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극복하는 지혜 1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워 온다
차례
서문
1. 애벌레의 몸부림
굴의 선택
물위에 뿌린 씨앗
답답한 일을 당했으나
촛불은 꺼졌지만
급할수록 천천히
삶의 고갯길에서
하나님은 아실까
애벌레의 몸부림
미래를 여는 도구
월남이 망한 이유
삶의 주인
아직 포기하지 마세요
소가 자동차를 끌다니!
편작보다 뛰어난 의사
2. 동굴과 터널
하나님께 독촉장을
성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
당신만이 아닙니다
골짜기를 넘어서
기록 갱신
대역전 드라마
동굴과 터널
이 시대의 현숙한 여인
표정 있는 얼굴
다이아몬드 이야기
당신은 소인입니까, 거인입니까?
장애물
"목사님, 딱 죽고만 싶습니다"
마음의 열쇠
밧데리 재충전
3. 향수가 없어도
밀밭으로 변한 밀 자루
하나님, 무엇이든지요!
꿈은 깨어져야만 한다?
노란 손수건
뿌리
두려움의 끝
기다림의 여유
영적 근시안
밀물은 반드시 온다
향수가 없어도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
안전 지대
4. 나비와 나방
한 발짝 물러서기
바다에서 느낀 것
기가 꺾여야
마음의 불황, 확 벗어 던지자구요!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이유
버드나무에 걸린 수금
나비와 나방
애통하는 마음
가지치기
하나님의 결재
뭐, 아버지를 바꾸고 싶다고?
당신은 누구입니까?
로빈새의 평안
밤에 부르는 노래
때로는 사람을 통해서
5. 마지막 남은 것
군대란 그런 기다
대체 왜?
불량 낙하산을 만들면
하나님의 작전
영원을 위한 투자
제가 설 자리는 어디입니까?
괜한 고민
함께 우십시오
거품 빼기
마지막 남은 것
염려가 담긴 상자
실상과 허상
속성 점술 학원
거절의 의미
원숙한 사랑
저자 소개
조용기 목사는 현재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이며, 세계 하나님의 성회
총회장으로 있다. 그동안 수많은 저서를 발표해 왔으며, 활발한 해외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문
은혜로운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시한 존 뉴턴은 "시련은 우리의
은혜로우시고 지혜 많으신 하나님께서 처방하신 약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약이 필요하기 때문에 처방하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시련이란
고통스럽고 힘이 들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났을 때 우리에게 크나큰 유익이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목회생활 40년은 처절한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당시는 '다시 기억도 하기 싫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돌이켜 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고난 당했을 때 밖에 없으니 참 오묘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런 일들을 통했기에 성도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고 이 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목회 초에는 고난당하는 사람을
보면 설교하고 훈계했지만, 내가 고난을 겪고 보니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와 안타까움이 우러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요즘 IMF 한파로 고통을 겪는 성도들을 보면서 가슴 깊이 아픔을 느낍니다.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내 마음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가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간 고난에 대해 생각해
온 것들을 글로 옮겼습니다. 내가 겪었던 일들과 역경 중에서도 신앙으로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함께 엮어 보았습니다.
이 책을 읽으시는 동안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하셔서,
고난을 담대히 이겨낼 수 있는 큰 믿음과 능력이 넘쳐나시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
1. 애벌레의 몸부림
굴의 선택
모든 보석은 땅에서 캐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바다에서 나오는 보석이
있는데 그것은 진주입니다. 진주는 '아비큘리데'(Aviculidae)라고 불리우는
특별한 굴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이 굴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은 '나카'(Nacre)라는 물질을 만들어
모래알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이 나카가 많이 덮일수록 진주는 커지고 값도
올라갑니다. 이 나카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생성되기 때문에, 작은 진주가
만들어지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립니다. 그리고 큰 진주는 수년에 걸쳐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이 굴 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모두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에게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주어집니다. 하나는 나카를
생성해서 코팅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경우 수년에 걸쳐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 대신 이 모래 때문에 굴은 병들거나 많은 경우 아주 죽어 버립니다.
굴이 당면하는 이 두 가지 선택이란, 침입한 모래알의 도전을 받아들여
진주로 만드느냐, 아니면 무시해서 죽어 버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도 두 가지에 대한 선택이 주어집니다.
우리에게도 자주 온갖 종류의 모래알이 들어옵니다. 이때 그것을 하나의
도전으로 여기고 받아들여 진주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이를
무시하고 회피하다 파멸에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
지금 당신에게 굴의 여린 살을 아리게 하는 모래알 같은 고통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다가온
고통을 진주를 생산하는 기회로 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언젠가
당신의 삶에 이로 인한 아름다운 진주가 탄생될 것입니다.
물위에 뿌린 씨앗
이집트는 고대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 중 하나입니다. 이 나라는 나일 강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이 나라 사람들은 큰 홍수가
나면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홍수로 나일 강이 범람해
주변의 농경지를 완전히 갈아 엎게 되면, 땅이 비옥해져서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일 강이 범람해 육지에 넘쳐 들어올 때에 이집트 사람들이 하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지로 들어온 강물 위에 곡식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씨앗을 땅속이 아닌, 물위에 뿌리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홍수가 지나고 불었던
물이 차츰 빠지게 되면, 물위에 뿌려 놓은 낟알은 땅속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이
씨앗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 결국 풍성한 수확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이집트 사람들은 노력에 비해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홍수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와 인접한 곳에 위치해 많은 영향을 받고 있던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러한 풍습은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이웃에게 친절과 도움을 베풀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 이러한 풍습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우리에게는 의아하게 생각되는 명령이지만, 이는 결코 이유없는 명령이
아닙니다. 씨앗을 물위에 뿌린 사람이 그 사실을 잊어버릴지라도 때가 되면
많은 곡식을 거둘 수 있듯이, 도움과 친절은 귀한 열매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약속하고 계십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혹자는 이렇게 말할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목사님, 하필이면 왜 이런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IMF 때문에 저희들도 살기가 빠듯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때가 바로 구제의 씨앗을 뿌릴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것은 지금이 바로 시련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홍수를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는 하나님께서 씨앗을
던지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베푸십시오. 작든, 크든, 남이
알든 모르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씨앗이 될 것입니다.
클라크라는 미국 부인의 경험담입니다.
클라크 부인은 어린 시절을 농장에서 보냈는데, 그 지방은 감자가 많이 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가을에 거두어 들인 감자로 다음해까지
지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는 어려운 사람들과 교회 성도들에게 애써 거둬들인
감자를 아낌없이 나눠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불평 섞인 투로 감자를
아껴 두자고 하면 아버지는 "감자는 나누어 주어야 남는다"고 빙그레 웃으실
뿐이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양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집집마다 저장했던 감자를 꺼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고 두고 먹기 위해 잘 저장해 두었던 집들의 감자는 모두
썩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클라크 부인 집의 감자는 썩지 않고 봄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고스란히 저장만 해두었던 집의 감자는 몇 개가 썩기 시작하면서 같이
보관되어 있던 모든 감자를 겨우내 썩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클라크 부인의
집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느라 감자를 계속 꺼내다 보니 썩은 것을
미리 골라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신 나눠 주고 베푸는 삶, 이는 남을 살리는 방법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을 살리는 길인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답답한 일을 당했으나
몇 년 전 남미 성회 때의 일입니다. 내가 콜롬비아에 도착하니, 그곳 대표단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큰일났습니다. 바로
어제 전대통령의 딸이 게릴라에게 잡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번에는
콜롬비아에 오는 조용기 목사를 체포하자, 그래서 조용기 목사를 인질로 정부와
교섭해 구속되어 있는 동료들을 석방시키자'고 결의했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벌써부터 시련이 다가오는 것으로 보아 이번 성회에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도착한지 이틀째 되는 날
아침, 함께 갔던 미국의 존 윌크슨 목사가 아주 불길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 목사님, 어제 내가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게릴라들이 기관총을 들고
종업원을 협박해 목사님 숙소로 쳐들어왔습니다. 게릴라들이 총을 들고 숙소에
침입하니까 콜롬비아 개신교 연합회 총회장은 벌벌 떨고만 있었고, 이들은 곧
목사님을 묶어 비상구로 끌고 갔습니다."
순간, 염려가 밀려와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불말과 불병거가 되어 주옵소서. 성회 장소를 천군 천사로
지켜 주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후 저녁 성회에 임했는데, 성령의 역사가 비처럼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성회 분위기는 은혜의 열기로 가득 찼습니다.
무사히 성회를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곰곰이 생각하니, 처음에
답답한 일을 당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만일 그런 위기감이 없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며 성회를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성령의 역사가 그렇게까지 크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두문불출하고 기도하니까 전통적으로 구교가 깊이 뿌리내린
곳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도는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답답할수록
기도하고 믿음을 쌓기 때문입니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영적 생활을 등한히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간혹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일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일이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__10)
촛불은 꺼졌지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유명한 시인 타고르가 젊었을 때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수만 평의 땅을 가진 부자였는데, 그 땅 가운데로는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타고르는 지붕이 달린 배를 타고 몇 달씩 이 배에서
지내곤 하였습니다.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그는 배 안에서 촛불을 켠채 철학자
크로체의 유명한 미학 논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고르가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논문에 매료되어 정신없이 책을 읽어 내려가고 있을 때, 갑자기
촛불이 꺼졌습니다.
다시 촛불을 켜려고 성냥을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조용히 앉아 있는데,
달빛이 은은한 광채를 발하며 배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뱃전으로
나아갔습니다. 고요한 숲에 떠오른 둥근 달과 이 달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흐르는 강물은 실로 경이로웠습니다.
그는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온통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외면한 채 아름다움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켜 놓은 작은 촛불이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촛불의 연약한 빛 때문에
달빛이 내 안으로 들어올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바람만 불면 꺼져 버릴 촛불에 매여 달빛의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삶의 촛불이 꺼졌다고 생각됩니까? 그러나 크게 염려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촛불이 꺼지면 달빛보다 더 밝은 하나님의 빛이
우리를 비춰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급할수록 천천히
얼마 전 IMF 경제 한파를 심하게 겪고 있는 한 성도님의 이야기를 듣고 매우
가슴 아파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성도님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좋은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사랑스런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넉넉한 생활 환경에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회사의 어려움으로 뜻하지 않게 명예 퇴직을
당하였습니다. 그나마 오랜 경력 덕택에 적지 않은 퇴직금을 손에 쥐기는
했으나, 그의 마음은 여러 생각에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하나?'
개인 사업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들을 수집하며 여러 모로 궁리하던 중,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한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정을 들었다는
그 친구는 자신이 하는 개인 사업에 퇴직금을 투자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없었고, 그나마 있는 돈까지 잃게 될까 봐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화해서 그 사업이
생각보다 이윤이 많이 남는다는 등 여러 말로 설득해왔습니다. 어느 때에는
집으로 찾아와서 슬며시 돈 봉투를 쥐어 주고 가기까지 했습니다. 급한 대로
살림에 보태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살기도 바쁜 요즘 세상에 저렇게까지 남을 생각해 주다니!'
그는 친구를 보며 적잖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내내 고민하며
알아보던 일들도 썩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던 터라, 마침내 그는 친구의 사업에
투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꽤 많은 액수의 퇴직금을 전부 투자한 그는 다소 걱정도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은행에 넣어 두고 받는 이자보다 몇 배는 더
얻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정말 미안하다." 는 그 친구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들어보니, 자신이 투자했던 그 사업이 부도가 나서 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을 날려 버린 것입니다.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면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가슴 아픈
현실 중 하나입니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명예 퇴직자나 실직자들의 절박한
심리를 이용한 여러 형태의 사기 행위가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개 직장을 잃은 사람은 당장 무엇을 시작하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을 갖기
싶습니다. 규칙적이고 꽉 짜여진 생활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많은 시간을 갖게
되니, 그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럽고 조바심이 드는 것입니다.
게다가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 하는 일 없이 그냥 집에 있으려니
가족들의 눈치고 보이고, 여러 면에서 견뎌내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다가 사업에 관한 어떤 제안이라도 들어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뜻 그
일을 승낙해 버립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이기에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 기다리기를 소홀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북 전쟁 당시, 우리 편에게 승리를 달라고 기도한다는 병사들의 말에 링컨
대통령의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성급히 계획하고 나아가다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을 우리의 뜻에 맞추려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정이 어렵다고 조급해 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보다 앞서 나아가지 마십시오. 기도하며
잠잠히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는 것, 이것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길은
없습니다.
삶의 고갯길에서
어떤 사람에게 장성한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사교술이 뛰어나 많은
친구를 둔 그 아들은 친구가 많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늘 친구가 많은 것을 자랑하며 다니는 아들을 보고,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얘야, 네가 자랑하는 친구들은 진실한 친구들이냐?"
"그럼요, 아버지. 그들은 목숨을 걸고서라고 나를 도와줄 친구들이에요."
아들의 확고한 대답에 아버지는 그 친구들의 우정을 시험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아들은 그 말에 동의하고 아버지와 함께 꾀를 짜냈습니다.
밤이 되자, 그들은 아들의 친구 중 하나를 찾아갔습니다. 밤중에 급한
목소리로 문을 두드리니, 그 친구는 눈을 비비며 억지로 문을 열었습니다.
"여보게, 큰일났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그 동안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시키지 않았는가?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네. 지금 빚쟁이들이 나를 만나러
오고 있다니, 난 우선 몸을 피해야겠어. 미안하지만 당분간만 노쇠한 아버님과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겠나? 내 곧 돌아 올 테니, 어렵겠지만 부탁하네."
아들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애원을 했습니다.
"자네 사정은 딱하지만, 누구보다 자네가 우리 형편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미안하네."
친구는 고개를 흔들며 이내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아들이 친하다고 하는 친구들의 집을 밤새도록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친구의 어려움을 도와주려는 자가 없었습니다. 지친 몸과
실망감에 풀이 죽은 아들을 향해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그들은 모두 네가 절친하다고 말한 친구들이 아니냐? 그런데 한결같이
모두 네 어려움을 모르는 체하는구나. 그렇다면 이제 내 친구 집을 한 번
찾아가 보자꾸나."
아버지는 자신의 한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의 위급한 사정을 들은
아버지의 친구는 뜻밖에도 그들의 부탁을 선뜻 받아들였습니다. 아들은
그제서야 어떠한 친구가 진정한 친구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생 행로에서 모든 일이 잘될 때에는 어느 누구나 친구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삶의 고갯길에서 쓰러져 낭패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렇게 다정하던
친구들도 하나, 둘씩 떠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친구는 어려움과 고난을 당했을 때에 발견되어집니다. 내가
잘되고 좋을 때에는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사업이 실패하거나 병들어
괴로울 때에는 진실한 친구만이 내 곁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 속담에 "진정한 친구가 없는 사람은 광야에서 사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인생의 가장 좋은 친구, 어떠한 삶의 고갯길에서도 결코 배반하지
않을 진실한 친구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큼 더 좋은 친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분은 내가 인생의 가장 처절한 밑바닥을 걸어갈 때에도 결코 나의 곁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세상의 친구들이 다 나를 버리고 외면하는 그 때조차도
친구 되신 예수님은 내 곁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도 처절한
십자가 형을 지실 때 사랑하는 제자들과 사람들로부터 크나큰 배신의 아픔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삶의 험한 고갯길을 함께 걸어 가는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하나님은 아실까?
내게 신앙 상담을 하겠다고 찾아오시는 성도들 중 많은 분들이 한탄 섞인
불평을 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너무 힘겹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내뱉고
나서 무안한 얼굴이 되어 나를 쳐다보곤 합니다. 그런데 그 불평의 대상으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정말 얼마나 힘든지 조금이라도 아신다면 이렇게
내버려두실 수가 없다고 생각돼요."
유명한 신학자 존 스토트 목사님이 쓴 글에 사람들의 이러한 심정을 잘
대변해 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수십 억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모여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광채 앞에서 몸을 움츠렸지만, 몇몇 사람들은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다는 건가? 그분이 우리가
받았던 고통을 알기나 하실까?"
"나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서 매질과 고문을 당하고 결국은
억울하게 죽어야만 했단 말이오."
그 유태인의 말에 이어, 온몸에 채찍 자국과 밧줄 자국이 남아 있는 한
남자도 외쳤습니다.
"난 정말 죄가 없어. 단지 흑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거야?"
불평은 이제 비아냥거림으로 바뀌었습니다.
"눈물도, 굶주림과 미움도 없고, 모든 것이 밝고 즐거운 천국에 사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행복하셨을까?"
"그러게 말야."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어. 이런 곳에 사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지옥처럼
고통스럽다는 것을 상상이나 하실 수 있을까?"
결국 사람들은 가장 심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을 자신들의 대표자로 세워
하나님께 조직적으로 항의하도록 했습니다.
유태인, 흑인, 기형아, 원폭 피해자... 대표자를 뽑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소요될 만큼 고통받은 사람은 도처에 넘쳐 났습니다.
대표자들은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실한 심판관이 되시려면 우리가 겪었던 고통을 직접
겪어야 하시지 않을까?"
"그래,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사람만큼 사람을 잘 이해하는 존재가 또 있겠어? 하나님께 사람이 되어
세상을 한 번 살아 보시라고 건의하자고."
이 말에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들었습니다.
"이왕이면 유태인으로 태어났으면 해."
"그도 나와 같은 출생으로 태어나서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느낌이 어떤
건 줄 알아야 한다구."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평생을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던 사람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족들까지 그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게 해야 해. 맞다, 절친한
친구로부터 배신당하는 아픔이 어떤 건지 맛보는 일도 잊으면 안돼."
"억울한 일을 당해서 법정에까지 호소하는데, 더 억울한 누명만 쓰게 되는
일을 경험해 봐야지 않겠어? 그래야 잘 판결할 거 아니야."
"처절한 외로움은 또 어떻고, 그거 만큼 죽을 맛이 또 없어."
"죽을 맛? 진짜 죽어 봐야 죽을 맛을 아는 거 아닐까?"
그 순간, 대표자들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은 혹시?"
"아니, 그러면 벌써?"
"...."
"...."
결국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그 일을
수행하셨다는 것을.
비천한 곳에서 태어나신 그분의 출생.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멸시받았던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분의 삶. 기적을 베풀 때에 왕으로
삼겠다며 열심히 환호했던 사람들의 배신으로 인한 죽음. 철저히 고통과
친숙했던 사람--예수. 그랬기에 그분은 우리의 고통과 그 뜨거운 눈물을
누구보다 더 깊이 이해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애벌레의 몸부림
어렸을 때 나는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가야 시간 안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책보를 등에 메고 한참을 걸어 논두렁을 지날 때였습니다.
맨발에 작은 고무신을 신은 탓인지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아 신발을 벗고 발을 주무르고 있는데, 풀 속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게 뭐꼬?'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잠자리의 애벌레였습니다. 그 애벌레는 꿈틀거리며
껍질을 벗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우와, 신기하네!"
