겠지만 있다고 해도 안 갈아입을 만큼죄수복 자체가 혁명투사의 자랑스러운 표지가 된 그들은 그대로 트럭에올라타 시내를 누비며 군중의 환호에 답하는 일반 군중의 열광을 유도했을 것이다. 오빠의 학교가 있는 시골에선 비교적 조용하게 세상이바뀌었다고 한다. 포소리도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아 설마 했었는데아침에 면소와 주재소에 인공기가 게양된걸 누가 일러 주면서 서울서는 큰전투가 벌어졌다고 해서 부랴부랴 서울로 오다가 그 트럭을 만난 거였다.
일러준 사람이 친절하게도 오빠에게 붉은 리본을 단 밀짚모자도씌워주고 자전거에도 붉은 헝겊을 매달아 줘서 오빠는 그게 계면쩍어도중에 떼었다 붙었다 했더니 그의 소심함을 짐작할만 했다. 그렇게이쪽에도 저쪽에도 자신이 없는 오빠니만치 혁명투사들이 탄 트럭을보고도 못 본척도 못하고 열광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트럭이 오빠 곁으로 바싹 다가오는 것 같아 비실비실 피하려는데 누가손을 내밀더라고 했다. 트럭에 탄 사람과 행인들과의 열렬한 악수와포옹을 이미 무수히 목격한 오빠가 수줍게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순간오빠는 "이럴수가, 동지를 이렇게 만날수가." 하는 감격스러운 소리와 함께붕떠서 트럭위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내자전거'하고 아끼던 자전거 한번불러 볼 새가 없었다. 그리고 한나절을 지칠줄 모르는 흥분의 도가니 속에쌀의 뉘처럼 어설프게 끼어 있다가 마지못해 그들을 달고 귀가한것이었다.
곧 우리 집 좁다란 마루가 그 트럭위가 되었다. 엄마하고 올케하고 나는부엌에서 밥을 짓고 찌개도 끓이고 지짐질도 했다. 동네 반찬가게에서두부는 목판째, 술은 짝으로 들여왔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지치지도 않고인민가요를 불러댔다. 조그만 집이 떠나갈 듯했다. 지붕에서 기왓장이 다들썩들썩하는 것 같았다. 활짝 열어제친 대문 밖에는 동네 사람들이몰려들어 큰구경거리가 난 것처럼 안을 기웃댔다. 얼이 반 넘게 빠진엄마는 다리를 후들대며 실수를 연발했다. 접시를 깨트리고 소금과 설탕을구별 못 했다. 가끔 이마를 짚으면서 "이게 무슨 징졸꼬?" 라고 뇌 까렸다.
그렇다. 그들은 엄마에게 죄수도 아니고 혁명투사사도 아니고 다만징조였다.
그런 와중에도 엄마는 올케나 나에게 될 수 잇는 대로 음식 시중을 안시키고 손수 하려 들었다. 그들에게 음식을 나를 때마다 "세상에 집에서얼마나 기다릴텐데..." 하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던지 다들 그 날 밤 늦게 뿔뿔이 헤어졌다.
다음날  우리 집에 전세들기로 한 사람이 계약금과 중도금을 찾으러왔다. 우리도 하룻밤 새에 그 계약이 무효가 됐다는데 이의가 없었으므로선뜻 내주었다. 엄마는 다락에 올라가 한참을 어딘지 쑤석거리고 나서 그돈을 가지고 내려 왔다. 그러고는 "쓰고 싶은데가 참 많았는데 조금이라도헐어 썼더라면 무슨 망신일꼬." 하면서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나는 불현듯 텃밭 사이에서 감자꽃처럼 웃던 엄마 생각이 나면서 가슴이깊이 아렸다. 최근의 일이라기보다는 진행중이던 일이었건만 중턱이잘리고 나니 먼먼 옛날 일 같았다. 이땅에 당장 지상 낙원이 온다해도우리 엄마가 꾼, 아기자기한 백 평 텃밭의 꿈과 바꾸지 않다는 반혁명적인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끝전까지 받으면 그 모갯돈을 숙부네 장사에투자해 이자를 받고, 텃밭을 가꾸어 푸성귀는 안 사 먹고, 그래서 우리가자꾸자꾸 부자가 될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수의를 입은 혁명가들이 우리 집에서 대대적인 축제를 벌이고 난 후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거물급을 미처 모르고지낸걸 송구스러워하는 것처럼 굽실대며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가 걱정한 것보다 일일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바늘 방석에 앉은것처럼 불안하긴 차라리 걱정하던 일이 일어난 것보다 더했다. 물론속사정까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는건 아니었다. 하나 둘 오빠의 옛동지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오빠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접한 그들은 당에속죄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은근히 비난도 하고 회유도 했다. 그럴때마다 오빠는 몸담고 있던 학교로 돌아가 진짜 노동자 농민의 아들들을혁명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자가가 할 수 있는 당을 위하는 일일 짓같다고 발뺌을 했다.
그 한 트럭의 징조들 때문에 용의주도하게 세운 계획을 실천할 기회를놓치고 난 엄마는 실의에 빠져 그저 하루하루를 살얼음 밟듯이 조심조심지냈다. 엄마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거물 취급하려는 동네 사람들 때문에늘 전전긍긍했다. 한 골목 안에서 대문 열어놓고 서로 무관하게 드나들던사이였다. 특히 손자를 본 노인네들은 골목안 장맛을 집집마다 분별하 수있을 만큼 마실이 잦았다. 업힌 아기는 어디든지 가야만 아 보채는 건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내집 새끼나 남의 집 새끼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흉허물 없이지내던 이웃하고 식량 걱정도 같이 할 수 없다는 건 못할노릇이었다. 그들이 죽 먹을 때 우리도 죽 먹고 그들이 뒤주 밑을긁을때도 우리도 그런다는걸 그들은 믿어 주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어우러져 뚝섬으로 열무를 사러 갈 때도 우리는 쏙 빼놨다.
재앙은 우리집에만 그치지 않았다 장사꾼에겐 안정된 사회보다뒤숭숭하거나 헤까닥 잘 바뀌는 사회가 더 유리하다는 숙부의 생각이이번엔 들어맞지 않았다. 상점은 곧 문을 닫았다. 전찻길로 면한 쪽이넓어서 반은 세를 주었었는데 그집도 마찬가지였다. 텅빈 상점 안이빈창고처럼 보였던지 우마차에다 무슨 장비인지 가득 실은 한 떼의인민군들이 거기다 말을 매놓고 싶어했다. 어느 영이라 거스르겠는가.
