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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년대의 대중,민중음악

by Casey,Riley 2022.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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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년대의 대중,민중음악

1.대중가요계의 변화
  
  (1) 대마초 파동과 포크의 좌절, 그리고 변질
  
   70년대 중반으로 향하면서 더욱 영향력이 강해지던 대중예술의 신세대,  청년문화세력은 
75.11월 대마초 사건으로 그 발전이 꺾이게 된다. 70년대 초 청년문화 붐은 한편으로는 대
중문화의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면서, 그것이 여전히 대중문화적 체제순응식 사
랑타령과 미국식  자유주의의 흉내내기에 그쳐있는 것에 대해서 대학생과 지식인 사이에는 
10월유신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반동화와 그에 대한 대학생, 지식인들의 거센 반대 움직임을 
호도하기위해 오히려 조장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앞에서 미국의 모돈포크의  진보적 
사회작 측면이 상당히 약화되거나 제거된채 이식된 포크는 그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청년문화가 미국식 히피이즘을 모방한 대마초흡연이나  스트리킹으로 드러
났다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장발,미니스커트, 대마초단속등을 통해 이러한 미국식 자유주의의 흉
내조차 금지하였다.  대마초사건으로 이장희, 이종용,  윤형주, 김세환, 신중현, 김추자등 
인기 음악인들이 구속, 활동정지를 당했다. 김민기의작품은 72년에 이미 음반출고가 중지되
어  있었고, 이 시기에 이르러 <아침이슬>은  공식적으로 금지곡이 되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75.4월 긴급조치4호, 민청학련 사건, 5월 긴급조치 9호, 유신헌법 찬반투표실시등
의 숨막히는상황이었다. 이전과 같은 포크의 발전은 중단되었고 포크는 분위기로나마  가지
고 있었던 반문화적인 요소를 청산하고  기성가요계의 중심부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번
쯤>,<왜불러>등에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송창식은 뽕짝과의결합을  시도하면서 가요계
의 중심부로 진입했고, 김정호, 정종숙도 기성가요계로 진입하였다. 더 이상 김민기의 노래
를 부를 수 없었던 양희은은  <내 꿈을 펼처라>,<한 사람>등 이주원의  작품을 노래하기 시
작하였다. 70년대 초반의 싱싱한 분위기는 많이 거세되면서, 포크 역시 대중화되어 쇼 프로
그램에서통키타가 아닌 밴드의 반주에 맞추어 불리워졌고 기성가요와 결합한 속화된  포크, 
포크록이 생산되었다. 
  김만수<푸른  시절>, 둘 다섯<긴머리 소녀>,<밤배>, 전영 <어디쯤 가고 있을까>, 전영록
<애심>,  버들피리<눈이 큰 아이>등등의 노래는 70년대 초반의 포크보다 참신함이나 음악적 
세련됨에 있어서나 별 발전이 없고  오히려  퇴보하기도 한다. 송창식<토함산>,<그대 있음
에>, 이정선<섬소년>,<뭉게구름>, 정태춘<시인의 마을>,<촛불>, 조동진 <행복한  사람>,<작
은  배>등 몇몇이 그나마포크적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2) 트로트의 부활과 무주공산 가요계
  
   가요계는 그야말로 스타가 없이 무주공산이었다. 남진,나훈아의 열기도 이제시들어졌고, 
최병걸, 이수미, 권태수, 김훈, 최헌, 이은하, 혜은이, 김태곤, 송대관 등등의 가수들이 별 
참신한 경향없이 인기를 유지해가고 있었다. 작품의 경향은 뽕짝, 포크, 스텐다드등이 적당
히 섞인   것 같은 그러한 노래들이었다. 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필두로 그
동안 포크의 열기로 주춤했던 트로트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트로트적인  노래를 록
그룹사운드식으로  연주하는 트로트고고가 유행하였고, 전자악기의 사용이 늘어갔다. 최헌
<오동잎>,<앵두>, 김씨네<연안부두>등
  
  (3) 대학가요제와 록의 제 2세대
  
   이런 분위기에서  대학가요제란 70년대 포크정도의 참신성도  기대하기 힘든것이었다.
   젊은 층이 가요의 주요 수용층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그들의 취향은 달라지고  있는데, 
기성가요계는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다 젊은 감수성에맞는 대중가요를  상업적 
이벤트를  통해 생산해내고자 하는 상업적  의도와, 대마초 파동과 정치적 억압으로 구멍뚫
린 젊은층의 마음을  대신 충족시켜 줄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정치적 배려가 맞아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작품수준은 초기  포크보다 저열했고 사회적 적극성은 고사하고  초기 
포크가  가진 반문화적 분위기도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운 실험보다는 대중적 인기를 고려
하여 수상작이 결정되었고, 회가 거듭할수록 '가수등용문' 같은 상업적  경향은 더더욱 강
화되었다.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의 그나마 새로운  경향은 '록'이었다. 영사운드, 히식
스, 신중현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이들 대학생 록그룹들은 상당한 인기를 모
으며 청소년 문화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샌드페블즈<나 어떡해>, 활주로<탈춤>,  이명훈
<그대로 그롷게>, 옥슨80<불놀이야>등. 또한 김창완 3형제의  산울림은 70년대 후반까지의 
록 1세대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탈피하고 이장희 등의  포크록과도 구별을 짖는 감각적파격
과 지적인 이미지를 몰고 왔다.  <아니벌써>,<내마음에 주단을 깔고>,<아마 늦은 여름이었
을꺼야>,<빨간 풍선>등
   그러나 아직 록은 70년대 포크가 해냈던 정도의 새로운 인식이나 정서를  담아내지는 못
하였고, 단지 질감과 양식의  변화로서만 받아들여졌다. 폭발적인정서의 표출, 강한 리듬과 
큰 음량, 전자악기의 금속적 질감의  사이키델릭한분위기 등 록 고유의 질감과 정서가 돋보
일 뿐이었고,  가사의 중요성은 줄어들엇다. 이러한 록의 열풍은 록의 제2세대라고 부를만
하며,  80년대 초반으로이어진다.
  
  2.민중가요 문화의 성립
  
  (1) 낭만적 학생운동기의 종말과 새로운 출발
  
   75년 긴급조치시대의 시잣과 함께 낭만적 학생운동기는 끝을 맺게 되고,  학생운동은 양
적인 축소와 함께 질적인 심화를 동반하게 된다. 즉,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분리되게 되고, 
운동권은 일반학생대중과는  다른 인식, 다른 생활,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반
성하고, 바꾸고자 노력하며 대학 생활4년동안 일생을 거는 결단을 해야 했다.  이들은 대중
가요에 대해서도 비판적관점을  가지면서 대중가요가 가지는 체제순응성에 대한  비판적 인
식을 가지고 자신의  노래문화를 반성하였으며,  새로운 노래문화를 원하였다. 민중가요는 
바로 요 지점, 즉 학생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시작하였다. 대중가요에  대한비판 내지는 극복
의 전망을 가지고,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향유층, 별도의 존재 방식을  가진 독자적인 노
래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자생적인 노래문화였으며 이러한  민중가요를 
주도하는 집단, 즉 노래운동집단은 존재하지 않앗다. (노래운동, 음악운동이 본격화되는 것
은  84년경에 이르러서이다.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민중가요는 음악운동에 비해 선행하며,  
대중 스스로 만들어 놓은  민중가요문화에 의해 노래운동의 성립과 발전이 추동되어 나아가
는 식이었다) 김민기는 노래에 관한  한 한 개인일 따름이었을 뿐이고, 노래운동집단의 산
실인 서울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는 아직 취미 써클차원의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들 대중
가요 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가 아니라, 기존의 노래를 대중 스스로 선택하여 의미를 부
여하고 구전하는 방식으로형성되었다.
  
  (2) 데모노래와 복음성가류
  
   운동권의 노래로서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60년대  이후 불려왔던 소위 데모노래와 기
타 몇몇의  노래들이었다. <해방가>, <탄아탄아>, <바람이 분다>,<스텐카라친>,<러시아농민
가> 등에 75년 이후 <훌라송>,<정의가>등이 덧붙여진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     같이 죽고 같이 산다 훌라훌라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 /  우리들을 정의파다 훌라훌라  
                         <훌라송> 
  (미국남북전쟁당시 남군의 노래의 선율에 가사를 붙임)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교회운동이 발달하고,교회가 사회운동에서 가지는 비중이 높아
지면서,진보적 교회운동에서 기존의  복음성가,외국의 반전운동,인권운동 노래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이 다시 학생운동권으로 유입된다.(노래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내
일을 위한 노래}도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출간)
  <오, 자유>,<흔들리지   않게>,<우리의 믿음  치솟아>,<보람된   생활>,<이 시계절반은 
나>,<가라 모세>,<춤의 왕>,<미칠 것 같은 이 세상>등등
  
  (3) 김민기에 대한 재해석과 그의 변화
  
   비로소 김민기는 대중가요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김민기의 노래가 가지고  있던 
특유의 장점은 바로 그것이 곧 민중가요의 중요한 자산이 될  근거가 되었다. 대중가요로서
는 더이상 들을 수 없었던 그  노래들을 이제 민중가요로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
회성이 강한  노래들,  미래로의 지향과적극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노래들이 더욱 부각되
었다. 또한 노래에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고 재해석 되었다. <친구>,<아침이슬>등. 
학생운동하는 사람들의 고민과 결단 등으로 해석되었다. 김민기의 작품의 경향은  74년군입
대와 제대, 야학의 체험, 유신말기 상황을 거치면서 변화한다. 또한 작품의  수가 거의 줄
어들게 된다. 지식인적 자의식이 강하게  표출되는 작품이 거의 생산되지 않고  민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외된 계층, 노동자, 농민에  대한 구체적 관심이 높아지고  그 발전된 형상
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또 미래에대한 밝은 지향을  담은 노래가 늘어나고 국악풍의 실험도 
늘어난다. <식구생각>,<소곰땀  흘리흘리>,<상록수>,,천리길>,<밤뱃놀이>,<늙은 군인의  노
래>
   그의 민중지향성의 최고 수준인 노래무용극 <공장의 불빛>(78)은 동일 방직사건에서  힌
트를 얻어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민족극운동의 맥락에 있다. 마당극 운동에서 보자면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지만 민중가요에 있어서는 거의 파격적인 것이었다. 거의 모든 
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록  뮤지컬과같은  작품이었다. 노동자의 삶과 투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이에 따른 가사와 악곡의  사용도 파격적이고 다양하다. 그러나 역시  투쟁장면의  
형상화보다는 개인적인 장면에 많은 할애가 되어있고 형상화도 잘 되어있다.
   
  (4) 김영동과 다른 노래들
  
   60년대 그 맹아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서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성립된 민족극운동은, 
공연예술분야에서는 최초의 움직임이었을 뿐 아니라   연극이라는쟝르의 종합예술적 성격, 
악가무가 결합된 전통예술을  적극적으로  이어받고있다는 특성 등으로 비단 연극뿐 아니라 
춤과 음악까지를 결합한 종합적인 연행예술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따라서  노래분야
에서도 적지  않은 작품적 성과를 남긴다. 이종구, 김영동, 김구한 등은 당시 연극반이었던 
김민기와함께 연행예술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종구의 <마라데스>(  소리굿아
구  삽입음악),<빈산>(김지하 시), 김영동의 <누나의 얼굴.(윤동주 시),개구리 소리>(이오
덕 시)등등의 작품이 있다. 
   그 밖에 국내 음악인들의 사회성 있는 내용의 노래들이 민중가요로 흡수된다.
  <진달래>(이영도 작시, 한태근 작곡),<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작시,  변규백 
작곡),<녹두꽃>(김지하 작시, 조념  작곡)등과 한대수, 양병집, 이연실 등의 사랑노래가 아
닌  포크송들인 <행복의  나라로>,<서울하늘>,<타박네>,<한중가>등과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러기>, 동요 <우리의 소원>, 60년대대중가요 <아다다>,  민요<아리랑>,<진주난봉가>등도 
민중가요의 목록에  올라있었다.
  
