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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생텍쥐페리-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by Casey,Riley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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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1 




  지은이: 쌩 떽쥐빼리 

  [  (저자 및 역자 약력)

    * 지은이 쌩 떽쥐베리
  1900 년 6월 리용 출생. 프랑스의 비행사. 소설가. 인류문학상 가장 보기 드문 
행동력의 작가이며 주로 비행가로서의 체험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다. 작품으로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 수상작인 "인간의 대지", '페미나 문학상'을 수상한 
"야간비행", "남방 우편기", "전시 조종사" 등이 있다.
    [  (프롤로그)
      나의 이야기

  나는 베르베르의 왕이다. 나는 사랑의 왕이며 제국이고 천형과도 같은 고독을 
친구로 삼는 자이다.

  남부사막.
  그 황량한 대지를 떠돌던 제국의 삶은 오로지 투쟁뿐이었다.
  제국의 백성들은 야영지의 안락 속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길 소망했다. 그들은 
아버지 아들, 어머니와 딸의 두터운 피의 나눔으로 부족을 이루고, 그들만의 피의 
빛깔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어떠한 핍박, 어떠한 패배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나는 완전을 믿지 않았다. 
영속하는 삶 속에서 도대체 완전이란 어떤 경우를 말함인가? 이러한 제왕으로서의 
번뇌 끝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가슴 가슴에다 굳센 성채를 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시들지 않는 창조의 마음이었다.

  야영지의 북쪽
  아득한 사막의 저편에서 그대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랫동안 전해오는 비옥한 
오아시스가 있었다. 그곳에는 신비스러운 성곽 안에 안주한 미개한 종족들이 나름의 
닫힌 문화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백성들을 위한 
나의 뜨거운 사랑과 욕구가 끝없는 지평선을 향하여 발을 내딛은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 앞에 놓인 이 기나긴 여정이 끝없이 이어지는 힘겨운 투쟁과 
만남과 대화로 나를 지치게 만드리라는 것을. 그 수많은 사람들. 논리학자, 대수학자, 
장군, 경찰, 간수, 문둥병자, 창녀, 여왕의 병사^5,5,5^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이 
여정이 나와 나의 제국에 빛나는 창조의 꿈을 싹틔울 것임을 또한 알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 나의 유언과도 같은 이야기를 남긴다. 나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창조의 힘, 그것은 이제 나의 몫이 아니다. 나는 
이루었으므로, 너희는 다시 땅을 일구라. 
    [  1. 연민

  나는 연민의 정이 인간의 정도를 그르치는 꼴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더군다나 지배자로서의 나는 동정을 받을 만한 대상에게만 어떤 관심을 베풀어야 
하는 까닭에, 인간의 마음을 탐색하는 방법을 익혀야만 했다. 그렇지만 나는 대개의 
여자들이 겪는 그런 가슴앓이에는 결코 연민의 정을 갖지 않는다. 빈사 지경에 
빠졌거나 이미 죽은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한때 부스럼투성이 거지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젊음의 혈기로 나는 그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이들을 격려하고, 일부러 살갗을 
재생시키는 향유와 약을 대상들에게서 구해주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동정이 무가치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나서부터는 그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지들은 자신들의 몸을 인내심 없이 긁어대고는, 진흙이나 짐승의 똥으로 
축여대곤 했다. 그들은 부자들이 사치에 매달리듯 자신들의 악취와 부스럼에 어떤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더러운 자신들의 상처를 내보이면서, 거지들은 동냥받은 
돈을 서로에게 자랑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적선받은 거지는 그들 세계에서 성당의 대사제와도 같은 
존재로 군림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그에 대한 연민으로 몸을 씻어주고 약을 발라 줄 양이면, 
스스로가 매우 중요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약의 효험이 나타나 부스럼이 없어지고 악취마저 희미해지기라도 할라치면 
스스로 소외되어 애당초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무기인 부스럼이 다시 돋아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그 험한 육체에 자줏빛 꽃이 찬란하게 
피어나면, 마치 잃어버렸던 자신의 소중한 명예를 회복한 듯한 몸짓으로 거만하게 
쪽박을 들고는, 너절한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구걸 행각에 나서는 것이었다.

  나는 여인들이 전사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녀들을 더욱 실망시켰던 것은 우리들 자신이었다. 
  당신은 살아 돌아온 자들이 거들먹거리면서 자신들의 무훈을 뽐내느라 소란 떠는 
꼴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그 무시무시한 종말이 왔을 수도 있었다고 
외치면서 동료들의 죽음을 자신들의 훈장인 양 과시하곤 했다.
  나 또한 그들처럼 젊은 시절, 적과의 싸움으로 생긴 이마 주위의 상처를 
자랑처럼 내보이면서 다닌 적이 있었다. 죽은 전우의 시체와 그들의 절망을 마치 
내 것인 양 떠벌리면서, 고향으로 금의 환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를 토하거나 내장을 움켜쥐고 안간힘을 쓰면서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이 
발견하는 진리란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죽음이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체는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고 이젠 더 사용할 수 없이 고장난 도구처럼 보인다. 
의식은 밀물과 썰물처럼 오락가락하기 시작한다. 그 기억의 조수는 마음의 해초를 
끌어올렸다가 다시 물에 잠기게 하며, 정적으로 죽음을 예비하므로, 마음은 평정을 
되찾고 결국 신의 흔적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맞이했던 것이다.
  내가 왜 그들에게 연민을 가져야 했을까? 왜 내가 그들이 인생을 마감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짜면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을까?
  나는 죽음의 극치를 너무나도 자세히 목격한 적이 있다. 열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소녀를 내게 데려다주었는데, 그녀는 그 순간 이미 
어둠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영양처럼 달리고 난 뒤였는지 매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기침을 옷에다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애써 
넘어오는 기침을 참으며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던 것이다.
  아아, 그때 그녀의 미소는 강변의 산들바람이었다. 그 미소는 꿈의 나래였으며, 
물가를 가늘게 날아가는 백조의 순결하고 고아한 흔적이었고, 그 백조의 깃에서 
뿌려진 투명한 물방울이었다.

  내 아버지의 죽음 또한 그러하였다.
  찬란한 인생을 마감하고 돌이 되어버린 나의 아버지. 암살자의 날카로운 단검은 
아버지의 육체에 덧없는 종말을 안겨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위엄으로 충만케 
하였다. 암살자는 머리칼이 순간 하얗게 되어버렸다고 한다.
  자기로 인한 희생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침묵의 덫, 거대한 
대리석 관과 마주하는 살인자는, 죽은 자가 꼼짝하지 않고 있다는 단지 그 사실 
때문에 새벽까지 그 관 앞에 고개 숙여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단숨에 영원의 시간 속으로 떠난 나의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흘 동안이나 멈추게 해놓았다. 그를 땅에 
묻고 나서야 우리들은 혀가 비로소 풀렸다. 그는 우리를 통치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크나큰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우리는 그를 매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의 신처럼 이 제국의 뿌리가 되어 땅 
속에 봉인되었을 뿐이었다. 내게 죽음을 가르쳐주고, 어린 시절 나로 하여금 죽음을 
직시할 수 있게 해주었던 이는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결코 눈길을 흐트린 적이 
없었다. 어쩜 독수리의 피를 가진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  2. 아버지와의 대화

  시간 속에 용해되고 모래로 화해버린 세월이 삼켜버린 유령들을 내가 발견한 
것은, 아버지가 나에게 죽음을 가르쳐주기 위해 나를 말에 태워 어떤 장소로 
데리고 간 때였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 곳에는 샘이 있었단다."
  그 샘은 굉장히 깊었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별밖에는 비치지 않았다. 그 밑바닥은 
진흙까지 굳어버렸기 때문에 거기에 비치던 별은 빛을 잃어버렸다. 샘은 별빛이 
사라지면 마치 복병처럼 길가는 대상들을 충분히 함몰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좁다란 샘의 통로로 사람들과 가축들이 살아있는 채로 스러져 가는 순간의 
전율이 나에게까지 다가왔다. 터진 짐꾸러미와 다이아몬드와 금덩이들과 함께 
죽음의 영역으로 침몰해가는 영혼들의 영상이 뚜렷하게 그려졌던 것이다.
  "너는 초대받은 사람들과 연인들이 모두 떠난 뒤의 잔칫집이 어떤 꼴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새벽이 되면 그들이 남겨놓고 떠난 무질서한 모습을. 술병들은 
깨어지고 어지러진 식탁과 지저분하게 꺼진 모닥불의 흔적.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의 흔적을 읽는 것만으로 너는 인간의 사랑을 판단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계속 말씀하셨다.
  "네가 예언서의 책장을 넘기다가 인물 소묘나 황금빛 삽화에서만 신경을 쓴다면 
성스러운 예지, 즉 본질적인 진리를 놓쳐버리게 될 것이다. 양초의 생명은 자취를 
남겨놓는 밀랍덩어리가 아니다. 그것은 빛 그 자체에 있다."
  이윽고 황량한 넓은 고원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고대의 신전과 그 제물들의 
참혹한 자취가 널려져 있었다. 내가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자 아버지는 다시 다시 입을 
열었다.
  "잿더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시체들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지 마라. 여기에는 
인도하는 사람이 없어 진창 속에 영원히 빠져버린 수레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누가 제게 생명의 진실을 가르쳐 주나요?"
  "대상의 본질을 그들이 다 없어지고 나서야 발견되는 법. 네 귀에 들려오는 온갖 
풍문은 흘려버려라. 절벽이 있다면 돌아갈 것이고, 바위가 있다면 피해갈 것이며, 
모래가 지나치게 가느다랗다면 다른 단단한 모래땅을 찾아서 가되 늘 같은 방향을 
따라갈 것이다. 나귀가 지쳐 쓰러져 집이 땅에 떨어지면,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부서진 
상자를 주워 모아 다른 짐승의 등에 싣고는 계속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안내자가 도중에 죽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즉시 다른 사람을 
지도자로 세울 것이다.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움직이게 되면, 
대상은 보이지 않는 언덕 위에 선 육중한 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나의 엉덩이를 두드리셨다.
  "아들아, 인간은 나무와도 같다. 그것은 씨앗도 아니고, 가지도 아니며, 바람에 
흔들리는 줄기도 아니고, 또한 죽어버린 땔감도 아니다. 그것을 알려고 나누고 
쪼개보아도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너 또한 마찬가지니라.
  신은 너를 태어나게 하셨고, 자라나게 하셨으며, 희망과 후회, 기쁨과 고통, 
분노와 용서로 끊임없이 너를 채워주실 것이고, 결국에는 너를 신의 품안으로 
데리고 가실 것이다.
  너는 학생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며 노인도 아니다. 너는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이다. 네 자신이 올리브나무의 흔들리는 가지임을 알게 된다면 너는 영원을 
맛보게 되리라. 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네 조상들, 네 
곁의 샘물, 너를 향한 사랑하는 여인의 눈빛이나 밤의 신선함 이 모두가 영원함을 
알리라." 
  [  3. 인간의 성채를 지으리라

  이제 내가 성채의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 올라보니 신의 품안에서는 고통도 죽음도 
또 장례까지도 서러워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살아있는 자에 대한 추억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자체보다도 
실존적이고 또 위대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인간들의 
고뇌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인간들의 존재를 불쌍하게 여기게 되었다. 침묵하는 
시간 가운데 홀로 깨어나 신의 별 아래 자신이 보호되고 있다고 믿다가는 불현듯 먼 
여행길에 서있는 그런 인간들을 말이다.
  도둑들의 마음과 그들의 절망적인 상태를 이해하면서도, 그들의 죄 많은 영혼까지 
구해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들을 죄악으로 인도하는 
불안감까지는 어쩌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턱대고 다른 사람의 황금을 노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랑은 그들이 절대로 포착하지 못할 어떠한 빛을 위한 사랑인 
것이다. 그들은 마치 샘물에 비친 달을 꺼내려고 샘물을 퍼내는 사람과도 같다.
  그들의 초조와 공포에 대해선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노리는 어떤 장소에 자신들을 만족시켜 줄 만한 무엇이 있으리라. 그래서 꿈꾸며 
밤의 행각을 계속하는 것이다. 내 충실한 부하들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행운이 
자기를 돌봐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도둑들을 계속 체포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을 내 사랑으로 감싸주리라.
  나는 그들이 자신이 좁다란 일터에서 무엇을 추구합네 하는 사람들보다 더욱 
열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 도시의 주인이다.
  사랑은 그 대상을 찾아내야만 한다. 나는 지금 이 시간에 존재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랑, 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을 구해주리라.

  내가 결혼이란 계약으로 여자들을 제약하고, 또 간통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도록 
한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다. 나는 그 여자의 욕망을 이해하고 있으며, 또 그녀가 
자신을 위하여 어라나 그 모험이 필요한지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녀의 마음 속에 있다. 따라서, 그녀는 아득한 초원 속에 갇힌 채 사형 
집행인을 기다리는 신세가 될 뿐이다. 모래 위에 잡혀 올려진 송어처럼 그녀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그녀는 밤을 향하여 소리친다. 그러나 아무 
보람도 없이 메아리만이 공허하게 울리리라.
  도대체 그 순간 그녀를 만족시켜줄 만한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자유롭게 남자를 바꾸도록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만남의 미래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평화에 대하여 오랫동안 명상한 적이 있다.
  방금 태어난 아기나 가을의 수확, 그리고 정돈된 가정의 행복은 위대하다. 
그것들은 평화롭다. 가득 찬 곳간, 잠들어 있는 양들과, 방 안의 잘 개어 정돈된 
옷가지는 완전한 평화이다. 일단 완성된 후 신에게 봉헌되는 것들의 평화.
  인간은 성채와 아주 흡사하다. 성채는 누군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무너뜨려지고, 또 천장에 별이 보이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의 어떤 
상실감이 고뇌를 부르게 된다.
  불타고 있는 포도넝쿨의 향기나 털을 몽땅 깎아주어야 하는 양으로부터 자신의 
진리를 찾아내는 일, 진리는 우물처럼 깊이 파는 것이다. 시선이 산만해지면 신의 
영상을 잃게 된다.
  마음이 한 곳에 모여 양털의 무게만치밖에 모르는 현인들도, 밤의 죄악 속에서만 
마음이 열린 간부보다 신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성채여, 나는 인간의 마음 속에 그대를 건설하리라.
  현실의 평화를 더욱 다듬어야 한다. 나는 땅의 틈바구니를 메워서 인간에게 
화산의 자취를 숨기는 자이다. 나는 심연 위에 펼쳐져 있는 잔디밭이다. 나는 
신에게서 한 시대를 위임받아 강을 건네주는 사공이다.
  신은 내게 맡길 때보다 훨씬 현명하고 성숙된 그들을 되돌려 받게 될 것이다.
  나는 내 백성들을 내 사랑 안에 머물게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전 세대의 
상처를 치료하는 이를 옹호한다. 이름 없이 읊어 내려온 조상들의 시에 자신의 
호흡과 영혼을 집어넣는 이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임신한 여인이나 젖먹이는 
여인을 사랑하며, 대를 이어 번창하는 짐승들을 사랑하고,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계절을 사랑한다. 나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 성채여, 나의 고향이여. 나는 사막의 폭풍으로부터 이들을 지키리라. 침노하는 
적의 위협에 대비하여 성채, 네 주위에 나팔수들을 세우리라. 
  [  4. 진실, 사람들은 집에서 살고 있다.

  나는 크나큰 진리를 발견하였다. 인간들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들에게는 
사물의 의미가 집의 의미에 따라서 변한다는 것 말이다. 마찬가지로 길이나 보리밭, 
언덕의 능선들 역시 그것들이 한 영지를 이루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왜냐 하면 이 잡다한 것들이 모여서 인간의 마음에 하나의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신의 왕국에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을 비웃으며, 재물이 없는데도 누군가가 확실히 재물을 추구한다고 믿는 
이들은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만일 그들이 그 가축떼를 무턱대고 
탐낸다면 그건 자만심이 그의 심중에 살아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거기에 양, 염소, 보리, 밀 그리고 산이 있습니까? 그 외에 다른 무엇이 또 
있나요?"
  나는 그들이 도살자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생명이란 그들 같은 부류로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내 영토 안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들, 하다못해 
미물조차도 그들의 썩은 머릿속에 있는 그 무엇과도 다르다는 것과, 내가 안주하고 
있는 이 영토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 때, 행복을 
알리라. 그들은 각자의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거주 장소는 공간 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 때문에 흘러가는 시간이 한 줌의 
모래처럼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안온하게 
해준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진정 좋은 일이다.
  시간은 하나의 건축이다. 따라서 나는 이 축제에서 저 축제로, 이 기념일에서 저 
기념일로, 이쪽 포도밭에서 저쪽 포도밭으로 돌아다닌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릴 적에 
그 발자국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 내 아버지의 궁전회의실에서 휴게실로 
뛰어다니던 것과 같다.

  나는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그 진실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인간이다. 내 제국의 
풍습과 법률과 언어, 나는 거기에서 의미를 찾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돌을 모으면서 
창조하는 것은 바로 침묵이다. 그 침묵은 돌 틈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무거운 
짐과 가면을 통하여 인간은 생기를 얻는다. 시체를 해부하여 그 뼈와 내장의 무게를 
재는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소위 유식한 자들과의 토의를 감연히 
거절한다. 그것을 통하여 증명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기 때문이다.
  내 백성의 언어여. 나는 썩지 않도록 그대를 구하리라. 
  [  5. 지배자의 논리, 인간들의 배(1)

  나는 우두머리다. 나는 지배자다. 나는 책임자다.
  우두머리란 타인들을 구원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를 구원하도록 타인들에게 
촉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의 양, 염소, 집, 산 들 
사이에 어떤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나의 힘이며 나의 능력이며 나의 의자에 의한 
것임을 내 스스로 잘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백성들은 나의 모든 것에 애정을 느끼고 있다. 저들이 처음에는 전혀 
알아보지도 못했던 어느 여신이 부드럽고도 강렬한 햇빛을 배경으로 그들에게 실바람 
같은 가슴을 열 때, 그 여신에게 자신도 모르게 도취되듯이, 마침내 그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룩해놓은 이 모든 현상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창조한 집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동상을 사랑하는 사람과 찰흙과 
벽돌, 그리고 청동의 질감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으면서도 어떤 조각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무한정 몰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집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그들의 사물들을 넣어둔다. 
그러면 그들은 피와 땀으로 그 집을 살찌우리라. 그 집은 그들에게서 그들의 피와 
어쩌면 육신까지도 요구하리라. 그 집은 아버지와 아들의 의미를 일깨워 줄 것이며, 
어머니와 딸의 정을 돈독히 해주는 공간이 될 것이다. 그 집에서 사랑은 피어나리라.
  만일 내가 별들에게까지 하나의 의미를 줄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집을 지을 
줄 안다면, 그리고 밤에 그들이 집 문턱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찬란한 빛을 
밝힌다면, 사람들은 이 별의 항해를 그처럼 잘 인도해주신 신에게 감사할 것이다.
  또 내가 그 집을 오랫동안 생명을 보전할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짓는다면, 그때에 
이르러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예지할 것이며 다양한 삶을 통하여 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채여! 그래서 나는 그대를 배처럼 만들었노라. 나는 바람 같은 시간 속에다 
그대를 못박고, 돛을 올렸으며, 밧줄을 늦추었노라.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나의 배가 없으면 영원조차 없으리라.
  나는 나의 배를 위협하는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다. 나의 배는 언제나 어두운 
바다의 풍랑에 가이없이 흔들리곤 한다. 그리고 수많은 외부적인 조건들에 의해 
파괴될 요인을 갖고 있다. 왜 그런가? 예로부터 하나의 위대한 성전이 그 가치를 
잃게 되면, 또 다른 위대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본래의 성전을 부수고 벽돌을 
빼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은 성전이 본래의 성전보다 낫다거나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무너진 돌무더기 위에는 어떠한 역사도 씌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오로지 침묵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숙련된 뱃사람들이 배에 오른 주인을 잘 도와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대대손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성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새로이 지으려 한다면, 나는 결코 나의 성전을 아름답게 완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6. 지배자의 논리, 인간들의 배(2)

  숙련된 뱃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하는 것은, 인간들의 건축물 
자제를 위한 나의 배려이다. 그 배의 주위에는 맹목적이며 완전하게 자유로운 거대한 
힘, 즉 자연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변덕스러운 자연을 사람들은 가끔 지나칠 
정도로 잊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가 절대적인 안전과 미래를 보장하고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져있곤 한다. 그들은 바다에 있으면서도 바다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하나의 
장식물 정도로 치부해버리곤 하는 것이다. 바다는 신의 선물이며, 언제나 자신들을 
감싸안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로 언제까지나 남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한 그들의 생각은 완전한 착각일 뿐이다.
  어떤 조각가는 돌을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었다. 다른 조각가는 또 
다른 형태의 영혼을 각인하였으리라. 하늘을 바라보라. 우리의 상상 속에서 태어난 
백조좌를, 이제와서 어떤 아리따운 여인의 자태로 상상할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가 
만든 어떤 상은 그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되레 우리를 사로잡아 버린다.
  이런 일은 우리 삶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나는 악당들이 어떻게 나의 백성들을 속이고 희롱하여 우리의 본성을 위협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곡예사라든지, 손가락을 잘 놀려 얼굴 모습을 만드는 자 등등, 그 
광대들이 노는 꼴을 넋이 빠져 보는 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내가 그들을 붙잡아 목을 베도록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기억하라. 나의 율법사들이 그 곡예사의 잘못을 증언해서가 아니다. 곡예사는 
엄밀하게 추적한다면 사실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가 옳은 일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현명함과 정당함이 그 현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목숨의 안개가 걷힐 지경에 이른 자들이여. 너희들이 나보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너희 손에서 태어난 참신하고 덧없으며 찬란한 
시간들, 그리고 오랜 신앙으로 쌓인 오만을 결코 내게 제시하려 들지 말라.
  너희들의 구조물은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구조물은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 내가 곡예사를 비난하고 목배어 내 백성들을 타락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들이여, 내 이 말을 명심하라.
  자신들의 배에 더 이상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자, 그 안에 살아있는 자신을 되돌아 
보지 못하는 자, 이미 요새의 담장이 허물어졌도다. 마침내 잔잔한 바다에 솟아 올라 
그 어리석음을 잠재워 주리라. 
    [  7. 삶과 시간

  나는 무엇인가 안정된 것이 세대를 통해 지속되지 못할 때에는 흘러가는 시간이란 
모래 시계와 같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날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백성들과 
함께 견고하고 영원한 무엇인가를 완성해야 한다는 자각에 도달했던 것이다.
  나의 거소는 비좁다. 과거를 살다 사라진 파라오들의 자취를 보라. 가이없는 세월을 
굳건하게 버티고 선 저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어 소멸하는 시간을 정복한 이들을 
향기를 맡아보라.
  나는 가끔 대상들이 찾아가는 광막한 사막의 한 곳에서 모래바람이 불고 난 후 
거대한 성전이 솟아오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성전은 보이지 않는 푸른 
파도가 그 마스트를 파괴하여 이젠 서서히 침몰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배와 같다. 결국 침몰을 면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그 성전에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인간의 생명을 다 바쳐 이루어진 
금은 보화가 있으며, 세대를 거쳐 전해내려 온 늙은 장인들의 혼이 서린 작품이 
있고, 또 할머니들이 성직자들을 위하여 눈을 부비며 만들어낸 화려한 제단보가 
있다. 그 수놓은 제단보들을 할머니들이 굳어져가는 몸을 이끌고 잔기침을 하며, 
죽음에 흔들리면서, 남겨놓은 긴 옷자락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간직한 성전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하리라.
  광활한 이 초원, 이 오래된 과거의 유물을 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자수를 놓을 수 있을까?"
  그렇다. 할머니들은 이미 이 땅의 대지가 되고 바람이 되었다. 자신들이 그처럼 
놀라운 재주를 가졌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5,5,5^.
  나는 이처럼 우리가 발견한 소중한 것들을 위하여 커다랗고 튼튼한 궤짝을 
만들어야겠다. 그것을 운반하기 위한 마차도^5,5,5^.
  그것은 내가 인간들의 생명보다도 더 오래 지속되는 모든 것들을 더욱 존경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교환의 의미를 보전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거대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저녁 때마다 나의 백성들과 함께 내가 품고 있는 고요한 사랑을 나눈다. 
나는 허망한 빛으로 자신을 불태우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불안을 느낀다. 그들은 
마치 시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나 진정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과 같고 사랑을 품고 
있으면서도 선택할 줄 모르므로 변화할 수 없는 여인과 같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 노파에게 자수를 잘못 놓았다고 탓하는 몰상식한 
인간이 있다면, 그는 노파가 다른 더 아름다운 무엇을 짤 수 있으리라는 구실로, 
창조보다는 허무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인식한다. 조용한 가운데 천천히, 또 거의 생각지 않아도 무르익는 
야영지의 여러 가지 냄새를 맡으며 나의 기도가 하늘에 닿는 것을 느낀다. 자수나 
꽃은 과일이 되기 위해서 우선 시간 속에 몸을 담그는 것이다.
  오랫동안 산책을 하며 나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다스리고 있는 이 
제국은 먹을 것에 대한 욕구보다는 의무의 성격과 작업의 열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 그것은 소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헌납에 의하여 이루어 
진다는 것.
  사물 속에서 그 자신을 재창조 하며, 반면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원 불멸의 
장인은 문명인이다. 또한 싸우면서 그 자신과 제국을 맞바꾸는 자 역시 문명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아무런 창조의 노력도 없이 자신의 몸을 사치품으로 휘감으며 남이 
써놓은 시를 읽곤 한다. 스스로 땅을 일구지 못하고 노예의 힘에만 의존하는 타락한 
인간들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남부 사막이 태고적의 빈곤 가운데서도 언제나 활기찬 종족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인간들과의 투쟁을 위해서이다. 이 종족들은 힘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는 식량을 따라 북으로 전진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늘 한 궤도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개선 없이는 
완성도 없다. 인생은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시간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한 줌의 모래처럼 흘러가버려 그들을 파멸로 이끌 뿐이고^5,5,5^.
  나는 그들의 이름으로는 신에게 아무것도 바칠 것이 없다.
  골목을 따라 걷는다. 어떤 집의 문 틈으로 하녀를 야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는 그 야단치는 분노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별 느낌이 없다. 다만 그 
열성만이 느껴질 뿐이다.

  샘가에 어린 소녀가 웅크리고 앉아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그녀의 머리에 내 손을 얹고 그녀의 얼굴을 내게로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돼 자신이 어째서 우는지 
모르리라고 나는 단정하였기 때문이다.
  슬픔은 늘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것은 황급히 흘러가는 슬픔이며, 그르쳐진 
시간으로 이루어진 채 잃어버린 고리의 슬픔, 또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시간에 속하는 그녀 동생의 죽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 슬픔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녀가 늙으면 연인과의 이별이,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현실과 주전자와 
울타리에 둘러싸여진 집, 그리고 젖 먹이는 아이들을 향한 잃어버린 길^5,5,5^. 시간은 
갑작스레, 마치 모래가 모래 시계의 좁은 틈을 따라 거침없이 떨어지듯이, 그녀의 
인생을 가로질러 무심하게 흘러갈 뿐이다. 
  [  8. 오아시스를 향하여

  나는 깨달았다. 한 장소에서 영원히 편안한 삶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아리따운 
환상이라는 것을, 모든 인간들의 거주지는 본질적인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그대가 산 위에 세운 성전을 보라. 그 성전은 북풍에 굴복하여 오래된 이물처럼 
차츰차츰 마멸되어서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다. 모래가 쌓여가는 그 건축물은 점차 
모래로 변해갈 것이다. 그대는 성전이 서 있던 자리에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황금빛 사막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건축물과, 양과 염소, 그대의 집, 나의 왕궁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내 
사랑의 우선적인 양식이다. 그것들은 왕의 얼굴에 집약되고 있어서, 만약 왕이 
죽게 되면 모두 분해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새로운 조각가들에게 제공된 
뒤죽박죽의 조각 재료가 될 것이다.
  사막의 조각가들은 이 재료를 가지고 하나의 새로운 모습을 창조 해낸다. 
그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어떤 영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그 재료의 
흐트러진 성격을 정돈해 주기 위해 올 것이다.

  그와 같이 나는 나의 법칙에 맞게 행동하였다. 내가 원정갔던 시절의 휘황하던 바, 
나는 그 찬란하던 기억을 아무리 뛰어난 언어로 표현한다 해도 다하지 못할 것 같다.
  처음으로 가보는 사막 위에 삼각형의 캠프를 치고 밤이 되기를 기다려 언덕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나의 전사들과 말과 무기들을 집결 시켜놓은 마을의 광장보다 
조금 큰 검은 진용을 바라보면서, 우선 그것들의 취약점을 생각해 보았다.
  사실, 하늘색 장막 아래 거의 발가벗은 채 이미 별들도 잡혀 있는 밤의 
추위를 견디면서, 가죽부대의 한 모금도 안 되는 물로 지독한 갈증을 견뎌야 하고, 
한 번 일어나면 그 거대한 힘을 과시하는 사막의 폭풍을 피하면서, 마침내는 
사람의 육신을 익어버리게 하는 뜨거운 태양에도 위협받는 저들보다 더 비참한 
지경을 당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사람은 검불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다. 무기를 들고 훈련받아 겨우 
단단해진 육체로 금역의 땅 위에 벌거벗고 누워서는 푸른 천을 두르고 있는 
저들보다 더 비참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이러한 취약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뭉치게 하여 
멸망해 버리지 않게 구원해주었다. 밤 동안에 단지 삼각형의 형태를 정돈하면서, 
나는 그것과 사막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의 야영지는 주먹처럼 꽉 닫혀져 있었다. 나는 조약돌 사이에 서있는 
삼나무가 파괴로부터 자신의 무성한 가지를 구원해내는 걸 보았다. 삼나무는 
매순간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는 밤낮으로 자신의 둔중한 내부 
속에서 투쟁을 하여야 했고, 적진 속에서 영양분을 탈취해야 했다.
  나는 야영지가 잠들어 버리거나 망각 속에서 해체돼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 
사막의 소음을 정탐하는 보초병들을 그 옆에다 배치해 두었다. 삼나무가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자갈밭을 흡수해 삼나무 밭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야영지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생명력을 얻어야 한다.
  밤의 교환.
  아무도 그가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는데 모닥불가에 불쑥 나타나 웅크리고 
앉은 조용한 사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이들은 북부로 전진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로라든가, 약탈당한 낙타를 추적하러 
남부로 간 족속들의 행로, 살인죄 때문에 다른 사람들 집에 일어났던 소동, 그리고 
특히 베일에 숨겨져 침묵을 지키고 밤이 오는 것을 관조하는 사람들의 계획을 
이야기해 해준다.
  당신은 자기 침묵을 이야기하러 오는 전령들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모닥불가에 그처럼 느닷없이 그처럼 음침한 말을 가지고 나타나면, 불이 곧 
모래 속으로 묻혀버리고, 사람들이 화약으로 야영지를 장식하면서, 자기들의 총기에 
배를 깔고 누워버리게 한 사람들에게 꼭 축복이 있기를! 밤은 기적을 잉태하는 
법이다.

  나는 정복해야 할 오아시스를 향해 나의 군대를 이끌고 갔다.
  인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라면, 그 자는 오아시스에 가서도 오아시스에 대한 
찬미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오아시스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거지를 모르고 
있다. 오아시스를 발견해야 하는 것은 사막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사막의 비적의 
가슴 속에서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들에게 사랑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내가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이 오아시스에 가면 향기나는 풀과 샘물의 노래에, 날렵한 암사슴처럼 
두려워 도망치지만, 결국에는 사로잡히기를 원하는 부드럽고 길다란 베일을 쓴 
여인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5,5,5^."
  또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여자들은 그대들을 증오한다고 생각하며, 그대들을 쫓아내려고 이빨과 손톱으로 
저항하리라. 그렇지만 그녀들의 푸른 머리카락을 그대들의 굵은 주먹 안에 꽉 쥐면, 
그녀들은 곧 양순해질 것이다. 그럴 때면 힘을 부드럽게 사용하라. 그녀들은 그대들을 
잊으려고 다시 눈을 감을 것이고, 비로소 그대들의 침묵은 독수리 그림자처럼 
그녀들을 누르리라. 그때에 이르면 그녀들은 눈을 들어 그대들을 볼 것이고, 그녀들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대들은 그녀들의 무한한 공간이 될 
것이다. 이럴진대 그녀들이 어찌 그대들을 일을 수 있겠는가?"
  나는 결론적으로 이 천국에 대하여 병사들을 열광시킬 작정으로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그대들이 그 곳에 가면 종려나무 숲과 온갖 색깔의 새들을 보리라. 오아시스는 
그대들의 것이다. 왜냐 하면, 그대들이 추적하는 자들은 그것을 가질 만한 자격이 
없으며, 오직 그대들만이 마음속에 오아시스에 대한 찬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동그랗고 흰 조그마한 자갈들 위로 흘러가는 시냇물에 빨래를 하면서, 
어느 축제를 축하할 때에는 언제나 그렇게 어떤 서글픈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알고 행동한다. 모래 속에서 잔뼈가 굵어지고 햇볕 속에서 수척해지며, 
염전이 타는 듯한 껍질로 절여진 그대들이여. 그대들은 여자들과 결혼하여 양 허리에 
주먹을 대고는 그녀들의 푸른 물 속에서 속옷을 빠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승리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제 오아시스는 더 이상 피신처가 아니라 사막 위에서의 낙원이리라. 그대들은 
이미 그들을 정복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축해놓은 식량에 만족하여 그만 
이기주의의 늪 속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그 오아시스의 입구에서 잠든 보초를 
교대시키고 그들을 선동하려고 애쓰는 성가시고 귀찮은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그들은 
둘러싸고 있는 사막의 영예 속에서 단지 오아시스를 위한 장식만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재물로 인한 행복의 환각 속에 빠져 있다. 그러나 행복이란 행위의 
열기와 창조의 만족에 불과한 것이 아니던가? 이제 그들은 스스로 노예의 나락에 
빠질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강조하였다.
  "오아시스가 일단 정복된 후라 할지라도, 사실상 변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사막에서의 또 다른 형태의 야영일 뿐이다. 
나의 제국은 언제나 위협받고 있다. 염소며 양, 거처, 저 산들이 이 제국의 
바탕이요, 우리를 동여매는 끈이라는 사실을 알라. 이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줄이 
끊어진다면, 난잡한 물질만이 남아 적들의 약탈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  9. 자비

  나는 인간을 통한 신의 권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지와 
종양이라든지, 그들의 세계에서는 우상처럼 존경받는 추태에 관한 권리를 나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바다까지 흘러가는 하수도처럼, 나는 언덕 중턱의 더러운 마을의 언덕배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골목길로 통하는 통로에서 역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거기에는 어떤 문둥병자가 웃음을 지으며 더러운 수건으로 눈을 부비고 있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지경이었지만 그 지경을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아버지는 이 마을을 불태우기로 작정하였다. 그러자 그 곰팡내 나는 빈민굴에 
사는 천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이들의 권리를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며, 정의란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을 영구 보존하는 것이니까."
  아버지의 그 말씀은 그들의 부패에 대한, 그들의 권리에 대한 인정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부패의 산물인 그들은 부패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아들아, 네가 만일 위선자들이 늘어나도록 방관한다면 그때에는 위선자들의 
권리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들을 네게 잘 보이기 위해서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그 노래는 소멸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선자들의 비장함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네게 들려 줄 것이다.
  의롭다는 것^5,5,5^. 너는 선택해야만 한다. 천사장을 위해서 의로울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위해 의로울 것인가? 고통을 위해 의로울 것인가, 건전한 육체를 위해서 
의로울 것인가? 사교의 이름으로 내게 이야기 하러 온 자의 말에 왜 내가 귀기울일 
것인가?
  나는 그들을 돌보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신에게 있지 결코 종양으로 
인한 그들의 욕망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를 깨끗이 씻어주고 가르쳐주면 그때에 가서 그의 소망은 달라질 
것이고, 그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게 되리라.
  정의란 예금 때문에 고객들을 존중하는 데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만큼 
고객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똑같은 빛을 반사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빛이 그 고객 속에서 아무리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교통수단으로, 
도로로 간주하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자비, 그것은 정의가 스스로 분만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렇지만 아버지, 저는 아무런 대가 없이 빵을 나누어주고, 무거운 짐을 지는 
이들을 거들어주며, 병든 아이를 보살펴주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의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보리죽을 
가지고서도 자비를 베푼다. 그들이 자비라 이르는 것은 사실상 자신들의 행위를 
통하여 어떤 위대한 감정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하늘의 선물이라 믿는 
것이지. 허나, 하늘의 선물이란 받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마치 
주정뱅이에게 술이 주어지듯이, 거지들에게 질병이란 하늘의 선물인 셈이지. 
그들에게 내가 건강을 주고자 하면 나는 그 육체를 도려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그 육체는 나를 증오할 뿐이다."
  아버지는 이야기의 기준을 나에게로 돌렸다.
  "아들아, 네 인생이 누군가에게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결코 감사하지 말라. 
너를 구해준 이가 네게 감사의 말을 기대한다면 그가 그만큼 친하기 때문이다.
  그가 기대하는 감사의 말은 곧 무엇이겠느냐? 네가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는 
너를 구원하면서 어떤 신을 섬겼으리라. 따라서 그는 너를 구원해주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를 받을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통한 타인의 훌륭한 협력만이 의미가 있다. 나는 너의 협력이나 
돌의 협력을 받는다. 성전의 기단으로 사용된 돌에게 누가 감사하더냐?"
  그리하여 나는 알게 되었다. 자비란, 나의 제국의 의미에 따른다면 협력이라는 것을. 

  [  10. 지배자의 논리, 공주의 일화

  아버지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위대한 역할을 맡고 있던 사람은, 또 존경을 받았던 사람은 누구나 전락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한 번 통치하였던 사람은 그 누구라도 제국에서 쫓겨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너는 거지들에게 동냥을 주었던 사람을 거지로 만들 수가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너는 네가 이끄는 배의 어떤 부분을 망가뜨리게 된다.
  내가 죄인에 따라 벌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고귀하게 만들어 놓겠다고 
작정한 사람이 만일 시시한 자들이었다면 나는 그들을 호되게 다루겠지만, 결코 
노예 상태로 만들어 놓지는 않는다.
  나는 언젠가 빨래하는 하녀로 전락한 어느 공주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의 동료들은 그녀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천한 것아. 네 공주의 고귀한 기품은 다 어디로 갔니? 너는 남의 목을 벨 
만큼 위풍당당했지만 지금은 우리 손아귀에 있단 말이다. 정의란 바로 이런 거야.'
  그들 식이라면 정의란 보상이였으니까.
  그들 말에 공주였던 그 하녀는 침묵할 뿐이었다. 그리곤 수치감 때문에 창백해진 
얼굴로 빨래터 쪽으로 몸을 수그렸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녀에게 욕할 만한 
구실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얌전한 행동거지와 인자한 풍모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동료들이 그녀 자체를 조롱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지위가 
추락되었음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탐냈던 것이 바로 자기의 발 밑에 떨어진다면 그는 그걸 
삼켜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불러내었다.
  '그대가 통치를 하였다는 것 외에는 내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부터 그대는 
빨래터에 있는 그대 동료들의 생사 여탈권을 갖게 되리라. 나는 그대를 다시 권좌에 
앉히겠다.'
  그녀는 예전의 권한을 다시 찾았지만, 전에 당했던 그 심한 모욕들을 하찮게 
보고 기억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빨래터의 여자들은 다시 그녀의 고귀함을 
찬양하고 숭배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옛 동료가 권좌에 복귀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를 열어주었고, 그녀의 손을 잡아보려 안달이었다.
  내가 정복한 왕자들을 뭇 사람들의 모욕이나 간수의 무례함에 내 맡기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커다란 원형 경기장에서 금나팔에 맞추어 
그들을 참수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
  사람을 깎아내리는 자는 누가나 비천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강조하셨다.
  "지배자는 절대로 자기가 거느리는 부하들에 의하여 심판받지는 않을 것이다." 
  [  11. 장교들과의 대화

  나의 군대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노새들처럼 지쳐 있다. 장교들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언제나 집에 돌아가는 겁니까? 정복된 오아시스의 여인들에 대한 
욕망도 집에 있는 아내만은 못할 것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내게 애원했다.
  "왕이시여, 저는 젊었을 때 말다툼을 하다가 사귄 여자를 꿈속에서도 봅니다. 
이젠 집에 돌아가 안정하고 싶습니다. 어떤 진리에 더 이상 깊이 파고들려 해도 
이젠 되지 않습니다. 고향의 고요함 속에서 지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의 인생, 
저는 내 인생에 대해 조용히 명상하고픈 마음입니다."
  나는 그들이 고요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침묵은 그 자체로 
진실의 열매를 맺고, 또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우리가 어머니의 젖을 
먹어야 자라나는 것처럼 중요하다. 아기가 순간적으로 커가는 것을 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유, 많이도 컸구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멀리서 온 사람들이다. 
아이의 부모도 아이가 자라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아이는 시간 속에서 그렇게 
되어야 할 존재로서 매 순간순간 자라난 것이다.
  이처럼 나의 부하들도 갑자기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고, 하나의 나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시간이란 것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언제 전쟁이 끝나게 되는 겁니까? 우리는 변화하고 싶습니다."
  나의 군대는 제국의 부를 위해서 오아시슬 진격하고 있었다. 멀리 있는 그의 
집을, 나의 궁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또 이렇게 누군가에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종려나무 숲, 상아를 조각하는 마을들은 남부를 향한 나의 궁전에 대해 
어떤 풍취를 줄 것인가^5,5,5^."
  그럼에도 우리는 그걸 이해하지도 못하고 싸웠으며, 또 각자는 고향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국의 이미지는 그들 내부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고, 또 세계의 혼잡 속에 자취를 감춘 채 파괴되어 갔다.
  그들은 이렇게 강변했다.
  "미지의 이 오아시스와 함께 다소 부자가 된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집에 돌아갈 살게 되는 경우, 이 오아시스가 어떻게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겁니까? 그 오아시스는 거기에 살거나, 종려나무 열매를 
거두어들이거나, 혹은 힘차게 흐르는 가물에서 빨래하는 사람들에게나 도움이 될 
터인데 말입니다." 
    [  12. 인간의 조건

  그들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믿음이 꺼지면 신은 죽고, 이후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무용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을^5,5,5^. 그들의 열정이 식어버리면 제국은 해체되고 만다. 제국이란 백성들의 
열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렇다고 해서 제국 자체가 허구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만약 올리브나무의 행렬과 같은 사람들이 비를 피하는 통나무집을 
'영지'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것들은 조용히 바라보는 가운데 애착이 생기는 
사람이나, 그 풍경을 마음에 담아두는 사람이 다른데 애착이 생기는 사람이나, 그 
풍경을 마음에 담아두는 사람이 다른 여러 가지 중에서 올리브 나무와 비를 
피하는 것 외에 아무런 쓸모없는 이 외톨이 통나무집만을 가지려 한다면, 그 
영지가 팔려 풍비박산이 나려고 할 때 그 영지를 대체 누가 구할 것인가. 영지를 
파는 것은 올리브나무나 통나무집에는 직접적으로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행위를 통해서만 그 사람을 알아보고, 서로 접해본 경험이나 어떤 
이점을 발견해내곤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몰두해서 그 사람이 과연 어떤 
인물인가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매우 미련한 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가 당장 손에 쥐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지의 주인이 새벽 이슬이 맺힌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의 손 안에 있는 것은 
오로지 한 줌의 이삭들, 그가 딸 수 있는 약간의 과일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 중에 나를 따른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가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그의 팔에 안아볼 수도 없는, 그리고 그를 생각조차 하지 않을 
애인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새벽 공기를 호흡하며 그를 잡아 
다니는 육중한 무게를 느끼는 이 시간에, 그처럼 멀리 애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그녀는 잠들어 있는 사람일 뿐이다. 아니, 그런 존재이다.
  남자는 그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 자기로서는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애정, 저장되어 있는 곡식처럼 그 스스로 잊어버린 
애정을 책임지고 있다. 어쩜 자신조차 맡지 못하는 향기에 대해 책임지고 있다. 그는 
고향에 있는 집 앞의 분수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시켜 주는 하나의 제국의 존엄성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지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마음속에 병든 아이를 가진 친구를 기억할 것이다. 그 아이는 
멀리 있어서 아이의 열을 느끼지 못하고 아이의 칭얼거리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당장 아이의 생명에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대는 
마음속에 있는 한 아이에 대한 부담 때문에 짓눌린 적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제국에 오면서도 제국을 한눈에 보아 감싸지도 못하고, 최소한의 특권도 
받아볼 수 없는 사람. 그러나 그는 영지의 주인처럼, 병든 아이의 아버지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애인을 생각해내고는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에 사랑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처럼, 제국과 더불어 도량이 넓어지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사물의 본래의 의미뿐이다. 
    [  13. 반역의 조짐

  나는 술렁이기 시작하는 군대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시인들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병사들은 오히려 시인들을 희롱하기까지 했다.
  "우리에게 우리의 진실을 노래하게 하라. 고향의 분수와 단란한 저녁 식사를 
달라. 그 외에 나머지 허튼 것들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때야 비로소 나는 잃어버린 권력은 다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제국은 이미 풍요에 대한 이미지를 잃어버렸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이젠 아무것도 
진실하지도 덜 진실하지도 않았다. 나의 해결 방법이 효율적인 것이냐 아니냐만이 
문제였을 뿐.
  이제는 그들의 선택의 다양성을 기대하기는 글러버렸다. 그것은 나의 손을 이미 
벗어나 버려 제국은 스스로에 의한 상처를 입었다.
  어리석은 장군들이 찾아와 여전히 어리석게 내게 물었다.
  "왜 우리 병사들은 싸우기를 원치 않는 겁니까?"
  여전히 우둔한 그들의 질문을 나는 나의 다정한 침묵 속에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스스로 다시 물었다.
  '왜 그들은 이제 죽기를 원치 않는가?'
  나는 하나의 대답을 찾아내었다. 이건 순전히 나의 지혜였다.
  사람들은 양들을 위해서나, 염소의 저택을 위해서나, 산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산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도 영원히 존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연결시키고, 그들을 영지로 제국으로 알아볼 수 
있고, 다정한 얼굴로 바꿔주는 보이지 않는 매듭을 구하기 위해서 죽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이러한 단순성과 교환한다.
  사람들이 죽을 때에도 역시 그것을 구하고자 한다. 죽음은 사랑 때문에 보상을 
치른다. 자기 생애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훌륭한 작품, 또는 몇 세기 후에도 
의연한 성전과 자신의 생명을 교환한 사람은, 그의 눈이 물질의 부조화에서 
궁전을 구제한 것을 예감하고, 그가 찬란함에 매료되어 그 속에 침잠되기를 
원하면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는 자기보다 더 위대한 것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그에 대한 사랑에 자신을 
헌신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이 생명을 세속적인 이해 관계와 바꾸겠는가? 이해 관계란 
우선 살기 위한 것이다.
  나는 그들을 사로잡아둘 수 있는 새로운 교훈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조각가처럼 창조적인 방법이 내게서 나올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후, 
결국 신에게 깨우쳐 달라고 기도하였다.
  여기저기서 가짜 예언자들이 창궐하기 시작하였다. 신자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었다. 비록 드물긴 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조그마한 교회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지어졌다. 그들은 서로 미워하였고, 모든 것을 거짓과 진실 두 
개의 잣대만으로 구분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조금도 진실이 아닌 것은 거짓이었고, 
조금도 거짓이 아닌 것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거짓은 철저하게 진실의 반대가 
아니었다. 똑같은 돌을 다른 방법으로 배열한 것이고,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또다른 
성전에 불과할 뿐, 더 진실하지도 덜 거짓되지도 않다는 걸 아는 나는 허망한 진실을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된 그들 때문에 피눈물을 흘렸다.
  내가 신에게 기도하기를
  "그들 자신만의 진리들을 지배하면서, 그 속에서 그 고유한 진리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진리를 가르쳐주십시오."
  서로 투쟁하는 풀들을 가지고 내가 유일한 영혼을 가진 생명 나무를 만든다면, 
그때에 이르러 이 나뭇가지는 다른 나무의 번성과 함께 성장할 것이며, 나무 
전체는 햇빛을 받고서 신비스럽게 협조할 것이고 개화를 준비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가? 지금 나의 풀들은 스스로 사멸하려 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 반문해본다.
  "나는 그들을 포용할 만한 가슴이 없는 사람인가?" 
    [  14. 권력

  나는 말없는 사랑으로 그들 중 상당수를 사형에 처했다.
  이러한 나의 결정은 잠재되어 있던 반역의 불씨를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현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문명한 진리의 이름으로 
새로운 진리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내가 신의 예지로부터 권력에 
관한 교훈을 얻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권력이란 엄격한 그 무엇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 단지 언어의 단순성에 
의하여 설명되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언어를 피지배자들에게 강요하기 위해서는 
엄격함이란 절대로 필요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 새로운 그 무엇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것은 더 이상 이제 진실이나 허위 같은 것으로 
설명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인간들 서로를 부정하게 내버려두고 그들 서로를 분리시킬 하나의 
언어를 어떻게 강요할 것인가? 그게 엄격함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언어를 
강제한다는 것은 분할을 강요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 엄격함을 부수는 일이다.
  내가 사물을 단순하게 만들려 한다면, 물론 나의 독단만으로 가능 할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도록 긴장을 풀고 명확하고 더 
너그럽고 더 열정적이 되며, 그의 갈망 속에서 그 자신과 합일될 것을 강조하였다.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병사들은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하는 것과 같이, 
이전보다 훨씬 강인해진 자신들의 광채와 오만 속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들은 
과거보다 더욱 강력한 무력을 갖게 되었다.
  내가 추구하는 권력이란 이런 것이다. 매질을 통해서 가축으로 하여금 털갈이를 
하게 하고, 그 가축들이 변모하도록 억지로 떠밀어뜨리는 기념비적인 문.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억지로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개종된 자들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대다수는 자신들의 날개를 가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손발이 잘려나갔다는 슬픔에 젖어 절망 속에 빠져 들어간다. 그리하여 
안타깝게도 쓸데없는 인간들의 피가 강물을 빨갛게 물들이게 되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나의 오류를 일깨워주려 했다. 그런 그들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지어냈다.
  "주님, 저는 모든 갈망이 아름답다는 것을 압니다. 자유의 갈망과 규율의 갈망도 
그러합니다. 명상을 허용하는 시간에 대한 갈망과, 욕신을 벌하고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정신적 사랑에의 갈망, 건설해야 할 미래에 대한 갈망, 구원해야 할 
과거에 대한 갈망, 씨앗을 심는 전쟁에 대한 갈망, 추수하는 평화에 대한 갈망^5,5,5^.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논쟁에 따른 결과물이란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요.
  주님, 나는 전사들의 고귀함과 성전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싶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성전의 신성함과 바꾸며, 성전은 그들에게 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들의 세계는 슬픔 속에서도 어떤 황홀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소녀의 눈물과 같이 커다란 목표를 향하여 가는 이 
와중, 나에게는 위안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 그것이 이 세계를 
지탱해 가는 힘일 것입니다." 
  [  15. 장군들과의 대화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만큼 견디기 힘든 일도 없다. 나의 장군들은 
교묘한 계책을 세우는 데 골몰해 있었고, 그 계책의 성공을 위하여 무진 애쓰고 
있었다. 신이 그들을 곁에서 감싸주지 않아도, 그들은 너무나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을 집합시켰다.
  "그대들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왜 박물관에나 가 있을 완벽을 
추구하는가? 왜 실패를 두려워 하나? 미래가 사전에 증명되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여러분들은 화가와 조각가, 상상력이 풍부한 발명가가 새로운 의식을 깨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과 똑같이 여러분 자신들의 승리조차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가?
  제국은 나무처럼 자란다. 이 나무들이 태어나고 자라나기 위해서는 인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 까닭에 그 현상 자체를 생명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이 생명력에 대하여 물 주고 가꾸어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그 모습을 계산하고 미루며, 단지 누구에겐가 보여주기 위해서만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눈먼 장님의 행동에 불과하다. 만일 당신들이 그런 집념을 제 
1선에 두고 한 도시를 얻기를 원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임은 
자명하다. 그들은 도시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는 알겠지만, 왜 그 도시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까막눈이기 때문이다.
  그대 장군들이여. 어떠한 무지한 정복자를 그의 백성들과 함께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황폐한 사막에 던져보라. 그대들이 다시 되돌아 올 때쯤이면 
30개의 둥근 지붕을 가진 도시가 햇빛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되리라. 
정복자의 소망만이 둥근 지붕을 가진 도시를 만들게 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찾아내고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기회는 원치 않는 곳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던가?
  그대들이 이끄는 군대는 누룩 없는 밀가루 반죽이며, 곡식 없는 땅과 같다. 
그것은 소망 없는 군중 일 뿐이다. 그대들은 이끌고 가려하지 않고 관리하려고만 
한다. 그대들은 어리석은 목격자일 뿐이다.
  제국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어둠의 힘들은 그들의 물결 속에서 당신들을 
인식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많은 관리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훗날 
당신들보다 더 어리석은 역사가들은 당신들이 당한 재난을 증거할 것이며, 적들이 
성공하는 데 사용한 수단들을 지혜, 또는 과학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끌로 쪼아서 바위돌을 대리석 조각으로 만들 것이다. 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는 
딱딱한 비늘들이 한꺼풀씩 벗겨져 나가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이 대리석은 신의 형상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것을 쪼은 이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은 조금도 계산하지 않고 돌을 빚어내었다. 이 조각의 얼굴과 미소와 
광채는 땀과 끌의 타격과 대리석의 내재된 힘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아니다. 미소는 
돌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창조자의 피조물일 뿐이다." 
    [  16. 미덕

  장군들이 다시 내게 찾아와 말했다.
  "제국의 좋은 풍습들이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제국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부디 법률을 강화시키고 더욱 가혹한 형벌을 시행해야 합니다. 범법자들을 참수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견해는 달랐다.
  실제 다스림에 있어서 범법자들을 참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미덕은 더 
중요하다. 나의 백성들의 부패는 무엇보다도 그 바탕이 되는 제국의 부패일 터이니까. 
제국이 살아 있고 건강하다면 제국은 그들의 고귀함을 끌어올릴 것이니까 말이다.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미덕은 인간 상태 속에서의 완성이다. 부패 또한 완전한 결점은 아니다. 내가 
하나의 도시를 건설할 때에는 도둑의 집단과 천민들을 고용하고, 권력으로 그들을 
귀족화시킨다. 나는 그들에게 약탈이나 파괴, 또는 모멸이 주는 초라한 도취와는 
전혀 다른 환락을 준다. 그러면 그들은 강건한 두 팔로 도시를 건설한다. 그들이 
가진 오만함은 탑과 성전이 된다.
  이들의 잔인성은 그대로 위대하고 엄격한 규율이 되고, 도시를 지키는 질서가 
된다. 그들은 도시를 구하기 위해서 성벽 위에서 죽어갈 것이다.
  어떠냐? 내가 하는 말에서 진정한 미덕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범법자들의 힘을 
경멸하며 비난한 적은 없었느냐? 만일 그렇다면 너는 제국의 정상에 힘없는 
무용지물들을 앉혀놓게 된다. 쓸모없는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은 악덕이 판치게 되고, 
박물관의 미라가 되어 결국 하나의 죽은 제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나는 범법자들을 참수함으로써 만사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타락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를 제재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무르익은 과일을 창고 밖으로 
내던지는 것과 병든 짐승을 외양간 밖으로 내모는 것과 같다.
  이런 경우에, 왜 사람들은 외양간을 새로이 마련하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변화가 가능한 이들을 벌 주는 것으로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주님, 모든 인간들의 커다란 소망을 보호해줄 수 있는 당신의 외투자락을 제게 
빌려주십시오. 나의 제국을 파괴하는 자들을 벌 주는 일에도 저는 이미 지쳐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타인들을 위협하는 존재이며 저의 선행을 비판하고 다닌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하나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  17. 미래는 현재 안에 있다

  나의 어리석은 장군들은 능수 능란한 언변으로 나의 정신을 점령하려 했다. 그들은 
틈만 나면 회의란 구실로 미래를 논하곤 했다. 
  그들은 나의 정복의 역사와 패배의 기록들을 정연하게 정리하고 있었으며, 제국 
탄생의 날짜와 죽음의 시간들을 모두 깨우치고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분명히 
어떠한 결과를 도출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상의 결과를 지나친 비약 안에 버무린 다음, 나를 괴롭히기 위한 
자료를 어깨에 가득 짊어지고 와서는 말했다.
  "당신은 인간의 행복과 평화, 제국의 번영을 위해 행동하여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학자입니다. 우리는 제국의 역사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학문이란 언제나 반복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결과로부터 원인을 발견하고 추적하기 위하여 논리를 
사용한다. 모든 결과는 하나의 원인을 가지며, 모든 원인은 하나의 결과를 도출할 
뿐이라고 그들은 내게 말한다. 그리고 원인에서 결과까지 가는 도중에 자꾸 한 말을 
반복하면서 장황하게 오류 속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결과에서 
원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원인에서 결과로 내려가는 것은 확연히 다른 것임을 
그들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광활한 사막의 한가운데서 적들의 역사를 다시 읽었다. 한 걸음 앞서 한 
걸음을 떼었기 때문에 그 다음 역시 한 걸음 뗄 수 있다는 것, 사슬은 고리가 
파손되지 않아야만 고리에서 고리로 이어진다는 것. 나는 이러한 엄연한 역사의 
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나는 모래 위에 쓴 글씨를 통해서 흔적을 주구하고 사물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대상들을 추적하면서 그들이 머물고 있는 협곡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흔적에 대한 지식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증오라든가 사랑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쓰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모든 것은 증명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증오, 사랑 따위에 대해 
설령 기록이 빈약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의 본질을 지배하는 것을 공포라고 이해한다면 
그것들의 움직임도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현재 속에 분명히 
포함되는 것입니다."
  나의 장군들은 말할 것이다.
  나는 예측할 줄은 모르나 건설할 줄은 안다. 미래란 건설하는 것이지 파괴하고 
회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예측할 줄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나는 창조하는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주위가 부조화한 속에서 나는 나의 
분명한 얼굴을 제시하였을 것이며, 그것을 강제로 부과했을 것이고, 인간들을 통치할 
것이다. 가끔 피까지도 강요하는 영지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다룬다는 것은 헛되고 덧없는 일이다. 유일한 가치는 현재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표현한다는 것은 현재의 부조화와 더불어 그의 지배자를 
찬미하는 일이며, 돌을 가지고 침묵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외의 나머지 주장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  18. 교육자들에게 고함

  나는 교육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하찮은 인간들을 죽일 책임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이 개미떼와 같이 
일사 불란하게 변화시킬 책임을 내가 주지도 않겠소. 이간들이 만족하느냐 아니냐는 
사실상 내게는 별 의미가 없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더 인간적이냐, 
덜 인간적이냐 하는 점이오. 나는 먼저 인간에게 행복을 물어보는 존재이지 
가축떼처럼 포만감에 젖어 있는지, 부유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소."
  나는 무의미한 말투보다는 확실한 구조를 가진 영상을 가르쳐줄 것을 원한다. 또 
죽은 지식보다는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형상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외양을 보고 그들의 능력을 평가하지 마시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싸워온 
사람들이라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사랑을 참작하시오. 관습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마시오. 다만 그 사람이 충성과 명예를 생각하며 자신의 나무에 대패질을 할 수 
있도록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가르치시오. 존경을 가르치시오. 빈정거림은 
게으름뱅이의 몫으로 스스로를 망각케 할 뿐입니다.
  당신들은 물질에 집착한 인간의 유대를 회복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주고받음의 미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당신들이 오히려 잘 알 것입니다. 그게 
없다면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게 됩니다.
  명상과 기도를 통해 영혼은 자랄 것입니다. 사랑의 훈련을 해주시오. 그 누가 
인간의 사랑을 대신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거짓말과 밀고를 벌하도록 하시오. 강인한 인간을 창조하는 것은 오로지 
충실함뿐이라오. 충실한 자는 언제고 충실한 법이니까. 그리고 충실하지 않은 
자는 언제고 동료들을 배신하게 마련입니다.
  나는 강력한 도시가 필요합니다. 나는 인간들의 부패를 나의 힘으로 이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완성에 대한 취미를 가르쳐 주시오. 모든 작품은 신을 향한 
행진이고, 결국에는 죽음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용서나 자비를 일찍 깨우쳐주진 마시오. 그것들은 잘못 이해되면 욕설이나 
훼손에 대한 존경으로 변하기 쉽상이라오. 또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대중들의 
신비로운 협력을 가르쳐주시오. 그리하여 별 것 아닌 환자의 상처를 고쳐주기 
위하여 사막의 모래 바람을 뚫고 지나가는 의사가 되게 해주시오.
  제국은 그런 이들로 번창할 것입니다. 
  [  19. 문둥병자의 거처에서

  내 도시에 한 문둥병자가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문둥병자가 살고 있는 
더러운 변두리 지역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에 한 심연이 있느니라."
  아버지는 야영지의 인간들과는 다른 그 문둥병자를 가리키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가 절망하고 있다고 믿느냐? 자, 이제 그를 잘 관찰해 보아라. 
지금보다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저 인간은 자기만의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다. 저 
문둥병자에게는 궁핍,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너의 의미 없는 주사위들을 가지고 놀아서는 안된다. 너는 너의 꿈이 조금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단 한가지의 이유 때문에 너의 꿈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것들은 실망이며 허망이며 절망이다. 유용한 것들이 네게 저항하는 것이다. 이 
문둥병자의 불행은 그의 살갗이 썩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저항하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그 사람은 자기의 틀 속에 틀어 박혀 있을 뿐이다."
  도시의 사람들은 가끔 그 문둥병자를 관찰하러 오곤 했다. 그들은 산을 
오르다가 화산의 분화구를 관심있게 들여다보듯 문둥병자가 사는 야영지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어떤 신비한 것을 구경이라도 하듯 이 문둥병자가 머물고 있는 한 
뙈기 땅으로 몰려왔다. 그러나 거기에는 불가사의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러한 현상들을 내게 보여주면서 말씀하셨다.
  "너는 결코 착각하지 말아라. 저 문둥병자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불면증에 
걸려 있다든가, 신이나 인간에 대하여 분노를 삭이고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에게는 그런 의식조차 존재하고 있지 않다. 그는 야영지 내의 인간들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의 눈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그의 팔들은 힘없이 
밑으로 처져 있지만 그러한 현상 자체가 그에게 무의미한 것이다.
  이 사람이 갑자기 어떤 마음의 변화로 말미암아 마차를 몰거나, 돌을 날라 
성전의 구석에 쌓아 놓는다면 그는 어떤 삶의 의미를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이미 규정되어 있다."
  풍습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주민들은 매일 그의 비참한 모습에 
감동되어서, 그를 둘러싼 말뚝 사이로 돈을 던져주곤 하였다. 그는 하나의 
우상처럼 사육되었고, 축제일에는 그를 위하여 음악을 연주해주기도 하였다.
  그것은 자비였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모두가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사람들이 던져준 많은 재물로 뒤덮여 있었으나, 그의 것을 
받으려 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는 지극히 호사스러웠으나 지극히 가난한 존재였다.
  아버지의 말씀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보라! 그는 이제 하품할 기력조차 없다. 그는 인간들의 기다림인 권태마저 
포기해버렸으니 말이다." 
    [  20. 사람들

  인간이란 희생과 유혹에 저항한다거나 죽음을 거부할 수 없다. 특히 허상에 
지배되어 행동하는 인간은 조그만 관심조차 가질 값어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꼴은 산 속의 멧돼지나 코끼리도 같은 지경일 터이니까.
  그래서 대중은 각자에게 자신의 침묵을 허용하여야 하고, 삼나무가 산을 
지배한다고 해서 그 삼나무를 증오하듯이, 자신을 내세워서는 안된다.
  누군가 논리를 앞세운 보고서를 가지고 내게 인간을 이해시키고자 설명하려 
든다면, 나는 그를 물통과 삽을 가지고 아틀라스 산맥을 파서 다른 장소로 옮기려 
하는 어린아이로 취급할밖에.
  인간은 존재하는 것이지 말로써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모든 의식의 목표는 
존재를 표상한다. 그러나 그 표현이란 어렵고 느리고 꼬불꼬불한 작업이다.
  표현이 어렵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표현과 
이해 사이의 거리는 참으로 멀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에서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혹 내가 인간에 대하여 조금도 숙고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고 상상한다면 
나는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산은 저기에 있는데 산을 바르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산은 그곳에 
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한다. 그러나 그가 
모른다면, 나는 굴러가는 돌들의 균열, 라벤더나 무의 늘어진 자락, 톱니 모양으로 
솟은 그 산의 산꼭대기^5,5,5^. 어떻게 그 많은 것과 함께 이 산을 그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를 위하여 복종하는 인간을 찬미할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완강한 인간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쪽에는 나의 손짓 하나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고, 나의 신앙 
때문에 내게 어린애들처럼 복종하나, 그 맞은편에는 그와 반대로 강철같이 단단하고 
숭고한 분노와 죽음 속에서의 용기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 동일한 
인간에게서 이처럼 상반된 두 가지의 얼굴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나는 수긍하고 있다.
  불굴의 낟알처럼 나를 감탄시키는 남자, 나의 품안에서도 무릎꿇리기가 
불가능한 바다와 같은 넓이를 가진 여인, 내가 남자다운 남자라고 말하는 남자. 
그런 인간들은 절대 양보하지도 타협하지도 화해하지도 않는다.
  능란함이나 선망, 또는 기교나 권태에 의하여 분해되지 않는 사람들. 그 군중이나 
폭군이 그 사람들을 강제로 구속하는 것, 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가슴의 
다이아몬드가 되어 그에게서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사람. 복종하고 규율에 
순종하며 공손하고, 신앙과 신뢰로 가득찬 정신적인 혈통을 물려받은 현명한 이들, 
그리고 그러한 미덕을 가진 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결정하며 냉혹할 정도로 혼자인 그 사람들은 누구에게든 조금도 지배받으려 하지 
않으며, 그들의 돛대 안에는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 내가 '자유인'이라 칭하는 
그들의 저항은 낱낱이 흩어진 변덕에 불과할 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제국의 지도자로서 나의 규제에 의하여 국민들이 활기를 띠고, 내적인 
조국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 
한편으로만 비치는 반항적인 면만으로 그들을 규정하는 것이 명백한 잘못이라는 
것을 내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들의 굳건한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종교의 힘이다. 그들에게는 
부드러운 또 하나의 모습이 있다. 그의 또 다른 영상은 순박한 미소 속에 기도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풍요한 안식을 주는 젖가슴이 있다.
  그러나 타인의 움직임에 의해서 살고, 카멜레온처럼 그 물이 들며, 선물이 들어오는 
곳을 사랑하며, 환호성을 즐기고, 다수의 거울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들. 그 
모두를 나는 천민이라고 규정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하며 마치 
하나의 성채처럼 화려한 보물에 둘러싸여 존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가훈도 없이, 자식들의 성격을 들판의 승냥이처럼 놓아 기르며, 
독버섯처럼 세계를 향하여 불쑥 일어난다. 
    [  21. 안락

  사람들이 나에게 안락함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나의 군대를 생각한다. 균형 속에는 생명력이 죽어버린다.
  그러나 그 자체는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무한히 노력하게 된다.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평화를 지향하는 전쟁을 시작하였다. 미지근하고 안온한 모래, 독사들로 가득 
찬 순결한 모래, 침범되지 않은 그 피난처, 그리고 놀면서 흰 조약돌을 변모시키는 
어린아이들^5,5,5^.
  사람들은 말한다.
  "여기에 어느 군대가 행진하고 있다. 거기에는 가축떼들이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본 것은 무엇인가?
  마음의 부란 이런 것이다. 공기 서늘한 새벽의 아침 햇살 속에 목욕하는 사람, 목이 
마르면 우물가로 가 두레박을 끌어올려 목을 축이는 사람, 그 물의 노래와 자신의 
소란스런 곡조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 그의 목마름은 이러한 행위로 어떤 충만한 
의미를 싣게 되었다.
  반면, 노예에게 손짓하여 입술을 적시는 사람들은 샘물의 노래를 듣지 못한다. 
그들의 안락함은 단지 결핍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고통을 믿지 않기에 기쁨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인간들을 주목한다. 그들은 음악을 원치 않으며, 껍질이 없다면 
과실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특유의 부재와 행복을 혼동하고 있다. 돈을 쓰지 않는 
부자는 진정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다. 아무든 산비탈을 오르지 않고는 산의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없다. 어찌 가마 위에서 세상의 아름다운 경관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병보다 더 심한 목마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물에 대한 질투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약의 효능을 알고 있는 육체처럼, 또 여인을 필요로 하는 
육체처럼, 그들은 갈증 때문에 물을 요구하고 있고, 꿈속에서 샘물을 긷는 사람들의 
모습을^5,5,5^.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미소짓는 여인들의 모습이다. 내가 그녀들과 몸과 정신을 
섞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모험이란 아무 데도 
없다.
  점성술사들은 그들의 연구를 위하여 밤을 새운다. 그리고 위대한 천체의 운행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다음엔 폭발하는 듯한 감동으로 신을 경배하게 된다.

  나는 당신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노력하는 것을 도피하고자 한다면 또 다른 노력을 기울여야만 그것을 면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고. 당신들은 성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22. 존경

  내 제국의 동편을 통치하던 사람이 죽었다. 그는 과거에 나와 처절하게 싸웠던 
사람이었다.
  언젠가 우리는 사막 한 가운데서 만났었다. 고요한 자주색 천막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힘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서로의 고독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에 우리는 가축들의 생존에 관하여 심각하게 토론했었다.
  그가 말했다.
  "나에겐 죽어가는 2만 5천 마리의 가축이 있다. 우리에게는 물이 절실한 상태이다. 
네 나라에는 비가 내렸다는 것을 안다. 어찌할 텐가?"
  그러나 나는 나의 영지 안에 다른 세계의 목자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생소한 
이방의 습관과 그로 인하여 파생되는 부패를 허용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가야 할 2만 5천 명의 인간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소중한 삶이 있다. 그러므로 내 땅의 어느 부분도 너희에게 양보할 수 
없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우리는 정복을 목적으로 한 힘의 과시와는 전혀 다른 전쟁을 
끊임없이 치러야 했다. 서로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겨룸이 아니라, 무기를 가진 
백성들의 생존 경쟁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한 도시의 정원이나 시장이나 유물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애써 파놓았던 관개 수로도 무사하지 못했다.

  열등한 인간은 모멸을 생각해 낸다. 다른 사람의 진리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란 공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대방의 진실을 
인정함으로써 내 자신이 깎인다고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내가 아는 사과나무는 조금도 포도나무를 경멸하지 않았으며, 종려나무도 삼나무를 
추호도 경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각자 강하게 굳어지며 자신들의 뿌리를 
다른 나무 뿌리와 조금도 섞지 않고도 본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진정한 교환은 작은 향수병, 씨앗, 또는 나의 향수로써 너의 집을 가득 채우는 
이 노란 삼나무의 선물이다."
  "인간은 그의 증오 너머에서, 자신을 존경하는 바로 거기에서, 서로를 만나게 
된다. 가치 있고 유일한 존경이란 적에 대한 존경이다. 친구들의 존경이란 그들이 
자신들의 사은과 감사와, 온갖 저속한 행동을 지배할 때에만 가치가 있다. 네가 
친구를 위해 죽는 일에 대해 스스로 감동하는 것은 금물이다^5,5,5^."
  이리하여 그는 내 마음 속의 한 친구가 되었다. 모진 사막의 폭풍우 속에서 
날카로운 칼을 부딪히면서로도 우리는 깊은 환희를 가지고 서로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너무나 제한적이라 이 깊은 마음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곤 한다.
  결국 기쁨이란 신의 영역 속에서 제대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인가? 그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린 나를 신께서는 용서하시리라. 완성되지 않은 나의 불행,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나의 눈물은 아직도 미숙함에 기인한 탓일까? 그는 나에게 죽음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캄캄한 밤중에 귀환하는 말처럼 세계의 이 커다란 동요를 응시하였다.
  "주여, 지금은 밤입니다. 당신의 의지에 의하여 또 낮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만들어진 세월 속에서, 이 지나가버린 시대에서 잃은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 
번민하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고요 속에 빠져들게 하였다. 
순수하지도, 그렇다고 영원에 대한 성찰조차 미흡한 나, 활기찬 장미 화원에 
차갑고 목쉰 바람이 엄습해오면, 나는 덧없이 시들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아, 나는 장미꽃 속에 죽어가고 있다고. 
    [  23. 노쇠를 겪는 슬픔

  지금 나는 허리 통증으로 괴로워한다. 의사들은 도대체 아픔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나는 꼭 나무꾼이 내리치는 도끼를 맞아들이는 숲 속의 나무와도 
같은 신세이다.
  눈을 뜬다. 스무 살의 단잠을 기억해본다. 나의 육신은 고성과도 같이 
퇴락해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웬만한 일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보잘것 
없고 개인적인 일은 너무도 쉽게 심신을 마멸시키기 때문이다.
  제국의 역사가들은 나의 이러한 고통에 대해서는 단 석 줄도 기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이가 흔들리는 것이나, 그 이를 뽑아 내는 것은 그들에겐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남의 동정을 기대한다면 아주 비참한 꼴이 될 것이다. 아니 
언뜻 그런 생각이 떠올라도 화가 난다. 꽃병에 금이 갔다고 해서 화사하게 핀 꽃에 
금이 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은 나에 대해 말하길, 어떤 경우를 다하더라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정신력에 대하여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 놓길래, 그런 입에 발린 
말은 구멍가게 주인들에게나 하라고 호통치며 조소한 적이 있다.
  통치자는 건강해야 한다. 그가 만일 자신의 육체를 지배하지 못한다면 권좌만을 
지키고 앉아있는 가여운 한 인간에 불과하게 된다.
  나에게 실권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게는 오늘 저녁보다 더 자유로워질 
내일의 기쁨만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노쇠. 아마도 나는 산 저편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리라. 
마음은 죽은 친구들로 가득차 있다. 그리하여 젖은 눈길로 어두워지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바닷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마음 속의 사랑이 나의 정신을 감싸오기 
시작하였다. 
  [  24. 모든 변혁은 고통스럽다

  나의 도시를 활기차게 만들어야겠다. 모든 나뭇가지를 영양의 원천인 줄기와 
뿌리에 맞대어야 한다. 침묵의 양식으로 창고와 물탱크를 가득 채워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들이 어찌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겠는가?
  내가 듣는 음악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음악을 연주해 주든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과학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새로움을 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1천년 전부터 얽매어오던 습관에서 탈출하기란 
정말 요원한 일이다. 새로운 꽃과 나무를 보지 못하는 삶이란 허구일 뿐이다.
  모든 변화는 고통을 수반한다. 내가 하나의 음악과 더불어 괴로워하지 않았다면 그 
음악의 깊이를 절대로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고통의 결실이었다.
  인간에게는 사랑도 있지만 고통도 있다. 권태가 있으며 비오는 하늘처럼 
무뚝뚝한 사람의 언짢음도 있다. 시를 음미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시 외에는 
다른 기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란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인간이 시의 참맛을 즐기기 위해서는 상승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정상에서 보았던 경치가 금방 시야에서 지워지듯이, 한 번 휴식을 
취하고 나서 행진을 열망할 때에 보는 똑같은 풍경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노력 없이 잉태되는 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하나의 사랑에 조금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마음의 훈련일 뿐이다.
  내가 통치하는 영지나 성전, 나의 시나 음악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다소 부유한 점을 제한다면 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나를 통치할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라고 강변하는 인간들이 많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 
때문에 내가 놀라거나 하지는 않는다.
  보통의 인간들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회의적이며, 아이러니로 가득차 있다. 평온이란 
변혁하고자 하는 자의 상승에 따른 결과물이듯이, 사랑은 선물로 그대에게 안겨준 
것이 아니라 정복된 산이 주는 선물이며, 높이 솟은 너의 기반의 승리인 것이다.
  사랑을 배울 때야만 사랑을 만난다는 말은 완전히 착각이다.
  짧은 나날의 열병으로 마음이 흔들리고 그로 인하여 왜소한 언덕배기에서 
나약한 승리 하나를 건져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평생 동안 자신을 
불태워줄 위대한 사랑을 만난 것처럼 기뻐하며, 스스로를 정복당하기 위해 인생을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가련한 인간이다.
  상승, 또는 통과가 아닌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발걸음을 
멈춘다면 풍경은 가르쳐줄 게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대는 오로지 권태만을 쌓여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맨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자기 자신임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대는 아내라도 
버릴 것이다. 
    [  25. 허영

  나는 그동안 도시의 무용수, 가수, 그리고 창녀들을 관찰해 왔다. 그들은 온통 
허영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다. 어쩌다 산책이라도 하려고 나가보면 허풍선이들을 
미리 거리로 내보내, 군중들이 모여들게끔 꾸미곤 하는데,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박수 갈채라도 보내면 마음 속으로는 기고만장하지만, 겉으로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미소를 보내곤 한다.
  그녀들은 아주 피곤에 지쳐 기진맥진해졌을 때에나 그들 몸을 휘감고 있는 
베일을 벗고 잠을 청하는 여자들이다. 그녀들이 순금으로 만든 목욕통에서 목욕을 
하면, 군중들은 목욕용 우유를 준비하는 광경을 보려고 모여든다. 수많은 
암당나귀들의 젖을 짜고 감미로운 향료를 섞는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상황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한 마디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분노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값비싼 물건을 좋아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쓰고자 하는 열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값비싼 것이 존재하고 있는 
한 그것들이 여인들을 향기롭게 치장하거나 어찌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논리학자들과 토론할 경우, 일단 내 영지 안에 속한 모든 것들의 열정부터 
찬양한다. 그리고 치장보다 빵을 무시하는 그런 부류에 대한 대처 방안을 항상 
준비해두고 있다.
  여자도 아름다우면 하나의 기념물이 된다. 어떤 기념물이 껍데기만 화려한, 신을 
모시는 성전의 역할만을 수행한다면, 고작해야 사람들의 눈에 금박을 부어넣는 꼴이 
될 뿐이다. 그러나 여자가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로 유혹하게 되면, 사람들의 타고난 
재능과 희생을 끌어들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향료가 섞인 우유로 목욕을 하는 것이다. 적어도 미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먹기에는 다소 지루하지만 보기 드문 진귀한 식사로 살아간다. 
그러다가 혹 생선뼈가 목에 걸려 세상을 하직하기라도 한다면, 그녀들은 애지중지하던 
진주목걸이와 사파이어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녀들은 어쭙잖은 삐에로의 
재담에도 정신없이 웃으며 배꼽을 움켜잡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포복 절도하여 
방바닥을 뒹굴기 전에 자신들의 빛깔에 알맞는 화사한 방석을 골라 꼭 그 위에 
쓰러지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녀들은 사랑이라는 사치를 즐긴다. 그래서 어느 젊은 군인을 위해 자신들의 
진주를 팔아서 애정의 도피를 즐기기도 한다. 그 군인이야말로 그녀들이 만났던 
사람들 중에 가장 잘생기고 가장 영리하며 가장 멋지며 가장 씩씩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면서.
  그 순진한 군인은 그 자신이 사실상 그녀들의 허영을 휘한 들러리로 이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에게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선물받았다고 착각하면서 감사하고 
도취하게 된다. 
    [  26. 침묵

  협박에 대해 두려워 말라. 이런 하찮은 일에 모든 것을 건다면, 결국 그것을 또 다른 
세세한 일에까지 연관짓게 되어 커다란 실패를 맛보게 될 것이다.
  제국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다.

  남을 이해하기 위해선 남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믿는 사람의 
자존심까지 지켜주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 속까지 의심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코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사랑과 인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그 노래를 짓는 사람은 서로 별개인 것이다. 그런데 
창조에 있어서는 누가 함께 하는가?
  이 문제는 딜레마를 제거하는 일이다. 모두가 협력하고 갈구하지 않는 한 창조란 
없다. 나무 그루터기가 사랑으로 묶여 있을 때에만 창조가 가능하다. 전체에 대한 
개인의 복종은 문제가 될 수 없다. 반면 수액이 흐르는 방향이 문제이다. 왜냐 하면 
나무는 하늘로 신의 성전과도 같은 가지를 펼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침묵의 찬가를 쓰겠노라. 침묵! 그대는 결실의 음악가이다. 그대는 
어둠침침한 곳에 있지만 부지런한 꿀벌들이 모아놓은 꿀단지이다. 충만한 바다의 
안식이다.
  침묵! 그대는 산꼭대기에 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를 감싼다. 조용한 
움직임, 그 외침, 그리고 저녁 꽃병 속에 든 모든 것의 움직임을 정지시킨다.
  익어가는 과일의 속살과도 같은 여인들의 침묵, 묵직한 유방과도 같은 여인들의 
침묵, 여인의 침묵은 그날그날 하루의 다발로서 일생의 허영을 이루기도 한다. 
나는 내일을 향해 가고 있는 여인의 뱃속에서 어린아이의 맑은 내일을 발견한다. 
침묵은 나의 모든 명예와 피를 책임진 수탁자이다.
  턱을 괴고 사색하며, 그 다음엔 지체없이 응락하고 열매를 맺는 남자의 침묵. 그 
침묵은 그를 인식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망각은 좋은 것이다. 침묵은 
벌레와 기생충, 그리고 해로운 모든 식물들을 거부한다. 침묵은 그대가 어떤 사상을 
전개하는데 있어서도 아주 유능한 동반자다.
  침묵은 사상 그 자체이다. 꿀벌들의 휴식이다. 성숙해가는 침묵, 날개를 준비하는 
사색의 침묵. 그것들은 당신의 내부가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해 줄 것이다.
  마음의 침묵, 감각의 침묵, 내적 언어의 침묵, 영원 속에서의 침묵인 신을 찾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모든 것은 모두 말해졌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신의 침묵은 양 치는 목자의 단잠과도 같다. 새끼 양이 위협받고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 안에 목자도 숫양도 없는 깊은 정오의 오수, 그것보다 더 달콤한 것은 
없으리라. 이윽고 모든 것이 양털처럼 보드라운 잠에 묻히고 나면, 마침내 별빛 아래서 
누가 그들을 알아보리오?
  주여 언젠가는 당신의 창조물들을 곳간에 밀어넣으시고, 우리들에게 당신의 양쪽 
문을 열어주소서. 그리하여 무사의 기쁨으로 충만한 그곳으로 끌어올려 주소서.
  그러면 사람들은 바다보다 더 넓고 부드러운 물을 발견하게 되리라. 그가 억지로 
달리게 하는 어린 영양 위에 앉아 다리를 늘어뜨린 채, 영양의 가슴에 목을 기대고 
숨을 몰아쉴 때, 그는 샘의 노래와 더불어 그 세상을 예견하였으리라.
  침묵은 항구이다. 신의 품 안에 있는 침묵은 오고 가는 모든 배들의 안식처이다. 

    [  27. 논쟁

  논쟁이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다.
  그대가 정확한 명증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 대항하여 논쟁을 벌인다면, 그대는 
한편으로 상대의 진실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상대를 받아들여라. 그들의 손을 꼭 
쥐고서 그들을 안내하라.
  "당신이 옳습니다. 그래도 나와 함께 산에 오릅시다."
  그리하면 그대는 세상에 든든한 규칙을 세우게 되고, 그들은 나름대로 정복한 평원 
위에서 큰 숨을 쉬게 되리라.
  사람에 대해서 토론하지 말라. 그대는 언제나 원인과 결과를 혼돈하는 사람이다. 
포착할 수 있는 언어가 없을 경우 어찌 자신들의 견해를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하천과 마찬가지로 물방울이 어떻게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까?
  그래도 하천은 흐른다.
  어떻게 나무의 세포들이 자기를 나무라고 알아볼 수 있을까? 그래도 그 나무는 잘 
자란다.
  어떻게 돌 하나하나가 성전을 의식할 수 있을까? 그래도 그 성전은 다락방처럼 
고고한 침묵 속에 서 있다.
  침묵을 포용하기 위해서 애써 산에 오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침묵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랴. 오로지 신만이 아실 일이다.
  그대는 각자의 언어가 인생을 죄다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대에게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선동가들이 해마다 출몰할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의 처자식과 헤어져서, 자신에게는 추호의 가치가 없다고 믿는 
땅을 빼앗으러 간다거나, 혹은 상처 입으면서 적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내맡기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진정 각각의 개인에게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면 아무도 함께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이듬해가 되면 제국은 또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각자의 빈약한 
계산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그 전쟁 속에, 그렇게도 거부했던 그들은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윤리관으로 뭉쳐 무기를 들게 된다.
  논리 이외의 다른 방법, 그것으로 그대는 창조의 빛을 보리라. 
    [  28. 다수의 판단

  결국 문제는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 여행자가 산등성이를 오를 때 
자신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환상일 
뿐, 그의 목적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현재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진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끊임없이 새출발을 할 것이다.
  나는 휴식을 믿지 않는다. 그에 대한 논쟁이 파생된다면 어느 한편의 
희생으로써 일시적이고도 해로운 평화를 추구하게 된다. 그대는 무엇을 보고 
삼나무가 바람을 맞이함으로 해서 얻는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바람은 나무를 
갈기갈기 찢어놓으면서도 그것을 제 자리에 있게 해준다. 
  그대의 인생은 논쟁의 망각이 지불하는 비참한 화합을 얻는 데 있지 않다. 
인생의 의미는 자기 본연의 모습에 달려 잇는 것이다.
  설사 어떤 의견이 그대와는 대치된다 할지라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다. 
그 인내로부터 그대의 뿌리가 솟아나오고 허물을 벗게 된다. 스스로의 내부에서 
자신을 탄생하게 하는 고통은 지극히 괴롭지만 행복을 가져다준다. 때문에, 나는 
평화를 빙자하여 자신을 단순함 속에 몰아넣고, 마음을 갈망을 억제하는 인간들을 
경멸한다. 그러므로 그대 자신이 성장하려거든 논쟁과 맞서 자신을 소진시키라. 
그것이 세상을 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통이란 거름과 같은 것이다.
  여기 모래 바람이 일으켜 세워줄 수 없는 연약한 나무들이 있다. 그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장점을 사멸시키고 어쭙잖은 단점을 모아 
행복이라고 치부한다. 실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숙자이다. 한 
마디로 실패한 인생들이다. 그들은 적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신의 음성은 
필연이며 탐구이며 가이없는 갈증인데도, 그것을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그런 
자들이다. 그들은 빽빽한 숲 속에서도 햇살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태양을 얻지 못할 것이다.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는 나뭇가지는 설령 숨은 막힐지언정, 그 본체인 나무는 
땅에서 솟아나 신이 있으리라 믿는 하늘을 향하여 상승하기 시작한다. 신이란 
결코 도달될 수 없는 경지이지만 그 방법은 이렇듯 쉽게 제시된다. 인간도 역시 
나뭇가지처럼 신의 공간 속에서 지어지는 것이다.
  그대여, 다수의 판단을 경멸하라. 다수의 판단이라는 것은 그대의 창조적인 
판단과 성장을 방해한다. 그대의 적들은 진실의 반대말이 오류라는 것밖에 없다고 
믿는 부류들이다. 그들 때문에 논쟁이라고 하는 박제화된 문제만이 남게 되었다.
  그대여, 그대가 누군가의 잠을 깨워야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를 갖고서 내게 
제기하려 한다면 나는 고개를 돌릴 것이다. 나는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노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현듯 창밖에 취하여 쓰러진 한 친구를 그냥 
잠자게 내버려둘 것인가? 사실 그런 형편에서 제대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가 정말로 한데 잠을 좋아해서 일부러 그 속에다 몸을 내던진다 해도. 
  [  29. 내가 여자를 경계하는 이유

  그 여자는 자기 집을 위해 그대의 재산을 털고 있다.
  가정이란 소중한 것이다. 맑은 눈을 하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 분수의 노래와 
향기로운 물병의 음악으로 아이들을 축복해 주는 사랑이란 정말로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쉽사리 규정짓지 말라. 명성에 이끌린다든지 해서 사랑의 마음이 아닌 
계약이나 유혹에 빠지지 말라. 언어는 많은 것들을 분열시킬 뿐이다.
  우물가에 숨어서 사랑할 줄 아는 연인의 마음 안에서만 생명이 존재한다. 맹목적인 
육체의 향연이란 사랑의 희생도, 선물도 아니다. 여자를 애무하는 사람이 만약 침대 
위의 비천한 금수 같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대체 사랑의 위대함을 어떻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무기를 내려놓고 어린애를 달래는 병사보다 더 위대한 존재, 혹은 남편으로서 
전장에 출정하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이 세상엔 없다.
  하나의 진실에서 또 다른 하나의 진실로 이행하면서 생기는 균형이나, 어니 
시대에서 다른 시대에 이르기까지 얻어지는 유효함은 문제가 아니다. 결합되어야만이 
하나의 의미를 지니는 두 개의 진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대가 연애하는 것은 
군인으로서이며, 그대는 연인으로서만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그러나 하룻밤의 
잠자리에 도취한 다음, 밤마다 그대를 찾는 여자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 키스가 달콤하지 않은가요? 저는 행복해요."
  분명 그대는 말없는 미소로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이렇게 대꾸하겠지.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저를 위한다면요. 욕망이 일어나면 당신은 팔만 뻗으면 
되는 것예요. 저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오렌지 나무예요. 손을 내밀면 열매를 
드리지요. 우리들의 샘물에선 신선한 물줄기가 퐁퐁 솟아나올 거예요."
  그대는 그 동안 외로운 방안에 홀로 누워 숱한 열정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대가 
상상한 여인들은 모두 아름답고 정열적이니까. 그리하여 그대는 전쟁이 안겨주는 
고독의 시간 때문에, 이렇게 연애할 수 있는 좋은 시기를 놓쳐버렸다고 섣부른 짜증을 
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차가운 얼음장 같은 눈으로 직시하라. 사랑은 사랑이 없는 곳에서만 
출현한다는 것을^5,5,5^.
  혹시 그대는 산의 우아한 자태를 산등성이에 있는 바위 위에서만 느끼지 않았는지? 
마찬가지이다. 신에 대한 경험은 응답 없는 기도의 반복 속에서만 모든 걸 깨닫게 
된다. 그것만이 소모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고 그대를 만족시켜줄 것이다.
  이와 같이 예정된 시간이 다 지나서만이, 사랑은 완성되고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사랑은 그대의 것이 된다.
  공허한 밤에 자기의 호소를 내세우며 시간이 자기의 보물을 앗아가고 있다고 믿는 
한 인간에 대하여, 그대는 오해도 동정도 할 수 있다.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사랑에 
대한 갈증이라는 것을 잊는다면, 스스로를 멸망의 나락에 빠트릴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그대에게 말하노라. 잃어버린 기회란 중요한 것이라고. 감옥의 창살을 향한 
침묵과도 같은 사랑이야말로 큰 사랑이다. 신의 응답이 없는 기도가 사실상 풍요로운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랑을 키워주는 율법이며, 동시에 가시덤불이다.
  열정과 식욕을 혼동하지 말라. 자신을 위해 갈구하는 열정은 진실한 열정이 
아니다. 나무는 자기에게 아무런 대가도 돌아오지 않는 과일에다 스스로를 부어 
넣는다. 나의 경우도 그러하다. 백성들에 대한 나의 태도, 그것은 나의 열정이 
아무런 대가도 없는 과수원을 향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여인들에게 빠져들지 말라. 그대가 거기서 이미 맛본 것을 또 다시 
구하려 한다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산에 사는 사람이 때때로 바다에 내려오듯 
그대는 간혹 그녀를 찾아주기만 하면 된다. 
  [  30. 사랑

  사랑과 소유에 대하여 혼동하지 말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과 소유한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소유의 본질은 고통이다. 내가 신을 사랑하려면, 먼저 다른 사람들을 신의 품 
안에 던져주기 위해 스스로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의 본질은 증오이다. 그대와 함께 식사를 한 남자, 혹은 여자에게 마음을 
준다면 그대는 곧 그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이는 애완견들이 그대의 식탁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음식을 탐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대는 이와 같은 것을 사랑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이 당신을 
포옹하는 즉시, 굴종과 노예의 굴레에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대에게 자유란 이미 저만치 물 건너가 버렸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사슬에 묶이기라도 한 듯 괴로움에 떨지도 모른다.
  내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그대는 내가 어떤 사랑에 빠지길 
원하는가?
  물론 나도 젊었을 때 나에게서 떠나버린 어떤 여자 때문에 테라스 위를 무거운 
마음으로 배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반짝이는 별빛 아래서 많은 시간을 숙고한 
끝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여자를 되찾기 위해 무력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기 위해 내 영지의 일부를 던져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은 알고 계시리라. 나는 결코 진실을 혼동하지 않았다. 나는 목숨처럼 
그 여인을 원하였지만, 한 번도 내 마음의 갈등을 사랑이라고 규정한 적은 없었다.
  실망하지 않는 우정에서 진정한 우정을 본다. 결코 침해받지 않은 사랑에서 참된 
사랑을 본다.

  누군가 그대에게 다가와 "그녀가 너를 해롭게 하므로 이젠 쫓아버려라."라고 한다면 
그 말을 너그럽게 받아들여라. 그러나 행동의 방향을 바꾸진 마라. 누구도 그대의 
의지에 대해 간섭할 권리를 갖고 있진 않다.
  또, 누군가 그대에게 다가와 "이젠 그녀를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너의 정성은 
헛되고 말았으니까."라고 말할지라도, 그대의 처신을 바꾸진 마라. 그 누구도 
그대의 소중한 것을 훔쳐갈 수는 있을지라도 빼앗아갈 권리는 역시 갖고 있진 
않으니까 말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추악한 계산을 강요한다면 귀를 막고 그 
사람을 쫓아버려라. 그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사랑에 대해 누가 그대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라.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선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이다."
  진실한 친구 한 사람은 쓸모없는 백 명의 바보들보다 적어도 백 배는 낫다는 사실. 
이 사실을 명심하라. 
    [  31. 현재

  그대가 지내온 날들의 열쇠는 오늘날까지 이 제국의 사건들과 함께 숨쉬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무엇에 대하여 후회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이 다른 시대에 태어나기를 
원하거나, 순간적인 절망을 얼토당토 않은 공상으로 해체하는 사람만큼이나 부조리한 
거이다.
  과거는 화강암 덩어리와도 같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과 충돌하는 대신 주어진 
하루의 운명을 받아들여라.
  '과거'란 낱말은 목적도 이상도 순환도 완성도 없다. 그리하여 그대의 시선은 
미래의 변형과 열정과 희망을 향하게 된다.
  그대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무엇을 지향해야 합니까? 나의 목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말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하나의 비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현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머언 명상에 빠진 인간들은 유토피아의 공상 때문에 제각기 힘을 잃고 만다. 유일한 
창작의 지리는 모든 부조리한 양상과 모순적인 언어 속에 묻힌 현재를 해석해주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미래에 관하여 헛된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대야말로 홀로 
회랑과 성전을 건축 할 수 있다고 믿는 바보이다.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적이 없을 
것이며, 적이 없다면 그 성전과 회랑은 누구의 손으로 우뚝 세울 수 있을 것인가.
  회랑이란 여러 세대를 거쳐 이룩되는 것이다. 하나의 형태만을 가진 회랑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들은 관습에 대항하기 위해, 적들과 투쟁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깎고 다듬어진다.
  위대한 작품들은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정리해야 할 것은 오로지 현재뿐이다. 그 속에 펼쳐진 미래를 바라보라.
  나는 양들과 염소떼, 그리고 보리밭과 가옥들, 산과 들판을 아울러 제국이라 
이름한다. 나는 이런 나의 제국에서 현재를 다듬고 즐긴다. 산등성이에 올라 
도시들의 아련한 흔적들을 참관하노라면, 나의 도시들이 커다란 배나 그윽한 
성전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마음으로 보는 눈이다.
  그러므로 그대여, 명심하라. 창조란 미래에 대한 편견이거나 공상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읽는 새로운 경관이다. 현재란 유산으로 받은 뒤죽박죽된 자료이다. 이를 
정리하여 스스로의 유용한 자산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그대의 몫이다.
  보라. 나의 정원사들은 봄의 향연을 위하여 부지런하게 정원으로 달려간다. 그들은 
꽃나무의 세밀한 각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다만 씨를 뿌리 뿐이다.
  용기를 잃은 자, 불행한 자, 패배자인 그대들에게 말한다. 그대들은 승리의 
군병이다. 왜? 그대들은 이 순간 다시 시작하고 있으며, 젊다는 것은 언제나 
아름답기 때문에^5,5,5^. 
    [  32. 친구(1)

  친구란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낯선 나그네에게 대문을 열어주고 
뛰어나와서는, 밝은 웃음으로 나그네의 지팡이와 외투를 받아드는 사람이다.
  이 나그네가 세상에 봄이 왔음을 이야기하면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봄을 
찬미하는 이가 바로 친구이며, 나그네가 지나온 마을의 얻던 참화에 대하여 
말하면, 눈물 흘리며 불행을 당한 그 마을 사람들을 위해 기도드리는 이가 바로 
친구인 것이다.
  인간에게서 친구란 신이 내리신 선물이다. 그는 그대를 위하여 준비된 아름다운 
꽃이다. 그 향기로운 내음은 당신의 체취 속에서만 풍겨나온다. 그러므로 그대를 
향한 친구의 모든 언동은 진실이라고 믿으라.
  친구 사이에는 어떠한 신분의 구별이나 부의 많고 적음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로지 평등한 마음의 교감만이 있을 뿐. 내가 육군 대위이고 그대가 하잘것없는 
가게의 점원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서로는 그 처지에 관계 없이 내면의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발견했고, 그리하여 서로가 마주하면서도 침묵을 용인할 수 있게 된다.
  친구여, 그대와 나의 우정은 내가 그대를 일국의 대사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접대할 때, 아주 머언 그들 나라의 음식이 내 입맛에 다소 맞지 않았다거나, 
아주 머언 그들 나라의 음식이 내 입맛에 다소 맞지 않았다거나, 그들 나라의 풍습이 
내 제국의 관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무시하며 쉽게 대하진 않는다. 우정이란 
무엇보다도 화해를 기반으로 하며, 하찮은 일상사를 넘어선 정신의 위대한 교류인 
것이다.
  환대와 예절과 우정은 인간의 내면적인 만남이 원천이다. 키와 건강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교회에 누가 발걸음을 옮길 것인가?
  나의 말은 하나도 들어주지 않고 나를 평가하기 위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는 
사람의 집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그대여, 세상을 변방을 헤쳐 나가노라면 그대는 스스로 판단하고자 하는 인간들을 
숱하게 접할 것이다. 만약 변화하고자 한다거나 스스로를 단련시킬 목적이라면 우선 
적들에게 그 일을 맡겨야 할 것이다. 그들은 삼나무를 다듬는 폭풍우처럼 그대를 
강인하게 훈련시킬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친구는 어떠한 지경에 이를 지라도 오직 친구일뿐이라는 것을. 
그대가 성전에 들어갈 때 신은 너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심판하지 않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맞이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  33. 친구(2)

  우정을 간직하고자 한다면 우선 인간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어야 한다. 비평이 
없는 세상에서만 어떤 종족이 숨을 쉬기 마련이다.
  만일 친구에 대한 어떤 부적절한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분명히 서로의 
만남이 적었던 탓이리라. 그러한 문제는 관용도 나약함도 무기력함도 아니다.
  관념의 엄격함도 별문제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대는 스스로에 대한 
재판관이라고 생각하라. 그대의 언도로 인하여 사형을 선고 받은 이가 있을 경우, 
그 사형수가 몸이 아프다면 그대는 그를 우선적으로 치료하려 들지 않겠는가?
  자신의 서투른 말투로 인한 분쟁을 겁내지 말라. 본래 말이란 그런 허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심판할 권한을 가진 동시에 신뢰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이처럼 상반된 판단이 양립한다는 자체가 사실 내 제국의 신비이다. 
물론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 역시 언어의 편협성에서 근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제국의 논리학자들과 빚어지는 허다한 논쟁에 별 무게를 두지 않는다. 
사막의 황량함을 딛고, 우리는 서로 싸우고 증오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찮은 말싸움으로 인한 시비에 서로의 소중한 관계를 걸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영혼 속에서 진리의 뿌리를 발견하고는 서로를 외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랑으로 굳게 손을 잡는다. 
    [  34. 어떤 창녀의 이야기

  그대는 창녀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느냐? 그녀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무엇을 강요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애인인 경우, 그대가 그녀를 도와주기 위하여 달려가고 싶다면, 그것은 그녀의 
내면에 실린 어떤 고귀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
  그렇다면 창녀와 애인은 어떻게 다를까? 애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 팔을 
벌리기만 하면 된다. 아니, 매춘과 사랑의 구별은 이런 것들보다는 선물로 가름하면 
쉬울 수도 있겠다. 창녀에게 적당한 선물을 준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만일 일을 
치르기 전에 곱게 포장된 선물을 준다면, 그녀는 화대를 미리 받는 것이라고 쉽게 
판단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선의의 선물이 모독이 되고, 그대는 세금을 내듯이 허망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저녁 나절, 도시의 홍등가에는 군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다니기 시작한다. 
쥐꼬리만한 봉급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들은 사막에서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사랑을 
흥정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꼬깃꼬깃한 돈으로 산 거리의 사랑은 한 여자의 육체를 
혹사시킨다. 이는 돈의 유희일 뿐이지, 어떤 열정의 결과물은 아닌 것이다.
  창녀란 본래 황금충과 같아서, 손님이 지불하는 지폐의 두께에 자신의 값어치를 
매긴다. 자신의 능란한 기교와 아리따운 미모가 손님들을 유혹하였다고 믿는 
창녀들은, 찾아온 고객들이 정신없이 뿌려대는 돈을 거두어들이며 끊임없이 
자기 도취에 빠져든다.
  밑도 끝도 없는 우물 속에 그들은 밤만 되면 수천 수만의 땀방울로 얼룩진 
황금을 쏟아붓는다. 그리하여 나의 충성스러운 군인들은 모래알같이 모여지지 
않는 헛된 애무와 열정 속에 흐트러지곤 한다. 그들은 자신의 품속에서 
꿈틀거리는 작은 동물에게서 황홀한 향연과 스스로의 사랑에 가슴을 떤다. 그러나 
사랑으로 남자의 가슴에 파고드는 창녀를 그대는 본 적이 있느냐?
  결국 나의 군인은 꼬깃꼬깃 모은 돈을 죄다 창녀에게 던져 버린다. 그러고는 
진흙탕 속에서 진주를 발견했노라고 큰소리를 친다. 물론 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인 데다가, 그 안의 인물들을 굴비처럼 한 두름으로 엮어놓아 그 성격이 
어떻다고 딱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준다는 것과 받는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잊을 때, 그대에게 다가오는 것은 재앙뿐이다.
  술 취한 군인과 창녀는 간혹 아름다운 사랑을 맺을 수도 있다. 
  [  35. 도자기에 얽힌 단상

  나는 잠깐 사소한 부분에 관하여 궁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도자기에 관한 
것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곳 야영지에서 빚어내는 도자기들은 매우 아름답고 
단단한데 비해, 다른 야영지에서 나온 도자기들은 질이 아주 형편 없었다.
  그렇다면 이 상반된 결과물을 빚어낸 장인들은 아주 다른 방법으로 흙을 반죽하고 
가마에 굽는가? 내가 관찰해본 바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은 두 곳이 한 치도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극단적인 결과를 
도출하는가?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것은 재료도 기술도 아닌 바로 
헌신적인 정신의 산물이라는 것, 바로 그것을^5,5,5^.
  헛된 야심에 사로잡혀 사물의 질을 무시한 채 일하는 사람들은, 설령 어떤 완성을 
위해 밤을 지새운다 해도 결국엔 선멋만이 비치는 조잡한 결과 외에는 그 무엇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해타산 속에는 신의 성질이 들어갈 틈바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기도 속에서 헌신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파악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둥지를 
트는 하얀 새털 마냥 따스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달콤한 꿀을 모으는 꿀벌과도 같다. 
그것은 오로지 도자기에 대한 열정으로 온 정신을 던지는 사람이다.
  너는 팔기 위하여 쓴 시를 읽느냐? 그것은 실로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욕망이 비곗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다. 
    [  36. 여가

  노동과 여가를 구분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생애 중 
하잘것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갖는다.
  여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굴린 주사위가 아무런 행운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원하는 바에 별 도움이 안 된다면 당연히 중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양떼와 소중한 목장을 걸고 하는 노름인 경우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행위는 모래로 집을 짓는 어린애 같은 짓이다. 모래는 단순한 한 줌의 
돌가루가 아니다. 하나의 성채이며 산이며 배인 것이다.
  나는 즐겁게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종려나무 아래서 낮잠을 즐기는 시인이 그랬고, 창녀촌에서 평안하게 차를 
마시는 굵은 주금이 패인 늙은 군인이 그랬다. 또 자기가 짠 평상에 누워 
해바라기를 하는 목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들 어떤 안식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사람들은 바른 궤도를 벗어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인간이 진실로 안식할 수 있는 것은 피로를 풀기 위한 주사위 놀이가 아니라, 
자신이 건축한 성전의 마지막 기왓장을 올리는 순간의 환희, 바로 그것이다.
  노동에서 얻는 여가란 그것이 단순한 시간의 공백이든지, 땀 흘려 일하는 
와중의 휴식이든지, 혹은 창조적인 발명 이후의 정신적인 회복 상태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은 시간이다.
  그래서 하찮은 인생은 두 가지 상반된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사역에 불과한 
작업과, 노동을 거부하는 여가가 바로 그것이다.