호기심 많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애벌레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이제나 저네나 껍질을 벗고 잠자리가 나올까 한참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애벌레는 꿈틀꿈틀 몸부림만 칠 뿐, 도무지 언제 껍질을 다 벗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껍질을 벗고 나온 잠자리를 보고 싶기도 하고, 껍질을
벗느라고 애쓰는 잠자리가 불쌍하기도 하여 잠자리를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쓸 만한 작은 나뭇가지가 있었습니다.
'됐다, 이걸로 하자.'
나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뾰족한 끝으로 애벌레의 껍질을 터주었습니다.
얼마 후, 잠자리는 껍질을 모두 벗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를 보고 마음이
흡족해진 나는 책보를 고쳐 메고 학교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침에 보았던 잠자리가 궁금하여
그쪽으로 가 보았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전혀 상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잠자리가 새까맣게 모여든
개미떼의 밥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왜 날아가지 못하고 저렇게 죽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자리가 죽은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다음날 선생님을 통해서였습니다. 내
말을 들으신 선생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잠자리가 수차례의 탈피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과,
껍질을 벗으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날개가 발달하고 힘을 얻어 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힘들게 껍질을 벗고 있는 잠자리를 도와준다는 것이
결국 날지 못하는 잠자리를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때로 힘들고 괴로울 때면 어릴 적의 이 경험을
생각해 보곤 합니다. 껍질을 벗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을 치던 잠자리. 오랜
시간 동안 힘겹게 몸부림을 쳐야 하지만, 그 고통과 몸부림을 통해 푸른 하늘을
날 수 있는 영광스런 날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뼈아픈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살아가는 우리. 그러나 그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는 조금씩 하나님 중심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 고통스런 몸부림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찬란한 영광을
누릴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자에게 주어지는 눈부신 믿음의
날개를 달고서 말입니다.
미래를 여는 도구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 인격 구조 속에 특별한 성품을 지니는가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세계 최대의 도시에 나가
경쟁을 승리하면서 살고 싶다는 욕망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현실보다는 거의 꿈속에서 살다시피 했고, 친구들과 형제들에게도 이런 꿈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은 나를 허황되다고 놀려댔습니다.
어느 해 여름 방학 때였습니다. 사촌들이 아버지의 농장에 놀러와 함께
있었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나를 '허풍쟁이'라고 놀려댔습니다. 나는 속이
너무 상한 나머지 아버지께 사촌들이 나를 놀려댄다고 일러 바쳤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너는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을 하는 아이가 아니다. 단지 꿈이 많을
뿐이란다. 마음 속에 있는 꿈을 보고 현실인 것처럼 말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거짓말같이 들릴 뿐이지."
나는 아버지의 이 말씀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늘 내가 그리는 꿈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목사가
되고 나서는 그 꿈을 좇아 우리 나라 전역은 물론, 5대양 6대주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나는 내일을 바라보고 꿈을 꿉니다.
"오, 주님, 저를 보내소서. 제가 여기 있나이다. 지위도, 명예도 그리고
호사스러운 생활도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바로 그곳이
제가 설 땅입니다."
나는 또 한 사람의 꿈꾸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매사추세츠 주에 살고
있는 로버트 고다드 씨입니다. 그의 꿈은 단지 산을 넘고 바다 위를 건너는
비행기 정도가 아니라, 달나라까지 갈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먼 길을 여행할 수 있는 연료를 만들기 위해 매일
폭음을 내며 냄새를 풍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사는 워체스터 마을의
골칫거리였습니다. 견디다 못한 마을 사람들은 그를 법원에 고소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그 당시(1920년 1월 13일자) "뉴욕 타임즈"는 그를 '달에
착륙하겠다는 망상을 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1969년 최초로 암스트롱을 위시한 우주 항공사들이 달에 착륙하게
되었을 때, "뉴욕 타임즈"는 그에게 사과문을 실어야 했습니다.
"'꿈', 그것은 참으로 우리의 미래를 여는 도구입니다."
월남이 망한 이유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희망의 줄'은 우리 삶의 이유와 가치를 마련해
줍니다. 그러므로 그 줄은 결코 끊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세 기독교 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단이 부하들에게 인간을 공격할 각종 무기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황금, 돈, 술, 마약, 미녀 등 사단의 애용 도구를 보여 주다가 도끼 한
자루를 내보였습니다. 한 부하가 의아해 하며 물었습니다.
"그런 낡은 도끼 한 자루로 인간들을 때려 잡을 수 있을까요?"
사단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이래 봬도 이것이 가장 효과를 본 나의 애용 무기란다. 이 도끼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희망의 줄을 끊어 버리는 훌륭한 도구이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월남의 게릴라 침투로 국가의 존립마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월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미국과 한국 등 자유
국가들은 군대와 물자를 보내며 적극 후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1975년
월남은 공산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월남이 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행기나 탱크나 기타 무기가
부족해서였을까요? 보병이 부족해서였을까요?
당시 월남의 모든 상황은 월맹보다 월등히 나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남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월남이 망한 것은 티우 대통령이 정책을 잘못 썼기 때문입니다. 그는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갑자기 철수시켰습니다.
나름대로 전략이 있어서 한 일이었지만, 그는 이것이 국민들의 마음속에
가져올 불안을 계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티우 대통령은 전략상 북쪽에 있는 군대를 대거 이동시킨 것에 불과했는데,
소문이 이상하게 돌기 시작했습니다. 월남이 월맹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문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군인들을
가득 실은 트럭들의 행렬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뒤이어 장갑차와 탱크가 줄을
잇고, 피난민들도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월남인들의 마음속에 불안이 밀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불안은 순식간에 공포로 변했으며, 그들은 자신감을 잃고 패배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싸우겠다는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월남은 패배했습니다. 월남 사람들은 월맹보다 무기도, 병사의 수도
월등하게 많았지만 불안과 공포로 마음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나라 없는
비참한 백성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 이것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희망의
줄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능히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주인
어떤 사람이 공동 묘지를 지나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조금 무서운 마음이 들은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한 꼬마를 만났습니다. 꼬마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밝은 얼굴로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가 물었습니다.
"꼬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아니?"
"물론 알지요. 바로 공동 묘지잖아요."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여기서 놀고 있니? 무섭지 않니?"
이렇게 묻자 꼬마는 "아뇨."하면서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왜 무섭지 않니?"
다시 묻자, 그 꼬마는 싱겁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가 이 묘지의 관리인이거든요. 저는 늘 여기서 놀아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어떻나 삶의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어려움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삶 속에 갑작스레 덮치는 역경을 능히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도 60년 넘게 인생을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삶의 홍수를 많이 겪어
왔습니다. 생사를 좌우할 만큼의 무서운 홍수도 몇 번씩 당해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겪게 되는 수많은 삶의 역경들. 그러한 역경의 홍수를 만났을 때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홍수 자체는 별로 문젯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마치 거대한 배가 작은 키 하나로 조정되는 것처럼, 한 가지 사실로
맹렬한 기세의 홍수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해답을 우리에게
명확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10)
그렇습니다. 역경의 홍수 때에 왕으로 좌정해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역경의 홍수를 만났을 때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아무리 맹렬한
홍수라고 결코 우리를 삼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이자 LG 트윈스의 투수는 김용수 선수의 아내가 작년 주일
예배 때에 들려준 이야기는 그 좋은 예입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하나님을 잘 섬기며 충실한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와 건축 헌금을 드리면서 그들은 약속된 말씀대로 온갖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남편인 김용일 선수가 86년부터 89년까지 최우수 구원투수상을
받고, 90년도 한국시리즈에선 MVP가 되는 영예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에게 갑자기 역경의 홍수가 밀려왔습니다. 김용수 선수가
92년도 전지 훈련 중 척추에 부상을 입어 '추간판 좌골신경통'이라는 중상을
입게 된 것입니다. 어깨와 허리가 생명인 야구 선수로서 이것은 치명적인
것으로 선수의 생명이 끝났다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고통과 좌절을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처절한 절망감에 몸부림쳤습니다. 당시 담당 의사는 한국에서
수술이 불가능하니 미국에 가서 수술을 받으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7개월 동안
매일 철야 기도회에 참석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처음엔 절망과 고통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혼신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7개월째 되는 날, 놀랍게도 삐뚤어졌던 김용수 선수의 허리가 반듯이
잡혀지면서 깨끗이 치료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 후, 체력과 근육 테스트에서도 그는 10년이나 젊은 후배들보다도 더
건강하다는 최상의 검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96년도 LG구단의 팀 성적이 부진한 가운데서도 그의 개인
성적은 크게 뛰어나, 그는 97년도에는 최고 연봉을 받고 계약하게 되었습니다.
환난과 역경의 홍수 때에도 왕으로 좌정해 계시는 하나님! 그분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직 포기하지 마세요
헬렌 켈러 여사는 귀멀고 눈멀고 말도 못하는 삼중고를 겪으면서도 보통
사람들보다 위대한 일을 이루어 냈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성인이 된 다음에 잠깐이라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귀가 멀어져
듣지 못한다면 영적으로는 퍽 유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눈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귀로 듣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상황이 우리에게 유익이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 없고 귀에 들리는 것 없는
캄캄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우리를 처하게 하시기로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방법과 길이 막힌 암담하고 답답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길과 뜻을
가르쳐 주시곤 합니다.
나의 인생을 뒤돌아보면 이와 같은 경험이 참으로 많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방이 모두 막혀 버린 것 같은 처절한 절망적인 상황을 여러 번 겪으면서 내가
품었던 뜻을 완전히 포기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의사가 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폐병 말기가
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나의 모든 꿈을 접어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 나를
부르시고 깨뜨리셔서 주의 종을 만드신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수없는 좌절과 캄캄하고 답답한 일을 당했지만, 그때마다
그런 좌절을 통해서 나의 생각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당할 때는 답답하기도 하고 억울한 생각도 들었지만,
지나고 나면 하나님의 뜻이 내 뜻보다 나았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귀먹고 눈먼 것 같은 답답하고 암담한 상황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방이 막혀 있을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될 때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한 지역장님의 최근에 겪었던 일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나 믿지 않는 집에 시집갔던 이 자매님은 남편을
전도하여 함께 신앙 생활하게 된 것을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중소
기업을 운영하던 남편의 사업이 점차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믿어 고생하게 됐다'며 비웃는 시댁식구들 앞에서 자매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업을 일으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남편의 기업은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한창 공부해야 할 두 자녀와, 도와줄 여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손가락질만
하고 있는 시댁 식구들을 생각할 때 앞이 캄캄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신앙
생활하며 기도했는데도 일이 이렇게 되자,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마음을 돌이키고 더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철야하고 금식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돕는 손길들이 생겨났습니다. 기업인들 중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남편의 재기를 위해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서 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도움으로 남편은 사업을 다시 일으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제 남편이 이 일을 통해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을 통해 진정한
이웃을 얻었고 믿음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처한 상황이 암담합니까? 그렇다면 바로 이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계시는 때입니다.
소가 자동차를 끌다니!
옛날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때의 일입니다. 영국 총독부에서 어떤 지방
부호에게 자동차 한 대를 기증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보니, 그 부호는 소 두
마리로 하여금 앞에서 자동차를 끌게 하고, 그는 자동차 안에 앉아서 즐기며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자동차는 소 수십 마리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도, 그 부호는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이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이 부호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루는 어떤 성도님이 내게 찾아왔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성도님, 성도님은 팔이 없는데 오늘 아침은 어떻게 드셨습니까?"
"네? 제가 팔이 없다니요! 이렇게 멀쩡하게 달려 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성도님, 성도님이 태어날 때부터 팔을 갖고 태어난 것처럼, 성도님은
예수님을 믿은 그때부터 영적으로 믿음을 갖고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구원받은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다는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태산을 옮길 만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믿음을 실생활에서 활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위대한 힘이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가 믿음을 끌고 가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믿음을 활용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믿음을
위축되고 맙니다. 이제부터라도 굳게 믿기로 작정하십시오. 머지않아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편작보다 뛰어난 의사
중국 위나라 때에 뛰어난 의술로 이름을 떨친 편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두 형들도 의사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루는 위나라 왕이 편작에게 물었습니다.
"삼 형제 가운데 누가 가장 뛰어난 의사인가?"
"큰 형님의 의술이 가장 뛰어나고, 다음이 둘째 형님이며, 제가
마지막입니다."
왕은 편작의 뛰어난 의술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의 대답은 형들을 높여
주려는 겸손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편작은 대답했습니다.
"큰 형님은 환자가 아프기 전에 혈색을 보고 어디가 안 좋은지를 알아내지요.
그래서 사람이 병이 나기 전에 미리 병의 원인을 제거해 줍니다. 그러니
아프지도 않은 상태에서 치료를 받는 환자는 형님이 병을 미리 고쳐 주었다는
사실도 잘 모릅니다.
또, 둘째 형은 병세가 미미한 상태에서 병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더 악화되기
전에 치료해 줍니다. 그래서 이 환자도 형님 때문에 큰 병을 고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지요. 그런데 저는 환자의 병이 커지고 고통으로 신음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병을 알아봅니다. 그런 상태에서 치료도 하고 수술도
하니까, 환자는 자신의 중한 병을 고쳐 주었다고 고마워 합니다. 사실 이것이
제가 명의로 소문난 이유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그제서야 편작이 자신보다 형님들의 의술이 더 뛰어나다고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나는 일들만을 기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편작의 형제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의사이신 하나님께서는 매일,
매순간마다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 한 예로, 우리 몸 속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들을 들 수 있습니다. 하루 동안
성인의 심장은 103,689번을 뜁니다. 피는 10만 킬로미터가 넘는 혈관을 1천 회
이상 순환합니다. 23,040번의 숨을 쉬고, 750개의 근육이 빠르게 혹은 천천히
움직입니다.
이렇게 대단한 작업들이 매일, 그것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몸을 작은 우주로 창조하시고, 정교하고
쉼 없는 활동들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살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행하시는 일에 감사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몸과 생활이
병들지 않도록 막아 주는 예방제이며, 병들었을 때 회복하게 해주는
치료제입니다.
때로는 감사할 제목을 도무지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고 게신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낙망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작은 것이라도 찾아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당신의 몸 속에서 매일 기적을 이루시는 분께서 당신의 삶을 위해 어떤
일인들 이루지 못하시겠습니까?
삶의 뼈아픈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살아가는 우리.
그러나 그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는 조금씩
하나님 중심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 고통스런 몸부림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찬란한 영광을 누릴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자에게 주어지는
눈부신 믿음의 날개를 달고서 말입니다.
2. 동굴과 터널
하나님께 독촉장을?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식사를 준비하려던 한 어머니는 식탁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게 뭐지?'
조심스레 종이를 펴 보니, 그 안에는 뜻밖의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엄마 보세요. 엄마는 나에게 천 원을 빚지셨어요. 언제 빚을 지셨는지 잘
모르시죠? 내가 여기 적어 놓을 테니, 한 번 보세요. 어제 심부름한 값 3백 원,
양말을 벗어서 세탁기에 넣어둔 값 2백 원, 자기 전에 일기 쓴 값 2백 원,
책상을 정리한 값 3백 원. 모두 합해서 천 원이에요. 엄마, 오늘 안으로 꼭
갚아주셔야 해요. 부탁이에요."
초등학교 2학년인 막내 딸에게서 날아온 계산서였습니다. 서툰 글씨로
정성스레 써 놓은 쪽지를 보며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그날 저녁, 막내딸의 책상 위에는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예쁜 종이와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이를 본 막내딸은 신이 나서 얼른 종이를 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편지 잘 받았다. 여기 있는 것은 네게 빚진 돈이야. 그러나
사실 너도 엄마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니? 엄마도 한 번 헤아려 볼
테니, 잘 생각해 보려므나. 네가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매일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준 값, 병으로 아파 누워 있을 때 간호해 준 값, 옷과 신발 그리고 예쁜
인형을 사 준 값, 피아노 학원에 보내 준 값 등등. 모두 합하면 얼마쯤 될까?
그러나 엄마는 너에게 아무 돈도 받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너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사랑하는 딸이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아 왔고, 지금도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루를 활동할 수 있는 건강이 있으며, 날마다 먹을 음식이
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은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잘 주어지지
않은 작은 것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하나님, 왜 제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땅을 살 돈을
주세요.', '하나님, 왜 저를 높여 주시지 않는 거죠.? 당장 승진시켜 주세요.'
등등. 끊임없이 하나님 앞으로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 위한 청구서를 보내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때에는 하나님께 독촉장을
띄워 보내기도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이라도 지신 것처럼
말입니다.
잠깐만 삶의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봅시다. 사실 우리에게는 없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 이제라도
하나님께 청구서와 독촉장 띄우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생각하며 감사합시다. 우리의 모습이 엄마에게 빚 독촉을 하는 철부지
어린 딸의 모습은 아닌가 돌이켜 보면서 말입니다.
성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
미국의 템플 대학교를 창설한 러셀 콘웰 박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백만장자들 4,043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생애를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놀랍게도 이들 중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불과
69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크게 성공해서 백만장자가 되기까지 그들
대부분은 물질과 교육, 정규 훈련 등에서 일반 사람들보다 더 좋지 않은 여건
속에 있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콘웰 박사는 그들의 생애가 평범한
사람들의 생애와는 다른 그들만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분명한 목표를 갖고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마음속에 뚜렷한 목표를 세워 놓고, 그것을
위해 전력 투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분명한 목표가 없기 때문에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밀려다니며 삽니다. 이와 같이 목표 없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마음속에 열화 같은 소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차지도, 더웁지도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도 바울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고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사람들의 특징은
불같은 열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불퇴전의 인내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공의 문에
들어서기까지는 기나긴 어둠의 시간을 지나야 하는데, 그 어둔 밤을 무사히
견뎌 낼 수 있는 사람만이 성공의 아침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참지 못하고 포기하기 때문에, 다가오는 아침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사람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 덴버라는
곳에 가서 금광업에 손을 댔는데 아무리 파들어가도 금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굴을 뚫고 뚫다가 지쳐서 그만 헐값에 그 금광을 팔아치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금광을 산 사람이 불과 10미터를 더 파들어가니 거기에
거대한 금맥이 있었습니다. 그가 조금만 더 믿고 인내했더라면, 그 꿈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언제나 목표에 도달하기 직전이 가장 절망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역경에 부딪히면서도 끈질긴 인내로 그 어려운 길을 통과하였습니다. 불퇴전의
인내,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환한 성공의 아침을 맞이하게 했던 것입니다.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의 환경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인내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든지 환경을
극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미래지향적인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만이 아닙니다.
캄캄한 밤, 험한 산기슭의 꼬불꼬불한 길을 트럭을 몰고 지나가던 한
운전기사가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떨던 이 기사는 속도를 줄여가며 천천히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좁은 길목에서 다음과 같은 표지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당신도 이 길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이 표지판을 본 그는 '위험'. '운전조심'이라는 표지판을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안정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그 길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때로 '다른 사람은 이런 일을 상상도 못할 거야.
나처럼 고통스러운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이 길을 가고 계시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더 나쁜 환경에서도 꿋꿋이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험한 길을 안전하게 통과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이
기대는 머지않아 사실로 이루어질 것이니까요.
