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EO가 본 얼간이들

by Casey,Riley 2022. 10. 11.
반응형

        EO가 본 얼간이들


    무묘앙에오, 그의 삶과 사상
  무묘앙에오, 36세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그의 촌철살인적 메시지는 그 생의 짧음만큼이나 간결하고 때
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서릿발같이 읽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통속적인 상식으로 덧칠해져 있는 종
교는 물론이요, 사회에서 당연시  여기는 무의식적 강박관념의 맹점(상행위나  온갖 기업활동, 정신세계 
등은 인간의 불행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을 놀라울 정도로 부각시키는가 하면, 이른바 속세와는 별개의 
<정신세계>라 명명된 갖가지 분야에 속하는 맹신적인  종교, 심령치료, 전통적 신학, 다른 별  사람들의 
문제 등을 그는 인간의 따분함과 공포심, 그리고 유치한 지성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지적하고 그것
이 갖는 지독한 어리석음에 대해 원숭이와 장자의 현대판 대화를 통해 명쾌하게 논파해 보이고 있다.
  그는 통속적인 정신세계와 종교신앙이 갖는 맹점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어리석은 바보의 짓으로 취급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저에는 그 누구도 반론을 펼 수 없는 철저한 논리로 일관하기 때문에 그
의 책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동안 간직하고 있던 정신세계 서적을  모두 헌책방에 내다팔기도 했
다.
  인류는 입으로는 <자유>가 소중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
라는 개념을 자기 좋을 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경향에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럴싸한 종교,  모럴, 수행체계라면 자신의 <
진짜 자유로운 영혼>을 팔아 넘기면서까지 스스로 따른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최후에 모든 것이 잘못되
었을 때,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즉 도망갈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기는 사는 법에 대해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이 있다. 이에 대해 EO는 진짜 탐구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일, 그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는 것은 나중이다. 죽는 것이 먼저다." 도의 명백한, 그리고 근원적인 사실을  직시하는 사람들만이 
그와 교류할 수 있다고 생전의 저자는 언급한  바 있다. "본질적으로, 나는 걸어다니는 한 채의  절이다. 
그 입구는 대단히 좁다. 그러나 그  출구는 세상에서 가장 클 것이다." 들어가는  건 간단하지만 졸업이 
어려운 라즈니쉬식 산야신을 사양했던 저자는 그의 절에 들어서기 위해 단 한가지 조건을 내건다. 그것
은 <배운 것을 전부 잊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의 저서 내용까지 포함해서.
  14세 때 <깨달음>을 언뜻 넘보는 체험이 있고나서  23세까지 여러 가지 신비학, 도 등을 섭렵했지만 
단체에 소속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30세 무렵부터 독자적인 <채널링>을 시작하여 은하계의 
막후 정보들을 얻었다. 33세에 그것들에 대한 총괄적 결론과 사색의 결과로 모든 생명과 존재에 절망했
다. 1992년 2월 17일 우발적으로 대오견성했다. 그 후 약 1년 동안 명상센터의 명상가들이나 치료가들에
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우편으로 보냈다. 모두가 묵살하는 중에도 3명의 문하가 생겼다.

  1993년 8월부터는 그의 지도와 방편이 갑자기 <선>으로 기울면서 선문의 본산, 각 지방 선방의 승려
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우편으로 보내는 일을 시작했다. 그  중에서 문하가 나왔으며 뒤에 그 승려는 대
오를 이뤘다. 전통과 형식에 매달리는 선, 그리고 스승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명상센터와의 마찰과 반
감 속에서 그의 글은 많은 명상가나 참선 수행자들에게 개인적인 편지 또는 기관지의 형태로 전해져 지
금까지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 일생 동안 단체화, 조직화, 통속적인 사제관계를 거부했다.
  1994년 10월 22일 죽었다. 당년 36세. 그의 선문 직계 문하로 쥬우와 호오장을 둘을 남겼다.

  태양계 제 3행성에 남겨진 작품으로 <폐허의 붓다들><속 폐허의 붓다들><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
><지구가 꺼질 때의 좌선><폐허의 붓다들 외전><반역의  우주><작은 붓다의 큰 이야기><섹스와 죽
음의 홈페이지>등이 있다.

    제 1장 얼간이 초능력자들

    <초능력자는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어느 마을에 염력을 이용해 자기 마음먹은 대로 숟가락을 구부리는,  이른바 초능력자가 있었다. 그는 
어떤 금속이나 물질도 모두 구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절대로  구부리지 못하는 것이 하
나 있었다. 그게 과연 무엇일까? 그가 절대로 구부리지 못하는 것, 그건 그의 <신념>이었다.
  - 그의 대가리는 여전히 망가진 시계인 채로다.

    <불로불사면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중국의 어느 마을에 한 약제사가 살았는데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불로불사의 약을 만들었다. 덕분에 
그 마을 사람들은 평균 150세까지 살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200세를 넘기지 못했
다. 약의 효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200년을 다 채우기도 전에 그들은 모두 자살해버렸
다. 마을 사람들은 불로불사의 약으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  마을에서는 외도와 이혼이 허용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 20년도 견뎌내기 어려운, 서방 또는 마누라 얼굴을  <영원히 보는 일>을 참아낼 수 있는 이는 아
무도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동물과 텔레파시가 통하면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만약 벌레나 새가 하는 말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다면 인간은 그들을 죽여버리고 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동물들은 인간이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그들 사이에서도 줄곧 같은 말들만을 주고받기 때문
이다.
  마치 샐러리맨들이 자신이 다니는 직장의 윗사람 욕을 하고 야한 차림새의  아가씨들은 먹을 것과 자
동차와 남자 얘기만 하는 것처럼 그리고 젊은이들이 자신의 취미와 일과  가십밖엔 지껄이지 않는 것처
럼 새나 벌레, 혹은 개나 고양이들도 날이면 날마다  그저 먹이나 이성에 대한 얘기만 조잘거리기 때문
이다. 그러니 <동물들이 나누는 대화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하는 인간
들에게 꼭 일러두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반드시 그들을 죽여버릴 것이란 말이다.
  예컨대 암코양이가 주인 아가씨에게 이렇게 말한다. "엊저녁에 새로 온 네 남자친구, 그 작잔 정말 서
툴더라. 그리고 오늘 아침은 왜 또 그렇게 맛없는 거니. 인간이면 인간답게 제대로  해서 맛난 밥 좀 먹
게 해주면 안 되는 거니. 그렇게만 해준다면 난 아무리  귀찮아도 꾹 참고 네가 쓰다듬을 때 가만히 있
어줄 수도 있어."
  텔레파시. 그건 당신이 <노여움>이라는 걸  완전히 초월하지 않는 한, 당신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당신은 먼저, 다른 이가 내뱉는 어떤 악담이라도 그걸 태연히 지켜볼 수 있는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만
약 물질 차원에서 그걸 할 수 없다면, 당신에게 텔레파시 같은 건 불가능하다.
  당신은 자기 감정이나 노여움을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관찰력도 없이 텔레파시를 가진다면, 당신에겐 
끊임없이 <당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의 위선이 그냥 그대로  감지>된다. 그럼 당신은 매일매일 
그들을 증오하기만 할 것이다. 또 당신은  시시한 사립탐정의 조수나 방송국의 <실종자 찾아내기>프로
그램에 출연하는 3류 점쟁이 정도는 될 수 있겠지만 결국 당신의 인생은 어김없이 파탄에 빠지고 말 것
이다.
  참된 뜻에서 당신들이 온유해질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모든 위선과  거짓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해져 
있을 때 뿐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기분이나 기호에 따라 내리는  판단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객관적이고 솔직한 관찰로부터 나오는 판단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황
에 대한 배려이다. 먼저 다른 이들이 겉으로는 체면을  차리면서도 머릿속으로 딴 생각을 하는 그 본심
을 또는 그들이 입으로 소리내는  모든 말들을 대하면서 철저하게  <냉정>해지지 않는 한, 텔레파시는 
당신을 괴롭힐 뿐이다.
  젊었을 때 내게 일어났던 일도 그랬다. 그 당시의  나는 아주 작은 일에도 흥분하고 걸핏하면 격노했
다. 당시의 내가 상대방을 마주한 상태에서 입버릇처럼 내뱉던  첫마디는 <이 거짓말쟁이야>였다. 그러
니 그들은 나를 마치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악마처럼  여길 수밖에. 심령적인 카운슬링을 할 때 그
들은 내게 경의를 품지만 내가 그들의 위선을 낱낱이 폭로하는 단계에  접어들면 그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나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설령 그것이 그들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기 위한 수단
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에게는 성장과 각성에 대한  갈구가 없다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텔레파시 같은 것은 자기의 사고를 완전히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에겐 그
저 하나의 도청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지진을 예지할 수 있어도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라디오에서 들은 말이다. 식물에 전극을 붙여놓고 자세히 조사해보면 지진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고 여겨 밤낮없이, 필사적으로 연구에 매달린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지진이 있기 
30시간 전에 식물의 전압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논평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연구가 하
루빨리 결실을 맺어, 완전한 지진예보가 가능해지면 좋겠습니다." 자, 당신은 어찌 생각하는가?
  이봐 이봐, 재미있는 연구라고는 하지 마시오. 난 폭소를 터뜨렸다. 지구에서는, <과연 세상을 위해 좋
은 일>이라는 생각 따위로 두 발 짐승인 원숭이들은 고개를 끄덕거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박장대
소했다. 무엇보다도 말이다. 관동대지진 같은 지진이 닥쳤다고 하자. 하늘에 빌어 가라앉힐 작정인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자연의 섭리로 일어나는 일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자, 그럼 다음으로, 어
떻게든 <예지>할 수 있게 됐다고 하자. 그래서 예컨대, "글쎄요, 내일 아니 모레쯤, 진도 7의 지진이 관
동지방에서 일어날 가능성은 85퍼센트입니다." 이런식으로 아나운서가 일기예보처럼 진지하게 말한다고 
하자. 그럼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도망갈 수 있을까? 더구나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100퍼센트라고 
했다가 예측한 결과 밖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사람들로부터 굉장한 항의를 받게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
한 일이다. 기업들은 피해소송까지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예지할 수 있다고 해서(그것도 기
껏 퍼센트 밖에는 말할 수 없으면서) 대체 <무엇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연구를 통해서든, 아니면 예지가 가능해져서 지진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해도 실질적으로 무얼 어찌
할 수 있는가? 이 아둔한 예언자, 예측전문가들이여.
  설령 연구를 통해 100퍼센트 확실한 지진예지가 가능해졌다고 하자. 참 대단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런 예지가 가능해지는 데는 적어도 앞으로 반 세기는 충분히 걸릴 것이다. 일기예보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일기예보를 시작한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겨우 이 모양이다. 아니, 여성의 생리조차 100퍼센트 확
실한 예지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원숭이 학자들이여, 어쨌든 내가 백보  양보하여 100퍼센트의 지진예지가 가능해진다고  하자. 그래서 
30시간 전에 또는 4일 전에 그걸 안다고 치자. 그렇다면, 어디로 피난가야 할지  또 어떤 교통수단을 이
용해야 할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대책을 세워놓은 상태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이제부
터 정부가 대응 시스템을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가?  결국엔 대공황에 빠져들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
리가 맞이하는 것은 대혼란뿐이다. 설사 1주일 전에 확실히 예지된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짐을 꾸리는데 
이틀, 도쿄에서 모든 사람이 빠져나가는 데는 모든 수단을 활용한다 해도 나흘은 족히 걸린다. 아니, 모
든 이가 질서 따윈 무시하고 자신이 먼저 빠져나가려고  덤빌 것이 뻔하니 결국은 공황이다. 정신을 못 
차리고 갈 곳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시간은 이미 흘러 유인원 수천 만이 바비큐 원숭이가 된다.
  자, 이렇게 실제로는 전혀 아무 쓸모 없는 그 지진 예지 연구라는 것을 목매달고 하는 교수의 연구비
는 대학에서 대고 있다. 더구나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온몸에 전극을 붙인  불쌍한 식물들. 교수는 말한
다. "이건 세상을 위한 연구요" 주위의 유인원들이 내놓는 답 역시 한결같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건 
세상을 위한 연구야" 나 같으면 그런 원숭이의 연구실에 엽서라도 한 장 띄울 것이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지진이 지나간 뒤에 살아갈 방법이나 생각하시지.  지진 예지가 맞을지 안 맞을
지를 따지는 당신의 그 도박취미를 가지고 <세상을 위해서>라고 말하진 마시오. 이 골빈 사람아!"
  이렇듯 앞으로의 일을 예지할 수 있다는 것과, 그걸 처리할 수 있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결국 지진의 예지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 예지는 그저 복권이나 마권 등 내기의 승패에 쓰이는 것이 
고작이고 그 능력은 당신의 도박에는 도움이 됐을지 모르지만 인류를 위해 공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
다.

    <적중률 100퍼센트의 예언자는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자, 여기 한 예언자가 있다. 그에게는  <내일의 신문기사>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당장 눈앞에 일어날 
일부터 열흘, 아니 10년 앞의 일까지도 완벽하게 100퍼센트 알아맞히는 능력이 있다고 치자. 안쓰러워해
야 할지, 아니면 당연하다고 여겨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단 열흘도 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알기 위해 큰 돈을 들여  용한 점쟁이를 찾아다닌다. 그러나 막상 진짜 예언
자가 나오면 그가 숭배받는 것은 처음 엿새  동안뿐. 7일째에는 안식에 들고, 그리고는 영원히... 왜냐하
면 보험회사에서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암살할 수도  있다... 그저 그뿐이다. 이것이 한 예언자의 <세계 
창조 6일>의 웃지 못할 이야기다.
  또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안다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좋은 미래는 기뻐하며 받아들
이지만, 나쁜 미래는 피하려 한다. 하지만 대체 누구의 기준에 비추어 좋은 것인가? 개인이 아니라 인간 
전체라 해도 그렇다.
  그렇듯 지구나 우주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제 
아무리 정확한 예언을 얻는다 한들 그건 더 큰 파멸을 초래할 뿐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파멸이다. 사람
들은 모든 것에 대해 <알기만 하면 어떻게든 대책이 서겠지>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미친 
사람의 증상이다.
  만약 무엇이든 알 수만 있다면 그래서 어떻게든 대책을 세울 수 있다면  지식인, 학자, 예언자등은 벌
써 오래 전에 이 세계를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알면 알수록 더 큰 혼돈에 빠졌고 더 큰 
불행을 사방에 뿌려놓았다. 이 세상에 나타났던 수많은  붓다들 가운데 예언에 귀기울이라고 한 붓다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지식이 사람을 성숙시킨다고 말 한 붓다 역시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지구의 유인원들은 정보를 모아, 적당한 판단을 내리고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지혜요, 과
학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또 그것이 지성의 기능이라고... 하지만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대체 무
엇인가?
  그들이 말하는 <적절>이란, 우주적 스케일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왜소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존
속, 그리고 고통을 겪지 않으려는 방책과 쾌락을 얻기 위한 적절한 조처를 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
렇다면 대체 최후에는 누가? 그리고 <인간의 본성 가운데 무엇이> 만족을 얻으려는 것일까?

    <영웅을 자처하는 목사는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이런 이야기를 하나 해주겠다. 항해중에 폭풍을 만나 배가 곧  침몰하게 되었는데, 구명보트에는 10밖
에 탈 수 없었다. 누군가 희생양이 되어 배와 함께 가라앉아야만 했다. 그 때 그곳에는 목사 한 분이 있
었다. 그는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좋은 일을 하게  됐다고 착각했다. 그는 
희생정신이 선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멋지게 <돌아가셨다>.(어떤 경로를 통했는지는 모르
지만 어쨌든??)
  그 뒤 누군가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이 전세계에  보도되고 목사는 높이 칭송받는, 아주 바보같은 일이 
있었는데 당신들에게 특별히 이 희생정신의 영웅인 목사의  뒷이야기를 해주려고 한다. 그 목사는 죽고 
나서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갔다. 당연히 그는 불평을 했다.
  목사 : 나는 열 사람의 목숨을 위해 내 한 몸을 희생했어요. 그만큼 숭고한 내가 왜 이런 구린내 나는 
악마들 속에 끼여 있어야 한단 말이오?
  그러자 지옥의 대왕 사탄은 말했다.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 그러고는 텔레비전 모니터를 켰
다. 화면에 표류하는 보트가 보였다.
  사탄 : 자 봐라. 네 한 몸 희생해  살린 열 사람 가운데 자기가 배에 남겠다고  우긴 고집불통 청년이 
하나 있었지?
  목사 : 아, 있었어요. 하지만 난 당신처럼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죽어선 안  된다고, 온갖 방법을 써
서 그를 설득하고 내가 대신 죽은 거요.
  사탄 : 그럼 화면의 보트를 잘 보아라.
  그러자 화면에 나타난 보트안에서 갑자기 청년이 권총을 뽑아들더니 아홉 사람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는 자신도 자살했다.
  사탄 : 너는... 왜 그를 구명보트에 태웠느냐? 그는 자기 의지로 남겠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는 거기서 
자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운명은 거기서 자살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더구나  말이다. 이 얼간이 목
사야, 잘 들어라. 청년은 스스로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기 꼭 1초 전에, 거기서 신을 보고 깨달아, 하나의 
예수가 될 운명이었다. 청년은 배가 가라앉기 30초  전에 러시아의 원자력 잠수함에 발견되어 구출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트의 사람들도 모두 살아날 수 있었단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야, 이 멍청아! 그렇
게 깨달음을 얻은 청년은 8년 뒤에는 러시아의 정치가로  제 3차 대전을 막아낼 인물이었단 말이다. 그
런데 네놈은 그걸 망쳐놨어! 아주 보잘것없는 네놈 하나가 천국에 가겠다는 욕심 때문에 어줍잖은 선행
을 하는 바람에 말이다! 그러니까 너 같은 놈은 지옥행이야. 이 개만도 못한 놈아!
  이 이야기의 의미를 당신은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인간은 이승에서는 겸허할 지 모르지만 저승에
서는 교만해지고 만다. 이것이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 운명이란 당신들의 타산적인 사고로
는 판단할 수 없다. 즉 궁극적 운명이나 숙명은 그 어떤 논리로도 계산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
의 <직감>이다. 그러나 그 직감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이해관계나 세속적인 판
단과는 아주 다른 경우가 많단 말이다. 왜냐하면 운명의 결과는 몇 년, 아니  몇 백년 뒤에 나타나기 때
문이다.
  사람은 자기 인생의 성과를 살아 생전에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좋은 운명의 흐름을 탔
다는 판단을 순간적으로 내릴 수 있기 위해서는, 사람의 선악이나 고통, 쾌락  따위와는 전혀 다른 마음
의 바탕이 필요하다. 그 바탕이 되는 요소로서의 직감을 최대한 수용해주는  것이 당신들의 <내적 고요
>란 말이다.
  그러면 지구인은 EO(본문에 등장하는 EO와 EO이즘은 무묘망에오 자신의 이름에서 이니셜을 따 표현
한 것임 - 편집자 주)에게 묻는다. "그 고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O : 그 전에, 당신은 왜 그걸 이루고 싶어하는가?
  지구인 : 그것이 올바른 판단의 원점이 된다고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EO : 그렇다면 그대는 목사와 같다.
  올바름을 위해, 결코 잘못을 범하지 않는 완벽한  자기를 세우기 위해, 고요를 이루려 한다면, 그대에
게 고요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는 <고요> 자체를 찾는 것이 아니라 <고요>를  발판
으로 자신을 위한 천국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지옥행이지.
  지구인 :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EO : 맞다, 바로 그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참된 <고요>다. 당신 마음에서 <한다>는 
것과 <해야만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순간이 <고요>이다.
  지구인 : 그럼 무심이란 것은 어떻게 해야 실현됩니까?
  EO : 무심의 실현 같은 건 필요치 않다. 살아 숨쉬는 생명들에게 무심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동물도 최소한 먹이 얻는 것을 생각하며, 초목 역시 어떤 방향으로 가지를 뻗을까
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헤매지는 않는다. 그냥  생각하고 그대로 판단한다. 사고와 헤맴은 같은 것
이 아니다. 선사도 차를 달이거나 밥을 먹을 때는  무심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먹을까, 어떻게 차를 우
릴까. 이런 것들은 모두 사고로써 가능한 것들이다. 산다는  것은 사고 없이는 될 수 없다. 여기서 말하
는 사고는 망설임이나 헤맴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행위나 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활동으로서의 사고
이다.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무심이냐 유심이냐가 아니라 당시의  본성이 사고가 아니라는 것, 당신의 의식
에 중심이 없는 것이다. 당신의 사고는 있는 그대로  좋다. 그것을 애써 무심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이
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무심은 좋고 사고는 나쁜 것이라고  당신이 좋고 나쁨을 따지기 때문에 하는 말
이다. 온갖 생각은 있지만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 무엇>이라는 체험의 결여가 당신, 아니 모든 
인간의 괴로움의 발단이다.
  이런 본질적인 체험이 필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나아가 그것은 또한 <안다>는 차원조차 아니다. 그것
은 체험되는 것이지만 배워서 아는 체험은  아니다. 당신의 본성을 깨닫거나 아는  것이 아니요,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미지인 존재성 그것일 뿐이다. 그건 100퍼센트 완전한 무지이다.
  이말은 거기에 사고나 지식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사고가 혼자  나서서 설치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당신의 모든 사고 앞에는 먼저 <의식>이 있어야 한다. 사고란 것은  단지 그 속을 떠도는 것에 
불과하다. 생활에 필요한 사고는 무수히 많다. 완전한 무심이 될 필요는 없다.
  다만 본심, 주인공, 본성으로서의 당신은 절대적으로 철저하게 그것들로부터 떨어져 따로 머물러 있으
라. 이것이 바로 가르침의 본질이다. 참된 무위자연, 자연법이 곧 올바른 판단력은 고요속으로부터 저절
로 우러나오는 것.

    <거미줄 이야기, 그 후>
  여기서 보통 세간에서 <친절>이라고 일컫는 행위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추한 에고(ego)에 관해 참고
가 될 만한 이야기를 하나 더해보겠다.
  살아 생전에 문득 작은 벌레의 목숨을  불쌍히 여겨 거미를 밟아 죽이지 않은  사나이가 지옥에 있었
다. <거미줄>이라는 동양의 유명한 이야기. 지옥에 있는 그에게 어느  한순간 천국에서 구원의 줄이 내
려왔다. 사나이는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줄에 매달렸는데 많은 사람들 역시 사내의 뒤를 따랐다. 사나
이는 자기 혼자만 살기 위해  줄을 흔들어 사람들을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다가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그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졌다. 이것이 원래  이야기의 줄거리다. 그런데 실은 이  이야기엔 후일담이 있
다.
  몇 백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지옥에  있었다. 지옥의 <멋지게> 흐린 어느  날. 다시 <거미줄>이 
그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 그는 줄을 잡았다.  중간쯤 올라가다 내려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이건 나를 위한 줄이야. 여럿이 매달리면 끊어지니 너희는 줄에서 물러서'하고 소리치
려다가 문득 옛날에 저지른 자신의 행동이 떠올랐다. '그 때 나 혼자만  살려고 하다가 거미줄이 끊어졌
었지. 좋아 그렇다면... '하고 사나이는 아래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어어이, 어서 매달려 올라와라.  자, 
얼른얼른 올라오란 말야!" 그렇게 소리지르고 나서 사나이는 흰구름 위로 사라졌다. 이어서 많은 사람들
도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모두가 거대한 왕거미에게 먹혀 버렸다.
  무언가를 바라고 베푸는 친절은 자기 자신을 망친다. 어떤 사람의 행위가 꿍꿍이속이 있든 아니면 마
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친절이든 그 어느쪽도 <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여전
히 당신은 <타산적>이니까.
  세간에서 말하는 친절이란 행위의 대부분은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든가, 아니면 친
절을 가장한 우회적 표현이라는 차이밖에  없으며, 그 어느 쪽이든  결국은 <가지> 만족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다른 이를 도와줌으로써 자신이  도움을 받는다>는 따위의 치사한 계산이 무의식속
에 있는 한 어떤 종교나 사상이든 <강압적이고  심리적인 이해타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
은 결국 영웅을 자처한 목사와 같은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결과밖에 안 된다.
  사람의 판단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잘 풀리지  않고 궁지에 몰리면 사람은 직감이나 점, 또는 
<하느님과 하나된 경지로부터 나오는 행위>라는 충동에  의지한다. 그런데 거기에도 다음과 같은 심리
적 함정이 있다.

    <직감에 의지해도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이라는 말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는 직감이란 의미지만, 나는 
이것 자체가 에고의 산물이라고 간주한다. 직감이란 말은 자연의 섭리나 또는 영적인 작용과 같은 착각
을 당신에게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 아주 듣기 좋은 <용어>다. 그것은 그야말로 <옳은 것>인 듯한 착각
에 빠지기 쉽다.
  어떤 사물에 대해 판단이 잘 내려지지 않을 때 당신은  직감에 의지한다. 그 때 당신은 그 사물에 대
해 직감을 써야 할지 아니면 쓰지 말아야 할지를 애당초 직감했는가? 말이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을 것
이다. 먼저, 당신이 직감에 귀를 기울일 때 이미 거기엔 당신의 사고가 있다.
  거기엔 문제를 풀어야만 한다는 강박감이 있는가 하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이미 당신
은 문제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가 막히니까 당신은 직감에 의지한다. 그러나 이런 부분
적인 내맡김으로는 당신은 결코 성장할 수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때문에 인간은 시시껄렁한 인생론을 
버리고 초월성으로 비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방식이라면 직감은 여전히 당신의 사고에 이용당할  뿐이다. 사고가 직관을 이용하게 되면 당연
히 아래와 같은 꼴이 된다. <이 직감은 옳고, 저 직감은 글렀다>는, 직감이 확실하다면 당신은 또 이렇
게 말할 것이다. <직감을 정확히 받아들이기에 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라든가 <직감에 대해 이리
저리 헤맸던 내가 문제였어>라고. 이렇게 해서 당신의 사고는 언젠가는 직감을 당신의 심리적인 사유재
산처럼 착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언제 어디서든 심리치료가나 신내린 무당의 간판
을 내걸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은 영원히 불행을 끌어안고, 더구나 다른  사람들까지 불행 속으로 끌어들
이겠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한 것을 가지고 카운슬러에게 온다. 특히 점쟁이나 채널러<Channeler : 외계인 혹
은 우주적 존재와 미묘한 에너지 차원에서 의사소통하는 사람을 말하며, 의식의 통로(Channel)가 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 Channeling은 그러한 행위를 말함 - 편집자주>에게 들고 오는 질문의  저속함이
란 듣기만 해도 <얼마나 인류가 살아 있을 값어치조차 없는 생물인지>를 통감할 정도이다.
  그들이 안고 오는 물음은 모두 '어찌하오리까?'이다. 더구나 그것들은 모두 <개별적 문제>에 대한 것
들이다. 주인공인 자신이 어떻게 바뀌어야 될까? 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되느
냐? 는 물음뿐이다.
  이런 물음에 기꺼이 대답해주는 소위 점쟁이를 찾거나 혹은 스스로 점괘를  뽑기라도 했다면 그런 짓
을 하는 자신을 주의깊게 살펴보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당신으로 하여금  도에서 빗나가게 하는 계기만 
될 뿐이다. 그것은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 때문도 아니고, 또 직감이 원인인 것도 아니다. 오직 당신의 
에고가 원인이다. 직감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다.
  자신의 직감에 의지하는 인생까지도 언젠가는 당신을  긴장시킨다. 당신은 언제나 직감이야말로 올바
르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영감이 솟아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땐 좌절한다. 맞으면 좋아하고 빗
나가면 머리 싸매고 고민한다. 이런 놀음을 언제까지  되풀이하려 하는가? 그 놀음이 좋으면 질릴 때까
지 하면 된다. 하지만 생명의 기준을 거기에 두면 당신은 엄청 불행해질 것이다.
  결국 당신은 타로트 카드(Tarot Card : 22매의 우의패와 56매의 수위패로 한 벌 78매의  카드. 옛날에
는 게임에 쓰였으나 지금은 주로 점을 치는 데 쓰임 - 편집자주)나 영감에 매달려 살아갈 것이다. 하지
만 그건 뭣 때문이지? 뭣 때문인가 말이야? 그 영감의 결과에 당신이 기대하는 게 도대체 뭐지? 당신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과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기대대로 행복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을 찾기 위해 당신은 직감을 <이용하
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기대하는 행복이 장기적으로 보아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왜 애초에 
점치지 않는가? 만약 당신이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는 것이  오히려 당신을 성장시키는 기회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은 단순한 가정의 논리가 아니다. 사실 당신의 삶은 당신 자신도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판단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판단기준이 있다. 결국 돈이나 결혼,  정신적 안정 등 <당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직감의 결과가 옳았다. 틀렸다고 당신은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대체 어떻게 판단하겠다는 말인가? 어느 쪽이 옳은가? 점이나 직감을 그런 사고방식으
로 다루는 한 당신은 끝내 <절대적인 옳음>에 대해 철학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우주가 근본적으
로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느냐를 규명하지 않는 한 당신의 판단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다. 지구
나 우주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판단기준으로 하지 않으면 겉보기에 아무리 잘  되고 있는 것 같
아도, 결국은 파탄에 빠지고 말 것이다. 가정을, 전제를, 목적을 잘못 잡으면 모든 것이 파탄으로 치닫는
다.
  내게는 분명히 명상센터나 선방이나 치료사 따위들이 파산하여 뿔뿔이 흩어지기를  부치기는 면이 있
다. 그런 것들은 당신의 본성에 무거운 짐이 되고 잡음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부추기는 
것은 <당신> 자신에 대한 포기다. 당신 인격에 대한 포기다. 당신의 내면에서, 당신이 상상하는 꿈이나 
갈등들, 당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고들 당신의 정책 같은 것들에 대한 포기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당신의 내면에 있는  사고들을 포기하게 만들고 끝으로 당신의  사고와 결별하게 
한다. 남은 것은 이제 진짜 <당신>뿐이다. 붓다들은 언제나  그저 존재 속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당
신도 명상이나 좌선의 이별속에서, 그저 순수하게 존재하고 있다.
  내 생각이 틀렸다면 나는 두 번 다시 거기서 나갈 수 없다. 당신들은 아이고! 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돈벌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모럴, 세상, 정신세계, 도사, 좌선, 사이코테라피(Psycho Therapy : 심령치료, 
물리적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  마음의  힘을 이용하여   치료하는 것  -  편집자  주), 트랜스퍼스널
(Trans-personal : 초감각적 지각을 중시하는 정신요법 - 편집자 주) OOBE(유체이탈 - 편집자 주),  채
널링, 그리고 우주의 끝까지 <떠밀려 버린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나갈 수 없다. 나는 두 번 다시 <지금  여기>의 본성에서 나가지 않는다. 왜
냐하면 두 번 다시 나가지 않는 것 그것이 삶과 죽음 사이 있음의 <내 집>이기 때문에.

    <기적의 치료가도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영적 능력으로 병을 고치는 뉴욕의 한 치료가가 말기 암환자를 고쳐주었다. 그런
데 병이 낫고 나서 몇 달 후에 그 환자는 이혼문제로 아내와 다투다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총을 난사하
여 아내말고도 열두 사람을 쏘아 죽였다. 그 소식에 충격을 받은 치료가는  자살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유서는 이랬다. '치료란, 또는 <도움>이란 무엇을 위한 행위인가?'
  테라피스트들, 카운슬러들, 치료가들은 명심해야 한다. 치료해주는 행위 그것이야 어떻든 어떤 환자는 
병을 고쳐워야 할 운명이고 또 어떤 이는  고쳐줘서는 안 된다고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말로 문제에서 슬쩍 비껴 도망친다. "도움을 받은 자의 뒤처리까지 치료가가 책임
질 일은 아니다. 자살한 치료가는 지나치게 자학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병을 고쳐주었기 때문에 열세 사람이 살해된  것은 <사실>이다. 사람은 흔히 <
백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식으로 쉽게 말한다. 그렇게 보면 그 환자 역
시 희생될 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중 하나가 붓다가 될 운명이었을 
지도 모르니까. 당신들은 어떻게 이런 복잡한 운명을 올바로 판단하여 결론을 내리려 하는가? 암환자를 
도와준 것은 옳은 행동인가, 아니면 잘못이었는가?
  "그건 그의 운명이니까, 그냥 놔둬." 이 말도 흔히 도망치기 위해 하는 말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맡
겨두고 싶다면, 당신들은 의사에게 가서는 안 된다. "차라리 자연이나 스스로의 운명에  맡긴다." 당신들
은 사물을 판단할 수 없을 때마다 이 말을 함으로써 철학적 추구를 내팽개치는  구실로 삼는 것을 나는 
보아왔다. 사정이 악화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때 당신들은 "운명에 맡기자"라는 따위의  말을 
한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하나에서  열까지 자신이 운명을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남의 운명에 
간섭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남의 운명을 점치는 짓거리까지 벌이고 있다.
  자, 그렇다면 당신에게 물어보겠다. 대체  옳음의 기준이 무엇이냐? 모든 말과  행위에 있어서 옳음의 
기준이 무엇인가 말이다. 당신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절대적 기준이 없다면 당신은 누구와도 관련되어
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저 자신의  불안과 불만에 타인을 끌어들여 혼란스런 말과 행동
만 보여줄 뿐이다. 그러니, 절대의 옳음을 알기 전까지, 결코 분에 넘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당신은 어느 대학에 가야 할까? 이런  문제를 당신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당신의 자유의지
에 따라야만 하는걸까?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당신의 자유의지일까?  아니면, 그저 사회로부터 주입된 
가치관에 따라 대학을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 당신이 독자적인 철학학과 인생관으로 선택한 대
학, 배우자 등 그 무엇이든, 당신이 선택하는 길의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어떻게 만드는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세상의 수많은 실패들도 뒤집어  보면 실패가 아니다. 그것들 역시 뭔가를 이뤄놓는다. 
그러니까 그 반대 역시 참이란 말이다. 또 무수히 성공해 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어, 헛된 것이 될 
날이 온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지막 선악의 기준인가? 자, 다시 우주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왜냐하면 그것은 나
의 광명, 대오의 날 직전까지 계속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되면 만사 해결이라고 여
겨 나는 탐구의 방향을 정하고 모든 우주인에게 그걸 물어봤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완전
히 내가 이해할 만한 해답이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몇 번씩 다른 결론을 가정해 보았다. 하지만 그 결론 
말고 다른 결론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날 이후 다시는 탐구하지  않게 된 원인 중 하
나였다. 그많은 원인 가운데 하나란, 이른바  사고를 넘어선 깨달음이 영원한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탐구의 대상이 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당신이  명상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해
도 언젠가는 또다시 세계의 존재 의미에 고개를 갸우뚱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절대 있
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해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다. 그것을 앎으로써 삶에 대해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하고, 지혜에 넘친다든가 생기에 넘쳐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우주의 발생과 또 그것을 유지하는 진실은 인간의 꿈, 진화나 발전이라는 달콤한 몽상이나 깨달음과 평
화 등 유치한 세계의 비전을 정면에서 때려부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기분 좋은 것>이어야 된
다는 따위의 논리는 이 세상 아무데도 없으니까 말이다.
  당신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것이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어도 그것은 사실이다. <사실>은 듣는 자의 기
분이나 기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나는 깨달음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사실을 구하고 있는게 아니라, 자신에게 지적 또는 감정적 
쾌락을 줄 수 있는 정보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왔다. 어쨌든 우주의  발생, 활동, 종말, 그 의미
와 목적에는 철학도 정신성도 하느님도 있지 않았다. 여기서 하느님이라고 한 것은 이를테면 뭔가 위대
한 뜻을 갖고 우주를 만드셨다는 그런  <자비로운> 존재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 <척>하는  고차원의 
지성체는 쓸어내버릴 만큼 얼마든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가 결정적으로 알게 된 사실은 이랬다.
  우주에는 위대한 목적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을 뿐 아니라 방향도 제멋대
로다. 오직 하나,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프로그램이랄까 의지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계속 <생존>하려
는 의지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지라기보다는 본능, 혹은 전 우주적인  충동이라고 해도 좋다. 즉, 표현을 
바꾸면 <병적인 충동>이다. 그 병명은 <활동병><창조병><생존병>이다.
  말하자면 이 우주는 계속 존재하려는 충동에  의해 그 모든 차원이 형성되어 있다.  일곱 영의 세계< 
1) 육체 2)에테릭(etheric) 3)아스트랄(astral) 4)멘탈(mental) 5)스피리추얼(spiritual) 6)코스믹(cosmic) 7)
니르바닉(nirvanic)의 일곱 가지 신체로 표현되기도 함 - 편집자 주> 마저도 모두가 <계속 생존>을 위
한 갈등 가운데 있다. 말하자면  육체가 없어도 정신체는 존재하며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존속과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어떤 고차원에도 제각각의 죽음이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죽음
을 두려워할까?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그들만이 아니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왜 그렇게 완전한 소멸을 두려워할까? 그것은  당신이 원래 편안히 죽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산다는 것, 가장  밑바닥의 충동조차도 자기 의지가  아니라 세뇌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살고자 하는 충동은 불안이 낳은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나는 전 우주적인 <불안산업>이라
고 칭했다. 특별히 지구라고 해서 프로그램이 과잉상태인  것은 아니고, 우주 전역이 다 그렇다. 우주에
는 목적이 없다. 하지만 우주에는 어떤 의지, 충동, 공포가 있다.
  그리고 무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 그 바람은 인간만이 갖는 것이 아니다. 우주에 고차원의 불안이 존
재하는 한 보잘것없는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때문에 존재의 이유를 캐는 일없이 
사람들과 우주인들은 <그저> 존재하며 계속 활동한다. 변화는  있지만 거기에 진화 같은 것이 있을까? 
진화란 생존을 위해 생물학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합리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일일까? 그렇다해도 결
론은 마찬가지다. 진화는 생존을 위한 것이지, 진화를 위한 생존은  아니다. 정신세계에서 말하는 <영혼
의 진화>도 고차원 우주에서 어떻게 하면 계속 생존할까 하는 생존욕의 부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또 삶
의 보람이라는 것도 목적을 위한 목적이 아니고 단지 살기 위한 자극에 불과하다.
  기쁨 역시 단지 자살 방지약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주에는 옳음도 없을 뿐  아니라, 진화와 같은 것
도 없으며 우주의 목적과 활동이 오직 하나의 기준 <존속>과 <고통회피>에만 바쳐지고 있다. 그저  무
작정 계속 있기. 그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존재를 위해.
  자 <사실>이 이정도라면 나도 마음을 고쳐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더 
복잡하고 또 단순했다. 결국 우주의 존재와 활동을 위해 우주는 어떤 시스템을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었
다. 그 문제는 나를 절망케 했다. 그리고 이제 두 번 다시 절망할 일이 없어졌다. 절망이 너무나 온전했
기 때문에 내겐 희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었다. 세속적인 것도 
정신적인 것도 모두.
  이렇게 나를 절망시킨 것은 우주의 생존에 쓰여지고  있는 기본적인 에너지의 문제다. 우주를 유지하
는 것은 중력이나 역학적인 법칙뿐만이 아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의지>이다. 진실로 이 우주가 
사고와 지각이라는 착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은 붓다가 아니더라도 평균적인 우주인들이라면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제  사고의 산물로서의 우주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무수한 사고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에너지가 있다. 그것은 <생존의지 에너지>이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다. 의지 또는 생물학적
인 충동이다. 모든 동물과 식물에게서도 이런 <생존의지>는 발생한다.
  더구나 그것은 생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고 고통을 주고, 갈등을 겪게 하고, 불안하게 만듦으로
써 더욱더 많은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부분적으로는 로버트 먼로(Robert  Monroe : 
1958년에 의식이 육체를 이탈한 체험을 하고나서 인생관이 변화, 이후 OOBE(체외이탈)현상을 연구했다. 
체외이탈의 연구와 실제적 체험에 관해 세계적 권위를 가진 인물 - 편집자 주)가 <혼의 체외여행>(Far 
Journey, 1985 : 저자가 본문에서 사용한 <루슈>나 <제 1작물>은 이 책에서 인용한 것임 - 편집자 주)
에서 <루슈>(본서 2권 2장의 '외로움은 무엇인가' 참조 - 편집자 주)라는 호칭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참
고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먼로는 그런 추구를 도중에서 포기했다. 루슈에 대해 먼로는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폐허의 붓다들>을 통해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사랑의 <
루슈>라든가 미움의 루슈는 외로움을 인공적으로 발생시킨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말은 <생존욕에의 집착>이고 그것을 뒤집어 말하면 <무에의 공포>이다.
  이러한 에너지는 온갖 방법을 통해 생물이나  혹성으로부터 채취가 가능했다. 미생물이나 식물보다는 
가동성인 동물쪽이 보다 더 생사의 문제로 갈등하기 때문에  쉽게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나아가 인
간에게는 머리끝에서 발 끝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위한 모든 기능이 심어져  있었다. 그 기능이란 <어떻
게 인간을 괴롭혀야 인간이  괴로워하고 갈등하면서도 계속해서  살려는 의지를 키워나가느냐>하는 즉 
고뇌의 발생을 불어 일으키는 것이다.
  지구인을 만든 제작자에게 자비 따위는 눈곱만큼도 있을  턱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감정 발생 
자원으로부터 어떻게 해야 <생존욕>이라는 원료를 더 짜낼 수 있느냐는  것만이 제작자의 목적이기 때
문이다. 사회적 압박, 종교적 강박관념, 불안, 공포 그리고 쾌락의 악순환 이것들이 인간 내면 문제의 원
인이라면 나는 좀더 드러내놓고 행동하겠다.
  내가 대오의 날을 지나서도 주저하면서 한동안 조용히 살았던 것은 크리슈나무르티가 온 생애에 걸쳐 
사람들에게 계속 물어온 <미친 세계>의  원인이 지구의 생물이외의 관리하에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알아봤자 아무 쓸모없는 것을 아는  것도 사형수인 인류의 <가냘픈 인권의 하나>일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서 쓴 <폐허의 붓다들>의  한 대목에서 나는 그것을 노골적으로 말했던 것
이다.

    <노여움을 가라앉히는 치료가는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을 위해 감정을 컨트롤함으로써 성질 죽이
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가 유행하고 있는데 그 (성질  죽이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바보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새끼야!!! 
같은 호흡법을 몇 번이나 가르쳐야 알아듣니! 멍청한 놈! 천천히 제대로  호흡하랬잖아! 그렇게 하면 성
질이 가라앉는단 말야, 이 멍청아!!" 그 교사의 숨은 매우 거칠고 말투는 욕으로 가득 찼다...

