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햇살
1
코지 2년(1556)의 정월은 세키구치 교부쇼우에게 기쁨과 희망에 찬 달이었다.
치카나가는 공식적인 신년 하례식을 끝내고 돌아와 곧 점괘를 뽑아 오는 5일에 혼례를 올
릴 딸의 신랑감 지로사부로의 운세를 점쳤다. 성안의 큰방에서 요시모토가 내뱉은 한마디가
왠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는데, 점괘에는 그것이 기우로 나타났다.
요시모토는 하례식에서 지로사부로와 츠루히메의 혼례식 일정을 발표한 뒤 치카나가를 불
렀다.
"그대도 물론 상의를 했겠지만 모토노부의 모토는 이 요시모토가 내린 것이고, 그럼 노부
는 어디서 딴 것인가?"
치카나가는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묻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요시모토를 똑바로 쳐다보았
다. 요시모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질투겠지. 질투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뜻밖의 소문을 들어서." "소문이라니?" "노부라는 글
자는 노부나가의 노부라고 하더군. 아츠타에 있을 때부터 타케치요는 노부나가와 친했다고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있었네." "당치도 않습니다!" 치카나가는 펄쩍 뛰며 고개를
흔들엇다.
"노부나가 따위의 이름을 어째서 빌리겠습니까? 카이의 하루노부님 성함에서 딴 것입니다.
당대의 영걸이신 고쇼 님을 제외한다면 카이의 성주님이 그 다음인데, 고쇼 임의 성함을 위
에, 다음 자는 카이 성주님의 성함을... 분명 이렇게 들었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좋소.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소."
요시모토는 그대로 넘어갔으나, 그런 중상을 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치카나가는
불안했다. 그래서 점을 쳤는데, 존귀와 근친이 모두 지로사부로와 어울린다고 나왔기 때문에
운세가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싱글벙글하면서 산통을 치웠다.
"츠루를 이리 들게 하라."
시동에게 명하고는 곧 그를 다시 불렀다.
"지로사부로도 이미 돌아왔을 것이다. 내가 잠시 할말이 있으니 그렇게 전하여라." 츠루히
메는 벌써 3,4년 전부터 신년 하례식 잔치에는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상대인 카메히메가 이
오 부젠에게 출가하여 츠루히메와 카메히메의 구색이 갖추어지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그
무렵부터 츠루히메는 이미 소녀라고 하기에는 너무 원숙하여 축하연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
문이다.
츠루히메가 먼저 아버지 방으로 왔다. 이미 부녀 사이에는 미리 신년 인사를 교환한 듯 츠
루히메는 들어오자마자 아버지 곁에 앉았다.
치카나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츠루히메를 향해 말했다.
"혼례는 오일로 결정됐다. 그날 고쇼 님은 참석하시지 않겠지만 도련님을 대신 보내겠다고
하셨어."
"아니, 도련님이..."
츠루히메에게는 아직도 우지자네가 증오의 대상이었다. 아니, 증오만이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잇는 지로사부로에게는 아마도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불쾌감을 상기시킬 것이
분명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마는..."
추루히메가 말했다.
"도련님의 임석은 거절하고 싶어요."
"뭐? 거절을...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치카나가는 표정을 굳히고 딸을 노려보았다.
2
요시모토가 성을 나와 지로사부로의 임시거처를 찾아간다는 것은 바랄 수조차 없는 일이었
다. 따라서 우지자네를 보내겠다고 한 것은 파격적인 호의라 할 수 있으며, 혈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영광으로 생각지 않고...'
치카나가는 정색을 하고 딸을 바라보았다.
"그런 버릇없는 소리는 내가 용서치 않겠다!"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장래는 어찌 되었건 출가하면 너는 마츠다이라 집안의 여자가 되는거야. 분수를 생각해야
한다."
츠루히메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도련님 같은 사람은..."
모처럼 잊어가고 잇던 상처를 혼인하는 날에 다시 떠올린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
다. 아니, 츠루히메 혼자라면 참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과거를 잊고 연하인 모토노부와 화
목하게 맺어지려고 하는데, 그일을 상기시키는 것은 죽기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아버님이 말씀 드릴 수 없다면 제가 직접 거절하고 오겠습니다." "츠루, 그것은 큰 잘못
이야. 도련님이 참석하시는 것만으로도 마츠다이라 집안에 얼마나 큰 무게가 실릴지 몰라.
잘 생각해보아라. 어째서 그런 철없는 말을 하느냐?" "도련님은..." 강하게 말하려다 생각을
바꾸었다.
"너무 농담이 지나치시기 때문에."
"하하하. 그럴 줄 알았다. 좋아, 내가 농담을 삼가달라고 말씀 드리겠다." 이때 부름을 받은
지로사부로가 들어왔다.
"노부모토, 실은 오리 혼례식에 도련님이 고쇼 님을 대신하여 오시겠다고 하는데, 이 츠루
가 거절하겠다고 하는군. 그건 안 되는 일이라고 꾸짖고 있던 중이었네. 자네도 나와 같은
의견이겠지?"
츠루히메는 흠칫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점점 굴욕으로 일그러지는 지로사부로의 표정을 보
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에도 말해주었지만 도련님이 참석하시는 것과 안 하시는 것은 세상이 보는 마츠다
이라 가문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일세. 물론 자네도 알고 있을 테지만." 지로사부로는 잠시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직접 목격한 츠루히메와 우지자네의 추잡한
자태가 눈앞에 떠올랐다.
"어떤가?"
"그렇습니다.'
재촉을 받고, 비로소 내키지 않는 대답을 했다.
"고마우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럴 것일세. 그것도 다 혈연이기 때문에 가능한 호의일세. 그리고 고쇼 님이 친히 지시하
신 것인데, 츠루가 자네한테 출가한 뒤에는 세키구치 마님이라 부르지 말고 스루가 마님이
라 부르라고 하셨네. 츠루는 내 조카딸이라고 하시면서." "감사하게 여기겠습니다." 츠루히메
는 가만히 속눈썹 너머로 지로사부로의 표정을 살폈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는 일이지만, 우지자네와의 정사는 두 사람의 일생에 두고두고
불쾌한 그림자를 남길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그 밖에도 두서너 가지 주의의 말씀이 계셨지만, 모두 두 사람의 새 출발을 염려하는 짙
은 애정이 담겨 있었네. 당일 초대할 장수들에 대해서까지 배려하고 계셨어. 이 은혜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되네."
지로사부로는 다시 조용히 머리를 숙였으나, 그 표정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츠루히메는
갑자기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몸을 비틀며 지로사부로의 무릎에 매달렸다.
"용서를 빌어요, 모토노부 님... 반드시 좋은 아내가 되겠어요." 3 지로사부로는 잠
자코 있었다. 가만히 츠루히메의 어깨에 손을 얹었으나, 이 상황에서는 할말이 없는 것 같
았다.
'약자는 언제나 비참하게 마련이다...'
우지자네가 농락하고 버린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 그러면서도 굽실거리며 영광스럽게 여긴
다는 뜻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비참한 심정이 무모한 분노로 나타나지 않고 무겁게
마음에 쌓였다.
'지로사부로, 결코 화를 내서는 안 된다.'
남의 일처럼 말하는, 소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깨의 짐은 무거울수록 좋다. 너는 능히 그 짐을 짊어지고 갈 수 있는 사나이다...' 셋사
이의 목소리가 되기도 하고, 볏짚으로 머리를 묶은 오카자키으 l가신들 목소리가 되기도 했
다.
아마도 그와 같은 목소리를 듣는 침착한 마음자리를 유지할 수 있음은 츠루히메 역시 약자
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세키구치 교부쇼유는 깜짝 놀란 듯 울고 있는 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
딸이 이처럼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는지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수치 때문일까? 아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기쁨의 표현이라기에는 너무나 기이하고, 응
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또 지나치게 버릇이 없었다.
"츠루, 이게 무슨 짓이냐?"
엄한 소리로 딸을 꾸짖는데, 나이 어린 사위가 비로소 무겁게 입을 열었다.
"꾸짖지 마십시오. 츠루히메는 단지 저에게 앞날을 위해 맹세를 한 것 뿐입니다." "그런가."
치카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례를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맹세의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 것은 자기가
연상임을 부끄러워하던 딸이 안도한 탓이었을까...
그러나저러나 무릎에 쓰러져 우는 딸과 그것을 달래는 지로사부로의 침착성은 어느 틈에
나이를 초월해 있었다. 이것이 치카나카에겐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과연 내 마음에 쏙 들어...'
"자, 눈물을 닦도록."
치로사부로는 다시 한 번 츠루히메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고 혼례식에 대한 상의를
시작했다.
요시모토의 호의를 기화로 화려한 혼례는 절대 삼갈 것. 지나치게 간소하다는 말은 건방지
다는 비웃음을 받는 것보다 장래를 위해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설득하는 동안 지로사부로
는 몇 번이나 눈시울을 붉히고는 했다.
츠루히메와 지낼 집을 증축하는데 든 비용 때문에 그는 몹시 궁색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
서 혼례를 화려하게 치른다는 것은 오카자키에 있는 가신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할 뿐이
었다.
처음 치카나가는 간소한 예식에 대해 아주 못마땅해했다. 마음에 든 이 나라 최고의 사위
와 고쇼 조카딸의 혼례를 되도록 화려하게 거행할 계획일었기 때문이다.
지로사부로는 교묘하게 치카나가를 설득했다.
우지자제의 참석은 도리가 없으나, 장수들의 초청은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제한할 것. 그렇
게 하지 않으면 질시를 받게 된다고 했다.
"좋아, 자네 말에 따르기로 하겠네. 자네는 나보다 몇 배 앞서 나가고 있네." 마음에 드는
사위인만큼 두말없이 한 발짝 양보했다.
그동안 츠루히메는 묵묵히 아버지를 쳐다보기도 하고 지로사부로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녀는 결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굴욕을 참아가며 자기를
용서하려는 지로사부로에게 자기도 여자의 진심을 보여주어야만 한다고, 그것만을 계속 생
각하고 있었다.
4
이틑날인 1월 3일-
혼례를 이틀 앞두고 츠루히메는 이른 아침부터 시녀의 도움을 받아가며 머리를 감고 정성
들여 화장했다.
날씨는 화창하고 정원에서는 때때로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은 맑게 개어 창을 열면 높직한 후지산이 보였다. 그러나 츠루히메의 표정은 결코 밝
지 않았다.
간밤에 계속되는 생각 때문에 충분하게 잠을 자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막
상 혼례를 앞두고 경솔했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수록 후회막급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츠루히메는 지금은 지로사부로라고 부르는 타케치요를 이따위 애송이… 하며 전혀 자
신의 상대로는 생각지 않았다. 이러한 마음에서 자신은 점점 아내 되기에는 도를 넘는 야유
를 하게 되고, 방자한 태도가 되어갔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지로사부로에게 자기는 얼마나
음탕하고 버릇없는 여자로 보였을 거인가. 아직 어린아이로 생각했기 때문에 끌어안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카메히메가 좋으냐 내가 좋으냐 놀리기도 하고, 마음에도 없이 미우라의 도
령을 사모한다고 희롱하며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었을, 우지자네
와의 밀회까지 보여주고 말았다. 그러고도 아직 지로사부로의 아내가 될 자기 운명을 내다
보지 못하고, 우지자네와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몸을 맡겨 더욱 사태를 악화시키고
말았다.
지로사부로는 지난해 여름 무렵부터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겐오니의 죽음으로 부쩍 어른
이 되었는가 싶더니, 지금은 자기를 앞질러 사려도 분별도 지나치게 노성하다고 할 만큼 성
장하고 말았다.
앞으로 이틀 뒷면 지로사부로는 자기를 아내라 부르게 된다. 아버지와 요시모토의 호의에
보답하여 자기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헤프게 보인 자신의 과거 행실 때문에 고통받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츠루히메 자신도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으면 어느 틈에 지로사부로
는 안타까울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로 바뀌어 있었다.
화장이 끝났을 때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딸의 요란한 화장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디 가느냐?"
고개를 갸웃했다.
츠루히메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이고, 시녀가 입혀주는 비단옷의 소매에 팔을 꿰었다.
"어딜 가는데?"
"고소 님을 뵈려고요."
"무슨 일로? 고쇼 님은 아직 내전에 계실 텐데."
"배려해주신… 인사를 드리려고요,"
그 말에 어머니는 비로소 딸의 고운 화장이 이해되는 듯했다. 요시모토에게 무척이나 총애
를 받은 츠루히메였다. 혼자 찾아가 인사 드려도 혈육이기 때문에 기꺼이 맞아주리라 생각
하고 미소지었다.
츠루히메는 고쇼를 만날 생각은 아니었다. 우지자네를 찾아가 혼례식 당일에는 절대로 지
로사부로의 집에 오지 말라고 단단히 약속을 받아낼 작정이었다. 원래 공차기와 남색, 술과
가무에 빠져 중요한 때마다 감기에 걸리는 것이 우지자네의 버릇이었다. 그러므로 당일이
되어 병 때문에 불참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우지자네가 동석한 혼례 같은
것은 남편을 위해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5
츠루히메의 가마가 성으로 들어가 둘째 성에 있는 우지자네의 거처에 도착한 것은 사시(오
전 10시)가 가까웠을 때였다.
우지자네는 오다와라에서 맞이한 아내 사가미 부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
나 자기 방에서 많은 시동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살고 있었다.
오늘도 늦게 일어난 우지자네는 잠자리에 길게 엎드려 처녀로 착각할 정도인 카노 아야치
요에게 허리를 주무르게 하고, 키쿠마루에게는 길게 뻗은 다리를 주무르게 하고 있었다.
츠루히메가 들어왔는데도 일어날 생각은 않고, 과음하여 푸석해진 얼굴로 말했다.
"어제는 공차기를 너무 많이 해서… 마침내 출가를 하게 됐는데, 상대가 오카자키의 애송
이라니 그대가 가엾군."
츠루히메는 똑바로 우지자네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제게는 너무 과분해요."
"그럴 리 없지. 이렇게 아름다운 그대인데."
"아니에요, 모토노부 님이… 이 츠루에게는 과분하다는 말입니다." 우지자네의 뜻밖의 말을
듣는다는 효정으로 다시 한 번 츠루히메의 온 몸을 훑어 보았다.
"그대도 이젠 어른이 되었어. 무리한 요구인 줄 알면서도 아버지 뜻을 받아들인 모양이군."
"고쇼 님의 무리한 요구라니요?"
"카이나 사가미 일족이라면 또 몰라. 하필 오카자키의 애송이를 택하다니. 그래도 아버지가
상경할 때는 소중한 길잡이가 될 테니 못마땅하겠지만 그런대로 이해해줘, 응?' 츠루히메는
머리가 확 달아올랐다. 우지자네는 츠루히메 자신이 요시모토의 정략에 따라 싫으면서도
출가하려는 줄 알고 있었다. 오만불손한 생각이 노골적으로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내가 손을 댄 그대를 타케치요 따위에게…'
이런 우월감이 그 오만불손의 이면에는 숨어 있었다.
츠루히메는 자세를 바로 하고 우지자네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도련님은 무언가 오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해를… 무엇을?"
"이 츠루를 말입니다. 츠루는 기쁜 마음으로 출가합니다."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우지자
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히죽 웃었다. 그것은 츠루히메가 아직도 우지자네에게 옛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줄 자만하고 있는 고개 짓이었다.
츠루히메는 애가 탔다. 애를 태우면서 경솔했던 자신의 과거를 또다시 저주했다.
'어쩌자고 나는 이런 남자 옆에 두어달라고 부탁했던 것일까…' "도련님." "응?"
"사람을 물리쳐주십시오."
아야치요와 키쿠마루가 무서운 질투의 눈으로 흘끗 노려보았으나 츠루히메는 눈치채지 못
했다.
"뭐, 사람을 물리치라고…"
당사자인 우지자네는 음탕한 장면을 연상하는 듯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정초부터 여간 아니군. 좋아. 아야치요도 키쿠마루도 잠시 나가 있어라." 두 사람은 얼굴
을 마주보고는 일어나서 나갔다.
우지자네는 이부자리 위에 엎드린 채, 슬며시 손을 내밀어 츠루히메의 무릎을 만지려고 했
다.
"자, 말해봐. 무슨 일이지?"
"도련님!"
그녀는 얼른 몸을 피하면서 날카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6
"도련님!"
"왜 그래, 잔뜩 인상을 쓰면서?"
"일어나세요. 그런 모습으로는 말씀 드릴 수 없어요." "하하하. 이거 사가마보다 더 간섭이
심하군. 나는 점잔이나 빼는 허례허식 따위는 좋아하지 않아, 귀도 있고 눈도 있으니 어서
하고 싶은 말이나 해." 츠루히메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더 이상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분
했다.
"도련님! 저는 모토노부 님과 화목하게 지내고 싶어요." "허어,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인
가?'
"예, 모토노부 님은 저에게 다시없는 남편이라 생각합니다." 우지자네는 다시 히죽 웃었다.
이 기세등등한 여자가 무슨 말을 할것인지, 그 이면의 의미를 생각하고 떠올리는 웃음이었
다.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봐. 망설이지 말고. 나와 그대 사이 아닌가."
"혼례식날 고쇼 님 대신…"
츠루히메가 입을 여는 순간.
"그 일이라면 잘 알고 있어."
우지자네는 손을 내저었다.
"나도 그대와 타케치요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염려하지마. 꼭 참석할 테니."
츠루히메는 또다시 굴욕을 느끼고 몸을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참석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쇼님에게는 비밀에 부치고
참석하시지 않았으면… 그것을 부탁 드리려고 왔습니다." "뭣이? 나더러 참석하지 말라고…
"
"예, 모토노부 님은 도련님과 저의 관계를…"
"잠깐!"
"예,"
"자와 그대의 관계에 대해 타케치요가 꼬투리를 잡고 있다는 말인가? 만일 그게 사실이라
면 그를 불러 혼을 내겠어. 건방진 녀석, 제 분수도 모르고." 우지자네는 벌떡 일어나 소리
를 질렀다.
"정말 그랬다는 거야?"
츠루히메는 새파랗게 질렸다. 전혀 예기하지 못한 뜻밖의 반문이었다. 우지자네는 자기가
손을 댄 츠루히메를 지로사부로가 영광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뭐라고 했어? 그 녀석이 어떻게 말했는지, 그냥 두지 않겠어. 타케치요 놈이 말한 그대로
나에게 말해봐."
"도련님!"
츠루히메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일부러 찾아왔는데 도리어 좋지 않은 결과가
될 것 같았다 우지자네가 지로사부로를 증오하게 된다면 결코 마츠다이라 가문을 위해 도움
이 되지 않았다.
"도련님은 제 마음을 모르시는군요. 모코노부 님이 무어라 말한 것이 아니라, 그날 참석하
시지 말라고 한 것은… 이 츠루의 부탁입니다."
"그대는 내 얼굴이 보기 싫다는 말인가?"
"예, 그날만은."
"흥, 전과는 많이 달라졌군."
"달라졌습니다. 도련님보다는 모토노부 님에게."
"마음이 기울었다는 거냐?"
"예."
이번에는 우지자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잘 말했다. 똑똑히 잘 말했어, 내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우지자네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서서히 츠루히메 쪽으로 다가왔다.
7
츠루히메는 깜짝 놀라 앉은 채로 뒷걸음질쳤다.
우지자네의 눈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증오의 빛을 보고 당장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츠루!"
"예…예."
츠루히메는 다시 물러나면서 본능적으로 우지자네와 우지자네 뒤에 있는 칼걸이를 보았다.
만일 저기에 손이 닿으면 과연 이 자리에서 도망쳐나갈 수 있을까 하고.
"그대는 되바라진 여자로군."
"마음에 거슬렸다면 용서해주십시오."
"마음에 거슬리지 않을 줄 알고 찾아왔나?"
"예, 도련님은 마음이 넓으신 분이기에… 사정을 말씀 드리고 부탁하고자…" 우지자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저으며 말을 막았다.
"닥쳐!"
그런 뒤 엷은 입술이 경련하듯 웃음으로 변한 것은 우지자네으 lqnssh가 잔인한 생각으로
방향을 돌렸다는 뜻이었다.
"이 혼례를 내가 깨뜨리겠다."
"예?"
"그대를 이렇게 괴롭히다니… 아버지에게 말해서 깨뜨리겠어." 우지자네는 다시 무릎 사이
의 거리를 좁히고 츠루히메의 어깨를 붙잡았다.
"용서를…"
츠루히메는 몸을 움츠리며 옆으로 피했다. 왜 이렇게까지 우지자네가 화를 내는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우지자네는 다시 웃음을 그치고 뱀과 같은 눈으로 츠루히메의 떠는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
보고 있었다.
"그대도 사실은… 깨지기를 바라고 있겠지?"
"아닙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타케치요와 맺어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어떤 상처를 입혀도 좋다는 말이로
군."
츠루히메는 소스라치게 놀라 우지자네를 쳐다보았다. 그가 분노한 이우를 비로소 알고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애처럼 나를 업신여긴 여자는 없었어. 내가 싫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대신 혼
례식에 참석하는 것에까지 이러쿵저러쿵 지시를 내리고 있어. 그런데도 내가 화를 내지 않
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예… 예. 저는… 저는 도련님의 도량에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용서를…" "용서할 수 없어!"
우지자네가 이번에는 츠루히메의 검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앞으로 끌어당겼다.
츠루히메는 앗 하고 소리를 지르려다, 그것이 더욱 우지자네의 비위를 건드릴 것 같아 얼
른 입을 다물었다.
우지자네는 머리카락을 무릎으로 누르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잠시 부르르 떨고 있었
다.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광포한 감정을 빈정대며,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말을 찾고 있을
것이었다.
"츠루!"
"예… 예."
"나는 그대의 청을 받아들여 혼례식에는 참석하지 않겠어." "저…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다
고 하셨습니까?"
"그 대신 오늘은 그대의 몸을 마음껏 농락하고 농락하고 또 농락하겠어." "예?" "그렇게 하
지 않으면 내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아. 타케치요 따위만도 못하다니." "아, 용서를…"
츠루히메는 방에서 빠져나가려고 이를 악물고 머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우
지자네의 오른손이 목으로 뻗어와 쓰러질 듯 끌려가고 있었다.
8
기질이 강한 여자와 권력을 가진 사나이의 싸움에서 승산은 처음부터 여자에게 없었다.
그보다 우지자네의 어리석은 질투심을 읽지 못한 츠루히메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우지자네의 팔에서 벗어나 옆방에 뛰어들었을 때의 츠루히메는 당장에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보다 더 비참한 패배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가볍고 부드러운 애무가 아니라, 여
자의 육체와 감각을 잔인하게 농락하고 또 짓밟았다.
'이미 남편으로 정한 사람이 있는 여자의 몸을…"
츠루히메는 울려고 해도 울 수가 없고 분노할 기력마저도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후회도 반성도 이 모욕을 지울 힘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우지자네는 츠루히메를 놓아주고
는 수치심도 없이 손뼉을 쳐서 시동을 불렀다.
"손 씻을 대야를 가져오너라!"
츠루히메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겨우 머리를 고치고 옷매무새를 만졌다.
자신의 당황하는 모습을 비쳐주고 있는 것이 우지자네의 거울이란 생각이 드는 순간 거울
을 냅다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니, 츠루히메 님이 아직도 여기에…"
키쿠마루가 일부러 장지문을 열고 여자 같은 목소릴로 바꼬았다.
"알겠지, 아제 나는 이틀 후 혼례식엔 참석하지 않겠어." 우지자네가 시동이 가져온 물에
손을 씻으면서 냉소했다. 츠루히메는 급히 방에서 복도로 나왔다.
얼마나 비싼 값을 치른 교환조건인가.
우지자네가 참석하지 않는 대신, 자기는 평생도록 이 굴욕의 기억을 지니고 고민하지 않으
면 안 되다니…
'차라리 자살을…'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둘째 성의 현관에서 희미한 햇빛 속으로 가마를 타고 나왔을 때
였다.
여러 츠보네에서는 정월 3일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지만, 츠루히메의 마음
은 납덩어리를 매단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혼례를 앞두고 자살한다. 물론 유서에는 우지자네로부터 받은 수많은 모욕에 대해 적어놓
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억울함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츠루히메는 다시 망설였다.
지로사부로만은 이 고통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이 유서가 과연 세상에 공개될 것인가. 상대
는 다름 아닌 우지자네이다. 아마도 부모는 요시모토가 두려워 그것을 비밀에 부칠 것이 아
닌가.
만일 그렇게 되면 세상의 소문은 사실과는 정반대로 퍼져나갈 것이다. 츠루히멘는 마츠다
이라 모토노부와의 혼례가 싫어 죽었다고.
가마가 자기 집 현관에 도착했는데도 츠루히메는 아직 멍하니 앉은채로 있었다.
시녀가 나와 가마의 문을 열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츠루히메는 가만히 가마에서 내렸다. 창백한 얼굴도 하얗게 질린 입술도 화장으로 감춰져
있었으나, 눈물이 마른 그 눈은 얼빠진 인형 바로 그것이었다.
츠루히메는 비틀비틀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자기 방에 들어가 그대로 털썩 방바닥에 엎드렸
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츠루히메의 자살이 얼마나 우지자네의 마음에 복수의 발톱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유령이 되어 달라붙을 수 있을까 없을까.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뇌리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두견새
1
그날도 노부나가는 여섯 점(오전6시)도 되기 전에 애마를 달려 성 아래서 열리는 여러 장
터를 둘러보고 다녔다 .이처럼 이른 아침에 말을 타는 습관은 아버지 노부히데가 죽은 뒤
하루도 빠뜨린 적이 없는 일과였다. 요즘에는 특히 그 일이 즐거운 듯했다.
여러 지방에서 자유롭게 모여드는 상인들로 오와리는 나날이 번창해가고 있었다. 센슈의
사카이가 바다를 통해 외국에서 부를 모아들이는 큰 장터라고 한다면, 이곳은 육지에 개방
된 사카이라 할 수 있었다. 호죠 일족이 지배하는 오다와라에도 제법 번화한 장이 섰으나
지금은 오와리가 그것을 능가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이처럼 개방된 오와리이기 때문에 외분의 첩자도 쉽게 들어올 테지만 노부나가는 그들을
또한 교묘하게 이용했다. 총포를 남들보다 많이 입수한 것도, 신축성이 좋은 도마루란 갑옷
을 새로 만들게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곳으로 모여드는 자유의 물결 덕택이었다.
아니, 이것말고도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나가는 상인들에게 그가 마음먹은 대로 유언비어나
소문을 퍼뜨리게 하기 위해서는 장터가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마츠다이라 타케치요가 지로사부로 모토노부라는 이름으로 관례를 올렸다는 것도 알고 있
었다. 그뿐 아니라 그 모토노부의 노부란 자가 은밀히 노부나가를 존경하는 표현이라는 것.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조카딸을 맞아 아내로 삼고 스루가 마님이라 부르게 했다는 것 역시
이웃집 일처럼 알고 있었다. 그가 풀어놓은 첩자가 상이들 속에 섞여 자유롭게 출임하고 있
었고, 그들은 면밀하게 상인들의 소문을 검토하여 노부나가에게 전해왔다.
그날 아침 노부나가는 새벽 장이 서는 변두리 생선장수 앞에서 말을 내렸다. 말을 돌보는
하인의 우두머리 후지이 마타에몬에게 고삐를 맡기고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 파묻혔다.
계절은 이미 초여름에 접어들어 생선 중에 가다랭이는 보이지 않았으나 근해에서 잡히는
농어의 비늘이 서늘한 초여름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노부나가를 알아보고
정중히 절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그의 옷차림이 기묘했
던 한때와는 달리 소박한 탓이기도 했으며, 장을 찾을 때는 일부러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떤가, 올해 야채 작황은?"
"야채는 지금부터죠, 지금은 모종하기에 바쁜 때라서." "음, 그렇군. 이미 씨는 뿌렸겠지. 비
가 좀 내려야 할 텐데." "아직은 괜찮아요, 오와리 지방은 하늘이 특별한 은혜를 내린 곳이
라 걱정할 것 없어요." "그래, 특별한 은혜지."
생선가게가 늘어선 곳에 이어 야채장이 서고, 그 구석에는 오래 된 무기류에서부터 활, 칼,
도자기 등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그사이를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거울장수가 부
지런히 유리를 닦고 있는 데까지 왔을 때 노부나가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 옆의 작은 돠
판에 바늘을 펼쳐놓고 노부나가를 빤히 쳐다보는 젊은이의 얼굴이 너무나 기이했기 때문이
다.
"허어."
노부나가는 걸음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띠면서 말을 걸었다.
"이봐, 바늘장수, 자네는 원숭이 해에 태어났겠지?"
2
노부나가가 말을 걸었는데도 기묘하게 생긴 젊은이는 웃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물론 난 원숭이띠지만, 보아 하니 당신은 말띠로군." "후후후." 노부나가는 웃었다. 자기
때를 알아맞혔다기보다도 자신의 긴 얼굴을 지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저러나 이 젊은이는 왜 이렇게 얼굴에 주름이 많은 것일까. 얼른 보기에도 원숭이
같았으나, 자세히 보니 더욱더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띠일세, 잘 맞혔어. 그런데 자네는 원숭이띠라도 보통 원숭이띠가 아닌 것 같아.
원숭이 해에 원숭이 달, 그리고 원숭이 날에 태어난 듯한 얼굴이야." "그렇소." 젊은이는 거
만하게 대답했다.
"그것을 정확하게 맞힌 당신도 보통 사람이 아니군. 그런데 내가 본대로 충고하겠는데, 당
신의 신변에 오늘 안으로 변고가 생기겠어."
"뭐, 내 신변에 변고가… 와하하하. 그걸 원숭이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나는 사정이
있어서 전국을 유랑하는 몸. 지금은 보다시피 바늘장수이지만,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
등 이 세상의 이치에 통달하고 있지. 참. 그 변고의 내용은…" 이렇게 말하고는 기분 나쁠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어, 노부나가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이 변고가 경우에 따라서는 당신의 불행과 연결되지… 않을지도 몰라." 노부나
가는 왠지 싸늘한 바람이 가슴을 뚫고 나가는 것 같아 쓴웃음을 지으면서 젊은이 앞을 지나
갔다.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 라는 과장된 말에서 문득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이 녀석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노부나가는 장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 기다리게 했던 마타에몬의 손에서 고삐를 받아들고, 말에 훌쩍 올라탔다.
"먼저 돌아가겠다."
철썩 말에게 채찍을 가한 노부나가, 푸른 잎 사이를 질주하여 곧바로 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둘러서 북쪽 성 내전에 들어가 노히메를 큰 소리로 불렀다.
"노히메! 미노에서 누가 오지 않았나?"
노히메의 대답은 없고 로죠가 허둥지둥 달려나왔다.
"마님은 지금 불전 앞에 계십니다."
노부나가는 로죠를 흘끗 바라보고 그 눈이 빨갛게 부은 것을 알고는 서둘러서 부처를 모신
방으로 갔다.
불전에는 역시 눈이 퉁퉁 부은 노히메가 새롭게 모셔놓은 네 개의 위패에 향을 피워 올리
고 있는 중이었다. 그 옆에는 위패를 가지고 온 듯한 서른 살 가까운 여자가 혼자 여행복
차림인 채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다.
노부나가의 예감은 적중했다… 아니 그보다도, 그 원숭이를 닮은 바늘장수가 그동안으 l사
정을 알고 노부나가에게 묘한 예언을 한 것 같다. 노부나가는 노히메 뒹 prkaksgl 서서 위
패의 글자를 읽어나갔다.
맨 처음 위패에는 '사이토 야마시로노카미 히데타츠 뉴도 도산 송신위'. 그다음에는 '도
산 송 부인 아케치 씨 신위'. 그리고 다음 두 개엔느 '키헤이지 타츠모토'와 '마고시로 타츠
노'등 이나바야마 성에 있는 노히메의 부모와 형제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으음."
노부나가는 호흡을 가다듬고, 노히메에게 말을 건네기에 앞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여자의
어깨를 칼집으로 가볍게 거드렸다.
여자는 깜짝놀라 고개를 들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아…"
3
노부나가는 여자의 얼굴을 본 기억이 있었다. 틀림없이 아버지의 애첩 이와무로의 하녀였
던 여자. 스에모리 성에 있을 때부터 그 미모 때문에 여러 문제를 일으켰던 여자.
제일 먼저 이 여자에게 눈길을 준 것은 분명 노부나가의 동생 칸쥬로 노부유키였다는 말을
들었다. 여자는 이보다 앞서 노부유키의 시동과 사랑을 속삭였던 모양인데, 뜻밖에도 노부유
키는 두 사람 사이를 용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자를 연모하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노
부나가의 중신 사쿠마 우에몬의 동생 시치로자에몬이 바로 그 사나이였다.
시치로자에몬은 노부유키가 시동과 여자의 관계를 용서한 사실에 분개하여 시동을 죽이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것이 이 여자가 유랑하게 된 동기인데, 그 후 여자는 미노으 l사기
야마 성주, 노히메에게는 이복 오빠인 요시타츠의 총애를 받다가 나중에는 아버지 도산뉴도
의 소실이 되었다. 도산과 요시타츠 부자가 애첩을 사이에 두고 쟁탈전을 벌여 사기야마 성
과 이나바야마 성 사이에는 험악한 공기가 감돈다는 소문이 나게 만든 장본인인 이 여자가
도산 이하 네 개의 위해를 가지고 찾아왔다.
노부나가는 칼을 짚고 선 채로 여자에게 물었다.
"이름이 아마 오카츠였지?"
무섭게 노려보듯 여자에게 눈길을 던지면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도산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아들인 요시타츠에게 살해되었다. 부자는 그토록 사이가 나
빴다.
쇼고로란 이름으로 기름장사를 하던 사이토 도산이 토키 일족을 섬기다가 마침재 주인을
대신하여 미노의 영지를 손에 넣게 되었을 때, 요시타츠의 생모 또한 토키 가문에서 토키
가문에서 도산의 내전으로 옮겨왔다. 이렇게 되었을 때 도산을 못마땅하게 여긴 토키의 유
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갖은 유언비어를 다 퍼뜨렸다.
도산의 내전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태어난 요시타츠에게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말
을 하여 은근히 암시하고는 했다.
"도련님은 토키의 핏줄입니다."
한낱 기름장수에서 성주까지 된 도산의 눈에 맏아들 요시타츠는 여간 못마땅하지가 않았
다. 그래서 심하게 꾸짖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교묘하게 속삭이고는 했다.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속으로 증오하시는 겁니다." 도산 자신이 세상을 보는 견해도 이
런 의심을 부추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실력으로 미노를 빼앗은 도산은 자기 행위에 대한 변명도 포함하여, 자기 자식 앞아세도
큰 소리를 쳤다고 했다.
"이 세상에는 힘이 제일이다. 힘이 있는 자는 언제나 내 손에서 미노를 빼앗아도 좋다." 그
러한 말을 노히메로부터 들었을 때 노부나가는 씁쓸하게 생각했는데, 그 불행이 드디어 미
노에서 현실로 나타난 모양이었다.
"장인께서는 대관절 어디 계셨나? 산속 성에 계셨나?" 선 채로 묻자 오카츠는 조용히 고개
를 저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겨우 몸 하나만 빠져나온 듯했다. 얼굴에는 숯검정이 묻어
있고 그려넣은 주름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노부나가의 눈에는 이 여자의 가련한 모습보다도, 인생의 덧없음이 야릇한 불길을 뿜으며
수레가 되어 돌아가고 있었다.
4
"성을 나와 센죠다이에 계셨습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꺼질 듯 나직했다.
"그대가 모셨나?"
"예."
"방심하셨군. 장인답지 않아."
노부나가는 세게 혀를 차고 칼자루로 마루를 탕탕 쳤다.
이나바야마 성에 있었다면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로에서 8정 반, 꼬불꼬불
한 고갯길이 13정, 1,100척이나 되는 높은 곳에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성안에서도 호응하는 자가 있었겠군, 그게 누군가?"
"예, 타케치 히고노카미 님."
"밑에서는 요시타츠, 위의 성에서는 타케이 히고노카미… 그러면 아케치 마님과 타츠모토,
타츠노는 성안에서 해를 입고 장인은 센죠다이에서 변을 당하셨나?" "예… 그렇습니다."노
부나가는 예리한 눈길로 노히메를 흘끗 바라보고 꾸짖었다.
"울면 안 돼!"
노부나가가 오카츠에게 질문하고 있는 동안 노히메의 울음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기 때문이
다.
"그렇군, 그대와 동침중에 습격받았다는 말이지?"
노부나가는 길게 한숨을 쉬고 잠시 천장을 노려보고 있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유해는? 머리는 물론 요시타츠가 가지고 있겠지만 유해는 어떻게 했나?" "예, 나가
라가와에 버려졌습니다."
"장모님은?"
"불에 타서 형체도 없습니다."
"노히메!"
"예… 예."
"알겠지, 그대 곁에는 이 노부나가가 있어."
이 경우 아내를 위로할 말은 달리 없었다.
노히메는 노부나가의 말에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오와리로 시집을 가서 오와리에서 죽어라. 너를 출가시켰다고 해서 나는 결코 오와리 공격
을 중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야심가인 아버지. 훌륭하게 길을 내어,
과연 백성들의 편이라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아버지. 무장들 사이에서는 잔인한 장수라고
매도당하기도 했으나, 그러면서도 실력을 인정받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머리도 없는 유해가
지금도 어느 강을 따라 떠내려가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토키 일족인 아케치 가문에서 출가해와서 타츠모토, 타츠노 형제가 똑
똑하지 못한 탓으로 언제나 마음 조이던 어머니까지도… "노히메!" 노부나가가 다시 불렀다.
"향을 올리고 난 뒤 이 여자를 쉬게 해. 그리고…"
어느새 불전 밖으로 나가면서, 말을 이었다.
"끝나거든 내 방으로 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예."
노히메는 노부나가의 뒷모습을 향해 합장했다. 그가 보통 남편이었다면 자기와 나란히 서
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부모에게 한 번이라도 명복을 빌자고 하고 싶었으나, 자기 아버지
의 위패에까지 향을 던진 노부나가였다.
노히메에게는 이미 그러한 노부나가밖에는 기댈 데가 없었다.
노히메가 영전으로 향하자 이번에는 오카츠가 몸부림치며 울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두견새가 울면서 지나갔다.
5
잠시 후 오카츠는 센죠다이에서 기습당한 그제께 밤의 사정을 노히메에게 다시 띄엄띄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새벽녘이었다고 한다. 그때도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산장을 스치면서 두견새가 울고 지나
갔다. 오카츠가 문득 그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사이토 도산은 이불을 차고 일어나 즉시 창을
열었다.
"이상한데?"
먼 파도소리처럼 밑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아차."
도산은 긴 창을 들고 얼른 정원으로 달려나갔다.
밑에서 공격해온다면 바로 성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때는 이미 뒷산이 뻘겋게 안
개를 물들이며 타오르고 있었다. 성안에 있던 타케이 히고노카미는 밑에서부터 공격해오는
요시타츠보다 한발 앞서 도산 뉴도가 후퇴할 성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오카츠! 오와리로… 사위에게로…"
이것이 오카츠에게 남긴 도산의 마지막 말로, 예순셋의 도산은 난입한 공격자 속으로 창을
휘두르며 그대로 돌진했다.
"아마도 성주님은 오와리 사위에게 복수를 부탁하려 했을 거예요." 노히메는 고개를 끄덕
이고 오카츠를 위해 세수할 물을 가져오도록 했다. 오카츠는 때때로 생각난 듯이 흐느끼며
얼굴의 검댕을 씻고 머리를 매만졌다.
옆방에 가서 쉬라고 했으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위패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잠시만 더 불전에…"
노히메는 오카츠를 남겨두고 불전 앞에서 물러나 비틀거리는 발에 힘을 주며 노부나가의
방으로 향했다. 노부나가가 요시타츠를 이대로 둘 리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위패 앞에서 그
의 입을 통해 확실하게 복수하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노히메!"
노부나가는 배를 깔고 눈운 채 정원의 푸른 나무를 노려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나는 잠시 그대와 떨어져 있을 생각이야."
"예? 떨어져 있다니요?"
뜻하지 않은 말에 깜짝 놀라 노히메는 숨길도 멈춘 채 노부나가의 머리맡에 앉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좀더 자세히."
"말해도 놀라지 않겠나?"
여전히 눈길을 정원에 돌린 채로 말했다.
"슨푸에 있는 타케치요 말인데."
"예, 모투노부 님이…?"
"곧 아기를 갖게 될 모양이더군."
"그래서요…?"
"그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그래서 나는 소실을 가질 생각이야." 때가 때이니만큼
노히메의 얼굴이 흐려졌다. 언제나 뜻밖의 말만 하는 노부나가에게는 익숙해 있었으나, 아
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는 말을 듣는 노히메로서는 가슴이 터질 듯 아팠다.
"하필이면 왜 오늘 같은 날에 그런 말을…"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거야, 이의 없겠지?" 노히메는 노부나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눈도 깜박일 수가 없었다.
6
"나는 오늘부터 잠시 그대 곁을 떠나서 내 손으로 직접 소실을 구하러 다니겠어." "성주님!
어째서 새삼스럽게 그런 것을… 저는 저의 부족한 점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의가
없느냐고 묻는 거야."
"이의도 질투도 없어요. 하지만 부모의 부음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지금, 어째서
요시타츠를 쳐서 원수를 갚아주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십니까?" 노부나가는 묵묵히 코털을
뽑았다. 이 여자만은 사이토 도산의 지모와 재능을 남김없이 물려받았을 텐데 역시… "이
마가와 요시모토는 말이지.'
잠시 후 노부나가는 엉뚱한 말을 했다.
"이 노부나가를 짓밟고 교토로 갈 준비를 완전히 갖춘 모양이더군." "그 일과 소실을 두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노부나가는 다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어."
"좀더 확실하게 말씀해주세요. 어디 마음에 드는 여자라도?" "음." 노부나가는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없지도 않아."
노히메는 다시 숨을 죽이고는 노부나가를 바라보았다. 없지도 않다…는 것은 있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말속엔 노부나가에게 어떤 생각이 숨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마가와의 상경준비는 끝났다. 그때는 일익을 담당하겠다고 했던 아버지 도산이 세상을
뜨고 미노는 오빠인 요시타츠의 손으로 넘어가 확실하게 노부나가의 적으로 돌아섰다. 여기
까지 생각했을 때 노히메의 가슴속엔 한 가지 와닿는 것이 있었다.
노부나가는 자기를 멀리하여 요시타츠와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것이 아닐까? 아니,
최소한 그렇게 함으로써 요시타츠를 방심케 하는 효과는 거둘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
다면 요시타츠는 아버지를 죽인 기세를 몰아 자기 쪽에서 먼저 오와리에 싸움을 걸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구나…그랬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졌는데, 더더구나 남편으로부터도 멀어지다니.
타케치요의 생모 오다이의 탄식이 결국 노히메에게도 찾아오는 것일까.
"알겠습니다."
노히메는 갑자기 남편 앞에 두 손을 짚었다.
"저는 아이를 못 낳는 여자. 그러나 성주님은 이미 아기를 가져야 할 때입니다.
노부나가는 깜짝 놀란 듯이 얼굴을 들고 노히메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해를 하는군…'
이런 생각에 한결 더 측은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입밖에 내어 위로할 수 없었다.
"저는 결코 버릇없이 성주님을 원망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곁에 두도
록 하십시오."
"이해가 되었나?"
"예, 사무칠 정도로."
"노히메!"
"예."
"언젠가는 요시타츠 놈을…알겠지, 지금은 참아야해." 노히메는 결국 그 자리에 엎드려 몸
부림치며 울기 시작했다.
7
엎드려 우는 노히메를 그대로 두고 노부나가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곳은 예전의 후루와타리 성이 아니었다. 시바 요시무네는 이미 죽고 오다의 종가 히코고
로는 멸망했으므로 키요스로 옮긴 노부나가는 오와리 통일의 실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노히메는 그러한 노부나가의 패업을 언제나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탁월한
전략보다 도리어 경영적인 면에서 비범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노히메는 요즘에 들어서는 자
신의 행복을 절감하고 있었다.
해마다 장마철이면 범람하는 키소가와의 제방을 보수하고 여러 곳의 상인을 유치해오는가
하면 형제들의 불만을 진정시키고…더구나 그 일도 언제나 전광석화,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책략을 구사하여 점점 가신들의 신뢰를 모으면서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어가고 있
었다.