  조각가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문화의 한 형태이며, 그들이 완수하는 일의 결과는 
고통과 기쁨과 온갖 신고의 표현이다. 모름지기 참다운 예술의 힘은 열정과 
굶주림과 갈등, 자식들을 위한 먹을거리의 장만, 어떤 현상에 대한 세상의 정의 
등을 모조리 포용할 수 있는 우스꽝스러운 삐에로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란 저항에 대하여 맞서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대가 여가를 아무런 부담 없이 잠자는 데 투자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대를 
괴롭히는 온갖 부당함이나 협박에서 자유롭다면, 분명해지는 진실은 그 시간 그대 
자신을 재창조하는 일 외에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 이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그렇다고 혼동하지 말라. 유희란 무가치한 것이다. 유희에는 그에 대한 형벌이 
예비되어 있지 않다. 나는 자신의 근시를 고치기 위해 안대를 한 사람과, 죽는 날 
까지 캄캄한 독방에 갇혀 있어야 하는 사형수를 구별할 줄 안다. 그 둘 다 
평온하게 침대 위에 누워 있고, 빈 공간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동이 틀 즈음 그들에게 물어보라. 전자는 밝은 모습으로 그대를 
맞이하겠지만, 후자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이 모래 위에다 막대기를 꼽고 있다. 아이들은 그 막대기를 여왕이라 
부르며 순진무구한 마음을 바친다. 그러나 내가 그 아이들의 방법을 따른다면, 그 
막대기를 대중의 우상으로 승화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손때 묻은 
헌금을 내도록 강요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희는 더 이상 유희일 수가 없게 
된다. 인간들은 두려움의 송가, 혹은 사랑의 찬가를 부를 것이다. 결국 생명 없는 
그 막대기는 차츰차츰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게 된다.

  노동은 사람들에게 현실에 만족하도록 강요한다. 노동은 돌을 만지게 하고, 비를 
간절히 기다리게 하며, 홍수를 경계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노동을 통해 
서로 마음을 통하고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노동은 사람의 발길을 인도하고 강요하며, 어느 영역에 소속되기를 요구한다. 이것이 
사람의 길이다. 나의 제국에서도 이 원칙이 통용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  37. 광고

  나는 상인들에게 상품 광고를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교육자라도 되기나 한 듯, 고매한 표정으로 단지 삶의 수단에 불과한 자기네 상품들을 
목적으로 착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거리나 시장에서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군중들을 오도하려 한다. 그들은 
오로지 파는 데만 열중하여, 저속한 음악으로 당신의 영혼을 꾀어내고 있다.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물건을 광고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쓸데없는 물건의 홍수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며 실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38. 창조

  창조하라. 그대에게 그런 의지가 꿈틀거린다면 말이다. 날파리들이 푸줏간에 걸려 
있는 고기한테 달려들 듯, 봉사할 사람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나타나 너의 창조에 
동참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종교를 이룩하고자 한다면, 교회를 세울 사람들은 밤하늘의 
모래알처럼 많이 나타날 것이다.
  창조한다는 것, 그것은 존재의 신화이다. 바다로 통하는 도시에서 하수도를 만들고 
도로를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단지 그런 일에 애착만을 가졌을 뿐이다. 
이러한 나의 애착으로 인하여 경찰관이며 건축가며 환경 미화원이나 전기공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창조란 사물의 부조화 속에서 하나의 영역을 돌출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사람들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애정처럼 말이다. 강한 인상을 억지로 만들거나 
수학 공식처럼 무엇을 증명하는 따위는 할 일없는 짓이다. 그대는 새로운 경이에 맞서 
머리를 곤두세우며, 논증에 대한 더욱 훌륭한 논증을 찾아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전의 그림자와 침묵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대가 그 성전을 해체하고 그 벽돌 
하나하나를 들어내 보인다면 얼마나 헛된 일이겠는가?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지저분하게 널린 성전의 유해일 뿐이다.
  나는 그대의 손을 잡고 갈 것이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걷다가 작은 언덕배기에 
오르면, 내가 창조한 질서의 언덕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대를 집안에만 
가두어둔다면, 그대는 편협하고 일방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인간으로 사육 될 
것이다. 내가 세상을 만들어 주고 그곳에 머물게 한다면, 그대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하나의 관점에서 느낄 수 있는 찬란함도 다른 시각에서는 보면 전혀 
가치없는 폐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나를 찬양하는가? 그러나 나는 창조하고 있지 않다. 나는 요술쟁이이며 
어릿광대이며 사이비 시인일 뿐이다. 그러나 이 언덕에서 바라보는 저 광활한 
평원은, 그대의 한계를 벗겨주어 넓은 가슴을 열리게 하리라.

  나는 지배하지만 흔적을 남기진 않는다. 이런 경우에만 나는 왕이며 창조자이다. 
그렇다. 창조자나 시인은 무엇을 만들어 내거나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추구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존재이다. 
  [  39. 죽음에 이를 때까지

  "주여, 제게 평화를 주소서. 제 마음은 지쳐 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 둘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고, 내 걸어가는 계곡에는 지루한 한가로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린아이들조차 제겐 너무나 생소하게 여겨집니다. 황금의 유혹도 지금의 저를 
어쩌진 못합니다. 주여, 저는 몹시 지쳐 있습니다. 제게 안식을 주소서. 제게 
나타나 응답하소서."

  나는 군중들의 열광과 꽃비 속에 승리자로서 도시에 들어서고 있었다. 제국의 
영광이 찬란하게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가혹한 신은 나로 하여금 군중 
속에 포위된 가련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진정 승리의 환호 속에 
배태되는 것은 무엇일까?
  일시적인 칭송의 세례 속에서, 나의 영혼은 군중들의 시야에는 보이지도 않을 머언 
변방으로 날아가버린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나 평판에 거의 귀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고독감과 깊은 슬픔에 빠져버린 것이다. 목이 말라 허겁지겁 물을 
마시려 할 때 어렵사리 발견된 우물이 텅 비어 있을 때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열광하는 군중들로부터 해방되어 더 이상 허영으로 들떠 있을 필요조차 
없는, 이미 죽은자들은 얼마나 편안할까? 이제는 나에게 더 이상 가르쳐줄 것이 없는 
헛소문처럼 갈채가 나를 피곤의 극에 달하게 했을 즈음, 꿈이 나를 찾아왔다.

  깎아지른 듯이 가파르고 매끄러운 길의 바다 위에 불쑥 나타났다. 천둥치는 
밤이 물로 가득 찬 가죽 부대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고집센 나는 사물의 이치를 
물어보고 생의 목적지를 물어보기 위해 신에게로 올라갔다.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검은 화강암이 쌓여 있었다. 그것은 움직이지도 썩지도 않는 
신이었다.
  "주여, 제게 축복을 내리소서. 왜 사랑이 저를 두렵게 하는 겁니까? 저의 
친구들 동료들 신하들은 모두 저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들을 가르치고 
복종시켰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들보다도 더 저를 고독에 찌들게 합니다. 아아! 
그러나 제게 돌아오는 것은 얼어붙은 메아리, 저의 목소리일 뿐입니다. 주여, 저는 
이 같은 사랑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빗물이 번들거리며 흐르는 화강암 더미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주여, 당신 곁에 까마귀가 있다는 것, 저는 그것이 당신의 침묵으로 인한 
위엄이라는 걸 압니다. 그러나 제게 하나의 징표를 보여주소서. 저 까마귀를 
날리소서. 그리하면 저는 세상에 혼자가 아님을 알겠습니다. 주여, 응답하소서."
  그러나 까마귀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여, 당신의 판단은 언제나 옳습니다. 당신은 제게 복종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저는 주님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 까마귀가 날아올랐을 때 저는 더욱 
슬퍼집니다. 이와 같은 징표는 바로 제 자신에게서 받았던 것이고, 이 모든 것은 
제 욕망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아, 저는 다시 고독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물러서는 순간, 나의 절망은 처음 느끼는 생소한 침묵으로 돌변해 
있었다.
  나의 길은 진흙탕에 빠져 있었고, 가시덤불에 찢기우고 돌풍과 싸워야 할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신이 내리는 빛줄기가 내 마음 속에 간직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은 기도에 응하지 않는 존재다. 기도의 위대함은 무엇보다도 교환이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기도의 수련은 침묵의 수련이다. 사랑은 받을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만 싹을 틔운다. 사랑이란 기도의 행위이며, 기도는 침묵을 
행하는 것이다.

  나는 백성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생전 처음으로 나는 사랑이 깃든 
침묵으로 그들을 감싸안으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들은 헌신을 일깨우리라고 
다짐하였다. 영광의 백성들은 꼭 다문 나의 입술에 도취되었다. 나는 목자요, 
그들이 찬양하고 숭배한 대상이었다. 나는 그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제왕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보다 훨씬 가난하였으며, 결코 굽힐 수 없는 나의 자존심에 
있어서도 더욱 겸손한 존재일 뿐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 안에서 존재한다. 그들의 찬송은 나의 침묵 속에 울려퍼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의 묵언 속에 빨려들어가 버릴 기도가 되었다. 
  [  40. 기하학자와의 대화

  제국의 기하학자들이 내게 어떤 권고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사실 그들은 
기하학자가 아니다. 제국의 기하학자들은 이미 모두 죽었다. 이들은 마지막 한 
사람, 나의 친구였던 그러나 이제는 세상을 떠나버린 기하학자의 후계자들이었다.
  그 기하학자는 한 척의 배를 만들기 위하여 연장이나 재료 따위를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배 만드는 곳에 만 명의 노예와 몇 명의 헌병을 집어넣으면 그뿐이었다. 그러면 
배는 금세 만들어져 바다의 물결 위를 미끄러져 가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하학을 실천하면서 연역적인 것에는 극히 무관심했다. 다만 
정리하고 탐색하여 자기가 선택한 '기하'라는 나무의 열매를 거두어들일 만 명의 
무리, 즉 자신의 후계자들을 움직이게 했다.
  기하학자의 후계자들은 그 기하학자를 이해하고 자신들의 작품을 풍부하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유능하고 소중한 존재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정신의 곡식을 거두어 들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결실이 창조적인 일이라고 
하기엔 뭔가 미심쩍었다.
  창조란 무상의 자유이며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행동이다. 나는 그들이 행여 
자신들을 나와 동격으로 착각할 것을 우려하여, 접견하는 자리를 아래쪽으로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나의 우려를 알아채고는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다가, 대표격인 
인물 한 사람이 나와서는 내게 말했다.
  "이성의 이름으로 우리는 당신께 항의합니다. 우리는 진실의 사도입니다. 당신의 
법칙은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보다는 덜 확실한 것입니다. 당신은 군대의 힘으로 
우리들의 육신을 가둘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의 정신을 제압하려 한다면, 
우리는 캄캄한 감옥에서라도 당신께 저항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용기에 매우 만족이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내 친구였던 진정한 그 기하학자를 회상하였다.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나는 
그의 거처를 방문하곤 하였다. 함께 차를 마시면서 나는 그를 통하여 깊은 예지의 
꿀을 맛보았다.
  "기하학자여! 내게 진리를 가르쳐주시오.
  "왕이시여, 저는 처음부터 기하학자는 아니었습니다. 남들과 똑같은 인간일 
뿐이랍니다. 저는 이따금 잠이 오지 않거나 배고프지 않을 때, 또 사랑의 열정이 더 
이상 내 마음을 뒤흔들지 못할 때, 공부를 조금 더 했던 그런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젠 
몸이 다 늙어빠진, 지금에 와서는 확실히 당신의 표현대로 저는 기하학자입니다."
  "그댄 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애써 상황에 알맞는 말을 찾아낼 뿐입니다. 진리는 좀처럼 눈에 
뜨이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의 수윈 말 한 마디에도 진리가 배어있다고 
믿는답니다. 결국 그들 스스로가 찾아내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기하학자여, 그댄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소."
  "왕이시여, 저는 우주에서 신의 흔적들을 찾아 헤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나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 우상의 번개불을 뿌려댔습니다."
  그는 격정에 불타서 소리쳤다.
  "작은 소리로 말해 주시겠소? 나는 이해는 느리나 귀는 밝답니다."
  그래서 그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진리를 속삭여주었다.

  헛된 자만심으로 내게 고개를 쳐들었던 기하학자의 후계자 중 한 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좀전의 허세에 대하여 그들 모두는 적잖은 불안과 후회가 엄습해온 
모양이었다. 나는 왕이었으므로.
  "어떻게 당신은 임의의 창조와, 당신에게 증정되는 기념물 속에 조각가의 고매한 
정신과 시인의 시가 스며 있음을 압니까? 우리들의 명제는 엄밀히 따진다면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연이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 어느 것도 지휘한다거나 
규제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렇게 그는 절대적인 진리를 규정짓고자 하였다. (마치 미개인들이 어떤 우상에 
대하여 벼락을 내리는 능력이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처럼) 그리하여, 그들은 내 
친구였던 진정한 기하학자와 동등한 반열에 서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당신 앞에서 한 도형의 선들 사이의 관계를 증명하고 확립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설령 당신의 법칙을 위반한다 해도, 당신은 우리의 법칙을 
용인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를 합당한 처우로 대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창조가 무엇인지 모르므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만일에 그대들이 어떤 
왕국을 건설한다면 그 결과는 자명하다. 갇혀버린 역사, 죽어버린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또 쓸데없는 논리에 대한 존경심을 강요하기 위해, 그대들은 야만적으로 칼을 
휘둘러잴 것이기 때문이다.
  벼랑에서 실족하여 죽은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하여 논리학자들은 
그가 죽은 원인을 면밀히 추적하였다. 결국 그 사자를 끌고 언덕과 사막과 벼랑을 
오르내리며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는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몇 번이나 다시 
죽음을 맛보아야 했다. 그대들은 이런 이야기에 내포된 진리를 알아 듣겠는가?"
  기하학자의 후계자들은 겉으로는 "이해하였습니다." 라고 이구동성으로 
지껄여댔다. 그러나 나는 그에 아랑곳않고 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옛날에 한 사람의 연금술사가 있었다. 그는 증류기와 약품 등을 이용하여 어떤 
작은 금속 조각을 추출해내곤 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분석해내기 위해 논리학자가 
달려오자, 그는 증류기 밑의 불길에 물을 뿌린 다음, 생명의 신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창조는 창조가 지배하는 사물과는 완전히 본질이 다르다. 그 자취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조자는 초월자이다. 그는 순수한 논리 그 자체이다.
  나의 친구였던 진정한 기하학자는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싹트게 한다. 이외에 또 어떤 진리가 있을손가?" 
    [  41. 믿음

  만약 그대가 자발적인 마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동기에 의해서 사물의 
개념을 규정해버린다면 나는 결코 그대를 믿지 않으리라.
  너는 아내의 이름과 아내의 본질이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느냐? 예컨대 이러한 
말이 성립된다고 보는가?
  '그녀의 이름은 그녀의 미모를 증명한다.'
  그대의 언어가 어떤 진리를 내포하고 있지 않고 모호하게 책임을 회피한다면, 
분명히 그대를 거부하리라.
  그대의 무모한 행동이 메마르고 형편 없는 논리를 근거로 한다면, 결국 
나에게서 추방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을 익히 보아왔다. 그들의 정신적 깊이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지사의 모든 책들을 읽어보라. 그 안에 씌어진 언어로 가당키나 하겠는가 
말이다.
  나는 전쟁에서 적을 생포할 때의 기묘한 심리 상태조차 그대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가령, 한번도 바닷가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그대의 가슴 안에 산을 
심어주고 싶을 경우, 나는 얼마나 많은 말을 해야 그것을 그대 마음 속에 
뿌리내리게 할 수 있겠는가? 거친 땀방울을 흘리며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그대에게 맑은 샘물의 시원함을 말로써 전해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은 다르다. 내 말이 진실로 그대에게 파고들려면 신의 침묵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다.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은하수가 
영롱한 빛을 발하는 산등성이에 그대를 올려보내는 일, 샘물에 매혹되게끔 그대를 
사막으로 보내 그 열풍 속에 여행하게 하는 일, 그 다음 정오의 태양이 바윗돌을 
달구는 채석장에 6개월 정도 가두어 그대를 기진맥진하도록 만들어놓은 다음, 
비로소 그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힘없는 인간이여. 별빛이 반짝이는 산꼭대기에 올라 성스러운 신의 침묵 속에 
샘물을 움켜 마시라. 이것은 제국의 어둠 속에 감추어진 비밀이니라."
  내가 우수를 조각하면 그대의 얼굴에 우수가 깃들 듯이, 신은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도 신을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1 



    전2권 중 제2권

  지은이: 쌩 떽쥐빼리 
  엮은이: 이상각
  펴낸곳: 도서출판 움직이는 책

    [  42. 우상

  새롭게 영혼을 일깨우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내 가슴에 꿈틀거리고 있다. 평범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 자들에겐 일용할 양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대는 한 세계의 주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나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대는 제국의 명암에 따라 좌우되는 운명이다. 그대의 허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단지 나의 제국의 힘에 의하여서만 보여지는 현란한 빛깔이 아니던가?

  그 여자는 15 년 여를 향기로운 눈화장 속에 잠겨 있다. 그녀는 시와 미혹과 
어둠을 배웠다. 그러나 침묵만이 가장 소중한 샘물을 품고 있으리라.
  어떤 육체가 다른 하나의 육체와 닮았다고 해서, 또 일시적인 쾌락을 위한 
창녀와 같은 음료를 만들어 준다고 해서, 그 여자를 일러 청정한 샘물의 
원천이라고 이름하겠느냐?
  그대는 정복과 풍요를 위해서 그 여자들을 제자리에 놓아둘 것이다. 공주를 
봉양하는 것보다 곁에 창녀를 두는 편이 훨씬 낫다. 그 편이 돈도 훨씬 덜 
들 테니까. 공주가 곁에 있다면 그대는 참담해지리라. 그대는 그녀의 기품과 
우아함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그대의 능력 탓이므로.

  나는 인간들의 논쟁 속에서 칼날이 번득이는 꼴을 많이 보아다. 얼마나 
더럽고 불결한 현실인가? 마찬가지로 그대는 그 여자를 위하여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이다. 그대에게 그녀의 육체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녀의 육체를 소유하지 
못하면 그대는 국외자로서의 노여움을 가진다.
  그렇다. 차를 끓이는 주전자가 없어지면 차에 담긴 작은 의미조차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의미에 매달려 주전자를 극진하게 모시고 자랑하고 경배해야 하는가? 
그리된다면 애당초 여자에 대한 그대의 사랑이나 집착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모두가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리게 된다. 나는 인간의 영혼을 일깨우고 안온한 
정원을 꾸미리라. 그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면서 그 아이들이 어떤 의미를 
마음에 담을 수 있도록 하여라.
  나는 논리를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을 믿을 뿐이다. 
만약 그대가 나무 한 그루를 키우고 있고 나 또한 한 그루 나무를 가꾸고 있다면 
우리들의 공통된 이야기꺼리는 나무를 배태한 씨앗이 아닐까?
  그러나 인식하라. 제국이 추구하고 발전시키려 하는 모든 것은 나의 의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무엇에 몰두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존재를 넘어서 존재한다. 
    [  43. 신성(1)

  그대는 어떠한 것도 신의 계시로 받아들이지 말라. 신성의 표적은 오로지 침묵일 
뿐이다.
  돌멩이는 성전에 대하여, 나뭇잎은 나무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전혀 알 
수가 없다. 나무나 성전도 다른 여러 사물들로 어우러진 나의 제국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원리로 그대는 신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만일 그게 진실이 아니라면 
성전은 돌멩이에게 자신을 보여주어야 하고, 나무는 나뭇잎에게 무엇인가를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돌멩이와 나무사이에는 각기 교감하는 언어가 없다. 이는 나의 새로운 깨달음이다.

  나는 밀폐된 방에 갇혀 있다. 나의 고독은 희망조차 거부하고 있다. 돌멩이로서 
돌멩이 외의 다른 것이 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 돌멩이는 서로 협력함으로써 
서로 모여 성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나는 백성들과 하나가 됨으로써 비로소 변화하고자 하는 열정에 불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신의 표적이다.
  그렇다. 공동체에서 벗어난 개인은 실로 하찮은 존재이고 만다. 스스로에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 같은 존재^5,5,5^. 그러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곳간 속에서 
겨울을 보내는 씨앗과도 같이, 그는 봄이 오면 파아란 새싹으로 돋아나올 것이다. 
    [  44. 신성(2)

  초월에 대한 거부, 그들은 그게 '나'라고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두드린다. 마치 그 속에 어떤 존재가 있는 듯이. 그렇다면 성전에 속한 돌멩이 들고 
말할 것이다.
  '나, 나, 나^5,5,5^.'라고..
  내가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일하도록 엄명한 죄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땀과 노동, 
강건한 근육과 열망이 어우러져서 다이아몬드가 된다. 그 신비한 빛이 된다. 그러나 
그들도 마침내 부르짖는 날이 올 것이다.
  '나, 나, 나^5,5,5^.'라고.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다이아몬드에 매혹되지 않는다. 이제 자신들이 다이아몬드처럼 
우러러보이고 싶어한다. 그들은 심각한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의 화려함은 
순전히 그들이 완성하고 경배하였던 다이아몬드의 광채 때문이었다. 그들이 광산을 
뛰쳐나와 반기를 드는 그 순간, 그들은 본래의 흉악한 죄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성전을 구성하는 돌멩이들이 제 위치를 찬고, 나무는 대지의 물과 양분을 
흡수하면서 푸른 바람을 일으킨다. 강물은 제국의 찬연한 영토가 있음으로 유연한 
몸매로 흐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법칙을 몰랐다. 그들은 스스로를 목적이고자 했고 결과이고자 
했다. 이 때문에 왕자들은 학살되었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는 산산이 부수어져 
사라져갔다. 언젠가는 지도자의 반열에서 있어야 할 현자들은 차가운 지하 감옥 속에 
갇히었다.
  그리하여 이젠 성전이 돌멩이에게 경배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반역자들은 
성전에서 뜯어낸 돌멩이의 부스러기들 때문에 모두가 부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결국 반역자들은 신의 선물을 파괴하여 
쓰레기만을 움켜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으리라.
  "그러한 변혁이 없다면 노예들은 언제나 해방될 수 있으며, 죄수들은 언제나 
감옥에서 밝은 빛을 볼 수 있단 말입니까? 대체 사람의 권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나요? 물로 신들의 권리는 있다고 할지라도 성전에 맞서 일어난 돌멩이와, 시에 
맞서 일어난 단어와, 제국에 맞서 일어난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너희는 단지 그러한 이기주의를 위하여 파멸을 선택하려는가? 단지 '나, 나, 
나'라고 외치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왕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성전에서 벗어난 돌멩이며 시에서 어긋난 단어, 그리고 육체에 반기를 드는 
살조각을 직시하라. 결국 이들은 빗자루에 쓸려 쓰레기장에 묻히고 말 것이다."
  본질적으로 계층이란 없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몇 가지의 이름을 지어내었다. 그 
길을 따라 다른 이름을 가진 소위 계층이란 것이 생겨난 것이다. 그대는 본질이 없는 
것을 본질로 돌리려느냐? 
    [  45. 법

  법이란 사물에 대한 무용한 의식이 아니라, 곧 사물의 의미하는 그 자체이다. 만약 
그대가 사랑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다면, 나는 그에 알맞은 사랑을 할 수 있다.
  나의 사랑은 내가 원하는 범위의 구속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법은 헌병도 
될 수 있고 좋은 관습도 될 수 있는 것이다. 
    [  46. 제국의 의미

  밤이다.
  나는 높은 성벽에 서 있다.
  제국의 병사들은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봉화를 올리면서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다. 
성벽을 순찰하는 파수병들은 각기 긴밀하게 신호를 보내면서 어떤 위험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밤, 제국에는 균열이 생기고 있다. 몇몇의 봉화대에 불이 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권태로운가? 어둠은 제국을 붕괴시킬 수 있다.
  그 붕괴는 단란한 가족을 무너뜨리고, 저녁 만찬과 자녀들과의 다정한 입맞춤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이다. 제국이 무너지면 그와 함께 모든 삶도 무너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어린 아이들의 맑은 눈을 통해 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라져가는 세대여, 내가 그대를 화형대 위에 올려놓았다한들, 그것이 무에 
중요할 것이냐, 사물의 의미로부터 성전을 구출해야만 한다.
  생명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팔다리가 잘린 육체에는 진정한 고통이 없다고.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반항은 인간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성전의 
규모에 비례하여 확대된다. 만약 제국에 충성하도록 교육받은 사람을 유형지의 
감옥에 가두어 제국에서 몰아낸다면, 그는 감옥 창살에 자해를 하면서 먹고 
마시길 거부할 것이다. 그의 언어가 더 이상 쓸모없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급류에 빠진 아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강물 속에 뛰어드는 아버지를 보라. 
그대가 만일 그 아버지를 염려하여 팔을 끌어당긴다면, 그 아버지는 그대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큰 소리를 지르며 강물 속에 몸을 던질 것이다. 그러하지 않으면 
그의 언어는 더 이상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있어 내가 부여한 가장 뜨거운 고통은 인연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사람들을 구출하여 억지로라도 그들을 살아있게끔 하고 싶다. 감옥에 
보낸다거나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서라도 말이다.
  이러한 결과로 그대가 가족이나 제국을 못 잊어 하며, 참을 수 없는 괴로움 
때문에 나를 비난한다면, 나는 그릇된 그대의 행동 방식을 바로잡아 어떤 존재의 
의미를 부여케 하려는 것이라고 감히 대답하리라.
  지나가버리는 세대여, 그대들은 객관성의 결여로 인하여 내가 성전의 
위탁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보라, 성전은 그대의 마음을 키우고 그대의 
언어를 살리며 그대의 기쁨을 내부로부터 활활 타오르게 한다. 이러한 믿음이 
없을 때, 군인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포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백성들을 개인의 영광을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 나는 신 앞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영광만을 받는 신은 나와 더불어 모두를 포용한다.
  나는 제국을 섬기기 위해 백성들을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들의 존재 의의를 
부여하는 데 제국을 이용했다. 이것이 내가 한 일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작업의 
결실을 내가 먼저 취했다면 이는 신에게 바치기 위해서이다.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써, 
신이 다시 그 결실을 백성들에게 뿌려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의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곡식이 바로 그것이다. 양식은 빛이 되고 찬송이 되며 마음의 평화가 
된다. 인간에 관계되는 모든 것이 이와 같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한 결혼의 의미를, 이 
야영지는 우리 종족의 생존의 의미를, 이 성전은 신의 은총을, 저 강물은 제국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47. 자유

  자유.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가 허물어뜨릴 수 없는 큰 산이 되어 인간의 지평선을 
가로막을 때, 논리학자와 역사가와 비평가들은 분노로 일어섰다. 그들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인간이란 아름다운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하다. 그들은 마음껏 
자유를 누리면서 활짝 웃음 지을 것이다. 저항이란 왕의 광채를 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 나절이 되어 사람들이 나무 줄기를 바로 세우고 가지를 쳐준 오렌지 나무 숲에 
가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렌지 나무는 아름답다. 맛있는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게 보이지 않은가? 
그런데 열매를 열게 하는 나무가지를 왜 자르는가? 나무를 그냥 내버려두라. 그리하면 
나무는 자유로이 꽃을 피울 수 있다."
  마침내 인간은 해방되었다. 사람들은 신에게서 재단받은 대로 획일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치될 수 없는 모래에 대한 존경심은 간 데 없고, 오로지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천박한 욕망은 인간을 구속하고자 하는 헌병들이 나타나자 
폭동으로 비화되었다. 자유의 욕구는 거리에서 거리로 들불처럼 번졌고, 자유를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아름다웠다. 거칠 것 없는 자유의 종소리!!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들의 자유란 바로 존재하지 않고자 하는 자유이다."
  그들은 점점 광장의 잡상인처럼 변해갔다. 여러 인간들이 각자 자의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모두의 행동 양식이 파괴되어 버렸다.
  만일 자신의 취향에 따라 어떤 물건을 붉은 색깔로 칠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파란 색으로 칠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노란 색으로 칠한다.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면, 그 물건에는 고유한 색깔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약 행군을 할 때 각자가 자기 방향만을 고집하여 걷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그대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가 가진 권력을 주위에 공평하게 분배해 
보아라. 그리하면 너의 권력은 강인해지지 못하고, 각자의 쪼개진 권력으로 결국 
분열만을 조장한 꼴이 될 것이다.
  창조란 단 하나이다. 그대의 나무는 단 한 그루의 나무에서만 싹트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나무는 죄악을 갖고 있다. 다른 씨앗으로 싹튼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권력이 지배욕이라면 나는 그것을 버릴 수밖에. 그러나 창조자의 행위와 창조의 
수련으로 만들어졌고, 그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라면 나는 권력을 찬양할 것이다. 
자연스러움이란 여러 가지 재료들이 섞이고, 늪에서 얼음이 녹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전이 풍화되는 것이다. 태양의 열기가 미적지근하게 분산되고, 책을 오래 
만지다보면 책장이 닳아 없어지는 것이다. 언어가 분열되고 퇴화하며, 힘이 관계가 
동등해지고, 모든 노력이 평준화되어 사물을 맺어주는 신의 매듭에서 생긴 모든 
인류의 구성이 부조리하게 부서지는 것, 이것이 바로 자연스러움이다.
  결국 자연스러움의 본체는 생명이란 구조이고 힘의 연결선이며, 불공평한 것이다. 
만약 그것에 권태를 느끼는 어린이가 있다면, 그대는 어찌할 것인가? 구속이란 놀이의 
규칙과도 같다. 구속을 경험하고 나서야 그들이 힘차게 달리는 것을 보게 된다.

  해방시킬 무엇을 찾을 수 없게 되면 자유란 한갖 증오를 품은 평등 속에서 
양식을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는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시기가 도래한다. 
자유로운 너는 자유로운 이웃과 충돌하고, 이웃은 너와 충돌한다. 바로 구슬들이 
섞이다가 멈춘 상태와 같다. 그리하여 자유는 평등에 이르게 되고 평등은 균형에 
이르게 되며, 그 균형은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너를 골탕먹이고 네가 증오해야 하는 유일한 구속은 너의 이웃과의 마찰, 
동료와의 질투, 금수와의 평등 속에 나타난다.
  그것들은 너를 메마른 광산의 굴 속으로 처넣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가 집단의 표현으로 나타나게 되고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그 속에 용해될 
시기가 도래하였다. 사람들은 그 부패하는 냄새를 자유라고 부르고 정의로 알고 있다.
  여전히 나팔소리를 흉내내고 있는 자유라는 이 단어는, 감동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고, 사람들은 그들을 깨워줄 수 있는 새로운 나팔 소리를 막연하게 꿈꾸는 시대가 
왔다.

  가치 있는 속박이란 존재의 의미에 따라 그대를 성전으로 안내하는 그런 
것이다. 참다운 구속이란 나팔수가 네 마음 속에서 승화되어 무엇인가를 
불러일으키려 할 때, 그 나팔수를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다.
  자유가 그들보다 더 큰 자신들의 모습이고 또 그들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한 행동일 
때, 자유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들은 구속을 받아들이고 나팔수의 부름에 한밤중에도 
일어난다.
  그들은 마음대로 잠을 이루거나 자기 아내를 애무할 수도 없다. 그대가 복종해야 
하는 이상 헌병이 안에 있건 밖에 있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헌병이 안에 
있을지라도 나는 처음부터 그가 밖에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명예도 이와 마찬가지다.
  속박이란 어떤 놀이의 규칙과도 같다. 어린이들은 놀이의 규칙에 따르며 열중한다. 
그 아이들은 규칙에 맞지 않게 행동한다거나 속이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그들의 열성과 문제의 해결에서 느끼는 행복, 대담성과 조화, 신은 아마 
놀이에서 탄생하였으리라.
  모든 놀이는 그대를 동일하게 형성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놀이를 바꾼다. 그러나 그대가 선택한 놀이에서 자신이 크고 
고귀함을 느꼈다면 그대는 속임수를 쓴 것이다. 다시 말해 놀이의 목적을 파괴한 
것이다. 이는 위대함과 고귀함을 파괴한 것이므로, 너는 어떤 큰 사랑의 힘에 의해 
구속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의 구속은 사랑이라고. 
    [  48. 기도

  그대 마음 속의 사랑이 상대로부터 받아들여질 일말이 조짐이라도 보이지 
않는다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좋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어떤 신도 그대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 그대가 사랑도 침묵도 
포기할 만한 정신력을 갖기 어렵다면, 하루빨리 의사를 찾아가보는 것이 좋겠다. 
사랑과 굴종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애원하는 사랑은 아름답다. 그러나 애원하는 사람은 노예이다.
  그러므로 어떤 여자가 그대를 사랑한다면 그대는 신에게 감사하라. 그녀가 
귀머거리요 장님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그대를 위해서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었다. 
그대는 일단 부유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위대한 정신들을 세상에 내보내고 그중 가장 완전한 것을 선택하여 침묵 
안에 가두어둔다면, 누가 보아도 그 정신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정신은 제국을 고귀하게 한다. 멀리서 지나가는 사람조차도 그 정신을 경배하며 
무릎을 꿇는다. 그리하여 표적과 이적이 생긴다.
  설사 그녀의 사랑에 관심이 없어도 만약 그대가 그녀를 선택한다면 그대는 빛 
속을 걸어가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녀의 신에 대한 기도는 위대하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 속의 사랑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사랑이 부패하지 않도록 신께 경건히 
기도하라. 행복에 겨운 사람은 마음을 의심하는 까닭이다. 
    [  49. 표절

  문체란 글의 맛이다.
  인간은 문체로서 자기 내면의 율동을 표현한다. 표절이란 남의 글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내 자신의 훌륭한 효과를 거두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마치 
당나귀가 지탱할 수 없는 짐을 짊어지게 함으로써 당나귀를 죽이는 일과 
마찬가지고, 무엇을 운반한다는 핑계로 남의 수레를 부수는 일이다. 그럴 때 짐의 
크기를 잘 계산함으로써 그대는 그 당나귀로 하여금 일하게 할 수 있고, 그가 
이미 일하고 있다면 도와주게 될 것이다.
  나는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에 대해 매우 엄격하다. 왜 자신의 규칙을 똑바로 세우지 
못하는가?

  자유의 수련이 아름다움 그 자체일 때는 창고를 약탈하는 것과 같을 수가 있다. 
아름다움이란 원형의 성질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것을 노출시키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 것을 내보일 수는 없다.
  곳간을 짓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대가 겨울에 그것을 나누기 위해 그 
곳간에서 곡식을 퍼낼 경우에만 그것들은 의미를 갖는다. 그때 곳간의 의미는 
처음 곡식을 넣을 때의 곳간의 의미와는 정반대가 된다.
  결국 서투른 언어 때문에 모순이 발생한다. '나가고 들어온다.'는 말은 부정이 
문제가 될 때 끄집어내는 말이다.
  "이 곳간은 내가 들여놓은 장소이다."
  이 말에 다른 논리학자는 당연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곳은 내가 밖으로 꺼내는 장소이다."
  이러한 분란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우선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라. 그러고는 
곳간은 씨앗의 정착지라고 말하면서 곳간의 의미를 확정하면 된다.
  나의 자유는 나의 속박의 결과를 이용한 것이다. 속박만이 해방될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을 해방시켜줄 권한이 있다. 그래서 마음 속에 폭군이나 집행자의 명령에 
거역하고 개종하길 거부한다면 그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은 자유롭다고 말한다.
  나는 저속한 사랑에 저항하는 사람도 역시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들이 설사 
노예가 되는 자유도 역시 자유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모든 요구에 순종하는 
그를 자유인이라고 볼 수는 있을까? 없다. 
  [  50. 의사 소통의 경계

  하나의 관점으로만 사물을 판단하려는 사람을 멀리하라.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전달하는 신의 대리인처럼 행동하면서, 스스로를 눈뜬 장님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 
말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끊임없이 깨우쳐주려고 시도하지만, 경계를 늦추지는 
않는다. 그는 나에게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나의 진리를 훔쳐가서는 자신의 
제국에 끌어들여 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언어를 이해하고 어디까지나 동등한 자격으로 맞서기 위해, 그는 나의 
진리를 채 소화하지도 않고 이용하는 수완을 가져왔다.
  행동하지도 싸우지도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사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는, 제국에서 가장 섬세한 순수를 잃어버린 가련한 꽃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현상만이 의사 소통의 수단이 된다.
  제국은 나의 병사에게 있어서 의미, 바로 그 자체이다. 나는 제국이라는 관념을 
통해서만 병사들과 의사 소통을 시도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잠들어 있거나, 설령 집에 없을지라도 오직 한 여인하고만 
의사 소통이 될 뿐이다. 그가 만일 일방적인 관점을 전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의사 
소통에 변화를 갖게 된다면, 그것은 곧 그와 내가 어떤 고차원적인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라. 그와 나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숱한 전쟁을 통하여 상대편의 목을 위협한다 할지라도, 제국과 제국을 
경영하는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적으로 그를 인식하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는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그에게 접근하며, 그 시도는 우리 공동의 가치가 된다.
  그도 나처럼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지금 사막의 천막 안에서 신께 기도드리고 
있는 나의 병사들처럼, 그의 군대도 어딘가 무릎 꿇고 신에게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만일 나와는 반대로 아직 절대자를 찾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의사 전달의 통로가 없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내면에 숨어있는 믿음이나 책임감이 
그 말을 보증하게 된다. 일상적인 영혼의 충동, 즉 '누군가의 네 주전자를 
빌려다오.'란 말에 흥분하면, 과거에 받은 상처에 기인한 것이다. 그 주전자는 단순히 
물을 담은 도구일 수도 있고, 풍요와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일 수도 있는 까닭이다.
  나는 우리 베르베르의 망명자들이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가지고도 신전을 짓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들이 신전을 지었다면 모두가 신전의 돌과 같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  51. 간수들의 예지

  간수들은 기하학자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나는 곧잘 장군과 
간수의 입장에서 무엇을 취할 것인가 망설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기하학자의 
입장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에 대해서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다.

  어떤 입장과, 그 입장의 방법이나 예지를 혼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문제삼을 
일이 아니다. 간수들은 자신들의 인식만을 예지로 알고 있다. 그렇다. 어떤 입장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자신들만의 진리를 믿어야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은 서투른 지배자의 칼로써도 사용될 수도 있다. 죄수들은 어린애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52. 기하학자의 진리

  죽은 기하학자의 추종자들은 아버지를 귀찮게 들볶았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들만이 안간 세계의 
진리를 알고 있단 말입니다."
  아버지의 대답은 단호했다.
  "너희들은 죽은 기하학자의 진리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뭐라구요?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행하는 것이 참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까?"
  "물론."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다.
  "그네들은 자신들이 여미고 있는 삼각형의 공식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내 말을 
명심하거라. 빵 만드는 사람들은 빵 만드는 법을 잘 알고 있다. 밀가루를 잘못 
반죽한다든가, 화덕이 너무 뜨겁다거나 하면 결코 좋은 빵을 만들 수 없다. 그들의 
숙련된 손을 거쳐야만 우리는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는 거이다. 그러나 어디 그들이 
제국을 통치하겠다고 조르더냐?
  저들은 어찌 자기들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역사가와 비평가들은 다 무엇이냐?"
  아버지는 잠시 한숨을 쉰 다음 말씀을 계속 이으셨다.
  "그들에게 제국을 맡기느니, 나는 차라리 악마에게 던져버리겠다. 악마는 사람들의 
난잡한 것을 아주 잘 찾아내는 능력이라도 있지. 저들의 진리라는 건 악마의 입장에선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지. 그들의 삼각형의 공식은 인간 삶을 영위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말씀이 어렵습니다. 정말로 어떤 진리를 알고 계신 건가요?"
  "아니다. 믿음이란 무엇이냐? 여름을 보리가 익는 계절이라고 믿는다면, 거기에 
풍요나 행복 같은 이름을 부여할 까닭이 있겠느냐? 그러나 보리가 귀리보다 먼저 읽는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성립된 어떤 관계를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야만인들은 소리가 북 속에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북에 기대고 
애정을 바친다.
  누구나 그러하다. 막대기와 손바닥에 소리가 숨어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물론 너는 그렇지 않으므로 북이나 막대기나 손바닥을 진리라고 부르진 않는다. 
다만 소리가 나게 하는 어떤 행위의 주체를 진리라고 알고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그들 기하학자의 추종자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전의 재료와 기술 따위를 우상으로 섬기고, 성전의 돌멩이들을 존경하는 
눈초리로 경배한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쌓은 삼각형의 공식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는 것이다."
  나는 그만 울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깐 진리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웃으면서 대답하셨다.
  "네가 만약 나에게 어떤 정식을 가지고, 어떤 경우의 인식에는 대답조차 
거부된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면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여태 스스로 아무것도 포착한 것이 없지 않으냐?
  연애 편지를 받아 본 사람은 그 편지만 보고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렇지만 그 
종이나 먹물에서 사랑을 찾진 않는 법이란다." 
    [  53. 속박

  나는 그대를 가르치면서도 속박한다. 그대는 보이지 않게 내게 속박되어 비난도 
한탄도 하지 못하리라.
  어린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보라. 그들의 규칙이란 본래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문제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사람들은 가끔 책략으로써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를 부여받기를 원한다. 그것은 
스스로의 속박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들의 언어도 이와 같다. 어떤 돌멩이들의 배열을 내가 '집'으로 명명하였을 때, 
만일 그대가 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는 제국의 외톨이가 되고 말 것이다. 내가 
나의 양들과 염소들, 그리고 거처들을 배열하여 '영지'라 이름하면, 그대는 홀로 
반대하여 일어설 것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공동체의 틀을 벗어나서 홀몸으로 살아가야 
할 뿐이다.
  만일 이러한 속박의 자유를 용인하지 못하는 너와 같은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결국 
자신들만의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저마다 자신들의 
축제일을 정하여 춤을 추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침내 제국과는 절연되어 하늘의 
고독한 별보다도 더 외로워질 것이다. 
  [  54. 잠든 보초를 바라보며

  잠든 보초여, 그대에게는 사형만이 있을 뿐이다.
  꿈꾸고 있는 너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다.
  이제 그대는 꿀처럼 모은 성직자들의 재산과 금박 입힌 의상들, 지혜의 
창고에서 안식을 취하는 고서들, 그리고 그대 자신의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만에서 푸른 바닷물이 헐떡이듯이, 생명의 달디단 호흡 
속에서 편안하게   보초여! 그대는 제국의 성곽이었다. 그것은 육신을 감싸고 
있는 살결과 같아서, 조그만 구멍이 뚫려도 피흘리며 죽기 마련이다.
  그대는 우리를 노리는 적들의 뜻대로 되었다. 이 성곽의 내부에서 깊이 잠들어 
버리도록, 바다가 배를 삼키기 위해 잔잔한 물결로 배를 맞이하듯이, 그대는 지금 
도시를 완전히 발가벗겨 버린 것이다.
  이제 도시는 위기에 빠져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대는 아직도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잠들어 있다. 무거운 총을 
감싸쥐고 찬란할지도 모를 깊은 꿈길을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막의 밤에 의해 정복된 보초들은, 도시의 기력이 쇠진하여 야만인들이 이 
도시를 필요로 할 때 기름바른 돌쩌귀 위에서 문들이 스르르 열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잠들어 있는 보초. 적들의 척후. 이제 제국은 이미 함락된 것이나 다름없이 
되었다. 보초여, 그대의 잠은 이 완전한 도시를 무너뜨리고 허물을 벗고 
자손들에게 생명의 끈을 넘겨줄 것이다.

  잠들어 있는 보초를 쳐다보면서 나는 도시의 일그러진 형상을 떠 올렸다.
  아아, 모든 것이 그대로부터 말미암았다. 도시의 귀와 눈초리인 그대가 밤을 
새운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대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별빛에 감싸인 이 집, 저 궁전과 병원들, 
죽어가는 이들의 한숨이 가슴에 아로새겨지기도 전에 해산하는 여인의 비명을 
들을 것이며, 어떤 이들의 잠과 철야하는 내밀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초여, 이들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어보라. 이들은 분명히 
살아 있지 않은가? 밤을 새우는 보초여! 그대는 나의 동료이며 제국 그 자체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나는 허락하리라. 그대가 내게 무릎 꿇을 수 있는 권리를^5,5,5^.
  잠든 보초여, 죽은 보초여! 나는 두려움으로 그대를 본다. 그대 잠속에서 제국이 
병들고 죽어간다(사형 집행자는 당연히 그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것이다).
  그런데 왜 나에게 동정심이 싹틀까? 이것은 새로운 문제가 나의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강력한 제국의 힘만이 잠든 보초의 목을 벤다. 그러나 잠을 자고 말 이런 
보초들에게 도시의 밤을 맡긴 저 제국에게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기강 없는 
제국의 가혹한 진리를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잠든 보초를 죽임으로써 제국이 깨어나는 것은 아니다. 깨어 있는 제국의 권능만이 
그를 목벨 수 있다. 주위의 다른 강력한 제국들은 지켜보고 있다. 그대는 그를 
죽임으로써 그대의 힘이 창조되기를 바라고, 그대는 어느덧 핏빛 광대가 될 것이다.
  사랑으로 그대의 결심을 이루라. 그리하면 그대는 보초들의 경계와 잠든 보초에 
대한 유죄 판결의 기초를 확립하리라. 그들은 제국의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보초여, 보초여. 내가 그대에게 보초들만이 가진 영혼의 충만함과 그대가 지켜야 
할 구역에 대한 권능을 줄 때, 제국의 경계는 안온하며 평안하리라.
  물론 그대가 어느 때에는 일을 하면서 투덜거리기도 하고, 맛있는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보통의 인간이라는 건, 이 순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대가 잠자는 것은 
좋은 일이고 잊어버린다는 것 역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대로 인하여 제국이 
무너진다는 사실은 더할 수없이 나쁜 일이다.
  나는 그대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구원하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그대는 
체포되어 결국 사형 언도를 받을 수밖에. 남은 일이 있다면 다시 정신차리는 
일뿐이다. 예를 들어 그대 자신의 고통이 다른 보초들의 경계심으로 승화되기를 
희망하는 따위 말이다. 
  [  55. 잠든 보초를 위하여

  나는 행복한 꿈 속에 잠긴 어린아이를 사망의 바다로 끌어내기 위해 결국 어떤 
명령을 내려 한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판단 때문에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보초는 내가 보는 앞에서 문득 잠이 깨었다. 손을 이마 위로 끌어올리면서 그는 
가냘픈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묵직한 총을 들고 그는 
밤하늘의 별을 응시한다. 이 영혼을 정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무겁게 스쳐갔다.
  그의 옆에 있는 나, 즉 왕인 나는 그와 외면적으로는 같지만 전혀 다른 입장이다. 
나는 도시를 바라보면서 몸을 돌렸다. 내가 그대에게 말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도 나와 마찬가지로 숨쉬고 소유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대개 정복한다는 것은 개종시킨다는 것이다. 구속이라는 것은 감옥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정복한다는 것은 한 인간을 석방하는 것이며, 내가 
그대를 구속한다는 것은 한 인간을 짓밟는다는 것. 이것이 나의 말이다.
  정복은 그대 속에서, 그리고 그대를 통한 개인의 건설이다. 구속은 나란히 엮인 
돌더미일 뿐, 그 안에서 창조란 없다.
  나는 인간을 정복해야만 한다.
  밤새우는 사람과 잠자는 사람, 순찰하는 사람과 그들을 보호하는 사람, 갓난아이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 죽은 사람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 예배 드리는 사람과 신을 
믿지 않는 사람, 그 사람들을 나는 정복해야만 한다.
  정복이란 뼈대를 잇는 것이며, 충만한 양식을 위해 정신을 영광의 문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준다면, 그 안에 있는 목마른 이들을 위한 
호수를 볼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신들이 그대를 개안시킬 수 있도록 하리라.

  무엇보다도 먼저 어린 그대를 정복해야겠다. 나이든 사람들은 모든 뼈대가 굳어 
제대로 진리를 배울 수가 없기 때문에^5,5,5^. 
  [  56. 도시의 사람들

  나의 도시는 이권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판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많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나로 인하여 파생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수익자들이 도시에서 이익을 내면서도 타락하지 않고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로지 도시의 현상이었다.
  나는 한 중위와 함께 사람들의 틈새를 비집고 거닐었다. 그러다가 중위가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목수라오."
  "나는 농부입니다."
  "나는 대장장이입니다."
  "나는 목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우물을 판다든가, 병자들을 치료한다든가, 편지 쓸 
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편지를 쓴다든가, 푸줏간 주인과 미장이들, 옷감을 짜는 
사람, 옷을 꿰매는 사람 등등^5,5,5^.
  이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위해서 지나친 소비 
생활을 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한 번 먹고, 한 번 치료하고, 한 번 옷을 입고, 한 
번 차를 마시고, 한 번 편지를 쓰고, 한 집의 한 침대에서 잠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는 궁전을 건설하는 사람과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는 사람, 
석상을 조각하는 사람 등도 있었다. 이들은 아주 소수의 인간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산물을 조금도 나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 여인들이나 병자들, 불구자들, 
어린애들이나 노인들, 그리고 오늘을 휴식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다.
  도시에는 전혀 물건을 만들지 않고도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이 있다. 
헌병과 군인들, 시인들, 무용수들, 각 지역의 총독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소비하며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잔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비하는 물건들을 만들지도 교환하지도 않기 때문에, 어디론가 가서 
그것을 만드는 이들에게 훔쳐와야 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생산품을 그들을 위하여 쓰겠다는 주장을 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어떤 사람들에게 모두 제공하겠다고 큰 소리칠 수 없는 어떤 
물건들이 있다.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아주 드문 것들, 어떤 문명을 
대변할 수 있는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이다. 가령 다이아몬드와 같은 물건이다. 
다이아몬드는 구슬방울 같은 눈물을 바친 1 년 동안의 노동이다. 꽃무덤에서 짜낸 
향수의 방울이다.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될 수 없다.
  하나의 문명이란 어떤 물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의 출생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나에게는 눈물과 향수 방울의 운명이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제국의 왕인 나는 병사들에게, 여인들에게, 그리고 노인들에게 방과 옷을 주기 위해 
그것들을 훔친다. 내가 훔친 빵과 옷을 조각가들과 보석 세공사들과 시인들에게 
준다고 해서 부끄러울 까닭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들도 먹고 살아야만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이아몬드도, 궁궐도, 그밖에 어떤 바람직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것은 백성들을 궁핍하게 할지도 모른다. 백성들이 부유하게 되는 것은 문명 
활동이 아닌 분야에 힘씀으로써이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극소수의 장인들만을 고용할 
뿐이다. 이찌됐든 이 문명에 관한 부분은 많은 조심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  57. 예언자와의 대화(1)

  냉혹한 시선을 가진 사팔뜨기 예언자가 생각난다. 어느날 나를 찾아온 그를 보자 
어떤 침울한 노여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나의 이러한 기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말을 꺼냈다.
  "죄 지은 자들을 모두 죽여야 합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장검처럼 날카롭게 재단된 이 영혼은 악에 
반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악이 있으므로 존재한다. 만약 악이 없다면 
그는 존재는 어찌되는가? 내가 그에게 물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의 승리입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 예언자는 자기의 칼을 뽑지 않고 녹이 스는 
것을 행복이라고 이름 붙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진리가 굳어지고 있었다. 바로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악엣 대해서 
관대하고, 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약함에 관대하다는 점이었다.
  언어란 서로간의 모순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과 악은 뒤섞여 있는 것이다. 
때문에 무능한 조각가들은 유능한 조각가들의 비옥한 땅이 되고, 기근은 공평한 빵을 
분배를 촉진한다. 또한 헌병들에 의해 괴로움을 겪고 지하 감옥에 갇혀 머지않아 
죽음에 이를 사람들, 즉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되어 반역을 획책했던 저 
사람들은, 자유와 정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위험과 빈곤과 불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눈부신 매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매력은 내가 그들을 심문을 할 
때 불길처럼 타올랐다. 나는 결코 그들을 죽게 할 수 없었다. 다이아몬드의 원석이 
없다면 어찌 영롱한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가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적이 없다면 
칼이 어디에 쓰일 것인가? 부재가 없다면 귀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유혹이 
없다면 정조란 또 무엇이겠는가? 선의 승리, 이것은 모이통 앞에서 배회하는 얌전한 
가금의 승리일 뿐이다.
  내가 다시 그 사팔뜨기 예언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악에 대하여 투쟁하고 있구나. 모든 투쟁은 춤과 같다. 그대는 춤을 
추고 있구나. 악에서 그대만의 행복을 끌어내는 그런 춤 말이다. 나는 그대가 
사랑에 의해 춤추기를 원한다.
  이 세상에는 어떤 사물에 대한 정반대의 무엇이 존재한다. 만일 내가 시를 위한 
제국을 그대에게 세워준다면, 이 땅의 논리학자들은 노리나 궤변으로써 시에 
반대하고 어떤 위험을 그대에게 알려줄 때가 올 것이다. 그러고는 시에 대한 
사랑과 그 반대되는 것을 혼동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는 것에 전념할 
탐정들이 그대에게서 태어날 것이다. 마치 올리브나무를 베어내는 것이 삼나무에 
대한 사랑과 대등하다고 믿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음악가나 조각가, 천문학자 
등을 마침내 지하 감옥으로 보낼 것이다.
  나의 제국은 이제 쇠퇴할 것이다. 삼나무, 그대에게 생명을 주는 것, 그것은 
올리브나무를 베어 내는 것도 장미의 향기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돛 단 배에 대한 사랑을 백성들에게 심어주라. 백성들의 열성은 돛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이교도들을 추적하고 고발하고 몰살시키면서 돛 단 
배들이 탄생하는 것을 감독하려 한다. 결국 돛 단 배가 아닌 것은 모조리 돛 단 
배의 반대라고 단정하게 된다. 그것이 그대의 논리니까. 이렇게 되면 그대의 
백성들은 다양한 사랑의 방법이 있다는 죄만으로 몰살을 당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그대는 돛 단 배 자체도 무로 규정짓게 되리라.
  무능한 조각가를 일소하여야 유능한 조각가를 우대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그대와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말로써 무능한 조각가들을 몇몇 유능한 
조각가의 적이라고 규정지어 버린다. 나는 그대 아들에게 그대와 같은 직업은 
절대 선택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말을 마치자 사팔뜨기 예언자가 발끈 성을 내면서 대꾸했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악덕도 너그러이 봐주어야겠군요?"
  "암, 반드시 그래야지^5,5,5^. 내가 쇠귀에 경을 읽은 꼴이군." 
    [  58. 배반

    * 후일을 위한 노트
  잘못된 대수학 때문에 이 바보들은 반의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민중 
선동의 반대는 바로 잔인성이다. 인생은 상반된다고 보는 두 가지 사항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없애기로 한다면 바로 멸망하게끔 짜여져 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의 반대는 죽음, 오직 죽음일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대수학자들은 완전의 반대를 추구한다. 원고에 삭제에 삭제를 
거듭함으로써 그는 그대의 모든 원고를 불태운다. 완전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완전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무엇을 미화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이들을 고결함의 반대를 추구한다. 따라서 그대의 모든 부하를 
화형시키고 말 것이다. 아무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바보들은 자기의 적을 사멸시킴으로써 그들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만 
그럼으로써 그들 역시 사멸당할 것이다.

  그 무엇과 싸운다면, 그 대상이 되는 세계는 의심투성이가 된다. 매복과 피난처와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비밀 창고와 양식이 그 안에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과 싸운다면, 그대 자신을 없애야 한다. 어느 한 부분 그대의 마음 속에 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떤 나무가 된다면, 그대는 결코 다른 무엇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본래 그대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하여 부당했으므로.
  그대의 열성이 사라질 경우 그대는 헌병들만이 제국을 구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면 이미 제국은 죽은 것이다. 나의 속박은 그의 매듭 속에 수액과 땅을 
맺어주는 삼나무의 힘의 속박이지, 가시덤불에 제공되긴 했으나, 또한 
삼나무에게도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무엇에 반대하여 전쟁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가시덤불을 말살하는 삼나무는 그 가시덤불을 업신여긴다. 삼나무는 가시덤불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다. 삼나무는 자신을 위하여 전쟁을 하고 가시덤불을 삼나무로 
변화시킨다.
  그대는 적들을 죽이고 싶으냐? 그 누가 죽음을 원할 것인가? 그런데 전쟁은 죽음의 
수락이다. 죽음의 수락이다. 죽음의 수락이란 그대가 그 무엇과 그대를 바꿀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대 수학자들은 미워한다. 감옥에는 포로들로 가득해진다. 따라서 적들을 존재하게 
해준다. 감옥들은 수도원보다 더 큰 힘으로 제국에 영향을 미치지 때문이다.
  이들이 투옥하고 고문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우선 자신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증인과 판사들을 말살해버린다. 그러나 자각하라. 적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서 위대해지지는 않는다.
  이들은 투옥하고 고문하고 사형을 집행한다. 왜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는가, 정말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이다. 강하면 강할수록 스스로 
의무에 대한 잘못을 자각할 수 있다. 이 자각은 승리할수록 스스로 의무에 대한 
잘못을 자각할 수 있다. 이 자각은 승리를 위한 교훈이 된다.
  나의 아버지는 장군들 중의 하나가 스스로 매를 맞게 만들고는 사과를 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식했다고 해서 잘난 체하지 마라. 내가 당나귀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었을 경우, 길을 잃은 것이 당나귀란 말이냐? 그것은 바로 나다."
  그러고는 이렇게 끝맺으셨다.
  "배반자들이 변명하는 것, 그것은 그들이 가장 먼저 배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59. 홀로 있는 그대에게

  홀로 있는 그대여.
  침묵의 바다에서 유영하는가? 나의 욕망으로 그대는 빛을 받으리라. 양식을 
받으리라. 고독 속에서 그대는 부유해지리라. 그대는 어린 아이처럼 두 손을 
모으고 내가 주는 선물을 받으리라.
  세 개의 조약돌로 전투 함대를 구하고 폭풍우로 그것을 위협할 줄 아는 사람, 
내가 그대에게 나무 인형을 주리니 그것으로 군대와 선장을 만들고, 제국의 
충성과, 준엄한 규율과, 사막에서의 목마름에 의한 죽음을 만들어 보라. 그대는 
헌신하는 이상으로 받으리라. 무의 존재에서 유의 존재가 되리라.

  홀로 있는 그대여.
  나는 그대 안에서 살아 있기를 원하므로, 말하리라. 어깨가 빠지고 눈이 불구인 
남편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라도, 승리의 아침이 되면 초라한 침대 위에 누운 궤양 
환자는 단지 어제의 남편이 아니라 충만된 기쁨의 상징이 된다.
  사물들의 매듭, 그것은 곧 승리이다. 그보다 더 열정적인 신은 어디에 있을까?
  그 때문에 내가 그대를 방문한 것이다. 그대는 나를 전혀 몰라도 관계없다. 나는 
제국의 매듭이고 그대에게 기도문을 지어주는 사람이다. 나는 삶의 동반자로서 기쁨의 
열쇠를 갖고 있다. 그대가 나를 따름으로써 고독은 종말을 고하리라.
  이제 그대는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진실도 거짓도 아닌 
음악은 그대를 불태운다. 방금 그대가 이루어졌도다. 나는 그대가 완성 속에서 
고독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만 고독과 슬픔으로 그대를 각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열성은 약탈하지 않는다. 소유나 현존을 요구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시는 논리 이전의 이유 때문에 아름답다. 시가 그대의 공간 속에 더욱 
잘 어울릴수록 감동은 그대 앞에 다가서리라. 
  [  60. 고독의 기도

    * 고독으로 당신을 부릅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독이 저를 괴롭힙니다. 이 외로운 방 안에서 저는 
군중 속에 있을 때보다 더 고립된 자신을 발견합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의 어떤 여인은 방안에 홀로 있을지라도 기쁨에 충만되어 
있더이다. 귀머거리에 소경인 그녀는, 누군가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의 
미소를 짓습니다.
  주님, 저 또한 그녀처럼 무엇을 보거나 들으려 애쓰지는 않습니다. 나의 처소에 
은총을 베푸소서.
  대상들은 사람들이 사는 집이 보이면, 설령 내일 세상에 종말이 온다 해도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누구도 그 순간의 환희를 빼앗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사랑 
속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그러한 집이 가까이 있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한 남자가 여왕을 보고 나서 첫눈에 반했습니다. 여왕의 미모는 물론 그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 순간 변모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여와의 병사로서 몸을 바칩니다. 저도 이 남자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무엇을 약속하여 주실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 고독이란 정신이 온전치 못한 가운데 야기되는 미묘한 현상입니다. 정신의 
조국은 하나이며, 조국은 곧 사물을 의미합니다. 성전이 돌에게 어떤 의미가 될 
때, 돌도 성전의 의미가 됩니다. 성전은 사람들의 공간을 위해서만 날개를 폅니다. 
제가 이러한 진실을 배우고 실천하게 하여 주십시오.
  제 고독의 해법은 오직 이 소망뿐입니다. 
  [  61. 제국의 희망

  저속한 행위들은 저속한 영혼을 불러일으킨다.
  고상한 행위들은 고상한 영혼을 불러일으킨다.
  저속한 행위들은 저속한 동기에서 비롯된다.
  고상한 행위들은 고상한 동기에서 비롯된다.
  내가 배반하려면 적들로 하여금 배반하게 할 것이다.
  내가 건축하려면 석공들로 하여금 돌을 깎게 할 것이다.
  내가 평화를 바란다면 겁쟁이들에게 조약의 서명을 맞길 것이다.
  내가 죽음을 원한다면 가련한 영혼들로 하여금 선전 포고를 하도록 할 것이다.

  명백하게 다양한 경향 속에서 어느 하나가 우세하다면, 그 방향에서 가장 크게 
소리친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겁쟁이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웅적인 사람들에게 항복을 선택하게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어떤 행위가 어떤 관점에서는 모욕적이고 단순한 것이 하나도 없을 지라도, 
필요하다면 가장 덜 까다로운 인간을 내세우는 편이 낫다. 나는 콧구멍이 예민한 
사람을 쓰지는 않는다. 넝마주이 같은 사람들 말이다.
  나의 적이 정복자라면, 그와의 협상을 통하여 내가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나는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적의 벗들을 선택하리라. 그러나 한쪽을 존중하고, 내가 
자진하여 그에게 굴복한다고 비난하지는 말라. 그대가 나의 넝마주이들에게 
항의한다면, 그들은 고약한 냄새를 본래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응답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또, 나의 망나니는 피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에 죄수들의 목을 자른다고 
대답하리라.
  그러므로 그대가 그들의 행동거지에 따라 나를 판단하지는 말라. 내가 넝마주이를 
용인하고 망나니에게 어떠한 일을 맡기는 이유는, 쓰레기에 대한 혐오감과 사형수의 
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대가 그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뭇 인간들의 언론에 귀를 막아라. 내가 
제국의 평원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선택할 경우, 영웅적인 군인들을 앞세운다면 
그들은 군인의 명에와 승리의 영광에 대해서만 노래하게 된다. 제국의 평온을 
위해 목숨 바친다고 여길 군인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포화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것보다 죽음의 잠이 
문제가 된다. 약탈로부터 평원에 있는 무엇을 구하기 위해. 그리하여 적들과의 
전쟁을 중단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들에 대한 증오심이 덜한 사람들에게 문서의 
조인을 맡길 것이다. 그들은 이조인서의 구절구절에 대한 정당성과 의미에 대하여 
변론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의 정당성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거부하도록 한다면 그 행동의 모든 책임은 거부한 자의 몫이며, 
내가 누군가에게 수락하라고 한다면 그 행동의 책임 역시 수락한 당사자의 몫이 된다.
  제국은 입씨름으로 오르내리지 않는다. 그만큼 제국은 강력한 무게와 힘을 내포하고 
있다.
  이 밤, 나는 왕국의 꼭대기에서 저 어두운 대지를 바라보고 잇다. 불행하거나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자신감에 차 있거나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
  제국은 언어가 없는 거인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서로가 다르게 제국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이 거인을 외침을 가진 살아있는 제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렇다. 아름다운 송가는 보잘것없는 송가들로부터 파생된다. 아무도 송가를 
연습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안에서 아름다운 송가가 태어날 것인가?
  사람들은 아직도 서로가 모순되는 언어를 갖고 있다. 제국을 말하기 위한 
완전한 언어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다만 귀를 기울여라.
  모두가 옳다. 다만 상대편이 옳다는 것을 이해할 만큼 저들은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지 못한 것뿐이다. 저들이 만일 서로 욕하고 싸우며 서로 죽이기 시작한다면 모두 
이룰 수 없는 언어에 대한 욕망 탓이다. 그러다가도 저들이 서로 더듬거리며 대화를 
나눈다면 나는 용서를 해주리라. 
    [  62. 영예

  어떤 사람이 내게 묻기를,
  "어찌하여 이 국민들은 노예 상태를 용인하고 끝까지 투쟁을 하지 않습니까?"
  고귀한 사랑에 의한 희생은, 비천하고 저속한 절망에 의한 자살과는 구별된다. 
고귀한 희생을 위해서는 우선 영지와 공동체, 또는 하나의 신이 필요하다. 신은 그대의 
뜻을 받아들이고 신의 뜻을 준다.
  몇몇의 사람들은 다수를 위하여 죽음을 택한다. 설령, 그 죽음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가치 없는 개죽음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제국은 그로 인하여 더욱 
굳건해지고, 더욱 밝은 눈과 폭넓은 정신을 갖게 된다.
  영예란 자살이 아니라 거룩한 희생의 광채로부터 나온다. 
    [  63. 삶

  "제가 시를 썼습니다. 이제 그 시를 다듬으려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노여운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너는 퇴고가 끝난 다음에야 시를 완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퇴고하는 
행위를 빼면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돌조각을 다듬고 쪼으는 일을 
제외하면 조각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
  너는 진흙을 반죽해 보았느냐? 주무르고 또 주물러야만 하나의 형상이 
만들어진다.
  나는 도시를 건설할 때 모래를 우선 섬세하게 고른다. 그런 다음에야 도시를 
지어나간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일만이 신에 좀더 가까이 가는 방법이다. 
    [  64. 신중함

  그대는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만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그대의 
의미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아리를 남기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 
하나의 함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들과의 어떤 연결 고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춤이나 음악은 시간 속에서 뛰논다. 그 흐름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대는 음악 속에서 스스로에게 어떤 감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나에게 자신을 내보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끼리는 하나의 약속이 
필요하니까. 그대의 얼굴에 눈과 코와 귀와 입이 없다면, 어떻게 서로의 휘고 패이고 
볼록하고 오목한 부분들을 느낄 수 있겠느냐? 무엇으로 그대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메시지를 감지하겠는가? 눈에 띄는 이러한 형상들로 인하여 나는 하나의 얼굴을 
기억하게 된다.
  그대의 얼굴은 단순히 그대의 형체나 표본으로서만 이해되며, 그대에 대한 
이식의 도구로써 내게 파악될 것이다.
  기실 나는 그대에게서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 그대는 생기 발랄하고 재치 
있으며, 역설적인 인간일 수도 있으나, 시장바닥의 인생임에 분명하다. 그대는 
단지 허수아비처럼 물질을 경멸하고 본질을 주장하며, 어떤 야망이 섞인 메시지를 
내게 던지기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대는 창조의 목적을 오판한 것이다.

  신중함이란 그대가 나에게 보이고자 원하는 것을 고집하지 않는 데 있다. 나는 
예민한 눈을 가지고 있기에 그대가 내 코를 없애려 한다는 사실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어떤 물건을 남몰래 컴컴한 방 안에 들여놓는다고 해서, 누가 그대더러 
신중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  65. 신기루에서

  나는 사막의 신기루에서 그대의 눈을 열어주고 싶다. 나무와 초원과 가축떼들의 
자유 속에서, 커다란 공간의 고독한 흥분 속에서, 겉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열정 속에서, 
나는 그대가 나무처럼 곧게 하늘로 치솟으리라는 것을 믿는 까닭이다.
  애당초 곧게 뻗어오르는 나무들은 자유롭지 못하였다. 자유를 누리는 나무들은 삶을 
서두르지 않았으므로, 빈둥거리면서 비틀리고, 처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로운 
나태를 즐기던 나무들은, 적들의 모진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따분하게 태양을 좇던 
나무들은 어느덧 생명에 대한 위기 의식으로 하늘로 곧장 수직 상승한다.

  그대는 자유나 흥분, 사랑조차 찾아내지 못하리라.
  그대가 사막에 들어가 그곳에다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거기에 남아 있고자 한다면, 
그대의 열정은 사막을 옥토로 만들 수 있다. 그대는 이르는 곳마다 수로를 건설하고 
예비해 놓았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 더욱 의미있는 승리를 위해 그대의 
사막을 가치 있는 것으로 창조해야 한다.
  모래 속에서 번쩍이는 대상들의 백골이 그대의 영광을 증명해줄 것이다. 백골들이 
누워 있는 사막은 그대로 인하여 태양 아래 풍요한 자신을 과시하게 된다. 그대는 
사막의 예식에서 춤추며 정복해야 할 적이 있으므로 찬연히 존재할 것이다.

  그대는 길을 떠난다. 한 우물에서 다른 우물로 기어오르며 물이 축복하는 나라를 
향하여, 나는 그대에게 강인한 근육과 위대한 영혼을 불어넣어 주겠다. 그대가 다다를 
사막마다 적들로 들끓게 하리라. 때문에 그대는 심신의 정력을 다해야 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더욱 풍요롭게 변모할 것이다. 적들은 그대가 개척한 우물을 장악하려 
하고, 그대는 그들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 이제 온 신경을 기울여 적들의 동태를 
파악해야 하리라. 이 사막에서는 어떤 종족들이 잔인하고 덜 잔인한가, 무장의 정도는 
어떠한가, 등등
  사막은 모든 점에서 불변인 듯 하다. 허나, 행군을 하며 바라보는 풍경은 그렇지도 
않다. 무한한 공간이 누르스름하고 단조로우나, 그대 심신을 위로하는 계곡과 푸른 산, 
맑은 물을 담은 호수와 초원들이 있는 평화스런 고장들이 그 사막 때문에 눈에 뜨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 정경에 이끌려 각자 다양한 걸음걸이와 색채를 띠게 된다. 이 
사람은 사형수의 걸음이며, 저 사람은 해방자의 걸음이고, 놀라움의 걸음, 안도의 
걸음 등등. 여기서는 누군가를 추격하는 듯하고 저기서는 그대가 사랑하는 여인의 
방 안에서처럼 주의 깊고 신중하게 움직인다.
  여행 도중에 큰 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 있어 그러한 인간들의 
삶이 다양하고 필수적이라는 사실과, 거기서 창조될 숨의 질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안정되기 때문이다.

  이기적이며 자존심이 강하고 침울한 그대를 선택하여, 이 오물이 넘쳐 흐르는 
오아시스에서 저 사막으로 보낸다. 그대는 단 한 번의 사막 횡단으로 인하여, 
씨앗이 깍지 밖으로 튀어나오듯이, 그대 안에 숨어있던 한 남자가 드러나 
잠들었던 지성과 감성을 깨어나게 할 것이다.
  강자의 삶, 너는 탈바꿈한다. 튼튼한 골격과 강인한 몸매로 무장되어 내게 
돌아오리라. 사막은 그대를 작렬하는 태양으로 달구며, 선인장처럼 무럭무럭 자라게 
한다.
  그대는 해내고야 말 것이다. 그대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돌아올 때, 그대를 
꿈꾸던 여인들조차 놀라 몸을 기댈 것이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에 싸여 있을까?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에 다다르는 것이라고, 행복은 욕망의 
충족이라고 믿는 저 사람들. 실로 아리송한 부류가 아닌가?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자기 내면의 밀도와, 발걸음의 무게와, 우물의 베품과, 
기어 올라가야 할 산비탈의 준엄함이 있어야 한다.
  저 사람, 손목의 힘이 빠지고 무릎에는 피를 흘리면서도 뾰족한 바위산 꼭대기에 
오르는 기쁨, 어느 휴일, 부드러운 언덕의 풀밭에 누워 연인과 즐기는 어느 병사의 
보잘것 없는 기쁨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겠는가? 
    [  66. 여왕과 병사

  그대가 늙음과 죽음의 길을 인도하는 세월에 대하여 표현하고 싶다면, '10월의 
태양'이라고 말하라. 그리하여 11월이나 12월의 태양이 뜨면 어떤 인생의 신호가 
깜박인다고 생각하라.
  낱말이 문장 속에서 머리를 쳐들거든 그 머리를 후려치라. 그대의 문장은 포획을 
위한 함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함정에 빠지고 싶지 않다.
  그대는 읽는 대상에 대해 오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대가 우울하다고 말하면 
나는 우울해 진다. 내가 '파도 속의 분노'라고 말하면 그대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일 
것이고, '죽음을 위협받는 병사'라고 말하면 그대는 나의 병사들을 걱정하게 된다. 
버릇 때문이다. 그 작용은 표면적이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그대가 가는 곳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달빛'을 말한다고 해서 달빛 속에 있는 그대를 지적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그것이 태양이거나 집이거나 간에, 그대는 언제나 그대이다. 그리고 나는 
달빛을 선택했을 뿐이다. 나 자신에게 이해시킬 하나의 낱말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의 행동은 애초에는 단순한 나무였는데 차츰 다양화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씨앗이란 축소된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시간의 카펫 위에서 나뭇가지와 
뿌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인간도 이와 같다.
  내가 거기서 어떤 말을 덧붙인다면, 한 구절로 표현할 수 있는 간단한 무엇을 
첨가한다면, 나의 힘은 곧 다양해진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본질부터 변화시키려 
하고, 달빛 아래서 집안에서 또는 사랑에 관해서도 그의 행동을 변화시키려 한다.
  내가 '여왕의 병사'라고 말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물론 군대의 힘이 아니라 
사랑이다. 중요한 점은 그 사랑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그 무엇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다는 점이다. 이 사랑은 품위를 심어주고 유지시켜 준다.
  이 병사는 여왕을 위해 자신을 존중한다. 마음 안에 여왕의 사랑을 담고 그는 
으쓱한 기분으로 마을로 돌아온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왕에 대해서 물으면, 그는 
곧 여왕에 대한 수줍음으로 얼굴이 빨개져 버린다.
  그러다가 전쟁에 동원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여왕의 적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몸을 떤다. 결코 자신의 왕을 존경하는 병사의 감정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전쟁의 결과로 인해 그는 곧 마음을 바꾸어 다시 
사랑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명백한 것은 눈에 비치는 영상은 언제나 일부이고, 그대는 깜박이는 연약한 
램프 불빛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하나의 씨앗이다. 씨앗은 
인간을 옥토 위해서 자라게 하며, 무수한 부하들을 만들어 낸다.
  그대가 어느 인간들 틈에 여왕의 병사를 옮겨 놓을 수 있다면, 거기에서 그대의 
문명이 싹튼다. 그리하여 여왕을 잊게 된다. 
    [  67. 문장

  나의 문장은 하나의 행위이다. 그대가 나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어떤 이론을 
앞세우진 말라. 나는 거기에 대항하는 최신의 이론을 찾아낼 것이다.
  그대는 버림받은 여자가 소송을 걸어 바람난 남편을 되찾았다고 해서, 그의 
사랑까지 되찾은 경우를 보았느냐? 사랑이 떠난 다음에는 구슬픈 노래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
  그 곡조로 누군가의 마음을 일깨울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이미 화가 난 상태로 
결별을 꿈꾸었으리라.
  여기에서 창조적인 재능이 개입된다. 인간에게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누구에게 바다를 보여줌으로써 배를 만들도록 하는 이치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재능의 여러 갈래를 발휘하게 된다.
  사랑이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태어난다. 그 틈에 고통이나 비난을 섞지 말라. 
그는 곧 싫증을 느끼고 돌아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대로 처신하진 
말라. 사랑이 사랑으로써 남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나는 도시의 산꼭대기를 오르내리면서 사람들을 관찰하였다.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샘에 가서 이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아오렴.'이라고 하든지, 
어떤 군인이 부하병사에게 '네 보초 근무는 자정부터야.'라고 하는 언어의 신비.
  나는 수송이나 건축, 간호와 도시의 상공업을 돌아보면서, 누구보다도 대담하고 
창의력이 풍부한 곤충, 개미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
  인간의 관찰, 개미의 규칙, 나의 여행자는 명확해 보이는 개미의 습성만큼도 언어와 
습관 따위를 긴밀하게 연결시켜내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들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나는 한 예언자의 선동에 평화로운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 진흙탕과도 같은 싸움의 
도가니 속에 빠져드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였다. 그들은 개미와 같은 행동 양식을 
멸시하면서도 그보다 못한 죽음의 향연 속에 뛰어들고 있다.

  언어 속에는 마술이 있다. 변화하는 사람들은 집이나 일터에서 풍습에서 말을 
나누며, 그 낱말 조립의 마술 탓에 죽음에 유혹되기도 한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사람들의 말에서 조심스레 그 목적을 탐색한다.
  언어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을 중시하는 부류는 시인들로서, 
'공격하라. 불타버린 향수 내음을 맡고자 하는 사람들이여, 나를 따르라.' 따위의 
선동적인 언변으로 지도자가 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변을 섣불리 흉내낸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선행을 권장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  68.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을 무슨 필수품처럼 인간에게 분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르베르의 난민들에게 위대한 영웅인 나의 아버지조차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친 사막의 혹심한 헐벗음 속에 살면서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잠시라도 고독과 허무와 헐벗음으로부터 행복이 나온다고 착각하진 말라. 
그들은 필수품의 질과 인간의 행복을 구분할 줄 알았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행복하리라 생각하는 오아시스의 주둔병보다는, 사막과 수도원의 
희생 속에 행복한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음식의 질이 행복의 질과 반대가 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겠다. 단지 부유한 
사람들은 행복에 대하여 잘못 규정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본시 기쁨이나 행복은 제국의 영지에서 파생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이란 
자신들의 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더욱 더 헛된 부만 
추구하게 된다. 사막이나 수도원의 사람들은 가진 것이 별로 없으나 기쁨의 원천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열정의 샘물과 절망의 폐수를 결코 혼동하지 않는다.
  여기에도 적은 존재한다. 그대에게 죽음과 성장의 조력자인 적, 그리하여 그대가 
진정한 생을 찾고 오아시스에서 자신의 열정을 살릴 줄 안다면 거기에서 태어날 
인간은 보다 위대해지리라. 그는 여러 개의 현을 가진 악기처럼 풍성한 음량을 펴게 
될 것이다.
  내 아버지의 궁전은 나무 천 음료수 음식 등의 품격을 고상하게 하고, 발걸음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갖게 한다. 그러나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이다가도, 어떤 
사람들에게 나누었을 때만 빛을 발하는 새로운 금박들도 분명히 있다. 
  [  69. 예언자와의 대화(2)

  언제나 성스러운 분노로 가득차 있는 예언자가 또 다시 나를 찾아 왔다. 그는 
부자들에 대한 징벌을 간청하기 위하여 말을 꺼냈다.
  "그들은 마땅히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대꾸했다.
  ""물론이지요. 그들에게는 생활 필수품으로 세금을 물릴 작정입니다. 그네들에게는 
재산이 조금 축날 정도겠지요. 부유하게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도록 말입니다. 
부자에게 재산이 없다면 그네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리니까요."
  예언자는 의혹에 가득 찬 눈초리로 나를 재촉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고행을 명령하십시오. 그들은 가난을 겪어야만 합니다."
  "당연합니다. 단식을 좀 하도록 한다면, 그들은 가난의 기쁨을 느끼게 되겠지요. 또 
강제로 굶는 이들과는 연대 의식을 갖게 되거나, 결국 자신들의 의지를 시험하면서 
신과 결합할 것입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살은 좀 빠지겠지요."
  그러자 그는 흥분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그들은 좀더 강력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이 예언자가 감옥에 갇혀 빵과 햇빛을 차단당함으로써, 초라하고 나약한 
꼴로 생명을 애걸하는 사람에게만 너그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악은 
뿌리뽑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을 갖고 있소. 자칫하면 모든 것을 멸망 속으로 
이끌 그런 생각 말입니다. 왜 악을 근절시키는 것 보다 선을 권장하고 확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인간을 덜 너절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옷을 입히는 편이 낫지 않겠소? 또 그들의 자식이 굶지 않고, 기도의 큰 
가르침으로 잘 키우는 편이 제국을 위해서 이롭지 않는가 말입니다. 결국 문제는 
인간의 선에 가해지는 한계보다는 그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품격이 문제일 것이오.
  나는 나에게 작은 배를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 배를 만들어 타고 
고기를 잡게 하고, 좀더 커다란 배를 건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배를 
이용하여 세계를 정복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부를 가지고 저를 부패시킬 작정이십니까?"
  "왜 내 말을 바르게 알아듣지 못하는 거요? 나는 눈에 보이는 껍데기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오."
  결국 예언자는 자신의 흥분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되돌아갔다. 
    [  70. 헌병(1)

  내가 헌병들에게 하나의 세계를 건설할 것을 명한다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아니다. 
그 세계는 결코 태어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들에게 합당한 임무와 자격이 있는 
까닭이다.
  헌병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명령을 집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금을 
지불토록 하는 것, 어떠한 규칙에 복종케 하는 것, 이웃의 물건을 훔치지 않도록 하는 
것 따위로써, 어디까지나 명확한 법규에 의한 행동이다.
  헌병은 결코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벽의 창틀과 건물의 뼈대처럼 그냥 있는 
존재이다. 그들이 아무리 무자비하게 행동할지라도 그대가 그들을 만날 필요는 없다. 
밤에 햇빛을 쬘 수 없거나, 바다를 건너기 위해 여객선을 기다리거나, 왼쪽에 문이 
없을 때 오른쪽으로 나가라는 강요를 받는 일 등은 똑같이 무자비한 경우이다.
  그대가 헌병의 임무를 강화하고 이 세상에서는 누구도 하지 못할 인간 평가의 
책임을 떠맡긴다면, 자기 관할에 속하는 임무 외에 자의 적으로 악을 추적할 
권한을 준다면 그는 당혹해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일부의 사람들만이 자유롭게 존속하는 세상이 될 것이며, 그대는 
권력의 본질에 더 가까이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질서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것은 도시의 힘의 기원이 아니라 강력한 도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열정과 지향은 질서를 창조하지만, 질서는 생명과 열정과 지향을 창조하지 않는다.
  헌병의 말투에서 나오는 잡다한 상념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인간에 
대한 그대의 영상이 높고 거창하다거나 고상한 무엇이라 할지라도, 헌병이 그대처럼 
그것을 표현하게 되면 저속하고 바보스럽게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라. 하나의 문명을 
지고 가는 것은 헌병이 아니다. 헌병의 의무는 명령에 따른 행위의 구속뿐이다.
  사람은 절대적인 힘의 영역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우며, 보이지 않는 헌병들인 
절대적인 구속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다. 이것이 제국의 정의이다.

  나는 헌병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행위만을 판단하시오. 그 행위들은 법규에 잘 나와 있소. 나는 
여러분들의 불의를 받아들이겠소. 왜냐하면 도구가 없이는 하나의 벽을 제거할 수 
없다는 슬픔 때문이오.
  과거에는 공격받은 여인이 건너편에서 소리치면, 이 벽은 도둑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주었소. 그런데 이제는 그 벽은 벽일 뿐이고, 법률은 법률이 되었소.
  여러분들은 그러나 인간을 심판하지는 마시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말에 
귀기울여서는 안된다는 말이오.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악을 근절하다 보면 진짜 선까지 용광로의 불길 속에서 타버릴 수도 있는 까닭이오. 
또한, 여러분들에게 벽과 같은 장님이 되라고 요구하는 내가 어떻게 악을 
근절시킨다고 할 수 있겠소?" 
    [  71. 헌병(2)

  감옥을 순시하는 도중, 나는 헌병들의 확고 부동한 믿음으로 자신들의 진실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지하 감옥 속에 던져버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곳에서 육신이 자유로운 사람들은 거짓 증언을 했다거나 속임수를 쓴 
부류들이었다.
  내 말을 기억하라. 헌병의 교양이나 너의 교양이 어떻든간에, 심판 할 권한을 쥐고 
있는 천박한 사람들만이 헌병 앞에서 굽히지 않을 따름이다.
  헌병에게 있어서 모든 진실은 논리학자의 범주에 속해 있다. 그 외의 인간 나름의 
진실은 위법이요, 오류가 된다. 어리석은 논리학자는 단 한 권의 책, 단 하나의 말투를 
지향하는 까닭이다. 그는 또, 바다를 없애려고 노력하면서 선박을 건조하는 헌병이기 
때문이다. 
    [  72. 공동체

  나는 서로 상반되는 사람들의 언사들로 인하여 지쳐버렸다. 이 공동체 안에서, 
이 속박의 틈바구니에서 한 자유의 특질을 찾는다는 것이 왜 부조리하단 말인가?
  전장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용기 가운데 사랑을 찾는 것처럼.
  결핍의 와중에서 사치를 찾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긍정적 해석 이후에 쾌락을 찾는 것처럼.
  계급 제도의 와중에서 결연과 같은 평등을 찾는 것처럼.
  재산에 대한 거부 속에서 그 재산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는 것처럼.
  제국에 대한 전적인 순종 아래 인간 각자의 품위를 찾는 것처럼.
  그대가 그를 도와주겠다고 주장할 경우, 인간이 혼자일 때는 어떠한 모습인가를 
말해 달라. 나는 문둥병자에게서 그것을 잘 보았다.
  그리하여 그대가 풍요롭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도와주겠다고 간청할 경우, 하나의 
풍요롭고 자유로운 공동체란 무엇인지 나에게 말해 보라.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나의 종족인 베르베르의 사람들에게서 잘 보았다. 
    [  73. 속박

  사람들은 세상을 어떤 항아리의 형태로밖에 보지 못하므로, 그런 것만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형태의 모습을 발견할 경우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 어린애와도 같다.
  이웃 제국에서 그대를 닮지 않은 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그대는 
자신과 그가 다르기 때문에 사랑하고 불평하고 또한 증오하면서, 왜 저들은 나와 
같은 완전한 인간의 전형을 변형시켰는가 자문하게 된다.
  그대의 무력함은 거기에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무엇을 만든다는 것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라는 점을 그대가 깨닫지 못한다면, 그대는 나의 성전을 결코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에는 소중한 심장과 기둥들, 궁륭과 그것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대를 억누르는 위협에 대해서 그대는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타인의 작품 속에서 일시적인 방랑의 결과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제 한 인간을 
삼켜버리려 하는 영원한 위협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대는 내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속박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면 분개하곤 한다. 사실 나의 속박은 
헌병의 속박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벽 너머의 문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절박하다는 사실을 그대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그 문이 얼마만큼의 모욕인지조차 그대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결국 
그대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실재하는 현상으로만 살아가려 한다면, 
그대를 움직이고 일깨워주는 힘은 내가 줄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움직이는 원천이다. 그러나 그 인식은 그대가 저항할 
때뿐이다. 그래서 바람에 몸을 맡긴 나뭇잎에게는 바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방된 돌에게도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속박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한 
구속은 그대가 한 도시를 불사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단순한 그대의 언어로써의 속박은 결코 그대에게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법전의 본질은 속박이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74. 그리고 우둔한 시대가 왔다.

  정신적인 차원의 인간들을 지배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이미 공포된 법률과의 
공통분모를 연결지을 수는 없는가?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역대 군주들의 책과 제국 내에 공포된 각종 법령들, 각종 종교적 전례 장례 
결혼 출생에 관한 의식, 과거의 의식까지도, 결과는 실패였다.
  그러나 제사의 의식을 중요시하는 이웃 제국에서 온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면, 그들 
나름의 방식과 더불어 사랑하고 증오하는 모습들과 우리 제국의 유사성을 발견하곤 
하였다.
  사랑과 증오는 별개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적극적으로 그 상관 관계를 그들에게 
물었다.
  "사랑과 전혀 관계없는 어떤 의식이 어떻게 사랑을 확립시켜 주는가? 누군가의 
특유한 미소가 그의 품위를 자아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인간이 서로 분명히 다르다는 것과, 인간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통역관 노릇을 
부여받고 있다는 점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통역의 임무란 다른 사람의 말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다. 즉 다른 언어로 표현된 것을, 그대의 언어와 가장 유사한 언어 속에 
찾아내는 것이다.
  사랑이나 정의, 질투가 어떤 경우엔 너를 위해서는 질투와 사랑, 정의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 내용은 전혀 다른 데도 불구하고 그대는 그 유사함에 빠져 황홀지경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대가 번역에 번역을 더하여 계속적으로 언어를 분석해간다면, 
유사점만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포착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막상 분석에서는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대가 인간들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인간들간의 상이성은 절대적인 것이다. 사랑도, 정의도, 질투도, 죽음도, 성가도, 
어린아이들과의 나눔도, 왕자와의 교제도, 창조 안에서의 고통도, 행복한 모습도, 
이해관계의 형태도 비슷한 것은 하나도 없다.
  자기의 손톱이 길게 자라면 만족해하며 입술을 다물거나 눈을 찡긋하면서 겸손을 
떠는 사람들, 자기 손바닥에 박힌 못을 바라보면서 상대편에게도 똑같은 유희를 
요구하거나, 지하실에 숨겨둔 금괴의 양에 따라 서로를 평가하는 사람들 등등, 그들이 
산 위에 있는 쓸모없는 돌멩이들을 굴리면서 똑같은 자만심을 느끼고, 자신을 
비관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그들은 그대에게 비열한 탐욕주의자들로 비칠 
것이다.
  나의 시도에 있어서도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 나의 행동 양식이 한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 가기 위한 추론은 전혀 없고, 그대와 함께 하나의 조각품을 감상하면서, 
축제날의 기분을 그대의 코나 귀의 크기로 설명하겠다고 말할 만큼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나무를 광물질의 정수로, 침묵을 돌로, 우울증을 선으로, 영혼의 품격을 
의식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
  광물의 상승을 나무의 발생으로, 돌들의 배열을 침묵에 대한 취향으로, 선들의 
구조를 선들에 대한 우울증의 지배로, 의식을 영혼의 품격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영혼의 품격은 단일성인데, 그대는 나에게 그것을 포착하고 영속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계교, 특정한 의식을 제공하였다. 영혼의 품격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대는 창조적이고 자연적인 질서를 흔들어 놓았다.

  내가 젊었을 때 표범 사냥에 나간 적이 있었다. 어린 양을 미끼로 삼아 말뚝을 
많이 박고 풀로 덮인 함정을 이용하였다. 새벽녘에 함정에 나가보면, 거기에서 
죽은 한 마리의 표범을 발견하게 된다.
  그대가 표범의 습관을 잘 알고 있다면, 그대는 어린 양들과 풀을 가지고 표범을 
포획할 함정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내게 표범잡이 함정을 
연구해달라고 청한다 해도, 내가 표범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면 헛일이 된다.
  나는 유일한 친구였던 진실한 기하학자에 대해서 말하겠다.
  그는 단지 표범 냄새만 맡고도 함정을 만들어냈던 사람이다. 그는 함정을 한 
번도 못 보았는데도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에 대해서 의심을 가졌으나, 곧 
알게 되었다. 번번이 표범은 기하학자에게 사로잡혔던 것이다.
  사람들은 말뚝들, 어린 양, 풀, 그리고 함정을 만드는 여러 가지 요소들과 더불어 이 
세상을 관찰하게 되었고, 그들의 논리에 따라서 어떤 진리를 끌어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진리란 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기하학자는 그대를 
자신에게로 인도하기 위하여, 귀로와 흡사한 길을 신비스럽게도 이용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인간을 사로잡기 위해 자기의 의식을 만들어낸 또다른 
기하학자였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옛날처럼 다른 고장에서 다른 의식을 
확립하고서 자신들과 다른 인간들은 모두 체포하였다.

  그러다가 논리학자들, 역사학자들, 비평가들이 지배하는 우둔한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들은 그대의 의식을 똑바로 쳐다보고도 거기에서 인간의 영상은 조금도 끌어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 그들은 '이성'이라고 부르는 떠도는 
이름으로, 제멋대로 그대에게 함정의 미끼를 던져주고는 그대의 의식을 파괴하며, 
포로들을 방면한다. 
  [  75. 무엇이 세상을 이끄는가?