숙모 말에 의하면 인민군 중에서도 높은 보위군관들이라고 했다. 그들은말만 했을 뿐 아니라 숙식을 다 숙부네서 해결하려 들었다. 숙모가 인민군잡데기가 된 것이다. 처음ㅇ[는 이게 웬 재앙인가 싶었지만 식량난이혹심해지면서부터 두식구 밥 걱정은 안하게 된걸 다행스럽게 여기게되었다. 밥뿐 아니라 반찬 걱정도 안 했다. 소를 통째로 잡아다가 각을떠서 딴 부대하고 나누긴 했지만 한 이틀 약비나게 고기로만 배를 불린적도 있다고 했다. 냉장고가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것이다.
그런때는 누린내가 온동네로 퍼져 비록 시켜서 하는 일이지만 큰 죄를짓는 것 같았다고 했다 소 잡을 때 훗날 장사 밑천으로 숨겨 두었던 술이들통나 그날로 바닥이 났다고 했다. 숙부네 장사의 주종목은 주류도매였다.
빼앗긴 술에 대한 보상이나 삼시 밥 해대는 수고비는 조금도 바랄 수 없는상황이었는데도 세끼를 흰밥으로 배불릴 수 있다는건 굉장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숙모는 그런 호강을 혼자서만 하고 나눌 수 없는 게 미안해서어쩔 줄 몰라했다. 동네 사람 앞에서 얼굴을 못 든다고 했다. 하다못해누룽지라도 좀 나눠 먹고 싶은데 먹을 것에 관한 한 감시가 하도 철통같아 도저히 엄두를 못 냈다. 친척이 드나드는 것까지 뭐라지는않는다지만 숙모가 그들 몰래 밥 한 그릇이라도 먹일 기회를 엿볼 것이뻔해 우리 쪽에서 발길을 끊고 살았다. 먹는 것에 츱츱한 걸 가장 좋지못한 일로 교육받아 온 우리는 남에게 그런 합의를 받는다고 상상하는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그 정도의 숙부네 소식도 어쩌다밤늦게 마실오는 숙모를 통해서였다. 온종일 부엌에서 사는 숙모는 몸에음식 냄새가 배 있었지만 누룽지 조각 한쪽 가지고 오지 못했다. 바라지도않건만 숙모는 그게 미안한지 우리 집에 들어서자마자 변명부터 했다.
"그것들이 의심할까 봐 내가 먼저 그것들 코앞에다 대고 치마를 이렇게훌훌 털어 보이고 나왔단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고쟁이가 보이도록 치마를 펄렁 거려 보였다. 우리식구가 극도로 허기가 지고부터는 숙모는 그럼 밤 마실 조차 삼갔다.
8월초에 오빠가 드디어 시골 중학교로 돌아갔다. 지하로 숨을 기회도놓치고 당에 속죄할 기회도 놓치고 마냥 어정쩡한 무소속상태로 지낼 수잇는 세상이 아니였다. 청년 장년 할 것 없이 길에서도 의용군으로잡아들일 때였다. 오빠가 겉보기에 한유롭게 시국을 관망하고 지 낼 수있었던 것도 인민위원회로 변한 동회사람들이나 한 골목 사는 인민반장쪽에서도 오빠가 거물급인가 아닌가 관망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그런 상태에서 느끼는 어떤 위기의식과 이웃으로부터의 따돌림으로늘 우두망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이래라저래라 자기 의견을 말하지않았다. 최초의 계획이 어긋나고부터 자기판단력에 자신을 잃은 엄마는시심하고 과묵해졌다. 그 줏대는 어디 갔는지 숫제 자기 의견 같은 건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오빠는 아마 월급은 못 줘도 쌀 배급은 준다는, 출근공작 나온동료교사의 말에 가장 끌렸을 것이다. 내달이 올케의 해산달이었다. 흰쌀몇 움큼을 남겨 놓으려고 엄마는 손자 베갯속에 든 좁쌀을 다 꺼내서 멀건우거지 죽에다 보탰다. 그 동료교사는 다음 번에는 오빠의 신임장까지해가지고 와 통행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출근한 오빠는불과 사흘만에 의용군으로 붙들려갔다. 붙들려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밤중에 누가 숙부네 집 유리창을 두드려서 나가 보니 오빠가 서 있고뒤에는 통 든 인민군이 두사람이나 따라왔더라고 했다.
미아리고개로 통하는 전찻길 가에 있는 숙부네 집에선 야밤에 군대나민간인이 이동하는 소리를 늘 들을 수가 있었다. 오빠도 북으로끌려가면서 인솔하는 인민군에게 잠시 양해를 구해 가족에게 소식이라도전하고자 들렀던 것이다. 겨우 그 말만 전하고 다시 끌려가는 조카를 그냥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나로 숙부하고 숙모는 속옷 바람으로 무작정미아리고갯마루까지 따라가다가 인솔자가 총대로 밀어내는 바람에놓쳤다고 했다. 길가로 물러나 바라보니 어둠을 틈타 끌려가는 장정들의행렬이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다소 위로가 되더라고도 했다. 숙모는 그행렬을 끝까지 보고 나서 곧장 우리 집으로 달려와서 일러 주는 건데도우린 잘 믿기지가 않아 어리벙벙했다. 날이 밝으니 더욱 숙모가 헛것을보고 나서 헛소리를 지껄이고 갔으려니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엄마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구파발로 떠날 채비를하면서 나도 같이 가자고 했다. 국도는 특히 폭격이 심했다. 그래서 군대고민간인이고 밤에 이동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공습을 만나 밭이나논으로 뛰어들어 포복해서 있다가 다시 걷곤 했다. 오빠가 의용군에 나간건 틀림이 없었다. 중등교사가 재교육을 실시할 테니 한 학교에서 꼭 몇명씩은 의무적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상부 지시가 있어서 그렇게출근공작에 열을 올린 거였다. 재교육을 청운국민학교에서 받다가 곧장전원이 의용군으로 지원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누굴 원망할 수도없었다. 우리 집에 출근 공작을 왔던 지도교사도 같이 끌려갔다니까 그도속았을 뿐, 그에게 속은 것도 아니었다. 탓을 하려면 순진한 시골 인심이나탓할까, 우리를 속여먹고 있는 것은 그 보다 훨씬 조직적인 힘이었다.
