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사고
차례
첫째 마당
사람은 왜 '왜?'라고 물을까요?
인간은 '왜'를 묻는 존재
논리는 '이성의 지팡이'
'논리'는 새로운 시대의 생존 원리
대학 공부--이해와 평가
비판적 사고
먹은 것으로 무엇을 만드는가?
우리는 모두 자동판매기?
"따지면 말대꾸한다고 야단치는데요?"
연습 문제
둘째 마당
논리를 단숨에 배울 길은 없나요?
'입증 책임'은 논리의 모든 것
논리적 웃음?
계속 '왜?'라고 물어라!
'원인'과 '이유'
살아 있는 지식
믿음과 확신
연습 문제
셋째 마당
여러 가지 추리들
우리는 언제나 논증을 제시한다?
'특수 사실'과 '일반적 사실'
'경험'과 '지식' 그리고 '추리'의 관계
귀납 추리
가설 추리
자연 법칙
현상
세계 탐구와 지적 호기심
연역 추리
'증명'과 '설명'
현상을 설명하는 '가설 추리'
공부를 잘 하는 법--물고 늘어져라!
현상과 가설 가려내기
가설의 설명력
지식의 확장과 세계의 이해
연습 문제
넷째 마당
논증을 찾아라!
논증 없이 받아들이는 주장
가설적 '사실'의 기술
사실도 가설이 된다!
' 때문에' 때문에 속지 말라!
주장들간의 관계를 살펴라!
'논증'을 분석한다?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
논자의 입장을 생각하는 '자비의 원칙'
푸주 주인이 적용한 '유일한 가설'
가설과 사실을 혼동하는 오류
연습 문제
다섯째 마당
재구성하여 평가해 보자
인쇄된 글자들의 유혹
서툴지만 스스로 평가하라!
광화문 네거리를 막고 물어 봐!
논증의 평가를 위한 재구성
'숨은 전제'를 찾아라!
'논술'과 논증의 평가
일기 쓰기와 연애 편지 쓰기가 논술의 비결?
'소극적인 평가'와 '적극적인 평가'
살아 있는 글 쓰기
고마움을 모르는 학자
연습 문제
첫째 마당
사람은 왜 '왜?'라고 물을까요
달래:선생님, 저는 '달래'라고 합니다.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논리를 공부하게 되어
기쁩니다.
철학 교수:그래, 나도 기쁘구나. 달래는 예쁘기도 하지만 여학생답게 인사성도
밝구나. 그런데 바우는 별로 내키지 않은가 보지? 남자라고 해서 반드시 무뚝뚝해야
하는 건 아닐 텐데?
바우:선생님, 저도 물론 대학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논리를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는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 외에 논리를 별도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선생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솔직히 저는
입시만 아니면 논리 공부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은 '왜?'를 묻는 존재
철학 교수:바우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그러나 '오직 대학입시 때문에
논리를 공부해야 한다.'는 바우의 생각은 잘못이야.
바우:왜 잘못이에요?
철학교수:글쎄..., 모르겠는데?
바우:아니, 이유도 모르시면서 제 생각을 비판하실 수 있으세요?
철학 교수:그래? 이유를 모르고 비판하면 안 되나?
바우:그렇습니다.
철학 교수:왜 이유를 모르고 바우의 생각을 비판하면 안 되지?
바우:그건...
철학 교수:바로 그거야. 지금 바우는 '오직 대학 입시 때문에 논리를 공부하는
것이다.'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야. 우리가
논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대학 입시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이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야.
부조리극인 '고도를 기다리며'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어느날 파리 노상에서
낯선 청년의 칼에 찔려 병원으로 실려 갔어.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그는 내내
궁금했어. 그 낯선 사내는 왜 나를 찔렀을까? 정신 이상자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드디어 그는 경찰에 붙잡혀 온 그 사내를 만났어. 그런데 그는 미치광이가
아니었어. 그는 "왜 나를 찔렀소?"라는 베케트의 질문을 받자,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어.
베케트는 이 대답을 듣고 미칠 것 같았어, "차라리 무슨 이유를 댔더라면, 그
이유가 아무리 황당한 것이라 해도 나는 오히려 편안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최소한 '이유'를 가진 것이니까. 그런데 모르겠다니, 이 무슨 어이없는 대답인가."
부조리극의 작가인 베케트는, 역설적이게도, 그 청년의 부조리한 대답에 충격을
받았던 거야. 이 점이 중요해. 삶의 부조리성을 고발한 작가가 청년의 부조리한
답변에 박장대소하는 일이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왜 그는 어이없어 했을까?
달래:인간은 '왜?'를 묻는 존재이고,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철학 교수:그래. 인간 외에 어떤 존재도 '왜'라고 묻지는 않아. 나무는 도끼에
찍히면서도 그저 찍힐 뿐, '왜 나는 사람들의 도끼에 찍혀야 하는가?'라고 묻지 않지.
논에서 쟁기를 끄는 소도 '왜 나는 이렇게 힘들게 일해야 하는가?'라고 묻지 않고
그저 쟁기를 끌 뿐이야. 그런데 인간은 항상 '왜?'라는 물음을 던지고, 이 물음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답을 알아야 마음이 편해지는 존재이지.
달래:그럼 '왜?'라고 물을 줄 모르면 인간이 아닌가요?
철학 교수:맞았어. '왜?'라고 물을 줄 안다는 것은 인간이 되기 위한 필요 조건이기
때문이야.
논리는 '이성의 지팡이'
바우:그렇지만 '왜?'를 묻는 존재라는 것과 논리와는 무슨 관계가 있지요?
철학 교수:매우 깊은 관계가 있어. '왜?'라고 물었을 때, 어떤 이유가 제시되었다고
해. 이 경우 우리는 아무 이유나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제시된 이유가
정말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가 되는지 판단해야 하는데, 이 때 '판단의 기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논리이거든.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고, 논리는 '이성의 지팡이'라고 할
수 있어.
달래:논리가 '이성의 지팡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철학 교수:이성이 제 역할을 하자면 논리가 앞에서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뜻이야.
달래:논리가 어떻게 이성을 이끌어 주지요?
철학 교수:이성은 끊임없이 계산을 하는데, 그 계산의 원리는 논리야. 달래가
학교에 가려고 집을 막 나서는데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어. 그럼 달래의 이성은
즉각적으로 계산을 시작하지. 구름의 색깔, 높이, 공기의 습도 등에 대한 데이터를
놓고 이성은 계산을 하지.
"하늘이 저 정도로 흐려 있으면, 비가 올 가능성이 많아. 그러니 우산을 가지고
가는 게 좋겠어."
지금 당장은 비가 오지 않아도 이러한 계산에 따라 달래는 우산을 챙겨 들고
가겠지?
바우:그렇지만 인간의 본질과 그렇게 깊은 관계를 가질 정도로 논리가 중요하다면,
왜 이제 와서야 새삼스럽게 논리를 강조하는 것이지요?
철학 교수:사실 그 점이 우리 나라 교육의 문제였어. 지금까지의 교육은, 마치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시키듯, 학생들의 머리에 단편적인 지식을 입력시키는
것이었어. 데이터 저장 능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컴퓨터를 따라갈 수 없는데도
말이야.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어, 그리고 이 시대의 변화가 우리 나라 교육을
변화시키고 있어. 과거와는 달리 우리 시대는 합리주의와 과학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시대거든.
이러한 시대 정신과 이념들의 핵심은 바로 논리야. 따라서 이제 논리는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살기 위한 모든 사람들의 생존 원리가
되었어.
'논리'는 새로운 시대의 생존 원리
달래:논리가 '새로운 시대의 생존 원리'라는 말씀은, 앞으로는 논리를 알아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뜻인데, 정말 그런가요?
철학 교수:원시 시대의 생존 원리는 무엇이었지? 물리적 힘이었어. 거친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다른 부족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육체적인 힘이 필요했을 거야.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
어느날 사자가 입을 벌리며 양에게 물었습니다.
"내 입에서 무슨 냄새가 나지 않나 맡아 보게..."
그러니까 양은 가까이 코를 대보더니,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라고
대답하였지요.
그러자 사자는 버릇없는 놈이라고 그 양을 잡아먹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늑대에게
물었습니다.
"내 입에서 무슨 냄새가 나지 않나 맡아 보게..."
그러니까 늑대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면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지요. 그러자 사자는,"이 간사한 놈이 내 맘에 들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구나."하면서 늑대를 잡아 먹었어요.
다음에는 여우에게 물었습니다.
"내 입에서 무슨 냄새가 나지 않나 맡아 보게..."
그러나 여우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자님, 저는 감기 때문에 맡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달래:양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생존 원리가 아닌 상황에서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잡아 먹혔군요.
바우:그리고 늑대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 생존 원리가 아닌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잡아 먹혔고요.
철학 교수:그렇지. 그런데 여우는 살아 남을 수 있는 새로운 원리를 생각해 낸
거지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어. 우리는 더 이상 우리끼리만 살아갈 수가 없어.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거야. 그래서
이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해서, 더 나아가 이 시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논리로
무장할 필요가 있어. 이 시대의 '사자'는 매우 합리적이거든.
논리가 강해야 경제도 발전시킬 수 있고, 세계의 일류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어. 정부 당국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게 되었고, 그래서
암기력보다는 논리를 이용한 비판적 사고력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교육을 전환시킨
거야.
바우:선생님, '오직 대학 입시 때문에 논리를 공부하는 것이다.'는 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에게는 대학 입시 때문에 논리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희들에게는 인간의 본질을 지키는 것보다는
대학 입시를 치러야 하는 현실이 더 절박합니다. '수염이 다섯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철학 교수:알겠어. 너희들이 논리를 공부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대학 입시
때문이라는 말은 맞아. 그러나 대학 입시에서 논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현실적인 이유'를 알지 못하고서는 공부의 방향이 빗나갈 수 있어.
달래:그럼 그 현실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철학 교수:그건 대학 입시의 정신이 대학 교육의 본질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전에는 대학 입시가 고등학교까지의 교과 내용을 얼마나 잘
습득했는가를 알아보는 데 중점을 두었어. 곧, '학업 성취도'를 측정하는 것이었지.
그러나 이제는 대학 입시가 대학에서 학문을 연구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아보는
데 중점을 두게 되었어.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아?
바우:그럼 '대학 수학 능력 시험'만 보면 되었지 왜 또 논술 시험을 보게 하지요?
대학 공부--이해와 평가
철학 교수:그건 대학 공부의 성격과 깊은 관계가 있어. 물론 너희들이 대학에
진학하면 스스로 알게 되겠지만,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지식의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지식의 생산자가 되어야 하거든.
대학 공부는 크게 네 가지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어. 강의 듣기, 독서, 토론, 논문
쓰기, 이렇게 말이야. 그런데 이 네 가지의 활동은 고등학교 때의 공부 방법으로는
해낼 수가 없어.
바우:암기만으로는 안 되고 논리를 알아야 한다, 그 말씀이시군요.
철학 교수:맞는 말이야. 그렇지만 왜 논리를 알아야 대학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
바우:그야..., 당연히...
철학 교수:'이해'와 '평가', 이 두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해.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어떤 이론을 소개할 때, 학생들로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강의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 하면서, 또박또박 받아 적었다가 시험에 대비해 암기하고, 시험이
끝나면 다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공부해서는 당연히 안 되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교수님이 소개하는 이론의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해. '이해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이론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씨름해야 돼. 그것도 수없이 많은 이론들의 정체를
말이야.
이론의 구조를 이해한 다음에는 그것을 평가하는 단계로 넘어가지.
고등학교까지의 공부는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하지만, 대학에서는 달라. 교수님이 소개하는 이론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받아들이는
것은 학문하는 자세가 못 돼.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이처럼 '이해'와 '평가'는 '대학 공부'라는 수레의 두
바퀴 같은 것으로서, 그 어느 쪽이 조금만 기울어도 대학공부는 성공할 수 없어.
그런데 이해와 평가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의 듣기, 독서, 토론, 논문
쓰기 등의 학문 활동에서 늘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해.
비판적 사고
철학 교수:비판적 사고는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트집을 직고 나무라는
방식의 사고가 아니야. 비판적 사고는, 아무리 그럴 듯한 주장, 사상, 이론, 이념,
통념, 상식일지라고, 일정한 평가의 기준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하고 평가하여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사고 방식을 말해.
바우:왜 그렇게 힘든 일을 해야 하지요?
철학 교수:삶은 생각의 소산이기 때문이야. 우리는 우리 안으로 끊임없이 유입되는
정보를 가지고 세계관과 가치관을 형성하지. 그리고 세계관을 지도로 하고 가치관을
나침반으로 하여 미지의 세계 속으로 나아가. 따라서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가진
세계관과 가치관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어,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가에 따라 출력되는 미래가 달라지는 거야.
바우:'출력되는 미래'라니요?
먹은 것으로 무엇을 만드는가?
철학 교수: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커피가 나오지? 왜 동전을
넣었는데 커피가 나오는 것일까?
바우:그건 자판기가 그렇게 설계되었기 때문이지요.
철학 교수:맞아. 자판기는 튜링(turing) 기계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원시적
수준의 컴퓨터야. 자판기는 설계사가 프로그램 하여 넣은 알고리즘에 따라 어떤
종류의 입력이 주어지면 어떤 종류의 출력을 실행하도록 되어 있는 비교적 간단한
기계야.
그런데 입력된 정보를 처리하는 내부 메커니즘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출력이
결정되는 예는 자판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어. 옛날 시계의 경우 태엽을 감아 놓으면
바늘이 움직여 시간을 알려주지. 기계적 메커니즘의 전형적인 예야. 토양과 묵과
햇볕만 있으면 도토리는 참나무로 자라지. 남녀가 사랑을 '입력'하면 놀랍게도
새로운 생명이 '출력'되어 나오고. 생물학적 메커니즘 덕이지.
먹은 것을 꿀로 만드는 벌도 있고, 거미줄을 만드는 거미도 있어. 사람은 어떤가?
카잔차키스의 '회랍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하는 말을 들어볼까?
"인간이란 얼마나 이상한 기계입니까!' 하고 그는 놀라는 듯이 말했다. "그에게
빵과 물과 물고기나 홍당무 따위를 가득 먹여 놓으세요. 그 속에서 한숨과 웃음과
꿈이 쏟아져 나올 겁니다. 공장 같다니까요. 유성 영화가 우리 머리 속에서 틀림없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조르바도 내부 메커니즘의 중요성을 알았음이 분명해. 그는 입력된 것으로 무엇을
출력시키는가에 따라 인간의 본질(사람됨)을 알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야.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 말해 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나는 알아맞출
거예요. 어떤 사람은 먹은 음식을 비계와 비료로 만들고, 어떤 사람은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그리고 또다른 사람들은 내가 듣기로는 그걸 하느님에게 돌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꼭 세 가지 인간이 있다는 말씀이죠."
바우:나도 먹은 것으로 비료를 맞드는데...(머리를 긁적거린다.)
철학 교수:조르바의 인간론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고, 우리의 관심사인 비판적 사고
능력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많아. 물론 사고나 행위의 수준을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의 종류가 꼭 셋만 있는 것은 아닐 거야.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입력된
것으로 어떤 사고와 행위를 출력하는가를 보아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맞출 수
있다는 거야.
달래:사람을 자판기로 비유한 것이 재미있어요.
바우:내가 모든 시험 문제에 만점 답안을 출력시키는 자판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모두 자동판매기?
그럼 구체적으로 인간 자판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볼까? 다음은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 나오는 한 구절이야.
공원 안도 입구도 온통 사람으로 붐비고 있어서, 나는 장님의 모습을 금방 찾아낼
수가 없었다. 아니, 보였어도 혼잡 때문에 그의 모습을 얼른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나는 순간 나의 상상이 전혀 무가치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비참은 드러난
그대로 어떤 거리낌이나 아무런 공상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나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그의 몸이 이렇게 기울어져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눈꺼풀 속에서 끊임없이 전해지는,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공포도 나는
전혀 몰랐다. 배수구처럼 움푹한 입술을 나는 생각해 볼 수 있었을까? 아마 그도
여러 가지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속에 전해지는 것은
날마다 어루만지고 있는 등 뒤 석벽의 형체 없는 감각뿐이다. 나는 무심결에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나는 거의 동시에 이런 모든 것을 관찰하면서 그가 여느 때와는
다른 모자를 쓰고 외출용 넥타이 같은 것을 매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노랑과
보라의 사각형 무늬가 비스듬히 흐르는 넥타이였다. 모자는 초록빛 리본을 두른
싸구려 새 맥고모자였다. 물론 하나 하나의 이런 색채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다만 내가 여기서 반드시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이 모자와 넥타이가 그의 인상
중에서, 작은 새의 복부에서 가장 보드라운 깃털처럼 애처롭게 보였던 점이다. 그는
그런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누가 이러한 치장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오 하느님, 하고 나는 불현듯 솟아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당신은 역시
'존재'하십니다. 당신의 존재를 증명할 증거는 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모두 잊어버렸고, 그것을 상기하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존재를 확증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짐을 짊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저는 당신의 증거를 본 것입니다. 장님에게 모자와 넥타이를 주는 것,
이것이 당신의 취향이며, 당신은 또 이런 일에 만족하십니다. 우리는 꾹 참고 견디는
일, 경솔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것이 괴로운 일일까요?
어떤 것들이 즐거운 일일까요? 그건 오직 당신만이 알고 계십니다. 다시 겨울이
오고, 제가 새 외투를 입어야 할 때, 하느님, 그 외투가 새것인 동안만이라도 저
장님처럼 제가 그것을 입도록 해 주소서.
말테는 공원을 산책하던 중 한 장님을 만나지. 장님의 모습이 말테의 머리
앞부분에 있는 '전두엽'이라는 대뇌의 작업장에 입력된 거야. 전두엽은 컴퓨터로
말하자면 '램(RAM)' 영역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입력된 정보와 대뇌로부터 불려 온
정보를 놓고 여러 가지 정신적인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지.
말테의 전두엽에 장님에 관한 정보가 계속 입력돼. 그는 전두엽에 입력된 장님의
자세, 눈, 입술에 관한 정보와 관계된 것으로서, 그의 대뇌 다른 부분에 저장되어
있는 '정상적인 사람'에 관한 정보 파일을 전두엽으로 떠오르게 하여 비교하지.
그리고 장님을 자기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비참하다고 판단해
그런데 말테의 전두엽에 장님의 '초록빛 리본을 두른 싸구려 새 맥고모자'와
'노랑과 보라의 사각형 무늬가 비스듬히 흐르는 넥타이'에 관한 정보가 입력돼.
그리고 그는 대뇌에서 '장님 파일'을 불러와 검토한 후 그러한 차림은 장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작은 새의 복부에서 가장 보드라운 깃털처럼'
애처롭다고 느끼지.
그러나 말테는 갑자기 어떤 감동을 느끼게 돼. 그리고 그러한 장님의
차림새야말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추리하지. 그 하느님은 장님에게
그러한 모자와 넥타이를 주는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러한 일에 만족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거야.
더 나아가 말테는 전두엽에서 진행된 장님에 관한 판단의 변화로부터 하나의
교훈을 추리해 내. 겉모습만 보고 경솔하게 판단해서는 안되며, 어떤 것이 괴롭고
어떤 것이 즐거운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거야.
그리고 말테는 자신도 하느님의 취향과 만족에 걸맞은 일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해.
"다시 겨울이 오고, 제가 새 외투를 입어야 할 때, 하느님, 그 외투가 새것인
동안만이라도, 저 장님처럼 제가 그것을 입도록 해 주소서."라고 말이야.
달래:말테는 매우 예민한 자판기군요.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들인데...
철학 교수:말테는 예민한 '논리적 감성'을 가진 사람이지. 물론 이 능력은
'이제부터는 비판적으로 사고한다!'고 선언해서 생기는 게 아니야. 또한 비판적 사고
능력은 열심히 암기하여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논리를 잘 하면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러나 논리를 전혀 공부하지 않아도 기본 원리만 알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 게 비판적 사고야.
사실 오늘날 우리 인류가 이루어 놓은 과학 문명과 정신 문화는 '왜?'라는 물음을
던지고 답을 추구한 비판적 사고인들이 이루어 놓았다고 할 수 있어. 교과서에 적힌
것을 열심히 암기하여 지식의 창고를 살찌게 할 필요는 있겠지. 그러나 '교과서에 써
있는 진리'일지라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달리 생각해 보지 않고서는 원칙적으로
발전이란 있을 수 없어 더욱이 대학 공부는 기존의 사상과 이론에 도전하는
'반체제적' 학문 정신을 필요로 하거든.
달래:대학 공부는 어렵기도 하겠지만 재미도 있겠어요.
"따지면 말대꾸한다고 야단치는데요?"
바우:그렇지만 선생님, 비판적으로 사고하자면 뭔가를 자구 따져야 하는데, 그러면
어른들은 말대꾸한다고 야단치잖아요! 실제로 아버지는 저에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시며 둥글둥글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거든요.
철학 교수:바우 말이 전혀 들린 건 아냐. 옛날 이야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지.