미노에는 아버지가 있고 오와리에는 남편이 있다…고 은근히 기뻐하고 있을 때 전혀 예기
치 못했던 아버지의 횡사를 접했다. 더구나 그 죽음은 그녀의 심적 균형만이 아니라 노부나
가의 생애까지도 크게 뒤흔들 소용돌이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신뢰하는 마음이
깊었던 만큼 노히메가 받은 타격은 아주 컸다.
'인생이란 이렇게도 덧없는 것이었을까…?'
아버지의 생애도 한 조각의 꿈이었다면 미노의 경영과 어머니의 노력도 공허한 것이었다.
아니, 그 공허함이 가리키는 것은 양친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지금에 와서는 노히메에게서도
모든 희망과 힘을 앗아가려 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노부나가의 발빠른 대비와 움직임을 훌륭하다--고 느끼면서도, 이 역시 결국
에는 '헛된-' 것으로 변할 날이 오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은 왜 이렇게 두려움으로 다가올
까…?
그때 로죠가 발소리를 죽이고 들어와 작은 소리로 불렀다.
"마님."
노히메는 눈물에 젖어 있는 얼굴을 힘없이 돌리고 가만히 미소지으려고 했다. 어떤 경우에
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틀지어진 그 미소는, 그러나 로죠의 겁먹은 눈을 보는 순
간 굳어지고 말았다.
"불전에서…'
로죠는 헐떡이면서 말했다.
"오카츠 님이 자결하셨습니다."
"뭐, 자결을 …?"
노히메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감았다. 이곳에도 슬픈 인간의 종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름답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 남자 저 남자의 손을 거치면서 숱한 전쟁의 씨앗을
뿌려야만 했던 불행한 여자의 종말이…
노히메는 이제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일어섰다. 하늘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서서히 장마철로 접어들 것이었다. 하다못해 다만
얼마 동안이라도 하늘만은 맑았으면 싶었다.
로죠가 앞장서서 불전으로 들어갔다.
"보시다시피…"
나직하게 말하고 합장했다.
노히메는 선 채로 다다미에 엎어져 있는 오카츠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져
있지는 않았다. 가슴 밑을 찌른 단도의 끝이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얼굴
에는 아무 고통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겨우 안식을 발견한 자의 얼굴이었다.
"오카츠…"
노히메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8
함부로 손을 대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도리어 잔인하게 여겨질 만큼 오카츠의 옆모습은
아름다웠다. 검댕을 묻히고 왔을 때는 서른 살쯤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노히메보다
더 젊고 윤기있는 피부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고작 스물대여섯 정도일 것이다. 그동안 칸쥬로 노부유키에게 사랑을 받고, 노부유키의 시
동에게 사랑받고, 또 시치로자에몬의 사랑을 받고, 요시타츠의 사랑을 받고 ,다시 아버지 도
산의 사랑을 받다가 결국에는 전쟁의 불씨가 된 여자.
이처럼 슬픈 여자의 생애에 대관절 누가 저주를 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이 여자는
누구의 품에 안겼을 때도 기쁨보다는 슬픔을, 편안보다는 불안을 느끼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으으…으…마님."
옆에 서 있는 노히메의 모습에 오카츠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미 눈은 초점이 흐려
져 있었다. 허공으로 향한 눈이 갓 태어난 동녀의 것처럼 청순했다.
"저…저는…죄 많은 여자…용서해주십시오."
노히메는 갑자기 심한 분노를 느끼고 오카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죄가 많은 것은 그대가 아니에요! 그대에겐 죄가 없어요." 그 말은 더 이상 오카츠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용서를…"
오카츠의 영혼은 어디서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작게 말하고는 그대로 입
술을 꼭 다물었다.
노히메는 로죠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이와무로 부인을."
이 여자가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의 마지막 애첩 이와무로에게 사랑받는 시녀라는 것
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로죠는 허겁지겁 불전에서 나갔다가, 지금은 외아들인 카타쥬로를 이 성에서 키우고 있는
삭발한 이와무로 부인을 데리고 왔다.
"오카츠가 왔다지요?"
들어온 이와무로 부인은 오카츠를 보고, 또 위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자리에 얼
어붙었다.
"곧 숨을 거둘 것입니다. 하실 말씀을…"
노히메의 재촉을 받고, 이와무로 부인은 오카츠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
가, 잠시 후 눈물을 흘리는 대신 멍하니 노히메에게 눈길을 돌렸다.
"오카츠!"
노히메는 다시 정신없이 오열했다.
오카츠나 이와무로 부인도, 또 자기도 모두 같은 또래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이
미 삶은 닫으려 하고 또 한사람은 삭발을 하고 여승이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인 자
기는… 그런 생각과 함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목청껏 저주의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왜 이처럼 여자들은 모두 가여운 운명일까…'
로죠는 오카츠의 머리맡에 조용히 향불을 피웠다. 오카츠의 영혼은 파르스름한 연기를 타
고 가볍게 허공을 타오르는 것 같았다.
노히메는 염불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 영혼이!'
애써 오열을 씹어삼켰을 때 이와무로 부인이 어린 계집아이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또 두견새가… 흐린 하늘을 ."
그러고 보니 바람 한점 없는 정원 나무 위에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낮게 구름이 드리워지
고, 가느다란 빗줄기가 희뜩희뜩 빛나며 내리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구도
1
노부나가신장은 여느 때와는 달리 걷고 있었다. 수행원으로는 모리신스케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멀리서 따르게 하고, 질풍 같던 평소의 움직임도 오늘은
전혀 달랐다.
키요스 성은 고죠가와 서쪽에 있고 가게와 장터는 동쪽에 펼쳐져 있었다.
이제는 큰거리만도 30군데가 넘었으며, 더구나 계속 확장되어가고 있었다.
키요스의 오다 히코고로 노부토모가 종가인 시바 요시무네를 공격했을 때
노부나가는 이미 키요스로 옮겨 오와리 전체를 호령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리고 모리 산자에몬을 파견하여 히코고로를 죽인 뒤에는 요시무네의 아들
간류마루를 데리고 후루와타리 성으로 옮겨왔다. 그런 의미에서 노부나가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그런
노부나가의 구상이 사이토 도산의 죽음으로 어떤 차질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걱정 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다시 장터 쪽으로 들어섰다. 야채와
생선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무기류와 도자기류를 진열해놓은 상인도 하늘을
쳐다보며 가게를 닫으려 하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그 사이를 뚫고 며칠 전에 본
바늘장수를 삿갓 밑에서 찾고 있었다.
'녀석은 틀림없이 있을 텐데 .'
미노의 변고를 노부나가의 첩보망보다 먼저 알아낸 원숭이를 닮은 젊은이. 그
후 조사로 장인 도산의 방심과 요시타츠의 기습에 대해 상세히 알게 되었으나,
어쨌든 그 젊은이는 예사로운 녀석이 아니었다.
노부나가에게 호의를 가지고 통보한 것일까? 아니면 요시타츠가 보낸 첩자일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다시 한 번 노부나가가 그 앞에 나타날것임을
상대도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음, 역시 있었구나.'
오늘도 전과 같은 위치에 바늘을 늘어놓고 익살맞은 표정으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산책을 나온 것처럼 일부러 느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어떠냐, 원숭이. 바늘은 좀 팔리느냐?"
지나가는 말을 하듯 묻자 젊은이는 흘끗 삿갓 안을 들여다보고, 자못 친근한 듯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 말상을 한 사람이군. 어때, 내 예언이 맞았지?"
"넌 대관절 여기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물론 당신이지."
"무엇 때문에?"
"약간의 도움이나 줄까 하고."
"무슨 인연으로?"
"그건 알 수 없지. 천문, 지리, 모르는 것이 없는 내 지식이 왠지 당신쪽으로
마음을 가게 하거든."
"원숭이는 어디서 잡혔어? 스루가.. 아니면 카이 부근인가?"
"아니."
상대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좀더 가까운 곳. 당신의 발 밑에서."
"내 발 밑...?"
노부나가는 그 이상 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엉뚱한 방향으로 화제를
돌렸다.
'어떤가, 나도 자식을 낳을 것 같나?"
단아한 얼굴을 원숭이 앞으로 내밀었다. 너무도 엉뚱한 곳으로 화제가 돌아가서
원숭이도 어리둥절했는지, 주름투성이에 움푹 들어간 눈을 껌벅거리며, 놀란
소리로 반문했다.
"자식?"
2
"어때, 생길 수 있을 것 같나? 자네는 관상과 골상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물론이지 , 가질 수 있어! 얼마든지."
젊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답은 했으나 무엇 때문에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풀지 못해 당황해 하는 얼굴이었다.
노부나가는 밝게 웃었다.
"어떤가, 원숭이.나도 자네의 관상을 보아줄까? 자네는 지금 큰 전쟁이
벌어지기를 바라고 있군."
"천만의 말씀, 그렇지 않아."
"아니야. 어딘가에서 난리가 일어나면 장수의 목이라도 줍고 싶다고, 그 주름진
얼굴에 씌어 있는걸."
그러면서 노부나가는 말을 돌렸다.
"음, 자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지금부터 여자를 찾아
나서야겠군,"
"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자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도 같아. 그런데도
여자가 잘난 체하면 울화가 더 치밀어."
순간 원숭이의 눈이 번쩍 하고 무지개를 토하듯 빛났다가 이내 그 빛이
사러졌다.
"그럼, 야마시로 뉴도의 딸이..."
원숭이를 닮은 젊은이가 입을 여는 것과 노부나가가 걷기 시작한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역시 나를 알고 있구나!'
"기회를 잡을 생각이 있거든 따라와."
"오오!"
원숭이는 또 묘한 소리를 질렀다. 벌여놓은 바늘은 그대로 둔 채, 신이 나
떠들어댔다.
"여자 찾는 일의 수행원... 이거 신나는 일이로군."
다가서는 원숭이의 모습에 모리 신스케가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노부나가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가까이 오지 말도록 했다.
"인간은 말이지."
"예."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자식을 갖고 싶어지지."
"그것은 천지 자연의 이치,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어느 틈에 원숭이는 말투부터 달라졌다. 노부나가는 재미있기도 하고 방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네는 아내를 가진 적이 있나?"
"있습니다. 그런데 용모만 내세운 차디찬 여자라서 ."
"어디서 아내를 구했나?"
"엔슈에서였죠. 이마가와의 가신 마츠시타 카헤이지님의 중매로."
"그런데 어째서 여기까지 왔지?"
"헤헤헤헤..."
젊은이는웃었다.
"표면적으로는 주인의 부탁으로 갑옷을 사러 왔습니다."
"뭐, 갑옷을?"
"예. 오와리에 가서 갑옷 한 벌 사오너라...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다 써버리고
없습니다."
노부나가는 새삼스럽게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고
싶기는 한 모양인데, 그가 하는 말에는 너무나 가식이 없었다.
"주인의 돈을 가지고 도망쳤다는 말이냐?"
"헤헤..."
젊은이는 다시 웃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여편네가 싫어서 도망친 거나 다름없어요. 정말이지,
예쁘기만 한 여자는 차라리 따뜻한 돌을 품는 것보다도 맛이 없어요. 그런데다
입을 열 때마다 남편인 나를 원숭이와 닮았다고 하는 겁니다."
노부나가는 그만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하다가 겨우 참아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었군, 아내까지도 그런 말을 했다는 말이지.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잘 도망쳐나왔어."
젊은이는 또 고개를 갸웃하고 노부나가를 쳐다보았다.
3
웃기려 하면 씁쓸한 표정을 짓고 허풍을 떨면 그냥 웃어넘겼다. 무서운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고 격한 것 같으면서도 태평스러운 것 같아 도무지
노부나가라는 사람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솔직히 말해서 이 젊은이가 오와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노부나가의 그 매력
때문이었다. 그러한 노부나가가 '여자 찾기-' 라는 묘한 문제를 자신에게 던졌다.
이 수수께끼를 멋지게 풀어주고 싶었으나 노부나가는 아직 그것을 풀 열쇠조차
주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장터를 벗어나 성의 남쪽 가까이까지 왔다.
"여기야. 같이 들어가자."
"이곳은 분명 이코마 님의 저택인데 제가 그냥...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럼 , 내 조리토리로 따라오면 돼."
"조리토리라니 너무 지나칩니다. 사실은 저도..."
"그럼 달리 부를 만한 일이라도 했다는 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대들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원숭이라 불러 주세요."
노부나가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이코마 데와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데와는 있느냐? 나 노부나가다. 차를 내와라!"
과연 소문 그대로 방약무인한 태도였다. 집이 떠나갈 듯이 소리를 지르고 바로
정원 쪽으로 돌아갔다. 젊은이는 그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라 갔다.
노부나가의 목소리를 듣고 집안은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황망하게
마루에 나와 두 손을 짚은 데와는 노부나가보다 네댓 살 가량 연상인 것 같았다.
"아이구, 성주님. 어서 오십시오..."
"아부는 그만둬. 어서 차나 내와!"
"원, 성질도 급하셔라. 곧 준비하겠습니다."
"데와!"
"예."
"그대에겐 여동생이 있었지?"
"그렇습니다."
"이름이 뭐였더라?"
"오루이라고 합니다."
"몇 살이지?"
"열일곱입니다."
"좋아. 그 아이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해."
"예...?"
데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에겐 소실이 있나?"
"아니, 그 무슨 말씀을..."
"나는 말이지, 아내가 싫어졌어. 아이도 못 낳으면서, 잔머리만 굴리고 있지.
그래서 헤어지기로 했네."
"말씀하시는 뜻을... 그토록 화목하셨는데..."
"싫어졌어!"
노부나가가 소리지르는 것과, 얌전한 태도로 댓돌 밑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젊은이가 무릎을 탁 치는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순간 노부나가는 젊은이가
무언가 지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는 눈치 빠르게 사정을
알아차리고는 무릎에서 톡톡 먼지를 털며 그 자리를 얼버무렸다.
"두려워할 것은 없네. 오루이가 싫다면 굳이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 차를
가져오도록 하고, 그 뒤에 자네가 넌지시 물어보도록 해. 서두르는 것이 좋아."
이코마 데와는 이 엉뚱한 말이 오루이를 둘째부인으로 삼겠다는 구혼인 줄 알고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아버지의 애첩 이와무를 내놓으라고 한
저돌성과 그 이면에 숨은 위로와 배려를 알고 있는 만큼 데와는 귀가 솔깃 했다.
데와가 사라지자 원숭이를 닮은 젊은이는 버릇없이 웃기 시작했다.
"후후후후."
4
"원숭이! 뭐가 우스워?"
노부나가는 진지한 표정으로 젊은이를 돌아보았다.
"헤헤헤..."
젊은이는 다시 웃었다.
"우스워서 웃은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감동하면 웃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느 틈에 자신을 '저' 라 부르면서 젊은이는 천연덕스럽게 턱을 쓰다듬었다.
"묘한 버릇이군. 내 앞에서 그러면 용서치 않겠다."
"알겠습니다. 과연 이 원숭이의 주인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천지 이치에
맞습니다. 상대가 싫다면 굳이 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또 그놈의 천지냐..."
노부나가가 쓴웃음을 지었을 때 이코마 데와가 긴장한 얼굴로 다시 나타났다.
뒤에 열일곱 살의 오루이를 데리고 나온 그는 흘끗 노부나가의 기색을 살피고
눈에 겁먹은 표정을 떠올렸다.
노부나가는 그토록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젊다고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탓도 있었지만, 전광석화와 같은 행동이 그 성격에 뿌리 내리고 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원숭이를 닮은 바늘장수 젊은이는 노부나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이 젊은이만이 아니라 지금 데와를 따라나온 오루이의 얼굴에도
그러한 기색이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손히 두 손을 짚고 절한 뒤 가지고 온 차를 노부나가 앞에 내놓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 노부나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음."
노부나가보다 먼저 젊은이가 신음했다.
"허어, 이것 참..."
아름답다고 말하려 했었는지 아니면 위축되지 않는 그 천진난만한 태도에
감동했는지.
노부나가는 별로 오루이를 바라보지도 않고 소리를 내며 차를 마시고는 불쑥
말했다.
"오루이-"
"예."
"그대는 아이를 낳을 수 있나?"
"혼자서는 낳지 못합니다."
"싱거운 소리를 하는군. 누가 혼자 낳으라고 했느냐. 이 노부나가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고 묻는 거다."
데와는 깜짝 놀라 여동생을 돌아보았다. 이런 기괴한 문답은 세상의 보통 남녀
사이에서는 오갈 만한 문답이 아니었다.
그는 겨드랑이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성주님의 아기라면 낳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노부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키요스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더군. 나는 아름답지 않은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이 더 좋아."
그리고는 하카마의 주름을 툭툭 쳤다.
"원숭이, 따라와!"
그렇게 말하고는 노부나가는 데와 쪽을 돌아보았다.
"잘 들었겠지? 알았거든 내일이라도 성으로 데려 오도록."
"내일이라도...?"
"그래, 빠를수록 좋아. 원숭이 ! 어서 가자."
젊은이는 다시 한 번 감탄한 듯 고개를 갸웃하고, 급하게 데와 남매에게 꾸벅
절을 하더니 노부나가의 뒤를 따랐다. 문을 나와 노부나가에게 삿갓을 건네면서도
젊은이는 다시 신음했다. 아마도 노부나가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엉뚱하고
개방적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밖으로 나온 노부나가는 이번에는 빠른 걸음으로 오른쪽을 향해 걸었다. 아직
성에 돌아가려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5
"이젠 어디로 갑니까?"
원숭이가 물었다.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너는 지나치게 말이 많아."
노부나가는 약간 삿갓을 쳐들고 스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원숭이를 닮은 젊은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 뒤를 따랐다.
이번에 노부나가가 걸음을 멈춘 곳은 역시 그의 중신 요시다 나이키의 집
앞이었다. 노부나가는 문지기에게 기합을 넣듯 큰소리를 지르고 여기서도 바로
정원을 돌아 서원의 마루로 올라갔다.
문지기가 재빨리 성주의 방문을 알렸던 듯 요시다 나이키는 뚱뚱한 몸을 이끌고
나와 양미간을 모으면서 마루에 두 손을 짚었다.
"무슨 변고라도?"
"변고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노부나가가 미노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말하려는 줄 알았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기분도 울적하고 하니 오늘은 사냥이나 할까 하고."
"몰이꾼도 없이..."
"그런 건 필요치 않아. 오늘을 내가 직접 잡겠어. 그런데 나이키, 그대의 딸은
몇 살인가?"
"딸...이라면 나나 말씀이군요. 열여섯 살입니다."
"허어, 딱 맞는 나이로군. 잠시 이리 오라고 하게. 차는 이미 마셨으니 냉수나
가지고."
요시다 나이키는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하면서 가신을 불렀다.
"나나에게 성주님께 드릴 냉수를 가지고 이리 오라고 일러라. 급히 말이다."
노부나가는 털썩 마루에 걸터 앉았다.
"곧 장마철에 접어드는데 올해에는 둑이 무너지지 말아야 할 텐데."
"키소가와..말씀입니까?"
"음, 미노 근처에서 둑이 무너지면 농부들이 큰 고생을 할거야."
"미노 근처에서...?"
나이키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을 때 조용히 옷 끌리는 소리가 나면서,
아직 앳된 나나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냉수 가져 왔습니다."
"성주님, 나나입니다. 알고 계시지요?"
"오오, 많이 자랐군. 토실토실하고 아버지를 닮아 몸집도 커."
나나는 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수그렸다.
원숭이를 닮은 젊은이는 눈이 휘둥그래져 처녀와 노부나가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의 오루이가 잘 닦은 거울이라면 이 나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이는 이쪽이 아래인데도 수줍음을 통해 스며나오는
색향이 짜릿하게 온몸에 스며들었다.
"나나..."
노부나가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고쳐 불렀다.
"나이키, 내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네. 그래서 소실을 두어야겠네."
"예... 소실을?"
노부나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완에 따라 성은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지만, 자식이란 건 몸이 녹초가 될
정도로 노력을 해서 만들어야 하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한 사람은 아내의 시녀 중에서 뽑겠어. 미유키란 이름이지. 또
한 사람은 데와의 여동생 오루이. 이것으로는 좀 부족한 것 같아. 나나를 나에게
주게."
"예...?"
요시다 나이키가 아연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여자에 대해서만은 결벽 그
자체인 줄 알고 있던 노부나가가 느닷없이 부인을 네 사람이나 두겠다는
것이었다...
6
"성주님, 설마 농담은 아니시겠지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이키는 흘끗 딸을 돌아보았다. 딸의 얼굴과
목덜미가 연지를 발라놓은 듯 빨갛게 불타고 있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일부다처가 전혀 이상할 것 없었으나, 상대가 노부나가이니만큼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농담...?"
노부나가는 반문하면서 일어났다.
"농담이 아니야. 나나가 좋다고 한다면 데려오도록. 빠를수록 좋아."
나이키는 두 손을 짚은 채 대답할 말을 잊고 노부나가를 배웅했다. 오는 것도
갑작스러웠고 가는 것도 갑작스러웠다. 용무는 더더욱 기상천외했다. 딸은...
하고 돌아보니 이미 노부나가의 뜻을 읽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기묘한
옷차림을 그만두고 나서부터 노부나가는 놀랄 정도로 미남이 되어 있었다.
"성주님의 뜻이라면 거절할 수 없습니다..."
불쑥 중얼거리는데 노부나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숭이!"
깨닫고 보니 함께 온 젊은이가 정원에 아직 웅크리고 있었다. 젊은이는 벌떡
일어나 나이키에게 꾸벅 절을 하고 노부나가의 뒤를 따랐다.
"주인님."
"나는 아직 주인이 아니야."
"미유키에 오루이, 이번에는 나나입니까?"
"함부로 지껄이면 안 돼."
"이제 분명히 알았습니다. 오와리노카미 노부나가 님의 난잡한 행위에는 정말
질렸습니다."
노부나가는 아무 말도 않고 이번에는 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 원숭이는 마츠시타 카헤이지 님 밑에 있을 때는 키노시타 토키치로라
불렸습니다. 이 토키치로는 정말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토키치로는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면서 익살스러운 눈으로 노부나가의 등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럼, 이 바늘장수는 미노의 사기야마로 돌아가, 노부나가 님은 잔뜩 겁을
먹고 요시타츠 님이 두려워 마님을 멀리하셨다고..."
"누가 말이냐...?"
"헤헤헤헤, 주인님이."
"아직 주인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잖느냐?"
"그렇게 해서 소문과 유언비어는 멋대로 퍼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적적함을 이기지 못해 미유키와 오루이와 또 나나에게... 정말 소문에 어긋나지
않는 겁쟁이라고."
노부나가는 웃지도 않고 계속 걸었다.
토키치로는 다시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주인님 , 저는 미노 다음엔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요?"
"내가 그따위 걸 알 게 뭐냐?"
"스루가가 먼저냐 이세가 먼저냐... 아니, 어느 쪽이 더 바늘이 잘 팔릴 것
같습니까?"
"대답이 없으신 것은 마음대로 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러나 이 토키치로가
성주님이라면 또 하나 중요한 돌을 던지겠습니다마는."
"다름이 아닙니다. 이 돌은 멀리 에치고에, 에치고의 나가오 카게토라에게.
하기야 거기서는 난잡한 행위가 있다는 소문은 없지만..."
이 말에 노부나가의 걸음이 딱 멎었다. 이미 고죠가와 기슭에 도착해 있었다.
강 건너로 호젓한 키요스 성과 푸른 나무가 보였다.
7
노부나가가 핵 돌아보는데 토키치로는 다시 뻔뻔스럽게 웃었다.
"토키치로라고 했지?"
"예, 주인님."
토키치로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자리에서 노부나가를 주인으로 삼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노부나가는 다시 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예사로운 놈이 아니다...'
그렇다고 놀라움에 자기를 속박할 노부나가도 아니었다.
'그렇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배후를 위협하는 수단은 에치고에 있다...'
노부나가는 새삼스럽게 토키치로의 얼굴을 보면서 꾸짖었다.
"어리석은 놈. 내가 그처럼 중요한 돌을 잊어버리고 있는 줄 알았느냐?"
"헤헤..."
토키치로는 다시 웃었다.
"참고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주인님 ."
"아직 주인은 아니래도!"
"저는 미노에서 이세, 다시 스루가를 돌아서 와도 되겠습니까?"
"이세는 좋아. 아니, 스루가도 좋다."
"그럼... 미노는."
"난 모른다!"
노부나가가 다시 뱉어내듯 말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예, 알았습니다."
토키치로는 천연덕스럽게 자기 가슴을 가볍게 두드려 보였다. 그리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듯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자기가 먼저 아까 지나온
장터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노부나가는 잠시 그 뒷모습을 지켜 보았으나
토키치로는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우스운 녀석이야!"
노부나가의 입가에 비로소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로써 아마 요시타츠가
당장 오와리에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아직 영내에는
적이 있을 것이고, 그들에 대한 회유와 진압 때문에 잠시 동안은 오와리의
동향만을 주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스케, 돌아가겠다."
모리 신스케가 제방 건너편의 버드나무 밑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그 원숭이를 닮은 사나이는 어떤 녀석입니까?"
"그 녀석 말이냐..."
노부나가는 즐거운 듯이 대답했다.
"언젠가는 내 오른팔이 될... 녀석인지도 몰라."
"전부터 첩자로 있었습니까?"
"아니, 어제 처음 만났어, 장터에서."
"어제 처음으로... 믿어도 괜찮겠습니까?"
"신스케!"
'예."
"사람과 사람은 말이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첫 대면이야. 형제도 부자도."
이렇게 말하면서 성으로 들어가는 다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첫 대면 때 자기 장점을 상대에게 깨닫게 할 줄 모르는 자는 도움이 되지
않아. 그 녀석은..."
웃다가 다시 생각난 듯이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보다 나는 소실이 될 여자를 보고 왔다."
"예?"
"성밖에서 두 사람, 안에서 한 사람... 그런데 노히메가 무어라고 할지
모르겠어."
잔뜩 흐린 하늘에서 다시 뚝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돌아온 기러기의 집
1
드디어 오카자키의 가신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왔다. 슨푸에 있는
지로사부로 모토노부에게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성묘가 허락되었다.
태어난 딸의 이름은 카메히메라고 지었다. 왜 그런 이름을 지었나
오카자키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모른다는 점에서는 슨푸에서 지금 떠돌고 있는
소문도 마찬가지였다. 소문은 이곳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딸은 달이
채 차지 않고 태어났는데, 그것이 남의 자식이라는 따위의 소문은 아니었다.
이와는 반대로, 부모가 혼례 전에 이미 관계를 맺지 않았을까... 하는
소문이었다.
딸의 이름은 스루가 마님의 의견에 따라 지어진 모양이었다. 요시모토는 스루가
마님의 어릴 적 이름인 세나히메를 그대로 부르지 않고, 키라의 딸과 함께 츠루와
카메라는 대칭으로 불렀었다. 스루가 마님은 그 '카메' 에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렸던 모양이었다. 지로사부로의 가슴에 있는 '카메히메' 에 대한 배려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양보를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 딸의 탄생으로 요시모토는 안도한 듯, 이렇게 말했다.
"정월이 되기 전에 돌아오도록 하라."
12월 초에 허락이 내렸다는 소식이 오카자키에 전해진 것은 이미 지로사부로가
슨푸를 떠난 뒤의 일이었다.
오카자키의 가신들은 즉시 성으로 모였다.
어떤 약속을 하고 허락을 받은 것일까? 어찌 되었건 철없는 타케치요는 옛날의
일, 두 사람이 타는 가마로 떠난 지 10년 만에 돌아온다. 우선 숙소는 어디로
정할 것인가...? 이 문제부터 의견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슨푸에서 파견된 성주
대리가 지로사부로를 위해 본성을 비워줄 리 없었다. 만일 둘째 성을 사용하게
한다면 가신들의 감정이 용납하지 않았다. 사정을 설명하고 잠시 본성을
비워달라고 하자는 일파와, 그것은 도리어 졸렬한 태도라는 일파의 대립이
있었다.
"만일 성주님이 두 번 다시 슨푸에 돌아가시지 않을 결심이라면 적이 지키는
성안에는 들어가시지 않는 게 좋소."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마님과 따님을 두고 오시지 않았소?"
"하지만 성인이 되신 성주님의 흉중을 그대가 알 리 없지 않은가?"
두 파가 다시 심하게 대립해 셋째 성에서 슨푸의 명으로 행정을 맡아보고 있는
토리이 타다요시가 중재에 나섰다.
"일단 다이쥬 사에 모시고 나서 성주님의 의향을 여쭙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성묘를 위해 오시니 그것이 가장 온당하다고 믿소."
지로사부로가 된 타케치요가 오카자키에 도착한 것은 12월 8일.
하늘은 파란 물이 떨어질 정도로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오후였다. 가신들은
오히라의 가로수가 있는 데까지 마중할 사람을 내보내고는 겨울의 추위도 잊고
마른 풀 위에 앉아 기다렸다.
오늘도 그들의 옷차림은 초라했다. 남자들은 겨우 무사답게 차리고 있었으나,
여자들은 상인인지 농부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군중속에 섞인 혼다
헤이하치만이 깨끗한 코소데를 입고 있었다. 어머니와 같이 슨푸에 심부름을 갔을
때 타케치요가 준 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듯.
"아직 도착하시지 않았습니까?"
훤칠하게 자란 헤이하치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흔들었을 때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아, 저기 보인다."
2
"아, 오시는구나,"
"아아... 정말... 늠름해지셨어."
"어쩌면... 저렇게 멋진 말을 타시고."
마중 나온 사람들의 속삭임은, 그러나 곧 흐느낌으로 변해갔다.
뒤에 사카이 수타노스케와 우에무라 신로쿠로를 거느리고, 앞에는 히라이와
치카요시에게 창을 들게 하고 천천히 말을 타고 오는 지로사부로에게는 그 어느
곳에도 10년 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단지 토실 토실하게 살이 오른
천진난만한 아이였으나, 지금은 근육이 불거지고 뼈대가 굵직굵직한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노인이나 노파들 중에는 그 젊은 모습에서 조부 키요야스를
떠올리는 면이 많았는지도 몰랐다.
"오오, 선대의 성주님 그대로야..."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토리이 타다요시와 오쿠보 타다토시가 앞장서서 말에 다가섰다. 그들보다 먼저
지로사부로가 말을 멈추고 그들에게 말했다.
"오, 영감들이시군. 그동안 안녕하셨소?"
"예, 성주님께서도 무사히..."
타다토지는 이렇게 말하고 갑자기 와하하하 하고 웃기 시작했다. 목이 메어 그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토리이 타다요시는 잠자코 지로사부로의 말
앞으로 다가가 고삐를 받아들고 여러 사람 앞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역시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하고, 단지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혼다의 미망인이 헤이하치의 손을 잡고 활기찬 걸음으로 앞으로 나왔다.
"그 고삐를 헤이하치가 잡도록 해주십시오."
이어 헤이하치가 큰 소리로 말하면서 타다요시의 손에 달려들었다.
"성주님! 어서 오십시오."
지로사부로는 아직 걸음을 떼지 않았다. 등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을 이처럼
안타깝도록 고맙게 느낀 적이 없었다.
'나 같은 놈을...'
이렇게도 생각했고, 어떤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이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기둥이
되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럼, 다이쥬 사로 갑시다."
타다요시가 말했다. 마른 풀 위에 앉아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을 때, 행렬이 조용히 그들 앞으로 지나갔다.
"정말 다행이야. 이제 오카자키에는 성주님이 생겼어. 믿음직한 성주님이
생겼어."
사정을 모르는 하급무사의 가족 중에는 지로사부로가 이대로 오카자키에 계속
머무를 줄 알았는지, 행렬 뒤를 따라가면서 속삭이는 소리가 되살아났다.
"이제는 슨푸의 성주님과 친척이 되셨대."
"그래. 슨푸의 무리들이 물러가면 오카자키는 우리들의 것. 열심히 일하세."
"암, 당연하지. 이대로 있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이야."
"얼마나 경사스러운지 몰라. 봄은 우리가 제일 먼저 맞이했어."
오히라 가로수까지의 행렬은 겨우 4, 5명밖에 되지 않았다. 약간의 짐을 짊어진
일행이었으나 오카자키에 들어서면서 그것은 이가의 하치만구 신사에서 열리는
축제 때와도 같은 행렬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얼굴에나 고생을 잊은 듯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지로사부로는 천천히 말을 몰면서, 자꾸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 몇번이나
하늘을 쳐다보았다.
3
군중의 환희가 크면 클수록 지로사부로의 가슴은 더 아팠다. 그는 아직 이같은
모두의 기대에 부응할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단지 요시모토가 명하는
대로 인질이 되기도 하고, 관례를 올리기도 결혼하기도 했다. 성묘를 하게 된
것도 그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명령을 받게 될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요시모토의 쿄토 진입을 위한 선봉대라는 것은 갈수록 내부를 공고히 다지고
있는 노부나가와 싫건 좋건 결전을 벌이도록 강요당하는 것이었다. 피로에 지친
가신들이, 착실히 부력을 축적하고 있는 오와리의 정예부대와 전멸을 각오하고
싸울 장면을 상상한다는 것은 정말 고통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내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고향에 돌아왔는데도 머물 곳조차 없는 상태가 아닌가.
다이쥬 사만 해도 이마가와의 승낙이 있기 때문에 그를 맞아주는 것이리라.
'집도 없는 다이묘란 말인가... 나는...'
아니, 다이묘가 갖는 힘의 모든 것을 교묘하게 박탈당한 한낱 인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자기 한 사람 만이 아니라 아내와 새로 태어난 딸까지도.
"그래요, 먼저 이가의 하치만구에 참배하겠소."
자기 성을 왼쪽으로 바라보면서 행렬이 아스케모 가도에 접어들었을 때
지로사부로는 태도만은 흐트러뜨리지 않고 앞에서 걷고 있는 타다요시에게
말했다.
"그러는 것이 좋겠지요."
타다요시는 이렇게 대답하고 말 옆으로 와서 속삭였다.
"겟코 암은 나중이 좋겠습니다."
지로사부로는 끄덕이는 대신 다시 맑은 하늘로 눈길을 보냈다. 아버지
히로타다의 유해는 일단 다이쥬 사로 보내졌다가 다시 겟코 암에 암장된 채로
있다고 말해준 것도 타다요시였다. 타다요시는 가신들이 그토록 의지하고 있는
지로사부로가 만일 비탄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불쌍한 것은 나만이 아니다...'
바로 오른쪽 노미가하라 건너편 땅 속에도 구원받지 못한 아버지가 잠들어
있었다. 나중에 다시 기회를 보아 성묘하기로 하고 오늘은 아버지도 잊어버리자.
이가 다리를 건너자 마츠다이라 가문이 대대로 섬겨온 이가 하치만이 왼쪽에
있었다. 지로사부로는 말에서 내려 오랫동안 신사에 기도를 드렸다. 열다섯 살의
젊은 나이이지만 마음속의 안타까움을 숨기는 능력만은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신주인 시바타 야스타다가 흔드는 헤이 밑에서 정성을 기울이는
지로사부로의 모습에서는 비탄이나 감상 같은 것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으로 무운이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눈에 가득 눈물을 담은 채 기원하듯 말하는 우에무라 신로쿠로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신전에서 물러나온 지로사부로는 다시 유유히 말에 올랐다.
"영감... 이 근처를 조부님도 걸으셨겠지요?"
타다요시보다 먼저 오쿠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마는... 치야리쿠로(창의
명수. 여기서는 이에야스의 조부를 가리킴)가 새빨간 창을 메고 저 한테는
말고삐를 잡게 하시고는 몇 번이나 이곳을 지나가셨는지 모릅니다. 아니 , 그때의
용감하시던 모습이 성주님께도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핏줄입니다, 핏줄."
이렇게 말하고 노인은 우는 대신 다시 낙엽이 날아가는 듯한 소리로 웃었다.
4
일행이 카모다에 있는 다이쥬 사에 도착한 것은 해가 거의 머리위에 올라왔을
무렵이었다.
마츠다이라의 4대조 사쿄노신 치카타다가 건립한 정토종에 속하는 이 절은
부근에서는 성 다음으로 큰 건물이었다. 지로사부로의 할아버지 키요야스가 텐분
4년(1535)에 칠당가람을 보수한 지 벌써 22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 그
어디에도 황폐한 곳이 없고, 절의 문을 닫으면 진지 이상으로 견고한 요새였다.
"잘 오셨습니다. 당연히 성묘를 하셔야지요."
주지 텐쿠 화상이 직접 마중 나와 정중하게 맞았다. 그 뒤에 도열한 건장한
체구의 승려는 대략 40명. 그들은 이 난세에 폭력으로부터 성역을 지키기 위한
이를테면 경호원인 셈인데 따로 승병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문 앞에 이르러 말에서 내린 지로사부로는 성큼성큼 텐쿠 화상에게 다가갔다.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소홀함이 많소. 용서하시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 절은 마츠다이라 가문과는 삼중 사중으로
인연이 깊은 고찰.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자, 어서 객실로 드시지요."
앞장서서 걸으면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지로사부로를 돌아다보았다. 열다섯
살치고는 지나치게 세상일에 익숙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 히로타다처럼
소심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강한 정신의 발로라고
화상은 생각했다.
객실은 셋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그 가장 안쪽이 건립자 치카타다와
조부인 키요야스의 휴식공간으로 쓰였던 곳으로, 정면에는 약간 높은 칸이
마련되고, 두번째 칸 그리고 마루가 딸려 있었다. 모두 다다미 24장의 크기.
이것이 오카자키에 머물 때 지로사부로가 사용할 거실과 침소였다. 이곳은 또한
가신들과의 접견장소도 되었는데, 슨푸의 임시처소에 비하면 궁전 같았다.
노신들은 장지문을 사이에 둔 다른 칸에 머무르게 되어 있었다.
화상은 우선 차를 가져오게 하고 지로사부로의 얼굴을 다시 자세히 바라보았다.
평범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천 사람 가운데 섞여도 금세 눈에 띌 볼과
귀였다. 그리고 그 눈에서 눈썹에 이르는 부분은 격렬한 선과 빛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할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았어...'
성급하거나 과격한 탓으로 몸을 망칠 염려가 다분했다.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울컥 하는 혈기때문에 몸을 그르칠 위험성이.
"차를 드시고 나서 곧 성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좀더 휴식을 취하시고..."
지금 당장 하겠다고 답하리라 확신하면서도 화상은 부드럽게 물어 보았다.
"모두가 원하는 대로."
지로사부로의 대답에 화상은 뜻밖이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것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대답한 말은 아니었다. 지로사부로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에
압도되어, 자기가 소멸되어버릴 것 같은 감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금 전에 본
성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 조상들이 무엇을 바라고 무엇에 의지하려고 이와
같은 가람을 세웠을까... 그 정신의 밑바닥에 깔린 것을 그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대관절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때 노신들이 잇따라 들어와서 보고를 했다.
"성묘준비가 끝났습니다."
5
인질에서 인질로 전전하는 생활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지로사부로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방랑자와도 같은 정신적 부박함이 있었다. 침착한 자세를 견지하고
집요하게 살아온 인간의 역사를 대할 기회가 적었다. 나고야의 성을 보아도, 텐노
사나 만쇼 사를 대해도, 또 슨푸의 웅장한 성곽을 접해도 단지 큰 건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린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있었으나, 그 이면에 있는 깊은
것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지금 자기 조상이 건립하고 할아버지가 다시 보수했다는 가람을 보고 있으려니,
오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불가사의가 생생하게 마음을 압박해왔다.
'한 사람의 지로사부로는 결코 우연히 있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시대에서 시대를 수직으로 꿰뚫고 그 끝에 자기가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아니, 자기에게도 이미 딸이 있다. 그렇다면 자기를
하나의 점으로 하여 미래에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었다...
텐쿠 화상의 안내를 받아 중신들을 거느리고 먼저 조상의 무덤에 성묘했다.
머리 위에 큰 소나무 다섯 그루가 자라고, 그 나뭇가지에 몇 개인가 부엉이 집이
있었다.
"밤이 되면 이 부엉이들이 산소를 지킵니다."
화상은 이마에 손을 얹고 나뭇가지를 쳐다보고 나서 산소 앞에 향을 피웠다.
지로사부로는 석양을 향해 합장했으나, 이럴 때 무어라 기도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내 생명의 근원이 있는 곳. 울컥 그리움이 치밀었다. 자기를 합쳐 9대...
그리고 앞으로 몇 대까지 계속될 것인가.
성묘가 끝나자 텐쿠 화상은 다시 산문으로 안내하고, 누각에 걸린 고나라
천황이 직접 쓴 현판을 가리켰다.
다이쥬사라 씌어 있었다.
"키요야스 공이 생존하셨을 때인 텐분 이년 십일월에 하사하신 것입니다."
화상은 그때부터 지로사부로의 가슴에 오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다보탑으로 안내하여 거기 씌어 있는 할아버지의 친필을 보여주기도 하고,
치카타다가 기증한 부처의 화상 앞으로 안내하기도 했다. 그동안 지로사부로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을 뿐이었다. 오늘날까지는 자기를 중심으로 한
가신들의 횡적 연결밖에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여러 조상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일행은 다시 객실로 돌아왔다.
"보여드릴 것이 또 있습니다. 중신들께서도 이리 오시지요."
화상은 지로사부로 앞으로 중신들을 불러 조상들이 기증한 소중한 물품들을
나란히 펼쳐놓았다. 겨우 스물네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기증품이 의외로
많아, 이것이 지로사부로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자개를 박아넣은 파란 문갑이 있었다. 쇼토쿠 태자의 화상도 있었다. 목계가
그린 두루마리 그림도 있고, 손으로 직접 쓴 와카도 있었다.
지로사부로가 이들 유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토리이
타다요시가 조용히 혼자말을 하듯 속삭였다.
"모처럼의 귀향이시니 와타리의 제 집에 들러주십시오. 이 늙은이 또한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토리이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도 지로사부로는 아버지가 기증한 물품들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6
지로사부로가 와타리에 있는 토리이 타다요시의 집을 찾아간 것은 그 이틀
후였다. 어제는 성에 들어가 이마가와 쪽 성주 대리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상대는 아직 지로사부로를 소년으로 취급하고 또 요시모토의 지시를 받기도
했으므로 다섯 가지 채소와 두 가지 국으로 식사를 함께 하면서 정치에 대해서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언젠가 고쇼님이 상경하실 때는 필히 수행하게 되실 테니 열심히 무예를
연마하십시오."
이런저런 교훈적인 말을 했다.
"모처럼의 귀향이시니 가신들의 충성을 공고히 다져두는 것이 마땅 할 줄
압니다."
지로사부로는 간단한 말로 대답하고 마음에 점화된 한 점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개 없는 자신. 가신들의 애처로움. 그리고 또 여기 와서 보고들은 모든 것은
슨푸에서 들은 것보다도 더 할머니의 유언과 셋사이 선사의 말에 깊이 이어져
있었다.
다음에 올 때는 틀림없이 전쟁이 벌어져 있을 터. 더욱 어려워진 자기 입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흘렀다.
"내 성이기 때문에 그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
스루가에 있는 아내와 딸도 버린 채 단단히 결심하고 이대로 성에 도전하고
싶었다. 토리이 타다요시가 셋째 성에 있는 관아로 안내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지로사부로를 데려간 것도 그러한 혈기를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와타리에 도착했을 때, 사철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있는 타다요시의 집은 작은
진지보다 더 큰 저택이었다.
"이 늙은이의 집입니다."
지로사부로는 비로소 미소를 떠올릴 수 있는 집다운 집을 보았다. 토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문도 훌륭했으며 벽도 상한 데가 없었다. 이 정도로 모든 것이
갖추어진 집에 살고 있는 것은 가신 중에서는 타다요시 한 사람뿐. 부유하기
때문에 슨푸까지 많은 물품을 보내준 것이겠으나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
고케닌의 영접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서원식 구조로 되어 있었다. 직접
농사도 짓고 있는 듯 고케닌도 하인도 꽤 많았다. 우선 다과가 나오고 고케닌들이
잇따라 절을 올렸다. 집의 규모에 비해서는 모두 소박한 차림이었으나 그래도
넉넉한 살림살이의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장지문에 겨울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고 있었다.
"휴식을 마치고 나서 성주님 한 분께만 이 늙은이가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로사부로를 재촉하여 정원으로 나왔다. 뒷문으로 돌아서니 말먹이 냄새가
코를 찌르고 그 너머에 네 채의 곳간이 이어져 있었다.
