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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너와 나의 한의학

by Casey,Riley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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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한의학


    이책은 4부로 구성되었다. 
  제1부: "솜니별곡". 도올이 이리에서 사는 모습과 학생 도올의 한의학관.
  제2부: 본 1시작때 낸 학생 레포트 모음.
  제3부: 본 1끝날때 낸 학생 레포트 모음.
  제4부: "이땅의 4만약사님들께 드리는 글"

      차례

    제1부 솜니별곡
    제2부 본 1을 시작하면서
  레포트를 모으면서
  아드레날린과 소프라노에 대한 단상
  한의학의 나아갈 방향
  어머니의 눈물
  미래관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
  양심과 양식
  쿼크와 물
  핑크빛이 바래는 이유는 
  체와 용
  무동이네 집
  본과생이 된 연화
  한의학, 그것을 고민하면서
  고통과 유산
  한의과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한의대 생활
  한의학에 관한 나의 소견
  컴퓨터와 한의학
  한의학에 대한 나의 소견
  한의학에 대한 나의 작은 생각
  내가 바라본 한의학
  목련꽃 봉오리
  마이 웨이
  신의
  3년의 세월
  짬뽕
  한의학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에의 고민
  무한대여! 
  반성속에 피는 한의학
  사심과 잡심
  한의학의 모퉁이에 서서
  믿음을 주는 한의학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기에
  한의학 입문
  과학이란 자기환경 인식체계
  나에게 있어서의 한의학
  예과생활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나의 예과생활
  진실한 인술
  내가 해야할 한의학
  책이 너무 많아서
  교과과정
  12와 365
  평범한 사고
  닭과 달걀
  한약장 놓고 재미보는 약사님들!
  꽈의 고민
  한의대에 다니며
  대의와 소의
  나를 닦는 마음
  한의학의 위상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우리의 권익을
  성적과 임상은 반비례일까?
  아플때 나는 한의원을 가지 않았다
  컴퓨터와 한의학 발전
  전통한의학파와 한양방상호보완파
  한의사와 약사와 침구사
  방안에 널려있는 술병부터
  주역이 죄라면
  국가는 한의학의 현상만 유지시켜라!
  나의 별은
  비피, 글루코스, 병자병평
  엔돌핀이여
  한의학에 대한 소박한 사견과 마음가짐
  시작이 반
  한의대생들은 토론이 너무 없다
  우리는 왜 이다지도 단결이 안될까?
  맛만 볼것인가
  환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장부라는 전쟁터
  보편화를 통한 객관화
  하나님의 은혜로
  조상과 후손을 연결하는 하나의 고리
  거대한 황무지
  나의 꿈은 노벨상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한과 한의 차이
  서양의학을 받아들여라
  나의 발전은 곧 한의학의 발전
  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통영이의 꿈
  한의학에 대한 실망
  청운의 꿈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한의학의 접근 방법
    제3부 일 년 후(One Year After)
  둠벙올 막고 품는 우직성
  빵(0)의 애상
  아웃사이더
  날개 
  자신감과 근면
  좋은 것과 싫은 것
  나에게 온 편지
  정저지와에서 탈출을 시도할때
  전쟁과 평화 그리고 고독한 황제
  고독을 씹으며
  렛 잇 비
  반성은 내일을 기약한다
  남과 여, 그리고 희망과 절망
  발전적인 삶을 위해서
  첫 눈 
  결단의 시기
  마이 플랜
  타임머신을 타고...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여유를 갖는 마음으로
  한의학은 종교일까?
  아버지의 병환을 고민하며
  앞으로는 열심히 부지런히
  나만의 내가 아닌 나
  순리를 쫓으며
  여전히 뜬구름
  아! 가을이여!
  아니 연극은 인생일까
  더 성숙한 고민을 위해
  미완을 위하여
  우측뇌를 통해서 본 "오행설"과 그것으로 인한 잡념
  라면과 아이스박스
  아! 아쉬운...
  이제부터라도
  인내심을 갖자
  사랑 이상의 사랑
  나의 본연은
  미쓰 전북 선발대회
  깨어라! 가져라! 살아라!
  모두를 사랑합시다
  서너가지 중에 하나 정도는
  내탓이오!
  황제내경의 속편을 기대하며
  에펠탑을 쌓으며
  한의학도로서의 나의 위치
  겨울의 길목에서
  공부해서 남주나
  한의학의 정도
  도둑고양이
  밋션
  참다운 의자는
  고민의 완성
  우리는 써머리 세대인가보다
  빨주노초파남보
  뜬구름을 격추시킬 고성능 미사일을 만들자
  낙엽
  마음으로 보자
  예과와 본과는 한 층 차이
  고지가 보이지 않는 전진
  클래식과 음양
  나를 찾기 위한 노력
  아쉬움
  후회없는 1년이라 말하고 싶다
  모내기 뙤약볕아래 심는 한의학
  존재한다는 모순
    제4부 이땅의 4만 약사님들께 드리는 글

      솜니별곡

    I
  째진 구멍속으로 밀어넣은건 다름아니 백원짜리 동전이다. 앗차! 안되겠다. 재빨리 청색 쌔무 가죽잠바를 벗어던지고 목에 걸친 수건목도리를 잡아댕기자마자 사정없이 날라왔다. 나는 첫구를 놓쳐버렸다. 왕년의 실력을 발휘해볼려고 유감없이 쐐방망이를 휘둘러 보았지만 스트라잌을 때린건 두어개정도였다.
  나는 노래방을 좋아하지 않는다. 외기어려운 가사나 멜로디가 나와 리드해주니깐 노래를 연습하기엔 십상이라든가, 돼지목따는 소리로라도 힘껏 외칠 수 있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든가 하는 것은 결코 불쾌한 일은 아니지만 나의 감정이 인정사정없는 기계에 이끌려 가야만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일수는 없다. '예기' '악기'에 이르기를 소리란 인간의 마음이 물에 촉발되어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기때문에 정취를 담을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범음지기, 유인심생야. 인심지동, 물사지연야. 감어물이동, 고형어청). 이 옛말에는 노래의 본질, 그 원초적 충동에 대한 매우 정확한 지적이 담겨져 있다. 소리란 심(주관)과 물(객관)이 상응되어 촉발되어 나오는 것이며 그 소리에 일정한 비율이 성립할 때 음이 되고 그 음이 모여 악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군자만이 악을 알 수 있고, 악을 모르면 금수와도 같다고 했다. 허나 그러한 원초적 충동이나 촉발에 의한 자발성이 그 자발적인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선 박자라는 기계적 일정성이 나의 소리앞에 군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핏치의 정확성은 유지해야한다해도 장단이 강요된다는 것은 좀 기분나쁜 일이었다. 나는 어느날 두 환이와 함께 어느 한의대생의 어머니가 경영한다고 하는 노래방엘 난생 처음 들어가봤다가 답답하고 깝깝해서 그냥 나와버렸다. 그리곤 노래방이라는 곳은 다시 들어가볼 생각이 나질 않았다.

  우선 쇠방망이가 마음엘 들지 않는다. 자주 부러지니 할 수 없겠지만 나무로 만든 옛날 빳따의 촉감이 그립다. 그리고 인간이 던지는 공의 흐름이 아닌 기계적 발출앞에 내가 압도당하는 것도 기분이 나쁘다. 아니, 날 당혹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환이는 백발백중 공을 시원하게 잘 날렸다. 그 녀석은 역시 운동신경이 참 좋다. 나역시 운동신경은 누구못지 않지만 나이는 못속이나부다. 준비없이 들어가 흉내낸다고 휘둘렀다가 그만 나는 며칠을 두고두고 후회해야만 했다. 손바닥이 부르텄고 손목관절에 관절염이란 마왕이 되돌아 오셨다. 그러나 나는 우리한의대 길목건너 이 야구연습장이 자리잡고 있다는 이 기적적인 사실을 마음속깊이 감사하고 있다. 아마도 이 집 주인은 참 단순하고 순박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고집이 센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천치 백치일 것이다. 땅의 효용이 요즈음과 같이 치열하게 돈으로 계산되는 판에 이처럼 큰 공간이 단돈 백원짜리 단위로 운영된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키 어려운 것이다. 
내가 대학 다닐때만해도 이런 야구연습장은 서울에 가득했었다. 그런데 지금 서울서 이런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은 없다. 그만큼 이리는 인간공간의 도시화라는 진화과정이 늦은 셈이다. 단 돈 백원짜리 동전만 한개 집어넣으면 공이 열개가 튀어나오고 시각과 운동의 중추로부터 말초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경과 근육이 수축과 이완의 격렬한 작동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끔찍한 강의실 쎌(감옥=세포)을 들락거려야 하는 우리 의대생들에겐 더없이 고마운 스트레스해소처방임에 틀림이 없다. 아마도 이 야구장이 문을 닫는 날, 이리신동의 시골다운 정취도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내가 신동에 처음 발을 디뎠던 삼년전만 해도 여기저기 공터천지였고 소위 대학로라고 하는 신작로변에도, 북일국민학교 꼬마들이 쏟아지는 길목에는, 오마께를 파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설탕을 녹여 부은 판에 아령같은 모양으로 된 무늬를 찍어 그것을 입속의 혀로 녹여 그 아령같이 생긴 모양만 뽑아내면 여러가지 사탕모양과자 덤을 얻을 수 있는 그 께임을 아마도 내나이 또래의 사람이라면 모두 야릇한 동경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혓바닥 침으로 그것을 녹인다는 발상이며, 그것을 녹이는데 들어가는 시간과 정력을 계산하고, 또 그 시간과 정력의 댓가로 얻어지는 전리품의 수준을 생각할 때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하지만 그런 것으로 그렇게도 짜릿한 흥미가 유발된다는 사실은 지금의 스트리트파이터감각으로는 도무지 상상조차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당명황의 양귀비가 그다지도 리즈를 좋아했다는 것을 보면 옛날에는 감미를 느낄 챈스가 그다지도 없었다는 증거다. 지금 쵸코렡의 농한 맛이 지겨웁게 느껴지는 감각엔 그 설탕녹인 판때기가 뭐 말라빠진 깨비냐 하겠지만 내가 어릴 때만해도, 아마 그 아령같은 사탕판을 녹여내는 과정에 은은하게 번지는 감미에, 매력이 끌렸던 것 같고, 또 투기라는 것이 부재했던 세상에 그나마 그런 것으로라도 오마께라는 인센티브가 주어진다는 것이 참으로 스릴만점의 성취감이 있었던 같다. 단지 나는 그런 께임의 단골 낭패자였다. 아무래도 의사집 막내아드님이래서 주위환경에 비해 유족하다면 유족한 환경에서 커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 악바리같은 짓엔 항상 꼴찌였다. 따뜻한 침으로 녹이다 보면 기필코 그 아령 손잡이 한 가운데가 똑 끊어지는 것이다. 내평생 우리 천안 잿배기 천안극장 옆골목입구에 항상 오마께장사에게 일환이나 십환짜리 지폐를 수천배 갖다바쳤을텐데 내기억에 아령빼내는 짓거리에 승리의 구가를 부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완전히 망각의 나락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런데 나는 이런 신동에서 그런 나의 망각된 추억이 되풀이되고 있는 북일국민학교 앞 공터의 꼬마들 동아리패들을 목격하고 충격적인 타임머신의 필름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꼭 한번 예전의 낭패를 만회해보아야지."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면서 그 오마께 할아버지와 그 주변에 모여든 꼬마들의 제전에 참여할 날을 계산하고 있었다. 허나 막상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리고 꼬마들이 그 오마께판 주위로 모여들어 침을 아직도 흘리고 있다는 그 장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 느낌에 휩싸이곤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엔 아직도 때꿍물이 흐른 건강미가 있었고 그 주변의 색깔은 황토색 단조였다. 그리고 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리벌판엔 항상 부는 군산앞바다 바닷바람으로 그 사탕과자위엔 뽀얗게 먼지가 서렸다. 그런데 이런 광경을 사진이라도 찍어두어야지, 우리 해방후 민족사의 마지막 문화인류학적 풍속도를 보존이라도 해야겠다는 사명감에 차일피일하던 중에 공터는 사라졌고 황토빛 군조는 얼룩달룩한 네온싸인으로 변해버렸고 인도. 차도의 구분이 확실해지곤 쭈악 포장길로 단장되더니만 나의 타임머신의 장면들은 눈깜짝할새 없이 증발해버리고 만 것이다. 내가 이리에서 산 삼년, 그 삼년이 바로 나의 유년-청년-장년시절의 삼십년시간의 축소판이었다. 그렇게도 빨리 그렇게도 어마어마한 체험의 축이 압축되어 회전되었다. 그러면서 그 신동의 풍속도는 가차없이 변질되어 갔다. 삼년전 오마께할아버지 풍속도가 지금은 완전히 이대앞 대학로의 풍경보다 더 화려한 트란스포메이션을 일으켜버린 것이다. 알라스! 문명의 참모습은 과연 어때야 하는 것인가? 무위와 유위의 갈림길은 과연 어디에 그 잣대가 있는 것이냐!
  내가 김우중회장님과 아프리카 여행을 할 때였다. 사실 우리의 대화는 '대화' 이후에 벌어지는 대화가 더 재미있는 체험의 연속이었다. 허나 펜대만 들면 쏟아져나오는 잔가지 상념들 때문에 나는 목적지돌파의 전진에 항상 실패한다. 우리의 '대화'는 아프리카여행 초입에서 좌절되고 말았지만 우리의 진짜대화는 그 뒤로 이어진 것들이었다. 김우중회장과 나의 아프리카 여행은 일종의 스테이트 비지트(state visit)였다. 물론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전세기가 각국에 도착할 때마다 공항에서부터 대통령특사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기자회견을 했으며 꼭 대통령을 알현할 기회가 있었다. 김우중 회장은 그만큼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의 아프리카 벤쳐는 아프리카 정부들에게 신심을 주어왔던 것이다. 김회장은 아프리카를 특별히 사랑하는 것 같았다. 아프리카라는 검은 대륙의 광활한 가능성, 순박하기 이를데없는 인간들의 삶의 모습, 그리고 끊임없이 펼쳐지는 검푸른 자연, 누구든지 그러하겠지만 이러한 원시의 자유를 특별히 사랑하는 것 같았다. 루사카공항에서 펼쳐진 공항의 잔디밭위 벤치에 몸을 기대 차를 마시면서 그는 이와같이 중얼거렸다 "말년엔 정말 아프리카본부장으로나 와서 여생을 마칠까 해요. 왜 인간들이 그렇게 옹졸한 세계에 갇혀 아웅다웅해야 하는지요. 이런 넓은 세상에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보는 것도..."
  "잠비아국립대학교 의과대학교수로나 여생을 마쳤으면 좋겠슴니다"하고 나도 맞장구를 쳤다. 광활한 자유도 좋지만, 벌판에 홀로 던져진 인간의 고독은 참으로 감내키 어려운 것일게다. 엘에이의 사막에서조차 문명의 모든 이기를 만끽할 수 있는 체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독과 냉대와 질시와 불시의 위협에 노출되어야만 하는 재미교포들의 삶을 연상할 때 결코 환상적인 동경이상의 고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나는 김회장님의 화술에 유려한 영어로 어색치않은 적절한 양념을 보태드려서 그랬는지 김회장님은 나를 꼭 동반했다. 카다피와 같은 무시무시한 사람들로부터 갓 구테타에 성공한 삐까뻔쩍 어깨훈장이 빛나는 군사독재자들, 그리고 민족독립의 영웅이며 문아한 품격을 지닌 할아버지 카운다대통령, 이런 사람들을 만났다. 김회장님의 배려는 나로서는 참으로 고마운 것이었다. 이 이리 신룡리벌판에서 사는 촌놈에겐 그런 기회란 도무지 평생을 두고두고 다시 체험키 어려운 것일테니까. 언제 내가 그런 정치적 권력의 권좌에 있는 사람들을 단시간에 도맷금으로 만나면서 휘젓고 다닐 챈스가 있을까? 전세기가 공항에 내린다. 그러면 저 멀리서 특사들이 공항의 벌판을 걸어나온다. 우리도 걸어간다. 아프리카의 훈훈한 겨울바람이 내 두루마기 옷깃을 휘날릴 때 우리는 악수를 한다. 브이아이피 영접실로 들어간다. 국립테레비방송 카메라가 기다리고 있다. 거기서 몇 마디. 기다란 특사의 쎄단에 오른다. 대통령궁에 들어간다. 의장대 문지기들의 착착 차렷 경례를 뒤로하며...

  나는 이런 체험을 반복하면서 참으로 야릇한 사실을 발견했다. 인간은 급격한 변화는 쉽게 감지한다. 허나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는 쉽사리 감지하지 못한다. 갑자기 토사광란이 일어났을때 그러한 동통의 변화는 쉽게 감지되지만 손톱이 자란다든가 피부가 각질을 벗겨낸다든가 하는 것은 잘 감지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갑자기 이혼을 당했다라든가 누가 죽었다든가 하는 것은 쉽게 인식되지만 자기가 나이를 먹는다는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감지하기가 어렵다. 사회적 변화도 박종철군의 죽음으로 인한 혁명적 변화같은 것은 쉽게 인지되지만 보이지 않게 서서히 변하는 사회상은 그것이 혁명적인 성격의 것이라할지라도 감지되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나이를 먹었다든가 성인이 되었다든가 또 그것과 부수되어 나의 주변의 모든 환경적 사태가 같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의식할 기회가 거의 없이 살아가는 것같다. 그래서 나는 일국의 대통령을 만날때도 대통령을 만나고 있는 어떤 동급의 권위를 지닌 성인의 모습의 나를 연상한다는 것이 어려웠다. 나의 어린시절의 느낌대로 대통령을 만나고 있는 나자신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어린시절의 나로 돌아가서 나의 오늘의 모습을 생각할 때, 나는 마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장군을 만나고 있는, 미국의 대기업의 회장을 수반하고 있는 어느 고문관의 느낌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것은 생각만해도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어찌보면 제국주의의 사령탑에 있는 내가 매판자본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제삼국의 수령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러한 레토릭은 60년대 대학시절에 내가 목청드높이 외쳤던 소리가 아니던가?

  어느 나라를 들어가던지 간에 풍기는 냄새로부터 그 나라의 꼴을 형량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자회견을 할 때부터 닥아오는 느낌, 만나 인사를 나누는 고급관료들의 인간됨됨이, 그리고 가도를 지나면서 목격할 수 있는 그 나라의 기본투자시설(도로. 교통. 통신 등등)의 수준, 이 모든 것으로부터 그 나라의 정치가 잘되고 있다는 것과 잘못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투자를 할만한 나라라는 것과 해서는 손해만 볼 나라라는 그런 판단이 쉽사리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 신생국으로서의 우리나라의 모습이 어떻게 타인에게 비쳐졌을까 하는 것을 반추해보는 것은 나자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도 적지않은 도움이 되었다. 이와같이 대통령궁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인물을 만나다가 나에게 결정적 챈스가 왔다. 사실 내가 방문하고 목격해보고 싶었던 것은 다국적기업의 총수에 부착된 제국주의자로서의 나의 모습이나 그러한 나의 눈에 비친 아프리카국가들의 정치. 경제 지도자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만나보고 싶었던 것은 그 나라에서 살고있는 아주 평범한 인간들의 일상적 삶의 리얼리티였다. 나는 나에게 배정된 차를 몰고 있던 당지의 사람을 사귀었다. 나는 그에게 그가 살고 있는 집을 좀 구경시켜줄 수 없겠냐고 청했다. 그 운전수는 쾌히 응낙했다. 왈, 자기는 부인이 세명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부인에게서 애들이 둘씩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돈을 좀 더 벌면 부인 하나를 더 얻겠다고 했다. 미국돈으로 계산해 200$이면 처녀를 하나 살 수 있다고 했다. "산다"는 의미는 장인에게 돈을 주어야한다는 의미였다. 일천구백구십일년 일월 이일 수단 카르툼에서의 일이었다. 이날 나는 낮에 대통령을 만났다. 그리고 그날밤으로 운전사집으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풍토라는 것은 인간의 삶의 양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내가 카르툼에서 받은 강렬한 풍토적 인상은 두개가 있었다. 하나는 광대한 나일강이었고 또 하나는 하부부라는 엄청난 황삿바람이었다. 하부부가 불때면 대낮도 갑자기 시커멓게 한밤중으로 변해버렸다. 집집마다 모든 창문밖엔 샷타가 달려있는데 하부부가 불면 그 샷타를 걷어올리고 황토먼지를 털어낸다. 수십센티 푹푹 쌓여있다. 따라서 길거리는 항상 이 하부부의 잔재로 덮여있었다. 하부부속에서 문명을 영위한다는 것은 우리네 감각으로는 참 견디기 어려운 일일 것 같으나 또 그런대로 그들의 삶은 건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부부의 먼지가 덮인 카르툼외각을 달리고 또 달렸다. 깊은 한 밤중이었다. 전등불도 가로등도 보이지 않는 행길엔 뽀얗게 이는 머지만 헤드라이트를 가리웠다. 나를 태운 차는 화이트 나일을 따라가고 있는 듯 했다. 황토먼지속 어둠속에 황토흙벽돌로 지은 집들의 취락이 어슬프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사이사이 골목길엔 흰광목 잘라비아를 휘감은 시커먼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때로는 바스타라는 호떡을 파는 포장마차 주위로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장난을 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멀리멀리 덜컹덜컹 검은 먼지 속으로만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래서 내심 덜컥 겁도났다. 한밤의 어둠 속에 황토색이 진하게 배어든 그러한 미로를 따라 내가 도착한 집은 결코 그들의 수준에선 작은 집은 아니었다. 부엌과 방, 그리고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고 토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최소한의 규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두 부인을 한울타리안에 거느리고 있었고 또 한부인은 딴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방식은 미니말 아트의 극치였다. 내가 잠비아의 탕가니카호수끝 카사바베이에서 경험한 집은 원두막식의 동그란 원추지붕의 토담집에 구멍하나 뚫어놓고 거적을 걸쳐놓고, 그리고 들어가면 격막이 원의 중심까지 하나 걸치고 있는, 인간이 살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었다. 부엌취사시설이란 망갓트라라는 깡통으로 만든 네모난 작은 화로하나 뿐이었다. 그 화로에 숯불을 피워 위에 따와우아라는 프라이 펜을 놓고 모프라카라는 나무 주걱으로 휘젓는 것이 전부였다. 초가지붕위엔 고기를 말려놓았고, 그 말린 고기를 기름에 볶아먹는 것이다. 주식은 애쉬라는 딱딱하게 마른 밀가루빵인데 정부로부터 한 가구당 하루에 4개를 배급받는다고 한다. 밥짓고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서너평 될 정도의 공간안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똥은 우리네 시골변소 비슷하게 생긴데서 눗는데 변소간에 들어갈때 그들은 물담은 깡통을 들고 들어간다. 오른손으로는 밥을 먹고 왼손으로는 똥을 닦는 것이다. 숫갈도 젓갈도 있을 수 없고 한 손엔 밥, 한손엔 똥이 움켜쥐어져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밥과 똥이 돌고 도는 대자연의 최소한의 싸이클속에서 문명이 짓는 죄를 최소화하면서 그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집구경을 시켜주던 운전사의친구 통인은 잘 생겼고 키가 백팔십오는 되어보였다. 잇빨과 눈 그리고 손톱이 검은 광채와 대조되면서 빛났다. 그는 말끝마다 어둠의 촛불속에서 힛끗힛끗 웃어댔다.

  영어를 못했지만 그는 내가 묻는 것을 알아채곤 모든 제스츄어를 동원하여 설명을 시도했다. 그리고 내가 알아듣는 듯 싶으면 헛기침을 하듯 읏읏하면서 히멀건한 잇빨을 드러내보였다. 그의 얼굴은 참으로 성스러웠다. 사특한 모습이라고는 티눈만큼도 없는 그러면서도 모든 것이 개방된 무위자연의 순수한 인간의 모습의 극치였다. 나는 중3이라는 아이방에 들어가 보았다. 중3영어책을 펴보았다.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을 그려놓고 "A happy boy" "A sad boy"라고 써놓고 익히게 하는 수준이었다.

  수학책을 펴보았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이 배우는 수학이, 2+3=( ), 3+( )=5,
  빈칸채우기였다.

  나는 몇일전 하라레의 집바브웨 국립미술관에서 숭중이, 일중이, 미루 갖다줄 토산톰 선물을 몇개샀다. 그때 계산하던 흑인할아버지가 열심히 종이쪽지에 써가며 꼬무작거렸는데 나는 30분가량이나 기다려야만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나는 여기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보았다. 히쭉히쭉 웃는 그 순결한 얼굴, 똥과 밥이 잘 구분안되는 삶의 미니말리즘, 황토벽돌담속의 무위공간, 문명을 영위하기위해서 우리가 배운다고 하는 행위의 의미, 이 모든 것을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는 나 김용옥의 한 삼사십년전의 본모습으로 되돌아가보자!

  학교다닐때만 해도 월봉산밑 눈들 건너편 소나무숲이 있었던 곳엔(지명은 잊어버렸다. 동백꽃담으로 휘둘린 그 아름다운 서당의 기억만 가물가물하다) 옛서당이 그대로 존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소학교를 다니던 대부분의 친구들, 나보다 일년아래였지만 가장 친하게 놀았던 세아희들, 순종이, 백헌이, 재필이네 집을 가보면 그야말로 초가집 단칸방의 규모를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집은 뇌리끼리한 장판이었고 모든 벽은 쎄멘으로 발라 도배한 것이었고, 부엌솥건 붓두막도 쎄멘으로 빤질빤질하게 바른 것이었지만 그들의 집에선 도무지 쎄멘이라는 것을 구경 할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지푸라기를 쓸어넣은 황토흙도배였다. 부뚜막도 흙으로 발라놓은 것이래서 가끔 솥을 새로 걸어야만 했다. 지금은 이런 정황이 다 옛이야기가 되어버렸으니 복룡간이나 백초상의 진품(아궁이에서 나오는 전통한 약재)을 구할 길도 없다. 방이라고 해봐야 단칸방 온돌위에 황토흙을 바른 것이고 흙도배 위에 그냥 밀거적을 덮어놓은 것이라서 불을 때면 황토흙 냄새가 그대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불이래야 시커먼 광목이불 한채였고 엄마. 아버지. 자식. 친구 모두 한이불속에 부챗살모양으로 다리 집어 넣고 자는 광경이란 흔한 일이다. 그리고 어린 아기새끼가 똥을 싸면 거적 틈 사이사이로 배어들어갈 것은 정한 이치로 걸레로 훔치기도 하지만 키우던 멍멍이가 앞뜨락에 보이면 불러들여 애기가 싼 똥을 핥아먹게 하곤 했던 광경도 결코 비위생 운운의 대상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에 속하는 일이었다. 흠치고 남은 똥이 거적틈 사이사이에 배어 오래묵어 발효되어, 방안엔 항상 고약한 향취가 황토 흙냄새와 뒤범벅되어 표류하고 있는 것 또한 흔히 일상적으로 체험하던 정취였다. 초가집 단칸방의 이러한 삶의 건강미 속에서 나도 뒹굴고 자라났다. 지금 나는 비록 삼사십년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만나고 있는 아무개 미국 다국적기업의 고문격인 인물이되어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지만, 바로 동시에 나 자신이 바로 내가 쳐다보고 목격하고 있는 아프리카 뭇사람의 현실의 나일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단 하루의 낮과 밤이라는 음양을 사이에 두고 나의 의식세계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위에 군림하는 한 인간상의 의식으로부터 바로 그 시절의 천안 잿째기 초가 단칸방에서 애기똥을 핥아먹는 멍멍이와 같이 뒹굴고 있는 순종이 친구, 바로 그 모습을 동시에 오가고 있었다. 천문학의 재미는 주어진 동일한 공간속에 무한히 다른 시간이 존재하는 재미라 하는데 나의 의식의 천체속엔 도저히 동시에 체험될 수 없는 두 의식의 장이 같이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기괴한 정황속에서 이런 질문을 해 보았다. 과연 전세기를 타고 김우중회장을 따라다니고 있는 내가 진실한 인간의 모습이냐? 그렇지 않으면 천안 잿빼기 앞냇깔에서 불알내놓고 초가단칸방 수수깡토벽 공간안에서 뒹굴고 있는 나, 지금 내가 이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목격하고 있는 저들의 삶의 모습과  오버랲되고 있는 그 나가 더 진실한 모습이냐?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더 검푸른 탕가니카 호수를 보트로 질주하면서 그 드높은 창공을 향해 나는 이렇게 외쳤다.

  어둠의 대륙이여!
  희망이 널 부른다.
  어둠은 삶과 죽음을,
  사랑과 미움을 삼킨다.
  네가 어둠에서 깨어날때
  세상은 밝아지리.
  밝음은 소박한 것
  너의 아름다움을 깨치진마라!
  우리 모두
  너 검은 대지의 품속으로
  돌아가리.
  영원한 여명
  우리의 희망이어라!(원문 영시)

  나는 이 시를 카운다대통령에게 건네 주며 다음과 같이 속삭였다 
"대통령 할아버지, 저는 당신의 나라를 개발하려는 회장님을 따라왔지만요, 제 속 마음은 당신은 나라가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파괴되는 것을 보고싶지 않아요. 공장을 지어 고용을 늘인다구요? 그래서 이 탕가니카엔 썩은 고기가 뜨고 대기를 악취로 가득 채운다구요? 세상이 개발될 수록 개발안되는 것이 재산이라구요. 가난도 생존의 기본권만 최저로 충족될 수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삶의 양식의 상대적 가치의 문제라구요. 당신의 나라는 너무도 아름다워요. 최소한의 개발은 막을 수 없다해도 당신의 나라가 개발되는 양식이 곧 인류의 미래의 한 본보기가 된다는 것을 잊지마세요. 지나온 제3세계의 비극적 전철을 되풀이하지 마시구요. 네? 네?" 일천구백구십년 십이월 이십구일 아침 일곱시 나는 지구상의 가장 깊고 가장 긴 호수 탕가니카의 북단 카사바베이에 자리잡고 있는 카운다대통령의 거대한 원두막같이 생긴 별장에서 대우 스태프들과 함께 카운다대통령롸 식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떠나면서 상기의 말을 속삭였던 것이다. 아프리카 독립운동의 대부인 카운다대통령은 애정어린 눈으로 나를 껴안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 윌낱 비트레이 유어 트러스트."(We will not bettray your trust.)

  노동운동가들에게나 개발전문가들에게 이러한 나의 로만티시즘은 단순한 센티멘탈리즘으로 비치거나 기득권자의 배부른 낭만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기실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의 현실은 나의 무위적 로만티시즘을 거부하기에는 너무도 절박하다. 이러한 절박한 느낌은 나의 이리 신동 삼년의 생활속에서도 압축되어 드러나고 있다. 삼년의 변화가 곧 나의 조국의 삼십년의 변화였고 그것은 하나로 연결된 지구촌의 되돌이킬 수 없는 파괴적 변화였다. 토지공개념도 좋다! 그것은 분명 우리사회의 양식으로서 받아들여야만 할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다. 허나 그것의 궁극적인 존재이유가 토지의 효용가치의 상승에 있는 것이라면 결국 그것은 비극적 결론에만 이르게 될 것이다. 전국토가 되돌이킬 수 없는 개발의 재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간에 퍼블릭스페이스로서의 구실을 하는 모든 휴한지들이 남어 날수 없게된다면.... 현금으로 이식을 산출하고 있는 땅이라면 모르되 공한지 같은 것은 오히려 과중한 과세의 대상이 아니라 장려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문명세계속에 단지 비어있다는 허의 가치 하나만으로도 지구의 건강에 기여할 수 있다는 에콜로지의 진리를 생각할 때 인위적 효용의 극대화 그리고 그 가치의 평균화라는 척도에서만 바라보고 있는 토지의 공개념은 그 근본철학적 전제가 시정되어야할 부분이 있지않나 하고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신동의 빈터들이 공한지세의 등살에 못이겨 몽조리 싸구려 하숙집이나 불필요하게 소모적이기만 한 상업건축으로 꽉 들어차버리는 비애를 나는 가슴아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개발! 발전! 느는 것은 똥쓰레기요 인간쓰레기다. 불필요한 팽창으로 시달리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일확을 꿈꾸는 부평초같은 인간들의 부동, 그리고 늘어가는 소음과 쓰레기의 공해속에 인간의 진실은 노래방속의 한 쎌에 같혀버릴 뿐인 것이다.

  나는 한마디 하고 싶다. 요즈음 김영삼대통령의 모습은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하고는 또 다시 등에 엎었던 당이라는 외세를 몰아쳐내야만 했던 김춘추의 운명을 연상케한다. 그것은 분명코 역사의 필연이로되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 계파의 숙청이라는 정치음모적 계산의 일환에서 머물지 않고 이 사회의 보다 보편적 이념의 정착을 위한 개혁적 시도로서 확고하게 그리고 양보없이 진척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허나 국민이 이해해주어야 할 것은 개혁을 시도하는 리더의 고충과 그 부작용일 것이다. 영웅은 사실 우리가 살고있는 역사가 만드는 것이며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고위공직자의 재산공개로 인한 파문은 분명 우리사회의 윤리구조를 뒤엎는 한 실마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허나 이러한 개혁의 진행과 동시에 경제적 부의 획득이라는 양면을 다 충족시켜달라는 요구에는 분명 무리가 뒤따른다. 재산공개로 여태까지 우리나라 상층지도부의 실태를 폭로하고 또 그러한 윤리구조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것은 필연적으로 경제적 위촉감을 초래 할 것이며 또 여태까지 이 사회를 운영해왔던 방식의 근원적 수정을 요구하기 때문에 종전에 해왔던 방식에 대하여 새로운 가치나 신념을 갖지못한 자들은 매사를 방치하거나 방관해보려는 자세를 갖을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경제적 회전의 속도는 늦춰지게 마련인 것이다. 허나 내가 아프리카의 체험을 운운했던 것은 우리가 살고자 하는 모습의 궁극적 가치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같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거짓으로 잘 살아온 것이 아니었든가? 우리 모두가 자기 것은 없이 남의 것만 훔쳐 살아온 사기꾼 아니면 도둑놈들이 아니었든가? 우리가 세계적 상품을 만들고 세계시장을 석권하느니 운운하면서 흥청망청했던 것 자체가 하나의 위선이 아니었던가? 과연 우리는 진실한 우리의 실력과 노력대로 부의 댓가를 얻어왔던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역사적 진실이 축적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진실했던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각오를 새롭게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언제 그렇게 나와 너가 잘살었드냐? 그리고 잘 살아야만 한다는 말인가? 물론 체제를 유지하는데 하루하루를 허덕여야만 하는 사람들의 절박한 감각에는 너무 이상적 발언 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의 진의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회개혁이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이유로 또 다시 지연되거나 번복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개혁을 지향하는 리더에 대한 요구가 알먹고 꿩먹고 식의 양면적 욕망충족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양립키 어려운 구조적 모순의 변화라고 한다면 그 우선성이 우리사회의 합리성과 진실성에 있어야하는 것이지 부의 증대에 있을 수는 없다. 막연하게 잘살아 보자라고만 외쳐오던 과도한 팽창주의. 개발주의. 착취주의의 가면의 부담에서 과감히 벗어나 보다 진솔한 나의 삶을 설계해 볼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시 경제의 실패를 구실로 역사의 진보를 좌절시키는 우매한 국민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야구연습장을 지나 대학로로 접어들기 전 포장마차가 몇개 있다. 그 중 나는 "만남의 집"이라는 곳을 잘간다. 어느날 삼로라는 아이와 같이 도서관에서 자정넘어서까지 늦게 시험공부를 하다가(시험과목은 조직학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니깐 본1 일학기의 일이었을 것이다) 귀가하는 길에 출출해서 소면국수하나 먹으려고 들어갔는데 아주머니가 날 알아보고 정성스럽게 대접해 주었다. 그 뒤론 웬지 그 집 소면우동이 구미를 당겼다. 요즈음도 밤늦게 출출할 때면 두환이를 불러내 그 포장잡으로 마실을 나가 우동을 한 그릇먹고 꼴뚜기 한접시 끓여달라는게 심심치 않은 일과가 되어버렸다. 그집에서 어쩌다가 시원찮은 흑백테레비로 밤뉴스를 보는 것이 내생활에서 테레비와의 인연의 전부다.

  대학로를 접어들면 작은 포장마차가 하나 있고 무뚝뚝하고 건실한 청년 하나가 붕어빵 만드는 주물기계를 빙빙 돌리고 있다. 때로는 불그스런 볼에 건강미가 넘쳐흐르는 부인이 나와있다. 부부가 작은 포장마차 하나 굴리며 건강하게 살고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도 이들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물론 내가 누군지 알야야 할 이유는 전혀없다. 내가 한의대 학부학생이라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어색하게 느껴질만큼 표가 나는 것이 나에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유난히 젊게 보이는 외관때문에, 게다가 빡빡깎은 머리를 빵덕모자로 가리고 검은면바지에 가죽잠바를 입고 다니면, 내가 같이 다니는 좀 나이먹은 학생들보단 나이가 적게 먹어 보이면 보였지 늙어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고 봉변도 적지 않게 당하고, 단순히 어리게 보인다는 이유로 날 까뭉게버리고 싶어하는 인습이 발동하는 어리석은 자들도 많이 만나게 되지만, 난 하여튼 젊게 보이고 어린사람으로 취급당하는 것이 좋다. 내가 진실로 한의대에 입학한 당년까지만해도, 나는 나의 젊음에 자신이 있었다. 40대의 나의 얼굴이 20대의 소년들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고 자신했다. 허나 지금은, 불과 한 두해 동안에, 그러한 자신은 싹 도망갔다. 작년 한해동안 병약하여 죽을 고생을 하고나니 이젠 역시 제나이가 다 들어 보이는 현실을 어쩔 수 없다고 체념케된다. 허나 아직은 기운이 쌩쌩히 돋을 때면 유연한 몸매를 두환이에게 자랑키도 하곤한다. 두환이와 나는 목욕친구다. 두환이와 나는 권도원선생 체질의학으로 말하면 목양체질인데 이제마의 사상으로 말하면 태음인이다. 그래서 체표의 한하고 속이 더운 편이다. 이런 체질은 표리의 발란스를 맞추어주는 것이 좋기 때문에 체표를 덥게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한증과 같이 땀을 내게하는 목욕이 건강에 좋다. 물론 그것도 적당히 해야 좋겠지만. 게다가 작년 본1강의실은 북향방 반지하였는데 완전한 냉동실이었다. 원광대한의대 6년 생활중에서 본1 일년 동안만 얼어 죽지 않으면 생존의 가능성은 높다. 본1은 교실도 춥고 따라서 내 몸이 얼어붙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과도하게 밀려닥치는 양. 한방의 수업부담 때문에 머리속까지 항상 으시시 떨린다. 그래서 나는 거의 매일 동네 목깐탕을 갔다. 수업이 끝나면 다 얼어버린 몸을 우선 해동시키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는 길로 매일 두환이와 금강목욕탕 한증으로 직행하였다. 두환이는 어렸을 때 구기를 많이 했고 또 어깨기질이 있어 잘 놀았던 놈이라 뭄매가 후리미끈 잘 빠졌고 날렵하다. 나의 고등학교시절을 회상해보면 그 놈과 나는 족보가 비슷한데가 많다. 나도 잘 놀았고 운동도 많이 했다. 난 사실 고등학교때 역도부에 들어 육체미를 한 전력이 있다. 그래서 벗어부치고 두손을 모아 갑빠에 힘을 주면 대흉근, 복직근, 그리고 광배근, 소위 델토이드, 펙토랄리스, 세라투스, 라티씨무스 도르시 운운하고 암기했던 것들이 그래도 보기좋게 울퉁불퉁 튀혀나온다. 두환이와 목욕탕 한증탕속에서 서로 왕년시절 몸자랑하느라고 폼을 잡노라면 두환이는 항상 양보한다: "아이,선생님 몸매는 왓다에요."
  나의 일상생활의 특징중의 하나는 옷이 몇벌 없다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옷이 많다는 것이 매우 싫었다. 우선 선택의 여지가 많다는 것이 싫고 또 보관이 구차스럽고, 그리고 먹는 것과는 달리 옷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된 까닭이다. 나의 어머니는 나보고 제발 옷좀사입으라고 사정사정 성화를 내시곤 하셨는데 그 반동으로 옷은 악착같이 안사입는 습관이 몸에 밴것 같다. 그러나 내 건강과 직결되는 옷, 즉 내 몸뚱아리에 직접 부착되는 속옷은 펄이나 신경을 쓴다. 나는 내 몸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100%면 자연 제품이 아니면 근접시키지 아니한다. 그리고 속옷은 매우자주 갈아입는 셈이다. 허나 겉에 걸치는 것은 닳을까봐 무서워 빨거나 세탁도 잘 안주고 수십년을 짱꼴라처럼 입는다. 내 옷장의 메뉴는 기나긴 역사나 추억을 지닌 몇벌이 그 전부다. 내가 가장 즐겨입는 까만 두루마기 한복도 겉으로 보기엔 근사해 보이지만 순 백프로나이론 싸구려 옷인데, 내가 대학교 4학년때 우리어머니가 동대문시장을 샅샅이 뒤져 제일 싸고 좋아뵈는 옷감으로 끊어다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입는 한복동복은 단벌인데, 그것은 자그마치 스무해가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직도 새것모양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물론 아직도 일상적으로 입고 산다. 그것을 지어주신 노모가 아직도 그 한복처럼 고결하게 그 모습 그대로 살아계시다는 사실만 나에게는 기적같이 고마울 뿐이다.
  이리 원광대에 합격해서 내려갈때 아내는 내옷 걱정을 했다. 항상 따뜻한 집에서 헐렁한 한복이나 츄레닝복만 입고 살다가 어쩌다 외출할때면 단벌 한복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물론 한복의 동정을 깨끗하게 유지시키기 위해 계속 갈아다는 작업은 그리 간단한 작업은 아니다. 요즈음 세상엔 순면동정이 없기 때문에 아내는 직접 동정을 만들어 달아야 한다) 나에겐 정말 대학생활에 걸맞는 옷이 하나도 없엇다. 잠바도 오바도 세비로도 나에겐 서양옷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평생 양복점에서 맞춘 옷이 단 두벌이 있었다. 그 하나는 내가 유학가기전 양복점을 경영하던 친구(지금 강원대 철학과 한동원교수) 집에서 곤색양복 한벌 지었던 것과, 결혼할때 장인이 맞추어준 녹색 계열의 양복한벌이 있었는데 하도 안입어 곰팡이가 쓸었고 또 모양새도 너무 구닥다리인데다가 워낙 만든 품새가 불편해서 골동품으로 보관만 하다가 최근에 용단을 내려 과감하게 도태시켜 버렸다. 한번도 안입는 옷을 평생 지겨웁게 모시기만하고 산다는 것이 죄악같이 느껴져 동네봉원교회 헌옷수집소에다 갖다 주어버렸던 것이다. 이리내려가기전, 아내와 나는 이태원 빅토리타운에 가서(옷이 유별나게 싸고 괜찮다고 해서 아내가 애들 옷사러 잘 갔던 곳) 잠바 두개를 샀다. 물론 100% 면잠바였다. 그리고 밑둥아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좀 "스마오"한 유행첨단의 것으로, 이왕 사는김에 맘먹고 두벌을 샀다. 하나는 카키복 색깔의 겹이었고 하나는 짙은 초록인데 홑이었다. 강남 압구정동을 걸어 다니는 아이들의 유행첨단을 흉내낸다고 산 것이었지만, 결국 아무옷을 걸치든 그것은 걸치는 사람의 기품에 동화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 잠바들은 내가 이리에서 걸치고 다년본들 아무 멋대가리도 없는, 정말 유행과는 관련없는 아주 후진 옷이 되어 버렸다. 나의 젊은이들에 대한 유행감각의 판단이 물론 오류였었다. 실패였다. 완전 실패였다.
  이리는 봄이 없다. 봄늦게 까지 겨울이 계속되다가 갑자기 무더운 여름이 닥쳐온다. 이리는 벌판이다. 산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조금만 세심한 후각중추를 발동시킬줄 안다면 군산앞바다에서 불어닥치는 바닷냄새를 이리시내에서도 쉽사리 맡을 수 있다. 새벽에 신동을 걸을 땐 뺨에 와 닿는 기운이 꼭 해변가를 산책하는 것 같다. 그 차거운 습기가 으스스하게 코넥티브 팃슈(결합조직) 깊숙이 저며들어 온다. 이리의 풍토를 인상적이게 만드는 것은 새벽의 짙은 안개와 하루종일 불어대는 바람이다. 내가 받은 이리의 강렬한 느낌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람과 연결되어 있다. 바람이 하도불어 아무것도 정체되는 것이 없으니 공기는 깨끗할 수밖에 없다. 허나 이리에는 머무는 정이 없다. 모든 정감이 바람과 함께 날아가버리고 마는, 그래서 으시시 떨면서도, 누가봐도 춥게만보이는 초라한 행각을 했으면서도 나는 그대로 일년을 버티었다. 한번 산 옷을 버리기가 아까왔고, 또 개비하자니, 보통사람들은 정말 내말을 안믿겠지만, 단 한번 쇼핑나갈 수있는 시간이 허락되질 않았다. 견대다 견대다 못해 나는 새로 잠바를 하나 살려고 여기저기를 끼웃거렸다. 허나 내몸에 맞는 잠바는 도무지 눈에 띄질 않았다. 우선 나는 무엇이든 무거운 것은 질색이다. 내가 걸친 옷이 나의 몸에 어떤 하중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다. 하루에 끊임없이 활동을 하면서 최대의 효율을 올려야만 하는 나의 삶엔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무겁거나 거창하면(부피가 크면) 젬벵이다. 그래서 나는 기발한 생각을 하나 했다. 이리의 바람을 가죽으로 막자. 내 살가죽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을 소가죽이나. 돼지가죽으로 막자. 에피테리알 팃슈(상피조직)는 에피테리알 팃슈로 막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아내와 신세계. 미도파. 롯데 등 여기저기를 끼웃거렸으나 너무도 터무니없이 가격이 비쌌다. 나는 에피테리알 팃슈말린 것이라도 번뜩이는 가죽은 싫었다. 내가 원한 것은 쎄무였다. 그것도 청색쎄무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시절 우리 세째형이 미국에서 살다 돌아왔다. 피부과 의사인 우리셋째형(이름은 김용환)은 당대 보기드문 멋쟁이였다. 경기를 나오고 잘 안풀려 들어간 것이 카톨릭의대 1회가 되었다. 그래서 결국 의사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형이 미국갔다 오면서 멋있는 곤색쎄무잠바를 하나 가지고 왔다. 사실 당시 곤색쎄무잠바라는 것은 하나의 판타지였다. 나도 달라고 졸라댔다. 허나 형은 그 곤색쎄무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곤 순모의 곤색오바기지를 하나 주었다. 영국제였는데 정말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옷감이 내가 해입기에도 조금 모잘랐다. 그래도 천안교회가는 길목의 작은 양복점에가서 그 황홀한 기지를 놓고 상의한 끝에 억지로 오바를 하난 지어내는데 성공했다. 허나 품이 너무 꽉 끼었다. 그래도 나는 그 꽉끼는 영국제 곤색오바를 열심히 입었다. 입으면 포근했고, 순모의 실루엣에 보풀보풀 비치는 색깔은 너무도 청순한 청색이었다. 허나 그 곤색쎄무잠바에 대한 미련은 가시질 않았다. 그러던중 나의 형집엔 도둑이 들었다. 형이 군의관이었기 때문에 도봉산 밑 창동 의무부대에 근무하면서 살림을 차리고 있었는데 그만 도둑이 들어 세간을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형이 싫증날 때쯤,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나에게 그 곤색쎄무를 일찌기 물려주었더라면 화를 면했을텐데하고 형을 원망도 해보았지만 날아가 버린 곤색쎄무는 십대부터 가슴에 품게 된 청운의 꿈으로 남게되었다. 어딜가나 나는 그와 똑같은 쎄무가 눈에 띄기를 바랬으나, 물론 유학생활에 아무리 세상을 다 휘젓고 다녔다한들 그런 쎄무는 사입을 생각도 못한 탓이겠지만,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나는 30년이 지난 오늘 비로소 곤색쎄무에 대한 한을 풀기로 작정했다. 백화점을 쏴다녀봐도, 이왕 평생 한을 푸는김에 돈일랑 백만원이 들어도 사자! 하고 주머니를 두둑하게 불리고 쏴다녀봐도,곤색쎄무가 없었다. 모두 갈색아니면 누런색이었다. 그리고 디자인이 씸플하질 않았고, 또 학생생활에 가장 필요한 주머니가 너무 인색하게 달려 있었다(실용중심 아닌 멋중심). 그래서 생각난 것이 외국사람들이 잘 간다는 이태원이었다. 이태원에는 가죽잠바 전문집이 많이있던 기억이났다. 거기서는 다양한 스타일을 고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여러군데를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내내 마찬가지였다. 내가 원하는 청운의 꿈, 곤색쎄무는 보이질 않았다. 생겨먹은 것이 모두 흑인이나 지아이구미에 맞게 재단되어 있어 좀 무지막지했다. 오랫만에 풀어보기로 작정한 꿈이 다시 다시 수포가 되어 버리고 마는 순간, 체념하고 집으로 돌아서려는 그 순간, 날 호객하는 어느 키 큰 청년이 있었다.
  "아! 교수님 아니십니까?"
  그는 내가 가죽잠바를 살려고 여기저기 끼웃거린 사실을 아는듯 했다. 그리고 날 비좁은 통로를 지나 지하에 자리잡고 있는 "히트타운 피혁세계"라는 자기가게로 안내했다. 마지막이니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날 알아보는 그 청년과 얘기를 해본 즉 자기도 광김이고 자기 동생이 내 책을 아주 열심히 사서 읽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곤색쎄무잠바는 원하는대로 맞추어 입으라는 것이다. 나는 가죽잠바를 맞추어 입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내가 평생 품어온 꿈이 단 돈 십여만원에 해결된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한 것이다. 60년대 어딜 우리나라에서 십이만원가치에 상당하는 돈으로 곤색쎄무잠바를 맞추어 입을 수 있었단 말인가? 백화점에서 4.50만원 주고도 해결할 수 없었던 곤색쎄무의 꿈은 이렇게 우습게 해결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뒤로 이 김용환이라는 순박한 청년(우연케도 나의 셋째형 이름과 한문까지 일치했다)이 지어준 이 쎄무만을 입고 이리바람을 막아냈다. 본1때도 본2때도 이 쎄무만이 내몸을 막아주었고 대체로 나는 이 쎄무에 만족했다. 그런 쎄무잠바의 고뇌는 비맞으면 안된다는 것과 빨기 어렵다는데에 있다. 그래서 나는 목덜미 칼라에 때가 꾀죄죄하게 끼는 것이 싫어 목도리를 하기로 했다. 헌데 아무리 찾아봐도 순면목도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발견할 수 있었던 값싸고 품질좋은 순면목도리는 매일매일 얼굴을 부벼대는 수건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나의 단골메뉴는 검은 진바지에 곤색쎄무잠바, 그리고 목에 두른 수건목도리다. 이것이 이리에서 사는 내 외관의 전부다. 얼마전에 정헌택교수님방에서 그 중학생따님 경이와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데, 내가 수건을 목도리로 목에 걸치고 있는 것이 퍽이나 걸렸던 모양이었다. 경이는 팻션에 관심이 지대하고 심미적 감성을 지닌 아이였던 모양인데, 영화도 만들고 연극도 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들은 도올선생이 초라한 행각에 고작 수건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있다는 사실이 퍽이나 당혹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경이가 두고두고 내 수건목도리얘기를 하더라 했다. 내 외관에 하나 더 덧붙일게 있다면 한복을 할 때외엔 내머리위에 항상 까만 무정형의 빵떡모자가 하나 얹혀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하바드유학시절 캠브릿지 길가 쓰레기통에서 주은 것이다. 그 쓰레기통에서 주은 영국제 모자를 십년가까이 즐겨썼는데, 다 닳아 빵꾸가 날 정도가 되어 그것은 박물관행으로 보관키로하고, 최근 일본학위에 갔을 때 "알트로"란 마크가 붙은 그 비슷한 일제 곤색모자가 눈에 띄길래 새로 사서 머리에 얹었다.

  밀가루반죽에 앙꼬를 넣어 조개처럼 입이 다물아지는 주물철갑속에 구었다가 입을 벌려 쇠꼬창이로 파내면 톡톡 튀쳐나오는 이 풀빵이 왜 하필이면 붕어모양을 하고 있을까? 내가 이린시절부터 오늘날까지도, 구멍탄이 프로판가스로 바뀌었을뿐, 그 붕어모양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물속에서 은비늘의 찬란한 붕어가 튀어나오듯이, 아마도 이 붕어들은 불속에서 튀어나오는 생명일꺼야!하고 시시껍적한 생각을 여기 나열하는 이유는 그 붕어빵의 미학적 본질을 탐구하려는 의도에서라기보다는 내가 이 대학로의 한 모퉁이에서 오가다 겸연쩍게 한두개 먹곤하는 이 붕어빵의 느낌 속에서 음양오행이라는 한의학의 대원리를 깨달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비위가 허냉한 사람이다. 여기서 비위라 함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비위가 좋다"라 함의 "비위"를 말한 것이나 이것은 한의학적으로 비장과 위장을 지칭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비장과 위장을 단순히 서양해부학에서 말하는 팽크리아스나 스토마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스토마크와 위가 비록 동일한 실체를 가리킬 수는 있으나 그 실체에 대한 인식방법이 다를 때는 양자는 전혀 별개의 사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위란 오행에서 말하는 상기의 상징이다. 즉 "비위가 좋은" 사람은 "상기가 강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데 이들은 대개 비위가 덥기 때문에 뭐든지 잘 삭히는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모처럼 쇼핑을 했다가 냉장고에 쌓아둔 음식이 미쳐 손을 못써 한물 갔을 경우, 약간 쉰내가 나더라도 버리기 아까워 좀 께림직한 쿠킹을 감행했을 경우, 그 음식을 같이 먹었는데 한 사람은 어김없이 조금있다 스핑크터운운하는 항문괄약근이 느슨해지며 직장의 똥자루가 터지는가 하면 한 사람은 변소를 들락날락하는 상대방을 좀 이상하다는 듯이 멀쩡하게 쳐다보는 상황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체험할 수 있다. 바로 나와 나의 아내가 이런 관계인데, 나의 아내 최영애는 바로 "비위가 좋은" 체질에 속한다(물론 세속적으로 말하는 "비위 좋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이 "비위가 좋은" 사람은 권도원선생의 체질의학으로 말하면 대강 "상양"이라는 체질이 되고 이제마선생의 사상으로 말하면 "소양인"이 된다. 나는 목양이고 나의 아내는 토양인데 대강 "궁합이 맞는다"함은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목양과 토양은 쉰 음식을 놓고 이렇게 엇갈리니 궁합이 잘 맞는 것이다. 쉰음식먹고 두 부부가 같이 싸질러대도 좋지 않을 것이요, 두 부부가 같이 멀쩡해도 좋지 않을 것이다. 같이 싸질러대면 서로 피곤할 것이요, 같이 멀쩡하면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것이다.

  우리가 온실의 열기를 바닥에 돋군 흙으로 내듯이, 토기는 원래 더운 것이고 더워야 좋은 흙이다. 따라서 비위가 좋은 사람은 이가 온한 사람이며 기미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복중이 더운 사람이래서 잘 때 이불을 재키거나 배를 내놓고 자도 별탈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엘리멘타리 트랙(소화기관)으로 무엇이 진입해도 다 식혀버리기 때문에 세칭 그 성격도 "비위가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속이 더우니 성격이 활달하고 앞뒤가 없으며 표리가 부동커나 음험치 않고 일을 잘 저지르고 뒷마무리를 못지어 안달거리며, 서울역이나 뻐스터미날에 나갈 때는 항상 예정시간보다 일치감치 나가 있게 마련이다. 특별히 뱃속이 덥고 소화가 잘 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내말을 잘 상고해보면 틀림없는 얘기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비는 원래 희조오습하고 위는 원래 희윤오조한다했으나 둘다 냉한 것은 금물인데 나는 비위가 모두 냉한 것이 내몸에 일어나는 모든 탈의 근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복중이 항상 차거운 느낌이 있고 특히 상중초, 그러니까 갈비아래 상복부쪽이 항상 허냉하다. 무슨 이유로든지 여기만 덮게되면 나는 몸이 가뿐해지고 만병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예를 들면, 아주 심한 열병에 걸렸을 때 오한에 떠는 표열이 아닌 이열로 온몸이 화끈화끈 달아오를 때는 장 속의 노폐물이 깨끗하게 타버려 말끔한 속변이 똑 떨어지는 체험을 할 땐 비록 고열로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지언정 기분이 되게 좋다.

  내가 중원의 보토파인 동원 이고와 영남의 보(부)양파 거맥인 석곡 이규준을 만난후로 보중익기와 부자에 관심이 생겨, 내 몸에 과감하게 부자실험을 해보았으나, 온중효과는 분명 있으되, 위로 신기가 승잘하여 상초에 화가 올라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나는 상초가 허하기는 한 사람이나 상화가 되면 골치가 띵하고 모든 것이 올스톱되어 버린다. 최근엔 당귀하고 녹용하고만 배합한 간방을 대려먹어보았으나 원기를 보하는 놀라운 효과는 있으되 기가 상역하여 역시 좋지를 않았다. 나는 아직 중을 이하면서 간기의 역상을 막고 화를 하초로 끌어내릴 수 있는 그런 명방을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부자실험을 내몸에 해보는 동안에 공연히 머리카락만 빠져나가 대머리가 가속화되었을 뿐이다.
  내가 살았던 돈암동, 콜럼반 화더스라고 하는 아이릿쉬-호주 계열의 신부님들의 종단본부가 있는 성당앞에 (정확히 하계 동소문동 6가 118번지) "홍약국"(정식 이름은 홍씨한의원)이라고 하는 장안의 명의집안이 있었다. 원래 홍약국의 명의는 지금 원장을 하시는 홍성헌선생의 조부로 남양홍씨 소석 홍순승(살아계셨으면 지금 105세)이라는 할아버지였다. 우리형제들은 우리 아버지가 천안에서 서의를 개업하고 계신 동안 바로 홍약국 옆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한옥에서 서울유학을 다 끝마쳤기 때문에 홍약국집과는 근 반세기의 인연이 깊다. 그리고 그집 막내둥이 성장이가 나하고 동년배였기 때문에 중.고시절을 같이 뒹굴며 보냈다. 홍할아버지는 참으로 고결한 품덕을 지닌 명의였던 것 같다. 항상 그집앞에 병자들이 줄을 지어있던 모습, 새벽이면 꼭 정능길로 약수뜨러 다니시던 모습, 그리고 살아있는 도마뱀을 꽁둥이 잡고 목구녕으로 살짝 집어넣어 잡수시던 모습등이 눈에 생생하게 서린다.
  홍할아버지는 원래 소양인이다. 강부탕이라고 하는 건강과 부자를 대려 먹는, 몸이 쇠진했을 때 소음인에게 쓰는 명방이 있다. 홍할아버지는 40대 이 강부탕을 자신에게 써 보고 효험을 본 적이 있었다. 몸이 좀 성할때는, 소양인이지만 소음인방을 역방으로 써서 효험을 볼 때도 있다. 음인에게 쓰는 정치의 약은 그 반대의 양약이다. 그런데 양인에게 그 음인에게 정치로 쓰는 양약을 쓰는 것은 반치다. 양을 양으로 때리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간을 사하는 것이 정치이지만 때로는 간을 보하는 역방으로 재미를 볼 때도 있다. (물론 권도원선생님은 이런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홍할아버지가 말년에 설악산을 다녀오시다 허리를 다치셨고 그로 인해 계속 탈기가 되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젊은 시절의 재미를 보신 강부탕의 체험이 되살아났던 모양이었다. 의사가 된 그 아들은 할아버지가 강부탕쓰시겠다고 하는 것을 극구 말렸다. 그런데 어느날 홍할아버지는 손수 건강과 부자를 머리맡 화로에 놓고 대려잡수셨다. 그리곤 나흘만에 운명하시었다. 첫날 약간 빤짝 회춘하는 것 같았으나 그 기운을 회복할 길이 없었다. 돌아 가시기전 할아버지는 주위사람에게 "내가 부자를 잘못썼다." 하시곤 자기의 운명을 예견하시었다. 그리곤 돌아가시기 5분전까지도 문깐에 들어온 환자를 들어오라해서 처방을 쓰셨다고 한다. 비록 오판에 의한 죽음이었지만 참으로 명의다운 정직한 삶이었다. 1961년 음9월 17일 73세, 내가 중삼때의 일이었다. 이렇게 부자 한돈이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나는 겁없이 부자를 섯돈이나 써보고도 결국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나는 이와같이 비위가 허랭한 사람이래서 "뜨거운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결코 마린 몬로의 치마자락을 연상케하는 얘기가 아닌 나의 생리적 반응을 가리키는 것이다. 밥이래도 뜨거운 밥, 밥먹고 나도 펄펄 끓는 숭늉, 오뉴월 복중에서 펄펄 끓는 차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잘때도 뜨거운 방, 공부할때도 뜨거운 공기, 모든 것이 뜨거워야 한다. 아마 내가 관절염을 오래 앓는 동안에 형성된 병리가 내 생리화된 후천적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태음이나 목양이라 해서 꼭 뜨거운 것만을 좋아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허나 간목이 너무 강해 목극상, 토기를 누를 것은 자명한 이치지만, 또 목은 화를 생하고 화는 토는 생하기에 그 생의 싸이클이 강한 사람은 반드시 토가 목에만 눌려지내지는 않을 것이다. 좌우지간 나는 철판에서 막 튀쳐나오는 붕어가 아니면 먹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붕어와 화를 함께 허랭한 위속으로 집어넣어야하기 때문이다.

  어느날이었다. 지나가다 무심코 붕어빵을 먹게되었는데, 시마이가 다 되어 찬 것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들 먹는 것, 괜찮겠거니 하고 식은 붕어빵을 입안에 넣는 순간, 앗 나는 대자연의 이치를 퍼뜩 깨닫는 대오의 짜릿함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에게 독자들은 과대망상적 발상을 하는 기재의 과장된 발언이거니 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깨달음이란 전혀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알고있던 진리를 한 번 리얼하게 느껴보는데 불과하다. 아무리 불교에서 말하는 대오라 한들, 부처님의 대각의 사실을 모르는 자, 그리고 내가 그러한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 불성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결국 깨달음의 본질일 뿐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자 경멸하는 자들은 부처, 예수를 포함하여 도통했다고 자부하는 모든 인간들이다. Shit!
  내가 붕어빵을 입속에 집어넣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결국 "그게 그거다"라는 상투적 생각을 무심코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한 기대의 연속속에서 나는 그 붕어빵을 입에 집어넣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내 입속에 들어간 붕어빵은 분명 붕어빵이 아니었다. 도저히 내가 그다지도 맛있게 먹던 그 붕어빵이라고 판단할 수가 없었다. 정말 구역질이 나게 맛이 없었다. 나는 곧 쓰레기통에 그 붕어빵을 뱉어내버리고 말았다. 붕어빵주인이 그것을 붕어빵이라고 양심의 가책없이 판 행위나 그것을 내가 사먹은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고의 본질은 "실체성"이다. 즉 따끈한 붕어빵이나 식어빠진 붕어빵이나 동일한 성분을 지닌 동일한 실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따끈함과 식음은 단순한 열역학적 제1.제2법칙에 따라 그 온도가 이동한 동일한 실체상의 변화일 뿐 그것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사태라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다지도 맛이 없는 식은 붕어빵을 입에 넣고서는 이와같이 뇌까렸다. 따끈한 붕어빵과 식은 붕어빵은 다른 두 개의 사태일 뿐아니라, 완전히 다른 독립된 두 개의 실체이다. 도무지 그 양자를 내 느낌에 있어서 동일한 것으로 연결시켜야할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한의학에 대한 래디칼한 사고의 출발은 바로 이와같이 실체론적으로 접근했던 대상인식을 완전히 붕괴시키는데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오행의 상생상극의 변화를 말한다면, 즉 붕어빵에 있어서 화의 결여는 단순한 화의 결여가 아니라, 금.목.수.토의 토탈한 관계양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행으로 인식되는 사물에 있어선 이와같이 그 물체를 구성하는 성분성이라든가 양적 수치의 변화라는 실체성 그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행이라는 관계론상의 변화와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느낌의 변화, 즉 그 관계성과 느낌성이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다시 언급하게되겠지만 약물의 성분분석을 통한 약리의 이해, 즉 약물-수용체복합체라는 실체와 실체의 결합에 의한 고도의 특이성을 주안점으로 하는 약리의 이해는, 이러한 오행론적 가설에 의한 관계론의 정체성을 그릇치게 할 수가 있다. 따라서 동일한 약물이라 할지라도 수치에 의한 변화가 귀경의 변화까지 수반하게 된다든가, 또 여러 약물을 배합했을 때 나타나는 상수.상사.상외.상오.상살.상반.단행이라는 칠정의 문제도 인체장기상호간의 총체적 느낌과의 역동적 관련속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허나 항상 반문되는 것은 이러한 관계론적 언어의 궁극적 의미, 그리고 그 의미의 정확성에 대한 논란이겠지만, 그 해결이 성분적 환원주의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붕어빵 포장마차를 지나가면 자전거포가 성업중이다. 그 점포가 내가 기거하고 있는 숙원제주인과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 그 점포주인청년은 나와 시선이 닿을 때면 인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항상 미소를 띄우며 자전거를 열심히 수리하고 있는 모습이 참 건강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이다. 자전거포가 아직 성업중이라는 사실은 이리는 그래도 아직은 자동차에 의해 완전하게 오염되지 않은 허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원광대도 연일 학생들의 자가용이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대치해가고 있는 상황이니 참 걱정스럽다. 그리고 대학로 주변이 양쪽으로 꽉 주차되어 자동차한대 지나갈 자리도 안생기는 형편은 참으로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나 주민파우어가 쎄서 그런지 경찰이 스티커한도 발부하지 않는다. 주차시설없는 주택을 어떻게 그렇게도 난잡하게 허가하는지, 그리고 이리경찰서 아저씨들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 신동대학로의 무질서는 날로날로 심각해져가는 것만 같다.

  자전거점포에서 북일국민학교를 지나 더 내려가면 제이 앤 비 저스트커피라는 글씨가 유리차에 붙어있는 커피집이 하나 있다. 신동에 그다지도 엄청난 유흥.오락시설이 몰려 있지만, 원두커피 한잔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집은 이 저스트커피 단 한집뿐이다. 사실 또 다시 오행론적 사고가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인스탄트 가루 탄 커피는 커피가 아니다. 커피는 사하작용이 있으며 기름끼를 씻어내는 작용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럴려면 탁하지 말고 청해야하며, 프림이나 설탕으로 범벅된 그런 니끼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커피는 태음인에게 대체로 괜찮은 것이나 하루 한잔 이상은 이로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맑고 향기로운 원두커피, 불순물없는 원품 그대로 단 한잔, 결정적인 시각에 들이키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인스탄트커피를 입에 안댄 것이 이미 일본유학시절부터니깐 스무해가 되었다.
  저스트 커피집 주인과는 통성명이 없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른다. 허나 그 커피집 하나는 깔끔하게 운영되는 것 같아 가끔 들린다. 내가 이리에 내려왔던 첫 해에는 "연출"이라는 커피집이 퍽 인기래서 한의대생이 많이 가곤 했다. 연출 주인이 권영관이라는 원광대 미대학생이었는데 나한테 극진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거기서 가끔 원두커피 한잔 얻어먹는 것이 낙이었다. 그런데 그 건물주가 커피집을 내달라고 해서 영관이가 떠난 후로 연출은 사라진 셈이고, 또 영관이도 나에게 연락이 없다. 젊은 시절의 인생의 전변의 역정을 어디선가 부지런히 밟고 있을 것이다.

  저스트 커피집을 지나 더 내려오면 사거리 한 모퉁이에 이리과학서적이라는 의학책을 파는 곳이 있다. 주인은 건실한 청년부부인데 지나칠 때면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나는 가끔 거기 들려 서양의학에 관계된 책들을 산다. 내가 사실 이리에서 사는 가장 큰 보람은 미진한대로 서양의학을 공부할 수 있고, 서양의사들과 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어휘를 획들할 수 있다는 기쁨에 있다. 공부가 항상 모잘라 죄책감을 떨구어 낼 수가 없지만 언젠가 서양의학을 맘놓고 공부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한다. 정말 학문다운 학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책이라도 사둔다.

  네거리를 지나 조금만 가면 몇 개의 포장마차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21세기 호떡"이라는 간판이 걸린 명소가 있다. 아마도 이 21세기초떡집이야 말로 신동대학로에서 가장 많은 학생들이 들려보는 집일지도 모르겠다. 그집 아줌마는 생긴 것도 자기가 굽는 호떡하고 똑같이 생겼는데, 발갛게 달아오른 달마같은 얼굴이 아마도 소양인의 체질을 하고 있을 것같다. 호떡 아줌마는 워낙 사람이 좋다. 그리고 호떡, 만두, 어뎅을 파는데 우선 값이 싸고 출출할 때 부담없이 요기가 되니깐 학생들이 잘 들린다. 저 남쪽 구례 피아골 불낙사의 주지 석상훈이 어느날 내 강의를 들으러 이리에 왔다가 날 저녁대접한다고 자기신도집을 데려갔는데 그곳이 이리공단지역에 있는 고바우라는 낙지집이었다. 그날밤 어찌나 맛있게 산낙지탕을 먹었는지 그 뒤로는 그집을 자주 가게되었다. 21세기 호떡집아줌마는 그 고바우집에서 일하던 "김양"이라는 여직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느닷없이 이 김양이 호떡장수로 변신하여 신동대학로에 포장마차를 끌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 장사가 된다는 것은 그 주인의 인덕과 정성에 딸려있게 마련이다. 호떡도 풍성하게 굽는 품세가 멋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호떡아줌마는 사람이 착하다. 나도 저녁에 출출할 땐 신동거리에서 아무곳은 들리지 않아도 이곳 21세기호떡집만은 한 번 들린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여기를 들려보면 두환이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다. 대학로를 지나 가는 사람들은 대강 아줌마눈에 띄기 때문에 그 녀석이 또 누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어디로 샜는지 대강 감이 잡히기 때문이다. 내가 21세기호떡집에서 먹는 것은 단 한 개의 호떡이다. 그 가격이 백원인가 이백원인가 하는데 매번 내기가 구차스러워 꼭 두환이 앞으로 달아놓는다. 그리고 내가 이십일세기호떡집에서 나누는 것은 아줌마와의 농담이다.
  "그 후리미끈한 아가씨말야! 좀 중신을 스라구."
  아줌마보고 예쁜 아가씨를 좀 소개해달라고 매번 졸라대도 언제 한 번 힘써보겠다고 하고선 웃기만 한다. 사실 난 이리신동에서 혼자살땐 외롭고 처량할때가 있다. 신동엔 예쁜 대학생들이 그렇게 우글우글거려도 나를 접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 요즈음 젊은 학생들은 지나치게 실리적인 것 같다. 목전의 현실은 목전의 현실로서만 처리하는 것 같다. 내가 날 돌아봐도 그렇게 매력이 없다거나 늙어 쪼그라들은 형편은 아닌데, 내가 젊은 학생이라면 나같은 놈하고 한 번 로맨스를 꿈굴만도 한데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자기의 현실앞에 좀 냉혼한 것 같다. 자기의 분을 넘어서는 로맨스는 아예 시도의 가능성조차 배제해버리는 리얼리즘이 꽉 몸에 배어있는 것 같다. 아멘! 나무아미타불! 어찌보면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헌데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은 정상적인 보통사람들이 아니라, 대개 "기"니 "단"이니 혹은 뭔가 이상한 종교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다. 타지에서 날 찾아오는 모든 사람이 나는 두렵다. 그리고 정말 그런 사람들은 만나기 싫다. 이리생활만이라도 고적한대로 한 세상 보내고 싶다. 엊그저께도 어떤 불량스럽게 보이는 학생이 학교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길목에서 날 잡았다. 그리고 자기는 전남대학교 학생인데 날 만나러 광주에서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학생이면 내 책이라도 읽고 무슨 의문이라도 있어왔냐 하니깐, 그 학생이 서슴치 않고 대답하기를, 내 책은 읽은 것이 없고, 다만 내가 미남인 것 같아서 한 번 쳐다보려고 먼길을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하고 같이 걷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이찌 내가 비록 이 이리신동 훠훠벌판을 혼자 거닐고 있을지언정 네까짓놈들이 한 번 같이 걸어보고 싶다고 하는 그따위 무성의한 충동을 만족시켜 주는 그런 시간의 한발짝걸음이라도 내인생에 있을까보냐? 너희들이 정말 나를 이렇게 능멸할 수 있는가? 하고. 그리고 나는 요즈음 젊은이들이 무섭다. 도무지 논리가 통하지 않는 행위를 마음대로 정당화하고 내마음대로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옆에 때마침 두환이 조차 없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사정사정했다. 제발 돌아가 달라고-. 날 이제 쳐다봤으니 돌아가서 공부나 해야지, 내가 이렇게 이리에서 절박하게 사는 이유는 너같은 학생들이 나같은 놈 이렇게 찾아오지 않고 자기일에 몰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사정사정 달래었다. 그 학생은 면도도 하지않은 거친 얼굴로 나를 째려봤다. 나는 무서워서 도망갔다. 도망가며 카브를 틀다 뒤돌아보니 가슴을 풀어헤치고 길목 땅바닥에 딱 버티고 앉아있는 것이다. 아이고 맙소사! 나는 그런 날 밤이면 공포에 떨면서 잔다. 다행스럽게 요즈음은 뜸해졌지만, 좌우지간 벼라벨 종류의 인간들이 날 찾아왔다. 그런데 그런 사람치고 나에게 유의미한 시간을 던져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러웠다고 기억되는 단 한건의 유의미한 사건이 있었다. 어느날 또 귀가길에 대학로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한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도 광주가 집이었는데 고려대학교 유전공학과에 재학중인 학생이었다. 그런데 유전공학과를 때려치고 철학과를 들어가 선생님처럼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재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되었냐니깐 내책 '대화'를 탐독하던중 내가 유전공학은 매우 나쁜 학문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나쁜 학문은 공부안하기로 작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이 대두된 정확한 맥락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확실히 자연주의자인 나는 진(유전자)의 인위적 조작이 문명의 안락을 위한 어떤 새로운 품종이나 제품을 생산키 위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나 천지가 준 자연적 질서를 파괴하는데까지 이르게 된다면, 여태까지 물리적.기계적 생산품이 준 자연파괴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엄청난 생태계의 파손을 초래하게되리라는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다. 유전공학이라는 말자체가 나에겐 사실 혐오스럽게 들리는 말이었다. 사십억년의 진화의 결정으로 생긴 "유전"이라는 정보의 지혜를 인간이 함부로, 공학적으로 조직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불경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허나 나의 그러한 언급이 이땅의 어린 학도에게 유전공학은 공부하지 말라는 식의 강압에 가까운 명령으로 들렸고 또 그에따라 그의 삶의 진로를 변경시킬 만한 중대한 결단에 이르게 했다면 거기에는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제발 오해를 좀 말게, 아니 지금 뭐 말라빠진 철학을 다시하겠다고 하나? 생명의 신비! 그 자체 이상의 철학이 어디 있을 수 있나! 비록 유전공학이라는 학문의 오용가능성은 인류의 미래에 대해 심각한 폐해를 끼칠 수 있는것이라해도 그 학문은 현대생물학의 모든 첨단적 지식을 그 기초로서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데, 왜 그렇게 좋은 학문을 버리고 다시 철학과를 가겠다고 하나! 이제 인류사에서 철학은 사라져도 좋으니 유전공학만이라도 열심히 공부하게. 휴학을 했다하니 1년 손해를 보긴했지만 그 시간동안 재수한다고 그 가치없는 시간을 보내지 말고 일년동안 '킴볼 생물학'책이라도 돌돌 외워 놓으란 말야! 그 이상의 철학은 없네! 자네 같이 정직한 사람들이 유전공학을 공부하면 인류는 잘못가지 않을꺼야!"
  나는 길거리에서 호통을 쳤다. 그리고 그 길로 되돌려 보냈다. 짧은 길거리에서의 순간이었지만 나의 간곡한 심정을 담은채. 얼마후 그 학생으로부터 유전공학과에 다시 복학했다는 서신이 학교로 날라왔다. 후유.

  21세기 호떡집아줌마는 매일 중매를 서달라고 졸라대는 내가 정말 총각인줄 안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느날 내 딸이 대학교엘 다닌다고하니깐 깜짝 놀래었다. 그리고 속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뒤론 중매를 설 생각도 하질 않는다. 맙소사!

  이리신동엔 당구장도 많다. 사실 대학생사회에서 당구장만큼 만만한 오락도 없다. 폭력적이 아니고 고전적이며, 또 정적이면서 동적이고, 또 무한한 개발의 가능성이 보장되며, 개연성과 필연성의 스릴이 항상 멋드러지게 교체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께임으로서 이만큼 참가자들이 지속적으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오락은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당구의 역사에 관하여 우리는 기원전 6세기 스키티아의 철학자 아나카르시스가 쓴 문헌속에서 오늘의 당구와 같은 께임을 희랍여행중에 목격했다고 하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정말 이 당구의 기원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오리무중에 가려있을 뿐이다. 희랍-로마시대에 이 당구와 관련된 문헌은 여기저기 찾을 수 있지만 "빌리아드"라는 말이 불어계열인 것을 보아, 대강 오늘날 한국에서 경험하는 포켓없는 이 카롬이라는 양태의 께임이, 16, 7세기경 불란서에서 발전된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의 학자들은 이 당구의 기원을 중국에서 발생하여 서양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 확실한 근거는 찾기어렵다. 그런데 이 당구라는, 4각의 판과 볼로 구성된 이 단순한 께임의 역사적 성격중에서 가장 특이한 사실은 가장 하이클라스의 가장 고상한 놀이로 인식되는가 하면 가장 천민의 가장 야비한 께임으로 인식되기도 하는 천의 얼굴이다. 아마 인류의 놀이의 역사중에서 당구만큼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며 당구만큼 상하좌우의 넓은 계층의 참여의 폭을 가지고 있으며, 또 고상과 천박의 인식적 양면을 수용하고 있는 께임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중학생때의 일이었다. 카톨릭의대를 다니던 셋째형과 어떤 연유에서였던지 기억은 없으나 혜화동 로타리를 걷고 있었는데, 나중에 같이 군의관으로 입대케된 학교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만나서 나누는 첫마디가 :
  "야, 요새 좀 많이 늘었냐?"
  "응 쪼끔."
운운하는 듯 하더니 검지의 팔란지스(지절골)를 말아세우면서 이상한 폼을 잡는 광경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의 상징은 저렇게 손을 말아 뭔가를 때리는 짓을 하는 것인가부다하고 아주 인상깊게 그 장면을 기억했다. 그러다 나는 곧 당구장출입을 시작했고 고교졸업전에 당시 수준으로서는 달인의 경지에 올랐던 것이다. 내가 청도관 태권도 까만띠도복을 어깨에 둘러매고 출입하던 아지트가 바로 을삼당구장이었기에 우리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을삼패"였다는 것을 언급해두는 것으로 간략히 스쳐지나가자! 나는 대학교시절에는 관절염이라는 중병으로 처절한 투병의 세월을 보내야했기 때문에 당구를 칠 기회는 없었다. 그리고 고대철학과시절에는 동료학생들과 다방 한 번을 편하게 간적이 없는 철저한 학구파였다. 4년의 철학과 생활이 막바지에 이른 어느날 나는 우연히 졸업반학우들과 당구장엘 가게 되었다. 그들에게 비친 나의 모습은 철저한 묵언의 공부벌레였고 당구를 친다든가 하는 것과는 정말 거리가 먼 인상만 간직되어 있었다. 내가 큐를 들었을 때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 공부벌레 김용옥의 솜씨에 대한 경악, 칸트가 말하는 숭고미에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하더래도, 하여튼 인상깊을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었으리라.

  우리나라에서도 예외없이, 일본을 통해 유입된 당구장의 역사는 상층문화의 고상한 아트로서라기보다는 젊은 한 때의, 그리고 하층민이나 깡패, 도박꾼들의 좀 거친 분위기의 인상이 짙게 풍긴다. 따라서 당구장하면 으레 담배연기자욱한 곳에, 가끔 싸움이 벌어지거나, 주인과 깽값으로 다툼질하는 그런 곳이라는 선입견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이 신동대학로에 자리잡은 "우리당구장," 바로 21세기호떡집을 지나 곧 건물외측 비상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한적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 우리당구장은 그러한 모든 선입견을 거부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당구장을 운영해도 조금도 그러한 이상한 분위기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사회의 지대한 변화를 실감케하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일반문화질서의 합리화라는 측면에서 여러 이유를 들수도 있겠지만 역시 그 당구장을 운영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 이 당구장의 매력의 전부를 말해주는 것 같다. 
  나에게는 나이를 많이 먹은 누나가 한사람있다. 친누이가 둘이 있지만 우리엄마가 양녀로 기른 큰형과 같은 년배의 누나가 하나 있는데 나는 이 누이의 인품을 매우 좋아한다. 고요하고 온화하며 말이 없고 꼼꼼하며, 얼굴에서 풍기는 선량함이 모든 사람의 모남을 씻어주는, 깊고 은은한 미소가 배인, 그리고 짙은 눈썹과 깊은 눈가를 잔잔히 흐르는 주름이 말해주는 상전벽해의 무상함이…. 나는 우리당구장아주머니를 처음 봤을 때 내가 좋아하는 그 누이생각을 했다. 얼굴이 너무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우리 조선의 여자의 전형적 매력이 있다면 바로 저런 얼굴속에 다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유약함이 강함을 승한다는 라오쯔츠의 말대로 바로 그 당구장아줌마의 유약함이 이 당구장을 찾아드는 거친 아희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것 같다. 우리당구장은 항상 그 다이가 정성스럽게 유지되었고, 그 분위기도 항상 깨끗했다. 그리고 비교적 구저분한 행동들이 없었다.
  사실 내가 이리생활에서 당구를 칠 시간이 나는 것은 아니다. 허나 가끔 어쩌다 빈시간이 나면 그래도 시간을 건전하게 메꿀 수 있는 오락이라곤 이 당구밖엔 없다.(당구이상의 오락문화를 못만들어낸 우리나라도 참 문제가 많다.) 그리고 같은 당구라해도 나는 이 우리당구장의 아주머니가 지켜 보는 그런 분위기속에서 당구를 칠 수 있다는 것이 기분이 좋다. 물론 당구장아저씨도 한없이 선량하고 부지런하신 분이다. 
  두환이는 당구를 썩 잘친다. 당구는 혼자치는 께임이 아니다. 골프처럼 나 혼자 걸어가면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치는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지극히 영향을 받는 께임이다. 당구도 내 차례 내가 치면 그만인 것이 아니냐하겠지만, 당구는 인간의 기의 교감이라는 생리가 강하게 작용하는 절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몰론 켄세이다마라해서 상대방의 타구의 기회를 흐리는 직접적 영향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당구를 같이 치는 상대방의 타구방식의 분위기에 따라 나의 쵸오시가 결정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뿐만아니라 쿳션등 공이 굴러가는 다이의 상태, 그리고 습도, 그리고 집중을 가능케하는 분위기에 따라 결정되는 순간적 감의 정밀도등등. 그러니까 당구야말로 외사와 내감이 모두 발동하여 이루어지는 매우 정밀한 께임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사실 다마를 두 백밖에는 치지않는다. 네개를 놓을 수도 있겠지만 네 개까지 치자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없는 시간에 잠깐 들리는 당구장인데 그렇게 죽치고 들어않아있을 수도 없으려니와 보통 한께임만 치고 나오는 형편에 그리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 상쾌할 것도 없다. 두환이는 두개반을 놓는다. 현재 두환이는 나보다 확실히 웃길이다. 
  "야 임마, 넌 이제 졸업하면 명의가 되겠다."
  사실 난 한의대생들과 다마를 쳐보면 그 녀석이 나중에 졸업후에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거의 단언할 수가 있다. 다마를 다루는 솜씨, 그 집중하는 진지함, 결과적으로 맞든 안맞든 물샐틈없는 사전에 계획하는 진로의 치밀성, 이미 막연하게 친 공은 큐가 닿는 순간 결과가 잘못된 것은 빤히 아는 일이니까, 이런 품새들을 보면 그 인간의 됨됨이, 다시 말해서 그가 환자를 다루는 인품의 됨됨이를 미루어 헤아려볼 수가 있는 것이다.
  두환이는 그래도 서른이 넘었다. 그래서 그 녀석은 좀 철이 든 셈이다. 그래서인지 당구철도 들었다. 어느새 백아절현이라, 나는 두환이가 아니면 당구를 칠 맘이 안나게 되었다. 두환이는 상아빛 다마를 뽀이얀 처녀의 방뎅이를 어루만지듯 살살 달랜 줄을 안다. 다마가 굴러가는 재미의 미학은 그 연속성이다. 다마가 불연 속의 점프가 없이(의도되지 않은 이상) 미세한 동요도 없이 생각되는 진로를 따라 천천히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원하는 지점까지 오게 만드는 타술의 미학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한 큐내에서의 연속성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큐와 다음 큐를 연결하는 연속의 미학이다. 나의 다마의 움직임이 연속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피타된 다마의 연쇄적 운동이 형성해가는 전체 판의 연속성, 그것은 오로지 나의 큐의 강약과 히네루에서 결정된다.

  내 나이에 최소한 게임값을 걱정할 일은 없다. 그래서 게임이라는 승부적 성격에 나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치는 동안 내가 얻을 수 있는 느낌의 만족, 어떤때는 그렇게도 협애하게 보이고 어떤때는 그렇게도 광막하게 보이는 그 사각의 우주를 굴러 다니는 공의 미학이 주는 심미적 기쁨, 그 기쁨때문에 나는 다마를 칠 뿐이다. 그런데 어린 학도들은 너무 승부에 집착한다. 승부에 집착을 하지 않는 것 같이 보여도 그 압박감이 그들에게 부여한 느낌때문에 공이 덜거덕거리고 내가 집중할 수 있는 판이 깨지고 만다. 허나 두환이의 타구는 매우 고상하다. 그 녀석은 공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을 줄도 알고 또 공의 성격에 따라 따라다닐 줄도 안다. 자기 판을 지키되 남의 판을 깨지는 안는다.
  나는 늙어서 근 삼십년전에 잡었던 큐를 다시 잡으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원리를 하나 깨닫게 되었다 : "당구의 제일 원리는 원쿳션이다." 나는 옛날에는 절묘한 쓰리쿳션이나, 맛세이, 세리다마 같은것이야말로 당구의 지고의 경지로 알았다. 그런데 요즈음 나의 생각은 달라졌다. 복병은 완쿳션에 있다. 세로가로 완쿳션만 확실히 잡을 수 있다면 다이라는 세계는 좁아진다. 그리고 셀 틈이 없어진다. 스리쿳션도 결국 가장 단순한 완쿳션의 연속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요즈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방제학의 기본도 역시 군신좌사의 쓰리쿳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군약의 완쿳션에 있다. 그래서 나의 인간관계도 요즈음은 쓰리쿳션의 여백이나 에두름을 점점 벗어나 완쿳션으로 흐르고 있다. 책임있는 언어의 완쿳션미학, 그 간결함이, 느는 다마와 함께 몸에 배어가고 있는 것이다.

  늦게까지 책상머리에 붙어 있다가 궁덩이가 군실군실거리면 전화로 두환이를 불러내 신동대학로를 한 번 훑는다. 먼저 야구장에서 방망이 열 개 휘두르고, 만남의 집에서 국수를 한 접시 들이키고, 디저트로 21세기에서 호떡하나를 집어먹고, 우리에서 한 큐 돌리고 나선, 꿈꾸는 도시로 날러, 맥주 한잔 들이킨다.(꿈꾸는 도시: 실내장식이 밝고 틔인 요즈음 신동에서 제일 잘되는 맥주집. 주인이 순박하고 좋은 사람이다. 나는 여기서 마이클 잭슨 비디오를 잘 본다.) 허나 이런 풀코스를 뛰는 것은 어쩌다 한 번이요 대강 그중 한코스만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의대를 다닌다고 하면 뭔가 쉬운 일을 건성건성하고 있는 줄 안다. 내가 한학의 달인이니까, 한의학은 비슷한 동네고, 또 주변에서 적당히 봐주겠거니 하고. 실상 내가 사는 삶의 역정이란 매일매일 눈물겨운, 건강과 시간과의 투쟁이다. 언젠가 나는 말할 것이다.

  나의 일생을 회고컨대 그것은 오로지 시간과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과정을 통해 인간문명에 너무도 많은 죄를 지었다. 허나 하늘은 나를 용서할 것이다.

  나는 평상시는 아침 7시경에 일어난다. 그리고 세수하고 커피한잔들거나 일기를 정리하곤 8시엔 밥먹는 집으로 간다. 내가 숙박하고 있는 숙원재는 식사가 없다. 그래서 밥은 두환이가 사는 집에서 매식한다. 사실 내가 이리에서 살면서 가장 고민한 문제는 식사문제였다. 거처문제도 항상 말썽이 뒤따렀으나 숙원재주인을 만난 후로는 그런 문제는 말끔히 해결되었다. 그런데 숙원제 아주머니가 몸이 불편해 식사를 해줄 수 없게 된 후로 나는 여기저기 매식을 시도하였는데, 정말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행히 숙원재에서 가까운 곳에 세끼를 정해 놓고 먹을 수 있는 곳을 마련케 되었고 또 아주머니도 인간적으로 좋으신 분이었고 또 정성껏 해주셨으나 이상하게도 음식이 잘 맞지를 않았다. 아주 괴로왔던 것은 우선 세끼 쌀밥 그자체였다. 군대밥보다도 더 푸걱푸걱한 정부미였는데 아무리 반찬이 좋다한들 쌀이 누렇고 날라갈 듯 찰진 맛이 조금도 없으니 세끼 목구녕이 편할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건대 그 아주머니가 결코 인색한 사람도 아닌데 그런 기본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나와는 다른 것 같았다. 그리고 먹는 그릇이나 냉장고를 들락거리는 음식들의 관리가 좀 깔끔한 느낌이 부족했다. 허나 전혀 의도되지 않은 사태에 대하여, 그리고 나에게 곡진하게 성의를 다해주시는 그분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실망을 시켜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괴로워도 아무말 않고 참고 또 참았다. 그러면서 두학기 일년을 버티고 나니까 밥맛이 달아나 버렸다. 진실로 고행의 수련이었다. 사실 나는 주위사람이 다 알지만 식사가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다. 주는대로 맛있게 먹는 식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릇이나 상차림새의 정결성은 매우 따지는 편이다. 성찬은 좋아하지 않으나 정찬은 사랑한다. 따끈한 밥 한그릇에 단 한가지 찬만 있으면 두말하지 않는다. 나는 예로부터 한국식으로 매일 똑같은 형식의, 간장, 고추장 같은 것이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 상차리기를 매우 싫어한다. 밥한그릇과 단 한가지 국이나 단 한가지 먹을 찬만 있으면 행복하다. 나와 나의 아내 영애는 그런게 서로 좋아 평생 그렇게 간결하고 정결한 식탁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외국을 많이 돌아다닌 덕분에 중국요리.일본요리.서양요리 등의 다양한 메뉴가 몸에 배어 있고 마늘냄새나는 한국식 일곱양념 무치기는 매우 싫어하는 식성이 되었다. 그러니 따지자면 고급스럽고 까다롭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요번 학기부터는 두환이가 자기 하숙집음식이 아주 좋다고해서 가 들어보니, 내 고향 천안에서 멀지않은 대천분 할머니가 사연이 있어 이리를 타지로 삼고 와서 사시는데 품위가 있는 큰살림을 해보신 분이라 과연 음식이 정갈하고 맛이 있었다. 정말 큰 행운이었다. 이 대천할머니를 만난후로 식사타령도 싹 가셔버리게 된 것이다. 이젠 그저 세끼 투정없이 먹을 수 있다는 것만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아침 8시에 대천할머니집에서 아침을 먹고 숙원재로 돌아와 책가방을 꾸리고 학교로 갈땐 으레히 제시간에 대느라고 힘겨웁게 대학로를 뛰어간다. 그리곤 9시부터 저녁5시까지 꼬박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6시엔 또 대천할머니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좀 산보를 하거나 어정거리다 집에 들어가면 7시가 된다. 그러니까 저녁에 남는 시간이라곤 7시부터 11시까지 한 4시간 정도다. 이 저녁 4시간이 내가 학과의 예습.복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허나 불행하게도 그렇게도 하고 싶고 또 해야만 하는 예습.복습을 할 수가 없다. 방학때 다 처리못된 서울일, 끊임없이 서울서 동경에서 밀어닥치는 불가항력적인 잡무들이 나의 저녁시간을 첩첩히 에워싸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교수님들이나 두환이에게 불려나가 이 시간마저 까먹게 되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이런 생활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닷새동안 꼬박 빈틈없이 이리에서 진행된다.

  나는 금요일 6시 40분 새마을열차에 몸을 싣는다. 서울 제기동에서 삼화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두환군과 함께. 두환이는 원래 아버지의 소망과는 달리 공과대학을 나왔다. 그리고 철이 들어 아버지의 소망대로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에 나와같이 입학하였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부친은 두환이가 한의사 수업길에 들어선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던중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하는 운명을 맞았다. 두환이는 그래서 일년을 휴학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경험하면서 두환군은 정신적으로 크게 성숙하였다. 그리고 내가 복학할 때 함께 복학하였고 그래서 결국 두따라지는 같이 이리에서 시간을 보내는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새마을이 9시 15분 서울역에 도착하면 날 기다리고 있는 쎄단이 있다. 나는 그 차속에서부터 서울일을 보고 받는다. 학생신분이 아닌 전혀 다른 사회적 인간으로서 주말을 빈틈없이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일요일 밤차로 나는 다시 이리로 간다. 찰칵, 열쇠를 돌리고 방문을 열면 숙원재는 날 한가롭고 따스하게 맞이해 준다. 다시 책상 스탠드 밑에서 또 일주일간 벌어질 전투의 준비를 한다. 생각할 틈도 없이 지친 몸은 고적하기 그지없는 하숙방의 공허한 울림속으로 덧없이 스러져간다. 이것이 내가 요즈음 살아가는 삶, 솜니별곡의 전부다.