  (5) 민중가요의 다양함과 그 미덕
  
   이 시기에 민중가요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에서 우리는 대중들의문화적 저력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대중가요의 획일성과 체제순응성을  거부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노
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노래를 의미의   변경을통해서라도 선택,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민중가요는 대중가요에 비해 매우 다양한 내용과 양식을 가지게 된다.  양
식적으로도 동요, 포크,스텐다드에서 찬송가,민요,군가까지에 이른다. 내용으로서도 사람살
이의 다양한 모습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들어있다.  이러한 다양함은 새로운 노래가 
만들어지기보다는 기존의 노래 중의 몇몇을  선택함으로써 생긴  현상인면도 있으나 이와함
께 대중가요의 사랑타령에 대한 명확한 거부의 산물이기도하다.따라서 사랑타령으로의 획일
성이 사라지면서 그 체제순응성도 극복된다.
   또한 국악과 민요에 대한 의식적인 지향도 눈에 띈다. 기존의 다양한 노래문화를 먹어치
워 민중가요로 소화해내는 대중의 소화력(일제시대 창가와 뽕짝까지 먹어치웠던 것을  생각
해보자)을 통해 기존의 노래양식들은 이러한 전혀 다른 존재방식 속에 들어옴으로써 진보적
시각으로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9. 광주항쟁과 80년대 초반의 민중가요 
  
1. 80년 봄이라는 시기
  
    70년대 후반의 민중가요가 대학의 대다수 대중들에게 확산되고, 민중가요의대중적 기초
가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이 과정에서 노래가 정치적·사회적  영향력, 운동성, 즉 집단적 
정서를 고양하고  공동체의식을 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시기 대학노래써클은 초기 포크송 경향의 취미써클로부터, 80년 봄을 겪으면서 민중가
요 일반을 받아들이고 보급하는 운동성을 띤 써클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2. 80년대 초반 민중가요의 발전과 그 경향
  
  (1) 처음부터 민중가요로 만들어진 노래들이 생산
  
    기존에 만들어진 노래를 취사선택한  것이 아니라, 대학생 스스로의 손으로만들어지고 
입에서 입으로 돌아다니면서 다듬어지고 취사선택된다. 그 이유는이미 70년대까지의 민중가
요와는 다른, 새로운 노래의 경향을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김민기의 포크와 복음성가류 등 
이전까지의 노래로서는 그 요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새로 
만들어지는  작품들은80년 이후 당시 학생대중들의 인식, 정서적 흐름에 가장 적확하게  조
응하는것이었다.
  
  (2) 단조 행진곡의 시대
  
    이 시기의 행진곡들은 단순히 구호를 반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서를 강하게 
담고 있었다.  이는 이들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이 운동을 단순한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의와 용기는 젊음의 생명 /   승리의 깃발은 높이 솟았다
    외쳐라 젊은이여 호국의 정기 / 민족을 이끌고 지켜온 용사
    삼천만 겨레가 뒤를 잇는다 /   아아 자유를 위하여 피 흘린 이 땅
    승리의 여명이 동터 오른다
                         <정의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
  
    이 시기에  노래들은 장조에서 단조로  옮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70년대까지<해방가>, 
<정의가>,  <솟아라> 등 행진곡의 대부분은  장조였고, 복음성가류역시 장조의 노래가 주를 
이루었다.   80년 겨울 <전진가>(일명 <가자 가자>,박치음 작사·작곡)가 나와 삽시간에 전
국에 퍼지면서 단조행진곡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낮은 어둡고 밤은 길어 /      허위와 기만에 지친 형제들
     가자 가자 이 어둠을 뚫고 /   우리 것 우리가 찾으러
                     <전진가> 80년 
  
      어두운 그림자 하늘 가려 /    남 몰래 흐르는 저 비명소리
     (후렴)뜨거운 피 형제들아 /    어서 일어서서 가자 가자 가자
     억압의 발길에 짓밟혀도 /      이대론 못 죽는다 일어서자 
               <전진가2> 1,2절  81년
  
    단조 행진곡은 80년 봄의 죽음과  패배,  절망의 비장함과 이를 딛고 일어서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81년 강주 연행예술운동패('광대'로부터 '신명'으로 이어지는)들과 
황석영, 김종률이 함께 만든 노래극  <빛의 결혼식>의 피날레곡으로 백기완의 미발표  시에 
김종률이 곡을 붙인 것이다.  <빛의 결혼식>은 광주항쟁 때 도청에서 전사한 윤상원 열사의  
영혼결혼식을모델로 한 것이다. 
    <전진하는 새벽>, <전진하는 동지>, <선봉에 서서>
  쏟아지는 빗발 뚫고 오던 무거운 어깨 / 
  말없이 동녁 응시하던 동지의 젖은 눈빛
  이제사 터오니 당신의 깃발로       /   두견으로 외쳐대던 사선의 혈기로
  약속한다 그대를 딛고 전진하는 새벽  / 
  어느새 닥친 조국의 아침 그대를 기억하리라
                             <전진하는 새벽> 82년 
  
  기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선봉에서>, <광주출정가>, <전진하는 새벽>,  <민족해방
가>로  이어지면서 단조행진곡은  우리 민중가요 행진곡의  전형을 이루었다. (80년대 후반 
노동가요로 까지 계승됨)
  선봉에선 내 친구여 너의 찬 손 내가슴에 /  끊일 듯 끊이지 않는 너와 나
  우리 지금 헤어져도 새벽에 다시 만나리 / 바람 부는 저 들판에 횃불을 당기자
             <선봉에서> 1절, 84년경
  
    징소리 울렸다 북소리 울렸다 /        메마른 이강산을 적의 피로 물들이자
    가자 가자 가자 혁명의 전사들아 /     가자 가자 가자 피의 전선으로
    죽음이 두려우랴 삶이 두려우랴 /      죽기로 싸운다면 승리하리라
    가자 가자 가자 혁명의 전사들아 /     가자 가자 가자 피의 전선으로
           <민족해방가> 1절, 85년 경
  
    새로 만들어진 노래뿐 아니라  기존 노래나 악곡을 가져오는 경우에도 주로단조행진곡
의 수요에 맞추어진 것이었다.
    <압록강행진곡> 등 독립군가류와 <출정가>
  
      노래 부르세 즐거운 노래 /       이른 아침 안개를 똟고 
      내일 전선 멀리 떠나갈 /         이 밤을 노래부르세
    (후렴) 사랑하는 조국 /        내일은 멀리 산으로 산으로
      이른 아침에 먼 산을 보니 /    낯 익은 붉은 손수건
  
      멀리 떠나세 깨어일어나 /      장백산맥 넘어 만주로
      쓰러진 전우 영혼을 모아 /     이 밤을 노래 부르세
    <출정가> (러시아 수병의 노래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 81년 경 유행
    복음성가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81년 경)
  <오월> : 미셀 폴나레프(Mischel Poiareff)의 <Gui a tue' grandmaman?>의악곡
  <새 농민가> : 백창우 작사·작곡의 대중가요 <바램>기타 군가(진중가요)의  개사곡류 : 
<전선을 간다>,  <사나이 한목숨>, <전우야 잘 자거라> 등
  
    장미꽃 우거지 아크로 폴리스 /      쇠창살 둘러친 면학의 도서관 
    젊은 넋 숨져간 그 때 그자리 /      피 뿌리던 그 날을 벌서 잊었나
    학우여 들리는가 피 맺힌 목소리 /   학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전선을 간다> 개사곡
  
  
  3. 단조 서정가요의 시작
  
    단조의 비장함은 비단 행진곡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느리고 유장한 이른바서정가요에
서도 단조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비로소 이 시기부터 행진곡과  서정가요의 작품경향이 만
들어진다.
    <친구2>(81년 경), <타는 목마름으로>(82년 경),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민중의 
아버지>, <이 산하에>(문승현 작사,작곡), <노래2>(김남주 시), <사월 그 가슴으로>, <부활
하는 산하>(이성지 작사,작곡), <의연한 산하> 등.
   그 외에 드라마주제가 <예성강>도 불렀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    아 이미 떠났다고
     어두운 죽음의 시절 /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         떠났다고 대답하라
     저 깊은 곳에 영혼의 외침 /  저 험한 곳에 민중의 뼈아픈 고통
     내 작은 이 한몸 역사에 바쳐 / 싸우리라 사랑하리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82년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짤린 하나님 / 우리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하나님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을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엽은 하나님
              <민중의 아버지> 83년
  
    예성강 푸른 물에 바람이 불면 /   말하라 강물이여 여기 젊은 이 사람들
    말하라 강물이여 그대는 알리라 /
   겨레 위해 쓰러져간 그 때 그 자리 그 사람들
    말하라 금남로여 그대는 알리라 / 
    민주 위해 쓰러져간 그 때 그 자리 그 사람들
                     <예성강) 1,3절
  
  
4. 작품경향과 그 의미
  
  (1) 비장함, 희생, 격렬함.
    
   80년 봄의 죽음과 패배, 5공화국 초기의 지독한 억압적 분위기와  잇달은 희생을 겪으면
서도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비장함을 표현하고 있으며,상황이 극단적으므로 정서
는 매우 격렬하다. (치덜리는 노여움,가슴이 빠개지도록 사무지는 이 산하, 목 놓아 통곡) 
- 혁명적 낭만주의 경향을 보임이를 통해  광주항쟁에 대한 패배의식이  극복된다.  <오월
의 노래>, <무등산가>, <오월>, <부서지지 않으리>, <광주출전가>로 학살, 죽음,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으로부터 부활하는 광주, 투쟁하며 승리하는 광주의  이미지로 나아간다. <광주
출정가>가 만들어진 85년은 홍성담의 판화 <대동세상>이 만들어지는 때이기도 하다.
  
  (2) 양식적 변화의 의미
  
    양식적으로 볼 때, 단조 행진곡은 단조  군가(진중군가)의 영향, 단조 서정가요는 단조 
스탠다드와 가곡의 영향을 받고 있다. (물론 단조 진중가요 역시단조 스탠다드의 영향 하에
서 만들어졌다) 단조 서정가요는 <동심초>같은  가곡이나 포크의 일정한 영향도 받았다.
    포크보다 넓은 계층, 연령층에게 호소력있는 스탠다트의 전통을  적극적으로받아들임으
로써 적어도 음악적으로 민중가요는 넓은 계층의 호소력을 지닐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격렬한 절정부, 절절한 비극성이  있고 비극, 슬픔과 눈물이 있으나 뽕짝처럼 과잉되지 
않고 나름의 절제를 해낸다. 즉 포크(복음성가류 포함)에서 단조행진곡과 서정가요로의  변
화는 작품에서 그리는 인간형이 혼자  담담하게 사색하는 지식인에서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격렬하게 고뇌하는 지식인으로  변화한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김민기의 영향력은 상대
적으로 줄어들었다.
  