어떤 노인 한 분이 성품이 순박하고 매사에 둥글둥글하게 대하니, 뜻이나 말이나
행동에서 남과 맞지 않아 다투는 법이 없었다. 하여 백발의 노인이 되었지만 일찍이
누구와 시비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급히 찾아와 이르기를 , "오늘 아침 남산이 다 무너졌으니
큰일입니다."고 하자 노인은, "그럴 거야. 몇 백년이나 오래된 산이니, 그게 무너진다
해도 그럴 수도 있는 일이야. 괴이한 일은 아니지." 하고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 말은 들은 다른 사람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산이 늙었다고 해서 함부로
무너질 까닭이야 없지요."하고 이의를 내세우자 노인은, "그대 말도 옳아. 산이란
위는 뾰족하나 밑은 넓고 또 바윗돌이 서로 엉키어 있으니. 틀림없이 무너질 염려는
없지."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또 한 사람이 달려와서, "참으로 괴이한 일이 생겼습니다."하고 황망한
소리로 말하니 노인은, "무슨 일인가? 차근히 말하게."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소가 쥐구멍에 들어갔다니 이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당혹함을 보이자, "자네의 말이 거짓이 아닐 거야. 소란 놈은
성품이 볼래 우직하지. 비록 그것이 쥐구멍일지라도 돌진할 게 틀림없지."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이 너무도 답답했던지, "그런 이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소가 제 아무리 우직하다지만 어떻게 쥐구멍을 뚫고 들어간단 말입니까?" 하고
목청을 돋구니 노인은, "자네 말도 일리가 있어. 소는 우직하지만 두 뿔이 있어서
그게 거추장스러우니 쥐구멍엔 들어갈 수 없을 거야." 하는 것이었다.
이에 거기 몰려 있던 사람들이, "영감님, 어찌 그렇게 성실치 않은 말씀을
하십니까. 어불성설의 말을 이도 저도 모두 옳다하니 그 무슨 연고입니까?" 하고
일제히 노인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인이,"이건 내가 이렇게 늙기까지 심신을
편안히 가지는 비결이니 만큼 웃지들 말게. 난 이로써 다툼을 잘하는 자를 경계하는
것이네."하고 대답하니 그를 비웃던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다.
철학 교수:우리는 이렇다 할 결론에 도달할 수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거나 다투는 경우가 많아. 더구나 논쟁 끝에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라도 그 결론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닐 경우가 많고. 그래서 논쟁이나 다툼은 시간과 정력만을
낭비하게 할 수 있어. 따라서 그러한 논쟁이나 다툼을 피하여 심신을 편안히
가지려는 노인의 자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삶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은
자세로 볼 수도 있어.
그렇지만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논쟁과 다툼을 피할 수 없다는 거야. 노인의
경우를 놓고 보더라도, 어불성설의 말을 이도 저도 다 옳다 했다고 늘 바라는 대로
심신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거든, 어불성설의 말을 이도 저도 다 옳다 하면 우리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며, 이 경우 심신은 오히려 병이 들 수 있어. 노인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사람에게, "자네 말도 일리가 있어. 누구나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기
마련이니까." 하고 태평스럽게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무시해도 좋을 일을 놓고 시간과 정력을 바쳐 논쟁하고 다투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지.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의 경우에는 시간과 정력을 아끼지 않고
시비를 가릴 것은 가려야 하는 거야.
옛날 옛적에는 노인의 처세술이 바람직한 것일 수 있어. 그 때 사람들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을 터이니 말이야. 그들이 '논증'이라는
말을 들어나 보았을까 생각해 봐. 나아가 설사 그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방법을
알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소용없거나 오히려 화근이 되는 수도 있었을 거야.
지금도 노인과 같은 처세술은 유용한 경우가 많겠지. 그러나 두루뭉실한 것이
항상 최선일 수는 없어. 더구나 요즘엔 두루뭉실해 가지고는 낭패보기 십상이야.
심신을 편안하게 갖기 위한 노인의 처세술은 더 이상 심신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이솝 우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지?
사자와 나귀가 같이 사냥을 떠났습니다. 사자는 힘이 세고 나귀는 빨랐으므로 몇
마리의 짐승을 잡았습니다. 사자는 그것을 세 몫으로 나눠 놓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 몫은 임금이자 제일인자인 나의 것이다. 그리고 둘째 몫은 너의 협력자로서
애쓴 값으로 나의 것, 그리고 셋째 몫, 이것도 내 몫이다. 너는 일찌감치 다른 데로
꺼지는 것이 좋겠어! 아니면 너는 불행해질는지도 몰라!"
이렇게 당하면서도 "임금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하고 굴복하는 시대는
지났어. 대통령일지라도 잘못이 있으면 국민이 나서서 지적하고 또 그래야 하는
시대인 거야.
지금까지 진행된 이야기를 정리하고 마무리를 짓도록 하자. 논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바우가 요약해 볼까?
바우:대학 입시 때문만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철학 교수:그 말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 말이 핵심은 아니지?
달해:첫째,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고, 논리는 이성의 지팡이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논리는 새로운 시대의 생존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우:셋째, 대학 공부의 핵심인 이해와 평가를 잘 하기 위해서는 논리를 이용하여
비판적으로 사고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학 입시의 논술 고사는 바로
이러한 능력이 있는지 평가하는 것입니다.
달래:바우, 넌 말끝마다 대학 입시구나!
바우:맞았어. 대학 입시는 우리 청소년들의 악몽이거든. 난 지금 악몽을 꾸면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선생님, 우리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논리를 단숨에
해치우고 싶습니다.
달래:바우, 너 급하다고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는 격이로구나.
철학 교수:그래. 논리는 단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논리의 체계를 배우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그 체계를 호흡하듯이 자연스럽게 응용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연습문제
[01]
'오직 대학 입시 때문에 논리를 공부하는 것이다.'는 바우의 생각을 이유도 모르고
비판하는 것은 왜 안 되는 것일까? 그 이유를 말해보자
[02]
우리는 태엽의 힘으로 움직이는 장난감 오리를 '이성적 존재'라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보자
[03]
논리를 공부해야 할 본질적인 이유와 시대적인 이유,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보자
[04]
대학에서 공부를 잘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해'와 '평가'라는 수레의 두 바퀴가
균형을 이루어 잘 굴러가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왜 그런가? 왜 이해를 할 줄
모르면 안되고 평가를 할 줄 모르면 안 되는가? 차근차근 말해 보자
[05]
일반적으로 사람은 어떤 일에 칭찬을 받고 어떤 일에 비난을 받는가? 사무엘
베케트를 쏜 청년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놓고 생각해 보자
[06]
왜 논리가 비판적 사고의 틀인지 생각해 보자
[07]
다음 글을 읽고 입력된 정보를 처리하여 출력을 시행하는 '나'의 내부 메커니즘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날마다 내가 그 앞을 지나다니는 석고상 가게의 입구 옆에 두 개의 마스크가 걸려
있었다. 하나는 시체 안치소에서 본을 떠온 익사한 젊은 여자의 얼굴인데, 당당한
미인으로서 얼굴에는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자신도 미소의 아름다움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은 허식적인 웃음이었다. 그 마스크의 바로 밑에 그의 예지에 넘치는
얼굴(악성 베토벤의 마스크)이 있었다. 아주 야무지게 전신의 감각을 매듭지은 듯한
얼굴, 끊임없이 발산되어 가는 음악을 사정없이 붙들어매어 꽉 응결시킨 듯한 얼굴,
그 자신의 내무의 소리만을 듣게 하려고 하느님이 일부러 귀를 막아 버린 음악가의
얼굴이었다. 잡음의 혼탁과 허약에 휩쓸리지 않게 하려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었으리라. 그의 마음에는 소리의 드맑은 음색과 지속만이 있었다. 이제 소리를
잃어버린 그의 감각은 소리없는 무섭게 긴장된 단 하나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세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겨우 소리를 형성하려고 하는 세계만을 그의 내부에
가져다주리라.(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08]
자신은 먹은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앞으로 10년
후 먹은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보자.
둘째 마당
논리를 단숨에 배울 길은 없나요?
달래:선생님, 정말 논리를 단숨에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있긴 있나요?
바우:"학문에는 왕도가 없다."고 하던데, 설마 진담은 아니시겠지요!?
철학 교수:진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농담만도 아니지. 앞에서 배운 것을
응용해 보면, 그 방법을 알 수 있어. 창의력이란 다룬 게 아니야. 배운 것으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인 거야.
바우:선생인, 앞에서 배운 것이라고 해야...
달래:아! 알았다. 선생님, 사람은 '왜 ?'를 묻는 이성적 동물이고 논리는 이성의
도구라고 했으니까, 논리를 잘하는 것과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깊은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철학 교수:그래! 달래의 말대로 논리를 잘하는 것과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깊은 관계가 있어. 그리고 바로 이 점만 잘 이해하면 논리를 단숨에 배울 수도 있고.
바우:빨리 말씀해 주세요.
'입증 책임'은 논리의 모든 것
철학 교수: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주장을 하지. 그런데 어떤 주장을 하든지
주장자는 반드시 자기 주장이 왜 참인가를 알고 있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언제나 그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해. 이 경우에 우리는 주장자가 자기 주장에 대한 '입증
책임(입증 의무, 증명부담)'을 갖는다고 말하지. 그리고 늘 입증 책임을 다하는
생활을 하면 논리는 반 이상을 익힌 셈이 되는 거야. 입증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원칙이거든.
바우:입증 책임이 왜 그렇게 중요하지요?
철학 교수:무엇보다도 입증 책임을 다할 수 없는 말을 하게 되면 웃음거리가 되고
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게 돼.
갑돌이와 을순이가 함께 산보를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갑돌이가 공중 전화를
걸고 오겠다고 하면서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꼭 여기야."
그런데 하필이면 냄새 나는 공중 화장실 앞이었다. 그래서 조금 떨어진 곳에
벤치가 있는 것을 가리키며 을순이가 말했다.
"다리도 아프고 하니 저 벤치에서 기다릴게."
그런데도 갑돌이는 고집을 부렸다.
"아니야, 꼭 여기야."
"왜 꼭 여기여야 하지?"
"모르겠는데..."
갑돌이의 대답을 듣는 순간 웃음이 나오지? 만일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너희들에게 문제가 있는 거고.
그런데 왜 웃음이 나오는 것일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라고 간단히
넘어가지 말고 곰곰히 생각해봐. 이 대화를 읽고 나오는 웃음은 그야말로 순수하게
'논리적인 웃음'이야.
바우:웃음도 논리적인 것이 있나요?
논리적 웃음?
철학 교수:있지.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웃음이 나오지. 또한 입학 시험에 합격을
했다든가 복권에 당첨되는 등 자기가 크게 원하는 일이 잘 되었을 경우에도 웃음이
나오기 마련이야. 개그맨이 문어 다리처럼 흐느적거리며 춤추는 것을 보고도 웃음이
나오고.
이러한 웃음들도 분석해 보면 논리가 전혀 없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이러한
웃음은 모두'반사적 웃음'이라 할 수 있어. 어떤 사건 자체가 직접 우리의 웃음
감각을 자극하여 반사적으로 웃음이 나오기 때문이야. 반면에 다음 이야기를 들어봐
남편이 다른 볼일이 있어서 부인이 배를 부리고 있는데 중국사람이 하나 탔다.
그런데 이 검측한 사람이, "아주머니 내 마누라야! 내가 아주머니 배 탔으니, 나
아주머니 영감이지? 안 그래?" 하며 짓궂은 소리를 했다.
여사공은 속이 상해 죽겠으나 대꾸도 않고 노만 저었다. 잠시 후, 중국 사람이
강을 건너 뭍에 내려서 가는 것을 여사공이 그제사 불렀다.
"아들아, 내 아들아!"
중국 사람이 돌아다 보았다.
"너는 내 뱃속에서 나왔으니까 내 아들 아니냐?"
"?!"
너희들 웃음이 나왔지?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곧 웃음이 나왔기 때문에 반사적
웃음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아.
여사공은 중국 사람이 자기를 놀리는 논리적 방식과 똑같은 방식을 이용하여 중국
사람의 짓궂은 놀림을 멋있게 되돌려 주고 있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논리의 흐름을
이해하기 때문에 웃음이 나왔던 거야.
달래:논리를 알아야 나오는 웃음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철학 교수:맞았어. 일반적으로 논리를 모르면 유머도 쓸 줄 모르고 유머를 들어도
웃음이 안 나오게 돼.
바우:일단은 무조건 웃고 봐야겠군요.(웃음)
철학 교수:위에서 말한 대로, 모든 사람은 어떤 주장을 하든지 그 주장이 참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하고, 또 필요하다면 언제나 그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해.
그런데 갑돌이는 입증의 책임 자체에 대한 논리적 감각이 결여되어 있는 듯한 답을
하고 있지? 불 속에 손을 넣고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이야.
자신의 주장에 대한 이유, 곧 입증 책임을 물었을 때 "모르겠는데."라고 답하는
갑돌이는 일종의 '논리적 정전'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이는 정상적인 사람들간의 대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갑돌이가
"모르겠는데."라고 답했을 때 웃음이 나오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갑돌이가 과연 정상적인 사람인가 하고 의심해 볼 수도
있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입증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야.
바우:갑돌이는 바보군요.
달래:아냐. 이 경우 갑돌이는 바보도 되지 못해. 바보는 입증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인 반면에, 갑돌이는, 적어도
"모르겠는데."라는 다에 관한 한 입증 책임과 관계된 '회로'가 고장난 비정상적인
사람이기 때문이야.
바우:하기야 바보는 웃음거리는 되지만 정신 병원에 가지는 않지요.
달래:입증 책임이 그렇게 중요하군요!
바우:그런데 논리를 단숨에 배우는 방법과 입증 책임과는 무슨 관계가 있지요?
계속 '왜?'라고 물어라!
철학 교수:입증 책임을 다하는 생활을 하면, 논리는 반을 한 셈이 돼. 실제로
논리의 초보자라도 논리적으로 대단해 강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요령은 간단해.
상대가 하는 말을 받아 계속 '왜 그렇지?'라는 형식의 물음을 던지면 돼.
바우:그거 쉽네요?
철학 교수:그렇지도 않아. 우리는 이유를 묻고 생각하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거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도 그런 자세를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
자기가 지금까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주장이 왜 참인지를 생각해 봐. 확실한
주장?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 주장들은 얼마나 될까? 그야 많지!
"나는 엄지손가락을 가지고 있다. 나는 검지손가락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렇게 상당히 많이 늘어놓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주장들의 참을 의심하도록 해 봐. 만일 너희들이 비판적 사고를 정말로 배우고
싶으면 말이야. 이렇게 생각해 봐. 옛날 이야기에서처럼 산길을 가다가 도둑을 만나
가진 것을 몽땅 털렸다고 말야.
"나는 지금까지 내가 확신하고 있었던 주장들을 모두 도둑맞았다. 그래서 내
지식의 창고는 텅텅 비었다. 이제부터 새롭게 그 창고를 채워야 한다. 단, 입증
책임의 원칙에 따라 정당화되는 주장만을 창고에 넣는다."
이렇게 생각하며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 봐. 그러면 너희들은 굉장해질 수 있어,
너희들이 단 하루 만에 논리와 비판적 사고를 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고, 무심코 받아들였단 그 동안의 신념들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거야.
바우:재미도 있겠지만 힘들겠습니다. '이성'이라는 것이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군요.
철학 교수:그러나 이성으로 인해 인간은 무생물이나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존엄성을 갖게 되는 거야. 인간 외에 입증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존재는 없지?
'원인'과 '이유'
바우:있어요. 집에서 강아지가 구두를 물어뜯어 놓았을 때 "너 왜 구두를
물어뜯었어?"하고 물을 수 있거든요.
철학 교수:그렇게 물을 수는 있겠지. 그러나 강아지에게서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물음은 아니겠지? 더구나 "네가 구두를 물어뜯은 행위가 합리적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아라."의 뜻은 아닐 테고.
달래:강아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래요.
철학 교수:그러나 스트레스는 이유가 아니라 원인이야. 그것도 우리 인간이 추리해
낸 것이고.
"왜 천둥이 치는 것일까?"
우리는 자연 현상에 대해서도 이렇게 물을 수 있어. 그러나 이 물음은 천둥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묻는 것이야. 그리고 이 물음으로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천둥이 치는 원인이지 이유가 아니야. '이유'는 주장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가리키는 반면, '원인'은 어떤 사건을 불러일으킨 인과적 선행 조건을
말하거든.
바우:어렵습니다.
철학 교수:쉬운 문제는 아니야. 자연 현상과 인간 현상을 구분할 줄도 알아야
하고, 인과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의 차이도 알아야 하는 등, 많은 문제들이
관계되어 있어. 앞으로 차차 연구하기로 하자.
살아 있는 지식
달래:선생님께서는 논리를 단숨에 배우고 싶으면 입증 책임을 다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실제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어디서든 어떤
주장이 나오면, "이 주장은 왜 참인가?"라고 묻고 또 만족할 만한 답을 얻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고 버티면, 사람들은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겁니다.
바우:그렇게 한가롭지도 못합니다. 그러다가는 공부 진도가 나가지 않을 겁니다.
달래:선생님들도 야단치실 거예요.
철학 교수:물론 입증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해서 모든 주장에 대하여
"입증하시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겠지. 굳이 입증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들이 많이 있거든. 그러나 우리가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주장이 나왔을 경우에는 반드시 입증 책임을 묻도록 해야 해.
나아가 입증 책임을 다하는 것이 공부도 잘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거야.
마구잡이로 머리 속에 집어넣은 단편적인 정보들은 살아 있는 지식이 되지 못해.
논리적으로 잘 정돈되고 체계화되었을 때만 정보들은 '살아 있는 나의 지식'이
되거든. '살아 있는 지식'이 없으면 대학에 들어가기도 어렵고.
바우:대학 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달래:바우, 너는 아직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입증 책임을
생활화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따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것이지, 오로지 대학에
가기 위한 것이 아니잖아?!
바우:오라, 달래 너 참 똑똑하구나.
달래:그걸 이제 알았어?
바우:넌 누굴 닮았니? 어머니? 아버지?
달래:사람들이 어머닐 닮았대.
바우:어머니가 살아 계시니?
달래:그럼!
바우:"어머니는 살아 계신다."는 네 주장은 왜 참이지?
달래:선생님, 바우가 절 놀리고 있어요.
철학 교수:하하, 그렇지 않아. 바우는 너에게 입증 책임을 묻고 있는 거야. 평소
같으면 "어머니는 살아 계신다."와 같은 주장을 입증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일단 상대방이 입증할 것을 요구하면, 입증을 할 수 있어야 해. 그게
입증 책임의 원칙이야.
달래:어머니가 살아 계시니까 살아 계신다고 말했을 뿐인데...
철학 교수:잘 생각해 보아라. 달래는 지금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는 것인데, 바우는 네가 믿고 있는 그 '사실'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야. 자, '어머니는 살아 계신다.'는 달래의 생각을
뒷받침할 만한 것이 있으면 모두 말해 보아라.
바우:선생님은 역시 제 생각을 너무나 잘 읽고 계십니다. 달래, 너 잘난 체하더니
혼 좀 나 봐라.
믿음과 확신
달래:어머니는 살아 계세요. 오늘 아침 집에서 나올 때 뵈었거든요.
바우:그렇지만 그 사이에 달래 어머니가 교통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도 있잖아!?
달래:바우 너 말조심해!
철학 교수:달래야, 당연히 어머니는 살아 계시겠지. 교통 사고를 당하거나
심장미비를 일으키지 않고 말야. 바우가 단지 논리 공부를 위해 그런 상상을 해
보는 거니까 이해해라.
달래: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 이상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요?
철학 교수:믿음만으로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어. 고대 사람들은 태양과 달과
별들이 '하늘'이라는 높은 천장에 난 구멍들이라고 믿었지.
달래:그렇지만 제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 아닙니다. 저는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 교수:확신은 강한 믿음일 뿐이야. 따라서 확신도 사실을 뒷받침해 주지는
못해.
바우:달래 야단났구나.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는 것도 입증하지 못하니 말야.
따라서 달래 어머니는 살아 계시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지?
달래:바우 너 계속 약올릴 거야?
철학 교수:달래야. 바우가 약올린다고 해서 흥분해서는 안 돼. 흥분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그 결과 실수를 범하여 오히려 불리한 입장에 처하는 수가 많아.
상대가 약을 올리더라도 말려들지 말고, 논리적으로 대응해야 바우가 꼼짝 못하게
돼
달래:어떻게 논리적으로 대응하지요?
철학 교수:마찬가지로 입증 책임을 생각해 보면 돼. 바우는 "달래 어머니는 살아
계시지 않다."는 주장을 하고 있어. 그리고 그 근거로서 "달래는 자기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를 대고 있고. 따라서 바우가 과연 입증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되겠지?
달래:바우는 입증이 안 되는 주장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는 것을 제가
입증하지 못해도, 어머니는 살아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 교수:그래.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달래:선생님, 입증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는 것도
입증할 수 없다니... 어떻게 해야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지요?
바우:달래야, 머리 좀 써라. 집에 전화를 걸어 보면 알 거 아냐!
달래:그렇구나! 선생님, 집에 전화를 걸어 어머니가 받으면,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지요?
철학 교수:'어머니가 받으면'?... 어머니가 전화를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달래:목소리를 들어서 알 수 있지요!
철학 교수:누군가 어머니의 목소리를 흉내낼 수도 있지 않을까?
바우:달래야, 이쯤 해서 손드는 게 좋겠다. 입증하는 방법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서는 안 되겠어.