그 앞에 선 타다요시는 하인을 불러 곳간의 열쇠를 가져오게 하였다.
"너는 물러가 있거라."
하인을 물리고 나서 세번째 곳간 문을 열었다. 튼튼한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자, 들어가시지요.'
지로사부로는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려는가 싶어 허리를 구부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실에 웬 동전이 바닥 가득히 쌓여 있었다.
"성주님."
타다요시가조용히 말했다.
"동전은 이렇게 세로로 쌓아놓으면 절대로 썩지 않습니다. 기억해두십시오."
7
"이 많은 돈이 대관절 누구 것이오?"
동전을 쌓는 방법보다도 지로사부로는 그 소유자가 누구인지에 더 관심이
있었다. 노인 개인의 축재로는 그 양이 너무 많았다. 몇 천 관이나 될지 젊은
그로서는 눈대중도 할 수 없었다.
"누구 것이라니요, 모두 성주님의 것입니다."
"뭐, 내 것이라고...?"
타다요시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지로사부로의 놀람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성주님께서 다시 이 성에 돌아오시게 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라고 이
늙은이는 생각합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비, 그때가 되어 급하게
백성들을 괴롭혀가며 마련해서는 백성들의 원성만 사게 됩니다."
타다요시는 조용히 밖으로 나와 눈시울을 붉히면서 문을 닫았다.
"성주님은 성주님 뒤에 가신들의 피와 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다음 곳간에 들어가니 그곳에는 마구와 갑옷, 칼과 창이 가득히 들어차 있었다.
"우선 돈을 모으고 무기를 갖추고 나서 다음에는 식량을 마련하지요. 이 모두
성주님이 처음 출전하실 때를 위한 준비입니다."
"음, 식량도 준비했소?"
"우선 당장의 전쟁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군사도 말먹이도...
마른풀만 해도 이천 관쯤은 비축되어 있습니다."
지로사부로는 이미 대답할 말을 잃었다. 이런 노인에게 그같은 준비가
있었다니... 더구나 그것을 궁핍한 가신들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비상시를 대비하여 준비해놓다니...
"영감."
"예."
"나는 울고만 싶소. 평생 잊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영감께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무엇입니까?"
"혹, 이마가와로부터 위임받은 공납을 취급하면서 뒤로 빼돌린 것은 아니오?"
타다요시는 깜짝 놀란 듯 어둑어둑한 곳간 안에서 지로사부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상대가 책망하는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안도하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것은 원래가 마츠다이라 영지의 조세입니다. 결코 빼돌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 말했소. 영감이 이것을 집에 비축했다가 발각되어 문제라도 생기면,
그 비난을 혼자 다 뒤집어쓸 생각이오?"
타다요시의 늙은 어깨가 무섭게 들먹였다.
"오오, 그런 일까지 배려하시는 성주님이 되셨군요."
"영감!"
"예."
"영감... 이 지로사부로는 훌륭한 가신들을 가져서 정말 행복하오. 조상님의
덕택... 이렇게... 영감..."
지로사부로는 무릎을 꿇고 주름투성이인 타다요시의 손을 받쳐 들었다.
타다요시는 그가 하는 대로 맡겨둔 채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 지로사부로를 따라와 있던 타다요시의 아들 모토타다가 큰 소리를 지르며
곳간 밖에까지 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비로소 눈물을 닦고 밖으로 나왔다.
"아버님! 성주님! 어디 계십니까? 오카자키에서 급한 일이 생겼다고 사카이
우타노스케 님이 달려오셨습니다."
곳간에서 나왔을 때 바깥 햇빛은 눈을 멀게 할 만큼 밝았다.
8
두 사람이 모토타다와 같이 돌아왔을 때 말을 타고 달려온 우타노스케는 마루에
서서 몸의 땀을 닦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소?"
타다요시의 목소리를 듣고 우타노스케는 돌아서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피해달라는 눈짓을 했다. 모두 서원에서 나간 뒤 그는 지로사부로와 타다요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다 노부나가가 오타카 성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말이오?"
우타노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노의 장인 도산 뉴도가 살해되어 먼저 행동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혹시 장인의 원수 요시타츠와 손을 잡았는지도 모릅니다."
타다요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시타츠와는 손을 잡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나저러나 노부나가가
먼저 행동을 일으키다니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군..."
"경우에 따라서는 큰 전쟁으로 번질지도 몰라 우선 상의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지로사부로는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성격에
대해 그 일면을 직접 보아온 그로서는 예사롭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노부나가의 세력이 더 이상 장인의 생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힘의 과시. 다음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반대였다. 뜻을 모아
이마가와의 상경을 저지하자는 요시타츠와의 묵계가 이루어졌다는 증거. 아니,
노부나가의 행동은 언제나 이면의 이면에 또 하나의 이면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로사부로가 귀성한 것을 알고 슨푸에 등을 돌리려면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
노부나가는 언제라도 타케치요를 도와주겠다.'
이러한 사자가 올 전제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얼마 전에는 가신의 동생과 딸들을 소실로 삼겠다고 직접 찾아 나서서
한꺼번에 아내가 넷으로 불어났다.
역시 멍청이라는 얘기가 어디선지 모르게 흘러왔다.
"결국은 그것이 무모한 짓이라고..."
우타노스케가 다시 타다요시에게 말했다.
"슨푸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성주님께 그대로 성에
머무르면서 지휘를 하시도록 말씀 드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타다요시는 눈을 감았다. 우타노스케의 말에도 분명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상책인지 아닌지는 당장 판단하기 어려웠다.
지금 이대로 성안으로 맞아들이면 요시모토가 없는 싸움이므로 성주 대리의
선봉으로 나서야 한다. 그보다는 일찌감치 슨푸로 돌아가게 하여 요시모토가 직접
출진할 때 다시 새로이 맞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지로사부로는 두 사람과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지닌 젊음은
지금까지 망설임으로 일관되어왔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처자를 버려야 한다는
결단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요구당해왔다.
'언젠가 버려야만 한다면 과감하게 지금...'
이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후끈 달아올랐다.
타다요시가 눈을 떴다. 그리고 우타노스케보다는 지로사부로를 설득하는 듯한
어조로 조용히 자기 무릎을 만지면서 말했다.
"이삼 일 오와리의 동정을 더 살펴보고, 사정에 따라서는 곧 슨푸로 돌아가셔야
할 줄 압니다."
노부나가가 던진 돌 하나!
지로사부로는 노려보듯 타다요시에게 눈길을 던진 채 있었다.
꾀꼬리의 성
1
이미 벚꽃이 피기 시작했는데도 여기저기서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른봄의 앳된 울음소리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다투는 듯한 그 소리가 모여 있는
무장들의 귀에 기분 좋게 흘러들었다.
슨푸의 본성 정원이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적자 우지자네가 쿄토에서 슨푸로 내려와 있는 나카미카토
노부츠나와 공차기를 하면서 그 광경을 여러 장수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요시모토 자신도 오늘은 웬일인지 마루에 휘장을 치고 깔개를 깔게 한 뒤 이 유서
깊은 성안 풍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화창하여 햇볕은 따사롭고 흰 눈을
머리에 인 후지산 정상이 뚜렷이 보였다. 이제 곧 주연이 마련될 예정이었는데,
꾀꼬리 울음소리와 공 튀는 소리가 자못 한가로운 느낌을 주었다.
요시모토는 사방침에 살찐 몸을 기대고 쿄토식으로 화장한 얼굴에 눈썹을
그리고, 공차기보다는 여러 장수들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이 유서 깊은 공차기가 슨푸가 아닌 쿄토로 옮겨질 시기가 올 때를
상상하고 있었다. 선조 때부터 와신상담하며 꿈꾸어 온 야망이었다.
오다와라의 호죠, 카이의 타케다와 이중으로 맺은 혈연동맹이 지금의 그로서는
자못 의심스러운 바가 없지 않았다.
요시모토가 쿄토로 출발하면 그들 가운데 하나가 반드시 배후를 칠 우려가
있었다. 더구나 그럴 위험성은 호죠 우지야스보다 타케다 하루노부 쪽에 더
많았다.
하루노부의 누나를 아내로 맞고 아버지를 슨푸 성에 억류한 요시모토였으나,
하루노부의 뜻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쿄토 진입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언젠가는
한번 싸워야 하는 숙명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하루노부는 당분간 야심을
억누르고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토라와의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 장기전으로 돌입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다!'
요시모토의 뇌리에서는 이미 출발시기와 준비가 끊임없이 검토되고 있었다.
세키구치, 오카베, 오하라 등 공차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중신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눈길이 마츠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야스의 옆모습에 멎었을 때.
"그렇다!"
요시모토는 잊어버리고 있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위 사람들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해 , 일어날 때 팔을 부축해준 시동 하나만을
데리고 슬그머니 휘장 뒤로 사라졌다. 마츠다이라 지로사부로는 관례 때 명명된
모토노부란 이름을 열다섯이 되던 해의 정월에 조상의 성묘를 끝내고
오카자키에서 돌아온 후 '모토야스' 로 고쳤다. 모토노부의 노부란 글자가 오다
노부나가의 노부와 통하는 것을 요시모토가 꺼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요시모토는 성 중심의 높은 망루 옆 복도를 지나 안채로 돌아왔다. 그곳에서도
꾀꼬리 울음소리는 요란했고, 처마 밑으로 복숭아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그 마루 끝에 한 여자가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오오, 오츠루. 오래 기다렸지?"
요시모토는 일부러 허리를 구부려 여자가 데리고 있는 세 살쯤 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자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에게 출가한 그의 조카딸이자
세키구치 교부쇼유의 딸인 세나히메였다.
2
오츠루라는 애칭으로 불린 세나히메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모토야스의 맏딸
카메히메를 낳았을 뿐 아니라, 다음 아이를 임신하여 산달이 가까웠다. 이미 전과
같은 처녀티는 없어지고 완연한 부인의 모습이었다. 나이도 모토야스보다 여섯 살
위인 스물네 살.
요시모토는 살찐 몸이 거추장스러운 듯 사방침에 기대고, 임부의 투명한 피부를
바라보았다.
"내가 널 부른 것은 모토야스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예, 말씀하십시오."
"지난 이월 초 오와리의 노부나가도 상경하기 시작했다. 미요시의 무리들에게
혼이 난 쇼군 요시테루를 농락하기 위해서일테지. 설마 오다의 멍청이가 무슨
일을 저지를 리는 없겠지만, 나도 이제 서서히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아."
세나히메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생각중이다마는... 어떠냐, 모토야스와 너희 모녀
사이는?"
"어떠냐고 말씀하시면?"
"화목한지 아닌지를 묻는 게야."
세나히메는 자신의 불룩한 배를 가리듯 살며시 옷소매를 편 채로 올려놓았다.
"이번에는 아들이었으면 하고 모토야스도 말하고 저도 역시 원하고 있습니다."
"하하...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이로구나."
"안심하십시오..."
"그래, 그래."
요시모토는 가볍게 끄덕이고 나서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상경할 때 모토야스에게 선봉을 명할 것인지 아닌지 지금 많이 망설이고
있다."
"모토야스의 마음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방심은 금물이야."
요시모토는 다시 한 번 세나히메의 얼굴과 몸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네가 모토야스보다 나이가 위라고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토야스의 부하 중에는 오다 쪽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 선봉을
명령받은 모토야스가 그들 부하에게 조종되어 너희 모녀를 버릴 생각으로 오다
세력과 손을 잡기라도 하면 상경하려는 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 와."
세나히메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럴 염려는 절대 없습니다."
"네가 확실하게 모토야스의 마음을 붙들고 있다는 말이냐?"
"나이가 위면 질투가 많다고 소실도 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모토야스도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말이로구나. 네게 그런 자신감이 있다면 틀림없겠지."
세나히메는 가까스로 일어나 걸으려고 뒤뚱거리는 카메히메를 뒤에서 받쳐
주었다.
"만일 의심이 가신다면 상경에 앞서 모토야스의 마음을 시험해보십시오."
"음, 그런 방법도 있겠지."
요시모토는 성격이 거센 조카딸의 말에서 문득 한 가지 암시를 받은
기분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종종 카사데라, 나카네, 오타카의 경계선에서
거추장스러운 싸움을 걸어왔다. 우선 그 부근에 군대를 보내 모토야스의 기량과
부하를 다루는 솜씨를 시험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요시모토는 정원의 햇빛에 눈길을 던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모습에
세나히메는 다시 야무진 말을 했다.
"저는 모토야스의 아내이지만 고쇼 님의 조카딸이기도 합니다."
3
세나히메에게는 남편이 요시모토의 의심을 받는 것이 여간 안타깝지 않았다.
모토야스에게 자기와 아이를 버리고 오다 쪽에 가담할 마음이 있을 리 없었다.
다시 아이가 하나 늘어날 것이고, 고쇼의 조카딸이란 긍지와 체면을 연하의
남편에게 충분히 납득시켜놓았다.
"그래, 그럼 네 의견에 따르기로 하겠다. 모토야스에게는 오늘 내가 한 말을
이야기하지 말아라."
"예."
"안에 들어가 아이에게 쿄토에서 보내온 과일이라도 주어라. 나는 다시
나가봐야겠다."
이렇게 말하고 일어서려다 발이 저려 비틀거렸다.
"조심하십시오."
세나히메는 얼른 달려가 요시모토의 몸을 부축했다. 그는 잠시 세나히메의 손에
의지하고 낯을 찌푸렸다.
"알겠지, 모토야스의 마음을 놓쳐서는 안 돼. 연상이니 몸가짐에도 더욱
조심하고."
"잘 알고 있습니다."
"명령하는 말투를 쓰면 안 된다. 여자는 언제나 귀엽게 응석부리는 것이 좋아."
세나히메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에서는 빈틈없이 해나가고 있다...
이런 의미를 담은 콧대 높은 미소였다.
요시모토가 밖으로 나간 뒤 세나히메는 딸의 손을 잡고 안이 아니라 곧바로
현관으로 갔다. 모토야스의 첫 출전이 결정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열여덟 살이 되도록 자기 가신의 지휘를 맡지 못했다는
것은 모토야스는 물론 자기한테도 한없이 서글픈 일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거취를 의심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쿄토 진입이
결정되면 오카자키 군말고는 오와리 침공의 선봉을 담당할 자가 없었다.
세나히메는 모토야스에게는 비밀에 부치라는 말까지 그대로 남편에게 고할
생각이었다.
물론 첫 출전은 미카와와 오와리의 경계일 것이다. 거기서 오와리의 오다 군을
궤멸시켜, 과연 마츠다이라 키요야스의 손자, 세키구치 치카나가의 사위라는
찬사를 들어야 했다. 요시모토의 조카딸인 동시에 모토야스의 아내였다. 남편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 아내의 길. 세심하게 마음을 써서 모토야스의 각오를
굳건하게 만들어야 한다. 모토야스도 연상인 아내의 말을 잘 따랐다. 따르지
않을수 없는 억센 세나히메의 성격도 있었지만.
"성주님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세나히메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면, 열여덟 살의 모토야스는 노숙한 사람처럼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카메야, 꾀꼬리와 꽃을 잘 보아두어라. 올해는 아버지께 마침내 봄이 찾아올
거야."
기다리게 했던 유모에게 카메히메를 안게 하고 현관에 나온 세나히메는 기분이
좋아 자기 아이를 꽃 밑으로 데려갔다.
밖에서는 공차기가 끝났는지, 이번에는 퉁소와 작은북소리가 들려왔다.
'성주는 언제 돌아올 것인가.'
여자로서 한시도 모토야스를 곁에서 떠나게 하고 싶지 않은 모순도 지닌
세나히메였다.
4
인연이란 이상한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여자라는 생명체도 이상했다. 처음에는
타케치요였을 때의 모토야스를 곯려주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 뒤 어쩌다가
인연이 맺어지고, 한때는 그 일을 후회했다.
'이런 어린애와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러다가 점점 더 오기가 나서 놓아줄 수 없게 되고, 혼례 전에는 자기가 먼저
모토야스를 위해 우지자네를 찾아갔다가 심한 봉변을 당하기까지 했다.
카메히메를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세나히메는 인생이 캄캄해진 것처럼
당황했다. 도무지 모토야스의 자식이란 생각은 들지 않고 우지자네의 씨앗인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지금은 그런 불안도 사라지고, 자기는 처음부터 모토야스를
위해 있었던 것 같은 안정 속에 살고 있었다. 연상의 아내라는 열등감도 없었다.
혼인하기 전부터 맺어졌다는 수치감도 없었다. 남편이란 생각만 해도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사랑스럽기만 했다. 어쩌면 주위 사정이 모토야스의 젊은 몸에
한가로움을 강요했기 때문에 부부의 일상이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더 짙었는지도
모른다. 모토야스는 끊임없이 세나히메를 요구했으며, 그녀 또한 모토야스가 곁에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사이 곧 둘째 아기가 태어난다. 이번에는 의심할 여지 없는 모토야스의
씨앗이었다.
세나히메는 들뜬 마음으로 마구간을 돌아 서쪽 문을 나섰다. 해가 잘 드는
제방의 벗꽃은 이미 7할 가량이 활짝 피어 있었고, 푸른 잎이 해자에 하늘하늘
비치고 있었다.
"유모, 이번에는 아들이었으면 좋겠는데."
"정말로 아드님이 태어나신다면 모두들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마츠다이라 가문의 장남인만큼 성주님 어릴 적의 타케치요란 이름을 잇게 될
거야. 유모도 기도를 많이 해줘요."
"여부가 있겠어요."
세나히메는 해자 옆 벗나무에 손을 뻗어 작은 가지 하나를 꺾어서 카메히메의
손에 쥐여주었다.
"지금 전국을 통틀어서 이렇게 여자들만 걸을 수 있는 곳은 슨푸말고는 없다고
해. 도처에서 도둑과 부랑배들이 들끓고 있다는 거야. 이런 곳에 사는 우리는
여간 행복하지 않아."
유모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모는 오카자키의 가신 카타다소우로쿠의
아내로 언제쯤 오카자키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것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미야마치에 있는 모토야스의 임시거처에 도착한 것은 여덟 점반(오후 3시)
무렵이었다. 해는 아직 높았으나 정원에는 봄을 장식하는 정원수가 없었다. 갓
싹이 나오기 시작한 차나무와 배나무 사이에서 사카이 우타노스케가 열심히
밭벼의 씨를 뿌리고 있었다.
세나히메는 자기 방에 돌아와 곧 우타노스케를 불렀다.
"성주님은 아직도 성에 계시나요?"
우타노스케는 흙 묻은 손을 무릎에 얹고 애매하게 웃었다. 그의 눈에 비친
세나히메, 스루가 마님은 정이 너무나 깊다. 첫째도 성주, 둘째도 성주, 화창한
봄날 같은 화목함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 마님에게는 오카자키에 대한 그리움은
없었다. 이러한 점이 모토야스가 오카자키에 돌아가는 날을 늦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고쇼 님을 뵈러 가셨다고 들었습니다마는, 기분은 어떠하시던가요?"
우타노스케는 교묘히 화제를 돌려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세나히메를
바라보았다.
5
"그 일로 성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참, 그대에게도 솔직하게 말해볼까요?"
세나히메는 넘칠 것 같은 교태를 부리면서 어린 계집아이처럼 생긋 웃었다.
우타노스케의 씁쓸해하는 표정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쇼 님은 성주님께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수는
없잖아요? 성주님은 제 생명과도 같으니까요."
"그 말씀이란?"
"성주님께 좋은 일이에요. 드디어 출전이 허락되었어요."
"출전...?"
"우타노스케, 출전할 때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우타노스케는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첫 출전이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오와리와의 경계선까지는...
날짜가 얼마나 걸리지요? 너무 오래 떠나 있을 수는 없어요."
세나히메는 우타노스케의 고지식함을 놀리듯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우타노스케 역시 세나히메를 무시하는 태도로 말했다.
"오와리와의 경계라면 일 년이나 이 년, 아니 평생 돌아오시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우타노스케!"
"예!"
"왜 그런 불길한 말을 하는 거예요?"
"마님이 농담을 하시기에 저도 농담으로 말씀 드렸습니다."
"농담을 해도 정도가 있는 거예요. 첫 출전이 임박했다는 말을 듣고
그대에게까지 숨김 없이 털어놓는 내 마음도 좀 알아줘야 할 것 아닌가?"
"마님, 이것은 쉽게 기뻐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왜죠?"
"상대인 오다 노부나가는 마침내 문중의 혼란을 바로잡고 오와리를 통일하여
현재 욱일승천의 기세에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이기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성주님은 열여덟 살이 되시기까지 아직 군사지휘도 허락받지 못한데 비해
상대는 열세 살 때 첫 출전한 이래 이미 그 어떤 노련한 자보다도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무사히 개선하실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꾸임없는 우타노스케의 말을 듣고 세나히메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빛이었다.
"성주님을 도와 공을 세우시도록 하는 것이 그대들의 임무 아닙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주눅이 들면 어떻게 합니까? 알았어요, 어서 가서 밭이나 손보세요."
우타노스케는 하라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마음이 개운치 않은 것은, 세나히메가 성주의 생모 오다이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슨푸의 여성과 미카와 여성의 차이. 미카와 여자는
한없이 공손하고 견실한 데 비해, 슨푸의 여자는 화려한 옷차림에 바깥일에까지
참견을 한다. 노골적으로 성주의 애정을 입밖에 내어 말하고 언제까지나 이곳의
생활이 계속될 줄로 알고 있다. 이것은 우타노스케만이 아니라 다른 가신들에게도
불안의 씨가 되고 있었다.
모토야스도 결코 말리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대로 맡겨두고, 때로는 그
무릎을 베고 한가롭게 귀를 후비게 하거나 하루 종일 멍하니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거나 했다.
"드디어 시험당할 날이 왔구나."
우타노스케가 다시 밭으로 가서 씨를 뿌리고 있을 때 당사자인 포토야스가
수행원 히라이와 시치노스케를 데리고 한가로운 표정으로 문에 들어서고 있었다.
6
모토야스는 우타노스케 옆으로 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우타노스케는 일부러 아는
체하지 않았다. 스루가 마님은 성안에서 요시모토가 한 말을 당장 이야기할 것이
분명했다. 이 젊은 남편은 어떤 반응을 보일것 인지, 잠자코 지켜보고 싶은
우타노스케였다.
"우타노스케."
모토야스가 먼저 말을 걸었으니 도리가 없었다.
"오오, 돌아오셨군요."
우타노스케는 씨앗주머니를 든 채 고개를 들었다. 오후의 햇살이 막 파헤친
검은 흙 위에 소나무 그림자를 떨구고 있었다. 모토야스의 흰 얼굴이 그 흙의
그림자와 대조를 이루며 자못 유약하게 보였다.
"공차기란 제법 재미있는 것이더군. 그대는 본 일이 있소?"
"없습니다. 또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째서? 아주 풍류가 있던데."
"저희들과는 아무 인연도 없는 것이므로 전혀 흥미가 없습니다."
"영감..."
모토야스는 옆에 있는 히라이와 시치노스케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대는 몹시 초조해 보이는군. 지금 시치노스케와 그 이야기를 하며 오던
중인데, 아마 영감한테 방금 했던 말을 하면 틀림없이 이런 대답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과연 그대로군."
우타노스케는 눈을 치뜨고 모토야스를 바라보았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무리가 아니지. 나도 이제 열여덟 살이 됐소. 오카자키에서 인질로 왔을 때가
여섯 살, 십이 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오. 그리고 또 언제 오카자키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몸..."
모토야스는 여기서 일단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나는 지금 어떻게 하면 초조해하지 않고 봄 다음에 올 여름을 기다릴 수
있을지 그것을 궁리하고 있소, 자연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소. 오늘도 성안
숲에서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고 있더군요. 그렇다고 자연은
언제까지나 꾀꼬리가 울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아요. 그렇지 않소, 영감?"
"예."
"그대는 공차기를 우리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했소."
"예,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무 인연이 없는 놀이입니다."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아요. 양지바른 정원에서 꾸벅꾸벅 졸며,
그대들에게 이것을 보여줄 날을 생각하고 있었소."
이렇게 말하고 시치노스케를 재촉하여 현관으로 향했다.
우타노스케는 쏘는 듯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때를 기다린다. 이렇게 말하는 뜻은 알 수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화가
치밀어올랐다. 천하제일의 명궁이라 일컬어지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인
키요야스는 스물다섯 살로 전사할 때까지 얼마나 크게 나래를 펼쳤던가. 그런데도
열여덟 살이 된 그의 손자 모토야스는 지금...
인간도 칼과 마찬가지여서 오랫동안 쓰지 않고 내버려두면 녹이 슬게 마련이다.
성에 불려가 쿄토의 풍류나 구경하고 성을 나와서는 스루가 부인의 무릎을 베고
있는 동안, 오카자키의 백성들이 하늘처럼 우러러보는 모토야스가 그때로 녹이 슨
둔한 칼로 변하지 않을까 하여 여간 초조하지 않았다.
시치노스케가 현관에서 큰 소리로 성주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렸다. 그렇다고
많은 장수들이 마중 나올 만한 신분은 아니었다.
우타노스케는 들고 있던 씨앗주머니에 눈길을 떨어뜨렸다. 순간 자기 눈이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눈물을 닦고 다시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7
모토야스는 토리이 모토타다와 이시카와 요시치로의 마중을 받으며 현관으로
올라섰다. 모토야스가 여섯 살에 오카자키를 떠날 때는 아직 철없는 아이였던
그들이 지금은 씩씩한 청년 무사로 변해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우타노스케를
비롯하여 오쿠보 일족, 토리이, 이시카와, 아마노, 히라이와 등 노신들보다도
얼마나 더 격렬한 혈기와 불만을 간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모토야스는 어디까지나 태평스러운 멍청이를 가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니, 단지 가장하는 것만으로는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교묘하게 자신을 융화시켜 봄에는 꾀꼬리를, 여름에는
두견새나 매미의 울음소리를 황홀한 듯 들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었다.
"수고가 많소."
모토야스는 현관에 올라서서,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눈을
반짝이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세나히메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언제 아이를 낳을지 알 수 없는 몸이므로 보통 때 같으면 당연히 산실을
마련해주고 거기에 떨어져 살게 해야 할 것이지만 아직 산실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가련한 것."
지금 모토야스에게는 세나히메가 마냥 가없기만 했다. 버릇없이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녀도 한낱 꾀꼬리에 지나지 않았다. 린자이사의 셋사이 선사라는
거목이 쓰러진 뒤부터 슨푸의 봄은 지나치게 무르익어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세나히메 역시 아무 자유도 없는 희생자라 할 수 있었다. 오카자키 일족을
이용하기 위한 인질인 모토야스에게 주어진 살아 있는 장난감. 그리고 이
장난감의 소유자는 때가 되면 일족을 위해 떠나야 한다. 떠날 때는 아마도 이
가엾은 장난감은 돌아볼 여유가 없을 것이었다.
"처자를 버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셋사이 선사가 남기고 간 말은 결국 모토야스에게, 유사시에는 처자를
택하겠느냐 10여 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한 오카자키 일족을 택하겠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오카자키 일족 중에는 2대나 3대에 걸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남편을, 형제를
바쳐가며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한
사람들을 버리고 처자와 자신의 안전만 도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지금 모토야스의 뇌리에서는 선사가 남기고 간 숙제가 완전히 풀렸고,
풀렸기 때문에 더욱 세나히메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제 돌아오시는군요."
아니나다를까 세나히메는 안채 복도로 마중 나왔다. 두 손으로 칼을 받아들려고
내미는데 오른손 손가락에 엷게 연지가 찍혀 있었다. 산달이 가까웠기 때문에
눈이 창백할 정도로 파래져서, 촉촉이 교태를 머금고 있었다.
'아름다워!'
모토야스는 생각했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처녀 시절보다 유부녀, 유부녀는
아기를 낳게 되면 더욱 아름다움이 더해졌다. 그리고 생활의 모든 것이 남편에게
사랑받으려고 기대는 형태가 되면, 그 의지가 이윽고 남편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시하고 싶다는 본능으로 발전해가는 것 같았다.
"성주님! 이리 오십시오. 중요한 이야기를 듣고 왔어요."
세나히메는 고개를 갸웃하고 가쁘게 숨을 쉬면서 말했다.
8
모토야스가 아내의 방으로 들어가자 시녀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남편과
단둘이 있는 자리에 다른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싫어하는 세나히메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니히메는 남편의 칼을 칼걸이에 걸고 그 옆에 바싹 다가앉았다. 방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자줏빛 철쭉꽃이 주위를 환하게 하고 향로에서는 캬라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주님!"
세나히메는 두 손을 모토야스의 무릎에 얹었다.
"성주님이 나가신 뒤 고쇼 님이 사람을 보내오셨어요."
"누구한테?"
"저한테요. 표면적으로는 카메히메가 보고 싶으니 데려오라고."
"허어, 고쇼 님이 카메히메를 보고 싶으시다고..."
세나히메는 살짝 웃고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구실, 저보고 지로사부로 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어요."
모토야스는 의아하다는 듯 세나히메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같이 있으면
스물네 살의 세나히메는 열여덟 살인 모토야스와 전혀 나이 차이가 없는 것 같고
도리어 모토야스가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성주님 ! 저를 꼭 안아주세요. 이 세나히메는 사랑받고 있어요, 행복한
여자...라고 고쇼 님께 대답했어요.
그 말이 맞지요, 성주님?"
모토야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세나히메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고쇼 님은 어째서 그대를 부르셨지?"
"쿄토로 진입할 때가 가까워졌다. 그때는 성주에게 오카자키 사람들을 지휘케
하여 쿄토까지 데려가야겠다고... 저는 그때 가슴이 섬뜩했어요... 성주님과
헤어져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나 하고, 성주님."
"고쇼 님은 그랬을 경우, 혹시 선봉에 선 성주님이 오다 쪽으로 돌아서서 저와
카메히메, 또 뱃속에 있는 아기를 버리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고, 그 점을
걱정하시는 말씀이 있었어요."
모토야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눈길이 세나히메에게 박히고 잠시 호흡이
멈춘 것 같았다.
"그래서 무어라고 대답했소?"
"그런 일은 없다고요."
"분명하게 대답했겠지?"
"예, 만일 의심되시거든 그 전에 일단 첫 출전을 명해보시면 어떠냐고 말씀
드렸어요."
모토야스는 그제야 안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렇구나... 고쇼에게 그런 의심을 갖게 했구나.'
"성주님! 기뻐하십시오."
세나히메는 다시 모토야스의 무릎을 거칠게 흔들었다.
"성주님이 얼마나 그날을 기다리고 계셨는지 저는 잘 알아요. 성주님이 안
계시는 동안 무척 고독하기는 하겠지만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고쇼 님에게 그런
청을 드렸더니 고쇼 님도 그럴 뜻이 계신 것 같았어요."
"그래? 그것 참 잘했소."
"성주님! 칭찬해주세요, 이 세나히메의 공을."
"칭찬해주지. 암, 칭찬해주고 말고."
응석부리는 세나히메를 껴안은 모토야스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속이 뜨거워졌다.
'드디어 살아 있는 장난감이 울 날이 오는구나...'
그것도 모르고 응석부리는 세나히메의 눈동자가 슬펐다.
난세의 형상
1
모토야스가 어깨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자 세나히메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기미가 엷게 낀 눈언저리에서 짙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행복에 젖어 넋을 잃은 여자의 마음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행복이란
무엇일까 하고 끊임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영혼의 떨림으로도 보였다.
모토야스는 처음에 이와 같은 감상이 자기 마음의 나약함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세나히메도 불쌍하고 자기도 불쌍하며 앞으로 계속해서 태어날 아이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소리내어 울고 싶을 때가 있었다. 아내에게 진심을
말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고, 자식에 대한 감정을 살릴 방법도 없었다.
'나는 어떤 죄업을 가지고 태어난 것 일까?'
지금은 그 미망에서는 벗어났다. 부모가 있어도 부모를 믿지 못하고, 자식이
있어도 자식을 믿지 못한다. 형제끼리 칼을 휘두르고 장인과 사위가 서로 죽인다.
이것은 결코 모토야스에게만 부과된 것이 아니었다. 카이의 타케다에게도,
에치고의 우에스기에게도, 오와리의 오다에게도, 아니 현재 이 슨푸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 분명한 난세의 모습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아내는 적의
첩자이고 형제는 가장 가까이 있는 적과도 같았다.
타케다 하루노부의 아버지 노부토라는 그 아들과 사위인 요시모토 때문에
지금도 슨푸 성안에 갇혀 있고, 오다 노부나가도 친동생 칸쥬로 노부유키를
결국에는 죽여 없앴다. 칸퓨로 노부유키가 형의 자리를 넘보았기 때문이다.
노부나가의 장인 사이토 도산도 그 아들 요시타츠의 기습을 받고 죽었다.
이와 같은 혈육간에 얽힌 불신은, 그 원인이 제거될 때까지는 끊임없이 반복될
지옥과도 같은 것. 사상의 혼란이라고도 할 도의의 상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도 모른 채 그저 살아남으려고만 하는 인간들의 본능이 확실하게 그려내는
무간지옥의 모습이었다.
중국의 손자는 말했다.
"싸움을 즐기는 자는 망한다."
모토야스는 최근에 들어 이 한마디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무력의
힘만으로는 골육상잔의 이 지옥은 결코 끝낼 수 없다. 섣불리 첫 출전의 공을
세우려고 서두르기보다는 지금의 불행을 신이 내린 와신상담의 기회로 삼아,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차분히 생각하려고 노력해왔다.
"아, 성 주님..."
황홀하게 눈을 감고 있던 세나히메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뱃속의 아기가 움직여요. 아파요... 성주님!"
"그럼, 쓸어줄까?"
"예..."
모토야스는 세나히메를 껴안은 채 한 손을 옷 안으로 들이밀었다. 둥글게
솟아난 복부의 부드러운 감촉이 따스하게 손바닥에 전해왔다. 손바닥을 천천히
움직이자 세나히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긋 웃었다. 이 웃는 얼굴이
모토야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
'남편 곁에 있을 때만 이 여자는 자신의 행복을 믿을 수 있다.'
해가 지는지 치겐인에서 저녁 예불 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2
내일을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살다보면, 인간들에게 삶을 확인시켜 주는 것은
순간순간의 만족인 것 같다고 모토야스는 생각했다. 그 순간적인 만족중에서
남녀의 성행위가 가장 정확하게 '삶'을 확인시켜준다. 따라서 난세일수록 남녀에
성행위는 성해지고, 그럴수록 가련한 씨앗은 늘어만 간다. 그렇다고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아내를 그 이유만으로 탓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었다.
"이제 괜찮아졌나?"
'아뇨."
세나히메는 고개를 흔들었다.
세나히메는 언제까지라도 남편이 배를 쓸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아니,
언제 아기를 낳을지 모르는 몸으로 단지 가까이 기대는 것만이 아니라, 집요할
정도로 행위를 요구해왔다.
이러한 것이 과연 태아를 위해 허용될 수 있는 일일까? 적어도 자기가 태어날
때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인 미즈노게부인 오다이는
검소하기는 했으나 산실로 옮겨져 외부와의 내왕을 끊고 오직 부처에게 기도만
올리면서 청결한 마음을 유지하다 자기를 낳았다고 했다...
그 생각이 모토야스의 가슴을 예리하게 찔렀으나, 그 말을 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첫째는 산실을 마련해주지 못하는 사정이 있었고, 둘째는 세나히메가
가없어서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난세에 사는 한 인간인
자기에게 얼마나 색정의 세계를 헤엄쳐갈 힘이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성주님..."
세나히메는 다시 어리광을 부리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태어나는 아이가 아들이면 타케치요라고 이름 지어주세요."
모토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케치요는 할아버지 키요야스의 아명이고 자신의
아명이기도 했다. 그보다도 마츠다이라 가문의 상속자로 삼고 싶다는 것이
세나히메의 속마음이었다.
"첫 출전은 이 아이가 태어난 후로 결정해달라고 고쇼 님에게 부탁 하겠어요.
얼굴을 보고 출전하실 수 있도록."
"알았소. 이제 배는 괜찮소?"
"아뇨."
모토야스는 다시 천천히 둥근 구릉을 쓰다듬었다.
불행한 아버지, 음탕한 아버지, 뻔뻔스런 아버지, 슬픈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아내의 배를 쓸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쓸어주고 있었다.
'부디 착한 아이로 태어나라. 이 아비는 네 어머니에게 진심을 말하지 못하지만
너는 아직 신의 세계에 있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
장차 이 아이에게 어떤 모진 바람이 불어닥칠 것인가. 그 바람은 이 아이
하나에게만 불어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난세의 바람이다...
"이 아비는 그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길을 찾고 싶다! 제발 알려주기 바란다.'
이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성주님, 마님도 함께 계시는 줄 압니다마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볍씨를 다 뿌린 듯, 우타노스케의 목소리였다. 모토야스는 아내의 배에 손을
올려놓은 채 대답했다.
"좋소, 들어오시오."
3
방으로 들어온 우타노스케는 언어도단이라는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린 채
두사람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문 옆에 앉았다.
"씨는 다 뿌렸소?"
"예, 오카자키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하는 밭일, 씨를 뿌리면서 때때로
주책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알고 있소, 그 눈물이 비료가 되어 머지않아 일찍이 보지 못한 큰 수확을
거두게 될지도 모르오."
"농담이 아닙니다. 성주님!"
"누가 농담이라 하던가요. 하지만 영감, 이 세상에는 흐르지 않는 눈물, 마른
눈물도 있는 거요,"
우타노스케는 고개를 돌린 채 무릎에 얹은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우타노스케라고 해서 마음속으로 우는 사나이의 눈물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아니
, 이따금 깜짝 놀라 반성하고는 했다. 언제부터인지 우타노스케와 모토야스의
위치가 반대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성급한 타케치요를 나무라는 것은
언제나 우타노스케 쪽이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도리어 모토야스가 타이르고는
했다.
'그만큼 나는 성주에게 응석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사람을 저도 모르게 응석부리게 만든 성주의 기량을 새삼스럽게
재평가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마님의 문제에 한해서는 여간
못마땅하지 않았다.
마츠다이라 집안은 대대로 색을 좋아하는 경향이 강하여 때로는 이것이 재앙을
불러오기도 했다. 할아버지인 키요야스가 미즈노 타다마사의 아내인 오다이의
생모 케요인을 소실로 삼은 것도 떳떳하지 못한 일이었고, 아버지 히로타다가
죽은 것도 애꾸눈 하치야의 여자에 대한 원한이 계기가 되었다. 그 아들 모토야스
또한 아무리 외로웠다고는 해도 여섯 살이나 나이가 더 많은 세나히메에게 손을
대는 바람에 이마가와 일족의 인척이 된 것도 우타노스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책으로 보였다. 게다가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자기 앞에서
태연히 여자의 불룩한 배를 쓸어주고 있다.
"성주님! 마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으셨겠지요, 첫 출전에 관한."
"음, 자세히 들었소."
"첫 출전이시라면 전쟁터는 오와리와의 접경이 되리라고 봅니다만."
"알고 있소. 카사데라나 나카네 , 오타카 부근이겠지."
"성주님께서는 승산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 첫 출전으로 성주님의 실력을
시험한 뒤 쿄토 진입 여부를 결정하려는 것일 텐데, 적은 파죽지세인 오와리의
군사입니다."
"그럴 테지 , 그럴 거요."
"그걸 아시면서도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영감."
모토야스는 세나히메의 어깨 너머로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전쟁에서는 말이오, 싸워보기도 전에 기가 죽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법이오."
"만일에 패배하면,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아무래도 우타노스케는 모토야스보다 세나히메에게 더 화를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모토야스가 눈으로 신호를 보냈으나 우타노스케는 못 본 체하고 말을
계속했다.
"첫 출전 때부터 전사하시는 불길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하하..."
모토야스는 웃어넘겼으나, 그때 이미 세나히메는 똑바로 머리를 들고 있었다.
"우타노스케! 그대들은 첫 출전에서 성주님을 전사시킬 정도로 무능하단
말인가요?"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마님은 파죽지세인 오와리 군의 기세를 꺾을 만큼
오카자키가 무력을 갖추도록 꼬쇼 님이 허락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세나히메는 눈을 치뜨고 모토야스의 팔을 뿌리치면서 거칠게 옷자락을
바로잡았다.
4
"그냥 들어 넘길 수 없는 말이군요. 고쇼 님이 일부러 오카자키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것처럼 들리네요. 고쇼 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카자카는 그대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오다에게 벌써 짓밟혔을 거라고 생각지 않나요?"
세나히메가 무섭게 반발하는 것을 보고 우타노스케도 무릎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님, 이 우타노스케가 감히 항변하는 것은 성주님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말은 용서해 주실 것이라 믿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좋아요, 어디 들어봅시다."
"고쇼 님에게 호의가 없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호의는 결코 오카자키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주님이 연소하셨을 때는 그렇다
하더라도, 관례를 행하신 지가 이미 사 년, 아직 오카자키에는 미우라
코즈케노스케 님과 이오 부젠노카미 님이 성주 대리로 계십니다. 이 사실을
마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주님께서 미우라, 이오 두 분보다 실력이
뒤쳐진다고 여겨 고쇼 님이 경시하시는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세나히메는 눈을 무섭게 빛내며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성주님은 일족의 소중한 사위이기 때문에 고쇼 님이 특히 가까이 두고
애지중지하시는 거예요... 그걸 다르게 해석한다면 오카자키 사람들의 생각이
몹시 삐뚤어졌다고 크게 경멸당할 거예요."
"마님!"
우타노스케는 모토야스를 흘끗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모토야스는
세나히메가 뿌리친 손을 어색하게 무릎에 얹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고쇼 님의 인정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미우라와 이오
두 분보다 실력이 뒤진다고 보신 성주님을 어떻게 선봉에 서시게 할 수 있습니까.
왜 성주님을 오카자키 성에 들여놓으시고, 미우라와 이오 두 분에게 선봉을
명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성주님은 안전하실 것이고, 우리 또한 오랫동안
살아온 성이므로 만일에 선봉의 두 분이 패주하더라도 반드시 오카자키를 사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을 오다 군에게
성주님을 먼저 보내시려 하다니요. 경우에 따라서는 첫 출전부터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른다고 아까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이것이 과연 저희들에게 용기가 없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래요, 용기가 부족해요."
세나히메가 부들부들 떨면서 대꾸했다.
"미우라, 이오 두 분에게 명하지 않는 것은 성주님의 능력을 인정하신다는
증거예요. 그런데도 말이 많은 것은 겁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요!"
우타노스케는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정말 딱하십니다. 그런데 , 마님!"
"뭔가요, 우타노스케?"
"지나치게 말씀 드린 건 사과 드립니다. 하지만 마님께서 진정으로 성주님과
카메히메 님,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기님을 사랑하신다면 부탁을 하나
들어주십시오. 성주님을 오카자키 성에 들어가게 하시고, 현재 오카자키 서쪽에
있는 여러 장수들을 선봉에 배치하시도록 마님이 고쇼 님께 말씀
드려주십시오..."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말을 삼가시오, 우타노스케!"
모토야스가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세나히메는 이 모토야스의 아내, 지시할 것이 있으면 내가 하겠소.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예..."
우타노스케는 무너지듯 엎드려 바닥에 두 손을 짚었다.
"황... 황송... 합니다."
반백이 된 머리를 떨면서 잠시 얼굴을 들지 않았다.
5
세나히메는 순진하게도 요시모토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우타노스케는
요시모토의 마음을 믿을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성을 반환하지 않고 쿄토
입성에는 선봉에 내세우려 하다니 이 얼마나 흉측한 처사란 말인가. 요시모토가
의도하는 목적은 모토야스가 지휘할, 겨우 살아남은 오카자키의 잔당과 잔뜩
기세가 오른 오다 군을 맞붙게 하여 쌍방을 모두 약화시키고 나서 본래를
오와리에 수월하게 진입시키려는 데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오카자키와
오다 양군은 아즈키자카 전투나 안죠 성 공격 이상의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할
것이다. 오다
쪽에서도 물론 큰 타격을 입겠지만, 오카자키 쪽은 13년이나 고난의 세월을 보낸
한을 안고 전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타노스케는 마님에게까지 그런 지나친 말을
했지만, 모토야스의 꾸중을 듣고는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손을 짚은 채 하염없이 울고 있는 우타노스케를 보고, 모토야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감, 난세에는 말이오, 어떻게 생각하든 다 그대로는 되지 않소. 사거리에
서서 지팡이가 쓰러진 쪽으로 가게 마련이오... 고쇼는 지금 그 지팡이를
쓰러뜨렸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소? 나도 생각해볼테니 그대도 물러가서 잘
생각해보시오."
