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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장 밥피스트 륄리

by Casey,Riley 2022.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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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오페라가 온 유럽을 뒤덮고 있을때 프랑스는 오페라가 프랑스 정
신에도 맞지 않는 음악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발레나 연극을 더  좋아했으며 
음악은 단순히 춤과 연극의 부속물로 여겼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왕권강
화차원에서 프랑스 오페라가 발전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큰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륄리(Jean - Baptiste Lully)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륄리의 생애와 그의  오페라를 중점적으로 살펴 보려한다. 
특히 [서정비극]이라 불리는 륄리의 오페라의 특징을 중심으로 보고 그가 프
랑스 음악에 끼친 영향이 어떤 것인지 알아 보도록 하겠다.




쟝 밥피스트 륄리 (Jean-Baptiste Lully,1632~1687)

 륄리는 1632년 11월 28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부친 로렌쪼 디 말도 룰리
(Lorenzo di Maldo Lulli)와  모친 카테리나 델 세라(Caterina  del Sera)사이
에서 태어 났다. 1646년 3월에 륄리는 프랑스로  이주하여 루이 14세의 사촌
누이인 몽팡시에 공주의 이탈리아어 회화 상대및  시중을 들게 된다. 륄리는 
여기서 20세까지 있으면서 작곡과 하프시코드를  배우는 등 좋은 음악적  환
경에서  성장하게  된다.  또한  1647년  그는  루이지   롯시(Luigi Rossi)의 
<<Orfeo>>를 루브르 궁정에서 듣고 그 단원들과 사귀는 등  이탈리아 음악
도 접하게 된다. 
 프롱드 내란의 실패(1648 ~ 53)이 후, 몽팡시에 공주는 추방이 되었고 댄서
와 광대로 당시 어린 나이의  루이 14세의 마음에 들어 륄리는  루이 14세와 
같이 1652년 11월에 궁정으로 들어가게 되고 1653년 궁정기악음악  작곡가에 
임명되었다. 1662년 그의 음악적 스승인 미셸  랑베르의 딸과 결혼하면서 자
신의   비천한  출신을   감추기  위해   이름을  Lulli에서   Lully로  바꾸고 
Jean-Baptiste de Lully로 완전히 프랑스로 귀화하게 된다. 그  후 륄리는 유
명한 극작가들과 작품을 쓰는데 초기에는 코미디 발레를 쓰게 된다.