  대장장이와 목수들은 배라는 것이 못과 판자로 만들어진 것을 기화로 바다 
위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들의 왜 착각하는가?
  철공소와 목공소에서 배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다를 향한 인간의 욕망과 
배 만드는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철공소에서 만든 못과 목공소에서 켠 판자의 
수요가 증대되었을 뿐이다. 즉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 적용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대장장이와 목수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못과 판자에 대해서만 언급할 수 있다. 
누가 그들에게 배 전체에 관해서 물어보기나 하겠는가?
  제국의 세무서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인류의 문명 발달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다만 슬기롭고 국고를 살찌우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제정에 관하 법규와 세금 징수에 관한 조항을 어쩌다 변경하려 하면, 
그들은 투덜거리면서 저항하려 한다. 그들은 어떤 관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배는 나의 욕망에 근거한다. 나는 대장장이나 목수를 격려할 뿐, 그들이 하는 
일에는 참견하지 않는다. 규율과 관계없이 규율을 따르게 하는 것, 때가 되면 못과 
판자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것들은 인생의 현실과 맞서 마멸에서 벗어난 
자신들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항상 그대에게 말해 왔다. 미래를 세운다는 것은 우선 현재를 깨우치는 
일이라고, 배를 만드는 것도 이와 같다. 그것은 우선 바다를 향한 욕망을 바로 
불사르는 데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주목해주기 바란다.
  재료를 지배하는 크고 논리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제국을 나무, 
강 도시, 산 그리고 사람들로 각각 쪼개서 설명하려느냐? 또, 대리석상에 비친 
그대의 우수를 선과, 코, 턱, 귀 등의 개념만으로 설명하려느냐? 그대는 신전의 
명상을, 그것을 구성하는 돌멩이를 내세워 설명할 수 있느냐?
  '강압은 불가능을 실현시키려다가 그 실패에 대한 비난과 흥분으로 난폭하게 
변하는 데서 출발한다.'
  논리적인 언어란 없는 것이다. 나무는 광물질의 수액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씨앗에서 자란다. 다만 나무는 그 수액을 흡수하여 빛 속에 
자신을 일으키고자 한다.
  이처럼 새로 일으킬 나의 제국에 대하여 몰두하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그 중 한 부류는, 지성으로써 유토피아를 구축하고자 하는 논리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는 자칫하면 속빈 강정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창조란 
창조자가 아무리 지성적이라 해도 지성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십중팔구 이 논리학자는 폭군이 된다.
  또 한 부류는 무지한 족속들이다. 그들은 목동이거나 혹은 목수일 수도 있다. 
본래 창조란 지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그대로 하여금 
결과를 알 수 없는 점토를 반죽하게 한다. 그러고는 불만족스런 표정으로 
이리저리 쿡쿡 찔러보다가는, 자기가 만족을 느끼고서야 비로소 그 동작을 멈추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교감이 이루어진 그 형상은 곧 조각가를 움직이고, 그대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이젠 그대도 그 형상에 매어 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 형상이 지성일 아니라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까닭이다. 즉, 세상을 이끄는 것은 정신이다. 
  [  76. 사랑의 조건

  노예 상태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의견이 있다. 이는 변덕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투른 까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자기 입맛에 맞는 언어를 취사 선택하게 된다.
  진실이란 어느 한켠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내면을 간단한 한 마디 
말로 모두 담아둘 수 있을까? 만일에 가능하다면 그것은 변변찮은 말이 아닐까?
  그대가 만일 제국의 가수로서 악사들의 구태 의연한 연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우선 손가락 훈련을 한 다음 악기를 들고서 가수로서의 능력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전쟁이고 속박이고 인내심이다.
  그대가 만일 촌부의 자유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근육을 단련시켜야 하고, 
시인의 자유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스스로의 두뇌를 훈련시키고 주어진 
문제들을 직접 해결해나가야 한다.
  행복으로 가려면 행복이란 집착을 버려야 한다. 행복이란 창조의 보상물이기에 
행보의 조건들은 창조를 향한 전쟁이며 속박이고, 인내심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나 자유에 관한 조건들도 이와 같다. 그것들은 그대에게서 하나의 
인간이 형성되었을 때 그 인간에 대한 보상을, 하나의 제국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대에게 있어 우애의 조건들은 그대의 평등이 아니다. 평등이란 보상이며 신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위계질서를 이루는 나무도 성전도 마찬가지다. 부분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본적이 있느냐?
  군대 없는 장군? 장군 없는 군대?
  평등이란 제국의 평등이고, 권리는 아닌 까닭이다. 우애는 계급의 보상이며, 
그대가 건축한 성전의 보답이다.
  아버지가 존경받고 맏아들이 어린 동생을 돌보는 가정에서, 그 가족들이 함께 하는 
만찬은 매우 흐뭇한 시간이다. 만약 그들이 아무렇게나 부려놓은 건축 자재들처럼, 
서로 의존하지도 않고 돕지도 않는다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대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가 어디에 있고 그대가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 
그리하여 바다물결 속에서 그대를 구원하였다면 그대의 생명에 대한 책임만큼 
사랑을 주리라.
  나는 목동이 되리라. 그대를 등불처럼 여기며 염소젖을 마시러 그대를 
찾으리라. 이렇듯 우리는 서로 대접하는 관계가 되리라.
  역정을 내면서 나와 동등해지길 원하거나 억누르려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에게 소속되고 싶지 않다. 그 자도 그대의 마음과 같으리.
  나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하여 비통에 빠진, 바로 그런 사람만을 사랑한다. 
  [  77. 다음 세대를 위하여

  시골의 외양간에는 순한 가축들이 살고 있다.
  식물에게는 언어가 없다.
  인간은 어느 정도 침묵을 깨우치게 되었으므로, 이 가축들만이 대상들 속에서 
생명을 증언해주고 있다.
  그대는 암에 걸린 사람을 보았느냐? 입술을 깨물고 겪어내는 그의 고통은 이미 
육체의 소란을 초월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신은 나무로 변하여 제국 안에 
싱싱한 가지를 뻗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는 제국의 사물이 아니라 의미된다.
  말없는 고통이 비명보다 강렬하다. 도시는 고통 속에 충만해진다. 마치 그대가 
사랑하는 여인이 입술을 깨물고 고통을 참으면, 그 아픔은 그대의 몫이 되듯이 말이다.
  나는 인생의 신음 소리를 듣고 있다. 외양간에서, 들판에서, 물가에서 영속하고 
있는 나지막한 삶의 신음 소리를.
  어린 송아지가 외양간에서 "메^36,36^" 하고 울고 있다. 늪에는 개구리들이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히이드 나무 우거진 숲에서는 수탉이 여우에게 사로잡혀 
"꺼억꺼억" 비명을 지르고, 오늘 저녁 그대의 식탁에 오를 염소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기나 한 듯이 처량맞게 울어댄다.
  야수들이 포효한다. 고통의 시큼한 내음을 따라 그의 모든 제물들이 얼어붙고, 
정오의 군중들처럼 어떤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땅과 하늘과 물가의 짐승들은 해산과 사랑, 죽음으로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다.
  '아, 거기엔 마차소리가 있다. 세대에서 세대로 삐걱거리며 굴러가는^5,5,5^.'
  순간 나는 사람들이 살면서 느껴야 하는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도 세대에서 세대로 삐걱거리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옮겨간다. 밤이든 낮이든 
도시건 시골이건 간에 몸이 세포가 찢어졌다가 다시 아물 듯이 분열은 냉혹하게 
지속된다. 새삼 느끼는 상처의 통증처럼 나는 내 마음의 변화를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사물의 의미가 함께 하고 있다. 여기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암호를 사용하듯이 아이들에게 언어를 가르친다. 그 보물 
상자의 열쇠, 그들은 마음에 쌓인 경이와 신성을 아이들에게 전수한다. 물질은 썩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마을은 빛나고 있으며 감동적이다.
  그들이 이토록 다음 세대를 예비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대는 이 도시를 야만의 
정글로 만들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 자손들이 인간의 피가 도는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잡다한 사물 속에 들어 있는 집, 영토, 제국의 참모습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나는 그대들의 자식들이 너를 닳도록 직접으로 교육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강제로 교과서 따위를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정이 없는 타인들은 그대가 
가진 내면의 지식들을 전수하려 들지 않는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도, 포착되지도 않는 
그대의 영혼을 이 따위 것으로 혼탁시켜버린다면, 다음 세대의 여린 영혼들은 텅빈 
야영지를 떠돌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승냥이와 하등 다름없게 될 것이다. 
  [  78. 제국의 공무원들

  제국의 공무원들은 낙천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낙천주의란 좋은 것이고, 완전이란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법이라고.
  물론 완전이란 사람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지만, 그것은 캄캄한 
밤바다의 북극성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별이 없다면 폭풍우 속의 항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바다 속에는 안주할 식량조차 없으므로, 그대는 그곳에서 송장과 다름없는 꼴이 
된다.
  어떠한 장소가 그대를 열광시키는 것은 그 장소가 승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새로운 승리를 갈구하는 전쟁은 다른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제 작품과 남의 작품을 비교하는 데 몰두할 것인가? 

  [  79. 엘크수르의 기적

  사막의 바람은 우리가 목표로 하는 오아시스의 풍요로움을 실어다 준다.
  야영지에는 새들이 날아와 천막마다 기어들었다. 그러나 그 새들은 먹이가 없으므로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무수히 죽어갔다. 새들은 순식간에 말라붙어 나무껍질처럼 
우지직 소리를 내면서 죽어갔다. 병사들은 새들의 사체를 바구니에 모아 바닷물에 
던져버렸다.
  뜨거운 사막의 태양.
  우리가 처음으로 갈증을 느낄 즈음, 몇몇 병사들은 신기루를 보기 시작하였다. 
고요한 물 속에 질서 정연하고 웅대한 도시가 나타났다. 한 병사가 미친 듯이 
소리지르면서 그 신기루를 향해 달려갔다. 이동해가는 오리들이 다른 오리들에게 
영향을 주듯, 그의 절규는 다른 병사들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나는 재빨리 총을 
들어 그를 쏘아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상황은 진정되었다.
  병사 하나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나는 그가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는 줄로 알았다.
  "무슨 일인가?"
  내가 다가가서 묻자 그는 발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새의 잔해를 들어 보였다. 
그는 새들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의 솜털이 사라지게 되면, 인간에 대한 신의 징벌이 가까워졌다는 
징조랍니다."

  우리는 우물 속에 들어간 사람을 꺼냈다. 그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우물 속이 
말라버린 것이었다. 우리에겐 피의 샘인 우물, 그러나 지금 우물은 우리들의 
절박한 꿈일 뿐, 모두가 절망으로 가득 찼다.
  이튿날 저녁, 우리는 다시 우물을 파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물은 나오지 않았다. 
처량하고도 화려한 별들이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이제 우리들의 양식은 별빛같이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뿐이었다.
  태양이 삼각의 포진으로 사막의 안개를 헤치면서 솟아올랐다. 마치 우리 
백성들의 심장을 궤뚫는 송곳처럼.
  직사 광선의 화살에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들은 혼잣말을 
지껄이면서 일어서고 있다.
  사막에는 더 이상 신기루도 깨끗한 지평선도 없었다. 단지 그곳은 탁탁 튀기는 
벽돌가루처럼 모래 먼지로 뒤덮이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고개를 들어 천막 받침대 틈으로 밖을 응시하였다. 멀리서 깜부기불빛 
같은 것이 반짝였다.
  "아아, 저 빛은 신이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신호인가?"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세 마리의 낙타 중, 두 마리의 배를 잘라 내장의 수액을 마신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몇 사람을 
엘크수르의 샘에 파견하였다. 몇몇 사람들은 나의 명령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웃었다.
  "만약 엘크수르에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거기를 가나 여기에 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에게 예비되어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이틀이 지났다. 남은 부하들 중 3분의 1이 죽었다.
  드디어 엘크수르에 파견했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산 채로.
  "엘크수르의 샘물은 생명의 창입니다."

  사막의 폭풍이 가라앉은 틈을 타서 우리는 생명의 샘물이 일렁이는 엘크수르에 
다다랐다.
  샘물 주위에는 빼빼 마른 막대기 위에 꽂힌 먹물빛 형상들이 가득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형상들은 어떤 분노의 음향을 지르면서 폭발하였다. 
까마귀였다.
  뼈대를 모조리 파괴하고 달아나는 살점과도 같이, 달빛 가득한 하늘을 까맣게 
덮으며 비상하는 까마귀떼. 우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들의 머리 위를 뒤덮는 신의 
선물에 감사하였다.
  우리들은 허공에서 배회하는 까마귀들을 잡아 배를 채웠다. 까마귀 고기의 향기, 
엘크수르의 샘물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적을 안겨 주었다.
  주님, 저는 오늘 당신을 보았습니다. 우리 군대의 나무껍질과도 같았던 육신이, 
이제 오렌지처럼 피와 살로 충만해졌습니다. 기운을 차린 병사들의 근육은 우리가 
원하는 성채를 향해 나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아아, 작렬하는 태양볕이 한 시간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우리는 지상에서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들의 자취는 흔적도 없이 말입니다. 저는 오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를 들으며, 나의 추억의 창고이며 아득한 존재에 대한 열쇠인 병사들을 
바라봅니다.
  모든 희망과 절망과 기쁨이 그 위에 있습니다. 그 한시간의 태양, 우리들의 
엘크수르^5,5,5^.
  저는 우리들의 목표인 오아시스를 향해 진군하려 합니다. 알지 못하는 
족속들에게 우리들의 관습을 전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미개한 그들에게 제국의 
등장은 크나큰 변화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엘크수르의 기적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배를 채울 뿐입니다. 기적의 샘물은 
시와 도시와 큰 정원을 창조해냅니다. 그것은 나의 뜻이며, 주님의 은총에 다름아닐 
것입니다.
  마른 씨앗에 물을 뿌리니 씨앗은 물 마시는 즐거움 외에는 무관심해졌습니다. 
마치 지금의 나의 병사들 같이 말입니다. 물은 도시와 성전과 성벽, 거기에 딸린 
정원들의 잊혀진 힘을 일깨워줍니다.
  나는 당신이 궁륭의 열쇠인지, 공동의 척도인지, 상호간의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보리밭과 엘크수르의 샘물과, 저의 군대에서 아무렇게나 쌓아둔 
건축 재료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별 아래 어떤 도시를 비춰주는 당신의 존재가 없다면 말입니다. 
  [  80. 신비의 오아시스, 성채

  우리는 도시를 관망할 수 있는 곳까지 전진하였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에는 굉장히 
높고 붉은 성벽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장식이나 어떤 돌출물, 총안도 없었다. 외부 
세계의 어떠한 시선도 용납하지 않는 저 성벽은 일종의 거만스런 풍채를 과시하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우뚝 솟아보이는 성벽, 마치 도시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한 
침묵뿐이었다.

  첫날은 그 둘레를 배회하며 돌파구나 어떤 약점, 아니면 최소한의 막힌 출구를 
찾아 헤맸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우리는 그들의 사정거리에 이르는 지점까지 
걸어갔다. 몇몇 병사가 불안감에 사로잡혀 위협 사격을 했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성벽 뒤에는 몽상을 벗어날 가망이 없어 보이는 딱딱한 등껍질 
속의 악어 같은 도시가 갇혀 있었다.
  멀리 솟아 있는 높은 고지에서 성벽 안을 다시 자세히 관찰하였다. 그 안에는 
물냉이처럼 빽빽한 초원들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성벽의 밖에는 메마른 모래와 
자갈, 작렬하는 태양 외에는 한 포기의 풀잎도 자라나지 않고 있었다.
  오아시스의 샘물은 오로지 그 도시만을 위해 쓰여졌던 것이다. 빼곡하게 자란 
나무와 여러 종류의 새들, 꽃들이 만개한 저 낙원의 몇 발자욱 건너 삭막한 사막 
위를 우리들은 그저 멍청하게 배회하고 있을 뿐이었다.

  성벽에서 전혀 아무런 허점을 찾아내지 못한 병사들은 조금씩 겁을 집어먹기 
시작하였다.
  이 도시는 결코 외부에 대상을 파견한 적도 없었고, 어떤 여행자의 관습을 배운 
적도 없는, 멀리서 포로로 잡은 어떤 소녀에게도 자신들의 핏줄을 남기지 않은 
신비로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점이 나의 부하들에게 다른 지상의 어떤 
민족들과는 전혀 다른, 무형의 괴물과 조우한 듯한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이 
괴물의 껍데기는 눈에 보이지만 그 이빨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이 일단 사막을 건너고 나면, 헤아릴 수 없는 
무엇들과 만나곤 한다. 반대하면서 마음의 길은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정복하거나 사랑할 수도, 그로 인해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무슨 일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내면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성벽 밑에 허연 모래 지대를 찾아냈다. 
해골들이었다.
  먼 고장에서 이 오아시스를 찾아 온 사람들의 마지막 흔적이 바로 거기 있었다. 
마치 절벽에 다다른 파도가 뿜어대는 하얀 포말과도 같이 이 도시는 우리가 
정복하고자 하는 도시라기보다는, 거꾸로 우리를 공략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했다.
  만약 이 비옥한 땅에 딱딱하고 잘 여문 씨앗을 심는다면, 그 씨앗을 둘러싸고 
포위하고 있는 것은 땅이 아니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운다는 것은 곧 땅 위에 
자신의 제국을 퍼뜨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정복자가 될 것인가, 패배자가 될 것인가? 군중들은 그대를 에워싸고 밀친다. 
만일 그대가 속빈 강정 같은 인물이라면 곧 짓밟히고 억눌릴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내부에 어떤 심오한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고, 그 바탕이 튼튼한 
사람이라면 그대는 군중들에게 어떤 깊은 이상을 심어주게 되고 이내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가 걷기 시작하면, 군중들은 너의 뒤를 힘차게 따를 것이다.
  저들의 저의도 이와 같다. 우리는 그를 빙 둘러싸면, 그는 일부러 눈을 감고, 
우리의 위험한 놀이를 감지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즉시 장군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이 오아시스의 도시를 격동시켜서 점령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소. 그들은 
우리의 해로움에 눈 뜰 것이 분명하므로 말입니다."
  장군들은 내 말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대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 내심으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라고 자조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장군들이 내게 물었다.
  "도시의 사람들이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다면 어찌할 것인가요?"
  "그대들은 사람들이 새로운 소리를 거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소?"
  "사람의 마음이 확고 부동하다면, 유혹에 둔감한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열중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누군가가 제시하는 경우, 
받아들이게 마련이오. 이 도시의 사람들이라고 예외라 생각지 않소. 그렇지 
않다면 저 굳건한 성벽은 대체 누가 세울 수 있었겠소? 만약 그대들이 메마른 
우물 주변에 성벽을 쌓고, 내가 그 외부에 호수를 만든다면 그대들의 성벽은 
저절로 무너지고 말 것이오. 물 없는 도시라는 게 우스꽝스럽지 않소?
  만약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대가 두터운 성벽을 쌓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외부에서 나의 병사들이 그보다 더한 비밀을 목이 터져라 외쳐댄다면, 그대가 
굳게 지키던 비밀의 성벽은 금세 무너져 내리지 않겠소? 또 그대들이 극에 달한 
아름다운 춤을 간직하기 위해 튼튼한 성벽을 구축하였다고 합시다. 내가 그대의 
성벽 밖에서 그것보다 화려한 공연을 펼친다면, 그대들은 나의 춤을 배우기 위해 
그 성벽을 부수고 뛰쳐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소? 만일 그 재경에서도 
이르러서도 성벽을 고수한다면 해답은 한 가지뿐이겠지요. 그대들이 완전히 
미쳐버린 것이라는^5,5,5^."
 악어 가죽도 그 악어가 죽고 나면 아무것도 보호하지 못한다. 나는 콘크리트 철근 
속에 박혀 있는 적의 도시를 바라보면서, 그 힘의 원천과 약점들을 예리하게 
주시하였다.
  "춤을 이끌어가는 것은 도시인가, 나인가? 밀밭에 독보리 씨앗을 뿌리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독보리는 밀의 존재를 지배하려 들기 때문이다. 외모나 
숫자는 문제가 아니다. 힘은 씨앗 속에 들어 있으므로, 그 수를 세기 위해서는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  81. 거인은 가고

  나는 성채에 관하여 오랫동안 명상하였다.
  참된 성벽은 그대 자신 안에 있다. 칼을 휘두르는 병사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제 그대는 무사통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자가 힘차게 발톱을 휘두르면 
커다란 황소조차도 둘로 찢어 놓는다. 마치 전신주에 아무렇게나 나붙은 벽보를 
떼어내듯이 말이다.
  물론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린 꼬마는 아무래도 어리다. 세상의 내노라 하는 영웅들도 어릴 땐 훅 하면 금방 
꺼져버릴 양초와 같이 허약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주위의 노인들과 어린이들을 바라보았다.
  "허약한 어린이? 허약하다는 말을 하려면 군대를 이끄는 장군처럼 허약하다고나 
해야 옳다."
  여왕벌 주위에 모인 벌떼, 금광에 모인 광부들, 지휘관 휘하의 병사들을 보면서, 
그들이 일심동체를 이루고 하나의 힘을 지니는 것은 씨앗이 양분을 흡수하여 나무로 
커가듯이, 탑과 성벽과 영혼이 스민 은밀한 미소가 그들을 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미소는 투쟁을 위해 지어진다. 어린아이의 살 속에는 취약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시 전체는 어린아이의 하인이 된다.
  그대는 이 거인의 외모와 주먹과 그의 외침을 믿느냐? 그대는 시간 속에 그걸 
잊는다.
  시간은 흘러흘러 뿌리를 내리고, 거인은 이미 자유를 박탈당한 존재로 남는다. 
그대가 허약하다고 믿는 그 어린이가 군대의 선봉에 서 있다.
  거인은 결코 아이를 짓밟지 못한다. 거인에게 아이는 결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 그렇지만, 분명코 말하건대 그대는 목격할 것이다. 어린아이가 거인의 머리 
위를 타고 올라 발길질로 거인의 머리를 부수어버리는 것을. 
  [  82. 성벽을 허무는 법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짓밟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 순간은 물론 허위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착각하게 된다. 시간을 잊어버린 까닭이다.
  허약한 어린이라도 거인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면, 그 거인은 아이를 짓밟아버릴 
것이다. 거인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놀이도, 의미도 아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 성년이 되면 거인을 도울 정동의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드디어 그 아이가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어, 천여 명의 병사들을 끌어모아 그 거인을 
포위한다면, 거인은 갑옷에 둘러싸인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대여, 가서 그 갑옷을 
헤치고 거인을 만져 볼 수 있는지 알아보라.
  아이는 자라나서 세상을 철로 된 갑옷처럼 정돈시킬 것이고 단 한 개의 씨앗만이 
성공한 성전들처럼, 폭군들과 병사들과 헌병들은 멸망을 맛보게 되리라.
  그 씨앗은 거목에서 나왔고, 그 거목은 잠깨어 기지개를 펴면서 그 팔의 근육을 
팽창시키며 뿌리를 뻗어내린다. 그 뿌리가 저 성벽의 벽과 기둥과 천장을 부수게 
되고^5,5,5^. 그러면 나무는 이 먼지구덩이 속의 폐허가 된 재료 위에서 군림하기 
시작한다.
  이제 나는 거목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 나무가 성전이 된 까닭이다. 나는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다니는 씨앗만을 준비하면 된다.
  시간에게 그대는 무엇을 보여주려느냐? 이 도시는 자신의 두꺼운 갑옷 속에 
갇혀 있다. 나는 안다. 자신의 저장품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메시지이다.
  나의 군대는 엘크수르 샘의 깊은 물에서 솟아나왔다. 우리는 신의 군대이다. 
누가 우리를 거역할 수 있으랴.
  이 성전을 부수기 위해서는 씨앗 속에 갇혀 있는 나무를 단 한 번만 
깨움으로써, 갑옷 속에 있는 균열을 찾아내면 그만이다. 이제 이 도시는 길든 
도시가 되기 위해 추어야 할 춤만을 알게 되리라. 그대는 이제 꿀사탕 같은 나의 
여인, 자신만을 믿는 도시에 불과하다. 
    [  83. 밤

  밤이다.
  야영하는 부대의 모닥불빛이 하나 둘 꺼져가고 있다.
  나의 군대는 전진하는 힘이다. 도시는 화약통처럼 폐쇄된 힘이다.
  나의 군대는 성벽 안에 점점 뿌리를 뻗어내리고 있는 중이다. 어둠 속에서 내가 
지배하려는 도시의 영상을 응시해본다. 시간이라는 한 척의 배처럼, 뜨거운 태양이 
지나가면 차가운 밤의 어둠이 도래하고^5,5,5^.
  꿈을 위한 기름진 밤. 밤은 낮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있다. 결과는 낮에 
이루어졌던 까닭이다. 그래서 밤에 내가 승리했을 경우, 축배는 낮으로 미루게 된다.
  어둠 속에 영근 포도송이의 수확을 기다리는 밤. 추수가 유예된 밤. 해가 
떠야만 인도받을 수 있는 포위된 적들의 밤. 노름이 끝난 밤에 노름꾼들은 잠자러 
가고, 상인들도 잠을 잔다. 그러나 그들은 파수꾼에게 명령권을 위임했다. 장군도 
잠자리에 들었다. 그도 역시 파수꾼에게 명령권을 위임했다. 선장도 잠을 잔다. 
그는 1등기관사에게 모든 명령권을 위임했다. 그리하여 1등기관사는 돛대 근처의 
오리온좌를 그의 시선이 미치는 곳까지 데려다 놓는다.
  명령이 잘 전달되는 밤. 창조가 휴식을 취하는 밤. 그러나 사람들이 속임수를 쓰는 
밤. 도둑들이 움직이는 밤. 반역자가 성채를 공격하는 밤. 울부짖음이 크게 울리는 밤. 
기적의 밤. 사잇잠을 깨는 밤. 그대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하여 그 밤을 지키는 
등불이다.
  씨앗을 받는 밤. 신이 인내하시는 밤. 
    [  84. 불의

  불의에 관하여 증오하지 말라. 불의는 변화하는 한 순간이어서, 결국 정의가 되기도 
한다. 불평등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보이거나 안 보이는 하나의 계급일 따름이다.
  인생을 경멸하거나 증오하지 말라. 만약 그대가 커다란 무엇에 복종한다면, 그대 
인생은 그 커다란 힘 안에서 안주하는 머저리가 될 뿐이다.
  증오는 영원한 독단의 사생이다. 그 독단은 인생의 의미를 파괴하고, 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  85. 죽음

  본능은 죽음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동물들도 역시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생존하고자 하는 성향은 다른 모든 성향들을 지배한다. 생명이란 신의 소중한 
산물이다. 나는 그 빛을 잘 보존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 누구나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투쟁한다. 요새를 포위하거나 공격할 
때의 용기를 유지하라. 그리고 도취하라. 그리하여, 비밀한 선물을 몰래 받으라. 침묵 
속에서 죽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  86. 문명

  부자들의 풍요를 내가 왜 묵인하는가? 바로 그들의 풍요를 이용하여 좀더 고상한 
무엇인가를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이다. 도시의 환경을 위하여 청소부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인 것이다. 나쁜 취미가 있기에 그 중에서 좋은 취미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무엇이 자유의 조건이 되는 경우, 내면의 속박을 일부 용인하기도 하고, 
부자들의 경우 다수의 정신적인 고양에 이바지하도록 하는 조건으로 묵인되는 것이다.
  부자들은 농부들에게서 곡식을 약탈하는 대가로, 이 돌대가리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시 몇 편이나, 아니면 한 번쯤이나 제대로 감상할까 궁금한 조각 
작품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헌납하게 된다.
  이 부자와 같은 우둔한 약탈자가 없었더라면, 시인이나 조각가들이 어찌 
제국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겠는가?
  문명에 있어서 그 창고 주인의 문패는 별로 문제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전달의 
수단이며, 길이며, 오직 시간의 통로일 따름이다.
  만약 그대가 곡식 창고를 시와 조각과 궁전의 창고로 개조하고, 백성들의 귀와 
눈을 속인다고 해서 나를 비난한다면, 나는 부자의 허영심이 그의 보물들을 
진열했을 뿐이 아니냐고 말하리라.
  궁전도 이와 마찬가지다. 문명은 창조한 물건의 효용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향한 열정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이다. 제국의 진열장 
속에 부자나 무용을 전시하진 않는다.
  만약 그대가 부자에게 열 번이면 아홉 번의 저질적인 취미를 보여주고, 
감상적인 시인들과 조각가들을 옹호하는 것이냐고 비난을 듣는다면 그냥 들으라!
  나무에서 꽃을 바라는 경우, 어떤 상황에서는 나무 전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쁜 조각가들 틈에서 좋은 조각가가 나오는 것이다. 저질의 창고 중에서도 분별 
있는 창고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바탕은 넓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대는 지금 나의 논리에 따라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체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없다.
  그대는 성전을 짓기 위해 돌을 다스리는 법을 내게 묻지 않았다. 성전은 
건축가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 내가 존재하고, 나의 시를 가지고, 시를 향한 비탈길을 이룬다면, 그 
길은 신의 영광을 위해 백성들의 열정과, 창고의 곡식과 부자들의 행동 양식을 
죄다 흡수한 것이다.
  창고에 주인이 있다 해서 흥미를 갖는다든지, 고약한 냄새에 매료되어 악취는 
그냥 둔다든지 하지 않는다. 나는 재료가 아닌 것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다.
  아침을 대하듯 음악을 무시하고, 증오를 대하듯 박수를 무시하며, 모든 것을 
통해 신을 섬기는 동굴 속의 멧돼지보다 더 고독한 나, 산비탈에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조약돌을 단지 한 줌의 꽃씨로 바꾸어 날려보내면서, 나무보다 더 굳게 
뿌리내린 나. 돌이킬 수 없는 유배의 몸짓으로 어느 한켠에 기울어짐이 없이 
오로지 한 그루의 나무를 위해 나는 존재한다.
  나무를 위해 나무의 요소를 옹호하는 나에게 그 누가 항거할 것인가? 
  [  87. 눈을 뜨고 사물을 다시 보라.

  나는 그대가 사물의 의미에 눈멀기를 바란다. 그러나 대개는 문간에서 내게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인생은 무의미하기만 합니다. 아내는 잠만 자고, 노새는 마구간에서 쉬고 
있으며, 밀은 밭에서 익어갑니다. 나는 어리석게도 끝없이 기다리는 신세랍니다. 
아아, 참으로 권태롭기만 합니다."
  진리의 구슬을 꿰지 못하고, 읽을 줄도 놀 줄도 모르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여,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그대는 아무 목적도 없이 유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라. 그대의 유영은 아름답다. 그것은 해안으로 밀려들어 온 
바닷물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는 도르래는 그대에게 물을 제공하며, 해안의 
검은 흙에서 자라나는 황금빛 밀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다만 도르래의 소리를 
내기 위해 줄을 당기고, 옷감의 질감을 위해 바느질을 하고, 육체의 향연만을 위해 
정욕을 불태운다면 그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 행위들은 그대에게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다. 창조가 없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대는 밀을 수확하기 위해 밭을 갈고, 축제를 위해 바느질을 한다. 다이아몬드를 
세공하기 위해 원석을 자른다. 이제는 하나의 의미를 가진 창조가 개입되었다.
  그대가 보기에 행복해보이는 사람들, 그대보다 많이 가진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신이 맺어주는 인식을 빼고 말이다.
  그대가 스스로의 방식을 찾아 변화하지 않는다면, 겨로 평화를 찾지 못하리라. 
그대가 하나의 전달 수단으로써 길과 수레를 만들지 않는다면, 제국 안에는 
단순한 피의 유전만이 이루어지리라.
  나는 그대가 존경받고 존중받는 인물이기를 바란다. 그러면 나는 세상의 
무엇이라도 억지로 탈취하여 그대에게 주고자 한다. 하지만 그대는 자신의 물건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는 인물이 아니더냐?
  막연히 어떤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 그가 홀연히 나타나 남들이 
그대에게 해주니 못하는 어떤 것을 모조리 해결해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냐?
  길 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지켜보라.
  병원으로 문병가는 사람의 걸음걸이와, 빈 집을 향해 아무런 희망없이 가는 사람의 
걸음걸이, 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딛는 즐거운 걸음걸이. 분명히 다르지 
않느냐? 결국 나 자신, 있는 그대로 사물을 꿰뚫는 만남이 되고, 해안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것이 변화하게 된다.
  나는 언덕 너머에 있는 밀이요, 어린아이 너머에 있는 인간이요. 사막 너머에 
있는 샘물이요, 굵은 땀방울 너머에 있는 다이아몬드가 된다.
  나는 그대로 하여금 마음 속에 한 채의 집을 짓게 하리라. 그 집이 완성되면 그대 
마음을 불태워 줄 주인이 찾아올 것이다. 
  [  88. 사랑을 위하여

  세상이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자는 세상을 소홀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기에겐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등의 넋두리를 늘어놓는 자는 사랑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이란 저절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선물이 아닌 까닭이다.
  사랑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대는 사모하는 여왕을 섬기는 근위병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별들을 사랑하는 기하학자를 알고 있다. 그는 한 줄기 별빛을 가지고 어떤 
규칙과 형태들을 변형시킬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개량한 장미를 자랑하는 정원사도 마찬가지였다. 기하학자는 별 때문에 
아쉬워하고, 정원사는 때때로 정원 때문에 슬퍼한다. 그러나 그대에겐 기하학자의 
별도, 정원사의 정원도, 아이들이 갖고 노는 해변의 둥근 자갈도 전혀 부족하지 
않다. 이럴진대 그대가 가난한 까닭이 무엇인가?

  나의 보초병들을 보라. 그들은 농담과 폭언을 일삼으며, 순찰이나 야경을 돌 때 같은 
동료들끼리도 적대시한다. 그러나 막상 일이 끝나면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즐긴다. 일이란 자체가 그들의 적이었으며, 생존의 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전쟁이나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다.
  보초병들은 그들끼리만의 식사를 한다. 그들이 나누는 빵 한 조각 한 조각에는 
따스한 정이 있으며,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들의 식도를 통해 들어간 빵이, 
보초병들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도시를 지키는 것이다.
  그들이 일이 끝난 후 도시의 홍등가로 몰려가서 여자를 유혹할 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난 성벽 위에서 총알이 귓밥을 스쳐가도, 그냥 꼿꼿하게 버티면서 총을 
쏘아댔지." 하면서 거만스럽게 빵을 한 입 크게 베어문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나의 보초병은 결코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헛된 자만심이 아니라, 여자에 
대하여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다만 고백이 서투르고, 단순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민다면, 보초병은 자신의 귀한 사랑을 가슴 속에 구겨넣고는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물론 그가 이름도 모르는 신을 위하여 죽을 때까지만이겠지만.
  그는 결국 죽음으로써 이 도시를 구출할 것이다. 그리곤 그대의 허영 앞에 
빛나는 승리를 뼈다귀처럼 던져주며 이렇게 말하리라.
  "나를 이용하는 자여, 사랑이 있었다구? 내게도 사랑이 있었으므로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랑을 노래하는 그대들을 나는 비웃고 있다고." 
  [  89. 거짓말쟁이 세상

  도시를 지키고 있는 보초병은 거짓말쟁이다.
  그는 만찬에 나오는 양고기 수프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밤낮으로 시를 읊조리는 시인은 거짓말쟁이다.
  어느 저녁, 복통이 그를 엄습하면 그의 입에서는 온갖 상스러운 신음소리가 
터져 나올 것이다.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모기 한 마리가 그를 습격하면 그는 금방 사랑의 늪에서 뛰쳐나와 권태로움에 
하품을 한다.
  언제나 신과 함께 하고 있다고 떠벌이는 성자는 거짓말쟁이다.
  신도 가끔은 바다처럼 그의 뒤켠으로 물러선다. 그러면 그는 메마른 해파리와 
같은 꼴이 된다.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감각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권태뿐이다. 권태는 정신의 병약함에서 나온다.
  그대는 알고 있지 않느냐? 사팔뜨기 예언자의 성스러운 노기를. 그대가 어떤 
인간의 외양만을 보고 징벌하려 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의식은 일상 생활의 권태와 인습으로 인하여 타락한다. 정의의 고고한 규칙이 
비열한 놀이의 칸막이로 이용되는 꼴을 너는 보고 있지 않느냐?
  그때에 그대는 누구의 무기력을 탓하겠는가?
  나는 꽃이 없어도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는 나무를 알고 있다. 
  [  90. 나무는 과일을 영글게 하고

  계층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인간에게서 기대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무례하며, 타산적이고, 
이기적이며, 비겁하고 또한 추잡한 족속들입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 그대는, 딱딱한 돌멩이를 가리키면서는 왜 '거칠고, 육중하며, 
두텁다.'는 식으로 표현하는가? 그 돌멩이로 이루어진 성전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말할 참인가?
  인간이란 본래 예측 불가능한 존재이다.
  이웃 종족들의 사회를 살펴보라. 그들 하나하나는 가정을 사랑하며, 강아지를 
키우고, 가구와 집을 고치거나 정원을 꽃향기로 가득 채우곤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쟁이나 약탈을 좋아할래야 할 수가 없다. 그에 대해 그대는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입니다."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의 오만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전쟁 준비에 힘을 기울인 
커다란 수프 그릇에 불과하다. 선량함과 다정함, 동물에 대한 연민의 정, 꽃에 
대한 사랑은 다가올 피의 제전을 예비하는 마법의 식단일 뿐이다.
  그대는 나무를 건축 재료로서의 가치로만 평가하진 않았느냐? 오렌지 나무에 
관해 말하면서, 그대는 그 뿌리와 살의 맛, 껍질의 끈적임이나 까칠한 감촉, 그 
자기의 조직을 비판하려느냐? 오렌지를 보고서야 오렌지 나무를 평가하라.
  그대가 징벌하고자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개인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나무는 많은 사람들의 비겁과 욕망에 항변하며, 괴로움 속에 빠진 
육신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영혼을 자아낸다. 그들은 다락방의 창문을 
보이는 한 줄기 별빛만으로 숨을 쉰다.
  그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이 흡족해진다. 그대가 논쟁을 볼 때 나는 조건을 보기 
때문이다.
  나무는 과일의 조건이 되고, 돌은 성전의 조건이 되고, 사람들은 종족의 조건이 
된다.
  이젠 사람들의 감미로운 꿈이나, 집에 대한 사랑에 박차를 가하리라. 수프 
그릇을 채우기 위한 흑사병, 범죄, 기아가 문제인 까닭이다.
  다른 사람들이 선량하지 않다거나 꿈을 거부한다거나 집에 대한 집착이 
엷다거나 해도, 그러한 조건들이 몇몇 사람들의 고귀함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면 
나는 그들을 용서하리라.
  이 부분에서는 논리적인 바탕이 내겐 분명히 없다. 
    [  91. 통치

  제국의 순경들이 나를 찾아와, 부패의 원천이 비밀조직을 찾아냈다고 보고하였다.
  그들은 그 비밀 조직에 소속되어 있음직한 인물들의 행위의 일치점과 상호 
관계, 회합 장소 등을 열심히 설명하였다
  내가 그들이 왜 제국에 해악을 미치는가에 대하여 묻자, 순경들은 그 조직원들의 
비리와 횡령, 그리고 그들이 일으킨 각종 추태에 대한 기록들을 늘어놓았다.
  "그래? 나는 그보다 더 위험스런 조직을 알고 있네. 그들과는 싸울 엄두조차 
못낼 정도의 그런 조직을 말일세."
  순경들은 놀라서 물었다.
  "그건 어떤 조직인데요?"
  "왼쪽 관자놀이에 점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일세."
  그러자 순경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전직이 목수였던 순경 한 사람이 
헛기침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자들은 조직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선 회합 장소조차 없지 않습니까?"
  "그게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지 않나? 전혀 발각되지도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여, 그들은 나의 법령에 대하여 암암리에 반대하고, 똘똘 뭉쳐 나의 정의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네. 그리하여 그들은 꿋꿋하게 자신들의 계급과 이권을 지키려 
하고 있다네."
  그러자 그 순경이 다시 반론을 제기하였다.
  "저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씨 좋고 너그러우며 
정직하시지요. 그는 제국을 지키다가 세 군데 상처를 입은 영웅이랍니다."
  "정말 자네는 그렇게 믿고 있나? 여자들이 지각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중에 
이성적인 여성이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장군들의 목청이 우렁차다고 
해서 내성적인 장군이 그중에 한 사람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말이네.
  어떤 예외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말게. 일단 징조가 나타난 사람을 골라 뒤를 
캐보도록 하란 말일세. 그들은 유괴, 폭력, 횡령, 사기, 탐욕, 파렴치 등 온상일 
것이야. 자네는 정말 그들이 이런 범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순경들이 즉각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욕망이 그자들의 주먹 속에서 눈을 떴을 테니까요."
  나는 다시 물었다.
  "어떤 나무가 썩은 열매를 맺는다면 그 잘못은 대체 나무인가, 열매인가?"
  "당연히 나무입니다."
  "그렇다면 몇 개의 성한 열매 때문에 나무의 죄를 사해줄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행히도 제국의 순경들은 죄를 용서하지 않는 투철한 직업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왼쪽 관자놀이에 점이 있는 사람들의 조직을 나의 제국에서 
소멸시키는 것은 정당한 일이 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선언하자, 전직이 목수였던 그 순경은 여전히 개운찮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순경들은 그를 주시하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중의 
한 순경이 전직 목수를 위 아래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이 자가 알고 있다는 그 사람은 혹시 자기의 동생이 아닌가? 아니면 아버지^5,5,5^. 
아니면 가족 중의 한 사람일지도^5,5,5^."
  나는 그때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소리질렀다.
  "왼쪽 관자놀이에 점을 가진 집단은 위험하다. 우리가 전혀 고려해본 적이 없는 
부류이니까. 그렇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 눈에는 뜨이지 않도록 
가면을 쓴 인간들은 다 위험한 존재란 말일세. 결국 나는 모든 인간들의 집단에 
철퇴를 내려야 한다.
  순경들이여. 자네들은 순경이라는 직업 외에, 또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까닭에, 나는 자네들을 통하여 세상을 정화하려는 걸세. 무슨 말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군.
  나는 자네들의 내면에 살아있는 순경이라는 인식에게, 또 다른 자네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이라는 인식을 지하 감옥 속으로 던져버리라는 말을 하고 있단 
말이야!"
  그러자 순경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은 제국 안에서는 
오로지 주먹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나는 즉시 겸손을 떠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전직 목수였던 그 순경을 
체포하였다.
  "너는 순경의 자격을 상실하였다. 너는 목수에게 저항하는 나무와도 같이 내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순경이므로 내가 흉악한 부류로 지정한 인간에 대해서 
관할하는 것만이 바른 행동이다. 그런데 너는 그러한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였다.
  너는 어느 범죄자에 대하여 그 이웃이 경건한 인간이라고 하여 방면할 것이며, 
그에 대한 자비의 본보기로서 그 이웃의 이웃까지도 용서하게 될 것이다.
  정의는 비뚤어지고 죄악이 그로 인하여 창궐하게 된다. 나의 병사들조차 혼란 
속에서 피흘리게 되겠지. 살육을 저질러도 상관에 대한 존경심이 있으므로 너에게서 
풀려날 것 아닌가?
  정의에 대한 어쭙잖은 너의 사랑은 결국 제국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쥐새끼와도 같은 
결과를 낳고야 말 것이다. 너는 순경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인간이다." 
    [  92. 해방의 아침

  드디어 날이 밝았다.
  나는 언덕 위에 올라 맑은 바람을 들여 마시며 신에게 기도 드렸다.
  "주님, 해방의 아침이 왔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프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도시와, 종려나무와 
옥토와 오렌지 나무 등이 하나의 운명으로 합쳐졌습니다.
  이 도시는 오른편에는 넓다란 항구가 있으며, 왼편에는 사막의 한켠으로 푸른 
산맥들이 축복의 빛깔로 도열해 있습니다. 이제 제국은 새로운 성채를 건설하고 
사막을 옥토로 만들 것입니다. 시간 속에 씨앗은 삼나무 뿌리로 굳건해질 것입니다.
  이제 저의 성채를 세울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이 상태에서, 사랑을 가지고 
일구어 나가렵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나왔습니다. 이 찬란한 해방의 아침, 제 자신 
나무들을 향해 발길을 옮기는 정원사가 된 기분입니다."

  노여움과 쓰라림, 혐오와 복수의 욕망 속에서 나는 성난 인간의 유혹을 
경험하였다. 반란과도 같이 뒤죽박죽이었던 나의 군대에게서 명령이 지켜지지 
않았던 패배한 전투의 치욕 속에서, 신도들을 폭력으로 가두어놓던 미치광이 
예언자들에게 미치지 못하던 내 권력의 무력감 속에서.

  제국은 살아있다. 내가 그 타락의 와중에서 공범자들을 탓하여 죄다 
목베었더라면, 내가 그들의 게으름이나 무능함, 어리석음까지 심판해야 했다면, 
나는 그 때문에 제국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까지 잃는 우를 범했을 것이었다.
  인간에게서 병들기 쉬운 것들을 소멸시키기는 쉽다. 그러나 그 파장은 비옥한 
토양을 지독하게 오염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나의 고통과 고독과 슬픔은 하나의 씨앗을 깨우기 위한 재료였던 것이다. 오류를 
범하는 자를 처단하는 것이 창조를 돕는 길은 아니다. 창조는 실패의 지식인 
까닭이다.

  나의 진리는 나무이다. 이것은 제국의 유산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원사이다.

  나는 증오를 멸시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너그러움 때문이 아니다. 만물 속에 
현존하는 신, 당신에게서 나온 제국이 매 순간 내 안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새롭다.
  나는 내 아버지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다.
  "대지가 씨앗을 가지고 삼나무가 아닌 채소를 빚어낸다 하여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 씨앗은 채소의 씨앗일 테니까."
  "어느 사팔뜨기가 소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소녀는 그를 외면하고는 
눈길이 바른 사람에게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 사팔뜨기는 눈길이 바른 사람들이 
소녀를 타락시키고 있다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가버렸다."

  자신을 초월하려는 모색, 부정, 실수, 그리고 수치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너무나 치사한 부류이다. 열매가 나무를 멸시한다는 것,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  93. 초월에 다다라서

  나는 그대의 마음 안에 우애를 심어놓았다. 더불어 이별의 슬픔까지도, 아내와의 
이별, 친구와의 이별까지도. 그대가 이별의 고통으로 마음 아파할 때마다 나는 또 
생존에 대하여 알려주고 싶었다. 샘물이 없는 세계보다는 그래도 갈증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이 좀더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시장에 갈 때, 아내를 포옹하면서 느낀 사랑의 감정을 기억하라. 아내는 
미소지으며 그대를 배웅하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안일을 하리라. 그리곤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할 것이다.
  "너무 일찍 돌아오시면 안 되는데^5,5,5^.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기쁨이, 당신을 
기다리는 이 행복이 조금만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을텐데."
  그대는 한가로울 때보다도 훨씬 더 아내와 결합되어 있다. 아내에게 집을 
온전하게 맡기고, 그대는 가고자 하는 먼 곳의 결혼식이라든지, 그동안 소원했던 
친구에 대해서도 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지금, 그대는 당나귀의 방울 소리를 들으며 마음 안에 넘치는 
기쁨으로 미소지으리라. 태양도 우러러 보리라.

  "주님, 저는 최선을 다하여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이제 제 자신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그동안 당신께서는 사람들의 고뇌를 죄다 제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풍문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제게 침묵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저는 주기만 하였지 받은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왕이고 사람들의 피로 이루어진 제국이 제 안에 있으며, 그것이 피의 
대가를 제가 치러야 하는 까닭이었습니다. 주님, 저의 미소가 어느 보초병을 
도취시킬 수 있었을 때, 저는 그 보초병의 미소 안에서 무엇을 얻었겠습니까?
  저는 저를 위한 사랑을 간청하지는 않겠습니다. 저의 모든 행동은 당신을 향한 
길인 까닭에 그들이 저를 무시하든, 증오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아! 이제 홀로 있다는 피로감이 저를 엄습합니다. 순수란 이토록 멀리 있는 
걸까요? 그러나 주님, 저는 초월함으로써 이루었습니다. 완성 안에서 백성들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었습니다. 저와 끊임없이 투쟁하던 사랑하는 적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저는 그를 위하여, 도시의 늙은 정원사가 친구에게 대하듯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내 정원에는 장미꽃이 활짝 피었다네.'
  사랑하는 주님, 당신은 우리들의 척도이십니다. 당신은 모든 행위의 본질이십니다. 
그리고 매듭이십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2 

    전2권 중 제1권

쌩 떽쥐빼리 

  [  (저자 및 역자 약력)

    * 지은이 쌩 떽쥐베리
  1900 년 6월 리용 출생. 프랑스의 비행사. 소설가. 인류문학상 가장 보기 드문 
행동력의 작가이며 주로 비행가로서의 체험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다. 작품으로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 수상작인 "인간의 대지", '페미나 문학상'을 수상한 
"야간비행", "남방 우편기", "전시 조종사" 등이 있다.
      [  (머리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2(Terre des Hommes)'는 쌩떽쥐뻬리의 죽음을 건 체험과 
깊은 명상과 시적 정감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서사시적인 작품이다.
  쌩떽쥐뻬리는 그의 직업인 비행사로서 인생을 성찰했고 생의 의미를 추구했다. 
그는 이 책의 서두에서 '농부는 땅을 가는 동안에 자연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내는데 이렇게 캐낸 진리야말로 보편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항공로의 
도구인 비행기도 사람을 모든 옛 문제들로 끌어 넣는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비행기를 연장으로 해서 인생에 참가했고, 그 체험을 통해서 '서로 맺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명제를 추구했으며, 마침내 '오직 "정신"만이 진흙 위로 불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다'라는 확신에 도달하고 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2(Terre des Hdmmes)'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되기 
진전인 1939년 2월에 출판되어 그해 5월에 아카데미 프랑세스의 소설 대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6월에는 '바람과 모래와 별들(Wind, Sand and Stars)'이라는 
표제로 미국에서 출판되어 '이 달의 양서'로 선정,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전세계에 
절리 읽혀지고 있다.
  은유가 많은 에세이이기도 한 이 작품은 쌩 떽스(에칭)의 비행사로서의 15년간의 
풍부한 체험과 회상들을 작가 특유의 서정미 넘치는 문체로 펼쳐나가로 있다. 같은 
동료 비행사인 앙리 기요메의 영하 40도의 안데스 산맥에서의 불시착과 쌩 떽스 
자신의 4일 동안의 사하라 사막속에서의 기갈을 견디며 생을 찾은 놀라운 용기와 인내 
등 어느 것이나 극적이고 흥미로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진가가 이러한 
에피소드의 흥미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쌩떽스가 이들 체험에서 성찰 해낸 
구약성서의 묵시록을 방불케 하는 청순 고결한 인생관과 모럴에 있는 것이다.
  생명의 희생에서 인생의 의의를 찾고자 하는 인도적 히로이즘의 탐구, 이것이 
이 책의 근본 사상을 이루고 있다. 그는 진정한  히로이즘이란 헛되이 죽음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책임 관념에 뿌리박힌 자기 희생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책임관념이 인간에게 인간 이상의 것을 이룩할 수 있는 강인한 
의지를 주고 곤란을 극복하는 노력을 하게 한다. 안데스 산맥의 눈보라 속에서 
5일간 길을 잃었던 기요메를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서 물 한 방울 없이 사흘을 
헤매던 쌩떽스를 추위와 기갈과 피로를 극복하고 삶을 되찾게 한 기적도 이러한 
책임관념이 현대의 영웅들에게 강하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행동의 윤리를 추구하는 주제와 아울러 인간의 존엄성을 압살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정신도 나타나 있고, 또 부르주아적인 개인주의를 
초월한 집단적 책임 의식도 강조되고 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 프랑스 아카데미의 에드몽 잘루는 '보기 드문 뛰어난 
사색의 서다'라고 말했고 문학평론가 앙드레 루소는 '이 책은 모든 중, 고교 및 
대학에서 교양서로 읽혀져야 할 양서다'라고 격찬했다.
  마지막의 9.'어느 볼모에게 보내는 글(Lettre a un Otage)은 1943년 2월 쌩 
떽쥐뻬리가 뉴욕에서 발표한 작품이다. 이에 앞선 1940년 6월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독일에 항복했다. 당시 제33 비행 대대에 대위로 
복무중이던 쌩 떽쥐뻬리는 동원 해제가 되어 어머니와 누이가 있는 지중해 연안의 
아게로 돌아가 심신을 휴양하는 한편 그의 미완성의 유작이 된 성채(Citadelle)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령 하에서의 생활에 정착할 수 없었던 그는 그해 
1월 리스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었다.
  프랑스에 볼모처럼 남겨진 친구 레옹 베르뜨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된 이 
에세이는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에 씌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망명자에게 있기 쉬운 현실도피나 절망감은 전혀 없다.
  미국에 망명해 있으면서도 독일군에 점령당한 조국 프랑스에 대한 일체감과 그리움, 
거기에서 볼모처럼 압박받고 있는 4천만 명의 동포들에 대한 격려와 사랑으로 넘쳐 
있다.
  이 작품은 또한 '미소의 찬가'이기도 하다. 전쟁 전에 쏘온느 강변에서 국적이 다른 
뱃사공들과의 무언의 미소, 에스파니아 내란 당시 신문사특파원으로 취재 중 민병들에 
체포당했을 때의 미소가 이룩해 준 기적 등, 그것은 마치 태양이 떠오르듯이 언어와 
국적과 주의를 뛰어 넘어 인간들을 하나로 결합시켜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음을 작가는 
일깨워주고 있다. 
    [  인간의 대지

  대지는 우리들 자신의 대해 모든 책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장애물과 겨룰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다. 대패라든가 쟁기가 
있어야 한다. 농부는 땅을 가는 동안에 자연의 비밀을 조금씩 알아내는데 이렇게 캐낸 
진리야말로 보편적이다. 이와 같이 항공로의 도구인 비행기도 사람을 모든 옛 
문제들로 끌어넣는다.
  아르헨티나로 최초의 야간 비행을 하던 날 밤의 들판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불빛들이 마치 별처럼 깜빡이던 밤의 인상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그 불빛 하나하나가 이 어둠의 큰 바다 속에도 인간의 의식이라는 기적이 
깃들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보금자리 속에서 사람들은 읽고, 생각하고, 
마음속 이야기를 되뇌이고 있을 것이다. 딴 집에서는 공간의 계측에 애를 쓰고, 
앙드로메드좌의 성운에 관한 계산에 열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저기에서는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것이다. 
  띠엄띠엄 그 불빛들은 저마다의 양식을 찾아 
들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시인의, 교원의, 목수의 불빛 같은 아주 
얌전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 살아 있는 별들 가운데에는 또한 얼마나 많은 
닫혀진 창들이, 꺼진 별들이, 잠든 사람들이 있을 것인가...
  서로 맺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들판에 간간이 타오르고 있는 이 불빛들의 어느 
것들과 마음이 통하도록 해야 한다. 
    [  1. 항공로

  1026 년의 일이다. 나는 '라떼꼬에르' 회사의 젊은 정기 항공로 조종사로 갓 들어간 
때였다. 이 회사는 나중에 '에르 프랑스' 회사가 된 우편 항공회사가 전에 뚤루즈와 
다까르 간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내 직업을 익히고 있었다.
  나는 도료들과 마찬가지로 우편기를 조종하는 영광을 갖기에 앞서 풋나기들이 
치뤄야 하는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 비행이며, 뚤루즈와 빼르빼냥 간의 
단거리 왕복이며, 썰렁한 격납고 속에서의 쓰라린 기상학 공부 등이었다. 
  우리는 아직 알지도 못하는 스페인의 산들에 대한 두려움과 선배들에 대한 존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선배들을 우리는 식당에서 만나곤 했는데, 
무뚝뚝하고 약간 쌀쌀한 그들은 거만스럽게 우리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다.
  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알리깡뜨나 카사블랑카에서 돌아와서 비에 젖은 
가죽옷을 입은 채 뒤늦게 우리들과 합류했을 때, 우리들 중 하나가 조심조심 그의 
여행에 대해서 묻기라도 하면 그의 짤막한 대답만으로도 폭풍우가 부는 날이면 
덪과 함정과 느닷없이 나타나는 낭떠러지와 삼나무라도 뿌리 채 뽑아버릴 것 같은 
돌풍들로 가득찬 우화적인 세계를 우리 눈 앞에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시커먼 용바람이 골짜기 어귀를 가로막고, 번개 뭉치들이 산마루를 뒤덮는 그런 
광경이었다.
  이 선배들은 교묘하게 우리들의 존경심을 북돋우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 중의 하나가 돌아오지를 않아 영원히 우리의 존경할 본보기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나중에 꼬리비에르 산중에서 죽은 뷔리가 돌아오던 어느 날의 일이 
생각난다. 그 나이 많은 조종사는 우리들 사이에 들어와 앉자 아직도 어깨가 일 
때문에 짓눌려 있는 듯이 아무 말없이 무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항공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하늘이 썩어 문드러진 듯 장마 비를 
뿌리고, 조종사에게는 옛날의 돛단 군 선의 대포들이 밧줄이 끊어져서 갑판 위를 
마구 굴러다니듯이 모든 산들이 시커먼 구름 속에서 뒹굴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그런 악천후의 저녁이었다. 
  나는 뷔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이번 
비행이 힘들었냐고 물어보았다.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머리를 접시 위에 
틀어박고 있던 뷔리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덮개 없는 비행기에서 날씨가 궂을 조종사는 좀 더 앞을 잘 보시 위해서 
바람막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내다보게 되는 데 그래서 귀를 때리는 바람 
소리가 오랫동안 윙윙거리기 마련이다.
  마침내 뷔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제야 내 말이 들리는 것 같았고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갑자기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 웃음이 나를 감탄하게 
했다. 왜냐하면 뷔리는 좀처럼 웃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 짧은 웃음이 그의 
피로를 밝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승리에 대해서는 그밖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음식을 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어둠침침한 식당 안에서 하루의 초라한 
피로를 풀고 있는 하급 관리들 가운데에서 이 묵직한 어깨를 가진 동료가 내게는 
이상하게도 고귀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 거친 외모 속에서 용을 정복한 천사의 모습을 엿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내게도 차례도 닥쳐 지배인 실로 불려 가는 저녁이 왔다. 그는 이렇게만 
말했다.
  "내일 출발하시오."
  나는 그의 작별인사만 기다리며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동안의 침묵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규정은 잘 알고 있겠지?"
  그 당시의 비행기 엔진은 오늘날만큼의 안전성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엔진은 
종종 접시가 깨지는 것 같은 소음 속에 아무 예고도 없이 별안간 우리를 
내팽개치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조종사는 피신할 데라곤 거의 없는 스페인의 
바위산을 향해 손을 들 도리밖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늘 말하곤 했었다.
  "여기서 엔진이 고장 나는 날에는 유감이지만 비행기도 이제 끝장이다."
  그러나 비행기는 바꿔 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턱대고 이 
바위산을 들이받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산악지대에서는 구름바다 
위로 비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위반하는 경우에는 가장 무거운 징계를 
받게 되어 있었다. 고장을 일으킨 조종사가 흰구름층 속으로 빠져들어 가다가는 
보이지 않은 산꼭대기를 들이받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지배인의 느릿한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 한번 복무 규정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기야 스페인에서 구름바다 위를 나침반만 가지고 비행하는 것도 재미있지. 
아주 운치가 있고 하지만...."
  그리고는 더욱 느리게 말했다.
  "... 하지만 명심해 두시오. 그 구름바다 밑은 ... 바로 저승이라는 것을."
  그러자 갑자기 구름을 뚫고 솟아올랐을 때 보게 되는 그렇게도 고요하고 
편평하고 단순한 그 세계가 내게는 미지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 
고요가 덫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나는 저 내 발 아래 펼쳐져 있는 끝없는 흰 덫을 상상해 보았다. 그 밑에는 
누구나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북적거림이나, 혼잡이나, 도시의 활기찬 차들의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절대적인 침묵과 보다 결정적인 평화가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그 흰 끈끈이가 나에게는 현실과 비현실, 기지와 미지의 경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벌써 어떤 풍경이든 그것을 보는 사람의 문화와 
작업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산골 사람들도 구름바다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이 우화적인 
장막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지배인의 사무실을 나왔을 때 나는 어린애 같은 자랑을 느꼈다. 나도 이제 내일 
새벽부터는 승객에 대한 책임, 아프리카행 우편물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충분치 못하다고 
느꼈다. 스페인에는 피난처가 적다. 위협적인 고장을 당했을 때 구조 받을 만한 
곳을 찾아낼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나는 필요한 가르침도 찾지 못한 채 불모의 지도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서움과 자랑스러움이 뒤얽힌 가슴을 안고 이 싸움의 전날 밤을 
동료 기요메 한테 가서 지내기로 했다. 기요메는 이 항공로를 앞서 왕래한 
경험자였다. 기요메는 스페인의 열쇠를 얻는 비결을 알고 있었다. 나는 기요메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소식을 들었네. 기쁜가?"
  그는 포르투갈산 포도주와 컵을 가지러 벽장 있는 데로 가더니 여전히 
빙글거리면서 돌아왔다.
  "우선 축배를 드세, 염려 말게. 잘될 테니."
  훗날에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과 남대서양 횡단 우편 비행의 기록을 
수립하게 될 이 동료는 램프가 불빛을 발하듯이 주위에 자신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보다 몇 해 앞선 이날 저녁, 그는 셔츠바람으로 램프 밑에서 팔짱을 끼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에 참 미소를 띠며 이렇게 간단히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폭풍우니 안개니 눈 따위가 이따금 자네를 괴롭히겠지만, 그럴 때 자넨 
자네보다 먼저 그것을 겪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그리고 자네 자신에게 이렇게 
타이르게. '남들이 해낸 일은 나도 꼭 해낼 수 있다'라고."
  그러나 나는 가지고 간 지도를 펼치고 그렇더라도 나와 함께 항로를 재검토 
해보자고 간청했다. 이렇게 램프 불 아래 엎드려 이 선배의 어깨에 기대고 
있으려니 나는 학창시절의 평화가 되돌아옴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나는 얼마나 이상한 지리 수업을 받았던 것일까? 기요메는 내게 
스페인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그는 스페인을 내 친구로 만들어 주었다. 그는 
수로학에 관해서도 주민이나 가축 임대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또 
구아디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고, 다만 구아디스 근처에 들판을 둘러싸고 서 
이는 세 그루의 오렌지 나무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것들을 조심하게. 자네 지도에다 표시해 두게...."
  그래서 그 후부터는 세 그루의 오렌지 나무가 지도 위에서 시에라네 바다의 
높은 산맥보다도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 롤까 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롤까 시 근처에 있는 하찮은 
농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살아 있는 농가에 대해서, 그 농부에 대해서, 그 
안주인에 대해서. 그러자 우리로부터 1천 5백 킬로 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부부가 
엄청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산비탈에 자리잡은 채 마치 등대지기처럼 그들의 별아래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청하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세계의 모든 지리학자들도 모르고 있는 상세한 것들을 그 
망각과 상상도 할 수 없는  먼 거리 속에서 끌어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리학자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큰 도시에 물을 대주는 에브르강 뿐이지, 모뜨릴 서쪽 
숲 속에 숨어서 서른 포기쯤의 꽃을 가꾸어 주는 아버지인 그런 개울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개울을 조심하게. 이것 때문에 불시착에 소용이 없으니까.... 이것도 자네 
지도에 적어 두게."
  아! 나는 모뜨릴의 그 작은 뱀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그 가벼운 물소리로 개구리 몇 마리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고작인 이 실개천 
눈만 가리고 있는 격이다. 이 불시착의 낙원 속에 풀숲 밑에 길게 누워, 여기서 
2천 키로 미터나 떨어진 것에서 나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첫 기회에 그놈은 나를 
불꽃더미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또 조그마한 산 허리에 진을 치고, 당장이라도 덤벼들 태서를 갖추고 있다는 
그 서른 마리의 싸움 양에 대해서도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대기하는 것이었다.
  "자네는 이 초원에서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겠지. 하지만 보게! 자네 바퀴 
밑으로 서른 마리의 양들이 굴러든단 밀일세...."
  이런 믿지 못할 위협에 대해 나는 다만 감탄의 미소로써 답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내 지도 속의 스페인은 램프불 아래서 차츰차츰 동화의 나라가 되어 갔다.
  나는 피난처와 함정을 십자표로 표시했다. 그 농부와 서른 마리의 양과 그 개울도 
표를 했다. 나는 지리학자들이 등한히 했던 그 양치기 처녀를 정확한 제자리에 
놓았다. 
  기요메와 작별하고 나오자, 나는 이 겨울을 얼어붙은 밤을 걷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나는 외투 깃을 세우고 아무것도 모르는 행인들 틈에 끼어 내 젊은 
정열을 산책시켰다. 마음에 비밀을 간직하고 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 야만인들은 지금 내가 누군지 모르고 있지만, 그러나 새벽이 되어 우편 행낭이 
비행기에 실릴 때가 되면 그들은 자기의 격정과 정열을 내게다 맡길 것이다. 그들의 
희망도 내 손안에 맡길 것이다. 이렇게 나는 외투에 몸을 감싸고, 그들 틈에 끼어 
보호자 같은 걸음을 옮기고 있는 데도 그들은 나의 심려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내가 이 밤으로부터 받는 여러 가지 메시지들도 전혀 받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어디에선가 채비를 차리고 있을지도 모를, 그리고 내 첫 비행을 
훼방 놓을지도 모를 그 눈보라가 바로 내 몸에는 중대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별들이 하나하나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산책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별들의 비밀은 나 혼자만이 알 수 있었다. 전투에 앞서 적군의 
배치를 내게만 알려주는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렇게 막중한 책임을 지워주는 이 암호를 크리스마스 선물들이 
번쩍이는 환한 쇼윈도우 옆에서 받았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 밤에서 땅위의 모든 
보화가 진열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단념의 자랑스러운 도취감을 맛보는 
것이었다. 나는 협박당한 병사였다. 그러니 밤축제를 위한 이 번쩍거리는 수정 
그릇들이며, 저 램프 갓이며, 저 책들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나는 안개 덮인 하늘에 잠겨 있는 것이다. 벌써 나는 정기 항공의 
조종사로서 비행하는 밤들의 쓰디쓴 과육을 베어 물고 있는 건이었다. 
  나를 깨워 준 것은 새벽 3시 였다. 나는 덧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거리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며 신중하게 옷을 입었다.
  30분 후 나는 빗물로 번들거리는 보도에서 작은 가방 위에 앉아 내 차례로 회사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나보다 앞서 많은 동료들이 오늘 같은 처녀 
출동 날에 가슴을 약간 조이며 이와 똑같은 기다림을 맛보았을 것이다.
  마침내 거리 모퉁이에서 구석 차가 고철 같은 소리를 내며 나타냈다. 이번에는 
나도 다른 동료들처럼 잠이 덜 깬 세관관리와 몇몇 사무원들 틈에 끼어 등받이 
없는 의자에 자리를 잡을 권리를  가졌다.
  이 버스는 곰팡이 냄새와 먼지 많은 관청 냄새와 자칫 사람의 한 평생이 
파묻히기 쉬운 낡은 사무실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차는 5백 미터씩 가다가는 
멈춰 서기를 하나 더, 세관리를 하나 더, 주임을 하나 더 태우기 위해서.
  차안에서 벌써 꾸벅거리고 있던 사람들은 새로 탄 사람의 인사말에 분명치 않게 
웅얼웅얼 대답했고 새로 탄 사람들도 가까스로 자리를 비집고 앉자마자 
꾸벅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뚤루즈 시의 울퉁불퉁한 길 위를 실려 
가는 일종의 서글픈 짐들이었다.
  이렇게 사무원들과 줄을 지어 섞어 있으면 정기 항공의 조종사도 언뜻 보면 
거의 분간되지 않는다. 가로등이 줄을 지어 스쳐가고 비행장이 가까워 온다. 
그러면 진동이 심란 이 낡은 버스도 이제는 변모한 사람 이 빠져나올 한낱 회색빛 
번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동료들 누구나가 이와 같이 한번은 오늘 아침과 비슷한 아침에 저 주임의 화풀이에 
아직도 짓눌려 있는 욕받이 하급 관리에 끼어 앉아 있는 자신 속에서 스페인과 
아프리카 간 우편기의 조종 책임자가 태어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3시간 후에는 
오스삐딸레의 용과 번개 속에서 대결하고 4시간 후에는 그 용을 정복하고 나서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완전히 혼자만의 자유 판단하에 해상으로 우회할 것인지 아니면 
알꼬아 산덩이를 향해 똑바로 돌진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뇌우와, 산악과 대양과 
대결할 인간이 태어나는 것을.
  동료 누구나가 이렇게 한번을 뚤루즈의 음산한 겨울 하늘 아래 이름 모를 
무리들 속에 묻혀서 오늘과 흡사한 아침에 5시간 후면 북극의 비와 눈을 뒤로 
하고 겨울을 버리면서 엔진의 회전수를 줄이고 한여름인 알리깡뜨의 찬란한 태양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할 왕자가 자라나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 낡은 버스는 이미 없어졌다. 그러나 그 딱딱하고 불편스러웠던 것은 내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차는 우리들의 직업상 거친 기쁨을 맛보는데 필요한 
준비를 잘 상징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사무치게 검소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 생각난다. 3년 뒤에 그 차 안에서 열 마디도 안되는 대화에서 
조종사 레끄리벵의 죽음을 알게 됐던 일을. 그도 안개 짙은 날이나 혹은 어느 
밤에 갑자기 영원한 은퇴를 한 이 항로의 1백여 명의 동료들 중의 하나였다. 
  그 때도 역시 새벽 3시였고, 똑같은 침묵이 흐르고 있다. 어둠 속에 있어 
모습이 안보이는 지배인이 감독관에게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다.
  "레끄리벵이 어젯밤에 카사블랑카에 착륙하지 않았다네."
  "아! 그래요?"
  감독관이 대답했다.
  그리고 갑자기 꿈 속에서 끌려 나온 그는 잠에서 깨려고 자신의 근무열을 
보이려고 애쓰며 덧붙였다.
  "아! 그래요? 통과를 못했군요? 그래, 되돌아 왔나요?"
  그 말에 대해 버스 안쪽에서는 다만 '아니'하는 대답뿐이었다. 우리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말도 없었다. 그리고 1초 1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아니'라는 말에는 아무런 다른 말도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것, 이 '아니'라는 
말에는 호소할 길이 없다는 것, 레끄리벵은 카사블랑카에만 착륙 못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어떤 곳에도 착륙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더욱 명백해졌다. 

  이리하여 그날 아침 나의 첫 우편 비행을 하는 새벽에 나는 또한 이 직업에 
따른 신성한 의식을 치렀고 유리창 너머로 가로등의 불빛을 반사하여 번들거리는 
돌을 깐 길을 내다보며 자신을 잃어감을 느꼈다.
  물구덩이 위로 스쳐 가는 바람이 종려 나뭇잎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내 처녀 비행치고는 ... 정말이지... 운이 나쁜데.'
  나는 감독관을 쳐다보았다.
  "날씨가 좋지 않죠?"
  감독관은 피곤한 시선을 창쪽으로 돌리더니 이윽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뭘, 그렇지도 않은데."
  그럼, 악천후는 도대체 어떤 징후로 알아낼 수 있는가 하고 나는 자문해 
보았다. 기요메는 엊저녁에 단 한번의 미소로 선배들이 들려주면서 우리를 겁주곤 
했던 불길한 전조들을 지워 주었지만, 그래도 그 불길한 징조가 내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흔히 이런 말을 했었다. 
  "항공로를 조약돌 하나하나까지 알고 있지 못한 조종사가 만일 눈보라라도 
만난다면, 가엾지...아암! 가엾고 말고...."
  그들에게는 위신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약간 거북스런 동정의 
눈초리로 우리들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천진난만함을 동정하기라도 하듯이.

  하기야 이 버스가 이미 우리들 중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피난처 노릇을 
해 주었던가? 60명? 80명? 비오는 날 아침, 바로 이 과묵한 운전사에게 이끌려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밝은 점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담배가 제각기의 
명상에 구두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늙은 월급쟁이들의 하찮은 명상들, 우리들 중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람들은 마지막 호상객 노릇을 했을 것인가?
  나는 또 그들이 낮은 소리로 주고받는 마음속 이야기를 귓결에 들었다. 그것은 
병이니, 돈이니, 집안 걱정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이 사람들이 갇혀 있는 
우중충한 감옥의 벽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자 별안간 운명의 보습이 내 앞에 
나타났다.
  여기 있는 늙은 샐러리맨이여, 나의 동료여, 아무도 당신들을 해방시켜 준 일이 없고 
그것은 조금도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은 저 흰개미들이 그렇듯이 광명으로 
빠져나갈 모든 구멍을 한사코 시멘트로 막음으로써 당신의 평화를 건설해 왔다.
  당신은 자신의 소시민적인 안전 속에 자신의 습관 속에 시골 생활의 숨막히는 
관습 속에 공처럼 움츠려 들어가 바람과 조수와 별을 막기 위해 이 보잘것없는 
성벽을 쌓아 올렸다. 
  당신은 세상의 큰 문제에 대해서 근심하려 하지 않았고 인간으로서의 처지를 
잊기 위해서 갖은 고생을 했다. 당신은 방랑하는 떠돌이 별의 주민이 결코 
아니며, 대답이 없을 질문은 던지지도 않는다.
  당신은 뚤루즈의 한 소시민이다. 때가 늦기 전에 당신의 어깨를 움켜 잡아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신을 빚어낸 진흙이 마르고 굳어진 지금은 아무도, 
어쩌면 애초에 당신 속에 깃들이고 있었을지도 모를 잠든 음악가를 시인을 또는 
천문학자를 일깨워 줄 수는 절대로 없다.
  나는 이제 폭풍우를 원망하지 않으련다. 직업의 마력이 또 하나의 세계를 내게 
열어준다. 그 세계 속에서 나는 이제 2시간도 안돼서 검은 용과 푸른 전개의 
머리털을 왕관처럼 쓴 산봉우리들과 대결을 할 것이다. 그리고 밤이 오면 
폭풍우에서 해방되어 별들 속에서 내 길을 찾아 갈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들 직업상의 세례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는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하늘의 여행은 대개의 경우 무사했었다. 우리는 평온하게, 마치 
직업적인 잠수부처럼 우리들 영토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 영토는 오늘날에 속속들이 탐사되어 있다. 이제는 조종사도, 기관사도, 무전사도 
모험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다. 그들은 갖가지 계기의 
바늘의 유희에만 순종하지, 풍경의 변화에는 이제 아랑곳하지 않는다.
  밖에는 산들이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그것들은 이미 산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력일 뿐, 그 접근만을 계산하면 된다.
  무전사는 현명하게 램프 불 아래서 숫자를 기입하고 기관사는 지도에 점을 찍고 
조종사는 산들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거나, 왼편으로 피해서 돌아가려던 산마루가 작전 
준비 때와도 같은 침묵과 비밀 속에서 정면에 나타나거나 할 때만 진로를 수정한다.
  지상의 비행장에서 야근을 하는 무전사들로 말하더라도, 그들은 똑같은 시각에 
그들의 노트 위에 동료로부터 받은 통보를 슬기롭게 적어 넣는다.
  "0시 40분, 방향 2백 30도, 기내 이상 없음"
  오늘날 승무원은 이렇게 비행한다. 그들은 움직이고 있다고는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바다 위의 밤처럼 모든 목표들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엔진이 이 밝은 실내를 그 본질을 바꿔 놓는 진동으로 채우고 있다. 
시간은 흐른다. 그러나 계기반 속에서, 무전 장치 속에서, 이 바늘들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연금술이 행해지고 있다. 
  1초 1초마다 이 비밀스런 몸짓, 이 가만가만한 말들, 이 주의가 기적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오면 조종사는 어김없이 바람막이 유리판에 이마를 
갖다 댈 수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황금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기항지의 등불 속에서 빛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들은 모두 이러한 비행도 겪어 알고 있다. 기항지에 닿기 
2시간 앞두고 어떤 특수한 각도에서 비쳐오는 불빛을 보고 갑자기, 설사 인도에 
가있었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을 만큼 우리가 멀리 와 있음을 느끼게 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단념하게 된 그런 비행을.
  이를테면 메르모즈가 그랬다. 처음 수상기로 남대서양을 횡단했을 때, 그는 
해질 무렵에 뽀또놔르 지방에 접근했다. 그는 전방에 회오리 바람의 꼬리들이 
마치 벽을 쌓아올리듯이 시시각각으로 포위해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이어서 밤의 
장막이 이 전투 준비 위에 내려, 그것들을 숨겨 버렸다. 그리고 1시간 후에 
구름떼 밑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환상적인 왕국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거기에는 바닷물 기둥들이 겹겹이 솟아올라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것들은 
신전의 검은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꼭대기가 부풀어서 
컴컴하고 낮은 폭풍우의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천장의 틈새로는 빛의 자락들이 드리워져 있었고 만월이 기둥 
사이로 바다의 싸늘한 포석 위를 비추고 있었다.
  메르모즈는 이 사람없는 폐허를 가로질러 빛의 물길과 물길 사이로 비껴가며 
바다가 울부짖으며 솟아 올라가고 있음에 틀림없는 그 거대한 기둥들을 피해 돌며 
비행을 계속했다. 달빛의 여울을 따라 4시간을 비행한 끝에 그는 마침내 그 
신전의 출구를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광경이 하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메르모즈는 뽀또놔르를 넘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는 또 생각이 난다. 내가 현실 세계의 변경을 넘어섰던 때의 일들의 하나가. 
그날 밤은 밤새껏 사하라사막의 착륙지에서 보내주는 위치 측정의 무선 유도에 
오차가 심해서 무전사 네리와 나를 완전히 궁지에 빠지게 했다.
  안개가 갈라진 틈 밑으로 물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나는 급히 기수를 해안 쪽으로 
돌렸다. 도대체 몇 시간 전부터 우리가 외양을 향해 달리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우리는 해안에까지 당도할 수 있을런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가솔린도 
떨어질지 모르니까. 그러나 해안에 가 닿는다하더라도 다시 착륙지를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는 달이 질 무렵이었다. 각도 보고가 없어 이미 귀머거리가 된 
우리는 점점 장님이 되어 갔다. 
  마침내 달은 사위어가는 숯불처럼 눈벌판 같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늘은 우리 머리 위에서 역시 구름에 뒤덮여 갔고, 지금부터는 이 구름과 안개 
사이를 모든 빛과 모든 물체가 텅빈 세계 속을 비행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우리에게 응답해주던 여러 비행장들도 우리 자신에 대한 정보를 
보내기를 단념했다. 
  "위치 측정 보고 없음.... 위치 측정 보고 없음...
  왜냐하면 우리들의 목소리가 그들에게는 사방에서 들려왔으므로 결국 
아무데서도 들려오지 않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갑자기 우리가 이미 절망하고 있을 때 전방 좌측 수평선에 반짝이는 점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북받치는 기쁨을 느꼈다. 네리는 내게로 몸을 굽혔고 나는 
그가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착륙 비행
장이며 또 그 등불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하라 사막은 밤이 되면 완전히 
빛을 잃고 하나의 광대한 죽음의 영토를 이루니까.
  그런데 그 불빛은 잠시 반짝이더니 이내 꺼져버렸다. 우리는 사라지기 직전에 
몇 분 동안 안개의 층과 구름 사이의 지평선에 보였던 별 하나를 향해 기수를 
돌렸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또다른 불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우리는 희미한 
희망을 가지고 그 불빛 하나하나에 기수를 돌렸다.
  그리고 그 불빛이 오래 지속되면 우리는 생사에 관계되는 실험을 시도했다.
  "불이 보임. 신호등을 껐다가 세 번 켜라.
  네리는 시스네로스 비행장에 명령했다. 시스네로스 비행장에서는 신호등을 
껐다가 세 번 켰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보던 그 무자비한 불빛, 지조 굳은 
별은 도무지 깜박일 줄을 몰랐다.
  가솔린이 점점 없어져 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번번이 금빛 낚시에 
덤벼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것은 진짜 신호등이었고, 착륙 비행장이었고, 
생명이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별을 바꿔야만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백의 손이 닿지 않는 떠돌이 별 가운데에서 단 하나의 진정한 
별, 우리의 별, 우리 눈에 익은 풍경과 우리들의 정다운 집들과 우리들의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그 별을 찾다가 길을 잃었음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만이 간직하고 있는 단 하나의 별...나는 그때 내 눈앞에 나타난 그 
모습을 말해 보련다. 혹시 당신에게는 유치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사람은 위험의 한가운데에서도 인간으로서의 걱정거리는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나는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만약 우리가 시스네로스를 찾아내기만 하면 가솔린을 보충 받고 비행을 
계속하여 서늘한 새벽녘에 카사블랑카에 착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만 하면 
일은 끝나는 것이다! 네리와 나는 함께 시내로 들어갈 것이다. 새벽녘에 일찍 문을 
여는 작은 술집들이 거기 있다. 네리와 나는 안도감에 젖으며, 전날 밤의 일들을 
웃으면서 뜨끈뜨끈한 끄롸상 빵과 커피 잔을 앞에 놓고 식탁에 마주앉을 것이다.
  네리와 나는 이 생명의 아침 선물을 받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사꾼 할머니는 
하나의 화상이나, 하나의 소박한 염주를 통해서 자기의 신과 만나게 된다.
  우리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한 말로 우리에게 말해야 한다. 그래서 
삶의 기쁨이 내게 있어서는 이 향기롭고 따끈한 처음 한 모금에, 이 우유와 
커피와 밀가루의 혼합물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평화로운 목장들과, 이국의 농장들, 수확물들과 
하나가 되며,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온 대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저렇듯 많은 별 중에서 우리의 능력이 미치는 곳에 자신을 두기 위해, 새벽 
식사의 이 향기로운 그릇을 차려주는 별은 단 하나, 이 지구밖에 없다.
  그런데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가 우리의 비행기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지 
사이에 겹싸여 있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이 성좌들 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한 알의 
먼지 속에 깃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별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천문가 
네리는 계속해서 별들에게 애원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의 주먹이 내 어깨를 쿡 찔렀다. 그 주먹이 알려준 종이쪽지에서 나는 
읽었다.
  "됐어. 멋진 통신을 받았어...."
  그래서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가 우리를 구해 줄 대여섯 마디의 글자를 
마저 써주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나는 받았다. 이 하늘의 선물을.
  그것은 어젯밤 우리가 출발했던 카사블랑카에서의 신호였다. 전송이 늦어졌기 
때문에 이 무전은 2천 킬로 미터나 떨어진 바다 위의 구름과 안개 사이에서 길을 잃은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 온 것이다. 이 무전은 카사블랑카 비행장 주재의 항공관에서 
보낸 것이었다.
  나는 읽었다.
  "쌩 떽쥐뻬리 씨, 귀하는 카사블랑카 출발시 지나치게 격납고 근처를 
선회하였기에 본관은 부득이 귀하의 징계를 파리 당국에 신청함."
  내가 격납고 근처를 너무 가까이 선회한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이 남자가 화를 
내며 직책을 수행하는 것도 틀림이 없다. 나로서도 이 비난을 어느 비행장의 
사무실에서 듣는 것이라면 공손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여기, 와서는 안될 곳에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이 너무나도 
드문드문한 별들, 안개의 층과 위협하는 듯한 이 바다의 맛 사이에서 폭발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굳게 움켜 쥔 손 안에 자신들의 운명을, 우편물과 탑승기의 운명을 
쥐고 있었고, 살기 위해서 많은 곤란을 극복해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는데 이 
관리는 자기의 하찮은 불만을 우리에게 내뱉고 있다.
  그러나 네리와 나는 분노를 느끼기는커녕 도리어 커다란, 그리고 갑작스런 환희를 
느꼈다. 여기, 하늘 밖에 있는 한 우리는 자유였다. 이 사실을 그 조그만 관리는 
우리에게 발견시켜 주었다. 그 하사는 우리가  대위로 승진한 것을 우리 소매를 보고 
몰랐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우리가 이렇게 북두성과 사수좌 사이를 엄숙하게 
오락가락하고 있을 때, 우리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유일한 
문제는 오직 달의 배반뿐인 절박한 이때에 우리의 명상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었다.
  절박한 의무, 저 사람이 존재를 표시하고 있는 저 지구의 유일한 의무는 천체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의 계산의 기초가 되는 정확한 숫자를 알려주는 일밖에 
없다. 그런데 그 숫자들이 엉망이다. 그때 네리가 이렇게 써서 보여준다. 
  "쓸데없는 짓 대신 그들은 우리를 어디로든 이끌어줘야 할 게 아닌가...."
  이 '그들'이란 그에게 있어서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 상원과 하원, 해군, 
육군, 그리고 황제들까지도 통틀어 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대들어 보겠다는 이 정신 나간 친구의 통신을 되읽으며 우리는 
기수를 수성 쪽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실로 기묘한 우연으로 살아났다. 시스네로스로 갈 생각을 단념하고 
해안선을 향해 수직으로 기수를 돌려 가솔린이 다 떨어 질 때까지 방향을 바꾸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순간이 마침내 온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함으로써 바다 속에 잠겨버리지 않아도 될 약간의 찬스를 남겨둔 
것이다. 불행하게도 눈을 속인 그 신호등들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갔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또한 불행히도 일이 가장 잘 되어 유지에 당도했다 하더라도 
한밤중에 짙은 안개 속을 사고 없이 착륙할 수 있는 기회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황이 지극히 분명한 것이어서 나는 우울하게 어깨를 흠칫했다. 그때 네리가 
통신을 건네 주었다. 만약 그것이 한 시간만 일렀더라도 우리를 구해주었을 통신을. 
  "시스네로스가 우리 위치를 측정하기로 결정. 시스네로스의 지정. 확실치는 않으나 
2백 60 도...."
  시스네로스는 이제 어둠 속에 파묻혀 있지 않다. 시스네로스는 저기, 우리 
왼편에 감촉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 
거리는? 네리와 나는 잠시 대화했다. 
  너무나 늦었다. 우리는 같은 의견이었다. 시스네로스는 날아가다가는 도리어 
해안에 도달하지 못할 위험이 커진다. 그래서 네리는 답전했다.
  "가솔린이 한 시간 뿐이므로 기수를 93도로 고정하겠음."
  그러는 중에 비행장이 하나 둘 깨어났다. 우리의 대화에 아가디르, 
카사브랑카, 다까르 비행장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각 도시의 무전 국들이 공항들에 급보를 보낸 것이다. 공항의 주임들은 
동료들에게 급보를 보냈다. 이리하여 그들은 차례차례로 아픈 사람의 침대맡에 
모여들 듯이 우리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것은 소용없는 정열이지만, 그러나 
정열임에는 틀림없다. 헛된 충고이지만, 그러나 얼마나 다정스러운가?
  그런데 갑자기 뚤루즈가 나타났다. 항공로의 시발점인 뚤루즈가 4천 킬로 
미터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우리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느닷없이 묻는 것이었다.
  "귀기는 F....'등록표지는 잊었다'가 아닌가?"
  "그렇다."
  "그렇다면 가솔린은 아직 두 시간 분이 있음. 그 기의 탱크는 표준형이 아님. 
시스네로스로 기수를 돌려라."

  이와 같이 직업이 강요하는 필요성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뀌게 하고 또한 
풍요롭게 만든다. 정기 항공로의 조종사로 옛 풍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와 같은 밤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승객들의 눈에는 싫증나고 단조로운 풍경도 승무원에게는 색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지평선을 가로막는 저 구름 떼도 승무원에게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고, 승무원들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그에게 여러 문제를 던져주는 것이다.
  벌써 그는 그 구름 떼를 고려하고 그것을 자질한다. 그러면 어떤 참된 언어다 
되어 그들과 구름 떼를 연결시켜 준다.
  여기 산봉우리가 하나 보인다. 아직은 멀리 있다. 그것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달빛 아래서는 그것은 그것은 편리한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조종사가 
만약 사리 분별에 어두운 안목으로 비행을 할 경우, 또는 기류 때문에 수평으로 
밀려 항로에서 벗어났을 때 수정이 곤란하고 자기 위치에 의심이 갈 경우에 그 
경우에 그 산봉우리는 폭발물로 변하고, 밤 전체를 위험으로 가득 채우고 만다. 
마치 물 속에 잠겨 해류를 따라 표류하는 단 하나의 기뢰가 온 바다를 망쳐 놓듯이.
  이와 같이 해양도 변한다. 단순한 여객에게는 폭풍우도 보이지 않는다. 아주 
높은 곳에서 보면 파도는 전혀 두드러져 보이지 않고, 그 물거품 덩어리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엽맥과 얼룩이 보이는 커다란 흰 종려나무 잎사귀 같은 것이 서리에 
얼어붙은 듯이 해면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승무원들은 이런 곳에는 
수면에 내리는 게 금지되어 있음을 판단한다. 그러한 종려잎은 그들에게는 커다란 
독있는 꽃으로 보인다.
  또 비록 그날의 비행이 행복한 것이었을 경우에도 항공로의 어느 한 부분을 
비행하고 있는 조종사는 그저 단순한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땅과 
하늘의 저 빛깔, 해상의 저 바람의 발자국들, 황혼의 저 황금빛 구름들, 이런 
것들을 그는 감탄하지 않고 그것들을 묵상한다. 자기의 논밭을 돌아보는 농부가 
천 가지 징조에 의해서 봄이 다가오는 것과, 서리의 위협과, 비가 올 기운을 
짐작하는 것처럼 직업 조종사도 또한 눈의 조짐과 안개의 조짐, 다행한 밤의 
조짐을 읽어내는 것이다.
  기계, 처음에는 그를 자연계의 큰 문제들로부터 멀리 떼어 놓을 것 같았던 
기계가 오히려 보다 더 엄격히 그를 그러한 문제들에 맞서게 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이 마련해 주는 광대한 법정 한가운데서 이 조종사는 혼자서 
산악과 해양과 번개와 비라는 개벽 이래의 세 가지 신들을 상대로 자기의 우편 기를 
사이에 두고 겨루는 것이다. 
    [  2. 동료들

      (1)
  메르모즈도 그 한 사람이지만, 몇 명 동료들이 귀순하지 않은 사하라 사막을 
거쳐 카사블랑카에서 다까르 사이의 프랑스 항공로를 창설했다.
  당시의 엔진은 별로 저항력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은 고장이 메르모즈를 
모르인들에게 붙잡히게 했다. 그들은 메르모즈를 학살하기를 주저하고 15일 동안 
포로로 가둬두었다가 그를 되팔았다. 그래서 메르모즈는 다시 같은 영토 위를 나는 
우편비행에 복귀했다.
  남아메리카 항로가 개설되자, 항상 선두에 서는 메르모즈는 부에노스아이레레스와 
산띠아고 구간의 항공로 조사를 위임받았다. 즉, 사하라 사막 위에 다리를 놓은 뒤를 
이어 안데스 산맥 위에 다시 다리를 놓게 된 셈이다.
  그에게는 상승 한도 5천 2백 미터의 비행기가 주어졌다. 그러나 안데스 산맥의 
높은 봉우리들은 7천 미터나 솟아 있었다. 그런데도 메르모즈는 통로를 찾기 위해 
이륙했다. 사막을 정복한 후에 메르모즈는 산에 
도전한 것이다. 산이라지만 그쪽 고봉들은 바람이 불면 눈보라의 띠를 펼쳐놓고, 
폭풍에 앞서 온 천지를 창백하게 하고, 비행기를 아주 심하게 동요시키는 역류, 
이런 것들을 바위의 절벽 사이에서 만나게 되면 조종사는 일종의 백병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메르모즈는 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러한 굴레로부터 살아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채, 싸움에 뛰어들었다. 메르모즈는 남들을 위해 '해보는' 것이었다.
  마침내 어느날 이렇게 '해보다'가 그는 자신이 안데스 산의 포로가 된 것을 알았다.
  4천 미터 높이의 절벽에 둘러싸인 곳에 불시착한 그와 기관사는 이틀 동안이나 
그곳에서 탈출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빠져 나갈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운명을 걸고 비행기를 허공으로 내몰았다. 비행기는 울퉁불퉁한 땅 위를 
절벽 끝까지 튀어 올랐고, 그들은 거기서 굴러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비행기는 
필요한 속력을 내게 되어 다시 조종사의 말을 듣게 됐다.
  메르모즈는 산봉우리를 날아 그곳에 도달했으나 밤 사이에 얼어 터진 모든 
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 때문에 비행 7분만에 다시 엔진이 정지됐으나 마치 
약속의 땅처럼 그들의 눈 아래 칠레의 평원을 보았다.
  이튿날 메르모즈는 또다시 시작했다. 안데스 산맥이 샅샅이 탐험되고, 횡단 
기술이 잘 조정되자 메르모즈는 이 구간을 동료인 기요메에게 맡기고 자기는 밤의 
탐험에 나섰다. 착륙 비행장에 조명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캄캄한 
밤이면 착륙장에는 초라한 가솔린 등이 3개 메르모즈 앞에 켜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것을 해내어 야간비행의 길을 열어 놓았다. 밤을 완전히 길들이고 나자 
메르모즈는 대양을 시험했다. 이리하여 1931년부터 처음으로 뚤루즈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우편물이 나흘만에 운반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메르모즈는 남대서양 한복판의 풍랑 높은 바다 위에서 가솔린이 떨어졌다. 
지나가던 기선이 그와 우편물과 승무원을 구출해 주었다.
  이와 같이 메르모즈는 사막과 밤과 바다를 개척했다. 그는 몇 번이나 모래 속에, 
산 속에, 밤 속에 바다 속에 빠져들어 갔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12년 동안을 근무한 후, 또다시 남대서양을 횡단하던 중 그는 '후방 
우측 엔진을 끈다' 하는 짤막한 통신을 보내왔다. 그리고는 침묵이 흘렀다.
  이 소식은 그다지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이 10분 동안 계속된 
뒤에는 파리에서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르는 항공로의 모든 무전 국들은 가슴 
조이며 경비에 들어갔다. 왜냐하면 10분간의 지각이란, 일상 생활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지만 우편비행의 경우에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 죽은 시간 속에는 어떤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무의미한 것이든, 또는 불행한 것이든 그것은 그 이후에 진행되었을 것이다. 
운명이 판결을 내렸을 것이고, 이 판결에는 상소할 길이 없다. 어떤 무쇠 같은 
손이 승무원들을 무사히 착수시켰던가, 아니면 파멸로 이끌어 갔을 것이다. 다만 
그 판결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통고되지 않는다.
  우리들 중의 그 누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갈수록 더욱 
희미해져가는 그 희망과, 치명적인 병처럼 시시각각으로 악화되어 가는 그 침묵을.
  메르모즈는 분명히 자기가 한 일 뒤에 숨어 버린 것이다. 마치 보릿단을 잘 묶고 
나서 자기 밭에 드러눕는 타작군처럼.

  한 사람의 동료가 이렇게 죽을 때 그의 죽음은 그래도 직무상의 질서에 따른 
행동처럼 생각되어 처음에는 다른 죽음보다 덜 상심이 되는 것 같다. 물론 그는 
마지막 전근 명령을 받고 멀리 떠나갔다. 그러나 그가 없어진 것은 빵이 없어졌을 
때만큼 우리에게 그 아쉬움이 절실하지는 않다. 
  우리들은 사실 서로의 만남을 오랫동안 기다리는 버릇에 젖어 있다. 항공로의 
동료들은 파리에서 칠레의 산티아고에 이르기까지 온 세계에 흩어져 있어 별로 
말을 주고받을 기회가 없는 보초들처럼 약간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흩어져 있는 이 직무상의 대가족들이 여기 저기서 서로 만나려면 여행의 우연이 
있어야 한다. 카사블랑카나, 다까르나, 혹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어느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그들은 여러 해 동안의 침묵 뒤에, 중단되었던 대화를 다시 
시작하고, 옛 추억을 서로 잇는다. 그리고는 다시 출발한다.
  대지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 황량하기도 하고 풍요롭기도 하다. 감춰져 
있어서 다다르기는 힘들지만, 어느 날엔가는 우리의 직업이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 
줄 은밀한 정원들이 지상에는 수많이 있기 때문에 풍요롭다.
  생활이 우리를 떼어놓기 때문에 우리는 동료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가에 있다. 어딘지는 몰라도, 조용하게 잊혀진 채, 그러나 
지극히 믿음직하게!
  그래서 우리가 혹시 그들의 길을 마주쳐 지나가기라도 하면 그들은 아름다운 
기쁨의 불꽃을 보이며 우리의 어깨를 흔들어 주곤 한다! 물론 우리는 기다리는 
습성에 젖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차츰 우리는 그 사람의 밝은 웃음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정원이 우리에게는 영원히 닫혀져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들의 진정한 초상, 가슴을 찢는 듯한 슬픔은 
아니지만, 약간 마음이 쓰라린 초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아무것도 죽은 동료를 대신할 수는 없다. 오랜 벗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아무것도 그 많은 공통된 추억, 함께 겪었던 위험한 시간들, 그 많은 불화와 
화해, 마음의 설렘 등의 보물만큼 값진 것은 없다. 이러한 우정은 다시는 되살릴 
수 없다. 떡갈나무를 심고, 바로 그 그늘에서 쉬려 한들 헛일이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먼저 우리들 자신을 풍부하게 하고, 여러 해 동안 
나무를 심어 왔다. 그러나 시간 이 작업을 무너뜨리고 나무를 베어 내는 해들이 
오게 된 것이다. 동료들이 하나 둘 우리에게서 그들의 그림자를 앗아간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우리들의 슬픔에 늙어감에 대한 남모르는 회환이 섞이는 것이다.
  이것이 메르모즈와 그밖의 동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다. 어떤 작업의 
위대함이란 어쩌면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결합시키는데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사치란 인간 관계의 사치뿐이다.
  오직 물질적인 재물만을 위해 일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옥을 쌓아 올리고 
있다. 삶에 보람을 주는 아무것도 살수 없는 재물과 같은 돈을 안고 우리 자신을 
고독 속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내 추억 속에서 오래 남을 기쁜 맛을 남겨 준 사람들을 찾아보거나 보람있는 
시간들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본다면 내가 되찾는 것은 어김없이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 뿐이다. 메르모즈 같은 친구의 우정이나, 함께 시련을 
겪음으로써 영원히 맺어진 어느 동료의 우정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그 야간비행의 밤과, 그 천만 개의 별들, 그 고즈넉함, 그 몇 시간 동안의 
절대력, 이런 것들은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다.
  어려운 비행을 한 후의 세계의 새로운 모습, 저 나무들, 저 꽃들, 저 여인들, 저 
미소들, 새벽녘에야 우리에게 돌아온 생명에 의해 싱싱하게 채색된 우리의 노고에 
보답하는 이 하찮은 것들의 콘서트, 이런 것들을 돈으로는 살 수 없다. 
  그리고 그 때의 추억이 지금 생각나는, 돌아올 수 없는 지대에서 겪은 그 
하룻밤도 또한 그런 것이다.

  우리는 해질 무렵에 리오 데 오로 해안에 불시착한 우편 항공회사 소속의 3조의 
승무원들이었다.
  동료 리겔이 맨 먼저 크랭크 고장으로 착륙했다. 다른 동료인 부르가가 그 
승무원들을 태우려고 착륙했다가 대수롭지 않은 고장으로 그까지도 땅에 붙들리고 
말았다. 끝으로 내가 착륙했었는데, 내가 참여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부르가의 비행기를 구해 내기로 작정하고, 완전한 수리를 위해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1년 전에, 바로 이곳에 불시착한 우리의 동료, 구르와 에라블이 불귀순민들에게 
학살당했었다. 우리는 지금도 소총 3백정을 가진 모르인 도둑들이 보자도르 부근 
어딘가에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멀리서도 보았을 우리들의 3번의 
착륙이 그들에게 경비 태세를 취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 밤샘을 시작했다.
  우리는 밤을 지샐 준비를 했다. 화물 실에서 대여섯 개의 상품 궤짝을 끌어내어 
속을 비우고 둥그렇게 늘어놓고 하나하나의 궤짝 안에는 병사들이 보초막 
구덩이에다 그렇듯이 바람에 가물거리는 빈약한 촛불을 켜 놓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 지구의 벌거벗은 껍질 위에 천지창조 때와 같은 고독 
속에 인간의 마을을 세운 것이다.
  우리들 마을의 이 큰 광장 위의 빈 궤짝들이 떠는 불빛을 흘리고 있는 사막 한 조각 
위에 밤새껏 모여 앉아 우리는 기다렸다. 우리를 구원해줄 새벽을, 혹은 모르인의 
공격을...그런데 그 무엇이 그 밤에 크리스마스와도 같은 흥취를 주었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는 서로 추억을 이야기했고, 농담을 주고받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잘 차려진 축제의 한창 때와도 같은 가벼운 흥분을 맛보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한히 가난했다. 바람과, 모래와, 별들. 그것은 마치 트라피스트 
수도사에게나 알맞은 엄한 생활 양식이었다. 그런데도 이 어두컴컴한 모래의 
식탁보 위에서 자기들의 추억 말고는 이 세상에서 이미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예닐곱 명의 사내들은 보이지 않는 보화를 서로 나누고 있었다.
  우리들은 마침내 만나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침묵 속에 갇힌 채 
오랫동안 나란히 걸어가거나 또 는 아무 감동도 옮기지 않는 말들을 교환한다.
  그러나 위험에 부닥치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 돕는다. 그들은 한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발견함으로써 사람은 자신을 넓혀간다. 사람들은 큰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본다. 그때 사람은 바다의 드넓음에 경탄하는 해방된 죄수와도 
같다.

      (2)
  기요메, 나는 자네에 관해서 몇 마디 해야겠네. 그러나 안심하게. 자네의 
용기라든가, 자네의 직업상의 가치에 대하여 미련하게 강조해서 자네를 난처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
  자네의 그 많은 모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하나를 이야기함으로써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일세.
  무어라고 부르면 좋을지 알 수 없는 미덕이 있다. 그것은 '의젓함'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 말도 흡족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미덕은 더없이 맑은 
쾌활함을 수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무토막 앞에 대등한 기분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만져 보고, 치수를 재고, 경솔하게 다루지 않고, 자기의 온 
정성을 집중시키는 목수의 미덕 바로 그것이다.
  기요메, 나는 언젠가 자네의 모험을 찬양한 어떤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후 나는 
이 부정확한 '아마쥬'를 시정해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네. 그 글 
속에서 '건달패'같은 재담을 해대면서 마치 용기라는 것이 급박한 위험 속에서나 
죽음의 순간에 처해서 중학생들이나 할 농담을 하는 비굴함에 있는 것 같은 자네를 볼 
수 있었네.
  그것은 자네를 이해하지 못한 말이네. 기요메, 자네는 적과 대결하기 전에 상대를 
조롱할 필요를 느낄 남자는 아니네. 몹쓸 폭풍우에 부닥치면 자네는 판단할 걸세. 
'이건 몹쓸 폭풍우로군.' 자네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재어 볼 걸세.
  기요메, 나는 내 추억의 증인으로서 자네를 여기에 끌어 왔네.