들판엔 고추 잠자리가 평화로이 날고 시냇가 미루나무에선 쓰르라미가자지러지게 울고, 우리의 텃밭은 아직도 주인을 못 만나싸는지 쇠비름에뒤덮혀 있었다. 우리 모녀는 허름하게 늙은 노교사 한 분이 지키고 있는교무실 창으로 이런 것들을 내다보면서, 심한 허기증 때문인지 전쟁의근심과 공포가 꿈결같이 아찔하게 멀어져 가는 걸 느꼈다. 노교사가자기보다 더 늙은 소사하고 같이 창고로 가서 쌀가마에서 쌀을퍼내주었다. 우리는 감지덕지 그걸 받았다. 엄마는 이고 난 지고 와서 그날저녁은 그걸로 배부르게 쌀밥을 지어먹었다. 엄마는 오빠가 첫 월급과쌀을 타 왔을때 별로 기뻐하지 않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한탄을했었다. 엄마는 그 소리를 왜 이렇게 미리 했을까, 되레 그날 저녁엔암말도 안 했다. 그러나 그 식사야말로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나는 진즉부터 학교에 나가고 있었다. 오빠와 달리 바뀐 세상에서슴없이 공감했다. 그들이 이승만 정부 욕하는 데 공감했고, 노동자농민에 대한 약속에 공감했다. 거의 잊고 지내던 팜플렛을 보고 맛본공산주의에 대한 최초의 감동과 매혹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 그들의승승장구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었고, 한때 민청조직에 들어 있었다는 걸대단한 투쟁경력처럼 자부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게다가 입학한 지얼마 안 되는 대학에 대한 애착도 무시 못했다. 나는 바뀐 세상에참여하고 싶었고, 내가 속할만한 데는 대학밖에 없었다. 등교해 보니문리대 건물은 인민군이 차지하고, 연건동에 있는 수의과대학에서 등록을받는 걸로 돼 있었다.
아마 7월 중순쯤 되서였을 것이다. 마음은 급했지만 뒤숭숭한 집안 사정때문에 등교 시기는 좀 늦었었다. 지신도 임의로 할 수 없는 불안감에짓눌려 어떤 경우에도 잘 하던 우스갯소리까지 잊어버린 엄마는 내가등교를 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그래도 내 딴엔 용기 있는 등교였는데학생 수도 민청 간부를 빼면 과마다 한두 명으로 셀 정도밖에 안 됐다. 그소수의 주요과제는 등교 공작이라는 거였다. 학교에 비치된 신상 카드를한 사람 앞에 몇 장씩 나눠 주면서 약도대로 집을 찾아가 등교를 권하라고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 학생을 긁어보아 의용군으로내보낸 적이 벌써 몇 번 있었다고 했다. 오빠가 당한 것과 똑같은수법이었다. 그런 수법이라는 걸 모를 때도 나는 그 짓은 안 했다. 집 찾는데는 워낙 소질도 없었거니와 대학생에게 학교를 나와라 말아라 권한다는게 암만 해도 말이 안 됐다. 당하는 쪽보다 내 자존심에 관한 문제였다.
그런 일말고도 매일매일 말 안 되는 일만 시켰다. 문리대생 중 반동분자명단을 복사하는 건데 누가 작성했는지 모를 명단을 왜 그렇게 자꾸복사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명단 맨 처음에 나오는 이름은나중에 국회의원을 지낸 손도심 씨였다. 아마 그때 정치과에 재학주이었을 것이다. 학습시간이라는 것도 있긴 했다. 그러나 교수를 본 적은한번도 없었다. 끝끝내 교수는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학교의 주인은 민청이었다. 민주학생동맹다운 민주적인 학습방법은소련공산당사나 신문의 전면을 차지한 김일성 수령의 교시를 돌아가며일고 예찬하고 열광하는 일이었다. 우러나오지 않는 예찬과 열광처럼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도 없었다. 몸에서 서서히 생기가 증발해 가고있다는 걸 현저하게 느꼈다. 같은 교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도 처음과다름없는 고조된 열광을 유지해야 했고 불을 지펴야 했다. 그게 어떻게가능한가? 가능했다면 그건 틀림없이 가짜였을 것이다. 가짜를 좋아하는수령은 얼마나 멍텅구리일까. 이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할 짓이 못되었다.
나는 체질적으로 예습을 싫어했다. 고교시절에도 시험 때 복습은 어쩔수 없이 하지만 예습은 하지 않았다. 집중력도 산만했다. 싫어하는 과목시간에는 수업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소설책을 읽는 못된 버릇이있었고, 좋아하는 과목도 예습 없이 간간이 딴 생각도 좀 하면서 듣길좋아했다. 그래도 꼭 알아야 할 새로운 지식은 그런 방심의 시간을느닷없이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싱싱하게 요동치게 하는 법이다. 괜해예습 따위를 해서 그 시간을 한물간 생선 같은 복습의 시간으로 만들기가싫었다. 그러니까 정말 싫어하는 건 예습이 아니라 복습인지도 몰랐다.
민청학습은 소학생도 알아들을 빤한 소리의 무한한 복습이었다. 저절로지쳐 떨어져 물 간 생선이 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엔 스스로 박제가 돼버린 것처럼 느꼈다. 여북해야 민청 간부나 동무라고 부른 남학생 중엔잘생긴 남자도 있었을 법한데 어깨를 맞대고 학습도 하고 툭하면 악수도잘 했건만 한번도 야릇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건 결코 연애감정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성간에만 있는 것이면서도연애감정 이전의 이끌림이 남자와 여자가 섞여서 하는 일 가운데는 반드시있는 법이다. 그 남자와 여자가 남매나 부녀나 모자간이라 해도 말이다.
생기라 해도 좋고, 윤기나 부드러움이라 해도 좋은 그런 정서 때문에남자와 여자가 더불어 하는 일 가운데는 따로따로 하는 일에서는 맛볼 수없는 잔재미가 있는 법이다 어떻게 된 게 그것까지 말라 버린 느낌이었다.
아니, 그건 느낌이 아니라 실제였다. 황폐의 극치였다.
나는 전쟁 중 생리가 멎어 버렸고, 비슷한 경험을 했단 소리를 나중에여러 번 들었는데, 대개는 영양부족 탓으로 돌리는 듯했다. 물론영양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심리적 중성화 현상의 영향도 있지않았을까. 여북해야 그 무렵 나는 북조선이 과연 노동자의 낙원일까를의심하는 것보다는 북조선서는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인구를 증가시킬까를궁금해하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재미있고 싶었다. 나는오빠가 의용군에 붙들려 간 걸 기화로 학교에 나가는 걸 그만두었다. 오빠때문이라고 말하진 않겠다. 그냥 지쳐 나자빠진 거였다. 수정이 안 된열매처럼 말라 비틀어져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따져 보면 얼마 안되는 동안인데 그때도 그랬고, 훗날 돌이켜볼 때도 그렇고, 그동안이인민군 치하의 석 달 동안보다도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엄마는 매일 밤 장독대에다 정안수를 떠 놓고 치성을 드렸다.
달빛이라도 휘영청 하거나 비는 동안이 유난히 오래 걸릴 때는 엄마가 꼭무당 같았다. 오빠가 인민군이 됐다면 인민군대가 이기길 바라야겠지만유난히 극성스러워진 폭격과 간단없는 박격포탄 소리를 들으면 그 반대의기대로 가슴이 울렁거리곤 했다. 남쪽에서 들리는 포 소리가함포사격소리라는 걸 안 것은 무슨 질긴 인연인지 삼선교 집에서 잡혀간혁명가의 아내의 방문을 통해서였다.
