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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복제인간

by Casey,Riley 2022.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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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인간 1




      복제인간
    차례
  프롤로그
  제1장 라이프 프로젝트
  제2장 신인류
  제3장 석양의 표류자
  제4장 망각에서 온 사나이
  제5장 첫출발
  제6장 스타 탄생
  제7장 다가오는 검은 손길
  제8장 시작되는 싸움
  제9장 습격
  제10장 골든 게이트
  제11장 데드 크로스
  제12장 무서운 추격
  작가의 말

    프롤로그
  쌩! 마치 손가락을 튕기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푸른 유리 
조각으로 부서져 내릴 듯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1월달임에도 
불구하고 나뭇잎을 살랑이는 바람은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것 
같았다. 따스한 햇살, 한가로운 오후였다.
  미 전역의 기상 예보를 책임지고 있는 매럴랜드 소재 미 국립 
기상청(National Weather Service)의 국장 스미스골든은 자신의 
집무실 책상에 두 다리를 올려 놓고 의자에 온 몸을 묻고서 
느긋하게 창밖을 보고 있었다.
  "골프? 그거 좋지! 언제 할까? 말난 김에 아예 오늘 어때?"
  스미스는 전화를 빙긋이 받으며 웃었다.
  기상청의 일이라는 것은 날씨가 모든 것을 좌우했다. 
허리케인(Hurricane)이라도 휘몰아치면 며칠 밤이건 집에 못 
들어가는 것은 예사였고, 기상청이 날씨뿐 이니라 그에 관련된 모든 
것을 총괄하고 난 다음엔 아예 편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이 며칠 간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기상 이변은커녕 
불어오는 바람조차 처녀의 입김처럼 부드럽지 않은가.
  "지금이 2시니까 3시까지 클럽에서 만나기로 하자구."
  스미스는 전화를 끊고 골프 가방을 바라보았다. 핸디 4의 골프 
실력을 썩힌 것이 벌써 몇달째던가.
  그때였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스미스는 놀라 인터폰에다 소리쳤다.
  "적색 사태입니다! 빨리 상황실로 와 주십시오!"
  인터폰에서 쏟아져 나온 말소리에 스미스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적색 사태(Red alarm)라니! A근 허리케인이 와도 기껏해야 경계 
경보에서 활색 사태(Yellow alarm)에 이르면 끝이 나곤 하였다. 
기상청에서 평생을 보내다시피한 그의 기억에도 적색 사태는 
1980년도엔가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기상청이 
확대 개편되고 난 다음에는 황색 사태가 두번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경계 경보 한 번 없이 적색 사태라니!
  
  상황실은 거대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에 시야를 압도하는 
초대형 스크린들만 봐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상청은 날씨 예보만 하는 곳이 아니니까. 게다가 이 국립 
기상청에서는 전 세계를 커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실에는 활기 대신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경보음이 꼬리를 물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은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자료를 움켜쥔 채로 마친듯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뭐야? 데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적색 경보를 내린 거야?"
  스미스는 상황실에 들어서자마자 상황실의 리더 제인에게 소리 
쳤다.
  "코넬 박사의 지시였어요! 스크린을 보세요."
  제인은 전면의 초대형 스크린을 주시한 채 대답했다.
  전면을 가득 채운 초대형 스크린 3개는 제각기 크레이의 
슈퍼컴퓨터 MYP7E로 해석된 미국 전역과 서부 지역과 바다, 그리고 
로키 산맥지대의 위성사진을 눈에 잡힐 듯 선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 바다를 보여 주고 있는 왼쪽 스크린에는 소용돌이 현상이 
두렷이 나타나 보이고 있었다.
  "기상 위성 델타 3호로부터 수신되고 있는 화면입니다!"
  제인의 말에 스미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해일인가?"
  "그렇습니다!"
  "해일이라니? 아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해일이야? 어디서 해저 
화산이라도 폭발한 건가?"
  "그런 징후는 없습니다."
  제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컬러모니터를 힐끗 바라보곤 대답했다.
  "그럼 저 화면은 뭐야? 태풍이 있는 것도 아니잖나?"
  스미스의 물음에 제인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금 전에 태평양과 서부 지역의 19개 지진 관측소에서 
긴급보고가 들어왔는데 마그니튜드(Magnitude)2.4정도의 해저지진이 
감지되었다고 합니다!"
  마그니튜드는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단위이다. 보통 지진을 
이야기할 때 쓰는 진도라는 것을 비교차이지만 규모라는 것을 
절대치이다. 통상 규모의 단위 1이 상승할 때마다 지진의 강도는 
30배가 되며, 약자로 M을 쓴다.
  제인의 대답에 스미스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해저지진? 화산활동도 없이? 아니, 그렇다고 적색 사태를 
발동해?"
  그때, 옆에서 전화를 받던 기상요원이 소리쳤다.
  "실장님! 방금 엠(M) 4도의 해저지진이 다시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기상요원의 외침과 참께 끼익! 끼익! 사방에서 프린터들이 미친 
듯이 자료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번엔 또 어디야?
  제인이 그쪽을 보며 소리쳤다.
  "샌프란시스코 북동쪽 300Km해저입니다!"
  스크린에 보이는 해일의 소용돌이가 거대하게 변하고 있음이 
보였다. 사람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경보음이 찢어지게 울어대고 있었다.
  "난데없이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신음하는 스미스를 보며 제인이 말했다.
  "지금 토넬 박사가 모든 상황을 종합검토 중입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60대의 대머리 노인 한 사람이 컴퓨터 
화면을 들어다 보고 있었다. 야콥 코넬, 작달막한 키에 늘상 웃음띤 
얼굴로서 평판이 좋은 그는 지질학계의 거물이고 지진관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는 권위자였다.
  "믿을 수 없어. 이런일이 일어나다니. 이건 재앙이야!"
  코텔은 컴퓨터에 섬광처럼 지나가는 상황을 보고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중얼거렸다. 이럴 수는 없었다.
  "무슨 소립니까? 재앙이라니?"
  스미스의 말에 코넬은 식은 땀을 흘리면서 신음처럼 대답했다.
  "판(Plate)이 움직이고 있소!"
  "판이 움직이다뇨?"
  "태평양판과 판데푸카 판, 그리고 코모스 판이 한꺼번에 급격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중이오. 판은 수백, 수천 년을 두고 천천히 
움직여 지각에 변동을 주는데 이처럼 급격한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어요. 이건 믿을 수 없는 일이오."
  각 대륙은 제각기 수십, 수백 Km두께의 거대한 판을 형성해 지각 
밑의 맨틀 위를 떠돌고 있다. 그것을 판 구조론이라고 하는바, 거대 
규모의 지진은 언제나 판의 경계선에서 판의 충돌로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진이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이미 지진은 일어났지 않습니까?"
  스미스의 말에 코텔은 머리를 저었다.
  "그건 전진에 불과하오."
  코넬은 앞쪽의 거대한 스크린을 쳐다보며 단정하듯 말했다.
  "내 계산 대로면 M910정도의 거대규모 격진이 12간 내에 
샌프란시스코 북부에서 포틀랜드까지의 일대를 강타할 겁니다."
  맙소사! 사람들의 얼굴이 일시에 하얗게 질렸다.
  "기록된 사상 최강의 기진이 8.9였는데 9에서 10이란 말입니까?"
  스미스의 말에 코넬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진의 규모로 보아 본진이 일어나기만 하면 그 일대는 지옥이 
될 겁니다. 피해 예상지역의 사람들을 모조리 소개시켜야만 되요!"
  "빨라, 빨리 피해 예상지역을 확인해봐!"
  코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미스가 고개가 떨어져 나가도록 
돌리며 악을 썼다.
  그리고, 모니터에 나타난 지진 피해 예상지역을 본 사람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불신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진 피해 예상지역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오리건 주 해안전역, 
폭 650Km, 길이 1200Km 범위 내의 모든 지역.
  그것은 정말 모서운 재앙이었다.  
    제1장 라이프 프로젝트
  오리건 주 서부해안 산악지대 위를 한 대의 군용 노타(NOTAR; 
꼬리 날개가 없는)헬기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흰백의 산등성이들이 쏜살처럼 다가왔다가 
뒤로 물러나는 과정이 지루하고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 헬기 안에는 펜타곤의 극비 프로젝트 사령관인 워커 소장과 미 
중앙정보부(CIA)의 과학기술처장인 존빅터가 묵묵히 계속되어지는 
아래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 195Cm, 체중 90Kg의 당당한 체구에 올해 49세인 워커는 
장시간의 비행에도 불구하고 군인다운 강인한 체력으로 조금도 
지쳐보이지 않았다. 지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그가 보게 될 것은 가히 혁명적인 것으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향후 펜타곤, 군 전체가 엄청난 변혁을 겪게 될 것이고 
군의 역사는 다시 씌여져야 할 것이기에 그의 정신은 바늘 끝 같은 
긴장으로 팽팽히 곤두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존 빅터는 사정이 달랐다.
  CIA는 펜타곤이 이 일에 관계하는 것을 처음부터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다 된 일에 펜타곤이 손을 대는 것은 현 CIA 장관 
D.H. 쿠퍼로서는 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알게 된 펜타곤은 전력을 다해 개입했고 결과, 
존은 워커를 문제의 장소로 안내하고 있는 것이었다.
  워커는 눈 아래로 빠르게 물러가는 경치에는 눈길을 돌려 곁에 
앉은 존을 보았다.
  "아직 멀었소?"
  "다 와 갑니다. 지루하십니까?"
  존의 물음에 워커는 미미하게 웃었다.
  "아니. 그 신인류라는 존재가 과연 어떤 것인지 빨리 보고 싶어서 
말이요."
  존이 따라서 웃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우리와는 다를 게 없습니다."
  "하긴."
  워커는 고개를 끄떡였다.
  돌연 끝없이 펼쳐지던 산악지대가 푹 꺼지는가 싶더니 그들의 
눈앞에 계속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평지가 나타났다.
  계곡 속으로 길게 뻗은 사도로에 연결된 분지 가운데에는 넓은 
헬리포트를 갖춘 3층 콘크리트 건물이 눈에 덮힌 채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존이 워커를 보고 말했다.
  "다 왔습니다. 아래가 바로 나사(NASA) 산하의 뮤즈 
연구소입니다!"
  워커가 타고 잇는 헬기는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하고는 정적에 묻혀 
있던 연구소 전역을 굉으로 떨어 울리며 눈보라를 일으키면서 
헬리포드에 내려 앉았다.