어느 틈에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좁은 주방에서 밥 짓는 냄새가 이곳까지 풍겨
왔다 .
"예... 알겠습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우타노스케는 힘없이 일어섰다. 아직 눈썹을 거꾸로 세우고 있는 세나히메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세나히메는 우타노스케가 나갈 때까지 남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우타노스케의 말을 듣고 갑자기 크게 불안을
느꼈다. 그것은 전투에 따르게 마련인 인간의 죽음이 란 현실이었다.
'모토야스가 만일 첫 출전에서 전사한다면...'
생각은 했으면서도 잊고 있던 불길하고 가증스러운 공포였다. 다시 몸을
모토야스에게 돌렸다.
"성주님... 성주님께 승산이 있는 거지요?"
"물론, 걱정할 것 없소."
"오와리 군이 아무리 격렬하게 저항해도... 만에 하나 성주님이 전사하시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모토야스는 가만히 세나히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몸에 해롭소."
"몸에... 앗, 또 뱃속의 아기가..."
진통의 시작이었다. 세나히메는 모토야스의 무릎에 손톱을 세우고 몸을
비틀면서, 신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으으, 성주님! 너무 아파요. 아기가... 아기가..."
모토야스는 겨우 사태를 깨달은 듯, 밖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게 누구 없느냐?"
그 소리를 듣고 여자 셋이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왔다.
"불을... 이불을."
"더운물을..."
모토야스는 여자들에게 세나히메를 맡기고 나서야 겨우 일어서서 하카마의
주름을 폈다.
'또 태어나는구나.'
기뻐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기분으로 모토야스는 산실로 변하는 방에서
복도로 나갔다.
6
"아이 하나가 또 태어난다..."
모토야스는 일단 자기 방으로 왔으나 거기에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어떤
운명을 가지고 어떤 아이가 태어날 것인가, 살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는 난세에 어째서 인간은 잇따라 태어나는 것일까? 태어난 것을
단순히 축하할 수 있는 시대는 좋았으나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혀 기쁘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모토야스는 조마조마하여 방안에서 서성거리다가 이윽고 정원으로 나갔다.
"시치노스케, 목검을 가져오너라."
하늘을 쳐다보니 이미 여기저기서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바람다운 바람은 불지
않았으나 치겐인의 소나무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고, 서쪽에 있는 산은 아직도
약간의 능선을 남기고 하늘에 솟아 있었다.
'남자에게도 진통이 있는 모양이다.'
시치노스케가 가져온 목검을 건네 주었다.
"낳거든 알려라. 나는 여기 있겠다."
모토야스는 웃옷을 벗어던진 뒤 목검을 휘둘렀다.
쳐야 할 것은 무엇인가.
눈 높이에 칼끝이 오도록 목검을 겨누고 숨을 가다듬으며 무아의 경지로
들어가려 하는데 도리어 주방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세나히메의 목소리가 아닌가 싶은 신음소리도 때때로 가슴에 울렸다.
"앗."
목검을 후려치고 딱 멈출 때 손에 느껴지는 맛. 오른쪽 하늘에서 별 하나가
떨어졌다.
'행복한 아이가 되기를.'
할아버지는 스물다섯, 아버지는 스물네 살 때 각각 남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모토야스 자신도 시시각각 그 시기가 다가오는 것 같아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첫 출전은 그렇다 쳐도 요시모토가 상경할 때 선봉이 된다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때 지금 태어나려 하고 있는
아이는 길 수 있을지 또는 일어설 수 있을지, 좌우간 걸을 수 있지는 못할
것이었다.
"얏! 얏! 얏!"
모토야스는 나직한 기합 속에 모든 망상을 가두려고 계속 목검을 휘두르고 발을
내딛으면서 공간을 베었다. 이렇게 하고 있을 때만은 아이에 대한 것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우주의
의지였다.
"얏! 얏! 얏!"
등줄기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요시모토도, 노부나가도, 자기도, 세나히메도,
가신도, 허공도 모두 베고 베고 또 베고 싶은 충동 속에서 영혼만이 희미하게
눈을 뜬 채 떨고 있었다. 현세의 모든 것을 꿈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끝까지 집요하게 현세에 집착해야 하는가. 별을 노려보면 전자가, 부엌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면 후자가 마음을 점했다. 결국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영혼의
눈을 두려워하면서 언제나 무언가를 베고자 서 두르고 소리지르고 있을 뿐인지도
몰랐다.
"성주님,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다시 똑바로 목검을 겨누고 잠시 숨을 가다듬고 있을 때 우타노스케가
나타났다. 아마 우타노스케도 조금 전의 이야기와 출산 소동 등으로 침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산의 능선이 점점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 달이 뜨려는 것 같았다.
모토야스는 우타노스케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다시 목검 끝에 무섭게 눈길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7
"성주님, 아까는 이성을 잃고 공연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타노스케는 모토야스 곁으로 가서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말했다.
"달이 뜨기 시작합니다. 곧 출산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음 아기가 성인이 되실 때까지 무운의 혜택을 받아도 좋을 때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영감."
"예."
"그대 는 내가 전사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시오?"
"적은 예전의 오와리 군사가 아닙니다."
"알고 있소. 그러나 나도 이젠 주저하지 않겠소."
"주저하지 않으시겠다니, 그럼 자진해서 사지에 들어가시겠다는..."
"영감."
모토야스는 비로소 우타노스케를 돌아보고 목검을 내렸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소, 그러니 더 이상 아무 말도 마시오."
"마음을... 정하셨다면?"
"나는 말이오, 처자에게는 묶이지 않을 것이오. 거기서는 이미 벗어났소."
우타노스케는 바싹 앞으로 다가와 모토야스의 눈에서 반사되는 별을
바라보았다.
"나를 묶어놓는 것은 단 하나, 오카자키에 남아 있는 가신들이 오늘날까지
참아온 인내요. 알겠소, 내 말을?"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말이오, 슨푸의 성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대들의 것이 되겠소. 아내도
생각지 않고 자식도 버리고..."
"성주님!"
"그때까지만 참아주시오. 그런 뒤에는 싸울 것이오."
"예... 예."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울 것이오. 승패와 생사를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겠소. 그것만은 내 힘도,
고쇼나 노부나가의 힘도 미치지 못하오. 영감! 하늘을 좀 보시오."
"예."
"무수한 별이 빛나고 있지 않소?"
"수없이 많은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아, 또 하나가 떨어지는군. 저것들 중에서 어느 것이 이 모토야스의 별인지
그대는 알겠소?"
우타노스케는 고개를 저었다.
"모를 것이오. 나도 몰라요, 언제 떨어질지도 모른 채 그저 빛나고만 있소."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인사는 다하지 말라고 해도 다하게 되는 것임을 깨달으라는 말이오."
"예."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각자의 지혜와 힘이 미치는 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오. 나도 그런 사람이라고 믿어 주시오. 그리고
나에게 지혜도 힘도 없거든 그때는 같이 죽을 결심을 하자는 것이오."
우타노스케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치자를 버리고 오카자키를 위해 죽을 결심이니 그렇게 이해하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사실 그 이상 무슨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만일의 경우에는 버릴
처자이므로, 그녀를 통해 요시모토에게 부탁하려는 일만은 그만두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알겠소? 다른 말은 하지 마시오."
"예... 예."
8
우타노스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모토야스는 다시 목검을 휘둘렀다.
"나는 말이오, 영감. 운이 좋은지도 모르겠소."
"그런 말씀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운이 나빴다면 여섯 살 때 오이즈 해변에서 살해되었을지도 모르오. 아츠타에
인질로 가 있을 때도 종종 생명의 위협을 받았소.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무사히
살아온 것은 하늘이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다시 목검을 힘차게 휘둘렀을 때 히라이와 시치노스케가 마루에서 황급히
말했다.
"성주님! 성주님! 탄생하셨습니다. 옥동자십니다. 성주님!"
"뭣이, 사내아이가 태어나셨다고?"
모토야스보다도 먼저 우타노스케가 물었다.
"바로 상면하시겠습니까, 성주님?"
모토야스는 목검을 우타노스케에게 건네고 성큼성큼 마루를 향해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사내아이. 타케치요.
새로운 생명이 마츠다이라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에 왠지 무서운 숙명 같은
것을 느꼈다. 자기가 마츠다이라 가문에는 적인 미즈노 가문의 어머니한테서
태어났는데, 이번에는 그자식 또한 가신 일동이 은밀히 불만을 갖고 있는
이마가와 일족의 어머니한테서 태어났다.
"성주님 ! 지금 목욕을 시키고 있습니다. 곧 상면하실 수 있습니다."
모토야스는 움직이지 않았으나 우타노스케는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아이가 출생했다면 젊은 성주를 성가시게 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나마 칼과
화살을 들려주는 의식을 올려야 했다.
"성주님!"
"그래, 만나겠다."
다시 한 번 시치노스케가 재촉하는 바람에, 모토야스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고 마루에 올라섰다.
"옷을 갈아입겠다. 시치노스케, 좀 도와다오."
"알겠습니다."
시치노스케는 오늘 성에 들어갈 때 입었던 카미시모를 가지고 와서 모토야스의
뒤로 돌아갔다.
모토야스가 엄숙한 표정으로 옷을 입고 있을 때, 안에서는 우타노스케가
활시위를 퉁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악마가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는, 예로부터 내려온 관습이었다. 그것마저도
모토야스에게는 무언가 납득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관습이 얼마나 익살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대인가. 모두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역시 그것을 따르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 시치노스케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성주님께서 듭십니다."
그 목소리까지 환히 들리는 작은 임시거처에, 지난 가을부터 와 있는 앞머리를
내린 혼다 헤이하치로가 의젓하게 칼을 받쳐들고 뒤따랐다. 왠지 장난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에게 해야 할 일은
했다고 말해주기 위해 이 역시 아버지로서의 불가피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등불은 평소보다 훨씬 더 밝고, 모토야스가 들어가자 카메히메의 유모가 공손히
갓난아기를 안고 내보였다.
모토야스는 보았다. 작고 빨간 살덩어리가 새하얀 강보에 싸여 눈을 감고
있었다. 희미하게 코를 벌름거리는 모습이 그만 가슴을 메이게 했다.
"아들이란 말이지..."
모토야스는 중얼거리고 나서 입술이 하얗게 되어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세나히메에게 눈길을 옮겼다.
"세나, 수고가 많았소."
세나히메는 가날프게 입술을 움직여 미소지었다.
물과 물고기의 만남
1
불어난 강물 위에 아침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 왼쪽으로 벼가 자란 논
이곳저곳에 흰 두루미가 날아와 앉았다. 그 안개 속을 두 필의 말이 쏜살같이
달렸다. 선두는 노부나가였다. 이보다 약간 떨어져 달리는 것은 마에다 이누치요.
이누치요는 이미 예전의 하급무사 모습이 아니었다. 2만 2,000석의 영지를 가진
아라코 성주 마에다 토시하루의 후계자였다. 관례를 올려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라 부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강가를 따라 30리 길을 숨도 돌리지 않고 달렸다. 매일 아침 30리
이상 말을 타고 달리는 것. 노부나가가 아침마다 하는 첫번째의 일과였다.
여전히 노부나가가 하는 일은 남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노히메라는 아내가 있으면서도 한꺼번에 오루이, 나나, 미유키 등 세 명의 소실을
두고 세 여자에게 각각 아이를 낳게 했다. 처음에는 모두 딸이었으나 그 뒤
잇따라 아들을 낳았다.
맨 먼저 태어난 아들을 보았을 때 노부나가는 그 빨간 볼을 살짝 만져보고는
말했다.
"기묘하게 생겼군. 키묘마루라고 이름지어라."
두번째 사내아이는 배냇머리가 길었다.
"허어, 이거 재미있군. 이대로 챠센을 해도 되겠어. 이 녀석의 이름은
챠센마루다."
세번째는 며칠 전인 3월 7일에 태어났다.
"에이 귀찮다. 우선 산시치마루라고 해두어라."
태어난 날짜 그대로 이름을 지었다.
이렇듯 습관이나 관습을 무시했다. 동생 노부유키와 시바타 곤로쿠 등의 모반을
평정한 뒤에는 종종 춤을 추러 마을에 내려가곤 했다. 백성들 틈에 섞여 성주
스스로 묘하게 가장하고 함께 어울렸다. 처음에는 백성들도 깜짝 놀랐다.
"과연 우리 성주님이셔!"
백성들은 어느 사이에 파격의 성주에게 이상한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지방 상인들에게 자유로운 성안 출입을 허용한 뒤로도 성주 자신이 영내에서
신변에 위험을 느낄 우려는 없었다.
"마타자에몬."
대번에 30리 길을 달리고 나서 노부나가는 말을 세웠다. 아직 강가의 안개는
걷히지 않아 눈앞의 상수리나무 숲이 연기처럼 뿌옇게 보였다.
"이 부근에서 잠시 쉬도록 하자. 올해는 농사가 잘 될 것 같구나."
"그렇습니다. 풍년이 들 것 같습니다."
혈기왕성한 젊은 마타자에몬 토시이에도 이마에 땀을 흘리며 말에서 내렸다.
"풀밭에 앉아서 쉬어라."
"앉아서 쉬지 말라. 어떤 경우에도... 성주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던 가요?"
"때로는 바뀔 때도 있다. 쉬어라."
이렇게 말하고 자신도 아직 이슬이 마르지 않은 풀밭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아, 상쾌하구나."
목덜미에 와닿는 싸늘한 감촉을 느끼며 기지개를 편 순간이었다.
"실례하오!"
낯선 말소리와 함께 숲속에서 기묘한 모습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마타자에몬이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노부나가는 풀 위에 드러누운 채 싱긋 웃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구겨진 청색 무명 진바오리를 걸치고, 등이 훤 칼 두
자루를 허리에 차고는 상투를 위로
향해 묶은 원숭이 같은 얼굴의 사나이였다.
"웬 놈이냐!"
토시이에가 다시 소리질렀다.
"너의 대장 노부나가 공을 만나고 싶다."
원숭이와 같은 사나이는 터무니없이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에헴하고 헛기침을
했다.
"뭣이 , 너의 대장을 만나고 싶다고?"
마타자에몬은 이 기묘한 모습의 사나이와는 첫 대면이었다. 혹시 노부나가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돌아보니 노부나가는 시치미를 떼고 아침
하늘을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냥 만나고 싶다는 말만으론 안 된다. 이름을 밝혀라."
"후후후."
원숭이를 닮은 사나이는 남을 업신여기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너는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겠지. 나는 키노시타 토키치로라고 하는데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에 이르기까지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 없는 지혜
주머니다."
"뭐라고, 건방진 녀석.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말하다 말고 혀를 차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웃기는군, 미친놈이로구나. 가까이 오면 베겠다."
"생각이 모자라는군. 너의 대장이 매일 아침 말을 달려 성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알고나 있느냐?"
"뭐라구, 아직도 나를 깔보느냐?"
"그렇다. 천하를 위해 말해줘야겠군. 마에다 마타자에몬, 넌 지금의 천하를
어떻게 보고 있지? 대장의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해. 슨엔의 총대장인 이마가와
지부노타유 요시모토가 드디어 대군을 거느리고 쿄토를 목표로 진군하고 있어.
너의 대장은 그 앞에 굴복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고민하고 있지. 그 모습이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 굴복하면 영원히 그의 부하가 되고, 싸워서 무찌르면
토카이도의 패자가 되는 거야. 무찌르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이마가와의
장수들은 모두 오래 전부터 성을 가지고 정규전에 대한 전술을 배웠지만
노부시나 무뢰한들의 전법은 알지 못해. 그래서 너의 대장은 그런 전법에 밝은
인재를 구하려고 매일 아침 말을 타고 성밖으로 나오는 거야, 나를 만나게 된
것은 하늘이 내린 은혜야. 나 하나를 얻는 것은 천하를 손에 넣을 상서로운
징조지 ."
마타자에몬은 어이가 없어 다시 슬쩍 노부나가를 돌아보았다. 굳이 알릴 필요도
없이 이 대단한 허풍은 그대로 노부나가에게도 들렸을 터였다.
"마타자에몬."
노부나가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말했다.
"그 원숭이를 아시가루의 책임자에게 데려가거라."
"괜찮겠습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내 말 돌보는 일을 시키라고 일러라."
이 말에 무명 진바오리를 입은 사나이는 히죽 웃었다.
노부나가는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풀을 뜯고 있는 애마 질풍의 목을
가볍게 두드리고 마타자에몬을 돌아보았다.
"마타자에몬, 나는 먼저 돌아가겠다."
훌쩍 말에 올랐다. 뒤에 남은 마타자에몬 토시이에는 기묘한 사나이와 마주보는
자세가 되었다.
"토키치로라고 했지?"
토키치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라고 했겠다."
토키치로는 성큼성큼 다가와 토시이에의 어깨를 툭 쳤다.
"그것은 허튼 소리였어요, 이누치요 님."
갑자기 존댓말을쓰기 시작했다.
"친한 사이나 되는 것처럼 이누치요라고 부르지마."
"그럼, 마타자에몬 토시이에 님 . 나는 원래 오와리 태생 , 나카무라의
야스케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성주 노부히데 님의
아시가루였는데 어느 전투에서 다리가 잘려 농부로 돌아왔지요, 잘 봐주십시오.
맹세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는 어안이 벙벙하여 다시 이 기묘한 사나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왠지 화가 풀리고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전에 성주님을 만난 일이 있느냐?"
"아뇨, 만나지 않은 것으로 알아주세요, 오늘이 첫 대면, 토시이에님의
추천으로 고맙게도 아시가루가 될 수 있었어요. 키노시타 토키치로가 이렇게 감사
드립니다."
얼른 마타자에몬의 손에서 고삐를 받아들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말에 오르시지요."
"와하하하."
마침내 마타자에몬은 하늘을 처다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지리 운운하는가 하면,
이번에는 님 자를 붙여 존댓말을 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혐오감이 들지 않았다.
사람인가 싶으면 원숭이와 너무 닮았고, 미쳤는가 했더니 말에 오르시라고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닌가.
"아니, 잠시 걷도록 하세. 토키치로라고 했지?"
"예."
"조금 전 노부시와 불한당의 전법에 밝다는 말을 했겠다."
"예. 하치스카 마을의 코로쿠, 서미카와의 쿠마도령 , 그리고 혼간사 무리들의
전법에 통달해 있습니다."
"통달했다니 , 큰소리를 치는군."
"아니, 사실입니다. 이런 난세에는 성을 가진 자의 전법 따위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성 없이 산이나 마을에 부하들을 매복시켰다가
유사시에는 한데 모아 군단을 이루고 흩어져서는 그대로 양민 속에 섞여듭니다.
이 방법은 얼마나 유용한지 모릅니다. 그 점에 착안하여 백성들과 함께 허물없이
춤을 추고... 대장님은 과연 훌륭하십니다. 언젠가는 이 토키치로도 발탁하실 줄
알고 있었어요."
"음, 성을 가진 자들의 전법만으로는 지금의 세상을 다스리기 어렵다는
말이로군."
"예. 만일 의심이 되시거든 마에다 님 영지에 이 토키치로를 잠입시켜주십시오.
반달도 채 안되어 쑥밭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지. 그런데 이 경우에는 먼저 어디서부터 손을 대겠나?"
"첫째, 불을 지릅니다."
"위험한 녀석이로군."
"불은 인간의 공포심을 가장 크게 불러일으킵니다. 둘째는 집단적인 강탈."
"허어."
"셋째는 선동입니다. 성주는 백성들을 전혀 보호하지 않는다, 보호할 능력도
없는 자에게 공납을 바칠 수 없다고."
"으음."
"그러니 나와 같이 성주를 타도하자, 나를 따르라 겉으로 보기에는 반란이지만,
나는 실속을 차려 마에다 님을 대신하여 내가 성주가 되는 것입니다. 반 달이면
충분합니다."
마타자에몬은 대꾸하지 않았다.
'소름끼치는 소리를 지껄이는 놈...'
확실히 그런 수법을 쓰면 무너지는 곳이 숱할 것 같았다.
"토키치로."
"예."
"그대는 그토록 멋진 전법을 왜 실행에 옮기지 않나?"
토키치로는 히죽 웃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작아요, 너무 작아요. 그렇게 하면 고작 강도 출신의 작은 다이묘밖에 되지
못해요. 오히려 그런 사태를 사전에 막아 천하를 제압하지 않으면 이 난세를 구할
수 없어요. 그러기 위해 이 아시가루는 전력을 다해 섬기려는 것입니다. 마에다
님, 두고 보십시오, 이 토키치로를."
마타자에몬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어느 틈에 안개가 걷히고 푸른 하늘 아래
싱그러운 논과 은빛 강이 땅과 하늘을 차지하고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4
두 사람이 키요스 성에 도착한 것은 한낮이 다 되어서였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에게 토키치로는 신선한 충격 그것이었다. 나카무라의 이름없는 백성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토키치로, 스루가와 토토우미를 비롯해 미카와, 오와리, 미노,
이세에 이르기까지 화제가 종횡무진했다. 인물평도 세상사람들과는 아주 달라 그
하나하나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토토우미에서 이마가와 세력인 마츠시타
카헤이지의 밑에 잠시 있었지만, 이마가와 일족의 앞길에서는 광명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성을 가진 보통 다이묘들은 알지 못하지만, 난세가 너무 오래 계속되면
자기만의 안전이란 없습니다. 이마가와 일족은 지금 제 세상을 만난 양 쿄토의
풍류만 즐기고 있을 뿐,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전혀 실정을 몰라요.
백성들도 인간입니다. 다이묘들에게 죽거나 착취만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노부시들과 손잡고 반기를 들거나 정토진종의 렌뇨 선사가 생각해낸
반란에 가담합니다. 더구나 난세의 다이묘 중에 다른 다이묘를 적으로 두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외부의 적에 대비하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혀 무력을
갖췄다는 것, 그만큼 내부의 적도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경쟁하여
군마를 갖추어도 피장파장이란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마에다 님의
대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큰 도량으로 여러 지방 상인들을 자유롭게 출입시켜
계속 백성들을 살찌게 하고 있어요. 지신의 대에 백성들의 공납도 깎아주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 속에 섞여 즐겁게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러니 언제든지 안심하고
영지를 떠나 출전할 수 있습니다. 이마가와는..."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는 때때로 그 어조가 너무 과장되어 거슬리기도
했지만, 이 사나이라면 이틀이나 사흘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키요스의 둘째 성 옆에 있는 공동주택, 아시가루의 우두머리 후지이
마타에몬의 집 앞에 왔을 때였다.
'아아, 그렇구나.'
그제서야 토키치로가 오늘 기묘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유를 알았다.
토키치로는 완전히 노부나가에게 반해 있었다. 노부나가도 이미 토키치로를
밑에 두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는 오늘 이렇게 만나
정식으로 후지이 마타에몬 휘하에서 일하도록 합의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구 없느냐?"
"예."
토시이에의 부름에 맑은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마타에몬의 딸 야에가 나타났다.
"마타에몬은 안 계시냐?"
"예 , 하지만 곧 점심시간입니다..."
"그래 . 그럼 잠시 기다리기로 하지."
야에는 토시이에의 어깨 너머로 살짝 토키치로를 바라보았다. 토실토실한 볼과
시원스럽고 순진해 보이는 눈, 그리고 귓불이 앵두처럼 물들어 있었다. 젊은
무사들 사이에서 사위 되기를 자청하는 사람이 많은 마타에몬의 외동딸이었다.
"사실은, 이 사람이 오늘부터 아버지의 부하가 될텐데..."
토시이에가 이렇게 말하자 토키치로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늘을 찌를 듯한
소리로 웃었다.
"원 이런, 눈이 번쩍 뜨이는 미인이로군. 하하하..."
야에는 깜짝 놀라 토키치로를 다시 한 번 보았다. 토시이에도 어이가 없는 듯
얼굴이 뻘겋게 되었다. 토키치로는 가슴을 떡 펴고 말을 계속했다.
"마에다 님도 보기 드문 미남이지만, 이쪽 아가씨도 그림 같군요. 나는
키노시타 토키치로라고 합니다. 기억해두세요."
"야에라고 해요. 자, 그럼 이리로."
야에는 더욱 당황해하며 , 현관 옆 사립문을 열고 뒷마루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이런 미모이니 귀찮을 정도로 혼담이 많이 들어오겠군요. 그렇죠, 야에 님 ?"
"예... 아니 , 아니에요."
"젊은 무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요. 아름답다는 것은 정말 큰 복입니다.
마에다 님도 기분이 좋아 얼굴이 뻘겋게 되어 있지만, 나도 막 피어나는 꽃 앞에
있는 것처럼 상쾌합니다. 아버님이 무척 만족해하실거예요."
"이봐, 말이 지나쳐 ."
야에가 도망치듯 사라지자 토시이에는 얼굴을 찌푸리고 책망했다.
"야에는 너의 아첨 따위엔 기뻐 할 여자가 아니야."
"그럴까요."
토키치로는 마루에 걸터앉아 방약무인한 태도로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당장 보리차를 가지고 나올 테니 두고 보세요."
"대관절 너는 몇 살이냐, 수치심도 없어?"
"하하하, 있지만 나타내지 않을 뿐이죠. 나도 남자인데."
토시이에는 다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이는 자기와 비슷한데 이마에
노인처럼 주름이 많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조금 전의 야에에 대한 그 속
들여다보이는 칭찬도 이 사나이의 한 가지 수법인 것 같았다. 익살스럽게 보여
남이 웃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여기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상대에게
인식시키는 방법 .
"마에다 님 ."
"왜."
"오늘부터 말을 담당하게 되어 자주 빌 것 같습니다마는, 마에다 님에게 공
세울 수 있는 길을 말씀드릴까요?"
"공을 세울 수 있는 길?"
"예, 마에다 님은 슨푸에 있는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키요야스의 손자를
아십니까?"
"타케치요...라면 어렸을 때 우리 성주님과 자주 만나곤 했지 ."
"그 타케치요...지금은 관례를 올리고 모토야스라 불리고 있는데, 얼마 안 있어
출전하게 된다는 것은 모르셨지요?"
"타케치 요가 출전을? 어디로?"
"뻔한 일이죠. 우리 대장 휘하에 있는 마루네, 와시즈, 나카시마, 젠쇼사, 탄게
중 어느 한 곳일 겁니다."
토시이에는 눈을 부릅떴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하...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
토키치로가 재미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고 있을 때였다.
"보리차라도 드시지요."
안쪽에서 장지문이 열리고 야에가 쟁반을 들고 들어와 공손히 손을 짚었다.
"정말 고맙소.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목이 말랐었는데. 마음이란 이렇게 서로
통하는 것이죠. 자 마에다 님 ,
드십시오,"
야에의 손에서 쟁반을 받아들고 능청스런 얼굴로 히죽 웃었다.
6
두 사람은 야에가 나갈 때까지 묵묵히 보리차를 마셨다.
집에서 좀 떨어진 둘째 성 성벽 밑 팽나무에서 물까치가 큰 소리로 울었다. 그
소리가 토키치로의 목소리와 비슷하여 토시이에는 웃음이 나왔다.
"토키치로."
야에가 안으로 사라진 뒤 토시이에는 얼른 잔을 놓고 말을 이었다.
"과연 너는 지혜 주머니인 것 같다. 분명히 야에가 보리차를 가져왔어. 하지만
타케치요가 오와리로 출전한다는 것은 보리차를 예언하는 것과는 문제가 달라.
어떤 천문을 통했는지 말해보아라."
토키치로는 잔을 든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사물의 이치를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짐작했을 뿐이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이 세상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 움직이는 법, 밤이 되면 해가 지고
아침이 되면 날이 밝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그 이치의 해법을
말해드리죠. 이마가와 지부노타유가 쿄토에 진입하여 아시카가 쇼군을 대신해서
천하를 호령하겠다는 뜻을 가졌다는 것은 아시겠죠?"
"물론, 알고 있지 ."
"그렇다면 제일 먼저 통과해야 할 곳은 오와리입니다."
"당연하지."
"우리 대장이 순순히 항복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만일 일전불사의 각오로
진용을 가다듬는다면 그쪽에는 과연 누구를 선봉에 내세울 것 같습니까?"
"마츠다이라 타케치요에게 선봉을 명할 것 이라는 말이로구나."
"달리 사람이 없으니까요."
"으음."
토시이에 는 고개를 갸웃했다.
"없지는 않지. 아사히나 야스요시, 우도노 나가테루, 미우라 빈고등은 모두
상당한 맹장들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게 바로 이치를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요시모토의 소중한 장수들입니다. 뿐 아니라 오와리를 통과했다고 해서
당장 그 앞에 쿄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노도 있고 오미도 있어요. 따라서
오와리에서 전멸당해도 요시모토에게 좋으면 좋았지 별로 아깝지 않은 자를 뽑는
것은 인정이고 또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 이치에 맞는 것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한 사람뿐, 모토야스의 오카자키 군과 우리 대장이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면
지부노타유는 무릎을 치며 기뻐할 겁니다. 오카자키 무리는 물러갈 성도
없는 굶주린 호랑이들뿐, 살길이 달리 없으니 용맹을 떨칠 거예요."
"토키치로!"
토시이에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과연 이치에 맞는 말이다. 너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에게 미리 연락해
놓으라는 거겠지 ?"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제게는 말을 돌보는 일이 가장 중요하죠. 다만
모토야스와 우리 대장이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면 지부노타유가 무릎을 치며
기뻐하리라는 것만은 확실하지요. 그걸 대장에게 말씀드린다면, 마에다 님의
출세는 보장됩니다."
출세를 보장한다는 말에 토시이에는 다시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일단
회전하기 시작한 토키치로의 혀는 멎을 줄 몰랐다.
"자, 선봉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로 정해졌습니다. 그럼 지부노타유가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요. 선봉이 오와리를 치는 대신 우리 대장과 손을 잡는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우선 시험해보려 하겠지요... 장마철에 들어서면 지리의
이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보름 남짓한 동안에 소규모의 전투를 걸어올
것입니다."
"누가?"
"뻔한 일이죠, 마츠다이라 모토야스가."
슬쩍 내뱉는 말에 토시이에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7
집주인 후지이 마타에몬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토키치로의 장광설은 한없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흐르는 물과 같이...라고나 할까.
말하는 동안 어느 틈에 신분의 경계를 뛰어넘어 2만 2,000석 영주의 후계자를
타이르고 꾸짖는가 하면 조롱하기도 했다.
"남의 속을 들여다보고 앞질러 말하는 놈은 쓸모가 없다."
평소 노부나가의 입버릇이었으나 토키치로는 당장 쓸모가 있을 것 같고, 더구나
노부나가가 좋아할 만한 난세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괴물로 보였다.
"오, 마에다 님이시군요."
후지이 마타에몬이 점심을 먹으러 돌아왔을 때 원숭이를 닮은 토키치로는
이야기를 뚝 그치고 무명 진바오리의 앞깃을 여미며 정중하게 맞았다.
"키노시타 토키치로라는 자요. 그대 휘하에 두시오. 성주님이 말을 돌보게
하라고 하셨소."
토시이에의 소개에 토키치로는 다시 공손하게 절을 했다. 또 그 궤변이
쏟아져나오지 않을까 했으나 그것은 공연한 염려였다.
"나카무라에 사는 선군의 아시가루 야스케의 아들입니다. 이번에 아비를
대신하여 대장님을 곁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만, 부디 잘
가르쳐주고 이끌어주십시오."
"오오, 야스케 님의 아들이란 말이지. 아닌 게 아니라 많이 닮았군. 그래 ,
어머니는 안녕하신가?"
"예 . 제가 출세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지요."
"아, 그래. 열심히 일하도록 해라. 성주님께 말씀 드려 성안에 들어와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 마에다 님 , 분명히 인계받았습니다,"
후지이 마타에몬의 말을 들으면서 토시이에는 마루에서 일어났으나 왠지
토키치로와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구간에 갈 것이다. 성주님이 타시는 말을 가르쳐주마, 토키치로, 날
따라와."
"그럼 , 나중에 다시."
토키치로는 마타에몬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토시이에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집을 벗어나자 곧 토시이에의 말고삐를 잡았다.
'빈틈이라고는 전혀 없는 녀석이야.'
"토키치로."
"예."
"나하고 단둘이 있을 때는 친구처럼 대해도 좋다."
"황송합니다. 이만 이천 석 영주님의 도련님과 어찌..."
"입으로는 그러면서도 마음은 다를 거야. 아까 나에게 출세 길을 열어주겠다고
했는데, 그대 쪽에서 나를 이끌어주려 하고 있지 않느냐?"
"하하하...정확히 보셨군요. 그럼 그런 줄 알고 있겠습니다. 그 대신 마에다
님, 토키치로는 언제든지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너는 말을 다루어본 적이 있느냐? 성주님 말은 모두 천하의
일품, 여간 사납고 기운이 세지 않아."
"말은 다루어본 적이 없지만, 사나운 인간은 많이 다루어본 경험이 있죠. 말
속에 뛰어들어가 말과 한 몸이 되면 녀석들도 내 체면을 세워 주겠지요."
토키치로는 태연하게 얼굴에 주름을 잡으면서 웃었다.
8
마구간에는 노부나가의 애마가 두 채에 나뉘어 12마리 , 모두 늠름한 모습으로
울타리에서 목을 내밀고 있었다. 명마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디라도 사람을 보내
모아들인 준마들로서, 칼과 함께 젊은 노부나가가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제일 앞에 매여 있는 것이 거대한 몸집의 잿빛 돈점박이. 오늘 아침에
토키치로가 본 말이었다. '질풍' 이란 이름표가 있었다. 다음으로 흰말이 '월광'
, 세번째의 짙은 밤색 말이 '번개' , 네번째의 연한 갈색 말이 '떼구름' , 이렇게
하나하나 말들을 둘러보고 있을 때 번개가 토키치로의 어깨 언저리에서 히힝 하고
큰 소리로 울었다.
토키치로가 깜짝 놀라 옆으로 펄쩍 뛰었다. 그 모습이 개구리 같아서
토시이에는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하하하...그래 가지고 어디 말을 다룰 수 있겠어?"
토키치로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더니 슬금슬금 번개에게 다가갔다.
"너 못된 버릇을 가졌구나, 인간을 놀리려 들다니 . 나였으니 다행이지 간이
작은 녀석이었다면 아마 크게 다쳤을 거야."
그런 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번개의 콧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번개가 그대로
얌전히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과 눈 사이를 탁 때렸다.
"앞으로 나를 놀라게 하면 이렇게 해주겠어 ."
그리고 나서 토시이에를 돌아보았다. 토시이에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행동에는 지기 싫어하는 고집과 뱃심과 조심성이 익살스럽게 뒤섞여 있었다.
"토키치로."
"왜요?"
"그대는 먼저 쓰다듬어주고 나서 때리는 버릇이 있나?"
"당치도 않습니다. 남을 놀라게 하면 자기도 놀라게 되는 것이지요. 하늘의
이치를 가르쳐준 것뿐입니다."
"듣기 싫어. 친구의 의리로 가르쳐주겠다. 성주님은 언제나 말이라고만
말씀하신다."
"음, 말! 과연 이것들은 말임이 틀림없군요."
"말이라고 하셨을 때 어떤 말을 끌고 갈 것인지, 어느 말을 가리키고 계신지를
판단하지 못하면 성주님의 말고삐는 잡지 못해."
"그렇군요, 그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성주님의 안색, 행선지에 따라 오늘은 어느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나?"
토키치로는 무릎을 탁 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돌보는 사람은 바로 접니다. 성주님보다는 제가 그 날에는 어떤 말이
상태가 좋은지 더 잘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으로 해결되는 것이죠."
그때 12마리의 말이 일제히 울었다.
"아."
토키치로는 얼굴빛이 변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들의 눈길이 머문 곳으로
따라가 보니 노부나가의 모습이 있었다. 노부나가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울어대는 말.
"하하하하."
토시이에가 다시 웃었다.
"말들은 돌보는 그대보다 성주님이 더 좋다고 하는구나. 하하하..."
노부나가가 가까이 오자 먼저 질풍이 코를 대고 힝힝거리며 반가워했다.
"원숭이 !"
노부나가는 질풍의 목을 두드리면서 토키치로를 불렀다.
감도는 풍운
1
노부나가가 부르자 토키치로는 꾸벅 절을 하고 가까이 갔다.
"너에게 단단히 일러둘 말이 있다."
"예 , 어떤 말씀인지요."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말을 때려서는 안된다."
"아아...보고 계셨습니까?"
"노부나가의 눈은 언제나 사방에서 빛나고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너는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를 가져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터에서 대장님의 말고삐를 잡을 수
없으니까요."
"누가 너더러 말고삐를 잡으라고 하더냐?"
흘끗 노려보는 노부나가에게 토키치로는 다시 꾸벅 절을 했다.
"그만 말이 헛나갔습니다. 말 앞에서 죽을 각오를 해서."
"너 는 말이다..."
노부나가는 토키치로의 몸짓과 말 따위에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랑도 받지만 미움도 받는다. 오늘부터는 사랑받을 생각은 하지마라."
"예...?"
이번에는 토키치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그 반대의 말을 들을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의 사랑을 받으려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녀석은 이 세상에 흘러넘칠 정도로
많아. 나는 그런 녀석들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
"과연 그렇겠습니다..."
"알겠느냐? 남에게는 미움을 받지만 말한테는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일해야 해. 말은 정직하지만 요즘 세상사람들은 다 비뚤어져 있어."
토키치로는 탁 하고 큰 소리가 나도록 자기 이마를 때렸다.
"분명히 이 머리에 새겨두겠습니다."
"새겨넣었거든 이제 마타에몬한테 가서 거처할 곳을 배정받고 오너라..."
말하다 말고 다시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참, 그 얼굴을 보니 여자에 대한 버릇도 좋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마타에몬의 딸 야에에게 손을 대면 안된다."
"고마우신 말씀, 그것도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이마를 탁 때리고 그대로 얼른 사라져갔다.
"마타자에몬."
노부나가는 차례차례 말의 목을 두드려주며 걸어가다가, 마타자에몬을
돌아보았다.
"원숭이 가 무슨 말을 했을 테지 ?"
"했습니다. 앞으로 보름 사이에, 그러니까 장마철로 접어들기 전에..."
"마츠다이라 모토야스가 접경에서 전쟁을 도발할 것이라고 하던가?"
토시이에는 성주가 앞질러 말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쳐다보았으나, 그때 이미
노부나가는 토시이에에게 등을 돌리고 마구간 구석에 있는 무기고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무기고 너머에 있는 활터에서, 이 역시 일과로 되어 있는
50발의 활을 쏠 모양이었다. 챠센 머리에 햇빛을 받아 장신의 뒷모습이 더욱
늠름해 보였다.
이윽고 노부나가는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 그리움을 생각하면 무슨 소용인가 이미 정해둔
사연이나마 남겨두리라
2
노부나가는 활터에 이르러 웃통을 벗고 등나무로 만든 활을 들었다. 그러나
활쏘기에는 열중하지 않았다. 화살을 뽑아들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 발을
쏘고는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고는 했다. 자기 생애를 통해 등쪽에서 두 번에 걸쳐
큰 위기가 온다는 것은 이미 계산해놓고 있었다.
그 하나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쿄토 진입 . 다른 하나는 그것을 무찌른 뒤에
있을 타케다 하루노부의 공격. 그러나 두번째 위기는 첫번째 위기를 넘겼을 때를
가정한 위기였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눈에는 여전히 비호처럼 활달하게 비치는
노부나가의 행동 속에는 한없는 고뇌가 뿌리깊이 감추어져 있었다.
50발을 쏘고 난 노부나가는 시동에게 활을 내던지듯 건네고, 다시 노래를
부르면서 본성으로 돌아왔다.
햇빛은 푸른 잎에 따갑게 쏟아지고 망루의 지붕에는 비둘기가 떼지어 모여
있었다. 하늘은 맑게 개고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조차 없었다.
그러나 요즘 노부나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전운이 감도는 소용돌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란 말인가..."
만일 요시모토의 상경을 저지할 수만 있다면 그의 생애에는 찬란한 빛이 비칠
것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무한한 암흑이 닥칠 터 . 그는 운명의 기로에 서서,
혈기와 망설임과 초조 속에 파묻혀 있었다.
"노히메."
노부나가는 거친 걸음으로 방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외치며 띠를 끌렀다.
"땀!"
웃옷을 벗어 등뒤로 내던지고 늠름한 나신을 드러낸 채, 달려온 노히메가 땀을
깨끗이 닦아줄 때까지 떡 버티고 서서 바깥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히메는 자못
기쁜 듯이 남편의 몸을 깨끗하게 닦고는 그 위에 새로운 홑옷을 걸쳐주고 띠를
매주었다. 노부나가는 노히메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노히메."
"예."
"드디어 결심 했어..."
"무엇을... 결심하셨습니까?"
반문을 당하고야 비로소 자기가 한 말을 깨달은 듯 빙긋이 웃고 그 자리에
앉았다.
"무엇을 결심했을 것 같소?"
"소실도 자식도 생겼어요. 오와리도 평정되었고요. 이번에는 미노의..."
노부나가는 고개를 흔들어 그 말을 중단시켰다.
"그대 아버지의 복수 말이오? 그것은 나중 일이오."
노히메는 남편이 벗어던진 옷을 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만 않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제멋대로였으나 노히메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남편 노부나가였다.
오빠 요시타츠를 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줄 것이었다.
"노히메 , 아이는 그대가 낳았으면 좋았을 텐데 ."
"예... ? 무어라 하셨나요?"
"아이 말이오. 그 해가 낳았더라면 안심 할 수 있는데 ."
노히메는 일부러 못 들은 체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서는 자식 이야기처럼 괴로운 것도 없었다. 세
사람의 소실이 지금 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더구나 그 아이들에 대한
집착이 자유분방한 노부나가의 마음을 이렇듯 묶어놓고 있다고 생각하니 노히메는
여간 안타깝지 않았다.
3
노히메가 아이를 낳았으면 좋았겠다고 한 것은 소실보다 정실 노히메의 기질이
더 뛰어났기 때문에, 그대의 자식이라면 안심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싸울 수
있다는 뜻인 것 같았다. 노부나가는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아내에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노히메로서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더욱
괴로웠다.
"노히메, 내가 말이오."
"예."
"아이들에게 묘한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 그대는 내 기분을 알 수 있겠소?"
노히메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코마 집안에서 시집온 오루이가 맨 처음에 낳은 토쿠히메는 그렇다 치고,
다음에 같은 배에서 태어난 아들은 키묘마루, 그 다음은 챠센마루, 그리고
미유키의 배에서 나온 것이 산시치마루. 더구나 챠센마루와 산시치마루는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각각 다른 배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되만 생모의 가문에 따라 순서를
정하는데, 결국 챠센마루를 형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때도 노부나가는 정실인
노히메 앞에서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두 여자를 같은 날에 품었던 모양이군. 와하하하."
이러한 노부나가의 마음에서는, 나는 세상사람들처럼 부자의 정에는 빠지지
않는다, 무시한다, 상식을 거부한다는 격렬한 혁명아의 기질이 엿보였다.
그러나...이러한 노부나가도 역시 육친이라는 자연 앞에 결국 무릎을 꿇으려는
것일까.
"성주님 , 오랜만에 키묘마루를 이리 부를까요?"
오루이의 배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노히메는 어머니로서의 정을 쏟고 있었다.
키묘마루도 노히메를 몹시 따랐다.
"음, 자식이란 기묘한 것이라고 처음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불러오지
그래. 기묘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면 어떤 묘책이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노히메는 알았다고 하면서 오루이한테로 갔다. 노부나가는 손뼉을 쳐서 코쇼
아이치 쥬아미를 불렀다. 쥬아미는 마에다이누치요와 함께 노부나가의 총애를
다투는 재기 넘치는 젊은이 , 여자들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미남이었다.
"쥬아미 , 쿠마 도령은 아직 기다리고 있겠지 ?"
"예, 성주님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으시는데 뭘 하고 계실까 궁금해 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좀더 기다리라고 해라. 정중한 말로."
"예."
화사한 젊은이의 모습인 쥬아미가 사라진 뒤 곧바로 노히메가 세 살난
키묘마루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키묘마루, 아버님이 기다리신다."
키묘마루는 누가 일러주었는지 단정히 앉아 문안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노부나가는 그 모습을 고개를 갸웃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건네는 것도
아니고 반겨주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희한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키묘마루는 그 눈길에 겁을 먹었는지 흘끗 노히메를 쳐다보았다.