6월 28일 우리 집에서 그렇게 뻑적지근한 축제를 치르고 간 그 남자는그 후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오빠는 그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엄마는 한두 번 그 남자가 거물이었을까 송사리였을까 하고 궁금해하는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아내의 방문으로 그 남자가 그 후 지금까지인천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 정도면거물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매우 초라하고 초췌해 보였고,겁에 질린 듯한 남매를 대동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통해서 인천시가밤낮없는 집중적인 함포사격으로 거의 초토화돼 가고 있다는 걸 알았고인천시를 포기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소리도 들었다. 가족을 먼저 북으로피난시키고 당 고위간부만 끝까지 남아 있으라는 지령이 내려졌다는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북으로 가는 길에 들른 건데, 도대체 우리집이저네들한테 뭐관데 빨랑빨랑 제 갈 길이나 갈 것이지 들렀을까, 하는 이런야박한 생각에 짜증부터 났다. 그러나 엄마는 잠자리랑 먹을 거랑 극진히해서 돌려 보냈다. 다음 날 새벽, 부디 가는 곳마다 귀인을 만나 고생덜하고 평양에 도착하라는 덕담까지 길게 늘어놓으면서 그들을 배웅하는엄마를 보고 나는 화가 나서 엄마의 비위를 긁을 소리를 한마디하고말았다.
"그 사람이 다시 세도 잡을 줄 알구요? 틀렸어요."
엄마는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즉각 생생하게 떠오른 표정은 부정을 탄것처럼 공구하고 꺼리는 기색이었다.
"듣기 싫다. 조 조 방정맞은 놈의 주둥이. 내가 귀인 노릇하지 않고 느이오래비가 어떻게 귀인을 만나길 바라냐, 바라길."
나는 그만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 동네만 남겨 놓고 온 천지가 불바다가 됐다 싶게 시내 쪽 하늘에화광이 충천하고 폭격과 포격이 잠시의 숨돌릴 새도 주지 않고 도시를짓이기는 날 아침에 하필 올케는 산가가 있었다. 첫 손자 볼 때난산이었던 걸 본 엄마는 혼자 당하기가 겁이 났던지 나한테 빨리 숙모를좀 불러오라고 했다. 나도 얼떨결에 밖으로 뛰쳐나오긴 했지만 보통걸음으로 십 분이 채 안 걸리는 숙모네를 한 시간 가까이 걸려서도도달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거리엔 인적이 끊기고 무기들만이 삼지사방에서 그리고 공중에서태산이라도 무너뜨릴 것처럼 포효하면서 맹렬한 살의를 내뿜고 있었다.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만 봤다 하면 병아리를 발견한 매처럼 곧장 땅을향해 내려꽂히는 비행기의 기총소사 때문에 추녀 끝과 가로수 밑만을 골라이동하느라 그렇게 오래 걸렸건만 거의 다 가서 돌아오고 만 것은전찻길을 건널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에 올케는 순산을 해서 아기를 뉘어 놓고 조용히 울고 있었고,엄마는 첫국밥을 짓고 있었다. 또 아들이었다. 뱃속에서 못 얻어먹어서그런지 고구마만한 얼굴에 보이는 건 이마에 굵은 주름뿐이었다. 너무작아서 산고도 없이 쑥 빠져나오더라고 했다.
며칠 안 있어 세상이 다시 바뀌었다. 석 달 동안에 청년들은 씨가 마른줄 알았는데 어디에 그렇게 감쪽같이 숨어 있었는지 머리칼이 길길이자라고 얼굴이 백지장같이 센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와 서로 얼싸안고 또는개선한 국군을 붙들고 미친 듯이 환호하고 춤췄다. 그 기나긴 날들을어떻게 숨어서 견딜 수가 있었을까. 인내력이나 가족들의 보호만으로가능한 일이 아닐 터였다. 우리만 바보 같았다.
그러나 그 동안 끌려가고 죽임을 당한 수효가 속속 드러남에 따라 그엄청남과 잔혹함 또한 하늘 무서운 것이었다. 살아남은 자는 제각기구사일생이나 간발의 차이를 안 거친 이가 없었으니, 천명이 아닌 이 또한없었다. 누구나 한번 사선을 넘고 나면 담대해지고 뭔가 보람 있는 일에몸바치고 싶은 의욕이 충만해지는 법이다. 복수의 정열이 그들을살기충천하게 했다. 게다가 아직도 전쟁 중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게 돼있는 전쟁을 동족끼리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적은 피부색이나언어가 다른 이민족이 아니라 그냥 공산당이었다. 국군과 함께 적의수중에서 우리를 구해 준 유엔군도 고마웠지만 독립된 정부가 있음으로써그런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으니 나라 있음이야말로 얼마나 감격스러운일인지 몰랐다. 내남없이 애국심이 가슴에서 목구멍까지 벅차 올랐다.
그러나 애국은 곧 반공이었다. 애국과 반공은 손바닥의 앞뒤처럼 따로성립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애국하고 싶은 마음들이 급해 많은단체들이 생겨났고 무슨무슨 청년단이니 자위대니 하는 애국 단체가 하는일도 주로 빨갱이 족치기였다. 정부와 경찰, 군인, 헌병 등 치안을 유지할수 있는 기관이나 다 환도했지만 그들의 주업무도 공산분자를 색출하는일었다. 계엄령 하였다. 적 치하에서 부역한 빨갱이들을 유치장이 메어지게잡아들이고 즉결처분도 성행했다. 빨갱이 목숨이 사람 목숨과 같을 수없었다. 저기 빨갱이가 간다는 뒷손가락질 한 번으로 그 자리에서 총을맞고 즉사한 사례도 있었다.
워낙 저지르고 간 일이 엄청났으므로 뒷손가락질해 주고 싶은 사람도많았으리라. 고발과 밀고가 창궐했다. 고발당할까 봐 미리 고발하는 수도있었다. 따지고 들어가면 공산 치하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도 죄가 될 수있었다. 천장 속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다고 해도 누군가가 먹을 걸디밀어 주었으니까 연명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이 아내나 어머니가 여맹에나가 열성분자보다 덜 열렬히 수령을 찬양하고 목청을 드높여 인민가요를불렀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렇듯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에겐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일단은부역의 혐의를 걸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마련이었다. 비록 그들이야말로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정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순순한 양민이었다고해도 말이다. 정상은 참작되지 않았다. 부역에 있어서 한 점 부끄러움도없이 결백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한강다리를 건너 피난을 갔다 왔다는게 제일이었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반공주의자 내에서도 도강파라는특권계급이 생겨났다.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꾀어 놓고떠난 사람들 같지 않게 안하무인이었다. 어쩌면 자기 잘못에 대한자격지심 때문에 선수를 치느라고 그렇게 위세를 부리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일파의 정상은 그렇게도 잘 참작해 주던, 그야말로성은이 하해와 같던 정부가 부역에는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는노릇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참아 내기 힘든 가혹한 고통의 시기가 닥쳐왔다. 그건우리 집안의 일이면서 나 혼자 겪어 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동네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집을 거물 빨갱이라고 여기고 싶어했다. 수복이되고 나서 밖에 나간 엄마를 보고 옆집 사람이 질겁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북으로 안 가고 남아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일 뿐 아니라 기분 나쁜일이었을 것이다. 기분 나쁜 정도가 아니라 시한폭탄을 옆에 끼고 사는것처럼 무섭고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짓을 해서가 아니라 우리의존재 자체가 사회 불안 요소였다. 제거 당해야 마땅했다.