달래:바우, 네 말이 맞아. 그렇지만 갑자기 어머니 안부가 걱정 되는데...? 아무래도
집에 전화를 걸어 봐야겠어.(집에 전화를 건다.) 이상해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아요. 어머니가 집에 계실 시간인데...
연습 문제
[09]
컴퓨터는 정보의 저장 및 처리 면에서 사람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컴퓨터를 인간보다 더 훌륭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 이유를 말해
보자.
[10]
갑, 을, 병, 정 넷이 회의에 늦게 참석하였다. 의장이 늦은 이유를 묻자 그들은
각각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입증 책임'이 인간의 본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아래의 대답들은 각각 자신의 사람됨을 반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답에 따라 각각 어떤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 말해 보자
갑:모르겠습니다.
을:지구가 둥글기 때문입니다.
병: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정:기분 나쁘게 이유는 왜 물어요? 늦었으면 늦었나 보다 하고 말 일이지, 그렇게
따져 묻다니 기분 나빠요.
[11]
바보는 웃음거리는 될지언정 정신 병원에 수용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12]
자신이 의심할 여지없이 참이라고 확신하는 주장 하나를 생각해 보고, 그 주장이
왜 참인지 말해보자.
[13]
강아지의 스트레스가 구두를 물어뜯은 이유가 아니라 원인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말해 보자.
[14]
다음 글에서 '입증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지적할 수 있는 주장들을 가려내고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바른 대로 말 해. 네가 이 지갑을 소매치기한 것은 사실이잖아!?"
형사가 소매치기에게 호령했다.
"그래 맞아요. 그렇지만 그 지갑 속에 돈은 3만 원밖에 없었어요."
소매치기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그건 네 주장일 뿐이야. 지갑 주인은 이 지갑에 20만 원을 넣어 두었다고
하잖아!"
형사가 지갑을 소매치기의 눈앞에 흔들면서 말하였다.
"나 참! 지갑 속에 3만 원밖에 없었다니까요. 그래서, '오늘 지수 더럽게 없는
날이다.' 그렇게 침까지 퉤! 하고 뱉었다니까요."
소매치기는 실제로 파출소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야! 너! 어디다 침 뱉는 거야!"
[15]
달래가 어머니를 보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머니는 살아 계시다."는 주장이
참이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 지 생각해 보자.
셋째 마당
여러 가지 추리들
철학 교수:너희들, 입증 책임을 묻는 놀이를 해 보았니?
바우:해 보았는데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어떤 주장을 하든, "왜 그렇지?"
하고 물었더니, 다들 쩔쩔매었습니다. 정말 제가 논리적으로 강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대답에 대해서는 판단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답답했습니다.
달래:저는 선생님 말씀대로 "지식 창고를 도둑 맞았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안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하여 "왜 그렇지?"하고 묻고,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어요. 이유가 생각나더라도,
그게 정말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답답했습니다.
철학 교수:그건 너희들이 논증을 평가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야. 논증 평가에
앞서서 먼저 논증의 종류를 알아둘 필요가 있어. 논증의 성격에 따라 평가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야.
우리는 언제나 논증을 제시한다?
바우:'논증의 종류'라는 말씀만 들어도 골치가 아파 오는 것 같습니다. '논증'이
무엇이기에 그렇지요?
철학 교수:바우 야단났구나! 우리는 사실 늘 논증을 제시하며 살고 있는데 말이야.
바우:그게 정말인가요?
철학 교수:그래. '논증'은 이유와 주장이 전제와 결론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일단의
주장들이야. 따라서 특별히 논리를 공부하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일 경우 어떤
주장을 할 때는 언제나 논증을 제시하는 셈이지.
바우:왜 그렇지요?
철학 교수:배운 것을 응용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어.
바우:선생님은 방금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셨습니다.
특별히 논리를 공부하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일 경우 어떤 주장을 할 때는
어제나 논증을 제시한다.
만일 이 주장이 참이라면, 선생님이 이 주장을 할 때도 논증을 제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논증은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적어도 두 개의
주장들이 있어야 하는데, 선생님은 하나의 주장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뭔가 잘못
아닌가요?
철학 교수:그렇지 않아. '논리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지?
달래:알았습니다! 입증 책임과 관계가 있죠?
철학 교수:그래.
달래: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제시한 셈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자기주장에 대한 입증 책임을 다한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람은
특별히 논리를 공부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논증을 제시한다.
철학 교수:잘 했어.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어.
첫째, 앞으로 우리는 많은 논증을 다루게 될 거야. 따라서 논증을 보다
일목요연하게 나타내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는데, 다음 세 가지가 있어, 가로줄과
삼각점기호는 '그런고로'를 뜻하는데, 그 앞의 주장(들)은 전제이고, 그 뒤의
주장들은 결론이야. 논증의 크기나 성격에 따라 아무 것이든 편리한 대로 사용하면
돼.
정상적인 사람은 자기 주장에 대한 입증 책임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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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사람은 특별히 논리를 공부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논증을 제시한다.
정상적인 사람은 자기 주장에 대한 입증 책임을 다한다.
그러므로--정상적인 사람은 특별히 논리를 공부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논증을
제시한다.
(1) 정상적인 사람은 자기 주장에 대한 입증 책임을 다한다.
그러므로--(2) 정상적인 사람은 특별히 논리를 공부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논증을
제시한다.
둘째, 논증을 제시할 때는 ,결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제들을 가능하면 많이
열거하는 것이 좋아. "주장하는 사람이 입증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전제와 위의
결론이 매끄럽게 연결되기 위해서는, 다른 전제들이 더 필요하겠지?
달래:다시 해 보겠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어떤 주장을 할 때 입증 책임을 다한다.
'입증 책임'은 '주장에 대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책임'이다.
'논증'은 이유와 주장이 전제와 결론 형식으로 제시된 것이다.
특별히 논리를 공부하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일 경우 어떤 주장을 할 때는
언제나 논증을 제시한다.
철학 교수:훌륭해! 아주 잘 했어.
바우:소가 뒷걸음질하다 쥐 잡는 격이지요. 그렇지만 이건 굉장합니다!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할 때마다 논증을 제시하는 것이라니 말입니다.
철학 교수: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그가 하는 어떤
주장도 사실 어떤 논증의 결론이다.'라고 해야겠지
달래:그러니까 우리는 주장을 하면서 논증의 결론을 말하는 것이군요!
철학 교수:헛소리나 잠꼬대가 아닌 주장을 할 경우에는 그렇지.
바우:머리를 (긁적거리며)그렇다면 차라리 헛소리나 잠꼬대를 하는 게...
'특수 사실'과 '일반적 사실'
철학 교수: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늘 추리를 하며 살수밖에 없어.
달래:논증 말고 또 추리를 해야 하나요?
철학 교수:'추리'는 논증을 제사하는 정신 활동을 말해. 그러니까 논증은 추리의
내용인 셈이야. 우리는 이 추리를 하며 살수밖에 없다는 거고.
바우:왜 그렇지요?
철학 교수: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특수 사실들뿐이고, 특수
사실들에 관한 지식만으로는 우리가 살 수 없기 때문이야.
바우:그래도 잘 모르겠습니다.
철학 교수:우리가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납득할 수 있을 거야.
아무 교과서나 펼쳐 보자. 자, 아래 글의 주장들 가운데 특수 사실에 관한 것이
있으면 지적해 보아라.
지표면의 물은 증발하여 대기 중에 떠 있다가 비나 눈이 되어 지표로 다시
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대기 중의 먼지나 질소산화물, 황산화물이 섞여 지표로
내려온다. 또 육지에 있는 물은 하천을 따라서 바다로 흘러간다. 이 때, 물은 바다,
대기, 육지를 거쳐 순환하면서 대기를 깨끗하게 해 주는 역할도 한다.
물은 대부분 자연적으로 정화되지만, 오염이 심할 때에는 자연적으로 정화될 수
없다. 물이 오염되면 수중 생태계가 파괴될 뿐만 아니라 식수, 농업 용수, 공업 용수
등에 사용할 수 있는 물이 부족하게 된다. 또 오염된 물을 사람이 마시면 여러
가지의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중학교 환경', 교육부, 1996, 84쪽)
달래:'특수 사실에 관한 주장'이란 어떤 주장이지요?
철학 교수:'세상에서 단 한 번 일어나는 일에 관한 주장'을 말하지. "지금 우리는
공부하고 있다.", "달래가 방금 어떤 질문을 했다.", "타이슨이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었다."와 같은 주장들을 예로 들 수 있지.
바우:타이슨은 홀리필드의 귀를 두 번 물어뜯었는데요?
철학 교수:그래도 각각 특수 사실이야. 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난 것은 아니거든.
반면에 "복어알에는 독이 있다."는 것은 일반적 주장이야. 어떤 특수한 복어의
알에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복어의 알에 독이 있다는 일반적 사실을
말하고 있어.
달래:알았습니다. 위의 글에는 특수 사실에 관한 주장이 하나도 없습니다.
'경험'과 '지식' 그리고 '추리'의 관계
철학 교수:맞았어. 이처럼 교과서에 실린 것들은 대부분 일반적 주장들이야.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지식은 대부분 일반적 사실들에 관한 주장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지.
이제 "우리는 늘 추리를 하며 살수밖에 없다."는 말의 뜻을 알겠지?
바우:우리는 특수 사실들만을 경험하고, 우리의 지식은 일반적 사실들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특수 사실들에 관한 '경험'으로부터 일반적 사실에 관한
'지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추리'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하지만 일반적
사실에 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요? 무식하겠지만 말입니다.
철학 교수:그렇지 않아. 특수 사실로부터 일반적 사실을 추리하여 이용할 줄
모르면, 복어알을 먹고 죽을 뻔한 사람이 다음에도 복어알을 먹을 것이고, 그 때는
진짜 죽을 수 있거든.
달래:특수 사실들을 일반화할 줄 모르면, 정말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겠네요.
발을 내디딜 땅이 단단할 것이라는 판단조차 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바우:밥을 먹을 때도, "이거 먹어도 되는가?"하고 늘 의심하겠군요!
철학 교수:맞았어. 제법이구나. 다음 글을 읽고 구체적으로 연구해 보자꾸나.
종교 개혁, 프랑스 혁명, 진화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뉴턴의 만유인력,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뿐 대사건이나 이론이 제기될
때마다 사람들은 양편으로 나뉘어 '혈투'를 벌였다. 이런 혁명적인 상황에서 어느
편에 서느냐는 가족 내 출생 서열에 크게 좌우된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 미국에서
출간돼 화제다. 미국 MIT의 연구 학자인 프랭크 설로웨이(Frank J. Sulloway)가
28년에 걸친 연구 결과를 담은 '타고난 반골'(Pantheon )이 그것.
지난 5세기 동안 굵직한 역사적 사건 26건을 대상으로 당시의 과학자 및 정치가
6000여 명을 장남과 장남 아닌 사람으로 구분해 각각의 반응을 분석했다.
그 결과는 '혁명적' 아이디어를 내놓거나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거의가 장남이
아니었으며, 그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가장 앞장섰던 인물 역시 장남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장남이 아닌 사람들이 혁신이나 사회 변화에 보다
개방적이었다는 뜻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형제들이 남남처럼 보이는 예를 흔하게 접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똑같은 환경이라도 형제간 서열에 따라 각각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자녀들마다 성향이 크게 다르게 형성되는 이유는 부모들이 베풀 수 있는 지적,
정서적, 물질적 '자원'을 서로 많이 확보하기 위해 형제들끼리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저마다 최고로 꼽는 것은 당연히 부모의 사랑이다."
부모의 애정을 확보하는 전략을 보면 장남의 경우 동생들에게 '대리 부모'의
역할을 떠맡고 나서는 것이다. 그런 역할을 일찌감치 장남에게 빼앗겨버린 동생들은
붙임성을 보임으로써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장남들은 대체로 지배적, 공격적, 보수적, 야심적이며 질투심도 강하다. 장남이
아닌 사람들은 가족 내에서 장남에게 빼앗긴 역할을 새롭게 찾기 위해 관심 분야를
확대해 나간다. 그것은 바로 개방성으로 통한다. 위험에 처했을 때 한 번 도전해
보겠다는 의지도 차남들이 더 강하다. 그러나 장남 아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엄격한 리더십을 잘 참아내지 못한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주창하기까지 서구 지성계의 풍경을 살펴보면 재미있다.
진화론 논쟁에 불을 붙인 것은 다윈의 자연도태설이었지만, 진화론이란 개념은
그보다 1세기 전인 1740년대에 베누아 드 마이에에 의해 도입됐다.
그 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되기까지 1세기 동안 진화론에 대한 과학자들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그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의견을 개진했던 과학자 중에서
장남이 아니었던 사람은 117명. 이 중 48%에 해당하는 56명이 이 이론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에 의견을 발표했던 장남 과학자 103명중 진화론에
동조적이었던 사람은 9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도 '종의 기원'이 발표된
1850년대에 견해를 바꾼 사람이 태반이었다. 다윈 본인도 형제자매 6명 중 다섯
번째였다. 프랑스 과학자들이 진화론에 특히 강력하게 맞섰다. 다윈이 "도대체 믿을
수 없는 프랑스인들"이라고 불평을 털어놓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도
저자는 인구 통계상의 특성으로 풀이한다. 프랑스의 경우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50년 이상 앞서서 자녀수를 줄이는 경향이 자리잡는 바람에 장남의 수가 월등히
놓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저자가 과학사 박사여서 주로 과학 분야를 다뤘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엉뚱하게도 미국 경영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경영계를 뒤흔들고 있는
정보화 소용돌이가 혁명에 버금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언론에서도 앞다퉈 경영계 진단에 설로웨이 박사의 이론을 차용하고
나섰다. 색인까지 합쳐 65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은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2개월
만에 10만 부나 팔렸다. 자칫하다가는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표이사 선출 등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발생할지 모를 일이다. (정명진 기자, 중앙일보, 1997년 3월
4일자)
설로웨이 박사는 먼저, "왜 종교 개혁, 프랑스혁명, 진화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뉴턴의 만유인력,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과 같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혁명적 사건들이 발생할 때, 어떤 사람은 찬성하고 어떤 사람은 반대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졌어.
곧, 역사는 위와 같은 혁명적 사건들이 발생함으로써 발전한다... 따라서 역사의
발전을 바란다면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과감하게 변화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어떤 사람은 찬성하고 어떤 사람은 반대한다...
물론 사라들은 우연히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일반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는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연구에 착수한 거야.
귀납 추리
철학 교수:설로웨이 박사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먼저 '특수 사실들'을
조사했어. 그는 지난 5세기 동안에 일어난 굵직한 역사적 사건 26건과 관계된
당시의 과학자 및 정치가 6000여 명을 장남과 장남 아닌 사람으로 구분해서, 각각의
반응을 분석했어.
그리고 그는 '혁명적' 아이디어를 내놓거나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거의가 장남이
아니었으며, 그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가장 앞섰던 인물 역시 대부분 장남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어.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는 "장남보다는 장남이 아닌 사람들이 혁신이나
사회 변화에 더욱 개방적이다."는 결론을 내렸지. 특수 사실들이 가진 성격을
일반화하는 추리 방법을 '귀납 추리'라고 하는데, 그는 이 귀납 추리를 이용한 거야.
바우:역사적 사건들을 조사해 보고, "장남보다는 장남이 아닌 사람들이 혁신이나
사회 변화에 더욱 개방적이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을 뿐인데 왜 그게 귀납
추리이지요?
철학 교수:"장남보다는 장남이 아닌 사람들이 혁신이나 사회 변화에 더욱
개방적이다."는 사실은 특수한 것인가, 일반적인 것인가?
바우:일반적인 것입니다.
철학 교수:일반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바우:아! 그렇군요. 우리는 오직 특수 사실만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철학 교수:그래. 설로웨이 박사가 '발견'한 것은 모두 특수한 것들이야.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이러저러한 경우에 장남이 아닌 사람이 더욱 혁신적이고
개방적이었다는 개별적 사실들을 말해야겠지. 그러나 특수 사실들을 그대로
보고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뜻은 있겠지만,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지도 못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도 않아. 특수 사실들이 가진 일반적 성질을
드러내야 하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추리가 귀납 추리인 거야.
바우:특수 사실들이 가진 일반적 성질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학자들이나
귀납 추리를 할 수 있겠군요!?
철학 교수:그렇지 않아. 우리는 누구나 귀납 추리를 해.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말야. 벌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는 벌을 잡으려 하겠지. 그러다가
벌에 쏘이면. 다음에 어떻게 하지?
바우:벌을 무서워하겠지요.
철학 교수:자기를 쏘았던 바로 그 벌만 무서워할까?
바우:아닙니다. 벌이라면 모두 무서워 할 겁니다. 아이는 단 한 번 어떤 벌에
쏘였지만, "모든 벌은 쏜다."고 일반화하기 때문에, 어떤 벌이든지 무서워하는
겁니다.
철학 교수:맞았어. 어린아이도 벌에 쏘인 단 한 번의 경험을 일반화 할 줄 알지?
이처럼 귀납 추리는 사물들과 사건들이 가진 일반성, 보편성, 항상성 또는 규칙성을
드러내는 추리야. 따라서 특수 사실들을 관찰하면서도 그 안에 어떤 요소가
불변하는 요소인지 꿰뚫어 볼 수 있어야 좋은 귀납 추리를 할 수 있어. 쉬운 예를
들어볼까?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또 음악을 잘 하는 민족이었음은 전통
사회의 생활 습속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농부들은 논에 모를 심거나 김을 맬 때,
여러 사람이 손발을 맞추는 노래를 했다. 또, 벼를 벤다든지 타작을 할 때에도
노래를 부름으로써 일의 능률을 높였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노래를 부르며
상여를 메고 나가고, 노래 장단에 맞춰 무덤을 다져 나갔다. 정월 초하루나 대보름
등의 명절이나 절기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민속 행사에도 음악은 빠지지 않았다.
('중학교 국어 1-2', 교육부, 1996,138쪽)
이 글의 필자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모를 심거나, 김을 매거나, 벼를 베거나,
타작을 하거나, 심지어는 장례를 치를 때도 노래를 했다는 사실들을 들어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또 음악을 잘 하는 민족이었다."는 귀납적 결론을
내리고 있어.
바우:정말 우리 나라 사람들 노래를 좋아해요. 노래방이 없는 동네가 없잖아요!
철학 교수:귀납 추리는 과학적 탐구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추리 방법이야. 그러나 귀납 추리에 의한 일반화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의해야해.
바우: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지요?
철학 교수:그건 차차 연구하기로 하고, 또 다른 추리를 알아보자.
너희들 "장남보다는 장남이 아닌 사람들이 혁신이나 사회변화에 더욱
개방적이다."는 말을 듣고 궁금한 게 없니?
달래:왜 장난이 아닌 사람들이 장남보다 더 혁신적이고 개방적일까요?
철학 교수:그게 궁금하지?
가설 추리
철학 교수:설로웨이 박사는 형제간의 서열에 따라 다른 성향이 형성된다는 점을
알아냈지만,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왜 형제간의 서열에 따라 다른 성향이
형성되는 지 궁금했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그는 더 깊은 연구를 했어. 그리고 그는 "부모들이 베풀 수 있는 지적,
정서적, 물질적 '자원'을 서로 많이 확보하기 위해 형제들끼리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어. 장남은 부모의 사랑에 대한 기득권을 장남
아닌 형제에게 양보하지 않아. 그래서 "장남이 아닌 사람들은 가족 내에서 장남에게
빼앗긴 역할을 새롭게 찾기 위해 관심 분야를 확대해 나간다. 그것은 바로
개방성으로 통한다."는 것이었어.
달래: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십시오.
철학 교수:장남은 대부분 보수적이고 장남이 아닌 형제가 대부분 진보적이라는
현상은 매우 흥미롭지? 그런데 그건 왜 그럴까? 이 현상을 설로웨이 박사는
'가족관계설'이라 부를 수 있는 가설로 설명한 거야. 만일 가족관계설이 옳다면,
형제들의 성향이 우연하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열에 따라 인과적으로
형성된다고 말야.
바우:어떻게 가족관계설이 옳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요?
철학 교수:그는 어떤 확고한 결론을 내린 게 아니야. 문제의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되는 가설을 내놓은 것이지.
바우:왜 확실하지도 않은 가설을 내놓지요?
철학 교수:궁금하기 때문이지. 다시 말해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본성상,
모든 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으로 보고 싶어하지. 우리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일까?" 우리는 이렇게 묻고 답을 찾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 현상이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야.
평소에 놀기 좋아하는 친구가 성적이 좋을 경우,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든 이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해. 그래서 우리는 "아마 그는
머리가 좋을 거야."라든가 "그는 우리가 안 볼 때 혼자서 공부한다."는 등의 가설을
생각하게 돼.
과학자들은 DNA 가설로 콩이나 팥을 비롯한 생명 현상 모두를 설명하지. 물리,
화학, 생물 등의 자연과학은 물론이요, 경제학, 사회학, 철학, 종교학 등의 인문 사회
계열의 학문들도 모두 관심 분야의 현상들에 대한 이론, 곧 가설의 체계를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탐구 활동들이야.
바우:다른 학문은 몰라도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 등은 가설이 아니라 자연
법칙을 발견하는 학문들이 아닌가요?
자연 법칙
철학 교수:자연 법칙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바우:자연 법칙도 일반적 사실에 관한 주장이군요!