  
5. 노래운동(음악운동)의 시작과 창작곡들
  
  (1) 활 동
  
    84년 노래모임  새격의 활동 시작과 부정기간행물  {노래}의 발간으로 대학밖에서 본격
적인 노래운동(음악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80년을 계기로 운동성을 획득한 메아리, 한
소리, 석화(노래얼) 등 대학노래써클의 첫   졸업생그룹이었다. (문승현, 김창남, 김보성, 
표신중, 이영미  등)  메아리의 변화는{메아리}라는 악보집의  변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79년에 펴낸 4집에서까지도 각 노래의 분류 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부 회람용처럼 만들어
졌다.  서문에는 '수많은 갈등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예술은  하나의 
구원일 수 있습니다.'로 시작하여 현재의  대중예술이 상업주의에  물들어있어서 대학인의 
감정과 의식을 투명하게 반영한 노래가 없는 실정에서 이 노래책을 냄으로써 '노래를 향한 
지적인 노래를 향한 초석'을 삼고자 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80년대에 낸 5집에서는  '한 시대의 노래는 어떤 형태로든  그것이만들어지고 불
리우는 시대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역사의 산물이다.'로시작하여 '역사의 주체인 민중
들의 의식과 감정을  투명하게 반영한 노래', '사회의 진실'을 담는 노래를 재향한다고 밝
히고 있다. 또한 작품도 1부 데모와 작자 미상의 민중가요류, 2부 <진달래> 등 정식으로 발
표되지 않은 음악인들의 노래, 3부 김민기의 노래, 4부 한대수, 양병집, 돌, 나동민, 김
의철의노래, 5부 메아리 창작곡, 6부 복음성가와 영가류 등으로 분류하여 싣고 있다.
  이 시기에는 이미 형성된 민중가요문화를 정리, 보급하는 일이 가장 우선되었다.   
  84,85년을 경유하면서 연세대, 성균관대 등  많은  대학에 진보적  노래써클이생겨났고, 
보다 다양한 대학 출신들이 노래운동 집단으로 이전해왔으며, 86년경부터는 음악대학  졸업
생들도 노래운동 집단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잘 알려진 데모노래, 김민기, 복음성가류 등을 비롯하여 잘알려지지 않았던  개
인 작품들, 즉 돌, 안혜경, 메아리와  한소리 창작곡,  새롭게만들어 불려지기 시작하는 
노래들을 수집, 편곡, 정리하여 공연과 노래테이프를 통해 보급하였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노래테이프 2집 <또 다시  들을 빼앗겨>(84년), 5집 <민주주의여  만
세>, 6집 <우리가락 좋을시고>(85년), 9집 <그 날이 오면>(86년),11집 <해방의 노래>(87년) 
등이 새벽에서 제작한 테이프이며, 그 시기 중요한민중가요 작품을 수록한  비합법노래테이
프의 전범의 구실을 하였다. 또한  노래책 {임을 위한 행직곡}(학민사}를 편집하였다.  또
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이들 노래와 함께 보급함으로써, 민중가요 작품을 풍부히 하였다.
  그러나 민중가요 작품을  주도하기보다는 자생적인 작품들에 따라가는 셈이었으며, 차차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작품생산력이 고양되었다. 유일한 노래운동 단체인 노래모임  새
벽은 86년 즈음까지는 10명 미만의 작은  집단이었다.
  대학써클의 경우는 정기공연이 가능한 실정이었지만,  대학 밖에서는 아직정기공연과 같
은  형태의 공식적 공연이  가능하지 않았고 또 그럴만한  역량도 되지 않았다.  
  84년 <가지꽃>,<또다시 들을 빼앗겨>,85년 <불꽃>,87년 <신이수일과 심순애>등의 공연 외
에도, 재야단체의 집회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의  공연이 많았다.
  
  (2) 창작품의 경향
  
  70년대 메아리와 한소리의  창작품들은 포크가 주종이었으며, 김민기, 한대수 등의 영향
을 지대하게 받은 작품들이었다. 사랑노래가  아닌 것이 주종을 이루었지만 사랑노래  역시 
많았고, 사회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민중가요에 비해서는 작고 소극적이었으며, 내향적  감
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민중가요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
다.  (특히 행진곡 등 적극적 태도를 가진 작품들)
  이 시기 메아리의 한동헌과 문승현의 작품이 주목할 만하다.
  한동헌 <그루터기>,  <바람씽씽>, <노래>,  <쐬주>, <비료지기>, <신개발지구에서> 등
  문승현 <기도>,  <영산강>, <여행자>, <바다여 바다여>,  <아버지를 찾아간아이>, <찬비
오는 새벽>,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등그 외  김기수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김창
남 <강>, 정종수  <약수 뜨러 가는 길>, 이영웅 <친구> 등
  문승현의 작품형향은 80년을 경유하면서 변화한다.  <오월의 노래>, <닭>등사회현실을 적
극적으로 자신의 작품 속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 밖에 박윤우의 <꽃상여 타고>, <맹
인부부가수>, 김제섭의 <산하>등이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의 창작곡은 노래패들끼리 부르는 레파토리였으며, 전체민중가요의 중
심적 경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들이 만든 노래에는 행직곡은한 편도 없었고,<타는 목마름
으로>와 같은 격력한 감적을 담은 노래도 만들지 못했다.
  84년 노래모임 새벽 창립 후 문승현의  <이 산하에>가 드디어 민중가요의 중심에  진입했
고, 이는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이성지의 <사월그 가슴으로>, <부활하는 
산하> 등 단조 서정가요로 나타난다.  (86년 경부터는 새로운 경향을 주도하기도 함)  그외 
<부서지지 않으리>(김준태 작시,  이미영 작곡), <코카콜라>(곽재구 작시 김제섭 작곡)
  그러나 여전히 행진곡은 만들지 않았으며, 행진곡 열풍에 대한 나름의 우려를 가지고 있
는 등 그러한 경향과는  완전히 일치할 수 없었다.  행직곡을 잘감동적으로 편곡하고 부르
지도 못했다.
  이 시기의 공연양식은  몽다쥬식의 노래공연으로 83년 고대 석화(노래얼)의공연에서부터 
시작하여 84년 <또 다시 들을 빼앗겨>이후 대중화되었다.  노래발표회식이 아닌 단일한 주
제를 가지고 노래,  시와 멘트, 슬라이드, 연극적 장면 등이 몽따쥬식으로 구성됨. (노래극
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88년 이후 집체극의 형태로 발전하기도 하였으나, 연극이
라고는 볼 수 없음)
  
6.민요운동의 시작과 고민
  
    84년 민요연구회  창립으로 민요운동이 본격화된다.   민요운동은 포크를 중심으로 한 
노래써클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노래운동과는 달리 풍물운동처럼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
예술운동의 발전과정에서 형성되어, 전통민요 보급에그치지 않고 창작민요를 발표하기에 이
른다.  <둥당에타령>, <액맥이타령>, <질꼬내기>, <비타령>, <노세소리>, <이어도사나> 등 
전통민요와 <진도아리랑>, <아리랑타령> 등 신민요, 그밖에 동요, 구전가요,  독립군가까지 
계승하고,<돌아가리라>(신경림 시),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신경림 시), <저  놀부 두손에 
떡  들고>(양성우 시, 이상 김용수 작곡), <우리 것이다>(신경림 시, 김석천 작곡), <비야 
비야>(김석천 작사,작곡), <광주천> (박선욱 작시,  이정란작곡)  등의 창작곡을 발표하여 
그동안 노래패에서는 적극적이지 못했던 국악과 민요의 진보적·민중가요적 계승을  하고자 
한 성과가 크다.
  그러나 대중의  자생적인 민중가요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민요의 적극적 
계승은 쉽게 대중화되지  않았으며, 민중가요가 점점 대중화됨에 따라 아이러니칼하게도 민
요운동의 세는 점점  약해졌다.  노래운동에서는민요운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계승, 수용
하지 못했으며, 일반 대중보다도 더민요적·국악적  감수성이 적은 실정이었다.  대중성을 
위해서 서양음악적, 대중음악적 측면을 받아들이면  노래운동과 다른 독자적인 민요운동의 
영역이 없어지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7. 그 밖의 노래들
  
  * 돌
  김민기의 작품 창작이 뜸해진 대신, 기층민중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포크로담아내는 돌
의  작품이 뒤를 이어 생산되었다.  <갈 수 없는  고향>, <터>,<땅>, <가지꽃>, <소>, <내
일이면 간다네>, <못  생긴 얼굴> 등 기층민중, 소외받은 사람들의 삶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노래들로  대체로김민기의 <식구생각>을 연상시키는 동요의 분위기이며, 5
음계의 단순  소박함이 특징이다.
  
  * 김의철  
    <군중의 함성>, <이 땅의 축복 위하여>, <불행아> 등 70년대 말부터
  
  * 안혜경 
    70년대 <민주>, <허재비>, <황혼>, <까치길>, 80년대 <침묵의 봄>, <작업장타령> 
  
  * 박용범(박치음) 
    <전진가> 외에 <산처일기>, <땅의 사람들> 
  
  * 그 외 
    <이 세상 사는 동안>, <작업장>, <서울길>, 구전가요 <해야 솟아라>, <고아>, 대중가요 
<에레나로 불리운 순희> 등
  
  
  10. 80년대 중반의 변화와 
       기타의 노래들
  
  1. 84년과 85년이라는 시기 
    - '시의 시대'에서 '소설의 시대'로
  
  단조 행진곡을 중심으로  단조스탠다드풍의 서정가요가 보족적 위치를 차지한 80년대 초 
민중가요의  작품 경향은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민중가요의 변화를 보이는  이 시기는 비단  민중가요뿐  아니라 민족극, 민족문학 등 
진보적 예술운동 진영의 여러 쟝르에서 동시적으로 작품 경향의 변화를 보였던 시기라는 점
에서 주목을 요한다.
  
  (1) 84년과 85년
  
    84년 이른바 유화국면,  자율화국면의 시작으로, 80년 패배의 충격으로부터학생운동을 
비롯한 민민운동이 일정한 세력의  회복을 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각 이념써클의 조직력 
회복으로 운동권의 수가 증가하며 시위의 회수와 강도가 높아진다거나, 학도호국단에  학생
운동이 침투한다거나  대학축제를  대동놀이 등 연행예술운동의  성과로 채운다거나 등등)   
제 5공화국 정권의 일보후퇴가 이루어짐으로써 제적생의 복교와 총학생회의 부활, 대학  내
의  대중집회 허용, 상주 기관원 철수(과연 실지로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등이 이루어지고, 이른바 재야단체라고 불리는   민민운동단체 발족하게 된다. (83년 가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발족(의장 김근태), 84년 4월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발족을  시발로, 84
년에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미술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
의회], [한국출판운동협의회], [민주교육운동협의회] 등등 수많은 단체들이  만들어짐. 85
년 3월 이러한 민민운동단체들이 협의체적 연합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발족)이 시기에 단
조행진곡, 마당극, 시 등 80년대 초반의 민족예술의 성과가 최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들 
작품들은 격정적이며 주장이 단순하고 뚜렷하다.
   주장이 뚜렷하다는 것은 타도 대상이 분명하며 이에 대한  타도 의지가 강하며, 이 이외
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생각을 할여유가 없었으며 할 필요
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타도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여지가 없는 당위였다.  
    <전진가>:음악적으로 2마디가  기본이며 8마디에서  모든 노래가 끝난다.
  가사도 '가자' '나가자' '단결하세'식으로 단순한 의미가 기본을 이루는 노래도 많다.
  그러나 85년 하반기부터 정부측의 탄압이  강화됨에  따라  다시 제적생, 구속자 늘어나
고, 84년까지 이루어낸  한 단계의 발전을  딛고 새로운 단계의 발전이 요구되고 있었으나 
그 방향은 불투명했고,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단계의방향을 모색하는 일종의 과도기의 모습
이었다.  따라서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와 정서를 갖게 된다.  
  가자, 나가자 식의 단순한 주장이 더 이상 호소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열정을 가라앉히
고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태도가 싹트며 이를 바탕으로 한 보다 복잡하고 
다기한 논리를 요구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앞으로의 운동방향을 둘러싸고 비합법문건들을 
통한 격렬한 논리투쟁, 사상투쟁이  벌러지는 것도 이 때이다. 
  (학생운동의 각 패밀리가 완성, 정돈되는 것은 83,84년 즈음이며,  이 시기에초보적인 정
파적 움직임으로 발전하기 시작함)
  진달래, 오월, 붉은 꽃잎 등의 시어들만으로도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알 수  있었고 
감동스러웠던  시의 시대가 가고 소설, 특히 장편소설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에 선 굵은  집단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마당극에 대한 비판이 시
작된다.
  