  겨울에 안데스 산맥을 횡단하던 중에 자네는 50시간이나 행방불명이 되었었네.
  빠따고니아의 오지로부터 돌아오던 나는 멘도사에서 조종사 들레이와 합류했네. 
우리 두 사람은 닷새 동안을 각기 비행기로 그 산더미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네. 우리 두 비행기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네. 백 개의 비행 편대가 백년 동안을 날아다닌다 해도 
7천 미터에 달하는 고봉을 포함하는 이 거대한 산악 덩어리를 모두 탐색할 수는 
없으리라고 말이네.
  우리는 모든 희망을 잃었네. 그 나라의 밀수업자들, 평소에는 단돈 5프랑을 
위해서도 범죄를 청부받는 산적들까지도 구조대에 끼어 그 산악 부벽 위에서 
모험하기를 거절했네.
  '거기선 목숨이 위험하니까.'라고 그들은 말했네.
  '안데스 산은 겨울에는 사람을 돌려 보내주지 않는 걸요'
  들레이와 내가 산티아고에 착륙했을 때 칠레의 장교들도 역시 수색을 
중지하라고 충고했네.
  '지금은 겨울이오. 당신의 동료가 설령 추락할 때 살아 있었더라도 밤의 추위는 
견뎌내지 못했을 거요. 저 위에선 밤이 사람을 스쳐가기만 해도 얼음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니까요.'
  어쨌거나 내가 다시 안데스의 거대한 절벽과 기둥들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을 
때, 사실 나는 자네를 찾는다기보다는 눈의 대성당 안에 말없이 누워 있는 자네 
시체를 지키고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네. 
  마침내 이레째 되던 날, 비행을 마치고 다음 비행을 기다리는 사이 멘도사의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네. 한 사나이가 문을 밀고 소리쳤네. 
그것은 짤막한 말이었네.
  "기요메가.... 살아 있어!"
  그러자 거기 있던 낯선 사람들이 서로를 껴안았다.
  10분 후, 나는 르페브르와 아브르의 두 기관사를 태우고 이륙하고 있었네. 40분 
후, 나는 어떻게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모르지만, 쌍 라파엘 쪽으로 어디인지 
자네를 싣고 가는 자동차를 알아보고는 어느 길가에 착륙했네.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해후였네. 우리는 모두 울었네. 그리고 자네를 
으스러져라 껴안았네 살아 있는, 부활한, 자신의 기적을 만든 자네를 말이네.
  그때 자네는 말했네. 그것은 알아 들을 수 있는 자네의 첫 마디 말이었고, 또 
찬탄할 만한 인간의 긍지이기도 했네.
  "내가 한 일은, 자네에게 맹세하네만, 어떤 짐승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어."

  그후, 자네는 우리에게 조난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네.
  48시간 동안 5 미터 두께의 눈을 안데스 산맥의 칠레 쪽 산허리에 퍼부었던 폭풍이 
온 천지를 가로막았고, '팬 에어' 회사의 미국 조종사들은 되돌아갔다. 그런데도 
자네는 하늘의 찢긴 틈을 찾아 이륙했다. 자네는 약간 남쪽에서 그 함정을 발견했다. 
그리고 6천 5백 미터 내외로 고도를 유지하고, 다만 높은 봉우리들만이 솟아 올라 
있는 6천 미터 높이의 구름들을 굽어보며 아르헨티나로 기수를 돌렸다.
  하강기류는 가끔 조종사들에게 묘한 불쾌감을 주는 수가 있다. 엔진은 이상없이 
도는데 비행기는 하강한다. 고도를 유지하려고 급상승한다. 그러면 비행기는 
속력을 잃고 흐느적거린다. 기체는 자꾸만 하강을 계속한다. 이번에는 너무 
급상승시켰나 싶어서 손을 늦춘다. 도약대처럼 바람을 받아줄 적당한 봉우리에 
숨어보려고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비행기를 표류시켜 보았으나 하강은 계속된다.
  하늘 전체가 꺼져 내리는 것만 같다. 이런 때 사람들은 우주의 대 이변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젠 피난할 곳도 없다. 공기가 단단하게 차 있어서 
기둥처럼 기체를 받쳐 줄 지대로 되돌아가려고 뒤로 반 회전해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기둥은 이미 아무 데도 없다. 모든 것이 분해되고 사람은 우주의 붕괴 속으로 
뭉게뭉게 그가 있는 데까지 피어올라와 마침내 그를 삼켜 버리는 구름 쪽으로 
미끄러져 간다.
  "나는 이미 꼼짝 못하게 되어버렸어. 그러나 난 아직 단념하지 않았네."
  자네는 말했었지.
  "안정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름 위에서도 하강기류를 만나는 때가 있는데, 
그건 구름이 같은 높이에서 끊임없이 자꾸만 생겨나기 때문이다. 정말 고산 
위에서는 모든 것이 이상야릇하거든...."
  그리고 그 구름들이라니!
  "구름에 붙잡히자마자 나는 조종간을 놔 버릴 수밖에 없었네. 기체 밖으로 
팽개쳐지지 않으려고 의자를 꼭 움켜잡아야만 했거든. 충격이 어찌나 심했던지 
안전 벨트가 어깨에 파고 들어 당장 끊어져 나갈 것 같았네. 게다가 성에가 
심하게 끼어 계기의 수평을 전혀 알아볼 수 없어서 나는 6천, 3천, 5백 미터로 
모자처럼 굴러 떨어졌네."
  "3천 5백 미터에서 나는 수평으로 펼쳐진 어떤 검은 덩어리를 언뜻 보았네. 
그래서 나는 비행기를 다시 수평으로 세울 수가 있었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다이아몬드' 호수였네. 나는 그것이 깔때기 모양을 한 산골짜기 밑바닥에 
위치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깔때기 벽의 한쪽이 마이쀼 화산인데, 6천 9백 
미터나 솟아 있거든. 겨우 구름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빽빽한 눈보라의 
소용돌이 때문에 앞이 안보였네. 그래서 이 깔때기의 한쪽 옆구리를 들이받지 
않고는 호수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호수 둘레를 
30미터의 높이로 가솔린이 다 떨어질 때까지 빙빙 돌았네. 2시간 동안을 탑돌이를 
한 뒤에 나는 내려앉다가 뒤집혀 버렸네. 기체에서 기어 나오자 태풍이 나를 
쓰러뜨려 버렸네. 나는 다시 일어섰지. 그러나 태풍은 또다시 나를 자빠뜨렸네. 
하는 수 없이 기체 밑으로 기어 들어가 눈 속에 구멍을 파는 수밖에 없었네. 
거기서 나는 우편 행낭을 둘러 쓰고 48시간을 기다렸던 거네. 그런 후에 태풍이 
가라앉자 나는 걷기 시작했네. 나는 닷새 나흘 밤을 걸었네."

  그런데 기요메, 자네의 무엇이 남았단 말인가? 우리는 자네를 다시 찾아내기는 
했지만 자네는 새까맣게 타고, 빳빳해지고, 노파처럼 오그라들어 있었는데!
  그날 저녁, 나는 바로 자네를 비행기에 싣고 멘도사로 데려갔네. 그곳에서는 
하얀 시트가 향유처럼 자네 위에 흘렀네. 그러나 그것들이 자네를 낫게 하지는 
못했네. 자네는 그 지쳐버린 몸을 어찌할 바를 몰라 잠 속에 빠지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했네.
  자네의 몸은 바위들도 눈들도 잊지를 못했네. 그것들이 자네 몸에 낙인을 찍어 
놓았던 것이네. 나는 얻어맞고 물크러진 과일처럼 부어오른 자네의 시커먼 얼굴을 
지켜 보았네.
  자네 일에 쓰이는 그 훌륭한 연장의 사용을 잃어버린 자네는 몹시 추하고 
비참했네. 자네 손은 마비된 채로 였고, 숨을 쉬기 위해 침대 가에 앉아 있을 
때면 동상 걸린 다리가 두 개의 죽은 시계추처럼 축 늘어져 있었네.
  자네는 아직도 자네의 고난의 여행을 끝내지 못하고,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네. 그리고 안식을 찾아 베개 위에 몸을 누이기가 무섭게 억누르지 못한 
환영의 행렬이, 무대 위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행렬이 자네 두 개골 밑에서 
당장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네. 그 행렬은 행진을 계속했고 자네는 그 잿더미 
속에서 되살아나는 적에 대항하여 스무 번이나 싸움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네.
  나는 자네를 위해 다시 탕약을 따랐네.
  "마시게! 이 친구야."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건... 자네도... 알겠지만...."

  이기기는 했지만 심한 타격으로 멍든 권투선수같은 자네는 자네의 기이한 
모험을 재현하는 것이었네. 그리고 자네는 조금씩 거기서 벗어나고 있었네.
  나는 자네의 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네의 모습을 역력히 보았네. 자네가 
알펜스토크(등산 지팡이)도, 로우프도, 식량도 없이 걷고 있는 모습을 4천 5백 미터의 
높은 고개를 넘어, 또는 절벽을 따라 영하 40도의 혹한 속을 발과, 무릎과,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기어 걸어가는 모습을 차츰 온몸의 피를, 힘을,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자네는 개미 같은 끈기로써 전진했네. 장애물을 돌아가기 위해 가던 길을 
되돌아오기도 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났고, 절벽으로 가로막힌 비탈도 올라갔네.
  사실 미끄러졌을 때는 돌덩이로 변해버리지 않기 위해 재빨리 일어나야만 했네 
추위는 시시각각으로 자네를 돌로 만들었고, 굴러 넘어진 다음 단 1분간이라도 더 
쉬려다가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죽은 근육을 움직이게 해야만 했네.
  자네는 온갖 유혹에도 견뎌냈네. 자네는 이렇게 말했지.
  "눈 속에서는 자기 보존의 본능이 모두 없어져 버리네. 이틀, 사흘, 나흘을 
걷기만 하니까 자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어진단 말일세. 나도 그랬어. 그러나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네."
  "내 아내가 만약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걷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을 거다. 동료들도 내가 걷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모두들 나를 믿고 있다. 
그런데 내가 걸어가지 않는다면 나는 못난 놈이다 라고 말일세."
  그래서 자네는 줄곧 걸었네. 그리고 나이프 끝으로 날마다 조금씩 더 구두의 
운두를 잘라 내어 동상으로 부은 발이 들어가도록 했네.
  자네는 또 이런 이상한 고백을 들려 주었지.
  "이틀째부터 내 가장 큰 일이 뭐였는지 알겠나? 자신에게 생각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네.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또 내 처지가 너무나 절망적이었네. 걸어갈 
용기를 가지려면 이런 상태를 생각하지 말아야 했네. 그런데 곤란하게도 머리가 
말을 잘 듣지 않았어. 그놈은 마치 터빈처럼 돌아가는 거야. 다만 나는 대상물을 
골라 줄 수는 있었네. 나는 내 머리를 전에 본 책이나 영화에 집중시켰네. 그러면 
그 영화나 책이 내 머리 속을 줄달음쳐서 지나갔네. 그리고는 이내 그것이 나를 
또다시 지금의 처지로 되끌고 오는 걸세, 어김없이, 그러면 나는 또 머리를 다른 
추억으로 돌리곤 했네."
  그런데 한 번은 미끄러져서 눈 속에 배를 깔고 엎어졌을 때. 자네는 일어나기를 
단념해 버렸네. 자네는 마치 결정적인 일격을 받고 모든 정열을 상실한 권투 
선수가, 아득한 세계 속에서 1초 1초가 마지막 10초째까지 떨어지는 것을 듣고 
있는 것과도 흡사했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희망은 전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고통을 계속하려는 걸까?"
  이 세상에서 평화를 얻으려면 자네는 눈만 감으면 되었네. 이 세상에서 바위와, 
얼음 덩이와, 눈들을 지워 없애려면 말이네. 이 기적과도 같은 눈꺼풀을 감기만 
하면 타격도, 전락도, 찢겨진 근육도, 타는 듯한 동상도, 황소처럼 끌고 가야 할 
짐수레보다도 무거운 삶의 짐도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이미 자네는 독약으로 바뀐 추위, 이제는 모르핀처럼 자네를 큰 행복으로 
채워주는 그 추위를 맛보고 있었네. 자네의 생명은 심장 둘레로 피난하고 있었네. 
달콤하고도 귀중한 그 무엇이 자네 자신의 한가운데에 도사리고 있었네. 자네의 
의식이 이제까지 고통으로 가득한 짐승 같았던 자네 육체의 먼 부분을 차츰 
버려갔고, 벌써 대리석과도 같은 무관심을 물려받고 있었네.
  자네의 걱정마저도 가라앉았네. 이제는 우리가 부르는 소리도 자네에겐 이르지 
못했고, 더 정확히 말해서 자네에겐 그것이 꿈속에서 부르는 소리로 바뀌고 
있었네. 자네는 행복한 기분으로 꿈 속을 걸으며 그에 응답했네. 평야를 걸어가는 
즐거움을 쉽사리 자네에게 갖다 주는 편하고도 큰 걸음걸이로.
  자네는 자네를 위해 그렇게도 다정해진 세계 속으로 얼마나 기분 좋게 미끄러져 
갔던가! 기요메, 자네는 인색하게도 우리에게 돌아오기를 거부하기로 결심했었네.
  뉘우침이 자네의 양심 밑바닥으로부터 왔네. 꿈 속에 갑자기 명확한 현실의 
일들이 섞여 들었던 것이네.
  "나는 아내를 생각했네. 내 보험증서가 아내를 궁핍에서 구해 주겠지. 그러나 
보험이란...."
  실종인 경우, 법률상의 사망은 4년 후로 연기된다. 이 생각이 다른 영상들을 지워 
없애고, 또렷하게 자네 마음 속에 나타났네. 그런데 그때 자네는 급경사진 눈 비탈에 
배를 깔고 엎어져 있었네. 자네 몸뚱이는 여름이 되면 이 흙탕물에 섞여 안데스의 
수많은 늪 중의 하나로 굴러 들어갈 것이다. 자네는 그것을 알았네. 그러나 자네는 
또한 50미터 앞에 바위 하나가 솟아나 있다는 것도 알았네.
  "나는 생각했네. 내가 다시 일어만 난다면 저기까지는 갈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내 몸을 저 바위에 기대 두면 여름에 날 찾아 낼 수 있을 거다."
  한번 일어서자 자네는 이틀 밤 사흘 낮을 걸었네.
  그러자 자네는 멀리 갈 생각은 하지 않았네.
  "나는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걸 여러 가지 징조로 알았네. 그 중의 하나는 이런 
거였네. 나는 대략 2시간마다 구두 운두를 더 잘라 내거나, 부어 오는 발을 
눈으로 문지르거나, 또는 다만 심장을 쉬게 하기 위해 멈춰서야만 했네. 그런데 
마지막 며칠이 되자 기억력이 없어지더군. 다시 걷기 시작해서 꽤 시간이 
지나서야 머리 속에 퍼뜩 생각나는 걸세. 나는 번번이 무엇인가를 잊곤 했네. 첫 
번은 장갑 한 짝이었는데, 그 혹한에 그건 중대한 일이었지! 나는 그것을 내 앞에 
벗어 놓았다가 집지 않고 그대로 떠났던 거네. 다음은 시계였어. 다음은 나이프, 
또 다음은 나침반, 쉴 때마다 나는 가난해져 갔네.
  살아날 길은 한 걸음을 내디디는 것뿐이었네. 또한 걸음, 언제나 같은 한 
걸음을 다시 내디디는 거였네...."
  "내가 한 일은, 맹세하네만, 어떤 짐승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네."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고귀한 이말, 인간을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에 앉히고, 
그를 영예롭게 하고, 진정한 계급을 결정해 주는 이 말이 내 기억에 되살아난다.
  자네는 마침내 잠들었다. 자네의 의식은 이미 없어 져 버렸지만 이 상처입고, 
구겨지고, 타버린 육체로부터 잠이 깸과 더불어 되살아나서 다시금 이 육체를 
지배하려 하는 것이다.
  이때 육체는 하나의 정교한 도구, 하나의 좋은 하인일 뿐이다. 이 정교한 
도구에 대한 자랑을, 기요메, 자네는 이렇게 표현했네.
  "먹지도 못한 채 사흘이나 걷고 나니... 심장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리라는 
건 자네도 짐작이 가겠지. 그런데 말일세! 깎아지른 듯한 비탈에서 허공에 
매달려서 손잡이가 될 구멍을 눈 속에 파내면서 더듬어 가는 그때 심장이 뛰질 
않는 걸세. 멈칫멈칫하더니 다시 뛰겠지. 고르지가 않은 거야. 1초만 더 심장이 
멈칫거려도 나는 손을 놔버릴 것만 같았어. 나는 꼼짝도 않고 내 가슴 속에 귀를 
기울였네. 자네, 알겠나? 나는 일찍이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도 그 몇 분 동안 내 
심장에 매달리듯이 그만큼 바싹 엔진에 매달려 본 적이 없었네.

  내가 자네를 밤새워 간호하던 멘도사의 그 병실에서 자네는 마침내 숨이 찬 
잠이 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면 기요메는 어깨를 흠칫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겸손을 찬양하는 것도 또한 그를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이런 
평범한 미덕을 훨씬 넘어서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용기를 찬양 받고 그가 어깨를 
흠칫한 것은 그의 총명 때문이다.
  그는 알고 있다. 사람이란 일단 사건 속에 휘말려 들면 더 이상 겁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오직 미지의 것만이 사람들을 겁나게 한다. 그러나 그것도 누구든 
그것에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미지의 것이 아니다. 하물며 이렇게도 총명한 
신중함으로 그것을 관찰하는 때는 더욱 그렇다 기요메의 용기는 무엇보다도 그의 
곧은 성격의 결과인 것이다.
  그의 참된 미덕은 여기에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자기의 책임을 느끼는데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우편물에 대한, 또 기다리는 동료들에 대한 책임. 그는 
그의 손안에 그들의 슬픔도 기쁨도 쥐고 있다. 저기 살아있는 인간들 속에 새로이 
건설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책임, 그것에 참여해야만 한다. 자기 직무의 범위 
내에서 인간의 운명의 일부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도 또한 자기의 잎사귀들로 드넓은 지평선을 뒤덮는 역할을 맡은 위인들 중에 
끼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빈곤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다. 또 그것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으로 아는 일이다. 또 자기의 돌을 갖다 놓으면서 
세계의 건설에 가담한다고 느끼는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사람들을 투우사나 도박꾼들과 혼동하려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죽음을 가벼이 여긴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비웃는다. 그 죽음이 맡은바 책임감에 뿌리박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은 
빈약함의 표시이거나 젊음의 과잉일 뿐이다.
  나는 자살한 어떤 젊은이를 알고 있다. 어떤 사랑의 괴로움이 그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자기 심장에 총알을 쏘아 박히게 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문학적인 유혹에 빠져 그 손에 흰 장갑을 끼었는지 모른다. 다만 내게 생각나는 것은 
이 애처로운 광경 앞에서 숭고하다기보다는 천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그렇게도 사랑스러운 얼굴 뒤에 그 사람의 두개골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다른 소녀들과 똑같이 어리석은 한 소녀의 모습밖에는.
  이 초라한 운명 앞에서 나는 인간의 참다운 죽음의 하나를 기억해냈다. 내게 
이렇게 말하던 한 정원사의 죽음을.
  "아시겠지만... 땅을 파면 때때로 땀을 흘리죠 신경통으로 다리가 땅기거나 하면, 
나도 이 종살이 같은 일을 저주도 했습죠 그런데 지금은요, 땅을 파고, 또 파고 싶기만 
하거든요. 땅을 판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땅을 파고 있으면 
이렇게 마음이 편한 걸입쇼! 또, 내가 안하면 누가 이 나무들을 손질해 주겠어요?"
  그는 갈아야 할 땅을 남기고 갔다. 갈아야 할 지구를 남기고 간 것이다.
  그는 사랑으로써 모든 땅과 땅 위의 모든 나무들과 맺어져 있는 것이다.
  그이야말로 관대한 사람이며, 멋있는 낭비자이며, 위대한 영토의 주인이었다! 
그이야말로 자기의 '창조'를 위해서 죽음과 겨루어 싸웠던 때, 기요메처럼 용기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  3. 비행기

  기요메, 자네가 일하는 낮과 밤이 설사 압력계를 점검하고 자이로스코우프로 
기체의 평형을 유지하고, 엔진의 숨결을 청진하고, 15톤의 금속을 어깨로 
떠받치는 일로 흘러간다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네에게 부과된 문제들은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그래서 자네는 단번에 시골사람의 
그 고귀함과 쉽사리 맺어지는 것이다. 시인과도 같이 자네는 새벽의 예고를 즐길 줄도 
안다. 고난의 밤의 심연 속에서 자네는 그 몇 번이나 저 창백한 꽃다발, 캄캄한 땅을 
동녘에서 솟아오르는 저 광명이 나타나기를 희원했던가. 이 기적의 샘이 때로는 자네 
앞에서 천천히 해빙하여 자네가 죽는 물로 체념했을 때 자네를 고쳐주곤 했다.

  정교한 기계의 사용이 자네를 무미건조한 기술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급속한 
기술의 발달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단순히 물질적인 재물만을 바라고 싸우는 사람은 누구나 삶에 보람이 있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 쟁기와 같은 하나의 연장이다.
  기계가 인간을 해친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당한 것과 
그렇게 급속한 변화의 결과를 비판하는데 필요한 시간적인 거리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 역사의 20만 년에 비한다면 기계의 역사의 1백 년 따위가 
무슨 문제란 말인가?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 겨우 이 광산이나 발전소의 풍경 속에 겨우 자리잡은 
셈이다. 우리는 채 다 짓지도 못한 새집에 살기 시작한 셈이다.
  우리 주위에서 인간 관계도, 노동 조건도, 풍속 습관도 모두 너무나 급격하게 
변화했다. 우리들의 심리조차도 가장 밑바탕으로부터 혼란되어 버렸다. 이별이니, 
부재니, 거리니, 귀환이니 하는 개념의 말은 똑같아도 이미 같은 현실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오늘날의 세계를 파악하는데 있어 우리는 어제의 세계를 위해 
만들어졌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과거의 생활이 우리들의 본성에 부합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들의 언어에 더 부합된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진보의 하나하나가 간신히 우리가 체득해 가던 습관 밖으로 우리를 더욱더 멀리 
쫓아내버렸고, 그리하여 우리는 고국을 떠나 아직 자기의 조국을 세우지 못한 
이민들과도 같다.
  우리는 모두가 아직 새 장난감에 감탄하고 있는 젊은 야만인들이다. 우리들의 
비행기 경주도 이것 이외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저것은 보다 높이 올라가고, 
이것은 보다 빨리 날아갈 뿐이다. 왜 그것을 날게 하는지를 우리는 잊고 있다. 경주 
그 자체가 우선은 그 목적보다도 중요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제국을 건설하고 있는 식민지 군에게 있어 삶의 의의는 정복에 있다. 즉, 병사는 
농부를 멸시한다. 그러나 이 정복의 목적은 이 농부들을 정착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이 진보의 열광 속에서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을 철도 부설이니, 공장 
건설, 유정파기에 종사시켰다. 우리들은 이러한 건설이 사람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자칫 잊어버리기 쉽다. 정복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의 윤리, 도덕은 군인의 윤리. 
도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식민을 해야 한다. 아직 모습을 갖추지 못한 이 새 집에 
생명을 주어야 할 때다. 전자에 있어서의 진리는 집을 짓는 것이었고, 후자에 
있어서는 거기 들어가 사는 데 있다.

  우리들의 집은 아마도 조금씩 인간다워질 것이다. 기계조차도 완성되어 갈수록 
그 역할이 주가 되고, 기계 자체는 몸을 감추게 된다.
  인간의 온갖 생산적 노력, 그 모든 계산이며, 설계도 위에서의 모든 밤샘도 
외면적인 현상으로는 모두가 단순화로 귀착되는 것 같다. 하나의 원주라든가, 
하나의 용골, 또는 한 대의 비행기의 동체의 곡선을 차츰 풀어내어 여자의 
유방이나 어깨의 곡선의 그 단순한 순수성을 갖게 하기까지에는 여러 세대의 
경험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기사들이나, 제도사들, 연구실의 계산원들의 일도 
외견상으로는 그 날개가 잘 눈에 띄지 않게 될 때까지, 동체에 붙인 날개라는 
느낌이 들지 않게 될 때까지 닦고 문지르고 연결을 가볍게 하고 날개의 균형을 
잡고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광물을 지니고 있는 
암석으로부터 분리되어 완전히 활짝 핀 그 형태가 신비롭게도 결합된, 그러면서도 
시와 같은 훌륭한 질을 갖춘 천성의 작품으로 나타난다.
  완성이란 덧붙일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아무것도 없을 때 
이루어지는 것 같다. 발달의 극치에 다다르면 기계는 몸을 숨긴다.
  발명의 완성은 이와 같이 발명이 없는 것과 종이 한 겹 사이이다. 그리고 
기계에 있어서도 눈에 띄는 장식은 점점 사라지고 바닷물에 닦여진 조약돌처럼 
자연스러운 물건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가 사용되면서 차츰 
제 자신을 잊혀지게 된다는 것도 또한 찬양할 만한 일이다.
  전에 우리는 비행기에서 복잡한 공장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엔진이 돌아간다는 것조차 잊고 있다. 우리가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심장이 뛰는 것처럼, 엔진도 마침내 돌아간다는 자기의 기능을 다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주의력을 도구에 빼앗길 필요는 없게 됐다. 도구 너머로, 도구를 거쳐서 
우리가 찾아내는 것은 자연, 정원사의, 항해자의, 또는 시인의 그 자연이다.
  조종사는 날기 시작하자마자 물과 공기와 접촉하게 된다. 엔진이 전개되고, 
기체가 벌써 바다를 가르며 단단한 파도소리를 억누르고 징처럼 울릴 때, 그는 
자기의 허리의 동요로써 그것을 알 수가 있다. 그는 느낀다. 이 15톤의 물질 속에 
비상을 가능케 하는 그 성숙이 준비되고 있음을.
  조종사는 조종간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러면 차츰 그의 손바닥 안에 이 힘이 
선물처럼 주어진다. 조종간의 금속성 기관은, 이 선물이 그에게 주어짐에 따라 
그의 힘의 전달자가 된다.
  이 힘이 무르익으면 꽃을 따기보다도 더 부드러운 동작으로 조종사는 비행기를 
물에서 떼어서 대기 속에 얹어놓는 것이다. 
  [  4. 비행기와 지구

      (1)
  비행기도 틀림없이 하나의 기계지만 그러나 얼마나 놀라운 분석의 기구인가! 이 
기구는 우리에게 땅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해준다.
  길이란 사실, 여러 세기 동안 우리를 속여 왔다. 우리는 자기의 백성을 찾아 
보고 그들이 자기의 통치에 만족하고 있는가를 알고자 했다는 저 옛이야기 속의 
여왕과 비슷하다.
  그의 신하들은 여왕을 속이려고 행차하는 길에 훌륭한 장식을 세우고 사람을 사서 
춤을 추게 했다. 여왕은 그 가느다란 길밖에 자기 나라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넓은 
들판에서 굶어 죽는 백성들이 자기를 저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오랫동안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걸어왔다. 길은 불모의 땅이나, 
바위나 사막을 피해서 인간의 욕망에 따라 샘에서 샘으로 간다. 길은 농부들을 
곡간에서 밀밭으로 이끌어가고, 외양간 문턱에서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가축을 
받아다가 새벽빛 속의 개자리 밭에 풀어 놓는다. 길은 이 마을을 저 마을과 
결합시킨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저기로 결혼하니까. 그리고 길 중의 하나가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험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아시스를 즐기기 위해 수십 번을 
우회한다.
  이렇게 달콤한 거짓말과도 같은 길의 굴곡 하나하나에 속아서 여행하는 동안 잘 
관개된 많은 땅과, 과수원과, 목장들을 보아 온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감옥의 모습을 
아름답게 생각해 왔다. 이 지구를 우리는 기름지고 부드러운 것으로만 믿어왔다.
  그러나 우리의 시력은 예민해졌고, 우리는 무자비할 만큼 발전을 했다. 비행기로 
우리는 직선을 배웠다. 이륙하자마자 우리는 물 먹이는 곳이나 외양간으로 기울어지는 
길들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구부러져가는 길들을 버린다. 이때부터 정든 굴종에서 
벗어나고 샘에 대한 욕망에서 욕망에서 해방되어 우리는 먼 목표를 향해 기수를 
돌린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직선탄도의 높이에서 본질적인 바탕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위와 모래와 소금의 집적이며, 그곳에는 가끔 생명이 폐허의 구덩이에 
돋아난 한줌의 이끼처럼 여기저기에 꽃을 피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짜기 속을 미화하고, 때로는 기적적으로 기후의 혜택을 받는 
꽃밭처럼 피어나 있는 이 문명을 조사하면서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로 바뀐다. 
과학자가 실험기구를 통해 보듯이 비행기 창을 통해 인간을 관찰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야 우리의 역사를 다시 읽고 있는 것이다. 

      (2)
  마젤란 해협을 향하는 조종사는 갈레고스강의 조금 남쪽에서 오래된 용암 
분출구 위를 나아가게 된다. 이 잔해는 20미터 두께로 평야를 짓누르고 있다.
  이어서 그는 둘째 분출구, 셋째 분출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뒤로는 땅이 
솟아오른 곳마다, 2백 미터쯤의 젖꼭지 같은 같은 야산 하나마다 모두 옆구리에 
분화구 흔적을 가지고 있다. 거만한 베스비어스 산과는 달리 이것은 들판 위에 
늘어선 유탄 포의 포구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요함을 되찾았다. 지금은 변해버린 풍경속에서, 수천 개의 
화산들이 서로 호응하듯 불을 뿜으면서 지하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을 울려대던 
당시의 광경을 생각하면, 지금의 이 정적이 이상할 정도이다. 이제 사람들은 검은 
빙하로 장식된, 영원히 잠잠해진 땅위를 비행한다.
  그러나 더 멀리 더 오래 된 화산들은 벌써 황금빛 잔디를 입고 있다. 가끔 그 
우묵하게 파인 곳에는 나무 한 그루가 낡은 화분 속의 꽃처럼 자라고 있다. 
황혼빛 속에서 평야가 짧은 풀로 꾸며져 공원처럼 사치스러워지고, 이제는 그 
거대한 둘레에서나 겨우 불거질 뿐이다.
  산토끼 한 마리가 뛰어 가고, 새 한 마리가 날아 오른다. 이 별 위에, 좋은 
흙반죽이 쌓인 새로운 지표를 마침내 생명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윽고, 뿐따 아레나스 조금 못미친 곳에 마지막 분화구들이 솟아올라 있다. 
편편한 잔디밭이 화산들의 기복을 따라 펼쳐져 있다. 이제는 그 화산들도 
평온하기만 하다. 갈라진 곳마다 잔디의 부드러운 아마실로 꿰매져 있다. 지면은 
편편하고, 경사는 완만하여 사람들은 그 화산으로서의 기원을 잊어버린다. 이 
잔디밭이 구릉 옆구리의 어두운 상혼을 지워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앞쪽의 세계 최남단의 도시 뿐따 아레나스 원시의 용암과 남극의 
빙하 사이에서 우연히 약간의 진흙에 의지해서 이 도시는 존재한다. 시커먼 
분출구에서 그리도 가까운 곳이어서, 사람들은 한층 더 인간의 기적을 느끼게 된다.
  얼마나 이상한 만남인가! 어떻게, 또 왜 인간이라는 길손들이 아주 짧은 
시간밖에는 살 수 없는 이 가식의 정원을 하나의 지질학적 시대, 하고 많은 날 
중에서 축복 받은 이 하루에 찾아오게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저녁의 아늑함 속에 착륙했다. 뿐따 아레나스여! 나는 샘물 가에 기대서서 
소녀들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그녀들의 두어 걸음 앞에 서서 나는 인간의 신비를 더욱 
느낀다.
  생명이 생명과 그렇게도 쉽게 결합되고, 바람의 침대 속에서도 꽃들은 꽃들과 
섞이며, 한 마리의 백조는 다른 모든 백조와 알게 되는 이 세상에서 홀로 인간들만이 
그들의 고독을 쌓고 있다.
  얼마나 커다란 공간이 그들 사이의 마음의 통로를 가로막는 것을, 어떻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눈을 내리뜨고 혼자 미소지으며 이미 귀여운 교태와 거짓을 품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는 저 소녀에 대해서 누가 무엇을 알 수 있으랴?
  그녀는 한 애인의 생각과, 목소리와, 침묵으로써 하나의 왕국을 이룩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그녀에게는 그 애인 말고는 모두가 야만인이었다. 나에게는 
그녀가 어느 떠돌이 별에 있는 것보다도 더 자기의 비밀과, 습관과, 자기 추억의 
즐거운 메아리 속에 갇혀 있는 듯이 느껴졌다. 화산에서, 잔디밭에서, 또는 
바다의 소금물에서 어제 막 태어난 이 소녀가 벌써 반은 신이 되어 있는 것이다.
  뿐따 아레나스여! 나는 어느 샘물 가에 기대 서 있다. 노파들이 물을 길으러 
온다. 그녀들의 일생의 비극에 대해서 나는 지금 그 하녀의 몸짓밖에는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 사내 아이가 소리도 없이 울고 있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달랠 길 없는 한 예쁜 아이로밖에는 내 기억 속에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방인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제국'에는 끝내 들어갈 수 
없다.

  얼마나 초라한 무대장치 속에서 인간의 원한과 우정과 기쁨의 거창한 연극이 
상연되고 있는가? 아직도 식지 않은 용암 뒤에 위태롭게 서 있으면서, 벌써 뒤에 
덮쳐올 모래와 눈사태에 위협받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이 영원에 대한 동경을 어디서 
찾아낸 것일까?
  그들의 문명은 취약한 도금에 불과하다. 화산이, 새로운 바다가, 모래바람이 
그것을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고 보면.
  뿐따 아레나스 시는 보오쓰(프랑스의 곡창 지방)의 땅처럼 속속들이 기름지게 
느껴지는 진짜 땅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서도 다른 곳처럼 삶이란 사치이며, 인간의 발 밑에는 깊이 있는 땅은 아무 
데도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뿐따 아레나스에서 10킬로 미터 되는 곳에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늪이 있다는 것을, 왜소한 나무들과 나지막한 집들에 둘러싸인, 
농가 앞마당의 웅덩이처럼 보잘것없는 그 늪은 이상스럽게도 밀물 썰물이 있다.
  이 늪은 갈대와 뛰노는 아이들의 이렇듯 평화로운 현실에 감싸여 있으면서도 낮과 
밤에 그 완만한 호흡을 계속하면서, 또 하나의 다른 법칙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잔잔한 수면 아래, 꼼짝 않는 얼음 밀, 단 한 척의 낡은 조각배 밑에서 달의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다의 소용돌이가 이 검은 덩어리 밑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소화작용이, 풀과 꽃의 가벼운 이불 밑에서 
이 호수 주위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백 미터도 못되는 이 물웅덩이는 사람들이 인간의 대지 위에 든든히 자리잡고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믿고 있는 이 도시 문턱에서, 어찌알랴, 바다의 맥박을 치고 있는 
것이다.

      (3)
  우리는 하나의 떠돌이 별 위에 살고 있다. 이 별은 이따금 비행기의 덕분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근원을 보여준다. 달과 관계 있는 웅덩이가 숨겨진 친척 관계를 
드러내 보이듯이...그러나 나는 그것에 대한 다른 징후도 알았다.
  쥐비 끝 부분과 시스레로스 사이를 사하라 사막의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고 
있노라면 원추대 모4양의 사고가 드문드문 산재해 있는데 그 넓이는 백 보 
정도에서부터 30킬로 미터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이다.
  그 높이는 놀라울 만큼 한결같이 3백 미터이다. 그런데 높이가 같을 뿐만 
아니라 그 고원들은 어느 것이나 같은 색깔, 같은 흙의 결, 같은 절벽의 돌의 
새김들을 보이고 있다. 모래 위에 홀로 솟아나와 있는 신전의 원주만으로도 
붕괴되기 전의 식탁의 화려함을 보여주듯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이 모래 
기둥들도 예전에는 하나로 되어 있었던 광대한 사구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카사블랑카와 다까르 간의 정기 항로를 개설하던 당시에는 기재가 취약해서 
고장이니, 수색이니, 구출 작업이니 해서 우리는 종종 불귀순 지구에 착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모래란 놈은 속임꾼이다. 단단하리라고 믿었다가는 파묻혀 버린다. 
아스팔트처럼 단단해 보이고, 발뒤꿈치 밑에서 굳은 소리를 내는 옛 염전 광만 
하더라도, 가끔 바퀴 무게로 내려앉아 버린다. 그러면 흰 소금 껍질이 갈라지고 그 
밑은 시커먼 늪지의 악취를 풍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이 사구의 
편편한 표면을 택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결코 함정을 숨겨두지는 않았으니까.
  이런 보장은 알이 굵고 단단한 모래의 덕택이다. 그것은 자세히 보면 작은 
조개껍데기들의 어마어마한 퇴적이었다. 그것들은 사구의 표면에서는 아직 제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만 능선을 따라 내려감에 따라 가루가 되어 엉겨 있음을 볼 수 있다. 
산기슭의 가장 오래된 퇴적층에서는 그것들은 이미 순수한 석회암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동료인 레느와 세르가 불귀순민들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어 있을 때, 
모르인의 심부름꾼 한 사람을 내려놓기 위해 이 안전지대 하나에 착륙한 일이 
있다. 나는 그를 그곳에 남겨 두고 떠나기에 앞서, 그가 내려갈 수 있는 곳이 
있나 하고 그와 함께 찾아보았다. 그런데 우리의 이 높이 쌓은 대는 어느 
쪽에서나 나사 모양과 같은 주름을 지으며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곳에서 빠져나오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나는 다른 착륙지를 찾아 이륙하기에 앞서 여기서 꽤 오랫동안 
서성거렸다. 어쩌면 나는, 일찍이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 누구도 더럽힌 적이 없는 
이 땅 위에 내 발자국을 남긴다는 어린애 같은 기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용감한 모르인의 불귀순민도 이 성과 요새를 공격할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유럽사람도 일찍이 이 지역을 탐험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한의 순결한 모래를 밟고 섰다. 나는 이 조개껍데기 가루를 귀중한 황금인양 
이 손에서 저 손으로 흘려보내며 반짝이게 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이 정적을 깨뜨린 
최초의 인간이었다. 태고 적부터 단 한 포기의 풀도 나게 한 적이 없는 이 북극의 
빙산과도 같은 곳 위에서, 나는 바람에 불려 온 한 알의 씨앗처럼 생명의 최초의 
증거였다. 
  별이 하나, 벌써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별을 골똘히 쳐다봤다. 나는 생각했다. 
이 순백의 지면은 수천만 년째 오직 별들에게만 바쳐져 왔었다는 것을.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순결한 식탁보 그리고 이 식탁보 위, 내 앞에서 15내지 20미터쯤 되는 
곳에 까만 조약돌 하나를 발견했을 때는 위대한 발견이라도 했을 때처럼 가슴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3백 미터 두께로 쌓인 조개껍데기 위에 서 있었다. 이 거대한 지층 전채가 
하나의 절대적인 증거인양 돌 하나라도 거기 있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구의 완만한 소화작용에서 생겨난 규석들이 어쩌면 저 땅속 깊이 잠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기적이 그들 중의 하나를 이다지도 새로운 지표 위까지 올려 
놓게 했을까?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 나의 발견 물을 주워 들었다. 단단하고 
까맣고 주먹만하고 금속처럼 무겁고, 눈물 모양을 한 이 조약돌을.
  사과나무 밑에 펼쳐진 식탁보 위에는 사과밖에 떨어지지 않는다. 별아래 펼쳐진 
식탁보 위에는 별가루밖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어떠한 운석도, 내가 
주워든 이것만큼 명백하게 자기 근원을 보여준 일이 없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쳐들며 극히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했다. 이 하늘의 
사과나무에서는 다른 사과들도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것들을 떨어진 그 
자리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것들을 떨어진 그 자리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수십만년 이래 아무도 그것들을 흩뜨려 놓지 않았을 거니까. 또 
그것들은 다른 물질들과 조금도 뒤섞이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당장 내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탐사에 나섰다. 내 가설은 실증되었다. 나는 대략 1헥타르에 돌 하나 
꼴로 내 발견 물을 주워 모았다. 어느 것이나 응결된 용암의 그 형상, 언제나 까만 
다이아몬드의 경도였다. 나는 이리하여 이 별의 우량계 위에 서서 수천만 년의 시간의 
축도 속에서 이 느린 불의 소나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4)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지구의 둥그런 등 위에, 이 자기를 띤 식탁보와 별들 
사이에 한 인간의 의식이 서 있어, 이 별의 비가 거울에 비치듯이 그의 인식에 비쳐 
나왔다는 그것이다. 광물의 층 위에 한 꿈이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보니 꿈 
하나가 생각난다...

  또 한 번은, 모래가 두껍게 쌓인 지방에 불시착하여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금빛 언덕들은 달빛에 그 밝은 쪽 경사면을 향하고 있었고, 어두운쪽 경사면은 
빛의 분계선까지 솟아 올라 있었다. 그늘과 달빛의 이 적막한 선대 위에는 작업이 
끝난 뒤의 평화와 함정의 침묵이 군림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잠이 깨었을 때 나는 밤하늘의 연못밖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 별들의 연못을 향하여 어느 모래 산 위에 누워 있었으니까.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 심연과 나 
사이에 붙잡을 나무 뿌리 하나 없고, 지붕 하나 나뭇가지 하나 없기 때문에 나는 
벌써 몸을 의지할 곳을 잃고 잠수부처럼 추락에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떨어지지는 않았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뒤꿈치까지 나는 땅에 
붙들려 매어져 있음을 알았다. 나는 내 몸무게를 대지에 내맡기고 있는 데에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인력이 나에게는 사랑처럼 지고의 힘으로 느껴졌다. 
  나는 대지가 내 허리를 받쳐 주고, 나를 지탱해 주고, 나를 들어올리고, 나를 
밤의 공간 속으로 옮겨 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커브를 돌 때 마차에 착 달라붙게 
하는 것과 같은 중력으로 내가 이 지구에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깨로 떠받쳐 주는 듯한 든든함과 안전감을 맛보았으며 내 등밑에 내가 탄 이 
배의 휘어진 갑판을 느꼈다. 
  나는 내 몸이 실려가고 있다는 의식이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에 설령 힘을 
내려고 안간힘 하는 물질들의 한숨이나, 항구로 돌아오는 낡은 범선들의 
신음소리, 역풍에 시달리는 작은 배들의 날카롭고 긴 외침소리 등이 땅 밑에서 
들려 왔다하더라도 놀라지 않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꺼운 대지 속에서는 
침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중량감은 내 어깨에 조화 있게 떠받쳐져 
영원히 변함없을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마치 죽은 조역형수의 시체가 추를 달고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듯이 분명히 이 나라에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사막 속에 홀로 떨어져 반도들의 습격에 위협받으면서 모래와 
별들 사이에서 알몸으로, 내 생활의 중심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침묵에 의해 격리되어 
있는 내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 중심에 찾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찾아내지 못하거나, 모르인들이 내일이라도 나를 학살하지 않는다면, 여러 날과 
주일과 달들을 허비해야 하리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나는 모래와 별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다만 숨을 쉰다는 흐뭇함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한 
죽어야 할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 안에 꿈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꿈들은 샘물처럼 소리도 없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처음에 나는 나를 가득 
채워주는 이 흐뭇함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다. 거리에는 목소리도 모습도 
없었지만 무언가 존재한다는 느낌, 아주 가까이 있어서 벌써 반쯤은 집착되는 
우정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나는 눈을 감고 내 기억의 환희에 
나를 내맡겼다. 
  그것은 어디인지 모르는, 검은 전나무와 보리수와 우거진 넓은 정원이었고,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낡은 집이 있었다. 그 집이 여기서 멀든 가깝든, 또 그 
집이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든 없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꿈의 역할을 해주고, 그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나의 
하룻밤을 가득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미 모래 벌판에 추락한 불쌍한 몸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을 
알아차렸다. 나는 이 집 냄새의 추억이 가득 차 있는 그 현관의 서늘함이 가득 차 
있는, 그 활기를 띠게 하던 목소리들이 가득 찬 이 집의 어린아이였다. 
  연못 속의 개구리 울음소리까지도 여기까지 나를 찾아왔다. 나 자신을 
재확인하기 위해, 이 사막의 맛이 어떤 부재들로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개구리조차 울지 않는 이 천의 침묵으로 이루어진 침묵에서 하나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내게는 이런 천 가지 부호가 필요한 것이다.
  아니다. 나는 이미 모래와 별들 사이에 머물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이 
배경으로부터는 차디찬 메시지밖에는 받지 못했다. 전에 내가 이런 배경으로부터는 
얻었다고 믿었던 영원에 대한 동경도, 나는 이제 그 근원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그 집의 화려하고 큰 장롱들을 눈앞에 떠올렸다. 그 장롱 문이 빠끔히 열려 
있어서 눈 같이 흰 시트가 채곡채곡 개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문이 빠끔히 열리며 
눈같이 찬 피륙들이 보였다. 늙은 가정부가 이 장에서 저 장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노상 살펴보고 펼쳐 보고, 다시 개켜 놓고, 세탁한 속옷들을 다시 세어보곤 하면서 이 
집의 영구성를 위협하는 어떤 불길함의 징조가 보일 때마다, '아이구 하느님, 이걸 
어쩌나!' 하고 소리치면서 달려가 램프 불 밑에서 눈이 벌개 가지고 그들 제단 보의 
실 올을 고치고, 돛대가 3개인 범선의 돛만큼이나 근 백포를, 자기보다도 큰 사람, 
하느님이나 그의 배에라도 쓰려는지 열심히 꿰매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당신을 위해 한 페이지만 더 써야겠다. 내가 첫 번 비행에서 
돌아왔을 때, 할멈이여,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났다. 비늘을 한손에 들고, 무릎까지 
흰 천 더미 속에 파묻혀, 해마다 주름살이 더하고 백발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그 
손은 우리들의 숙면을 위해서 구김살없는 시트를, 수정 그릇과 빛의 축제 같은 
우리들의 만찬을 위해서 솔기 없는 식탁보를 마련하고 있는 당신을.
  나는 바느질 방으로 당신을 찾아가 당신 앞에 앉아서 당신을 감격시켜 주기 위해, 
세상을 향해 당신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당신을 놀려 주기 위해, 죽을 뻔했던 내 
모험들을 들려주곤 했었다.
  당신은 말했었지. 내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어릴 적부터 내가 곧잘 속옷에 
구멍을 냈었다고...
  "아이구! 이걸 어쩌나! 걸핏하면 무릎을 깼고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붕대를 
감아달라고 했었다우. 마치 오늘밤처럼 말야."
  "아니야, 아니라니까, 할멈. 지금 내가 돌아온 것은 정원 안쪽에서가 아니라 
세계의 끝에서야. 그래서 나는 고독의 쓰디쓴 냄새를, 뜨거운 모래의 회오리 
바람을, 열대지방의 번쩍이는 달을 데리고 온 거야!"
  그러자 당신은 말하는 것이었다. 
  "아암, 사내애들은 뛰고 뼈를 부러뜨리고 하면서 자기가 아주 힘이 세다고 생각하는 
거라우."
  "아니야, 아니라니까, 할멈. 나는 이 정원보다도 훨씬 먼 곳을 보고 왔단 말야! 그 
따윈 사막이나, 화강암이나, 처녀림이나, 큰 늪 가운데 갖다 놓으면 어느 구석에 
있는지도 몰라!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만나기만 하면 대뜸 총부리를 겨눠대는 땅이 
있다는 걸 할멈은 알아? 얼어붙은 밤에, 지붕도 없이, 침대도 없이, 이불도 없이 잠을 
자는 사막이 있다는 것을 할멈, 알기나 해...."
  그러자 당신은 소리쳤었지.
  "어휴, 야만인!"

  성당의 하녀의 신앙을 움직일 수 없듯이 나는 이 할멈의 신념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눈멀게 하고, 귀머거리로 만든 그의 미천한 운명을 가엾게 여겼다.
  그러나 이 밤, 사하라의 모래와 별들 사이에서 벌거숭이로 내팽개쳐지고 나서야 
나는 그녀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속에서 일어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처럼 많은 별들이 자기를 띠고 
있건만, 이 중력이 나를 땅에 잡아 매어 놓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중력이 나를 나 
자신에게로 데려온다. 나는 그 많은 것들 쪽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내 중력을 느낀다.
  나의 꿈은 이 모래언덕보다도, 저 달보다도, 여기 있는 모든 존재들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아아! 집의 소중함은 그것이 우리들을 감싸 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또 그 
벽을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우리들 마음 속에 그리도 많은 
포근함을 축적시켜 주기 때문이다. 마음속 깊이 샘물처럼 꿈들이 태어나는 이 
안보이는 덩어리를 형성해 주기 때문이다.

  사하라, 나의 사하라여! 너는 이제 털실을 잣는 한 할멈 덕분에 아주 황홀해져 
있구나! 
    [  5. 오아시스

  나는 사막에 대해 이미 많이 이야기했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더 하기에 앞서 
오아시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지금 그 모습이 내게 떠오르는 오아시스는 사하라 오지에 숨어 있다. 그런데 
비행기의 또 하나의 기적은 당신을 신비의 한가운데로 곧바로 데려다 준다는 
그것이다. 당신을 비행기 창을 통해 인간의 개미집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였다. 
당신은 들판에 별 모양으로 벌어져서 동백처럼 논밭의 양분으로 갈리는, 길들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그 도시들을 냉철한 마음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도계 위에서 바늘이 한 번 떨자 저 아래에 있는 저 푸른 수풀이 
하나의 우주가 되어버린다. 당신은 잠들고 있는 정원 잔디밭의 포로가 된 것이다. 
  먼 곳을 재는 것은 거리가 아니다. 우리네 어떤 집 정원의 담이 중국의 
만리장성보다도 더 많은 비밀을 둘러싸고 있을 수도 있으며, 한 소녀의 마음이 침묵에 
의해서, 사하라의 오아시스가 모래의 두꺼운 켜로 숨겨지는 것보다 더 잘 감춰질 수 
있다. 
  나는 세계 어느 곳에선가의 짧은 착륙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것은 
아르헨티나의 꽁꼬르디아 근처에서의 일이었지만, 다른 어느 곳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신비란 그렇게 흩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어느 들판에 착륙했었는데, 내가 동화의 나라를 체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나를 태우고 달리는 그 낡은 포오드 차도, 나를 태워준 그 
온화한 부부도 아무 별다른 것이 없었다.
  "오늘밤 우리 집에서 묵으시오...."
  그런데 어느 길 모퉁이를 돌아가자, 달빛 아래 숲이 하나, 그리고 숲 뒤에 그 
집이 나타났다. 얼마나 이상한 집이었던지! 몽톡하고, 육중한 것이 마치 성과 
요새 같았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이 전설의 성은 수도원처럼 평화롭고 안전하고 
듬직한 피난처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그때 두 처녀가 나타났다. 그녀들은 금단의 왕국 입구에 서 있는 두 재판관처럼 
엄숙하게 나를 훑어보는 것이었다. 나이 어린 쪽이 입을 뾰족 내밀더니 초록색 
나무막대기로 땅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소개가 끝나자, 두 처녀는 이상하게 
도전적인 태도로 말없이 내게 손을 내밀고는 사라졌다. 
  나는 재미 있으면서도 매력을 느꼈다. 그 모든 것이 단순하고 조용하며, 마치 
무슨 비밀의 첫 마디처럼 은밀했다. 
  "이거 참! 애들이 버릇이 없어서요!"
  아버지가 간단히 말했다.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언젠가 파라과이의 수도에서, 포장해 논 돌의 틈바귀로 코끝을 내민 
짓궂은 풀잎을 보고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 풀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처녀림의 척후병으로서, 인간들이 여전히 도시를 점령하고 있는지, 이 
돌들을 약간 뒤집어 엎을 때가 되지 않았는지 보러 온 것이었다. 나는 굉장히 큰 
풍요함을 나타내주는 이런 황폐의 형태를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이 집에 
들어와서는 감탄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모든 것이 오랜 세월에 다소 금이 간 이끼 덮인 고목처럼, 
또한 10세대 전부터 연인들이 앉곤 했던 나무 벤치처럼 아주 매력 있게 황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루바닥은 닳아빠졌고, 문짝은 벌레가 파먹었고, 의자들은 
건들거렸다. 그런데 여기서는 수리는 않는 대신 청소는 깔끔히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깨끗했고 밀초로 닦여져서 윤이 났다.
  그래서 살롱은 주름살 많은 노파의 얼굴처럼 이상하게 강직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벽의 균열과 천장의 틈새가 모두 나를 감탄하게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는 마룻바닥에 감탄했다. 여기는 꺼져 들어갔고, 저기는 배의 타랍처럼 
출렁거렸지만, 그래도 잘 닦여지고 광을 내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 이상한 집은 조금도 소홀히 했다거나, 게을리 했다고는 느껴지지 않았고, 
이상스런 존경만을 자아내게 했다. 해마다 아마도 이 집의 매력에, 그 모습의 
복잡성에, 그 친밀한 분위기의 열정에, 또 응접실에서 식당으로 건너가려면 
겪어야 하는 여행의 위험에 새로운 그 무엇인가가 보태어져 왔음에 틀림없다.
  "조심하십쇼!"
  그것은 구멍이었다. 그 집 사람은 내게 주위를 환기시켰다. 보다시피 워낙 큰 
구멍이어서 내가 다리 하나 부러뜨리기는 손쉬울 것이라고 이 구멍, 그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한 일이다. 이 구멍에는 왕자의 품격, 온갖 변명을 
아^36^예 경멸하는 위풍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집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구멍쯤 막을 수야 있죠. 우린 부자니까요. 하지만...."
  또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사실이었지만.
  "이 집을 시에서 30년 계약으로 빌려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리는 시에서 
해야 하는데, 워낙 양쪽이 고집이 세어서...."
  그 집 사람들은 설명을 경멸했다. 그 대범함이 내 마음에 들었다. 고작 이런 
말을 할 뿐이었다.
  "이런! 약간 퇴락해서요."
  그것도 아주 가벼운 어조여서, 나는 이 친구들이 그것을 조금도 언짢게 여기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생각해 보시오. 미장이, 목수, 가구 수리공, 석고 세공사들의 
한 패가 이런 과거 속에 그들의 모욕스런 연장들을 펼쳐 놓고 1주일도 안돼서 
당신이 전혀 알지도 못할 집, 남의 집에 방문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집으로 
뜯어 고쳤다면 어떻게 될가를! 그것은 아무런 신비스러움도 없고, 아늑한 구석도 
없고, 발 밑에는 함정도 없는, 도시 호텔의 응접실 같은 곳이 되지 않겠는가?
  이 요술의 집에서 처녀들이 사라진 것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집의 
처마 밑 방들은 어떨까. 응접실이 이미 다락방만치 풍성함을 보이고 있으니!
  응접실의 벙싯 열린 아주 조그마한 장에서도 벌서 누렇게 바랜 편지 뭉치며, 
증조할아버지 때의 문서며, 온 집안의 자물쇠 수보다도 더 많은 열쇠들, 그러니 어느 
자물쇠에도 맞지 않는 열쇠 꾸러미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우리의 이성을 혼란케 
하고, 지하 창고며, 거기 숨겨진 궤짝이며, 그 속의 루비 금화를 연상하게 하는 그 
기막히게 쓸데없는 열쇠들.
  "어떠세요, 식탁으로 가실까요?" 
  우리는 식탁 앞에 앉았다. 나는 어느 방에서나 향내처럼 감도는 오래된 서고의 
냄새, 온 세상의 온갖 향료보다도 향기로운 그 냄새를 맡았다. 무엇보다도 램프 
불을 옮겨놓는 것이 나는 좋았다. 그것은 묵직한 진짜 램프였으며, 나의 소년 
시절의 가장 아득한 무렵처럼 그 집 사람은 그것을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들고 
다니는 것이었는데, 그때마다 벽에다 이상한 그림자를 어른거리게 했다.
  그 집 사람은 그 램프 속에 빛의 다발과 검은 종려 잎을 떠오르게 했다. 램프가 
자리를 잡고 나자 빛의 해변이 펼쳐지고, 마루바닥만이 삐걱거리는 그 둘레의 
널따란 밤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두 처녀가 아까 사라졌을 때와 똑같이 신비롭고 조용하게 다시 나타났다. 그녀들은 
정숙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녀들은 틀림없이 그들의 개와 새들에게 먹이를 주고, 맑은 
밤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저녁바람 속에서 초목의 향기를 맡곤 했을 것이다.
  지금 그녀들은 냅킨을 펴면서 곁눈으로 조심스럽게 나를 살펴보고 있다. 자기들의 
친한 동물들 속에 나를 끼워 줄까 말까 하고 생각하며, 왜냐하면 그녀들은 갈기도마뱀 
한 마리와 망구스 한 마리, 여우 한 마리, 원숭이 한 마리에다 꿀벌까지 기르고 
있었으니까.
  이런 것들은 한곳에 어울려 살면서 서로 화목하며, 새로운 지상낙원을 이룩하고 
있었다. 그 처녀들은 지상의 모든 짐승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 조그만 손으로 
그들을 어루만지고, 먹이를 주고, 물을 먹이고, 또 망구스에서 꿀벌에 이르기까지 
귀를 기울이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면서.
  그래서 나는 이렇게 활발한 두 처녀가 그들의 온 비판력과 예민성을 발휘하여, 
마주앉은 남성에 대해서 재빠르고 은밀하며 또한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나의 누이들도 이와 같이 우리 집 식탁에 처음 앉은 
손님들에게 점수를 메기곤 했었다. 그래서 어른들의 대화가 중단됐을 때, 침묵을 
깨뜨리고 갑자기 이런 소리가 울리는 것이었다.
  "11점(프랑스의 학교에서는 대개 20점 만점의 채점법이 행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재미는 누이들과 나밖에는 아무도 몰랐었다.
  이런 장난을 한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약간 불안했다. 그리고 내 재판관들이 몹시 
영리하다는 느낌 때문에 더욱 거북했다. 그들은 속임수를 쓰는 짐승과 순진한 
짐승들을 분별할 줄도 알고, 그들의 여우의 발소리로 기분이 좋은가 나쁜가도 아는, 
속마음의 움직임에 대하여 그렇게도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재판관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날카로운 눈과 그렇게 올곧은 작은 마음들을 좋아했으나, 그녀들이 이 
장난을 달리 바꾸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비굴하게 
'11점'에 겁이 나서 그녀들에게 소금 접시를 건네 주고, 포도주를 따라 주기도 했지만, 
눈을 쳐들 때마다 그녀들은 이런 것으로는 매수할 수 없을 만큼 얌전하고 의젓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런 아첨은 소용없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허영을 몰랐으니까. 그녀들은 
허영심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부심에 의해서 내 도움 없이도 자신들에 대해 나의 
아첨의 말이 나타냈을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의 직업의 매력 같은 것을 끌어내어 위신을 세워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지 새 새끼들이 날개가 돋았는가 살펴보거나, 아래를 지나가는 
동무들에게 인사나 하기 위해 플라타너스 꼭대기까지 기어오른다는 것은 지나친 
대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 천사들이 말없이 내가 식사하는 것을 살펴보고 있었고, 그녀들의 
훔쳐 보는 시선과 어찌나 자주 맞닥뜨리는지 나는 그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 침묵이 흐르는 동안 무엇인지 마루 위에서 가벼운 
휘파람 소리를 내며 식탁 밑에서 바스락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이상하다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자 자기의 시험 결과에 만족하지만, 
그러나 마지막 시금석을 써보려는 듯, 그 싱싱하고 야성적인 이빨로 빵을 
물어뜯으면서 둘째 소녀가 대수롭지 않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내가 만약 그것에 
놀라는 야만인이라면 놀래 주려는 천진스런 속셈으로.
  "살무사들이에요."
  그리고 그다지 바보가 아니라면 이 설명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언니가 내 첫 번 반응을 판정하려고 번갯불 같은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둘이 다 더할 수 없이 상냥하고 순진한 얼굴을 접시 위로 숙이는 것이었다.
  "아! 살무사로군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내 다리 사이로 미끄러지며 내 
종아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놈의 살무사가...
  다행히도 나는 웃음을 지었다. 아주 예사롭게. 그녀들도 그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나는 즐거웠고, 이 집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웃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살무사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기도 해서.
  언니가 나를 도와 주었다.
  "구멍 속에 집이 있어요, 식탁 밑에."
  "밤 열 시쯤이면 돌아와요."
  동생이 덧붙였다.
  "낮에는 사냥을 나가구요."
  이번에는 내가 두 처녀를 곰곰이 바라보았다. 그 평화로운 얼굴 뒤에 깃들인 그 
영리함과 조용한 웃음. 나는 그녀들이 행사하는 임금님 같은 위엄에 감탄했다.
  지금 나는 꿈처럼 생각해 본다. 이 모든 것이 아주 아득한 옛일이다. 그 두 
천사들은 그후 어떻게 됐을까? 아마 결혼을 했겠지. 그렇다면 그녀들은 달라졌을까? 
처녀의 위치에서 부인의 위치로 옮겨간다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다.
  새 집에서 그녀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잡초와 뱀들과의 우정은 어떻게 
됐을까? 그녀들은 어떤 우주적인 것들과 얽혀 있었는데.
  그러나 처녀 속에서 여인이 눈을 뜨는 날이 온다. 그러면 자꾸 19점을 주고 
싶어진다. 19점이 마음 속의 무거운 짐이 된다. 그때에 한 바보가 나타난다. 그러면 
그렇게도 날카롭던 눈이 처음으로 잘못 보고 그 바보를 아름다운 빛깔로 비춰 준다.
  그 바보가 정말 시라도 한 구절 읊으면 그녀는 그를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구멍 뚫린 마루바닥을 이해하고, 망구스를 좋아하는 줄로 안다. 식탁 밑의 제 
다리 사이에서 몸을 구불거리는 살무사의 신뢰감을 그가 좋아하는 줄로 믿는다.
  그래서 잘 가꾼 정원밖에는 좋아할 줄 모르는 그에게 자연 그대로의 꽃밭 같은 
자기의 마음을 줘 버린다. 그러면 그 바보는 공주를 노^36^예로 데려가고 마는 것이다. 

    [  6. 사막에서

      (1)
  사하라 정기 항공로의 조종사로서 모래밭의 포로가 되어 몇 주일이고, 몇 
달이고, 몇 해고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 초소에서 저 초소로 날아다니는 
동안에는 이와 같은 따사로움은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었다.
  이 사막은 그와 같은 오아시스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지 않았다. 정원이니, 
처녀들이니, 그 무슨 옛날 이야기란 말인가! 물론 우리가 근무를 끝내고 그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활할 수 있는 그 머나먼 곳에는 천도 넘는 처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곳에서는 그녀들의 망구스와 책들 틈에서 소녀들은 참을성 있게 
달콤한 혼을 꾸미고 있을 것이다. 정녕 그녀들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고독을 알았다. 사막에서의 3년간이 나에게 그 맛을 잘 가르쳐 준 
것이다. 거기에서는 광물 적인 풍경 속에서 낡아가는 젊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져 온 세상이 늙어가는 것 같았다. 나무들은 열매를 
맺었고, 대지는 밀들을 돋아나게 했고, 여인들은 벌써 아름답다. 그럼에도 계절은 
흘러가니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계절은 전진하고 사람은 먼 곳에 붙들려 
있다. 그래서 땅 위의 재화가 사구의 가는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간다.
  시간의 흐름은 흔히 사람들에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일시적인 평화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목적지에 착륙하여 끊임없이 움직이는 무역풍이 우리를 짓누를 
때, 그것을 느끼곤 한다. 그런 때 우리는 밤중에 요란스럽게 차축의 소음을 울리며 
달려가는 급행 열차의 여객과도 같다. 그는 차창 밖으로 휙휙 던져지듯 지나가는 한 
줌의 빛으로 그곳의 번쩍이는 들판이며, 자기 마을의 모습이며, 아름다운 풍경들을 
짐작할 뿐이며, 여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도 또한 가벼운 열기를 띤 채 조용한 착륙장에 서 있으면서도 아직 비행기 
소리로 귀가 멍멍하여 비행중인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바람의 중역을 
뚫고 미지의 미래로 끌려가고 있음을 우리의 심장의 고동으로써 알아차리는 것이다.
  사막에다 불귀순민들까지 겹쳐지나. 쥐비의 밤은 15분마다 시계 치는 소리에 
의하기나 한 것처럼 토막내어져 있다. 보초들은 차례차례로 규정된 큰 소리로 
경보를 전해 준다. 불귀순 지구 속에 고립돼 있는 그곳의 스페인 요새는 이렇게 
하여 모습이 안보이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눈먼 
배의 승객과도 같은 우리는 이 외침 소리가 차례차례로 퍼져 나가서, 우리들 위로 
해조의 둥근 궤도를 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막을 사랑했었다.

  사막이 언뜻 보기에 공허와 침묵뿐인 것같이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애인에게는 
몸을 내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고장의 그 하찮은 마을조차도 자기 몸을 감춘다. 
우리가 그 마을을 위해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일 
그 마을의 전통이며, 풍습이며, 경쟁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결국 그 
마을이 어째서 어떤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인지 모르고 만다. 게다가 우리 바로 곁에 
자기 수도원에 갇혀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법칙에 따라 살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티벳의 고독 속에, 어떤 비행기도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없는 외딴 곳에 
솟아나 있는 셈이다. 그의 독방을 찾아가 보았자 무슨 소용이랴! 그곳은 텅 비어 있다. 
인간의 왕국은 내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사막도 결코 모래나, 뚜아렉족이나, 또는 
소총으로 무장한 모르인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갈증을 겪어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이 사막이라는 
우물이 넓은 공간 위에 빛나고 있음을 오늘에야 비로소 발견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인도 이렇게 온 집안을 즐겁게 만들 수 있다. 우물이란 사랑처럼 멀리 미치는 
것이다.
  사막은 처음에는 인적이 없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랍인 유격대의 습격이 
두려워, 그들이 몸에 두른 큰 망토의 주름들을 모래 위에서 판독해야 할 날이 
온다. 이리하여 그들 역시 사막을 변모시킨다.

  우리는 놀이의 규칙을 받아들였고, 그 놀이는 우리를 제 모습대로 만들어 버린다. 
사하라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 내부에서이다. 사막에 접근한다는 것은 
오아시스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샘으로써 우리의 종교로 만드는 일이다.

      (2)
  나는 첫 비행 때부터 사막의 맛을 알았다. 리겔과 기요메와 나는 누아쇼트 초소 
부근에 불시착했었다.
  이 모리타니아의 작은 초소는 당시 바다 한가운데 작은 외딴섬만큼이나 모든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이 먹은 중사 하나가 15명의 세네갈 병사들과 
함께 거기 갇혀서 살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하늘에서 온 사자인양 환영했다. 
  "야아! 이거, 당신네들과 얘기를 하게 되다니...이 기분을 뭐라고 말할 수 
없어요. 아아! 정말!"
  아닌게 아니라 그는 울고 있었다. 
  "여섯 달만에 당신네들이 처음이오 식량 보급이 여섯 달마다 한 번씩이니까. 
중위님이 올 때도 있고, 대위님일 때도 있죠. 지난번은 대위였지요."
  우리는 아직도 정신이 멍해 있었다. 점심 준비를 하고 있을 다까르에서 2시간 
거리인데, 연간축받이가 터지니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바뀐다. 우리는 울고 있는 
늙은 중사를 위해 유령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 드십시오, 포도주를 드리는 것이 기쁩니다. 생각 좀 해보십쇼. 대위님이 
왔을 땐 그분에게 드릴 포도주가 없었거든요."
  나는 이것을 어느 책(남방 우편기. 역주)에 쓴 일이 있지만, 그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건배조차 못했단 말입니다. 나는 하도 창피해서 전출신청까지 냈었어요."
  '건배!' 땀에 범벅이 되어 낙타 등에서 뛰어내린 사람과 잔을 찰깍 부딪치며 하는 
'건배!' 이 순간을 위해 여섯 달 동안을 살아온 것이다. 한달 전부터 이미 무기에 광을 
내고, 초소를 지하실에서부터 처마 밑까지 닦아 왔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는 이 축복 
받은 날이 가까워 옴을 깨닫고, 전망대 위에서 끊임없이 지평선을 살펴보며, 아따르의 
이동 부대가 뒤집어쓰고 나타날 그 먼지를 발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포도주가 없어서 이 축제를 베풀 수가 없다. 건배를 할 수가 없다. 
이래서 체면이 깎였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가 다시 오길 몹시 고대하고 있어요. 나는 그를 고대합니다."
  "그가 어디 있는데요, 중사?"
  그러자 중사는 광막한 모래밭을 가리켰다. 
  "알 순 없지만, 대위님은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초소의 망대 위에서 별들 이야기를 하며 지샌 그 밤도 실제 있었던 일이다. (남방 
우편기. 역주) 감시할 것이라고는 별밖에 없었다. 별들은 거기에도 비행기에서 보는 
것과 다름없이 가득 차 있었다. 다만 고정되어 있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별이 무척 아름다운 밤이면, 비행기에서 거의 조종을 하지 않고 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기체는 차츰 왼쪽으로 기울어진다. 오른쪽 날개 아래로 마을이 하나 
보여도 아직도 비행기가 수평인 줄로만 안다. 사막 속에 마을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바다의 어선 떼겠지. 그러나 사하라 한복판에 고기잡이 배가 있을 리 
없다. 그러면? 그때서야 착오를 깨닫고 웃음이 난다. 천천히 비행기를 바로잡는다. 
그러면 마을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는 떨어뜨렸던 성좌를 그림판에 다시 건다. 
저것을 마을이라고? 그렇다. 별들의 마을이다.
  그러나 초소 위에서 보면 얼어붙은 듯한 사막과 움직임이 없는 모래의 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잘 걸려 있는 성좌들. 그래서 중사도 우리에게 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 보십쇼! 나는 방향에는 환해요. 저 별이 있는 쪽이 바로 튀니스죠!"
  "튀니스에서 왔소?"
  "아아뇨. 내 사촌누이가 있죠"
  그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중사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감추지 못한다.
  "언젠가는 나도 튀니스로 가겠어요."
  그럴 테지. 그러나 그것은 저 별 쪽으로 가는 게 아니 딴 길로 해서일 것이다. 
원정하는 어떤 날, 우물이 말라서 그를 정신 착란의 시상에나 붙잡히기 전에는. 
그렇게 되면 저 별도, 사촌누이도, 튀니스도 모두 뒤범벅이 될 것이다. 그러면 
남들에게는 고통스럽게 여겨질 그 영감에 의한 행진이 시작될 것이다.
  "한번은 대위님에게 튀니스로 사촌누이 일로 휴가를 신청한 일이 있어요. 
그랬더니 그 대답이...."
  "그래, 그 대답이?"
  "그 대답은 이랬어요. '세상에는 사촌누이로 꽉 차 있다' 그래서 더 가깝다면서 
다까르로 보내 주더군요"
  "그래, 사촌누이는 예쁘던가?"
  "튀니스의 누이 말이오? 물론이죠. 금발이었어요."
  "아니, 다까르의 누이 말이오."
  중사여, 약간은 억울하고 쓸쓸한 듯한 대답을 듣고 우리는 당신을 껴안기라도 
하고 싶었다.
  "아, 그건 검둥이였어요...."

  중사여, 사하라는 당신에게 있어 무엇일까? 그것은 당신 쪽으로 끊임없이 
걸어오는 하느님이었다. 그것은 또한 5천 킬로 미터의 사막 저편에 있는 금발의 
사촌누이의 다사로움이기도 했다.
  사막은 우리에게 있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내부에 생겨나는 그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배우는 그것이다. 우리 또한 그날 밤에 한 사촌누이와 한 대위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3)
  불귀순 지역과 접경해 있는 뽀르 에띠엔은 도시가 아니다. 그곳에는 초소와, 
격납고와, 우리 회사의 승무원들을 위한 바라크가 한 채 있을 뿐이다. 둘러싸고 있는 
사막이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빈약한 군사 시설에도 불구하고 뽀르 에띠엔은 
난공불락이다.
  그것을 공격하려면 굉장한 모래와 폭염의 넓은 띠를 돌파해야 하기 때문에 
아랍인 습격대들은 기진맥진하고 물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그 곳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한 옛날부터, 북쪽 그 
어디엔가에서 뽀르 에띠엔을 향해 진격해 오는 습격대들이 항상 있었다.
  사령관인 대위가 우리한테 차를 마시러 올 때마다 그는 지도를 펼쳐 놓고, 그 
습격대의 진격로를 마치 아름다운 공주의 전설을 이야기하듯 그려 보여 주곤 
했었다. 그러나 그 습격대는 강물처럼 모래에 빨려 들어갔는지 결코 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유령 습격대라고 불렀다. 정부가 나누어 준 수류탄과 
탄약통들도 밤이면 우리 침대 밑의 상자 속에서 잠을 잔다.
  그러니 우리는 우선 우리의 비참함에 보호받아, 침묵이라는 적 외에는 싸울 
상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행장 주임인 뤼까는 낮이고 밤이고 축음기만 
틀어놓고 있다. 그 축음기는 생명의 저 먼 곳으로부터 반은 잊어버린 말로 
우리에게 말을 하면서 야릇하게도 갈증과 비슷한 목적 없는 우울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초소에서 저녁 식사를 했고, 사령관 대위는 그의 정원자랑을 했다. 
그는 정말 프랑스에서 보낸 진짜 흙이 들은 궤짝 셋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4천 킬로 미터를 건너온 것이다. 거기에는 파란 잎이 3개 돋아나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보석처럼 손끝으로 어루만진다. 대위는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이건 내 공원이오."
  그리고 모든 것을 말려 벌리는 모래 바람이 불 때면 이 공원은 지하실로 내려간다.
  우리는 초소에서 1킬로 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달빛을 이고 우리 초소로 돌아온다. 달빛을 받으면 모래는 분홍빛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빈곤만을 느끼는데, 모래는 분홍빛이다. 그러나 보초의 부르짖음이 
온 세상에 감동을 되찾게 한다. 우리들의 그림자에 놀란 사하라 전체가 우리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아랍 습격대가 진격 중이니까.
  보초의 부르짖음에 사막의 모든 소리가 메아리 친다. 사막은 이제 빈집이 
아니다. 모르인의 대상이 밤에 자기를 띄운다.
  우리는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가! 질병이니, 사고니, 
습격대니, 이 얼마나 많은 위협들이 전진해 오고 있는가! 인간은 보이지 않는 
사격수들을 위한 땅 위의 과녁이다. 그리고 세네갈 사람인 보초가 예언자처럼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 준다.

  우리는 '프랑스인 이다!'라고 대답하고 그 검은 천사 앞을 통과한다. 그러면 숨을 
들이킨다. 이런 위협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귀함을 되돌려 주었던가...오오! 그 위협은 
아직 몹시도 멀리 있고, 그다지 급하지도 않고, 그 숱한 모래들에 의해 완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세계는 이미 전과 같지 않다. 이 사막은 다시 
사치스러워진다. 어디에선가 전진 중이면서 결코 여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할 습격대가 
이렇게 해서 자기의 신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지금은 밤 11시다. 뤼까가 무전 국에서 돌아와 자정쯤에 다까르발 비행기가 
도착한다고 알려 준다. 기상에는 모든 것이 이상 없다. 0시 10분이면 우편물을 내 
비행기에 옮겨 싣고 나는 북쪽을 향해 이륙할 것이다.
  쪽이 떨어진 거울 앞에서 나는 조심스레 면도를 한다. 이따금 수건을 목에 건 
채 나는 문 앞으로 가서 발가숭이 모래밭을 바라본다. 날씨는 좋지만 바람이 
잤다. 나는 거울 앞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생각한다. 여러 달을 불던 바람이 자면 
온 하늘을 어지렵혀 놓는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복장을 갖춘다. 비상 신호등을 허리띠에 매고, 고도계며, 연필을 
챙긴다. 오늘 밤 내 무전사가 될 네리 한테로 간다. 그도 면도를 하고 있다. 그에게 
말을 건넨다. '어떤가?' 지금으로선 만사 OK이다. 이러한 예비 작업은 비행에 있어 
가장 쉬운 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푸드득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내 램프에 잠자리 한 
마리가 부딪친 것이다. 왠지 모르나 그 잠자리가 내 가슴을 죄인다.
  다시 한번 밖에 나가서 바라본다. 모든 것이 맑다. 비행장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절벽이 날이 샐 때처럼 하늘에 또렷이 드러나 보인다. 사막 위에는 정돈된 
집과 같은 깊은 침묵이 군림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초록나비 한 마리와, 
잠자리 두 마리가 내 램프에 와 부딪친다. 
  나는 또 다시 야릇한 감상에 싸인다. 그것은 어쩌면 기쁨일지도, 불안감일지도 
모르나 어쨌든 나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것이며, 아직은 막연하고, 이제 겨우 
드러났을 뿐이다. 누가 아주 멀리서 내게 말한다. 이것이 본능이란 것일까? 나는 
또 밖으로 나간다. 바람은 완전히 자 버렸다. 여전히 서늘하다. 그런데 나는 어떤 
예고를 받았다. 나는 나를 기다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알아차렸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내 착각일까? 하늘도 모래도 아무런 징후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두 마리의 잠자리가 내게 말해 주었고, 또 초록나비도 그랬다.
  나는 모래언덕에 올라가 동쪽을 향해 앉는다. 만약 내가 옳다면 그것은 오래지 않아 
올 것이다. 오지의 오아시스에서 수백 킬로 미터나 떨어진 이곳에 잠자리가 무엇을 
찾아왔단 말인가? 바닷가에 밀려 온 하찮은 표류 물들이 바다를 휩쓰는 사이클론 
태풍의 증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이 곤충들도 열사의 폭풍이, 멀리 야자나무 숲에서 그 
초록나비를 쫓아낸 동쪽으로부터의 폭풍이 다가오고 있음을 내게 가르쳐 준다.
  그 거품이 벌써 나를 스쳤다. 그리고, 하나의 증거이기에 장엄하게, 중대한 
위협이기에 장엄하게, 또한 그것이 폭풍을 머금고 있기에 장엄하게 이 동풍은 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가느다란 한숨이 이제 막 내게 와 닿았을까 말까이다. 나는 그 
물결이 다가와 핥는 마지막 경계석이다. 내 뒤 20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천막 하나 
펄럭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뜨거운 기운은 단 한 번 죽음 같은 애무로 나를 휩쌌다.
  그러나 나는 다음 순간에는 사하라가 숨을 돌이켜 두 번째 입김을 내뿜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는 3분도 못가서 우리 격납고의 통풍 통이 떨리기 
시작할 것이다. 10분도 못가서 모래가 하늘을 뒤덮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곧 이 불길, 사막이 내뿜는 불길 속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을 흥분하게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야만적인 
기쁨으로 나를 채워 주는 그 것은, 천지의 비밀의 언어를, 귀띔만으로도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이며, 모든 미래가 가벼운 웅얼거림으로 예고되는 원시인처럼, 
어떤 발자국을 내가 냄새 맡아냈다는 것이며, 또 그 천지의 분노를 한 마리 
잠자리의 날개가 푸덕임에서 읽어냈다는 사실이다.

      (4)
  그곳에서 우리들은 불귀순 모르인들과 접촉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지역, 우리가 비행할 때 넘어 다니는 지역 안쪽에서 불쑥 나타나는 것이다. 
그들은 빵이나, 설탕이나, 차를 사러 쥐비나 시스네로스 초소에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나타났다가는 다시 그들의 신비속으로 잠겨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가는 그들 중의 몇을 구슬려 보려고 마음먹었다.
  그가 유력한 두목일 경우에는 그들에게 넓은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회사 간부의 
동의를 얻어 가끔 비행기에 태워주기도 했다. 그들의 오만을 꺾는 것이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포로로 한 백인들을 학살하는 것은 증오에서보다는 오히려 경멸 
때문이었으니까. 초소 근처에서 우리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들은 욕설조차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외면을 하면서 침을 뱉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오만은 자기네들의 힘에 대한 착각에서 오는 것이다. 소총 3백 정의 
군대를 전투 준비시켜 놓고는 그들 중의 얼마나 많은 자가 이런 말을 나에게 
되풀이했던가.
  "당신들은 운이 좋소. 걸어서 백 날이나 걸릴 프랑스에 있으니 말이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여행시켜 주었고, 그들 중의 세 사람은 그 미지의 
프랑스까지 방문했다. 그들은 언젠가 나를 따라 세네갈에 갔을 때 나무들을 처음 
보고는 울음을 터뜨린 패들과 같은 종족이었다.
  내가 그들을 자기네 천막 속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나체의 여인들이 꽃들 
가운데에서 춤추는 뮤직 홀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나무도 
샘물도 장미꽃도 본 적이 없었고, 그들이 천국이라고 부르는 시냇물이 흐르는 
정원이 있다는 것을 '코란'에 의해서만 알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30년 동안의 비참한 생활 끝에 이교도의 총탄을 맞고 모래 위에서 쓰라린 
죽음을 함으로써 그런 천국과, 거기 갇혀 있는 미녀들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알라신은 그들을 속이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보화가 주어져 
있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그 신은 갈증의 보상도, 죽음의 보상도 요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지금 그 늙은 두목들이 생각에 잠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천막 
주위에 인적 없이 펼쳐져 있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하찮은 기쁨밖에 주지 않는 
사하라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신세타령을 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래도... 프랑스 사람들의 신이... 모르인의 신이 모르인에게 해주는 
것보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더 잘 해주는 것 같아!"
  몇 주일 전에 그들을 사보아에 데리고 간 일이 있다. 안내인이 그들을 포효하는 
원기둥을 꼬아놓은 것 같은 굉장한 폭포 앞으로 데리고 갔다.
  "맛을 보시오"
  안내인이 말했다.
  그런데 그것은 단물이었다. 물! 여기서는 가장 가까운 우물에 가려 해도 며칠을 
걸어야 하며, 또 그것을 찾아냈다 해도 그 속에 메워진 모래를 파내어, 낙타 
오줌이 섞인 흙탕물이 나오기까지 몇 시간이 걸려야 했던가! 물! 쥐비 곶이나, 
시스네로스나, 뽀르 에띠인에서는 모르인 아이들이 돈을 달라지 않는다. 빈 
깡통을 손에 들고 그들은 물을 구걸한다. 
  "물 좀 줘요, 물...."
  "얌전하게 굴면 준다."
  물 한 되가 금 한 되 값이 나가는 물 한 방울만으로도 모래에서 풀의 초록빛 
불꽃을 끌어낼 수 있는 물. 어디에서 비가 오는 날이면 사하라는 대 이동으로 
활기를 띤다. 많은 부족들이 3백 킬로 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돋아나올 풀을 찾아 
내려간다. 그런데 그렇게도 인색하고, 뽀르 에띠엔에서는 10년 내내 한 방울도 
떨어진 적이 없는 그 물이 거기에서는 바닥 없는 저 수통에서 온 세계의 물이 
쏟아져 나오듯이 울부짖어대는 것이었다.
  "이제 갑시다."
  안내인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좀 더 있게 해주오."
  그들은 입을 다물고 엄숙히 벙어리가 되어, 이 장엄한 신비가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산의 뱃속에서 솟아나오는 그것은 생명이었고, 사람의 피 
바로 그것이었다. 1초 동안에 쏟아지는 물이면, 갈증에 못이겨 소금과 신기루의 
호수의 무한 속으로 영원히 빠져들은 저 많은 대상들을 소생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이 여기에 나타나 있었다. 어찌 그에게 등을 돌리고 갈 수 있으랴. 신은 그의 
수문을 열고 자신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세 사람의 모르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얼 더 보겠다는 거요? 갑시다."
  "기다려야지."
  "기다리다니, 무얼?"
  "끝을."
  그들은 신이 자기의 미치광이 짓에 지쳐버릴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워낙 
인색한 신이니까 이내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이 물은 천 년째나 흐르고 있는 걸...."
  그래서 오늘밤에 그들은 폭포에 대해서는 고집부리지 않는다. 어떤 기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그보다도 그것을 너무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모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네 신을 의심하게 된다.
  "프랑스 사람들의 신은, 아무래도...."

  그러나 나는 나의 미개인 친구들을 잘 안다. 그들은 지금 신앙이 흔들리고, 
넋이 나가 금방이라도 귀순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있다.
  그들은 프랑스군 보급대로부터 보리를 보급 받고, 우리 사하라 부대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귀순만 하면 물질적 이득을 얻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셋은 뜨라르자의 추장 엘 맘문의 혈족이다.(이 이름은 틀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우리의 부하였을 적에 알았다. 그 공으로 공적인 명예가 허용되었고 
총독에 의해 부자가 되었고, 여러 부족들로부터 존경받는 그는 세상의 영화에는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어느 날 밤, 그와 사막을 동행하던 
장교들을 학살하고, 낙타와 소총을 빼앗아 불귀순 부족들한테로 돌아갔다.
  앞으로는 사막에서 추방될 이 한 두목의 영웅적이고도 절망적인 이러한 불의의 
반항과 도주, 오래지 않아 아따르의 이동기병대의 탄막 앞에서 봉화처럼 
사라져버릴 이 잠시 동안의 영광을 사람들은 배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미치광이 짓에 놀라는 것이다.
  그러나 엘 맘문의 이야기는 다른 여러 아랍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는 
늙어갔다. 늙으면 사람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래서 어느 날 밤, 자기가 
이슬람의 신을 배반했다는 것과, 또 자기에겐 치명적인 계약 조인을 기독교도의 
손에 함으로써 자기 손을 더럽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보리나 평화가 그에게 무슨 소용이었던가? 낙오된 무장이 양치기가 된 
것쯤인 그는 사하라에 살던 때를 회상하는 것이다. 거기는 모래의 주름마다에 
감추어진 위협으로 풍요로웠고, 밤에 전방으로 이동한 야영에서 불침번이 파견되었고, 
적의 동정을 알리는 정보들이 화톳불 주위에서 기슴을 뛰게 하던 일들을. 그리고 한 
번 맛보기만 하면 한평생 잊을 수 없는 저 큰 바다의 맛을 회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모든 위엄을 잃어버린 평온한 모래 위를 아무 영광도 없이 
헤매고 있다. 오늘이야말로 그에게 사하라는 사막이다.

  그가 암살했던 장교들을 어쩌면 그는 존경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라신에 
대한 사랑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
  "안녕히 주무시오. 엘 맘문."
  "신이 그대를 보호하시기를!"
  장교들은 담요를 둘둘 말고, 뗏목 위에서처럼 별을 향해 모래 위에 눕는다. 뭇 
별들이 천천히 들고, 온 하늘이 시간을 새겨 간다. 달은 자신의 '예지'에 의해 
무에로 이끌려 모래밭 위로 기울어진다.
  기독교인 장교들은 이내 잠이 들 것이다. 이제 몇 분만 지나면 별들이 반짝이게 
되겠지. 그러면 타락한 부족들에게 지난 날의 영광을 되돌려 주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만이 모래를 빛나게 하는 그 추격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잠 속에 
잠겨 들어간 저 기독교들의 조그만 부르짖음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제 몇 초만 더 
지나면, 그 돌이킬 수 없는 일에서 하나의 세계가 태어날 것이다.
  그래서 잠든 훌륭한 중위들은 학살당하는 것이다.

      (5)
  쥐비에서 오늘 케말과 그의 동생 무얀이 나를 초대했다. 나는 그들의 천막에서 차를 
마신다. 무얀이 말없이 나를 쳐다본다. 그는 입술 위까지 덮는 남색 베일을 벗지 
않는다. 그것은 미개인의 경계의 표시다. 케말만이 나에게 말을 하며 경의를 표한다.
  "내 천막도, 낙타도, 아내들도, 노^36^예들도 모두 당신 것이오."
  무얀은 여전히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기 형에게 몸을 숙여 몇마다 
하고는 다시 입을 다문다.
  "뭐라고 하는 거요?"
  "보나푸가 게이바네 낙타를 천 마리나 강탈해 갔다는군요."
  아따르의 낙타부대 장교인 이 보나푸 대위를 나는 모른다. 모르인들 사이에서의 
그의 전설 같은 이름은 나도 들어 알고 있다. 이 형제들은 그에 대해서 분개하며 
말하자면, 마치 신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의 존재가 사막에 가치를 
부여한다.
  오늘도 그는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남쪽으로 진격중인 아랍인 습격대의 
배후에 나타나 그들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재물을 구하기 위해 되돌아가도록 
만들고는 수백 마리의 낙타를 약탈해 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천사장과도 같은 이 
출현으로 이따르를 점령하고는 석회암 고지에 야영하면서, 잡으러 오라는 
불모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위력은 대단해서 부족이 그의 군도를 
향해 전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얀이 더 거칠게 나를 바라보며 또 뭐라고 지껄인다.
  "뭐라고 하는 거요?"
  "우리도 내일 보나푸에게 진격한다. '소총 3백 자루로,'라고 하는군요."
  나도 무엇인가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미 사흘 전부터 뻔질나게 우물가로 끌고 가는 
낙타들이며, 그 수군거림과 그 열정. 눈에 보이지 않는 범선을 채비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밀고 갈 바닷바람은 벌써 일고 있다. 보나푸 때문이 
남쪽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이 영광에 가득 찬 발걸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출발이 증오를 품은 것인지, 사랑을 내포한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암살해야 할 그렇게도 훌륭한 적을 가졌다는 것은 호사스러운 일이다. 
그가 모습을 나타내면, 그 근처의 부족들은 정면으로 맞닥뜨릴까봐 겁이 나 천막을 
걷고 낙타들을 끌어 모아 도망치지만, 극히 먼 데 있는 부족들은 사랑과도 비슷한 
현기증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들은 천막의 평화에서, 여인들의 포옹에서, 달콤한 
잠에서 빠져나와, 두 달 동안이나 남쪽으로 기운 빠지는 행군을 하고, 타는 듯한 
갈증을 참고, 모래바람 밑에서 웅크리고 기다리고 하던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아따르의 
이동 부대를 만나, 신이 허락한다면 거기서 보나푸 대위를 죽인다는, 그 일만큼 훌륭한 
일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보나푸는 힘이 세오."
  케말이 고백한다.
  이제야 나는 그들의 비밀을 알겠다. 그것은 마치 한 여인을 욕망 하는 뭇 
남자들이, 여인의 냉담한 산책의 발걸음을 꿈꾸면서, 그들의 꿈속까지 따라와 
괴롭히는 그 냉담한 산책에 속 태우거나 몸이 달아 밤새껏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듯이, 먼 곳에서의 보나푸의 발걸음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덤벼드는 습격대를 교묘히 비켜가면서, 이 모르인 차림의 기독교도는 2백 명의 
모르인 역적들 선두에 서서 불귀순 지구로 침입해 들어갔다. 그곳은 프랑스의 
속박을 벗어난 그의 부하들이 제일 하급자조차도 벌 받지 않고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기의 신을 위해 돌상 위에 제 몸을 제물로 바칠 수 있으며, 또 거기서는 
이 신의 위력만이 그들을 제지 할 수 있으며, 그의 약점조차도 그들을 떨게 한다.
  그래서 오늘 밤도 모르인의 어설픈 잠 속을 멋대로 오락가락하면서 그의 발자국 
소리가 사막 복판에까지 울리는 것이다. 
  무얀은 천막 안쪽에서 푸른 화강암에 새겨진 그림처럼 여전히 꼼짝도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오직 두 눈과, 이제는 장난감이 아닌 은제 단도만이 번쩍인다. 
습격대에 가담한 뒤로 그는 얼마나 변했던가! 그는 그전과는 달리 자신이 고귀하다고 
깨닫고, 그의 경멸로써 나를 압도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보나푸를 향해 진격할 
것이고, 사랑과 아주 흡사한 증오에 부추김을 받아 내일 새벽에는 진격할 것이니까.
  그는 다시 한번 형에게로 몸을 숙이고 나직한 소리로 말을 하고 나를 쳐다본다. 
  "뭐랍니까?"
  "요새에서 떨어진 데서 만나면 당신을 쏘겠다군요."
  "왜요."
  "당신은 비행기와 무전기와 보나푸도 갖고 있다. 그러나 진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무얀은 조각과 같은 주름이 달린 푸른 베일 속에서 꼼짝도 않고 나를 재판한다. 
  "당신은 염소처럼 샐러드를 먹는다. 당신은 돼지처럼 돼지를 먹는다. 당신네 
여자들은 수치심 없이 얼굴을 드러낸다. '나는 많이 봤다'라고 말합니다.'당신은 
도무지 기도를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비행기도, 무전기도, 보나푸도 
무슨 소용인가? 진리도 없으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자유를 지키려는 것도 아니며(사막 안에서는 사람이 항상 
자유로우니까), 눈앞의 재화를 지키려는 것도 아니며(사막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단지 남모를 왕국만을 지키고 있는 이 모르인들을 감탄한다.
  모래 물결의 침묵 속에 보나푸는 늙은 해적 모양으로 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돌아다니고 있다. 그 덕택으로 쥐비 곳의 이 야영지는 이제 한가로운 목자들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보나푸라는 폭풍이 그 옆구리를 위협하고, 그 때문에 밤이면 
사람들은 천막들을 밀집시키고 잔다. 침묵이 남쪽에서는 얼마나 가슴을 조이게 
하는가! 그것은 보나푸의 침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늙은 사냥꾼 무얀은 바람 
속을 걸어오는 보나푸의 발자국에 귀를 기울인다.
  마침내 보나푸가 프랑스로 돌아간다면, 그의 적들은 기뻐하기는커녕 울 것이다. 
마치 그의 출발이 그들의 사막에서 한쪽 끝을 빼앗아 갔거나, 그들의 생활에서 
위신의 한 부분을 빼앗아 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들은 내게 말할 것이다.
  "왜 가버렸소, 당신에 보나푸는?"
  "글쎄요...."
  그는 자기 생명을 그들의 생명에 걸고 지내 왔다. 그것도 여러 해 동안이나, 그는 
그들의 규율을 자기의 규율로 삼아 왔다. 그는 그들의 돌을 베개 삼아 잠들었다. 
끊임없는 추격 속에서 그도 또한 그들과 같이 별과 바람으로 된 바이블(코란)의 밤을 
알았다.
  이제 그는 떠나면서 그가 꼭 필요해서 이 도박을 해온 것이 아님을 그들에게 보여준 
셈이다. 그는 시원스럽게 자리를 뜬다. 그래서 그 노름판에 혼자 남겨둔 모르인들은, 
이제는 사람들을 피와 살과 함께 끌고 들어가게 했던 이 생명의 도박에 대한 신념을 
잃고 만다. 그들은 아직도 그를 신뢰하고 싶어 한다.
  "당신네 보나푸 말이오. 꼭 돌아오겠지요?"
  "글쎄요."
  그가 돌아올 거라고 모르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유럽의 도박만으로는 그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장교클럽에서의 브리지도, 승진도, 여인들도 잃어버린 
고귀함을 잊지 못해 한 걸음 한 걸음이 사랑을 향해 가는 발걸음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이 사막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여기에는 다만 모험으로 살았을 뿐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거기, 
고향에서나 찾을 수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일하고 진정한 보화는 
이곳 사막에서만 가졌었다는 것을 그는 환멸 속에서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사막의 
매력이며, 이 밤, 이 침묵과, 이 바람과 별들의 나라를.
  그리고 어느 날 보나푸가 다시 돌아오면, 그 소식은 첫 밤부터 불귀순 지구에 
퍼질 것이다. 사하라의 어딘가에 2백 명의 부하들 한가운데서 그가 자고 있다는 
것을 모르인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침묵 속에 낙타들을 우물가로 
끌고 갈 것이고, 저장 보리를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총 놀이 쇠를 검사할 것이다. 
그 증오 또는 그 애정에 부추김 받아서.

      (6)
  "비행기에 숨겨서 마라께시로 데려다 주시오...."
  매일 저녁 쥐비에서 모르인들의 이 노^36^예는 이런 짧은 기도를 내게 올리곤 했다. 
그러고는 살기 위해서 가능한 일을 다했다는 듯이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내 차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를 고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의사에게 내맡겼고, 
자기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신에게 청원했다고 생각하고 하루 동안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주전자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자기 생애의 단순한 모습들과, 
마라께시의 검은 땅들과, 장미빛 집들과, 몽땅 빼앗긴 하찮은 재산들을 되새겨 
보는 것이다. 그는 내 침묵도, 그에게 생명을 주기를 지체하는 것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자기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며, 
언젠가는 자기 운명 위에 불게 될 순풍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개 조종사일 뿐이고, 쥐비 곶에서 몇 달 동안 비행장 주임 일 뿐이며, 
재산이라고는 스페인 요새에 기대 세운 바라크 하나와 그 안의 대야 하나, 짠물이 
든 주전자 하나, 짤막한 침대 하나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나로서는 내 능력에 
대해서 환상을 가질 수 없었다. 
  "바르끄 영감, 좀 두고 봅시다...." 
  노^36^예들은 모두 바르끄라고 불린다. 그래서 그도 바르끄다. 붙잡힌지 4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 체념하지 않고 있다. 그는 임금이었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바르끄, 자네는 마라께시에서 무얼 했나?"
  그의 아내와 아이 셋이 아직 살고 있을 마라께시에서 그는 훌륭한 직업을 가졌었다.
  "나는 가축 몰이꾼이었읍죠. 이름은 모하메드였구요'!"
  거기서는 높은 사람들이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었다.
  "모하메드, 팔 소가 있다. 산에 가서 끌고 와라."
  아니면,
  "들판에 양 천 마리가 있다. 그걸 더 높은 목장으로 몰고 가라."
  그러면 바르끄는 올리브 나무 지팡이를 들고 그들의 이주를 지휘하는 것이었다. 
많은 양들의 유일한 책임자로서, 새끼 가진 어미 양을 위해서 빠른 놈들의 걸음을 
늦추고 게으른 놈들은 재촉하면서, 그는 모든 양들의 신뢰와 복종 속에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어떤 약 속의 땅을 향해 그들이 올라가고 있는지를 자기만이 알고, 별들을 보고 
길을 찾는 것도 자기만이 알고, 양들에게는 나누어 줄 수 없는 지식들을 무겁게 
몸에 지닌 자기의 지혜로써 쉴 시간이며 샘터로 가는 시간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이면 그들의 잠 속에 홀로 서서 그 많은 무지와 연약함을 측은히 
생각하면서 무릎까지 양털에 묻힌 채, 의사이며, 예언자이며, 왕이기도 한 
바르끄는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 드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랍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가축을 찾으러 우리와 함께 남쪽에 가자."
  그를 오랫동안 걸리더니 사흘 후에 산 속 깊이 불귀순 지구 경계로 접어들자, 
그는 간단히 붙잡혀서 바르끄란 이름으로 팔리었던 것이다.