  모자를 손으로 누르면서 잰 걸음으로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는 
헬기를 빠져나오던 워커는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 중 맨 앞에 서 있는 흰 가운에 쉐터를 걸친 금발의 미녀가 
단숨에 눈길을 끌었다. 한마디로 아름다웠다. 170Cm가 훨씬 
넘어보이는 늘씬한 모매에 지성적으로 빛나는 눈, 맑은 빛으로 
빛나는 강인하게 다물어진 입술은 그녀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은 그녀가 미모와 지성을 겸비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 발미녀가 워커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뮤즈 연구소의 수석연구원 사라 오스먼드입니다."
  워커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존 차장보가 뮤스 연구소에 절세미인이 있다고 하더니 바로 
당신이로군요! 반갑소. 오스먼드 박사!"
  존이 펴에서 불었다.
  "닥터 김은?"
  "연구실에 있습니다. 중요한 순간이라서 몸을 뺄 수가 없어 제가 
대신 마중을 나왔어요.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뮤즈 연구소는 나사 산하의 5개 연구개발센터에 속해 있지 않지만 
그 중요성은 다른 연구개발센터를 띄어넘고 있는 곳이다.
  그것은 이 연구소에서 실행되고 있는 극비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큰 유리문으로 현관을 구성하고 있는 뮤즈 연구소의 내부는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있는 듯했다. 문의 개폐에서 온도조절까지. 보통 
이야기하는 인텔리전트 빌딩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고 
워커는 생각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다른 연구소 직언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건 너무 조용해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군!"
  사라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던 워커가 말했다.
  "처음 오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 말을 합니다. 
연구소라기보다는 심신요양원 같다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여기 
연구인력외에는 전혀 외부인력을 쓰지 않고 있거든요."
  워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연구인력밖에 없다니? 그럼 경비원도 없단 말이오?"
  사라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그를 돌아보곤 웃었다. 지성적으로 
반짝이는 두 눈이 웃음 속에서 아름다워 보였다.
  "필요가 없죠! 이 뮤즈 연구소 건물은 외부공격을 방어할 수 있게 
프로그램화 되어 있으니까요."
  존이 보충했다.
  "여길 공격하려면 사단병력이 있어야 할 겁니다."
  두개의 유리문을 지나치자 복도가 끝이 나면서 막다른 벽이 
나타났다.
  그 벽에는 공을 반으로 잘라붙인 듯한 금형이 붙어 있었다. 
사라는 그 금형의 투명한 판넬 위에다 손을 올려놓자, 투명한 
판넬이 푸르게 물드는가 싶더니 소리도 없이 레이져 광선이 
천정에서 쏟아져 내려와 사라의 몸을 뒤덮었다. 사라의 전신이 
삽시간에 푸른 수정과 같이 변했다.
  놀란 표정의 워커를 보고 푸른 수정미녀로 변한 사라가 웃으며 
말했다.
  "DNA검색 시스탬이죠! 등록된 사람을 제외하곤 아무도 통과시키지 
않아요. 이 연구소내에선 저를 포함해서 이걸 통과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셋에 불고합니다."
  레이저가 꺼지더니 벽에서 낮은 통의 음성이 
흘러나왔다'Je#11.사라 오스먼드. 검색완료. 통과하실 수 
있습니다.'동시에 벽이 소리없이 갈라졌다. 부드러운 물빛이 안에서 
흘러나왔다. 사라가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는 사라를 보며 존 차장보가 중얼거렸다.
  "망막검사나 음성인식보다 한 단계 앞서 있는 시스템인데 우리 
CIA 보안을 위해 기술 제공을 요구했지만 들은 척도 않습니다."
  워커은 뜻밖이란 듯 물었다.
  "그럼 이 시스템이 여기서 개발한 거란 말이오?"
  "뮤즈 연구소의 프로젝트 책임자인 닥터 김이 만든 겁니다."
  "그 사람.. 생명공학이나 유전공학 외에 이런 것도 해낸단 
말이오?"
  그때, 사라가 문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까지 거기서 잡담만 나누실 건가요?"
  열린 문의 안은 엘리베이터였다.
  겉보기로는 일반 엘리베이터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지만 5, 9, 15, 
40.. 표시되는 숫자는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그 숫자만큼 빠르게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사라가 표시 판텔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프로젝트의 진행은 지하 300m지점에서 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미간을 굳히며 말을 계속했다.
  "사실은 오늘 아침에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우리는 매우 
당황했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CIA가 관계하고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펜타곤까지 여기 관여하고 있는 줄은 몰랐었거든요."
  워커은 미미하게 웃었다.
  "워낙 엄청난 연구라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소!"
  그는 신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 펜타곤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방안을 오래 
전부터 연구해 왔었소. 군인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은 국의 
소망이니까! 생각해 봐요. 신인류로 군대를 만든다면 그 군대야말로 
천하 무적이 돌 게 아니오? 게다가 내가 알기로는 신인류는 
복제인간이라서 얼마든지 제조해낼 수 있으니 그거야 말로.."
  사라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갑자기 차갑고 부러지는 듯한 음성으로 워커의 말을 
잘랐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신인류는 물건이 아니에요! 더구나 
우린 파괴를 위한 목적으로 연구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순간, 땡! 막은 음향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사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찬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사라졌다. 워커는 멍청해져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저러는 거죠?"
  "그녀는 우리 CIA가 중간에 끼어든 것만 해도 못마땅한 판에 
펜타곤까지 끼어들어 군대 운운하니까 열이 받친 겁니다."
  존은 장난스레 웃으며 양 집게 손가락을 머리 위로 세워 뿔을 
만들어 보였다. 재미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엘리베이타의 바깥쪽은 태양광과 흡사한 광선이 조사되고 있어서 
전혀 지하의 느낌을 주지 않는 길게 뻗은 복도였다. 여전히 사람의 
모습은 모이지 않았다.
  또각또각..사라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앞서 걷고 있었다. 그녀의 
뒷를 따르면 존이 워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닥터 김을 만나거든 행여 아까 했던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는 
사라보다 더해서 아마 그런 말을 들으면 소장님을 당장 여기서 
쫓아내벌릴 겁니다."
  워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이오?"
  "라이프 프로젝트팀은 순수합니다. 더구나 그 리더인 닥터 김은 
연구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구 소련에서 망명해 온 
사람이니까요."
  "그 닥터 김이란 친구.. 한국계라고 하던데 그가 그렇게 천제요? 
기록이 상당히 불충분하던데?"
  존이 씩 웃어보였다.
  "그의 신상기록 자치가 극비 분류처리되고 있으니까요. 그가 
천재라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죠! 우리 CIA분석팀은 그가 없었다면 
이 라이프 프로젝트는 앞으로 10년 뒤에라도 완성될 수 없었을 
거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워커 소장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국립위생연구소(NIH)와 에너지성(DOE)이 공동으로 그 
게놈(Genome)인가 뭔가하는 DNA해석 15개년 계획을 추진했어도 아직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혼자 그걸 분석해 
내고 응용까지 않다는 걸 보면 대단한 친구임에는 틀림없나 보군."
  (라이프 프로젝트(LIFE PROJECT))
   그것은 한마디로 신인류(New Humankind)의 창조였다.
  존 워커가 나사(NASA)에서 추진하고 잇던 라이프 프로젝트(LIFE 
PROJECT)를 알게 된 것은 불과 1개월 전이었다.
  생명창조! 그것은 단어 자체로 그의 흥미를 끌기에 족했다. 물론 
그 단어가 처음부터 그의 흥미를끌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와 유사한 
여구는 바이오테크롤러지가 활성화되면서 끝없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접한 나사의 '라이프 프로젝트'는 그가 지금까지 
들어와던 어떤 연구와도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나사는 무려 370억 달러를 들인 우주스케이션 
'프리덤(Freedom)'의 오나성은 눈아펭 두고 항성탐험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우주를 탐험하면서 접하게 될 숱한 위험 앞에 
인체는 너무도 미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겹겹으로 싸둔 우주복 
한 곳에 바늘끝만한 구멍만 생겨도 인간은 그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위험을 이겨낼 수 있는, 우주의 갖은 악조건을 견뎌 
낼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의 창조!
  그것이 라이프 프로젝트의 핵심 목표였다.
  장차 있게 될 항성탐험을 위해 새로운 인류를 창조한다는.. 그 
계획은 인간을 능가하는 또 다른 인간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인간을 뛰어넘은 초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입안되고 진행되고 있는 라이프 프로젝트를 처음 
접한 워커는 흥분으로 가슴이 떨렸었다.
  초인으로 만들어진 군대!
  바람처럼 달리고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인간으로 만들어진 
군대..
  그것은 군인으로서는 꿈에도 그리는 군대가 아닐 수 없었다.

    제 2장 신인류
  그곳은 거대한 광장이었다. 마치 거대한 타원형의 공을 반으로 
잘라 엎어 놓은 듯한 돔이 시야를 압도하고 있었다. 수백 미터에 
이를 듯한 돔의 좌우벽에는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 윗부분의 우리로 
된 관 형상의 갭슐들이 질서정연히 늘어서 있었다. 갭슐에는 
각종계기와 굵고 가는 관들이 어지러히 연결되어 있었고 상태를 
나타내는 표시등이 규칙적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안쪽으로는 가운을 걸친 두 명의 남자가 갭슐 안을 들어다 보며 
뭔가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건 생가보다 엄청난 규모로군!"
  워커는 메인스케이션의 문 앞에 서서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존 차장보가 설명했다.
  "현재 여기서 한 번에 배양해낼 수 있는 복제인간은 
100면선입니다. 여기 갖추어진 성장 캡슐이 100개니까요."
  사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존을 돌아 보았다.
  존히 황급히 말을 고쳤다.
  "아, 아니 참! 복가 아니라 신인류요!"
  사라가 차갑게 말했다.
  "복제인간이란 사람을 그대로 재생해내는 것을 말해요. 하지만 
우리의 신인류는 그것과는 출발부터가 다릅니다."
  존이 손을 들었다.
  "알고 있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 뿐이오!"
  워커가 입을 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가 한 말에 대해 불쾌했다면 닥터 사라가 
양해를 해주면 좋겠소. 닥터 사라가 과학자이듯이 난 군인이오. 
지금도 군인이지만 앞으로도 군인일 것이고. 내가 군인인 이상, 난 
모든 것을 군과 연관시켜 생가하지 않을 수가 없소. 다른 뜻이 
아니오."
  사라는 워커를 쳐다보았다.
  워커의 가식없는 주름진 눈웃음을 보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한 분이로군요. 좋아요!"
  그녀가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저도 오늘 있을 시험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으니까 그렇게 
양해해 주세요. 향후 전치 플랜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실험이거든요."
  "워커 소장님. 이분이 우리 팀장이신 닥터 김이세요!"
  사라는 베인스케이션의 끝쪽에 서 있던 두 사람에게 워커와 존을 
안내해 소개했다.
  감색 가운을 걸친 닥터 김이란 사람은 30대 후반이었다.
