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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프로이트 Freud

by Casey,Riley 2022.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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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부        잘   못

  <첫 번째 강의>--서론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새로운 요법을 쓸 때,그 요법이 충분히 믿을 만 하다
  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나 노이로제 환자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다
  르다.치료 효과는 환자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주지 시켜야 한다.정신분
  석은 매우 어려운 과정이며 지금 까지의 사고 방식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정신 분석의 교수법과 강의에 따르는 첫 번째 곤란은 의학도로서 사물을 관
  찰하는 데에는 익숙해 있으나 정신 분석에서는 새로운 사고 방식이 필요하다
  .정신 분석 요법에서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 주고 받는 말이 유일한 치료 방법
  이기 때문이다.정신 분석에서 행해지는 대화는 제 삼자가 들어서는 안되며 단
  지 그 상황을 남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정신 분석을 배우는 방법으로 가
  장 좋은 것은 자신의 성격을 연구하는 것이다.그렇게 함으로써 정신 분석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의 어려움은 교육의 결함으로 인한 ,정신생활에 무관심한 자신에게
   있다.정신 생활을 믿지 못하는 제약은 의사로서의 활동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의학 영역에서의 정신의학은 관찰된 갖가지 유형의 정신 장애를 기술하고 임
  상적으로 정리하고는 있지만,정신의학의 순수한 기술적 진술이 과연 과학의
  이름에 해당하는가는 정신의학자 자신도 의심하고 있다.
  세 번째의 어려움은 세상 사람들의 지성적인 편견과 충돌하거나 다른 하나는
   미적,도덕적인 편견과 충돌한다는 것이다.정신 현상 그 자체가 무의식이면
  의식 현상은 정신 생활 중 활동 부분에 불과하다는 일반의 주장과는 달리, 정
  신 분석에서는 의식과 정신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정신 분석에서 말하는 정
  신이란 감정,사고,욕망의 과정이며,정신에는 의식적 사고와 무의식적인 욕망
  이 있다.정신 분석의 업적으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제는 성적 충동이 문
  학적,예술적,사회적 창조에 크게 기여했다고 보는 것이다.문화란 생존 경쟁의
   압력 속에서 본능적 욕구 충족을 희생하여 창출한 것이며,새로이 일원이 된
   각 개인이 사회 전체를 위해서 욕구 충족을 수 없이 희생시켜 이룩한 것이다
  .
  <두 번째 강의>--잘못(1)
  정신 현상 중에서 사람들이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잘못 말하기", "잘못
   읽기",  "잘못 듣기" 등의 '실책 행위',오랜 동안이 아닌 일시적인 '망각',
  그리고 "일시적"이라는 조건이 없는 마지막 하나의 경우에 초점을 맞춘다.이
  러한 하찮은 것에 정력과 관심을 소비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으
  나,이런 주장은 문제의 규모가 크다는 것과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을
   혼동하는 것이다.사소한 증거에서 커다란 증거에 도달할 수 있고, 가망이 없
  을 것 같은 연구에서 커다란 문제에 도달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잘못이 일어나는 조건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며,여러 가지 인자에 의해 주
  의력 분산을 가져온다.주의력 장애는 어떤 경우에나 기질적인 원인이나 심리
  적 원인 때문이다.잘못이나 망각은 정상적인 사람에게도 나타나므로 어떤 행
  위에 기울여진 주의력에 따라서 그 결과가 나타난다고 할 수는 없다.
  잘못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이차적 현상이 많이 있는데 "식자 상자의 요괴" 또
  는 "오식의 악마"라고 불리우는 경우이다.이것은 잘못을 정정하려다 또 잘못
  을 범하는 경우를 말한다.이런 경우를 본다면,주의력 학설만으로는 불충분하
  다는 한계를 느끼게 된다.잘못 말하기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그 과정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다면,생리학적으로는 훌륭한 해석이 될지라도 심리학적으로는
   우연에 불과한 것이다.1895년 메링거와 마이어는 잘못 말하기를 도치,선행,
  여운,혼성,대리의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그들은 하나의 말의 발음과 철자는
  각각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가치가 높은 발음의 신경 지배는 가치가 낮은
  발음의 신경 지배를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잘못 말하기의 작용은,그 자신이 목적하고 있는 정당한 심리적 행위이며,또
  내용과 뜻을 가진 표현으로 해석해도 괜찮다는 것을 뜻한다.잘못이 포함하고
   있는 이 독특한 의미는 ,어떤 경우에는 아주 이해하기 쉽고,뚜렷하다.잘못
  말하기에 있어서 그 대부분이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면, 모든 생리학적,심리학
  적 요소는 무시되어야 하며,잘못의 의의,잘못의 목적을 순수하게 심리학적으
  로 연구해야 한다.

  <세 번째 강의>--잘못(2)
  심리 현상의 '의미'란 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의도 또는 심리 연쇄상의 위
  치를 말한다.잘못 말하기의 사례를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하고자 하던 말과 정반대의 말이 입 밖에 나올 경우
  2.정반대의 것을 말하지 않았더라도 잘못한 말 속에 정반대의   의미가 표현
  되어 있는 경우
  3.의도했던 의미에 단지 제2의 의미를 덧붙이는 경우
  4.잘못 말한 것이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기대에 어긋나는
  경우
  잘못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정신적 행위이며,거기에는 의미가 있고 두 가지
  상이한 의도가 상호작용하여 발생하는 것이다.여기서 두 가지 의도란 방해하
  는 의도와 방해 받는 의도의 두 가지이다. 반드시 이러한 메커니즘이 작용하
  는 것은 아니며 전술한 "주의력 장애"학설과 함께 인정될 때 비로소 충분한
  해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잘못 말하기의 설명에서 흥분,방심,주의력 장
  애 등은 상투어에 불과하고 핵심은 발음,언어의 유사,연상(聯想)등이 중요하
  다.앞에서 말한 두 가지 의도,방해하는 의도와 방해 받는 의도를 확인하는 것
  은 무척 어려운 일이나 방해 받는 의도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악의가 없어 보이는 것 같은 잘못이라는 문제도 한 걸음 더 깊이 파고 들면
  표면과 전혀 다른 새로운 내용이 드러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분석 받
  는 사람이 잘못의 의미를 스스로 설명하지 않을 경우,간접 증거는 다방면에서
   구할 수 있으며 잘못 이외의 현상에서 유추할 수도 있다.
  의도(意圖)의 망각은 세상 일반의 견해와도 일치하는데, 어떤 사람이 약속 같
  은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그런 약속을 실행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정신 분석에서나 세상 일반에서나 마찬가지이다.의도의 망각의 경우 그
   의미는 대개 명료하며 분실이라든가 둔 곳 잊어버리기 등도 당사자에게 있어
  서는 잊고 싶은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더욱이 각종 실책이 계속되는 경우에는
   그 실책 행위의 중요하고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가가 밝혀진다.
  어떤 부인이 유명한 예술가인 자기 형부와 함께 로마를 여행했다.두 사람은
  로마에 사는 독일인에게 환대를 받았으며,형부는 선물로 고대(古代)의 금메달
  을 받았다.그런데 이 부인은 형부가 이 귀중한 메달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그러다가 그녀는 그녀의 형부보다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그런
  데 집에 돌아와서 짐을 풀어 보니 어떻게 된 까닭인지 그 메달이 자기 짐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부인은 곧 형부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가 무심코 메달
  을 가지고 왔는데,내일 로마로 우송하겠다고 알렸다.그런데 그 다음날,메달을
   어디다 두었는지 아무리 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우송하지 못했다.부인
  은 자기가 실수하게 된 것은 이 메달을 자기가 갖고 싶어하는 생각 때문이라
  는 것을 깨달았다.

  <네 번째 강의>--잘못(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잘못에는 하나의 의미가 있으나, 모든 잘못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일상 생활에서는 어느 정도의 범위에까지만 정신
   분석학적 견해를 적용할 수 있음을 알아 보았다.실책 행위라는 것은 심리적
   행위이며,두 가지 의도의 간섭으로 일어난다는 가설에서 시작하는 것이므로
   위의 적용 범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잘못은 '심리적 행위'라는 주장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우리가 어떤 현상을
   정신 과정이라고 부를 때는, 정신 과정의 배후에 있는 일련의 기질적인 작용
  이 있는 다른 정신 과정에서 직접 유도된 것을 말한다.잘못과는 달리,우발 행
  위와 징후적 행위(徵候的行爲)는 동기,의의가 없고 중대성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도 모두 의미가 있어서 연구 가능하다.

  방해하는 의도에 관해서
  1.다른 의도의 방해자로서 나타나는 의도는 대체 어떤 의도인가
  2.방해하는 의도는 방해 받는 의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둘째의 의문부터 본다면,잘못 말하기에서는 두 의도가 내용상으로 서로 반대
  ,정정(訂正),보충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나 아무런 관계도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첫째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가지각색이지만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
  다. 방해하는 의도를 말하는 본인이 잘 알고 있고 잘못 말하기 직전에 자신도
   문득 깨닫는 경우
  ,  말하는 사람은 방해하는 의도가 자기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잘못 말하기 직전에 자기 마음 속에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
  , 방해하는 의도의 해석을 잘못 말한 본인이 부정하는 경우의 세 가지이다.
  잘못이란 의미와 의도를 알아볼 수 있는 심리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두 가지
  의 서로 다른 의도의 간섭으로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이것만으로 잘못을 모두
   설명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아직도 수 많은 의문이 남아 있는 것이다.잘못을
   더욱 깊이 연구해 나간다 해서 이 미지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지는 않으며
  잘못과는 다른 정신 생활의 잘못 이외의 연구되지 않은 영역을 탐구하는 일이
   필요하다.지금까지의 실례로 심리학이 가진 목표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
  었으며 단순히 현상을 묘사하거나 분리하지 않고,정신의 한 숨겨진 부분의 힘
  이 작용하여 나타난 것 ,또는 협력하고 반발하면서 작용하는 목적 추구 의도
  의 발현으로 본 것이다.
  잘못 말하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었지만,몇 가지 덧붙인다면 감정 현상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일부러 잘못 말하는 사람은 없다.자기가 잘못 말하
  면 흔히 흘려 버리지만,남이 잘못 말하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전염성(傳染
  性)이 있다고 할 수 있다.즉,남의 잘못 말하기에 참견하면 반드시 자기 자신
  도 잘못 말하게 된다.잘못 쓰기의 경우도 잘못 말하기와 같은 메커니즘을 가
  진다. 잘못에 대한 정신 분석의 학설이 실제로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잘못 읽기는, 그 심리 상태가 잘못 말하기나 잘못 쓰기와는 확실히 다른 것이
  다.잘못 읽기의 경우, 서로 충돌하는 두 의도 중의 하나는 감각자극이기 때문
  에 이 의도는 집요하지 않다.의도의 망각은 매우 뚜렷하므로 그 해석에 항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의도를 방해하는 의향은, 항상 그것과는 반
  대의 의도, 즉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의도와 그 수행 사이에 심리 상태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서 그 결과 의도의 수행이 문제되지 않게 되었을 때는
   의도를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은 실책 행위가 아니다.
  어떤 의도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의도에 도전하는 '반대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반대 의지는 연구 결과에 의하면 직접의 반대 의지와 간접의 반대
  의지로 구별할 수 있다.'간접'의 반대 의지는 정상적이며 건강한 상태에서도
   나타난다.고유명사나 외국 이름 및 외래어 등을 잊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
  름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반대 의도 때문임을 알 수 있다.이
  름을 상기하는데 반항하는 의도의 동기로서, 여기에 하나의 원칙이 제시되는
  데 어떤 일이 불쾌한 감정과 결부되어 있어, 그것을 상기하면 불쾌감이 떠오
  르는 기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그러나 이름의 망각은 정신 생리적
  (精神生理的)으로 설명하기가 가장 쉽다.불쾌라는 동기가 없을 경우에도 이름
  의 망각은 일어난다.
  정신 생활이란 대립하는 의도의 투기장이며, 정신 생활은 한 쌍의 대립과 모
  순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것을 한시 바삐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의도
  의 존재를 증명했더라도 그에 대립하는 의도를 소홀히 한다면 아무 소용도 없
  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대립하는 것이 어떻게 하여 나란히 있는가, 한쪽
   의도는 어떤 작용을 하고, 다른 한쪽 의도는 어떤 작용을 주느냐 하는 것이
  다.
  물건의 분실이나 둔 곳 잊어버리기는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모든 경우의 공통점은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고 싶다는 소망이다.반
  성과 자책감으로 분실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요컨대 분실로서 물건을 멀리
  하고자 하는 의도를 통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실수도 단념해야 할 소
  망을 채우기 위해서 잘 이용되는데, 이 경우 의도는 다행히도 우연이라는 가
  면하에 존재한다.
  이것으로 잘못이나 실책 행위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을 다한 것은 아니다. 그
  러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종래의 사고방식 속에 새로운 학설을 받아들
  일 자리가 준비되었다면 족하다.