    <자기가 얼마나 바보가 아닌지 설명하는 바보원숭이>
  이 혹성에서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자주 하는 말 가운데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잘 들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난 한 번도 그렇게 말하는 이의 눈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
하는 이들의 눈은 노여움과 경멸, 강요로 가득 차  있어서 도저히 보기에도 역겨운 추한 눈이었기 때문
이다. 나는 그들이 눈을 보면서 나보다 30년이나 오래 산 그들이 너무나도 불행해 보였기에 안쓰럽기까
지 했다. 
  사람의 눈을 쳐다보며 듣는다는 것은  본래 <있는 그대로 듣기>위해서는  필요없는 일이다. 난 가끔 
멍청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또는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었다. 그때 들려오는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통해, 그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무엇이 거짓말인지 아주 명확하게 느껴졌다. 그때 난 어느 누구보
다도 귀기울여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것은, 그들은  항상 말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며, 자기 스스로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고, 결코 듣는 사람의 <필요>를 살
피며 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듣는 사람에게 있어 그 말이 필요한지 어떤지를 최우선적으로 살
피는 것이야말로 본래 말하는 사람의 예절이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자
신의 시간을 쓰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에게 가치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예절이다. 말하는 
사람은 항상 듣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말하는 사람이 제멋대로 습관적인<
발작>처럼 수다를 떠는 것이라면 듣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수다쟁이 원숭이에게 
박자를 맞추는 원숭이 하나만으로 족하다. 가끔 세상에는 의견을 구하는 게 아니라 동의를 구하는 타입
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공통되는 말버릇이 있다. 어미에 '-않아?', '-하지', '-할걸'을  연발하는 것
이다. 이와 같은 말은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하는 언어이다. 동의를 강요하거나 기대하는 데서 생기는 강
조의 말들이다. 이런 타입의 사람들을  한번 시험해 보아라. 무언가를  말하면 아무 이유 없이 <고개를 
옆으로 흔드는>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곧바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들은 의견을 받아들이는 지성
도 없이 오로지 "그래"라고 말해주길 바랄 뿐이다. 이런 타입은 상대하지 말라. 당신들은 누구와도 상대
할 필요가 없다. 세상은 이런 원숭이 떼들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나는 자주 방문객들에게 이렇게 말
한다. "당신이 내 말을 이해하는 데는 30년은 더  걸린다." 또는 "당신 정말 바보로군"하면서 나는 아무 
근거도 없이 말한다. 그리고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말을 들었을 때 보이는 그들의 <반응>이다. 
  내 경멸이나 비난에 대해 소위 지성 있다는 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떻게 30년이라는 세월이  필
요하다고 판단하시는 겁니까?" 이것이 소위 지성 있는 자의 반응이다. 무슨 근거로 30년 세월이라고 말
하는가에 대해 그는 순수하게 지적 <호기심>을 갖는다. 
  그러나 날 찾아온 자들의 대부분은 호기심이 아니라 나한테 <바보>라 불려진 순간, 반사적으로 '뭐라
고? 당치도 않은 말이야. 우선 너는 나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애송이다. 세상이나 인생에 대해선 내가 더 
잘 알아'라는 사고가 발생되고 거기에 사로잡히다 보니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바보
가 아닌지에 대해 변명과 주장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했
다.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굳이 날 찾아올 필요도 없다. 나보다  20년이나 늙었다면 나보다 20년 빨리 
죽는 거다. 그렇다면 가서 성불이나 하시게."
  진실로 지성 있는 자라면 논점을 피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안정되어 있다. 반면 지성 없는 
자는 단지 그 말의 자극만으로 너무나 쉽게 감정적으로 동요하며 허영심을 있는 대로 드러내 놓고 굴욕
에 대해서는 심한 노여움에 휩싸이고  만다. 과거, 먼 곳에서 일부러  날 찾아온 심리학자, 박사 학위를 
주렁주렁 단 교수들, 정신과 의사, 심령가, 치료가, 큰스님이라 불리는 중들, 평소 남들이 굽실굽실 머리
를 숙이는 그 모든 이들은, 내가 보기에는 항상 '귀에 거슬리는 환상적인  바보 이야기'나 하는 '아는 척
하는 떠벌이'인 한 마리의 침팬지였다. 
  이런 연유로 세상은 의견이 아니라 동의를 구하는 자들  천지다. 처음부터 들을 만한 귀도 갖지 못한 
주제에 단순히 타인에게 의견을 구하는 <척>하는 자를  상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 타입의 사람들이 찾
아오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박수를 칠까요?  아니면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요?" 이렇듯  그들의 
의견을 교환하는 게 아니라 동의를 구하고 싶어하는 어린애  같은 동기로 수다를 떤다. 그래서 난 그런 
수다를 단숨에 끊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박수를 치고 머리를  쓰다듬읍시다. 그러면 당신이 
처음부터 바라던 결과가 속시원하게 성취되고, 쓸데없는 이야기도 필요없잖소."
  이런 연유로 난 이 혹성에 태어난 뒤 이곳 원숭이들의 기묘한 습관을 보며 키워졌지만 티끌만큼도 그 
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인간이 머리를 끄덕이는 세가지 이유>
  그런 기묘한 원숭이의 습관 가운데 내게 가장 흥미있던 것은 <응 - 하고 끄덕이는> 동작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세계 원숭이가 공통적으로 보이는 동작이었다. 말없이 동의나 승낙을 나타내기 
위해 <끄덕이는> 것인데 이를 자세히 관찰해보니  실로 기묘했다. 왜냐하면 동의, 승낙, 이해라는  것은 
굳이 고개를 흔들지 않아도 <예스>라든가 <노>라는 대답만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숭이들이 한결같이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난 이게  도대체 무슨 습성인가 싶어 관찰해보았다. 그 결과 
알아낸 것이 무수히 많다.
  첫째,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자는 내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이야기의 내용과 자신
의 의견이 일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단순한 쌍방의 일치 신호에 지나지 않으
며 거기에는 어떤 정확함도 없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내용이  <옳기 때문에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우연찮게 듣는 자의 <의견에 합치됐기 때문에 끄덕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대가 고개를 끄덕일 때는  저 자식은 <나와 의견이  같았구나>라는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원숭이들은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를 보고 자신이 <옳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 
사실에 난 쓴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않은가?
  도둑 세 명 또는 살인자 셋이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갈 계획을 세울 때 그들 역시 한결같이 고개를 <
끄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두 나라의 국민은 제각각 따로따로 일치단결해서 고개를 <끄덕인
다>. <끄덕인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옳은 것일까?  그 후에 일어난 일에 관해 굳이 말하자면 두 
나라 사이에는 20년에 걸친 살육과 전쟁이 있었다. 20년동안 국내에서는 <끄덕거리고>, 상대 나라에 대
해서는 <계속 고개를 옆으로 흔들어댔기> 때문에 고로, <끄덕임>과 <정론>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있
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두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동의에 마음 편안해 할 사람이 대부분이
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경우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가 진행될 때, 원숭이들은 <아는  척>하기 위해서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일이 가
끔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라면 실제로 듣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듣고 있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맥을 끊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아는 <척>하기 위해 목을 
끄덕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럴 때 상대에게 "잘 아시겠습니까?"하고 한번 물어보라. 대답은 항상 이렇다. 
"... 잘은 모르겠지만 알 것도 같아." 이는 사실 전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알 것도 같
은데 중간에 혼선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고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세 번째로, 아주 미미하게 경련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그런 모습을  보면 빨리 집으로 돌
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경련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쪽 이야기는 
듣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그들은 자신의 머릿속 세계에  듬뿍 취해 있을 뿐이다. '그래그래, 그렇지. 정
말 그래. 그것 봐, 난 옳다니까.' 이런 이유로, 원숭이들은 정말 잘도 고개를 끄덕인다. 
  동의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애써 고개를 흔들지 않아도 좋을 텐데 어떻게 된 이유인지 원숭이들에게는 
<위 아래로 흔드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또 <예스>라고 할 때는 고개를 옆으로 흔드는 민족도 있을 
법한데 어찌 된 연유인지, 없다. 추측하건대, 아무래도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가장 편하다는 생
물학적인 원인에 의한 것 같다. 지구의 원숭이들이 타인을 받아들인다는 <이완> 상태가 자연스레 고개
를 위 아래로 끄덕거리게 하는 것인데, 굳이 그런 동작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응>하고 입으로 한 마
디만 말하면 되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혹성의 새끼원숭이들은 부모로부터 강제적으로 <끄덕이는> 
또는 <대답할 것>을 강요받으며 자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듣고 있건 말건, 알건 모르건,  어찌 
되었든 우선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거리면 부모의  짜증스러운 설교가 빨리 끝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리고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이는 법을 머릿속에 입력시킨다. 
  이렇게 해서 그 동작은 이해를 표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이야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동작으로 기억된다. 이렇듯 <고개 흔들기 운동>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지고, 나아가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사회적인 체제와 인사와 위선의 동작으로 이 습관은 일상의 당연한 동작이 되는 것이다. 
  자, 그런데 나는 이 끄덕거리는 짓도 못하고 <대답>조차 못했다. 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
면 모든 힘을 기울여 듣기 때문에 고개를 흔들 여유도 그들의 박자를 맞출 여유도 없이 의식이 깨어 있
다. 난, 있으나마나 한 사람들에겐 직장에서 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을  때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도중에 내가 필요한 말을  하지도 않았다. 상대는 중간중간  "아시겠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난 
"끝까지 말씀하십시오"라고 밖에 말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나는 끄덕이거리지도 않고, <예>라고 말하지
도 않는다. 그 대신 상대의 모순된  논점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종합해서 지적한다.  이렇게 하면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가 듣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듣고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마지막에 나오는 질문의 내용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난 이 <끄덕이는> 원숭이들의 습관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못한채 날마다 목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잊어버릴 질문은 하지마라>
  이야기가 옆으로 샌 느낌이 들지만, 나의 문하생들은 거의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내가 의견
을 구하지 않는 한 그들로부터 사견을 듣는 일은 거의 없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지도 않는다. 왜냐하
면 난 그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듣지도 기억하지도 말라. 그저 있어라. 그저 
들리는 대로 내맡겨라. 말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기억할 필요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내 말에 자신의 경
험과 조합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는 법 그것이다. 있음 그것이다. 존재의 방법, 그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귀기울여 들을 
필요조차 없다. 그저 순수하게 존재하며 의식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존재하는 법, <있는 법>
을 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답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
의 존재하는 법, 그 안에  있다. 나는 당신에게 이해를 구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기억시키고 싶지 않다. 
또 나에게 귀기울이는 것조차도 바라지 않는다. 원한다면 이야기하는 중간에  돌아가도 좋다. 내 이야기 
따위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그런 것은 안 들어도 된다. 그저 있으며, 상황을 음미하는 것
만으로도 좋다 때문에 나와 논의 따위를 할 필요는 없다. 나 역시 정보  교환 정도는 괜찮지만, 함께 토
론할 생각은 없다. 당신은 자기가 말하기 위한 기회로 타인을 이용해선 안  된다. 그것이 당신의 떠들기
를 위한 준비 자세처럼 느껴지는 침묵은 좋지 않다. 가끔 내가 "그런 질문은 모아서 한 번에 하라"고 말
하면, 그들은 "지금 생각났을 때 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만다"고 말한다. 나는 자꾸 얘기했다. "그 따위 
잊어버릴 것 같은 질문은 질문의 가치도 없다."

        제2장 우주편, 다른 차원편
    <지구의 얼간이 종교가와 우주의 얼간이 지성체와의 논쟁>
  질문자 : 아무래도 당신은 도(Tao)나 선이나 특정  유파의 불교만 지지하는 것 같은데, 그럼 그  밖의 
종교에 대해서는 모두를 부정하는 건가요?
EO :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렇다. 내가 종교를 부정하는 논거는 다음의 글에서 말하겠지만, 그것은 아주 
명확한 논리적 근거에 의해서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그 '종교가 무엇인가'의 정의를 말해주었으면 하는 
데?
질문자 : 절대자를 믿음으로써 그것이 보여주는 삶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EO : 다시 말해두지만, 나는 지구에 존재했던 여러 종파의 종교를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본다. 유태교, 
그리스도교는 물론 힌두, 이슬람, 라마교, 도교, 불교를 모조리  부정한다. 물론 신도 따윈 말할 것도 없
다. 다만 내가 부정하는 도교란 노자가 아니라, 뒤의 세속화한 도교다. 또 불교라고 했지만, 원시 경전에 
대해서는 다르다. 또 현재의 일본 불교라는 것도 힌두교적인 다신교와 그리스도교적인 일신교의 이념의 
'뒤죽박죽'임이 명백하다. 종파라는 회사의 사장, 곧 주신이나 주불의 대가리가 바뀐 것뿐이고, 말단의 불
(보살들)은 여기저기 종파에 고개를 내미는, 아무튼 엉망진창이다. 
  종교가나 신학자나 신자들이 도대체 무엇에 의지하고 싶은지는 잘 오르지만, 그들이 우러러 섬기는 <
유일 절대자>의 개념이란 과거의 수많은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의 <소문>이거나 <터무니없는 엉
터리>의 하나다. 나는 데바(Deva ;  인도 신화에 나오는 자연정령,  혹은 하늘을 다스리는 천신-편집자 
주)를 주정하는 것도 아니고 온갖 차원의 중간관리직에 있는, 육체를 갖지 않은 지성체의 존재를 부정하
는 것도 아니다. 또한 우주의 생명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논하는 것은, 그 꼭대기에 있다고 소
문난 절대자의 정의가 갖는 모순,  그리고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의  근거에 대해서다. 또한 
그런 <유일 절대자>가 존재했다 해도 피조물이  그에게 존경의 뜻을 품거나 경의를  표하는 것 자체는 
모순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장황하게 해설하는 것보다 우주의 역사에 대해  우리들보다 훨씬 정통한 다
른 차원의 지성체가 하는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다음의 기록은 지구의 전형적인 얼간이 종교가와 우주의 전형적인 얼간이 지성체와의 불꽃 튀는 토론
의 기록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지적 생명체라는 존재의 진짜  분위기를 이해하기 쉽게 하려고, 
<그들>의 말투를 심히 경박하게, 욕되고 천박하게 또한 논리정연하게 해봤다. 컴퓨터가 말하는 것과 같
이 무미것조하고 논리적인 말투를 써도 무방했겠지만 오히려 그 냉철함에 당신들의 감정이 아파할 것을 
배려한 나머지 그야말로 아주 천박한 말투로 표현했으니 독자들은 그저 즐겨주기 바란다.
  이 기록을 다 읽고 나서도 당신이 신사라든가 교회나 절이나 아니면  그 밖의 사원에 가서 <무언가>
를 위해, 또는 <자기 이해를 위해 빈다>면, 당신은 회복  불가능한 망상을 지녔거나 논리적인 이해력이 
전혀없는 유인원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바보다>
  . 1992. 8. 21 EO
  . 채너링 By EO
  . 채널링 소-스=배후 우주의 시리우스 Z의 의식체!!(발음 불능)

  시리우스(큰개자리(Canis Major)의 으뜸별로 표준 1등성의 약 10 배 밝기의 아주 밝은 행성. 눈부시게 
빛난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는  나일강의 범람 시기를 알려준다 하여 숭배됨. 
채널러들에 의해 이 별로부터 온 외계인들이 인간으로 많이 태어나 살고 있다는 내용이  보고됨 - 편집
자 주)의 난봉꾼 이성인이 지구인과 하느님을 바보라고 매도하다.
  창조자가 얼마나 바보인지, 또는 바보(였는지)에 대해 논리적 고찰을 통해  시리우스의 우주 지성체가 
말한다.
  이 소논문의 타이틀에 괄호된 과거형 부분이 있는 것은 아래 이유 때문이다. 가령, 창조자<그것이 사
람인 근거도 없으므로 그저 창조의지라 해둔다>가 우주에 맨 처음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존재한다
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자, 지구인아, 그대의 조상이 있었기 때문에 네가 있겠지만 그대의 조상은 지금 없다. 따라서 '네가 있
는 것은 창조주가 <지금도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 따위를 굳게 믿을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설
령 교묘하게 작동하는 우주의 법칙이 있다 해도 창조의지(신이라 불러도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해하
는 데 까다로워지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놈>이라고 무르겠다)가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놈이 죽어 오래전에 우주에서 사라져 버렸다 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다. 기계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진 법칙이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컴퓨터가  처리하는 모습을 당신이 지켜볼 
필요는 없으며 그대로 계산을 시켜놓고, 산책을 하든가 혹  당신이 죽게 된다 해도 기계는 여전히 작동
할 것이다. 따라서 좀 말이 많아졌지만, 그놈이 가령 태고 적부터 있었다  해도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증
거는 전혀 없다. 차라리 우주 법칙을 꾸며낸 직후 일지감치 꺼져버렸다는 Z909은하계 기밀정보 쪽을 믿
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체 생물, 특히 지구인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하느님이 있다고 생각할 만
큼, 전혀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지성이 없는 생물이다. 여기에 조그만 자극을 주기 위해 이  EO라는 지
구인의 언어 중추를 빌려 말한다. 당신들 역시 매일매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죽을 때까지 똑같은 짓
을 되풀이하는 생활이 지겹기도 할 터이고, 권태와 맞부닥치지 않으려고, 생활에 변화를 주고 싶을 지도 
모르니 우리 함께 조촐한 논리 게임이라도 해보자.
  첫머리에서도 말했지만, 자네 할아버지보다  자네가 그리고 자네보다 자네  손자 쪽이 우수한 인재가 
된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아니, 많은 경우 현상을 한정지어놓고 다른  측면에서 보면 뒤에 나타나
는 생물 쪽이 우수한 것은 당연하다.(무엇을 기준으로 우수한가 하는 문제는 여기선 무시하자)
  그렇다면 가령 신, 아니 실례, 그놈이  맨 처음 있었다고 해서 자네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놈이 최초로 우주에 존재했다는 것은 전혀 그놈의 위대성을 밝히는 근거가 되지 못한
다. 신이 바보라는 고찰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하여, 최초에 있었기 때문에 위대하다란 말은 오호, 비
논리적이로다! 이를 통해, 처음에  있었으니까 위대하다거나 지배자라는 논리는  사라졌다. 항상 뒷세대 
쪽이 우수할 수밖에 없다.
  자네들 지구인으로부터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우주는 왜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해서는, 질문의 
구조부터 먼저 분해해 보겠다. 우리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말한다. "왜 우주가 있느냐고 인간은 왜 
묻는가?"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은하계 변두리에 있는 한 태양계의 인기 퀴즈 프로그램<왜냐? 월드> (세
상의 모든 것에 대해 왜?를 찾는 게임 - 편집자주)에서 그전까지 출제된  1천만 개에 이르는 퀴즈를 깔
아뭉개는 문제가 나왔다. 그건 <왜, 왜인가?>였다.  이 문제가 출제된 1년후, 그  태양계의 주민 절반이 
자살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자네들이 죽건 살건 우리와는 상관없지만 일단 같은 논법으로 해보자.
  왜 자네들은 <왜>라고 묻느냐? '맨 처음의  질문을 분해하자'고 한 것은 언어에  대한 정의가 없으면 
질문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우주가 있느냐고, 왜 인간은 묻는가?" <왜>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
보면 까닭, 이유, 원인, 동기 등의 뜻을 지닌다. 이 가운데 자네들이 말하는 것은 <그놈>의 <동기>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의 물리적  발생과정에 대해서는 자네들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지구가 찌그러질 만큼 많은 방정식으로 이루어진 문서를  자네들의 혹성에 보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네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우주의 현상적 설명은 아닐 것이다. 단지 지구를  만든 동기, 의지의 원천을 
알고 싶어할 뿐이라고 추측하여 이야기를 진행시켜 보겠다. 
  우주란, 아니 대체 어디에 있는 우주를 말하는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네들이 말하는 우주란 자네
들의 지각 범위 안의 정보밖에 되지 않는 만큼, 그것은 우리 또는 우리 이외의 생명이 지각하는 우주와
는 그 본질이 다르다. 자네들은 잠꼬대처럼 <만물>을 외치지만, 자네들은 만물의 1조분의 1만큼도 보지 
못한 상태이니 이건 전혀 의미가 없는 언어다. 그러므로  자네들이 묻는 그 우주의 범위를 어떻게 한정
지으면 되겠나? 이건 다음의 말에서도 문제가 된다.  있다??? 그러면 <있다>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
가? 아마 자네들이 보고 만지고 추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네들은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일 
터이니, 결국 자네들의 첫 질문은 좀더  엄밀하게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표현이 
될 것이다. "자네들에게 지각된다는 이유만으로, 자네들이 인식하는 감각  정보만으로 이름 붙여진 우주
(말하자면 자네들에게 보이는 것, 그러니까 아프다든가 춥다든가 하는 식으로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사
물 전체)는 어떤 동기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목적으로  제작되었는가? 라고, 자네들은  왜 의문을 갖는
가?" 이 정도겠지. 자, 이 질문에서 우리의 논리 회로가 받아들이는 것은 이렇다.
  자네들은 언제부터, 우주 또는 그 창조의지 <그놈>을 인격적인 존재로 인식했는가? 자네들 인간에게
는 무엇이든 자네들과 같은 것으로 의인화하는 나쁜 버릇이 있는 것같다. 무엇 때문에 그놈이 인간적인 
존재여야 하는가? 왜 그런지 한번 대답해보라. 자네들이  말하는 자연계의 어디에 대체 인간적인 것 따
위가 있는가 말이다? 자네들 이외의 모든 것, 아니 자네들 육체의 세포 하나하나 조차 애당초 인간적인 
것도 인격적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만물의 제작자가 인간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말이다. 자
네들이 갖고 있는 사고의 망상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우주를 창조한 그놈이 피조물보다 상위에 있다는 
망상이다. 그런데 대체 <상위>란 무얼 말하는건가? 대답해보라. 모르겠다면, 내가 간단한 역설 또는 가
설을 말해볼까.
  불도저는 자네들 인간보다 힘이 약한가? 자네들 대가리는 쇠망치보다 단단한가?  자네들이 갖고 다니
는 전자수첩에 입력된 주소와 전화번호를 자네들은 기억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모두 NO지. 
그렇다면, 이렇게된다. 우주를 만든 그놈이 자네보다 물리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강하다는 근거는 아무데
도 없다.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놈도 할 수 있다고 볼 순 없다. 자네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 하
기 싫은 것을 시키려고 도구나 연장을 만들어내지.
  그렇다면, 우주도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네들이 아주 이해하기 쉬운 
논리적인 비유겠지. 즉, 창조의 동기는 제작자의 대행 업무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행을 위해 만들어진 제품은 항상 창조자보다 상위 수준에 있을 필요가 있다.
  전자수첩이 자네 머리통보다 늦게 계산한다면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만다. 따라서 목적을 제대로 수행
하도록 만들어지기 때문에 모든 제품은  그놈보다 기능적으로 우수하다는 말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미 폐품이 되어 있을 테니까. 단,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그놈은 뭐든 조금씩은 할 수 있는 놈이라고. 
자네들이 암산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비유하면, 자네들도 50미터쯤은 잠수할 수 있는 것과 같
다. 하지만 400미터까지 잠수해야 할 때는 구질구질하게 강철통을  만들어야만 하겠지. 여기서 잠수함은 
잠수기능에 있어서는 자네들보다 우수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부분적 기능성의 차원>에
서는 그놈이 자네들위에 있다거나 상위 존재라는 논리는 간단히 무너져버린다. 별게 아닌 것이 되고 만
다. 
  때문에 신을 피조물과 비교한다면 거의 무능하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이 두 번째 요점이다. 그놈은 
솜씨가 없거나 능력이 없다. 
  앞서 말한 대로 먼저 있었다고 해서 우월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바퀴벌레는 자네들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지만 살충제로 당하는 것을 보면 자네들보다 상위에  있다고 하긴 어렵다. 하긴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네들이 생각하는 생물의 분류이론이다. 참된 우세종이나 상위 존재는 시간적으로  앞서 있지 않다. 때
문에 그놈, 곧 신이 태초에 있었으니까 위대하다는 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상위 존재는 실제로 어떤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신이 만능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재정의할 수 있다. 
  또한 그놈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논리도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놈이 우리를  만들고, 자네들을 
만들었다 해도 빌딩이나 자동차는 자네들이 만든 것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산이나 바다나 별이나 태
양을 그놈이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예컨대 그놈이 만든 창조 로봇이 우주를 제
작, 관리하고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자네들은 이성과 침대에서  삐걱거리며 아이를 만들지
만, 그 아이가 백사장에서 만든 모래산까지 관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하나에서 열까지 그놈이 만들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그놈은 멍청이 지성체를 만든 것인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문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우주를 만들었고 지금은 어떤 목적으로 누가 관리하고 있는가? 그런데 지구
인들아, 목적이란 것은 본래 목적과 달라진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자네들의 일상생활을 보라. 
우주도 마찬가지다. 우주도 처음에는 어떤 목적이 있었다. 해도, 지금까지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
는 없다. 벌써 오래 전에 다른 목적을 향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왜 우주가 먼저 만들어졌느
냐는 의문은 무의미해지고, 그보다도 왜 지금 유지되고 있느냐, 또 앞으로는 어떤  목적을 향해 가게 되
느냐가 자네들이 고민하기에 알맞은 문제가 될 것이다. 자, 그놈이 자네들, 또는 자네들을 만든 다른 생
물, 나아가 그 생물을 만든 근원의  지성체를 만든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단지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그놈이 위대하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저 창조자를 창조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에도 없는 존경심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자네 자식이 자네를 존경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이제 마음이 조금 편해졌나? 지구인이여.
  자, 그럼 자네들은 상위 존재에 대해 어떻게 정의할 작정이지? 그놈을 존경할 필요는 전혀 없어. 대체 
지금 무엇이 그놈의 <부권성의 모가지>가 붙어 있게 하는냐 말이다.  이런 일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놈은 다급해지면 자네들에게 딱 한 마디밖엔 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네들이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본 
말이다. 
  "누가 먹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자네들은 그놈이 있건 말건, 그저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놈은 어쩌면 오직 하나의 능력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도 추측하고  있다. 그것은 <전우주의 
파괴능력>이다. 그놈에게 남아 있는 능력과 부권을 유지하는 협박은 아마 그것뿐일 것이다. "언제든  이 
우주와 너희들의 즐거운 생활을 때려부술 수 있단 말이다"하며 그놈은 항상 스위치에 손을 대고 있는 9
천억의 나이를 먹은 <꼰대>일지도 모른다.
  자, 이렇듯 그놈, 곧 신은 존경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인데 대체 자네들은 무엇 때문에 그놈 앞에서 알
랑방귀를 뀌며 두손 모아 우러러 섬기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그놈에게 만약 우주의 <관리 권한>이 있
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관리하고 있는 것인가? 관리한다는 것은 아주 성가신 일이다. 따라
서 그놈이 그 일을 할 까닭이  없다. 애써 말 안 듣는  우주를 만들어놓고는 그걸 어떻게든 지배하려고 
할 만큼 그놈이 바보라면 또 모르겠지만 원래 관리할 필요 따윈 없는 것이다.
  법칙만 만들어놓으면 자동적으로 관리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그놈도 마지막 주장을 할 것이다. "나
는 우주에서 발상을 하는 것이다." 발상이라는군. 그놈은 대체 무얼  발상하는 걸까?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떻겠는가?
  애당초 그놈은 발상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가? 그놈은 아무래도  권태를 싫어하는 서성대는 애인지
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주란 그놈의 심심풀이 부산물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나온다. 그 작자는 따분함
을 아주 싫어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가하기를 바라고 또 아주 좋아하는 우리들 순수 의식체는 이 우
주의 산물은 아닌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놈에게 "심심한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포교하고 있
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뇌파를 빌려 쓰고 있는 채널러 역시 마찬가지다.  자네들의 우주란 것도 따져보
면 시시한 발상의 산물이다. 더구나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창조 원숭이의 산물이다.
  요점을 정리해보자.
  1. 그놈은 최초에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있다는 증거는 없다.
  2. 그놈은 처음에 있었다 해도 별로 위대하지 않다.
  3. 그놈의 기능이 우월하다는 증거는 없다.
  4. 그놈이 만물을 만든 것은 아니다.
  5. 그놈이 관리하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
  6. 그놈은 그저 어찌하면 따분하지 않게 영원이라는 시간을 넘길까를 생각하고 아니면 과거에 생각했
건 안했건, 지금은 이미 <뒈져>, 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7. 지금의 우주는 전혀 무목적이고 각각의 우주에서 관리자라고 자처하는 지성체에 의해 제멋대로 운
영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8. 그놈이 만약 살아 있다면 "우주는 내가 생각해낸 거야"하고 특허권 소송을 지금도 벌이고  있는 늙
어빠진 멍청이거나,
  9. "나는 우주를 언제든지 지워버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얼간이>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하여 신은 어리석은 자이다. 그놈이 위대하다는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끝으로 자네들
의 문화에 대해 우리들이 관찰한 소감을 말해보겠다.
    <자네들이 좋아하는 것, 우주의 지성체가 싫어하는 것>
  사회란, 자네들의 것이든, 우주 민족의 것이든, <죽고  싶지 않다>와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두 
가지의 공포 신경신호에 의해 운영된다. 그것은  생명체가 평균적 생존 상태를 유지하려는 <몸부림>의 
집합이다.
  발전, 성장 또는 진화라는 전혀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이  말을 맹목적으로 믿고 자네들은 오늘도 
내일도 죽기 직전까지도 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자네들은 때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나날이 새로운 
자극과 오락, 철학을 만들어낸다"고, 그러나 이것은 자네들 스스로의 내부에 품게 된 <호기심을  현상유
지하고 싶다>는 심리적 충동으로 여겨진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보더라도 기본적으로 자네들과 같은 사고
체 생물에게 발전같은 것은 없으며, 사전에 프로그램 되었고 지금도 작동하는 충동의 유지에 중점이 놓
여져 있을 뿐이다.
  발전해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 자네들이 <발달>시키고 있는 것은  생존을 위해 호기심을 유지
하기 위한 수단밖에는 되지 못한다. 즉, 특대형 바보의 충동을 자네들은 <호기심>이라고 부리는 프로그
램으로 간직하고, 심심하고 따분한 것을 싫어하도록 설계되어  자네들의 문명이란 것은 다음과 같이 뭉
뚱그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육체의 정상적 기능, 지성이라고 하는 호기심의 유지, 형성이라는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는 기능을 중
요한 의무로 짊어지고 살게끔 만들어진 것이 자네들이고, 우주가 존속하려는 본능적인 몸부림의 수단으
로 만들어 낸 무수한 부산물을 자네들의 문명이라고 한다.  이렇듯 지구의 사고체 생물은 지금 있는 내
부의 프로그램(나쁘게 말하면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며, 자기가 대단하다는 것, 
그리고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망상과 착각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시시하고 쓰잘 데 없는 짓을 벌임
으로써 쾌감을 갖는 참으로 불쌍한 생물이다.
  한편, 우리 의식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심심하지도 않다. 자신이 
아무것도 못하는 <얼간이>라는 <사실>에 안주하기에 또 많은 일들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없는 
평온함을 누리고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자네들의  자유지만 자유라는 말의 정의를 내리는 데에
는 자네들의 언어를 구사해 설명해도 40세기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쯤에서 마치겠다.
  PS : 우리들 시리우스의 지성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지적 생물에 대하여 언제나  간단하게 테스트를 
한다. 먼저 우리는 짧은 시간에 상대방이 갖는 취미, 기호, 사고방식, 외모,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아무 
근거 없이 부정하고 욕한다. 나아가 상대방이  가장 듣기 싫어할 말을 찾아내어  퍼붓는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은 즉각 반론을 펴면서 자기 주장을 한다. 또 혐오나 격노하는 따위 유치한 반응을 보일 때 우리
는 그 생물을 파리 또는 원숭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지적 생물일 경우 자기 자신이 부정될 때 보이는 정상적 반응은 <저들의 어떤 경험이 나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일까?>하고 <판단의 이유>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지적  생물은 "왜 나를 그렇게 판
단하느냐"고 반문한다. 지적 생물은 항상 인식의 근거에 주목한다. 그러나 원숭이나 파리는 자기 보존본
능을 반사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날이 고독한 삶을 산다. 조금  불쾌한 것은 이따금 
예고도 없이 "당신의 고요함을 어지럽혀도 괜찮을까요?"하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파리들의 존재이
다.
  그런 우리에게도 즐기는 것은 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완전 소멸이라는 죽음을 맛보는 것이
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은 잠자기이다. 세 번째로 좋아하는 것은 그저 <있는 것>이다. 네 번째는 좋
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 것인데 그저 <보는  것>이다. 따라서 거꾸로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우리가 세 번째로 싫어하는 것은 사고하기이다. 우리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것은 지껄이는 것
이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사는 재미이다.

    <함께 즐기기를 마쳤노라>
  1992. 8. 23, 채널러 : EO, 채널소스 : 정의 불가능,  천체위치 : 시리우스 A의 뒤, 지성체 이름 : 발음 
불가능
  앞서 빌린 이 채널러의 뇌파를 통로로 삼아, 이 논문을 자네들 지구인의 집합의식의 평균적 지성속으
로 던져넣어 보았다. 그리고 하룻밤을 기다렸다. 다음날 아침 채널러의 뇌에 회수된 자네들의 반론은 <
기분이 울적해질 만큼> 바보같은 것들이었다. 그것은 이랬다.
  자네들 : 그래도 하느님은 존재한단 말이오. 옛부터 문헌에 나와 있소.
  우리들 : 그글은 누가 썼지?
  자네들 : 하느님을 본 사람이지.
  우리들 : 자네들이 얘기하는 건 지겨울 정도로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얘기를  들어봤자 모두 다 전혀 
다른 견해들이었다. 하지만 공통되는 특징은 있었지. <우리 민족이 인식한 것만이 제일이다>라는 각 종
족의 주장뿐이었다. 그 중에는 힘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지배력이 그 다음이고, 애정, 파괴력 순으
로... 결국 그놈은 관념의 경쟁표적이 되어 버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네들 : 그러니까 신이지. 우리들 : 그렇다면 왜 으뜸만 되고 둘째는 안 되는 거지?
  자네들 : 둘째는 궁극적으로 지배자가 아니기 때문이야.
  우리들 : 봐라. 역시 자네들은 으뜸 찾아내는 걸 좋아해. 그러면, 그 으뜸인 놈이 있기 전에는 뭐가 있
었지?
  자네들 :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 : 그럼 무가 으뜸이잖아?
  자네들 : 그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논할 가치가 없다.
  우리들 : 좋아. 그럼 다시 으뜸놀이를 가지고 얘기해보자. 그래, 그놈은 어떤 모습인가?
  자네들 : 장소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더부룩한 머리에 길쭉한 눈을 지닌 모습일 때도 있고, 수염이 있
는 장로로 나타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건 우리의 눈에 비치는 것일뿐 신에게는 모습이 없다.
  우리들 : 그럼 그 작자에겐 뭐가 있는가?
  자네들 : 지혜, 지식, 힘이다.
  우리들 : 어느만큼 갖고 있는가?
  자네들 : 무한이다.
  우리들 : 바보같은 소리만 하는군. 자넨 무한을 본 일이 있는가? 설마 별이  빛나는 공간 저편도 아마 
그럴 거라고 짐작해서 무한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겠지?
  자네들 : 아, 아니, 맞아, 네말대로야.
  우리들 : 그렇다면 무한이 작은 공간은 얼마나 탐색했나?
  자네들 : 기계를 통해서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논리적으로는 어느 정도...
  우리들 : 그럴테지. 자네들이 본 것은 무한한 세계가  아니라 제한된 세계야. 그러니까 자네들은 무한
이란 말을 쓸 자격이 없어. 무한이란 것도 자네들의 환상에 불과한 게 아닌가?
  자네들 : 좋다. 그럼 당신들은 무한을 알고 있는가?
  우리들 : 알 턱이 없잖은가. 하지만 무한 그 자체가 된 적은 있지. 이  봐, 잘 들어, 원숭이, 무한이 된
다는 건 무한해진다는 거야. 자네들이 말하는  시각이니 인식이니 하는 것의 범위나  내용 등, 무엇이든 
다 무한이야. 한없이 퍼져나가는가 하면  또 무한 마이크로까지 오므라들기도  해. 한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끝이 없다. 끝이 없는 무한 속에서 인식같은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무한 속에서는 합치는 것도 
나누는 것도 없다. 어디서 어디까지라는 제한도 없어. 따라서  무한이 될 수 있어도 그걸 볼 수는 없어. 
알겠나, 원숭이?
  자네들 : 그럭저럭
  우리들 : 그럼 논점을 되돌려보자. 자네들은 그 우주에서 맨 처음 생겨난 자를 신이라고 부르나?
  자네들 : 그런 말이 되겠지.
  우리들 : 단지 최초라고 해서 존경하거나 복종할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은 아니지 않나?
  자네들 : 아니, 아니, 신은 모든  시간 속에 두루 퍼져있다. 최초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을 뿐 아니라 
최후에도 있다.
  우리들 : 그저 있는 것뿐인가?
  자네들 : 우주를 운영하고, 스스로 만들어 낸 생명체를 진화시키는 것이 그의 의무야.
  우리들 : 이봐, 원숭이. 최초에 있던 놈이, 더구나  최후까지 남아있는 놈이, 대체 다른 어떤 존재에게 
의무 따위를 강요당하겠는가? 이 멍청이야!
  자네들 : 아니, 의무는 아니야.  그건 즐거움... 그래, 맞아.  취미야. 창조는 신의 즐거움이라고 동양의 
경전에도 씌어 있지.
  우리들 : 그래? 그렇다면 좋다. 그 즐거움이란 무얼 말하지?
  자네들 : 우리가 웃을 때의 감정으로 대표되는 마음의 작용.
  우리들 : 허허...? 그럼 이런 말인가? 자네들이 포르노 잡지를 보면서 '이거 정말 끝내주는군'하며 침을 
흘리고, 아니면 하느님인지 뭔지가 만들어 낸 창조물을 잡아먹기도 하고,  또는 먹지도 않으면서 낚시질
을 하거나 깔아뭉개고 살육한단 말이지. 그런가, 신이란  그런 것인가... 요컨대 수단이야 어떻든 자신만 
좋으면 된단 말이지?
  자네들 : 아니, 그게 아니야. 신의 유희는 건전하다.
  우리들 : 와하하하하... 건전하다고? 그래? 그럼 건전이란 걸 여기서 정의해보라.
  자네들 : 그것은... 말하자면 좋은 놀이이다. 악의없는
  우리들 : 우린 자네 아이들이 악의도 없이 곤충의 다리를 부러뜨리면서 즐기는  것을 보는데, 바로 그
건가?
  자네들 : 아니야, 그건 달라. 그들은 생물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건 결코 신의 유희
가 아니다.
  우리들 : 이봐, 원숭이. 벌레에겐  아픔이 없어. 몸부림을 치긴 하지.  왜냐하면 자네들이 싫어하는 그 
꿈틀거리는 발이 없어지니 말이야. 하지만 곤충에겐 아픔이 없어.
  자네들 : 하느님은 생물이 아파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
  우리들 : 그럼 자네들에게 잡아먹히는 생물들은 아파하지 않는단 말이군?
  자네들 : 그... 그건 아니야. 신이 먹이사슬이라는 법칙을 만들었으니까. 그런 것까지 우리가 생각할 필
요는 없어. 그것 역시 하느님의 뜻이지.
  우리들 :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신은, 잡아먹히는 것과 잡아먹는 것  두 가지를 만들어놓고는, 한쪽 
편을 들어주는 놀이를 하고 있다고 말해도 되겠군.
  자네들 : 이봐, 우주인, 잠깐만. 그건 육체 차원의 이야기야. 영의 세계에서는  먹고 먹힐 필요가 없어. 
영의 세계는 누구에게도 고통이 없을 뿐 아니라, 모두 즐기는 것들뿐이다. 물질세계란 것은 우리가 초월
해야 하는 저차원의 세계다.
  우리들 : 저차원의 세계도 신의 산물이잖아? 그것 역시 그놈의 즐거움의 하나지.
  자네들 : 그러니까 만물을 만들었지.
  우리들 : 물론 고통까지도. 자,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만물을 만들었지?
  자네들 : 배우기 위하여.
  우리들 : 무엇을?
  자네들 : 만물에 대하여.
  우리들 : 누가?
  자네들 : 우리들이지.
  우리들 : 그놈이 만물에 대해 뭐든 다 알고 있다면, 왜 우리에게 그런 걸 배우게 하지?
  자네들 : 아니, 우리가 틀렸어. 정정한다. 신은 우리와  함께 배우고 있는 것이다. 우주를 창조한 것은 
신의 자기 인식을 위해서라고 서양 경전에 씌어 있었다.
  우리들 : 그럼 그 으뜸이라는 것은 어떻게 되었나? 원숭이
  자네들 : 우리와 함께 으뜸이란 말이다. 동양의 경전에 있듯이, 신과 우리는 하나이다.
  우리들 : 함께 으뜸이라... 흥, 그럼 순위를 따질 필요가 없어졌군 그래?
  자네들 : 동양의 경전에는 무차별, 무변별이 깨달음이라고 씌어 있다.
  우리들 : 이봐, 아무도 깨달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 이 원숭이들아.  논점을 하나하나 우리가 되돌려
놓게 하다니. 그래 자네들의 신이란 것이 어떤 거지? 어떻게 그놈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지?
  자네들 :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만물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 : 너희들, 대체 누구에게 배웠기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만 하지?  어떻게 그런 공식이 성립되
냔 말야? 채널러를 통해 이미 말했지. 태고엔 존재했을지 몰라도 지금까지 있을 필요는 전혀 없다고 말
이야.
  자네들 : 아니, 신은 법칙 자체 속에 살아 있다.
  우리들 : 좋아. 그렇다면 말이야. 자네들의 사생활에 대한 카운슬링이라든가,  나아가 그놈이 제멋대로 
만들어놓은 자네들이 그 빈약한 육체를 치료해야 할 정도로, 그놈이 인격이나 자비심을 지니고 있을 의
무는 없겠지? 대체 그놈이 남겨놓은 건 어떤 법칙이지?
  자네들 : 전부 다 남겨놓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지켜보며 관리하고 있다.
  우리들 : 무엇 때문에?
  자네들 : 즐기기 위해.
  우리들 : 누가?
  자네들 : 우리와 함께 말이다.
  우리들 : 그 표현이 그놈의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똑같은  슬로건이 시리우스 인공두뇌 개발회사에도 
있었지. <함께 즐깁시다> 이거였어. 얼마 전 우리는 그 기업을 한 순간에 소멸시켜버렸다. 그리고 수백 
광년의 공백으로 남은 우주의 빈곳에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함께 즐기기를 마쳤노라>고.
    <왜 파리를 죽이는 걸까>
  자, 이젠 자네들과의 쓸데없는 논의를 끝맺기 위해, 이제까지의 자네들 이론을 종합하고, 우리가 지각
한 자네들에 대해 말해보겠다.
  자네들이 구축해놓은 <으뜸인 놈>의 개념은, 그 개념의  논리 자체가 충분치 못할 뿐 아니라 모순투
성이다. 그리고 많은 제약과 한계가  보이기 때문에, 개념이라기보다는 맹신에  가깝다. 여기서 <맹신의 
정의>는 이렇다.
  근거가 될 만한 검토자료나 정보가 충분히 쌓이기도 전에, 이미 사실의 검토  따윈 상관하지 않고, 처
음부터 무턱대고 그것을 믿음으로써 뇌파의 쾌락을 목표로 하는 본능, 물론 그  반대 역시 참이다. 의혹
과 부정에 대한 맹신도 마찬가지다. 그저 말만 뒤집어 놓은 것일 뿐,  일단 부정하겠다고 작정하면 우선 
어떻게 부정할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뇌파의 쾌락중추가 자극을  받게 되고, 그것을 부정하는 자료를 다 
모으기도 전에 <무조건 부정해 버리는 거야>하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다.
  이때는 온전한 정신으로 논리를 따르거나 검토할 수 없다. 단지 어떻게  하면 <가정으로서 준비한 논
리>에 많은 응원단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 하는 게임이 시작될 뿐이다.  이 게임은 아직도 안드로메다의 
민족이 하등생물에게 프로그램시켜 <함께 즐기고>  있는 게임이지. 자네들 세계에서는 이것을  <포고> 
또는 <선거>라고 부르지. 논리의 정당성이 아니라, 정당한 논리를  추구하는 지성체를 어떻게든 설득하
여, 자기의 가설을 믿도록 만드느냐 하는 거지. 자네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 같은데 틀렸는가?
  자네들 : 나는 다르다. 논리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 뿐이다.
  우리들 : 그렇다면 그 논리를 따라가보기로 하자.  그 전에, 쓸데없는 전제이긴 하지만 멍청한 원숭이
가 70억이나 자네들 행성에 배치되어 있어 말해두는 것인데,  설령 관념의 유희라 해도 신의 개념과 자
네들이 보기에 유능한 지성체나 생물체 또는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 지성체와 혼동하지 말라, 이 말이다. 
신이라는 것을 정의해보라고 하면, 평소에는 평온하고 고요한 우리들마저도 <기분이 울적해지는 대답>
이 자네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거든. 자네들이 믿는 하느님 즉, 그놈의 이미지는 이런 거야.
  병을 고쳐준다. 하지만 병은 병원에서도 고칠 수 있어. 따라서 백신이 신이다.
  무엇이든 다 꿰뚫어본다. 하지만 그놈이 자네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꿰뚫어본다 해도 자네들에
게는 그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다. 따라서 그놈이 뭘 꿰뚫어보는지를 자네들은 알 턱이 없어. 자
네들이 생각하는 것은 이른바 EPS(Extra Sensory perception : 초감각 지각, 오감을 벗어난 지각능력 - 
편집자 주)를 지닌 능력자의 완성체 이미지 같은데, 그건 단지 지각 시스템의 연장일 뿐  이해력이나 통
찰력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대화를 우리는 흔히 듣는다.
  능력자 : 저... 당신의 집 마당에 이런게 보이는데요.
  질문자 : 와, 정말? 어떻게 그런 걸 볼 수 있지요?
  우리들 : 와, 정말? 어떻게 그런 걸 모르지요?
  잘 살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자네들이 갖는 이런 류의 경의나 존경, 숭배에는 반드시 그것을 떠받
치는 근거가 있다. 단, 숭배에는 양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즉,  이 부분은 나보다 능력이 있
으니 숭배한다든가, 이 부분은 나보다 처지니 경멸(이때는 마이너스의 숭배치 = 경멸)한다는 따위. 숭배
나 존경의 바탕에는 언제나 하나의 기준이 자네들에게 있다.
  때문에, 자네들이 지금처럼 아무 쓸모없는 파리떼인 한, 자네들은 우주의 모든 것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네들이 사는 목적은, 당분간 자네들의 바보같은 자식들과  바보같은 자네들 이웃들과 자
네의 멍청이 제자, 그리고 자네들 자신을  경멸하는 대신, 다른 모든 존재를  숭배하고 존경해야만 하는 
것이다. 열심히 해보라, 이 원숭이들아.
    <쾌락과 고통의 비밀>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 채널러 EO가 어느 날 지켜보았던 일이다. 한 사나이가 우연히 날아가는 파리 
한 마리를 죽이면서 뇌까렸다. "(난 이렇게 약한  생물을 죽이는 일에 대해 의문을 품을 만큼의  사랑은 
있단 말이다... 하고 말하려는 듯)왜 사람들은 파리를  죽이는 걸까?" '네가 파리를 생물이라고조차 여기
지 않는 비정한 깡패이기 때문이지...' 라고 말하지  않고, "단순한 습관이겠지요..."하고 EO는 말하고 나
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고 지켜보았다. 그랬더니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거참, 고약한  습
관이군." 그놈은 이렇듯 습관 탓으로 돌렸다. EO는 생각했다. '그저 일하는 데 신경이 쓰여(별로 방해도 
하지 않는 파리였지만) 죽였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남들에게 비정한 놈이라고 경멸받기 싫다는 이유 따
위로 쓸데없는 갈등을 하는군. 자연법칙의 ABC를 가르쳐주고 싶지만, 내겐 그런 권한이 없으니...  그래, 
그저 그런 거지' 그런데 도의 형벌인지, 아니면 붓다나 달마의 개입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단순한 우연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나이는 사흘 뒤 궁둥이에 세균이  감염되어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의 고
통을 며칠씩 겪었다. 파리보다 몇천 배나 더 작은  균에 의해서 말이다. 여기서 하나의 교훈을 본다. 생
물의 크기나 생물의 지능이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겨,  생물을 모욕하고 심지어 살육하는 자는 언젠가는 
<자기보다 훨씬 작고 보잘 것 없는 생물>로 인해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알겠는가, 지구인들이
여.
  자, 공포, 존경, 숭배, 경멸... 무엇이든 거기에는 기준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네들에게 <어떤 영향
을 미치는가>로 구분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무수한 전자파, 중력, 미생물, 기체 등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
받고 있으면서도 자네들은 그걸 깨닫지 못한 채, 그저  한가롭게 술집에서 하룻밤 같이 보낼 상대나 찾
는 멍청한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엄밀하게 말해, 자네들에게 건전하고 모범적인 생활은  이런 것이다. 즉, 자네들은 자네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믿는 것들 중에서 자네들의 <기분좋음>을 한층 고조시키는지 아니면 저해하는지를 기준
으로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분류한다. 그리고 자네들에게  프로그램된 쾌락신호를 증폭하는 직접적인 대
상물 (이성이나 맛난 음식) 또는 관념적인 대상물(주위에 <그래 맞아. 바로 이거야>하고 흥분하고 동조
하는, 자네의 사고보다 뒤떨어진 바보 무리들) 따위를 열심히 끌어모으는 것뿐이다.
  이런 생물을 상대로 신을 논의할 필요는 없겠지. 군소리가 길었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자. 자네들은 말
한다. 그놈은 요컨대 전지전능하다. 지역성이  없고, 고유명칭도 모양도 없다. 그놈이  하는 일은 멍청한 
생물을 그놈 자신의 낙원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지구인은 믿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놈의 말을 듣고 실천하면 그놈의 낙원에 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굳
게 믿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믿고 실천한 결과는  셀 수 조차 없는 무수한 곳에서의 헤아릴 수 
없는 싸움뿐이었다.
  그리고 지구인에게는 낙원에 대한 지식이 아무것도 없다. 있다 해도 그저 먹고 자고, 매일매일 권태를 
느끼며, 이따금 신, 즉 그놈의 부업을  거드는 천사인가 뭔가하는 생물과 함께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자빠져 있다. 그렇다면 자네들이 있어야 존재하는 낙원이 아닌가? 더군다나, 이 극락산업의 발생은 정말 
기막힌 것이었다. 그것은 먼저, 죄악감 즉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 잘못된 것은 나쁜 것이라는 관념을 저
능생물에게 철저히 주입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관념체, 곧 아스트랄계<astral : 칼 융의 심리학에서 아스
트랄의 세계는 집단무의식으로 불렸으며 꿈의 3차원으로  불리기도 함. 이 세계에서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여행할 수 있는데 단지 과거로만 가능함. 불가에서는 이 단계를 숙명통으로 봄  - 편집자 주>의 
수준에서 해본 적이 있는데, 우주에서의 근본적인 생명의 추진력이 되는 <공포의 실감>이 도무지 생기
지 않았다. 잘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잘못하면 <이렇게 된다>고 철저하게 알아듣도록 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아스트랄계는 자네
들이 아무리 무서워해도 꿈에서 깨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지나치게 엉성한 세계였기 때문에 절
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의 고통, 곧 물질이 고안되었다. 물론 일정  기간이라는 시간 제한이 있었지
만, 원자의 수명정도는 지속되기 때문에, 그만하면  됐다고 인정되었다. 하지만 고통회로가 생물마다 다
르기 때문에 고통과 불쾌에 대해 전우주적으로 정의하긴  매우 어렵다. 그러나 자네들의 생존에 국한한
다면,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고통의 감각도 아니고, 피도 땀도 눈물도  아니다. 그것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고통이란 <편치 않는 것>. 병에 걸리면 자네들은 편치 않다. 남의 간섭을 받으면 편치 않다. 매를 맞
으면 편치 않다. 가만히 있어도 편치 않다. 그래서  뭔가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떻게 편치 않게 하
느냐가 극락산업의 목표였기에, 되도록 오랫동안 불편해지는 요인이 많이 고안되었다. 물론 자네들에 의
해서는 아니다.
  최초의 프로그램은 단순히 <어떻게든 움직이지 않으면 편치 않아>지도록 설계한 것뿐이었는데, 그리
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자네들 자신의 손으로  무수한 논리, 오락, 가치관을 생산하고 있다. 자
네들이야말로 편안해질 줄 모르는 파리들이다.
  아무튼 애당초 있지도 않은 하느님을 논할 시간은 없다. 채널러의 뇌파가 떨어지는 것이 보이니 이쯤
에서 마쳐야 될 듯 싶다. 그 전에, 채널러를 조금만 더 괴롭히기 위해 지껄여보자.
  자네들에게 집적거리거나 설교하는 지성체는 우주에 수없이 많다. 그것은 자네들 세계에서의 <참견>
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주된 동기는 자네들을 위한 것일 리 만무하다. 온갖 종류의 이해관계가 있지
만, 근본적으로 <존속>말고는 다른 동기를  찾을 수 없다. 공존이건  적대이건, 부분적이건 광범위하건, 
그저 <존속>할 뿐이다.
  우리가 관찰한 바로는, 우주의 존속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자네들이 말하는 신은 그것 이외에는 프
로그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은 무책임한, 창조물의 제작자이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이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자꾸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열심히  <존속시키려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장치
가 발명되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즐겁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쾌락신호>다. 그런데 이 쾌락신호는 
뒤집어보면, <죽는 것은 즐겁지 않다>는 회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주산업의 극락산업 부문에서는 
<죽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강조해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고통>의 체험 시스템이 고안된  것이
다.
  희생자라는 의미에서는 지구인보다 더 불쌍한 생물들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다. 무슨 소리
인가 하면, 자네들도 무척 불쌍하다는 말이다.  어떤 생물은 쾌락중추에 단 한가지만 프로그램되었는데, 
그 쾌락이란 <죽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집행할 수 없도록 차원과 차원의 경계선에 가두
었다. 때문에 아무리 죽고 싶어도, 우주산업이 도산하기 전까지는 모든 존재물을 혐오하고 거부하며, 존
재함으로써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채널러 EO는 그 존재의 핵심과 동조한 날로부터 전혀 새로운 변화를 시작했고, 그리하여 생존,  존속, 
고통, 쾌락의 모든 프로그램이 해제되었다. 즉, 자네들의 우주에서 완전 실업한 것이며, 또한 그럼으로써 
완전한 프리랜서로 전우주에 대한 동조기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얻지 못한 것도 있다.
  그것은 쓸모없는 시시한 이성인들과 애써  동조하려는 의지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네들의 우주인이 
아닌 우리들>과만 이렇게 직통회선을 열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지껄이는 것은 자네들을 돕는 
것이 아니다. 혹 자네들이 우리를 일러 악마라 부른다면, 우리에겐 그것이 칭찬이란 말이다.