골짜기를 넘어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손에 비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60만 명도 아닌 600만 명을 일시에 잃어버린 유대 민족은 재기 불능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유대 민족은 오히려 옛 땅을 도로 찾고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처참하게 파멸된 유대 민족이 어떻게 재기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야훼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유대인 강제 수용소 벽에 이런 식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사형 집행을 당하기 직전, 절망적인 순간에 새겨 놓은 것인데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나는 믿노라.
해가 비치지 않더라도 해가 있다는 것을.
나는 믿노라.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라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노라.
하나님께서 침묵하실지라도 여전히 침묵 뒤에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그들이 사랑이라고는 전혀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고난의 삶을
살면서도 반드시 사랑은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진 확대와
멸시 속에 비참하게 죽어 가면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침묵하실지라도 그 침묵 뒤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소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재기하였을뿐 아니라, 지금은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망을 뛰어넘어 환경을 극복하고 살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우리 앞에 있는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배의 잔이
넘치는 생활로 인도하시기 전에 반드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시고
욕심을 죽이십니다. 믿음의 좇아 아브라함도 이 골짜기를 지났고, 야곱과 요셉,
모세도 이 골짜기를 통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골짜기를 지나고 나면 하나님의
눈부신 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꺾이지 않는 소망, 그것만이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빠져 나와 승리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기록 갱신
토마스 에디슨은 전구, 축음기, 발전기, 가정용 영사기를 비롯해 무려
1,093개의 발명 특허를 얻어 발명으로 세계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를
흔히 '발명왕'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만큼 많은 실패를 했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실패 부문의 세계 기록이 있었다면, 그가 세운 기록은 아직까지
갱신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전구 하나를 만드는 데만도 무려 1만번의
실패를 했습니다. 전구를 제외한 특허품 1,092개를 만드는 데 열 번씩
실패했다고 가정해도 그는 총 2만 번이 넘는 실패를 한 셈입니다.
이렇듯 그는 보통 사람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을 실패자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를 실패자로 낙인 찍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나는 9,999번의 실험을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얼마나 더 실패를 되풀이할 셈이냐?'고 묻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9,999번의 실패를 한 게 아니고, 다만 전구를 만들 수 없는
9,999가지의 이치를 발견했을 뿐이다.'"
이처럼 그는 계속되는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많은 발명품으로 마련한 돈을 가지고 그는 공업용 실험실을 세웠습니다. 이
실험실은 제품 생산까지 할 수 있는 공장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67세 되던 해에 공장에 큰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진화 작업에 나섰지만, 각종
화학 약품과 실험 기구들이 많았기에 불길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에디슨과 함께 그 광경을 목격하던 그의 아들은 연로하신 아버지가 받을
충격에 위로의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장이 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에디슨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어서 가서 엄마를 모시고 오너라. 평생 가도 이같은 장관은 아마 다시
구경할 수 없을 게다."
결국 그는 모든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는
80세로 사망할 때까지 왕성한 발명 활동을 계속해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성공이 아닌, 실패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여러 번의 성공을 통한 교훈보다 한 번의 실패를 통한 교훈이 더 마음
깊이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결코 당신을 파괴시키지 못합니다. 다만
실패를 바라보는 당신의 태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실패를 좌절이 아닌 교훈의
기회로 삼을 때, 성공을 통해 얻을 수 없는 보다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실패하셨습니까? 그것은 결코 낙담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당신은 성공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깨달은 것뿐입니다.
대역전 드라마
나는 축구 경기를 대단히 좋아합니다.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아시아 지역
예선 경기 때에도 흥분하며 TV를 보았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야구나 농구 경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축구 역시 마지막까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패배할 것 같은 조짐이 뚜렷한 상황에서도 최후의 한 순간에
역전되어 패배가 승리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통쾌한 역전승이
이루어지면 관중들은 열광하고, 경기장은 금세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인생에서도 대역전극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사방이 막혀 버린 절망적인
상황이 소망이 가득한 상황으로, 처절한 슬픔과 눈물이 기쁨과 웃음으로, 낭패와
실망이 대성공으로 놀랍게 변하곤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단은 반드시 그를 죽여야 했기에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습니다. 마침내 사단은 로마의 법률과 유대인의 종교를 이용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하하...."
사단은 자신의 승리에 대단히 기뻐하며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과 환희도 잠시,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불과 3일만에 최대의 역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있어야 할 무덤은 텅 빈
채로 남겨졌습니다.
자신의 승리를 기뻐하던 사단은 결국 완벽하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역사상
이보다 더 위대한 역전 드라마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부활로 말미암아 사망이 생명으로, 어둠이 빛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뒤바뀌는 획기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대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세우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당신은 일생을 하나님께 맡겼습니까?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승리의 대역전 드라마를 멋지게 연출해
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동굴과 터널
처음에 들어갈 때는 비슷해 보였지만, 나올 때는 전혀 다른 두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굴과 터널입니다.
동굴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워질 뿐 아니라, 반대편으로 뚫려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다시 들어갔던 곳을 찾아 나와야만 합니다. 왔던 길을 제대로 못
찾으면 동굴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터널은 다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일지라도 한 발 한 발
계속 앞으로 전진하기만 하면 반드시 출구가 보이는 것입니다. 터널을 다 나와
뒤를 돌아보면, 걸어서 넘기에는 너무 힘겨운 높고 험한 산을 터널을 통해
직통으로 지나올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이러한 터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은 이유 없이 들어갔다가 고생만하고 다시 나와야 하는
동굴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위를 쳐다보지 못해 터널이 왜 있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 터널을 통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크고 험한 산을
지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터널을 지날 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고
앞으로 갈수록 어두워질지라도 계속 나아가면 출구가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우리는 이 길이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미리 닦아 놓으신 터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당장 발 밑을 분별할 수 없는 어두움이 있을지라도 염려할 이유가 없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만 하면 터널의 설계자께서 친히 우리를 인도하셔서
무사히 나가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터널을 지날 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더 힘들고
많은 시간을 들여서 갈 길을 쉽고 짧은 시간에 통과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좋으신 아버지로 굳게 믿고 나아갈 때는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이 캄캄해서 발디딜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지금 당신에게 손 내밀고
계시는 분, 그분이 바로 당신을 위해 터널을 미리 뚫어 놓으신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이 시대의 현숙한 여인
몇 년 전 오클라호마 성회 때의 일입니다. 두 부인이 가정 문제로 내게
울면서 신앙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그 중 한 부인은 자기는 지금까지 자기
남편을 성실한 아버지요, 좋은 남편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흔 아홉 살이 되자,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나는 더 이상 위선적인
생활은 하기 싫소. 당신이 곁에 오기만 해도 난 몸서리가 쳐진단 말이오."
하면서 가출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부인은 남편이 쉰세 살 된 의사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당신이
싫어졌소. 같이 살고 싶지 않으니, 이혼합시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년의 가정 파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쌓였던 실망과 증오가 갱년기에 이르러 폭발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뒤늦게 부부간의 애정이 파탄이 이르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부부가 율법적인 안목을
가지고 서로의 약점을 드러내어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부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화장을 왜 그렇게 촌스럽게 하느냐, 옷 맵시가 그게 뭐냐, 음식이 왜 이러냐,
집안 관리 좀 잘 해라." 등등 아내의 인격과 자존심을 처참하게 짓밟는 남편과
사는 아내는 불행합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적인 안목을 가지고 남편을 대하는 아내들도 있습니다. 많은
아내들이 남편의 결점이나 약점을 들추어 내어 남편을 정죄합니다. 이런 아내와
사는 남편 역시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적인 아내는 사사건건 남편과
논쟁해서 남편을 이기려고 합니다.
나에게 상담을 요청해 온 두 부인이 그러했습니다. 그 부인들은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부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너무 율법적인
태도를 가지고 남편을 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부인들의 남편을 몇십
년 동안 이와 같은 아내의 비판적인 태도에 증오를 느끼다가 견디다 못해
뒤늦게 해방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 어려운 시대에 남편에게 힘과 소망을 주며 가정을 잘
이끌어가는 현숙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작은 회사에 다니는 봉급 생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봉급 인상이 계속
연기되자, 하루는 사장에게 봉급 인상을 요구하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아내에게
이 일에 대해서 말한 후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그날 저녁, 아내보다 먼저 퇴근한 그는 찾을 물건이 있어서 아내의 경대
서랍을 뒤지다가 두 개의 카드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봉급 인상을 축하한다는
내용의 카드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봉급은 인상되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지금의 봉급으로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으니, 낙심하지 마세요."
부부간에는 서로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감싸 주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요즘처럼 서슬 퍼런 정리 해고의 칼날 앞에 잔뜩
움츠러든 남편에게 아내의 따뜻한 태도는 더욱 필요합니다. 많은 남편들이
집이나 사회에서 설자리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집에서나마
아버지이며 남편임을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돕는 배필로서의 아내들의 내조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사랑과 이해심이 넘치는 현숙한 여인--이 시대가 요구하는 아름다운
여성상입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잠 31:10)
표정 있는 얼굴
그리스도인을 나타낼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후 오히려 표정이 없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문제에 얽매여 있거나 슬픔, 미움, 원망 같은 감정을
풀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이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감정들을 그대로 나타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편치 않은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써 참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은 슬픔이나
노여움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슬퍼하고 노여워하는 것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때로 우시기도
하셨고, 화를 내시기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감정을 꾸밈없이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슬픔이나 노여움의 감정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갑작스런 해고 소식에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어 슬퍼지고
눈물이 납니다. 한참을 울다 보니 남편을 이용만 해먹고 하루아침에 잘라 버린
사장이 원망스럽게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니 남편도 왠지 무능하게 보이고
얄밉게 보입니다. 사정도 모르고 아빠가 집에서 같이 놀아 준다고 좋아하는
아이들도 보기 싫습니다. 이런 생각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 하나님까지
원망스러워지고 모든 게 짜증스러워집니다."
이처럼 슬픔을 슬픔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슬픔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그들에게 책임을 미루다 보면, 어느새
슬픔은 미움과 원망의 감정으로 변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우리의 감정들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너무 슬픕니다. 당장 일자리를 잃고 보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주님, 그 사람이 이유도 없이 저를 욕하고 다닙니다. 저한테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저는 그 사람 때문에 화가
납니다."
만일 이런 저런 말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북받칠 때는 우십시오.
엘리 제사장의 눈에 술 주정으로 보일 정도였던 한나의 흐느낌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하시겠습니까? 이렇듯 한참을 울다 보면,
내 안에서 성령님께서 대신 간구해 주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간구하심을 따라 기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슬픔과 노여움이 그치고,
잔잔한 위로와 기쁨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억지로 기쁘게 살아야겠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표정을
가지십시오. 주님과 사람 앞에 솔직해지십시오. 울고 싶을 때 울며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주님 앞에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런 당신을 보고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어머, 요즘 표정이 참 밝아지셨네요. 기쁨이 넘치시나 봐요."
다이아몬드 이야기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보석 중의 보석인 다이아몬드. 이
다이아몬드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이아몬드의 이러한 진가는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지는 과정 가운데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원래 다이아몬드는 숯과 같은 성분의 물질로 땅속 깊은 곳에 있습니다.
이것이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땅이 내리누르는 지압과 뜨거운 열기를 받음으로써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 물질이 다이아몬드가 되기 위해서는 총 150만
파운드의 압력과 섭씨 2,700도의 열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숯과 같은 별 볼일 없는 우리를 다이아몬드 같은 소중한 존재로
만들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압력과 열기를 보내십시오. 이러한
압력과 열기는 남편이나 자식을 통해서 오기도 하고, 직장으로 이웃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를 멸하려는 것같이 우리를 짓누르고 견딜 수
없게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만큼만 가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이아몬드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에게 합당한 압력과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볼 때, 연단은 과연 우리 삶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삶에 주어지는 압력과 열기의 연단은 우리를
다이아몬드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당신은 소인입니까, 거인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걸리버 여행기"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작품인 이 책은 본래 어른들을 위해 쓰여진
것이지만, 내용이 흥미로워서 오늘날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읽혀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걸리버'는 의사로, 모험심이 많아 여러 차례 배를
타고 먼 나라를 여행합니다. 그러던 중 어느 항해 때에 배가 파선되어 이상한
나라들을 떠돌며 여러 희한한 일들을 겪게 됩니다. 꼬마의 나라, 거인의 나라,
하늘을 나는 나라, 말의 나라 등등.
특히 '꼬마의 나라'에서 걸리버는 개미만큼 작은 소인들을 만나지만, '거인의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난쟁이가 걸리버의 두 다리를 들어 자신의 우유잔에
던져 버릴 만큼 거대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를 보고, 나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저자는 당시 영국의 두 정당인 휘그 당과 토리 당의 싸움을 비꼬면서 보다 넓은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 이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의도가 아닌, 단순한 이야기만을 통해 살펴본다면,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걸리버는 동일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꼬마의 나라'에서는 거인으로,
'거인의 나라'에서는 소인으로 변합니다. 사람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이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걸리버는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소인들에게는
엄청난 거인이요, 거인들에게는 신기한 소인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장애물들,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장애물은
이야기 속의 걸리버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걸리버가 동일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 또한 똑같으니까요.
단지 우리가 그 장애물을 소인이 되어 바라보느냐, 아니면 거인이 되어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뿐입니다. 그것은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소인에게는
거대한 장애물이지만, 담대하고 적극적인 믿음의 거인에게는 너무나 하찮은
장애물에 불과합니다.
성경에 그 좋은 본보기가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후 오랜 길을 걸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파란 광야에
진을 쳤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찾아 온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제 바로
눈앞에 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줄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라. 각
지파에서 족장 한 사람씩을 보내어라."
이에 각 지파에서 뽑힌 열두 명의 두령들은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각각 두 사람씩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막대기에 꿰어 메고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과 기대감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모세와 아론과 함께 그들의 보고에 귀기울였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에 가보니, 과연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자, 이것이 그 땅의 일입니다."
어깨에 메고 온 포도송이와 석류와 무화과를 보이며 그들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곳 사람들의 키는 장대같이 컸습니다. 또 성읍은 얼마나 크며
튼튼했는지요. 또 성읍은 얼마나 크며 튼튼했는지요. 우리는 절대로 그 백성을
점령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강해요.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우리는 메뚜기 같았어요. 아마 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밤새도록 엉엉 소리 높여 통곡하더니, 마침내 한 지도자를 뽑아 애굽으로
돌아가려고까지 했습니다. 이때 열두 명의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우리가 다니며 정탐하고 온 땅은 대단히 아름다운 땅이었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반드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겁니다. 그 땅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버렸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앞선 정탐꾼들의 보고와는 전혀 다른 보고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대조적인
보고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여호수아와 갈렙이 탐지한 땅은 다른 곳이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땅을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보고
왔습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의 소유, 그것이 그들을 열 명의 사람들과
다르게 한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믿음의 거인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가나안의 장애물은 한낱 '밥'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당장 내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뛰어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 그것은 넘지 못할 큰
장애물 혹은 너무나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자,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의 소인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믿음의
거인이 되시겠습니까?
장애물
한 교육학자가 자신의 세 아이에게 어떤 실험을 해본 결과, 동일한 상황에서
각기 다른 반응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기어다닐 무렵,
자신의 앞에 있는 장애물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관찰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아이는 장애물 앞에서 멈추더니 그냥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둘째 아이는
장애물을 피해서 다른 데로 기어갔습니다. 그리고 셋째 아이는 장애물을
밀어젖히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장애물 앞에서 첫째 아이는 체념하였고, 둘째
아이는 도피하였으나, 셋째 아이는 적극적으로 상황에 대처한 것입니다. 여기에
흥미를 느낀 교육학자는 기어다니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같은 실험을 해
보았는데, 역시 세 종류의 태도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적극적으로 장애물을 밀어젖히고 앞으로 나아간 아이의 동기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이의 호기심이었습니다.
'야, 이것 참 재미있는 것이 있네?'
그 아이에게 장애물은 새로운 흥미거리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장정들이 보기에, 골리앗은 너무 커서 그들이 도저히
쳐서 쓰러뜨릴 수 없는 것이었지만(too big to hit), 소년 다윗의 눈에는 그의
돌팔매가 빗나가기에는 골리앗이 너무 컸던 것(too big to miss)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갔던 열 명의 족장들이 보기에 그 땅의 아낙
자손들은 너무 거대해서 도저히 자기들이 이길 수 없는 것이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의 눈에 그들은 능히 삼킬 수 있는 밥에 불과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담대한 마음으로 장애물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는 오직 믿음의
시각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담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은 불가능이라는 가면을 쓰고 온 위대한 기회입니다.
장애물이 있습니까? 그 옛날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열두 명의 족장
중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당신 앞에 놓인 기회를 꽉
붙잡으십시오.
"목사님, 딱 죽고만 싶습니다."
최근 한 성도가 나를 꼭 만나고 싶다면서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초췌한
모습으로 찾아온 그분은 "목사님, 딱 죽고만 싶습니다."라고 하더니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한참이 지나서 마음을 조금 가라앉힌 그 성도가 내게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자매님은 많지 않은 남편의 월급을 쪼개 가며 저축한 끝에 오십이
되어서야 겨우 집을 마련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작년 말에 집을 계약한
자매님은 돈을 모 투자신탁에 맡겼습니다. 잔금을 치를 때까지 기간이 꽤
있었기 때문에 이자도 늘릴 겸, 안전하게 보이는 곳에 돈을 예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지고 금융 기관들이 정리되면서 자매님이
돈을 맡긴 투자신탁회사가 다른 금융 기관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란 자매님은 맡긴 돈을 찾으려고 했지만, 인수한 곳에서는 예금
지급을 계속 연기하며 돈을 언제 주겠다는 확답을 회피했습니다.
몇 달째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잔금 지급 기간이 다가왔고, 결국 잔금을
치르지 못한 자매님은 입주는커녕 계약금만 날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살던
전셋집에서도 쫓겨나 당장 갈 곳이 없어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하루하루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힌다며 울고 있는 자매님을 보고 있으니 30년 전의 제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공사도 아직 끝나지 않은 아파트 7층에서 아래를 보며
목숨을 끊더라도 제발 천국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던 때, 그때는 정말
죽음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건축비는커녕 땅 값도 없이 시작한 여의도 성전 건축, 어려울 것을
예상했었지만 그 어려움이란 가히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공사
시작과 동시에 오일 쇼크와 달러 하락으로 경제 불황이 닥쳐와 건축 자재 값은
오르고, 실직한 성도들이 늘어 교회의 헌금은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금리마저 폭등해 교회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결국 철근만 세운
채 공사는 중단되었고 지불하지 못한 공사비 때문에 건설 회사 측은 나를
고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려움이 가중되자,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원망하며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게 목사님, 저희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을 것을. 저희들이 여의도로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일이 정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이렇게 극심한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면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은 밥 달라고
울어 댔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이제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이제 죽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데, 성령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죽는다면 너를 신임했던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잃게 될 것이다. 그들의
가정은 파탄될 것이며, 그들까지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 너는 끝까지 견뎌야
한다. 반드시 너와 모든 사람들의 빚이 청산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파트 7층에서 사무실로 내려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고통으로 인해 밤낮으로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러자 성도들 사이에 목사님이 절망에 빠졌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성도들은 골조만 서 있는 교회에 몰려와 날마다
철야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을 구해 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예배 때의 일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단상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분은 재산도, 자식도 없이 정부의 보조금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저는 목사님을 통해 수년 동안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도
뭔가를 하고 싶지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낡은 밥그릇과 수저 한 벌이
전부입니다. 이것들을 주님의 일에 바치고 싶습니다."