  제 2 부       꿈

  <다섯 번째 강의>--여러 난관과 예비적 시도
  노이로제 연구의 준비로서 꿈의 의미를 증명하려는 것이다.꿈의 여누는 노이
  로제 연구의 가장 좋은 대상일 뿐만 아니라, 꿈 자체가 노이로제 증상이고,
  게다가 꿈은 건강한 모든 사람에게도 나타난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대개
  의 꿈은 일반적으로 기억해 낼 수가 없으며, 사소한 단편적인 것까지 잊어버
  린다. 그러므로 이러한 재료를 해석하는 것이 과학적 심리학이나 환자의 치료
  에 기초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비판을 깊이 있게 받아들인다면 회의에 빠지게
   된다.꿈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바로 꿈의 다른 특징들과 마찬가지로 꿈의 한
  특징인 것이다.
  대개 고대 민족은 모두 꿈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여 실제적인 이용가치가 있
  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후 어떻게 하여 해몽이 쇠퇴하고, 굼이
  신용을 잃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꿈에 대한 흥미가 차츰 미신으로 떨어지고 무
  지한 사람들의 손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 원인일 것이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 그 후에 다시 견실한 꿈이 나타나는 식의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정신이라는 것은 그렇게 빨리 잠의 깊이를 바꾸지 못한다.
  자명종의 소리에 반응한 세 가지 꿈을 보면 이런 꿈에 공통적인 것이 있다.
   결말이 어제나 하나의 소리에 유래하고 있으며 눈을 떴을 때 그것이 자명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점이다.이에대한 정확한 대답은 할 수 없으
   자의적(恣意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이 수면을 방해하고 정신을 자극하여 꿈을 꾸게 하느나는 문제가 안된다
  . 그것이 만일 항상 외부의 감각 자극이라고 할 수 없다면 외부 자극 대신 내
  부 기관에서 비롯되는이른 바 내장 자극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꿈 속에서
  는 내부 자극이 외부 자극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
  국 내장 자극설도 꿈이 자극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이라는 것 밖에 더 이상 설
  명해 주지 못한다. 꿈은 받은 자극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 뿌만 아니라 그 자
  극을 가공하고 채색하고 거기에 이야기를 만들어 그것을 다른 무엇으로 대치
  하려고 한다.이것이 꿈의 작업(Traumarbeit)의 한 측면이다.