    II

  일천구백구십이년 사월 십오일 수요일 열한시의 일이었다. 예정대로 한종현교수님의 약리학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한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이상한 책을 하나씩 나눠주기 시작하셨다. 그 껍데기에 '나, 너, 우리의 한의학은'이라고 쓰여져 있는. 그것을 받아보는 학생들은 당혹했다. 전혀 기대치 않았던 사건이었기에.
  사실 그 자리에 앉아있었던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학기초부터 선생님은 이제 본과로 올라왔으니 '한의학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밝히는 글을 레포트로 제출하라고 숙제를 내주셨고, 계속 레포트 안낸 사람들을 독려하는 게시가 나붙어있었다. 허나 나는 그런 걸 새삼 써내는 것도 뭔가 겸연쩍었고 또 주제를 보니 학점과 직결되는 것 같지는 않아 게으름을 피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한선생님은 학생들의 레포트를 읽다가 그것을 묶어 책으로 내어 돌려주어, 서로 읽어보게하고 서로의 생각에 대해 반추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자는 기발한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럴줄 알았더라면 나도 레포트를 냈을걸. 나같이 게을러 레포트를 안낸 사람들은 그 순간 모두 나와 똑같은 심정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니까 '너와 나의 한의학'은 순수한 학생들의 무심한 붓, 그리고 전혀 누구에게 보이고자하는 생각이 없이 쓴 글들의 모음이다. 그리고 이책은 '책을 만든다'는 행위를 쉽게 해준 컴퓨터문화의 소산일 수도 있다. 허나 아무리 그러한 것이 쉽게 가능하다해도 학생레포트를 책으로 묶어 돌려주시는 한선생님의 마음씨는 참으로 고귀한 사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몰론 원광대학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은 서프라이스 어태크라는 것을 이유로 필자들의 이름을 다 지워버렸다. 그래서 이 책은 더 재미있었다. 이 책을 받아본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글만 알고 나머지 글들은 '아무개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책을 당장 출판하리라고 마음먹었다. 한선생님의 고운 마음씨를 보다 넓은 세상에 펼쳐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당일 나는 출판사로 출판가능성을 타진해보고 그날 밤으로 원고검토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대실망이었다! 도저히 출판이 불가능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우선 학생들의 문장력이 한두편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형편이 없었다. 출판을 전제로 하는 아무런 긴장감이 없이 우발적으로 그것도 타의에 의해 하룻밤 끄적거린 문장에 불과하다는 실사정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대학교를 3년째 다니고 있는 학생들의 수준치고, 그리고 또 우리나라의 한강이남에서 가장 높은 커트라인을 페스했다고하는 수재들치고, 너무도 표현력이 빈곤했다. '표현력의 빈곤'이라고 하는 내말은 뭐 대단한 수사학상의 우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부, 술부의 논리적 관계가 제멋대로 나뒹굴고 도대체 완결된 한 문장의 의미체계가 과연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감이 안잡히는 암호의 형국을 이루고 있는 그런 매우 원시적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논리나 생각, 느낌이 너무도 획일적이었다. 표현력의 다양성이나 미추의 역학을 얘기하지 않는다 하더래도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멧세지가 너무도 제한되어 있었고 반복적이었다. 이것을 정말 우리나라 교육의 실상을 나타내는 적나라한 현실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여태까지 진실로 '한의학에 대하여' 자기자신의 생각을 해보았다든가 혹은 그러한 고민에 수반하여 광범위한 독서를 한다든가 하는 여유가 전혀 결여된 상황에서 중고시절이나 대학생활을 보냈다는 확증이 되는 것이다. 허긴 현금의 입시체제나 또 특히 의과대학체제안에서는 그들에게 학과공부이외의 별도의 폭넓은 독서를 한다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한 일임을 나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허지만 내가 느끼기에 '한'의과대학생들은 일상생활속에서 자유롭게 발생하는 진지한 토론의 장이 너무도 없는, 그리고 창문이 없는 모나드처럼 오직 홀로 자기만의 우주를 비치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같다. 최소한 내가 대학교다닐때만해도 이다지도 개인주의적이고 이다지도 고독하고 서글픈 대학생활은 아니었던 것같다. 이러한 말을 하는 나를 우리 동급생학생들은 또 질책할지도 모른다. 너무 일면만을 침소봉대한다고. 누구든지 자기를 나쁘게 말해주는 것을 싫어하게 마련이니깐. 그리고 날 또 '인민재판'위에 올려놓을지도 모르겠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요즈음의 젊은이들이 공포스럽다. 그들은 80년대의 반군사독재투쟁과정을 통해 이 사회의 정의의 기반을 확립했으며 그래서 정의라고 딱지붙은 모든 사태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주권에서 밀려나는 모든 자들은 함부로 경멸스러워지는 것이다. 나역시 때로는 그들에게 경멸스러운 인간말짜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에 항의할 능력이 나에겐 없다.!

  솔직히 말해서 4월 15일 받은 원고뭉치에서 내가 건질 수 있었던 문장은 단 한편, '아드레날린과 소프라노에 대한 단상'뿐이었다. 그런데 그 문장은 변재석군이라고, 서울대학 정치학과를 나오고 다시 뒤늦게 신입하여 한의학수업을 착실하게 밟아가고 있는 노학생의 글이다. 그 외로는 특수한 편집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활자화되기 어려운 문장들이었다. 허나 나는 이 책의 출판에 대한 일념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첫째, 양식있는 편집과정만 거친다고 한다면, 글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높은 수준만을 과시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있는 현실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소박함이야말로 좋은 글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둘째, 이러한 글모음이 반드시 다양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좀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처럼 동일한 양식의 번복의 효과도 재미있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반 동급생아이들은 오비(예비역)가 거의 없어 대체적으로 보푸른 솜털의 아기병아리같이 순진한 학생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순수한 모습을 순수한 그 모습대로 세상에 공개하고 싶었다. 나는 사실 이들과 별 인사가 없이 지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이런 책을 출판하여 그들에게 유익할 수 있는 어떤 기회를 마련하는 것으로써 인사를 대신하고 싶었다. 예를 들자면, 이 책이 출판되면 인세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내이름을 걸어 인세를 좀 출판사에서 뜯어내면, 그 돈으로 학우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갈 수 있게 될른지도 모른다. 그러자면 최소한 2만부는 팔려야 할텐데… 하고 생각해보니 별자신이 생기질 않았다. 2천부도 팔기 어려운 판에…. 물론 손해볼 짓은 안할려고 하는 것은 당여한 출판사의 속성이다. 출판사는 나의 전적인 책임편집과 나의 별도의 글이 없이는 출판이 어렵겠다고 난색을 표명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 사정을 한종현교수님께 상의드렸더니, 한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일년을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본1을 시작하면서' 쓴 글이니깐, '본1을 마치면서'라는 제목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레포트로 제출하라해서 그것과 같이 묶어 출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나는 한종현선생님의 자상한 생각에 감탄했다. 그리고 출판에 대한 욕심은 다급했지만 일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본1의 스케쥴상 도저히 원고를 편집하고 내글을 덧붙이고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길 수 없었다. 
  한종현교수님은 약리학선생님이다. 본1 일년동안 홍사석엮음 '이우주의 약리학강의'(1991)라는 책 한권을 모조리 외워야 한다. 우리나라 의학계에서 나온 책으로서 나는 본서를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 문장이 평이하고 깔끔하며, 또 오식이 비교적 없다. 요즈음 배우고 있는 대한병리학회편 '병리학'(고문사, 1991) 책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문장이 치졸한 곳이 많고 부정확한 정보와 오식이 눈에 많이 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교수님께 배우는 학문은 한방의 약리가 아니라 서양의 약리다. 순 화학기호로 된. 나는 사실 화학의 기초가 부실해 이런 것을 암기하느라고 죽을 똥을 쌌다. 아세틸콜린에스터라제니, 글루코스-식스-포스페이트디하이드로게나제니, 레닌-안지오텐신-알도스테론이니 뭐니, 아이구 두야, 답안지를 작성해가면서 바로 망각으로 사라져가는 이 암호들을 대가리속 타부라 라사에 끌어모아 두느라고 속알머리만 없어졌다.(가운데 머리만 빠졌다. 내 대머리 형태) 그런데 한교수님은 한의과대학을 나온 한의사다.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은 양방과목을 대부분 한의과대학을 나오신 선생님들이 가르치신다. 이 선생님들은 한의과대학을 나오고 모두 서양의과대학으로 유학해서 서의의 실력을 획득한 분들이다. 서양의과대학교수님들이 직접 가르치실 경우도 적지 않지만(예를 들면, 기생충학은 사계의 최고석학이라할 수 있는 소진탁교수님이 직접 강의해 주신다) 많은 경우 그런 과목을 서의과대학에만 의존하다보니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여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그러한 유학제도를 만들어 인물을 키워왔던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원광대학교의 자랑이며 미래를 설계할줄아는 큰 뜻이라 할 수 있다. 
  요즈음은 그런 폐단이 없어졌지만 과거의 한의과대학에 출강하시는 서의과대학 선생님들은 한의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거나 또 멸시감을 가지고 계셔서, 강의하시는 도중 한의과대학생들에게 모멸감을 던져주는 발언을 서슴치않는 교수님들이 많아 학생들이 반발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럽다못해 자구책을 마련한 것이 한의대출신을 순수한 서의학 학자로 키워 스태프로 채용하는 우원하지만 정직한 코스를 택했던 것이다. 지금은 한의과대학에 이러한 선생님들이 꽤 많이 계신데, 이들에게서 무슨 동.서의 융합이 이루어지거나 한 단계는 아니라해도, 이들의 서의학에 대한 이해는 매우 정확한 것이다. 해부학을 가르치시는 우원홍교수도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출신으로서 소속은 한방병리학교실이다. 한의사가 무슨 그레이나 커닝햄의 '아나토미'를 가르치냐고 반문하겠지만, 우원홍교수 같은 분은 청대 '병임개착'을 쓴 왕청임과 같은 한의해부학자의 적통을 잇고 있다고 말해야할 것이다. 우교수 같은 분은 해부학과 조직학을 서양 원서로 가르치고 있지만, 자신이 한의과대학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오히려 더 철저히 서의학을 말하고 학생들에게도 보다 경쟁적으로, 서의과대학 못지않게, 치밀하게 가르쳐 줄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내가 수강한 느낌으로 그 내용이 충실하고 강의자세도 매우 정직하다. 그리고 서의과대학이나 치대에서 손이 모자랄 때는 그쪽으로 출강까지 나가고 있으니 이렇게 가다보면 동.서의 교류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것이 아닐까? 서양의 병리를 가르치고 계신 전병훈선생도 원대 한의대출신으로 서의과대학 병리학교실에서 공부한 분인데 '로빈스'원서로 강의하는 그 강의내용이 매우 충실하고 또 효율성이 높은 강의로 나는 평가한다. 
  한교수는 서양의 약리를 말하면서도 역시 한의출신이기 때문에 한약의 서양약리적 성분분석에 관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많이 들려준다. 그리고 침에 관한 문제도 신경세포의 액션포텬시알 문제와 관계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전해질의 탈분극-재분극과 관련있는 것으로 강의한다. 허나 물론 어떤 교수님들은 강의시간에 들어와 이러한 식의 '침의 이해'가 터무니없는 발상일 뿐아니라, 한의학의 본질을 왜곡하는 이단적 논리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정.기.신이니, 태양.양명.소양이니, 명문.삼초니 하고 좀 구름잡는 이야기들을 둘러댄다. 학생들은, 이선생 이얘기 저선생 저얘기,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할지 그 명확한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혼미스럽게 된다. 그리고 결국 졸업할때까지 아무런 결론을 못내리고 사회라는 벌판에 내던져진다.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무편으로부터도 확실한 판단근거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한의의 석학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기초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 고문(옛글)이요 고경인데 그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검증할 길이 없는 것이다. 고경이래서, 고인이 쓴 것이래서, 권위가 있는 것이니, 외우라고 하니깐 외우는 것이다. 학생들이 그것을 외우는 이유는 단하나, 안외우면 학점이 안나오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 위선을 견디지 못하는 자는 한의과대학을 도중하차한다. 물론 실리의 이기가 앞에 놓인 자들에게, 요세같이 약삭빠른 세상에, 그런 정직과 용기는 기대키 어려운 것이지만.

  임마누엘 칸트는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수마일도 벗어난 적이 없이 바로 그곳에서 죽었다. 1724년 프러시아 쾨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그곳 쾨니스베르크대학에서 강사생활을 시작하여 빈곤하게 살다가 그곳에서 총장까지 지내고 1804년에 거기서 죽었다. 그러면서도 칸트는 세계각국의 인문지리학을 유려하게 강의했다고 한다. 런던브릿지의 형태, 색깔, 길이, 광경을 그 디테일까지 묘사해가면서... 그리고 또 당구의 천재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결혼도 하지 않았다. 당구를 잘 친다거나 결혼을 하지 않았다든가 하는 것은 닮지 않았지만 우리 한종현선생은 임마누엘 칸트와 비슷한데가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이 바로 원대에서 전군가도로 나가다보면 곧 오른쪽으로 바라보이는 자그마한, 그가 다닌 국민학교가 그대로 남아있는 대평지의 논에 둘러싸인 소담한 농촌이다. 그가 태어날 때만 하더라도 그가 다닌 이리가 그의 학구적 포부를 충족시켜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골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재수생활 잠깐하러 서울유학한 것외로는 모두 이리에서 세월을 보낸 학자이다. 그래서 얼굴이 발갛고 말갛고, 바람을 피하느라 그랬는지 땅딸막하다. 나는 한선생님을 좋아한다. 순수하고, 항상 실험에 열중하고, 남의 말을 편견없이 듣고, 항상 약자의 편에 서서 생각하는 그 시골사람의 정취가 나는 좋다.

  내가 이리생활에서 신세를 졌다면 가장 신세를 많이 진 교수님이 한.양방으로 각기 한분씩 계신데, 두분 다 공교롭게도 임마누엘 칸트를 닮은 이리토배기들이다. 한교수님이 그렇고, 양방으로는 국제적으로 눈부신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면역학 학자인 정헌택선생님이 그렇다. 정헌택선생님과 나와의 기나긴 연분은 언젠가 딴 기회에 말하겠지만, 요즈음은 효율과 정밀도가 매우 높은 피씨알이라는 유전자증폭기 신제품을 개발하는등, 하여튼 공부하고 기초의학교실 운영하는 것 외로는 생각하는 것 없이, 부지런하고 바지런하기 이를데가 없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일.이부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과연 한종현교수님은 일년후 학생들의 레포트를 모아 다시 책으로 묶어내고는 카나다로 갔다. 맥길대학에서 한학기 강의초청을 받았다. 나는 새학기 초부터 오후시간은 모조리 학생들의 원고편집에 쏟았다. 내인생에서 남의 문장을 다듬어주기위해 이만큼 막대한 시간을 투여하는 일은 처음이려니와 마지막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지루하게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줄한줄 거의 손대지 않은 것 없이 토씨와 표현상의 애매한 부분을 바로잡아 나갔다. 토씨하나의 변화가 문장의 맛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 섬세한 감각이 그들에겐 너무 결여되어 있었다. 나의 편집의 원칙은 원저자의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일 뿐이며, 무리한 가감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 있는 문장들은 모두 학생들 자신의 것이다. 단지 그들이 자신의 원문과 대조해보면서 나의 교정이 옳았다고 생각하면 그 옳은 부분을 치밀하게 생각해보고 배우는 바가 있기를 바라며, 만약 개악이 되었다든가 내가 본인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못했다고 생각할때는 날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도저히 본인들에게 일일이 확인해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출판사가 원한 내자신의 글을 쓸 수 있는 공백이 도저히 생기지 않아 애태우고 있던중(사실 방학이되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여유는 나에게 더더욱 없어진다) 정말 예기치 않은 대사건이 발발했다. 일천구백구십삼년 삼월 이십사일, 애꿎게도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수요일 정우열선생님의 한방병리학강의를 마지막으로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생들은 분노를 삭히지 못한채 전국 11개 한의과대학생들과 보조를 맞추어 무기한 농성휴학에 돌입하였다. 이날 나는 새벽 4시에 벌컥 일어났다. 나자신 동학들이 억울하게 느끼는 심정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학생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하게되는 처지가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졌던 탓인지, 어젯밤 늦게야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새벽에 벌컥 눈이 떠진 것이다. 나는 병리학 공부나 할까하다가, 이럴 수 있겠나하고, 아무 신문에나 기고해 볼양으로 우선 붓을 들었다. 사실 학생들이 아무리 농성을 해본들 그들의 소리가 국민의 귀에 들릴 까닭이 없고, 또 한의학계는 아직 사회적으로 명망을 축적해온 인물이 부각되어 있지를 않기 때문에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여 신문에 글을 쓸 수 있는 인물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의사나 약사가 쓰는 글들은 모두 이권투쟁의 이전이투 이상의 짓거리로 보이기가 어렵다. 그래서 문제의 핵심이 호도되기 쉽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글을 써본들 그것이 신문에 나가리라는 보장도 없다. 약사업계는 제약회사와 한통이고 제약회사는 언론사로 볼 때는 가장 거대한 광고주이기 때문에 제약회사의 입김을 거부하기 어렵다. 제약회사의 광고채녈을 통해 언론사에 로비를 해 놓았으면, 편집국에서 올라오는 기사하나 필터링하는 것은 손바닥뒤집기보다 쉬운 일이다. 허나 나는 언론의 양식을 믿고 우선 아무 곳이나 닥치는 대로 뚫어보기로 하고 붓을 옮겼다.

    특별기고
  보다 진실한 해결
  철학자 도올 김용옥

  나는 지금 한의과대학생이다. 대학생이라면 모름지기 공부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 나는 공부를 할 수가 없다. 왜냐? 11개나 되는 한의과대학이 모두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교수, 학생 할것없이 모두 격분속에 호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회에선 아무도 이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벙어리 냉가슴! 하늘을 치고 땅을 치고, 소돔의 멸망을 예언하는 자들의 울부짖음같다. 
  "요즈음 살맛 나."
  "왜?"
  "엊그제까지도 테레비에 대통령 얼굴만 나오면 죽일놈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최소한 그런 감정은 없어. 대통령 욕 안 해도 매일매일 살 수 있다는게 참 이상해.' 한국역사의 억압의 도를 측정하는데 가장 정확한 바로메타가 된다 할 전라도에서 살고 있는 내가 주변에서 정직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한국사회도 이쯤 되었으면 어찌되었든 합리화의 길로, 좋은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잘하는 것은 잘한다고 해줘야지 인색할 필요있나? 신한국 파이팅!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합리화의 와중속에서 유독 내가 속해있는 한의학계는 불합리의 미궁으로 빠져만 들어가고 있는 것같다. 구한국의 재앙을 한몸에 껴안은 듯, 쯧쯧쯧.
  뭐가 문제냐? 아주 쉽게 생각해보자! 국민여러분들은 누구든지 동네 방방곡곡에 약국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약국에는 흰 까운을 입은 약사가 있다. 그들로부터 여러분들은 박카스나 아스피린이나 무슨 마이신을 살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 약국에가서 약학대학을 나오신 어여쁜 아가씨에게, 옛날 뇌리끼리한 온돌장판위에 놓여있던 판도라상자같은 것이 수십개 꽂혀있는 약장에서 곰방대 구수한 할아버지가 지어주시던 창호지첩약을 지어받는다? 뭐가 이상해! 모든게 다 현대화되는 판에. 농촌에서도 컴퓨터때리고 있다고. 문제는 이 서양의 약리를 배우신 약사님들께서 '한약제조'가 약사의 고유권한임을 포고하고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한약의 판매가 아닌, 처방, 조제, 판매, 그리고 약재의 유통업부까지 한약에 관한 모든 것이 서양약사들의 고유권한임을 전면적으로 주장하고 나온 것이다. 6공말기의 권력누수현사이었다. 안필준보사부장관은 퇴임 이틀전 강력한 약사님들의 등살에 못이겨 도장을 찍어버리고 말았다. '약국에서 재래식 한약장외의 약장을 두어 이를 깨끗이 관리하여야 한다'라는 약사법 제11조 1항 7호를 삭제시키는 시행규칙이 3월 5일 관보에 공고되었고 그것은 4월 5일부로 집행에 들어간다. 4월 5일 이전 저지를 위해 나의 전국 2천여 학우들은 총파업에 들어갔다. 
  한의사들은 지금 약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페니실린을 달라든가 주사기를 달라든가 마약을 달라든가, 아무것도 요구한 것이 없다. 그런데 약사님들은 한의사의 모든 것을 앗아 갈려고 한다. 한의학이 정규대학의 체제속에 6년제 메디칼스쿨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전세계를 통틀어 우리나라 하나뿐이다. 이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한의학을 아예 없애버렸다. 그리고 서의의 동호인모임으로 만들어 버렸다. 중국의 경우도 한의학이 대단히 흥성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사회주의 의료복지정책의 보편적 조달을 위한 수단으로 의타적으로 급조된 것이며 교육기관도 '중의학원'이라하여 독립되어있을 뿐이다. 우리가 애써 이룩해온 독자적 장점을 살려나가도 모자라는 판에 죽이려 한다. 국가가 면허를 준 8천여명의 한의사가 엄존하고 4천여명의 한의과대학생이 모두 드높은 카트라인을 통과한 이땅의 수재들이다. 이들은 갑자기 닭 쫓던 개 되어버렸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본다. 푸른하늘 마저 검게 물들어 버리고있는 것이다. 
  '한방은 경험방일 뿐이며 그때 그때의 환자의 체질과 상태에 따라 증감이 있을 뿐이다. 학이라는 문자가 있다고 해서 모두 학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의학은 수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어 학문으로 인정될 수 없다. 한의사들은 약사가 한방에 관한 모든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지만 한약취급의 상당수는 민간요법에서 볼 수 있는 것이며 한약의 방제에 학문적 특수기술을 요하는 것이 없다. 약사야말로 한약을 개선하여 소위 한약의 과학화의 기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대한약사회의 공식주장이다.
  '우리약사들은 한의사들이 우리가 한약을 다루는 것이 범법인냥 시민들을 오도시키는 불법행위에 비분강개한다. 전통의학이라는 미명아래 한약의 과학적 발전을 저해하는 그들의 아집과 전근대적 행위를 규탄한다. 대한약사회는 질병을 치료하는 한약을 전문직능인인 약사들로부터 탈취하고자하는 한의사들의 음해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 이것은 지난 3월 15일에 나온 서울특별시약사회의 결의문이다.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무리 언어가 무기력한 시대라하지만 좀 너무하지 않는가? 
  뭐가 정말 문제인가? 한의사나 약사나 말할때는 '국민보건의료' 운운하지만 사실 이것은 쌩거짓말이다. 현대자본주의사회의 집단행동의 궁극적 모티브는 결국 권력투쟁일 뿐이요 쉬운말로 이권싸움일 뿐이다. 그런데 철학을 하는 내가, 그리고 속말로 이미 기득권자라면 기득권자인 내가 어느 한편의 이권을 대변하고자하는 생각은 추호도 있을 수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진리며 정도며 정직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역사의 바른 논리며 사회의 바른 모습이다. 약사법개정이라는 이러한 상황은 우리사회가 왕정에서 민주로 변용하는 과정에서 국가권력체제속에 들어 있지 않았던 제반 사회적 행위들이 체제를 빌리지 않고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사태로 진입하게 됨에 따라 그 유리한 체제 속의 고지를 점령하려는 관계 그룹간의 치열한 전쟁의 한 패턴이며 이것은 한의학의 사회적 진화가 매우 후진한 현실과 관련이 깊다. 허나 한의학도들의 입장에선 남들이 다 멸시해온 전통을 버겹게 지켜 여기까지라도 끌고왔는데, 이제 피어날만하니깐 그 열매를 여기저기서 따잡수시려는 얌체족속들에 대한 서운함 밖에는 남는게 없다. 되는 푸줏깐에 쇠파리 꼬여드는 것이다. 허나 한의사들의 가장 큰 실수는 한의사와는 별도로 존립해오던 전통적 약종상(한약업사)의 제도를 종료시켰다는데 있다. 그들만 살려놓았어도(소위 건재약방들) 오늘같이 약사들에게 당하지는 않는다. 줄 것을 주면서 자기것을 지켰어야 하는데 자기관계의 것은 모두 독식하기만 하려는 우를 범한 비젼없는 한의학계의 정책에도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어찌 치과의사들이 치기공사제도를 없애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겠는가?
  나는 참으로 한의학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배우고, 한약을 통해 국민건강에 이바지하고 싶어하는 많은 훌륭한 약사친구들을 알고 있다. 이들의 갈망을 제도적으로 충족시키는 길은 없을까? 물론 약학대학에서 본초 필수 2학점 한과목 땄다는 것을 근거로 한의과대학 6년과정의 결실과 권위를 송두리채 강탈하려하는 약사법개정이 그 바른길이 될 수는 없다. 나 도올을 쳐다 보아라! 인간에게 침한번 놓는 과학적-기철학적 실험을 해보고 싶어서 이 기나긴 6년이란 세월의 하숙방생활을 감내하며 하루하루 눈물겹게 살고 있는 이 노학생의 모습을 보아라! 그래도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는 최소한의 양식이 지켜지는 정도는 있어야하지 않을까?
  해결은 간단하다! 의과대학에 약학대학이 있듯이, 한의과대학에 한약학대학이 신설되어야 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한의사들에게 모두 동의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약학대학을 현 약학대학이 주도하여 설립한다해도 그것을 반대할 명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존립하는 4년제 한약재료학과에 일정자격을 부여해주어 한약학대학으로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한약사중에서 한약업에 종사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한약학대학에 편입하거나 특수대학원코스(2년제 이상)를 만들어 한약을 다룰 수 있는 당당한 코스를 열어주어야 한다. 
  한의사들도 전문의제도의 도입운운하는 한심한 발상(한의학이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침구과등 등의 전문의제도로 찢겨버리는 발상은 한의학의 총체적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며 그렇다면 약진분리를 주장하는 약사들의 논리에 대응할 하등의 근거도 있을 수 없다)에서 헤어나, 이권에 눈이 멀어있는 약사들과 대적치말고, 한의학 그자체의 발전이라는 보편적 이상을 위해 누구와도 협렵해가면서 자기의 권익을 수호하는 원대하고 일관된 비젼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허나 이번의 변칙적 약사법개정 시행규칙안은 철회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은 일반 국민들은 물론 약업에 종사하시는 훌륭하신 분들의 상식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약사법개정 시행규칙은 철회되어야 한다.
  이 글은 12매로 축약되어 뒤늦게야 1993년 4월 11일'일요일' 제5면에 특별기고로 '한국일보'에 실렸다. 이것은 약사법개정문제에 관한 최초의 신문논설이다. 마지막 부문 '현약사중에서 한약업에 종사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한약학대학에 편입하거나'의 '현약사중에서'가 '한약사중에서'로 '한국일보'에 오기되었음을 밝힌다.

  나는 정우열선생님의 병리학강의가 끝나기 전에 선생님이 계신 자리에서 학우들을 향해 또박또박 한줄한줄 이 글을 읽었다. 학우들은 숙연하게 그리고 격앙된 얼굴로 깊은 감동의 인상을 지으며 나의 목소리를 따라왔다. 모두 울먹이고픈 심정에 가슴을 저미는 그런 침통한 분위기였다.

  사실 한의과대학의 존립 그자체를 거부하고 한의학이라는 것이 이땅에서 말살되기를 원하는 사단법인 대한약사회 소속 4만회원일동(1993년 3월 31일, '동아일보'제3면 하단 전면광고 내용에 정확히 의거)의 서슬퍼런 8만개의 눈동자가 감시의 빛을 번뜩이고 있는 이런 마당에 '너와 나의 한의학'이라는 한의과대학생들의 레포트를 펴낸다는 것은 자살행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실린 글들을 통해 한의과대학생들의 실태를 파악할수 있을 것이며, 한의과대학체제와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부실한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공격의 무기로 여겨지는 글들을 얼마든지 설득력있게 인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그러한 노력에 동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그러한 노력에 아랑곳없이 우리 자신의 진실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우선 나는 학생들 레포트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그들의 상념의 오류를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학생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아무런 반추나 부담이 없이 뇌까리고 있다: '한의학은 철학이다.' 그들이 어디서 이런 말을 주서듣게 되었는지, 어느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나는 강의시간에 어느 교수님으로부터도 이와같은 얘기를 들은적이 없다), 도대체 불가사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이러한 명제에 대하여 하등의 회의나 부담감이 없이, 그것이 마치 만고불변의 진리인냥 자신있게 뇌까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들이 진정

  무엇을 방황하고 있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도대체 방황과 고민의 대상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서, 고민이나 방황의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체를 논하기에 앞서, 도대체 고민을 하는 방법, 방황을 하는 방법이나 알고 있는지, 깊은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고민이 고민할 가치가 없는 고민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그 고민은 고민이라 말할 수 조차 없는 것이다.

  한의학이 되었던, 한의학이 되었던, 서양의학이 되었던, 아프리카의 학이 되었던, 의학의 일차적 존립의의(raison dette)는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거부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질병이 과연 무엇이냐? 라는 정의(definition)와 관련된 논란을 여기 나열할 필요도 없이, 질병은 건강(Health)과 대비되는 사태이며, 건강이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규정키 어려운 것임에 반하여 질병이라는 것은 불균형이나 파괴나 고통을 수반하는 너무도 명백한 사실(fact)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세에 의학이 존립하는 이유는 원시사회로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경감이나 제거를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 이유야말로 의학의 공시적 구조(the synchronic structure of medicine)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 말대로, 한의학이 철학이라고 한다면, 한의학이야말로 철학으로써 인간의 질병을 구원하는 학문이 될 것이며, 그렇다면 한의학은 인간의 질병에 대한 심리적 치료(mental therapy)이상의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어떤 학생들은 심지어 그렇게 믿고 있다.) 한의학이 다루는 영역의 본질은 정신적 고통의 경감이 될 것이며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위해서 철학을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약물까지도 그러한 정신적 영역의 작용을 그 궁극적 소이연으로 생각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한의학은 종교다. 그리고 한의사는 목사다. 옛날에는 목사도 침도 놓고 약도 주고 다했으니까. 사실 요즈음의 현대사회에서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원인은 병적인 것이다. 병원으로 가기에는 너무 돈도 많이 들고 또 병자취급 받는 것이 싫어 교회를 택한다. 교회에 가면 예수가 있고 사랑이 있고 헌신이 있고 인간들과의 만남이 있고 협동이 있으며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목사가 있다. 그래서 그들의 병이 낫는 것이다. 그런데 한의사들은 교회에 가기를 싫어하거나 교회에 가도 잘 낫지 않는 사람들을, 헌금대신 치료비로, 안수대신 침으로, 기도대신 문진이나 진맥으로, 성령대신 첩약으로, '성경'대신 '내경'으로 해결해주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이 신학을 공부해야 하듯이 한의사들은 동양철학을 공부해야 '물리가 트고 명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개소리다! 만약 한의학이 철학이라고 한다면 이미 철학에서 일가를 이룬 내가 무엇때문에 이제와서 이 고생을 하며 한의학을 배운다고 하면서 처량한 솜니별곡을 노래하고 있겠는가?
  나는 말한다: '한의학은 철학이 아니다.' 한의학은 철학일수 없으며, 철학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학생들이 한의학은 철학이라고 말하는 그 주장의 이면에는, 한의학이라는 것을 생각할 적에 도무지 주관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떠한 애매모호한 부분을 우선 '철학'이라는 말의 소쿠리에다 담아 놓으면 안심이 되고 무엇보다도 남보기에 그럴듯하게 보인다고하는 도피심리(escapism)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철학이란 신비적인 그 무엇이며, 대개 '주역'이라든가, 무슨 '운기'니 '천인상응'이니 '대우주-소우주'니 '음양오행'이니 하는 따위의 어휘로 도배질이 되는 그 무엇이다. 도무지 '철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정의나 반추를 내포하지 않은 언구호설(아가리만 믿고 아무렇게나 싸지름)인 것이다.
  나의 이러한 매설에 또다시 당혹스러움을 면치 못할 어여쁜 학생들을 위하여 내 이 문제에 대하여 두번 다시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단언을 내리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한의학계가 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하여 확연한 인식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이론적으로 정돈이 되어 있지 못한 불행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철학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어떤 '것'이 아니다. 철학은 것이 아니라, 그 '것'을 인식하는 '방법'일 뿐이다. 따라서 철학은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기 떄문에만 철학은 철학일 수 있고 따라서 만학의 제왕의 자리를 구축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세칭 말하는 모든 과학은 그 과학을 탄생시킨 세계관이나 가치관과 유리되어 생각될 수 없으며, 그러한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그 세계나 가치를 인식하는 '인식의 원리'인 것이다. 따라서 과학이란 그 과학이 소속해 있는 세계의 인식의 원리와 유리되어서 생각되어질 수 없다. 근세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말하는 듯 하지만, 그 절대성이나 객관성을 창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것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듯이 보이게 만드는 가치관 속에서 생각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대상의 세계의 인식의 기초로서 계량적이고 수량적인 것을 절대시하는 그러한 인식론을 떠나서는 현대과학의 절대성은 절대 도출되지 않는다. 그런 계량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감성적 인식 위에서 우주를 해석하고 문명을 건설한 어떤 외계인이 있고 그가 우리와 소통 가능한 언어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는 스티브 호킹박사가 하는 말을 정교하지만 매우 원시적이고 유치한 그러면서도 황당한 운기정도로나 인식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과학에 있어서 조차도 절대적 진리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현상을 해석하는 확실한 방편(certain means)만 있을 뿐이며, 이 확실한 방편조차도 인식의 확충이나 전환으로 인하여 시대적으로 계속 변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의학은 철학이다'라는 말과 오히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있지 않냐고 반문하는 학생이 있겠지만, 물론 그렇지 않다. 내 말을 지긋히 듣고 섬세하고 정확하게 이해해주기 바란다.
  '한의학은 철학이다'라는 명제의 최대의 오류는 그 의미맥락속에서 철학을 실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철학은 뉴톤의 세계관에 인식론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철학이다. 여러분들은 칸트의 대표적 저작이라고 불리우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순수이성'(Pure Reason)이라는 말은 그 실내용에 있어서 개념적 오성(Understanding)을 가리키는 것으로 , 이 오성이라 함은 중세기 스콜라철학의 계보를 빌리자면 인텔렉투스(intellectus)와 구분되는 라티오(ratio)를 의미한다. 라티오란 인간의 '계산하는 능력' '개념을 통한 추리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양적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비판'이란 칸트의 말을 빌리면 '독단'(볼프가 그 대표)과 '회의'(데이비드 흄이 그 대표)라는 양 극단과 대비되는 개방적 방법론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순수이성비판이란, 중세기적 기독교종교문명속에서 은총이나 계시에 의해 이해되었던 자연에 항거하여 자연을 수학이라는 이성적 법칙에 의하여 이해하려고 했던 갈릴레오, 뉴톤의 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인간의 인식능력인 '순수이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그 이성이 저질러 왔던 오류를 광정하고 또 그러한 한계의 지적을 통해 그 이성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따라서 그러한 이성의 기초위에 서있는 과학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노력에서 12년동안(1769-1781) 숙고한 끝에 내놓은 역작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얘기해 볼 수 있다: 뉴톤이 칸트를 낳았는가? 칸트가 뉴톤을 낳았는가? 물론 칸트철학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뉴톤이 칸트를 낳은 셈이 되지만, 다시 말해서 과학이 철학을 탄생시킨 셈이지만, 이 양자간의 문제는 결코 일방적으로 결정이 될 수 없는, 동시적이고도 역동적인 복합성의 문제라 해야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철학은 과학을 탄생시키고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인식론적 배경을 형성한다는 사실이다. 뉴톤이 탄생되기까지는 뉴톤이 바라보는 세계를 정당화시키는 어떤 인식의 회전이 선행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한 인식의 회전은 하나의 시대정신(Paradigm 혹은 Zeitgeist)으로서 과학적 발전과 함께 면면히 흘러갈 것이다. 그러다가 그러한 시대정신을 명료하게 인식론적으로 체계화시키는 작업을 감행하는 천재가 태어난다. 이러한 천재를 우리는 그 시대의 '사상가'니 혹은 '철학자'니 하는 말로써 묘사하게 되는 것이다.
  인체를 인식하는 방법, 즉 그 개념적 틀이, 체액(humor: blood, bile, phlegm)인 시대에는 체액병리(humoral pathology)이상의 질병관이 생겨날 수가 없다. 신체의 이상과 정상이라고 하는 개념이 모두 정체적(holistic)인 체액의 균형과 불균형에 의하여 밖에는 설명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중세기문명이 사라센의 과학문명에 의하여 그 틈을 내기 시작하면서, 알데롯토(Taddeo Di Alderotto), 루시(Mendino De Lucci), 베니베니(Antonia Benivieni, 1440-1502), 그리고 근세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에 의하여 소위 해부학(anatomy)이라는 학문방법이 새롭게 정착되고, 이러한 새로운 방법에 따라 장기의 물리적 구조에 대한 확연한 인식이 성립하면서, 그 유명한 모르가니(Giovanni Battista Morgagni, 1682-1771)의 병리해부에 의한 장기 병리학(organ pathology)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 뒤로 인체를 바라보는 인식의 체계가 조직이 될 때는 병리학도 조직병리학(histopathology)이 될 것이니, 프랑스인 삐샤(Xavier Bichat, 1771-1802)의 '해부학총론'(Anatomie, ge'ne'rale, 1801)을 호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인체를 바라보는 인식의 단위가 세포가 될 때는 월효(Rudolf Virchow, 1821-1902)의 세포병리학(cellular pathology)이 탄생할 것이고, 루스카(Ernst Ruska, 1906-1988)가 전자현미경을 발명함에 따라 세포의 인식이 정밀해지면서 세포내 병리학(subcellular patholgy), 즉 소기관 병리학(organelle pathology)이나 분자생물학적 병리학이 발전하게 된다. 최근 에이즈라는 고약한 병때문에 면역학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고, 또 면역기전에 의한 새로운 인체인식구조가 등장하게 되니깐, 병리도 자연 면역학적 병리학(immunological pathology)이 탄생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질병의 정의 그 자체가 곧 그 질병이 발생하고 있는 '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체계, 그리고 그 인식의 체계의 변천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오늘 우리가 병리학시간에 배우고 있는 세포병리가 반드시 조직병리를 부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인가? 조직병리는 또 다시 장기병리를 부정하는 것일까? 또 장기병리는 체액병리의 모든 진리를 죄악으로, 위선으로 간주해버리고 말것인가? 체액에서 장기로, 장기에서 조직으로, 조직에서 세포로, 세포에서 세포내 분자단위로 소위 '발전'했다고 하는 서양병리학사의 과정은 어쩌면 인체의 인식의 단위의 단순한 소규모화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인식의 단위가 거시적인데서 미시적인데로 나아갈 과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유를 들라면 아마 나는 다음의 두가지를 생각할 것이다. 첫째는 그 발전과정이 전에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발견해나간 과정이었기 때문에 재미있었을 것이고, 둘째는 그러한 소규모화가 병변에 대한 규정의 정밀도를 높였다는 생각일 것이다. 허나 나는 다시 묻겠다. 과연 정밀해졌는가? 물론, 정밀해진 측면은 부인못한 사실일 것이다. 허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과연 정밀성의 제고가 곧 인간을 질병에서 구원한다함을 의미할 것인가? 화이트헤드는 '생각들의 모험'(Adventures of Ideas)이라는 명저속에서 진리(Truth)를 말함에 있어,앙리뽀인까레(HenriPoincare)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밀성의 제고가 과학의 발전을 저해할 수도 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반추되지않은 도덕적 오류일 수도 있다. 진리도 운대가 맞아 떨어져야 진리다.(The Truth must be seasonable.)

  병리의 이해가 반드시 그 시대시대에 있어서 그 이해를 가능케 하고 있는 인식의 구조가 있듯이, 물론 한의학이라는 언어에도 반드시 그 언어를 지배하는 인식의 구조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세포나 조직이나 'DNA'나 T-cell', "B-cell"과 같은 어휘가 아니라 음양이니 오행이니 기니 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그 병리를 정당화시키고 있는 어떤 인식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음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인간의 몸의 병변에 대하여 똑같이 기능적일 수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학생들이 말한 '한의학은 철학이다'라는 명제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reformulation)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의학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한의학의 언어를 구성하는 개념들을 지배하는 인식의 구조를 반영할 뿐이다.' 이렇게 재구성된 나의 말을 놓고 혹자는 그 말이 맨 그 말이 아니냐?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한의학이 철학이라는 말과, 한의학에 있어서 철학은 그 인식론적 배경일 뿐이라는 말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의학의 일차적 소이연은 질병의 치료다. 다시 말해서 그 인식론적 바탕을 안다는 것이 곧 질병의 치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인식론적 바탕에 대한 아무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가 만약 환자를 치료하는데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하면 그는 명의라 할 수 있다. 명의의 기준은 철학이 아니라 의학이요, 의학이란 질병의 치료다. 꿩잡는 것이 매일뿐이다.
  허나 이 말에는 곧 의학에 있어서 철학적 인식이 필요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단지 음양이나 오행이니 하는 것을 인식의 바탕으로서가 아니라 지식의 내용으로서 생각하는 그 수많은 한의학도들의 용렬성을 개탄할 뿐인 것이다.

  내가 생각컨대 한의학이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학도들의 상념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현재 한의과대학의 커리규럼이 의학과 의학사가 전도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서양의과대학에도 물론 '의학사'(History of Medicine)라는 과목이 있다. 허나 이것은 단지 한 과목, 교양으로서 그리고 재미로서 가르치는 것이며, 그 의학사의 내용이 곧 그들의 의학적 지식을 구성하지 않는다. 더구나 의학사에서 나열하고 있는 과거 의서들의 세밀한 연구에 6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하는 그런 짓을 하지는 않는다. 예를들면 의학의 기초로서 레닌저의 '프린시플스 어브 바이오케미스트리'를 탐독할 지언정, 방대한 히포크라테스전집을 희랍어로 탐독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것을 하는 것은 의학사 학자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나 그나마 이런 학자들은 전세계적으로 희귀한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허나 실제로 한의과대학 커리큐럼은 의학 그 자체의 공부과정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의학사의 연구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결국 한의과대학은 의사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의학사 학자들을 기르고 있다고 말해도 과히 빗나간 말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6년동안 한의학에 관하여 배우는 모든 내용이 실제로 한문으로 쓰여진 고의경. 의서가 거의 전부라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아무도 나의 말을 결코 부정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황제내경'이라고 불리우는, 한대에 성립했다고 믿고 있는 책에서 인용만 하면 그 인용문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논거가 되며, 아무도 그 '내경'의 명제가 과연 얼마나 의미론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그리고 그 논리적 근거가 과연 실증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한의학은 '내경'의 도그마를 신봉하는 '내경종교학'인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학을 하는 개명한 사람들은 한의학은 근대적 실증적 방법이 도입되기 전단계로서의 중세기적 즉 전근대적 사이비과학(pseudo-science)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의학에는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공간적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학과 전근대의학의 시간적 구분이 있을 뿐인데 한의학은 근대화과정을 거치지 못한 전근대의학(pre-moden medicine)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아직 진화가 되지 못한 단계의 의학일 뿐이다 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서양의사들의 주장을 논박할 생각이 없다. 그러한 주장이 분명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많은 다른 측면을 나는 한의학에서 발견하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허나 명백한 것은 서양의학에서는 과거의 의학에 비해 명백한 패러다임쉬프트가 일어났는데 반해, 동양의학에서는 그러한 획기적 패러다임쉬프트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시말해서 DNA의 헬릭스 구조나 리보좀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히포크라테스가 말하는 휴머(체액)가 전혀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지마는, 오늘 한의원을 개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삼초다 하는 말들이 유용한 패러다임으로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패러다임의 지속을 전근대성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고집속에 정당한 이유가 내재하고 있는 것인지, 바로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내가 한의학은 철학이 아니다 라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그대들이 나처럼 아무리 철학을 마스타한들 그대들의 고민은 풀릴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고민과 방황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가 무엇을 고민할 때, 고민 그 자체가 사이비라면 우리는 허망한 결론에 이르고 만다. 우선 한의학도들이 한의과대학에서 고민하고 있는 문제의 성격이 대부분 사이비적인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단지 의학과 의학사의 혼동에서 유래되는 것이며, 그들의 이러한 혼동은 기개가 '문헌비평'(Text Criticism)이라는 학문적 방법에 의하여 거의 완벽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문헌비평이란 1) 판본학 2) 주석학 3) 해석학 이라는 세분야로 구성된 것인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한의학계는 이러한 분야에 있어서 엄밀한 훈련을 거친 학자를 단 한사람도 배출시키지 못했을 뿐아니라, 근본적으로 문헌비평의 엄밀성과 포괄성에 대한 인식조차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혹자는 나는 한문을 똑똑히 새겨 읽는 것이 장끼라고 자부할지는 모르겠으나 '문헌비평'이란 그와같이 '옥편'찾아서 훈달어 한문 똑똑히 읽는다고 해결되는 그런 차원의 학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한의과대학에는 지금 문헌비평이 결여된 의사학만 있을 뿐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임상학체계'(Systematic Clinical Medicine)가 부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헌학을 한의학의 통시적 구조(diachronic structure)이며 임상학을 한의학의 공시적 구조(synchronic structure)라고 한다면 이 양자가 모두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즉 한국의 한의학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헌학의 단계에도, 또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임상학의 단계에도 진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헌학이란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문헌비평이란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지금 나는 지면과 시간의 제약때문에 이를 소상히 밝힐 수는 없다. 허나 소략한 대로 한 예를 들어보자! '황제내경'이라는 문헌은 원래 단일한 저자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도 많은 논란이 예상됨으로, 단일한 저자의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상한론'의 예를 한번 둘어보자! 우리는 '상한론'이라는 현존하는 책이 동한말 장소의 태수, 장중경의 저작이라고 알고 있다. 문헌학의 과제는 이러한 말이 과연 어떠한 문헌의 근거위에서 말하여 진 것인가를 추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현존하는 '상한론'송본에 수록된 '상한졸병론집'이라는 제목이 붙은 서문에 저자인듯이 보이는 사람의 자신의 말로서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하고 있다: '나의 종가일족이 원래 많아 이백여명이나 되었었는데 건안 기년(AD 196)이래 십년도 못되어 사망한 자가 삼분의 이나 되었다. 그 열중에 일곱은 모두 상한열병으로 죽은 것이었다.' (서종족소다, 향여이백. 건안기년이래, 유미십권, 기사망자, 삼분유이, 상한십거기칠.) 우리는 이 말에 근거하여 '상한론'의 저자는 2세기 말에 실존하였던 인물이며 당시 프로렌스 복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의 상황을 연상하는 어떤 열성전염병에 의하여 많은 사람이 대거로 쓰러지자, 그것을 구하려는 휴매니스트적 동기에서 고훈을 동구하고 중방을 전채하여 기존 의서를 참조하여 이 책 '상한잡병론'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나 이러한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이 '상한졸병논집'이라는 문장은 원래 장중경이라는 사람의 원문이 아니라 후대에 날조된 문장이라는 설이 강력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문장내에서 전혀 다른 문체와 내용이 겹치는 등 그 신빙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사과반의'라는 구절 이전과 이후로 그 내용이나 문체가 달라 동일인의 문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서문에서는 주어가 일인칭의 '서'로만 되어 있을 뿐, 그 '서'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정보가 일체 없다. 단지 그 생존연대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생존연대는 후한말에서 삼국시대에 걸쳐 활약한 명의, 화타의 시대와 겹치는데 ,화타의 경우 '후한서'에도 '삼국지'에도 그 전이 나오고 있으나, 화타보다 훨씬 의학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할 명의 장중경의 전은 어느 정사에도 비치는 바가 없다. 그렇다면 과연 장소의 태수, 장중경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치평 이년(1065), 한종의 성지를 봉하여 교정 의서국의 고보형. 손기. 임의 등이 간행한 송판 '상한론'의 '상한논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장중경은 '한서'에 전이 없다. 그런데 그 전기자료가 '명의록'에 보인다. 거기에 말하기를 그는 남양의 사람이며, 명은 기로 중경이라함은 그 서다. 효렴에 천거되었고 관은 장소태수에 이르렀다. 처음에 그 의술을 같은 군에 사는 장백조에게서 배웠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르기를 앎과 씀새의 감미로움이 그 스승을 뛰어넘는다고 하였다.'(장중경, 한서무전. 견명의록원. 남양인, 명기, 중경급기한야. 거효렴, 관지장소태수, 시수술어동군장백조. 시인언, 식용감미과기사.) 허나 이 고보형등이 의거하였다고 하는 '명의록'이라는 책은 현존하지 않으며 일체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남양사람으로서 장기라는 인물을 아무리 역사자료에서 뒤져보아도 그런 인물이 발견되니 않는다. '후한서' '헌제기'에 남양의 태수에 장자라는 자가 있어 오의 손기에게 살해되었다고 쓰여져 있지만 장자와 장기는 동일인물이 아니다. 진의 황보밀이 쓴 '갑을경'의 '서'에 중경과 건안의 문인 왕찬(중선)과의 일화가 실려있으나 그 중경이 '상한론'의 저자라는 보장이 없으며 그 '서'조차도 황보밀자신의 문장으로 볼 수 없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매득자는 '중국의학사약'에서, 남양인으로서 장소태수를 지낸 장양이라는 사람이 있었지만 생몰년대가 맞지않음을 들어 동일인물로 추정될 근거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동한말(200년전후)에 실존했다고 하는 어느 인물에 관한 기록을 약 8세기 반이 지난 후에야, 그것도 믿을 수 없는 서문에 의거하여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쉽게 단안할 수가 있다: 장중경이라는 인물은 완전한 가공의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장중경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실존성을 '상한론'의 저자로서 확보할 수 없다해도, 동한말에 엑스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 엑스라는 인물은 당시에 유행하던 장질부사와 같은 전염성유행병에 시달리는 인간의 참혹한 상황을 경험하고 '내경'의 원리적이고 연역적인 그리고 경락위주의 관념적 질서에서 탈피하여, 외사에 중상한 급박한 증후군을 제거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귀납적인 약물학적 치료의학의 체계를 수립할려고 하였다 라고하는 역사적 가설조차를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 가설의 주체가 장중경이냐 또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상한론'의 체계가 과연 동한시대의 그것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론 장중경이라는 인물의 기록도 장중경의 저작도 아무것도 현존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판본학의 제일과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의 소급가능한 물리적 원본을 추적하는 길이다. 예를 들면 장사에 장중경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진 확실한 고분이 있고, 고분을 파보았더니 그 속에서 '상한졸병론'이라는 황서가 나왔고, 그 황서의 내용을 해독해 본 즉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한론'의 문안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한다면 판본학의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될 것이 없다. 거론될 것이 있다해도 그것은 확고한 기준위에서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문헌의 경우 이렇게 행복한 상황은 거의 전무하다.

  우리가 '장중경'이라는 암호의 약속으로서 지칭하고 있는 동한말의 엑스가 있다고 하자! 이 장중경이라는 엑스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상한론'을 쓰지 않았다. 내가 지금 이 책을 쓰듯이 중경이 저술을 한 것이 아니다. 그가 한 작업은 상한(한에 상한다는 뜻으로, 한은 외사를 말하며 상은 적중의 중과 같은 뜻으로 '얻어 맞는다'는 뜻이다. 대개 장티프스, 디프테리아, 인프루엔자, 마라리아와 같은 열성전염병이었을 것이다)에 관한 기존의 처방들을 수집하고 또 그러한 처방에 해당되는 증상들에 관해 단편적으로 기록해두는 작업에 그쳤던 것이다. 지금의 '상한론'만 잘 들여다 보아도 그것이 어떤 체계적 저작이 아니며 한 건 한 건의 독립된 편린의 몽따쥬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연결성이 희박하거나 혹은 중복되거나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상한론'의 원본은 물리적 형태는 황서계열이 아니라 죽간계열이었을 것이다. 허나 실제로 중경이라는 역사적 인물(historical Chang Chung-ching)이 과연 무엇을 했는지 그 정체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이 중경의 작업을 최초로 서적의 형태로 만든 사람, 중경이라는 명의가 남긴 단편들을 수집하여 어떤 체계속에 묶어 그 차서를 정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가감을 하여 책으로 펴낸 사람이 바로 왕숙화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의대학생들은 '상한론'의편찬자로서 왕숙화라는 이름을 외워야 하고 그것을 답안지에 써야 점수를 맞는다. 그럼 왕숙화가 선차했다는 '상한론'이 현존하는가? 그런 책이 과연 있었는가? 왕숙화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죄송스럽게도 우리는 왕숙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더구나 왕숙화가 편찬했다고 하는 '상한론'은 인류역사상 아무도 그것을 본 자가 없다. 그럼 도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왕숙화에 관한 전기자료는 거의 전무하다. 단지 지금 '맥경'이라는 책이 현존하고 있는데 그 '맥경'의 저자로서 그에 대하여 몇마디 얘기들이 후대에 기술되고 있을 뿐이다. 허나 이 '맥경'이라는 책이 고경이라는 실증은 거의 없으며, 그 내용이 대부분 우리가 볼 수 있는 '소문', '난경', '영구', '상한론', '금궤요약'의 인용으로 구성된 것이며, 우리가 지금 이 책들의 성립연대에 관한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맥경'자체가 후대의 사람이, 후세에 성립한 의경들을 여기저기 베껴 날조한 책임이 분명해진다. '맥경'의 저자로서의 왕숙화의 실존성은 신빙근거가 없다. (대부분의 제대로 아는 의사학학자들은 이러한 생각에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허나 '맥경'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촌구맥삼법의 기본적 방법을 확립한 저술로서, 그리고 문헌적으로 삼맥부위와 내부세기와의 관계를 최로로 언급한 저술로서 그 의학사적 가치는 살아있다.

  보통 왕숙화는 고평의 사람으로 명을 희라 하고 숙화는 자며 서진의 태의령을 지냈다고 말하여 지고 있다. 허나 매득도는 '사략'에서 숙화가 서진의 태의령일 수 없으며 혼의 태의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목로'라는 연호의 고증으로서 문제를 추적). 그렇다면 왕숙화의 활약시기는 대강 삼세기전반이 되며, 그렇다면 대략 엑스의 중경이 '상한론'을 쓴 것을 건안세기(196)후 10년 이후로 계산해야 하니깐 빨라야 206년으로 추정한다면 그 후 약 50년후에 왕숙화라는 태의령이 중경이 상한에 관하여 남긴 고귀한 자료가 유실되는 것이 아까워 정리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허나 숙화가 정리한 '상한'은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런데 왜들 숙화와 '상한'을 꼭같이 들먹이는가? 그 근거는 황보밀의 '황제삼부침염갑을경' '서'에 나오는 단 한줄의 언급에 의존하고 있을 쭌이다: '중경이 이윤이 지은 '탕액'을 널리 논구하여 열몇권에 그것을 묶어냈는데, 그 방을 써보면 효험이 많았다. 요즈음 사람으로 태의령인 왕숙화가 중경이 남긴 논을 순서를 매겨 새로 저술을 했는데 그 논의가 매우 정밀하다. 실제 임상에 적용하여 시술하여도 모두 무리가 없다. (중경론광이윤탕액위십수권, 용지다험. 근대태의령 왕숙화선차중경유론심정, 배가시용. '유' 원작 '선', 거정통본개. '배가' 원작 '시사', 거정통본개.) '갑을경'의 저자 황보밀은 비교적 생평이 확실한 사람으로 건안이십년(215)에 태어나 태강삼년(282)에 죽었다. 그러므로 황보밀은 왕숙화를 가리켜 '근대'(요즈음 사람으로)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숙화가 보밀보다 앞서는 것은 분명 하지만 거의 동시대의 사람들임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밀은 리가 건안년간에 활약했던 주경이라는 어느 명의의 탕액에 관한 처방을 선차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이 '갑을경'이라는 문헌과 그 '서'자체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밀의 참저서냐 아니냐하는 문제가 또 논란에 걸려 있지만 이 '서'의 진실성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우리는 '상한론'에 관한 최초의 언급을 이 밀의 '서'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물론 송판본에 붙어 있는 '상한졸병론집'보다 훨씬 더 진실한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최초의 언급속에는 일체 '상한론'이라는 서명이나 '상한'이라는 어휘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단지 중경이 이윤의 '탕액'을 논광하여 십수권을 지었다는 것이 서술적으로 기술되고 있을 뿐이며 또 숙화의 선차의 대상으로서 언급된 것도 중경의 '유론'이라는 말 뿐이다. 숙화에 대하여서는 '심정'등의 표현으로 뭔가 확실한 듯이 말하고 있지만 중경에 대해서는 '십수권'이니 하는 불확실한 표현으로 쓰고 있을 뿐 그가 어떤 확실한 저술을 하였다는 표현이 없다. 그리고 이윤의 '탕액' 운운하는 것을 보면 중경에 대한 인상은 처음부터, 후대에서 말하는 '태양 - 양명 - 소양 - 태음 - 소음 - 궐음'등의 이론적 체계라가 보다는 순수한 탕약중심의 처방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언급된 맥락이나 이유도 실제 크리닉칼 닥터의 입장에서 써보니 효험이 놀랍더라는 어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임상적 가치의 맥락이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나 이 '중경탕액처방집'에 관한 3세기(수진시대)의 논의는 단지 몇줄의 서지학적 근거에 매달려 있을 뿐 그 실상을 알 수 있는 서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중국의 과거의 책을 조사해 볼려면 그 과거의 진본은 구하기 어렵다해도 정사에 반드시 '예문지'나 '경잡지'라고 하는 도서목록일람표가 붙어있기 때문에 판본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 도서목록을 평생토록 보고 또 본다. 도서이름과 저자, 그리고 반드시 써있는 권수나 편수만 가지고도 무궁한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역사에 '상한론'이라는 이름의 서물이 등장하는 최초의 진실한 사실은 '신당서' '예문지'이전의 기록에서는 어디에서도 그 원정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당대에 '상한졸병론'이라는 책이 이미 존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 그것은 그렇지 않다. '신당서'는 오대 후진의 재상 검국등이 감수하여 편찬한 '구당서'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송 인종의 명으로 구양수, 송기등의 학자들이 봉칙하여 택한 것으로 그 저성연대가 1060년이며, 이 '신당서' '예문지'는 1060년까지의 정보를 기준으로 하고 있음으로 당대의 현황을 아는데로 정확한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신당서' '예문지'가 쓰여진 바로 이 때는 송대의 그 유명한 교정의서국이 성립 (가우 2년, 1057년)한 이후다. 따라서 후에 논술하겠지만 '신당지'의 '상한졸병론'십권은 고보형. 임의등이 교정한 바로 송본(십권: 소위 '상한론졸병론집'에서 말하는 '상한잡병론'합십육권에서 잡병에 헤딩되는 '금궤요약방론'이 빠졌다고 하는 본)을 정확히 지칭하고 있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당대의 정황을 가장 정확하게 수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그 정밀도가 높이 평가되는 '수서' '경잡지' ('수서'는 당대에 성립한 것이다. 위징이 봉칙 택한 것이나 지는 장손무기의 택으로 656년에 완성된 것이다)에는 '상한론'이라는 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장중경방십오권, 중경, 후한인. 량유황소약방이십오권, 망.'이라는 말만 보인다. 이 '수지'의 언급은 바로 밀의 '서'에서 우리가 추측한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즉 송대이전에 존재한 '상한론'의 프로토타입은 오늘의 '상한론'이 아니라 장중경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빌린 일종의 처방집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량나라때에도 이십오권으로 된 '황소약방'이라는 유사한 처방집이 만들어졌었는데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소약방'은 그 이름으로 보아 지금의 상한방과는 다른 계통의, 즉 '황제소문경'에 의거한 다른 계통의 약방을 모은 처방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실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황소약방'이 망했다고 한 것과 대비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서'의 시대에는 오십권으로 된 '장중경방'이라는 책이 확실히 실존하고 있었다는 실증이다. 그리고 후진에 성립한 '구당서' '경잡지'당대의 정황을 보다 리얼하게 전달)에는 '장중경약방십오권, 왕숙화택'으로 되어있는, 여기서 말하는 '장중경약방'이라는 책은 권 수가 같은 것으로 보아 '장중경방'과 동일한 책으로 간주된다. '방'이라는 말에 보다 확실한 성격을 부여하기위해서는 그 뒤에 어느 누가 사갈하는 과정에서 '약'이라는 말을 덧붙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서'의 시대에서 '구당서'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방'이 '약방'으로 되는 일반적인 어휘의 변천이 일어난 시대적 상황의 반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수지'의 '장중경방' 십오권의 경우는 '중경, 후한인'이라고만 하여 이 책 중의 고유명사를 해석한 형식으로 중경을 말하였을 뿐 그 저자를 밝히지는 않고 있으나('수지'에 '맥경'십권, 왕숙화택'이 실려있다. 그 '택'을 확실히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경, 후한인'이라고 한 것은 저자를 밝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리고 '장중경방'을 왕숙화의 택으로 명기함이 없다) '구당지'에는 '장중경약방' 십오권이 '왕숙화택'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재미있는 것은 '신당지'에 가면 그 책명이 아예 '왕숙화장중경약방' 십오권이 되어버린다. 그 변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도식화하여 보면:

    도서목록카드집 -> 카드에 정리된 정확한 내용
  '수서' '경잡지' 656년성, 장손무기등택 -> 장중경방십오권 중경, 후한인. 량유황소 약방이십오권, 망.
  '구당서' '경잡지' 945년성, 검국. 장소원등택 -> 장중경약방십오권 왕숙화택.
  '신당서' '예문지' 1060년성, 구양수. 송기등택 -> 왕숙화장중경약방십오권, 우상한졸병론십권.

  '장중경방'(수) -> '장중경약방'(구당) -> '왕숙화장중경약방'(신당)으로 그 명칭이 변천해간 이 책의 역사속에 숨어 있는 많은 비밀들을 다 밝힐 수는 없으나, 이 세 책은 분명 동일한 책이며, 중경과 관련하여 최초의 확실한 언급이라 할 수 있는 황보밀의 '갑을경서'에 기재되고 있는 '중경의 탕액처방이 다험하다, 왕숙화가 중경의 유론을 선차한 것이 심정하다' 등등의 언급내용과 확실한 연계선상에 서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조차 그 실존성이 역사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당나라때의 명의며 진인이라 할 수 있는 손사양이 중국최초의 임상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보은 천금요방'(약칭'천금요방' 혹은 '천금방')을 썼을 때(손사양의 태년이 영부원년(682)이 확실함으로, '비급천금요방'이 성립한 시기는 대강 '수지'가 성립한 시기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그 방대한 자료와 처방을 섭렵하고 있으면서도, ''중경요방'을 강남제사들이 비장만 하고 있어 전하지 않음'을 개탄하고 그 책을 구해보지 못한 서운함을 토로하고 있다. 손사양과 같이 황제들의 추앙을 받은 대의도 중경의 요방을 구해볼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당대의서인 '천금익방'과 '외대비요'속에 수록되어 있는 중경상한관계자료는 '상한론'의 당대고본의 모습과 이본들을 추적하는데 상당히 좋은 자료이지만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지므로 생략한다.)

  중국의잡사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대사건은 뭐니뭐니해도 송대 인종의 칙명으로 (경재가우중, 인종념성조지유사, 장추간지, 내소통지기학자, 비지시정. '중황보주황제내경소문서'에서 인용) 가우2년(1057)에 교정의서국을 설립하여 고보형, 손기, 임의 등 우수한 학자들로 하여금 기존의 스러져가는 의서들을 정리하여 출간케한 사건이다. '소문', '영구', '맥경', '갑을경', '상한론', '금궤요약방론', '금궤옥함경', '신농본초경', '소씨병원후론', '상한론', '비급천금요방', '천금익방', '외대비요방'등 오늘 우리가 의경이라 부르는 현존 고서들이 도무지 이들의 손을 안거치고 탄생된 것이 드물다. 이들 때문에 그나마 스러져 없어질지도 모르는 의서들이 수집되어 오늘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고마움을 표현해야겠지만, 돌이키건대 그것은 다행인 동시에 불행이요, 천행인 동시에 재앙이요,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교정의서국이라는 말에서 우리에게 가장 걸리는 말은 바로 '교정'이라는 바로 이 두 단어다. 이들이 생각하는 '교정'이라는 개념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교정'이라는 개념과 전혀 다르다. 이들에게는 우선 '지적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어느 한 주제에 관한 여러 판본을 모아 마음대로 뜯어고치고 마음대로 순서를 고치고 마음대로 가감하여 하여튼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읽기좋고 가장 말끔한 형태로 다듬어 놓는다는 것이 그들의 '교정'의 생각이었으며, 그들이 '교정'의 자료로서 사용한 원서나 자료를 정확히 원모습대로 밝히는 짓을 하지않았을 뿐만아니라, 교정에 사용된 모든 책들을 상재후에는 무가치하다고 생각되어 다 없애버린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교정을 위해서만 필요했던 자료일뿐 교정본이 탄생되면 그것들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출판사에서 책출간후에는 수고를 무가치하다고 내버리는 짓보다도 더 무자비한 짓들을 그들은 서슴치 않고 감행했던 것이다. 사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고의경은 이들 송대교정의서국의 교정을 거친 것이 대부분이며, 일단 교정을 거친 의서는 그 진실성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한의학도는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이 '깨달음'이 없는 한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엄밀성은 앞으로도 영원히 기대할 수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교정'이란 떄로는 '날조'였으며, 때로는 임의적 '조작' '개작'이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나는 이런 경험을 한다. 출판사에 내 원고를 갖다주면 그 출판사에서 교정을 본다고 하는 아가씨가 수고스럽게 내 글을 고쳐놓는다. 그런데 그 아가씨가 고쳐놓는 부분은 자기에게 이해가 안되기 때문이거나, 또는 자기 개인의 성견에 안맞는다거나, 혹은 저자의 원칙이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원칙과 안맞을 적에 무반성적으로 세상의 원칙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저지르는 짓들이다. 그런데 이런 짓들이 때론 교정자의 지식이나 식견이 필자보다 높을 때는 참 고마울 때도 없지 않지만, 출판사의 아가씨들과 나와의 관계처럼 그들의 지적수준이나 문장의 원칙에 대한 이해가 비교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경험되는 것은 거개가 개악일 뿐이며 원저자의 의도를 왜곡시키는 경우뿐이다.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항의할 수도 있다. 허나 죽은 자들은 교정의서국에 항의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고보형, 보기, 임의 등의 사람들은 국자감의 박사이거나 직밀각의 각신으로 고명한 석학들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앞에 말했듯이 이들에게는 지적소유권(authorship)의 개념이 없었고 더구나 고서의 진본을 '있는 그대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전무했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에게 '이해안된다'고 하는 부분이 역사적 언어습관의 변천때문이거나 혹은 그들의 이해부족으로 인한 것일때 그것은 완벽한 '왜곡'이 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서 있는 그대로 남겨두었더라면 비록 그들에게 이해가 안되었더라도 후대의 석학들에게 해독될 수 있는 여지도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들이 잘못 고쳐 놓은 것에 대하여 일관된 원칙이 수립되면 불행하게도 그 원칙에 걸리는 모든 부분이 왜곡을 당하게 될 것이다. 교정에 있어서는 이 '일관성'(consistency)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이 일관성이 판본학에 있어서는 저주의 원칙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일관성때문에 고서의 다양한 진면목(variety)이 상실되는 불행한 결과가 초래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판본이나 다양한 자료를 모아 한 체계로 정비하여 단일 서적으로 꾸밀 경우, 원래 관계없는 단편들이 마치 일관된 일인의 흐름속에 있는 것인냥 꾸미는 작업이 이루어 진다. 근본적으로 자체맥락이 다른 조각들이 자기들과는 맞지 않는 맥락속에서 일관성이라는 미명아래 은폐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알고있는 '상한론'이라는 텍스트는 이러한 일관성속에 은폐된 조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난본(corrupted text)이라는 사실을 우리 한의학도는 알아차릴줄을 알아야하는 것이다.

  단언컨대 사실 여러분들이 알고있는 그 권위로운 바이블 '황제내경'이라는 텍스트는 그것이 '소문'이든 '영구'이든지를 막론하고, 순엉터리 텍스트다. 엉터리도 이만저만한 엉터리 텍스트가 아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6년동안 '황제내경'의 권위를 옥황상제 모시는 것보다 더 모시게되는 경험을 하게될 것이다. 그것이 송대의 교정의서국에서 완전히 날조되고 조작된 텍스트라는 것을 모르고(왕빙의 일차적 조작에 가세하여 더 엄청난 조작이 자행되었다.) 그것이 마치 한대의 고경인냥 공부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은 '내경'이라는 텍스트의 역사적 변천과정에 대한 치밀한 논고나 강술을 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 한의학계는 한의학을 성립시킨 원전에 대하여 문헌학적 분석의 매스를 가할 수 있는 단 한명의 책임있는 학자가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허술한 중국학자들의 논의를 베낀 엉성한 몇마디만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새삼 문제가 되어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의과대학의 교수님들이 한결같이 '황제내경'으로부터 뭣 한줄이라도 인용할때면 그것이 곧 선태시대나 한대의 사상이나 그 시대의 언어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 한의학계의 불행이요,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원초적인 오류다. 다시 말해서 송대에 날조된 언어를 한대의 언어나 사상으로 강의한다는 것, 따라서 한대의 사상의 진면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 따라서 역사적으로 인체의 이해가 어떻게 변천해 왔느냐 하는 것을 모르게 된다는 것, 따라서 모든 한의학의 텍스트를 바라보는 역사적 시각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경락이든 음양이든 혈명이든 병명이든 병변이든 약방이든 모든 것이 살아꿈틀거리는 역동성을 상실한 채 절대적·종교적 진리처럼 사판화해버리고 만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우수한 학생들의 분석적 두뇌가 개발이 되지않고 점점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편을 잡순 멍청이처럼 히멀건한 동태눈깔만 껌벅이게 되고 만다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 한의과대학의 교육의 실태요, 학생들의 불만과 방황, 좌절과 고민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고민은 결국 단순한 정보의 저질성에 기인하는, 고민다운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를 가지고 얘기해 둔다.
  따라서 의경판본학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교정의서국의 교정을 거치지 않은 판본을 구하는 것이다. 교정의서국의 교정이라는 저주를 거치지 않고 살아남은 그 이전의 텍스트가 있을 땐 그것은 교정의서국 이후에 성립한 텍스트를 형량하는 아주 훌륭한 기준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소중한 텍스트가 바로 양상선의 '태소'다! 이 문제에 관한 기나긴 논의는 본제에서 벗어남으로 소상히 밝힐 수는 없으나, 양상선은 당초의 사람으로 그 전기자료는 일체 구해볼 수가 없으나, '태소'의 저성연대는 667-683년 사이로 확실하게 추정된다. 교정의서국 작업을 약 2백년 앞서는 텍스트다. 그런데 이 '태소'는  '소문'과 '영구' 2서의 내용을 아울러 편집하여 그에 대한 자신의 주해를 가한 것인데, 그것이 당대에 새로 편찬된 것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태소'조차 한대의 진면목을 말하는 근거로서 삼기는 어려운 것이나, 우리가 지금 알고있는 교정의서국본의 '내경'텍스트가 얼마나 심하게 조작된 것인가 하는 것을 현존하는 '태소'텍스트하고 비교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태소'는 쉽게 사 볼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한의과대학생들이 이 '태소'에 의거하여 '내경'을 분석하는 엄밀한 작업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만큼 판본학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태소'는 중국에서는 송대까지 있다가 유실되어버린 것이나, 헤이안(평안)시대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결권이 있는 상태로 경도의 진언종 어실파 총본산인 인화사에 현재 이 시간까지 물리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 판본의 존재는 에도(강호) 말기에나 알려져 광서중엽(19세기 말)에 양성오라는 중국인이 그 잔본을 가져다 중국에 소개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귀중한 판본이며, 그것이 교정의서국의 작업을 거치지 않은 유일한 고경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근자에는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판본학적으로 말하자면 기적적인 사실들이 속출하고 또 이러한 사실들은 한대의서와 의경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너무도 엄청난 일차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1973년 바로 장중경이락 태수를 했다는 장사의 마왕뛔이(마왕퇴) 분묘군 중 제3분묘에서 발굴된 대량의 황서중에 7편의 의서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마왕뛔이의 주인은 차후 이창의 아들인데 한문제십이년(168 BC)에 매장된 것임으로, 거기서 나온 의서는 최소한 기원전 168년 이전의 것이다. 마왕뛔이 의서로 '오십이병방', '각속원식기편', '양생방', '족비십이맥구경', '음양십일맥염경', '맥법''음양맥사후'의 칠편과 황서 '도인도'가 연구팀에 의하여 발표되었는데 이중 '족비십이맥염경'이하 4편은 놀라웁게도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태소'와 교정의서국이후의 '내경'텍스트의 몇 논문의 직접적인 조형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는 현재 11세기에 성립한 문헌을 자그만치 13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 그 물리적 원형을 직접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 문헌들(마왕퇴 문헌-'태소'-송판'내경')의 비교연구를 해보면 우리나라의 한의학도들이 알고있는 한의학의 상식이 얼마나 허망하게 붕괴되는가 하는 것을 내가 여기서 새삼 말할 수 있는 계제가 아니다. 도무지 그러한 사실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또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 기껏해야 아무것이나 손에 든 한문이라고 생긴 종이 쪼가리만 있으면, 그리고 그것하나 낑낑대고 독해만 하면 뭐 대단한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가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한의학계의 교수님들은 너무 일찍 애늙은이 노릇을 하려는데 그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뿐인가? 마왕퇴문헌외로도 한대의 처방으로서 거정한간, 유사대간, 그리고 감연정무위계의 성외, 시연유록의 간난파에서 발굴된 한묘의 목관중에서 1972년 11월에 출토된 대량의 목간과 목독, 연구자들에 의해 '무멸한대의간'이라고 불리우는 자료들이 한대의 의약에 관한 직접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이러한 놀라운 사실들이 우리나라 한의학도들에게 전혀 소개가 되고있지도 않고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놀랍고 놀라울 뿐이다. 도대체 이러한 엄청난 자료들에 대한 연구가 없이 '의학입문'이나 '동의보감'을 돌돌 외워본들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한의학의 인식구조나 패러다임의 이해가 생길 수가 있는 것일까? 그러한 고경의 보상에 대한 인식이 없이 어떻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축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고를 가지고써 고를 파할 줄 알아야만 신이 생기는 것이다. '온고이지신'이란 고로 복하라는 헛말이 아닌 것이다. 또 이러한 한간외로도 교정의서국의 작업이전의 작품으로서 실크로드에서 발견된 돈황의문헌들이 상존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흔히 '상한론'을 얘기할 때에 기준으로 삼는 '물리적 근거'가 되는 최초의 판본은 교정의서국에서 고보형, 손기, 임의 등이 편찬한 것으로 그 정확한 이름은 '상한졸병론'이며, 권수는 십권이며, 그 저성연대는 치평2년(1065)이며, 그것이 정확하게 '신당서' '예문지'의 '상한졸병론십권'을 가리킨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이를 '교정국본'이라고 하자.

  많은 사람들 이 '상한론'이라는 책명에 관하여 혼동을 하고 있고, 그 완전한 이름은 '상한잡병론'이며 '상한졸병론'이란 잡의 와전으로 생겨난 (잡자에서 새진변이 빠져 신이 졸로 된 것이라고) 오명이라고 알고 있으나, 이것은 전혀 사실무근한 것이다. 이것은 교정국본에 붙은 '상한졸병론집'이라는 서문의 내용중에서 '위상한잡병론합십육권'이라는 한 구절이 있어 이에 근거하여 원래 중경이 지은 것은 '상한잡병론'십육권이라 주장하는 것인데, 후술하겠지만 당평고래에는 그 구절조차 '위상한졸병론'으로만 되어 있을뿐 합십육권이라는 말도 없고 '잡'으로 되어 있지도 않다. '상한잡병론십육권'에 관한 추측은 모두가 낭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한잡병론'이라는 말은 상한과 잡병의 합성어이며, '합십육권'이라 하는 말은 '상한'십권과 '잡병'육권을 합친 것이며, 이 '잡병'에 해당되는 부분이 바로 '금궤요약방론'(이것도 고보형, 손기, 임의 등이 편찬한 것, 치평3년, 1066년 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도 교정국사람들이 그렇게 추정해서 말해 놓은 것에근거하여 하는 말일뿐 아무런 확실한 근거가 없다. ('요약'은 상중하 삼권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상한'을 '잡병'과 대비시켜 쓰는 용법의 역사적 정당성이 문헌학적으로 송대이전에 성립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기를 '잡병'이란 상한(전염성 급성 외감열병)처럼 육경의 전변이라는 체계적 단계로 밟지 않는 잡스러운 병이라는 뜻으로 외감열병의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일반 내과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하여지며 그것의 대표로서 '금궤요약'을 꼽고 있으나, 기실은 잡병이라는 개념이 선행하여 '금궤요약'이 성립한 것이 아니라, 교정국본 '금궤요약'이 성립하고나서 비로소 잡병이라는 개념이 성립한 것이며 '상한잡병론'이라는 말의 하등의 역사적 정당성이 없다. '상한론'의 원래 이름은 '신당지'가 말하듯이 '상한졸병론'일 뿐이며 '잡병'운운케 된 것은 '졸'자의 뜻을 제대로 새기지 못한 무식한 자들의 단순한 오류에서 기인된 것일 뿐이다. '졸'이란, '졸도'(갑자기 쓰러진다)라는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갑자기'의 의미이며 '졸병'이란 '갑자기 생기는 병'즉 급성병을 의미하는 것이다. 상한과 졸병은 대비되는 두 카테고리가 아니라 상한이 곧 졸병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졸의 의미를 '장수가 졸병을 거느린다. 인솔한다'의 의미로 새롭게 새겨, '상한졸병론'의 의미를 상한이라는 장수에 해당되는 병과 그것에 부수되어 따라붙는 잡졸과 같은 중풍등 기타 일군의 병상을 순서좋게 정리·배열하여 그 진단과 치료를 논한 서물의 의미라고 단정한 오오쯔카 케이세쯔(대가경절)의 설도 실내용과 관련하여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아울러 말해둔다.
  하여튼 교정국사람들이 '상한졸병론'십권을 1065년에 펴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 '상한졸병'이전에 장중경의 '상한론'이라는 서물이 있었다는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다. 물론 왕대의 '외대밀요'나 손사요의 '천금요방'이나 '천금익방'중에 나오는 '상한'에 관한 토의와 처방에 비추어,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서는 마왕퇴문헌인 '호십이병방'(이것도 처방집). 그리고 앞서 언급한 '무위한대의간'(이 속에 이미 '상한'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등에 비추어 오늘 교정국본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근거가 되는 자료들은 송대이전에 충분히 축적되어 있었다고 해도, 그 정확한 근거가 되는 원본은 발견될 수가 없다. 이러한 정황에 관하여 고보형등저 자신은 '송태조 한보년간에(968-975) 전도사 고계충이라는 사람이 일찌기 이 '상한론'을 편록하여 진상하였으나 그 문리가 어긋나고 착오가 많아 바르게 잡아놓은 것이 되지 못한다'(한보중, 절도사고계충, 증편록진상, 기문리열적, 미진고정.)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들이 직접 근거로 삼은 듯이 보이는 이 고려충본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역사적으로 상고할 길이 없다.
  '예문지'에 의거하여 생각해보면 역시 그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의존한 자료는 '왕숙화장중경약방'이라는 책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약방'이 '상한졸병론'으로 흡수되면서 '약방'은 사라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신당지'에 '약방'십오권과 '상한졸병론'십권을 완전히 독립된 것으로 독립시켜 병렬시키지 않고, '우'라는 접속사로 연결시켜 '논'을 '방'에다 부속시킨 것이 그러한 심증을 굳혀주게 한다. '지'가 성립한 것은 1060년이요, '논'이 성립한 것은 그 5년 후인 1065년의 사건이다. 그러니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방'에 대한 정보가 동시에 구양수등의 귀에 들어왔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그 양자의 관계를 '우'라는 글자로 연결시켜 말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왕숙화장중경약방'과 '상한졸병론'은 외면적으로 한글자도 겹치지 않는 독립된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우'로 연결한 것은 이 양자가 완전히 동계열의 서적임을 예시한 것이다. 동 '지'내에서 '빙경십권우이권'과 같은 용례와 같이 같은 내용의 다른 판본에 '우'라는 접속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자아! 이제 우리는 1065년에 성립한 '상한졸병론'이라는 서물에까지 논의가 내려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교정국본은 물리적으로 현존하는가? 우리는 그 책을 북경도서관이나 어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두눈으로 볼 수 있는가?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만 할 사실을 고보형들이 새롭게 편한 이 '상한졸병론'이라는 송대의 교정국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럼 도대체 송대교정국에서 '상한졸병론'이라는 책을 펴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 책이 없는데? 나는 분명히 말한다:송대 교정국본 '상한론'은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송대교정국본의 정확한 정체도 우리는 확인할 길이 없다. 교정서국의 존재는 송대에 발흥한 목판인쇄술문화의 일반역사정황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을 물론이지만 교정국본은 결코 많은 부수를 찍은 것도 아니고 몇몇 사람들이 나눠 가졌을 것이나 불행하게도 전란을 겪는 과정에서 이미 대부분 유실되었고 하나도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원본이 없다.

  우리가 이 교정국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명나라 때의 '상한론'연구가로서 말년에 이십년가의 상한에 관한 주를 모아 직접 판각해낸 '집주상한론'의 저자 조개미의 복각본을 통해서일 뿐이다. ('집주상한론론'조차도 지금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소위 '송본'이라고 하는 것은 북송교정의서국 각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명말의 조개미의 복각본을 말하는 것이며, 그 복각본이 성립한 연대는 만역 27년, 그러니까 1599년이다. 이 카이메이(계미)의 복각본이야말로 우리가 '상한론'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최고의 확실한 판본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정밀한 연구에 비추어 볼 때 이 카이메이의 복각본조차, 바로 송판 교정국본과 정확하게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물론 교정국본 자체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이는 타 판본과의 비교에 의한 추측일 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판본학적으로 볼 때에 '상한론'이라는 책은 실존가능한 추정연대(AD 200년 경)와 실증가능한 기준연대 사이의 거리가 꼭 1400년이나 되는 것이니 이 14세기의 갭을 생각치 아니하고 '상한론'이라는 책을 한대의 의서로서 강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하는 것은 참으로 더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14세기 동안 실증가능한 물증리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그동안 전해 내려오는 방식이 요즈음과 같은 보편적 '출판' 행위가 아니라 개별적인 수소 (손으로 써서 배낌)행위 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상한' 한대원본의 재구성을 둘러싼 여러 가설은 무궁무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조개미 복각본은 단행본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간각한 '중경전서'속에 수입되어 있으며, 그것은 현재 북경도서관, 구본의 내각문고등지에 몇 부가 보존되어 있다.

  헌데 조개미시절에만해도 소위 교정국본을 구해보기는 매우 어려웠다.그가 '상한론'에 관해서 제일 먼저 손에 쥔 것은 다름아닌 성무기의 '주해상한론'십권 이었다. 조씨는 이'성무기'의'주해상한론'을 먼저, 그러니까 1599년 이전 어느 시점에, 간행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는 송교정국본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조개미는 일생을 통하여 '상한론'을 세번 간행했는데, 그 제1차가 성무기의'주해상한론'이고 제2차가 교정국본에 기초한 송본'상한졸병론'이며, 제3차가 자신의 저술이라 할 수 있는 '집주상한론'이다. 간행년도는 제2차, 1599년만 확실히 알 수있다. 하여튼 우리덕분에'상한'에 관한 확실한 진적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무기는 지금 산동성 요성현으로 되어 있는 요섭의 사람으로, 바로 교정국본이 간행되던 해인 북송의 치평년간(1064-1067)에 태어났으나, 정강(1126)의 변이후에는(남송이 성립한 사건) 그 땅이 금나라에 속하게 되었으므로 금인이 되었다. 정륭 내자(1156)에 이르도록 90여세를 살았다고 한다. 그의 생평사에 관하여는 '의림요전'에 '가세유의, 성식명민, 기문해박'(집안이 대대로 학자출신의 의사들이었으며 그 성품과 견식이 명료하고 민첩하였다. 무엇을 기억하고 묻고하는 것이 자세하고 넓었다)이라는 몇마디외로는 아무것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의 이름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무이(무이, 우이)라 하기도 하고 무기(무기, 우지)라 부르기도 하는데, 왕제천교정본에 쓰여진대로 무이라 해주어어야 옳을 것이다.
  무이는 교정국본이 간행되던 해즈음에 태어났으니까 그 살아있을 동안에, 집안이 유의였고 하니깐, 바로 교정국본을 얻어 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교정국본이 세상에 '상한졸병론'의 이름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 교정국본을 있는 그대로 읽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난삽한 내용에 족보가 다른 많은 다양한 편린들이 한코에 꿰어져 있을 뿐아니라 맥이니 경락이니 운기니 그리고 토하, 발한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가 뒤엉켜 있는 텍스트인데다가 일체의 주석이 없고 고보형등은 몇자 안되는 매우 인색한 서문만을 붙여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씨는 이 '상한론'을 해석하는 작업을 벌리게 되었다. 그의 주석은 1144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사료되는데(성무이와 동시대인으로서 역시 '상한'에 오십여년간이나 미쳐있었던 사람인 엄기지라는 사람이 서를 쓴 것이 갑자 즉 1144년 이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말한 것이다) 허나 성씨의 생전에는 출판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유고를 왕정이라는 사람이 얻어 금·대정 12년 (1172)에 이를 출판하였으니 이것이 '상한졸병론'에 관한 인류의 최초의 주해서인 것이다. 이 성무이의 주해서에 관한 것은 바로 내가 말하는 문헌비평의 제2분과인 '주석학'(exegetics)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내가 또 주석학이라는 분야로 붓을 옮기게 되면 독자들은 또 다시 끔찍하리만큼 길고 지루한 장광설을 들어야 할 것임으로 여기서 생략하고자 한다. 허나 그 요점만을 말하자면 판본학은 원래의 텍스트의 물리적 정황, 즉 그 역사적 성립과정(출판사)을 밝힘으로써 텍스트의 원형에 접근하거나 그 사라진 원형을 복원하고자 노력하지만, 주석학은 그러한 역사적 '오리진'(기원, 근원)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어지 텍스트의 역사적·상대적 성격에 더 관심을 갖는다. 어떠한 텍스트든지, 그 텍스트가 일단 성립하면 그 성립한 텍스트에 대한 역사적(시대정신적)이해가 성립하게 마련인데, 그 역사적 이해는 그 텍스트에 대하여 시대적으로 변천해가는 인식의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러한 인식의 구조는 대개 주해, 주소라는 형태로 결집되게 마련이다. 주어진 텍스트를 이해한 자기의 구조를 써놓은 것을 '주석'이라고 한다. 주석자 본인은 항상 자신의 주석이 그 원래의 텍스트의 '원의'를 반영한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은 여하한 경우에도 원의일 수가 없으며 그들이 말하는 원의는 그들이 이해한 역사적 해석의 구조일 뿐이다.

  성무이의 '주해상한론'은 역사적으로 여러 판본이 있으나, 금나라때 간행된 것은 전하여 지는 것이 없고, 현재 가장 흔히 우리가 '주해상한론'으로서 접할 수 있는 것은, 1545년 가정24년에 간행된 명나라의 주제천이 교정을 가한 판본이다. 지금 중국고전에 관하여 선본으로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판본은 상해항분루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상무인서관에서 1922년에 펴낸 사부홍간본인데, 이 사부홍간정편전집 속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주해상한론'십권이며, 이것이 바로 주제천의 교정본이다. 물론 주제천의 교정본은 조개미판본을 약 반세기 앞서는 것이다.

  그러니깐 우리는 성무이가 '주해상한론'조차도 완벽한 원래의 모습은 알길이 없다. 그럼 성무이가 '주해상한론'에서 주해의 대상으로서 써놓고 있는 '상한론'텍스트와 원래 성무이가 구해보았을 교정국본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많은 사람이 성무이는 송판 '상한졸병론'을 주해한 것임으로 주해를 제외한 나머지 원텍스트는 송판(교정국판)과 다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모든 주해자들은 자기의 주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원텍스트를 개정하거나 가감하거나, 순서를 뒤바꾸거나, 심지어 자기의 생각을 원문인 것처럼 날조해 집어넣거나 하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적소유권이 없었음은 물론 판본학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최근까지의 주해사의 공통된 현상이다. 왕필이 '주역'이나 '노자도덕경'에 대하여 한 짓도 자기의 주해의 구조나 의미체계에 따라 원문 그자체를 바꾸고 체제를 새롭게 개편했던 것이다. 성무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 성본에는 머리에 '연기도설'일권이 붙어있고 각권미에는 '역음'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성씨기 증입한 것이다. 그리고 송본의 각권중에 중출하는 처방을 모두 삭제해버렸고, 송본에는 정문속에 들어가 있던 25개의 가멸방을 삭제해 버리고 제십권의 미에다 다시 모아 놓았고, 송본의 제팔·제구·제십권중의 '가' '불가'중에 중출하는 조문을 전부 상제해버고, 송본에 있던 소위 왕숙화씨의 교어라고 하는 것도 제거했으며, 임의등씨의 교주부분도 제거해 버렸다.

  허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다. 바로 성주는 '상한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틀을 결정해버리는 중대한 오류를 본의아니게 저질러 버린 것이다. 이것은 '노자도덕경'의 이해가 왕필주의 이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동일한 문제이다. 왕필의 경우는 혼진현학이라고 하는 소위 삼현학의 틀에 의하여 노자를 해석한 것이며, 또 그 양자간에 어느 정도 이해의 틀의 공통분모를 허락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또 왕필의 경우 텍스트자체의 변화가 '도덕경'에서 '도덕경'으로 라는 체제의 변화는 있을지언정(즉 '도덕'과 '도덕'의 순서의 변화가 발생), 그 내용자체의 엉터리(textual corruption)는 최소한에 머무르는 것이지만, 성무이의 경우는 그 이해의 틀이나 텍스트 그자체의 오류의 폭이 도저히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혹자는 왕숙화를 가리켜 중경의 역신이라 했는데 사실 중경도 역사적 실존인물이 아닌며 숙화도 실존 인물이 아니고 보면, 픽션과 픽션에 대한 얘기는 구름잡는 허언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중경의 역신은 숙화가 아니라 성무이이다!

  이가 살았던 시대는 주자학이 성립할 무렵이며(이가 주희보다 약 반세기 앞선다)소위 신유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도덕형이상학이 성립할 시기며, 이러한 이론적 경향과 더불어 의학에 있어서도 심각한 이론적 탐구가 성행키 시작한 초인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속에서 이는 보다 이론적이고 보다 사변적이고 보다 체계적이고 보다 형이상학적인 어떠한 의학체계를 갈구하였고, 이런 자들의 구미에 예외없이 걸리든 것이 '운기'와 '상한'이었다.
  '주해상한론'에 대한 최초의 저자라 할 수 있는 이와 동시대인인 암기지가 그 '서'에서 말하기를: '우개인 '내경', 방견중설, 방법지변, 모불윤당.' (성무이의 주해는 '내경'을 주안점으로 삼고 제반 관계된 모든 설을 보조로 삼아 끌어들였기 때문에 112방과 397법을 변론하는 있어서 타당치 아니한 것이 없다)라고 하여 이의 '상한'이해가 '내경'에 기초한 것임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또 성주를 직접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해도 청대의 종합의서인 '의종금감'의 권일에 '정정중경전서상한론주'의 첫머리에 ''상한론'후한장기소저, 발명'내경'오지자야.'('상한론'은 후한의 장 지가 지은 것이다. '내경'의 깊은 뜻을 밝히고 펼쳐낸 것이다)라는 말을 서슴치않고 하고 있는 것도, 이 모두가 성무이기 '상한'에 대한 이해의 최초의 틀을 '내경'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한'에 대한 이러한 오류적 인식을 가져도 무방하도록 이미 이에게 주어진 교정국본텍스트가 엉터리텍스트였고, 당·송대의 아주 사변적인, '상한'의 본지와 전혀 무관한 단편들을 그럴듯하게 꿰맞춘 사이비텍스트였던 것이다. 이는 그것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지적 능력도 없었고 또 그 근거가 될만한 텍스트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던 것같고, 무엇보다도 그의 사변적 관심자체가 송대의 오류적 텍스트의 체제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의 관심은 어떻게 말안되는 것을 말되게 만드느냐는 것이었고, 서로 상관없는 편린들을 어떻게 서로 유기적 통일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이게 만드느냐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해서 아주 그럴듯한 상한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건축물을 건조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성무이의 주를 읽고 앉아있자면 구역질이 난다. 그것은 터무니 없는 위선이요, 중경의 본지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의 편견이요 그가 속한 시대정신(Neo-Confucian paradigm)의 반영일 뿐이다.

  내경도 내경나름이요, 상한도 상한나름일텐데, 즉 '내경'에도 '내경'나름대로의 해석의 여지는 많은 것이요, '상한'에도 '상한'나름대로의 해석의 여지는 무궁할 것일진대, 도올선생은 너무도 자기 주관이 강하고 독단이 심해, 성무이와 같은 대가, 상한의 종주라 할 수 있는 금대의 대가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칠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 내가 말하는 문헌비평의 제3분과인 '해석학'(hermeneutics)이 등장하는 것이다.