그분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도님, 이것들은 식사 때마다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걸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게 별 도움이 안 되는 건 알고 있지만, 저도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이때 한 성도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것을 사겠습니다."
제법 큰 사업을 하고 있던 그 성도님은 그 그릇을 1,200만원에 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도들 사이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내어 놓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집을 팔고, 더러는 일 년치 봉급을 건축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성도들의
눈물겨운 정성으로 우리 교회는 일 년 남짓한 기간에 모든 부채를 갚고, 큰
감격 속에 교회를 헌당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때 이 일을 겪은 이후로 돈 때문에 고민하며 죽을 생각까지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때엔 정말로 죽음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의 미혹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죽을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죽고 싶을 때 그때가 살아야 할 때입니다. 죽고 싶을 때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새롭게 출발해 보십시오. 반드시 길이 보일 것입니다.
인간의 끝이 바로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고 포기할 때,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손 쓸 수 없도록 망가져 버린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손을 쓰시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 40:1,2)
마음의 열쇠
우리 교회에는 6.25 전쟁 때 부모와 형제를 잃고 고아가 된 사람이 한 분
있습니다. 숱한 굶주림과 천대 속에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그는
눈물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성인이 되었어도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그는 겨우 학력을 따지지
않은 조그마한 회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산직의 일을 배워 나갔습니다. 월급도
적고 육체적으로 힘은 들었지만,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기술을 배웠고,
오랜 경력으로 제품의 판로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도 하게 된 그는 38세가 되자, 그 동안 뼈를 깎듯이 절약하여 한 푼 두
푼 모은 돈에 처갓집에 돈을 보태어 조그마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맨주먹
상태에서 자신의 독립된 사업체를 갖게 된 그는 세상을 얻은 것처럼 행복했고,
사업도 흥왕하여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1년 만에 석유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매스컴에서는 석유 파동이 우리 나라 경제에 끼치는 악영향을 연일 보도해
댔습니다. 석유 값의 상승은 곧 생산 원가를 높이는 것으로, 이는 곧 국가
경제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실에 덜컥 겁을 집어 먹었습니다. 아직 그 여파가 직접적으로
그의 사업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는데, 그는 미리부터 두려움에 떨며 절망적인
환경을 바라본 것입니다.
자신감을 잃고 망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감과 의욕을 잃었으며,
그러한 사장의 모습을 본 사원들도 일할 힘을 잃어 갔습니다. 회사 전체가 이미
파산한 것처럼 어두움에 잠겨 들었습니다. 그 회사가 두 달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져 내 사무실에 찾아온 그와 상담을 하면서, 나는 그의 문제점이
환경보다는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마음이 약해질 대러 약해져서
심한 두려움에 빠진 그를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집사님은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잇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가득하면 외적인 환경은 하나도 문제되지 않아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집사님의 마음을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각부터 그 망했다는 생각과
두려움을 버리시고, 다 망해도 나만은 흥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또
입으로 끊임없이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집사님이 다시 나를 찾아왔을 때에 그의 얼굴빛은 확
달라져 있었습니다.
"목사님,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상상하실 수 있겠어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제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바뀌었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결코 실패란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회사에 나가서
사원들을 모아 놓고 이제부터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해보자고 했습니다. 다
망해도 하나님을 믿는 나는 흥한다고 거듭 말했어요. 그때부터 누구를 만나든지
'나는 흥한다. 두고 봐라.'며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전혀 뜻밖에도 거래처에서 나를
밀어주겠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당연히 사원들의 의욕도 넘쳐 나고 있고요.
놀랍게도 모든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요즈음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우리는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물가가 치솟고, 기업이 무너지며, 실업자가 급증하는 등 곳곳에서 절망의 탄식
소리가 흘러 나옵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앞에는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그 무서운
절망을 호흡하며 그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절망의 극복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우리에게 절망적이 것은 상황과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상황과
환경을 바라보고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 더 무서운 절망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담대히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물들지 않게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재의 불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밧데리 재충전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밧데리 방전으로 당황하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밤새
라이트가 켜져 있었다거나, 고장이 생겨 전기가 흐르게 되면 밧데리가 방전되어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아침 출근 시간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 곤혹스러움은 더 커집니다.
이러한 곤경에서 가장 쉽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충전되어 있는 다른 차의
밧데리와 연결시켜 재충전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밧데리를 연결시킬 수
있는 전선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결국 카센터를
찾거나 차를 포기하고 다른 방법으로 출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재충전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히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힘을 얻을 때가 있지만,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기력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의 영적 에너지가 소모되어 재충전이 요구된다는
신호입니다.
이런 경우 무조건 쉰다고 해도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나지는 않습니다. 방전된
밧데리를 잠시 쉬도록 둔다고 해서 다시 충전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다시 새롭게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때로 심한 피로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성회나 해외
집회를 끝내고 나서 이런 일이 많습니다. 처음 이런 일이 있었을 때는 '내가
너무 무리했는가 보다. 좀 쉬어야지.'하는 생각에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피로감은 더해지고 마음의 상태까지
힘들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일어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기도에 집중할 수도 없고, 피로감이 밀려와 자고
싶은 생각만 가득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물리치고, 나는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고 하신 하나님, 제가 지금 지쳐 있습니다. 제게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과 같은 새 힘을 주시옵소서."라고 말씀을 의지하며 계속
기도드립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그 피로감이 썰물처럼 밀려가고 새로운 힘과
기쁨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당신은 지금 지쳐 있습니까? 그럴수록 말씀과 기도의 줄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 줄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영육간에 새로운 힘으로 우리를
완전히 충전시켜 주시는 것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향수가 없어도
밀밭으로 변한 밀 자루
한 부유한 상인이 사업차 외국에 가면서 갖고 있던 밀 두 자루를 두 명의
친구에게 각각 맡겼습니다.
"수고스럽지만 이것을 좀 맡아 주게나. 곧 돌아올 테니 그냥 보관만 해두면
될 걸세."
그 후 몇 달 뒤, 상인인 친구로부터 "일이 좀 늦어질 것 같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밀 자루를 맡은 친구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조금 더 있으면 밀이
상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친구는 생각했습니다.
'이를 어쩐다지? 에이 모르겠다. 어차피 보관만 해 달라고 한 거니까 어쩔 수
없지. 뭐.'
다른 한 친구도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를 어쩌나? 그냥 두면 썩어 버릴 테고, 이 친구는 언제올지 알 수 없으니...
그래도 다 썩어 빠진 것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 밭에
심는 거야.'
그는 그 친구 상인이 돌아와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며 땅을 일군 뒤 한 자루의
밀을 밭에 심었습니다. 그런 다음 날마다 물을 주고 김을 매었습니다.
몇 달 후, 그 상인은 돌아왔고, 두 친구에게 맡긴 밀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한 친구가 썩은 냄새가 풀풀 나는 밀 자루를 들고 왔습니다.
그것을 본 그 상인은 민망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한 친구는 그를
데리고 들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밀밭을 가리켰습니다.
"자네가 맡긴 밀이라네."
"...."
그 상인은 친구에 대한 고마움과 감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밀을 거둔 후 그 착하고 충성되고 지혜로운 친구에게 밀 두 자루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먼 나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주인에게 유익을
주고자 그것으로 장사해서 갑절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땅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회계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갑절을 남겨
드린 종들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였고,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둔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묵상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착하고 충성된 마음을 갖는 것과
지혜를 얻는 것과는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친구에게
충실하였던 착한 사람이 밀이 썩어 못쓰게 되는 것을 막을 지혜를 얻었고, 착한
마음씨를 가졌던 종들이 어떻게 하면 주인에게 충성을 다할까 하여 생각할 때
지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착하고 충성된 마음을 지닐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무엇이든지요!
사람은 살면서 맑은 날과 비 오는 날, 따뜻한 날과 추운 날을 지냅니다. 또한
기쁠 때와 슬플 때, 잘될 때와 안될 때, 살 때와 죽을 때를 겪습니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이러한 시간들이 수없이 머물렀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겪었던 크고 작은 여러 일들이 결국에는 내게
유익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고,
절망적인 문제였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어 좋은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어느 조그마한 제재소에서 일하던 40세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며 성실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루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신은 해고되었소."
소장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한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당시는 극심한
불경기였고, 그가 받던 적은 돈은 그나마 가정의 생계를 꾸려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심각한 고민과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해
왔는데, 제재소 소장이 자신을 이렇게 대우하다니 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오랫동안 고민하며 생각해 온 계획을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그 동안 내내 생각해 봤는데,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우리 집을 저당
잡히는 거요. 그리고 난 건축 사업을 시작하리다."
처음에 그의 아내는 펄쩍 뛰며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는 할 수 없이 그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첫 모험은 두 개의 작은 건축물을 짓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건축 사업을 시작하면서 겪었던 어려움과 고통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그는 수백만 달러의 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가 바로 수많은 홀리데이 인 호텔들을 건축한
윌리스 존슨입니다.
그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옛날 제재소에서 나를 해고한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에게 대단히
감사하다고 말할 거요. 그때 나는 왜 내가 해고당해야 했는지 알지 못했죠.
그러나 그때의 아픔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었음을 그후에야
알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엮어 가는 삶의 모든 조각들은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이루어 냅니다. 영광과 기쁨의 조각뿐만 아니라 고난과 아픔의
조각까지도 우리 인생의 작품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 인생의 여러 조각들을 합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시는 하나님.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무엇이든지요!"
꿈은 깨어져야만 한다?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아름다운 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유치장 전도를 시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평양
출신의 김덕진 목사입니다. 그는 30년 동안이나 기타와 바이올린을 둘러메고
서울 시내 각 경찰서를 돌아다니면서 형사 피의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게 된 데에는 동기가 있습니다.
그는 평양의 숭실 전문을 다니면서 음악에 뛰어난 자질이 있어 전국 음악
콩쿨에서 1 등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 유학까지 한 음악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전도 유망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가 되겠다던 그의 꿈은 허랑방탕한 생활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순회 극단 악장으로 떠돌며 술과 여자로 몸과 마음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습니다. 6.25 때 북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장으로
끌려가다가 극적으로 구출되기도 하였고, 북한에서 유치장에 장기간 구류되어
있기도 하였으며, 간첩 교육을 받고 남파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남파되자마자 자수하여 육군에서 특수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1953년 이중
간첩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고 대구 육군 형무소에서 징역살이를
하였습니다.
그의 꿈은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마흔 가까운 나이에 무기 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꿈을 잃고 복역하던 그에게 소망의
빛이 비춰졌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다녔던 주일 학교에서
만난 하나님께서 그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오직 믿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의 기쁨이 충만하여 만나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그는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여 작곡도 하고, 감옥소 안에서
성가대도 조직했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 한 살 되던 해, 그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군법에서는 간첩으로 무기 징역이 확장된 후에는 재심이란 있을 수 없는데,
대통령 특명으로 유례없이 재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30년 간이나 유치장을 돌아다니면서,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활용해서 복음을 전했던 이유입니다. 그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가 다시 새롭게 열매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꿈은 왜 깨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자아를 깨뜨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자아가
깨어지지 않은 채 꿈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마치 자기의 능력으로 그 꿈을
성취한 것인 양 교만해집니다.
김덕진 목사는 석방된 후 한국 초대 경목실장이 되었어도 교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끌어 주셨노라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꿈이 깨어지는 경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만일 그가 출애굽의 꿈에 한창 부풀어 있던 40의
나이에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더라면, 출애굽에 성공한 후 스스로
도취되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양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꿈이
완전히 좌절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출애굽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습니다.
꿈이 깨어졌다 할지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면, 사라져
버린 듯한 꿈은 우리의 것으로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노란 손수건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집안 식구들 몰래 아버지의 재산을 훔쳐
가지고 달아났습니다. 먼 땅으로 도망친 그는 술과 여자, 노름 등 그 동안
자신이 원했던 모든 향락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그는 그 많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돈이
떨어지니 자신을 위해 주던 주위의 친구들도 하나둘씩 떠나 버렸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고 멀리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빈털터리로 외로이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뭘하나....'
처절한 절망과 고독,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지내던 그는 마침내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에게 남은 길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죽음을 택하기로 하자, 문득 자신을 사랑해 주시던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들이 영화의 필름처럼 한 장면씩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아버지를 생각하니, 그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눈에서는 고통과 희한과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용서를 빌어야겠다.'
그는 아버지께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건강하신지요? 저는 무어라 말씀드릴 면목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이 불효 막심한 아들이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속을
썩인 이 못난 아들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이 아들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 아버지, 제가 사흘 후 기차를 타고 집 앞을 지나가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만일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집 앞에 있는 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걸어 주십시오. 그 손수건이 걸려 있으면 용서해 주신 줄로 믿고 아버지를 뵈러
집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손수건이 없으면 아버지께서 저를 용서해 주지
않으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지나가겠습니다."
드디어 약속된 날이 왔습니다. 전날 밤을 뜬눈으로 새운 탓에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손수건이 걸려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아버지께로 갈 수 없어. 그땐 모든 게 끝이야.'
초조한 마음으로 그는 차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정든
마을로 들어섰습니다. 낯익은 마을의 풍경이 눈에 비쳤습니다. 두근거리던 그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더 빨리 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옛 집이
보였습니다.
'아! 이럴 수가....'
그는 가슴이 미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만치 보이는 집 앞의 나무에는 마치 노란꽃이 만발한
듯 수없이 많은 손수건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손수건 걸어 놓은 것을
못보고 그냥 갈까 염려한 아버지가 노란 천을 모두 찢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모님의 사랑만큼 강한 것은 없습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님의
사람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무슨 대가를 바라고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없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못났을지라도 끊임없이 베풀어 주려는 마음,
무언가 하나라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깝기만 한 심정, 그것이 부모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사랑은 희생적입니다. 부모님은 자신의 삶을 희생하더라도
자녀가 잘되기만을 바랍니다. 자녀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에는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호하려는 사람이 부모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자녀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과 마음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습니다. 이기적이고 연약한 성품을 지닌 우리가
자녀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아는데, 하물며 완전한 사랑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고 계시겠습니까? 끝이 없는 무한한 사랑을
지니신 하나님 아버지이시기에 성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__11)
당신은 지금 어떠한 상황에 있습니까? 삶의 중압감에 눌려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오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넓고 따뜻한 그
품안에 마음껏 안기십시오. 좋으신 아버지께서 당신을 품으시며, 당신의 삶에
가장 좋은 것들을 풍성히 안겨 주실 것입니다.
뿌리
나무의 생명은 그 뿌리에 있습니다. 모든 나무들이 뿌리를 통해서 날마다
물과 영양분을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무들은 더 많은 물을 마시려고
땅속 깊은 곳을 향하여 뿌리를 뻗어갈 뿐 아니라, 더 많은 뿌리를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그저 잎이 무성한 아름드리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땅속
뿌리의 세계에서의 생명은 향한 노력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뿌리는 나무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뿌리 깊은 나무는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도 끄떡없습니다. 열대 지방의 어느 보리수 나무의
뿌리는 무려 320개나 되며, 그 전체 둘레는 600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무엇이
이 보리수를 쓰러뜨릴 수 있겠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나무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생명에 대한
갈급함에 신앙의 뿌리를 생수 되시는 예수님 안에 내리기 때문입니다. 갈급함이
더할수록 신앙의 뿌리는 주님 안에 더욱 깊이 내리워지고, 우리의 전 존재는 그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하여 신앙의 뿌리를 주님 안에 내리게
되면, 인생의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전혀 요동치 않는 거대한 신앙의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골 2:6,7)
두려움의 끝
얼마 전 신문을 보다가 참으로 안타까운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
공무원의 자살 기사였습니다.
서울시 환경 관리 기능직으로 근무하던 40대 중반의 가장이 자신의 집
안방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이유는 감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공무원 감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자, 그는 "공무원 감원이 시작되면
말단에다가 건강도 좋지 않은 내가 제일 먼저 잘리게 될 것 같다."며
괴로워하다가 이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상 그의 소속 부서에서는 감원 계획을 구체적으로 구상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에 지레 겁을 먹고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루마니아인인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의 일화는 두려움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
방법을 보여줍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1948년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공산당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14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며, 거의
독방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마지막 3년 동안은 빛도 거의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석방된 후, 그는 수감되기 전보다 더
활발하게 복음 증거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석방되자, 많은 사람들이 고독하고 가혹했던 감옥 생활 중에서도 어떻게
소망을 잃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담담히 대답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성경을 수백 번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체크해
보았더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365번이나 나와 있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
말씀들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매일 한 번씩 격려해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때로 '영원히 석방되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는 것은 아닐까?', '석방되더라도
오랜 독방 생활과 고문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저를 엄습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자신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말씀을
계속 반복해 읽었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다 보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어느새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을 점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체험들이
저를 지탱하게 해준 힘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움이 마음을 점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두려움
대신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을 지배하도록 하는 방법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자, 선택하십시오. 두려움입니까 아니면 평안입니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기다림의 여유
한국 사람들은 머리가 좋고 근면하지만, 너무 조급합니다. 고급 요리로 유명한
불란서 파리의 식당에서 식사를 독촉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뿐이라고 합니다.
식사를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 시간에, 일본 사람들은 이것저것 구경하며 시간을
잘 활용하는가 하면, 미국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고, 프랑스 사람들은 유머를
즐기며, 중국 사람들은 묵묵히 앉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10분만 지나면 식사 독촉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 사람을 상대하는 상인들은 누구나 "빨리,
빨리!"라는 말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기다림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다림보다 더 고된
일은 없습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무척 고달픈 일이지만,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은 이에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기다리는 과정 가운데 우리의
교만이 산산이 부서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자아가 깨어지는 아픔이
수반됩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기다림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한 방편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 없고, 귀에 들리는 것
없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우리의 믿음이 참되면, 우리는 묵묵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요한 바다가 그 수면 위로 하늘을 담아
내듯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다리지 못함으로 낭패를 본 사람과, 굳센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신앙의 높은 반열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무수히 이끌고 오자, 위급함을 느낀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번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결국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식 주시기를 25년 간이나 기다린 아브라함, 20년을
하루같이 본향에 갈 것을 기다린 야곱, 아무 죄없이 13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낸
요셉, 40년 간이나 오직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모세는 기나긴 기다림의 시련을
이겨냄으로써 자랑스런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 30:18)
영적 근시안
어느덧 육십이 넘은 나는 이제 돋보기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사물은 안경 없이도 볼 수 있지만, 가까이 놓여 있는 책은
눈앞에 있더라도 도무지 초점이 맞지 않아 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문가의 말을 들어 보면, 가까운 곳은 잘 보이나 먼 곳이 잘 보이지 않는
근시는 젊은 사람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는 원시가 되어
나처럼 먼 곳은 잘 보이나 가까운 곳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득 나는 '오늘날 사람들의 영적 시력을 테스트해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이 '근시'라는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만 볼 뿐, 멀리 있는 영원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현실만이 삶의 전부인 줄 알고 그 문제에 모든
일생을 겁니다. 돈에 대한 탐욕, 출세와 명예, 내 가족만의 번영 등 철저히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영적 시력은
멀리 있는 영원을 보지 못하는 최악의 근시 상태입니다. 겨우 현실이라는
눈앞의 일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도 영적 근시안을 지닌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큰 부자였습니다. 추수 때가 되자 그의 논밭에는 온갖 수확물이
넘실거렸습니다. 그는 이를 보고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는 한가지 방책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 그거야!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은 뒤 거기다가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면 되는 거야.'