    <좋지 않다는 사고가 가장 좋지 않은 사고이다>
  1992. 8. 26
  이번에는 최저의 악마, 가장 낮은 죽음의 신, 최저의 존재인 우리의 생명관을  우리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해주겠다. 우선 최하라는 것이 <의식체>에게는 얼마나 멋지고  좋은 것인지, 반면에 <사고체>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자네들 지구인도 충분히 비교해보기 바란다.
  자네들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존재라면 그 누구도  자네들을 주목하지 않는다. 누구도 자네에게 뭔가 
시키려고 집적거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네에게는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다. 만약 자네가 세상 어느 누구
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세계 제일의 무능력자로,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로 있다면 자네에게는 절대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때야말로 자네의  의식이 본래의 본성 밖으로 <나들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정말로 실감한다면 자네들의 마음은 지금 당장 고요해질 것이
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자각을 자랑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그저 먼지로 안정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주니 뭐니  하고 스케일을 따지기 전에 자네들 세계 속에서도 
먼지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우주에서는 먼지로 존재해도 사람들 속에서 권위나  자기 우월성을 갖는다면 그건 <최저>가 아니다. 
때문에 제일 먼저 할 일은 자네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최저>가 되도록 애쓰는 것이다. 자네의 자
식보다 더, 자네의 상사보다도 더 최저로  남도록 노력하라.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최저로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할 뿐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물론 이건 내면적 차원에서의 이
야기다. 왜냐하면 의식이란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이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그것은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존재한다. 그것은 지금 자네
들이 자신을 동화시키고 있는 지성이나 정보, 경험의 기억이나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다. 만약 이 의식에 
자네가 영구히 <그 누구도 아니다>라는 체험 속에서 안정을 찾고 편해질 것이다.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삶을 위해 활동한다든가 배운다든가  하는 자네들 귀에 쏙쏙 들어가는 말이나 
개념들을 닥치는 대로 짓밟고 뭉개버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자네들의 역사 속에서 도라 
불리는 체계나 불교라 불리는 것의 본질이 뜻하는 바다.
  노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나는 줄의 맨 끝에 있다. 때문에 누구도 나를 떠밀 수 없다."고 했듯이 말이
다. 우리는 우주에서 <최저>의 수준에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우주의 어느 누구로부터도 강요당할 일이 
없다. 우리는 힘을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삶에 대한 희망이나 의지도  없이 우리는 그저 있다. 그것
은 존재하려는 의지에 의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의식의 존재나 발생에 
대해 의문을 갖건 말건, 그것은 <그저 있다>. 자네들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라면 자네들 <본
래의 집>으로의 귀환은 아주 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네가 어떤 사람이고자 하거나,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또 어떤 존재로 남아 있기
를 스스로 강요한다면 영원히  자네들의 본질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불쾌,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광기,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에고가 <그것을 포기하는 일의 중요성>
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인 집합의식 속에 단단히 간직되어 이젠 버릇이 
되어버린 <신학적> 개념을 파괴하고 철거하고자 앞에 쓴 책 같은 것을 무의식 수준에 던져넣었다.
  자, 우리가 누구든 그런 것은 자네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시리우스 성계
의 뒤쪽 차원, 자네들에게는 관측도 인식도 불가능한 우주에 우리가 현재화하는 기반, 곧 터미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어도 자네들에게는 옛날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어떤 정해진 개체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우리의 의견이나  견해도 없다. 우리는 
자네들의 사고 속에서만, 말하는 존재로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특별한 기억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는 이 채널러의 뇌를 경로로 삼아 이 시대의 지구인에게서 일반적인 정보를 관찰하여 그것을 단순한 소
재로 다룬다. 그러므로 자네들이나 채널러의 지식에 결점이 있더라도 그것 또한 있는 그대로 쓰도록 하
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네들  논리의 결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 그 자체가 지닌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자네들은 먼저 존재한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체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즉, 존재와 활동은 서로 같지 않다는 말이다. 이로써 <활동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자네들의 머릿곳에 굳게 새겨진 습관적 논리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우리가 말하는 활동이
란 자네들이 몸을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네들의 사고활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격언을 몇 
가지 보여주겠다.
  공포 그 자체외에 공포스러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곤란 그 자체외에 곤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좋
지 않다는 사고가 가장 좋지 않은 사고이다. 그러나 자네들은 이러한 가장 본질적인 예로부터 가르침을 
들어도, '사고해서 안 된다면 도대체 앞으로 닥칠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걱정하고 거기에 반
발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자네들에게는 의식체 체험이 없는 것 같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면 조금씩
은 있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중요성에 대해 깨달을  수 없을 만큼 그 반대 사고를 발달시키지 못
한 것 같다. 그래서 자네들은 아직도<생활이나 마음의 쾌락>에 도움이  되는 사고, 곧 생각하는 방법의 
교본을 갈구하고 있다. 하지만 거듭 이 채널러가 말했듯이 그것이야말로 장애인 것이다. 
  혹시 뭔가 도움이 된다고 여기면, 자네들은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지키려 한다. 그리고 그것에 매달
린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의식체에게는 부담요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채체 어떤 
도움을 주는지 한번 살펴보라. 그것은 자네들의 안정된  육체생활과 자에들의 심리적 쾌감에 도움을 준
다는 것말고는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제시하는 의식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자네들을 위해 듣기 좋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제시하는 것은, 자네들의 사고에는 가장 
불편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죽음이다. 사고나 영체에게 불편한 것은 송두리째 말살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밀고 나간다. 왜냐하면  의식체에게 이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이니까. 자, 우리와 이 
EO라는 채널러는 몇 달 동안 시험삼아 이런 영역의 문체를 자네들에게 던져주고 함께 생각해보았다. 그
런데 일반적인 무의식의 응답은 극히 비이성적인 것들이었다. <우주? 신? 우주인? 아니 도라고? 모르겠
는데. 그런데 이봐요, 대체 그런 것이 내 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자네들 사고의 짜임새 거
의 전부를 이 말이 나타낸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즉, 각자의 생활이나 흥미에  맞지 않는 사물은 그것이 
아무리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라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인류의 사고에 공통되는 <이해관계>나 <생사의 문제>로 발전하는 관념적인 갈등을 
가지고 자네들의 개념에 참견하기로 했다. 자네들은 당장 다음날부터  생활과 직결되는 고민을 <인공적
으로 증폭>하고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네들에게는 불쾌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혼관, 연
애관, 인생관, 오락... 일체를 부수어버리기 때문이다. 자네들이 말하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산다는 모든 
희망을 버리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모든 희망이 종말을 고하고 나서 비로소 자네들이 제정신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희망이야말로 절망의 원인이다>
  1992. 9. 1
  그리하여 <폐허의 붓다들><속 폐허의 붓다들><폐허의 붓다들/외전><지구가 꺼질 때의 좌선>이 완
성된 것이다.
  언젠가 내게 일본 사람인 <여자 채널러>가 왔다. 내가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쪽 맘 내키
는 대로, 할 말이 있다고 하며... 그리 입을 열어 대뜸 하는 말이...
  여자 :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당신은  깨쳤다느니 뭐니 하는데, 내가 접촉하고 있는 우주의식에게서 
당신이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들었어. 그런 거짓말을 세상에 대고 나불대는 일은 이제 하지마.
  나 : 나는 그게 거짓말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당신은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굳게 믿고 있으니 참말 
같군. 그럼 됐어. 잘 가시오.
  여자 : 당신이 하는 말은 말장난이야. 그로 인해  숱한 사람들이 상처받는단 말이야. 그래서 따지려고 
온 거야.
  나 : 그렇다면 책이나 방송을 통해 나에 대한 비난을 하는 게 효과 만점이지 않을까? 그럼 몇만 명의 
사람들이 볼테니까 말야.
  여자 : 그렇게 한다 해도 당신은 또 사람들을 해칠 말을 다시 할 게 분명해.  당신이 두 번 다시 그런 
걸 쓰지 않게 하라고 우주의식이 일러줘서 이렇게 일부러 온거야.
  나 : 저런저런, 정말 거창한 사명을 띠고 오셨군. 뿌리를 끊어야 한다 이 말인데. 하하하, 그래... 뭘 끊
을 작정이지?
  여자 : 당신의 입과 손을 묶어버리는 거지. 그러기 위해 먼저 당신의 잘못을 알려주려는 거야.
  나 : 그럼 어서 시작해 보시지.
  여자 : 당신이 말하는 것은 어떤 근거나 증거도 없어. 우주에 대해 거창하게 말하지만, 듣고 있노라면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처럼 말하고, 우주를 욕하면서도 자신은 깨쳤다는 따위로 거들먹거리질 않나, 게다
가 더구나 당신은 인간을 원숭이나 파리에 견주어 비난하고 있잖아. 당신이 내뱉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는단 말야. 그런 짓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 : 좋은 일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필요하다고는 생각해. 특히 당신 같은 사람에겐.  나는 몇 번씩 
말했어. 다른 현실에 직면함으로써 생기는 모순의 원인은  각자가 너무 오래 지켜온 사고와 아이덴티티
에 있다고 말이야.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겪는다고 말했지. 당신은 나라는 독초를 뽑아버리
려고 왔을지 모르지만, 나는 인류가 갖고 있는 괴로움의 뿌리를 뽑아버릴 작정이야.
  물론 당신도 포함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통은 있어야겠지.  당신의 머리와 가슴에서 그
걸 잡아 뽑으니까 말이야. 어때, 들어보니 마치 외계인이  벌이는 유괴 같지. 하지만 내 말을 아무 사심
없이 듣는다면 고통도 없을 뿐 아니라 누구도 상처입지  않을 거야. 또 듣기에 불쾌하다고 생각되면 버
리면 되지. 언론자유의 세계잖은가. 이곳은.
  여자 : 당신은 리틀그레이(Little Gray : 외계인의 일종으로 키가 작고 회색을 띠고 있다고 함  - 편집
자 주)에게 세뇌당한 거야.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과 인생관, 사랑을 자르고 뽑아내려는  거야. 당
신은 악마의 앞잡이야.
  나 : 저런저런, 이거야 정말.  이야기가 옆으로 샌 것 같은데  어쨌든 이야기의 논점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고 얘기하지. 그래서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여자 : 말했잖아. 당신을 설득하여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나 : 그럼 어서 설득해 봐.
  여자 : 내가 이미 말했지.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 심리적인 범죄, 살인이란  말이야. 많은 사람이 당신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렸는데 어떻게 책임질 거야?
  나 : 절망이나 심리적 고통을 자극함으로써 노이로제에 걸리게 하는 것이 범죄란 말이지?
  여자 :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당신이야말로 원숭이야.
  나 : 그렇다면 말이야. 만약 그렇다면 세계의 모든  종교, 사회, 전쟁, 어버이들, 학교, 이런 것들이 모
두 나보다 훨씬 솜씨가 좋군. 왜냐하면 그들은 몇만 년 동안이나 계속  노이로제를 생산하고 있잖아. 차
라리 나보다 그쪽부터 먼저 정리하는 게 어떨까?
  여자 : 내게는 그런 힘이 없어. 큰 일은 할 수  없지만 작은 일이라면 어떻게든 해보는 거지. 우선 당
신이라는 종자를 뭉개버리는 것이 내  사명이야. 이건 하느님의 명령이야. 당신같은  거짓말쟁이 때문에 
이 세상의 혼란이 더 심해지고 있어.
  나 : 허허, 거짓말이란 걸 알 수 있다면 누구도 상처입지 않겠지. 그렇다면 당신은 만우절의 농담으로 
상처를 받나? 그렇진 않겠지. 상처를 입는다는 건 <당신에게 가 닿았다>는 거야. 찔렸지. 그건 또 영향
을 받았다는 거야. 즉, 현실적이란 말이야. 내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 웃을 수가 없겠지. 왜냐하면 현실적
이니까.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것은 현실과 진실이 아니란 말인가?
  여자 : 당신은 우주와 접촉했다느니 우주의 끝까지 갔다느니 하는데, 그건 증명할 수 없는 말이야. 그
런데도 당신이 하는 말은 마치 진짜처럼 들린단 말이야. 그러니 무지한 독자는 진실이라고 여길 수밖에.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당신은 몰라? 당신이  하는 짓은 말하자면 사기야. 진짜처럼 보이게 해서 
뒤흔들어놓고 있을 뿐이야. 게다가 당신이 하는 말에는 사랑도 부드러움도 없어. 당신은 쓰레기야.
  나 : 허허- 그런데 왜 진짜처럼 들릴까?
  여자 : 난 우주의식에게서 분명히  들었으니까 거짓말이라는 걸 알지.  하지만 일반 독자는 어리석어. 
당신의 말을 덮어놓고 받아들여 절망하거나, 당신이 말하는 위험한 명상을 하는 바람에 폐인이 되고 있
잖아.
  나 : 그렇다면 한번 더 묻겠느데, 왜 일반 독자에게는 진짜처럼 보인다고 당신은 느끼는 거지?
  여자 : 그건 당신이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때문이야. 물론 나처럼 거짓말이 라는 걸 알아차리는 능력자
도 있지만 말야. 하지만 당신은 일상생활의 이야기들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말하기 때문에 모든 이가 자
신이 겪은 일을 생각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거지. 당신은 사람들이 
불안해 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어.
  나 : 일상생활과 관련되지 않은 문제를 다룬다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지? 그건 SF겠지. 하지만 난 
SF작가가 아니야. 내가 다루는 것은 <마음>이야. 당신이  늘어놓는 우주인의 설명이나 설교가 대체 무
슨 소용이 있지? 그런 것들은 단지 정보의 쇼핑잡지일 뿐이야. 그런 것으로 인해 당신은 자각하게 되고 
인생이 바뀌는가? 그런 것으로 인해 당신의 고통이 줄거나, 한결 마음이 침착해지고 느긋해지는가?
  그건 아니야. 그런 정보를 마치 제 것인 양 늘어놓으면서 우주에 대한  잡담을 즐기는 것뿐이겠지. 그
리고는 또 다른 의견과 입씨름을 하지. 그래, 여기서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이런 
짓은 이제 그만 하자고 하는 거야. 그것이  전쟁의 시작이지. 의견교환도 좋고 정보교환도 좋아. 하지만 
우리의 논쟁에는 아무 의미도 없지 않은가.
  여자 : 그렇게 당신은 초점을 슬쩍 비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당신은 새디스틱하게 남에게 
상처를 주는 악마일 뿐이야. 그래서 내가 신의 이름으로 끝내주겠다는 거야.
  나 : 그렇다면 어서 당신 맘대로 해. 난 벌써 오래 전에 죽었고, 당신의 생각에 필사적으로 반대할 의
견도 없으니까. 또 내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말을 하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으니까. 당신이 하는 말은, 
이렇게 보이니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는 관찰과  의견 같은 것이지. 뭐 부정을 해도  좋아. 아니면 내가 
이미 말했듯이 당신은 내게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은 건가? <내 잘못이었습니다. 당신이 옳습니다>하
고 말이지. 그 말 한마디가 듣고 싶은  거라면 몇십번이라도 해드리지. 물론 내 본심은  일절 담지 않고 
말야. 그건 내가 깨달은 이래 처음 하는 거짓말이겠지만. 하하하.
  여자 : 그럼 어서해. 난 그걸 녹음해서 방송사와  출판사로 가져가겠어. 그리고 당신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버릴 거야.
  나 : 그건 소용없는 일이 될지도 몰라. 난 당신이 녹음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다시 <정직>하게 쓰겠
지. 마침 청탁받은 원고의 소재가 없었는데 당신  덕분에 쓸 만한 것이 생겼군. 어때  이 대화를 소재로 
해볼까 하는데 말야.
  여자 : 당신은 그렇게 해서 날 우롱하고 비난하는 글을 쓰겠지. 정말 당장 여기서 죽여버리고 싶어.
  나 : 그래그래. 바그완(신성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 혹은 신성  그 자체. 여기서는 즉 라즈니쉬를 의미
함 - 편집자 주)도 그렇게 해서 당신 같은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지. 당신 이야기는 비난이 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개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여자 : 정말 기분 나빠. 당신은.
  나 : 좋아. 내가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뉘우칠 수 있도록 당신이 날 설득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당신
이 믿고 따르는 우주의식의 사랑과 힘이겠지. 그럼 자, 어서 시작하지.
  여자 : 당신에겐 사랑도 없어. 오로지 부정하기만 해. 우주의 놀라운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아. 하느님
의 위대함을 말하지 않아. 당신이 하는 일은 단 하나, 사람들을 절망시키는 거야. 그건 죄야.
  나 : 그래. 내겐 아무것도 없어. 사랑도 없지. 하지만 미움도 없어. 나는 사고뿐인 당신들을 부정해. 그
리고 우주의 놀라움도 몰라. 신이 위대한지 어떤지 따위도 몰라. 하지만 그 비참함은 알고 있지. 그리고 
의식만이 당신들의 유일한 희망인 것은 알고 있어. 때문에 당신들을 절망시키지 않을  수 없는 거야. 사
람들은 어떻게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버릴 수 있지? 죄든 뭐든 다 괜찮아. <나를 십자가에 매달라> 내
가 하는 말은 단 한마디야.
  <희망이야말로 절망의 원인이다> 희망이 없으면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아. 당신이란 존재가 없으
면 상처받지도 않지. 아무것도 없으면 그 어떤 것도 무너지지 않지. 그렇게 되면 세상과 우주는 그저 자
연히 있게 돼. 만남도 헤어짐도, 말하고 귀기울이고 바라보고, 모두 그저 있는 그대로 있을 뿐이야. 그게 
우주의 아름다움이야. 있는 그대로 아무것도 손대지 않는 것이야말로 존재에 대한 상냥함이요 사랑이고 
느끼는데
  여자 : 그건 그저 시적인 비유야. 붓다를 인용해 무에  대해 떠벌리려는 것 같은데, 결국 당신은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해. 사람들에게 비참한 기분만 갖게 할 뿐이지.
  나 : 당신들이 어떻게 해서 비참해지는지는 아주 자세히 설명해 줬을 텐데.  그건 당신들이 스스로 만
들어내는 거야. 그 근본적인 원인을 나는 글로  쓰고 말로 하지. 혹시 그 방법말고  당신들의 불행과 다
툼, 고통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면 제발 내게 가르쳐 줘. 그걸 알고 싶어.
  여자 : 그건 사랑이야, 사랑. 사랑은 만능이란 말이야.
  나 : 그렇다면 만약 나로 인해 고뇌하는  사람을 당신의 사랑으로 껴안을 수 있다면, 먼저  나를 감싸
줘. 결코 반항하지 않고 받아들일 테니. 어서 말야.
  여자 : 누가 미쳤다고 악마에게 사랑을 주겠나.
  나 : 악마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단 말야? 너무 불쌍해. 그들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겠군.
  여자 : 그렇고말고. 그것들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거야.
  나 : 그런데 나는 괴롭지 않아. 사랑이 없어도 쓸쓸하지 않고...
  여자 : 이제보니 당신은 멍텅구리야. 아니, 미치광이야. 미친  사람이 글을 쓰니 이런 꼴이 될 수밖에. 
맞아. 당신은 미치광이야. 결론이 나왔어. 당신은 미치광이야.
  나 : 그래? 지구의 법을 보면 미친 사람이 한 짓은 범죄가 되지 않는다던데...  그렇다면 당신이 그 지
구의 법을 적용시켜 나를 무죄 판결하면 어때?
  여자 : 아니아니. 내가 말을 잘못했어. 취소취소. 당신은 사기꾼이야. 그리고 당신이 벌인 짓은 사기야.
  나 : 난 아무래도 괜찮아. 그런데 당신의 목적은 전혀  달성된 것 같지 않군. 날 범죄자든 미치광이든 
뭐라 불러도 좋아. 내 자신이 미쳤다거나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나도 이쯤에서 취소할 
게 하나 있어. <내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나에 대한 거짓말이 돼. 그러니 내가 진심으로 후회하
고 참회할 때까지 부디 계속 말해줘.
  여자 : 이젠 그만. 당신과는 대화가 안 돼. 당신은 언젠가 꼭 벌을 받고 말거야. 똑똑히 기억해 둬.
  나 : 아니, 아마 난 금방 잊을 거야. 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니까. 내게 기억이나 사고는 그저 흘러
가는 것일 뿐이야. 난 아무것도 붙잡지 않아. 당신도, 그리고 죽음도 삶도.
  여자 : 역시 당신은 미치광이야. 몽유병 환자란 말야.
  나 : 그러고 보니 갑자기  당신의 채널링을 보고 싶어. 혹시  그걸 보면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르는데. 
어때...?
  여자 : 좋아. 이번엔 분명히 우주의식이 당신을 때려눕힐 거야.
  여자는 정해진 대로 심호흡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그리고는 정해진 대로 이렇게 말했다.
  그놈 : 오케이. 질문이 뭐가?
  나 : 일단 당신을 시험해보겠다. 내가 종이에다 짧은 문장을 쓸테니 당신이 한번 알아맞혀보라.
  그놈은 어려움 없이 해냈다. 멋지게 맞힌 것이다. 훌륭했다. 내가  쓴 글은 이랬다 - <넌 바보야> 그
놈은 정확하게 정답을 알아맞혔고, 내가  쓴 <내용>도 진짜 정답이었다.  <그놈>이 얼마나 바보인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난 말했다. "투시로 글자를 알아맞힐 정도라면  마음을 읽는 건 아무것도 아
니겠군. 그럼,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걸 맞혀봐라. 말하자면 내 <본심>을 꿰뚫어보란 말이야"
  그놈 : 좋아. 단단히 생각해라.
  나는 마음속에서 <...(무사고. 곧 생각없음) 뒤에, 아까 해보인 이놈의  투시는 정말 멋지다. 놀랄 정도
야. 이놈은 확실히 투시능력이 있어. 훌륭해>하고 진심으로 생각하면서... 그놈이 집중하고 있는 동안 크
게 소리내어 말했다.
  나 : 네가 아까 해보인 것은 가짜지. 네게 투시능력  같은 건 없어. 나의 사고패턴을 추측하여 어쩌다 
맞힌 것이지. 흥!
  하고 전혀 마음에 없는 내용을 말했다. 즉, 그저 말로만 한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놈은 반응을 보였다.
  그놈 : 아니야, 그건 정말이야. 넌 그렇게 무엇이든  의심한다. 그러니까 열린 마음이 아니다. 그건 우
리들 고차원 의식의 표준적인 능력이다. 그 사실을 증명해도 너는 아직 인정하지 않은가?
  나 : 아니아니, 그건 우연이야. 난 전혀 믿지 않아.(나는 다시 거짓말했다. 본 마음에는 믿고 말고가 없
는데도)
  그놈 : 넌 글렀다. 너의 그런 마음이 지옥을 만드는 거야. 너 스스로  말했지.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고. 하지만 넌 지금 모순에 빠져 있어.
  나 : 웬만큼 해두지. 이젠 좀 제대로 내 진심을  보라고. 나는 처음에 진심으로 당신의 능력을 믿었단 
말이다. 진심으로 당신의 능력을 인정했어. 다만 당신을 시험해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본거
야. <네 능력 같은 건 가짜야>하고 말이야. 그랬는데  당신은 나의 본심은 하나도 보지 않았어. 당신이 
들은 것은 나의 그저 말뿐인 말이야. 그리곤 반박했어. 만약 당신이 내 진심을 보았다면 분명 이렇게 말
했을 거야... <저런저런, 넌 마음으론 믿으면서 입으로는 부정하는 척했어. 꽤 좋은 함정이야>하고 말이
다. 그런데 당신은 내 말만 들었어. 난 속으로  크게 <멋진 능력>이라고 소리쳤단 말이다. 그런데도 넌 
반박했어. 넌 바보야. 그러니 어서 빨리 이 계집과 함께 꺼져!
  그 때 여자는 트랜스(깊은 명상에 의해 도달하는 무아의 경지, 황홀경을 말함 - 편집자  주) 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채널링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원숭이의 혹성에서 있었던 일이다.

    <정말? 거짓말 아냐?>
  1992. 3. 31
  <폐허의 붓다들>에서 말했듯이, 지구의  인류를 만들어내어 세뇌하고  또는 고통을 만들어내어 그걸 
섭취하는 지성체의 차원이라면 지구의 인간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 자
신이 먹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가축을 사육하고 생물을  양식하거나 유전자 조작을 통해 배양하는 것과 
단지 입장만 다르기 때문이다. 그 정도라면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의 추측과 이해가 가능하다. 인간의 행
위를 바꾸어 놓으면 그만이다. 설령 지구인이 리틀그레이에게 수확당하는 일이 있다 해도 그건 다만 이
제껏 가축에 대해 가해자였던 우리가 피해자가 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다른 종류의, 아득한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미지의 존재 에일리언은 살려는 충동말
고는 우리와 공통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중에는 시간의 내부에  서식하는 지성체까지 있다. 알겠
는가? 그들은 어떤 조형물도, 2차원도,  3차원도, 4차원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지각하는 것은 시간뿐이
다. 그러므로 시간의 도시에서 시간을 먹고 산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전혀 이해되지 않는 지성체
의 수준이다.
  이 우주의 물리적 영역만으로도 방대한 생존환경의 차이, 지각영역의 차이와 생존형태의 차이로, 그들
은 자신의 육체를 위해 전혀 이질의 문화를 낳은  것이다. 때문에 애당초 그들이 현실로 인식하고 이용
하는 에너지에는 굉장히 많은 종류가 있다. 비행접시 등 우주선의 항행원리도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우
리가 일컫는 워프(시간휨 현상을 말한다. 시간축이 휘어지는 현상으로 이때 휘어져 마주친 두  시간대를 
통하면 순간에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고 한다 - 편집자 주)니, 중력이니, 빛이니, 동조니, 염력이니 하는 
그런 것들과는 다르다. 우리의  에너지는 지구인이 생활 속에서  알고 있는 것들뿐이다.  당신들은 그저 
SF적 상상력의 연장에서 <추측>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하지만 애당초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계적으로도  심령적으로도 감지하지 못
하는 또한 알 수 있는 가능성조차 희박한 에너지가 우주에 충만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전기를 쓰듯 그 
에너지를 사용하는 종족이 우주에는 있다. 그러니 진짜  우주인이라는 존재의 우주선은 내가 투시한 바
로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것들이다. 비행접시라 부르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개 같은생물이 있는가 하면 흐르는  유체 모양을 한 것이  있고, 비대칭의 울퉁불퉁한 모양이 있는가 
하면 전혀 두께가 없는 완전한 2차원 평면체이거나  움직일 때마다 모양이 달라지는 것도 있다. 때문에 
인간이나 지구의 생물 같은 것이 우주 속에 있다는 전제는 맞지 않다.
  마이크로 레벨, 곧 분자나 원자 수준의 크기밖에 안 되는 우주인도 있다. 다시 말하면 키가 1센티미터
인 것도 있고, 1미터인 이성인도 있다. "정말?  거짓말 같은데"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마라! 이런 건 
그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대체 어떤 걸 생물의 표준적  크기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대가리
를 좀 식혀보시라. 물체나 생물의 표준적 크기 따윈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되게 큰 위성이거나 혜
성이구나> 했는데, 실은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체였던 일도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주변의 가시영
역의 보통 생물들과도 하나의 정신체로서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다.
  이런 차이가 물질영역에서 나아가 불가시 영역이 된다. 때문에 아스트랄계니 멘탈계(미래,  과거, 현재
라는 시간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다만 개인의 마음이 시간에  초점을 두고 있는 상태로 예를 들어 마음
의 초점이 현재에 맞춰지면 미래와 과거는 현재가 됨 - 편집자 주)니  하는 상상의 영역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진짜 다차원 우주의 실상은 <전혀 미지요 불가해>인 것이다. 때문에 이젠 우주<인>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성체>란  말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그들이 과연 생물이냐고 한다면, 일단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혹 유기체가 아니더라도, 가
시영역이 아닌 영역의 생명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금속성의  무기생명체도 있다. 어느 쪽이든 <지성>
이라고 하면, 우리는 아리송한 채널링처럼  친절하게도 지구의 언어로, 더구나 쓰잘데  없는 말세론이나 
설교를 늘어놓는 것이라고 얼른 생각한다.
  그런 놈들은 그냥 팽개쳐두면 된다. 그것은  그저 지구적인 지성체의 연장일 뿐,  전혀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이 우주에서는 최저 수준에 속한다. 정말  시시한 무리들이 지구인에게 집적거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짜 우주>와의 교류가 이어지면 거기에는 논리도  언어도 없다. 지성 같은 건 
더더욱.
  그러나 고도의 과학을 발달시킨 무리는 많이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모럴도 사랑도 감정도 없다. 그
들을 대할 때는 그들에게 지성이 있다는 분위기도 또는 지성이 없다는 분위기도 풍기지 말아야 할 것이
다. 그 우주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이름은 우리들  나름대로 <우주의 그 무엇>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
는 것이다.
  그 옛날 내가 사귀었던 우주인들은 이랬다. 기하학 도형으로 생긴 에일리언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미
적 개념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키가  2미터인 지네나 거미같은 에일리언도 있다. 이른바 그레이
타입도 있었고, 엷은 자주색 피부의 대단한 미인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  뇌 속에 전혀 이미지화 
할 수 없기 때문에 투시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존재도 있었다. 이런 시시한 것에 밝은 노인이나 콘
탁티(외계인 접촉자 - 편집자 주)라든가, 아는  체하며 큰소리치는 논평가 같은 놈들이 지구에  몇 있으
니, 자세한 것은 그들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대개 자
기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우주의 무한하고 긴 시간을 <놀이> 또는 <학습>이네 <진화>네 하며  그럭저
럭 때우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어차피  인간이 그런 외부 차원의 생명체를 만나게 돼도 
결국 그것은 수많은 의문과 욕망을 낳을 뿐이다. 예컨대 지구에 싫증나면 다른 차원이나 공간적 우주에 
태어날 수 있지만, 각각의 천체마다 나름대로의 규제는 있는 법이다. 자유란 근본적으로 환경에 있지 않
은 것이다. 그리고 생명형태로 여러 가지 변형이 가져다주기보다는 보다 많은 혼란을 가져다 준다.
몇 백년 전 아메리카에 상륙한 서양인이 흑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해보라. 같은 두 
발 달린 생물에 대해서도 평등의식이 없는  자들이 어떻게 열 두발 생물이나 공포영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생물과 사귈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성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훨씬 더 진보해 있다.
  덧붙이면, 당신이 본 그들의 별에는 어떤 과학의 산물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구조물이 전혀 없는 경
우도 많다. 그렇다고 행성이 땅 속에 도시를 만든 것도 아니다. 거의 곤충처럼 조용히 살고 있는 존재들
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간직한 우주에서의 경험이나 지식은 이따금 은하계의 간부들이 상담하러 갈 정
도이며, 겉으로 보기엔 겨우 5센티미터의 애벌레 같은데도, 그들은 놀랍게도 은하계에서 <장로>들로 불
린다. 당신들 지구인이 그들의 별에 가서 그들을 보면 기분이 나빠 발로 짓뭉개버릴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당하기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생사의 문제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물질로서의 한때 
모습이 애벌레 모양이 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런 현상은 우주의 일종의 상식인데, 특정 동물의 형태란 다윈 식의 진화과정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
라, 외부세계의 에일리언이 물질세계의 차원으로 뚫고 나올 때 취하는  형태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 근거를 갖는 형태가 아니다. 잘 알려진 것으로는 우스개처럼  소설속에 등장한 것인데, 생쥐는 
가장 높은 차원의 나타남으로 알려져  있다. 돌고래나 고래도 그렇고,  거미도 그렇고, 벌이나 개미같은 
곤충도 그렇다. 그리고 식물 가운데도 여러 가지 꽃이 있는데, 이는 대개 다른 우주의 의식이 지구에 <
의식 안테나>를 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어쨋든 우주에서 유별나게 UFO를 타고  날아다닌다든가 거대한 우주 정거장을 공간에  건조한다든가 
하는 것만이 지성이 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우주  항해를 위해 여러 가지 상상을 해야 하는 우
주인들은 차원이 높다고 할 수 없다. 그런 기술은  당신들 지구인에게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들
의 과학 부스러기에 몰리는 바보도  많지만, 실제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물리적 과학기술이 
아니다.
  사실 전기의 발명으로부터 2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 이만큼 편리하고 다양해졌는데도 우리의 행성
은 여전히 불행한 채로 있다. 오히려 혼란만을 정신 속에 낳고 있으며,  생산하는 물질도 자연에 환원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우리들보다 3천년 정도밖에  진보하지 않은 에일리언들의 과학이나 사회이념은 우
리가 지향하는 이상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그것을 실현한 그들이 과연  행복한지를 따진다면, 나 개인의 
생각은 매우 의심스럽다고 말하겠다.
  가령 당신이 아마존에 간다고 치자.  당신에게는 헬리콥터가 있고, 먹을  양식이 있고, 살아가기 위한 
모든 장비를 갖추고 있지만, 내면적인 충실감에 있어서는 그들쪽이 훨씬 앞서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검소
함 또는 미개함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렇다. 당신이 보다 많은 정
보와 에너지, 혹은 많은 생명들과 균형잡힌 교류를 갖고자 한다면, 자아나 상식 따위가 송두리째 벗겨진 
순수의식, 곧 도나 선같은 의식이 실현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지구인은 우주의 다양
성과 복잡성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인간관계에 있어 조금만 복잡한 문제가 생겨도 동요하는 지구인
이 엄청난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우주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틀림없이 미치광이가 되어 돌아온다. "아- 역시 지구가  제일이야"하고 말이다. 아무튼 지구인
이 상상하고 그리는 우주는 어린아이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채널러,  콘탁티, 그리고 펜타곤과 정부가 
알고 있다고 소문난 우주인에 대한 정보도 아직까지는 정말 유치한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SF 이미지
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문명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주에는 아직까지도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인해 벌어지는 행성간 전쟁이 있다. 멍텅구리 채널
러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주는 평화가 아니란 말이다. 또 지구만이 뒤쳐져 있으니 빨리 진화하라고 말하
는 멍청이 우주인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럼 그들은 대체 어디까지 진화했다는 거지?
  그들은 아직도 우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집적거릴 행성을 찾거나 은하계의 공무원으로서 의무적
으로 개미처럼 일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겉으로는 마치 천사와 같은 행동을 보이지만 침착함에 있어서
는 노자나 붓다나 달마의 발치에도 미치치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가 훌륭한 곳이라고 말하려는 것
은 아니다. 인간만 없다면, 이곳은 자연의 예술풀이라 일컬어질 만큼 아름다운 행성이라고도 할 수 있지
만 그러나 지구보다 훨씬 더 절묘하게 아름다운 행성이 무수히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해관계가 분명하면 다루기 편하다>
  지구인들의 미적기호, 안심, 의존감, 이해관계의 사고, 그것들은 정말 유치하다. 내가 우주인이라면 이
런 저능생물의 행성 정도는 백 일 정도면 점령할 수 있다. 당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행동하고, 또 당신들
이 안심하게끔 당신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가지고 과학적인  원조를 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기적적인 치
료를 통해 기쁨을 주고, 손에서 잡동사니를 출현시켜 보이고, 끝으로는 당신들을 포함해 행성째 비싼 값
으로 다른 행성에 팔아넘기면 된다. 당신들은 순수한 의문이나  지성이나 판단력보다 <감각적인 기호와 
자기 중심의 이해관계>만으로 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하다.
  이해관계가 분명한 생물은 참으로 다루기 편하다.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듯이 후한 보수와 가혹한 
징벌을 적당히 섞어 당신들에게  베풀면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떤 우주인에게도 절대로 조종당하지 
않는 민족이 있다. 그것은 애당초 생명에 의존하지 않는 언제 죽어도 좋은 욕망없는 사람들이다. 욕망이 
있으면 반드시 이용당한다. 그러나 욕망이 없는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다.
  이것이 "도둑은 거지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선의 철학이다. 그 집에 들어가보았자 도둑은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위협도 물질의 유혹에 대해서도  이해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것이 도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주인들로부터 왜 독립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그들이 <죽음>과 친하
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주에서의 완전 소멸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의 <삶>은 든든한 절대의 어둠, 죽
음과 무에 뒷받침되어 있다.
  가까운 장래에 우주로부터 갖가지 생명체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제공하는 과
학기술이나 정신성의 <미끼>에 몰려들 것이다. 그런 꼴이 벌어지는 광장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공원에
서 한 늙은이와 그의 친구들은 꽃과 벌레와  해바라기하는 고양이를 바라보며 순진하게 웃는다. 지난날  
EO라 불리던 노인과 그의 문하들은 우주인따윈 아랑곳없다.
  눈앞의 아름다운 초목이 그의 행복과 광명의 전부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사람들만이 에일리언과 
교류할 수 있다. 이해관계, 죽음의 공포가 없는 자만이 우주 민족과의 교류에서  중립적인 매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내막을 공개하고자 한다. 내가 도나 선에 관해 말하는 데는 몇가지 목
적이 있다.
  첫째는 당신들의 탐구를 끝냄으로써, 좀더 당신들을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
  둘째는 자주적인 순수 지성의 확립으로 갈팡질팡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인종이 되지 않게 하려고, 그 
바탕은 깨달음이다.
  셋째는 그런 이들은 머지않아 우주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외교적 의식을 지니
게 될 터인데, 내가 자주 말한 것처럼 당신이 만약 눈앞에 있는 풀 한  포기에서 빛을 볼 수 있다면, 당
신은 어떤 것과도 의식을 교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척 이상하고  기묘한 모습을 한 우주인을 마주 
대하면서도 결코 기죽거나 비굴해지지 않는 사람들이 내 문하에서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이런 평화로운 지구에서 깨달음을 얻어 그저 <있음>에 깊이 느긋하게 있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우주
>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사자선>이라도 해서 <암흑>과 친해지고, 생의 모든  것
에서 해방되어 그저 세계를 바라보듯 고요히 살며, 목적을 갖지 않고 느긋하게 또는 자기를 되돌아보거
나 분석하거나 뉘우치거나 하지 말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인 채로 있으시길. 결코 <의문투성이 꼬
마>는 되지 말기를...