  주석학(exegetics)은 시대적으로 변천한 주해의 연구를 통해 시대정신의 상대성을 규명할 뿐아니라 오늘 내가 이 텍스트를 다시 주해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관련된 많은 구체적 기술을 습득하는 학문분야이지만 해석학(hermenutics)은 주석전체보다도 텍스트의 개념, 즉 언어, 어휘를 지배하는 인식의 구조(epistemolodgical framework)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상대성보다는 인식적 보편성을 추구하며, 어느 주어진 시점에 있어서의 개념의 의미구조의 보편성을 추구한다. 주석학은 한마디로 통시적 학문(diachronic science)이라고 한다면 해석학은 공시적 학문(synchronic science)인 것이다. 우리가 의경을 접할 때 그 의경은 우리에게 단순한 종이쪽지와 말장난이라는 언어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의경이 쓰여진 시대의 인식을 반영하는 개념으로서 나타난다. 우리는 그 개념을 통해 그 인식의 구조를 '해석'(interpretation)해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병명이 '내경'에 수록되어 있다고 하자! 그리고 마침 그 병명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병명과 같은 언어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자. 허나 우리는 이 병명이 동일하다고 해서 그것이 같은 병이라고 말할 수는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언어(병명)를 지배하는 각각의 인식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록 같은 언어일지언정 다른 개념이며 따라서 해석의 구조(the structure of interpretation)가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더더욱이 병에는 패션이라는 것이 있다. 패션이 옷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인간의 몸이 앓는 병도 계절적인 유행이 있을뿐 아니라 시대적 유행이 있는 것이다. 즉 '내경'시대에 사람들이 앓았던 병의 패션과 우리시대의 사람들이 앓는 병의 패션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나이브한 오류에 속한다. 내 어릴때만 해도 치과 의사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충치였다. 허나 요즈음은 충치보다는 잇빨병의 패션이 풍치로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도 충치학문에서 풍자학문(petiodontology)으로 그 첨단성이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어릴때는 에이즈라는 병이 없었다. 허나 요즈음 사는 사람들은 모두 에이즈공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학문적으로는 면역학이 발전하고, 도덕적으로는 성모랄이 바뀌어가고 사회적으로는 '웅진여성'이 문을 닫는 해프닝이 생겨난다. 질병변천사, 질병의 패션은 이와같이 그 시대의 인식구조 전체와 관련되고 있다. 심지어 코호(Robert Koch, 1843-1910)가 결핵균을 발견한것은 당시 결핵으로 시달리던 공장노동자들의 계급구조적인 책임소재를 은폐하기 위하여, 지배계급에 의하여 조장된 연구결과라는 좌파이론까지도 있다. 즉 결핵에 시달리게되는 산업구조의 문제점의 책임성을 모두 결핵균(tubetcle bacillus)에게 돌려 은폐시키려는 음모의 일환이라는 분석인 것이다. 이와같이 질병사를 둘러싼 문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곧 100주년을 맞게되는 갑오동학혁명도 콜레라라는 '괴질'의 질병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내경'을 가지고 '상한'을 해석한다는 것이 그 가능성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식의 구조를 가지고, 일자가 타자를 왜곡하고 혼동시키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말하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조선의 의학사는 '내경'중심이며, '상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반대로 일본의 의학사는거의 '상한'일변도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상한중심일 뿐 '내경'이라는 사변적 언어가 가지고 있는 횡설수설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 이것은 강력한 주리론전통을 고수하는 정통주자학의 조선사상사와 주자학을 배격하는 고학(코가쿠)중심의 에도사상사와의 구조적 차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며, 일본 '상한'의 대가들 명고옥현학(1625-1696), 후등양산, 춘천수덕, 송원일한제, 산협동양, 길익동동등이 모두 고학의 영향권에서 태어난 고방파들이라는 사실도 주목할만한 것이다. 춘천수덕은 경도의 거유 이토오 진사이(이승인제, 1627-1705)의 직전 문인이며 산협동양(1705-62)도 고문낙학의 테두라 할 수 있는 강호의 거유 오규우 소라이(적생조왕, 1666-1728)의 문인인 야마가타 슈우난(1687-1752)의 문우다. 이것은 곧 한국인이 원리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반해 일본인이 상황적인 것을 좋아하고, 한국인이 추상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일본인이 구체적인 것을 좋아하고, 한국인이 이념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반해 일본인이 즉물적인 것을 좋아하는 어떤 민족적 아키타입의 성향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상한'이해도 '내경'적이며, 원리적이고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것을 좋아해서, 성무이의 주해를 아무런 저항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내경'은 신유학의 패러다임의 언어를 빌리자면 주해의 보루요, '상한'은 주기의 보루인 것이다. (물론 실제적으로 이렇게 완연히 이분화되지는 않는다.)

  중경이 살았던 동한말의 시대상은 그 유명한 조조(155-220)의 삼자 보식(192-232)이 '설역기'에서 읊어 말한대로 '가가유강시지통 실실유호읍지애'(집집마다 나자빠진 시체의 고통이 있고 방방마다 울며불며 흐느끼는 아픔이 있다)라고 표현한 그러한 처절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중경이라는 엑스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내경'이고 뭐이고 명문삼초고 금목수화토고 도무지 사변적인 체계를 논할 그런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중경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랄 수 있는 동시대의 보밀이 지적한대로, 그것은 탕액의 약방이었을 뿐이며, 효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다급한 문제상황에서 출발한 것이었을 것이다. 현 '상한론'의 체계가 태양-양명-소양-태음-소음-궐음이라는 어떤 증치의 규합개념(organizing conceps)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구체적 증상에 앞선 사변적 인체의 체계에서 연역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한'에 대한 모독이요 모멸이요 몰이해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성무이의 주해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커다란 오류는 상한의 병증의 규합개념으로서 태양-양명 운운한 것을 오행과 장상개념에 기초한 수족삼양삼음의 십이경락체계와의 관련속에서 그 유기적 통일체계를 구축할려고 했을 뿐아니라 그것을 심지어 운기라는 천지운행법칙체계의 도식적 이해와 결부시켜 이해할려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넌센스다! '상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의학적 병리개념으로 말한다면 질병(disease)이 아니라 질환(illness)이다. 질환이라는 것은 환자의 병변을 규정하는 어떤 '개념'(명사)이 아니라 그 개념을 성립가능케하는 과정(process)이며 타각적 증후며 자각적 증상이다. 맥이 부하며, 골치가 아프고(두통) 목덜미가 뻣뻣하며(정강) 열은 나는데 찬 것은 싫어한다(악한), 그러한 구체적 증상을 우리는 '태양병'이라고 할 뿐이다. 태양이라는 말(개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한'의 첫구절이 말해주는대로 태양의 병됨, 즉 '태양지위병'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한 증상을 보다 세분화하여 '중풍'이니 '상한'이니 '온병'이니 하고 나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데 따라서 구체적 처방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한고방의 원래 취지는 경락의 장부에서 도출되는 기의 흐름에 따라 장상론적으로 질병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외야의 침입경로에 따라 병변이 진행되는 과정을 논한 것이며 그것은 구체적 장상과 결부된다기 보다는 전체적 체형론에 따라 생각해본것이며(holistic morphology) 그 병변의 전변은 전체적 면역기능의 항진과 약화, 그리고 어떤 사의 추세와 성질에 따라 단계적으로 논의된 것이다. 

  나는 요번 학기 들어 나의 동급반학생들에게 '상한론'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우리 커리큘럼이 '상한'이 기초가 되어야 할 많은 과목(진단학, 병리학 등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혀 '상한론'이라는 서적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끼리 자습을 해서라도 그 갭을 메꾸자하고 금요일 아침시간이 비는 것을 틈타, 학생들을 좀 일찍 나오라하고 매주 금요일 아침 8시 반부터 10시반까지 사부업간본 '주해상한론'을 텍스트로 하여 나는 학기초부터 강의를 시작했던 것이다(물론 비공식 자습강의다). 사실 내가 여태까지 '상한론'에 대하여 말한것은 학기초 3주에 걸쳐 6시간 강의했던 내용을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내가 '상한'은 '내경'에 의하여 해석될 수 없으며 '상한'과 '내경'은 근본적 다른 두개의 독립된 패러다임이다. 아마도 '내경'은 한초에 북방에서 성립한 사변적이고 연역적인 패러다임인데 반하여 '상한'은 한말에 남방에서 성립한 증후론적이고 귀납적인 패러다임일지도 모른다 라고 말하자 '상한'에 대하여 좀 안다고 하는 학생이, 질문을 하기를 텍스트를 원문 그 자체에 태양병이 '내경'에서 말하는 족태양방광경과 관계되는 것이라고 그 구체적 연계를 직접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양자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겠는가? 참으로 똑똑한 질문이렸다.

  중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상한론' 일련번호 제8조에:
  8. 태양병, 두통지칠일이상자유자, 이행기경진경야, 약속작재경자, 침족양명, 사경부전칙유

  (도올역) 태양병은 머리가 아픈 증상이 7일간 계속되다가 7일이 넘어가면 스스로 낫게 되는데 그것은 경락을 모두 돌아 다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다시 발작하여 다시 경을 돌라고 할때에는 족양명위경에 침을 놓아라 그리하여 그경에 전하지 않게하면 곧 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성무이가 주를 단것을 보면:
  상한자 일일지육일, 전삼양삼음경진, 지칠일상유. 경왈, 칠일태양병쇠, 두통소유. 저칠일불유. 칙태양지야재전양명, 침족양명, 위영면탈지. 사경부전, 칙유.

  (도올역) 한에 상하게 되면 첫날로부터 엿새째이르기까지 3양경·3음경을 모두 다 돌아 끝내게 된다. 그러니 이레째 이르게 되면 당연히 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 말하기를 이레째는 태양병이 쇠퇴하여 두통이 슬그머니 사라진다고 한 것이다. 만약 이레째도 낫지 않으면 태양경의 시기가 다시 양명경으로 전한 것을 의미함으로 족양명위경을 침을 놓아, 그 사기를 맞이하여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양명경에 전하지 못하게 하면 곧 병은 낫게되는 것이다.

  과연 이래도 '상한'이 말하는 태양병이 '내경'이 말하는 태양경락과 관계없다고 말하실 수 있겠나이까? 과연 도올선생님은 이 똑똑한 학생님의 질문에 뭐라 답하시겠나이까? 아멘! 나무아미타불!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의학은 계속 불필요한 논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되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그 명료한 판단기준이 서지 않음으로 불행하게도 모호하기만 한 가운데, 국가시험을 치루고 면허증을 딴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여태까지 논의해왔던 문헌비평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이다. 여기에 동원되어야 할 것은 판본학·주석학·해석학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을 종합적으로 발동시키는 것이다. 판본학의 문제가 어떻게 주석학과 해석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그렇게 됨으로써 어떻게 우리의 지식이 명료해질 수 있는가? 바로 이러한 문제가 문헌비평의 진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식이 기초하고 있는 판본의 정당성을 회의해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성무이의 주해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은 송판교정국본이다. 그렇다면 '내경'에 대해 '탱소'가 있듯이, 교정의서국의 교정을 거치지 않은 송대 이전의 판본은 과연 구해볼 수 있는가? 이러한 일말의 희망에 서광을 비추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당평고본'이라는 엄청난 이벤트인 것이다. 이 판본은 1936년 사계의 권위인 오오쯔카 케이세쯔(대총경절)가 세상에 알림으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끌게 되었는데, 그 판본이 당평본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이 '당평상한론'이라고 제한 상하이책의 전사본의 말미에 일본의 편작이라고 불리우는 단파진충의 저명이 붙은 당평삼년이월십칠일이라는 오서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당평삼년은 1060년이며 일본의 헤이안(평안)시대며 우리나라 고려시대 중엽초기에 해당된다(문종조). 그리고 이외로도 '화기씨고본상한론'이라는 제가 붙은 다른 전갈본도 발견되었는데 그 표지만 다를뿐 내용은 완벽하게 동일한 것이다. 화기씨란 화기사성을 가리키며 그 총서의 연대는 정화 2년(1346)이다. 1060년이라는 해는 바로 교정의서국에서 '상한론'이 발간된 것보다 5년이 앞서는 것이며, 물론 그 5년이 앞선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일본평안시대때 이미 송본과는 무관하게 그 이전시대에 유입되어 들어온 고본일 것이며, 더더욱 결정적 사실은 교정의서국의 교정이라는 '저주'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현존하는 당평본 (내가 다녔던 동경대학이 자리잡고 있는 혼고 '본향'의 고서점에서 발견됨)은 수사본이며 전갈한 것이래서 고본의 형태는 계속 유지해왔을지언정 그 물리적 판본연대가 그리 높이 올라가지는 않는 것 같다(이 문제에 관한 확연한 고증이 없다). 그래서 이판본을 놓고 강호시대의 위작이라고 하는 각종의 논거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위서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단파아충의 오서와 관련된 것이 많고, 또 고증자의 대부분이 한방에 전문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그들의 논리를 따라갈 수는 없다. 이것을 단순히 위서로 간주하기에는 교정의서국 이전의 (상한)본에 관한 너무도 많은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서 단순한 후대의 날조로 돌릴 수 없는 정당성을 이 판본은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 강판본과 같은 체제의 (상한론)판본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사계의 혁명적 사건이 될 것이다. 모든 고서나 손사본에 대해서는 그 정확한 판본을 식별할 줄 아는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껍데기만 보고 그냥 (상한론)이라고 쓰여져 있다고 해서 이따위 것은 지금 활자로 된 보기좋은 책이 얼마든지 있다고 하고 팽개칠 것이 아니라 모든 고서는 판본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이 알아 주었으면 한다. 우리나라 민간에 많은 고의서들이 아직도 사장되고 있을텐데(서지학자들의 눈이 의서쪽까지 삐치지는 못하고 있다) 독자중에서 내 글을 읽은 사람들로서 집안이나 연줄로 고의서가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판본을 헤아릴 능력이 없을 때는 나에게 가지고 와서 감별을 받아도 좋다. 만약 우리나라 의서가운데 송판본 이전의 고본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판본이 나온다면 그것은 세계적인 보물이 될 것이다(나자신은 골동품소장을 증오하는 사람이니 얼마든지 가져와도 빼앗길 염려는 없다. 물론 우리집엔 현재 골동품이 전무하다. 유일한 골동품이 내 대가리다).

  나는 강판본의 사진판을 사부총간본 (주해상한론)과 비교해보면서 그 면밀한 검토를 해본 결과, 강판본이 정확하게 어느 시대의 어느 계열의 작품인지는, 아직 나의 (상한)연구의 심도가 그에 미치지 못해 판정을 내릴 수는 없어도, 그것은 도저히 강호시대의 위작일 수는 없으며 분명 교정국의 저주를 거치지 않는 어느 고본계열의 완전한 잔존태임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강판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한론)의 상식을 너무도 여지없이 깨어버린다.

  아까 학생이 제기한 문제는 강판본에서 쉽사리 풀려버린다. 즉 그 구절이 강판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상한)고본의 원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후대에 (상한)을 읽는 사람들이 첨가한 자기류의 주석에 불과한 것임을 명백하게 밝혀놓고 있다. 예를 들면 그 문제가 되는 유명한 (상한졸병론집)이라는 서문에서 '사과반의'구문이전과 이후의 문제도 강판본에는 그 이후가 그 이전문장에 대해 첨가한 주로서 처리가 되고 있다. 그리고 후대의 삽입으로 정론이 모아지고 있는 (변맥법)(평맥법)이편이 강판본에는 아예 없으며, '진무탕'이 '현무탕'으로 되어 있고(물론 진무가 아니라 현무가 맞다. 북방의 수호신이 현무며, 현을 진으로 바꾼 것은 송의 선조의 휘를 피한 것이다), '사역탕', '사역산'이 모두 '회역탕', '회역산'으로 되어 있다(물론 '사역'은 사지의 궐역을 회복시킨다는 의미의 '회역'을 자양때문에 착오한 결과임이 분명하다). 이런 것만 봐도 강판본의 진가는 너무도 명명백백한 것이다.

  아까 학생이 제기한 문구 자체가 (상한) 원텍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쳐놓고라도, 그 문구에 대한 성주를 분석해 보면 성기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머리가 흐리멍텅한 사람인가를 잘 알 수 있다. 원문에 '태양병, 두통지칠목이상자유자, 이행기경진고야'라고 한 구문에서 '행기경'의 '기경'은, 전경의 순서를 가지고 말한다면 태양경일 수 밖에 없다. '칠목이상'이라고 말한 것이 꼭 3양3음의 6경락을 돌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보장은 아무 것도 없다. 태양병은 태양경을 돌게 마련이고 태양경을 7일이상 돌면 다 돈다는 얘기가 된다면, 이 '태양경을 돈다'는 얘기가 지금의 경락유주개념에서 말하는 점경, 순경, 통경운운하는 법칙을 따라 돈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보장이 전혀 없는 것이다. 만약 '태양'이 족태양방광경이든 수태양소장경이든지 간에 이를 현재 말하는 '태양경'으로 해석한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유주순서로 보더라도 태양경에서 양명경으로 전경한다면 어폐가 있다. 그렇게 될려면 한참을 건너 뛰어야 할 것이다. 족양명위경으로 전달되는 것은 수양명대장경 아니면 수태음폐경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논의되어야 할 핵심적 문제는 텍스트에서 말하는 '태양병'이라는 말과 '행기경'이라는 말의 진정한 관계며, '기경'이 꼭 '태양경'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 보장이 없으며, 더더욱 '태양경'이 지금 우리가 생각한다는 '족태양방광경'을 정확하게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족태양방광경'의 유주가 바로 독맥 우방으로 등뒤를 타고 가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형태학적으로 말할때도 외사가 제일 먼저 접근하기 쉬운, 더군다나 엎드려 논.밭일을 하는 과거 농부(서민)들에게 있어서는 등뒤야말로 가장 열사와 관계되어 직접 노출되는 곳(족태양방광경이 흐르는 자리)이라는 점에서 그 막연한 형태학적 논의로서 '태양경'을 상정할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의 논의는 (상한)원문의 고의에 의거하여(지금 이 교정본텍스트의 진실성을 받아들이는 가설위에서라도) 왈가왈부 할 수가 없다.
  성무이는 '침일이상'을 첫째날부터 여섯때날까지 하루에 하나씩 '3양3음'6경락을 돌고나서 제7일째라고 해설했는데 이것은 참으로 웃기는 해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이런 생각이 어불성설임은 이미 청대의 사금(원백)이 논파한 바와 같다). 만약 성씨의 말대로라면 3양3음 6경맥을 다 돌았으면 그 다음에 올 때는 또다시 태양경으로 돌아올 것이지 어찌 '양명으로 전한다'함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왜 하필 6경맥만을 얘기하고 수족12경맥은 말하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번쇄한 논의를 아무리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성기이가 이해하고 있는 그 인식의 틀이 (상한)의 고의원들과 다른데서 생기는 것이다. (상한)의 고의는 중후론적(symptomatological)인데 반해서 성주의 의각은 도식론적(schematological)이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어떤 연역적 도식(schema)을 벌리지 아니하고서는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 성기이의 기본입장이며 이것은 매우 극단적 송유의 병폐를 나타내는 것이다. 허나 우리나라의 의가들의 생각의 틀은 애강 성기이의 아류로 보면 족하다. 그리고 더우기 그 다음에 나오는 제9조, '태양병, 욕해시, 종사지말상'따위의 운기론적 언급에 이르게되면 더더욱 신이나서 춤을 추게되고 벼라별 도표들을 다 그리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추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운기적 도식은 (상한)과 거기가 멀다. 물론 원텍스트에 그 따위 말들이 들어가 있지 않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상한)의 기본적 단지 상한(한사에 얻어 맞았다)이라는 협의의 열성을 치료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러니까 사실 (수지)나 (당지)에서 말하는 '장중경엽방'이라는 명칭이 그 원제목으로서 더 타당한 것이다) 결국 인체의 질환을 입망의 원칙에 의해서 볼려고 했다는데 그 위다상이 있는 것이다. 입망(물론 이말도 후대에 정리된 개념)이란 음양, 표리, 한렬, 허실의 매우 단순한 형태학적 원리(morphological principle)다. 그리고 그에 따라 약방의 원리는 하  3법이다.

  우리나라 의가중에서 (상한)을 제대로 읽은 자는 동무 이제마(1837-1900) 일인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용렬한 후학들이 이제마의 본의를 헤아리지 못하고 이제마의 사상이 말하는 장상을 오행개념에 배속새켜 운운하나 그것은 이제마의 본지와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동무의 근본취지는 오직 음양에 있을 뿐이요, 오행을 취한 바가 없다. 그리고 관념적인 경락을 말한것이 아니라 실제의 중후론적 신체의 형태(Morphology of Mom)만을 말한 것이요, 그가 말하는 사상약방도 결국 음양 승강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상한)을 제대로 읽는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니 나 도올은 동무의 혜안에 찬탄을 금치않을 수 없다. 허나 동무론은 본지에서 벗어남으로 더 이상 논의할 생각이 없다.

  내가 여기 역설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 한의학계를 둘러싸고 있는 정보의 저질성이다. 학생들의 고민과 방황이 바로 이러한 정보의 저질성에 기인하는 것이며,정보가 정확하지 않을 때는 애매하니깐 모두 본의 아니게 신비주의(myscicism)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곤 말한다. 한의학은 철학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상한론)에 관해서도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은 채인식선생의 (상한론역전)이라는 책이지만, 이 책은 판본학적 고려가 전혀 결여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해석학적 성찰이나 엄밀성이 부족하다. 그냥 한문만 해석해놓고 약간의 주석학을 덧붙인 것일뿐인데 그것조차 매우 부정확한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그러한 책조차 번역되어 있어 우리말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허나 그정도의 수준의 책을 보고 (상한론)을 운운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중국사람들이 근자에 펴낸 책들도 그리 대단한 것이 없다. 마마후후(마마후후=두리뭉실 적당주의)로 말하자면 중국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사촌지간이니깐.

  우리는 한의학계의 선대의 업적을 조금도 폄하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살았던 불운한 시절, 그렇게 엉성하게 살았어도 모든것이 굴러갈 수 있도록 사회분위기가 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나마 그들이 이룩한 업적은 우리의 발전의 밑거름으로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짓 가운데서 파렴치한 짓들,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짓들, 우리의 가치관을 흐리게 만드는 짓들, 이런 짓들의 인속성을 용서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 고리를 끊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살아계신 여러 선생님들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포문을 열기는 싫다. 우선 그런짓을 하면 내 학점에 지장이 있을 것이고, 내 졸업에 지장이 있을 것이고, 좁고 좁은 동네에서 내가 발붙일 곳은 없어져 버리고 말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허나 손을 가슴에 얹고 한번 이 후학의 말을 상고해 보시는 것도 멀게 내다볼 때는 해가 됨이 없을 것이다.

  우리한의학계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 우리말로 된 거의 모든 텍스트가 백퍼센트 최근 중국의학계에서 쏟아져나온 책들을 베낀 것이다. 물론 해적판들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정말 몇명의 한의학도가 그것을 정확한 중국말로 읽고 해독하는지는 의문스럽다. 그런데 이 '베꼈다'하는 문제는 문화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하등의 나쁜 것이 아니며 모택동석권이후 중국의학계의 놀라운 문헌학적 발전의 업적을 흡수하는 방편으로서 많은 교수님들의 수고스러운 업적을 우리는 높게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베끼는'데도 도리(right moral)가 있고 도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의학계의 일부 교수님들 그리고 석학님들은 이러한 기초적 도리나 도덕을 좀 결여하고 계신 듯 하다.
  '베끼는 것'을 우리는 '번역'(translation)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번역이라는 것은 반드시 저자(author)가 있고 역자(trasnstor)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국민학교일학년이라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의학계의 텍스트는 대개가 저자도 없고 역자도 없다. 이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베끼긴 베낀 것인데 어디서 누구의 것을 베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가 남의 것이며 어디까지가 내 말인지, 이런것들이 도무지 구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의학계의 대가들의 책일 수록 대강 이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 낸 말이 아무개 '편저'라는 말과 이 지구상에 족보가 없는 '편저'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저기 중국책에서 따다 번역을 해서 모자이크 모양으로 주어 모아놓았다는 얘기인데, 이러한 편역의 경우도 반드시 원저의 부분을 정확히 밝히고 번역자의 이름을 밝히고, 그것을 다시 에디팅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최근까지 정식수교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짓들이 법적으로 묵인될 수 있을지 모르나, 세계에 통용되는 저작권법이나 지적소유권의 법률상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한의학계의 거의 모든 텍스트가 위법적인 책들이다. 왜 같은 고생을 하고 그렇게 떳떳치 못한 위법적 행동을 하는가? 이것은 우리 한의학계를 지배하는 출판업자들의 무자비한 상식과도 연계되어 있는 폐해지마는 그런 짓들은 묵인해온 우리 한의학도들에게 그 일차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중국사람들의 학문적 업적을 베껴내면서 왜 중국사람 저자(author)의 이름을 밝히지 않거나, 기껏해야 밑이 구려 서문에다가 몇줄 써놓고는 표지에는 밝히지 않는 그런짓을 하는가? 일본사람들의 저작이나 서양사람의 저작일 경우는 대부분 일반상식을 따라가면서, 왜 유독 중국책을 베끼는데는 동초서초하면서 원저자를 흐리는가? 이런짓을 하는 모든자들은 아무리 겉표지에 '지음'이라 하지 않고 '편저'니하는 애매한 소리를 했다해도,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표절(plaiarism)로 간주될수 밖에 없다. 이 표절은 스구학계나 일본은 물론 한국의 일반학계에서도 발각이 될 적이는 교수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불명예스러운 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러한 표절적인 저작행위가 우리나라 한의학계에 미치는 고질적 병폐는 언어의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학문의 엄밀성이 축적되어나갈 수 있는 기본적인 룰(rule)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의학계의 출판문화가 내가 말하는 이 한마디만 수정을 해도 한의학은 곧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상식에 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비상식적인 사실은, 젊은 학자, 젊은 교수들이 자기들의 선배교수들이 한 짓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젊은 학도들일 수록 더욱 열심히 '표절장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득도의 '중국의학사략'(태원: 유서인민출판사, 1979)은 분명 가득도라는 단일 인물의 스칼라십에 의한 단독저술이다. 즉 그에게 지적소유권이 인정되는 그의 연구의 결과로 세상에 떳떳이 나온 현재로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중국의학사책이다. 이 책이 우리말로 번역될 때는 분명히 '가득도저, 아무개역'으로 나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 '편저자'의 변은 그 내용만으로는 부실함으로 그외의 여러가지 자료를 보완하여 좋은 책을 만들고 학생들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적당히 짬뽕한 편역저술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이 경우 편역에 참고된 서목을 서문에 밝히었고 또 그 전체모습이 당시의 한의학계 수준으로 매우 성실한 노력의 결과라는 점이 인정됨으로 나는 이 행위를 표절로서 간주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발상이 후학들에게 파급되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칠뿐이다. 특정인데 대한 비방의사가 전혀 없음을 밝혀둔다). 허나 이것은 사계의 리더십을 장악하고 있는 책임있는 권위자라며는 삼가해야할 잘못된 발상의 소산이다. 우선 가득도의 '사략'부분의 번역을 엄밀히 살펴보면 정확성이 매우 부족하며 기호의 일관된 약속도 결여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타 추가된 부분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번역된 것인지, 그리고 타 저술의 경우 한국말로 이미 번역된 것을 옮긴 것도, 허가없이 마음대로 인용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의문이 가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편저자는 이름만 도둑질 해서 걸었을 뿐 그 실제작업은 밑에 있는 조교나 대학원생들이 한짓이라는데 본질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번역짬뽕행위의 가장 고질적 병폐는 정보의 정확성을 일일이 대조해 볼 수 있는 정확한 기준이 독자들에게 제공되지 않는다. 가득도의 '중국의학사략'이 우선 완벽한 원문 그대로 정확하고 정밀하고 정직하게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면, 우선 독자들은 '번역의 수준'을 가늠질 할 수 있을 것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가득도를 통하여 중국 의학계의 의학사서술 수준(the standard of medical historiography in China)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한 평가가 학생들에게 주어지게 될 때만이 비로소, 학생들 사이에선 아! 번역이 개판이라든가, 번역이 잘못되어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으니 졸업하면 내가 후학들을 위하여 보다 정확한 번역을 해야겠다는 등의 생각을 하게 될 것이며, 또는 번역의 문제를 떠나 가득도라는 중국학자의 중국의학사사락이 마음에 안든다든가, 그 서술내용의 정보수준이 박약하다든가, 그러니 '사고전서'를 다 읽어서라도 가득도보다는 더 훌륭한 의학사가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일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허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고 있고 한의과대학의 모든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모든 '중국의학사'나 '한의학원론'이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없도록, 즉 학문발전의 기틀이 될 수 있는 책임있는 기준을 세울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사실 대학교에서 공부한다는 행위는 기초적 입문텍스트 한권의 명저로 끝나는 것이며 대학생활이란 그것을 세분하여 배우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철학과에서 4년을 공부한다는 의미는 버트란드 럿셀의 '서양철학사'나 램브리히트의 '서양철학사' 한권을 개론적으로 배우고 그 다음에는 그것과 일관된 내용을 지니는 작가들의 생각을 각론적으로 배워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생물과 4년도 킴볼의 '바이올로지'한권을 정확히 배우는 과정이라 말하여도 어폐가 없을 것이며, 서의과대학 6년이래야 몇권의 해부학, 생기학, 병리학교재를 일관된 학문적 방법과 인식위에서 세밀하게 배우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한의학계에는 이런 기본적 텍스트가 없을 뿐 아니라 현주소를 도무지 알수 없는 유령같은 정보만 떠돌아 다니고 있다. 젊은 교수님들! 지금부터라도 정확히 자기실력으로 자기책을 펴내는 작업을 하시든가, 번역할 때는 반드시 원저자를 밝히는 책만을 내십시요, 뭐- 그런게 어렵습니까? 여태까지 선배교수들이 원저자를 밝히지 않았던 이유는 남의 책을 베꼈다고 하면 자기 권위가 떨어지는 것으로 알았고, 또 중국백화나 한문에 자신이 없어, 또 한글의 실력이 부족하여 자기번역의 정확한 실상이 공개되는 것이 두려웠던 까닭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불법이라거나 학자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없었던 시대의 소산이었다. 허지만 지금도 실력있는 젊은 교수들이 출판업자들과 짜고 과거 선학들의 타성을 되풀이하고 있다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보기 딱한 노릇이다.!
 
  그리고 한의학관계 출판문화에 대해 한마디만 첨가하자면 경악스러운 수준의 오식의 방치다. 도무지 책임있는 교정과정이 없는 것같다. 한자, 한문이 유독 많을 수 밖에 없는 한의학교재에 튀어나오는 한자의 오식은 현재 내가 경험하는 우리나라 학계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열악한 정황이다. 일례를 들면 전국한의과대학의 통합교재로 나온 '학' 상, 하권이 매 페이지마다 옛날 우리집 풍성한 앞냇길에서 그물에 붕어 건졌던 것보다도 더 두루룩 오식을 건져낼 수 있다. 매시간 수업을 받는 것이 오식건져내는 재미로 앉아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학생들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러한 것이 분노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적응의 대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학문이 어디서부터 고쳐져야 하고, 학문이 어떻게 발전하는 것인지, 도무지 도무지 그 길을 모르고 가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수학의 길을 거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오식투성이의 엉성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알아차릴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매주 엄청난 정보를 담아나오는 '타임'지가 단 한 자의 오식을 발견할 수 있는가? 문화가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학문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같이 생각해 보자! 우리의 혼란이 과연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한의학계의 치부를 드러내는 표절문화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의서라 할 수 있는 허준의 '동의보감'국역본의 예이다. 현재 시중에서 살 수 있는 '동의보감' 국역본은 남산당에서 발간한 것으로 원본과 곡역증보판 두책이 한 상자속에 들어가 있는 큰 책인데, 그 초판 발행일이 1966년 8월로 되어 있다. 허나 그 초판이라는 것은 원래 풍년사라는 곳에서 원문, 번역문 단권으로 발간한 것은 1969년 8월의 일인 것같다. 그런데 남산당에서는 증보판이라하고 많은 수정을 가한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지만 풍년사본과 남산당본을 비교해보면 완전히 동일한 지평으로 찍어낸 동판인쇄물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동판에다가 한두글자 오려낸 수정 '쏘강'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같은 지형인 이상 '증보판'이라 함은 거짓말에 속하는 것이다. 허나 그런 것은 중요한 얘기가 아니다. 현존하는 남산당판이 되었든, 풍년사판이 되었든 그 겉표지에 보면 허준원저로 되어있고 책임감수라하여 한의학계의 기라성같은 네분 선생님의 이름이 책임감수라는 명목아래 나열되어 있다:김영훈, 신활구, 김재성, 배원식. 나는 이 네분 선생님들이 과연 이책을 펴내는데 어떠한 수고를 하셨는지에 관해서는 시비를 삼을 생각이 없다. 단지 그 분들의 양심에 호소할 뿐이다. 가장 결정적 사실은 허준원저와 책임감수라는 말만 있을 뿐 역자의 이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우리나라의 대표 의서라고 하는 '동의보감'이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된 계기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풍년사에서 간행한 '동의보감'(1966년판)의 머리에 보면, 겅희대학교의과대학장 박홍렬, 대한한의사협회회장 이범성, 대한약사회회장 조성호, 그리고 풍년사 사장 홍종하의 추천사와 머리말이 써있는데, 그 내용에 일체 그 역자에 관한 얘기가 없으며, 박홍렬학장은 '홍종하사장이 웅지를 가지고 오랜 세월에 거액을 들여 국역에 착수하여 완성을 보게되엇다'는 등의 책임질수 없는 허황된 말을 하고 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이 개명한 세상에 거짓말은 있을 수 없다. 출판의 역사란 뒤져보면 그 정확한 물증이 밝혀지는 것이다.

  조선문명고금의 거족적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의보감'은 불행하게도 지금의 통용언어와는 다른 한문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래서 국민의료와 직접 연결되는 소중한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을 수 잇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동의보감'을 우리말로 옮겨 후학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그 웅혼한 뜻을 세운 사람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초야의 선비며 이당 김의 적통을 이은 화백이다.

  감히 의종의 성서의 '동의보감'을 번역한다는 것은 마치 모기가 산을 지고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은 외람된 일인줄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차제에 졸렬하고 소루하나마 정성을 다하여 이 책을 번역해 내기만 한다면 원문을 해독하기 곤란한 학구제현에게 모래더미 속에서 사금을 줍는 것과 같은 아쉬운 방편이 다소나마 있을 것이요, 또 이것을 토대로 하고 나아가서는 자극을 받아서 좀더 잘된 번역이 나올 동기가 된다면 나의 이 우거가 노상 헛된 것이 아니라는 망상이 시작하여서 거의 만용에 가까운 집필의 결심을 해 본것이다.

  세상에 첫선을 뵌 '동의보감' 첫머리에 나오는 이 구절의 주인은 운전 허민선생이다. 허민은 1911년 11월 29일(음)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득촌리에서 허용표의 4남1녀중의 첫아들로 태어났다. 그 조부가 (영규집)이라는 문집을 남긴 사실이 말해주듯이 학문이 깊었던 집안이래서 5, 6세때부터 영남의 산저의 금황의 문하로 들어가 한학의 수업을 받아 12세에는 사서삼경을 소독하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신문화에 대한 동경이 강해 득촌에서는 최초로 머리를 잘랐고 1920년에 창간된 '개벽'을 구독해보기도 했다고 한다. 14세때 해주 정씨 수근이라는 규수를 맞아 결혼하였는데 그 장인이 바로 '동의보감'에 정통한 인물이었던 것같고 '동의보감'에 눈을 뜨게 된 것도 바로 진주 근처 까꼬실마을에 대대로 살아왔던 만석꾼인 장인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뒤 허민은 서울에 올라가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가 20세에는 선전에 입선한다. 그 후로 그는 후소회의 멤버로 활약하였고, 운포 김기창, 내고 박생광, 소정 변관식, 벽출 정대기, 청남 오제봉등의 서화가, 그리고 최범술, 김단부, 김법린과 같은 지사와 깊은 교우관계를 가졌다. 그의 화풍은 화조유수를 주제로 삼은 것이 주이지만 운포의 초기그림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정교한 신선도나 인물도, 그리고 대담한 풍속도도 있으며 특히 한학의 달인이었던 그의 초서는 천하의 일품이다. 허나 그의 일생을 결정지운 사건은 당대의 모든 깨인 지식인이 그러했듯이 좌익사상에 탐닉하게 된 것이었으며 해방후 그는 남로당의 거물급 중책을 맡았다가 서대문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고 6 25때 인민군에 의하여 출옥되지 않았더라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주변의 사람들은 말한다. 허나 그는 그뒤로 계속 좌익이라는 딱지때문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수 없는 사람을 살게되었고 그것이 바로 서화와 한적의 국역사업에 그를 몰두하게 만든 끊임없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 같다.

  운전 허민은 6 25직후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리 남중동으로 도망와 그곳에 손수 흙을 이겨 토담집을 짓고 4년이나 살았다. 다시 쫓기게 된 그는 밀양, 대구를 거쳐 결국 부산 수정동 판잣촌에 정착하게 된다. 그가 '동의보감'을 국역해야겠다고 결심을 한 것은 순수한 한학자로서의, 한문이 낯설어져 가기만 하는 후학을 위한 문화적 사명감이외의 어떤 동기도 찾아볼 수 없다. 1961년에 착수하여 1964년에 완성했는데, 그 원고정리를 도왔던 딸 허혜수(4녀1남중 막내딸, 1944년생)를 나의 제사 김현박사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탈고된 '동의보감'을 아무도 출판시켜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부산 동광동에 있었던 국제출판사에서 자비로 상, 중, 하 세권으로 출판했는데 출혈이 커서 그나마 영도에 마련했던 2층집을 빚으로 날려야만 했다. '동의보감'의 국역판 출판소식을 들은 당시 한의학을 강습했던 대구의 동양종합통신대학은 그 지형을 사다가 바로 그해 1964년 11월 30일에 동양종합통신대학교육부발행으로 상, 중, 하세권으로 출판했다(발생인:박중갑). 나는 이 동양종합통신대학교육부발생의 세권짜리 (상역동의보감)이라는 책을 소장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분명하게 '허매역'으로 못박혀 있다. 지금 이 동양본(동양종합통신대학발생본)을 풍년사=남산당본과 비교해 보면 후자가 새로 제판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동양본의 번역을 거의 그대로 옮기되 약간의 수사적인 표현만을 바꾼 것이다. 동양본을 풍년사에서 사가 다시 제판하는 과정에서 역자의 이름을 빼버린 것이다. 어찌 판권을 샀다하는 것이 그 역자의 이름마저 사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찌 역자가 엄존하는데 역자의 이름없이 엉터리 감수자의 이름만 나돌아 다니는가? 오늘날의 눈으로 볼때 허민선생의 번역은 부정확한 곳이 적지않으며 그 표현도 어눌한 곳이 눈에 띄나(물론 남산당본도 그 폐습을 그대로 답습) 어찌되었던 실상 원전만을 놓고 초역한다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 공은 청사에 기리 남은 대업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사라녀, 애통해하는 유족의 서글픔이라도 진실을 밝히는 우리 한의학도들은 달래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현 남산당'동의보감'본에 운전 허민선생의 이름이 역자로서 회복되어야 한다(가족들은 풍년사 최초의 판본에는 허민이 역자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초판본을 나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한의학도들은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 보감의 최초의 국역자로서의 운전 허민의 이름을 같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훗날에 '동의보감'의 위대한 새 번역이 나올때 허민선생의 업적을 충분히 평가해야 할 것이다.
 허민은 그후로도 '열하일기'를 완역했다. 그리고 1967년 8월 9일 저녁 5시 25분 부산 당평동4가 59번지에서 57세로 일기로 영면했다. 그의 머리맡에는 빈 소주병 하나와 이연의 '의학입문' 번역원고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리다 만 화조도 한폭만 서글프게 뒹굴고 있었다.

    III
  1993년 3월 마지막날이었다. 나는 이 원고를 긁어대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정재의 벨이 울렸다. 그러더니 푸릇푸릇한 세 사람의 객인이 나무서가가 드높게 치솟은 내 서재로 안내되었다. 
  '이리에서 올라왔읍니다.'
  염기복, 전창환, 이민정, 이들은 나와 동반동학들이다.
  '오늘저녁에 여의도 법정이 열리는 것을 아십니까?'
  나는 사실 글쓰느라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요번 일에는 초연하게 있어 달라고 부탁하는 일종의 로비를 하는 판인데, 한의사님들은 원래가 점잖은 분들이래서 그런지 약사법개정문제에 관하여 나에게 의논을 한다고나 하는 일체의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들은 약사법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허나 주어진 여건에서 탤런트가 있다고 하면 그 탤런트를 정당한 절차를 통해 객관적인 대접을 할줄 알아야 할 것이며 또 작전을 짜는데 치밀하게 사전논의도 해봐야 할것이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6시 45분이었다. 생각해 보니 문제가 좀 촉급한 것 같았다. 약사법 문제가 최초로 사회화되는 계기에, 만약 한의사측이 불리한 판정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빤찌를 얻어맞는 격이 될 것 같았다. 나는 평소 교분이 있는 KBS 남성우 피디님에게 다이알을 돌렸다.
  '오늘 여의도법정이 약사법문제로 열린다는데요?'
  '제 데스크는 아니지만 옆에 있는 팀 소관입니다.'
  염기복은 나에게 지금이라도 선생님이 방청석에 들어가 앉아계실수 없겠느냐고 졸라댔다.
  '쯧쯧, 두시간 전에만 전화를 거셨더라도 자리배치를 새로 해볼 수 있겠는데 조명이고 뭐고 다 고정되어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동숭동으로 갔다. 우리집에는 테레비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날 여의도 법정! 120회로 문을 닫게된 그 마지막 법정에서 약사측과 한의사측의 변론을 보건대, 약사측의 점수가 더 높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서울대 약학대학교수님이라는 심창구씨는 여유가 만만했고 말도 차분하게 잘 했다. 그리고 나는 한의사분들의 논리가 약사들의 페이스에 휘말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약사들과 한약의 조제권에 대한 타당근거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보기엔 어부성설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의 차원이지 실력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한약조재 실력이 누구에게 더 있느냐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한의과대학을 나온 한의사와 서양약학대학을 나온 서약사들 사이에서 논의되어야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운물이냐 찬물이냐 하는 등의 수치를 논하고 인체의 이론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한의사 자신을 끌어내리는 논리일뿐 아니라, 그런 문제로 들어가면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보다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해답이 약사님들 측에 더 잘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치에 지나지 않았다. 좀 걱정스러웠다. 물론 서효석씨나 최한영씨도 할 말은 정확하게 다 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최후의 배심판결에 있었다. 배심판결이란 건강한 시민의 임의적 선발에 의한 그 사회상식을 묻는 제도이다. 심창구교수는 도대체 양약이든 한약이든 약에 관해서 약사보다 약을 더 잘아는 사람이 어디 있을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국민들은 과연 이러한 주장에 어떠한 판결을 내렸을까?
  79:21이었다. 나의 예상을 뒤엎고 국민은 압도적으로 한의사들에게 표를 찍었다. 일반약방에서 한약을 조제해서 판다는 것은 도무지 억지춘향도 이만저만한 억지춘향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국민들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약방에선 한약을 조제해서 팔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수준이 높을 수록 압도적 비례로 나타났다. 나는 이날 밤 동숭동 하이델비르그에서 늦게까지 학우들과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이 이상의 극명한 상식은 있을 수 없다. 대한민국 사회가 상식을 지니고 있는 사회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나는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면허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면과 허라는 두말(개념)의 합성어이다. 허는 허락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허락한다는 허자앞에 있는 '면'이라는 글자다. 면이란 바로 허의 조건이다. 무엇을 호락한다는 것은 바로 허락을 받는 사람 이외의 사람들을 허락을 받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로부터 면제시킨다는 의미다. 허는 영어로 'sanction"이라는 말이고 면은 영어로 'exclusion"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희승 (국어대사전)에 보면 면허를 법률용어로 규정하고 '일반에게는 허가되지 아니하는 특수한 행위를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가하는 행정처분'이라고 써놓고 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이 면허라는 말자체는 좀 이상한 말이다. 예를 들면, 우리 일상생활에서, 내가 나의 딸 미루에게 놀러가는 것을 호락했다고 해서 반드시 미루외의 일종이나 승중이가 놀러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미루와 나와의 허락사항은 미루와 나와의 관계에 한정되어 처리되는 것을 뿐이다. 그 처리가 타인에게 부정적인 금기를 전제로 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바로 이 '면허'라는 말의 특수한 의미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면허'라는 이 말 한마디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근세사회의 최대의 특질이며 역사적으로는 '민족국가'(nation state)의 성립이후의 인간제도(human institutions)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며 이것은 인류보편사에서 대강 불란서혁명(French Revolution)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사회성격인 것이다.
  불란서의 현대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그의 유명한 디스꾸르(discourse)이론에서 근대사회를 규정해온 진리의 성격 그 자체가 배제(exclusion)의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갈파했다. 진리는 언어로 표현되며 언어의 특질은 배제인 것이다. 내가 이것을 책상이다 라고 개념화하는 행위 그자체가 이미 책상이외의 부분은 책상이 아니라는 배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정치사회에 있어서 배제는 곧 권위(authority)를 의미한다. 즉 근대사회란 이 배제를 통하여 권위를 확보하는 것이 그 특질이라는 것이다. 권위는 때로는 폭력이라는 부중적인 결과도 수반하지만, 그것은 현대사회에서는, 행, 불행을 떠나, 사회질서체제의 유지를 위해 행위의 정당성의 근거(the foundation of the social action)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위를 획득하기 위하여 근대 사회의 구성원인 근대시민은 권위에 합당한 디시플린(discipline=dnflakfdml "훈련' '절제' '극기'등의 뜻이 담겨있는데 고어로서의 '공부'의 의미와 완전히 일치한다)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자동차면허를 딴다는 현대사회적 행위는 곧 자동차면허를 따는 차만이 자동차운전을 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런데 운전면허를 딴적이 없는 사람이 운전면허를 딴 사람보고 '누가 너희들 보고 운전하지 말랬느냐? 너희들은 면허땄다니깐 운전해라! 그러나 우리들도 운전하겠다. 우리들 운전하는 것 막을 생각마라!'라고 말한다면 그런 사람을 '미친놈'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가라지에 가면 차에 대해서 도사같이 잘알고, 또 운전도 완벽하게 할줄 아는 수리공이지만 운전면허가 없는 사람도 있다(나이가 안되었거나 기타 이유로). 그렇다고 이 사람이 얼마나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알고 또 운전을 안전하게 잘 하든지간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거리로 나와다닐때는 '불법행위'가 되며 곧바로 감옥에 구치된다.
  약사들이 말하는 모든 논리는 앞서말한 '미친놈'의 논리며 약사들이 행동하는 모든 짓은 바로 구치의 대상이 되어야 할 '불법행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동차 무면허 운전은 분명하게 단속되고 있는데 반해, 약사들의 한약조제는 마치 그것이 약사와 한의사들사의 '밥그릇사움'으로 사회적으로 오도되고 있으며, 또 단속에나 구치의 대상이 되고 있지도 않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자동차면허의 경우는 그 단속의 주체인 국가가 권한을 강력하게 행사하고 있는데 반해, 이 한약조제의 문제에 관해서는 주체가 되어야 할 국가가 그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근원적으로 제기 되어야 할 문제는 '국가권력'에 관한 문제인데, 왕정체제하에서는 그 권력의 방향이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결정되지만, 민주체제하에서는 그 권력의 방향이 쌍방적으로, 다시 말해서 아래의 그룹간의 이해의 상충에 의한 권력의 역학에 의하여 결정된다. '짐이 곧 국가다'를 외칠 수 있는 절대왕정의 루이 14세의 앙시앙 레짐적 권력을 오늘날 폭력이라고 규정할지 모르지만, 현대 민주사회에 있어서의 권력구조의 결정조차도 그 도덕성이나 명분성이 결여된 채 오로지 이해의 상충에 의한 권력성으로만 규정된다면 그것도 별 대차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의 권력구조가 민주의 주체인 민의 그룹간의 권력의 고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민주는 아이러니칼하게도 폭력적인 민주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쎈 놈이 강자요, 강자의 말이 진리며, 그것이 곧 국가권력이 되며, 그것이 곧 강자가 약자를 억누를 수 있는 정당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강자의 강함을 근거지우는 것은 다수성이다. 많기때문에 쎄고, 쎄기 때문에 권력적 우위를 차지하고, 그래서 그것은 국가권력의 구조에 반영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민주사회에 있어서의 '다수의 폭력'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러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약사들에게는 한 실오라기도 주어져 있질 않다. 그들의 근거는 오로지 다수라는 폭력이다. 폭력을 폭력으로서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들은 문제를 근원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서울대학교라하면 우리나라 지성의 산실이요, 도덕적 양심의 보루가 되어야 할 상아탑이다. 그러한 서울대학교의 약학대학교수라고 하는 사람이 약사들의 폭력적 이권을 대변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좀 격이 떨어지는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 여의도 법정에 나온 심창구교수라고 하는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자! 그는 자랑스럽게 '쌍화탕'에 대한 성분분석을 하고 그것이 약리기전이나 인체에 미치는 효과를 연구하여 영어로 쓴 페이퍼를 보이면서, 아주 굉장한 것을 연구한듯이 자랑하면서, 우리약대교수들은 이런 것을 할줄도 아니깐, 한약의 도사들이며 또 그래서 한약조제는 우리 약사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연구의 결실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도 생각이 모자라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한약의 성분분석이나 약리기전을 그것은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아닌 너무도 당연한 것일뿐이다. 그것이 영어로 쓰였든 한국말로 쓰였든 중국말로 쓰였든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나는 심창구교수님께 반문하겠다:나 김용옥이 뉴론(신경세포)에 관하여 심도있는 연구를 했다고 하자! 슈반쎌이니 덴드라이트니 엘렉트로라이트니 뭐니 하는 것들에 대해 여태까지 서양인들이 생각치 못했던 새로운 엄밀한 과학적 가설을 정립하고 그 연구에 획기적 성과가 있었고 또 신경세포에 관한 기철학적 해석을 가미하여 미국의 (싸이어지나 (네이쳐)지에 발표되는 행운을 얻었다고 하자! 물론 그것은 나 한의대출신의 의사연구가로서 충분히 가능한 영역이요, 칭찬받을 짓이다. 헌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연구를 했다고 해서, 내가 서울대학교 대학병원 신경외과에서 두개골을 갈라내고 신경외과 수술을 감행한다면(내 연구와 관련되는 특수질병이었다고 가설해서) 그대는 그러한 행위를 당연한 연구결과라고 인정하고 칭송할 수 있을 것인가? 도무지 그대들의 주장은 근원적으로 논리가 통하지 않는 날강도짓 이상의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본초 한 학점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도무지 근원적으로 월권되어서는 아니될 영역을 아무런 정당한 도덕성이 없이 오로지 그것이 장사가 된다거나 탐이 난다는 이유만으로 침범하고 탈취하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본초는 물론 그대들이 공부해야할 영역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 한약조제권의 정당근거가 될 수는 없다. 심창구교수님은 또 도표까지 제시했다. 벼라벨 약리와 관계되는 모든 학점을 나열하면서 약사들이 한약공부를 충분히 한다고 했다. 나는 반문하겠다:철학과 커리큐럼속에는 심리학개론이 당연히 들어가 있다. 그리고 심리학과 관련된 철학과의 커리큐험을 뽑으라면 나는 우루루룩 주체할 수 없을만큼 많이 뽑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철학과에서 심리학 공부를 충분히 했다고 해서 싸이카이어트리스트나 싸이콜로지스트가 하는 싸라피(therapy)를 마음대로 환자들에게 시술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혼동하고 있는 것, 약사들이 주장하고 있는 논리의 오류는 바로 '학술연구'와 '면허행위'의 차원을 혼동하고 있는데 있다. 여의도 법정에 나온 김양일이라는 사람은 심지어 한의사들의  한약장은 오동나무에 옻칠한 것인데 반해서 우리약사들의 한약장은 보통 나무에 니스칠 한 것이니 다른 것이며 그래서 문제될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참으로 파렴치한 자들이다! 아니 어떻게 약장의 물리적 형태와 한약조제권의 상징적 의미를 혼동하는 그런사고의 걸음마도 할 줄모르는 사라밍 4만약사의 대변인으로 법정에 나왔을까?

  내가 여기선 얘기를 더 하게 되면 내 입만 추저분해 질 것이요, 내가 입에 담기조차 역겨운 피곤한 소리만 해야 할 것이니 입을 다물겠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학생들이 가투를 할 때에도, 그리고 한의사들이 공총회에 나와달라고 할 때에도, 로비에 협조해 달라고 할 때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 글에만 매달렸다. 나는 나의 양심의 소리를 독백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누구든지 알겠지만 나는 한의사들의 이권을 대변하하는 사람이 아니요, 한의학을 통해 돈을 벌고자하는 옹색한 자도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일차적으로 우리 한의학의 자체반성을 위하여, 한의학도들의 고민과 방황에 연민을 느끼기 때문에, 그리고 기존의 한의학계의 모든 그릇된 권력구조를 비판하기 위해서 썼다. 내가 약학계, 약사계, 약업계에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그들 가운데는 그들 자신의 그릇된 사회적 행위,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월권적 행위를 비판할 수 있는 양심이 하나도 없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진실로 뼈아픈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93년 4월 7일 전구에서 몰려든 한의과대학생 2천명은 백만인가두서명운동을 벌린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약사볍개정항의시위를 했고 보사부장관면담을 요청했다.

  내가 한의학에 관하여 스승으로 모시는 권도원박사도 학벌로 말하자면 한국신학대학 출신이며 원래 한의사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권도원선생의 '체질의학'(Constitutional Medicine:"체질의학'이라는 말 자체가 권도원박사가 최초로 창안한 고유술어업을 주지할 것)을 '입상'이니 운운하여, 이제마의 '사상'을 장, 부관계로 조금 변용시켜 만든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단언컨데, 권도원선생의 체질의학과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며 서로 혼동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근원적으로 출발부터가 다르며 그 이론적 근거가 전혀 다른 토대위에 서있다. 권도원선생은 오로지 어려서부터 자기몸에 일어나는 자각증상에 대한 탐구로서 그 의학을 이룩했을 뿐이며, 그것은 자득의 과정이었으며, 또 그가 소위 체질의학의 틀을 집어나가기 까지 이제마를 알지도 못했다. 자기의 생각이 성숙한 후에야 이제마를 알게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권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권선생님은 이제마를 내가 알고 있는 것만큼도 알고 계시지를 못하다. 권선생님은 이제마를 탐구한 적이 없다. 단지 비슷한 유형의 사고를 자기보다 앞서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인간적으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상의학을 한다고 하는 사람과 얘기를 해보면 권선생님의 의학체계를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비난만 하려고 든다. 사이비 사상의학이라는 것이다. 같이 비교될 아무런 근거도 없을 뿐아니라, 임상적으로 이미 체질의학은 사상의학과는 완전히 다른, 그리고 그 한계가 미칠 수 없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을 진실하게 탐구해보려는 마음가짐조차도 없다(이런 말을 하면 내가 객관성이 없다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이 객관성의 실체는 앞으로 내가 이 역사의 정당한 시험대위에 올릴것이니 너무 섣부르게 의론치마라). 그래서 우리 한의학계는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로 계파간의 부질없는 싸움때문에.
  내가 말할려고 하는 것은 한의학의 발전이 한의사자체 전통내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한의사외의 민간에서 자득으로 이루어지는 시술이나 이론에 의하여 이룩된 경우가 적지않다는 것이다. 이미 세계적으로 보급되고 민간시술로서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수지침의 경우도 그 창시자가 나와 동년배의 젊은이로 유태우라는 사람이다. 유태우씨도 한의사가 아니다.

  권도원선생의 경우는 다행히도 그 당시(60년대) 검정의제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구제되었고 한의사자격을 획득하였다. 나도 권선생님의 의술을 배우면서 생각키를 '검정의제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에 그리고 또 그렸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시험이라면 자신이 있으니깐.

  지금 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약사들의 심정을 나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대들의 한의사에 대한 감정, 한의과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갖었던 동일한 감성의 구조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의사들의 무비젼, 그리고 배타성, 그리고 무지함, 나도 이런 것들에 충분히 시달릴대로 시달린 사람이다. 내가 한의과대학에 편입을 시도한 과정이 꼭 10년이나 되는 과정이었고,나같은 사람조차 그 동아리에 끼어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독선과 아집에 그들은 똘똘 뭉쳐있는 듯했다. 나는 서럽고 또 서러웠다. 만약 원광대학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원불교라는 순수한 종교정신의 힘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영원히 한의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을 허락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6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해가면서 고생하고 있는 이과정을 단지 약사법의 한조항을 삭제시키는 것으로 송두리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은 참으로 날강도짓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한의과대학에 들어왔다고 해서, 한의사라는 기득권자의 그룹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대 약사들의 진리를 향한 갈망을 묵살시키는 기득권자의 행패에 가담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한의과대학에 들어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가가 정해 놓은 체제의 권위를 존중해야만하는 양식과 양심을 갖었기 때문이며, 최소한 한의과대학의 존립이라는 제도적 계기가 한민족의 새로운 역사적 비젼을 창출할 수 있겠다고하는 믿음 에서 그 제도와 타협했기 때문이었다. 한의학의 역사가 반드시 제도권내의 의사들의 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또 의료행위라는 것 자체가 과거에는 반드시 국가권력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옛날의 명의는 대개 유의며, 유의란 나와 같은 학자출신의 의사며, 그것은 학문적 깨달음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었으며 오늘과 같은 교육제도나 시험제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이미 제도화된 한의사체제에 그에 합당한 '배제'와 '권위'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사회의 특성 그 자체를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한의학을 키워주어야 할 사람들은 바로 강자인 약사들 당신자신이다. 당신들도 당신들의 자제를 한의과대학에 보내려고 할 것이다. 그럼 당신의 자제가 다니는 의과대학이 약사들의 폭력에 의하여 수모를 당해야하고, 받고 싶은 수업을 거부해야하고, 길거리로 서명운동을 하려 젊음과 배움의 소중한 시간들을 낭비해서야 되겠는가?
  93년 4월 6일밤, 경희대학교 크라운관에서 있었던 제9대 전한련 출범식 
  전국에서 몰려든 학생들은 울분으로 뭉칠 수 있다는 감격속에서 매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한의과대학생들을 격분시킨 1993년 3월 15일자 서울특별시 약사회회원일동 이름으로 나간 결의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점철되어 있었다.

  1. 우리나라 약사의 한약 취급은 한의사가 배출되기 50년 이전부터 취급하여온 고유권한이었음을 다시한번 밝힌다.
  5. 대한약사회는 질병을 치료하는 한약을 전문직능인으로부터 탈취하고자 하는 한의사들의 음해에 적극 대처해 줄 것을 촉구한다.

  약사들 중에서는 대대로 한의사업이나 한약업을 해오시는 집안의 자제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약사의 한약취급은 50년전부터가 아니가 5천년전부터 일 것이며, 아니 5만년전부터 확보해온 권한일 것이다. 5만년이 아니라 네안델타르인(Neanderhal)보다 이전의 50만년의 한약조제권을 확보해도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한약조제에 관한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될 수가 없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체제의 논리며 권력의 논리며 도덕적 정당성의 논리인 것이다. 만약 국가가 약학대학을 만들어 놓았고 그래서 약사면허를 주는 바로 동일한 논리에 의하여 한의과대학이 세워졌고 그에 합당한 한의사면허제도가 있다고 할 때는 그 제도의 고유권한과 직능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면허란 특정한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며, 그 행위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면허가 존재하게 되어 있는 것이며, 그래서 다른 면허를 딸때에는 자기면허의 실력이 여하하든지 간에, 다른 면허에 합당한 새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면허제도 그자체의 부정 밖에는 있을 수 없다. 그대들이 한의사들로 부터 한약조제권을 빼앗아 간다고 한다면, 그것을 면허제도의 한계의 부정을 의미함으로, 물론 약사들 자신이 자기들의 고유권한에 관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한약이란 생약은 그까짓 풀뿔리래서 아무나 팔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까짓 페니실린은 썩어빠진 곰팡이에서 뽑아낸 것인데 아무나 다루면 어떠냐고 말해도 하등의 서로 치고박고할 논리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

  여의도 법정이 열리던 날 사단법인 대한약사회 4만회원일동은 (동아일보)(1993년 3월 31일. 제3면 하단전면)에 전면광고를 내어 말하기를:

  의료계에서는 한의사부조리가 가장 큽니다. 보사부의 부정의료업자 단속현황에 의하면 의료인중 한의사의 위반율이 가장 높습니다.

  참으로 저열하고 가소롭기가 그지없다. 한의사 부정의료건수가 245건이 되든 말든(약사들의 위반건수는 1,387건이나 되는데 비율이 좀 떨어질 뿐) 한의학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 영역이 자기것이라는 논리는 참으로 저열하고 더러운 강탈의 논리일 수 밖에 없다. 한의사들의 잘못은 누구보다도 한의사자신이 더 잘 아는 것이며, 누구보다도 나같은 인사이더들이 비판하여야 할 문제다. 한의사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한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징계되어야 하는 사항이며 그것이 곧 약사들의 한약조제를 정당화시켜준다는 발상은 저열해도 너무 저열하다. 내가 한의학이라는 동네를 들어와 보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글을 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바로 한의학을 말살시키고자하는 그대 약사들을 향해 이렇게 절절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한의사들의 문제는 모든 것이 아직 덜 진화되어서 생기는 문제이며 이 사회에 어떤 병폐를 끼치고자 하는 악질적인 고의성은 없다. 그들은 현대사회에 일찍 적응해오지 못한 사람들이며 조직적 사고와 조직력이 강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약사법개정, 그것도 한약조제권의 긍정적 클레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약국에는 재래식 한약장외의 약장을 두어 이를 깨끗이 관리하여야 한다'는 제11조 1항7호의 조항 하나를 슬그머니 빼버리는 시행규칠통과를 통해 모든 한약에 대한 권한을 반사적으로 갈취하려는 음모, 그런 음모를 자행하는 그대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악랄한 암적 존재들이 아닌가?
  제 11조 1항7호가 여태까지 엄존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한약장을 놓고 영업을 해왔다면 그대들이야말로 불법을 장행해온 파렴치한들이 아닌가? 왜 불법적 행동에 대한 죄의식이 없었다면, 왜 그다지도 야비하게 보사부장관퇴임 이틀전에 도장을 찍게 만드는 편법으로 그 조항을 삭제하려고 음모를 꾸며야만 했단말인가? 나는 규탄한다! 나는 절규한다! 이것은 있는 자들간의 밥그릇싸움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정의(social justice)의 문제며 강자가 약자를 짓누를려고 하는 폭력(violence)에 대한 레지스탕스의 문제다. 사회정의를 수호하는 한의학도들은 이러한 폭력에 항거하여 끝가지 투쟁해야 할 것이다. 일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

  지금 전국11개 한의과대학생 4천명은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이것은 수업거부가 아니다. 이것은 학업의 거부가 아니다. 업을 수하는 자나 업을 수하는 자가 모두 한마음이 되어 이 업자체를 거부하려드는 자들을 거부하는 정당한 사회적 행위이며, 신한국건설을 위한 정의로운 투쟁이다. 만약 국가가 약사들에게 한약조제권을 인정하기를 고집한다면 우리 4천학도들은 눈물을 머금고 자퇴서에 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다. 우리 4천학도들은 자회할 수 밖에 없다. 정든 교실과 교정을 버리고 떠날 수 밖에 없다. 스승과 제자는 헤어질 수 밖에 없고 한의학책들은 주인을 잃고 자둥굴 수 밖에 없다. 더 이상 한의학이라는 학문을 한의과대학에서 공부해야할 아무런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의과대학에 들어와 공부를 한다는 것은 국가가 그 공부를 함으로써 얻게될 면허라는 행정력을 통하여 그 제도적 권위(institutional authority)를 보장해준다고 하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만 유의미한 행위다. 그런데 국가가 우리자신의 요구가 아닌 타인의 요구에 의하여 그 권위를 부정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대학에서 공부하는 의미를 상실케되는 것이다. 국가가 약사들에게 한약 조제권을 주어야한다면, 국가는 한의사제도와 한의과대학을 폐지시켜야 한다. 그래서 또 사단법인 대한약사회 4만회원 일동은 외친다(동상 3월 31일 결의광고 내용).

  한의사 제도가 언제까지 존속됩니까? 한의사제도는 기필코 바뀌어야 합니다. 국민들은 한의원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한의원으로... 이렇게 경제적, 시간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와 같이 의료일원화를 통해 과학에 접목된 한방치료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우리와 같은 한의사제도로 2원화된 나라는 없습니다. 같은 동양의학권인 일본은 일찌기 한의사 제도를 없앴으면서도 더 훌륭한 한방연구와 한약의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한약의 과학화, 대중화는 약사가 이룩하겠습니다.

  과연 이것이 민족의학 5천년의 결론인가? 과연 이러한 약사들의 주장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역사의 양심인가? 과연 이 시점에서 한의사제도를 없애는 것이 한약의 과학화며 대중화의 첩경일까? 그리고 그 주체는 한의사가 아닌 약사가 되어야 하는 것일가? 이 글을 읽는 국민모두에게 호소합니다. 한의학의 앞날이 이렇게 4만약사일동에 의하여 종지부를 찍는 것이 과연 반만년 우리민족 의료문화의 종말이 되어야 할 것인가요?

  4천학우들이여! 그냥 울자! 그냥 참자! 그리고 아무말 하지말자! 그리고 자회서에 도장을 찍자! 그리고 먼 훗날, 우리의 자손들에게 말하자! 우리는 이렇게 수모를 겪으며 공부를 했고, 이렇게도 불운한 역사를 살아야만 했다고...

  1993년 4월 8일 오후 3시50분
  일곱해전 양심선언으로 정든 고려대학고를 떠나야만 했던 바로 그날 무정재에서 눈물지으며 탈고하다

  모든 대학은 구현하고자하는 이념의 구심점이 있다. 원광대학교의 이념은 원불교의 개창자인 대종사 소태산 박중빈으로부터 출발한다. 박중빈은 1891년 음3월 27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선읍 길룡리 영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친지와 인간의 이치에 대한 심오한 의문이 많았다. 20여년 구도의 고행을 거듭한 끝에 1916년 4월 28일 대학을 이루었다.
  앞에 있는 사진은 1923년 그러니까 33세의 모습으로 그가 처음으로 삭발하고 찍은 것이다. 다음해 갑자년에 익산땅(현재 원광대학교 자리)에 새 회상을 열었다. 키가 180cm가 넘는 거구로 광채나는 눈빛과 인자한 마음의 소유자였으며, 영적인 비범한 인간이었으나 기적을 거부하고 상식을 존중하였다. 우리나라 격동의 두세기를 지배한 개벽사상을 이해하는데 박중빈의 생애와 사상을 빼어놓을 수 없다. 1943년 6월 1일 53세로 입적하시었다.

      본1을 시작하면서

    레포트를 모으면서

  여기에 우리는 평소 가지고 있었던 생가, 학문에 대한 자긍심, 학문에 대한 고민, 한의학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였다. 레포트를 읽어 내려 가다가 나만 읽기에는 너무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글들은 한의학에 입문한 젊은이들이 밤을 새워가며 나누는 우리들의 대화인 것이다.
  나, 너, 우리의 한의학인 것이다.
  궁리끝에 여러분의 레포트를 정리하여 나누어 갖기로 결심했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기대효과는 지면을 통한 서로의 대화와 다른 급우들의 레포트를 읽어봄으로써 자신의 과제물에 대한 성실성을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제출한 과제물 전부를 내용의 선택이나 수정을 하지않고 있는 그대로를 실었다. 처음으로 이런 작업을 시도해 보는 것이고, 여러분들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않았었기에 제출자의 이름은 생략하였다. 아마 이름없이 누구의 글인가 상상해보며 읽어보는 것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우리 본1학생들의 이해와 성원에 레포트 수거 3일만에 컴퓨터 작업을 끝냈다. 빨리 엮어보고 싶은 마음에 문단설정이나 교정이 섬세하지 못한 점은 이해 바란다.
  바쁜가운데 시간을 많이 내어 도와준 본2 심진찬, 본1 고현, 나영훈, 송철민, 안영남, 장통영, 그리고 미쓰 최에게 감사한다.
  1992. 4. 15.
  한종현

    아드레날린과 소프라노에 대한 단상
  I
  주말의 화창한 날씨가 눈부시다. 연푸른색 하늘위에 구름이 한가로이 떠 간다. 헤르만 헷세가 저런 하늘과 저런 구름을 좋아 했다지? 담벼락 위로 솟아난 조그만 나뭇가지 위에 노오란 꽃이 푸짐하게 피고, 그 옆에 키작은 나무에는 참새들이 저희들끼리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마당에는 수선화꽃이 커다란 개나리마냥 수줍다. 언제 이렇게 바뀌었지? 이 모든 일들이 불과 일주일 사이에 정신없이 바쁜 나의 시야를 벗어나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정말 그립다. 문득 저 하늘, 저 구름, 이 꽃, 이 상황, 이 시간을 붙들어 놓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아서라! 시간은 쉬임 없나니 어찌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있으리오. 새 학기가 시작하면서 매주 등산을 가는 것을 금년의 특별 사업으로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더구나 오늘같은 날은 더욱 마음이 설레인다. 그러나 밀려있는 레포트가 세개나 된다. 아마 주말 내내 골머리를 썩여가며 자신과 싸워야 할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한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이다.

  II
  낭만과 현실의 대립을 생각해 본다. 살아가다 보면 매번 부딪치게 되는 문제이지만 낭만과 현실은 정말 별개의 문제일까? 그것들은 사이좋게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줄 수는 없을까? 한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을 고쳐 주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지식을 머릿속에 쑤셔 넣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꼭 이렇게 세상의 변화는 일주일만에 한번씩만 실감할 수 있어야 할까?
  아드레날린이나 아세틸콜린에 의해 유발되는 나의 흥분과, 오늘 아침 화창한 날씨에 감응된 나의 마음의 흥분과는 서로 상관이 없을까? 저 예쁜 꽃들을 정량, 정성분석해서 새로운 약물을 얻어 내려고 온갖 궁리를 다하는 실험가와, 저 예쁜 꽃들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소프라노는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일까? 아니다. 그들은 똑같은 인간이다. 이 모든 대립적이 모습도 모두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요, 동일한 대상인 꽃에서 나온 것이다.
  즉, 예술과 과학은 근원이 같은 것이고, 그것들과 연관된 낭만과 현실 또한 같은 것이다. 이렇듯이 논리적으로는 낭만과 현실이 하나임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마음은 산으로 들로 가 있는 채 몸은 책상에 묶여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 나의 마음이 수양이 부족해서일까? 그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나의 동료들도 십중팔구는 나와 비슷한 갈등에 사로 잡혀 있을 게다.
  꽃피는 청춘, 인생의 봄, 그렇듯이 피어나는 봄의 에너지를 잔뜩 머금은 마음이 저만큼 수선화가 피는 것을 보고 구름이 떠가는 것을 보고서 어찌 방랑의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III
  아인슈타인이 그랬다고 한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과학적인 것이요, 가장 예술가다운 사람이 가장 과학자다울 수 있다고. 실제로 그는 바이올린의 대가였고 그의 과학적 업적의 상당부분도 예술적인 영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는 자서전에서 쓰고 있다.
  한 예로 질량-에너지 등가방정식 (E=mc2) 을 그는 수학적 탐구의 결과 얻어내고 스스로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E는 운동을 추동하는 근원적인 에너지이다. m은 정지 즉 운동을 거부하게 하는 근원인 질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가지가 서로 같을 수밖에 없다니...
  그러한 그의 망설임에 자신감을 불러 넣어 준 것은 예술적 영감이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주는 조화로운 것이고, 조화한 상호 대립적인 것, 상호 모순적인 것들 사이의 대칭이라는 영감.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결론을 내렸다. 운동과 정지는 상호간에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것이고, 굳이 하나로 묶어서 말하자면 정지가 운동의 일부분에 속한다고. 나아가서 질량과 에너지가 서로 교환될 수 있으며, 굳이 하나로 묶는다면 질량은 에너지의 한 형태라고.

  IV
  20세기 들어서 서양의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동양의 고대사상을 다투어 배워 가고, 또한 노벨상을 받기까지한 많은 과학적 업적이 실제로 동양사상에서 인사트 (통찰) 를 얻은 결과라고 한다. 정말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불과 백년 전까지만 해도 동양사상이 일상생활의 기초가 되었었고,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생활의 상당부분을 동양사상이 지배하고 있는 동양권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왜 그렇게 드문 것일까? 무엇인가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는 어쩌면 오늘 아침 나의 짤막한 의문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다.
  거창하게 말해 보자. 예술과 과학은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해주는 생활이야 말로 가장 창조적인 것이라고. 또한 그러한 생활의 연장으로서의 교육만이 진정한 과학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고. 그러한 교육에서는 낭만과 현실을 서로 배척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실 낭만이라는 것도 언제까지나 머릿속에서 바램으로만 끝날 것도 아니요, 현실에 대하여 쓸모없는 것만도 아니다. 낭만에다 구체적인 시간적 여유와 물질적 노력을 투자해 보라. 그것은 이전의 현실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 줄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낭만과 현실이 본래부터 서로 배척하는 성질을 가졌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척하는 것이라고 소홀히 보아 넘겨 버리는 우리의 잘못된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마음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잘못 방향지워진 생활, 잘못 방향지워진 교육이다.
  다시금 대담하게 결론을 지어 본다. 이 화창한 봄날에 청춘 남녀들의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는 방랑에의 욕구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욕구에 시간과 노력과 피를 불어 넣어 현실의 발전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않은 현실이 잘못된 것이다.

  V
  장자가 말했다. '뜨거운 남쪽 나라 사람들에게 얼음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해 주려고 애쓰지 말아라.' 나도 한 마디 덧붙여 보자. '타고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지 않고서 빨간색을 설명하기를, 파장 750nm의 엘렉트로 마그네틱 웨이브 (electro-magnetic wave) 라고 해 주는 것이 낫겠는가? 아니면 그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 낫겠는가?'

    한의학의 나아갈 방향

  한의과 대학에 다니면서, '한의학은 어떤 학문이고, 한의학은 장차 어떻게 공부해야 하며, 어디에서부터 접근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의학이 서양에서 들어온 양방학문보다 이땅에서 먼저 체질화된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답에 대해서 뚜렷하게 그 대안을 제시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의학 자체를 동양제반학문에 접근시켜 해명하려는 견해도 있고, 의학 자체로서만의 의미에 의의를 두고, 임상과 질병치료라는 목표달성에만 그쳐, 학문자체의 본질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견해도 있다.
  비교를 해서 안됐지만, 서양의학이 우리나라에 정착하기까지 결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현재 의학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일 때, 정책적으로 장차 소멸되어질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를 배제하기 어려운 한의학에 대해, 그동안의 학문적 고민이 충분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다.
  그러면, 한의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겠다. 한의학은 동양학이며, 동양적 학문이라는 맥속에서 이해되는 생명현상을 다루는 분야이므로, 동양학에 대한 이해가 우선 선행되어야 하겠다.
  동양학은 현상, 즉 나타난 존재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종합적으로 인식하고 사고하며 지적인 추구나 이론의 형성보다는 지의 실천을 그 목적으로 하는 학문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동양학은 다분히 철학적인 성격이 강하다. 서양학이 과학적이며 이론적인 학문이고, 동양학이 철학적이고 실천적인 학문이라고 하는, 학문적으로 서로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 사실에 대해 그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동양학을 비과학적인 학문이며 심지어 학문으로서의 체계가 미흡한 학문이라고 속단하기 쉽다.
  이미 현대교육을 받으며 서양학적인 관점 하나만으로 20년 동안을 공부한 눈으로는 이러한 학문적 차이를 인식해내기는 어렵다. 한의학은 동양학이며, 또한 의학이다. 한의학을 의학으로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의견이 많은 것 같다. 동양학으로서의 한의학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 의견에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의학으로서의 한의학에 대한 이해와 견해는 교수님들마다, 모임마다, 학생들마다 서로 틀린 것 같다.
  고전이나 경서위주의 학문적인 접근은 의학으로서의 한의학 발전에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견해도 있고, 서양학적인 사고와 관점으로는 학문적 토양이 근본적으로 다른 한의학을 올바로 이해해 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전자의 견해를 갖는 사람들은, 한의학을 실험과 검증을 통해 객관화시키고 고전을 답습하는 폐단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후자의 사람들은, 이제는 우리식으로 한의학을 바라보는 한의학적인 시각을 가져야하며, 서양의학적 관점인 생리,병리의 틀을 한의학에 그대로 적용시키기보다는 경서를 주시하고 새로운 학문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양자 모두 장단점이 있다. 이 두가지를 절충하여 적절히 조화를 취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서로 다른 방법을 절충하는 데에도 기본적으로 중심을 두어야 하는 관점은 반드시 세워야 하는 것이므로, 나의 소견을 감히 밝히건데, 후자의 입장을 근본입장으로 하여 전자의 방식으로 연구하는 방법을 취함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적인 학문과 과학적인 학문, 이 양자가 융화되어 갖추어진 학문이 완전한 학문이겠지만, 학문을 완성시키는 과정 중에는 반드시 어느 한가지 관점을 기본으로 하는 입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한의학은 결국 동양학을 모태로 하기 때문에, 실제 임상이나 치료의 형태로 구체화되는 의료적인 차원은 2차적인 문제로 보고싶다. 현재 문제시되고 있는 의료일원화방안도 결국은 학문적 측면과 응용적 측면의 양자 중 어느것을 더 중시하고 우선시하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되어진다고 생각한다.
  의학, 즉 의료라는 것은 국가기관의 행정방침에 따라 크게 좌지우지될 수 있는 분야이므로, 의료일원화방안 문제에 대해서 더 깊은 고민을 해 나가야 할 것이며, 학계간의 의견을 한 데 모아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응을 모색하는 것이 지름으로서 시급한 과제라 할 것이다.
  의료일원화 뿐아니라, 한의학 교육과정을 개편문제도 함께 해결해 나가야할 관건이다. 지금의 한의대 교과과정은 경희대가 6년제대학으로 만들면서 얼렁뚱땅 적당히 얼버무려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인데, 서양의학분야를 교과과정에 포함시키는 여부, 그리고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바람직한 결합방법을 앞으로 교육과정상 풀어나가야 할 문제라고 본다. 또한 이러한 문제의 해결도 단독으로서가 아니라 한의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같이 고민하고 의견을 모아야만 그 해결의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의학을 동양학문적 측면에서, 의학적 응용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두가지 상반되는 견해와 의료일원화 문제, 그리고 고과과정 문제가 얘기되었는데, 이 문제점들을 앞으로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가장 핵심고리인, '우리의 눈으로 한의학을 알자'는 명제의 해결을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동양학의 현대화운동과 서양의학의 신과학화운동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상호 달리하는 학문적 입장의 차이를 인식한 상태에서, 자기학문의 장단점을 올바르게 파악한 후 상대방 학문으로써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주지해야 하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중심입장을 분명히 하는 바탕 위에서 부분을 보완하려는 움직임으로써 그 운동의 의의를 찾아야 하는 것이지, 결코 본말이 전도되거나 양적 평형을 유지하는 선에서의 타협에 그 의의가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어머니의 눈물
  수화기에서 아는 이가 전해준 대학합격 소식을 듣고 기뻐 어쩔줄 몰라 눈물지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내 뇌리에 진한 영상으로 남아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만을 되풀이 하며 눈물을 떨구셨던 어머니!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할 때나 나는 항상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한다.
  중3때부터 동양의학에 관한 나의 관심은 높았지만 어머니의 관절통증으로 고생하는 모습은 더욱 나로 하여금 행동의 진로를 명확하게 해주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한의과대학에 들어온지도 어느덧 3년을 맞이한다. 무언가에 열심히 쫓기며 살아 왔건만 아무리 뒤돌아 봐도 나를 쫓던 것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많은 시간을 동아리활동에 투자하고 또한 남들과 비교하여 학과 공부에 뒤져서는 안되겠다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공연연습이 있을 때도 술먹는 날을 제외하고 피곤한 와중에도 이불속에 얼굴을 파묻는 대신 책상에서 30분간이라도 앉아 있으려고 노력했던 모습이 생각난다. 어머니의 독려하시는 모습과 함께. 방학때 나름대로 계획한 공부 스케쥴 때문에 중복되었던 풍물전수회도 선배들과동료로부터 욕 먹을 것을 감수하며 도망쳤던 기억이 난다. 5월이면 으례히 찾아오는 데모주간에도 앎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과 내 자신의 소극적 이기심과 치열하게 고민했었던 나의 모습 또한 기억난다. 그렇듯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황금의 대학2년이지만 나에게 지금 남아있는 것은 뽀얗게 떠오르는 추억과 아름다운 인간의 정, 그리고 얼마 안되는 소박한 의학적 지식뿐이다.
  이제는 예2년 동안의 즐거웠지만 너무나도 힘들었던 대학 생활을 조금씩 정리해야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올바른 한의사에 대한 막연했던 고민을 잠시두고 그 이전에 실력을 갖춘 능력있는 한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두레활동은 즐거웠고, 이기적이며 소극적인 나의 생각과 모습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지만 실력있는 한의사의 길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불현듯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 말씀이 생각난다. '공부는 남을 위해서하라.'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부터라도 고등학교 입시공부하듯 아빠, 엄마를 위해서 공부를 해 보자. 그리고 두레 후배들에게도 실력있고 지도 할 수 있는 선배가 되자' 라고.
  본과 1학년 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많은 변화를 원했고 나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예의 어린 후배에게는 모범이, 원했던 나의 학문에 대해서는 욕심이 들끓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은 약리학 레포트로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위에 적은 나의 의지에 대한 새학기맞이의 어리둥절함에 대한 정리의 기회로서 가치가 있다.
  첫째, 새로운 마음으로 한의학에 입문하는 입장에서 내가 먼저 선택하고자 한 책은 '중국통사'와 '철학사'에 관한 서적이다. 어느 교수님이 이야기 했듯이 한의학이라는 인식대상에 대한 인식방법으로써 선인들의 사고와 그 사고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환경과 역사의 연구는 중요한 것 같다.
  둘째로 원전에 대해 열심히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황제내경)만큼은 본2때까지 꼭 완독해야겠다.
 세째로 개론서적 및 한방생리의 공부시 반드시 정리를 위주로 해야겠다.
 이 세가지를 내 자신이 실력있는 한의사가 되기위한 조건으로 꼭 이행해야겠다. 더불어 의료일원화저지투쟁에는 반드시 동참해야겠다. 의료일원화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아직 나는 정확한 견해와 대안은 없지만 현재의 방안에는 목숨걸고 반대한다.
  하여튼 본과 1학년이라는 부담은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히 3년째라는 사실에서 오는 것일지 몰라도 하여튼 새롭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다. 실력의 바탕위에 최소한 평범한 이웃이라도 구원해 줄 수 있는 올바른 한의사의 길을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

    미래관
  나는 한의학에 그다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생각해오던 한의사로서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들이 있다. 그러한 것들을 말하기에 앞서 우선은 한의학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말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모든 학문이 그렇고 또 그래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학문은 의학이 되어야하지 않나 싶다. 의학이 인간적이지 못할때 과연 왜 우리는 의학을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게되고 의학의 필요성도 찾지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의료계의 상황은 어떠한지 잘 모르겠지만, 한의학계건 양의학계를 막론하고 점차로 비인간적이 되간다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나는 정말 인간다운 의학, 아니 한학을 하고 싶다. 의학이 인간적이면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제반 의료문제는 그다지 크게 부각되지 않으리라. 그렇게되기 위해서는 의사 자신, 의학도 자신이 우선 인간적이어야 하겠지. 역시 인격의 문제가 대두된다. 또 한의학은 한의학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리하게 옛것만 고수하자는 생각이 아니라 동양적인 인식론의 바탕위에서 한의학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학문의 연구방법에 있어서 수단은 서양의학의 도구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사용하고 이용하는 방향이 동양적이라면 그것은 한의학을 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상으로 나의 한의학관을 정리해보면 인간적이고 한의학적인 한의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맞추어 나 역시 한의학을 배워갈 것이고, 풀어갈 것이다.
  결국은 위의 두마디 말에 귀결되겠지만 나는 앞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쉽지는 않겠지...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지만 모든 것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인데 피할수 없겠지요. 내가 어떻게 되어 갈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가장 인간적으로 살아가고 싶고, 봉사하며, 가장 한의학을 하는 사람다웁게 인간을 사랑하면서 세상을 살아나가겠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그래서 만학의 제왕이 되는 한의학의 미래를 위해 우리모두 건배!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
  어느덧 어느덧 여대생이 된 지도 2년, 길다고 생각하면 무척 긴 시간이 흘러갔다. 지난 예과2년의 시간을 되돌아 본다. 다른 대학을 권하시던 선생님과 부모님의 말씀을 뒤로 미루고 내 자신이 선택한 대학이 바로 한의대였다. 무작정 의대를 갈 생각만 가지고 있었던 내가 어찌 보면 의대와는 정 반대라고 볼 수 있는 한의대를 어떻게 가기로 결정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광주를 벗어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큰 희망이니 장래성 같은 것은 별로 생각하지도 못하고 무작정 접수시킨 대학원서, 그에 따른 합격소식, 너무 기뻤다. 예상외로 점수가 안나와서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이렇게 해서 한의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같이 시험봤던 친구는 떨어졌는데 이 친구가 말하기를 한의대생은 세수할 시간도 없다고 한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 와 보니 그게 아니었다. 선배들이 예과땐 놀아야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무척 놀랬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놀아라'는 의미엔 많은 뜻이 담겨져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당시에는 그걸 몰랐으니까.
  하는 일 없이 1학기가 지나가 버렸다. 남은 것은 방학때 날아든 성적표뿐이었다. 평점 3.35에 꼭 35등했다. 충격이었다. 그냥 생각없이 세월을 보냈더니 이렇게 되고 말았다. 가족들에게서 야유와 반성하란 소릴 많이 들었다. 이렇게 안좋은 성적을 받아보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래서 2학기부터는 신경을 썼더니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조금씩이지만 계속해서 받았다.
  써클활동을 시작했다. 푸른나무라는 노래동아리였다. 나의 생활의 거의 전부였다고도 할 수 있다. 노래를 잘 하진 못하지만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이 동아리에 가입했다. 여러 선배님들과 같은 동기들이 모두 나에게 잘 대해주었고 나도 굉장한 애착을 가지고 생활했다. 하지만 예2가 되면서 써클의 성격이 민중가요 노래패로 바뀌면서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고 써클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덜어버린 기분이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나니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심한 공허함과 허탈감이 생겼고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생애 처음 겪는 고독감과 상실감에 젖어서 예2를 보냈다.
  써클을 그만두고 나니 시간이 많이 남아서 다른 일들을 돕다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다. 그저 바라만 볼뿐 아무런 내색도 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설상가상으로 내 예2의 생활은 거의 락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지나갔나 싶다. 이렇게 내 자신이 힘든 상황일때 내 곁에서 날 보살펴 준 여자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가 없었다면 아마 거의 지켜보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의대에 들어온 이상 돌파리로 전락해서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공부는 미루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게 성적이었기 때문에 성적엔 항상 신경을 썼다. 하지만 교수님들이 수업에 들어오셔서 한 말씀들이 나의 심장에 침을 꽂듯이 막혔다. 그 당장 외워 말만 지어 A+를 받으면 뭐 하냐 실력이 없는데 차라리 자기 실력대로 C를 받는 것이 더 좋다는 말씀이었다. 완전히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젠 함께 공부하는 스타디그룹도 생겼다. 아침 6시 30분에 모여서 한시간 동안 '황제내경' '소문'을 공부하는데 힘들긴 하지만 재미있다. 아직도 누가 나에게 도대체 한의학이 뭐냐고 묻는다면 달리 뭐라고 할말은 없지만 굉장한 학문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배우면 배울 수록 흥미있는 것이 많고 광범위하다. 나의 선택에 이젠 만족한다. 이렇게 좋은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해주신 부모님께도 감사드린다.
  앞으로 우리 한의학도가 나아가야할 길은 너무나도 험난하다. 이 험준한 가시덩굴에 그대로 찔려서 죽진 않아야 한다. 어떻게 장래를 보내야 할 진 모르지만 현재 나의 생각엔 오늘,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최상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오늘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간다.

    양심과 양식
  이제 본과 1학년이 되어서 말그대로 한의학에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많은 공부를 하지 못하여 소견이라는 것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만, 겨울방학 동안에 광주에 있는 한약재를 도매하는 건재한약방에 아르바이트겸 공부겸 하여 약 두달간을 일했었는데, 짧은 시간이 나마 한약업계의 생리랄까? 아니면 지금 우리 한의계가 처한 현실 같은 것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약재의 문제인데, 여타 다른 양방의료의 약물에 비해 한약의 유통과 포제, 제제등의 과정이 조금은 구시대적이고, 비위생적이라고 느껴졌다. 보통의 시내 한의원이나 한약방으로 공급 되어지는 약재들이 약재창고의 나무상자와 가마니등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나무상자의 경우는 곰팡이 필 염려도 많았다. 또, 다른 약재와 섞일 수도 있었다. 고가의 몇몇 약재는 한근씩 비닐포장지에 포장되어서 판매되었으나, 값이 싸고 양이 많고 부피가 큰 것은 포장이 되지 않았다. 가마니에 보관된 약의 경우 행인, 도인이나 빈랑같은 것은 쥐가 갉아서 가마니가 터져 버리는 수도 있었고, 먼지가 너무 많이 났다. 지골피같은 약재는 원래 그런다고는 하지만 흙먼지가 채 제거되지 않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낡고 불결한 창고안의 환경이 그 안에 쌓여있는 약들이 과연 약이 될까? 하는 의문에 나게 할 정도였다. 약재 중의 대부분은 중국산 수입약이었는데, 그 중에는 물론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는 약재들로 있었지만, 값이 싸다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수입되는 약재들도 있었다. 황기, 홍삼, 천마, 계피 등등 이것들은 엄연히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수입약의 등살에 밀려서 우리나라에서 재배를 포기해버린 것들도 있다. 대부분의 중국산보다 품질과 약효면에서 우수한 우리나라 약재가 사멸되어가는 느낌에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지금 중국의 약재 재배면적이 점점 줄어든다고 보도된 바도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충분한 약재의 공급이 중국에 의해서 되지 않을 경우는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정부차원의 약재생산농가보호책이 장래를 위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지금이라도 일선에서 약을 다루시는 분들이 우리나라 약재를 조금 비싸더라도 많이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른 문제는 시내한약방과 한의원의 약들의 종류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근무한 약방의 경우도 200종이 넘는 약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소매로 팔려 나가는 약재들은 40-50종 정도로 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임상본초학 교재만 보더라도 거의 400여종 가까이 되는데 졸업해서 한의사가 되면 쓸모없는 것이 될 것 같았다. 실제 임상에서는, '보약'만을 위해 한의학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우리 한의학이 현실에서는 인술이 아닌 보약을 팔아먹기 위한 상술로 완전히 바뀔지도 모른다. 물론 전부 다는 아니겠지만. 좌우지간 이런 저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한의학을 당당한, 그리고 확고한 의학으로 양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한 두 사람의 노력으로 어림없음을 깨달았다. 최우선적 과제는 한의대내에서의 철저한 교육이겠고, 국가차원에서 사회에 종사하고 계시는 한의에 관련된 분들의 광범위한 재교육이 필요하며, 약재 유통의 현대화와 규격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끝으로 국민들의 한의학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그저 보약만을 지어 먹기위한 학문이 아닌 우리나라 고유의 우수한 의학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인식의 변화를 시킬수 있는 홍보 같은 것도 필요하다고 느꼈다.

    쿼크와 물
  본과 1학년이 된지도 한달이 지나려 한다. 이젠 대학생활도 제법 노련해진 듯하고 안목도 좀 트인 듯 싶다. 본격적으로 전공분야를 점하게 되는 이 시점에서 내게는 열정이 솟구친다. 이 길을 잘 선택했다는 만족감과 예과2년간 기다려 왔던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들뜨게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 그 걱정이라고 하는 것이 학문 자체에 대한 회의라기보다는 내 자신의 그릇의 크기 문제다. 예과 때는 빨리 배웠으면 하던 것이 너무나도 방대한 것이었다는 것을 안 지금, 그 동안의 한의대 생활을 점검해 보고 앞으로의 수학 대책을 세워 보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취지다. 
  동양인으로 태어나서 동양적 사고관에 길들어졌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학교에 들어와서 나는 동양의 사고체계에 얼른 수응한 것 같다. 어려서부터 서양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물리, 화학 등을 좋아한 나는 서양과학의 우수성은 그 나름대로 높이 평가하면서, 동시에 동양의 사고체계도 나름대로의 논리정연함이 있다는 것을 무리없이 수긍했다는 점이 대수롭지 않은 듯도 싶지만 나는 바로 이 점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이것은 서양의학은 서양의학대로 우수함이 있다는 것이 인정한다는 말도 된다. 의학을 동, 서양의학으로 구분한다는 것부터가 논란거리지만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는 그 사람의 선택에 의해 동, 서양의학의 전공 결정도 자신이 오를 산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 산이 같은 산인지 다른 산인지는 개념의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확실히 대답할 수 없지만 그 산의 정상에서 얻는 이치라는 것은 진리가 하나라는 점에서 같은 것이다. 나는 시야를 넓혀서 우주의 끝을 보려고 하니, 너는 세포, 원자, 쿼크... 미시세계로 깊이 들어가려 하고, 결국 그 끝은 서로 통해있다. 어느 면에서 진리를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인 것 같다. 이와 같은 생각이 억견일지도 모르고, 엉성한 부분이 보완되어야 할 테지만 그 분야마다의 독특함은 분명 인접해야 할 것이다. 의학이라는 화제에 비약이 심하긴 했으나 이왕 이렇게된 김에 한의학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히려 한다. 남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라 해야겠지만 한의학은 물과 같다는 것에 크게 공감한다. 배우는 이의 그릇에 따라 달리 담겨질 것이고, 그릇의 크기에 따라 담기는 양모양도 방법도 다 다를 것이다. 지난 예과과정이 그릇을 키우는 과정이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 그릇을 만드는 일에 꾸준히 힘쓰려 한다. 내가 이 길을 택한 것에 만족하고 있는 이상, 즉 선택을 한 이상, 한의학의 독특한 사고체계에 적응해야 하고, 방대한 지식을 포괄할 수 있는 제반여건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예과과정동안 나는 사람들도 많이 사귀었고, 내가 접할 수 있는 한도내의 문화행사에 다 참석하려 애썼다. 사주팔자(명리학)도 1년 이상 배웠으며 소설도 많이 읽고 티비도 많이 보았다. 이런 것들이 혼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것들이 다 무엇인가를 창조하기 위한 혼돈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앞으로도 이런 혼돈속에서 갈등을 겪어야 할 것 같다. 의료시술을 행하는 한의사상을 태극이라고 일컫는다면 지금 잡다한 정보를 추려가며 배움을 넓히려고 있는 이 상황은 무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산고가 크듯이 훌륭한 한의사를 만드는 무극의 혼란상태도 그 만큼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런 혼란에 나는 기꺼이 뛰어들 것이며, 이 혼란한 상황을 헤쳐 나가면서 내 능력 만큼의 한의사상을 만들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인생의 깊이도 더해질 것이다.