철학 교수:그래. 자연 법칙이란 자연 현상을 일반적 진술의 형식으로 표현한
가설이야. '자연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 속에 있는 법칙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법칙이라고 추정한 것이거든. 물론 과학자들은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드러내는
'법칙적 진술'을 찾아내려고 하지. 그러나 아무리 진리에 가깝다 할지라도 가설은
가설일 뿐이야. 법칙은 '세계'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이 제시하는 가설들
중의 한 종류에 불과한 거야.
달래:그렇지만 과학자들은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이론을 내놓지 않아요!?
철학 교수:사람들은 흔히 '이론'이라고 하면 굉장한 것이라 생각하지. 그러나 사실,
이론은 가설의 체계에 불과해.
바우:그럼 이론이나 자연의 법칙도 별 거 아니군요!
철학 교수:그러한 결론이 나올까?
달래:그렇지 않습니다. 가설들 중에는 좋은 가설도 있고 나쁜 가설도 있을
것입니다.
철학 교수:맞았어. 그래서 어떤 가설이나 이론은 법칙의 대우를 받는가 하면, 어떤
가설이나 이론은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고 폐기되는 거야.
달래:선생님께서는 법칙이 '세계'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설들 중의 한
종류하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세계를 설명하는 다른 종류의 가설들이 있나요?
현상
철학 교수:그렇고 말고. 자, 우리를 둘러 싼, 아니 우리가 그 안에 들어 있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보자.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 땅 위에는 강과 산과 도시들, 사람,
코끼리, 새, 벌레, 나무, 풀, 꽃 자동차, 비행기, 우주선, 컴퓨터, 대포, 박테리아,
바이러스, 심지어는 컴퓨터 바이러스까지..., 세계 안에는 이렇게 수없이 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지.
그뿐만 아니라 세계 안에서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어. 먹고, 싸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선거하고, 전쟁을 하고, 다리를 폭파하고,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태풍이 불고, 홍수가 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전염병이 돌고,
꽃이 피고, 공부하고, 수술하고, 연극하고,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재판하고,
기도하고... 이러한 것들을 모두 '현상'이라고 하지. 현상으로서의 세계는 대단히
중요해.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거든. 따라서 우리는 이 현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하여 많이 알 필요가 있어 자기가 처한 환경에 대하여 잘 알수록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지.
그러나 우리 인간은 현상에 대한 지식에 만족하지 않아. 천둥이 치면 '치나
보다.'하고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하지. 작은 씨앗에서 싹이
나오고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왜?'라는 의문을 갖지. 왜 저 작은 씨앗으로부터 꽃이
피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왜 우주는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운행하고 있고, 어떻게
해서 땅 위에는 생명체들이 생겨나게 되었을까? 인간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것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이렇게 묻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왜?'라는 물음을 묻는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야. 이렇게 묻고 또 만족할 만한 설명을 얻지 않으면 불안해지지.
바우:왜 그럴까요?
세계 탐구와 지적 호기심
철학 교수:어느날 집에 돌아와 방문을 열었을 때 방 가운데에 이상한 보따리가
하나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고 해. 조심스레 보따리를 열어 보니 그 안에 큰돈이
들어 있어. 천만 원쯤 된다고 해. 아니, 요즈음은 모두 '억, 억!'하니까, 10억쯤 들어
있다고 하지 뭐. 자, 이 경우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일어날까?
바우:어떻게 은행에 가져갈까를...
달래:그 많은 돈이 어떻게 해서 내 방에 놓여 있는지 알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은데요?
철학 교수:그래. 그래서 가족들에게 물어 보겠지. 그러나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어.
다녀간 사람도 업고, 방문은 잠겨 있었고, 열쇠는 나만 가지고 있으며, 누군가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 왔다는 흔적도 없어. 누가, 무엇 때문에, 어떻게? 이렇게 아무리
궁리해 봐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이 경우 그날 밤을 편안히 잘 수 있을까?
바우:잠을 잘 수 없겠지요. 대단히 불안할 겁니다. 도둑을 맞을까 봐.
철학 교수:이 보따리가 왜 내 방에 존재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잠을 설치겠지.
이처럼 우리는 존재하는 것들이 왜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하고,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할 경우 불안을 느끼게 돼.
그래서 우리 인간은 존재하는 것들의 배후에 대한 탐구를 해 온 거야. 현상의
배후에서 현상계를 존재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되는 법칙을 탐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 등의 자연과학과, 심리학이나 사회학, 정치학 등 인간
현상에 관한 학문들이 생겨나게 된 거야.
이렇게 현상계를 법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게 되지. 그러나 우리의 지적 호기심은 거기에
머물지 않아.
왜 법칙들은 존재하는 것일까? 도대체 세계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삶의 목적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떤 사회가 이상 사회인가? 역사에는 법칙이 있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과연 진리는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들을 묻고 답을 추구해.
바우:그러한 물음들이 바로 철학적 물음들이지요?
철학 교수:맞았어. 그래서 세계를 신, 절대자, 이성, 물질 등으로 설명하려는
형이상학적 이론이 등장하고, 본질주의니 절대주의니 상대주의니 유명론이니
자연주의니 인본주의니 하는 사상들이 나오는 거야.
바우:말만 들어도 어려운데, 그 사상들은 우리가 다 알아야 하나요?
철학 교수:결국 알아야 돼. 그러나 지금은 걱정할 필요없어. 우리는 지금 추리를
통하여 지식을 얻는 방법을 공부하고 있으니까.
어떻든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의 '탐구 영역'에서 다루는 무제들은 사실 이러한
인간의 탐구 활동에 관한 것들이야.
바우:탐구 영역을 잘 하려면 가설을 잘 다룰 줄 알아야겠군요!
달래:넌 모든 걸 시험과 관계시키는구나! 제발 수준 좀 높여라.
연역 추리
철학 교수:위의 글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더 소개하고 있어. 설로웨이 박사의
연구가 미국 사회에 재미있는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이야. 설로웨이 박사의
전공은 과학사이고, 연구 내용이 과학적인 것이어서 경제와는 무관할 것 같은데도,
미국의 경제를 주무르는 경영인들이 그의 이론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야.
이유는 간단해. 그들은 설로웨이 박사의 이론이 매우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이론을 전제로 하여 '정보화'라는 새로운 시대에 어떤 인사 정책을 펴는 것이
좋을지를 추리한 거야. 그들은 '연역 추리'를 한 것이지.
바우:그게 왜 연역 추리이지요?
철학 교수:연역 추리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까?
(주머니 속의 동전을 꺼내 보여주며) 자, 봐라. 이처럼 내 오른쪽 주머니에는
100원짜리 동전 다섯 개와 5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들어 있어. 그 외엔 아무것도
없고. 그럼 대답해봐라. 내 주머니에서 100원짜리 동전 네 개를 꺼낼 수 있을까?
바우:꺼낼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팔이 갑자기 마비되면...
철학 교수:선생님 팔이 마비되더라도 원칙적으로는 꺼낼 수 있지?
달래:그렇습니다.
철학 교수:그럼 500원짜리 동전 세 개는?
달래:꺼낼 수 없습니다.
철학 교수:맞았어. 이처럼 연역 추리는 전제들 속에 이미 들어 있는 내용으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는 추리야. 내 주머니에 100원짜리 동전 다섯 개와 5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들어 있을 경우, 100원짜리 동전 네 개를 꺼내는 것은 가능한 일이고,
500원짜리 동전 세 개를 꺼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마찬가지로 전제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 있고 끌어낼 수 없는 결론이 있어.
전제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을 끌어냈을 경우에 우리는 '타당한 연역 추리'를
했다고 하고, 전제를 가지고 결론을 '증명했다.'고 해. 그리고 전제로부터 끌어낼 수
없는 결론을 끌어냈을 경우에 우리는 '부당한 연역 추리'를 했다고 하고, 전제를
가지고 결론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
달래:그럼 미국 경제인들의 연역 추리는 타당하군요. 설로웨이 박사의 이론이
맞다면, 장자보다는 차남이 새로운 변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철학 교수:그렇지. 자, 너희들 여러 가지 추리의 성격을 좀 알겠지?
달래:자신이 없습니다.
바우:아직 잘 모르겠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증명'과 '설명'
철학 교수:연역 추리는 다음과 같이 전제를 가지고 결론의 참을 증명하고자 하는
추리를 말해.
(전제):(결론) = 증명
반면에 귀납 추리나 가설 추리는 다음과 같이 전제를 설명 할 수 있는 가설을
결론으로 추리하고자 하지.
(결론):(전제) = 설명
바우:예를 들어 연구했으면 합니다.
철학 교수:너희들 1995년도에 일본 고베 지방에 큰 지진이 발생한 것을 알고
있겠지? 그 때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엄청났어. 이러한 사실을 놓고 너희들은 어떤
생각을 했지?
달래:고배 지방의 땅값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바우:저는 일본인들이 과거에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철학 교수:좋아. 달래는 연역 추리를 했어. 지진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고베 지방을
기피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땅값이 떨어질 것이라고 추리한 셈인데, 이는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냈기 때문이야. 반면에 바우는 가설 추리를 했어.
"일본인들은 과거에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결론을 가지고 이번 지진이 일어난 것을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야.
달래:'설명하다'는 말이 특별한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아요.
철학 교수:그렇지? 일상적인 의미에서 '설명한다'는 말은 '이해하기 좋게 말하여
밝힌다.'는 뜻이지. "'고진감래'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 설명해 주겠어?"의
경우에서처럼 말야.
반면에 과학적인 의미에서 '설명한다'는 말은 '주어진 현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밝힌다.'는 뜻이지. 고베 지방의 지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바우는
"일본인들은 과거에 많은 죄를 지었다."고 말하였고, 요코하마 시립대 교수인
가쿠지마 마시유키는 "진원지가 된 아와지시마로부터 효고현 세토 나이카이에 걸친
지역은 활단층 지대로, 많은 단층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중
하나가 움직여 지진이 난 것 같다."고 말한 것을 신문에서 읽었을 거야. '설명한다'는
말은 이처럼 특별한 뜻으로 사용되기도 해.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니까 잘 알아
두도록 해라.
이제 증명적 논증과 설명적 논증을 구분할 수 있겠지?
바우: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요령이 없나요?
달래:넌 또 요령이구나!?
현상을 설명하는 '가설 추리'
철학 교수:증명적 논증과 설명적 논증을 구별할 수 있는 어떤 기계적 방법 같은
것은 없어. 그러나 설명적 논증의 성격을 잘 알면 도움이 돼. 우리는 증명적 논증에
비교적 익숙해 있는 반면, 설명적 논증에 대하여는 거의 알지 못하니까 말야.
자, 내 왼쪽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이렇게 흔들어 보면...?
바우:알았습니다! 열쇠 꾸러미가 들어 있습니다.
철학 교수:무슨 근거에서 그렇지?
바우:주머니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 보아서 그렇습니다.
철학 교수:바우는 방금 다음과 같은 가설 추리를 한 거야.
선생님 주머니에서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그러므로--선생님 주머니에 열쇠 꾸러미가 들어 있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보았을 때 왜 그 현상이 일어났는가를 추측하거나 짐작해
보고 싶어하지.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마을에 변괴가 생기면 산신령이 노했다고
제사를 지냈어. 평소에 우울하던 친구가 싱글벙글하는 모습을 보고는 "무슨 좋은
일이 있나보다."고 추측하고,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성적은 늘
상위권일 경우 "저 친구는 머리가 좋은가 보다."고 추측하지. 이렇게 우리는 늘 어떤
형상을 보고 그 현상의 원인을 추측해 보는데, 이러한 추리를 '가설 추리"라고 하는
거야.
바우:추측만 하면 다 가설 추리인가요?
철학 교수:그렇지는 않아.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10만 명? 100만
명? 이러한 추측은 가설 추리가 아니지.
달래:그럼 어떤 추측이 가설 추리인가요?
철학 교수:가설 추리는 '현상을 설명하는 가설'을 추리라는 것이라 했지? 따라서
추리해 낸 결론이 전제 속의 어떤 현상을 설명 할 수 있는지를 보아서, 단순한
추측인지 아니면 가설 추리를 한 것인지 구분할 수 있어.
다음 다 예들은 같은 현상으로부터 다른 결론을 추측해 내는 것들이야. 이들 중
어느 것이 가설 추리를 한 것인지 말해보자.
병삼이가 오늘 결석하였다.
그러므로--병삼이는 선생님께 야단맞을 것이다.
병삼이가 오늘 결석하였다.
그러므로--병삼이는 교통 사고를 당하였다.
달래:후자가 가설 추리입니다. 병삼이가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추측으로 병삼이가
결석한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추측은 이러한 설명을 하고있지
않습니다.
바우:첫 번째 추측은 연역 추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가설 추리도 별
거 아니군요! 선생님, 어서 진도를 나가죠.
공부를 잘 하는 법--물고 늘어져라!
철학 교수:서두르지 말아라. 너희들, 공부를 잘하는 방법 하나 가르쳐 줄까?
바우:달래가 무척 알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철학 교수:'물고 늘어져라!' 이 말을 명심하고 공부하면 돼.
바우:강아지도 아닌데...
철학 교수:깊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공부하라는 말이야. 이해가 안되는 것이
나오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기어코 이해를 하고야 만다는
정신으로 공부를 하면 틀림없이 공부를 잘 하게 될 거야.
바우:그러면 진도가 늦어지는데요?
철학 교수:그렇지 않아. 당장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렇게 철저하게 이해를
하면서 나가면 진도도 빠르고 결국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돼.
바우:왜 그렇지요?
철학 교수:집에 있는 너희들의 책상을 생각해 보자. 물건을 잘 찾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물론 정리를 잘 해 두어야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정리를 잘 하는 것일까? 그건 어떤 종류의 물건을 어디에 둔다는 원칙을 정해 두고,
그 원칙에 따라 물건을 정리하는 것을 뜻해. 그래서 필기구 종류를 넣는 서랍,
시험지를 보관하는 서랍, 성적표나 편지 등 조금은 비밀스러운 것들을 감춰 놓는
구석 등 책상 주변의 수납 공간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놓고, 새 물건이 들어오면
그중 어느 하나에 넣어 두는 방식으로 정리를 하게, 되면 정리도 빨라지고 나중에
필요할 때 찾기도 쉬워지는 거야.
공부도 마찬가지야. 우리의 두뇌는 거대한 지식의 창고와 같아. 그래서 그 창고가
잘 정리되어 있으면, 머리도 복잡하지 않고 필요한 지식을 쉽고 빠르게 꺼낼 수
있어. 반면 그 창고가 잘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머리도 복잡하고 필요할 때 원하는
지식을 손쉽게 꺼내 올 수 없게 돼.
그럼 어떻게 해야 지식을 잘 정리하는 것일까? 먼저 창고의 수납 공간이 잘
분류되어 있어야 할 것이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알맞은 공간에 넣어
두어야겠지. 그래서 수납 공간을 어떻게 나누는 게 좋을까 하고, 지식을 머리 속의
창고에 잘 정리해 넣어둘 수 있기 위해서 궁리해야 하는데, 이 경우 반드시 필요한
것이 새로운 정보를 깊이 이해하는 일이야.
자, '현상을 설명하는 가설'이라는 새로운 정보가 등장했어. 이것을 두뇌 창고의
어디에 분류해 넣을 것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 표현이 뜻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 표현은 두뇌 창고 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게 돼.
마치 어떤 새로운 물건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것이 무슨 물건인지 모르면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듯 말야. 설사 암기를 통해 아무 데나 억지로 머리 속 어딘가에
쑤셔 넣는다 할지라도, 나중에 필요할 때 찾아 쓰기가 어려워. 공부를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두뇌 창고는 거대한 쓰레기통으로 변하고 마는 거야.
바우:쓰레기통이라고요! 충격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방안에는 적어도 두 개의
쓰레기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저 구석에 있고 다른 하나는 제 목 위에 달려
있습니다.
달래:어느 정도 깊이 알아야 말의 뜻을 알게 되지요?
철학 교수:예를 들어 현상과 가설을 정확하게 가려낼 줄 알면, 그 말들의 뜻을
안다고 할 수 있겠지.
현상과 가설 가려내기
철학 교수:앞에서 잠시 생각해 본 것이지만, '현상'이란 말을 생각해 보자. 이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적, 외적 감관을 통해 지각되는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를
뜻하지. 꽃이 피고, 비바람이 불고, 누룩이 발효하고, 지진이 나는 등의 자연 현상도
있고, 컴퓨터를 만들고, 시를 쓰고, 저축을 하고, 전쟁을 하는 등의 인간(문화)현상도
있지. 오관을 통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내적 성찰에 의해서 지각되는 느낌이나 생각도 있고.
바우:이제 알겠습니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현상이고, 지각할 수 없는
것은 현상이 아니군요!
철학 교수:바우는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만, 사실 우리가 언급하는 것들로부터
현상을 가려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 예를 들어볼까?
어떤 사람이 소녀 가장에게 천만 원을 주었어. 그래서 그는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지. "참 훌륭한 사람이다."고 말이야. 자, 이 이야기에서 현상을 가려내어 보아라.
달래:"어떤 사람이 소녀 가장에게 천만 원을 주었다."는 것이 현상입니다.
바우:그리고 "그는 참 훌륭한 사람이다."는 것도 현상입니다.
철학 교수:그럴까? "그는 참 훌륭한 사람이다."는 것은 현상이 아니야. 그가
훌륭하다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지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바우:그럼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칭찬을 할 수 있지요?
철학 교수:사람들이 그의 '행위'를 보고 "그는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추리한
것이지 뭐. 이 추리는 물론 가설 추리야. 왜 그는 그러한 행위를 했을까? 이렇게
묻고, 그가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를 한 것이라고 추리한 거야.
달래:현상과 가설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군요.
철학 교수:다른 예를 연구해 보자.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 '말테의 수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지.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모여드는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오히려
여기서는 모두가 죽어 간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바깥을 다녀왔다.
내 눈에 띈 것은 이상하게도 병원뿐이었다. 한 남자가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금방 많은 사람들이 둘러쌌기 때문에, 그 후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후에 나는 임신부 한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무거운 걸음걸이로
양지바른 높은 별을 따라 걷고 있었다. 때때로 손을 내밀어 벽을 더듬어 보았다.
벽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가를 확인이나 하듯이. 그런데 벽은 여전히 길게 뻗어
있었다. 벽 안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나는 지도를 꺼내어 찾아보았다. 시립
산원이었다. 아, 그렇군. 여인은 해산하러 가는 모양이군. 산원이니까 해산할 수
있겠지.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갔다. 생 자크가가 나왔다. 둥근 지붕의 커다란 건물이
서 있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발 드 그라스 육군병원이었다. 물론 이런 것을 특별히
알 필요는 없겠지만, 알았다고 해서 해가 될 것도 없었다. 거리가 일제히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요오드포름과 감자를 볶는 기름과 정신적인 불안, 이 세 가지
냄새를 나는 그럭저럭 알아낼 수 있었다. 여름이 되면 어느 도시나 냄새를 풍기는
법이다.
이 글의 문장 하나 하나를 검토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니까, 내가 몇 개를 골라
물어 보겠어.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모여든다."는 것은 현상인가?
바우:그런 것도 같고 안 그런 것도 같고...
철학 교수: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상이 아니야.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현상이지만 '살기 위해'라는 목적을 지각할 수 없겠지?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모여든다."는 말이 사실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현상'을
"사람들은 살기를 원한다."는 가설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해. 그럼
"여인은 해산하러 가고 있다."는 말은?
바우:앞의 문제와 비슷합니다. "여인은 시립 산원의 벽을 따라 가고 있다."가
현상이고, 이 현상을 "여인은 해산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 교수:그럼 "요오드포름과 감자를 볶는 기름과 정신적인 불안, 이 세 가지
냄새를 나는 그럭저럭 알아낼 수 있었다."는 말은?
달래 ; 요오드포름의 냄새와 감자를 볶는 냄새는 맡을 수 있겠지만 어떻게
'정신적인 불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지요?
철학 교수:누구도 그런 냄새는 맡을 수 없지. 이 글의 주인공은 요오드포름 냄새와
감자 볶는 냄새 외에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미묘한 냄새를 맡았고, 그것을 "사람들이
정신적인 불안을 느끼고있다."는 가설로 설명하고 있는 거야.
달래:'현상'과 '가설'의 구분을 놓고 글을 대하니 아주 새로운 맛이 납니다. 그런데
어렵습니다. 현상을 구분하기도 어렵지만, 어떤 말이 가설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지요?
철학 교수:어떤 주장이 가설이 되기 위해서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해. 가설은
설명력이 있어야 하거든.
가설의 설명력
달래:가설이 설명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지요?
철학 교수:가설이 설명력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논증의 전제와 결론을
뒤집어서 타당한 연역 논증이 되는지 봐야 해. 함께 연구해 보자. 밖에서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고 있지?
바우:사이렌 소리입니다.
철학 교수:사이렌 소리는 왜 나는 것일까?
바우:이 근방 어딘가에 불이 났을 겁니다.
철학 교수:방금 바우가 한 추리는 다음과 같지?
밖에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그러므로--이 근방 어딘가에 불이 났다.
이것은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현상'을 "이 근방 어딘가에 불이 났다."는
가설로 설명하고자 하는 가설 추리야. 그럼 이 가설은 설명력이 있을까?
바우:논증의 전제와 결론을 바꾸어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이 되나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지요?
철학 교수:그랬지.
바우:위의 논증의 전제와 결론을 뒤집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근방 어딘가에 불이 났다.