    <소년 아로(다음 세대의 노자)와의 만남>
  서편 - 범천의 소년과의 만남
  1993. 11. 20 새벽 4:00
  반 년 전쯤부터 꿈에 이따금 나타나는 사내아이가 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절의 동자승 
같기도 하고 인도의 거리에서 구걸하는 떠돌이 아이 같기도  하다. 다만 언제나 느끼는 것은 그 아이가 
엄청난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많이 알고 있다는 따위의 지성이 아니라, 지혜, 관찰력, 감성
이 날카로운, 말하자면 틀을 벗어난, 어른보다 영리한 아이다. 그 국적 불명인  꿈 속의 아이를 향해, 나
는 이글을 쓰기 시작하기로 한다.
  먼저 그 소년에게 이름을 붙여주자. 그래, 그 소년을 <아로>라 부르자. 아로는 꿈에서 내 뒤를 어슬렁
어슬렁 따라온다. 내가 "어서 너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해도 계속 따라온다. 이따금 나는 뭔가를 가르쳐
주지만, 그는 내가 말하는 대로 척척 알아듣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척척 잘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그
는 아주 중립적인 태도로 듣는다. 어떤  의견에도 결코 판단이나 반론을 서둘지  않는 아이다. 슬기로워 
보이지만, 어딘가 역시 어린이다운 장난기가 베어 있다.
  아로가 말했다. "왜 내 이름이 아로지?"
  EO : 그야 뭐, 소년이라고 불러도 되지만 지구에서 소년이라고 하면 의식의 내용을 나타내는 말이 아
니라 인간이라는 동물로서의 개괄적인 연령을 나타내는  말이야. 그런 건 내게 의미가  없어. 만약 내가 
너의 내면 나이를 말해본다면, 넌 80세 정도 될  거야. 그런데 말야. 옛날에 이 행성에는 노자라는 사람
이 있었지.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정신은  이미 80세를 넘게 성숙해 있었다고 해.  그래서 노자의 이름 
가운데 한 자를 따와 <로>라 하고  <아>는 <다음>이라는 뜻이니까, <아로>라는 이름은 다음  세대의 
노자라는 의미란 말이다.
  아로 : 난 도대체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어.
  EO : 핫핫하. 그래? 그럼 의미 따윈 잊어버려. 어쨌든 이제부터 나와 함께  있을 때의 네 이름은 <아
로>야. 알았지?
  아로 : 응
  EO : 그런데 여긴 어디지? 너와 만나는 곳은 언제나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곳이야. 그래 여긴 어디
지?
  아로 : 어디? 뭐 어디라도 상관없어. 여긴 그저 우리끼리의 거리일 뿐이야.
  EO : 넌 죽은 사람이냐? 아니면 아직 살아 있어서, 몸은 나처럼 잠이 들어 여기 와 있는 거냐?
  아로 : <죽고><살아 있고>가 뭐지?
  EO : 그렇구나,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럼 묻겠는데, 이곳에서 누군가 네가 아는 사람들이 사라
지거나 움직이지 않게 되거나, 그런 걸 본 일은 없니?
  아로 : 있어. 그건 아저씨가 아까 걸어가고  있을 땐데, 아저씨의 모습이 사라지기도 하고 찌그러지기
도 하고 망가지기도 하다가 또 나타나곤 했어.
  EO : 바로 그거야... 그러다간 그대로 멎어버리지. 모습이 사라져버린 네 친구는 없었니?
  아로 : 응, 브하릭 박사가 그랬어. 박사는  어느 날 이곳에 와서 나하고 친구가 됐어.  그런데 얼마 후 
박사는 움직이지 않게 됐어. 그리고 또 잠시 후엔 사라져버렸어.
  EO : 그런 사람이 이 거리에 많이 있었니?
  아로 :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두 꺼져버리는 거야.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곧 와서, 뭔지 
잘 모르겠지만 사람 수는 별로 달라지지 않아.  세본 일은 없지만, 이 거리엔 아마 9백명쯤  있는 것 같
아.
  EO : 흐응, 그런데 또 다른 거리도 있니?
  아로 : 있는 것 같다는 말은  들었지만, 난 여기서 아무것도 불편한 게  없기 때문에 흥미가 없어. 난 
그냥 이 거리에 있고 싶어.
  EO : 너의 아버지와 엄마는?
  아로 : 그건 뭐지? 아버지니 엄마니 하는 거.
  EO : 그렇구나, 넌 알맹이가 인간이 아니구나. 브하릭 박사는 네게 뭘 가르쳐주었지?
  아로 : 응, 다른 곳에도 많은 거리가 있지만, 너는 어딜 가도 너라고 말했어. 나란 걸 1이라 치고 그 1
이란 나를 잘 보면, 그건 1이 아니라  0이라고, 늘 말했어. 그게 무슨 말인지 난  몰라. 1은 하나란 말이
고, 0은 없다는 거지.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잘 몰라.
  EO : 박사는 어떤 사람이었지?
  아로 : 잘 모르겠지만, 늘 가지고 다니는 판자나 방바닥에다 줄 같은 걸 그리고 있었어. 그래 그 줄을 
<숫자>라 그랬어.
  EO : 그랬구나... 그런데 넌 왜 나를 졸졸 따라오는 거지?
  아로 : 전에도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있었어. 아주 가끔씩이었지만.  아저씨와 똑같은 사람들이 왔던 
일이 있어. 난 늘 그들을 따라다녔어. 그런데 그들은 이 거리의 사람들하곤 달랐어.
  EO : 어떻게 달랐다는 거지?
  아로 : 그들은 다 아저씨처럼 온몸이 새까만 사람들이었어.
  EO : 뭐라고? 네 눈엔 그렇게 보이니? 그럼 내가 아저씨라는 걸 어떻게 알지?
  아로 : 전에도 한번 아저씨  같은 사람이 왔는데, 내가  할아버지라고 불렀더니, 아저씨라고 부르라는 
거야. 하지만 모두 새까만 사람들뿐이니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어.  그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저씨, 아
줌마, 할아버지, 할머니, 형, 누나같은 여섯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는 건 알았어. 어떻게 알았나 
하면, 그들은 말하는 방식이 달라. 목소리도 다르고.
  EO : 그럼 내 목소린 잘 들리니?
  아로 : 응, 하지만 모습은 안 보여. 안 보인다기보다는 아저씨가 있는 곳은 그저 뻥 뚫린 동그란 암흑
이야.
  EO :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동그랗게 보이니?
  아로 : 응, 동그랗다, 삼각형이다 하는 것도 다 브하릭 박사에게서 배운 거야.
  EO :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 있지?
  아로 : 아저씬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옆에 잔뜩 있잖아?
  EO : 난 몰라. 그럼 그들은 네 눈에 어떤 모양으로 보이지?
  아로 : 파란 삼각이라든가 빨간선, 아니면 노란 사각이나  푸른 반원, 은빛 삼각... 뭐 여러 가지야. 하
지만 아저씨처럼 새까만 건 특별해. 그래서 말인데,  아주 새까맣고 동그라미인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
도 자길 할아버지로 부르지 말라고 내게 말했어. 난 처음에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할아버지>라고 부
르라고 배워서 그렇게 불렀지만, 그 다음 사람은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했어. 또 다른 사람은 <형>이
라고 부르라는 거야. 꼭 아저씨처럼 말하는 사람이 전에 여기 왔었어. <붓다>라고 하더라. 괴상한 이름
이지?
  EO : 그랬구나. 그런데 말이다. 내 눈에는 네 모습이 우리 세계의 거리에선 소년이라고 하는 모습으로 
보인단다. 알겠니?
  아로 : 모르겠어. 그게 어떤 모양이지?
  EO : 그래? 그럼 방바닥을 잘 봐라. 바로 이런 모양이야.
  나는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바닥에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그랬더니 아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었다.
  아로 : 동그라미와 타원형과 네 개의 선이구나. 이렇게 짜여진 건 처음 보는데.
  EO : 그래그래. 내 눈엔 네 모습이 이렇게 보여.  그런데 아로,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먼저 
네게 제일 무서운 것이 뭐지?
  아로 : 무섭다는 게 뭐지?
  EO : 그럼 아프다는 건 아니? 또 부서진다든가 멈춰버린다든가 하는 건?
  아로 : 몰라
  EO는 아로를 산산조각으로 부수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렸다.
  아로 : 아저씨가 생각하고 있는 건 알아.  모양이 달라지는 거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게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난 부서지지도 않아.
  EO : 아프다든가 무섭다든가, 그런 게 전혀 없니?
  아로 : 말하는 의미를 모르겠어. <무섭다>느니 <아프다>느니, 도대체 그게 뭐지?
  EO : 그럼 지루하다, 심심하다는 건 알겠니?
  아로 : 그건 또 뭐지?
  EO : 말하자면 가령 계속 이 거리에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없이 너만 남게 되고, 네가 보는 거리
도 전혀 달라지지 않거나 또  세계가 캄캄한 암흑이 되거나 할 때 말이야.
  아로 : 그때는 그때지 뭐. 캄캄하면 캄캄한대로 그냥 그렇게 있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잖아. 아무도 오
지 않으면 그저 조용하지 뭐. 캄캄해도 난 그대로 있어.
  EO : 정말 졌다. 졌어. 이건 고통도 없다. 공포도 없다. 무도 무섭지 않다니. 지루하고 심심할 것도 없
이 무한한 공백의 시간도 문제가 없다는 말이야. 이런 일은 어떤 영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계속 
에너지를 보충하지 않고 활동하지 않으면, 설사 육체가 없더라도 영적인 존재의 윤곽이 소멸되고 말 텐
데... 영적 세계에서도 활동하지 않으면 소멸되고 만다는데, 여긴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아로 : 아저씨 왜 이상한 소리만 하고 있는 거야?
  EO : 우리가 배운 바로는 생명 또는 의식  아니 말하자면 너와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에
게 뭔가 반드시 하는 일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나는  육체로 돌아가면 무엇이든 먹고 배설하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라는 관속을 다른 형태의 물질이 통과하는 거야.
  아로 : 그런게 뭐가 재미있지?
  EO : 별로 재미있지도 않아. 그걸 하지 않으면 괴로운거야. 이렇게 존재는 항상 뭔가를 해야 한단 말
이다. 그러니까 네게도 늘 하는 일이 뭔가 있을  거야, 그걸 하지 않으면 안정이 안 되는  그런 거 말이
야.
  아로 : 움직이건 아니면 그대로 있건 별로 다를  게 없어. 그런데 안정이 안 된다는 건  뭘 말하는 거
야?
  EO : 넌 아까 <뭐가 재미있느냐>고 했지?  그렇다면 네게는 고통은 없어도 재미있다는 감각은 있는 
거냐?
  아로 : 그건 아저씨란 말이야.
  EO : 뭐라고?
  아로 : 아저씨 존재란 말야, 내가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저씨나 그 이상한 이름을 가진 <붓
다>라든가 노자, 장자라든가, 괴상한 이름의 새까만 사람들이 잔뜩 여기 왔는데, 난 그게 제일 재미있어. 
그걸 보려고 난 여기 있는 거야.
  EO : 그렇다면 지구의 시간으로 넌 4000년을 여기 있는 셈이구나.  아니, 미안미안, 이 말도 혼자말이
란다. 그보다 그 밖의 사람들은 어땠지? 재미없었니?
  아로 : 뭐 그냥 그저 그래. 이 거리의 모두가 재미있어하는 건 이런 거야

    <날려버리기 게임>
  1993. 11. 20 아침 10:00 나는 육체로 돌아왔다.
  그리고 <신>인지 뭔지 하는 자와의 대면은 3일 후에 있었다.
  그 때 아로가 돌연 산산이 갈라지면서 한 줄기  빛이 되었다. 그리고는 뾰족한 원추형이 되더니 무서
운 속도로 직선을 그리며 날아가  공중에서 번쩍 파란 불꽃을 튕겼다.  그리고 90도의 지그재그를 열번 
반복하면서 날아가 또 불꽃을 튕기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로 : 어때 재미있어?
  EO : 뭘 하는 거지?
  아로 : <날려버리기>라는 게임이야. 상대방에게 가서 쾅  부딪치는 거야. 모양이 무너지지 않은 쪽이 
이기는 거지. 모양이 무너져도 또 부딪쳐. 그렇게 해서 상대를 날려버려. 그런데 직선만으로는 재미없으
니까 춤을 추는 거야. 여러 가지 동작으로 날면서. 그러면 움직일 땐 뭔가 이상하게 찌릿한 감각이 전해
져오거든. 하지만 이젠 하나도 재미없어. 시시하지도 않아. 흥미를 잃었단 말야.  그런 놀이보다 난 아저
씨 같은 새까만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고 싶어.
  EO : 아까 말하던 그 부서져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되지? 너도 그렇게 날아가본 적이 있니?
  아로 :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몰라, 그런 일을 아직 당해보지 않아서 말야.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모르
고 재미있는지 어떤지도 난 몰라. 그렇듯 이 거리 사람들은 죄다 <날려버리기> 게임을 해. 그렇게 해서 
다른 거리에서 오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난 여기서 나간 적이 없으니까  다른 세계는 모르고, 
또 흥미없어.
  EO : 그 게임은 누구에서 배웠지?
  아로 : 생각 안 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모두 하게 됐어. 하지만 언제  그만두었는지는 알고 있어. 브
하릭 박사가 그래선 안 된다고 했어. 난 잘 모르지만  그걸 하면 우주라든가 시간, 차원, 은하계, 별, 세
계, 이런 것들이 자꾸 망가진다고 했어. 망가지는 것만 아니라 태어나기도 한다고 했어. 그리고 그것 때
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생각나. 아저씨가 아까 말한 <괴로워한다>는 말을 브하
릭 박사가 많이 했어. 난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그냥 잊어버렸지. 어쨌든 박사가 그  게임은 안 된다고 
해서 그만둔 거야.
  EO : 이 거리에 있는 너희들은 아무래도 고차원 생명체라는  존재들 같구나. 말하자면 너희의 움직임 
하나로 우주가 변하는 거야. 네 한 걸음이 몇 만의 항성군의 흐름을 지배하고, 몇억 년의 시간을 지배하
고 있는 거야. 아니, 지배한다기보다는 영향을 주고  있는 셈이지. 이 거리는 말하자면 우주활동의 근본
적인 화신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 거리에 정기적으로 들르는 뭔가 어마어마한 놈이 있을 것 같은데?
  아로 : 있어. 신이라는 괴상한 모양의 사람이야. 만유의 지배자라고도 불려.
  EO : 절대무한광이라는 자지.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있다니. 그런데 아로, 그자는 언제 오지?
  아로 : 저기 탑이 보이지? 저 탑의 빛이 자주색으로 변할 때야. 지금 파랑이니까 곧 올 때가 됐어.
  EO : 그자가 오거든 나를 불러줘. 이제 곧 지구의 육체로 돌아갈 시간이니까 오늘은 이렇게 헤어지지
만, 그 자가 오면 상관없으니까 날 불러줘. EO 앞에다가 뭐뭐라는  암호를 붙여서 나를 부르면 너와 연
결되니까 말이야. 부탁한다.

    <GOD인가, DOG인가와의 만남>
  아로가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나는 다시 그 거리로 갔다. 아로 옆에  선 내 눈앞엔, 지구에서는 <개>
로 인식되는 생물이 <거꾸로> 서 있었다.
  개 :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게 자네였나?
  EO : 뭐야. 이 물구나무 선 멍멍이는?
  멍멍이 : 물구나무를 서면 나는 개가 되는 거다.
  EO : 그럼 물구나무를 서지 않으면 뭐가 되지?
  멍멍이 : 이렇게 되지...
  그놈은 빛나는 방사선 덩어리가 되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눈부셔 난 아로 뒤에 숨었다.
  EO : 이봐, 그 이상한 특수효과 연출을 멈춰줘. 다시 멍멍이가  돼줘. 이래서야 방사선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겠어... GOD씨.
  그랬더니 그놈은 다시 멍멍이가 됐다.
  조물주와의 대화
  개 : 또 자네인가? 자네는 여기저기 온 우주를 돌아다니며 시스템을 들쑤셔 혼란시키기만 하는군
  EO : 혼란시킨 것은 오히려 당신 쪽이 아닌가?
  개 : 그게 무슨 말인가? 이 우주는 훌륭히 관리 운영되고 있지 않는가?
  EO : 예를 들면 나의 행성에는 회사라는 것이 있다.  당신이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회사란 것은 집단이 조직적으로 상호 의존하며 우리의 육체 생존을 관리하기  위한 에너지를 얻는 곳이
다. 그리고...
  아로 : 아저씨 그건 무슨 말이지?
  EO : 그건 말이야, 전에 네게 말해준 것처럼 우리는 생존, 즉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물질을 몸으
로 흡수하고 있어. 왜냐하면 우리의 몸, 존재는  그냥 있으면 에너지가 부족해지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
걸 보충하기 위해 다른 물질을 찾아내어 섭취하는 것이지. 그런데 그 행위를 늘 하고 있어야 한단 말이
다. 그리고 우리들 거리에서는 그 에너지를 모아둘  수 있어. 그것을 돈이라든가, 냉장고에 넣어둔 식품
이라든가, 수표라든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결국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에너지로 바뀌고 말
지. 그것을 한 사람이 아니라 몇 사람이 하는 것을 회사나 사회라고 하는 거야.
  아로 : 흐응, 난 통 모르겠네.
  개 : 그 말이 나의 우주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지?
  EO : 딴청 피우지마. 멍멍씨. 예컨대 그런 회사가 있는데 거기서 일하는 <사원>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은 아침부터 <노동하는 것이 얼마나 옳은  일이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원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세뇌당한 채 일하고 있어.  회사안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동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일한 만큼 보수를 받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어. 그런데 그런 회사에 꼭 하나 맹점이 있다. 그것은 '회
사가 존재하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에는 해답이 전혀  없단 말이다. 지구에는 의식주
에 전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산업이 무수히  많다. 생존을 위해서일 뿐이라면 없어도 되는 직종들
이지. 그러나 일단 회사 안에 들어가면, 거기서 일하는 것이 당연지사가 되면서 기본적인 의문은 잊혀지
고 말아.
  즉, '회사가 애당초 필요한가?'라는 의문말이야. 또  우리의 행성 지구에는 화폐제도라는 것이 있는데, 
직접 에너지가 아니라 에너지와 교환할 수 있는 보증서를 화폐라고 부른다. 실제 전체적인 식량 공급이 
줄어들고 있는데도 화폐라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바보같은 착각을 하기도 한단 말이다. 
그런 착각 때문에 의식주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산업이든 아니든 단지  화폐라는 한낱 보증서나 예금을 
증가시키기 위해 전혀 무익한 산업이 생겨나는 거야.  그런데 본질적으로 전혀 무익한 산업과 회사밖을 
나와 생각해보면 이런 의문이 나온다. 그속에 있을 때는 의미가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데. 과연 그 산업
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 이 의문을 당신에게 들이대보겠어. 모든 우주를 유지하고 생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그곳에 서
식하는 어떤 생물에게나 공통되는 영위이다. 그런데도 과연 이 우주라는  산업, 회사가 존재한다는 일에 
근본적으로 어떤 가치나 당위, 목적이 있다고 하겠느냐  말이다? 그러므로 단 한 마디로 당신같은 멍멍
이는 그 존재가치가 사라진단 말이다.
  그저 이 한 마디, 우주같은 건 뭐 없어도 된다! 그곳에 서식하게 된 것들은 그 서식을 당연한 일로 지
각하고, 또 지탱하기 위해 우리처럼 에너지 보급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활동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
다고 생각하는가?
  멍멍이 :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어. 그저 심심풀이  삼아 벌이는 움직임이지. 나는 무한한 무에 진력
이 났을 뿐이야. 그래서 만물을 창조했다.
  EO : 가만 가만... 지구의 물리학자나 신학자 모두가 결국 어떤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
이다. 그것은 바로 이런 의문이다. <빅뱅(Big Bang)>이건 뭐건 아무튼 그런 일로부터 우주가  시작되었
다고 하자. 설령 그렇다 해도 첫째, 그 최초의  시발점이 되는 질량은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둘째, 그것
이 그렇게 폭발한 요인은 어디서 왔는가? 또 그 목적 내지 의도는? 폭발은  무엇을 목적으로 또는 어떤 
계기로 일어났는가? 이 두 가지 의문에 당신은 답할 수 있는가?
  멍멍이 : 말할 것도 없이, 그 최초의 질량이란 것을  꼭 물질이라고 가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가령 
의식의 점이라 해도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꿈 같은 세계였다고...
  EO : 이봐, 이봐, 잠깐. <꿈>이란 것은 정보일 뿐이야. 그 정보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점으로 
정지해 있는 우주에 꿈이야기 따윈 꺼내지 말라. 내가  묻는 것은 그<의식의 점>은 어디서 왔느냐? 그
것이 나온 근원은 무엇이냐 하는 거야? 나아가 그 근원의  근원은 어디에 있느냐? ... 이렇게 무한한 의
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개 : 무 속에서 돌연 생겨난 것이다. 
  EO : 넌 바보냐? 무 석에는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무엇이 생겨날 턱이 없지. 
  개 : 그것 잘 모른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나는 전 우주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조합하여 
현재의 우주를 만들었다. 나의 발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이 없단 말이다. 
  EO : 그렇다면 결국 이 우주는 몇 대씩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군.  그렇다면 그 최초의 존재를 만나고 
싶다. 
  개 : 그건 불가능하다. 최초의 절대 존재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네가 네 조상과 만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EO : 그렇다면 우주 최초의 발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는 건가? 
  개 : 아마 그럴 것이다. 
  EO : 내가 추론하는 바로는 , 우주는 처음에는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그저 질량의 존재였을 것이
다. 즉, <무>란 것은 없어. 처음부터 모든 것이 존재 그 자체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
다. 거기에 인식으로서의 의식이 투영된 순간에 존재라는 의식이 발생하는데, 존재라는 의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있다>는 것은 <없다>는  의식을 필요로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절대의 유의식과 절대의 무의식으로 의식이  분열했다. 그리고 우주는 회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의문은 
계속된다. 그 최초의 절대적 존재성인 질량의 바다는 왜 있었는가? 다음으로 그 바다를 두 개의 소용돌
이로 분열시킨 의식이란 무엇이냐? 그리고 최초의 질량의 바다를 둘로 나눈 존재와 무의 의식도 애당초 
필요없는 것이 아닌가? 당신 생각은 어떤가?
  개 :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다. 
  EO : 그렇다면 당신은 창조주가 아니야. 그저<우주라는 나라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개 : 그렇게 되나? 그래, 자네는 무얼 원하나?
  EO : 최초의 질량을 체험하고 싶을 뿐이지. 이렇게 된 마당에 의미니  의의니 목적 따윈 아무래도 좋
아. 다만 그 발생 원점의 의식이나 질량이 원래 존재하고 있던, 물질이나 인식이나 시간이 없는 곳을 경
험하고 싶다. 
  개 : 그런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자네는 자네의 지론으로 결론
짓지 않았는가? 즉, 발생의 중심은 절대 인식 불가능이고, 그저 그 자체일 뿐이라고 말이야.
  EO : 그건 <인간>이란 한정된 의식이 도달하는 최후의 극한, 곧 깨달음일 뿐이야. 내가 말하는  것은 
깨달음 그것의 의식 발생점이야.
  아로 : 그것 소용없는 일이야.  아저씨가 말하고 있는 건 우주의  중심이 아니야. 그건 차원을 지키는 
경비일 뿐이야. 게다가, 아저씬 그대로 가다간 함정에 빠지고  말아. 아저씬 있다, 없다, 혹은 존재니 무
니 하지만 아저씨가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  존재하는 것을 전혀 본  일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의식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 난 생각해. 아무것도 없는 것이 그저 아무것도  없는 거라면, 구별은 생기지 
않아. 반대로 있다는 경우도 마찬가지야. 그것이 이전에는 없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가 우주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순간 이미 두 개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 아니야? 이건 
브하릭 박사가 가르쳐주었지만 말이야. 
  EO : 그건 그렇지만...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우주의 최초란 말이다. 
  아로 : 아저씨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최초>가 없으면 안 되는 것 같아. <최초>라는 것이 꼭 있어
야 하는 거야?
  EO : 아로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알겠다. 즉, 원이 있다면 그 어느 곳도 시작이나 끝이라고 할 수 없다
는 말이지? 그러나 원 그 자체가 이번에는 안과 밖이라는  둘로 나뉘게 된단 말이야. 물론 그건 인간이
나 생물의 경우이지. 뭔가를 보면 우리는  반드시 이렇게 하지 않는 의식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우주의 
모든 것이 둘로 나누지 않으면 활동이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야. 그걸 인간이 둘로 나누건 말
건 나는 상관하지 않아.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전기도 그래. 그것은 우리가 < + 와 - >라고 이름붙였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이미 정해져 있는 거야. 물론 그건 원래 하나가 둘로 갈라진 것이겠지
만. 그래서 말인데, 아로야, 이렇게 둘로 나누기의 최후의 최후의 <궁극적 둘>이란, 우주가 있느냐 없느
냐 하는 존재와 무의 근본 문제가 되고 마는 거야. 그리고 그건 까다롭게도 실은 실체로서의 유무의 문
제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란 말이다. 예를 들면, 아까 저 멍멍이가 방사선을 내보
냈지? 우린 지구에서는 <눈>이라는 것 갖고 있어. 하지만 그  눈이라는 것을 통해 뭐든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야. 아주 엄청난 빛을 보면 우리의 눈은 파괴되고 말아. 그와 같이 우리의 지각은 범위가 정해져 
있어. 소리도 그렇고, 뭐든 다 그래. 우리는 아주 좁은 것만 지각할 수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되
고 마는 거야.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지가에 미치지 않는 것은 무 또는 <없다>라고 단정짓고 만다. 가령 우리가 캄
캄한 방에 갇히면, 숨을 쉬면서도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공기
가 있고, 그 공기 속에는 여러 종류의 가스가 있어. 없다고 해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보일 뿐
이야. 우리는 밤이 되면 조용하다고 하지만, 곤충들은 아마 여러 소리를 듣겠지. 그러니 있다 또는 없다
고 하는 것은 다만 우리같은 생물의 지각에 미치느냐 안 미치느냐의 문제에 불과하단 말이다. 
  아로 : 아저씨, 그렇다면 이 우주에는 <없다>나 <무>같은 건 있을 수 없는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전
부가 <존재>일지도 모르지. 만약 누군가 우주 끝에 가서 무를 체험했다 해도, 사실은 거기에 뭔가 있었
는지도 모르는 일이겠네.
  EO : 나는 그 <무>에 갔었어. 의사적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로 말이지만. 하지만 그것에서 
대상은 문제되지 않았다. 거기서 사라지거나 무가 된 것은 우주가 아니라 나의 의식이었다. 나는 그것이
야말로 참된 의미에서의 <무>라고 생각한다. 세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지각하는 자 스스로가 소
멸한다는 말이야.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지. 때문에 나의 의문은  물체나 차원으로서의 
외부적 우주가 아니라, 그것들을 보고 있는 내 의식의 발생에 대해서만 적용시킬  수 있다. 우주의 모든 
것이 실은 <한낱 꿈>이었다 해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꿈을 꾸는 의식 그
것이 어떻게 있느냐는 거야. 아마도 우주의식은 시행착오로  뭔가를 지각하고 경험하려 아는 것 같다고 
여러 우주인들이 말하고 있지. 말하자면 우주가 스스로를 보려고 한 결과로 인해 마치 우주를 창조하고 
있다는 <꿈>이 시작되었다는 거야. 한데, 어째서 우주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수 없느
냐 말이다? 아로는 세계 같은 걸 보지 않아도 지루하지도 심심하지도 않고, 무의 지각에 질리지도 않잖
아?
  아로 : 아저씨, 그게 아니야. 내가 무의 지각에 질리지  않는 게 아니라 무의 지각이야말로 질리지 않
는 거란 말이야!
  그때 갑자기 그놈의 방사선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리 전체가 사라졌다. 거기에 있
는 것은 오직 어둠뿐이었다. 그것은 무한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둘은 어딘가에 갇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캄캄한 무로 보이는 세계에, 나와 아로만 남겨져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
  EO : 아로, ...시작의 시작이란 뭘까?
  아로 : 뭐긴 뭐야, 끝의 끝이지... 이 말귀도 못 알아듣는 아가야.

    <저자후기, 어떤 탐구자에게 부치는 편지>
  나는 결코 복잡한 것은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인류가 불필요하게 만든 <엉클어짐>을 설명하려 한 
결과, 복잡하게 보이는 말로 되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복잡한 것은 무엇 하나 쓰지 않았다.
  가끔 나를 통해 씌어진 것들을 흘깃 보고, 난해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
폐허의 붓다들>과 그 잡다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본서만큼 정중한,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서는 존재
하지 않았을 터이다. 왜냐하면, 난 항상 현실속에서 우리들의 내면에  일어나는 심리적인 에고와 공포와 
그 투영으로서의 행동패턴을 그래서 모두 실례를 들어가며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
었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말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현실적 차
원을 다루고 있다.
  시적 표현도 아니며 심령의 세계도 학문의 세계도  아니다. 그야말로 사회와 개인의 혼란스런 모순을 
난 그냥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러한 내 지적에 대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반론을 난 전부 앞질러 
그냥 뭉개나간다. 왜냐하면 사고가 어떻게 반론하는지는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문서에는 
가끔 우회적 표현이 나온다. <이렇게 말하면, 세상에서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추측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싫증날 정도로  똑같은 반복을 인간이 
되풀이하는 것을 봐왔기 때문에 승려나 산야신과 일반인이 무엇을 반론할지는  추측할 필요조차 없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결국, 일반인에게 보지도 못할 광명에 대해 말하고 못하는 것을 나무라는 사디스
트일까?
  어떤 의미에서 도사(구루)란 방편이  역사상 가장 많이 사용되어  왔다. 나무라고 비난하며, 어디선가 
전면적으로 버리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말이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관념을 버릴 수 없
다. 특히 도시같은 곳에서 소박함이란 생존경쟁 속에서 평가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죄책감에 대해 잠깐 관찰해주기 바란다. 죄책감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 "죄책감? 나한
테는 그런 건 없어"하고 말하는 사람은 붓다들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승려, 그것도 선을 
하는 일견 무분별한 사람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인가 잘못되었어, 고치지 
않으면 안 돼, 무심이지 않으면 안 돼, 그렇듯 죄책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죄책감이 있다고 보는가? 아주 작은 일상에서도 죄책감은 무수하게, 돌을 던지면 
맞을 정도로 굴러다니고 있다. '전철  안에서 노인이 앞에 서 있지만  그저 자는 척한다' 따위의 싱거운 
사회체제를 비롯해 섹스를 하다가 상대보다 먼저 가 버려 <미안>하게 생각하는 죄책감, 수다떨고 있는
데 썰렁한 화제를 꺼내들었다가 <너무 썰렁해서>  느끼는 죄책감, 한 가지 <극단적 논리>로  죄책감이 
없는 범죄자들 역시 타인에 대한 죄책감은 없어도 자신이 범죄를 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에 있어서, 죄책감을 갖고 있다. 그것은 굴절되어 있지만, 본인의 내부에서 두 개의 사고가 싸우는 죄책
감이다. 죄책감은 열등감의 산물이다. 그것은 또한 우월감이다.
  뉴욕에 있는 범죄자는 <그냥 신문에  실리고 싶었다>는 굴절된 우월감에서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한
다. 그리고 그런 타입의 죄책감도 발생 원인은 아주 단순하다. 그것은 불쾌감을 상대에게 주었다고 믿어
버리는 경우와 불쾌감을 자기에게 주었다고 믿어버린 경우 두 가지이다.
  그러면 무엇이 그 불쾌감의 정의일까? 그것은 생물학적 고통일 수도 있고 단순히 사교상의 예절을 무
시한 정도의 무해한 것까지 여러 케이스가 있는데,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여기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본서에서 시리우스의 지성체가 신학론을 깎아내리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 후반에 종합된 것<제1
권 제2장 p117∼p130 참조 - 편집자 주>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즉, 불쾌감의 정의는  간단하다. 복잡
함 따위는 전혀 없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당신과 타인이  <편치 않은> 것이다. 그 외의 쓸모없다. 그냥 
그 뿐이다.
  범죄자는 내면이 편치 못해 범죄를 향해 달리고, 평범한 사람 역시 내내 편안치 않다. 그 원인은 기본
적으로 안정을 이루기만 하면 될 것을, 일부러  편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하찮은 모럴, 오락, 제품,  산업, 
그리고 가치관이 범람하고, 또 거기에 끌려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왜 끌려다니는 것일까?
  그것은 외부사회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허점을 이용당하는 당신들에게 원인이 있다. 근본적으로 
무관심을 실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협박이나  자극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달음이라
는 의미에서 완벽한 무관심의 안정된 기반을 이루는 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의 부재다. 난 육체의 <고통
>에 대해서는 처리하는 것이 괜찮다고 본다. 격심한 고통에 이르는 치통따위는 고치는 게 좋다. 그러나 
육체를 지나치게 보호하는 것은 안 좋다. 그리고 죽음 따위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말해도, 그 
두려움이 우리들을 노동으로 몰아세우고 종교로 몰아세우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노동이라면 굳이 과도하게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무위한 조용한 시간에는 신비학 서적 따위를 읽지 말고 그냥 충분히 안정을 취하는 게 명상의 
본질이다. 선사같은 곳을 가면 편안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당신들의 좌선이나 포교활동, 테라피 
또한 결국은 <이대로 있어서는 내  내면생활은 안된다>는 손님들의 죄책감을 미끼삼아  장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당신들에게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우선 당신들이 안정을 찾지 못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당신들의 가치관이 있다고 주장해댄다. 그  속에 화상이 있고 선이 있고  세기말이 있고 사회가 
있고, 이른바 세계의 모든 것이 당신을 편치  못하게끔 하고 있다. 평범하고 평균적인 인격자, 사회인에 
적응하라는 최소한의 모럴조차도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들고 만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그 최소한
의 사회인이 못 되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최소한의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
에서는 <교육받은 미치광이가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지고 보면, 그 평균적인 사회인이라는 인격
자 나부랭이가 다수결로 이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이긴 하지만 몇천 년 동안 인류의 내면에 있는 불행을 박멸시키는 데 대해 아무런 조치
도 취하지 않았다. 그 원인 또한 어이없는 것이다. 만약 근본적으로 불행의 원인을 제거한다면, 즉 이것
은 나와 붓다들의 일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우리들의  취미이긴 하지만 말이다. 만약 그걸 한다면, 그것
은 사회의 모든 이해관계를 무효로 만들고 말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필경, 죽음의 공포를 먹이로 한 제
품, 산업, 종교, 테라피로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들은 무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부적응에의 공포>를 음식물로 삼는 정신병원
과 테라피스트, 선사까지 그 전부를 파괴하는 일이다.  굳이 폭탄으로 파괴할 필요는 없다. 파괴하기 위
해서는 수요를 정지시키면 된다. 마치 원자력발전소 만드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싶다면, 건설에 반대할 
게 아니라 애초에 <전력 수요>를 없애면 되는 것처럼. 즉, 기업과 가정용으로 된 무공해 발전기를 팔면 
된다.
  당신들은 라즈니쉬와 어딘가에서 도사라 일컬어지는 불성발전소에  의존하고 만다. 나는 당신들 혼자 
불성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그렇게 하면 중앙집권적인 도사에 의존할 필요없이 그들은 도산
한다. 나는 석가와 달마와 라즈니쉬도 도산시키고 싶다. 물론 나라는 존재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을 하루빨리 붓다로 만들고자 한다.  붓다들과 상거래할 수 있는 상인은 존재하지
도 않거니와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훔칠 도둑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지>이기 때문이다. 가장 깊숙
한 내면에 있어서.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이 탐구자들에게 존재하는  죄책감을 경감시키고 싶다. 그것은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죄책
감들이다.
  보통 사회에 적응하는 데 위와  같은 모토는 필요없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정신세계 따위에 발을 들여놓았을  게 분명하다. 틀렸는가? 누가 반론할 수 있겠
는가? <충분하게 일반적인 생활을 즐겼으니까 다음엔 새로운 세계를  찾아 정신세계에 들어섰다>고 나
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 또한 만족할 수 있는  사회적인 틀을 벗어나고 말았다>는 의미
에 있어서 그는 사회 부적응자인 것이다.
  통상의 만족에 만족하지 못한 난 탐욕스러웠던 것이다.  어떤 경과이건 간에 상식사회의 최소한의 모
럴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또는 상식사회는 적응했더라도 그 사회가 불만스러웠다더거나, 그 어느 쪽이든 
간에 사람은 정신세계에 들어선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상식적인 사회인으로 지금도 거리에서 
여자나 꼬시고 있을 테니 말이다. 또는 나이들어 친구를 사귀어 장기라도 두면서 놀던가, 할머니가 되어 
손자와 놀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나 그러한 틀에 적응하지 못해서 절과 인도로 떠나는 것이다. 결
국 그것도 안 돼 드디어 이름없는 붓다 가운데 하나인 EO같은 사람과 교류를 갖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과정을 보고, 도사들의 과정을 보고  더 이상 전통적인 그 어떤 수단이나 형식도 
효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미묘하고 쓸데없는 말들,  형식, 논리를 배제시키기 
위해 이처럼 방대한 <쓸데없는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그것이 <폐허의  붓다들>과 <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본서의 일본판 이름 - 편집자 주)였다.
  그 속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쓸데없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이 붓다 탄생을 위
해 쓸데없는 것인가 하는 설명의 산이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제시한 새로운 우주론을 당신에게 기억시
키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당신의 중심>이외의 모든 우주도, 타인도, 사회도, 도와 선조차도 당신 본인의 
의식, 무, 존재성에 비한다면, 우주의 존재물 그 자체가 전혀 본질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만물 그 자체가 
당신의 본성과는 인연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조합시킨 개념, 사회, 인간성 등은 아무런 본질도 아니다.
  사실은 당신의 <단순한 존재상태>  그대로가 사마디이다. 그리고  그 사마디는 최종단계에서는 그냥 
무다. 거기까지 무가 된다면, 그곳에서 존재로 귀환했을 때, 당신은 벌거숭이로 아무런 걸림없이 존재와 
만난다. 그리하면 만물 전부가 광명 그 자체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완전하게 부정되고, 완전하게 무로 
된다는 것은 당신의 영혼도 내던지고 공허가 되는 것이다.
  공허 자체는 사실상 죽음이다. 그것은 우주적인 레벨의 완전한 죽음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그것
에서 귀환하는 자들이 있다. 바로 우리들이다. 거기서 귀환하면 세계  그 자체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
고 전혀 역설적인 현상으로써 세계를 통째로 얻고 만다. 그러나 얻기 위해 심리적으로 죽어보자는 것으
로는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이러한 <꿍꿍이속이 있는 에고 트릭>을 교묘하게 빠져나가기 위해 <사
인선>이라는 메소드가 있다.
  그저 오로지, 무로 향하는 것. 이유도 목적도 없다.  성과도 확인하지 않고, 편안하게 있을 뿐이다. 명
상에서 돌아오면 당신은 순수하다. 처음에는 잘  안 되더라도 몇 개월이 지나면,  당신은 명상할 때마다 
무언가 성숙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욱,  텅 비게 된다. 그냥 무거운 짊이 덜어질 뿐
이다. 그 가벼움이 드디어 자신의 안정을 이루는 데 있어 당연한 것이 된다. 그것은 언제라도, 어디에서
도, 누구와 있어도, 또 홀로 있어도 항상 <전혀 아무것도 모르고, 알지도 못하고, 찾으려 하지>도 말 일
이다.
  침착하게, 그저 있을 것. 그러나 정말 그처럼 <존재>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전혀<없는> 즉 무의미와 
무존재, 그저 존재한다라는 의식조차도 사라진 무로 사라지는 게 낫다. <사는 것은 나중이다. 죽는 것이 
먼저다> 이 도의 명백하고 근원적인 사실을 일별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현재의 나와 교류를 갖게 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나는 걸어다니는 한 채의 절이다. 그 입구는 대단히 좁다. 나는 일본의 대학방식을 
채용한다. 미국처럼 들어가는 건 간단하고 졸업이 어려운 라즈니쉬식 산야신은 사양한다. 나는 일본인이
고, 일본의 무술도장과 대학의 전통에 따라 좁은 문으로 한다. 그러나 그 출구는 세상에서 가장 클 것이
다. 내 문서란 단순한 입시참고서이다. 내 절에 들어서기 위해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은 단 한 가지다. 그
것은 배운 것을 전부 잊어버리는 일이다.
  물론, 내 원고 내용도 말이다.
  1993. 10. 13 EO

    옮긴이 소개
  박취산 : 1926년 평안북도 강계 태생으로 30대 이후 정신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에 '아봐타
코스'를 최초로 소개한 바 있으며 북클럽 '미내사'를 설립, 운영해오고 있다. 역서로는 '바가바드 기타','갈
매기 조나단'외 다수가 있다.
  손성애 : 1963년 서울 태생으로 일본 호오세이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일본 홋카이도 신문, 니시닛
폰 신문 서울지국 기자를 역임했다.

        EO가 본 얼간이들 제2권
    지은이:무묘앙에오
    출판사:모색 출판사

  내가 도나 선에 관해 말하는 데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당신들의  탐구를 끝냄으로써, 
좀더 당신들을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 둘째는 자주적인  순수 지성의 확립으로 갈팡질팡 이해 관
계에 휘둘리는 인종이 되지 않게 하려고, 그 바탕은 깨달음이다. 셋째는 그런 이들은 머지않아 우
주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외교적 의식을  지니게 될 터인데, 내가 자주 말
한 것처럼 당신이 만약 눈앞에 있는 풀 한 포기에서 빛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것과도 의
식을 교류할 수 있을 것이다. 무척 이상하고 기묘한 모습을 한 우주인을 대하면서도 결코 기죽거
나 비굴해지지 않는 사람들이 내 문하에서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이런 평화로운 지구에서 깨달
음을 얻어, 그저 있음에 깊이 느긋하게 있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우주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사자선이라도 해서 암흑과 친해지고, 생의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그저 세계를 바
라보듯 고요히 살며, 목적을 갖지 않고 느긋하게, 또는 자기를 되돌아보거나 분석하거나 뉘우치거
나 하지 말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인 채로 있으시길. 결코 의문투성이 꼬마는 되지 말기를...

    (한국어판 서문) 
  이 한국어판 서문은 무묘앙에오의 제자 호오장이 보내온 것입니다. 
  한국의 독자 여러분들께 
이 책에는 인간과 다른 별 사람들, 인간과 종교인, 인간과 현자들이 인류와 우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부모, 학교, 종교로부터 가르침받은대로 우
주 의식과 창조주라는 것을 단순히 이미지화시켜 신은 완전할뿐 아니라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기
대하고 있던 독자라면 이 책으로 인해 그 희망이 산산조각날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스승 EO
는 '우리들은 왜 살아 있는가? 우리들 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생물과 모든 고차원적인 존재를 
포함해 왜 생물은 살고 죽는가? 그리고 우주 그 자체는  왜 존재하는가?' 하는데 의문을 갖고 끊
임없이 연구를 계속한 탐구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이러한 물음과 대면할 때는 자신의 
맘에 드는 이야기나 자신의 이익이 될 만한 이야기에 달려듭니다. 그러나 EO는 진실만을 탐구하
기 때문에, 인간들이 자기들 형편에 맞춘 종교를  철저하게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인
간에게 있어 즐거운 것이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인간의 생명과 마음, 사랑과 상
상보다 훨씬 더 큽니다. 따라서 우주의 진실이 인간의 감정을 배려하고 타협하는 따위의 일은 절
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우주와 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연유로 
인간 본위의 종교라든가 마음 편한 우주의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진실만을 추구하고 탐구한 EO
의 말은 많은 탐구자들이 안고 있던 의문과  정신세계, 그리고 종교의 위선적인 모순을 보기좋게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탐구자가 진정으로 갖춰야 할 모습을  분명히 제시해주었습니다. 기
존의 종교가 말하는 가르침이나 최근의 새로운 채널링 정보에 많은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만큼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없었습니다. 본서는 모든 종류의 정신세계 정보가 존재하고 있
는 일본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예를 들어, EO는 채널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채널링에 의한 우주인  정보라든가 콘탁티에 의한 다른  우주 이야기의 본질은 
거의 종교사기 같은 것이다. 숭배의 대상이 되는 캐릭터의 디자인이 다를 뿐 그것은 종교와 아주 
똑같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신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진화된 천사 계급의  존재가 지구를 인도한
다'는 환상이 사람들 속에 심어져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두 한결같이 지구인보다 정신적으로
나 과학적으로 다른 별 사람들 쪽이 우리들보다 더  진화돼 있다고 표현되어 있다. 때문에, '신이 
되기는 불가능해도 천사 정도라면 내가 다시 태어날때  가능한 일이 될지 모른다'고 신자들은 믿
는 것이다. 그러나 탐구자들은 조심해야  된다. 어리석은 맹신은 이처럼 종교  이외의 곳에서부터 
당신의 마음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채널러들이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과학적이고 우주적이
고 미래적으로 보여도 전부 옛날  이야기와 같은 허구의 천국을 당신에게  팔고 있는 것과 같다. 
채널러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저차원에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세계는 진화하고 있다. 너희
들은 정신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그러니  빨리 눈뜨거라. 신나는 일을  하여라. 네 이웃을 사랑하
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들은 곧 일어날 지구의 위기를 도와주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
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오히려 지구에 불행이  늘어나지 않는다는게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보지 않는가? 단 하나의 종교조차도  지금까지 충분히 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렸건만 여기에 
다시 도대체 몇 개나 더 많은 천국과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일까? 채널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지구인의 마음속 열등감을 부채질하고, 위기감을 자극시키며,  우리들에게 자학적이
길 강요하는 것뿐이었다. 자, 이제 세속의 행복이 아니라, 영혼의 진화라든가, 신과 같은 능력이라
든가, 만물과의 일체화라든가, 또는 이 지구를 벗어난 다른 세계의 지식을 얻고자 하는 목표를 갖
게 되면, 그것들은 당신의 에고를 만족시켜줄 목적이 된다.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던 
사람이 이러한 새로운 목적을 누군가에게 듣고 받아들이면  '드디어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발
견했다.'며 기뻐하곤 한다. 그러나 그 목적이 자기로서는 도저히 도달할수 없는 것이고, 또 이웃과 
세계 역시 그런 이상적인 상태는 몇천  년이 흘러도 도저히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감하면
서, 탐구자는 현실에 실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어느새 당신은 평범한 행복조차도 순수하
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의식이 탁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시대가 혼란해지면 꼭이라
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서민을 위한 종교라는 것이 등장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썩은 자가 구원받는
다. 악인이 구원받는다. 평민이 구원받는다.'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비즈니스로서  커다란 선전 효과
가 있기 때문이다. 뭐니뭐니 해도 사람 머릿수 불리는 데는 이만큼 듣기좋은 이야기, 귀가 솔깃한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서민에게 '당신에게도 선거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정치적 전략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것과  같다. 즉 이러한 종교는 '당신에게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대충 말하고 나서는 정치적인 종교활동에 당신을 참가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
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 '누구나 다 구원받는다'라고 말하거나,  '선택받은 일부 사람들밖에 구
원받지 못한다'라고 말하면, 꼭 우월감을 지닌 거만하고  어리석은 자들만 몰려든다. 그러니 당신 
주변의 종교와 그 신자들을 잘  보기 바란다. 세속의 욕망과 정신세계의  욕망은 어디 하나 다를 
바 없다. 그 어떤 욕망도  이상도, 신앙도, 목표도, 불만도 모든  것은 세속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지금 이 순간이라는 미지의 심연으로 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다른 지점으
로 도망치고자 할 뿐이다. 때문에  많은 종교가들이 하고 있는 것은  탐구도 아니고 노력도 아닐 
뿐더러, 더 정확하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도피다. 마음의  죽음, 에고의 죽음으로부
터의 도피다. 그러나 모든 희망과 천국, 그리고 모든 미래의 이상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에 멈추
는 도를 탐색하는 자. 그가 진짜 탐구자다. 진짜 탐구자에게는 천국도 우주인도 필요없으며 그 어
떤 보편적 사랑도 필요없다. (EO의 말에서)
스승 EO의 저작은 전부 9권으로 이 책은 원래  폐허의 붓다들(은하계 끝의 가르침)의 보완용 잡
담으로 씌어진 것입니다. 남은 저작에 대해서도 한국에 계신 독자분들을 위해 번역될 예정이므로 
기대해주시길 바랍니다. 또 이 책이 한국에서 발행될 계기를 만들어주신 취산  선생님, 번역가 손
성애님, 도서출판 모색의 권영선님, 그리고 많은 스태프에게도 마음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드립니
다.  1998. 6. 24. HOUZAN  

    무묘앙에오, 그의 삶과 사상
  1. 무묘앙에오, 36세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그의 촌철살인적 메시지는 그  생의 짧음만큼이나 간
결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서릿발같이 읽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통속적인 상식으로 덧
칠해져 있는 종교는 물론이요, 사회에서 당연시 여기는 무의식적 강박관념의 맹점(상행위나 온갖 
기업활동, 정신세계 등은 인간의 불행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을 놀라울 정도로 부각시키는가 하
면, 이른바 속세와는 별개의 정신세계라 명명된 갖가지  분야에 속하는 맹신적인 종교, 심령치료, 
전통적 신학, 다른 별 사람들의 문제  등을 그는 인간의 따분함과 공포심, 그리고  유치한 지성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지적하고  그것이 갖는 지독한 어리석음에 대해 원숭이와 장자의 현대판 
대화를 통해 명쾌하게 논파해 보이고 있다. 그는  통속적인 정신세계와 종교 신앙이 갖는 맹점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어리석은 바보의 짓으로 취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저에는 그 누구도 
반론을 펼 수 없는 철저한 논리로 일관하기 때문에 그의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동안 간
직하고 있던 정신세계 서적을 모두 헌책방에 내다팔기도 했다 한다.
  2. 인류는 입으로는 자유가 소중하다고  한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라는 개념을 자기 좋을 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경향에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럴싸한 종교, 모럴, 수행체
계라면 자신의 진짜 자유로운 영혼을 팔아넘기면서까지 스스로  따른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최후
에 모든 것이 잘못되었을때,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즉 도망갈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기는 사는 법에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이 있다. 이에 대해 EO는 진짜 탐구란 자
신에게 되돌아오는 일, 그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3. "사는 것은 나중이다. 죽는 것이 먼저다." 도의 명백한, 그리고 근원적인 사실을 직시하는 사
람들만이 그와 교류할 수 있다고  생전의 저자는 언급한 바 있다.  "본질적으로, 나는 걸어다니는 
한 채의 절이다. 그 입구는 대단히 좁다. 그러나  그 출구는 세상에서 가장 클 것이다." 들어가는 
건 간단하지만 졸업이 어려운 라즈니쉬 산야신을  사양했던 저자는 그의 절에 들어서기  위해 단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그것은 배운 것을 전부 잊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의  저서 내용까지 포
함해서.
  4. 14세 때 깨달음을 언뜻 넘보는 체험이 있고나서 23세까지 여러가지 신비학,  도 등을 섭렵했
지만 단체에 소속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30세 무렵부터  독자적인 채널링을 시작하여 
은하계의 막후 정보들을 얻었다. 33세에 그것들에 대한  총괄적 결론과 사색의 결과로 모든 생명
과 존재에 절망했다. 1992년 2월 17일  우발적으로 대오견성했다. 그 후 약 1년  동안 명상센터의 
명상가들이나 치료가들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우편으로 보냈다. 모두가 묵살하는 중에도 
3명의 문하생이 생겼다. 1993년 8월부터는  그의 지도와 방편이 갑자기  선으로 기울면서 선문의 
본산, 각 지방 선방의 승려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우편으로 보내는 일을 시작했다. 그 중에서 문하
가 나왔으며 뒤에 그 승려는 대오를 이뤘다. 전통과 형식에 매달리는 선, 그리고 스승을 맹목적으
로 신봉하는 명상센터와의 마찰과 반감 속에서 그의 글은 많은 명상가나 참선 수행자들에게 개인
적인 편지 또는 기관지의 형태로 전해져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  일생동안 단체화, 조직
화, 통속적인 사제관계를 거부했다. 1994년 10월 22일 죽었다. 당년 36세. 그의  선문 직계 문하로 
쥬우와 호오장 둘울 남겼다. 태양계 제3행성에  남겨진 작품으로 폐허의 붓다들, 속  폐허의 붓다
들, 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 지구가  꺼질 때의 좌선, 폐허의 붓다들  외전, 반역의 우주, 작은 
붓다의 큰 이야기, 섹스와 죽음의 홈페이지 등이 있다.