 1669년 페랭(Pierre Perin)과 캉베르(Robert  Cambert)가 왕으로 부터  오페
라 공연의 독점권을 12년간 얻어 왕립음악원을 설립하자, 륄리는 프랑스어는 
오페라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지만   그들의   오페라
<<Pomone>>(1671)가 대성공을 거두자 태도를 바꾸어  경제적 어려움을 겪
고 있던 오페라 공연 독점권을 돈으로 사게  된다. 이 후 륄리는 프랑스무대
음악의 모든 영역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1673년에  극장을 
건축하게 된다. 
 1673년부터 극작가 퀴노(Philippe Quinault)와 손잡고 1681년을 제외한 매년 
한작품 정도로 오페라를 만들었고 총  15개의 오페라를 썼는데 그중  11개가 
서정비극(주1)으로      쓰여     륄리에게      제공되었으며     그      중에서 
<<Bollerophon>>(1679)의 대성공 이후에는 악보를 출판하였다.  서정비극이
라는 프랑스 오페라의 기본 양식은  륄리가 이전부터 있던 고전비극과  목가
극,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과 프랑스 발레를 결합하여 프랑스식 오페라를 재
창조한 것이다. 
 그의 작곡수법은 퀴노가 대본을  쓰고 하프시코드로 가사를 맞추면서  통주
저음(주2)을 연주하여 선율을 만들고, 각 막에 흥미를  주기 위해 가끔씩 음악
에 가사가 너무 맞지 않으면  퀴노에게 다시 수정하게 하고 내성은  그의 제
자들에게 맡겨 완성토록 했다. 이것을 보면  륄리는 작곡가로서는 성실치 못
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 그의 생활은 대부분 작곡과 공연연습으로  보
내었고 댄서이기도 한 그는 댄서들을 가르치고 엄격한 규율로  성악가들에게 
세심한 신경을 쓰는등 매우 바쁜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1683년 가을에 루이 14세가 신앙이 깊은 맹트농(Mme de Maintenon)부인과 
결혼하자 궁정은 '수도원風'이 유행했고  이에 따라 륄리도  모테트를 주로한 
교회음악을 작곡하게 된다. 
 1687년 1월 8일 그의 엉뚱한 죽음을 가져온 날이  되는데, 그 날은 루이 14
세가 수술을 받은 후 쾌유를 축하하는  륄리의 <<Le Deum>>을 연주날 이
었는데 이 날 날카로운 지휘봉이  그의 발가락을 찌르게 되고 이로  인해 생
긴 종기가 번져 절단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를 져버리고 1687년  3월 22일
에 숨을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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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서정비극(Tragedie lyrique:일명음악비극)코르네이유(1606~1684),키노(1635~1688),라시느(1639~1699)가  고전비극
과 고대     비극을 혼합하여 만든 오페라로서 5막으로 구성됨.시의 운율은 알렉산드렝,소재는 신화.전설.역사적 영
웅전이 대부분.
   이 오페라의 핵심은 장중한 비극 레시타티브,모든 음악은 이 레시타티브의 틀을 모방한다. 이 장르는 귀노와 륄
리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륄리는 자신의 서정비극을 다음과 같이 구성함: 프랑스서곡 -> 프롤로그 -> 프랑스
어 레시타티브     -> 프랑스어 에르 -> 앙상블 -> 합창 -> 발레음악 -> 기악곡들 

주2)Basso continuo,숫자저음,계속저음이라고도 하며 간략하게 기록되는 악보의 일종.베이스만 기보되고 다른 성부
들을
    위한 화성은 베이스밑에 숫자와 기호로 표기된다.
    통주저음 사용악기:류트,테오르베,쳄발로,첼로,콘트라베이스,트럼본,감바,바순(베이스를위한 선율악기류)


J.B.Lully 의 음악적 특징
 륄리의 작품 시기에 따라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1)무용음악 (Ballet de Cours, 1653 ~ 1662)
(2)희비극적 무용연극 (Comedies - tragedies - Ballet , 1663 ~ 1672)
(3)서정비극 (Tragedies - Lyriques , 1673 ~ 1687)

륄리는 3기에 서정비극이라는 주목할  만한 무대음악을 작곡하는데 그의  뛰
어난 무용실력과 무용음악,무용연극들은 서정비극을 만드는데  큰 영향을 받
는다. 그는 무용음악을 만들기 위해 여러 나라의 음악과 많은 작곡가의 음악
을 분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에서  영향
을 받아 프랑스 발레음악에 적용(주3)을 시도했다. 1662년후 륄리에게 많은 도
움을 주며 큰 영향을 끼친 극작가 몰리에르와 가까워지면서 코미디  발레(주4)
를 작곡하는데 이것은 후에 서정비극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주5)
 그의 작품활동 중에 가장  큰 업적인 서정비극(Tragedies-lyriques)는  시인
인 퀴노(Quinault)와 결합하여 본격적인 무대음악을 작곡한다. 이탈리아,스페
인에서 그다지 사용을 하지 않는 그리스신화를  이용하여 대본을 쓰고, 여기
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을 강하게  대비시켜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어  극의 
성격을 확실히 표현하여 관객들이 알기 쉽도록  유도했다. 음악도 흥미를 더 
하기 위해 오케스트라와 합창,독창을 적절히 혼합하여 사용했다.
 서정비극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레시타티브이다. 당시 프랑스 관객들은 
이탈리아의 레시타티브를 단조롭게 생각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
다. 그러나, 륄리는 프랑스에서 쓰이던 낭송법을 찾아 내어 이탈리아의  경우
보다 더 선율적이고, 극적인 억양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2박자와 3박자가 번
갈아 나타나는 표현성이 좋은 쉼표를 사용하고,  가락을 다양화하기 위해 한
층 강화된 악구를 썼다.(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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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1661년 이탈리아 오페라<<Intermedes>>를 보고 직접적 영향을 받음