  나는 다른 노^36^예들도 알고 있었다. 나는 매일 차를 마시기 위해 천막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맨발로 푹신한 양탄자 위에 누워 나는 하루가 지나갔음을 
음미하는 것이었다. 그 양탄자는 그들 유목민들의 사치품이며, 그들은 그 위에 
그들의 잠시 동안의 처소를 마련하는 것이다.
  사막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역력히 느껴진다. 타는 듯한 태양 아래서는 짐승들도 
사람들도 죽음을 향해 가는 것만치나 확실하게 저녁이라는 커다란 물구유를 향해 
걸어간다. 이러한 무위함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온종일 바다로 가는 
길처럼 아름답다.
  나는 그 노^36^예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주인이 보물상자에서 풍로니, 주전자니, 
컵들을 꺼내 놓으면 천막 안으로 들어온다. 그 상자 속에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물건들이 묵직하게 들어 있다.
열쇠 없는 자물통이니, 꽃 없는 꽃병이니, 서푼짜리 거울이니, 낡아빠진 무기들, 
이런 것들 이 사막 한가운데 밀려 와 있어 난파선의 조각들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면 노^36^예는 묵묵히 풍로에 마른 가지를 얹고 불씨를 붙이고 주전자를 채우고 
하며, 어린 계집애면 될 일에 삼나무라도 뽑을 수 있는 근육을 움직인다. 그는 
온순하다. 그는 차를 끓어내고, 낙타를 돌보고, 밥을 짓고 하는 일에 열중한다. 
찌는 듯한 태양 아래서는 밤을 향해 걸어가고, 얼음같이 찬 벌거숭이 별들 
아래에서는 찌는 듯한 태양을 그리워하면서.
  4계절의 변화가 여름이면 눈의 전설을, 겨울이면 태양의 전설을 이루어주는 
북쪽 나라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한증막 속에서 별다른 변함이 없는 열대지방은 
불행하다. 그러나 낮과 밤이 사람들을 이 희망에서 그렇게도 간단하게 오가게 
해주는 이 사하라는 역시 행복한 곳이다.
  가끔가다 검둥이 노^36^예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저녁 바람을 맛보고 있다. 이 
포로의 둔중한 육체 속에는 이제 추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유괴되던 때의, 지금의 어둠 
속으로 그를 거꾸러뜨린 사나이의 팔이며, 고함소리며, 주먹질 따위가 겨우 생각날 
뿐이다.
  그때 이후로 그는 소경처럼 세네갈의 느린 강물도, 남부 모로코의 흰 암석의 
도시들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처럼 그리운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이상한 잠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이 흑인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병들었다. 어느 날 이 유랑민들의 
생활 속에 굴러들어, 그들의 이동에 매이고, 그들이 사막에 그리는 궤도에 평생동안 
붙들려버린 그가, 그때부터 그의 과거니, 그의 집이나, 그의 처자식이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런 것들과 무슨 공통된 것을 간직할 수 있겠는가?
  오랫동안 위대한 사랑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이 그것을 잃고 나면 자기의 고독하고 
높은 신분에 싫증이 나는 수가 있다. 그들은 겸손하게 삶에 접근하여 평범한 사랑으로 
자기들의 행복을 만든다. 그들은 체념하고 몸을 굽혀 평온한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음 편함을 깨닫는다. 노^36^예는 주인의 불씨로 자기의 자랑을 삼는다.
  자아, 마셔라."
  가끔 주인이 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모든 피로와, 모든 심한 더위에서 
놓여나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저녁의 시원함 속에 들어가고 있으므로 주인이 
노^36^예에게 어질어졌을 때다. 그래서 주인은 차 한 잔을 노^36^예에게 준다.
  그러면 노^36^예는 감격에 겨워, 그 차 한 잔 때문에 주인의 무릎에 입을 
맞추게까지 된다. 노^36^예가 쇠사슬에 매여 있는 일은 없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렇게도 충실한데! 그는 현명하게도 박탈당한 검둥이 왕을 자기 
속에서 배척한다. 그는 이제 행복한 포로일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그는 해방될 것이다. 그가 먹는 식량이나 입는 옷에 알맞은 
값어치가 없을 만큼 너무 늙으면 그는 분에 넘치는 자유를 허락 받는다. 사흘 
동안 그는 이 천막에서 저 천막으로 다니며 헛되이 사정할 것이다. 하루하루 몸은 
더 허약해진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끝날 무렵, 언제나 그렇듯이 얌전하게 
모래 위에 드러누울 것이다.
  나는 쥐비에서 알몸으로 죽어 가는 노^36^예들을 본 일이 있다. 모르인들은 그들의 
죽을 때의 오랜 괴로움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고 있지만 잔인성은 없다. 모르인의 
아이들은 그 검은 표류물 옆에서 놀고 있다. 그리고 날이 새면 그것이 아직도 
움직이고 있는지 보기 위해 달려가지만 늙은 종을 조롱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극히 자연적인 질서였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너는 일을 잘했다. 그래서 잠들 권리가 있다. 자아, 이제 자거라."
  그는 여전히 누운 채 현기증과도 같은 배고픔은 느끼지만, 괴로움을 주는 바르지 
못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흙에 동화되어 갔다. 태양에 말리고, 
대지에 받아들여져서. 30년 동안의 노동, 그래서 얻은 잠과 대지에 대한 이 권리.
  내가 처음 만난 노^36^예는 신음하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하기야 신음해 보일 
상대도 없었겠지만, 나는 그에게서 힘이 다 빠져 눈 속에 누워, 꿈과 눈에 파묻혀 
들어가는 길 잃은 두멧사람과도 같은 일종의 체념을 느꼈었다.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그의 고통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고통을 
느낀다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인간의 죽음과 함께 미지의 세계가 
하나 죽어 가는 것인 만큼, 그의 안에서 꺼져가는 영상들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세네갈의 어떤 농원이, 남부 모로코의 어떤 백악의 도시들이 차츰차츰 
망각 속으로 잠겨 드는 것일까? 이 검은 덩어리 속에서, 차를 준비한다던가, 
가축들을 우물가로 몰고 가는 따위의 하찮은 걱정만이 꺼져가는 것일까...즉 
노^36^예의 한 영혼이 잠들어 가는 것일까, 아니면 추억의 소생으로 다시 살아난 이 
인간이 그 본래의 위대함 가운데에서 죽어가는 것일까.
  그 단단한 두 개골이 나에게는 오래 된 보물상자처럼 보였다. 어떠한 빛깔 고운 
비단들이, 어떠한 잔치의 추억들이, 이 사막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고 아무 소용이 없는 
유물들이 난파를 모면하여 거기에 들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상자는 단단히 
채워진 채 무겁게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며칠의 그 커다란 잠을 자는 동안에, 
세계의 어떤 부분이 이 사람 속에서 해체되어 가는 것인지, 차츰차츰 밤과 뿌리로 
되돌아가는 그 의식과 육체 속에서 분해되어 가는 것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나는 가축 몰이꾼이었읍죠. 이름은 모하메드였구요!"
  검둥이 노^36^예 바르끄는, 내가 알기로는 그의 운명에 저항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모르인들이 그의 자유를 하루아침에 빼앗고, 그를 이 땅 위에서 
갓난아기보다 더한 발가숭이로 만든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의 수확을 
삽시간에 짓밟아 버리는 신의 폭풍도 있으니까.
  그러나 모르인들은 그의 재물보다도 그의 인격을 깊이 상처 입혔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도 많은 다른 포로들이 1년 내내 먹을 것을 벌기 위해 일을 했던 불쌍한 가축 
몰이꾼을 자기들 속에서 죽어가게 내버려 두었지만 바르끄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바르끄는, 남들이 기다리다 지쳐 보잘 것 없는 행복에 자리잡듯이 그렇게 
노^36^예살이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는 주인의 선심을 노^36^예의 기쁨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은 없는 모하메드를 위해, 그 모하메드가 살았던 집을 자기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텅 비어 쓸쓸하긴 했지만, 다른 아무도 살게 할 
수는 없었다. 바르끄는 오솔길의 풀과 침묵의 권태 속에서 충실하게 죽어간 그 백발의 
정원지기와도 같았다.
  '나는 모하메드 벤 라우셍이오.'라고 그는 말하지 않고 '나는 모하메드였었죠'라고 
말했다. 그 소생만으로도 자기의 노^36^예의 모습을 쫓아내어 줄, 그 잊혀진 
인물이 되살아날 날을 꿈꾸면서. 이따금 밤의 고요 속에서 그의 모든 추억들이 
어렸을 적의 노래처럼 완전하게 되살아나기도 했다.
  우리들의 모르인 통역이 이런 말을 했다.
  "밤중에, 한밤중에 그가 마라께시 얘기를 하고 울었어요"
  고독 속에 있으면 누구나 이런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자기가 예고 없이 깨어나 자기 팔다리 속에서 기지개를 켜면서, 여자라고는 한 
번도 가까이한 적이 없는 이 사막에서 자기 곁에 여인을 찾는 것이다. 또 
샘물이라고는 일찍이 흘러본 적이 없는 그곳에서 샘물의 노래를 듣는 것이다. 그러면 
바르끄는 눈을 감고 하얀 집에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여기, 사람들이 거친 
천으로 엮은 집에 살면서 바람만을 쫓고 있는, 매일 밤 같은 별 아래 앉아 
있으면서도...
  신비스럽게도 생생하게 되살아난 옛 애정을 품고, 마치 그 끝이 가까이에 
있기라도 한 듯이 바르끄는 나에게 왔었다.
  그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의 애정도 모두 준비돼 있고, 그것을 나눠주기 
위해서는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내게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눈짓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바르끄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그 
비결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내가 그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기나 한 것처럼.
  "내일이지요, 우편물이 떠나는 게...아가디르로 가는 비행기에 나를 감추고...."
  "불쌍한 바르끄!"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불귀순 지구이다. 어떻게 그의 탈주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내일이면 모르인들은 이 도둑질과 모욕을 무서운 학살로써 보복할 것이다. 나는 공항 
기관사인 로베르그, 마르샬, 아브그랄의 도움을 받아 바르끄를 사려고도 해보았지만, 
모르인들은 노^36^예를 사려는 유럽사람을 만난 적이 없으므로 배짱만 퉁긴다.
  "2만 프랑 내쇼,"
  "우리를 놀리는 건가?"
  "그놈의 억센 팔을 보슈."
  이렇게 해서 여러 달이 지나갔다.
  마침내 모르인들의 달라는 값이 내려갔다. 그리고 내가 편지로 호소한 프랑스의 
친구들의 도움도 얻어서 늙은 바르끄를 살 수 있을 만큼 되었다.
  그것은 굉장한 흥정이었다. 그것은 여드레나 걸렸다. 열 다섯 명의 모르인과 
나는 모래 위에 빙 둘러앉아 흥정을 진행했다. 소유주의 친구이자 내 친구이기도 
한, 산적 진 울드 라따리가 은근히 나를 거들었다.
  "팔아 버려라. 어차피 그놈은 없어진다. 그놈은 병들었어. 병이 처음엔 보이지 
않지만, 속에 들어 있다. 언제고 갑자기 불거져 나온다. 얼른 저 프랑스 사람한테 팔아 
버려라."
  그는 내가 권한대로 자꾸 주인에게 말했다.
  또 하나의 산적인 랏지에게는 흥정을 도와주면 커미션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랏지는 주인을 구슬렸다.
  "그 돈으로 낙타하고 총하고 탄환을 사라. 그러면 너는 습격대를 만들어 프랑스 
사람들과 싸움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따르에서 새 노^36^예를 셋이고 넷이고 끌고 
올 수 있다. 이런 늙다리는 팔아 치워라."
  이리하여 바르끄는 내게 팔렸다. 나는 우리 바라크 속에 그를 쳐 넣고 엿새 
동안 자물쇠를 잠가 두었다. 비행기가 지나가기 전에 그가 문밖에서 
어정거리다가는 모르인들이 그를 다시 잡아 먼데로 팔아버릴까 봐서였다.
  어쨌든 나는 그를 노^36^예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것은 또한 아름다운 
의식이었다. 회교의 중이 오고, 그전 주인과, 쥐비의 추장 이브라힘도 왔다. 
보루에서 20미터 떨어진 곳에서라면, 나를 골려 준다는 재미만으로도 서슴없이 
바르끄의 목을 잘랐을 이 세 산적들이 그를 열렬히 껴안았고, 서명했다. 
  "이제 너는 우리 아들이다."
  그래서 바르끄는 그의 여러 아버지들에게 키스를 했다.

  그는 출발할 때가 오기까지 우리 바라크에서 유유한 포로 생활을 보냈다. 그는 
하루에도 스무 번씩이나 그 쉬운 여행에 대해 설명을 시키는 것이었다. 아가디르에서 
비행기를 내리면 그 비행장에서 마라께시로 가는 버스 표를 받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탐험가 놀이를 하고 놀 듯이 바르끄는 이렇게 자유인 놀이를 하는 것이다. 삶으로 
향하는 그 첫걸음, 그 버스며 그 군중, 그가 다시 보게 될 도시들....
  로베르그가 마르샬과 아브그랄을 대리해서 나를 찾아왔다. 바르끄가 차에서 
내린 후 배를 곯아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르끄를 위해서 내게 천 
프랑을 주었다. 이리하여 바르끄는 일거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20프랑을 주고는 감사를 요구하는 '자선을 하시는'사회 사업체의 
노부인들을 생각했다. 비행기 기관사인 로베르그와 마르샬, 아브그랄의 세 사람은 
천 프랑을 주면서도 자선을 하지 않고, 더구나 감사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또한 행복을 꿈꾸는 그 노부인들처럼 동정심으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히 한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되돌려주는데 이바지했을 뿐이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바르끄가 귀향의 흥분이 일단 지나면, 그를 제일 먼저 맞이할 
충실한 친구는 곤궁이라는 것과, 석 달도 못가서 그가 그 근처 철로 위에서 침목을 
뽑느라고 애쓰고 있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막에 있을 때보다 
덜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기 가족 사이에서 그 자신이 될 권리를 갖고 
있다.
  "자아, 바르끄 영감, 가시오. 그리고 사람이 되시오."
  출발 준비가 된 비행기는 떨고 있었다. 바르끄는 마지막으로 쥐비 곳의 끝없는 
황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비행기 앞에는 2백 명의 모르인들이 삶의 문턱에 선 
한 노^36^예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잘 보기 위해 떼지어 모여 있었다. 비행기가 
조금 가다가 고장이라도 나면 그들은 그를 도로 빼앗아 갈 것이다.
  우리는 세상으로 나가려고 약간 얼떨떨해 있는 이 쉰 살 먹은 갓난애에게 
작별의 손짓을 했다.
  "잘 가게, 바르끄!"
  "아니오."
  "아니라니?"
  "아닙죠. 나는 모하메드 벤 라우셍인 걸요."

  아가디르에서 바르끄를 돌봐주라고 우리가 부탁해 둔 아랍인 아브달라로부터 
그에 대한 마지막 소식을 들었다.
  버스는 저녁 때에야 떠나게 되어 있었다. 바르끄는 온종일 마음대로 보낼 수 
있었다. 그는 맨 먼저 그 조그만 도시를 아무 말도 없이 오랫동안 쏘다녔다. 
아브달라가 보기에는 그가 불안해하고 감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냐."
  바르끄는 갑작스런 휴가의 한복판에서 아직도 자기의 부활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렴풋한 행복을 느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어제의 바르끄와 오늘의 
바르끄 사이에 아무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저 태양을 나누어 받을 권리도, 여기 이 아랍인 카페의 정자 밑에 앉을 권리도 있는 
것이다.
  그는 거기 앉았다. 아브달라와 자기를 위해 차를 주문했다. 그것이 양반으로서의 첫 
행동이었다. 그 권력으로 하여 그의 얼굴모습조차도 달라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급사는 그 행동이 당연하다는 듯이 놀라지도 않고 그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급사는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 차를 따름으로써 한 자유인을 예찬하고 있다는 것을.
  "어디, 다른 데로 가보세."
  바르끄가 말했다.
  그들은 아가디르를 굽어보는 가스 바로 올라갔다.
  베르베르족의 춤추는 소녀들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녀들이 길들여진 친절을 
잔뜩 보여주었기 때문에 바르끄는 다시 살아난 것만 같이 여겨졌다. 그녀들은 
자기네들도 모르게 그를 인생 속으로 맞아들여 준 것이다. 여자들은 그의 손을 
잡고 친절하게,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차를 권했다.
  바르끄는 자기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자들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가 
만족해하니까 소녀들도 그를 위해서 만족해했다. 그는 그녀들을 놀라게 해주려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하메드 벤 라우셍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 말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다 이름이 
있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아주 먼 데서 돌아오기도 하니까...
  그는 아브달라를 다시 시내 쪽으로 끌고 갔다 그는 유태인의 노점 앞에서 
서성거렸고,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리고 생각했다. 어느 방향으로든지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과 자기는 자유롭다는 것을... 그런데 이 자유가 
그에게는 씁쓸한 것 같이 생각되었다. 어떤 점에 있어서 그가 이 세계와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 자유가 더욱 뚜렷하게 그에게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때 한 아이가 지나가기에 바르끄는 그의 볼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아이는 방긋 
웃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첨하는 주인의 아들이 아니었다. 바르끄가 쓰다듬어준 
아이는 연약한 아이였다. 그 아이가 방긋 웃고 있었다. 이래서 이 아이가 바르끄를 
깨워 주었고, 자기에게 미소지었던 이 연약한 아이 때문에 바르끄는 자기가 이 
지상에서 좀더 중요해진 것 같이 여겨진 것이었다. 그는 그제야 어떤 것들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 발걸음을 크게 떼어 놓는 것이다.
  "뭘 찾지?"
  아브달라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바르끄가 대답했다.
  그런데 어느 길모퉁이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한 떼와 마주치자 그는 걸음을 
멈췄다. 여기였던 것이다. 그는 말없이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유태인 
노점 쪽으로 가더니 선물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아브달라는 화를 냈다.
  "바보같으니, 돈을 아껴야지!"
  그러나 바르끄는 이미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점잖게 그는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작은 손들이 장난감이니 팔찌니 금실로 수놓은 슬리퍼 위로 
뻗쳐졌다. 아이들은 저마다 보물을 손에 들고 버릇도 없이 달아나 버렸다.
  아가디르의 다른 아이들이 이 소문을 듣고 그에게로 달려왔다. 바르끄는 그들에게 
금실로 수놓은 슬리퍼를 신겨 주었다. 그러자 아가디르 근방의 다른 아이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일어서서 환성을 지르며 이 검은 신을 향해 달려 올라와서, 그의 낡은 
노^36^예옷에 매달리며 저의들 몫을 요구했다. 바르끄는 파산하고 말았다.
  아브달라는 그가 '기뻐 미친'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르끄로서는 넘치는 기쁨을 나누어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유였기 때문에 사랑 받을 권리도, 북쪽이든 남쪽이든 마음대로 걸어갈 
권리도, 자기가 일해서 빵을 벌 권리도, 이런 모든 본질적인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돈이 무슨 소용이랴...그러자 그는 사람들이 심한 허기를 
느끼듯이 인간들 속의 하나의 인간, 인간들과 연결된 하나의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것이다.
  아가디르의 춤추는 소녀들은 늙은 바르끄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지만 그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 가볍게 헤어질 수가 있었다. 그녀들에게는 그가 필요치 
않았으니까. 그 아랍인의 노점 상인도, 길을 오가는 통행인들도 모두 그의 속에 
있는 자유인을 존경했고, 그와 함께 태양을 나누어 가졌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이상 자기에게 그가 필요하다고 알려 준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땅 위에 자기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한없이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에게는 서로의 걸음걸이를 방해하는 인간 상호 관계의 무게가 
없었고, 그가 어떤 행동을 하려 할 때마다 사람들이 쓰다듬기도 하고 짓찧기도 하는 
모든 것, 저 눈물이며, 이별이며, 책망이며, 기쁨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그를 다른 
사람들과 결합시켜 주고, 무게를 갖게 해주는 그 숱한 관계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바르끄 위에는 벌써 아이들의 천 가지 희망이 묵직하게 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바르끄의 왕국은 아가디르 위에 저무는 태양의 영광 속에서, 또 그렇게도 
오랫동안 기다렸던 유일한 다정함이었고, 유일한 안식처였던 저녁의 시원함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바르끄는 옛날에 양떼들에게 둘러싸였던 것처럼 
어린이들의 물결 속에 파묻혀 세상에 첫발자국을 찍으며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내일이면 가난한 자기 가족들에게 되돌아 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노쇠한 
팔로는 먹여 살릴 수 없을 만큼의 생명들의 책임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기에서 자기의 참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삶을 
살기에는 너무나 몸이 가벼운 천사가 속임수로 허리띠에 납덩어리를 꿰매 
넣기라도 한 것처럼, 바르끄는 금실로 수놓은 슬리퍼를 갖고 싶어 하는 그 숱한 
어린이들에 의해 대지 쪽으로 이끌려 가면서 고달픈 걸음을 내디디는 것이다.

      (7)
  사막이란 이런 것이다. 본래는 놀이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 한 권의 코란이 사막을 
제국으로 바꿔 놓는다. 텅 비었을 사하라 한복판에서 인간의 결정을 뒤흔드는 은밀한 
연극이 연출된다. 사막에서의 참된 삶은 목초를 찾아 옮겨가는 부족들의 이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지금도 행해지는 놀이에 의해서이다.
  귀순사막과 불귀순 사막과의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내용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현재의 전혀 다르게 변모해 버린 귀순 사막을 앞에 두고 나는 소년시절에 여러 
가지 놀이를 하던 일들이며, 우리가 온갖 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던 컴컴하고 
금빛 도는 그 공원이며, 우리가 완전히 알아낼 수도 없었고, 전부를 뒤질 수도 
없었던 1킬로 미터 평방으로 된 그 무한한 왕국 등을 회상한다. 우리는 한 
발자국마다 어떤 맛을 갖고 있고, 사물들이 다른 데서는 있을 수 없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갇혀진 문명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 다른 법률 아래 살게 되었을 때, 소년시절의 음영으로 가득 찬 
그 마법의 공원, 그 얼어붙은 공원, 그 폭염의 공원에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인가! 지금 
그 공원에 다시 돌아온 사람들은 일종의 절망감을 느끼며 바깥쪽의 나지막한 회색 
돌담을 따라 걸으면서, 이렇게 좁은 울타리 안에 그때는 자기에게 있어 무한한 
넓이였던 하나의 세계가 갇혀 있었음을 발견하고는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제 자기는 
그 무한한 세계 속에 다시는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들어가야 할 곳은 그 공원이 아니라, 그 놀이 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불귀순 사막은 없어졌다. 쥐비 곶, 시스네로스, 쀠에르또 
깡사도, 사뀌에뗄함라, 도라 스마라, 그 어디에도 이제 신비는 없다.
  우리가 그리고 달려가던 수많은 지평선들도, 마치 따뜻한 손의 올가미에 걸리면 
빛깔을 잃어버리는 곤충들처럼 차례차례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지평선을 
쫓아다녔던 사람들도 어떤 환영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달리던 우리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의 팔에 안기자마자 아름다운 여자 
포로들이 날개의 황금빛을 잃고 하나하나 새벽 빛 속에 사라져갔다는, 저 너무나 
정교한 것을 추구했던 아라비안나이트의 사르탕 왕도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막의 마술을 양식으로 삼았지만 다른 사람들 같으면 거기에 유정을 
파서 그것으로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오는 것이 너무 늦었다. 
왜냐하면 들어가지 못할 종려나무 숲이나 사람의 손이 닿은 적이 없는 조개껍데기 
가루가 그 가장 귀중한 부분을 이미 우리에게 주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단 
한 때의 열광밖에는 주지 않았으며, 그리고 그것을 살린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사막이라고? 언젠가 나는 바로 그 심장부로 해서 그곳에 뛰어든 적이 있다. 1935 
년 인도차이나로 가는 장거리 비행 도중, 나는 이집트의 리비아 접경 오지에서 
끈끈이에 붙들리듯이 사막에 붙잡혀 버렸는데, 그때 나는 꼭 죽는 줄로만 알았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2 

    전2권 중 제2권

  지은이: 쌩 떽쥐빼리 
  옮긴이: 조희수
  펴낸곳: 도서출판 움직이는 책

 
  [  7. 사막 한가운데서

      (1)
  지중해로 들어가면서 나는 낮게 뜬 구름을 만났다. 나는 고도 20미터까지 내려갔다. 
소나기가 앞 유리창을 두드렸고, 또 기선 마스트를 들이받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기관사 앙드레 쁘레보가 내게 담뱃불을 붙여준다.
  "커피를 할까...."
  그는 비행기 뒤쪽으로 사라졌다가 보온병을 들고 나온다. 나는 회전 속도 2천을 
유지하기 위해 가끔 가스 핸들을 퉁겨 준다. 힐끗 계기반들을 훑어 본다. 내 
신하들은 모두 공손하다. 바늘이 모두 제자리에 있다. 나는 바다를 한 번 내려다 
본다. 바다는 빗발 아래서 끓는 커다란 대야 모양 김을 내뿜고 있다. 내가 만약 
수상기를 타고 있었다면 바다가 그렇게 푹 패어있음을 애석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육상기를 타고 있다. 패어 있건 말건 내려앉을 수는 없다. 
어째서인지는 모르나, 그것이 일종의 이치에 안맞는 안전감을 내게 주는 것이다.
  바다는 내 것이 아닌 어떤 세계의 일부분의 이루고 있다. 여기서 사고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고, 내게 위협을 주지도 못한다. 나는 
바다에 대비해서 장비는 되어 있지 않으니까.
  한 시간 반을 날자 비가 수그러진다. 구름은 여전히 낮게 드리웠지만, 이미 햇빛이 
크나큰 미소처럼 뚫고 비친다. 나는 이 갠 날씨의 유유한 준비에 감탄한다. 나는 머리 
위에 흰 솜의 켜가 덮여 있음을 짐작한다. 나는 돌풍을 피하기 위해 사행한다. 이제 
그 복판을 가로지를 필요는 업다. 마침내 첫 하늘 조각이 드러난다.
  나는 그것을 보기 전에 예감했었다. 왜냐하면 내 앞 바다 위에 초원의 빛을 띤 긴 
띠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빛나는 진초록의 오아시스 같은 것으로서, 그것은 
세네갈에서 3천 킬로 미터의 사막을 넘어 남부 모로코에 다다랐을 때,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던 저 보리밭 빛깔과도 흡사했다. 여기서도 나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고장에 접어든 느낌이 들어 가벼운 기쁨을 맛본다. 나는 쁘레뽀 쪽을 돌아본다.
  "됐어. 잘 돼 간다!"
  "네, 됐어요."

  튀니스, 가솔린을 채우는 동안 나는 서류에 사인을 한다. 사무실을 나오는 
순간, 다이빙할 때,  같은 '풍덩!' 하는 소리가 들린다. 울림이 없는 둔한 소리. 
나는 그 순간에 전에도 이와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때는 
차고가 폭발했었다. 그 목쉰 기침소리로 두 사람이 죽었었다.
  나는 활주로를 끼고 길 쪽을 돌아다본다. 약간의 먼지가 피어올랐는데, 두 대의 
고속으로 달리던 자동차가 충돌했던 것이다. 갑자기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쪽으로 달려가고 몇 사람은 우리에게로 달려온다.
  "전화를 해... 의사를... 머리가...."
  나는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운명이 고요한 저녁 햇빛 속에서 기습에 성공한 
것이다. 한 아름다움이, 아니면 한 지혜가, 한 생명이 짓이겨졌을 것이다. 비적들도 
이렇게 사막 속을 걸어왔지만, 아무도 그 모래 위의 가벼운 발소리도 듣지 못했다. 
주둔지 안에서 약탈하는 짧은 웅얼거림만이 들렸을 뿐이다. 그런 다음은 모든 것은 
황금빛 침묵 속에 잠겨드는 것이다. 그것과 똑같은 평화, 똑같은 침묵....
  내 옆에서 누군가가 두 개골이 깨어졌다는 말을 한다.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피투성이의 얼굴을 알고 싶지 않아 도로를 등지고 내 비행기 쪽으로 온다. 그러나 
위협감은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조금 뒤에 그 소리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시속 2백 70킬로로 시커먼 사구를 스쳐갈 때, 그와 똑같은 목쉰 소리, 약속 
장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저 운명과도 같은, '콜록!'하는 소리를.
  벤가지를 향해 출발!

      (2)
  도중.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도 2시간. 트리포리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벌써 검은 
안경을 벗어버렸다. 그러자 모래가 금빛으로 물든다. 그런데 이 지구는 왜 이리도 
적막할까? 나에게는 또다시 강물이며, 나무 그늘, 사람의 집들은 어떤 우연한 요행의 
결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바위와 모래의 영토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나는 비행의 영역에 살고 있으니까. 나는 
신전에 들어앉듯이 사람들은 본질적인 관례의 비밀에 의해 구원 없는 명상 속에 
갇힌다. 이 속된 세상은 이미 희미해지고 곧 사라지려 하고 있다. 눈 아래 풍경이 
아직은 불그레한 빛을 머금고 있지만, 무엇인지 벌써부터 거기에서 새어나가고 있다. 
나는 이 시간만큼 값진 것을 아무것도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비행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맛본 사람만이 나의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차츰차츰 태양은 포기한다. 사고가 났을 때 나를 받아 줄 드넓은 
황금빛 표면도 나는 포기한다. 나를 안내해 줄 표적들도 포기한다. 나를 위해서 
암초를 피하게 해 줄, 하늘에 솟아난 산들의 옆모습도 포기한다. 나는 깊은 밤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비행한다. 나를 위해 가진 것이라고는 별밖에 없다.
  이 세계의 죽음은 천천히 이루어진다. 그래서 빛도 조금씩 내게서 없어져 가는 
것이다. 땅과 하늘이 조금씩 섞여든다. 저 대지가 솟아올라 수증기처럼 퍼져나가는 것 
같이 보인다. 첫 별들이 푸른 물 속에서처럼 떨고 있다. 그것들이 단단한 
다이아몬드로 변하기까지에는 아직도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어떤 밤에는 날아가는 
불꽃들이 하도 많아서 나는 별들 사이로 큰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쁘레보가 고정 램프와 구급 램프를 시험해 본다. 우리는 빨간 종이로 전구들을 
싼다.
  "한 겹 더 쌀까...."
  그는 한 겹 더 싸고는 스위치를 넣는다. 불빛이 아직도 너무 밝다. 그 빛은 
사진관에서처럼 바깥 세상의 희미한 형상들을 지워 없앨 것이다. 그것은 종종 밤에 
사물들에 붙어 있는 저 가벼운 무리를 망가뜨릴 것이다. 밤은 이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 진짜 밤은 아니다. 초승달이 아직 남아 있다. 쁘레보가 뒤쪽으로 
기어들어가 샌드위치를 갖고 나온다. 나는 포도 한 송이를 먹는다. 배가 고프지 않다. 
시장기도 갈증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전혀 피로도 느끼지 않는다. 이대로 10 
년이라도 조종을 할 수 있은 것 같다.
  달이 졌다.

  벤가지가 캄캄한 밤 속에서 나타난다. 벤가지는 하도 깊은 어둠 속에 쉬고 있어서 
아무런 무리로도 장식되어 있지 않다. 나는 거의 가깝게 다다라서야 도시를 알아볼 수 
있었다. 비행장을 찾고 있으려니 붉은 표지등이 일제히 켜진다. 불빛들이 검은 
장방형을 그려 놓는다. 나는 선회한다. 하늘로 향한 표지등 불빛이 화재의 분수처럼 
곧바로 하늘로 치솟아 회전하면서 땅 위에 황금빛 길을 그린다. 나는 장애물을 잘 
살피기 위해 여전히 선회를 계속한다. 이 공항의 야간 시설은 훌륭하다. 나는 속도를 
늦추며 검은 물속인양 다이빙을 시작한다.  내가 착륙한 것은 현지 시간 23시였다. 
나는 표지등 쪽으로 굴러간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장교와 사병들이 어둠 속에서 
탐조등의 단단한 빛 속으로 나타나며 차례로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사람들은 내 
서류를 받고, 가솔린을 채우기 시작한다. 나의 통과 절차는 20분이면 완료 될 것이다.
  "한 번 선회해서 우리 위를 지나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륙이 제대로 끝났는지 
모르니까."
  "출발!"
  나는 장애물 없는 통로를 향해 이 금빛 길 위를 활주한다. 시문(사막의 열풍이라는 
뜻)형인 내 비행기는 활주로에 충분한 여유를 남기고 무거운 기체를 떠올린다. 
탐조등이 뒤따라와서 방향 선회의 방해가 된다. 마침내 그것은 나를 놓아준다. 그것이 
나를 눈부시게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수직으로 반선회한다. 그때 
탐조등이 다시 내 얼굴을 스친다. 그러나 닿자마자 내게서 달아나 그 긴 금빛 플롯을 
딴 데로 돌린다. 이러한 조심성에서 나는 최대의 친절을 느낀다. 이제 나는 사막을 
향해 다시 기수를 돌린다.
  파리와 튀니지, 벤가지로부터의 기상 통보들은 시속 30--40 킬로미터의 뒷바람을 
내게 알려준다. 나는 시속 3백 킬로 미터의 속도만을 믿는다.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를 맺는 직선의 한가운데로 기수를 돌린다. 이렇게 하면 나는 해안의 비행 
금지구역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모르고 편류를 일으킬 경우에도 오른쪽이나 
왼쪽에서 이들 두 도시 중 어느 하나의 등불을 만날 것이다. 바람이 그다지 
바뀌지 않는 한 나는 3시간 20분 동안 비행할 것이다. 바람이 약해진다면 3시간 
45분 동안을, 그래서 나는 1천 50킬로 미터의 사막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달도 이미 없다. 별들이 있는 데까지 부풀어 오른 시커먼 타르. 나는 불빛 하나 
볼 수 없을 것이고, 목표물 하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무전도 없으므로 
나일강에 이르기 전까지는 사람이 보내는 신호도 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제 내 
나침반과 '스뻬리' 이외에는 살펴볼 생각을 않는다. 계기의 어둠침침한 눈금판 
위에서 완만한 호흡하고 있는 가는 라듐선 이외는 아무것에도 흥미가 없다.
  쁘레보가 움직일 때마다 나는 가만히 중심의 변화를 수정한다. 나는 2천 미터로 
상승한다. 그 높이이면 바람이 알맞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가끔가다가 나는 전구를 켜본다. 계기 중에서 야광 장치가 없는 것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어둠 속에 깊이 갇혀 있다. 별들과 똑같은 
광물성의 빛, 똑같이 쓸데없고 은연한 빛을 내며, 똑같은 언어로 말하는 내 작은 성좌 
속에서.
  나도 천문학자들처럼 하늘의 구조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나도 또한 근면하고 
청순하다고 느낀다. 외계에서는 모든 것이 꺼져 버렸다. 잘 견디어내던 쁘레보는 
잠 속에 빠졌고, 그래서 나는 더욱 고독을 느낀다. 엔진의 부드러운 붕붕거림이 
있고, 내 앞 계기반 위에는 이 모든 조용한 별들이 있다.
  이럴 때면 나는 명상에 잠긴다. 우리는 이제 달의 혜택도 없고, 무전 연락도 없다. 
우리가 나일강의 번쩍이는 물줄기에 머리를 들이밀 때까지에는 우리를 세계와 연결 
지어 줄 어떠한 가느다란 끄나풀도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의 밖에 있으며, 우리의 
엔진만이 타르 속에서 우리를 지탱하고 지속시켜 준다. 우리는 동화에 나오는 거대한 
어둠의 골짜기, 시련의 골짜기를 가로지르고 있다. 여기서는 구조란 전혀 없다. 
여기서는 과오에 대한 사면도 없다. 우리는 신의 자유의사에 맡겨져 있다.
  배전반의 접촉점에서 광선이 새어나온다. 나는 쁘레보를 깨워 그것을 끄라고 
한다. 쁘레보는 어둠 속에서 곰 모양 움직이더니 재채기를 하고 앞으로 나온다. 
그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손수건과 검은 종이를 결합하기에 열중하고 있다. 나를 
방해하던 그 광선은 사라졌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계기 바늘의 라듐의 창백하고도 아득한 빛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은 어두운 밤의 유흥장의 빛이었지 별의 빛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 빛은 내 눈은 부시게 하고, 다른 빛들을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비행 3시간. 강렬한 것 같은 빛이 오른쪽에서 솟아 오른다.나는 지켜본다. 
그때까지는 보이지 않던 기다란 비행기가 지나간 흔적 같은 것이 날개 끝의 등에 
걸린다. 그것은 환해졌다 꺼졌다 하는 단속적인 빛이었다. 나는 구름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 구름이 내 램프에 반사되는 것이었다. 생각했던 것들에 
다가온 지금 나는 맑게 갠 하늘을 원했었는데.
  날개가 무리 아래서 반짝인다. 빛은 자리를 잡고, 고정되고, 번쩍이며, 또 날개 
끝 쪽에서 장미빛 꽃다발을 이룬다. 커다란 소용돌이가 나를 뒤흔든다. 나는 
두께를 모를 두터운 구름 덩이 한가운데를 날고 있는 것이다. 나는 2천 5백 
미터까지 올라가 본다. 그러나 구름 위로 솟아 나지 못한다. 1천 미터로 다시 
내려간다. 꽃다발은 여전히 있어, 꼼짝도 않고 점점 더 번쩍인다. 그래, 좋다. 할 
수 없지. 내게는 딴 생각이 있다. 빠져 나갈 때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저 불길한 여인숙의 등불 같은 빛이 싫다.
  나는 어림해 본다.
  '여기서는 야간 기체가 흔들린다. 이건 정상이다. 그런데 하늘이 맑고, 높이 
날아 왔는데도 끊임없이 동요가 있었다. 바람이 조금도 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시속 3백 킬로 미터를 초과했던 셈인가.'
  결국 나는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구름에서 빠져 나가면 
어떻게든 위치를 알아내도록 해야겠다.
  이윽고 구름에서 빠져 나왔다. 그 꽃다발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다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예고다. 나는 앞을 주시한다. 그러자 일순간 하늘과 다음 
구름 덩이 사이로 좁은 골짜기가 보인다. 꽃다발이 어느새 되살아났다.
  나는 이제 이 끈끈이에서 단 몇 초 동안밖에는 벗어나지 못할 모양이다. 3시간 
반 동안을 비행한 후에 이 끈끈이가 나를 불안에 몰아넣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한대로 전진하고 있다면 나일강이 가까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수가 
좋으면 구름의 회랑 너머로 강을 볼 수 있겠지만 그러나 회랑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나는 감히 더 내려 가지 못한다. 만약 내가 생각했던 만큼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고지 상공을 날고 있을 것이니까.
  나는 여전히 다른 불안은 느끼지 않았으나 다만 시간을 허비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침착성에 4시간 50분의 비행이라는 한계를 긋는다. 
이만한 시간이 지나면 설령 무풍 속을 날았다 하더라도 (무풍이란 있을 수도 
없지만) 나는 벌써 나일 계곡을 넘어섰을 것이다. 
  구름의 가장자리에 이르자 그 꽃다발은 점점 더 자주 명멸하는 빛을 내더니 
갑자기 꺼져 버린다. 나는 밤의 악마들과 하는 이런 암호  교신이 싫다.
  파란 별 하나가 내 앞에 등대처럼 빛나며 나타난다. 별일까, 등대일까? 나는 이 
불가사의한 빛, 마왕의 별, 이 위험한 초대도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쁘레보가 잠이 깨어 계기반에 점화한다. 나는 그와 그의 램프를 모두 밀어 
젖힌다. 나는 방금 두 구름떼 사이의 단층에 접근한 것을 이용해서 아래를 
관찰하려고 애썼다. 쁘레보는 다시 잠이 든다.
  그러나 관찰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4시간 5분의 비행. 쁘레보가 내곁에 와서 않는다.
  "카이로에 도착할 시간인데...."
  "누가 아니래...."
  "저건 별인가, 등대인가?"
  나는 아까부터 엔진을 약간 죄었었는데, 그것이 아마 쁘레보를 깨운 모양이다. 
그는 비행소리의 모든 변화에 민감하다. 나는 구름더미 아래로 빠져 나가기 위해 
천천히 하강을 시작한다.
  방금 나는 지도를 살펴 보았다. 어쨌든 나는 표고 제로에 와 있을 것이었다. 
나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다. 나는 강하를 계속하며 정북으로 진로를 바꾼다. 
그러면 비행기의 창으로 도시의 불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아마 그 도시를 
지나쳤을지도 모르니까 그것은 왼쪽에 나타날 것이다. 지금 나는 적운 밑을 날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왼편으로 더 낮게 내려가고 있는 다른 구름을 스치며 날고 
있다. 그 그물에 걸려 들지 않으려고 기수를 북북동으로 향한다.
  이 구름은 분명히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서 내게서 지평선을 모두 가려버린다. 
이제는 감히 더 고도를 낮출 수가 없다. 나의 고도계는 4백 미터를 가리키고 있지만, 
이 기압을 알 도리가 없다. 쁘레보가 몸을 구부린다. 나는 그에게 소리친다.
  "바다로 빠져나가 바다에 내려가 보세. 들이받지는 않게."
  이미 항로를 벗어나 바다로 들어서지 않았다고  증명할 아무것도 없었다. 이 구름 
밑의 어둠은 전혀 들여다 볼 수가 없다. 나는 창에 몸을 바짝 붙인다. 아래를 확인해 
보려고 시도한다. 불빛이 나 표적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나는 재를 파헤치는 사람이다. 
나는 아궁이 밑바닥에서 생명의 불씨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사람과 같다.
  "등대다!"
  우리 둘은 동시에 이 명멸하는 함정을 보았다. 얼마나 미친 짓인가! 이 유령 등대, 
이 밤의 속임 꿈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더란 말인가? 왜냐하면 쁘레보와 내가 날개 밑 
3백 미터쯤에서 그것을 다시 찾아내려고 몸을 숙인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앗!"
  나는 다른 아무 말도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우리의 세계를 뿌리째 뒤흔드는 
어마아마한 폭음밖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갓 같다. 시속 2백 70킬로 
미터로 우리는 땅을 들이받았던 것이다.
  그 뒤에 온 1초의 백분의 1동안 우리는 우리 둘은 한 덩어리로 뭉쳐버릴 폭발의 
커다란 진홍빛 별밖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쁘레보도 나도 조그만 
감동도 느끼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 속에 엉뚱한 기다림,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그 
속에서 사라져 버릴, 그 찬란한 별에 대한 기다림밖에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진홍빛 별은 끝내 없었다. 있었던 것은, 유리창을 뜯어 내고, 철판을 
1백 미터나 날려보내고, 그 요란한 울림으로 우리 창자 속까지 꽉 채우고 
조종실을 쑥밭으로 만든 일종의 지진 같은 것이었다. 기체는 멀리서 던져 단단한 
나무에 꽂힌 칼처럼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분노 때문에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1초, 2초.... 기체는 여전히 떨고 있었고, 나는 비행기가 
간직한 에너지가 그것을 유탄처럼 폭발시키기를 무서운 초조감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지하의 진동은 결정적인 분화에 이르지 않은 채 계속되었다.
  나는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업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진동도, 이 분노도, 이 끝없는 유예도 알 수가 없었다.... 5초, 6초.... 그러자 
갑자기 우리는 회전하는 듯한 느낌을, 비행기 창으로 우리 담배를 내동댕이치고, 
오른쪽 날개를 박살낸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얼어붙은 듯한 
부동 외에는 아무것도, 나는 쁘레보에게 소리쳤다.
  "뛰어 내려, 빨리!"
  동시에 그도 소리쳤다.
  "불이!"
  순간, 우리는 이미 떨어져나간 창으로 곧두박질했었다. 우리는 20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나는 쁘레보에게 말했다.
  "다친 덴 없나?"
  그가 대답했다.
  "다친 덴 없어요!"
  그러나 그는 무릎팍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에게 말했다.
  "만져보게. 움직여보구. 정말 다친 데가 없다고 내게 맹세해봐...."
  그러나 그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녜요. 구조 펌프가...."
  나는 그가 머리에서 배꼽까지 갈라지면서 별안간 쓰러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똑바로 뜬 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구조 펌프였어...."
  나는 생각했다. 미쳤구나, 이제 춤이라도 출 거다.
  그런데 그는 화재를 면한 기체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나를 보면서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녜요. 구조 펌프가 무릎에 걸렸을 뿐예요."

      (3)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나는 손에 회중 전등을 
들고 땅 위의 비행기 자국을 더듬어 되올라간다. 정지 점에서 2백 50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미 우리는 비행기가 달리며 모래를 퉁겨 놓은 뒤틀어진 쇳조각이며 철판들을 
발견한다.
  날이 밝으면 우리는 어느 황막한 고원 꼭대기의 비스듬한 경사면을 거의 
접선처럼 들이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충돌 점에 생긴 모래 속의 구멍은 쟁기 보습으로 판 것과도 같았다. 기체는 
곤두박질하지 않고 성난 길짐승이 꼬리를 휘두르듯이 배밀이를 하며 나갔던 것이다. 
기체는 시속 2백 70킬로로 구르는 검은 돌들이 축받이 구슬 역할을 해주었던 덕택일 
것이다. 
  쁘레보는 늦게나마 누전으로 인한 화재를 막기 위해 축진지의 접속을 끓어 놓았다. 
나는 엔진에 기대어 생각해 본다. 고공에서 4시간 15분 동안을 시속 50 킬로 미터의 
강풍을 계속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과연 진동이 있었다. 그런데 예보를 
수신한 후에 변화가 있었다면 나로서는 바람의 방향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나는 한 변의 길이 4백 킬로 미터의 정방형 안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쁘레보가 내 옆에 앉으면서 말한다.
  "살아 있다는 게 이상하군요."
  나는 목표를 찾기 위해 쁘레보에게 그의 전등을 켜 놓게 하고 내 회중 전등을 
들고 똑바로 걸어 나간다. 주의 깊게 땅을 들여다본다. 천천히 나가면서 커다란 
반원을 그리고, 여러 번 방향을 바꾼다. 마치 떨어뜨린 반지를 찾기라도 하듯이 
여전히 땅을 들여다 본다. 방금 나는 이렇게 해서 생각의 불씨를 찾았던 것이다.
  나는 나의 전등이 비치는 흰 원반 위로 몸을 굽히며 여전히 어둠 속을 
나아간다. 역시 그래, 역시 그렇군.... 나는 천천히 비행기 쪽으로 다시 
올라간다. 나는 조종석 옆에 앉아서 생각에 잠긴다.
  나는 희망적인 증거를 찾아보았으나 그것을 도무지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생명이 
내보이는 어떤 표시를 찾았으나, 생명은 내게 아무런 표시도 해주지 않았다.
  "쁘레보, 나는 풀 한 포기도 보지 못했어."
  쁘레보는 잠자코 있어서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날이 밝아 장막이 
걷히면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나는 단지 심한 피로를 느끼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사막 한가운데 4백 킬로 미터 쯤 되는 곳!'
  갑자기 나는 벌떡 일어섰다.
  "물!"
  가솔린 탱크도 오일 탱크도 터져 있었다. 물 저장고도 마찬가지였다. 모래가 전부 
마셔버렸다. 우리는 박살이 난 보온병 밑바닥에서 반 리터의 커피와, 다른 병 
밑바닥에서 4분의 1리터의 백포도주를 찾아냈다. 우리는 이 액체들을 걸러서 한데 
섞었다. 우리는 또 약간의 포도와 오렌지를 한 개를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속셈을 
한다.
  '사막에서, 햇빛 아래서 다섯 시간만 걸으면 이건 다 없어져 버릴 걸....'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 의해 우리는 조종실 안에 자리잡는다. 나는 드러누워 
잠을 청하려 한다. 나는 잠이 들면서 우리가 한 모험의 결산표를 만들어 본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도무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1리터의 음료도 없다. 만약 
우리가 대략 항로의 직선 위에 놓여 있다면 1주 일 후라야 발견될 것이고, 그 
이상은 바랄 수도 없고 또 그때는 이미 너무 늦다.
  우리가 만일 옆으로 벗어나 있다면 여섯 달이나 걸려서야 발견될 것이다. 비행기에 
의한 수색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를 3천 킬로 미터나 되는 지역에서 찾아야 할 
테니까.
  "아아, 유감이다."
  쁘레보가 내게 말한다.
  "뭐가?"
  "단번에 깨끗이 죽을 수 있었는데!"
  그러나 그렇게 빨리 단념할 필요는 없다. 쁘레보와 나는 생각을 덜린다. 그것이 
아무리 가냘픈 것일지라도 비행기에 의한 기적적인 구원의 찬스를 놓쳐서는 안된다. 
또한 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서 어쩌면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오아시스를 
놓쳐서도 안된다. 날이 새면 오늘 하루 종일 걸어가보자. 그리고 다시 비행기 있는 
데로 돌아오자. 그리고 출발에 앞서 우리의 예정표를 모래 위에 큰 글자로 써두고 
가자.
  그래서 나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누워서 새벽까지 자야겠다. 잔다는 것이 
나는 몹시 기쁘다. 피로가 수많은 영상들로 나를 에워싸준다. 나는 사막 속에서도 
고독하지 않다. 나의 어렴풋한 잠 속에는 갖가지 목소리와, 추억과, 속삭여진 
속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아직은 목마르지 않고 기분이 좋다. 나는 
모험에 향하듯이 잠에 몸을 내맡긴다. 현실도 꿈 앞에서는 맥을 못춘다.
  아아! 그런데 날이 밝았을 때 사정은 아주 딴 판이 아닌가!

      (4)
  나는 사하라를 무척 사랑했다. 나는 여러 밤을 불귀순 지역에서 지낸 일이 
있다. 나는 바람이 바다에서처럼 물 이랑을 새겨 놓은 그 황금빛 벌판에서 잠을 
깬 적도 있다. 나는 사막에서 비행기 날개 밑에 자면서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완만한 구릉의 비탈진 면을 걸어간다. 땅은 반짝거리는 까만 조약돌이 
한 켜 온통 뒤덮인 모래로 이루어져 있었다. 금속 비늘이라고나 할까. 우리를 
둘러싼 은모래의 도움(둥근 지붕)들은 갑옷처럼 번쩍인다. 우리는 광물질의 세계 
속에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쇠로 된 풍경 속에 갇혀 있었다.
  첫 봉우리를 넘어서니, 그 앞에 또 비슷한 번쩍이는 검은 봉우리가 나타난다. 
우리는 나중에 되돌아올 때의 표적으로 하기 위해 발로 땅을 긁으면서 걸어간다. 
우리는 태양을 향해 전진한다. 내가 이렇게 정동 쪽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은 모든 
논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기상 통보도, 나의 비행 시간도 모두 내가 
나일강을 넘어섰다고 믿게 하고 있었으니까.
  하기야 아는 서쪽으로 잠깐 동안 가보았지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었다. 그래서 서쪽 방향은 내일로 미루었다. 나는 또 바다로 이끌어 주기는 
할 북쪽 방향도 일단 희생시켰다. 사흘 뒤, 반 실신상태가 되어 우리가 
결정적으로 비행기를 포기하고, 쓰러질 때까지 줄곧 바로 걸어가기로 결심하게 될 
때에도 우리는 역시 동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북동 
쪽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모든 이론에도, 또 모든 희망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구조된 뒤에 우리는 다른 어떤 방향도 우리를 살아 돌아오게 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왜냐하면 북쪽으로 향했더라면 너무나 지쳐서 
바다에까지 이르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생각에도 이치에 닿지 않아 
보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그 방향을 선택하게 할 아무런 표시도 없었으므로, 
그때 내가 그 방향을 택한 유일한 이유는 안데스 산 속에서 내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내 친구 기요메를 구해 낸 것이 바로 그 방향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방향이 내게는 막연하나마 생명의 방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섯 시간을 걸으니까 풍경이 바뀐다. 모래의 강이 골짜기를 흐르고 있는 것 같아 
우리는 그 골짜기를 따라 가기로 했다. 우리는 큰 걸음으로 걷는다. 가능한 한 멀리 
가야하고, 만약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 밤이 되기 전에 되돌아가야 한다. 갑자기 
나는 멈춰 섰다.
  "쁘레보."
  "왜요?"
  "발자국을...."
  얼마나 오랜 시간 전부터 우리는 발자국을 남기는 것을 잊고 있었던가? 만약 
그것을 다시 찾아 내지 못한다면 그건 바로 죽음이다. 
  우리는 되돌아간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약간 비껴서, 우리가 꽤 멀리 오고 나서 처음 
방향을 향해 직각으로 꺾여서 가면 우리가 잊기 전에 남겨 놓았던 발자국을 찾아낼 
것이다.
  그 금을 다시 이어놓고 우리는 다시 출발한다. 더위가 더 심해지고, 그와 
더불어 신기루들이 생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초기적인 신기루 일 뿐이다. 
커다란 호수들이 이루어지더니 우리가 전진하면 사라진다. 우리는 모래 골짜기를 
넘어서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지평선을 살펴보기로 작정한다. 
  우리는 이미 여섯 시간을 걸었다. 우리는 큰 걸음으로 도합 25킬로 미터는 
걸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시커먼 산등이 꼭대기에 이르러 말없이 주저앉는다. 
우리 발 밑에 있는 모래의 골짜기는 흰 빛이 우리 눈을 태우는 듯하다. 눈이 닿은 
한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까마득한 지평선에는 빛의 장난으로 벌써 마음을 끄는 
신기루를 만들고 있다. 요새며, 회교 사원의 첨탑이며, 직선으로 된 기하학적인 
덩어리들. 나는 또 초목을 가장해 보이는 거대한 검은 반점도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은 낮이면 흩어졌다가 밤이면 다시 생겨나는 저 구름의 마지막 한 조각에 
의해 덮여 있었다. 그것은 어느 적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더 가봤자 소용이 없다. 이러한 시도는 아무 곳에도 이끌어 주지 않는다. 
비행기로 되돌아가야 한다. 저 빨갛고 흰 표지가 어쩌면 동료들에게 발견됐을지도 
모른다. 공중으로부터의 탐색에 조금도 희망을 걸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내게는 유일한 구원의 기회같이 보이는 것이다. 더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곳에 
마지막 몇 방울의 액체를 두고 왔으며, 벌써 우리는 그것을 꼭 마셔야 할 
지경이다. 살기 위해서는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갈증이라는 한정된 
자치권인 쇠우리에 갇힌 포로다.
  그러나 생명을 향해 걷고 있을지도 모르는 때 되돌아선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저 신기루 너머의 지평선에 진짜 도시며, 단물이 흐르는 운하들이며, 풀밭들이 
꽉 들어차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발길을 돌라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무서운 방향 전환을 할 때 나는 파멸로 향한다는 느낌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비행기 옆에 누웠다. 우리는 60 킬로 미터 이상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액체도 다 마셔버렸다. 우리는 동쪽에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고, 또 아무 동료도 이 
지역 위를 비행하지 않았다. 얼마 동안 우리는 견디어 낼 수 있을까? 벌써 이렇게 
목이 마른데...
  우리는 박살이 난 날개의 파편을 주워 모아 커다란 분화대를 쌓아 올렸다. 
가솔린과 강렬한 흰 빛을 내는 마그네슘 판자를 준비했다. 우리는 불을 붙이기 
위해 밤이 아주 캄캄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제 불꽃이 솟는다.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는 사막 속에 타오르는 신호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고요하게 빛나는 우리의 메시지가 밤하늘에 빛나는 것을 
쳐다본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이 메시지가 비장한 호소를 싣고 가는 
것이지만, 또한 그것은 많은 애정도 싣고 가는 것이라고. 우리는 물을 마시고 
싶지만 또한 서로 통하고 싶기도 한 것이다. 다른 불이여, 이 밤 속에 켜져라. 
사람만이 불을 갖고 있다. 사람이며, 우리에게 대담하라!
  내게는 아내의 눈이 보인다. 내게는 그 눈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눈이 묻는다. 수많은 시선들은 떼를 지어 나의 침묵을 나무란다. 
대답하지! 대답한단 말야!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대답한다. 밤하늘에 이 이상 더 
빛나는 불꽃을 울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거의 
마시지도 않고 60킬로 미터를 걸었다. 이제 우리는 더 마실 수도 없다. 더 오래는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잘못일까? 마실것만 있다면 우리는 얌전하게 물통이나 
빨면서 여기에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석 컵의 바닥까지 들이마신 그 
순간부터 하나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 한 방울을 내가 빨아들인 그 
순간부터 나는 내리받이 길을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강물처럼 나를 싣고 
간다손 치더라도 내가 어떻게 그것을 당해낼 수 있단 말인가? 쁘레보는 운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말한다.
  "글렀으면 글렀지, 뭘 그래...."
  그가 대답한다.
  "내가 뭐 나 때문에 우는 줄 아나?"
  그래! 정말 그렇다. 나는 이미 이 명백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견디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더욱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 고통에 대해서도 나는 
절반밖에 믿지 않는다. 나는 벌써부터 이런 일을 생각했었다.
  나는 한번은 조종실에 갇힌 채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을 내 머리가 으깨진 줄로 생각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도 튼 사건같이 여겨지지 않았다. 여기서도 지금 나는 별로 번민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이면 이 점에 대해서 더욱 이상한 것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큰 
불을 오렸지만, 사실을 사람들에게 들어달라는 것은 이미 단념하고 있지 않았던가!
  "나 때문에 우는 게 아니다."
  그래. 그렇다. 바로 이것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눈들이 
보일 때마다 나는 불에 덴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당장 일어나서 앞으로 곧바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저기서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사람들이 
난파당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이상한 주객 전도이지만, 나는 늘 이렇게 생각해 왔었다. 다만 
나는 완전한 확신을 얻기 위해 쁘레보가 필요했다. 그런데 쁘레보 역시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저 죽음을 앞둔 번민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아아, 나는 기꺼이 잠들 생각이다. 그것이 하룻밤 동안이건 여러 세기 동안이건 잠들 
것이다. 잠이 들면 그 차이를 전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평화로운가! 그러나 저 
멀리서 사람들이 외칠 그 부르짖음, 그 절망의 크나큰 불꽃들은... 생각만 해도 나는 
견딜 수 없다. 이 난파선들은 눈앞에 두고 팔짱만 끼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침묵의 1초 1초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조금씩 학살해 간다. 격한 분노가 내 
안에서 부글거린다. 어째서 이 사슬들은 침몰해 가는 사람들을 늦기 전에 구출해 
내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일까? 왜 우리의 화롯불은 우리의 외침을 세계의 끝까지 
전해주지 못하는 것일까? 참아라! 우리가 간다! 우리가 간다! 우리가 구조대다!

  마그네슘은 다 타버렸고 우리의 불은 벌개졌다. 이제 여기에는 우리가 그 위에 
구부리고 몸을 쬘 한 더미의 잉걸불밖에는 없다. 우리의 빛의 커다란 메시지도 
끝났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무엇을 움직이기 시작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렇다! 
나는 그것이 아무것도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안다. 결국 그것은 귀에 
들려지지 못한 하나의 기도였던 것이다.
  '좋다. 잠이나 자야겠다.'

      (5)
  새벽녘에 우리는 헝겊으로 날개를 위로 훔쳐서 도료와 기름이 섞인 이슬을 컵 
밑바닥에 깔린 만큼 모았다. 그것은 구역질나는 것이었으나 우리는 마셨다. 하는 
수 없이 입술이나 조금 추긴 것이다. 이 잔치가 끝나자 쁘레보가 내게 말한다.
  "권총이 있는 게 다행이오."
  나는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심술궂은 적의를 품고 구에게로 몸을 돌린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센티멘털한 감정의 북받침밖에는 미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모든 것이 극히 단순하다고 보고 싶은 생각뿐이다. 태어난다는 것은 단순하다. 
자라나는 것도 단순하다. 그리고 갈증으로 죽는다는 것도 단순하다.
  나는 곁눈으로 쁘레보를 살펴본다. 그가 잠자코 있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모욕이라도 줄 작정을 하고. 그런데 쁘레보는 침착하게 내게 말했다. 그는 위생 
문제를 논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손을 좀 씻어야겠는데' 하는 정도로 
끄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감이다. 나는 이미 가죽 주머니를 봤을 때 
곰곰이 생각했었다. 그때의 나의 생각은 비장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것이었다. 
비장한 것은 사회문제뿐이다. 우리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안심시켜 주지 못하는 
우리의 무력함, 이것만이 비장한 것이다. 권총은 비장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찾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아마 딴 
곳에서 우리를 찾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라비아에서, 사실 우리는 그 이튿날 우리 
비행기를 버린 후 까지 비행기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었다.
  또한 그때 그렇게도 멀리에서의 단 한 번의 통과도 우리에게는 무관심했을 것이다. 
사막 속의 몇 천 개의 검은 점 속에 섞여 있는 검은 점에 불과한 우리를 발견해달라고 
우겨댈 수는 없다. 훗날에 이런 괴로움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내가 체험한 듯이 
말하는 그런 생각은 하나도 정확하지 않다. 나는 아무 괴로움도 느끼지 않았다. 
구조대들이 내게는 딴 세계에서 오가는 것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사막에서 행방불명이 된 비행기를 찾아내려면, 3천 킬로 미터의 거리로 보고 
15일 동안은 찾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를 트리플리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사이에서 찾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이 가냘픈 
행운에 기대를 걸고 있다. 다른 행운이란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작전을 바꾸어 
혼자 탐험에 나서기로 작정한다. 쁘레보는 화롯불을 준비해서 누가 찾아오면 불을 
붙일 것이지만, 아무도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떠난다. 내가 되돌아올 기운이 있을지조차 모른다. 리비아 사막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기억이 떠오른다. 사하라에는 40퍼센트의 습도가 있는데 
여기서는 18퍼센트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 수증기처럼 증발한다. 
아랍 유목민이나 여행자, 식민지군의 장교들은 체험담으로 사람이 열 아홉 시간은 
마시지 않고 견딘다고 말한다. 스무 시간이 지나면 눈은 빛으로 가득차고 종말이 
시작된다. 갈증의 걸음은 번개같다.
  그러나 우리를 속이고, 모든 예측을 어기고 우리를 이 언덕 위에 못박아 놓은 
이 야릇한 북동풍이 지금은 아마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도 동이 트기까지 얼마만한 유예를 우리에게 줄 것인지?
  그래서 나는 떠난다. 그러나 마치 대양 위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그렇긴 하지만 새벽의 덕택으로 이러한 광경이 좀 덜 슬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우선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고 밭 도둑처럼 걸어간다. 엊저녁에 우리는 그 
근처의 어느 알 수 없는 굴 어구에 덫을 쳐 놓았었다. 지금 내 속에서는 밀렵자의 
습성이 눈을 뜬다. 우선 나는 덫을 살펴보러 간다. 그것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니 나는 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게 됐다. 사실 나는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었다.
  나는 실망하기는커녕 그 반대로 호기심이 끌린다. 이 동물들은 사막 속에서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페네끄', 또는 모래 여우라는 토끼만 
하고 귀가 큰 육식수일 것이다. 나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어 그중 한 마리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그 발자국은 나를 좁은 모래 시내로 이끌어 간다. 그곳에는 
발자국이 더욱 뚜렷이 찍혀 있다. 나는 세 발가락이 부채꼴로 된 종려 가지 
모양의 예쁜 발자국을 감상한다. 나는 이 친구가 새벽녘에 사쁜사쁜 뛰어다니면서 
돌 위의 이슬을 핥고 있는 모습을 눈앞에 그려본다. 여기에서 발자국이 뜸해진다. 
내 페네끄가 뛰어간 것이다. 여기서는 친구 하나가 끼여들어 함께 나란히 
깡충거리며 달아났다. 나는 야릇한 기쁨을 느끼며 그들의 아침 산책을 구경한다. 
나는 이들 생명의 표시들이 좋다. 그래서 나는 목이 타는 것도 잠시 잊어버린다.
  마침내 나는 여우들의 식료품 저장실에 다다랐다. 이 근방에는 1백 미터쯤의 
사이를 두고 수프 접시 만한 메마른 작은 관목이 모래바닥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 줄기에는 조그마한 금빛 달팽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페네끄는 새벽에 
먹이를 먹으러 나온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커다란 자연의 신비에 부닥친다.
  이 페네끄는 나무마다 다 멈추는 것이 아니다. 달팽이가 잔뜩 붙어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무가 있다. 분명히 그가 조심해서 패해 가는 나무도 있다. 또 
접근은 하지만 마구 건드리지 않는 나무도 있다. 거기에서는 두세 마리의 달팽이만 
따고 다른 레스토랑으로 바꾼다. 
  그는 아침 산책의 즐거움을 더 오래 갖기 위해 일부러 단번에 배를 불리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장난은 필요 불가결한 
전술과 너무나도 부합되기 때문이다. 만약 페네끄가 첫 번째 나무의 산물로 배를 
채운다면, 두세 번의 식사로 그 나무의 산 열매를 벗겨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 나무 한 나무 그는 목축 농장을 전멸시키고 말 것이다.
  그런데 페네끄는 파종하는 일을 망칠까봐 아주 조심하고 있다. 한 끼의 식사를 
위해 그는 백도 넘는 갈색 덤불을 찾아갈 뿐만 아니라 한 가지에 나란히 붙은 두 
달팽이를 따는 일은 결코 없다. 모든 일이, 마치 그가 그런 위험을 의식하고 
있기나 한 것처럼 진행되고 있다. 그가 만약 조심성 없이 먹어댔더라면 이미 
달팽이는 씨가 없어졌을 것이다. 달팽이가 없으면 페네끄도 없을 것이다.
  그 발자국은 나를 굴로 인도한다. 안에 있는 페네끄는 내 발소리에 놀라며, 
아마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을 건다.
  "나의 꼬마 여우야. 나는 아주 녹초가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지경이 
됐어도, 네 기질이 네 기질이 내겐 재미가 있구나."
  그래서 나는 거기서 잠시 몽상에 잠긴다. 사람이란 아마도 무슨 일에고 적응할 
수 있는 모양이다. 30년 후면 죽을 것이라 생각은 한 인간의 기쁨을 망가뜨리지는 
않는다. 30년이건 사흘이건 그것은 단지 원근법상의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영상들은 잊어야 한다.

  이제 나는 나의 길을 계속한다. 그런데 벌써 피로와 함께 무엇인가 나의 내부에서 
변형되어 가고 있다. 신기루들이 거기 없는 것이라면 내가 그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어어이!"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두 팔을 쳐든다. 그런데 방금 몸짓을 하고 있던 그 
사내는 시커먼 바위일 뿐이다. 모든 것이 벌써 사막에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다. 
나는 자고 있는 베두인(사막 지방의 아랍 유목민) 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는데 그는 
검은 나무 줄기로 변했다. 나무 줄기라니? 그런 게 있다는 것이 나를 놀라게 한다. 
나는 몸을 굽혀서 본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우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리석이었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펴본다. 다른 검은 대리석들이 보인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삼림이 그 부러진 줄기들을 땅 위에 흩뿌려 놓고 있다. 그 삼림은 10만년 전에 
창세기의 폭풍으로 대성당처럼 무너졌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세기가 이 강철처럼 
닦여지고, 화석이 되고, 유리처럼 된 먹빛깔의 거대한 기둥 파편을 내가 있는 데까지 
굴려보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지에 있는 마디를 알아볼 수 있으며, 생명의 비틀림을 볼 수 있고, 
줄기의 연륜을 셀 수 있다. 새들과 음악이 가득 찼던 이 숲은 신의 저주에 얻어맞아 
소금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이 광경이 적의를 품은 것처럼 느껴진다. 저 모래언덕의 철갑 
옷보다도 검은 이 어마어마한 표착 물들이 나를 거부하고 있다. 살아 있는 내가 여기 
이 변치 않는 대리석들 가운데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덧없는 나, 그 몸이 
소멸해 버릴 내가, 여기 이 영원 속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
  어제 이후 나는 벌써 60킬로 미터나 돌아다녔다. 나의 이 현기증은 아마 갈증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태양 때문일까. 태양은 기름으로 닦아 놓은 것 같은 이들 줄기 
위에 내리쬐고 있다. 이 세계의 등껍질 위에 내리쬐고 있다. 이제 여기엔 모래도 
여우도 없다. 다만 거대한 쇠모루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쇠모루 위를 걷는다. 
그리고 머리 속에는 태양이 울려 퍼지는 것을 느낀다. 아아! 저기에....
  "어어이! 어어이!"
  "저기엔 아무것도 없어. 덤비지 말아. 망상이다."
  나는 이렇게 나 자신에게 타이른다. 왜냐하면 나는 내 이성에 호소해야 했으니까.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거부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저기 걸어가고 있는 대상 
쪽으로 달려가지 않는다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다. 저기에... 저렇게 보이는데....
  "바보야, 잘 알면서도. 그걸 만들어낸 것이 바로 너라는 걸...."
  "그렇다면 이 세상엔 참된 것이라곤 하나도 없구나...."

  그렇다. 저 언덕 위, 내게서 20킬로 미터 앞에 있는 저 십자가 말고는 참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저 십자가, 아니면 저 등대...
  그런데 저것은 바다 쪽이 아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다. 어젯밤에 나는 밤새껏 지도 
공부를 했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위치를 알지 못하니까. 그럼에도 
나는 사람의 존재를 표시해주는 온갖 기호들 위에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지도의 한 부분에서 십자가 비슷한 것이 그 위에 솟아 있는 조그만 동그라미를 
발견했다. 나는 범례를 참조했는데 거기에는 '종교 시설'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 
십자가 옆에 검은 점이 하나 있었다. 다시 범례를 참조했다. 그리고 보았다. '마르지 
않는 우물'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나는 가슴에 큰 쇼크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큰 소리로 되풀이해 읽었었다.
  "마르지 않는 우물.... 마르지 않는 우물.... 마르지 않는 우물!"
  알리바바와 그의 모든 보물인들 마르지 않는 우물 하나와 견줄 수 있겠는가? 
조금 떨어진 곳에 나는 흰 동그라미 두 개를 보았다. 범례를 보고 읽었다. '마르는 
우물' 이것은 벌써 덜 아름답다. 그리고 그 둘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 종교 시설이 바로 저것이다! 난파 자들을 부르기 위해 수도승들이 언덕 위에 
커다란 십자가를 세워 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저 십자가 쪽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저 도미니끄회 성직자들 쪽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리비아에는 꼽트파의 수도원밖에 없을 텐데."
  "...저 부지런한 도미니끄 성직자들 쪽으로 그들은 빨간 벽돌이 깔린 시원하고 
아름다운 부엌을 가지고 있고, 안마당에는 녹이 슨 근사한 펌프도 있다. 그 녹슨 펌프 
밑, 그 녹슨 펌프 밑에는, 벌써 짐작이 가셨겠지.... 그 녹슨 펌프 밑에는 바로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 아아! 내가 저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면, 내가 그 큰 종을 치면, 
거기선 야단법석이 일어날 거다!"
  "바보야. 전 지금 프로방스의 어떤 집을 그리고 있다 거기에 무슨 종이 있단 
말인가."
  내가 그 큰 종을 치면! 문지기가 두 팔을 쳐들고 소리칠 것이다. '당신은 
주님의 사자십니다!' 그리고는 모든 수도승들을 부를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모두 
달려나올 것이다. 그리고 나를 불쌍한 아이처럼 환영해 줄 거다. 나를 부엌 쪽으로 
떠밀고 갈 거다. 그리고는 말할 거다.
  "잠깐만, 잠깐만, 내 아들아, 마르지 않는 우물에 달려갔다 올 테니까...."
  그러면 나는 행복감으로 온 몸이 떨릴 거다.
  아니다. 결코. 나는 울고 싶지 않다. 저 언덕 위의 십자가가 없어졌다는 그까짓 
이유로는...

  서쪽이 주는 약속은 모두 거짓말뿐이다. 나는 정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북쪽은 적어도 바다의 노래로 가득 차 있다.
  아아! 이 등성이만 넘으면 지평선이 펼쳐진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다.
  "넌 알고 있잖니, 저게 신기루라는 걸...."
  저게 신기루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무도 나를 속이지 못한다, 이 나를! 
다만 내가 신기루 쪽으로 끌려 들어가고 싶어진다면? 만약 내가 그것을 바란다면? 
내가 저 햇볕으로 장식된 총안이 있는 도시를 사랑하고 싶어진다면? 날렵한 
발걸음으로 곧장 걸어가고 싶어진다면 어떻단 말인가.... 나는 이젠 피로도 느끼지 
않고 또 행복하니까.... 쁘레보와 그 권총이라고? 웃기는구나! 나는 이 도취를 
좋아한다. 나는 취해 있다. 나는 목이 말라 죽어간다!
  황혼이 취기를 깨워 주었다. 너무나 멀리 온 것에 놀라 갑자기 멈춰섰다. 
해질녘에는 신기루가 죽는다. 지평선은 그 펌프니, 궁전이니, 승복이 나를 벗어버렸다. 
그것은 사막의 지평선이다.
  "너는 너무 멀리 왔어! 밤이 너를 잡으려고 한다. 넌 날이 새기를 기다려야 
하고, 내일이면 네 발자국은 지워진다. 그러면 넌 아무 곳에도 있지 않게 될 거다."
  "그러니 다시 네 앞을 곧바로 걸어가야 해. 되돌아서봤자 무슨 소용인가! 어쩌면 
내가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리려는 이때, 아니 이미 벌리고 있을지도 모를 이때 
방해받고 싶진 않다."
  "어디서 바다를 봤단 말인가? 또 절대로 거기까지 가 닿지 못할 것이다. 아마 
3백 킬로 미터는 될 거다. 그리고 쁘레보는 '시문기'곁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가 어느 대상에게 발견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선 사람이나 불러보자. 
  "어어이!"
  제기랄, 이 지구에는 주가 살고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어어이! 인간들아!"
  나는 목이 쉰다. 이제는 목소리도 나질 않는다. 이렇게 소리지르는 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진다. 한번 더 던져본다.
  "인간들아!"
  그것은 과장되고, 귀 거슬리는 소리로 되울려 온다.
  그래서 나는 되돌아선다.

  2시간을 걷고 난 후 나는 쁘레보의 불꽃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길을 잃은 줄로만 
알고 겁을 먹은 쁘레보가 하늘로 올린 불이었다. 아아! 나는 또 그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걷기를 1시간.... 아직도 5백 미터... 아직도 1백 미터. 아직도 5십 미터...
  "아!"
  나는 깜짝 놀라서 우뚝 섰다. 기쁨이 내 가슴에 넘쳐나려 해서 나는 그 격렬함을 
간신히 억누른다. 화롯불에 비쳐진 쁘레보가 엔진에 등을 기대 선 두 아랍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아랍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아직도 나를 보지 
못했다. 그는 자기 기쁨에만 마음이 쏠려 있다. 아아! 만일 내가 그처럼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나는 벌써 해방됐을 게 아닌가! 나는 반갑게 소리친다.
  "어어이!"
  두 유목인이 소스라쳐 나를 쳐다본다. 쁘레보가 그들을 떠나 혼자서 내게로 
달려온다. 나는 팔을 벌린다. 쁘레보가 내 팔꿈치를 부축한다. 그럼 내가 쓰러지려 
했던가?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젠 됐군"
  "뭐가요?"
  "아, 아랍인들이!"
  "무슨 아랍인들이?"
  "저기 아랍인들 말야. 자네하고 같이 있던...."
  쁘레보가 이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서 나는 그가 하는 수 없이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랍인은 없어요."
  정말이지, 이번엔 내가 우는 모양이다.

      (6)
  물 없이 여기서 열 아홉 시간은 살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엊저녁 이후 무엇을 
마셨던가? 새벽에 이슬 몇 방울 뿐! 하기는 북동풍이 여전히 불어 우리의 증발을 약간 
늦추어 준다. 이 바람막은 또한 구름의 높다란 건축물들을 하늘에 마련해 준다. 아아! 
저 구름이 우리 있는 데까지 떠내려 올 수 있다면, 비가 올 수만 있다면! 그러나 
사막에는 절대로 비가 오지 않는다.
  "쁘레보, 낙하산을 삼각형으로 자르세. 그 덫을 돌멩이로 땅바닥에 매어놓자. 새벽에 
바람만 바꾸지 않는다면 헝겊을 짜서 가솔린 탱크에 이슬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우리는 별 아래에다 여섯 개의 흰 덫을 늘어놓았다. 쁘레보는 탱크 하나를 
뜯어냈다. 이제 우리는 날이 새기만 기다릴 뿐이다.
  쁘레보가 파편들 속에서 기적적인 오렌지 한 개를 발견했다. 우리는 그것을 
분배한다. 나는 기뻐서 가슴이 막힐 것 같다. 그러나 20리터의 물이 필요한 판에 
이것은 너무나 조금이다.
  우리의 밤뿐. 옆에 드러누워 나는 이 빛나는 과일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한다.
  "사람들은 한 개의 오렌지가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나는 또 말한다.
  "우리는 사형을 선고받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확실한 사실이 내 기쁨을 
앗아가지는 못한다. 내 손에 쥔 이 반쪽의 오랜지가 내 일생에서 가장 큰 기쁨의 
하나를 가져다준다."
  나는 반듯이 누워서 내 과일을 빤다. 나는 별똥별을 센다 잠시 동안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그래서 또 혼잣말을 한다.
  "우리가 그 질서 속에서 살고 있는 이 세계란 것은 자기 자신이 그 속에 갇혀 
보지 않고서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형수의 한 잔의 럼주와 한 대의 담배의 뜻을 이해한다. 
나는 왜 그가 그런 하찮은 것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숱한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그가 만약 미소라도 지으면 사람들은 그를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럼주를 마신다는 것에 미소짓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원근법을 바꾸어, 그 마지막 시간을 가지고 인간의 일생을 삼았다는 것을....

  우리는 굉장한 양의 물을 받았다. 아마 2리터는 될 것이다. 갈증은 끝났다! 
우리는 살아났다. 자아 마시자!
  나는 주석 컵으로 탱크 속에서 물을 푼다. 그런데 이 물이란 게 고운 연두 
빛이었는데, 첫 모금부터 지독한 맛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갈증에 이렇게 
괴로워하면서도 첫 모금을 다 마시기 전에 일단 숨을 돌이켜 쉬어야만 했다. 
흙탕물이라도 마실 것 같은데도, 이 독 섞인 금속의 맛만은 내 갈증보다 더 지독하다. 
  쁘레보 쪽을 보니, 그는 무엇을 열심히 찾기라도 하듯이 땅바닥에 눈길을 박은 채 
빙빙 맴을 돌고 있다. 갑자기 엎어지더니 여전히 맴돌면서 토한다. 30초 후, 이번엔 내 
차례다. 나는 너무나도 경련이 심해서 무릎을 꿇고, 손가락을 모래 속에 찔렀다. 
우리는 말도 없이 15분 동안 이렇게 몸을 뒤틀고 있었다. 이제는 약간의 담즙밖엔 
토해내지 못하면서...
  겨우 끝났다. 이제는 은근한 구역질만 느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희망조차 잃어버렸다. 나는 이 실패가 낙하산의 도료 때문인지, 아니면 탱크에 끼인 
탄소염화물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다른 그릇이나 다른 천을 썼어야 했다.
  자아, 그러면 서두르자! 곧 날이 샌다. 출발하자! 우리는 이 저주받은 언덕을 
떠나 큰 걸음으로 똑바로 쓰러질 때까지 걸어갈 작정이다. 안데스 산맥 속에서의 
기요메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다. 어제부터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사람들이 이제는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리라 단념하고, 비행기 잔해 곁에 있어야 
한다는 엄중한 명령을 나는 어긴다.
  다시 한번 우리가 난파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난파자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침묵에 위협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미 무서운 과실로 인해 
비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을 수 없다. 기요메도 
안데스의 조난에서 돌아와서 내게 말했었다. 그가 난파 자들 쪽으로 달려온 것이라고. 
이것은 하나의 세계적 진리이다.
  "내가 만약 이 세상에 혼자였다면 그냥 누워버렸을 거네."
  "쁘레보가 내게 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북동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 만약 우리가 나일강을 넘어서 
있다면, 우리는 지금 한 걸음 한 걸음 더 깊숙히 아라비아 사막 안쪽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 하루에 대해서 더는 생각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것은 서둘렀다는 것뿐이다. 온갖 
것에 대한 서두름, 내가 쓰러지는데 대한 서두름. 신기루에 진저리가 나서 땅바닥을 
내려다보면서 걷던 것도 생각난다. 때때로 우리는 나침반으로 우리의 방향을 
바로잡았다. 또 가끔 숨을 돌리기 위해 드러누웠다. 나는 또 밤에 대비해서 간직하고 
있던 레인코우트를 어딘가에서 내버렸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모른다. 내 기억은 
서늘한 저녁이 와서야 다시 이어진다. 나는 또한 모래와 같이 모든 것이 내 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해가 지자 우리는 야영을 하기로 한다. 더 걸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물 없이 이 밤을 넘길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낙하산 천의 덫을 가지고 왔다. 
그 독이 도료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내일 아침이면 우리는 물을 마실 수가 있다. 한 
번 더 별 아래에 이슬 잡는 덫을 펴놓아 보자.
  그런데 북쪽 하늘에 오늘밤엔 구름이 없다. 게다가 바람의 맛이 달라 졌다. 
바람의 방향도 바뀌었다. 벌써 사막의 뜨거운 입김이 우리 몸을 스친다. 이것은 
맹수의 깨어남이다! 그것은 우리 손과 얼굴을 핥는 것을 나는 느낀다.
  나는 더 이상 걷는댔자 10킬로 미터도 못갈 것이다. 사흘 전부터 마시지도 않고 
80킬로 이상을 걸어왔으니...
  그런데 막 멈춰 서려는 순간이었다.
  "저건 틀림없는 호수요!"
  쁘레보가 말한다.
  "자네 돌았군!"
  "이 시간에, 이 황혼에도 신기루가 있단 말이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내 눈을 믿기를 단념해 
왔다. 저게 신기루가 아니라면 우리의 광기가 만들어 낸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쁘레보는 아직 그런 걸 믿는단 말인가?
  쁘레보가 고집을 부린다.
  "20분이면 돼요. 내가 가보겠어."
  그 고집에 나는 화가 치민다.
  "가보게나. 바람이나 쐬고 오게.... 건강에 좋을 거니까. 만일 자네의 호수가 있다 
하더라도 짠물일 걸세. 그거나 알아두게. 짜든 안짜든 아주 먼 데 있을 걸. 그리고 
도대체 그런 있을 수 없네."
  쁘레모는 눈을 한 곳에 박고 벌써 멀어져 간다. 이런 지상의 유혹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하긴 기관차 밑으로 곧바로 뛰어드는 몽유병자도 있긴 하지.'
  쁘레보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공허한 현기증에 
사로잡혀 다시는 되돌아설 수가 없으리라. 그래서 조금 더 먼 곳에서 쓰러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모두가 
얼마나 하찮은 일들인가!
  나는 내게 생긴 이러한 무관심을 아주 좋지 않은 징조라고 느꼈다. 전에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도 나는 똑같은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런데 나는 이 조용한 기분을 
이용해서 돌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유서를 쓰기로 했다. 내 글은 퍽 아름답다. 아주 
품위가 있다. 나는 그 글에 지혜로운 충고들을 잔뜩 써넣는다. 나는 그것을 다시 읽어 
보며, 막연한 자만의 기쁨을 느낀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말 훌륭한 유서다.! 이런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참 애석한 일이다!"
  나는 또 내가 어느 지경에 다다랐는지 알고 싶다. 나는 입 속에 침을 모아보려고 
애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나는 침을 뱉지 않았던가? 이미 침은 없다. 입을 다문 채 
있노라면 끈적끈적한 것이 입술을 봉한다. 그것은 말라붙어 입밖에 단단한 덩어리를 
만든다. 그러나 아직은 삼키려는 시도에 성공한다. 그리고 아직은 눈이 조금도 부시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 눈부시게 되면 내 목숨은 두 시간뿐이다.
  밤이 되었다. 어젯밤보다 달이 커졌다. 쁘레보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드러누워 이 
명백한 사실들을 곰곰 생각해 본다. 나는 내 속에서 어떤 오래된 인상을 발견해 낸다.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밝혀 보려고 애쓴다. 나는 그때... 나는 그때... 나는 
그때 배를 타고 있었다! 나는 남아메리카로 가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상갑판 위에 누워 
있었다. 마스트 끝이 별들 가운데에서 느리게 가로 세로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마스트는 없지만, 나는 역시 배를 타고 가고 있다. 내 노력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가는 배를, 노^36^예 상인들이 나를 묶어서 배 위에 던졌던 것이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 쁘레보 생각을 한다. 나는 그가 단 한 번도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쁘레보는 남자다.
  아니! 내게서 5백 미터쯤 되는 곳에서 그가 등불을 흔들고 있지 않은가! 자기의 
발자국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응답할 등불이 없다. 나는 일어나서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그는 듣지 못한 것 같다.
  두 번째 등불이 거기서 2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켜진다. 그리고 세 번째 
등불이, 아아니, 이건 수색꾼이다.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소리 지른다.
  "어어이!"
  그러나 못들은 모양이다.
  3개의 등불은 자꾸 부르는 신호를 한다.
  나는 돌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기분도 좋다. 마음도 평온하다. 나는 주의 깊게 
바라본다. 역시 등불이 3개, 5백 미터 거리에 있다.
  "어어이!"
  그러나 여전히 듣지 못한 모양이다.
  이때 나는 잠시 공포에 사로잡힌다. 내가 경험한 유일한 공포, 아! 나는 
아직도 뛸 수가 있다. '기다려라...기다려....' 아, 그들이 돌아가려고 한다! 
멀어져 간다, 딴 데를 찾으러. 나는 쓰러질 것 같다! 생명의 문턱에서 쓰러지려 
한다. 나를 받아들여 줄 팔들이 바로 저기까지 와 있었는데!
  "어어이! 어어이!"
  "어어이!"
  내 소리에 응답했다. 나는 숨이 막힌다. 숨이 막히는데도 나는 여전히 달린다. 
소리 나는 쪽으로 달린다.
  "어어이!"
  쁘레보를 보자 나는 쓰러지고 만다.
  "아아! 그 등불들을 봤을 땐!"
  "무슨 등불을?"
  그렇다, 그는 혼자다.
  이번에는 아무런 절망도 느끼지 않았으나, 희미한 분노가 인다.
  "그래 자네 호수는?"
  "내가 가면 갈수록 멀어져 갔어요. 나는 30분 동안을 그쪽으로 걸어 갔지만, 더 
멀어졌어요. 되돌아왔어요. 그러나 지금도 그것이 호수였다는 건 확실해요."
  "자네 돌았군. 완전히 돌았어. 아! 왜 그런 짓을 했지. 왜?"
그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나는 분해서 울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분해하는지 나는 모른다. 쁘레보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설명한다.
  "하도 마시고 싶어서...당신 입술도 이렇게 희잖아요.!"
  아아! 내 분노가 사그라진다. 나는 잠에서 깬 것처럼 내 이마를 문지른다. 
그리고 나는 슬퍼진다. 그래서 나는 조용 조용히 이야기한다.
  "나는 보았네. 자네를 본 것처럼, 분명히 난 봤어. 틀림없이 등불 
셋을...쁘레보, 난 그걸 봤었네!"
  쁘레보는 우선 잠자코 있다가 마침내 이렇게 자백한다.
  "그래요, 일은 더 안돼 가는 모양이오."

  수증기 없는 대기 아래서는 땅은 빨리 열을 발산한다. 벌써 몹시 춥다. 나는 
일어서서 걷는다. 그러나 이내 참을 수없이 몸이 떨려온다. 수분이 빠진 내 피는 
순환이 나빠져서 얼음 같은 추위가 뼈에까지 파고든다.
  이것은 밤 추위 때문만은 아니다. 턱이 딱딱 마주치고, 온몸이 경련하듯 
흔들린다. 손이 하도 떨려서 이젠 회중 전등을 쓸 수가 없다. 추위를 타지 않던 
내가 얼어 죽을 것 같으니, 갈증의 결과란 참으로 이상하구나!
  나는 더웠을 때 걸치고 있기가 귀찮아서 레인코트를 어딘가에 버리고 왔다. 그런데 
바람이 점점 더 험악해진다. 사막에서는 전혀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사막은 대리석처럼 반들반들하다. 낮에는 그늘을 만들어 주지 않고, 밤에는 사람을 
발가벗겨 바람에 내맡긴다. 몸을 의지할 나무 한 그루, 담장 하나, 돌멩이 하나도 
없다.
  바람은 광활한 벌판에서 기병대가 돌진하듯 나를 몰아친다. 그것을 피하느라고 뱅뱅 
맴을 돈다. 나는 누웠다간 다시 일어난다. 누워 있든 일어나든 나는 얼음의 채찍에 
휘감긴다. 나는 달릴 수도 없고, 기력도 지쳐 이 암살 자로부터 도망칠 도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두 손으로 감싼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고!
  얼마 뒤에야 나는 일어나서 여전히 떨면서 앞으로 곧장 걸어가고 있는 나를 
의식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아! 방금 떠났는데. 쁘레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가 부르는 목소리가 나를 깨웠던 것이다.
  나는 그가 있는 데로 돌아온다. 온몸이 떨리고 딸국질이 나서 여전히 몸을 
비틀거리면서. 그리고 혼잣말을 한다.
  "이건 추위가 아니다. 다른 것이다. 이젠 끝장이다."
  나는 이미 수분을 너무 잃어버렸다. 그저께 하고 어제, 혼자 갔을 때 나는 너무 많이 
걸었다.
  추위로 죽는다는 것이 슬프다. 그 전에 마음속에 간직했던 신기루가 더 좋다. 
그 십자가며, 아랍인이며, 등불들이. 언제부터인지 이런 것들이 더 관심거리가 
되기 시작한다. 나는 노^36^예처럼 채찍질을 당하기는 싫다.
  나는 또다시 무릎을 끓는다.
  우리는 약간의 약품을 가져 왔었다. 순수 에테르 1백 그램과 90도 알코올 1백 
그램, 그리고 옥도정기 한 병. 나는 순수 에테르를 두어 방울 마셔 본다. 마치 
칼을 삼키는 것 같다. 다음엔 90도 알코올을 조금, 이건 목을 막히게 한다.
  나는 모래에 구멍을 파고 거기 눕는다. 그리고 다시 모래를 덮는다. 얼굴만이 나와 
있다. 쁘레보가 잔가지를 찾아내어 불을 붙었지만 금방 사위여 버린다. 쁘레보는 모래 
속에 묻히기를 거부한다. 그는 발을 움직이는 편을 택한다. 그것은 잘못이다.
  내 목구멍은 그냥 막혀 있다. 이것은 나쁜 징조다, 그러면서도 기분은 좀 낫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모든 희망을 넘어선 마음의 평정이다. 나는 별빛 아래, 노^36^예 
상인의 갑판 위에 묶여서 원치 않는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몹시 불행한 것 
같지는 않다.
  이제는 근육만 움직이지 않으면 추위를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모래 속에 잠든 내 
육체를 잊는다. 나는 이제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다. 그러면 더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거니까. 하기는 사람은 그리 많은 고통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고통 뒤에는 
피로와 망상이 교향악처럼 짜여져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림책으로, 약간 잔인한 
동화로 바뀐다.
  조금 전에는 바람이 나를 몰아쳤고, 나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짐승처럼 맴을 
돌았었다. 이어서 호흡이 곤란해졌다. 마치 무릎팍이 가슴을 찍어누르는 것 같았다. 
어떤 무릎팍이. 나는 이 천사의 무게와 싸웠다. 사막에서 나는 한 번도 혼자 있어 본 
적이 없다. 지금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들을 믿지 못해 내 자신 속에 파묻혀 두 
눈을 감고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수많은 영상의 강물이 나를 고요한 꿈 속으로 
끌고 가는 것을 느낀다. 강물은 바다의 깊은 속에서는 고요해지는 법이다.
  잘 있어라. 내가 사랑하던 그대들이여. 인간의 몸이 마시지 않고 사흘을 
견뎌내지 못했다해서 그게 내 잘못은 아니다. 나는 내가 이렇게도 샘물의 포로인 
줄은 몰랐었다. 나는 이렇게 자치밖에 허락되지 않는 줄은 생가도 못했다. 
사람들은 인간이 자기 앞을 곧장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인간은 자유롭다고 믿고 
있다. 사람들은 인간을 우물에 붙들어 맨 밧줄, 탯줄처럼 인간을 대지의 배에 
붙들어 맨 밧줄을 보지 못한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그는 죽는다.
  당신들의 고통을 제외하고는 나에겐 아무 후회도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운이 좋았다. 만일 내가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다시 시작 할 것이다. 나는 살 
필요를 느낀다. 도시에는 이미 인간의 생활이 없다. 
  여기서는 비행이 문제가 아니다. 비행기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사람이 
생명을 거는 것은 비행기를 위해서가 아니다. 농부가 땅을 가는 것이 쟁기를 
위해서가 아님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비행기에 의해서 사람들은 도시와 그들의 
회계원들을 떠나서 농부의 진리를 재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인간의 일을 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고뇌를 알게 된다. 사람은 바람과, 
별들과, 밤과, 모래와, 바다와 접촉한다. 사람은 자연의 힘에 대항해서 꾀를 쓴다. 
정원사가 봄을 기다리듯이 사람은 새벽을 기다린다. 사람은 약속의 땅인 양 
착륙지를 기다리고, 별 속에서 자기의 진리를 찾는다.
  나는 불평하지 않겠다. 나는 사흘 전부터 걸었었고, 목말랐었고, 모래 위에 
발자취를 쫓았었고, 이슬로 내 희망을 삼았었다. 나는 땅 위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잊어버린 내 동료들과 만나려고 애써 찾았었다. 이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걱정이다. 나로서는 이것이 오늘 밤에 뮤직 홀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제, 저 교외 열차를 탄 주민들, 자기들을 인간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어떤 압력에 의해서, 마치 개미처럼 그 용도에 맞게 
퇴화되어 버린 그 인간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한가로울 때, 무엇으로 
그들의 무의미하고 하찮은 일요일을 채우는 것일까?
  한 번은 러시아에서, 어느 공장에서 모짜르트를 연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썼었다. 나는 2백 통의 욕설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나는 
싸구려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다른 노래를 모르는 
것이다. 내가 미워하는 건 싸구려 카페의 경영자들이다. 나는 인간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나는 내 직업 속에서 행복하다. 나는 나 자신을 착륙 지의 농부라고 생각한다. 교외 
열차 안에서 나는 여기와는 아주 다른 고통을 느낀다. 생각해 보면 여기는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나는 아무 후회도 없다. 나는 걸었었고, 잃어버렸다. 이것은 내 직업의 당연한 
질서다. 어쨌거나 나는 상쾌한 바다 바람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한 번 이것을 맛본 사람은 이 양식을 잊지 못한다. 안그런가, 동료들이여? 
문제는 결코 위험하게 산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공식은 과장된 
것이다. 투우사들은 전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위험이 
아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생명이다.

  하늘이 희끔해지는 것 같다. 나는 모래 속에서 한 쪽 팔을 빼낸다. 손닿는 데 
있는 헝겊 덫 하나를 더듬어 본다. 그러나 마른 그대로이다. 기다려 보자. 이슬은 
새벽에 고이니까. 그러나 새벽은 우리 헝겊을 적셔주지 않고 밝아 온다. 그래서 
내 생각은 약간 뒤얽힌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을 듣는다.
  '여기 있는 것은 메마른 마음... 메마른 마음... 눈물도 통 지을 줄 모르는 메마른 
마음!'
  "떠나자, 쁘레보! 우리 목구멍이 아직은 막히지 않았다. 걸어야 한다."

      (7)
  사람을 열 아홉 시간이면 말려버리는 서풍이 분다. 내 식도는 아직 
막혀버리지는 않았지만 딱딱하고 아프다. 거기서 무엇이 긁어대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 사람들이 말해주기도 했고, 기다리고 있기도 한 그 기침이 시작될 것이다. 
혀가 걸치적거린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대한 것은 벌써 눈에 어른거리는 
반점들이다. 그것이 불꽃으로 변하게 되면 나는 드러누울 것이다.
  우리는 급히 걷는다. 우리는 새벽의 시원함을 이용한다. 별이 내리쬐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말하듯이 우리는 더는 걷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대낮이 되면....
  땀을 흘릴 권리도 우리에겐 없다. 기다릴 권리도 없다. 이 시원함은 습도 
18퍼센트에 의한 시원함일 뿐이다. 이 부는 바람도 사막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거짓된 부드러운 애무 아래서 우리의 피는 증발돼 간다.
  우리는 첫날에 포도를 몇 알 먹었다. 그리고는 사흘째 오렌지 반쪽과 스펀지 케이크 
반 쪽뿐, 설령 먹을 것이 있다한들 무슨 침이 있어 씹겠는가? 그런데 전혀 배고프지가 
않다. 그저 목이 마를 뿐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갈증 자체보다도 갈증에서 오는 
결과를 더 느끼게 될 것이다. 이 굳어버린 목구멍. 석고와도 같은 혀. 이 깎아내는 것 
같은 기분과 지독히도 쓴 맛. 이러한 감각들은 내게는 새로운 것이다. 아마도 물이 
이것들을 고쳐 주겠지만, 이 물이라는 약을 이러한 감각과 결부시켜 줄만한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다. 갈증은 점점 더 욕망 이상으로 하나의 병이 되어 간다.

  샘물과 과실들도 이미 내게는 그다지 애절한 영상을 주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나는 오렌지의 그 광채를 잊었다. 마치 내가 다정스러운 것들을 잊어버리고 만 느낌이 
들 듯이, 어쩌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앉아 있다. 그러나 다시 떠나야 한다. 우리는 단숨에 먼 길을 걷기를 
포기했다. 5백 미터를 걷고 나면 우리는 피로로 주저앉는다. 그리고 드러눕는데 
크나큰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다시 떠나야만 한다. 
  풍경이 바뀐다. 돌들이 점점 드물어진다. 지금 우리는 모래 위를 걷고 있다. 
우리 앞 2킬로 미터쯤 되는 곳에 사구들이 있다. 그 사구들 뒤에 짤막한 식물의 
얼룩점들이 있다 강철의 갑옷보다는 나는 모래가 좋다. 이것은 황금빛 사막이다. 
이것은 사하라다. 나는 그것을 알아 볼 수 있다.
  이제는 2백 미터에서 기진맥진한다.
  "어쨌든 걸어야 해. 적어도 저 소관목 있는 데까지는...."
  그것은 엄청난 한계였다. 여드레 후에 우리가 '시문호'를 찾기 위해 자동차로 우리의 
발자국을 되밟아 갔을 때 확인한 일인데, 이 마지막 시도가 80킬로 미터나 됐다. 
그러니까 이때 나는 2백 킬로 미터를 걸어갔던 셈이다. 어떻게 그 이상 걸을 수 
있겠는가?
  어제 나는 희망도 없이 걸었었다. 오늘은 그런 말조차 그 뜻을 잃어 버렸다. 
오늘 우리는 걸으니까 걷고 있다. 아마 소들이 밭을 갈 때도 이럴 테지. 어제 
나는 오렌지 숲의 낙원을 꿈꾸었었다. 그러나 오늘은 내게 이미 낙원은 없다. 
나는 이제 오렌지가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는다.
  나는 이제 마음이 굉장히 말라 빠졌다는 느낌밖에는 내게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나는 당장 쓰러질 것 같고, 절망조차 모르겠다. 괴로움도 없다. 나는 그것이 
유감이다. 고통이 내게는 물처럼 다정하게 여겨질 텐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연민하고, 
또 친구처럼 자신을 동정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세상에 친구가 없다.
  사람들이 두 눈이 바싹 타버린 나를 발견하면 아마 내가 굉장히 소리쳐 부르고, 
몹시 고통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발버둥도, 후회도, 애증의 
고통도 아직은 재화이다. 그런데 내게는 이미 그런 재화도 없다. 순결한 소녀들은 
첫사랑의 저녁에 괴로움을 알고 눈물짓는다. 이 괴로움은 생명의 떨림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내게는 이제 괴로움도 없다.
  사막, 그것은 바로 나다. 나는 이제 침도 나오지 않지만, 또한 내가 그것을 향해 
울부짖었을 그리운 영상들도 그려낼 수가 없다 태양이 내 속에서 눈물의 샘을 
말려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희망의 숨결이 바다 위의 돌풍처럼 내 위를 
지나갔다. 내 의식을 두드리기 전에 이제 막 내 본능에 알려준 이 신호는 
무엇일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 모래의 
식탁보며, 이 언덕들, 그리고 저 아련한 초록의 널빤지는 이미 풍경이 아니고 
무대를 이룩한다. 아직은 텅 비어 있지만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무대, 나는 
쁘레보를 쳐다본다. 그도 나와 똑같은 놀라움을 느끼고 있지만 그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정녕 무엇이 일어나려 하는 게 틀림없다.
  사막이 생기를 띠어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정말이지 이 부채, 이 고요가 
갑자기 광장의 소란함보다도 더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살아났다. 모래에 발자국들이 있지 않은가!
  아아! 우리는 인류의 발자국을 잃어버리고, 부족들로부터 떨어져나와, 세계의 
움직임으로부터도 잊혀져 이 세상에서 외톨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나, 이제야 
우리는 모래에 찍혀진 인간의 기적적인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쁘레보. 두 사람이 갈라져 갔어."
  "여기선 낙타가 꿇어앉아 있었구...."
  "여기선...."
  그런데 아직은 우리가 구조된 것이 아니다.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몇 
시간만 지나면 사람들이 우리를 구해낼 수 없게 된다. 한 번 기침이 시작되기만 하면 
갈증의 진행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다. 그런데 우리의 목구멍이 더욱....
  그러나 나는 이 대상을 믿는다. 사막의 어디쯤에서 어정대고 있을 이 대상을....