  <여섯 번째 강의>--꿈 해석의 가설과 기법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큰 방침으로서 '꿈이란 육체적 현상이 아니라 심리현상
  '이라는 가설을 세우고자 한다.꿈이란 꿈을 꾼 사람의 작품이며 표현이지만
  우리로서는 도무지 짐작을 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작품이며 표현인
   것이다. 또 하나의 가설은 '인간에게는 자기가 알고 있는 줄 모르면서도 알
  고 있는 심적 사상(心的事象)'이 있다는 것이다. 일부의 잘못에 관한 연구에
  서 현상(現象)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려면, 본인이 전혀 모르는 정신 과정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시사를 받았다.
  최면 상태와 수면 상태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실제로 최면은 인공적 수면
  (人工的睡眠)인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암시를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 꿈을 꾼 사람에게 질문 했을 때 떠오르는 연상은 단 하나이며, 그 외에 다
  른 연상은 없다는 것을 사실로서 인정하는 것이 좋다. 떠오른 하나의 연상을
   출발점으로 하여 연상의 흐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이런 연상은 이
  미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며, 마치 꿈의 요소에 대한 연상에 묶여 있듯이
   묶여 있는 것이다.갑자기 떠오르는 멜로디도 어떤 관념의 흐름에 의해서 규
  정되며 , 거기에 종속되어 있다.자유로이 떠오른 연상이 이와 같이 규정되어
  , 일정한 연쇄에 이루어서 배열되어 읨는 것이다' 혹은 '무의식적이다'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꿈이란 어떤 다른 것, 즉 무의식의 왜곡된 대용물이며, 이 무의식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꿈을 해석하는 과제가 된다. 그런데 꿈의 해석을 연구하는 동안에
   반드시 지켜야 할 세 가지 규칙이 있다.
  1. 합리적이거나, 불합리적이거나, 선명하거나 결코 꿈의 표면적인 뜻에 개의
  해서는 안된다.
  2. 꿈의 어떤 요소이건 그 대용 관념이 떠오르도록 연구의 초점을모아야 한다
  .
  3.목적하는 숨은 무의식이 저절로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꿈을 꾼 사람이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못마땅해 할 필요는 없다.꿈을 꾼 사람
  이 예비지식이 없으면 없을 수록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꿈의
   해석이란 이에 반항하는 하나의 저항을 어기고 행하여지는 것이며 비판적 항
  의는 이 저항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우리는 저항이라는 역학적 관념
  을 끌어 넣는 순간에 이 저항이라는 인자가 양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꿈을 골라서 기법을 시험하고, 이에 대한 지금까지의 기대가 충족되는지
   어떤지 살펴 보는 것이 좋다. 문제를 쉽게 만드는 방법은 꿈 전체를 해석하
  는 대신 해석을 꿈의 개개 요소에 한정시키는 것이다. 꿈이 이야기하는 것을
   꿈의 현재내용(顯在內容)이라고 부르고, 연상함으로써 나타나는 감추어진 것
  을 꿈의 잠재의식(潛在意識)이라 부르자.해석하는 일이란 단편의 의미를 완전
  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여덟 번째 강의>--어린이의 꿈
  어린이의 꿈에서 우리는 매우 쉽고 확실한 꿈의 본질에 대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1.어린이의 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분석이나 또한 우리의 기법을 이용
  할 필요도 없으며,또한 자기 꿈을 이야기 하는 어린이에게 질문할 필요도 없
  다.
  2.어린이들의 꿈들은 알기 쉽고 천진 난만한 심리적 행위이다.
  3.어린이들의 꿈에는 왜곡이 없었으므로 해석이 필요치 않다.
  4.어린이의 꿈은 전날의 사건에 대한 아쉬움의 반응이다.
  5.꿈이 심리적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면 꿈은 이 심리적 자극을 해소시켜 주는
   데 그 가치가 있다.
  6.꿈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소망이 꿈을 야기시키는 것이며, 이 소망의 충
  족이 꿈의 대용이라는 것이다.
  7.꿈에서는 방해받는 의도란 바로 잠자고자 하는 의도이다. 방해하는 의도는
   심리적 자극, 즉 반드시 제거되기를 갈망하는 소망이다.
  8.백일몽은 분명 소망의 충족이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공명심에 찬 소망
  이나 성적인 소망의 충족이다.그 왜곡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셋째, 그 왜곡
  은 어째서 그와 같은 형태를 갖는가 하는 것들이다.
  어떤 꿈의 해석에 있어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점은 꿈이 몇 군데서 탈락, 그
  것도 기억의 탈락이 아니라 내용의 탈락이 있다는 것이다. 말살된 대목이 있
  는 것은 그 부분을 억제하는 동기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와
  비슷한 일을 찾으려면 굳이 먼 곳을 찾을 필요 없이 시험적으로 아무 정치 신
  문이나 들여다 보면 된다. 신문의 군데군데에 원문이 삭제되어 백지인 채로
  되어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검열 기관의 노여움을 산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
  으므로 삭제된 것이다. 이처럼 꿈의 일부를 왜곡시ㅋ는 것을 우리는 '꿈의 검
  열'이라고 부르는데 현재 내용에 탈락이 있는 부분은 언제나 이 검열 탓인 것
  이다.
  이와 같이 재료를 생략하고 변형하고 고치는 일이 꿈의 검열 의무이며, 꿈에
   왜곡을 일으키는 수단이다. 기실 꿈의 검열이야말로 꿈을 왜곡시키는 장본인
  의 하나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수정과 배열 고치기를 '대치'라는 이름으로
  총괄한다.
  검열의 대상이 되는 의도들은 내적인 입장에서도 설명이 되어야 한다. 이 의
  도는 어디까지나 비난할 만한 성질의 것으로 윤리적, 사회적, 미적 관점에서
   혐오스러운 것이며,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생각지 않으려 한다거나 혐오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하게 하는 것들이다. 특히 검열을 당하기 때문에 꿈속에 왜
  곡되어 나타나는 소망은 방종스럽고 체면도 없는 이기주의의 표현이라 하겠다
  .그러나 내용이 악에 넘친다고 해서 꿈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된다.꿈은 무해
  한 기능, 아니 오히려 수면이 방해되지 않도록 하는 유익한 기능을 가졌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 내용의 흉악성은 꿈의 본질이 아니다. 인가의 내
  면에 있는 악에 관해서 우리가 상당히 길게 역설하는 까닭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부인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생활은
   물론 개선될 리 없으며 또한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우리가 일방적인 윤리
   평가를 버릴 때야말로 인간성에 있어서 선과 악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공식
  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열 두 번째 강의>--꿈의 실례와 그 분석
  이따금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친구의 꿈을 연구하기도 하고, 정신분석의 연
  구의 연습으로 한동안 자기 꿈을 연구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분석 치료를 받
  고 있는 노이로제 환자의 꿈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가장 쉽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꿈의 상징이며, 다음은 꿈의 퇴행 묘사의 특징들이다.
  "1910년 7월 13일 새벽에 꾼 꿈이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튀빙겐 거리를 지나
  가는데, 갈색 사냥개가 맹렬히 쫓아와서 내 발 뒤꿈치를 물었다. 나는 좀 더
   달린 후에 자전거에서 내려 돌 층계에 앉아, 발꿈치를 꽉 물고 놓지 않는 개
  를 떼어 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개가 문 사실과 장면 전체가 조금도 불쾌하지
  가 않았다. 마침 맞은 편에 두 명의 중년 부인이 앉아 있었는데 나를 바라보
  며 웃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전에도 자주 경험한 것처럼
   잠에서 깨려고 하는 순간 여태까지의 꿈 전부가 또렷해지는 것이었다."
  이 꿈을 꾼 환자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했다.
  "나는 최근에 한 여성이 좋아졌으나 거리에서 거니는 것을 바라만 볼 뿐 접근
  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 여성이 데리고 있는 사냥개를 매개로 해서 접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개를 매우 좋아했고,
   그 여성도 역시 개를 좋아하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평소에 구경꾼이 깜짝 놀랄 만큼 개싸움을 잘 말렸다고 덧붙였다
  . 즉 그가 반한 처녀가 언제나 이 특이한 사냥개를 데리고 다녔음을 알 수 있
  다. 그런데 처녀는 현재몽에서 말살되고, 다만 처녀를 연상시키는 사냥개만이
   현재몽에 남아있다. 꿈 속에서 그를 바라보며 웃어 보인 중년 부인은 아마
  처녀를 나타낼 것이다. 꿈 속에서 그가 자전거로 달리고 있는 것은 그의 경험
  의 직접적인 되풀이로서 그가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만 개를 데리고 있는 그
   처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열세 번째 강의>--꿈의 태고성과 유아성
  꿈의 작업에서의 잠재의식을 어떤 다른 표현 양식으로 바꾸는 데에서 이 표현
   양식은 인류가 오래 전에 극복한 지적 발달의 한 단계, 다시 말해서 상형문
  자 상징 관계의 시대, 아마도 우리의 사고 언어가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에 사용되던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의 작업의 이와 같은
   표현 양식을 태고적, 또는 퇴행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꿈의 작업에 의하여 우리가 거슬러 올라가는 원초 시대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개체'의 원초 시대, 즉 유아기이며, 또 하나는 '계통발생적' 원초 시
  대이다. 잠재하는 심적 과정들의 어느 부분이 개체의 원초 시대에 유래하며,
   또 어느 부분이 계통 발생적 원초 시대에 유래하는지를 과연 구분할 수 있을
  까 하는 문제에 대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개체가 한번도 배운 적이 없는
  상징 관계는 분명히 계통발생적 유산으로 계승되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후일에 경험하는 인상의 재료에 대해서 우리의 기억은 마치 선택하는 듯하다
  .요컨대 기억은 중요한 것은 보존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떨쳐 버린다. 그러
  나 보존되어 온 유아기의 기억은 이런 선택을 받지 않는다.유아기의 기억이
  반드시 유아기의 중요한 체험은 아니고, 중요하다고 여겨질 체험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흔히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지난 번에, 어린 아
  이라도 중요한 인상만이 기억 속에 남는다는 결론을 얻었는데 이 중요한 인상
  은 이미 알고 있는 압축 작용, 특히 대치 작용으로 겉보기에는 중요하지 않은
   것같이 나타날 뿐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유아기의 기억을 '은폐 기억'이라
  고 부르는 것이다. 이 유아기의 인상들은 실제로는 잊혀진 것이 아니라 잠재
  하고 있는, 즉 무의식의 세계였던 것이다.
  우리는 소망의 유래를 지적하기에 주저하지 않아도 된다. 이 나쁜 소망의 충
  동은 과거, 흔히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에 유래하고 있다. 이 소망 충동이 있
  다는 것을 현재는 알지도 의식하지도 않지만, 전에는 그런 소망이 있다는 것
  을 알았고 의식했었다는 증명이 된다.
   계속해서 배척 소망을 문제 삼아 그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우리는 이 소
  망을 대개의 경우, 꿈을 꾼 사람의 끝없는 이기심 탓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 배척 소망이 바로 꿈을 꾼 사람의 끝없는 이기심 탓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 이 배척 소망이 바로 꿈의 형성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누군가가 우
  리 인생을 막는다면--이것은 인간 관계가 복잡해지면 많아지는데--꿈은 그 방
  해자가 아버지이건 어머니건, 가령 형제자매이건 부부건 그 사람을 죽이려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본성이 이처럼 악한 것일 수 없다는 생
  각에서 이런 식으로 꿈을 해석하지 않았던 것에 불과하다.그러나 이와 같은
  소망의 기원을 과거에서 찾게 되면 이와 같은 이기심이나 소망 충동이 근친자
  에게 향해지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개인의 과거의 한 시기를 알 수 있
  게 된다. 이 어느 시기란 바로 유아기의 초기이다. 대개의 경우는 현저한 이
  기주의의 소질, 즉 이 소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평소의 관찰에 의하면 양친과 다 큰 자식들 사이의 감정 관계가 사회에 의해
  서 세워진 이상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으며, 그 감정 관계에 얼마나 많은 적의
  가 작용하는가, 그 감정 관계에 얼마나 많은 적의가 작용하는가, 그 감정관계
  에 효성이나 사랑의 충동을 덧붙여 억누르지 않는다면 적의가 얼마나 나타나
  기 쉬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이 적의의 동기가 무엇인가는 잘 알려져 있
  는데, 동성이 서로 반발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딸은 어머니를 자기
  의 의지를 속박하고 성적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의 요구를 지키게 하는 사명
  을 지닌 권위로 인정한다.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
  는 사회적 구속의 화신(化身)이다.아버지란 아들의 자유로운 의지 활동과 어
  릴 때의 성적 향락 및 돈의 사용 등을 방해하는 존재일 뿐이다.그러므로 많은
   사람의 꿈 속에서 양친, 특히 동성의 부모를 배척하려고 하는 소망을 발견했
  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 소망은 깨어 있을 때도 존재해서 어떤 다른
   동기에 의해 가장되며 의식되기조차 한다고 해도 괜찮다.
  어린이에게 성생활이 없다든가, 성욕은 사춘기에 성기가 성숙해야 비로소 나
  타난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그 성생활은 어른으로서 정상으로 간주되는 것과
  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그런데 우리가 어른으로서 "도착"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상인의 성생활과 다음과 같은 정에서 다르다. 1.종의 한계를 무시하
  는 것 2.불결이라는 제한에 무감각하다는 것 3.근친상간이라는 제한을 깨뜨린
  다는 것 4.동성애를 보통으로 생각하는 것 5.성기에 의해서 행해지는 역할이
   다른 기관이나 신체의 다른 부위에 대치되는 것 등이다. 어린이는 성기에서
  만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몸의 다른 여러 부위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다
  . 따라서 그 부위가 성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다형성 도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린이가 이 모든 충동을 아주
   조금밖에 행위에 나타내지 않는 까닭은 후년에 비해서 이와 같은 충동의 강
  도가 약한 때문이며, 또 한편 교육이 어린이의 성적 표현을 강하게 억제하기
   때문이다.
  금지된 소망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근친 상간의 소망이다.인간 사회에서
   이와 같은 성교가 얼마나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가, 떠 얼마나 강력하게 금
  지되어 있는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정신분석 연구 결과, 근친 상간적인 애
  정의 선택은 누구에게나 처음에 있다는 것, 그리고 후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에 대해 저항이 나타나는데, 그 저항이 어디서 유래하는가는 개인 심리학
  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구 결과를 두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꿈이 하는 일의 퇴행성은 형식적인 동시에 실질적이기도 하다. 이 퇴행성에
   의하여 우리의 관염은 원시적인 표현 양식으로 번역됨은 물론 원시적인 정신
   생활의 모든 특징, 즉 자아의 그 예전의 강대성과 성생활의 원초적 충동들이
   다시 소생되며, 만일 상징 관계를 태고적인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면 인류의
   태고의 지적 소산도 다시 눈뜨게 한다.
  2.오늘날의 우리는 일찍이 우리의 지배적이고 독재적이었던 이 옛 유아적 특
  징을 모두 무의식 속에 넣어 무의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고쳐 확대해야 한
  다. 무의식은 독자적인 소망 충동, 독자적인 실현 양식, 보통의 발동하지 않
  는 독자적인 심적 메커니즘을 가진 특수한 심적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열 네 번째 강의>--소망 충족
  어린이의 꿈에서 우리는 꿈의 작업의 목적은, 잠을 방해하는 심리적 작용을
  소망 충족으로 제거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왜곡된 꿈은 그 꿈을 해석하
  기 전에는 어린이의 꿈과 같다고 말할 수 없었으나, 우리의 예상은 처음부터
   왜곡된 꿈이라 하더라도 어린이의 꿈과 같은 견지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
  이었다. 소망 충족의 학설을 부정하고자 하는 태도는 분명히 꿈의 검열의 결
  과에 지나지 않는다. 즉, 검열을 받은 이 소망을 부정하는 태도의 대상적 발
  로인 것이다.
  꿈이 소망 충족이라면 꿈속에 고통스러운 감정이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여기에는 세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다.
  1.꿈의 작업이 소망 충족을 이루는 데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결과, 꿈의 잠재
  의식의 고통스러운 감정 일부가 현재몽에 남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 꿈을
  분석해 보면, 이와 같은 꿈의 잠재 의식은 그것에서 만들어진 꿈보다 훨씬 고
  통스러웠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2. 소망 충족은 쾌감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지만, 누구에게 가져다 주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것인데, 꿈을
   꿈 사람은 자기의 소망에 대해서 아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꿈을 꾼
   사람은 자기의 소망을 비난하고 검열한다. 즉, 꿈을 꾼 사람은 그 소망을 인
  정하지 않는다. 또한 소망의 충족은 꿈을 꾼 사람에게 아무런 쾌감도 가져다
   주지 않고, 도리어 불쾌감을 느끼게 해 준다. 양쪽의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한쪽의 소망 충족은 다른 쪽의 사람에게는 불쾌한 것이 된다는 것이
  다. 불안한 꿈은 억압된 소망의 공공연한 충족이다. 불안은 억압된 소망이 검
  열에 대항해서 그 소망 충족을 관철하려고 한 증거이다. 억압된 소망 충족은
   검열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 원인이며, 방어
  가 개시되는 원인이다. 소망은 어떤 뚜렷하지 않은 원인으로 언제 강해질지
  모르지만, 우리는 앞에서 이미 검열의 강도는 꿈마다 다르다는 것, 또 꿈의
  요소마다 그 엄격함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낮 동안은 검열관의
  무거운 압력이 이들 소망을 억누르고 있어 일반적으로 소망은 그 작용을 발휘
  하지 못한다. 그러나 밤에 금지되어 있는 소망이 활동하는 것은 검열의 간섭
  력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3.자기의 소망에 반항하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무언
  가로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두 인물의 합체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견해를 상기
  한다면, 왜 소망 충족에 의해 매우 불쾌한 징벌이 행하여지는가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소망 충족,불안 실현, 징벌 실현이라는 세 가지에
  더 덧붙일 것은, 불안이란 소망과는 대립물이며, 이 대립은 연상에서는 서로
   특별히 밀접한 관계가 있어 이미 말한 것처럼 무의식 속에서 합치한다는 점
  이다.
  꿈이 우리가 앞에서 열거한 의도, 경고, 숙고, 준비, 또는 어떤 과제를 해결
  하는 시도 등을 대리할 수 있으며, 또 그것들에 의하여 대리될 수 있다는 것
  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꿈의 원천이 되는 잠재의식
  에만 적용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 꿈의 작업은 낮의 잠재의식에 속하지
  않지만 꿈 형성의 원동력인 그 무엇을 항상 그 위에 덧붙인다. 꿈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이 부가물은 무의식적인 소망이며, 이 소망은 채우기 위해서
   꿈의 내용이 변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꿈 속에 나타난 관념만을
   고려한다면 꿈은 의도,경고,준비 등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꿈의 잠재의식에 관하여 중요한 것은 1.잠재의식은 꿈을 꾼 당사자에게는 의
  식되지 않으며 2.이 잠재의식은 완전히 합리적인 것이므로 꿈을 일으키는 자
  극에는 명백한 반응으로서 이해될 수 있고 3.잠재의식은 어떤 심리적 충동,
  또는 지적 조작으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낮의 잔재 위에 무의식에 속해 있던 것, 강력하긴 하지만 억압된 어떤 소망
  충동이 첨부된다. 그리하여 이 소망 충동만이 꿈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낮의 잔재에 소망 충동이 작용하여 꿈의 잠재의식의 다른 부분이 형성된다