  178Cm정도의 키에 금테안경을 쓴 이지적 용모. 아무렇게나 
빗어넘긴 머릿결은 동양계의 흔적이 역력한 그의 모습을 흐트리기 
보다는 묘하게 침착한 느낌을 주었다. 편한 가운데 빈틈이 없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마중이 늦어 죄송합니다."
  닥터 김은 정중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워커는 그의 손을 마주잠아 흔들며 힘있게 말했다.
  "닥터김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소."
  "이쪽은 본 클라우스 프리드만 박사입니다. 선진독일의 
자부심이죠."
  갭슐 옆에 서서 뭔가 기록하고 있던 클라우스가 워커를 보며 
웃었다.
  "그 놈의 선진은..안녕하십니까?"
  워커는 그의 푸른 눈에서 번뜩이는 날카로움을 읽을 수 있었다. 
나이는 닥터 김과 비슷한 30대.
  워커는 그들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라이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천재 과학자 3인이 바로 여러분이란 
말이오?"
  존이 옆에서 참견했다.
  "생각보다 너무 젊죠?"
  워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렇소! 겉보기로는 아직 대학에 다닐 나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렇긴 하지만 사상 최고의 두뇌와 사상 최강의 팀웍을 자랑하고 
있는 불세출의 삼총사입니다.!"
  존의 설명에 닥터 김을 비롯한 세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들 세 삶은 모두 20세 이전에 박사학위를 받은 천재였다.
  
  "인간의 유전자(DNA)에는 이중난선구조의 30억쌍이 염기가 
배열되고 있고 그중 5% 정도가 유전에 직접적인 관련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게놈(Genome)은 바로 그 30억쌍의 염기를 
가리키는데 라이프 프로젝트는 바로 그 게놈 인자를 모태로 시작 
되었습니다."
  닥터 김은 흥미롭게 유리 갭슐을 들어다 보는 워커에게 말했다.

  사람이 일생을 마치기까지 필요한 유전 정보는, 모두 
DNA(디옥시리보 핵산)라는 화확 물질이 담당하고 있으며, DNA는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이라는 4종류의 염기와 
디옥시리보오스라는 당, 인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염기와 당, 인산이 모여 뉴클레오티드라는 유전의 기본 단위를 
구성한다. 이들의 결합은 긴 사슬 모양을 이루며, 이 사실이 두 
가닥으로 꼬이며 이중난선 구조를 하고 있다. 유전 정보는 아데닌, 
구아니, 시토신, 티민이라는염기의 배열순서로서 DNA분자 속에 
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유전 정보란 DNA 분자 속에 A, G, C, T의 4문자로 
쓰여진 생명의 문장이다. 사람의 유전 정보는 약 30억 쌍의 
염기배열로 구성되어 있다. 이 30억쌍의 염기쌍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사람의 모든 유전 정보를 가진 유전 물질(=DNA)을 사람의 
게놈이라고 한다.
  사람의 게놈(DNA)은 핵 속에 존재하는데, 단백질과의 복합체인 
염색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게놈 DNA에는 유전 정보가 '유전자'라는 
단위로 존재하고 있다. 사람의 유전자 수는 5만에서 10만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골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의 소장인, 와트슨(J. Watson)이 
DNA 이중난선 구조를 발견한 이래 DNA 재조합 기술, DNA의 염기 
배열의 결정법으로 유전 정보에 대한 지식이 놀랄 만큼 발달 했지만 
지금까지 해명된 사람의 유전자 수는 600개에서 700개 정도이고, 
대충 위치산정이 이루어진 것까지 합해도 2000개를 상회할 분이며 
이것은 전체 유전자(5만10만)의 몇 %에 불과한 것이다.

   7의 판넬이 붙은 유리 캡슐의 안에는 전라의 남자 한 사람이 
똑바로 누어 잠자듯 눈을 감고 있었다. 얼핏 보기로는 20세 정도. 
길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어우러진 용모는 눈을 감고 있음에도 
뛰어나게 수려했다.
  한눈에 동양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워커는 그 유리 캡슐 안의 사람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그 게놈이란게 미국 국립 위생연구소(NIH)와 에너지성(DOE)이 
5개년 계획으로 1차 해석작업에 들어간 거 아니오?"
  "맞습니다."
  워커는 눈을 끔벅였다.
  "맞다니? 내가 알기로는 그 게놈 계획은 1990년에 시작해서 제 
1차 연구도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일텐데?"
  옆에서 존이 웃으며 말했다.
  "닥터 김은 그것을 혼자 해냈습니다. 해석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응용 하고 있죠! 그렇지 않다면 이 라이프 프로젝트는 시작조차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워커는 놀란 눈으로 새삼 닥터 김을 바라보았다.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을 말이오?"
  닥터 김은 미미하게 웃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해석해냈을 뿐입니다."
  그는 유리 캡슐 안의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인류는 그 게놈의 염기를 컴퓨터로 조직, 변형시켜서 모든 
조직을 강화합니다. 심폐기능에서부터 시작해서 뼈의 구조, 근육의 
힘까지.."
  "이른바 초인이로군"
  워커가 눈을 반짝였다.
  "초인이라고도 할 수 있죠! 달려오는 자동차를 정면으로 세울수 
있는 힘을 가실 수 있게 프로그램화하고 있으니까요."
  "몇 Km로 달려오는 차를 세울 수 있단 말이오?"
  "최종목표가 100말일로 되어 있습니다."
  "맙소사! 100마일이라고?"
  워커는 입을 딱 벌렸다.
  100마일이라면 160Km가 넘는 가공할 속력인 것이다.

   7의 성장 캡슐의 판넬에 붙어 있는 기록을 들어다 보고 있던 존 
차장이 머릴 들었다.
  "여기 이 친구가 태어난 게 오늘로 만 3년 7개월 9일째라고 적혀 
있는데..이게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닥터 김의 대답에 워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3년 7개월? 그런데 벌써 이런 성인이 되어 있단 말이오?"
  "이미 1년 전에 성인으로 성장은 했습니다."
  워커는 믿을 수 없는 듯 새삼  7성장 캡슐 안의 남자를 내려다 
보았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20세 이상의 건장한 신체였다.
  "엄청난 일이로군! 엄마 품에 안겨 재롱이나 불릴 꼬마가 이런 
어른이 되어 있다니..."
  옆쪽에서 스위치 조작을 하던 클라우스가 웃으며 참견했다.
  "지금은 더 고속성장을 시킬 수 있습니다. 세포분열을 촉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배양법을 발견해 냈으니까요."
  "지금 보다 더 빨리 말이오?"
  "그렇습니다. 한 1년 정도면 성인으로 성장시킬 수가 있습니다."
  존과 워커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건 듣자니 점점 엄청나다. 한 사람의 인간이 어른으로 크는데 
불과 1년이란 말인가. 아무리 만들어진다고는 하지만..
  워커는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렇게 고속성장을 시켜도 정상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소?"
  클라우스는 자신있게 웃음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여기  7의 머리에 씌워진 리아프링이 보이시죠?"
   7 성장 캡슐에 잠자듯 누워있는 신인류의 머리에는 미세한 
전선이 잔뜩 연결된 은백색의 테가 둘러져 규칙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워커가 그것을 손가락질했다.
  "이..뇌파검사할 때 쓰는 것 같이 생긴 거 말이오?"
  "그렇습니다. 우린 그것을 라이프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거기서 
프로그램된 지식들이 신인류에게 전달되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간접 경험이지만 인간이 자라면서 배우는 것과 달리 신인류는 이 
성장 캡슐을 벗어나면서부터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필요한 지식과 경험치들을 배우고 있는 셈이죠. 또 이렇게 
함으로서 신인류를 우리가 원하는대로 컨트롤 할 수 있게 됩니다."
  "지식과 경험치라면..어느정도의 수준을 말하는 건지.?"
  "그분야의 전문가 수준을 말하는 겁니다."
  닥터 김의 대답에 워커는 눈을 반짝였다.
  "전문가 수준이라면, 10년 복무한 군인과 같은 수준의 교육도 
가능하다는 뜻이오?"
  닥터 김은 머릴 끄덕였다.
  "프로그램만 완벽하다면 가능하죠!"
  옆에서 클라우스가 다시 참견했다.
  "장군과 같은 군사전문가의 지식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 순간 
장관과 같은 능력을 지닌 신인류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이건 정말 엄청나군!"
  워커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숙력된 군인 하나를 키우는데 드는 세월과 돈이 얼마인가. 그런데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런 군인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것이다. 더구나 자신과 같은 고급 군사전문가라니.
  이건 흥분이전에 가슴이 섬뜩해지는 일이었다.
  그때,  7성장 캡슐 안의 신인류를 들어다 보고 있던 워커는 문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신인류의 얼굴이 닥터 김의 것과 
너무나 흡사함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신인류의 얼굴과 닥터 김의 얼굴을 번갈아보는 것으르 본 
사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 7이 우리 닥터 김을 닮았죠?"
  "그렇소! 아주 흡사하오. 마치 쌍둥이를 보는것 같은데.."
  워커의 말에 사라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당연하죠! 닥터 김의 아들이거든요?"
  워커는 얼떨떨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들이라니?"
  닥터 김이 쓰게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7호는 제 유전자를 조작해서 태어난 
신인류입니다. 그러니 겉모습이 닮는 것은 당연하죠."
  옆의  8의 계기를 만지작거리던 클라우스가 고개를 들며 웃었다.
  "제 것과 사라의 것도 있습니다. 특히 사라의 유전자를 받은  
1호는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늘씬한 몸매를 전혀 가지지 않고 벗고 
있으니까 더욱 환상적인데..한번 보시겠습니까?"
  워커와 존은 순간적으로 사라를 쳐다 보았다. 저 늘씬한 미녀의 
유전자를 받아 그대로 태어난 복재..아니신인류라면 몸매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었다. 더구나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친 게 없을 
것은 불문가지.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모습에 사라는 한심한 듯 클라우스를 흘겨보았다.
  "하여튼 못말린다니까."
  그때였다. 이상한 소리와 함께 그들이 서 있는 바닥이 
뒤흔들렸다. 올려놓았던 물건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다음 순가, 그처럼 환하던 불빛이 깜박이며 주위를 어둠으로 
물들였다가 다시 밝아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사람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
  동시에, 삐이삐이! 요란한 경보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지진 감지장치 작동! 본 연구소에 방금 마그니튜드(M)4.2의 
지진엄습! 2분 30초 후에 S파 도달 예정입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의 물결이 흘러갔다.
  지진에는 S파와 P파가 있다. 그중 S파는 P파보다 전달속도는 
느리지만 그 위력은 몇 배에 달한다 지진의 피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이 S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
  P파은 전달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P파가 도달하면 그것을 일러 
전진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그 위력은 S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위력이 약하다는 S파의 진도가 M4를 넘는다는 것은 실로 
머리끝이 곤두서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닥터 김은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클라우스! 어떻게 된 일인지 외부와 연락을 해봐!"