그러므로--밖에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철학 교수:잘 했구나! 그러나 다음과 같이 둘째 전제를 보충해 넣으면 설명력을 더
잘 확인할 수 있어.
이 근방 어딘가에 불이 났다.
만일 이 근방 어딘가에 불이 났다면, 밖에 사이렌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러므로--밖에 사이렌 소리가 들릴 것이다.
이 논증은 전제들을 받아들이면 결론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타당한 논증으로서,
'전건긍정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형식이야.
'만일 ㄱ이라면 ㄴ'과 같은 형식의 조건문을 놓고, 그 전건인 ㄱ을 긍정하여 그
후건인 ㄴ을 결론으로 도출시키는 논증이지.
일반적으로 가설 추리는 다음과 같이 현상으로부터 가설을 추리하는 논증을
말하는 것이야.
현상
그러므로--가설
그리고 이 논증의 결론인 가설이 현상에 대한 설명력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가설을 전제로 놓고 볼 때 현상이 연역적으로 도출된다는 것을 말하지.
가설
만일 가설이 참이라면,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므로--현상이 나타난다.
여기서 둘째 전제는 가설과 현상을 인과적으로 연결하는 조건문인데, 이 조건문이
정당화하는 정도에 따라 가설이 가진 설명력의 정도가 결정되지. 이 조건문이 높게
정당화될수록 가설은 그만큼 강한 설명력을 가지게 되고, 이 조건문이 정당화되지
않을수록 가설은 설명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말이야. 둘째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경우에는 가설은 가설로서의 역할도 할 수 없는 거고.
바우:그러니까 "만일 가설이 참이라면, 현상이 나타난다."는 조건문이 정당화
되는지만 보면 되겠군요. 이제 가설의 설명력을 조사하는 거라면 자신 있습니다.
어떤 문제든 내 보십시오.
철학 교수:그럼 한 번 해 보자. "아이가 운다. 따라서 아이는 배가 고프다."
바우:"아이는 배가 고프다."는 가설은 설명력이 있습니다. "만일 아이가 배가
고프면, 아이는 운다."는 조건문이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철학 교수:"아이가 운다. 따라서 아이는 귀신 들렸다."는?
바우:말도 안 됩니다. "아이는 귀신 들렸다."는 가설은 설명력이 없습니다. 귀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래:아닙니다. 그 가설은 설명력이 있습니다. "만일 아이가 귀신들렸다면, 아이는
울 것이다."는 조건문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 교수:달래가 맞다. 그 조건문은 비록, "아이가 귀신 들렸다."는 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이를 참이라 가정하고 "아이는 운다."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거야.
바우:그렇지만 그런 가설은 엉터리잖아요!
철학 교수:그래서 가설은 설명력이 있어야 하지만, 설명력이 있다고 다 좋은
가설이 되는 것은 아니야. 가설의 평가 방법은 앞으로 깊이 연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점은 잠깐 접어 두고, 문제를 좀 더 풀어보자.
"아이가 운다. 아직도 남북 통일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는?
달래:"아직 남북 통일이 안 되었다."는 주장은 아이가 우는 현상에 대한 설명력이
없습니다. 이북에 고향을 둔 할아버지가 운다면 몰라도, 남북 통일이 안 되었다고
아이가 울 리 없습니다. 따라서 이 주장은 가설조차 될 수 없습니다.
지식의 확장과 세계의 이해
철학 교수:귀납 추리와 가설 추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보다 더 많은 것을
주장하는 추리야. 반면에 연역 추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을 추리해 내는 방법이고. 따라서 귀납 추리와 가설 추리로는 전제들이 모두
참이어도 결론의 참을 보장할 수 없어. 단지 현상을 설명하는 최선의 가설을 추리할
뿐이야.
반면에 연역 추리는 전제들의 참에 근거하여 결론의 참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전제들이 말하는 것을 넘어설 수 없는 문제점이 있어.
어떻든 우리가 잠시 살펴 본 세 가지 추리들은 모두 우리의 지식을 확장하는
방법들이야. 너희들 학교에서 배웠겠지만, 예를 들어 높은 산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비가 오고, 다른 쪽에는 해가 쨍쨍 나는 경우가 있지? 왜 그럴까?
교과서에는 이 현상에 대한 설명이 정리되어 있어.
높은 산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비가 오는데, 산 반대편 지방의 날씨는 맑고
쾌청한 경우가 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까?
공기가 산을 만나면 강제 상승하므로 단열 팽창하게 된다. 상승하는 공기는 응결
고도에서부터 구름이 생성되기 시작하여 비 또는 눈으로 내리므로 공기 중의
수증기량은 감소하게 된다.
이 공기가 산을 넘어 하강하면 단열 압축이 일어나므로, 공기의 온도는 높아지게
된다. 또한 하강하는 공기는 건조 단열 변화를 일으키면서 하강하게 된다. 결국 산을
넘어온 공기는 산을 넘기 전에 비해 온도는 높고 습도는 낮은, 고온 건조한 공기가
된다. 이러한 현상을 푄(Fohm) 현상이라고 한다. (김정우 외.'고등학교 지구과학2',
지학사, 1997, 193쪽)
우리는 과학자들의 과학적 추리 덕분에 공기의 압력과 습도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이 지식을 이용하여 '푄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야. 이처럼 추리는
우리의 지식을 확장시키고, 세계를 한 층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따라서 이
추리들을 잘 활용할 줄 알면 같은 조건에서도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겠지?
달래:배운 것을 활용해 볼 일이 있어요.
철학 교수:그게 뭐지?
달래 " 바우가 집에서 몇째인가 하는 겁니다.
바우:달래 너, 나에게 관심 있구나!
달래:그런 엉터리 가설이 어디 있어?
바우:아니야, 이건 가설이 아니라 현상이야 현상! 하하하.
연습 문제
*다음 각 주장이 특수 사실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 사실에 관한 것이지
지적하고, 이유를 말해보자.
[16]
한반도는 분단되어 있다.
[17]
좋은 약은 입에 쓰다.
[18]
너 자신 외에 너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없다.(에머슨)
[19]
열은 분자 운동이다.
[20]
자구는 자전한다.
[21]
바우는 지각하였다.
[22]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
[23]
행복한 인간은 항상 선량하다.(도스토예프스키)
[24]
육상 식물은 태양의 빛 에너지를 받아 광합성을 한다.
[25]
원시 시대의 인류는 자연을 거의 훼손시키지 않고 자연과 조화된 생활을
유지하였다.
*다음 각 물음에 답하라
[26]
프랑스인들이 진화론에 매우 적대적이었던 사실을 설로웨이 박사가 어떤 가설로
설명하는지 말해 보자.
[27]
중국은 오랫동안 한 아이만 낳도록 하는 정책을 펴 왔다. 그 결과 대부분의
가정은 한 아이만 갖게 되었다. 설로웨이 박사의 이론에 비추어 보아 중국 사회가
앞으로 어떤 성향을 띠게 될지 생각해 보자. 또 이 점에 대하여 어떤 판단을 하게
되었을 경우, 어떤 추리를 통해 얻은 판단인지 말해 보자.
[28]
미국 언론은 경영계를 진단하는 데 설로웨이 박사의 이론을 차용하고 나섰다. 이
진단에 이용되는 추리가 어떤 것인지 말해 보자.
[29]
자신이 형제들 가운데 몇째며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자신의 경우도 설로웨이 박사의 이론에 맞는지 생각해 보자. 만일 설로웨이 박사의
이론이 자신의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요인 때문인지 연구해 보자.
[30]
설로웨이 박사의 이론에 비추어 보아 앞으로 결혼하여 자녀를 낳을 경우 어떻게
기르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판단이 어떤 추리를 이용한 것인지
말해 보자.
*다음 각 글은 논증을 포함하고 있다. 전제와 결론을 찾아 낸 다음, 어떤 종류의
논증(추리)인지 말해 보자.
[31]
달래는 예쁘고 명석하다. 따라서 달래는 남학생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이다.
[32]
달래는 예쁘고 명석하다. 따라서 예쁜 여학생은 모두 명석할 것이다.
[33]
달래는 예쁘고 명석하다. 따라서 달래의 어머니는 예쁠 것이고 아버지는 명석할
것이다.
[34]
바우는 유머도 있고 장난기도 있지만 거칠고 도전적이다. 그래서 바우의 친구들은
바우를 좋아하면서도 두려워 한다.
[35]
바우는 유머도 있고 장난기도 있지만 거칠고 도전적이다. 바우는 평범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36]
바우는 유머도 있고 장난기도 있지만 거칠고 도전적이다. 요즈음 남학생들은 모두
그렇게 밝고 진취적이다.
[37]
바우는 오늘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따라서 바우는 집에서도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38]
어린아이의 형태를 취하는 것보다 더 유리한 것은 없다. 아직 세상 경험이 없는
천진한 아이라면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있는 까닭이다. 형식이 지배하는 세상
속으로 아직 들어가지 않은 몸이기에, 아이는 세상의 예의 범절에 구속받지 않는다.
그리고 예의에 구애됨이 없이 자신의 감정을 마음대로 표출할 수 있다.(밀란 쿤데라,
'불멸', 청년사, 79쪽)
[39]
지구는 계속 태양의 복사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지만, 그 연평균 기온은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지구가 공간에서 흡수한 에너지만큼을 방출하여
복사 평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강만식 외, '고등학교 공통 과학', 교학사, 1997,
149쪽)
[40]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많은 물건과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우선 먹고 입고 생활하기 위하여 식량, 의복, 주택 등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배우기 위하여 학교가 필요하고,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며, 치안과 국방을 위하여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등학교 정치 .경제',
한국교육개발원, 1997. 149쪽)
[41]
인류가 이렇게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게 된 그 바탕이 되는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본 적이 있는가? 인류가 저 자신도 땅 위에 사는 하나의 동물이면서, 다른
동물은 물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제 뜻대로 부리고 또 이용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아는가? 그것은 실로 아득한 옛날,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부터
지녀온 이성, 다시 말하면 정신의 작용에 말미암은 것이라 한다. 사람에게 만일
이성이란 것이 없었다면, 오늘날 같은 눈부신 문명을 만들기는커녕, 다른 동물과
아무 것도 가릴 바 없는 삶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산과 들을 외로이
방황하다가, 자연의 힘이라든지 더 힘센 동물 때문에 지쳐 씨가 없어졌을지도
모르는 것이다.(박갑수 외, '고등학교 독서', 지학사, 1997, 32쪽)
[42]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물질과 에너지에 기초하고 있으며, 물질과
에너지의 변화는 열역학 법칙으로 설명된다. 열역학 법칙은 물질이 어떠한 경우에도
창조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물질 보존 법칙, 에너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창조되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단지 형태만 바뀔 뿐이라는 에너지 보존 법칙,
에너지는 형태가 변하는 과정에서 보다 쓸모없는 형태의 에너지로 변화한다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열역학 법칙은 환경 문제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물질 보존 법칙은 폐기물은
어떠한 형태로든 지구상에서 없어지지 않고, 에너지 법칙은 지구상에서 인류가 쓸
수 있는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 이 에너지는 인류의 사용에 따라 점차 쓸모없는
에너지로 변화해 갈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최석진 외, '고등학교 환경 과학',
대한교과서, 1997,28쪽)
[43]
객주집을 하는 남자가 아내를 보고 하는 말이, "제기랄! 객주집 10년에 나그네를
그렇게 많이 쳐 왔어도, 어느 한 놈 물건 내버려두고 가는 놈이 없으니!"라고 했다.
그 말에 아내라는 인간은 한 수 더 뜨는지라, "여보, 참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무엇이든지 잘 잊어버린다고 하잖아요. 우리 까마귀 고기를 구해다가 한번
손님들한테 먹여 봅시다."라고 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구료. 정 그렇다면 내 한 마리 구해오지."
그러나 나그네의 밥상에 까마귀 고기 반찬을 해 놓아도 역시 물건 빠뜨리고 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지라 사내는, "괜한 거짓말이지. 당신 말 듣다가 돈들인 까마귀
고기만 떼먹히지 않았소?"라며 핀잔을 주었다.
그 소리를 듣고서 아내는 얼마쯤 무안해 하더니만 조금 있다가 남편을
쳐다보면서, "안 빠뜨려 놓구 가는 것 어쩌겠어요. 그런데 밥값은 틀림없이 받았우?"
하고 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밥값 받는 걸 깜박 잊은지라, 사내가 기겁을 하여, "아참! 그
놈이 밥값을 안 내고 가 버렸어!"하고 말했다.
아내가 신통한 듯이 깔깔 웃으면서, "아, 그거 봐요. 내 말이 왜 빈말이란 말예요.
밥값 내는 것까지도 잊고 가는 걸 보면 까마귀 고기란 놈이 효력이 있긴 있는 게지
뭐예요, 그렇지요?"
*다음 각 글에서 현상과 가설을 가려내어 보자.
[44]
높은 곳에서 출발한 열차는 낮은 곳으로 내려오면서 그 속력이 점점 빨라진다.
열차가 높은 곳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큰 위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가 내려오면서
그 위치 에너지는 감소한다. 이 때에 열차의 속력은 점점 빨라지므로 그 운동
에너지는 증가한다. 이것은 열차가 처음 출발할 때의 높이에서 가지고 있었던 위치
에너지의 일부가 열차의 운동 에너지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중학교 과학 3',
교육부, 1987,49쪽)
[45]
그러나 아아, 우리들의 미칠 듯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신은 비도 햇빛도 우리에게
내려 주시지 않는다네. 나는 그것을 느낀다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괴로워지는
그 시절, 어째서 그 시절은 그다지도 성스러웠던가! 그것은 내가 참을성을 가지고
성령을 기다리고 신이 내게 베풀어 주시는 기쁨을 마음속으로 감사하면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네.(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다음 각 가설이 설명력을 가지고 있는지 판단하고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46]
안과 병원에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공기 오염이 심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47]
우리가 사는 지구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생명 현상은 존재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48]
일인당 국민 소득 만 달러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일부 계층 사람들이 부를 독점하고 있다.
[49]
나는 아무리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 나는 그런 팔자를 타고난 모양이다.
[50]
마술사의 모자에서 비둘기가 나왔다. 그것은 마술사가 '얏!' 하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51]
행성계의 모습이 회전 원반이라는 사실에서 우리 태양계는 회전하던 성간운이
중력 수축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된다.(강만식 외, '고등학교 공통 과학',
교학사, 1997,290쪽)
[52]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한다. 태양계는 조화로운 체계이기 때문이다.
넷째 마당
논증을 찾아라!
철학 교수:논증을 평가하려면, 먼저 논증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해. 예를 들어 다음
글이 논증을 포함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새로운 땅을 만들어 낼 수 없듯이, 새로운 물도 만들어 낼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쓰는 물을 더럽히게 되면, 우리는 물론, 우리의 후손들까지도 더러워진 물을
쓸 수밖에 없다.('중학교 환경', 교육부, 1996, 85쪽)
바우:논증이 있습니다. 증명적 논증(연역 추리)입니다.
철학 교수:잘 했어. 그럼 다음 글은?
인간은 기쁨도 슬픔도 맛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올바르게 알고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간다.(윌리암 블레이크, '결백한 점')
바우:논증이 없습니다.
철학 교수:맞았어, 논증이 없지?
논증 없이 받아들이는 주장
달래:그렇지만 선생님, 입증 책임의 의무 때문에 모든 주장은 논증적이라고
하셨는데, 왜 논증 형식으로 주장하지 않지요?
철학 교수:그것은 사람들이 '경제성의 원칙'에 따르기 때문이야. 굳이 논증을
제시하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들에 대하여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번거롭기만 하고 비경제적이겠지?
"인간은 기쁨도 슬픔도 맛보게 되어 있다."는 것은 일반적 주장으로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귀납 추리를 한 것이겠지.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자신이 관찰하고
경험한 사례들을 전제로 제시해야 하지. 그러나 이 글의 필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야. 모두들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했겠지. "이를 올바르게 알고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간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야.
"환경을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우리의 소비 생활, 경제 활동, 환경,
열역학 법칙, 자연의 파괴, 건강한 삶 등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전제로 한 연역
추리의 결론이야. 그러나 우리는 이 주장의 근거를 묻지 않아. 잘은 몰라도 그
근거를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과학적 지식의 경우도 근거가 생략된 것을 흔히 볼 수
있어. 다음 예를 봐.
지방은 우선 지방산과 글리세롤로 분해된다. 그리고 지방산은 활성 아세트산이
되어 TCA 회로로 들어가고, 글리세롤은 3탄당 인산을 거쳐 피루브산이 된 다음
활성 아세트산을 거쳐 TCA 회로도 들어간다.(홍영남 외, '고등학교 생물2', 천재교육,
1997, 134쪽)
"지방은 지방산과 글리세롤로 분해된다."는 것은 생물학자들이 실험과 관찰의
결과를 귀납적으로 추리해서 얻어낸 일반적 주장이지. 그러나 교과서에는 이러한
귀납 추리의 과정이 대부분 생략되어 있어. 과학자들 사이에 이미 인정되고 정립된
견해이기 때문이지. 몰론 과학자들에 의해 정립된 견해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리고 자신의 관찰에 의한 주장도 논증을 제시할 필요가 없어. 물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리고 자신의 관찰에 의한 주장도 논증을 제시란 필요가 없어. 물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되어 있어야 하지. "엄마, 저 오늘 학교에서 오는 길에 교통
사고 나는 것을 보았어요."라고 달래가 말할 경우, 엄마가 "너 그 말이 왜 참인지
근거를 대 보아라."고 하시지는 않지?
상식이나 통념 등도 논증을 제시하지 않아도 돼. 논증을 제시하면 오히려
사람들은 참지를 못하지. "요즈음 출퇴근 시간에는 길이 너무 막혀. 왜냐하면..."
이렇게 이유를 말하려고 하면, 귀를 막고 싶겠지?
바우:그러고 보니 생략할 근거를 적절하게 생략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겠군요.
철학 교수:그래. 생략할 것을 생략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지루하게 여기고, 결국
청중이나 독자를 놓치게 돼.
그렇지만 '굳이 논증을 제시하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지. 유신론자는 "신은 존재한다."는
전제를 생략하고 말을 하는 반면, 무신론자는 바로 이 생략된 전제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
바우:"그래서 서로 누가 옳은가를 따질 수밖에 없게 되고, 그래서 논증 평가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은 생략하셔도 되겠습니다.
철학 교수:하하, 선생님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게 아냐. 논증 평가를 잘 하기
위해서는 생략된 근거의 성질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다음 글을 읽고,
근거가 생략된 주장이 있을 경우, 어떤 종류의 근거가 생략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
근거가 생략되어도 좋은 지 말해 보아라.
금속의 반응성의 서열을 찾아보면 분명히 철보다 알루미늄의 반응성이 앞선다.
그런데 왜 철보다 알루미늄이 더 오래 견딜 수 있을까?
이 현상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알루미늄을 새로 깎아 공기 중에
방치하면 그 표면에 얇은 산화알루미늄의 막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내부의 알루미늄을 보호하기 때문이다.(강만식 외, '고등학교 공통과학', 교학사, 1997,
42쪽)
달래:"금속의 반응성의 서열을 찾아보면 분명히 철보다 알루미늄의 반응성이
앞선다."는 주장은 귀납 추리의 근거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화학자들이 다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우:"알루미늄을 새로 깎아 공기 중에 방치하면 그 표면에 얇은 산화알루미늄의
막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것이 내부의 알루미늄을 보호하기
때문이다."는 주장은 "철보다 알루미늄의 반응성이 앞서는데도 알루미늄이 더 오래
견딘다."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입니다.
그런데 이 가설 속에 있는 "알루미늄을 새로 깎아 공기 중에 방치하면 그 표면에
얇은 산화알루미늄의 막이 형성된다."는 주장은 귀납 추리의 결론으로서 그 근거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 근거 역시 화학자들이 모두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략되었습니다.
가설적 '사실'의 기술
철학 교수:아주 잘 했어. 그럼 다음 글이 논증을 포함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조선 초기의 유학은 새 왕조의 개창을 둘러싸고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사장을 중시하면서 현실의 정치, 경제에 보다 관심을 가진 관학파 학풍이며, 다른
하나는 경학을 중시하여 유교의 기본적인 정치 철학의 추구에 주력했던 사학파
학풍이었다. 이 두 학파간에는 실제로 학문의 경향과 현실 정치에 대응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고등학교 국사(상)', 국사편찬위원회, 1997, 181쪽)
바우:논증이 없습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그리고 있는 글입니다.
철학 교수:바우가 이젠 제법이구나.
바우:수제자는 다르지요!
철학 교수:하하하... 바우가 정말 선생님의 수제자인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지. 다음
글은 논증을 포함하고 있는가?
지구는 지금으로부터 약 46억년 전 태양 주위의 미행성들이 서로 충돌. 합체하여
탄생되었다. 탄생 직후의 지구는 뜨거운 용암으로 덮여 있었으나, 미행성들이
잠잠해짐에 따라 냉각하여 지각이 형성되었다. 수증기가 이산화탄소로 이루어진
원시 대기에서 대량의 강우에 의해 바다가 형성되었으며, 대륙은 25억 년에서 10억
년 전에 이르러 작은 대륙들의 충돌, 합체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이 무렵 지구
표면의 온도는 현재 온도와 유사했으며, 지구 환경도 안정기에 들어섰다.(최석진 외,
'고등학교 환경 과학', 대한교과서, 1997. 4쪽)
바우:이 글 역시 논증이 없습니다. 지구 탄생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그리고 있는
글입니다.