  그래서 우리는 다시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기요메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마지막 판에 나는 안데스 산맥 속에서 수탉 울음 소리를 들었어. 또 기차 
소리도...."
  닭이 운 바로 그 순간에 나는 그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혼잣말을 한다.
  "처음에 내 눈이 나를 속였다. 그것은 틀림없이 갈증 탓일 거다. 귀가 더 
버티어 온 셈이지...."
  그런데 쁘레보가 내 팔을 붙든다.
  "들었어요?"
  "뭘?"
  "수탉 말이요!"
  "그래 그렇다면...."
  그렇다면 틀림없다. 이 바보야, 이젠 살았어...
  나는 마지막 환각에 사로잡혔다. 서로 쫓고 쫓기는 3마리의 개를. 쁘레보도 
쳐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아랍인 쪽으로 팔을 내민 것은 
둘이 함께였다. 그쪽을 향해 모든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도 우리 둘이였다. 이 
기쁨에 웃고 있는 것도 우리 둘이였다!
  그러나 우리의 목소리는 30미터도 채 못간다. 우리의 성대는 이미 말라붙었다. 
우리는 서로 꺼져가는 소리로 말했고, 또 그것을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런데 언덕 뒤에서 막 모습을 드러낸 저 아랍인과 낙타가 지금 천천히 멀어져 
가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는 혼자인지도 모른다. 잔인한 악마가 그의 모습만 
보여주고 다시 끌고 가는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더 이상 달릴 수가 없다!
  또 하나의 아랍인의 옆 얼굴이 그 사구 위에 나타난다. 우리는 울부짖는다. 그러나 
너무나 낮은 소리다. 그래서 우리는 팔을 휘저었는데, 온 하늘이 거대한 신호들도 가득 
차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아랍인은 여전히 오른쪽만 바라보고 있다.
  마침내 그는 천천히 몸을 45도 가량 돌리기 시작한다. 그가 앞 얼굴을 보일 그 
순간에 모든 것은 끝마쳐질 것이다. 그가 우리 쪽을 바라볼 그 순간에 그는 이미 
우리에게서 목마름과, 죽음과, 온갖 환영을 지워 줄 것이다.
  그는 45도를 돌기 시작했고, 그것은 벌써 세계를 바꾸어 놓는다. 그의 상반신의 
움직임 하나, 그의 시선의 움직임 하나로 그는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신과 같이 보이는 것이다.
  이건 기적이다. 그는 바다 위를 걷는 신처럼 모래 위를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아랍인은 그저 우리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는 두 손으로 우리 어깨를 눌렀다. 
그래서 우리는 복종했다. 우리는 누웠다. 여기에는 이미 종족도, 언어도, 차별도 
없다. 우리 어깨에 천사장의 손을 얹은 이 초라한 유목민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마를 모래 속에 박고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은 배를 깔고 엎드려 
송아지처럼 냄비 속에 머리를 처박고 마시고 있다. 아랍인은 겁이 나서 번번이 우리를 
중지시키려 든다. 그러나 그가 늦춰주기가 무섭게 우리는 다시 얼굴을 물 속에 처박는 
것이었다.
  '아아, 물!'
  물이여, 너는 맛도, 색깔도, 향기도 없어 너를 정의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너를 알지도 못하면서 다만 마신다. 너는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 
그 자체다. 너는 감각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준다. 너와 함께 우리가 단념했던 모든 힘이 되 돌아온다. 너의 은총으로 우리 
가슴 속의 말라붙었던 모든 샘물이 다시 솟는다.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보물이며, 또 가장 섬세하여 대지의 뱃속에서 
그렇게도 순결하다. 산화마그네슘이 섞인 샘물 위에서는 사람이 죽는 수가 있다. 
짠 호수 바로 옆에서 죽는 수도 있다. 약간의 분리 염분을 함유한 2리터의 
이슬만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가 있다. 너는 어떠한 혼합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어떠한 변질도 용납하지 않는 꽤 까다로운 여신이다.
  그러나 너는 무한히 단순한 행복을 우리들에게 부어 준다.

  우리를 구해준 그대 리비아의 유목민이여, 그렇지만 당신은 나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져 버릴 것이다. 그 얼굴도 영영 생각나지 않게 되리라. 당신은 '인간'이다. 
그래서 당신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내게 나타난다. 당신은 우리를 눈 여겨 
바라본 적도 없었지만 벌써 우리를 알아보았다. 당신은 가장 사랑하는 형제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모든 사람들 속에서 당신을 알아볼 것이다.
  당신은 숭고함과 친절에 싸여 있어, 내게는 물을 줄 권능을 가진 왕자로 보였다. 내 
모든 친구와, 내 모든 적들이 당신을 통해서 내게로 걸어온다. 그러기에 이제 나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의 적도 없어지고 만 것이다. 
  [  8. 인간들의 모순

     (1)
  나는 또 한번 하나의 진리에 접근했으면서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는 모든 것이 파멸되어 절망의 밑바닥에 닿은 것으로 믿었는데, 일단 단념을 
하고 나자 평화를 알게 됐다. 그런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되는 것 같다. 우리 속에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했던 그 
어떤 본질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충만감보다 나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각건대 
바람을 쫓아 가느라고 자신을 망가뜨렸던 보나프는 이런 고요한 편안함을 
알았으리라. 기요메도 또한 눈 속에서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나 자신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모래 속에 목까지 파묻히고, 서서히 갈증으로 목이 졸리면서, 그 
별들의 외투 아래서 마음이 그다지도 포근했던 때의 일을. 
  우리 마음 속의 이러한 일종의 해방감을 어떻게 하면 복돋아줄 수 있을까? 
인간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모순 투성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마음껏 창작할 수 있도록 생활을 보장해 주면 그는 잠들고 만다.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연약해지고, 인심 좋은 사람도 부자가 되면 수전노가 되고 만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주장하는 정치상의 주의라는 것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인간들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를 우선 알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무슨 중요성이 
있겠는가? 누가 태어나려는가? 우리는 살만 찌우면 되는 가축이 아니며, 가난한 한 
사람의 파스칼의 출현이 어느 이름 없는 부호의 출현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다.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제각기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가장 흐뭇한 기쁨들을 맛보았다. 이러한 기쁨들이 우리에게 그다지도 사무치는 
노스탤지어를 남겨 주었기에 우리의 비참함까지도 그리워하게 된다. 동료들과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모두가 쓰라린 추억들의 기쁨을 맛보았던 것이다.
  우리를 윤택하게 해주는 미지의 조건이 있다는 것 이외에 우리가 무엇을 안단 
말인가? 인간의 진실은 어디에 깃들이고 있는가?
  진리란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곳이 아닌 이 땅에서만 오렌지 나무들이 
튼튼한 뿌리를 뻗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면 이 땅이 바로 오렌지 나무의 진리이다.
  다른 어느 것이 아닌 이 종교가, 이 문화가, 이 가치의 기준이, 이 활동 
형태가, 인간 속에 이러한 충만감을 주고, 그의 마음속에 알지 못하던 하나의 
왕자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가치 기준, 그 문화, 그 활동 형태가 
바로 인간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논리는? 논리가 인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좀더 고생을 겪어내어야 한다.

  이 책에서 나는 내내 어떤 지상의 천성에 따라,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이 수도원 
택하듯이 사막이나 항공로를 택한 사람들 중의 몇 사람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내가 당신들에게 이 사람들을 찬양해야 할 것은 그들의 바탕이 되어 준 대지이다.
  천품도 물론 어떤 작용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 가게 안에 틀어박혀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필요한 방향을 향해 감연히 그들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우리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의 역사 속에서 그들의 운명을 설명해 줄 힘의 싹을 
발견한다. 그런데 사후에 읽혀지는 역사는 눈을 석이는 법이다. 이러한 힘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 볼 수 있다.
  난파나 화재가 일어난 밤에 그들 자신 이상의 위대한 활동을 보인 상인들을 우리는 
다들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은 자기네가 발휘한 푸진 힘의 특질에 대해 과대 
평가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화재는 그들의 생애에서 예외적인 하룻밤일 테니까. 다만 
새로운 기화나, 알맞은 대지나, 또는 엄격한 종교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간직한 
위대함을 알지 못한 채 다시 잠이 들고 만다. 분명히 천성은 해방되고자 하는 
인간들을 도와준다. 그러나 그러한 천성을 해방시키는 일도 똑같이 필요하다.
  하늘에서의 밤들이며, 서막에서의 밤들... 이런 것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드문 기회이다. 그러나 사태가 그들을 부추길 때, 그들은 모두 똑같은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내게 많은 교훈을 준 스페인에서의 
하룻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 주제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눈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 많이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보통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은 내가 통신원으로서 방문했던 마드리드 전선에서의 일이었다. 그날 밤 
나는 지하 대피소 안에서 한 젊은 대위의 식탁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2)
  전화 벨이 울렸을 때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긴 대화가 시작됐다. 사령부에 
명령한 국지 공격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것은 이 교외의 노동자 거리에 있는 
콩크리이트 요새로 바뀐 몇 채의 건물을 점거하라는, 터무니없고 절망적인 공격 
명령이었다.
  대위는 어깨를 흠칫하고는 우리 있는 데로 돌아온다.
  "우리 중에서 먼저 나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거기 함께 있던 한 상자와 내게 꼬냑잔을 2개 내민다.
  "자네 나하고 제1차 출발일세. 마시고 가서 자게."
  상사에게 말한다
  상사는 자러 갔다. 이 식탁에 둘러 앉은 우리 여남은 명은 불침번이다. 완전히 
빛을 차단시켜서 어떠한 빛도 새지 않는 이 방에서 불빛이 너무 부셔 나는 눈을 
깜박인다. 5분 전에 나는 총구로 밖을 내다보았다. 창구를 가린 헝겊을 제자리에 
가렸을 때, 그것이 기름이 흐르듯이 달빛을 지워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도 
내 눈에는 암록색 요새의 영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 병사들은 아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줍게 침묵을 지킨다. 
이 돌격은 명령이다. 인간의 저장 속에서 퍼내는 것이다. 곡물 창고에서 퍼내는 
것이다. 씨뿌리기 위해서 한줌의 낟알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꼬냑을 마신다. 내 오른쪽에서 장기를 두고 있다. 왼쪽에서는 농담들을 하고 
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반쯤 취한 한 남자가 들어온다. 텁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우리에게 정다운 시선을 굴린다. 그의 시선이 꼬냑 위로 미끄러졌다가는 
돌리고서 다시 꼬냑으로 되돌아 와서 애원하듯 대위 위로 돌린다. 대위는 나지막하게 
웃는다. 희망을 얻은 그 사나이도 웃는다. 가벼운 웃음이 구경꾼들 사이에 번진다. 
대위가 술병을 슬며시 끌어당기자 사나이의 시선이 절망의 빛을 띠고, 이래서 어린애 
같은 장난이 시작된다. 이 일종의 말없는 발레가 몽롱한 담배 연기와, 철야의 피로와, 
임박한 공격 등과 어울려 마치 꿈속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서는 바다의 파도 소리와 같은 폭발음이 심해져 가는데도 우리는 
우리 배의 훈훈한 선창 속에 갇혀서 장난을 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이제 곧 그들의 땀과, 알코올과 기다림에 찌든 때들을 전투의 밤의 
왕수 속에서 씻게 될 것이다. 나는 이들이 정화될 시간이 임박했음을 느낀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정꾼과 술병의 발레를 출 수 있는 데까지는 아직도 추고 있다. 
그들은 이 장기를 둘 수 있는 데까지는 두고 있다. 그들은 생명을 될 수 있는 데까지 
끌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선반 위에 버티고 있는 자명종을 맞추어 놓았다. 그러니 그 종이 
오래지 않아 울릴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혁대를 
졸라맬 것이다. 그러면 대위는 걸린 권총을 벗길 것이다. 그땐 주정꾼도 술이 깰 
것이다. 그러면 모두들 달빛으로 푸른 장방형을 이룬 입구까지 비스듬히 경사진 
복도를 서두르지 않고 않고 올라 갈 것이다.
  그들은 이런 하찮은 말들을 하리라. '빌어먹을 놈의 공격....'이라든지, 
'어유, 춥다!'느니 하는. 그리고 그들을 뛰어 들어갈 것이다. 
  시간이 되어 나는 상사가 잠을 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뒤죽박죽이 된 
지하실에서 쇠침대 위에 뻗어 자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자는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불안하기는커녕 몹시도 행복스러운 그 잠의 맛을 나도 알 것 같았다. 그의 자고 
있는 모습이 리비아에서 첫날의 생각을 나게 했다.
  그날 쁘레보와 나는 물도 없이 조난 당해 죽음의 선고를 받고서도 아주 심한 
갈증을 겪기 전에 한 번, 꼭 한 번 2시간 동안을 잘 수 있었다. 그때 자면서 나는 
현실 세계를 거부하는 놀라운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맛보았었다. 그때, 
아직은 평화로울 수 있는 몸의 소유자였던 나는, 얼굴을 팔에 파묻고 나니 그 
밤을 행복한 밤과 구별지을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상사는 공처럼 뭉쳐서 사람 같지 않은 모양으로 잠자고 있었다. 
깨우러 온 병사들이 촛불을 켜서 병에 꽂았을 때, 그 두루뭉수리의 덩어리에서 
내가 처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군화밖에 없었다. 징을 박고 편저를 낀 
엄청나게 큰 군화, 날품팔이나 부두노동자들이 신는 군화였다.
  이 사내는 자기의 작업 도구를 신고 있었고, 그의 몸에 있는 것은 연장이 아닌 
것이 없었다. 탄약 함도, 권총도, 가죽 멜빵도, 혁대도. 그는 길마니, 목띠니 
하는 밭갈이 말의 마구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모로코에서는 지하실 속에서 눈먼 
말이 끄는 연자매를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흔들리고 불그스레한 촛불 
속에서, 연자매를 끌리기 위해서 역시 눈먼 말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봐, 상자!"
  그는 아직 잠에 취한 얼굴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꾸물거렸다. 그리고는 잠을 깰 
생각은 통 하지 않고 벽 쪽으로 돌아눕는다. 포근한 엄마 뱃속인양, 깊은 잠 
속으로 다시 빠져 들어가며, 깊은 물 속에서처럼 오므렸다 폈다 하는 두 주먹으로 
무언지 모를 시커먼 해초를 붙잡곤 하면서 그의 손가락들을 펴주어야만 한다. 
우리는 그의 침대에 걸터앉아 한 사람이 그의 목 밑으로 팔을 살며시 넣고, 
웃으면서 그 무거운 머리를 쳐들었다. 그것은 마치 훈훈한 외양간에서 서로 목을 
비벼대는 말들의 다정함 같았다.
  "이봐, 친구!"
  나는 평생에 이보다 더 다정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 상사는 행복한 잠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다이너마이트와, 피로와, 얼어붙은 밤으로 된 우리의 세계를 
거부하려고 마지막 노력을 다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밖에서 오는 그 어떤 것이 
그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일요일에 학교의 종도 이와 같이 벌받은 아이를 슬며시 깨운다. 아이는 책상도, 
칠판도 벌로 낸 숙제도 잊고 있었다. 그는 벌판에서 놀이하는 꿈은 꾸고 있었으나 
헛일이었다. 종은 줄곧 울려 인간들의 부정 속으로 악착같이 그 아이를 다시 끌고 
가는 것이다.
  이 아이를 닮아 이 상사도 피로에 지쳐빠진 이 육체도, 그도 원치 않는 이 
육체를 차츰차츰 의식하는 것이었다. 잠이 깰 때의 추위 속에서 이내 저 뼈 
마디마디의 쓰라린 아픔을, 또 마구의 무게를, 또 저 무거운 달음박질을, 
그리고는 죽음 알게 될 그 육체를. 죽음 자체보다도 몸을 일으키기 위해 손을 
담그는 저 피의 끈끈이와, 그 힘든 호흡과, 그를 둘러싼 빙판, 죽음 자체보다도 
죽어갈 때의 그 불편함. 그래서 나는 그를 쳐다보면서 줄 곧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 잠이 깨었을 때의 허전함과, 엄습해 오던 갈증과, 태양과, 
사막과, 사람이 어쩌지 못할 꿈인 생명의 엄습 등을 생각하며.
  그런데 상사는 일어나서 우리를 똑바로 쳐다본다.
  "벌써 시간인가?"

  역서 인간이 나타난다. 여기서 인간이 논리의 예측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상사는 
웃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이 유혹은 무엇인가? 메르모즈와 내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축배를 들던 파리에서의 어느 밤이 생각난다. 무슨 기념일 이었는지는 모르나 우리는 
너무 많이 지껄이고, 너무 많이 마시고, 공연히 피로해진 데 진저리가 나서 새벽녘에 
어느 바의 문간에 서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벌써 희끔해져 있어, 갑자기 메르모즈가 
내 팔을 움켜잡았다. 그것도 그의 손톱이 느껴질 정도로 억세게.
  "이봐, 지금쯤 다까르에서는...."
  그것은 정비공들이 눈들을 비비며 프로펠러의 커버를 벗기는 시각이며, 
조종사가 기상 통보를 알아보러 갈 시각이며, 땅 위의 온통 동료들만으로 가득 찰 
시각이었다. 벌써 하늘은 붉게 물들고, 벌써 사람들은 잔치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고, 벌써 우리는 참석하지 못 할 연회의 식탁보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위험을 무릅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긴 얼마나 불결한가...."
  메르보즈가 말을 맺는다.
  그런데 자네, 상사여, 자네는 죽음에 값할만한 어떤 연회에 초대를 받았던 말인가?
  나는 이미 자네의 속내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 자네는 내게 신상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네는 바르셀로나 어느 곳의 보잘 것 없는 경리사원으로서 전에는 
숫자를 늘어놓고 있었다. 자네 나라가 갈라져 있다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이, 
그런데 한 동료가 지원 입대했다. 이어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리하여 
자네는 어리둥절해서 어떤 야릇한 변화를 받아들였다. 자네의 하는 일이 점점 
시시하게 여겨졌다. 자네의 기쁨들도, 걱정들도, 하찮은 일상의 안락함도 모두가 
예 시대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지 않았다. 마침내 자네 동료의 한 사람이 말라가 
근처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왔다. 자네가 그 복수를 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를 그 
친구  하나가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란 것도 일찍이 자네의 마음을 어지럽힌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죽음 소식이 바다의 돌풍처럼 자네 위를, 자네의 좁다란 운명 
위를 스쳐 갔다. 그날 아침 한 동료가 자네를 쳐다보며 말했다.
  "갈까?"
  "가자."
  그래서 자네들은 '갔던' 것이다.
  자네가 말로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그 명백한 사실을 자네를 지배했던 그 
진리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몇 가지 일들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이주기에 기러기가 날아갈 때, 그들이 굽어보는 지역 위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은 집오리들이 그 거창한 삼각형의 날개에 끌리듯이 서투른 
날개짓을 시작하는 것이다. 야성의 부름 소리가 그들 속에 있는 무엇인지 모를 
어떤 야성의 흔적을 잠깨운 것이다.
  즉, 농가의 오리들이 잠시 철새로 바뀐 것이다. 웅덩이니, 벌레니, 오리집이니 
하는 하찮은 영상만이 내왕하던 그 작은 무긴 머리 속에, 대륙의 드넓음과, 큰 
바닷바람의 맛과, 해양의 진리가 전개된 것이다. 이 짐은 제 골이 이렇듯 놀라운 
것들을 간직할 수 있을 만큼 넓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 날개를 
치고, 낟알과 벌레들을 깔보며, 오직 기러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내 영양들이다. 나는 쥐비에 있을 때 
영양들을 길렀었다. 거기서는 모두들 영양을 길렀다. 우리는 그것들을 창살 달린 
우리 속에 가두어 한데다 두었다. 영양에게는 유동하는 공기가 필요하고, 또 
그들만큼 허약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붙잡혀서라도 자라고, 
시림 손에서 풀을 먹게 된다. 쓰다듬어 주면 가만히 있고, 그 촉촉한 콧잔등을 
손바닥에 파묻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놈들이 길이 든 줄로 안다. 사람들은 
소리도 없이 영양의 씨를 없애고, 살그머니 그들을 죽이는 알지 못할 
괴로움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놈들이 조그만 뿔로 사막 쪽을 향해 울타리를 떠받는 것을 발견하는 
날이 온다. 그놈들은 자석에 이끌린 것이다. 그놈들은 사람들에게서 도망친다는 
것도 모른다. 조금 전에도 당신이 갖다준 우유를 막 먹고 난 참이다. 그것들은 
아직도 쓰다듬어 주면 가만히 있고, 콧잔등을 손바닥에 더 다정스레 파묻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놓아주기가 무섭게 기뻐서 껑충거리는 듯이 보이다가는 
다시 창살 있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간섭하지 않으면, 
그냥 거기 서서 울타리와 싸워볼 생각은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뿔로 
죽어라 하고 울타리를 떠받는 것이다. 발정기라서 그런가? 아니면 숨이 차도록 
뛰놀고 싶은 단순한 욕구 때문일까?
  그놈들은 그것을 모른다. 사람들이 붙잡아 왔을 때는 아직 눈도 뜨지 않았었다. 
그놈들은 수컷의 냄새를 모르듯이 사막에서의 자유도 전혀 모른다. 그러나 
그대들은 그 양들보다 더 영리하다. 그놈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그대들은 안다. 
그것은 그놈들의 소원을 채워 줄 넓은 들판이다. 그놈들은 영양이 되어 저희들의 
불꽃을 피하려는 듯이 갑작스런 도약을 섞어 가며, 시속 1백 30킬로 미터의 
줄달음질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두려움을 맛보는 것이 영양들의 진리이고, 그 두려움만이 그들에게 제 힘 
이상을 해내게 하고, 가장 높은 재주를 끌어내게 하는 것이라면, 샤깔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폭양 밑에서 맹수의 발톱에 찢겨 죽는 것이 영양들의 진리라면, 
사자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대들은 그들을 들여다보며 생각할 것이다. 그놈들이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고 향수, 그것은 알지 못할 그 무엇인가에 대한 동경이다. 
동경의 대상이 있기는 하다. 다만 그것을 표현할 말들이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무엇이 그립단 말인가?

  상사여, 자네는 여기서 자네의 운명을 저버려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할만한 그 
무엇을 발견했단 말인가? 어쩌면 그것은 자네의 잠든 머리를 쳐들어준 그 
우애로운 팔이거나, 또는 동정은 아니나, 나누어주는 그 정다운 미소가 아닐까? 
'이봐, 친구!' 동정한다는 것은 아직도 둘로 있다는 뜻이다. 아직도 갈라져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감사도 연민도 똑같이 의미를 잃게 되는 인간 관계의 
높이가 있다. 사람이 해방된 포로처럼 숨을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2대의 비행편대로 아직 귀순하지 않은 리오 데 오로 지방을 날아 넘었을 때, 
우리는 이러한 결합을 맛보았었다. 나는 조난자가 구조자에게 감사하는 말을 
일찍이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흔히 우리는 이 비행기에서 저 비행기로 우편 
행낭을 옮겨 싣느라고 애를 쓰는 동안에도 서로 욕지거리를 하곤 했었다.
  "망할 자식! 내가 고장이 난 건 네 탓이야. 미쳤다고 그 역풍 속을 고도 2천으로 
날아! 좀더 낮게 날 따라 왔더라면 우린 벌써 뽀르 에띠엔에 가있을 게 아냐!"
  그러면 목숨을 내맡기고 따라 왔던 상대편은 망할 자식이 된 부끄러움을 깨닫게 
된다. 하기야 무엇에 대한 감사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도 역시 우리 생명에 대한 
감사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도 역시 우리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나무의 가지들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구해준 자네가 자랑스러웠다!
  상사여, 죽음을 위해 자네에게 준비를 시켜주던 그 병사가 왜 자네를 
동정했겠는가? 자네들은 서로를 위해 이 위험을 택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사람들은 이미 언어가 필요치 않은 일치감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자네의 출발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자네가 바르셀로나에서 가난했고, 일이 끝난 후에는 
외로웠고, 자네 몸을 편히 쉴 곳조차 없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자네 자신이 
완성되는 느낌을 맛보게 되었고, 또 우주적인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따돌림받던 자네가 사랑으로써 맞아 들여졌던 것이다.
  어쩌면 자네를 충동질했을지도 모르는 저 정치가들의 호언장담이 진정했고 
안했고, 또 이치에 맞지 않고를 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씨앗들이 싹을 
틔우듯이 그 말들이 자네를 붙들었다면, 그것은 그 말들이 자네의 욕구와 
합치됐기 때문이다. 자네만이 심판관이다. 밀을 알아 볼 줄 아는 것은 대지이다.

      (3)
  우리는 어떤 곳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공통된 목적에 의해 형제들과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숨을 쉬는 것이며, 또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임을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들이 같이 도달할 같은 봉우리를 향해 같은 로프에 묶여져 있지 않으면 
동료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바로 이 안락한 세계에, 왜 사막 한가운데서 
마지막 식량을 나누는 것에 그렇게도 넘치는 기쁨을 느끼겠는가? 이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억측 따위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우리들 중에서 사하라 
사막에서의 그 구조작업의 큰 기쁨을 맛본 모든 사람에게는 다른 기쁨들이란 모두 
하찮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가 우리 주위에서 와지끈거리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에게 이러한 충만감을 약속해 주는 종교에 
열광한다. 모순된 말들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똑같은 정열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제각기 이성의 열매인 방법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 목적은 다르지 
않다. 목적은 다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자기 속에 잠자고 있는 미지의 것을 짐작조차 
못했던 사람이, 바르셀로나의 어느 아나키스트들의 지하실에서 희생이니, 상호 원조니, 
정의의 준엄한 영상이니 하는 것에 감동되어 단 한 번이라도 그것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고 나면 ,그 사람은 이제 하나의 진리, 아나키스트의 진리밖에는 알지 못하게 
되더라도 또 스페인의 수녀원에서 겁을 먹고 꿇어앉아 있는 어린 수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한번 보초를 선 사람은 끝내 그 교회를 위해 죽을 것이다.
  가슴에 승리감을 안고 안데스 산맥의 칠레 쪽 비탈을 향해 빠져 들어가는 
메르모즈더러 잘못이라고, 상인의 편지 한 장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는 없을 
것이라고 당신이 반대했다면, 메르모즈는 당신을 비웃었을 것이다. 안데스 산맥을 
넘었을 때 그의 속에서 태어나던 인간, 그것이 바로 그의 진리인 것이다.
  전쟁을 불사하는 사람에게 전쟁의 무서움을 납득시키려거든 그를 야만인 취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를 이해하도록 힘써라.
  리프 전쟁 당시, 두 불귀순 고지 사이의 쐐기 모양으로 설치된 전초 진지를 
지휘하던 남방지구의 그 장교를 생각해 보라. 그는 어느 날 저녁, 서쪽 산악에서 
내려온 군사들을 맞았다. 격식대로 함께 차를 들고 있는데 총격이 벌어졌다. 동쪽 
산악 지대의 부족들이 이 초소를 공격해 온 것이다. 전투를 위해 물러갈 것을 
요구하는 대위에게 적의 군사들은 이렇게 응답했다.
  "오늘 우리는 귀관의 손님이오. 신은 귀관을 내버려 두고 떠나는 것은 허락지 
않소...."
  그래서 그들은 대위의 군대와 합세해서 그 진지를 구해주고는 그들의 독수리 
집으로 다시 기어 올라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이 이 진지를 습격할 준비를 하는 전 날, 그들은 대위에게 
사자들을 보냈다.
  "저번 밤에 우리는 귀관을 도왔다."
  "그랬소."
  "우리는 귀관을 위해 소총탄 3백을 쏘았다."
  "그랬소."
  "그것을 우리에게 돌려 줘야 옳지 않소?"
  기품 있는 대위는 그네들의 고귀함에서 얻어낼 수 있었을 이익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들을 향해 쓰여질 소총탄을 돌려 주었다.
  인간의 진리란 자기를 하나의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와 
적군과의 이러한 관계의 어엿함, 승부에 있어서의 성실함, 목숨을 건 상호간의 
경의의 주고 받음을 이해한 그 대위가, 자기에게 주어진 이 고귀함을, 같은 
아랍인에게 어깨를 툭 치며 자기의 우애를 보이고, 그들에게 아첨도 하나 동시에 
창피하게도 하는 저 선동 정치가들의 비열한 친절과 비교할 때, 만일 당신이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늘어 놓는다면, 대위는 당신에 대하여 약간 멸시 섞인 
연민밖에는 느끼지 못 할 것이다. 그런데 옳은 것은 바로 그다.
  그러나 당신들이 전쟁을 증오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인간과 그 갖가지 욕망을 이해하고, 그가 가진 본질적인 것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려면, 당신들의 진리의 명백한 사실을 서로 대립시켜서는 안된다. 그렇다. 
당신들은 옳다. 당신들은 모두 옳다. 논리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세계의 불행을 
꼽추에게 전가시키는 자에게도 일리는 있다. 만약 우리가 꼽추들에게 선전포고를 
한다면, 우리는 이내 흥분할 이유를 찾아 낼 것이다. 우리는 꼽추들의 죄악에 
보복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물론 꼽추들도 죄악을 범한다.
  이 본질적인 것을 끌어내어 보려면, 잠시 이들의 차이를 잊어야만 한다. 차이란 
한 번 인정받게 되면 온통 코란 한 권만큼의 요지부동의 진리와,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광신까지도 끌어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을 좌익과 우익, 꼽추와 꼽추 아닌 사람, 파시스트와 민주주의자로 
구분할 수 있고, 또 이러한 구분은 비난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세계를 단순화하는 것이지 혼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진리란 보편성을 끌어내는 언어이다. 뉴턴은 결코 퀴즈 풀이처럼 오랫동안 숨어 
있던 법칙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뉴턴은 하나의 창조적인 실험을 행한 것이다. 그는 
풀밭에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동시에 표시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를 창조했던 것이다. 진리란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이데올르기를 논쟁한들 무슨 소용인가?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들을 
또한 반증될 수 있으며, 이러한 논쟁은 인간의 구원을 절망으로 이끌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우리 주위 어디서고 똑같은 요구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우리는 해방되고 싶어하다.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은 그 곡괭이질의 의미를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형량을 선고 받은 사람을 모욕하는 수형자의 곡괭이질은 
탐험가를 위대하게 하는 곡괭이가 박힌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위 속에 추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도형장은 의미를 갖지 않은 곡괭이가 박힌 곳, 그 사람을 
인간의 공동체와 맺어 주지 않는 곡괭이가 박힌 곳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형장을 탈출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현재 유럽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아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2억의 인간이 
있다. 공업이 그들을 농민으로서의 전통에서 끌어내어 시커먼 열차들로 혼잡한 
역과도 같은 거대한 게토(유태인 지정 거주 지역) 속에 가두어 버렸다. 노동자 
도시의 밑창에서 그들은 깨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개척자의 기쁨도, 종교적인 기쁨도, 학자로서의 기쁨도 금지된 온갖 
직업의 톱니바퀴 틈에 끼어 들어가 있다.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옷을 
입히고, 먹이고, 그들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고 사람들은 믿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츰 차츰 자기 속에 꾸르뜰린 같은 소시민이나, 촌뜨기 정치가, 내면 
생활에 관심이 없는 기술자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들에게 교육은 잘 시킨다 하더라도 정신을 북돋주어줄 생각은 이미 없다. 문화에 
대해서도 정말 보잘것 없는 의견을 갖게 되어, 그것이 단지 공식의 암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전문학교의 열등생이라도 자연이나 그 법칙에 
관해서는 데카르트나 파스칼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정신에 있어서도 
같은 걸음걸이가 가능할까?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막연히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그 해결 방법이 잘못되어 있다. 물론 사람들에게 군복을 입힘으로써 
활기를 줄 수는 있다. 그러면 그들은 군가를 부르고 전우들과 더불어 빵을 뜯어 
먹을 것이다. 그들은 또 자기들이 찾는 보편적인 것의 맛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빵으로 인해 그들은 죽어 가는 것이다.
  땅 속에서 나무 우상을 파내어 그럭저럭 무엇을 증거 세운 신화를 부활시킬 
수도 있고, 또 범게르만주의나 로마제국의 신비론자들을 부활시킬 수도 있다. 
독일 사람들로 하여금, 독일 사람이며, 베에토벤과 동국인이라는 도취감에 취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으로 부두 노동자까지 만취시킬 수도 있다. 그것은 분명히 
부두 노동자로부터 하나의 베에토벤을 끌어내기보다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상들은 사람 잡아먹는 우상들이다. 지식의 진보나 질병의 
치유를 위해 죽는 사람은, 그가 죽는 것과 동시에 생명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다. 영토 확장을 위해 죽는 것도 갸륵한 일인지는 모르나, 오늘날의 전쟁은 
그것이 조장시켜 준다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를 파괴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민족 전체를 살리기 위해 약간의 피를 희생시킨다는 것도 문제가 
안된다. 전쟁이 비행기와 이페리트가스를 쓰게 된 이래로 그것은 이제 피투성이 
외과 수술에 지나지 않는다. 저마다 콘크리트 벽으로 된 방공호에 의지하고, 
서로가 밤마다 비행 편대를 보내어 상대편의 오장육부를 폭격하여 그 치명적인 
중심부를 파괴하고, 그 생산과 교역을 마비시킨다. 승리는 맨 나중에 썩는 자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두 적수들은 대개 같이 썩어 가는 것이다.

  무인지경이 된 세상에서 우리는 동료들을 찾느라고 목이 탔었다. 동료들과 
나누어 먹는 빵 맛은 우리에게 전쟁의 가치를 인정하게 했다. 그러나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옆 사람들 어깨의 따스함을 찾기 위해 전쟁이 필요한 건 아니다. 
전쟁은 우리를 속인다. 증오가 달음박질의 흥분에 보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 우리는 증오하는가? 우리는 같은 떠돌이 별을 타고 있는 한 배의 선원으로서 
연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새로운 종합을 북돋우기 위해 문명들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들이 서로 잡아먹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우리를 해방시키려면, 우리 서로를 맺어주는 하나의 목표를 인식하도록 도와주면 
되는 것이니 만큼, 우리 모두를 결합시켜 주는 바로 거기에서 그것을 찾아야 할 
일이다. 진찰하는 의사는 그 환자의 하소연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것이다. 의사는 보편적인 언어를 말한다.
  원자와 성운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신과도 같은 방정식을 생각해낼 
때의 물리학자도 마찬가지다. 순박한 양치기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다. 왜냐하면 
별 아래서 몇 마리의 양들을 조심성 있게 지키고 있는 그가 자기의 역할을 
자각한다면, 자기가 한낱 종이 아님을 깨달을 테니까. 그는 보초인 것이다. 그리고 
보초 하나하나는 나라 전체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양치기가 자기의 역할을 자각하고자 원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나는 마드리드 전선에서, 참호에서 5백 미터쯤 떨어진 언덕 위의 조그마한 돌담 
뒤에 자리잡은 학교를 찾아가본 일이 있다. 한 사람의 하사가 거기서 식물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손 끝으로 개양귀비 꽃의 연약한 기관을 분해해 가면서 그는 
수염 난 순례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는데, 그들은 둘러싸여 있는 진창을 빠져 
나와 포탄을 무릅쓰고 그가 있는 곳으로 순례하러 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하사를 둘러싸고 그들은 책상다리를 하고 주먹으로 턱을 괴고 앉아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눈썹을 찌푸리기도 하고, 이를 악물기도 했다. 그들은 수업에 
대해서는 대단한 것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이런 말은 알아들었다.
  "당신들은 짐승이다. 당신들은 이제 겨우 동굴에서 기어나왔다. 인간성을 
따라잡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따라잡으려고 무거운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자각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그때라야 우리는 평화롭게 살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은 죽음에도 의미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그것이 자연의 질서 안에 있을 때 지극히 다사로운 것이다. 가령 
프로방스의 늙은 농부가 자기 대의 끝에 임박해서, 자기 몫의 염소와 올리브 나무들을 
아들에게 물려 주고, 그 아들들도 차례로 그 아들들에게 물려 줄 수 있게 하려는 그런 
때 그러한 것이다. 농부의 가계에서는 사람은 반밖에 죽지 않는다. 각기의 생명은 
자기 차례가 오면 깍지처럼 터져 씨앗을 넘겨 주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어머니의 임종의 자리에 임한 세 사람의 농부를 곁에서 본 일이 
있다. 물론 그것은 비통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 그들의 탯줄이 끊어진 셈이다. 두 
번째로 매듭이, 한 대와 다음 대를 잇는 매듭이 풀어진 것이다. 이 세 아들들은, 
이제부터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하고, 명절날 모여, 앉을 단란한 식탁도 
없어지고, 의지해야 할 중심을 잃어버린 외로운 자신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와 함께 이런 것도 발견했다. 이 끊어짐 속에서 또한 생명이 두 
번째로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아들들도 역시 차례가 되면 줄의 선두가 되고, 
집합 점이 되고, 가장이 될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차례가 와서, 지금 안마당에서 
놀고 있는 저 한 배의 자식들에게 지휘권을 넘겨 줄 그때까지.
  나는 그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평화롭고도 굳은 얼굴에 입술을 꽉 다문 늙은 
농사꾼 아낙네, 돌의 가면으로 바뀐 그 얼굴을, 나는 그 얼굴에서 아들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이 가면은 그들의 얼굴을 찍어내는데 소용되었던 것이다. 
그 몸은 그들의 몸, 그 아름다운 인간의 원형들을 찍어내는데 소용됐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어머니는 찌그러져서, 열매를 꺼낸 깍지처럼 쉬고 있는 것이다. 
아들과 딸들도 그들의 차례가 오면 자기들의 몸으로 작은 인간들을 찍어낼 
것이다. 농가에서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어머니는 죽었다. 어머니 만세!
  비통하기는 하다. 그렇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순박한가. 백발의 아름다운 껍질을 
가는 길에 하나하나 버리면서, 자기의 변신을 통해서 알지 못할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이 혈통의 모습은...

  그러기에 그날 저녁, 그 시골 작은 마을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절망이 아닌 
조심스럽고도 다정한 기쁨을 실은 것처럼 내 귀에 들린 것도 이 때문이다. 장례와 
세례를 한 목소리로 엄숙한 그 종소리는 또다시 한 세대가 다른 세대로 옮아감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엾은 한 노파와 대지와의 약혼식 노래를 
들으면서 크나큰 평화밖에는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한 그루의 나무의 성장처럼 유유한 걸음으로 전해져 가는 
것은 생명이기도 하지만 또한 의식이기도 하다. 얼마나 신비스러운 올라감인가! 녹아 
흐르는 용암에서, 별의 반죽에서 기적적으로 싹튼 생명 있는 세포에서 태어난 우리는, 
차츰차츰 칸타타 노래를 쓰고, 은하수를 계측하는 데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 어머니는 결코 생명만을 전해준 것이 아니다. 아들에게 말을 가르쳐 주었고, 
여러 세기에 걸쳐 차츰차츰 쌓여진 짐짝을, 자기가 맡아 왔던 정신적인 유산인, 
뉴턴과 세익스피어를 동굴 속의 짐승들과 구별지어주는 전통과 개념과 신화 등의 
조그만 몫을 그들에게 맡겨준 것이다.
  우리가 배고플 때 느끼는 것, 저 스페인의 병사들을 포격을 무릅쓰고 식물학 
수업으로 이끌어 가고, 메르모즈를 남대서양 쪽으로 몰아가고,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시로 본 그 굶주림에서 깨닫는 것은 천지의 생성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하여 자각해야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두운 밤에 타랍을 걸쳐 놓아야 한다. 자신들을 이기적인 것이라고 
믿는 무관심으로써 자기들의 지혜로 삼는 자들만이 굶주림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러한 지혜와는 모순된다!
  동료들, 나의 동료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증인으로 세운다. 그래, 어떤 때에 
우리는 행복을 느꼈던가?

      (4)
  이제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생각나는 것은, 조종사로서 지명된 행운을 
얻어, 우리가 인간으로 탈피할 준비를 하고 있던 그때, 그 첫 우편 비행을 떠나던 
새벽에 우리를 배웅해 주던 늙은 사무원들이다. 그들도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기는 
하나, 자기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잠자게 내버려 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몇 해 전에 기 기차 여행 도중에, 나는 사흘 동안이나 그 바닷물에 굴리는 
조약돌 같은 소리의 포로가 되어 갇혀 있던 기차의 이 진행중인 고장이 보고 
싶어서 몸을 일으켰었다. 새벽 1시경이었는데, 나는 열차 전부를 종단해서 
걸어갔다. 침대 차는 비어 있었다. 1등 찻간도 비어 있었다.
  그런데 3등 차는, 프랑스에서 해고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수백 명의 폴란드 
노동자들을 태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타넘으면서 복도를 지나갔다. 
나는 둘러보기 위해 발을 멈추었다.
  희미한 등불 아래 서서, 나는 이 병영이나 유치장 같은 냄새를 풍기는 공동 
숙사 비슷한 칸막이 없는 객차 안에서, 열차의 동요로 흔들리고 있는 혼잡한 
군중을 보았다. 그것은 악몽 속에 파묻혀 그들의 비참함 속으로 되돌아가려는 
군중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빡빡 깍은 카다란 머리들이 나무 걸상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들의 망각 속에서 
그들을 위협하는 이 모든 소음과 동요에 시달리듯이 좌우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단잠의 후대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들, 경제의 조류에 밀려 유럽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쫓겨다니고, 내가 전에 폴란드 광부들의 창가에서 본 적이 있는 제라늄 화분 
3개와 손바닥만한 마당이 달린 그 노르 지방(프랑스 북부지방)의 작은 집에서도 
떨려 난 이 사람들은 인간의 자격도 태반은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엉성하게 
묶어 탈장처럼 터진 봇짐 속에는 부엌 세간과, 담요와, 커튼밖에는 챙겨 넣지 
못했다. 그들이 쓰다듬고 귀여워하던 모든 것, 프랑스에서 지낸 4~5년 동안에 
길들였던 모든 것들, 고양이며, 개며, 제라늄 따위는 단념해야만 했고, 이 부엌 
세간만을 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아기 하나가, 하도 지쳐서 잠든 것처럼 보이는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 이 
여행의 부조리와 무질서 속에서 생명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돌덩이처럼 무겁고 까까중인 머리통, 작업복 속에 갇혀 불편한 잠 
속에 빠져 오그린 울퉁불퉁한 육체, 그는 마치 진흙덩어리 같았다. 밤이면 이와 
닮은 이미 형체도 없는 표류물들이 시장의 벤치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문제는 이 비참함 속에, 이 불결함 속에 이 
추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긴 커녕 바로 이 남자와 이 여자가 어느 날 
서로 알게 되어, 아마도 남자 쪽에서 여자에게 미소를 던졌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하루 일이 끝나면 그녀에게 꽃도 가져다 주었겠지. 수줍고 서투른 그는 
어쩌면 업신여김 당할까봐 떨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타고난 아양과 
매력에 자신을 가지고 그를 골려주며 즐거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제는 
곡괭이질이나 망치질을 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게 된 이 남자는 마음 속에 달콤한 
번민을 느꼈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지금 그들이 진흙 덩어리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어떤 
지독한 거푸집을 거쳐 나왔기에 이처럼 판박이 기계에 눌린 것처럼 이렇게 
찍혀졌단 말인가? 늙은 짐승도 아직 제 매력을 간직하는 법이다. 어째서 이 
아름다운 인간의 진흙은 망가진 것일까?
  나는 잠자리가 사창굴처럼 어지러운 군중들 사이에서 여행을 계속했다. 거친 
코고는 소리와, 알아듣지 못할 한탄과, 어느 한편이 견딜 수 없어 다른 쪽으로 
뒤채는 사람들이 바닥을 긁는 헌 구두 소리 등이 뒤범벅이 된 야릇한 소리가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바닷물에 뒹구는 조약돌 소리 같은 그칠 줄 모르는 반주가 
여전히 나지막이 들리고 있었다.
  나는 어느 부부 맞은편에 앉는다. 그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어린 아이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잠들고 있었다. 그런데 잠자면서 돌아 눕는 바람에 그 얼굴이 
희미한 등불 밑에 드러났다. 오오! 얼마나 사랑스러운 얼굴인가! 이 부부에게서 
일종의 황금 과실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 둔중한 암수 남, 녀에게서 이 아름답고 
매력 있는 걸작이 생겨나온 것이다.
  나는 그 반듯한 이마, 그 귀엽게 내민 입술 위에 몸을 굽혀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음악가의 얼굴, 어린 모짜르트, 생명의 아름다운 
약속이다라고 전설 속의 어린 왕자인들이 아이와 다를 바 없다. 보호받고, 
귀염받고, 교양 받는다면 이 아이도 무엇인들 못될 것인가!
  정원에 돌연변이로 새로운 장미꽃이 피어나면 정원사들은 모두 법석을 떤다. 그 
꽃을 따로 옮겨 심고, 가꾸고 우대를 한다. 그런데 사람을 위한 정원사는 없다. 
어린 모짜르트도 다른 아이들처럼 판박이 기계에 찍히게 될 것이다. 모짜르트는 
카바레의 악취 속에서 썩어빠진 음악으로 자기의 가장 높은 기쁨으로 삼을 
것이다. 모처럼의 모짜르트도 마지막이다.
  나는 내 찻간으로 돌아왔다. 나는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의 운명을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자비심이 아니다. 영원히 
터지기를 계속하는 상처를 연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상처를 입은 피해자는 개인이 아니고 인류라고나 할 그 무엇이다. 나는 
연민을 믿지 않는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정원사의 관점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결코 이 비참함이 아니다. 비참함 속에서라면 인간은 나태 속에서 그렇듯이 
그 속에 안주해 버릴 수도 있다. 유럽에 가까운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대대로 신분이 낮은 천함 속에 살면서도 그것을 낙으로 삼아 왔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묽은 수프(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무료 급식)만으로는 
고칠 수 없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울퉁불퉁함도 누추함도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 인간들 하나 하나 속에서 학살당한 모짜르트인 것이다.

  오직 '정신'만이 진흙 위로 불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  9. 어느 볼모에게 보내는 글

      (1)
  1940년 12월, 내가 미국에 가려고 포르투갈을 횡단했을 때, 리스본은 내게 마치 
밝고도 쓸쓸한 일종의 낙원처럼 보였다. 그때 거기서는 침공이 임박했다는 
이야기들이 퍼져 있었는데, 포르투칼은 자기의 행복에 대한 환상에 매달려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전시장을 꾸며 놓은 리스본은 약간 창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전생에 나간 아들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으면서도 '내가 웃고 있는 이상 내 아들은 살아 있어'라는 확신으로써 아들을 
구하려고 애쓰는 그런 어머니들의 미소와도 같았다.
  '보세요,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스러우며 구김살 없이 밝은가를....'하고 
리스본은 말하고 있었다.
  대륙 전체가 사나운 족속들로 그득한 원시적인 산악처럼 포르투칼을 짓누르고 
있는데, 화려하게 장식한 리스본은 유럽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내가 숨으려고 
전혀 애쓰지 않는데 누가 나를 공격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무방비 
상태인데.' 하고...
  내 조국의 도시들은 밤이 오면 잿빛으로 변한다. 그곳에서 나는 모든 불빛에 
대한 습관을 잃었었다. 그래서 이 휘황한 도시는 내게 막연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위의 변두리 거리가 어두우면 너무나 휘황한 진열장의 
다이아몬드들은 부랑자들을 유인한다. 지금 그들이 돌아다니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치 멀리서 이 보물 냄새를 맡기라도 한 것처럼, 떠돌아다니는 폭격기들의 
무리로 가득 찬 유럽의 밤이 리스본을 짓누르는 것 같이 내겐 생각된다. 
  그러나 포르투칼은 이 괴물의 욕망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불길한 조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절망적인 확신을 가지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처럼 예술을 숭배하고 있는 포르투칼을 누가 감히 짓밟겠는가? 그는 
경탄할 만한 모든 예술품들을 끄집어냈다. 이처럼 놀라운 예술품 속에 있는 
포르투칼을 누가 감히 짓밟겠는가?
  포르투칼은 그들의 수많은 위인들을 내보였다. 군대가 없고, 대포가 없기 
때문에 그는 시인, 탐험가, 모험가, 등의 석상으로 된 보초들을 침략자의 쇳덩이 
앞에 세워 놓았다. 군대와 대포가 없기 때문에 그의 모든 과거를 내세워 길을 
막아섰다. 이렇게 웅장한 과거의 유산을 지니고 있는 포르투칼을 누가 감히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이리하여 나는 매일 저녁, 지극히 고상한 취미로써 가다듬어진 이 훌륭한 
전시품들 사이를 우울한 기분으로 돌아다녔다. 거기에서는 너무도 사려 깊고 솜씨 
있게 골라진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웠다. 음악은 정원 위를 
부드럽게, 마치 샘물의 소박한 속삭임처럼 격렬한 음을 내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절도 있는 놀라운 취미를 누가 파괴하겠단 말인가?
  그런데 내게는 이렇게 미소짓고 있는 리스본이 내 조국의 불꺼진 도시들보다 더 
침울하게 생각되었다.
  아마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죽은 사람의 자리를 그들의 식탁에 그대로 남겨 
넣는 좀 이상한 집안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회복할 수 
없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도전이 위안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역을 맡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들은 죽음의 역할에서 
하나의 다른 존재의 형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족들은 죽은 
이들의 귀환을 중단시키고 있다. 그 가족들은 죽은 이를 영원한 부재자, 영원히 
지각하는 손님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사별의 슬픔을 내용 없는 기다림과 
맞바꾸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는 이 집안들의 슬픔과는 다른 끊임없이 숨막히는 
어떤 불안 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잃은 마지막 친구, 항공 우편 업무 공사 중에 순직한 조종사 기요메,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기요메는 더이상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더이상 우리 앞에 현존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영영 부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쓸데없는 올가미인 그의 식기들을 내 식탁에서 치워 버렸다. 
그럼으로써 그를 정말로 죽은 친구로 만들었다.
  그러나 포르투칼은 그의 식기와 램프와 음악을 남겨둠으로써 행복을 믿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리스본에서는 신이 행복을 믿도록 하기 위해 모두들 행복을 가장하고 
있었다.
  리스본의 우울한 분위기는 어떤 피난만들이 와있는 탓이기도 했다. 나는 피난처를 
찾아온 추방당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자기들의 노력으로써 비옥하게 
만들 땅을 찾으러 온 이주민들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들의 재산을 안전한 곳에 
갖다 두기 위해 동족들의 비참함을 멀리하고 망명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시내에 거처를 정할 수 없어서 에스또릴의 도박장 근처에서 기거했다. 나는 
치열한 전쟁에서 빠져 나온 참이었다. 아홉 달 동안 독일 상공 비행을 중단한 적이 
없었던 우리 비행대대는 독일군의 단 한번의 공격에 승무원의 4분의 3을 잃었었다.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노^36^예 상태와 같은 음울한 분위기와 기아의 위협을 
체험했다. 나는 내 나라 도시들에 내린 그 답답한 밤들을 체험했다.
  그런데 여기 내 숙소에서 두어 걸음밖에 안되는 에스또릴의 카지노에는 밤마다 
유령들로 들끓고 있었다. 어딘 가로 달려가는 것같이 보이는 소리 없는 캐딜락 
승용차가 현관 입구에 깔린 보드라운 가는 모래 위에 그들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예전처럼 만찬회 때의 정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슴 장식과 진주 목걸이들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화제도 없는 겉치레 식사를 하기 
위해 서로를 초대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재산 정도에 따라 '루울렛'이나 '바카라(트럼프의 일종)' 
놀림을 한다. 나는 가끔 그들은 구경하러 갔었다. 나는 분개하거나 빈정거릴 
감정은 들지 않았으나 어떤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었다. 그것은 동물원에서 
멸종되어 가는 종족 중의 남아 있는 동물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가슴 답답한 
불안감이었다. 그들은 놀음탁자 주위에 자리잡는다. 그들은 무뚝뚝한 도박대 
감시인에게 바싹 다가앉아, 희망과 실망과 두려움과 선망과 환희를 맛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마치 생존자처럼, 그들은 어쩌면 바로 그 순간에 이미 
모든 의미를 상실했을지도 모를 재산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무효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의 위협을 받고 이미 파괴되어 
가고 있는 공장들의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시리우스좌를 지불 인으로 하고 어음을 끊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몇 달 
전부터 시상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고거에 매달려 오직 
그들의 흥분의 정당성과, 수표의 예치금과, 약속의 불변성을 믿으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인형들의 발레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슬픈 광경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버리고 바닷가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그러나 이 에스또릴의 바다, 물의 도시의 바다, 길들여진 
바다도 놀음에 한몫을 끼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부드럽고 단조로운 물결을 철 지난 긴 옷자락처럼만 속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항구 안의 여객선에서도 그 피난민들이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여객선도 역시 가벼운 불안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 배는 뿌리 없는 식물들을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실어가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한 사람의 여행자는 되고 싶지만, 이주민이 되고 싶진 않구나. 나는 내 
조국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것은 다른 곳에서는 소용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저 이주민들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주소록과 신분증 등등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인 체하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 있는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시겠소? 나는 이런 사람이오. 이러이러한 도시 출신이오. 아무개의 친구요. 
당신은 이러이러한 사람을 아시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친구 이야기나, 어떤 책임 이야기나, 어떤 실패 이야기나, 록은 
그들을 아무것 하고라도 관련지어줄 수 있을 듯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을 등지고 떠나온 만큼 이미 그런 과거는 아무것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마치 사랑의 추억이 처음에는 그렇듯이, 그것은 아직도 아주 따뜻하고 아주 
신선하고 아주 생생했다. 그들은 연애 편지들을 모아 놓는다. 거기에는 어떤 추억들이 
깃들이어 있다. 그것들을 모두 소중하게 묶어 놓는다. 그러면 이 유물들은 처음에는 
우수에 찬 매력을 풍긴다. 그러다가 파란 눈의 금발머리 아가씨라도 지나가면 그 
유물들은 죽어버린다. 왜냐하면, 친구도, 책임도, 고향읍내도, 자기 집의 추억도 더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면 퇴색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리스본이 행복을 가장하고 있듯이 그들도 
머지않아 돌아갈 줄 믿고 있는 체하고 있었다. 탕아가 집을 나간 것은 얼마나 
아늑한 느낌인가! 그의 뒤에는 고향 집이 있는 만큼 그것은 외양만의 부재다. 
누가 옆방에 가있다든가, 지구 반대편에 가있다든가 하는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보기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의 존재가 어떤 눈앞의 실재보다도 더욱 
가깝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것은 기도에 의한 현존이다.
  나는 사하라에 있을 때보다 더 내 집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16세기의 브르따뉴 
뱃사람들은 호른 곶(남아메리카의 남단. 칠레령 호른 섬에 있다)을 돌아가며 역풍의 
장벽과 대항하면서 늙어갔지만 그들보다 약혼녀와 더 가까이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출발의 돛을 감아 올리면서 그 투박한 손으로 귀항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브르따뉴 
항구에서 약혼녀의 집으로 가는 지름길은 호른 곶을 거쳐 지나간다.
  그런데 저 피난민들이 내게는 약혼녀를 빼앗긴 브르따뉴의 뱃사람처럼 
생각된다. 이미 그들을  위해 그 창가에 가물거리는 램프를 밝히는 브르따뉴의 
약혼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탕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돌아갈 집이 
없는 탕아들이다. 그래서 진짜 여행은 자기 자신 밖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 속에 
묵직한 추억의 실타래를 다시 감을 수 있을까? 이 유령선은 고성소(구약시대에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던 의인들의 영혼이 머물던 곳)처럼, 태어날 영혼을 싣고 
있었다. 배와 하나가 되고, 진정한 직무로써 자신을 향상시키면서 쟁반을 나르고 
놋그릇을 닦고 구두에 약칠을 하는 이들이, 은연중에 경멸감으로 죽은 이들의 시중을 
드는 이 사람들이 실로 현실적으로 보였으며,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싶으리 만치 
현실적이었다. 피난민들이 그런 가벼운 모멸을 받는 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라 비중이다. 그들은 이미 어떤 일정한 짐과 
어떤 친구와 어떤 책임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런 역할을 하는 
체했지만, 그것에는 이미 진실성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에게 호소하려 하지 않았다. 한밤중에 그대들을 떠밀어 
일어나게 해서 역으로 달려가게 하는 그 전보, '빨리 오라! 네가 필요하다'라는 
전보는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가!
  우리는 우리를 도와주는 친구를 이내 알아본다. 그러나 우리에게 도움 받기를 
처하는 자들은 천천히 얻게 된다. 물론 내 눈앞의 저 유령들을 아무도 증오하지 
않았고, 아무도 시기하지 않았고,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환영 칵테일 파티나 
위로 만찬회에 휩쓸려 들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그들의 문을 흔들며 '문 좀 
열게! 날세!' 하며 들여주기를 요구하겠는가? 아이가 무엇을 요구하기까지에는 
오랫동안의 사귐이 필요하다. 낡은 성관을 사랑할 줄 알려면 여러 세대 동안 
수리비를 탕진해야 한다.

      (2)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왔다는 것을 어딘가에 남기는 일이다. 관습이 그렇고, 집안의 
잔치가 그렇고, 추억이 깃들인 집이 그렇다. 중요한 것은 되돌아오기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향하고 있는 그 먼 목표가 덧없는 것이기에 나는 내 본질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진짜 사막을 체험하는데 위험을 무릅썼고, 그리하여 
오랫동안 내 호기심을 끌었던 어떤 신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3년 동안 사하라에서 살아왔다. 아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라 
사막의 마력에 대해 생각했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외견상 고독하고 헐벗어 
있지만, 사하라의 생활을 맛본 사람은 누구나 거기서의 몇 해를 자신이 살아온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인 듯 그리워한다. '사막에의 향수, 고독에의 향수, 
공간에의 향수'라는 말들을 문학적인 관용어에 불과하며,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선객들이 빼곡이 들어차 우글대는 뱃전에서 나는 비로소 
사막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사하라 사막은 끝없이 단조로운 모래밭,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기에는 
모래 언덕이 드물기 때문에 끝없는 자갈 투성이의 모래밭 뿐이다.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는 항상 권태감에 잠기게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신성이 그 사막에 갖가지 방향과 경사와 표지의 그물을, 은밀하고 살아있는 
조직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리하여 단조로움은 없어지고, 모든 것은 위치가 
잡혀져 있다. 거기서는 침묵조차도 다른 침묵과 같지 않다.
  부족들이 화해하고, 저녁이 서늘함을 몰고 오고, 사람들이 조용한 항구에서 
돛을 내리고 휴식을 취할 때는 평화의 침묵이 감돈다. 태양이 사고와 움직임을 
중단시킬 때는 정오의 침묵이 흐른다. 북풍이 수그러지고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에서 꽃가루처럼 쫓겨난 곤충들이 나타나 모래가 불어오는 동쪽의 폭풍을 
예고할 때는 그것을 거짓 침묵이다. 멀리서 어떤 부족이 술렁거리고 있음을 알게 
될 때는 그것은 음모의 침묵이다. 아랍인들 사이에서 알지 못할 집회가 시작되면 
그것은 신비의 침묵이다. 전령의 귀환이 늦어질 때는 간정된 침묵이 흐른다. 밤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숨을 죽일 때면 예민한 침묵이 있다. 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회상할 때는 우수의 침묵이 있다.
  모든 것은 자극을 가지고 있고, 별들은 저마다 진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별들은 모두 동방박사의 별들이다. 별들은 모두 자신의 신을 섬긴다. 이 별은 
도달하기 힘든 먼 곳에 있는 우물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당신과 그 
우물 사이에 놓여 있는 공간은 성벽과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저 별은 물이 
마른 우물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그 별조차도 메말라 보인다. 그리고 
당신과 그 마른 우물 사이에 놓인 공간에는 아무 경사도 없다. 또다른 별은 
유목민들이 당신에게 찬양한, 그러나 불귀순민들이 그 길을 막아선 미지의 
오아시스를 가리켜 주는 안내자이다. 그리고 당신과 오아시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사막은 동화 속의 잔디밭과도 같다. 또다른 별은 입 안에 든 과일처럼 
풍미로운 남쪽의 하얀 도시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도 저 별은 바다로 
가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마침내 거의 비현실적인 것 같은 목표물들이 아주 멀리에서 이 사막에 자기를 
띠게 한다. 추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집이라든지, 그가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라든지 하는 것들이...
  이렇게 당신을 끌어당기거나 떠다밀거나 하고, 또 당신에게 간청하거나 항거하거나 
하는 자께의 힘에 의해서 당신은 긴장되고 생기가 나는 것을 느낀다. 당신은 이제 
동서남북 한가운데 단단한 기초를 잡고 정확히 방향을 정하고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막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어떠한 재물도 주지 않고, 사막에는 보거나 
들을 것도 없으므로, 거기서는 내적 생활이 마비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갖가지 작용에 오히려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정신'에 의해 지배받는다. 사막에서 
내가 숭상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저 구슬픈 여객선 뱃전에서 아직도 많은 목표가 있음을 느낀 것은, 
내가 아직도 생기에 넘치는 한 유성에 살고 있다는 것은, 내가 뒤에서 프랑스의 밤 
속에 사라진, 그리고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기 시작한 몇몇 친구들 
덕분이다.
  프랑스는 확실히 내게 있어서 추상적인 여신도 아니고, 역사학자의 개념도 아니며, 
그것은 내가 속해 있는 하나의 육체이며, 나를 지배하는 인연의 그물이며, 내 마음 
속의 경사를 만드는 목표의 총체이다. 나는 나 자신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그들이 나 자신보다 더 튼튼하고 더 영속적인 존재라고 느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어디로 돌아와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 현실에 존재하기 위해서.
  내 조국 전체가 그들 속에 깃들이고 있었고, 그들을 통해 내 속에 살아 있었다. 
바다를 향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륙이란 이렇게 몇 개의 등대의 단순한 광채로 
요약된다. 등대란 원근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불빛은 그저 단순히 눈 속에 
비쳐질 뿐이다. 그리하여 대륙의 모든 경이로움은 그 별 속에 들어 있게 된다.
  그런데 지금 프랑스는 전면적인 점령으로 인해 마치 등불이 모두 꺼져 침묵 
속에 송두리째 빠져들어가 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운명은 
내 몸 속에 깃들은 질병보다도 더 아프게 나를 괴롭힌다. 그들의 덧없는 운명으로 
해서 내 본질이 위협 당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오늘 밤,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은 지금 쉰 살이다(앞에 나온 기요메와 
함께 생떽쥐뻬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레옹 베뜨르를 말함).그는 병이 들었다. 
그리고 유태인이다. 어떻게 그가 독일 의 공포 치하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그가 
아직 숨을 쉬고 있다고 상상하기 위해서는, 그가 그의 마을 농부의 아름다운 
침묵의 성채 속에 숨어서 침략자에게 발각되지 않았다고 믿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아직 그가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야만 아득히 먼 그의 
우정의 나라, 국경이 없는 그 나라를 거닐면서 내가 망명자가 아니라 여행자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사막은 사람이 생각하는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하라는 어떤 수도보다도 더 활기에 차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끓는 도시라도 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자력을 상실하면 텅 빈 것이 된다.

      (3)
  그런데 생명은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자력선들을 이룩해 놓는가? 그 
친구의 집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중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러한 존재를 내가 
필요로 하는 목표의 하나로 만든 중요한 순간들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도대체 
어떤 은밀한 사건들로 해서 개개인의 애정이 생기며, 또 그 애정을 통해서 
조국에의 사랑이 생기는 것일까?
  진정한 기적들은 그렇게 떠들썩한 것인가! 중요한 사건들은 그렇게도 단순한 
것인가! 내가 이야기하려 하는 이 순간에 대해서도 하도 내세울만한 말이 없어서 
나는 꿈속에 살아 있는 그 친구를 되살려서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전쟁 전의 어느 날, 쏘온느 강변에 있는 뚜르뉘 도시 쪽에서의 
일이었지. 우리는 점심을 먹 위해 널빤지로 만든 발코니가 강 위로 튀어나온 어느 
식당을 찾아들었네. 손님들이 칼자국을 낸 아주 소박한 식탁에 팔을 괴고 앉아 
우리는 '뻬르노'술 두 잔을 주문했네. 자네의 주치의는 술을 금했지만, 자네는 
특별한 경우에 슬쩍 하곤 했네. 바로 그때도 그런 경우 중의 하나였네. 이유는 잘 
몰랐지만 어쨌거나 그런 경우였네.
  우리를 즐겁게 한 것은 그 불빛의 질보다도 더 느껴지지 않는 그럼 것이었네. 
그래서 자네는 그 특별한 경우에 그 '뻬르노'를 마시기로 결심했던 거네. 그리고 
마침 우리 근처에서 두 사람의 사공이 거룻배에서 짐을 부리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들을 초청했네. 우리는 발코니 위에서 소리쳐 불렀었지. 그러자 그들은 왔네. 
그들은 아무 꺼리낌없이 왔네. 우리가 그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됐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 마음 속의 그 보이지 않는 축제 기분 때문이었을 
거네. 그들이 부르는 신호에 응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했네. 그래서 우리는 
축배를 들었던 것이네!
  햇빛은 좋았네. 따뜻하고 달콤한 햇살이 건너편 강둑의 포플러들과 지평선까지 
펼쳐진 평야를 비추고 있었지. 우리는 여전히 그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점점 더 
유쾌해졌네. 태양이 밝게 비치고, 강물이 흐르고, 식사가 준비되고, 사공들이 
부름에 응했고, 하녀가 마치 영원한 축제를 주관하듯이 즐거운 친절로써 시중 
드는 것이 모두 우리를 마음 놓이게 했네.
  우리는 한껏 평화로움을 느꼈고, 혼란에서 벗어나서 최후의 문명 속에 들어가 
있었네. 우리는 일체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더이상 아무것도 부탁할 것이 없는 
것같은 일조의 완벽한 상태를 맛보고 있었네. 우리는 자신이 순수하고 올바르고 
총명하며, 관대한 것같이 느껴졌네. 그 명증 속에 어떤 진실이 우리에게 
나타났는지 분명히 말할 수는 없었으리라. 드러나 우리를 지배하는 감정은 
틀림없이 확실성 그것이었네. 거의 오만스러울 정도의 확실성이었네.
  이와 같이해서 우주는 우리를 통해서 그의 선의를 증명했다. 성운의 응결, 
유성의 굳어짐, 첫 아메바들의 형성, 아메바를 인간으로까지 이끌어온 생명의 
거대한 작업, 이 모든 것이 희한하게도 한곳으로 모여 우리를 통해 그 독특한 
즐거움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것은 성공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무언의 일치와 거의 종교적이랄 수 있는 이 의식을 
음미하고 있었다. 성직자와도 같이 오가는 하녀들의 걸음걸이에 진정되어, 사공과 
우리들은 꼭 어떤 교회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같은 교회의 신자들처럼 건배를 
했다. 사공 중의 한 사람은 네덜란드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독일 
사람이었다. 이 독일사람은 고향에서 공산당인지 트로츠키파인지 카톨릭인지 
유대인인지 그런 걸로 몰렸기 때문에 오래 전에 나치즘을 피해 왔다는 
것이었다(그가 어떤 명목으로 추방당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그 사공에게는 명목 이상의 다른 것이 분명히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었다. 인간적인 됨됨이였다. 그는 단순히 한 사람의 친구였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들로서 마음이 맞았다. 자네도 동감이었고 나도 그랬다. 사공들과 
하녀도 동감이었다. 무엇에 대해 동감이었단 말인가? '뻬르노'에 대해서였던가? 
생의 의미에 대해서였던가? 그 하루의 즐거움에 대해서였던가?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도 역시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감은 너무나 완벽한 것이었고, 깊숙이 단단히 뿌리박은 것이었고,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너무나 분명한 일종의 성서에 
의거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 실체를 구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그 정자에 방벽을 
치고 거기에서 공격을 방어하고, 기관총 뒤에서 죽을 것을 수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실체란 말인가? 이 점이 바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나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반영만을 포착할 위험성이 있다. 불충분한 말은 진실을 놓치게 한다. 
뱃사공의 미소와, 자네와 나의 미소, 그 하녀의 미소의 그 어떤 성질을 구하기 위해서, 
또 수천만 년 전부터 그토록 애써 왔고, 마침내 우리를 통해서 꽤 성공했던 미소의 
성질에까지 도달한 그 태양의 어떤 기적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가 흔쾌히 투쟁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내 말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대개 조금도 무게가 없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이란 겉보기에는 어떤 
미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미소는 흔히 본질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미소로써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미소로써 보상을 받기도 한다. 미소로써 생기가 나는 일도 
있다. 그리고 어떤 특성을 지닌 미소는 사람을 죽게 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특성이 현시대의 고민에서 우리들을 그렇게도 잘 구출해 주었고, 우리에게 확신과 
평화를 주었으나, 나는 지금 내 생각을 좀더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미소 
이야기를 할 필요를 느낀다.

      (4)
  그것은 에스파니아의 내란에 관한 현지 탐방을 하던 중의 일이었다. 나는 
무모하게도 새벽 3시경에 어떤 화물 역에서 비밀 물자를 싣고 있는 광경을 몰래 
구경했었다. 인부들의 소란스러움과 어둠이 내 무분별한 행동을 용이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인 민병들에게 내가 사상한 자로 보였다.
  그것은 매우 간단했다. 나는 그들이 유연하고도 소리없이 다가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손가락을 오므리듯이 벌써 나를 조용히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카빈 총대는 가볍게 내 배에 들이대어졌고, 그 침묵은 
내게 아주 엄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마침내 손을 쳐들었다.
  그들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내 넥타이를 (무정부주의자들 
지구의 유행은 이 예술품의 사용을 금지했었다) 응시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 몸이 
굳어졌다. 나는 발포를 기다렸다. 그때는 즉결 재판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발포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역 작업반들이 딴 세상에서 환상의 발레를 
추고 있는 것 같은 절대적 고적감에 싸인 몇 초가 흐른 뒤에 무정부주의자들은 
가벼운 머리 짓으로 내게 앞장서라는 신호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입환선을 
가로질러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체포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또 놀랄 정도로 
절제된 동작 속에서 이루어졌다. 마치 바다 밑 동물들이 노는 것처럼.
  마침내 나는 감시 초소로 바뀌어진 어느 지하실에 처넣어졌다. 싸구려 석유 
램프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다른 민병들이 카빈총을 다리 사이에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체포한 순찰병들과 감정 없는 목소리로 몇 마디 말을 
주고 받았다. 그들 중의 하나가 내 몸을 수색했다.
  나는 에스파니아 말을 할 줄 알지만 카탈로니아 말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신분증을 내보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런데 나는 깜박 잊고 신분증을 호텔에 두고 
나왔었다. 그래서 나는 내 말이 어떻게 전달 될는지 모르면서 '호텔 ... 신문 
기자....'라고 대답했다. 민병들은 내 카메라를 무슨 증거물이나 되는 것처럼 모두들 
돌려가며 보았다. 건들거리는 의자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던 자들 중의 몇 명이 
권태롭게 일어나서 벽에 등을 기댔다.
  그 자리의 지배적인 인상은 권태롭다는 느낌이었다. 권태롭고 졸립다는 인상, 
그 사람들의 주의력은 바닥이 나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인간적인 접촉이라면 
적의의 표시라도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분노의 표시도, 어떤 
비난의 표시조차도 내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러 번 되풀이해서 에스파니야 
말로 항의를 해보았다. 내 항의는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마치 어항 속의 
중국 물고기라도 바라보듯이 아무 반응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누가 돌아오기를? 새벽이 
오기를?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 배가 고파지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나는 또 이렇게도 생각했다.
  '이자들이 바보 같은 짓을 하려는 것이다! 그건 아주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내가 느낀 감정은 불안감보다도 더 절실한 부조리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들이 몸이 녹으면, 움직이고 싶어지면 총을 쏠 것이다.!'
  내가 정말 위험에 처해 있는 걸까, 아닐까? 그들은 여전히 내가 태업자나 
밀정이 아니고 신문기자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걸까? 내 신분증이 호텔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그들은 판정을 내린 걸까? 그건 어떤 판정일까?
  나는 그들이 별다른 양심의 가책도 느낌이 없이 사람을 총살한다는 것 외에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혁명 전위대들이란 그들이 어떤 당파에 속해 있는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그들은 사람을 그 실체로써 평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보여주는 전조를 사냥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반대되는 사실을 전염병처럼 여긴다. 
의심스러운 조짐만 보여도 그들은 전염병 환자를 격리수용소로 보낸다. 공동묘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문드문,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짧은 말로 내게 던지는 그 
신문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분별없는 룰렛 놀음이 내 생명을 걸고 있다. 그런 
때문에 나는 또 내 진정한 운명에 내 의견을 개입시키고, 내 실재의 무게를 측정하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소리지르고 싶은 야릇한 욕망을 느꼈다. 이를테면 나이 같은 것! 
사람의 나이란 깊은 인상을 주는 법이다! 그 인간의 전 생애가 그 속에 요약되어 
있다. 그 사람의 원숙함이란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장애물을 겨뤄 
이기고, 수많은 중병을 치르고, 많은 고통을 가라앉히고, 많은 절망을 극복하고, 
대부분은 의식하지 못했던 많은 위험을 겪고 나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도 많은 욕망과 희망과 후회와 망각과 사랑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나이란 수많은 경험과 추억의 훌륭한 축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많은 
함정과 곡절과 진창에 박히긴 했지만 성능 좋은 덤프차처럼 간신히 이긴 해도 
전진을 계속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다행한 호운의 집요한 집중 덕분으로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서른 일곱 살이다. 그리고 만약 신이 원하신다면 이 덤프차는 그 
추억의 짐짝들을 아직 더 멀리 싣고 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여기까지 내가 이르렀다. 나는 서른 일곱 살이다.'
  나는 가능하다면 이런 고백으로써 내 재판관들을 무겁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신문하지 않았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아! 그것은 아주 하찮은 기적이었다. 나는 담배가 없었다. 내 
감시자 중의 하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기에 나는 몸짓으로 한 개비 달라고 청하면서 
애매한 미소를 싱긋해 보였다. 그는 우선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손으로 이마를 만지며 
내 넥타이가 아니라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매우 놀랍게도 그 역시 빙그레 
미소짓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 기적은 비극을 결말지어준 것이 아니라 빛이 어둠을 지우듯이 그 비극을 간단히 
지워버렸다. 이제는 어떤 비극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기적은 눈에 보이는 것을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싸구려 석유 램프도, 어수선하게 서류가 흩어진 
테이블도, 벽에 기대선 사람들도, 물건들의 빛깔도 냄새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본질 자체가 변화되었다. 그 미소가 나를 구원해준 것이다. 그것은 
태양이 뜨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음에 일어날 결과에 있어서 결정적이고도 명백하며 
다시 역진 할 수 없는 표시였다. 그것은 어수선한 서류들이 널린 테이블이 살아났다. 
석유 램프가 살아났다. 벽들도 살아났다. 이 지하실의 음울한 물건들에서 스며 나오고 
있던 권태감이 마술에 걸린 것처럼 가벼워졌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피가 다시 
순환을 시작하여 같은 육체 속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면서 그것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회복시켜주는 것과 같았다.
  민병들도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 순간 전에는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어느 종족만큼이나 멀리 내게서 떨어져 있는 것 같았던 그들이 지금은 나와 아주 
가까운 생명에서 태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운 실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실재의 느낌! 그리고 나는 그들이 같은 혈족임을 느꼈다.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인 그 젊은이, 한 순간 전까지만 해도 어떤 한 역할, 한 
도구, 일종의 흉측한 벌레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지금은 약간 어색해하며 거의 
신기하리 만치 수줍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테러리스트가 다른 패들보다 덜 
거칠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의 마음 속에 나타난 한 인간이 그의 연약한 
부분을 그렇게 잘 드러내어 준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잘난 체하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은밀히 주저와 회의와 슬픔을 느끼고 있다.
  아직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든 것은 해결되어 있었다. 그 
민병이 내게 담배를 내밀었을 때, 나는 고맙다는 뜻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일단 그 얼음이 녹자 다른 민병들도 다시 인간성을 되찾았고, 
나는 자유로운 새 나라로 들어가듯이 그들 모두의 미소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전에 사하라에서 우리 구조대원들의 웃음 속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들의 웃음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동료들은 여러 날 동안의 수색 끝에 우리를 발견하고는 가능한 
멀지 않은 곳에 착륙하여 가죽 물주머니를 높이 쳐들어 잘 보이도록 흔들면서 
성큼성큼 우리에게로 걸어왔었다. 내가 조난했을 때의 구조대원들의 웃음을, 내가 
구조대원이었을 때의 조난자의 웃음을 나는 내가 그토록 행복하게 느꼈던 고향을 
기억하듯이 지금 기억한다. 진정한 기쁨이란 함께 음식을 나누는 기쁨이다. 구조는 
이러한 기쁨을 맛보는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물은 우선 인간의 선의의 선물이 
아니고서는 결코 사람을 매혹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병자를 돌봐주는 간호나, 추방당한 자에게 베푸는 환대나 용서조차도 그 잔치를 
밝혀주는 웃음이 있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와 계급과 당파를 
초월하여 웃음 속에서 서로 결합하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관습이 있고, 
내게는 나의 관습이 있지만, 우리는 그런 채로 같은 '교회'의 신자들이다.

     (5)
  이러한 성질의 기쁨이야말로 우리 문명이 낳아준 가장 귀중한 결실이 아닐까? 
절대적인 전제군주제라도 물질적인 욕구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목장의 가축이 아니다. 어떠한 번영과 안락함도 우리를 
만족시키는데 충분하지 못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찬양하게끔 길러진 우리에게는 
극히 단순한 만남이 소중히 여겨지고, 그것은 때때로 신기한 축제로 변한다.
  인간의 존엄성! 그렇다. 인간의 존엄성! 여기에 시금석이 있다! 나치주의자가 
오로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만 존중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창조적인 반대를 거부하고, 상승하는 모든 희망을 
무너뜨리고, 인간 대신 개미집에 사는 로봇을 천년 동안 세워 놓는다. 질서를 
위한 질서는 인간으로부터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변혁시킬 수 있는 본질적인 힘을 
앗아간다. 인생이 질서를 창조하지, 질서가 인생을 창조하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상승이 완성되지 못했고, 내일의 진리는 어제의 
오류를 양식으로 하고, 극복해야 할 반대들은 우리의 성장을 위한 부식토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도 동족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그것은 
얼마나 기묘한 동일성인가! 이 동일성은 과거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근거를 둔다. 우리는 서로가 다른 길을 거쳐서 같은 회합 장소로 가기 위해 
고행을 계속하는 순례자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상승 조건인 인간의 존엄성이 위기에 빠져 있다. 현대 세계의 
붕괴가 우리를 암흑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문제는 조리에 맞지 않고 해결책을 서로 
모순되어 있다. 어제의 진리는 죽었고, 내일의 진리는 아직 건설하고 있는 단계다. 
누구에게나 가치 있는 종합책은 아직 조금도 내다보이지 않고, 우리들은 저마다 
진리의 일부분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 국민들을 위협할 만한 명증이 없으므로 정치적 
교의는 폭력에 호소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 방법을 달리함으로써 우리가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할 위험이 있다.
  어떤 별에 인도 받아 산을 넘고 있는 길손이 올라가는 데에만 너무 정신이 
빠지면 어떤 별을 따라가고 있었는지를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만약 그가 행동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그는 아무 데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대성당의 의자를 
관리하는 여인이 의자를 빌려주는 데에만 너무 탐욕하게 골몰하면 자기가 신을 
섬기고 있음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도 내가 어떤 당파적인 
정열에 빠져들면 정치가 어떤 정신적 확증을 위해서만 의의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그 기적이 일어나던 시간에 인간 관계의 어떤 
특질을 맛보았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곳에 진리가 있었다.
  아무리 다급하게 행동할 때에도 그 행동을 주관하는 사명감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명이야말로 행동을 지배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행동은 아무 보람도 없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같은 진영 안에서 서로 
증오하고 있는가? 우리들 중의 누구도 순수한 뜻의 특권을 가진 사람은 없다. 나는 내 
길을 내세워 다른 사람이 선택한 어떤 길을 공격할 수도 있다. 나는 내 길을 내세워 
다른 사람이 선택한 어떤 길을 공격할 수도 있다. 나는 그의 이성의 발걸음을 비관할 
수도 있다. 이성의 발걸음은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같은 별을 향해 
어려운 걸음을 계속하고 있다면 나는 '정신'적인 면에서 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 만약 인간의 존엄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이 존엄성을 확립할만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체제를 이룩하게 될 것이다. 문명이란 우선 본질 속에서 이룩되는 것이다. 그것은 
먼저 어떤 정열에 대한 맹목적인 욕망으로서 인간 속에 자리잡는다. 그런 다음 
인간은 오류를 거듭하면서 등불로 인도하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6)
  벗이여, 그러기에 나는 아마 자네의 우정이 이토록 필요한가 보다. 나는 이성의 
논쟁을 초월하여 내 마음 속의 그 등불을 찾아가는 순례자를 존중해줄 길동무를 
갈망하고 있다. 나는 가끔 그 약속 받은 정열을 미리 맛볼 필요성을 느끼며, 얼마쯤은 
나 자신을 벗어나 언젠가는 우리의 것이 될 그 약속 장소에서 쉬고 싶어진다.
  나는 논쟁과 배타주의와, 광신주의에는 너무나 진저리가 난다! 나는 자네의 
집에라면 군복도 입지 않고, 코란 구절을 외워야 할 구속을 받지 않고, 내 마음의 
고향을 아무것도 단념하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다. 자네 곁에서라면 자기 변명을 
할 필요도 없고, 항변할 필요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다. 나는 뚜르뉘에서처럼 
평화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서투른 말을 하더라도,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추론을 하더라도 자네는 그런 것을 넘어서 내 안에서 오직 '인간'만을 발견할 
것이다. 자네는 내 마음 속에서 신념과 습관과 개인적인 사랑의 전달자를 존중해 
줄 것이다. 내가 자네와 다른 점이 있더라도 그것이 자네를 해치기는커녕 자네를 
향상시킬 것이다. 자네는 사람들이 길손에게 물어보듯이 내게 물어본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만 자네 안에서는 순수함을 
느끼고 자네에게로 간다. 나를 순수하게 만들어줄 그곳으로 가야 할 필요를 나는 
느낀다. 내가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자네에게 알려준 것은 나의 상투적인 말투와 
행동이 아니다. 내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에 자네는 필요에 따라 
내 말투와 태도에 대해 관대하게 보아준다. 나는 자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준 데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나를 비판하는 친구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내가 어떤 친구를 내 식탁에 맞아들였을 때, 그가 다리를 절룩거린다면 
그에게 앉으라고 권하지, 춤을 추라고 청하지는 않는다.
  나의 벗이여, 나는 숨을 흠뻑 쉴 수 있는 산마루처럼 자네가 필요하다! 나는 다시 
한 번 쏘온느 강가에서 갈라진 널빤지로 만든 작은 주막의 식탁에 자네 곁에 팔을 
괴고 앉아, 두 사공을 초대하여 태양과도 같은 미소의 평화 속에서 그들과 함께 
축배를 들고 싶다.

  내가 아직도 투쟁을 한다면, 자네를 위해서도 조금은 투쟁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 
미소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믿기 위해 자네가 필요하다. 나는 자네가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렇게도 나약하고 위협받고 있는 자네의 모습이, 다시 
하루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어떤 초라한 식료품점 앞길을 다 헤진 외투차림으로 
추위를 막지 못해 벌벌 떨면서, 쉰 살의 몸을 이끌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네는 진정한 프랑스 사람이면서도 이중으로 죽음의 위험에 빠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프랑스 사람이면서 또한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논쟁을 더 이상 허용치 않는 어떤 공동체의 가치를 더욱 통감한다. 우리는 
모두 한 나무에서 생겨난 것처럼 나도 자네의 진리를 위해서 힘쓸 것이다. 
우리들, 국외에 와 있는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이 전쟁에서 독일군의 점령이라는 
눈으로 얼어붙은 씨앗 무더기를 다시 녹여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국에 남아 
있는 당신들을 구출하는 일이 중요하다. 당신들이 뿌리를 뻗어 내릴 근본적인 
권리를 갖고 있는 그 대지에서 당신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문제이다. 
당신들은 4천만 염의 볼모들이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진리가 준비되는 곳은 압박 
받는 지하실 속이다. 4첨만 명의 볼모들이 지금 고국에서 그들의 새로운 진리를 
물상하고 있다. 우리는 미리부터 그 진리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당신들이야말로 우리들을 가르쳐 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정신적인 불꽃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밀초처럼 자기 
자신의 존재를 희생시켜 그 불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쓴 책을 아마도 
당신들은 읽기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연설을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아마 우리의 사상을 배척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프랑스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를 위해 봉사하는 일밖에 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했던지 조금도 감시 받을 권리가 없다. 자유로운 곳에서 
투쟁하는 것과 암흑 속에서 압박 받는 것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공통된 척도는 
없다. 군인 신분과 불모의 처지를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공통된 척도는 없다. 당신은 
성자들이다. 
      [  (해설)
    쌩 떽쥐뻬리의 인간과 문학

  "수업시절"
  앙뜨완느 드 쌩 떽쥐뻬리(Antoine do Saint-Exupery)는 1900 년 6월 29일 
리용에서 귀족의 후^36^예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의 성관에서 
어머니의 애정에 싸여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09 년 르망으로 이사하여 그곳 제수이트 회파에서 경영하는 쌩뜨끄루와 학교를 
거쳐, 스위스 후리이브르그 대학에서 고전학을 수학했다. 그의 성격 중 특출한 그 
명상적인 경향과, 음악과 시에 대한 깊은 애착도 이 고전적 교양에서 우러난 것으로 
보여진다.
  처음에 해군사관학교를 지원했으나 시험에 낙제하여 미술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1921년에 군에 응소, 스뜨라스부르의 항공대에 입대하여 조종사로서의 
훈련을 받게 됐는데, 이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세계의 소설사에 처음 하늘을 다룬 항공작가의 탄생 씨앗이 이때 뿌려졌기 때문이다.
  1924년 제대 후, 그는 자동차 공장을 비롯하여 판매원 등 여러 가지 직업에 
전전하면서 소설의 습작을 시작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문필을 가리는 신분에 
대하여 거의 종교적이라고 할만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누이의 
말에 의하면 소년시절에 한밤중에 가족들을 깨우고, 자기가 지은 시를 낭독해서 
들려 주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조종사 생활"
  이 무렵에 잡지를 주재하고 있는 장 쁘레보와 알게 되어 1926년에 단편 소설 
'비행사'를 그 잡지에 발표했다. 같은 해 10월에 그는 라떼꼬에르 항공회사에 취직, 
1927 년에 뚤루즈와 카사블랑카 간의 정기 항공로 조종사가 됐다. 이듬해에는 
아프리카의 쥐비에서 비행장의 주임이 되고, 다시 개편된 동사의 남아메리카 항공로 
개설과 동시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전임하여 1931년까지 그곳에서 근무했다. 이 동안 
1928 년에 모르인의 반란으로부터 동료 비행사를 구출했으며, 그 2 년간의 체험에 
의해 '남방 우편기'를 28년에 집필 발표했다.

  "남방 우편기"
  이 소설은 위험한 정기 항공로의 일에 종사하면서, 세계와 사물의 미지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꿈을 채우려는 한 비행사의 내면을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서 
묘사한 형식의 작품이다. 그러나 유부녀와 불행한 사랑이라는 약간 통속적인 취향이 
가미된 면도 있어, 쌩 떽쥐뻬리 특유의 고결한 분위기는 아직 완전히 표현되어 있지 
않다.

  "야간 비행"
  1929년에는 남아메리카 항로의 개발에 종사하였고, 이때의 체험이 마침내 '야간 
비행(1931년)'로 결정을 보게 된다. 1930년 6월에 그의 동료 기요메가 스물 두 
번째의 안데스 산맥을 횡단 비행 도중에 폭풍설에 갇히어 불시착, 쌩 떽쥐뻬리와 
동료가 5일간 수색 활동을 벌였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기요메는 자기 힘으로 닷새 
동안을 걸어 살아나온 기적 같은 사건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대지' 
제2장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1931년에 프랑스로 돌아가서 전해부터 알게 된 꽁스엘로 슨신과 결혼했으며, 
'야간 비행'을 앙드레 지드의 감동적인 서문을 붙여 출판했다. 이 작품은 이해 
'페미나'문학상을 획득했으며, 새로운 차원을 연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이 작품에는 비행장에서 부하들의 탑승기의 귀착을 초조히 기다리는 항공회사의 
지배인을 중심으로 하여, 힘들 야간비행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군상이 묘사되어 있다. 
끊임없이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면서, 자기 극복의 의지로 갖가지 장애와 싸우는 
조종사들, 조그마한 개임 생활에의 집착을 끊어버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확증하는 
고매한 용기에 찬 행동 등, 즉, 이 소설의 주재는 행동의 윤리 추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막에 불시착"
  이러한 작가로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행사의 직업을 버리지 않고 하늘에서 
대지와 인간을 관찰하는 한편, 파스칼, 스피노자, 바르작, 네르봘 등의 저작들을 
애독하여 사색을 심화시켰으며, 인간의 존엄에 대한 독자적인 모럴을 구축해 갔다.
  1935 년에는 '파리 스와르'지의 특파원으로 모스크바를 비롯하여 베를린, 스페인 
내란 등을 현지 취재하여 르포르타주를 썼다. 또 이해 12월 29일에 파리와 사이공 
간의 비행 시간의 신기록 수립을 목표로 '시문'기로 쁘레보와 함께 출발했으나, 리비아 
사막에서 불시착하여 사흘 밤낮을 헤매던 끝에 대상에 의해 구출되었다.
  쌩 떽쥐뻬리는 이런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1937년에는 
카사블랑카와 똠뷰드 간을 '시문'기로 연결시키는 항로를 개척했다. 이해 9월에는 
자기의 "시문"기로 뉴욕과 때르 드푀(남아메리카 남단의 섬) 간 장거리 비행 허가를 
받고 뉴욕으로 건너가, 1938 년 2월 15일 출발하여 과테말라에 도착, 이륙하려다가 
속력이 떨어져 추락하여 중상를 입었다. 3월에 뉴욕으로 건너가서 정양하면서 그간 
써놓았던 원고를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가 1939 년 2월에 출판한 것이 그의 대표작 
"인간의 대지" 이다.

  "인간의 대지"
  이 작품은 같은 해 6월에 "바람과 모래와 별들" 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어 '이 달의 양서'로 선정되었고, 프랑스에서는 39년도 아카데미 프랑세스 
소설 대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존엄성의 모럴을 추구한 에세이와 단편 
소설로 되어 있는데, 죽음이라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이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일생을 바친 쌩 떽쥐뻬리의 
사상의 본질을 이루는 성찰이 모두 이 책 안게 제시되어 있다.
  같은 해 9월에는 동원 소집되어 뚤루즈에서 대위 계급으로 비행 교관으로 
있다가 후에 2의 33대 정찰 비행단에 전속됐다. 1940년 8월에는 동원이 해제되어 
마르세이유로 돌아가 "성채" 의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전시 조종사"
  1941년에 파리가 독일 군에 점령당하자 아내와 함께 뉴욕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 체재하면서 외과 수술을 받고 "전시 조종사"를 썼다 1942년 2월에 
"전시 조종사" 영문 판인 "아라스 지구 비행(Fight to Arras)"을 출판했으며, 
베스트 셀러가 됐다. 이 작품은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도 출판됐으나 독일 
점령군에 의해 발매금지가 됐다. 이 "전시 조종사" 는 수기 체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1940년에 프랑스 군이 패주 중에 보고할 곳도 없고, 호위 전투기도 없이 
정찰 비행을 하는 프랑스 비행사의 무익한 사명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어린 왕자"
  1943년 2월에 역시 뉴욕에서 "어느 볼모에게 보내는 글" 을 출판하고, 4월에는 
유명한 동화 체의 작품 "어린 왕자"를 내놓았다. 어느 볼모에게 보내는 글은 쌩 
떽쥐뻬리가 한 유태인 친구에게 미국에서 써 보낸 메시지로 이루어진 소책자이다. 
또 "어린 왕자"는 어린 사람들을 위한 아름다운 서정미 넘치는 동화이지만, 한편 
철학적인 깊이와 고도의 시의 영역에까지 높여진 서정 산문이기도 하다.
  이해 6월에 북아프리카로 가서 본토 해방 전선에 참가, 수많은 정찰비행을 하여 
연합군의 시칠리아 섬 진격에 공헌했고, 6월에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7월에 
프랑스 상공을 비행하다가 가벼운 사고를 두 번 일으켜, 그를 위험에서 
멀리하려는 미국 당국의 배려로 8월에 고령을 이유로 대기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알제로 돌아가 친구의 집에 머물면서 제트기의 원리를 연구하는 
한편 그전부터 구상했던 "성채"를 계속해서 집필했다. 

  "마지막 비행"
  1944년에 샷생 대령이 지휘하는 31중폭격기 중대에 배속 받고, 이어 전에 있던 2의 
33대 정찰 비행단에 복귀하기 위해 여러 차례 지중해지구 공군 총사령관인 이커 
장군에게 건의, 마침내 5회만 출격한다는 조건하에 대정찰 비행단 복귀를 승인 
받았다. 
  그해 7월에 동 비행단은 코르시카 기지로 이동했고, 그간 쌩 떽쥐뻬리는 
5회보다 더 많은 8회 출격을 허락을 받아 정찰 비행에 출격했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일설에는 미국으로 건너 간 이후의 불행한 정신 상태에 의해 
자살했으리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코르시카의 바스띠아 북쪽에서 독일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성채(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미완의 대작인 '성채'는 참된 자유를 얻어 신의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베르베르왕을 통해서 그가 희구하는 이상 사회를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의 짧은 생애와 함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948년에 발견됐다.

  "생의 찬가"
  지구를 떠나기 수천 피트 높이에서 국한된 좁은 공간에 혼자 앉아 끊임없이 죽음에 
직면했기에 그는 죽음이라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는 인간을 최대 극한 점까지 응시할 
수 있었다. 유한한 개인의 생을 통해 그는 인간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강한 의지로 
일관되어 있다.
  니이체의 초인사상을 연상케 하는 '야간 비행'에서 출발하여, 톨스토이적 
휴머니즘이 풍기는 '인가의 대지'를 거쳐, 후기의 '전시 조종사', '어느 
볼모에게 보내는 글', '어린 왕자', '성채' 등 종교적인 정신주의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는 인간 찬가에의 고행에 찬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리 많지 않은 작품들은 어느 것이나 각각의 단계에서 이 작가의 현대 
사회에 대한 냉엄한 경고와 아울러 인간성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사랑의 표명을 
독자들에게 안겨 준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3




    전2권 중 제1권

쌩떽쥐뻬리


  [  (저자 및 역자 약력)

    * 지은이 쌩 떽쥐베리
  1900 년 6월 리용 출생. 프랑스의 비행사. 소설가. 인류문학상 가장 보기 드문 
행동력의 작가이며 주로 비행가로서의 체험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다. 작품으로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 수상작인 "인간의 대지", '페미나 문학상'을 수상한 
"야간비행", "남방 우편기", "전시 조종사" 등이 있다.

  [    젊은 날의 편지

    [  어린 왕자의 추억
        르네 드 쏘씬느

  젊음과 우정의 십년간. 그의 나이 스무 살에서 서른 살 동안. 
  이 기간은 넘치는 감정과 익살과 논쟁의 시기였다. 쌩 떽쥐뻬리 앙뜨완느, 훗날 
유명 작가로 이름을 드높인 그는 이 때부터 자기 행동의 일관성,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영광, 다시 말해서 또 하나의 비장한 면을 알게 된 것이다. 
  쌩 떽쥐뻬리의 글을 읽으면 수많은 추억의 영상들이 한결같이 생생한 느낌으로 
엄습하여 억누를 수 없는 감동으로 되살아난다. 
  문득 그의 한 가지 특이한 몸짓이 떠오른다. 
  왼쪽 손 엄지와 셋째 손가락 사이에 담배 한 개비를 끼고는 동시에 성냥갑을 
집는다. 오른손으로 켠 성냥 불빛이 반짝이며 아래로부터 그의 얼굴을 밝히더니 곧 
가물거리다가 꺼지고 만다. 그럴 때면 건장한 그의 체구와 바또의 그림 '어리석은 
사람들'의 주인공 같은 그의 얼굴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어둠속에 잠겨들곤 했다.
  그와 대화를 하다 보면 그는 아주 천천히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여 무척 단호하게 
자기 입장을 옹호하였으며 동시에 은은한 목소리로 극히 간략하게 결론을 내리곤 
했다. 
  쌩 떽쥐뻬리는 언제나 어린아이들에 의해 흔히 쌓아지기도 하고 또 정복되기도 하는 
침묵의 성채 뒤에 서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줄곧 어린아이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는 보쎄초등학교를 거쳐 쌩 루이 중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나의 오빠와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학교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참 괴짜야! 그 아이는 육분의(항해에 쓰이는 측량기기)를 사기 위해 크림을 탄 
커피만 먹고 산대. 수업 시간에도 단편소설을 쓰고 있거든. 아마 나중에 유명한 
사람이 될 거야.'

  이 년 후 쌩 떽쥐뻬리는 해군사관학교 시험에 떨어졌다. 우리들은 한데 어울려 
앞으로의 진로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리의 어느 여름. 더위가 
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괴롭혔던 그 시절.
  되돌아보면 그 더운 여름날은 우리들에게 카페의 테라스에서 오랫동안 환담을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쌩 제르망 데 프레에 있던 맥주홀의 낭만과 
추억은 쌩 떽쥐뻬리에게도 아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것이었다. 
  생 기욤가에 있는 회관에서 연주회가 열릴 때, 쌩 떽쥐뻬리는 음악에 푹 
젖어들어 있곤 했다. 그는 가끔 내 바이올린을 움켜쥐고 즉흥적으로 연주를 
하다가 갑자기 영화 구경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그의 어떤 소넷트가 생각난다. 시인다운 눈길로 어떤 도시의 
날카로운 단면도를 응시하면서 이렇게 읊조렸었다. 
  '외로운 새 한 마리가 그 곳에 쉴 수 있으련만'
  그럴 때면 쌩 떽쥐뻬리는 박자에 극히 민감해지곤 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리듬이 하나 엇나가기보다는 오히려 프랑스어가 하나 틀리는 것이 더 나을 거야!'

  우리들의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그는 절친한 친구 에우세비오 앞에서 악마의 편을 
들곤 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관계였지만 그들 사이에는 짓궂은 야유가 항상 
있었다. 
  이런 면 때문에 나는 언젠가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쌩 떽쥐뻬리에게 우정어린 
조언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문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를 잘 했다. 그 후 나는 그의 편지에게 나를 믿는다는 고백을 받았던 것이다.