  <열 다섯 번째 강의>--의문점과 비판
  1.꿈의 해석 작업의 여러 결과는 분석 기법을 아무리 정확히 지킨다 하더라도
   불확실한 데가 많으므로, 현재몽을 잠재의식으로 번역하는 시도는 실패로 끝
  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마 다음과 같은 점이 지적될 것이다
  . 첫째, 꿈의 어떤 요소를 본래의 의미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상징으로 해
  석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것은 상징으로서 사용된 사물도 그 자체의
   의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쪽인가를 결정하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이 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오로지 해석자의 자의에 맡길 수 밖
  에 없다. 둘째, 꿈의 작업에서는 상반되는 것이 도리어 일치되는 것이므로 어
  떤 꿈의 요소를 그대로의 의미로 풀이할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의 의미로 풀
  이할 것인가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셋째, 꿈에서는 갖가지
   전도가 사용되어 있으므로 해석자는 자기 마음대로 그와 같은 전도를 억지로
   적용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미 들은 적이 있는 것, 즉 어떤 꿈에 대해
  서 발견된 해석이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이라고 확신 되는 일은 드물다.
  꿈의 작업이란 꿈의 관념을 상형문자와 비슷한 원시적인 표현 양식으로 번역
  하는 일이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꿈의 작업에서는 상반되는 것이 오히려
  일치하는데, 이것은 이른바 '원시어의 대립적 의미'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태고어의 문자와 같이 태고어의 표현 체계에는 현대어에서는
  허용되지 않을 것 같은 많은 애매함이 발견된다. 그러나 꿈의 표현 체계는 이
  들 고대 문자보다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다. 왜냐하면 고대어나 고대 문자는
   하나의 전달 수단으로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방법
  , 어떤 보조 수단을 사용하면 더 잘 이해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꿈에는 이 특징이 없다. 꿈은 누군가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꿈은 전달의 수단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이해
  되지 않는 데에 꿈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꿈을 이해할
   수 있는가는 숙련과 경험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상당한 정도까지 할 수 있다
  고 본다.
  2. 제2의 의문점은, 우리의 꿈의 해석술로 풀이한 결과는 부자연스럽고 어색
  하며 억지처럼 보이는, 무리하고 우스꽝스럽고 장난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이
  다. 누군가가 심층 심리학의 미묘한 문제에, 그 사람의 첫 인상으로 재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판단 내리는 것을 보면 확실히 통쾌할 것이다. 그의 눈에는
   모든 해석이 고의적인 억지로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해석이 그의 마음에 들
  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거짓이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비평가는 생
  각할 지도 모른다. 꿈의 잠재의식과 그 현재적인 대용물과의 관계는, 가장 거
  리가 멀고 기괴하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러운 면을 띠는 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예에서 풍부한 경
  험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을 혼자 힘으로 끌어내는 것은 물론 불가
  능하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이 둘의 연관을 추측할 수는 없다. 꿈을
  꾼 사람이 그 직접적인 연상으로 단숨에 꿈의 의미를 해석해 주든가, 또는 꿈
  을 꾼 사람이 우리에게 많은 재료를 주어 특별한 통찰력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해결되거나 하는 것이다.
  3.오랜 세월 동안 꿈의 해석에 전념해 온 정신 분석가들 중에 꿈에 대한 우리
  의 견해에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특별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이처럼
   풍부한 선동성이 있는 말이 새로운 잘못을 저지르는 데 이용된 것은 실로 당
  연한 일이었다. 이 주장은 개념의 혼동과 옳지 않은 일반화의 결과로서, 꿈의
   의학적 견해와 별 차이 없는 그릇된 여러 주장이 생겼다. 꿈은 현재에 적용
  하고자 하는 시도와 장래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를 다스린다. 즉, '
  예상 경향'을 추구하고 있다. 이 주장은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꿈과 그 꿈의
   잠재의식을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꿈의 작업'의 무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소수의 편리한 예만을 근거로 부당한 일반화를 시도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즉, 어느 꿈이라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우리의 견해처럼 이른바 정신 분석적 해석이며, 또 하나는 이른바 본능적 경
  향을 무시하고 정신작용의 표현을 목표로 하는 신비적 해석이다.
  4.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환자가, 자기를 치료하는 의사의 학설에 자기 꿈의
  내용을 맞추려고 했기 때문에 꿈 연구의 객관적 가치가 의심을 받던 때가 있
  었다. 꿈을 일으키는 기연(機椽)이 되는 낮의 잔재는 깨어 있을 때 강하게 흥
  미를 끈 것의 나머지이다. 사람은 굼을 실험적으로 만든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꿈의 원료의 일부를 꿈 속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 3 부   노이로제의  일반이론

  <열 여섯 번째 강의>--정신분석과 정신의학
  노이로제라는 현상의 정신분석적 견해에 관하여 알아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징후 행동(徵候行動)을 알아보기로 하자. 징후 행동은 하나의 동기
  , 이를테면 하나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며, 또 그것은 그 어떤 정신 연쇄에 속
  하고, 또 그것은 중요한 정신 과정의 조그마한 표시로서 결코 우연이 아니라
  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이와 같이 표면에 나타난 과정은, 그것을 행한 당사
  자의 의식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징후 행동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지만
  , 이 증상은 중요한 의미로서 우리에게 부딪쳐 온다. 증상은 심한 자각적인
  고뇌를 수반하고 있으며, 객관적으로는 가정의 공동 생활을 위협한다. 그러므
  로 증상은 정신의학적인 관심의 좋은 대상이 된다. 정신과 의사는 먼저, 증상
  을 본질적인 특징에 의해 분류하려고 한다. 망상이 현실과의 관계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 망상은 현실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망상은 무의미한 것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심장하고 훌륭한
  동기를 가진 것이며, 환자가 겪은 강한 감동의 체험과 인과관계를 가진 것이
  다. 망상은 반드시 다른 징후로 추측되는 어떤 무의식적인 정신 과정의 반응
  으로서 나타난 것이며, 망상이 망상적인 성격이나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공격
  에 끝내 저항하려고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관계 대문
  인 것이다. 망상은 그 자체가 원했던 것이며, 일종의 위안이다.
  이제 정신의학과 정신분석학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정
  신의학은 정신분석의 기법을 응용하려고 하지 않으며, 또한 망상의 내용에 어
  떤 것을 결부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정신의학은, 우리에게 특수한 원인을 제
  시하는 대신 유전이라는 것을 꺼내어, 아주 일반적이고 멀리 있는 병의 원인
  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정신의학적 연구의 본질에는 정신분석의 결과로서 거
  부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에 반항하는 것은
  오직 정신과 의사 뿐이다. 정신분석학과 정신의학과의 관계는, 마치 조직학과
   해부학과의 관계와 같다. 해부학은 기관의 외부 형태를 연구하고, 조직학은
   조직과 세포로 구성된 기관의 외부 구조를 연구한다. 한 쪽의 연구는 다른
  쪽의 연구의 연속이므로 이 두 연구 방법에 모순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종
  래의 정신 의학에 의한 치료법으로는 망상 같은 질환을 다룰 수가 없었다. 그
  렇다면 정신 분석은 망상이라는 증상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독특한 견해를 갖
  고 있으므로 망상을 치료해 환자의 마음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감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환자 자신에게 이해시킬 방법은 없다.

  <열 일곱 번째 강의>--증상의 의미
  노이로제 증상은 잘못(실책 행위)이나 꿈과 같이 뜻을 갖고 있으며, 또 그 증
  상에 시달리는 사람의 생활과 관계가 깊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언제나 뜻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어떤 동기
  로 인해 히스테리에서 실례를 찾지 않고, 히스테리와 매우 가까운, 아주 주목
  할 만한 다른 노이로제를  들겠다. 강박 노이로제는 잘 알려진 히스테리만큼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집요하고 소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
  자의 사사로운 일 같은 형태를 가지며, 그 모든 증상이 정신의 영역에서 만들
  어진다.
  강박 노이로제와 히스테리는, 그 연구 결과를 기초로 했을 때 정신 분석이 구
  축되고, 그 치료에 있어서도 정신분석 요법이 개가를 올린 노이로제 중의 두
   가지 형태이다. 강박 노이로제는, 정신 분석의 노력으로 우리에게는 히스테
  리 증상보다 더 뚜렷하고 친근한 것이 되었다. 또 이것은 히스테리 환자의 어
  떤 극단적인 특징을 똑똑히 나타내고 있음을 알았다. 강박 노이로제는 다음과
   같은 형태를 가진다. 환자의 마음은 관심이 없는 생각들로 점유되어 있고,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충동에 의해 그대대로 행동하지만 그 행동에서 기쁨을
   느낄 수가 없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그만둘 용기도 없는 것이다
  . 이 관념(강박관념)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고, 환자의 입장에서도 흥미 없
  는 것이다. 환자는 자기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것이 가장 중대한 인생 문제이
  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고민한다. 환자가 마음 속에 느끼는 충동 또한
   유혹처럼 무서운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으므로 환자는 그 생각을 자기는 짐작
  도 못할 일이라고 부정한다. 그 충동은 한번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으므로 결
  과적으로 언제나 도피와 경계가 승리를 차치한다. 환자는 강박관념을 대치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모든 증상을 그 원래의 형태
  에서 멀리 떨어진 것으로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실로 이 병의 중요한 특징이다
   현대의 정신의학이 강박 노이로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알고 싶
  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정신의학의 빈약한 한 부분이다. 정신의학은 여러
   가지 강박관념에 이름을 붙였을 뿐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신
   그런 증상을 가진 사람을 '변질자'라고 강조한다. 사회에 뛰어난 공적을 남
  긴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안다면, 규정해 버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정신의학은 이런 사람을 우수변질자(優秀變質者)라고 불러서
   도피구를 만들었다.
  개인적인 노이로제 증상은 환자의 체험과의 관계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정신
  분석의 기법은 그 증상의 예로 훨씬 자주 나타나는 정형적인 증상을 설명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노이로제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특징, 강박 노이로제 환자의 반복과 회의는 병적 변화라는 일반적인 반
  응인지도 모른다.

  <열 여덟 번째 강의>--외상에의 고착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일생을 통해서 불리한 태도를 가지게 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태도는 노이로제의 일반적인 특징이며 결코 이 두 환자에
  게만 특별히 있는 특징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모든 노이로제에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으며, 또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우리는 분석을 통해서, 어느
  환자나 증상의 결과에 의해 과거의 어떤 시기로 되돌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 많은 증상의 예에서 환자는 초기의 인생 단계, 즉 소아기나, 심하면 유아기
  에까지 고착되어 있었다. 짧은 시간에 정신 생활의 자극이 극도로 증가하여,
   이 자극을 정상적인 방법을 처리하고 극복할 수 없어 에너지 활동에 생기는
   장해를 우리눗 부른다.
  모든 노이로제에는 이와 같은 고착이 포함되어 있지만, 고착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노이로제가 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 어떤 일에 대한 감정적
  인 고착의 전형은 슬픔이다. 슬픔에 빠지면 현재와 미래에서 완전히 격리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추어의 판단으로도 슬픔과 노이로제는 명확
  히 구별된다.
  강박 노이로제의 증상, 관념 및 충동에서, 정신에는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확
  신할 수 있는 넓은 길이 펼쳐진다. 그리고 다름 아닌 이 이유로 말미암아, 오
  직 의식심리학만 아는 임상 정신의학은 이와 같은 병에 특수한 변질의 표지라
  는 낙인을 찍는 것 밖에 하지 못한다. 강박관념이나 강박 충동은 당연히 그
  자체는 무의식이 아니다. 그러니 강박 행위의 수행에 의식적인 지각이 결여되
  어 있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정신 분석에서는 무의식적인 정신 요소가 있어
  야만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으며, 그것을 다루는 데 익숙해진다는 것 등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을 단순히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 분석
  을 해본 적도 없고 꿈을 해석했다던가 노이로제 증상을 뜻이나 목적으로 번역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은 모두 이 문제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
  아야 한다.
  증상의 뜻은 언제나 무의식이며 실로 이 무의식성과 증상의 존재 가능성 사이
  에는 대리 관계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어떤 증상에 부딪쳤을 때는 언
  제나 그 환자의 마음 속에 특징의 무의식 과정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
  에 증상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반드시 무의식적이어야 한다. 그 무의식
  적인 과정이 의식적이 됨과 동시에 그 증상은 사라져 버린다. 여기에 치료에
   대한 열쇠, 즉 증상을 소멸시키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증상
  은 밖에 나타나지 않는 어떤 다른 것의 대상물이다. 어떤 종류의 과정은, 정
  상적인 상태에서 의식이 이 정신의 과정의 존재를 알고 있을 수록 강하게 발
  달한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대신 방해되고 저지되고, 무
  의식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과정에서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교환
  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증상의 의미를 아는 동시에 증상은 없어진다라는 명제는 옳다. 다만 이 지식
  은 환자의 내부 변화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이 필수 조건이며, 이 내부의 변화
  는 일정한 목적을 가진 심적 작업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증상 형성의 '역학'이라는 개념에 총괄되는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한 셈이
  된다. 앞으로의 연구 방향은 두 가지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왜 인간은 병에 걸리는가, 다시 말해서 왜 노이로제라는 생활 태도를 취하
  게 되는가 2. 노이로제라는 조건에서 어떻게 증상이 발전하는가 하는 것 역시
   정신 역학의 문제이다.
  상기 능력이 침범 된다는 것이 히스테리의 특징이라는 것은 이미 말했다. 히
  스테리의 경우, 기억 속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상태가 증상으로서 나
  타난다. 강박 노이로제의 경우에는 이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들 건망증은 히
  스테리서 변화의 심리학적 특징이지 노이로제의 일반적인 특징은 아닐 것이라
  고 추측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의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생각도
   무색해진다. 두 가지란 증상의 유래(어디서)와 증상의 목적(무엇 때문에)이
  다. 증상의 유래란 결국 오계에서 와서 반드시 한 번은 의식되고, 그런 다음
   잊혀져서 무의식이 된 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증상의 목적, 증상의
  의향은 처음부터 의식되었는지도 모르지만, 한 번도 의식에 떠오르지 않은 것
  과 같은 과정, 이를테면 발단에서부터 무의식에 머물러 있는 내부심적인 과정
  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히스테리의 경우에 일어나듯이 유래, 곧 증상을 지탱
  하고 있는 체험까지도 건망증이 침식했는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실로 증상의 목적, 즉 처음부터 무의식적이었는지도 모르는 의향이야말로 증
  상이 무의식적인 것에 좌우되고 있다는 근거인 것이다. 또한 강박 노이로제에
  서의 증상은 히스테리의 경우처럼 무의식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