노히메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고는 안도하며 후하고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후후후."
노부나가는 웃었다.
"알겠어 ! 바로 이거야."
벌떡 일어나 노히메를 돌아보고, 한마디 툭 내던지고는 바람처럼 방을 나갔다.
"키묘마루에게 과자를 줘라.
노부나가는 자기 아들 키묘마루의 작은 탄식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방에서 나와
곧바로 내객을 접견하는 서원으로 갔다. 서원에서는 아이치 쥬아미가, 역시
화사한 차림으로 그의 형같이 보이기도 하는 쿠마 마을의 토호 타케노우치
나미타로와 마주앉아 있었다.
타케노우치 나미타로는 노부나가가 킷포시로 불리던 유년 시절에 신도이야기를
자주 들으러 갔던 쿠마 마을의 젊은 도령으로, 매사에 남의 의표를 찌르고
구습타파에 앞장서는 노부나가의 불같은 성격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당시 오와리에서 미카와에 걸쳐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는 괴인으로는 노부시의
두목인 하치스카의 코로쿠 마사카츠와 쿠마 마을의 젊은 도령 타케노우치
나미타로 두 사람을 꼽을 수 있었다. 마사카츠는 언제나 모피로 만든 옷을 입고
자못 산적과 같은 모습이었는데 반해 타케노우치 나미타로는 여전히 코소데
차림이었다. 나이는 노부나가보다 열 살이나 위일 텐데도 아직 앳되고 순박한
청년으로 보였다. 머리는 소하츠이고, 손에 든 합죽선에서는 백단 향기가 은은히
풍기고 있었다.
"쥬아미 , 너는 물러가라."
노부나가는 서원에 들어서면서 아이치 쥬아미를 내보냈다.
"언제쯤 장마가 시작될까?"
버릇없는 자세로 나미타로 앞에 털썩 앉았다.
"글쎄 , 아마 오륙 일 후면 시작될 테지 ."
"조금 전에 키묘마루를 불러 아무 말도 않고 노려보기만 했더니 겁을 먹고
한숨을 쉬더군."
"그래서..."
나미타로는 흰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대관절 나에게 무슨 명령을 내리려고 하나?"
노부나가는 스승이나 다름없는 나미타로에게 전혀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오카자키의 애송이를 치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을까?"
"오카자키의 애송이라니 마츠다이라 타케치요를 말하는 건가? 그대는 여전히
말을 비약시키는 버릇이 있군. 나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걸. 그래,
타케치요가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한다는 말인가?"
노부나가는 시치미를 떼지 말라는 표정으로 웃었다.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러는군. 테라베의 스즈키 시게타츠가 내게 알려줬어 .
타케치요에게 공격을 지휘하게 한다는 것은 구실이고, 사실은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타케치요의 능력과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 출전시키려는 것이 분명해."
"으음, 있을 수 있는 일이지 ."
"문제는 그 후의 쿄토 진입인데, 첫 출전하는 타케치요를 때려부술 것인지
아니면..."
"후후후"
노부나가의 말에 나미타로는 웃었다.
"때려부수려다 도리어 실패하면 어떻게 하겠나?"
"이 노부나가에게 오카자키 따위를 격파할 실력이 없다는 말인가?"
"또 비약하는군. 질이 안 좋은 망아지라니까. 내 말은 어디까지나 때려부수려
했지만 때려부술 수 없었다... 뭐 이 정도로 해두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 일세
."
"뭐?"
"그대는 조금 전에 자기 아들을 노려보았더니 탄식하더라고 했어. 나중에 다시
한 번 웃어보지 그래. 아마 그 애는 또 한 번의 큰 탄식으로 그 웃음에 응할
거네 ."
노부나가는 눈을 부릅뜨고 나미타로를 노려보았다. 자기 생각과는 정반대였던
것이 분명했다. 노부나가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에게 한번 크게 겁을 주려고
했는데 , 나미타로는 때려부수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일을 끝내
라고 한다...
"쿠마도령."
노부나가는 오른쪽 어깨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타케치요에게 공을 세우고 물러가도록 하란 말인가?"
"공을 세울 만한 능력이 있다고도 한 거지."
나미타로는 부채 그늘에서 여자와 같은 눈을 빛내며,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적의가 없는 자를 일부러 적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해 !"
"으음."
"일부러 적으로 돌려 굴복시키려는 것은...무모한 짓이야! 죽을 힘을 다해 싸울
오카자키 군을 굴복시키려면 이쪽도 소중한 병력을 소모시킬 것이 분명하니까."
노부나가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천장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나미타로의 말은
확실히 옳았다. 오카자키에서는 반드시 영토를 되찾기 위해 모토야스가 처음
출전하는 이번 전투에 필사적으로 싸울 터 . 그들의 기세를 무찌르려면
노부나가도 큰 손실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문제는 타케치요가 아니라 지부노타유. 마지막 목표인 쿄토 진입 때 일부러
타케치요가 아닌 새로운 대군을 맞이하는 것도 어리석은 생각, 자신의 병력이
손실을 입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
나미타로는 이렇게 말하고, 열려 있는 문 너머로 널찍한 정원을 바라 보았다.
"오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군. 밀려오면 물러나고, 물러서면
밀려들어가고... 아니, 이건 저 어린 앞에 바람이 와닿는 부드러움을 말하는
것일세. 방법은 있네. 아구이 성에는 타케치요의 생모도 있고, 카리야의 미즈노
노부모토는 외삼촌이고."
노부나가는 갑자기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알겠어 , 이해하겠어 , 그것으로 충분해 ."
나미타로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에 대한 용무는 그것뿐인가?"
노부나가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흔들었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흘렀는데. 정말 할 이야기는 따로 있지."
"어디 그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할까."
"쿄토 진공의 시기 !"
노부나가는 말에 힘을 주었다.
"쿠마 도령의 천문에는 어떻게 나와 있나?"
"타케치요의 능력을 시험한 뒤에 총대장이 출진할 테니 노부시나 부랑자들처럼
가볍게는 움직이지 않겠지. 일러야 춘삼월, 늦으면 오월..."
"그럼 역시 그때도 여름일까?"
"아마 그렇겠지."
"병력은?"
"많을수록 좋지. 우선 삼만 정도."
"으흠"
노부나가는 신음했다.
북쪽에 미노를 두고 있는 노부나가로서는 출동시킬 수 있는 병력은 고작
3,000명의 군사였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미타로는 적의 수가 많을수록
좋다고 한다.
"어떤가, 십 분의 일인 병력으로는 킷포시조차 이길 수 없다는 건가?"
"그대도 돕도록 해 ! 이것이 내 용건이야."
"호호!"
나미타로는 여자처럼 웃었다.
"이거 참, 강제로 떠맡기려 하는군, 그런데 나가 싸우겠나 아니면 농성을
하겠나?"
"모르겠어 !"
노부나가는 대답했다.
"밀려오면 물러나고, 물러서면 밀려들어가겠다는 말은 누가 했지?
나는 그 반대로 말하겠어. 밀려오면 같이 밀어붙이고 물러나면 이쪽에서도
낮잠을 자고."
노부나가는 이렇게 말하고, 나미타로를 향해 다시 한 번 눈을 부릅뜨고
다짐받았다.
"알겠지 , 나를 도와야 하는 거야!"
6
노부나가의 부릅뜬 눈을 마주하며 문득 나미타로의 눈이 빛났다. 노부나가의
비약하는 두뇌는 불꽃 튀는 듯한 강한 힘을 가지고 하나의 확신에 도달한 것
같았다.
"허어 , 그렇다면 그대는 당당하게 스루가, 토토우미 , 미카와 등 모두를
상대로 낮잠을 자 보이겠다는 말인가?"
노부나가는 못 들은 체하고 천장을 쳐다보면서 코털을 뽑았다. 그가 코털을
뽑는 것은 언제나 의기양양했을 때였다.
"그래서 도와달라고 하는 거야. 지는 싸움인 줄 알면 도와줄 쿠마의 젊은
도령이 아니지 ."
"도울 정도의 것은 못되지만 타케노우치식 전술이라면 이용해도 좋아. 그럼 이
정도로 하고 물러가겠네. 하늘이 흐려지고 있어 . 흐리면 장마가 시작될 테지 .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카리야로 돌아가 옷이라도 좀 말려야겠어 ."
타케노우치 나미타로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노부나가
따위는 무시해도 좋다는 듯 거칠 것 없는 태도였다. 이런 인물이 나타나는 것도
센고쿠 시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방하는 힘이 일정치 않아 여기서 빼앗기고
저기서 점령당하는 가운데, 깊이 뿌리내린 토착적인 힘을 숨기고 있다가 새로운
성주가 오면 도리어 위협하여 어느 틈에 성주와 대등한 위치를 점유했다. 성주의
땅을 지상의 정부라 한다면, 그는 지하의 지배자였다.
성밖에 나가 싸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주들은 후방을 교란당하지 않으려고
이러한 호족들을 우대하여 이용했다.
나미타로가 나간 뒤 노부나가는 얼른 일어나서 서원의 창을 열어젖혔다. 아무도
없는 정원을 향해 빙긋이 미소를 던지고 다시 앉아 큰 소리로 말했다.
"거기 누구 없느냐? 마에다 마타자에몬을 불러라. 그리고 아이치 쥬아미도."
곧 두 사람이 나타났다.
노부나가는 마에다와 쥬아미 두 사람을 나란히 앉게 하고 찬찬히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여자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년 .
또 한 사람은 이미 관례를 올린 늠름한 무사,
"마타자에몬."
노부나가는 먼저 토시이에에게 말을 던졌다.
"그대는 쥬아미가 개라고 불러서 화를 내고 있다면서?"
토시이에는 머리를 똑바로 들고 노부나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그랬다. 재기발랄한 아이치 쥬아미는 토시이에의 머리가 둔하다고 하면서
관례를 올린 뒤 오늘날까지도 그의 아명인 이누치요를 끝까지 다 부르지 않고,
'이누' 즉 개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토시이에는 비위에 거슬려, 이렇게
되받아넘기곤 했다.
"애송이 아이치 , 볼일이 뭐냐?"
노부나가가 어째서 두 사람을 나란히 앞에 놓고 그 말을 꺼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7
"어떠냐, 무사의 신분으로 아직 관례도 올리지 않은 쥬아미에게 개라 불리다니
참을 수 없을 것이다. 화가 나겠지 ?"
"예 . 그렇습니다."
"그럴 것이다. 그러면 오늘 밤 해시(오후 10시) 본성 망루 밖에서 쥬아미를
죽이고 피신하라. 무사 체면으로 보아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예?"
토시이에는 깜짝 놀라 흘끗 쥬아미를 돌아보니 그는 교태를 부리듯 목을
움츠리고 칙칙 웃었다.
토시 이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놈, 또 나를 업신여기는구나!'
"어떠냐, 자신 있느냐?"
노부나가가 물었다.
"나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싸우는 것은 금하고 있다. 그러니 죽인 뒤에는 도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토시이에는 겨우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죽인 체하고...도망간 것처럼 꾸며서
어디론가 심부름을 보내려 한다는 것을...
"그럼 , 행선지는?"
토시이에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쥬아미가 다시 킬킬 웃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토시이에는 엉겁결에 쥬아미 쪽으로 자세를 취했다.
"무례하지 않은가?"
쥬아미는 꾸벅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미안해, 용서해줘. 하지만 저절로 웃음이 터지고 말았어 . 주군의 노여움을
사서 도망가야 하는 몸이 그 행선지를 주군에게 묻다니 이상하지 않아?"
노부나가는 번득이는 눈길을 쥬아미에게로 옮겼다.
"너는 알고 있느냐?"
"예."
"나도 행선지는 말하지 않겠다. 쥬아미, 멋진 모습으로 죽어야 한다."
"잘 알고 있습니다."
"후후후."
노부나가는 웃었다. 웃으면서 정원을 바라보고 이어서 옆방을 살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마가 오기 전에... 나도 옷이라도 말려야지 ."
그대로 훌쩍 서원을 나가버렸다.
"쥬아미!"
"왜 그래 , 개야?"
"너는 혼자 약은 체하고 있는데 , 그래도 되는 거냐?"
"그럼, 개는 아직 자기가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있구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신중을 기하고 있는 것뿐인데."
"그렇다면 얼마든지 신중을 기하도록 해.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어."
"어디로 가려는 거야?"
"저 세상으로."
"쥬아미. 너는 네가 갈 곳도 나한테 숨길 작정이냐?"
"주군께서 칼에 맞아 죽으라고 말씀하셨어. 죽어서 갈 곳은 저 세상 밖에 또
있겠나.
그런데 개는 나를 죽이고 나서 스루가 근처에라도 여행을 갈 작정인가?"
토시이에는 혀를 차고 무릎에 얹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키노시타 토키치로라는 원숭이 같은 사나이의 수다에는 어딘지 모르게 애교가
있었다. 그러나 아이치 쥬아미의 말은 뼈를 찌르는 것 같은 독설이었다.
토시 이에는 분함을 참고 웃어 보였다.
"칼에 맞아 죽어도 원한은 남을 것이다. 어딘가에 귀신이라도 되어
나타나겠느냐고 묻는 거다."
"하하하하..."
쥬아미는 코웃음을 쳤다.
"그게 고작 개가 생각해낸 익살이란 말이냐? 놀랐어 ! 하지만 개야. 실수로라도
내 유령이 있는 곳으로 도망쳐오면 못써. 그러면 나중에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토시이에는 다시 불끈 화가 치밀었으나 애써 참았다.
"그럼 해시에 망루 밖에서 만나자."
칼을 들고 벌떡 일어섰을 때 쥬아미도 뒤따라 바로 일어섰다.
"개야, 너 정말 알고 있는 거야? 모르겠거든 사나이답게 가르쳐달라고 하는
것이 좋을 텐데. 성주님 말씀에도 그런 뜻이 담겨 있었어."
토시이에는 대답 대신 거칠게 발소리를 내며 사라져갔다.
8
아이치 쥬아미는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싱긋 웃었다. 왜 자꾸
토시이에를 놀려주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그 성실한 인품은 자기도 잘 알고
있고, 능력도 담력도 순수성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못 점잖은
체하는 표정과 침착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면 그만 저도 모르게 놀려주고
싶어졌다. 역시 호적수라는 경쟁심과 노부나가의 총애를 다투는 소년다운 감정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너무 놀려서 미안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문득 깨닫고 보면 어느 틈에 채찍과도 같은 독설을 퍼붓고
있고는 했다. 그런 그의 마음에는 토시이에를 존경하기 때문에 허물없이 대하는
면도 있는 듯했다.
'하찮은 일에 화를 내는 그런 졸장부가 아니지.'
화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독설을 퍼붓는다면 비겁할지 모르지만, 응석을 부려
말하는 것은 친근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쥬아미의 독설과 그에 대응하는 토시이에의 말싸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노부나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타자에몬 토시이에에게 화를 낸 것처럼 가장하여 쥬아미를 죽이라고 했다.
쥬아미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기뻤다. 토시이에는 죽이고 도망치는
것이고, 자기는 칼에 맞아 죽는다. 도망친 쪽은 언제든지 쉽게 돌아올 수 있지만,
죽은 쪽은 당분간 모습을 나타낼 수 없다.
쥬아미는 예리한 두뇌를 움직여 자신의 행선지를 오카자키로 정해 놓았다.
오카자키에 가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중신들을 만나, 노부나가에게는
모토야스를 적으로 돌릴 마음이 없다는 뜻을 전한다. 더구나 자기는 그 말을
고하고 얼른 돌아와서는 안 된다. 적어도 쿄토 진공을 위한 요시모토의 대군을
맞이하는 사생결단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오카자키의 동향을 감시하여
노부나가에게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인질로 삼아
그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은 그런 필요성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그렇다면 나를 죽이고 도망칠 토시이에는? 그는 아구이의 히사마츠
사도노카미에게 몸을 맡긴다. 거기 가서 같은 말을 모토야스의 생모 오다이에게
하고, 오다이를 통해 카리야의 미즈노 노부모토와 오카자키의 중신들에게 그 뜻을
전하도록 한다.
쥬아미가 미리 알아차리고 스루가에 가지 말라고 한 것은, 고지식한 토시이에가
무언가 착각하고 모토야스에게까지 그 말을 하러 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만일 그렇게 하여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요시모토는 모토야스까지 죽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누 이 자식 , 정말 성주님의 마음을 읽었을까?'
쥬아미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모리 신스케에게 두 사람의 결투에 입회해줄
것을 부탁했다. 다행히 도둑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었다.
"아이치 쥬아미와 마에다 마타자에몬, 평소 말다툼이 불씨가 되어 결투를
했다가 쥬아미는 죽고 마타자에몬은 도주했습니다."
사형당한 시체에 거적을 씌우고, 이렇게 보고하도록 미리 짜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만일 남의 눈에 띄었을 경우를 대비해 일부러 코쇼 차림을 하고 봄날
밤의 달빛에 마음이 들떠 성안을 거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쥬아미는 허리에 퉁소를 꽂고 훌쩍 본성 밖으로 나갔다.
떨어지는 별
1
약속한 망루 밖에는 오래 된 단풍나무가 울창하게 가지를 뻗고 있었다. 갓
수리를 끝낸 토담에 달빛이 희미하게 비추고, 어디서 우는지 모를 개구리
울음소리가 달빛을 타고 흘러왔다.
쥬아미는 허리춤에서 퉁소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이대로 당분간 성을 떠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아직 약속한 시각보다 약간 일렀다.
그동안에 정말 퉁소를 즐기고 있을 생각이었다.
이때 단풍나무 너머 모밀잣밤나무 밑에서 가만히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있었다. 모리 신스케가 벌써 왔을 리는 없었다. 누구일까 하고 성큼성큼 그쪽으로
걸어갔다. 제삼자가 있을수록 좋았다.
"누구냐'?'
"쥬아미냐?"
메아리치듯 응하는 토시이에의 목소리였다.
토시이에 혼자가 아니라 그 옆에 또 하나의 그림자가 따라붙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개야, 너 혼자가 아니로구나."
"그래."
"누굴 데려 왔어 ?"
"오마츠, 내 약혼자야."
"뭐 , 여자를 데려왔다구?"
여간 아닌 쥬아미로서도 이유를 알 수 없어 나무 밑 어둠 속을 응시했다. 과연
열한 살인 토시이에의 약혼자가 자못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대관절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토시이에는 잠자코 있었다.
"열한 살 된 신부를 데리고 갈 작정이냐?"
"묻지 않아도 알잖아? 뭐든 꿰뚫어보는 너니까."
"음, 이게 바로 네 복수구나? 이 형편없이 미련한 놈아, 그 다리도 약한 것을
데리고 어딜 가겠다는 말이냐?"
쥬아미의 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설마 이 여자를 데리고 스루가에 갈 생각은 아닐 테지? 수치를 당하고 싶거든
오와리에서 당하도록 해. 미카와, 토토우미, 스루가에까지 자신이 못났다고
광고할 것은 없어 ."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너의 얕은 꾀란 말이다. 도망치는 길이라면 아내도
데려가야지 . 너도 미노의 아케치 쥬베에라는 사람은 알고 있을 테지 ?"
"사이토 도산 뉴도 부인의 조카 말이로군. 네 머리로 그것과 이것을 어떻게
억지로 결부시켜 설명하려는 거야?"
"그 사람도 아내를 데리고 여러 지방을 여행했어. 어디서나 주군을 섬길 수
있도록 말이야.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실은 사이토 도산의 첩자였어 . 나도
아내를 데리고 가겠어 ."
"으음."
쥬아미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다시 봐야겠는걸. 정말 감탄했어 ! 암캐를 데려가는 것이 좀 성급한 짓이라는
걸 모르고 있군. 역시 개야, 너는..."
오마츠가 참다못해 옆에서 입을 열었다.
"아이치 님 , 말씀이 나무 지나치십니다."
"아, 부인이셨군요. 입버릇이 나쁜 것은 원래부터 타고난 것이니
용서해주십시오."
"암캐라고 한 것은 나를 가리켜 한 말이겠죠?"
"설사 그렇다고 해도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그것은 개에게 한 말이니까요,"
2
신들은 때때로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을 창조한다. 아이치
쥬아미도 그러한 창조물 중의 하나였다. 겉보기에는 마치 보살 같았으나 그
독설은 악마가 들이대는 칼과 비슷했다. 빼어난 용모라는 점에서는 노부나가의
소실들도 여자이지만 그에게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굳이 비교한다면 노히메와
노부나가의 막내 여동생 오이치가 겨우 필적한다고나 할까. 그런 만큼 그의
독설은 훨씬 더 상대에게 매섭게 느껴졌다.
"아무리 아이치 님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어요. 개한테 말한 것이라 해도 어찌
암캐라는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어째서 내가 암캐인지 설명이 듣고 싶군요."
열한 살의 오마츠(후의 호슌인)는 비록 체구는 작았으나 야무지기로는
키요스에서도 소문난 여자였다. 게다가 노히메의 처소에 드나들면서부터 그녀의
감화도 있고 하여 어린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틀림없이 이누치요에게 없어서는 안 될 현명한 부인으로 자랄
것이다."
노히메는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그러한 오마츠에게 질문당하자 쥬아미의
혀는 점점 더 유들유들해졌다.
"부인은 참으로 놀라운 질문을 하시는군요, 원래 개라는 것은 주인에게
충실하지요. 약간 머리가 모자란다는 뜻은 있지만 결코 모욕적인 말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개의 부인이기에 암캐라고, 이것은 수놈, 암놈을 한 쌍으로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오마츠는 나무 그늘에서 나와 달빛 아래 섰다. 아직 소녀 티를 벗지 못했으나
그 눈은 분을 이기지 못해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쥬아미 님도 개, 즉 자신은 수캐란 말씀이군요?"
"이 쥬아미 말입니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개가 아닙니다. 착각을 하셨군요."
"아, 쥬아미 님은 인간이면서도 짐승에게 반했군요. 호호호, 암캐에게 연문을
보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한 일을 잊으셨나요?"
"뭐... 뭐라구요..."
쥬아미는 당황했다. 그러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노히메가 너무도
오마츠를 칭찬하는 바람에 장난삼아 연문을 써서 보냈던 일이 있었다. 그랬더니
소녀는 마치 어른처럼 의젓한 회답을 보내왔다.
'나는 이미 정해진 남자가 있는 몸, 쥬아미 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부도에 어긋나고 인륜을 어기는 일이 됩니다. 단념해주십시오.'
그 말에 쥬아미는 토시이에 앞이라 그만 독설의 창끝이 무디어졌다.
설마 인간이 암캐를 사랑할 리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쥬아미 님은 암캐한테까지
거절당하는 들개인가요?"
"잠깐!"
토시이에가 소리 질렀다.
"내 앞에서 계속 악담을 퍼붓고, 그것도 부족해서 아내까지 유혹하려 했다니,
무사의 체면상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자, 칼을 뽑아라, 쥬아미."
토시이에는 연극의 시작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누가 보아도 이 정도면 정말
결투로 여길 것이었다.
쥬아미는 아직 토시이에의 행선지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칼을 빼어 드는 것은
토시이에가 정말 화가 났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용서하라'고 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좋다. 덤벼라."
두 사람은 재빠르게 거리를 두고 달빛 아래 칼을 겨누었다.
3
모리 신스케가 죄인의 시체를 운반해올 무렵이 되었다.
빠져나갈 곳은 후죠몬, 야음을 틈타 모습을 감출 생각인데, 그 단계에서는
토시이에보다 쥬아미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쪽은 도망가는 것이므로 납의
눈에 띄어도 괜찮다. 그러나 죽은 쥬아미를 보았다는 사람이 생기면 사정이
달라진다.
쥬아미는 초조했다. 어떻게든 빨리 두 사람의 행선지에 대해 합의를 보아야
했다. 쥬아미를 죽이고 도망가는 토시이에와 죽임을 당한 쥬아미가 오카자키 성
어딘가에서 만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만천하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
"흥, 개한테도 질투는 있는 모양이군."
칼을 겨눈 채 쥬아미가 말했다.
"그렇게 중요한 부인이라면 섣불리 밖에 내놓아선 안 되는 거 아냐. 차라리
배꼽 언저리에 감아두지 그래?"
"쓸데없는 소린 집어쳐 . 이미 용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심한 이상 반드시
죽이고야 말 것이다. 이 마타자에몬은 너같이 주둥아리만 살아 있는 놈이
아니다."
"죽일 수 있거든 어디 죽여봐라. 그리고 그렇게 소중한 여편네를 데리고 도대체
어디로 도망치겠다는 거냐? 아구이의 히사마츠 사도노카미한테냐, 응?"
그곳으로 가라는 의미도 포함시켜 이렇게 말했다. 토시이에는 칼을 바싹
쥬아미의 코끝에 대고 고개를 흔들었다.
"도망가는 놈이 어찌 우리편에 기대겠어? 오와리의 적한테로 가겠다."
"뭐 , 적한테...? 더더구나 용서치 못할 배신자 같으니라구."
쥬아미는 당황했다. 물론 토시이에의 생각에도 일리는 있었다. 성주의 총신을
죽이고 도망가는 자가 자기편으로 피신했다기보다는 적에게 투항했다는 편이
자연스럽다.
'이누도 오카자키로 갈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일단 결정하면 여간해서는 그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성실한 반면에 완고하기
짝이 없는 토시이에의 성격이 쥬아미에게는 큰 짐이 되었다.
"나는 말이지 ."
토시 이에가 나직하게 말했다.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와는 구면이야. 모토야스 밑에 있는 코쇼들도 알고 있어 .
연고를 봐서 찾아가면 몸을 숨기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지."
더더욱 난처했다. 확실히 그의 말이 옳기는 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것을
알리고 싶어 쥬아미는 큰 소리로 혀를 찼다.
"개야. 너는 왜 그렇게 돌대가리냐. 너 정도나 되는 놈이 모토야스의 가신에게
몸을 맡긴다면 일부러 일을 그르치는 것과도 같아, 이 바보야!"
"잔소리 말고 덤벼라."
"그래 , 좋다."
겨눈 칼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힘껏 내지르는 쥬아미의 칼끝을 왼쪽으로
비키고, 마에다 마타자에몬은 노부나가를 상대로 연마한 칼을 오른쪽으로
후려쳤다.
"으윽."
뜻하지 않은 반응에 토시이에는 한 걸음 물러나서 몸을 숙였다.
쥬아미 역시 자기와 똑같이 히라타 산미 아래서 배운 병법의 달인. 당연히 피할
줄 알았는데 칼을 내지르는 순간 나무 그루터기인지 돌인지에 발이 결렸던
모양이었다. 토시이에가 후려치는 칼 바로 밑에 몸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
"이누... 너 , 정말 나, 나를 베었구나."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리고 쥬아미는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쥬아미..."
그대로 쥬아미한테 달려가, 그제야 비로소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아차!"
오마츠는 다시 나무 그늘로 들어가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토시이에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두뇌 회전이 빠른 오마츠는
오늘의 결투에는 그 이면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토시이에는 허리를 숙이고 상처를 살펴보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을 만큼 정확히 치명상을 입혀 놓았다. 왼쪽 목에서부터 가슴에 걸쳐 깊이
갈라지고 부근의 풀이 완전히 피로 물들어 있었다.
"쥬아미 , 너는 왜 이다지도 불운하단 말이냐."
그의 아버지는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여 그는 어릴
적부터 고아였다. 겨우 관례를 올릴 나이가 되고, 이번 일에 성공하면 몇 만 석의
상이 주어져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 텐데. 토시이에의 음성이 귀에 들렸는지
쥬아미는 마지막 힘을 다해 풀을 움켜쥐고 짓밟힌 메뚜기처럼 몸을 뒤틀면서
경련했다.
"개야... 가거라..."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은 들리지 않고, 마침내
희미한 달빛 아래 창백한 옆얼굴을 드러냈다.
"어서 도망가요. 누가 이리 오고 있어요."
오마츠와는 모든 것을 상의해두었던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풀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토시이에를 재촉했다.
토시이에는 흠칫 놀라며 일어섰다. 모리 신스케가 일꾼 두 사람에게 시체를
들려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토시이에는 한 손을 가슴에 얹어 쥬아미의 명복을
빌고 얼른 종이를 꺼내 칼의 피를 닦았다.
인생에는 예기치 못한 일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지나치게 심한 쥬아미의
독설에 화가 치밀어 한칼에 베어버릴까 하고 생각한 일은 종종 있었다. 그 생각을
토시이에의 애도
아카사카 센쥬인 야스츠구가 알고 스스로 움직인 듯했다.
토시이에는 야스츠구를 칼집에 꽂고 아무 말도 없이 어린 신부에게 등을
들이댔다. 신부는 순순히 두 소매를 벌리고 업혔다. 그는 한 번 추슬러 올리고
망루 밑을 왼쪽으로 돌아 상수리나무 밑에서 모리 신스케를 지나가게 두었다.
지나가게 하고도 걱정이 되어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되돌아가 귀를 기울였다.
"성급한 녀석이로군. 벌써 죽다니."
모리 신스케는 쥬아미가 쓰러진 곳에 와서 중얼거렸다.
"그 시체는 버리고, 대신 이걸 준비해온 거적에 싸서 운반하여라."
죄인의 시체를 운반해온 것은 일꾼이 아니었다. 혹시 누설되지나 않을까 하여
아시가루 중에서 뽑아왔는지, 그중 한 사람은 분명 키노시타 토키치로였다.
토키치로는 두 사람이 같이 운반해온 것을 풀숲에 굴려버리고 그 위에 거적을
덮고는 쥬아미의 시체로 다가갔다.
"아니 ,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리다니 ."
"피까지 흘렸군, 빈틈이 없어 ."
신스케는 선 채로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 쥬아미의 연극인 줄로만 알았다.
"대관절 이건 누가 누구를 죽인 것입니까?"
"마에다가 주군의 총신 쥬아미를 죽인 거야..."
"앗! 마에다 님이...이거 큰일났군! 그럼, 마에다 님은 성에 있을 수 없지 ,
어딘가로 피신해야겠죠?"
모리 신스케는 나직하게 웃고 발부리의 돌을 걷어찼다.
5
"마에다 님이 어째서 쥬아미 님과 결투까지 했을까? 그렇게 도량이 좁은 분은
아닌데..."
토키치로는 이렇게 말하더니 깜짝 놀랐다.
"으앗! 이거 놀라운 칼솜씨야. 목 왼쪽에서부터 젖가슴 밑에까지 한칼에
베었군."
"잔소리말고 어서 거적으로 시체를 싸도록 해라. 너희들에게 단단히
말해두겠는데, 입 조심해야 한다. 쥬아미라는 놈은 주군의 은총을 등에 업고
누구한테나 독설을 퍼부었어.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나도 한번 혼을
내주고 싶었을 정도였지."
신스케는 쥬아미가 죽은 체하고 있는 줄만 알았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을 때
실컷 화풀이를 할 생각이었다.
"예, 단단히 말조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주제넘은 말씀입니다 마는 어째서
시체를
바꿔치기 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은 몰라도 된다."
"그러나저러나...아, 목이 떨어지려고 해요, 목이, 목이 반 이상 잘렸어요."
이 말에 신스케는 깜짝 놀라며 옆으로 왔다.
"뭣이 ...? 목이 떨어지려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토키치로가 안아 일으킨 쥬아미의 얼굴을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고는 소리쳤다.
"앗!"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은은한 달빛 아래 이를 악물고 죽어 있는 쥬아미.
더구나 풀에 닿아 있는 얼굴 반쪽에서는 검은 피가 흥건하게 흐르고있었다.
신스케는 깜짝 놀라 이마에 손을 짚어보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냥 두어라, 옮길 필요 없다."
평소의 원한을 참지 못하고 마에다 마타자에몬은 정말 쥬아미를 죽이고 말았다.
주군에게 중요한 사명을 명령받은 이 마당에...이렇게 생각하고 신스케는 사실을
노부나가에게 보고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마음먹었다.
"서둘러라! 운반해온 시체를 그대로 후죠몬을 통해 들여보내고 어서 문을
닫도록해라."
적어도 주군의 명령을 어기고 동료를 죽인 토시이에. 그대로 도망치게 할 수는
없었다. 아직 성밖으로 나가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급히 사방의 문을 닫게 하고
토시이에를 체포해야 했다. 노부나가가 그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는 그로서는 알
바 아니었다.
토키치로와 또 하나의 아시가루는 명령에 따라 들것에 다시 죄인의 시체를 싣고
달리기 시작했다. 마에다 마타자에몬은 자기 앞으로 달려가는 세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등에 업힌 오마츠는 아직 사정을 모르는지 토시이에의 귀에
입을 대고 하늘을 가리켰다.
"아, 별이 떨어지고 있어요."
토시이에는 다시 한 번 천천히 오마츠를 추슬러 올리고, 나직하게 불렀다.
"오마츠."
"예."
"혼자서 노히메 마님한테 돌아가도록 해 ."
"싫어요."
오마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노히메 마님의 시종이 아니에요. 마에다 마타자에몬 님의 아내예요."
"나는 뜻하지 않은 실수를 해서 성주님에게 목이 잘리게 됐어 . 그대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 나는 실수로 쥬아미를 죽이고 말았어."
"예...?"
어린 신부 오마츠는 비로소 눈을 크게 뜨고 토시이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6
"쥬아미 님을 정말로 죽였나요...?"
오마츠가 얼굴을 들여다보자 토시이에는 고개를 끄덕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는 혼자 돌아가야 해. 그대에게까지 벌을 내리시지는 않을
거야. 내 말 알겠나?"
"싫어요..."
오마츠는 둥에서 계속 고개를 흔들었다.
"마타자에몬 님이 처형되신다면 저도 같이 죽겠어요."
토시이에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걷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오마츠의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안에 들어가 꾸짖기라도 해서 내려놓고 노부나가 앞에
자수해야지 . 그 다음은 노부나가의 처분에 맡기고 도마위에 오른 잉어가 될
생각이었다.
"오마츠."
"예."
"그대는 영리한 사람으로 태어났어. 고집을 버리고 넓은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야 해 ,"
"예."
"오마츠는 착한 사람이지...?"
"마타자에몬 님 , 저 소리는 무엇일까요?"
"나를 찾는 소리일 거야. 저기 저쪽 문을 향해 횃불이 움직이고 있어...
알겠지? 문이 닫히면 밖에 나갈 수 없어. 도망쳐서 숨는다면 평생의 수치가 돼 .
얌전하게 노히메 마님에게 가서 몸을 의탁하도록 해 ."
등에 업힌 오마츠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가운데
점점이 불어나는 횃불에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앗, 괴한이..."
바로 가까이 있는 싸리나무 그루터기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토시이에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 주변을 살폈다.
"이 마에다 마타자에몬은 숨지도 도주하지도 않을 것이다. 너는 누구냐?"
그 검은 그림자가 급하게 말했다.
"쉬잇."
소리를 내지 말라는 신호인 듯했다.
"누구냐..."
다시 토시이에가 물었다.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
"신참내기 토키치로군. 우리 일에 간섭하지 마라."
"신참내기가 아니야. 신참내기로 보인다면 네 눈이 흐린 탓이다. 내가 주군과
흉금을 털어놓은 것은 지난해 구월부터야."
"토키치로, 그만해. 나는 네 말을 듣고 있을 틈이 없다."
"어리석은 소리 ! 나를 따라와. 나도 얘기 나누고 있을 틈이 없다."
"따라가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우리 대장을 위해 후죠몬으로 도망치는 거야."
"안돼!"
"바보 같은 소리 . 지금 자수하면 그 사나운 말이 당장에 목을 자를 거야."
"각오하고 있다."
"그러기에 바보라는 거야... 대장의 소중한 부하 하나가 죽고 또
그대까지 죽인다면 우리 대장은 이중으로 손해야. 그 정도의 계산도 못하다니
머리가 형편없군. 도망쳐야 하는 거야. 그대를 죽이고 나면 대장은 반드시 나중에
후회해. 후회하게 만드는 것이 충성은 아니잖아? 일단 도망쳤다가 나중에 두
사람 몫을 하란 말이야."
토키치로가 단숨에 말하고 나자 등에 업힌 오마츠가 방울벌레 소리같은
목소리로 그 말이 옳다고 했다.
"그래요. 누군지 모르지만 옳은 말을 하고 있어요. 그 말이 옳아요. 자, 마에다
님 , 어서 도망쳐요."
토시이에는 똑바로 서서 점점 성안에서 불어나는 횃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이고 나면 대장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이 말이 예리하게 가슴을 찔러왔다. 그토록 총애를 받고 있으면서도 도망친다는
것이 성실한 이 토시이에에게는 참을 수 없었다.
7
토시이에가 생각에 잠기는 것을 보고 토키치로가 가까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해요. 길은 하나뿐이오. 그렇지 않소,
부인?"
"예."
오마츠가 등에서 대답했다.
"주군에게 이중으로 손해를 끼치는 것은 불충이에요. 자, 어서 ."
말하고 나서 이 어린 여자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토시이에의 어깨를 탁쳤다.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부탁이 있어요."
"예예 , 무엇이든 좋습니다. 나와 마타자에몬 님은 남이 없는 곳에서는 마음을
터 놓은 친구가 되자고 맹세 한 사이이니까요."
"우리가 도망친 뒤 실수로 죽였다고 하지말고, 쥬아미 님이 저에게 연심을
품었기 때문에 화가 치밀어 죽였다...고 사실 그대로 말씀 드려주세요."
"예?"
보통이 아닌 토키치로도 그만 웃음이 터져나오려 했으나 겨우 입을 틀어막았다.
'이것으로 구원은 되겠군...'
토키치로는 생각했다. 이 밝고 티없는 부인이 옆에 있으면서 토시이에의 어두운
반성을 구원해줄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음, 그렇다면 더더구나 용서받을 수 없는 일.
자, 서두릅시다."
토키치로가 손을 홱 끌어당기고 걷기 시작했다. 토시이에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울고 있었다. 입을 한 일자로 꼭 다물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고 있었다.
"대장은 곧 전운이 몰아칠 것이라 보고 나까지 곁에 두고 있어요. 이처럼
지금은 중요한 땜니다. 오다 쪽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이누치요
님이 개죽음 당해서야 어디 될 말입니까?"
"그건 , 사실이에요."
"부인은 이해가 빠르시군요. 마타자에몬 님은 살아만 계시면 반드시 쥬아미
님의 몫까지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
"물론이에요. 히라타 산미 님도 우리 주인이 가장 강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세 사람은 나무 그늘의 어둠을 택해 물이 마른 해자의 골짜기를 건넜다. 도중에
수색대 한 쌍을 만났으나 토키치로가 도리어 큰 소리로 호통을 치고 지나갔다.
"거기 지나가는 게 누구냐? 우리는 후지이 마타에몬의 부하, 후죠몬의 통로를
지키고 있다. 이름을 밝히고 지나가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검문을 하였다.
"신참이로군, 우리도 역시 그분의 부하다."
상대는 그대로 둘째 성의 군량 저장소 쪽으로 사라져갔다.
"자, 도착했어요. 마음을 넓게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게 좋을 것입니다."
토키치로가 어떻게 머리를 써서 어떤 수단을 강구해놓았는지 안으로 잠겨 있는
후죠몬에는 아무도 감시하는 자가 없었다. 토키치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물통을 열고 빗장을 뽑았다. 하늘에서는 계속 별이 흐르고, 내리막길인 성밖의
논에서는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토키치로."
토시이에는 성 밖에 나가 등에 업은 오마츠를 다시 한 번 추스르며 처음으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는 그대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빚을 졌다. 살아 있는 한 평생 잊지 않으마."
"뭐 이 정도 갖고... 좌우간 어이없는 재난이었어요. 그럼 잠시 이별을
해야겠군요. 몸조심하시고..."
이렇게 말한 토키치로는 정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마의 계절
1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땀을 흘리기가 싫어 양쪽에서 코쇼들에게 부채질을
시키면서 쏘는 듯한 눈빛으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말을 듣고있었다.
후계자가 될 타케치요도 태어났다. 형식적인 첫 출전은 작은 테라베성 부근으로
국한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한 부대의 대장으로서 과연 얼마나 역량을
발휘할 것인가? 말하자면 이번 출전은 쿄토 진입 작전 예행연습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식량수송은 누구에게 맡길 생각이냐?"
요시모토는 모토야스의 작전계획을 듣고 나서 부드럽게 물었다.
"오와리의 노부나가가 시건방지게도 공세로 나왔어. 오타카 성이 포위되고
우도노 나가테루는 식량과 원병을 요청하고 있더군. 이것은 원병보다도
식량반입이 우선이라 할 수 있지 . 식량만 있으면 쉽게 함락될 성이 아니야."
모토야스는 요시모토의 속뜻을 알 수 있었다.
"식량수송의 책임은 사카이 우타노스케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음, 우타노스케라면 노련하니 일단 안심할 수 있겠지. 우타노스케를 호위할
무사는?"
"토리이 히코에몬 모토타다와 이시카와 요시치로 카즈마사, 그리고 히라이와
시치노스케 치카요시."
"모두 젊어서 걱정되는 부분도 있군..."
요시모토는 모토야스가 젊은이답지 않은 조심성으로, 늙은 중신들을 되도록
일선에 내세우지 않으려는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아직 오쿠보 신파치로 타다토시와 토리이 이가노카미 타다요시가 남아 있는데,
이런 중신들은 어디로 돌리려느냐?"
"유격대입니다."
"허어, 그럼 본진의 지휘는 누가 맡고?"
"제가 직접 지휘하겠습니다. 전위와 우익의 지휘는 이시카와 아키의 아들
히코고로 이에나리, 후위와 좌익의 지휘는 사카이 사에몬노죠 타다츠구에게
명하겠습니다."
"이시카와 이에나리는 몇 살이지 ?"
"스물여섯입니다"
"우에무라 신로쿠로는 어디에 배치하려느냐?"
"제 곁에 두겠습니다."
"너의 참모로 말이냐...?"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사카이 쇼겐도 곁에 두는 것이 좋겠다. 가신들을 잘 통솔할 수 있을 테니까."
요시모토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오쿠보 일족, 혼다 히로타카, 사카키바라 일족, 이시카와 키요카네... 그리고
토리이 노인도 움직이게 해야 할 것 같다. 좋아, 네 생각과 내 생각이 거의
비슷하다. 곧 출발하도록 해라."
모토야스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요시모토는 오카자키 군이 전위에
나설 실력이 없으면 그들을 오다 군과 맞서게 하여 전멸시키려 할 것이 분명했다.
전멸이냐 승리냐? 모토야스의 동요는 이미 가라 앉고 정면으로 운명과 맞설
결심이 서 있었다.
모토야스가 느릿한 걸음으로 현관을 나섰을 때였다. 호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혼다 나베노스케(헤이하치로 타다카츠)가 달려와 허리를 굽혔다.
나베노스케는 열두 살이 되어 이미 늠름한 용사로 성장해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시치노스케는?"
여기 들어올 때는 히라이와 시치노스케가 호위하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나베노스케로 바뀌어 있었다.
"예, 고향의 제 어머니로부터 서신이 와서 교대를 했습니다."
"고향의 미망인이 무어라 말했기에?"
"너도 이제는 열두 살이나 되었으니 성주님께 부탁 드려 출전하라고 했습니다.
저에게 말고삐를 잡게 해주십시오."
모토야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가 무거운 구름에 덮이고, 멀리 바라다 보이는
후지산
꼭대기는 연한 먹빛으로 감싸여 있었다.
2
혼다 나베노스케는 묵묵히 걸어가는 모토야스의 뒷모습을 쫓아가 말을 걸었다.
"성주님 ! 허락해주시지요? 만일에 버려두고 가신다면 저는 어머니를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아마 성주님께서는 너무 이르다고 하실 것이다. 그때는 잠자코 슨푸를 도망쳐
나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성주님이 가만 계셔도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그래도 모토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한 기질의 혼다 미망인은 당연히 그런
글을 써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사를 알 수 없는 전쟁, 요시모토가 일일이
이름을 말한 가신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어린 사람들은 남겨두고 싶었다.
그들이 어떤 인물로 자랄지는 인간의 지혜로는 예측하기 어렵다.
현재 모토야스 자신도 카메히메와 타케치요 등 두 자식을 남기고 떠난다. 아니,
모토야스만이 아니다. 장수의 한 사람으로 동반하는 사카이 타다츠구도
키요야스와 케요인 사이에 태어난 딸인 그의 아내, 모토야스에게는 부모 양쪽으로
인연이 닿아 고모가 되고 또 이모가 되는 그의 아내를 인질로 슨푸에 남기고
간다. 이를테면 의리와 인질이라는 총구를 들이대고 사지로 몰아넣는 전쟁이라 할
수 있었다.