  
  2. 민중가요의 작품 경향 변화
  
  (1) 행진곡 중심에서 서정가요 중심으로
  
  대중의 정서가 이렇게 변화하므로  단순하고 선 굵은 정서의 행진곡보다는보다 개인적이
고 복잡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서정가요를 더 요구하게 된다.  물론 행진곡은 계속 만
들어졌으나 인기를 주도하지는 못한다.
  <이 산하에>는 빠르게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85년에 들어서면서 서서히큰 인기를 얻었
다.  이  뒤를 이어 <부활하는 산하>(이성지 작사,작곡),<의연한 산하>(작자 미상), <노래 
2>(김남주 시, 김경주 작곡) 등 서정가요 계열의긴 노래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이러한 서정가요의 인기는 대학 노래팀들이 84,85년간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데에  그 
한 원인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은 공연을 통한 서정가요의 집중적인 보급을 이루어
낸다.
  
  (2) 행진곡의 길이가 길어짐
  
    이 시기는 말이 많아지는 시기, 논리가 복잡해지는 시기로 <전진하는 오월>, <민족해방
가> 등의 작품이 나오게 된다.
  
  
  3. 장조 서정가요의 시작
  
  단조 행진곡과 단조 서정가요에서  드러나는 격정적 감정을 자제하고, 보다절제되고 이성
적이려 하는 태도를 가진 장조 서정가요  작품이  나오고 인기를얻기 시작한다.   <그날이 
오면>(85년, 문승현 작사,작곡)이 86년에 들어서면서 널리 불려지고, 80년대 장조 서정가요
의 시발을 이룬다.
  대체적인 특징은 의미단위가 길고,  낭만적  격정성을 가라앉힌 고전적인 차분한 화성과 
선율 전개한다는 것이다.  단조 서정가요가 60년대 단조스탠다드의 전통을 받고 있다면 이
들 장조 서정가요는 찬송가와  가곡, 포크의 영향을강하게 받고 있다.  올갠 반주나 혼성합
창의 편곡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격정을 속에 감춘 절제된 감정을 운용하고, 매우 부르기 어렵다.
  문승현의 또 하나의 역작  <이 산하에>로 민중가요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이 노래로부터 민중가요의 경향을 미리 짚고 선도하는 데에 이르게 되며, 그 뒤를 이어 <벗
이여 해방이 온다>(86년,  이성지 작사,작곡 -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모곡, 추모곡이면서도 
장조)가 발표된다.
  
  (4) 개사곡(改詞曲)의 급격한 퇴조
  
  학생운동의 상승이 뚜렷했던 83년부터 대학에서 개사곡 붐이 인다.
  그 이전의 노동자들의  개사곡(노래가사 바꿔부르기)이 주로 노동자들이 부를 민중가요의 
부재로 인해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것이거나,노동자 교육용  프로그램(즉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기, 주체적으로 사고하기 등을 위한)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대학생들
의 개사곡은 주로 반전의 재치를 중심으로 하는 풍자적인 개사곡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 
<개사곡의 구조와 사회적 기능>참고 -
    * <00대는 짭새땅>, <아, 대한민국> 등이 대표적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 돈 있으면 돈 있으면 돈 있으면)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어  (빽   있으면  빽   있으면  빽   있으면)                 
 (하략)
              <아, 대한민국> 개사곡
  
   어쩌다 빌려온 양키놈 돈에 우리 공장 문 닫아 버렸네
  어쩌다 빌려온 쪽발이 돈에 우리들은 갈 곳이 없네
  사장님께 할 말이 있는데 왜 이리 용기가 없을까
  월급은 안 줘도 수출은 안돼도 원리금 상환 꼬박꼬박
  개판 개판 한국경제 개판인가 봐
           <어쩌다 마주친 그대> 개사곡
  
  즉 기존에 익숙하게 알고 있는  노래를 가져와서 가사의 몇 부분을  바꿈으로써, 기존의 
노래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새로운 의미  사이의 부조화로 인한충돌과 긴장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노래장난으로 바로 그 부조화와 충돌이 반전형 개사곡의 요체이다. (따라서 악곡과 
가사의 부조화 때문에  노래의 질이떨어진다는 식의 평가는 잘못된 것임)
  개사곡은 주도적인 노래는 아닐지라도, 일반 민중가요에서는 채워주지 못하는 희극성, 풍
자의 재리를 만끽하는 노래로서 독자적인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자고 새면 새로운 개
사곡이 나왔던 83,84년을 지나 85년부터는 노래공연을 위한 의도적인 창작을 제외하고서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대여 날유혹하지 말아요> 등) 자생적이고 풍자적인 개사곡의 창작
은 잘 이루어지지않는다.  이는 풍자라는 미적 원리가 당시의 변화된 정서 속에서 호소력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풍자는 풍자주체가 상승하고 풍자대상이 쇠퇴하는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 가능해진다.  완전히 쇠퇴하지 않았으며 비록 지금은  풍자주체에 비해 힘이 강하고 
지배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머지 않아 쇠퇴해가리라는 흐름을  감지하는 사람들이 에돌아
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비판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그러한 동적인 흐름
이 계속되다가  정체가이루어지는 시기, 풍자주체의 상승이나 풍자대상의 하강이 두드러지
지  않는시기이므로 풍자는 호소력을 잃는다.  풍자적인 마당극의 쇠퇴도 이와 관련있다.
  
  
3. 기층민중의 삶을 다룬 작품과  노동자가 부르는 민
      중가요
  
  (1) 70년대 이래 연민주의적 시선
  
  지식인이 만들어낸 노동자나 농민의 삶의 모습은 가난하고 슬프며 무력하다.
  <서울로 가는 길>, <공장의 불빛>(김민기),  <황혼>, <까치길>(안혜경),  <하얀 비행기>
(김제섭), <약수 뜨러 가는 길>(정종수), 돌의 <소>,  <갈 수 없는 고향>, <땅> 등
  이는 지식인들이 여태까지  한 번도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기층민중, 소외
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의  시작을 뜻한다.  이러한연민은 못 사는 사람들에 
대한 양심의 발로이다.
  그들의 삶의 어려움을 설명하려고 들면서도  직설적인 설명을 피하려고 형상화한  흔적이 
역력한데,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모르고 있는 대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도 이들 노래는 노동자들의 즐겨부르는 노래와는 거리가 있다.
  이런 노래의 양식은 대체로 포크이며, 포크적 질감과 태도를 가진다.
  
  (2) 극복, 탈피의 노력
  
  그러나 실제의 노동자들과 접하면서 지식인들이  책에서 읽고 머리속에서 그려온  민중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탈피의  노력을 한다. 
  민요풍의 노래가 가지고  있는 민중성과 역동성(직설성에서 오는)을 빌어온작품들을 발표
하게 되는데 -  <작업장 타령>(안혜경, 84년  경), <서울길2>(김지하 시, 오용록 작곡, 82
년) - 이는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예술운동과관련있음.
    그러나 여전히 설명적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하늘 나는 저 새는 너의 날개짓으로 / 푸른 하늘 날으면서 맘껏 자유 누리는데
  기계에 매어달린 못난 이내 몸뚱이는 / 고달픈 몸짓만 되풀이하는구나 
  어허야어허
    (후렴) 누구를 원망해랴 못 배워 땅만파는 
           우리 부모 원망하랴 어허야어허
  
  가난해서 못 배운 설움만도 뼈 아픈데 / 걸핏하면 교양없다 무식하다 쥐어박고
  부모님이 나에게 지어주신 이름 있건마는 / 공순이 공돌이 개 부른듯 불러대네  
  어허야 어허 (후렴)
  
  작업장에 들어서니 형무소가 따로 없네 / 일하는 자 시키는 자 너무나도 다르구나
  이 세상 모든 것을 이내 손이 만들건만 / 이 세상 모든 것 이내 손길 거부하네
    어허야 어허 (후렴)
  
  85년 이후 노동자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보하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지고대개는 노동자
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 <귀례 이야기>(이성지 작사,작곡), <깜빡잠>, <우리 이야기>(김보성 작사,작곡 -  어
린이용의 <우리이야기>를 개사한 형태인데,  노동자용의 이 노래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 <밥,자유,평등,평화>(김보성,김용수), <대결>(박노해 시, 김보성): 노래로 하는 라이
프 스토리 <살아온 이야기>(김용수 정리)
    오늘도 시다판에 엎드려 깜박잠 자는데 / 
    고향집 뒷산길 들국화 이리도 예뻤나
    잠깨지 말았으면 엄마도 봐야하는데 / 
    그러나 언니의 호통소리 엄마도 봐야하는데
                   <깜빡잠> 1절
  
    (후렴) 라라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라 힘찬 투쟁
           라라라라라라 라라라 민주노조 만만세
    아늑한 사장실 책상을 마구 치며 노조를 노조를 포기하라모두 개새끼들 불순분자  길길
이 날뛰는 저들은 
    아아 기업주와 노동자는 마치 사슴과 돼지들처럼 동등할 수는 없대요
    묵묵히 일하고 시키는 대로 따르고 주는 대로 받고 항상 복종함이 안정사회 이루는 노
동자 도리라지만
    인간이란 똑같이 존중하며 서로서로 이낄 때 큰 힘됨을 우린 몸으로 안다
    너흰 돈과 무력 권력만이 전지전능함을 믿지만 
    우린 온 세상이 평등과 사랑 일치될 것을 믿는다. 솟구쳐갈수록 뜨겁게 다가오는 숙명
의 대결을 어찌한단 말이냐
    너희들이 짓밣고 깨뜨릴수록 우린 더욱더 힘차게
    우린 인간으로 평등으로 민주주의로 통일로
    솟구쳐갈수록 뜨겁게 다가오는 숙명의 대결을 어찌한단 말이냐  <대결>
  
    내가 어렸을 적 엄마가 말했어요 / 
    서울에 가서 돈 벌어 갖고 시골에 와서 시집가라고 // 나는 서울이 너무나 좋아 중학교 
졸업하고 / 서울로 갔답니다.//서울 와서 처음 다니던 공장은 / 
    너무도 힘들고 고달픈데 한달 월급은 삼만  오천원 //나는 서울이 너무나 싫어  공장이 
너무나 무서워 / 엄마에게 돌아갔어요 //엄마 엄마 / 서울은 너무나 싫어 공장은 너무나 무
서워 / 다시는 공장에 안 갈거라고 //
    집에 와서 있다 오빠와 싸웠어요 /
    그런 후에 가정부로 가서 오개월 동안 일을 했었죠 //나는 공순이란 놀림이 싫어 공장
이 너무나 무서워 /노동자가 안되겠다고 //엄마 엄마 /  그러나 알겠어요 우리가 노동자 된  
것 /우리들 모두의 운명이라고 /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우리 앞에 있을지라도 / 
    굳센 용기 힘을 모아 싸우러 가자 //
    악의 무리 물리치는 노동자가 됩시다
                        <살아온 이야기>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노래에  비해  구체성이 확보되었고, 투쟁적인 노래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으나, 역시 노동자의  일상을 힘들면서도 역동적이고 힘차며, 
비참함도 직설적이면서  질기디질긴 생명력의 느낌(<노동자의 생활>)을 가지지 못하고 <깜
빡잠>처럼 어리고 곱고 연약하여 무력하다.  또한 여전히 양식은 포크에 묶여있고, 그 포크
의 연약함과 비생활성의영향을 받고있다.
  
    내 손 거쳐 만든 물건 백화점에 가득해도
    셋방살이 내 집에는 재고품도 하나 없네
    어쩌다가 이 내 몸은 노동자로 태어나서
    거친 세상 풍랑 속에서 멸시 천대 받는구나
     <노동자의 생활> 1절
                  (노동자 장남숙 시)
  
    이들 노래의 몇몇 곡들은 노동교회 등을 통해 보급되기도 하였지만,  역시대학으로 많
이 퍼져나갔다. 본격적인 노동가요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반면 노동자들이 좋아한 노래들은  <사노라면>과 <불나비>이다.  이들 노래는 대중가요 
중 보다 대중적인(그런 의미에서 통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식을 차용했으며, 특히 <불나
비>는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대학가요제 풍의 속화된 록의 형태이다.
    이런 노래들은 설명적이지 않으면서도  노동자의 감수성에 맞았던 것이다.
    일상적 낙관적이고 역동적으로 힘들지만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하고있다.(투쟁
이 일상화 될 수 없었던 시절이므로 어차피 일상의 표현이 중요함)표현은 직설적이며 외향
적이다.  이러한 낙관이 근거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있겠지만, 실상은 몸을 움직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의 표현
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러한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은  무지향적이다.  <불나비>에서 야
간의 지향성을 보이는 듯하지만, 역시 '불나비'라는 비유가 패배주의의 냄새를 지니고 있다
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 외에 80년대 초부터 불려졌던 <민족해방가>가 있다.
  