철학 교수:그럴까? 잘 생각해 보아라.
바우:사실을 그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철학 교수:사실을 누가 그리고 있지?
바우:그야 과학자들이지요.
철학 교수:그러니까 과학자들이 46억 년 전에 지구 탄생 과정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그렸다는 것인가?
바우:그렇지는 않지요. 그 때에는 인간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철학 교수:그럼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과학자들이 어떻게 그 사실을 그렸다는
것이지?
바우:수제자 되기가 쉽지는 않군요.
철학 교수:위의 글은 지구 탄생에 관한 과학적 가설(이론)을 소개하고 있는 거야.
물론 이 가설은 '정설'로 인정되고 있어서, 교과서에는 마치 사실인 것처럼 기술되고
있을 뿐이야. 따라서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것 같은 글일지라도 가설적인 것들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고, 정확하게 가려낼 줄 알아야 해.
달래:이미 정설로 인정되는 가설이면, 그것을 굳이 사실과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요?
철학 교수: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럴 필요가 있어. 첫째, 우리가 정설로
인정되는 가설을 지식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을 어디까지나 가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지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돼. 가설은 아무리 정설로 인정된
것일지라도, 언젠가 수정되거나 폐기될 수 있거든.
둘째, 사실과 가설은 평가 방법이 달라. 사실은 문자 그대로 사실 여부를 밝히는
과정을 밟으면 돼. 그러나 가설은 대부분 사실 여부를 밝힐 수 없어. 앞으로
공부하겠지만, 가설의 평가는 사실 확인과는 다른 절차를 밟아서 이뤄지거든.
바우:이제 교과서를 읽을 때 조심해야겠습니다. 국사 교과서는 빼고요.
철학 교수:엄밀히 말하자면 국사 교과서에 실린 진술들도 가설적이라 할 수 있는
게 대부분이야. 현대사가 아닌 바에야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오늘날까지
살아서 증언하는 것이 아니고, 사료라든가 역사적 유물을 놓고 "아마 이랬을
것이다."라고 추정해서 역사를 기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추정은 물론 특수 사실에
관한 가설 추리거든. 그래서 위의 글 역사적 사실을 말한다고 하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잘못일 수 있어.
달래:그렇다면 가설 아닌 게 없지 않을까요?
철학 교수:그런 견해도 있지. 특히 미국의 철학자 콰인 같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바우:진도를 나가지요.
사실도 가설이 된다!
철학 교수:그렇게 하자. 다음 글은 논증을 포함하고 있을까?
호남 지방은 넓은 평야와 따뜻한 기후 등이 농업에 유리하여 일찍부터 벼농사를
지어 왔다. 이 지역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여러 곳에 농업용 저수지를 만들고, 관개
수로를 정비하는 등 벼농사에 힘을 기울여 왔다.
호남 지방은 경지 면적이 전국에서 가장 넓고 쌀, 쌀보리 등의 생산도 전국에서
가장 많다. 그러나 농가 1호당 경지 면적이 좁아 토지 이용은 집약적이다. 요즘에는
많은 농민이 농촌을 떠남으로써 노동력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벼농사는 동부
구릉 지대에서 많이 하고 있다.('중학교 사회1', 교육부, 1996, 77쪽)
바우:논증이 없습니다."호남 지방은 넓은 평야와 따뜻한 기후 등이 농업에
유리하며 일찍부터 벼농사를 지어 왔다."는 부분이 가설을 추리하는 논증 같지만,
호남 지방의 넓은 평야와 따뜻한 기후가 농업에 유리하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가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철학 교수:"호남 지방의 넓은 평야와 따뜻한 기후가 농업에 유리하다."는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이 사실을 설명하는 가설로 제시되고 있어.
왜 호남 지방은 일찍부터 벼농사를 지어 온 것일까? 그건 아마 호남 지방이 넓은
평야로 되어 있고 기후가 따뜻하여 농업에 유리하기 때문일 거야. 이렇게 사실과
사실이 인과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가설 추리이니까 주의해야
해.
바우:사실도 가설로 사용될 수 있군요!
'때문에' 때문에 속지 말라!
철학 교수:그럼 다음 글이 논증을 포함하고 있는지, 만일 포함하고 있다면, 어떤
논증인지 생각해 보자.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가정의 일원이 되고, 그 가정을 바탕으로 성장하면서
친척, 이웃 사람, 직장 동료, 학교 친구들과 생활하면서 사회 구성원이 된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본성, 즉 사회성이
있다. 자연계에서 인간만이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이 사회성
때문이라 하겠다.('고등학교 사회.문화', 한국교육개발원, 1997, 125쪽)
바우:논증이 들어 있습니다. "자연계에서 인간만이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이 사회성 때문이라 하겠다."는 부분이 논증입니다.
철학 교수:어떤 논증이지?
바우:증명적 논증입니다. 다음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진 연역 추리입니다.
인간은 사회성이 있다.
그러므로--자연계에서 인간만이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간다.
철학 교수:달래도 그렇게 생각하니?
달래:'때문에'라는 말이 있는 부분이 전제일 테니까요.
철학 교수:'때문에'라는 말이 붙었다고 해서 무조건 전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야. '때문에'는 이유를 가리키기 위해서도 쓰이지만 원인을 가리키기 위해서도
쓰이기 때문이야. 방금 선생님이 쓴 '때문이야'라는 밀은 어떤 것을 가리키지?
달래:그보다 먼저 이유와 원인의 차이를 말씀해 주세요.
철학 교수:이미 앞에서 한 번 설명했듯이, '이유'는 논증의 전제를 말하고, '원인'은
결과를 불러일으킨 선행 사건을 말해. 그래서 이유를 가리키는 '때문에'는 연역
추리를 만들고, 원인을 가리키는 '때문에'는 가설 추리를 만들지.
바우:그럼 선생님이 쓰신 '때문이야'라는 말은 이유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앞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가설 추리입니다.
자연계에서 인간만이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간다.
그러므로--인간은 사회성이 있다.
철학 교수:맞아. 다음 각 예들 속의 '때문'이라는 말의 쓰임도 생각해 보자.
(1) 그가 왜 비난받는 줄 알아? 그가 교만하기 때문이야.
(2) 그는 앞으로 큰 일을 할 것이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통이 큰 인물이기
때문이다.
(3) 그가 배신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비밀은 보장되지 않는다.
(4) 그는 운이 좋았기 때문에 교통사고에서 살아 남았다.
바우:달래에게는 좀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철학 교수:그럼 바우에게는?
바우:(1)과 (4)는 원인을 가리키는 '때문'이고, (2)와 (3)은 이유를 가리키는
'때문'입니다.
철학 교수:잘 했어. 수제자가 될 소질이 있기는 있어.
바우:그런데요?
철학 교수:사실은 위의 글에 또 하나의 논증이 들어 있어. 그걸 발견 할 수
있으면, 바우가 수제자인지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겠는데...
주장들간의 관계를 살펴라!
바우:논증이 있다는 어떤 단서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그런고로'와 같은 말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철학 교수:물론 논증은 대개 '그런고로', '따라서', '왜냐하면', '때문에', '까닭이다',
'그 이유는'과 같은 표현을 담고 있어. 그래서 이러한 표현을 발견하면 그 근방에
논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 없다고 해서 논증이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돼. 이러한
표현이 없이 논증이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야. 위의 글 앞부분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가정의 일원이 되고, 그 가정을 바탕으로 성장하면서
친척, 이웃 사람, 직장 동료, 학교 친구들과 생활하면서 사회 구성원이 된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 속에서 갈아가야 하는 본성, 즉 사회성이
있다.
이 부분은 다음과 같은 논증이야.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가정의 일원이 되고, 그 가정을 바탕으로 성장하면서
친척, 이웃 사람, 직장 동료, 학교 친구들과 생활하면서 사회 구성원이 된다.
그러므로--사람에게는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본성, 즉
사회성이 있다.
바우:그러고 보니 정말 논증이군요!
달래:귀납 추리를 하고있군요!
철학 교수:이 논증의 경우엔 그 점이 분명하지 않아 달래 말대로 귀납 추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사람들이 어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사례를 들어 일반적으로
인간이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말이야.
그러나 이 사회성을 '본성'으로 여기면, 이건 귀납 추리가 아니가 가설 추리야. 왜
사람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그건 사람들이 '사회성'이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거야. 이러한 추리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아?
달래:위의 추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애매한 추리군요.
철학 교수:그래. 따라서 위의 추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봐야 하지.
바우:그런데 어떻게 '그런고로'와 같은 말이 없는데 논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비법을 좀 공개해 주시지요.
달래:바우 너 또 요령에 관심이 있구나!
철학 교수:비법 같은 건 없지만, 다음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거야.
(1) 주장들간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내용을 파악한다.
(2)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들은 전제일 가능성이 많다.
(3) 다른 주장들보다 도전적이고 문제성이 있는 주장이 결론일 가능성이 많다.
(4) 심증이 가는 주장을 결론에 놓고 다른 주장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5) 생략된 근거나 결론을 보충해서 생각해본다.
이러한 점들을 살피면서 논증을 분석하면 한결 쉬울 거야.
'논증'을 분석한다?
달래:논증도 분석하나요?
철학 교수:'분석'은 원래 복합된 사물을 그 요소나 성질에 따라 나누는 일을
말하지. 물이 어떤 물질인가를 알기 위해 과학자들은 물의 성분을 분석해 그래서
물(H2O)이 수소(H) 원자 두 개와 산소(O) 원자 한 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히지.
이 경우 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물 분자를 분석했을 때 어떤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지 안다는 것에 해당하는 거야.
그런데 분석의 기법은 과학자들의 실험실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야. 분석의
기법을 통해 우리는 거시적 사건의 현상 뒤에 숨은 미시적 사건들의 진면목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거든.
달래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 간단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겠지. 그러나 잘 생각해 봐. 이
'이해'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달래의 동작 하나 하나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
달래가 문 앞으로 걸어간다. 문 손잡이에 손을 얹고 그것을 돌린다. 문이 열린다.
열린 문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이 정도의 분석만 해도 사건의 모습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지? 그러나
우리는 분석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 우리는 '달래'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고, 그녀가 누구의 방에 들어가는지도 궁금하기 때문이지. 논증을 바르게 이해하여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주어진 논증을 면밀히 분석할 수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논증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야. 이 과정에서 우리는 논자가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은밀하게 전제하고 있는 '숨은 전제'를 찾아내야
하고, 또 애매모호한 표현을 바로 잡는 일 따위를 해야 해. 이른바 '자비의 원칙'에
따라서...
바우:'자비의 원칙'이란 어떤 것이지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
철학 교수:그건 아주 중요한 원칙이니 잘 연구해 보자.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 두 젊은이가 푸주에서 고기를 샀지. 그런데 그 중
한 젊은이가 푸주 주인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앞서 있던 고깃덩어리를 훔쳐 뒤에
있는 젊은이의 호주머니 속에다 숨겼어. 주인은 고기가 없어진 것을 알고
젊은이들에게 내놓으라고 하였지. 그러나 훔친 젊은이는 주머니를 털어 보이며
"나는 갖지 않았다."고 잡아떼었으며, 고깃덩어리를 주머니에 넣고 있는 젊은이는
"나는 절대 훔친 일이 없다."고 우겼어.
바우:그래서 푸주 주인이 뭐라고 말했어요?
철학 교수:그야 "누가 훔치고 누가 가진 것은 알 수 없으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신들 때문에 고기가 없어졌다는 사실이오"라고 말했지. 자, 이제 젊은이들은
꼼짝 못하고 고기를 내놓아야 할까?
바우:자기들도 양심이 있겠지요.
철학 교수:푸주 주인은 양심이 아니라 논리에 호소하고 있어. 따라서 젊은이들이
고기를 훔쳐 갔다는 것을 푸주 주인이 증명했는가를 생각해 봐.
바우:증명한 것 같은데요.
철학 교수:바우야, 단답 형식으로 대답하지 말고 가능한 한 언제나 논증적으로
대답하도록 해라. 그래야 비판적 사고 훈련도 되고 글쓰기 연습도 되는 것이야.
바우:알았습니다. 젊은이들 때문에 고기가 없어졌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사실에 의하여 젊은이들이 고기를 훔쳐 갔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달래:선생님, 어쩐지 석연치 않습니다.'사실'이 무엇인지 밝혀야겠습니다."젊은이들
때문에 고기가 없어졌다."는 것이데...
철학 교수:푸주 주인이 그렇게 말했지.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봐야
돼. 논증을 평가할 때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전후 맥락을 살펴
재해석할 필요가 있어. 그렇지 않으면 말의 참 뜻을 놓치거든.
자, 젊은이들 때문에 고기가 없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때문에'라는 말을 잘
생각해 봐.
달래:'때문에'라는 말은 벌써 전제에서 젊은이들에게 혐의를 두는 표현이군요.
철학 교수:그래. 이 경우 푸주 주인은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했다고 하지.
'순환 논증'이라고 하기도 하고. 곧, 결론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을 전제하는
오류야. 그리고 푸주 주인의 논증이 오류라면 젊은이들이 고기를 훔쳤다는 것이
증명될 수 없는 거고.
논자의 입장을 생각하는 '자비의 원칙'
철학 교수:따라서 우리는 푸주 주인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참뜻을 살리는 방향으로 논증을 재구성해야 돼.
논증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경우, 이렇게 논증을 논자(푸주 주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데, 이를 '자비의 원칙'이라고 하지.
자비의 원칙은 논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논증을 가장 경제적으로
제시하였다는 것을 가정하고, 그 논증의 실체를 밝히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이야.
이렇게 어떤 사람의 논증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자비의 원칙에 따라 논자의 입장에서
논증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해.
그렇지만 생각해 봐. 음미하는 사람은 평가자이지? 그래서 이 원칙을 따르다 보면
평가자가 논증을 본래의 논증보다 더 강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데, 그래서는 안돼.
그러한 논증은 본래의 논증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러나 더욱 나쁜 것은
논증을 실제보다 약화시켜 평가하는 거야. 이 경우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게
되지. 그래서 자비의 원칙에 따라 논증을 재구성할 때는 원래 논증의 성격을 바꾸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해. 그건 전혀 새로운 논증이 되어 버리니까 말이야.
바우:선생님, 자비의 원칙에 따라 제가 '사실'이 무엇인지 말해 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사실만을 말하자면, "젊은이들이 푸주에서 고기를 사는 동안 고기가
없어졌다."는 것 아닌가요?
철학 교수:맞았어. '때문에'라는 말을 빼고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아. 그럼 이제
푸주 주인의 논증을 바우가 다시 한번 말해 볼까?
바우:"두 젊은이가 푸주에서 고기를 사는 동안 고기가 없어졌다. 따라서 이
젊은이들이 고기를 훔쳤다." 이렇게 되겠습니다.
철학 교수:좋아. 그럼 이 추리는 어떤 종류인가?
바우:가설 추리입니다. 푸주 주인은 "두 젊은이가 푸주에서 고기를 사는 동안
고기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젊은이들이 고기를 훔쳤다."는
가설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 가설은 설명력이 있습니다. 이 가설을 참이라 가정 할
때 고기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학 교수:잘했어. 그럼 이제 정리해 보자. 푸주 주인은 다음 가설 추리를 한
것이지?
두 젊은이가 푸주에서 고기를 사는 동안 고기가 없어졌다.
그러므로--이 젊은이들이 고기를 훔쳤다.
푸주 주인은 이렇게 가설 추리를 한 끝에 젊은이들에게 고기를 내어놓으라고 한
거야. 그랬더니 푸주 주인의 가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한 젊은이는
"나는 고기를 가지지 않았다."고 하였고, 다른 젊은이는 "나는 고기를 훔치지
않았다."고 하였던 거야. 이 젊은이들의 말이 참말이라고 할 경우 그들이 고기를
훔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바우:그런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 논증이 부당한 연역 추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고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나는 고기를 훔치지 않았으며, 나의 친구는 고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다음 논증 역시 부당합니다.
나는 고기를 훔치지 않았다.
그러므로--나는 고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나의 친구는 고기를 훔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푸주 주인의 가설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했습니다.
달래:그렇다고 해서 젊은이들이 고기를 훔쳤다는 것이 증명된 것도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고기를 훔쳤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이기 때문입니다.
푸주 주인이 적용한 '유일한 가설'
철학 교수:가설 추리로는 증명을 해낼 수 없는 게 사실이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설 추리로 생각해 낸 것이 모드 쓸모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야. 가설 평가의
여러 기준이 있지만 그중에 "문제의 현상을 설명하는 가설이 하나밖에 없을 경우,
다른 문제가 없는 한, 그것이 문제의 현상을 설명하는 최선의 가설이다."는 원칙이
있어. 푸주 주인이 젊은이들을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원칙을
적용하였기 때문이지. 고기가 없어진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가설이 없거든.
바우:알았습니다. 그럼 다른 가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경우는 어떻게 하지요?
철학 교수:그 경우에는 주의해야 해. 설명력은 어떤 가설이 진정한 가설이 되기
위한 필요 조건이지 충분 조건은 아니거든.
가설과 사실을 혼동하는 오류
철학 교수:특히, 유일한 가설이 아닌데도 유일하다고 생각하든지, 가설을 가설로
여기지 않고 사실로 여기게 되면 '가설과 사실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어.
너희들 김동인의 '배따라기'를 읽어 봤지?
그러나 그가 그의 집 안방에 들어설 때에는 뜻도 안 하였던 광경이 그의 눈앞에
벌어져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떡상이 있고, 그의 아우는 수건이 벗어져서 목뒤로 늘어지고,
저고리 고름이 모두 풀어져 가지고 한편 모통이에 서 있고, 아내도 머리채가 모두
뒤로 늘어지고 치마가 배꼽 아래 늘어지도록 되어 있으며, 그의 아내와 아우는 그를
보고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움쩍도 안 하고 서 있었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어이없이 서 있었다. 그러나 좀 있다가 마침내 그의 아우가
겨우 말했다.
"그놈의 쥐 어디 갔나?"
"흥! 쥐? 훌륭한 쥐 잡댔다."
그는 말을 끝내지도 않고 짐을 벗어버리고 뛰어가서 아우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형님. 정말 쥐가!"
"쥐? 이놈! 형수와 그런 쥐 잡는 놈 어디 있니?"
그는 아우의 따귀를 몇 번 때린 위에 등을 밀어서 문 밖에 집어 던졌다. 그런
뒤에 이제 자기에게 이를 매를 생각하고 우들우들 떨면서 아랫목에 서 있는
아내에게 달려들었다.
"이년! 시아우와 그런 쥐 잡는 년이 어디 있어?"
그는 아내를 거꾸러뜨리고 함부로 내리 찧었다.
"정말, 쥐가...,아이 죽갔다.!"
그의 팔다리는 함부로 아내의 몸 위로 오르내렸다.
[...]
"상년! 죽얼! 물에래두 빠데 죽얼..."
그는 실컷 때린 뒤에 아내도 아우도 같이 등을 밀어내어 쫓았다. 그 뒤에 그의
등으로, "고기 배때기에 장사해라?"고 토하였다.
[...]
그는 불을 켜려고 바람벽에서 떠나 성냥을 찾으려고 돌아갔다. 성냥을 늘 있던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저기 뒤적이느라니까 어떤 낡은 옷뭉치를 들칠
때에 문득 쥐소리가 나면서 무엇이 후더덕 뛰어나온다. 그리하여 저편으로 기어서
도망한다.
"역시 쥐댔다!"
그는 조그만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만 그 자리에 맥없이 털석 주저앉았다.
[...]
그리하여 낮쯤, 한 삼십 리 내려간 바닷가에서 겨우 아내를 찾기는 찾았지만, 그
아내는 이전과 같은 생기로 찬 산 아내가 아니요, 몸은 물에 불어서 곱이나 크게
되고, 이전에 늘 웃음을 흘리던 예쁜 입에는 거품을 잔뜩 물은 죽은 아내였다.
[...]
장사를 지낸 이튿날부터 아우는 그 조그만 마을에서 없어졌다.
아내가 죽고 아우가 마을을 떠나는 비극이 왜 일어났지?
바우:비극의 원인은 형이 어수선한 방안의 모습을 보고 추리해 낸 가설이 단순한
가설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그것을 사실로 여기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철학 교수:그래. 형은 방안의 풍경을 보고 "아내와 아우가 정을 통하였다."는
가설을 세웠던 거지. 물론 이 가설은 설명력이 있어. 이 가설을 받아들이면 왜
방안의 풍경이 그러한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이 가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지. 가설은 설명력이 있어야 하지만,
설명력이 있다고 해서 가설이 사실로 변하는 것은 아니야. 동일한 현상을 설명하는
다른 가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거든.
아내와 아우는 쥐를 잡고 있었다고 말했지. 형은 이 말을 믿지 못할지언정
가설로서는 인정할 수 있어야 했어. "아내와 아우는 쥐를 잡고 있었다."고 해도
방안의 풍경이 설명되기 때문이야.
나아가 형은 적어도 두 개의 경쟁 가설들 중 어느 것이 옳은가를 알아내기 위한
검증 절차를 밟았어야 했어. 그랬더라면 방안에 쥐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을 것이고,
이 경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거야.