그리고는 매우 만족해 하며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오, 나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꾸나,'
그때 하나님께서 나직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리스도인은 영원을 바탕으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란 영원 속에 있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무시하고
현실적인 문제만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는 근시안의 인생을 사는 비극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먼저 영원의 삶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영원의 문제를 해결 받을 때,
현실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는 것입니다.
밀물은 반드시 온다
강철왕 케네기의 사무실에는 커다란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그림은 그의 명성이나 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아니었고 예술품으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썰물이 빠질 때에 함께 밀려나가 모래 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나룻배 한 척과 노가 그려진, 무척 어둡고 처량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그림 밑에는 "밀물은 반드시 온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던 한 사람이 그에게 그림에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카네기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습니다. 하루는
물건을 팔러 갔다가 어떤 노인의 집에서 이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림이
인상적이었고, 무엇보다도 글귀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시간이 지나고
그 그림과 글씨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노인을 찾아가
정중히 부탁했고, 그분은 그림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림에 얽힌 사연을 말한 카네기는 그림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나는 이 그림을 언제나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고 평생을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밀려와 내게서 무언가를 휩쓸어 갈 때마다
그림을 보면서 내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습니다. '밀물은 반드시 온다'"
지질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축복의 땅 가나안은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라고 합니다. 알고 보면, 그 땅은 이 그림 속의 물 빠진 백사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으면 가뭄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자연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농사짓기에 턱없이 부족한 강물, 그나마 내린 비도 고이지 않고 흡수되어
버리는 모래와 석회석의 땅. 어디를 봐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이름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습니다.
희망에 부풀어 그곳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축복의 땅'이라고
명명하신 하나님의 뜻에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들 때문에 그들은 매일,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그들은 그 땅 자체가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그 땅조차 축복의 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땅을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일궈
냈습니다.
썰물처럼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삶의 저편으로 밀려 나가 버릴 때,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나룻배를 다시 움직일 수 없을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을
기대할 때입니다. 땅 자체가 축복이 될 수 없듯이 밀물 자체가 축복은
아닙니다. 썰물 때에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분을 강하게 체험한 사람들, 그들만이
밀물을 축복으로 누릴 수 있는 자들입니다.
향수가 없어도
자연에는 고유의 향기가 있습니다. 대지의 흙내음과 꽃들의 달콤한 향취,
풀잎의 싱그러움이 자연 속에 어우러져 아름다운 향내를 발합니다.
또한, 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여러 향기를 맡고 삽니다. 잠시의 여유를 즐길
때에 마시는 차의 특유의 향이나, 정성스레 준비된 식탁에서 풍겨 나는 따스한
음식 내음 등이 그것입니다.
사람 역시 삶의 과정에서 향기를 발합니다. 인격과 신앙의 향기를... 사람이
지닌 이러한 향기를 아무 일 없이 평탄할 때에는 잘 풍겨 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평상시에는 어느 누가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지녔는지 쉽게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이 지닌 향기가
발산됩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오해와 비난 속에서 나타나는 향기가 그
사람의 참된 향기인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에게서도 고난의 때에 가장 아름다운 향기가 풍겨 납니다. 뜻밖의
고난으로 아픔의 밤을 지나면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심치 않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마침내는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성도에게서는 오히려 고난의 때에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향기가 발산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향수는 발칸 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향수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곳에서는 좋은 향수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한밤중에 장미를 딴다고 합니다.
밤 12시에 장미를 따기 시작해서 2시간 안에 일을 끝마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한밤중 짧은 시간 내에 장미를 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장미가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발산한다는 실험 결과 때문입니다. 햇빛이
따뜻한 낮에는 장미의 향기가 40퍼센트 정도나 감소됩니다. 하지만 햇빛도 없고
공기도 차가운 밤에, 모든 식물이 활동을 멈추고 움츠러드는 그때에 장미는
오히려 가장 깊은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극심한 고난을 통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당신에게선 이전에 알 수 없던 가장 아름다운 향기가 풍겨 나게
됩니다. 비록 몸에 향수가 없어도 당신 곁의 사람들은 당신으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믿음의 향내를 맡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
작년 초에 어떤 집사님이 나를 만나러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중소 기업을 경영하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기업 경영을 화제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요즘 자금 사정이 안 좋아 중소 기업들이 힘들다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집사님은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자금 사정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견딜만 합니다. 그것보다 더 힘든건
직원들 일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집사님은 자동차 부품을
대기업에 납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공장 직원들이 일은 하지
않고 놀 기회만을 엿보는 것 같아 애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기업의
주문이 밀려 국경일에도 나와서 일을 해야만 납품일을 맞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직원들의 손을 일일이 붙잡고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내일 휴일 수당에 특별 보너스도 더 얹어 줄 테니, 꼭 나오게."
"개인적으로 다른 스케줄이 있겠지만, 나를 봐서라도 한 번만 나와 주게."
그런데 다음날 공장에 나가 보니, 출근한 사람은 공장장 한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부랴부랴 직원들 집에 연락을 했지만, 다들 외출했는지 통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집사님은 공장장과 둘이 밤새도록 일했습니다.
하지만 주문 받은 수량을 다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납품하는 기업에서는
그 일은 물론, 새로운 주문량까지 다른 곳에 하청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말을 마치면서 이런 걱정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만 이런 일 겪는 게 아닙니다. 요즘 기업하는 사람들 모두 사람
쓰는 게 겁난다고 합니다. 정말 큰일입니다. 암, 큰일이고 말고요."
우리 나라 경제는 외환 시장에 이상이 있어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난했을 때는 잘살아 보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열심히 일하고, 허리띠 졸라매며 근검 절약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경제 상황이 나아지자, '이제는 되었다.'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 소비
향락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부동산 투기로 횡재한 사람들이 늘자, 일확천금
사상이 꽉 들어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사람들이 제일
큰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풍조는 부유층뿐 아니라, 중산층과 일반 근로자들에게도 확산되어 돈을
주고도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직종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더럽고 위험하고 어렵다'는 소위 3D 직종이 생겨났고, 이에 그들의 빈자리를
채워 주는 외국인 노동자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색다른 모습들이 생겨났습니다. TV 뉴스에서 설
연휴에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취재한 것을 보았는데,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습니다.
"요즘 일거리가 없어서 아우성들인데, 연휴에도 할 일이 있는 게 너무
감사합니다."
"고향에 내려가지 못해 섭섭하지만, 부모님께서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게
더 큰 효도라도 하셨습니다."
그걸 보면서, '진작 깨달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많은 것들을 잃고 있는
시대이지만, 반면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국민들은 IMF 시대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랍니다. 물론 나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때만 넘기자.'는 자세로 대처한다면 더 큰 위험이 올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배우지 못하는 국민을 다시 고난의 역사를 되풀이 한다.'는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빨리 극복하는 것 못지 않게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때가 바로 기회입니다.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뜻을 회복하고, 건전하고
정상적인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말입니다. 성경은 놀고
먹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그러므로 땀 흘려 일하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는 우리의 자세부터 돌이켜야
합니다. 만일 일하지 않아도 생활에 충분한 돈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
돈을 주셨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달란트를 맡긴 자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물질적인 것을 잃었을지라도 영적, 정신적 자원을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새로운 기회는 찾아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 기회를 꼭
만들어 주십니다.
기대합시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안전 지대
동북 아시아 나라들은 매년마다 불어닥치는 태풍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습니다. 1900년 텍사스의 겔버스턴에 불어닥친 폭풍은 6천 명의 인명을 앗아
갔고, 1954년 일본 북쪽 섬에서는 태풍으로 연락선이 침몰되어 1천 명이나
사망했습니다. 또한, 1970년 방글라데시에서는 폭풍으로 생긴 해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하는 인명 피해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태풍은 수천 명, 때로는 수십만 명의 인명 피해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크나큰 재산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태풍은 6천만 톤
이상의 물을 들어올릴 수 있다고 하니, 그 막강한 힘으로 인명과 재산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태풍이 휘몰아쳐도 전혀 요동치 않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바닷속입니다. 바다 밑 10m 이하로 내려가면, 아무리 거대한
태풍이 몰아쳐도 고요하고 잠잠하기만 하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무서운 생존 경쟁, 정신없이 돌아가는 생활 패턴, 일의 중압과
스트레스 등 마음의 평화를 부서뜨리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어도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어렵더라도 마음에 평강이 있으면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의 현실은 마음의 평강을 깨뜨리는 불안과 걱정의 요소들로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의 풍파 속에서도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그곳은
어디일까요? 우리에게 그러한 안전 지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에 지키시리라"(빌 4:6,7)
그렇습니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 그 외에는 평강을 얻을 수
있는 안전 지대가 없습니다. 그 어떠한 재산도, 어떠한 명예도 요동치는
삶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만이
가장 든든한 안전 지대입니다.
당신의 삶에 무서운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습니까? 태풍으로 인해 마음의
평강이 깨져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태풍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듯이, 기도를 통해 예수님
품으로 더 깊이 들어가십시오.
그곳만이 사나운 삶의 태풍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안전한 유일한
안전 지대입니다.
4. 나비와 나방
한 발짝 물러서기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그는 난로가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을 즐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난로가에 앉아 책에 몰두하던 그가 갑자기 큰 소리로 하녀를 불렀습니다.
"난로불이 너무 뜨겁소. 그러니 불을 좀 낮춰 주시오."
하지만 이 명령을 들은 하녀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난로는
장작으로 불을 지피는 것이었기에, 당장 온도를 조절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타오르는 장작불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녀는 뉴턴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의자를 뒤로 조금 물리시지요."
지금 당신의 모든 신경은 오직 시련의 불꽃에만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까?
맹렬히 타오르는 시련의 불꽃을 바라보며 '하나님, 저 불꽃을 꺼 주세요.
아니면, 불꽃의 위력을 감소시켜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보십시오. 조급한 마음을 한 템포 늦추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시련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에 대처해
나가는 당신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이 연단을 통해 제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버릴 것은
무엇이고, 새롭게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듣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고 난 후에 당신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시련의 불꽃은
여전한데도 전처럼 위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다에서 느낀 것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나는 수많은 바다를 보아 왔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짙푸른 바다, 그 바다의 광대함과 장엄함을 볼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솜씨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부터 하얗게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갈릴리 바다 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생각나곤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전 광야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기적으로 인해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들에 모인 사람들을 보니, 여자와 아이들을 빼고도 5천 명쯤 되더라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을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이 다 먹고 남은 것은 모은 것만 해도 열두 바구니가
되었다네."
이처럼 신나게 노를 저어 가던 제자들이 바다 가운데쯤에 이를 때였습니다.
돌연히 바람이 불더니 파도가 거칠게 일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한
제자들이 안간힘을 쓰며 풍랑에 맞서 배를 저어 가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날을 저물어 어두컴컴해졌는데도 검푸른 바다는 여전히 삼킬 듯이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두렵고 고통스런 시간은 점점 흘러 밤이 사경(새벽 3__6시)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캄캄한 바다 저쪽에서 누군가 그들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유령이다!"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그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면서 무서워 벌벌 떨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오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베드로는 거친 파도가 출렁이는 칠흑같이 캄캄한
바다를 향해 발을 내디뎠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물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 다가가는 베드로를 거친 풍랑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삼킬 듯한 기세로 바람이 휘몰아치고 파도가 무섭게
솟아올랐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걸어가던 베드로는 눈을 돌려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그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
찼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마음에 두려움이 갖자마자, 물위로
걸어가던 그는 곧장 바다 속으로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아, 아앗!"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대며 황급히 베드로가 소리쳤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그들이 배에 함께 오르자,
거칠게 휘몰아치던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움을 갖자 곧 거친 풍랑에 삼켜서 물에 빠진 베드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던 눈을 돌이켜 환경을 바라보면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극심한 환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삶의 풍랑이 거세게 밀려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그 풍랑 위를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기가 꺾여야
송아지는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자유롭게 놓아 먹이지만, 일단 때가 되면
그 기를 꺾어야 합니다. 만일 송아지의 기를 꺾지 않고 그냥 두면, 그 송아지는
영영 쓸모 없게 되고 맙니다. 따라서 송아지 주인은 송아지의 코를 뚫고, 논밭을
갈게 하고, 멍에를 메어 짐을 끌게 함으로써 그를 길들입니다.
또한, 망아지로 하여금 준마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망아지의 기를
꺾어야 합니다. 야생마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직업적으로 말을 훈련시키는 사람이 그 말의 기를 꺾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나운 야생마의 등에 올라타고는 말이 온갖 몸부림을 다
쳐도 끝까지 내려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지친 말은 이내
야생적인 기질이 꺾여 주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사용하시기 위해서는 야생마 같은
인간을 꺾으십니다. 지난날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혹독할 정도로 나의 기를
꺾으셨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그토록 아픈
매를 맞고 환난과 고통을 당한 것이 얼마나 내게 큰 복이었는가를 생각하면
형언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에 북받치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생애 속에 다가오는 시험과 환난을 싫어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고통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할 때, 그 고집이 꺾이고 불순종이 꺾여 하나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 치고 꺾임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야곱이 그러했으며, 요셉과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히
5:8,9)
하나님께 꺾임을 당하고 있습니까? 순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믿음의 그릇이 될 것입니다.
마음의 불황, 확 벗어 던지자구요!
우리 경제가 나락에 떨어지고 돈을 구걸하기 위해서 소위 선진국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말 한 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요즘, 때로는 그들 앞에
우리의 모습이 너무 미약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위기가 결코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이야기 하나
미국에도 경제 공황이 있었습니다. 연세가 좀 많으신 분들은 193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불어닥친 무서운 경제 공황을 기억할 것입니다.
많은 사업체가 도산하고, 은행이 파산하고, 사람들이 직업을 잃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며 굶어 죽는 일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경제 상황이 다소 어려워지기 시작하자, '경제가 어려워진다. 기업체가 부도
위기에 있다. 은행이 파산하면 한 푼도 찾을 수 없다. 그러니 예금한 돈을 빨리
인출해야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 공포, 절망, 초조로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은
은행 창구에 줄을 지어 너도나도 예금한 돈을 모조리 인출해 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은행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은행이 문을 닫게 되자 은행에서 대출한 돈으로 그나마 돌아가던 공장들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직자가 홍수처럼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리하여 1930년대에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경제 공황이 전세계를 휩쓸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불황이라는 절망 가운데 소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매일 저녁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서 전국민의 마음속에 신념과 내일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불황에 눌려 절망적이기만 했던 국민들의 마음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은행에 돈을 예치시켰고, 사업체와 공장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불황은 놀라운 힘으로 극복되어 갔습니다.
*이야기 둘
예수님을 만나기 전 베드로의 삶에도 불황인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어부였습니다. 모아 놓은 재산도 없이 하루하루 벌어 먹고 살았습니다. 그의
일은 매일 밤 어둠이 짙게 깔리면 갈릴리 호수로 가서 고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너무 맑아 낮에 그물을 던지면 고기들이 보고
도망가기 때문에 낮에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도 베드로는 여느 때와 같이 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갔습니다.
그런데 어부 생활 수십 년에 어찌된 일입니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며 그물질하기를 밤이 깊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기 잡아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갔습니다. 절망 속에 날이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힘없이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였습니다. 한
사람이 군중들에게 밀려 호숫가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바로
얼마전 장모님의 열병을 말 한 마디로 고쳐 주셨던 분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갑자기 자신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배를 호수 안으로 조금 들어가게 하라."
엉겁결에 예수님을 배 안에 모시게 된 베드로는 노를 저어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배 한 편에서 말씀에
귀기울이고 있던 그는 그 말씀드린 두 날 가진 검같이 심령을 파고드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그는 환경의 불황도, 식구들에 대한
걱정도 잊고 예수님의 말씀에 도취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삶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불황이 사라지고 은혜가 임한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순간적으로 베드로의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오갔습니다.
'이 밝은 날에 갈릴리 호수에 그물을 내리라니, 더군다나 지난 밤 내내 그물을
내렸는데도 물고기 한 마리 구경도 못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것은 잠시 스치는 생각이었을 뿐,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불황이
사라지고 믿음과 소망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깊은 곳을 향하여 배를
저어 갔습니다.
"밤이 다하도록 수고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자
그물은 수많은 고기로 인해 잡아당길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의
일생은 변화되고 말았습니다.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불황을 만나 자리에 나타나셔서 먼저 그의 마음
가운데서 불황을 몰아내셨습니다. 그런 다음 실제로 그의 환경에 드리워져 있던
불황을 제거해 주신 것입니다.
환경에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눈비가 와도, 마음속에 불황이
다가오지 않는 사람은 환경의 불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과
운명은 우리 마음의 믿음과 소망에 따라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이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주지 않은 이유는 옷을 주면 주머니를
달아 달라고 할 것이고, 주머니를 주면 거기에 돈을 채워 달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 번이라는 코미디언이 인간의 욕심을 풍자한 말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원하는 것을 얻으면 잠시 만족을 누릴 뿐, 또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애를
씁니다. 왜 이렇게 인생에는 만족함이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탐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이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사실, 이 비밀을 누구보다
깊이 깨달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쁘다'는 말을 다른 어떤 사람보다 많이 했습니다. 그것도 감옥에 가서까지
말입니다. 이렇게 기쁨을 누릴 줄 알았던 사람, 그 기쁨을 성도들과 나눌 줄
알았던 사람, 그가 그토록 기뻐하고 행복해 한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자조하는 마음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늘어만 가는 물질에도 행복을 못 느끼는 사람뿐 아니라, 물질이 줄어드는
것이 생명이라도 줄어드는 것처럼 전전긍긍하는 사람 또한 자족함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자족함을 배워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삶의 중심이
예수님이 될 때 우리는 자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족은 재물의 소유 여부에
달려 있지 않고,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도 예수님이 아닌, 물질이 주인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느냐는 물질이 없어지거나 아주 많아질 때 쉽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가난해질 때보다 부자가 되었을 때 믿음에서 떠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부도를 내고 살길이 막막해 고민하던 한 남자가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회를 나오게 된 배경은 다름아닌 돈때문이었습니다.
'조용기 목사가 설교를 잘해서 교회에 헌금이 많이 들어온다던데, 대체 어떤
식으로 사람을 꼬셔서 돈을 버는지 알아봐야겠다.'