(주4) Comedie-ballet:심각한 내용의 궁정발레에 대조되는 우스꽝스러운 내용.몰리에르와 륄리의 작품 엘리드 공주
     (La princesse d'Elide,1664)가 그 시초.희극발레는 대사를 말로 전달하는  연극을 바탕으로 하여 발레,독창,중
창을 
     추가.그러나 이러한 희극발레는 (1673년 몰리에르가 죽은 후에)음악부분이 적어지면서 차츰 춤과 샹송으로 구
성된
     일반희극으로 변모한다. 

(주5)<<강제결혼(Mariage Force)>>는 처음 시도된 프랑스 오페라 부파 스타일이며 <<멋진 연인들(Les Amants
     magnifiques)>>은 연극발레라기 보다는 하나의 오페라로 보아도 무방하다. <<프시케(Psyche)>>는 비극발레
로서
     서정비극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륄리는 1막에서 장엄하고 화려한 음악을 썼으며,피날레에서는 사랑과 프시
케가
     결합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처리하였다.
(주6) 오페라<<Alceste>>에서 륄리는 G-D-G-D-G, A-D, G-C-E-A  음을 사용했다. 이러한 대칭성을 깨뜨리고 
다양한
     전달속도와 행마다 다양한 수의 음절을 배치하기 위해 륄리는 유동박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단순레시타티브,
정상
     레시타티브는 라무(Rameau)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오페라의 지속적인 특징이 되었다.
주로 반주는 통주저음만을 사용했고 이탈리아적  장식음 사용은 배제하였다. 
그러나,   슬픈장면을  표현할   때는  오케스트라   반주를  붙였다.   오페라 
<<Atys>>이후 륄리의 정상레시타티브는 표현력이 강화되었고  하강 감5도,
상행 단6도와 같은 음정의 효과적  사용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오페
라<<Armide>> 2막5장에는 유명한 독백이 나오는데 혼란스러운 아르미드의 
마음을 17세기 표준 낭송법(주7)과  같은 표현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1679년 
<<Bellerophon>>에서 부터 륄리는 반주레시타티브(주8)가 큰 특징이다.  이탈
리아의 '아리오소(Arioso)'에 가까운 유형으로  단순레시타티브에서 보여주는 
유동적 박자가 나타나지 않는 확대된 악구를 볼 수 있다.
  륄리의 프랑스 오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비교해 보면 레시타티브와 아
리아를 분명하게 구분 짓지 않고 있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주로 레시타티브
는 아리아의 구속된 선율형에 의거했으며 아리아는 반드시 레시타티브의  낭
송법을 수용했다. 이를 다르게 생각해 보면 프랑스의 레시타티브는 노래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아리아는 노래의 성격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독백아리
아에서는 무대연기에서 긴장상태가 표현됨으로  륄리는 주로 풍부한  대화아
리아나 격식아리아에서 과감한 화성과 선율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륄리는 
서정비극에서 다른 소규모 앙상블보다  이중창을 선호했으며 이것은  단순한 
이중창 단편과  유절,춤노래의 화려한  이중창,아리아,레시타티브로 이어지는 
다양한 형태를 나타낸다.  륄리의 이중창은 대개  동질이음으로 되어 있으며 
가사와 어울리는 일관된 양식을 보여준다.  
 륄리는 그의 오페라에서 [프랑스식  서곡](주9)을 많이 채용했다.  그러나,이러
한 서곡은 실제 극과는 별 관계가 없고 음악적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
니다. 단지,륄리는 서곡에서 임금에 대한 칭송의 내용만 담고 있다.
 륄리는 비극적인 배경에서 묘사적 악기를 주로 사용했다. 예를 들어 전원장
면, 전투장면,지옥장면,장례식장면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리스신화의 영향
으로 신들이 땅으로 내려오는 장면, 마법이나 요술장면등 고도의 기계장치가 
필요한 장면들이 각 오페라마다  들어 있다. 또한,  각종 전통무용과 행진.행
렬,[성격무용]이라 정의하는 발레도 사용했다. 이처럼  륄리의 오페라는 화려
하고 볼거리가 많은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고 반드시 국왕을 찬양하는  프롤
로그도 있어 당시 루이 14세의 權力과 榮華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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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특별한 점이 없이 낭송하는 양식.선율이 언어의 구문에 따라 만들어 졌다. 마침부호,콤마,행의 끝,의미  단위가 
음악적
    단락을 이루게 한다. 화성은 한 단위에서 그대로 머물거나 더 길어지기도 한다. 화성은 새로운 생각이나  두드
러지는
    언어 등과 함께 변한다. 초기의 레시타티브에서는 언어적 표현을 음악적인 요소로 방해하는 일이 더 드물었다. 
    리듬은 가사의 낭송리듬을 따른다. 
(주8)Recitativo accompagnto:아리오소(Arioso)라 불리기도 한다. 주로  서정적,관조적,마드리갈적 가사를 사용하고, 
단일한
    감정을  가졌으며,곡 전체가 악보에 기록된다. 세코레시타티브와 아리아 사이의  중간적 음악이다. 부파오페라
에서는
    극적이고 변화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주9)륄리에게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Alcidiane 발레,파리 1658),바로크 시대에 가장 잘 알려진 서곡 종류가 된다.
     구조적으로는 세 부분으로 나눌수 있다. 
    (제1부):느리게,짝수 박자,부점 리듬,바로크적 감정 고조. 
    (제2부):빠르게,대부분 푸가적,매우 동적,홀수 박자가 흔하다.
    (제3부):원래는 첫 템포로 되돌아 가서 마지막 화현을 울리는 것이었으나,후에는 처음 테마를 다시 연주한다.
글을 맺으며...