  "알았습니다."
  클라우스가 뛰어나가는 것을 본 닥터 김은 사라에게 소리쳤다.
  "사라! 피해가 있었는지 알아봐줘!"
  "알았어요!"
  사라가 대답과 함께 클라우스의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워커는 긴장된 표정으로 뛰듯 출입구 쪽으로 가고 있는 닥터 김을 
따라가며 물었다.
  "이거.. 자주일어나는 일이오?"
  "프로젝트 진행 이후,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이곳은 
지진 안전지대니까요!"
  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드드드..! 마치 벽돌이 이를 
갈아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주이가 더 크게 흔드렸다. 
  천정의 불빛은 명멸했다. 긴장감이 살처럼 흘러갔다.
  
  컨트롤 센타는 좀 전에 존과 워커가 있던 지하광장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전면의 거대한 유리창은 신인류가 있는 지하광장을 
한준에 보여주고 있었다. 그 옆으로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드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지하광장의 곳곳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자동조절되던 이 지하 컨트롤 센터는 아연 숨막힐 듯한 
긴장감으로 휩싸여 있었다. 사방에서 붉고 푸른 불빛들이 번쩍이고, 
심장을 떨어 울리는 경보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시스탬 자체엔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요?"
  쉴새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라의 옆에서 클라우는 찌직거리는 
스크린을 보며 연달아 스위치들을 올리며 혀를 차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외부 통신비디오가 꺼졌어!"
  클라우스는 신경질적으로 헤드폰을 집어들고 소리쳤다.
  "다시 말해봐! 잘 안들려! 뭐라고?"
  클라우스가 경악한 표정으로 닥터 김을 바라보았다.
  "큰이났습니다! 캘리포니아 북부와 오리건 주 해안에 
전면소개령이 내렸답니다!"
  "전면소개령?"
  "그렇습니다.! 서해안 일대의 판구조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 
사상최악의 지진이 해안지대에 일어날 것 같다는 군요! 
예상대로라면 해안일대가 완전히 바다 밑으로 함몰할 가능성도 
있다는데요."
  사람들의 얼굴이 모조리 경악으로 굳어졌다.
  존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미국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는 말이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우리가 올 때까지만 해도 그런 소린 
들은 적도 없는데!"
  워커가 신음하듯 말했다.
  닥터 김은 클라우스의 손에서 낚아체듯 헤드폰을 넘겨받아 말하기 
시작했다.
  그를 지켜보던 클라우스는 힐끗 벽에 부착된 시계를 보곤 
워커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석상과 같이 굳어 있었다. 상황은 
생각보다 대단힌 엄중했던 것이다.
  "예상시각까지는 아직 7시간의 여유가 있는데 상황이 삼상치가 
않는 것 같습니다!"
  "심사치 않다니?"
  "상황이 이미 시작된 것 같다는 분석이 있는 모양입니다!"
  워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럼 조금 전의 그 지진이?"
  그때, 외부와 통신하던 닥터 김이 격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래! 지금 당장! 최대한 빠른 시간내에 모든 인력을 연구소에서 
대피시키도록 해!"
  닥터 김은 귀에 대고 있던 헤드폰을 팽개치듯 내려놓으며 
시스팀을 점검하고 있는 사라에게 빠르게 말했다.
  "사라! 손님들을 밖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해!"
  "닥터 김은?"
  "난 이 연구소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워커의 물음에 닥터 김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말을 하면서도 
그 시선과 손은 쉬지 않고 스크린과 스위치 조작 판넬들을 오가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워커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지난 10년간의 피땀이 바로 이 자리에 모두 있습니다! 여길 
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요? 닥터 김이 없다면 이 라이프 
프로젝트는 누가 어떻게 한단 말이오?"
  워커와 존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닥터 김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클라우스를 보았다.
  "라이프 프로젝트의 모든 데이터를 디스크에 정리하도록해! 
얼마면 되겠나?"
  클라우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워낙 기록이 방대해서.."
  "최대한 움직여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할테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타다다닥..클라우스가 컴퓨터 앞에 앉아 미친듯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초당 290억회 이상의 명령을 수행한다는 
슈퍼컴이 정신없이 좌우에서 마구 돌아가기 시작했다.
  닥터 김은 머뭇거리고 있는 사라를 보며 소리쳤다.
  "뭐하고 있어? 빨리 손님들을 밖으로 안내하지 않고! 그리고 다시 
돌아올 필요는 없어! 같이가!"
  사라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긴 우리 둘만 해도 충분해! 사라까지 있을 필요는 없어!"
  "말도 안 돼요. 어떻게 그런 소리.."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던 클라우스가 고개를 들어 사라를 
보았다.
  "시키는대로 해! 만일의 경우, 라이프 프로젝트를 이어갈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겨면 어떻게 하나?"
  "."
  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프 프로젝트는 너무도 중대했고 
그들이 모든 정열이 다 바쳐진 일이었던 것이다.
  그순간, 무서운 진동이 지하 컨트롤 센터를 엄습했다.
  컨트롤 센터 전체가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뒤흔들렸다. 
바닥이 춤을 추듯 굼틀거리고, 조명이 깜박거리면서 팡!팡! 각종 
계기들에서 섬광이 명멸하며 불꽃을 튕겨 내었다. 천정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면서 콘크리트 조각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귀청을 찢는경보음이 연속적으로 울리는 가운데 사람들은 술에 
취한 듯 중심을 못잡고 비틀거리다 내동댕이쳐졌다. 사방이 
순간적으로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였다가 밝아졌다.
  "위험해!"
  닥터 김은 사라를 덮쳐가 그녀를 안고 나뒹굴었다.
  콰앙! 방금 사라가 서 있던 자리로 벽에 붙어있던 기계가 엎어져 
산산히 부서졌다. 후두둑.. 사라를 덮친 닥터 김의 위로 둘가루와 
기계부속이 흩어져 내렸다.
  "괜찬하?"
  탁터김은 자신의 밑에 깔리 사라를 보며 물었다.
  "."
  사라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닥터 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안도의 물결이 닥터 김의 얼굴에 흘러갔다.
  구 소견에서 망명을 할 때만 하더라도 그의 가슴에 불타는 것은 
오로지 연구에 대한 정열 뿐이었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그의 
가슴에는 어쩌면 그 연구보다 더한 존재가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라 이름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머뭇거릴 여유를 주지 않고 있었다. 급박한 
경보음이 계속해서 울려퍼지는 가운데, 컴퓨터로 조작되는 
합성음성이 숨가쁘게 들려왔다. 그것은 공포의 전주와도 같은 
것이었다.
  "방금 M8의 강진 엄습! 2분후, 해안전체에 격진 도달 예정..추정 
강동M10!"
  "맙소사 M10이라고!"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벌벌 기어 일어나던 존은 입을 딸 벌렸다. 
마그니튜드(M) 10이라면 그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제아무리 
견고한 거물이라도 장난감처럼 허물고 설령 바다라 할지라도 뒤엎어 
버릴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마그니튜드, 강도 1이 
증가할때마다 지진의 위력은 30배 증가한다. 이러한 로그스케일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다. 마그니튜드 8과 마그니튜드 10과의 차이는 
2배가 아니라, 900배인 것이다.
  닥터 김은 사라를 멀어내었다.
  "빨라 가! 나도 곧 뒤따라 갈테니까!"
  "정말이에요?"
  사라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물론! 내가 여기 있는 것은 개죽음하기 위해서가 아니니까! 
사라를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잖아?"
  순간, 사라는 폭풍처럼 그를 끌어안으며 그에게 격렬히 키스했다. 
자신도 왜인지 알 수 없는 슬픔이 갑자기 용솟음쳐 올랐다. 눈물이 
그녀의 빰을 타고 굴러내렸다. 어쩌면 그것을 여인 특유의 
직감이었는지도 몰랐다.
  사라는 닥터 김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래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선 안돼요! 사라를 
위해서라도..!"
  한쪽에서 간신히 몸을 세우며 일어나던 클라우스가 그 광경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
  지하 컨트롤 센터는 아직도 출렁이고 있었다.
  여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천정에선 돌가루가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어디선가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여기저기 최첨단을 
자랑하던 기계들이 흉한 몰골로 칙칙거리며 섬공을 튕겨 올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사라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듯했다.
  그런 그녀의 손을 워커가 잡아챘다.
  "오스먼드 박사는 개가 맡겠소! 닥터 김! 올라가 기다릴테니까 
빨리 클라우스 박사와 같이 나오도록 하시오!"
  "부탁합니다."
  닥터 김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커가 존과 함께 사라의 손을 잡고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서 닥터 
김은 탁탁탁. 컨트롤 판넬 위의 스위치들을 맹령하게 올리기 
시작했다.
  컨트롤 판넬 위의 지지등이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클라우스가 그것을 보고 외쳤다.
  "물하는 겁니까? 신인류들을 다 깨울 작정입니까?"
  "그를 수밖에 없잖나? 이대로 지진이 엄습한다면 그들은 
깨어나지도 못하고 이곳을 무덤으로 삼아야 할테니까.."
  그때 다시 급박한 컨트롤 컴퓨터의 합성음성이 드려왔다.
  "지진파 도달 예상시간 1분전! 남은 신간 59초 58초.."
  닥터 김은 뛰기 시작하며 클라우스에게 외쳤다.
  "내 연구실에 가서 연구자료를 가져 올테니 자료정리가 나보다 
빨리 끝나면 먼저 올라가도록 하게! 나도 곧 뒤따라 갈테니까!"
  "54초. 53초."
  컨트롤 컴퓨터의 경고음성은 마치 죽음의 카운트다운과 같았다.
  죽음은 정말 초를 다투어 달려오고 있었다.
  닥터 김, 그는 강제로 시베리아로 이주당한 조선족의 후예였다. 
조선족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안드레이 김이란 
이름으로 소련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었다.
  비록 지금은 붕괴되었으되, 지난날 소련의 최고 두뇌만이 
모인다는 소년 과학아카데미에 불과 15세 나이에 들어가 세상을 
놀라게 하고 3년만에 과학 아카데미 사상 최고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던 그였다.
  그런 그가 사회주의 체제에 환면을 느끼고 오직 연구를 위해 
망명한지 10년.. 그 피와 땀의 세월이 결실을 거두려는 마당에 이런 
뜻밖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인간을 창조한다는 것에 대한 신의 
노여움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바늘이 떨어질 만큼 조용하던 사위는 붉은 불빛이 섬멸하는 
가운데 귀청을 찢을 듯한 경보음이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안드레이 김의 연구실은 지한 컨트롤 센터의 B구역에 위치해 
있었다. 평소 정동이 잘 되어 있던 그의 연구실은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음을 증명하듯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안드레이 김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 설비들을 돌아보았다.