    핑크빛이 바래는 이유는
  한의학에 입문한지도 벌써 3년째이다. 처음 1년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핑크빛 생각에만 젖어 살았다. 그러나 학기가 더해갈수록 내게도 그와는 다른 생각이 생기기 시작했다. 선배들로 부터 드는 소리는 동, 서양의 차이에 관한 것들이었다.
  한의와 서의학의 관점의 차이는 주관적 객관적, 종합적 분석적, 동태적 정태적 등이다. 조형물에 비유해 말한다면 한의는 피라미드, 서의는 역삼각형이다. 피라미드는 매크로한 기반으로 부터 무엇인가를 지향할려고 하는데 반해 역삼각형은 마이크로한 어떤 뾰족한 특정치로부터 매크로한 체계를 구성해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의학이 월등하게 우수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공부하면서(물론 교과과정상 양방과목이 많은 탓이리라) 분석적인 양방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이제 어느덧 겨우 '사람'소리를 들을수 있는 본과에 진입했다. 이제는 더이상 그러한 생각이 들지않는다. 왜냐하면 이제 한방에 각론이라 할 수 있는 과목이 많아졌고, 자연히 나의 관심도 그러한 쪽으로 모아졌다. 무엇인가 있을 것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지마는 종합적인 한의학의 방향을 설정하기에는 나의 지식이 너무나도 빈약했다. 내가 예과때 조금만 더 한의학기초에 신경을 기울였다면 나도 자신있게 나의 소견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적이나 나의 소견을 말하고자 한다. 우선 일반적으로 말하여지는 한의학이라 함은 침, 구, 약일 것이다. 기능장애에는 침구를, 기질장애에는 약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것의 사용원리는 음양, 오행학설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즉 자연현상을 이원론, 오원론으로 설명한 것인데, 소우주라 불리우는 인간에게 적용한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고 그 자연원리에 따라 인간의 질병도 치료한다. 이러한 말보다는 좀더 근원적인 말을 해야겠다. 한의학의 역사는 수천년에 이른다고 한다. 반면에 서의는 길어야 이천년이다. 그리고 그 오랜시간동안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있는 한의학이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양의학에 비해 월등히 우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처음에 양의를 역삼각형의 건물에 비유했었다. 이러한 건물이 쌓아 올려질때 아무리 견고한 조직과 접착제를 썼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쓰러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불치병에 대한 대책이다. 이러한 병이 임기웅변적인 의료에 의해 치료된다는 것은 힘들 것이다. 즉 자연에 순응하고 오랜경험에 의해 근원을 치병하는 한의학이야말로 불치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정리가 안되고 횡설수설한 감이 있다.
  나의 무지함에 실망하면서 아직도 지니고 있는 나의 포부나마 후배들과 나누어 가지고자 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일반대중들의 한의학에 대한 인식과 현 한의학도들의 의식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회가 뒤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과 함께 이만 마치려 한다.

    체와 용
  요근래 한의학에 대한 관심들이 커져가고 있다. 서양의학의 한계때문에 관심이 쏠린 듯은 하지만 그러나 한의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평가는 아직도 미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양의학은 논리적이고 한의학, 즉 동양의학은 비논리적이라 여기는 것도 지금까지의 편협된 가치관의 소산일 것이다. 서양의학이 과학적 토대, 즉 실험을 통한 실증이라는 단계를 거쳐 논리성을 획득하였다고는 하지만 동양의학은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또 그 나름대로의 과학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두 의학을 비교해 본다면 한의학, 즉 동양의학은 종합치료 의술이고 근본을 다스리는 치본의학이며 양생의술이다. 반면 서양의학은 국소치료 의술이고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곳을 다스리는 치표의학이며 방어의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근본적이 치료에는 한의학이 우수하고 응급처치에는 서양의학이 우수하다. 물론 외과분야에서의 우수성은 서양의학이 그 혁혁한 공을 차지한다고 하겠지만...
  이러한 차이점에서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스스로의 장단점을 갖고 있으며 어느 한쪽의 단점들이 잘못된 편견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한의학은 위에서 말했다시피 하나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한가지 논리성만을 내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각기 다른 사고체계와 범위 그러기에 한의학에 대한 깊은 사고에 빠지지 않는다면, 덧없이 쉬울 수도 있는 하나의 기술, 즉 치료기술을 인지한 기술인으로 머물러 버린다. 하지만 스스로 고민하고 노력이 배가가 된다면 진정한 의료인상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 본다. 단지 치료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닌, 이렇듯 우리의 한의학에 대한 기대도 스스로의 노력이 없으면 한낱 허상일 뿐일 것이다. 
  한의학의 철학적 기초인 음양의 원리를 실질적인 임상에 관계하는 분야로서만 알고 있다고 해서 음양의 원리를 터득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너무 피상적이고 막연하기에 그러는지도 모르겠지만...
  한의학에 대한 모두의 기대와 회의는 한 측면으로 이해가 되어지고 있을 뿐이다. 막연한 가운데 어떤 법칙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 지금 주위에서 의료일원화를 비롯한 모든 문제점들은 단지 문제점들일 뿐이다. 서로의 이해득실, 자본의 집중등 사회의 모순들에 의해 자행되어지는 일들이지 그것은 한의학 학문자체를 발전시키게 하는 수단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문제들이 제기되는 것은 그만큼 한의학이나 전통문화를 멸시하고 말살하려는 지배계급이나 기득권자들의 편견에 원인이 있다. 물론 한의학계 자체내의 통일된 비젼이나 일관된 투쟁노선이 결핍되어 있는 점도 반성되어야 하겠지만...
  한의학에 대한 지금 나의 생각은 단지 피상적인 측면에서 논의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지금 내 자신의 성실성에 대한 물음에도 답을 내리기 어렵다.

    무동이네 집
  얼마전 테레비 드라마 '무동이네 집'에서 이런 대화를 들었다. '무동이 엄마가 화상을 입어서 병원에 다니는데 젊은 담당의사가 무척 친절해서 남편에게 자기가 아직도 밖에 나가면 처녀처럼 대우받고 인기가 있다고 하자 남편이 말하기를 그건 당신이 예뻐서가 아니라 손님을 끌려고 하는 수작이야, 알겠어'라고 하였다.
  그걸 보고나서 문득 의료법규 시간에 이기남교수님이 요즘 의사들은 끄덕하면 멱살을 잡히는 등 의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다는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예과이년 동안 아무 생각없이 유람선을 타고 세월이라는 강을 흘러 가듯이 보내왔다. 그러는 동안 현재 한의학의 위치나 의료인의 자세나 윤리 등을 깊이 고민해보지 못했다. 지금의 의료인의 권위가 땅에 곤두박질쳐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뭣도 모르는 촌놈인 나에게는 한의사가 되어 흰 까운을 입은 모습은 만인이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그런 선망의 대상이었다.
  여기저기서 의사사위를 얻기 위해서 벌이는 헤프닝은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었지만 나는 속으로 그런 지위에 설 수 있으려니 하는 생각으로 어깨가 으쓱한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이따위 일반인들과 다르다고 하는 선민의식이 바로 의사와 환자들간의 불신과 괴리감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우선 한의학계에도 의사들 못지않게 비양심적이고 환자를 기만하는 사례가 많다는 얘길 들었다. 양의학에 비해서 우리의 의학이기에 민중의료로서 국민들의 신임과 믿음을 얻어야 할텐데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외래종교 사상이 밀어닥쳤을 때 우리 선조들은 천도교나 대종교 등을 만들어 우리 고유의 것들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러던 것이 근대에 들어와 일제 36년 통치와 해방후 미군부의 신탁통치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저마다 새롭고 경이롭게만 보이는 서양문물에 매혹되어 버렸다. 그래서 서양것이면 무조건 좋다고 여기고 우리것은 낙후된 것이고 전근대적인 고물처럼 여기는 풍조가 만연되었다.
  한의학도 서양의학에 밀려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인식되어버렸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도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미팅에 나온 여학생드로가 얘기하다보면 한의학에 대한 것이라곤 테레비 드라마 '동의보감' 정도가 다 이고 큰 관심이란 더욱이 별로 보이는 것 같지 않다. 침을 맞아서 못 움직이는 팔이 돌아갔다고 하면 정말 신기하다고 말할 뿐 이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 한의학을 하는 중국, 일본, 북한은 제각기 주체성을 살려 중의학, 동양의학, 동의학이라고 명칭을 표방하고 자기들의 고유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름만 한에서 한으로 바꿨지 새로운 이론이나 연구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국가차원의 지원도 문제겠지만 현실적으로 졸업하자마자 큰 돈을 벌려고 하지 학교나 병원에 남아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의 가족이 나의 혈육이 단지 나와 피를 같이했기 때문에 추하고 못났을지라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듯이, 우리 조상들에게 물려 받은 우리것이기 때문에 더욱이 훌륭하고 아직도 깨우쳐 터득해야 할 것이 많은 한의학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우리는 허준선생 등 우리 선조가 물려준 한의학을 계승하고 더 발전시켜서 후세에 전해야 할 임무가 있기에 더욱 더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정진해야겠다.

    본과생이 된 연화
  지금 한시가 훨씬 넘어서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영화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쓴다. 몇번인가 쓰려고 시도했는데 열줄 정도 쓰면 그 다음은 도대체 무슨 내용을 써야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편지처럼 그냥 친구들에게 보내는 글은 부담없이 항상 쓰곤하는데 어떤 주체를 놓고 막상 쓰려면 머리가 텅 비어 버린다.
  대학을 삼년째 다니는 내 자신이 부끄럽긴 하지만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을 믿으며 두서없는 글을 써본다. 며칠전 본과진입식이 있었다. 후배들의 축하와 학장님의 격려말씀과 가슴에 단 자랑스런 한의뺏지가 자꾸 나를 감격시켰다. 그냥 '1층 추운 강의실을 내려 왔구나.', '아 참 팍팍하다' 등, 닥친 현실에 찌들었을 뿐 본과생이 된 어떤 뿌듯한 감동과 긍지를 느끼지 못했었는데 이런 의식을 거침으로써 다시금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예과 때는 수업이 고등학교 때와 똑같은 주입식이었고 준비 단계로서 거쳐가는 과정 정도의 수박 겉핥기식이어서 전혀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 대신 내가 활동했던 동아리가 이념써클이었고 덕분에 여러 사회과학서적과 노동소설 등을 읽어서 세상의 다른 면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의료의 사회화'에 대해서는 의료의 예방적 측면에서 깊이 공감하지만, 소위 운동권써클이었기 때문에 내 가치관이나 정서에 맞지 않아서 무척 고민을 했고 결국 1년반만에 탈퇴하고 말았다. 한의대에 들어와서 부모님의 곁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는 것하며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그 중 하나가 남성위주의 한의대에서 '여성으로서의 나의 위치 확인'이었다.
  써클 활동에서도 그랬는데 남학생들과 완전 동화될 수도 없었고 또 그렇다고 사사건건 여성으로서 특수성을 내세울 수도 없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지만 예과 1학년 때는 어떻게해야 올바르게 처신하는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많은 시행착오와 선배나 동료들과의 만남속에서 대학 2년이라는 세월은 나 자신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인제는 정말 애니멀에서 어슬프게나마 휴맨이 된 것 같다. 그리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의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 만족스럽고 지금은 굉장히 한의학이 매력적이고 학과공부가 즐겁다.
  지금 우리 학년에서는 스터디그룹을 만들어서 공부하는 것이 유행인데 나도 3명 친구들과 아침마다 모여서 '황제내경'을 같이 공부하고 있다. 그 책을 보면 어쩜 사람들이 이렇게도 지혜로웠을까 감탄할 때가 많다. 또 어떤 부분은 양방에서 배운 의료지식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자면 생진, 상혈 등은 소금섭취와 신장고혈압과의 관계에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지난번 의료버규 시간에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한의사상'에 대한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내 단순한 생각으로는 환자의 상태와 치료과정에 대한 한방용어를 쉽게,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잘 설명해 보편화 시켜야 할 것이다. 또 한방의 잇점인 예방적 측면에서 국민들이 쉽게 한방을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은 실력있는 한의사가 되야한다.
  나는 과동료들을 볼 때 같은 길을 간다는 공동체의식이 느껴질 뿐만아니라 한명 한명이 자신의 독특한 개성과 재능이 있음을 보고 감탄한다. 우리 학년 애들이 참 맘에 든다. 앞으로 남은 4년 동안 열심히 생활해서 사회에서의 나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싶다. 글쎄, 어떤 일을 하게 될 지 모르겠지만.

    한의학, 그것을 고민하면서
  3월도 막바지에 이르러 기세등등하던 꽃샘추위도 물러가고 따뜻하고 온화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어제는 의과대학에서 시체해부실습이 있었는데, 교수님의 허락을 얻고 참관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시체를 대한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하고, 호기심도 강했는데, 막상 눈 앞에 시체를 대했을 때는 적잖은 실망감마저 들었다.
  전혀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마네킹을 보는 기분이었다. 지독한 냄새를 제외하고, 시체를 다루는 다른 학생들에게서도 전혀 사람을 다룬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고, 심지어 장갑도 끼지 않은 맨 손으로 근육을 찾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서글픔이 느껴졌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일단 죽으면 한낱 고깃덩어리 정도로밖에 남지 않는 것일까?
  해부실습실을 나서면서 혼란스럽기도 했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다루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특히 동양의 독특한 의술인 한의학을 하는 나의 자세는 어떠해야할지 정리해 보았다. 때마침 약리학 레포트를 쓸 수 있어서 기쁘다. 신입생시절, 막연히 신비스러운 학문이라는 생각을 갖고서 한의학을 대했을 때는, 사고하는 방식이 종전과 달랐기 때문인지, 좀체로 잡힐 듯 하면서 잡히지 않는 많은 새로운 개념들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예과시절을 보내고 어엿한 본과생이 된 지금에도 그런 혼란스러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고민들은 그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좀더 성숙한 고민들이라고나 할까? 그때는 막연한 것이 지금은 좀더 분명해졌다고 말하고 싶다. '의'에는 학문으로서의 의학과 기술로서의 의술, 그리고 윤리적 측면에인 의도가 있어서 하나의 '의'를 이룬다고 한다. 세가지 측면은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고, 골고루 닦아 나가야 할 숙제들이다. 나에게 있는 고민들을 이러한 세가지 측면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첫 번째 의학을 하는데 있어서 강의시간에 듣는 내용들을 이해하는 것조차 벅찰때가 많다. 어디까지를 내것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분별하기도 어렵다. 서양과학은 절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교수님이 계신가하면, 한의학을 과학으로 설명하시려는 분도 계신다. 원전을 한글화해서 독자적인 우리나라 한의학 체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생님도 계시다.
  매번 학기가 바뀔 때마다 사는 책들은 책장을 메우기 위한 것같기만 하다. 졸업을 하고나서 내가 얻은 학문적 지식이 얼마나 되며, 도 얼마나 가치가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배워야할 지식은 많은데 아직 걱정할 단계는 아닌 것 같지만, 약을 짓고 달이는 것이나 침을 놓고 뜸을 뜨는 치료행위 자체를 의사라고 무턱대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일이므로 신중해야하고 정성을 쏟아야 하겠다. 일반 환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주어서 치료에 협조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의도로 말하자면, 자기가 가는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나는 그 분의 가르침에 따라 그 영혼까지도 세상을 바라보면서, 특별히 한의사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물들지 않으려는 노력을 한다면 의도는 자연히 바로 서게 되리라고 믿는다.
  이상 나름대로 고민이 아닌 고민들을 소박하게 적어 보았지만, 이러한 고민들은 학교를 마칠때까지, 아니 평생의 업이 될 한의사로서의 삶을 마칠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사람만이 진정 한의학을 사랑하며, 또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고통과 유산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우리 선조로부터 현세까지 다양한 문제에 특히 질병에 대한 고통에 계속 시달려왔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노력과 연구를 계속해 온 결과 현재 서양에서 발생해서 전개되어 온 양의학과 동양에서 발전되어진 동의학 일명 한의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요즈음 제3의학이 상부에서 설명한 양자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 전세계 특히 일본에서 열심히 연구되고 있다고 하지마 아직 병을 치료하는 정도에는 미흡하다고 본다. 내가 한의학과 만난 계기는 아주 우연찮은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그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나 자신이 의사가 된다는 것은 안중외의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한의대 입학을 계기로 나의 일생은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정해져 버린 것이다.
  생각해 보건대 나와 같은 경우로 한의대에 입학한 학우들이 의외로 많으리라 본다. 그러나 이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당연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의학이라는 학문은 단순히 흥미위주로 공부하기에는 너무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평소부터 관심을 가지고 이 학문에 접근해도 모자랄 것을 단순히 흥미만으로 될 수 있을까? 물론 문제가 단순히 한의학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학계에도 역시 공존한다. 그러나 우리 한의학이 더 큰 문제라고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우리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의대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서양학문에 의식이 완전히 젖어 있었기 때문에 동양의학에 접근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 예로 우리나라가 서양학문을 받아들인 이후로 한의학계가 발전했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단순히 고대로부터 전해진 한의학을 답습하는 정도 아니 그것에조차 미치지 못했다고 본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까지 했던 연구나 공부방법에 대해 일종의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다.
  현재라는 시점에 어느정도 부합되는 의학으로서 변화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양방의 뒤를 쫒자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인지하기론 양방의학은 일종의 과학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의학이 서양과학보다는 몇수 위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방법론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럼 양진한치를 하자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어느정도는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한의학을 공부하다보면 느끼는 점이 언어개념의 뜻의 다양성 및 모호성이다. 이는 텍스트 자체가 한문이기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라고 보지만 어느정도는 객관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현재 시중에 있는 한방관계서적의 다수가 해독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많다.
  한의학이 발전하려면 일반대중에게 한발짝 더 다가가야한다고 본다. 내가 인식하기로 양약보다 한약의 장점이 내과분야에서는 더 많다고 본다. 그러나 일반인이 이를인지하지 못한다. 이는 아직도 한의학이 특정인에게만 인식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이밖에도 한의학을 저해하는 요소는 굉장히 많다. 의료보험문제, 한약유통과정의 문제 등등, 그러나 한의학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우리 한의학을 일반대중에게 보편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한의학에 관련된 모든 사람 특히 우리 후학이 해야 할 것이다.

    한의과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벌써 한의과대학을 들어온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예과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본과에 진입하고 나니 이젠 뭔가 해야될 때가 된 것 같았다. 지난 2년을 되돌아 보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지난 2년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긴 겨울이 끝나고 봄 햇볕이 따사롭게 비치는 양지에서 보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체 대학에 들어와 이리 쏠려다니고 저리로 밀려다니고 한 것 같다. 시입생오리엔테이션 때, 무언가 희망을 품고 있었던 그 때가 생각난다. 우리나라의 교육의 현실에 비춰보면 대학에 들어온 것은 하나의 꿈의 성취였다. 지금 생각하면 고등학교나 대학이나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때는 왜 그리 그 틈이 넓게 보였는지. 하여튼 청운의 꿈을 품고 시작한 대학생활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많은 친구들과의 만남, 새로운 학무네 접하는 신선감, 모든 것이 다 좋았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어찌 좋은 일만 있을 수 있으랴. 화염병과 짱돌이 날아가는 속에서 왝왝 구역질을 해대던 기억, 의료일원화 그리고 교내문제로 편입학문제등,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났다.
  또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 그 때문에 술마시면서 별을 헤이던 수많은 밤, 그리고 이런 문제로 인해 나는 점점 더 한의학에 관심과 정열을 쏟아 부었고 또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진 것 같다. 예과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친구들과의 지리산등반인 것 같다. 정상에서 바라볼 때 내 발치 아래 뾰족뾰족 솟아있던 봉우리들, 그 사이사이에 몽올진 솜처럼 포근하게 감싸주던 구름들, 그냥 뛰어내리면 푹신하게 날 받아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이학년때의 상경투쟁, 의료일원화에 반대하기 위해 투쟁, 거기다 나 자신이 너무도 미약하다는 것, 그러나 나와 너가 합쳐서 수많은 우리가 됐을 때 상상할 수도 없는 큰 힘이 생긴다는 것, 그런 깨달음이 의식에 남아 있다. 한의학계는 너무나도 힘이 분산되어 있다. 점점 배가불러 개인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그 분산된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는 사이 이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본과에 올라와 벌써 한달이 지나갔다. 처음 느낀 것은 예과와 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배님들이 예과생을 애니멀이라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일주일동안 각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나니 몸이 두 개쯤 있어야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빡빡한 것 같았다. 새학기가 시작되니 일의 추진력같은 것이 강렬해 처음에는 잘 되어갔다. 그러나 점점 생활이 나태해지고 있는 것 같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처음부터 잘못 디디면 결과는 뻔한 것, 다시 마음을 재정비해 생활을 바로잡아 나가야겠다. 본과1학년, 새로운 의미로 나에게 다가 올 수 있도록 힘차게 나가야겠다. 십년후 내 모습이 추하지 않도록 하루하루의 생활을 충실히 할 것이다.

    한의대 생활
  나는 내 몸하나 간수 못한 것 때문에 대학 1, 2학년 생활은 물론이고 고등학교때부터 지금까지 밝게 살아오질 못했다. 내가 보기엔 육체의 병은 마음의 병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 같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한의과에 오게 되었지만 누구보다도 한의학에 심취해 보고싶다. 하지만 이것도 표피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전산학과였는데 한의과에 오게 되면서부터는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전산학에 대한 것은 단순히 적성이 아닌 흥미였던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내가 어떤 학문에 관심을 갖든지 간에 모든 것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건강과 정신적 불만 때문에. 정말 힘들고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밥을 먹을때면 입맛이 없고 구토증세가 있었다. 식사하고 나서든 그렇지 않든간에밖에 나가서 조금 걸을라치면 호흡이 가빠오르고 숨도 잘 못 쉬겠고 머리가 어지럽다. 수업을 들으면 잦은 소변 때문에 불안하고 억지로 참으면 초조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또 불면증으로 항상 신경은 예민해 있었으며 우울했다. 또한 위장에서 배고프다는 신호가 오면 힘이 없어지고 빈혈처럼 어지럽고 떨린다. 고작 내가 하는 일이라곤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에와서 누워있거나 밥맛이 있든 없든 억지로 다 먹어야 하고 불안한 마음에서 탈피하기 위해 책을 읽거나 만화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리고 수업도 빠지기 일쑤였고. 나에게 있어 써클이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이러이러한 동아리에 들어가 멋지게 한 번 살아보리라. 꿈에 부풀었던 그 순간들이 나에게는 한낱 꿈으로 그치고 말았다. 내 앞에는 모든 것이 펼쳐져 있었지만 나는 나의 성벽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지금은 옛날만큼 심하지는 않다. 모든 증상이 완화되어 가고 있으니까.
  세월은 참 빠르게 흘러간다. 하루하루가 지겹게만 느껴지던 그 시간들이 이젠 과거라는 이름으로 가슴 아프게 자리잡고 있다. 허무하게, 아무 적극성도 없이 그냥 흘러보냈던 시간들을 난 후회할 수도 없다. 남들처럼 '아 이렇게 보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그런 바램조차도 나에겐 이상하게 들리고 수치스럽게 느껴진다.
  대학에 들어와서 벌써 2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만약 내가 4년제 대학에 들어왔다면 내 인생에서 학창시절의 추억은 한숨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기대할 수 있는 앞으로의 4년이란 세월이 위안이 되어줄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하듯이 난 지나왔던 삶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너무 긴 세월이었고 그 만큼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뿐, 그 과정에서 나에게 남겨준 것 또한 있으므로.
  앞으로의 일들, 난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젠 밝은 삶도 비치리라 믿는다. 학교수업도 충실히 하고 축제나 의료봉사활동, 동문회 기타등등, 많은 것들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면서 앞날에 대한 걱정도 할수 있고 어느 자질구레한 일들까지도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의학이라는 거대한 학문을 조금씩 쓰러뜨리는 정복의 쾌감 또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난 이렇게 소극적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을 뿐이다.

    한의학에 관한 나의 소견
  한의학이라고 할 때 한인지 한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인 것 같다. 진실한 내 생각으로는 한이 맞다고 본다. 옛날 조상들이 중국의 책과 사상을 많이 받아들이고 공부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의학으로 소화시켰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우리 것이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의학은 사실 잘 와닿지 않는다. 우선 의학과 철학이란 개념사이에서 혼란을 겪게 만든다. 인간의 몸을 대상으로하는 것이 의학인데 한의학은 정신이라는 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한의학은 또 유, 불, 선의 종교와도 혼란을 겪게 만든다. 고서에 보면 의사인지 도사인지, 아니면 무당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상당수 있다. 우선 서양의학과의 차이점을 생각해보면 가장 큰 특징으로 와 닿는 것이 한의학은 근본을 다스리는 의학이고 서양의학은 당장 눈에 보이는 곳만을 치료하는 의학이라는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우리들이 자신있게 우월하다고 느끼게 해 주는 점이다. 한의학은 어떤 증상이 보이면 그 병의 원인을 찾아내어 생리적 기전 전체를 다스린다.
  둘째로 한의학은 생체의 자연치유력을 높여 병을 쫓아내고 서양의학은 인공적으로 항생제나 수술을 통한 제거등으로 치료한다. 여기서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외과수술에 의해서만 가능한 치료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이 외과적인 면이 한의학의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옛날 접골사가 보였던 지혜같은 것을 한방외과로 잘 살려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로, 동양의술은 종합적이고 서양의술은 국소적이라한다.
  넷째로, 서양의학은 해부학을 기초로하는 조직의학이며 한의학은 증후학을 기초로하는 현상의학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고 말을 많이 듣는다.
  앞에서 서양의학과의 비교를 대략해 보았지만 한의학이 마구잡이로 근거없이 사람을 고치는 것은 아니다. 한방에는 한방 나름대로의 생리, 병리적 기전이 있다. 그것을 자기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남을 헐뜯는 사람은 미친놈이 틀림없다. 그런데 사실 한의학은 너무나 어렵다. 음양, 오행이론부터가 이해하기에 내 자신의 능력의 모자람을 느끼게한다.
  음양이론은 상대적 이분법이라는 점에서 그래도 좀 낫지만, 오행의 경우는 왜 목, 화, 토, 금, 수의 다섯 개념으로 나누었으며 각자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지, 그리고 상생, 상극, 상승, 상모는 무엇인가? 모든 것이 말장난같기만 하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물론 앞에 던져지는 사실을 그대로 머리에 박아 두고 시작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금이 수를 생한다는 전제하에 금은 매운 맛과 연결된다는 것과 수가 신과 연결된다는 것을 안다면 신장이 약한 사람이 매운 음식을 좋아할 것이라 생각이 미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암기를 통한 지식과 공식에 대입하는 식의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언젠가 들은 이야기중에 여름이 화인 것은 나무가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뜨겁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말이 훨씬 더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나름대로의 생각의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의학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적인 개념을 많이 도입하였기 때문에 철학처럼 보이는 것이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혼란을 가져오고 말았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는 공부도 아니라고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좋은 이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것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더구나 그런 상태로 임상에 나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여기에 우스운 것은 실제로 임상에서는 기전을 모르고 쓰는 처방도 효과를 볼 때가 많다는 것이다. 한의학은 사람과 우주자연의 조화를 꾀하는 양생의 술이며 증치를 위주로 하는 진단방법과 전체적인 생리기전을 살피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펴는 철학적 의학이다. 그리고 수신을 외면하지 않는 보통사람의 삶의 의학이다.

    컴퓨터와 한의학
  한의대에 들어 오게 된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기억으로는 재수하는 동안 전에 바라던 공대보다는 인술을 배우고 펼 수 있는 과를 더 원하게 되었던 것 같다. 막연하게나마 한의대를 생각하게 되었고, 어떤때는 의대와 한의대를 놓고, 그래두 의대쪽이 더 많은 치료방법을 배울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도 했지만 여러 여건상 점쳐서 결국 한의대를 택하게 된 걸로 기억이 된다.
  대학이란 곳이 시간과 더불어 기억을 훔쳐가는 곳이라 말하면, 나태한 내 모습만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겠지만, 1년이라는 시간을 고민하고 숙고한 후 결정하고, 이어 발담은 한의대인데도, 입학한 다음 한 일들은 지극히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그래서 얻은 것이 연극과 컴퓨터이다.
  하지만, 컴퓨터말고는 다른 건 다 실패했다는 생각이 든다. 컴퓨터로 성공할 생각은 없다. 그럴 실력도 못되거니와, 무엇보다도 난 한의대를 나와 한의사가 될텐데, 나의 이 최소한의 본분까지 잊어 버릴 만큼 외도를 하고 싶지는 않다.
  컴퓨터는 한의학에 필요한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허준선생님의 동상을 설계할 수도 있고, 한의학 도서목록을 작성할 수도 있다. 도서목록의 하나를 찾아 그 책의 내용을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한의학에 관련된 책들을 번역하거나 자신이 쓴 것을 책상 위에서 출판할 수도 있게 해 주며, 기타 여러 가지를 제공한다. 정보를 멀리서 곧 불러 오기도 한다. 나라 고유의 특징적인 학문의 성과가 현대학문일반속에서 이용되기 위해서는,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 우선 폭넓은 언어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컴퓨터는 필수적이다.
  그저 '한의사가 되면 남들보다 비교적 수입이 좋다'는 금전적인 인식만 널리 깔려져 있을 뿐, 한의학 자체에 대해선 어려운 한자 때문인지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방편으로 많은 원전들을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필수적 방법일 것이다.
  여기에도 문제가 없진 않다. 다른 건 그만두고라도, 우리말로 바꾸어 놓은 문장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얼만큼 이해되느냐 하는 건 번역한 사람의 문장력의 수준에 의존할텐데 한의과대학교육이 그러한 문장력의 수준을 확보해주질 못한다. 한글로 바꿔놓은 문장이 이해안가니 다시 원문을 보게 된다면 번역자체가 별 볼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있어도 그만 둘 수 없는 것이 번역사업이다. 위대한 번역은 결국 나쁜 번역들이 중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얘기하고 싶은 것은 컴퓨터에 대한 것인데, 컴퓨터 한 대하고 프린터 한 대만 있으면 조그만 책은 그때 그때 만들 수 있다. 요샌 출판용 워드프로그램이 있어서 진짜 책같이 만들게 해 준다. (컴퓨터가 좋은 점은 자료를 저장하고, 보관하고 특히 정리하는데에 돈이 덜 든다는 점이다.) 한의학의 발전을 누구 하나가 다 책임진다는 건 거짓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술을 통하여 참여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가지고 있고, 한의학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지만, 구체적 계획이 없이 비싼 노리개로만 사용하고 있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한의학에 대한 나의 소견
  한의학이 무얼하는 건지도 몰랐다. 왠지 한의학 그 낱말에서 풍기는 우리 것이라는 어떤 푸근함, 중국인들도 감탄했다는 허준선생님의 '동의보감'에서 느끼는 자랑스러움, 그리고 의사선생님에 대한 어떤 환상, 이런 것들 때문에 한의과대학에 지원했고 지금까지의 2년을 보낸듯 싶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처음의 환상은 깨어지고, 정말 예전에 나는 오해를 해도 한참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의학이 한의학인줄 알았는데 엄밀하게는 한의학일 뿐이었고 우리의 것을 배운다는 것보다는 열심히 중국의 의학을 따라가고 베껴야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허준선생님의 '동의보감'이나 이제마선생님의 (동의수세보원)에서 우리 조상님에 대한 자랑스러움도 컸고 그 책의 훌륭함에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것은 의술아 천대받던 시대에 대단한 천재에 의한 저술이었을 뿐 장구한 한의학의 역사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빈약한 저술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의사에 대한 철부지같은 환상이 깨져나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충격이 컸다.
  아마 직업중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직업이 의사인듯 싶고, 특히 한의사는 나날이 나아지고 있지만 일반인에게 무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괄시받는 미개척 분야라는데 그 매력이 있는 것이다. 의료 일원화니, 침구사제도 도입이니 하는것이 마음을 심란하게 하지만 우리나라 한의학이 아직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현실때문에 생기는 이모든 바람에 어떤 사명감이 내가슴에 뿌리를 내린다.
  그러나, 한의학을 우리나라에서 주도하고, 저서도 국문이고, 현대적인 체계가 확고히 서있는 상태에서 풍부한 연구자원을 받고, 또 한의학사가 누구보다도 존경받는 입장이라면, 정말 공부할맛이 날텐데 하는 생각이 야누스적인 인간이기에 떠오른다. 그렇치만 현실은 그렇지않은데 어찌하리. 지금보다 20년, 30년전은 더했겟지만 한의학을 대하는 입장이 서부를 개척하는 건맨, 그리고 중세기의 어떤 도를 찾는 수도승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지난 2년간 대학생으로서 할만한 일은 거의 모든 것을 해봤다. 연극에도 미쳐봤고, 폭넓은 인간관계도 나눠봤다. 그러나, 한의학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부끄럽고 창피하게 깡통이어서 그저 그저 한의예과생으로서 교수님과 선배님 그리고 친구들에게 주워들은 것을 가지고 나의 소견을 말했다. 그러니 입학당시의 환상이 깨진만큼, 그리고 그동안의 공부에 대해서 불성실한 만큼, 지금의 한의학에 대해 몹시 목이 말라 있다.
  본과생으로서, 그리고 한의학도로서,내가 할수있는 가능한 지식을 섭취한 후 앞으로 2년후에는 조금은 더 진취적이고 희망적인 한의학에 대한 소견을 자신있게 밝혀야겠다.

    한의학에 대한 나의 작은 생각
  내가 한의대에 입학한 것은 나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직 장래에 대한 꿈이나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아버지께서는 내가 이 길을 택하기를 원하셨고 여러가지 사정이 그렇게 하지않으면 안되었었다. 또 나자신도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온게 그거였고 의사라는 직업이 갖는 어떤 매력이나 보람같은 것과 졸업후에 어느정도 안락한 생활을 누릴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큰 거부감없이 나를 이 길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어쨌든 나는 재수라는 힘든 길을 힘든 길을 걷긴 했지만 한의대에 입학했고 처음에는 굉장히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그러한 희망은 깨어지고 고민과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그 당시 고민은 자기 학문에 대한 회의나 불안보다는 굉장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고민들이었다. 지금은 생각하기 조차 그래서 입밖으로 꺼내기가 싫은 그런것들이지만 그 당시는 그런 문제들이 왜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예비과정을 괴장히 무의미하게 많은 시간을 낭비하면서 보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학문을 한시도 잊어버린 적은 없었다.
  요새는 그런 생각이 자꾸든다. 나는 일단 한의대에 들어왔고 평생동안 한의학을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터인데 과연 한의학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물론 막연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한의학이라는 학문은 나를 너무 실망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생각은 나뿐만이 아니고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부딪쳐본 벽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자신이 한의학을 공부하는 의학도이지만 과연 지금은 한의학을 학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의 공부가 짧고 아는 것도 별로 없기 때문에 뭐라고 확실히 얘기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나의 생각으로는 한의학을 학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모든 면에서 부족해 보인다.
  한의학을 이루고 있는 기본적 바탕이 되는 이론들이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너무 허무맹랑하고 뭔가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을 갖는 것이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이론들이 수천년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이고 또 우리들은 그런 생각들을 쉽사리 이해할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의 방향은 수천년전에는 진리이고 진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천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가 그런 생각들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한의학을 좀더 현대화하고 한의학의 이론들을 좀더 세련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서 버릴것은 버리고 취할것은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고대의 진리가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이미 현대와 동떨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과감히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어도 변하고 질병도 변하고 삶의 방식도 변한다.
  한의학을 설명할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찿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방법은 다분히 현대적이어야 하고 오늘날의 처지와 맞아떨어져야 한다.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방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물론 그러한 방법을 양의학적인 사고나 지식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동서의학의 접목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는 가능성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학문을 좀더 발전시키고 변화된 새모습을 찿기위해서 많은 방법을 모색해야 하며 그러한 방법을 찿기 위해서 학자들 뿐만 아니라 학생 그리고 많은 임상한의사들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만약 영원히 그러한 방법을 찿지 못한다면 한의학의 미래는 밝지 못할것이며 우리들의 미래 또한 한의학과 그 운명을 같이하게 될 것이다.

    내가 바라본 한의학
  한의학은 경험이 총괄된 학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랜 세월동안 질병과 투쟁하면서 얻은 귀중한 경험이 오늘의 한의학을 만든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열매라 할지라도 근본이 없으면 오래 갈 수 없듯이 독특한 이론체계 아래에서 얻어진 경험일 뿐이며 결코 비과학적인 경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우리들 속에서 자리잡고 있는 과학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한의학을 바라보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일면만을 보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미 과학성 너머의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수 있다.
  가령 몸이 열성인 사람에게는 쥬스같은 것이 맞지않는다고 하자! 이를 화학적으로 분석할때 H기(산성)는 열을 높인다고 하고 기타약물을 분석하여 각기 성분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했다해도 과연 이것이 우리가 수천년동안 해왔던 용약에 어떤 영향을 미칠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학문적인 객관화를 이루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으리라 본다.물론 우리의 학문을 외부로 확산해 가고 과학성을 입증하고 만약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다면 보다 현대적으로 고쳐 나가야겠지만 어떤 특징적인 성분이 있다고 하여 그것만을 추출하여 투여한다면 그것은 이미 한약이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돼지고기찌게에 고추가루를 넣고 냉면에 겨자를 넣는 것이 이화학적으로 근거를 따지자면 분명 미세한 근거가 있겠지만 앞에서 말한 섭취방식을 화학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이 된다.
  의학의 특징은 유물론에 근거를 둔다는 점이다. 그런데 동양의 한문에서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중 정신을 강조하는 탓인지 한의학에서는 칠정, 오지, 오신같은 이론으로 정신적인 면을 위에 둔다. 이 점 은 우리 스스로가 경험하고 인정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단순히 노하면 간이 울체된다 하는 식의 서술보다는 인체 순환적인 측면에서 다른 한의학이론을 좀더 응용하여 체계화시켰으면 한다.
  한의학의 기본이론은 역시 음향오행학설이다. 이 체계에 의하여 자연과 인체의 관계를 파악했고, 이 체계에 의해 자연과 일체되는 인체의 모든 기능과 장부의 상호관계를 해석했으며 병리와 진단, 치료등의 의료원칙이 확립되었다. 여기에서 한의학의 우수한 점이라고 할수있는 체질의학이 나올수 있다.
  인체의 순환은 인체안의 현상으로만 설명될수 없다. 때문에 같이 호흡하는 자연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 분명 체질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치료가 행해져야 하고 실과 허의 조화를 맞추는 병을 치료하는 근본이 된다는 것이 명확하다. 
  음향오행학설이 틀에 맞추기 위해 인위적인 면이 가끔씩 보이긴 하지만 우리 의학의 커다란 획을 긋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한의학은 또한 전체 의학적 인식을 기초로 한다. 즉 오장은 육부와 관계를 갖고 또 체표와도 유기적인 상호의존의 관계가 맺어진다. 이 점은 앞의 음향오행설에서도 보이지만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더욱 중요함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병인과 예방에서도 특색을 가지는데 내인, 외인, 불내외인으로 분류하여 병의 원인을 가리고 이에 따라 병을 치료하는 것은 의자의야라는 말을 실감케 하고 하늘과 땅의 기운에 순응하여 그에 맞도록 하여 항상 천지의 기운을 지니도록 하는 한의학을의 생활방식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주의를 가지고 지켜봐야 할 또 하나의 커다란 주제이다.
  위에서 여러가지를 얘기했는데 한의학을 하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안에 담겨있는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도 역시 특징으로 얘기할수 있지만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내포하기도 한 말이다.

    목련꽃 봉오리
  한의학이란 이름에 이끌려 대학의 문턱에 들어서서 어느덧 목련꽃의 봉오리를 세번째 맞이한 지금의 나에게 과연 한의학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또 그런 한의학과 나란 존재는 어떤관계에 놓여 있을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뿌듯함보다는 부끄러움이, 만족스러움보단 보다 큰 아쉬움이 찾아든다. 물론 지금의 나는 입학당시의 나보단 한의학이란 말을 많이 귓속에 담을수 있었고 그런 말에 짧게나마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에겐 제일명제로서 한의학에 대한 일관된 생각이 없다. 어쩌면 이것이 대학생활 2년을 보낸 나로서는 당연할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의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에 맞는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내가어떤사람이 되어가야 하는지, 이런 생각은 나의 위치에서 한번쯤은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내가 학교생활에 불충실해서 이렇다 저렇다 할말을 꺼낼 처지는 못되기에 단순한 나의 느낌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고 싶다. 우선 한의학이란 누가 뭐라해도 의학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그 자체가갖는 본질 그것을 난 느껴보고 싶다. 어느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으로서 진정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부여해줄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이 생명을 시작하면서 할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일 것이다.
  신이 창조한 생명은 그 생명이 무언가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이룰 수있도록 협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넓어져가는 세상에서 한의학의 존재가 흔들림없이 그리고 누구 어느 특정인들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 길을 찾아보고 싶다. 강의중 어느 교수님의 말씀처럼 객관화, 과학화란 말보다 더 원초적인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은 보편화란 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대중이, 아니 대중의 개념을 이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넓혀 그들의 삶에서 같이 호흡할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그들 모두에게 공감될 수 있는데 나의 땀이 떨어졌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난 한의학이 단순한 학문이 아닌, 또 단순히 나를 전문인으로 만드는 도구가 아닌, 나의사랑을 받아줄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며 항상 생활하는 사람이고 싶다. 모든걸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모습이니까. 그런 자세의 생활인이어야만 나의 사랑과 땀과 피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언제나 줄수 있으리라. 이렇게 한의학이라는 것은 나에게 진실되고 가치있는 호흡을 할 수 있도록 의미를 부여해 준다. 또한 이런 존재로 나를 지켜주는 한의학과 나는 언제나 사랑이 오가는 그리고 존중해줄 수 있는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끝으로 모든 생각은 실천으로 표출되어야 살수있다는 것을 아는 나로선 지금의 학교생활에, 내가 존속한 사회생활에, 나의 존재를 아는 모든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할 뿐이다.

    마이웨이
  세상에는 질병으로 인해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선택한 한의학의 길로 들어선지 이제 어언 3년이 되었다. 지난 2년 동안 한의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배웠으나 확실한 개념은 아직도 확실히 서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피상적으로 생각해왔던 한의학의 위치며 한의학의 발전에 대한 처음과는 달라진것 같다. 
  사회에서의 양의학과 대립하며, 여러제도상의 위치, 무한한 탐구와 생각을 통한 한의학의 습득 등 많은 어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흔히 말하듯 한의학은 철학적인 바탕위에 세워진 의학이며 서양의학은 사실검증의 과학적인 바탕위에 세워진 의학이라 한다. 그래서 현대 서양과학 사상에 물들어 있는 우리들의 한의학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과학의 범주에서 해결될수 없는 것에 대해 신비롭다든지 미신적이라든지 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부에선 한의학에대해 과학적인 인식을 부여하고 객관화시킬려는 노력을 많이하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한의학이 올바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의학은 기본틀이 과학적인 해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의학에서는 자연과 사람을 동일시하고 사람을 자연의 일원으로 자연에 순응하는 방법의 치료를 강조하고 있어 이러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충분한 동양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며 한의학의 과학적 인식은 새로운 의학의 창조만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널리 사람들에게 한의학을 인식시켜주고 긍정을 얻어 낼수 있는 한의학의 보편화를 통하여 한의학의 발전을 꾀하여야 할 것이다.
  한의학의 보편화란 한의학의 확실한 개념정리를 통해 문헌적으로 표현되는 것아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연구와 생각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과제가 있는 것이다. 한의학에 대해 배워온 날보다 배워나갈 날들이 훨씬 더 많은 지금 무엇이 어떻다고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단지 나는 그렇게 느낄 뿐이다.

    신의
  우리는 평상시 생활속에서 문득 진귀한 것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진귀하다라고 말하면서 이미 정의내려져 버리고 말기에 진귀함은 본래 진귀함을 잃고 실존하지 않는 허명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허명은 생겨나게 되고 그것은 질기고도 긴 시간의 수레바퀴 안에서 더욱 큰 허명을 만들어낸다. 
  노자는 옛날에 기가막힌 말을 남겼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한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회의에 빠질 때가 있다. 
  한의학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해답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는다. 수학의 고리처럼 어떤 공리를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담배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담배꽁초와 소주병과 함께 뒹구는 한의학도여! 나는 한의학을 공부하는 방법을 이렇게 모색해 본다. 
  첫째, 사물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만일 사물에 대해 정의를 내려버리면 그 사물은 그 범주를 넘어서기 어렵게 되어 도리어 자신까지 그 사물에 얽혀 '물에 물이 되고 만다. (얽매여 버리고 만다) 라는 장생의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현대의학은 너무 쉽게 대상의 가능성을 규정하고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수신해야 한다. 자신이 닦이지 않고 남을 구제함은 여태 본적이 없다. 사람은 가끔 자신을 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 곧 자신의 위치가 그 사회에서 선이 되는지 악이 되는지 알아서 그 마땅한 자리로 옮길 줄 알아야 한다.즉 한의학을 하려면 뜻을 굳게 해야만 한다. 수신하려면 성의정심해야 함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는 자는 드물다. 한의학을 하는 데 달리 방법이 없는 듯 싶다. 몸이 닦여 천과 지의 기운이 몸안에서 교구됨을 느껴야만 옛 성현들의 말씀을 체득할 것이니 달리 무슨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한의학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성의정심에 힘써야 할것이다. 우리는 신의에 뜻을 두어야 한다.

    3년의 세월 
  한의학과에 들어와서도 공부한지도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한의학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마치 안개속을 해매고 있는 것만 같다.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등등 참 많은 생각을 해 보았지만 명확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내가 많은 생각을 했던 부분들을 대충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커리큘럼에 많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자연과학적 사고만을 연습해온 학생들이 갑자기 한의학을 하기위해 동양철학적인 사고를 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혼동을 가져온다. 그러한 혼동을 최소화해주기 위해선 예과과정에서 동양적사고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많은 시간이 할애되어야 할텐데 지금의 과정은 그렇지 못한것 같다. 먼저 자연과학의 기초라 할수있는 물리, 화학 등을 배우는 대신 한의학개론, 한문, 의학사, 동양철학,경서 등을 배우는데에 무척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한의학을 할수있는 기초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의학을 해야할 사람이기 때문에 동양적사고의 숙달이 필요한 것이지 양방과목들이 급한 과목은 아닐 것이다. 우리 한방의 가초가 확실히 섰을때 비로서 양방을 첨가시킬수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자기 전공분야의 기초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더 많은 양방과목의 압력으로 인해 이도 저도 아니게 되고 뭔가 짙은 안개속에 헤매는 것처럼 한의학에 대한 막연한 신비감만 더 들고 자연히 흥미만 더 떨어져 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예과때의 교과목들은 학생들이 빨리 한의학에 흥미를 느끼고 또 정확한 이해와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고 한의학의 기초를 공고히 할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시급히 바꿔져야할 것이다.

    짬뽕
  서양의학이 서양철학에 근거를 두었다면 동양의학은 물론 동양철학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음양오행, 오운육기등 다시 말해서 제각기 그 과학을 탄생시킨 고유한 세계관이 있는 것이다. 지금 교육은 동서 짬뽕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서양의학은 지근이 1990년대라는 시대적인 이유에서라도 우리가하는 동양의학에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심이 흔들린다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표식이 아닌 그 안을 깊이 파고 들어야 하겠다. 
  동양의학, 한의학은 느깜과 직관의 학문이다. 그래서 (주역)이라는 참고서에서 계발된 나만의 눈을 가지고 남들속의 나를 보고 그래서 혹 환자를 보더라도 있어야할 그 사람의 참 모습을 바꿔줄 수 있는 엄청난 일을 내가 할수 있지않을 까? 물론 의학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이 동반되어야 하겠다. 
  이제 첫걸음마를 하는 본1의 입장에서 가능성과 동시에 방황을 하게 되는데 나의 입장은 한방의 과학화보다는 전통의 고수(?)쪽이다. 동양과 서양의학이란 사실 시대에 따른 표현벙식의 차이일 뿐 크게 어떤 새로운 범주를 뛰어 넘는 새로운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될 것 같다.
  한방의 과학화란 예수의 제자 도마와 같이 어떤 의심에서 시작한다. 전혀 방향이 다르고 괴논리라고 생각한다.

    한의학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에서의 고민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에 나는 본1이 되며, 이만큼의 미숙한 걸음마상태에서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 자산과 우리 학도들에 대해 반성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어찌보면 3년째나 공부하고 있는 한의학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이해했으며 진정 우리는 바른 길을 걷고 있는가? 나를  포함한 우리 급우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부분.  안개속을 걸으면서도 뒤뚱걸음이나마 앞으로 가고자 하는 이 많은 상들.
  지금 우리는 무언가를 빠뜨리고 달리는 망아지같다. 그것은 바로 한의학의 기초이며 우리는 기초를 다지는 방법론을 다시 찾아야 한다. 내가 3년째 한의대 생활을 하면서 그 기초정립에 장애가되는 네가지 문제점을 밝혀 보고자 한다. 
  첫째, 주체적이지 못한 교과의 배정이다. 지금은 없어진 물리학, 아직도 존재하는 수학이나 유전학등 고교과정에서 골에 박힌 서구적 사고를 벗겨내야 함에도 이런 부담스러운 과목으로 사고의 혁신을 이루지 못하며, 여기에 덧붙여 미생물학 교수님처럼 그 많은 용량을 예습, 복습과 더불어 열심히 하기를 강요한다면 그나마 벅찬 우리에겐 가슴에 얹힌 큰바위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둘째, 주입식 교육방식의 전철을 밟는 현실이다. 힌의학은 그 학문이 포괄적이고 광범위한데 그것을 짧은 교육과정에서 가르치려는 부담으로 인해 우리는 배운 것을 이해할 학습보다는 우선 외우고 본다. 물론 우선 외우야 한다는 교수님과 선배님들의 말씀 에 타당성은 인정하나 어딘지 의문이 간다. 보다 효율적인 학습에 대한 교수님들의 연구가 너무 부족하다. 제각기 교수들은 학생들의 암기만을 빙자해서 교실에 들어오는대로 설사만을 싸지르고 니갈 뿐이다.
  셋째, 위의 모순으로 인하여 선배들은 한의학에 대해 주체적 수용에 흠이 있게 되고 따라서 후배들을 이끌어 가는데 밝은 길을 제시하지 못하므로 해를 거듭하여도 기초정립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교수님들 간에도 학설이 분분하고 선배들마다 그저 자기 주관대로 후배들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그 요구대로 실행하려면 밤잠을 없애든지 한의대를 12년제로 해야할 것 같다.
  넷째,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 스스로의 문제이다. 우리 한의학도들은 의과대학과 차이는 많이 나지만 한의학을 쉽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진정한 한의학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자격증 취득을 위한 한의학도가 된 것처럼 보인다. 또 앞서 언급했듯이 너무나 넓고 넓은 학문을 실감한 나머지 스스로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즉 수십 년을 연구한 끝에 위대한 처방을 남기신 위대한 선현 명의들과는 달리 고속화 시대에 맞춰 빨리 얻어지는 게 아니면 취하지 않는 습관이 있다.
  지금까지 미약한 수준에서 학도들의 기초정립에 장애가 되는 몇가지를 지적했지만 앞으로 더깊은 사고로 이런 모순의 개선을 위한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우선 생각해보면 교과과정에서 필수과목 육성을 위해 비필수과목의 삭제 또는 시간 감축정책을 써야한다. 또 한의학의 정보를 고등학생레벨에 까지 보편화시킴으로서 예비지식을 어느 정도 습득하고 참으로 한의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한의학도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또 한반도에서 자생할 수 있는 한의학을 만들어 기초를 다지는 작업을 보다 의미있게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한의학도는 이 땅에서 한의학의 생존을 짊어진다는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길게 보며 끝까지 학업에 매진하여야 한다.
  한의학도여! 자본주의 병폐에 찌들어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역활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무한대여!
  내가 처음으로 한의학을 접한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이다. 나는 처음으로 동양철학에 대해서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러니 한의학은 나를 매우 실망시켰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름답고 좋아 보았던 것이 막상 울타리를 넘어서 안으로 들어오자 여러 모순들이 드러나면서  무척 실망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나를 실망시킨 것이 무엇이냐를 따져보자. 지난 2년 동안 배운 내용들은 너무 편협하고 한의학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또한 선배님들을 보면 자기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학문의 발전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한의학은 헤쳐나가야 할 문제점들을 가득 안고 있다. 나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이러한 문제들을 헤쳐나가야겠지만 아직은 어리고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에 무척 힘들다.
  난 한의학을 이렇게 생각한다. 자연에 순응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고 이 도를 어겼을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병과 증상을 다시 자연에 맞춰 순응시키는 것 즉 병을 고치는 것이라고. 동양학문의 본질은 자연이다. 화초가 살지 못하는 곳에서는 분명 인간도 살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한의사 여러분이 치료방법을 개선하여 투약과 침시술 보다는 예방의학을 위주로 해야 할 것이며 기존의 한의사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환자를 보다 끌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환자가 의원을 찾아오지 않도록 할 것이다.
  '내경'에 밀하기를 음양에 법하고 술수에 조화되고 음식을 절도있게하고 거처는 일정해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니 이러한 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이러한 현상들이 어떠한 이유에서 생겼을까?
  첫째, 대학에서의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과정으로는 한의학의 이해는 커녕 오히려 한의학이란 무조건 외우는 과목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암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막상 그 뜻을 물어보면 명확한 대답이 없을 뿐 아니라 교수님들 마저 제설이 분분하다. 구체적으로 한의학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인 개론시간이 너무 적다. 그리고 교수님들의 강의방식이 너무 단조롭다. 솔직히 말해서 교수님이 책을 낭송하고 있는 것인지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작년에 했던 강의를 올해도 또 낭송하고, 이러니 무슨 한의학의 발전이 있겠는가? 
  둘째, 한의학에 관하여 너무 어렵게 설명하는 것 같다. 본질이 장악되지 못한 탓이니라. 
  셋째, 나 자신이 속물화되어 가는 것 같다.
  한의학은 서양의학과 나란히 서서 이 세상의 병을 고쳐나가는 엄연한 역사의 기둥이다. 동양수천년의 역사가 있다면 그와 함께 숨쉬어온 한의학은 살아있다. 결코 동양과 서양의학은 일원화될 수 없다. 어떤 분은 일원화를 주장하지만 우리의 의학이 서양의학의 여러 가지 방법과 도구를 받아 들여야지 결코 서양의학으로 병합,흡수될 수 없다. 여태까지 진탕 무시하고 멸시해놓고 요즈음 한의학의 뿌리가 잡혀가면서 사회적으로 돈이 되다고 하니깐 그것을 잡아먹으려는 파렴치한 계산이 양의사나 약사들에게 깔려있는 것이다. 일원화를 말하기 전에 의대나 약대의 기존 커리큘럼에 한의학과목을 반이상 설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타협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너무도 상식적인 얘기가 아닐까? 
  이 모든 자연법칙을 담고 있는 한의학은 내가 사랑하는 학문이며 앞으로 무한대의 가능성을 지닌 학문이다.

    반성속에 피는 한의학
  나의 생활에 한의학이 함께 자리한 지도 어언 5년이 되어간다. 입학 당시의 희망들은 이제 한의학에 놓인 현실에 직면해 문제상황으로 남아 있다. 아직은 미개척 분야로 여기고 뛰어 들었던 많은 학도들은 지금의 의료일원화를 비롯한 외부의 문제와 더불어 안으로는 한의학의 새로운 발전이라는 과제를 눈앞에 놓고 있는 현실이다.
  한의학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이런 문제들을 도외시하고 혼자만의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동아 볼 때 후회만 남는다. 그저 어떻게 되겠지하는 안일한 생각들은 자신을 더욱 게으름의 타성에 젖게 하고 민주화의 흐름이란 미명하에 자유가 아닌 방종으로까지 흘러버린 지난 날의 나의 모습을 볼때 모두가 이율배반적인 행동들이 아니었는가 싶다. 겉으로는 무엇 무엇을 싸워야 한다 하면서 안으로는 자신의 안일만을 찾았던 시간들, 이것이 모든 한의학도의 발자취가 아닌 나 개인의 자취이길 바랄뿐이다.
  우리의 현실은 입모아 떠들고 있긴 하지만 내 피부에 직접 와 닿지는 않는다. 물론 그러한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못한 내 잘못때문이겠지만 하여간 피상적으로 느끼는 양의와의 갈등, 약국에서의 한약판매 등의 문제들 뿐이다. 휴학시절 경동시장에 있는 한 전재상에서 일할 때 느낀 것인데 한약방을 개업할 때 약사가 있어야 한다든지, 약을 취급하는데 한약에 대해선 어찌 보면 문외한인 듯한 그들을 통해야 한다는 (이는 일부일지도 모르지만)그런 점을 볼 때 이대로 가면 과연 우리의 자리는 무엇이 남겠는가 하는 우려가 앞선다. 또한 유통구조에 있어서도 전근대적인 면들이 많이 보여 개선이 필요하다 생각되다. 
  한의학에 대한 앞으로의 목표를 나의 견지에서 볼 때에  첫째는 안으로의 힘을 기르는 일이라 하겠다. 이는 물론  풍부한 지식과 탁월한 실력을 이름이다. 내적 실력이 없고서는 어떤 문제를 놓고 해결하려 해도 자격미달이 될 뿐이다. 최후로 살아남는 것은 실력과 진실이다. 둘째로 한의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유대강화를 들 수 있다. 어찌보면 한의학도들의 수는 아직도 소수다. 소수가 모였을 때 버틸수 있는 힘을 결속력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면이 잘 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모든 면에서 우선되어야 할 것은 한의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일일 것이다. 한방하면 보약을 떠올릴 정도로 한방은 많은 사람과 쉽게 접근되고 있지만 그들에게 진정한 의료혜택을 얼마나 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앞을 가린다. 아팠을 대 쉽게 한의원의 문을 두드릴 수 있도록 하려면 보약을 우선하는 사고보다는 치료약을 더욱 연구발전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예과생활을 마치고 본격적 한의학의 길에 접어든 본과 1년이 지난 그 동안의 잘못되어진 생활을 반성해 보며 나의 조그만 노력들이 한의학의 앞날을 비출 수 있는 등불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면서 한의학을 사랑하는 동료들의 전진해 나가려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 동안 과일에 충실하지 못했음에 반성하면 자신만을 위하는 생활이 아닌 한의학의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 노력하는 자세를 갖도록 노력하겠다.

    사심과 잡심
  한방에 관심을 갖게 된 때는, 학교를 떨어지고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였다. 부모님이 잘 가시는 한의원이 있었는데 그 한의원을 찾는 별의별 환자들이 효험을 보는 것을 목격하고 이것은 뭔가 연구되어야 할 것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입학한지 올해로 3년째다. 예과때 나름대로 경서도 본다 (내경)을 본다하며 법석을 떨었고,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한방을 제대로 살리는 것인지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지금의 나의 한의에 대한 생각은 우리 조상들의 유구한 시간에 걸쳐 축적해놓은 생활 속의 의학이라는 것이다. 물론 항간에서는 이것을 미신적이라 하여 과학화를 주장하고 있으나 이미 우리 생활 속에 이처럼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 오히려 바로 그 과학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민간요법으로서 그 학문적인 체계가 잡혀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도 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 한가지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다루는 의학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것 입는것 사는곳 이 모두가 인간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일찌기 깨달은 것이었다.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을 분리시키지 않은 것이다. 또한 치료보다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병을 예방하기 위해 평소의 섭생과 절도있는 생활, 감정의 젤제등을 주장하였다. 
  한의는 철학적인 체계를 임상에 응용하였기 때문에, 우리 정신의 작용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는 서양의 사고방식으로 공부를 해 왔기에 이러한 사고방식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느낀다. 그러나 한의학을 배우면서부터 나는 좀 더 우리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한 인간이 커 나올 수 있는 환경, 즉 자연과 그 기후, 꽃과 동물들 또한 사람들과 풍습, 이 모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요즘 한방의 과학화를 부르짖으면서 어정쩡하게 양쪽을 이어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도 한방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지도 모르나 아직 나의 미미한 수준으로는 웬지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나는 얼마전 한 노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자신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을 누군가 가르쳐 주기만을 바라고 쉽게 불평만을 늘어놓고 있다고 그 말씀을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다.지금 당장 행동으로 실천해 보고 깨달을려고 노력을 해야지 이런 강의실에서 기계적으로 앉아서 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감히 무례한 생각도 해보았다. 나는 한의에 전혀 미신적인 요소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 미신적인 요소까지도 우리 인간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하는 생각이 들며, 고대 선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낳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봄이 오면 다시금 깨달을 것이다. 마음 깨끗이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인간을 대할 때 사심과 잡된 마음으로는 그대로의 모습을 결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한의사가 되어 하고 싶은 것은 한방을 좀더 민간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려 자신들이 자신의 별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하며 특히 주부들의 식생활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 나가는데 노력하고 싶다.예를 들면, 세상이 나쁘다고 하는 편식이야말로 좋은 것이며, 편식에도 도가 있다는 등등.

    한의학의 모퉁이에 서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한의대를 들어온지가 벌써 두해 세월이 흘렀다. 어제만 해도 가장 저학년으로 선배들의 도움과 사랑을 받았는데 이제는 선배라는 입장으로서 후배들에게 사랑과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지워졌다. 
  갓 들어온 신입생들이 우리에게 한의학은 무엇이며 그것을 가장 잘 알기 위해 우리들이 해야하는 일들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여야 하는지 곤란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닐 것이다.하지만 2년이라는 어설픔과 귀동냥으로 얻은 지식을 총동원하여 한의학의 정의와 목표를 나의 주관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한번 기술해 보고자 한다.
  대학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내가 배우는 학문이 무엇인가? 또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목표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라는 것들이다. 먼저 한의학은 무엇인가? 요즘같이 서양의 문화가 대중적으로 번져있는 이때에 이 학문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일까? 선인들은 질병을 어떠한 방법으로 예방, 치료하였는가? 라는 질문에는 한의학의 기원, 정의가 들어 있다 할 수 있다.
  '내경' '이법방의론'에 보면 지역에 따라 질병의 치료방법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이 한의학은 지역의 기후와 지세풍토에 따라 그들 고유의 사상과 철학을 접목하여 가장 알맞은 치료방식을 찾아냈을 것이다. 처음은 유치한 방법이었지만 이것이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실수와 성공의 경험을 거치고 그때 그때의 생각을 도입하여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었고 치료방법의 피라미드를 쌓았다. 이것이 동양의학 곧 한의학의 특징이다. 혹자는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다.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지만 한의학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지금의 내가 100% 자신을 보일수는 없지만 강력하게 주장은 할 수 있다.) 지금의 과학은 연역적 방범에 의해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즉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고 집중하여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한의학은 귀납적인 방법의 두가지가 있을 수 있다. 서양의학은 연역적 방법, 즉 가설을 세워 그것을 입증하는 서구라파 자연과학의 방법과 궤적을 같이한 것이고 동양의학은 귀납적 방법, 즉 경험의 사실을 토대로 그것을 거칠지만 느낌 그대로 엮어 구성해나간 것이다.
  다음으로 한의학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치료일 것이다. 여기서의 치병은 예방과 치료 두 가지 면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한의학을 배우는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나자신의 한의학 공부의 방법과 목표를 기술하고자한다. 나의 진정한 목표가 생긴 것은 동양의 고전인 '사서'를 보기 시작하면서이다. 이렇게 의미깊고 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나는 책을 접해 본적이 없다. 여기에서 나는 한의학공부의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한의학을 가장 잘 이해하려면 동양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동양사상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서'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잇다. 고전학의 바탕이 없는 동양학이나 동양의학은 순엉터리다. 
  '논어'에, 배우고 나서 생각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하듯이 배움과 생각은 언제나 병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나의 지금 과정의 작은 목표며 방법이다. 더 큰 목표는 이를 바탕으로 많은 옛 한의학의 서적을 읽고 이해하며 지금의 새로운 의료방법과 접목하여 더욱더 새로운 경지의 의학으로 발전해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모두 달성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의 다하는 과정에서 나는 후회없는 한의학을 해나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술한 내용이 지금 현상태의 한의학에 대한 나의 가장 중심적인 생각이며 나 자신의 결심이다.

    믿음을 주는 한의학
  나는 어려서부터 의사가 되고 싶어했다. 나이가 들면서 양방보다는 한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한의학의 신비에 관심이 끌린 것이었다. 그래서 한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예과 1,2학년을 보내는 동안 약간은 내가 너무 신비감에 젖어있지 않았나 하는 회의가 일기도 했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우리가 계속 서양의 물질과학적인 교육을 받은 우리의 사고체계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새로운 동양적인 사고를 접하게 되어서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같은 상태로 계속 나간다면 내가 졸업을 하고 나서도 한의학에 대해서 정말 아는 것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다. 이제 본 1이 되어서 한의학의 전공과목들을 공부하게 되면서 이런 걱정과 고민이 더욱 가시화되는 것 같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학문을 단 몇년에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분명히 무리일 것이다. 내가 생각해 보건대 한의학은 수천년동안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형성된 하나의 경험적 의학이라고 생각한다. 그 같은 오랜 기간동안 다듬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말 서양의학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뛰어난 의학이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너무 완벽해져서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현재에 와서는 별 발전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수침이나 전기침들이 개발되었으나 이런 것은 한낱 과학의 힘을 빈 약간의 변조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런식의 발전은 우리 한의학 자체의 문제점이다. 그리고 그저 자격증만 따면 된다는 식의 안일한 태도가 앞날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생각은, 우리가 교육받아온 과정대문에 우리는 가시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는 반면, 한의학은 그런 가시적이고 명확한 체계가 없어서 우리가 공부하기가 더욱 힘들어지는 것 같다. 누구나가 한의학에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러한 매력은 단편적인 신비감(눈에 보이지 않는 경락에 의한 침구치료등)에 다름아니라 생각한다. 그들은 호기심과 매력은 느낄지 몰라도 진정으로 우리 의학을 높이 평가하고 신뢰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결국 우리 자신의 과오와 노력부족을 귀결되게 된다. 한의학에 대한 전문교육을 받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노력부족이라고 본다.
  내가 볼 때 우리 한의학은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본다. 과학적인 실증과 체계화된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 한의학을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공유하게 하고 신뢰감을 심어주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좀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서 말한 그러한 것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활발히 진행중이라 듣고 있지만  우리와는 아직 거리가 먼 것 같다. 우리들은 좀더 새로운 세계관의 본질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 길만이 우리자신의 의학인 한의학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길일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기에
  한의과 대학에 입학한지 2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나의 행동에 대한 반성과 동시에 한의학에 대한 나의 생각을 쓰려한다. 멋도 모르고 지내온 2년이란 세월이 아깝기만 하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아쉬움속에 나 자신을 관조해본다. 앞으로 남은 날들을 생각하면 희망차기도 하고 또다시 전철을 밟을까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전자의 길을 걷기로 다시금 다짐해 본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는 한의학계는 일반국민에게 보편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장 문제가 된다. 한의하겡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한의원하면 보약이나 팔아먹는데고 정력이나 키워주는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이런 문제점을 볼 때 현 한의원을 하시는 분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요새는 많은 서적들이 나오고 있지만 좀더 알기 쉬운 한의학에 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야 하겠다. 한의학은 동양철학에서 온 학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동양철학에 대한 어떤 관을 정립할 수 있는 제대로된 교육을 받고 있질 못하다. 한문서적들이 너무 난해한 표현으로 되어 있어 알기 쉽게 씌어진 책이 많이 나와 어떤 관을 정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다음으로 양방과목과 한방과목을 둘다 배우고 있는데 예과때 어떤 관이 서도록 한의학의 전반에 대한 학습이 필요한 것 같은데 너무 양방과목에 치우쳐 있는 듯하다. 한의대에 다니면 한의학적 사고로 환자를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진단은 양방으로 치료는 한방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런 점도 한의학의 문제점이다.
  마지막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주관을 가지고 한의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한의학 입문
  남들은 한의학을 비과학적이라하여 비판한다. 난 그들에게 묻고 싶다. 무엇이 비과학이고 무엇이 과학인지 그 명쾌한 보더라인을 보여다오!나에게 있어서 한의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도 우수하고 또 가장 친근하게 다가오는 학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한 기리요, 한의학을 배워서 나중에 한의사가 되는 것이 내 운명이므로. 이제 겨우 한의학에 입문한지 3년째이고, 진정한 출발인 본과는 이제 겨우 몇주가 흘렀을 뿐인데 한의학외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만큼 그 속으로 몰두하고 있다.
  한의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한의학은 인간이 건강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양에서 오래전부터 시도된 노력이다'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동양으로 지역적으로 한계를 두긴 했지만 (사실 동. 서양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지역에서나 건강하고 싶은 욕구는 있으리라고 본다. 이런 욕구를 조금이나마 덜기위해 노력한 여러 인물에 의해 오랜 세월동안 형성된 학문인 것이다. 이런 한의학은 내 생각으로는 경험을 통해 이룩되었기에 어떤 학문보다 과학적이고 실험적이라 말하고 싶다. 눈에 보이는 체계적인 자료가 있어야 과학인가? 명백한 사실적 결과가 있지 아니한가?
  한의학을 사랑하고 한의학에 심취하는 사람은 한의학의 비과학성을 비판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한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에 조금씩 나의 사고를 좀더 한의학적으로 돌리려고 노력중이다. 한의학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나의 고정적인 틀을 깨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한의학은 양의학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체질에 맞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의학은 깊은 이치를 갖고 있으며 긴 세월을 통해 이루어져서 많은 경험이 그 안에 들어 있다고 본다. 물론 한의학도 문제점이 있다. 너무 방대한 양이기에 전부를 시모있게 다룰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내 생각으로 모두 조금씩 맛보기 보다는 한 분야를 확실히 공부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 지금 우리가 배우는 한의학은 너무 많은 양의학 도입으로 인해서 올바른 인식이 어렵다고 느낀다. 많은 양방과목, 그리고 한방의 양방적이 해석으로 인한 올바른 이해불능등이 지금 현실인 것이다. 사실 처으의 상상 속의 한의학은 이미 다 사라지고 그저 어느 쪽으로 답해야 하는지 갈등하는 나 자신이 되어 버린 듯하다.
  한의학에 바라고 싶은 것은 주체성의 확립이다. 양방을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라 한방의 주체가 되어야겠다는 것이다. 꼭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신감을 가져야겠다. 우리는 한의학을 배우는 것이 자랑스러워야 한다. 더 나아가 완벽하게 한의학을 이해할 수 있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한의학은 아직 나에게는 가깝게 와 닿지는 않지만 더 다가서야겠다는 욕구를 이제는 느낀다. 본1이 되어서 느끼는 지금 생각은 이제 한 번 한의학을 한의학적으로 대해보고 싶은 것이다. 내가 내 젊음을 다 바쳐서 얻는 것이 있다면 한의학적 지식과 환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마음가짐과 환자를 고치는 힘이길 바란다.
  나는 이 길을 걷는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충실히 이 길을 걷다보면 무언가 얻겠지. 길고 험하고 아직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과학이란 자기환경 인식체계
  대학에 들어 온지 어언 3년째가 된다. 나에게 일어난 큰 변화는 물론 다름아닌 동양의학을 알게 된 그 자체일 것이다. 솔직히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의 진학은 지금 생각해보면 우연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선택에 있어서는 별다른 후회는 남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지금 공부에 절대적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내가 선택한 이 길은 지금은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상당한 그 어떠한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느낌이 조금씩 들기 시작한다.
  내가 생각하는 동양의학은 너무나 과학적인 것이다. 물론 과학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 들이냐의 차이에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과학이라는것은 나를 포함하는 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자기화경 인식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동양의학은 그 자체가과학이며 다만 그 방법으로 철학체계를 채용했을 뿐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며 또한 자연의 축소판이라는 전제하에 동의학에서는 그 이론을 전개해 나가며 체내현상을 철학적방법 특히 음양, 오행이론으로 풀어 나가고 있다. 이 얼마나 과학적인가? 과학은 분명 '기준의 정립에 따라' 우열의 구분은 있을 수 있으나 과학에 있어서 동, 서가 있을 수는 없다.
  우주에 있어서 천지인의 상호관계를 규명하고 천지인의 조화 속에서 삶을 영위해 나아가게 한다는 이런 말로서 동의학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고 할 수 이을까? 물론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산업의 급격한 발달로 파괴되어 가고 있는 자연속에서 옛날의 그 방식대로 이론을 고정시킨다면 문제가 있을 것이다. 즉, 지금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새롭게 규명하여 네오(neo) 천인상응설에 맞추어 이론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다. 변하는 것이 도요, 그 변화를 맞추는 것이 바로 덕이다. 그래야만이 동의학의 이론체계에 묘미가 있을 것 같다.
  증상은 같되 치료방법이 각각 다른 것, 이것이야말로 포괄적이고 정확하고 또 그리고 의학이론이 아닐까?

    나에게 있어서의 한의학
  대학에 들어온 지도 3년이 접어 들고 있다. 예과 2년 생활을 마치고 본과에 들어온 것이다. 처음 입학한 결정할 즈음에는 한편으로는 신비감에 한편으로는 비과학적이라는 우인들의 비판에 나 자심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의학이라는 거대한 주제앞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았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어찌할 줄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내경'을 공부하는데도 한번 보았을 때는 정신없이 보았지만 다시 보면서 서양적인 사고로 이것은 틀릴텐데 하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구절 하나하나에서 각 부분마다 논리가 어긋나 있는 것을 보고 괜한 비판도 하게 되는 것이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지엽적인 것에 억눌려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사고의 전환, 인식의 전환이라는 가장 필수적인 능력이 없는 것이다. 동양철학을 이야기한다는 책들도 대부분 서양적 기술방법, 연구 방법에 의해 씌어진 작품이라는 회의에도 빠지고 큰 줄기를 못잡는 것이다. 본1때 가장 많은 고민을 한다고 선배들이 말한다. 그들은 다른 방향을 모색해 보기도 하나 대부분은 교과목에 붙잡혀서, 학점에 붙잡혀서 그냥 그대로 보낸다고 한다. 몇몇은 한두번 유급하기도하고 휴학하기도 하면서 고민이 지나가기를 바라고 그러다 보면 암기와 임상실습을 하는 시기로 넘어가 자격증을 따게 된다고 한다. 현 한의사들은 학부떄 했던 고민들을 모두 해결했을까? 나도 얼마 안가 이런 고민들을 저 깊은 구석에 밀어 둔채 부분부분의 눈가림식 공부만할 것이다.
  한의학은 우주와 자연에 대한 포괄적 이식의 학문이다. 이는 고대 중국인의 사고속에서 형성되어 왔고 우주-인간 일체의식 속에서 출발하여 도교, '주역'의 영향이 가미된 것이다. 이는 과연 현대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런 역동적인 사회, 천과 지의 움직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지금,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고대에는 천이 동한다하여 양의 대표로 삼았고 지는 정한다하여 음의 대표로 삼았다. 그러나 과연 천은 동하고 지는 정한가? 물론 천이 동하기는 하지만...
  현재의 병은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급성적 병도 상당히 많고 응급수술을 요하는 사고도 많아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한의사, 한의원이 할 일이 전통적인 치료 범위내에서 머물러야 할 것인가? 이제 한의원도 병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단순한 한약방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병원이나 한의원중 아무곳이나 가까운 곳으로 갈 수 있는 장소로 되어야 한다.
  '내경'을 뛰어 넘는 의서가 없는 지금 우리 의학의 역사는 '내경'의 각주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경'의 근본정신은 존중하면서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부분부분을 부정해 나가면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열한 정열이다. 끊임없는 탐구이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열한 정열이다. 끊임없는 탐구 정신과 불굴의 노력으로 과거의 이론들을 치밀하게 검증해 나가야 한다. 과거 고전의 권위를 파괴하는 과감한 행도이 한의사들의 새로운 인식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이러한 수준있는 학인들이 많이 졸업을 할수록 한의학계는 더욱 위상이 높아지고 한의학은 더욱 그 정수를 빛낼 것이다.
  한의학은 형이하학이다. 아무리 형이상학적 설명 방법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분명한 형이하학이다. 이런 형이하학을 공부하는 데는 반드시 암기가 필요하고 실제적인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한의학은 수천년의 역사가 어우러진 우수한 학문이다. 아무리 공부해도 티끌만 얻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얻을 수 이는 최대한의 것을 얻어내야 한다. 아무리 한의학을 전부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할 수 있는 한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앞으로 남은 4년! 이 4년이 지난 후에라야 내가 과연 이 길을 잘 선택했는지 감이나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예과생활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한의대에 들어온지 어느새 2년이 지나고 본과생이 되었다. 올해부터는 웬지 반의 분위기도 달라진 것 같고 학급 아이들도 진지해진 것 같다. 항상 새학기가 되면 모두들 마음의 준비도 새롭게 하곤하지만 올해는 특히 더! 본과생이 된 탓일까? 지난 2년동안 예과 생활을 회상해 보면 정말로 후회가 많다. 2년동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하고 요즈음 곰곰이 생각해 보곤 했는데 수업시간에도 그렇다고 평상시에도 나의 한의학에 대한 기초를 전혀 닦지 않았던 것 같다.
  본과 2학년에 공부를 열심히 하기위해서 휴학까지 한 언니가 있는데 처음엔 그걸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선배님들도 그들이 나와 같은 학년이었을 때 이런 고민들을 나와 마찬가지로 했다고들한다. 그러나 설마 나처럼 이런 정도는 아니겠지 한다. 정말로 지난 예과생활이 너무도 아깝고 지금에 와서는 흐지부지 보낸 내 자신이 밉다. 하루에도 몇번씩 도대체 한의학에 관한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고민이 내 마음을 죄어온다. 그러나 이 무궁무진한 한의학을 2년간 했으면 얼마나 했을 것인가? 또 무엇을 했을 것인가? 이제부터 시작이 아닐까? 이제 한가지 한가지를 체계적으로 풀어나가고 탐구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또다른 이야기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의과대학 6년, 6년동안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길래 곧바로 입상가로 뛰어들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6년이란 기간은 너무나도 짧은 기간이다. 6년만 지나면 사람의 생명을 정말로 다룰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정말 이런게 궁금하다.
  물론 정말로 책임의힉과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고 심취하는 학생들도 많다. 반면에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고 좀더 놀고 싶어하는 학생들도 많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고귀한 일인데,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어쩌면 6년은 정말로 덧없이 짧은 기간이다. 하물며 후자의 경우는! 이것은 우리 한의학 뿐만 아니라 양방의사의 경우도 포함된다. 사실 생각해보면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의 불행한 자들인지 모른다. 질병을 안고있다는 것 자체도 불행한 일인데 이런 불확실하고 위험한 곳으로 자기자신을 맡기게되니 말이다. 인간사회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생각해보면 참으로 엉터리인 것 같다.
  여기서는 의사는, 아니 우리는 한 걸음 멈추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 몇 년 후면 나도 졸업을하고 의사가 될텐데 나는 그 불행한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대할 것인가? 과연 불행한 자들을 더 비침하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것인지. 이 시점에서 나는 또다시 현실로 당당하게 환자를 대할 수 있게 되기위해 좀더 현명한 생활을 해야겠다.
  그러나 결론이 나질 않는다. 아직도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의문이고 불확실하다. 그렇다고 이런 불안정한 공부를 계속할 수도 없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한건지 아니면 내가 모자라는건지...

    나의 예과생활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여 생활을 한지도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을 돌이켜 보면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생활을 하였던 것 같다. 대학교에 들어오기전, 그러니까 중학교나 고등학교때 바라보는 대학은 그때의 고생하며 공부하던 뭐 고생이랄 것은 없겠지만, 그리고 그때의 느꼈던 압박감들을 완전히 해소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중학교나, 고등학교때의 규제속에 살아왔던 생활로부터 탈출하여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생활로 생각했다. 그리고 대학교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슨 TV 영화같이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마시며 무슨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고 또 잘 알지도 못하는 어려운 말을 지껄이고 그리고 화려한 축제에서 활약하는 등등... 지금와서 생각하며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생각이 별로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대학에 들어오기전 공부하며 생각하기를 대학에 들어오면 활발하게 활동적으로 다니며 친구도 많이 사귀며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하여튼 멋있는 대학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맘같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 대학생활은 역시 고등학교 때와는 아주 달랐다. 무슨 새 소식을 알려면 자기가 직접 대자보같은 것을 보고 알아야하고 무슨 일이든 자기가 하려고 한다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대학교 들어오기 전에는 담임선생님이 다 알아서 알려 주시고 또 친절히 가르쳐 주시는 것만 열심히 하면서 학교와 집만을 왔다 갔다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대학교에선 그것과는 달리 완전히 성인적인 사회생활은 아니더라도 반사회생활로 들어가는 것이니 사람도 많이 사귀어야하고 자기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갈등도 느끼고 또 결정을 하면 거기에 대한 결과에도 스스로 책임을 져야 했다.
  나는 온상에서 길들여진 화초처럼 되어가지고 대학이라는 낯선 곳에 들어와서 잘 적응하지도 못한채 지내온 것이 벌써 2년이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것이 고등학교의 꼭 짜여진 틀과 같은 생활과는 달리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틈도 또 기회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나는 너무 꽉 짜여진 틀에 더 잘 길들여져 있는지 그러한 기회가 있어도 잡을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잡고 싶었지만 말이다. 용기가 없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현재만 유지할려고 하는 마음 때문이었나 보다.
  나는 다시 1학년이 되었다. 다른 대학생들은 벌써 3학년이 되어 군대도 가고 또 졸업하고 난 후의 생활에 대해 미리 설계하며 학과공부에도 열심히 할것이라 생각되지만 우리과는 다른 대학과와는 달리 6년제가 되어서 그런지 아직도 애송이 같이 계속 그 자리에만 있는 것 같다. 예과때는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그냥 지나가 버렸다. 앞에서 말했듯이 예과생활을 별로 충실히 보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해서 무슨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예과때 생각하기를 고등학교떄 좋은 대학에 간다고 공부를 하여 한의과에 들어왔는데, 들어와보니 과연 내가 한의사가 될 수 있을까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의사가 된다는 것이 가능할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은 영 실감이 나질 않는다. 과연 나는 의사가 되는 것일까? 과연 죽어가는 자 앞에서 침을 들고 설 수 있을까?

    진실한 인술
  햇볕이 포근하고 따사로운 만물이 시생하는 활기찬 계절, 봄이다! 처녀들 가슴이 봄바람 따라 괜히 흔들리고 치마자락도 살랑거린다. 사회나 학교의 초년생들은 누구나가 설레이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낯설은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설레이던 시절이 있었고 본과에 진입한 지금도 역시 설레이고 두근거리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막 먼 여행을 시작하여 창가에 펼쳐지는 낯설고 새로운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나는 여행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서양식의 교육을 12년이나 받은 데다가 아파트, 햄버거식의 생활방식마저 동양적인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이런 환경에서 근 20년이나 생활하면서 얻어진 사고방식으로 동양철학을 바탕으로한 한의학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머리 속에 저장해 둔 모든 것을 세척해 내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또 한의학이 고대 중국에서 크게 발전하여 서적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한문에 능하지 못한 나로서는 상당한 고충이 크다. 한문이 한자지식으로 읽히는 것은 아니지 아니한가?
  한의학은 서적을 읽고 경험을 통하여 문득 느껴지는 바를 종합하여 체계를 잡으면서 진행해 나가야 하는데 나에게는 이런 일이 매우 힘들다. 그저 책에 나와 있는 검은 글자모양만을 암기할 뿐, 그뜻을 요리 조리 생각을 굴려 헤아릴 줄 모르는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럽다. 괜스리 부모님을 원망도 해봤다. 허나 이렇게 힘들어도 한의학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철저히 파헤쳐 오묘한 우주변화의 원리, 인체의 생리적 구조의 진비를 느끼고 싶다. 아리따운 처자가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아 생각할수록 즐겁다. 유방백세라도 하고픈 과욕도 든다.
  그런데 내가 한의대에 들어오게된 동기가 생각할수록 우습다. 고2때 나는 무협소설을 탐독하고 있었다. 내 자신이 주인공인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그 주인공들은 모두 호흡법을 통해 내공을 쌓고 쌓은 기로 호신하고 기를 방출하여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전멸을 하고 약물, 독물을 잘 이용할 줄 아는 능력자들이다. 그래서 그런 능력을 소유하고자 했던 것이 입학동기이다. 어떤 아이는 베트맨이 되고 싶어 아파트에서 뛰어 죽었다는데 난도 결코 그런 상상력에서 벗어난 사람 같지는 않다. 허나 입학해보니 한의학이란 단전도사들의 신비감을 뛰어넘는 오묘한 학문이었다. 좀 제대로 배워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일부 한의사들은 한의학의 발전을 암중에 방해하고 있다. 한의사가 꼭 약장사 아니면, 허황된 말을 둘러대는 야바위꾼 같다. 허가낸 도적놈이라 하지 않는가? 환자를 살펴보아 돈이 있겠다 싶으면 아부하고 겁주면서 그저 비싼 약이나 팔아 돈을 챙기려 혈안이 되어 있고, 빈자의 처지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옛 의생들은 부의 재분배를 실천하였고 의서에도 부를 탐하지 말고 생을 구하는 데 힘쓰라 하였다. 일부 의사는 연구는 할 생각은 않고 기존의 좋다는 처방이나, 남이 효험봤다는 처방만을 외어 써먹으려 한다. 환자 몸은 무책임한 시험대가 된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이 미래의 내모습이기 싫다. 이래서는 존경받고 신뢰받는 한의사가 될 수 없을뿐더러 한의학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존경받고 신뢰받는 줄 알고 돈에 연연하지 않는 진정한 의인이 되어야 한다. 많이 알아야한다. 환자의 궁금한 점, 괴로워 하는 점을 말끔히 해소시켜 주어야 한다. 의사 자신의 인격수양을 통해 건전한 인격체로서 환자를 대하여야 한다.
  한의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문적 발전도 중요하지만 실제 사회에서 진실된 의인이 베푸는 인술의 도덕이 그 핵심일 것이다. 그렇게 도덕성을 구현하는 의인의 한의학의 우수성을 역설하면서 이웃에게 존경을 받을 때 비로소 국민들의 인식이 바뀔 것이다.

    내가 해야할 한의학
  올해에 새로 들어온 후배를 보는 게 나에게 어떤 특별한 뜻을 던져주는 것은 웬일일까? 본과생으로서 처음 맞이하는 해이어서 그런가보다 .신입생에게 내가 보냈던 예과 2년 동안의 생활에서 무엇을 했노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는가?
  여기에 한의학도로서 보낸 2년동안의 생각과 본과생으로서의 시작에 있어서 느끼는 점을 적어본다. 먼저 한의학도로서 나의 현위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대학에 들어오기까지 12년의 교육을 통해 나는 동양이라는 것, 더구나 한의학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서양과학의 세계에 구시대의 유물이라 생각되던 이 학문이 들어오게 되었는가? 그것이 우연이거나 필연이었던, 나에게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고민을 안겨주는 것 같다. 신입생때는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원전을 읽어 보면서 한의학이 먼지속에 파묻혀 있어야 할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해야할 학문이라는 자신감이 생기게 됐다. 선현들의 신묘한 가르침이 한의학을 이룩했지만 현재는 손댈 곳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서양의학에 밀리고 있으며 사회의 불신이 이런 사정을 더욱 힘들게 한다. 이런 상황에 우리 한의학도의 현실이 있는 것이다.
  그럼 나는 한의학을 뭐라고 정의하겠는가? 한의학은 천지자연의 도에 인간이 순응하도록 하고 사시변화에 순응하게하여 음양오행의 변화를 몸에서 온전하게 하는 학문이다. 이로써 이천년동안 우리민족은 병을 이겨 나왔던 것이다. 고대인들은 자연과 인간을 음양오행, 오운육기 등 등의 나로서는 아직도 알 수 없는 그들 나름의 언어와 설명방법으로 풀이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하며 그들의 설명을 완벽하게 현대의학에 재현하려는 이들이 드물다는 것이 한의학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내가 신입생일 때 한 교수님께서 한의사는 많아도 한의학자는 드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 앞에서 말한 문제점 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문제도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돈버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데 공부는커녕 발전이 있을 턱이 없다. 내가 보기에는 한의학을 한의학으로 만들려면 원전의 올바른 이해가 급선무라고 본다. 원전의 내용을 모두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기는 작업을 통해 한의학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 많은 의서가 있는데 참으로 우리실력으로 정확하게 번역된 것이 얼마나 되는가?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한자로 번역되면서 중국인 고유의 대승 불교를 만들어 냈다. 이런 말을 할 필요없이 모은 외래학문을 받아들여 우리의 것으로 발전시키려면 번역이 첫작업인 것인데 왜 우리 한의학은 아직도 한의학으로 머물러 이는 것인가? 한의학의 언어가 우선 우리에게 우리말로 풀어져 있질 않기 때문이다.
  한의학의 문제를 이렇게 본다면 앞으로 나의 미래는 어떠할까? 고대인의 음양, 오행, '주역', 유학, 도가 등 등의 고대 중국의 사상을 올바로 접해보고 그것을 통한 원전의 올바른 이해와 올바른 번역을 하고 싶다. 중국 고의경 번역도 모두 중국백화자료에만 의지하고 있을 뿐, 우리 자신의 실력에 의한 정확한 번역서가 없다. 우리나라 대가들이 번역해 놓은 것은 모두 현토장난일 뿐이다. 한의학서적의 번역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모두 국어실력이 영점인 사람들이다. 지금 한의학은 춘추전국시대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 한의학도 한의학의 여러 문제를 고치려는 노력에 의해 한의학의 발전이 있을 것이다.
  헛점이 보인다는 것은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 때문에 보이는 것이요, 그러므로 더욱 애착이 가는 것이다. 현대과학문명의 한계는 분명 한의학속에 극복할 수 있는 열쇠가 있으리라 믿는다.

    책이 너무 많아서
  지금까지 2년여동안 한의학을 접해보았지만 아직도 한의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 자신이 열심히 안해서 그런 생각이 들리라는 자책감이 앞선다. 예과 1학년 음양오행 학설을 배울 때 그것을 의학에 어떻게 적용시키느냐는 의구심마저 들었고 예과 2학년때에는 동양철학시간때에는 그 광범위한 '주역'을 언제 다 깨달아서 한의학에 적용시킬것인가 하는 회의감또한 없지 않았다. 물론 지금와서도 이런 생각들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뭔가 잡힐 것 같은 생각이 들고, 한의학은 잘 모르지만 앞으로 어떤식으로 공부해나갈 것인가 하는 지표가 어느정도는 세워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수님들께서 말씀하시던 '동양적 사고, 동양적 사고'하는 것이 이제와서는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 몸소 느껴진다. 예2때 원전시간에 '장부총론, '장부조분'을 배울 때 우리의 생각으로 이해 안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고 해부학 수업때와 원전 수업때 사고방식을 달리 가져야 된다는 갈등이 부담스러웠다. 현대 양방의학도 한의학도들에게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과 1, 2년 또는 본과 1년때의 한의학에 대한 자신감, 그러니까 공부하는데 뚜렷한 지표설정이 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양적 사고로 똘똘 뭉쳐진 우리들에게 동양적 사고로의 전환을 위한 모종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것이 얼마나 힘든지, 얼만큼 노력을 해야하는지는 잘 모른다. 아무튼 선인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 사상을 기반으로 성립된 한의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양적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로는 한의학도들이 접해야 한다는 책의 분량이 너무 많다는 부담감이 든다. 매년 학기초가 되면 이번에느 어떤 책을 살까 망설이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닌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책을 사서 한두번도 뒤져보지 못하고 서가의 전시용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다. 물론 나중에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전부다 필요한 책이겠지만 지금 생각엔 사야할 책이 너무 만다는 생각이고 일단 책을 사서 잘 읽지는 않지만 읽어야 된다는 부담감이 든다는 솔직한 심정이다.
  셋째로는 다른 사람들의 한의학에대한 인식을 한의학도로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다. 양방의사들도 그렇지만 일반국민들도 잘못 인식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한의학이라는 학문이 성격상 그렇고 그리고 현대사회가 서양적인 사고방식의 틀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학으로서의 한의학이 일반 국민들속에 스며들기가 용이하지는 않다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도 우주와 인간을 연계시켜 자연의 질서를 바탕으로 인간신체에 있어서 생리 병리현상을 정체적으로 깨우친 우리 선인들에게 절로 고개숙여질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아무리 몇천년동안 이루어진 경험의학이라지만 그래도 그 속에 철학이 없으면 민간인 사이에 뿌리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단순한 경험처방만이 아닌 어떤 연역적인 사고, 아무튼 우리 선인들의 사고방식 즉 한의학이 그 기저에 깔고 있는 철학을 느끼고 싶은 심정이다.