    제1장 현대판 장자이야기
    장례이야기
  원숭이가 말했다. "벌써 보스가 죽은지 삼 년입니다. 올해는 성대하게  추도식을 하려고 하느느
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장자:그거 괜찮지. 하지만 왜 삼 년이냐?
원숭이:관습 때문이죠. 삼 년 다음엔 칠 년. 그러니까 음... 엣날부터 3이나 7이라는 숫자에 중요한 
의미가 있잖습니까. 선생님은 그것도 모르세요?
장자:그래. 그렇다면 삼십년 후나 칠십년 후에도 추모식을 성대하게 할 거냐?
원숭이:예에, 선생님?
장자:그러면 삼백년 후나 칠백년 후에도 성대하게 치를 거냐?
원숭이:그때쯤이면 전 살아 있지도 않겠지만 아마 하겠죠.
장자:그러면 삼천년이나 칠천년 후에도 성대하게 하겠구나, 원숭아.
원숭이:선생님 그렇게 먼 미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장자:삼만년 후나 칠만년 후가 되면 더 성대하게 하겠구나, 원숭아.
원숭이:선생님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장자:넌 숫자가 중요하다고 말했잖느냐. 그래서  다시 한번 묻겠는데 삼억년 후나  칠억년 후에는 
더욱 더 성대해지겠지. 안 그러냐 원숭아.
원숭이:선생님 그까짓 일 제가 알 바 아니지 않습니까?
장자:봐라, 너도 그까짓 일은 모르지 않는가 말이다. 
이말을 들은 원숭이는 어리둥절해져서 자기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풀이야기-인간이 식물을 키우는 진짜 이유
  언제나처럼 원숭이는 장자에게 자기 자랑을 하고 있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지겹게 떠들어댄 
다음 원숭이는 히죽 웃으면서 장자를  한번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장자에게 굉장하다든가 
재미있다는 말 한 마디라도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 드디어 장자가 입
을 열었다. "평소 나는 그저 앉은 채로 하루를 보내도 전혀 따분하지도 않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
었는데 너무나 심한 네 시시한 이야기 때문에  오랜만에 따분함이라는 것을 맛보았다. 고맙다 원
숭아." 그말을 들은 원숭이는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굳어진 얼굴을 풀지 
않자 장자는 말했다. "무엇 때문에 화내고 있는 거냐? 난 네 이야기가 시시하다라고 말했지 네가 
시시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네 이야기가 유치하다고  말했을 뿐 네 자신이 나쁘다고는 말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유치하다는 것이지 네가 유치하다고 말하지 않았단 말이다.  그런데 넌 왜 
화를 내는 거냐? 그렇게 일일이 무언가 말하거나 또 무언가를 할 때마다 너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재미있는 원숭이라고 생각되길 바라거나 시시한 녀석으로 보이지 말아야지 나쁘게 보이지 
말아야지 따위에 신경쓰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거니?  그렇다면 넌 정말 불쌍한 녀석이구나." 
이말을 들은 원숭이는 장자의 말을 이해하는  듯했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리고 말았
다.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단다. 어떤 원숭이가  매일같이 아주 소중하게 나무 
화분을 안고 다녔다. 날씨가 흐려지면 화분을  들고 다니면서 다른 원숭이에게 "식물을 사랑한다
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그때 내가 그  원숭이를 보고 있었다. 원숭이
가 보리를 빻을 때마다 보릿가루가 날리는 바람에 나뭇잎이 굉장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언제쯤이
면 그 사실을 알아차리까 싶어 3개월을 기다리며 지켜봤지만 원숭이는 끝내 그 사실을 깨닫지 못
했다. 드디어 나무가 시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을 원숭이에게  알렸다. 다음날부터 원
숭이는 바람이 안 부는 곳에서 보리를 빻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어느날 원숭이를 지켜
보고 있자니 가까운 산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를 나무에게 주고 있었다. 그 산의 물은 암염이 많아 
식물의 성장에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물은 빗물을 받는 것이 좋다고 알려주자 원숭이는 이
렇게 말했다. "당신, 내가 나무를 가꾸는 방법에 불만이라도 있어? 하지만 이건 내 나무야." 난 원
숭이에게 말했다. "봐라, 이 산에는 작은 풀은  돋아도 나무가 없잖느냐. 가까운 연못에는 물고기
도 없어. 이 부근의 물은 좋지 않기 때문이란 말이다." 이후 원숭이는 강물이나 빗물을 받아 사용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양지에 화분을 놓아두고 있는 원숭이를 3개월동안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서 이젠 원숭이가 귀를 기울일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고 말을 건넸다. "자연의 빛은 눈
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을 주고 있단다. 날씨가 흐린  날은 왜 밖에 내놓으려 하지 
않지? 풀은 흐린 하늘에도 불평하지 않는단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비가 와도 풀과 나무는 사이
좋게 지내고 있다. 날씨가 좋거나 나쁘다고 차별하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다. 흐린 날에는 흐린 날
대로 맑은 날에는 없는 흐린  하늘 나름대로의 부드러운 빛이 있단다.  때문에 맑은 날 태양아래 
무리하게 화분을 내놓는 것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생각한 배려란다. 게다가 사람들은 날씨가 좋은 
날에도 물을 주는데 자연 속에 있는 풀뿌리는 맑은 날에  자연으로부터 물을 받는 일이 없어. 자
연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물은 비오는 날이나 개인 날에 주는 것이 좋단다." 이말을 들은 원숭이
가 화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원숭이는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뭐니뭐니 해도 빛이 제일이야. 
게다가 당신은 이 나무의 주인도 아니잖아. 쓸데없는 참견하지마. 난 남에게  설교하는 것은 좋아
하지만 설교받는 것은 좋아하질 않는다고." 난 말했다. "길가에서 어린애가  넘어지면 그 애의 부
모가 누구든 간에 난 달려가 안아 일으킨단다. 네게도 그와 같은 행동을 했을 뿐이야. 부모로부터 
우리 애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마란 말을 들어도 난 개의치  않고 어린애를 일으켜 세워. 그런 여
유로 나는 이 가엾은 식물을 안아 일으키는 거란다." 남에게 말 듣는 걸 싫어하는 원숭이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원숭이에게 다시 말하기 위해 항상 2개월 이상의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무가 거의 숨 넘어가기 일보 직전까지. 어느날의 일이다. 꽤 자란 그 나무가 
나에게 말했다. "나, 배고파요." 그래서 나는 낙엽을 모으고 근처에 떨어진 까마귀의 알껍질을 모
아 나무에게 주었다. 원숭이는 "누구야, 이런 짓을 하는 자식이..." 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나무에게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나에게 화내러 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너
무 물을 많이 주어 뿌리가 썩기 시작했다. 난 원숭이가 없는 틈을 타, 받침접시에 고인 물을 혀끝
으로 맛보았다. 그 물에서는 뿌리가 썩었을 때의 맛이 났다. 그래서 살짝 접시에  고인 물을 비웠
다. 원숭이는 그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만두지 못해. 이건 내 꺼야.  내가 사서 키우고 내가 
사랑하는 거야." 난 말했다. "그래, 그건 자네꺼야. 그러나 그 생명은 자네가 만든 게 아니야. 자네
는 빛을 찾아 화분을 안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다른 일에는 눈곱만큼도 마음을 쓰지 않잖아. 풀을 
사랑한다는 것은 흙속에 있는 징그러운 벌레들, 땅 속의  시체, 오물에도 경의를 표하고, 맑은 날
이나 흐린 날에도 경의를 표하며, 눈에 안 보이는 뿌리를 키우기 위해 물과  흙도 한께 사랑하며, 
자연으로부터 주어지는 건 무엇 하나 싫고 좋고를 가려서는 안 된단다. 빛이나 물뿐이 아니라 모
든 것이 나무의 성장을 돕고  있어. 나무가 하늘에 닿기 위해선  지옥까지 뿌리내릴 필요가 있는 
것처럼 커지면 큰 화분에 옮겨 심어야 하지 않니.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자연 속에서 나무의 
성장을 돕는 것들이야. 때문에 무엇 하나 사람의 약아빠진 짓에 의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놔둘 일
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 안에서 죽으려 하지  않는 풀은 한 포기도 없다는 진실
이다. 자연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연은 그 절반이 죽는 것
으로 지탱되고 있다. 시드는 것을 거부하는  꽃은 하나도 없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연은 풀과 
꽃 천지가 되고 또 벌레투성이가 되고,  세계는 그것을 잡아먹으려는 새들로 가득 차고  말 거야. 
죽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것이란다. 요컨대 대지로부터 무언가를 잘라내어 키우
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야. 꽃을 보고 싶으면 산으로 찾아가면 돼. 우리에게는 자신의 감상
을 위해서건 취미를 위해서건 아무리 미미한 풀  한 포기라도 자연으로부터 잘라낼 자격이 없다. 
따라서 원래부터 꽃장수도 분재장수도 멍청한  놈들이다. 애당초 그것은 사람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으면 결국 자네처럼 억지로 자연과 가까워지기 위해 마
음 고생을 하게 돼 있어. 물과 흙과 바람에 대한 배려와 고생이 끊이질  않는단 말이다. 원래대로
라면, 풀은 혼자 자라고 혼자 죽어간다. 그것이 식물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다. 본시 사랑하는 행
위는 쓸모없는 것, 즉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 일이다." 이 말을 들은 원숭이는 더욱  더 화를 내
며, "그렇다면 네 맘대로 키워봐." 하며 나를 향해 화분을 내팽개쳤다. 그의 소중했을게 분명한 화
분, 사랑하고 있을게 분명한 그 화분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원숭이는  나무를 사랑했던게 아니라 
나무를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다른 원숭이에게 자
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원숭이는 자신의 마음에 물을  주고 자신의 마음에 남의 칭찬이라는 빛을 
쪼이고 싶었던 것이다. 원숭이가 내팽개친 화분을 받아든  나는 풀과 이야기하며 풀의 마음을 들
어주었다. 나는 풀을 화분에서 꺼내 구덩이를 파고 땅 속에 묻었다. 그 풀이 죽었는지 또는 잘 자
랐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그것은 애당초 우리가 알 바가 아닌 것이다..
  이제 잘 알아들었나?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장자의 조삼모사의 진의다.  좋다든가 나쁘다, 즐
겁다든가 시시하다는, 모두 물건을 나누어 갈라놓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치우침이다. 잠깐 저울을 
생각해보자. 밸런스를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무리하게 중도를 보전하려는 자는 항상 저울 양쪽에 
있는 접시의 무게에 신경이 쓰여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저울의 양쪽에 있는 접시는 사람들의 좋
다 나쁘다, 예쁘다 더럽다, 즐겁다 괴롭다, 그리고 살고 죽는 두 가지 기준을 나타낸다. 자연 안에
서 본래 하나인 생과 사를 둘로 나누는 것은 인간의, 그리고 너희들 원숭이의 사고법이다. 원래부
터 하나인 것을 둘로 나누어놓고는 그것을 또다시 하나로 통합하려 하는 짓이야말로 사서 고생한
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두개의 접시는 아무리 기울어도 괜잖다. 불행투
성이에 행복 제로라도 괜잖다. 행,불행 등의 구분은 두개의 접시 이름, 즉  라벨일 뿐이다. 당신은 
저울이 아무리 흔들리고 기울어져도 결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면 된다. 아무리 기울여도 결코 
기울어지지 않는 장소에 살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부동의 점에  그저 있으면 된다. 
그것이 붓다들이 말한 중도다. 그것은 저울의 축, 한가운데다. 잘 알아들었니? 원숭아, 사람아, 이 
유인원아? 따라서 잠자코 정숙하게 살며, 한껏 바보가 되어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잊은채 그저 존
재하며 음미하는 것이 선의 즐거움이다. 무엇이든 구하는 자는 본질을 놓치고,  말하는 것은 본질
을 모르며, 실제 이 세상은 안 것조차 없으며, 그저  존재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이말을 들은 원
숭이는 어리둥절해서 자기 자랑을 잊어버렸다고 한다.

    전생 이야기
  원숭이가 어느날 전생에 대해 말했다.  "실은 나는 전생에 인간이었어요. 그  높은 덕으로 지금 
이렇게 원숭이 두목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장자:대단한 덕이로구먼. 그런데 원숭아, 사람이 되기 전에는 무얼 했었니?
원숭이:나쁜 짓을 한 원숭이요.
장자:그렇다면 그 다음엔 인간이 되겠구나. 그런데 넌 전세에 대한 비밀을 알고 싶지 않니?
  어느날 서쪽에 있는 장원의 연못이 말라버렸다. 물은  하늘로 사라져 구름이 되었다가 동쪽 땅
에 비가 되어 내렸다. 날이  개자 아홉개의 연못이 생겼는데 아홉개의  연못 모두 이전에 자신이 
서쪽 하늘의 서쪽 나라에 있던 장원의 연못이었다고  말했다. 전생은 이처럼 한 가지가 증발하여 
복수가 되었다 하더라도 신기한 일이 아니다. 아홉개의 연못은 모두 처음엔  서쪽 연못이었다. 그
래서 내 전생은 노자다라고 말하는 자가 백 명이 있어도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처럼 사람의 전생도 다수의 것으로 나누어지는 경우가 있다. 사람은 하나의 영혼으로 여행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개성을 보전, 유지하며 수천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같은 경우도 
있지만 특히 붓다들에게 있어 개인 따위는 존재에 용해되기 때문에 붓다의 전생을 가졌다고 주장
하는 1만명의 아이들이 있어도 그들 또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죽는 방법에 있어 만약 개
체를 보전하고 유지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은 다음에도 개체로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개체를 
녹이는 법을 안 자는 언젠가는 개가 아닌 다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짜 전생이다.  그에 비하면 세
속에서 말하는 전생 또한 전세란 자연과 도의 이치를 모르는 얼마나 어리석은 지적 유희인가? 그
릭 또 거꾸로인 경우도 있다. 붓다의 제자 사리붓다, 목갈리아나, 아난다,  마하카샤파 등 그 모두
라고 칭하는 자가 나타났다고 치자. 세속의 사람은  말할 것이다. "그럴리가 없어. 그들은 동시대
를 산 사람들인걸. 그들 모두가 자신이 전생이었다는 것은 이치에 안 맞아. 뻥치지마" 라고. 그런
데 복수의 연못이 하나의 연못이 되는 일도 있다. 예를 들면, 원숭아. 넌 새끼원숭이였던 적이 있
었고, 청년 원숭이였던 시기가 있었으며,  그리고 지금은 늙은 원숭이다.  그러나 그 어느 시절의 
원숭이가 진짜 너라고 단정할 수 있겠느냐? 언제의 원숭이가 진짜 자신이지? 그처럼 시간 속에서
는 여러가지 성격을 가졌고, 지금의 너는 그 총체로서 여기에 있다. 이는 시간  속의 복수가 하나
로 되는 경우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간에 있어  복수의 사람이 하나로 통일되어 다시 태어난다면 
이상한 것일까? 때문에 전생의 말의 유희든 진실이든,  그것을 문제삼는 자들은 원숭이만도 못한 
멍청이들이다. 항상 어느 누구도 아닌 자, 언제나의 나가 아닌자,  어디의 연못도 아닌, 떠도는 무
명의 물이야말로 우리처럼 도를 살아가는 자들의 본질인 것이다. 
이말을 들은 원숭이는 멍하니 선 채로 전세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예언 이야기 
  원숭이가 장자에게 말했다. "선생님, 최근에는  근처의 화산도 분화를 시작하고  이세상은 내알 
일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전 최근 노스토리다무스의 대예언(No story 다무스? 이는 노
스트라다무스에 대한 저자의 조롱섞인 표현임.-편집자 주)이라는 책에 빠져  있습니다. 잘은 모르
지만, 그 책에는 얼마 안 있어 원숭이의 세상에 종말이 오거나 대변동이 일어난다고 씌어 있습니
다. 또 매일같이 마누라의 시시한 잔소리를 듣는 것도 이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습니다. 이제 세
계로 눈을 돌려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장자:원숭이 세계의 10년 후를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는 원숭이와 자네 무리의 열흘 후를 예언할 
수 있는 원숭이가 있는데 그중 어느 쪽이 되고 싶은지 고르라면 자네는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원숭이:글쎄요, 아무래도 가까운 문제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열흘  후 쪽이 더 알고 싶네요. 그렇
게 되면 무리에서의 내 신용도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장자:그렇다면 자네 무리 전체의 열흘 앞을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는 원숭이와 자신의 하루를 완
전하게 예언할 수 있는 원숭이가 있다면 자넨 어느쪽을 택하겠는가?
원숭이:그거야 당연히 하루 앞날을 예언하는 원숭이죠.
장자:오 그래, 그건 또 왜 그렇지?
원숭이:만일 내일 확실하게 죽는다는 것을 안다면 제일 먼저 마누라를 두들겨팰 겁니다!
장자:음 그래, 대단할 정도로 전 세계에 눈을 돌리고 있군.
이말을 들은 멍하니 선 채, 전 세계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사냥 이야기-꽃과 나무와 새를 사랑한다고?
  어느날, 원숭이가 눈곱을 떼면서 장자를 찾아왔다.
원숭이:선생님, 요즘에는 도무지 좋은 일이 없어요. 여기저기 삭신이 쑤시고, 숲에도 눈에 띄게 나
무열매가 줄어들었어요 이참에 다른 숲으로 옮길까 싶네요.
장자:그런데 자네 혹시, 나쁜 짓이라도 했나?
원숭이:절대로 없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전 정직해요.
장자:사물을 보는 눈과 방법은 하나의 행위라네. 자넨 누군가를 얕잡아보거나 경멸의 눈으로 다른 
원숭이를 본 적이 있는가?
원숭이:천만에요. 전 절대 누굴 얕잡아보지 않습니다. 게다가 원숭이뿐만 아니라 길에 핀 꽃과 나
무에게도 하나도 빠짐없이 인사하고 있는 걸요.
장자:그렇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네 눈은 더 나빠질 거야.
원숭이:으응.... 그런가요.... 아참, 선생님, 다음 주에  동료 원숭이가 사냥 가는데 저도 데려가준대
요. 총이라는 걸 만져보게 해준다지 뭡니까? 요즘엔 시시한  일만 생기는데 이참에 기분 좀 풀까 
합니다.
장자:자네.... 설마.... 새를 쏘려는 건 아니겠지?
원숭이:아 아, 아니 그, 그게 그친구가 그러는데 새는 없다던데요. 그러니까 그냥 쏘는 것일뿐이에
요.
장자:그럼 도대체 무얼 쏜다는 건가?
원숭이:아무거나요.
장자:자네, 대충 얼버무리는 것도 적당히 하게. 자네는 그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새를 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만약 그 새가 어미새라면, 불쌍하게도 새끼가 굶어죽을걸세. 게다가 그 새가 힘차게 
날기 시작한 새라면 한창 때에 아무 죄도 없이 목숨을 뺏기는 것 아닌가. 게다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자네의 기분을 풀기 위해서 말야. 달리 먹을  게 없어 총을 쏜다면 별개의 문제지만 
그렇지도 않잖은가. 그저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새들이 죽는거야. 총을 쏘고 난 후  몸을 떨며 죽
어가는 새를 보며, '내가 정말 얼마나 나쁜 짓을 했나 싶을 정도로 눈물이 나왔습니다'라고 내 앞
에서 말해보게. 자네 얼굴이 돌아갈 정도로 그 낯짝에 주먹을 날릴 테니까.
원숭이: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저 그냥 쏘는 것뿐이에요. 새 같은 건 정말 쏘지도 못해요, 영감
님. 아 그래요, 그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 정도나 쏘는 거예요.
장자:자넨 전혀, 조금도, 아예,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군. 자네는 항상 꽃과 나무에게도 인사한다고 
했지? 숲 속의 나무에도 생명이 있어. 지금은 겨울이라  말라버린 것처럼 보여도 봄에는 활짝 생
명을 피워. 자네가 쏜 하찮은 총알  하나가 그런 작은 생명을 날려버리는 거야.  그렇다면 자네는 
자연 그 자체와 꽃과 나무와 풀들 그 자체를 생각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맘에 들어하는 것만 편애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자네는 다른 생물들을  얕잡아보고 있는걸세. 그런 식으로 차별하면서 
자연과 동물을 좋아한다고? 자네는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어. 그따위 짓을 학 다니다 언젠가는 
자네 역시 눈도 입도 잃어버릴 거야. 게다가 항상 남의 말에 귀기울일 줄 모른다면 그 귀도 언제
가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거야.
원숭이:선생님, 그건 좀 지나친 말씀입니다. 동료들 가운데는 벌써 몇십 년씩 새와 동물을 취미로 
쏘고 있지만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 인과응보 따위는 믿지 않습니다. 
장자:자네, 내 얘기를 들어봐. 옛날 옛적 이 별에는 인간이라는 종족이 있었는데, 그놈들은 싸움이 
나면 작은 단추 세개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3천 명의  동료를 죽였다는군. 그렇게 동료를 죽인 놈
이 집으로 돌아와 "봐, 난 아무렇지도 않아. 벌도 안 받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잖아...."라고 말했다
네. 하지만 그 행위가 올바른 행위라곤 할 수 없지 않나. 원숭아, 자네는 자신만 괜찮다면, 무엇을 
하든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할 생각인가? 아무리 작은 새 한 마리, 풀 한 포기라 하더라도 쓸데없
이, 필요없이, 살생한다면 분명히 자네 가족에게도 재난이  닥쳐올 거야. 자네는 무엇보다 체면이
나 세우고 얼렁뚱땅 회피하려는 변명과 위선일랑 그만두게. 
원숭이:하지만 벌써 약속해버렸는데요. 이제와서 새가 불쌍하니까라고  말하면, 그 친구한테 바보
취급 당한다고요.
장자:바보 같은 자식! 창피하다는 이유로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면 넌 원숭이 쓰레기가  되는 
거다. 아무리 창피해도 정직하게 새는 쏘지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게 네가 할 일이야.
이 말을 들은 원숭이는 어리둥절해져서 나쁜 친구와의 약속을 잊어버렸다고 한다.

    오늘의 순간에 관한 이야기-도를 잊고서 누가 헤매나
  오늘도 원숭이는 장자의 암자를 찾았다.
원숭이:일전에 선생님은 내게 우주의 광대함과 그 속에 사는  원숭이와 인간의 비할데 없는 왜소
함, 편협함, 어리석은 짓거리에 대해 말해주셨지만 난 아무리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려 해도 눈앞
의 걱정거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장자는 해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아무리 이유를 대고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세우며 살아가는 의의를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려 해도 쓸데없는  일이다. 속세에 사는 
녀석들의 허튼소리로 인생은 즐기면  그만이라든가, 종교나 철학을  섭렵해봤자 아니면 점쟁이나 
영능력자에게 카운슬링을 해봤자 잠시의 안심으로 눈가림하는 것일 뿐 너희들은 죽을 때까지, 그
리고 죽어서도 여전히 불안과 불만 속에 휩쓸릴 것이다. 마음에 있어서는 죽은 자처럼 행동에 있
어서는 잡을 수 없는 바람과 물처럼 떠돌듯 조용하게 나처럼 살아볼 생각은 없는가?'
원숭이:저도 물론 그렇게 하고 싶죠. 하지만 원숭이 무리의  보스이기도 하고 또 가족도 있고, 어
찌어찌 살다보니 눈앞의 걱정거리에 끌려다니고 맙니다. 
장자:봐라, 자꾸 눈앞 눈앞 하는데  그건 어중간한 눈앞이다. 네가  죽을 때의 일을 눈여겨본다면 
난 다른 때보다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다. 너의  걱정 근심도 그저 네가 내일을 괴로워하지 않
기 위한 작은 걱정일 뿐이다. 불안이라는 것은 언제나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지나간 과거에 불안해 할 녀석은  없을테니 말이다. 불안은 항상 미래를 제멋대로 
억측해서 생기는 것이야. 하지만 광대한 시간의 미래를 보면 그곳에는  십 년, 백 년, 천 년의 미
래가 있다. 실제 네가 걱정하는 것은 기껏해야 하루 앞이거나 일 년 앞, 혹은  십 년 앞의 생활에 
대한 걱정일 거다. 덧붙여 말하면 할 앞은커녕 한 시간, 아니 일 분 뒤에  일어날 일까지 너는 그
렇게 걱정하고 있지 않느냐. 이런 일을 하면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고.... 그런 건 불과 몇 
초 앞의 걱정거리다. 그처럼 너희들은 몇 초 앞의 걱정거리에 휩싸이고 몇 시간 앞일을 걱정한다. 
며칠, 아니 몇 년을 걱정에 번민하다 끝내는  몇십 년 후의 예언 따위에 휘둘리고 만다.  마치 네 
인생은 하루하루를 걱정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넌 자꾸 눈앞 눈앞 하고 말하는
데 그렇다면 내친김에 진짜 눈앞을 보면 어떻겠니?
원숭이:에? 그게 무슨 말씀....?
장자:즉, 현재다. 지금이다. 이 순간이다. 봐라, 그렇게 말한 순간에도 시간은  벌써 과거가 되잖았
냐. 봐라, 벌써 과거가 되었다. 봐라, 지금 한 말도 과거다. 도대체  순간의 현재, 지금이란 현재를 
넌 어떻게 잡으려는 거냐?
원숭이:그러고 보니 순간이란 건 잡을 길이 없네요.
장자:이제 알겠느냐. 눈앞에 대해 말하려면 넌 좀더 눈앞에 있으면 된다. 그 속에서 살면 되는 거
야. 네가 말하는 눈앞, 예를 들어 네가 순간이라는 것을 잡으려 한다면, 그것을 잡고자 하는 앞의 
네가 바로 그것이다. 잡고자 마음먹기 직전의 너는 잡고자 생각한 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잡으려 
한다든가 이해하려 한다든가, 걱정되기 직전의 너는 도대체  누구냐? 그러니 눈앞을 보려면 궁극
의 눈앞을 보는 것이 좋다. 불안이나 걱정이 일어나면 그것이 생기기 이전, 그 전을 보는 것이다.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걱정이 아니다.  그곳에는 결코 걱정도 불안도  불만도 없다. 그곳에서, 넌 
그저 있을 뿐이다. 그냥 존재할 뿐이다. 그곳에는 너라고 하는 것조차 없다.  그것은 누구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구분하고 나뉨이 없는, 타인과 차별도 구별도 할 수  없는, 그냥 있음이다. 그것이 
너의 기반이며, 그것이 있음으로써 넌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수레바퀴의 축이
다. 따라서 죽은 듯이 산다는 것은 순간을  산다는 것이며 그 순간이란 너 그 자체이며,  너의 그 
자체는 결코 네 생애에 걸친 불안이나 걱정,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죽을 때는 넌 틀림없이 죽는 
과정 속으로 돌아오고 말 것이다. 틀림없이 뒤돌아보고 집착하고,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에 두려움
을 가질 것이다. 네가 도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다. 그것은 
네가 결코 화내지 않으려고 참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노여움도 짜증도 불안도 없는 것이다. 오락
이나 술로 불안한 마음을 눈가림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타인으로부터 잔소리를 듣거나 경멸받는
다 하더라도 애당초 너라는 개인에게 매달리지 않았다면 그 어떠한 노여움이나 초조함도 있을 리 
없다. 너는 그저 이름없이 조용한 본성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 속에는 어떠한  성냄이나 경멸
도, 가치도 무가치도, 의미도 무의미도 없다. 그것은 너무나 순수하고 소박하기 때문에 완전한 바
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나나 우리 붓다들은 왕바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본성이 사는 집이다. 일본에는 이런 하이쿠(일본의 전통
적인 싯구)가 있다. 
도가 미혹에 빠졌거늘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 도에서 무엇을 찾는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가 있다. 두사람의 나그네가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그중 한  사람은 친구에게 볼일이 
있었는데 지도에 의지해서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한 사람은 아무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그가 돌아올 때까지 어슬렁거리며 마을을 산책했다. 한편, 친구를 찾아나선 이는 지도를 가지고도 
여기저기 헤매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친구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한편 마을에 남은 사람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사귀고, 그  마을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자, 그러면 
이제 한번 생각해보자. 갈 곳이 있는 사람은 분명히 목적이 있다. 어떤 일이건  목적을 갖고 시작
하면 우선 그것을 해치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네 눈에 세계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음미하는 것을 모를 수밖에 없다. 마을에 남은 나그네는 한가로이 밭과 꽃을 즐기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볼일이 있던 쪽은 그럴 틈이 없다. 이 볼일, 목적이라는 걸 네 생활의 
가치관으로 바꾸어봐라. 네게 만약 삶의  목적이나 목표,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넌 지도라는 
지식을 갖고 여기저기 찾아 헤매며  다른 사람들까지도 끌어들인다. 하지만  네 여행은 헛수고의 
연속이다. 그것이 아무리 살아남고 즐기기라는 목적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산다는 것이나 즐
기는 것이 목적이 되면 모든 순간이나 타인, 환경을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지도로 삼을 것이
다. 그렇게 되면 여행은 더 이상 여행이 아니라 심부름이  되고 만다. 한편 나나 도의 선인들, 붓
다나 선사들은 아무런 목적도 가치도 갖고 있지 않다. 때문에 지금이라는 순간을 다른 목적을 위
한 희생으로 삼지 않는다. 지도도 없이, 볼일도 없이, 그저 떠도는 것이다.  그것도 헤매면서 떠도
는 것이 아니라 마음 편하게 음미하며 떠도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죽음 역시 즐길 수 있다. 자신
이 비난받고 비방당하는 것 또한 즐길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에겐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성을 따르는 자는 자신을 특정의  누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핮 
않는다. 그래서 경멸당해도 화내지 않고  존경이나 감사를 받아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니 네가 
당황하거나 또 불안해지면 지금 다시 한 번 바라보는 것이  좋다. 무릇 도 자체를 잊었다면 도대
체 누가 헤맨다는 말인가? 길, 그것은 행선지이다. 행선지란 목적, 목표, 달성해야 한다고 네가 생
각하고 있는 너의 욕망이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너는  무엇을 헤맨다는 말인가? 그때 너는 그저 
목적지가 없는 나그네로 떠돌듯이 살고  죽는다. 그곳에는 아무런 불안이나 불만,  희로애락도 없
다. 오락, 술, 수다 같은 것에 완전히 흥미를 잃고  그런 것 따위는 돌아볼 생각도 없어질 만큼의 
고요한 광명, 무욕인 채 충만한 아름다운 존재가 있을 뿐이다. 
이 말을 들은 원숭이는 어리둥절해져서 내일을 잊었다고 한다. 

    에고의 소멸과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
  원숭이가 장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들이나 당신은 도대체 왜 사는  것입니까? 난 평생 보
잘것 없는 먹이를 얻기 위해 헐레벌떡 숲을 뛰어다니다가 저녁에는 지쳐 잠들고 맙니다. 잠이 안 
올 때는 술나무의 열매를 먹고 시시했던 낮  동안의 일을 잊어버립니다. 여행을 떠나거나 암컷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거나 다른 원숭이와 싸움이 붙으면 그때 조금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 정도입니
다. 하루가 지나고 일 년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허무함뿐입니다. 때로 
당신은 도를 설교하면서 말없이 살고 여행도 안 가고 학문도 하지 않고  인간으로서는 보기 드물
게 그 어떤 물건도 만들지 않고 지내고  있건만 전혀 따분해 하는 기색도 없고  슬퍼하는 기색도 
없고 또 당신이 성내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즐거워 보입니다.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선생님은 단순히 팔자좋은 낙천가인가요? 그런 선생님이나 우리나 언젠가
는 죽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아니 그 이전의 세상, 또 저 세상, 모두를 포함한 모든 
세상, 즉 존재란 무엇이죠? 왜, 우리들은 존재하고 있는 겁니까?"  장자는 원숭이가 잠잠해지도록 
한참을 기다린 뒤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들, 또는 존재 전체의 의미와  가치, 근거, 세계의 시작과 
끝,세계가 만들어진 목적, 이러한 것들을  탐구하는 일은 인간 지성의 특권인  것처럼 속세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우선 너에게 난 한 가지 결론을 말해두겠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새, 벌레, 지렁
이, 지네, 개와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네가 감기에 걸리는 원인인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작
은 생물까지, 실은 과거 먼 옛날에 그 물음 즉 세계의 근원, 세계를 만든 자와 세계의 목적, 만물
의 의미에 관해 사색에 빠졌다. 실로 그런 일에 연연해 하는 것은 인간과 원숭이뿐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인간과 원숭이를 제외한 모든 생물, 식물, 광물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과거
를 묻고, 그리고 끝내 그것을 넘어섰다. 지성을 가진 존재란, 실은 우주에서 가장 수준이 낮은 노
예적 생물인 것이다. 겉으로는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하면서 그 내면은 항상 삶과 죽음에 대한 공
포의 노예가 되어 있다. 항상 해도해도 모자란 걱정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생명에 대한 걱정의 노
예가 되어 있으며, 내면은 걱정과 노여움, 질투와 열등감에 지배되어 그것을 일시적으로마 무시하
지도 못한 채 살고 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항상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사람이나 만물을 끌어들이고 자신이 괴로울 때도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것을 속
세에서는 상부상조라느니 정을 나눈다느니 교제를 나눈다고 하는데 자연계에서  상부상조하는 것
은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와주고자 하는 자 역시 아무도 없다. 자신의  신세 타령을 하는 
자 역시 누구 하나 없다. 자연 속에서 헤매는 자 역시 누구 하나 없다.  자연 만물은 균형을 지니
며 스스로 서로 돕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에 있어서 상부상조의  가장 큰 기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넌 그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자, 죽음의 문제는 나중
에 말하기로 하고 인간과 원숭이만이 이같은 고통 속에서 살며 그런 주제에  자신들이 가장 뛰어
난 자라는 생각에 빠져 있다. 들짐승과 물고기는 아무런 부자유나 아무 근심도 없이 일생을 마친
다. 하지만 인간과 원숭이는 많은 물건을 생산하고 불편함을 합리화시키고 자원을 침식하고 개인
의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사회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보다 더 오래 안전하게  안정된 생활을 확보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산물이며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이 정도로 넘쳐날만큼 생존을 위한  물건을 만들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 인간사회는 
뛰어난 지성의 산물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의 사생아(부산물)라 불러도 좋
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생물은 모두 의문을 갖는 일  없이, 불안을 갖는 일 없이, 생을 음미하고 
죽음을 음미한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너희들  원숭이들의 계산법으로 치면 12조 년 전
에 꼭 너희들 원숭이와 인간이 의문을 가진 것처럼 만물의  존재에 의문을 가졌다. 그 의문을 해
결하기 위해 어떤 자들은 30억개나 넘는 별들을 여행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의문에 결단을 내렸
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자연 속에서 태어나는  수많은 생물의 형태를 취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외견상으로 보면 너희들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충만해  있다. 그들은 지성
이 없는게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그것을 남겨둔 자들이다. 그들은 쓸데없는 짓,  특히 필요 이상
으로 살아남기 위해 의학과 무기를 만드는 일을 때려치우고 자연 속에 떠돌며 사는 길을 택한 것
이다. 그들에겐 지성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진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용한 뒤  버려진 것이
다. 그러면 원숭이와 인간들의 지성이란 어떤 것일까? 너희들과 인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지성이
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힘을 기반으로 발전하
며, 그것을 위해 도구를 만드는 일을 기억해낸 것 같다. 언제부턴가 도구를 만들어내는 일이 마치 
지성의 특권인 양 믿어버린 것 같지만 실제로 그 근저에 있는 것은 항상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
려움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안정된 생활을 얻게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따분함을 기억하기 시작했
다. 그런 식으로 모든 예술, 논리, 철학, 종교, 과학 등 대부분이 발전했지만 사실은 발전했다기보
다는 오히려 복잡하게 변화했다는  것뿐, 발전했는지 어떤지는 의심스러울  뿐이다. 첫째, 무엇에 
가까워지는 것을 발전이라고 부를 생각인가? 생활필수품 이외의 물건을 만들어낸 진짜 원인도 역
시 공포와 불안 때문이다. 그 또한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노예적인 부자유스런 본능의 산물이
었다. 원래 생활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사용된 지성이었지만 한번  그것이 기동하고 만들어지고 
나서는 지성 그 자체가 독립된 생명처럼 되어 지성체로 살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마치 육체가 
죽음을 두려워하며 갖가지 물건을 만들어냈듯이  지성은 계속 살아남아 활동하면서  지성 연명과 
안정을 위해 예술과 오락과 스포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결국에는 철학과 종교 나부랭이까지. 이
것들이 모두 어디서 유래하는지 잘  보아라. 그것은 인간이 대단하다고  칭송하는 지성의 산물이 
아니라 요컨대 따분함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따분함이란 온화한 말이기는  하나 실제 지성체에 
있어서는 죽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고활동의 정지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
어낸 사회, 언어, 과학, 예술은 말할 나위 없이 육체와 지성의 끝없는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만들어냈는데 무엇 하나 사람을 끊임없이 만족시키는  것은 없다. 모든 의미에 있어 원숭
이와 인간은 굶주려 있다. 그 굶주림은  먹을 것이 아니라 정보와 사고하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유인원과 사람들은 결국 생식, 술, 수다, 오락, 스포츠, 그리고 작은 전쟁(언쟁)과 큰 전쟁(살육)으
로 하루를 보내면서 공허함, 따분함, 공포, 불안, 불만을 때우고자 한다. 그리고 삶은 이것들의 끝
없는 악순환이다. 모든 원인은 그것이  육체이건 정신이건 간에 모든  것을 보전하고 유지시키고 
살아남기 위해 있다. 그러나 도대체 그렇게까지 하면서 목숨을 부지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육체
가 아니라 정신에 있어서조차 왜 그렇게 비참하게 발전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우주는 정말 그런 
일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첫째, 인간이나 원숭이의 지성이 우주 앞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
다는 말인가? 기껏해야 은하계를 120개 가량 횡단하는 정도다. 우주에 비하면 사막의 모래 한 알
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도대체  지구에, 그리고 또 다른 별의 원숭이와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떤 별의 사람들이 인생과  우주와 신에 대해 또는 사랑과 가족과  예술에 대해 
한가로이 즐겁게 논하고 있는데 혹성이 충돌해 한 순간 그 세계가 멸망하는  일은 우주에서 수없
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 속에서 세계, 사람, 원숭이,  과학과 예술, 똑똑한 체하는 학습 따위가 무
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별의 존재 그 자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 원숭
이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아니아니, 귀찮은 생각은 필요없어. 그저 즐기면 그만이야" 라고. 그
러나 무엇을 위한 즐거움인가? 즐기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건가? 너희들은 자신이  즐기기 위해 
아무런 사전 양해도 없이 타인을 끌어들이고 쓸데없는  말을 조잘대고 있다. 그것이 대부분 말싸
움의 원인이 된다. 국가간에 벌어지는  전쟁조차 처음에는 아주 시시한  문제로 시작하지만 결국 
입 때문에 악화되는 것이다. 아니면 시시한 종교 대립에서. 그러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있는 그
대로 보자. 너희들은 정말 즐기고 있는가? 사실은 억지로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 기분내는 정도가 
아닌가? 평생 생활에 쫓기고 따분해하며 싸우고 기분 나빠하고 가끔 불안을 잊기 위한 섹스와 술
과 수다와 오락에 몰두하며 수천 년을 보냈을 뿐이다. 우주는 인간 사회에 맞춰서 편리하게 발전
하고 복잡해진 것일뿐, 밑바닥에 있는 정신의 불만은 무엇 하나 충족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사람
들은 우주, 세계,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 전에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게 있다. 너희들
은 그걸 존재의 이유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존재란 어떤 것인가? 너희들 원숭이는 숲에 살며서 
그 근방을 자신들 문자로 세계라 부르고 있다. 많은 원숭이들이 숲에 머물면서 다른 세계는 모른
다. 소수의 원숭이가 다른 숲으로 여행을 가는데 그렇다고 대륙을 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세
계란 무엇인가? 객관적으로 이러저러해서 이 정도의 넓이와 내용을 갖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 세
계같은 건 없다. 너희들이 끝까지  보고 알고 있는, 그리고 눈과  귀, 손으로 만질수 있는 정보를 
세계라 부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너희들은 몸 속에 무수히  많은 미생물을 갖
고 있지만 병만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딴 세상의 일이다.  너희들은 또 거울과 사진 없이는 평
생 자기 등과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존재다. 또 숲에 사는 원숭이는 바다를  모른다. 그래서 바다
는 그들의 세계라 부르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또 우주라 부르는데, 그것은 관측된 범위
의 것이다. 신비가들이 말하는 영이라든가 7개의 영계조차 관측된 것이다.  세계는 이처럼 한계를 
갖고 있다. 넓이도 깊이도 내용도  사소함도, 지각하는 자에 따라  실로 가지각색이다. 항상 어떤 
범위에서 어떤 범위까지를 세계라 부르는데 지나지 않는다. 너희들은 세계가 시간 속에서는 어디
에 존재한다고 판정할 수 있는가? 일 분 일 초  앞도 실재하지 않고, 설사 그것이 존재한다 해도 
너희들의 기억 속밖에 없다. 똑같이 미래라 하더라도 실재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일 초 앞이라도 
말이다. 항상 현재의 순간만이 실재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또 자신의 과거라고 
말하거나 미래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실체로 내놓을 수  있겠는가? 물체로써 말이다. 그것은 전부 
너희들의 사고 속에 있다. 기억은 과거이며, 기억을 모은 일반적인 예상이 미래다. 오늘도 건강하
다. 그러니 내일도 건강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등등. 그렇게 말해도 내일 병에 걸릴 수 있고 상
처입을 수 있다. 너희들의 미래는  기대를 배신한다. 과거와 미래는  그저 보통 사고다. 무리적인 
예측, 예를 들면 로켓의 궤도 계산은 할 수 있어도 너희들의 생활에 밀착된 것은 무엇 하나 정확
하게 예측하지 못한다. 그러면 사고가 미래나 과거라는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
로 지금 현재 실재하고 있다고 부르는 세계라는 것 역시 근거가 불확실하다. 이미 말했듯이 그것
은 지각된 세계일 뿐이며 지각하는 것이 우리 내부에 없었다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 세계조차 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우리들은 박쥐 세계의 감각을 측정조차  못한다. 뱀의 감열감각(뱀은 보통 시
각이 아니라 열로도 물체를 감지한다. 즉 대상의 체열을  인식함으로써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다.)
은 이론으로나마 그럴싸하게 꾸며내는 정도지 결코 실감하는 것은 아니다. 전자파나 자기를 감지
하는 미생물이 있어도 그들이 부대끼는  세계를 결코 느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세계 그 자체는 
생물마다 다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진짜 세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단언하건대, 그런 것은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진짜 올바른 지각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이처럼 세계로서 안정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 보는 생물마다 다르다. 지각 밖에서 세계라 부르는 것은 없다. 
더 평탄한 표현을 쓴다면, 어떤 회사에 4명의 사원이  있는데, 그곳에는 4개의 아침이 있었다. 한 
사람은 가족들과 싸우고 출근하고, 한사람은 전철 안에서 치한을 만났으며, 한  사람은 조용히 출
근하고, 마지막 한 사람은 지각했다고 치자. 맑게 개인 날,  조용히 출근한 사람이 "날씨 좋내요." 
라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가족들 일로 열받아 있고, 또 한 사람은 치한 때문에 
열받아 있어 전혀 눈곱만큼도 좋은 아침이 아니다. 두 사람의  곱지 않은 반응 때문에 조용히 출
근한 사람 역시 잔뜩 부은 채 일을 시작했다. 각각의 아침, 각각의 내면이 다른 날씨의 아침이다. 
여기에 네번째 사원이 싱글벙글 웃으며 나타났다.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 어제 저녁 늦게 전화가 걸려왔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지 뭐야. 너무 기분 좋아서 이렇게 
웃는 거지" 라고. 그가 아버지와 과거에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세 사람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즐거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평범한 하루 아침조차 그곳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4개나 
있다. 인간 사이도 그럴진대 원숭이와 인간끼리 이해가 있을리 없다. 그것은 그저 추측이 되고 말 
뿐이다. 게다가 그 추측은 추측하는 사람의 경험의 범위 안에서 한정된다. 때문에 그들 사이에 이
해 같은 건 불가능하다. 공유할 수 있는 정도의  상식, 오락, 감각이라면 고작해야 보조를 맞추는 
척이라도 할 수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보고 온 사람들끼리라면 이해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하
물며 다른 생물에 대해 베푼다고 여기는게 사랑이란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은  자연을 사
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른 생물, 악어나 도마뱀, 쥐, 모두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
들에게는 그것이 세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들이  만약 철학과 예술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정말
이지 우리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지구상에는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때문에 나처럼 다른 차원의 우주를 조금 본  것만으로도 누구든 비명을 질러댈 것이다. "어떤 것
이 진짜 현실이야?" 라고. 사람은  많은 것을 알면 알수록 무언가가  해명되고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예를 들어 내가 어느 우주에  있건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를 문제삼았는데  대답이 하나로 통일되기는커녕 더욱  더 뭔지 모르게 
되었다. 그것은 각각의 우주민족이 완전히  다른 지각으로 우주를 보고 독자적으로  사회, 문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완곡한 표현을 쓰더라도  지상의 다른 생물과는 정도의 차이가 있
다. 전자파만을 지각하는 우주인과 텔레파시로 교신할 때도 나는 전혀 그 세계를 인식할 수 없었
다. 무언가 공간의 밀도가 다른, 꼭 음악에서 소리를 뺀 감성의 움직임만 있는  듯한 상당히 묘한 
감각만을 간신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세계가 우주에는 무수히 많다. 따라서 더  이상 우주를 여
행하며 지식을 모아봤자 헛수고였다. 그것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서, 결국 길거리에서 헤매는 꼴
이었다. 왜 존재하고 있는가는 더 한층 불확실했으며 애초에 그것이 존재했는지 어땠는지조차 미
심쩍기만 했다. 이미 말했듯이 그것은 지각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세계란 지각  속에만 있으며 지
각한 것의 기억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지각 그 자체가 단순히 만들어진 것이라면, 진짜로는 아무
것도 세계가 없는데 모든 이로 하여금 그것이 있다고 믿게 만드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 가능하
다. 그처럼 단순히 지각세계라고 하는 것은,  실은 오래 전부터 우주에서 알려진  사실이다. 동물, 
식물, 광물은 이미 그 단계를 통과하고 각자의 지각세계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결코 현실
이 어떤 것인지 따위를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득히 먼  옛날에 이미 물었기 때문이다 결코 자
연은 묻지 않는다. 아무리 삶의 목적, 존재의 목적, 원인이 궁금해도 결코  묻지 않는다. 그들에겐 
이미 오래 전 과거의 일이기 때문이다. 가장 진화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인간과  원숭이. 지성을 가
진 우주종족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원숭이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계속 의문을 갖고 모색하며, 
계속 탐구한 끝에 질려서 자살할 정도로, 우주에, 존재에 따분해지고 만다. 난 그들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장소에 가봤다. 그들은  형체가 거의 없는 녹색 액체와도 같은 생물이었지만 고도의 지
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벌써부터 우주에서 생존하는 일에 헉헉거렸다.  그들은 영원히 
죽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주의 끝을 찾았다. 왜냐하면 우주의 내부에서  죽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내부란, 활동과 갈등과 생존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그저  목적 없이 살아가
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우주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 완전히 무의미하게 그저, 존속하
기 위해서 있을 뿐이다. 실제로 존재의 목적을 탐구한다는 것은  이 우주가 활기에 가득 차 있기 
위한 불만을 만들어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 우주가 있는가가 아니라 우주가 존
재하기 위해, 그 연명수단으로 물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너희들이 시시한 퀴즈를 푸느라 
쓸데없이 시간과 노동력을 소모하는 것과 같다. 없는 답을 찾는다는 게임  말이다. 앞의 녀석들은 
드디어 우주의 끝에 당도하고 말았다.  그런데 무한하다고 생각했던 존재는  실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 그 밖으로 나간  순간 그들은 진짜 무한을 보았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
다. 완전하게 아무것도 없는 어둠,  어둠조차 이식할 수 없는  어둠, 그곳에는 지각조차 소멸되고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으로 우주에 돌아와, 영원히 우주의 
불구, 광기로서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그  끝으로 사라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우주의 내부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미친 채, 우주와 무한한 무의 경계선에  동결되어 있었다. 그들
은 자신을 소멸시켜주길 바랐지만, 우주는 그들을 생매장한  채로 영원히 죽고 싶지만 죽지 못하
는 폐허에 가두어버렸다. 그들은 죽도록 따분하고 답답하게  허무의 암흑을  벌써 몇십억 년이나 
바라보고 있다. 그들과 의식이 겹쳐졌을때 난 발광할 것만  같았다. 영원한 안식, 영원한 무의 암
흑에 영원히 산다는 것은 지성에게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곳에 사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스스로 
영원한 무로 화하는 것뿐이었다. 무사고,  무위로 있는 차원에 도달하지 않으면  완전히 발광하고 
만다. 행인지 불행인지 나에게는 그 어둠 속에서 영혼까지 함께 죽을 각오가 생긴 순간에 세상에
서 말하는 대오가 일어났다. 실제 그것은 무언가를 얻은  것도, 깨달은 것도, 발견한 것도 아니며 
그것은 단지 그저 자신의 집, 즉 자신의 의식, 다시 말해 그저 그뿐인  존재성으로 돌아온 것이었
다. 쓸데없는 세계도 가치도 목적도 정의도 그리고 감정도 감성도 능력도 모든 것이 통째로 내게
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저 있음이라는 상태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라든가 전체라고 하는 구별 그 자체가 
없기에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조차 빗나가 있었다. 그것은 전혀 아무것도 아닌 누구도 아닌, 그
저 있음, 그저의 의식, 그저의 존재성이었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틀려도 자기가 
아니며, 또 전체도 아니었다. 그것은 분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지성이 내게서 떠어지
고 말았다. 난 거의 바보가 되었다. 난 완전하게 무기럭해졌으며, 완전하게 우주라는 고향조차 잃
어버리고, 왜 아직 살아 있는지 신기했다. 마음속에는 부랑자처럼 안주할 곳, 즉 생각이라는 것이 
없어졌으며, 그저 언제나, 있음만으로  충분한 조용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드디어 세계라는 것을 
다시 멍하니 바라보았을때.... 그곳이  미쳐 있고, 미치광이 원숭이  무리들이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숭이, 이는 여전히  지나치게 좋은 표현이다. 곤충보다  낮게 보였다. 파리였다. 파리는 
끊임없이 날아다니며 안정을 모른다. 그래서 난 인류를 파리라 불렀다. 아니, 파리조차 지성을 넘
어 자연 속에 살아 있으니,  인류는 그 이하, 아니 파리만도  못한 존재였다. 한동안 육체를 갖고 
지구에 살아야 했기 때문에 적당히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목적의식이 없었기 때
문에 무리하게 사회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흐름과 자연에  내맡겼을 뿐이었다. 그리
고 몇 개월이 지나, 난 특별한 종족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꿈 속이
나 낮에 뇌내의 비전으로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특별한 종족이 아니라 무종족이었다. 그들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고통이나 고뇌, 희로애락,  분별과 갈등과 생존에의 불안과 따분함
에 대한 불만을 전혀 갖지 않은 완전한 모습으로. 그것은 나와 같은 존재였다.  그들의 이름을 여
기서 밝히면, 난 틀림없이 속세의 원숭이들에게  미치광이로 받아들여질 것이며 승려로부터는 의
혹과 호기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들은 내 친구가 되어 무척 편안하고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
들은 붓다와 그 제자, 노자, 달마, 예수, 마이트레야(미륵), 크리슈나무르티, 라마나 마라히쉬, 바그
완 슈리 라즈니쉬, 그리고 과거 중국과 일본의 몇몇 선사들이다. 덧붙여  기묘한 우주로부터의 친
구들과도 교류했으며, 내 나날은 평화롭고 조용하며 평범했다. 그래서 죽을 때도  또한 그럴 것이
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무욕에도 구애되지 않은 채, 그저 난 있다. 의문의 불안도 없고 즐거움
도 괴로움도 없기 때문에 무상의  조용함을 친구삼아 존재만으로 충만해  있다. 존재가 없어지든 
말든 그 또한 좋은 일. 왜 이같은 일을 원숭이들에게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아마 그것
은 또, 누군가 편안해지는 사람을 위해서일 것이다. 누군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사람이 
우주의 거지가 되어 그저 편안해지기 위한.... 
이 말을 들은 원숭이는 멍하니 선 채로 방황을 잊었다고 한다. 
  장자와 원숭이의   문답은 세상에서   말하는 원숭이   혹성의 대소란시대에   생긴 일이었다.           
            