동네 사람의 고발에 의해 우리는 가택수색을 당했다. 가족이 월북하지않은 걸 보면 그 거물도 어디 숨어 있을 거라고 고해바친 듯했다. 의용군중 자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군인이나 경찰의 형제 중에도 의용군으로끌려간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건 그다지 죄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오빠가 의용군 나갔다는 걸 그들에게 믿게 하려고 호소하고애원하고 울고 빌었다. 올케는 산모고 엄마는 늙어 내가 대표로 연행되어온갖 수모를 다 당했지만 구속당하지는 않았다. 유치장이 넘칠 때였고,빨갱이 다루는 전문가의 눈엔 별 것 아니게 보였던 것 같다. 그만한사람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어떤 일에고 전문가보다 비전문가가 더무서운 법이지만 사람 잡는 일에서는 더했다.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후 나는 끊임없이 끌려 다녀야 했다.
고발이 그렇게 잇달았는지 저희끼리 나 하나를 가지고 서로 조리돌리는건지 그 내막은 알 도리가 없고, 또 궁금해할 경황조차 없었다. 별의별청년단체들이 다 나를 보자고 했다. 그들은 나를 빨갱이 년이라고 불렀다.
빨갱이고 빨갱이 년이고 간에 그 물만 들었다 하면 사람도 아니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영자이고 나발이고 인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빨갱이를 색출하고 혼내 줄수 있는 기관은 수도 없이 난립돼 있었고,이웃이 계속 우리를 수상쩍게 여기는 한 난 그들의 밥이었다. 그들은 나를함부로 욕하고 위협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 비하면 그정도는 인권침해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다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돼 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정말로 그들에겐 징그러운 벌레를가지고도 오락거리를 삼을 수 있는 어린애 같은 단순성이 있었다. 다행이그들은 빨갱이를 너무도 혐오했기 때문에 빨갱이의 몸을 가지고 희롱할생각은 안했다. 나는 내가 너무 귀족적으로 자란 걸 다 원망했다. 잘 먹고잘 입고 떠받들여졌다는 소리가 아니라 수모에 길들여질 기회없이 커왔다는 뜻이다.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미친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들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린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여러군데서개별적으로 당한 일들이 한 묶음으로 단순화돼 남아 있어, 구체적인사건들을 추상적으로밖에 생각해 낼 수가 없다. 그건 몸으로 벌레처럼기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폭력에 굴복당했다는 증거겠지만 어쩌랴,그렇게 생겨먹은 게 보통 사람이 안 미치고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의 한계인것을.
숙부네의 몰락에 비하면 내가 당한 건 약과였다. 그만한 사람을 만난것도 엄마가 아직도 정안수 떠 놓고 회구하는 귀인을 만난거나다름없었다. 숙부네는 시월 중순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말똥냄새를 닦아내고 장사를 새로 시작할 준비를 서둘고 있었다. 걱정이 있다면 우리 집걱정이었다. 우리 일만 생각하면 일이 손에 안 접혀 뭔 일이 안 된다고했다. 오빠가 끌려가면서 숙부네 들렀을 때, 뒤따라온 인민군에게 얼른금반지라도 빼주고 흥정했더라면 빼돌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하고 또 했다. 인민군에게는 뇌물이 안 통하는 건 줄 알았는데 뇌물을써서 안 될 일을 되게 만든 경험을 어디서 얻어듣고 만날 그걸 분해하다가숙모하고 다투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금반지 같은 건 남자가 생각하기전에 여자가 먼저 생각이 미쳤어야 하지 않느냐는 숙부의 생트집때문이었다.
그런 숙부네가 역시 동네 사람들한테 고발을 당했다. 정치보위부앞잡이가 되어 호의호식했다는 치명적인 제보에 의해서였다. 숙부하고숙모하고 따로따로 연행됐는데 처음엔 숙모가 즉결처분을 당했다고 했다.
그쪽 동네 사람 중 숙모하고 친했던 사람이 일러 주면서 성신여중뒷산으로 여럿이 함께 끌려가는  걸 봤고 연이어 여러 발의 총소리를들었다고 했다. 그러니 어서 가서 시체라도 거두라는 거였다. 우리말고도그 사람이 일러 주어 시체를 찾은 사람이 있고, 식구가 끌려간 후 소식이없자 행여나 해서 그 산으로 시체더미를 뒤지러 오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의리 없게도 거기를 직접 가보지 않았다. 마침 우리가가택수색이네 연행이네 하도 경황이 없을 때이기도 했고, 집안 내에 사형당할 만한 빨갱이가 또 있다는 게 알려지면 또 무슨 꼴을 당할까 싶은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황망 중에 숙모의 친정 어머니한테 알렸다.
사돈마님이 미친 듯이 달려와 남은 시체를 일일이 확인해 봤는데 없더라고했다.
나중에 숙모한테 들어서 안 일이지만 즉결처분을 단행한 군 장교가여자가 무슨 죽을죄까지 지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여자들만 따로세워 두었다가 경찰서로 넘겼다고 했다. 숙모는 그 후 재판까지 받고1·4후퇴 못 미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동안 친정 어머니가 지성껏옥바라지를 했고 우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처음부터 경찰로 붙들려간 숙부는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사실을 출옥하는 사람편에 숙부가 보낸 편지를 통해 알았을 정도로 우리는숙부에게 옥바라지도 제대로 할 형편이 못 됐다. 숙부의 편지는 내가 왜사형을 당해햐 하는지 모르겠다, 변호사라도 대서 나를 좀 살려 달라는거였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힘이 나 백이 돼 줄 만한 친적이 그렇게도없었던지 우리 집안이 무밑동 잘라 놓은 것처럼 고적하고 보잘 것 없는처지라는 걸 그때처럼 절감한 적도 없었다.
부역한 죄수가 하도 많을 때라 솜옷 한번 차입하는 데도 온종일 걸렸다.
마침 오래 형무관 생활을 한 친척이 있어 그 정도의 편의는 봐 주길기대하고 청을 해 봤는데 어림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말단 공무원이부역자하고 상종하기를 꺼릴 수밖에 없는 세상이란 걸 알면서도 치가떨리게 야속했다. 될 수 있는대로 이른 새벽에 줄을 서려고 엄마는 예전에현저동에서 각별하게 지내던 집을 찾아가 염치없이 하룻밤을 드새곤했는데 그럴 때마다 따뜻한 위로와 대접을 받았다며 없는 사람이 훨씬인정스럽더라도 했다.