    교과과정
  대학생활을 시작한지 벌써 2년이 지났다. 다시 말하면 한의학에 입문한지 벌써 2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진정 한의학을 공부하고있는 학생인지부터가 의심스럽다. 대학에 처음에 들어와 나는 대학의 멋진 낭만만을 생각하며서 그것을 추구하려는 생활태도를 견지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신입생의 처지일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한의학이라는 것을 뒤로 제쳐놓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설상가상으로 우리학과의 교과과정 또한 학생들에게 한의학의 기본원리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심어줄마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한의학은 제쳐두고 양의학에 더 치우쳐있다. 물론 양방을 배우는 것도 좋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한의학의 우월성을 더 인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학생들은 한의학의 기본원리에 대해서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한의학을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양방을 배우는 것은 모래위에 성을 쌓는 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우리 한의학은 계속 양방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제시하고 싶은 것은 우선 예과 교과과정중에 우선 한의학의 기본원리와 기타 이론적인 것을 학생들에게 확고히 인식시킬 수 있는 교과를 삽입시켜야 된다. 그리고 그러한 위대한 교수를 모셔와야 한다. 물론 지금 한의학개론이라는 2학기 과정이 있으나 무엇인가 핵심이 전달이 되지않는다. 어떠한 확실한 교과과정이 있어서 학생들이 거의 20년동안 빠져 있는 서양적 사고관을 깨뜨려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동양적사고를 요하는 한의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본1에 올라와서 닥쳤던 학문적 갈등, 방황이 바로 예과때의 잘못된 교과과정이 한몫 거들어 준 것 같다. 학문은 무엇보다도 재미있어야 한다. 학문을 재미있게 가르쳐줄 수 있는 선생이 있어야 한다. 재미속에, 간단히 몇마디속에 심오한 진리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학교 정책상의 잘못으로 인한 학문적 갈등, 방황을 얘기했다. 지금부터는 우리 학생들의 현주소를 말하고 싶다.
  한의대를 다닌다고 하면 세인들은 거의 모두가 엘리트로서 인식을 한다. 그러면 우리 학생들이 진정 엘리트로서의 합당한 생활 및 학습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간단히 말해보면 '노우'이다. 학교앞 유흥업소의 대부분은 단골손님은 우리 한의대 학생이다. 도서관이용이 가장 적은 학생들은 한의대 학생들이다. 밤새도록 불을 밝혀 공부해도 이해할 수 없는 학문에 몸을 담고있는 학생으로서 취할 수 없는 태도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공부를 해도 하지 않은 사람과 다를게 별로 없는데 뭐하러 하냐?' 그렇다! 학문적 특성 때문에 공부를 많이해도 별로 두드러지게 나아지는 것이 인식되지 못한다. 양방과 비교해서 더욱 그러하다. 이런 학문적 특성에서 파생되어 나온 학생들의 그릇된 인식에 의해서 우리 한의대내의 한습분위기는 별로 좋지 못하다. 좀 더 근원적으로 생각해 보면 학생들의 이런 자포자기적 학습태도는 한의학의 막막한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또한 이렇게 학생들의 한의학에 대한 인식이 잘 안되고 있는 것은 교과과정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되어 왔다는 것을 주시해야 된다. 물론 이유를 더 밝히자면 많이 있지만 정책적 문제점을 여기선 따지고 싶다. 나역시 내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잘 수는 없지만 한의학계에는 너무도 구심점이 될 수 이는 인재가 부족하다. 허나 후회는 없다. 후배들에게 또다시 비판의 화살과녁이 되지 않을 나자신의 모습을 위하여 매진 또 매진!

    12와 365
  짧은 생각이지만 한의학에 대해서 나는 이말을 수차례 생각해왔지만 확실한 비젼을 제시할 수 없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어렴풋하게 아니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을지 두렵다. 한의학의 매력은 한마디로 철학적인 의미로서의 학문이다. 결코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없는 동양철학적에 그 뿌리를 단단히 박고 서 있음은 초심자도 그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중요성은 익히 들어왔을 것이다. 이렇게 뽀얀 안개가 드리워진 신비감이 감도는 것이 한의학이다.
  천인합일(상응), 음양오행이 기본이 되는 '역'을 바탕으로 인체를 운용하는 기발한 착상과 억지없이 맞춰지는 12라는 숫자, 365라는 숫자등도 신비함을 더욱 증가시켜준다. 물론 5라는 숫자는 더욱 그렇지만 이론적인 면에서의 매력을 차치하고서라도 임상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도 또한 매력적이다. 현실주의자만 살아남는 이윤추구의 현대시대에 이런 면이 없다면 한의학은 점점 작아졌을 것이다. 아직도 무궁무진한 신비한 매력이 남아있다. 그렇다고 내가 한의학에 푹 빠진 골수분자는 아니다. 수천년이 지나오면서 간행된 책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볼까한다. 쉽게 공부하려는, 단물만 빨아먹으려는 얌체같은 생각이지만 첫째로 너무 어렵다. 애매모호한 문장, 시대성에 얽매인 사고 등은 분명 한의학의 맹점이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확실하고 명백하게 선현들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 책은 그냥 그렇게 알아 둬! 라고 질문을 회피하기만 하던 선배들이 괜히 밉기도 했고, 어떤 고전이라 할지라도 그 저자의 사고를 뛰어넘고 싶은 결심도 생기게 되었다.
  현대의학과의 공존 또는 연계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한 바를 말하겠다. 기본이론이 완전히 다른 두학문의 접목은 상당한 무리를 초래할 것 같게 생각됐지만 인간의 신체라는 광막한 우주의 포용성이 발현되어 임상에서의 접목은 너무도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어쨌든 두 집안의 한집살림은 바람직하게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세력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통합은 말도 많고 불만도 많을 것이다. 원래 주인이었던 한의학이 서양의학에 밀려 주체성을 상실한 현 의료계를 비관한다. 한의학이 아직 크지도 못했는데 의료일원화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양의사들은 권력을 빙자하여 진실을 도둑질하려 한다. 한의학을 독자적으로 살리는 길만이 양의학의 살길이다!
  뿌리 박힌 우리민족의 한의학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의학은 어떻게든 그 생명을 이어갈 것이고 이 생명을 담보로 해서, 쪼개고 또 쪼개는 서양의학의 분석사고보다 합치고 또 합치는 동양의학의 창조적인 사고를 발전시켜 나간다면 새로운 신과학의 가능성이 생겨날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인간의 질병으로부터의 구원이지 동의, 서의의 세력다툼이 될 수는 없다. 이제까지 재미보았던 서의님들! 이제 국민의 심판앞에 조용한 대가를 받아라. 새로 태어나는 민족의학을 말살하지 말라!

    평범한 사고
  한의학에 대한 소견을 적으려고 하니 괜시리 멋적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깊게 한의학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상시에 생각했던 평범한 사고를 적는다. 사실 나의 경험으로서는  예1학년 때 뭇 선배님들로부터 들은 많은 말들이 있다. '한의학적 관점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라', 어떤 선배님들은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며 생리, 병리를 정확히 알수가 없으니 기전의 설명과 정확한 치료를 위해서는 양방을 열심히 해야한다.'등등이었다.
  예2에 올라와 양방과목과 한방과목을 접하면서 명확한 양방에 더 매력을 느꼈음도 사실이며, 무지에서 오는 애매모호한 한의학의 생각에 자포자기의 심정까지 생겼다. 왜냐하면, 유전병이라든지, 불치병일 경우 어떻게 침이나 약으로 고쳐질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본과에 들어와 최근에 나는 다시 내 사고를 수정해야했다. 한의학 서적을 읽고 있는 도중, 또 수업을 받는 도중 한의학에도 한의학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으며, 효과도 상당히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어떤 틀에 꼭끼지 않으면 무조건적 틀리다'는 소위 과학의 비과학적 모순도 있음을 느꼈다. 개론책의 '소박한 유물론적 사고,' 몇일전까지만 해도 아무 의식없이 바로 넘어갔을 단어였으나, 이제야 눈에 독특하게 보이는 것은 지금까지 얼마나 내가 과학적 사고에 젖어 있었는가를 느끼게 한다. 또한 자연관에서 나온 '소박한 유물주의'와 '과학의 유물주의'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도 느낀다. 그런 사고방식의 전환은 지금의 나로서는 새로운 면을 보고 있다는 흥미로움을 느끼게 한며, 모든 사물이 다르게 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과학적 사고방식을 추구하는 양방과목을 배제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의사로서 당연히 알아야 할 '최소'로 생각한다.)
  양의지식은 치인을 위해서는 반드시 병행해야 할 것이다. 다만 한의학의 고유한 사고방식만은 버려서는 안된다는게 나의 평범한 소견이다.

    닭과 달걀
  2년동안 한의과 대학에 다니면서 동양사상에 대한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것은 나에게 신비스럽고 오묘하게 보였던 동양의 학문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특히 한의학은 동양철학을 이용하여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그나름대로 멋이 있는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현대는 21세기를 향하여 과학기술이 급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근간이 되는 것은 학문의 진보이다. 매우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학문이 없다면 지금같은 비약적인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힘을 내고 있는 서양학문에 비해 정작 한의학은 삼황오제 이후로 큰 발전이 없어왔다.
  그렇다고해서 한의학을 서양학문처럼 논리가 딱딱 맞아 떨어지게 개혁시키자는 말은 아니다. 만약 그럴수만 있다면 좋겠지마 한의학의 가치는 역시 그와는 다른 모습에 있는 것 같다. 그러면, 한의학의 방향은 어쩌면 좋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 것을 적어보겠다. 먼저 한의학이 형성되고 있는 글 즉, 한문을 모두 국역하였으면 한다. 이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과제인 것 같다. 한문으로 된 원서를 공부하면 한문실력은 늘지는 모르지만 정력낭비가 된다. 어려운 한문외우느라 골치 아프니까 모두 국역하여 기본 한자만으로 통하는 때가 오면 싶다. 그리고 나서야 한의학 방법론이 문제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학공부가 어학공부와 혼동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옛날부터 근세까지 의가들은 몸의 생리를 경험적으로 깨달아 그것을 의학이론에 첨가하여 왔다. 따라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본래의 의학체계에서는 논리가 통한다. 그러나, 주관적인 의사 자신의 생각이 너무나 많이 들어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 잡다한 것을 배제하고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양의학은 발전해 나왔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훌륭한 방법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물리학을 이용하여 기공에 연구를 심도있게 하는 사람도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한다. 화학의 성분분석에 있어서는 좀 반대의 생각을 가졌으나, 한종현교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고 필요하다고 느꼈고 가능성이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철학을 통한 의학을 고수했으면 한다.
  오행을 기초사상으로 해 놓고 약물의 효능을 그때그때 주먹구구식으로 맞추는 것이 아닌 정확한 이론 위에 서 있는 한의학이었으면 한다. 물론 이것은 힘든 것이다. 허나 최소한 개념정의를 물질적으로 확연히 보이게 하였으면 한다. 정확한 정의를 통하여 나아가는 학문은 그 시비를 논리를 통해서 알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의학을 가지고 암(canner)이나 후천성 면역결핍증(acquired immunodeficience syndrom)을 치료했으면 한다. 그러면 엉터리처럼 보이던 것으로 큰 병을 고쳤으니 서양사람들도 자연히 그 엉터리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한의학을 하는 방법이 어쨌든 하던 방식대로 질병을 하나씩 정복해 간다면 누가 멸시하겠는가? 결론적으로 서양의학을 취한 학파와 전통 한의학파가 나와서 서로가 질병치료를 위해 이념적 배제가 없이 진실하게 노력했으면 한다.

    한약장 놓고 재미보는 약사님들!
  내가 한의과대학에 들어온지도 3년째가 되어간다. 2년동안의 예과과정속에서 내가 과연 무엇을 배웠으며 또한 무엇을 찾으려고 헤매여 왔는가? 글쎄, 이런 애매한 물음만 떠오른다. 그간에 나의 태만함이 이런 애매한 물음을 나오게 했겠지만 한의과대학의 현재 커리큐럼 문제라든지 우리나라 한의학의 취약한 풍토라든지 하는 원인도 제기 할수 있다. 많은 한의학도들이 학문에 대한 지표를 제대로 갖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의 가장 큰 원인중 하나는 한국한의학 자체의 취약성으로 보고싶다. 한국한의학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에 대해서 평소에 생각한 바를 간략히 말해보겠다.
  흔히들 사람들은 한의학을 민족의학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의학은 과학적근거가 별로 없고 미신 비슷한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한의학, 한방은 소위 말하는 비과학적인 영역에 속하는가? 서양과학에만 젖어있는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인 것이다. 저들이 말하는 과학은 이미 신뢰성을 잃어서 파기된지 오래이고 이제는 새로운 과학의 이론들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요즈음 새로이 발견되는 입자이론이라든지 행성이론 같은 것들도 사실은 수천년전에 동양에서 이를 생각해내고 예언해왔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이것은 바로 서양철학에 대한 동양철학의 우월성이라 말할수 있다. 인간의 협소한 눈과 생각으로 이뤄진 서양철학보다는 동양철학을 그 근간으로 갖는 의학이 바로 한의학이다. 이런 면에서 볼때에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완전히 다른 체계의 의학이며 어느 면에서는 한의학이 훨씬 우수한 의학인 것이다.
  요즈음에는 한방의 과학화니 한의학의 서양의학을 도입한다든지 의료체계를 일원화한다든지 하는 풍조가 만연돼 있는 것 같다. 이 속에서 많은 한의학도들이 고민하고 있다.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커리큐럼자체에도 문제가 많아서 한의과대학 학생들은 상당수의 양방과목을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한가지 의학도 하기도 힘든데 두가지를 다 하다니 조금 무리가 따르는 것 같다. 한의학에 대한 '기본적인 체계를 이해가 방해받고 있는 것이다.'
  한의학은 한의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해야한다고 주장하신 모교수님의 말씀에 매우 공감이 간다. 그래서 나는 원전위주의 본론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 옛날의 의인들은 치료하는 거의 대부분의 환자를 쾌유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에 있어서 우리는 선배 의인들의 의학적인 성과를 이어받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보다 더 한의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한의학을 이해한다면 커다란 학문적인 진흥이 있을 것이다. 한의학발전의 저해요인중 하나는 연구직에 남으려는 이가 너무 적은 것도 그 한 이유일 것이다. 한의학의 기초적인 연구를 통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더 많은 지식들을 알려야 한의학발전에 보탬이 되어야 할텐데, 앞으로는 그러한 이들이 많아지리라 믿는다. 개개인의 상업적인 목적에 앞서 한의학을 학문적으로 무장시키는데 한의사들이 솔선하여 투자를 해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가적인 지원을 문제로 들겠는데 사실 지금까지는 한의학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었다고 말할수 있다. 학문의 발전에는 국가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한의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의학을 민족의학으로서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 일관된 보건행정시책이 필요하다. 보사부에서는 기득권의 그릇된 야욕에 눈이 어두워 한의학을 말살시키려는 임시방편적 법령만 만들려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어떻게 한의학을 배우지도 않은 약사들이 한약을 마음대로 조제해서 팔 수 있게 해주려 한단말인가? 약사들이 한약뺏어가고 침구사들이 침을 뺏아간다면, 그리고 양의사들이 병원조직까지 다 뺏어간다면 한의학의 고유영역이 공중분해되어 버릴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린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의과대학에 다니면서 공부한단 말인가? 우린 기존의 제도의 장점을 살리고 거기에 합당한 권위를 인정해야 할 것이 아닌가? 약사회에서 공식적으로 말하기를 한의학은 학문이 아니라 민간경험방일 뿐이므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되묻겠다. 페니실린이 발명된 것이 불과 수십년 전인데 그 따위 곰팡이에서 뽑아낸 약일랑 누구든지 팔 수 있는 것 아닌가? 왜 자기의 권익은 지킬려고 하면서 남의 권익을 강탈하려고 하는가? 도대체 왜 이다지도 한의학을 말살시킬려고 하는가? 이땅의 도덕성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남을 죽이면서 나만 더 잘 살자고 어거지 논리를 펼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한약장놓고 재미보는 약사님들 도대체 당신들 양심이 어디에 있오?

    꽈의 고민
  내가 한의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좀 창피한 일이지만 입학하고나서도 2년 정도가 지난 요 근래의 일이다. 나는 대학진학을 할 때까지는 전혀 한의학에 관심이 없었고 더군다나 한의학을 가르치는 학부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조차 자세히 알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한의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는가? 좀 창피한 일이지만 나는 그런 부모님의 권유를 받기전 까지는 막연히 공대계통으로 진학하리라는 뚜렷하지 못한 계획아래 우왕좌왕 방황하고 있었다. 즉, 모의고사는 볼때마다 오늘은 모의지망을 어떤 과를 할까? 생각해서 마음에 드는 과를 쓰고 붙으면 좋고 떨어지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께서 나에게 한의대를 권유하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약방은 알아도 한의대라는 말에 낯설었던 나는 머리가 하얗고 나이가 지긋이 잡수신 할아버지가 침을 놓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즉, 그 인상이 굉장히 진부하고 서양의학에 비해서도 진취적이지 못한 고리타분한 인상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약간의 강제성을 띠게 된 권유를 하시는 아버님꼐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나자신 또한 뚜렷한 목적이나 지망하는 과가 마땅치 않았기에 아버지와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억지로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을 하고나서도 한 일년여 동안은 한의학 공부라는 것을 어색하게만 느껴 적지 않게 방황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대학과는 달리 유급제도가 존재하는 한의대에서 나는 유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쨌든 공부를 해야했다. 그렇게 해서 시험을 위한 것이었지만 전공과목을 공부하다가보니까 한의학이 이때껏 내가 생각했던 그런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고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관심을 갖고 노력하려고 한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대학진학할 때 나같은 사연을 가지고 우리 한의대에 입학했던 학우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한의학도가 아닌 보통사람들은 내가 한의대에 입학했던 그전에 갖던 생각들을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의학이 타개해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된다. 한의사면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약지어주고 돈 많이 버는 직업으로만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한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한의사들의 책임이라고 생각된다. 현재의 한의사들은 학문에 정진하여 보편적 가치관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이기적인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있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주변상황에 무관심하여, 한의학이라는 전체적운명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요즈음 돈을 잘 버는 한의사들이 많은데 그들이라도 한의학이라는 학문발전을 위하여 조직적인 투자를 하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학생들도 우리를 가르치는 교육자도 비합리적인 교과과정을 밟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한의계 모두가 옛날의 전해오는 지식에만 의존하지 않고 좀더 진취적으로 연구하고 국민들의 보건의료에 더욱 더 앞장설 여건이 바련되어야 한의학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과 서양의학에 빼앗긴 국민들의 신뢰와 의료권을 되찾아 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임상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한의대에 다니며
  원광대학교 한의학부 2년과정을 마쳤고 앞으로도 본과 4년의 시간을 배워야 할 한의학을 시작하면서 지난 시간과 앞으로 지날 시간에 대해 생각해본다. 고3 진로를 결정할 당시 친구의 의견을 쫓아 원서를 써내고 난 후 어딜가면 뭐 다를게 있겠느냐며, 잘못됐을지도 모를 결정에 자위를 했다. 그런데 운좋게 나는 붙었다.
  주위에서 남의일 구경하듯 들어왔던 일들이(졸업후 수입이 어떻다느니 공부는 의대보다 편하고 신사다운 직업이라는 말들) 입학후에도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예과 1, 2학년의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편한 공부, 멋진 장래... 그러나 2년의 교육과정을 지나며 좋게만 보였던 일들이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둔갑하고 있다. 본과에 올라온 지금 한의학을 바라보는 나의 입장은 지나야 할 길들이 그다지 밝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낀다. 졸업 후에 상대하게 될 일들 즉,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는 침구사, 이발소, 사우나등에서의 안마, 지압, 침시술들 뿐만 아니라 약사들의 한약조제판매(약대가 6년으로 개편될 추세라는데... 그 때 이들의 행동이 어떨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등 등의 외압적 양태외에도, 공부를 하고 있는 나의 눈에 들어오는 사실들 또한 한의학의 기반을 의심케 하고 있다.
  한의, 한희 문제, 양방의학과의 일원화 문제, 원전의 명확한 이해, 후학들의 공부법 등등... 이밖에도 더 많은 문제점들이 있겠으나 나의 적은 식견에서 느껴지는 문제들은 대충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문제가 많다고 내던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어차피 나의 일생을 걸고 싸워 나가야할 일들이며 또 후배들에게 같은 문제로 고민시키고 싶지 않게 때문데 이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볼까 한다. 근원적 해결은 못 되더라고 최소한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아보는 시도로서,
  먼저 양방의학의 도입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의대에 다니고 있는 친구와 종종 토론을 할 때 친구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한방은 몇천년 전의 의학을 아직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현대의 병은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느냐? 동양의학은 현대의학이라고 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동양의 의학과 사상은 이미 몇천년 전 그 당시부터 이미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을 고대인이나 현대인이나 보편적 인간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이미 동양은 인간에 대한 모든 이해가 이루어졌고 서양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도 발견해가고 있는 과정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서양의 사상 및 물리학의 이론 등이 동양의 정신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고 동의학이 근본적인 치료법이라는 것 또한 통용되어지고 있다. 하지만 동의학이 비틀거리고 있는 이유는 우리 후학들이 원전의 생각을 아직도 몀확히 밝혀내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마치 없어진 한글 자음중에 ^5,46^, ^5,45,2356^, ^5,145^의 발음을 당시 어떻게 했는지 우리가 잘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취해야 할 방향은 시시콜콜한 양방의 도입 및 한방의 규명등이 아니라 원전을 명확히 이해하고 그것들을 반드시 한글화하여 한의가 될 수 있는 체계를 세워야 한다. 중국의학 서적을 본다고 해서 한의가 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우리땅 우리사람들에게 맞도록 바꾸어서 생각하고 이해하면 우리의학인 것이다. 또한 양방을 도입해야 한다는 사람중에 환자에게 병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데 양방적 지식이 있어야한다는 소리는 더욱 엉터리이다. 환자들이 왜 양방적 외래지식만 있어야 하는가? 그들이 한방적 지식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는가?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 국민들은 모두가 한방적 상식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또한 동양사람들의 건강을 유지하는 첩경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의학 한가지만 제대로 알려고해도 벅찬데 양방의학에 솔깃해 자기자리도 찾지 못하는 우를 범해선 안될 법이다. 뭐 대충 이정도가 한의학을 하는 나의 견해이다. 나의 생각이 틀리고 소견이 좁을지라도 그 길을 헤쳐나가는 것 또한 내가 해야할 일이기에 일단 나의 원칙에 맞게 공부해 나가련다. 나는 한의학을 사랑한다.

    대의(대의)와 소의(소의)

  내가 높은 경쟁률과 높은 커트라인이라는 부담감을 빠져나와 한의학이라는 멀고 깊고 험한 원시림으로 탐험을 시작한 지도 2년이 넘었고 얼마전에는 본과진입이라는 나즈막한 언덕에 올라 메아리 없는 최고봉을 향해 함성을 질렀다. 이제야 진정으로 한의학의 맛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들 하지만 앞으로 땀흘려 가며 해야 할 노력을 생각해 보면 기뻐할 수 만은 없다. 이제 명실공히 한의학도가 되었으니 지금까지 생각없이 지나왔던 나 자신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통하여 한의학에 대한 나의 기초적 관점을 다져야겠다.
  한의학하면 사람들은 대개 아주 오묘하고 신비하다고 하면서도 내심 믿지 못할 구석이 너무 많다고들 생각한다. 내가 한의대에 온 것도 모르지만 분명히 기대이상의 것이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과 조그만 호기심에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한의학 그 자체는 분명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얼마전 한의학이 철학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철학의 사전적 의미는 세계, 인생, 지식에 있어서 그 근본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라는 것이다. 한의학을 철학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한의학은 우주근원을 밝히개 위해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철학에서 밝혀진 그 체계를 기반으로하여 인체의 건강을 구현하는 응용학문으로 어디까지나 사실의 학문이며 철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한의학이야말로 동양철학의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용하고 또한 창조적으로 응용하고 있음으로 어떤 사람이 한의학적 사고체계를 갖는다면 그야말로 진정하게 철학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더욱 철학은 이론만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현실상황에 적용되어야 하기에 이러한 생각에 기초한 한의학적 사고는 우리 한의학도에 있어서 모든 사고체계의 기준이 되며 또한 생활방식과 개개의 행동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래서 동양철학에 기초한 한의학적 사고를 널리 펼 때라야 비로소 이 세상에 도가 구현되리라 본다. 단, 그것은 한의학적 사고체계가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제 우리 한의학도는 한의학 자체의 학문적 발전을 극대화함과 동시에 나 자신만의 한의학이 아닌 우리들 모두의 한의학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리라. 한의학의 미래상하면 한의학이 어떻게 무엇으로 발전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한의학이 발전하면 두가지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한의학의 학문적 발전이고 또 하나는 사회에서 한의학의 위치상승, 즉 대중화라고 할 수 있다. 한의학은 서양적 문화, 학문이 만연한 현실사회에서 비과학적 학문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한의학을 아는 사람은 그 사고체계의 논리성과 정확성에 놀라게 되고 그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학문으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같은 현실에서 한의학의 학문적 발전이라고 한다면 학문적 기초부분을 더욱 체계화하여 누구나가 그러한 체계에 준하여 한의학적 사고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임상경험을 토대로하여 기초이론부분을 더욱 튼튼히 넓혀가는 것에서 한의학은 하나의 과학으로서 인식되고 저절로 일반 대중에게 사랑받게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생각할 수 있는 바이다. 다시 말해서 기초의학으로서의 한의학에 아낌없는 인재와 재력이 투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의학이 사회적 입지를 충분히 확보하고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학문적 발전을 기초로하여 그 위에 한의사들의 재교육과 의식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의학을 공부하고 직접 환자들과 대하며 의료를 행하는 사람들이 사회에 얼마만큼의 기여를 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매우 만족스럽지 못하다. 한의학발전이라는 측면을 볼 대 한의학계 내부에는 너무도 많은 문제들이 가득 차 있다. 이것부터 치료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 한의학을 배우는 이들은 미연에 예방되어야 한다.
  자신이 나태하고 안일함만을 추구하면서 과연 자신의 학문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대의는 모름지기 나라의 병을 고친다고 했는데 우리는 스스로가 병들어 있으니 소의에도 들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의료행위는 궁극적으로 사회전체의 건강과 분리되어 생각되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대의는 항상 나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권계층으로서 기득권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환자들과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하며 스스로가 항상 노력해야 한다. 사회와 함께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제까지 내가 처한 현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서투르게나마 되돌아 보았다. 현재 세상은 동양으로 돌아오고 있다. 결국 도는 우리의 한의학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태해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들을 반성하며 나로부터 자체정화를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한의학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한의학의 사회운동은 한의학이라는 전문성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며, 나자신도 실천을 시작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할 때 이세상은 누구나가 한의학적으로 생활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만민건강세계가 되고 이땅의 도가 될돌아 오기를 빌자!

    나를 닦는 마음
  내가 한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까닭은 한의학의 신비감(모르는 상태에서)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어떤 한약을 먹고 나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내게 한의학이 무슨 신기한 마법이나 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고 그 무궁할 것 같은 가능성에 대해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그래서 한의대에 입학했지만 예과2년을 보내고 난 지금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 같다. 처음 입학한 지 얼마되지않아 강의시간에 교수님께서 한의학이 신비롭다든가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 하셨다. 안개속에 있는 무언가를 찾겠다는 식의 생각으로 한의학을 대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셨던 것 같다. 그때는 그 말씀이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는 꼭 뭔가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겠지만 졸업하고 한의사로 돈 많이 벌면서 살기위해 한의대에 온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년동안 나는 지식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처음 입학했을 때는 이제 대학에 왔다는 안도감 때문었는지 그냥 떠돌아다녔고 조금 지난 다음에는 늦게 학교에 들어온 데서 오는 부적응증 때문에 방황했다. 예과1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들어서 생각을 가다듬고 2학기를 맞았지만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공부를 등한시 한 대신 써클이라든가 대인관계를 충실히 다진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 속에 갇혀서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했다. 예과2학년에서도 시험만 그럴듯하게 보려고했지 정작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별도의 공부는 한 것이 없다.
  어느 선배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 몇 년만 더 있으면 실력없는 한의사는 밥을 굶게 될거다"라고. 이제 나는 본과생이 되었다. 흔히 하는 말로 동물에서 인간의 경지에 올라섰다. 이제 게으름은 그만 피우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진지하게 학문에 임해야겠다. 나는 아직 한의학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한의학에 대한 소견, 비젼, 한의학의 문제점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나를 비참하게 하지만 이제라고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해서 한의학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한의학에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은 없다. 뜬구름 잡는 식이 아니라 구체적 사고를 바탕으로하여 철학을 만들어 가야겠다. 더불어 학우들과의 관계도 원만히 유지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도 한둘쯤 사귀고 특기도 하나 정도는 만들어야겠다. 열심히 공부하고 활기차게 생활하면서 인간을 널리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먼저 나를 닦아야겠다. 결국 신비로움이란 내 몸속에 다 들어있는 것일테니깐.

    한의학의 위상
  한의학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선조들의 무수한 시행착오를 통해서 형성되고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의학이다. 한의학은 엄연히 그 나름의 과학성을 띠고 있으며 또 한의는 원래부터 임상을 바탕으로 한 의학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의학의 위상이 서양의학의 소위 과학적 실험적 설득력의 기세에 눌려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어디에 원인이 있는 것일까?
  그 첫 번째로는 정체성을 들 수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정규대학과정까지 갖추고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서도 의학사에 남을만한 어떠한 한의학설이나 학자적 노력과 정성이 담긴 저서가 나오지 않고 있는 현실은 그 정체성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제 겨우 본과1학년으로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평소 그 방면의 정보에 소홀했던 내 자신에게도 역시 문제이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소위 한의사면허증을 손에 넣으면 적당히 환자나 치료하면서 돈벌기에만 급급한 한의사가 너무 많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어째서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돈버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질병으로부터 환자를 구원하는 것이며 그것은 의사의 의무다. 배운 학문을 실제로 적용시킬수 있는 동시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실험적, 연구적 자세로 의사는 환자를 대하여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너무나도 서양의학에만 젖어있는 사회적 인식의 현실이 한의학을 고립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 궁여지책으로 한의학을 과학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는 한의사라면 당연히 인체에 발생하는 질병을 모든 한의학적 지식과 치료방법으로 치료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서양의학을 본 뜬 듯이 진료과목을 나누어 치료하고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어색한 일이다. 왜냐하면 한의학의 본질이 환자의 인격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체성에 있기 때문이다. 한의학은 분과(분과)될 수 없다.
  물론 현재로서는 서양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한의학을 일반대중에게 친근한 학문으로 보편화시킬 필요는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한의학은 한의학적인 연구방법과 그 독특한 철학적 인식을 통해서 발전해야 한다.
  이와같은 두가지 측면의 문제점은 하루아침에 해결 될 수는 없겠지만 우선 대학과정의 교육을 통해 진정으로 한의학 자체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성실하게 연구와 임상에 임할 수 있는 한의사를 배출해야 한다. 한의사 개개인의 확고한 신념과 부단한 노력을 통한 한의학의 보편화를 통해서만이 진정으로 확고한 한의사와 한의학의 위상을 세울 수 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우리의 권익을
  엊그제 본과 진입식을 했다. 한의대 뺏지가 옷깃에 달아지던 순간 느껴지던 의료인으로서의 어떤 사명감같은 것, 돌이켜지는 지난 2년간의 방황의 시간, 나는 이런 것들을 잊을 수가 없다. 예과1학년 때의 철없이 객기부리던 시절. 늘 술로 저물던 나날들 속에서 한의관을 오르내리는 내 온몸을 감싸는 것은 어떤 패배주의 같은 거였다. 표현이 좀 틀렸다면 "나른함" 같은 거라고나 할까? "대충대충"이라는 말이 꼭 맞을, 대충대충 한 학기를 마치고 한 학년을 마치고 졸업을 하고 대충대충 한의사가 된다? 아예 한의학에는 눈조차 돌리지 못하고(큰 산을 보지 못하고) 그저 교과과정에 허둥지둥 끌려다녀야 했다.
  예과2학년때는 더욱 더 당황했다. 난데없이 쏟아지는 양방과목들, 양방 지식들... 이런 생활속에서 내게 두가지의 문제가 생겼다. '사암도인 침술원리 40일강좌'라는 1학년 가을에 만났던 필사본의 책과, 2학년 1학기때 가졌던 "한의학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주제의 강연회였다. 나는 이 두 계기를 통하여 비로소 깊이 있는 생각을 해볼 수가 있었고 나름대로의 답을 얻을 수가 있었다. 지금의 무수한 과학적 기기들이 없던 시기에 만들어진 한의학은 그 나름의 다른 길을 걸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제 과학이란 것이 있으니 애써, 좀 이질적이고 뜬구름 잡는 것같은 한의학은 필요없는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과학적 기기의 측정, 분석등이 없이 다른 방법으로 발달한 한의학 자체와 한의학적 사고방식은 분명 지금에도 그 설 자리가 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명제를:"과학은 불완전하다." 이 가치명제가 모든 답이 될 듯하다.
  이처럼 한의학의 가치를 인정한 바탕위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한의학이 당장 눈길을 돌려야 할 부분을 생각해 본다. 어쩌면 한의학의 장점에 대한 얘기가 될 수도 있겠고 또는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남고,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어떤 전략일 수도 있겠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한의학은 요즘의 과학적 기기들이 없던 시기에 생겨났다. 이 말은 지금도 그런 기기들이 없이도 인간의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도 되겠다. 즉 전통적 방법도 그 보편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병을 치료하는 한에 있어서는 가릴게 무엇인가? 사진, 침, 주위에서 쉽게 구해지는 약재... 지금의 현대 양방의학아래서 소외된 계층에게 한의학은 막대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지금의 어설픈 법과 제도는 한의학을 사회적으로 축소시켜 왔고 한의사들은 오히려 그런 법과 제도 아래서 경제적 부의 축적을 위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자리를 좁혀 놓았다. 넓게 봐야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우리의 권익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다. 의학은 보다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데 그 목적이 있다.이제까지의 두 계기가 나의 한의학 공부에 있어서 외형적 틀을 쌓아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한의학을 공부하며 그 내실을 기해줄 계기가 많이 생기기를 빈다. 그 매력에 푹 빠져들 그런 기쁨의 순간들이.

    성적과 임상은 반비례일까?
  이곳저곳 새파란 새싹이 눈에 들어오면서 예전의 학기시작 때와는 다른 어떤 막연하면서도 어슴프레한 것이 무겁게 어깨를 누른다. 본과, 제법 듣기에 좋아보인다. 어느 학년이 중요하지 않겠는가마는 더욱 책임감이 느껴지는 것 어쩐 일일까? 수업에 임하는 우리 동기들의 남다른 열의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그래 나도 그들 비슷하게 흉내를 내보지만 나 자신을 규제하기란 제법 힘들다.
  언젠가부터 듣던 이야기중 "학교성적과 임상은 반비례한다"는 말에 호감을 가져본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주관과 지식이 뚜럿했으리라 생각한다. 남들이 보기에 나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스스로가 아는게 없으니 큰일이다. 거의 한달간 모임 등의 일 때문에 공부를 못해서 그런지 요즘 한학년 진급이 무척이나 긴장스럽다. 원래 나 자신이 공대 희망자였기에 사전지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또 아직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엄청나게 해야할 공부가 많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 많다는 것만 어슴프레 느낀다.
  다른 학과후배나 동창들과 이야기할 때 나는 언제나 우리 한의학에 별 비젼이 없다고 말한다. 어리숙한 상태에서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가 양심과 윤리를 잃어 버렸으며 더 나아가 연구하는 자가 적은 듯 하다. 조그마한 세, 네평 한의원에 앉아 일과를 반복하고 있는 하꼬방지기들로부터 과연 무슨 학문이 나올 것인가? 우리 의학의 앞날은 밝지만은 못하다.
  엠티나 여러 과행사에 참여하는 학생의 명수를 보면 우리 학우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제잘난 맛에만 사는 것 같다. 이윤적이다. 교수님대하기도 버스안에서 신발을 밟아 미안케 생각되는 상대방을 대하기보다 더 어렵다. 만약에 내가 좀 더 넉넉한 생활환경속에서 키워지고 자라났다면 내손과 내힘으로 곳식을 키우고 가꿔 조용히 살고 싶으나 교육에 대한 한이 많은 부모님 덕분에 학교를 마치면 집안을 위해 황소처럼 일해야 될 것 같다. 충청도인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 받아서인지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동화되고 엎어지는 자신이 싫을 때가 많다.
  여하튼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지금 다시 한 번 한의학에 대한 나의 관점이 과연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비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과 견해와 주관을 갖추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다. 끌려 나아가는 오늘의 삶보다 늦게나마라도 스스로 행동하는 삶을 시작한다면 나중에는 더 빠르리라. 일단은 한의학도로서 또한 본과생으로서 방안에서 내몸에 침놓는 연습도 해보고 실제로 효험이 있는지 실증해 봐야겠다. 조급히 생각말고 차분히 나아간다면 자신을 속이는 짓은 적어도 하지 않게 되겠지.

    아플 때 나는 한의원을 가지 않았다
  보통 토요일이라면 벽으로 사방 둘러싸인 두평 남짓한 방구석에서 뭉그적거리며 지냈을 텐데, 요즘은 시내외출이 매일 한 번씩이니 꽤잦은 편이다. 봄바람이 처녀가슴을 부풀렸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건강(?)해서 감기조차 모르고 지내던 내가 비로소 병명을 가진 무서운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감기가 오랫동안 지속된다고 생각하기에는 기간이 너무 길었고, 오른쪽 쇄골 주위에서 호흡시마다 통증이 느껴져서 내과전문의사를 찾았다. 복진후 소변, 혈액, 엑스레이검사를 하고서야 "폐렴"이라는 진단결과가 나왔다. 그 병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의학도의 입장에서 질병, 특히 내가 경험하는 질병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이치였으나, 의사의 냉기어린 답변에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집에 돌아와 내가 가진 몇 아니되는 서적에서 정보를 얻고자 하였으나, 한의학서적에 "폐렴"이라는 단어가 있기를 바란 내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곧 내 증상과 비슷한 병증이 줄지어 씌여있는 몇 개의 병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때의 기쁨이란! 결국 병을 나타내는 이름이 다름 뿐이지 한의학에도 내 질병의 개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반갑고 놀라웠다.
  그러나, 왜 나는 코앞에 자리잡은 한방병원의 문을 두드릴 생각을 못했을까? 이것에 대해 나는 동기생으로부터 날카로운 질타를 받았다. 그 당시의 내 행동의 원인을 정리해 본다. 첫째, 감기(그 땐 감기라고 생각했으니까)같은 감염성 전염병은 주사 몇대만 맞으면 신속하게 고칠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둘째, 병원이야 몇천원이면 가지만 한의원의 경우 기만원은 준비해야 한다는 경제적 문제가 있었다. 내 사고의 문제점은 둘중 첫 번째에 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다. 나의 선배이자 스승되는 분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한편으론 나의 그런 생각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잡념에 마음이 더 괴롭다. 물론 음식을 잘못먹어 체했을 때 침의 효과를 든든히 본 경험도 몇번 있다. 뜬구름잡기 같지만 무언가 있다는 생각은 든다. 그 무언가를 몰라서 탈이지만, 어떤 교수님의 말씀이 무척 인상적이다:"근세의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베살리우스(Andress Vesalius, 1514-1564)의 공로는 위대하지만 그의 이론에는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우리 서양의학은 틀린 것을 고쳐가며 그것위에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습니다. 한의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허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무조건 신봉하고 쫓을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점은 과감히 개혁해야 겠지요." 맞다. 우리는 딱딱한 흙벽을 벌레가 갉아 먹듯이 전래되어오는 지식을 하나하나 꺼내어 이용할 뿐 더 이상 발전을 하지않고 있다는 비관론도 가지게 된다. 
  시대적 환경이 바뀐 상황에서 의학도 방향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차라리 맹목적으로 전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왜"라는 질문을 하기에는 흐르고 있는 시간이 아까운 생각이 든다.
  일주일 후 위 글에 이어서 쓴다. 요새 며칠은 온몸으로 느끼는 고통속에서도 지평선 너머에 그 무엇이 있다는 확신이 날 기쁘게 한다. 딱딱해서 먹기 힘든 먹거리를 좁은 구멍에다 마구 밀어 쳐넣고서 너희가 이것을 소화시키든 말든 난 먹이를 구해다줬다는 식의 강의와(물론 잘 소화해내도록 노력하는게 우리의 임무겠지만), 평이라고 단조로운 주지의 사실들 만으로 전혀 신명나지 않는 강의를 제외하고는,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 같은 환희가 느껴진다. 친구와 담소를 나누거나 쇼핑을 하러가는 기쁨에 어찌 비하랴! 본과에 진입하고서의 3주간 단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학문의 신빙성에 대해 회의에 휩싸였던 나에게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한다.
  앞으로 또 그런 고비가 없으랴마는 가끔씩 카페인보다 훨씬 독한 각성제가 본과공부에서 주어졌으면, 그리고 항상 깨어있고 싶다. 아니, 깨어 있겠다. 그러면 위기(위기)가 양경(양경)으로만 돌겠지?

    컴퓨터와 한의학의 발전
  처음 한의학이란 단어를 접한지 4년으로 접어들었다. 뭔가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그 무엇을 가슴속에 품게 되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나의 눈앞에 나타나는 한의학이란 거대한 고무풍선 같기도 했고 또 바위 같기도 했다. 한의학의 작은 이론이나 묘방을 벗어나 큰 줄기를 보기위해 노력하였다. 이책저책 조금씩 읽어보아도 별 소득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나자신의 생각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주관이라고 해서 방종이 아닌, 흩어진 이론의 종합분석을 말하는 것인데 사실 나에겐 너무나 많은 자료를 분석하는 것만도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였다. 요즘 우리학교 선배님들이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고 한의학자료를 정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무척 기쁘다. 이처럼 수많은 자료의 공유와 전달만이 진짜 한의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여러 책을 읽다가 어디선가 본듯한, 또는 서로 연관이 되는 부분을 발견했을때 이를 찾아보고, 정리하고픈 때가 수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컴퓨터의 위력을 절실히 느꼈다. 컴퓨터를 이용하면 개별적으로 중복되는 일을 하는 불편함을 없앨수 있고 서로 다른 사람과의 토론과 보충이 쉬워지므로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있다.
  한의학에서 필요한 것은 번역사업이다. 한자로 된 학문이라 훌륭한 점도 많지만 낯설은 문자에 대한 해독의 어려움, 시간손해, 문법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의 소지, 일반인들의 한의학에 대한 무지, 분석 종합의 어려움 등등, 한의학은 켤코 한문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결론은 대대적인 번역사업의 필요성이다. 한문의 숨은 뜻을 표현할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일단은 우리가 익숙한 일상적 언어체계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한문을 번역한 책은 대부분 엉터리니 보지마라는 이야기는 너무 이기적이고, 그야말로 무식한 소리라고 생각한다. 비록 틀린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 큰 흐름은 변함이 없고, 누구든 쉽게 그 틀린 것을 고쳐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것이 좋다고 백화체니 뭐니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 배운것을 잘 이용하여 넓게 퍼트리라는 것이다. 자기손해라는 생각에 자기만 재미보고 마는 행동은 이미 의사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얘기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세상은 몇몇 선구자에 의해 이끌어지며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한 자다. 그렇다. 나의 길은 선구자가 되어 보자는 것이다. 비록 남들이 명의니 하며 돈벌고 승용차를 굴릴지라도 난 새로운 방향과 길을 닦아 보리라. 아직 구체적인 방향을 찾진 못했지만 그것이 본초든 원전이든 모두를 열심히 하리라. 의경의 아름다운 우리말 번역에 나의 평생을 바칠 용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팀웤이 될 수 있는 한의학연구소라도 있으면 좋겠다.
  나의 생각과 같은 말씀을 해주시는 교수님들이 계셔서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한의학을 암기과목으로 생각하고 외워서 의료에 사용하는 것은 헛거다. 이해와 집요한 추측끝에 응용을 할 수 있는 것이 진짜다.

    전통한의학파와 한양방상호보완파
  이제 겨우 예과의 과정을 마치고 한의대의 정식학생이 되었다. 본과생이 되었다는 뿌듯함보다는 앞으로 열심히 해나가야 할 학과공부의 중압감이 더 앞선다. 입학 당시부터 여러 선배들의 조언, 교수님들의 말씀, 많은 서적들의 난무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던 학교생활, 학과에 대한 인식 들이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감이 잡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니 갑자기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공부가 물밀듯이 밀려드는 것 같다. 어쩌면 자신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공부하는 지도 모르겠다. 내가 입학하고나서 힘들었던 일 중의 하나가 그 동안 굳어진 사고관의 개혁이었다. 어떤 문제든 하나의 답만 요구받던 나의 머리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태극, 태극에서 갈라졌다는 음양, 몇번을 읽어도 뜬구름 같았던 기의 개념을 내 수준으로 낯춰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떠들어 대는 한의학의 문제점들은 나의 가치관에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작년에 순수 전통한의학을 주장하는 교수님과 양방과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발전시키자는 교수님의 초청강연회가 있었는데 나는 후자쪽의 주장에 더 관심이 갔다. 허지만 아무리 최첨단의 진단기계라 할지라도 한방이 말하는 미세한 인간의 느낌은 복합적으로 잡아낼 수 없을 것 같다. 작년에 주로 양방과목들을 많이 배우고 올해는 주로 전공과목을 들어가는데 똑같은 인체의 생리기전을 설명하는데 양자가 너무 판이하게 달라 서로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딱 꼬집어 말하기에는 내 지식이 짧아 감히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한방과 양방을 연결시켜 공부하기가 좀 힘든 것 같다.
  3년째 학교를 다니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우리가 너무 우물안 개구리식으로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타 학생들과 정보교환이 너무 없는 것 같다. 그건 내자신 스스로가 반성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학하여 서울에 가 있으면 나 혼자만 한걸음 뒤로 쳐진 것 같은 열등감이 들곤 했다. 그래서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그동안 손놓았던 첨단 의학잡지를 읽는다든가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힌다든가 해야 할 것 같다. 원광대가 지방대라는 지리적 핸디캡을 극복해야 할 것 같다. 학생들 중 대부분이 그것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국가고시보고 나서 면허증 생기면 얻어질 경제력만 기대하면서 다른 것들은 그냥 눈감고 덮어버리고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여러가지를 경험하고 느낀 것들 중에서 가장 큰 지침으로 삼고 있는 것이 있다 : 어떤 사물, 사건이든 간에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실외에도 다른 방향이 있다는 걸 항상 생각하는 태도이다. 이제껏 유명한 학자들에 의해 해석되어 왔던 원전들도 짧은 지식이나마 내 나름대로의 해석과 비판을 해본다면 현대적 감각이 가미된 새로온 내용들이 나오지 않을까? 어쨌든지 간에 이 모든 것은 내가 직접 부딪쳐 보고 공부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다. 아무리 나쁘다는 것도 직접 부딪쳐 보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하나의 진보다. 첫머리에 썼던 얘기중 불안감을 느껴 공부한다는 것도 어떤 자극에 의한 것일 수 있다. 항상 안일한 태도를 버리고 직접 부딪쳐 보는 공부를 해야겠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한의학이 생판 남의 학문같기만 하던 것이 예과를 마치고 나서 점점 내 학문, 내가 공부해야 할 학문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어 예과 과정이 마냥 헛되지만은 않았구나 하는 다행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런 분위기를 함께 만들어온 우리반 학우들이 소중하고 고맙게 생각된다.

    한의사와 약사와 침구사

  전통의학인 한의학이 과연 미래에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오늘날 한의학은 거대한 위기에 봉착함과 동시에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 한의학의 현실과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가 될 지 모르나 논하여 보고자 한다. 고래의 우리 한의학은 일제의 탄압과 말살정책으로 인해 감춰지다가해방후 주체적인 세력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6년제대학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한의과대학의 치열한 경쟁률과 우수한 치료효과와 더불어 높은 수익성이 확보되는 듯 싶으니까 민간침구, 한학자 또는 기존의 약사, 그리고 심지어는 양의사 까지 한의학의 고유영역을 빼앗으려고 갖은 술수를 다부리고 있다. 과거에는 멸시만 하다가 이제 멸시받는 사람들이 피눈물나는 노력에 의해 자립할만큼 되니깐 또 다시 말살시킬려고 하는 것이다. 정말 우리역사는 왜 이다지도 도덕성이 없을까?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립의료원의 한방진료부가 한 예이다. 한방진료부의 태동은 보사부와 양의사들간에 한의학을 양방에 흡수 통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보인 것이며, 이미 보사부는 의료일원화 계획안의 작업을 끝내고 시기를 내다보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더불어 한방병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서울의 몇개 의과대학에서도 보사부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있으며 또한 약사끼리도 현재 위법적인 한약장을 설치하지 않으면 오히려 약국 개설허가를 내주지 않는 등 한의학을 하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조직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뿐인가? 침구사들은 침구사 제도부활을 외치며 침구학을 자기들의 고유영역인 것처럼 따로 분과시키려고 히고 있다. 한의과대학을 만들어 오늘에 이른 이상 한의학을 발전시키는 일관된 정책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며 또 한의사들에게 고유한 권한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의사에게서 약장뺏어가고 침구뺏어가면 도대체 한의사 노릇을 해야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한의사의 위상이 겨우 침쟁이와 돌팔이 약장수들과 이권다툼을 해야하는 꼬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이는 역사의 잘못된 부산물이요 시대의 착오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기존의 한의사들 중 의료일원화를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어 의견통일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물론 약사의 한약조제권이나 침구사의 침구행위는 영원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한의학도들은 의료일원화에 절대반대 할 수 밖에 없다. 흡수통합의 형식은 우리민족의 소중한 자산의 말살을 초래할 뿐이다. 국민의료의 측면에서도 한의학은 존재가치가 있다.
  결과적으로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초, 중, 고교부터 동양철학의 기본적사고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며 한의학연구자와 한의사들의 정신적 재무장이 필요하다. 한의사에게 의료기사를 고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의사와 양의사는 공동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의학혁명 또한 기대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한의사들의 하나된 모습과 한의학도의 자만에 그치지 않는 학문적 자세인 것이다. 뭉쳐야 산다! 힘을 기르자!

    방안에 널려있는 술병부터 
  어렴풋한 희망과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었던 예과시절, 어린시절 동네 할아버지가 가지고 다니시던 기다란 침, 그렇게도 맡기 싫어했던 한약냄새, 그때의 기억들이 이젠 막연한 동경으로 나타났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앞으로의 대학생활에 대한 물음에 선배들은 가지각색의 대답이었다. 어떤 선배는 이렇게도 말했다 : '너희들 무엇하러 무슨 동기로 우리과를 선택했는가? 대부분 부모님의 권유로 또는 요즈음 유망학과로 떠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 뚜렷하게 반대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렸을때 부터 꿈은 이것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관심을 갖고 눈여겨 본것이 채 1년도 되지 않는다. 들어올 때의 마음은 단지 한번 해볼만 하다는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 뿐이다.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제시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실감나게 쏙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먼저 공부보다는 변화된 환경, 즉 대학생활의 여러가지 재미에 더 이끌렸다. 그렇지만 날을 새기며 술을 마시고 노는 것에 몰두해도 마음 한구석은 빈듯한 느낌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날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보았다. 한의학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은 어때야 할까?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쉽게 답이 나지 않는다. 먼저 주변생활을 정리하고 난 후에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방안에 널려 있는 술병,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책들, 이런 것부터 정리하자! 주변정리를 한 다음 몸 정리도 해본다. 목욕도 깨끗이 하고. 이젠 무엇을 해야 할까?
  한의학 또는 한의사의 지위는 옛부터 중인이상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었다. 양반층에서도 서얼들이 유학을 공부하다 실사구시로 돌아가는 한 구실이었다. 그 유명한 이제마도 서자가 아닌가? 해방후에도 의원들을 학문을 하는 이들이라기 보다는 수공업자들 즉 기술자로 보았다. 한나라의 정치적 이념설정은 국민들의 의식방향을 많이 바꾸어 놓는다. 생명을 구하고 치료하는 신성한 것을 한낱 기술자들이 하는 행위로 보았으니 그 당시의 의원들에 대한 나라의 정책은 잘못된 것이었다. 의원들 자신들에게 스스로 비하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것들이 계속이어져 지금시대에는 그 명맥조차 위험한 초석위에 놓여 있는 것 같다. 한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인 우리는 다른 모든 수업도 한의학적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 배우는 서양의학 지식은 한의학적인 사고나 학문의 내용이 채 영글기도 전에 깊이 우리의 의식속에 파고들어 주객을 전도시켜 놓고 만다.
  말 그대로 본학문을 하기전에 기본적인 소양을 닦는다고 하는 예과시절에 한의학에 대한 보다 폭넓은 소개와 보다 많은 정보가 제공되어야 할 것 같다. 거기에 맞추어 우리들 자신도 스스로의 공부에 게을러선 안될것이다. 감이 익어 저절로 입안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이젠 본과생 한의학도의 참맛을 한번 진하게 느껴보고 싶다.

    '주역'이 죄라면
  한의대에 들어온지 어언 2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물론 세월이란 것도 인연이라지만 고3때 나는 전혀 한의대가 있는지 조차 몰랐다. 대학을 한번 실패하고 재수를 동경할 무렵 친구가 하도 꼬시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원서를 쓰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합격하고 말았다. 인연이란게 참 묘해서 입학하기 전에도 난 재수할 마음을 먹었었고 입학해서도 여전히 그런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헤매었다. 특히 입학과 동시에 나에게 닥쳐왔던 시련은 나를 더더욱 방황하게 만들었다. 이리라는 소도시에서 생활해야 된다는 생각이 좀더 큰 물에서 생활해보고 싶은 나의 욕망을 자꾸 부추겼다. 그렇게 나의 방황이 가중되어 갈 무렵 '주역'을 접할 기회가 주어졌고 '주역'에 대한 무수한 신비스런 말들을 들어왔기에 서슴치 않고 그 책을 읽어보기 시작 했으며 읽다보니 재미가 있어서 어설프게나마 한페이지씩 읽어가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그 내용도 모르고 시간이 있을 때나 생각날 때 가끔씩 뒤적거리곤 해본다. 보면 볼수록 단번에 볼 수 없는 책이어서 평생을 통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한문공부나 하려고 한의대에 눌러앉은 신세가 되어 버렸다.
  지금도 떠나긴 무척이나 싫다. 내가 뭐 특별하게 한의학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나 한놈 없어진다 하더라도 한의학이 뭐 크게 잘못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 수록 나를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특별히 꼬집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가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마 졸업후 진로가 확실히 보장되고 먹고 사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조그마한 소망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느끼기론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새벽 두시경엔 참 즐거운 시간이다. 나의 생각이 맑아지고 분위기가 착 가라 앉으며 세상이 고요해져서 생각을 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시간이다. 특히 이 시간에는 난 그들을 만나고 싶어진다. 나보다 몇천년 먼저 살다간 그들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우주를 끌어안은 그 넓은 가슴을 간직한 선조들을 무척이나 만나고 싶어진다. 그들을 만나서 이 밤을 지새우며 우주를 논하고 싶어진다. 이 시간이면 난 그들과 우주를 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들! 그 가슴! 그 넓은 가슴을 대했을 때, 그 희열을 느끼고 싶어진다. 한의학, 내가 생각하기엔 별것 없다. 아픈 이들이 아픔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아주 인간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쉽게 터득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보다 그 속에 묻혀있는 우리 선조들의 그 드넓은 가슴! 그 가슴이야말로 내가 진정 접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느끼건대 아무리 잘난 명의라도 모든 이들의 병을 치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병이든 사람은 그만큼 그의 생활이 문란했던가 아니면 그의 마음이 피폐했기 때문이며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의학은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애가 우선이다. 그 다음이 실력이요 능력이며 학문일 것이다. 한의학도 인간의 의학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걸 포용하는 마음자세로 탐구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끝으로 의학 그 자체에 대한 매력을 고백하며 무엇보다도 한의학을 통해서 몇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선조들의 그 드넓은 가슴과 마주 대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으면 하고 바란다.

    국가는 한의학의 현상만 유지시켜라!
  '한의학이 어떤 학문이며, 무엇을 배우는 것인가'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도 없는 상태에서 한의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학교에서, 선배들로부터, 혹은 주위 여러사람들로부터, 책으로부터 한의학에 대해 듣게되어 조금은 눈이 뜨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한의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먼저, 한의학과 인연을 맺게된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한의학이 학문으로서 우수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병을 치료하여 고통을 덜어주며,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함으로써 인류에 봉사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우수한 학문으로 생각하는 것은 동양철학적 사고와 이해속에서 발생되었다는 점이다. 인간을 천지자연의 대우주속에 존재하는 소우주로 보고, 양 우주간의 변화를 관찰하여, 그 속에서 어떤 이치를 발견하여, 인간의 생리, 병리를 알고 치료방법까지 찾아내는 것이 한의학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의 터전인 자연을 연구하고 그것을 인간에 결부시켜 우리들 자신을 이해하여 올바로 살아가기 위한 그 어느 학문보다도 훌륭한 학문인 것이다. 우수한 학문인만큼 공부하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한의학이 동양철학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있기 때문에 철학을 이해하지 않고는 깊은 곳을 파헤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의학을 공부하는 우리들은 동양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서양의학은 '이 병은 이것이다'라고 찍어 말할 수 있지만, 한의학은 이 병이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음을 말하면서 그 모든것을 종합하는 학문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말로만으로는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학문인 것 같다. 서양의학은 분석적이고, 한의학은 종합적이라고 하는데, 사실 한의학도 한가지 병이 발생했을때, 그 병의 원인을 여러가지로 분석하며, 병자체도 여러가지로 나누어 생각한다. 단지 병을 이해하는 언어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사회적 위상에 있어서 많이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병원수, 의사수, 병원을 찾는 환자수를 보면 쉽게 느낄 수가 있다. 한의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며, 해결 또한 우리들의 것이다. 국가가 이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공권력의 개입은 항상 부작용이 더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국가가 조용히 우리의 현상을 지켜주고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싸워나가도록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국민들의 생활 속으로 더욱 깊게 침투하여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의술을 베푸는 휴매니스트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가가 오늘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유지시키고 법령뜯어 고치는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 것이다.

    나의 별은
  이 세상에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학문이 있다. 각각의 인간들이 자신 나름대로의 길을 그 중에서 택하여 간다. 물론 나도 예외는 될 수 없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할수도 있겠지만 내가 선택한 길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금 현대의 학문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서양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철학을 보아도 먼저 서양철학을 배운다. 도대체 우리 전통의 것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한의학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호기심이랄까 흥미로운 점들이 엿보였다. 언뜻 보면 참으로 한심한 학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실상은 이세상 모든 학문을 통달할 수 있다는 묘한 기대가 나를 끈다. 그 이유는 한의학을 이해하려면 우주와 세계, 자연 그리고 인간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늘을 알고 사람을 아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한의학을 알기 전에 먼저 자연관을 정확히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삼라만상의 자연을 보라. 각각 제멋대로 생겼다. 어디를 보아도 똑같이 생긴 자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인간들이 배워야할 과제이다. 내가 전에 들은 말 중에서 과불급이라는 말이 있었다. 넘어서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아주 안정된 상태,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자연은 자신의 도를 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지 않는다. 인간들은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술을 마셔도 그렇고, '내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술과 섹스때문에 수명이 단축되었다는 말이 옳을 것 같다. 하긴 사람들이 모두 신선처럼 살아도 재미는 없겠지만 과불급이라는 말과 함께 내가 좋아 하는 것이 '의자의야'라는 말이다. 물이 흘러가면 흘러가는대로 그대로 두면 참 편한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물을 그대로 흘러가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차라리 수백년 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기도 하다. 언젠가 한의학은 세상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말이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무위자연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매우 무책임한 것 같기도 하다.
  얘기를 하다 보니 한의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것이 되었는데 한의학에 대한 얘기는 솔직히 별로 아는 바도 없고 할 수 있는 말도 없다. 가고 가고 가다보면 알게 된다는 말처럼 남들이 공부하듯이 뭐가 뭔지 모르면서 쫓아 가다보면 내가 한 일을 문득 깨닫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 말을 하고보니 내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심스러우면 어떠냐, 내 자신에게 득만 된다면 됐지. 서양사람들에게서 부러운 점은 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부끄럼없이 한다는 점이다. 남들을 인식하지 않고 행동한다는 점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가 없는데 가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나 자신도 그러한 것을 어찌하랴!

    비피, 글루코스, 장자장평
  녹용, 인삼, 침... 이런 것들이 한의학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으리라. 아니 한의대가 있는지도 몰랐었으니 기껏해야 한약방에 대한 인상뿐이었으니까. 고교 3학년때 어느 신문에선가 '한의학의 새 조명'이라는 글을 읽었다. 중국의 놀라운 침술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그 후에 내 진로가 한의대로 확정된 것같다.
  예과 1학년, 그때 한의학개론 정도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강의 내용, 형식은 고등학교때와 별로 다른게 없었다. 오죽했으면 '원광대 부속 한의고교'라고 우리끼리 말했겠는가? 그래서 대학에 갓들어와 갖게된 새 학문에 대한 기대, 대학에 대한 어떤 희망이 한풀 꺾이었다. 그러나 선배, 그리고 '한방이야기'와 같은 읽기쉬운 서적, 또 의료활동을 따라가서 얻은 내용은 한의학에 대한 어떤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음양, 목화토금수, 상생상극..., 지금까지 내가 듣고 보고, 배우지도 못했던 이런 것들은 마음 속을 울렁거리게 하였다. 그곳에는 어떤 잠재된 가능성이 숨겨져 있는 듯 했으며 스스로 책을 읽는 도중 '나는 이러이러한 의사가 돼야지!'하는 마음가짐이 생기기도 했다. 물론 대학에 들어와서 만난 새로움이 한의학뿐만이 아니었다. 해보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고 자유도 너무 많았기에 대부분의 나날이 학과이외의 부분에 투자되었다. 그래서 한의학이 무엇인지도 잘몰랐으며 어떤 방식으로 공부해야 하는지는 더더욱 몰랐으며 단지 그 피상적인 면만을 보았을 따름이었다.스컬, 버테브래, 비피, 글루코스... 예과 2학년을 뒤돌아 볼때 떠오르는건 이런것들일 뿐이었다.
  물론 '장자장평야'도 있었지만. 예과 2학년때의 학과목은 주로 양방과목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해부학, 생리학, 생화학, 유전학, 조직학... 이런 과목은 어쩐지, 나와는 관계없는 듯이 느껴졌다. 물론 지금도 그런 느낌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래서 학과공부가 꺼려졌고, 그냥 대충 시험만 넘기면 된다는 식의 생활이 연속되었다. '장부총론', '장부조분'등 그 의미도 파악하지 못하고 마냥 앵무새처럼 외웠던(그마저도 지금은 거의 잊어버렸지만)것이 예과2년의 원전공부의 전부였다.
  지금 생각하건대 정말 자기공부를 소홀히 했던 것이다. 그렇게 자내다가 보니 어느새 '예'짜가 빠지고 '본'짜가 붙은 학년에 이르게 되었다. 학기초를 지내며 예과때의 강의와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특히 교수님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찾아하는 공부를 요구하셨다. 그리고 어쩐지 거리감을 느끼는 양방과목의 비중이 많이 줄고 한방과목이 늘어 웬지 좋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걱정이 생겼다. 내가 과연 학과공부를 따라갈 수 있을까? 이러다가 '돌팔이'되는 것은 아닐까? 왜 예과때 준비를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나는 예과때 읽다가 덮었던 '한의학원론'을 다시 펴 들었다. 스스로 학과공부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런데 내가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그 원인은 물론 나 개인적 나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부의 방향제시가 불분명한 현 한의학 자체도 분명 어떤 문제가 있다. 작년에 박찬국교수 초청강연회에서도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아마도 선명한 방향제시가 아닐까 한다.
  학생들이 믿고 따라갈 만한 어떤 행로가 정해진다면 우리 한의학의 발전은 자연스럽게 달성되리라 본다.

    엔돌핀이여
  벌써 한의대에 입학하여 예과과정에서 한의학을 접한지도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어쩌면 긴 시간일 수도 있다. 이 시간동안 느꼈던 것을 피력하라니 어쩐지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염치불구하고 이러한 글을 쓰게되는, 또 쓸 수 있는 것은 우리 90학번은 타학년에 비해 더 학문에 대한, 사회에 대한 심한 갈등과 고민에 휩싸여 나이에 맞지않게 애늙은이가 되어버린 사람이 많기 때문이기도 할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고민들은 쓸데없는 것일 수도 있다.
  2년전 한참 써클을 고르다가 침구반을 선택했다. 개강모임이 시작되자 엄청난 숫자의 선배들이 몰려와서 우리들을 환영했다. 그 다음부터 써클수업이 시작되었다. 음양과 오행과 장부학설에 대해 선배들은 우리에게 퀘스쳔을 던졌다. 그때만 해도 선배들은 음양이니 오행이니 하는 것들을 마스터하고 한의학에 도통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그냥 왠지 모르게 학문에 대해, 선배들에 대해 신뢰감이 없어져 갔고 심지어는 교수님들의 강의조차 권위가 없어져 갔다. 의료봉사를 가서도 본1선배가 본3선배에게 침구학에 대해서 더 아는체하고, 심지어는 예과생이 한의학을 왈가왈부하며 열을 올릴때는 그 정도로 한의학이 우스운 것인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우여곡절끝에 무재시로(의과대학 무재시는 그래도 알아줄만한 것이다) 예2과정을 통과하고 본과에 들어왔다. 써클에서도 이제 두학년의 선배가 되었다. 더불어 써클수업도 준비해야한다. 그러나 수레바퀴처럼 해마다 맴도는, 아~ 나는 또다시 음양, 오행의 쳇바퀴를 계속 돌려야 한다. 2년전에 비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가 어쩌자고 책상머리에 앉아있냐 하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요새는 심지어 교수님들도 해매고 계시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떤 교수님은 한방의 객관화, 과학화를 내걸고 계시고 어떤 교수님들은 원전으로 돌아가야한다고 말씀하신다. 도무지 학문에 대한 감을 느낄 수 없다. 오전에는 최첨단의 의학의 프론티어과목인 면역학에 대하여 논하고, 오후에는 원전으로 돌아가서 황제왈하고... 우리는 이 정도로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신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떤 때는 약대를 다니는 듯하고, 어떤 때는 의대를 다니는 듯하고, 어떤 때는 동양철학과를 다니는 듯 싶다. 슬프기 짝이 없다.
  예2, 겨울방학때 대전으로 유학을 갔다. 봉기종 선생님을 뵈었다. 두달 동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대학', '논어', '중용' 등을 조금씩 읽어 나갔다. 더불어 아침에는 먼나라 얘기로만 들었던 가부좌를 하고 수도라는 것도 해보았다. '역'의 말씀을 하시면서, 아무런 책도없이 의학의 최종목표는 수승화강이라고 하시면서 '괘'를 말씀하셨다. 학교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정신의 맑아짐을 맛보았다. '유경도익'을 보면 고인들의 그림이 나오는데 유달리 아랫배의 단전 부위가 볼록 나왔다. 왜 그랬을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옛 의학자들은 '사서'의 이치와 '역'의 이치에 따라 호흡을 하여 단전부위에 가를 불어 넣어 아랫배가 나왔던 듯 싶다. 의서를 씀에 있어서 자신의 몸으로 직접 수련을 하여 12경락의 흐름과 신수의 상승과 심화의 하강을 느꼈던 것이 아닌 듯싶다. 천지자연과 인간이 하나임을 느꼈기 때문에 모든 의서마다 인신은 소우주라고 했던 것같다.
  그러나 학교교육 12년동안 물리, 수학, 화학등 모두 외제학문만 배우는 교육을 받고 한의대에 입학하여 머리가 좋아 장학생으로 졸업해서 경혈학교수가 된다면, 그리고 계속 과학화, 객관화를 부르짖으면서 침에 무슨 엔돌핀이 들어가니 어쩌니 하면서 토끼나 쥐나 잡고 있는다면, 결국한의학의 미래는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2년동안 느꼈던 것은 이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거창하게 한의학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그냥 느낌을 피력하는 것으로 그쳐야 겠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학문을 사랑하고 후배들을 사랑하고 선배들을 사랑하고 존경해야겠다. 우리는 한배를 타고 있지 않은가?

    한의학에 대한 소박한 사견과 마음가짐
  일반적으로 한의학은 사장된 학문으로, 고전적인 한 분야로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한의대에 입학하기 이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고, 한의대를 지원한 친구를 이상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다시 대학에 입학한 이후 한의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하게 되었고 어렴풋이나마 공부해야할 방향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학문이나 그것을 연구해 나가는 방법상 문제에 있어서 이견이 있기 마련이고, 비판과 재해석이 있기 마련인데 한의학에도 이러한 문제점이 있고 제도적인 문제가 얽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쉽지는 않으며, 따라서 한의학도들에게는 졸업후의 진로 등에 어려움이 있으리라 예상이 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는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제기보다는 내가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소박한 생각과 나 자신에 대한 다짐을 밝혀 두고자 한다. 한의학은 인체를 소우주로 보는 생각 즉 자연의 일부에 포함시켜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에 순응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학문이라는 점이다. 흔히들 한의학을 비과학적이라고 말하지만 '과학'이라는 것만큼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것은 없다. 도대체 과학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실험과 검증을 통하여 언제든지 파기되고 재건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에는 분명 어폐가 있으며 '합리적'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또한 한가지 증상에 대한 획일적인 처방이 아닌 각 개인의 체질과 각각의 증상에 대하여 다양한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는 다양성 속에서 조화로운 통일을 이루고 있다. 또한 한의학과 관련된 고전속에서 인간의 도리, 윤리 등을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그러나 서양화된 사고체계로 동양적 사유를 바탕으로하는 한의학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건강부회적인 우를 범할 수도 있으며, 원문의 번역과정에서 파생되는 혼란을 극복하기에는 앞으로 많은 세월을 지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운다는 것'은 정말 큰 기쁨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움은(가르치는 것에 비하면) 때로는 힘들고, 심지어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나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많이 느꼈다. 특히 우리생활 속에서 그것도 피할 수 없이 크고 작은 질병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에게 직접 적용하여 치료의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는 양의사 못지않은 책임감과 경외에 가까운 사려깊음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양의에 비하여 한의는 의료사고도 적기 때문에 투약 및 침술에 있어서 신중하지 못함이 있을 수 있고 이것이 습성화되어 버리면 오히려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의사는 자신의 가족을 치료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원리를 터득하고 임상에 슬기롭게 잘 이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은 공부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 과정은 분명히 내 인생에서 현명한 선택이었으며 내 이웃에게도 유익한 일이 될거라는 생각이다.

    시작이 반
  처음 한의대를 선택한 후 한의학이 어떤 학문인가, 또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한의학이란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 한의학을 접했을 때 한의학은 매우 복잡하고 애매하여 현대과학처럼 명확한 그 무엇인가가 잡히지 않고 그저 뜬구름 잡는 식의 공부가 아닌가 하는 느낌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다. 또, 한의대에서 배우는 것은 단지 침이 어떻게 사람의 몸에 작용하여 질병을 치료하게 되는가, 또 어떻게 쓰는 것인가, 어떤 약이 어떤 병에 좋은가,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했던 종전의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달리 내가 접하는 한의학에 관한 모든 것들(수업시간의 교수님들 말씀과 주위 선배님들의 말, 그리고 책등)은 나를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벌써 한의대에 들어 온지도 2년이 지나고 본과의 문에 들어선지 한달이 지나고 있다. 요즘 들어서 본과라는 단어가 내게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지어 주는 것 같다. 지난 2년 동안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힘들면서도 즐거웠던 일도 많았지만 가장 후회되는 것은 한의학 전반에 관한 공부를 너무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이 책을 보아도 너무 애매하고 확실히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조금 보다가 그만두고 저 책을 보아도 마찬가지로 포기해 버리고 결과적으로 어떤 것도 제대로 해 놓은 것이 없이 시간낭비만 한 것같다. 예과때는 그저 놀기에 바쁘고 써클활동에 바빴지만 요즘은 공부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이 들고 쓸데없이 보내어 지는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걸 보면 본과라는 단어가 내게 적지않은 심적 변화를 가져 온 것이 확실한것 같다.
  조금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내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 반은 해놓은 것이니까 나머지 채워지지 않은 반을 지금 이 원고지 한칸 한칸에 글자들을 채워가듯 꾸준히 채우다 보면 언젠가는(끝은 없겠지만)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정도는 될 것이다. 남들은 이 책을 보고 저 책을 본다고 해도 나는 그런데에 연연치 안고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것들만이라도 꾸준히 해나가야 겠다.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미래상은 항상 나 자신만을 위한 한의사가 아닌 항상 끈임없이 공부하는 의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드디어 그러한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과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나와 내 주위에 있는 동료들, 선배들, 그리고 후배들과 아울러 모든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건투를 빌며 짧으나마 나의 생각을 적는다. 지금의 생각과 각오가 계속해서 변치 않기를 바라며...

    한의대생들은 토론이 너무 없다
  한 해가 갈 때마다 후회와 반성도 하였건만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다. 뭔가 해보려고는 했으나 항상 마음 뿐 몸이 따라가질 않았다. 교수님의 과제로나마 나를 반성하고 뭔가 새로운 계기가 되었르면 해서 글을 쓴다. 한의학에 관한 소견, 전망 등을 쓸려해도 아는 것이 없을 뿐이다. 한심한 내 모습에 한숨지으나 그저그저 보내버리는 나날들이다.
  한의학과 나, 정말 잘 어울리는 관계일까? 한의학이라는 학문 속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 설 수 있을까? 한번 결정한 나의 선택에 이제는 책임을 질 수가 있어야 한다. 한 사회인으로서 난 사회에 대해 봉사를 해야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며 기초를 닦아야 한다. 그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캠퍼스생활이다. 돌이켜 보면 예과생활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시험기간에만 유급이라는 딱지는 받지않으려고 마지못해 공부하고 간신히 넘겨버리고 무엇에 하나 메달리지도 못했던 나였다. 2년이 그냥 흘러 버린 것 같으나 생각해 보면 길기도 긴 시간이이다. 고등학교에서 졸업하고 산뜻한 신입생이었던 내가 어느 정도 성숙 될 수가 있었던 시간, 참 긴 시간이었다. 그랬던 내가 본과라는 큰 직책을 받고 보니 떨리고 긴장되고 이제는 뭔가 새로운 것이 있어야 겠다는 부담감마저 든다. 그러나 막상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려 했으나 막연하기만 했다. 항상 그래왔듯이...
  그러나 결심했다. 나의 확고한 위치를 굳히자. 그렇다. 한의학은 이제 나의 꿈이 되었고 나의 책임이 되었다. 한의학 속에서 내가 할 수있는 위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한의학의 위치는 과연 어떠한가? 사회에 있어서 한의학은 아직도 재자리를 확고히 굳히고 있지 아니한 것같다. 의료일원화라는 문제만 봐도 그렇고, 약사들의 무리한 권리 주장도 그렇고, 일반국민들의 인식도 그렇다. 한의학이 과연 이런 문제들을 싸워나갈 수 있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객관적, 학문적 위치를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이러한 많은 문제를 갖고 있는 한의학에 있어서 한의사, 아니 나에게 주어진 일은 많은 것같다. 책임이 있는 일을 멀리 내다보며 하나 하나 지식을 쌓아가고 뭔가 의문점을 가지며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원대한 비젼과 플랜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도록 학우들끼리 서로 토론해야 할 것이다. 우리 한의대생들은 너무도 대화가 적다. 타대학생들에 비해 너무 이기적 안일에 빠져 있는 것같다. 얼굴을 맞대고 보편적 문제를 놓고 머리싸매고 논쟁을 벌리는 그런 진지한 모습을 보기 어렵다. 우리 다같이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이다지도 단결이 안될까?
  '한의학엔 미래가 있다.'
  '한의학엔 무궁무진한 발전가능성이 있다.'
  '한의학의 의료일원화는 말도 안된다.' 이런 말들을 듣고 지내 온지도 벌써 3년째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을 질문형식으로 내게 묻는다면 과연 어떠한 말과 행동으로 응해야 할지 나는 자신할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이 학문이 가장 인간답고 멋있는 학문이라는 느낌뿐이다. 내가 이 방면에 뛰어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바라는 한의학의 발전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다.
  내가 처음 이 대학에 들어와 맨 처음 내게 강한 이미지를 준 것은 '한'자의 느낌이었다. 아! 이 학문에는 강한 독립심과 끈기가 있구나! 하지만 그런 느낌은 갈수록 무디어졌다. 아니, 차라리 사라졌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해서 강한 주장을 할 수 있는 형편은 못되지만, 우리의 한의학은 고루한 진흙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솔직히 들어난 길이 없다. 어떠한 사상하에서 어떠한 학문을 하여야 하며 어떠한 방법으로 학문을 진행시켜야 하는지 명료히 말하는 이는 없고 모두들 그저 '의자는 의야'라든지 '과학화'라는 틀에 기우뚱거리는 것 같다.
  이제 내가 바라는 바를 이야기해 보겠다. 미리 그 요점을 말하자면 '한'의 의미를 살리자는 것이다. 과학화든 도를 깨우치든 우리의 민족정신하에서 학문을 발전시키자는 거다. 한의학은 분명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지 않은 유기적 관점을 고수한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정신, 무의식중에 솟아나는 우리민족만의 '끼'를 인지하지 않는 의학은 죽은 의학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정신으로 한의학을 발전시킬 때 우리민족내에서 공감대형성이 가능하고 더 나아가 수출이 가능하리라 본다. 또 그러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 국토내에서의 약재의 자주화, 한글로 된 한의학의 연구등도 수반되어야 한다. 어디선가 들은 말인데 중국에서의 약재수입이 금지된다면 우리의 한의학은 괴멸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아마 중국과 일본에서의 서적수입이 금지된다면 더 큰일 일지도 모른다. 교수님들은 강의를 하실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부활 반세기의 역사이기에 어쩌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 수도 있다. 단지 내 지적은 현 시점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추잡한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우리과의 분반도 고려해 볼만한 일이다. 1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큰 강의실에서 있으니 협동이 잘 안되는 것 같다. 뜨끈뜨끈한 정이 없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일단 정이 있는 곳에 큰 힘과 발전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미지근한 학우들의 연대감으로 과연 사회에 나가 일치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꽈회의를 해도 카리스마를 가지고 힘있게 나가 말하는 사람도 없고 또 진지하게 듣는 사람도 없다. 가벼운 전달사항도 그냥 흩어져버려 학과시간 중에 선생님께 양해를 얻어 수업시간을 할애하며 몇마디 떠들어야 한다. 한의과대학이라하면 분야의 특수성과 단과대학 단일과로서의 특수성 때문에 결속력이 강할 것 같은데 그 실상은 정반대다. 자기개인의 이기적 이해관계에 걸리는 일 이외의 모든 일에는 불감증에 걸려 있으며 좀 전체를 위한 자기희생의 자세가 근원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결국 한의학이라는 학문이 자기존재의 신념을 주고 있질 못하기 때문이다. 근원적으로 자기 프라이드가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문제거리의 사슬이 우리나라에 있다고 하지만 나는 거기에 덧붙여 한마디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의 사슬, 모순의 사슬은 한의과대학에 얽혀 있다고, 또한 열쇠가 존재하는 곳도 바로 여기라고. 너무 강한 표현일까?

    맛만 볼것인가
  내가 한의학을 접한지 벌써 3년째로 들어서고 있다. 이년간의 예과과정에서는 한의학에 대한 것을 약간 맛만 본 정도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그래도 그 동안 접한 한의학에 대해서 나의 작은 소견을 적어 볼까 한다. 내가 생각해 볼때 한의학의 큰 특징이라 할수 있는 것은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서 적용되는 음양오행의 법칙을 인체에 적용하는데 있다.
  이러한 특징때문에 한의학은 그만큼 이해하기가 어렵고 또한 신비감 마저 주는 것이다. 따라서 한의학의 동양철학적인 특징 때문에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해야만 한다. 많은 생각을 하는중에 그 어떠한 이치를 깨닫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동양철학에 바탕을 둔 한의학적 진단은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증상 뿐 아니라 그 증상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구명하기 위해 힘을 쓴다. 또한 이런 원인을 정체적으로 규명한 후에는 그 원인을 치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있다. 따라서 이러한 진단과 치료에도 단순히 병증에 의존하지 않고 철학적인 음양 오행의 원칙과 장상과 경락원칙까지 이용하여 진단, 치료해야 하는 것이다.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도 양방과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데 침, 구, 약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약에 있어서 단순히 약 한가지에 들어있는 유효성분에 의한 치료뿐 아니라 환자의 상태가 냉한지 열한지 또는 허한지 실한지에 따라 만약 허하다면 약중에서 보해주는 약물을 사용하여 조화를 이룩한다. 또한 약을 복용할 때도 단순히 한 약물을 복용하기 보다는 여러 약물을 혼합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강화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침과 구는 한의학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치료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침이나 뜸의 치료는 경락의 원리에 그 바탕을 드고 있다. 경락이라 하는 것은 제3의 혈관이라 부르는데 이 경락은 기가 순환하는 통로가 되며 인체의 생리작용을 주관하는 있다. 이 경락에 대한 신비감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그 기의 흐름을 느낄수 있으나 죽은 사람을 아무리 해부해 보아도 찾을 수 없다는데 더욱 가중된다. 즉 경락은 생체에만 존재하는 생명선인 것이다. 침이나 뜸의 치료는 이러한 경락을 이용하여 그 경락상의 경혈을 자극하여 병을 치료하게 된다. 침구치료에 있어서의 경혈의 자극은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기를 보내주는 것으로, 인체의 생리작용을 주관하는 기의 작용을 도와서 어떤 비정상적인 상태를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 주는 작용을 자지고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의학에는 여러 특징이 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 이러한 좋은 특징을 배격한채 양방적인 지식을 이용한 치료를 시행하려는 자가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수 없다. 따라서 한의학을 하는 나로써는 이런 한의학적 특징을 잘 살릴수 있도록 기초부터 다지는 작업에 몰두해야겠다.

    환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동양의학 혹은 동양학이라는 학문을 근거로 하여 발생하고 발전되어온 한의학은 민중의료와 국민의료의 큰부분을 차지하는 단계에까지 발전하였다. 수천년의 시간동안 선배의학자들이 경험과 수련으로 쌓아올린 금자탑을 우린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우리에게 주어진 위치를 고수할 수 있는지 알아보아야 겠다.
  우선 의사로써 갖추어야할 자세에 대해 보면, 환자의 아픈점을 찾아 고통을 덜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인간의 질병과 고통에대한 지식이 풍부해야겠고 그에 걸맞는 기술을 갖추어야 되겠다. 이런 기술과 지식을 갖추었다 하여도 의사의 인간성 자체가 나쁘다고 하면 그 지식과 기술이 오도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의사의 자질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을 위하고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역사의 인간성이 중요하겠다. 손사막(?-682)의 말대로 환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알며 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나도 생활하며 금전에 구애받지 않고 환자를 대할줄 알아야겠다. 선배의학자들은 이런 자질의 바탕위에 한의라는 의학을 발전시킨 것이다. 우선 인간의 몸을 자연의 운영원리에 맞춰서 음과 양의 두 작용으로 나누고 이의 변화에 의해 각종 대사가 이루어 진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음과 양의 조화가 깨어질 경우 각종 질병이 발생하며 또한 음과 양의 조화를 맞추어 주는 것이 치료라고 했다. 이렇듯 간단한 이론에서 부터 출발하여 지금의 의학으로 성립된 많은 부분이 의학자의 헌신과 노력으로 이루어 졌다. 이런 고귀한 한가지 한가지의 이론과 지식을 경시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그들의 정신에 걸맞게 인간을 사랑하며 환자의 병을 나의 병같이 생각하고 아무리 미미한 병이라도 자신의 혼신을 다하여 치료하려는 노력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 많은 부분에서 한의학이 경시되고있다. 객관화가 부족하다는 점과 미신에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 사람들이 꺼리고 있다.
  이는 서양과학문명에 길든 사람들이 한의학을 자신의 짧은 과학 지식으로만 해석하려다 실패하는 경우 자신을 원망하기 보다는 한의학의 객관화의 부족만을 한탄하고 있다. 그러나 한의학은 절대로 객관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객관성을 인지할 힘이 우리에게 부족했기에 힘을 쏟지않았을 뿐이다. 모든 인류가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동료 의학자들은 여기에 유념하여 지구상의 질병타파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서양의 과학이 동양의 사상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모두 한가지의 원리에서 출발한 것이요 단지 해석방법이 다를 뿐이다. 의학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고 이해시켜주어야 하므로 알기 쉬운 의학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서양과학과의 타협이라는 의미 보다도 접목이라는 의미로 나간다면 분명 밝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장부라는 전쟁터
  이제 본격적으로 한의학에 입문한 나로서는 한의학이라는 피상적이고 신기루와 같은 존재라서 감히 단정을 내릴 수 없고 이제까지 원광대 한의과대학을 다니면서 한의학에서 느낀 소감만 적어볼까 한다. 한의학은 단순히 술을 가르치기보다는 철학을 강조하는 학문이 아닌가 싶다. 원전을 공부할 때, 우리의학도가 지녀야 할 몸가짐을 가장 먼저 배웠고 가끔씩 접해보는 의학서들도 대부분 그렇게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또한 문구 하나하나에서 동양사상, 동양철학이라는 것이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애타심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즉 아를 이기고 상대의 편에 서서 생각하는 대아의 방법과 이때문에 내 몸처럼 남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생겨나는 것이다. 내가 간의 입장이 되었다가 담의 입장이 되었다가, 어떤 때는 병사가 되어 장부라는 전쟁터를 휘젓고 다니고 있다는 착각에도 빠진다. 환자라면 어떠한 곳이 어떻게 아프겠다라고 상상도 해 본다. 그래서 한의학에 심취할수록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우리들을 경종시켜 겸손하게 만드나 보다. 더 나아가 우리 조상들의 지혜롭고 뛰어난 학문능력에 경탄과 존경심을 갖게 한다. 이렇게 전후세대를 하나로 이어준다는 의미에서 한의학은 조선문명의 적통이라고 말하고 싶다. 의가에서만 전해 내려온 것이 아니라 민간요법으로 백성들 가까이서 손쉽게 접할 수 있던 것이 한의학이었다. 비록 지금은 의료수가가 비싸지고 생활의 격차가 생겨 국민들과 멀어져 있는 건 사실이지만...
  겨울방학중에 의료실태 조사를 나갔던 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민중들은, 항상 악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살고 있는 서민들은 양의학이고 동의학이고, 민의고 면허의고, 내것네것으로 갈라 놓는 것에 관심이 없단다. 자신들에게 제일 가까이 있고 치료액수가 부담이 없는 의학이 제일 좋단다.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노동조건으로 병은 만성이 되고,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 할 때 빨리 낫고 돈적게 들고 절차가 간단한 의료가 가장 필요한 의료라는 것이다. 우리는 의료일원화이니 흡수통합이니 하면서 자신들의 돈벌이 챙기기에 급급하지 않았는지, 원문구절마다 새겨져 있는 의미를 지나치게 단순히 지식을 암기하는데 머물지나 않았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전통의학이라는 자처하는 한의학을 배우는 우리는 사구에서 배운 돈만 벌면 아무래도 좋다는 식에서 벗어나 상대방 즉, 국민들이 원하는 의술, 하늘에서 부여받은 생명을 다루는 의술을 신중하게 행하여야 할것 같다. 그리고 평생을 통해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찾아내려는 노력이 의술과 함께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이 지극히 우매한 나의 소견과 앞으로의 생활자세다.

    보편화를 통한 객관화
  현재 한의학을 보는 일반적인 견해는 보약위주처방과 서양인이 보는 신비주의적 의술로서의 대부분일 것이다. 이에 전반적으로 한의학의 보편화, 객관화라는 문제가 대두되어 왔다. 과거의 한제국 문명의 토대위에 형성된 동양철학과 매치된 의술과 근대서양의 계량적이고 분석적인 사상의 토대위에서 성립한 사양의술의 차이점은 아직 융화되어 있지 않다. 한의학의 분석되어지지않은 부분들은 분석적인 서구문화에 물들여져 가는 일반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잔재되어 있는 전통문화와 새로 교육되어지고 있는 신문화와의 혼란도 있을 것이다.
  객관화나 보편화라는 말이 어떤 혼란에서 야기된 것도 같다. 객관화보다는 '보편화'가 더 시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의 한의학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부족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이는 한의학의 존속을 해결하는 답이 될 것이다. 대중의 한의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서뿌른 객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객관화란 결국 환자를 쉽게 접근하고 그래서 수익을 쉽게 올릴려는 얕은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처럼 한약을 정량화하고 제품화하는 것이 객관화의 참 뜻은 아닐것이다. 객관화를 통하여 보편화를 이루려는 것은 얕은 수작이다.
  임상면에서도 더욱 큰 발전이 있어야 하는데 단지 객관화를 학교에 떠 맡기고 있는 듯하다. 물론 객관화를 시킨다는 것이 일개인의 힘으로 하기에는 벅찬 일일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개인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보다는 임상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서로 제공하여 한의학의정보를 보편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도대체 한의학계에 학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학술잡지 한 종이 없지 아니한가? 각각의 데이터들이 쌓이고 쌓이면 서로 다르게 보였던 지식들이 하나의 큰 정보가 될 것이다. 이것은 아직 어린 학생의 의문점일 뿐이다. 객관화를 통한 보편화는 많은 제약을 초래한다. 그러나 보편화를 통한 객관화는 점차적인 정도일 것이다. 즉 한의학의 올바른 인식이 재정립되어야한다. 하지만 객관화에 대한 노력을 하지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계속적인 객관화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야 하나 먼저 보편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선결과제에는 전통문화전반에 대한 대중교육, 데이터의 전산화, 나태해진 의식개혁, 데카르트적인 이원론학문의 탈피, 스스로의 자각등 여러가지의 여건개선이 있다. 의료봉사의 확대로써 시민들과의 접촉도 필요하겠다. 허나 이것들만의 답일수는 없을 것이다. 그 시대의 문화전반에 관계가 없는 것이 없다.
  그러나 한의학은 너무나 전통과 정통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물론 선배한의사님들이 이정도까지라도 이룩해 놓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피눈물나는 노력이었으리라. 선배님들의 노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한의학에 대한 정보는 아직도 미흡하다. 위에서 제시한 선결과제들이 몇몇 인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제도상의 문제도 크지만 스스로가 해결해야만 하는 참여의식 결여는 학생 스스로의 문제인 것 같다.
  나 스스로도 용기의 부족으로 인한 나태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다수의 한의학을 사랑하는 용기있는 학우나 선배님들에 의해 한의학은 밝은 비젼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서부터 의학에 매료를 느끼던 나였기에 한의학은 나에게 나름대로의 꿈을 펼칠 수 있는 현장이다. 한의학 하면 일단 학문의 영역에서보다도 뭔가 치료하는 시골 할아버지, 침쟁이, 맥짚어서 치료한다는 이해한다는 비과학적인 의료방법, 그리고 은근한 약물냄새들, 이런 인상만 짙었던 내가 그속에 몸을 담고 있다니... 그러나 뭔지 새로운 것이 기다리고 있는 듯 싶고 또 그것을 찾고 싶다는 내면에서의 욕망이 나를 이곳으로 부른 듯 싶다.
  한의학이나 양의학이나 똑같이 생명을 구하는 길이 아닌가? 우리 자신의 의학을 통해 생명에 봉사를 하는 것이 뭔가 나에게 의미를 던져줄 듯 싶었다. 결국 서양의학의 푸른 꿈을 꺾고 뭔지 미심쩍고 한편으로는 터질 듯 부푸른 풍선 같은 기대로 첫 난간에 들어 섰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폭발하듯이 접근해오는 대학문화, 한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듯한 세계로 뜻을 펼쳐 보고 싶은 써클 가입 등등, 마치 새장에 갇혀 있었던 힘 잃은 날개를 가진 새처럼 드넓은 공간은 너무 넓고 위험했다. 너무 넓기 때문에 고민하고 정해야 하는 나의 정로, 숨막히는 생존졍쟁에서 내가 처신해야 할 위치, 나에게는 몇번을 되뇌어도 고난뿐이었다는 황금이 되새겨 지는 시간들이었다. 고난은 자기극복의 절호의 기회!
  짜여진 고등학교의 틀에서 굳어버린 내 지식을 깨물려고 머리를 치켜 들었던 예 1,2학년의 시기.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고 미쳐 한의과에 있다는 생각마져 잊을 정도로 숨가쁜 과목 마다의 수업량과 시험들 속에서 좌절한 적도 있었지만 낙심하지 않았고 도리어 감사하며 소망을 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었던것 같다. 2년의 대학생활, 얻어진 것은 내가 가야 할 길의 구축이었던것 같다.
  인류와 국가와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외치기전에 먼저 나 자신이 변해야 한다. 내가 한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져야 한다. 작은 불꽃하나가 큰불을 일으키어 주위 사람들을 녹여주듯이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불꽃을 태워 많은 이들의 불꽃과 합쳐 주의 사랑으로 비춰나갈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얻을 것인가? 한의인은 '학'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배우는 자세, 겸손한 종의 자세를 가져야 국민에게 사랑받는 한의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먼저 나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낀다.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주장하지 아니하는 사랑의 마음,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나의 고통처럼 생각하는 인자의 마음, '능'의 상하를 따지기 전에 먼저 이 마음이 바탕이 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공부의 우열을 가리기 전에 먼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파하는 마음, 동참하는 마음, 나보다 불운한 자들의 발을 씻는 자세, 그들을 돕는 한의학을 귀하게 여기는 이것이 이 생에서 내가 바라는 목표다. 하나의 물질의 손을 통해서만 다른 것의 이가 있는 질량의 법칙처럼 결국 남이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 손해는 손해가 아니요, 보상인듯 싶다. 이 땅을 주관하시는 그분의 섭리가 나를 통해 한의인으로서 질량의 법칙에 또한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학문발견! 학문 그 자체가 인간에게 진실로 행복을 가져다 주어야 할 것이다. 이 위에 영혼의 기쁨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하는 것이 인류과제이자 나의 과제이다.