  하나하나 모두 그의 손때묻은 것들이었다.
  "지진파 도달 18초 전!"
  하지만 급박하게 울려 퍼지는 컴퓨터의 경고음은 그러한 감회에 
젖을 시간을 주지 않고 있었다.
  안드레이 김은 다급하게 그의 개인 금고 속을 뒤져 몇가지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그의 앞에는 마치 얼음과 같은 싸늘한 웃음을 떠올린 클라우스가 
그에게 권총을 겨누고 서 있었던 것이다.
  클라우스는 침착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 연구 노트..이리 주실까?"
  안드레이 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납득할 수 없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클라우스! 이게 무슨 짓인가?"
  순간, 불을 뿜는 클라우스의 권총에 안드레이 김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연구 기록들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드레이 김은 가슴을 움켜지고 신음했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클라우스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그를 
쏜 것이다. 이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클라우스는 안드레이 김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구 노트를 
줏어들었다. 그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안드레이 김을 내려다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머리끝이 곤두서는 섬뜩한 웃음이었다.
  "시간이 없어! 긴 말은 할 수 없지만, 한가지만은 알고 가게. 
안드레이 김.."
  그는 손에 든 연구 노트를 들어 보였다.
  "이 연구 기록과 내가 미러 빼돌려 놓은 데이터만 있으면 너 
없이도 이 라이프 프로젝트는 추진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것은 내가 더 이상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
  붉은 빛이 명멸하는 가운데 그는 다시 웃었다. 그것은 섬뜩한 
악마의 웃음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는 보여 
주고 있었다.
  안드레이 김은 일그러진 얼굴로 가쁜 숨을 토해냈다.
  "클라우스..대체 왜 이러는 건가? 자네와 나는 그 동안.. 그처럼 
잘 지내왔는데..대체..?"
  "그게 잘 지낸 건가?"
  클라우스는 코웃음쳤다.
  "그건 잘 지낸 게 아냐! 굴욕의 세월이었지..왜냐하면 난 어는 
누구도 나보다 뛰어난 걸 용납할 수가 없는 체질이거든! 게다가 난 
네가 사라를 가로채는 것을 더더욱 용납할 수 없고 말이야.."
  "사라?"
  클라우스는 싸늘하게 웃었다.
  "사라와 네가 어울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아나? 
네가 없다면 사라는 내것이지!"
  "이 나쁜 놈.!"
  안드레이 김은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했다.
  "시간이 없군! 잘 가게 안드레이 김! 헬 익스프레스가 널 
기다리고 있어.."
  클라우스는 방아쇠에 힘을 주었다.
  순간, 마치 천지개벽을 하는 듯한 거대한 부르짖음이 땅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은 굉렬한 자연의 포효였다.
  클라우스의 총소리 같은 것은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연구실 
전체가 뒤흔들리며 천정이 갈라지고 콘크리트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마치 두사람이 배필을 좌우에서 잡고 출렁이게 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연구실 내의 모든 기물들이 뒤지어졌다. 마치 
물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클라우스눈 총을 쏘다가 그대로 문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굉장한 소리를 내며 그의 발밑이 쩍 갈라졌다.
  연구 노트 한자랑이 그 벌어진 땅의 입으로 빨려드는 것을 보고 
클라우스는 혼비백산해 연구 노트를 가슴에 움켜작고 죽어라고 
달리기 시작했다.
  땅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클라우스는 죽을힘을 다해 복도를 달렸다.
  태어난 뒤로 자신의 눈썹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고 느낀 것은 
맹세코 이것이 처음이었다.
  복도는 춤을 추고 있었다. 한 발자국 뒤에서 천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공포의 대지진이 마침내엄습해 온 것이다.
  숨이 턱에 차 엘리베이터의 앞에 까지 도달한 클라우스는 
미친듯이 보턴을 놀렸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대답..
  "감지 장차 작동 불능..작동불능..장치가 회복될 때까지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현재 적색 비상사태.."
  "이런 미친놈의 기계! 이런 상황 하에서 어떻게 장치가 회복되길 
기다리란 말이야?"
  클라우스는 미친듯이 감지 장치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아리러니하게도 엘리베이터의 그 감지 장치는 그가 고안한 
것이었다.
  그 순간, 땅바닥이 꺼지며 그를 집어 삼겼다. 클라우스는 
기절초풍해서 몸을 날렸다. 끔찍한 소리를 내며 방금 까지 그가 서 
있는 곳이 꺼져 내리고 있었다.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클라우스! 빨리! 빨리 타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라가 고개를 
내밀고 그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사라!"
  클라우스는 환성을 터트렸다.
  아마도 서부 개척민들이 인디언들에게 포위당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가 기병대를 만났을 때 기분이 이러했으리라.
  "빨리 가야 돼! 늦으면 엘리베이터의 작동이 중지될는지도 몰라!"
  클라우스는 엘리베이터로 뛰쳐들면서 외쳤다.
  사라는 엘리베이터의 밖을 내다보았다.
  "닥터 김은?"
  클라우스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사라의 얼굴도 따라서 굳어졌다.
  "왜요? 설마 무슨 일이 있는건 아니겠죠?
  클라우스는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같이 나오다가 그만 무너지는 천정에 깔리는 바람에.."
  사라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탈색되었다. 
  휘청하던 사라는 다음 순간 찢어지듯 소리쳤다.
  "안돼!"
  사라는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의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듯했다. 클라우스는 사라의 팔뚝을 
거세게 낚아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놔! 놓으란 말이야!"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라는 광란의 사태를 보이고 
있었다.
  클라우스는 몸부림치는 사라를 잡고 마주 소리쳤다.
  "놓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럼 사라마저 개죽음을 하겠다는 
건가? 저 아수라장으로 가야겠어? 닥터 김이 그런 걸 바라겠어?"
  그는 침통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그는 죽으면서 내게 사라를 부탁한다고 했고 나 그걸 응낙했어! 
사라 그런 일을 하도록 둘 순 없어!"
  사라는 울음을 터뜨리며 클라우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클라우스는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다둑였다. 하지만 그의 눈과 
얼굴은 음흉히 웃고 있었다.
  (잘 봐뒤. 안드레이 김! 이제부턴 모든 게 내 마음대로라는 걸 
말이야..)
  그는 소리내어 웃고 싶었다. 그것도 크게 소리내어서..
  사라의 울음소리는 통곡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안드레이 김은 이를 악물고 다시 기었다. 그가 지나온 자리에는 
붉은 핏자국이 섬뜩하게 그어져 있었다. 전신의 피는 이미 다 빠져 
나간 듯했다. 눈앞이 희미하고 눈꺼풀이 천근이양 무거워오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컨트롤 센터의 거대한 스크린이 있었다.
  스크린에서는 섬광이 튀고 있었지만 아직 건재했다. 그 
스크린에는 무너지고 있는 신인류의 요람인 지하 광장이 보여지고 
있었다. 
  안드레이 김은 이를 악물고 손을 뻗어 몇개의 스위치를 연속해서 
올렸다. 스크린의 화면이 움직이더니 순간적으로  7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아직도 잠자듯 눈을 감고 있었다.
  안드래이 김은 머릴 흔들었다. 정신이 가물거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어지로 눈을 치켜 뜨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기대를  7 네게 할 수 밖에..부디 이 프로그램이 네 
뇌리에 기억되길.."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열쇠를 통제시스팀 판넬에 있는 열쇄 
구멍에 넣고 돌렸다. 낮은 소리와 함께 그가 준비해준 시스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라.."
  안드레이 김은 낮게 신음했다.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안드레이 
김은 그 큰트롤 판넬에다 머리를 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최고의 
천재라던 그는 이렇게 생을 마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천재였다.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며, 그가 죽은 다음에 더욱 
절실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쩡쩡! 거대한 균열이 사방으로 생겨나고 땅이 꺼지고 천정이 
무너져 내렸다. 스크린들도 마침내 한 조각 유리로 화해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스크린에 마지막까지 투영되고 있던 7이 눈을 뜨고 
그를 보고 있었음은 지진의 진동으로 생긴 착각이었을까.
  그처럼 아름답던 뮤즈 연구소 건물은 마치 장난감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산선이 모조리 뒤흔들리면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땅이 꺼지고 있었다. 천지개벽을 보는 듯했다.
  그 하늘에는 워커와 존 차장보가 타고 온 헬기가 떠 있었다.
  사라와 클라우스를 태우고서..

    제3장 석양의 표류자
  199*년 1월 서태평양 괌도.
  수채화를 그린 듯한 괌의 해변엔 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들이 
그야말로 그림처럼 깔려있었다. 공해의 어둠을 모르는 바다 또한 
그저 맑고 푸르게 철썩이며 모래사장으로 밀려와 부서지곤 했다.
  어디를 보나 그저 편안한 대자연 그대로의 숨결... 
  하지만 그렇게 그린 듯한 괌의 풍치도 임병권의 가슴을 밝게 
만들어 주진 못했다.
  아마를 포함한 야구인생 25년 통산 3할 4푼 3리, 프로 14년 연속 
3할, 타격 3관왕에 3연속 오르기 두 번. 그야말로 프로야구의 
금자탑을 세웠던 임병권은 타격코치를 거쳐 신생 블루 앤젤스를 
맡은 첫해 준우승을 시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과연 임병권!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퍽퍽! 그의 앞에선 수영팬티 바람으로 선수들이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미친 듯이 배트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새롭게 맡은 이 레드 드래곤은 선수가 너무 
부족했다.
  숫자가 아니라, 그 자리에 맞는 선수가 부족한 것이다.
  프로야구는 땀을 흘린 만큼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다. 그것은 
임병권 감독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지옥의 
조련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도 선수의  자질이 따라와 줄 때였다.
  "마! 그것도 배팅이라고 휘둘러? 포인트를 잡아야 할 거 아냐? 
파도를 향해 휘두른다고 무조건 힘만 들이면 제일이야?"
  앞에서 타격코치 장대복이 선수들에게 악을 쓰고 있었다.
  그때, "잘 되어 가나요?"
  임병권 감독의 뒤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뒤에는 수영복차림에 비치 가운을 걸친 팔등신의 늘씬한 
미녀가 선글라스를 낀 채로 서 있었다. 24, 5세? 선글라스가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어도 뛰어난 미녀임을 알아보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아니, 유나래양이 여긴 어쩐 일이오?"
  임병권이 눈을 크게 떴다.
  유나래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싱그럽게 웃었다.