그나마의 옥바라지나마 못 하게 된 사이에 숙부는 처형을 당했다. 실은언제 처형을 당했는지 그 날짜도 모른다. 숙부의 편지 한 장 외엔 아무런연락도 없었고, 사형을 집행했으니 시체를 인수해 가란 통고 같은 것도물론 받은 바 없다. 사형을 당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지만, 곧 1·4후퇴가있었고, 그 후 숙부의 존재나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후퇴 전의 제반 상황으로 미루어 집단적으로 처형됐을 것이다. 빨갱이목숨은 파리 목숨만도 못했고, 빨갱이 가족 또한 벌레나 다름없었다.
옥바라지고 뭐고 경황이 없이 된 시초는 시민증에서 시작된다. 보통사람도 양민임을 입증하는 증명서가 있어야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제도가 9·28수복 후에 비로소 생겼는데 그때는 그걸 시민증이라고 했다.
나중에야 대한민국 국민이며 다 받을 수가 있었지만 그 제도가 처음 생긴때가 때이니만치 양민과 잠복해 있는 적색분자를 구별하려는 목적성이강했다. 따라서 아무에게나 발급해 주는 게 아니라 엄격한 심사를 거쳤다.
심사도 받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반장은 시민증 발급 신청서류를집집마다 나누어 주면서 우리 집만 쏙 빼 놓았다. 그건 밀고를 당할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시민증이 없으면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고여길 만큼 그게 사람 노릇 할 수 있는 기본요건이 될 때였다. 반쯤 등신이된 것처럼 모든 환난을 말없이 견디던 엄마도 땅을 치며 탄식을 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해도 너무 하는구나. 서로 고사떡 나누고 비단치마무명치마 안 가리고 서로 손주새끼 오줌 똥 받았거늘. 어찌 이럴 수가."
이사오던 사람마다 팥죽 쒀서 나누고, 고사떡 돌리고, 그러고는 이내 내집 네 집 없이 마실 다니며 남의 손자 오줌 똥도 더러운 줄 모르고 지낸사이라는 걸 엄마는 이렇게 넋두리했다. 아니꼬운 걸 무릅쓰고 심사를해서 시민증을 발급 받고 못 받고는 우리 일이고 신청서라도 줄 수없느냐고 했더니 마침 한 장이 모자라서 우리를 빼 놓았으니 동회에 가서말해 보라고 했다. 반장 하다 인민반장 하다 다시 반장하는위인한테까지도 이런 구박을 받아야만 했다. 신청서 한 장 받는 데까지동회 직원한테 굽실대며 예비심사를 받았지만 정작 본심은 우리를 모르는기관에서 나와서 했기 때문에 엄마하고 올케는 무난히 시민증을 교부받을수가 있었다. 나는 학생이니까 학교에 가서 학생등록증을 받아 오라는것이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대학을 다시 다니게 될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공산치하에서 학교에 나간 것은 명백한 부역이기 때문에 나는 처벌이 무서워학교 앞엔 얼씬도 못 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학마다 학도호국단감찰부에서 학생을 심사하는데 학교에 따라서는 가혹행위도 한다는 소리를전해 듣고 있었다. 각 기관마다 심사가 유행이었고 심사과정에서 별의별일이 다 있었다. 두려웠지만 시민증이 없다는 것은 죽은목숨이나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어떤 수모나 폭력도 견딜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학교에나갔다.
이번엔 유엔군이 문리대를 쓰고 있어서 대학 업무는 동숭동 교수관사에서 한다고 했다. 등교해서 등록서류를 작성하는 걸 옆에서 보고벌써 내가 누구라는 걸 알고 수군댈 만큼 나는 이미 부역한 학생명단에올라 있었다. 그런 형편이니 그날로 등록증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며칠걸려 최종적으로 감찰부장이 심문을 하고 훈계를 하고 학생등록증을발급해 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발급받은 등록증을 제시하니 시민증도 쉽게 나왔다.
지금까지도 그때 문리대에서 받은 심사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간직하고 있는데 그건 시민증을 받는데 도움이 됐기 때문만이 아니라처음으로 인간대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역의 혐의와인간대접의 양립은 두고두고 고마웠고 결과적으로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믿음만은 잃지 않게 도와 주었다. 내가 그런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에더욱 그렇게 느꼈겠지만 부역자 숙청이 한창일 때는 제일 무서운 게사람이어서 사회가 온통 흉흉한 공포분위기였다.
단박 압록강가지 밀고 올라갈 만큼 승승장구할 때 승자가 과연그렇게까지 모질게 굴 필요가 있었을까. 승리의 시간은 있어도 관용의시간은 있어선 안 되는 게 이데올로기의 싸움의 특성인 것 같다.
애국단체는 또 왜 그렇게 많이 생겨났던지, 그들이 내건 구호와성명으로 거리거리의 벽마다 도배를 하다시피 했는데 하나같이 공산당의만행을 규탄하고 적색분자를 남김없이 색출해 이참에 씨를 말려야 한다는격렬하고도 호전적인 것들이었다. 한번은 그런 벽보가운데 '자유주의만세'라고만 쓴 초라한 벽보를 보고 이상 느낌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한참심신이 황폐할 때였는데 그걸 보자 무릎이 스스로 꺾일 만큼 힘이 빠졌다.
이런 수모와 단련을 받으면서도 북쪽에서 설사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준대도 바꾸고 싶지 않은 건 저것 때문이었을까? 수모와 단련 끝에감옥살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 땅을 택할 만큼 이 땅에 더 있는자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래, 참 국가원수를 광신하지 않을 자유가 있었지.
나는 쓸쓸하게 자조했지만, 한편 그 정도의 자유도 태산만한 희망이었다.
북진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우리가 밀리기시작했다. 이번엔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거짓말을 안 하고 작전상후퇴를 할 수도 있을을 미리미리 비췄다. 여름에 놀란 가슴들이 있는지라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은 일찌거니 피난을 서두르고 없는 사람들도 설마설마 하면서도 피난짐을 싸 놓고 있었다. 하루도 정안수 떠 놓고 치성을드리지 않은 날이 없는 엄마와 올케의 실망과 비탄은 이루 말할 수가없었다. 집안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가운데서도 그들을 버텨준 것은희망이었다.