그런데 형은 자신의 가설을 여러 가설들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고 사실로 믿어
버렸어. 가설과 사실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지. 그래서 형은 격분한 끝에
폭력을 휘둘렀고, 결과적으로 아내가 바다에 몸을 던지고 아우가 마을을 떠나는
비극이 빚어진 거야.
바우:가설과 사실을 혼동하는 오류! 달래야. 잊지 말아라.
철학 교수:이 '배따라기'의 경우처럼 개인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현실 사회에서도
가설과 사실을 혼동하는 데서 오는 폐해가 심하지. 출처 불명의 추측들과
이야기들이 사실로 둔갑하고, 각종 여론 조사의 결과가 거꾸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고...
달래:어떻게 어른들이 가설과 사실을 혼동하지요?
철학 교수:아무리 어른이라 해도 별 수 없어. 어른들은 논리가 힘을 쓸 수 없는
시대를 살았거든. '경제 성장'이라는 이념이 진리와 가치의 표준인 시대를 살아온
거야.
바우:그리고 우리도 비판적 사고를 공부하지 않으면 같은 오류를 반복할 것이다,
이 말씀이시죠?
연습 문제
*다음 글은 논증을 포함하고 있는가? 만일 논증을 포함하고 있다면 어떤 종류의
논증인지 말하고, 전제와 결론을 가려내 보자. 만일 논증의 뒷받침을 받고 있지 않은
주장이 있다면, 어떤 논증이 생략되었을지 생각해 보자.
[53]
언어는 뜻이 있는 음성으로 되어 있고, 언어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고 사회성이
잇다. 그리고 언어는 변하며,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언어는, 우리의
의사나 감정을 소통시켜 주고, 지식을 쌓게 하며, 문학 작품을 이루게 한다.(장윤호,
'언어에 대하여', '중학교 국어 1-1', 교육부, 1996, 23쪽)
[54]
원래, 인류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그러나 이성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연을 이용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 따라서, 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최석진 외, '고등학교 환경 과학', 대한교과서, 1997, 29쪽)
[55]
호흡계에 영향을 받으면 완벽한 가스 교환이 일어나지 못하고, 심장은 산소
결핍을 보충하기 위하여 더 많은 심장박동을 하게 되어, 심장과 혈관은 더 큰
압력을 받아 심장 확대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다.(최석진 외, '고등학교 환경
과학', 대한교과서, 1997, 101쪽)
[56]
우리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것은 삶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이다.(도스토예프스키, '악령')
[57]
개인의 사업이 탁월할 수 있는 시대는 사라졌노라. 왜냐하면 국민과 당파의 집단
스스로가 근대의 영웅이기 때문이다.(하이네, '프랑스의 상태')
[58]
사람은 자기가 잘못이었다고 고백하기를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오늘의 자기는 어제의 자기보다 더 현명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알렉산더 포프)
[59]
지하수는 한 번 오염되면 정화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거나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원과 시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지하수에는 오염 물질을 분해할 수 있는
미생물들이 살기 어렵기 때문에, 강이나 호수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정화 과정이
거의 없다.(최석진 외, '고등학교 환경 과학', 대한교과서, 1997, 57쪽)
[60]
사람들은 흔하지 않은 것에 더욱 큰 가치를 느낀다. 경제적 가치는 희소성에서
비롯된다. 우리에게 잠시도 없어서는 안 될 공기를 생각해 보자. 공기가 없으면 살
수 없지만, 공기는 무한할 정도로 주어져 있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등학교 경제', 교육부, 1997, 6쪽)
[61]
민주 사회에서 강조되는 생활 양식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인 의식을 발휘하는 태도다. 주인 의식이란, 국가 생활과 공동 생활에
관련된 일을 나의 일처럼 생각하고, 그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고 그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따라서,
권리를 침해당하고도 정당한 권리 주장을 하지 않거나., 권리만을 주장하고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참다운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다.(고등학교 정치, 경제, 교육부, 1997, 42__43쪽)
[62]
팔을 벌리고 천천히 돌던 스케이트 선수가 팔을 오므리면 빨리 돌게 된다. 같은
이치에서 중력 수축으로 성간운의 부피가 감소할수록 성간운은 점점 빨리 회전한다.
회전에 의한 원심력은 적도 부분의 물질이 수축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으나 극
방향의 물질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따라서 천천히 회전하던 구형의
성간운은 중력 수축이 진행됨에 따라 납작한 회전 원반체로 바꾸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태양계가 왜 회전 원반의 형태를 띠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강만식 외, '고등학교 공통 과학', 교학사, 1997, 291쪽)
[63]
진정 중대한 철학상의 문제는 오직 하나밖에는 없다. 그것은 자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는 것이다. 그 외의 것, 즉 세계는 3차원으로 되어 있다느니 하는 것
따위는 어디까지나 그 이후의 문제다. 그런 것은 한낱 유희밖에 안 되며, 따라서
먼저 이 근본 문제에 답해야 하는 것이다.(카뮈, '시지프스의 신화' 제1장)
[64]
몇 년 전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에서 희대의 엽기적 살인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하였고 마침내 살인범은 검거되었다. 그 살인범이 미국의 청소년과 가정을 위한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이 책임자인 답슨 목사를 간절히 만나기를 원하였다. 그
살인범이 답슨 목사에게 청원한 것은 세상에 있는 음란물을 없애서 자기와 같은
범죄자가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살인범 자신이 다섯 살 경에
음란물을 보았는데, 그 이후 음란물에서 본 장면이 자신의 머리를 사로잡아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웠고, 늘 음란한 생각 속에서 살다가 자신은 엽기적 살인마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성인들의 경우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는 '플레이보이'같은
잡지나 '펜트하우스'같은 것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될 수 있다.(박성수,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 유해 창작물의 통제', '철학과 현실' 1997년 여름, 225~226쪽)
[65]
우리의 조상들은 반만 년의 역사를 통하여 국토를 그 지리적 성격에 알맞게
효과적으로 개발, 이용하면서 삶을 영위하여 왔으며, 아름답게 가꾸고 훌륭하게
보전하여 후손에게 물려 주었다. 오랫동안 우리 민족은 국토와 긴밀한 상호 작용을
통하여 민족의 고유한 역사와 독특한 생활 양식을 이루어 왔기 때문에 국토는
단순한 자연 공간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노력이 깃든 문화 공간이다.
뿐만 아니라 국토는 민족의 애환이 서려 있고 민족의 얼과 뜻이 담긴 가치
공간으로 인식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의미 있는 공간이다.
단순한 토지공간과는 달리 국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서찬기 외, '고등학교 공통 사회(하)', 금성교과서, 1997, 8쪽)
[66]
멘델이 우열의 법칙과 분리의 법칙을 발견하였을 당시에는 양친의 형질이
융합되어 자손에 나타난다는 학설이 지배적이었으나, 우열의 법칙은 이를 완전히
반증하는 것이었다. 또, 분리의 법칙은 숨겨진 형질이 다음 대에 재현됨을
보여줌으로써 유전 요소(유전자)는 소멸되지 않으며 섞이지도 않음을
입증하였다.(홍영남 외, '고등학교 생물2', 천재교육, 1997, 243쪽)
[67]
재화의 희소성에 따른 욕구의 충족은 어떤 하나의 선택으로, 선택되지 못한 다른
욕구를 희생시켰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정된 자원으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는, 그러한 선택으로 얻어지는 만족을 가장 크게 할
것인가라는 합리적인 경제 활동과 직결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경제적 선택은
반드시 포기된 욕구의 가치, 즉 기회 비용에 대한 고려가 따르게 마련이다.('고등학교
경제', 교육부, 1997, 8쪽)
[68]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솔한 포르투갈 선단은 리스본을 출항하여 희망봉을
돌아오는 동안 괴혈병으로 많은 선원을 잃었다.
오랜 세월 동한 경험에 의해 오렌지와 같은 과일을 먹으면 괴혈병의 증상이
회복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750년경에 이르러 괴혈병은 어떤 종류의 영양소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에 많이 포함되어 있는 이 영양소는 비타민C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1932년에는 그 본체가 아스코르브산이라는 것이 밝혀졌다.(홍영남 외,
'고등학교 생물2', 천재교육, 1997, 96쪽)
[69]
나는 아주 훌륭한 학생으로 앞으로 위대한 지성인이 될 거라고 모든
선생님들로부터 촉망받던 학생이었다. 바로 그런 판단에 근거하여 나의 초등학교
선생님도 내가 수위권에 들어가리라고 기대하며 나라에서 치르는 '장학생 선발
고사'에 나를 내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거의 꼴찌에 가까운 성적으로 붙었던
것이다. 경악...! 나는 지금 그 실망스런 결과를 다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 의해서만
이해하게 된다. 즉, 나는 나의 선생님들과 무척이나 깊은 동일시, 즉 유혹의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본의 아니게 나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오해를
했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 그들에 대해 '아버지의 아버지'노릇을 했기 때문에, 아니
그것보다 오히려 '어머니의 아버지'노릇을 했기 때문에,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인격과 태도를 모방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그들을 유혹했기 때문에, 그들은 나에게서
너무나 명료하게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들은 자기 자신들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 또는 그들 자신의 향수나 희망 사항들에 의해 자신들에게
부여하던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투영시켰던 것이다.(알튀세르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다섯째 마당
재구성하여 평가해 보자
철학 교수:이제 글을 분석하여 평가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연구해 보자. 우선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다음 글을 읽어보자.
세상을 바꾼다는 것! 퐁트뱅으로서는 이는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세상이 칭찬할 만해서가 아니라 모든 변화는 필연적으로 더욱
나쁜 쪽으로 이끌리고 있기 때문이다.(밀란 쿤데라, '느림')
인쇄된 글자들의 유혹
철학 교수:인쇄된 글자들은 잘 재단된 옷과 같아. 그래서 인쇄된 글자는 마술을
부리지.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극을 보면 주인공 테비아가 평소 하느님에게
기도하면서 곧잘 '위대한 책들'에서 한두 구절 인용하는 것을 보 수 있어. 그런 그가
어느날, 딸 문제로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자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지.
"하느님,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위대한 책들'에도 씌어 있는
말이지만... 아닙니다. 왜 제가 거기에 있는 말을 당신에게 말해 줍니까!"
어떤 말이 "책에 그렇게 씌어 있다."는 표현은 "틀림없이 참이다."는 것을
함축하는 경향이 있어. 그러나 악당이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듯이 나쁜 생각이
멋있는 글자로 인쇄될 수 있겠지? 따라서 글을 비판적으로 읽을 줄 알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거든. "나쁜 책보다 더 나쁜 도둑은 없다."는 이탈리아의
속담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어.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은 철학적 깊이와 독특한 스타일로 독자들을 매료시키지.
그러나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모든 생각들을 참이라고 여기는 젓은 잘못이야. 특히
작중 인물들의 생각은 가지각색이거든. 비판적 자세로 읽게 되면 의외로 많은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어.
자, 그럼 위의 글을 평가해 볼까?
바우:갑자기 '평가'하라고 하시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서툴지만 스스로 평가하라!
철학 교수:그래. 평가는 단순히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에 해당하는 작업이야.
평가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어라, 너희 창조자들이여! 평가하는 것
자체가, 평가된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평가되어야 할 보물인 것이다. 평가하는
행위에 의해서만이 모든 것에 가치가 부여된다. 그리고 평가할 수 없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껍데기일 뿐이다. 이 말을 들어라, 너희 창조자들이여!(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평가는 참과 거짓, 옳고 그름, 선악, 귀천, 옥석을 가려내는 일이야. 니체의 말대로,
평가를 통하여 비로소 어떤 것은 나에게 의미를 갖지. 따라서 지금까지 배운 것을
응용하여, 글을 비판적으로 읽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보아라.
바우:그렇지만 저희들은 교과서 외의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더구나 그것을
비판적으로 읽고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저희들이 어떻게 감히 훌륭한
사람들의 글을 평가하지요? 할 수만 있다면, 모범 답안을 암기하면 좋은데...
철학 교수:내가 이야기를 하나 해 주마.
어떤 농부가 모내기를 하다가 힘이 들어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하느님, 모내기가 힘들어 죽겠습니다. 하느님이 대신 좀 해 주십시오."
하느님은 농부를 가엽게 여겨 모내기를 대신 해 주었다. 그런데 벼가 잘 자라도록
하자면, 논을 자주 매 주어야 했다. 농부는 또 꾀가 나서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하느님, 김매기가 힘들어 죽겠습니다. 하느님이 대신 좀 해 주십시오."
이번에도 하느님은 농부 대신 김을 매 주었다. 어느덧 가을철이 와서 추수를 하게
되었다. 농부는 다시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하느님, 추수하기가 힘들어 죽겠습니다. 하느님이 대신 좀 해 주십시오."
하느님은 농부 대신 추수도 해 주었다. 농부는 이런 식으로 힘든 일은 모두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해결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자, 이제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자. 농부는 자신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을 진정 살았을까?
바우:아닙니다. 농부의 삶은 하느님이 대신 살아 주었습니다.
달래:그렇지만 이 이야기와 평가가 무슨 관계가 있지요?
철학 교수:'나의 삶'이라고 할 만한 삶은 나의 판단과 결단에 따라 내가 산 삶이야.
비록 서툴지라도 자신의 견해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해. 아무리 훌륭한 생각일지라도
다른 사람이 쓴 '모범 답안'이라면, 그것은 자신에게 전혀 의미가 없어. 남의
것일지라도 적어도 주체적 시각에서 분석하여 음미한 후 재 서술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달래:'주체적 시각'이라니요?
철학 교수:'주체적 시각'이란 간단히 말해서 '나의 시각'이야. 세상에는 사상도 많고
이념, 이론 등 수없이 않은 견해들이 있지. 이 견해들은,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과 관계없이, 나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평가하도록 해야 돼.
커다란 통 속에서 개처럼 살고 있던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 대왕 앞에 엎드려
절하는 대신, "내게 그늘지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 주시오."라고 당당하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건에 대한 나의 견해는 무엇인가? 이렇게 묻고 내 입장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해. 그래야 비로소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던 신념들이 '나의 것'이 되고, 세계에 대한 이해도 넓고 깊어지며, 그 부산물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거야.
광화문 네거리를 막고 물어 봐!
바우: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지 않아요!?
철학 교수:당연하지. 그러나 그걸 걱정할 건 없어. 논증의 평가는 객관성을 목표로
하지. 그렇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평가는 주관적이야. 객관성을 목표로 하는 평가가
주관적으로 이루어진다? 역설적으로 들리는 말이지? 그러나 전혀 역설이 아니야.
논증의 평가는 주관적이야. 논증은 언제나 특정한 개인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야.
평가자의 교육 정도, 경험, 세계관, 가치관, 논증의 분석력 등 수없이 많은 변수가
논증 평가에 영향을 미치지. 그래서 논증 평가는 주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어. 평가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개인인 거야.
그렇지만 논증의 평가가 주관적이라고 해서, 평가가 자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야. 평가자는 자신의 주관적 평가가 언제나 "광화문 네거리를 막고
누구에게나 물어 봐!"라고 말할 수 있는 떳떳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야.
그런 의미에서 논증의 평가는 객관성을 목표로 해.
이처럼 평가자들이 열린 평가의 마당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견해가 드러날 수 있어.
나아가 비록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마음'에 갇힌 삶을 살고 있지만, 주관적 평가
과정 속에서도 인류 보편적인 특성이 자연스럽게 객관성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거야.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과감히 펼칠 수 있어야 해. 과감히 틀릴 줄 모르는
사람은 역사의 발전에 기여할 수 없어. 역사는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해 왔거든.
물론 틀리기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니까, 우리는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하고 있는 거야.
바우:달래야, 빨리 그 방법을 배우자!
달래:바우야, 너 '빨리빨리병'에 걸렸구나!
바우:그래? 그렇다면 '어서' 그 방법을 배우자.(웃음)
논증의 평가를 위한 재구성
철학 교수:그럼 논증을 평가하기 위해서 먼저 무엇을 해야 한다고 했지?
달래:먼저 평가 대상인 글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철학 교수:그래. 논자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핵심적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어떤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가? 이렇게 물으며 글을 정독하고,
글의 논증적 구조를 이해 할 수 있어야 해. 그런 다음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글 속에 담긴 논증을 재구성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거야.
바우:재구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지요?
철학 교수:논증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논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논증의 전제와
결론을 간단 명료하게 가려내는 것을 말해.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논증 평가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재구성이야. 수사적인 표현들과 잡다한 정보들에
현혹되지 않고, 글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 낼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숨은
전제를 보충해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야.
이러한 재구성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논증을 체계적으로 평가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어. 대부분의 경우 글의 핵심을 놓친 채 여기 저기를 집적거리는 결과를 빚을
뿐이기 때문이야.
일반적으로 논증의 재구성은 다음과 같이 하면 돼.
(1) 결론을 찾는다.
(2) 이 결론을 뒷받침하는 데 꼭 필요한 전제들만을 전제로 내세운다.
(3) 필요하다면, 본문에는 없지만 논자가 전제했다고 인정해 줄 수 있는 숨은
전제를 논증이 타당한 형식이 되도록 보충해 준다.
(4) 전제와 결론을 이루고 있는 표현들을 논자의 뜻을 분명히 하는 방식으로
다듬어 완전한 문장이 되게 한다.
그럼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퐁트뱅의 논증을 재구성 해 볼까
바우:제시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때문이다'는 표현이 원인을 가리키는 지
아니면 이유를 말하고 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겠지요. 저는 다음과 같이 논증을
재구성하였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세상이 칭찬할 만해서가 아니라 모든 변화는 필연적으로
더욱 나쁜 쪽으로 이끌리고 있다.
그러므로--세상을 바꾼다는 것! 퐁트뱅으로서는 이는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철학 교수:바우는 방금 선생님이 일러준 '요령'을 적용하지 않았어. 논증의 핵심을
정확하게 걸러내지 못하고 있거든. 예컨대 "세상을 바꾼다는 것! 퐁트뱅으로서는
이는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는 주장은 무슨 뜻일까? 한마디로 표현해
보면?
바우:"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은 잘못이다."는 말입니다.
철학 교수:맞았어. 그럼 그렇게 표현하면 돼. 그런 다음 생각해 봐. 왜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이 잘못이라는 거지?
바우:모든 변화가 필연적으로 나쁜 쪽으로 이끌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철학 교수:그렇지. 이젠 전제와 결론이 분명해졌지?
바우:재구성을 다시 해 보겠습니다.
모든 변화는 필연적으로 더욱 나쁜 쪽으로 이끌린다.
그러므로--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은 잘못이다.
철학 교수:잘 했어. 그러나 좀 더 정확한 재구성은 다음과 같이 하는 거야.
모든 변화는 필연적으로 더욱 나쁜 쪽으로 이끌린다.
만일 모든 변화가 필연적으로 더욱 나쁜 쪽으로 이끌린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은 잘못이다.
그러므로--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은 잘못이다.
바우가 처음 재구성한 것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거야. 달래도
이러한 재구성이 퐁트뱅의 견해를 간결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겠지?
'숨은 전제'를 찾아라!
바우:그렇지만 의문이 있어요.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세상이 칭찬할 만해서가
아니라"는 주장은 왜 전제 속에 넣지 않지요? 그리고 선생님이 재구성한 논증의
둘째 전제는 불필요 한 것 같은데 왜 굳이 넣으셨나요?
철학 교수:첫째 질문에 먼저 답해 보자. 퐁트뱅은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세상이
칭찬할 만해서가 아니라"는 주장을 전제로 사용하지 않고 있어. 그는 자기가 전제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 주장을 밝히기 위해서 이 말을 하고 있을 따름이야. 따라서 이
주장은 그의 논증을 재구성할 때 제외시켜야 해.
둘째 질문에 대해 답해 보자. 사실 둘째 전제는 불필요한 것 같지? 그러나 잘
생각해 봐. 둘째 전제 없이 어떻게 첫째 전제만으로부터 결론을 도출시킬 수
있을까? 이렇게 물으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지?
"그야, 만일 모든 변화가 필연적으로 더 나쁜 쪽으로 이끌린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은 당연히 잘못이지요."
바로 이러한 생각이 은밀하게 전제된 것이지. 이 전제는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어, 그래서 생략해도 좋은 거야. 그렇지만 논증을 재구성할
때는, 이렇게 은밀하게 가정된 '숨은 전제'를 가능하면 모드 드러내는 게 좋아.
그래야 논증도 형식적으로 타당하게 되고, 논증의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야.
이제 재구성된 논증을 놓고 평가해 볼까?
바우:퐁트뱅의 논증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비관론자일 뿐입니다.
철학 교수:한두 마디로 잘라 말하지 말고, 자신의 견해를 논술 형식으로 펼쳐
보도록 해라.
달래:왜 굳이 '논술' 형식으로 평가해야 하나요?
'논술'과 '횡설수설'
철학 교수:그건 '논술'이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논리적으로 잘 짜여지지 않은 글로 다른 사람의 견해를 평가해 봐야 소용이 없어.
평가하는 글은 그 자체로 논리적 설득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거든. 따라서 평가를 잘
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주제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견해를
논술문으로 잘 쓸 줄 알아야 해. 이 점은 '논술'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알면 더욱 잘
알 수 있지.
바우:'논술'의 반대말? 그런 게 있습니까?
철학 교수:'논술'의 반대말은 '횡설수설'이야.
바우:농담이시겠지만 그럴 듯합니다.