정문을 나와 해자에 드리워 흔들리는 푸른 나뭇잎들을 바라보면서 나베노스케는
다시 말을 꺼냈다.
"어머니 편지에는 전사하실 각오를 하고 계실지도 모르는 성주님이 다음 기회에
출전시키겠다고 하시거든, 무사에게 다음이 어디 있느냐고 여쭈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성주님, 저를 꼭 데려가 주십시오, 방해가 되지는 않겠습니다. 이
나베노스케도 할아버지의 손자이고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모토야스는 참다못해 큰 소리로 꾸짖었다.
"시끄럽다!"
"뭐가 시끄럽습니까!"
나베노스케도 어깨를 들먹이며 대꾸했다.
"충성스런 부하가 말하는데 시끄럽다고 하시는 대장은 못난 대장입니다."
"뭣이, 지금 말대꾸를 하는 게냐?"
"말대꾸가 아닙니다. 성주님은 이 나베노스케의 심정을 모르시겠습니까?"
'어이가 없군, 너는 마치 나를 꾸짖는 것 같구나."
"꾸중을 받기 싫으시면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이 나베노스케는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다는 말이냐?"
"성주님은 슨푸로 돌아오시지 않습니다."
"뭐?"
모토야스는 깜짝 놀라 나베노스케를 바라보았다. 나베노스케의 눈에까지 그렇게
보였다면 요시모토가 경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구나. 이 어린것의 눈에까지 그렇게 비쳤구나.'
"너는..."
모토야스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한숨을 쉬었다.
"내 말고삐를 잡고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달릴 수 있느냐?"
"달릴 수 없을 때는 적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달리겠습니다."
"나베노스케, 너는 지나치게 자부심이 강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 약간 난폭한
데가 있다. 이 모토야스의 군율은 엄하다. 너는 그걸 지킬 수 있겠느냐?"
"후후후."
허락받은 줄 알고 나베노스케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투란 마치 살아 있는 짐승과 같은 것이어서 그때그때의 상황을 보고
움직이게 됩니다. 군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성주님, 성주님께
만일의 경우가 생긴다면 이 나베노스케가 대신 죽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나베노스케는 3대에 걸쳐 성주 곁에서 죽을 각오인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3
"나베노스케."
"왜 그러십니까, 성주님?"
"전쟁에는 죽음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 점을 좀더 잘 생각해보아라."
"그 따위는 생각지 않습니다."
나베노스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생각한 것으로
하라고요. 성주님 , 전쟁에는 오직 승리와 패배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토야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베노스케를 돌아보고 다시 입을 무겁게
다물었다.
생사의 문제는 어머니 뱃속에서 해결했다. 이렇게 생각하라고 미망인이
일러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저러나 전쟁에는 승리와 패배가 있을 뿐이라는
말은 얼마나 엄연한 진리인가. 불가피한 전쟁이라면 끝까지 승리를 추구하는 자가
이기고 그렇지 못한 쪽이 패한다.
'그렇다, 다른 일에 마음이 쓰여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데려가 주시는 것이죠, 성주님?"
나베노스케가 다시 조르는 바람에 모토야스는 가볍게 대답했다.
"응."
그대로 머릿속에서는 부대 배치를 생각했다.
아마 이번 출전에서 노부나가는 직접 전면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킷포시의
모습으로 노부나가가 나타난다면 전투보다는 그리움이 앞설 것 같아 불안했다.
이런 인정에 끌리는 마음을 청산해버리고 하나의 무기로 화해야 한다. 선진은
보급대를 지키기 위해 전방 4, 5정 되는 곳에 배치하고, 후진은 후방 4, 5정 되는
곳에 배치한다.
좌우는 각각 반 정쯤 되는 위치에서 궁포병으로 하여금 측면을 방비하게 하고,
노신들로 구성된 유격대는 기회를 보아 언제든지 진형을 전개할 수 있도록 후방에
배치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역시 걱정되는 것은 총포였다.
아마도 총포는 노부나가가 가장 많을 것이다. 오카자키로부터 첩자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전국 상인에게 나고야, 키요스, 아츠타 등을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하면서 농민의 공납말고도 상인의 자릿세 수입으로 계속 총포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했다.
하시모토 잇파라는 사격의 명인을 불러들여 우수한 아시가루들에게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고 있었다. 백병전이 아닌 경우 이 신식 무기로 위협받으면 사람도 말도
모두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토리이 노인은 얼마나 총포를 준비해두었을까?'
미야마치에 있는 임시거처를 들어설 무렵에는 하늘에서 부슬부슬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출전을 앞두고 미리 슨푸에 와 있던 가신들은 물론
오카자키에 있는 장수들의 연락병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작은 저택에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세나히메의 친정 세키구치 교부의 집까지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성주님이 돌아오셨다."
언제든지 출정할 수 있도록 이미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던 토리이 모토타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현관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얼른 좌우로 길을 열었다.
"성주님! 출전은 언제입니까?"
사카이 우타노스케가 물었다.
"내일 새벽. 오늘밤은 푹 쉬도록 하시오."
모토야스는 이렇게 대답하고 현관에 부복하고 있는 여자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한 사람은 슨푸에 살고 있는 고모. 또 한 사람은 나베노스케의 어머니
혼다미망인.
4
"부인, 나베노스케는 부인이 서신을 보냈다고 했는데 어째서 직접 오셨소?"
혼다 미망인은 자못 감개무량한 듯 얼굴을 쳐들고 모토야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어깨를 기운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남편 헤이하치로
타다타카를 잃은 이 미망인에게는 모토야스가 주군인 동시에 영혼의 연인이고
마음의 등불인 것 같았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성주님의 뜻깊은 첫 출전에 저 하나만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편지는 인편에 부탁했습니다마는 뒤따라 저도
올라왔습니다."
모토야스는 이렇게 말하는 미망인의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건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알겠소. 한데 그대는 이제 여자가 아닌 것 같소. 안에도 들어가지 않고 이렇듯
남자들 틈에 섞여 있으니..."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토야스의 뒤를 따라 미망인은 얼른 바깥 거실로
들어갔다.
"나베노스케, 첫 출전이 이루어진 모양이지?"
나베노스케는 싱긋 웃으며 모토야스의 손에서 칼을 받아 칼걸이에 걸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모토야스가 천천히 자리에 앉은 뒤 미망인도 기쁜 듯이 생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예, 나베노스케의 첫 출전을 앞두고 관례를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고, 약간 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좌우를 물리쳐주십시오."
무언가 비밀스런 다른 용건을 부탁 받고 온 모양이었다.
모토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히 할말이 있으니 모두들 잠깐."
손을 들어 다른 사람들을 물러가게 했다.
"오카자키의 사기는 어떻던가요?"
"예, 모두 사기가 충천해 있습니다. 저는 오는 도중에 산속의 무리(오쿠보
일족)들을 하나하나 설득시키고 왔습니다."
"용건은?"
"먼저 토리이 이가노카미의 전갈입니다."
"아, 토리이 노인의...?"
"총포는 충분히 준비되었으니 안심하시라고."
"그래요? 정말 고마운 일이오."
"다음은 오와리로부터..."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라코의 마에다 토시하루의 아들이 노부나가 님이 총애하시는 아이치
쥬아미를 사사로운 원한으로 죽였다면서 도망쳐왔습니다."
"뭐, 마에다 이누치요가..."
"예."
미망인은 뭔가 의미를 강조하려는 듯 한쪽 볼을 긴장시켰다.
"노부나가 님은 슨푸의 고쇼 님이 상경하실 때 타케치요 님과 다시 뵙기를
기대하신다고 합니다."
모토야스의 눈이 복잡하게 빛났다.
"다시... 다시 만나겠다는 말이지..."
"예, 그리고..."
"또 있소?"
"아구이의 히사마츠 사도노카미에게 의탁하고 계신 성주님의
어머님으로부터...."
"어머니가 뭐라 하시던가요?"
"상경을 위한 전투 때 대면하시겠다고."
"상경을 위한 전투 때라... 그렇다면 이번에는 만나시지 않겠다는..."
모토야스가 무릎을 탁 쳤다. 미망인은 다시 생긋 하고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5
혼다 미망인이 가져온 정보는 모두 모토야스에게 매우 중요한 깊이와 폭을
느끼게 했다.
마에다 이누치요의 유랑. 상경을 위한 전투 때 다시 만나자고 하는 노부나가.
이번 전투에서 목적했던 대로 오타카 성에 군량을 전하고 우도노 나가테루를
구한다 해도 그 승리에 만족하여 어머니를 만나려는 생각은 하지마라는 뜻인 것
같은 오다이의 전갈.
"그대는 나의 어머니가 한 말을 어떻게 해석하시오?"
혼다 미망인은 여전히 웃음을 띠고서 말했다.
"성주님이 스스로 해석하셔야 할 줄로 압니다."
"지금 만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다음의 이야기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 같소."
모토야스 역시 미소를 띠고 고개를 갸웃했다.
"망설이지 마십시오. 승리하신 뒤에 만나면 되지 않겠습니까?"
"승리한 뒤에..."
"예, 오로지 승리가 있을 뿐입니다."
"후후후."
미망인의 말에서 그녀의 매서운 성격을 느낀 모토야스는 웃었다.
"부인."
"예."
"앞으로 부르게 될 나베노스케의 이름이 떠올랐소."
"성주님이 지어주시겠습니까?"
"관례 때 입회하겠소. 이름은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
"헤이하치로 타다카츠... 타다란 글자는?"
"삼대에 걸쳐 충성으로 일관한 가문. 그 충성을 일컫는 타다와 지금 그대가
말한 오로지 승리가 있을 뿐이라는 카츠, 이 두 글자를 합치면 타다카츠가 되오."
미망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
"왜, 마음에 들지 않소?"
"아니, 오로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미망인이 기뻐하며 고개를 숙였을 때, 모토야스는 이미 조금 전과 같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와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본격적인 장마철은 아직 일렀다. 그러나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오와리 가까이
가서 논과 논사이로 전진하기에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오타카 성을 지키는
우도노 나가테루를 군량 부족으로 후퇴시킨다면 모처럼 다져놓은 이마가와 쪽
전선에 큰 구멍이 날 것이었다.
'상경을 위한 전투 때 다시...'
모토야스는 노부나가가 말했다는 그 한마디를 되새겨보았다.
"관례는 오늘밤에 올리겠소."
그렇게 미망인에게 말하고 노부나가는 자리를 떴다.
쉽게 풀릴 것 같은데도 풀 수 없는 것은 노부나가의 그 의표를 찌르는 성격
때문이었다. 다시 만나자고 한 것이 뒤집혀, 이번에 오카자키까지 그가 나온다면
이미 요시모토가 무어라 하건 슨푸에는 돌아가지 말라는 암시인 것 같기도 하고,
그 반대로도 해석되었다. 승리하고 무사히 돌아감으로써 요시모토의 신뢰를
받아둬라,
그리고 그 다음 기회에는...
모토야스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나베노스케는 얼른 칼을 받쳐들고 뒤따랐다.
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므로 말과 무기 같은 것들을 임시창고에 옮기기
위해 부산스러웠다.
모토야스가 안채와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나베노스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성주님이 돌아오십니다!"
그 말에 아기를 유모에게 맡긴 세나히메가 종종걸음으로 거실에서 나왔다.
"어서 오세요."
쏟아질 듯한 교태를 부리며 나베노스케로부터 모토야스의 칼을 받아들었다.
6
세나히메는 타케치요의 출산을 사당에 고하기 전에 벌써부터 요염하게 화장하고
모토야스에게 접근했다. 소실이 생기는 것은 대체로 정실이 산욕기에 있을 때일
경우가 많다. 세나히메는 이를 경계하기 위해 의상을 야하게 차려입고 화장도
짙게 하고 있었다.
출산을 사당에 고하는 일은 이미 끝났다. 산욕기의 푸석푸석하던 얼굴도 이미
정상으로 돌아와 피부에는 매끄러운 한창 때의 윤기가 돌고 있었다.
"타케치요, 아버님이 돌아오셨다."
세나히메가 아기를 남편 앞으로 살며시 밀었다. 모토야스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얼러주었다. 아직 깊은 사랑은 우러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이 내
생명에서 갈라져나온 것이라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성주님..."
타케치요를 유모에게 데리고 나가게 한 세나히메는 혼자 두 사람 몫의 응석을
부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새벽에 출전하신다지요?"
모토야스는 그 말엔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카메에게도 타케에게도 마마가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그대도 감기
조심하고."
"성주님... 이 세나는 여간 걱정되지 않아요."
세나히메는 벌써 두 손을 모토야스의 무릎에 얹고 상체를 무너뜨리듯 맡기고
있었다.
"내가 전쟁에 패할 것 같다는 말이오?"
"아뇨."
세나히메는 고개를 저었다.
"뒤에 고쇼 님이 계세요. 전쟁에는 이길 거예요."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은?"
"성주님의 습관. 저는 잘 알고 있어요."
"나의 습관...?"
"성주님은 말이죠..."
세나히메는 몸을 비틀고 모토야스의 턱에 손을 가져갔다.
"여자가 없이는 못 견디는 분이에요."
모토야스는 씁쓸한 얼굴로 양미간을 모았으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바보 같은 소리는 하는 게 아니오, 출전을 앞둔 사람한테."
"아니,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에요. 이삼 일은 참을 수 있으나 오 일은 넘기지
못하는 성주님의 버릇. 성주님이 오래 전쟁터에 계시는 동안 혹시 다른 여자를
사랑하시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모토야스는 대답하고 싶지 않아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와, 무언가를 깨닫고 걱정하는 여자의 가련함이
연기처럼 마음에 휘감겼다.
"성주님... 약속해주세요. 돌아오실 때까지 여자에겐 눈길도 보내지
않겠다고..."
모토야스는 강한 어조로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대답했다.
"알았어!"
세나히메가 말하는 그런 여유가 자기한테 있을 것인가.
사느냐 죽느냐, 버리느냐 버려지느냐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무언가 섬뜩한
느낌이 일었다. 세나히메가 내뱉은 말 이면에는 그녀 자신의 고백이 숨겨져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었다. 모토야스가 없으면 견딜수 없는 여자, 그것은 또한
남자가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여자라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세나히메는 자기가
모토야스 이외의 남자에게 눈길이 갈 것을 두려워하여 약속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알겠어, 약속하지."
모토야스는 감정을 누르고, 이번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세나히메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7
세나히메는 모토야스의 손 밑에서 잠시 황홀한 듯 남편의 턱을 쳐다 보고
있었다. 이 세상에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표정이었다. 태평한 시대였더라면 아마도 남자 역시 이 세나히메와 같이
황홀에서 황홀로의 생활을 추구하려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거실 밖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싸울까 하는 절실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난 기필코 적의 장수를 죽이겠다."
"일부러 죽을 자리에 뛰어들진 말게. 이번 싸움은 군량을 무사히 오타카 성에
수송하는 게 목적이야."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무사히 들어가기 위해서는 싸워야지."
"물론 싸워야지 . 그렇지만 한 사람의 병력 손실도 없었으면 하는 것이 성주님
생각이셔."
세나히메의 거실 정원에까지 말을 끌어온 모양이었다. 한 사람은 아베
마사카츠, 또 한 사람은 아마도 사부로효에인 듯했다.
"성주님이 그런 생각을 하신다고 우리들까지 몸을 사린다면 손실이 더욱 많아질
거야."
"몸을 사리자는 게 아니야. 침착하게 잘 생각해서 , 만용을 부리지 말라는
뜻이지."
"알겠어.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안달이 나 있어. 혼다 나베노스케도 관례를
올리고 따라간다는데, 첫 출전에 적장의 목을 베겠다고 결심이 여간 아니야."
"그 녀석도 미망인을 닮아 고집이 어지간해야지. 그럼 , 관례를 올리겠군?"
"벌써 이름까지 생겼다고 여간 기고만장한 게 아니야,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라더군. 누구보다도 충성스럽고, 또 오직 승리가 있을 뿐이라는..."
모토야스는 그와 같은 대화를 들으면서 세나히메의 머리카락 향기를 맡고
있었다. 엷게 연지를 바른 세나히메의 귀에는 그와 같은 바깥의 대화조차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행복만 붙들고 놓아주려 하지 않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자기만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여자의 가련함.
"세나히메..."
"예."
"내가 출전한 뒤 고쇼 님에게 가거든, 모토야스는 반석 같은 자신감을 가지고
출전했다고 말해줘."
"그 말은 벌써..."
"이 모토야스가 어떤 기량으로 싸우는지 잘 보아두시도록, 나는 남의 전법 같은
것은 답습하지 않아. 만전의 대비를 하고 적의 의표를 찔러 보이겠다고 전해."
"믿음직한 그 말씀, 안 계시는 동안의 적적함을 그 말씀으로 위로삼겠어요.
주위에 충성스러운 부하들로 울타리를 치시고 행여 빗나가는 화살에라도 맞지
않도록 하세요."
모토야스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자, 지금부터 전략회의를 열어야 하니 그대는 사카이
고모하고 얘기나 하고 있어요."
"성주님, 약속은 잊지 않으시겠죠?"
"알았어, 알았어."
모토야스가 일어나는데, 세나히메는 다시 한 번 남편의 턱 밑에 빵을 바싹
밀어붙이고 헤어지기 아쉬운 듯 가만히 손을 놓았다.
8
비는 내렸다 그쳤다 하고 있었다. 나베노스케의 관례가 끝나고 형식적인 출전
축하회가 끝났을 때는 일곱 점 (오전 4시)이었다. 타케치요도 유모에게 안긴 채
카치구리와 다시마를 차린 상 앞에서 토기에 따른 신주를 이마에 대었다. 이
무렵부터 세키구치 교부의 집에 있던 인마도 모토야스의 임시거처로 모여
미야마치는 말 울음소리로 법석거리기 시작했다.
선발대 대장은 이시카와 아키의 아들 히코고로 이에나리.
후발대 대장은 모토야스의 고모부 사카이 사에몬노죠 타다츠구. 오타카 성에
보낼 군량은 오카자키에서 토리이 이가노카미 타다요시 노인이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수송 책임자인 사카이 우타노스케 마사이에는 그때까지 총대장 모토야스의
측면을 경계하면서 진군하기로 했다.
도중에 오쿠보 신파치로 타다토시 노인이 일족의 무사들을 거느리고 가담하기로
되어 있었고, 오카자키에 도착하면 구신들이 모두 농기구를 버리고 참가할
것이었다. 총병력은 2,000명이 될 예정이었으나 그날 아침에 모인 것은 600명
남짓이었다.
세나히메의 아버지 세키구치 교부 치카나가는 갑옷을 입고 현관 앞 걸상에 앉아
있는 모토야스에게 흰 부채를 펴고 축하의 말을 했다.
"오오, 정말 늠름한 무사의 모습이오."
모토야스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을 펴고 날씨를 살폈다. 안개와 같은
가랑비만 내리고 있었다.
모토야스는 할아버지의 유품인 분홍빛 갑옷에 역시 유품인 지휘용 부채를 들고
있었다. 앞머리를 올린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는 의연한 모습으로 모토야스의
부채꼴 우마지루시를 들고 있었다.
모토야스는 조용한 표정으로 부채를 펴서 흔들었다. 이어 우타노스케가 신호를
보내고 노노야마 토베에가 소리높이 소라고동을 불었다. 나이토 코헤이지가
모토야스 앞에 말을 대령했다. 모토야스가 직접 고른 밤색 말로 겉으로는 아주
순했으나 그 대신 아무리 먼 거리라도 쉬지 않고 달리는 5척 1치의 살진
말이었다.
모토야스가 훌쩍 말에 올랐고, 선발대 대장 이시카와 히코고로도 얼른 말을
타고 맨 앞으로 달려나갔다.
고난에 고난을 거듭하며 18년의 인생에서 13년을 인질로 지낸 청년 모토야스의
운명을 건 출전이었다.
비가 그쳤다. 바람도 없고 무더운 공기만이 사방에 고여 있었다. 하늘은 이미
밝아오기 시작했다.
모토야스의 말이 문을 나섰다. 사카이 우타노스케가 말에 올라 모토야스 옆에
바싹 다가섰다.
"성주님!"
모토야스가 돌아보고 미소 띤 얼굴로 우타노스케에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소, 나는 이미 이겼으니까."
대열이 임시처소를 나간 뒤, 얼마 후 혼다의 미망인이 산뜻한 여행자 차림으로
방실방실 웃으며 타다츠구의 배웅을 받아가며 대열 뒤를 따랐다.
초승달소리
1
아구이 골짜기에는 안개가 층을 이루며 세 겹으로 끼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리던 비는 잠시 그쳤으나 소나무도 느티나무도 흠뻑 젖어 있었고, 아직 햇빛
구경은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히사마츠 사도노카미 토시카츠에게 재가한 오다이는 히사마츠 가문이 시주하는
사찰인 토운인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손가락을 꼽고 있었다. 오다이가 타케치요라
부르던 모토야스를 오카자키에 남긴 채 마츠다이라 가문으로부터 이혼당한 지
햇수로 이미 1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열네 살에 시집와서 열일곱 살 때 벌써
이별의 슬픔을 맛보았다. 마츠다이라 가문에 머문 것은 고작 3년 남짓이었으나,
그녀에게는 전반의 생애로 느껴졌다.
"나도 곧 서른셋..."
여자 나이 서른셋은 액년이라고들 했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앞서 걱정되는 것은 역시 곁에 있지 않은 자식에 대한 일이었다. 이미
열여덟 살의 늠름한 무사로 성장했다는 말과 카메히메와 타케치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눈물겨운 감회에 젖기도 했다. 자기한테
손자가 되는 모토야스의 아이들, 할머니로서 과연 만날 날이 있을 것인가...?
기원하는 마음으로 집안을 돌보는 틈틈이 경문을 베끼고 기도를 드리는
오다이였다. 그럴 때 모토야스의 출전 소식이 전해왔다.
'결국에는...'
처녀출전을 하는 모토야스와 이미 호랑이 장군의 풍모를 갖춘 노부나가, 아무리
보아도 모토야스에게 승산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다이는 남편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카리야 성주인 오빠 미즈노 노부모토에게
밀사를 보내기도 하여 모토야스를 구하기 위해 애썼다. 모토야스의 배후에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삼엄한 감시가 따르고 있었다. 만일 노부나가가
사도노카미에게 오타카 성을 공격하라고 하면 남편과 자식은 전쟁을 하게 된다.
오다이는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다시 자기 피로 관음경을 필사하면서 마음을
썼다.
그 기원이 통한 것이라고 오다이는 생각했다.
노부나가로부터 남편의 출전명령은 없었다. 그리고 사흘 전인 5월 15일 이상한
대형으로 모토야스의 군대가 오카자키를 떠났다.
오다이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오늘이 벌써 18일. 오다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이미 승부는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기더라도 그 승리에
의기양양하여 어머니를 찾아 아구이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열에
일고여덟까지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언덕을 내려온 오다이는 성의 입구와는
반대쪽에 있는 타케노우치 규로쿠의 집으로 갔다. 규로쿠도 오다이 이상으로 이
전투의 결과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혹시 무슨 소식이라도 전해지지 않았나 싶어
그리로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사실 오늘 절을 찾았던 것은 규로쿠를
방문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오다이는 큐로쿠의 집 앞에서 같이 왔던 시동을 먼저 돌려보냈다. 규로쿠의
집은 문 안쪽에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산에서 맑은 물을 끌어 들여, 무인의
집이라기보다는 풍류를 즐기는 대인의 거처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안에 누구 없나요?"
오다이는 주위에 흩어져 있는 말발굽자국을 보고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을
느끼면서 안내를 청했다.
2
오다이의 음성이 그대로 안으로 전해진 듯.
"내가 나가겠다."
규로쿠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 안의 삼나무로 된 문이 열렸다.
"마님이 오실 줄 알고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규로쿠는 완전히 가신이 된 태도로 오다이를 맞았다.
"실은 쿠마 마을에서 나미타로 님 , 그리고 또 귀한 손님 두 분이 와
계십니다."
"어머나, 쿠마의 젊은 도령이?"
규로쿠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던 오다이는 깜짝 놀랐다. 타케노우치
나미타로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미타로와 나란히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와 인형처럼 귀여운 처녀가 앉아 있었다.
"저, 혹시 그대는 마에다 이누치요...?"
나미타로 옆에 앉으며 오다이가 물었다.
"지금은 관례를 올리고 마타자에몬 토시이에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전의 이누치요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 아가씨는 토시이에 님의 여동생인가요?"
"아닙니다."
토시이에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내입니다."
오다이는 눈이 휘둥그래졌으나 웃지는 않았다.
"아, 그런가요. 나는 히사마츠 사도노카미의 안사람이에요."
"저는 마에다 마타자에몬의 아내 마츠라고 합니다."
인형 같은 어린 여자는 아무 거리낌도 없이 오다이를 상대했다.
"지금 셋이서 이번 전투의 결과에 대해 검토하고 있던 중인데, 마츠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야스는 과연 훌륭했습니다."
토시이에의 말에 오다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걱정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면서,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 전투는 이미 끝난 모양이지요?"
토시이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은 우리 주군도 깨끗이 당하셨습니다. 지로사부로 모토야스님, 거의
병력 손실을 입지 않고 무사히 오타카 성에 군량 반입을 끝내셨어요."
"예? 모토야스가..."
안도하면서 나미타로를 바라보니 그는 조용히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규로쿠는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키요스 성주님이 패하시다니... 마츠다이라 쪽은 대관절 어떤 전법으로 맞선
거죠?"
"저희 쪽은."
이번에는 규로쿠가 설명했다.
"이 마가와 쪽에서 오타카 성에 식량을 보급하려 하면 즉각 와시즈와 마루네 두
성채가 함께 출동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지요. 그런데 마츠다이라 쪽은 느닷없이
테라베 성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원 저런 테라베 성을...?"
"테라베 성에서는 와시즈와 마루네에 구원을 청했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서 양쪽 모두 원군을 테라베에 보내 전투중인 성 밑에 도착하고
보니 집들이 불타고 있는데도 적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답니다.
아차! 테라베를 공격하는 것은 위장이었던가. 그렇다면 유격대와 본진은 다른 곳
어딘가에 있겠지. 후퇴해 그 길로 오타카 성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모토야스는
본진처럼 꾸민 보급대를 이끌고 성에 들어간 후였다고 합니다.
이쪽의 백전노장 사쿠마 다이가쿠와 오다 겐바는 이를 갈면서 분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야 분하기 짝이 없겠지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오다이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여간 거북하지 않았다.
3
오타카 성에 들어가는 체하고 테라베를 공격한다. 그래서 오다의 군사를
테라베에 집결토록 하고 그 틈을 노려 오타카 성에 들어가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작전인가. 열여덟 살의 모토야스가 진두에 서서 지휘하는 모습이 오다이의 눈에
보이는 듯했다. 아니, 그 환상 속의 모토야스가 실은 모토야스가 아니라 첫 남편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의 모습...
"그랬군요. 사쿠마 님도 오다 겐바 님도..."
자기 아들에게 의표를 찔렸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노부나가는..."
갑자기 나미타로가 입을 열었다.
"와시즈를 공격해서 마루네 군사를 와시즈로 끌어들여 오타카 성에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같소. 아무튼 이번 전투는 제가 보기에도 상당히
재미있었소."
"재미있었다니?"
토시이에의 질문에 나미타로는 우뚝한 콧날에 주름을 잡고 미소를 떠올렸다.
"마츠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야스란 사나이의 힘을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오다
노부나가 양쪽 모두에게 확인시킨 거요. 말하자면 무장의 시험에 급제했다고나
할까. 그것을 인정한 자가 적과 아군이란 점이 재미있었다는 말이오."
나미타로는 어디까지나 냉정한 제삼자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에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자가 천하의 패권을
잡는다... 이렇게 힘을 과시했다는 점에서 이번 전투는 모토야스를 큰 위치에
올려놓았소. 정말 재미있소..."
"쿠마 도련님은..."
토시이에가 다그쳐 물었다. 그는 나미타로의 이같은 싸늘한 태도가 오다 가문을
위해 섭섭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츠다이라 군을 그대로 오카자키로 돌려보낼 생각이오? 도중에 노부시를 시켜
습격하지 않겠습니까?"
나미타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재미있는 싹은 짓밟지 않는 것이 좋아요. 꽃도 피기 전에 독초라고 단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오."
"으음."
토시이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사나이 또한 요시모토가 상경할 때는
이마가와와 오다의 일전은 피할 수 없다고 보는 모양이었다. 그 일전을 통해 서로
화합하기 어려운 두 가문의 운명이 결정되고, 새로운 무엇이 탄생한다. 그날을
위해 모토야스를 그대로 둘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토시이에로서는 다시
캐물을 필요가 없었다. 현재 그로서는 노부나가가 모토야스에게 깊은 증오심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다이에게 이해시키는 일이 중요했다.
토시이에는 얼른 오다이 쪽으로 돌아앉았다.
"저희 주군은..."
자기가 도망쳐다니는 몸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듯했다.
"활달한 성격이니 지금쯤은 키요스 성에서 축배를 들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타케치요가 이겼다! 그는 내 동생이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설마 그럴 리야..."
"아니, 오카자키 쪽에 손실이 없었다는 것은 오다 쪽에도 손실이 없다는 것,
주군의 마음도 홀가분할 것입니다.
주군은 모토야스 님에게 특별한 친근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미타로는 부채 그늘에서 가만히 오다이의 표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4
오다이의 심정은 복잡했다.
슨푸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아직 오다와 싸워 패배하는 경우는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다쪽으로서는 다음의 일전이야말로 지상에서
말살되느냐의 여부를 결정짓는 막다른 골목이라 할 수 있었다.
오다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모든 수단이 다 강구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노부나가가
타케노우치 나미타로를 키요스에 초대했다는 것은 나미타로휘하에 있는 노부시,
농민, 신도의 신자 등을 동원하여 요시모토의 쿄토 진공 때 후방의 교란을
부탁하기 위한 것일 테고, 마타자에몬 토시이에가 주군으로부터 도망쳐 유랑하는
것도 무언가 깊은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되어 더더욱 그의 말에
함부로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노부나가의 확실한 의뢰가 있지도 않은데,
오다이가 모토야스와 연락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는 어떤 화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히사마츠 님의 부인께서는 미즈노 가문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미즈노 가문이
시주하는 오카와의 겐콘인에 성묘를 겸하셔서 우리 부부를 안내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오카와의 켄콘인으로...?"
토시이에의 말에 오다이보다도 먼저 나미타로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면서
말했다. 나미타로는 토시이에가 하려는 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요리토모 공의 묘소가 있는 카키나미의 오미도 사에도 참배하고
토키무네 공의 수련장으로 알려진 오하마의 쇼묘 사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유랑하는 길에 덕이 높으신 분들의 가르침을 받을까 해서 말입니다.
캔콘인의 주지 스님 또한 쿄토에까지 알려진 고승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소개해주시면 한 이레 정도 참선을 할까 합니다."
오다이는 당장 대답할 수 없었다. 사려가 깊고 원숙해진 눈을 토시이에에게서
가만히 규로쿠 쪽으로 돌렸다.
"어떨까, 성주님이 허락을 내리실까?"
"마님의 뜻대로 하라고 말씀하시겠지요."
오다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생각에 잠기는 오다이에게 열한 살의
신부도 졸랐다.
"저도 그런 큰 절을 보고 싶습니다. 데려가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절에 가는 게 목적은 아닐 것이다.'
오타카 성에서 철수하는 모토야스와 나를 만나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오다이는 미소를 떠올렸다. 만나게 해서 어떻게 하려는지 오다이는 잘 알 수
있었다. 만나고 싶었다. 몰래 슨푸에 옷을 보내주고 먹을 것을 전달한 자기
자식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섣불리 모자의 정 같은 것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모토야스는 노부나가의 적이고, 또 노부나가에게 이기고 돌아오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반가울지 모르나 나중에 혐의를 뒤집어쓰게 되는 경우라도
생기면 히사마츠 일족을 궤멸시킬 구실이 될지도 몰랐다.
"어떻습니까,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오다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마음에 결심한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따뜻한 미소로 볼을 물들였다.
"모처럼 생긴 신앙, 우리는 모두 같은 불자이니 거절한다면 부처님께 면목이
없지요, 안내하겠어요."
가슴에 와닿는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5
오다이의 관찰은 정확했다.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는 오다이와 모토야스를 몰래 만나게 하여,
노부나가의 호의를 모토야스에게 보이려고 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쿄토 입성을
위한 전투 때 오와리에 이익이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아이치 쥬아미의 일도 있고
해서 두 사람의 몫을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려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이려 했다.
오다이가 오카와에 가겠다고 승낙하자 타케노우치 나미타로가 벌떡 일어났다.
언제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일어나는 그 태도만은 당돌했다.
"그럼, 나는 이만 실례하겠소."
규로쿠가 당황하여 현관까지 따라나왔다.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어."
그는 턱으로 안쪽을 가리키며 말한 뒤 그대로 채찍을 들고 마구간으로
돌아갔다. 토시이에가 쓸데없는 일을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오다이를 가리키는
것일까?
하늘에는 아직 비구름이 잔뜩 깔려 있고 후덥지근한 바람이 땅을 감싸고
있었다. 규로쿠는 나미타로의 말이 성문 앞 소나무 그늘로 가려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나미타로는 도중에 안장 뒤에 있는 조그마한 빨간 깃발을 세웠다.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마치 빨간 헝겊이 바람에 날려와 허리띠 뒤에 걸린 것처럼도
보였다. 나미타로는 큰길만을 달리지 않았다. 때때로 마을 안에까지 들어갔다가
막다른 길에 들어선 것처럼 얼른 되돌아나오기도 했다.
오케하자마에서 흘러나온 물이 사카이가와로 흘러드는 코이시가하라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오카와로 건너가는 나루터의 움막으로 들어갔다.
"아니, 쿠마 도련님이시군요."
안에 있던 쉰 가까운 사공이 머리띠를 풀어내면서 허리를 굽혔다.
"전투."
나미타로가 말했다.
"적은?"
"오카자키의 철수부대를 노리는 거야. 누구냐고 묻거든 카리야의 미즈노 쪽
복병이라 대답하라. 추격할 필요는 없다."
"누구냐고 묻거든 카리야의 미즈노라고. 추격할 필요는 없다."
사공은 복창하고 즉시 배를 저어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
이 부근의 뱃사람, 농부, 토호 중에는 나미타로의 부하라기보다 경우에
따라서는 노부시가 될 수 있는 양민들이 많았다. 전쟁의 형세에 따라 성주는 쉽게
바뀌었다. 이러한 양민의 불안을 깨달은 나미타로는 그들에게 조직과 지혜와
무기를 주었다. 기근이 들면 나니와나 사카이에 가서 물길을 따라 식량을
실어왔고, 정신적인 면에서는 난효의 후예를 자처하며 신도의 신앙을 은밀히
전파해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서미카와에서 동오와리에 걸친 이 지역 백성들은
성주의 백성이기에 앞서 나미타로의 가족이라 할 수 있었다.
모토야스를 무사히 슨푸로 돌려보내겠다고 한 나미타로가 어째서 갑자기
오카자키 군이 돌아오는 길에 매복해 습격할 생각을 한 것일까? 더구나
모토야스의 외숙부인 미즈노 노부모토의 이름을 사칭하면서까지. 나미타로는 말을
버드나무 기둥에 매고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6
나미타로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움막 구석에서 야채를 절일 때 쓰는 것처럼
보이는 낡은 통을 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안에서 갑옷을 꺼내 무표정한
얼굴로 입기 시작했다. 사카이와 하카타에 서양식으로 정련된 쇠가
수입되면서부터 만들어진 신식 갑옷이었는데, 소박하고 활동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까지의 옷차림이 여자처럼 우아했기 때문에 갑옷을 입은 그는 완전히
사람이 달라져 보였다. 일개 잡병이 섞여 들어온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치가네까지도 서양 쇠로 만든 수수한 것이었다. 입었던 우아한 옷은 갑옷을
꺼낸 통 속에 숨겼다. 창 역시 움막 구석에 있는 짚과 그물 속에 감춰져 있었다.
칼도 조금 전에 차고 있던 가느다란 것이 아니라 등에 메는 큰 칼이었다.
그가 준비를 마치고 다시 움막 밖으로 나왔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강가에는
이미 네댓 척의 나룻배와 어선이 모여 있었다. 나미타로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매복할 장소를 지시하고 자신은 다시 말에 올랐다. 주위는 숨이 막힐
정도로 잔뜩 흐린 채로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다. 나미타로는 뒤쪽에 무슨 신호인
듯한 붉은 깃발을 꽂고 상류를 향해 제방 위를 달려갔다. 그 자신이 젊은
도령식이라고 이름붙인 노부시의 수법인 듯했다. 그의 모습을 보고 논에서도
강에서도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 무장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이와 같은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동안, 오타카 성에서 철수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부대가 도착한 것은 다섯점 반(오후 9시)이 지나서였다. 달은 아직
뜨지 않았고 지상에서는 캄캄한 가운데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밝은 것이
있다면 때때로 생각난 듯 날아다니는 반딧불뿐이었다.
맨 앞에서 오고 와는 것은 사카이 사에몬노죠 타다츠구, 그 다음은 이시카와
히코고로 이에나리로서 갈 때와는 반대였다. 사카이 우타노스케는 모토야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중앙 본대 한가운데에 있었다. 적이 추격해오기 전에
군량을 운반해들이고 재빠르게 철수. 입성때 이상으로 민첩한 질풍과도 같은
철수였다.
아마도 사쿠마 모리시게와 오다 겐바는 오늘 밤 오타카성에 들여보낸 오카자키
군을 어떻게 무찌를지 머리를 맞대고 작전회의를 열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 틈을 타 오카자키로 철수함으로써 한 사람의 병사도 다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
모토야스의 생각이었다. 감쪽같이 들어갔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그의 책략은
성공이었다. 어둠을 타고 나온 오카자키 군의 철수를 가로막을 어떤 것도 없었다.
"이 부근에 노부시나 강도 같은 것은 없소?"
모토야스는 때때로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여 후위를 살피면서 우타노스케에게
말했다.
"염려 없습니다."
우타노스케가 대답했다.
"이 부근은 쿠마의 젊은 도령이란 자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주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습격하는 자가 있으면 죽이겠다고 미리 알려놓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답했을때였다.
오른쪽 작은 언덕 부근에서 번쩍하고 한 줄기 빨간 봉화가 솟아올랐다. 예기치
않았던 일이어서 우타노스케도 모토야스도 깜짝 놀랐다.
"와아!"
그때 배후에서 함성을 지르면서 좌익을 습격하는 자들이 있었다.
7
추격하는 적이 없다고 안도하고 있던 때여서 마츠다이라 군 본대의 놀라움은
컸다. 선발대의 사카이 타다츠구는 벌써 코이시가하라 가장자리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 하고 있었으며, 후발대의 이시카와 이에나리는 조금 뒤떨어져 전방이
보이지 않는 골짜기에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기분 나쁜 것은 짙은 어둠이었다.
적의 수효도, 누구의 복병인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마 오른쪽에서 올라간
봉화는 선발대와 후발대도 보았을 것이지만, 이미 본대가 습격당하고 있는 줄은
모를 것이었다. 모두가 깜짝 놀라 행진을 멈추고 방어태세로 들어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음, 복병이 있었구나."
좌익이 공격당했다고 판단한 순간 열두 살의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는
메뚜기처럼 모토야스 앞으로 뛰어나와 칼을 뽑았다. 순간 그 앞을 번개같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지르는 적의 그림자가 있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함성도
지르지 않았다. 등에 멘 칼의 길이와 날랜 말의 모습만이 헤이하치로의 눈에
남았다.
"와아."
"와아!"
적과 아군이 질러대는 함성. 한쪽은 의기충천하여 습격하는 함성이었으며, 다른
한쪽은 당황하여 지르는 함성이었다.
"대열의 허리를 사수하라, 한데 뭉쳐라!"
우에무라 신로쿠로의 외치는 소리에 섞여 , 우타노스케의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사카이 우타노스케 마사이에의 부대를 습격하는 자는
누구냐!"
우타노스케는 적이 모토야스의 본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어둠
속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성주님!"
헤이하치로는 모토야스의 말고삐를 잡은 손에 퉤 하고 침을 뱉고 칼을 고쳐
쥐었다.
"곁에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가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몰려오건
안심하십시오."
그 자신 있어 하는 모습이 우스워 모토야스는 저도 모르게 말 위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질러 갔던 그림자가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적들은 마츠다이라 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꼼짝 못하게
함으로써 코이시가하라에 묶어두려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여기서 지체하다 밀물
때가 되어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배후에서 오다 군이 추격해온다면, 이겼던 싸움은
단번에 어려운 전투가 되어버릴 것이었다.
"노부시들이로구나."
모토야스가 중얼거렸을 때 오른쪽 20간쯤 되는 곳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마츠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야스의 본대에 고한다. 코이시가하라는 우리
미즈노 시모츠케노카미 노부모토의 막료가 지키는 곳, 한치의 땅도 용납할 수
없다. 감히 지나가겠다면 시체로 산을 이루게 하겠다!"
"뭣이, 외숙부의 막료라고..."
상대의 경고에 모토야스는 말 위에서 창을 거머쥔 채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했다.
"외숙부가 일부러 우리를 맞아 기습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 이상하다..."
단숨에 무찌르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왼쪽으로 멀리 길을 우회하여
사상자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상책일까?
이때 칠흑같이 어두운 지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달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하늘을 무섭게 가로지르는 비구름의 모습도 보였다.
사카이 우타노스케가 모토야스 곁으로 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면 돌파가 상책일 듯합니다마는."
"기다리시오."
모토야스가 제지했다.
다시 오른쪽 둑에서 적의 함성이 들렸다.
"와아."
구름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져 조금만 기다리면 구름 틈새로 달이 얼굴을
내밀지도 몰랐다. 지리에 밝은 적에게는 어둠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마츠다이라
쪽에게는 밝아야 했다.
"우타노스케."
"예."
"도주합시다."
"아니, 도주라니?"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른 것은 말 앞에 버티고 서서 손에 침을 뱉고 있는
헤이하치로였다.
"타다카츠에 게 도망이란 말은 없습니다."
모토야스는 우타노스케 쪽으로 말을 가까이 몰아갔다.
"하찮은 싸움으로 모처럼의 승리를 헛되게 만든다면 이가 하치만에게 면목이
없소. 내가 보기에 상대는 노부시들이오. 외숙부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우리를 그대로 통과시키면 오다 편에 미안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행동이라 생각하오."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보시오, 함성만 지를 뿐 공격하려고는 하지 않소. 왼쪽으로 크게 우회해서
도주합시다. 고전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말이오."
"아직 모르겠소? 상류에 도달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강을 건널 수 있소. 그러나
하류에서 밀물이 올라오면 협공당하게 되오."
"알겠습니다!"
우타노스케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 멀어져갔다. 아마도 선발대와 후발대에 그
뜻을 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시치노스케는 어디 있느냐? 히코에몬은? 모토타다는?"
모토야스는 나직한 소리로 자기를 에워싼 사람들 중에서 젊은 무사들을 불렀다.
모토야스가 비로소 헤이하치로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오너라."
"성주님, 도망치시는 겁니까?"
"다음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다음에는 칼날이 무뎌지도록 싸워야해."
"다음 전투 때까지 먼길을 가야겠군요. 알겠습니다."
헤이하치로는 등에 메었던 칼을 능숙하게 칼집에 꽂고 모토야스와 나란히
굴러가듯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따르라!"
우에무라 신로쿠로가 칼을 높이 쳐들었다. 주위는 이미 그 칼이 번득일 정도로
밝아졌고, 하늘을 쳐다보니 골짜기의 시냇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구름이 흩어져
있었다.
노부나가는 장마철이 되기 전에 모토야스가 공격해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토야스는 일부러 장마철까지 기다렸다가 군사를 일으켜 목적을
달성하고는 질풍처럼 철수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역시 당장 일전을 교환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도주하여 멋지게 적의 허를 찔러놓고. 병력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인 그 작전은 누구의 전략에도 없는 놀라운 것이었다.
대열은 코이시가하라에서 상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발대의 지휘자
이시카와 히코고로 이에나리와 연락이 닿은 모양인지 교묘하게 강변에 횡대로
전개하여 보이지 않는 적의 습격에 대비했다.
흐르는 구름 사이로 초승달이 고개를 내민 것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9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는 때아닌 인마 소리에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다.