이같은 생각으로 교회에 나온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처음에 가졌던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믿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사업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시작한 사업이 점차 커지면서부터 없던 고민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십일조 문제였습니다. 부도 직후에 몇천 원에서 시작한 십일조가
몇백만 원에 이르게 되자, 아까운 마음이 들어 선뜻 드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와서 마지막 십일조를 가져 왔노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갈등이 많습니다. 십일조를 적게 드리자니 제 사정을 뻔히
아시는 목사님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많이 드리자니 너무 아깝고, 그래서 저는
교회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다른 교회에 가면 제가 얼마를 십일조하더라도 잘
모를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미련 없이 교회를 떠났는데 떠난 지 3년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부도를 내고 거기다 큰 빚까지 진 채 말입니다. 물질의 복을
받으면서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귀중하게 생각한 결과가 이렇게 비참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데는 무엇을 얼마나 가지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고
오직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면 가난한 중에도, 부요한 중에도 시험에
들지 않고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버드나무에 걸린 수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이 지속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 중 몇 명이 바벨론의 강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나긴 포로 생활과,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에게 당하는 멸시에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파괴되어 버렸지만 그 옛날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니, 이내 사람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나라를 잃고 성전을 빼앗긴 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땅에서
지내는 자신들의 처절한 현실에 가슴이 미어져 왔습니다.
이때 그들 중 한 사람이 일어나 강가의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었습니다. 이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수금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 쓰이던
악기였습니다. 그곳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이를 보았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얼마 전의 치욕스런 경험을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바벨로 사람들이 술에 취한 채 이스라엘 포로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이리 와서 노래나 한 곡조 뽑아라."
"그거 좋지. 이왕이면 너희가 찾는 그 하나님 노래를 불러 보시지 그래? 혹시
알아? 하나님이 나타나 너희를 구원해 주실는지."
"하하, 맞아. 남의 나라에 잡혀 온 주제에 끝까지 하나님을 찾더라구. 어디 한
번 하나님 노래나 불러 보시지, 노예 양반들. 우리 흥을 돋우러 보란 말이야."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분노와 모멸감에 몸이 떨렸습니다. 이 때문에 이방인들 앞에서는, 더욱이 그들의
쾌락을 위해서는 결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두었던 것입니다.
이는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처참함과 애절한 슬픔을 내용으로
한 시편 기자의 글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
그러나 그들에게도 이처럼 처절한 고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민족과 구별하셨고,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나라들을
거침없이 멸망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엄청난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나라 바벨론에게 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은 무참히 파괴되었고, 왕을 비롯한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황하였고, 처절한 고통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나긴 포로 생활을 지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소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때를 자신들의
불신앙과 잘못을 돌이키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비록 현실이 어둡고 힘들더라도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그곳을 벗어나
자신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70년이라는 긴 포로 생활이 지났을 때, 마침내 그들은 해방을 얻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초토화되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던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시금 새롭게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상상치 못했던 어려움을 당하곤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면, 고통과 더불어 주위의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핍박과 조롱까지 겸하여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줄을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는 새롭게 회복될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굴욕스럽던 기나긴 포로
생활 후 회복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나비와 나방
이 꽃 저 꽃 사이를 우아한 자태로 날아다니는 나비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가로등 사이에서 이리저리 빙빙 돌다가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의 모습은 나비의 우아함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이 차이의 근원을 나비와 나방에 대한 연구 결과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즉, 나비는 태양으로부터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반면, 나방은
자기 힘으로 에너지를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나비는 날개짓이 자연스럽고 유연하며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날아야 하는 나방은 날기 한참 전부터 있는 힘을
다해 파닥거리며 에너지를 충전한 후 힘을 모아 날기 때문에, 나는 모습이
힘겨워 보이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알지만 그분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지 않은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 혼자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는 것 자체를 힘들어 하며, 그들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힘겹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쉽게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그 전능하심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여유가
있습니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삶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알 수 없는 평안함과 넉넉함이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마음
현재 우리 나라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더니, 이제는 경제까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소득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학생 시절에 영어 공부를 참 열심히 했습니다. 그것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안타깝고 애통한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애통함이
지나쳐 밤잠을 자는 것이 아까울 정도가 되었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밤이나
낮이나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는 영어 학원이라는 것도 없었고,
교재도 다양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교재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영어 사전과
교과서를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학습방법이나 효율성을 따지지 않고, 그저 읽고
또 읽고, 쓰고 도 쓰는 공부, 그야말로 우직하게 나는 공부했습니다.
부산공고 2학년 때의 일입니다. 폐의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은 것을 알게
되어 아버지와 같이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당시는 피난시절이라 서울대학병원이
부산에 이주해 와 있었습니다. 나는 병원에서 엑스레이 촬영을 마친 후 결과를
기다리느라 엑스레이실 구석 자리에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몇
명의 교수들이 한가한 틈을 이용해 그곳에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야. 대나무를 영어로 뭐라고 하더라?"
교수 중 하나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글쎄, 알았었는데...."
"그게 말야, 아...생각 날듯 날듯 하면서 안 아는데."
이를 듣고 있던 나는 불쑥 그 대화에 끼어 들었습니다.
"그거, 뱀부(bamboo)아닝교 뱀부."
"아! 맞다. 그렇지."
일제히 교수들의 눈이 구석 자리의 나에게 쏠렸습니다.
"학생 참 영특하네."
이 말에 아버지께서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야는 영어 사전을 A부터 Z까지 몽땅 외고 있답니더."
그 후, 폐병 3기의 진단을 받은 나는 수술도 못하고 집에 와서 하루하루를
병마와 싸워야 했지만, 영어 공부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맡에 둥근
바가지를 엎어놓고 숯으로 단어를 썼다가 닦아 내면서 단어를 외웠습니다.
가족들은 하나같이 나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공부를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영어가 부족하다는 생각, 모자란 영어 실력을 빨리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강하게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절박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계적인 복음 전도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그런 간절한
마음을 주신 듯합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 덕택에 나는 영어를 구사하는 데
특별히 지장을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영어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거나 창피를 당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노력한 결과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애통하는 마음을 잊고 산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는 올림픽 이후 세계 사람들의 찬사와 부러움을 들으며 단번에 선진국의
대열에 끼어든 것처럼 의기양양했습니다. '1만 불 소득에 2만 불 소비'라는
비아냥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작스런 경제 위기를 맞게 되자, 도처에서 한숨 소리를 쏟아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망과 탄식 속에 마냥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탄식을 단순히 과거에 대한 한탄이나 원망이 아닌, 부족함을 깨닫는
반성의 소리로 바꿀 때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애통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철저히 애통해야 합니다. 철저히 낮아져야 합니다. 과거의 교만과 태만을
회개하고 삶의 방향을 돌이켜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 부족함으로 인해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모자란 부분을 채울 새로운 꿈을 꾸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새로운 꿈을 붙들고 기도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노력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 우리는 반드시 위로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지치기
한 사람이 친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장미를 매우 좋아하는 그 친구는
자신의 집 정원을 온통 장미로 꾸며 놓고 있었습니다.
"와, 대단한데. 난 이렇게 훌륭한 장미들은 난생 처음일세."
그 사람은 정원을 돌아다니며 여러 종류의 아름다운 장미들을 감격스럽게
보았습니다. 친구는 멋쩍은 듯 미소를 띤 후 장미 손질을 시작했습니다.
"아니, 자네 지금 뭐하는 건가? 그토록 아름다운 장미들을 뽑아 내다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 친구는 멀쩡한 장미 덩굴을 뿌리까지 뽑을 뿐 아니라, 아직 봉오리도
터지지 않은 장미 가지까지 무참히 잘라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 이거? 놀라지 말게나. 자네는 모르고 있었군. 장미들을 잘 자라게 하려면
옆의 좋지 않은 장미들을 뽑아내고, 또 가지들을 잘 살펴 가지치기를 해 주어야
한다네. 그래야 좋은 장미들을 얻을 수 있지."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 인생의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입니다. 어떤 때에는 '이러다가 나와 내 가정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마저 듭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겪고 있어도 결코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쳐내야 할 가지와
치지 말아야 할 가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때론 고통스럽기도 하고, 또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되어가고
있는지 몰라 불안해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의 과정을 참고 견디다
보면 아름답고 탐스런 꽃을 피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가지친
나무에서 활짝 피어난 장미처럼.
하나님의 결재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안정이 심한 때인 만큼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부쩍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묻는 성도님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이에 40년 간의 목회
경험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1.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지난 1969년 서대문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내게 1만 명이 앉아서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즉시 나는 당회에다가 교회 건축건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장로님들이 교회 건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당시 6백여 명 되는
안수집사님들 조차도 건축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처음에 대단히 혼란스러웠습니다. 내게는 교회를 지을 만한 돈도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 기도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내게 '할 수
있다!'는 불타는 마음의 소원을 주셨습니다. 어떠한 가능성도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새 성전 건축을 놓고 기도하면 내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확신이 넘쳐 났습니다. 모든 환경이 부정적이었지만, 결국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을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여의도에 이렇게 커다란 성전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나는 기적과 같은 이 일에 새삼 감격을 느끼곤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 마음에 강한 소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꿈과 비전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해 안타까울
때에는 기도하면서 우리 마음에 불 같은 소원을 타오르는지 그렇지 않은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을 구별하기 어렵습니까?
그때에는 마음을 정하여 간절히 기도드리십시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지지만, 인간적인 소원을 몇 날이 못 되어 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2. 소원이 말씀과 일치되는지를 확인하십시오.
자, 당신의 마음에 분명한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소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행여 인간적인 정욕이나
세상의 자랑을 좇아 나온 것이라면, 그 소원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어느 이혼녀와 사귀고 있습니다. 그녀는 대단히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요. 제가 기도하면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 소원이 불같이 타오릅니다.
그러나 제게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말했습니다.
"성도님, 그 생각을 단호히 버리십시오. 그 소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이
아닙니다. 악한 사단으로부터 온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지금의
아내는 제게 맞는 상대가 아니라고요. 제가 사귀고 있는 그 여자야말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진짜 아내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는 '간음치 말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32). 그러므로 말씀으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세요."
그러나 그의 나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내와 이혼한 뒤 그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원했던 두 번째 아내가 처음 아내보다 더 맞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흘러가 버린 뒤였습니다.
3. 환경의 문이 열리는지를 눈여겨 보십시오.
당신이 품고 있는 마음의 소원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명한 소원이 말씀과 일치된다면, 그 다음으로 환경이
열리는지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이라면 주신 소원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열려지게 됩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억지로 열려고 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구역장 세미나에서 말씀을 증거하셨던 필리핀의 데이빗 소브레페나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을 따라 큰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세우는 도중 예산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당장 시멘트가 떨어졌지만,
돈이 없어 시멘트를 사지 못했습니다. 철근이 녹이 나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교회는 흉한 몰골을 드러냈지만, 건축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날마다 성도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를 짓기 시작한 것이니, 환경을 열어 주십사고 모두가 합심하며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 앞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중년쯤 되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그는 대단히 화가 난 목소리로 다짜고짜 욕을 해댔습니다.
"교회를 지으려면 다 짓지 그게 뭡니까? 보기 싫은 철근을 드러내 놓고
그렇게 도시 미관을 망쳐 놓다니. 못지을 것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짓지나 말지,
짓다 만 건물로 거리가 흉물스럽게 되었지 않소?"
데이빗 목사님은 부드럽게 대응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미리 계산해서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교회를 짓습니다. 잠시 동안은 돈이 없어서 공사를 진행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곧 짓게 해주실 것입니다."
"뭐라고요? 나는 그 앞을 매일 지나야 한단 말이오. 당신 교회 때문에 기분
나빠 죽을 지경인데, 앞으로도 계속 이래야 된다는 거요? 도대체 무엇이
모자라서 못 짓는 거요?"
그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시멘트가 없어서 못짓고 있다고
대답했더니,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가 수표를 보낼 테니 그 돈으로 시멘트를 사시오. 제발 그 흉측한
건물들을 완성하란 말이오."
그 사람이 보낸 수표는 시멘트 수천 부대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성전
건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환경을 통해 분명한 뜻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그 교회는 얼굴도 모르고 교회도 다니지 않는 사람이 보내준 돈으로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와 같은 단계들을 거쳐 확인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 단계를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결재를 받으십시오.
뭐, 아버지를 바꾸고 싶다고?
내게는 가끔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가 옵니다. 사연인즉, 대개
자기들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며 방탕자, 혹은 이중 생활을 하는 자들로
무책임하고 난폭하여 도저히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는 나쁜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나도 세 아이들을 길러 보았기 때문에 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
훌륭한 신앙적 모범을 보여야 하고, 그들과 대화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며,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등 제반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아버지의 자격에 대해 스스로 평가해 보면, 나는 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 달라는
아이들의 편지에 사양하는 답장을 쓰느라고 진땀을 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편지에다 다음과 같은 참으로 좋으신 하늘
아버지를 소개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좋으신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__11)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정말 최고로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믿는 믿음에
나의 신앙의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불과 물을 통과하는
환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면 나쁠 것이 하나도 없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대는 결코 헛되지 아니하여 하나님께서는 나쁜 환경을 초월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나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 하나님을 체험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정말로 좋으신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감사하며
찬양드립니다.
"참 좋으신 내 아버지여, 감사합니다."
"좋으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와 친하게 지내는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쓰신 글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 도중 한
흑인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조니, 우리는 지금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조니는 누구인가요? 말해 보세요."
갑자기 교실 분위기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조니는 인종 차별로
인해 학생들 사이에서 멸시와 따돌림을 받던 아이였던 때문입니다. 모든
학생들이 호기심과 조롱이 가득찬 눈빛으로 조니를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에
조니의 얼굴은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조니, 일어서서 말해 봐요. 조니는 누구지요?"
선생님이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여기 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때 조니가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너무도 당당한 모습에 그녀의
검은 얼굴은 환하게 빛나 보였습니다.
"예, 선생님. 제 이름은 조니이고, 아시다시피 저는 흑인입니다. 언제나 저는
거울을 볼 때마다 '조니, 너는 대단한 중요한 사람이야. 아주 멋있는
사람이라구.'라고 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쓸모
없는 사람을 만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가치를 잊고 살아갑니다. 삶의 치열한 경쟁에서
조금만 뒤쳐지면 자신을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돈이 많지 않으면 부끄러운
가난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업에서 실패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로
여기고, 남들보다 외모가 뛰어나지 못하면 못생겼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코 이런 평가를 내리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평가 기준은 사람들 혹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자신들이 만들어낸 올무에 걸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속임수 중 하나이지요.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무능력하며 못난 사람으로 혹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엄청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당신을 향해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그렇습니다. 사실 당신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놀랍게도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영광과 승리, 부와
능력의 주이신, 만왕의 왕 하나님의 자녀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제부터 거울을 보며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외치십시오.
"너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구!"
로빈새의 평안
꿀벌에게 있어서 장마철은 가히 살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마가 시작될
즈음이면 그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해져서 괜스레 사람들을 쏘려고 달려드는데,
이것은 그들이 한동안 쏟아지는 비로 인해 꿀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통 속에 저장되어 있는 꿀로는 수만 마리의 벌이 장마가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없습니다. 얼마 안 가서 식량은 바닥날 것이고, 굶어 죽는
벌들이 무수히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식구 줄이기'를 위한 비상 회의를
소집한 후 '대량 살육'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벌통 앞에는 벌들의
시체가 수북이 쌓이게 됩니다.
이 '대량 살육'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마철이 가까워 오면 그들이 왜 그렇게도 불안해 하는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
치열한 경쟁을 앞둔 극심한 정서 불안인 것입니다.
지난해부터 불기 시작한 경제적 한파로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고통 지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명예 퇴직의 바람에서 비롯된 중견 간부들의 불안감은 IMF
구제 금융이 들어오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실직
당할 상황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한평생 몸담고 일했던 직장이 하루아침에 공중
분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곧 대량의 정리 해고가 단행된다고 합니다. 이
당혹스러운 현실 앞에 우리는 너나할것없이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총체적인 불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이 많아 호화롭게 살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안정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궁리
끝에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그림을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화가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평안을 주는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드디어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는 전시장에서
작품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감상했습니다.
아름다운 산 밑에 호수가 있고, 두둥실 흰구름이 떠 있는 그림도 있었지만,
그는 이 그림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또 평화스러운 시골 마을의 정경을 그린
그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그림도 지나쳐 갔습니다. 평안을 주제로 한
그 많은 그림들 중 그의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주는 그림도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걸려 있는 그림 앞에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
그림은 평안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암벽 한 쪽 틈새에 로빈새가 둥지를 틀고 알을 품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바람이 불면 폭포수에 휩싸여 천 길 만 길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 같은 둥지인데도 알을 품고 있는 로빈새의 눈에서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택했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며 물었습니다.
"좋은 그림은 다 놔 두고 하필 그런 그림을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 평안한 환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안을 얻는
길은 이 로빈새처럼 불안한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고 평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안을 찾을 수 있는 환경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환경에서 평안을 찾으려 하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불안과 좌절뿐입니다.
성도들이 얻는 평안은 무풍지대에서의 평안함이 아니라, 폭풍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이 세파속에서 우리가 평안을 얻는 유일한 길은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 품안에 안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품안에서 평안을 얻는
다음,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갈 때,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우리에게는 솟아날 구멍이 생기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대하
20:20)
밤에 부르는 노래
사람에게 주어진 하루에도 밝은 아침이 있는 반면, 어두운 밤도 있습니다.
아침에는 온 세상이 환하고 명랑하여 활기찬 희망이 가득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내 밤이 오고 온 세상에는 칠흑 같은 어두움이 덮이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아침과 밤이 존재합니다.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도 찬란한 아침과 어두운 밤이 공존한다면, 70년 이상 되는 인생살이에
아침과 밤이 있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흔히 즐겁고 기쁠 때에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서 인생의 밤보다는
아침이나 낮에 더 많은 노래를 하게 됩니다. 극심한 고통으로 인생의 밤을 지날
때 눈물과 탄식 대신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 인생의 어두운 밤에 오히려 노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경의 첫 성이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그곳으로 오라고 청하는 환상을 본 바울은 그곳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함께 빌립보에 가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실라에게 오히려 뜻하지 않은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어느 날 그들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 주었는데, 그로
인해 여종의 주인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된 것입니다. 여종이 점을 칠 수
없음으로 자신들에게 커다란 물질적 손실이 온 때문이었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바울과 실라를 치안관들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대단히 요란하게 했습니다. 글쎄, 이들이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행치도 못할 풍속을 마구 전하며 다니고 있지
뭡니까?"
그들의 말에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너나할것없이 다 일어나 바울과 실라를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크게 화가 난 치안관들이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저들의 옷을 찢고 벗기고 매로 치라."