  군 복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의 오빠는 해군으로, 에우세비오는 
알프스 엽보병으로, 그리고 쌩 떽쥐뻬리는 공군으로 입대했다. 입대 후 쌩 
떽쥐뻬리의 어린아이 같은 순진무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쌩 떽쥐뻬리는 부르제 공항에서 곡예사 같이 저공비행을 하는 등 온갖 묘기를 
부렸다. 이미 약혼을 한 몸인데도 이러한 어린아이같이 위험한 행동 때문에 당시 
약혼녀는 그에게 비행기 조종을 그만두라고 간청하곤 했다. 모험적인 그의 행동 
때문에 친구들은 그를 사형수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마침내 쌩 떽쥐뻬리는 변두리 지역에서 또 저공비행을 
하다가 휘발유가 떨어져 추락하고 말았다. 두개골이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천운으로 회복이 되었다. 이후 그는 약혼녀가 원하던 대로 사표를 제출했지만 
그녀의 가족들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일을 해야 했다.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프랑스 남부 지방의 명문가 출신이지만 집안의 도움을 받기에는 너무 멀었다. 
  드디어 그는 봐롱 뛰일러리 회사 사무실의 회계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쌩 떽쥐뻬리의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은 마치 바닥에 끌리는 옷자락처럼 나에게 맞지 않아!'
  마침내 우울증이 생겨났다. 그것은 그가 계산하는 숫자와 함께 점점 커져가기만 
했다. 결국 그는 쏘레 화물자동차 회사로 직장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쌩 
떽쥐뻬리는 5톤짜리 화물차를 팔러 다니는 외무사원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어쨌든 그는 여행을 하게 되었고 프랑스 방방곡곡을 샅샅이 알게 되었다. 
외무사원이 된 쌩 떽쥐뻬리는 프랑스 중부 산악 지대인 모르방에서 그는 친구 
에우세비오와 함께 여행을 계속하다가 혼자서 크뢰즈 지방을 답사했다. 그 동안 
우리들은 쌩 떽쥐뻬리를 그리워 하기만 했다. 
  그의 다정한 편지가 끊겨 궁금해 하던 차에 그가 돌아왔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시 쌩. 제르망. 데프레 유흥지와 리프 맥주홀과 아. 라. 담 블랑셔 제과점을 
부산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언젠가 아. 라. 담 블랑셔에서 나와 언니 로오즈, 쌩 떽쥐뻬리가 만났다. 우리들은 
문학에 대하여 상의할 예정이었는데 화제가 빗나가서 샹젤리제 극장에서 피도예프 
극단이 공연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제각기 진실이 있는 법'의 작가 
필랑델로에게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 토론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제과점의 
웨이트레스들이 소금 석고상처럼 굳어져 버릴 정도였다. 
  '당신은 나에게 있어서 인생의 항구요. 리넷뜨'
  '아니, 한 마리의 돼지라구요! 쌩 떽쥐뻬리?'
  '이거 정말 너무한데!'

  이렇게 시작된 봄의 따스한 여흥은 흥분과 감동, 호기심으로 우리들을 들뜨게 했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를 깨뜨리면서 갑자기 필랑델로란 화제가 등장했던 것이다.
  한순간 쌩 떽쥐뻬리의 이마에 구름이 덮이고, 그의 눈이 안개로 흐려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신기할 정도로 맑고 큰 그의 까만 눈이 마치 물고기눈처럼 옆으로 
돌려지더니, '아!' 하는 한숨이 터져나왔다.
  언니는 필랑델로의 이야기를 계속했고 덩달아 나도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아름다운 모험'과 '아르센느 뤼벵'을 보았다. 그러자 조용한 분위기에 사냥 
이야기도 아니고 탐정 이야기도 아닌 철학적인 이야기가 폭탄 터지듯 시작 되었다. 
전에 없던 열띤 철학적인 대화였다. 쌩 떽쥐뻬리는 '흠!' 하며 눈에 뜨이게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건 아주 간단해요'
  쌩 떽쥐뻬리의 노기를 의식하지 못한 언니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흥미거리를 찾으려면 입센까지 올라가야겠는데요'
  그러자 쌩 떽쥐뻬리는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흥!' 하고 비웃는 투로 소리쳤다.
  '어떻게 감히 비교하려 듭니까? '당신네'의 필랑델로는 문지기들이나 하는 
추상론입니다.'
  그가 갑자기 일어섰기 때문에 작은 스푼 하나가 떨어졌다. '쨍' 하는 소리가 
주위의 소금 석고상들을 깨웠다. 

  어째서 그가 그처럼 갑자기 화를 냈을까? 나는 감동적인 입센의 '물오리'의 
추억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다른 극적인 힘이 무슨 모욕이 된단 말인가? 사실 
형이상학에 관해서 필랑델로와 그의 독자들인 우리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문지기'란 단어가 석연치 않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그 역시 자신의 그러한 말 때문에 괴로워 할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철학적이며 
문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미래의 쌩 떽쥐뻬리가 보일 
태도를 상상하면서 밤잠을 설쳐야만 했다. 

  쌩 떽쥐뻬리는 일년에 한 대의 트럭밖에 팔지 못했다. 쏘레 회사의 간부들은 쌩 
떽쥐뻬리를 멋있다고 생각했으나 별로 실질적인 인물은 못된다고 판단했다. 
  이런 시기에 그의 별이 문학의 하늘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쌩 떽쥐뻬리의 
사촌누이가 많은 문인들에게 귀부인으로서의, 또한 친구로서 대접을 베풀면서 기회가 
열렸던 것이다. 
  쌩 떽쥐뻬리가 앙드레 지드와 라몽 페르낭데, 또 편집인인 가스 똥 갈리마르를 
만난 것은 바로 그녀의 집에서였다. 또 그들을 통하여 폴 발레리와 레몽, 폴 
파르스와 모든 "신프랑스 잡지"의 기고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잡지의 기고자 중의 한 사람인 쟝 프레보는 새로운 저서에 집념하고 있다.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쌩 떽쥐뻬리는 젊은 파일럿의 머리를 떠나지 않던 하늘에 대한 
향수에 젖었다. 그 향수를 표현하기 위해 어떤 단어들을 사용해야 할지! 정말 굉장한 
향수야!
  '이 모든 것을 쌩 떽쥐뻬리 자네는 써야 하네!'
  '그렇게 생각하나?'
  얼마 후 '나비르 자르쟝' 잡지사의 편집국장인 쟝 프레보는 젊은 작가 쌩 
떽쥐뻬리 드 앙뜨완느를 그 잡지사의 창설자이며 사장인 아드리엔느 모니에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하여 쌩 떽쥐뻬리가 쓴 "비행사"는 르뷔 지 뿐만 아니라 
새로이 발간된 '아미 데 리브르'에도 실리게 되었다. 이렇게 발탁되어 호평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쌩 떽쥐뻬리는 가끔 이렇게 외치곤 했다.
  '역시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던 거야!'

  그러나 그는 아직 외무사원이었다. 이 직업은 우리 모두를 자기 못지 않게 
괴롭혔다. 
  나는 쌩 떽쥐뻬리를 펜으로 영광과 부를 안고 파리와 온 세계를 정복하는 
발자끄 소설의 주인공처럼 생각했었고, 사실상 그는 자기의 발 아래 이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첫 성공 후에도 작가로서의 길을 걷지 
않는데 적잖이 놀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쓰기 전에 우선 살아야 한다.'
  또 그는 '글을 쓴다는 건 중요한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쌩 떽쥐뻬리는 다시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옛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 
라떼조에르 항공사의 경영자를 알고 있었다. 그 회사에서는 새로운 우편 항공기 
운항을 계획하고 있어서 파일럿이 필요했다. 
  쌩 떽쥐뻬리는 지난 날의 군 입대가 그의 미래를 예고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결심했다. 사무실과 장사와 트럭도 이제 그만이었다.
  '내가 운에 맡겨야 할 자본이란 하나밖에 없다. 내 몸밖에.'
  그러면서 그는 떠났다. 친구들은 그에게 편지를 썼다. 고독을 메우기 위해 그가 
지원했던 비행, 우리들은 마치 돌팔이 의사처럼 그의 피곤을 회복시킬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편지는 오고갔지만 우정 속에서 보다 빨리 
전달되는 사랑만큼은 충분히 교감할 수 없었다. 
  그 사회에서 불화와 침묵이 생기자 쌩 떽쥐뻬리에겐 우울증이 생겨났다. 괴테가 
말했던가. 우울증이란 '천재가 가지는 신체적인 특징이다'라고. 인생의 충격적인 
일들 앞에서 이는 불행한 일이지만, 시인의 이러한 민감한 감수성은 그로 하여금 
천상의 소리를 받아들이게 해 준다. 
  고독은 침울하지만 그의 말을 빌리면 거의 신기한 고독이기도 하다. 이는 '삶의 
의의'에 대한 불안한 탐구이기도 하며, 충돌이 없지 않은 '자연'과의 사귐이기도 
하다. 때로는 시간의 작용이기도 하고 때로는 생활 환경과 투쟁이기도 하지만, 
자연 환경이 짓는 미소 앞에서는 느닷없이 긴장이 풀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의 유머와 사랑은 그러한 고독에서 솟아 나오는 것이다. 
  항상 강력히 작용하는 '천직'의 부름과 그로의 전진에 따라, 위험 신호도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한 사실들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주는 글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으므로 쌩 떽쥐뻬리 스스로 어떤 형이상학적인 두려움도 가지고 있지 
않은 '죽음'과의 첫 대결을 엿본 것이다. 
  '죽음은 마치 태어나는 것과 같아.'
  그런데 갑자기 그 죽음이 나타난 것이다. '그 죽음은 형용하기 어려운 새로운 
일종의 예지다. 마치 무서운 절벽을 뛰어넘기 위한 것처럼. 
  그는 어린 시절로 뒷걸음 쳐서 그곳에서 자기의 초점을 찾는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렸을 때 가졌던 출발에 대한 동경을 상기시켜 준다.'
  다른 아늑한 장애물은 그에게 죽음과 비슷하다. 난해하고 가까이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그것. 바로 마음의 세계이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얼굴을 상기시키는데^5,5,5^ 나는 방심하는 바로 그 순간으로 
느껴졌다.'
  이때가 바로 하늘과 땅 사이에 기록된 파열과 추락을 면치 못하는 순간이다. 이는 
불안이 엄습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쌩 떽쥐뻬리의 시적이며 인간적인 공명을 스트라디바리우스와 비교 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바로 그의 고상한 마음씨 때문이리라. 마치 귀중한 악기에서와 같이, 진동하는 
그 악기의 정확한 자리를 치기만 하면 모든 음을 다 낼 수 있다. 그 악기의 현과 
음관과 악궁에 미치는 상상할 수 없는 압력. 즉 시련을 그의 마음이 극복하여 그 
시련을 일종의 찬가로서 완성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음의 현은 항상 반향을 일으킬 
수 없다.
  쌩 떽쥐뻬리가 이미 도달한 위대한 예술가의 연주에서는 그의 다른 옛 애인과 
시골에 대한 부드러운 변주곡들은 명쾌하고 짓궂게 들린다. '토니오는 
시골뜨기다.'라고 레옹 폴 파르끄가 말했다. 우정은 산산조각 나 버릴 수 있지만 
감상적인 우정의 발자취는 남는 것이다. 
  지금 쌩 떽쥐뻬리는 다카르까지 정기 우편기 운항을 맡고 있다. 엔진과 기계 
상태도 무시하고, 아랍인들의 적대 행위도 무시하며 그는 비행하고 있다. 
  아프리카 원주민 중 어떤 종속들은 비행기를 향해 총을 쏘아댄다. 그들은 조난 
당한 비행사들을 잡아 약탈하기도 하고 고문을 하기도 한다. 
  '나는 정말 자유가 필요하다.'
  그는 잠 못 이루고 있다. 그들은 위험 지역의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그들의 밀접한 연대의식은 계속될 것이며 더욱 강화 될 
것이다. 이러한 우정의 한 복판에서 쌩 떽쥐뻬리의 껍질은 녹아 용해되어 버릴 
것이며, 장차 쌩 떽쥐뻬리의 위대한 특색이 새겨질 것이다. 

  쥐비 갑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자 판자로 된 초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초소는 에스파니아의 요새 정면에 세워졌다.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착륙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무어족과 협정을 맺지 않으면 싸워야 했다. 
에스파니아 인들을 설득시켜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기도 했다. 
  '희망에 넘치는 새해 아침!'
  1927 년 1월 1일 황홀한 밤에 그는 이렇게 외쳤다. 
  '바람에 나는 희롱 당하고 있어!'
  그러나 말을 타고 무장한 쌩 떽쥐뻬리가 다시 일어나서 무어족들을 평정하러 
가기 위해서는 시종과 어린 왕자는 잠을 자야 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그는 책임자였다. 비행기를 탈 때에도 낙타를 탈 때에도 길을 
걸어갈 때에도 그는 무수한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는 외교상의 투쟁이나 혹은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치러서 조난 당한 파일럿들을 구하기도 했으며, 또한 
희생자들의 죽음을 슬퍼하기도 했다. 그는 에스파니아인들을 설득시켜 긴급히 
후원을 받아 적들을 진압도 하고 정복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전사들 보다 더욱 
더 혁혁한 무훈을 세웠으며 신화의 주인공처럼 빛나는 공적을 쌓았다. 이러한 
십자군 같은 그의 전투에서 이마가 숙여질 따름이다. 
  쌩 떽쥐뻬리는 휴가를 얻어 프랑스에 다시 돌아왔다. 그는 자기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자기의 항공대와 다른 항공대의 인화를 실현하지 않았던가? 파리에 
돌아올 때 그는 남방항공로에서 첫 순교를 한 희생자에 대한 경의를 표시한 
"남방우편기" 작품의 원고를 품에 끼고 돌아온 것이다. 
  아직 넘어야 할 단계가 하나 남아 있다. 파리에 돌아오자 쌩 떽쥐뻬리는 알젠틴 
항공 우편기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29 년 가을부터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공 노선을 개척해야 했다. 불타는 대륙까지도 항공 노선은 미리 준비되고 
개척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 그가 해야 할 과업이었다. 
  쌩 떽쥐뻬리에게는 이와 같은 대서양 횡단이 그의 명성에 합당한 능선이었으며 
그가 아직 갖지 못한 황금의 화살인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동료와 친구들의 모임에서부터 시작된 쌩 떽쥐뻬리의 공적에 대한 이야기가 
그를 모르는 사람들과 외국인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전쟁과 극도의 예찬을 받은 기간을 
합한 십오년 동안에 걸친 조종사로써의 그의 서사시는 차라리 전설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작품들은 상으로 장식되었다. "야간비행", "인간의 대지", "전시 
비행사", "어떤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 "어린 왕자", "성채" 등 그의 빛나는 작품들은 
문학적일 뿐만 아니라, 대중적이고 세계적인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우리의 방심한 "어린 왕자"는 이러한 영광 속에서 가장 심한 단장의 비애를 느낄 
것이다.  
    [  글의 진실
      1923 년 가을

  리넷뜨,  나는 정말 바보인가 봅니다. 당신의 콩트는 항상 옆에 끼고 다니지만, 
당신이 준 풍경 사진은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일요일날 전화를 
했더니 집에 없더군요.
  리넷뜨, 당신에게 나의 깊은 우정에 대해, 그리고 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나는 에우세비오의 개선기념식장에 갔었습니다. 그는 식장에 가득한 
청중들 앞에서 첨탑보다 더 뾰족한 산악 지대를 어떻게 정복했는지에 관하여 
연설을 하고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영웅적인 행동에 대하여 실감나게 묘사를  
했는데. 청중들은 어찌나 감동했는지 부르르 몸을 떨기까지 하더군요.
  이야기는 꽤 좋았지만, 그의 표현은 리넷뜨^5,5,5^.
  그는 장엄한 산의 정상을, 하늘을, 여명을, 그리고  석양을 캔디와 쨈과 같이 
달콤하게 비유를 했어요. 아침에 떠오르는 첫 햇살을 받은 산봉우리를 장미빛으로, 
지평선을 젖빛으로, 그리고 바위들이 황금빛으로 표현했지요. 정말 그가 말한 
경치에 군침을 흘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화려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당신의 글이 오히려 담백하고 
간결하게 쓰여져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리넷뜨, 열심히 글을 쓰세요. 당신은 대상물에서 그 물체에 독특한 생명감을 
주는 본질적인 요소를 아주 잘 포착하고 있답니다.
  에우세비오에게는 대상물들이 추상적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정상과 
석양과 여명' 뿐입니다. 그것은 보수적이어서 가게에서 파는 액세서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들을 화려하게 치장하면 할수록 더욱 더 평범해질 
뿐이지요.
  어떻게 쓰느냐를 배워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를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쓴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까요.
  에우세비오는 어떤 대상을 선택하여 그것을 미화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형용사는 그림에 덧칠을 하는 것과 같아요. 중요한 
본질을 끌어 내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장식만 붙이는 셈이지요.
  산봉우리에 관해 말할 때 그는 신과 보랏빛 색깔과 독수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듣는 이들은 경건해지고 감동에 사로잡히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그 인상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야만 합니다. 
대상이란 마음속에서 우러난 반작용으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결코 장난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에우세비오의 예를 든 것은 그의 결점이 당신의 장점을 대조적으로 잘 
부각시켜 줄뿐만 아니라 당신이 이끌어 내야 할 부분을 잘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당신이 받는 인상으로부터 시작을 하십시오. 그러면 진부한 표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당신의 이야기 속에는 어떤 밀접한 연관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갖다 꾸며댄 부분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랍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독백은 지리멸렬하지만, 그 독백이 필연적이고 논리적인 
인상을 얼마나 주고 있으며 자기 주장을 얼마나 옹호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그의 독백이 갖는 연관성이란 내재적인 것입니다.
  다른 작가들의 글을 보십시오. 간혹 그 안에 살아 있는 인물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외적으로는 논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는 터무니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에우세비오의 묘사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작가들은 어떤 대상에 지나치게 장단점들을 결부시켜 
이야기를 꾸며냄으로써 살아 있는 인물 창조에 실패하곤 합니다.
 어떠한 감정이 마치 즐거움과 같은 단순한 것일지라도, 만일 당신이 당신 
이야기의 주인공에 대하여 '그는 즐거운 인물이다'라고 말로도 만족하지 못할 
경우, 그러한 감정은 너무나 복잡해서 묘사할 말을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더구나 그런 작품들은 개인적인 것밖에는 거의 표현하고 있지 않아요. 어떤 
기쁨이란 다른 어떤 기쁨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표현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차이 즉 그 기쁨이 가지는 특유의 모습을 포착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유식한 체 그 기쁨 자체를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 
기쁨을 묘사하되 개인의 반응에 따라 묘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는 즐거운 인물이다'라고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지요. 그러한 기쁨은 마치 
당신이 느꼈지만 어떠한 단어도 정확하게 적합하지 않는 기쁨처럼, 그 자체가 
독자적인 개성을 갖고 생긴다는 말입니다.
  만일 당신이 기쁨이란 단어가 소설 주인공의 기쁨을 표현하기에 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단어가 인위적인 것이며 또한 당신은 말해야 할 뜻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내가 좀 우스꽝스러워진 것 같군요. 이런 말은 그만 두겠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작은 술집에는 피아노가 감상적인 곡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회계원이 
좌우로 몸을 꼬고 있군요. 지배인은 하품조차 하기 싫은 모양인가 봅니다.
  보이는 기침을 하면서 나의 주의를 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마지막 
손님이기 때문이겠지요. 우울한 장면이^36^예요. 지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야겠습니다.
  리넷뜨, 저번에 바하의 곡을 들려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아직 못했군요. 나는 
감사할 줄을 모르는 사람인가 봐요. 하지만 당신은 나를 정말 기쁘게 
해주었답니다.
  리넷뜨, 드디어 보이가 내 앞에서 나무처럼 꼿꼿이 서서 그의 냅킨을 빗자루처럼 
흔들고 있소. 그럼 안녕. 
      [  여행
      동삐에르, 쉬르, 베스브르

  리넷뜨, 나는 지금 고색 창연한 여인숙에 머물고 있습니다. 눈이 얼마나 두껍게 
쌓였는지^5,5,5^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여행하는 고장들은 참 재미있는 곳들입니다. 이 마을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친구가 자기 차를 몰고 몽뤼에서 나를 만나러 와서 함께 산책을 했지요. 우리는 
저녁 9시쯤 동회 앞에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다기에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대번에 동삐에르. 쉬르. 베스브르의 정다운 분위기 
속에 젖어들게 되었답니다. 약사와 식료품상 주인 사이에 끼어서 우리는 5분 만에 
테너 가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또한 보좌관의 딸의 익살과 이 지방의 사투리를 
배웠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감동한 것은 놀이가 아니었습니다. 다름아닌 
이 마을 사람들의 애국심이었지요. 그들의 애국심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언제 
내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애국가를 불렀던가 되돌아 볼 정도였으니까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순수한 애국심의 감정을 찾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와야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한 감정들이 낡아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에서는 상당히 
호감이 가는 어휘들과 함께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요. 말하자면 '게르만 
족속들'이라든가, '야만적인 전사', '배신한 황제' 등의 말이었지요.

  리넷뜨, 금관악기를 모두 갖춘 군악대가 등장했습니다. 여드름이 송송 난 
중학생들이 그 군악대 속에서 악기를 불고 있었어요. 우리는 고음으로 올라갈수록 
그들이 어떻게 숨을 불어 내쉴까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전이 되었습니다. 촛불이 켜지고, 킥킥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무대 위의 배우와 구경 온 친척들 사이에 이야기가 오고가고
  '아! 너 마르셀이로구나!'
  '네^5,5,5^ 아이구, 내 수염이 떨어졌네!'
  그 배우는 친척이 보는 앞에서 다시 수염을 달았지요. 그리고 우리들은 식료품 
장수와 이야기를 하고^5,5,5^.
  그러다가 우리는 사람들이 자정쯤 자리를 떠났어요. 우리는 역을 경유하지 않고 
차편으로 '황금사자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지배인의 미소를 받으면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기차로 로안느까지 친구와 함께 갔습니다. 이 친구는 몹시 근시여서 밤에 길 
위에 생기는 그림자들을 모두 짐승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나는 
잠들어 있는 그 지방 사람들 사이를 지나 기차 구석칸으로 그를 데리고 갔지요.
  빽빽이 몰려 있는 납작한 집들과 함께 로안느가 보였습니다. 정말로 음산한 
풍경이었습니다. 지평선상에 커다란 공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길게 
늘어선 공장의 창문들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어요. 두 번째 공장이^5,5,5^ 또 세 번째 
공장이^5,5,5^.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새벽 두 시경이라 우리는 이러한 공장과 신호등 앞에 
번쩍이는 물웅덩이밖에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후 가스등으로 밝혀진 성곽이 지나가고 그칠 줄 모르게 줄지어 늘어선 
네모난 집들. 또 '자전거'라고 써 붙인 곰팡이 낀 가게가 가끔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역 앞에서 나를 다시 동삐에르. 쉬르. 베스브르로 데려다 줄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지친 몸을 잠재워 줄 호텔을 찾아냈습니다. '로안느' 이 이름은 
실로 상냥하게 어우러지는 화음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습니다. 맑은 날씨였지요. 리넷뜨, 이것이 당신 
덕분일까요?

  토요일, 몽뤼쏭의 댄스파티에 갔었습니다. 꽤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는데^5,5,5^ 
불행히도 거기에는 술집 주인도 칵테일도 재즈도 없었지요. 우리들에게는 다만 
어머니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왈츠를 추어야 하는 조그만 무도회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이라곤 '당신 부인은? 그리고 당신의 딸들은 어떻게 
지내지요?' 따위 뿐이었습니다. 부인들은 홀 주위에서 사각형을 이루면서 무대를 
빙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바로 구식의 경계 방법이었지요. 
  그렇듯 부인들이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색색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천사 같은 젊은 처녀들이 홀 가운데에서 손에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그네들은 거울에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있는 듯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행복한 표정들이었지요. 
  나는 또 혼자서 아르장 똥. 쉬르. 크뢰즈에 갔었습니다. 아담한 마을이었지요. 
장난감처럼 4시간마다 작은 레일 위를 달리는 증기 전차가 그 도시를 지날 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나는 한바탕 들여마셨지요. 낡은 돌다리 난간에 앉아 
모자를 벗으니 자유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모자 역시^5,5,5^ 그 모자는 시냇물을 따라 흘러 지금은 아메리카로 향해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한순간 내 모자는 천천히 순회하면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분이 
나빴다기보다는 오히려 우울했습니다.

  리넷뜨, 나는 지금 당신을 떠나 물랭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이 편지를 
부치겠습니다. 답장을 해 주겠지요? 사랑하는 리넷뜨, 나의 깊은 우정을 믿어 주시길. 

    [  그리움
    게레(크뢰즈) 192 년 어느 날

  리넷뜨, 간단히 씁니다. 당신은 답장을 주지 않을 것 같군요.
  별로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십분 후면 나는 2백 킬로의 긴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지금 내 생활은 가능한 내가 빨리 돌아버리는 커브와 모두 비슷비슷한 호텔, 또 
빗자루 같은 가로수들이 줄지어 늘어선 이 도시의 작은 광장같이 지겹기만 합니다.
  당신은 이러한 광경을 생각이라도 할 수 있을런지^5,5,5^ 그 권태란 아마 나의 
지배자인 당신 때문^5,5,5^ 나는 당신에게 나 자신이 반해버린 이 콩트를 읽어 주고 
싶어요! 내가 더 이상 쓰지 않더라도 당신은 스스로 쓴 이 콩트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좀 울적합니다. 파리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군요. 나는 지금 침묵으로 내 
심정을 달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기약 없는 나의 유람 생활을 동정하고 있습니까? 

    [  입센과 필랑델로
      파리 1925 년 봄

  리넷뜨, 당신에게 마담 드의 소설을 돌려드립니다. 편지에 그 소설에 대해 느낀 바도 
함께 적었습니다.
  내가 이 소설의 단점들을 적은 것은 장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러한 
단점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소설에 그처럼 몰두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쓴 비난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문학에 
대해 나와 같은 견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 몹시 난처하답니다. 왜냐하면 필랑델로에 대해 너무 과격하게 비난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지요. 기분도 좋지 않습니다. 나는 '문지기들의 추상론'이란 단어를 
잘 소화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말은 점잖은 말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내가 필랑델로에게 그 말을 
자주 적용시켰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그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와 버렸던 거요. 
나의 실수였습니다.
  하지만 당신께 나의 생각을 설명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또 우리는 그 문제를 피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상을 테니스 공이나 사람들이 주고받는 동전 따위로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나는 비세속적이라 사상을 가지고 희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가 우연히 내가 집착하고 있던 화제로 옮겨지게 되면 그만 참지를 
못하고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하게 되지요. 그래서 에우세비오는 나와는 조리있게 
토론을 할 수가 없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내가 '문지기들의 추상론'이란 말에 몹시 후회는 하지만 화를 낸 것은 전혀 
후회스럽지 않아요. 왜냐하면 리넷뜨, 문학적인 문제를 고려하기 전에 우리는 입센과 
비교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당신은 보다 고차적인 문제에 집념하고 있는 어떤 인물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영향력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작품을 썼지요. 그는 가장 내면적인 문제에 대해서 공격을 했었고, 
특히 여성들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공격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입센은 그가 성공을 했든 안 했든 우리에게 새로운 복권놀이를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어떤 자양분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인간적인 면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당신의 내적인 생활을 가장 주요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있다면, 당신은 진실성 때문이든 단점 때문이든 그 작품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흥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 유명한 극작가일지도 모르는 필랑델로는 상류사회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이 정치나 일반적인 사상이나 간부들을 
농락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추상론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허용하기 위하여, 
창조되고 지상에 생겨난 사람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브릿지 게임보다 더 얼빠진 것은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입센과 동등시할 권리가 당신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입센은 
당신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하지 않았고 당신들은 책동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당신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경우에 작가는 작품이 어떻든 간에 그의 작품을 능가 할 것입니다.
  제 말이 개인적인 비평을 하는 것도 문학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과격하게 평한 것이 잘난 
체하는 것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는 일종의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필랑델로의 가치에 대하여 말하자면, 당신들이 그에게 만족의 뜻을 표시하는 그 
점을 바로 내가 경멸하는 바입니다. 나의 논거를 들어보시겠습니까?
  첫째,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극화한 그의 대담성: 그러나 그가 맨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레노르망과 같은 몇몇 바보들이 그보다 먼저 그러한 짓을 했었지요.
  둘째, 그의 독창성: 이것은 흔한 일입니다. 강의 내용을 잘 소화시키지 못하고 모든 
것을 혼란하게 하는 17세의 철학도 소년은 몹시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 소년은 외계를 느끼게 되겠지요.
  셋째, 이러한 주제에 대한 관심: 필랑델로의 희곡에는 주제에 대한 관심이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의 소재는 철학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로 귀착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 뜻도 없는 것들이지요.
  리넷뜨, 당신도 아시겠지만 사람들의 사고를 올바르게 키울 수 있는 것은 단지 
끊임없는 훈련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며, 또한 그것은 역시 인간이 가지는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설혹 그 사람들이 그들의 기억이나 지식이나 말재주는 넓히려고 하지만, 거의 
그들의 지능을 개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올바르게 추리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옳게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아요. 
그들은 잘못 알고 있는 셈이지요.
  이것이 그래도 인간적인 이해를 위하여 노력한 입센을 좋아해야 한다는 
이유이며, 또한 필랑델로를 거부하고 모든 꾸며낸 혼미를 거부해야 하는 이유지요.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명확히 이해되는 것보다 더욱 
사람의 마음을 끄는 법이니까요. 하나의 어떤 현상에 대한 두 개의 해석 중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애매한 쪽으로 더 기울어지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하나의 해석이 진리라면 그것은 단순하고 생기 없는 것이어서 사람들에게는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이란 참된 해석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끌게 되고, 사람들은 역설을 더 
좋아합니다.
  지금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것들입니다. 여러 개의 판단 착오는 
바로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그 사실들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상 때문에 감동되기 위해서, 그 관념들을 포착하려는 필요성이 생기는 겁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지요. 즉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것은 종종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이해하기 위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일종의 무사무욕의 정신이며, 자아 
망각입니다. 상류 인사들은 과학과 예술과 철학을 마치 그들이 기중기를 이용하듯 
이용하고 있습니다. 필랑델로는 일종의 기중기나 마찬가지지요. 

  나의 사랑하는 리넷뜨, 이런 편지를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원망하지 말아 
주시길. 또 '문지기들의 추상론'이란 표현에 대해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그러한 문제들이 세속적인 희롱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문제들은 무척 중요하니까요. 
  상류 인사들은 '우리들은 사상을 자세히 검토해 보았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역겹습니다. 식량이 부족하여, 아기들을 양육할 양식이 
모자라, 다음달 봉급을 가불하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합니다. 그들이 더 가깝게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제 나는 버스 승강구 곁자리에서 다섯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고, 
그들 또한 나에게도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상류 인사들은 나에게 그 
무엇도 가르쳐 준 일이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 어떤 불쌍한 창녀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여자는 내게 이렇게 
고백했답니다. 
  '나는 드레콜 양장점에서 마네킹 걸 노릇을 하고 있어요. 매달 6백 프랑을 벌죠. 
남편은 나와 아들을 버리고 갔어요. 나는 어린애를 유모에게 맡기고 일을 해야만 
했어요. 그 비용이 매달 3백 프랑이 들어요. 그러면 나에게 3백 프랑이 남게 되지요. 
그런데 제가 어떤 다른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파리에 있는 어떤 여자도 한 달에 
천 프랑을 벌지는 못해요. 그래서 나는 창녀가 되었지요. 나는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침 다섯시에 자리에 누우면 마네킹 걸이라는 직책 때문에 세 시간 밖에는 잘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일을 잘 해낼 수가 없습니다. 수줍은 성격인 나를 친구들은 비웃어요. 
나는 지금 기관지염에 걸려 있어요. 왼쪽 가슴에 뭐가 생긴 모양이에요. 이런 생활을 
오래 하지 못할 것 같아요. 이제 나는 손님을 끌 수가 없고, 또 현실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한데 이 사실을 알면 누가 나를 고용하겠어요. 그래서 나는 남의 집 
하녀로 들어가려고 해요. 그러면 나와 내 아들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만 해도 괜찮겠지요?

  실상 그만 해도 괜찮겠지요. 내가 뭐라고 대답해 주기 바랍니까?
  이 이야기는 쇼 극장이나 매춘부들에게서 힌트를 얻어 글을 쓰거나 극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시시한 이야기겠지요. 감동과 꾸며낸 동정일 뿐입니다. 80 년대에 
유행하던 멜로 드라마처럼 그러한 비탄은 사람들의 가정을 자극시키거든요.
  레온 월쓰가 인용한 어떤 대화가 생각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아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고서 어째서 그들의 최고의 
위안인 하느님을 빼앗으려고 하십니까?'
  '그들이 다른 위안을 찾고, 당신의 얼굴을 갈기기 위해서지요'

  참 좋은 말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리넷뜨, 나를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에우세비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전혀 관대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허영심이나 자만심 때문이 아니라 
바로 관용이 나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물이나 관념들은 그것 
자체로써 좋아해야지 희롱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동정심도 없는 무뚝뚝한 인간입니다. 이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군요. 또 다른 많은 이유, 그러한 것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리넷뜨, 나 자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정을 믿어 주시길. 
      [  고독 (1)
    국립 육해군 클럽 1926 년 10월

  리넷뜨, 편지를 받고 당신께 소설을 부쳤습니다. 나는 그 소설에 대해서 감히 
어떠한 비평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끌었어도 나를 별로 
골탕을 먹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필랑델로에 대한 이야기를 지워버리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작은 책'을 보내는 것이 꺼림칙하여 나는 그 책을 태워버렸던 겁니다.
  당신에게 편지는 쓰지 않았습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답장에 
너무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고, 또 그런 희망이 꺾여버리면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까닭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잊어버린 탓이라고 
생각지는 마십시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는 남에게 그리 호감을 주는 타입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곰처럼 어떤 항공노선일지라도 비행하는 데 적합한 사람일 뿐입니다. 
  나는 내일 파리를 떠납니다. 라떼꼬에르 회사가 알제리와 에스파니아와 남미에 
연결되는 세 개의 노선을 신설했는데 그 중 하나를 내가 맡을 것 같군요. 아가이 
해수욕장에서 호출을 기다릴 작정입니다. 
  너무 많을 것을 기대하게 하였지만, 아무 것도 충족하지 못한 파리에 이젠 
싫증이 났습니다. 이건 물론 다 나의 잘못입니다. 
  당신에게 다정한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5,5,5^ 이렇게 되어버렸군요.
  그래도 당신은 짤막하나마 회답해 주겠지요? 당신께 잘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우정을 믿어 주시길. 
    [  허상과의 대화
    뚤루즈. 1926 년 10월

  리넷뜨, 나는 뚤루즈에 와 있소. 파리에서 보낸 며칠간의 쓸쓸한 추억이 
생각나는군요. 친지들과의 만남, 몇 차례의 외출과 시험을 치른 기억들, 호텔방을 
바꾸느라고 책과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찬 무거운 트렁크를 나르기도 했지요. 
  나는 평생 이러한 이사에서 해방되어 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제판압착기, 
담배제조기 따위는 결코 내가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만 언젠가는 필요한 때가 
생기겠지요.
  기차 타기 전 아무런 할 일이 없는 무료의 시간 15분.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와 쉬고 있는 오후의 마지막 시간. 에우세비오는 
퐁뗀블로 궁전을 쏘다니고, M은 영화관에 가고, 당신은 음악회에 가고 없었어요. 
나는 말라께 둑에 있는 고장난 전화기 옆에 홀로 서 있었습니다. 모자와 외투를 
가지고 있었는데 몹시 불편하더군요. 
  마침내 나는 당신 곁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허용하지 않았지요. 내가 
남들을 비웃자 당신은 내게서 당신을 빼앗아 가 버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지 않는다고 꾸짖었어요. 그 때 내가 품은 앙심을 분명히 말할 수가 없군요.
  리넷뜨, 당신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항상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창작에 대한 정열을 물론이구요. 그러나 사람들은 말할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정열을 
가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을 어떤 집단으로 여기더라도 마찬가지겠지요.

  오늘 저녁 나는 평온한 고독감으로 명상을 하고 있습니다. 감기에 걸린 탓으로 
옴 몸에서 기분좋은 열이 나고 있어요.  머리가 약간 아픕니다. 문득 스스로가 
측은한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당신 곁에 있으려 했습니다. 당신은 역시 허락하지 않을 뿐더러 역정까지 낼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화내는 걸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당신을 내 마음에 맞도록 꾸며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상 속의 당신은 얼마나 다정한지요. 사실 이것은 내가 당신과 편안하게 나누는 
유일한 대화 일 것입니다. 바로 그 대화가 내 마음속에서 꾸며낸 이야기지요.
  당신은 참을성이 대단해요. 게다가 현명하기까지 하지요.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고 보니 말이 많아졌어요. 참 놀라운 일입니다. 마음속에서 꾸며낸 여자 
친구에게 내가 무슨 복수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당신을 마음속으로 그려냈다는 것은 분명히 내가 당신에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끔 당신은 내가 꾸며낸 당신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어쨌든 
당신은 내가 품은 당신의 이미지를 키워주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음악으로 
메꾸어지는 당신의 오후는 내가 오늘 저녁 만들어 낸 이 공상의 친구에게 많은 
생명감을 불어 넣어주고 있습니다. 
  리넷뜨, 지금 당신은 오펜바하를 약간 혼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신은 하늘 
빛깔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불평하지 말아 주세요.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과 관계없는 일입니다. 
  사실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당신을 
성가시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또 울적한 기분에 빠져 
버릴 겁니다.
  감기가 오늘 저녁 중요한 일들을 망쳐 버리고 있군요. 하지만 나는 계속 우울하게 
지낼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멋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에게는 차라리 더 쉬울 
것입니다.
  나는 악의를 가지고 이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괴로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괴로워 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아아, 당신은 내게 아무 것도 주려고 하지 않지요.
  세상에는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너무 집착하면 거북살스러워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면이 일종의 지나친 신뢰가 
되어버리거나, 혹은 그들의 자유에 굴레를 씌우는 셈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당신도 약간 그렇지요.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오늘 저녁 당신 앞에 앉아 
당신을 포로로 만들어 버려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무슨 운명이람!' 나는 곧 세네갈의 포로가 되어버릴 거요'
  이 말을 아시나요? 당신이 가끔 나를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경우를 거의 조심하지 않는 것도 유감스럽구요. 
왜냐구요? 당신의 오늘 저녁 모습은 매우 경박스럽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모습은 한 마리 비둘기의 무게지요'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근사하고 
아름다운 시구이지요. 이 시구가 얼마나 근사한가를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마치 지속될 수 없는 그 무엇 같은 그 새 한 마리. 사람들은 '흥'하고 코웃음을 칠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불행히도 가끔 그것이 포석일 때가 있거든요.
  편지함을 보고 나는 '흥' 하고 코웃음을 잘 칩니다. 하지만 포석은 그래도 역시 
무게가 나가지요.

  자, 당신에게는 이 편지가 낭패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편지는 당신한테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 자신과 대화할 당연한 권리가 있는 거니까요. 내가 나의 
여행 가방을 풀긴 했지만, 사실은 당신을 속이고 있는 거니까요. 
  지금 내가 출발 날짜와 지금의 날씨와 저녁 식사의 메뉴를 말하기를 당신이 
기대한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쌩 모리스에 상당히 큰 금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 금고 안에 7살 
때부터 5막으로 된 비극의 초안과 갖고 싶은 모든 것도 거기 안에 넣어 두었지요. 
가끔 나는 그것들을 마룻바닥 안에 뒤죽박죽 늘어놓곤 배를 깔고 엎드려서 
살펴봅니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이 금고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것들, 날씨나 저녁메뉴니,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 등, 이런 것들은 
될대로 되라지. 나는 당신의 이미지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  고독 (2)
    뚤루즈 1926 년 10월 22일

  나의 사랑하는 리넷뜨.
  당신을 잊었다는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서 편지를 씁니다. 이처럼 대담한 말투로 
말입니다, 나의 손가락이 얼어버렸고, 커피를 몇 잔 마셨어도 몸이 아직 녹지 
않는군요.
  정찰 비행을 기다리는 동안 카사블랑카에서 잠시 머물다가 신형 항공기를 
인수받았습니다.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이 나라에서의 생활은 몹시 고독합니다. 리넷뜨, 우정을 발휘하여 나에게 편지해 
주세요. 편지를 받는 것이 쌩 귀욤에서 저녁을 보내는 것만큼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몹시 기쁠 것입니다. 
  일기는 한심하기 짝이 없군요. 오늘 오후 한 시간 동안 폭풍우 속에 지상 1백 미터 
상공에서 새로운 비행기의 성능 시험을 했었습니다. 당신은 비행에 별로 호감을 갖지 
않고 있을 겁니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목욕하는 것과 마찬가진데 
말입니다. 당신은 좋은 친구지만 나는 이런 것을 잘 말할 수가 없군요. 단지 당신을 
생각할 뿐입니다. 
      고독 (3)
      뚤루즈 1926 년 10월

  리넷뜨, 당신은 결코 좋은 친구가 아니군요. 왜 편지를 않겠다는 거지요? 왜 내가 
전화했을 '당신이^36^예요? 아! 네, 안녕하세요. 빨리 전화 좀 끊어주세요'라고 나에게 
소리쳤나요?
  나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몇 달 후에 내가 어떻게 될 줄 당신은 알고나 있습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나는 당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카사블랑카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아마 나는 확실하게 그 곳으로 가게 될 
듯합니다. 혹 세네갈에 갈지도 모르겠구요.
  당신에게 나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군요. 당신은 딴 일들로 바쁘니까 
말입니다. 아마 에우세비오처럼 법학을 공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법학이란 
편지를 못쓰게 하는 공부지요. 
  그래도 내가 죽기 전에 답장을 해 주세요. 내가 죽고 나면, 나는 당신의 편지에 대해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당신을 조용히 내버려 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  고독 (4)
  뚤루즈 1926 년 10 년 24일 

  무척 우울한 일요일입니다. 비가 끈질기게 오고 있군요. 
  일요일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브레께를 목장으로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10분이 지나자 그 놈이 
다시 외양간으로 돌아가겠다고 보채지 않겠어요. 그러고 보니 내가 마치 델리여 
신부처럼 말하고 있군요. '아! 전원의 생활이여!'
  10분 동안 비행을 하고 그 다음 시간은 잠자며 보냈습니다. 성냥과 담배, 우표 
따위를 사면서 하루를 보냈어요. 옆집 가게 여사무원이 무척 아름다워요. 방에는 내가 
40 년 동안 쓸 우표와 성냥통이 벌써 30통 이상이나 됩니다. 그녀를 일 주일 동안 
사랑한 서글픈 결과이지요. 
  그녀는 참 아름다운 수납계원입니다. 계산대가 마치 왕좌처럼 멋있지요. 그녀는 
매우 멀리 있는 듯 아주 아스라하게 보였어요. '40 쌍띰' 그 소리는 아주 황홀하게 
들리지요.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말을 찾고 있어요. 

  친구들이 얼마나 그리운지! 몇 안 되는 친구들이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욱 
애착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랜 후에 내가 흰 수염을 기르고 돌아가면 당신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화나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내가 어디로 떠나야 하는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리칸테라든지, 모로코라든지, 다카르라든지 어디든지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가야 하지요. 

  방금 쓴 문장이 너무나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당신은 없었습니다. 리넷뜨, 어디에 가서 책상 정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항상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하면 말입니다. 
  리넷뜨, 비행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당신 알고 있습니까? 하지만 그리 쉬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행을 좋아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여기에서의 비행은 부르제 공항에서 하던 것과 같은 스포츠가 아니고,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며, 일종의 전쟁입니다. 비오는 날 새벽에 우편기의 출항은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야간 비행팀이 비몽사몽간에 있다가 에스파니아 쪽에서 일어난 폭풍우 때문에 
깨어나고, 피레네 산맥 위에서는 짙은 안개가 끼게 되지요. 이륙 후 비행기가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사람들은 다른 일로 흩어지게 되지요. 
  리넷뜨, 나는 자주 비행하고 싶습니다. 그럼요. 당신께 전화를 하고 싶었어요. 
사실 나는 말을 할 줄 몰라요. 그렇지만 태연자약하기 위해 '여보세요. 
여보세요'라고 말할 겁니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나는 축음기판을 모은다거나 멋진 넥타이를 맨 놈팡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좀더 
젊었을 때 그렇게 되어야 했을 텐데, 지금은 너무 늦었습니다. 내가 그것을 
후회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대머리가 된 지금 내가 더 이상 그렇게 노력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와이셔츠 가게와 구둣방 진열장 앞에 서면 서글픈 생각이 앞섭니다.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러한 경험들이 나를 도와줄텐데^5,5,5^ 이렇게 생각해도 별 위안이 
되지는 않는군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나를 무척 호남으로 봐주고, 또한 내 손톱 따위를 
보면서 감탄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기름투성이인 나의 손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뿐입니다.
  나의 어처구니 없는 독백이 당신을 지겹게 만들진 않았나요? 나는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전혀 설명될 수 없는 기분입니다.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서 몹시 고독 속에 빠졌기 때문에 내가 마치 증조부같이 늙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런 나에게 편지를 써 주셔야 해요. 나의 다정한 리넷뜨. 
    [  태양과 들판과의 대화
    알라칸데 1926 년 11월

  나는 어제 당신에게 세 통의 편지를 썼지만 모두 찢어 버렸습니다. 불필요하게 많이 
썼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오늘 저녁 아주 초연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에게 너무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누구를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당신에게 유리한 주위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당신은 '이처럼' 쓸 수 없겠지요. 당신은 그 사실을 나에게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잘 이해하지 못했지요. 
  그런데 내가 애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군요. 사실 내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을 상의할 우정이 몹시 필요하답니다. 나의 
걱정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구요. 그 파트너로 내가 왜 당신을 선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몹시 이상한 사람입니다. 내가 편지지 위에 쓴 문장이 나에게 되돌아오는 것 
같아요. 편지를 읽느라고 고개를 숙인 당신의 얼굴을 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나의 
태양과 나의 조그마한 과자와 나의 꿈에 대하여 관대한 당신이 상상이 되질 않아요. 
단지 나는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하여 별 생각 없이 편지를 썼어요. 결국 내 자신에게 
쓴 것이지요. 자정이 지났지만 나는 무척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번 출발은 소년시절에 
길 떠나기 전에 잠기던 공상을 회상시켜 주는군요.
  시골 마을, 램프 아래서 어른들은 브릿지 놀이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책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말레이지아 민족은 까만 눈을 가졌다' '하이티 섬 사람은 
파란 눈을 가졌다'라고 쓴 글을 읽었지요. 
  그날 저녁 나는 정말로 까만 눈과 정말로 파란 눈을 결코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들을 
정복하러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행하는 다른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어제 나는 지상에서 무척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하늘 가장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어떤 관대함까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충격을 느꼈을 때 3천 미터를 내려왔어요. 순간적인 기계의 파열로 
여겼습니다. 나의 비행기는 고장이 잘 났었으니까요. 나는 조종간을 깊숙이 눌렀지요. 
그리곤 비행기가 선회하며 하강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계기의 지침반 
위에 만년필로 보이게끔 '기계 고장, 찾아볼 것, 추락을 모면할 수 없음'이라고 
썼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경솔하게 내가 자살했으리라 추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 
생각이 나를 괴롭혔지요. 추락하여 산산조각이 날 들판을 나는 충격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약간 새로운 경험이었지요. 나는 온통 겁에 질려 
백짓장처럼 하얗게 되어버렸습니다. 영문 모를 이상한 공포였으나 터무니 없는 공포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지혜가 번쩍 떠올랐어요.
  기계의 고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나는 지상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는 주위를 외면해 
버렸습니다. 
  이런 나를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최소한의 본질적인 문제도 
말입니다. 남모르는 어떤 세계, 나는 그 순간 사람들이 묘사할 수 없는 기이한 
세계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 때 내가 느꼈던 그 들판과 조용한 태양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단순하게 '내가 들판과 태양을 이해했다'고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잠깐동안 찬란히 빛나는 그날의 정적을 
느꼈어요. 그 날은 바로 내가 잘 살다가 박차고 나가게 된 어떤 집처럼 견고하게 
세워진 어떤 날이었지요. 아침해가 중천에 높이 떠오르고, 조용히 거미줄을 짜고 
있던 대지가 굽어 보이는 어떤 날이었어요.
  행길에서 이 세계의 일부를 소제하고 있는 청소부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그들의 
행위에 만족하였습니다. 또 마을의 순경들은 사방 백 미터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집을 정돈하는 것도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나는 
살아서 돌아왔고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인생을 대단히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36^예요.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라도 억지로 이해시키고 싶습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아랑곳하지 
않지요? 누가 당신을 방심하게 하지요?
  그 광경은 내게 어떤 얼굴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너무나 근본적이며 너무나 불안한 
그 무엇을 느꼈기 때문에 나는 내 사상이 그 얼굴 속에 맴도는 것을 보았어요. 나는 
그 얼굴에서 뾰루퉁한 표정을 알아차렸고, 내 사상이 그 얼굴에서 각성시키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지요. 갑자기 그 얼굴이 사막 속으로 도망치는 것을 느꼈어요. 내 
사상은 기쁨의 흔적도 고통의 흔적도 이해하기 위한 노력도 파악하지 못했소.
  나는 기분이 전환되는 정확한 순간을 느꼈어요. 그 기분 전환은 너무 빨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떤 뜻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나는 '그의 이마로 구름을 
쫓는다'라는 희한한 표현을 생각했어요. 밀밭은 광선을 바꾸더군요. 
  나는 니체를 팔로 껴안았어요. 나는 이런 인간형을 무한히 좋아하지요. 그의 고독을 
좋아하지요. 나는 쥐비 갑 모래 위에 몸을 죽 펴고 누워 니체를 읽을 것입니다.
  '짧고 더우며 우울하고 또 지극히 행복한 금년 여름, 나의 여름을 다 태워버린 
내 심장'을 내가 몹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열을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겠지요? 
      [  원망
  뚤루즈 1926 년 11월 24일

  방금 비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당신에게선 아무 소식도 없군요. 편지하지 
마세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기 위해 나는 
이쪽 주소는 보내주지 않겠습니다.
  내가 너무 우스꽝스러운 사람이지요. 이처럼 우정을 구걸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건 이해가 됩니다. 나는 당신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섭섭하게 
생각진 않습니다. 그 편이 더 좋기 때문이지요.
  이젠 당신이 편지를 한다 해도 나는 편지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편지를 
비웃을 거^36^예요. 당신은 약속된 날 저녁 그렇게 할 수조차 없겠지요. 이 편지를 왜 
쓰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전날 세 통의 편지를 찢었는데 네 번째 편지도 
찢을 수 있겠지요. 쳇! 이젠 작별입니다.
  당신은 나의 아픔에 대하여 의무가 있다고 생각지 마세요. 지금의 나는 어떻든 
상관이 없으니까요. 리넷뜨, 나의 운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언젠가 그 운명을 당신에게 너무 졸라댔어요. 당신에게 너무 희망을 걸었구요. 
그것이 유감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정을 
잃었지요. 나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뒤로 물러 설 수 없었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은 분명 나의 잘못이니까요. 
    [  황홀한 고독
    뚤루즈 1926 년 12월

  리넷뜨, 용서하십시오. 내가 편지를 보내는 동안 당신 역시 편지를 보냈군요. 그 한 
통의 편지가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리넷뜨, 나는 굉장한 여행을 했어요. 뚤루즈에서 새벽 네 시에 일어났는데도 
탕헤르에서 낮잠을 잤지요. 나는 에스파니아와 모로코에 익숙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랍인과 그들의 낙타를 보면 내가 어떤 서커스장에 구경온 것같은 
생각이 들어요. 세관과 국경이 없는 여행을 상상해 보세요. 대지 위를 일렬로 
지나간 3천 킬로미터의 여행을, 그 요지부동의 여행을 떠올려 보세요.
  이름 모를 땅, 한결같은 대지 위를 여행하는 것은 이상한 생활이지요. 관측기를 
통하여 모로코 땅 어느 한 구석을 발견할 때, 샌드위치의 기억이 회상되는군요.
  그래서 알리칸테에서 걸어서 10분 동안만 돌아다녔지요. 귀로에서는 거기서 
잠을 잤어요. 지금은 에스파니아 내가 잘 알고 있는 곳이지요. 길가의 저 여인은 
우리 여관 주인 삐삐따입니다. 동료들은 그녀를 '아름다운 자동차'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에스파니아를 아름답게 생각진 않는답니다.
  낯선 나라에 가서 새로운 사물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바뀐 
역에는 이름도 없고, 세관원도 짐꾼도 없고, 그 나라를 명예롭게 하는 역마차의 
마부도 없어요. 어리둥절한 정신 상태로 사람들은 단번에 소도시의 자질구레한 
생활에 젖어들곤 합니다. 교외를 통하여 간신히 그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리넷뜨, 에스파니아는 어떤 카페의 보이에 불과하고, 그다지 예쁘지 않은 여관 
주인 삐삐따에 불과하답니다. 이 나라는 서글픔 그 자체라는 생각입니다.
  에스파니아는 또 비행기가 고장나기에 알맞도록 지면이 기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아주 낮은 지역을 지나 울퉁불퉁한 지대를 통해 깎아지른 절벽을 올라가기까지 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한 동료가 이렇게 큰 소리지르기까지 했으니까요.
  '여기서 죽으려면 문제 없군. 정말 사람들이 투신자살하기 알맞은 곳인데'
  절벽 중의 어떤 것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고, 아래쪽으로 마지막 구멍이 보이는 
곳으로 적시에 50미터 정도로 고도를 낮추어 통과해야 합니다. 에스파니아 만큼 산이 
많은 지역에서는 산의 정상이 구름을 꿰뚫게 되지요. 그러므로 그 정상을 내려오면서 
비행기가 고장나거나 아니면 꼭대기가 보이지 않아서 자칫하면 산에 충돌하게 됩니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다처럼 깔린 구름 위를 나침반을 보면서 비행하는 것은 무척 재미있을 
거^36^예요. 발 아래 한결같이 전개되는 광경을 생각해 보세요'
  아주 조용하고 평온한, 저 하얗게 전개되는 평야를 바라보고 있으면 '발 아래 
한결같이 전개되는 광경'이라는 말은 체험하기 힘들고(거의 황홀한) 고독감만을 
느끼게 되지요. 
  당신은 부르제 공항에서의 비행을 알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브르제에서의 정신 
상태도 이해하지 못할 거^36^예요. 이곳에서의 비행은 하면 할수록 힘들기는 하지만 
더 좋지요. 

  오! 리넷뜨, 뚤루즈로 말하자면, 내가 돌아다닌 시골길을 묘사해 볼까요. 나는 
오른편의 가로등을 지나서 카페에 들러 앉습니다. 나는 항상 같은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며, 신문가게 주인에게 매번 같은 말을 하지요. 
  리넷뜨, 나는 항상 같은 친구를 만납니다. 이 상황에서 도피하여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젠 카페를 옮기든지 다른 가로등을 지나 다른 
가판대를 찾든가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신문가게 주인에게 말할 새로운 말을 생각해 
내야겠지요.
  리넷뜨, 나는 스스로에 대하여 싫증이 납니다. 나는 내 생활에서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어요. 아아, 나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동료들이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군요. 나는 두세 명의 친구밖에 
없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말없이 지내고 있어요. 이것이 당신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가끔 내게 편지를 써야만 하는 이유랍니다. 리넷뜨, 당신은 나의 오랜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  유쾌한 비행
  빨마리움, 뻬르삐냥 1926 년 12월

  리넷뜨, 당신은 얼마나 불친절한지! 나는 매번 드는 실망스러운 마음이 불쾌하기 
때문에 이제는 결코 편지를 쓰지 않겠습니다. 이 말이 당신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겠지요. 
  나는 완전히 혼자이므로 하찮은 일로도 기뻐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의례적으로 3개월에 한 번씩 보내는 편지는 나를 권태롭게 만듭니다. 
당신은 '어머나! 아직도 답장할 편지가 있었네!' 하겠지요. 이젠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아마 다른 일 때문에 답신을 쓰는 것조차 귀찮겠지요. 

  뻬르삐냥에서 비행기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튿날에야 뚤루즈로 돌아갔지요.
  뻬르삐냥의 저녁은 음산해 보였어요. 나는 조그마한 오르막길을 산책했습니다. 
그 길에는 잡화상인들로 가득했습니다. 이들보다 더 침울한 광경은 정말 더 없을 
겁니다. 그들은 3쑤우짜리 실과 2쑤우짜리 바늘을 팔고 있었는데 정말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창문 커튼에 이마를 기대고 세월을 보내지요. 레이스가 
달린 커튼에 말입니다. 그들의 방에는 감옥보다 더 진저리쳐지는 벽난로가 달려 
있어요. 그들의 모든 생활은 습관적으로 행해집니다. 바로 감옥이지요. 나는 
그러한 습관을 무척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안에서 안식을 취합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부러워졌습니다. 
내일은 뚤루즈에서 잠을 자고 모레는 알리칸테^5,5,5^ 내가 갈 곳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사냥에서 돌아와 '제기랄!' 하면서 난로 앞에서 손을 비비는 바보처럼 정직한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5분 동안 파이프 담배를 다져 연기를 
내뿜는 사람 말입니다. 매춘부들이나 등쳐먹고 사는 편이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르지요.

  피레네 산맥 정산에 쌓인 눈이 장미빛이 되었습니다. 멀리 나르본느의 늪도 
역시 장미빛이는군요. 당신은 상상할 수 있습니까? 엔진의 속도를 늦추면서 나는 
푸른빛으로 빛나는 뻬르삐냥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광경은 참 아름다웠지요. 
  기계 고장도, 짙은 안개도, 산 밑이 온통 캄캄한 저 밑에 자욱히 깔려 있는 
구름도 두렵지 않을 때의 하강이란 얼마나 유쾌한 것이지^5,5,5^.
  순간 엔진에 고장날 수도 있지요. 그러면 비행기는 확실히 수직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나는 좌석 등받이에 몸을 바짝 기대고 바람을 이용하여 비행기를 
조종합니다. 
  조종간을 올리면 비행기는 상승합니다. 조종간을 억제하면 비행기는 서서히 
하강하지요. 그 뒤에 집들과 가로수들이 뒤로 넘어지며 달아나면 착륙하게 되는 
겁니다. 착륙이란 참으로 유쾌한 일입니다. 
    [  권태
    뚤루즈 1926 년 11월

  끝없는 여행에 지쳐 녹초가 되었습니다. 나의 여행은 변동이 많군요. 라바트 
근처에서 비행기가 고장이 났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사고였지만 착륙할 만한 곳이 
없어 당황했습니다. 이번 비행기는 그전 비행기와 전혀 달랐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는 조종하지 않았지요. 기체의 타박상까지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에스파니아에서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폭풍우 속에서 '아홉 시간' 동안 춤추듯 
흔들렸지요. 알리칸테에서 뚤루즈까지의 길고 긴 아홉 시간. 내가 얼마나 녹초가 
되었는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나는 곧 세네갈로 출발할 거^36^예요. 거기서 이삼일 내지 열흘 정도 머물게 될 
겁니다. 그 때까지 약간의 공백기간이 있군요. 차라리 빨리 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  행복
  알리칸테 1927 년 1월 1일

  새벽 두 시. 긴 여행을 마치고 뚤루즈에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화창한 
날씨인지^5,5,5^. 알리칸테는 유럽에서 가장 더운 지역입니다. 여기서만 대추야자 
열매가 열리지요.
  이곳 '천일 야화'의 밤에 취하여 바닷가의 희미한 별빛이 비치는 종려나무 숲을 
거닐었습니다. 바다는 너무나 고요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면서 내가 아주 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풀밭을 뒹굴고 싶었고, 
새로운 모든 것들을 입을 벌린 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그것들을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아득했던 나의 꿈을 태양이 키워서 꽃을 피우게 만들었습니다.
  나에게는 행복해야 할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마차의 마부. 구두를 정성들여 
닦아 윤을 내곤 미소짓는 구두닦이 소년들, 얼마나 희망에 넘치는 새해 
첫날인가요. 오늘은 내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방금 거지에게 담배 세 개비를 주었습니다. 그 거지가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그 마음을 계속 갖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스스로가 호의와 관용으로 충만해 있다고 느낍니다. 
  리넷뜨, 당신 때문에 무척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순하게 길들이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요. 전에는 당신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었습니다. 물론 내 잘못이었지요.
  리넷뜨, 나의 말을 아무런 저의가 없답니다. 그 말들은 당신에게보다 나에게 더 
중요했어요. 내가 단순한 나태를 낙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흐뭇한 광경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아마 이해 할 수 없을 거^36^예요.
  요즘 나는 자동 피아노 소리를 즐겨 듣고 있습니다. 참 좋더군요. 모든 
에스파니아 여성들이 오페라의 주인공들이었어요. 그 피아노는 나를 닮았습니다.
  피아노 옆에서 한 에스파니아 여자가 울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 뚱뚱한 창녀 몇이 큰 소리로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소란을 떨다니! 하지만 그녀는 자신보다 창녀들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더군요. 단지 그녀는 자기의 고통에 집착하고 있었으니까요. 
  리넷뜨, 돌아가면 아마 당신의 편지가 와 있겠지요. 나는 다시 에스파니아 
인들의 사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낼 겁니다. 
  이처럼 따뜻한 날씨에는 사람들은 남모르는 어떤 비밀을 간직하게 됩니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미소짓고 있기 때문이지요. 미소는 
에스파니아 말 세 마디를 대신할 수 있더군요. 
    [  만족
    알리칸테 1927 년 1월 2일 

  리넷뜨, 다른 우편 항공기가 고장났기 때문에 나는 카사블랑카로 여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나는 무척 만족하고 있습니다. 
  최근 나는 에스파니아 인들의 삶에 약간 동화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카페 발코니에서 사람들이 권하는 여러 생소한 일들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조그마한 영계 요리를 열 점 정도 집어먹어 보았고 큼직하게 자른 과자도 
먹었습니다. 그 과자는 생김새는 참 보기 좋은데 과자 속은 별 게 없었어요. 
  떠돌이 사진사에게 점잖은 포우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어요. 나는 잘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동료가 '사진은 실제보다 훨씬 잘 나오는 법'이라며 친절하게 
권하더군요. 그래서 종려나무에 기대어 포우즈를 취했어요. 그리곤 해변에 가서 
산책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 영화관에 가는 길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잠을 잔 다음 아침 일찍 
카사블랑카로 떠날 예정입니다. 
    [  사랑과 죽음
  카사블랑카 1927 년 1월 3일

  새벽 한시.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현명하게 잠을 잤습니다. 당신을 
향한 편지가 나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것 같아요. 시 시각 당신은 잠을 자고 
있겠지요. 그래서 내 머리를 스쳐가는 모든 것들을 당신에게 이야기할 수 없군요. 
  폭풍우가 내립니다. 창문이 야릇하게 불규칙적인 박자로 덜커덕거리고 
있습니다. 이 소리는 무선전신의 소리거나 아니면 악령의 소리일지도 모르지요. 
이따금 지나가는 택시들이 잠들어 있는 도시에서 침울한 소리를 내고 있군요. 
나는 행길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 역시 좋아하지 않아요. 들려오는 모든 소리는 
나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내가 편안한 기분으로 안식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간밤에는 여느 때 같지 않았습니다. 침대에서 눈을 뜨고 있을 때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적은 예전에도 물론 있었습니다만.
  안개 주의보를 나는 싫어합니다. 그 다음 날 낯선 사람끼리 부딪쳐 얼굴을 
깨뜨리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안개가 끼어도 대수로운 손해는 보지 
않지만 나는 모든 것을 잃으니까요. 
  내가 알리칸테에서 우정과 추억과 태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오늘 산 아랍 양탄자의 주인이 된 내 심정이 내 가슴을 무겁게 
만드는군요. 나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아 무척 홀가분했었는데^5,5,5^.
  리넷뜨, 동료 한 사람이 손에 화상을 입었어요. 나는 그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내 손을 사랑합니다. 내 손을 바라보았어요. 이 손으로 나는 편지를 쓸 수 있고 
구두끈을 맬 수 있으며, 즉석에서 비행기를 조종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비행을 좋아하지 않지요? 그래서 나를 측은하게 만들구요. 이것은 20 년간의 
훈련이 필요한 일이지요. 가끔 이 손으로 얼굴을 꽉 조일 때도 있습니다.
  오늘 저녁 나는 토끼처럼 불안하군요. 이번에 터진 다카르 사건은 정말 
불쾌하답니다. 누구나 그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죠. 
  '이 도시는 흥분의 도가니랍니다. 다음 번에 오는 비행사가 고장을 내면 무어 
인들에 의해 학살당할 것입니다'
  무어 인들에게 학살당한다고? 이 말이 밤새 귓가에 들려오는 것같아 짜증이 
났습니다. 밤새도록 나는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모든 것에 애착을 느끼고 있습니다. 누가 자고 있는가, 침대에 
누워 밤을 지새울 때면 환자를 지키는 간호원보다 나는 더 불안합니다. 여러 날 
밤을 새울 때 나는 나의 보물들을 잘 지키지 못합니다. 
  나는 약간 쑥맥입니다. 낮에는 모든 것이 단순했어요. 출발하고 싶고 모험에 
뛰어들고 싶습니다. 그런데 밤보다는 낮에 출발하고 싶어해요. 밤에는 몸이 
불편하여 스스로 불평을 늘어놓곤 하니까요. 
  슬픈 이야기를 당신에게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좋은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3개월 전에 탕헤르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탕헤르에서 그 친구의 행로를 찾아나섰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 친구의 발자국을 찾아냈어요. 내가 어디서 그를 찾았는지 
당신은 알겠어요? 카페였어요. 그는 매혹적인 친구였으니까 카페 아가씨들도 
당연히 그를 사랑하게 되었던 거지요. 
  한데 아가씨들은 그를 잘 보살펴 주지 않았습니다. 그 아가씨들은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곳으로 친구는 그런 아가씨들을 만나러 
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충실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바친 사람에게는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가씨들은 가끔씩 화대를 받지 않았어요. 
아가씨들은 그의 가장 귀중한 것을 그로부터 감쪽같이 훔쳐간 셈이지요.

  인생이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내가 당신을 떠나야만 합니까? 한 
켤레의 구두가 나를 역겹게 하는군요. 불을 끄겠습니다. 
    [  비가 온다
    카사블랑카 1927 년 1월 14일

  리넷뜨, 나는 이상하게 편지를 읽습니다. 편지에서 당신의 골난 모습과 특유의 
억양과 미소를 찾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편지글 속에 '날씨가 좋다'라는 말이 없으면 
저으기 실망하곤 한답니다. 그 말은 많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가 온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은 '얼마나 유쾌한가! 비가 오는군 비가 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아요'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또는 '하느님, 당신은 나를 귀찮게 만드는군요'라는 의미이거나 
아니면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요. 그런데 그 이유는 모르겠어요. 할 말이 
별로 없는데 말이에요. 비가 오는군요'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  그리움
  부에노스아이레스 1930 년 1월 23일

  리넷뜨, 매달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 생기며, 세계는 찬란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원하는 거^36^예요. 
  지금 나는 대단히 아름다운 가죽 손가방을 샀습니다. 그래서인지 부드러운 모자와 
세 개의 바늘이 달린 이프로노미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최근 몇 달 동안의 생활은 불규칙적이었고 우울한 느낌이었습니다. 계절도 
나처럼 자주 바뀌는군요. 
  그러나 나는 희미한 그림자 같은 인상을 남들에게 주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원치 
않던 임무 때문에 나 자신이 몹시 둔한 것처럼 느끼게 되는군요. 그 이유는 내가 
'항공우편회사'의 지사이며 국내 노선을 위하여 설립된 '아르헨티나 항공우편회사'의 
경영 책임자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나에게 남은 젊음과 진실로 원하는 자유 등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3천 8백 킬로미터의 항공망이 내게 주어져 있는 까닭입니다.
  나는 매월 2만 5천 프랑을 벌고 있습니다. 나는 이 돈을 어떻게 쓸지 모릅니다. 
결국 낭비하려 애쓰게 되겠지요. 
  나는 수많은 물건들이 가득 찬 방안에서 질식할 것 같습니다. 별로 사용하지도 않은 
그 물건들은 싫증난 지 오래이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 더미는 점점 쌓여만 가고 
있어요. 결국 이 제물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지고 말 것입니다.
  나는 15층 건물의 중앙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위로 7층, 
아래로 7층이 있지요. 주위에는 콘크리트 건물로 둘러싸인 거대한 도시가 
보입니다. '거대한 피라미드' 속에서 나는 경쾌한 기분까지 들게 되지요. 유쾌한 
기분입니다. 불행히도 이곳에는 아르헨티나의 삶들만 가득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계절이 있는지 없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입니다. 봄이 
어떻게 수천 입방 미터의 콘크리트를 뚫고 들어올 수 있을까요? 봄에 통에 든 
제라늄이 창문에서 터지는 것을 상상해 보았습니까?
  파리에서도 나는 봄을 그렇게도 좋아했지요. 생에 대한 환희가 쌩 제르망가 
마로니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가슴에 복받쳐 왔습니다. 존재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감흥은 어디에서나 느끼게 되는가 봅니다. 
  그런데 왜 내가 파리를 그리워하는지 모르겠군요. 파리에 있는 우리집에서의 
나는 보잘것 없는 존재인데 말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내가 끼여들 수 없는 일에 
정신이 없겠지요. 그곳에는 분명 내가 차지할 뚜렷한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무척 잘된 일 같기도 합니다.

  나의 유일한 위안은 비행하는 일입니다. 나는 이미 새로운 노선에 대한 시찰도 했고 
비행도 해보았어요. 그렇게 많이 비행한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저께 최남단에서 
돌아왔는데 그 여정은 무려 2천5백 킬로였습니다. 멋진 장거리 비행이지요?
  내가 아무런 고통없이 당신께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카르 이후에 이번이 
처음이군요. 당신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원할 때 당신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지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죄는 아니랍니다. 단지 내가 실성했었고 우스운 
사람이었지요. 그게 아니라면 젊은이의 환상 때문일 겁니다. 젊은이의 희망 
때문이지요.
  당신은 무척 분별있는 여성입니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나에게 고통을 주었고 그후에 기쁨도 주었습니다. 
  내가 슬퍼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내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거지요. 리넷뜨, 
또 편지할게요. 
    [  삼손의 마음
      아게(바르)

  그리고, 자 분별있는 결심, 찢어버린 편지들, 2 년 동안 얼마나 많은 편지를 
찢어버렸던가.
  한밤중 난로 곁에 앉아서 모든 결심을 꺾었습니다. 심중에 스쳐간 숱한 경험과 
많은 패배의 자취들. 진하게 설탕을 타서 홍차를 마셨습니다. 유칼리 나무가 타는 
냄새, 송진 냄새가 풍기는 난로 곁에서 나는 조용히 웃었습니다.
  이제 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무엇을 당신께 이야기하지요? 나는 반성입니다. 
오늘 저녁 당신 곁에서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있겠습니다. 잠자고 있는 
자질구레한 나의 사상을 말하지 않고, 음미하려고만 애쓰면서 말입니다. 
  당신은 나 자신을 속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편지를 당신에게 써야만 했습니다. 정원에서 몇 발자국 걸었지요. 
사람들이 기지개를 켤 때, 삶이 왜 기쁜지를 사람들이 알지 못할 때, 나는 아직도 
각성의 편지를 썼지요. 

  우체통에는 사흘 동안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 내가 얼마나 순박한지! 정말 
나는 불행한 놈이랍니다. 
  그날 저녁 나는 라파엣뜨 카페에서 편지를 몇 통 썼습니다. 그 편지에 쓴 
말들은 중요하진 않지만, 말의 억양 속으로 나의 비밀을 숨겼지요. 내가 
'알리칸테'라고 말할 때는 그 알리칸테는 태양과 폭풍우가 있는 것이지요. 그 
도시는 무척 미소를 잘 짓지만, 어떤 얼굴처럼 투명하지요!
  그 해 겨울 내가 세상에(말라카에, 카르타제나에) 알린 모든 봄, 내가 고백한 모든 
봄, 나는 실성했었습니다.
  사람들을, 아니 모든 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누군가가 내게 
편지하겠지요. 
  '빨리 또 편지를 보내 주세요. 나는 당신의 편지를 그토록 좋아해요.'
  나는 내 편지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모조품을 교묘하게 진짜 
보석으로 준 호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그 보석을 사용하고 가짜 보석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겠지요. '다른 보석도 나에게 또 보내주세요.' 그런데 '나에게 이런 
보석을 보내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치사한가!' 아, 불쌍한 사람.
  물론 편지를 쓰는 것보다 차라리 음식을 먹는 편이 더 낫겠지요. 그러나 수년간 
마음의 진정, 여러 곳으로 다닌 그토록 많은 비행, 혹은 카사블랑카 시민들, 아니면 
마음의 노쇠 현상, 드디어 이 모든 것이^5,5,5^.. 이것들은 이제는 아마 중요하지 
않은가 봅니다.
  물론 다소의 거짓말도 했습니다. '파리의 인생'이라는 가요에도 별로 성실치 못한 
속임수는 있고 기타를 치면서 다른 가요를 연습하는 데도 배신적인 요소가 있는 
법입니다. 
  데릴라가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하여 노래 부른 가요도 물론이지요. 
삼손이 속임수가 아닌가 어슴프레 의심했을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당시 데릴라의 태도를 자신의 머리털보다 더 좋아했답니다. 

  밤은 계속하여 조용히 흐르고 있고, 나는 조용히 잠이 듭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의 
비밀을 조심하고 있습니다. 사무치는 나의 원한을 잊고 있다는 사실. 이것은 중대한 
일이지요. 
  아마 역시 나의 나약성 때문에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가 봅니다. 내가 함정에 
빠졌는지 아닌지에 대하여서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삼손은 감히 움직일 수도 없었고 
실을 끊을 수도 없었지요. 삼손은 단지 새잡는 사람의 함정에 걸린 시동이 된 것을 
감탄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    사색 노트

    [  투쟁

  투쟁이란 부조리한 것이다.
  좌익이나 우익, 스탈린, 트로츠키의 추종자들, 아나키스트 등등, 그들은 과연 
무엇을 주장하는가? 그들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투쟁에 나서는 것일까?
  민주주의, 이 제도 속에서 나는 보잘것 없는 한 개인의 권리를 찾고자 한다. 
아니 참다운 서구 문명 속에서 나는 신의 권리를 찾고자 한다.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인간을 통한 신의 권리를 말이다. 나는 인간의 깊은 속에 존재하는 신, 그 
모습을 숭배한다. 신이라는 개인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나치들의 정의대로 인간이 사회적인 견지에서 어떤 결함이 있는 존재라면 나는 
그를 없애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애기를 훼손하는 비행사에게 내리는 
벌과도 같다. 그러나 서구적인 정의를 따른다면 그의 정신적인 조국의 이름으로 
비행기 내의 지위로부터, 만찬에서의 권위로부터 그를 추방시킬 것이다. 
  나는 인간을 어떠한 잣대로 측정하거나 평가할 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과오란 그들이 인간을 나름의 잣대로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분명히 통계적인 확률, 엔트로피의 증대, 힘의 
분산인 극한, 즉 무정부상태에 이르는 권력 분립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민주주의란 명백하게 인간 해방으로 귀결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만 보일 뿐 
개인 해방에 그치고 만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결국 그 속에 용해되어 형태를 
감춰버리기 때문이다. 
      [  논쟁

  논쟁이란 이미 멀어진 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각자가 자신의 고상함을 믿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개념이 
있다는 사실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지나치고 있다. 
  가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들은 손에 쥐어진 카드가 
아니라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그들의 말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분노와 흥분, 앙심과 증오의 대화들.
  증오란 겉으로는 항상 비틀어진 모습만을 비추게 마련이다. 그들이 내가 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믿을 때 우정은 변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들의 우정을 원치 않게 된다. 
그것은 내가 가진 그들에 대한 증오와 그들의 부당함 탓이다. 항상 그렇듯 비열한 
그들은 우정을 더럽히기 일쑤이다. 단지 나를 칠 단단한 몽둥이가 손에 쥐어져 있지 
않을 뿐. 
      [  미신

  놀라운 방송 프로그램이나 저속한 드라마가 끝나고 마침내 '라 마르세이유'가 
흘러나오면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한다. 
  이 애국가에는 무엇보다도 모든 지도자들에 대한 평민들의 증오가 담겨 있다. 또 
자신들이 쟁취한 소중한 자유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이 담겨 있다. 
  이 함께 하는 사랑, 이것이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라 마르세이유를 알아듣지 못한다. 마치 지겨운 문체의 소설을 대하거나 
선거 유세장의 연설을 듣는 것처럼.
  이제 이 나라는 마비되어 버렸다. 그는 유일한 상속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어리석은 대통령, 그에 대한 신격화, 그러나 그 대통령에게 인정받는 자는 
자랑스러움에 눈물을 글썽인다.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관직이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투표의 
결과 만큼이나 관직의 효용가치를 숭배하고 있는 까닭이다. 
      [  시민

  내가 누군가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지키는 법률이 어느 정도 
엄격한가가 아니라 그의 창작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이다. 
  오늘날 사회 구조는 부패할 대로 부패하였다. 이젠 사상이나 프로그램이 
인간보다 더 중요한 취급을 받고 있다. 대체 이러한 기준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처음에는 증권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경제 신문을 읽다가, 늙어서는 백발이 
되어 초콜릿을 사먹을 그런 사람들에 의해 채택된 사상, 프로그램들의 가치?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시민이다. 그렇다. 그런데 시민이란 무엇인가? 
일방적인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시민인가? 
      [  목표

  위함이란 인간 자체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외부의 어떤 목표를 새울 
때 그 목표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내부에 가두는 그 순간부터 
초라해진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를 돕는다면^5,5,5^.
  사회주의는 대중에 대한 우선권을 맨 처음 주장했었다. 개인에게 외부적인 어떤 
것에 대한 희생을 설교하던 파시즘보다 인간을 내세웠다. 
  상징의 담보물이란 상징 그 자체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예를 들면 조국이란 
종교적인 판화에 나오는 신보다는 덜 우스꽝스럽다. 이러한 파시즘의 매력을 
부정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역사적인 한 모습이니까. 
    [  양배추와 여자

  보델이란 친구는 민주주의라는 구실로 인간들을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 그는 
종교나 문명, 정의나 전통 등 아주 천천히 인간을 교화하는 이 여러 가지가 
인간의 상식이나 양식 속에는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실 그는 상식과 올바른 판단을 가진 사람이다. 
  개념적인 인간의 노력들 중에 어떤 것도, 즉 모짜르트에 대한 사랑이나 다른 
종류의 사랑 등이 이러한 상식이나 양식 속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이 정식적인 상부 구조를 발견할 때마다 집요하게 추적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간파해 내지 못하는 부분을 인간의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튜우브나 일종의 기계와 같은 모습으로 귀착시키는 것이다. 
  내가 양배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문명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양배추가 아닌 
여자, 예를 들어 만일 그녀가 은밀한 곳에서 만난 귀족 부인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차이를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머리가 굳어 버린 남자의 입장에서 그가 많은 
여자들과 사귀어 보았더라도, 그는 분명 양배추와 여자의 차이를 모르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

  인간이란 영양을 섭취하고 번식을 함으로써 영원히 지속한다는 것을 믿는 당신. 
당신을 인간 정신의 본질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대체 무엇으로 나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나를 소름끼치게 만드는 것은 당신의 무지이지 당신의 계획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계획들은 내 마음에 든다. 
  당신은 당신을 사람으로 만든 그 물로써 스스로의 갈증을 풀고 있다. 그러나 그 
샘물이 당신을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무지한 당신은 별것도 아닌 이익 
때문에 그 샘물을 말려버리려 한다.

  나는 별로 좋은 계획이 없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환경에 매달린다. 즉 보수적인 
견해를 옹호하게 된다. 이해 관계가 인간을 지배한다고 믿는 당신은 그 
보수적이라는 것이 편리한 방편이며 거짓이 될 수도 없다는 점을 모르고 있다. 
  기실 편리하기는 하지만 별 효능이 없는 것인데도 물론 나로서는 종족을 영원히 
지속시키고 나의 인간상을 영구화시키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만일 이 
존속의 본능을 욕심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종족의 보존욕이 될 것이다. 
  당신은 내게 아름다운 가구와 좋은 자동차와 보다 좋은 깨끗한 공기를 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차지하기 위해 나는 어떤 인간이어야 한다는 말인가? 
    [  신앙에 대하여

  세뜨띠랑즈 신부는 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 신앙에 따라 인간을 신자와 비신자로 
나누었다. 이에 따라 신자들의 집단에 적대하는 비신자들의 무리들이 무장하여 
대항하는 그림도 그려졌다. 
  야비하고 비종교적인 천한 욕설과 괴벽하고 어리석은 생물학적인 주장이 이 
비신자들 무리의 영도자라고 규정한 라마르크와 푸엥카레의 품위를 떨어뜨렸다. 
  전쟁을 위해서는 편리하지만 이 세상의 질서를 만들어 내기에는 옳지 않은 그의 
독자적인 진술은 이미 문제를 왜곡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실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 두 그룹을 나누는 
효과적인 경계선이 이 두 그룹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경계선 양쪽으로 
각기 갈라져 모이게 될 뿐이다. 

  세뜨띠랑즈 신부님, 우리를 비난하면서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십니까? 철모르는 어린아이 취급을 하면서 우리들을 어떻게 설득하려 하십니까? 
스스로의 자만도 돌아보지 못하고 우리들의 고귀한 것을 자만이라고 
질타하십니까? 어떻게 자만이나 음란이라는 무서운 단어를 우리에게 던지십니까?
  중세이래 우리들은 달라졌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이론을 위해 그에 대한 비판을 
꺼리는 자는 이제 비겁자의 반열에 설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성실한 사람입니다. 설사 그 때문에 우리들의 평화가 희생될지라도.
  우리는 항상 전설과 사실을, 가정과 기록 문헌을 구분하는 것을 철칙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와 함께 파스칼의 적대자들을 비난했습니다. 갑자기 
당신은 우리들의 안이한 생활뿐만 아니라 그 인생의 의미까지도 구속을 주는 문제들을 
제기했습니다. 
  당신 스스로 갈피를 잡지도 못하면서. 진실과 신화를 동시에 원하는 우리가 
당신의 교회 문턱에서 머뭇거릴 때 당신은 우리에게 화를 냈습니다. 당신의 
증거들이 대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기독교에 기반을 둔 우리는 
기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필요에 의해 신을 다시 찾을 것입니다. 또 우리 자신이나 전 세계 
사람들에 의해 외관상 자연 발생한 것 같은 윤리 도덕도 되찾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물을 바로 볼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당신의 사상을 통제하는 그 
개념까지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바로 진실이라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란 우리들 
속에 있는 것이지 결코 우리들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신은 우리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세뜨띠랑즈 신부님, 가라앉혀야 했던 것은 우리들의 악의 결실이 아니라 
우리들의 고상함에게 기인된 것입니다. 우리가 도덕적 관념 때문에 부자유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구속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는 강한 자를 길들이기 위해서 보다 엄격한 법률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들은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수긍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오로지 약속된 보상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우상에게 우리의 사랑을 
주고 그 우상을 우리들의 소중한 희생으로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아직도 도피처를 
구해야 할 시기에 너무 일찍 신을 박탈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의 삶을 위해 
고독하고 보잘것 없는 약한 인간으로서 계속 투쟁해야 할 것입니다.
  세뜨띠랑즈 신부님, 당신은 계시를 믿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에게 그 계시를 
전달해 준 유일한 증거물들을 외면하십니까?
  왜 우리는 아무도 저자를 모르며, 그 저자들 중 누구도 그리스도 생존시에는 
살아 있지 않았던 그 제자들의 문헌을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까? 
또한 당신의 교회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야곱의 이야기를 중요시하면서 
교리들의 유래에 대해서는 왜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까? 또 그 교리들을 
선택할 때 그 중 어떤 것은 채택할 수 없었던 원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십니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진실 그 자체가 당신 교회의 거점인데도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고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우리가 
생각했던 그 부당한 전제가, 또한 당신이 적대자들로부터 이러한 부당한 전제를 
끄집어내어 폭로되었을 때, 우리들만큼이나 당신을 분개시켰던 그 부당한 전제가 
갑자기 당신 교회에서 겸손과 복종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고귀한 것으로 바뀌어진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교리란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을 주관했던 종교 회의는 어떤 잘못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결정에는 잘못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이란 이 
종교 회의의 교리 선별이 절대적인 경우에 한해서만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정신적 결함 때문에 성스러운 교단의 문헌을 더럽힐 이 모순들, 부활, 
성모 마리아의 성 엘리자벳 방문 등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사후의 그리스도와 예언자들이 소개한 그리스도를 짜맞추기 위해 창조한 잘못된 
교리를 어떻게 증명하시렵니까?  그리고 교회의 계속적인 태도의 변화와 교회 
안에 깊숙이 감춰진 비밀에 대해서 당신은 무엇이라고 변명할 것입니까?
  대답이 없어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모순적인 단언을 할 것이며, 그 
모순 안에서 공통적인 대책을 강구하려 할 것입니다. 이 대책을 당신은 또 
교리라고 할 것이며 '이러한 주장들이 이 우주의 질서와 일치한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러한 조작들은 가능한 일입니다. 정신병자들도 자신들의 공상을 성공적으로 
정리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도 오류도 아니므로 그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정신보다는 과학적인 상대론을 보다 확장시켜야 합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과학적인 나의 이론이란 단지 생각을 언어로 표현해 낸 것에 불과합니다. 만일 
자연이란 것이 우리가 읽어야 할 책처럼 우주 체계적으로 명백한 점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면 바빌론 시대의 연구가 왜 이러한 비밀들을 알아내지 
못했을까요? 그렇다면 이 하늘 밑에서 이 세계를 만든 것은 신이란 말입니까?

  실제로 어떤 증거를 그토록 침이 마르게 말했던 카톨릭 교도가, 그 증거들이 
정확한 과학과 역사적인 비평으로 비추어 불충분하다고 밝혀졌을 때 놀라 
물러서는 우리들을 보고 무엇을 불평하겠는가?
  이 흔들리는 불안한 땅 위에 종교를 세웠던 것은 우리가 아니다. 종교의 이율 
배반, 오늘의 역사적인 비평에 그 많은 가치를 나는 인정하고 있지만 나는 할 수 
없이 그 비평을 시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런 오랜 전통을 부인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독교가 어떤 
소유권을 주장하는 부수적인 세계가 되어버린 오늘, 나는 그 기독교를 복음서와 
일치시켜야 한다.
  이 세상에 대해 분석한 결과에 의해 나타난 초자연적인 경이에 대하여 실망했던 
오늘, 나는 이러한 분석을 몰랐던 그 시대의 경이를 믿어야 한다. 과학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교회의 태도를 맹렬히 공격하는 오늘, 나는 그 때문에 내 믿음에 
방해를 받지 않고 계속 그 비밀을 간직해야 한다.
  원인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의심을 품는 오늘, 나는 제1원인의 의미를 계속 주장해야 
한다. 종국목적론이 우습게 되어버린 오늘, 나는 그래도 종국목적론자로 남아야 한다.

  그렇다. 전해 내려온 개념들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들이 바로 내가 은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 
개념들을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로마 시대에는 아무 것도 기독교에 저촉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그 
기독교가 내가 주장할 권리를 갖고 있는 많은 나의 사고의 대상과 충돌하고 있다. 
또한 나에게는 종교적인 이상을 고집할 권리가 있다. 나는 이 종교적인 이상이 
현실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섭섭해 할 권리도 갖고 있다.
  나는 더 이상의 논리적인 말을 할 수가 없다. 
    [  행복의 조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들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나!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신성을 준다. 신. 인간과 신의 게임의 법칙은 성가시게도 
개인의 독단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의 우둔함으로는 신을 알아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신은 인간의 우둔성 밖에 있다. 인간은 신을 포착할 수가 없다.
  신이란 모든 것에 존재할 수도 있고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신이란 인간이 절대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이고도 상징적인 
지주인 것이다. 
  인생의 의미에 관한 문제에 다가가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접근은 필요하다. 이 문제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거기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만일 인생이 그 인생으로 하여금 어떤 목적을 
지향하게 하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소원이란 단지 
잘 살기만을 바라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 안에 어떠한 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한해 한해 보내는 흉칙한 
노름꾼이 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식량만을 가지고 주위와는 담을 
쌓은 채 사는, 마치 곤충같은 까닭이다. 
  인간이라면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공간에서 또 다른 무엇을 시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카드놀이와 자기 직업에 사용되는 방정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한 
기술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참다운 인간적인 생활이 동반되는 진정한 행복이 
결여되어 있었다. 인생의 목표가 없기 때문에 그의 행복이란 것은 오로지 부에 대한 
감각일 뿐이었다. 
    [  당신의 내면

  당신은 당신 안에서 무엇이 나올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당신은 자신이 계속하여 
본질적으로 안정되어 끊임없이 영속할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들만이 스스로에게 허용되었으며 자신의 인간성만이 최고라 믿고 있다. 당신은 
당신 안에서 어떤 불새가 날개를 펼칠지 모르고 있다. 당신 내부의 세계는 당신도 
모르게 닫혀져 있다. 
    [  육체와 정신

  어떻게 인간이 장차 육체를 포기할 수 있으며 다시 그 육체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인가?. 분명 이는 인간의 이원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찌 악마를 만들어 
내지 않았겠는가?
  사람들은 말한다. '돌려주세요. 우리에게 영생을 주세요' 하나의 놀이에 지나지 
않는 그 춤이 독단적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란다. 
  우리에게 우리의 종교를 돌려주시오. 그것이 바로 내가 심어서 내 아들이 가꾸게 될 
올리브 나무에 대한 숭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종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조국이나 
가족들의 생일잔치나 축하연에 대한 예찬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종교가 되는 것인가.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을 돌려 주시오. 그리고 우리가 이 덧없이 늙을 육신을 
변치않는 귀중한 돌로 만들어 주시오. 
  내가 너에게서 좋아하는 어떠한 것도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너의 입술, 그렇다. 그러나 그 입술로 사람의 외관을 만드는 미소를 짓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도 그 육체의 살덩이가 아니라 그 육체의 조화된 배열이다. 어떠한 
것도 물리나 화학으로 정의될 수는 없어도 순수한 수학(리듬)이나 존재하지 않는 
기하학(형태)으로는 가능하다. 모든 것은 정신적인 면에서 의미를 갖고 있다.
  인간의 신성, 춤추는 여자들의 외면에 담겨 있는 그 모든 아름다움, 황금, 육체, 
웃음, 젖가슴, 몸짓, 많은 꽃, 광선의 반사^5,5,5^. 
    [  종족의 의미

  조상 숭배, 이는 정신적인 단결이며 종족의 근원이 된다. 이 모든 증인들이 
신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은 우리들의 본보기이기 때문에.
  무기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된다면 당신은 진정한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무기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무기를 
사용하는 동물이 된다. 
  신이 우리에게 준 신성한 말,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 
소녀가 빛으로 만들어졌다면 나는 그 소녀를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연히 빛을 발하는 진흙덩이로 무엇을 어쩌란 말인가?
  인간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군중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뭐라구요, 주님? 당신 
때문에 내 마음이 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 은하계에 살고 있는 
자유로운 우리들, 이에 비하면 답답하리만치 법률을 지켜야 하는, 법률에 얽매어 
있는 사람들의 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인간들, 그들은 현재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그들이 될 수 있는 
그 인생을 위해 희생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인간을 만들기 위해 자기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다. 
      [  믿음

  당신은 전혀 믿지 않았다구요?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씨앗이 자연의 체계 속에 가담할 때만이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이것이 왜 비판 정신을 포기하는 것이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당신 
속에서 어떤 인간이 태어날 것인지 알고 노력하십시오.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  신부는 나쁘다?

  앙드레 지드는 체험하지도 않고 판단한다. 
  하나의 개념적인 체계란 그 체계를 만들어 내는 인간에 의해서만 가치를 갖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개념의 전체적인 체계를 알 리 없는 법니다. 그런데 지드는 
행복의 명목으로 막역한 사교를 대표하여 판단하고 있다. 
  종교의 경우 아메리카에서는 어떠한 종교적인 운동을 심어줄 개념의 파종이 
필요하다. 이해를 시킨다는 것과 개심을 시킨다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보라.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이 모든 씨앗들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는 
러시아 인에 대해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지드는 말했다. '신부는 나쁘다'
  이 뜻없는 주장.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나았다. '중세기적인 인간 타입은 나쁘다' 
아니면 이렇게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한 인간 타입은 현실과 모순된다'
  하지만 나는 신부들이 다니는 시골길과 일주일간의 일과 때문에 그들을 좋아했다. 

      [  문명

  문명의 근원. 이것은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명백하다. 문명은 자연과 
인간에게 질서를 준다. 또한 마음의 풍요를 안겨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단지 
보잘것 없는 모방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과학은 상상할 수 있다. 극장이나 음악, 서적들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 어떤 고귀한 것이 있다고는 믿을 수 없다. 문명이란 어떤 유일한 
것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인간과 숲. 만일 인간 이외의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금방 
지쳐버릴 것이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야수와의 접촉을 잃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실감나는 사냥의 즐거움을 잃은 것이다. 또한 부분적으로 자연의 힘과의 접촉도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는 도시 문명 속에 갇혀 있으므로. 그는 지금 유성을 
야채밭으로 가꾸고 있다.
  이러한 점을 시발로 사회적인 문제들의 위치를 정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인류의 
팽창과 여러 종족 중 특정 종족의 팽창에 대한 문제들.
  나는 아직까지 그 팽창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세계의 대부분이 빛을 잃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냥이라는 것에 어떤 이해 
관계를 갖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사실은 음침한 제국 시대 사람들이 
사냥하러 가던 땅이 더 이상 사냥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국내 이주나 국외 이민에 대한 주장. 인간은 만일 그가 자리를 옮기면 모든 
것을 잃게 되지만, 그러나 나는 새로운 문명에 통합된다. 그것은 종탑과 같은 
숭배의 대상이 되는 위대한 역할 때문이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떤 정당한 비난을 원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이주가 
그들에게는 결정적이며 구체적인 어떤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하락시켰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구체적인 것의 의미가 우리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  좌와 우

  어떤 사람은 대중을 좋아해서 좌익이었다.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해서 우익이었다. 
  성실하고 찬양받을 만한 노동자는 땅에 침을 뱉을 권리가 있으므로, 혹은 
손수건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므로 좌익이 되었다. 
  나는 대중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우익이다. 
  만일 내가 그들을 좋아함으로써 좌익이 된다면 나는 그들을 특권 계급보다 고결하게 
만든 생활 조건(가난, 희생, 불공평)을 파괴하기 위해서 라면 투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모르는 인간. 포만, 안락, 부르주아적인 인내 등을 지닌 인간에 
대해서만 찬사를 보낸다. 행복이란 소비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란 
인간의 관계를 쓸데없는 물건의 관계로 바꿔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아나키스트여, 만일 당신들의 지하실과 곳간에 어떤 인간적인 
플로르(특정지역에 사는 모든 식물)를 생기게 한다면 그리고 거기서 정과 지의 
온정을 돋구어 준다면, 그 지하실과 곳간을 보존하고 지키시오. 마치 사람들이 
빛나는 가구와 안이한 생활과 정의 대신에 수도사의 독방을 보존하듯이 말이오. 
  정신적인 문명의 측면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어느 정도의 생화 수준은 
지적인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나의 재산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행운을 가졌습니다'라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인간들에 대해 파스칼보다도 무지하다. 좌익의 그들은 우익의 
그들보다 무지한 것이다. 파스칼은 개미의 행진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개미는 인간과는 다른 것이다. 
  파스칼이란 우익의 인간과 데카르트란 좌익의 인간.
  여행에서 돌아온 당신은 어느 때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합니다. 위대한 
비전통주의자 데카르트씨. 
      [  사상

  사상이란 그 사상 때문에 저지른 단순한 학살이라는 관점에서 토의될 수 있을 
것인가?
  여기 저기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내 생각이 옳은 것같다. 에스파아녀, 그 
어린아이는 놀이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 아이가 죽음을 각오하게 되었을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 그렇다. 그러나 그건 오로지 수단이 목적에 저촉되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인간이 존중되어지기 위해, 혹은 인간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존중하기 위해 좌익이 혁명을 일으킨다면 좋다. 그러나 그것에 비방이나 옳지 못한 
타협이나 인간의 존엄성이나 혹은 아름다움을 망각한 협박 등의 방법을 사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  평등의 조건

  평등이란 자연의 계열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 본래 가장 강한 동물인, 가장 지적인 
동물이 군림하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가장 강하고 지적인 인간이 다스린다.
  기독교에서 유래된 평등,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평등, 그리고 그 후 
철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이 평등은 고대 문명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고대 문명 
이후 문명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선물에 의해 인간 속에 심어진 
것이다. 
  평등이란 적어도 다수가 개인보다 강하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 평등의 개념은 
참되고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 개념이 정신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것은 이것이 
맹목적인 힘을 신성시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이 개념이 이 맹목적인 힘을 완화시킬 
때만이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된다.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대하여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이 잘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라면 또한 노^36^예 
제도의 정당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평등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이 평등이란 개념이 대중에 의한 개인의 힘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이 대중들이 해방되면서부터는 즉각 개인에 대한 그들의 힘도 반드시 완화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군중들이 베르뜨르를 교수형에 처할 때는 평등이 없었다. 