    조상과 후손을 연결하는 하나의 고리
  한의학과 나와의 만남은 그렇게 최근의 것은 아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비로소 알게된 것이 아니라 평소의 경험으로부터 가까워졌다. 고교시절 관심을 가졌던 기공술에서도 경락이니 경혈이니하는 말들을 접했었다. 어쩌다 5일장에 가보면 할아버지들이 따온 약초들을 보면서 이상한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어릴적에는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시골생활에서 하는 군것질거리를 찾아서 들판을 헤매며 뛰어다녔다. 꼬마들끼리 뛰어다니면서 어떤풀은 먹을 수도 있고 어떤풀은 먹을 수 없으며 무슨나물은 봄에 케고 무슨 나물은 여름에 캐는가, 또 비가 온 뒤에 축축한 풀은 토끼에게 먹이면 토끼가 설사를하고 또 무슨 풀을 좋아하는지, 개(우리집 검둥이)가 아플때에는 어떤풀을 먹는지, 등등 지금말하자면 본초학 아니 잡초학적인 경험이 있었다.
  유난히도 코피가 많이 났던 나는 띠풀의 뿌리를 떼어 놓을수 없었으며 쑥을 찧어서 코를 막고 다닌적도 있었고 장난하다 손이라도 베었을땐 쑥물을 바르면 금방 피가 멎기도 했었다. 할머니께서 담그시는 감주에 쓸 도둑가시뿌리를 캐러도 다녔고 송편을 만드는 익모초도 캐러 다녔었다. 지금와 생각하면 내가 여기 한의대에 들어온 것도 우연만은 아니라고 생각되는 이유의 하나다. 고등학교때는 호흡에 관심이 있어서 어렴풋이나마 경락 경혈 등의 말을 미리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것만으로 내가 한의학과 인연이 크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앞으로 한의학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예과과정동안 구름잡는 듯한 속에서 알고는 싶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리 한의학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어쩌다 졸업하면 자격증도 따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바보같은 생각도 했었다. 나만이 그런 생각을 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거의 모든 급우들의 생각이리라. 이것은 커다란 문제다. 정규 한의학을 배우는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한의학에 대한 신비감만 이을 뿐 신뢰감과 책임감이 없다는 것은 교과과정이 어딘가 잘못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해결을 위해 내 짧은 소견이지만 음양관과 오행론에 대한 확실한 인식부터 예과과정에서 배웠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의학한문이나 한의학개론 시간에 더욱 철저한, 보다 과학적이고 참 실력을 기를 수 있는 수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암기도 물론 학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하지만 암기보다는 사물과 학문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지금의 우리 학교 현실은 그렇지 못하며 단순 암기주입식인 수업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6년이란 세월의 절반이 흐르고 있는데 아직도 확실한 방향을 못잡은 나도 한심스럽지만 결울방학부터 해오는 경혈공부와 사암침법등 여러 가지 책들에게서 그래도 불확실하지만 무엇닌가 보일듯하다. 사실 6년은 너무도 짧은 세월이다. 위로 신농, 복회씨와 황제, 기백, 우리나라의 허준, 이제마 등 성인들의 생각을 따라 가기에는 너무도 적은 시간인 것 같다. 그분드르이 생각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그분들의 저술을 통과해야하며, 구분들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자기의 뚜렷한 관념을 가지는 연습을 지금부터 해야한다. 한의학이 무엇인지 아직도 감이 안잡히지만 장막뒤에 숨어서 나를 기다리는 커다란 실체가 옅은 발에 그림자로 비칠 때 평생을 걸고 도전해 보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의학과의 싸움은 곧 나와의 싸움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오늘도 나는 우리고유의 민족성이 담긴, 조상의 숨결이 살아있는 한민족의 학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하다. 조상과 후손을 연결하는 하나의 커다란 고리가 되고 싶다.

    거대한 황무지
  나는 처음 한의학을 거대한 황무지처럼 느꼈다. 뭔가 다듬어지지 않은, 쉽게 넘볼 수 없이 부피만 큰, 열심히 경작하면 풍족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단지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다는 흥분과 더불어 동양학문을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선입관에 빠져있었다. 수천년을 이어오고 발전되어져 온 한의학이 황무지일 수는 없다. 수년동안 우리의 머리를 지배해온 서양의 논리 때문에 한의학이라는 영역에 발을 담기가 어려울 뿐이다. 두 번째로 나는 의학은 실학이니만큼 어려운 동양철학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크나큰 오만에 빠져있었다. 아무리 이론이 좋아도 적용이 안되면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한의학은 단순히 임상경험의 축적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대자연관과 생명관에 뿌리를 두고, 세월이 지나면서 유불선이 융화된 철학적 성격이 많이 포함되어어 있었다. 따라서, 자연대가 없으면 공대가 존재할 수 없듯이 동양철학의 기초가 없으면 한의학도 그 뿌리를 잃게 된다. 그러면, 나는 한의학을 어떻게 보는가? 나는 한의학을, 중국문화권에서 발생한 의학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중인,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환자를 구제하려는, 지금 이시대에 터득하기 어렵지만 그 우수성이 뛰어난 학문이라고 본다.
  나는 먼저 과연 한의학이 우리의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싶다. 한의학이 발생하여 발전하고 또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것을 수입 하였을뿐 우리자신의 것으로 융화시키지 못한 채 쓰고 있지 않은가? 중국의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의 백성을 고쳤다고해서 우리의학이 될 수는 없다. 특히 요즘에 와서는 범람하는 중국책들 속에서 오직 허준선생만이 독야청청하지 않는가? 진실로 한자가 아닌 한자를 붙이고 싶다면 지금의 우리들이 좀더 각성해야된다. 아니면 동양의학이라하여 내것네것 따지지말고 공부하는 것도 좋을성 싶다.
  두 번째로, 한의학의 대상은 사람이기에 한의학이 단순한 숱이 되서는 안된다는 것을 많은 책들이 강조하고 있다. 의사가 단순한 고급기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선 먼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의학외에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알아야 된다고 믿는다.
  세 번째로, 한의학은 지금의 과학시대에는 공부하기 어려운 학문이다. 한의학은 의학을 함에 있어 철학적 방법을 도입했는데, 철학은 과학의 어머니라 불리우는데 이 의학을 과학으로 증명하려하니 될 리가 없다. 그래서 도외시된다면 우리 한의학도들의 설 자리는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사람들이 알기쉽게 풀이하고, 보편, 객관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양방상식을 어느정도 갖고 있듯이 한방상식도 어느 정도 터득하면 대중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네 번째로, 한의학은 우수한 학문이다. 다른 문명권의 의학인 양방과비교하면 절대적 스케일로는 뒤질수 있으나 그 장점이 만만치 않다.  의학은 자연의 법도에 순응하여 치료하기 때문에 과학을 등에업고 발달한 양방의 방식과는 다르다. 산업사회에서 필요한 응급조치 등, 양방의 장점도 많다. 허나 한의학의 강점도 점차 부각되고 중요시 될 것이다.

    나의 꿈은 노벨상
  한의학과에 들어온지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그 수많은 시간과 정열을 바쳤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 자신이 무척 한심하게 느껴진다. 대학생활을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면서 보내려한 것은 분명 아니었을테니 말이다. 물론 내 나름대로 한의학에 뜻한 바가 있어서 지원했었던 까닭에 학문을 전폐하고 지낸 것만을 아니다. 알기 쉬운 한의학에서부터 '한의학원론', '한의학의 형성과 체계', '오운육기학', '중의학기초', '사암도인 침술원리 40일 강좌', '장부변증론치', '주역' 등 만은 책들을 가까이 하였고, 선배님으로부터 한방과 양방의 학문접근방식과 그로 인한 많은 장단점들에 관해 귀동냥으로 얻은 지식을 얼만큼 읊조리는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예과를 지내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한의학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 단계에서 아직까지도 한의학에 대한 관을 정립시키지도 못했을 뿐아니라, 이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고민해야하는 나 자신이 좀 서글프다.
  아무튼, 유급을 당하지 않고 본과에 진급한 것은 다행이다. 이제는 어느정도 과우들과 친목도 있고 여러 단체들에서 선후배 유대관계를 돈독히 한 이유로 학과생활에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원만하게 대학생활이 넘어가리라고 본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공부에 관한 열정을 식히지 않는 일이다. 공부란 것은 본래 안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안하게 되고 하려고 하면 끝없이 하게 된다. 많은 시간들을 요구하는 과목이 하둘이 아니고 더욱이 양방과목까지 곁들여 배운 것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나의 것으로 소화한다는 일이 말처럼 쉽질 않다. 진리는 하나로 통할텐데 말이다.
  며칠전 개강모임에서 선배님 한분이 조언해 주시기를, '남은 대학 생활은 몸으로 직접 부딪치면서 더 많은 삶을 경험하는 것이 가장 보람있을거야'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시길래 진솔하게, '노벨상 받는 거에요'라고 말씀드렸다. 한의학용어의 개념들로 양의학자를 설명하여 이해시킨다는 것을 상당히 무리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동양학문과는 동떨어져서 사는 외국인들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이 부분이 무척 난제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본초의 성분을 검출하여 실험대상에게 투여함으로써 고전의 타당성을 밝히는 등, 여러분야에서 많은 시도가 진행되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한의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히 석연치 않음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무엇인가가 빠져버린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지금 당장은 어찌할 수도 없다. 처해 있는 입장도 입장이거니와 한의학을 완전히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모순과 억지투성일 수밖에 없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컴퓨터를 동반한 기술집약적 문명들에 대항하거나 혹은 접근하여 응용을 하든지간에, 인간은 자연의 환경하에 놓여 있음을 인지하고 변화한 자연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본과에 올라온 지도 이제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이 눈앞에 뚜렷이 떠오르지 않고 마치 아지랑이가 봄날 피어오르듯 어렴풋이 나타날뿐이다. 내가 한의과대학을 드러온 이유는 서양적인 것보다는 동양적인 것에 훨씬 많은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변화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구체적으로, 처음 접하는 한문과 한약에서 배어 나오는 그윽한 향취, 그리고 붓글씨의 아름다움은 어린시절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막상 한의과대학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배운 것을 보면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서양의 교양, 서양의 의학기초, 대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학교생활은 별로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다만 한의학을 학문으로 말하지 않고 신으로 말하는 금오선생의 책을 읽는 다든지 전통무술을 익힌다든지 하는 학교와 상관없는 일에 더 열중했던 것 같다.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내 신조에 역행하여 심한 갈등을 겪었다.
  한의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현재에는 대개 두 부류의 주장이 있다고 들었다. 하나는 원전을 중시하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한의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른 하나는 서양의학과 접목시키고 서로의 좋은 점을 취하면서 한의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외에도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으나 대략 이렇게 귀결된 것 같다. 난 첫 번째 주장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한의학은 한의학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한의학에 정통을 한 후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연구할 것이 없다고 판단될 때, 비로서 서양의학을 응용하고 이용하고 공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두 번째의 주장은 한의학이 완전히 정착하고 뿌리를 단단히 내린 상태에서 고려되어야 할 차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양의학을 같이 공부하는 이상 양의과대학 학생들도 반드시 한의학을 공부하여야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분명 동양의학은 서양의학의 아래에 놓이게 되거나, 배워도 좋고 안배우면 그만이란 식의 발상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런 학문을 공부해야만 하는가? 물론, 서양의학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말은 아니다. 많이 알면 알수록 좋은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현대사회에서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주와 종이 바뀌고 그런 상태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한의학의 앞날은 어두울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양의학은 가장 동양적으로 공부하여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온전히 동양의학이 선후에 서양의학이 보탬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다 잡으려다 놓치는 어리석은 우를 피할수 있지 않을까?

    한과 한의 차이
  한의학! 이 세글자는 그것을 처음 접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 주었다. 항상 허공에 떠 있는 이론이라 생각되었다. 무언가 잡힐 듯 하면서도 나와는 웬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왜 그럴까? 1학년때부터 지금까지 주위에서 고민하는 많은 선배들과 동료들, 후배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하지만 그들중 어느 누구도 뚜렷한 해답을 얻을 사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에 나는 그 문제성의 근본원인을 크게 세가지로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첫째 원인으로 우리들의 서양적 사고방식을 들수 있겠다. 근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심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서양의 유물론적 합리주의 사고가 우리의 심신을 이미 지배하여 한의학도 무의식중에 그 틀안에서 들여다 보게되므로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은 다르다. 특히 그들의 사상의 형성과 체계는 거의 완전히 이질적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서양문물이 동양에 처음 들어왔을 때 많은 석학들이 그 신학문을 동양적 관점에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어 소위 '위정척사파'라는 것까지 만들었듯이, 현재 서양적 사고의 결정체인 내가 동양철학과 그 틀 속의 집결체인 한의학을 이해하기란 대단히 힘든 것이다.
  둘째로는 현 우리나라 한의학의 과기도적 단계와 그에 파생된 혼란스런 한의과대학의 교육체계를 들 수 있겠다. 내가 대학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나는 여러 선배님들과 교수님으로부터 소위 한의학과 한의학의 차이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들어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자부심대신에 나는 한자의 존재가 과연 필요한가에 대한 의혹만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현재 내가 공부하고 있는 책들은 옛 중국고서와 현대중의학교재와 일본의학서적을 표절한 번역판들이다. 이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많은 교수님과 선배님들은 '동의보감' 하나로 카바하려 하신다. 허나 '동의보감'도 결국 중국의서들을 모자이크한 것이다. 정말 통탄스럽다. 적어도 내가 아는 참된 우리 의학은 존재치 않는다. 또 이 과도기적 상태에서 현 한의학대학의 학과과정 또한 문제성이 많다. 중심있는 일관성이 없다. 현 우리나라 한의학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한의과대학의 비중을 고려할 때 이 문제는 정말로 가장 먼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는 우리 한의학계 사람들의 나태함을 들겠다. 학창시절에는 놈팽이가 대부분이고, 졸업하고 나면 웬만큼 돈을벌어 현실에 안주하며, 각계에서는 파벌싸움만 한창 진행중이다. 정말 이래도 되는건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문제의 원인을 크게 세가지로 분석하여 보았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모두 진취적 기상을 가지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현재의 우리 모습을 정리정돈하여 진짜 오리지날 우리의학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우리 스스로의 역경의 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전쟁의 일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렇다. 이건 전쟁이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꼭 승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일심단결하여 계속 독자적인 추진력을 가져야되고, 만약 그렇지 못하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의료일원화에 의하여 한의학은 공중분해될 것이다.

    서양의학을 받아들여라
  오늘날 한의학은 각계 각층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고 어느정도 인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수천년동안 선인들로부터의 경험이 축척되온 과학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의 한의학은 사막의 황무지와 같이 미개척 부분이 너무도 많이 있다. 이와 같이 한의학이 학문적인 정립이 아직 되어 있지않고 여러부분에서 미약한 부분이 많이 잇는 것은 한의학의 특성상 서양의학처럼 실험적 검증, 세부적 관찰에 의한 원인을 찾아 질병을 고치려는 생각에서 발전한 의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쉽게 데이터를 통해서 공통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점도 찾으면 있겠지만 현재나 과거나 한의학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만을 생각하는 안일주의와 노력이 부족해 그런데 미치지 못한 것 같다.
  현재 한의사의 위치는 진정으로 국민의 보건을 맡고 있는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 보다는, 부유층의 풍요로운 생활을 부추겨서 돈을 벌고만 있다는 정도로 머무르고 있다. 너무 비약해서 말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 한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상당히 잘못되어 있다. 이러한 우리 고유의 문화와 학문이 홀대를 받아온 비참한 결과인 것같다. 요즘들어서 서양의학이 한계에 부딪히고 한의학의 우수성이 입증됨에 따라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한의학을 발전시키고 꽃피울 수 있는 좋은 시기에 우리 한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정시을 바짝차리고 한의학의 발전에 모든 전력을 쏟아야 하겠다. 진정으로 한의학이 미래에 국민의 보건을 책임지고 인류를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잘 잡아야 할것다. 현재 한의학의 방향에 대해서 사람마다 주장하는 것이 다르다. 한의학을 처음 시작하려는 나로서는 이러한 다양한 다른 방향에서 무척 갈 등을 느끼고 어떻게 해야할지를 잘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의 생각으로는 한의학이 동양철학적인 인체를 소우주로 생각하여, 분석적이 아닌 전체적인 사상에서 비롯된 한의학적 사상의 바탕위에, 서양의학의 현대 과학기술집약적인 우수한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단적인 예로 현재 한방적인 진단으로 인식하기 상당히 어려운 병이 많이 있다. 옛날 선인들은 그 당시의 특유한 감각으로 진단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 우리는 현대 문명에 쪄들어서 그러한 감각이 둔화되었다. 한의학의 진단방법만을 고집하여 잘못 진단하여 잘못 치료하는 것보다 서양의학의 진단방법중에서 한의학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받아 들여야 한다. 물론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질병을 보는 관점은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모든 학문이 극에 달하면 결국 하나의 학문이론으로 되듯이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서로 보충하면서 점차 발전한다면 결국 서로 통하는 하나의 학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의학을 하는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고 무조건 서양학문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좋은점은 받아들여야 하겠다.

    나의 발전은 곧 한의학의 발전
  벌써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시간은 자꾸 가고 하는 일은 없고 심히 괴롭다. 세월이 나이와 비례해서 흘러간다는 말이 맞는 것같다. 어렸을 때는 하루가 굉장히도 길다. 그러나 10살 정도면 10킬로미터의 속도로, 20살 정도면 20킬로미터의 속도로, 그리고 60살 정도면 아마 백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리고 있을 것이다.
  대학에 들어온 지도 벌써 2년이 지나고 3년에 접어 드는데 과연 내가 어떻게 살아 왔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는 게을리 산 적도 많으나 열심히 살아 왔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더욱 더 앞으로의 일에 희망을 가지고 박차를 가한다. 학창시절이야말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갈등도 많고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닐까?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언제나 많이 들어왔고 나도 옳다고 생각되는 문구 '이론과 실천은 병행되어야 한다.' 이 말은 역시 좋은 말이다. 가지고 있는 이론으로 실천을 해 본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나는 한의학과 나의 발전을 위해서 임상교수가 되고 싶다. 거기에는 힘든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하면 안되는 일이 뭐 있겠느냐는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간다. 한편 인간적인 면에서 얼마나 훌륭한 한의사가 될지는 걱정된다. 사회풍조가 그러하니 순수함을 가지고 잘 해 나갈 수 있을지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주로 해 보고 싶은 것은 침구학이다. 관심도 많고 별로 돈도 안드는 치료방법이기 때문이다. 돈 안들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한의대에 다니고 있지만 감히 한의원 또는 한방병원에 가지 못한다.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서 길은 멀고도 험하다. 지금 학교에 다니면서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생각되는 것이 번역작업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책은 드물고 중국책이 대부분이다. 그것도 다 저자의 이름을 빼먹고 표절한 것이 대부분이다. 모든 것을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해서 우리것으로 소화해내야 한다. 문구해석에 수십년을 걸려가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빨리 없애는 것이 좋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다른 일도 있겠지만 침구학 부분의 임상교수로 남으면서 그 부분의 번역작업만이라고 완벽하게 해 보고 싶다. 이미 몇천년 전에 쓰여진 내용을 가지고 지금 너무도 왈가왈부하는 것이 많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번역작업에 착수한다면 그런 왈가왈부하던 정체가 드러나고, 우리나라 한의학의 앞날은 밝아질 것이다. 본과에 진입하고나니 잘은 모르겠지만 무언가 조금씩 한의학의 본령에 가까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어떤 학문이든지 그러하겠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신선한 감이 들면서 재미있다.
  내가 이 세상에 살다간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겨 보고 싶다. '나의 발전은 곧 한의학의 발전이다.'

    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한의대에 들어와 열심히 놀기도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재미있는 것만 찾고 다녔다. 술도 마시고 같이 앉아서 한의학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낫느냐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어도 보았고 또 집회나 시위하는데도 나가서 짱돌도 던지고 화염병도 던져 보았다. 왜 학생들이 사회에 대해 불만이 많은가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최루탄이나 지랄탄가스는 심한 구토증을 일으킨다. 어떤이는 심하게 얼굴이 붓고 빨개진다. 그럴때마다 침이나 한약을 먹어 한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없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이렇게 나의 예과생활은 공부보다도 주로 노는데 그리고 좀 더 많은 것들을 접해 보려는 노력에 소요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정신없이 돌아다녔고 지쳐서 쓰러질 정도였다. 그 속에서 어느정도 선배님들한테서 한의학을 공부하는 길에 대해서 이것 저것 주워들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별로 나에게는 와닿질 않았다. 그러나 차츰 학년이 올라가니깐 한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대한 벽에 부딪혔다. 선배님들에게 물어봐도 어떤 뚜렷한 확답을 주기 보다는 이책을 봐라, 저책을 봐라기만 했다. 그러나 그 공통적인 것은 예과때는 원론적이고 개론적인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의학에 대해서 나는 어떤 체계가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현재의 나로서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지만 본과생에게 물어봐야 뚜렷하게 말해 주는 이가 없다. 물론 개중에 어떤걸 공부해라 하는 선배님도 있었다. 그분도 한의학에 대해서 뭔가 알것도 같다는 느낌을 받은 분이시다. 그분도 원론을 강조하셨다.
  먼저 한의학을 폭 넓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어느 한곳에 집중하기 보다는 먼저 한의학에 대한 전체적인 틀이 머리속에 있어야 수월하게 한의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뼈대 속에서 각각 분야별로 나누어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본과생때 이루어져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본과생때 이루어져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동양적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문헌에도 나와 있었고 어떤 교수님도그렇게 말씀하셨고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한의학은 서양의학이 아니고 동양의학이기 때문에 동양 동양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동양인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동양적 사고가 아니라니, 우리는 너무나 서구문화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서구에 의해 특히 미국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서 이제는 어린애들 노는 것도 예전에 우리 어렸을 때 노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밖에서 뛰어 노는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 방안에 조그마한 공간속에서 기계를 가지고 논다든지 한다. 음악도 또한 그러하다. 팝송이나 디스코에 우리사회가 너무 썩어 있지 않은가? 우리춤, 우리가락은 이제 특별한 공연때만 보여지는 사람들 속에서 멀어져가는 어떤 특별한 문화로 전락해 버렸다. 저번에 뉴키즈공연때 벌어진 일을 옛 선인들이 봤다면 무슨 말이 나올는지 상상이 간다. 이러한 문화침투현상은 학문에서도 또한 그러한 것 같다. 이것은 나혼자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옛 우리조상들은 '천자문' '사자소학' '격몽요결' 같은 것을 배워 사람의 됨됨이나 올바르게 사는 방법들을 교육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사이에서 인정이 오가고 서로 도우며 살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데 요즈음은 영어공부다 수학공부다 컴퓨터다해서 계산적인 공부 특히 외국어가 강조되고 있다. 물론 시대에 맞추어 살아간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학문에 대해 너무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서구문물에 나 또한 찌들려 사는데 어떻게 동양적 의식을 가질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다! 그리고 방법론적인 것도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렇게해서 동양적 의식이 잡히면 이제는 원전에 충실해야 할 것 같다. 원전은 그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서 그 한자 하나하나에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어 각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한의학은 우리들에게 혼돈을 가져오고 있다. 아뭏튼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생각을 가지고 원전을 잘 해석하여 이 시대에 맞게 나 자신의 한의학적 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의 원전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사회에는 많은 한의사들이 있다. 유명한 분들도 많다. 그러나 각각의 한의사들은, 물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각각의 독특한 자기방법을 고집하고 의료를 베푼다. 물론 전체적인 틀은 같지만 자기가 강조하는 것들이 있고 침을 놓는 것도 다르다. 이것은 동양적 사고를 가지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자신의 깨달음이 있을 때, 자신의 한의학적 관점이 세워지는 것 같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 자신의 한의학적 주관이 필요한 것 같다.

    통영이의 꿈
  청운의 꿈에 부푼 가슴을 안고 2년여의 세월을 보내면서, 나의 주장은 항상 정통 한의학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수천년 누적된 그 무엇인가가 분명하게 있을거라는 기대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생각에서인지 양방과목을 조금멀리하는 경향도 있었고, 양방으로 진단하고 한방으로 치료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상당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던 어떤 날이었다. 친구가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뇌졸증으로 쓰러지셨다. 전주한방병원에 가보았지만 차도가 없어 예수병원에 갔더니 나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말이 '전북대 의대에 가는건데 한의과에 잘못 온 것 같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에 쥐어지는 것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서도 '네까진게 겨우 예과1년을 마쳤는데 뭐 아는게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나 자신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뭔가 있겠지, 있겠지' 하지만 그동안 는 것이라곤 말빨뿐이었다. 그때가 예과2년 2학기였는데 또 다른 사건이 생겼다. 원치않게 발목을 삐게 되었는데 한방병원에 있는 선배 한의사가 '네 발목으로 텐던이 세게 지나가는 것 알고 있는가'하고 묻기에 '모른다'했더니 '양방을 모르고 텐던이 찢어진 환자 잘못 치료하면 병신만든다'는 것이었다. 많은 갈등과 혼란이 가슴을 갈갈이 찢었고, 그 아픔은 발목 아픈 것을 잠깐 동안이나마 잊게할 정도였다. 한의학의 치법원리는 자세히 모르지만 대단히 좋은 것이라는 인상을 강렬하게 받았다. 하지만 양방과는 조화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세틸콜린'과 '에피네프린'에 과연 기와 혈로 어떤 힘이라도 쓸 수 있을 것인가? 양방의 해부학적 장기의 개념에 한의학적 장부는 아무런 값어치가 없는 것인가? 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어떠한 느낌외에는 확실한 답을 해 줄 수 없는 나 자신에 스스로 실망과 미안함이 생길뿐이었다. 나 자신은 아직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뿐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으며, 젊어서 암기하고 늙어서 이해한다고 했으니 우선 공부를 하고서 정리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접어두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가끔씩 나를 우울하게 하였고 길을 헤매게 하였다.
  이제 본과에 진입하여 여러 가지 과목들을 배우게 되었다. 약간은 멀리 있는 듯하나 한의학의 원류에 들어선 것이다. 한의학의 치법원리는 정말 우수한 것 같다. 그 원리가 적절하게 쓰여지도록 많은 연구를 거듭하여 양방이 더욱 우수하게 발달된 것은(어떤 치료의 한 방면이겠지만) 우수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다. 즉 양방에서 더 잘 고치는 부분은 과감하게 양방으로 돌리는 한편 양방이 손못대는 분야에서는 눈부신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방의 치료도 단지 일회성에 머물지 않고 누구든지 반복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서로가 연구결과를 발표해야 할 것이다. 비방을 꼬불치다가 무덤에 가지고 들어가 뭐 그리 좋을게 있는지!

    한의학에 대한 실망
  한의학에 대한 나의 소견을 말하자면 우선 이곳을 오기위해 원서를 썼던 그 시절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이곳에 원서를 쓸 당시, 나의 의견보다는 주위사람들의 의견에 의해서, 대부분 한의대생이 그러하듯이 타의에 의해 원서를 썼다. 합격하고나니 평소에 알고 지내던 형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우선 합격했으니 다니고, 적성은 다니면서 맞추어라'. 나는 그 말을 마음에 두고 그렇게 예과를 시작했다. 물론 학과에 대한 적성은 잘 맞지 않았다.
  고등학교때까지 한의대에 존재조차 모르던 나였기에 처음에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또 원광대에 대한 실망도 꽤나 컸다. 선배들에게서 듣던 서울내의 학교와는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것들을 다 느껴보고 예과 1학년을 마칠때즈음 조금은 한의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무리 적성에 거슬린다고 해도 이 학교를 그만둘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흥미는 없었지만 평생 접해야하는 학문을 언제까지나 멀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그동안 해왔던 공부와 차이가 있어서 공부하는데 애먹었다. 그래서 선배를 찾아다니며 여러 조언을 듣고 또 책으로 느끼는 것보다는 직접 몸으로 느낄려고 자청해서 침도 맞고 선배가 지어준 약도 먹어보았다. 그렇게 관심을 갖고 예과를 마칠때가 되니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의학은 아무래도 믿을 것이 못되는 것 같다' 내가 직접 치료를 받든지 아니면 의료봉사가서 치료받는 사람을 접하든지 실지로 효과를 보는 것은 반정도도 안되는 것 같았다. 그나마 확실한 치료는 드물었다. 이런 생각을 자꾸하다가 그맘때 선배가 지어준 약으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다. 정말 학문자체가 미워졌다. 그러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뒤에 다시 생각하게끔 되었다. 현재로서의 나의 생각은 한의학이라는 것은 양방의학 같지않고 매우 광범위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고등학교 계열에는 이과로 되어 있지만 문과로 바뀌어야 할 정도로 학문자체가 워낙 철학적이다. 이러한 학문은 시험을 위한 공부보다는 평소에 많은 서적을 읽으면서 또 스스로 많은 생각과 고민에 빠져 스스로 터득해야 할 것 같다. 책을 통해 접해 보기도 하고 방학중에는 여러 가지 강좌를 듣고 느껴야 한다.
  그리고 한의학이라는 학문자체가 워낙 주관적이다 보니, 원전과 근래 의학서적은 차이가 많은 것 같다. 또 여러 이론을 운용하는데, 일관성이 없는 것 같다. 원칙이 없이 때에 따라서 끼워 맞추기식으로 해석하면 배우는 사람 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학문에 대한 믿음이 적어질 것이다. 한 예로 본초에서 기미보사법은 내용만 나와있고 그것에 대한설명은 어느 서적에도(흔히 접할 수 있는)없다. 더군다나 몇줄위에는 오행의 상생상극에 대한 설명이 있어 마치 기미보사법을 설명한 것 처럼 보인다.
  한의학에 대한 믿음을 다시금 갖게 될려면 당장 이론의 운용에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철학적인 학문이라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을 것같다. 지금 느끼는 바로 아직 정리되지 못한 학문밖엔 안된다.

    청운의 꿈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청운의 꿈을 품고 원광대 한의예과 입학한 것도, 벌써 예과2년을 마치고 본과에 진입한 것도 너무 일순간의 일같다. 내가 벌써 본과라니 내가 2년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수업시간에 강의를 들은 것보다 술집에서 술마신 것이 더 기억에 남고 강의시간에 들은 이야기보다 선배님들과의 대화속에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왜 이토록 많은 학우들이 강의시간에 들어가지 않고 당구장, 술집에서 서성대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의대 내의 놀자판의 분위기는 강의시간표 즉 커리큐럼의 문제 같다. 강의시간표는 예과 2년을 방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 같다. 수학 3학점, 물리 2학점, 화학 3학점! 수학, 물리, 화학 이것이 바로 전공기초에 과목에 들어가 있다. 한의학에 입문할 때 '사서삼경'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정작 한의학 한문은 1학점이다. 한의예과에 들어온 동기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돈을 잘 번다기에, 또 서양의사에 비해 힘들지 않다기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점차 생활을 하면서 특히 농촌의료봉사를 갔을 때 그런 생각은 점차 부끄러운 마음으로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게 되었다.
  한의학이 지금까지 얼마나 부르조와적 의학이었던가? 한의원의 문턱은 일반의원보다 훨씬 높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의학이면서 뿌리를 우리 한민족에게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몇백년의 역사를 가진 서양의학에 밀려 일반대중속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보약이니 다른 약장사의 이미지로 하락되었단 말인가? 대중속에 자리잡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이 한의학이 나아갈 길이 아닌가 한다.
  또 가끔 의대교수님들이 들어오셔서 한방을 과학화 하여야 한다고 이야기 하곤 하신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크게 반대한다. 한방의학과 서양의학은 그 뿌리가 같지 아니하다. 서양의학은 성분이 무엇이며 그 성분이 인체에 작용하는 특수한 기전이 무엇이냐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학은 잘은 모르지만 경험에 의해서 수천년동안 내려온 것으로 독특한 포괄적인 나름대로의 이론이 있다. 서양의학은 쥐 등의 동물에서 생체실험을 일차적으로 거친 뒤 인체에 실험하고 그러고 난 뒤 비로소 인체를 치료하지만, 한의학은 수천년동안 해온 것이 바로 인체실험인 것이다. 즉 인체 전체를 항상 살아있는 채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이 작용기전을 양방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어떠한 무리가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특히 우리의학에서 현대인즐이 이해하기 어려운 미신적인 것, 신화적인 것은 과감히 배제해야할 것 같다.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새로 나오는 책들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책들은 기껏 외국책의 번역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것도 버젓한 한의대교수님들의 표절작품이다. 우리나라 스스로의 연구에 엄밀한 새로운 책이 아쉽다.

    한의학의 접근 방법
  한의학의 접근방법에 대하여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기술해 보기로 하겠다. 한의학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때는 막연히 기술적인 면들을 터득하고 잘 짜여진, 정해진 방법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다가보면 이루어지는 의술로 알았다. 그렇지만 조금씩 한의학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보면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엄청나게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서양의학과는 달리 우리의 의학인 한의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기본이 동양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거기에 대한 많은 이해와 깨달음이 있어야만 진정한 의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접근하고자하는 방법은 동양철학에 대한 많은 노력을 우선으로하여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터득하는 것을 선행하여 한의학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런 생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확실하고 구체적인 방향성을 설정하지는 못했지만, 동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단순하게 암기하고 기술적인 면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하여 마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작업을 먼저하고 거기에다 지식적인 면을 가미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즉 몸으로 해야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 자신이 직접 몸으로 체험해봐야만이 진정으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자면 동양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이론중에는 기철학이 있다.(기철학이란 원래 도올 김용옥선생님의 특유한 이론체계를 가리키는 말로 창안된 고유명사이나 지금은 일반명사로 보통 쓰고 있다). 그래서 기에 대한 엄청난 책자와 논문들이 있지만 그런 책이나 논문을 통해서 우리는 기에 대해 알 수 있는 방향성을 제공받을 수 있을 뿐이지 직접적으로 기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을 것이다.
  단전호흡이나 좌선을 통하여 몸에서 기의 운행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기에 대해 확실한 이해를 했다고는 말할수 없을 것이다. 이런 면들이 유독 동양철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겠으나 동양철학에는 훨씬 그런 면들이 강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동양철학을 기본으로 하는 한의학을 이해하고 명의가 되기 위해서는 동양의 사고방식을 실천하고 마음으로 학문을 이해해야만 하리라 생각한다. 보통 한의서의 대부분은 원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당시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완전한 이해를 하기 힘들 것이다. 또 그들만큼의 세상을 바라보는 커다란 눈을 가지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한의학을 알고 의술을 펴나가려면 이런식으로 체험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 여기에 한가지 논하고자하는 문제가있다. 현재의 한의학과의 커리큐럼의 문제이다. 육년의 학창시절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닌데 그 시간의 대부분을 양방을 다루는 시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양방적인 지식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튼튼하고 큰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뿌리가 견고하고 본줄기가 강해야만 하는데 한의학에서 양방의 의미는 결코 나무를 풍성하게 하는 줄기의 가지는 될 지언정 결코 본원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좀 더 많은 원전의 이해를 위하여 시간을 배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원전은 안 가르치고 원전에 대한 이차적인 논설만을 가르치는 것도 큰 문제이다. 그러기 위해선 원전 그 문헌자체에 대한 문헌학적 이해가 깊은 교수들이 많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한의학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우리라도 그런 교수가 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커리큐럼으로 그런 기회가 올지도 의문이다.

      제 3부 일년후(One Year After)

    둠벙을 막고 품는 우직성: 한종현
  오늘날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방향도 좌표도 없이 표류하고 있는것 같은 인상을 준다.
  우리 학생들만 보더라도 한의학도로서의 한의학 탐구에 대한 열정은 온데 간데 없이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포도에 뒹구는 낙엽이나 또는 나침반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위태한 배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 사실이다.
  레포트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을 읽어가는 동안 잠시 나를 학생시절로 되돌려 보낸 여러분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항상 느껴보는 것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무엇인가 잡아보려는 우리들의 욕망과 잡히지 않는 학문세계와의 갈등이 깊은 고민으로 여실히 남아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부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것이다. 부단히 노력하고 그동안 많은 욕구분출도 해봤고, 집회에도 참여하면서 많은 것을 얻고 또한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면서 문득 나 자신을 돌이켜 볼때 나의 위상은 무엇이며?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때로는 텅 빈 자신을 발견하리라.
  지금이야말로 한의학을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의 손을 모아야 한다. 표류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오로지 한의학에 결집시켜 학문의 체계화와 나아가 이를 통해 자기동일성 회복에 주력하여 자칫 구심점 없이 부표하기 쉬운 현대의 위기를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한의학도들이 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일천구백구십이년 십이월 원대 약리학연구실에서 한종현

    빵(0)의 애상: 송일곤
  낙엽이 뒹굴어서 가을이구나 했더니 계절은 벌써 겨울로 접어들었다. 계절이 언제나 나를 속이듯이 어느날 하늘도 나를 그렇게 속였는데...
  병상의 희멀건 폐병환자처럼 멀겋게, 창 밖으로 저무는 해를 바라본다. 이렇게 맑은 하늘이고 이렇게 조용한 하늘이어늘. 창밖의 세상은 통 말이 없다. 그러하거늘 해의 가운데에 걸친 구름때문에 해는 두개다. 지붕 위에서 날으는 비둘기들이 거대한 나무의 가지를 뚫고 하늘에 박힌다. 그러더니 흡사 하늘을 물고 내려온다. 알을 깨고서 아프락삭스를 향해 날으는 새처럼 비둘기들은 날으고 나는 어느새 비둘기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하늘을 날으던 신비는 사라져 가고 날개달린 개구리의 꿈도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어가며 비둘기는 이미 비둘기가 아니되어 간다.
  두무리의 총성은 울려 퍼지고 술마시러 간 이 계절의 애상은 서글프기만 하다.
  원대한 꿈을 지녔던 공민왕은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성계의 반역으로 물거품이 되고 폐위되었다. 이성계는 공민왕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조금 있다가 공민왕의 아들인가를 의심하여 또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통성이 없는 왕조는 시작되었다.
  그 하늘 아래에서 공민왕은 무엇을 얼마나 부르짖었을 것인가. 그는 얼마나 오열했을 것인가.
  그 하늘 아래 새로운 시간이 열리고 또 두무리의 하늘은 얼마나 울었을 것인가.
  역사의 거짓은 변함없이 흘러가고 엄청난 민족의 근원을 숨겨야 했던 삼국의 인물들은 이 하늘 아래에서 또 얼마나 부르짖었을 것인가.
  술이나 마시러 가자. 노가리 대가리 딱딱 두들겨서 떼어내고 고추장에 찍어 발라서 한 입에 집어 넣어 씹으며 쓴 소주 한잔을 들이키자. 그리하여 가로등이 빙빙 돌거든 삥 둘러서서 오줌이나 갈겨주자. 그리고 하늘에 대고 '꺼억'하고 소리치자. 그래서 조용히 잠룡이 되자.
  다음날 새로운 시간이 열리는 축시에 일어나 정좌하고서 이 문장 하나를 읽자.
  망망기여부앙무랑
  인어기간소연유신
  시신지미대창불미
  참위삼재왈유심이
  약리학 실습 학점 0.5때문에 글은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그로 인하여 본1을 마치는 소감은 
어델가고 두무리의 총성이 되살아나고 술마시러 간 이 계절의 애상은 또 다시 서글프기만 하다.

    아웃사이더: 선행
  난 과거의 기억들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을 뒤바꿔버린 먼 과거의 단 한번의 기억도, 아직도 가실줄 모르는 죄의식도, 그날이 올때까지, 나의 불운이 끝나는 그날까지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
  난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러나 난 침묵을 강요받았다. 난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 내게 남아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건강한 정신도, 건강한 육체도, '나'라고 떠올릴 수 있는것도...
  지금 여기에 남아있는 건 나약하고 죄책감과 죄의식에 시달리는, 타인들에게 무시당한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끊임없이 압박당하고 자극받아도 난 소리칠 기운을 스스로 억제시켰다. 왜? 난 속죄를 해야했기 때문에. 난 죽어있는 게 아니다!

  나는 당신들이 듣게 될 진지함과 
  냉정함을 흥분없이 큰 소리로 
  낭독할 생각이다.
  나는 아직 해골이 아니며 노후가
  나의 이마에 들러 붙지 않았다.
  내가 죽어 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따라서 생명이 달아나려 하는
  순간의 백조와 비교하려는
  생각은 버려라
  당신은 왜 내가 찬미하는 
  이 광경을 관조하지 않는가?
  수정의 파도가 출렁이는
  늙은 태양이여
  -로뜨-

  아! 언제쯤이면 내 불면의 밤들이 사라질까. 난 손으로 꼽아본다. 정확히 그날을 예측할 수 없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참혹한 꼴을 보든지 간에.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했고 그 끝맺음도 내가 해야 하는 것임을. 
  난 지금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지껄이고 있다. 당연하다. 나의 모든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 한 이것은 어떤 이의 넋두리에 불과할 수 밖에. 내 인생은 너무나 극단적이다. 모든 것이. 난 내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임을 잘 알고 있다. 전에는 뭐가 뭔지 몰라 당황했던 것에 대해서 그것들이 내속에 내재해 있는 것임을.
  악취가 코를 찌르는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막을 내리게 되면 내게는 또 다른 형태의 속죄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난 그 기회를 달라고 끊임없이 외쳐댔으니까. 난 기회를 놓치지 않을 작정이다. 그것은 나를 정화시키고 한층 성숙된 인간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다.
  너무나 많은 무책임과
  너무나 많은 변명들로 채워진 
  나의 생활은
  이미 썩을대로 썩어있다.
  나의 무책임으로 인한 영향은 이제 이것으로 족하다.
  더 이상 피해를 입힐 수 없고
  더 이상 나태해지기도 싫고
  이젠 그만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대학가 익명시 모음 중에서-

  인생은 새옹지마. 자신의 죄업을 이 생에 갚을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일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땐 난 행복하다. 훗날 죽음의 순간 내 인생을 뒤돌아 봐야 할 때 난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으리다.

    날개: 김중길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의 (날개)에 나온 말이다. 날개가 돋아나 다시 한번 날아보자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들 모두는 누구나 자기 나름의 날개를 꿈꾼다.
  내가 시골에서 처음 시내로 나와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시골의 중학교에서는 공부한다는 것은 아예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즐기며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하늘과 바다는 마냥 넓었고 나는 그저 즐거웠던 것 같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나의 즐거움을 하나씩 앗아갔다. 고등학교 3년동안 내가 꿈꾸던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 넓은 세계에서 마음껏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대학! 지금의 고3생들에겐 무척이나 가슴설레고 두려운 것이리라. 나도 그때만큼 시간을 시간을 쪼개며 문자들과 싸워본 일은 없었으니까. 그들은 지금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가? 난 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싸웠던가?
  날개! 그렇다. 우리는 날개를 얻기 위해 그토록 지겨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가. 대학에 들어가면 날개가 돋아나며 넓은 창공이 우리를 손짓하리라 꿈꾸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날개가 있는가? 넓은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날개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렇다. 날개는 없었다. 그 어디에도... 우린 단지 꿈을 꾸며 살아 왔었다. 조금 있으면 날개가 돋아나리라는 꿈을 꾸면서 하루하루를 지탱해 오지 않았던가.
  아니다. 날개는 있다. 이렇게 또 몇 년만 참고 기다리다 보면 날개는 꼭 있을 것이다. 너무 빨리 그것을 얻으려하지 말자. 기다릴 줄 아는가? 지금 너는 이 순간에도 날개를 기다리며 준비해야 하지 않는가? 기다려라! 그러면 올 것이다. 지금 준비해야 할 때가 아닌가? 날개가 돋아날 때 날개를 움직일 힘이 없다면 그 날개는 무용지물이 아니던가?
  우리 모두 날개를 꿈꾸며 살아가지 않을까? 노벨상, 억만장자, 큰집, 백마를 탄 왕자님, 아름다운 공주님, 와이키키해변, 알라스카... 이런 것들이 아니라 좀더 고상한 꿈을 가진다면, 쏘샬 포대기(social position: "포대기'는 전라도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별명, 은어, 비어들을 부르는 사람은 쾌감을 느끼고 듣는 사람은 비참함과 웃음이 있어야 할 언어다), 덕망, 명성, 학문적 성취...
  그렇다면 우릴 그토록 날개를 꿈꾸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시인 김상요의 말처럼 여기서 웃고 넘겨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한의학이라는 날개를 달고 날기 위해 이렇게 살고 있다. 좋던 싫던 우리는 몇년 후면 한의학이라는 날개를 달고 사회라는 창공으로 뛰어들어 날개짓을 하면서 비상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날개에다 좀더 나은 부속품을 달기 위해 또 몇년을 기다리며 보낼 것이다. 한의학이라는 날개는 다른 날개들 보다 훨씬 크고 튼튼하게 보인다. 아니 곧 바람에 부러질 것 같아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게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일, 부러질까? 더 튼튼해질까? 아무도 모르면서 그저 기다리는 것이다. 어쨌든 날개가 있으니 날개를 움직일 힘이라도 키워 놓아야지. 그래서 세상이라는 창공을 마음껏 휘젓고 돌아다녀야지.
  그러나 나는 지금 무엇인가? 날개? 내가 진정으로 바라던 날개가 한의학이라는 날개이던가? 아니면 그 날개보다 더 큰 날개를 바라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지금 이곳이 창공이 아니더냐? 이곳에서 날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난다고 한단 말인가? 날 때는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비상할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다.
  날개야 돋아라! 한번만 더 날아 보자. 돋아라! 돋아라!
  우리의 마음과 가슴은 어째서 날개를 키워 내지 못할까? 오염된 공기를 가슴으로 마셔서 날개 씨앗이 발아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한의학이라는 날개보다 더 큰 날개를 꿈꾸었다. 기다리면 그냥 붙여지는 그런 날개가 안닌, 가슴속 깊숙이 진주를 품고 있는 진주조개처럼 우리는 비상의 씨앗을 심장속에 키우고 있지 않은가? 외쳐보자!
  '날개야 돋아라.'

    자신감과 근면: 배성혁
  계속 되풀이 되는 시간속에서 벌써 한 해를 보내고 말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잊지 못한 한 해, 아니 24시간의 일과를 가진 것에 무한한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지낸 하루의 일과를 다시 여기에 적어봄으로써 더욱 나의 신념을 확고히 굳히려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의 6명의 하숙생은 단돈 만원을 가지고 11월7일 하숙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각자 나름대로의 길을 떠나 8일 오후 7시까지 다시 하숙집에서 모여 자신의 하루생활을 토론하기로 했다.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편히 지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단지 만원을 가지고 하루를 버티면서 많은 경험과 느낌들을 쌓는 것이 필요했기에 이 의견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8일 09시까지 나에게 벌어진 상황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겠다. 다만 서울에 올라가게 된 나는 수중에 1,900원만이 있을 뿐으로 다시 이리로 돌아올 차비가 없었다는 것과 전일 저녁과 당일 아침을 굶었다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기술한다.
  막막했다. 일을 해야 했다. 공사판에 나가는 것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던 중 예전에 친구가족의 결혼으로 예식장에서 도와준 기억이 떠올라 그 일이 가장 적격이라고 판단하고는 신촌으로 나갔다. 눈에 비친 S예식장과 H예식장이 나의 곤궁을 탈피할 해결책이 된 것이다. 그러나 S예식장에서는 부속 음식점이 없는 관계로 H예식장에서는 일손이 많다는 이유로 말미암아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나 이리로 돌아와야만 했던 나에게는 그대로 주저앚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신촌으로 가던 길의 공사현장에서 사정이야기를 하고 일을 하려다가 혹시나 싶어 예식장 뒷골목의 회관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S회관에까지 이르렀다. 주어진 상황은 나의 성격까지 바꾸기에 충분했다. 인내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사장에게 간청했다. 어떤 일을 해도 좋으니까 기차비만 주십사 간청했다. 차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사천원입니다. 사장이 픽 웃는다. 그리고는 담배를 물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럼 육수를 나를 수 있냔다. 무엇이든 못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나의 육수 나르는 일은 시작되었다. 나의 일을 하던 총무하고 불리는 사람이 허리를 다쳤다고 한말이 실감했다. 커다란 통에 육수를 채우는데 여섯 양동이가 필요했다. 그 한 통이 100명의 갈비탕 식사에 해당되었다. 우선 한 통씩 채워놓고는 식사를 했다. 시간상으로는 이른 점심이었지만 나에게는 전신에 전류가 흐르던 시간이었다.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단지 적당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고생하려고 나온 이상, 열심히 하고 싶었다. 또한 남들과 섣불리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런 고질적인 성격을 고칠 절호의 기회로 삼고 싶기도 했다. 조금 쉴 시간이 생기면 메모를 했고, 아주머니들의 일들을 도와드리며 정을 쌓았다. 부지런히 움직였다.
  거의 일이 끝나갈 무렵,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다.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소주를 손에 부어주기도 했고, 찬물에 적신 수건을 감싸주기도 했으며, 치약을 발라주시는 분도 계셨다. 고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열감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차라리 신경이 죽었으면 싶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2, 3층에서 육수를 올려 달랜다. 아주머니들께서 일부 올려 주셨지만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일을 해야했다. 이것은 내가 맡은 일이다. 후-.
  일을 마무리 한후, 사장께 이젠 가봐야겠다고 했다. 잠시 기다리란다. 세수를 하고 나오니 사장이 불렀다. 손은 어떠냐고 물었다. 주방장한테 들은 모양이다. 괜찮다고 했다. 오늘 처음 해보는 일인데 수고했다면서 봉투를 내민다. 15,000원이었다. 다음주에 또 오란다. 기뻤다. 나의 성실성을 인정해 줌을. '덕분에 좋은 경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서울에 있는 누나에게 전화해 서울역 대합실에서 만났다. 감격스러웠다. 지금 여기에서 그 기나긴 여정과 느낌을 다 열거할 수 없으나 다만 사람에게는 자신감과 근면함이 가장 커다란 재산임을 몸소 실천한 하루였다. 지금까지의 생활이 얼마나 단조롭고 무의미한 생활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생애 처음 느낀 이 경험은 앞으로도 나의 생활을 이끌어 나가리라.

    좋은 것과 싫은 것: 서수환
  바람이 갑자기 차거워져 겨울기분이 드는데 한 해를 회고하는 글을 쓰려고 하니 기분이 약간 이상해진다.
  대개 비슷비슷 하겠지만 본1이라는 생활이 상당히 몸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피곤하게 하는 듯하다. 수업은 여전히 빽빽한 모습으로 우리를 강의실에 잡아놓는데 모든 모임의 집행부격으로 뛰다보니 1년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지금은 머리속에 잘한일도 못한일도 모두다 뒤섞여 멍멍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같은 찹찹한 기분이다. 다만 어렴풋이 1년이 아깝다는 생각만 들뿐이다.
  본1을 마치면서, 마칠지 못 마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머리속에는 하기싫은 일과 하고싶은 일이 양분되어 있다.많은 고민속에서 탄생되어진 것은 아니지만 몸에서 원하는, 즉 정신생리학적인 요구라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유치한 발상같기도 하지만 용기를 가지고 지금의 나를 이해하기 위하여 과감히 쓰겠다.
  미생물과 면역학은 정말 싫고,
  (장부면증론치)를 더도말고 덜도말고 다섯번만 읽고 싶다.
  땡땡이 치는것도 조금 싫고,
  따악 한번만 일주일동안 수업을 한번도 안빠지고 다 듣고 싶다.
  한문을 읽다 막히는 것이 싫고,
  한글처럼 술술술 읽어버리고 싶다.
  말을 갖다 맞추는 것은 싫고,
  철학적인 것은 좋다.
  양방과목은 싫고, 과학적 사고는 좋다.
  (사서삼경)은 읽기 싫고, 인간이 되고 싶다.
  시험은 보기 싫고, 당일치기는 좋다.
  유급은 싫고, 본2강의실은 따듯해서 꼭 거기에서 공부하고 싶다.
  섭천사는 싫고, 설생백은 좋다.
  학과는 싫고, 새로운 학설은 좋다.
  외우는 것은 싫고, 이해하는 것은 좋다.
  모르고 넘어가는 것은 싫고, 진도는 느릴수록 좋다.
  생리학책 글씨는 보기 싫고, 내용은 아주 좋다.
  경혐학 교재는 싫고, 교수님은 좋다.
  경악의 글자는 싫고, (유경)의 명쾌한 논리는 좋다.
  점점 멍청해지는 느낌은 싫고,
  아침에 맑은 머리로 항상 남고 싶다.
  날마다 반복되는 무기력한 생활이 싫고,
  날마다 활기차고 신선한 생활을 하고 싶다.
  자취생활은 정말 싫고, 결혼하고 싶다.
  아침식사대신 보중익기탕을 먹고 싶다.
  행림제때 배구시합 빠진 것이 싫고,
  내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싶다.
  혼자 영화보는 것이 싫고,
  여자와 함께 보고 싶다.
  땍땍거리는 여자는 싫고,
  고분고분한 여자가 좋다.
  돈 부쳐 달라고 집에 전화하기는 싫고,
  부모님 목소리는 듣고 싶다.
  일어나는 것은 싫고, 자는 것은 좋다.
  미팅은 싫고, 소개팅은 좀 낫다.
  머리가 큰 것이 싫고,
  가슴이 넓은 것이 좋다.
  술먹고 인사불성이 되는 것은 싫고,
  잠이 올만큼 취한것은 좋다.
  4구는 싫고, 3구가 좋다.
  졸업하는 것은 싫고, 학년 올라가는 것은 좋다.
  합방 쓰기는 싫고, 독방을 쓰고 싶다.
  방위들이 싫고, 현역들이 좋다.
  군대가기는 싫고, 군대 간 친구에게 면회는 가고 싶다.
  12시가 넘어서 자기는 싫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싶다.
  도서관은 싫고, 학생회관은 좋다.
  이리는 싫고, 보성이 좋다.
  결혼식장 가는 것은 싫고,
  축하는 진심으로 해 주고 싶다.
  말다툼하기는 싫고, 얘기는 하고 싶다.
  성질이 급한 것이 싫고, 
  차분한 것이 좋다.
  라디오는 듣기 싫고, 티비는 보고 싶다.
  망상하는 것은 싫고,
  생각하는 것은 좋아한다.
  오락은 하기 싫고,
  만화는 보고 싶다.
  황제는 기백에게 물었다: '그대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백은 말했다: '좋고 싫은게 없는 것이외다.' (황제문기백: '여소호내하?' 기백왈: '무소위호악.')

    나에게서서 온 편지: 염기복
  나는 생명이다.
  너를 살게 하는 명령이다.
  네가 '왜 살아야 하느냐'로 고민할 때면 나는 무척 서운해진다. 그건 네가 네곁에서 항상 너를 지켜 보고 있는 나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란다. 네가 만약 나를 잊게되면 너는 너 밖에 모르는 너뿐인 나쁜놈이 된단다. 결국 생명을 잊은 죄로 너는 조금씩 죽어갈 것이며 다시 태어난다 해도 도태된 모습일게다. 하지만 나를 잊지 않는 한 너는 영원히 죽지 않으며 적당한 시기에 다른 공간에서 전보다 진화된 모습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 때의 공간이동은 두렵고 슬픈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공간에서의 탄생을 의미하는 축복인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아라. 너에게 삶의 의욕을 솟구치게 하는 살아 있는 것들이 보이는가? 그것이 무엇이건 그들로부터 삶의 명령을 들었다면 그것은 나의 분신일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속삭인다. 생명의 수칙이다.
  I 
 '길들여 지지 말라.' 즉 노예가 되지 말라는 거다. 노예는 죽어가는 생명이다. 아니 생명이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될 기계나 다름없다. 그들은 길들여졌다는 사실을 모른단다. 죽지 않으려면 야생이어야 한다. 야생동물을 봐라. 어디 사자가 토끼 길들이는 것 보이드냐? 하물며 토끼가 사자밑에서 빌붙어 살더냐? 물론 어미가 새끼를 길들일 수는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철이 들때까지만이다. 자연의 무자비한 이치를 알게되는 순간 그들은 어미곁을 떠나 홀로 살게된다. 헌데 너희 인간들은 어떠하냐? 도대체 나이를 먹으나 안먹으나 그저 길들여 지고 있다. 무자비한 사시사철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니 평생 철모르는 철부지로 사는 게지. 야생짐승만도 못한것들. 나서부터 이놈 만나면 이놈닮고 저놈 닮고 평생을 닮기만 하는 거지. 독특한 놈은 찾기 힘들어. 그러니 전부 삐뚤어진 놈들만 모여있으면 결국 닮는건 삐뚤삐뚤 이겠지.
  II 
  '길들이지도 말라.' 길들이는 것이 주인이라는 건 착각이다. 길들이다보면 닮게돼있다. 노예를 부리는 자도 결국 노예가 되고 만단다. 그러니 참다운 주인은 노예가 싫단다. 노예란 항상 욕하고 성질을 부리는 데 어찌 귀찮지 않을쏘냐? 주인에게 길들여진 줄은 모른체 남의 주인에겐 방자한 놈들. 주인 아니라고 짖어대는 개새끼하고 똑같은 거란다. 그 짖어대는 소리, 노예들이 퍼붓는 욕설, 그것은 너도 자기 주인이 돼달라는 애원의 소리란다. 어떤 게으른 놈이 늑대를 잡다가 힘 안들이고 평생 먹으려고 길들인 거란다. 그 게으른 놈은 늑대를 노예로 만든거겠지? 가끔 개들 중에도 사나운 놈이 있긴 하더구나. 야생으로 돌아가려는 놈인데 결국 못 돌아가는 걸 보면 같은 또래의 노예들을 이기지 못하는 거겠지. 노예개들 그리고 노예주인을 죽여서라도 빠져나와야할텐데, 생명이란 살기위해 남을 죽이게 돼있다. 그것은 선한 것이란다. 노예들은 이렇게 말한단다. 새장의 갇힌 잉꼬처럼. 새장 바깥의 참새가 놀러 와서 '넌 왜 거기있니? 이리 나와 봐. 이 좋은 벌한 넓은 하늘을 맘껏 날 수 었어' 라고 말하면 잉꼬는 대답한다. '밖에 나가면 사람이 밥주니?' 하고. 지금 너희들이 살려면 노예를 죽여야 한다.
  III
  '네 몸은 네가 고쳐라.' 야생동물에겐 병원이 없다. 자기가 고치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다. 스스로 고치지 못하면 죽는 것은 당연하다. 한데 너희 인간들은 병원에만 의지 하는데 병원이란 병자가 사는 곳이다. 의사들이 누군 줄 아니? 인간 쓰레기를 치워주는 노예들이다. 결국 제 손에 제가 죽겠지. 매일 건강한 사람을 보고 살아도 시원찮은 놈들이 병든 놈들만 보고 사니 건강하던 놈이라도 금방 병들고 말테다. 물론 쓰레기를 해치운다는 공헌을 하고서 말이다. 스스로를 고치려 들기만 한다면 네 병은 낫는다. 설사 못고치면 어떠냐? 그만큼 네가 애를 써 봤는데 달리 미련이 남겠니? 그리고 네가 그토록 치열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있었더라면 애초에 병에 걸리지 말았어야지. 너만 건강하면 된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건강해져야 한다. 스스로 건강한 자가 많아져야 한다. 남까지 건강하게 만들겠다는 의사놈들, 스스로의 착각에 빠진 거다. 업을 닦아내라는 수업시간에 장차의 업을 쌓고 있는 중이라니!
  IV 
  '미래를 알아야 한다.' 주인인 네가 일을 찾아나서고 너 스스로 만남을 주도하겠다는데 어찌 미래가 불투명할쏘냐. 낮이 지나면 밤이 온다. 계절의 변화를 안다. 분명히 안다. 알려고 들면 더 어려운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아는 것이다. 언젠가 알게된다고 생각하면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다. 각자가 스스로의 미래를 알고 가꾸는 주인들로 구성된 사회, 이것이 너희들이 지향해야 할 사회인 것이다.
  FIN
  이상의 수칙을 들었을 때 너는 생명을 들은 것이며 그 때 '너'와 '내'가 만나 큰 나인 '하나'가 된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정저지와에서 탈출을 시도할 때: 변재석
  돌이켜 보면 본과1학년은 매우 짧았던 한 해였지만 그래도 예과2학년때 보다는 의학과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I
  가장 먼저 나는 의사에 대한 관념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의대에 입학하면서 나는 의술은 인술이라고 하여 상당한 자부심을 느꼈었지만 실제로 의학의 기초이론을 배우면서부터는 이 자부심이 서서히 흔들리고 있다. 이른바 '과학적'이라고 하는 양방과목의 교과서에서는 왜 이리도 'It seems that... It might be..., It is nor fully known that..."등의 표현이 자주 등장하며, 직관의 진리라는 한방 과목의 정기신 사시음양오행은 왜 이리도 상식의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는지. 이런 상황에서는 한방, 양방을 막론하고 의사가 병을 고치는 사람이라고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의사란 아픈 사람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현재의 의학적 지식이란 고객에게 안심하고 팔 수 있는 백화점의 물건이기보다는 깜깜한 산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의 손에 들려 있는 조그만 호롱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II
  그 다음 절실하게 느꼈던 것은 한약재의 약효가 의문시된다는 점이다. 가장 흔히 쓰는 인삼에도 농약을 치고, 수입하는 한약재는 방부재투성이라고 하니 이래 가지고서는 설령 진단과 처방을 잘 한다고 해도 치료가 될까 의심스럽다. 실제로 나는 예전에 숙지황이 들어가는 약을 먹은 적이 있는데 그 약을 먹고는 계속 설사를 한 경험이 있다. 나중에 들으니 제대로 수치가 된 숙지황은 유통되는 것이 극히 드물다고 한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결국 한의사란 사회의 일부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의사 자신이 세상과 담을 쌓고 살든 그렇지 않든 한의학의 발전은 사회적 조건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따라서 한의학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요즈음 우리사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농산물 수입개방 반대운동이나 농촌의 몰락, 공해추방운동 등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사회가 변화하여 갈수록 사람들의 생각은 개인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지만 사람들의 실제생활은 오히려 상호간에 더욱 밀접하게 되어간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 같다.
  III
  신입생 시절의 교수님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말아라.' 이제 한의대 6년의 기간 중 절반이 지나가는 마당에 나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예과때는 신문을 정기구독 하였고, 시간을 내어 자주 서점에도 들였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본과에 들어와서는  그런 것들에 별 흥미가 나지 않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세상일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 지난번의 공중보건의 쟁취를 위한 서명운동때나 의료일원화 반대 움직임때에도 나 자신은 얼마만한 확신을 가지고 임했던가. 그리고 나의 동료들은 어떠했던가.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변했을지는 몰라도 나는 여전히 우물안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다양하고, 그들이 보여주는 질병 또한 다양하다. 그런데 의사라는 좁은 견문으로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질병의 근본을 알 수 있을까?
  IV
  누구나 느끼는 것이지만 가을은 봄보다 빨리 지나가고, 산행은 등산길보다 한산같이 더 다급하고, 학교생활은 1학기보다 2학기가 훨씬 빨리 지나가는 법이다. 한의대 6년을 1년 4계절로 본다면 다가오는 또 한번의 기나긴 겨울잠 후에 남는 시간은 추동뿐인 셈이다. 게으른 자 석양에 바쁘더라고 다급한 마음 뿐이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미 들어선 길, 한걸음 한걸음 충실히 가다보면 무엇인가 나타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생활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고독한 황제: 김두환
  전쟁 시작, 디 마이나스 텐(D-10), 전투준비 전무, 카운트 다운 제로, 파이어! 순간, 극도의 긴장감과 함께 전면전의 시작, 적들은 모두가 강력한 난물들이다. 다양한 공격의 시작이다. 그들은 아기요 나는 위기다. 눈으로도 식별이 어려운 미생물들의 반란, 면역과의 전쟁. 이것들의 사령관은 다양하게 작전을 구사하는 제갈공명이다. 내가 방어하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고 전투준비도 없다. 결국 발사되어 오는 20발의 스커트 미사일을 나의 페트리어트로 단 몇발 정도만 요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첫날의 미생물들의 반란을 필두로 장장 10일간의 전투에 돌입했다. 자연의 힘을 빌어 나오는 신비의 약초들, 인간의 생활을 아름답게 해주기도 하며 사랑하는 연인의 가슴에 달리는 꽃을 피우기도 하며, 때로는 인간의 질병을 구해 주기도 하는 진실로 고마운 약초들, 강호들의 고수약물의 삼단옆차기 그리고 사단옆차기공격, 그리고 방어, 짱꼴라 의가들의 쿠데타, 그들의 이름, 호, 기타등등, 기생충들의 반란, 이렇게 처절하게 닥쳐오는 다양한 형태의 10일 공격을 전투 준비없이 방어해낸다는 것은 장대없이 장대높이 뛰기를 하는 것과 같지 않는가?
  처절한 전투, 그 후의 잔잔히 밀려오는 백수곡기의 파우어! 지금부터 주패를 즐기며 평화를 만끽하자. 그들에게 승리했건 패했던 전쟁뒤의 평화를 나는 만끽하련다. 그동안 이루지 못했던 잠이라는 평화를 누리고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자. 하늘의 푸르름, 하늘님의 수채화 솜씨, 대자연의 그림을 눈에 담아 전쟁을 치루며 메마른 정서라는 이름의 대지를 적셔 기름진 옥토를 만들어 보자!.
  으악! 이것이 웬일인가 평화를 만끽하고자 하는 순간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졌다. 기생충의 반란이다. 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프라지칸텔이면 끝장나는 이놈들을 또 치루어야 한다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내가 켄이면 기생충은 춘리인데 춘리의 휘돌려 차기에 당하다니. 모르겠다. 케세라세라. 동서양의 내노라 하는 막강한 부대들과는 전쟁은 나를 무척 지치게 한다. 하지만 그들과의 싸움은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는 안되는 고독한 싸움인 것이다. 이러한 전쟁은 나를 고독한 황제로 만들기도 하지만 고독한 황제는 그 전쟁들을 치루면서 평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황제의 등극을 꿈꾼다. 고독한 황제는 또 시작될 전쟁을 기다리며 전투준비를 시작한다.

    고독을 씹으며: 한동훈
  기말고사가 앞으로 2주일 정도 남았다. 달력을 보니 1992년도 2장이 남아서 올해도 거의 다 갔다는 생각이 든다. 햇빛, 음악, 커피, 담배... 너무나도 편안하고 웬지 저절로 웃음이 나올것만 같은 분위기, 방이 아주 정다워 보인다. 본과1학년, 너무나도 많은 일들, 생각을 하다보니 어디서부터 쓰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방학이 끝나고 이리로 와서 처음 등교할 때 2층까지 안 올라가고 1층에서 수업받는게 아주 이상하고 또 신기했다. 그리고 정헌택 교수님과의 첫만남, 그때부터 본과1학년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수업도 꼭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방학중 천번도 더 했던 생각. 이번 겨울방학에도 또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학교나가고 애들이랑 저녁에 술도 마시고, 그때는 대학들어와 처음으로 복습도 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2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항상 느끼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 아직도 뭐가 부족한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직도 찾고 있다. 예과1학년 때 처음으로, 이리에서의 낯설은 얼굴들, 웬지 모를 불편함, 시선을 둘 곳이 없어 계속 움직이는 눈동자, 너무나도 갑갑하고 미칠것만 같았다. 그날 저녁 (대학생활안내)라는 책자를 보다가 감기지 않는 눈을 감으며 억지로 잠을 청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다 힘들게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긴 했지만 굉장히 피곤했다. 수업을 나가고 오후에는 피곤해서 집에와서 다시 잤다. 깨어보니 11시, 다른 사람은 자고 나는 할 일이 없어 내일수업 생각하고 다시 자려했다. 물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1시부터 8시까지의 9시간 인생에 있어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때 인생에 있어 고독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마 그때부터 내 낮과 밤이 바뀐것 같다. 나는 아직도 해가 떠있으면 움직이기 싫고 밤 9시이후에는 웬지 쏘다니고 싶어진다. 혼자있는 외로운 밤, 마음을 터놓을 수 없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있는 외로운 밤. 사람들을 만나면 가식을 뒤집어 쓴채로 웃으며 얘기하지만 항상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고 학교에 가서 피곤해하고,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가 잠을 잘자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겠지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오는 잠을 억지로 잘 수도 없고 그래서 술을 마시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몸도 좋았기에 술을 마시면 어디서 끝내야 할지 모르는 술을 계속 퍼부었다. 며칠간 계속 술을 진탕으로 마시니 잠은 잘왔다. 너무 잘와서 그 다음날 수업을 못듣기도 했다. 그러다가 술을 안마시면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매일 아침 술이 깨서보면 퉁퉁 부어있는 얼굴, 어지러진 방, 술냄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사랑, 사랑. 가수마다 짖어대는 끝이 안날것 같은 지겨운 사랑노래. 몸이 피곤했다. 만사가 귀찮아지고 내가 지금 뭘하는지 모르겠고 또 뭘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꿈꿔오던 대학생활은 이게 아닌데. 허탈감, 실망감, 학교에 나가기가 정말 싫었다. 다른데 몰두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하루 6-7시간씩 당구도 치기 시작했다. 오락이 아니었다. 무척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 순간은 다른 생각을 안할 수 있어서 매우 좋았다. 12시까지 당구장에 있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면 아무도 없는 나의 단칸방. 또 술을 마시러 나가고 정신을 잃을때까지 술을 마신다. 필름이 끊기고 눈을 떠보면 황량한 천장에 덩그렇게 걸려있는 형광등이 마치 조롱이나 하듯 허옇게 번들거리고 있고 등교시간이 지나버린 시계는 미친듯이 째깍거리고 있다. 일어나 보면 깨질듯한 머리, 뒤집힐것 같은 속, 오늘도 학교에 못 나갔다는 생각에 자신에게 화를 낸다. 모든 것에 짜증을 낸다. 될대로 되라는 생각에 다시 누워 잠을 청한다. 학교에 있는 애들은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고 있을까? 다시 밀려드는 허탈감과 고독감, 점심을 알리는 벨소리,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밀어넣고 다시 드러눕는다. 다시 고독감. 못참고 학교에가서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당구장에 간다. 반복 또 반복. 어쩌다가 술을 안마시는 날이 있어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왜 고독하지? 맞아. 친구가 해달라면 뭐든 다해줬다. 친구가 아무리 무리한 부탁을 하더라도 서운하지 않았다. 친구니까. 어쨌든 친구를 만들려고 학교에 나갔다. 대학들어와 아쉬운것 중의 하나가 짝궁이 없다는 것이다. 자리라도 나란히 않을 수 있으면 수업시간에 재미있을 텐데. 나에게는 교제수단이 술 빼고는 없다. 만나는 애들마다 기회있으면 같이 마시자고 하였다. 하지만 친구로 만들지는 못하였다. 벽. 나는 자꾸 애들로부터 술꾼 취급을 받고, 이상한 놈으로 생각되어져 갔다. 이해한다. 내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포기했다. 그 당시 재수하고 있는 동창 영석이(지금 같이 방을 씀)를 찾아 서울에 자주 갔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이 세상사람들 모두가 나를 이해못하더라도 영석이는 끝까지 나를 이해해 주겠지. 그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뭐라고 하든지 신경안쓴다. 이렇게 1년이 지나고 또 지났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계속 찾아보아야 겠다.
  삶의 진실을 허무다. 
  허무를 노래치 마라
  그대들이 실무를 뽐낸다해도 
  나를 비웃지마라
  허공속에 흩어지는 한줌의 기가 되어 
  표류하고 있을지라도

    렛 잇비: 배형일
  오라! 시간이 흘러가는대로 그대로 두어라! 시간이 흘러가며 움직여 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거기엔 어떤 평가나 결론도 내리지 마라. 각각의 사람마다 약간의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대로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얘기를 누구에게 할 필요는 없다. 어색해질 테니까. 아마 그는 듣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그대로 두어라! 렛 잇비! 그것이 도! 그것이 자연!
  그리고 멀리 서서 움직이는 모습만 쳐다보면 된다. 비례는 이그러질지 모르지만 나의 짱구가, 20여년의 배경이 해결해 줄 테니까. 당황할 일은 없다. 잘 생각해 보면 그런일은 당황케 하려고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 늦지 말고 조금 빨라라. 
  생활에서 생활은 곧 도! 그 자세에 따라서 그렇게 될 수 있다. 그 변화하는 모습을 본다면 모욕, 수치, 섹스, 보람, 따뜻함, 그 모든 것이 도가 된다. 
  대신 정신을 차려라. 한 순간도 놓치지 마라. 먼저는 내가 조금 늦음을 인정하고 복습을 해라. 그리고 여러 생활속에서 귀납적으로 얻은 지식으로 더 큰 그리고 섬세한 능력을 터득해라. 머지않아 과거 미래가 열릴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는 생명의 시작을 비롯해서 이승의 모든 것을 미래로 돌리는 큰 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면 드디어 시공을 초월해서 거기서 진정한 자유를 얻게될 것이다. 욕심은 최대의 장애물이 되겠지.
  이 욕심, 이 조급
  욕심때문에 고민까지 할 필요는 없다. 욕심도 조미료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결코 정신적으로 인위적이어서는 안된다. 정신적으로 인위적이라면 아주 치명적이다. '혹시나'하는 생각은 두 걸음을 물러나게 한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지 마라. 알게 되기도 하겠고, 모르는 일은 그저 그렇게 잊혀지고 묻혀질 이야기. 다 알수 없는 일이니까!

    반성은 내일을 기약한다.: 방상현
  올해도 여느 해가 같이 저물어 가고 있다. 하지만, 내손에 남은 것은 웬지 모를 공허함 뿐이다. 시간은 항상 그랬듯이 나에게 허탈감을 안겨 주었다.
  이리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지 이제 3년이 다 되어 간다. 처음 왔을 때와 내 모습과 마음은 거의 변화가 없는데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 가 버렸다. 예과 1년 때 였을 것이다. 어느 교수님이 들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신게 기억이 난다. 
  '여러분은 이리사람 신동사람이 되어선 안됩니다. 여러분은 가슴속에 큰 이상과 희망을 품고 비록 이리에 있지만 보다 더 넓은 세계를 향한 패기를 품은 젊은이로 남기를 바랍니다.' 그 말이 지금 피부에 와 닿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떠한 학문적 자극도, 또한 타 대학과의 경쟁도 거의 결여된 상태에서 우물안 개구리로 되어 버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 모든것을 내 자신의 노력부족으로 돌리고 싶지만 그렇지만도 않은것은 인간이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과 자신의 노력부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진 현재의 내 모습은 부끄러울 뿐이다.
  올해1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전체적으로 원전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본초학, 생리학,의사학, 경혈학, 이 모든것들이 원전을 기초로 해서 나오는 것들이다. 원전공부의 필요성을 더욱 더 절실히 느낀다. 또한,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 면역학, 미생물, 이 두과목이 나에게 준 텐션이다. 악몽으로 생각하고 싶다. 
  대학하면 캠퍼스가 떠오르고 캠퍼스하면 낭만이 떠오른다고 누가 말했다. 하지만 올해도 캠퍼스를 여유있게 즐기면서 걸어 본 것은 다섯 손가락만 있으면 다 셀 수 있을 정도이고 가끔 한가로운척 거닐다가도 수업시간에 쫓겨 바쁜 걸음으로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여러가지 행사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그냥 지나가 버리곤 했다.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기억에 남는 일도 꽤 있는 것 같다. 약리실습시간에 저녁 늦게까지 같은 조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서로 도와가며 실험결과를 도출해 내고 실패하면 서로를 위로하면서 다시 시작하고 그러면서 조원들과 친해지고 그래서 서로의 마음이나 생활을 조금씩 알게 되었을 때 기뻤다.
  또 한가지는 '하계의료봉사활동'이다. 각 써클마다 배정된 지역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플랑카드를 걸고 진료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진료를 하게 되는데 진료가 끝나면 선후배가 같이 모여 여러가지 놀이를 함으로써 더 친해질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어떤때는 진료받은 환자가 듣던 것을 직접 배울 때는 조금씩 눈이 떠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떤 일을 끝마치거나 한 해가 지나면 항상 반성을 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한다. 
  난 내년에는 이렇게 살고 싶다. 
  첫째, 평상시에 공부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힘껏 노력할 것이다. 
  둘째, 많은 책을 읽고 급우들과의 많은 대화를 통하여 어는 한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학생이 되고 싶다. 
  셋째, 시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학생이 되고 싶다. 
  넷째, 공부에 관한 자료 혹은 생활환경을 항상 정리하는 습관을 기르고 싶다.
  본과 2학년 때는 이 네가지를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원전공부도 열심히 하고 대학의 낭만도 좀더 즐기면서 항상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여 조금씩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남과 여, 그리고 희망과 절망: 이종길
  (남과 여)라는 영화를 고2땐가 보게 되었는데, 감수성이 예민했는지 아니면 여자가 보고 싶었는지 모르는 맘에 무척이나 열심히 보았던 기억이 난다. 
  (남과 여)라는 영화의 내용은 우연히 자식들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절망과 희망, 그리고 남자란 무엇인가, 여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비가 오는 차 속에서 하루를 같이 보내며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의 모습도 어쩌면 나의 삶이라는 여자(나는 남자니까 동성은 싫어 삶을 여자라고 하였다)와 대화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죽음이라는 편안한 안식처를 향해서 희망과 절망을 노래하면서.
  1학기를 보내면서 여자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남자에게 여자, 여자에게 남자, 참으로 동양에서 말하는 음양이 이 말들에 내재하는 것일까?
  아뭏든 본 1때는 여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삶에 있어서 큰 것인지를 느껴 보았다. 1년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나의 대학생활에 들어와서 가장 큰 고민은 마땅한 대화상대를 찾지 못한 것이다. 앞에 나아갔던 선배들의 전철을 밟고 또 다시 밟고하는 과정속에서 좌절을 겪을 뿐이다. 
  아득히 멀기만 한 나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 걸까? 요즘 들어와서는 이일, 저일 하다보니 정신이 없지만, 가장 어렵다고 생각되는 일이,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것이다. 
  해마다 한의대에서 열리는 의명제전야제를 보면서 해마다 퇴색해 가는 의명인의 밤이 가슴에 서글프게 와 닿는다. 예 1, 2후배들과 한번 뒹굴어 봤으면 하는 마음이 그리도 간절했었는데...
  텅비어 버린 도서관에서 84학번 선배와 본과4학년 선배들이 눈을 크게 뜨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어딘지 모르게 힘을 내자하는 마음이 솟는다. 언제나 100개의 의자가 임자를 찾지 못해서 이리돌고 저리도는 판에 자리를 지키고 공부를 하는 선배님들이 계시다는 것이 기쁘다. 
  대학인의 상징이요, 삶의 공간이라는 이 한의대건물의 도서관은 언제쯤 생기가 넘치려는지, 너무 스산하기만 하다.
  면역학실습을 하고 오는데, '실험기자재가 얼마예요?'하고 물어보았는대 적은 것은 100만원이요, 많은것은 1억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교감신경이 흥분했다. 아니, 부교감신경이 흥분했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왜 한의대에는 실험실은 그 분위기가 너무도 달랐다. 그 분위기는 억지로 꾸민 것이 아닐텐데, 분명 말해 주는 것이 있었다. 우리는 연구의 전통이 부재한 것이다. 
  강순수교수님께서 음양의 틀을 벗어나야 한의학이 살 수 있다라고 하셨는데, 나의 사고의 틀을 아직 서양의 틀도 벗지 못했는데, 음양의 사고마저 호기하라고 하시는게 사뭇 궁금하다.
  인간의 세상이란 참 오묘하다.
  인간들은 그 넓은 하늘을 보고서 우주는 끝없이 무한한데 무한하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들은 왜 우주가 창조된 것이라고 생각할까?
  우주는 무엇일까?
  이 문제가 나의 삶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전달해줄까?
  송나라 사람은 '하늘이 무너지면 어쩌나'하고 걱정하며 울었다지만, 지금은 아무도 울지 않는다.
  나 또한 절망을 보고서 울지는 않는다. 이제는 저 희망을 보고서 웃을 때가 오면, 우주의 벽을 놓고서, 저 끝없이 뛰어가는 거북이와 토끼의 경기를 보면서 우주의 문제를 끝내겠다.
  과연 우주와 남여, 절망과 희망은 어떤 것일까?

    발전적인 삶을 위해서: 김송백
  우리반 누구나 다 그랬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도 본1은 중요하게 다가왔었다. 학기초에는 안하던 다짐도 해보고, 여러가지 계획도 세웠었지만 역시 그것은 용두사미격이 되고 말았다.
  항상 학기가 끝날 때나, 학년이 끝나갈 때는 내가 이번 학기, 학년에 무엇을 했던가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단순한 반복의 연속이었다. 너무나도 관성적으로 시작되고, 진행되고, 끝나버리는 학교생활일 뿐이다. 이러한 고민은 우리반의 어느 누구라도 계속해 왔겠지만 실지로 눈에 띄는 모습들을 보면 몇몇을 제외하고는 단지 사고의 상태에서 끝나버린다. 점점 더 깊어만 가는 낭패감에 어쩔줄을 모르고 헤매는 자신을 돌아보며, 과연 내가 한의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충실히 공부도 하고 소양을 쌓으면 되리라고 생각했던 대학생활은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는 단지 관성에 젖어만 가는, 무의미한 생활로 전락되어 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3년이다. 얼핏보면 긴 시간이지만, 사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2년 정도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고, 의욕조차도 따라주지 않는다. 입학할 때에는 시간도 정말 충분한것 같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려고 했다. 열정이 있었다. 그 열정을 찾기 위해서 나는 한가지를 하기로 했다: 쉬고자 할때 푹 쉬자! 우리반 학우들도 모두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고민의 한계가 눈에 계속 보인다. 고민이 고민으로만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 본과 1학년을 마쳐가는 이 시점에서 대학생활전반을 바라보면 위와같이 결론밖에 얻어지지 않는다. 한의학의 문제점 역시 크다. 하지만, 그 이전에 대학생으로서의 생활을 냉정히 살펴 본다면, 학계의 문제점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 대학생으로서 기본적으로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한의사가 되어 사회로 나갈수 있을까하고 의문이 생긴다. 본과 1학년이 막 되어서는 한의학을 제대로 공부해보리라하는 열정에 불탔었다. 1년이 지난 지금에 돌이켜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는 얼마 남지않았다. 진실로 총력을 기울여 투자해야 할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또다시 걱정이 되는 것은 다시 한번 반복 되지않을까하는 생각이다. 궁하면 통한다고 하지만, 본과생의 핑크빛 꿈의 환상에서 깨어난 나는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만 생긴다. 하지만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되겠지하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자신을 다시 한번 믿어 보자. 믿고 행해보고 후회는 하지말자. 실천도 해보지 않고 계속해서 생각만하고 그 생각에 얽매이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나의 오류는 이러한 것이다. 반성을 해보고 실행으로 옮겨야 하겠다.
  발전이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이다. 또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발전이 없다. 정신이 죽는 사람은 육체도 또한 건전하지 못하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정신이 죽어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쉼없이 생각하고 노력하여, 발전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앞으로 두번 다시 실수는 하지 않아야겠다. 작심삼일이 될지라도 작심삼일을 1년에 122번만 한다면 1년내내 결심으로 가득차게 된다고 중학교 때 선생님의 말씀처럼 항상 각인하고 체화시켜야 한다.
  발전적인 삶을 위해서...

    첫눈: 문성재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아니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단지 하숙방에서의 시간에 모든 것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영화음악을 들으며 담배를 물고 마음대로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이 시공을 사랑한다. 이 밤이 좋다. 고요한 적막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고 내가 좋아하느 음악만을 들으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시계바늘 소리가 좋다. 너는 밤을 지새워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본적이 있는가?
  나는 그 해를 보면서 내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본다. 나자신이 초라한 미물임을 가르쳐 주지만 내 가슴을 뜨겁게 해주는 태양을 사랑한다. 하지만 태양과 함께 나타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그들은 내 자신을 초라하게 한다. 나를 그들속으로 집어넣게 한다. 그러고 나면 나는 아침의 태양을 잊는다. 아니 바라보지 못한다. 너무 밟아서 도저히 바라볼 수 없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내가 증오하는 사람들은 내 자신에게서 나를 빼앗아간다. 나는 내 자신을 잃어 버린다. 문득 문득 내 자신을 잠시 찾지만 세상은 그런 나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고나면 세상에 지치고 찌들여버린 내 자신만 남는다. 초라하고 한심하다. 내일아침에도 어김없이 태양은 떠오르겠지. 그것은 뜨거운 태양이다. 바쁜 하루가 되겠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려는 모습이 진정한 내 자신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 글을 쓰는 나는, 나는 괴롭다.
  아~!.
  II
  한의과 대학과 동시에 경우회에 들어 온지도 벌써 3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나는 말이 많아졌고 웃음도 많아졌고 현실생활도 느끼기에 바빴다. 조금 더 커진 우물속에서 나는 책임감을 배웠다. 이 책임감은 나를 무겁게 억압했고 지금은 더욱 더 무겁게 느낀다. 경우회장을 이번 2학기부처 맡고 있다. 하나하나의 행사를 계획하고 보내면서 나름대로의 즐거움과 많은 고충을 맛보았다. 모두 다 나열할 수는 없겠지만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학기에 학우들이 써낸 글들을 모두 한번 읽어본 적이 있다. 결국은 '모두 비슷하다'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럴꺼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숫자였다. 입학할 때의 기대와 현실 사이의 벽을 느끼고 있었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같은 고민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나도 많은 고민을 해 봤지만 지금은 그저 어떻게 되겠거니, 운명이려니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보면 잘 될거라고 생각한다. 남들은 이런 나의 모습이 수동적이라고 탓할지 모르겠지만 마음만은 편하다.
  대학에 입학해서 지금까지 못해본 가장 아쉬운게 있다면 사랑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애인 하나도 없는 바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고, 그러다가도 없으면 어떠냐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언제나 진짜 애인다운 애인이 생길지. 윤종신의 노래중에서 '애인 하나 없는 사람을 위하여'라는 노래가 생각나는데 기회가 있다면 나같은 사람들은 한번쯤 들어보기를 바란다. 
  III
  결론적으로 나의 길은 고독하다. 아무도 경우회장을 대신해 줄 수 없고 누가 내 대신 국가고시를 치루어 주는 것도 아니고 어느날 갑자기 애인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앞으로의 생활을 생각해보니 할일이 아직도 태산같다. 잘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걱정과 기대감 속에서 붓을 놓는다.
  언제 첫눈이 올지 모르겠다.

    결단의 시기: 김헌
  대학에서 3년, 벌써 3년이 지나고 있다. 올 1년동안은 매우 바쁘게 보냈다. 본1처음에는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가득했고 그만큼 바빴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가을이라고 계절이 다시 한번 나를 슬프게 한다.
  앞으로의 내 인생은 한의사로서 살아가는 것일게다. 사람의 목숨과 건강을 맡는 다리, 학문적인 토대를 튼튼히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의대를 다니는 나의 모습이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지만 지금에서는 솔직히 회의를 느끼고 있다. 지금과는 다른 인생, 다른 환경, 다른 사람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그런곳에서 잠시 쉬고 싶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허나 이런 모든 것들에 의해 지금 나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제일 먼저는 홀로 서고 싶다. 어떤 시제목같아 우습겠지만 내게는 중요한 것이다. 그 동안 내게 주어진 여건과 친구, 부모님등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 뚜렷한 주관을 가질 수 없었고 이리저리 되는대로 살아 온 것 같다. 물론 산다고 하는 것이 여러가지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나 앞으로는 내 판단 내 의지에 의해 살아가고 싶다. 물론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나 그 동안 나는 남을 너무 의식하며 살았다. 이제 물질적, 정신적 독립이 있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나이만 스물하나가 아니라 진짜 어른이 되고 싶다.
  내가 한 행동에 내 스스로가 책임질 수 있고 내 인생의 현실에 보다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어야 한다. 눈을 돌리면 또 다른 인생이 있다. 어른으로서 나 자신이 홀로서게 되면 앞으로 내 인생은 분명히 달라지리라. 그러면 앞으로 남은 대학 3년, 졸업후 직업이 될 한의사로서의 내 인생은 진실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자연의 변화, 이 가을을 고맙게 생각한다. 가을의 단풍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마이 플랜: 김태형
  본과 1학년의 소중한 시간이 지나간다. 나에게는 또 다른 1년의 허무한 기억으로 기억되려나 보다. 1학기초 기록했던 나의 각오들은 한번 펴지 못하고 잊혀졌다. 순간 순간 힘들고 바쁘게 정신없이 지내온 생활속에 만족했던 순간들은 나의 정열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 없다. 멋진 연예생활 한번 해 보려다 실패한 일, 한의학 좀 제대로 공부하자고 다짐했던 공허한 결심, 그때 그때의 시험을 따라 흘러온 나의 1년의 생활들이 소중하지만 안타까운 기억일뿐이다.
  하지만 이러했던 나의 생활들에 대한 후회보다는 지금은 앞으로 남은 나의 3년간의 대학생활에 대해 무언가 새로운 열정들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때까지 끌려만 왔던 나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이제는 내 스스로 나의 삶을 끌어가야겠다.
  요즘 내 주위의 많은 친구들이 내년에는 좀 더 멋있는 학생회를 만들려고 분주히 준비한다. 정책과 사업을 결정한다고 새벽 늦게까지 회의하고 토론을 하고 있다. 우리 학년을 대표해서 나온 우리의 자존심인 학생회 준비요원들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기대와 고마움을 갖는다. 내 자신도 3년 동안 학생사업에 나름대로 참여하고 노력했으나 많은 고민과 방황으로 모범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실망과 좌절을 많이 맛보았다. 자신감이 없어진 탓에 내 자신이 매우 소극적인 행동을 하게 됐지만 이리의 최고학년으로서 조그마한 성의라도 다 해야겠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 나 자신과 우리 모두가 내년부터는 좀더 성실한 모습으로 학업에 충실해야겠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로서 너무 나태한 모습으로 한의학을 대했던것 같다.
  '한의학!' 나에게 닥친 것은 실천의 문제다. 아무리 '무엇을 하겠다' '어떻게 하겠다'는 각오들만 되풀이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씩 실천해가며 나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틀을 닦아야 겠다.
  '본과 2학년!' 우리에게 많은 할일과 책임을 느끼게 하는 그리고 또한 새로운 각오를 느끼게 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최수덕
  벌어진 문틈새로 불어드는 늦가을 바람이 무척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세가 등등하다. 오랫만에 책상머리에 앉아 턱을 괴고 여유를 부리고 있자니 책장에 앉은 시커먼 먼지가 여간 눈에 거슬리는게 아니다.
  먼지를 따라 손가락자국을 주욱 내다보니 (너와 나의 한의학)이 손끝에 걸린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샌다.
  1년간 무엇인가 주워듣고 배웠으리라는 착각의 만족감과 그 만족감에 의해 밀려난 나머지 것들에 대한 허탈감이 섞여 나온 웃음이 아닐까.
  주체적으로 살아보겠다는 학기초의 결심과 달리 역시 또 일련의 행사들에 맞춰 내 삶을 수정, 계획하여 보낸 본과 1학년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절대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일련의 행사들을 통해 단순히 참가자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모든 일들을 직접 계획하고 주최하면서 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오직 이 때가 아니면 얻지 못 할 소중한 것들을...
  처음에 가진 막막하기만 하던 그런 초조감들이 여유가 붙어 느긋해지면서 학문에 대한 여유도 생겨나고 내 자신에 대한 반성과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일처리를 위해 다른 사람들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릇된 사고관, 편견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의학적 용어를 잠깐 빌자면 '나'자신이라는 체에 새로운 감각들이라는 용이 합해지므로 생기는 '제3의 기'라고나 할까.
  학문에 대한 나의 욕구를 그나마 가장 많이 채워주었던 것이 그 악명높은 과목중의 하나였던 '의사학'수업이었다. 수백, 수천년의 세월들, 아니 그네들이 그러한 의서를 쓰기 위해 들인 노력과 시간들을 합하면 그 이상일 기나긴 세월들, 교수님이 간간이 섞여 들려 주신 재미있는 일화들을 들으며 그 시대, 그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이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상한론)주를 자기 멋대로 하여 성전을 왜곡했다고 성무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유창의 과감성, 서로 사이가 안좋아 앙숙지간이었다는 엽주와 소엽산인 설설의 모습, 전염병에 걸려 버려진 어린 아이들의 시체를 해부하는 왕정임 등을 상상해보며 그들의 학문에 대한 열의들을 같이 느껴보고자 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저기 저 복희, 신농씨도 한번 만나보고 싶고(난경)을 쓴 저자를 찾아 내어 후대 논란을 일으키게 된 '삼초 명문'에 관해서 한번 속시원히 따져보고 싶다.
  내가 너무 꿈에 젖었나? 한의학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부여해준 의사학을 배우면서 역시 역사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다.
  어정쩡한 이론들, 긴가민가한 학설들을 옛날 의가들을 만나 속시원히 얘기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본과1년을 마치고 한 학번이 높아졌다는 생각보다 지금이 다음 학년과 이어질 고리라는 단계로 생각하고 앞으로도 좀더 여유를 가지고 생활하자!
  '나, 너, 우리의 한의학'으로 시작된 우리반 모든 학우들의 한의학이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서로 여유가 있다면 같이 타임머신을 타고 신농씨가 약초캐고 있던 시절로 엠티를 가봄이 어떨지...