  "웬일이라뇨? 이번에 제가 우리 레드 드래곤의 홍보팀장이 된걸 
설마 잊으신 건 아닐테죠? 패넌트레이스 연속 3년 최하위의 우리 
구단이 새롭게 부임해오신 명조련사 임감독님을 맞아 과연 얼마나 
달라진 모습을 금년 시즌에 보여줄 것인지... 팬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게 제 할일이라구요! 그러자면 동계훈련에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그녀의 손짓에 따라 그녀의 뒤를 따라온 카메라 맨들이 
훈련장면을 찍기 시작했다. 조명과 촬영기사들이 분주하게 설쳐대는 
것을 보고 임병권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러면 곤란하오! 우린... "
  유나래는 환하게 웃었다.
  자신감을 가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
  "현대가 자기 피알시대라던 건 이미 80년대의 구시대 유물이에요! 
지금은 자신을 창출해서 대중에게 보여주는 시대예요! 프로구단이 
누굴 위해서 존재하죠? 선수들을 위한 프로구단이 존재할 수 없는 
이상, 홍보없는 프로구단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 각자 할 일이나 할까요?"
  유나래는 손을 들어 보이곤 앞으로 걸아가기 시작했다.
  임병권은 입맛이 썼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상대는 레드 
드래곤을 운영하고 있는 태산그룹의 총수 유대철의 외동딸이니까.
  파도는 지칠 줄 모르고 해안으로, 해안으로 덤벼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파도를 향해 배트를 휘두르는 선수들의 팔에는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3루수 곽일도는 죽어라고 배트를 휘두르다 헉헉거리고 주저앉고 
말았다. 전지훈련이란 것은 빛좋은 개살구였다. 괌에 온 지 닷새나 
되었지만 시내 관광 한 번 나가 본 적이 없었다.
  비키니 브래지어 사이로 금방이라도 터질 듯 흔들리는 풍만한 
젖가슴, 아슬아슬한 삼각 팬티에서 폭발할 듯 뻗어나온 늘씬한 
다리... 눈앞에 삼삼이던 남국의 미녀는 남가일몽이었다.
  "빌어먹을! 이거... 정말 사람 완전히 잡는구나야... "
  "힘드신가 보죠?"
  문득 옆에서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지옥에서 여자, 그것도 한국 여자의 말소리라니... 
  그가 조금 전까지 그렇게 꿈꾸었던 늘씬한 미녀가 그의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비록 비치가운을 걸쳐 몸매가 조금 가리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게 웬 횡재냐!
  곽일도는 마치 스프링이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미녀가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새로 홍보팀을 맡은 유나래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그, 그러십니까? 자, 잘 부탁합니다."
  왜 이렇게 말이 더듬어지냐.
  곽일도는 혀를 찼다. 이 놈의 혀는 이쁜 여자 앞에만 나서면 그만 
석고붕대를 하게 된다. 이러니 30이 넘도록 애인 하나 없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유나래의 앞에는 선수들이 배트를 집어던지고 몰려들었다.
  곽일도는 죽을 힘을 다해 하체에 힘을 두고 버텼다.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아무래도 내게 보인 저 웃음은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임병권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이번 괌도 전지훈련은 망칠(?)것 같았다.
  괌의 해변 경치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다.
  더구나 갈매기 나는 저녁 노을이 하늘을 뒤덮을 때즈음이면 그 
아름다움은 가히 환상적이란 말을 듣게 된다.
  유나래는 그 저녁 해변을 혼자 걷고 있었다.
  샌들을 한 손에 모아쥐고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는 느낌이 새롭다. 
아삭아삭... 한 걸음마다 모래가 뭔가 속삭이는 듯했다.
  이따금 슬며시 밀려와 그녀의 발목을 간지럽히고 가는 파도도 
얄밉지만은 않았다. 유나래는 허리를 굽혀 파도에 씻기는 조개를 
주워 들었다.
  조개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다시 조개를 내려놓는 그녀의 앞쪽으로 장대한 저녁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며 바다를 뒤덮고 있었다. 그 속에 두둥실 떠가는 
요트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보였다. 
그러한 것을 보고 한문으로 천연입화라 한다던가.
  '얼마난 오랜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인가...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일종의 축복이겠지.'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휘드러지게 날리며 지나간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태산그룹의 무남독녀 외동딸, 거기에 
서울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후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까지 받아낸 재원. 모 방송국에 특채된 이후, 촉망받는 
여성앵커로 자리매김하다 특채시비가 일자 미련없이 사표를 
던지고는 평소에 관심이 있던 홍보 일을 맡았다.
  레드 드래곤의 구단 홍보라는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녀는 
광고에서 시작해서 차세대 미디어라는 씨에이티브이에 뛰어들 
작정이었다.
  한국 최초의 방송국 여사장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렇게 뛰다보니, 이 일년여는 마음 편하게 쉴 틈도 없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고나 할까.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유나래는 돌연 우뚝 멈춰 섰다.
  철썩이는 파도.
  유나래와 조금 떨어진 앞쪽, 암초가 밀려드는 파도와 싸우며 
버티고 있는 그 곳에 뭔가 검은 물체가 철썩이는 파도에 씻기고 
있음을 본 것이다.
  '사람?!'
  유나래의 얼굴이 순간 경악으로 굳어섰다.
  사람이었다.
  팬티조차 입지 않은 채 전라를 드러내고서 모래사장에 엎어진, 
해초처럼 흐드러진 긴 머리카락의 주인공...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는 그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미국 서해안을 엄습... 전대미문의 재앙을 초래했던 대지진 
발생으로부터 저확히 18일 9시간 23분 후... 파도에 밀려 온 한 
사람의 표류자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제4장 망각에서 온 사나이
  괌 메디컬 센터는 푸른 바다가 바라보이는 아가냐의 해변을 끼고 
세워져 있었다. 눈에 잡힐 듯한 바다를 가릴 듯 병풍처럼 둘러선 
열대 파초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리는 이곳은 
병원이라기보다는 휴양지와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유나래는 그 메디컬 센터 512호 병실에서 조금 전 시내 꽃집에서 
사 온 장미를 꽂고 있었다.
  창밖으론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산호초 무리가 그림같이 펼쳐져 
있었다.
  유나래는 장미꽃을 화병에 꽂다말고 침대에 누운 남자를 
돌아보았다. 스물대여섯쯤 되었을까? 아니면 더? 많아봐야 분명 
서른은 넘지 않은 저 남자가 해변에서 태초의 모습 그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유나래에게 발견되어 이 병원으로 온 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다.
  그리곤 나래는 하루도 빠짐없이 꽃을 들고 병원을 찾았다.
  나래의 눈빛이 빛났다.
  어느 틈인지 그 남자가 눈을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신비한 눈빛이었다. 마치 깊은 바다 속을 보는 듯한... 어쩌면 
나래는 저 눈빛에 끌려서 매일 병원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깨어나셨군요?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떠세요?"
  "... "
  남자는 나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나래는 병원복을 입은 그 남자가 마치 바위가 이동하듯 창가로 
다가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저 등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생각... 안 나요... "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던 남자가 중얼거리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의 말투는 매우 특이했다. 서툰 한국어, 거기다 국민학생이 책을 
읽듯 고저없는 딱딱한 말. 그나마도 쉽게 단어구사가 되지 않는 
듯했다.
  "어제... 나, 나래씨 간 다음... 종일 생각... 그런데도... "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늘이 어렸다.
  "여, 여전히 아무 것도... 기, 기억... 할 수 없어요. 내가 
누군... 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 것도... "
  나래는 남자의 눈에 서린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 마세요. 차차 기억이 날 거예요."
  그녀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누가 알아요? 혹시 해일에 밀려나온 아틀란티스나 무의 
왕자일런지?"
  "아, 아틀란티스? 무... ?"
  자신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뭔가를 찾아내려는 남자의 순박한 
모습에 나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남자는 머리를 흔들었다.
  "나 농담... 아녜요. 그렇게 생각... 거듭 아무 것도 떠오르질 
않아요. 마, 마치 어제까지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나래는 말도 안된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있어요? 당신은 여기 이렇게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는데요? 걱정 말아요! 의사말로는 일시적인 기억상실인 것 같다고 
하니까 뭔가 계기가 있으면 다시 기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나래는 남자의 눈을 들여다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때요? 시간이 좀 있는데 우리 같이 산책이나 할까요?"
  해변.
  산호초로 둘러싸인 모래사장이 길게 늘어서 있는 그 해변엔 
여전히 파도가 밀려와 포말로 부서지고 있었다.
  비릿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나래의 머리보다 더 긴 그 남자의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가지고 놀고 있었다.
  "여기에요!"
  나래는 그가 처음 발견된 곳을 가리켰다.
  "나 처음엔 당신이 죽은 사람인 줄 알고 도망치려고 했었어요. 
그때 당신은 정말 죽은 사람 같았었거든요?"
  그는 자신이 발견되었다는 그 자리에 섰다.
  파도는 무심히도 출렁이며 다가와 그의 발목을 두드렸다. 푸른 
바다는 고요히 흔들리고 있었다. 보여지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일망무제의 드넓은 바다... 
  나래는 바다를 바라보고 선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잘 생긴 얼굴이었다. 아니, 상당한 미남이었다. 우뚝한 콧날에 
서글한 눈매는 나이답지 않게 순수했고 맑으면서도 또한 모호했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기억상실에서 기인한 듯 생각되지만... 
  대체 어디서 온 사람일까?
  이역만리 괌에서 만난 한국인 표류자. 조난당한 선원 같진 
않았다. 그의 몸에서 은연중에 풍기는 느낌이 그러했다. 그렇다고 
뚜렷한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뭐 생각나는 거 있어요?"
  그는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 것도... 거친 바다... 무서운 파도 언뜻언뜻 그런 것만 
떠오를 뿐입니... 다."
  "당연하겠죠! 파도와 싸우면서 해안으로 밀려왔을 테니까요."
  나래는 문득, 생각이 미친 듯 눈을 반짝이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혹... 안드레이란 이름 기억나요?"
  "안드레이?"
  "그래요! 안드레이! 당신은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몇 번 그 
이름을 불렀어요.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소련계 사람들이 쓰는 
이름인데... 기억나지 않아요?"
  "소련... 구 소비에트 연방을 말하는 겁니까?"
  그는 기억을 더듬는 둣한 표정으로 나래를 보았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이 그쪽 사람일 리는 없고... "
  나래가 갑자기 소리쳤다.
  "가만! 다시 한 번 말해봐요!"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래를 보았다.
  "뭘... 말입니까?"
  "안... 더듬는군요?"
  나래는 흥분해 속사포처럼 말을 쏘아냈다.
 "당신은 처음에 눈을 떴을 때 어색한 영어를 말했어요. 그리곤 날 
보더니 마치 어린애가 처음 말하듯 한국어를 하더니... 겨우 하루가 
지난 어제 거의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군요?"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고갤 끄덕였다.