 본문에서 보았듯이 륄리는 그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는 기회주의적인  음악
가로 평가하고 싶다. 그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프랑스에 이주한 후 공주의 시
중드는 사람으로 프랑스 생활을 시작하였고  비천한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이
름을 바꾸고 더 나아가 프랑스  음악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짐으로서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할  수 없는 지위로  가기 위한 신분상승에  집착한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심리적 경향은 오페라 극장의  운영이나 작곡 태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권위적이고 독단적이고  기회주의적 행동으로 나타  나고 있다. 이 
때문에 당시 많은 사람과의 충돌은  불가피했지만 루이 14세의 신임과  음악
활동의 庇護로 그는 당시 프랑스의 가장 많은 권력을 휘두르는 작곡가가  된
다. 그러나,음악적 측면에서  보면 그는  서정비극이라는 프랑스식  오페라를 
만들어 내었고 열성적이고 세심한 극장관리를 통해 프랑스 무대예술의  활성
화를 가져 온 것은 그의 공로라고 인정하고 칭송받기 마땅하다.
 오늘날, 그의 무용음악과 오페라는 그다지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은 그의 곡
들은 지극히 프랑스 특유의 음악이고  궁정 중심의 음악이기 때문이라  생각
한다. 한편으로는 그의 오페라는 전 유럽에 영향을 주었으나 당시 막강한 이
탈리아  오페라의  힘에   밀려 버린것   같고,  륄리  이후에  라모(Rameau. 
Jean-Philippe 1683~1764)외에는 그를 이어  갈만한 프랑스의 대작곡가가  그
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륄리의 업적은 프랑스  음
악을 재정비,재출발하게 만들었으며 당시 유럽을 휩쓸던 이탈리아 음악의 그
늘에서 독자적인 프랑스 음악을 정착시킨  장본인으로 볼 수 있기에  음악사
적으로도 마땅히 언급되어야 하며 신중히 연구해야 될 인물이라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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