벌써 마츠다이라 군이 철수해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철수한
뒤에는 오다이를 데리고 나와도 의미가 없어진다는 생각에 일부러 가마를
재촉했다. 히가시우라까지 와서 그 지방 호족 센다 소베에가 아버지와 친교가
있다는 것을 핑계로 그 집에 머물러 있었다.
"겐콘인에는 내일 아침에."
오다이와 오마츠는 별실에 묵게 하고 자기는 혼자 그 옆방에서 쉬고 있었다.
'이상하다!'
그는 칼걸이에서 칼을 집어들고 가만히 덧문을 열어보았다_ 초저녁부터 덮여
있던 비구름은 어느 틈에 걷히고 노송나무 생울타리 너머로 사카이가와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토시이에는 나막신을 신고 가만히 정원으로 내려갔다.
하늘 복판에 걸린 초승달이 그의 모습을 뚜렷이 지상에 그려주고, 상류 쪽으로
올라오는 인마의 모습이 수묵화처럼 선명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모토야스는 우도노 나가테루와 같이 성을 지킴으로써
맞닥뜨리게 될 오다 군과의 무모한 싸움을 피하고, 군량을 전달하고는 즉시
철수한 것 이 분명 했다.
"놀라워!"
토시이에는 혼자 중얼거리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만나고 싶을까?'
이런 생각만 해도 오다이의 방에 찾아가는 것이 전혀 망설여지지 않았다.
'마님, 주무십니까?"
오다이는 이미 잠이 깨어 있었던 듯.
"무슨 일인가요?"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속히 나오십시오."
오다이는 이미 토시이에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잠자코 일어나 매무새를
가다듬고 토시이에의 뒤를 따랐다. 오다이 곁에서 자고 있는 오마츠는
천진스럽기만 한 얼굴로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토시이에는 오다이에게 나막신을 벗어주고 자기는 맨발이 되었다.
"제가 곁에 있으니 안심하시고 서둘러주십시오."
오다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토시이에의 뒤를 따랐다. 한쪽은 강가에서부터
쌓아올린 7척 남짓한 돌담, 그 밖의 삼면은 토담이었다. 북쪽으로 난 문을 나서자
갑자기 시야가 넓어졌다. 토시이에는 이마에 손을 얹고 강가를 지나는 검은
그림자를 유심히 살피면서 모토야스가 있을 본대가 어디쯤인지 눈으로 찾았다. 맨
앞에는 말을 탄 무사가 두 사람, 그보다 조금 떨어져 보병이 있고 다시 말을 탄
일고여덟 명의 무사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저것이로군.'
바로 그때 선발대가 행진을 멈추었다.
타케노우치 나미타로의 노부시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은 데 따라 그 근처에서
대열을 가다듬을 생각이었다. 토시이에는 물론 그 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는 본대를 찾아 10여 년 만에 모자를 상봉시키고, 오와리의 호의를
모토야스에게 알리면 목적을 달성한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도 하나의 책략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토시이에는 뒤따라오는 불운한 어머니의 마음이
되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는 가까이 가기도 전에 화살을 맞으면 안 되겠다 싶어 둑에 자란 대여섯
그루의 개암나무 비슷한 나무 그늘에서부터 곧바로 행렬로 다가갔다.
10
바로 눈 아래 선발대 대열이 있었다. 말을 탔던 무사는 내려 말에게 물을
먹이고, 보병은 창을 짚고 서서 휴식을 취하며 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소리들이 손에 잡힐 듯이 들려왔다.
"정말 카리야의 미즈노가 야습해온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겠어. 우리는 그것을 뚫고 나왔잖아?"
"뚫고 나왔다는 것은 과장이야. 나는 적의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잠자코 있어! 아무리 숙질사이라 해도 미즈노 집안은 오와리편이야. 한 번도
공격하지 않고 통과시켰다면 무사하지 못해."
"음, 그래서 우리는 뚫고 나올 수밖에 없었군."
"그래. 굉장한 고전이었지."
토시이에는 그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나무 그늘에서 본대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에게 고한다.' 이렇게
말하고 생모가 여기 와 있다고 알릴 작정이었다. 모토야스 모자가 얼마나
기뻐할까. 그걸 상상만 해도 젊은 토시이에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때 갑자기 오다이가 작은 소리로 말하며 토시이에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마에다님, 보여주겠다고 한 것은 저 행렬인가요?"
"예, 오타카 성에 군량을 수송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가 철수하는 대열입니다."
"마에다님."
순간 오다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번득이는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나에게 마츠다이라의 행렬 따위를 보여주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토시이에는 어이가 없어 오다이를 돌아보았다.
"나는 오다 가문 쪽인 히사마츠 사도노카미의 아내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어머님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마에다 님, 비참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적과 아군으로 갈려서 사는 어미와
아들이 어디 손잡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인가요?"
"말씀을 나누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까?"
"만날 수 없지요. 만나면 이 손으로 찔러야만 해요, 그것이
히사마츠사도노카미의 아내에게 부과된 이 세상의 의무예요."
"아... 아니... 모토야스 님을 찔러야 하다니요?"
오다이는 달을 똑바로 쳐다보고 나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는 잊지 않겠어요. 하지만 히사마츠 사도노카미의 아내에게는 두 마음이
없어요. 그 점을 분명히 마음에 새겨두도록 하세요."
말을 마친 오다이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수그렸다. 어깨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토시이에는 잠시 동안 묵묵히 서 있었다. 자신의 젊음과
오다이의 단호한 각오가 후회와 존경심을 새롭게 했다.
'내가 너무 안이 했어.'
사실 지금 기꺼이 모토야스를 만날 오다이라면 그녀 자신만이 아니라 남편인
히사마츠 사도노카미까지도 믿을 수 없는 우군이 된다.
'그렇구나. 그것을 깨닫지 못했구나...'
토시이에가 길게 한숨을 쉬었을 때, 제방 밑 강가에 당사자인 모토야스가
달빛을 받으며 우에무라 신로쿠로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나타났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토시이에는 오다이의 귓전에 조용히 속삭이고 강가를 가리켰다.
11
오다이는 온몸을 떨었다.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토시이에에게 감사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섣불리 그 말을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 노부나가에게 뒷맛이
개운치 않은 오해를 남기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히사마츠 사도노카미의 아내는 주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만날 수 있었던 자기
아들도 만나지 않았다. 이런 말을 들어야 오다이에 대한 노부나가의 신뢰가 더
두터워질 것이었다.
눈 아래 말을 탄 모토야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오오..."
얼마나 씩씩한 대장인가. 달빛을 받은 늠름한 얼굴은 첫 남편 히로타다보다
자신의 아버지 미즈노 타다마사를 더 닮았다. 모습이 닮았으면 성격 또한 닮았을
것이다. 미즈노 타다마사는 깊은 생각과 인내심에서는 비교될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전쟁이 그치지 않는 이 난세에도 집에서 죽을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
'제발 이 아이도 전쟁터에서 죽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마츠다이라 가문에서는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비명에 쓰러졌다. 그것이 3대나
계속되지 않도록 오다이는 기원했고, 피로 경전을 베끼는 것도 그것을 위해서
였다고 할 수 있었다.
눈 아래 강가에서는 가까이에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모토야스가
말을 세웠다. 어떤 사람이 모토야스를 태우고 있는 갈색 말 앞에 물통을
가져오고, 말은 그것을 맛있게 마셨다.
"우타노스케."
모토야스가 불렀다. 풀 위에서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소면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서웠소."
"예?"
우타노스케는 젊은 대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정말 무서웠소. 야습한 일당이 외숙부의 군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소."
'예에..."
"외숙부만이 아니라 부근 노부시도 가담하고 있었소. 양쪽이 뜻을 합쳐
습격해왔던 것이오. 이 일은 잊지 않도록, 슨푸에 돌아가서는 반드시 고쇼 님에게
말씀 드려야겠소."
"예, 물론이죠."
우타노스케는 비로소 모토야스가 한 말의 뜻을 이해했는지 분명하게 대답했다.
"반드시 말씀 드려야 합니다."
"이 부근 노부시들은 이마가와 쪽에 심한 반감을 품고 있다고 말이오. 다시
나타날 때는 크게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예에..."
우타노스케의 대답이 다시 애매해졌다. 미즈노 시모츠케노카미가 오다 쪽에
충실했다고 고할 필요성까지는 알 수 있었으나. 이 부근 노부시가 이마가와 쪽에
반감을 품었다고 고하는 것이 오카자키에 얼마나 이익이 될지 얼른 납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겨우 호랑이 굴을 벗어났소. 자, 그만 가도록 합시다."
이 말에 우에무라 신로쿠로가 신호했다.
선발대의 사카이 타다츠구가 행진하기 시작했다. 달은 점점 더 밝아져 뚜렷하게
주위에 명암을 그려나갔다.
모토야스는 어머니 바로 앞에서 달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주문해서 만든 달 같구나."
오다이는 이를 악물고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고, 토시이에는 얼어붙은 듯
나무 그늘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구름을 부르는 자
1
에이로쿠 2년(1559)은 오다 세력과 이마가와 세력이 같은 선상에 못 박힌 채로
저물어갔다.
첫 출전이나 다름없는 싸움에서 무사히 오타카 성에 군량을 수송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를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크게 칭찬했다.
마츠다이라 가문의 노신 혼다 히로타카와 이시카와 아키가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토야스의 오카자키 귀한을 간청했으나 완강하게 거부당했다. 모토야스의
오카자키 귀한을 간청했으나 완강하게 거부당했다. 모토야스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할수록 요시모토에게는 쿄토 진공의 대망을 달성할 때까지 슨푸에
붙잡아둘 필요가 있는 인물이었다. 무사히 쿄토 진입에 성공했을 때는 오다
노부나가가 멸망하든지 굴복하든지 결판이 날 것이었다.
요시모토의 계산에 따르면, 모토야스의 오카자키 귀환은 그 후의 일이었다.
만일 노부나가가를 누를 수 있도록 하여 돌려보내면 그만이었고, 노부나가가 계속
반항한다면 우선 방패막이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것이었다.
에이로쿠 3년 2월의 사태는 더욱 요시모토에게 유리하도록 전개되었다.
우에스기 카게토라와 타케다 하루노부의 카와나카지마에서의 대치가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결국 승부 없이 어느 쪽이나 화친을 제의하지 못하고 무찌를 수도 없는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다.
요시모토는 드디어 3월부터 중앙 진출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겨울부터 계속 사들였던 식량을 자기 휘하에 있는 오와리와 마카와 접경의 성으로
옮기고, 여러 장수들에게 명했다.
"각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모아 보고하라."
요시모토가 중앙 진출에 성공하면 토카이에 있는 여러 장수들은 모두 영지를
가진 다이묘가 되어 부귀를 누릴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공을 세울 때라고 각자
전력을 다해 병력을 모았다.
이럴 때 셋사이 선사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요시모토는 그조차 아쉬어하지 않았다. 어떤 육친이라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성을 비운 사이 오다와라의 호죠 일족으로부터 배후를
공격당하지 않도록 슨푸에 남기고 갈 아들 우지자네의 병력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
쿄토 진공에는 약 2만 5,000명을 동원할 예정이었다.
선봉 마츠다이라 군 2,500.
제2진 아사히나 야스요시 2,500.
제3진 우도노 나가테루 2,000.
제4진 미우라 빈고 3,000.
제5진 카츠라야마 노부다사 5,000.
제6진 요시모토의 본대 5,000.
그밖에 수송대 약 5,000.
그리고 슨푸, 히쿠마노, 요시다, 오카자키 등 여러 성에는 각각 수비를 담당할
군사가 남았다.
당시 이 정도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에서는 분명 요시모토 외에는
달리 없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고작 5,000이었다. 우에스기 켄신은 8,000, 타케다
신겐은 1만 2,000, 호죠 우지야스는 1만 정도 밖에는 동원하지 못할 것이었다.
5월에 접어들어 요시모토는 맨 먼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를 슨푸 성으로
불러들였다.
쿠마 마을의 타케노우치 나미타로가 예언한 대로 이미 여름철에 접어들고
있었다. 장마 전인데도 올해의 더위는 유난했다.
마흔두 살이 되어 더욱 살이 찐 요시모토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모토야스를
거실로 맞아들였다.
2
"오, 왔느냐. 드디어 때가 왔어."
아직 저녁볕이 뜨거운데도 요시모토는 장지문을 모조리 닫게 하고, 귀족처럼
화장한 얼굴과 목에서 연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기의 침입을 몹시 싫어하여
해도 지기 전부터 장지문을 모두 닫게 한 요시모토였다.
"올해는 무척 덥구나. 자, 편히 앉거라."
자기는 양쪽에서 코쇼에게 부채질을 시키고 있었다.
"출전 준비는 이미 끝냈겠지?"
"예, 모두 끝났습니다."
"어떠냐, 츠루의 기분은? 아이들도 잘 있겠지?"
츠루란 세나히메의 애칭이었다. 모토야스는 약간 과장하여 자신있게 말했다.
"츠루도 카메도 모두 잘 있습니다. 이 모토야스는 안심하고 출전할 수
있습니다."
"참, 반가로운 일이로군."
말하고 나서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그 이오 부젠에게 시집간 카메 말인데."
모토야스는 섬뜩했다. 키라 요시야스의 딸 카메히메는 모토야스가 열한 살 때
처음 알게 된 여자였다.
"카메는 아이를 못 낳는 모양이야. 여자는 아이를 낳는 편이 좋아.
그런점에서는 츠루를 택한 것이 잘한 일이야."
요시모토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알겠느냐, 이번 전투에는 네가 제일진이야."
각오하고 있었던 만큼 모토야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마츠다이라 가문에는 이것이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야. 알고 있겠지?"
"예."
"오다는 너희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렇게 이대에 걸친 숙적이다."
요시모토는 갑자기 어조를 무겁게 하고 말을 이었다.
"너의 할아버지 키요야스는 모리야마 성까지 쳐들어갔으나 끝내 오다를
무찌르지 못했다. 또 아버지는 평생을 두고 오다와 싸웠지. 그런 숙적에게 다른
장수를 선봉해 내세우면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내 면목이 없어. 그래서
너에게 선봉을 명한 것이다."
모토야스는 가슴에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분하다기보다는 왠지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떠냐, 오다 군은 고작 사, 오천 정도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너의 군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느냐?"
"마츠다이라 군만으로 오다 군을 무찌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대대로 내려오는 숙적 아니냐. 아니, 가신들의 조상에게도 한없이 피를
흘리게 한 가증스런 적이야."
"황송하지만, 마츠다이라의 군세만 가지고는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하다니, 모토야스, 너는 오다 군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마는 충분한 대비가 없이는 이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부근의 백성들을 비롯하여 노부시, 도적의 무리들이 모두 오다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으음, 너는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로구나. 하지만 나의 대군이 나가면
그들은 반드시 유리한 쪽에 붙을 것이야. 가는 길마다 방을 붙여 어느 쪽에
가담하는 것이 유리한가... 아니, 그런 것은 나에게 맡겨두면 돼. 너는 오로지
오다 군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섬멸할 각오로 싸우면 돼."
모토야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면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3
대답은 했으나 모토야스는 자못 걱정스러운 듯 무릎의 부채를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것 같구나."
요시모토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묻자 모토야스는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닌 투로 애매하게 말했다.
"그 부근 양민들 중에는...... 상당히......"
"상당히 어떻다는 말이냐?"
"기개 있는 자들이 섞여 있습니다. 지난해에 제가 갔을 때만 해도 철수해
돌아오는 도중 매복해 있던 그들의 야습을 받아 하마터면 먹이가 될 뻔했습니다."
"또 그 노부시 이야기군."
"예,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고쇼 님도 충분히 대비를 하셔야 할 줄 압니다."
"알겠다, 알겠어."
요시모토는 웃었다.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신변을 조심하여 방심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새겨 들었다.
"잘 알아들었다. 그러나 말이다, 모토야스. 그들도 삼만에 달하는 우리 대군과
나의 본진을 보면 그 위용에 눌려 다른 마음을 갖지 못할 것이다. 안심하고 너는
가신들이나 격려하도록 해라."
그리고는 뜻하지 않게 기분이 좋아 말했다.
"여봐라, 모토야스에게 술을 올려라."
모토야스는 잔을 비우는 척하고 일찍 요시모토의 거실에서 물러났다. 더울 때
요시모토는 남이 자기 자세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 싫어했다. 그래서 오래 머물러
있으면 불쾌하게 여기곤 했다. 모토야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찍
물러나왔다.
거실을 나와 모토야스는 쓴웃음을 떠올렸다.
이번에 출전하면 다시는 슨푸에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요시모토를 따라 그
길로 상경할 수 있다고 해도, 또 오다 군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고 해도.
그는 이쌍방의 경우를 면밀히 계산해 놓고 있었다.
단숨에 오다 군을 공격하라고 하면 카리야의 노부시에게 습격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전진할 수 없다고 할 작정이었다. 곧 후속부내가 뒤따라올 테니 그때같이
전진하겠다고. 오카자키의 군대만으로도 노부나가의 정예부대와 맞부딪쳐 혈전을
벌이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면 가신들이 너무 가엾고, 그래서 그는 마음으로
결심하고 있었다. 만약 그 때문에 요시모토의 분노를 산다면, 노부나가보다 약한
주위의 어느 곳을 공략하여 전혀 다른 방향에서 혈로를 찾을 생각이었다.
1년이란 세월이 모토야스를 그 정도로 대담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요시모토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성문을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져 있었다. 저녁볕을 받은 후지산은 빨간
정상을 하늘에 드러내고 모토야스의 씩씩한 마음을 북돋아주는 듯했다.
`오랫동안 신세를 졌어......'
모토야스는 후지산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슨푸는 나를 위한 좋은 수련장이었어. 후지산이 있고...... 셋사이 선사가
있었고...... 또 그리운 할머니의 무덤과 처자가......'
모토야스는 걸음을 멈추고 해자 둑에 앞자락을 벌리고 서서 유유히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문득 갓 인질이 되었을 무렵 신년 축하식장에서 오줌을 눈 일이
생각났다.
`아아, 그때도 새로운 출발, 이번에도 새로운 출발. 그때는 고추가 작았지만
지금은 크다. 잘 보아라, 후지산아.'
모토야스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대로 속이 후련하도록 큰 소리로 혼자 껄껄
웃었다.
4
키요스 성 부엌은 네 개의 들보에 여덟 간 넓이의 나무로 지은 것이었다. 그
중앙에 한 간 사방인 화로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화로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큰 소리를 지른 것은 새로 부엌에서 일하게 된 키노시타 토키치로였다.
"이봐, 아직 시식할 음식이 덜 됐어?"
"예, 곧 됩니다."
요리를 담당한 하인이 말했다.
"빨리 해, 배가 고프다."
토키치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얼른 정정했다.
"사실은 내 배가 고픈 게 아니고 성주님이야."
1년이란 세월은 원숭이를 닮은 이 사나이의 신상에도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이미 후지이 마타에몬 휘하의 부하가 아니었다. 300석 녹봉을 받게 되고
오다 일족의 부엌을 담당하는 직책을 맡았다.
처음에는 마구간 청소 당번이었다가 어느 틈에 노부나가의 신발을 챙기는
자리에 오르더니, 이어 말고삐를 잡았다. 그러다가 다시 삼림을 관리하는
직책에서 부엌의 책임자가 되는 등 돌계단을 오르듯이 출세했다.
원숭이를 닮은 이 사나이가 어째서 그토록 노부나가의 마음에 들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원인을 스스로 재미있는 이야기로 꾸며
여럿에게 들려주었다.
"인간이란 말이지, 코로 숨을 쉬는 동안에는 머리를 써야 해."
그가 화로 너머에서 말하기 시작하자, 음식을 담당한 자도 하녀들도 또
시작이로군-하는 표정으로 킬킬 웃었다.
"좀 모자라는 녀석은 입으로 후후 하고 숨을 쉬기 시작했을 때에야 겨우 머리를
쓰기 시작하지. 그건 너무 늦어! 물고기도 입을 뻐끔거리기 시작하면 이미 죽을
날이 가까웠을 때야. 그런데 좀더 얼빠진 녀석들은 머리란 죽은 뒤부터 쓰는 것인
줄 알고 있거든. 이봐, 머리는 살아 있을 때, 그것도 코로 숨을 쉴 때 써야만
하는 거야."
오츠네라 불리는 하녀가 전처럼 조롱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출세했다는 건가?"
"암, 물론이지. 나는 마구간 당번이었을 때 어떻게 하면 말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고심했어. 말과 이야기할 수 없으면 훌륭한 말지기가
되지 못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사흘 만에 말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게
됐어."
"짚신을 들고 다닐 때는 짚신의 이야기도 기억했겠군요?"
"바보 같은 것. 짚신이 어떻게 말을 하겠어? 그대는 매일 아침 남보다 일찍
일어나 짚신을 등에 대고 따스해지게 만들었지. 배에 대면 배탈이 나니까."
"호호호, 그럼 산림을 지킬 때는 무얼 했나요?"
"그야 어려울 것 없지. 도벌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인간이란 말이야, 윗사람의
눈을 속이고 주인의 물건을 훔치려고 하는 근성, 이것이 있으면 출세하지 못해.
모두 명심하도록."
성실한 체하고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 새로운 책임자는 노부나가와 똑같은
요리를 2인분 만들게 하고 화로 옆에 앉아 그 하나를 먹어치우곤 했다. 이 성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은 노부나가와 토키치로였다.
"자, 식사가 마련되었어요."
"응, 수고 많았다."
의젓하게 대답하고 토키치로는 젓가락을 들었다.
5
"음, 맛있군. 좋아."
소반에는 연노랑 색 공기가 놓여 있고 국은 닭고기가 들어 있는 된장국.
무생채에 회가 얹혀 있고 접시 건너편에 도미구이와 야채절임이 있었다.
평소에는 이처럼 국과 세 가지 반찬이 전부였지만, 오늘은 이것말고 다른
소반에 생전복과 껍질째 요리한 호도에 곁들여 구운 은어가 차려져 있었다.
츠시마의 어부들이 은어를 가져왔기 때문에 특별한 식단을 마련했다.
토키치로는 먼저 그 은어부터 부리나케 입에 집어넣었다.
따로 상이 차려졌을 때는 술이 곁들여졌다. 대개는 3홉이었는데 노부나가의
주량에는 한도가 없었다. 흥이 나면 스스로도 도가 지나쳤고, 누구에게나
막무가내로 술을 권할 때도 있었다.
계속 은어를 먹어치우는 토키치로를 보고 오구이 소큐라는 요리사가 꿀꺽
군침을 삼켰다.
"어때요, 간이 잘 되었나요?"
"나쁘지는 않군."
"나쁘지 않다고 한 것은 드시기 전의 일이었는데요."
"말이 많구나, 너는......"
토키치로는 다시 한 마리를 입안에 던져 넣었다. 두 마리를 계속해서 먹고
있었다.
"원래 생선이라는 것은 신선도를 가지고 요리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다.
먹어보지 않고는 맛을 모르는 자라면 부엌에서 일할 자격이 없어."
소큐는 원망스럽다는 듯 혀를 차고 외면해버렸다.
부엌에는 상과 밥공기를 올려놓는 선반 외에도 쌀궤가 여럿 놓여 있고, 그
너머에는 나날이 소모하는 쌀이 스무 섬쯤 쌓여 있었다.
"이 날 전복은 별로 맛이 없어. 하지만 된장국은 언제 먹어도 맛이 좋군. 이봐,
밥을 가져와."
큰 공기에 수북하게 담아온 밥을 토키치로는 마치 녹여 없애기라도 하듯 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두 공기째 가져왔을 때 밥통을 안고 있던 오츠네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머리 위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이 원숭이 놈아!"
목소리가 크기로 유명한 노부나가의 호통이었다.
"옛!"
순간 이에 못지 않은 큰 소리의 대답이 터져나왔다.
"아니, 대장님 아니십니까?"
노부나가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토키치로의 소반 위에 있는 먹다 남은 음식과
입가에 붙어 있는 밥풀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대답과 함께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있는 토키치로의 얼굴에는 전혀 겁을 먹은 기색이 없었다.
"일부러 여기까지 오시다니 웬일이십니까?"
"나를 따라와! 거실로 오너라."
"옛, 곧 가겠습니다. 여봐라, 이 상을 치워라."
토키치로는 침착하게 노부나가의 뒤를 따라갔다.
거실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노부나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토키치로는 움찔했다.
노부나가가 화를 냈을 때는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웃기 시작하면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원숭이 이놈!"
"예."
"어째서 너를 불렀다고 생각하느냐? 대답해봐라."
"먹은 것이 뱃속에 가득 차서 그런지 도무지 머리가 돌지 않아서......"
"그렇다면 내가 말해주겠다. 너에게 상을 내리려고 불렀다. 하루에 세 번씩이나
내가 먹을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네가 먹어보곤 하니까 말이다."
노부나가는 노여움을 억제하고 비꼬았다.
6
"특히 오늘은 힘이 들었을 게다. 닭고기 국에 은어에다 도미와 생전복을 고루
맛보아야 했으니."
노부나가의 말에 토키치로는 황송하다는 듯이 절을 했다.
"칭찬해주시니 시식한 보람을 느낍니다. 원래 저는 검소한 음식에 익숙한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 오늘 같은 진수성찬을 대하면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참고 먹어봐야 하는 고통......"
"원숭이 이놈!"
"예."
"뻔뻔스럽게 능청을 떠는구나. 오늘부터는 밥 한 공기만 맛보도록 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된장이 너무 짜다."
"그건 조금 뜻밖의 말씀이군요. 된장은 대장님만이 아니라 성내에서 일하는
아랫사람까지 모두가 먹습니다. 원래 몸을 많이 움직이는 사람은 짠 것을
좋아합니다. 싱거우면 몸이 허약해집니다."
"원숭이 녀석, 건방지구나. 소금은 생명의 근원이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소금이 부족하면 어떻게 싸우겠느냐. 저장해둔 소금이 줄어들고 있어."
토키치로는 흘끗 노부나가를 쳐다보고 하찮은 일까지 간섭하는 사나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원숭이......"
"예."
"너는 천문을 보았느냐?"
"원, 대장님도. 또 농담을......"
"어떠냐. 지금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슨푸에서 출발하려 하고 있다. 며칠이면
오카자키에 도착하게 될지 말해보아라."
"말하지 않겠습니다. 말씀 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뭣이......"
노부나가는 주위를 돌아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소용이 없다니?"
"상대는 오닌의 난 이후 유례가 없는 대군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는 줄로
압니다. 그 군대가 히쿠마노(하마마츠)에 언제 도착하건, 또 요시다와 오카자키에
며칠을 머무르건, 그런 것은 우리와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대장님은
우리의 얼마 안 되는 군대로 구름과 같이 많은 적을 공격하실 작정입니까?"
"건방진 놈!"
노부나가는 갑자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질문은 내가 하고 있는 거야."
"아 이거, 그만 얘기가 빗나갔습니다. 이 토키치로라면 며칠에 오와리에
들어오겠느냐는 것은 생각해도 아무 소용없으니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또 그런 소리. 방자한 놈 같으니라구."
노부나가는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는 마에다 마타자에몬이 사죄하러 왔다고 했지?"
"예, 주군이 총애하시는 아이치 쥬아미를 죽이고 도주한 것은 만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일. 그러나 너그럽게 보아 용서하시기를."
"안 된다. 알겠느냐, 또다시 그런 소리를 하러 온다면 이 노부나가가 당장
죽이겠다고 전하여라."
토키치로는 대답 대신 노부나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정말 노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마가와 쪽과 싸울 때 공을 세우고 돌아오라고
하는 것일따? 노부나가가 그런 말을 할 때는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대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전하면, 고지식한 마타자에몬 님이라 사죄의 뜻으로
자결할 것 같습니다마는......"
토키치로가 은근히 마음을 떠보자 노부나가는 무뚝뚝하게 화제를 돌려버렸다.
"국이 식겠다. 왜 너는 시식을 끝냈으면서도 상을 가져오지 않느냐?
괘씸하구나."
7
"황송합니다. 곧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토키치로가 일어서려고 하자 노부나가는 비고는 웃음을 띤 채 불러 앉혔다.
"네가 갈 것 없어. 코쇼를 시키겠다. 네 상도 이리 가져오라고 해서 같이
먹도록 하자."
노부나가는 손뼉을 쳐서 코쇼를 부르고 엷은 웃음을 떠올리면서 터키치로의
상도 함께 가져오라고 명했다.
토키치로의 얼굴에 잠시 당황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그의 상이라고 해서 따로
차리게 하는 일은 없었다. 독이 들었는지를 검사하는 시식을 통해 배를 채우고,
그것으로 나날의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지금 새삼스럽게 노부가나의 지시를
전한다면 주방에서 어떤 상을 차려올지 알 수 없었다.
노부나가는 물론 그것을 알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것과 똑같은 상을 차려온다면
큰일이었다.
"원숭이."
"예."
"내기를 할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밥상 말인데."
노부나가는 싱긋 웃었다.
"너는 부하들에게 잘 일러두었겠지?"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
"네 얼굴이 좀 창백하구나. 그 은어구이에 독이라도 들어 있었더냐?"
"원, 대장님도!"
토키치로는 정색을 하고 얼굴을 문질렀다.
"독은 바로 대장님의 입에 있습니다."
"어떤 내기를 할까, 원숭이?"
"글쎄요, 만일 이 토키치로가 한 일에 잘못이 없다면 이마가와와의 전투 때
저에게도 한 부대를 지휘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토키치로는 조마조마하면서도 기회를 잡아 자기 뜻을 전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러한 성격이 노부나가에게는 재미가 있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다.
"그럼, 잘못이 있다면?"
"그때는 처분대로 하십시오."
노부나가는 허허 웃고 교묘하게 난처한 입장을 얼버무리는 토키치로를
바라보았다.
사도노카미나 시바타, 사쿠마 등 중신들이 갖추지 못한 천진스러움을 이
원숭이는 가지고 있었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추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경박하지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잠시
그의 윗사람으로 있었던 후지이 마타에몬의 말에 따르면, 토키치로는 그 주제에
무척이나 여자를 밝힌다고 했다.
"그런 얼굴로 설마하고 생각했으나, 아시가루의 아낙이나 딸들이 몰래 그의
방에 먹을 것을 갖다 주곤 합니다. 난처한 일입니다."
고지식한 마타에몬은 이렇게 보고하고 나서 덧붙였다.
"야에에게도 토키치로를 조심하라고 엄하게 타일러놓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러한 토키치로에게 노부나가는 지금 한 가지 일을 맡겨야 할지 어떨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러한 난세에는 살아남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는 물론 능력과 수완이었다. 여기에는 이미 토키치로는 합격한 것이라
보아도 좋았다.
그러나 둘째는 후천적인 소질 이상의 것...... 세상 사람들이 `운'이라 부르는
것을 과연 그가 가지고 태어났을까 하는 점이었다.
노부나가는 지금 토키치로의 그 `운'을 시험해보려 하고 있었다. 밥상을
가져왔는지 근시들이 옆방에서 일어서는 기척이 손에 잡힐 듯이 들려왔다.
8
먼저 노부나가의 상이 들어왔을 때 토키치로는 자세히 점검했다. 그리고 자기
상을 가지고 온 코쇼 쪽은 일부러 보지 않으려 했다.
상이 놓였다. 꾸중을 들을지 어떨지는 이미 토키치로 뒤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토키치로는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뒤로 물러난 뒤 자기 밥상을 보았다.
노부나가도 예리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키치로는 겨우 안도하고 얼른 노부나가 쪽으로 돌아서서 꿇어앉았다.
"황송합니다. 이 내기에서는 제가 졌습니다. 대장님 처분만 기다리겠습니다."
상 위에는 무생채와 소금에 절인 야채, 그리고 볶은 된장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노부나가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겼다고 생각하면 도리어 넙죽
엎드려 사죄해 보이기도 한다. 약아빠진 놈이라 생각되지만, 사죄한 뒤 어떤
구실을 꾸며댈 것인지 알고 싶기도 했다.
"못된 놈, 이것으로 끝날 줄 아느냐?"
"황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실수가 없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참고로 묻겠는데, 어떻게 주의시킬 것인지 말해보아라."
"예. 평소에 검소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기 때문에
이런 소찬이 나왔습니다. 이래서는 대장님 앞에서 저희들의 일상적인 식사가
얼마나 부실한지 빗대어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장님의 분부가 계시면
저희들의 상도 똑같은 것으로 차리도록 단단히 타이르겠습니다."
노부나가는 혀를 차면서 이를 악물었으나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원숭이 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이 녀석은 운도 강하지만 얄미울 정도로 머리도 잘
굴린다, 그 정도라면 이런 난세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아, 어서 먹어라."
노부나가는 직접 도자기 술병을 기울여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 마셨으나
토키치로에게는 마시라고 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주종은 묵묵히 배를 채워 나갔다.
"원숭이."
"예, 이제 배가 부릅니다."
"밥을 말하는 게 아니야. 나는 이마가와가 이 성 정문에 도착할 때까지 잠이나
잘 생각이다."
"음, 농성하시겠다면 그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너도 말했듯이 이마가와 지부노타유가 히쿠마노(하마마츠)에 다다르건 요시다,
오카자키에 들어가건 우리로서는 적진에 공격해 들어갈 수 없으니 잠이나
자야겠다. 그러나 오와리에 나타난다면 슬슬 잠에서 깨어나야겠지."
"옳은 말씀입니다."
"너는 적이 미즈노 시모츠케노카미의 영지에 들어올 무렵부터 자세히 동정을
살펴 보고하도록 하라."
"이 토키치로도 이번 전투에 참가하게 되는 것이로군요."
"이 멍청아, 농성이라는 것은 아녀자들까지도 모두 나서서 싸우는 것을 말하는
게야."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알겠느냐, 그날 나는 자고 있겠다. 눈을 떠도 좋을 무렵이 되면 신호하도록
해라.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시중을 들던 코쇼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고개를 갸웃했으나, 토키치로는
볶은 된장을 부신 물을 마시면서 고개를 숙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오케하자마의 조짐
1
토키치로는 노부나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노부나가에게는 그야말로 중대한 갈림길이었다. 세상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전투가 아니라, 죽느냐 항복하느냐의 싸움이었다.
노부나가는 그 전투에서 앞의 것을 택하려고 확실히 각오한 듯했다. 아마도
모든 면에서 갖가지 수단을 강구해본 결과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남의 가신으로 전락하여 몸을 굽힐 정도로 비굴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기 자신도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일이 재밌게 되어가는군."
토키치로가 노부나가를 주군으로 택한 것은, 반드시 그의 정략이나 경영의 재능이
남달리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바타, 하야시, 사쿠마
등의 중신들이 한결같이 노부나가의 결점으로 지적하는 그의 성격-대장이 되지
않고는 못사는 기질. 토키치로는 여기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노부나가가 토키치로의 `운'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 이상으로 토키치로도
노부나가의 `운'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노부나가가 이럴 때 `지금은 일단
이마가와에게 항복했다가......' 따위의 말을 꺼낸다면 그는 당장 노부나가를
버리고 다른 데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 곳에는 키노시타 토키치로가 인생을 걸
`도박장'이 없었다. 노부나가는 토키치로가 생각했던 대로 항복하기보다는
`죽음'을 택했다. 노부나가의 성격상 가만히 농성만 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공격해나갈 기회를 잡지 못하면 정말 성안에서 잠든 채 전사할 생각일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노부나가는 남이 하는 그대로 따르기를 싫어했으며,
토키치로가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정말 재밌게 됐어."
토키치로는 노부나가 앞에서 물러나와 곧 부엌의 화로 옆으로 돌아와 요리사
오구이 소큐를 손짓해 불렀다.
"이봐, 소큐. 장부를 가져와."
"무슨 장부 말입니까?"
"이제부터 된장을 사러 간다."
"된장이라면 이미 충분히 사들였는데요."
"그것으로 부족해, 부족하단 말이야."
토키치로는 얼른 고개를 가로젓고, 진지하게 말했다.
"농성이야, 우리 대장은 농성하기로 마음먹었어. 그러면 성밖에 있는 부하의
가족들도 모두 성으로 들어오게 돼. 쌀은 아마 괜찮을 테지, 하지만 된장이
부족해."
"그렇다면 빨리 콩을 삶아서 속성으로......"
"안 돼. 콩은 콩대로 따로 쓸 데가 있을 테니 농부들에게서 조금씩 된장을
구해와야 해. 장부를 만들어라."
소큐는 어이없다는 듯이 토키치로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미농지를 접어 장부 한
권을 만들었다.
"음, 됐어. 벼루를 가져와."
소큐가 하라는 대로 벼루와 먹을 가져오자, 평소에 글자 같은 것은 써보지 못한
토키치로였지만 신기하게도 붓을 들어 겉장을 썼다.
-된장 구입자 장부
공손히 떠받들더니, 따로 꺼낸 붓통과 함께 매어 허리에 찼다.
"나는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 테니 된장이 도착하거든 받아놓아라."
토키치로는 이렇게 말하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2
인생 전체를 걸고 하는 도박처럼 신나는 것도 없다. 더구나 예상했던 대로
노부나가는 기대했던 주사위를 던지려 하고 있었다. 토키치로도 이제 모든 지혜를
다해 이 승부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자기 생애를, 죽을 때까지
질주하려는 노부나가란 사나운 말에 걸었다.
성에서 나온 토키치로는 잠시 해자 옆에 서서 혼자 중얼거렸다.
"된장을 사올 사람으로 누구의 부하가 적당할까?"
짐짓 점잔이나 부리는 중신들로는 안 된다고 토키치로는 생각했다. 핫토리
코헤이타나 이케다 신자부로, 아니면 모리 신스케가 어떨까.
"그래, 야나다가 좋겠어!"
토키치로는 무릎을 쳤다.
야나다 마사츠나는 셋째 성에 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해자 안으로 되돌아와
마사츠나의 집을 찾았다.
"뭐, 원숭이가 찾아왔다구......?"
마사츠나는 토키치로 따위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성주의 특이한 취미-정도로
생각하고, 그를 주방 책임자로 승진시킨 일에 대해서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원숭이가 밤에 자기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직접 현관으로
나갔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느냐?"
"그렇습니다."
토키치로는 안하무인인 듯한 표정으로 허리에 찬 장부를 끌렀다.
"그게 뭐냐?"
"겉에 씌여 있는 대로입니다."
"된장...... 구입자 명부란 또 뭐냐?"
"글자 그대로 된장을 사들일 사람의 명부입니다."
"된장 구입...... 그 된장 구입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게냐?"
"야나다님 답지 않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된장과 관계없는 사람은 중국이나
천축이라면 몰라도 이 일본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찌개도 만들어 먹고
국도 끓이고......"
말하다 말고 토키치로는 싱긋 웃었다.
"아무튼 자세한 말씀은 안에 들어가서......"
마사츠나는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까닭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들어와."
먼저 바깥채의 거실로 들어갔다. 그 뒤를 토키치로가 어슬렁어슬렁 따라
들어갔다.
"된장을 사들이게 똑똑한 사람 다섯 명 정도만 빌려주십시오."
앉기도 전에 이렇게 말했다. 마사츠나가 정색을 하고 바라보자 슬쩍 덧붙였다.
"우리 주군께서는 농성을 하실 모양입니다. 그러려면 된장이 필요합니다."
"뭐, 주군이 농성을 하신다고......? 누가 그러더냐?"
"아무도 말은 안 했지만 틀림없습니다."
토키치로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나루미, 카사데라 부근부터 안죠, 카리야까지 가서 사들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똑똑한 사람으로 네댓 명만 부탁드립니다."
장부를 무릎에 펼치더니 토키치로는 붓통에서 붓을 꺼내었다.
"누구누구 빌려주실지 그 이름을 여기 적어 넣어야겠는데......"
"......내 부하를 된장 구입하는 데 쓰겠다구!"
마사츠나는 비로소 눈앞에 있는 토키치로의 기묘하게 생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3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나는 잘 알아들을 수 없다. 좀더 자세히 말해보아라."
야나다 마사츠나의 채근하는 말에 토키치로는 가볍게 코끝에서 손을 흔들었다.
"더 이상 말씀 드려도 마찬가집니다. 된장 사들이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된장
사들이는 사람. 야나다 님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 된장 사들이는 사람들이
돌아오기 전에 전투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것뿐입니다."
"뭐, 돌아오기 전에 전투가 시작된다고......?"
"그렇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고 오와리에 불이 붙을 때까지 열심히 된장을
사들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으음."
"전투가 시작된 뒤에야 돌아오게 되므로 여간 똑똑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됩니다. 똑똑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이 점을 잘 고려하시라는
뜻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의 버릇대로 토키치로는 마사츠나에게도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마사츠나는 다시 입을 다물고 토키치로를 바라보았다. 납득되는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이 왜소한 사나이가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아 누구보다도 노부나가의 생각을 잘아는 입장에 있다는 점
때문에 아예 묵살할 수도 없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것은 없습니다. 농민으로부터 된장을 사들일 수완이
있는 자, 전투가 벌어져도 무사히 야나다 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는 자......"
내용을 설명하다 말고 토키치로는 이마에 잔뜩 주름을 잡고 후후후 하고
웃었다.
"야나다 님은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특히 입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부탁 드리는
것입니다."
마사츠나는 대답하는 대신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았다.
"된장을 사들이는 것은 표면적인 일이고 사실은 척후란 말이냐?"
토키치로는 손을 내저었다.
"된장 사들이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된장 사들이는 사람입니다."
"알겠다. 너에게 다섯 명을 빌려주겠다."
토키치로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을 뿐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반드시 야나다 님에게 도움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제발 똑똑한 사람을 골라
주십시오. 그럼, 그 사람들의 이름을 말씀해주시죠."
장부를 들치면서 어색한 동작으로 붓을 들었다.
"네고로 타로지."
"네고로 타로지...... 그 다음은?"
"하시바 마사카즈."
"하시바 마사카즈."
"야스이 세이베에, 타바타 고시치로, 무카이 마고베에."
마사츠나는 차례로 이름을 대면서 토키치로의 장부를 들여다보고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음을 참았다. 마치 중신이나 된 듯 거창하게 떠벌리면서 사람의
이름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식함.
`대관절 이 자는 어떤 놈일까?'
이렇게 생각했을 때, 그 의문에 대해 당사자인 토키치로 자신이 대답했다.
"앞으로는 세상이 변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있던 학문 따위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통용되지 않을 것을 몸에 익힌다면 허리가 무거워서 움직일 수 없죠.
그러므로 저는 나 자신이 바로 학문이라 굳게 믿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 다섯 명이나 어서 이리 불러주십시오."
마사츠나는 더 할말이 없었다. 이 부엌일이나 보고 있는 녀석은 어느 틈에
자신을 제 부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4
토키치로가 야나다 마사츠나의 집을 나왔을 때는 그럭저럭 다섯
점반(오후9시)이 되어 있었다. 그는 몇 시가 되었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데리고 나온 다섯 명의 건장한 사나이들을 향해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오늘부터 너희들은 당분간 나의 부하가 된다. 지시에 잘 따르도록. 알겠나?"
그리고는 하야시 사도의 집에 갔다. 그의 집 역시 셋째 성에 있었는데, 주인의
성격대로 자못 큼직한 문에 문지기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문에 드리워진 늙은 소나무에서 부엉이가 울고 있었다. 토키치로는 부엉이
울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치솟았다. 하야시 사도가, 나야말로 오다 일족의
주춧돌-이라 믿고 점잔부리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부엉이와 비슷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리 오너라!"
토키치로는 소나무 밑에 문지기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에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불렀다.
문지기는 깜짝 놀라 어둠 속을 살피듯이 하면서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주군은 이미 주무시고 계십니다."
"부엌 책임자 키노시타 토키치로, 급히 전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안내해주기
바란다."
문지기보다도 대기실에서 쉬고 있던 자가 먼저 허둥지둥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얼른 다시 나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했다.
"너희들도 따라오너라."
토키치로는 작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다섯 사람을 데리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이곳 현관에도 사도가 직접 나와 있었다. 요전히 점잖은 사람은 웃지 않아야
한다는 표정이었다.
"원숭이로구나. 밤중에 무슨 일로 왔느냐?"
토키치로는 꾸벅 절을 했다.
"키노시타 토키치로, 오늘부터 된장을 구입하기 위해 성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고 드리려고 왔습니다.
"뭐, 된장을 사려고...... 누구의 지시냐?"
사도는 뒤에 늘어선 다섯 명을 흘끗 바라보았다. 토키치로는 목청을 돋우었다.