  
7. 86년 이후 학생운동의 대중화와 편안한 노래들
  
  학생운동의 대중화가 이루어져 써클의  양적 팽창과 단과대나 과를  중심으로 한 조직화
가 진전된다. 그리하여 지하운동가 같은 비장하고 긴장된 분위기에서 보다 밝고 편안한 대
중적 분위기가 만들어고 자연수러운 양적 성장의 귀결이기도 하면서 대중노선의 관철이기도 
한다.
  84년 경에 만들어진 <광야에서>(문대현 작사,작곡)이 뒤늦게 인기를 끌게되고, <솔아, 푸
르른 솔아>(안치환 작사,작곡)의 인기 등 편안한 노래가 유행하게 된다.
  기득권 포기나 생명을 바침   같은 극단적인 결단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비장함이 없다.  
감옥에 가 있는 동지나 우리 민족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도 그렇게 지하운동가 같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지 않는다.
  이 시기 반미 내용의 노래들은  단순히 새  날, 해방의 세상, 인간다운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또  일반적인 민주화의 지향과는 다른,  반미와 분단극복을 명확하게 내세운 
노래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전의 통일지향의 <터>같은 노래와 달리 주 타도대상으로서의 미
제국주의를 설정하고 반미의 내용성를 두드러지게 드러낸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특정  
정파와의 관련이 있다.   <반전반핵가>(박치음 작사,작곡),  <반미출정가>(윤민석 작사,작
곡), <민족해방가2>
  
  제국의 발톱이 이 강토 이 산하를 / 할퀴고 간 상처에 성조기만 나부껴
  민족의 생존이 핵폭풍 전야에 섰다 / 이 땅의 양심들이 어깨 걸고 나가자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이 목숨 다 바쳐 / 해방의 함성으로 가열찬 투쟁으로
  반전 반핵 양키 고우 홈!
                    <반전반핵가>
  
  그러나 아직 통일  지향의 내용의 형상화는 잘  이루어지지 않으며, 대학생노래에 있어서 
정파에 따른 노래의  분리 현상이 시작된다.  편안한 노래, 반미·통일지향의 노래와 정파
에 따른 노래의 분리 현상 등은 이후 대학생의 노래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11. 80년대 초중반의 대중가요 
  
1. 대중가요계의 제 3의 안정기와 수퍼스타 조용필
  
  ⑴ 가요계의 천하통일, 조용필
  
  70년대는 포크의 등장으로 기존 가요계의 주된 흐름인 트로트와 스탠다드와는 분리된  새
로운 경향을 만들어나가고,  70년대 후반 록이  거기에 또 하나의경향을 보태는 등 새로운 
경향들이 어느 것  하나도 뚜렷한 주도성을 잡지 못한 채 솟아오르는 시기이다.
  79년에 조용필은 이전까지의 가요의 성과를  종합하고 총괄함은 물론 그 수준을 한 단계 
높이면서 수퍼스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창 밖의 여자>, <비련>, <못찾겠다  꾀꼬리>, 
<촛불>, <물망초>, <꽃바람> 등 그의 재기를 성공시킨  노래들은 모든 계층에 고루 대중적
이면서 선율적이며 느낌이 풍부한 단조스탠다드와 강한 리듬·음색의 록을 결합시킨 노래들
이다.  또한 조용필은 다양한 쟝르의  곡을 통해 거의 전연령층·전계층에 호소력을  발휘
한다.  조용필의 노래들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이 다양한 쟝르에걸쳐 분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록에 가까운 노래들 : 
    <단발머리>, <나는 너 좋아> 등
    # 정통 스태다드 : 
    <돌아오지 않는 강>,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꽃순이를 아시나요>, <정> 등
    # 정통 트로트 : 
    데뷔곡 <돌아와요 부산항에>,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에야> 등#  포크적·가
곡적 분위기의 노래 : <친구여>
    # 민요 :   <한오백년>, <강원도 아리랑> 등 
  
  이렇게 다양한 쟝르를 소화한 가수가 소화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스탠다드와 록을 결합
한 노래들을 성공시킴으로써 80년대 전반 가요계의 판도를 결정지었고, 이러한  경향에 따
라 김수철, 전영록,  윤시내, 이은하, 이선희  등 가요계의 대중적 히트곡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80년대 가요계는 70년대와는 달리  수퍼스타 조용필을 중심으로 일정한  안정기를 
맞게 된다.
  
  ⑵ 최고의 상품으로서의 조용필
  
  거의 전 연령층, 전 계층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구매자를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용필은 가요계에서 최대이윤을 창출하는 
가장 우수한 상품이며, 그 상품적 우수성을 확보하기 위해 작위적인 노력이 가해진다.  즉 
계획적인 매니지먼트에 의해  그다양성이 유지된다.  한 가수가 한 시기에 자연스럽게  하
나의 경향을 가지게되거나,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
라,  작품경향과  이미지가 최대  이윤창출이라는 원리에 따라 조정되는 것이다.
  다양한  경향의 노래가  동시에  실린 음반이  기획되고 (1집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와  <돌아와요 부산항에>, 3집 <고추잠자리>와 <물망초>, <미워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
레야>가 동시에 실림), 다양한 이미지로 부를 작품의 경향과 그 무대, 관객의 취향에 따라 
의상 등을 선택하여 변신해가며 적재적소에 등장한다.  
  또한  대중가요의 경향  변화에  따라 작품의 경향을 바꾸어 나간다.  예를들어 장조트로
트가 유행할 때에는 <허공>, 발라드가 유행할  때에는 <그대 발길이 머무는 것에>, 김현식
의 <내 사랑 내 곁에>가 유행할 때는 <꿈> 등을 발표한다.
  팬클럽의 결성  등을 통해 인기의 조직적 관리를 시도하는 등  본격적인 가요산업의 시대
를 열어나가게 된다. 그 뒤를 이어 전영록, 이선희가 나타난다.
  
  ⑶ 가요 수용층으로서의 10대
  
  조용필의 등장이 확인시켜준  것은 10대 -대학생이 아닌 중고등학생 - 특히중학생이 매우 
중요한  가요수용층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극성스러운10대  팬들이 본격적으로  등
장 (70년대 어니언스나 이수만에 대한  호응과는그 질이 다르다).- 10대가 가요의 주요 구
매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소형 오디오의 대중적  보급과 경제적 여유로 10대의 음반 구매
가 가능해졌다는 것과관련이 있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80년대부터 텔레비젼을 중심으로 하는 가요계의 중심적흐름은 10대를 
겨냥한 작품으로 흐르게 된다. 이러한 속에서 10대들은 대중음악의 주요한 소비자, 음반 구
매층이며, 팬클럽과 박수부대 등으로 '이것이 대세다'라는 느낌을 주게 만드는  오피니언리
더의 구실을 하는 계층이 된다.
  가요계의 흐름이 이러한 경향을 나타내게 되면서 전영록, 구창모, 김수철,이선희 등  10
대를 겨냥한 가수들의 대거 등장한다.  이시기 가사를 살펴보면  수용층인 10대를 겨냥하여 
유아적 발상과  표현이많이 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을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깨끗이 지워야 하니까','아직은 사랑을 몰라 몰라', '못 찾겠다 꾀꼬리',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슬퍼지지', '내 사랑 울보', '만나 사랑한게 잘못이었나봐', '그대 우나봐
','...했잖아','...했어요' 등
  
  ⑷ 록의 제2세대의 전성기와 록의 대중화
  
  조용필의 등장은 록의 대중화를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대학가요제 출신을 비
롯한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대거 등장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록의 제2세대가 전성기
를 맞게 된다. - 당시 {영  11} 같은  청소년 쇼프로그램은 이들이  빠지면 이루어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송골배 <어쩌다 마주친  그대>,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 
  김수철 <못다핀  꽃 한송이>, <왜 모르시나>, <나두야 간다>, <젊은 그대>등
  
  2. 록의 대중화 시대의 인간형과 세계 인식
  
    포크와는 달리 록은  반문화적 분위기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고 처음부터 대중가요의 내
용적 관행을 따르면서 대중적으로 시작하였다. 록의 제2세대에 이르러서도 록 특유의  세계
인식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비극적 사랑노래의 내용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
다. 특히 가사를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는음악양식과 질감, 기법을 중심으로 노래를  발전시
킨다.
    록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절규'이다.  여태까지의 가요에서는  없었던 남성의 고음과 
째지는 듯한 전자악기의 음향, 폭발적인 드럼, 강한 리듬들이 사용된다. 대개 고음부와 저
음부가 나뉘며, 클라이맥스인 고음부는 맨 앞의  저음부보다는 완전히 한 옥타브 높은 음높
이에서 진행된다. 김수철의 <못 다핀 꽃한송이>, <모르시나>, 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 등
을 보면 한 옥타브  위로의도발적인 절규와  같은 상승이 있다. 저음부와 고음부의 분리와 
고음부의 절규는 이  시기부터는 대중화되어서 <잊혀진 계절> 같은 팝발라드 계열의 작품에
서도 흔히 드러난다. 조용필의 <촛불>, <비련> 등은 아예  고음부의 절규부터시작하는 강렬
함을 보인다.
    이러한 노래들의 표현을 보면 이성적이지 않고, 머리보다는 몸으로 먼저 다가온다.  지
적이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대중적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도볼 수 있다.
    슬픔의 표현이 직설적이며 도발적이다. (직설적이라는  점에서는  트로트와일치하며 도
발적이라는 점에서는 다름) 비극의 원인을 자신의 탓(운명이든 못난 탓이든 여자이기  때문
이든)으로 돌리는 자학적 심리와,  그 비극으로 자신을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트로트와 흡사
하다. 그러나 록의 인간형은  자폐적이며,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는 그것을 말해준다. 자신과 
세계 사이에 일정한  벽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세계가 세상 전체보다도 중요하며  
자신의내적 세계에 의해 세상 전체를 규정되고 좌지우지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록
에서의 자신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것은 곧 세상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같은 극단적인 분위
기를 만들어낸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창밖의 여자> 
  
  그 파괴적이고 도발적이며  극단적 분위기의 절규는 자신을 가장  절절하게드러내는 것이
며, 록의 아름다움의 핵심이 된다.  도저히 절규하지   않고서는견딜 수 없는 인간의 자기 
회복, 인간성의 발현과 같은 것이기도 하며,  그것은 그만큼 이 세게가 절규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낼  정도로 어둡고  힘든 곳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성의 발현이 파괴적일 정도로 극단적이라는 것에 그 비극성과 불건강성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가사에 드러나는 경우는 그리  흔치않고, 악
곡과의 결합을  통한 정서, 질감으로 드러난다.
  가사 내용은 복잡한 내면심리를 드러낸다.  특히 팝발라드의 산문적이고 서술적인 가사들
에서 더욱 그러하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네가 떠나가서  슬프다' 정도의 단순한  논리
보다 훨씬 복잡하다. 사랑이든 이별이든 사람의 움직임이나 외적 사물로의 정서의 응집 (가
을의 풍경이라든지, 새의 울음이라든지)보다는 한 순간의 느낌이나 분위기,감각의 포착, 복
잡한 내면 심리의 포착으로 기울고 있는 경향이 보인다.
  