    어떻게 공부 할 것인가?: 황기명
  본과생이 된지도 벌써 1년이 거의 다 되어가고 벌써 한의과 대학생활의 절반을 마무리 지어가게 된다.
  3월달 레포트를 제출할때의 결심과 각오도 무색한 채 지금은 후회와 함께 한숨만이 나올 뿐이다.
  (너와 나의 한의학)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우리 학우들이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구나, 모두 다 나름대로 한의학을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물론 예외에 속하는 분들의 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비슷하고 또 모두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헤매고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매우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어떤 위안이 되어주기도 했다.
  이 글의 제목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로 정해 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공부해 왔던 방식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흔히들 한의학이 어렵다고들 말한다. 고등학교 졸업할때까지 듣도 보지도 못했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음양이니 오행이니, 기니 혈이니, 풍이니 한이니 하는 낱말들은 그 개념부터가 이해하기 힘들다. 처음 한의학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점이었다면 이런 용어사의 문제, 다시말해 더 근본적으로 어떤 사고방식의 차이, 즉 서양적인 것에 길들여져온 의식을 동양적인 것으로 개혁하고 전환하려는데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만약 의식의 전환만이 주어진다면 다음에 한의학을 공부하는 것이 매우 쉬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한가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인가하면 한의학을 공부하기 전에 반드시 그러한 의식과 사고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동양적인 관을 키우기 위해 한의학 이론서적을 읽고 (사서삼경)을 읽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 했다는 것이다. 물론 게으른 나 자신의 노력부족탓으로 그런 것들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한번씩 한의학 서적을 꺼내놓고 공부를 하려해도 흥미가 생기지 않고 황당무계한 말들에 아연해 버리기만 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한의학적 사고란 어디 다른데서 길러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물론 조금 이해가 안가는 말들이 많고 어려운 부분들이 많겠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속에 소위 한의학적 사고가 내재하는 것이지 한의학 개론서나 원전 한권쯤 독파 한다고 한의학적 사고가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싶다. 흔히들 우리는 자조섞인 우스갯 소리로 그런말을 한다. 임상가에는 (의학입문)파니 '동의보감'파니 (진료요감)파니 하는 여러 파가 있어서 그 책 이외에는 죽을때까지 볼 생각을 안한다고 한다. 나는 이게 꼭 그렇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의학이 정말 과학이라면 거기에는 어떤 기본이론이 있을 것이고 (의학입문)에서 말한 것과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것이 서로 두가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책의 어떤 처방만을 취해서 쓰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일테지만. 매끄럽지 못한 글솜씨로 생각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한의학을 공부하는데 너무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겐 고민이 부족한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고민을 하는게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잘 모르는 부분은 그냥 외워버리고 그렇게 어떤 책이든 하나 정도 자기 것으로 만든다면 한의학적 사고는 생길 것이고, 그 이후에나 한의학에 대한 비판적 안목이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매우 간단하고 쉬운 이야기를 장황하게 이야기 했지만 그런것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노력하고 실천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여유를 갖는 마음으로: 하경화
  아름다운 가을산에 아직 가지도 못했는데 벌써 가을이 나의 곁을 떠나려 한다. 항상 바쁜 한의대 생활 속에서 가을이라는 정취와 낭만을 즐기기엔 벅차서...
  벌써 세 해가 지나 본과 일년도 과거로 넘어간다. 교정의 낙엽들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아마도 우리 학교의 미화원들이 부지런하시나 보다) 까맣게 그을어진 아스팔트 만이 가을햇살에 달구어져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두 눈을 찌푸리게 만든다. 누부시게 화려했던 여름날의 모습들은 한 두컷 영상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어느덧 손발이 시려울 정도로 추운 우리 강의실처럼 사람들의 마음도 점점 차갑게 닫혀간다. 한잎 두잎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대학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입문하면서 가슴속에 품어왔던 우리들의 아름다운 꿈들도 점점 하나 둘씩 잃어버리고 어느덧 그저그러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웬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한다. 저물어가는 가을이라서 이렇게 감상적이 되나 보다. 역시 가을은 사람들 모두를 상상속에 빠뜨리는 무서운 힘이 있다.
  갑자기 수업시간에 생리학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가을에느 '여보게 친구! 차나 한잔 마시세'라고 하면서 창밖엔 둥근 달이 환하게 비치고 지기지우 또는 자신 혼자서 차향과 차색 차미를 즐기며 고시 한수를 읊조릴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살자고 하셨다. '여유'라는 단어, 정말 쉽지만 어렵다. 특히 성격이 급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지난번 '동서의학의 만남'이라는 세미나에서 박석연이라는 소장님께서 '교감신경(sympathetic nerve)는 양신경이고 부교감신경(parasympathetic nerve)는 음신경'이라고 강력히 말씀하시면서 본태성 고혈압 환자나 인슐린 비의존성 당뇨병환자등은 모두 양신경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이 세미나를 듣고 그 교수님께서 주장하신 결과의 진위를 떠나서 그 소장님이 한가지 테마를 가지고 무려 삼십년 이상을 바쳐오셨다는 점에서 감동이 왔다. 한 가지에 그토록 오랜 시간과 정열과 노력을 바칠수 있는 그 집념과 인내가 바로 마음속에 갖고 계신 '여유'가 아닐까? 우린 이런 점들이 부족하다. 비단 우리들 뿐만이 아니리라. 현재를 같이 살아가는 대부분의 젊은 세대들은 거의 다 그렇다. 우리가 '인스턴트 세대', '써머리 세대'이기 때문일까?
  지금은 가을이다. 일년중에서 사람들은 가을단풍을 최고로 꼽으며 그리워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봄, 여름동안 힘들여 키워왔던 것들이 결실을 맺기에, 아니면 새로운 성장과 탄생을 위하여 긴 칩거에 들어가야하는 월동을 대비하여 자신의 가장 화려한 부분들을 아낌없이 버릴수 있는 '겸허'때문일까?
  인간은 소우주라고 하였다. 또 자연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가을의 나무처럼 마음속의 좋지못한 생각이나 욕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다.
  앞으로 남은 삼년간의 대학생활, 나는 또 어떤 고민과 갈등속에 서게 될른지 몰라도 무엇을 얻어서 사회에 나가야 할까? 비단 학교공부와 한의학적인 실력이 전부는 아니리라.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중에 우리가 사회에 나가게 되면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에 대한 이해와 태도 그리고 마음가짐이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알아야하기 때문에 직접 경험까지는 힘드니까 많은 독서를 통하여 사상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이 계절에 책 한권도 제대로 못읽은 내 자신을 스스로 한탄하다. 그러한 '여유'는 갖지 못하고 '위기의식'만 느끼다니. 진정한 의사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나가는 것을 남은 삼년간의 과제로 삼아야 할려나보다. 세상을 넓게 바라보고 폭 넓게 많은 것을 이해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자.
  폭 넓은 독서와 마음의 수양을 닦기위해서 그리하여 새롭게 비상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가을산에 다녀와야겠다. 자연의 웅장함, 풍요로움, 그리고 부드러움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하는 낭만을...

    한의학은 종교일까?: 박영준
  날씨는 엄청나게 춥고 비까지 기분 나쁘게 내리는 찝찝한 가을날 바쁜 친구들을 바라보며 게으른 나를 자책한다. 웬지 '바쁘다'라는 사실이 아직까지 별 할일 없는 초라한 나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고 한편으론 부럽다. 가을이라는 계절의 분위기 탓인것 같기도 하다.
  대학생활 3학년,때로는 꽉꽉 채워서 충실하게 때로는 느슨하고 나른하게, 많은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하고, 깜짝 놀랄 만큼 즐거웠던 적도 있었고 인정사정 없던 고통과 고독도 있었다. 다사다난이랄까? 이 표현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지난 날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의 모난 부분이 부드럽게 마모되어 이제는 미소 띄울 추억으로 조용히 자리 잡는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라는 괴물의 위력인가 보다.
  며칠전의 일이다. 교수회관에서 '동서의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한의학 학술초청 강연회가 열렸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거기에 들러 강연을 들었다. 그런데 한마디로 경악의 연속이었다. 강의내용은 제쳐놓더라도 나이지긋한 교수님들의 젊은이 못지 않은 학문의 열정과 진지함이 나를 아무 쓸모없는 단세포동물로 만들어 버렸다. 유급공포증과 에프학점기피증에 시달리는, 식량만 축내고 있는 단세포동물말이다. 이래선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들과 그때의 당혹감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날 강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시간은 마지막 강사인 강순수교수님의 '미래의 한의학 어떻게 할것인가'였다. 한의학의 발전을 위한 음양이론의 탈피가 주요 골자인것 같다는데, 한마디로 '쇼킹'했다. 젊은 학자가 아닌 한의학을 수십년 연구하신 분이여서 더욱 그러했다. 집에 들어 와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 문제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해묵은 논쟁은 비슷한것 같다. 침범할 수 없는 절대사의 우주창조라는 '위대한' 명제하에 여러 사실을 편리하게 맞춰 끼우는 '창조과학'이라는 과학아닌 과학이 내가 공부하는 한의학의 어떤 이론패턴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은 별로 유쾌하지 못한 사실이다.
  다윈이 과학사에 있어 크나큰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피동적이고 발전없는 '신의 은총'에서 벗어나 불완전하나마 엄연한 과학의 큰 잠재력을 지닌 출발점을 제시했다는데 있을것이다. 적어도 과학을 공부한다고 자처하는 사람, 과학다운 과학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윈의 위대함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학이라는 것은 '불완전함'을 속성으로 가진다. 이 말은 무한한 과학의 잠재력, 발전을 의미한다. 한의학의 발전과 과학화의 실마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교수님의 주장이 참으로 끌린다.
  나는 나 자신을 점성가나 주술가로 만들기 싫다. 나는 진정한 '닥터'가 되고 싶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해야할까?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이제까지의 나태함 때문이리라.
  진급후의 새 과목들의 묘한 흥분과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젠 적어도 두렵지 않다. 마음 속에 조그마한 열정이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득, '한의학은 종교다'라는 우스갯 소리가 비참히 들려온다.

    아버지의 병환을 고민하며: 박종철
  본과에 올라와서 어언 1년이 다 되어간다. 막상 뒤를 돌아보니 내 자신이 무엇을 했나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생각나는게 없다. 그러나 나자신의 내적 성숙은 조금 이루어진 것같다.
  그 이유는 1년을 지내면서 예과 때 한의대 혹은 한의학에 대해 가졌던 나의 관점과 시각이 어찌보면 180도 바뀐 것 같아서 이다. 이러한 역할을 하게된 구체적인 사건 하나가 내 주위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 일은 아버지께서 병으로 누우셔서 보름동안 아무것도 못드시고 물만 겨우 몇 숟가락 드시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나 자신의 생각은 아버지께서는 연세가 상당히 많으셨고 농촌에 계시기 때문에 너무 일을 많이 하셔서 기력이 떨어지셔서 그런 병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 누나들이 양방병원에 입원시키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아버지의 병세를 보아 한방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하여 한방병원에 내 고집대로 입원시켰다. 그러나 막상 병원에 입원하신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버지의 병세를 간호하고 관찰하여 보았지만 병원내에서는 특별한 병에 대한 인식도 없었을 뿐더러 담당의사(수련의라는 생각이 든다)한테 직접 물어 보아도 2년 동안 한방병원에 근무하면서 처음 본 증세라며 일단은 열을 떨어뜨려야 한다면서 얼음찜질과 청열약에다 보기약을 섞어서 계속 투여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경과해도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자 형, 누나들은 양방병원으로 옮기자고 하셨고 담당의사를 만나보아도 차라리 양방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말해서 할 수 없이 양방병원으로 옮겨 종합진찰을 받게 되었다. 맨 처음 진단서에 식도암이라고 씌여있어서 몹시 걱정했는데 종합진찰 결과 에소파지알 캔디다(Oesophageal candida)라는 병으로 판명됐다. 이것은 식도에 미생물이 번식하여서 발열과 함께 음식을 못드시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15일 동안 계속 약을 드시고 음식을 조금씩 드신 결과 예전에는 보행 아니 않아계시기도 힘드셨는데 이제는 웬만큼 걸어다닐 수 있게되셔서 대, 소변을 직접 보시게 되었다. 이외에 또 한가지 일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농촌에서 흔히 걸리는 '쓰쓰가무스'라는 병에 걸리셔서 일주일 동안 병원에 다니셔서 낫게 되었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해서 참 많은 것을 느꼈다. 그 중 한의학에 관련된 것은 환자가 오늘 내일 하는데 담당의사들은 구체적으로 이것은 무슨 병이다라는 언급이 없어 보호자의 입장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한의학은 '변증론치'에 의해서 병을 치료한다고는 보지만 현대인에게는 단순히 어떠 어떠한 증후가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병을 치료한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확실한 병명을 밝히고 이러 이러한 방법으로 병을 치료해야 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환자의 입장에서는 안심이 되고 믿음이 간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문제점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병에 대해 치료기간을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병이나 환자에 따라서 치료기간이 연장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러한 경우에 대해서는 의사 자신들도 그만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 한 얘기가 구체적 질병에 관한 한의학의 문제점을 지적했기 때문에 오류나 모순이 많이 있을지 모르지만 종합병원이라 하면 병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될 것같다.
  이러한 모순이 쌓여있기 때문에 현재 이러한 병원에는 디스크나 중풍환자가 거의 90%이상이라고 한다. 이건 너무 편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우리는 한의학의 모순을 깊게 반성하고 좀더 포괄적인 병에 대한 인식이 필요할 때이다. 한의학이 '민중의학'이 되려면 우선 이러한 몇가지 병만 좋은 효과를 본다는 모순된 인식을 일반사람들에게 우리가 제거시켜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앞으로는 열심히 부지런히: 나영훈
  내가 예과때 본과선배님들을 보면 뭔가 우러러 보이고, 선배님들은 한의학의 진정한 학도의 길에 성큼성큼 들어서 있고 한의학에 대해 뭔가 나름대로의 생각과 가치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았다. 그리고 예과생인 내가 한의학에 대해 질문을 하면 대답을 척척 해주실 것 같았다. 그러나, 현재의 내가 나를 살펴보면, 그런것 같지않다. 한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자신있게 뭔가를 말할 수 있지 못하다. 뭔가 한의학에 대해 어렴풋이는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지식은 말그대로 '어렴풋이'이다. 이것은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이리라. 본과생이라면 그래도 뭔가 달라야 하는데.
  1학년을 마감한다는 얘기는 곧 2학년이 된다는 얘기다. 이렇듯 세월은 빠른 것이다. 입학한지 벌써 삼년이 흐른 것이다. 그 동안의 대학생활에서 특별한 일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입학할 때, 수업을 미리 예습하고 끝나면 복습하며 공부를 열심히 하여 생활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가는 그러한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다. 못 미쳤다. 나의 대학생활은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해서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내용면에 있어서도 충실을 기해서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거의 기한일에 닥쳐서 하는 버릇이 있다. 이것은 정말 왜 그런지 모르겠다. 이런 생활을 고쳐서 여유있게 마음편하게 지내고 싶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 레포트정리나 시험공부를 미리 하려하면 도저히 아무것도 들어 오지 않을 뿐더러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지 않을때 다른 일을 하느냐? 그것도 아니다. 레포트나 시험 걱정하느라고 다른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 원고를 쓰는 것도 제대로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서야 하게 되었다. 그러한 이유중에 또 다른 하나는, 나는 글 쓰는 일에 소질이 없어서 막상 쓰려고 하면 쓸 말이 생각 나질 않는다. 이 글도 나의 머리를 쥐어짜서 모든 생각을 쏟아부어서 이렇게 써 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 보면 '이렇게 쓰면 되는데 나는 왜 안되지'한다. 글 좀 잘 써보려고 요즘은 일기도 써 보건만, 이야기를 하다보니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지금까지 본과1학년 때의 얘기를 하고 보니 좋은 것은 하나도 없고 나쁜 것만 써놓은 것 같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좋은 일도 있었던 것 같지만 생각이 나질 않은다. 학창시절 많이 야단치시던 선생님만 잘 떠오르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다. 
  1학년을 반성하여 실망감을 느끼는 것도 이젠 충분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반성을 통해 앞으로는 좀더 발전된 생활을 해야 겠다는 것이다. 본과 1학년때의 생활은 만족스럽지 못하므로 앞으로는 '열심히''부지런히'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다. 아니, 노력만이 아니라 앞으로 꼭 생활을 그렇게 이끌어 가려한다. 그리고 그 좋은 일을 일기고 남겨서 나중에도 회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도록.

    나만의 내가 아닌 나: 박민수
  추락하는 낙엽을 보며 이 가을 나는 시를 쓸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나에게 첫눈보다 먼저 찾아온 손님. 한 여인이 나를 차지하고 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온 이상 나는 더이상 나만의 나가 될 수는 없다.'
  92년 새해 첫날이 기억난다. 그날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고 지금에야 생각된다. 왜냐하면 새해 첫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내 인생중 처음겪었던 새해 첫날이었다. 첫날에 사람은 보통 다짐하고 약속한다. 첫날밤에 새신랑, 신부는 영원한 사랑의 약속을 한다. 태우 노나 대중 김, 영삼 김, 그들로 첫날이 되면 '올해는 꼭 정권을 잡고 말거야'라고 다짐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첫날이든 둘째날이든 그것은 그대들 인생의 한 날일 뿐이고 1월2일이 되면 첫날은 어제가 되어 버린다. 나는 특별한 날의 특별한 약속보다는,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하듯이, 계획과 실천이 지금 여기 동시에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다. 이것은 바로 완전한 무계획속에서 성실한 현재를 실현하려는 나의 방안일 뿐이다.
  오늘까지와서 나는 약리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고개를 등쪽으로 반쯤 돌려 본다. 처음에 중간, 기말고사밖에 생각나지 않더니 달력을 넘기듯 영상이 펼쳐진다. 겨울방학 동안의 피튀긴 (내경)강독, 신입생을 맞이하고, 아버님 환갑때 돼지고기 먹고 이질설사병에 걸린일, 그 후로 시험때마다 설사로 고생한일, 학우들과 함께 가두판매를 했고, 의료봉사를 갔고, 또 그녀를 만났던 일들, 또한 그 많았던 집회와 축제들, 또한 집회나 축제 때마다 외면하고 제일에만 바빴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과거는 항상 반성의 여지를 남긴다. 그러기에 현재는 더욱 의미있게 될는지 모른다.
  특히 92년도에는 무엇인가에 전념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방황한 많은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소중한 친구를 외면해야했던 슬픈 시간들도 있었다. 그 열망은 소박한 것이었지만 나에겐 큰 의미였다. '마음에 갈등이 없는 상태의 유지, 그 속에서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 물론 무엇속에든지 학문탐구가 큰 비중을 차지할 수 밖에 없었다. 갈등하고 집착했던 내 일부를 버리자 나에겐 자유와 평안함이 찾아왔다. 그후 난 버릴때 더 얻는다는 이치를 새롭게 느꼈다. 그러나 버릴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의학에 대한 사랑과 한의학도에 대한 사랑이었다. 뜬구름을 잡는다는 말들을 우리는 많이 사용한다. 나도 그러했고 그러기에 좌절도 수 없이 했다. 그러나 그 좌절은 실천이 선행되지 않은 좌절이었고 비겁이었다. 나의 안일이었고 집에 대한 회피였다.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당당히 한의학을 죽을 때까지 공부하겠노라.' 나를 좌절시켰던 것들이 역으로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 막연함들은 앞으로 나의 몫이다. 한의학을 사랑하는 나의 몫이다. 이런 다짐이 싹틀때 시월 이십이일 초청강연회가 열렸다. 학문탐구는 일관된 원리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며, 가능한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일단은 시도해 보아야 한다. 특히 한의학은 음양론의 패러다임속에 묶여 성지에 갇혀 살지 말고 과감히 새로운 땅을 개척해야 한다. 그럴때만이 한의학이 생존하고 발전하며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의 갈 길은 정해졌다. 이사진이 그러했고 장경악이 그러했듯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그 길을 내딛고 있다. 조급하지 않으련다. 또한 이로인해 또다시 사랑하는 벗들을 외면하고 싶지도 않다. 이 순간 '나만의 내가 아닌 나'를 느낀다.
  오늘밤이 지나고 내일 아침이면 낙엽은 가지를 떠나 뒹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낙엽은 방황이 아닌 내년의 푸르름을 위해 오늘 떨어지고 뒹굴고 있는 것이다.
  자아~! 벗들이여 우리 함께 나만의 내가 아닌 나로 우뚝 서서 한의학사랑의 길에 동참하지 않겠는가!

    순리를 쫒으며: 김현중
  본과에 들어와 본초, 생리, 과공학 등 한의학의 근본과목을 1년정도 배워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목들은 이해가 잘 안되기 때문에 내것으로 쉽게 동화되지 않는다. 저변에 깔린 이론체계를 잘 몰라서 야기된 결과이다.
  문명이 그리 발달치 못한 고대의 인간들은 나약한 존재로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대해 무방지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연재해를 속절없이 감수해야만 했다. 지식이 증가하고 오랜동안 자연 발견하게 됐다. 그 규칙성과 변화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설명하여 재해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이론이 탄생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음양오행설이 탄생했다. 이 학설의 근본적 설명도구는 대표적 자연현상인 밝음과 어두움, 기본적 자연구성물인 나무, 불, 흙, 광석, 물 등의 성질을 이용하여 우주내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당시 의료행위는 경험적 산물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음양오행이론을 의료에 도입함으로써 학문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다. 그래서 인체의 변화를 잘 설명할 수 있게 되어 한의학은 이론적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을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치료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렇듯 음양오행이론은 한의학의 근간을 이룬다. 요새 과학시대에 맞게 한의학을 객관화하고 과학화하자고 한다. 그것이 한의학발전의 최선책이라면 그래야만 된다. 그러나 뿌리가 얕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뽑히듯 한의학에서 음양오행학설을 모르고는 진정한 한의학을 이해, 발전시킬 수 없고 수박 겉핥기식의 학문연구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확고한 이론적 무장없이는 상대방 이론에 의해 쉽게 무너져 버린다. 자기 이론의 장단점을 확실히 안 연후에야 상대방이론의 장점을 수용하여 내이론과의 융합을 통한 단점보안이 이루어지어야 할것이다. 따라서 기초단계에 있는 우리는 우리이론의 장단점을 확실히 이해하도록 해야한다. 그래야만 양방의 장점을 취할 수 있는 것이지, 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남의 것도 알려고 하면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는 격이 된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해야한다. 그래야만 발전이 있게된다.

    여전히 뜬 구름: 조정문
  참 많이도 지났다. 그 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나브로 예과2년, 그리고 '본과에 들어오면서'라는 글을 쓰면서 시작했던 1년이 거의 끝나가는 여기까지 왔다니 참 감개가 서린다.
  본과에 올라가면 뭔가 달라지겠지. 뭔가 알게 되겠지 하는 기대로 가슴부풀게 시작했던 것 같은데.
  아니면 알지못하는 사이에 몸에 배이게 된 것이 있게 된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내 자신이 너무 억울해지고 비참해 지니까. 그 뭔가가 무엇인지 확실히 말못하는 현실이 서글플 따름이다.
  때로는 한의학이라는 말을 쓰기가 거북해 진다. 요전에 초청강연에서 한의학은 음양설을 토대로 하므로 음양설을 없애야만 한의학은 발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과감한 말을 들었다. 한의학의 전반적인 내용을 모두 포괄해서 설명해주는 음양설이 그 때문에 발전에 장애가 된다니 선뜻 용납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럴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는 생리, 병리적 인체현상을 모두 '음양'의 두타이틀 속으로 집어넣으려하니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 한의학이란 본질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궁극적 실체로서의  한의학이라고 규정짓는 간판은 무엇을 걸어야 하는 걸까? 한의학이란 본질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궁극적 실체로서의 한의학을 인식하는 체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뜬구름이다.
  공부 좀 하자고 마음을 먹고보니 너무도 할 것이 많았다 : 원전, 의사학, 본초학, 경혈학, 생리학외에도 갖가지 양방과목들. 뭘 주로 하고 월 부로 해야 하는가? 양방이냐? 한방이냐? 물론 나는 한의대생이니 한방이 주가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양방은 왜 이렇게 비중이 큰가? 한방생리시험공부하는 것보다 미생물공부하는 것이 더 힘들고, 경혈학공부하는 것보다 면역학공부하는 것이 더 힘든 것은 왜 그래야 하나?
  학교 때 배운 것은 다 소용없고 국가고시만 보고 나면 다시 새로 임상에서 필요한 것을 해야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뭐하러 힘들여 애쓰게 가르치시고 우리는 또 힘들게 공부해야만 하는가 말이다. 왜 학교에서 배운것이 졸업하면 쓸모가 없어져야 한단 말인가? 이유도 모르겠고, 이유를 듣더라고 6년 허송세월이 아깝기만 하다. 학교바깥에서는 한의학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의료일원화, 공중보건의, 침구사, 한약유통, 약사법개정 등등.
  한의학의 존립기반을 흔드는 여러 폭풍속에서 헤쳐나갈 길이 막막해 보이고 위태롭기만 한데, 학교안의 상황은 딴판이다. 학점따고 자격증만 있으면 어딜가도 먹고살 직업이라는 배부른 소리. 참 이상하게 보인다. 안과 밖의 일이 이렇게 다를수가!
  본과 1년 을 마치며 3년이나 학교를 다녔어도 여전히 뜬구름이다.

    아! 가을이여!: 박상남
  따르릉 따릉 따르르륵 뚝 음냐음냐 푸와 드르렁 새벽 4시50분 나의 자취방에서의 음향이다. 한달전부터 국선도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매일같이 이 똑같은 반복, 정말 나는 마음이 오지질 못하다. 그러나 내일은 절대 술 안마시고 아침에 꼭 가야지, 시간은 흐르고 흘러 번쩍! 일어나자 이닦고 세수하고 똥싸고 머리감고 시계를 보니 8시 52분! 점점 더 빨라지는 내 행동에 스스로 존경심이 생긴다. 55분에 출발해도 충분하다. 그동안에 뭘하지? 감을 깎아 먹을까? 나가서 빵을 사먹을까? 아니면 일찍 학교에 가서 수업준비를 할까? 좋다! 오랜만에 음악이나 듣자! 눈을 감고 아무 테이프를 골라 잡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레너드 코헨의 음악인데 눈을 감고 듣다가 눈을 문득 뜨니 8시 59분! 생각이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다. 교수님이 출석을 늦게 부르시기만 기대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핫 둘 셋 넷 1초에 페달을 네바퀴 돌리면 3분안에 도착 할 수 있다. 1분 늦게 가면 1년 동안 등록금을 더 바쳐야 한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게 강의실에 도착. 휴강. 비오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내가 그 꼴이고만. 어디로 가서 이시간을 때우지? 오늘따라 배도 고프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다. 좋다! 하이킹이나 하자. 목표는 대운동장. 자전거를 차고 덜거덕거리며 박물관 아래를 내려 간다. 곳곳에 학생회장선거 플랭카드가 걸려 있고 벽마다 포스터가 붙어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캠퍼스는 잠에서 깬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복잡거리고 있었다. 신기하다,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시작하러 바쁘게 걸어가는 모습이. 내가 일주일만 젊었어도 뭔가 앗싸한 일이 있을까하고 생각을 굴릴텐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자꾸 도피할려는 시절이 있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동경하여 절에도 가고 싶었다. 외항선을 타고 6개월도 좋고 1년도 좋다, 바다에 살고도 싶었다. 이것 저것 다 때려 치우고 장가나 가서 노가대 기술이나 배워서 오손도손 짝짜꿍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그런 일을 할만한 혈기가 없어서도 아니다. 지금 한의학공부를 하는게 힘들고 지겹고 따분하고 짜증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환상속의 그런 생활을 해도 지겹지 않을까? 힘들지 않을까? 자신이 없다. 그러나, 가끔 머리속으로 그려 본다. 내가 환자를 치료해주는 모습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나의 존재를 정말 가치있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행복해하는 내 모습도 상상속에서 보인다. 돈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괜히 멋있는체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갑자기 세상이 환희에 차 보인다. 그런데 영숙이는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가 말이다. 하? 하! 하! 도서관에 가서 (황제내경)을 곡괭이침지하고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아니 연극은 인생일까: 김민철
  움츠리게 하는 강의실
  환상속의 그대... 깨어진 환상과 술, 담배
  인생은 연극이다. 아니 연극은 인생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밥만 먹고 똥만 싸는 똥자루
  권  태... ... 문 제 제 기... ... 갈 뜨옹
  답    따압
  부우운  노
  피곤

  수업듣는 것 보다는 잠자는 게 더 좋았고, 친구들과 밤새도록 당구 치는 것이 좋았고, 소주보다는 맥주가 좋았고, 심각한 영화보다는 벗는 영화를 보길 원했고, o15B, 서태지와 아이들이 강수지나 김완선보다는 더 좋았고, 최진실이냐 아니면 옥소리냐? 결혼상대자로!(바아보. 옥소리는 내년에 시집간대. 편집자주)
꿈속에서 고민했고 스트리트 파이터 투우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비를 맞으며 걷고 싶었고 가을을 느끼고 싶었다.
연극에 미치고 싶었고 미치도록 사랑하고 싶었다.
갑자기 생각나는 말이 있다.
무지개... 노을... 미녀... 꿈...
다같이 아름답다. 그래서 똑같이 순간적이다.
  면역학과 미생물학은 정말 싫다. 하지만 그것들도 인생이라는, 길수도 짧을 수도 있는 여정중의 하나의 과정이겠지. 유급은 싫다.
  모두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하지만 가슴 속에는 모두 다른 마음. 가자 걸어가고 있는 거야. 아무런 말없이 어디로 가는가. 만약 인생이라는 길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봤니?
너나 해라.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본다. 서울보다는 별이 많구나. 밤이 되면 더 힘이 나서 새로운 음모, 기껏해야 밥먹고 또싸는 음모를 꾸미는 내모습이 싫다.
  스물두살이 된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마음의벽을 허물고. 나는 나, 너는 너. 왜 나는 에고를 버리지 못하는가? 더욱 참을 수없는 건 고민하는 내모습을 거부하는  나 자신. 용기없는 나. 그래서 바보같은 나. 그래서 미워지는 나. 슬퍼지는 나. 술한잔에 다시 살아나는 열정. 그러나 또다시 좌절과 허무의 시간들.
  여행을 떠나고 싶다. 기차를 타고 종착역이 없는 여행을. 아니면 무인도에서 원시인처럼 살고 싶다. 안간은 고독한 존재다. 아무도 나의 길을 대신 걸어가 주지않는가. 하지만 단 1초라도 혼자있고 싶지는 않다. 왜냐면 외롭고 쓸쓸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사는 세상위에 있는 시간과 공간속으로 가고 싶다. 난 정말 인간인가보다. 한계에 부딪히면 피해가고픈 나약한.
  사랑하는 차 한잔이 있다면... 사랑하는 책한궝이 있다면... 사랑하는 한 곡의 노래가 있다면... 진정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면... 연극에 미칠 수 있다면... 가슴이 따뜻한 남자가 될 수 있다면... 시인이 될 수있다면...
  넋두리는 이만하면 됐고. 나의 길을 밝혀 준 친구들과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더 성숙한 고민을 위해: 김양귀
  어젯밤부터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아침까지 이어지고, 첫눈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일기예보에 반가운 마음보다는 스산한 찬 바람에 옷깃부터 여미게 된다. 비내리는 등교길. 여기저기에 비에 젖어 아무렇게나 팽개쳐 있는 낙엽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심란하다. 찬 기운이 뼛속까지 시리게 하는 강의실.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내 모습. 올 한해 이렇게 저물어 가는구나! 추웠던 기억으로 시작해서 추운 기억으로 마치게 될 것 같다. 한의대에서 가장 춥다는 본1강의실의 매서운 맛을 톡톡히 보고 있다.
  가끔씩 일이 안풀린다는 생각이 들때면 일기장을 뒤적이며 지난 기억들을 더듬어 보곤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니었던 일에 마음을 상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고민에 빠지기도 했던 일들을 반성해 보기도 하고, 때로는 기쁘고 보람 있었던 일들을 발견하고는 다시금 행복감에 젖어보기도 한다.
  그 속에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직접적인 해답이야 없지만,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있는 귀중한 체험이 들어 있다.
  요즘은 지난 일기를 읽어보는 여유조차 없이 살았다. 내 마음도 강의실만큼이나 찬 바람이 돌고 있나보다. 어제는 오랫만에 일기장을 펴고 3월부터 시작된 본1생활을 돌아 보았다. 참 까마득한 옛 일인냥 잊고 살았는데, 불과 몇달 전에 일어난 일인 것을 알고는 놀랐다.
  학년 초에는 휴맨이 되었다는 기쁨과 설레임 속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해내고 말리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교만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 교만함 때문에 나는 스스로에게 엄청난 책임감과 부담스러움을 지워 주어야 했고, 결국은 얼마 못가서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더욱 마음 아픈 것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 상처를 주었고, 부모님에게도 걱정을 끼쳐 드렸던 일이다.
  그 때에는, 그러니까 1학기 말, 모든 것이 부담이었다. 과연 내가 한의사로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출 수 있게 될까? 도대체 한의학이 학문으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급우들을 돌아 보면 다들 자기의 갈 길을 잘 찾아 가고 있는데, 나 혼자만 방황한다는 느낌으로 심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또, 후배들에게는 내 모습이 너무나 무능하게 비쳐질 것이다라는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선배인 애가 피해다녔다.
  특히 의대에 다니는 친구와 같은 방을 쓰던 나로서는 그 친구가 한의사나 한의대생들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할 때마다 견딜 수가 없었다. 한의사는 단지 '보약장수'로 밖에 인식될 수 없는가? 한의대생들은 그저 편하게 돈 잘버는 직업을 찾아 한의대에 온 것인가? 한의학에 대해서는 무지한 반면 자기들 의학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난 척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와는 많은 신경전을 거듭한 끝에 서로에게 지쳐 결국 헤어져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지금도 방은 달리 쓰지만 같은 하숙집에서 살고 있다. 사이좋게 지내고는 있지만 서로의 학문에 대해서는 선입관을 완전히 깨뜨리지는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솔직하게 우리 한의학의 잘못된 부분들을 인정하면서 그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안이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각오만을 느낀다.
  한방에서 분명히 양방보다 훨씬 뛰어난 점들이 많이 있지만, 양방이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없듯이 한방 역시 그러하고, 우리에게 놓여있는 넘어야 할 벽들은 너무나 높기에 그만큼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앞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한의학의 바른 방향은 어떤 것일까? 의료일원화가 우리를 위협하고, 수입한약재가 판을 치고, 한의사마저 중국에서 수입된다는 현실은 나를 맥빠지게 한다.
  2학기에 들어서면서 시간은 더욱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잠시 한눈 팔고 지체하는 사이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곁에서 가을을 앓고 있는 인간들을 보니, 내가 이미 겪었거나 겪고있는 고민들을 앓고 있다. 우리는 결국 같은 길을 가야 할 동지인 것이다. 서로에게 더욱 힘이 되어 줄 수 있어야겠다. 아마 먼 훗날에도 지금의 일기를 펴보며 미소지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지금보다는 더 성숙한 고민을 하고 있겠지? 끝으로 (의학입문)에 있는 말이 생각난다.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의도의 세계는 바닥이 없나니.'(면지면지,의 무저)

    미완을 위하여: 문미숙
  상당히 우쭐한 마음으로 본과에 진입하여 일층교실로 가볍게 미끄러지듯이 들어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벌써 두학기를 지냈다.누가 한의대공부는 예과때만 잘 지내면 해 볼 만하다고 했던가! 올 한해는 다른 어는 해 보다 힘들고 부담스러웠다.
  예과시절 못지않은 많은 수업량과 탄탄한 실습시간, 예상하기 곤란한 시험문제, 양적으로 많아진 수업내용... 이에 따라 추운 교실에서 긴 시간 쪼그리고 앉아 꼬박 강의를 듣고, 밤 늦게까지 진행되는 실습기간에는 얼마나 많은 체력소모가 요구되는가!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평소에 공부하지 않고 시험때에 벼락공부를 하느라 고생이라고 핀잔을 준다. 그러나 뛰어난 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강의내용을 곧바로 숙지하는 것이 힘들고, 그렇다고 평시에 늘 집중적인 공부를 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내 집에는 이제 생후 두 살이 된 딸아이 효주가 있다. 기묘박해때 치명한 순교성인 '김효주 아네스'를 기려 지은 이름이다. 나는 이 아이하고도 '퍼즐맞추기'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이렇듯 항상 바쁘고 쫓기듯이 생활하지만 열심히 살고 있지 못하다. 이제는 처음 대학에 입학하여 느꼈던 이방인으로서의 서먹함, 어설픔은 많이 가셨다해도 때로 막연한 회의와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한다. 그것은 내 가족에게 너무 많은 짐을 떠맡기고 있다는 일종의 죄책감과, 때로는 모호함으로 다가오는 한의학적 개념에 대한 당혹감 등이 뒤범벅된 것이다. 한의대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새로운 인식체계에 대한 혼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기존의 사고에 수정을 가하여 새로운 질서를 찾아내야 하는데, 사고를 다양하게 만들어 주는 다양한 학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안목을 가지고 공부를 해나가야 할텐데, 수업내용에 치중된 암기위주의 학점따기식공부에 너무 열심이지 않느냐는 반성을 해보곤 한다. 그렇지만 결국 학문에 대한 종합, 정리는 자신이 하는 것이니 만큼, 우선은 조금조금씩 국부적인 것을 터득하다 보면, 후에 무엇인가 나름대로 파악되는 근간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런 문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사실 아직은 어린 학년인 본과 1학년생으로서 '힘들다'하는 말을 공공연히 하기에는 너무 경솔하고 가소로운 것만 같다. 남들보다 수 년을 늦게 시작한 한의학에의 입문은 그저 이제부터 시작이며, 그것이 힘들건 흥미있건 간에 어차피 내게 주어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삶이란 끊임없는 과정이고 따라서 현재의 순간에 오로지 전일할 수 밖에는 없는 듯 하다.
  아마도 완성이라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학문에의 로정에서 얼마나 많은 좌절과 극복에의 기쁨을 맛보아야 할까? 그래서 나는 감히 다짐해 본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 능력이 가능한 만큼만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가자고. 치열하지도, 맹목적이지도 못하지만, 나의 작은 노력과 힘이 나와 내 이웃에게 조화롭고 유익한 것이 되도록 바로 이 순간에 충실하자고. 힘들고 답답하다는 생각을 자꾸 떨쳐버리도록 애쓰자고 한다. 오히려 순간 순간의 크고 작은 불안과 갈등을 수렴하여 내적인 충실을 기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주어진 삶의 여건에서 열심히 살고자 한다.

    우측뇌를 통해서 본 '오행설'과 그것으로 인한 잡념: 장통영
  대학입학 이후로 한의학적인 사고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경험을 쌓으라는 선배의 충고에 여러 종류의 사람과 만나서 그런 사람의 생활를 본받고, 생활에서 얻게된 지혜도 들어보고, 나 자신을 투명해 보고,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만화도 읽고, 당구도 치고, 책도 읽고, 술도 거의 미친 척 하며 마셔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그런 나 자신이 방향을 잘못 잡지는 않았나 고민도 해 보고, 여러 사람을 보며 어리숙한 '사상'이니 '오행'이니 하는 한방학설을 대입해 보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오행'학설이었다.
  한의과대학에 들어와서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에서 헤매고 있을 때 빛처럼 다가왔고 손에 쥐이지는 듯한 느낌, 또는 뭔가 유추가 가능하고 자연법칙의 관찰의 도구로서 인체와 조화를 이루어 줄 수 있는 다리로써의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만한 학설이었다. 선배님들과 교수님들도 적어도 오행설 하나 만큼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은 직관적으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로써 보이는 것처럼 직관적으로 이해가능하다는 식의 말을 해 왔다. 하지만 아직은 물이 흘러 가는 것과 같은 법칙은 아니었다.
 한의학에 음양의 개념이 생겨나고 거기에서 갑자기 5라는 수(개념)가 등장했다. 5라는 수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각 장기를 거기에 배합하고 상생, 상극, 상모 등의 개념을 만들었다. 처음에 절대적인 것처럼 보였던 오행이라는 것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떤 선배형이 말한 것처럼 불을 흙으로 껐을 경우 수극화가 아니라 '토극화'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여기저기에 적용시키는 융통성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저기에 갖다붙이면 된다는 식의 어중이 떠중이 같은 이론을 한의학에서 신주단지 모시듯이 한다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너무 비약이 심한지 모르겠지만,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나 산불이 있을때 물 한양동이를 부으면 더 잘 탄다. '극'이라는 개념은 이긴다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에는 이긴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서로 공존하는 것이며 극이라은 것 보다는 성질의 문제이다. 또 하늘은 양인데 땅은 중앙이라는 것은 모순이다. 음양에서 오행으로 가면서 중앙토로 변화된 개념은 이동원의 '비위론'을 형성시키는데 탁월한 영향을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그 시대에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만들어 놓고서는 (내경)의 이론적 권위를 씌워야만 학설로서 안정받기 때문에 오장중 비는 중앙토에 배합되는 중요한 장기라는 이론을 갖다붙인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든다.
  오행에 냄새, 맛, 색, 자기를 배속시킨 것을 외우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배속원리를 알고 자연법칙에 타당하게 적용시키는 안목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나 자신부터가 이 정도로 안주해도 어느 정도 보장된다는 타성에 젖어 있는 것 같다. 주어지는 사상과 타율에 얽매여 잠자고 있는 우측뇌를 깨우고, 오행에 자연을 가두어 두지 말고 창조적인 관점으로, 아침해가 떠오를 때 눈을 뜨는 동물과 반대로 달이 뜰 때 눈을 뜨는 동물을 한번 살펴보고, 왜 하필 오행은 목화토금수인가를 물어보자.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진정한 자기가 없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한방이 임상을 토대로 발전해 왔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법칙이 있다면 자연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이 자연의 눈에 과학적인 방법을 배제시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자연의 눈이라고 해서 현미경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도 아니다.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화학시간에 배웠다. 에탄올같은 것을 태우면 물과 이산화탄소가 생긴다. 신장은 수를 주관한다고 하면서 역대 의가들은 상화의 논쟁에 휘말려 여러가지 이론을 주장했다. 화학시간에 배운 이론을 대입시키면 신장도 화로 구성된 것으로 수를 주관한다는 것이 금방 떠오르지 않나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극화의 개념에 매여 있다면 이해가 무척 어려울 것이지만 먼저 음양의 조화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지금까지 예를 들었던 수극화는 우리가 다시한번 밤잠을 설쳐가며 관조해 보아야 할 한방이론 중에서 극히 작은 한 주제에 속할 뿐이다.

    라면과 아이스박스: 고현
  솔직히 본1년을 마치는 지금 본1을 마친다는 말을 하기가 두려운게 사실이다. 그만큼 내 학력수준이라는 것이 낮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내 스스로도 인정하는 셈인 것이다. 어쨌거나 정말 마치고 내년엔 본2에 들어서길 기대하며 글을 써 본다.
  여러가지 생각과 기대와 부담속에서 지난 3월 본과에 들어섰고, 지금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 버렸는지 눈치챌 겨를도 없이 학년말이 됐다. 이제 곧 기말시험이 닥칠텐데, 어떻게 하지? 걱정하는 만큼만 공부를 해도 평점 2.5는 거뜬히 넘어서 부모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텐데. 그래도 이번 학기엔 기대를 해볼만 한게, 이젠 예전처럼 여자때문에 신경쓸 일도 없어졌고 게다가 두달이란 긴 시간동안 내 시간과 마음과 정력을 요구했던 연극이 10월 30일 공연을 끝으로 날 떠나 갔다는 거다. 이번 공연때 애들이 날 보구 제일 많이 웃었는데, 그러구 보면 인기나 명예같은 것은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따라 개구리 왕눈이 같은 큰 눈깔을 가진 어떤 여가수가 불렀던 노래처럼 내 인생은 남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과,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웃으면서 단을 거둔다는 (성경)구절과, 한 그루의 사과나무에 목숨을 걸겠다던 스피노자의 말을 떠올려 본다. 그런데 나는? 나는 뭐지?
  평점미달될까봐 조마조마하는 내가 이 시점에 와서 인생이라는 것을 걸고 넘어져아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사람이 생계만을 걱정하는게 비참한 것처럼 학생이 학점만 가지고 끙끙대는 것도 마찬가지로 비참한 것 같다. 나도 성인이 된지도 몇년됐고, 옛날같으면 결혼해서 아이가 두셋은 됐을텐데, 이렇게 살면 안되겠지.그리고 너무 작은 것에 내 시야를 고정시킨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겠고. 내 나름대로의 비젼을 갖고 싶다. 이 나이에 새삼스레 무슨 비젼이냐는 생각도 들지만 내 인생이 나의 것이고, 앞으로 남은 시간이 날 기다려 준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나도 한번 웃으면서 거두어 볼 줄도 알아야 될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앞뒤가 맞을지 모르겠는데, 사람이 준비하며 산다는 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다. 앞날을 다 알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할수 있는 길이 바로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생각한다고 해서 씨마이너스인 내 학점이 에이플러스로 깡충 뛰는 건 결코 아닐테지만 내 비젼을 바라보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내 구만리 인생을 위해 지금 준비하면서 살고 싶다. 혹시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에게 저 소말리아나 이디오피아 같은 어두운 땅으로 평생의료봉사를 보내실지 알 수없는 일이고, 그런데 그러면 난 지금 뭘 준비해야 되냐? 아이스 박스나 몇개 마련해 놓을까? 그러면 지금부터 적금을 넣어야 될텐데. 아니면 라면 서너박스 사서 쟁여 놓을까? 에라, 사발라면 한컵이나 끓여 먹자.

    아! 아쉬운...: 장진요
  어느덧 1992년도 5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기말고사만 보면 그렇게 희비가 엇갈리던 나의 본1도 끝나게 될것이다. 멋모르고 자나치면서 아무것도 이룬것이 없어 부끄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본1이라는 학년은 예과 1, 2학년동안 선배들의 지도만 받는 입장이다가 이제는 점점 후배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좀더 책임감이 생기는 시기인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번 1년 동안 공부에 치중하기보다는 써클활동에 더 치우친 것 같다. 그리고 이번 보칼공연을 마치고는 작년 재작년과는 약간 감회가 새로왔다. 그것은 아마도 이번 콘서트가 우리 학년에게는 마지막으로 서는 무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생활 면에서 말하자면 착실했던 예과 1, 2학년때와 비교해서 강의를 빠지는 횟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특히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버릇이 생겨 오전강의를 많이 결석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주로 수업이 끝난 후 밤시간대를 잘못 이용하기 때문아닐까 싶다.
  즉, 예과 2학년 때는 수업이 끝나고 써클에서 연습하기 바빴다. 그런데 본1이 되고 활동기수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남게 된 저녁시간대는 낯설고 무료하였다. 그 시간들을 나는 공부나, 어떤 미래지향적인 것들에 쏟기보다는 술이나 노는것에 낭비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된데는 외부적인 요인도 많이 있었으나, 궁극적으로 외부적인 유혹들을 내 스스로 자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일년동안 나와 절친한 친구들이 대부분 군에 입대했다. 그들이 군에 가는 것을 보고 '어느덧 내 나이가 그렇게 되었나'하는 것을 느꼈다.
  이번 일년동안 학교생활외에 여러 사회생활을 접하면서 '아! 이젠 내가 어른으로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자식으로서만이 아닌 하나의 능동적인 개체로서 성장해야 할 시기이구나'하는 생각을 무엇보다 많이 했다.
  그러면서 자기주관없이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 더욱 부끄럽게 여겼다.
  생각없이 살고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의 주관을 받쳐줄 수있는 가치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항상 생할에서 생각하고 느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1년을 마치면서 한가지 아쉬운 문제는 이제 미팅, 소개팅 기회가 적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예과 1, 2학년때도 미팅같은건 별로 해보지 못했고, 더 중요한 사실은 여자하나 번번이 사귀게 보지 못했다는 점이 내가슴을 쓰리게한다. 이럴줄 알았으면 그때 미팅이나 많이 해 보는건데. 후에라도 미팅이나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어도 예과 1, 2학년때의 감정은 아니겠지.
  학년이 올라 갈수록 1년이라는 세월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남은 3년동안은 더더욱 빨리 지나갈 것 같다. 옛날에는 내 나이의 남자가 남편,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니, 지금의 같은 또래들이 당시의 청년들보다 정신연령이 낮다고 보아야 할까?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면서 내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가꾸어가야하는 것들중 하나가 바로 친구와의 우정이라 생각한다. 나의 좋은 친구들, 그들로 인해 나의 인격이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예과1학년 때의 사진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면 변화가 없는 듯한데, 좀 자세히 살펴보면 그래도 괴로웠던 일년의 그림자가 비친다.
  미생물, 면역학 시험공부, 써클 콘서트, 친구들과의 여행등으로 고생과 즐거움이 교차했던 본1. 그 시간도 앞으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겠지.

    이제부터라도: 김경수
  벌써 11월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을 쏜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이나 빨리 지나가 버린 것이다. 일학기에 썼던 '본과생이되면서'란 글의 기억이 그리 오래지 않는데 벌써 '본과 1년을 마치면서'란 제목의 글을 쓴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나의 1년동안의 생활을 뒤돌아보니 그리 자랑스럽지 못하다. 아니 부끄럽다고해야 옳을 것이다.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별로 기억남는게 없으니말이다. 예과 2학년동안은 한의학을 배우기위한 준비과정이라고 할 수있다. 그리고 본과의 과정은 본격적인 한의학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의 사분의 일이 지났다. 올 한해 동안 많은 과목들을 배웠고 무사히 이수했던 것 같다. 본초학, 원전, 생리학, 경혈학, 의사학등 새로운 분야와 더 심도있게 배우는 분야가 어러가지 있었다. 본초학은 사실 우리를 많이 괴롭힌 과목중 하나다. 시험범위는 항상 누적이되고 배워가는 약물들의 수는 늘기만 하고, '평소에 조금씩만 해놀껄'하고 후회해본 적이 여러번이었다. 하긴 백에 육박하는 수의 약물들을 며칠간의 공부에 맡긴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본초실습같은 경우는 너무나 형식적인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작게 조각나버린 약재의 파편들을 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기란 힘들 것 같았다. 농대처럼 직접 재배할 수 있는 것들을 길러 보여주는 고육이 되었으면 한다. 원전은 내가 가장 많이 빠진 과목중의 하나다. 예1때의 한의학한문, 예2와 본1의 2년 동안의 원전과정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게 후회된다. 방학중에라도 원전실력을 기를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다.거의 대부분의 강의시간들이 일방적인 교수님말씀으로 끝나는데 비해 약리학강의는 토론을 할 수 있고 무언가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의학과 양방의 약리학을 서로 매칭시켜 보려는 노력은 좋은 것 같았다. 생리, 경혈학을 배우면서 한의학을 배우는 이들이 느끼는 딜렘마, 즉 뜬구름을 많이 느껴보았다. 물론 이것은 제대로 학문을 탐구해 내지 못한 이들의 변명이겠지만. 커리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서 가장 매달렸던 과목은 미생물과 면역학이었다. 조금은 아이러니칼하다. 양방과목을 전부 없앨 수는 없을 테지만 무언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단지 한학년을 올라가기 위해서 미생물과 면역학을 목숨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좀 더 한의학적인 방법으로 양방에 접근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한의학적으로 한의학을 해야한다는 박찬국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자기학문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학문까지 하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후배들에게만은 무언가 다른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올해는 공중보건의문제로 심각했던 한해이기도 하다. 공중보건의를 쟁취해 내기위한 우리의 노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국가적인 지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전통적인 것을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는 국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인식의 변화를 위한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 나는 우리 앞에 닥친 이런 문제에 너무 소극적이었다.
  92년 올 한해는 너무 힘들었다. 건강이라는게 가장 큰 재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주 병치레를 했기때문에 공부에도 상당히 소홀했었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 여러가지 행사, 사건들에 별다른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생활에 변화를 갖고 바쁜 삶을 살아야겠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3년 밖에 남지 않았다.

    인내심을 갖자: 장원석
  우리 학년의 공부형태는 크게 세가지 형태 나누어 지는 것 같다. 학과 시간표에 맞추어 공부해 나가는 형태와 학과 시간표와 상관없이 자기주관에 따라 공부하는 형태와 공부에는 관심없이 학년을 올라가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있는 형태이다. 결코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한의학에 관심과 애정을 갖지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년동안 서양의 과학을 공부해 왔고 더구나 주입식교육을 받아온 우리에게는 분명히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한문보다는 영어에 더 익숙한 우리다. 우리가 지금의 현실에서 가장 빨리 한이학이론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은 한학을 공부하여 원전을 옛날 선비가 자유로이 읽을 수 있는 것 같은 실력을 기른는 것이다.하지만 우리 학우중에 과연 몇이나 원전에 자신을 갖고 있는가? 물론 나 자신이 원전실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보통의 한의학도의 입장으로는 원전은 하나의 큰 걸림돌이다. 그렇다고 해석판을 보더라도 문맥상 어색한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어서 번역한 이가 저자의 뜻을 잘 반영하고 있는가하는 점도 난관에 부딪히는 문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의학서를 모두 우리것화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작업은 배움의 효율성을 높이는 가장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어느 누가 원전을 읽는 것이 국역판을 읽는 것보다 빠르겠는가? 생리병리에 나오는 고루한 언어문자를 모두 현대화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본초나 생리를 공부하다 보면 어려운 문자로 기록된 것들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도 과감히 북한처럼 우리의 쉬운말로 고쳐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그 어려운 글자를 우리가 원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그 의미가 희석될 수도 있지만 그 시간의 효율성을 생각해보면 누구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양방과목 즉 면역학, 미생물 이 두과목은 한의사라는 것보다 의사라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실존체로서 반드시 상식적으로 알아 둘 필요가 있는 과목이다. 하지만 이 과목은 한의사가 알아야 할 부수적인 것이지 소위 이것으로 밥을 먹지는 않는다. 가뜩이나 본초나 의사학이란 중요한 과목들이 학생들을 채찍질하고 있는데 미생물과 면역학이 우리에게 가하는 부담은 너무 큰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면역학은 반드시 공부해볼만한 가치있는 학문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예과학년들에게 양방과목에 대한 이질감과 거부감을 없애달라구 말하고 싶다. 어차피 의사라면 현대속에 살아간다면 서양의학의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후회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의대 6년의 생활 중에서 거의 반이 흘렀다. 3년이란 세월동안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때 손에 잡히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허탈해진다.
  이제까지 우리는 기초이론과목을 배웠다. 이것은 아직 시작의 단계라는 증거이다. 남은 시간은 3년의 시간이다. 지나간 3년의 세월을 아쉬워 하기보다는 남은 3년의 세월을 희망으로써 맞이하고 싶다. 우리의 한의학을 긴 안목으로 바라보는 인내심을 갖자.
  '그림설명'
(원광대학이 자랑하는 대학박물관. 백제권 민속문화자료가 풍부하다.)

    사랑 이상의 사랑: 안영남
  얼마뒤면 본과2년이 되는 나로서 오늘같은 이유로 한해를 반성해 보는 것이 쑥스럽지만 이 기회를 주신 교수님 뜻을 조금는 생각하면서 지나온 일들을 회상해본다. 본1이 되면서 진짜 학과생으로서의 본분뿐만 아니라 대학생으로서의 자세가 무엇인가도 생각하면서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꿈이었던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역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오고 말았다. 바뀐 것이라면 쉬운 소설이라도 읽기 시작했고 몇일전 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 뿐, 무척이나 오랫만에 쓰는 일기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어색하기만 했다. 이젠 더이상 후배가 아닌 선배로서의 자세를 생각하면서 나를 키우기위해 나의 단점과 장점을 찾아내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자부심을 가지며 일과를 더듬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것 같다.
  일학기는 적응하는데 소모했고, 또한 나태하고 현실에 안주해왔던 지난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정신없었고, 그토록 그립던 학교인만큼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며 진취적으로 임하고도 싶었다. 그도 그럴것이 한참 건강하여 모든 일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항상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들어 건방져 보이기도 했을 것 같다. 아주 힘들다고 하는 본1도 별로 어렵지않게 느껴졌었다. 물론 일학기 초에 써클의 장을 자청하였고 나의 계획대로 이끌어 나가고 싶었으며 좀더 발전적이며, 침체되어 있는 분위기를 없애기위해 노력하였다. 지금은 그 모든 자신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매일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건강을 유지하기위해 조신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폐인이다.
  연애에도 열심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처음보는 순간, 무척 낯익은 얼굴인 듯했고 지금까지 내옆에 있고,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것 같았기에, 그녀를 쫓아다니는 선배가 있었어도 나는 그녀를 내것으로 하기 위해 모든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지지 앟고 그녀를 찾아갔으며 항상 미소지으며 사랑을 주려고 힘썼다. 어떤 때는 며칠동안 장미를 한송이씩 방문앞이 두고 가기도 했다. 혹시나 시들까봐 작은 병에 물을 담아서.
  지금은 껍데기를 만나고 있다.
  약간은 낯설은 과목과 실습, 빽빽한 수업, 황당하리만큼 빠쁜 진도와 시험, 주위의 황량함 또한 나를 괴롭히는 요소였다. 나는 A조에서 실습을 하게 되었는데 약리실습시간은 많은 의문을 남겼다. 생명의 시작은 어디이며 끝은 어디인가하는 새삼스런 의문이 생기기도 했고, 죽어가는 쥐들을 보면서 인간의 잔인함을 다시 한번 맛보았다. 솔직히 실험에 대해 귀찮은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밥을 먹기위해 하숙집으로 갔다가 다른 사람과의 교대 때문에 일찍 학교로 되돌아 간 뒤 밤12시에 돌아오기도 헸으며, 실험이 엉망으로 되어 다시 조작도 해봤고, 뭔가 실험에 이상을 느꼈을 때 서로서로 몸으로 느껴지는 불안감들, 정말 괴로왔다. 흥분, 신경질, 최악의 경우 될대로 되라!
  언제였는지 기억이나지 않는데 장관실험을 하다가 전혀 그야말로 엉망의 반응이 나타났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토끼의 장은 원래 그렇다나)수축이 강해지는 약물을 넣지도 않았었는데 반응이 없다가 한참뒤에 갑자기 떨어지고, 약물은 넣지도 않았는데 올라가고, 수축이 일정해지길 기다렸다가 약물을 넣을려고하면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모두들 서로 노력을 했으나 결국 하나, 둘 포기를 하기 시작했지만, 억지로 해내고 말았던 적도 있었다.
  본초는 맨날 말로만 하던 것을 실제임상과 더불어 배우는 것이 진짜 본과생이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있게 해 주었다. 더러워진 까운을 깨끗이 빨아 입고 실습실에 들어설 때의 설레임이 무척 상큼했던것 같다.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는 내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제일 관심이 가던 과목은 역시 경혈학이었는데 처음부터 확실히 해두고 싶었기에 이책저책 뒤지고 원리위주로 깊게 공부해놓고 싶었다. 안하던 노트정리도 하고 매일매일 다시 외워 복습위주로 열심히 했는데 시험엔 징크스가 있었는지.
  여름방학때 의료봉사에서 약간의 덕을 보기도 했던 경혈학이었다. 사암침범을 몇일동안 엉터리로 간단히 실습만 해본 덕에 침구파트에서 침을 놓을 수 있었는데, 몸으로 느끼기 위해 신경을 집중시켰더니 굉장히 피곤해짐만 느낄 수 있었지 다른 기대하던것은 얻지 못했다. 역시 한의학은 결코 외우는 것만으론 되는 것이 아닌가보다. 2학기들어 예전부터 관심갖고 있던 전산분야의 수업이 생겨나 기뻤으나 학교실정상 실습보다는 일반 상식정도의 수업에 미칠 수밖에 없음이 안타까왔다. 나도 컴퓨터를 만지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한의학과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1년을 다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거다. 몇번씩 대리점을 왕복했고 더불어 수리도 몇번, 여기저기 물어보고 직접 만져보고 부탁하고 심지어 컴퓨터를 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갔다. 아직도 멀었지만 한단계 이룰때마다의 성취감은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생활 덕분에 어느정도 쬐끔은 컴퓨터를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써클후배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어렵고도 어려운 자신과의 싸움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들, 그들을 위해 특별히 해줄것이 없는 나. 그들을 확실히 잡아주고 인도해줘야 하는 것이 나에게 맡겨진 일이며, 또한 그들을 써클로 부른것도 나였다. 그들에게 대학생으로서 공부외에도 다른 인생이 있다는 것과 기타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너무 목표에 치중하다 보니 분위기를 재미있게 끌어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하다.
  사람이 변해가고 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점점 개인화되는 경향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그전에 통념적으로 이루어져 있던 미풍이 한심한 작태쯤으로 간주되고 선후배간의 아름다움을 어디서도 보기가 힘들어진 것 같다.
  가장 하고 싶었던 것과 너무나 아쉬움과 고통으로 남은 것은 인간의 사랑이었다.
  인간의 사랑이었다.

    나의 본연은: 조범연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이곳에서 계절이 바뀌어 간다는 것을 알기가 문득 어렵다. 오랜만에 이 도시를 빠져나가다보니 정갈하게 베어넘어짐 볏단과 아직도 외색한채 농부의 손을 기다리는 노란 나락들을 발견했을 때 '아!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흘렀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학기초 새로운 일정에 대한 그리움만 남긴채 지금은 다시 한학년을 마친다는 숙연함과 비판감에 고개숙여잔다. 여차여차 지나던 시간들에 대해 아쉬움은 없다. 허나 변화를 추구했던 나의 마음에 미흡한 힘 밖에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 찝찝하다. 여하튼 살면서 느끼는 것은 해보아서 후회하는 그런, 마음이 타격을 입는 행동들은 결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공부에서는 실천하지 못했을까?
  그래도 남들 앞에서는 텅빈 머리에서 흩어지나던 문구를 잡아 채 마치 신들린냥 거짓말을 해대는 나 역시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그런 글귀에 해당되는 것 같다.
  3년간의 생활에서 특히 올 한해는 그래도 안정된 생활을 한 것 같다. 우리꽈 친구들이외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던 후배들의 대부분이 군에 입대하여 서로 이야기하며 서로의 힘든 일 등을 논의하며 술마시며 당구치며 하는 시간들, 소위 이런 시간들이 나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삶의 부분이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 특히 부모 형제에게는 그렇지 아니하다. 이따금 한가로운 날에 공부도 했던 기억이난다. 그것이 마치 먼 추억 같지만.
  조급히 생각하던 학문의 기초, 쉬운 토대부터 먼저 쌓자는 생각이 더욱 절실하다. 어느덧 학교생활이 출석을 위해, 쏠리는 과목만을 찾아 주의를 기울이는 그런 때는 지난 듯하다. 하나의 개체로 인간을 대하는 사람을 양성시키는 학문이기에 적어도 자신을 속이지는 말자!
  언젠가 후배가 찾아와 여러가지를 묻다가 후배에게서 치료를 부탁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우리꽈가 아니기에 나는 대충 비슷한 이론과 상식을 결부시켜 확신을 심어준 다음, 침을 놓았다. 물론 어떠냐는 질문에 좀 괜찮은 것 같다고 했다. 그때의 나 자신은 큰 가책은 없었다. 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후배를 어떤 실험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지였다. 비참함이 서렸다. 그 후론 절대 어느 누구에게도 나 자신의 이론이 서지 않는 한 서툰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6년간의 과정중 반이지만 본격적인 첫번째 해가 어떻게 마지막 정리가 될 것인지 긴장된다. 거의 3달에 가까운 시간동안을 뭘하며 보내야할지 아직은 기말시험이 남아서 계획을 구체화 하지 않았으나 학기초처럼 긴장감이 도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꼭 긴 방학에 힘을 다해서 독하게 하지는 못 할것 같다. 너무 얽매이지 않게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유도해 자율적으로 해 나가야 할 것같다. 여하튼 해가 바뀌면 짧은 대선배가 되니 그 또한 기쁘다. 물론 지금 단계에서 느끼는 어떤 책임감과는 다른 또다른 괴로움들에 마음죄이며 살겠지만.
  강의하시는 교수님과 진지하게 고개들며 집중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니, 아! 그중엔 맨뒤에서 엎어져 자는 사람, 눈치보며 교실을 나가는 학생도 있지만, 모두가 진지하다. 그래서 나는 본연의 나로 돌아설뿐이다.

    미쓰 전북 선발대회: 국윤형
  한의학이론에 대해 이빨을 열심히 깐 것, 지금은 개인사정으로 휴학한 친구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일, 미쓰전북 선발대회를 본 후 약리 시험시간에 후회한 일,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래도 큰 진전은 학교행사에 전보다 많은 참여를 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여름방학때의 일이 가장 눈에 선하다. 정말 햐얀색에 질려 버렸으니까.
  1학기 내내 많은 고민을 했다. 본과1년이 된 후 배운 것이 소변이 노란색이면 몸에 열이 있다는 것이었으니 자연히 소변색깔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난 노란색이니 몸에 열이 있는 것이 된다. 구갈도 약간 있었고, 그땐 소갈,(아마 상소)일거라고 생각하고 한약방에서 약재를 구하려 했었으나, 단위, 가격등을 몰라 그냥 나오곤 했다. 하여간 사람의 체질을 안다는게 어렵다. 대대 빼빼한 사람은 한성을 띠는게 당연한데도 그렇지 않았다.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양약복용실험이다. 요충증세가 있는 것 같아서 기생충시간에 배운 지식을 십분 활용했다. 그러나 재가 했던 일중 가장 무식한 점은, 구충의 100%제거를 노렸던 거다. 그래서 하루에 한알, 또 제품을 달리하면서 복용했으니 몸이 성치않을 것은 당연했다. 정말 몸이 이상해지려고 했을때 복용을 금했다. 정말 사람이 재수가 없으려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곧 시험기간이 되어 미생물을 위해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험기간 중에 갑자기 비린내가 나는 듯 했다. 입속의 우측에선 침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맥을 짚었는데 폐가 약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 곧 괜찮아져서 더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느덧 방학이 되었다. 그러나 우연찮은 기회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기흉(pneumothorax)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정말 사진에 하얀 줄이 보였다. 폐포가 세개정도 크게 보였다. 이때 양방도 쓸모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하여간 병원에 입원하였고, 나는 간호원들의 나이와 용모를 추측하느라 매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옆에 계신분들과 아주 친하게 되었다. 쥬스같은 것이 선물로 들어오면 내가 뺏어먹을 정도가 되었다. 병원에 와서 깨달은 것이지만 참 병도 여러가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학영어시간에 배운 것을 종합해도 자연히 떠오르는 병명은 두서너가지에 불과했다. 나와같은 병에 걸린 사람도 의외로 많았다. 이것은 마르고 잘 먹지않는 사람이 여름에 잘 걸린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또 죽고나면 별볼일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같은 호실에 소화기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더 이상의 내과적 치료가 되지않아 이곳으로 옮겨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신이 이상하여 튜브를 코와 입으로 집어넣어도 곧 빼버리곤 하였다. 심장도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창만이 되는 것을 튜브로 뽑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뽑아내면 다시 배가 부풀어 올랐다. 볼 수가 없었다. 얼마후 곧 죽고 말았다. 그 덕에 나는 구토을 하고 말았다. 내옆에 계신 분도 더러운 손으로 눈물을 닦느라 눈이 충열되었다.
  입원하지 사일후 전신마취를 당한 후 수술을 했다. 칼로 절개할 때 왜 그리도 아픈지. 병원신세를 지면서 주사를 열심이 맞았고 체온과 혈압을 재는 사람을 깨워가면서 그런 것도 열심이 쟀다. 그리고 모기와 쥐 등 병원환경에 대해 신경질을 내는 동안 혈압이 올라가 냉찜질을 하기도 했다. 역시 병원이란 곳은 갈 데가 못된다.
  병원에서의 체험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맥의 변화를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물론 엉터리지식일지도 모르지만 어느정도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틀림없다.

    깨어라! 가져라! 살아라!: 이주헌
  고등학교때에는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할까? 많은 고민을 했었지만, 현실속에 있는 가족, 친척, 친구들을 둘러보며 그런 고민을 했던 기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한의학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주위 어른들의 권유에 의한 선택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진정한 의술을 익혀서 질병으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그토록 꿈꾸었던 대학생활은 입학식을 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때에는 대학입시 때문에 취미활동도 못하고 친구들도 깊게 사귈 수가 없었다. 대학교에서는 마음껏 놀고 취미활동도 하고 친구도 많이 사귀어 보고 싶었다. 입학식을 하면서부터 부척 바쁘게 생활해야만 했다. 각종 개강모임, 행사준비, 친구들이나 선배형들과의 만남등, 꽉 짜여진 수업시간에도 불구하고 저녁을 하숙집에서 먹고나선 새벽까지 정신없이 놀았다. 이런 생활을 하다보니 당연히 학교공부도 소홀하게 되고 몸도 많이 상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렇게 생활해서는 진정으로 내가 바랬던 명의가되어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싶었던 꿈을 이룰 수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의학에 대해서 고민도 해보고 하루에 적어도 한번은 보고싶은 책을 펴보기라도 할려고 마음먹었다. 되도록이면 하숙방에 혼자 있으면서 조용히 지내려고 했으나 그동안 몸에 배었던 습관을 바꾸기는 무척 힘들었다.
  이렇게 갈등과 방황 속에서 대학생활을 보낸지 3년이다. 그러나 이런 생활속에서도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여러 생각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디. 한의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기자신의 마음을 닦고 수련하여 도를 겸비해야 한다. 이러한 것은 먼 다른 데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위의 가족, 선후배, 친구들과의 생활속, 즉 사람들과의 어떤 관계를 맺고 서로 살아가는데 얻어야 한다. 사람들과의 실제 생활속에서 학교공부로부터는 생각하기 어려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서로 간의 대화나 말다툼, 상대방의 행동이나 생활습관등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되고 자신에 대해서도 되돌아 보게 된다. 즉, 여러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면서 인격을 수양하는 과정에서 자연의 이치도 이해하게 되고 한의학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대학생활하면서 비교적 많은 경험도 하고 생각도 했지만 한의학과에 지원하며서 꿈꾸었던 포부는 현실에 부딪혀 점점 무너져 가고 있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생활하는 것 같다. 3년간의 대학생활은 방황기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는 지난 3년을 방황하면서 얻은 많은 추억과 경험을 토대로 남은 3년간을 알차게 보내자.
  사회는 점점 전문화되어 가고 있고 분업화되어 가지만 인간의 목숨을 다루는 의학도는 다방면에서 정통적인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어야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러방면에서 지식이나 경험을 쌓아 진정으로 한의학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항상 깨어있는 생각을 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좀 더 높은 포부를 가질 수 있도록 힘차게 열심히 살아야겠다.

   모두를 사랑합시다: 김남수
  한 일도 없이 지났다는 말은 하고 싶지가 않다. 나는 경험이 많아 졌고 매사를 보는 눈이 생긴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흘러가는 시간을 탓하는 일은 이젠 없다. 일학기초를 되돌아 본다. 마냥 즐겁고, 후배들 앞에서면 어깨에 자연히 힘이 들어간다. 옷깃에 박힌 뺏지를 바라보는 후배들의 두 눈은 부러움으로 그득하다.
  지난 일년을 돌아보면 수많은 장면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허겁지겁 시간때우며 지냈던 1학기, 곁에 사람이 없어 혼자 골때리며 준비했던 하계봉사활동, 그 때 졸업선배들과 기울였던 수많은 궤짝의 막걸리, 걱정되는 학점 땜시 자주 대했던 교학과의 상냥한 누나, 너무나 힘들게 많은 일을 시키신 조교선생님, 새로이 출범하며 많은 약속을 했던 경침회 개강모임, 다사다난 했던 내 바른쪽 신발과의 생활, 유난히 신경썼던 2학기 중간고사, 생각해보면 너무나 많은 추억이 서려있다. 노가리와 땡땡이, 담배를 곁들인 약리학실습 또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채워줄 것이다.
  예과와 본과의 차이점은 각자의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공부하는 방향이나 동의학적 시각이 선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허" 하면 "보" 한다라는 말에 대하여 우리는 그 동안 길들여진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울의 한쪽이 적어졌으므로 보태줘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음양을 하는 우리는 상대적인 개념을 지녀야 할 것이다. 한쪽이 더 많아지면 다른 쪽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이땐 사하는 것이 보가 된다. 다시 말하면 보란 뿌라스의  의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리를 배운 우리는 잠을 자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는 말을 설명할 수가 있어야 한다. 간장혈이요 간주형이다. 즉, 활동은 혈로 인한 것이므로 사람이 수면을 취한다는것은 활동의 정지를 의미하니 간의 창인 목을 닫아야 쉬게 되는 것이다. 비단 이것뿐 아니다. 주위에 있는모든 사물과 현상에 동의학적 사고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막연하기만 했던 학문이 이젠 이정표가 보이려 한다. 자료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손길이 알아서 찾아간다. 그래서 보고 싶은 책들을 사느라 돈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이 많아지고 고민하느라 머리털도 많이 빠진다. 솔직히 말해서 공부하는 방향이 서고 동의학적 사고를 한다고 해서 전부가 아닌 것 같다. 온갖 걱정투성이다. 이젠 정말 미칠 것만 같다. 우린 정말 듣기좋은 말로 선택받은 사람들일까? 아니면 버려진 사람들일까? 도무지 모르겠다. 학문이 좋으니 열심히 공부하자고 다짐하며 양의대생들을 비웃고, 나야말로 정말 진실한 의학을 한다고 자위하지만 한숨으로 토해지는 건 웬일 일까? 제도적 불편때문에 학생들은 고민하고 술마시고 슬퍼한다. 지금 있는 후배들과 앞으로 생길 후배들은 측은해 질때도 있다.
  이 글을 읽을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린 너무도 쉽게만 살려고 하는 것 같다. 시험볼 때만 친구들이 살아있는 것 같아 느껴지는건 왜인가? 교수님과 교과과정만을 탓할 문제는 아닌것 같다. 커리에서 빼야한다는 여러 과목이 있다. 그러나 그 과목들에 대해서 진정 고민하며 공부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건  들어보지 못했다. 상식이란 말은 왜 존재하는가? 알아서 해될리 없다. 이 말을 하고 있는 난 재시를 보았다. 말할 염치는 없지만 용기를 낸다. 그 내용을 한의학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재미있지 않은가? 난 요즘 미생물수업을 들으면 미생물로 인한 병들을 사기로 인한 병들과 연관지어 본다. 우리는 "배울학" 자의 학생이다. 좀더 넓게 생각을 가지고 생활한다면 우리의 불만에 찬 목소리는 조금은 낮출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미워하는 교수님들도 우리를 위해서 고민을 하고 계신다. 친구들이여! 교수님을 사랑하고 우리 한의학을 사랑합시다. 수신을 합시다. 여러분이 너무도 좋습니다. 함께 고민하고 도우며 삽시다. 우리 학년이 잘한다면 우리 후배들 또한 잘할 것이고, 우리 학교의 발전도 도모할수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부지런히 삽시다.
  여러분의 한 친구가.

    서너가지 중에 하나 정도는: 이현수
  내 머리속에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본과진입식 행사중에 교수님들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또 한의대 뺏지를 받고 이제 드디어 진정한 한의인이 되는구나하는 벅찬 가슴으로 설레이던 때도 벌써 1년이 지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특히 항상 시작할 때에는 이번만은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여 무엇인가 남을 만한 생활을 해야겠다 생각하지만 막상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해 놓은 것도 없다. 항상 마음은 있지만 실천이 없고, 그때 그때의 시험일정에 끌려 다니기만 했던 기억들, 적극적이지 못하고 수동으로만 활동했던 동아리에 대한 기억들, 이런 안타까운 기억들만 내 머리속을 가득 메우고 있다.
  요즘 주의에서 내년이면 맡게 될 학생회를 좀더 나은 학생회를 만들고자, 좀 더 낳은 한의대를 만들고자, 예비학생회임원들이 밤잠을 설쳐가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개인적인 일은 제쳐두고 이렇게 밤늦게까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무언가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하나의 희생으로 좀더 많은 학우들에게 여러가지 측면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희망의 움직임인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모임이라도 이렇게 그 안체를 이끌고 가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실망과 좌절을 주는 것은 바로 무관심인 것 같다. 이번 의명제 때에도 700이 넘는 한의대 학생들 중에 겨우 1백명정도만이 넓은 대강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뒷풀이 때에는 그 수의 반도 안되는 사람이 남은 것을 보고 너무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들이나 선배님들이 우리 학년은 다른 해에 비해 전체적인 활동등을 볼때 다른 학년보다 적극적이고 단결력이 강하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 그러나 본과에 올라온 후부터는 그것도 말뿐인 것 같다. 엠티나 체육대회 같은 행사를 보면 항상 참여 하는 사람들이 너무 개인적인 사정은 있겠지만 좀더 공적으로 생각하고 학우 하나하나가 적극적으로 도와 줄때 학생회를 짊어지고 나갈 친구들에게 힘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다른 학년보다는 우선 우리 학년이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년엔 이리에서 최고선배가 된다. 우리가 먼저 적극적인 활동과 노력으로 개인적인 생각에서 벗어날때 후배들에게 말만 많이하고 실제 행동을 못한 나자신이 부끄럽다. 그러나 이제는 후회만 할 것이 아니라 작은 것 부터 시작할 때인것 같다. 우선 나부터 조그마한 노력과 조그마한 관심으로 모든 면에서 진취적인 활동을 시작할 때이다. 이런 조그마한 관심으로 모든 면에서 진취적인 활동을 시작할 때이다. 이런 조그마한 노력들이 모일때 큰 기쁨과 보람이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내 탓이오!: 김영태
  아!
  아! 본과1학년, 일반대학으로는 3학년.
  예과때 얼마나 되고 싶었던 본과1학년이었던가?
  드디어 되었고, 이제 지나가고 있다.
  막상 1학년이 되었을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희망과 함께 예과때 느끼지 못했던 선배로서의 위치가 주는 중압감이었고 이 때문에 학기 내내 고민했던것 같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과때 추구했던 대학생활을 놓치지 않으려고도 무진 애를 썼다. 그러다보니 결국 아무것도 순에 쥐어진 것이 없으며, 그 시간들이 공중에 붕 떠버린 생각마저든다.
  앎이 없는 지식으로 후배들을 대했을때 얼마나 두렵고 떨렸었던가?
  또한 아는체 하려고 얼마나 고심했던가?
  하지만 학기초에 있었던 그런 긴장과 떨림도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졌고 예과때 지녔던 그 웅장한 한의학에 대한 포부도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친구들과 대화에서도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의식에 대해서 보다는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과 그에 대한 불만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나누었던것 같다.
  한의학에 대해서도 선배들의 말에 이쪽저쪽 쏠렸던 것을 기억하며, 학문에 대해서도 도전적인 호기심보다는 "그런가보다..." 하는 안일함으로 휩쓸렸던 것을 기억하며, 시험기간에 조차 요령주의로 넘어가려고 했었던 것을 기억한다.
  "콩나물은 자라는 것이 보이지는 않지만, 나중에 보니 굉장히 자랐더라." 라는 식의 자위적인 말을 얼마나 뇌까렸던가! 그렇다고 아무것도 얻지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종교와 학문의 갈등은 많이 사라졌으며, 약간은 성숙했다고 생각한다.
  이에 다시 내 자신을 재정비해야 함들 느낀다. 그리고 다시 내가 입학전에 가졌던 나의 신조를 다시 되씹어 본다.
  "내탓이오!"

    황제내경의 속편을 기대하며: 류명환
  이젠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 그동안 옷장 깊숙이 집어넣어 두었던 겨울옷을 꺼내 정리해 본다. 두텀한 옷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 옷솔로 털어 옷장에 걸어 놓으려하니 벌써 한 해가 다 저물어가는 허탈한 마음에 잠깐 손을 멈춘다.
  이제 한달 정도 지나면 본과1년의 생활도 끝나게 되고 대학생활의 절반이 지나게된다. "내가 한의대에 들어와서 무엇을 했으며, 해야할 무엇이 남아 있는가"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 진다. 예과 1,2년 동안에는 본과에 올라가 열심히 공부하면되지 하고 막연히 생각해 오다가 막상 본과생이 되고 나니 의식없이 지나버린 느낌이다. 물론 처음에는 계획을 거창하게 세웠으며 수업도 충실하게 들었다. 무엇인가 아련하기만했던 한의학의 조그만한 맥이라도 잡기위해서 나름대로 이책, 저책도 뒤적거려 봤지만, 지금에 와서의 나는 시험에만 급급하고 시험기간 외에는 공부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물론 내 자신의 나태함도 있겠지만 너무나 무사안일주의에 있는 전체적 흐름이 크게 작용함이 크다고 본다. 하나의 변명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그냥 넘겨버려야 할 문제만은 아니라 본다.
  이번 학생회장후보로 나온 학생들의 주요구호도 한의대내의 학습 분위기의 고조를 위해 각 학술동아리의 활성화를 들고 있다. 그동안의 예술동아리나 운동동아리의 활성화로 인해 전체적인 학생의 본분이 전도되어 버린 느낌이 있었던 것도 인정할 일이다. 대학생활이 꼭 공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이나 취미활동이 주가 되어버려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학생회의 계획은 정말 고무적인 일이다.
  몇개의 학술동아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명무실해져버린 현실에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학업분위기 조성이란 말뿐인 맹목적인 주장에 불과할 것이다. 본과1학년을 마치면서 많은 반성들이 있다. 그리고 대학생활의 절반을 지난 지금에서, 나는 그동안 경험해왔던 것과는 매우 다른 많은 일들을 대학생활에서 겪었다. 어떤 한 모임의 책임을 맡으며 한 단체가 어떻게 이끌어지는지를 보았고 배낭 하나 메고 전국일주를 한다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녀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산 저산 찾아다니면서 고적한 가운데 자연속으로 융화되어지는 내 자신을 느껴보기도 했다. 정말 소중했던 기억들이고 체험이었다. 누군가, 수많은 돈을 들여가면서 대학에 가는 이유가 무엇이냐, 과연 대학에서 무엇을 얻느냐고 물어보면 나는 학생의 신분으로 자기가 하고싶고 할수 있는 일들을 마음껏 해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 3년이라는 생활이 남았다. 이 기간은 앞으로 내가 참의료인으로서 자질을 기르며 하나하나의 인술을 습득해나가야 할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지금부터는 사명감, 의무감을 가져야 된다. 나의 하나 하나의 지식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연결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각 개개인이 갖는다면 앞에서 말한 학습분위기의 고조는 자연히 이뤄질 것이며, 능동적인 많은 경험의 습득과 자신감의 함양은 더욱 가치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한마디 해야겠다. 이번 의명제 전야제때 우리 학년에서 꽁트로 했던 대사중에 깊이 새겨지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황제내경속편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데, 어찌보면 우습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목표일는지 모른다. 보다 높은 이상을 갖고 보다 열심히 탐구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나,너,우리가 해 나가야 할 일임을 명심토록 하자.

    에펠탑을 쌓으며: 오명진
  1992년!
  나에게는 원광대학교 한의과 1학년으로 기억될 한 해이다.
  3년전 척박한 미지의 도시 이리에 발을 들여놓고 무엇을 어떻게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할 필요도 없이 인정머리없고 삭막하기만 했던  이 도시가 이제는 제2의 고향이라고 할 만큼 내게는 친숙해졌다. 이 도시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일게다. 우왕좌왕하던 예과1학년에 비하면 많이 능글맞아진 내 모습이 가끔은 뿌듯 할때도 있다. 하지만 이곳의 3년 생활동안 수없이 강의실에서 하숙집으로 또 강의실로 다녔건만 그 강의실 바닥에서 주워낸건 하나도 없는것 같다. 과연 내가 이 삭막한 도시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내 고향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지금까지 과연 이곳은 무엇을 주었는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난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그동안 한의학이라는 작은 탑을 그리며 마치 파리의 에펠탑을 그리듯 떠벌리며 다닌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에펠탑은 입에서 의미없이 쏟아져 나온 헛된 말로 쌓아올린 것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아름다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 나는 대학3년생활을 학문에 대한 아무런 요구도, 욕망도 없이 지냈다. 게다가 그 많던 자유로운 시간들은 당구장에서 공굴리며, 호프집에서 술잔 기울이느라, 비디오방에서 한 프로씩 섭렵하느라 기억도 없이 지나갔다. 이런 생활속에 책은 점점 내 손에서 멀어져만가고 수업시간에는 강의실밖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주위에는 열심히 생활하는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오히려 그것이 창피하게 느껴지는 것이 되어 버렸다. 전주병원에서 본 3,4강의실을 보며 과연 이곳에 앉을 그날 난 한의학을 말할수 있으며 자신있게 한의학을 배우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 지금 그 자리에 앉아있는 선배님들이 자신있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나의 의문들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닌걸 보면 많은 학우들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청운의 꿈을 안고 신용벌 한구석에 모였건만, 그들의 개념에는 맞지 않는 이론과 유혹하는 주변의 환경, 남아도는 많은 시간을 주체 못하는 모습들이 우리를 모두 소극적인 한의학도로 만들어 가는게 아닌가 싶다. 앞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학생들, 적극적인 사고를 기피하는 학생들, 이 모두는 바로 우리의 모습일거다. 올빼미처럼 낮에는 강의실에서 잠만자고 해가지면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마시고 붓고 하는것이 전부인냥 지내고만 있는 우리, 우리의 이런 모습들을 바로잡을 길을 무엇인가? 말로만 쌓아놓을 에펠탑을 진짜 에펠탑으로 쌓아 올릴 수 잇는 방법은 없는가? 이미 소극적으로 되어버린 우리의 의식을 돌리어 우리가 우리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일도 필요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얻은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일도 중요하다. 물론 반성들이 반성으로 그치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반성으로 더나은 행동이 생기며 그로인해 높은 에펠탑, 한의학의 에펠탑이 세워진다면 한의학은 그 탑의 높이만큼 성장해 있을 것이다.
  본과1학년을 마치며..., 나는 본과2학년을 생각한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 본과2학년이면 본3도, 본4도 후회없을 것이고, 내 평생 한의학을 선택한 것이 후회되지않을 것이다. 이리를 사랑하며 원광대학교를 아끼며 한의학을 나의 생활로 삼는다면 남은 3년의 생활은 후회되지않는 시간일 것이다. 새로운 내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본과1학년이 다 끝나가는 이 마당에 난 나의 에펠탑을 쌓기위해 강의실로 향한다.

    한의학도로서의 나의 위치: 김철호
  지금은 11월 12일 오후3시. 한종헌교수님의 약리학강의 시간이다. 출입문에서 제일 가까이 앉아서 언제라도 빠져나갈 준비가 되었다.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계속 술에끌려 생활해와서인지 정신이 몽롱하다. 오늘도 새벽5시까지 술에 시달리다가 아침 생리학, 의사학강의를 땡땡이치고 느즈막히 일어나 학술제준비에 바쁜 종길이를 슬슬 약올리다가 "본과1년을 마치며" 라는 주제의 레포트를 오늘까지 써야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교실 제일 귀퉁이에 앉아 끄적여 본다.
  한 2분정도. 무엇을 쓸까 생각해 보았지만 벌써 지나버린 본과1년의 생활속엔 학문의 목표, 살아가야할 길, 사함과의 관계 등등의 문제들이 여전히 구름속에 묻혀있다. 한의학! 정말 너무도 매력적인 학문이다. 수많은 학우들이 밤새며 서로 아야기해도 동짓달 기나긴 밤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한의학은 우리를 깊은 상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한의학인가? 한의학일까? 어쩌면  한의학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많이 경과했다. 지금은 오후 5시30분. 면역학 실험. 오늘의 실험주제는 ROI(Reactive Oxygen Intermediate)와  RNI. 외부의 안티젠(항원)이 인체에 침입하였을때, 옥시진과 나이트로젠에 의해서 외부로부터 들어온 이물질을 아주  톡식하게 해치운다는, 우리 몸에 존재하는 방어기전(defense mechanism)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기전이 한약에 의해 증진될 수 있다는, 또 이런 과정을 촉매시키는 어떤 물질이 한약, 즉 생약에서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말에 나는 새삼 놀라움과 함께 현 우리학문이 양방의학계에서 깊이 거론되고 있음을 알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시간이 또 많이 지났다. 오후 7시30분. 저녁식사를 하고 연탄불이 꺼진 냉한 방안의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있다. 아까 있었던 면역학실험이 가슴깊이 다가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아! 도대체 한의학은 왜 이리 여러 학우들을 괴롭히는가? 정말 한의학일까? 지금 밖은 바람이 불고있다. 조금은 쌀쌀하다. 더더욱 방안의 냉기가 나의 몸을 춥게한다. 시간의 흐름은 역시 빠르다. 2학기도 특별히 하는일 없이 그냥 무작정 바쁘게만 지나간 것 같다. 내년에도 여유있는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다음주에는 각종 동문회, 써클종강모임이다 해서 또 정신없이 불러낼 것이고 그 다음주에는 약리시험을 필두로 하여 또 기나 긴 고통의 시험장정이 시작된다.
  저번주에는 오랫만에 집에 갔었다. 어머니께서 일 하시다가 허리를 삐끗했나보다. 통증이 다리까지 온다고 한다. 생각한 김에 겨우 지압정도까지만 해보았지만 나을리가 없지, 침을 가지고 갔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의활기간에 했던 식으로 신수, 방광수, 관원수, 승근, 승산, 위중, 곤륜, 신맥을 자침해볼걸!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물론 침구학각론을 배우지 못한점도 있겠지만 첫째 어머니 몸이라는 점과 둘째는 건방진 행동도 같았고 마지막으로는 누구나 자침하던간에 정말 나을까하는 의구심이 스쳐지나갔다.
  아뭏든지간에 학생시절, 현재의 위치레 있어서 나에게 다가오는 한의학은 심한 의구심과 함께 학문으로서의 건강한 믿음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무엇인가 보이겠지하는 막연한 믿음은 너무도 나를 힘빠지게 한다. 그러나, 어쩌면 열심히 공부하는 일상생활과정에서 한의학은 나에게 환한 웃음을 줄까? 그러나 정말 힘들다.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내가 지금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무척 어렵다. 양방과목에 비유한다면 본과1학년이 배워야할 해부학은 배우지 않고 엉뚱한 방사선학을 배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후배들이 개념도 와닿지않는 병리, 임상용어를 외우는 것 처럼!
  이제 몇일 있으면 시험이다. 시험이나 열심히 보고 재미있는 종강모임을 하고 싶다. 우리 학우와 못다한 얘기를 서슴없이 해보고 싶다. 그리고 본과2학년에 올라가 더욱 더 후배들과 동료들과 함께 멋있는 학창생활을 보내고 싶다. 본과1년이여 굿바이!

    겨울의 길목에서: 이관순
  저녁노을 빛에 눈부시던 은빛의 갈대가, 신작고에 흐드러지게 피던 가련한 코스모스가, 무심하게 벌써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알린다. 가을옷은 정리하여 옷장에 넣어두고 겨울옷을 꺼내야겠다. 이런 겨울 날씨는 돌연 창문을 깨듯 내 머리를 치며 묻는다. 여름에 넌 무엇을 했냐고. 계절의 바뀜은 나를 깨우고 깨치게 한다. 과거를 돌이켜 본다는 행위가 어쩌면 도로의 행위로 격이 떨어질 우려가 없지 않으나 이런 행위가 없이는 그 완고한 정지를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말로써 변명을 해 본다. 교수님께서 정해주신 "본과1학년을 마치며" 란 레포트숙제를 내주신것도 이런 뜻이 아닐까?
  이런 글로나마 나를 정리하고, 나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다시 한번 바랄 뿐이다.
  본과에 올라오면 뭔가 달라지리라 믿었는데 2학기를 마감하려는 지금 다시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은 부심하게 가버리고 말았고 지금도 가고 있다. 본과1학년은 너무도 빨리 흘러 가끔 나를 반성할 여유조차 주지 못했다. 지속으로서의 시간이 아닌 마음의 문제였겠지만.
  항상 생각만 있을 뿐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실속없는 생활을 해 왔다. 대학생활의 거의가 인간관계의 학문탐구의 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지만 그 어느 하나 자신있게 했다고 내세울 것이 없다.
  그러나 방황아닌 방황은 이제 이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에 대해 위안을 삼기 위해서인지 스스로 변명해 보았지만 과거로부터 헤어날 수 있어야 발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방황도 이젠 족하니까, 과거에만 여념하기 보다는 좀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싶다.
  한의학에 대해 아는것은 없으나 이젠 한의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조금은 잡힌 듯하다.
  한의학이란 괴물자신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은 이젠 그칠 때가 된것 같다. 누가 그랬던가? 보헤미안의 방황은 꿈이 있음으로 안주하는 자보다는 낫다라고. 방황도 그래서 필요하긴 하겠지만 어느 만큼의 정착도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역시 중용의 덕이야말로 최고의 덕인것 같다. 하지만 한의학에 대해 비판을 하기에는 아직은 부족하고 나자신 내부의 문제가 더 크다. 지신의 문제를 타개하지도 못하는데 외부의 것을 고치기바란다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나 스스로 떳떳하다면 외부에 대해 거는 기대도 떳떳할 것이다. 우리 한의학도들도 한의학의 문제점을 논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우리각자 하나하나가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노력해서 한의학을 발전시키는데 힘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방황과 시행착오를 거친다. 그러나 그 방황의 길이가 성취의 높이를 나타내주는 것은 아니다." 라는 어떤 이의 말도 가슴에 와 닿는다. 그렇다. 방황은 희망이 있어 좋다. 하지만 그것도 어딘가에 자신을 세울 수 있고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어야 의의가 있다. 한의학도 바람이 가끔 불어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을 수 있어야겠다. 올 겨울은 뭔가 다르리라 믿는다.