  <열 아홉번째 강의>--저항과 억압
  노이로제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경험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
  째, 우리가 환자의 병을 고쳐서 그 괴로운 증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려고
   하면, 환자는 의사에게 집요하게 저항한다. 환자의 병으로 말미암아 환자 자
  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까지 괴롭히며,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간, 돈
  , 노력을 과감히 희생하면서도 자기가 병들어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의사
  에게 적극 반항한다는 것이다. 환자에게, 그것을 입 밖에 내기에 너무나 불쾌
  하다, 점잖지 못하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방향이 다르다, 엉뚱하여 말할 필
  요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떠오르는 연상을 선택하거나 버리려는 어떠한 동기
  에 구애되지 말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주의시켜야 한다.
  환자 중에 치료를 함에 따라 자신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
  생각 중의 일부를 숨기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분석 요법이 이와 같은 성
  역의 특권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강박 노이로제 환자는 그
  과도의 양심과 의혹을 오로지 이 기법의 규칙을 무효화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 불안 히스테리 환자는 이쪽이 찾고자 하는 것과 완전히 동떨어지고 분석에
  도 도움이 되지 않는 연상만을 제시함으로써, 이 규칙을 불합리한 것 같이 만
  들어 버리는 경우가 간혹 있다. 여성은 저항을 위해서, 의사에 대한 상냥하고
   성적인 색체를 띤 전이법을 천재적으로 터득하고 있다. 의사에 대한 이 애착
  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현재의 치료 상황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환자가 분
  석 요법을 받을 때 약속한 어떠한 의무도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환자의 불타
  는 질투심과, 의사의 부득이한 거절의 말로 상처 받은 감정은 의사와의 개인
  적인 친밀감을 손상시켜, 분석의 가장 큰 원동력이 작용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저항을 확인하는 것이 중대한 문제가 되므로 우리는 저항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데 경솔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이유로 연상이 떠오르지 않는 노이로
  제의 증상 예가 존재할지도 모르고, 우리의 가설에 반대하는 의논이 실제로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며, 또 분석 받은 사람의 지적인 비판을 간
  단히 저항이라고 판단한 것은 아니다. 관찰 결과 저항은 치료를 행하고 있는
   사이에 부단히 그 강도를 바꾼다는 것을 알았다. 증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전체로 어떤 심적 과정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완료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것이 의식에 나타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증상은 거기서 멎어 버
  린 어떤 것의 대용물인 셈이다. 저항으로 우리들에게 제시되는 이 병원적(病
  原的)인 과정을 우리는 억압이라고 부른다.
  억압은 증상 형성의 전제조건이지만 동시에 유례없는 술어이다. 하나의 충동
  을 어떤 행동에 옮기려 하는 하나의 심적 과정을 그 예로서 생각해 보자. 충
  동이 격퇴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기피 또는 부인이라고 부른
  다. 어떠한 심적 과정도 처음엔 무의식적인 단계 혹은 무의식적인 위상(位相
  )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 위상에서 비로소 의식적인 위상으로 옮겨 간다고 가
  정하자. 이를테면 사진의 상은 처음에는 음화이지만, 인화에 의하여 양화로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느 음화나 모두 양화이어야 할 필요는 없듯이 무의
  식적인 심적 과정이 모두 의식적인 심적 과정이 될 필요는 없다. 개개의 과정
  은 처음에는 무의식이라는 심적 체계에 속해 있으며, 경우에 따라 의식이라는
   체계로 옮겨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편리하다.
  억압이란 증상 형성의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증상이 억압에 의해서 방해된
  어떤 것의 대용물인 것이다. 그러나 억압에서 이 대용 형성을 이해하려면 아
  직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억압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다른 측면에서 의문
  이 일어난다. 어떤 종류의 심적인 움직임이 억압에 굴복하는가, 또 어떠한 힘
  에 의해 어떠한 동기에서 억압이 관철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해서
  는, 저항을 연구했을 때 저항은 자아의 힘, 곧 우리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잠
  재하고 있는 성격적 특성에서 나온다는 하나의 대답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요
  컨대 억압을 하는 것도 이 힘이다.