    사랑함에 세심했던 나의 마음이 /  그렇게도 그대에겐 구속이었소
    믿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  어저다가 헤어지는 이유가 됐소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외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뿐인데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  남이 아닌 남이 되어 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희나리> 
    (추제호 작사·작곡, 구창모 노래)
  
    아직은 사랑을 몰라 몰라 /  그래도 우리는 좋아 좋아
    알 수 없는 너의 고백이 /  내 마음을 뛰게 하지만
    그런 것은 너무 어려워 싫어 (후략)
                <나는 너 좋아> 
    (김순곤 작사, 조용필 작곡·노래)
  
    이러한 경향은  80년대 말로 가면 갈수록 강화된다.
  
  
3. 팝발라드, 댄스뮤직, 트로트의 세 양식의 태동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가요의 양식은 팝발라드, 댄스뮤직,트로트의 세 양식으로  정리
·정립된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80년대 초반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그 정립이 거의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⑴ 팝발라드의 태동
  
    스탠다드의 전틍을 가지고 있으면서 포크와 블루스의 세련된 분위기를 수용하는 작품도 
많다.  보다 다양하고 화려한  화성을 구사하면서 주로 피아노가 주도하는 반주로 고급스러
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장조가 주도적이고, 가사는 체언으로 시상을 응축하기보다는  용
언으로 서술적으로 마무리하여 말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주는 경향이 주도한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로부터 시작하여(박건호,이범희 콤비의 신선함), 이선희 <J에게>, 
최성수 <남남>, 이광조<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문세<난아직  모르잖아요>,  <그녀
의  웃음소리뿐> 등으로 이어진다.
  
  ⑵ 댄스뮤직의 본격화
  
  가창력보다는  용모와 춤을 중심으로 하는  비디오형 가수가 등장하게 된다. 남자가수는 
10대를 겨냥, 여자가수는 20대 이상 성인을 겨냥한다.
  록의 대중화와 고고, 디스코로 이어지는 대중춤의 유행이 바탕이 된다.
  나미 <빙글빙글>,<유혹하지 말아요>,<보이네> 등  건반주자 김명곤의 세련된편곡이  돋보
임.   뒤를  이어 김완선, 박남정, 소방차 등의 등장.
  
  ⑶ 트로트의 유지와 장조 트로트의 부활
  
    주로 여자 트로트가수가 주도한다. 정통  트로트 분위기의 김연자, 스탠다드와  결합한  
특이한 창법의 김수희, 심수봉등이 등장하게 된다. 퇴행적 비극성을 보다 직설적인  어법으
로 노래하면서 목이 메는 듯한 창법이나 휴성의 호흡을 심하게 섞어 간드러지면서도 애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창법으로 노래한다.
  뒤를 이어 주현미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같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다.
  첫째, {쌍쌍파티}라는  뽕짝메들리의 대중적 인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뽕짝메들
리는 익숙한 노래를 매우 단순하고 일률적인 기계적 편곡에 담아서, 동일한 템포의 리듬으
로 끊임없이 들려주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노래 하나하나가 아니라 쉬지 않고 동일한 기계
적 리듬의 노래가 흘러나와 시간을 채운다는 점이다. 주로 운전기사를 중심으로 하여 일을   
하면서 노래를 듣는 성인층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성인용 춤곡의 구실도 한다. (남자와 여
자가  번갈아 부르는 '쌍쌍파티'라는 발상 자체가 이러한 성인용 춤곡의 분위기를  만들어 
냄)
  둘째, 장조 트로트의 부활.  
  {쌍쌍파티}의  성공으로 데뷔한 주현미의 첫 신곡 <비 내리는 영동교>를 통해 단조트로트
가 주도한 흐름을  깨고 장조  트로트의 시대를 열고, 이러한 흐름은  <신사동  그 사람>,  
<잠깐만>으로 이어진다.
  셋째, 나훈아식 창법을  계승한 꺽는 목을 남용하는  목소리를 트로트의 대표적 창법으로 
굳히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현철, 문희옥  등으로 이어지면서 두드러진다.(김수희,심수봉을  거치면서 
주현미에 이르기가지 트로트는 주로 과장된  창법, 목소리 사운드의 변화로 신선함을  유지
함)
  넷째,  이전의  트로트보다 단순해지고 표현은  유치해졌으며 (주현미의 <비내리는 영동
교>, 현철<사랑은 나비인가 봐>,문희옥의 {사투리 디스코}등), 훨씬 중년의  향락적 분위기
가 두드러진다. (주현미  <신사동 그 사람>, 문희옥<사랑의 거리> 등
  즉, 이는  더이상 트로트에 진지한 삶의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4. 가요계의 다양화와 언더그라운드
  
    텔레비젼에 연연하지 않고 한때의 인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면서,개성있는작품세계를 
추구하는 대중음악인이 늘어난다.  70년대 초 포크와 록의 후예들이지만 70년대의 작품세계
와  많이 다르다.
    팝 세대가 40대에 이르면서 그만큼 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가요인들이 양적, 질
적으로 축적되고, 수용층의 취향도 다양해진 것이다. 이들은 가요계의 중심적 흐름과는  조
금 거리가 있지만 콘서트와 음반판매를  통해 자신의음악세계를 고집하면서 소수의 고정수
용층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한다.
    혹은 한때 텔레비젼에 출연하는 인기가수였으나 그 유행이 지나가버린  싱어송라이터들
이 그 창작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계속 변화시키면서 언더그라운드로, 혹은 영화
음악 등으로 음악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⑴ 포크 계열
  
    가사를 중시하는 특성 때문에  대개 이  계열의  언더그라운들들은  '음유시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포크 계열의 언더그라운드는 80년대에  들어서서는이미 그  나이가 모두 30
대를 넘어버렸기 때문에, 포크 특유의 지적이고 맑고순수한 세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70년
대 초반과 같은 철없을 정도의 순수함은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으로  칩거하
여 세상을 관조하는 소극적분위기를 풍기거나(입을 게으르게 움직이는 창법이 일반적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상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거나 대중가요의 일반적 관행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하는 경향을 보인다.
  * 조동진 : 72년 데뷔 후  7년만에 1집 음반을  냄. (79년) <작은  배>, <행복한 사람>, 
     <나뭇잎 사이로> 도시적 세련미와 사색적인 분위기.  
  * 정태춘 : <촛불>,<시인의  마을>이 실린 1집 이후에는  거의 음반으로만 활동을 해옴.   
     포크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스탠다드를 많이 이어받고 있음. 투박함 속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함.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서망부가> 등  
  * 해바라기 : 대중적 음악어법을 구사. 트로트적 분위기가 나는 스탠다드와결합한  <모두
     가 사랑이예요> 등으로부터 록의 분위기를 내는  <어서 말을 해>까지. 내용도 사랑노
     래가 주를 이루고 있다.    
  * 신형원 (돌) : 민중가요권의 작곡자 돌의 작품.88년 이전까지는 민중가요와의 관계
     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었고  그저 특색있는 언더그라운드 포크가수로 알려져 있었음.  
      <불씨>, <유리벽>, <개똥벌레> 
  * 송창식 : 대곡 분위기의 작품까지 소화했던 최전성기를 넘어서고, 80년대초 작곡자로서 
     <밀양  머슴 아리랑>, 김연자의  <당신은> 같은 대중적인 곡을만드는 경험을 하면서, 
     87년 <참새의 하루>,<담배가게 아가씨> 등에서 보통사람의 일상을 낙관적으로  긍정하
     는 작품을 발표. 국악에 대한 관심도 보임(진보성보다는 국악의 음색을  연구하는 정
     도).
  
  ⑵ 블루스, 록 계열, 록의 제 3세대
  
  * 김창완 : 동요를 비롯하여 명랑하고 순진하면서도 참신한 작품을 발표.초기 산울림보다
     는 대중의  취향을 파악한 듯 참신함을 강조하면서도 대중적임.   <창문 너머 어렴풋
     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청춘>, <안녕>* 김수철의 영화음악, 춤음악. 국악과의 결합 
     시도  
  * 신촌블루스 : 이정선을 중심으로 함. 이정선은 포크4인조 해바라기로부터 시작하여  한
     영애를 데리고 블루스로 변화하였고,블루스를 중심으로한 그룹 풍선을 만들어서  이광
     조, 엄인호 등과 활동한 성과를 바탕으로 이정선, 한영애,김현식, 엄인호, 정서용, 60
     년대말 소울가수 박인수 등과 신촌블루스로 활동.   정통 블루스.  
  * 들국화 : 전인권을 중심으로함. 우리나라 록의 최고 단계를 보여줌  음악적 세련됨. 가
     사에서도 록적인 인식태도도 이미  체질화된 듯, 이전보다 강하게 록적인 세계인식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자폐적인  인간형, 주관적 세
     계의 절대화. <오후만 있던 일요일>,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순간의 시간을 중시하
     는 상대적 시간관념 등.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      나보고 그대는 얘기하지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래 아마난 세상을 모르나 봐 /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났나 봐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      그것만이 내세상
  하지만 후횐 없지 찾아 헤맨 모든 꿈 /    그것만이 내세상 / 
  그것만이 내세상
              <그것만이 내 세상>
                   (최성원 작사·작곡)
  
    기나긴 하루  지나고 대지 위에  어둠
  이 오늘 오늘은 끝남을 말해주는데
    오늘의 공허를  메우지 못해 또  내일
  로 미뤄야겠네 (후략)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조덕환 작사·작곡)
  
    * 하드록·헤비메탈 그룹 : 백두산, 시나위, 부활, H2O등.
  
  이들 언더그라운드는 우리나라 가요를 다양화하며  과감한 시도를 통해  가요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하는 구실을 하지만, 반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가요계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우리나라의 대중가요와 우리나라 대중의 음악적 감수
성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고  미국문화 추종적인  분위기를 가장 짙게 가지고 있는 부류이
기도 하다.
  
5. 가요의 미국화 경향의 강화와 우리말 파괴
  
    조용필에 이르러 기존의 가요의 흐름과 록의 결합이 안정적이며,  신촌블루스나 들국화
에 이르면 미국의 이른바 정통 블루스, 정통 록의 정착과  재생산이 완결되는 것으로 보인
다. 이른바 트로트에서 단조스탠다드로 내려왔던  한국가요티가 전혀 나지 않는 완전한 미
국화가 이루어진다. 이들에 이르면  3화음체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미국식 재즈, 블루스,록
에서 사용하는 불협류의 화음들이 자유자재로 구사된다. 또한 발음이 미국식 음운으로 교체
되고, 우리말의 억양과는 다른 액센트와 우리말의 흐흡을 고려하지 않은 악곡을 많이 사용
한다. 심지어 일부러 우리말 가사를 들이지 않게 발음하는 경우까지도 있다.
   (혜은이의 <작은숙녀>)
  이런 현상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이런  것을 쓰는 것이 오히려 세련된  것이라는 
느낌까지 주기도 한다. (마치 영어나 독불어의 직역투 문장이 지적인 문장인  것같은 느낌
을 주는  것처럼)
    예) / 날  기억 / 하는 사람 / 들을 지금 모두
    나중에는 아예  영어로 된 가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우리말 파괴는 비단 대중음악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8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음악과의 동질화가 진행될수록, 포크보다는 록이,  
미국음악과 더욱 동질적인 세련된 언더그라운드일수록 더욱 심하다.
  
  
  12. 80년대 말 노동가요    
    
1. 87년 항쟁과 80년대말 민중가요의 급성장
  
  87·88년부터 시작하여 90·91년 경에 마무리되는 이 시기에 민중가요의 두개의 대중화가 
실현되는데 하나는 대학생·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노동자대중을 비롯한 기층
민중으로까지 확산되었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조직된 대중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
가  대중문화 공간의 미조직 중간계층으로까지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예 :노찾사,노래마
을)  또한 음악운동집단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향이 다양화되었
다는 점도이 시기의 성과로써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90년 {민족음악협의회}의 창립이가능
해지게 되었다.
  