국군이 빠른 속도로 북진하는 동안 탈출하거나 일부러 낙오한의용군들이 귀환하는 일이 많았다. 엄마는 길에서라도 거지 꼴을 한청년을 만나면 혹시 의용군 갔다 오지 않느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하면반색을 하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뭐든지 대접해 가며 이것저것 묻고싶어했다. 남의 일을 내 일 같이 기뻐하고 감탄도 하는 사이에 우리에게도그 같은 기쁨이 있었으면, 하는 희망에 확신이 생기는 듯했다. 끼니 때마다오빠의 밥을 제일 먼저 퍼 놓았고, 바람이 대문을 흔드는 소리에도 생기를섬광처럼 내뿜으며 뛰쳐나가곤 했다. 내 아들이 미처 도망쳐 나오기 전에후퇴를 해버리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란 말인가. 엄마는 상상력속에서도 아들을 죽일 수가 없었으므로 계속 인민군으로 남겨 둘 수밖에없었다.  작전상 후퇴가 서울보다 훨씬 남쪽까지 이를 게 거의 확실시되고있었다. 첫추위가 몰아치는 가운데 서울 인구가 반 이상 줄자 엄마는중대한 결심을 했다. 딸의 운명을 분리시키기로.
"너 혼자라도 피난을 가야 한다."
실은 나도 그럴 작정이었지만 막상 엄마의 입에서 금 날이 떨어지자설움이 북받쳤다. 그건 나만 빼놓고 엄마와 올케와 조카들은 오빠와운명을 같이 해야 된다는 뜻도 되었다. 인민군이 된 오빠는 잘 상상이 안됐지만, 인민군이 된 오빠와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분명했다. 작전상 후퇴라니까 곧 다시 서울이 수복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있다 해도 다들 떠나고 집은 비어 있으리라. 혼자서 피난은 갈 수 있다해도 영이별을 할 각오는 쉽지 않았다. 엄마는 이미 그런 각오까지도 굳힌듯 구메구메 껴두었던 혼숫감 같은 것까지 다 꺼내 내 피난짐을 챙기면서연방 "너라도 좋은 세상 살아야지." 하는 소리를 되풀이했다.
내가 떠나기 전에 오빠가 돌아왔다. 아아, 오빠가 돌아온 것이다. 거지중에도 상거지 꼴이었지만 인민군이 안돼서 돌아왔으니 금의환향 부럽지않았다. 그러나 곧 오빠의 귀향은 우리에게 설상가상이 되었다. 이게꿈인가 생신가 붙들고 울고불고 웃는 것도 잠시. 우리는 너무도 달라진오빠의 태도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떻게 그 몸으로 전선을 돌파하고 먼 길을 걸어 집까지 돌아올 수있었을까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이 못 쓰게 된건 약과였다. 집에돌아왔는데도 조금도 기쁜 기색이 없었다. 자기가 없는 동안에 태어난아들을 보고도 안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그렇다고 무표정한 것하고도 달랐다. 시선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불안하게 흔들리고, 작은 소리에도 유난스럽게 놀랐다. 잔뜩 겁을 먹은표정은 무슨 소리를 해도 바뀌지 않았다.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도 그를안정시키진 못했다. 밤에는 바람소리, 쥐 부스럭대는 소리에도 놀라 한잠을못 잤다. 어디를 어떻게 무슨 꼴을 당하며 왔기에 그 꼴이 되었을까.
죽기를 무릅쓰고 사선을 넘은 무용담도 있으련만 말하지 않았다. 그런흔적도 안 보였다. 오빠는 심한 피해망상을 앓고 있었다.
기가 막힌 엄마는 울부짖다시피 그 동안에 숙부네서 일어난 얘기와우리가 겪은 고초를 쏟아 놓으면서 정신 차리라고 하소연했다. 엄마로서는오빠의 닫힌 마음을 두드리려는 충격요법이었겠지만 오히려 피해망상만가중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어서 피난을 가자고 서둘기 시작했다. 제풀에놀라 머리 먼저 아무데나 쑤셔 박고 덜덜 떠는 증세까지 새로 생겨났다.
"어서 가자 인민군 들어오면 난 죽어, 응 어서 가자." 모든 사람들이떠나고 있다는 급박한 분위기만은 정상인보다 더 예민하게 느끼는 듯했다.
안절부절 못했다. 온 집안 식구가 더불어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만 떠날 계획은 자동으로 취소되었다. 아직은 가족의 운명과 분리될때가 안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다지도 공교롭게 일이 꼬일수가 없었다. 오빠가 서둘지 않더라도 우리도 어서 피난을 떠나고 싶었다.
피난을 못 가고 서울에 남아 있게 된다고 해도 이제 북쪽에 붙는 최악의상상은 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수복된 후에 또 어떤 일을 당할지는 생각만해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속여 놓고 도망갔다 와서도그렇게 으스대던 사람들이, 한사람도 남김없이 피난을 가라고 미리미리한강에 가교까지 설치해 놓고 내모는데도 안 가고 남아있던 사람들을어떻게 취급할 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어서 떠나고 싶었다. 미치게 떠나고싶었다.
그러나 오빠가 한강다리 건너는 데는 문제가 많았다. 또 그놈의시민증이 문제였다. 피난민중에 간첩이 섞여 있을까봐 도처에서 검문이심했다. 후퇴를 앞두고 시민증을 발급한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의용군 갔다 도망쳐 온 사람을 비록 빨갱이로 몰지는 않는다 해도시민증을 발급 받으려면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했다. 오빠가 그걸 견딜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본인도 그건 싫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시민증은빨리 내달라고 졸랐다.
"어쩌면 나 시민증 하나 그냥 내다 줄 빽도 없냐? 우린."
이런 소리까지 부끄러움 없이 했다. 어쩜 우리 오빠가 저렇게까지비굴해질 수 있을까. 피해망상의 결과겠지만 비굴은 피해망상보다 더꼴보기 싫었다. 안보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묶인 한 운명의 줄을 끊을가망은 없었다.
오빠의 백 성화에 올케가 생각해 낸 게 다시 시골 학교였다. 교사들의소박한 사람됨과 시골에서의 교사에 대한 존경심은 기대해 볼 만했다.
올케가 먼저 가서 의논하니 기꺼이 협조해 주겠다고 해서 오빠를 설득해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 머물면서 시민증 대신 도민증을 발급받을수가 있었다. 거기도 거의 다 피난을 떠나고 몇 사람 안 남은 동료교사와동네 사람들의 소박한 위로와 도민증을 손에 쥔 안도감으로 오빠가 약간의소강 상태를 보인 사이에 올케도 집으로 돌아와 피난 갈 채비를 했다.
피난을 하도 벼르고 부러워했기 때문에 도무지 고생길이란 생각이 안들었다. 강 건너, 산 넘고, 들 지나 우리도 마침내 피난을 가게 됐다는 게꿈같이 그저 즐겁기만 했다. 연년생 두 아이를 어떻게 건사해야 얼어죽이지 않을 것이며, 무엇을 어느만큼 어떻게 가지고 가야 우리 식구가굶어 죽지 않을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조금도 걱정이 안됐다. 사실그런 현실적인 짐은 몽땅 내 몫인데도 한강다리만 건너면 모든 문제를떠맡고 안식을 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덮어놓고부풀었다. 피난짐을 피크닉 준비처럼 쌀 수는 없건만 그랬다. 우리는 피난갈 자격도 없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식구는 마음 속 깊이에 피난을 못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묻어 두고 있었다. 그건 적중했다.