  "기억을 더듬어야 조금씩 생각을 표현할 수 있더니 이젠 좀 
쉬워진 것 같긴 하군요."
  그의 말은 분명히 유창한 서울 표준어였다.
  나래는 귀신에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당신은 정말 신비스러운 데가 있어요! 어쩌면 당신은 정말로 
아틀란티스에서 온 게 아닐까요?"
  그때였다. 그의 입에서 마치 폭포수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아틀란티스...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의 대화편에서 
크리티아스의 입을 빌어 말한 기원전 9천6백 년경에 이미 위대한 
과학문명을 이룩하고 있었다는 그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 
말인가요? 그건 맞지 않아요. 아틀란티스는 대서양에 있었지, 
태평양에 있었던 건 아니니까... "
  무슨 기억을 잃은 사람이 이렇게 청산유수란 말인가?
  나래는 멍청해져서 눈을 부릅뜨고서 그를 보았다.
  '도대체 이 사람은... ?'
  닥터 제임스 월터스는 콜롬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야심만만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그 행로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단배였으며, 
콜롬비아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손꼽히는 존재가 되는 것도 멀지 
않은 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실수로 멀쩡한 환자 하나가 식물인간이 되면서 그의 
행로는 뒤틀렸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괌 메디컬 센터에서 다친 
관광객들이나 돌봐 주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진료실에 앉아 있었다.
  소파에 앉은 채 뷰우박스에 걸린 엑스레인 사진을 보는 그의 
얼굴은 곤혹으로 물들어 있었다. 턱을 고인 손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것만 같았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
  그의 입에서 신음처럼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보고 또 보았지만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누가 
장난을 해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면 이 일은 그의 인생에 
다시금 햇빛을 던져 줄런지도 몰랐다. 저 뷰우박스에 걸린 엑스레이 
사진은 정말 특별했다.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 호주에서 오리너구리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조작이라고 말했었다. 사냥꾼들이 박제까지 만들어 왔어도 
그것조차 조작이라고 했었다. 하긴, 몸체는 너구리에 주둥이는 
오리, 게다가 알을 낳고 바비처럼 헤엄치는 그런 동물을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었으랴.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찾으셨다구요?"
  밝은 얼굴로 들어오는 나래를 보고 닥터 월터스는 반색을 했다.
  "그래요.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닥터 월터스의 금테안경 속의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혹시 그 사람 신분에 대한 
단서라도... ?"
  소파에 앉으며 나래가 물었다.
  닥터 월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아요. 이번에 미 서해안에 밀어닥친 미중유의 지진으로 
인해 사방에 실종자 천지라 아마 단시간 내에 어떤 결과를 바랄 
수는 없을 것 같소. 그것보다는 우선 저것 좀 보시겠소? 미스 유."
  닥터 월터스는 뷰우박스를 손짓했다.
  뷰우박스에는 석 장의 엑스레이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사람의 전신을 전면과 후면, 그리고 측면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검은 색 바탕에 허연 뼈가 선명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던 나래는 눈을 깜박였다. 이상했다.
  "저게 뭔가요? 뼈가... 좀 이상해 보이는 군요?"
  닥터 월터스는 뷰우박스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보통 사람이라면 이 흉골이 가슴까지, 그리고 늑골이 
옆구리까지 감싸게 되는 건데... 이 사진은 흉골과 늑골이 아예 
드럼통처럼 몸 전체를 다 감싸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도 한 겹이 
아니라,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서 내부 장기조차 들여다 볼 수가 
없어요!"
  닥터 월터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누군지 아시겠소?"
  나래는 문득 굳어졌다. 저 의사가 자신에게 이러한 말을 할 
경우는, 오로지 한 가지 상황밖에 없었던 것이다.
  "설마... 저 사진이 그... "
  닥터 월터스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미스 유가 발견한 기억을 잃어버린 바로 그 사람이오!"
  나래는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닥터 월터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나래의 앞을 손바닥을 
비비면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이오. 뼈가 이렇게 생겼다면 이 
사람은 굴신은커녕,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어야 맞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조금도 지장없이 마음대로 움직인단 말이오!"
  "... "
  나래는 대답없이 뷰우박스에 걸린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있었다. 
과연 틀렸다. 그것도 많이 달랐다. 가슴을 가리고 배부분에는 
없어야 할 가슴뼈가 골반이 있는 곳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니, 
흉골과 늑골의 구분이 아예 없다고나 할까.
  "어쩌면 그 사람은 우리와는 다른 인종인지도 몰라요."
  나래의 눈이 둥그래졌다.
  "다른 인종이라뇨?"
  "지금으로선 나도 뭐라고 말할 순 없어요. 하지만 이제부터 
조사를 해보면 알아낼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소."
  "어떻게 조사하겠단 말씀이죠?"
  "워낙 괴이한 신체구조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하지만... 관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반이 검사를 
시작하면 대체 인류로서 어떻게 저런 골격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또 어떤 점이 다른 사람과 다른지 등이 밝혀질 수 있을 겁니다... "
  나래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사반... 그럼 저 사람을 모르모트처럼 실험도구로 쓰겠단 
말인가요?"
  닥터 월터스는 나래의 안색을 살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흥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이건 워낙 중요한 일이라... 
생각해보시오! 이 사진만 공개되어도 세계 의학계는 발칵 뒤집히고 
말 거요! 신종 인류의 출현이라고... 아니, 어쩌면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인지도 모르지!"
  "그 사람을 찍은 엑스레이가 저것뿐인가요?"
  나래가 쉴새없이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는 닥터 월터스의 말을 
가로챘다. 그때까지도 닥터 월터스는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소! 하지만 이제부터 전신을 씨티(컴퓨터 단층) 
촬영에서부터 엠알아이(자기공명)... "
  닥터 월터스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래는 발딱 일어나 
뷰우박스로 갔다. 그리고 그녀는 손을 뻗어 엑스레이 사진을 
차례대로 착착 뽑아냈다.
  "뭘하는 거요?"
  닥터 월터스가 놀라 소리쳤다.
  "이건 제가 맡아두죠! 그리고 그 사람은 제가 데리고 왔던 것처럼 
제가 데리고 가겠어요! 난 그 사람이 모르모트가 되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요!"
  나래는 쌀쌀맞게 말하며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닥터 월터스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돼! 그럴 순 없소!"
  쾅! 세차게 문이 닫히는 순간, 그 뒤를 쫓던 닥터 월터스는 
눈앞에 섬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이어 지독한 통증이 골을 
때려왔다. 이마로 문을 들이받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나래는 이미 문을 닫고 나간 것이다.
  나래는 영문을 모르는 채 얼떨떨해 있는 그 사람의 손목을 잡아 
끌고서 병원 현관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는 
그녀가 아끼는 붉은색 패라리가 서 있었다.
  "잠깐! 잠깐만... !"
  닥터 월터스는 가무잡잡한 괌 현지인들과 간호원들을 폭풍과 같이 
밀어 젖히면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환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 
뒹굴었다.
  나래는 눈길도 주지 않고 패라리의 문을 열었다.
  "어서 타요!"
  그는 날듯이 계단을 달려 내려오는 닥터 월터스와 나래를 번갈아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기에... "
  "어서 타세요! 가면서 말씀 드릴게요! 여긴 더 이상 있을 곳이 못 
돼요!"
  나래는 시동을 걸면서 재촉했다.
  닥터 월터스가 막 떠나는 차문을 잡았다.
  "잠깐! 잠깐만! 이야기 합시다! 미스 유! 이러면 안 돼요! 이제 
곧 의학협회에서 사람들이 올 거란 말이오!"
  나래는 그를 보면서 코웃음쳤다.
  "그 사람들이 오는 거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죠?"
  말과 함께 그녀는 힘껏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알피엠이 단숨이 
3000을 넘어갔다. 타이어가 귀청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대며 
격렬하게 패라리를 밀어냈다. 100미터 가속에 채 4초가 걸리지 않는 
수퍼카였다.
  차에 매달렸다가 손을 놓고는 땅바닥에 머릴 찧으며 처박히는 
의사의 모습을 백미러로 보며 나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모르는 그는 나래의 옆자리에서 눈을 꿈벅이고만 있었다. 
아직까지 그는 순박하기만 했다.
  백무명은 자신의 방 테라스에 선 채로 눈앞에 아스라히 펼쳐져 
있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수려한 얼굴에 드리운 우수는 조금씩 그 무게를 더해가는 
듯하였다.  과거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무엇인가 떠오르려고 하면 광란하는 파도가 그 생각 자체를 집어 
삼키며 몰려들었다. 지독한 파도... 백무명은 뇌리 속에 떠오르는 
파도를 상기할 때마다 머리를 흔들어야 했다.
  지금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 엄청남 파도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시야에 보이는 바다는 갈매기가 떼지어 날고 
요트 몇 척이 한가로울 뿐... 아름답기만 했다.
  그가 묵고 있는 레밍턴호텔은 그렇게 바다를 눈앞에 두고 뒤로 
푸르른 산자락에 감싸인 채 아늑히 존재했다.
  "대통령은 현 상황을 미국이 당한 최대의 위기로 규정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비상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만 피해가 너무 
참혹해서 과연 언제 복구될 수 있을런지 현재로서는 아무도 정확한 
예측을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이 뒤에서는 씨엔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25인치의 대형 텔레비젼 화면에는 지난 열흘 동안 연속해서 긴급 
뉴스 속보를 방송하고 있는 씨엔엔의 메인 앵커 체리 건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사건 발생 열흘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번 북아메리카 대륙 
서해안을 휩쓴 가공할 대재앙의 피해는 통신시설의 파괴로 인해 
정확히 집계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극심한 피해를 본 
곳은 역시 해안 일부가 바다 속으로 완전히 함몰된 오리건 주이며, 
제일 큰 피해가 예상되었던 샌프란시스코 일대는 예상보다는 
덜하지만 그 피해 정도는 역시 심각한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있습니다!"
  화면이 으르렁거리는 파도를 배경으로 서 있는 여자 앵커에게로 
바뀌어졌다. 세찬 바람이 그녀를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었지만 여자 
앵커는 마이크를 움켜잡고서 기를 쓰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깃발과 
같이 펄럭이고 있었다.
  "지금 기자가 서 있는 곳은 얼마 전까지 산등성이였던 오리건주의 
산악지대입니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산이 아니라 완전히 바다로 
변해버렸고 아직도 여전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백무명은 텔레비젼 화면에서 시선을 돌렸다.
  텔레비젼에서는 거의 종일을 미 서해안을 미증유의 재난으로 
뒤덮어 버린 가공할 지진에 대해 할애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도 
기사는 넘쳐 주체를 못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미치는 바다와 그 앞 백사장에서 뛰노는 
사람들에겐 그러한 상황이 별세계의 것인 듯 보였다.