2. 노동가요의 의의
  
  ⑴ 근대 음악사, 노래사 이래  최초로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진보적 노래문화, 노래운
동(음악운동)을 기층민중으로 대중화하는 데 성공.
    - 물론 여기에는  7·8·9투쟁과 함께 이루어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기층민중의 각 
계급계층운동이 광범위한 대중운동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에 크게 힘 입은 것이다.
    - 이 시기 이러한 기층민중으로의 대중화를 성공시킨 것은 노래와  연극으로민족예술운
동의 중요한 성과로 이야기될 수 있다.
  
  ⑵ 노동자 대중의  경험과 인식, 정서 등을 담은 작품적 성과를 남김으로써민중가요의 자
산을 풍성하게 함.
  
3.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 기간의 노래
  
  ⑴ 이 시기 주로 불렸던 노래들의 경향
  
  87년 이전까지는 노동자 대중이 대중적으로 노래를  부를 공간이 없었고  작품의 생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등 노동가요라는  독자적인  노래문화가만들어질 여건이 이루어지
지 않았다. 따라서 갑작스럽게 시작된 노동자대투쟁에서 광범위한 투쟁공간에서 불려질  노
동가요가 제대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의 민중가요는 학생과 지식인 중심의 민중가
요였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도 소시민적 지식인적 티를 벗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이 시기 노동자대중에게 대중화될 만한 작품이 되지 못했다.
  이 시기  불렸던 노래들은 주로 행진곡풍의  노래들로는 <임을 위한 행진곡>,<늙은  군인
의  노래>,<노동해방가>,<광주출전가>,<진군가>,<동지> 등이 있다.
  그 외에 대중가요들이 재해석되어 불리기도 하고, 개사곡이 만들어져  노래의 공백을 조
금이나마 메우고자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택시노조에서는 <노란 샤스의 사나이>, 광산노
조에서는 군가인 <전선을 간다>를 개사한 <막장을간다>등이 있었다.
  또한가지  이시기는 투쟁기였으므로 <사노라면>,<불나비>와  같은 일상적인분위기의 노래
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불리워지지 않았다.
  
  ⑵ 이 시기에 광주  지역의 노래가 많이 불려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대학생의 노래들 중에서도 주로 서울지역에서 만들어졌던  <껍데기를벗고서>,<전진
하는  새벽>,<선봉에  서서>,<선봉에서>,<민족해방가>등은 상대적으로 많이 불려지지 않았
다. 이러한 이유는 이들 노래들이 가지는  인식의 태도나 정서의 미묘한 질적 차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즉 서울지역에서  만들어진 대학생 작품들의 경향을 보면 대중보다 앞서나가
는 사람, 선봉, 전위의 인식을 주로 담고 있다. 그래서 전위적 분위기를 경쟁적으로 만들어
내었고 ('가자 가자 가자  혁명의 전사들아 /가자  가자 가자 피의 전선으로' 등의 관념적 
과격성)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전위가 가지는 남다른 부담감 때문에 생기는 자기부정의 괴로
움이나 피 토하며 통곡하는 듯한 특유의 비극적 정서가 있다.
  즉 이러한 정서는 역사의 당위적 흐름과 자신의  약심에 따라  어려운  삶을살고자 하는 
지식인들이 갖게 되는 치열함의 소산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불건
강한 복합심리를 포함한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노동자들에게 불려졌던 노래들은 이와는 달리, 투쟁적이면서도  전위적이
지 않고, 지식인 전위가 만들어내는  관념적 과격성이나 자기부정의 불필요한 긴장감  같은 
것이 없고, 감정의 표현이 외향적이며 편안하다.
  그리고 광주의 작품들에 이러한 대중적 특성이 일찍이 있었다.
  
4. <파업가>,<노동조합가> 노동가요의 시작
  
  ⑴ 88년 가을 김호철  <파업가>,<노동조합가>의 발표
  
  발표와 함께 전국적인 빠른 확산과 호응으로 88년  말, 89년 초부터는 새로운 노동가요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동지여 내가 있다>(마산),<딸들아 일어나라>,<단결투쟁가>,<진짜노동자2>,<해방역에  닿
을 때까지>,<노조연대가>,<총파업가>(이상 김호철) 등등
  
  ⑵ 이전과는 다른 작품의 질
  
  이 시기의 노래들은 80년이래 민중가요의  단조행진곡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87년 이래
의 노동자의 대중투쟁의 경험과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투쟁을  관념속의 당위가 아니라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구체적이며 생생한  표현하고 있다. (전 시대의 작품들과 비교해보자) 
'피 묻은 작업복은 파업의 깃발이다',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 두쪽되도 지킨다', '너
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이러한 표현들 속에는 지식인의 관념적 과격성이나 지식인적 기반의 허약함을 부정하고자 
하는 복잡한 비극적 정서가 없고 투쟁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낙관성과 역동성, 자
신에 대한 건강한 자긍심이 담겨있다. 또한  좀 더 살펴보면 투쟁으로 자신의 몫을  찾아야 
하며, 그것은 역사적 당위라는 초보적계급의식의 형성에 뒷받침되는  것이기도 하다.  
  음악적으로는  80년대 중반의  섬세함이 사라지고 마치 80년대 초반의 행진곡을 연상시키
는 선 굵고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음악적인 퇴보가 아니라 오히려 음악적
인 단순화와 더불어 새로운 질의 내용성을  담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질적 변화를 이루어냈
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⑶ 행진곡의 주도
  
    이 시기에 노동가요가 행진곡풍의 투쟁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80년대 중반의 노동자 
소재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연민주의  극복한  <단순조립공>,<짤린 손가락>,<공장 가는 
길>(이상 김호철),<나의 이야기>,<친구야>,<서울에서 살꺼야>(이상 안혜경)등의 일상가요들
이 있었다. 하지만 이 당시  민주노조가 없는 상태에서 노동조건 개선투쟁,  임금인상투쟁, 
민주노조설립투쟁 등 투쟁이 막바로 벌어졌기  때문에,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이란 
이러한  투쟁공간밖에 없었다는 것이 행진곡풍의 가요들이 주로 불렸던 큰 이유일  것이다.
  
  ⑷ [혜성같이 나타난 김호철]의 존재가 말해주는 몇 가지 사실
  
  아쉽게도 이전까지의 노래운동  집단들이 새로운 노동가요의   생산에 완전히무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87년의 노동가요 부재의 공백은 빨리 메워지지않았고 김호철이라는  개인
을 부각시켰다.  마산  등에서 몇 편의 작품이 만들어졌으나 그렇게 그 수요를 다 채울 수
는 없었고 상대적으로 그 공백을  메운김호철의 존재는 노동가요를  대표하는 것으로 부각
되었다.
  지식인인 김호철이 당시 노동자  대중에게 호응을 받는 노동가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험이 많이 작용했다. 즉 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체험·인식·정서·
인식태도·예술적 관행 등을 익힐  수 있었다.
  이후 89년 하반기에 들어서서 노동자 대상의 활동(창작,공연과 노래교육)을전담하는 노동
가요 전문패가 만들어지게 된다. (노동자노래단, 예울림,  소리새벽 등)
  
5. 89년 하반기부터 90년까지의 변화
  
  ⑴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의 시작.
  
  아직까지는 행진곡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민주노조의 설립으로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일상공간이 창출되었고,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라는 새로운 종류의 노래가  필요해
졌다.
  
  ⑵ 일상가요
  
  <포장마차>,<사랑과 행복>,<진짜 노동자3>,<참사랑>,<부모님께>(이상 김호철),<내가 왕이
다>,<서울에서 평양까지>(이상 윤민석),<거꾸로 돌아가는 세상>,<달동네 부푼 꿈>(이상  이
건),<내 사랑 민주노조>,<우리들의 사랑은> (이상 조민하) 등.
  이들 노래들은 노동자의 일상 체험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일상적  낙관성과역동성을 획득
한 것들이다. 이러한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은  투쟁적 낙관성·역동성과 상호 전화하고 
변증법적 상생하는 관계를 갖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노래들은 여태까지 민중가요에서  잘 
쓰지 않았던 통속적 대중가요의  어법을 사용하면서  이를 민중가요 안으로 끌어들이게 된
다. 이들 노래들이 통속적대중가요의 관행을 빌어오고있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데, 이는 '익숙함의  대중성'에  기대어 대중가요의 불건강성에 말려들어간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는 여태까지 민중가요가 어떻게 기존의 음악양식들을 계승·혁신해왔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기 때문인듯 하다 대중가요 어법을문제삼고 있지만 실상 지식인
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의 어법 (예를 들어 포크), 역시 불건강한 고급음악의 어법으로 쓰
여진 작품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오로지 저학력의 대중들이 향유해 왔던 노래들에 대해
서만 비판하는 것은지식인의 노래적 취향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며  통속적 대중가요의 어
법을사용하는 노래 중 성공한 것(민중음악의 자산으로 획득하게 된 것)과 실패한것의  구분
없이 모두 비판하는 것 역시 그 비판이  원칙없는 취향에 근거하고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⑶ 서정가요
  
    <끝내 살리라>,<열사의 그  뜻대로>,<꽃다지>,<골리앗의 그림자>(이상 김호철),<열사가 
전사에게>(최준 작사,김성민 작곡)
    주로 단조 스탠다드를 받아들인 단조 서정가요의 전통을 따른다. 그러나 이전의 민중가
요에  비해 훨씬 통속적 가요의 냄새를 풍기는 작품이 많다.
  
  ⑷  행진곡(투쟁가)의 다양화  -  전술적 투쟁가의 등장
  
  전술가요란 그 시기 투쟁과제를 담은 노래로 대표적으로 <전노협 진군가>,<구속동지 구출
가>,<무노동무임금을 자본가에게>(이상 김호철),<연대투쟁가>(윤민석)등이 있다.
  
6. 91년부터의 변화와 새로운 모색
  
  ⑴ 91년 상반기 노동가요의 약화
  
    이전과 같은 엄청난 호응을 동반한 인기곡이 없고 행진곡의  퇴조가 두드러진다. 특히 
전술적 행진곡의 인기가 떨어지고 일상가요도  시들해진다. 공권력투입, 대량구속, 자본철
수, 공장이전, 생산감축과 감원 등 노동운동 탄압으로노조가 현저하게 약화되는 등  대중운
동의 정체 내지는  침체가  뚜렷해지면서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이럴 때 '단결','투쟁','총파업' 등의 주장을 담은 선굵은 투쟁가는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고, 또한 가볍고 즐거운 낙관적 일상가요를 부르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려운시
기였다.  이 시기 상대적으로 노래들은 <철의  노동자>,<단결주쟁가>,<진짜노동자2>등 투쟁
의 주장보다는 '멋있는 노동자'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는 노래들이 많이 불렸고, 선율적이고 
선이 가는 노래로 이례적으로 <나의 사랑 전노협>이 많이 불렸다.  
  
  ⑵ 91년 하반기부터의 의도적 생산
  
  ① 슬픔과 절망에 대한 위로,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삶,지나간 2·3년동안의투쟁을 반추하
   며 성숙하게 어려운 시기를 버텨가는 의지적인 노동자의 모습을부각시키는 노래   
  - <희망의  노래>, <누가 나에게 이길을>, <다시 한번 투사가 되어>,  <사람이 태어나>  
  ② 이전의 투쟁가를 2·3년간의 투쟁을 담은 느낌으로 편곡하는 시도 
  - <단결투쟁가> (꽃다지)  
  ③ 이전보다 더 개인의 느낌이 강해지고 개인의  내면을 깊숙이 표현한   섬세한 감정의  
   노래들이 이후 큰  호응을 얻게됨   
  -  <민들레처럼>,  <동지들앞에  나의 삶은>, <전화카드 한장>(이상 조민하),<편지3> (윤
   민석 작사, 김신애 작곡),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유인혁) 등.
  