바울과 실라는 온갖 비난과 욕설을 받으며 모진 매를 맞았습니다. 수없이
채찍질을 당한 그들의 벗겨진 몸에서는 이내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죽지 않을
정도의 심한 매를 맞은 후 그들은 더럽고 음산한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피투성이 발에는 묵직한 착고까지 채워졌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자, 당신이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울과 실라는
자신의 잘못으로 매를 맞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빌립보에 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것인데, 이러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달빛이 은은히 퍼지는 밤중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고요한
빌립보의 감옥에서 갑자기 노랫소리가 울려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은은하면서도 평화스런 노래였습니다. 그곳이 흉측한 감옥이라는 사실이 잊혀질
만큼 그 노래는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영혼을 감동시키는 그 노랫소리에
험악한 죄수들까지도 잠잠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노래는 바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바울과 실라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탄식하며 낙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기도와 찬미의 노래로
하나님께 화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빌립보에 갑작스런 큰 지진이 일어나더니,
옥터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려워 소리지르는 사람들로 인해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던 감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쯤 지났을까요? 땅을 뒤흔들던 지진의 기세가 사그러지자, 고개를 푹
파묻은 채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조심스럽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주위를 살피던 사람들은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지진으로 인해
단단히 잠겨 있던 감옥 문이 다 열려져 있었고, 모든 죄수들을 아프게 조이던
착고가 다 벗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어두운 옥중에서 드린 바울과 실라의
찬양이 칠흑같이 캄캄한 환경을 놀랍게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일로
인해 자결하려던 간수까지 구원받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노래하십시오.
밤의 두려움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새로운 아침을 열어 주실 하나님께 찬미의
노래를 드리십시오. 감사와 찬미의 노래만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풀어 놓는
열쇠가 됩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도 해결할 수 없고,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도 꽉
막힌 절망뿐인 어두운 밤. 그 처절한 아픔과 눈물뿐인 실의의 밤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당신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밤의 노래를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연약한 후에 강건하며 애통한 후에 위로 받고
눈물난 후에 웃음 있고 씨뿌린 후에 추수하네.
괴로운 후에 평안하며 슬퍼한 후에 기쁨 있고
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고독한 후에 친구 있네.
고통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면류관과
숨이진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는 진리로다.
--찬송가 535장
때로는 사람을 통해서
기도를 열심히 하고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놓쳐 버리는 때가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성도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장마철, 그가 살던 지역에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보아 하니 보통의 장마가 아니었습니다. 물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홍수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옵소서." 기도가 끝나갈 무렵,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빨리 트럭에 올라타라고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에 트럭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노아의 가족처럼 우리 가족을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다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조그만 보트를 타고 와서 함께 가자고
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아가 온 가족과 소유물을 구원했듯이 가족과 재산을
모두 구하기 위해서는 방주 같은 큰 배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또
거절했습니다.
그는 또다시 기도드렸습니다. 한참 기도하는데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직접 구하러 오셨구나.' 그는 얼른 밖으로
나갔습니다. 헬리콥터가 지붕 위에서 밧줄을 내리고 그 가족들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밧줄도 거절했습니다. '내가 이 밧줄에 매달릴 것 같았으면 아까
트럭이나 보트가 있을 때 탔지.'
결국 그가 살던 지역은 물바다가 되었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습니다.
천국에 올라간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따졌습니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으십니까? 제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 드렸는데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트럭, 보트, 헬리콥터까지 보내지 않았느냐?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했으면서 그게 무슨 말이냐?"
이 사람처럼 초자연적인 기적만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고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필요에 따라서는 기적을 통해서도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사람이나 환경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 해결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으면 열려진 마음으로 환경과 주변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열려 있고, 우리의 생각과 다른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면, 생각지도 못한 응답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그분의 손길을 결코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나비는
날개짓이 자연스럽고 유연하며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날아야 하는 나방은
날기 한참 전부터 있는 힘을 다해 파닥거리며
에너지를 충전한 후 힘을 모아 날기 때문에,
나는 모습이 힘겨워 보이는 것입니다.
5. 마지막 남은 것
군대란 그런 기다
나는 스물 다섯 살에 머리를 빡빡 밀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집에서와는 달리,
군대에서는 모든 생활을 자기 손으로 해야 했습니다. 배식 받아 밥을 먹고 나면
자기가 식기를 닦아야 했고, 빨래도 자기 손으로 해야 했습니다. 침구를 펴고
개는 일, 청소 등 모든 일상 생활을 철저히 자기 힘으로 감당해 내야 했습니다.
처음 내가 군복을 받아 입었을 때였습니다. 군복을 입고 보니, 바지가 너무
짧아 발목이 깡똥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난 아무 거리낌없이 옷을 나누어
주는 하사관에게 말했습니다.
"하사관님, 바지가 너무 짧습니더."
그러자 하사관은 옷을 나누어 주다 말고 나를 노려보고 말했습니다.
"여기가 느그 집인 줄 아나? 바지가 짧으면 니 몸을 줄여서 맞추면 안 되나?
군대란 그런 기다. 더 할 말 있나?"
나는 그때를 생각하며 미소를 짓고 합니다. 모든 것이 획일화된 군 생활, 그
속에선 개인의 사생활이나 편의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철저한 헌신과 복종,
희생만이 요구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절제된 생활과 훈련을 통해 강인한 군인이 탄생됩니다.
따뜻하고 안락한 집에서 생활할 때에 결코 얻을 수 없는 놀라운 강인함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영국은 해군 제독이었던 넬슨 장군의 이야기는 훈련된 군인의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1770년 르코시마 전쟁 때 그는 오른쪽 눈을 잃고, 1789년 젠투빈샌트
해전에서는 오른쪽 팔을 잃었지만, 언제나 당당한 자세로 싸움에 임했습니다.
그러던 1805년 트라팔가 앞바다에서 벌어졌던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와의
접전에서 그는 적의 함대를 거의 침몰시켰으나 그만 몸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거의 죽음에 임박한 상태에서, 그는 누운 채 부하에게 전쟁의
결과를 물었습니다.
"걱정마십시오. 우리 편이 승리했습니다."
이 말에 그는 안심한 듯 미소를 띠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한마디를 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군인의 직분을 다 감당할 수 있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선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세우셨습니다(딤후 2:3,4).
그러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영적인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때로 인생을 통한 군사 훈련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훈련을 통해 우리는 헌신과 복종, 인내와 희생을 지닌 훌륭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훈련이 끝나고 승전하는 그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늘 아버지께서는 친히 달려와 의젓하게 변화된
우리를 안아주시며 기쁨으로 맞아 주실 것입니다.
대체 왜?
신앙 상담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고난'에 관한
문제입니다. 믿음도 좋고, 십일조 생활도 잘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고난을 당하면, 성도들은 무척 당혹스러워 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왜?"라는
의문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죄의 결과도, 불순종의 징벌도 아닌, 그야말로 이유도 모르는 고난을
당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심오한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방법으로 잠시 고난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이 우리에게는 이유 없는 고난일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이유가 있고
계획도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고난의 대표적인 예가 욥의 경우입니다.
성경은 욥과 같이 순전하고 악에서 떠난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까지도 그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한 욥이 고난을 당한 이유는
세상과 마귀 앞에서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욥 편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유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왜 고난을 당하는지, 그리고 그 고난이 어떻게 끝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고 했는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자기의 갈 길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고난이 왜 오는지, 이 고난이 어떤 식으로 끝날지도 알지 못한 욥이
어떻게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까?
그 해답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욥은 '고난'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그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욥은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오직 하나님만이 찬송을 받으실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한 그였기에, 그는 시련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고난' 그
자체보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고난에
대한 욥의 이러한 대처 방법은 우회하는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은 비로 인한 홍수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과도 같습니다.
홍수를 당하면 사람들은 침수된 지역의 물을 모두 퍼내기도 하고, 둑을 더
높이 쌓아 물이 범람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다못해 높은 곳으로 피난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일지라도 계속 비가 온다면, 인간의
모든 수고는 허사가 되고 맙니다.
홍수가 난 후에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쉽고도 간단한 방법은 비가 그치고
햇빛이 내리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은 마르고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는 감쪽같이 회복되어집니다. 이렇듯 홍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비와 햇빛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할 때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 '이
고난이 과연 언제나 끝이 날 것인가?'라는 의문에만 묶여 있다 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데 실패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믿음에서 떠날 뿐 아니라,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아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은 문제 해결은 물론이고, 한층 더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 사람들은 한결같이 욥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24:5)
불량 낙하산을 만들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은 불량 낙하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즉, 낙하산이 공중에서 제대로 펴지지 않아 군인들이 싸워 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는 일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불량품이 생산되는 주원인이 공장 직원들이 적당주의와 게으름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패튼 장군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는 낙하산 공장 직원들을 군용 수송기에 태운 후 각자 자신이
만든 낙하산을 메고 뛰어 내리게 하는 강력한 방법을 사용하자, 불량 낙하산
때문에 군인들이 죽는 일이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에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더 이상
불성실과 게으름으로 인한 불량품들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 경제의 몰락은 사회 전체에 만연한 적당주의, 한탕주의, 물질
만능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론 정부나 기업, 금융 기관 당국자들의 실책이
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우리가 그들의 위치에 있었다면 더 심한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물론 당국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겠지만, 우리 모두가 '내 탓이오.'하는 자성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더 이상 이 나라에서 남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 가는 불량 낙하산이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호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우리는 지금까지 심어 온 잘못된 씨앗들을 경제 한파라는
열매로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 이제 희망이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200만
성도와 4만여 교회가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에
기도하는 많은 성도들을 두시고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두신 이상 우리를 결코
내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 모두가 믿음의 씨앗을 심고, 정직과 성실과 근면과 충성의
물을 주어 가꾼다면, 머지않아 풍성한 열매를 거둘 날이 다가오리라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작전
여호수아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침공을 앞두고 파송되었던
열두 정탐꾼 중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죽자, 그는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특별히 여리고 성을 정복한 작전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군사 작전과도 다른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삼국지'에 나온 각종 군사 작전이 참으로 신묘하다 해도, 아이젠하워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유명하다 해도,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이 뛰어나다
해도 여리고 성 정복 작전만큼 특별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군사
작전은 아군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만, 여호수아는 아군의 피 한 방울 흘림 없이
작전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리고 성은 직접적인 군사 작전으로는 거의 공격 불가능한 천연
요새였습니다. 이 성은 가파른 경사지 정상에 위치해 있는 데다가, 적들의
침입을 대비해 성밖으로 3,4미터 높이의 석조 장애물까지 설치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접근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여리고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군대를 이끌고 여리고 성 가까이에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작전을 짜려고 성을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성벽은 높고 견고하고
가팔라서 도저히 작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성을 바라보며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작전 아닌 작전을 지시하셨습니다.
"엿새 동안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돌아라. 성을 돌 때에는 일곱 명의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며 법궤 앞에서 행하라. 모두들 함께 돌되, 입은 열지 말아라.
마지막 일곱 번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나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모두
큰소리로 외쳐라."
병법에 능한 제갈량이라도 이런 작전을 짜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도 어림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전쟁놀이에서도 이런 방법은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작전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견고한 성안에는
강한 군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데, 빙빙 돌기만 해서야 어떻게 성을
점령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여호수아 사령관은 순종했습니다. 자기의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가능한 전략을 백지화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성벽 돌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만만치 않다는 소문을 들어 왔던 여리고 성안 사람들은
'이제 드디어 공격이 시작되는가 보다.'하고 생각하여 만반의 임전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이스라엘 군사들은 그저 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돌뿐이었습니다. 여리고 성 군사들의 의아심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군대가 모종의 흉계를 꾸미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철통 같은 수비를 했습니다.
이윽고 일곱째 날이 이르렀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은 근심으로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을 빙글빙글 돈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짓이야. 이기려면 맹공을 펴야 되는
것인 아닌가?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말이야.'
'아니야. 우리 힘만으로 어떻게 저 철옹성 같은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겠어.
단단히 무장한 군사들까지 떡 버티고 있는데, 황당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면 어떻게 저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순종하자.
무조건 순종하는 거야.'
미명에 눈을 뜬 여호수아는 운명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또다시 어제와
같이 대오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일곱 바퀴를 돌라고 명령했습니다.
마침내 일곱 바퀴를 돌고 나자, 그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양각 나팔을 불게
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일제히 함성이 터졌습니다.
"와--와, 무너져라, 무너져라, 여리고 성아, 무너져라...."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토록 견고한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와르르... 툭 투두둑 툭 툭!"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어리석게 보이기까지 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함락시켰습니다. 그가 이끄는 하나님의
군대가 사용한 무기는 '순종의 행진'과 '믿음의 함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의 행보를 내디디면서 믿음의
함성을 하늘에 닿도록 외쳐 댔던 것입니다.
영원을 위한 투자
사람들은 대개 돈을 갖게 되면 그 돈을 늘리기 위해 여러 곳에 투자합니다.
전망 있는 회사의 주식을 사기도 하고,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은행에
저금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투자한 돈이 한 푼 두 푼 불어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을 느낍니다. 더욱이 자신이 산 주식 값이 오르고
은행의 이자율이 높아지기라도 하면, 그 마음은 세상을 얻은 것처럼
뿌듯해집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득을
얻어 잘 살수 있을까 하고 돈을 벌고 또 그 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세상의 온갖 부귀 영화를 다
누린 사람입니다. 그가 머리에 쓰고 있던 왕관은 오늘날 시가로 10만 달러가
넘는 것이었고, 값비싼 고급 옷은 너무 많아 한 번 입고는 다시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머물던 호화 찬란한 왕궁은 복도의 길이만 해도 1마일이 넘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벽은 자개와 상아로 멋있게 장식되었고, 천정에는 특별한 샤워
장치가 있어서 왕궁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향수가 이슬처럼 뿌려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한 번 출타할 때면 1천 명 정도의 군사와 마차가 행진하였고, 그가 즐겨
타던 말과 노새의 발에는 은으로 장식된 신발이 신겨졌습니다. 또한, 금으로
만든 낚싯 바늘을 사용하여 낚시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는 세상에서의 삶에 모든 투자를 하여 극치의
영광과 부를 누렸지만, 그 삶의 끝엔 허무와 죽음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라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는 노래가 의미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한 번 지나가고 마는 삶, 죽음으로써 끝나는
삶이라면 지금의 삶을 무조건 즐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마친 후에는 영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천국에서의 영광된 삶이든, 지옥에서의 고통스런 삶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둘 중 하나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도 없는
영원한 삶, 그 삶을 위한 투자를 결코 소홀히 해선 안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듯, 하늘나라에서의 복된 삶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여 투자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한 투자에만 급급해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영원의 삶을 위한 투자에 더욱 힘쓰십시오.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한 투자, 믿지 않는 영혼의 구원을 위한 투자, 형제 자매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투자 등 우리가 영원한 삶을 위해 투자해야 할 대상과 영역은 너무
많고 넓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제가 설 자리는 어디입니까?
가정에서 가장들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위기감을 느끼는 아버지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라는 소설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는가 하면,
돈벌어다 주는 기계로 전락해 버린 것을 한탄하는 아버지들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 '아버지의 전화'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경제적 상황까지
악화되어 그야말로 설 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남자들이 늘어만 갑니다.
교회 안에서도 의외로 가정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고민하는 가장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아내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합니다."
"아내의 바가지는 참을 수 있어도 아이들의 무시하는 눈초리는 정말
괴롭습니다."
그 중에서도 최근에 들은 어느 가장의 고백은 나의 가슴을 무척 아프게
했습니다.
40대 초반의 이 가장은 근무하던 회사에서 명예 퇴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에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되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원래 다리던 회사에서 몇 년 전에 이곳으로 옮겨왔기에 퇴직금 액수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취직을 하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지만, 감원 바람이
불고 있는 요즘 그를 받아 줄 회사는 어디도 없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퇴직금에 손을 대자니, 혹시 잘못해서 날리지는 않을까 싶어 새로운 일을
하기도 부담스러웠습니다. 구인 광고만 보고 용기를 내어 찾아갔던 곳에서는
'대졸자들도 일자리를 못 구해서 난린데, 그 나이에 접수를 하다니 참
대단하다.'는 비아냥 섞인 말을 듣기가 일쑤였습니다. 집에 들어가도 부인과
아이들 볼 면목이 없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추운 날씩에 늦게까지 돌아다닌 탓으로 몸살 가운데 일어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방으로 들어오던 부인이
혼자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딱한 양반 같으니라고, 집에만 누워 있으면 누가 일해 달라고 찾아오는가...."
부인의 말에 그는 '몸도 아픈데, 말이라도 따뜻하게 못해 줄 망정.'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달래며 자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그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오늘 오랜만에 친구들이 놀러 오기로 했어요. 그 애들은 우리집 사정
잘 모르는데, 당신이 있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설명하기도 창피하고, 전,
지금부터 청소하고 준비해야 하니까, 일어나서 어디라도 다녀오세요."
아픈 몸을 끌고 문밖에 나서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부인이 한마디 더
했습니다.
"이제부터 매일매일 나가세요. 애들 보기도 민망하고, 저도 답답해서 하루하루
지내기가 고역이에요."
그 부형님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목사님, 다른 건 고사하고 제발 집에서라도 저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하다 못해 '여보, 요즘 많이 힘드시죠?'라는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면 안
되나요?"
아내가 남편에게 끼치는 영향은 참으로 큽니다. 특히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아내가 해주는 위로의 말 한 마디가 남편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유명한 일화가 이를 증명해 줍니다.
마르틴 루터는 구교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교회에 게시함으로써 개신교 개혁의 불꽃을 일으킨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 개혁 선구자의 길이 그렇게 수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구교측의 반발은 거세지고, 심지어는 그를 죽이기 위해 벼르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막강하고 조직적인 구교의 세력을 상대하기에는 자신의 힘이
너무도 미약한 것을 깨닫게 된 루터는 깊이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며칠째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루터 앞에 소복을 입고 나타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그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소복을
입고 들어와서는 "아이고, 아이고."하며 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란
루터가 물었습니다.
"누가 죽었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대체 누구요, 누가 죽었기에 이렇게 슬퍼하는 거요?"
"하나님이요,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루터는 기가 막히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망발이오?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소. 당신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니오?"
이에 그의 아내는 눈이 동그래져서 되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왜 그렇게 낙담하고
계세요? 저는 당신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어요."
그녀의 말에 크게 충격을 받은 루터는 실의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의 일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후에 루터는 이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프랑스 또는 베니스를 준다 해도 나의 아내와는 바꾸지 않겠다."
이처럼 남편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울 줄 아는 현명한 아내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보, 뭘 그리 걱정하세요. 당신에게는 저와 아이들이 있잖아요. 저희들이
힘이 되어 드릴께요. 우리 함께 기도하고 이 위기를 잘 넘겨요.'
이 말 한 마디가 남편을 위기에서 건지고, 가정을 하나로 묶어주는 든든한
줄이 될 수 있습니다.
괜한 고민
6.25 사변 직후의 일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이른 새벽이면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멸치와 미역을 사다가 다시 동네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셨지만 생활력이 강하셨던 분입니다.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우리 형제들은 아마 굶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머니가 장사하고 돌아와서는 훌쩍거리며 우시는 것이
아닙니까?