철학 교수:논술문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한두 문장으로 된 짧은 글로부터 200자
원고지 100장이 넘는 본격적인 논문에 이르기까지 길이도 다양하지. 또 주어진 그의
핵심을 짧게 요약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어떤 주제나 자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길에 논하는 글도 있어.
달래:그러니 쓰는 방법도 다 다르겠군요.
철학 교수:조금씩 다르지. 그러나 논증을 평가하는 논술문이 기본이라고 생각하면
돼. 논증을 평가하는 논술문을 잘 쓸 수 있으면, 이를 다른 형식의 논술문 쓰기에
응용할 수 있거든.
그럼 논증을 평가하는 논술문은 어떻게 쓰는가? 먼저 추리의 종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해. 연역 추리인지 아니면 귀납 추리 또는 가설 추리인지에 따라 평가
방법이 달라지거든.
추리의 종류를 알아냈으면, 그것을 재구성한 다음,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해 봐.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의 핵심으로 글의 뼈대를 세우도록 해. 무작정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 가다가 지면이 다하면 끝내는 방식으로는 논술문을 쓸 수 없어. 써내려 가기
전에 가능하면 완전하게 글의 구조를 짜도록 해야 해.
글의 뼈대 세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론이야. 결론을 정한 다음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생각나는 대로 열거하고, 어떤 순서로 근거를 제시할 것인지,
어떤 예를 들것인지 등을 연구해야 해. 이 단계에서 논술문의 성패는 대강 결정이
되지. 주제에 대한 폭넓은 지식, 깊은 통찰력, 신선한 창의력, 치밀한 논리성, 그리고
가치관과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논자의 실력이 대부분 드러나는 부분이거든.
글의 뼈대를 세웠으면, 이제 글을 써내려 가는 거야. 글의 뼈대에 살을 붙이는
거지. 문장은 문법적으로 정확해야 하며, 전하고자 하는 생각을 간단명료하게 담고
있어야 해. 어떤 경우든 독자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해. 한 문장을 읽으면 다음
문장이 궁금해지고, 다음 문장을 읽으면 또 다음 문장이 기다려지고... 독자가 이렇게
계속 읽어 나가도록 쓸 수 있으면 일단 성공이야.
이처럼 독자를 계속 사로잡을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용이 중요하지.
그러나 아무리 좋은 내용일지라도 그것을 담는 그릇이 좋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어.
문장은 긴 것보다는 짧은 게 좋아. 긴 문장은 독자를 지루하게 하고, 앞뒤의 맥락을
놓치게 할 수 있거든. 독자가 글의 맥락을 놓치고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야
한다면 잘못 쓴 글이야.
본격적인 논문과 같은 논술의 경우에는 재구성된 논증을 본문에 소개하여 논하는
것이 좋아. 반면에 짧은 논술문을 쓸 경우에는 재구성된 논증을 본문에 소개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번거로울 수 있어. 그래서 재구성된 논증은 본문 밖에 두고 쓰는
게 좋아. 그러나 어떤 경우든 재구성된 논증을 바탕으로 논술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
물론 원고지 작성법, 맞춤법 등의 형식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하지.
서론 - 본론 - 결론 쓰기에도 소홀해서는 안 되고.
논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논증이라는 점을 명심해 두어야 해. 따라서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견해를 평가하는 논술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야 하는 거야.
1. 서론:자신이 이해하여 재구성한 논증을 간단 명료하게 소개하고, 이 논증이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지적하여 독자의 관심을 환기시킨다.
2. 본론:문제의 논증을 평가하는 자신의 논증을 제시한다. 논증은 타당해야 하고
전제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3. 결론: 논의된 점들을 바탕으로 하여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짧은 글의 경우 굳이 이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어. 첫 문장부터 핵심을
짚어 한 호흡으로 간단명료하게 생각을 전하는 것이 좋아.
증명적 논증의 평가
철학 교수:논증을 평가하는 논술의 요체는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데에 있어. 이 판단은 본론에서 이루어지는데, 설명적 논증의 평가에 대해서는
다음에 연구하기로 하고, 증명적 논증만을 놓고 볼 때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르면
돼.
(1) 논증의 타당성을 평가한다. 즉 논증이 전제들을 받아들이면 결론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지 조사한다. 만일 논증이 부당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필요도 없이 아래의 어떤 표현을 빌어 평가한다.
*논증은 부당하다.
*제시된 전제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전제로부터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전제가 결론을 함축하지 않는다.
*전제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결론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전제에 근거하여 그러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2) 만일 논증이 타당한 구조로 되어 있으면, 전제들을 모두 받다 들일 수 있는지
조사한다. 만일 전제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면, 결론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전제들 중 어느 하나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다음 중
어떤 표현을 빌어 평가한다.
*제시된 이유는 결론을 뒷받침하기에 빈약하다.
*그런 이유로는 그 결론을 뒷받침할 수 없다.
*논자는 결론의 참을 보장하는 이유를 지시하지 못했다.
*논자는 자기 주장을 입증시키는 이유를 제시하는 데 실패하였다.
*논자는 정당화되지 않는 전제에 근거하여 결론을 정당화시키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
*제시된 전제들 중 적어도 하나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결론의 참이 보장되지
않는다.
*전제들 중 거짓인 것이 있는데 이 전제가 거짓이면 결론도 거짓인 관계에 있다.
따라서 결론은 거짓이다.
바우:증명적 논증을 평가하는 논술문 쓰기가 그렇게 복잡한 줄 몰랐습니다.
일기 쓰기와 연애 편지 쓰기가 논술의 비결?
철학 교수:그래. 아무나 논술문을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논리를
공부해야 하고 독서도 많이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깊이 생각하고 늘 써 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 너희들, 매일 일기를 쓰는지 모르겠다.
달래:저는 매일 쓰고 있습니다.
철학 교수:바우는 쓰고 있지 않구나. 머리만 긁적거리고 있는 걸 보니.
바우:앞으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철학 교수:글 솜씨가 느는 방법이 또 있지.
바우:그게 어떤 건데요?
철학 교수:연애 편지를 많이 쓰면 돼.
바우:정말 그렇겠습니다. 자, 그럼 달래야, 일기만 쓰지 말고 매일 나에게 연애
편지를 쓰도록 해라.
달래:바우 너 가만 안 둘 거야!
바우:이게 모두 네 글 솜씨가 늘기를 바라는 충정에서 하는 말이데,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실까?
철학 교수:하하하 녀석들... 자, 그럼 지금까지 배운 것을 응용하여 바우가
퐁트뱅의 견해를 평가하는 논술문을 써 보아라.
바우:물론 어려운 것이니까 제가 해야지요.
퐁트뱅의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왜 모든 변화가 필연적으로 더욱 나쁜 쪽으로
이끌리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다. 즉, 퐁트뱅은 근거가 불확실한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퐁트뱅의 결론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소극적인 평가'와 '적극적인 평가'
철학 교수:바우의 평가는 잘못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으로만 논하고 있어.
퐁트뱅은 전제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지만, 바우는 그 전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지? 적극적으로 자기 견해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해. 모든 변화가 필연적으로
더욱 나쁜 쪽으로 이끌린다는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예는 얼마든지 있거든.
결론도 그래. 바우는 퐁트뱅의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전혀 견해가 없다면
몰라도 가능하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바우:퐁트뱅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아픈 사람이 약을
먹으면 병이 낫습니다. 이 변화는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입니다.
또한 결론이 잘못되었다는 예도 들 수 잇습니다. 아플 경우에는 약을 먹고 병이
낫도록 해야 합니다. 좋은 방향으로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요.
철학 교수:생각나는 대로 여기 저기를 집적거리지 말고 먼저 무엇을 하라고 했지?
달래:글이 뼈대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철학 교수:그럼 달래가 글의 뼈대를 세워 보아라.
달래:퐁트뱅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골격에서 평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서론:퐁트뱅의 논증 소개.
본론:(1) 논증의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지적(반증례 제시).
(2) 결론 자체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지적(반증례 제시)
결론:본론에서 지적한 문제점들로 인해 퐁트뱅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지적하고, 실제로 좋은 방향으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
철학 교수:그럼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바우가 다시 한 번 논술해 볼까?
바우:그렇게 하겠습니다.
퐁트뱅은 모든 변화가 필연적으로 나쁜 쪽으로 이끌리기 때문에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이 잘못이라 주장하고 잇다.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명백히 잘못된 주장이다.
먼저 지적할 것은 퐁트뱅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아픈 사람이 약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 이 변화는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따라서 모든 변화가
나쁜 쪽으로 이끌리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결론이 잘못되었다는 예도 들 수 있다. 몸이 아플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퐁트뱅의 말대로 하자면, 앓다가 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당연히 약을 먹고 병이 낫도록 해야 한다. 즉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퐁트뱅의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전제도 잘못되었고 결론도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글 쓰기
철학 교수:앞의 논술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야. 글의
뼈대에 살을 붙인다는 것은 '죽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몸'을 만드는 것과
같아. 뼈대에 살을 붙임으로써 '살아 있는 글'이 되도록 해야 하는 거야.
표현도 주의해야 해.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명백히 잘못된 주장이다.'는 표현은 '퐁트뱅의 견해는 잘못이다.'는
내용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그보다는 그 주장에 대한 바우의 '감정'이
더 크게 부각되어 있어. 논술할 때는 그러한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는 거야. 감정을
억누르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도록 해야 해.
수준 높은 영화에서 슬픈 장면이 어떻게 처리되지? 꼭 울어야 할 상황인데
주인공은 오히려 그 감정을 억누르고 눈물을 흘리지 않아. 이 절제된 감정이 관객을
더 감동시켜 슬프게 만드는 거야.
셋째 문단의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는 표현도 부적절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주입시키려 하지 말고 독자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거야.
달래:선생님께서 먼저 저희에게 좋은 논술문의 예를 보여 주셨으면 좋겠어요.
선생님께서는 퐁트뱅의 견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고 싶어요.
철학 교수:그렇게 하자.
퐁트뱅에 의하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은 잘못이다. 이 견해는 매우 흥미롭다.
우리는 늘 행위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이 더 이상 변화가 불필요할 정도로 완전하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 어떤 이유 때문일까? 모든
변화가 필연적으로 더욱 나쁜 쪽으로 이끌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물론 모든 변화가 필연적으로 더욱 나쁜 쪽으로 이끌린다면, 세상을 변화시켜려는
생각은 당연히 잘못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필연적으로 더욱 나쁜 쪽으로
이끌리는가?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변화는 나쁜 쪽으로 이끌린다. 음식이 부패하는
것, 건강한 몸이 병드는 것, 천재지변이 나는 것, 과로를 하는 것 등 나쁜 쪽으로
진행되는 변화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필연적으로 나쁜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썩은
음식으로 유기질 비료를 만들고, 약으로 병든 몸을 치료하고, 천재지변으로 파괴된
마을을 새로이 단장하고, 휴식을 취하여 피로를 푸는 등 좋은 쪽으로 진행되는
변화도 얼마든지 많이 있다.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은 잘못이다.'는 결론 자체도 문제다 삶의
조건이 모두 편안할 경우 변화를 꾀하려는 생각은 잘못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의 생명과 재산은 늘 위협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통을 덜고 기쁨을 증가시키는 방향, 곧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보아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은 잘못이다."는 퐁트뱅의
결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결론은,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를 근거로 하고 있으며,
이 전제를 문제 삼지 않더라도 결론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달래:선생님, 첫째 문단이 서론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문단이 결론이요.
철학 교수:그래. 그 사이에 있는 세 문단은 본론이고.
바우:선생님, 잘 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점수를 매겨 볼 것 같으면...(웃음)
고마움을 모르는 학자
철학 교수:그럼 다음 글에 담긴 논증도 평가해 보자.
신분이 높은 학자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마침 큰 홍수가 나서 강을 건너지
못해 서 있노라니까, 어떤 사나이가 와서 어깨에 태워 저쪽 강기슭까지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나 학자는 가난하였으므로 그의 친절에 보답할 길이 없어 고민하고 있는데,
그 사나이는 또 다른 사람을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학자는 그것을 보자 그
사나이에게로 가까이 가서 말하였습니다.
"여보시오, 이제 나는 아까 일로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소.
왜냐하면 당신이 나한테 한 것은 나의 신분을 알아서 한 일이 아니고 그저
아무에게나 하는 버릇임을 알았기 때문이오."(이솝우화)
바우:이러한 이야기는 읽고 교훈을 받으면 되지, 어떻게 논증을 찾아 평가하지요?
철학 교수:이솝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지. 그런데 이솝우화는 논증
평가의 자료로도 훌륭해. 이 우화에게 이솝이 전하고자 하는 교훈은 "훌륭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간에 모두에게 친절하면 친절하다는 말을 듣기보다 생각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는 것이야. 사실 그렇지?
그러나 이 교훈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어. 논증 평가를 통해서 이
점을 드러내도록 해 봐.
달래:논증을 평가하려면 먼저 재구성을 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선 문장이 많기 때문입니다.
철학 교수:그렇다고 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어. 학자가 한 말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의외로 간단해 먼저 달래가 논증을 분석해 보아라.
달래:학자의 논증은 마지막 부분에 있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습니다.
"여보시오, 이제 나는 아까 일로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소.
왜냐하면 당신이 나한테 한 것은 나의 신분을 알아서 한 일이 아니고 그저
아무에게나 하는 버릇임을 알았기 때문이요."
이 말에서 전제와 결론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의 논증을 다음과 같이 누구나 쉽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너 준 것은 나의 신분 때문에 한 일이 아니고
그저 아무에게나 하는 버릇이다.
그러므로--당신이 나를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너 준 것에 대하여 나는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일단 이렇게 논증을 재구성해 놓은 다음 논증의 타당성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논증의 평가는 논증이 타당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 당신이 나를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네 준 것은 나의 신분 때문에 한 일이
아니고 그저 아무에게나 하는 버릇이다.
*(2) 만일 당신이 나를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네 준 것이 나의 신분 때문에 한 일이
아니고 그저 아무에게나 하는 버릇이라면, 당신이 나를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네 준
것에 대하여 나는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3) 당신이 나를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네 준 것에 대하여 나는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이 논증은 '전건긍정법'으로서 형식적으로 타당합니다. 즉, 논증의 형식으로 보아
만일 우리가 전제들을 모두 받아들이면, 결론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전제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인데, 전제는 단
둘뿐입니다. 그리고 첫째 전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보완된 둘째 전제의
정당성만 생각해 보면 됩니다.
둘째 전제는 거짓입니다. 학자는 사나이가 자기의 신분 때문에 강을 건너 준 것이
아니라 아무한테나 하는 버릇이라고 해서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는데, 저는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사나이가, 학자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은 강을 건너
주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강을 건너주지 않는다면, 그는 사람을 차별하는 나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철학 교수:잘했어. 한 가지 덧붙인다면, 학자의 생각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거야.
강을 건너 준 일에 감사하지 않는 이유를 사나이의 버릇에서 찾고 있거든. 사나이가
마음씨 좋게 누구나 강을 건너 준다는 거야.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인신
공격의 오류'라고 하지. 사람의 됨됨이를 트집잡아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려 하는
오류지.
이제 달래가 분석한 내용에 이 점을 보완하여, 바우가 논술문을 써 보아라.
바우:그렇게 하겠습니다.
홍수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학자를 어떤 사나이가 어깨에 태워 건네 주었다.
이 경우 학자는 당연히 사나이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학자는 사나이에게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나이가 학자의
신분을 보아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나 하는 버릇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 이유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학자의 논증을 검토해 볼 때 우리는 학자가 자신의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은밀히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나를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너 준 것이 나의 신분 때문에 한 일이
아니고 그저 아무에게나 하는 버릇이라면, 당신이 나를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너 준
것에 대하여 나는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홍수 때문에 못 건너는 가을 건너게 해 준
것은 그 자체로 감사할 일이다. 그리고 오히려 사람 차별을 해서 신분이 높은
사람은 건네 주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건네 주지 않는 경우를 비난할 일이지,
사람을 차별 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함 사람을 모두 도와주는 것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러한 학자의 생각은 오류를 범한 결과다. 사나이가 강을 건너 주는 것이 학자의
신분 때문이 아니라 사나이의 버릇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나이의 사람 됨됨이를 트집잡아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것으로서, '인신 공격의 오류'에 해당한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학자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 학자는 , 사나이가 어떤
사람이든 관계없이, 그의 친절에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고, 더 나아가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을 돕는 그의 심성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철학 교수:바우가 많이 참았구나.
바우:그렇습니다.. 잘난 체하는 학자는 가만 놔둘 수는 없었지만, 논리를
조금이라고 아는 제가 참아야지요.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웃음)
연습 문제
*필요하면 숨은 전제를 보완하여 다음 각 논증을 재구성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평가해 보자.
[70]
독재자들도 사람이다. 따라서 어젠가는 그들도 모두 죽을 것이다.
[71]
단신은 체중이 100kg이나 된다. 따라서 당신은 오늘 밤 죽을 것이다.
[72]
신이란 실재하는 결과를 산출하는 이상 실재한다.(윌리암 제임스, '신비 체험이
다양성')
[73]
남자들 모두가 바보라고 할 수는 없지. 그 중에는 독신자도 있거든.
[74]
나는 외계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따라서 외계에 생명체가
존재한다.
[75]
여성이 남성보다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것은 이론일 뿐이지 입증된 바가 없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보다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것은 거짓이다.
[76]
만일 일이 즐거우면 인생은 낙원이다. 나는 일이 즐겁지 않다. 따라서 나의 인생은
낙원이 아니다.
[77]
나는 성공하고 싶다. 그런데 에머슨에 의하면 자기 신뢰가 성공의 첫째 비결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신뢰를 가질 필요가 있다.
[78]
일을 하는 데에 양다리 걸치기는 금물이다. 만일 당신이 전자를 원한다면 후자를
상실할 것이다. 혹 그렇지 않다면 두 마리의 토끼를 좇게 되어 전자나 후자의 어느
것도 모두 잃을 것이다.(에픽테토스, '단편')
[79]
사람은 짐승과 달리 자신의 선택이 자기의 삶의 방향과 의미를 결정하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잘못된 선택이나 그에 따른
삶은 한번밖에 없는 일생을 매우 비참하고 무의미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목적을 지니고 살아야 하며, 또 나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서 깊이 반성해 보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등학교 윤리', 교육부, 1996,
19쪽)
[80]
통합이 없는 사회는 분열된 사회요, 방향이 없는 사회와 같다. 반면에, 통합만을
강조하고 갈등을 무시하면 비현실적인 환상에 빠지고 만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등 자체보다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며, 통합과 갈등의 균형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등학교
공통 사회(상)', 교육부, 1996, 59쪽)
[81]
과학 기술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여 주는 도구이지만, 그것을 잘못 쓰면
무서운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요즈음에 외서 공해와 오염,
환경 파괴 등,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라 발생하는 역기능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과학 외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국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과학적 소양과
탐구적 태도가 필요하다.(강만식 외, '고등학교 공통 과학', 교학사, 1997, 27쪽)
[82]
언어란, 작게는 개인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기호의 체계며
사회적인 활동이다. 그리고 크게는 특정 사회 집단,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가 잘 살기
위하여 사회를 통제하고 상호 협동하는 수단이며, 인간 사회 생활의 한 양식이다.
우리가 언어를 대함에 있어 가장 긴요한 일은, 그 의미 용법을 정확하게 학습하여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언어 사용의 능력을 충분히 기르는 것이다.('언어의 사회성',
'고등학교 국어(상)', 교육부, 1996, 43쪽)
[83]
현대 사회에서는, 어떠한 정부나 그 구성원들도 일반 국민들의 자발적인 지지나
동의가 없이는 그들의 권한을 효율적으로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물리적
강제력에만 의존하는 지배권이 그 효력을 발생시키는 데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들의 요구에 기초를 두고 정부 활동을 전개해야 하며,
나아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이해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고등학교 정치',
교육부, 1997, 112쪽)
[84]
실제로 우리가 사용하는 열기관의 효율은 증기 기관이 10~20%, 가솔린 기관이
20~30%, 증기 터빈이나 디젤 기관이 30~40% 정도다 따라서 열기관의 효율이
높을수록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이 되므로, 이러한 기관을 만들기 위해 많은 연구가
진행중에 있다.
열기관의 효율이 100%인 이상적인 열기관을 제2종 영구 기관이라고 한다. 열역학
법칙들이 확립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영구 기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했으며, 이는 열역학 법칙에 위배되므로 만들 수 없다.(김법기 외, '고등학교
물리1', 한샘, 1997, 76쪽)
[85]
거의 모든 인간은 평생 동안을 일과 근심, 곤욕과 곤란을 등에 지고 살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이 원하는 것마다 다 성취된다면 인간은 자기의
생활을 어떻게 메워 나갈 것이며,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무엇에다 쓴다는 말인가?
만약 인간 족속을 게으름뱅이들이 사는 천국으로 옮겨 놓았다고 하자. 모든 것이
스스로 자라나고, 비둘기의 불고기가 날아다니고, 어느 남자든지 손쉽게 애인을 찾아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곳이라면, 아마 인간은 싫증이 나서 죽든가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어 버릴 것이다. 혹은 전쟁과 교살과 살인이 일어나 마침내
인류가 현재 자연이 인간에게 과하고 있는 그 이상의 고통을 자신에게 가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종족에겐 그 밖의 무대, 그 밖의 현존재는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쇼펜하우어, '철학적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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