  <스무 번째 강의>--인간의 성생활
  일상생활에의 필요에서, 성이란 양성의 차이, 쾌감 획득, 생식기능 및 극비로
   간직해야 할 외설스러운 것에 관련된 것 등등으로 충분할는지 모른다. 그러
  나 학문에서는 이것으로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상식에 어긋나게 기
  이한 성생활을 하는 사람도 간혹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도착자'들 중
  에는 일상생활에서 성적인 차이를 없애 버린 것 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 그들은 동성인 사람에 의해서만 성적 소망을 자극 받는다. 이성, 특히 이성
  의 성기는 그들에게는 전혀 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오
  히려 그것을 혐오하기도 한다. 그들 성도착자는 정상인이 그 성 대상을 대하
  는 것과 같은 태도로 자기들의 성대상에게 다가간다. 우리는 그들을 둘로 나
  눈다. 하나는 동성애자처럼 성적 대상이 변화되어 있는 것이고, 하나는 성적
  인 목표가 변화된 자들이다. 서로의 성기를 결합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배우자
  의 어느 쪽인가의 성기를 몸의 다른 기관이나 또는 몸의 다른 부분으로 대용
  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그 하나이다.
  정상적인 성적 만족이 저지당하면(욕구 불만에 빠진다) 대개는 노이로제에 걸
  린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저지될 경우, 욕구는 성욕을 흥분시키기 위
  한 비정상적인 것으로 바뀐다.그러나 아무튼 이와 같은 측지성의 역류 정체
  때문에, 도착 충동은 정상적인 성적 만족이 현실에서 전혀 방해를 받지 않을
   때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
  성욕과 생식 충동을 혼동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성욕, 도착
  및 노이로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이 전에는
  어린이였고, 어린 시절부터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는 데 이러한 과오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어린이가 지적 성숙의 한 단계에 이를 때까지 성 본능의 완전
  한 발달을 연기시키는 것은 사회의 이익이 된다. 그것은 성 본능이 완전히 나
  타나면 교육을 실시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 본능을 제어하려
  는 사명은 결코 쉬운 거시 아니어서, 성공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동기는 궁극적으로는 경제인 것이다. 인간 사회
  는 그 성원이 노동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식량이 없으므
  로, 그 성원의 인구를 제한하고, 그 에너지를 성활동에서 노동으로 돌려야 한
  다.
  인간의 성생활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리비도(Libido)이다. 리비도란
   굶주림과 비슷하며, 본능을 발현시키는 힘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유아의 성
  활동의 경우 가장 많은 해석을 해야 한다. 이 해석은 분석적 연구를 기초로
  하여 증상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얻어진다. 만일 유아가 말을 할 줄 안다면
  , 어머니의 젖을 빠는 행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유아는 젖을 빤다는 행위로 두 가지의 커다란 생활 욕구를 채우고 있기 때문
  에 이것을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신분석으로 일생을 통해
   이 동작의 심리적 의의가 얼마나 오랫동안 남아 있는가를 알고 크게 놀랄 것
  이다. 그런데 유아는 곧 이 최초의 대상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몸의 일부, 즉
   엄지 손가락이나 혀로 그것을 대용하게 된다. 이 결과 외계의 동의 없이도
  쾌감을 얻을 수 있는데다가, 신체의 어떤 제2의 성감대의 흥분을 높이려 한다
  . 성감대라고 모두가 다 같은 정도의 쾌감을 준다고는 할 수 없다.
  유아에게는 자기가 하고 싶을 때 배설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남이 정한 때
  에 배설을 해야 한다. 유아에게 이 쾌감의 원천을 단념시키기 위해서 배설 기
  능에 관한 모든 것이 천한 것이며 감추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유아
  는 쾌감과 사회적 품위를 교환해야 한다. 배설물 자체에 대한 유아의 태도는
   처음부터 매우 다르다. 즉 유아는 자기의 대변에 대해서 조금도 혐오감을 느
  끼지 않으며 오히려 대변을 자기 몸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성별에 관계없는 성적 호기심이 나타나는 이유는 어린이에게는 성별의 차이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남녀 모두 동일한 성기, 즉
   남성의 성기를 갖고 있는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자 아이는 어린
   누이동생이나 소꿉 친구에게 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처음에는 자기
   눈을 의심하려고 한다. 여자 아이는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음경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매우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가진 남자 아
  이를 시기하고, 이로 인해 남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된다. 또 여자 아
  이의 음핵은 유아기에는 음경과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성이라는 개념을 도착자의 성생활과 어린이의 성생활까지도 포함할 수
  있게 확대했다. 즉 우리는 성이라는 개념에 그 정당한 영역을 회복시켜 준 셈
  이다. 정신분석 이외의 분야에서 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식기능에 속하며,
  정상적이라고 일컬어지는 한정된 성생활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스물 한번째 강의>--리비도의 발달과 성의 체제
  우리가 너무 편협하다고 해서 거부하는 그 정의, 즉 유아 성욕은 생식기능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정의 이외에는, 하나의 현상이 성이라는 성질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기준이 아직 없다. 성과 생식
  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도착자가
  모두 생식이라는 목적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 도착이 배척되어야 하
  는 것이든 정상적인 성활동과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든, 정상인의 성생활을 관
  찰해 보면 그들에게도 한두가지 도착된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키스
  라는 것은 두 사람의 성기 대신 성감대라고 할 수 있는 입을 밀착시키는 행위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스를 성적 도착이라고 비난하는
  충동은 정상적인 성적 만족이 현실에서 전혀 방해를 받지 않을 때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
  성욕과 생식 충동을 혼동하는 과오를 성적 도착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오히려 연극에서는 키스를 성행위의 은근한 암시로 사용하고 있다. 정상
  적인 성욕이란 그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던 어떤 재료에서 각 특징을 무용의
  것으로 배제하고, 한 가지 새로운 목표 말하자면 생식이라는 목표에 종속시키는
  것으로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착 성욕은 집중적인 것이 특징
  이다. 모든 행동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달리는데, 거기에는 하나의 부분본
  능이 우세하다. 부분본능의 단 하나가 우세하여 그것이 증명할 수 있는 유일
  하 것이거나, 또는 하나의 부분본능이 자기의 목적에 다른 부분본능을 종속시
  키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는 지배적인 부분본능, 즉 성적 목표가 달
  라진 것 외에 도착성욕과 정상성욕 사이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유아 성욕
  과 가장 유사한 도착성욕의 예가 있는데 이 경우 무수한 부분본능이 서로 독
  립하여 각각의 목표를 계속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예는, 도착이라기 보
  다는 성생활의 유아성이라고 말하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우리가 쾌감을 얻으려고 하는 유아의 활동을 성적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
  자. 모든 기관 쾌감을 성적이라고 불러도 괜찮은지, 또는 성적인 기관 쾌감과
   함께 이 이름과 맞지 않는 다른 기관 쾌감이 있는지는 말할 수가 없다. 기관
   쾌감과 그 조건에 대하여는 거의 모르며, 또한 분석이라는 것은 과거로 거슬
  러 올라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뚜렷이 분류할 수 없는 요소에 도달하더라도
   당황할 필요는 없다. 유아의 활동은 성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더라도, 어린이
  가 성적으로 완전 무구하다고는 더 이상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3세
  부터는 어린이에게 분명히 성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나이가 되면 이미 성
  기의 흥분이 시작되며, 이 때문에 유아성 자위, 즉 성기에 의해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약 6세에서 8세 이후에 성적 발달의 정지와 후퇴가 온다.
  문화가 발달된 민족의 경우에는 이 시기를 잠재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잠재
  기라고 해서 성활동과 성적 호기심이 모두 중지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성기기(性器期)가 만들어지기 전에 어린이의 성생활이 어떤 모습
  을 하고 있는가를 말할 수 있다. 이 성기기는 잠재기 이전의 유아기 초기에
  준비되어, 사춘기부터 차츰 조직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 유아기에는 전성기적
  이라는 일종의 완만한 체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성기적인 부분본
  능이 아니라 가학적인 항문기의  부분본능인 것이다. 이 시기에는 남성적,여
  성적이라는 대립 관계는 나타나지 않으나, 능동적,수동적이라는 대립 관계는
   존재한다. 이 대립이 성적 양극성(性的兩極性)의 시초인 것인데, 이 성적 양
  극성과 앞서의 남성적,여성적이라는 대립 관계가 후일에 접합하는 것이다. 가
  학적인 항문기는 성기기의 바로 이전 단계이다. 한 걸음 더 깊이 연구하면 이
   체제 중에 얼마나 많은 것이 후년의 최종적인 구성 중에 남아 있는지, 또 어
  떤 길을 통해서 이 단계의 부분이 새로운 성기기 속에 강제로 갇혀 버리는지
  를 알 수 있다.
  항문 충동이나 다른 성감대의 충동은 처음부터 자기 성애적인 것이기는 하지
  만, 그 후의 발달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자기 성애를 버리고
   자기 자신의 몸에 있는 대상을 외계의 대상과 다시 바꾼다. 둘째, 각 본능의
   많은 대상을 통일하여 단 하나의 대상에 착수한다. 이것은 물론 이 단 하나
  의 대상이 자기 자신의 몸과 비슷한 전신(全身)일 때만 이루어진다.
  인간은 자기의 나쁜 충동을 억압하여 무의식으로 만들고, 그 충동에 대해 책
  임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역시 이 책임을 자기도 알 수 없는 죄악감으로 느끼
  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많은 노이로제 환자가 괴로
  워하는 죄악감의 가장 중요한 원천의 하나임이 확실하다. 어린이가 어머니에
  게 성적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어머니 곁에서 자겠다고 조른다면, 또
   어머니가 화장실에 갈 때도 같이 가겠다고 조른다면, 지나친 경우에는 어머
  니를 유혹하려고 까지 한다면, 어머니에 대한 어린이의 애착이 성적인 성질의
   것이라는 주장은 더욱 더 확실한 것이 된다. 어머니가 여자 아이에게 남자
  아이와 똑같은 시중을 들어 주어도 같은 결과가 되지 않으며, 아버지가 어머
  니와 경쟁해서 남자 아이의 시중을 들어주는 경우에도 남자 아이의 눈에 아버
  지는 어머니와 똑같이 주요한 인물로 비치지 않는다.
  다른 아이가 태어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확대되어 가족 콤플렉스가 된
  다. 가족 콤플렉스의 동기에 의해 어린이는 새로 이기심이 침해당하므로 남동
  생이나 누이동생을 증오하게 되고, 배척하겠다는 의향을 갖게 된다. 어린이는
   보통 이 증오감을 양친 콤플렉스에서 나온 것과는 달리 말로써 나타내는 일
  이 많다.
  분석에 의해 확인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형식의 배후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임상적인 사실은, 이제 실제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성본능이 처음으로 강
  력해지는 사춘기에 옛날의 근친상간적인 대상이 다시 부각되고, 리비도가 새
  로이 충당된다. 유아기의 대상 선택은 사춘기의 그것에 비하면 전주곡에 불과
  할 뿐이다. 사춘기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방향으로 향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형태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감정의 흐름은 그 심리적 내력
  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대부분 의식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이 시기 이
  후, 인간의 개체는 부모에게서 독립한다는 큰 과제에 몰두해야만 한다. 부모
  에게서 독립해서 어린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비로소 사회의 일원이 된다. 이
   과정이 아들의 경우에는 자기의 리비도적 소망을 어머니에게서 돌려, 어떤
  현실의 알지 못하는 연애 대상을 선택하기 위해 사용된다.
  <스물 두 번째 강의>--발달과 퇴행의 과정
  리비도의 발달이 두 가지 위험, 즉 첫째는 제지의 위험, 둘째는 퇴행의 위험
  을 반드시 수반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주장은 병리학 총론이 가르
  치는 것과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성충동의 어느 부분이 결승점에 도달해도,
  다른 부분은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 정지해 있을 수 있다는 것만을 비유로써
  사용하고 싶다. 이 경우 이와 같은 충동이 인생의 처음부터 계속되고 있는 것
  이라고 상상할 수 있으며, 이 흐름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개개를 운동,
  즉 인위적으로 분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부분 충동이 이와 같은
  초기 단계에 정지하는 것을 고착, 즉 충동의 고착이라고 한다.
  노이로제를 이해하려면, 고착과 퇴행의 관계를 계속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 리비도의 발달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에 두 종류의 퇴행이 있다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의 퇴행은 리비도에 의해서 충당된 첫 대상으로 역행하는
   일인데, 이 대상은 근친 상간의 성질을 갖고 있다. 제2의 퇴행은 성의 체제
   전부가 초기 단계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억압이란 의식이 될 수 있는 행위,
   즉 전의식 체계에 속하는 행위가 무의식, 즉 무의식 체계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만일 일반적으로 무의식적인 행위가 바로 가까이에 있는 전
  의식 체계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때도 우리는 이것을 억압이라고 부
  른다. 그러므로 억압이라는 개념은 성과 조금도 관계가 없다. 억압은 순전히
   심리학적인 과정이다.
  사람은 자기의 리비도를 만족시키지 못할 때 노이로제가 되며, 그 증상은 바
  로 충족되지 않은 만족에 대한 대용물이다. 물론 리비도의 욕구 불만에 빠진
   사람이 모두 노이로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노이로제의 증상 예를 연구
  한 결과 모든 경우에 욕구 불만이라는 인자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의 역이 반드시 진리인 것은 아니다. 병에 걸리지 않고, 리비도 만족
  의 결여를 참고 견디는 방법이 저지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들 주위에는 이러
  한 부자유를 참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사람은 그때 행복하지 않
  으며 만족의 동경에 고민하지만, 결코 병이 나지는 않는다. 리비도를 만족시
  키지 못해 병이 되는 것을 막고 있는 이 과정 중의 하나는 문화적으로 특히
  중요하다. 이 과정의 본질은 성충동이 부분 쾌감 혹은 생식 쾌감의 목표를 포
  기하고, 발생적으로는 그 포기된 목표와 관계가 있지만 이미 그 자체는 성적
  이 아니라 사회적이라고 불러야 할 다른 목표를 갖는 데 있다. 우리는 이 과
  정을 '승화 작용'이라고 한다.
  일정한 방향과 대상에 붙는 리비도의 점착성은 개인차가 있는 독립된 인자인
   것 같다. 이 인자가 무엇에 의존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노이로제의 병인으
  로서 중요하다는 것을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노이로제의 원인에 대한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사실 정신 분석의 연구로 우리는 하나의 새 인자를 발
  견했다. 그 병인론의 계열에서는 그것을 고려하지는 않았지만, 여태까지 건강
  했던 사람이 별안간 노이로제에 걸려 교란된 것 같은 증상 예에서는 쉽게 찾
  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서는 반드시 소망 충동의 충돌의 발현,
  즉 심적 갈등의 발현이 발견된다. 인격의 일부는 어떤 소망을 주장하고 인격
  의 다른 부분은 그 소망에 반항하고 그것을 막는다. 이와 같은 갈등이 없으면
  , 노이로제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심적 갈등의 의의는, 또 다른 표
  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그것이 병인이 되려면 외적 욕구불만과 내적 욕구
  불만이 있어야 한다. 외적 욕구불만은 만족의 한 가능성을 제거하고, 내적 욕
  구 불만은 만족의 다른 쪽의 가능성을 제거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갈등이
   생긴다. 내적인 방해는 인류 발달의 태고 시대에 현실의 외적 장해에서 발생
  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노이로제는 성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
  아와 성욕 사이의 갈등 때문에 발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정신 분석
  은 자아 충동의 존재나 의의를 부정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성충동이 병과
   인생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성본능의
   연구가 정신 분석의 대상이 된 까닭은 전이 노이로제에서 제일 먼저 성충동
  을 연구하는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고, 또 남이 등한시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정신 분석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노이로제 병인론의 제3인자인 갈등 경향은 리비도의 발달과 관계되는 것과 같
  이, 자아의 발달에도 관계가 있다. 이것으로 노이로제의 원인에 대한 견해는
   모두 말한 셈이 된다. 우선 먼저 일반적인 조건은 욕구 불만이고, 둘째는 리
  비도의 고착이며, 이 때문에 리비도는 일정한 방향으로 밀려간다. 셋째로, 자
  아의 발달에서 생긴 갈등 경향이다. 그리고 이 자아의 발달 때문에 이와 같은
   리비도의 흐름은 거부된다.
  성본능과 자기보존 본능이 현실의 궁핍에 대해서 똑같이 거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자기보존 본능과 이 본능에 결부되어 있는
   모든 본능은 훨씬 교육하기 쉽다. 자기보존 본능은 궁핍에 순응하여, 현실의
   명령에 따라 발달하는 것을 빨리 배운다. 이 본능은 그것이 필요로 하는 대
  상을 다른 수단으로는 입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의 욕구가 절정에 달하면
  , 청년에 대한 교육의 가능성도 대개는 끝이 난다. 교육자는 이것을 알고 이
   사실에 입각하여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은 앞으로 정신분석의 결과에 영향을
   받아 교육의 중점을 유아기로 옮기게 될 것이다. 흔히 4,5세에서 이미 작은
   인간이 완성된다. 그리고 그 후는 그 속에 숨어 있던 것이 서서히 겉으로 나
  타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심적 활동은 쾌감을 찾고 불쾌를 피하려 하며, 그 활동은 자동적으로
   쾌감 원칙에 의해서 조정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에 대해서 쾌감과 불쾌를 일으키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지만, 우리는
  아직 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우리는 쾌감이 심적 장치 속에 있는 자
  극량의 감소, 저하, 소실과 관계가 있으며, 한편 불쾌는 자극량의 증가와 관
  계가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쾌감 원칙에서 현실 원칙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자아의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진보라 하겠다. 우리는 성충동이 뒤늦게나마 자
  아 발달의 이 단계에 올라온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면 결론으로 이것과
  관계 있는 것을 또 한가지 설명해 두기로 한다. 인간의 자아가 리비도와 같은
   발달사를 지니고 있다면 당연히 '자아의 퇴행'이 있어야 할 것이다.