순간 나는 '너무 힘이 들어 우시나?'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하시며 어머니는 소매로 계속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사연인즉, 그날 아침 장사를 하려고 나가시는데, 어느 집 부엌에 빨간 것 세
개가 언뜻 눈에 띄더라는 겁니다. 그래 궁금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 보니,
그게 바로 얼어서 시뻘겋게 된 아이들 엉덩이였더라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전쟁통에 피난 내려오다가 부모를 잃고 자기들끼리 살았는데, 너무 추워 불을
쬐려고 상반신만 부엌쪽을 향한 채 엉덩이는 아무것도 걸친 것없이 추운 바깥
쪽에 그대로 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엉덩이가 그렇게 빨갛게 얼어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자식 가진 사람으로 그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넉넉지는 못하지만 부모가 있기
때문에 굶거나 헐벗지 않은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
부모 없는 아이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부모님이 계시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아이들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늘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이를 위해 밤낮없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부요한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 당신의 자녀에게 날마다 풍성한 삶을
허락하신 분,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늘 아버지를 잊은 채 염려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 아버지의 이 음성에 귀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있지 아니하냐? 어찌하여 아버지가 없는 것같이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의 필요를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미천한 짐승들도 자기 새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염려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있던가요? 염려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기도하세요. 염려는 전혀 무익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게 한답니다.
함께 우십시오
날카로운 풍자로 유명했던 영국의 문호 버나드 쇼는 "인생은 머리로 생각하면
희극이고, 가슴으로 느끼면 비극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남의 일은
머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일은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나타내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남의 얘기 하기를 좋아합니다. 자신에게 닥치면 가슴 치고 울 일도
남에게 일어나면 재미 삼아 하는 얘깃거리에 불과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우리의 가슴으로 느낀다면,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아마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23세에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어리다고 생각될 만큼 한창 젊은 나이에
목회를 시작했기 때문에, 어이없는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세상을 살아 온
경험보다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목회를 하려 했던 탓에, 나의 목회는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고통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러
찾아가서는 그들을 정죄하고 돌아올 때가 많았습니다.
성도들 중에 누가 소천하면 나는 초상집에 가서 유족들에게 호통을 치곤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울지 마세요. 왜
웁니까? 이 성도님은 지금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예수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이건 기뻐할 일이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울지 마세요."
이렇듯 내 딴에는 맞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도, 성도들은 전혀 위로받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성도님은 아버님이 하늘나라에 올라가신 것을 믿지 못하십니까?"
"아니요."
"그런데도 왜 계속 울고 있습니까?"
"다 아는 데도 자꾸 눈물이 나요."
이렇게 성도님과 내가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성도님은 가슴으로, 나는
머리로 그 일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이 불 같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깨어지자, 고난을
가슴으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결국에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체험했기에, 고난중에 있는
자들을 향해 설교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해 한마디라도 더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나님의 은혜로 저들이 이 연단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저들을 품어 주셔서 주님의 위로를 받게 하옵소서."
그러자 성도들의 반응이 달라졌습니다.
"목사님, 예전에는 목사님의 말씀이 이해되면서도 자꾸 서운한 마음이 들고
반감이 생겼는데, 지금은 별 말씀 없으셔도 '날 다 이해하고 계시는구나.'하는
마음이 들어요. 참, 이상한 일이죠?"
성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요즘도 고난받는 사람들과 위로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구역 예배에 가기가 싫어요. 어려운 일 때문에 기도 부탁하고
위로 받고 싶어서 나가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위로하는 척하면서 저를
정죄하거나, 간증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랑만 해요. 그 말을 듣고 있으면 그
사람은 잘 믿어서 축복받고 있는데, 저는 잘 못 믿어서 저주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목사님,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제 딴에는 도움이 되겠다 싶어 이 말 저 말로 위로하고 충고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십상이에요."
당신 곁에 고통받는 지체가 있습니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다가가십시오.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 손잡아 주고 그들과 함께 울어 주는 것, 그들과 같은
심정이 되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이것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롬 12:15,16)
거품 빼기
'거품 경제' , '거품 가격' , '거품을 완전히 빼냈습니다.' 이는 요즈음
매스컴이나 거리의 광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들입니다. 국제 통화
기금(IMF) 한파로 우리 사회에서 거품 빼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품 빼기는 사회 각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선호하는
화장품에서부터 레저 스포츠, 음식값, 결혼 예식, 심지어 설날의 세뱃돈에
이르기까지 기업 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불필요한 거품 빼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 할 만큼 어려운 경제 상황이지만, 그 속에서
오히려 불필요한 생활의 거품이 걷히고 내실이 다져질 수 있으니, 그 점에선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로 신앙인인 우리도 자신을 과대 포장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닌
현재의 신앙 높이보다 더 높게 자신의 신앙을 평가하는 것이지요.
마치 자신이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양 자랑스러워 하지만, 막상 환경이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곧 하나님을 의심해 버립니다. 하나님께 응답을 받을
것이라고 당연스레 여기고 있지만, 열심을 내어 기도하지 않습니다. 물질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십일조도 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말씀을 읽고 말씀대로 행하지도 않습니다. 많은 은사를
받았다고 신령한 척 하지만, 교회를 위해 적은 봉사도 하지 않습니다. '나
정도면...'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과대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
6:3)
혹시 우리의 신앙도 과대 포장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의 거품을
빼어 내고 내실을 다져, 하나님 앞에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드립시다.
마지막 남은 것
지금으로부터 3,4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방을
가면 음식 대접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내놓은 음식이라야 감자, 고구마나 차
정도였지만, 굶으면서 심방 다닐 때가 많았기에 음식 대접을 받는 것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앞에 두고서도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놓은 음식의 양이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나와 최자실 목사님 그리고 성도님
이렇게 세 사람이 있을 경우 대부분 가정에서는 2인분만을 내놓았습니다.
성도님은 우리가 부담스러워 할까 봐 음식을 내놓으면서 "저는 아까
먹었으니, 어서 드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음식을 앞에 두고 '내가 이것을 먹고
나면 이분은 한 끼를 굶을 수도 있는데...'하는 생각이 들면, 도저히 그것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걸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제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것은 너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것이니, 그 가정을 위해 축복하고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가정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 가정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복을 받았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물질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성경에도 이와 아주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합 왕 때에 이스라엘에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던 왕 때문에 생긴 일이었지만,
이유야 어쨌든 모든 백성들이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사르밧에서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살던 과부에게는 그
고통이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들은 두 식구 먹고 사는 것이 뭐 그리
걱정이겠냐고 했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형편에 가뭄까지 겹쳐 하루하루
연명해 나가는 것조차 매우 벅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그 지방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많은 부잣집을 제쳐 두고 그녀의 집에 머물기를 청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떡 한 덩이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그녀의 가슴은 쿵하고 내려앉았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하나님의 종에게 말했습니다.
"선지자님, 노여워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저희에게는 떡도 없고,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가루 한 주먹과 기름 조금이 전부입니다. 안 그래도 이걸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을 날만 기다리려고 했던 참입니다."
이 말을 듣고도 엘리야 선지자는 좀처럼 물러설 줄을 몰랐습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나를 위하여 떡 하나를 만들어 오고, 그 후에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해 떡을 만드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가뭄이 끝나기까지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셨소."
방을 나오는 그녀는 섭섭한 마음을 달래 길 없었습니다. '하필이면 왜 마지막
남은 것을 달라고 하신담?'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 남은 것을 엘리야 선지자에게 가져갔습니다. 아니,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녀는 이제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도 엘리야 선지자는 그녀에게 '떡을 가져 오라.'고
말했습니다. 빈 통만 달랑 두 개 놓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엘리야
선지자의 말을 따라 그녀는 부엌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바닥났던 가루통과 기름병이 다시 채워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일매일 써도 다시 채워졌습니다. 이렇게 채워진 가루와 기름으로 그 과부는
모든 사람들이 굶주림에 죽어 가던 극심한 가뭄을 견뎌 낼 수 있었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을 요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혼자 쓰기에도 부족해서 고민하고 있는 때에 말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물질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편의 필요가 아닌, 우리 편의 필요를 채우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의 복을 주시기 전에 우리에게 물질을 요구하심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먼저 확인하십니다. 만일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더라면
한 끼 또는 하루는 더 버틸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3년 6개월이나 지속된
가뭄은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떡을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말씀을 붙들자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살 길입니다.
염려가 담긴 상자
아더 랭크라는 영국의 실업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항상 불안했습니다.
'자금 사정이 안 좋은데 이러다가 부도라도 내면 어떻게 하나?' '매출액이
줄어드는데 어떻게 해야 늘릴 수 있을까?'
이렇듯 많은 염려 가운데 살던 그는 '염려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하고 생각하다가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그는 매주 수요일을
염려의 날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걱정거리가 생긴
날짜와 내용들을 적어 상자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날 그
쪽지들을 꺼내 보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수요일날, 그는 상자 속의 메모지를 살펴보다가 문득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상자에 넣을 당시만 해도 큰 문젯거리였던 그것이
훗날 다시 읽을 즈음에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상자를
계속 활용하면서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사람이 살면서 크게 고민하며 염려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염려의 무가치성에 대해서 이보다 훨씬 더 명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
이것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과 염려는 다릅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해결 방안을 찾되, 전전긍긍하며 염려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려와
걱정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밀려오는 염려와 걱정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염려에 빠져 들지 못하도록 우리의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염려는 미래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염려가 밀려올 때는 "하나님, 염려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줄 알면서도 자꾸 염려하게 됩니다. 제
생각을 주님께서 주장해 주시고 저의 염려의 목록들을 조목조목 아뢰오니 맡아
해결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내어 맡기면, 주님께서 그 염려들을 명쾌한 응답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실상과 허상
기원전 800년 전 이스라엘 나라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되어 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아람 왕의 온갖 전략을 다 써서 이스라엘을 침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람 왕이 아무리 잘 전략을 짜서 군대를 보낼지라도 그때마다 이스라엘
왕은 수비대를 보내 아람 군대를 격파하는 것이었습니다. 번번이 당하기만 하던
아람 왕은 화가 나서 신하들을 불렀습니다.
"너희 중에 누군가 이스라엘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 내가 어떤 작전을 써도
이스라엘 왕이 미리 알고 우리를 이기니 내통하는 자가 없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너희 중 내통하는 놈을 당장 잡아 내어라."
이때 한 신하가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왕이시여, 이것은 우리 쪽에 내통하는 자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 선지자는 왕이 침실에서
하시는 말씀까지라도 알고 있기 때문에, 왕이 전략을 세우면 그것을 일일이
이스라엘 왕에게 고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아 오라고 명했습니다.
엘리사가 도단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아람 왕은 즉시 마병과 보병과
기병들을 총동원해서 도단 성을 첩첩이 포위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그 성을
공격하여 엘리사를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른 아침, 무심코 기지개를 켜던 엘리사의 사환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수천, 수만의 아람 군대가 깃발을 휘날리며 도단 성을 몇 겹으로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놀란 사환은 덜덜 떨리는 다리를 겨우 옮겨 방으로
들어가서는 엘리사 선지자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엘리사 선생님, 큰일났습니다."
"왜 그러느냐?"
"아람 군대가 와서 이 성을 첩첩이 에워싸 이제 우리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합니까?"
엘리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사환을 보며 말합니다.
"이 사람아, 걱정 말게나. 우리와 같이 계신 이가 저희들보다 더 많다네."
사환은 엘리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뭐라고요? 여기 있는 사람은 선생님과 저뿐인데 어떻게 우리 군대가 아람
군대보다 많단 말입니까?"
엘리사는 그 사환을 마당으로 데리고 나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야훼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엘리사의 사환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습니다. 산에 가득히 진친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상과 허상에 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맨 처음 보았던 것은 허상이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아무리 마병과
기병을 동원하여 첩첩이 둘러싸고 있어도, 그것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사환은 실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허상만 보고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참되며
허상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오직 영의 눈이 열려야만 이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실상을 보았습니다. 그가 본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보장이 되셔서 불말과 불병거로 그를 둘러 진쳐 주시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엘리사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그러고는 담대하게 적군의 진지로 가서, 갑자기 눈이 멀어 당황해 하고 있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섰군요. 이 성은 도단 성이 아니니 나를 따라갔습니다.
엘리사는 이들을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 한가운데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들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람 군대가 눈을 떠보니, 그곳은 자기들의 적진인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이었습니다. 완전히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때 아람 군대를 본 이스라엘 아합 왕은 엘리사에게 물었습니다.
"선지자여, 내가 저들을 단칼에 칠까요?"
"아닙니다. 그들에게 먹을 양식과 물을 주어 본국으로 돌려 보내십시오."
왕은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을 잘 먹여 보냈습니다. 그 후, 엘리사가 살아 있는
동안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만일 엘리사가 실상을 보지 못하였다면 아람 군대에 잡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실상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인간의 감각이나 이성이나 지식으로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허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실상은 우리의 오감을 뛰어 넘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 영의 눈이 열릴 때 믿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실상을 보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허상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속성 점술 학원
얼마 전 TV 뉴스에서 '속성 점술 학원'에 대한 보도를 보았습니다. 어수선한
세태에 불안해진 사람들이 점치는 곳에 몰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점집에 몰리자, 1__2개월 과정으로 점쟁이를 만들어 주는 사설
학원들도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 수십만 원씩의 강의료를
내고 토정비결, 사주, 관상 보는 법 등을 배운 후 새로운 점집을 차린다는
것입니다. IMF 시대에 호황을 누리는 곳이 점치는 집이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태가 기독교계에까지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 개개인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해주겠다는 한 기도원의 광고는 흡사
점치는 집의 광고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이런 말도
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처럼 기도도 많이 하시고, 기적을 많이 체험한 분들도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나요?"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다니요?"
"가령 언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면 좋다든지, 어디로 가는 건 나쁘다든지
하는 사실을 미리 알면 장래에 대해 불안하지도 않고 좋잖아요."
이처럼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심리적으로 강한 불안감을 느낀 사람들은
어떻게든 삶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쪽으로 가면
안 되니 반대 방향으로 가라. 그 시기는 길하지 않으니 몸조심해라."는 식의
구체적인 지시에 솔깃하여 그대로 따라가곤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거짓과
속임수라는 사실도 모르는 채.
이런 사람들은 중대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창조주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며, 우리는 단지 피조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인 우리가 조물주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잠언 25장 2절을 보면 "일을 숨기는 것이 하나님의 영화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것이 어떻게 될는지 다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 연단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으로서 미래를 일일이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한 순간 한 순간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온전하게 하나님만을 믿고 나아가면 결국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알려고 애쓰지 말고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미래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을 신뢰하며 믿음의 행보를 내디디십시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발걸음을 내디뎠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거절의 의미
우리 교회 어떤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경제 사정이 악화되던 작년 가을부터
이 장로님에게는 고민거리가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달러에 대한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미국에 유학중인 둘째 딸의 학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달러를 보면서 장로님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빨리 외환 시장이 안정되게 해주세요."
장로님은 작정하고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안정되기는커녕 기도를
시작한 지 보름만에 거의 배에 가깝게 달러가 치솟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또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 사업을 번창하게 해주셔서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주세요."
그런데 더 많은 수입은 고사하고 현상 유지도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님은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겠다고 작정하고 계속
기도드렸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장로님은 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얘야, 아무래도 한국에 들어와야겠다. 정말 면목이 없구나. 미안하다...."
말을 다 잇지 못할 만큼 장로님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분위기를 이미 파악한
듯, 더 있어 보겠다고 조르지도 않고 순순히 귀국하겠다고 하는 딸의 대답이
무척 안쓰러웠습니다.
그날 이후로 장로님은 기도를 드리기가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기도만 드리려고
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거절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 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 저 장학금 타게 되었어요. 제가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아빠도
아시잖아요. 제가 아직 언어나 전공 분야에 미숙한 단계라는 걸. 미국 애들과
겨뤄 이기리라고 상상도 못했어요."
장로님은 그때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주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실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거절을 통해 더 큰 뜻을 깨닫게 하시거나, 더 나은 결과를
주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응답을 미루시는 것입니다.
그 거절이 어떤 의미이든 우리에게는 결코 손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앙에
진보가 오든지, 아니면 더 좋은 쪽으로 환경의 변화가 오든지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깊은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원숙한 사랑
'사랑'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공통
관심사가 되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나 소설, 연극, 음악 등 다방면에서
사랑은 그 중심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이 있는 반면, 사랑의 성숙도에 따라 자기의 유익만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과, 테레사 수녀가 보여준 것 같은 희생적인 사랑도 있습니다.
똑같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표현되기는 해도 그 내용에 따라 다르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
역시 성숙도에 따라 구별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일종의 액세서리처럼 여깁니다. 순간적인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다가도, 개인적으로 손해가 될 것 같으면
헌신짝처럼 그 사랑을 버리고 맙니다. 마치 원할 때 액세서리를 달았다가 필요
없으면 떼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 원숙한 사랑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에게 어떠한 고난이나 손해가
온다 해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설사 생명을
빼앗긴다 해도 그 사랑을 배반하지 않는 것입니다.
6.25 전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수난의 기간이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수백 명의 목사님들이 잡혀 총살되고 2천여 교회들이 파괴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와 목회자들을 혹독히 핍박했던 것입니다.
당시 인천에 공산당에게 끌려 온 어떤 목사님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민 재판을 받은 후 커다란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공산단원 중 유독 포악해
보이는 우두머리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목사 동무! 여러 해 동안 당신은 성경이란 미신으로 사람들을
잘못 인도해 왔소. 지금이라도 당신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 비행들을 뉘우치면,
당신과 당신 아내와 자식들을 살려 주겠소.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계속 그 미신을
고집한다면, 당신 가족은 모두 생매장될 것이오. 자, 결정하시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이 애타게 부르짖었습니다.
"아빠, 우리를 살려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아빠!"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아이들은 목사님의 팔에 매달렸습니다. 어린 막내는
급기야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목사님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랑스런 아이들의 죽는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지옥에 가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습니다.
한 공산당원이 섬뜩한 총부리를 들이대며 빨리 결정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목사님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 그렇게 하겠소. 대신 내 아내와 아이들만은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시오...
나는 그 동안 사람들에게...."
그런데 말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그의 아내가 목사님을 붙들며 말했습니다.
"여보, 아니라고 말하세요. 얘들아, 조용히 해라. 오늘 밤 우리는 왕중의
왕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식사를 하게 될 거란다."
그녀는 아이들을 품에 안고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그녀가 이 찬송을 부르자 잠시 후 목사님과 아이들도 찬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그들 모두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런 반동분자들 같으니라구. 어서 저 자들을 없애 버려!"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공산당원들은 그들이 있는 구덩이
속으로 흙을 퍼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찬양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내 아이들의 머리가 흙구덩이 속에 파묻혀 버렸고, 그들 부부는 목만 흙 위에
나와 있었지만 쉬지 않고 찬양을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님과 그
아내가 완전히 흙 속에 파묻혀 버릴 때까지도 끝내 그곳에서 건져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처형을 지켜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의 큰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힘든 시련이
와도, 설사 하나뿐인 목숨을 내어 주게 될지라도 절대로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라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에 따르는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노라 고백한다면 삶의
어떤 어려움이나 절망 앞에서도 변함이 없는 원숙한 사랑, 그 사랑을
보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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