"이 키노시타 토키치로는 우리 대장의 가신입니다."
"또 그 멍청이가...... "
말하다 말고 혀를 찼다.
"주군과 너는 아주 잘 어울리는 단짝이야. 밤중에 떠나야 할 정도로 된장이
부족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농성이 시작된 뒤에 구하려면 이미
늦습니다."
"뭐, 농성......? 누가 농성하겠다고 하더냐, 주군이냐?"
"그것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무튼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서 밤중이지만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그럼, 실례합니다."
하야시 사도는 홱 몸을 돌려 사라져가는 토키치로의 뒷모습을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원숭이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주군 자신이
농성하겠다는 말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인생 50에 가까운 그의
귀에는 오다 가문이 붕괴되는 소리가 뚜렷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잠시 이마가와에게 굴복하여 재기를 도모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암담한 기분으로 서 있는 그의 귀에 의기양양하게 지껄이는 토키치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고가 많다. 문단속을 엄중히 해야 한다."
5
중요한 일에 직면하면 어떤 가문이든 주전파와 자중파가 생기기 마련이다.
노부나가는 그러한 일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중신들 중에는 그 점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노부나가로서는 죽음이냐 승리냐가 있을 뿐인 이번 경우에도, 자중파는 아직
방책이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요시모토에게 무릎을 꿇고 오다 가문의 존속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토키치로는 하야시 사도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는 문을 나서자 갑자기 배를 끌어안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농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이마의 주름이 가관이야. 내가 원숭이라면 그는
멍청이 원숭이야. 하하하하!"
그 버릇없는 행동에 다섯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사람에게 된장을 사들이는 이상한 역할을 하도록 자기들을 보낸 주인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네고로 타로지가 참다못해 아시가루의 숙소와 가까운 마장 앞 벚나무 밑에서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이대로 된장을 사러 떠나야 합니까?"
"아니."
토키치로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차림으로는 안 돼. 오늘밤엔 내 방에서 느긋하게 한잔 마시도록 하자."
"방금 하야시 님에게 시급하다고 보고한 것은 거짓말이었군요."
"거짓말이란 말은 쓰지 마라. 거짓말이라고 하면 내가 그 분을 속인 것이 된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급하면 돌아가라는 말도 있어."
그들은 다시 얼굴을 마주보며 뒤를 따랐다.
"네 이름이 네고로라고 했지? 내일은 우선 성과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자.
된장을 팔지 않겠느냐고......"
"팔지 않겠다고 하면 그대로 뛰어들어 빼앗아 올까요?"
"당치도 않아. 우리 대장이 다스리는 오와리에는 도적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듣고 있어. 백성들이 문을 걸지 않고도 편히 잘 수 있는 곳은 일본 전체에서도
오와리뿐이라고 장에 오는 여러 지방 상인들은 말하고 있다. 그런 오와리에서
우리 대장이 도둑질을 시킬 것 같으냐?"
"숨겨놓고 팔 것이 없다고 하면?"
"아, 그렇습니까...... 하고 다음 집으로 가면 돼. 어쨌든 이건 비밀이지만,
이마가와 군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농성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래서 서둘러 된장을
사러 다닌다고, 그것만은 말해도 좋다."
"그런 중요한 일을 누설하면......"
"음, 도리가 없지. 아주 은밀히 해야 한다."
그들은 그제야 자기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된장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닌 것 같았다. 농성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목적인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그럼, 다음에는 또 어디로 갑니까?"
"나고야, 후루와타리, 아츠타를 돌고 나서 치타고리를 거쳐 서미카와로 가는
거야, 된장을 팔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을 때는 이미 토키치로의 숙소 앞에 도착해 있었다. 토키치로의
숙소는 한때 윗사람이었던 후지이 마타에몬의 집 건너편에 있었는데, 다른 두
젊은이와 같은 집을 쓰고 있었다.
"이봐, 술을 가져와. 손님이 왔어, 손님이."
토키치로는 집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하고 다섯 사람을 돌아보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6
현관 옆에 있는 다다미 여덟 장짜리 방을 이용해 토키치로는 거실과 객실 및
침실을 겸하고 있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젊은이의 방과 부엌이 이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처자를 거느린 사람의 `내실'이지만, 토키치로는 아직
독신이었다. 오늘밤에는 임시로 부하가 된 다섯 사람 모두를 여기서 재울
모양이었다.
아직 관례를 올리기 전인 듯 앞머리를 내리고 있는 소년이 현관으로 나왔다.
"토라, 술은 있겠지."
토키치로의 말에 그 소년은 불쾌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술은 있지만 안주가 없어요."
"그럼, 앞집 후지이 씨 댁에 가서 야에 님에게 뭐라도 좀 얻어 와. 손님은 다섯
명이다."
"예, 알겠습니다."
대답한 것은 토라라고 불린 소년이 아니라, 성안의 생활에 익숙한
스물일고여덟으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자, 걱정할 것 없다. 여기서 모든 것을 의논하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도록
하자."
토키치로는 허리에 찼던 칼을 벗어 아무렇게나 뒤로 던졌다.
"마사츠나 님에게 들었을 줄 알지만, 된장을 사러 돌아다니는 도중에 전쟁이
일어날 거다. 전쟁이 시작되거든 다섯 사람이 순차적으로 돌아오도록."
"순차적이라니요?"
"한꺼번에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뜻이야. 돌아올 때는 적장인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지금 현재 어디서 자고 어디를 지나 어디로 가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하여 마사츠나 님에게 보고하기 바란다."
"그럼, 최초의 보고는 언제부터?"
하시바 마사카즈가 물었다.
"치타고리를 벗어나 서미카와로 접어들려 할 때부터."
"다른 대장이 아니라, 본대를 말하는 것입니까?"
토키치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송사리 따위는 문제가 아니야. 반나절에 한 사람씩, 하루에 두 번
마사츠나 님에게 차례차례 보고하도록."
"알았어!"
무카이 마고베에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곧 공손한 말로 고쳐 말했다.
"잘 알았습니다."
"내 말을 잘 들어. 그대들의 활약에 따라 마사츠나 님의 출세가 결정되는 거야.
경우에 따라서는 마사츠나 님도 성에서 나가 싸워야 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
주군이 어디 계신지 모른다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 후세에까지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대들이 열심히 농성을 위한 된장, 농성을
위한 된장이라며 떠들고 다니면, 그것으로 그대들의 목숨도 붙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아니, 어째서요?"
네고로 타로지가 물었다.
"알고 있을 테지만, 농성하기로 결정난 싸움이라면 상대도 키요스성에 도착할
때까지는 칼을 뽑지 않을 것이고......"
이때 토라가 굵은 정강이를 드러내고 술을 가져왔다. 술은 야전용인 큰 냄비에
들어 있었고, 술잔 대신 밥공기가 칠이 벗겨진 쟁반에 놓여 있었다.
"자, 실컷 마시도록, 당분간 키요스와는 작별이다."
토키치로는 일어나서 자기 손으로 여럿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7
된장을 사들이기 위한 토키치로의 부하가 성에서 나와 나고야, 아츠타 등지를
향해 떠나고 이틀이 지난 5월 14일 오후였다.
본성 안채에서 흘러나오는 북소리가 들려오는 중신들의 대기실에서는 하야시
사도노카미 미치카츠가 침통한 표정으로 시바타 곤로쿠를 달래고 있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오, 카츠이에 님. 주군에게도 다 생각이 있을 거요."
하야시는 연하인 시바타 곤로쿠로 카츠이에를 달래기보다도 자기 자신이 그렇게
믿으려고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는 싶지만."
카츠이에는 안타깝다는 듯이 무릎을 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오늘이 되도록 군사회의다운 회의 한 번 열리지 않았습니다. 처첩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노래로 세월을 보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적의 본대는 이미
오와리에 진입하려 하고 있어요."
"나에게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 있겠소? 우리가 하는 말을 듣기나하는
주군이오?"
"가만히 앉아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야시 사도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동생인 미마사카노카미 미츠하루를
돌아보았다.
"선봉인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군대가 슨푸를 떠난 것은 이달 십일이었지?"
"예, 본대는 그 이틀 후인 십이일에 슨푸를 떠나 토카이, 모토사카의 두 길로
진격해온다고 주군께 분명히 보고 드렸습니다.
"그때 주군은 무어라고 말씀하시던가?"
"알겠다고 말슴하실 뿐 그 다음에는 잡담만 하셨습니다."
곤로쿠는 다시 감정이 격해졌다.
"우리는 주군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하야시 사도는 그 예봉을 피하듯이 말머리를 돌렸다.
"원숭이가 농성에 대비하기 위해 된장을 사들인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게
본심인지도 몰라요. 가문이 망하려 할 때는 다 그런 거요, 운명이지요."
"원숭이는 된장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까?"
곤로쿠는 무서운 눈으로 사도를 노려본 채 그 역시 침묵했다. 아무도 자기가
주군의 뜻을 알아보고 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곤로쿠 자신도 그것을
물으러 갔다가 대번에 쫓겨나고 말았다.
"주군의 본심을 알고 싶습니다."
이 말에 노부나가는 붓을 들어 직접 노래를 지으면서 쌀쌀하게 대답했다.
"본심 같은 것은 별로 없소. 있을 턱이 없지. 이마가와의 영지는 그대로 있을
것 아니오? 스루가, 토토우미, 미카와, 그리고 오와리의 일부를 합쳐 일백만
석이나 되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묻지 마시오. 나의 영지는 겨우 십육, 칠만 석. 일만 석의 병력을
약 이백오십 명으로 본다면 오천 명 미만, 육분의 일에도 못미치는 병력이오."
"그래서 농성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때문에 일단 굴복할 생각이냐고 물으려 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말고 물러가시오!"
벼락같이 꾸짖고는 다시 노래의 가사를 고치고 있었다.
8
시바타 곤로쿠는 결국 노부나가에게 한 마디도 못하고 쫓겨나왔다. 누가 다시
한 번 찾아가 타진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언제 군사회의가 열릴 것인가?
10일 아침 일찍부터 밤중까지 중신들은 노부나가가 회의를 소집할 대를
기다리며 이곳에 모여 있었다. 노부나가의 엉뚱한 성격을 잘 아는 그들이므로
집에 돌아가 자리에 누웠을 때도 언제나 갑옷을 옆에 놓고 말은 잘 먹여놓고
있었다.
그러나 노부나가로부터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때때로 안채에서는 각 지방의
본오도리와 남만인들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하였고, 또 각 지방으로 다니는
장사치들로부터 들은 재미있는 풍속 이야기 따위를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마가와 군사는 물밀듯이 토카이도를 달려오고 있었다. 선발대는 이미
미카와의 치리유에 들이닥치고, 본대는 오카자키에 도착하려 하고 있었다. 가까이
옴에 따라 그 진용은 더욱 오다 쪽 중신들의 마음을 압도했다.
요시모토는 일단 오카자키 성에 들어가 거기서 다음 명령을 내릴 모양이었다.
그러나 오다 군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도리어 오다 군을 섬멸한 다음에 미노의
잇시키, 오미의 사사키, 아사이 등의 호족을 물리치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다는
정보였다.
요시모토가 오카자키에서 출발하면 거기에는 1,400에서 1,5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이하라 모토가게가 수비대장으로 남고, 오카와와 카리야 경계를 위해서는
호리코시 요시히사에게 4,000의 병력을 주어 치리유에 주둔시키고, 2만 5,000의
대군은 그대로 오와리를 향해 진군을 계속한다. 아마도 주요 지점에 잔류시키는
인원을 합한다면 총병력은 4만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사도 님, 귀하밖에는 적임자가 없습니다. 주군에게 요시모토가 오카자키에
들어왔으니 어떻게 할 것인지 확실하게 지시를 받고 오십시오.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할 때가 아닙니다."
시바타 곤로쿠에 이어 히라테 히로히데도 한 마디 했다.
"옳은 말씀이오. 이것은 사도 님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야시 사도가 무섭게 히로히데를 노려보았다.
"나는 사양하겠소. 말을 들어줄 주군이 아니오. 벼락같은 호통의 모처럼의
결심도 흔들리고 맙니다."
"결심이라니?"
"다 같이 죽는다...... 단지 그것뿐이오."
어두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보다도 이코마 데와 님이 적임일 것 같소."
이코마 데와는 토쿠히메와 키묘마루의 생모인 오루이의 오빠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이보다 더한 빈정거림도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데와는 마지못해 승낙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일동은 데와의 뒷모습에
눈길을 던지고 침묵을 지켰다.
오늘도 날씨는 활짝 개어 따가운 햇살 속에서도 시원한 바람이 성곽 안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이것으로 오다 가문도 끝장이 나는가......'
데와의 감회도 이러했다. 마지막으로 가문의 혈통을 남긴다기보다 결국 성이
함락되면 오루이가 낳은 두 아이도 무사하지 못할 터.
`피신할 곳도 없다...... 어차피 내 손으로 목숨을 끊어줄 수밖에......'
무거운 마음으로 걸어가는 데와의 귀에 다시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용과 호랑이
1
활짝 갠 하늘은 그대로인데 오늘 들어 날씨는 갑자기 심한 무더위로 바뀌었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도 없고, 땅 속에서 올라오는 후텁지근한 공기는 무겁기만
했다.
이미 이마무라에 접어들어 쿠츠카케 성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요리모토는
진군에 신중을 기했다. 한 마을을 지날 때마다 척후를 내보내어 백성들의 동향을
살피게 하고 이상이 없다고 판단될 때만 가마를 나가게 했다. 출정에 앞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가 이 부근 백성들이 얼마나 완강한지를 누누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에이로쿠 3년(1560) 5월 18일 (양력 6월 21일), 그 이튿날인 19일 새벽부터
오다 군 최전선에 총공격을 가하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신변의
경계도 엄중했고, 요시모토 자신의 무장에도 전혀 빈틈이 없었다.
중국 촉나라 비단으로 만든 요로이히타타레 안에 갑옷을 입고, 칼은 그가
자랑하는 소조 사모지란 2자 6치 되는 대검, 와키자시는 유서 깊은
마츠쿠라쿄에서 만든 요시히로(칼의 이름)였다. 30관에 가까운 거구로 말을 탈 수
없으므로 금과 은으로 징을 밖아넣은 가마에 올라 유유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남이 보기에는 주위를 압도할 만큼 화려했으나, 그 자신은 괴롭게도
끊임없이 땀을 닦고 있었다.
16일과 17일 이틀 동안은 오카자키 성에 머물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모든
준비를 끝냈다. 오늘은 쿠츠카케 성에 머물면서 내일 새벽부터 시작되는 총공격의
결과를 보아 내일중으로 오타카 성으로 본대를 진격시킬 계획이었다.
선발대는 이미 어제부터 나루미 근처에 진입하여 여러 마을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요시모토는 땀을 닦으면서 때때로 무릎 위에 펼쳐놓은 지도와
군사배치도에 눈길을 모으고는 했다.
동이 트기가 무섭게 먼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가 2,500명의 오카자키 군사를
이끌고 마루네 성채를 습격한다. 마루네의 적장은 백전노장인 사쿠마 다이가쿠
모리시게였다. 모토야스는 아직 젊다. 하지만 그를 보좌하는 노련한 오카자키의
중신들이 설마 패하지는 않을 터.
다음으로 와시즈 성채는 아사히나 야스요시가 2,000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한다.
그곳을 지키는 적장은 오다 겐바 노부히라. 그 역시 노련한 장수. 그러므로
아사히나만이 아니라 미우라 빈고노카미의 병력 3,000을 보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나루미 성은 오카베 모토노부에게 새로운 병력 700명을 증원시켜 굳게 지키게
하고, 쿠츠카케 성은 아사이 마사토시에게 1,500의 병력을 주어 지키게 한다.
그리고 오타카 성의 우도노 나가테루에게는 전황을 보아가며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와 아사히나 야스요시를 돕게 한다.
말하자면 삼단 방어, 이것으로 우선 접경지대에서의 승리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디 카츠라야마 노부사다가 즉시 5,000의 군사를 이끌고 키요스
성으로 전진한다.
항복해도 좋고 농성을 해도 좋으며 또는 노부나가가 진두에 서서 맞아 싸워도
좋다. 비록 카츠라야마의 5,000 군사가 패한다 해도 그 뒤에 있는 본대의 병력
5,000을 합하면 키요스를 공격하는 군사는 자그마치 1만. 아니, 그러는 동안에
마츠다이라, 아사히나, 미우라의 군사도 각각 승리를 거두고 그 여세를 몰아
물밀듯이 키요스를 향해 육박해들어온다......
`농성을 한다 해도 고작 이틀이나 사흘밖에 버티지 못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근시인 니제이 우마노스케가 가마 옆으로 왔다.
"보고 드립니다."
"무슨 일이냐?"
요시모토는 배치도를 둘둘 말면서 조용히 물었다.
2
"이 지역 백성들이 축하의 뜻으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마는......"
우마노스케의 말에 요시모토의 눈이 순간 경계의 빛으로 변했다.
"뭐, 축하하기 위해 사람을...... 굳이 만날 필요 없다. 이름이나 물어
보아라."
"예."
"잠깐, 우마노스케."
"예."
"그 백성들이란 자가 얼른 보기에는 어떻더냐? 수상쩍은, 불온한 모습은
아니더냐?"
"예, 한 사람은 승려, 또 한 사람은 신관,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농부입니다."
"이 일대 세 마을의 대표라 하면서 쌀 열 섬, 술 두 통, 또 오징어와 다시마를
가지고 왔습니다. 순진한 사람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물건을 가져온 자들은?"
"어리석어 보이는 농부의 하인들입니다."
"좋아, 만나보겠다. 데리고 오너라."
가마가 멎었다. 요시모토는 칼을 끌어당겼으나 가마에서 내리지는 않았다.
"덥구나. 부채질 좀 하여라."
"예."
아시가루 두 사람에게 부채질을 시키고 있는데 승려를 선두로 세 사람이 가까이
왔다.
요시모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부노타유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나의
부하들은 절대로 난폭한 짓을 하지 않는다."
세 사람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요시모토가 가마를 세운 곳에는 늙은 소나무가 그늘을 펴고 있었으나, 세
사람이 엎드린 곳은 뜨거운 뙤약볕이 그대로 내리쬐고 있는 말라붙은 흙 위였다.
"그대들은 누구의 지배 아래 있는가? 카리야인가, 치리유인가?"
"예, 지금은 카리야입니다마는 대장님께서 직접 출전하였으니 내일은 알 수
없습니다."
예순이 가까운 승려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전쟁은 곧 끝날 테니."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오다 군도 결코 만만하진 않을 거야. 원군이라도 오면 그리 쉽게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지."
"바로 그 점입니다."
이번에는 농부가 입을 열었다.
"저희들도 이 부근이 격전지가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군이 올
듯한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허어, 어째서?"
"오다 군은 진작부터 키요스에서 농성을 할 모양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오다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농성하는데 필요한 된장을 내놓으라고
우리들한테 와서 허둥대며 설쳐댔습니다."
"뭣이, 된장을 구하러 다닌다고......?"
"예, 부엌에서 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요시모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몇 번이나 갸웃거렸다. 그가 수집한 정보로는
노부나가는 조심성이 많고 경제 사정도 넉넉했다.
"알겠다. 그렇다면 전쟁의 피해는 아주 적을 것 같구나. 알았으니 내 부하에게
이름을 고하고 돌아가 각자 생업에 힘쓰도록 하라. "
"감사합니다. 혹시 저희가 대장님께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으면 이
기회에......"
"괜찮다. 이 지부노타유는 그대들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가신들이 얼마든지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황송합니다."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눈이 빨개져 있는 것은 요시모토의 말이
그들을 얼마나 감격케 만들었나 하는 증거였다.
3
세 사람이 돌아간 뒤 요시모토는 근시에게 냉수를 가져오게 해 맛있게 마셨다.
"약한 장수 밑에 있는 백성들은 정말 가엾어."
쓴웃음을 지으면서 마지막 한 모금을 푸우 하고 칼을 향해 뿜었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돼. 내가 알기로는 이 부근에는 불온한 자들이 틀림없이
숨어 있을 게다. 좋아, 가마를 들어라."
행렬은 다시 쿠츠카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츠다이라 모토야스가 절대로 방심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논과논이 갈라지는 언덕에 이르렀을 때는 언제나 척후를 내보냈다. 이처럼
엄중하게 경계를 폈지만 푸른 논 한가운데서는 하얀 두루미가 한가롭게 먹이를
찾고 있을 뿐 수상한 기색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윽고 멀리 전방에서 가물거리던
평원에 해가 지기 시작했다.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계절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해가 졌는데도
기온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후텁지근하고 바람도 없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본대가 사카이가와를 건너 쿠츠카케에 도착한 것은 주위가 개구리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을 때였다.
쿠츠카케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역참으로 쿄토와 카마쿠라를 연결하는 63개의
역참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나루미까지는 시오 리 남짓, 아츠타까지는 30리로서,
작은 성이기는 하나 호리코시 요시히사의 방비는 여간 엄중하지 않았다.
본진은 사카이가와 부근에 있는 유후쿠 사를 중심으로 성 안팎 일대에서 야영을
하며 밥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요시모토는 왠지 초조해했다. 내일 있을 총공격의
결과에 대한 걱정때문이 아니었다. 전쟁터에 나가면 나날의 생활이 슨푸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불편하고, 또 이 부근에는 그가 아주 싫어하는
모기가 많아 여간 귀찮지 않았다.
"모기향을 피워라."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이런 명령을 내리고, 식사를 끝내고 마지막
작전회의를 열었을 때도 계속 두 사람의 시동에게 모기를 쫓도록 했다.
"내일 드디어 총공격이 시작되는데 말을 타시겠습니까?"
호리코시 요시히사가 물었다.
"오다의 애송이 따위에게."
요시모토는 이렇게 대답했을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굳이 말을 탈 것까지도 없다. 아니 그보다는 너무 살이 쪘기 때문에 허벅지가
스쳐서 상처라도 나면 정말로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진두 지휘를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위험이 없다고 판단되면 계속 가마를 탈 생각이었다.
요시모토는 서원 한가운데에 이부자리를 깔게 하고 그곳에서 잤다. 이때에도
계속 두 명의 시동에게 모기를 쫓게 했는데, 시동이 피곤할 것을 생각하니 자기도
깊은 잠이 들 것 같지 않았다.
"밤이란 것은 도대체 내 성격에 맞지 않아. 낮에는 모기가 없는 것만으로도
여간 다행이 아니야......"
내일이면 드디어 노부나가의 영지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승리할 것이 확실한
전투이니만큼 `백성들의 대표'가 가져온 술 정도는 시동들에게 나누어주어도
되겠지만, 술 냄새가 나면 모기들이 더욱 극성을 부린다.
`이기고 나서 하지.'
이렇게 생각하고 술을 나누어주지 않았더니 그것이 더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모닥불만은 밤새 피워두도록 했으나 여덞 점(오전 2시경)이 지나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요시모토는 여덞 점반(오전 3시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군대가 마루네 성채에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을 시각이었다.
4
요시모토는 일어나자 곧 무장을 서둘렀다. 살이 너무 쪘기 때문에 갑옷의
토시에서부터 정강이싸개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동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갑옷을 입고 띠를 매는 데도 두 사람이 도와주어야만 했다. 다시 땀이
비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촉나라 비단으로 만든 요로이히타타레를 입었으므로
남이 보기에는 아주 장엄했으나 더위가 안으로 파고들어, 자주 입어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정신이 아찔했을 것이 분명하다.
무장한 뒤 중국 궤짝에 넣어온 표범 모피를 깔게 하고 유유히 앉았을 때
전선에서 첫 번째 보고가 들어왔다.
새벽이 되기도 전에 마루네 성채를 공격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군대가
성문을 열고 공격에 나선 적장 사쿠마 모리시게의 용맹으로 고전중이라는
보고였다.
"그까짓 모리시게 따위를. 모토야스에게 일러라,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말라고!"
수면부족이던 요시모토의 눈에 무서운 눈빛이 되살아났다. 모토야스가 위급할
경우에는 오타카 성의 우도노 나가테루에게 즉시 구원하도록 명하고 자신도 바로
쿠츠카케를 나섰다.
때는 다섯 점(오전 8시)이 조금 지나 있었다. 다시 찾아온 `백성 대표'는
만나려 하지도 않고, 본대는 카마쿠라 가도를 서쪽으로 향해 밀물처럼 진군했다.
날씨는 여전히 더웠다. 장마철을 그냥 넘기고 곧바로 무더위가 찾아온 듯 찜통
같은 더위였다.
"하다못해 소나기라도 한 줄기 쏟아졌으면."
"이러다가는 올핸 장마가 없겠어."
"바람이 불지 않아 더욱 미치겠는걸. 여기에 비하면 슨푸의 기후는 얼마나
편해."
대장이 무장을 단단히 하고 있기 때문에 부하들도 모두 갑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오늘도 종종 척후를 내보내 부근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서 전진하는 점은 어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조금도 소홀함이 없는 철저하고 완벽한
진군이었다. 드디어 일행은 오치아이와 아리마츠 사이에 있는 오와키, 속칭
덴가쿠 분지라 불리는 곳에 이르렀다.
불에 구워진 산적들을 만났으니
꼬치에 꿰야 하지 않겠는가, 덴가쿠 분지
후세 사람들이 노래로 표현한 덴가쿠 분지는 아리마츠를 지나18정, 나루미
역참에서 동쪽으로 16정쯤 되는 곳에 있었다. 남쪽 오케하자마까지는 역시
17,8정쯤 떨어져 있었다. 사방이 나직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접어들었을 때
다시 전선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군대가 적에게 맹공을 가해 마침내 사쿠마 모리시게를
비롯하여 적장 일곱 명의 목을 베고 마루네 성채를 완전히 점령했다는 보고였다.
"음, 기어코 해냈구나!"
요시모토는 길가에 가마를 세우고 비로소 미소를 떠올렸다.
"모토야스가 해냈어. 장한 일이야. 곧 돌아가서 모토야스에게 전하여라. 오늘의
전공은 발군이었다고 말이다. 즉시 오타카 성으로 가 군사들을 휴식시키라고."
이렇게 말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오타카 성에 있는 우도노 나가테루는 전력을 다해 키요스를 공격하라고 해라."
오늘 새벽부터 분전한 모토야스의 오카자키 군을 오타카 성에 들여놓고 새로
우도노의 군대로 하여금 즉시 키요스를 공격하게 한다. 이것은 한치의 빈틈도
없는 요시모토의 용병술이었다.
"가마를 들어라. 해가 지기 전에 우리 본대도 오타카 성에 들어가야만 한다."
요시모토가 이렇게 말했을 때 다시 전선에서 온 전령과 `백성 대표'가 한꺼번에
안내를 받아 들어왔다.
때는 넉 점(오전 10시)이 조금 지나 점심때가 되려 하고 있었다......
5
보고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와 나란히 와시즈 성채를 공격한 아사히나
야스요시로부터 온 것이었다.
적장 오다 겐바 노부히라도 선전했으나, 아사히나의 군대도 마츠다이라 군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성문을 불태우고 방책을 부순 다음
성채로 돌격했다. 적은 미처 방어하지 못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시체를 남긴 채
겐바는 키요스 방면으로 패주하고, 성채는 아시히나의 손에 들어왔다는 보고였다.
"장하다. 그러나 모토야스는 적장의 못을 베었는데 야스요시는 놓치고 말았어.
돌아가거든 즉시 추격하라고 일러라."
전령이 돌아가자 요시모토는 지휘용 부채를 펴서 비지땀을 부채질하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모든 일이 조금도 차질 없이 완전히 예상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시작이 좋아. 이대로 가면 노부나가도 내일 중으로 항복하게 될 거야. 자,
그럼 그 백성의 대표란 자들을 만나볼까?"
전투에 승리자가 되면 축하하려는 자들이 줄을 잇는다. 어느 고장에서나 무력한
백성들은 자신을 억제하고 새로운 지배자에게 아첨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10여 명이나 되었다. 고을의 대표가 두 사람의 승려와 한 사람의 신관을 앞세우고
털이 뽑힌 양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나타났다.
"미즈노 시모츠케노카미의 백성들입니다."
부하가 소개하는 말에 요시모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해도 좋다.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할 것이니 너희들은 생업에나
힘쓰도록 하라."
"황송합니다."
50대의 승려가 땅에 이마를 조아리고, 오른쪽에 있던 신관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슨푸의 성주님은 덕이 높으신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여 저희 백성들은
마음으로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여 찹쌀떡 쉰
짐과 주먹밥 이십여 섬을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점심때가 되기도 했으니
웃으면서 받아주십시오."
"아니, 수고스럽게 찹쌀떡과 주먹밥까지...... 정말 고마운 일이로군. 참,
그렇구나, 정오가 다 됐군. 고맙게 받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신관이 고개를 숙여 사례하는 옆에서 부하 한 사람이 목록을 들고 요시모토에게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술안주도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기특한 일인 줄 압니다."
요시모토는 다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때가 가까운 것을 알고 취사의
번거로움을 덜어주려 하다니, 더구나 술안주까지 곁들여서. 재치있는 마을 대표
중 한 사람, 공손하게 말한 사나이는 쿠마의 젊은 도령 타케노우치 나미타로였다.
요시모토는 일행이 물러간 뒤 명했다.
"이 분지에서 점심을 먹도록 하라. 더위에 음식이 쉬 상할 것이니, 백성들이
가져온 것을 모두에게 분배하도록 하라."
그러면서 자기도 가마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걸상을 가져오너라. 나도 그늘에서 잠시 쉬도록 하겠다."
전방의 행진은 이미 멈춰 있었다. 시동이 요시모토를 도와 나무그늘에 걸상을
갖다놓고 있는 동안, 본대의 5,000군사는 분지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시냇물처럼 여기저기 둘러앉아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6
같은 날 이른 아침이었다.
키요스 성 넓은 회의실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모여 있었다. 북쪽 들보 밑에는
크게 나붙은 방문이 정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약간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안채에서는 오늘도 여전히 북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방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다.
"더위가 심하므로 중무장은 필히 삼가도록."
이것이 사람들을 몹시 실망시키기도 하고 노하게도 해, 여러 장수들의 집합이
늦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18일인 어제만 해도 와시즈와 마루네 성채에서는
원군을 보내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는 누가 보기에도 농성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뱃심 좋은 주군이라 해도 오늘은 무슨 지시가 있겠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갑옷차림으로 성에 달려온 것은 어제의 일이었다.
점심때가 가까웠을 무렵 코쇼인 이와무로 시게요시가 종이를 들고 안에서 나왔다.
"드디어 지시가 내린다."
모두들 누가 어느 성문을 지키게 될 것인가 하고 와르르 방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적을 맞아 싸울 전략에 대한 지시는커녕 위와 같은 엉뚱한 내용이 씌여
있었다.
이와무로 시게요시는 작고한 성주가 총애했던 이와무로 부인의 동생이자 카토
즈쇼노스케의 조카였다.
"이봐, 시게요시, 이게 무슨 방문이란 말이냐?"
맨 먼저 하야시 사도가 꾸짖었다.
"저는 모릅니다. 주군의 분부를 따랐을 뿐입니다."
"아무리 주군의 분부라지만, 이건...... 적은 이미 바로 눈앞에까지 육박해왔지
않느냐?"
"그래도 상관없다, 몹시 더우니 이것을 갖다 붙이면 모두 편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으로 편해질 것 같나?"
이렇게 말은 했으나 시게요시를 꾸짖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모두 얼굴을
마주보고 탄식했다. 갑옷을 벗고 바람을 쐬었으나 서늘하기보다는 도리어 오싹한
전율을 느낄 뿐이었다.
더구나 밤이 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홑옷의 옷소매를 걷어올리고 목욕을 하고 난
다음의 시원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는 태평스런 말을 했다.
"오늘은 각자 자기 집에 돌아가 자도록."
화가 나기보다는 얼이 빠졌다. 무슨 필요가 있어서 이렇게 모든 사람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일까.
"혹시 농성...... 죽음을 생각하고, 오늘밤만이라도 가족과 함께 보내며 마지막
작별을 고하라는 위로의 말이 아닐까?"
돌아가는 길에 현관에서 요시다 나이키가 말했다. 그 말에 하야시 사도는 별을
쳐다보며 토해내듯 대답했다.
"어쨌든 멸망이야, 그런 위안의 말은 이미 늦었어."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는 이미 날이 밝았는데도
손으로 꼽을 정도로밖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또 북소리가 들려오는군."
"오늘은 유난히 평화롭군. 지금쯤 마루네 성채에서는 전쟁이 시작되었을 텐데."
그때 어정어정 방에 들어온 것은 키노시타 토키치로였다. 그는 이마에 머리띠를
바짝 두르고, 방문 따위는 보지도 않았다는 듯이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여러분, 마루네의 사쿠마 다이가쿠 님이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군의 총포에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토키치로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다시 북소리가 나는 안채 쪽으로 향했다.
7
토키치로가 들어갔을 때 노부나가는 유유히 금빛 부채를 들고 춤을 추고
있었다.
인간50년
하천에 비하면
덧없는 꿈과 같은 것
자신의 질타하는 목소리는 전쟁터에서 적을 위축시킨다고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것. 그 목소리로 하는 노래가 아침 공기를 뚫고 안채에서 바깥채로, 바깥채에서
정원으로 낭랑하게 퍼져나갔다. 의기양양할 때는 그가 반드시 노래하고 춤추는
<아츠모리>의 한 구절이었다.
토키치로는 히죽 웃고 한쪽 가장자리에 가서 앉았다.
노부나가의 복장은 평소 그대로 홑옷이었는데 그 옆에 노히메와 키묘마루,
토쿠히메가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뒤에 오루이와 나나 부인, 그리고
미유키가 역시 토키치로에게 옆모습을 보이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째아들
citpsakfn와 셋째아들인 산시치마루는 유모에게 안겨 반대쪽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근시는 외팔이인 하세가와 하시스케와 이와무로 시게요시 두 사람뿐.
토키치로에게 흘끗 시선을 보냈다가 곧 노부나가의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인간50년
하천에 비하면
덧없는 꿈과 같은 것
한번 태어나서
죽지 않는 자 그 어디 있을까
소실 중에서 가장 정에 약한 나나 부인은 눈물이 글썽한 채 울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철이 없었고, 노히메는 이미 오늘이 올
것을 각오한 듯 조용히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눈치였다.
노부나가는 노래를 마치고, 북을 두드리던 성밖 북잡이에게 부채를 던지듯이
건내며, 날카로운 소리로 물었다.
"원숭이! 나를 깨우러 왔느냐?"
"그렇습니다."
토키치로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루네는 이미 함락되고 와시즈에서는 고전중이라고 합니다."
노부나가는 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부노타유의 본진은?"
"오늘 아침에 쿠츠카케를 출발하여 오타카 성으로 향하고 있다고...... 이것은
야나다 마사츠나의 부하가 보고한 내용입니다."
노부나가는 싱긋 웃고 연거푸 세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윗통을 홱
벗었다.
"갑옷을 가져와!"
고함지르듯이 말하면서 벌거벗은 배를 탁 쳤다.
세 소실이 깜짝 놀라 서로 마주보았으나, 노히메만은 과연 사이토 도산이
`형제자매 중에서 으뜸'이라 했던 만큼, 무릎을 세우고 당차게 말했다.
"준비해둔 갑옷을 어서 가져오너라."
"예."
두 사람의 근시가 허겁지겁 뛰어나갔다.
"밥!"
노부나가는 또 배를 탁 치고 선 채로 외쳤다.
"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막 아침 식사를 끝낸 참이었기 때문에 오루이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을 때
말석에 있던 미유키가 얼른 일어나려 했다.
"잠깐......"
노히메가 그 미유키를 불러세웠다.
"중요한 출전이니만큼 술과 카치구리를 잊지 말도록."
시녀에게 하듯 엄하게 명했다.
8
갑옷을 가져오자 노부나가는 토키치로조차 놀랄 정도로 재빨리 그것을 입었다.
슨푸의 용은 이미 오와리에 접근해 있었다. 키요스의 호랑이는 치솟는 투지를
억제하고 기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호랑이는 들에 있는 것,
구름 속의 용에게 싸움을 걸지 않고 그가 지상에 내려올 때를 기다렸다가 도약을
개시한다. 적과 아군을 막론하고 농성하는 것처럼 믿게 하면서.
갑옷을 다 입었을 때 노히메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칼은 무엇과 무엇으로?"
"미츠타다와 쿠니시게!"
주고받는 그 말은 불꽃을 튀는 듯했으나, 그 사이에는 한치의 빈틈도 없는
호흡의 일치가 느껴졌다.
"예, 미츠타다는 여기."
노히메가 묻고 노부나가가 대답하는 동안 오른쪽 팔이 없는 하세가와
하시스케가 와키자시인 미츠타다를 내밀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싱긋 웃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쿠니시게는?"
"미리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 쿠니시게도 여기 가져다놓았습니다."
"하하하......"
노부나가는 큰 소리로 웃었다.
"이겼어, 원숭이!"
"그렇습니다."
"하시스케까지도 내 마음을 정확히 읽었어. 이번 전쟁에는 확실히 이겼어!"
애도인 하세베 쿠니시게를 받아 옆에 놓았을 때 미유키가 산보를 가져다
노부나가 앞에 놓았다.
노부나가는 갑옷 궤에는 앉으려고도 하지 않고 선 채로 있었다.
"자, 잔을."
노히메가 얼른 잔을 건네고 자기 손으로 술을 따랐다. 노부나가는 단숨에
들이켜고 이번에는 오루이가 건네는 밥공기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네 아이를
둘러보며 말했다.
"싸움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야. 잘 봐둬라."
역시 꾸짖는 듯한 어조였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키묘마루 뿐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겁을 먹고 유모 곁으로 바싹 다붙었다.
"하하하......"
노부나가는 순식간에 밥 두 공기를 비우고 젓가락을 놓는 것과 투구를 쓰는 것.
"소라고둥을 불어라."
명령을 내리는 것.
"원숭이, 따라와!"
칼을 움켜쥐고 안채에서 달려나가는 것은 모두 동시의 일이었다.
토키치로는 춤을 추듯이 노부나가의 앞장을 섰다.
"말은 질풍을 타실 것이다. 출전하신다. 모두 서둘러라."
고함을 지르면서도 토키치로는 그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 급한 성미로
열흘 가량이나 꾹 참아온 노부나가의 심정을 생각하니, 감동이 번개처럼 온몸을
꿰뚫었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토키치로는 목숨을 걸어도 좋다......'
뒤에서 소라고둥 소리가 계속 들렸다.
"출전이다! 주군은 이미 말에 오르셨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장수들이 당황하며 무장을 갖추고 있을 무렵 노부나가는
벌써 애마인 질풍을 달려 성문에 다다르고 있었다.
질풍 소리
1
노부나가가 나가버린 안채는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정적에 휩싸였다.
오루이도 나나도 그저 망연히 정원에 내리비치는 아침햇살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이 생각되는 듯.
여기가 키요스 성 내전이라는 것도, 자기들이 노부나가의 소실이었다는 것도,
자식을 낳았다는 것도...... 그토록 서둘러 뛰어나가다니 과연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삶인가? 싸움이란? 또 죽음이란?
소실 중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미유키가 가장 애처로웠다. 그녀는 몸에 밴 시녀
시절의 습관으로, 이때도 폭풍이 휩쓸고 간 뒤처리를 해야 한다고 여겨 먹다남은
노부나가의 상을 꼭 끌어안고 몸을 떨고 있었다.
키묘마루는 생모인 오루이 대신 정실인 노히메의 무릎에 선을 얹고 불안한 듯
여러 사람을 둘러보고 있었고, 나머지 어린 두 아이는 유모에게 매달려 겁에 질려
있었다. 토쿠히메만은 어른스럽게 불안과 공포를 숨기고 있었으나 역시 철없는
아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메였다.
잠시 그와 같은 정적이 계속된 뒤 노히메는 눈을 들어 조용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미 그 자리에는 하세가와 하시스케도 이와무로 시게요시도 없었다. 그들 또한
서둘러서 무장을 하고 노부나가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이코마 님."
노히메는 오루이를 보자 야릇한 감정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기는 낳지 못한 노부나가의 아이를 낳았다는 질투 외에, 아이는 낳았지만
제대로 키우지 못할 것이라는 애처로움과 우월감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요?"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오루이보다 나나와 미유키가 깜짝 놀랐다.
"주군의 체통을 생각해서라도 어떤 경우든 의연한 태도를 보여야 해요. 모두
각오가 되어 있을 줄 믿어요."
"어떤 경우라니요?"
노히메의 시녀였던 미유키가 가장 솔직했다. 도움을 청하듯이 두 손을 짚었다.
"말씀해주십시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이번 전쟁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을 거예요."
"첫째는?"
이번에는 오루이가 물었다.
노히메는 얼음처럼 싸늘한 시선으로 다시 한 번 세 사람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이대로 전사하실 경우, 다른 하나는 성에 돌아와 농성하시는 것, 나머지
하나는......"
여기까지 말하고 미소를 떠올렸다.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시는 겁니다."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세 사람만이 아니라
토쿠히메와 키묘마루도 입을 모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승리하고 말인가요?"
"그래, 전쟁에 이기고......"
노히메는 키묘마루의 머리에 한 손을 얹어 쓰다듬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다짐했다.
"전사하셨을 때와 농성하게 되었을 때 내전은 내가 지휘하겠어요. 모두 이의
없겠지요?"
그리고는 다시 키묘마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2
물론 세 사람에게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노히메는 모든 것을 계산한 듯 침착한 태도로 자르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지시를 내리겠어요."
세 사람 모두 다음 말을 기다리는 표정이 되어 무릎걸음으로 조금씩
다가앉았다.
"주군이 전사하셨을 때는......"
"전사하셨을 때는?"
"곧 이 성이 포위될 것이니 그때는 각자 긴 칼을 들고 나가 싸울 것."
나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오루이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이들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노히메는 그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주군은 용맹하기로 유명한 분이시니 내전이 추태를 보인다면 후세의 수치가
됩니다. 그러나 싸움을 한 뒤의 지시는 내리지 않겠어요. 무력하게 항복하지 않고
여자의 의지를 보인 뒤 전사해도 좋고, 몸을 피해도 좋고......"
"마님!"
오루이가 정색을 하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경우 아이들은?"
"아이들은......"
말하다 말고 노히메는 아이드르이 눈길이 일제히 자기한테 쏠리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떠올렸다.
"내가 마지막을 지켜보겠어요."
"그렇다면 성에서 자결을?"
"글쎄, 그것은...... 적이 포위하는 상황을 보고 나서 미노로 피신하게 하는
방법도 있고, 또는 어떤 노신에게 맡기게 될지도 모르고......"
"마님은 그 뒤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유키는 그것이 걱정되는 듯 예전의 시녀로 다시 돌아와 애원하는 표정이었다.
노히메는 미소띤 얼굴을 엄하게 바꾸었다.
"물론 주군의 뒤를 따르겠어요."
그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각자 준비들 하세요."
세 사람은 굳은 표정으로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미리
노히메가 명해 두었던 노부나가의 동정을 알리는 첫 보고자가 허겁지겁 정원으로
뛰어들어왔다. 후지이 마타에몬의 지시로 아시가루 중에서 뽑은 여덟 명이 내전에
오늘의 전황을 알리는 전령의 역할을 지시받고 있었다.
맨 먼저 도착한 것은 타카다 한스케로, 그는 이전에 아츠타의 어부였다.
마타에몬의 딸 야에가 그를 안내해왔다. 야에는 이미 흰무명으로 어깨띠를 만들어
매고 이마에는 남자들이 하는 하치가네를 쓰고 있었다. 손에는 긴 칼을 들고 붉은
손등이 아침 해를 받아 씩씩해 보였다.
노히메는 야에의 모습에 미소를 띠었다.
"주군은 어디로 가셨다고 하느냐?"
정원에 한쪽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는 한스케를 내려다보았다.
"성문을 나서자마자 아츠타로 가라고 명하시고는 곧장 말을 달리셨습니다."
"뒤따르는 장수는?"
"겨우 다섯 명. 이와무로, 하세가와, 사와키, 카토, 그리고 키노시타 토키치로
님이 말고삐를 잡고 번개같이 달려갔습니다."
노히메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뒤따르는 사람이 고작 다섯 명이라니......
대관절 주군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알겠다. 그대도 뒤따라가서 자세히 보고 알리도록."
"예."
한스케가 뛰어나갔다.
"마님."
뒤에 남은 야에가 불렀으나, 아침 해를 얼굴에 받으며 서 있는 노히메는 못
들었는지 조용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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