  <스물 세 번째 강의>-- 증상 형성의 경로
  리비도가 거절된 대상 대신 다른 대상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더라도 현실이
   이를 완강히 거절하면, 리비도는 결국 퇴행의 길을 걸어 이미 극복한 체제나
   아니면 옛날에 버린 대상의 하나에서 만족을 구하려고  것이다. 리비도는
   그것이 발달했을 때 이러한 장소에 남기고 온 고착에 의해서 재생의 길로 끌
  려 들어가게 된다.
  유아기의 체험은 중대한 결과를 남긴다. 왜냐하면 이 체험은 발달의 미완성
  시기에 일어나고, 그리하여 유아기의 체험은 외상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노이로제의 병인 방정식 속에 체질적 인자의 대표로서 삽입
  한 어른의 리비도 고착은 유전적인 소인과 유아기 초기에 얻은 소인으로 나뉜
  다. 이 관계를 하나의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유전적인 성체질은, 각종 부분본능이 단독으로 혹은 다른 부분본능과 결합하
  여 특별히 강해짐에 따라 여러 가지 소인이 된다. 노이로제 환자의 리비도는
   그 환자의 유아기의 성체험과 관계가 있음이 확실하다. 이것으로 보면 유아
  기의 성체험은 인간의 일생과 인간의 병에 매우 중요하다는 인상을 받는다.소
  아기의 성적 경험의 중요성은 치료를 문제로 할 때 특히 중요하다. 유아기의
   체험은 그 자체가 의의를 가지며, 유아기에서도 그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관찰 결과 증명된 사실이다. 실제로 유아 노이로제라는 것도 있다. 물
  론 유아 노이로제는 시간적인 후퇴라는 인자가 매우 흐릿하거나 아주 없다.
  즉 이 병은 외상적인 체험에 이어서 일어난다. 유아기와 후일의 체험의 강도
  와 병원적인 의의 사이에는 앞에서 연구한 급수와 같은 보충 관계가 있다. 병
  인의 모든 중심이 유아기의 성체험으로 떨어지는 증상 예가 있는데, 이 경우
   성체험의 인상은 확실히 외상적인 작용을 한다. 그리고 이것을 보충하는 데
  는 보통의 성체질과 그 미완성품만으로 충분하다. 이와 같은 증상 예와 나란
  히 후일의 갈등에 역정이 있는 증상 예도 있다. 이 경우 분석에서는 유아기의
   체험이 강조되어도 그것은 퇴행의 결과로 생긴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므로
  '발달의 정지'와 '퇴행'이 있고, 둘 사이에서 이 두 인자가 함께 작용하고 있
  는 것이다.
  증상을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하여, 리비도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여기게 하는 다른 것도 있다. 증상은 보통 만족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에게 조금도 상기시키지 않으며, 그것은 대개 대상에서 독립해 있고, 또
   외계의 현실과 관계가 없다. 우리는 이것을 현실 원칙을 버리고 쾌감 원칙으
  로 돌아간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또 넓은 의미로는 일종의 자기성애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자기 성애는 실로 성본능에 처음으로 만족을 준 것
  이기도 하다. 그것은 외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대신 육체에 내부의 활동, 행동
   대신에 적응을 가져오는 변화를 일으킨다. 이것은 또한 퇴행과 합치한다. 증
  상은 어떤 때는 실제로 있었던 체험의 묘사이며, 그 체험이 영향을 미쳐서 리
  비도가 고착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또 어떤 경우는 병인적인 의의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환자의 공상을 묘사한 것이다.
  어린이는 언제나 유혹 공상으로 자기 성활동의 자기 성애적인 시기를 감춘다
  . 그리고 자기가 연모하던 대상을 초기 유아 시대로 소급하여 공상함으로써
  자위에 대한 수치심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아무튼 어린이가 가까운 친척에
  게 성적인 유혹을 받았다고 말할 때는, 그것을 공상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공상의 가장 유명한 산물은 이미 말한 '백일몽'이다. 백일몽이 반드시
   의식적이 아니라도 되며, 무의식적인 백일몽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이와 같이 무의식적인 백일몽은 밤의 꿈의 근원이며 동시에 노이로제 증
  상의 근원인 것이다.
  예술가는 노이로제 환자와 그리 멀지 않은 내향자가 될 소질을 갖고 있다. 예
  술가는 지나치게 강한 충동의 욕구에 쫓겨서 명예, 권력, 재물, 명성, 여성의
   사랑 등을 얻고 싶어 하지만 그에게는 이것을 만족시킬 힘이 없다. 그래서
  그는 다른 불평가처럼 현실을 버리고, 그의 모든 흥미를 공상 생활의 소망 형
  성에 돌린다. 참된 예술가의 경우에는 그 이상의 것을 뜻대로 할 수가 있다.
   첫째, 자기가 백일몽을 가공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서 남의 마음에 거슬리는
   개인적인 백일몽은 없애고 누구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한다. 둘째로,
  예술가는 백일몽이 엄금된 샘에서 왔다는 것을 남이 알지 못하도록 완화시키
  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셋째로, 그는 어떤 일정한 소재가 자기의 공상표상(
  空想表象)과 똑같은 것이 되도록 이 소재에 특별한 형태를 부여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무의식적인 공상의 이 표현에 많은 쾌감 획득을 결부
  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어서, 억압은 잠시 동안 이 표현에 압도되고 만다.

  <스물 네 번째 강의>--일반적인 신경증
  '정신분석 입문'이라는 제목이 노이로제를 다루려 하는 이 부분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면 아마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노이로제는 이미 정신분석
   그 자체이다. 우리의 보고는 전부 노이로제라는 병의 한 가지 부류, 즉 이른
  바 전이 노이로제의 연구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증상 형성의 메커니즘을 히스테리 속에서만 찾으려고 했다. 노이로제를 묘사
  함에 있어서, 먼저 노이로제 환자의 행동에서 시작하겠다고 말했었다. 그것은
   확실히 흥미가 있고, 연구의 보람이 있는 주제이며, 또 다루기도 쉬운 것이
  다. 환자의 자아가 믿을 만한 공평한 증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 자아는
   무의식을 부정하고, 그것을 억압해 버린 힘이다.
  우리는 자아의 진술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아의 주장을 믿
  는다면, 자아는 모든 점에서 능동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자아 자
  체가 증상을 만든 셈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자아가 상당히 수동적이 역할을
   했으며, 그때 자아는 이 수동성을 감추거나 얼버무리려 한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자아는 계속 허영을 부릴 만한 용기가 없다. 강박 노이로제의 증상에서
   본 자아는, 어떤 이분자(異分子)가 자기를 적대시하기 때문에 간신히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자아와 노이로제와의 하나의 관계는 매우 뚜렷하므로,
   처음부터 고려에 넣을 수 있다. 오늘날의 정신분석에 관한 지식으로는 아직
   접근하기 어려운 질환인 외상성 노이로제에서 이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외
  상성 노이로제, 특히 전쟁의 공포에서 발생한 외상성 노이로제에서는 사리(私
  利)를 얻으려고 하는 이기주의적인 자아 동기의 발생이 주의를 끈다. 물론 자
  아 동기만으로는 병을 만들 수 없지만, 이것은 그 병에 협력하여 일단 병이
  발생하면 그것을 지속시키며, 또한 이 동기가 병의 유인이 될 우려가 있는 위
  험으로부터 자아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위험이 되풀이되지 않게 혹은 이
  미 받은 위험에 대한 배상을 획득할 때까지 이 병이 회복될 가망은 없는 것이
  다.
  노이로제로 도피함으로써 어떤 내부적인 질병 이득이 자아에게 주어진다는 것
  을 우리는 일반적인 상태에서는 인정할 수 있다. 어떤 조건 아래서는, 현실에
  서 다소 높게 평가되고 있는 외부적인 이익이 이 내부적인 이익에 결합되기도
   한다. 증상에 수반하는 고뇌의 감각은 아마 갈등의 번민과 같은 가치의 대용
  물일 것이며, 게다가 불쾌하기까지 하다. 자아는 이 불쾌감에서 달아나고 싶
  지만 그렇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자아는 자기가 여태껏 믿고 있
  던 것만큼 능동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이로제라는 구조 수단은 대개 환자에
  게 좋은 결과를 주지 않는다. 그 까닭은 증상 형성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한 과정이기는 해도 그것이 생활의 요구에 맞지 않는 형태를 갖
  기 때문이며 또 그것은 인간의 최선이며 최고의 힘을 그 사람이 이용할 수 없
  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신 노이로제 가운데 제1부류는 전이 노이로제이다. 그
  런데 두 경우 다 그 증상은 리비도에서 나온다. 그 증상은 리비도의 비정상적
  인 이용이며 만족의 대용물이다. 그러나 현실 노이로제의 증상인 머리가 무겁
  다든가 동통감(疼統感), 어떤 기관의 자극 상태, 어떤 기능의 쇠약 또는 장해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과학으로서의 정신분석의 특징은 그것을 구사하는 기법에 있다. 정신분석의
  기법은 그 본질을 손상함이 없이 문화사, 종교학, 신화학(神話學)및 노이로제
  론에 적용될 것이다.정신분석을 정신생활 속에 있는 무의식을 발견하는 것만
   목적으로 삼는다. 독물의 직접 상해로 증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여겨지는 현
  실 노이로제의 문제는 정신분석으로 공격할 수 없다. 이것을 설명하는 작업은
   오히려 생물학적, 의학적인 연구에 넘겨야 하는 것이다.