최악의 소식이 왔다. 그 무렵 국도 주변의 들판은 밤이면 후퇴하는유엔군과 국군들의 야영장으로 변하곤 했는데 큰 건물도 마찬가지였을것이다. 나중에는 국민방위군과 합쳐졌지만 당시에는 청년방위군이라는 게있었는데 국군과는 어떻게 다른지 모르지만 아무튼 무장도 하고 전투도하고 후퇴도 하는 중이었다. 그 청년방위군이 마침 그 학교에 주둔하게되었고, 숙직실에 머물던 오빠는 따뜻한 구들목을 찾는 장교와 같이 자게된 모양이었다. 아침나절 총기를 분해해 점검하던 사병이 잘못해서 총알이나간게 오빠의 다리를 관통했다는 것이었다.
급보를 받고 달려 나갔을 때 오빠는 구파발의 아직 피난을 못 가고 남아있던 조그만 병원에 방치돼 있었고 부대는 이동한 뒤였다. 진상을 더자세히 알아도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오빠는 우리가 전해 들은 거 이상을말하려 들지 않았다. 다량의 출혈로 창백해진 오빠는 되레 평온해 보였다.
초로의 의사는 친절했지만 그 집도 피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생명에는지장이 없지만 덧나면 골치 아프다고 앞으로 계속해야 할 치료법을 일러주었다. 치료법이래야 간단한 최소한의 것이었다. 의사가 시범으로 관통한총구멍에서 피 묻은 심을 빼고, 소독한 심을 서리서리 한없이 집어넣는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그 구명이 지옥으로 통하는 나락만큼이나어둡고 깊게 느껴졌고, 그 안으로 하염없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공포감을맛보았다.
오빠는 비명 한번 안 지르고 희미하게 웃기까지 했다. 희망을 잃은평온함이 처절해 보였다. 심으로 쓸 가제와 붕대, 소독약, 연고 등 있는대로 우리에게 다 주고 의사도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나고 동네가 텅비었다. 우리가 남의 병원을 독차지한 지 사나흘만에 마지막 후퇴령이내렸다. 이른바 일사후퇴였다. 거의 다 떠난 줄 알았는데 행여나 하고관망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국도를 질주하는 소리와 낮게 뜬헬리콥터에서 마이크를 대고 피난을 독려하는 소리가 어우러져 조그만병원을 들썩들썩 흔드는 것 같았다. 실상 집보다 우리 마음은 더 심하게흔들리고 있었다. 엄마가 먼저 우리의 동요를 대변했다.
"떠나자, 죽는 한이 있어도 가는 데까지 가다가 죽자. 저렇게 내모는데안 가고 있어 봐라. 나중에 우릴 얼마나 못 살게 굴겠니? 그 꼴을 또당하느니 죽는게 낫다.."
병원 뒤뜰에 부실하지만 손수레가 하나 남아 있는걸 봐 두고 있었다.
차를 어어 탈 수 있는건 소수의 혜택 받은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은 다진즉 떴고, 나중판에는 널빤지에다 바퀴만 달아 손수레를 만들어서 아이나긴요한 짐을 싣는게 유행처럼 돼 있었다. 십중팔구는 부실해서 버리고떠났을 손수레다 오빠를 실었다. 엄마하고 올케는 아이를 하나씩 업고보따리를 이고 들었으니 손수레는 내 몫이었다. 내 짐은 천근이었다.
마지막 후퇴의 대열에 무작정 뛰어들긴 했지만 우리는 점점 뒤처졌고 겨우무악재를 넘고 나서 나는 지쳐서 나자빠졌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자, 으응 조금만 더."
엄마가 무자비하게 다그쳤다.
"한강다리가 어떻게 조금만 더야."
나는 쌓이고 쌓인 분노로 당장 폭발할 것 같았다.
"피난도 팔자에 있어야 가지 아무나 가는게 아닌가 보다. 그러니 피난가는 척이라도 해 보자꾸나. 저 동네에 아는 집이 있으니 거기 머물렀다가세상이 또 한 번 바뀌어 사람들이 돌아올 무렵 우리도 피난 갔다 오는것처럼 우리 동네로 돌아가자꾸나. 그 수밖에 없다."
엄마는 줄창 그런 계략을 짜고 있었던 듯 차분하고 조리 있게 말하며거기서 바라보이는 동네를 가리켰다. 우리가 가짜 피난지로 정한 동네는현저동이었다. 다시 현저동이라니.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으면서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것 같던 팔다리에 새로운 힘이 솟았다. 층층다리를통하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좀 돌게 돼 있었지만 손수레 때문에 그길을 택했다. 마지막 피난민이 드문드문 맹수에 놀란 토끼처럼 화들짝뛰어내리는 길을 거슬러 우리는 숨가쁘게 새로운 피난처에 도착했다.
엄마가 점찍어 놓은 집은 숙부네 옥바라지할 때도 신세진 일이 있는바로 그집이었다. 그 집도 피난을 떠나고 집이 잠겨 있었다. 그러나 허술한집일수록 자물쇠도 허술한 법이어서 우리는 힘을 합에 아예 문고리째낚아챘다. 방금 떠난 것처럼 아랫목에 온기가 남아 있었고, 윗목엔 먹다남은 밥상이 그냥 헤벌어져 있었다. 총각김치의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우리는 먼저 양식이 있을 만한 데를 뒤졌다.
우리가 가진 양식은 너무 적었고 어느 세상에서나 목구멍이포도청이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짓에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않았다. 쌀은 없고 잡곡 한 움큼과 밀가루가 반 자루 가량 남아 있었다.
저녁은 새로 짓지 않고 남기고 간 찬밥으로 때웠다. 군불도 뜨끈뜨끈하게지폈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날 건덕지가 없을 지경까지 몰렸을 때의평화로움 안에서 우리는 깊은 숙면에 빠졌다.
새날이 밝았다. 오빠가 오래간만에 잘 잤노라고 기지개를 폈다. 나는앞으로 후퇴한 정부가 수복됐을 때 생각만 하고, 당장에 대해선 대책없는식구들이 답답하고 짐스러웠다. 오빠를 손수레에서 내려놨다고 해서 내짐이 가벼워진 건 아니였다. 나는 바뀐 세상의 눈치를 보려고 조심스럽게문밖으로 나갔다.
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혁명가들을 해방시키고숙부를 사형시킨 형무소도 곧장 바라다 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느껴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독립문까지 빤히 보이는 한길에도골목길에도 집집마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연기가 오르는 집이 어쩌면 한집도 없단 말인가. 형무소에 인공기라도 꽂혀 있다면 오히려 덜 무서울 것같았다.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그게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싶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것이다. 그거야 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이 거대한 공허 뿐이야.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몰아 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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