  
  13. 80년대말 대중문화공간의 민중가요
  
  1. 대중문화공간으로의 대중화
  
  ⑴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모임 새벽에서 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만들게 되는데, 이는  노래팀으로서
의 모임이 따로 생기거나 대중 문화공간에서의  장기적인 활동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일과
성 음반취입이었다. 민중가요 중 심의를 통과하면서 음반을 내는 것이 중요했고,  <그루터
기>,<바람씽씽>,<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등 70년대  메아리의 창작곡을 중심으로 만들게
된다.
  [노.찾.사]라는 팀이 만들어진 때는 87년이다. 87년 6월 투쟁을  겪으면서 합법적인 공개
공연이 가능하리라는 판단 속에서, 당시  새벽을 중심으로 노래운동 선배들이 모여 대중문
화 공간에서의 합법적인 활동을 전담하는 팀을 만들기로 하고 의도적으로 [새벽]에서  분리
시켜 10월 공연이후 팀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노.찾.사]는 기간 축적되어온 민중가
요 중 대중문화 공간으로의 확산이 가능한 작품을 선별하여 재편곡·발표하는데,  대표적으
로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잠들지  않는 남도> <그날이 오면>같은 당시 새벽의 
창작곡이면서 대학가의 인기곡들, 예전에 발표되었으나 당시 민중가요의 주요한 작품경향에
서는 좀 벗어나 있어서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그러나  공연용으로서 좋은 노래들, [한
소리] [메아리] 등 대학노래패의 창작곡들, 새벽의 <사계> <귀례이야기>  <대결> <이 산하
에>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평등의 땅에> <뒤돌아 보아도>,  그 밖에 <녹두꽃> <진달래>   
<작업장> <오월  이야기><제발제발> 등 기간의 풍부한 노래운동의 자산을 바탕으로 활발한 
공연활동과음반제작을 통해 민중가요의 성과를 대중문화공간을 통해 발표하여  공식화시키
고, 미조직 중간계급에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초기의 
[노.찾.사]는 10여년동안 쌓아온 민중가요의 성과, 거기에 담겨있는 대학생·노동자 등  조
직대중의 진보성, 그들의 인식과  정서·질감등을  대중문화의 공간에서 소화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도 그것을 따라잡는 것이 중요한 활동의 근거이자 과제였다.  
  대체로  성공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때로 이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소시민적이라는 비
판을 받았고 또 종종 대중문화적 소시민적 특성,기교주의,감상주의,정태적이고 나른하며 소
극적인 분위기 등이 드러나기도 했다. 90년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감상주의적이면서 나른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해졌으나  [노.찾.사]의 신곡중심(<그리운 이름>,<사랑노래>,<영원
한 노동자> 등)으로 공연이 운영되어 민중가요 일반, 특히 80년대 후반 당시의 민중가요를   
정리하여 보급하는 역할, 민중가요 전체의  대중문화의 창구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을 보인
다.
  
  ⑵ 노래마을
  
   대중가요 작곡자 출신인 백창우를 중심으로 하여 84년  [노래마을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낸후 성남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활동을 하다가   [노.찾.사]의 대중적 성공에 힘입어 90년 
이후 대중문화  공간에서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주로  백창우의 창작곡과 [노.찾.사]
에서 소홀히했던 어린이들의 노래들 그리고 80년대 말 민중가요의 인기곡 등을 바탕으로 자
리를 잡게된다. 대표곡으로는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줌 될 수 있다면>, 
<아기염소>,<백두산>,<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등이 있다.
  
  ⑶ 개인가수들
  
   [노.찾.사]의 성공으로 진보적인 대중가요 가수들이 [노.찾.사]가 확보해 놓은 공간  주
변에 포진하게 되면서 대중가요권의  진보진영으로 나름의  영역을확보하게된다.  
  이전까지는 좀 특이한 가수로만 알려져 있던 신형원, 돌, 서유석, 김광석등이 진보적인 
가수로서의 색깔을 가지게 되었고, {겨레의  노래}와 같은  행사도 가능해지게 되었다.  
  또한 노래운동권 출신으로 안치환, 정세현, 권진원 등이 개인가수로의  진출을 이루어내
기도 한다. 이들은 노래운동권으로부터 대중가요권 사이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있게 되는데 
아쉬운 것은 아직 노래운동권  출신자들은 대중문화권에서 완전한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있다.
  특이할 만한 것은 정태춘의 경우  인기가수급의 대중가요 가수로부터 완전히  음악운동의 
중심지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는 작품이 대중과의 적극적인 접촉으로 얼마나 급격하게  자기
극복을 하며 예술적 경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보여준다.  정태춘은 자신의 작품 세계의 
특성을 살리면서 민중가요에서는 보기 드문 음유시와도 같은 긴 가사의 노래들을  만들어내
어 민중가요의 자산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아  대한민국>,<배반의 병아리>, <우리들  세
상>,<일어나라 열사여> 등
  
2. [새벽]의 변화와 고민 
  
   87년까지 많은  창작과 비합법테이프 제작 등으로 민중가요의 흐름에 발맞춰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대중으로의 대중화를 위해  활동하던 [새벽]은 88년에 들어오면서 작품의 
경향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너를 위하여>,<선언1·2>,<오월의 노래3>,<노동자
의  노래>,<불꽃이  되어> (이상  88년),<철의  기지>(89년),<바리케이트를 치며>(90년) 등
의 작품을 보면 알  수있듯이 유럽 고급음악적  분위기와 유럽 혁명가의 질감이 많이 나타
난다. 이러한 변화의 동기는 취미써클 출신인 노래운동 모임의 뿌리깊은 아마추어성의 극복
과 음악적 전문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하게된다. 그러나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
만) 인류의 보편적 문화유산을 계승해야  한다는 취지의이러한 전문성의 획득이 새로운 형
태의 전문성의 창출로 이어지지 못하고  기존의 고급음악적 전문성으로의 경도로 귀결된다.  
   [새벽]은 80년대  말이 이전까지의 민중가요의 경향으로부터 또 한단계의 변화·발전이 
요구되는 시기이며, 그 발전의 방향은 노동자계급의  낙관성과 과학성이라고 생각했다.  이
러한 생각은 작품의 경향에  그대로 반영되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80년대 중반까지의 나약
함과 비극성은 청산되었으나  현실적인노동자들이 질감을 획득하지 못하고 관념 속에서 노
동자계급의 상을 만들어내면서 고급음악의 숭고한  낙관적 분위기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민중가요의 폭을 넓힌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노동자대
중, 학생대중들이 향유할 수 있는 민중가요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따라부르기 어렵
다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작품 안에서 현실의 투쟁하는  노동자대중의  인식과 정서·질
감이 담겨있지  않고 먼 나라 노동자들의  느낌,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노동자의 느낌, 먼 
미래의  낙관적 지향 등이 두드러졌다는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까지 유일한 노래운동
집단으로서 맡아야 할87년 이래 노동가요의 창작·보급을 하지 못하고, 그  결과 김호철의  
노래가나오는 88년 말까지 노동가요는  거의 완전한 공백으로 있어야  했고, 그  후90년까
지 김호철 한사람에게만 노동가요의 창작의존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이 시기 [새벽]은 우리 민중가요·노동가요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
고 1920년대∼30년대 Hans Eisler등의 유럽  혁명가요의  전통을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적·사회적 맥락에 맞게 수용해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한 악곡의 전통이  유럽의 문화적 맥락에서는 진보적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
서는 유럽의  그것과는 다른 우리나라의 문화적 맥락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
급음악적 맥락은 식민지시대 이래 소시민적인  유학파 지식인들에 의해 유입·이식된  것으
로, 우리나라에서는  유럽의 혁명가요가 유럽에서 가졌던  진보성과는무관하게 우리나라의 
고급음악이 가지는   비민중성·관념성·정태성·엘리트주의적인  영향을  받게되는  것이
다.      
   결과적으로 [새벽]은 우리 현실의 노동자들의 삶의 구체적 현실성과  역동성등의 긍정성
을 부각시킴으로써 그 양식의 한계를 극복해내고 그 의미를  새롭게 소화해내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90년에 들어  노동가요가 자리를  잡게되면서 [새벽]은 <해방을 향한 진군>,<다시 또 다
시>등 기존 노동가요의  경향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바리케이트를 치며>,<노동자 전진이
다> 등 이전의 작품경향을 따른 작품을  발표하기도한다. 
  당시 가장 중심적이며 역량있는 집단인 [새벽]의 활동을 일면  부정적으로평가할 수 있겠
지만, 작품의 성과로서만 본다면 이들 노래가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부하게 만든 것은 긍정
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꾸준히 불리면서 이제 우리 대중의 정서로 많이  색깔
이 덮씌워진 <선언2>같은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3. 고급음악인들의 변화
  
   노래운동과 진보적 고급음악인들의 만남은 80년대 중반 기존 음악계에  대한비판의식을 
가지고 그러한 문제들이 일종의  사회적 산물임을 인정하는  작곡자, 평론가들 을 만나면서
부터이다.    
   이 두진영의 만남은 상호충격과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노래운동은  자신들이변화시키고 
책임져야 하는 것이  비단 노래뿐이  아니라 우리의 음악문화전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
고, 진보적 고급음악인들은 아마추어 출신의  젊은이들이 음악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
기를 하고 새로운 노래문화를 만들어온것에 비해 정작 고급음악인들은 대부분 미자각  상태
에 있다는 데에 자책감과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조직화와 운동으로 발전시켜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고 민족예술운동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86년경  이들의 제자 세대,80년
대 민중가요의 확산기에  대학을 다닌 세대들이 졸업을 하면서  조직화가ㅠ시작되어  88년 
[민족음악연구회]가 만들어지고, 87년에는 오페라연출가 문호근을 중심으로  [한국음악극연
구소] 가 만들어진다. 
  
  ⑴ 비평·음악사 연구 
     : 이건용, 노동은 등
  
  ⑵ [한국음악극연구소] 
     : 87년 오페라 소극장운동을 시작했고,  음악극 페스티발 등의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
다.  주요공연작품으로는  87년 가을 <우리들의 사랑>, 88년  <구로동연가> 등 창작 노래극 
공연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시와 노래가 어우러진 <우리아이들의 나라>를 공연했다.
  
  ⑶ 민족음악연구회 
     : 음악대학을 졸업한 진보적 음악인들의 느슨한 협의체의 성격이  강하다.
  (회원수는  많으나 중심활동가는 적음) 이건용, 노동은 등의 선생님들과 80학번들이 주축
을 이루고 있다.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는  여름과 겨울에  [민족음악 캠프]를 개최하여 고
급음악인들에게 변화의 계기를 주는 것이다.   그동안 가창·연주분과에서 여러차례  공연
을 했고, 비합법음반  {하나되는  땅},{백두산}, 합법음반 {하나되는  땅}을 만들었다. 창
립직후에는  주로 일반 대중을 겨냥한 활동을 많이 했으나, 최근에는 고급음악계 내부를 겨
냥한 작업에열중하고 있다.
   이건용 <그렇지요>, 전경숙 <하나되는 땅>, 이민주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임을 위한 
행진곡]>등은 민중가요와 고급음악을 잇는 성과로서  평가할 수있다.
  전통음악인들의 독자적 조직화는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90년대에  들어와서 
[해오름] [다스름]등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전의 일반 대중을대상으로 국악적 감수성의 
근저를 넓히며 국악의 진보적 현대화에 기여한  민요연구회나 풍물운동과 상호 보족적인 활
동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있다. 
  
4. 지방의 노래운동과 그 성과
  
    87년 이후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활동을 하고  있지만 서울에 
비해 양적 역량이 떨어지고 지역적인 편차가 존재한다. 마산 [소리새벽], 안양 [새힘], 부
산 [노래야  나오너라] [희망새], 인천 [노래선언] 등은 대개 노동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창작곡으로는 김봉철<들어나 봤나>, 이건 <달동네 부푼 꿈> 등이 있다.
   광주에서는 서울에서  찾아보기 힘든 민요의 적극적 계승을 통해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
는 성과를 내기도 한다.  국악도로 변신한  정세현을 중심으로  [친구]가 활동을 하게되고, 
90년 정세현이 독립하여 [우리소리 연구회]을 만들어합법음반 {통일은 언제일까}를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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