  <스물 다섯 번째 강의>--불 안
  불안이란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가 서로 맺혀 있는 매듭이다. 불안이란 확실
  히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이 수수께끼를 풀면, 우리의 정신생활 전모가 곧 환
  히 드러날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현실 불안이 합목적적이고 합리적이라는
   판단에는 근본적인 수정이 가해져야 한다. 즉 위험이 임박했을 때 취하게 되
  는 합목적이고 유일한 태도는 임박한 위험의 크기에 비해서 자기 능력을 냉정
  히 판단해 본 다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큰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위험에 대한 반응은 보통 불안이라는 감정과 방어 반응의
  혼합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깜짝 놀란 동물은 무서워서 달아나 버리는데
  , 이 경우의 합목적성은 '달아난다'는 것이지 '무서워한다'는 것이 아니다.
  불안의 발생은 결코 목적에 맞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불안에 있어
  서의 첫째 측면은 위험에 대한 준비 상태이며, 이 준비 상태는 지각적인 주의
  의 항진(亢進)과 운동성의 긴장의 항진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대
  기 준비 상태는 분명히 유익하며, 이와 같은 준비 상태가 결여되어 있으면 중
  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불안은 대상을 무시할 때, 공포는 주의가 대상을 향했을 때 사용하는 말이며
  , 이에 반해서 경악은 분명히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 돈다. 즉
   경악은 불안 준비 상태가 완료되기 전에 위험에 부닥쳤을 때 사용된다. 그러
  므로 인간은 불안으로 경악을 방지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노이로제의 불안'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노이로제 환자의 불안은 우리에
  게 어떤 새로운 현상의 형(形)과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첫째, 일반적인
  불안, 이른바 자유롭게 부동하는 불안이라는 것이 있다. 이런 종류의 불안은
   아무튼 적당한 표상만 있으면 어떤 관념의 내용에나 금방 붙어서 판단을 좌
  우하고, 예상을 선택하며, 모든 기회를 포착하여 자기를 정당화시키려고 한다
  . 우리는 이 상태를 '예상 불안' 혹은 '불안한 예상'이라고 부른다. 이런 종
  류의 불안에 괴로워하는 사람은 모든 가능성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예상하
  고, 뜻밖의 사건을 모두 전조로 해석하며, 불확실한 사건을 모두 나쁜 의미로
  만 간주한다.
  불안의 둘째 유형은, 방금 말한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심리적으로 경계가 정
  해져 있어서, 어떤 일정한 대상, 일정한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온갖
   것에 해당하는 흔하면서도 기괴한 '공포증'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공포증의
   첫 번째 부류는 무서움의 대상과 무서운 상황의 대부분이 우리들 정상인에게
  도 기분 나쁜 것들이며, 위험과 관계가 있는 경우이다. 두 번째 부류는, 위험
  과 연관성은 있지만 보통은 그 위험을 경시하거나 예상하지 않는 습관이 붙어
   있는 경우이다. 개개의 상황 공포증이 이 속에 들어간다. 공포증의 세 번째
   부류가 있는데,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당당한 체격의 건장한 사나
  이가 고향 마을의 어느 거리라든가 어느 장소를 불안해서 걸어가지 못할 경우
    혹은 건강한 여성이 고양이가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든가 쥐가 방안을 기
  어다닌다든가 하는 이유로 불안해 할 경우 등이다.
  이제까지 말한 불안의 두 가지 형, 즉 부동하는 예상 불안과 공포증이 결부된
   불안은 저마다 다른 것이다. 양자는 아주 드물게 우연인 것처럼 결부되어 나
  타난다. 일반적인 불안이 지나치게 심하다고 반드시 공포증이라는 혐오로 나
  타나는 것은 아니다. 생활 전체가 광장 공포라는 병으로 묶여 있는 사람에게
  도 염세적인 예상불안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임상적인 관찰은 노이로제적 불안을 이해하는 많은 실마리를 준다. 이제 실마
  리의 의의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아보자.
  1. 예상 불안 혹은 일반적인 불안이 성생활의 어느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
  다는 것을 입증하기 쉬운 일이다. 이런 종류의 실례 중에서 가장 단순하고 배
  울 점이 많은 것은, 이른바 욕구 불만으로 끝나는 흥분에 직면한 사람, 즉 심
  한 성흥분을 풀 적절한 출구를 찾지 못해 만족한 결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
  의 경우이다.
  2. 제2의 단서는 정신 노이로제의 분석, 특히 히스테리의 분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불안은 흔히 증상과 함께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 병에서는 불안이
  발작하거나 혹은 지속 상태가 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전부이다. 환자는 자기가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지 말하지 못하고, 명백한 2차적 가공으로 불안을 죽
  는다든가 미친다든가 졸도한다든가 하는 공포증과 결부시킨다.
  3. 제3의 관찰을, 특이한 방법을 사용하여 불안에 빠져 나오려고 강박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환자에게서 얻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환자의 강박 행
  위, 이를테면 세탁이나 의례를 방해하려고 하거나, 환자 자신이 자진해서 그
   강박 행위를 그만두려고 하면, 환자의 마음 속에는 일종의 무서움 같은 불안
  이 생겨 부득이 다시 강박 행위를 하고야 만다. 그러므로 강박 노이로제에서
  는 평소에 발생해야 할 불안이 이 증상 형성에 의해서 대치되고 있는 셈이 된
  다.
  리비도에서의 자아의 도주를 뜻하는 불안은 이 리비도 자체에서 발생한 것이
  어야 한다. 이 주장은 막연하지만, 어떤 사람의 리비도이든 그것은 결국 그
  사람의 일부이며, 리비도가 무언가 외부에 있는 것처럼 정신적 에너지가
   소비되고, 또 그것은 어떤 정신 체계에 속하느냐는 문제이다. 노이로제의
  현실 불안에 대한 뚜렷한 경향으로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무서움이
   첫 징조로서 나타난다. 또한 우리는 그가 어릴 때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
  어서도 모든 사물을 무서워하는 것은 결국 리비도가 높아짐을 무서워하는
  것이라 결론짓는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현실 불안의 조건을 살펴본다면,
  나약함과 무력감은, 만일 그것이 유아기부터 성숙기까지 줄곧 계속되는 경
  우, 노이로제의 궁극적인 원인이 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노이로제적
  불안은 단지 2차적인 것이며 현실 불안의 특수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어린이의 경우는 이용되지 않는 리비도에서 발생한 노이로제적 불안
   본질적 특징이 현실 불안이라는 형태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다운  현실불안은 어린이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은 아닌 것 같다.
  공포증에서도 어린이의 불안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방출되지
   않고 이용되지 않는 이 리비도는 표면적으로만 현실 불안으로 바뀐다. 그 결
  과 하찮은 외부의 위험이 리비도의 요구를 대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아성
   공포증은 우리가 '불안 히스테리' 속에 넣고 있는 후일의 공포증의 원형일
  뿐 아니라 그 직접적인 준비 조건이기 때문이다. 히스테리성 공포증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어린이의 불안과 일치한다. 그리고 비록 내용이 달라서 다른
   이름을 붙인 경우에도 히스테리성 공포증은 어린이의 불안의 계속인 것이다
  . 두 병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메커니즘의 문제이다. 공포증에서는 노이로
  제적인 단계를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억압하여 리비도를
  불안으로 바꾸고, 불안을 외부의 위험과 결부시키는 일이다. 두 번째 단계는
  ,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위험을 온갖 조심성과 안전 수단으로 피하는
   일이다. 억압이라는 것은 위험한 것으로 느껴진 리비도에 직면하여, 자아가
   도주하는 시도를 말하는 것이다. 공포증의 내용만을 설명하려 하거나, 온갖
   대상 혹은 임의의 상황이 공포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이 얼마나 불충분한
  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공포증의 내용은 현재몽의 내용, 즉 외
  관과 거의 비슷하게 중요하다. 공포증의 이와 같은 내용은 현재몽의 내용, 즉
   외관과 거의 비슷하게 중요하다. 걋막 계승함으로써 불안의 대상이 된다는
  痼 많다는 말을 어느 정도의 제한을 가지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
   불안을 일으키는 많은 것은 상징 관계뿐이며, 위험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
   계통발생적으로 계승했다는 그의 주장과 일치한다. 이로써 우리는 불안이
  育肩适 심리학의 중심 부위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스물 여섯 번째 강의>--리비도설과 나르시시즘
  이미 몇 번인가 자아본능과 성본능의 구별에 대해서 이야기해 왔다. 두 본능
  은 억압 작용에서 서로 대립하기 쉽고, 그렇게 되면 외형상으로는 성본능이
  자아본능에 지게 되어 퇴행이라는 우회를 거쳐 어떻게든 만족을 구하려 한다
  . 그러나 결국은 성본능이 정복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억압이 성본능을 패배에
  서 지탱시킨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음으로 이 두 본능은 그 필요성이라는 교
  사와의 사이에 처음부터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으므로 동일하게 발달하지 않
  으며, 현실원칙에 대해서도 역시 동일한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성본능은 자아본능과는 달리 불안이라는 감정에 연결되어 있음도 알았
  다. 이 결과는 어떤 중대한 점에서 아직도 불완전한 것이다. 그 증거로서 우
  리는 주목할 만한 심적 사실, 즉 가장 기본적인 굶주림과 갈등이 해소되지 않
  는다고 해서 불안해지는 일은 없지만, 채워지지 않는 리비도가 불안으로 바뀐
  다는 것은 사실이고, 또 자주 관찰되는 현상의 하나라는 점을 알고 있다.
  대상에 매달려 있고, 또 그 대상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노력의 표현인 리비도
  가, 또한 대상을 버리고 그 대신 자아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견해를 갖
  게 됨으로써 이 주장은 차츰 일관성을 갖게 되었다. 리비도의 이러한 조치를
   우리는 나르시시즘이라고 한다. 즉, 리비도가 다른 대상 대신에 자기 육체에
   고착되는 것을 말한다. 많은 성본능이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육체로 만족을
   얻고 있으며, 또 이와 같이 자기 성애적으로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현
  실 원칙에 복종시키고자 하는 교육이 성욕을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성애라는 것은 리비도 충당의 나르시시즘적 단계의 성활동이었던 것이다. 나
  르시시즘이란 이기주의에 리비도를 보충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이기주의란 개인의 이익에 주의가 집중된 상태를 말한다. 나르시시즘이라고
  말할 때는 개인의 리비도적 만족도 포함된다. 실생활의 동기로서는 둘을 완전
  히 분리하여 추구할 수 있다. 사람은 절대적인 이기주에 쌓였기 때문에 생긴
   증상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다른 현상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
  고 이와 같은 형상은 결국 다시 원 대상에 도달하려고 하는 리비도의 노력 때
  문이다. 이 노력은 회복과 치유의 시도와 일치하고 있다. 이런 증상이야말로
   사람의 눈에 띄게 마련이고 소란스러우며, 히스테리의 증상, 드물게는 강박
   노이로제의 증상과 유사한 것 같지만 역시 다르다. 조발성치매에 있어서는
  그 대상의 표상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리비도가 실제로 대상에서 그 무엇을
   붙잡고는 있지만, 결국은 그 대상만 붙잡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지만, 대상에 되돌아가려고 노력하는
   리비도의 이러한 거동에서 우리는 외식적인 표상과 무의식적인 표상의 구별
  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점에 어떤 전망을 얻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르시시즘적 질환의 분석으로 인간의 자아조성과 그 구조에 대해 알
  았다. 관찰망상의 분석에서 우리는 실제로 자아 속에는 끊임 없이 감시하고
  비판하며 비교하는 능력이 있으며, 이와 같이 하여 자아의 다른 부분에 대립
  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즉, 환자가 자기의 모든 행동이 누군가에게 감시
  되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알려져 비판받는다고 호소한다면, 이 환자는 아
  직 충분히 평가되지 못한 진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환자는 이
   불쾌한 힘을 밖으로 옮겨서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으로 본 점이 잘
  못되어 있는 것이다. 환자는 이것이 자기의 현실적인 자아의 그 활동을 꾸며
   낸 이상적인 자아에 비추어 판단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스물 일곱 번째 강의>--감정의 전이
  사람들은 노이로제 환자의 병원적 갈등을 동일한 심리학적 기반 위에 있는 심
  적 충동 사이의 정상적인 싸움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
  고 있다. 병원적 갈등이란, 한편은 전의식과 의식의 단계에 나타나 있고 한편
  은 무의식의 단계에 억제되어 있는 두 힘 사이의 충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갈등은 결코 해결될 수 없다. 두 힘이 한 기반에 설 수 있도록 수선해 주는
   것이 치료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분석요법으로 치료되는 것
  보다 환자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서 환자에게 직업을 갖거나, 기업, 결혼, 이혼 등에 대한
   인생의 중대한 결정은 내리는 일은 삼가게 하고, 모든 것은 치료가 끝난 후
  에 해야 한다주의 깊게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전이는 의사라는 인간으로 감정을 옮긴다는 뜻이다. 치료라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감정이 발생한다는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와 같
  은 감정이 다른 장소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즉 환자의 마음에 미리 준비되어
   있어서 분석요법의 기회에 의사라는 인간에게 옮겨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
  이다. 전이는 어떤 때는 격렬한 사랑의 요구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온화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이가 치료의 초기 단계에는 한동안 가장 강력한 원동력
  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전이가 의사와 환자가 합심하여 하고 있는
   분석에 편리하게 작용하는 이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 개의할 것도 없다
  . 그 다음에 전이가 저항으로 변한다면, 그때야말로 이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다음의 두 가지 정 반대의 상황 아래서는 치료에 대한 전이의
  관계가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째는 전이가 강한 애정의 경향을 띠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성욕에서 나오고 있다는 표시를 뚜렷이 나타냈기 때문에
   내부적인 반대를 일깨워야만 될 때이다. 둘째는, 전이가 사랑의 충동이 아니
  라 적의의 충동에서 나오고 있을 때이다. 이때 적의와 애정이 동시에 존재하
  는 것은 감정의 양가성의 좋은 실례인데, 이것으로 인해 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적의의 감정은 애정과 마찬가지로 감정의 결합을 의
  미한다. 이것은 마치 반항이 비록 정반대의 표현을 갖고 있더라도, 복종처럼
   의존을 뜻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전이는 히스테리, 불안 히스테리, 강박 노이로제의 치료에 있어서 중심적이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병을 종합해서 '전이 노이로제'
  라고 일컫는 것이다. 남에게 리비도적 대상 충당을 하는 능력은 정상적인 인
  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른바 노이로제 환자의 전이 경향은 이
   일반적인 특징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실제로 옛날부
  터 깨닫고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른하임은 그 무엇에도 현혹되지 않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최면 현상의 학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어떤 방법으
  로든 암시에 걸리기 쉽다는 즉 '피암시성(被暗示性)이 있다'라는 명제를 내세
  웠다. 전이경향이 바로 베른하임이 말하는 피암시성이다. 그러나 전이라고 해
  도 그 뜻이 매우 좁기 때문에 음성전이는 이 피암시성 속에 들어 있지 않다.
   그에게 있어서는 암시는 하나의 근본적인 사실일 뿐 그 유럼뎬.
  정신분석에서 얻은 지식의 관점에서 우리는 최면술의 암시와 정신분석의 차이
  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최면 요법은 정신생활 속에 있는 것을 숨기
  거나 장식하려 하지만, 분석요법은 이것을 들추어내어 제거하려고 한다. 전자
  는 미용술과 같은 일을 하고, 후자는 외과 수술과 같은 일을 한다. 최면 요법
  은 증상을 금지하기 위해서 암시를 사용하고, 억압을 강화하며, 증상 형성을
   가져온 모든 과정을 그대로 둔다. 그런데 분석 요법은 병의 근원을 더 깊게
   하며 증상을 일으킨 갈등을 공격한다. 그리고 이 갈등의 결과를 바꾸기 위해
  서 암시를 이용한다.
  노이로제 환자에게는 향락의 능력도, 일을 하는 능력도 없다. 향락하는 능력
  이 없는 것은 그 사람의 리비도가 현실의 대상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 일할 능력이 없는 것은 리비도를 계속 억압하여 그것이 솟아오르는 것을 막
  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만일 환자의 자아와 리비도 사이
  의 갈등이 끝나고, 그의 자아가 다시 리비도를 뜻대로 할 수 있게 되면 그는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므로 치료의 사명은 자아에서 멀어져 있는 현재
  의 속박에서 리비도를 해방하여, 그것을 다시 자아에 종속시키는 데 있다. 노
  이로제 환자의 꿈은 본질적으로는 정상인의 꿈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이
  로제와 건강의 차이가 낮에만 해당되며, 꿈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노이로제 환자의 꿈과 증상 사이에는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분명
  히 밝혀 낸 많은 가설을 우리는 건강인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건강인도 꿈이나, 꿈과 증상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를 정신생활 속에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 우리는 건강인도 억압을 하고, 그것을 지속
  시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며, 그 무의식 체계에는 에너
  지를 보충받은 억압된 충당된 충동을 감추고 있으며, 그리고 그의 리비도의
  일부는 그 사람의 자아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
  로 건강인도 잠재적인 노이로제 환자이다.
  정신분석의 해로운 결과는,대체적으로 분석을 잘 하지 못했거나 분석을 도중
  에서 중단했을 때 나타나는 갈등이 증대하여 생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 그러므로 우리의 노력이 과연 영구적인 장해를 가져다 주는 것인지 아닌지
  는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장신 분석의 남용은 여러 방면에서 나타
  날 수 있다. 특히 전이는, 비양심적인 의사의 손으로 이루어
  착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어진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치료법도 이 남용을 막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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