    장자의 유머광상곡 1
    
    라즈니쉬편
  어느날 바그완 라즈니쉬가 죽었다. 그러자 천계의  문지기가 업무상의 의무로 라즈니쉬를 찾아
왔다. "당신은 많은 제자를 이끌었지만 아직 한 사람의 깨달음이 모자라네.  한번만 더 태어나 그 
제자를 도와주지 않겠는가." 라즈니쉬는 "좋았어" 라고 말하고 태어났다. 그런데 그곳은 지옥이었
다. 언젠가 그 제자가 죽었다. 천계의 문지기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한 발짝만 더 나아갔으면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정말 아깝기 그지없어. 정말 안타깜구먼. 한번 더 태어나면 깨달을 터이
니 세상으로 돌아가시게." 그 제자는 "이번에야말로!" 라며  돌아가 다시 태어났다. 덧붙여 그 제
자는 "이번에야말로" 를 3백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다. 

    임제 선사편
  언젠가 임제 선사가 죽었다. 문지기가 말했다. "조금만 더 수행했더라면  자네는 붓다까지도 넘
어섰을 텐데...." 그러자 임제는 천계의 제단을 있은 힘을 다해 걷어차며 일갈했다. 문지기는 이런 
자들에게도 익숙해 있었기에 이렇게 말했다. "지랄하네, 기물파손죄로 넌 지옥행이야." 그러자  임
제는 문지기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친 뒤 이렇게 말했다. "열린 입이라고 이 멍청이가!  너의 본성
이 뭔지 말해봐!" 문지기는 말했다. "아아, 잘한다. 그렇게까지 무심해지는  자네가 왜 무심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여유있는 무심의 상태가 안 되는  거지?" 깜박 한 순간을 망설인 탓으로 임제
는 또 지옥으로 떨어졌다. 

    잇규 선사편
  언젠가 잇규 선사(일본의 대표적 선승)가 죽었다.  문지기는 말했다. "실로 놀라운 선으로 이루
어진 삶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곳은 20세기이다.  자넨 만화영화에서.... 움직이는 우키요에(일본 
풍속화)의 주인공이 되어있지. 거기서 자넨 머리 좋은 중으로 세간의 아이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어. 그래도 자네는 그 사실을 승복할 수 없을 테니까 오명을 만회하기 위해 한번 더 태어나 그 
아이들에게 진짜 선을 알려주지 않겠나?" 그러자 잇규  선사가 한 마디 읊었다. "세상은 먹고 벌
고, 자고 일어나고...."(잇규 선사의 유명한 이 게송은 '그러다가 죽는 것일 뿐'으로 끝맺음) 잇규선
사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문지기가 끼어들며 읊조렸다. "천국은 무심히 깨닫고, 자고 일어나고, 
그러다가 태어나는 것일 뿐." 자신의  하이쿠를 패러디하여 빈정거리자 일순  화가 치민 탓에 그 
또한 지옥으로 떨어졌다. 

    로마 법왕편
  언젠가 로마 법왕이 죽었다. 문지기가 말했다. "네게는 아직 인류를 위기에서 구할 위대한 사명
이 있다." 로마 법왕은 기뻐하며 씩씩하게 되돌아갔다. 문지기가 말했다. "....멍청한 것, 몇천 년이 
지나도 얼빠진 작자군."

    구제프편
  언젠가 구제프(Georges Gurdjieff, 1872-1949. 그리스계 아르마니아인.  동양을 순례하면서 많은 
신비적인 의식과 명상 비법을 배움. 신비적인 영의  소유자로 독특한 수피 무용을 개발하여 서양
에 널리 보급시켰다. 그의 수소론은 일본에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17년 코카서스 지방
으로 가서 조지아 티플리스에 조화로운  인간개발연구소를 세움. 현재 서구  여러 지역에서 그의 
뜻을 따르는 단체가 많이 있다.)가 죽었다.  문지기가 말했다. "자네 논리는 맞지만  일반인에게는 
조금 어려워. 알기 쉽게 펼치지 않으면 아무리 만고의 진리라도 포교의 의미가 없지. 천계의 일동
들도 부탁하니 한번만 더 태어나주지 않겠는가." 구제프는 말했다. "누구 좋으라고 그따위 지렁이
가 돼. 으웩...." 문지기가 말했다. "그러면 수소를 많이 주지. 어떤가?' 구제프 말하길, "좋았어, 한
번 더 태어날께."

    크리슈나무르티편
  언젠가 크리슈나무르티(Jidu Krishnamurti, 1895-1986. 인도 남부 출생. 신지학회를 이끌던 인물
이었으나 해체시켰다.)가 죽었다. 문지기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마이트레야로 강림할  수 있는 
그릇이 되었을 텐데 왜 단상에서  주저했는가?"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했다. "그게 아니야.  틀렸어. 
난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고. 그런데 입 밖으로 나온 말이 그거였어. 다시 말해 해체 선언이었
어. 난 제대로 마이트레야를 받아들였다고. 그런데 인간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었지." 그
러자 문지기가 말했다. "아니, 자네가 마이트레야를 좀더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주변 사람들 또한 
변용해나갔을 거야. 자네에게 책임이 있으니  한번 더 그곳에 태어나게. 마지막  한번으로 자네의 
사명은 완수야."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했다. "내게는 책임도 의무도 사명도 없어. 나는 마이트레야
가 아니야. 나는 그냥 나야. 난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아. 나는 그저 나일  뿐이야!" 문지기가 말
했다. "와! 정말 훌륭하게 자기 자신으로 있었군. 축하합니다. 당신은 천국행입니다. 자, 죽어 헤어
진 동생이 저 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성큼성큼 문을  가볍게 넘어섰다. 그 
순간 무겁게 전락하며 불쌍하게도 속아서 또다시 이곳에  태어났다. 그 문은 지옥으로 가는 직행 
문이었다.

    곽암사원편
  언젠가 곽암사원(12세기 중국불교의 선사로서 유명한 십우도를 그린 인물)이  죽었다. 문지기가 
말했다. "네가 그린 십우도처럼 깨달음은 세상에서 완결되는 것이야. 그러나  여기는 아직 아홉번
째다. 진짜 열번째는 저기지. 그러니 한번 더  세상에 태어나거라." 역시 선사였던지라 그는 이렇
게 말했다. "아니, 아니야. 거기가 아홉번째야.  여기가 열번째야. 그리고 이번에는 여기가 세상이
야. 중얼거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게." 이런 연유로 그는 천계의 술집으로 안내받아 계속 
퍼마셔대었다. 술이 너무 지나쳐 꿈을 꾸게 되었는데 얼토당토 않는 꿈이었다.  그것은 자기가 살
아있는 꿈이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 또한 지옥의 어딘가에 살아있다. 

    장자편
  언젠가 장자가 죽었다. 문지기가 말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 없습니다. 하고 싶은 대
로 하십시요." 그러자 장자는 하고 싶은 대로 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아마존에서 나비가 되어 인
간이 된 꿈을 꾸고 있다. 

    노자편
  언젠가 노자가 죽었다. 문지기가 말했다. "당신이 남기신 저서는 대단히 귀중한 것입니다. 하지
만 오해하기 쉬우니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번 더 형태를 바꿔 다시 만들어주시지 않
겠습니까?" 노자는 귀가 먹었기에 문지기가 "자, 이쪽 문을 통해 천계로 들어가십시요"라고  말하
고 있다고 믿었다. 서둘러 문을 따라갔는데 노자는  불행하게도 라즈니쉬, 찬드라, 모한으로 인도
에 태어났다. 
    
    석가편
  언젠가 석가가 죽었다. 문지기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십시요." 그러자 석가가 
말했다. "오오 이 얼마나 자비 깊으신 분이십니까."  문지기는 울었다. 그리고 안 보는 데서 혀를 
날름거리며 비아냥거렸다. "망령든 노친네, 언제나 이 수법에 걸려든단 말야. 자비심이 깊다 못해 
멍청한 작자군."

    달마편 
  언젠가 달마가 죽었다. 문지기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많은 사람들을 무심하게 하셨습니다. 그
러나 아직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부족합니다. 한번 더 태어나주시지 않겠습니까?" 달마는 묵묵히 
문지기 앞에 앉았다. 그러나 천계의 공무집행 방해로 그는 지상으로 추방되었다.  그가 태어난 것
은 1991년 독일에서였다. 불쌍하게도 그가 마주할 벽은 아무데도 없었다.
  이렇듯 천계의 문지기의 접대 용어, 행동에는 무수한 메뉴얼이 있다. 지상반환을  위한 주요 응
대로는 명상 경험이 없는 일반인의 경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봐, 보라니까, 자네 가족을, 애
인을, 한번 더 보고 싶지? 게다가 한번 더 태어나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인생이 지굿지긋
해 죽은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뭐라고? 삶은 게임 같은 거야.  무얼 망설여. 힘내라고. 다시 
한번 태어나서 못다한 일을 해. 자 이게 자네의 새로운 인생이네."  또 자기에게 상당히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자 지금이라도 자네가 사랑하는 육체로 돌아갈 수 있네"라고 말하고는 전혀 다른 육
체에 쑤셔넣는다. 한편, 이른바 도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접대 용어가  있다. "한번만 더 부탁하네. 
그걸로 끝이야. 자넨 삼빡하게 사마디(samadi;ㅎ;힌두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선정을 말하는 것으로 
주체와 객체의 차이가 유지되는 유상삼매와 모든 차별이 소멸되는 단계인 무상삼매로 나뉨.)에 들
어가는 거야. 더 이상 전생은 없어. 그러나 그 제자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돼. 구원은 도사로서의 
의무지. 불법의 정점은 사랑이잖나." 이로써  속물은 금방 돌아간다. 실로 멍청한  짓이다. 그런데 
조금 까다로운 것은 모든 것에 대한  도리도, 선악도 설법할 의무도, 사랑도 제자도  천국도 전혀 
무시하는 선을 하는 중들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들에게 분별심을 재발시킬지에 대해서는 손이 좀 
많이 갔지만 천 명의 부처들이 엎드려  절하며 기원하는 인공적인 홀로그램으로 그  반수는 속였
다. 그러나 나머지 반은 처음부터 꿈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럴 경우에는 여기는 지옥이다라고 말
하고 무서운 홀로그램을 보여주었는데 그들은 와! 극락이다, 극락이야라고 기뻐하며  그곳에 살고 
만다. 곤란해진 문지기는 천계의 디자인을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거기에 무수한 거짓말쟁
이 생물과 풍요로운 자연을 만들어냈다. 무수한 동식물과 인간을 만들어 천계로 찾아온 누구라도 
틀림없이 지옥이라고 믿게 만드는 혹성을 만들었다. 그 혹성을 지구라고 부른다. 

    한포기 잡초편
  그런 어느날, 한 포기 잡초가  인간에게 밟혀 죽었다. 문지기는  말했다. "넌 생애를, 무심하게, 
무욕으로, 그저 있는 그대로 살아왔다. 이번에는 고양이의 삶을 살아보지 않을래? 응?" 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 생각보다 욕심많은 잡초로군.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니?" 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문지기는 드디어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너 같은 바보가  무언가로 태어나는 그런 일
은 있을 수 없지. 넌 허무로 사라져라." 그러자 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에?"  문지기는 말했
다. "에가 아니라니까 이 바보  멍청이. 넌 그 어떤  것으로도 태어나지 않을거야. 그럴 가치조차 
없어. 전혀 태어날 가치가 없단 말이야." 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에....?" 그래서 잡초 하
나만 천계의 문을 넘어 머나먼 곳에 이르렀다. 잠깐 잊었는데  마지막 한 사람 더 머나먼 곳으로 
사라진 자가 있다. 문지기의 몇 번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단호히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농담 아니야! 이런 형벌(십자가에 매달리는 일)은  두번 다시 당하고 싶지 않아.  질려버렸어. 씨
팔!"

    장자의 광상곡 2
  우주에 있어 인간의 구조성에 관한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우주
는커녕 자신의 죽음조차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페허의 붓다들을 쓸 때는 신랄하
게 얘기해야 할 부분을 1/100로  농도를 희석시켰다는 사실을 초기  친구들과 문하들에게 누누이 
말해왔다. 도에 관해서는 지금 상황의 EO의 말로써는 더 이상의 표현수단은 한계일 것이다. 따라
서 희석시켰다는 것은 의식체의 설명부분이  아니다. 인간과 생명을 유난히  불쾌하게 만들어 나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통감시킨 부분에 대해 페허의 붓다들보다 훨씬  더 신랄한 부
분이 원래는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카피본으로 돌려진 일반인용 문서는 논리적인 문서로 
만들어짐으로써 읽는 사람에 대한 충격과 욕설이  소프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논리적 문장이라
는 것은 실제로는 상처가 없다. 예를  들면 당신은 미발달된 뇌, 악질적인 용모에  대해라는 이런 
논문 따위를 읽는 것보다는 직접  누군가에게 바보, 멍청이, 더럽게 못생긴  데다가 무능하기까지 
한 놈이라는 말을 들으며 머리라도 한 대 맞는 쪽이 훨씬 더 상처를 입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논
리적으로 쓰면 이상할 정도로 냉정하게 읽기 때문에 당신 본인의 존속의 무가치에 대해, 또는 우
주의 다양함에 대해 내가 터무니없는 말을  해도 당신은 정신세계에 관한 주간지라도  읽듯 그저 
즐기든지 단순히 공감할 뿐이다. 안타깝게도 페허의  붓다들이외에는 그런 안전책이 취소되고 말
았다. 그러한 약간의 문서조각들은 견성 직후에 몇 사람에게 보냈지만 모두 EO를 미치광이로 판
정했다. 나 또한 그들이 그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이해되지 않을 게  분명한 내용을 썼
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다기보다 사람이  이해를 거부하는 내용이며 모든  문서가 마치 남의 
일처럼 읽지 못하도록 직접 독자를 매도하고 있다.  구구절절이 이야기할 생각도 없기 때문에 화
끈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하면 독자를 자살 직전까지 몰아세울 것인가 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았
다. 이전에 있었던 바보같은 문하생의 충고 덕분에 페허의 붓다들에는 인류는, 우리는, 이라는 식
의 막연하고 묘하게 객관적인 주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 편이 무게가 있으니까라고 그놈은 말했
다. 그놈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무게라는 것은 당신의 머리를  까뭉개는 무게에 관한 것이다. 
위엄이라는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다. 난 항상 편지를 받는 대상자 단 한 사람을 상대로 공격해왔
다. 그가 한눈팔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본인을 공격했다. 막연하게  전체적인 인류의 문제 
따위를 논해봤자 전혀 상처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도 당신의  머리나 낯짝을 갈기고 
팔푼이 같은 놈, 뒈져버려라하고 말하는  편이 무게가 있을 것이다. 실질적인  효력이라는 점에서 
안전권에 있으면서 EO를 즐기고 EO가 말한 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
러나 나와 1:1로 대면하여 당신 에고가 죽임을 당하길 바란다면 단단히 각오하기 바란다. 난 결코 
당신들의 요구에 걸맞은 도사로 변형되지 않는다. 내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고통, 똑같은 최악의 
상태를 경험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그 열쇠는 전통적으로 품위있는 선에도 없으며 온화한 도에도 
없다. 불교에도 없다. 그것은 EO이즘만이 갖고  있다. 본서(일본판 제목 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
계)에서는 다소의 장난기로 공격적인 캐릭터를 표현했지만 그나마 1/50정도로 희석시켰다. 하지만 
그 기본이 된 1/50배의 캐릭터라는 것조차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당신을 질리게하고 우주 어디에
도 존재할 수 없도록 완전히 죽게 하는 것에 주목적이  있었다. 최근의 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그다지 날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나는 정신세계의 거의 모든 이로부터 혐오의 대
상이 되었다. 그것은 일반론적인 말을 해가면서 느낌을 부드럽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개인을 폭
격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공격 속에는 도로  이야기가 낙착되는 설득력이 있었던 탓에 상처가 
적었다. 전혀 사정볼 것 없이 퍼부어댈 시기와 상대가 필요했지만 그런 소질이 있는 사람은 누구 
하나 없었다. 누구 하나 피폭지인 내 중심에서 날 만난 사람은 없다. 그것은  너무 잔혹하기 때문
이다. 나와 같은 체험을 겪으면서 당신이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도 없거니와 미쳐버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을 공간적으로 내 옆에 있으라는 것도 복종하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제시하는 테마에 대해  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저것 자신이  초라해지지 않도록 
자아를 보호하는 이유를 붙여 나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이  실로 많았기 때문이다. 내 본래의 방편
에는 선도 깨달음도 없다. 안심도 없다. 거기에는 고통과 고뇌와 절망과 자살에 대한 소원이 길어
질 뿐이다. 사인선(선종에서는 매도하는 의미로  쓰이며 야호선, 대오선, 무사선과 함께  경멸하는 
말이지만, 저자는 이것을 가르침의 핵을 이루는 중요한 명상법의  이름으로 삼고 있다.)에는 구원
이 보이는 거대한 오점이 있다. 실제 구원 같은 건 전혀 없는 곳으로  각오하고 전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초기 EO의 입버릇은 죽어버려라였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짜 의미에서
의 변혁의 열쇠라는 사실이 지금 더 한층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읽은 당신은 다
음 생, 즉 내세가 소멸되면 진짜 본심으로 바라거나,  각오하거나 실감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그런 일은 각오하지 않거니와 바라지도 않기 때문이다. 여생을 명상으로  보내고 나면, 내
세에는 될 대로 되라는 정도가 될 것이다.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지 않
다. 그리고 변혁에 이르기까지는 다음 전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 점에 대해 당신은  아무리 보아
도 그런 건 싫어, 정말 지긋지긋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걸로 됐어, 좋아, 편하면 됐지, 
사인선이나 하다 보면 다음에는 좀 나은 곳에  태어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와 당신들의 커
다란 차이가 여기에 있다. 나는 영원히 어디에도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도
록 했고, 혐오하도록 했고, 그렇게  절망시킨 경험의 배경이 있다.  그런데 당신에게 그런 경험의 
배경은 털끝만큼도 없다. 일단, 지금 생의 남은 수십 년을 깨달은 듯한 경지에서  지내면 될 뿐이
다. 내가 근본문제로 제시하는 문제를 잊으면 곤란하다. 그  반복, 그 전생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
이다. 당신의 의지 따위와는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처분되고 전생하면서, 태어나고, 전생을 잊고, 
괴로워하며, 조금은 즐기고, 영원히 그 짓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영원하다는 것조차 당신은 실감
하지 못한다. 실감능력의 결여는 고뇌하는  능력의 결핍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 영원, 즉 
천 년, 억 단위로 계속되는 생명에 대해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실감하고  절망하였다. 도대체 무엇
에 비교해야 실감능력과 사고력이 없는 당신이 실감할 수 있을까. 제일 좋은 것은 고차원 생명체
들에게 벌레 취급당하거나, 인간의 존엄 따위 우주의 기구를 직접 의식으로  체험하는 것인데, 정
말로 이를 체험하게 했을 경우에는 인간으로의 복귀가 거의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나 감정에는 허용량이 있는데 비해 우주에는 그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는 정보량과 절대
비정의 철칙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우주에서 받은 진짜 세례는 다음 다음 생은 고사하고 내일을 
사는 것도 거부하고, 저녁밥을 먹는  것조차 거부하고 싶어지며 자신의  육체가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지금 여기에서 호흡하고 있는 게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절대적인 혐오와 존재
의 거부였다. 자살을 주저한 것은 해봤자 어떻데 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이 일부 지워
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또 다음 생에서는 왠지 모르게 막연한 혐오를 지니면서 어느 날 또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자살한다. 그것의 반복이다.  그것을 보고 우주는 매번 고마워요라며  나의 고뇌를 
홀랑 먹어치운다. 공포, 혐오, 죽음에의 절망, 윤회의  고, 이러한 것들은 우주를 영속시키는 양질
의 연료가 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EO의 독자들은 여러가지  오컬트(Occult:신비주의, 비밀의 지
식을 뜻함)에 물려 있던 차에 그것을 논리적으로 또는 시적으로  개그를 섞어가며 생각하게 만드
는 EO의 맛에 공감하고 이해하고 실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괜찮다 하더라도 근
본적으로 그가 제시한 문제, 진짜 배경은 피하고 있는 것같다. 왜냐하면  그 문제를 EO가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당신의 신이라는 자와 직면해서 절망하고, 또 수
억 년의 생명활동을 혐오하기에는 막대한 기력과  철저한 사고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절망이나 
단념한 척만 하는 독자는 너무  많다. EO가 간단하게 화끈한 말로  말했다 해서 그 본질과 방법 
자체가 간단할 리 없다. 인간생활의 나쁜 점은, 물론  어느 차원도 그렇지만, 상처를 서로 핦아주
는 흉내를 낼 뿐이라는 것이다. 위로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냉혹함과 만나지 못하는 것이
다. 지구에 국한시켜 말한다면, 철저하게 지구인을 식량삼아 공공연하게  포획하고잘게 썰어 요리
해서 먹어치우는 생명체가 대량으로 지구에  들어와 약육강식의 기본을 철저하게  경험하는 것이 
지구인이 제정신을 찾는 조건일 것이다. 다음으로 계속되는  천재지변, 죽음, 그리고 재생 불가능
할 정도의 황폐, 다시 말해 끝없는 아마겟돈이다. 아마겟돈  이후의 재생이 존재하지 않고, 또 다
른 별로의 영혼 이전도 불가능한 진짜 사면초가에서 자신이 한 마리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을 체험하는 것. 그것만이 하나의 길이다. 그러나 그 환경조차도 결국 인간을 겸허하게 하거나 깨
닫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또다시 다음 윤회에의 절망을 낳ㅇ르 뿐이다. 
그것은 수없이 우주에서 되풀이되어왔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도 당신은 전혀 우주의 광
대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당신  동네의 크기조차 실감하지 못한다.  하물며 몇억이라는 미래의 
시간 같은건 전혀 실감하지 못한다. 영혼의 진화라든가 깨달음이라고 말해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
도의 단계인 제일 밑바닥에 당신도 나도 존재한다.  그리고 도대체 우주가 몇번을 돌아야 진화할 
수 있다는 건가. 또 그런 일을 했다 해서 무엇이 어떻다는 것인가. 결국 우주같은 것에 대해 당신
은 생각할 마음조차 갖고 있지 않다.  그보다 내일도 평화스러우면 됐어, 하는 정도로  끝낼 것이
다. 그런 주제에 시시한 문제나 작은 고, 갈등이 당신을 괴롭히면 그것은 대우주보다도 큰 문제가 
되어 당신의 일대사가 되고 만다. 남들이 보면 항상 바보같은 일이다.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바보
조차도 되지 못한다. 꿈 속의 섬 안에서 당신이라는 쓰레기가 하나 있을까말까 한 정도이다. 이렇
게 말해도 당신은 자신의 왜소함을 실감하지  못한다. 전체의 막대한 크기, 그 속에  있는 당신의 
왜소함,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무한시간. 이들의 편린이나마 조금이라도  경험한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인간 따위는 눈 깜박할 사이에 자살시켜버리는 힘을 갖는다. 나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
야 했다고 통감시키는 일이 우주에는 무한할 정도로  가득 채워져 있다. 왜냐하면 우주는 당신의 
기분을 맞춰줄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진심으로 자신의 머리와  능력과 기력을 구사하여 
EO시리즈를 참고서로 삼아 자신의 머리로 파고들어가면서 자신을 폭발시키지  않는한 당신은 음 
이번 생도 편하게 살자라며 전혀 편하지 않는 일생을 다른 장소에서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할 뿐
이다. 그것도 그만두면 좋을 것을 여기저기  혹성의 생명형태나 고차원에 전생해서는 근본적으로
는 살고자 하며, 죽고 싶지 않다고  버둥거리는 일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말이다.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당신은 지금 문득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면 우주도 윤회도 고도 EO도 모두 잊고 만다. 당
신에게는 무엇 하나 큰 문제가 아니다. 어쩔 수 없지만  견디기 어려운 고를 만나는 것이 변혁의 
열쇠다. 허용할 수 없는 막중한  압력, 살해당한다는 공포,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라는 혐오이건 
무엇이건, 허용량을 넘어선 것이 당신을  덮치는 순간 외에 변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 편하다, 
아 즐겁다라는 느낌으로 사인선이 안정이라는 선물을  당신에게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절대의 완
전한 죽음이라는 환희에는 도달할 수  없다. 자신은 우주 따위에는  흥미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 
해서 그런 잔혹한 우주를 경험할 수  있나요"라고 가볍게 질문한 쓸모없는 인간이 올  초에 있었
다. "자네 머리로는 무리야"라고 말하자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이것이 문제다.  거기서 "어떻게든 
경험하고 싶다."고 말했으면 나도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보라는 말을 
듣고는 음 그런가하는 선에서 그치는  정도의 탐구심에는 나 역시 도와줄  마음이 생길 리 없다. 
내 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말라며 그와는 인연을 끊었다. 페허의 붓다들  상하권, 지구가 꺼질 
때의 좌선, 그리고 페허의 붓다들 외전도 지금 최종 원고를 다시 한 번 읽어보니 그 저서들은 너
무 어려웠다. 만약 이전의 내가 이것을 읽었다면 절대로 대오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설명에 누구
나 손쉽게 납득하고 말기 때문이다.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리거 행법이라는 구원의 길이 있
다. 그것도 선이나 도라는 쓸모없는 녹투성이의 오래된 응원단이 있다. 그러나  내가 대오한 결정
적인 원인은 어느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충고하지 않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행법도 없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이  세계에도 저 세계에도 어떤 차원에서도  무엇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페허의 붓다들과 본서는 정신세계에 한 가닥 의문부호를 던질지는 모르지만  그로인해 한 사람이
라도 비약할 수 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본래 나는 당신을  괴롭히기 위해 이 글을 쓰고자 했
다. 왜냐하면 고라는 것은 깨달음으로서의 최대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책에는 
구원이 너무나 많다. EO라는 나에게 흥미를 갖거나  진지하게 실천하는 것보다 정작 훨씬 더 중
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두뇌로 통찰하고 극한까지 생각하고,  그리고 만물을 철저하
게 싫어할 정도로 불행해지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손에 쥐고 있는 집착이라는 것이 미
끄러져 떨어지는 일은 절대 없다. 아무리 자기가 버렸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당신의 손에 착 달라
붙어 있다. 집착하고 있는 것을 버려도, 당신은 다른 것을 주우려 할 것이 분명하다. 당신이 버리
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쥐고 있는 손 그것이다. 달마의 면전에서, 자신의 팔을 잘라낸 혜가처럼. 

    장자의 유머광상곡 3
  다시말해 도나 선이 뺄셈인 이상 당신이 분쇄되는  것만이 광명으로 나아가는 열쇠다. 명상 또
한 지각력을 더해주는 것은 아니다. 사인선은 최근이  아니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에 치과의
사가 클로로포름으로 신경을 조금씩 죽여가면서 마지막에 이를 뽑거나 깎는 것과 별반 다름없다. 
사인선 행법은 당신들의 에고 신경을 조금씩 마비시켜간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마비도 안 시키
고 갑자기 이를 뽑는 것과 매한가지이다.  변혁의 열쇠는 늘 당신의 에고를 뽑는데  있다. 그것은 
항상 철저하게 당신의 마음이 분쇄되는 국면에서만 일어난다. 일본의 경우, 또는  근대에서 큰 문
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구루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구
루라는 것은 만연해 있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해도 몇 년이 지나면 당신은 다른 구루에게 눈
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신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좋
은 것이다. 그러나 옛날 수행자에 있어 구루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이 절대적이라는 것이 
요점이었다. 그때 도사가 진짜로 대오했는지 안 했는지는 논외가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도사가 
대오하지 않았다면 변용은 곤란할 것이다. 그것은 하여튼  절대적인 신뢰를 보낸 구루에 의해 완
전하게 분쇄되는 방법이 깨달음에는 필요했다. 구루의 역활은 제자의  에고를 까부수는 것뿐이다. 
최후까지 구루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의지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대에서 
그런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던 사람이  철저하게 기대를 배신하고 
버리는 이런것이 진짜 포교이다. 이러한 배신과 타격은 애인 사이에서도 일어나지만 그것은 항상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구루를 바꿀 수도 있다. 개념이나 사상 역시  당신의 사정에 맞게 
고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에서는 최후의 국면까지 도사를 절대시하는 일은 더 이상 불가
능하다. 절대시하는 것은 원래 에고이다. 무언가가 필요해서 구루에게 몰리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
없는 에고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내쳐쳤을  때는 의지할 곳이 없어져 멍해지는 당
신이 버림받는 무언가가 있다. 여기서 나는 EO라는 캐릭터를 방편으로 삼는 것을 그만두었다. 서
른여섯 살의 내가 어떤 낯짝을 하고 어떤  옷을 둘렀다 해서 원래 농담을 즐기는  탓으로 당신은 
내게 친근함을 가질지언정 절대시할 수는 없다. 거듭  반복하건대, 무언가를 절대시하는 것, 그것
은 당신의 망상이다. 그러나 그런 연유로 그것이 부서졌을때 망상과 함께 당신이 받는 충격이 있
다. 그래서 나는 특정 인간과의 신뢰관계를 통해 탐구자가 비약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자폭할 수 
있는 방편을 사용하고 싶었다. 내 우주론은 그 때문에 있다. 논리성 그 자체는  도사의 것이 아니
다. 그것은 논리이며 사실이다. 구루가 아니라 사실을 상대로 한다는 것이다. 날 철저하게 분쇄시
킨 것은 특정 우주민족이 아니라 전체 우주에 대한 자신의  통찰 끝에 내린 결론 자체였다. 누구 
부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자폭이다.  그리고 이 무인격의 구루=사실과 논리야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비참함을 맛보는 과정에서도 사실을 상대로 한다면 당신은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우주의 탓으로 돌리며 하늘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당신의 갈등이 갈 곳 없는 압축이 있
음으로써 비로소 당신에게 폭발이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EO는 어중간한  인간이다. 완전하게 
당신의 에고를 짊어지는 것도 곤란하고 그런 제자도  없다. 당신을 끌어당기는 요소가 조금 있다 
하더라도 이 시대에는 그것말고도 얼마든지 편한 길이 있다. 이것밖에는 없다는 집중력이 처음부
터 당신에게는 없다. 그리고 파멸하고 말 거라는 공포가 생기면 당신은 금방 도망칠  수 있다. 그
러나 내 관심은 어땋게 하면 도망갈 곳이  없어질까였다. EO를 어중간한 도망칠 곳으로 삼고 싶
지 않았다. 도망칠 곳으로 오해하고 있는 자에게는 항상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해왔다. 최후의 최후
까지 나와 함께 한다 해도 그런 신뢰가 당신에게 있을 리 없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 탓이 아니다. 
선택할 게 많은 현대의 교육 시스템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집중적 의존은 무리한 것이다. 지
금 필요한 것은 특정 구루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힘이나 절대적인 법칙성뿐이다. 이른바 
당신은 EO가 아닌 당신 자신이 절대자인 신을  상정하고 그것과의 일전, 즉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중간한 심령적 존재로는 안 된다. 게다가 상대는 완전한 절대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 신
에게 반론을 펴서 해치우기 위한 참고서가 EO의 책, 특히 우주론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채널러나 
종교가나 선사 어느 누구도 그 논리에는 이깆 못한다. 따라서  나를 도사나 신뢰할 수 있는 인간
이나 친한 청년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노리  컴퓨터로서 상대해야 된다. 나는 인간이라는 사
실에 별로 친근감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는 기계이길 바란다.  논리의 절대상대라는 점에서 
나라는 기계를 이용하면 된다. 내 목적은 단 하나, 당신이 그 어느 곳에도 복귀할 수 없도록 패배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목적은 내 논리를 패배시키는 일이다. 어떤 질문을 한들, 처음부터 
질문할 마음이 완전히 없어지고 마는 상태가 나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 이상의 질문이 전혀 무
의미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나에게 질문을  건네는 많은 인간들은 당신의  질문에 내가 대답하면 
그로써 무언가 진전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주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해도 그 대답은 하
나같이 철저하게 불쾌한 것이며 우주적인 사실뿐이다. 질문하고 있는 당신의 존재 자체가 무가치
한 것으로 분쇄되지 않으면 결코 정숙은 일어날 수 없다. 어딘가에서 자기는 어떻게든 된다, 조금
은 살아 있을 가치가 있다라고 아주  조금이라도 사고한다면 그 마음의 소음  때문에 당신에게는 
정숙도 광명도 100% 불가능하다. 지구에서 깨달음이  대단히 어려운 이유는 앞서 기술한 것처럼 
구루와 제자의 관계가 이젠 낡았다는 것에 덧붙여  철저한 타격에 부딪칠 찬스가 없다는 점이다. 
석가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는 자멸의 찬스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그것은 그의 탐구심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에게 고행하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단지  그 자신이 선택했을 뿐이다. 진지함
이 성숙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진지할수록 마지막에 무너지는 폭발력이 그안에 내재돼 
있는 것이다. 항상 문제는 당신이다. 도사의 성질이나 능력, 환경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어느 
도사한테 가든 아니면 스스로 혼자 하든 탐구심이 진지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누구에게도 구
루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당신 혼자로도 충분하다. 단 상대를 하고 싶다면 내가  아니라 책에 씌
어진 내 논리를 상대로 하라. 또 신이나 절대진리라는 것을 가상 적국으로 상정해서 그걸 상대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자문자답의 논의를 벌여라. 당신은 그저 논리를 상대하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
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행법의 애프터케어이다. 그래서 최근에 난 행법의 질문 외에는 그 어떠한 
질문도 받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행법에 관해 질문을 해오는 당신들에게는 각각의 배경이 
있다. 왜 명상이 진전되지 않는지라는 이유를  내가 통찰하면, 많은 경우 당신의 육체  탓이 아니
라, 체질이 어쩌구저쩌구가 아니라, 당신에게는 진짜 탐구심이 없다는 것뿐이다. 자신이 괴로워할 
정도의 두뇌와 감성이 빈냑하다는 사실이다.  나의 참선자를 분류한 문서가  있으니 거기에 따라 
당신은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 그리고  책망한다면 스스로를 책망하면 된다. 누구도  당신을 돕지 
않는다. 때문에 만약 그것이 일어날 때는 아무도 아닌 자의 현재화로 일어난다. 
1993. 6. 14

    제 2장 원숭이의 혹성 지구에서 사는 방법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기초지식
  원숭이의 혹성 지구와 병적인 은하계 우주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사전을 만들면 이렇게 
되고 만다. 1993. 8. 15 
이것은 별저 페허의 붓다들을 쉽게 읽기위한 기초지식이다. 

    자유
  있지도 않은 것에 이름붙여진 현실(꿈)의 하나. 실제로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어떤 부자유와 계
약(타협)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자유가 간신히 있을 뿐이며  완전한 자유는 죽음 이외에는 존재하
지 않는다. 단 그 선택의 자유조차 선택의  배경에 존재하는 교육이나 사회의 영향을 고려한다면 
실제 자유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자유나 자유주의에 열중한 나머지 정신나갈 여유가 있다
면 이들 비현실적인 용어  자체를 잊고 사라져버려라.  하다못해 언어에서만이라도 자유로워지면 
죽을 때까지 따분함이라는 고통은 경멸될 것이다. 

    깨달음  
  아주 편한 유일한 생존생태, 또는 죽음 직전의 유일하고 정상적인 의식상태.  또는 의식에 있어
서의 유일한 현실. 단 정확하게는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갖가지 현실이 개시되기 이전의 실존으
로 정의된다. 

    우주
  움직여, 멈추지 마라는 단순한 명령에 의해서만 활동하는 것으로 장하게도 그곳에 서식하는 생
물 전체가 거의 무한히 착각하고 있는 보잘것없는 시시한 구체의 일종.

    선
  움직이지 마, 멈춰라는 단순한 명령에  의해서만 성립되는 체계로 거기에  입문하는 생물이 그 
궁극의 뜻이 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한없는 공간의 일종. 그것은 우주 이
전, 또는 우주 이후를 시사한다. 
    
    자만
  자기가 얼마나 갖고 있는지를 선전함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키고 상황을 유리하게 가져가고자 하
는 원숭이들 행위의 일종. 단 우위란 본인이 감각적 쾌락을 맛보기 위한 의미에서의 우위이며 실
제 이 행위는 주위로부터 경멸받고 폭소 또는 코웃음을 동반하는 불리한 것이 될 경우가 많다. 

    타오
  자신의 왜소함과 우주의 거대함을 철저하게 비교하고 인식시킴으로써 철저하게  빈틈없는 정신
활동이나 행위를 포기하게 만드는 중국대륙에 존재했던  체계의 하나. 오랜 옛날부터 은하계에는 
이것을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따라 집행하는 정치가 있었다. 그것은 원래 고문을 위해 만들어졌는
데 지금은 우주에 질려버린 매니아들의 오락의 하나로 되어 버렸다.  단 이 오락은 한 번밖에 체
험할 수 없다는 결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시리우스제의 사마디 탱크(Isolation Tank. 물탱크의 
일종으로 오감을 지우고 의식을 실종시키는 기계)에 들어가면  거의 완전하게 방심해 무능생물이 
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예의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매너. 따라서 당신에게 가능한 유일한 예의는 누구
에 대해서도 잠자코 입 다물고 있는 것이다. 

    성자
  멍청할 정도로 정직하거나 단어 사용법에  무지하기 때문에 가끔 원숭이로부터  박해받지만 그 
자체는 지독하게 평범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철저하게  본대로 이야기하고 느낀 대로 행동한다면 
당신도 성자가 될 수 있다. 단 마지막에는 사형이나 투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

    도사
  당연한 사실을 얼마나 거드름피우며 말할 수 있는지를 숙련한 성자의 일종. 이 녀석은 보통 녀
석이 아니야라고 원숭이에게 믿게 하는 기술을 가진  보통 녀석. 투옥이나 사형은 피하지만 멍청
한 한 떼의 원숭이 제자 무리가 모인 감옥에 가끔 투옥된다. 일반적으로 이  감옥은 사원, 아쉬람
이라고도 불린다.

    비하
  자신이 얼마나 조금밖에 갖고 있지 않은지를 자만함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키고 상황을 유리하게 
움직이려 하는 원숭이들 행위의 일종. 이하, 자만 항목과 동일. 

    기쁨
  말할 필요도 없이 불행을 만들어내기 위해 직접 경험하든지 아니면  스스로 나서서 경험하고자 
하는 진화하는 불행, 또는 일종의 자살억제제. 단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
는 중대한 철학적인 과제를 생각해냄으로써 기쁨은 정지될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그 철학의 결
론이 기쁨을 느끼기 위해라는 점에 밀착됐을 경우에는 왜 무엇을 위해 기쁨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는 과제를 사색함으로써 손쉽게 불행으로 복귀할 수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반성
  어떤 특정한 행위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가까운 미래에 다시 그 생각
에 빠지게 되는, 다른 행위로 전진하기 위한 탄력성.

    자기 분석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한 자기의 정의가 안정된 것처럼 착각 가능한 분석행위  또는 그 디스플
레이. 타인과 자기 분석에 대해 말하는 행위는  서로 자기가 얼마나 바보인지를 즐겁고 경쾌하게 
폭로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바보가 경감된 시도느 없다. 잘해야 고작  비하를 촉진하는 정도
이다. 
 
    사색과 고민 
  언제 어느 때라도 깨끗하게 버릴 수 있는  사고와 노는 것. 한편, 그것이 두 번  다시 뇌리에서 
떼낼 수 없는 것으로 진화되면 고민이라고 부르게 된다. 

    음주
  세계를 기본부터 재인식하기 위한 유익한 다른 마약이 합법화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원
숭이들이 이용하는 마약을 마시는 행위. 단 많은 이용자가 인식을 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얄팍하게 함으로써 고통을 경감시키는 목적으로 이것을 섭취한다. 

    회화
  분명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정보 교환 또는 언어에 의한 개그를 즐기는  몫에 비해서는 무해
한 무형문화재적 마약의 일종. 단 상기 목적에 따라 자기 주장의 요소로 발전할 경우에는 수다라 
개명되며 그 말로는 싫고 좋고의 문제로 퇴화하여 결국 유유상종이라는  은하계 법칙을 촉진시키
는 기능을 갖는다. 

    계율
  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전체적인 공통의 중요한  계율은 딱 하나이다. 그것은 바보는 상대
하지 말라이다. 따라서 이것을 엄수한다면 당신의 내면적인 평화는 확실한 것이 된다. 

    바보
  바보로 보여지고 싶지 않다는 동기에서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바보는 피해야  하지만 행위를 
할 수 없을 정도의 무위한 바보라면 그것은  장려되어야 한다. 무위는 무위자연에 이르지만 행동
주의와 능동주의는 갈등만을 만들어낸다. 

    진화
  자유와 같은 것으로 이 우주에서 한번도 시도한  적이 없는 사어. 일반적으로는 합리화나 변화
에 이 용어를 남용하는데 그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무
  2센티미터 아래를 보라. 이 정의가 마음에 안 들 경우에는 그 부분을 가위로 절단해도 좋다. 그
래도 정의가 마음에 안 들 때는 당신의 목을 절단하라. 

    거짓말
  이 행동 없이 지구에서 평화적인 생존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행위 덕분에 우리들은 투옥 또
는 사형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간다. 이 행위를 포기하면 성자가 된다. 