    공부해서 남주냐: 김민철
  한의대에 입학한 지도 삼년이라는 세월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자율이라는 허상속에서 느낀 나태함뿐이다. 학년을 올라가기는 어찌보면 쉽다. 굳이 원서를 들추지 않아도 해석판으로 대신하면 되고 써머리가 있으니 시험기간에도 힘들여 공부할 필요가 없다. 이런 나태함속에서 진정 내가 해야할 것들을 하지 못하고 느끼는 당혹감이라니. 알고 있다는 느낌이 단지 허상에 머물러 있을뿐 진정한 "앎" 이 없다. 그러면서 한의학에 대해선 내나름대로 평가를 해버린다. 한의학은 제각기들의 학설이 다르며, 고방과 후세방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지금도 음식거처의 변화로 이론과 임상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얼마나 나는 한의학에 대해 고민하였던가? 사실 이런 고민은 말뿐이다. 도리어 학문을 저해하는 요소이고, 초월되어야 할 부분이다.
  먼저 한의학이라는 막연한 허상에서의 탈피가 필요하다. 이해하지 못한 바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억지고 모순이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에 대한 각각의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져야 양자를 논할수 있고 나아갈 방향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종두접종의 발명과 미생물에 대한 인식은 동양이 서양보다 200년이 앞선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이 분야는 가히 양방의 독보적인 분야가 되어버렸다. 발명만 있고 이론이 없는 것이다. 오랜 임상의 축적으로 실제이론상의 발전을 가져온 시기가 많았다면 이는 앞뒤가 맞지않는 모순일 것이다. 역사적 변명은 무엇인가 있겠지만 결과를 놓고 따진다면 문제가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럼 한방의 발전을 지체시킨 부분은 무엇인가? 한의학의 권위에 집착하는 우리들에겐 불가피한 논쟁이다. 요근래 "한의학연구소 초청강연회" 에서 강순수교수님께서 한의학의 현대화는 음양이라는 고립된 틀을 탈피해야 이루어진다고 하신말씀은 모든 학우들에게 충격과 회의를 던졌을 것이다. 한의학도 정수의 보존이라는 틀 속에서 절장보단의 작업이 필요할것이다. "좌신우명문(좌쪽에 있는 콩팥은 신장이고 우쪽에 있는 콩팥은 명문이다.)" "삼초유형무형론"(삼초라는 장기가 형체가 있는가 없는가?) 등은 더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결실이 없는 말장난일 뿐이다. 한의학과 양방은 이론상 부합되는 측면은 많다. 이는 우연한 결과가 아니다. 한의학의 이론상의 기초는 철학이고 그 대상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 양방의 한계로 인한 한방의 호황기는 양방의 또다른 돌파구, 즉 양방이 한방의 이론체계를 흡수하면서 사그러들 것이다. 지금 체질의 문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평균수명이 높음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일 것이다. 예전 방송에서 국립보건소에서 한약을 50여종 실험했는데 그중 두세가지는 AIDS 90~95% 성장억제 시켰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는 한약의 우수성을 말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양방은 부족함을 보완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서로 적대적이고 무시한다함은 양자를 모르는 이들의 허언일것이다. 물론 이런 시도를 통해 양자의 발전을 이루도록 노력하는 분들은 소수이다. 방약합편으로 처방을 내리고 증상에 따른 침구배열을 알고 거기에다가 약간의 본초지식을 첨가하여 사람을 소모시키는 의술을 펴는 용의가 결코 내 모습이 아닐거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망설임이 있다. 소위 요행을 바라는 한의학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한의학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발이 갑자기 떠오른다: "공부 좀 해라. 공부해서 남 주냐."

    한의학의 정도: 위영만
  이 글을 쓰기 위해 1학기초의 글을 보았읍니다. 거기에는 논리정연하고 확고한 의지를 표명한 글들로 차여져 있었읍니다. 그것을 다시 접하고서 이글을 쓰려니 막히는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었읍니다. 아마 이는 1년을 지나고 나서 전의 생각이 많이 퇴색 내지 회의감에 빠지지 않았나 싶어집니다. 문득 예과1학년때의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 들도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본1이 되면 많은 회의와 실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한의학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 그때 나는 나만은 그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러한 신념은 사상루각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읍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한의학의 전반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이러한 회의에 빠지게 된 것은 정도를 올바르게 걷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의학의 정도는 무엇일까? 지금부터 거기에 대해서 비록 나의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나름대로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내가 처음 한의대를 들어왔을때 많은 선배들의 조언이 한결같이 지름까지의 서양사고방식을 망각하라는 것이었읍니다. 그때는 그것이 무슨말인지 몰랐읍니다. 지금도 모든것을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감은 있읍니다. 한의학을 공부하다보면 서양사고방식으로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어떤 법칙이 없이 이리저리 맞추어가는 식의 방법으로 밖에 생각되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한의학은 동양의 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해왔으며, 이 동양사상은 그리 두리뭉실한 것이 아닙니다. 매우 정체적이고 논리정연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특히 한의학의 음양오행, 천인합일등의 사상을 하나의 큰 논리정연한 도를 벗어나지 않고 있읍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방황을 하지않나 싶습니다. 그러하면 이러한 도는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의학에 가장 깊이 내재되어져 있는 사상중의 하나인 역에서 알아보면 이는 곧 일음일양입니다. 그리하여 한의학은 이 일음일양의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져 나왔읍니다. 이 시간, 공간의 한계를 초월한 자연의 우주법칙을 설명하고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학자, 사상가들이 연구해 왔읍니다. 어느 사상이 우수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각각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를 깨닫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지금의 이 공부는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읍니다. 혹자는 너의 생각은 너무 추상적이며 현실에 맞지 않다고 하기도 하겠지만 진짜 우리의 한의학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노력들이 수반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겠읍니다.
  먼저 고전의 공부입니다. 너무 따분하고 어렵겠지만 이를 해나가다보면 재미와 흥미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저자의 사상, 인생, 역사에 대해서도 병행되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 다음에 다시 이를 실제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에 적용하여 널리 동서양을 배우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학교에서는 할 수 없고 자신이 해야겠읍니다.
  둘째는 이보다 더 어려운 자신의 마음의 수양입니다. 옛 선인들은 전자보다 바로 이점을 더욱 힘썼읍니다. 아니 전자는 후자를 위한 수련방법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 더이상 논할바가 없으니 각자의 생각에 맞는 수련의 방법을 찾으십시요.
  이러한 가장 큰 두가지를 바탕으로 하여 한의학을 접하지 않으면 한의학은 단지 지금의 끊임없이 발전하는 서양의학의 기술적인 패턴을 쫓게되어 서양의학에 흡수되지 않으리라는 보전이 없게 될 것입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한의학은 한의학 나름대로 마음의, 기의, 경험의 의학으로 자리잡지 않을까 생각되어 집니다.

    도둑고양이: 전창환

    이리에 살면서

  새벽 두 시
  신동 거리가
  부슬비에 젖는다

  쌓아둔 쓰레기를 뒤지던
  도둑 고양이
  인기척에 흠칫 놀라
  내 쪽을 노려본다
  이 마지막 자유만큼은
  뺏길 수 없다는 듯

  노려보는 눈이
  비에 젖는다

  젖는다
  쌓다만 벽돌이 젖고
  공터의 잡풀들이 젖고
  새어나온 포장마차의
  나직한 목소리가
  젖는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젖어가는 것들은
  젖어가는 것들끼리
  닮아가는 아픔을
  도닥거린다

  신동 빈가슴을 뒤지는
  허술한 신발아래로
  길의 속살이 젖는다

    젖어가는 것들
  1
  허술한 신발로 정신없이 한해를 걸어왔다.
  이제 이리에서 세번째의 겨울을 맞는다.
  며칠전에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다가 3년만에 처음으로 이리시내
  가로수가 은행나무라는 것을 알았다.
  11월의 첫추위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2
  한의대라는 틀이 자난 3년간 내 사고의 범위를 너무 좁히고 딱딱하게 만든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보편적인 삶들을 외면한채 턱없는 우월감과 나약함으로 내 시야를 좁힌 것은 아닌지.

  3
  한의학은 왜 팔딱팔딱 살아숨쉬는 현재가 없는걸까? 왜 그런것들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의사학을 배우면서 나는 비로소 살아 숨쉬는 한의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일뿐이다.
  최첨단이 휩쓸고 있는 현재에도 최첨단으로 팔딱거리는 한의학이 되어야한다.

  4
  잊지말자. 선진국 어쩌고하는 지금에도 의료혜택을 받지못하는 많은 민중들이 있음을.
  옛부터 의술은 축재의 수단은 결코 아니었다. 어찌보면 직업인이기 보다는 성직자에 더 가까왔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성직자도 하나의 직업인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민중을 떠난 의학은 영원히 한의학이 될 수 없다

    밋션: 임정국
  레포트를 내라고 한지도 벌써 몇 주가 흘렀는지 모른다. 늦게나마 쓰게돼서 다행이다. 언제나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하면 더 잘 쓸까 이런 것들이 레포트 쓰는 것을 미루게 한 것 같다. 이것을 과제물로 생각하고 부담스러운 일거리로 간주해버린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냥 가볍게 여긴다면 말도 잘 나올텐데. 아무튼 본과 1학년을 마치면서라는 글을 쓰게돼서 내 스스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고 지금의 나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된 계기가 된 것 같다. 22년간의 삶에 있어서 대학에서 보내고 있는 지금 순간들의 비중은 무엇보다도 더 무겁게 느껴진다. 미래의 활동을 위해서 진정한 그 무엇을 준비하는 시기인 것 같다. 나의 사명을 자각하고 그 사명에 따라 살려는 주체적인 결단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오늘 약리학 종강을 했다. 장래의 진로를 생각해보았다. 잘 모르겠다. 3·4년후 무엇이 되어있을지.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한 인간의 생애에 최고의 날은 자기의 역사적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 칼 힐티의 말이었던가? 평생동안 자기가 할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할 것 같다. 내가 이 세상에 온 생의 이유를  깊이 깨닫고 역사가 나에게 맡긴 사명을 바고 자각하는 날이 내 생애의 최고의 날이 될 것 같다. 사명을 영어로 밋션(mission)이라고 한다. 밋션은 라틴말 '밋시오' (missio)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밋시오는 보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왜 여기에 보내졌는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참다운 의자는: 이민주
  이때 쯤이면 한번은 수확하는 농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거둔다는 것은 씨를 뿌림이 있었고 또 많은 노력의 가꿈이 있었던 결과일 것이다. 일년을 마치는 시점에서 학기초에 세웠던 수많은 계획과 지침들에 대해서는 또 다시 반성이 될 수 밖에 없는 무절제한 한 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예과 일년때 느꼈었던 본과 일년 선배들의 위치와 지금의 나의 위치가 결코 같지 못한 것 같다.
  나름대로 전공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고는 했으나 구체적인 실행이 뒤따르지 못했고 아직도 그 개념은 뿌연 안개속에 있는 듯하다. 라오쯔는 도를 도라 말했을 때 이미 참다운 도가 아니라고 했는데 나에게는 기가 무엇인가라고 자문해 보았을때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이 아니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과연 본과일년의 자격이 있을까를 반성케 한다.
  한의학의 과학화를 지향하는 경향이 일고있는 시점에서 과연 어느 것이 주가 되고 어느 것이 종이 되는가를 논하기에 앞서 한의학 자체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소견으로 그 둘을 조금이나마 접목시킬 수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과 또 일정한 틀을 벗지 못하는 임상선배들의 모습을 볼 때 나의 길도 그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욱 당황하게 한다.
  참다운 의도는 병든자를 고치는데 있지 않고 병이 들지 않도록 하는 예방적, 사회적인 의에 있다고 한다. 사회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한사람의 환자를 대할 때 그들의 고통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나를 생각하면, 나의 발길은 자주 주저하게 된다.
  6년의 시간중 반을 보내며 한 일은 없고 할 일은 많은 나머지 시간을 위해 어느정도의 기초적인 소양을 갖추었으면하고 바랜 한해였지만 반성만이 뒤따른다. 비단 학업활동뿐 아니라 기타의 면들도 내면생활의 탐구라는 핑계로 자기를 축소시키기에 노력했을 뿐, 항상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생활을 보내왔다.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갖지 못하고 감정에 이끌리는 생활속에서는 올바른 자기를 찾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고 구체적인 자기연구가 아닌 막연한 도피적 생활은 결국 허탈함 만을 남긴다.
  사람은 사람들속에서 융화되어 가는 사람의 길이 있다. 선한 감정뿐 아니라 약한 감정도 인간이기에 품을 수 있고 또 사람에게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만물이 자연의 기에 동화되어 생활하는 것이 되므로 모든것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은 만물이 곧 치료의 근본이다. 먼저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가를 파악함이 필요하다. 인간은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순간순간의 선택은 인생에 있어 크건 적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난 일년간의 내가 행한 많은 선택들 가운데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이성이 감정을 앞섰기 때문일테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반대가 될 것이다. 나 속에 나 아닌 듯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영혼의 환상에 빠질 수 있게 한다. 지금의 내가 다른이의 영혼에 의한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엉뚱한 발상도 가져보았다. 타율적 윤회의 결과?
  무슨 글을 썼는지 자신도 이행하기 어려운 말이 되어 버린 듯하다. 
  학기초의 많은 계획들은 종이위에 그러진 몇개의 획으로는 남아 있겠지만 생활해야 될 몸과 마음속에는 그리 남은 것이 없는듯 하다. 이 글이 나의 본과 일년을 결코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한번쯤 일년을 숙고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자위하며 이 글을 가름한다.

    고민의 완성: 이민정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평가하는 작업이 제일 어렵다. 더구나 이렇게 작문의 형식을 빌어 쓰게되는 경우에는, 문항을 매겨서 감정적이지 않은 사무적인 글귀로 나열하는 작업이 제대로 되지않고 항상 감상이 들어가기 마련이라, 쉽게 끼어들어온 단어 하나에 이끌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이제까지 써내려온 글 분위기에 사로잡혀서 회의감에 빠지기도 하고, 또는 자신감을 새로이 얻기도 잃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직 1년의 마지막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고, 평가를 내릴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면에서는 형식에 구애없이 자유로이, 일년간 지내온 날들에 대해 생각나는대로 옮겨보고 싶다.
  지내온 3년동안 올해 1년이 가장 바빴고 육체적으로도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벌여놓은 일도 많았고, 일하다가 큰 힘을 얻기도 했고, 작은 무심함에서 의욕을 상실하기도 했던, 그러면서도 이것이 성장하는 과정이러니하고 내심 뿌듯하기도 했었던 한해, 그러는 동안 끊임없이 마주치게 되었던 '선택' 이라는 갈등, 그것이 그간의 과정속에서 겪었던 제일 힘든 부분이었던 것 같다. 당위를 쫓아야 하는가, 양심을 따라야 하는가, 편한대로 살 것인가, 거창한 듯 하지만, 결코 '내 자신' 에 대한 직접적인 일들이기에 그런 거창유치함은 생각할 여지가 없었고, '나' 에 구체적이고도 살아있는 고민들 앞에서 참으로 많은 순간들을 부끄러움과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힘들더라도 힘든 것을 핑계로 회피하지는 말라던 어는 선배의 말이 그나마 방향없이 기울던 내 생활에 작은 도움이 되었다.
  생활함에 있어 일관된 줄기가 없었기 때문에 조그마한 일 하나에도 선택의 갈등이 항시 따랐고, 구체적인 내 삶에 맞게 결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당위로서 풀어낸 일들은 많았어도 즐거움으로 받아안은 일은 얼마 없었던 듯 싶다.
  1년을 사는 것도 힘든 노정인데, 어찌 한두 해가 아닌 70여년이라는 일평생을 살아갈 큰 줄기를 단기간 내에 세워낼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인생을 긴 안목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앞의 짧은 내일만 국한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바로 몇미터 앞에 서 있는 내 모습만을 머리속에 그려내고 있었기에, 더 힘들게 일했고, 억지로 끌어낸 의욕속에서 짧은 만족감을 느끼며 달래기도 했었다. 그러는 동안 나를 돌아보았을 때!
  머릿속에도 두 속에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한심한 모습이었다. 복잡하고 들쭉날쭉 생활속의 자질구레함 가운데에서 정돈되지 못하고 울상이 된 얼굴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나는 욕심이 많아서 그런거야' 하고 자위하면서도, 벌써 본일이라는 선배위치에 올라온 사실이 불안스럽기도 했다.
  3년동안 편하고 안일하게 살아온 나날들이, 지금의 학년쯤이면 갖추고 있으리라 여겨지는 여러가지 형태의 기대들로 성큼 다가왔고 그 중량을 감당하기가 퍽이나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 가을부터는 조금씩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내 고민' 이 생겼고,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한쪽 방향을 자신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결코 큰 성과는 아니지만 혼돈 속에서 움튼 고민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에도 고민하는 친구들이 간간이 보인다. 그들도 생산적인 고민속에서 조금씩 더 성숙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가는 것 같다.

    우리는 써머리 세대인가보다: 김재근
  한의학의 기초과정인 예과과정을 마치면서 단순히 한의학이 무엇인것 같다라고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한의학이 깊은 내용과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본과과정의 시작은 설레임과 의지충만한 마음을 싹트게 했으며, 또 그런 마음으로 본과 1학년의 출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만물이 한 해를 마무리 하듯, 본과 1학년의 생활에 있어 유종의 미를 생각해야 될 때가 다가와 버린것 같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할때는 마치 처음 입학하여 낯선 강의실, 낯선 학우들을 대하는 듯한 서먹서먹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강의실을 들어설 때마다 조금은 긴장하기도 하고, 몸을 움츠리고 넓은 들판에 홀로 서있는 듯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는 지금은 처음과는 확실히 다르다. 많은 학우들 뿐만아니라, 강의실과 강의실안의 책상, 걸상, 벽에 걸려있는 시계, 인체경락도, 동의보감을 들고 있는 허준선생님의 사진등에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여러 학우들의 관심과 도움으로 특히, 현역생들을 마주칠때마다 나를 인식해주는 인사와 형이라고 불러주는 친근한 목소리의 도움으로 쉽게 학교생활에 적응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학우들에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하루하루가 시간에 쫓기는 듯한 본과 1학년생의 생활, 아침에 학교에 와서 강의를 받고, 점심시간이 되면 육상 경보경기를 하듯 시간에 쫓겨 점심을 먹고 다시 강의를 받고 하는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생활에 육체뿐만아니라 마음까지도 알게 모르게 병들어 버리는 것 같았다. 특히, 마음이 급해져서 평온함이나 여유스러움을 잃어버리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등교길을 오갈때마다 사람들의 기뻐하는 모습, 화를 내는 모습, 심각해 하는 모습, 가끔씩 보이는 강아지의 모습등을 보며 마음 속으로 미소를 지어 보기도 하고, 쓴 웃음을 나타내 보기도 했다. 또, 건물이 세워지는 모습, 길거리에 자라고 있는 풀과 나무들에 대한 관심은 삶의 경험으로 터득되는 한의학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보았다.
  본과 1년의 과정중 면역학과 미생물의 시험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광대한 분량, 쉽게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는 내용들, 게다가 양방과목의 무관심으로 시험때마다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우리 학년의 지혜롭고, 계획적인 써머리작전으로 시냇물의 징검다리 건너듯 무사히 지나가는 것 같다.
  본과 1학년이 되면서, 예과때와는 달리 원광대학교학생이 아닌 한의과대학의 학생으로만 지내온것 같다. 학생회관의 출입, 대운동장에 발을 디뎌보는 것, 다른 단과대학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들은 행사가 있을때나 가능했었던 것 같다. 그로인해 한의과 대학밖의 일어나는 일들이나, 변해가는 모습들을 접할 수 없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면서 얻지 못한 생활에 아쉬움이 남는다. 
  한의학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 더 깊은 내용을 공부할 수록, 우리가 생각하고, 노력함에 따라 엄청난 모습들이 드러날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안개 긴 저편에 많은 보석들이 묻힌 산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손에 확실히 잡히지 않고, 오히려 혼란스러운 상황에 접하곤 한다. 사실, 현대는 느낌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시대이며, 의술 또한 확신함이 없이는 행할수 없는 것이다. 안개를 걷어치우고, 한의학이 가지고 있는 심오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볼만한 가치가 한의학에 내재한다고 믿는다.
  본과 1년과정중 우리를 크게 고민스럽게 한 일이 있다. 다름아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방과 양방의 결합에 대한 것이다. 특히, 한의학을 가르치시는 교수님께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말씀하시니, 양방과목에 대한 관심을 놓아버린 상황에서 고민스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깊이 생각해보면 한방이 양방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한의학적 사고와 양방적 사고가 상반된다는 점에서 결합이 요구된다 하더라도 많은 마찰이 있을 것 같다.
  본과 1년을 보내면서 많은 어려운 일에 부딪치기도 하고, 고민스러운 일도 많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부족한 부분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나름대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으나, 후회되는 학교생활은 아니었던 것 같다.

    빨주노초파남보: 이래춘
  여기는 지상 50미터의 고공, 비행기안이 아니다. 헹글라이더도 아니다. 고층아파트일뿐이다. 고작해야 지상 수미터 높이의 생활공간을 50미터높이로 올려놓았을 뿐이다. 변화하는건 없다. 자동차소리도 시끄럽게 들려오고 어쩌다 녹용을 잡수신 모기들도 올라온다. 홀로 이러한 공간에 있는게 아니다  어머님이 항상 계시고 동생이 있으며 옆집의 예쁜 여대생도 있다. 더불어 공간에 존재한다.
  나는 사람인데 사람이 이처럼 높은 공간에서 숨쉬며 살아갈 수 있다는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땅 바로위에서와 거의 비슷한 삶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게 참 이상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이상한 인간으로 취급받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나의 현실이다. 
  가정해보자. 영화속의 투명인간이 실제 우리들 곁에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왜? 그것은 우리들 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까, 즉 특수한 경우들이니까. 다시말하면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상 50미터높이에 앉아 태연히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이상이 아닌 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눈에 새겨지거나 머릿속에 각인된 것들, 다시 말하면 현실적 사실을 진리인냥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현실을 이상하다고 의심할 줄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발전을 가로막는 보수라는 이름의 장애물이다. 우리는 기성세대들의 현실적응적 생활태도를 가족제도라는 장치를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커나온다. 부모들이 알려주는 이름(정보)들을 무조건 뇌에 집어넣는다.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가지 색깔이란다. 무지개에 대해 우리들이 갖는 통상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실재로 무지개는 일곱가지 색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다. 수없이 많은 색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이름때문에 우리는 무지개의 진짜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는건 아닐까? 하늘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무지개가 떠오르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학교에서 배운걸 확인하기에 바쁜건 아닐까? 그것은 오색일수도 백색일 수도 있는데. '야!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기보다 '야, 무지개가 저렇게 생겼구나'라고 해버리는건 아닌지. 기성화된 이름에 엄청 짓눌리고 있는 느낌이다. 
  한의학에 등장하는 용어들이 참 난해하다. 한의학의 용어중 대표적이라하는 기에 대해 생각해본다.
  기는 실재한다고들 한다. 한의학의 바탕이기도 하다. 실재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진 않지만 느끼려고하면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기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면 느끼려하지 않기 때문이라 말한다. 하지만 느끼려해야 느낄수 있는 것은 허구의 신기루 일 수 있다. 우리 남자들은 싱그럽고 늘씬한 여자를 보면 신체적 이상이 없는한 어떠한 감응이 온다. 느끼려 하지않아도 저절로 되는 현상이다. 춥거나 덥다는 느낌은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건 절대 아니다. 그것은 추위라든가 더위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1차적 단계의 기는 느끼려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으면 느끼기 어려운 2차적 단계의 기는 실재하는 것인가? 깨어있는 자만이 느낄수 있고 우매한 자는 느낄 수 없다면 2차적 단계의 기는 일부 엘리트들만이 사유하는 놀이기구는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상류사회로 진출해보려고 없는 기의 관념을 조작해 내려고 발버둥치는 졸장부에 지나지 않는건 아닌가?
  우리들의 몸뚱이는 대단히 융통성 있는 기계인 듯 하다. 수학적 체계가 아니며 일대일 대응 논리의 적용을 불허하는 듯 하다. 그래서 다양한 매카니즘을 수용할수 있다고 본다. 기로써 우리들의 몸을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다른 가설이 등장할 가능성의 문도 우리는 활짝 열어 두어야 하리라. 기는 결코 절대자가 아니다.

    뜬구름을 격추시킬 고성능 미사일을 만들자: 송운용
  참으로 힘겨운 한 해였다. 내적으로는 갑자기 폭증된 공부량에 시달렸고, 외적으로는 본과생으로서 후배들에 대한 보살핌, 지도, 안내등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내외적 강박속에서도 힘든만큼의 보람도 있었고, 이제까지 예과2년의 생활보다도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이제 한 학년을 정리하는 마당에 있어서 학기중의 모든 번뇌와 고통, 땀들이 모두 하나하나 알알이 오직 기쁨과 희망, 자신감으로 나를 새롭게 재무장시킨다. 이제부터 그 힘들었던 과정들과 지금 느끼는 그에 대한 보람들을 엮어서 두서없이 나열한다.
  하나, 본과에 막 처음 진입했을때 그래도 나에게 가장 부담있는 것이 학과공부였다. 많은 선배님들께서 본과 1년 공부가 힘들다고 하셔서, 남달리 새롭게 각오를 한바도 없지는 않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제 한의학 공부에 전력을 쏟아 예과때 찌든 양방의 때를 홀가분하게 벗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두 학기 동안에 그 시기의 바램, 계획을 만족스럽게 이루어 내지 못한것 같다. 다만 예과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한의학의 맛과, 멋을 어느정도 감지할 수있게 되어 스스로 위안한다. 
  둘, 이제 내 밑에는 후배들이 두학년이나 된다. 내년, 내후년 계속 늘어날 것이다. 솔직히 그 후배들을 보면 매우 안쓰럽고, 내 자신의 속속들이 고통스러워지는 마음을 떨쳐낼 수 없다. 그들은 고민한다. 한의학! 자신의 장래! 사회문제! 한의대 현실! '원광'이라는 비극! 교수님과 나! 지지리도 못난 이 고민들은 일부만 바람직할 뿐 대개는 우리대학을 계속 썩어가게 하는 것들이다. 가슴이 아프다. 먼 옛날에 나의 선배가 번뇌했고 바로 얼마전에 내가 번뇌했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나의 후배가 번뇌하고 있다. 똑같은 것을 가지고, 내년에 들어올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93학번 후배들은 지금 이 현실을 꿈에라도 생각이나 할까? 그들도 희망에 차서 들어왔다가 곧 실망하겠지! 과거의 나처럼.
  셋, 인간의 위대함은 현실을 딛고 '미래'라는 것을 창출해 내는데 그 가치가 있다. 이제는 본1두학기동안의 생활을 통하여 형성된 나의 느낌, 감응, 본능의 화살이 저절로 날아가고 있는 미래의 과녁을 쏘아맞추려 한다. 자연스럽게.
  진취적 기상인란 무엇인가? 천지만물은 항상 변화하고 있다. 현재는 항상 순간으로서 존재할 뿐 계속 머무르지 않는다. 그 자연속에서 인간도 변화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인간이 변화가 자연의 변화와 다른 점은 인간이 그 변화, 발전의 방향을 능동적으로 계획, 추진할 수 있고, 그가 가진 진취적 기상이 실로 지대한 역할을 담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 세태가 왜 이모양인지, 자꾸 사람들이 현실에 안주하기를 좋아하고 수동적이 되어, 극단적으로 표현하자 면, 우리네한의학이나 중의학이나 모두 서양문물의 똥찌꺼기나 받아 먹는 대리점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깨어나야 한다. 이 현실을 박차고 일어서야 한다. 나 자신의 마음속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진취적 기상을 토대로 하여 끊임없는 발전을 이룩하는 것은 실상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저 조그만 일에서부터 확실한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인 관점에서 일을 수행하며 항상 현실을 반성, 평가하고 조그만 일에서부터 나를 담금질하면 된다.
  지금 우리 원광한의대는 모든 것이 허장성세이다. 교수, 학생 모두 너나할것 없이 현 한의학의 문제점에 대해서 목이 터져라 성토하고, 단결, 발전을 외치지만 그저 계속 외치기만할 뿐 그 와중에서 교수님들은 항상 현실과 타협안주하시고, 학생들은 매우 나태하며 그들은 항상 서로 대립한다. 
  늦었다 싶을때가 빠른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우리는 단지 한의학을 사랑한다는 그 하나의 공통된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단결할 수 있으며, 재무장할 수 있다. 덧붙여 '진취적 기상'이라는 고성능무기를 가진다면, 우리는 현 원광한의대가 걸려있는 만성고질병 (전주 교육병원문제, 본3전주이전 문제, 교과과정 개편문제, 학생들의 학습불량 문제, 강의평가제 및 학생태도평가제 등)과의 전투에서 꼭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넷, 흔히 한의학 공부를 뜬구름잡기에 비유한다. 항상두리뭉실하여 잡힐 듯 잡힐 듯하나 잡을 수 없는. 그러나 오히려 그점이 한의학이 가진 최상의 매력포인트이다. 많은 한의학도들이 과거에 그랬었고, 오늘도 변함없이 잡고싶어 안달이 나게 만드는 뜬구름! 본1을 지내면서 기어코야 나도 그 일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기쁘다. 과거 그 뜬구름을 포기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기에 뜬구름은 나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올 겨울방학때는 꼭 뜬구름을 격추시킬 수 있는 고성능 미사일로 재무장하여 본2때 확실히 도전해 보겠다.
  다섯, 결론을 말하면, 진취적 기상과 공부를 통한 실력배양이야말로 '한의학'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기이며, 우리는 원광한의대를 이 최첨단 신예무기들을 가장 확실히 생산할 수 있는 최우수설비의 무기제조공장으로 기필코 발전시켜야 한다.

    낙엽: 손정석
  한 여름의 강한 땡볕과 강한 비바람을 맞으며, 그 푸르른 광택을 내던 나뭇잎들은 이젠 앙상한 가지에서 떨어져 겨울의 기운을 실은 바람에 몸을 의탁해 검은 아스팔트위를 어지럽게 쓸고있다. 아침에 하숙집의 작은 방에서 이불밖으로 빠꼼이 눈을 떠보면 다시 이불속으로 몸을 움츠리고 싶은 마음만 생긴다. 벌써 일년이 나의 몸을 스쳐 저멀이 만경평야의 마른 들녁으로 달아났다는 것을 문득 생각하니 웬지 서글퍼진다. 
  어느덧, 풍성한 가을도 요며칠간의 겨울비에 저만큼 물러서서 겨울을 양보하니 벌써 나의 일년이 지났다는 생각이다. 봄의 활기참에 부상되어 나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작은 포부는, 찬바람에 어깨를 움추리는 지금은, 한 조각의 파편도 찾을 수 없으니 말이다. 왜 이리도 서글픈 말만을 되새김질 할까? 이런 되풀이된 나자신에게의 푸념은 극히 자연스러우리라. 우리는 말한다. 한 여름에 땀방울을 흘린 농부는 찬 바람이 부는 들녘에서 지는 석양에 그의 가슴은 더욱 뿌듯하다고. 왜 이런 단순한 작은 진리를 알면서도 나는 어떤 과정으로 결과를 맞이해 오기에 이렇게 안타깝고 부끄러울까? 무언가 큰 변화는 원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내실을 기할 수 있는 일년이고자 본과생활을 시작하며 힘있게 하숙집 대문을 나서던 내가 지금은 출석에 얽매여 졸린눈을 부비며 터덕터덕 걷고있지 않은가?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크게 반성하고자 하는 의지마저 꺾이려 할 땐, 나 자신 놀랍기도 하지만 이런 모든 것도 잠시 뿐이다. 지금에 와선 무엇도 확신하고 싶지않다. 총학생회장 후보들의 공약처럼,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처럼, 누군가에게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작은 나의 믿음은 아직 잃지 않고 있다. 다만 무엇인지, 나 자신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 없을 뿐이다. 난 요즘 유독 낙엽의 의미를 생각해보다 어린 시절 책갈피에 예쁘게 생긴 낙엽을 끼워둔 것이 생각난다. 나의 일년은 결코 화려하지도 풍성하지도 않고 그저 시간이 흘러 누렇게 변색되어진 낙엽이다. 이런 낙엽을 난 나의 인생이란 책속에 하나의 갈피로 꽂아 놓고자 한다.  
  철이 바뀌고 해가 바뀌며 우리는 책갈피를 들쳐 보며 지난 나의 시절의 낙엽의 의미를 읽어본다.  나는 본과1년의 퇴색되어진 낙엽을, 철이 지난 나의 시간을 다시 한번 찾아보며 아름다운 추억이 아닌 나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추억으로 영원히 간직하고자 한다. 오늘도 검은 아스팔트위엔 찬 북풍이 그의 퇴색되어진 몸을 의탁한다.

    마음으로 보자: 김연화
  '정확하고 민첩한 판단력'
  이것은 무수한 가치가 쏟아져 나오고 그런 여러 가치 앞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는 현대에서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능력이다

  본과1학년을 마치면서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은 이것이 바로 학부때 키워져야 할 자질이다. 공자가 '일관성 없는 사람은 의사나 무당처럼 신용을 제일로 하는 직업은 가질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학교를 떠날 때쯤은 나름대로 한의사로서의 관이 형성되어 있어야 자신감을 갖고 환자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학문을 잠시떠나 환자를 중심에 두고 생각한다면 많은 지시도 중요하지만 머리에 탄력성을 주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환자가 가지로 있을 모든 가능성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능력, 그런 융통적이고 입체적인 사고가 한의사로서의 자질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앞선다. 그런 입체적인 사고력을 키우기 위해서 예과때부터 해부학, 양방, 생리, 조직학, 미생물 기타 등등의 학문을 배우지 않나 생각된다. 물론 공부 뿐 아니라 다른 자치활동들로 쫓기며 신음할땐 소화불량이다 못해 먹기조차 거부할 수 밖에 없는 많은 교과과정 상의 과목들과 교수님들을 얼마나 원망했으며 자신의 무능함을 얼마나 비웃었던가!
  하지만 그런 과정들이 나를 예비한의사로서 단련시켰으리라 자족한다. 특히 약리시간에 했던, 첫강의의 '건강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해서 당뇨나 고혈압에 이르기까지 '줄 시키기로' 그 질병에 대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한 가지씩 발표하게하는 훈련은 우리들의 딱딱한 사고를 좀 더 유연하게 해주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의학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와 비례해서 답답함도 커지는 것 같다. 이 답답한 벽너머 저쪽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것이라는 불길한 예감과 혹은 아예 포기하고 돈과 편안함에 '적당주의'로 안주하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이 더 앞선다. 하지만 가능성은 무한하고 미래는 불투명한 것이라서 더 이상의 상상은 못하겠고 앞으로 학년이 올라가야 뭔가 미래를 세워볼 수 있을 것같다. 미리 겁먹지 말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태로로 살아야겠다.
  계절탓인지 1년을 보내는 마음이 착찹하다. 네 자신을 투시하는 것이 괴로워 예리한 자의식의 눈을 잠기우고 싶어진다. 휘트먼의 말처럼 '나는 다만 이렇게 살고 있을 뿐이며 이것으로 족하다'하며 자기 비판에 자기가 쓰러지는 어리석음은 되풀이하지 말자. 내 속의 많은 나를 버리고 좀 더 여유로운 모습으로 밖의 것을 담을 수 있었으면 한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예과와 본과는 한 층 차이: 안승렬
  만약 누가 내게, '예과와 본과의 차이는?'하고 물어온다면, 나는 '층수 차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우리 대학은 예과와 본과가 위, 아래층으로 나뉘어져 있어, 본과에 오른 후 2층에 오르는 일이, 2층과 별거라도 하는 것처럼, 힘들어졌다. 실습을 하러 지날 때에도 별 느낌이 없이, 지나가는 길인냥 싱겁게 스쳐지난다. 하구파도 아니고 학교일에 적극적인 열정파도 아닌 관계로 시험시간에나 2층의 독서실에 들르고 특별히 학생회실에 들를 일도 없다. 그러나 가끔 내가 지냈던 강의실에 들르게 되면 그 때의 기억들이, 혹은 희미하게, 혹은 지금처럼 느껴온다. 후회라든가, 만족이라든가, 그런 단순한 말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많은 느낌이 존재하는 곳이다. 단순한 가을의 감상에 빠져 보고 싶고, 괜히 한번쯤 탈출이란걸 꿈꾸어 보는 1층의 본1강의실과는 다르게, 선뜻 선뜻 낯선 얼굴도 보이고 단순한 가을의 감상이 아닌 지난 가을의 낙엽까지 생각 해보는 조그만 여유가 생긴다.
  아주 어릴때의 짧은 가출이 생각난다. 체구만큼이나 아주 작은 욕심에 엄마에게 꾸중을 듣고, 혹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아주 작은 실수로 아빠한테서 매를 맞고는 집을 뛰쳐나와 엄마 아빠는 잘 모르는 곳, 흔히는 멀리 떨어진 냇가 혹은 뒷산의 나무 아래로 가서 눈이 팅팅 붓도록 울고, 또 울어서 눈물마저 말라버리면, 멀거니 하늘을 보다가 더 이상 슬픈 것도 없어지면 툭툭털고 뾰루퉁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귀가하는 내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때의 하늘이나 지금의 하늘이나 높고 푸르긴 매 한가지. 변한건 내 체구뿐이다. 가끔 지난 강의실에 들르는 것도 어찌보면 짧은 가출때문인 것 같다. 여지없이 이맘때가 되면 슬픛것도 웃을것도 없는 지난 일년동안의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이 나를 순수하게 정화시킨다. 아마 먼 훗날 머리가 백발이 되고 주름진 손으로 본1강의실의 문을 열었을 때에도 같은 종류의 느낌이 들것이다.
  본1을 거의 마쳐가는 지금 십일월, 성공이라든가 힘든 일년이었다든가 하는 그러한 것을 따지기에 내 나이는 너무나 젊다. 살아온 날보다 열심히 살아갈 날이 더 많은 까닭이다.
  자취방에서 연탄을 갈며 같이 오손도손 드러누워 애기를 나눌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본1을 마치면서는 그런 희망만을 생각하려 노력한다. 슬픔의 패배로 마음을 상하기에 내 나이는 너무나 젊은 까닭이다. 쓰러져도 일어설 시간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이생진씨의 시중에 이런 귀절이 있다.
  일시불로 꺼내 주며
  이세상 끝날 때까지 살라고 졸라도
  살아가기 막막한 때가 있겠지만 
  월부를 꼬박꼬박 치르며
  끝까지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은 기특하다
  사람이 슬픔만을 생각하지 않고 언젠가는 희망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도 마음만은 항상 젊은 까닭인 것일까?
  한 여름 산으로 바다로 젊음을 찾아다니며 흐르는 땀을 닦을땜면 언제나 단풍이 들려나 했는데 어느새 거리엔 낙엽이 팔십노인의 머리카락처럼 흩날리고 저물어가는 가을이 발 아래로 느껴진다. 이런 감상적인 가을엔 하늘마저 유달리 높고 푸르다. 하늘은 젊다.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언제나 푸른 빛으로 돌아 갈 준비를 하고있다. 나도 이젠 푸른 빛으로 돌아 서서, 내 사정은 봐 주비도 않고 제 갈 길만 가는 세월처럼 그렇게 살기로 다짐해 본다.

    고지가 보이지 않는 전진: 심정섭
  입학이래로 수없이 지나간 시간들, 수 없이 만난 사람들, 수 많은 사건들, 이런 것들이 아직까지 나에겐 아무런 각성도, 아무런 방향도 제시해주지 않은 것 같다. 타학과는 3학년이라는 명분아래 어른스럽게 고심하고 있는 이때, 이제 1학년이라는 안일감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까지 고착되지 못한 개체의 떠다님때문인지 안개를 헤매고 있는 느낌이다. 바닥에 뚝 떨어진 학점은 제쳐놓더라도, 내가 평소에 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는 회의에 빠진다.
  한의학과를 지원하며 각오했던 것들이 한, 양방이 어수선한 커리큐럼에 얽혀버리고 사소한 인간관계에 치이면서 희석되어 버리는 것을 느낀다. 전혀 체계적이지 못했던 독서, 졸음으로 때운 수업시간, 당일치기로 했던 시험공부, 이것이 내가 해왔던 전부가 아닌가?
  본일에 들어오면서 양, 한방에 대한 시각적 격차를 더욱 두드러지게 느끼면서 많은 고민이 쌓여만 간다. 한의학이 보신지제나 또는 양방에서 고치기 힘든 병을 고쳤다는 일회적 경험속에 머물러야 하나? 이러한 고민은 미생물, 면역학을 배우며 심해져 갔다. 특정개체가 아닌 대중적으로 입증시켜 나가는 방법이 효과적으로 급성병등을 치료하고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과연 우리의학은 환자 한사람 한사람을 따라서 치료해야만 하는가? 환자의 일렬일렬에 맞게 치료한다 지만 결국 그러면 수백, 수천만의 예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게다가 외과적 수술이나 급성질환치료의 필요성이 훨씬 늘어난 지금 우리의 모색 방향은 어디인가? 결국 우리는 보신 차원이나 만성병의 치료에 머무르며 양의학의 보조역할을 해야하는가? 결국, 우리의 해결 방안은 다양성이 조금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표준화가 필요하다. 즉 한마디로 말하면 무슨 병은 어떤 사람이 잘 치료한다가 아닌 어느약이 어떤 침구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다 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통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겨우 약간의 처방에 연계된 본초, 기본적인 원서인 (내경), 그리고 기초적 경혈학밖에 배운것이 없다. 그러나 이미 3년이 지난 것이다. 즉 이렇게 계속 진행되면 이론이 없는 임상, 부분적 경험에 의한 치료만 졸업후에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선배들의 얘기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들은 게으른 자의 푸념일 뿐이다. 3년이란 많은 시간을 그냥 보내버린자의 푸념일 뿐인 것이다. (사서)조차 아직 다 읽어보지 못하고 (내경)조차 훑어보지 못한 자의 자기반성일 뿐이다. 
  아! 벌써 겨울이 오는 모양이다. 일기예보에는 눈소식이 들리고,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도 겨울이 오고 있다. 이제 곡식도 거두워 들여지고 새 계절을 맞기 위해 정리하는 때도 오는 것이다.
  이제 나도 지난 3년을 정리할 때다. 지금까지 겪었던 많은 오류들, 주위로 부터 받았던 비난들을 자신안에서 승화시켜야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나자신의 발판부터 확실히 해야된다. 이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독서와 겸허한 생활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비에 젖은 은행잎 위를 짧은 거리나마 걸어 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보다는 쌓여있어 그 위를 밟는 기분이 스산함을 줄이는 것같다. 쓸데없는 것들에 시달리고 집착하다 보니 쌓인 낙엽을 보고도 조그마한 시상이나마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그런 감수성을 다 잃어버린 것인가?
  앞으로 학부생활은 3년이 남았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지난 3년의 실수들이 반성의 기준이 되느냐 또는 헛된 시간소모가 되느냐 하는 판가름이 날 것이다. 이제 마지막 본1 시험인 기말고사가 남았다. 학점보다는 앞으로의 학업태도의 기초가 되는 자세로 임해야겠다.

     클래식과 음양: 심호철
  아침이다! 기의 흐름을 족소음에서 족태양으로 옮겨 양분에서 순행 하도록 하자. 하지만 지난밤에 동료들과의 카오스를 겪은 내몸은 쉽게 정도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다. 그럼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들어보자. 작자의 의도와 과정에 상관없이 아무튼 장대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하루를 계획해 본다. 이때 나는 또 한번의 카오스를 겪는다. 아름다운 도나우 안에 있던 내가 빠져나와 춤추기 시작한다. 나와 격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열심히 돌아가던 필름이 갑자기 엉망이 되어 영상이 제멋대로 뒤섞이며 나의 영감은 그만 옴니버스 앨범이 되고 만다. 이쯤되면 클래식은 단순히 스피커의 단순운동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불쌍한 스피커, 스피커는 주인을 위해 열심히 전후 활동을  하는데 주인은 그 울림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왜일까? 나의 과제는 음향이다.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음향 체계를 벗어나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나에게는 역시 최대의 과제물이다. 오늘 하루도 이 음향이라는 전제하에 놓인 많은 학과목들이 나에게 다가올 것이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부담이 내 감성의 유리를 깨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음양이다. 클래식은 음양이다. (원의보감)을 쓴 심호철 선생은  '오갈역어발전한의학지론내실시'라 했다. 실은 곧 클래식이 음양.으로 느껴지는 경지와 같지 않을까 해서 생각해 본다.
  수업시간이다. 앞에선 지긋한 중년신사가 우리들을  향해 악보의 같은 의미있는 언어를 펼치신다. 이때 우리의  씨피유 (CPU)는 기억->연산 ->기억을 제어장치의 조정아래 작동시킨다. 물론 고장난 씨피유도 많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바로 우리 스스로 새로이 재정립하고 창립하는 노력이다. 이 순간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가 떠오른다. 베토벤이 만약 의학에 관심있었더라도 의학도를 위해 이보다 멋진 작품을 선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이는 현이 주한다는 이론에 따라 악성 베토벤의 귀를 치료 했더라면 지금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작품보다 더 못한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잔인한 생각을 잠깐 해보면서 한의학의 특징과 창조력과의 관계를 고민해본다. 우리는 너무 많이 벽에 갇혀 있는것 같다. 사고의 대부분을 서양식 사고 방식으로  이끌다 보니 우리안의 창조 능력을 잃은듯 하다. 한의학의 최대 장점은 기존의 이론체계에서 발전해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라 생각한다. 바로 창조력이다. 벽을 깨고 창조해보자.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듣자.
  밖에서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기억력과 집중력의 완벽함을 위해 (볼레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헨델의 (수상음악)을 내 귀에  들어오게 한다. 언젠가 영화의 배경음악으로도 쓰였던 적이 있는 라벨의 (볼레로)는 역시 집중력에 명약이다. (황제)와 (수상음악)도 뒤질세라 나름대로 한 몫을 한다. 베토벤의 예술적 천재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 기억력이기에 나는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부러움의 대상은 우리에게 (황제)를 안겨 주었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단순기억을 많이 해야하는 내 머리를 위해, 좀 더 세련된 기억을 위해 나는 이 음악들을 택했다. 솔직히 말하면, 시험 한번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하긴 하지만, 역대의 명의중에 엽천사와 설생백에 대한 얘기가 있다. 이 둘은 상반되는 일면으로 후대의 의학도에게 길잡이 노릇을 하는데 이 두사람 중의 위의 음악들은 엽천사에게 보다 효과가 있으리라 본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은 음악과 시험을 모두 택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이젠 하루 일과를 정리해야할 시간이다. 양의 활동을 마치고 음으로 접어들려 하면서 나는 음악을 고른다. 시벨리우스의  (투오넬라의 백조)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 A장조)가 바로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음악이다. 그날 하루의 성실도 여부에 관계없이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서는 당연히 음의 선율로 응축해야만 하는 것이다. 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치를 터득할려는 노력은 가장 작게는 생활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크게는 우주의 원리를  관찰하는 데에서 행하여지는 것이지만 거기에 이런 음악들을 첨가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가치가 있다.

    나를 찾기 위한 노력: 신경아
  본과 1학년 첫해, 어쩜 한의학에 이제 실제적으로 입문했었다고 할 수 있는 첫해를 마치며 항상 고민해 왔던 문제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평상시의 고민을 알고 있으면서도 노력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짜릿한 채찍질이 되기를 바라며.
  처음 본과에 올라오면 누구나 자신에 대해 새로운 각오를 하게될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예과때와는 다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려 했는데 결국 지금에와서는 별다른 소득없이 1년을 보낸 셈이다. 한가지 얻은것이 있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며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대강의 파악이 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한건 그런 주관이 섰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 11월 지금 밖에 불고 있는 매서운 비바람과 함께 나를 더더욱 춥게 만들고 있다. 
  한의학에 대한 고민, 여자로서의 고민, 인간으로서의 고민,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고민 등등.
  인간은 고민하면서 자신을 실현해 나간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걱정거리가 있으며 우리 한의대에 다니는 여학생들은 남다른 각자의 고민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서로 공유하고 있는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인간적인 것이다. 
  나는 사실 대학에 들어와서 많이 변했다.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지만 현실의 내 모습에 안주하는 형태로의 성격으로 변해 버렸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꿈도 많고 욕심도 많았었는데, 왜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진취성도 결여되고, 어쩌면 내가 확 늙어버렸나 보다. 이런 내가 밉다.
  가끔 주위에서 내가 참 욕심이 많다고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들은 지금의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강도가 높은 활력소와 자극제가 필요하다. 이런 활력소도 결국은 내가 찾아내야하는 것인데 이러니 자꾸 악순환이 되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필요한 공부나 지식도 색다른 생활에서 얻어질 것 같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점점 진취성이 없어지는 것 같다. 이제 기말고사만 끝나면 본과 1학년이 지나고 대학생활의 반이 지나가 버리는 셈인데.
  이제 삶의 의미보다는 활동을 찾고 싶다. 이제껏까지 방학이란 시간만 보내는 식의 지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올 겨울은 여느때보다 추울것 같다. 하지만 나는 추위를 박차고 예전의 나의 모습을 찾는데 땀을 흘리겠다. 아마도 기억에 남을만한 방학이 될 것같다.
  참, 한가지 3년동안 한의대에 다니며 나름대로 느낀 한의학에 대한 어렴풋한 생각이 있다. 한의학은 단순한 의학이 아니다. 의학이란 것 자체가 협애한 단순한 학문이 아니지만 한의학은 의학적인 면보다는 인간생활의 전반적인 면에 대한 동양적 사고방식 같다. 즉 병이나면 이렇게 치료한다고 간단히 외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이러한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기 때문에 들어올때 부모에게 이끌려 들어왔든지 억지로 밀려 들어온 사람도, 의학이란 학문에 거부감을 느꼈던 사람들도, 단순히 의학이란 기술을 넘어서는 더 큰 범위의 인간 생활 전부의 방법을 가르쳐주므로 누구나 공감대를 형성하고 동화될 수 있는것 같다.

    아쉬움: 송철민
  아쉽다. 올해도 목표하였던 계획을 이루지 못한 것이 대학생활의 반을 지내는 이순간 무척 아쉽다. 연애다운 연애 한번 못해보고 공부다운 공부 한번 못해보고 어느덧 졸업을 행해 달려 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그러나 또한 기쁘다. 잠시나마 옛일을 회상하며 이쉬움에 빠지고 다시한번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게 나를 이끌어 주는 생각들이 기쁘게 해 준다. 그동안 나에게 스쳐지나간 수 많은 남자와 여자들, 나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였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위해 걱정하여 주고 나로 인하여 고민하였을까? 또 나는 그들을 얼마나 생각하여 주었나? 아쉬움의 1년, 아니 3년. 여러가지 내가 겪은 일들이 영화보듯이 스쳐지나간다. 처음 교문에 발을 디딘날부터 오늘 지금 이순간 까지 영원할 것만 같던 지옥같은 시험기간들, 그리고 대학의 낭만과 지성을 찾기위한 숱한 체험의 시간들. 또 있다. 한때나마 한 여인을 사랑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시간, 그 아이와의 추억. 눈 오는날 집 밖에서 벌벌 떨며 기다리던 시간, 지하철역에서 약속을 해 놓고 기다리다 결국은 바람맞고 돌아온 날, 마지막 헤어지면서 멍청히 걸어서 집까지 걸어온 추억들이 슬픔과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제일 아쉬운 것은 나에게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친구들과 여러 사건들에 내가 소홀히 하였다는 것이다. 쓸데 없는 사랑타령과 인생타령을 늘어 놓았지만 소위 자아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지난 잘못을 따지고 나에게 경종을 울려야 겠다.
  솔직히 더 이상 쓸 말이 없다.

    후회없는 1년이라 말하고 싶다: 이문연
  시작 때의 각오도, 그때 만큼의 활기도 이제는 잊혀져가는 지금.
  참 짧았고 그 대신 무척 바쁘고 재미있게 보낸 기간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아직 한의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한의대의 반이 지나가고 마는구나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남았겠지하는 위안을 하며 내 자신을 다독거리곤 한다. 
  1학년 처음 입학할 당시에는 그저 대학생이라는 것이 대견스러웠고 학교를 다니는데서 무언가의 희열을 느끼곤 했었다. 이제는 그런 감정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아쉬움, 반성, 이런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겠지만.
  금년 1년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사건이 많았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써클회장단을 맡아서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도 느꼈고, 또 아쉽기만했던 써클발표회도 지나고 보니 그저 아름다운 한 추억이 되어 버린듯 하다. 모두 열심히 해주었기에 고맙다는 생각만 남아있다. 써클을 내 욕심대로 해보려 하였으나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또 큰 사건이 있었다. 어느날 잠에서 깨어보니 내 자신이 학생회 후보가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준비해 온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의 설득과 강요에 그만 남들 앞에 서게 되었다.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도 들고 한번쯤 잘 해보고 싶다는 의욕도 있다. 이미 들어온 자리이고 맡은 이상 잘하고 싶다.
  바쁘게 지내 온 1년, 바쁜만큼 내 주위의 여러 아는 이들에게 소홀하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해 본다. 서로 바쁘게만 지내다 보니 그런 인간적인면이 뒤로 밀린 것 같다. 이번에 입후보하면서 힘이 되어 준 친구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같이 놀 시간이 줄어 든 친구들에게 이런말을 해 주고 싶다. '그저 같이 있어 주는 것만이라도 나에게는 도움이 돼'라고
  1년, 시작할 때 무척 어려운 것 이라는 걱정도 많았고 밑에 많은 후배가 있어서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었고 한의대의 중심이라는 사명의식도 갖고 생활하였다. 아쉬운 점도 많고 추억거리도 많이 있지만 한마디로 그저 좋았다 라고 정의하고 싶다. 
  다시 돌아오지 못 할 1년이 흐르고 있다. 내 인생의 전환기가 될지도 모르는 기간이 돼 버렸다. 힘들게 느꼈었고 예과 떼를 동경하곤 했던 것도 나중에는 우스운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이곳 이리에서의 3년째 생활. 이젠 거의 이리사람 아니, 원대 한의대생처럼 되어가고 있다. 전에 내가 다짐했던 '저런 선배는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 내가 그 선배가 되어 버렸다. 후배의 지적에 자기 변호할 수 있는 말주변만 는 그런 선배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80명이 조금 넘는  우리 과 사람들. 누구든지 다 개성이 강하고 자기 맡은 것은 잘 처리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들중의 하나이고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는  입장이 될 수 있는 지금, 이런 생각. 전부가 다 좋은 이들이고 같이 고생한 친구들이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감'이 그렇다는 것이다.
  너무 짧게 지나간 듯한 1년이지만 좋게 무난히 지나가는것 같다. 내년을 구상하며 보다 많은 경험축적과 자기반성의 해로 금년을 삼고 싶다.
  내년에 본 1이 될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해 주고 싶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학년이지만 어느 학년보다 많은것을 경험할수 있는 학년이라는것, 그리고 자기자신의 능력을 가늠할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하루하루 밤이 길어지는 요즘, 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후회없었다라고 여기 적고 있다.

    모내기 뙤약볕 아래 심는 한의학: 이심로
  본과에 올라와서는 무언가를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3월초에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해놓은 것은 없고 세월에 떠밀려 학년만 올라가는 느낌만 든다.
  한해동안 내가 무엇을 하고 지냈는가 머리속을 살펴보면 첫째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동문회 일이다. 동문회장을 맡으면서 근 30여명의 회원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리더쉽이 부족해서인지 매 행사때마다 어려움이 많았다. 개강모임, 종강모임, 여름방학동안의 의료봉사, 이 네가지 일을 했다. 생각했던 대로 일은  잘 풀리지 않았기에 방학 한달은 아무일도 못하고 이 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돈이 확보가 안되어 가장 힘들었다. 결국엔 팔십만원의 돈을 마련했고 이 돈으로  침, 뜸, 약재를 준비했다. 의료봉사에 막상 들어가서는 덜 힘들었고 마치고나니 마음이 후련했고 눈물이 핑 돌았다. 공허한 느낌이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두번째로 기억에 남는 일은 과임원이었다.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내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된다. 본과진입 페스티발, 엠티, 종상모임이 있었다. 
  세번째로 기억에 남는 것은 가사일로 모내기인데 이 일은 해마다 해 온 일이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3월초에 학사일정의 원탑체전이 언제인가를 살펴본다. 지금까지의 대개의 날짜는 5월하순이었다. 이 날짜에 맞추어 4월에 볍씨를 뿌리고 체전기간동안 집에가서 열심히 일을 한다. 먼저 논에 물을 대어 경운기로 노타리를 하고 논을 편평하게 고르고 이틀정도 두었다가 비료를 뿌린다. 그 다음날 이앙기로 모를 심는다. 논에 모를 다 심기까지의 과정은 꼬박 일주일이 걸린다.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서 저녁 아홉시에 눕는데 눕자마자 눈이 감긴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집에는 일할 사람이 없다. 집에서 일하는 것이 등산간다거나 바다로 놀러가는 것보다 나에게는 더 의미가 있다. 한의대에 다니는 것도 촌에서 사는 것이 여러면에서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직까지 한번도 원탑체전에 참석해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존재 한다는 모순: 김용옥
  사람이 산다는 것은 몸(MOM)덕분이다. 몸이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삶 그 자체가 나의 몸을 죽이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모순이다. 이와같이 터무니없이 들리는 이 명제를 놓고 내가 하숙방에서 오장육부를 다 토할듯이 기침을 콜록이며 밤새 고민하며 나 존재의 모순을 한탄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의 학우들은 실감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백(땅)보다 혼(하늘)이 왕성하여 엔트로피증가법칙을 자기의 몸속에서 실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요즈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자기존재를 벗어난 하등의 보편적 가치에 믿음을 상실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몸의 아픔은 결국 나혼자 서러워할 수 없을 것 같다. 악몽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꾸지 않아도 될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첫째 내가 문명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몸이 문명을 벗어나 순수하게 자연(스스로 그러함)의 세계에서 살 수만 있다고 한다면 나는 구태여 이러한 악몽을 나의 삶의 존재양식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허나 순수 자연이란 거짓말이다. 불행하게도 내가 이미 언어를 획득한 이상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지간에 이미 문명의 노예가 되어버린것이다. 문명이란 가치의 총체다. 다시 말해서 문명속에 서 사는 나의 삶은 가치를 생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가치는 여러양태가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선 미래지향적인 어떤 비젼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악몽을 꾸고 있다하는 이 현실은 바로 이러한 비젼 때문인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말한다. 너의 비젼도 결국 너의 욕심이다. 정곡을 찌른 말이다. 어떠한 위대한 비젼도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단멸되어야 할 집일수도 있다. 허나 나의 욕은 욕이로되 끊을 수 없는 욕이다. 세속적 욕으로말하자면 나는 뭇사람이 추구하는 모든 욕을 이미 달성했다. 욕을 초월하는 욕, 그것을 욕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해탈의 고행이며 존재의 과정일 뿐이다. 나에게 있어서 해탈이란 도덕적 완성이 아니다. 그것은 비젼의 긴박성이다. 해탈! 나는 그 해탈조차를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운명이 나의 몸을 죽이는 비극을 초래 할지라도 이제 나는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해탈의 해탈, 그것은 죽음뿐이다. 명호!
  약리학(Pharmacology)을 일년 배웠다. 선생님은 너무도 잘 가르쳐 주셨으나 학생이 워낙 불민하여 뭘 배웠는지 머리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허나 단 하나의 명제가 내 머리속에 남아 있다. '약리학의 기본은 자율신경(autonomic nerve)이다.' 자율이라 함은 수의적으로 콘트롤될 수 없는 자동(스스로 움직인다)이라 함인데, 그 자율신경의 자동성은 생명의 보장(guarantee of life)이요, 그 생명의 보장을 보장하는 것은 다름아닌 우주(cosmos)다. 그러므로 자율신경은 말인즉 자율이지만 그 실상으로 말하면 우주신경(cosmic nerve)인 것이다. 자율신경은 우주신경이다. 그리고 약리학은 이 우주신경에 도전하는 학문이다. 이것이 내가 일년 약리학 시간에 깨달은 것의 전부다.
  우주신경인 자율신경은 우주가 천지라는 음양으로 되어있듯이, 음, 양의 구조를 지닌다. 바로 자율신경의 구조가 천지의 구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몸을 소우주(microcosmos)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자율신경의 음양구조를 우리는 교감신경(sympathetic nerves). 부교감신경(parasympathetic nerves)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길항을 우리는 '중용'(homeeostasis)이라 부른다. 중용은 시중이며, 시중은 역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다. 
  서의나 동의나 모두 동일한 몸(MOM)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의 인식의 편협함과 무지함이 있을 뿐이다. 자율신경을 동의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자율신경에 대한 동의적 이해는 반드시 체질론(Constitutional Theory)에 기초해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태까지 아무도 이 자율신경과 체질의 상관관계를 포괄적으로, 하나의 보편적 일반법칙(universal general law)으로 정립한 자가 없었다. 동의에서 말하는 모든체질은 궁극적으로 교감신경향진성 체질과 부교감신경향진성 체질로 대별될 수 있는 것이다. 전자를 심파티코토니아(sympathicotonia)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심파티코토니아와 바고토니아의 생리현상에 대한 경략적 전략을, 전신성경락(holistic meridians)인 심경-소자경, 심구경-삼초경 상에서 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나의 언어를 우주인의 언어라 할 것이고, 황당한 허언이라 할 것이나, 나에겐 매우 구체적, 사실적 레퍼런스가 있다. 많은 사람이 나의 말을 궁금히 여길 것이지만 더 이상 구체적 언급을 피하기로 한다. 현 시점에서는 천기의 누설이기 때문이다. 허나 나는 이를 금궤에 넣어 비전치는 않겠다. 오로지 독자들이 빌어야 할것은 삼년후의 나의 졸업이오, 졸업후 정확한 임상데이타에 의한 정직한 천기누설이다.
  약리는 반드시 정확한 체질론 위에서 재해석되고 재정립될 때만이 그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 진행되어온 모든 연구들이 새롭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여기 남겨둔다. 현 약리의 가장큰 문제는 '보편적 몸'을 전제로 했을 때 약효가 제일치 못하다는 것인데, 이는 '상대적 몸'을 보편적으로 전제했을 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교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항상 학생의 입장에서 같이 느끼고 이해해 주시는 한종현 교수님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린다. 한 선생님의 밝으스레한 해맑은 모습, 그것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삶의 위안이었다.

    이 땅의 4만 약사님들께 드리는 글
  지난 일요일 4월 11일 내 특별기고문이 (한국일보)에 실린 후로 심상치 않은 기류가 나의 삶의주변을 감돌고 있다.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라는 글이 나간후로 나는 스님들로부터 수차례 폭행의 위협을 받았고 심지어 우리집에 폭탄을 던지겠다고 전화가 계속 걸려와 괴로움을 겪어야만 했다. 허나 (나는 불교를)이라는 책은 외견상 불교계를 비판하듯이 보이지만 불교계에 대한 근원적인 애정을 가지고 쓴 글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읽어보면 알 수 있고, 또 그 내용이 특정한 이권과 걸려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일부 스님들의 프라이드를 손상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리고 내가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성철스님을 심하게 비판한 것도 사실은 수도승의 아만을 비판하기 위한 처명에 불과했던 것이지 성철스님과 같은 대선사의 위대함을 개인적으로 모독하려한 뜻이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만해도 불교계 자체의 문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신변의 위협을 느낄수 밖에 없었고 그 책이 나온후로는 절깐 출입을 삼가는 인간이 되어버렸는데. 이번 사태는 더욱 문제가 심각한 것 같다. 나는 이제 약사러 약방에도 못가는 신세가 된 것인가? 한의학계와 약학계가 동일한 잇슈에 대하여 대립되는 두 진영으로 완전히 갈려있는데 다가, 나 김용옥이 한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을 것이고, 그러한 김용옥의 입장이나 인상이 약사들에게는 절박한 생계의 이권문제와 결부되어 처치되어야만 할 장애물로 인식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는 5월 7일 금요일, 대구계명대학교 의과대학학생회주최, 대구, 경북지역 보건의료계열 학생회협의회 후원으로 동산동 계명대 의과대학 대강당에서 오후 5시반부터 '의학공부 왜 하나? 동, 서의과대학 기철학-'이란 제목으로 강연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 다음날 토요일에는 대구직할시 약사회주최로 시민회관에서 3시반부터, 내가 작년에 일본정부초청으로 아시아클럽재단(The Asia Club Foundation) 주최 아시아전통의학세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키노트스피치, '아시아전통의학과 인류의 미래' (일본어로 쓰여진 논문, 1992년 9월 20일 부산시민회관)를 재구성하여 대구시 약사님들을 대상으로 대강연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이런 일정들이 모두 취소되었다. 주초측에 불안한 기운이 감지되었고, 나의 신변에 일어날 불상사에 대한 아무런 보자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강연모임은 지금 약사법 개정운운문제와는 전혀 문관하게 일년전 부터 계획되었던 모임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이렇게 엉뚱한 일로 유산되어버리고 만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강연을 안할수록 마음이 편한 사람이래서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선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을 가질뿐이지만, 몇년전부터 내 얘기를 의과대학생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시던 계대의대 해부학교실주임 장성익교수님과 또 약사회모임주선을 위하여 서울까지 일부러 왕림하셔서 나에게 간청을 학시곤했던 대구직할시 약사회 김용보회장님과 이수근부회장님께, 그리고 이 모임을 중매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신 온누리건강백화점 대표 박영순박사님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리고 이런 문제와 무관하게 내 강연을 고대하였던 대구시의 선량한 약사님들께 아쉬음의 심정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약사들측으로부터는 이와같이 민감한 반응이 있는데 비한다면, 한의사들로부터는 전달되는 감사함의 느낌이라든가 전언은 개코방귀도 없다. 약사들의 상상과는 달리, 나의 행동은 완전히 나 개인의 행동일 뿐이며 나는 대한한의사협회로부터 요번사태에 관하여 단 한마디 의논의 말을 전달받은 적이 없고, 더우기 내가 같이 공부하고 있는 한의과대학생들로부터조차 부탁을 받은 한마디도 없다. 요즈음 학생들은 실상 저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며, 또 무슨 간부만 되면 그 간부들 자체의 생각으로만 무슨 일이고 해나가지 외부의 의견을 수렴한다든가 어른들에게 사의한다든가 하는 태도는 거의 전무하다. 우리역사가 우리젊은이들에게 '불신'하나만을 가르쳐와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의도 버릇도 비젼도 약착같은 행동력도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헛깨비같은 조직만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내가 비록 학생신분으로 학생들 사이에 앉아있을 지언정, 학생학업과 관련된 사항을 떠나 사회적 문제의 맥락에 있어선 그들이 나를 대하여야할 절차가 엄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 좁은 식견을 맴돌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행동이란 빤할 빤자인데 나같은 경험자의 지혜를 빌릴 생각조차 없고, 그들은 내가 자기들조직내의 단지 일개 학생으로서의 발언권만 지니는 것으로 생각하여 나에게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행동을 할 때가 많아 도무지 그 울분과 답답함의 심정을 새키느라고 눈시울을 붉힐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지난 11일 (한국일보)에 글이 나간 후로 대한한의사협회에서 전언하다는 것이 고작 내 학우 한명을 시켜 전화로 왈가왈부하길래, 도대체 인간관계가 이렇게 무성의하고 이렇게 명의를 월권하여 결례를 할 수 있는가 ㅎ고 전화통에 벌컥 화를내고 끊어버렷다. 그후로 도통 한마디 죄송하다는 말도 없다. 도대체 한의사협회 회장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내가 이런 문제를 공동대처하기위해서는 힘을 모아 장기적 전략을 짜야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번 사전에 같이 만나 전체적인 문제를 토의하자고 충분한 언질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바쁘니 지금 만날 수 없다는 말뿐이었고, 기껏 신문에 기고문이 나가자 겨우 한다는 짓이 내 학급의 어린아이시켜 행차하시겠다는 전갈을 내리시는가? 보사부장관이나 대통령은 직무상 인터뷰신청하면 만날수 있을지 몰라도,나 김용옥은 내집앞에 무긒꿇고 부복하여 아무리 졸라대도 내가 안만나면 그만이다. 사상가의 권위는 붓한자루에 있는 것이요, 그 붓끝에 힘을 주는 도덕적 삶의 모습에 있는 것이다. 아무런 직급이라도 나에겐 하등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지금 이 시간에 로비를 한다면 그 방법의 우열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려야 할 것이다. 자기들의 주장의 사회전략(socialization tatic)이 어떤것이 되어야 하는가는 자신의 좁은 소견으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약사님들 한번 생각해보라! 나 김용옥의 싸움은 4만: 7천 아니요, 4만: 1의 싸움일 뿐이다. 그대들이 나 김용옥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나하나 죽여본들 이 역사에 남는것이 무엇이며, 그대들이 얻을것이 무엇이뇨?
  문제가 되는 글은 지난 3월 24일 이리 하숙방에서 새벽 4시에 벌컥 일어나 책상머리에 정좌하고앉아 쓴 것이다(본서에 기재). 그것은 전혀 우연적인 착상이며, 단지 학생들을 야단치다 치다못해 하도 갑갑한 심정이 있어 딱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쓴 것이다. 그래서 막상 그 글을 실을려고 생각해보니 그래도 어떤 입장을 떠나 좋은 글이나 새로운 시도를 과감히 수용하는 신문은 한국일보밖에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평소 교분이 두터운 부국장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12매로 줄여보내면 싣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 창문에 비가 죽죽 흘러내리는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만지기 싫은 글을 억지로 만져 팩스로 쳐보냈던 것이다. 그 줄인 문자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특별기고: 보다 진실한 해결
  나는 지금 한의과대학생이다. 대학생이라면 모름지기 공부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 나는 공부를 할 수가 없다. 왜냐? 11개나되는 한의과대학이 모두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교수,학생 할것없이 모두 격분속에 호곡하고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선 아무도 이사정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벙어리냉가슴! 하늘을 치고 땅을 치고 소돔의 멸망을 예언하는 자들의 울부짖음과 같다.
  뭐가 문제냐?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약국이라는게 있다. 그런데 약국에는 흰까운을 입은 약사님들이 계시다. 이들과 연상되는 것은 박카스, 아스피린, 스트렙토마이신...판도라상자같은 것이 수십개 꽂혀있는 한약장에서 구수한 할아버지가 지어주시던 첩약을 이들에게서 지어받는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 이 서양약리를 배우신 약사님께서 '한약조제'야말로 약사의 고유권한임을 포고하고 전면전을 선포한것이다. 처방, 조제, 판매, 약재유통업무까지 한약에 관한 모든 것이 서양약사들의 고유권한임을 전면적으로 주장하고 나온 것이다. 6공말기의 권력누수현상이었다. 한필준 보사부장관은 퇴임 이틀전 강력한 약사님들의 등쌀에 못이겨 도장을 찍어버리고 말았다. '약국에는 재래식 한약장외의 약장을두어 이를 깨끗이 관리하여야 한다'하는 약사법 제 11조 1항 제7호를 삭제시키는 시행규칙이 3월5일 관보에 공고되었고 그것은 4월5일부로 집행에 들어간다. 4월5일 이전 저지를 위해 나의 전국 4천여 학우들은 총파업에 들어갔다. 
  한의사들은 지금 약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약사들은 한의사들의 모든것을 앗아갈려고 한다. 한의학이 정규대학의 체제속에 6년제 메디칼스쿨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전 세계를 통털어 우리나라 하나뿐이다. 이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애써 이룩해온 독자적 장점을 살려나가도 모자르는 판에 죽일수야! 국가가 면허를 준 8천여명의 한의사가 엄존하고 4천여명의 한의과대학생이 모두 드높은 카트라인을 통과한 이땅의 수재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갑자기 닭쫓던 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방은 경험방일뿐이며 그때그때의 환자의 체질과 상태에 따라 증감이 있을 뿐이다. 학이라는 문자가 있다고 해서 모두 학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의학은 수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어 학문으로 인정될 수 없다. 한의사들은 약사가 한방에  관한 모든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지만 한약취급의 상당수는 민간요법에서 볼 수 있는 것이며 한약의 방제에 학문적 특수기술을 요하는 것이 없다. 약사야말로 한약을 개선하여 소위 한약의 과학화의 기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대한약사회의 공식주장이다. 
  '우리약사들은 한의사들이 우리가 한약을 다루는 것이 범법인냥 시민들을 오도시키는 불법행위에 비붕강개한다. 전통의학이라는 미명아래 한약의 과학적 발전을 저해하는 그들의 아집과 전근대적 행위를 규탄한다. 대한약사회는 질병을 치료하는 한약을 전문직능인인 약사들로 부터 탈취하고자하는 한의사들의 음해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 이것은 지난 3월15일에 나온 서울특별시약사회의 결의문이다.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무리 언어가 무기력한 시대라하지만 좀 너무하지 않은가? 
  현대자본주의사회의 집단행도의 궁극모티브는 권력투쟁일 뿐이다. 보편적 가치관을 지향하는 철학을 하는 내가 어느 한편의 이권을 대변할 수는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진리며 정도며 정직이다. 국가권력 체제속에 틀어있지 않았던 사회적 행위가 체제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체제속 고지점령의 전재의 한 패턴인 이 약사법개정운운문제는 한의학의 사회적 진하의 후진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한의학도들의 입장에선 멸시당해온 전통을 여기까지 버겨웁게 끌어왔는데 이제 피어날만하니깐 그 열매를 여기저기서 따잡수시려는 얌체족속들에 대한 서운감은 숨길 수가 없다. 전통적 약종상(한약업사)제도를 종료시킨것도 한의사드르이 실수에 속한다. 줄것을 줄줄 알았다면 오늘 이렇게 약사들에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의학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한약을 통해 국민건강에 이바지하고 싶어하는 많은 훌륭한 약사님들의 갈망을 보다 정직하게 충족시킬 수는 없을까?
  의과대학에 약학대학이 있듯이, 한의과대학에 한약학대학이 신설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 존립하는 4년제 한약재료학과에 일정자격을 부여해주어야한다. 현약사 중에서 한약업에 종사하고 싶은 사람은 한약학대학에 편입하거나 특수대학원코스(9 제이상)에 들어가 공부하여 자격을 딸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약사나 한의사나 같이 추구해야할 것은 한의학자체의 발전이요 이권의 강탈이 될 수는 없다. 나를 보라! 인체에 단한번 침을 놓는 과학적, 철학적 실험을 하고싶어 6년이라는 쓰라린 세월을 감내하며 이리하숙방에서 하루하루 눈물겨웁게 살고 있지 아니한가? 최소한의 도독성과 정도는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 약사법시행규칙 개정은 철회되어야 한다.
  원래 22매짜리 기고문제목은 '강하다고 약한자를 누를수야' 그랬던 것인데 제목이 적합한 것같지 않아 '보다 진실한 해결'이라고 바꾸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렸어도 그 글은 (한국일보)지면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대한한의사협회에서는 4월2일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공청회와 한의학수호결의대회를 연다고 부산을 떨면서도 나에게 일체의 사전연락이 없었다. 물론 내가 한의사가 아니기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허나 ㄱ런 공청회나 결의대회라면 대규모집회의 베테랑중의 베테랑인 나같은 사람에게 사전모의가 있을 법도하고 그것을 어떻게 운영해서 효과적으로 자기들의 주장을 사회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전략에 대한 상담도 있을만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다보다 답답해서 전화도하고 연락을 취해보니 그 집회의 담당이라는 여의사한분이 당신을 테레비취재용으로 써주겠다는 결례중의 결례가 되는 말만 함부로 내뱉길래 구역질이 나서 전화를 끊고 말았고 공청회고 뭐이고 나는 상종을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래도 기대해볼 것은 (한국일보)밖에는 없어서, 장부국장님께 슬쩍 전화를 드렸더니, 좋은 글인데 왜 안싣겠냐고, 단지 부산열차사고등 요즈음 지면이동이 심해 지연되는 것 뿐 아무 다른 외부압력이 있는 것이 아니니깐 기다려보라고 확답을 하시길래, 나는 그냥 기다리기로 하고 오늘내일 뒤적여 보았으나 4월5일 이전에 그 모습을 내비치지 않길래 그나마 한가닥 품었던 소망마저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그 ㄴ데 느닷없이 4월 11일 새벽같이 두환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났어요'
  읽어보니 한글자의 수정도 없었고 단지 '그것은 4월5일부로 집행에 들어간다'가 '들어갔다'로,'4월5일 이전 저지를 위해 나의 전국 4천여 학우들은 총파업에 들어갔다'가 '그래서 나의 전국 4천여학우들은 이의 저지를 위해 총파업을 하고 있다'로 수정되었을 뿐이다. 사실 한의학계는 이 글을 내준 한국일보에 크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결코 쉽게 나갈수 있는 글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4월12일 개인사정상 이리를 다녀와야만 했는데 차간에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약사님들의 반응이나 한의학계의 반응이나 참으로 한심하기가 그지없었고 나는 고독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18일전에 쓴 글의 느낌이 내 지금의 심정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울에 올라오는 길로 요번에는 (조선일보)에 한번 기고를 시도해 보리라 하고 다음과 같은 붓을 옮겼던 것이다.

    특별기고: 한의학을 없애 버립시다.
  면허라는 말이 있다. 허란 허락이란 뜻이요, 면이란 면제의 의미다. 면허란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행위를 허락하는 동시에, 그 특정한 행위로부터 면허를 허락하는 사람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면제시킨다. 즉 배제시킨다는 뜻이다. 그런데 인간세의 일반상식으로보면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내가 큰아들에게 놀러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해위가 반드시 큰아들이외의 둘째, 세째아들이 놀러가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면러하는 두글자야말로 근대국가제도서의 모든 원리를 함장하고 있는 것이다. 
  디스꾸르(discourse)이론을 제창한 불란서현대철학자 미셀 푸코는 근대사회의 권력구조의 특질을 배제(excluision)란 한마디로 갈파했다. 배제의 원리는 권력(authority)의 생성이다. 근대사회의 모든 권력은 배제라는 부정의 논리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하는 실체인 것이다. 배제를 강제하는 것은 법률이요, 배제의 제도적 실례가 면허며, 배제의 궁극적 주체는 국가다. 이 국가에게 배제의 권한을 부여하고 그 권한의 신뢰하에서 서로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질서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회정의의 근대적 본질이며 그것은 바로 민주국가의 본질인 것이다.
  자동차운전면허를 딴다는 것은 자도차며허소지자이외의 사람은 자도차를 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해서만 민주시민이 국가권력과 타협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면허를 소지한 자나 소지하지 않은자나 똑같이 자도차를 굴릴수 있다면 그런 면허는 딸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자도차를 완벽하게 운전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해도 면허가 없는 이상 자동차를 굴릴 수는 없는 것이며, 또 아무리 자동차면허소지자가 운전을 엉터리로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면허를 소지하지 않은 사람이 자동차운전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노리적 근거는 될 수가 없다. 그것은 실력(capability)의 문제가 아니라 명분(unctional specificity)의 문제며, 이 양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혼동될 수 없으며, 이것이 무너지면 사회정의도 국가체제도 다 무너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동차면허를 소지하지 않은 사람이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위법으로 간주되어 구속이 된다. 그런데 약사법에 '재래식 한약자외의 약장을 두어 이를 깨끗이 관리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엄존하는데도 불구하고 지난 13년간 약사들의 한약조제가 위법단속의 대상이 되질않았다. 그 첫째이유는 국가권력의 부패며, 그 두째이유는 민주사회의 묘한 특질주의 하나인 '다수의 폭력'때문이다. 4만(약사): 7천(한의사)의 께임의 승부는 결과를 점치는 수고를 요구치 않는다. 김영삼대통령취임 이틀전 보사부장관령 시행규칙으로 상기 제 11조 1항 7호 문항만 살짝 삭제시키는 집요한 전략에 성공함으로써 이제 4만 약사들은 한약에 관한 모든것, 문진에 의한 환자진찰, 한약처방, 조제, 그리고 한약유통업에 이르는 모든 것이 서양약학대학을 나오신 '실력있는' 4만약사들의 고유직능권한임을 온천하에 포고한 것이다. 
  나는 지금 일개 한의가대학생일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한의사들의 권익을 대변해야 할 만큼 궁색커나 옹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한으사들의 전근대성, 독선, 아집, 비리, 흐리멍텅함 등등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아는 것이고 누구보다도 내가 더 비판해온 것이다. 허나 이러한 논의가 약사들의 한약조제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하등의 근거가 될 수가 없다. 
  약학대학에서 본초를 몇학점배우든, 생약을 몇십학점배우든 그것이 한의사면허제도로서 규정되고 있는 한약조제의 권한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철학과를 다닌 내가 심리학개론을 배우고 인간심리에 관한 모든것을 통달했다해서 정신과의사가 환자에게 베푸는 유료시술행위를 할수 있겠는가? 약사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선 새로운 면허제도의 요구와 그 면허제도를 정당화시킬수 있는 새로운 제도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지금의 요구는 단순한 강탈이며 다수의 폭력일 뿐이다. 약사들의 한약조제는 위헌이다.
  전국 11개한의과대학생들은 3월말부터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이것은 수업거부가 아니다. 이것은 국가가 한의대싱이 업을 수하는 이유가 되고 있는 바로 그 권능과 권위를 부정하는데 대한 항의다. 이 부정이 철회되지 않는한 이들 4천한의대싱은 자퇴할지언정 학교로 돌아갈수는 없을 것이다. 도무지 내가 곰곰히 생각해보아도 더이상 한의과대학에서 이 어려운 학업을 계속해야할 이유가 없는것같다. 약사들의 한약조제를 국가가 허용하고자 한다면 유일한 해결은 한의과 대학을 폐쇄시키고 한의학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약사들의 전면광고 내용은 이러하다:'한의사제도가 언제까지 존속됩니까? 한약의 과학화는 약사가 이룩하겠습니다.'
  13일 낮에 이글을 조선일보사에 갖다주었는데 그날로 나에게 정확히 해답이 왔다. 이 글의 성격이 우리사회의 보편적 주제를 다룬것이라며는 부담없이 싣겠는데 역시 한의사를 두둔하는 결론이 유도되는 국부적 주제에 한정된 글이므로 싣기 곤란하다, 본사가 그러한 결론에 동조하고 있는듯한  인상을 주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픈 생각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우선 나는 일찍 정확하게 회답을 해준 것이 고마웠고 또 그렇게 신문사측에 민감한 느낌이 와 닿아있다면 나의 논리가 통할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보편적 주제며 이궈느이 대변이 아니다. 그리고 신문은 시민의 다양한 견해를 수용할수 있는 중립적 입장에 있으므로 약사측의 논변을 같이 실으면 될것이 아닌가? 허나 이런 논박을 다룰 어떤 가치성을 근본적으로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문사의 입장같았다. 나는 사실 이 글을 딴 신문에 실을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문장을 팔러 이리저리 다니는 꼴이 영 처량한듯 생각이 들어 체념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말 이글이 또 다시 신문에 나간다면 약사계는 크게 격발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어떤 폭력을 가해오는 우발적 사태가 있을지 보장이 없다. 그런데 나를 보호해주어야 할 한의학계는 씨렁퉁도 하지않는다. 그들은 조직력도 돈도 인재도 없고, 생각도 원자적이고, 나를 보호해줄 능력도 성의도 없다. 그런판에 나혼자 약사님을 잘못 건드렸다간 뼉다귀도 추리지 못할 것이다. 사실 공포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듀~통뼈도올이여!
  나는 이 책을 펴내는 것으로써 요번 약사법개정이니 한약조제권이니 운운하는 문제를 나의 의식속에서 종결짓고 더 이상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한의사들의 문제는 오로지 한의사들의 자체 의식과 능력에 의하여 대체해야만 할것이다. 그리고 약사님들도 더이상 나를 두려워할  이 없을 것이다. 더이상 죽일놈하고 이를 갈아봤자 자기잇빨만 갈리는 것이지 내가 갈릴 건덕지는 없겠다. 나는 단지 한의과대학생의 일원으로 학생회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겠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내가 약사님들께 부탁하고 싶은 진실의 한마디는 남겨야겠다. 요번약사-한의사 싸움은 당사자들의 주장이 어떠한든지간에 국민대중의 입장에서는 둘다 있는자들이요, 둘다 나쁜놈이다. 그래서 어떠한 명분을 내세우든지간에 현재는 있는자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밖에는 비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미사여구를 덧붙이든지간에 구극적인 사실이다. 도눔ㄴ제가 안걸려있으면 이렇게 치열하게 싸울리가 없고 이렇게 치열한 로비를 통해 장기전을 획책할 까닭이 없다. 
  그리고 나 개인의 입장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약사들의 한약취급을 반대하지 않는다. 약사들이 한약을 취급하고 싶어한다는 사실 자체가 한약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의한 것이며 그것이 분명한 임상적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 이러한 요구에 대한 약사들의 참여를 역으로 한의학의 발전내지는 한의학인구의 확대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내가 분명히 주장하는 것은 약사들이 한약을 취급할수 있는 정확한 명분과 그 명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사적이 아닌 공인된 훈련과정(disciplinary process)이다. 이러한 명분만 정확하다면 나 김용옥은 약사들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 한의사들과 싸울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대들의 양심과 내 양심이 모두 고백하는 것이지만 그대들에게는 현재 그러한 정확한 명분이 없다. 어떠한 논리를 세워도 그것은 억지춘향이요 제발저린 도둑놈 논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현재 이 약사법문제는 공식화되고 사회적 토론의 장으로 들어오고 여론화되고 사회화되면 될수록 약사들에게는 불리하다. 그 명분이 궁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사들은 조향하나를 슬쩍 떨궈버리고 법해석의 문제로 해결할려고 했던 것이며, 공식적 명분이 없기때문에 포지티브한 주장을 내세운 법조항을 첨가하여 당당히 담넘어가듯 슬쩍 넘어갈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구렁이 담넘어가듯 슬쩍 넘어가려고 했던 것인데, 한의사들이 펄쩍펄쩍 반발하는데다가, 아닌밤에 홍두깨식으로 김요옥이라는 놈까지 나타나 긁어부스럼내는 꼴이 되었다. 4월5일이 지나 문제가 다 끝난 줄 알았더니 이게 웬일이냐? 도올의 강빤찌가 신문에 등장하다니! 그렇게 치밀하게 로비를 다 해두어 별볼일 없는 하느이사놈들은 다 묵살시켜버린줄 알았는데 어쩌자구 도올이란 글쟁이까지 나타나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느냐! 이놈! 약사들의 차마 대놓고 퍼붓기 어려운 울화, 왜 도올인들 모를손가?
  양쪽 진영 다 쉽게 양보할일 같지를 않다. 약사들이 11조1항7호를 떨구기까지는, 느긋하신 한의사님들의 행보와는 달리 정말 치밀하고 은밀한 대규모의 조직적 음모로서 진행시켜온 거사인데, 그것이 외면적으로 합법적인 성공을 거둔 마당에 약사들이 과연 양보할리 있겠는가?(국민들이 알아야 할 것은 여태까지 지역약사회에서 한약장을 설치하지 않으면 신규약국개설허가를 안내주는 등의 조직적 방법으로 사회적 저변확대를 꾀하면서 법개정문제를 진행시켜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과저와달리 7천여며의 갈역한 성원을 가지고 있고 4천여명의 이 사회같이 맹숭맹숭 쑥맹이처럼 당하고 있을 까닭도 없다. 나 개인은 이런 싸움의 현실적 승부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 관심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나 개인의 관심은 학문 그자체에 있고 이궈눔ㄴ제가 어찌되든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내 현실적 판단으로는 현재 약사들의 사회적 파우어는 한의사에 비해 막강하며 또 인재의 축적도의 심도가 내 느낌으로도 말이 안될 정도로 훨씬 더 두텁다. 아마 한약문제가 완전히 개방되어 양쪽에서 다 자유롭게 연구하고 개발한다면 약사쪽이 훨씬 더 값있는 연구업적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약사업계가 그들이 원하는대로 한약조제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한약학대학의 창설은 고사하고라도 약학대학에 그런한 현실적 주장이나 요구에 부응하여 한약이나 생약에 관한 커리뮤럼이나 교수진이 확보되어왔어야 했을 것은 너무도 당염한 일이지만, 그 실상인즉, 약학대학내에서 조차도 한약관계 스태프들은 천시를 받아왔고 또 그런 학과목은 천대를 받아온 현실이라는 것을 약사 그대들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약학대학 교수님들의 99%가 서양의 순짜배기 케미스트리의 산물이며 그들은 유기화학, 무기화학, 정량분석, 정성분석, 유기분석 운운하는 순전히 분자식 따지는 사고밖에는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래서 한야그이 수치라든가, 한약의 효과를 미신시하거나 타부시하기만 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60년대에 비로소 뒤늦게 끼어들어온 본초학 학점 하나도 확충시켜달라는 그쪽의 스태프나 학생들의 요구조차 수용하지 않고 여태까지 버티어온 것이 바로 약학대학의 현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약사들 자신이 잘 알고있는 사실이 아니가? 따라서 약사들의 세계속에서도 '한약조제'운운하는 것에 대해서 그 의견이 엇갈려 있는 것이 그 정확한 실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약학대학에서조차 배척받는 한의학이 이다지도 약사법개정을 운운할 정도로 마치 약사계의 일치단결되 주장인것인냥 위장된 모습으로 여기까지 굴러오게 되었는가? 그것은 약학대학에서 한약을 '생약'의 이름으로 연구해온 결과가 아니라 단지 일선에 나온 약사들이 약국을 경영해보면, 약에 대한 일반백서의 인식구조가 자기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괴리가 있고, 또 서양약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의료보험제도의 대중화로 약국으로왔던 자질구레한 일반환자조차 직접 큰병원으로 가버리게 되어 파리 날리는 형국이 되어, 박카스나 쌍화탕 푼돈이나 긁어모으고 앉아 있자니 명색이 대학이나 나온 주제에 구멍가게 벌리고 있는 기분이 들어 결국 이 한약이라는 신천지로 뛰어 들게되는 일선 약사들의 인구가 급증하는 현상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약조제나 재래식 한약장운운하는 사람들은 약학대학에서 배운 생약학이나 본초학 지식에 의하여 지금 처방, 조제를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적 관심을 갖게 일선 약사들의 자에모임 조직(스타디 그룹)속에서 어느정도 학습을 거친 결과로 운운하는 것이고, 또 한약이라는 것이 어찌되었든 그 성격상 조금만 관심을 갖고(방약합편)만 들척여도 누구든지 흉내는 낼수 있데 되어있는데다가, 양약이라는 것이 감기조차 해결할 수 없는때가 많다는 현실(바이러스에 도대체 무슨 양약이 있는가? 이런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아닌가?)의 자각이 더욱 더 간절히 생겨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열이라는 개념을 하나 들어봐도, 서양인체론에 있어서는 겨드랑이에 끼는 체온계수치밖에는 없는데, 도무지 몸에서 열은 펄펄나는데 어떤 자는 업다고 옷을 다 벗어제치는가 하면 어떤 자는 춥다고 이불을 층층으로 울러싸도 춥다고만 덜그럭 덜그럭 이를 떨뿐이니, 도무지 이런 현상을 체온계하나 해열제하나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 표열과 이열이 다르고, 사지궐냉과 뱃속이 찬것이 다르고, 간열, 폐열, 비열, 산열, 소장열 다르고 대장열 다른 판에, 한약에 재미를 붙여보니 헤어날수 없이 오묘한지라 사생결단 달려붙게 마련인 것이다. 약사임상생약연구회니 약사한방연구회니 약사한약연구회니 하는 단기, 장기코스 스타디조직이 서울에만도 40여개가 넘고 전국적으로 지금 60여개가 넘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한약조제권을 운운하는 약사법개저의 궁극적 근거는 약방차린 임상가들의 도호인 모임이요, 이들이 결사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결국 박카스 백병팔 수고를 한두개의 첩약으로 때워버리는 요묘한 금전의 마술을 포기할 수 없다는 현실의 문제때문인 것을 누구인들 거짓말로 후려댈수 있겠는가?
  사실 약사들이 서의사들과 관계에서도 쟁취해낸 '조제권'이라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것이며, 도무지 우리나라처럼 일반약국에서 아무나 항생제를 사먹을 수 있고 아무나 직접 약사에게 의사처방없이 조제받아 먹을 수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요상한 것이다. 약사들에게는 '민관식'이라는 세글자가 '성인'이라는데, 사실 이것은 과고 우리나라 의료행정의 비젼없는 변태적 운영의 결과며 결국 무분별한 파우러 폴리틱스의 부패상에서 연유된 것이다. 도대체 보사부직원의 75%가 약사출신이고 또 한의사출신직원은 단 한명도 없는 데다가 서의사들조차 약사들이라며는 고개를 휘휘 젓는 현실은 민관식이라는 거륵한 파우어맨을 중심으로 휘둘러온 과거 정치로비행태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역사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실 약사들은 해방후 대한민국 의료문화의 무법자며 마피아인 것이다. 그 숫자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막강한 서의를 쳐부신 경력이 있는 약사회가 지금 동의가 꿈틀거린다고 발밑에 밟힌 지러이새끼만도 신경쓸 까닭이 없다. 사실 께임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래서 나는 한의사들에게 아무런 기대조차 걸지를 않는다. 그 마피아조직을 쳐부실만한 여력과 성의나 조직력이 보이질 않는다. 허나 어찌됐던 약사들도 건드리지 않아도 될 것을 고연히 건드려 덧부스럼을 만든 격이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한의학계도 대대적인 각성과 새로운 조직력이 잉태될 것으로 보인다. 
  야갓들이 조제권을 따게되었고 매야그이 범위를 비상식적으로 넓혀놓게되 역사적 계기는, 의사들이 너무 성급하게 전문화 일변도로 치달았기 때문이었다. 일반백성이 의료문화와 첫접촉을 가지는 창구가 전문의일 필요가 없다. 우리 아버지때만 해도 의사라는 개념은 지피(general practitioner)일 뿐이었고 우리아버지가 한 짓은 지금 종합병원이 하는 모든 짓을 축약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아버님도 전문의제도가 생기면서 전문의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우리아버지같이 위대한 의사를 다시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골절치료부터 회위난산까지,그리고 작은 수술부터 큰 수술까지 못해낸 것이 없었고 참으로 사고율이 적었던 명의중의 명의였다. 우리아버지같은 사람들이 지피로서 청진기 한들고 축적한 체험의 깊이는 지금 의사들은 상상 조차도 못하는 세계다. 지금 말하는 전문의는 3차 의료기관에서나 필요한 것이지 1차의료기관의 기능은 아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나라 의료문화에서 6, 70년대 이 지피가 사라지면서 그 지피(일반의)에 해당되는 제1차 으료기관의 기능을 약국의 약사들이 대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웬만한것은 일차적으로 약국에서 다 해결하는 것이 우리나라 의료문화의 특색이 되었고, 그것도 또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가격의 저렴성과 절차적 단순성때문에 환영받는 제도가 되었다. 병원보다는 약국이 문턱이 낮으니 나부터라도 낮고 쉬운 곳부터 가게되는 것은 인지상저이요, 또 이러한 의료문화형태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실상 약진분리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는 미국에 살면서 나느 한국의 약국제도가 얼마나 편리한 것인가 생각케되었고, 또 한국의 약방이 그지없이 그리웠다. 미국의 드럭스토아라는 것은 우리나라 문방구, 구멍가게에다가 무좀약이나 알카셀처 같은거 몇개 갖다놓은 것이다. 그리곤 의사들의 건위와 횡포에 시달려야하니 올라가는 것은 블루클로스, 블루쉴즈 보험료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멘! 인간세상에 도대체 이상적 제도가 어디 있을까보냐? 허화 실, 장과 단이 공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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