  무정부주의자 올리베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훌륭한 화가라고 해서 부둣가의 노동자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보다 좋은 눈을 유전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잘 살아야 할 공적을 세운 것은 아니다'
  종교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공덕이니 선행이니를 구분할 수 있는가? 화가란 
그림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잘 그린다. 이건 사실이다. 동물 세계에서는 제일 
힘이 센 사자가 지배를 한다. 이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사회에는 힘이나 
기교라는 외적인 면도 아닌 또 다른 판단 기준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정신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 역시 우리 
사회에서 어떤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시인은 대중에게 봉사해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왜 대중이 시인을 위해 봉사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사회가 평화롭고 부드럽게 되기 위함이며, 또 다른 시인들이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시인이 사회에 봉사하는 것은 그가 공적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올리베리의 말을 전적으로 무시한다. 
  '보다 좋은 시력을 가진 자가 노동자보다 잘 사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나는 
정당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직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사회 구조가 창작과 정신과 정신적인 삶을 가장 잘 도울 수 있는가?'
  반대로 노동자가 좋은 시력을 가진 자보다 더 잘 사는 것을 나는 정당하다고 
하겠다. 정의나 약속을 이행함으로써 얻은 명예에 대해서도 같은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불명예란 항상 태도를 바꾸는 데서 온다. 그것은 또한 삶을 의미할 수도 잇다.
  명예란 죽은 자들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순결한 자들은 모두 그들의 
명예를 위해 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미워하고 있다. 명예란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색 노트는 계속하여 2권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3




    전2권 중 제2권

  지은이: 쌩떽쥐뻬리
  옮긴이: 구본수
  펴낸곳: 도서출판 움직이는 책
  엮은이: 이상각

    [  자기 만족

  앙드레 부르통은 비밀과 명백한 수수께끼를 구별하지 못한다. 
  만일 내게 비밀이 있다면 아는 그것을 감출 것이다. 
  만일 내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자랑하고 싶으며 또 내적인 정신 세계와 
자존심이 없기 때문에 야기시킨 결과에 따라 스스로를 평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나는 어떤 어렵지만 하찮은 수수께끼를 만들어 남들에게 내보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기 만족 만큼 신비스러운 것은 없다. 자기 역할, 자기 지위, 설혹 
외부의 형상들만이 어떤 인간에게 자양분을 제공했다 하더라도 인간의 주의를 
어찌하여 그 인간의 내부의 심리 상태가 독점한단 말인가?
  신기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들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한다. 죽기 위해 죽겠는가? 
아니면 인간을 위해 죽겠는가? 당신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죽음을 원할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브릿지 놀이가 삶의 의미일까?
  당신에게는 애국심조차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국가를 위태롭게 했으므로 당신은 
자신의 놀이를 위해 국가에 가장 위협을 가하고 있는 자들까지 옹호하고 있다. 
    [  지역 감정

  누군가가 어떤 정책에 관하여 당신과 다른 견해를 밝혔다고 해서 그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실로 비천한 짓이다. 
  또한 내가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을 때 당신이 내게 의견을 강요한다면 그것 
역시 좋은 것이 아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논리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선택할 뿐이다. '인간이 자기 사상을 초월해서 존경받는 문명' 이것이 나의 
문명이다. 이러한 공리에서부터 출발했지만 결국 그 공리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나는 인간에게서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영역을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내가 산책을 
하기 위해서는 넓은 영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민에 대하여 분개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나의 조국을 옹호하는 것은 그 하나의 문명, 하나의 언어, 하나의 독특한 인간형, 
그리고 어떠한 개념들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낭랑한 발음이 이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박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부르따뉴 사람도 플로방스 사람도 프랑스 인이다. 그런데 만일 조국이 
분단된다면 나와 같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곤 불어밖에 없는 프랑스 인보다는 
같은 종교, 같은 도덕, 같은 이상에 의해 형성된 외국인에게 보다 더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러므로 그들의 애국주의는 좋지 못한 당파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진정한 
동류 의식을 무시한 채 같은 색깔의 유니폼을 입은 패거리에게나 열정을 기울이는 
꼴이 아닌가.
    [  고정 관념

  계급의 범주에 대한 설명은 모든 것을 왜곡시켜 버렸다. 계급, 실업가, 착취자 
따위의 고정 관념은 실로 잘못된 것이다. 
  1840 년 지주들은 자신들을 위해 저택과 연장들을 만든 고용인들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지주들의 소유물은 고용인들의 
소유물과 일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주들이 고용인들에게 팔기 위해 자동차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기술자들과 지배인들을 어느 계급에 포함시킬까가 새로운 고민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계급의 개념은 이제 더 이상 난처한 문제의 해법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좌익은 지금이 여전히 르노 자동차가 르노 가문을 위해 자동차를 만들던 
때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  분배

  이젠 프롤레타리아도 부르주아의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마치 피지배 계급의 
가난이 지배 계급의 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아메리카의 번영으로 잘못되었음이 증명되었다. 이젠 소득의 분배가 
분제가 될 뿐 계급의 차이란 하찮은 것이다. 
      [  정의

  어떤 가난한 사람이 큰 저택을 가르키면서 나에게 묻는다. 
  "대체 내가 허름한 집에서 사는 것이 공정합니까?"
  평준화된 평등 개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니오'란 대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개념으로 본다면 '그렇소'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옛날 도덕적으로 엘리트 계급에 속하던 사람들까지도 그들의 노^36^예 
제도가 부당하게 보이지 않았는가를 증명하는 예이다. 
      [  부와 예술

  부가 없어진다면 나는 불안해질 것이다. 그것은 금박이나 사치스런 시계 
때문이 아니라 트랙터나 의자 등을 만드는 일에 둔감해진 가난한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은 보다 더 멍청해질 것이며 뚱뚱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노동자는 그의 노력이 결실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의 과정에 의해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배부른 예술가보다는 배고픈 예술가에게서 작품이 나오는 
것이  다. 예술만이 아니더라도 고장난 시계쯤은 누가 고쳐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 인간의 생명만큼이나 가치가 있으며 백만 프랑이 넘는 귀한 도자기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50 년 동안 도예가를 먹이고 재우고 입힐 귀족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도예가는 노력의 대상을 다른 물건으로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대량으로 물병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단지 투표를 통해 결정된 평범한 물병을 구입하면 된다. 이제 예술은 
사라져버렸다. 
      [  예술의 가치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것이 마치 열성적인 손으로 수놓은 제복과 같이 또한 
피땀나는 열정으로 빚은 도자기와 같이 수많은 인가의 삶의 대가를 치뤄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 속에 인간의 품위를 집어넣기 위해 시인은 자신을 희생해야만이 
아름다운 시가 탄생한다. 이런 신비스러운 예찬의 진실을 믿고 바라는 우리들은 
그런 세계, 그런 사회를 바란다. 
  예술이란 바로 인간적인 가치이다. 그것이 개인이 아닌 집단에 의해 공유된다면 그 
가치는 쓰레기통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먹을 빵이 없는데 사랑의 소네트를 쓰는 것이 
비도덕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어야 할 것이다. 
      [  대지

  대지는 사전에 많은 작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유일한 생산 수단이다. 게다가 
대지는 본질적인 삶을 보장한다. 
  대지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와 이어져 있으며 그 거대한 자연의 순환 체계 속에 
인간을 끌어들인다. 인간은 대지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발달한다. 나는 그 누구라도 
아무런 준비를 시키지 않고 대지로 돌려보낼 수 있다. 
      [  언어

  만일 지구상에 하나의 언어만이 있다면 인간들은 얼마나 나태해질 것인가?
  사람들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무질서를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다. 마치 데카르트 
이전의 사람들이 자연의 혼돈을 보고 자연계의 모순을 인정했던 것처럼. 그들은 
이제 부조리에서 법칙을 끌어내려 하며 그 고리들을 이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찾아야 할 것은 부조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 단 하나의 언어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하나의 사건이 동시에 부조리하며 명백하며 논리적이며 모순투성이일 수 
있다는 점을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많은 분야에서 그들의 무능을 정당화하기 위한 재료와 신화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은 유일한 도구인 언어로서 자신이나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면서도 그들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를 파악하려 하고 
세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  그 여자의 세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이나 혹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그 세계를 표현할 또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요건이 바로 
창조적 사고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그들이 생활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여자, 간호원이 
아니면 어머니일 이 여자를 보십시오. 그러나 그 여자가 하는 이야기는 듣지 
마십시오. 그 여자가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도구로서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것, 내가 그 여자의 책상 위에서 본 것은 한물간 책 '리용 공화국' 한 권.
  그 책은 이 여자에게 어떤 사상을 심어 놓았다. 
      [  단순화

  인간은 능란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언어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외적인 신앙을 믿고 있으므로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언어의 기교라고 여기고 있다. 
  히틀러는 '나는 모든 것을 단순화시켰다'라고 소리쳤다. 그건 사실이다. 
아리안 족의 개념으로는 모든 것이 단순화된다. 그러나 이는 세계가 이에 따라 
단순하게 정돈되어야 함을 의미하므로 그 부당성은 자명하다. 
  [  독일인의 끔

  히틀러의 논리가 독일인의 꿈을 충족시켜 주었다면 독일인들의 꿈은 실로 
보잘것 없는 것이다. 
  [  군형이 깨어지면

  잘 조직되고 균형잡힌 사회는 눈에 띄지 않는다. 결코 동요하지 않는다. 
  새들이 이와 같이 안정된 상태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만일 인간이 그 새들을 쫓는 
매를 잡아버린다면 새들은 농작물을 망쳐놓을 것이다. 균형이 깨진 것이다. 평화롭고 
잔잔한 바다도 마찬가지다. 만일 내가 그 바다의 둑을 허물어 버린다면^5,5,5^,.
  인간이 전쟁을 좋아하는 것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한 민족이 전쟁터로 
나간다면 그들 역시 히틀러와 같은 미치광이 짓을 하게 될 것이다. 
    [  자연 법칙

  나는 자연의 법칙이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 법칙을 자연의 한계에 대한 
한정된 개요에 의하여 표현하기 때문이다. 
  온전히 정확한 것이 되기 위해 그 개념의 유한성을 증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렇게나 정의한 그 곡선을 규정하는 법칙처럼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의 곡선이 내게 자연의 모든 현상을 제시해 
준다면 자연의 한계들을 합친 그러한 개요는 그 한계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을 
대략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신 분석

  나는 무엇이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 내 마음에 들거나 
안 들거나는 하나의 현상도 아니고 이미지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구조인 까닭이다.
  일종의 구조란 결코 구조에 지나지 않은 '명예'라는 낱말처럼 한정된 것이다. 내가 
하나의 구조를 꼬집어 규정한다면 나는 아마 구조로서의 그것을 파괴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하여튼 나는 그 구조에 의식의 작용을 덧붙인다. 그런데 나는 그 구조를 관찰할 
줄도 명확히 규정지을 수도 없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 구조를 파괴한다는 
것은 유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추란 어떤 진리를 가둘 가능성이 있다.
  개념적인 진리의 범위 안에서 누군가 노이로제를 치료하려 한다면 
리비도(성욕)는 악마보다 더 큰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신의 치료에 
있어서는 악마가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언어는 진리의 단면도이며 종합이다. 
언어가 이 사이에 하나의 질서를 만든다. 리비도가 악마보다 절대적인 의미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중요한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이다.
  언어란 모든 것을 전달할 수 없으며 또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름을 갖지 않은 사물들이 수 없이 많은 까닭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신 분석은 인식되지 않은 많은 대상물 중에서 어떤 대상 하나를 
의식에 의하여 포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물을 파괴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그 사물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  교육

  교육이란 피교육자에게 하나의 독자적인 인격을 길러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이라는 짐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도구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의 일부인 이 근본을 망각하고 있다. 각자의 
인격이란 바로 정신이다. 우리는 스스로 독자적인 품격을 만들지 않는다면 정신을 
길러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의 인격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식만을 
가르친다. 자신의 번뇌조차 선용할 줄 모르는 사람은 끈적거리는 일종의 보리죽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을 가져라. 그러면 자신만의 품격을 가질 수 있다' 
      [  동반

  프로이트는 자신의 딸을 사랑했으며 동시에 정신 분석학의 이론을 세웠다.
  이러한 사실이 정신 분석을 하는 한 남자의 딸에 대한 사랑으로 귀착시켜 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다만 그가 자기 딸을 사랑한 사람이고 그가 정신분석을 
체계화한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한 것일 뿐이리라.
  이것이 바로 잘못 사용된 인과 관계의 개념을 넌센스로 만들어 버리려는 좋은 
예이다. 
  동반의 개념. 프로이트가 불가피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인과 관계와 동반을 
혼돈 속에 밀어 넣었다. 그는 내적 충동의 상징적인 면의 일부를 자기 자신의 
상징적인 면의 다른 일부로 설명하려 할 것이다. 
      [  논리

  논리란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이다. 우리가 어떤 동기를 발견했을 때, 그것은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다른 면에 있어서는 이러한 논리적 형태가 다른 동기들과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믿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진리

  진리란 잘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역할에서 다소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그 자체에 거짓이나 진실은 없다. 이 말에 어떤 
사람들은 반박할 것이다. 태양이 저기 있는 나무를 비추는 것은 사실이라고.
  사실상 진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개념적인 진리와 관찰에 의해 포착된 
진리. 나는 이 나무가 저기에 있는 것을 관찰한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경험 
때문에 나는 거북하다. 
  내가 존재한다. 나와 관계없이 다른 것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진술은 
하지만 조작은 할 수 없는 요소들 사이에 어떤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 이러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은 관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순수한 
창작에 의해 이루어진다.
  내가 진술을 할 때는 곤란하지만 어떤 것이든 선택하는 것은 나의 자유이다. 
왜냐하면 대상 그 자체로는 진실도 거짓도 아니니까. 단지 정신적인 관점이 
문제가 될 뿐이다. 
  진술이란 일조의 행위인 것이다. 창조적인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진리는 처음에는 거부되다가 그 다음 하나의 뼈대가 되어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 
어떤 명백한 것이 되어버린다. 
      [  모순

  인간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죽의 하나. 
  무엇이든 간단한 체계를 만들어 낸 다음 그 체계와 상반되는 진리를 오류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신과 악마를 분명하게 상상해 내는 것은 광신자들의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는 조종하기 쉬우므로 즉각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  질서

  '이야기 속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부조리하다. 하나의 이야기란 
그것이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그 안에서 질서가 이루어진다. 마치 나무나 어떤 
위대한 생애와 같이.
  그러나 그들은 질서를 만들어냈고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비결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연의 법칙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질서는 자연에 대한 
표현 그 자체인데도 말이다. 
      [  학문

  학문은 결코 예측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학문은 
되풀이 되는 것만을 예측하는 것이다. 
  하나의 이론이란 현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들의 부류를 설명하기 위하여 
세워지는 것이다. 방정식에서 새어나오는 이미지들이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방정식만이 중요한 것이다. 방정식은 소수에 이르기까지 가치가 있다. 바로 그렇다. 

      [  비행기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비행기를 생각해 왔다. 그것은 곧 그들이 '지향했다'는 
사실이다.
  분명 사람들은 그들이 지향해 왔던 것을 실현시켜 왔다. 이것은 예측이 아니라 
창작이라는 말이다. 비행기는 그것이 상상되어졌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요구되어졌기 때문에. 비행기는 예언적으로 예감되어진 씨앗에서 나온 
나무가 아니라 사람들이 바랐던 나무인 것이다. 
  [    어린 왕자

    [  레옹 베르뜨에게

  이 책을 어른에게 바치는 데 대하여 어린이들에게 용서를 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어른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한 이유는 이 어른이 나의 모든 점을 이해할 수 있고 어린이들을 
위해 씌어진 책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이 어른이 
프랑스에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 그는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어른을 잘 위로해 주어야 한다. 만일 이 모든 이유가 충분하지 않다면 나는 
이 책을 이 어른이 옛날 어린이로 있던 시절에 기꺼이 바치고 싶다. 모든 
어른들은 어린이였다. 그래서 나는 헌사를 이렇게 고쳐 쓴다. 
  어린이였을 때의 레옹 베르뜨에게 
    [  첫 그림

  나는 여섯 살 때 "체험한 이야기"라고 하는 처녀림에 대한 책 속에서 굉장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한 마리의 동물을 삼키고 있는 보어뱀을 그린 것이다. 여기 
있는 그림은 그것을 본떠 그린 것이다. 그 책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보어뱀들은 먹이를 씹지 않고 통째로 삼킨다. 그리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서 소화가 되는 여섯 달 동안 잠만 잔다'
  나는 밀림의 여러 가지 모험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하여 
색연필로 나의 첫 그림을 그려냈다. 제 1호 내 그림, 그것은 이러했다.
  나는 이 걸작품을 어른들에게 보여주고 그림이 무서우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른들은 '모자가 왜 무섭지?' 하는 것이었다. 
  내 그림은 모자를 그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코끼리를 삼킨 보어뱀을 그린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보어뱀의 속을 그려보이니까 그제서야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은 언제나 설명을 필요로 한다. 내 그림 2호는 다음과 같다. 
  어른들은 내게 속이 보이거나 안 보이는 보어뱀의 그림 따위는 그만두고 차라리 
지리, 역사. 산수, 문법 등에 흥미를 가지라고 권했다. 그래서 여섯 살 적에 나는 이 
멋진 화가로서의 길을 포기했다. 내 1호 그림과 2호 그림의 실패로 맥이 빠졌던 
것이다.
  어른들은 혼자 힘으로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이로서는 언제나, 정말 
언제나 어른들에게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나는 다른 직업을 택해야만 했기 때문에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다. 그래서 세계의 
여기 저기를 날아다녔다. 지리 공부가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단번에 중국과 
아리조나를 구분할 줄 알았다. 밤에 길을 잃으면 그것은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성실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랫동안 어른들의 집에 살며 그들을 아주 가까이서 살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생각을 별로 고쳐놓지는 못하였다. 
  조금 현명해 보이는 어른을 만날 때면 나는 간직하고 있던 1호 그림으로 시험해 
보았다. 정말 이 어른은 이해심이 있나를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대답은 '그것은 모자로구나'였다. 그럴 때면 나는 보어뱀이니 
처녀림이니 별이니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다만 그분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브릿지 게임이나 골프, 정치나 넥타이 따위에 관해서만 말을 
하였다. 그러면 그 어른은 아주 사리에 밝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아주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  만남

  6 년 전,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가 고장이 날 때까지 나는 진실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 하나 없이 혼자 살아왔다. 
  갑자기 무엇인가가 기관에서 부러져 버렸다. 정비사도 승객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 어려운 문제를 나 혼자 해결해 내야 했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겨우 일주일치의 물밖에는 없었으니까.
  첫날 저녁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수만 리 떨어진 사막 위에서 잠이 들었다. 
넓은 대양 한가운데서 뗏목을 타고 있는 난파객보다도 나는 더 고독했다. 그러므로 
동이 틀 무렵 이상한 작은 목소리를 듣고 잠이 깨었을 때의 놀라움이란^5,5,5^.
  그 목소리는 이런 말을 했다. 
  "저^5,5,5^ 양 한 마리만 그려 줘요!"
  "뭐라구?"
  "양 한 마리만 그려 달라니까요!"
  나는 벼락을 맞은 듯이 벌떡 일어났다. 눈을 비비고 바라보니 아주 이상한 꼬마 
녀석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내가 그 녀석을 그린 것 
중에서 가장 근사한 그림이다. 
  물론 내 그림은 모델보다는 훨씬 아름답지 못하다. 하지만 이건 결코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여섯 살 때 어른들 때문에 화가로서의 직업에 낙심했었다. 그래서 속이 
보이는 보어뱀이나 속이 안 보이는 보어뱀을 빼고는 다른 그림을 한 번도 배우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나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이 유령을 바라보았다. 내가 사람 사는 
고장으로부터 수만 리나 떨어져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길.
  한데 이 꼬마는 길을 잃은 것같지도 않았고 몹시 피곤하다든가 시장하다든가 
목이 마르다든가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꼬마에게는 사람 사는 고장으로부터 수만 리 떨어진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내가 놀란 가슴을 접고 말을 걸었다. 
  "그런데 너 여기서 뭐하고 있니?"
  그랬더니 꼬마는 아주 중요한 일이기나 한 것처럼 부드럽게 되풀이하여 말을 했다.
  "저^5,5,5^ 양 한 마리만 그려줘요."
  누구나 이상한 일을 당하면 거역하지 못하는 법이다. 사람 사는 곳으로부터 
수만 리 떨어져 있고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이런 상황에서 꼬마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일처럼 여겨졌지만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지리나 역사, 산수, 문법 등을 배운 일이 생각나 (약간 언짢은 기분으로) 
그림 그릴 줄 모른다고 대꾸했다. 하지만 꼬마는 막무가내였다. 
  "괜찮아요. 양 한 마리만 그려줘요."
  나는 양을 그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릴 수 있는 오직 두 가지의 그림 
가운데 하나를 그려 보여주었다. 그것은 속이 보이지 않는 보어뱀이었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아냐. 아냐. 보어뱀 속에 들어있는 코끼리 그림을 원한 게 아니란 말예요. 
보어뱀은 너무 위험하고 코끼리는 거추장스러워요. 내 집은 아주 작거든. 나는 
양이 필요하단 말야. 양을 그려줘요."
  하는 수 없이 나는 양을 그렸다. 꼬마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냐. 이 양은 벌써 병이 난 걸. 다른 걸로 그려줘요."
  나는 다시 양을 그렸다. 그러자 비로소 이 친구는 관대한 표정으로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건 어린 양이 아니고 숫양이잖아요. 뿔이 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또 다시 그림을 그렸지만 또 다시 퇴짜를 맞았다. 
  "이 양은 너무 늙었어요. 난 오래 살 수 있는 양을 갖고 싶어요."
  나는 비행기를 서둘러 고쳐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려 놓았다. 그리고는 한 마디를 불쑥 내뱉았다. 
  "이건 상자야. 네가 갖고 싶어하는 양은 이 안에 있어."
  그런데 나는 비로소 이 어린 재판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거^36^예요. 근데 이 양에게 풀을 많이 주어야 
하나요?"
  "그건 왜?"
  "우리 집이 아주 작아서 그래요."
  "이거면 틀림없이 넉넉할 거야. 아주 작은 양을 네게 주었거든."
  꼬마는 고개를 숙이고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작지도 않은걸. 야! 잠을 자고 있어!"
  이렇게 해서 나는 어린 왕자를 알게 되었다. 
    [  별의 비밀

  그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기에는 오랜 시일이 걸렸다. 어린 왕자는 내게 많은 
질문을 하면서도 나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는 것같지 않았다. 우연히 하는 말로 
나는 조금씩 그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었다. 
  내 비행기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비행기는 그리지 않겠다. 그것은 나로서는 
너무 복잡한 그림이니까) 그는 이렇게 물었다. 
  "이 물건은 뭐죠?"
  "이건 물건이 아냐. 날아다니는 거야. 비행기라고 해. 내 비행기."
  나는 내가 날아다닌다는 점을 그에게 알려 준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그가 소리쳤다.
  "뭐라구? 그럼 아저씨가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예요?"
  "응."
  내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야! 그거 재미있는데^5,5,5^."
  어린 왕자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는데 나는 몹시 화가 났다. 
나는 그가 내 불행을 진지한 태도로 받아들여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덧붙여 물었다. 
  "아저씨도 하늘에서 왔다구요? 어떤 별에 있었는데요?"
  순간 나는 그의 신비로움을 알아내는 데 어떤 섬광이 비침을 깨달았다. 그래서 
얼른 물어보았다. 
  "그럼 너는 다른 별에서 왔니?"
  어린 왕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비행기를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아저씨가 이걸 타고서는 그렇게 멀리서 오지 못했겠어. 정말^5,5,5^."
  그러고는 아주 오래도록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주머니에서 양을 꺼내 
그 보물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다른 별들'에 대해서 약간 비치기만 이 상황이 나에게 얼마만큼의 호기심을 
자아냈는지. 나는 좀더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넌 어디서 왔지? 네 집이 어디니? 내 양을 어디로 데려 가려고 하는 거지?"
  어린 왕자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준 상자가 밤에는 양의 집이 될 테니까 참 잘됐어요."
  "물론이지. 그리고 네가 말만 잘 듣는다면 낮에 양을 묶어 둘 끈도 줄 수 있어. 
또 말뚝도."
  이 말은 어린 왕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양을 묶어 둔다구? 참 이상한 생각이군요?"
  "양을 묶어두지 않으면 양은 어디론가 가게 될 거구, 길을 잃을지도 몰라."
  그러자 어린 왕자는 아까처럼 다시 깔깔대고 웃었다. 
  "아니, 어디로 간다는 거죠?"
  "어디든지^5,5,5^ 곧장 앞으로^5,5,5^."
  이 말을 들은 어린 왕자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내 별은 아주 작거든요."
  그리곤 약간 서글픈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 곧장 가더라도 그렇게 멀리는 못가요." 
  [  소혹성 B612 호

  이렇게 해서 나는 아주 중요한 두 번째 사실을 알아냈다. 그의 별이 겨우 집 한 
채보다 클까말까 할 정도라는 것을.
  그건 별로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지구, 목성, 화성, 금성같이 사람들이 
이름을 붙인 큰 별 말고도 수백 개의 다른 별들이 있는데, 어떤 것은 하도 작아서 
망원경으로도 알아보기가 힘들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문학자가 
그런 별 중의 하나를 발견해 내면 그 별에 이름 대신 번호를 붙인다. 이를테면 
소혹성 3251호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어린 왕자가 살던 별이 소혹성 B 612호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 소혹성은 1909 년 터어키의 천문학자에 의해 단 한 번 망원경에 잡혔을 
뿐이다. 
  이 천문학자는 그때 천문학 회의에서 자기의 발견에 대하여 발표를 했었다. 그러나 
그의 복장 때문에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항상 그 모양이다. 
  소혹성 B 612호의 명성을 위해서는 다행스럽게도 터어키의 한 독재자가 국민들에게 
양복을 입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래서 이 천문학자는 1920 년에 
아주 멋진 양복을 입고 다시 발표를 하였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죄다 믿었다.
  소혹성 B 612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그 번호까지 말한 것은 어른들 
때문이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니까. 
  어른들에게 새 친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에 관해서는 
전혀 묻지 않는다. 
  '친구의 목소리는 어떠니?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를 수집하니?' 등의 물음이 
아니라 '나이가 몇이니? 형제가 몇이니? 몸무게가 얼마니? 그 아이 아버지는 돈을 잘 
버는 사람이니?'라고 묻는다. 그래야만 어른들은 그 친구를 알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만약 '창가에 제라늄이 있고 지붕 위에는 비둘기가 나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어른들은 이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한다. 이 집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만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다'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만 '참 훌륭한 집이로구나'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린 왕자가 존재했었다는 증거는 그가 아름다웠고, 그가 웃었고, 
양을 가지고 싶어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양을 가지고 싶어하면 그것은 그가 
있는 증거가 된다'라고 어른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우리를 
어린애 취급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떠나온 별이 소혹성 B 612호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른들은 금방 
이해를 하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해서 우리를 괴롭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어른들은 항상 그 모양이다. 그렇다고 어른들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에 대해 아주 관대해야 한다. 
  물론 인생을 이해하는 우리들은 번호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나는 
사실 이 이야기를 요정 이야기처럼 시작하고 싶었다. 이렇게 말이다. 
  '옛날에 자기보다 좀 클까말까 한 별에서 살고 있던 어린 왕자가 있었습니다. 그 
왕자는 친구가 필요했습니다^5,5,5^.'
  인생을 이해하는 이들에겐 이것이 훨씬 더 진실된 느낌을 갖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내 책을 아무렇게나 읽어버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추억을 이야기하자니 수많은 슬픔들이 북받쳐 오른다. 이미 6 년 전에 내 
친구는 자기 양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여기에다 그를 그려보려 애쓰는 것은 어린 
왕자를 잊지 않고 싶어서이다. 친구를 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누구나 친구를 
갖는 것은 아니다. 
  나도 숫자에만 관심을 갖는 어른들처럼 될 수도 있다. 내가 그림물감 상자와 연필을 
산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여섯 살 때 보어뱀과 속이 보이는 보어뱀 그림 외에는 
그려본 적이 없는 내가 이 나이에 그림을 다시 손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물론 가능한 한 가장 비슷한 초상화를 그려보려고 애를 쓰겠다. 하지만 꼭 
그렇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어떤 그림은 괜찮은데 어떤 그림은 비슷하지가 
않다. 키가 조금 틀린다. 여기의 어린 왕자는 너무 크다. 저기는 너무 작다. 그의 
옷에 대해서도 역시 망설여진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그려본다. 나는 가장 중요한 어떤 부분을 잘못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 점은 용서해 주시길. 내 친구는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는 아마 나를 자기처럼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상자를 꿰뚫어 
양을 볼 줄 모른다. 나도 조금은 어른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늙어 버렸든지. 

    [  바오밥나무

  매일 나는 별과 출발과 여행에 관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우연히 그렇게 된 것처럼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세 번째 날 내가 
바오밥나무의 비극에 대하여 알게 된 것도 이런 식이었다. 
  이번에도 양의 덕택이었다. 갑자기 어린 왕자가 어떤 중대한 의문이라도 생긴 
듯이 내게 이런 질문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양이 작은 나무를 먹는다는 게 사실이에요?"
  "응, 사실이야."
  "야, 참 좋다."
  양들이 작은 나무를 먹는다는 게 왜 그렇게 좋은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 왕자가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바오밥나무도 먹죠?"
  나는 바오밥나무는 작은 나무가 아니라 교회만큼이나 큰 나무이고 , 만일 그가 
코끼리떼를 몰고 간다고 해도 바오밥나무 한 그루를 다 먹어 치우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코끼리떼'라는 생각이 어린 왕자를 웃음짓게 만들었다. 
  "그 놈들을 모두 포개 놓아야겠는데."
  영리하게 이런 말도 했다.
  "바오밥나무도 자라기 전에는 조그맣게 돋아나지."
  "맞았어. 그런데 왜 넌 양들이 작은 바오밥나무를 먹기를 바라는 거지?"
  그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아이 참'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혼자서 
푸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어린 왕자의 별에도 어떤 별에서나 마찬가지로 좋은 풀과 나쁜 풀이 있었다. 따라서 
좋은 풀의 씨앗과 나쁜 풀의 씨앗이 있었다. 하지만 씨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씨는 
땅 속에서 몰래 자고 있다가 그 중의 하나가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 싹은 기지개를 켜고 우선 우무 해로움도 없는 예쁘고 조그만 싹을 햇빛을 향하여 
조심조심 내민다. 무나 장미나무의 싹이라면 마음대로 자라게 내버려둘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쁜 풀이라면 그것을 알아내자마자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 왕자의 별에도 이런 무서운 씨앗이 있었다. 그것은 바오밥나무의 씨였다. 
그 별의 땅은 바오밥나무 씨앗 투성이 였다. 그런데 바오밥나무는 조금만 손을 
늦게 대면 없애버릴 수가 없게 된다. 그것은 별 전체를 덮어버리고 뿌리로 구멍을 
판다. 그런데 별이 너무 작고 바오밥나무의 수가 많다면 별은 터지고 말 것이다. 
  어린 왕자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규율의 문제예요. 아침 화장을 끝마치고 난 후에는 별의 화장을 세심하게 
해야 하죠. 장미나무와 분간할 수 있게 되면 바오밥나무를 뽑아버리는 데 
규칙적이어야 하구요. 아주 어릴 때는 장미나무와 많이 닮았거든. 아주 귀찮은 
일이지만 그리 어렵진 않아요'
  어린 왕자는 어느 날인가 이 땅에 사는 어린이들의 머릿속에 이 사실을 잘 
간직해 주기 위해 예쁜 그림을 하나 그리라고 충고했다.
  '언젠가 어린이들이 여행을 하게 되면 소용이 될 거^36^예요. 종종 일은 뒤로 
미루는 것이 좋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바오밥나무의 경우에는 늘 말썽이거든요. 나는 
게으름뱅이가 살고 있는 별을 알고 있는데 그는 세 그루의 어린 나무를 소홀히 
했었어요'
  나는 어린 왕자가 가르쳐주는 대로 이 별을 그렸다. 나는 도덕군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오밥나무의 위험이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고, 또 소혹성에서 길을 잃는 사람이 겪어야 할 위험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단 한번 체면 차리는 것은 접어두고 말하겠다.
  "얘들아, 바오밥나무를 조심해라."
  내가 이 그림을 이렇게 애써 그린 것은 나처럼 오래 전부터 위험을 알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친구들을 위해서이다. 이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당신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왜 이 책에는 바오밥나무만큼 큰 그림이 또 없을까?'
  그 대담은 아주 간단하다.
  '해 보긴 했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사실 내가 바오밥나무를 그릴 때는 다급한 마음에 흥분했던 것이다. 
    [  해지는 광경

  아! 어린 왕자여. 이렇게 해서 나는 조금씩 너의 쓸쓸한 생활을 알게 되었다. 
너는 오랫동안 해질녘의 고요한 풍경을 즐기는 외에는 다른 오락이 없었지.
  네가 나흘째 되던 아침에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해지는 광경을 아주 좋아해요. 우리 그걸 보러 가요."
  "하지만 좀 기다려야 해."
  "뭘 기다려야 하는데요?"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러자 너는 아주 놀란 표정을 짓더니 금방 스스로를 향하여 깔깔 웃었지. 
그리곤 이렇게 말을 했어.
  "나는 아직도 우리 별인줄 알았어요."
  그렇다. 미국이 정오이면 프랑스에는 해가 진다. 해지는 광경을 보려면 일분 
동안에 프랑스에 갈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프랑스는 
미국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네 작은 별에서라면 몇 발자국만 의자를 잡아당기면 되었겠지. 네가 해지는 
광경을 보려고만 한다면 말이야. 
  "어느 날, 난 마흔 세 번이나 해가 지는 걸 구경했어요."
  "아저씨^5,5,5^. 아주 쓸쓸할 때면 노을이 보고 싶어져요."
  "마흔 세 번이나 해 지는 광경을 보던 날, 그렇게도 외로웠니?"
  이 물음에 어린 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  양과 꽃

  닷새 째, 언제나 그렇듯이 양의 덕택으로 어린 왕자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 어린 
왕자는 오랫동안 숙고한 결과인 양 밑도 끝도 없이 퉁명스럽게 이렇게 물어왔다.
  "양 말예요. 그 양이 작은 나무도 먹는다면 꽃도 먹겠네요?"
  "양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지."
  "가시가 돋친 꽃도?"
  "물론, 가시가 돋친 꽃도 먹지."
  "그럼, 그 가시는 어디에 쓰이는 거죠?"
  나는 알지 못했다. 당시 나는 너무 꽉 죄어진 기관의 나사를 뽑기 위해 끙끙대고 
있던 참이었다. 비행기의 고장이 심한 것처럼 느껴졌고 마실 물도 거의 바닥났기 
때문에 매우 근심스러웠었다. 
  "가시는 어디에 쓰이는 거^36^예요?"
  어린 왕자는 한 번 질문을 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나는 풀리지 않는 
나사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만 아무렇게나 대답해 버렸다. 
  "가시는 아무 소용도 없어. 꽃이 단지 심술궂기 때문이야."
  "설마!"
  그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내게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아저씨 말을 믿지 않아요. 꽃들은 약해. 순진하구. 꽃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자기를 지키고 있는 거^36^예요. 가시가 있으니까 자기를 무서운 것으로 아는 거죠."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나사가 말썽이면 망치로 두들겨 비틀어 버려야지.'
  어린 왕자가 이런 내 생각을 다시 흐트려 놓았다. 
  "아저씨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요? 꽃들이^5,5,5^."
  "아냐, 아냐. 나는 아무것도 생각도 하지 않았어. 아무렇게나 대답한 거야. 난, 이 
아저씨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든."
  그러자 어린 왕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중요한 일이라구요?"
  어린 왕자는 손에 망치를 들고 기름으로 새까매진 손가락으로 그에게는 흉해 
보일 물체 위에 몸을 굽히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도 어른들처럼 말하고 있네."
  그 말이 나를 몹시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저씨는 잘못 알고 있어요. 모든 걸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단 말예요."
  어린 왕자는 정말 화가 나 있었다. 그의 샛노란 머리카락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시뻘건 신사가 살고 있는 별을 알고 있어요. 그는 한번도 
꽃향기를 마셔본 적이 없고 별을 바라본 적도 없었지요. 누굴 사랑해 본 적도 
없구요. 단지 덧셈만 하고 있을 뿐이야. 그러면서 그는 하루 종일 아저씨처럼 
'나는 성실한 사람이야. 나는 성실한 사람이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죠. 그러면서 그 
사람은 몹시 잘난 체한단 말예요. 하지만 그건 사람이 아냐. 버섯이지."
  "뭐라구?"
  "버섯이라니까요!"
  어린 왕자는 노여움으로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수백만년 전부터 꽃들은 가시를 만들어 왔어요. 하지만 양들이 꽃을 먹는 것도 
수백만년 전부터죠. 그럼 꽃이 아무 소용도 없어보이는 가시를 만들기 위해 왜 
그토록 오랫동안 애를 써 왔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려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란 말예요? 양과 꽃들의 전쟁이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요? 이건 그 뚱뚱하고 
얼굴이 빨간 신사의 덧셈보다 더 중요한 일이 정말 아니란 말예요? 내가 만일 내 
별 외에 어디에도 없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어린 양일 자기가 무얼 하는지도 모르면서 어느 날 아침 그 꽃을 단 한 번에 
없애버릴 수 있다면, 정말 그것이 중요하지 않단 말예요?"
  어린 왕자는 화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만일 무가 수백 수천만 개의 별들 중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을 별들만 쳐다봐도 충분히 행복한 거^36^예요. 그는 생각하겠죠. '내 꽃이 저기 
어딘가에 있겠지^5,5,5^.' 하지만 만일 양이 그 꽃을 먹어버린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는 
모든 별들이 갑자기 빛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예요. 그래도 그게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졌다. 나는 쥐고 있던 연장을 놓아 버렸다. 이제 나는 망치와 
나사와 갈증과 죽음 따위를 비웃고 있었다. 
  어떤 별, 떠돌이 별, 내 별 즉 지구 위에는 달래 주어야 할 어린 왕자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를 품에 안고 조용히 흔들어 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꽃은 위험하지 않아^5,5,5^. 네 양에게 씌울 굴레를 하나 그려 줄게. 
꽃에는 갑옷을 그려 주고^5,5,5^ 그리고 또^5,5,5^."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무척 서투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해야 이 어린 
왕자를 진정시키고, 어디를 가여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해 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눈물의 나라란 그렇게도 신비스러운 것이다. 
  [  어린 왕자의 꽃

  나는 어린 왕자의 꽃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되었다. 그의 별에는 예전부터 꽃잎이 
한 겹만 있는 아주 소박한 꽃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리도 많이 차지하지 
않으면서 누구를 괴롭히는 일도 없었다. 이 꽃들은 어느날 아침 풀숲에서 
나타났다가 저녁이면 지곤 했다.
  어린 왕자의 꽃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씨앗에서 싹이 텄고, 어린 왕자는 다른 
싹들과는 다른 이 싹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살펴 주었다. 새로운 종류의 
바오밥나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어린 싹은 성장을 금방 멈추더니 꽃을 피울 
채비를 시작했다. 곧 봉오리가 맺혀졌다. 어린 왕자는 그 안에서 어떤 굉장한 
것이 나오리라고 생각했다.
  꽃은 자신의 녹색 방에 숨어 아름다운 화장을 계속했다. 자신의 빛깔을 
정성들여 고르고, 천천히 옷을 입었으며, 꽃잎을 하나하나 가다듬었다. 꽃은 
개양귀비처럼 꾸깃꾸깃 나오기가 싫었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그야말로 한창일 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 그래! 아주 멋을 부리는 꽃이었다. 그 신비로운 
과정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날 아침해가 떠오르는 그 무렵 꽃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토록 오래 
치장을 하고서야 눈을 뜬 꽃은 하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 겨우 깨어났군요. 미안해요 온통 머리가 헝클어져 있군요."
  어린 왕자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군요."
  "그렇죠? 나는 햇님과 함께 태어났으니까요."
  어린 왕자는 이 꽃이 그다지 겸손하지는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꽤나 감동을 
주는 꽃이었다.
  "아마 지금이 아침 식사 시간이지요? 제 생각 좀 해 주시겠어요?"
  어린 왕자는 당황해서 찬물 한 통을 가져다가 꽃에게 주었다. 그 뒤로 꽃은 
까다로운 허영심으로 어린 왕자를 괴롭혔다. 예를 들면 어느 날, 꽃은 자기가 갖고 
있는 가시 네 개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발톱을 가진 호랑이들이 오겠다면 오라고 그래요."
  "내 별에는 호랑이가 없어요 그리고 호랑이들은 풀을 먹지 않아요."
  그러자 꽃은 점잖게 대답했다.
  "나는 풀이 아니에요."
  "미안해요."
  "나는 호랑이가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하지만 바람은 아주 싫어요. 혹시 
바람막이 없으세요?"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바람이 무섭다고? 풀치고는 운이 나쁜데. 이 꽃은 정말 까다롭네.'
  "저녁에는 고깔을 씌워 주세요 당신의 별은 아주 춥군요. 자리를 잘 못 잡은 것 
같아요 내가 있다 온 곳은^5,5,5^."
  그러다가 꽃은 말을 멈추었다. 꽃은 씨앗으로 날아왔기 때문에 다른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었다.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다가 들킨 것이 
부끄러워지자 꽃은 잘못을 어린 왕자에게 뒤집어씌우려고 두세 번 헛기침을 했다.
  "바람막이는요?"
  "그걸 찾으려 가려던 참인데 당신이 말을 해서^5,5,5^."
  그런데도 꽃은 더 세게 기침을 하면서 일단 자신의 잘못을 어린 왕자에 
씌우려고 했다.
  이 때문에 착한 어린 왕자는 곧 그 꽃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는 대수롭지도 
않은 말을 신중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몹시 불행해지게 되었다.
  "꽃은 하는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어, 꽃이 하는 말은 절대로 듣지 말아야 해 
꽃은 바라보고 향기만 맡으면 되는 거야. 내 꽃도 내 별을 향기롭게 하지만 난 
그걸 즐길 줄을 몰랐어. 나의 신경을 거슬렀던 발톱 이야기도 측은하게 들어야만 
했었는데^5,5,5^."
  그는 또 이런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때 나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어. 나는 꽃이 하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판단했어야 했어. 그 꽃은 나를 향기롭게 해 주었고 환하게 해 주었어. 거기에서 나는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뻔히 드러나보이는 꾀 뒤에 사랑이 있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는데, 꽃들은 그렇게 표현하는 건데, 나는 너무 어려서 꽃을 사랑할 줄 
몰랐거든^5,5,5^." 
      [  아픔

  나는 어린 왕자가 철새들의 이동을 이용하여 별을 빠져나왔으리라고 믿는다. 
떠나는 날 아침, 그는 자기 별을 잘 정리했다. 불 뿜는 화산들도 정성껏 청소했다.
  그 별에는 활화산이 두 개 있었다. 그것은 아침 식사를 끓이는 데 아주 
편리했다. 그는 사화산도 한 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사화산도 청소했다. 청소만 잘 해주면 화산들은 
폭발하지 않고 조용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불을 내뿜기 때문이었다.
  화산의 폭발은 굴뚝의 불과도 같다. 물론 땅 위에서 화산을 청소해 주기에는 우리의 
체구가 너무 작다. 때문에 화산은 우리에게 많은 귀찮은 일들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린 왕자는 좀 쓸쓸한 마음으로 바오밥나무의 나머지 싹들도 죄다 뽑아냈다. 
다시는 되돌아 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항상 하던 일들이 그날 
아침에는 매우 정겹고 그리운 일이었음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꽃에 물을 주고 
고깔을 씌워 보호해 주려고 할 때는 눈물이 막 터져나오려고 했다. 
  그는 꽃에게 말했다. 
  "잘 있어요."
  꽃은 대답하지 않았다. 꽃은 기침을 했다. 그것이 감기 탓이 아니었다. 마침내 
꽃이 입을 열었다. 
  "내가 어리석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행복해야 되요."
  어린 왕자는 꽃이 자신을 나무라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고깔을 손에 
쥐고 어쩔 줄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이 편안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내 탓이긴 하지만 당신은 아무 것도 몰랐어요.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도 나처럼 어리석었어요. 부디 
행복해지세요. 그 고깔은 내버려둬요. 이젠 소용없어요."
  "하지만 바람이^5,5,5^."
  "감기가 그리 심한 건 아니에요. 차가운 밤 공기는 몸에 좋아요. 나는 
꽃이잖아요."
  "하지만 짐승들이^5,5,5^."
  "나비를 보려면 두세 마리의 벌레쯤은 견뎌 내야만 해요. 나비는 아주 
아름다우니까요. 그러잖으면 누가 나를 찾아오겠어요. 당신은 멀리 가 있을 거구. 
큰 짐승들은 조금도 겁나지 않아요. 내겐 가시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서 꽃은 순진하게 자신의 가시 네 개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지 말아요. 기분이 언짢아지잖아요. 가기로 결심했으면 
가세요."
  꽃은 자기가 우는 모습을 어린 왕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자존심이 센 
꽃이었다. 
    [  임금님의 별

  어린 왕자는 소혹성 325호, 326호, 329호, 그리고 330호를 차례로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서 일거리도 찾고 공부도 할 마음이었다. 
  첫번째 별에는 임금님이 살고 있었다. 수달피로 만든 붉은 곤룡포를 입고 있는 
임금님은 소박하지만 위엄이 넘치는 옥좌에 앉아 있었다. 어린 왕자를 본 
임금님이 소리쳤다. 
  "아! 나의 백성이 하나 왔도다."
  어린 왕자는 '저 임금님은 나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보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임금님에게는 세상이 아주 간단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어린 왕자는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백성인 것이다. 
  "짐이 좀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가까이 오라."
  임금님은 오랜만에 임금 노릇을 하게 되어 몹시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린 왕자는 앉을 자리를 찾아보았지만 별은 온통 호화찬란한 수달피 망토로 덮여 
있었다. 그래서 그냥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금방 피곤해져서 하품이 나왔다.
  "어전에서 하품을 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짐은 하품하는 것을 
금하노라."
  어린 왕자는 당황해서 이렇게 말했다. 
  "참을 수가 없었어요. 긴 여행에 잠도 제대로 못잤거든요^5,5,5^."
  "그렇다면 네가 하품하기를 명하노라. 몇 해 째 짐은 하품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노라. 짐으로서는 하품하는 것이 신기하구나. 자, 또 하품을 해라. 이것은 
어명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니 겁이 나요. 더는 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자 임금님은 심기가 불편한 듯 말을 더듬었다. 
  "흠, 흠 그럼 짐은^5,5,5^ 네게 명하노라. 하품을 하기도 하고^5,5,5^ 그리고 
또^5,5,5^."
  임금님은 자신의 권위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절대군주였지만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이치에 맞는 명령만을 내렸다. 그는 늘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짐이 만일 어떤 장군에게 새로 변하라고 했는데 그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장군의 잘못이 아니라 짐의 잘못이노라'
  어린 왕자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앉아도 되나요?"
  그러자 임금님은 자신의 수달피 망토 자락을 끌어올리며 위엄있게 말했다.
  "짐은 네게 앉기를 명하노라."
  어린 왕자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별은 아주 작은데 임금님은 대체 
무엇을 다스린다는 것일까?
  "임금님, 한 말씀 여쭈는 걸 용서해 주세요."
  "짐은 네게 질문하기를 명하노라."
  "임금님, 대체 임금님은 무엇을 다스리시나요?"
  그 질문에 임금님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모든 것을."
  "모든 것을요?"
  임금님은 신중한 자세로 자기 별과 다른 별, 그리고 떠돌이별 들을 가리켰다.
  "저것 모두를요?"
  "저것 모두를^5,5,5^."
  그는 절대군주였을 뿐만 아니라 우주를 다스리는 임금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별들은 임금님께 복종하나요?"
  "물론, 모두가 복종한다. 짐은 불복종을 허용하지 않노라."
  어린 왕자는 임금님의 권력에 감탄했다. 만일 내가 이런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의자를 끌어당기지 않고도 하루에 마흔 네 번 뿐 아니라 일흔 두 번, 백 번까지도, 
아니 이백 번 까지도 해가 지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으련만^5,5,5^, 갑자기 어린 
왕자는 자기가 버리고 온 별이 생각나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임금님께 말했다. 
  "임금님, 저는 해지는 광경을 보고 싶습니다. ^5,5,5^저를 기쁘게 해 주세요. 해에게 
지기를 명령해 주세요."
  그러자 임금님이 말했다. 
  "얘야. 만일 짐이 어느 장군에게 나비처럼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라든지, 
비극 한 편을 쓰라든지, 물새로 변하라고 명령했는데도 그 장군이 자기가 받은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면 그것은 그와 짐 중 누구의 잘못인고?"
  "그것은 분명 임금님의 잘못이지요."
  "그렇다. 각자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명령해야만 하느니라. 권위는 우선 
이치에 맞아야 하는 것이니라. 짐의 명령은 이렇듯 이치에 맞는 것들이기 때문에 
복종을 강요할 권리가 있는 것이니라."
  "그러면 해가 지게 해 달라는 것은요?"
  한 번 던진 질문은 절대 잊지 않는 어린 왕자가 되새겨 물었다.
  "해가 지는 광경을 너는 보게 되리로다. 짐은 그것을 명령하겠노라. 그러나 
짐이 통치하는 지식에 따라 그 조건이 성숙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느니라."
  "언제나 그렇게 되지요?"
  "흠, 흠^5,5,5^."
  임금님은 우선 커다란 달력을 들춰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흠, 흠^5,5,5^ 그것은 오늘 저녁 일곱 시 사십 분 경이 될 것이다. 너는 짐의 
명령이 얼마나 잘 이행되었는지를 보게 될 것이로다."
  어린 왕자는 하품이 나왔다. 당장 해지는 광경을 못보게 된 것이 섭섭했고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제가 더 이상 할 일이 없군요. 저는 떠나겠어요"
  "떠나지 말아라."
  한 사람의 백성을 가진 것이 자랑스러웠던 임금님이 말했다.
  "떠나지 말아라. 나는 어를 장관으로 삼겠노라."
  "무슨 장관인데요."
  "사법 장관이니라."
  "하지만 여기서는 재판을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요."
  "알 수 없는 일이다. 짐은 아직도 짐의 왕국을 순시해 본 적이 없노라. 짐은 
너무나 늙었고, 수레를 타고 다닐 자리도 없으며, 걸어다니면 피곤한 노릇이노라."
  "아, 그렇지만 저는 벌써 다 보았는걸요."
  별 저편을 다시 한 번 둘러보기 위해 몸을 숙이면서 어린 왕자는 말했다.
  "저기에도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너 자신을 재판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노라. 
자신을 재판하는 일은 남을 재판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법이니까. 네가 너 
자신은 잘 판단하게 된다면 곧 네가 진정한 현인이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니라."
  "저는 어디서나 제 자신을 잘 판단할 수 있어요. 제가 여기서 살 수는 없어요."
  "흠, 흠^5,5,5^ 짐의 별 어딘가에 늙은 쥐 한 마리가 있다. 밤에는 그 소리가 들려 
오노라. 너는 그 늙은 쥐를 재판할 수 있으리라. 너는 이따금 그 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생명은 너의 재판에 달려 있게 되는 것이니라. 그러나 
그 때마다 특사를 내려 그 쥐를 살려 주도록 하라. 한 마리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저는 사형 선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가야겠어요."
  "가지 말아라."
  어린 왕자는 떠날 준비를 끝냈지만 늙은 임금님을 서운하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임금님의 명령이 이행되기를 원하신다면 제게 이치에 맞는 명령을 내려 
주세요. 가령 일분 안에 떠나라는 명령 말이에요. 조건이 알맞다고 여겨지는데요."
  임금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린 왕자는 망설여졌지만 이내 한숨을 
쉬면 그 별을 떠났다. 그러자 임금님이 다급하게 소리질렀다. 
  "짐은 너를 대사로 임명하노라."
  그리곤 다시 위엄에 찬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여행을 하면서 어린 왕자는 어른들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허풍선이의 별

  두 번째 별에는 허풍선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린 왕자를 보자마자 
멀리서부터 소리쳤다. 
  "아! 나의 찬미자가 한 사람 찾아오는군!"
  허풍선이에게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찬미자였다. 어린 왕자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네요?"
  "인사하기 위해서지. 사람들이 네게 갈채를 보낼 때 답례하기 위한 거야. 
그런데 불행히도 이곳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구나."
  "아, 그래요^5,5,5^."
  어린 왕자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 맞장구쳐 주었다. 그러자 
허풍선이가 말했다. 
  "한번 손뼉을 쳐보거라."
  어린 왕자는 그가 시키는 대로 손뼉을 쳤다. 그러자 허풍선이는 모자를 
들어올리면서 점잖게 인사를 했다.
  '임금님을 만난 것보다는 재미있네'
  어린 왕자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손뼉을 쳤다. 허풍선이는 모자를 
들어올리며 다시 인사를 했다. 
  오분쯤 그러고 나니 어린 왕자는 단조로운 그 놀이에 싫증이 났다. 그래서 물었다.
  "그런데 모자가 떨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하죠?"
  하지만 허풍선이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허풍선이들이란 칭찬 이외는 들으려 
하지 않는 법이다.
  "넌 정말 날 찬미하니?"
  "찬미한다는 게 뭔데요?"
  "찬미한다는 건 내가 이 별에서 가장 잘 생기고, 가장 옷을 잘 입으며, 제일 
부자고,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야."
  "하지만 이 별에는 아저씨 혼자뿐이잖아요."
  "나를 기쁘게 해 다오. 설사 그렇다 해도 나를 찬미해 달라구!"
  어린 왕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를 찬미해요. 하지만 그것이 아저씨에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어린 왕자는 그 별을 떠났다. 어린 왕자는 어른들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술꾼의 별

  다음 별에는 술꾼이 살고 있었다. 이번 방문은 아주 짧았지만 어린 왕자를 아주 
슬픔에 싸이게 했다. 
  빈 술병 무더기와 가득찬 술병 무더기를 앞에 두고 묵묵히 앉아있는 술꾼에게 
어린 왕자가 물었다. 
  "거기서 뭐하세요?"
  우울한 표정으로 술꾼이 대답했다.
  "술을 마시지."
  "왜 술을 마시는 거죠?"
  "잊어버리기 위해서야."
  "뭘 잊어버리는 건데요?"
  벌써 측은해진 어린 왕자가 이렇게 캐어 물었다. 그러자 술꾼은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부끄럽다는 걸 잊어버리기 위해서야."
  어린 왕자는 그를 돕고 싶은 마음에 재차 물었다.
  "무엇이 부끄러운데요?"
  "술을 마신다는 게 부끄러워."
  속시원히 다 말해 버린 술꾼은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난처해진 어린 왕자는 그 
별을 떠났다. 
  여행을 하면서 어린 왕자는 어른들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상인의 별

  네 번째 별에는 상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린 왕자가 왔는데도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몹시 바빴다. 그래서 어린 왕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담뱃불이 꺼졌네요."
  "셋에다 둘을 더하면 다섯. 다섯에다 일곱을 더하면 열 둘, 열 두에다 셋은 열 
다섯이라. 안녕! 열 다섯에다 일곱은 스물 둘. 스물 둘에다 여섯을 더하면 스물 
여덟. 다시 불을 붙일 시간이 없단다. 스물 여섯에다 다섯이면 서른 하나. 휴우, 
오억 백육십이만 이천칠백삼십일이 되는 구나."
  "뭐가 오억이에요?"
  "응? 너 아직도 거기 있구나. 오억 백^5,5,5^ 잊어버렸다^5,5,5^. 너무나 바빠서! 난 
성실한 사람이야. 농담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둘에다 다섯이면 
일곱이라^5,5,5^."
  한번 던진 질문은 절대로 지나치는 적이 없는 어린 왕자가 다시 물었다. 
  "뭐가 오억 일백만이란 거^36^예요?"
  상인이 머리를 들었다. 
  "난 54 년 전부터 이 별에 살아왔지만 일을 하면서 세 번 밖에는 방해를 받아 
본 적이 없었어. 처음은 22 년 전이었는데 어디선가 풍뎅이 한 마리가 떨어졌지. 
그 놈이 어찌나 큰 소리를 질러대는지 더하기를 네 번이나 틀렸어. 두 번째는 
11 년 전이었는데 신경통이 발작했지. 나는 운동 부족이야. 하지만 산책할 시간도 
없어. 나는 성실한 사람이거든. 세 번째는^5,5,5^ 바로 지금이야! 오억 일백만이라고 
했겠다^5,5,5^."
  "대체 뭐가 몇 억이란 거^36^예요?"
  상인은 그제서야 조용히 일할 가망이 없음을 깨달았다.
  "가끔씩 하늘에서 보이는 그 작은 것들이 몇 억이야."
  "파리떼들?"
  "아니. 그 작은 것들은 반짝인단다."
  "그럼 벌인가요?"
  "아니라니까. 그걸 보고 게으름뱅이들이 공상에 잠기는 금빛나는 조그만 
것들이지. 하지만 난 성실한 사람이라서 공상할 시간이 없어."
  "아, 별 말이군요."
  "그래, 별이야."
  "근데 아저씬 오억 개의 별로 뭘 하죠?"
  "오억 백육십이만 이천칠백삼십 일이지. 난 성실하고 정확해."
  "그걸 가지고 뭘 하느냐구요?"
  "응. 아무것도 안 해. 그냥 갖고 있는 거야."
  "아저씨가 그 별들을 갖고 있단 말예요?"
  "그럼."
  "하지만 난 벌써 임금님은 한 분 뵈었는데, 그분은^5,5,5^."
  "임금님은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다스릴 뿐이지. 그건 아주 큰 차이지."
  "그럼 아저씨가 별을 가지는 게 무슨 소용이 있죠?"
  "부자가 되는 거지."
  "부자가 되는 건 무슨 소용이죠?"
  "누가 다른 별을 발견하면 그걸 사는 데 필요하지."
  어린 왕자는 이 사람도 술꾼과 비슷한 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질문을 계속했다. 
  "별들은 어떻게 가질 수 있죠?"
  "별들은 누구의 것이냐?"
  성미가 깐깐한 상인이 되물었다.
  "글세. 임자가 없죠, 뭐."
  "그래서 내 것이란 말이야. 제일 먼저 그걸 생각했거든."
  "그러면 그렇게 되는 거^36^예요?"
  "물론이지. 임자 없는 다이아몬드를 네가 발견했으면 그건 네꺼야. 임자 없는 
섬을 발견했으면 그건 네꺼야. 처음으로 네가 어떤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면 
그걸 특허를 내는 거야. 그 아이디어는 네 거니까. 그래서 나는 별을 가지게 된 
거야. 나보다 먼저 그것을 갖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말야."
  "그건 그렇다 치고 그걸 가지고 뭘 하죠?"
  "난 그것들을 관리한다. 별들을 세고 또 세는 거야. 그건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 
난 성실하니까. "
  어린 왕자는 상인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내가 만일 비단 스카프가 있으면 그걸 목에 두르고 다닐 수 있어요. 만일 꽃을 
가지고 있다면 그 꽃을 따서 가지고 다닐 수 있죠. 그런데 아저씨는 별을 딸 수가 
없잖아요?"
  "그래. 하지만 난 별을 은행에 맡길 수는 있지."
  "무슨 말이죠?"
  "그건 작은 종이에다 내 별들의 수를 적은 후, 그걸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그는 
거야."
  "그것뿐이에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어린 왕자는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 참 시적인데. 하지만 성실한 것은 아니야.'
  어린 왕자는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어른들과 아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꽃이 하나 있는데 매일 물을 줘요. 화산도 셋 있는데 일요일마다 청소를 
해 주고요. 사화산도 청소를 게을리하지 않죠.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이 화산이나 꽃에게는 좋은 일이죠. 하지만 아저씨는 별들에게 
별로 이로운 일이 없겠어요."
  상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곧 그 별을 떠났다. 
  '어른들은 정말 이상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5,5,5^. 
    [  점등인의 별

  다섯 번째 별을 아주 이상했다. 별 중에서 가장 작은 별이었다. 그곳에는 
가로등 하나와 점등인 한 사람이 살 정도의 공간밖에는 없었다. 
  어린 왕자는 가까운 하늘가에 집도 없고 사람도 없는 이 별에 가로등과 
점등인이 무슨 필요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사람은 어쩌면 머리가 둔한 사람일지도 몰라. 하지만 임금님이나 허풍선이, 
상인이나 술꾼보다는 나을 거야. 적어도 그는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가로등을 켜면 별이나 꽃을 하나 더 만들게 하는 것과 같고, 가로등을 끄면 별이나 
꽃을 잠들게 하는 거지. 참 재미있는 일이야. 재미있으니까 유익할 거구'
  별에 닿자마자 어린 왕자는 점등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왜 방금 가로등을 끄셨나요?"
  점등인이 대답했다. 
  "명령이란다. 안녕."
  점등인은 다시 가로등에 불을 켰다.
  "왜 또 가로등에 불을 켜나요?"
  "명령이니까."
  어린 왕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통 모르겠네요."
  "모르고 어쩌고 할 게 없단다. 명령은 명령이니까. 안녕."
  그는 다시 가로등을 껐다. 그리고나서 그는 붉은 체스 무늬가 새겨진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난 성가신 직업을 가지고 있단다. 예전에는 괜찮았지. 아침에 불을 끄고, 저녁에 
불을 켜고. 나머지 시간에는 쉴 수도 있고 또 나머지 밤시간에는 잘 수도 있었단다."
  "그런데 명령이 바뀌었단 말이군요?"
  "명령은 바뀌지 않았어. 그게 비극이라니까. 별을 해마다 점점 더 빨리 도는데 
명령을 바뀌지 않았거든."
  "그래서요?"
  "그래서 지금은 1분에 한 번씩 도니까. 난 1초도 쉴 수 없게 되어버린 거야. 
1분마다 한번씩 불을 켜고 꺼야 하니까."
  "그거 참 이상하네. 아저씨네 별에서는 하루가 1분이라니^5,5,5^."
  "이상할 거 없어.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거든."
  "한달이라고요?"
  "그렇단다. 삼십 분이니 삼십일이지. 안녕."
  그는 다시 가로등에 불을 켰다.
  어린 왕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명령에 이토록 충실한 점등인이 좋아졌다. 
어린 왕자는 예전에 자기 별에서 의자를 끌어당기면서 해를 지게 하던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이 친구를 도와주고 싶었다. 
  "아저씨, 난 아저씨가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방법을 알아요."
  "나도 늘 그러고 싶단다."
  점등인이 말했다. 그는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가 말을 이었다. 
  "아저씨의 별은 너무 작아서 크게 세 발자국만 떼면 한 바퀴를 돌 수 있어요. 
언제나 해를 보려면 아주 천천히 걷기만 하면 돼요. 아저씨가 쉬고 싶을 때는 
걸으면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낮은 아저씨가 원하는 만큼 길어지잖아요."
  "그건 별로 도움이 못되는구나. 내가 사는 동안 즐기는 건 잠자는 거거든."
  "그거 참 안 됐군요."
  "안 되고 말고. 안녕."
  점등인은 말을 하면서 또 가로등을 껐다.

  어린 왕자는 더 멀리 여행을 하면서 생각했다.
  '점등인은 다른 사람들, 임금님, 허풍선이, 술꾼, 상인들에게 아마 업신여김을 
당할 거야. 하지만 내 눈에는 어리석지 않은 단 한 사람이야. 아마 이 사람은 
자신이 아닌 남의 일을 보살피고 있기 때문일 거야.'
  어린 왕자는 저으기 섭섭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내가 친구로 삼을 사람은 오직 점등인 뿐이야. 하지만 그의 별은 너무나 작아서 
둘이 있을 만한 공간이 없잖아^5,5,5^.'

  어린 왕자가 차마 내게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하루에 1천4백4십 번이나 해지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이 축복받은 별을 못잊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  지리학자의 별

  여섯 번째 별은 점등인의 별에 비해 열 배나 더 큰 별이었다. 그 별에는 아주 
커다란 책을 쓰고 있는 노신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린 왕자를 보자 소리쳤다.
  "여! 탐험가가 한 사람 오는구먼!"
  어린 왕자는 의자에 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벌써 얼마나 많은 여행을 
했던가.
  노신사가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지?"
  어린 왕자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이 두꺼운 책은 뭐죠? 여기서 일을 하시나요?"
  "나는 지리학자란다."
  "지리학자가 뭔데요?"
  "그건 어디에 바다가 있고, 강이 있고, 도시가 있고, 산이 있고, 사막이 
있는가를 아는 학자를 말한단다."
  "그거 참 재미있겠네요. 이제서야 제대로 된 직업을 보네요."
  어린 왕자는 지리학자의 별을 둘러보았다. 그는 아직까지 이렇게 위엄에 넘치는 
별은 본적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별은 정말 아름답군요. 큰 바다도 있나요?"
  "그건 알 수가 없구나."
  어린 왕자는 조금 실망스러워졌다.
  "그래요? 그럼 산은요?"
  "알 수 없지."
  "도시, 강, 사막은요?"
  "그것도 알 수 없구나."
  "할아버지는 지리학자잖아요?"
  "그렇지. 난 지리학자일뿐 탐험가는 아니란다. 내게는 탐험가가 하나도 없어. 도시나 
강, 산, 바다, 대양, 사막들을 세러 다니는 것은 지리학자의 일이 아니란다. 지리학자는 
너무나 중요해서 돌아다니면 안 되지. 이 연구실을 떠날 수가 없어. 하지만 여기서 
탐험가들을 만나보지. 그들에게 질문하고 그들의 기억을 기록해 두기도 해. 또 그들 
중에 누군가의 기억이 흥미롭다면 지리학자는 탐험가의 품행을 조사한단다."
  "그건 왜죠?"
  "탐험가가 거짓말을 하게 되면 지리책의 내용이 크게 변화하기 때문이야. 또 
술을 너무 마시는 탐험가도 마찬가지지."
  "그건 또 왠가요?"
  "술주정뱅이들에게는 사물이 둘로 보이니까. 그렇게 되면 실은 하나밖에 없는 
산을 지리학자가 두 개로 적어넣을 수 있거든."
  "저는 좋지 못한 탐험가가 될만한 사람을 만나보았어요."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탐험가들의 품행이 좋으면 그 사람이 발견한 것을 
다시 조사시킨단다."
  "직접 보러 가시나요?"
  "아니야. 그건 너무 복잡해. 다만 탐험가들에게 증거물을 내 보이라고 요구하지. 
가령 그가 큰 산을 발견했다면 나는 그곳에 있는 커다란 돌멩이를 가져오라고 하지."
  지리학자는 갑자기 흥분했다.
  "그런데 넌 멀리서 왔구나. 넌 탐험가지? 네가 살던 별을 내게 이야기해 다오."
  장부를 펼치면서 지리학자는 연필을 깎았다. 그는 탐험가들의 이야기를 우선 
연필로 적었다. 그 다음 증거물이 제시되면 잉크로 다시 기록하는 것이다.
  "제 별은 그리 흥미로운 별이 아니에요. 아주 작거든요. 화산이 세 개 있는데 
둘은 활화산이고 하나는 사화산이에요.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죠."
  "물론 알 수 없는 노릇이지."
  "꽃도 하나 있어요."
  "우린 꽃은 기록하지 않는단다."
  "그건 왜죠? 그게 제일 예쁜데요."
  "꽃은 한시적이라서 그래."
  "그게 무슨 뜻인가요?"
  "지리책이란 모든 책 가운데 가장 귀중한 거란다. 그건 절대로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이 없어. 산이 위치를 변경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고, 바다의 물이 
말라버리는 일도 거의 없어. 우리는 영원한 것만을 기록하는 거야."
  어린 왕자가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사화산은 다시 불을 뿜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한시적이란 말은 무슨 
뜻이죠?"
  "화산이 꺼졌든 불을 뿜든 우리에겐 마찬가지란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산이야. 산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한시적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니까요?"
  한번 던진 질문은 절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어린 왕자가 재차 물어왔다.
  "그건 머지않아 소멸해 버릴 징조가 보인다는 것이야."
  "내 꽃이 머지않아 소멸해 버릴 징조가 있나요?"
  "물론이지."

  '내 꽃은 단명하다. 그리고 외부의 공격을 막는 데는 단지 네 개의 가시가 있을 
뿐이야. 그런데 나는 그 꽃을 별에 혼자 버려 두고 왔어'
  그것은 어린 왕자가 처음으로 갖는 후회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 제가 무엇을 보러 가면 좋을까요?"
  "지구라는 별이지. 그 별은 평판이 괜찮단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꽃을 생각하면서 길을 떠났다. 
      [  지구

  그러니까 일곱 번째 별이 지구였다. 지구는 평범한 별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111명(물론 흑인 임금님도 포함해서)의 임금님과 7천명의 지리학자, 90만 명의 
상인과 750만 명의 술꾼들, 3억 1천만 명의 허풍선이들, 다시 말하면 약 20억 
정도의 어른들이 살고 있었다.
  지구가 얼마나 큰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전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여섯 개 
대륙을 통틀어 46만 2천 5백 11명의 점등인이 있어야 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좀 떨어져 보면 그건 장관이었다. 이 무리들의 움직임은 오페라의 발레단처럼 
질서정연했다. 우선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점등인 차례가 되어 등불을 
켜고 자러 들어가면 이번에는 중국과 시베리아의 점등인들이 춤을 추며 나온다. 
이들 역시 무대 뒤로 사라지면 러시아와 인도의 점등인들 차례가 온다. 그 다음엔 
아프리카와 유럽, 그 다음엔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그들은 한 번도 무대 입장 순서를 틀린 적이 없다. 그것은 굉장한 장면이었다.
  단지 북극에 하나밖에 없는 가로등의 점등인과 남극의 하나밖에 없는 가로등을 
켜는 그의 동업자만이 한가롭고 태평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일년에 단 
두 차례만 불을 켜기 때문이다. 
      [  뱀

  재치를 부리려고 하면 언제나 거짓말이 조금 섞이게 된다. 내가 여러분들께 
말한 점등인의 이야기는 아주 정직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별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칫 잘못된 생각을 심어 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지구 위에서 아주 적은 자리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땅 위에 
사는 20억의 사람들이 어떤 집회에서 서로 좁혀 선다면 길이 20마일, 넓이 
20마일 정도의 광장에 빼곡하게 들어설 수 있다. 태평양의 가장 작은 섬 안에 
인류를 몰아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어른들은 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바오밥나무와 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더러 계산을 해 보라고 해야겠다. 어른들은 숫자를 굉장히 
좋아하니까. 그렇게 하면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푸느라고 
사간을 소비하지는 말라. 그건 소용없는 일이니까. 여러분은 내 말만 믿으면 된다.

  이렇게 해서 어린 왕자는 지구에 다다랐다. 처음에 그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 별을 잘못 찾아온 줄 알고 겁이 나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모래 위에서 
달빛 같은 고리 하나가 움직였다.
  어린 왕자는 어찌 되었든간에 인사부터 했다. 
  "안녕!"
  "안녕!"
  그것은 뱀이었다. 어린 왕자는 물었다.
  "내가 떨어진 이 곳이 무슨 별이니?"
  "지구의 아프리카라는 데야."
  "아 그래. 그런데 지구 위에는 사람이 안 사니?"
  "여기는 사막이야. 사막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 지구는 크단다."
  뱀의 말을 들은 어린 왕자는 바위 위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들은 누구든지 자기 별을 언제나 찾아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빛난다고 
생각해. 내 별을 한번 봐. 바로 우리 위에 있어. 그런데 얼마나 멀까?"
  "아름다운 별이구나. 그런데 여긴 무엇하러 왔니?"
  "난 꽃하고 사이가 나빴어."
  "그래?"
  그리고나서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 뒤 어린 왕자가 입을 열었다.
  "사막에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거야. 좀 외로운 걸."
  "사람들 집에 있어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야."
  어린 왕자는 뱀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넌 이상한 짐승이구나. 손가락처럼 가는 게^5,5,5^."
  "하지만 나는 임금님의 손가락보다도 훨씬 힘이 세."
  어린 왕자는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힘이 세보이진 않는걸^5,5,5^ 또 다리도 없구^5,5,5^ 또 여행할 수도 
없잖아."
  "난 너를 배보다도 더 빨리 데려갈 수 있어."
  뱀은 금팔찌처럼 어린 왕자의 발목을 감았다.
  "내가 건드린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땅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거야. 하지만 너는 
순진하고 또 별에서 왔으니까^5,5,5^."
  어린 왕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처럼 약한 아이가 화강암투성이의 지구에 있는 걸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드는구나. 언제고 네 별이 그리워지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을 거야. 나는^5,5,5^."
  "그래. 잘 알았어. 그런데 왜 넌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는 거지?"
  "나는 그 수수께끼를 다 풀거든."
  그리고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  야생화

  어린 왕자는 사막을 가로질러 갔으나 야생화 한 송이밖에는 만나지 못했다. 세 
개의 꽃잎을 가진, 별로 대수롭지 않은 꽃을^5,5,5^ 어린 왕자가 인사를 했다.
  "안녕!"
  야생화가 화답했다.
  "안녕!"
  어린 왕자가 공손하게 물었다.
  "사람들은 어디 있니?"
  그 야생화는 언젠가 대상(대상)들이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 내가 알기론 예닐곱 명이 있어. 몇 해 전에 그들을 보았지. 하지만 
어딜 가야 만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바람 따라 다니니까. 그들은 뿌리가 
없어. 그래서 굉장히 불편하단다."
  어린 왕자가 말했다.
  "잘 있어."
  야생화가 말했다.
  "잘 가." 
      [  메아리

  어린 왕자는 높은 산에 올라갔다. 그가 알고 있는 산이라고는 무릎밖에 안 오는 
세 개의 화산이었다. 그래서 그는 꺼진 화산을 의자로 쓰고 있었다.
  '이만큼 높은 산에서라면 한 눈에 별 전체와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는 뾰족한 바위로 이루어진 산봉우리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인사를 했다.
  "안녕!"
  "안녕^5,5,5^안녕^5,5,5^안녕^5,5,5^."
  "당신은 누구세요?"
  "당신은 누구세요^5,5,5^. 당신은 누구세요? 누구세요^5,5,5^."
  "우리 친구하자. 난 외로워."
  메아리가 대답했다.
  "난 외로워^5,5,5^ 난 외로워^5,5,5^ 난 외로워^5,5,5^."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참 이상한 별이네. 이 별은 온통 메마르고 뾰족하고, 정말 터무니가 없어. 
사람들이란 상상력이 없어. 남의 말만 자꾸 되풀이하고^5,5,5^ 내 별에 있는 꽃은 
언제나 먼저 말을 걸곤 했는데^5,5,5^.' 
      [  슬픔

  어린 왕자는 오랫동안 모래와 바위와 눈을 밟으며 걷다가 결국 길을 하나 찾아냈다. 
길이란 원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이어져 있기 마련이다.
  장미꽃이 가득 피어있는 어느 정원이었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꽃들도 답례를 했다.
  "안녕!"
  어린 왕자는 꽃들을 바라보았다. 이 꽃들은 자기 꽃과 아주 닮았다. 그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니?"
  "우리들은 장미꽃이야."
  "아, 그래^5,5,5^."
  어린 왕자는 갑자기 자신이 몹시 불행하게 여겨졌다. 내 꽃은 자신과 같은 
종류는 세상에 자기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여기 정원 안에 같은 
종류가 5천 송이도 넘게 있지 않은가!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내 꽃이 이걸 보면 굉장히 화가 날거야. 비웃음을 모면하기 위해 기침을 많이 
하든가 죽는 시늉까지도 할 거야. 그러면 나는 저를 돌보아주지 않을 수 없겠지. 
그게 아니라면 내게도 창피를 주려고 정말 죽어버릴지도 몰라.'
  어린 왕자는 생각을 계속했다. 
  '나는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가진 부자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단지 흔해 빠진 
장미꽃 한 송이인걸. 그것하고 무릎께밖에 안 오는 화산 세 개. 그중의 하나는 
아마 영원히 꺼져 있을지도 모르고, 그것으로 내가 위대한 왕자라고는 할 수 
없겠어^5,5,5^.'
  어린 왕자는 풀밭에 엎드려 울었다. 
      [  여우

  여우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녕!" 여우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 어린 왕자가 공손하게 대답하며 돌아보았지만 주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난 여기 있어. 사과나무 밑에^5,5,5^."
  "넌 누구니? 아주 예쁘구나."
  "난 여우야."
  "나하고 놀자. 난 아주 쓸쓸하거든."
  어린 왕자가 제안을 했다.
  "난 너하고 놀 수 없어. 길이 들지 않았거든."
  "그래. 미안해."
  어린 왕자는 이렇게 말하곤 잠시 후에 물었다.
  "길들인다란 말이 무슨 뜻이니?"
  "넌 여기 애가 아니구나. 뭘 찾고 있지?"
  "사람들을 찾고 있어. 그런데 '길들인다'란 말의 뜻이 뭐야?"
  "사람들은 총을 가지고 사냥을 해. 그건 나로선 아주 난처한 일이지. 사람들은 
또 닭을 길러. 그게 사람들의 유일한 재미지. 너도 닭을 찾고 있니?"
  "아니. 난 친구를 찾고 있어. 그런데 '길들인다'란 말의 뜻이 뭐냐니까?"
  "아, 그건 너무나 잊혀진 말이구나. 그건 '관계를 맺는다'란 뜻이야."
  "관계를 맺는다구?"
  "그래, 나에게 있어서 넌 아직도 수많은 아이들 중의 하나에 불과해. 나는 네가 
필요하지도 않고 너 또한 내가 필요치 않아. 나는 네게 있어서 그 많은 여우들과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거든. 그렇지만 만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게 되는 거야. 나에게는 네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네게는 내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야."
  "이제 알아듣겠어. 꽃이 하나 있는데^5,5,5^ 그 꽃이 나를 길들였었나봐."
  "그럴 수 있지. 지구 위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거든."
  "아니, 지구에 있는 게 아니야."
  여우는 호기심이 이는 것 같았다.
  "다른 별에 있어?"
  "응."
  "그 별에도 사냥꾼이 있니?"
  "아니."
  "그거 괜찮은데! 닭은?"
  "없어."
  "완전한 건 아무 데도 없다니까."
  여우는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내 생활은 극히 단조로워. 나는 닭을 잡고 사람들은 나를 잡지. 닭은 모두 
비슷하고 사람들도 모두 비슷해. 그래서 난 조금 싫증이 나 있어.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에 볕이 드는 것처럼 밝아질 거야. 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될 거야. 그들의 발자국 소리는 나는 굴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지만 네 발자국 소리는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저기 아래를 
봐. 밀밭이 보이지? 나는 빵을 먹지 않아. 그래서 밀은 아무 소용이 없어. 밀밭은 
내게 아무 느낌도 주지 않는단 말야. 정말 슬픈 일이지. 넌 금발머리를 가졌어. 
그래서 네가 날 길들인다면 놀라운 일이 될 거야. 황금색의 밀은 네 생각을 하게 
해 줄거구, 난 밀밭을 지나치는 바람소리를 좋아하게 될 거야."
  여우는 말을 멈추고 어린 왕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만 좋다면^5,5,5^ 날 길들여 줘!"
  "그럴게."
  어린 왕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난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단다. 친구들을 찾아야 하고, 또 알아야 할 
것들이 참 많아."
  "누구든지 자기가 길들인 것밖에는 알지 못한단다. 사람들은 이제 무얼 알 시간조차 
없어졌어. 그들은 가게에서 다 만들어놓은 것을 사니까.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인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친구가 없어. 네가 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주 참을성이 있어야 해. 처음에는 풀밭에, 그렇게, 내게서 좀 멀리 앉아 
있어. 내가 널 몰래 곁눈질해서 볼 테니까.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이란 
오해의 원인이거든. 그리고 매일 조금씩만 다가앉으면 돼^5,5,5^."

  이튿날 어린 왕자는 그 자리에 다시 갔다.
  "같은 시간에 오면 더 좋았을 텐데^5,5,5^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더 행복해지지. 네 시가 되면 나는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고 너를 걱정하게 되는 거지.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난 
몇 시에 마음을 다잡을지 모르게 되거든^5,5,5^ 이런 의식이 필요하단다."
  "의식이 뭐지?"
  "그건 오랫동안 잊혀진 거야. 그건 어느 날이 다른 날과, 어느 시간이 다른 
시간과 다르도록 만드는 거야. 나를 쫓는 사냥꾼들에게도 의식은 있어. 그들은 
목요일에는 마을의 소녀들과 춤을 추지. 그래서 목요일이 기막히게 행복한 
날이야. 그날이 오면 나는 포도밭까지 산책을 나간단다. 만일 사냥꾼들이 아무 
때나 춤을 춘다면 모든 날들은 다 비슷해질 거야. 그리고 내게도 여가라는 것이 
하나도 없을 거구."
  이렇게 해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다. 그리고 떠날 시간이 가까웠을 때 
여우가 말했다.
  "아! 난 울고 싶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네 탓이야. 난 네게 잘못하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길들여 달라고 
했잖아^5,5,5^."
  "그렇긴 해."
  "그런데도 울려고 하는 거야?"
  "그럼."
  "그러면 넌 아무 것도 좋은 게 없잖아."
  "있어. 밀 빛깔 때문에."
  여우는 이렇게 덧붙였다.
  "장미꽃들을 보러 다시 가봐. 네 꽃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그러고 나서 네가 내게 작별 인사를 하러 오면 선물로 비밀을 하나 가르쳐 줄게."

  어린 왕자는 여우의 말대로 장미꽃들을 다시 보러 갔다. 그는 꽃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내 장미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어. 너희들은 아직 아무 것도 아니야. 
누구도 너희들을 길들이지 않았어. 너희들이 길들인 사람도 하니 없지? 너희들은 
내가 길들이기 전의 여우와도 같아. 처음에 여우는 수많은 여우와 똑같은 그냥 
여우에 지나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삼았으니까 지금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된 거야."
  이 말을 들은 장미꽃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어린 왕자는 말을 계속했다.
  "너희들은 아름다워. 하지만 아무런 가치가 없어. 너희들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물론 세상 사람들은 내 꽃이 너희들과 닮았다고 여길 
거야. 하지만 나는 그 꽃 하나가 너희들 모두보다 더 소중해. 그 꽃은 내가 물을 
주었기 때문이야. 내가 고깔을 씌워 주었고 바람막이를 해 준 내 꽃이기 
때문이지. 그 꽃의 벌레도 잡아주었어. 나비를 보게 하려고 두세 마리는 
남겨두었지만. 불평하거나 뽐내는 소리, 때로는 침묵의 소리조차 들어준 것은 내 
꽃이기 때문이야. 그건 바로 내 장미였기 때문이야."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로 돌아왔다.
  "잘 있어."
  여우가 말했다.
  "잘 가. 내 비밀은 여기 있어. 아주 간단한 거야. 누군가를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5,5,5^."
  그 말을 잊지 않으려고 어린 왕자가 속으로 되뇌었다.
  "네 장미가 그렇게 소중한 건 네 장미를 위해 잃어버린 네 시간 때문이야."
  "내 장미를 위해 잃어버린 시간 때문에^5,5,5^."
  어린 왕자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다시 한번 되뇌었다.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잊고 있어. 하지만 너는 그걸 잊어서는 안 돼. 언제나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해. 넌 네 장미에 대해서 책임이 있어."
  "난 내 장미에 책임이 있다^5,5,5^."
  잊지 않으려고 어린 왕자는 다시금 그 말을 되뇌었다. 
      [  철로원

  "안녕!" 어린 왕자가 인사했다.
  "안녕!" 철로원이 화답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손님들은 천 명씩 고르고 있어. 그리고 손님들을 실어가는 기차를 왼쪽으로 
때로는 오른쪽으로 보낸단다."
  환하게 불을 밝힌 기차가 천둥같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전철기의 조종실을 
뒤흔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굉장히 바쁘네요. 대체 뭘 찾고 있는 거죠?"
  "기관사 자신도 그건 모른단다."
  또 다시 반대쪽에서 불이 환한 기차가 지나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까 그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 건가요?"
  "그 사람들이 아니야. 두 기차가 서로 엇갈린 거야."
  "자기들이 사는 데서 만족하지 못했나 보죠?"
  "누구나 자기가 사는 데서 만족하는 사람을 없단다."
  세 번째의 기차가 다시 우레 같은 소리를 냈다.
  "이 사람들은 아까 그 손님들을 쫓아가는 거^36^예요?"
  "그런 게 아냐. 그들은 차 안에서 졸고 있든지. 아니면 하품을 하고 있지. 
어린이들만이 유리창에 코를 납작하게 눌러대고 있는 거야."
  어린 왕자가 말했다.
  "어린이들만이 자기가 찾고 있는 걸 알고 있어요, 아이들은 헝겁인형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지, 그 때문에 그 인형이 아주 소중하데 된 거죠. 만일 누군가가 그 
인형을 빼앗아간다면 그 아이들은 울어버릴 거^36^예요."
  철로원이 말했다.
  "어린이들은 참 운이 좋단다." 
      [  약장수

  "안녕!" 어린 왕자가 인사했다.
  "안녕!" 약장수가 대답했다.
  그는 목마름을 풀어주는 개량된 환약을 파는 약장수였다. 일주일에 한 알씩 그 
약을 먹으면 목이 마르지 않았다.
  "아저씨는 그걸 왜 팔죠?"
  "그건 시간을 굉장히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지. 전문가들이 계산을 했는데 
일주일에 53분이나 절약된다는구나."
  "그53분으로 뭘 하는데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지."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나 같으면 53분의 시간 동안에 아주 천천히 우물가로 걸어갈 텐데^5,5,5^.' 
    [  사막의 신비

  사막에서 고장을 일으킨 팔일 째 되는 날이다. 나는 저장한 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면서 어린 왕자로부터 약장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아, 네 이야기는 참 재미있구나. 그런데 난 아직도 비행기를 고치지 못했고, 더 
이상 마실 물도 없단다. 나도 너처럼 샘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
  "내 친구 여우는^5,5,5^."
  "얘, 여우가 문제가 아니란다."
  "왜요?"
  "갈증이 나서 곧 죽게 될 테니까^5,5,5^."
  어린 왕자는 내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답했다.
  "설사 죽는다 해도 친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좋은 거^36^예요. 나는 여우 친구를 
가졌다는 게 아주 기뻐요."
  나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위험을 모르는구나. 배고픔도 갈증도 없고, 햇빛만 조금 있으면 
되니까^5,5,5^.'
  어린 왕자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내 생각에 대답을 했다.
  "나도 목이 말라^5,5,5^. 우리 우물 찾으러 가요."
  나는 몹시 피곤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드넓은 사막에서 무턱대고 물을 
찾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잠자코 몇 시간을 걷고 나니 땅거미가 내리고 별빛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나는 
목이 마른 데다가 미열이 나서 꿈을 꾸듯이 그 별들을 바라보았다. 어린 왕자가 
내게 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새삼스럽게 춤을 추었다.
  "너도 그렇게 목이 마르니?"
  내 말에 어린 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혼자 뇌까릴 뿐이었다.
  "물론 마음에도 좋을 수가 있어^5,5,5^."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물어보지 말아야 
한자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쳤는지 모래 위에 앉았다. 나도 그의 곁에 앉았다. 어린 왕자가 입을 열었다.
  "별들이란 보이지 않는 꽃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5,5,5^."
  나는 '그렇고 말고!' 맞장구를 치곤 달빛 아래 그득한 모래주름들을 말없이 
응시했다. 어린 왕자가 또 다시 말했다.
  "사막은 아름다워^5,5,5^."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 사막을 사랑했다. 모래언덕 위에 앉아 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무엇인가가 
침묵 속에서 반짝인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어린 왕자의 말에 나는 불현듯 모래의 신비스러운 반짝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아주 오래된 집에서 살았었다. 그 집에는 보물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내려왔다. 물론 아무도 보물을 발견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 
누구도 그것을 찾으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 집은 매력이 
있었다. 그 집은 가슴 깊숙이에 어떤 신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래. 집이건 사막이건 그것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 때문이야."
  "아저씨가 내 여우와 같은 생각을 해서 기뻐요^5,5,5^."
  그리고 어린 왕자는 잠이 들었다. 나는 그를 팔에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가슴이 뭉클했다. 깨어지기 쉬운 보물을 안고 가는 것같았다. 지구 위에는 그보다 
더 연약한 것이 없을 것이었다.
  나는 그의 창백한 이마와 감긴 눈,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다발을 달빛에 
비춰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5,5,5^
  어린 왕자의 반쯤 벌어진 입술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아이가 그렇듯 나를 감동시키는 건 자기 꽃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잠자고 
있을 때조차 램프의 불꽃처럼 그에게서 빛을 내고 있는 장미꽃 때문이야.'
  이런 생각이 들자 그가 더욱 연약하게 느껴졌다.
  '램프를 잘 보호해 주어야 한다. 바람이 한번 불면 불꽃이 꺼질 수 있으니까^5,5,5^.'
  이렇게 걷다가 동이 틀 무렵 나는 우물을 발견했다. 
    [  우물의 노래

  '사람들은 급행열차를 타지만 자기가 무얼 찾아가는지 몰라. 그래서 사람들이 
불안해 하고 빙빙 도는 거야.'
  어린 왕자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다 소용없는 짓이야."
  우리가 찾아낸 우물은 사하라 사막에 있는 보통의 우물과는 달랐다. 사하라 사막의 
우물은 모래에 단순히 구멍이 뚫린 것이다. 그런데 이 우물은 마을에 있는 우물과 
비슷했다. 이 근처에는 마을이 없는데^5,5,5^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이상한데^5,5,5^ 모든 게 다 갖추어졌구나. 도르래며 두레박, 줄까지^5,5,5^."
  어린 왕자는 웃으며 줄을 만져보고 도르래를 움직여 보았다. 도르래가 삐걱거렸다. 
마치 바람이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다시 일 때 낡은 풍차가 삐걱거리듯이.
  "아저씨, 들어봐요. 우리가 이 우물을 깨우니까 우물이 노래를 부르는 거야."
  나는 그에게 힘든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게. 네게는 너무 무거워."
  나는 천천히 두레박을 우물 둘레의 돌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곤 떨어지지 않도록 
잘 놓았다. 내 귀에는 도르래의 노래가 계속되었고 아직도 출렁거리는 물 속에서 
해가 춤추는 것을 보았다.
  "난 이 물이 마시고 싶었어요. 물 좀 주세요."
  나는 그가 찾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의 입술에 
닿도록 두레박을 들어주었다. 어린 왕자는 눈을 감고 물을 마셨다. 갑자기 나는 
축제처럼 즐거워졌다. 이 물은 보통 음식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별빛 아래서의 
행진, 도르래의 노래, 내 팔의 수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선물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크리스마스의 불빛, 자정 미사의 
음악, 상냥한 웃음들이 그 때 내가 받은 선물을 그렇게 빛나게 해 주었었다.
  "아저씨네 별 사람들은 한 정원에 5천 그루의 장미를 가꾸지만^5,5,5^ 거기서 
자신들이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해 내지는 못해요^5,5,5^."
  "찾아내지 못하지."
  "그들이 바라는 건 단 한 송이 장미꽃이나 물 한 모금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들인데^5,5,5^."
  "물론이지."
  그러자 어린 왕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눈으론 보이지 않아요. 마음으로 찾아야만 돼."
  나는 물을 마셨다. 한숨을 돌렸다. 동틀 무렵의 모래는 꿀 빛깔이다. 나는 이 
꿀빛 때문에 행복했다. 무엇 때문에 마음을 괴롭힐 것인가?
  어린 왕자가 다시 내 곁에 다가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저씨, 약속을 지켜줘요."
  "^5,5,5^."
  "다 알면서^5,5,5^ 내 양의 굴레^5,5,5^ 난 꽃에 대해 책임이 있거든!"
  나는 주머니에서 스케치한 그림들을 꺼냈다. 어린 왕자는 그림들은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저씨의 바오밥나무는 양배추하고 비슷한데^5,5,5^."
  "그래?"
  '난 애써 그린 바오밥나무 그림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가졌었는데!'
  "아저씨 여우는^5,5,5^ 그 귀는^5,5,5^ 좀 뿔같아요^5,5,5^ 그리고 너무 길어요!"
  "너무하는구나, 얘야. 난 속이 모이는 보어뱀하고 속이 안 보이는 보어뱀 그림밖에는 
잘 그릴 줄 몰라."
  "괜찮아요. 아이들은 잘 알 테니까."
  나는 그래서 굴레를 연필로 그렸다. 그 그림을 주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무슨 딴 생각하고 있구나."
  어린 왕자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나 지구에 떨어진 지^5,5,5^ 내일이면 일 년째예요."
  그리곤 잠시 후에 또 말했다.
  "난 여기서 아주 가까운 곳에 떨어졌었어^5,5,5^."
  그리곤 얼굴이 붉혔다. 이유도 모른 채 난 다시 야릇한 슬픔에 잠겨야 했다.
  "그럼 일 주일 전 내가 얼 만났던 아침에 네가 사람이 살고 있는 고장으로부터 
수만 리나 떨어진 곳에 혼자 거닐었던 건 우연이 아니구나. 네가 떨어진 곳으로 
다시 가던 길이었니?"
  어린 왕자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나는 망설이며 다시 물었다.
  "혹시 생일 때문에 그러니^5,5,5^?"
  어린 왕자가 또 다시 얼굴을 붉혔다. 내 물음에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붉어진다는 건 '그렇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아! 겁이 나는구나."
  그러자 어린 왕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저씨는 이제 일해야 해요. 기계 있는 데로 다시 가세요. 난 여기서 
기다릴게요. 내일 저녁에 다시 오세요."
  나는 걱정스러웠다. 여우 생각이 났다. 길을 들여놓으면 헤어질 때 좀 울게 
되는 것이다. 
      [  이별

  우물 곁에는 낡은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 이튿날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멀리서부터 그 돌담 위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어린 왕자가 보였다.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이 안 나니? 분명히 여긴 아냐."
  누군가가 대답을 한 모양이다. 다시 이렇게 대꾸하는 걸 보면.
  "그래! 그래! 날짜는 맞는데 장소는 여기가 아니라니까."
  나는 돌담을 향해 걸어갔다.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계속 말을 했다.
  "^5,5,5^물론이구 말구. 모래 위에 내 발자국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를 잘 봐. 
거기서 날 기다리면 돼. 오늘 밤은 그 곳에 있을 거니까 말야."
  나는 돌담에서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어린 왕자가 말했다.
  "넌 좋은 독을 가지고 있니? 날 오래 아프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겠어?"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게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어린 왕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가 봐^5,5,5^ 난 내려가고 싶어!"
  그 때 담장 아래를 내려다 본 나는 펄쩍 뛰었다. 그곳에는 30초 이내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노란 뱀 한 마리가 어린 왕자를 향해 대가리를 곧추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권총을 꺼내려고 주머니를 더듬으며 달려갔다. 그러나 나의 발자국소리를 
들은 뱀은 잦아드는 분수처럼 조용히 모래 속으로 기어가더니 서두르지도 않고 
가벼운 쇳소리를 내며 돌 틈을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내가 돌담에 다다랐을 때는 겨우 눈처럼 창백해진 어린 왕자를 품에 안을 
시간의 여우밖에는 없었다.
  "어떻게 된 거니? 이젠 뱀하고 이야기를 다 하고^5,5,5^."
  나는 그가 풀어 본 적이 없는 황금색 목도리를 푼 다음 목에 물을 적셔주고 또 
물을 먹였다. 어린 왕자는 나는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양팔로 나를 
껴안았다. 그의 가슴은 카빈총에 맞아 죽어가는 새처럼 팔딱거렸다.
  "난 아저씨가 기계를 고치게 되어서 참 좋아요. 아저씨는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걸 어떻게 알지?"
  나는 간신히 비행기를 고쳤다는 걸 알리러 그에게 달려왔던 것이다.
  "나도 오늘 집으로 돌아가요."
  그리곤 더욱 쓸쓸하게
  "그건 더 멀고^5,5,5^ 더 어려워^5,5,5^."
  나는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복받쳐 
어린애처럼 어린 왕자를 꼭 껴안았다. 그는 깊은 심연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들어갈 것만 같았다.
  어린 왕자는 진지한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내겐 아저씨가 준 양이 있어요. 그리고 양을 넣어두는 상자와^5,5,5^ 굴레도 
있어요."
  그리고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의 몸이 조금씩 
따스해져왔다.
  "너무 무서웠지?"
  어린 왕자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저녁이 훨씬 무서울 거^36^예요."
  이젠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 웃음소리를 
다신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사막의 샘물과도 
같은 웃음소리를^5,5,5^
  "네 웃음소리를 더 듣고 싶구나."
  "오늘 밤이면 일년이에요. 내 별은 작년에 내가 떨어졌던 자리 바로 위에 있게 
되는 거죠."
  "얘, 뱀이니 약속이니 별이니 하는 이야기는 나쁜 꿈이지 않니?"
  그는 내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렇고 말고^5,5,5^."
  "꽃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아저씨가 어떤 별에 있는 꽃을 좋아하게 되면, 밤에 
하늘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죠. 어느 별에나 다 꽃이 피어있으니까."
  "그렇고 말고^5,5,5^."
  "물도 마찬가지에요. 아저씨가 내게 마시라고 준 물은 도르래와 줄 때문에 음악 
같았어요. 생각나요^5,5,5^. 물이 참 맛있었어요."
  "그렇고 말고."
  "아저씨, 밤이 되면 별을 봐요. 내 별은 너무 작아서 어디 있는지 아저씨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게 더 나아요. 내 별을 아저씨에게는 많은 별들 중 하나가 
될 테니까요. 그래서 아저씨는 온갖 별들을 바라보는 게 즐거워질 거^36^예요. 별들은 
모두 아저씨 친구가 되겠죠. 내가 아저씨에게 선물을 하나 줄게요."
  어린 왕자는 또 상냥하게 웃었다.
  "오! 얘야, 얘야, 난 이 웃음소리가 참 좋아."
  "그게 바로 내 선물이에요^5,5,5^. 이건 물도 마찬가지에요."
  "무슨 뜻이니?"
  "사람마다 별들은 다 달라요.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별은 안내인이 되죠. 하지만 
어떤 이들에겐 별을 조그만 빛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학자에게 있어서 별은 풀기 
힘든 문제지만 내가 전에 말한 상인에게는 황금같이 보일 거^36^예요. 하지만 별들은 
말이 없어요. 그렇지만 아저씨는 이제 별을 다른 사람과는 달리 보게 될 거^36^예요."
  "그게 무슨 뜻이지?"
  "아저씨가 밤에 하늘을 바라보면, 내가 그 별들 중의 하나에서 살고 있고, 내가 
그 별들 중의 한 별에서 웃고 있으니까 아저씨에게는 모든 별들이 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될 거^36^예요. 아저씨는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갖게 될 거^36^예요."
  어린 왕자는 또 웃었다.
  "아저씨가 위로를 받고 싶을 땐 나를 안 것이 참 기쁠 거^36^예요. 아저씨는 
언제까지나 내 친구가 되죠. 나하구 웃고 싶어질 거구요. 가끔 창문을 열겠죠. 
그리고 아저씨는 이렇게 말할 거^36^예요. '그래 별들을 보면 언제나 웃음이 나네' 
다른 사람들은 아저씨를 미쳤다고 생각할 거^36^예요. 후훗, 그렇게 되면 난 정말 
아저씨에게 못할 일을 한 게 되겠네^5,5,5^."
  그러면서 그는 또 환하게 웃었다.
  "그건 별 대신에 웃을 줄 아는 방울을 아저씨에게 잔뜩 준 거나 마찬가지 일이 
될 거^36^예요."
  어린 왕자는 또 웃었다. 그러더니 엄숙한 얼굴로 선언을 했다.
  "오늘 밤엔^5,5,5^ 아저씨^5,5,5^ 오지 마세요^5,5,5^."
  "난 네 곁을 떠나지 않겠어."
  "나는 아픈 것처럼 보일 거^36^예요. 죽은 것처럼요. 그거. 그걸 보러 오지 말란 
말이에요. 올 필요가 없어요."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5,5,5^ 뱀 때문이기도 해요. 아저씨를 물지도 모르거든요. 
뱀이란 위헌한 거^36^예요. 괜히 물 수도 있어요."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니까."
  갑자기 어떤 생각이 그를 안심시켰다.
  "두 번째 물 때는 독이 없긴 하지^5,5,5^."

  그날 밤 난 그가 일어나는 걸 보지 못했다. 조용히 홀로 빠져나간 것이었다. 
급히 쫓아간 내가 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는 단호한 몸짓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를 본 어린 왕자는 괴로운 표정이었지만 이렇게 말하며 손을 잡았다.
  "아, 아저씨! 아저씨가 온 건 잘못이에요. 걱정을 하게 될 테니까요. 난 죽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녜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아저씨는 알 거^36^예요. 거긴 너무 멀어. 이 몸뚱이를 가지고 갈 수는 없어요. 
너무 무거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내버린 낡은 껍데기 같을 거^36^예요. 낡은 껍질은 슬프지 않아요."
  내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그는 힘이 좀 빠지는 듯했다. 그러다가 또 힘을 냈다.
  "아저씨 그건 아름다운 거^36^예요. 나도 별을 쳐다 볼 것이거든요. 모든 별들은 
녹이 슨 도르래가 있는 우물이 되겠죠. 모든 별들은 내게 마실 물을 퍼 줄 
거^36^예요."
  여전히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건 아주 재미있겠죠? 아저씨는 5억 개의 방울을 갖게 되구 난 5억 개의 
샘물을 갖는 거니까요."
  이 말과 함께 그도 입을 다물었다. 눈물이 나왔던 것이다.
  "저기야. 나 혼자 한 발자국만 내디디게 해 줘요."
  겁이 났는지 어린 왕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내 꽃 말이에요. 난 그 꽃에 대해 책임이 있어요. 그 꽃은 얼마나 
연약한데! 아주 순진하구. 꽃은 아무 힘도 없는 가시 네 개로 자기 몸을 보호하고 
있어요."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어서 주저앉고 말았다. 어린 왕자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자^5,5,5^. 이것 뿐이야^5,5,5^."
  그는 잠시 또 망설이더니 다시 일어나 한 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발목께서 노란 빛이 반짝했다.
  어린 왕자는 아무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잠시 동안 그대로 서 있더니 나무가 
넘어지듯 조용히 쓰러졌다. 모래 때문에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  어린 왕자의 추억

  물론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벌써 6 년 전의 일이다. 나는 한번도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해 본적이 없다. 당시 동료들은 살아 돌아온 나를 보고 아주 기뻐했다. 
나는 슬펐지만 그들에게는 단지 '피곤하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지금은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그것은^5,5,5^ 완전히 진정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어린 왕자가 자기 별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잘 안다. 동이 틀 무렵 그의 
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그다지 무거운 몸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밤에 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5억 개의 방울과도 같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났다. 내가 어린 왕자에게 그려준 양을 가죽끈으로 묶어주는 
걸 잊어버렸던 것이다. 어린 왕자는 양에게 굴레를 씌울 수 없을 것이다.
  '그 별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혹시 양이 그 꽃을 먹어버리지는 
않았을까 몰라'
  때로는 이런 생각도 했다.
  '그럴 리 없어. 어린 왕자는 밤마다 꽃에게 유리고깔을 씌우고 양을 잘 지켜 보았을 
거야'
  그런 생각에 잠기면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별들은 모두 조용히 웃는다.
  '한두 번 방심하면 그만이야. 저녁에 유리고깔을 씌우는 걸 잊던지. 아니면 양이 
밤중에 소리없이 나가든지 하다면^5,5,5^.'
  이런 생각을 하면 나의 방울들은 모두 눈물로 변해 버린다.

  그것은 정말 커다란 수수께끼이다.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나 나에게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이 어디선가 장미꽃을 먹었나 안 먹었나에 따라 세상이 온통 
달라지는 것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하라. '양이 꽃을 먹었을까 안 먹었을까?'라고. 그러면 
모든 일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도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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