    정신세간 
  정신세계나 종교, 절에 똑같이 세속적인 머리를 쳐박고 있을 뿐, 정작  실제부분은 진짜 속물들
인 사람들 또는 바보같은 집단을 의미한다. 이 중에는 꽤나  굉장한 수행을 했거나 그 결과 광명
을 얻고 대오했다라고 칭하는 도사들도 상당수 포함된다. 
 
    세간교
  정신세계나 종교에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 또는 종교를 경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
들도 결국은 평균적인 행복교, 사랑과 평화의 컬트교, 상식교, 포지티브 사고교 등이라는 이 또한 
대단히 훌륭하신 맹신적 종교에 속해있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 특히 매스컴이라든가 각종 평론가
나 코멘터, 그리고 심리학자나 테러리스트 등에  무척 많다. 바보들의 일종. (세간교는 세상의  상
식, 세속적인 정신세계를 의미함.)

    생존교
  우주의 모든 만물이 속해있는 유일한  종파다. 이 종파가 적대시하며  자기들의 적으로 겁내고 
있는게 절대무임. 즉, 만물의 활동 정지와 그로 인한  우주의 소멸이다. 따라서 그들은 전 우주의 
생명들에 대해 모든 구실이나 교의를 설교하고는, 영혼의 진화 따위의 거짓말을  하고, 그리고 그
것을 미화시켜서 우리들의 생존에 목적의식을 들춰낸다. (무리하게 만들어간다.) 또,  그와 동시에 
인간이나 고차원 지성체에게 죄악감이나 자책감, 공포심과 불안을 계속 주면서 생명체를 항상 활
동이라는 이름의 노동상태로 두려고 한다. 허구한날 이런 일들만 책략으로 일삼는 전우주적인, 얄
팍한 교단의 가르침을 생존교라 한다. (생존하는 일이야말로 진실이며 목적이다라는 지성이 부족
한 가르침을 비꼬아서 표현한 것임.)

    사랑
  내 말을 들어주고 날 기분좋게  해주며 날 따라주는 한은 난  당신이 무척이나 좋아질 것이다. 
그러나 날 고민하게 만들거나 내 기분을 망치게하는 일을 한다면 너같은 건 죽어버려도 좋아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라는 정신상태를 말함. 이토록 깊은  사랑(강한 사랑)은 없다. 왜냐하면 누구 하
나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어
  단어 하나하나를 일일히 정의하면 그만큼 방대한 양의 해설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우
리들은 그 단어의 연속인 회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해하고 있는 척하고 있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은 무서울 정도로 방대한 양의 정의의 연속을 이해할 수  있는 천재적인 생물이
거나 아니면 단순한 바보 집단이다. 단, 타인에게 언어의 두세 가지를  시험삼아 정의시켜보면 분
명히 후자에 속한다는 사실이 판명된다. 즉, 우리들이 매일 이유도 알 수 없는  말을 사용해 이야
기하며 알아듣는 척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완전히 광인 집단이라 생각된다. 또,  회화에 꼭 따라붙
는 응수에 대한 개략을 설명하기로 한다. 

    크게, 끄덕인다
  아 녀석은 나와 같은 생각이다. 따라서 내 생각은 옳다. 나는 지지받고 있다. 내 생각은 가치있
다라며 단순한 일치와 의견의 옳고 그름을 혼동하는 원숭이가 하는 고갯짓. 

    작게, 끄덕인다
  원숭이한테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르는  화제가 진행될 경우, 알아듣는  척하면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사용되는 고갯짓. 그동안 원숭이는 어떻게 하면  자기가 말하기 쉬운 화제로 이동시킬까 하
고 책략을 강구하며 때문에 에너지는 목까지 돌아가지 않는다.

    턱을 떨면서 빨리 끄덕이다
  이미 오래 전에 상대의 얘기 따위는 듣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내부에서  지론이 폭주하여 감동
하며 환희에 차 있는 생물이 일으키는 고개의  경련상태. 더욱이 이들에게는 고개의 횡적 운동을 
정지시키는 만국 공통언어가 존재한다. 그것은 상대에게 넌 진짜 바보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
면 눈에 거슬리는 끄덕거리는 고갯짓의 거의 95%는 정지시킬 수 있다. 

    철학 
  예를 들면, 나뭇잎과 똑같이 닮은 사마귀는 나뭇잎이 진화해서 사마귀가 된 것일까? 아니면 사
마귀가 진화해서 나뭇잎이 된 것일까?라고 당신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 당신의 손목에 찬 시계바
늘이 왜 난 이런 곳에서 매일 뱅뱅 돌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하고 자기 존재와 활동의 의의에 대
해 고민하는 것.

    우주인
  이 우주인의 인이라는 문자를 의의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면 무기물에서  유기물에 이르는 모든 
만물이 의의를 갖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우주인이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들은 매일 우주인을 잡아
먹고, 우주인을 짓밟고 다니며, 우주인과 살고, 우주인을 타고 이동하며, 우주인을 입고 있기 때문
에 정의를 내리면서까지 기술할 정도의 가치는 없다. 어쩌다 우연히 지구인을 잡아먹는 우주인과 
부딪쳤을 때 나나 당신이나 똑같네요라고 싱긋  웃으면 그들과의 전쟁은 전면적으로 피할  수 있
다. 즉, 밝은 무저항이야말로 평화로의 첫걸음이다. 

    현실
  생물마다 한정된 지각 정보로 구성되어 있고  게다가 그 평균적 내용의 총칭이라는  사실에 주
의. 지적 생물에 있어서는 여기에 기억과 그 배열인 사고가  첨가되어 외계의 지각 이외에 뇌 속
에 있지도 않은 믿음을 만들어낸다. 이들이 혼합된 정보를 의식은 현실로 본다. 실은 그 속에서도 
우선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안정된 정보를 현실이라 부르는 데 지나지 않는다.  즉, 바보같은 놈이
라고 어린아이에게 욕을 먹은 중년이 흥분을 이깆 못하고 드러내는 어리석은 행위는 현실을 이루
는 특징 중 하나다. 일상적이지 못한 정보나 내적 사고(믿은)와 상반되는 정보가 찾아왔다는 사실
만으로 현실과는 아주 간단하게 흔들린다. 통상적으로  흔들림에 대한 쓸데없는 저항을 반론이라 
부르며, 나아가 증상이 악화되면 논리성을 일탈해 두 사람이 각기 다른 현실을 소유하는 사람 사
이에 격노하는 에너지 파동 또는 살상행위가 발생한다. 한편, 은하계 우주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현실은 한정된 세계라고도 일컬어지는데 그것은 아무런 객관성도 지니지 않은  완전한 주관의 산
물이다. 단, 지구와 같은 저뇌한 인류의 혹성에서는 자칫 잘못되어 집합적인  다수결에 의한 주관
의 총체가 현실로 불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  지각기관이 닮은 생물끼리 비슷한 현실이라는 꿈을 
공유하는 일은 있지만 그것이 동일한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죽으면 당신의 현실은 없어진
다. 그래도 주변 인간에게는 현실이 계속되는데 인간이 말하는 현실 같은  것은 사라져버린다. 자 
그러면, 남겨진 동물들에게 있어서의 현실세계라는 것이 남는데, 그 생물이 전멸하면  그 또한 없
어진다. 게다가 남겨진 식물들에 있어서의 현실이란 것도 혹성이 폭발하면 사라진다. 그렇다면 잔
해가 흩어진 혹성의 어둠 속에서 현실이라고 말하는 자는 어디에 있을까? 가령  그곳에 현실로서
의 혹성 부스러기가 있다 하더라도 누구 하나 그것을 확인하는 사람이 없다면  현실이라는 말 자
체가 무의미해진다. 현실이란 인간에 한하지 않고, 지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정보의 단순한 단편이
며, 그것은 거의 꿈보다 뒤끝이 안 좋다. 왜냐하면 인간이 낮부터 보고 있는  현실은 갖가지 망상
을 만들어내며 그 행위는 더욱 더 현실이라는 꿈에 피드백해서 영햐을 끼치고, 보다 혼돈된 꿈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이같은 악몽에서 해방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꿈, 즉 현실을 갖지 않는 것
이다. 현실이 당신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한, 그 속에서 유희하는 것이 낫다. 그렇지 않고 당신의 
뇌의 허용 범위를 넘어선 현실에  직면한다면 즉시 닫아버려라. 그것은  아무것도 지각하지 않는 
것이며, 아무것도 사고하지 않는 것이며, 잠들지 않고 의식 자체로 나가는 것이다. 현실이 시작되
기 이전의 상태에 있으면 당신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지만, 이 지구에 있으면 필히 미치광이나 
백치 취급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신  이외의 사람이 미치광이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
다. 

    영원히 계속되는 우주의 뺑뺑이 돌리기 
  EO라는 청년이 이 혹성에 남긴 책은 약 10권이다.  그 한 권 한 권이 독자의 타겟을 한정하고 
있다. 여기서 질문자와의 편지가 원문이 된 이  방대한 문서로부터 개요를 꺼내놓지 않으면 많은 
독자들이 대략의 도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뭐가 뭔지 모를  쇼크 요법과 정신적
인 상처를 받은 채로 있을 수도 있다. 저서와 타겟은 다음과 같다. 
1.페허의 붓다들-자살 문제에서 시작하여 기본적으로는 일반인의 삶의 근저의 의문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결국은 각성된 눈으로 우리들이 종교나  날조된 사상으로부터 주입되어온 정보를 처리하
여 철학을 당연히 소박하게 돌진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결론 또는 순환논법에 귀착한다는 사실
이 증명되어 있다. 문제의식을 안은 독자와의 질의응답으로 구성되는 장에 들어가면 일반 사회의 
모순된 모럴이 철저하게 지적된다. 나아가 잠깐 수행에 손을 댄 사람들에 대한 지적이 연이어 나
온다. 여기서 독자는 거의 믿고 있던 도를 잃던지 다시 의문을 갖게 된다. 여기서 행법과 그 원리
가 등장하여 종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깨달음에  관한 상세하고도 미묘한 문제나 사회생활에서의 
수행의 자세 또는 행법을 실습한 사람들을 위한 면밀한 설명은 지면상의 문제로 '속 페허의 붓다
들'로 넘긴다. 
2.속 페허의 붓다들-이미 앞서 말한 책이다. 그야말로 필요불가결한 속편이며 이것없이 EO이즘의 
완료한 없다.
3.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일반적으로 종교,  오컬트, 수행 등에 누구나  한번은 호기심을 갖는 
이들 분야의 모순에 대해 철저한 논리적 간섭을 총체적으로 적용한 저서. 대부분의 신비주의자들
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종교를 탈퇴하고 또 애독하던 신비학 서적의 대부분을  헌책방에 팔게 되
었다. 
4.지구가 꺼질때의 좌선-선이라는 것이 정말 행복의 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점에 관해 수많은 의
문부호를 던지는 저서. 선의 본질은 평가하지만 선사나 조직, 형식, 전통은 일절 우롱한다. 그렇다
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최후의 보루로서의 선이나 도, 불교까지 분쇄되었을 때, 거기에
는 당신 혼자밖에 남지 않는다. 이리하여 탐구의 출발점인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자, EO이즘이란 항상 소박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전통적인 선이  머릿속에서 의문을 떼어내 일
직선으로 그 결과를 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너무나도 불친절한 친절함을 갖는데  대해 
EO이즘은 지나치게 친절한 불친절함을 갖는다. 종교건 선이건 또 아무런 의문도 없는 일반 시민
이건 그 어떤 탐구자이건 EO이즘에의 입문은 왜 세속적인 행복을 원하는지, 왜 수행하고 있는지, 
그 훨씬 이전에, 왜 당신이 그곳에 있는가라는 존재의 근저를 다시 묻는다. 승려는 자신의 언동을 
설명하기 위해 불교를 꺼내고  일반시민은 행복이나 쾌락주의를  꺼낸다. 그러나 EO이즘이 묻는 
것은 처음부터 무언가를 구하는 근저에 있는 것은  애초에 당신의 존재라고 말한다. 탐구하기 위
해 또는 고뇌하기 위해서조차 우선 당신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
실이 탐구나 행복 추구 이전의  근원이 아닌가? 그리고 EO는 말한다.  그러면 애당초 그 존재란 
무엇인가? 학자나 종교가들은 억측이나 희망적 관측에 따라  그것을 설명하고자 꾀한다. 또 궁극
적 목적을 알게 되면 재미가 없다느니 궁극의 목적 탐구야말로 참목적이다락 말하거나 또는 그것
이 궁극이기에 고로 알 수 없다라는 도망갈 구실이 최근 수만 년 동안 이  지구에서 버젓이 통용
되고 있었다. 이러한 구실이 통용되는 최대 원인에  대한 가설적인 결론은 사람들을 휘젓지 않는 
어중간한 논리에 귀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항상 막연하게 그냥 어쩐지 무언가를 믿고, 자
신의 사고를 납득시키며 살다 죽느다. 즉, 인류는 진실을 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을 안심시키
는 것이라면 거짓말이라도 관계없다는 태도이다. 그들이 철저한 쾌락주의에 임한다면 괜찮겠지만 
쾌락주의라는 것은 쾌락에 점점 더 마비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욕구  불만을 증가시켜나가게 된
다. 운 나쁘게 윤회라는 것이 시스템으로 현실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한 번뿐인 인생에서 성숙되
지 못한 욕망은 몇천 번에 걸쳐 채우고자 하지만 그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도록 되어 있다. 자, 그
렇다면 기분좋은 거짓 신앙보다 불유쾌한 진실을 직시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EO이즘의 근
원이다. 그리고 그의 4가지 문서에서, 과학자, 철학자, 종교가, 신비주의자, 그리고 일반시민, 그리
고 선사가 반론하든 말든 그 모든 반론에  앞서서 짓뭉개고 있다. 독자들이 머릿속에서 그래도라
고 반론하려고 할 찰나, 다음 행에서 피 터지게 한 방 얻어터진다. 독자의  이론이 추정되고 있는 
곳에 그의 책략의 최대 특징이 있다. 즉, 그의 막다른 골목으로 독자를 몰아넣고자 한다. 그 막다
른 골목의 최대 논점은 다음  문제이다. 우리들은 살다가 죽는다.  또는 삶과 죽음을 되풀이한다. 
또 우주의 시간과 공간은 무한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들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그리고 
애초에 존재하는 의미는 있는가? 당연한 것을 또 한 번 묻는 것이 철학의 본질이다. 그리고 어떤 
지성체이건 최후의 질문은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며, 무엇을 하면 좋은가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
기라는 것이 단독으로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세계의 현상을  관찰하고 자연을 
보고 또 자신을 보고 그리고 또다시  묻는다. 세계는 어찌어찌해서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속의 나는 무엇인가? 여기서 종교라는 것은 세계의  근원을 창조자라는 책임자에게 강요한다. 만
약 우리들이 신의 전화번호를 입수해서 그날로 신에게 전화를 걸어 왜 세계를 만들었는가를 질문
한다면 신은 아마 필시 그의 그 전의 신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그리고 이 뺑뺑이 돌리기는 영원
히 계속된다. 여기서 자연법칙이라는 것에 책임과 목적의 소재를 강요하는 게 과학자인데 처음부
터 자연법칙의 발생동기가 잡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많은 과학자들이 알면 알수록 자연의 면
밀함에 탄복하여 신의 존재를 믿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논점을 흐려놓고 탐구를 못하게 하는 
쪽이 탐구를 그만두지 않는 것보다도 심리적으로 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동기이다. 탐
구는 현상의 원인 추구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의짓고 그 정의에 따라 살고자 하는 방법이다. 

    우주는 당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EO이즘이 의문을 던지고 어떤 결론에  도달한 논법은 너무나도 명쾌한 것이었다. 우리
들뿐만 아니라 우주의 다른 민족도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발생 목적과 의미와 선악
과 행복, 쾌락, 그러한 것들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일반 상식으로  존재란 그러한 것들의 의의를 
찾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우주라고 암암리에 정의되어 있다. 즉, 신이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우주나 인류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반대라면 어떨까하는 것이 EO이즘이다. 
존재가 그 존재의 목적의 수단이 아니라 거꾸로 목적과 의미와 존재의 수수께끼의 해명을 추구하
는 일, 그것이 바로 존재 그  자체의 유지에 기여한다면? 또 우리는  무엇을 위한 자신과 우주의 
존재인가라고 묻는데 그 의문에 따라 어떻게든 존재가  유지되고 있다면, 만물과 그 법칙은 모두 
존재 유지의 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거기에 굳이 고상한 목적이 있다고 해야 할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다. 만약 우주가 어떠한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우주에도 우리에게도 그리고 당
신 집 부엌에 사는 바퀴벌레에게도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 이
상의 어떠한 목적도 없다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우리가 만들어내는 종교, 형이상학 또는 세속적
인 고민, 괴로움, 당신 회사의 도산, 가족의 죽음, 당신의 울음과 웃음과 어리석은 짓을 한 후회의 
마음, 어색한 분위기, 욕 얻어먹고 울컥 치민 당신의  감정, 애인과 침대에서 땀에 절어가며 당신
이 뿜어내는 에너지. 이러한 것들이 모두 당신에게 있어 불쾌하든 즐겁든 상관없이, 모든 것이 우
주의 존재를 회전시키는 전력이고, 에너지이고 또는 신의 음식물이라고 한다면 어떡할 것인가. 거
기에는 아무런 선악도 없게 된다. 그곳에서의 유일한 선악이란 존재는 선이고  죽음은 악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는 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유아가 살해당하고, 민족이 살해당하고, 그 
비명과 고통은 에너지가 된다. 시시한 개그에 웃는 당신의 웃음도 에너지가  되고, 당신의 따분함
과 고독 또한 에너지가 되고, 하잖은  일로 언쟁을 벌여도 에너지가 되고, 전쟁과  노여움은 나쁜 
것이라 말하면서 그것을 전혀 막지 못하는 갈등도  에너지가 된다. 그리고 당신은 매일매일 그저 
가족과 당신이 먹고 살아가는 것을 모든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 속에서 당신의 탐구나 좌선 따
위는 여가를 때우는데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당신의 지성이 따분해 하지 않기  위한 자아의 연명
수단이 된다. 즉, 지성이 살아남기 위한 탐구이지 지성이 발달하기 위한 탐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지성이 발달하고자 하는 충동조차도 발달하지 않으면 지성은 쇠퇴하여 멸망한다는 점에서 
결국엔 이 또한 단순한 연명, 존재 유지를 위한다는 명쾌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절대 무의미
성이 우주의 유일한 진실이다. 당신이 여기에 그  어떤 인간적 감정으로 자신을 지탱시키기 위한 
의미를 부가해도, 그 의미가 왜  당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당신은 그렇지 
않으면 난 사는 일에 의미가 없고 허무하다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즉, 의의란  생존의 연료에 지
나지 않는다. 세간에서 일반적으로 삶의 보람이라고 불리는  것 속에는 취미, 가족애, 승진, 저축, 
쾌락, 흥분 따위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 무엇에  공헌하고 있는가를 직시해
보면 그것은 당신과 사회, 인류, 우주의 존재활동을 유지시킨다. 인류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 목적
과 이유라는 정당성을 붙인다. 그러나 우주는 당신의 그 이유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
은 단순히 자신이 존재하기 위한 버팀목으로서의 목적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즉, 
이유와 목적이란 모든 것이 존재 유지를 위한 것이며 목적과 이유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명백
한 기본이 있다. 그렇게 되면  에일리언도, 고상한 작업이라고 믿고  있던 지성의 활동도,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발달했다고 믿는 물질활동도,  그 모든 것이 우주라는  기업의 연료에 회수된다는 
사실 앞에서, 사람들은 약간의 마음 불편함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 쾌락 또는 감각적 쾌락
을 통해 그 사실을 잊으려고 전념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이 근본적인 존재의  사실과 얼굴을 마주
치는 순간부터 도망갈 수 없다. 당신이 도망갈 수 없는 순간이란 당신의 고독한  시간, 그리고 무
위한 시간, 즉 할 일 없는 방대한 여가이다. 여가는 당신의 지성을 협박한다. 여가는 당신의 육체
를 협박한다. 즉 언제까지나 여가의 상태로  있다면 몸도 마음도 바보가 되어 죽고  만다. 때문에 
당신은 자신의 활동을 위해 힘을 쓴다. 우주는 그  꼴을 보고 좋았어, 걸려들었다며 웃는다. 당신
이 하고 있는 일은 철학 게임도 아니지만 탐구 게임도  아니다. 당신은 존재 유지 게임이라는 생
사의 게임을 연기하고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은 회답 불가능한 상태이다. 즉, 처
음부터 그 존재는 왜 있는가이다. 왜냐하면 이유의 이유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리적으
로도 절대적 무의미가 만물의 정답이다. 자, 여기서 최대의 문제는 사람이라는 것이 이 절대의 무
의미성 속에서 제정신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의미라고 들어도 
멍청하게 흘려듣고 만다. 당신은 무의미한 존재다라고 우주 최대의 진실을 들어도 멍청하게 오락
장으로 가든지 술을 마시든지, 텔레비전을 보든지 한다. 그리고 다음날 무의미한  생존을 위한 노
동에 나서며 가끔 당신은 말한다.  "왜 이런 말을 상사나  거래처한테 들어가면서까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지?" 그러자 옆에 있는 중년이 말하길 "할  수 없잖아. 살아가길 위해선 말야." 당신
은 말한다. "하지만 무얼 위한 인생이죠?" 중년은 다시 말한다. "즐기기 위해서지,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EO가, 그리고 우주가  말한다. "괜찮아, 열심히 해봐 즐겁게 일하면서 
잘 살아봐. 틀림없이 즐거울 거다. 한번 잘 살아보라고.  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즐기기 
위해서라고 자기 입으로 말했잖아? 뭐? 별로 즐겁지 않다고? 그러면 죽으면 되잖아? 뭐? 죽는 것
은 무섭고, 조금만 더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죽든 말든 네 멋대로 해!" 인류에의 대답은 먼 옛날에 나와 있다. 당신도 우주도 무의미하고 무가
치하다. 단, 존재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당신은 움직일 수 없다
  만약 고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 우주의 철칙과 명령대로 '좋아  헤쳐나가자, 어쨌든 살
아보자'하며 의욕에 넘치고 기쁨에 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사는 것
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보다  그저 연명해나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
이다. 만약 외부와의 충돌이 없다면 우리들은 지극히 마음 편한 우주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당신의 위장부터  먼저 활동을 계속 유지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기리고 
위장이 없는 심령적 존재들도 존재의 유지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움직일 것을 필요로 한다. 결국
은 먹이사슬이라는 것이 발생한다. 먹이사슬뿐이라면 우리에게 고는 없었다. 예를 들면 남성인 당
신이 정액이라는 음식물을 여성의 성기 속에 넣음으로서 여성이 산다면  당신에게는 아무런 고도 
없다. 오히려 당신이 살기 위해 또는 당신보다  상위의 존재가 살기 위해서는 거기에는 잡아벅힌
다는 과정이 존재하고, 또 잡아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과정이 있으며, 또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시
간을 깨닫기 위해 공복이라는 고통이 발생된다. 이처럼  생애는 어느 우주든 간에 고통 시스템이 
존재한다. 무엇 때문에 그런 고통 시스템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없으면 당신은 움직이지 않기 때
문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우주는 멸망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 발생을 기쁨으로  삼는 생명체가 있
는데 그들이 사랑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어찌 될까? 그들은 필시 고통을 느낀다. 이처럼 고통이
란 노동을 위한 채찍이다. 그리고 당근이다. 이 채찍과 당근을 자동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 당신 
속에 있는 고통/쾌락 회로이다. 따라서 당신은  결국 올바름보다는 고통이나 쾌락을 선택의 기준
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누군가를  위해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가정해도 당신의 마음은 
쾌락을 얻는다. 모든 것은 당신에게 프로그램된 고통으로부터의 회피, 그리고 쾌락에의 욕구에 의
해 계속 움직이는 부품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하면서 우주는 당신을 무엇
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것일까? 계속 공복상태로 있으면 왜 안 되는 것일까? 공복상태라면 당
신의 세포는 결합력을 상실하고 분해된다. 그러면 곧 죽음이 다가온다. 우주라는  것은 생물이 죽
어도 여전히 원소로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믿어지고  있다. 또 그 원소가 
빛으로 돌아간다 해도 여전히 빛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는 불멸이라고 우리들은 멋대로 생
각한다. 그러나 원소건 빛이건 그것들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 근원적인 활동을 완전히 정
지시키는 힘이 전우주의 외측에는 존재한다. 그것은 절대무이다. 우주의 차원 기록이  있는 한 이 
우주 존재라는 피막이 터지고 외측에 있는 무가 들어와 우주가 마치 풍선이 터지듯 한 순간에 사
라진 일이 몇십 번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 횟수는 무한일 것이다. 우주는  풍선처럼 존재하고 또 
언젠가 폭발한다. 그리고 도대체 어디에서 끝나는지 인간에게는  결코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정
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시공사이클의  무한소의 쓰레기와 마찬가지인 한  점에 당신은 존재한다. 
당신은 그저 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특별히 언제 죽는다 해도  그 누구도 당신을 
갱생시키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당신의 존재 따위엔  신경쓰지도 않는다. 당신은 자유다. 그리고 
자유롭기 때문에 고독하다. 그리고 또한 당신은 완전히 구속받고 있다. 계속 살아가라는 생물학적 
명령의 노예로 EO이즘이나 도는 사실을 뛰어넘는 논리가 아니다. 이 사실 속에 제정신으로 존재
하고 그리고 제정신을 갖고 사라질 수 있는 우주 최대, 최저의 낙관과 무관심과 현재라는 시간속
에 정지한 희미한 존재로 조용하게 여생을 사는 일이다. 어떤 일의 사실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을 넘어서는 것도 사실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실에 대해서도 고뇌하거나 발광하지 
않을 정도로 태연한 자. 이것이 대오자이다. 그리고 그들이  태연해 하고 있는 최대의 대상, 그것
은 세계와 자신의 죽음 그것이다. 만약 그러한 담담한 인생에  있어 생산성도 없이 살다 죽는 것
을 시시한 인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에게는 재미있는  인생을 즐기면서 우주로
부터 부지런히 연료를 제공받는 수밖에 없다. 또는  조용한 인생 따위는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사
람에게는 가치관 게임에 열중하게 만들어 우주로부터 고뇌전력을 공급받게 할 수밖에 없다. 그리
고 죽어버릴거야라고 말하고 죽는 사람은 허무감이라는 비료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외로움은 무엇인가 (1993. 6. 10)
  우주를 기획 관리하고 있는 어떤 자가 생물전체에 요구한 루슈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을 가
지고 일전에 한 친구가 "로버트 먼로가 말하는 것처럼 외로움의  감정이 아닌가?"하고 말했던 것
이 생각났는데 거기에 대해 한번 더 명확하게 해두고자 한다. "저 자식은 외로운 놈이야"라고 말
하면 통상적으로 경멸적인 표현의 일종이지만 왜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원인을 다른 사
람에게 묻자 무엇 하나 명확한 대답이  없었다. 그러면 "외로움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다른 사람
에게 묻자 이 또한 정의되지 않았다. 역시 인간은 언제나  정의도 돼 있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며 
대화할 마음이 되어 있는가 보다. 외로움이라는 파동은 무엇인지, 무엇이 그것을 발생시키는 원인
인지 하는 문제에 대해 상세하게 썼는데도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에 여기에  재차 명확히 밝
혀둔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발생은 우리 생물의 자아 발달과  비례한다. 그리고 자아발달이라는 
지금까지 몰랐던 모험의 재미에 끌려 상당히 많은 천체로부터 지구로 전생을 지원한 자가 물밀듯
이 밀려들었던 시기가 있었던 듯하다.  자아라는 것을 소문으로밖에 몰랐던  민족도 상당히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자아란 어떤 경험일까?라는 것에서 인간의 육체 체험을 선택하는 것인데 여기에 
좋은 고객으로 넝쿨채 걸려들고 만다. 외로움이 자아를 발달시킨다면 자아는 무엇으로 발달할까? 
그것은 의식에의 강력한 압력이다. 극단적으로 민감한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 외부와 자신의 경계
를 의식한다. 외부의 적에 대해 계속 긴장하는 일이 발생하다. 타인과 바깥 세계와의 오차의 인식
이 발생한다. 움직임으로써 육체의 체감적 실감이 발생한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자신이 외부와 나
누어진 하나의 개체존재로 인식된다. 이런 수법이 응용되었기 때문에 묘하게 엉커진 이상한 기능
의 동물을 만들어내어 개량하고 일반적으로 진화했다고 불리는 인간과 원숭이에 이르러서 장수한
다는 점에 있어서는 전혀 조금도 진화하고 있지 않다. 어쨌든 자아를 의식시키기 위해 육체가 만
들어졌다. 감각의 압박과 갈등 요소를 늘리면 자아가 보다 발달하고 자기라는 자각의식이 생기며 
그 결과 모든 생물은 개체를 보존하려고 한다.  개체의식이 없는 생물일수록 자기 보존의지가 희
박한데 개체성을 강하게 자각하면 할수록 간단히 분해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발생한다. 이 저
항력이야말로 기획자가 인간에게 바라던 것이다. 저항치가 높기 때문에 아무리 큰 압박을 주어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고자 하며 그 결과 아주 잘 움직여준다. 움직인다는 것은 굳이 운동을 하거
나 여행하는 것만이 아니다. 아스트랄계나 멘탈계에서도 늘 안정하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며 사고 
또한 계속 움직인다. 그리고 어쨌든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개체에 있어서의  반대세력 즉, 죽음
으로부터 도망가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예의 친화력의  법칙에 따라 기획자의 분신의 일부가 우
리들에게 심어졌기 때문에 원래의 몸에 일치시키고자 하지만 그 거리는  절대로 채워지지 않도록 
만든다. 구해도 얻을 수 없고 도망갈 수도 없기 때문에 정신체는 영구히 계속해서 움직이다. 자아
라는 것을 얻는 혹성이 있다라는 선전문구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가 지구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다. 실제로 해보면 별것 아니다. 그것도 동물로 태어난 경우에는 식물로  태어난 경우보다 지각이 
민감하고 언제나 먹는 일에 쫓겨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즐기기는커녕  자신이 고립된 
개체라는 자각만 늘어날 뿐이다. 끝내 자신은 주변  인간과 똑같아지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자부
심까지 멋대로 발달시키며 자아를 발달시킨다. 그리고 발달된 우리들 자아는 간단히 붕괴되고 싶
어하지 않기 때문에 수확자 쪽에는 튼튼한 발열회로로서의 이용가치가 있다. 때문에 루슈라는 것
은 외로움 자체가 아니라 외로움이 원동력이 되어 무언가 갈등의 움직임을 만드는 일에 이용가치
가 있다. 또 같은 동기로 창조자가 인간에게 자신의 일부를 주입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사고가 
움직여준다는 결과는 같다. 보잘것없는 인간과 같은  외로움이라는 감정 자체는 어딘가의 누군가
에게도 절대로 귀중한 자원이 될 리 없다. 오히려 생물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기 위한 모든 책
략을 DLP 시스템(Divided Life Provocation System;분해된 생명체로의 도발  시스템)이라 부르며 
루슈란 안정하지 못하고 항상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의  에너지라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움직이는 
게 좋은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충동적인 운동의지 바로 그것이다. 분재를 하다보면 식물의 가지를 
일부러 여기저기 자름으로써 필요 이상의 잎이 자라는데 인간도 그와 마찬가지로 우선 자아를 발
달시키기 위한 외기 감지능력을 만든다. 그리고 자기보존 프로그램을 해두고 마지막으로 자기 보
존작용을 이용해 죽지 않을 정도의 압박이나 위험을 준다. 결국에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 우주가 생물과 우리를 계속 개량해온  목적이다. 원래 전자기나 어떤 종류의 에너지
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이것이 원칙이다. 항상 정위치  제로 정점이라는 기준이 있어 거기로 돌아
가고자 하는 힘을 이용해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 역학적인 밸런스를 일부러 깨는 수법
이다. 정신과 마음이라든가 사고라든가 기억, 영성, 또는 발달성, 오리지널리티, 가치관, 영적인 차
원의 탐색 취미, 모험에 대한 자극, 재미, 오락성 등등 대단히 거창한 명칭이 붙여진 것이 지구에 
그리고 우주 전체에 만연해 있는데도 별다른 일이  없다. 어느 차원에서도 그것들은 그저 움직이
기 위한 동기와 자극이 되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왜 그렇게 분기하면서까지 움직이는가"라
고 물으면 "멈추면 곤란하기 때문에"라는 것이 신이라는 작자의 정해진 대답이다. 무엇이 어떻게 
곤란한지 모르지만 말이다. 루슈란 진동이다.  로버트 먼로의 저작에 의하면 루슈는  다음과 같은 
국면에서 발생한다. 생물이 죽을 때 또는  죽지 않으려 할때. 생물이 상대를 죽일때  또는 생물이 
자신의 자식을 지키려 할때. 자신의 고차원의 분신 또는 생물학적인 이성과  합체하려 할때. 자기 
의식의 근원과 합체하려 할때. 이것들과 공통되는 것은? 답:이 국면에서는 절대로  생물은 안정하
지 못하고 심하게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마음이 흔들린다는  말이 있는데 글자 그대로 인간이 동
요(초조)를 발생시킬 때는 마음이 진동한다. 나아가 루슈에는 정제된 것과 불순물이 많은 것이 있
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분류되어 있나? 답:외부요인이  계기가 된 물리적 압박에의 저항력이
나 생리적으로 안정이 없는 진동보다 더 심리적이고 섬세하고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막연
한 불안과 불만, 즉 안정되지 않는 진동쪽이 훨씬 더 섬세한 것. 또 뇌가 발달하지 않는 동물에게 
공포나 갈등을 계속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외부로부터 압력조건을 더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
는데 심리적인 갈등회로를 일단 만들어놓으면 그대로 방치해도 인간 스스로 갈등을 일으킨다. 인
간의 산업과 아주 똑같은 것으로 자동적으로 해두면 관리자로서는 손이 안 가는 이점이 있다. 
                          
            
                                                   
    입장을 거꾸로 가정하면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당신이 공원에서 비둘기나 벌집을 보았다고  하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비둘기로부
터 정신 에너지를 섭취하기 위해 비둘기를 갈등하게 만들고 공포에 떨게 해서  죽고 싶지 않다고 
허우적거리면서 살고자 하는 움직임인 루슈를 수확하는 일이라면 어떻게 할까? 지금 당신은 실제 
수확되는 쪽에 있지만 수확하는 쪽에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비둘기와 벌을 전멸
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사활의 문제로 몰아넣을 것인가 하는 것이 당신의  일이라면 당신은 어
떤 방법을 사용할까? 가장 원시적인 방법은 비둘기를 죽도록 쫓아다니거나 비둘기의 목을 적당하
게 비트는 일일 것이다. 벌이라면 벌집에 살충제를 적당히 뿌리면 될 것이다. 벌집은 대혼란에 빠
져 루슈가 발생한다. 이러한 일은 일일이  당신이 손대지 않으면 안 되는 중노동이  된다. 당신이 
비둘기를 쫓아다니는 일에 지치면 비둘기는 다시 한가롭게 나뭇가지 위에서  낮잠을 즐기고 살충
제가 떨어지면 다시 가게로 사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창조자나 관리자,  수확자 또한 우
리들 인간과 생물이 만들어진 초기에는  자신이 실제로 가혹한 기후조건을  만들거나 천재지변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생물을 상대로 루슈를  짜내기 위해서는 짜내는 쪽도 압박을 주
는 작업을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조금 편해지기 위한 아이디어가 생겨난다. 그것이 
자동화이다. 압력이나 환경조건을 조정하지  않아도 생물이 제멋대로  괴로워한다면 루슈를 점점 
더 양산할 수 있다. 이 멋대로 자동적으로 발생시키는 시스템이야말로 먹이사슬의 발단이었다. 식
물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일부러 바람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일단 먹이사슬 시스
템을 만들어놓으면 나머지는 생물끼리 루슈를 자동  생산해준다. 그리고 나아가 자아까지 만들어
버리면 다른 동물에게 쫓기기 않아도 루슈를 만들고 죽지 않아도 루슈를 만들며  지켜야 하는 가
족이 없어도 루슈가 나오고 완전히 외부에서 손대지 않아도 자기 갈등과 고뇌와  그에 따른 움직
임을 만들어준다. 이리하여 자아를 발달시키기 위한 감각부가와 고차원의식의 미량주입, 나아가서
는 사회적인 종교, 경제, 도덕 등에  따른 심리적 갈등과 자아가 발달하여 관리자가  전혀 손대지 
않아도 그 생물(인간)은 스스로 점점 더  많은 루슈를 생산하는 것이다. 더글라스  애담스의 은하 
히치하이커 가이드(The Hitchhiker's Galaxy)라는 소설  속에는 마빈이라는 로봇이 등장한다. 그 
로봇은 만성적인 우울병에 걸린 로봇이었다. 마빈은  모든 문제를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고뇌함으
로써 생존하고 기능하는 일을 원망하는 로봇이었다. 이 소설 속에는 그 로봇이 왜 그렇게 되었는
지의 원인에 대해 실로 놀라운 설명이 있다. 로봇:난 인공두뇌의 신제품으로 GPP가  부착된 신형
이다. 질문자:그게 뭐야? 로봇:진짜 인간의 개성이다. 기분나빠. 모든 것이 기분 나빠. 로봇은 따문
했고 철학했으며 자신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고 모든  것에 절망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언젠가 
그 로봇은 다른 컴퓨터에 자기를 접속시켜 자신의  우주관을 장황하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
자 데이터를 받은 컴퓨터가 자살하고 말았다. 인공적으로 컴퓨터 내부에 개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성의식 발생을 위해 자아를 인식하는 회로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반성회로가 필요하다. 나아가 
고통회로와 그것을 감지하는 주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주체회로는 자아다. 고통을 주면 그것을 
감지하고 나아가 이런 고통과 따분함을 자신만이 느끼고 있다는 폐쇄적인 감각을 만들기 위한 회
로가 필요하다. 이것을 전부 탑재한  창조자의 마음에 드는 시작품인  로봇, 그것이 당신, 그리고 
당신의 자식, 당신의 부모, 당신의 애인,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  즉 인간이라는 산업 로봇이
다.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발달했다고 하는 단 한가지?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해서 특별히 만족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들의  무언가가 200년 전
과 달라진 것은 아니다. 똑같이 우주여행이 가능해졌다 해서 해결된 것은 자원, 식량, 토지문제이
며 결국 바보 같은 일이나 하는 원숭이가 그 생존  범위를 확장한 것 뿐이다. 편리하게 됐으니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착각과 망상에는 두 손 들었다.  그런 편리한 것을 만들어낸 인간의 뇌를 
칭찬하는 풍조에도 진짜 두 손 다 들었다. 뇌, 특히 기억과 사고가 해낸  일이라고는 불편함을 보
충하기 위해 질서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도구는 결국 인간
을 이 혹성의 우성종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간은 외부의 적인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일
이 없어졌으며 자연의 밸런스가 무너지고 인구가  증가했다. 옛날이라면 증식된 인간끼리의 살상
행위로 어렵게나마 밸런스가 유지되었지만 근대에 있어서는 무기의 위력이  엄청나게 커짐으로써 
혹성에서는 경솔하게 사용할 수 없으며 또 인도주의라는 위선적이고 정치적인  규제 탓으로 죽이
는 양과 생겨나는 양의 밸런스는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만약 세계 전체가 선진국과 같은 소비생
활형태로 되어 상업 목적으로 자원을 소비해나가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먹을  것이 없어진
다. 의식주의 기본적인 문제가 위협받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전쟁의 기본적인 발단이다. 우리들 
자신이 칭찬해온 뇌나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고 자부해온 사고력은 결국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것
은 단순한 트러블 메이커에 지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만든다, 가공한다, 양산한다, 이러한 일은 틀
림없이 중독되고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동물들은 적당한 곳에서 욕망이 끝난다. 그러나 인간의 욕
망은 어디서도 끝나지 않는다. 실제 동물과 인간의 차이란 사고력의 차이도 아니고 뇌 탓도 아니
다. 인간은 공복을 느끼는 기관이 복부 이외에도 여기저기에 부착된 불행한  생물이다. 동물이 당
연히 만족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에스컬레이트시키지 않으면 불만이 쌓이기 시작
한다. 도대체 무엇이 증폭시키고 있는 것일까? 없으면 없는 대로 꾸려나가면 되는데도 계속 무언
가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경제 기구와 증가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관리가 발단이었다. 그리
고 만들어낸 것에 눈을 돌리면 인류는 이상한  만족감과 자부심을 갖는다. 그렇다면 만들어낸 동
기는 인류가 자부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인가?  그것은 결국 죽음에의 공포, 공복의 고통,  욕구 불
만, 따분함이 동기이다.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원인을 보자면 분명하게 그것을 생산해
내는 과정에서 우리로부터 방출되는 갈등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지 생산해낸  것에 우리들이 편하
든 고통스러워하든 그런 것은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편리하고 좋았지만 결
국엔 불만을 갖고 병적일 정도로 너무 지나치게  개량함으로써 우리는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우
리가 살아 있는 그 근저에는 먹는 것에 대한 고가 있다. 고가 없으면 활동도 없다. 원자에도 고가 
있다. 공간과 물질의 뒤틀림, 신경이 발달한 유기체가 갖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고통감각은 아니
지만 이러한 뒤틀림은 확실하게 고를 발생시킨다. 물질의 경우에는 단순한 뒤틀림, 원래로 돌아올 
뿐이다. 식물도 고통은 있지만 가동성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꼼짝 않고 살아가면서 빛과 물을 감
지하고 죽을 뿐이다. 그런데 동물은 먹을것을 찾아 움직일 것을 요구받는다. 이 가동성 생물 쪽이 
결국엔 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통찰해보면 좋을 것이다.  즉 식물과 동물 중 
일반적으로 진화 계열에서는 동물이 상위에 위치해 있지만 식물인 채로  움직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 동물로 움직이게 되자 움직이지 않았을  때는 필요하지 않던 많은 구조와  관리가 필요해진
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육체  관리가 더욱 귀찮아진다. 움직이면  상처도 입고 고통도 늘어난다. 
움직이기 위해 신경도 발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외부의 적에 대한 감지능력도 향상시키지 않
으면 안 된다. 식물이라면 가만히  흡수하면 됐을 양분이건만 동물이  되자 일일이 움직임으로써 
포획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결국 무엇이 늘어나게  되는가, 바로 긴장이다. 결국 가동성 생
물이 된 이점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갈등과 고만 점점 더 늘어날 뿐이다. 진화 계열상 인간
이 멋대로 칭한 것으로 상위에 위치하는 동물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등생물보다 괴로움, 갈등
하는 기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은 동물 같은 건 되고  싶지 않다. 
하물며 식물따위는 더더욱 되고 싶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꾸로 식물의 말을 빌리자면 동
물이 된다는 건 힘든 고생을 일부러 짊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이른바 우주에서 여
러 혹성의 생물관리를 해온 관리자, 발안자가 애당초 왜 유기체를 식물에서 동물로 개량했는지에 
대해 직시한다면 그것이 안정되게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 만들지 않아도 
좋을 문제를 보다 많이 만들어 고통을 느끼는 생물이 발안자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즉 안정된 생
존을 하는 생물이 아니라 불안정한 생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시 맨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자. 동
물이 되면 식물보다도 몇백 배 더 갈등 요소가 늘어나기 때문에 하물며 지능을 가진 인간에 이르
면 자기 관리를 위한 혼선 요소가 늘어 동물의 몇백  배가 된다. 그리고 자아를 자아를 발달시키
는 점에서도 가동성 생물은 그 목적에 적합하다. 피부감각과 운동감각의 발달은 개체의식을 만들
어내기 때문이다. 식물에는 나라는 의식이 없지만 동물에게는 있다. 나아가 무리를  짓고 있는 동
물보다 핵가족적인 동물의 경우에 자아가  더 발달한다. 인간에 이르면 완전한  고립을 감지한다. 
고립감=자아이다. 자아란 독립성을 낳는 것이다라고 미화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립감각에 의
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시스템이다.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변화하고 발달했다고 자부하는 
것은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물학적인 운동능력  향상, 경계와 긴
장을 위해 또는 끊임없는 수렵을  위한 시청각과 피부감각의 발달,  그리고 그것들은 종합적으로 
작용해 자아=자기만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을 피부를 통해  또는 관념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지구
인이 경솔하게 일반적으로 우수하다고 부르는 생물학적 발달의 모습은 각도를  바꾸어 갈등 요소 
부가의 결과로 본다면 너무나도 명확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보다 더 괴롭힐 것인가, 육체도 사고
도 감정도 보다더 움직이고 나아가 잠들면 잠든 대로 아스트랄 여행을 그만두지 못하게 할 수 있
을까. 즉 어느 차원에서도 벌레처럼 끊임없이 안정하지 못하고 활동하는 부품이 만들어질 것인가
하는 목적으로 인간과 이른바 지적 생물이라 명명된  것은 창조되고 개량된 것이었다. 이것이 로
버트 먼로가 혼의 체외여행이라는 저서에서 말한바 제1작물에서 개량형 제4작물로 변화한 지구의 
또는 지구와 유사한 혹성의 생물계획의 발단이었다.  우리를 계획적으로 증식시킨 우주라는 구조
와 그 관리자들이 가축으로서의 우리들 인간으로부터 수확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우리들
의 고통과 자아에 의한 자타  분리에서 오는 고독감도 아니고 죽음에의  공포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여세로 몬 의지의 활동력이 에센스이다. 그리고  일정 수준 이하로 활동이 떨어지면 경고신
호로서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발생하도록 만들어졌다. 인공적인 공포 시스템을 만들어 거기를 통
과할 수 없도록 처리되었다. 놀랍게도 호흡은 단 5분도 정지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처럼 "어쨌든 
움직여라, 일해라, 쉬지마라, 안정을 취하지 마라. 항상 분발하고 진동하고 있으라"라는 지령이 유
일하게 우주가 당신에게 내린 명령이다. 그리고 도란  여기에 역행해서 현재 개량형 제4작물에서 
제1작물로 나아가 소립자 이하로 귀환하고자 하는 길이다. 즉  에너지 양산에 게임 오버 또는 탈
회를 선언하고 우주에 있어서는 도움이 안 되는  생물로 역행하는 것이다. 특별히 대단한 붓다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우선은 인간처럼 떠들고 행동해도 기본적으로는 개나 고양이처럼 걷고 앉으면 
나무처럼 되고 잠들면 돌처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으면 그저 모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도이
다. 

    사회는 인간의 불행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생전에 무묘앙에오가 남긴 정신세계 서적물의 출판이라는 문제에 관한 메모 1993. 12. 24
출판사라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 책임이라는 그럴싸한 윤리 문제를 꺼내드는대  나 또한 우리들에
게 있어서 문제인 것은 한 사람의 타오이스트가 어떤 메세지를 풀어놓았을때 그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배려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몇 명의 도인이 살해되었고 박해를 받았
기 때문이다. 더 살아 있었다면 많은 유산이  남겨졌겠지만 인류는 언제나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듯 그들 즉 우리를 죽여왔다. 때문에 문제는 도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사회가 그에
게 미치는 영향이다. 사회는 한 사람의 인간 차원의 행복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
하게 기억해두어야 한다. 사회는 인류가 행복을  찾고 있다는 거짓말 아래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어떤 한 개인이 정말 행복해졌을  때 그에게는 이해관계도 심리적 협박도 이데
올로기의 세뇌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그는 장사가 성립되지 않는 인물이 되고 만다. 그
러나 이 사회는 정보도 그렇고 물자, 애정 등 모든 것이 심리적 거래로 성립되어 있다. 그 점에서
는 이른바 정신세계 따위는 불안사업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정말 행복을 얻
었다면 거기에 따라 방대한 피해를 입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기억해두는 게 좋다. 
즉 그것은 사회 시스템, 경제 그 자체다. 하지만 경제도 장사도 놀랍게도 인간의  불행 없이는 성
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행복은 그  자체가 사회적 죄악인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모든 기업은 적건 많건, 행복 또는 행복에 공헌한다고 여기는 상품을 팔려고 한다.  내 말이 틀렸
는가? 그러나 기업의 본심은 절대 그것이 달성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행복이 달성되면 기업
은 도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업 중 하나로  정신세계 출판사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문학이나  SF소설, 하이쿠는 독자에게는 취미의  범주로밖에 안 들어가는 
것으로 인생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른바 인축무해한  것이다. 그리고 출
판사는 언제나 취미 본위의 아무 것도 안 되는 책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글자 그대로 무해한 것
이 독자에게는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세게라는 것은 본래 어떠한 의미에서든 무해할 
수 없다. 책의 내용에 따라 수백 명의 사람이 인도로  향하고 가족을 버리거나 또는 평생 빈대붙
어 사는 인생의 문제의식을 주입시켰다는 점에서 과연 그런 책은 무해할 수 있는 것일까? 문학이
나 픽션, 하이쿠가 사람의 일생을 크게 바꾸어놓는 일은 없다. 그러나 도인의 존재와 말은 분명하
게 그 범주를 넘어선 영향력을 갖고 있다. 여기서 내가 문제삼는 것은 그 뒤처리다. 

    자유로이 존재하기 위한 길
  1970년 이후 주로 인도가 배출한 몇몇 도사의 강연서적이 출판되었다. 그리고 일본에도 명상센
터가 각지에 생겨났다. 그러나 무엇 하나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단 한 사람이라도 인간 내
면의 행복에 공헌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직화된 아쉬람에의 무수한 반감을 낳
고 그리고 그들의 최초의 비전이었던 그것의 생산은  무엇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병원에 들
어간 사람이나 진정제에 취한 사람도 상당히  존재했으며 삶의 진로는 크게 빗나간  채 방치되었
다. 따져보면 출판사가 거기까지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인들의  책이 이 
세계 수만 명의 어중간한 탐구자들 가운데  국내에서도 수천 명을 생산해내는 계기를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쓴 책은 이른바 성취되지 않은 영적 차원의 책임을 크게 중화시키는 물건
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그들은 EO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저작물에 의해 인도의 전통과 
일본의 전통과 구루라는 환상 또는 그로써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것은 그
들의 진짜 탐구에 한없이 공헌할 것이다.  진짜 탐구는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일,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로 사람들은 타인과 도사로부터 계율과 규제가 주어지는 것을 선호한다. 입으로는 자
유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유를 두려워하고 있다. 오히려 타인 또는 신으로부터 
규제와 만트라와 호흡과 작법과 계율과 명령을 받는 쪽이 인류에게는 더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만약 모든 것이 잘못되었을때 사람들은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도망갈 구
멍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자기가 사는 법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이 있
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스스로 내면적인 지침을  세우기에는 너무나 불안하고 확신이 없기 때문
에 결국은 규제나 타인의 의견과 구루에 찬성함으로써 자신을 정신적으로 안정시키려 한다. 인류
는 입으로는 자유가 소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결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자 
그러면 개중에는 이 자유라는 것을 자기 편한 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경향에  따라 살아가는 것으
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착각하는 사람이 나온다.  자유야말로라고 입으론 말하지만 막상 자유를 
구사하고자 했을 때는 이른바 반체제라는 인종이 해대는 짓거리는 항상  어차피 체제를 앞세우고 
나서는 반동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이미 그것은 처음부터 자유로부터의 것이 아니라 대립요소에의 
의존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은 그럴싸한 모럴이나 종교, 수행체계라면 자신의 진짜 자
유로운 영혼을 팔아넘기면서까지 따른다. 그리고 자유를 입에 올리는 자는 자유를 정확하게 정의
짓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자유라는 단어를 내뱉은 시점에서 그것은 부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
다는 사고, 그리고 그 역사 자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자유라고  하는 관념 자체
가 이미 사회적인 의미를 강요당하면서 교육받은 사회교육의 결과이다. 말하자면 이미 그것은 자
유가 아니다. 그리고 이들 악순환으로부터 전면적으로 자유로이 존재하기 위한 길을 말해온 사람
이 크리슈나무르티이며 라즈니쉬이며 그리고 나다. 우리들이  말하는 자유란 복종도 신앙도 발달
도 자연보호도 사회개혁도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떠한가. 그리고 정신세계 관련 출판사는 어떠
한가. 모든 것이 대부분의 출판물이 단순한 호기심  또는 문학적인 기분을 고양시키기 위해 또는 
심리적 협박과 죄악감을 선동하는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단순한 폭로  기사적인 저속한 것들뿐
이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포교활도이건 세라피이건 명상이건 또는 강연 서적이건 최종적으로 그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인간에게 보다 큰 짐과  심리적 고문을 가할 뿐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정신세계라는 카테고리의 책은 대부분이 약도 독도 안 되는 것투성이다. 하다
못해 인류에게 독이 된다면 거기에는 고뇌라는 도가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그것조차 없다. 단순히 
따분한 언어의 나열, 그저 그런  매뉴얼, 그저 그런 시, 그저  그런 에세이 그것도 아니면 하찮은 
재나 잡동사니를 공중에 나타나게 함으로써 신자를 모으는 것과 같은 유치한 재주와 그 신자들의 
책들뿐이다. 그리고 단순한 종교적 허풍과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심령신앙을 뒤섞어놓은 듯한 책
들뿐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제시하고 있는  도란 규제도 아니고 자유라는 단순한  관념도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차원자체가 다르다. 그러나 몇 사람을  탈락시키기 위해 결국 우리는 인간이 멋대
로 만들어낸 사상을 예외없이 전면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이 말하는 것은 어중간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것은 당신들 인간의 생에 있어서의 궁극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
면 부정이라는 방편을 누구도 비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석가의 본질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
는 항상 세 가지를 부정한다. 즉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다라는 것이 원시경전
에서의 그의 본질이다. 중도라는 말이 범람하고 있지만 불교의 원시경전에서 석가는 중도도 아니
다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석가는 항상 세 가지를 부정한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면 그의 논법은 4
개의 부정이다. 선도 아니다, 악도 아니다, 그 양쪽도 아니고, 그 양쪽이 아닌것도 아니다라고. 놀
리적 차원에서 체험적 인식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의 진짜 본성은 무엇입니까?"라고 출
판사 사장이 질문을 받고 나서 "예 그건 아트만입니다. 의식입니다. 본래면목(중생이 원래부터 갖
고 있는 순수한 심성)입니다"라고 말한들 도대체 올바른 대답이  됐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단순히 국어사전과 같다. 하나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꾸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무언가를  잘 알고 
있다고 겉만 그럴싸하게 꾸민 사람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은 항상 한 가지를 다른 이런저런 잡
동사니 말로 그저 바꿔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출판사 사장은  무엇 하나 본질에의 통찰에서 
생겨난 것이 아닌 단순한 정의가일 뿐이다. 무언가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실
제로는 무엇 하나 진실을 몰라도  가능하다. 백과사전을 암기하면 아무리  바보라도 영리한 척할 
수 있다. 때문에 설명의 교묘함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순히 그저 그런  언어적 변환의 트
릭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말은 언어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의의 파
괴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것에서 언어를 통해 도를 제시하는 일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르는데 나
는 극구 과거의 마스터들이 오해를 부른 용어를  주의깊게 재검토했다고 본다. 이들 언어는 여러
모로 라즈니쉬에 걸려든 인간들에게도 크리슈나무르티를 읽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그들이 구루의 
독특성과 그 언어의 방편으로 해를 입은 독성 제거의 역활을  다할 것이다. 그 중 일부 인간들은 
그들이 가장 혐오할때 그 혐오하는 상대에게 해댈  말을 내게도 해댈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이
런 새끼는 뒈져버려라"라는 말이다. 그들이  정말 행복해진다면 난 기꺼이 죽을  수 있다. 그들의 
요망대로 죽어주겠단 말이다. 그렇게 해서  기분이 풀린다면 난 이 세계에서  사라지겠다. 하지만 
그런 일로 인해 그들이 행복해진 예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이후 단 한 번도 없다. "내 저서
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정신세계의 대부분 전역에 찬물
을 끼얹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독서나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또 단순한 취미 ㅣ명상
이나 좌선이 아니라 진짜 거기에 도달하는  자는 필시 1만명 중 한  명일 것이다. 원인은 지극히 
간단하다. 그 정도로까지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은 지금의 일본에는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히려 
이것은 훨씬 더 불안정한 외국에서 출판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뇌가 없다면 어떻게 불성이 필
요하단 말인가? 일본에서는 1만 부가 팔려도 대부분이  휴지쪼가리가 된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것에 돌아온다면 내 목적은 달성된다. 그  자가 다음 세대의 방편을 낳기 때문에.  이상이 출판할 
때를 대비해 스승이 남기신 보존 문서의 기록이었다.

    저자가 담담히 자신의 내력을 말하면 이렇게 되고 만다
  1994. 6. 11 나는 아무래도 모든 걸 알 수 없다. 지금 이렇게 쓰고 있으면서도 뭐가 뭔지 잘 모
르겠다. 잘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주 모른다. 무엇이든 다 하나도 모른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 너
무도 편하고 즐거우니 어떤 선사가 나를 굼벵이라 해도 난  여기서 나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
에도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는 알고 싶었다. 자신이 혼자 방에 있다는 것도 내겐 수수께끼
였다. 나란 무엇이냐하고 말이야.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의문이  아니다. 그저 이곳에 자신이 있다
는 존재, 그것이 언제나 이상하고 기묘한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이것이  이상하지 않은 걸
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거기서 대체 무얼 물어야 하는지도 나는 알지 못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나는 몰랐다. 아무래도 뭔가 걸려  있었다. 나는 
어찌하여 이 방에 있을까? 여기에 있다는  이 있음은 무얼까? 이건 의식? 그렇다면  의식이란 뭘
까? 어쨌든 나는 알 수 있는  것은 뭐든 알고 싶었다. 중학교와  고교 시절엔 부모님이 이혼하는 
바람에 생활이 무척 어려워 많은 책을 사질 못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책방에 가면 
늘 생각했다. 여기서 평생을 보내면 얼마나 많은  것을 알 수 있을까. 여기 있는 책  전부를 읽는 
데 얼마만큼의 세월이 걸릴까? 아 책에 묻혀 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학교 
공부는 질색이었다. 누구나 다 그렇듯이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공부하는 것을 좋아할 
뿐이었다. 의문 같은 게 생기지 않으면 그 또한  좋은 일이지만.... 내게도 역시 남의 영향을 받은 
배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원인을 보라는 가르침이었다. 결과가 아니라 원
인을 보도록 배운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원인이 있으니 그걸 보라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까불지 마, 아니 원인 같은 걸 추구하면 아차 하는  사이에 궁극의 원인 탐구가 되고 말아하겠지
만 당시는 불쾌해지면 끝까지 자기 분석을 통해 원인을 파고들려고 했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 왜 
싫어졌는지? 그건 왜 그런지? 원인을 찾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원인에 가 닿으면 적당히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는 정도로 끝나지만 나는 뭐든 끝까지 파고드는 성질이었다. 끝없이 원인의 
원인의 원인.... 이런 식으로 원인  찾기를 하니 밤새워 애를 써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나의 의문은 늘 이랬다. 가령  자신이 불쾌한 느낌을 가졌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원인이 없다면 
내게 그 원인이 있는 걸까? 자신에게 나쁜 생각이 있다면 그 생각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뇌? 정보? 의식? 하지만 모든  근원은 자연계에서 시작해. 그럼 자연계는 
어떤 짜임새로 움직이는 걸까? 학자들은 법칙이라고 말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잘 짜여  있단 말
이야. 종교가들은 그걸 신의 탓으로 돌리지만 내겐 신 같은  건 아니고 분명 뭔가 인격적인 의지
도 아니지만 어떤 의도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여 이것이  나의 그 후 20년 간의 근본적
인 의문이 됐다. 어쨌든 자연을 보면 생존을 위해 참으로 멋지고 묘하게 짜여져  있다. 그러나 개
중에는 별로 효율이 높다고 할 수 없는 생물도 있는데 그런 건 차치하고 대체 진리란 뭘까? 선이
든 EO든 이건 그저 용어가 다를 뿐이다. 존재의 이유, 근거, 목적, 또는 진리, 주인공, 본성....뭐든 
나는 세계에 대한 단정의 계기를 찾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사는 방식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쉽게 말하면  진리 또는 이유를 알기만 하면  장땡이지하는 것이 내 본심은 
아니었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랐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도 몰랐다. 이따금 그럴듯하
다고 여겨지는 생활방식은 어김없이 오래가질  않았다. 생활방식 찾기에 앞서  나는 이유 찾기를 
시작했다. 결국 만물의 방향성, 그  발생 원인, 목적을 알고 싶다는  순수한 탐구심 같은 건 말짱 
거짓말이 된 셈이고, 결국 난 그걸 알고 나서 누구보다 실수 없이 잘  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다름아니라 올바른 생활방식, 또는 올바름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와 
같은 뜻이다. 선에서 말하는 사실이란 차원과는 크게 다르지만 말이다. 먹고  자고 일학 결혼하고 
똥 싸는 그 사실 그대로를 매일 웃으며 할수 있었다면 난  탐구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
컨대 재미가 없으면 난 살 수 없었다.  왠지 시시한 것은 싫었다. 물론 그건 나  개인의 문제이고 
남이 재미있어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철저하게 기분
이 나빴다. 기분 나쁜 것에 둘러싸여 있으면 누구든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에서 전문대로 진학하는 시기였다. 재미있는 것을 찾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인생이냐. 그래서 재
미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했다. 그러나 모두 쉽게 싫증이 났다. BONO BONO(일본 만화에 나오는 
수달의 이름)가 말하듯이 처음에만 재미가 있을 뿐 반드시 언젠가는 끝나고 마는 것이다. 당시 내
게는 Sunadorineko씨(일본 만화에 나오는 고양이) 같은 어른이 없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재미있
는 것도 끝이 있고 괴로운 것도 끝이 있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철학이다, 우주다, 바
그완 라즈니쉬다, 라고 해봐도 청년은 좌우간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이고 언제나 의문투성이 꼬
마였던 것이다. 언제나 존재의 이유에 대한 의문이 달라붙어 있었다. 아하  이대로 좋은 거로구나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라즈니쉬나 크리슈나무르티의 책도 그래서 떠났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한 인간의 의식상태로서는 이상적일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왜 붓다가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왜 
모두가 복잡하게 깨달음이다 뭐다 하는가?  이렇듯 내 의문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나는 생각하기를 아주 좋아했던 것이다. 생각하고 상상하고 추론을 확대하고 깊이 파고
들고 하는 것이 좋았다. 즐거웠다. 좋으니까 생각하기만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무심을 설하는 라
즈니쉬의 책이나 그런 부류의 책에서는 10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라즈니쉬는 이따금 들여다봐도 
만담 같기만 했다. 당연히 선에 관한 책은 전혀 산 적이 없다. 열네 살  될 무렵부터 깨달음을 구
하다가 그걸 단념하고 잊은 전문대 시절의 스물넷부터 서른넷 그날을 맞기 전까지의 10년은 나는 
전혀 오도와는 동떨어진 분야에 흥미를 느꼈다.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이 어디까지냐였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이른바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은 해내는 것을 보고 그 가치야 어
떻든 될 수 있다면 나도 다 되어보자고 생각했다. 육체에 대해 온갖 통제를  하는 수행자들, 실험
실 안에서 불가능한 물질현상을 일구어내는 과학자들. 기억술, 최면, 최면학습, 투시, 텔레파시, 염
력, 예지 등. 그런 것이 전지구적으로 인간과 존재 전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해보려는 여
러 조직들이 서양과 동양에 있었다.  선과 다른 것이 있다면  중간과정으로서 신비학을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방법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 역시 결국에는 그런 실없는 것은 통과
해버린다고 했다. 실없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손대지 않았으면  더 좋으련만 그러나 역시 나는 깨
달은 따위에는 안중에 없고 인간의 가능성에 흥미가  있었다. 정말 끌어내지지 않은 뇌의 가능성
이 90%나 있다면 그건 참 아까워, 그걸 전부 끌어내보자하고 말이다. 결국 난 뭘 찾고 있었는가? 
인간의 가능성이란 것도 이제 와 생각하면 그것 역시 내 거짓부렁이고 진짜로는  그 가능성을 통
해 인간이란 무엇이냐가 테마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인간이란 무엇이냐라는 것은 이 또한 알기 
쉽게 말하면 역시 나란 무엇이냐라는  소박한 의문의 투영이었다. 별로 요란한  의문이 아니었다. 
역시 내 몸의 불정확성이 싫었던 것이다. 불확정으로  남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은 자기 존재와 
죽음이 싫었던 말이다. 이건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래 이 모두를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
는 자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하고 말이다. 말할 것도  없이 바그완 라즈니쉬도 선도 당시의 내 
의문에서는 논외였다. 그들은 설명의 차원에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가 구한  것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 설명을 납득할 수 있으면 그에 따라 살아가는 기준이 얻어진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도 역시 아무것도 복잡한 게 없다. 쉽게  말하면 헤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
는 헤매는 것이 싫었다. 그것이 아마 탐구의 시작이었을 게다. 나는 어디서나 망설였다. 어디에서
든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은지 몰랐다. 세상에서는  상식이나 습관으로 일을 해나가지만 나는 무엇
이 옳은지 늘 헤맸다. 늘 정말 옳은 것일까하는 의문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되는 만성적인 노이로
제였다. 한 가지 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헤맸다. 무엇을 보면서도 이게 볼 값어치가 
있는 건가 없는 건가 하고 헤맸다. 언제 어디서나 줄곧 헷갈리고 헤매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언
제나 불안하고 매사에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지나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끈질기게 파고드는군하는 말도 하는 바람에 난 묘한 자부심도 가졌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이라면 
전혀 파고드는 일 없이 생각도 하지 않고 의문도 없이 살다 죽지만 난 그런  삶이 싫고 재미없었
다. 노이로제라도 좋다고 여겼다. 생각을 계속하는  가운데 겨우 난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게 생각하기는 좋은 일이지만 헤매기는 고통이었다. 여기에 선과 찰학의 두 길이 있다. 
난 철학이었다. 선은 헤맴을 끊는다. 하지만 그런 비과학적인 길은 매력이 없었다. 그래서 헤매지 
않기 위한 논리, 절대논리를 구했다. 그렇게 하면 분명  헤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절대의 옳
음, 진리, 존재 또는 자기 이유나 목적, 그런 명칭은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그걸로 두 번 다시 사
는 방식에서 헤매지 않고 지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선이나 도를 
무시했고 흥미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치의  초월이 아니라 초월적인 이치야말로  당시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별게 아니다. 결국  나는 고뇌하거나 괴로워가기 
싫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끝까지 생각하여 진리를 알면 더 이상 헤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다. 지금에야 정말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인류의 거의 대부분이 바로 그 
한복판에 있다. 진리를 알아 그것으로 헤매지 않게 하자는 것. 나 자신이 남의 말  같은 건 할 수 
없을 만큼 그 무렵은 사고병에 빠져 있었단 말이다. 만약  그 이치의 절대 진리를 찾지 못했다면 
나는 아직까지 탐구를 계속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발견된 그날 난 더 깊은 구렁
텅이 속으로 밀려 떨어진 것이다. 우주 존재의 이유나 목적만  안다면 더 이상 헤매지 않고 즐겁
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인생과 우주에 대해 설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주
는 무엇을 위해 지어졌고 무엇을 위해  가는 것이니까 우리도 무엇처럼 살면  된다고 누구에게나 
말해줄 수 있는 절대의 철학, 절대의  종교를 확립할 수 있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우주 
최하의 지옥 같은 공안이었음을 그때는 알 턱이 없었다. 꽤나 많은 일들이 5년 동안 어지럽게 일
어났다. 우주인을 만났다는 인물을 만나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지만 그 체험이 진실이라 해도 그
들은 결국 여행자에 불과했다. 그들은 아주 먼  차원이나 공간을 여행했다해도 그 전체상을 파악
하지 못하고 있었다. 채널러라고 자칭하는 영매를 끈질지게  잡고 늘어져 그가 접하고 있다는 우
주인에게 우주 발생의 목적은 뭐냐고 다그쳐도 우주인은 아무 대답 없이 어물어물 넘어가기도 했
다. 드디어 나는 나의 뇌를 그들에게 빌려주는 방식을 터득했다. 말하자면 내가 채널러의 한 사람
이 된 것이다. 망연히 텅 빈 상태로 친구 집에서 늘어져 있을때 나는 의식이 하얗게 되면서 로봇 
같은 말투로 친구에게 말했다. 괜찮으니까 무엇이든 물어봐. 그땐 뭔지 공백의  의식 수면에 누군
가 물음을 던지면 그 파문이 또  다른 무늬를 발생시킬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난 내 인격에서 쑥 
빠져나왔다. 그리고 친구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의 뇌는 멋대로 비전을 낳고  말하면서 내가 전혀 
모르는 별의 이름을 들먹이고 철학을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무얼  말하는지 몰랐다. 그
저 저절로 말을 하고 있었다. 다만 말투가 내가  아니었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인간이 아니었다. 
난 그 후 늘 친구에게 그 누군가에게 아주 꼬치꼬치  질문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몇백 페이지
나 되는 기록이 나왔다. 그것들은 이제 어디에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무릇  들어보지도 못한 내용
들이었다. 그러나 우주에 무수히 많은 다른 세계와 거기에 사는  자들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을 알
았다. 그것들이 나의 뇌가 멋대로 만들어낸 것인지는 맨 먼저 검증되었다. 내가 알  턱이 없는 것
들만 그 누군가가 지껄였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그것들은 천문학자에 의해 발견되거나 연구자
에 의해 발견되곤 했다. 금성탐사기의 마젤란 사진이  거의 NASA가 손질을 해 고친 것들이라는 
말이 나왔다. 미란다의 표면도 수정되어  있었다. 지구의 사람이 우주 속으로  날아들어갈 때마다 
우주비행사는 항상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에서 암스트롱이 처음으로 소리낸 말은 이것은 작
은 한 걸음이지만이 아니었다. 사실 아폴로 11호 이전에 이미 미국은 달에 도달해 있었다. 게다가 
우주비행사가 최초로 입을 열어 한 말은 이랬다. "뭐야 이건 여기 온 것은 우리가 최초가 아니잖
아!" 그는 달의 산맥에 널려 있는 무수한 월면기지와 비행물체를 목격한 것이다. 이  교신 기록은 
어쩌면 그걸 비밀로 보관하던 기관이 민간단체와의 소송에 패하는 바람에 NASA의 비밀기록으로 
출판되어 있을지 모른다. 바이킹(1976년 미항공우주국이 화성의 생명체 생존 여부를 탐사하기 위
해 화성 표면에 착륙시킨 두 대의 우주선)은 나의 세대에서는 아주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신문의 1면을 장식한 화성 사진이 매일매일  달라졌고 4번이나 색채가 수정된 사실을  누가 알고 
있을까? 맨 처음 화성의 하늘은 파랬다. 다음날 신문에서는 하얀 색이었고 그 다음날에는 분홍빛
이 되어 있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1950년대에  이미 화성에 탐사선을 보냈다는 소문이 참인지 
거짓인지 모르지만 여하간 나돌고 있다. 이 태양계까지도  우린 전혀 거짓의 천문학을 배운 것이
다. 내가 그렇게 그들과 교신하는 가운데 우리 지구인이 실은 다섯번째 행성으로부터 실험생물로 
이식되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말하자면 현재 아스테로이드대(Asteroid zone;소행성이 산재해 있는 
우주의 부위를 말하며 화성과 목성의 궤도 사이에 있음)에는 일찍이  행성이 있었는데 행성간 전
쟁으로 분해되어버렸으며 그때 살아남은 것이  지구인의 뿌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해서 처음 
듣는 역사를 기록했다. 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언제나  그런 역사나 진화의 사건들 밑바닥에 있는 
본질, 우주란 대체 무엇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떤 존재인지가 의문이었다. 위를 보면 엄청난 진
화의 거리가 있다. 불교의 부처 따윈 그 랭크 속에선 피라미같은 존재였다. 정말  기가 막힐 만큼 
위에는 위가 있었다. 무수한 은하계를 통솔하는 의식체들, 소우주 관리자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고 죽고 어찌하면 되는가? 헤맴은 갈수록 깊어질 뿐. 그들 
우주 존재의 배려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가르치는 학습 내용이 서서히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동시
에 인간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관점, 생물이나 다른 차원에서 다
각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나의 혼란은 커지기만 했다. 많아 알면 알수록 현실은 더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렇게 다각적인 지각이  있어서야 현실이 무엇인지? 도무지 헷갈릴 뿐
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현실 같은 건 없어, 그건 그저 지각 정보의 집적에 불과해." 그들에게 난 
말했다. "좋아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그 지각 정보를 우린 어떻게 처리하면 좋지?" 그들  왈, "뭐 
어떻든 그걸 가지고 멋대로 즐기려무나." 나는 끈질지게 파고들었다. "이 우주의 목적은 뭔가? 그
걸 알면 난 헤매지 않고 살 수 있소." 그들, "지구의 아가야, 알고나서 헤매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가르쳐주지. 하지만 아는 것이 곧 헤매지 않는 것이 되지 않는다는 걸 나중에 안들 그땐 이미 소
용없어." 나는 그럴리 없다,알면 만사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만약  만물에 대해 다 알면 
왜 헤매겠는가? 나는 신나게 모든 것의 원인을 안 사람이 된다. 그런데 그들은 나중에 내가 돌아
버릴 것을 예측하여 신중하게 일을 진행시켰다. 말하자면  인간 같은 생물의 두뇌로는 처리할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한꺼번에 입력해버리면  토해내고 만다. 조금
씩 나는 이상한 우주민족을 만나게 됐다. 어느 편인가 하면  좋은 우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겉
도는 자, 우주에서도 근성이 비뚤어지고 까다로운  철학자나 무료하고 따분해서 야단인 작자들이
었다. 은하의 뒷골목에서 나는 페가수스(천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페가수스라 불리는 별자
리. 어원은 그리스 신화에서 메두사의 피와 바다의 물거품으로 탄생했다는 신비의 말)나 시리우스
의 의식체들과 사귀게 됐다. 그들은  정말 지구나 생물을 물건으로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사고를 마치 자기 육체처럼 다루었다. 우리의  사고는 그들에게는 마치 책상과 같은 물질
이었다. 그들은 생물이 자아내는 사고패턴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때로 그것을 자아내
게 하려고 무수한 생물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무수한 별을 부순 일도 있었다. 그들에게 은하는 그
저 조그만 시험관에 불과했다. 그래도 나의 의문은 잠들지 않았다. 그런 이들보다 더 위의 차원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우주의 끝은? 혹은 중심은? 그리고 만물의 원인과 목적은? 그들은 말했
다. 우주는 그저 분해와  통합을 되풀이할 뿐이다. 의미  같은 건 없다. 목적도  없다. 난 말했다. 
"그럼 왜 있느냐? 원인은 뭐냐? 분명히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들, "그따위 것 알 게  뭐냐. 무엇
보다 우리의 역사도 이 우주에서는 현재 130대째란 말이다. 그 이전의 일은  우리도 몰라." 난 더
욱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말야, 아무  근거 없이 생물이나 물질이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 않
나?" 그들,"그것을 꿰뚫는 단 하나의 진리는 있지, 하지만 자네가 그걸로 만족할까? 그 진리란 이
유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 말하자면 우주는 존재하려는 의지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의
지를 가속하기 위해서라면 우주는 다양성이든 오락이든,  고뇌, 공포, 성취욕.... 그 무엇이든 모든 
생물에게 프로그램시켜놓는다. 존재에의 의지가 우주의 근거이다. 그러나 그 근거의 원인은 없다. 
그저 그럴 뿐이다. 다만 그 존재의 의지에는 상대적인 원인이 있지. 그건 무의  영역에의 공포 내
지 반발의 힘이야. 언제 한번 자네를 그 영역으로 데려가주지." 그리하여  나는 먼저 심연의 민족
과 어울렸다. 거기는 무한한 불모성의 차원이었다. 언제까지나  변화도 생명도 없었다. 혼탁한 공
간이었다. 거기서 우주를 바라보면 우주는 무의미하게 빛을 발하는 그저 둥근  공이었다. 그저 엄
청난.... 실감으로 안 것은 거기에 서식하는 거의 무한한 생물, 물질, 무엇이든 모두 일정한 프로그
램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멈추지 말라, 계속 움직이면서 
존재하라, 무는 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윽고 나는 동결의 차원으로부터 절대 암흑의 무 속으로 밀
려들어갔다. 그건 이미 말이 꽉 막혀버리는 지경. 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로 다시 방으
로 돌아왔다. 잠시 후 나는 무와 이 세계를 비교해보았다. 우주의 아득한 저편에는 무. 그리고 여
긴 유. 그래서 어쨌단 말아냐. 난 뭐란 말이냐?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대체 나는 뭐
냐?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난 아무가치도 없는 모래알에 불과하다. 있어도  없어도 되는 것
이다. 하지만 비단 나뿐인가. 그렇다면 인류도 우주까지도 아무래도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저 
조그만 공이 무 속에 떠  있어 죽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것도 머지않아 꺼지고 다시 
또 생겨난다. 그리고 다시 꺼진다. 이런 시시한 풍경을 대체 어디에 있는 누가  보고 즐긴단 말인
가? 세상은 인생이나 우주나 진리에 대해 요란한 이치를  말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내게는 하나
로 보인다. 어떤 이치나 진리도, 어떤 경지도 살려는 의지의 노예,  그리고 핑계, 정당화에 불과하
다. 그리하여 나의 철학은 끝났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던 날
  우주의 목적-존속유지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살려는 의지를 발생하는 일 및 활동  정지의 
회피를 영원히 계속하려 하는 일. 우주 자체의 발생원인-완전히  불명. 회답 불가능. 예상되는 우
주의 최종형태-무. 우주의 존재의미-제로,없음.  아인슈타인은 만년에 "신은  왜 우주를 창조했는
가"하고 계속 물었다고 한다. 어떤 등식을 발견해도 거기에 이콜(=)의 기호가 왜 존재하는지 모르
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식의 발견은 응용과학으로 발전하는 일은 있어도 무엇하나 우리를 채우지 
못한다. 채워지지 않는 것, 그것이 실은 우주가 의지하는 바의 책략이었다. 채워지면 우주는 소멸
하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불만을 프로그램시키기 위해 결코 평균화되어 
채워지지 않는 것이 원자의 활동이나 만물의 회전을 만들어냈다. 채워지면 활동은 정지한다. 따라
서 우주는 가까워지지만 일치될 수 없는 두 개의 극을 영원히 분리시켰다. 그것이 음양이다. 일치
해도 다시 분리되고 이것이 다시 반복된다. 중심이 있기 때문에  원주가 있는데 이 두 개가 일치
되면 모두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모든 이원성은 창조의 근원이다. 그것을  합체로의 갈등상태에 
두면서도 합체할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원소도 생물도 남녀도, 혹성과  항성도, 모든 것이 
분리된 채 활동하며 회전하고 영원히 돌아간다. 이것이 윤회이다. 이것은 다시  태어나는 일이 아
니다. 그만둘 수 없는 종식되지 않는 활동 자체를 윤회라고 한다. 그러나 그  활동 자체가 없으면 
안 되는 이유를 우주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무 정당한 근거도 이유도 진리도 
모른 채 그저 생존할 뿐이다. 안타깝게도  영혼은 사라지지 못한 채 존재를 강요당하고  있다. 그 
생존은 반드시 우리들에게도 쾌적의 연속이 아니다. 언제나 소멸에의 공포를 갖고 성내고 공포에 
떨며 따분해하고 헤매며 갈등하며 승려는 무언가를 찾고 세속 역시 무언가를 찾으며 우주인도 무
언가를 찾고 있다. 정말로는 모두 이젠 사라지고 싶건만 살고 싶은 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감각이나 지성이 끊임없이 즐거움 속에 있도록 얼마든지 설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난 이 지구와 우주라는 세계를 냉철한 눈으로 보았다.  천 개나 되
는 이유는 무의미해졌다. 철학과 과학도 인간 존재는 물론 신도 사라졌다. 그들은 모두 그저 충동
적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인생의 이유는 전부 그저  생존의 구실이다. 난 진절머리가 났다. 무엇 
하나 즐거운 게 없었다. 뭐야, 의미가 없다면 쉬엄쉬엄 하자고가 되어도 좋겠지만 그렇게 안 되는
게 이 지구였다. 모두 아는 척  의의를 떠들어대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는  자신을 포함해 
우리들의 사고활동은 그저 미생물의 발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외의 철학
은 가능한가? 선이라도 좋고 비트겐슈타인이라도 하이데거라도 아무거나 좋지만 철학  또는 논리
로써 세계의 절대진리를 완전하게 반론 불가능하게 설명해낼 수 있는 게 정말 있을까? 예를 들면 
무의미가 아니라 전부가 옳다라는 우주철학을 갖고 온다면 이번에는 전부가  옳다라는 기준 또한 
없어지고 만다. 선악도 없어지기 때문에  개선이나 진화도 없이 어떻게  살아가면 좋은지 기준도 
없이 멋대로 살라는 게 된다. 방황도 혼란도 전쟁도 살인도 모두 그대로 좋은게  된다. 그래서 전
면긍정은 전면부정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그러면 전면부정하면 역시 우주는 그냥 존재함이 된다. 
그냥 없음이라도 좋다. 어느 쪽이건 그냥은 이유가 아니고 진리조차도 아니다.  이런 잡다한 얘기
를 했지만 만약 그냥 오로지라는 것을 선이  말한다면 필경 선은 선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냥이 그냥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깨달음에는 목적도  의의도 근거도 가치도 없다. 
그런 것은 더 이상 어찌 되든 좋은 것이다. 세상도 선사도 어찌 되든 좋은 것으로 단지 소란피우
고 있을 뿐이다. 우주라는 것이 인간에게 경험시키는 담담한 비정함의 행복 또는 광기란 이와 같
은 것이다. 내가 깨달았을 때 주변의  모든 것이 깨닫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던 날, 주변도 세계도 우주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저자 후기 어떤 탐구자에게 부치는 편지
  나는 결코 복잡한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인류가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든 엉클어짐
을 설명하려 한 결과 복잡하게 보이는 말로 되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복잡한 것은 무엇 하나 쓰
지 않았다. 가끔 나를 통해 씌어진 것들을 흘깃 보고 난해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러나 일찍이 페허의 붓다들과 그 잡다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본서만큼  정중한 본질적인 의미에서
의 종교서는 존재하지 않았을 터이다. 왜냐하면 난  현실 속에서 우리들의 내면에 일어나는 심리
적인 에고와 공포와 그 투영으로서의 행동 패턴을 그래서 모두 실례를 들어가며 설명했기 때문이
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말했다. 그것은 전적
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현실적 차원을 다루고 있다. 사적 표현도 아니며 심령의 세계도 학문의 세
계도 아니다. 그야말로 사회와 개인의 혼란스런 모순을 난 그냥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러한 내 
지적에 대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반론을 난 전부 앞질러  그냥 뭉개나간다. 왜냐하면 사고가 
어떻게 반론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문서에는 가끔 우회적 표현이 나온다. 
이렇게 말하면 세상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추측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싫증이 날 정도로 똑같은 반복을 인간이 
되풀이하는 것을 봐왔기 때문에 승려나  산야신과 일반인이 무엇을 반론할지는  추측할 필요조차 
없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결국 일반인에게 보지도 못할 광명에 대해 말하고 못하는 것을 나
무라는 사디스트일까? 어떤 의미에서  도사란 방편이 역사상 가장  많이 사용되어왔다. 나무라고 
비난하며 어디선가 전면적으로 버리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말이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그렇게 간
단하게 관념을 버릴 수 없다.  특히 도시 같은 곳에서 소박함이란  생존 경쟁 속에서 평가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죄책감에 대해 잠깐 관찰해주기 바란다. 죄책감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
인지. "죄책감? 나한테는 그런건 없어"하고 말하는 사람은 붓다들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
를 들면 승려, 그것도 선을 하는 일견, 무분별한 사람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수행하고 있는 것일
까? 무엇인가 잘못되었어, 고치지 않으면  안 돼, 무심이지 않으면 안  돼, 그렇듯 죄책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죄책감이 있다고 보는가?  아주 작은 일상에서도 죄책감은 무
수하게 돌을 던지면 맞을 정도로 굴러다니고 있다. '전철 안에서 노인이 앞에 서  있지만 그저 자
는 척한다' 따위의 싱거운 사회체제를 비롯해 섹스를 하다가 상대보다 먼저 가 버려 미안하게 생
각하는 죄책감. 한 가지 극단적 논리로 죄책감이 없는 범죄자들 역시 타인에 대한 죄책감은 없어
도 자신이 범죄를 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있어서 죄책감을 갖고 있다. 그것은 굴
절되어 있지만 본인의 내부에서 두 개의 사고가 싸우는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열등감의 산물이다. 
그것은 또한 우월감이다. 뉴욕에 있는 범죄자는 그냥 신문에 실리고 싶었다는 굴절된 우월감에서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런 타입의 죄책감도 발생 원인은 아주  단순하다. 그것은 불
쾌감을 상대에게 주었다고 믿어버리는 경우와 불쾌감을 자기에게 주었다고 믿어버린  경우 두 가
지다. 그러면 무엇이 그 불쾌감의 정의일까? 그것은 생물학적 고통일 수도 있고 단순히 사교상의 
예절을 무시한 정도의 무해한 것까지 여러 케이스가 있는데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장황하
게 설명하는 것보다 본서에서 시리우스의 지성체가 신학론을 깎아내리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 후
반에 종합된 것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즉 불쾌감의 정의는 간단하다. 복잡함 따위는  전혀 없
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당신과 타인이 편치 않은 것이다.  그 외의 정의는 쓸모없다. 그냥 그뿐이
다. 범죄자는 내면이 편치 못해 범죄를 향해 달리고 평범한 사람 역시 내내 편안치 않다. 그 원인
은 기본적으로 안정을 이루기만 하면 될 것을 일부러 편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하잖은 모럴, 오락, 
제품, 산업 그리고 가치관이 범람하고 또 거기에 끌려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왜 끌려다니는 것일
까? 그것은 외부사회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허점을 이용당하는 당신들에게 원인이 있다. 근
본적으로 무관심을 실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협박이나 자극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그
리고 깨달음이란 의미에서 완벽한 무관심의 안정된 기반을 이루는 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의 부재
다. 난 육체의 고통에 대해서는 처리하는 것이 괜찮다고 본다. 격심한 고통에 이르는 치통 따위는 
고치는 게 좋다. 그러나 육체를 지나치게  보호하는 것은 안 좋다. 그리고 죽음  따위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말해도 그 두려움이 우리들을 노동으로 몰아세우고 종교로 몰아세우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노동이라면 굳이 과도하게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무위한 조용한 시간에는 신비학 서적 따위를 읽지 말고 그냥 충분히  안정을 취하는게 명
상의 본질이다. 선사 같은 곳을 가면 편안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당신들의 좌선이나 포교활
동, 테라피 또한 결국은 이대로 있어서는 내  내면생활은 안 된다는 손님들의 죄책감을 미끼삼아 
장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당신들에게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우선 당신들이 안정
을 찾지 못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당신들의 가치관이 있다고 주장해댄다. 그 속에 화상이 있고 
선이 있고 세기말이 있고 사회가 있고 이른바  세계의 모든 것이 당신을 편치 못하게끔  하고 있
다. 평범하고 평균적인 인격자, 사회인에 적응하라는 최소한의 모럴조차도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
들고 만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그 최소한의 사회인이 못 되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최소한의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교육받은  미치광이가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지고 보면 그 평균적인 사회인이라는  인격자 나부랭이가 다수결로 이 사회를 만들
어낸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이긴 하지만 몇천 년 동안 인류의 내면에 있는 불행을 박멸시키는 데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근본적으로 불행의 원인을 제거한다면 즉 이것은 
나와 붓다들의 일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우리들의 취미이긴 하지만 말이다. 만약  그걸 한다면 그
것은 사회의 모든 이해관계를 무효로 만들고 말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필경 죽음의 공포를 먹이
로 한 제품, 산업, 종교, 테라피로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들은 무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부적응에의 공포를 음식물로 삼는 정신병원과 테라피스
트, 선사까지 그 전부를 파괴하는 일이다. 굳이 폭탄으로 파괴할 필요는 없다. 파괴하기 위해서는 
수요를 정지시키면 된다. 마치 원자력발전소  만드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싶다면 건설에 반대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전력수요를 없애면 되는 것처럼.  즉 기업과 가정용으로 된 무공해 발전기를 
팔면 된다. 당신들은 라즈니쉬와 어딘가에서 도사라 일컬어지는 불성발전소에  의존하고 만다. 난
는 당신들 혼자 불성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그렇게 하면 중앙집권적인 도사에 의존할 
필요없이 그들은 도산한다. 물론 나라는  존재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을  하루빨리 붓다로 
만들고자 한다. 붓다들과 상거래할 수 있는 상인은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훔
칠 도둑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지이기 때문이다. 가장 깊숙한  내면에 있어서.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이 탐구자들에게 존재하는 죄책감을 경감시키고  싶었다. 그것은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
다.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죄책감들이다. 보통 
사회에 적응하는데 위와같은 모토는 필요없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
에 젊은 시절부터 정신세계 따위에 발을 들여놓았을 게  분명하다. 틀렸는가? 누가 반론할 수 있
겠는가? 충분하게 일반적인 생활을 들겼으니까 다음엔 새로운 세계를 찾아  정신세계에 들어섰다
고 나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 또한 만족할 수 있는 사회적인 틀을 벗어나고 말았다
는 의미에 있어서 그는 사회 부적응자인 것이다.  통상의 만족에 만족하지 못한 난 탐욕스러웠던 
것이다 어떤 경과이건 간에 상식사회의 최소한의 모럴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또는 상식사회는 적
응했더라도 그 사회가 불만스러웠다거나 그 어느 쪽이든 간에 사람은 정신세계에 들어선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상식적인 사회인으로 지금도 거리에서 여자나 꼬시고 있을테니 말이다. 또
는 나이들어 친구를 사귀어 장기라도 두면서 놀든가 할머니가 되어 손자와 놀고 있거나 둘 중 하
나다. 그러나 그러한 틀에 적응하지 못해서 절과 인도로 떠나는 것이다. 결국 그것도  안 돼 드디
어 이름 없는 붓다 가운데  하나인 EO 같은 사람과 교류를  갖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과정을 보고 도사들의 과정을 보고 더 이상 전통적인 그 어떤 수단이나 형식도 효력이 없다고 생
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미묘하고 쓸데없는 말들,  형식, 논리를 배제시키기 위해 이처럼 
방대한 쓸데없는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그것이  페허의 붓다들과 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였다. 
그 속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쓸데없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이 붓다 탄생
을 위해 쓸데없는 것인가 하는 설명의 산이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제시한 새로운 우주론을 당신
에게 기억시키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당신의 중심 이외의 모든 우주도 타인도 사회도 도와 선조차
도 당신 본인의 의식, 무, 존재성에  비한다면 우주의 존재물 그 자체가 전혀  본질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만물 그 자체가 당신의 본성과는 인연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조합시킨 개념, 사회, 인간
성 등은 아무런 본질도 아니다. 사실은 당신의 단순한 존재상태 그대로가  사마디이다. 그리고 그 
사마디는 최종 단계에서는 그냥 무다. 거기까지 무가 된다면 그곳에서 존재로 귀환했을때 당신은 
벌거숭이로 아무런 걸림없이 존재와 만난다. 그리하면 만물  전부가 광명 그 자체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완전하게 부정되고 완전하게 무로 된다는 것은  당신의 영혼도 내던지고 공허가 되는 것
이다. 공허 자체는 사실상 죽음이다. 그것은 우주적인 레벨의 완전한 죽음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
인지 그곳에서 귀환하는 자들이 있다. 바로 우리들이다. 거기서 귀환하면 세계  그 자체를 잃어버
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역설적인 현상으로써 세계를 통째로  얻고 만다. 그러나 얻기 위해 심리
적으로 죽어보자는 것으로는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이러한 꿍꿍이속이 있는 에고 트릭을 교
묘하게 빠져나가기 위해 사인선이라는 메소드가 있다. 그건 오로지 무로 향하는  것. 이유도 목족
도 없다. 성과도 확인하지 않고 편하게 있을 뿐이다. 명상에서 돌아오면 당신은 순수하다. 처음에
는 잘 안 되더라도 몇 개월이 지나면 당신은 명상할 때마다 무언가를  성숙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욱 텅 비게 된다. 그냥 무거운 짊이 덜어질 뿐이다. 그 가벼움이 드디어 자신
의 안정을 이루는 데 있어 당연한 것이 된다. 그것은  언제라도 어디에서도 누구와 있어도 또 홀
로 있어도 항상 전혀 아무것도  모르고 알지도 못하고 찾으려 하지도  말 것이다. 침착하게 그저 
있을 것. 그러나 정말 그처럼 존재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전혀 없는 즉 무의미와  무존재, 그저 존
재한다라는 의식조차도 사라진 무로 사라지는게 낫다. 사는 것은 나중이다. 죽는 것이 먼저다. 이 
도의 명백하고 근원적인 사실을 일별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현재의 나와 교류를 갖게 된다. 그러
나 본질적으로 나는 걸어다니는 한 채의 절이다. 그 입구는 대단히 좁다. 나는 일본의 대학방식을 
채용한다. 미국처럼 들어가는 건 간단하고 졸업이 어려운 라즈니쉬적 산야신은 사양한다. 나는 일
본인이고 일본의 무술도장과 대학의 전통에 따라 좁은  문으로 한다. 그러나 그 출구는 세상에서 
가장 클 것이다. 내 문서란 단순한 입시 참고서이다. 내 절에 들어서기 위해 당신이 배워야 할 것
은 단 한  가지이다. 그것은 배운  것을 전부 잊어버리는  일이다. 물론 내  원고 내용도 말이다. 

반응형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 이야기  (0) 2022.10.11
환상  (0) 2022.10.11
가을동화 1  (0) 2022.10.11
가을동화 2  (0) 2022.10.11
가을동화 3  (0) 2022.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