  잔잔한 바다와 밝은 태양은 언제 어디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듯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백무명은 미간을 찡그렸다.
  답답했다.
  그의 머리 속에 담긴 모든 지식은 하나 남김없이 떠오르건만 
괴이하게도 과거만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고 있어요?"
  짤랑거리듯 맑은 음성이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나래가 그의 뒤에 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를 보자 백무명의 그늘진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의 그에게 있어 나래의 존재는 가히 천사와 같았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녀가 그만큼 
커다란 의미로서 그의 가슴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나래는 눈빛을 장난스레 빛내며 백무명을 바라보았다.
  "혹... 무명이 유명으로 바뀔 단서라도 떠올랐어요?"
  나래의 물음에 백무명은 쓰게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백무명.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여 흰 백자로 성을 삼고 이름을 무명이라 한 
것은 나래가 지어준 것이었다. 간단한 듯 하지만 호칭에 고심하던 
나래가 반나절을 고민 끝에 만들어낸 이름이었다.
  백무명은 쓰게 웃는 것을 보고 나래는 다시 말했다.
  "억지로 생각하려고 하지 말아요.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나게 
되겠죠 뭐."
  나래는 말과 함께 백무명의 팔을 잡아 끌었다.
  "자  그만하고 우리 나가요! 오늘은 바깥 구경이나 하자구요!"
  백무명은 그녀가 끄는대로 따라나갔다.
  지금의 그는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백지와도 같았다. 자신의 
주관보다 아직은 남에게 끌려가는 상태였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뇌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지식일 뿐, 스스로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따악! 방망이에 맞은 야구공이 하늘로 날아 올랐다.
  임병권 감독은 벤체에 앉아 한심한 표정으로 날아오른 야구공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턱을 괴고 올려진 머리통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괌의 아가나에 온 지도 벌써 보름... 
  수비 코치 곽삼수가 친 노크볼을 주전유격수가 몸을 날리다 
글러브에서 튕기는 모습이 다시 보였다. 한심했다.
  "개판이로군... "
  임병권 감독은 내뱉듯 중얼거렸다.
  타격은 그런대로 볼만 한데 수비는 정말 엉망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팡팡 공을 뿌려댈 
투수라도 하나 제대로 있어야 어떻게 용을 써보지 이건 아예 방법이 
없었다. 저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패넌트 레이스에 나선다고 
생각하니... 진심으로 한심했다.
  "잘 안 되시나 보죠?"
  옆에서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나래가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그를 보며 서 있었다.
  임병권은 심드렁히 대꾸했다.
  "이래가지고서는 나래양이 홍보할 것도 없겠소."
  말하다 나래 옆에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서 있는 백무명을 본 
임병권은 나래에게 물었다.
  "이 친구는 누구요?"
  "말씀드렸잖아요? 해변에서... "
  임병권의 얼굴에 아...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 기억 상실증이라는 친구로구만!"
  그때, 깡! 소리와 함께 갑자기 나래의 앞으로 라이너성의 볼이 
무섭게 날아들었다. 파울 볼이 그녀를 향해 날아온 것이다.
  너무 갑작스럽고 빠른 속도라 나래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볼은 이미 그녀의 코앞에 와 있었다. 나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위험해!"
  임병권이 놀라 소리쳤다.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 너무 빠른 속도였다.
  "악!"
  나래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음과 동시에 임병권이 눈을 
부릅떴다.
  믿지 못할 일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나래의 옆에 서 있던 백무명이 나래의 얼굴 앞으로 손을 쭉 뻗어 
순식간에 날아든 타구를 당연한 듯 잡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저럴 수가... ?'
  임병권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파울 볼이 얼마나 빠른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하다 보면 그것을 손으로 낚아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창졸간에 
나래의 얼굴로 날아든 공을 받아낸 백무명의 얼굴은 너무도 
담담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포수가 날아든 공을 받아든 듯 아주 당연해 보였다.
  그것은 당연치 않은 일임은 야구에 평생을 바친 임병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성기는 어젯밤부터 꿈이 좋질 않았다.
  대학시절 때부터 총망받던 유망주였건만 고비 때마다 부상이 
아니면 그때마다 무슨 일이 생겨서 늘 평가절하가 되곤 했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간신히 선수부족의 레드 드래곤에 입단한 
조성기는 이번에는 하고 밤잠을 설치면서 꿈에서까지 배트를 
휘둘렸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하필이면 가장 잘 맞추었다고 친 타구가 
파울 볼로 저 호랑이 감독의 안면을 향해 질주를 하다니... 
  "죄송합니다. 감독님... "
  조성기는 임병권의 앞에 가서 모자를 벗고 고개를 푹 숙였다.
  "너 나한테 감정 있어? 있으면 사내답게 말로 해!"
  "가, 감정 없습니다!"
  "감정도 없는데 타격을 그 따위로 해? 마! 야구선수에게 배트는 
군인의 총과 같은 거다! 알겠나? 총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군인에겐 죽음밖에 올 게 없고, 배트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야구 
선수는 은퇴밖에 올 게 없다! 은퇴하고 싶나?"
  감독의 말에 조성기는 황급하게 소리쳤다.
  "싫습니다! 전 올해 입단한 신인입니다!"
  "알겠습니다! 배팅 3천회 실시!"
  마치 군대에서 하듯 차렷자세로 소리친 조성기는 나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땅에 박힐 듯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뒷머리를 긁으며 어깨가 처져서 배트를 둘러맨 채로 걸어가는 
타자의 뒷보습에 나래는 안스러운 표정으로 감독을 보았다.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배팅 
3천회라니... "
  "그건 내 소관이오."
  임병권은 신경도 쓰지 않고서 백무명을 보았다.
  백무명은 잡은 공을 만지작거리며 무심한 눈길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임병권은 백무명에게 말을 걸었다.
  "자넨 대담한데다 상당한 반사신경을 가지고 있군? 그런 
상황에서태연히 라이너로 날아오는 타구를 맨손으로 잡아내다니 
말이야."
  "... ?"
  백무명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렇게 시작된 임병권의 말은 나래를 펄쩍 뛰게 만들었다.
  "어때?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좀 도와주지 않겠나?"
  "무슨 소리예요? 이 사람은 환자예요."
  나래가 놀라 소리치자 임병권은 코웃음쳤다.
  "환자는 무슨 환자? 사내자식이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으면 없던 
병도 생긴다는게 내 신조요! 어떤가? 자네도 구해준 은인에게 계속 
빌붙어 지낼 생각은 아니겟지? 그런 스타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나래가 당항해 말을 더듬었다.
  "아뇨. 괜찮아요."
  백무명은 임병권에게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민한 일이 있습니까? 전 야구... 잘 모르는데요."
  임병권은 미간을 찡그린 채 야구장을 힐긋 돌아보았다. 작열하듯 
쏟아지는 태양 아래 그물을 쳐놓고 공을 던지는 투수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투수는 포수가 공을 받아주지 않으면 연습을 할 수가 없게 돼. 
그런데 우리 팀은 지금 주전에다 예비포수까지 포수란 놈들이 
모조리 탈이 나서 꼼짝도 못하고 있어."
  "맙소사! 야구도 모르는 사람을 포수를 시킬 작정이세요?"
  나래가 어이가 없는 듯 입을 벌렸다.
  "뭐 어떻소? 할 수만 있다면 놀고 먹는 거보다야 낫지! 어떤가?"
  "할 수만 있다면 해보죠. 하지만 캐치는 단순히 공만 받는 게 
아닐텐데 제가 그걸 할 수 있겠습니까?"
  임병권은 눈을 끔벅였다.
  "이 친구... 야구 모른다더니 그런 게 아닌 모양인데"
  "요새 그 정도도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임병권에게 톡 쏘아 붙인 나래는 백무명에게 달래듯 말했다.
  "그렇게 쉽게 대답할 일이 아니에요. 우리 구단이 돌아가려면 
아직 보름이나 남았어요! 당신은 자신의 과거부터 찾아야 
하잖아요?"
  "그건 이 친구보다 나래양이 하는 게 더 좋을 거요."
  임병권으니 말에 나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렇잖소? 여기 괌에도 태산 그룹의 지사가 있을테니 나래양이 
나선다면 당연히 자기 이름도 모르는 친구가 골머릴 싸매는 것보다 
나을 거 아니오?"
  나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져갔다.
  "우리 무명씨를 부려먹으려고 저까지 시켜먹을 작정이로군요?"
  나래의 말에도 임병권의 표정은 태연했다.
  "사람을 구하려면 철저히 해야 하는 법이오. 그래야 물에서 건져 
놓은 사람이 보따리 내놓으란 소리 못하니까!"
  나래는 마침내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야 사람들이 감독님을 여우 호랑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았어요!"
  임병권은 눈을 끔벅였다.
  "여우... 호랑이라고?"
  다음 순간 임병권과 유나래는 서로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백무명은 둘이 왜 웃는지늘 몰라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그로서는 아직 말 속에 숨은 의미까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한 순간에 생간 엉뚱한 일로 그의 행로에 새로운 장이 열릴 
것임을 그는 물론,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미래를 예측할 능력을 지닌 사람은 없으니까.
  바닷가.
  파도가 거세게 밀려와 산호초에 부딪혀 악을 쓰며 포말로 
흩어지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장대히 스러지고 있는 노을, 들리는 
것은 파도 소리 뿐... 
  백무명은 자신이 발견된 곳에 홀로 석상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곳... 원형의 돔이 번개처럼 머리 속을 
스쳐가더니 거기에 겹쳐 실험 캡슐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부셔버리며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땅덩어리... 
그것은 너무 거대해 거히 어둠이란 표현만이 어울릴 것 같았다.
  "여기 있었군요? 한참 찾았어요!"
  문득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백무명은 정신을 차렸다.
  나래가 그의 뒤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오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그에게는 천사와 같았다.
  "왜요? 어디가 아프세요?"
  백무명의 굳은 얼굴을 발견한 나래가 물어왔다.
  "아닙니다. 뭔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상들이 마구 떠올라서요."
  나래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영상? 지난날의 기억들인가요?"
  "모르겠군요. 너무 단편적이라... !"
  "잘 생각해보세요. 어쩜 그런 것들이 모여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런지도 모르잖아요?"
  백무명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묵묵히 나래를 바라보았다.
  들려오는 파도소리... 
  나래는 평소와 다른 그의 태도에 어색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왜... 그래요?"
  백무명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그윽히 번져갔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나에게... 나래씨는 너무 
잘해주는군요."
  나래는 바다를 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고 
있었다.
  "당신에겐 묘한 느낌이 있어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에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그런 잡아끄는 힘이랄까... ?"
  나래는 활짝 웃으며 백무명을 보았다.
  "하여튼 그런 거예요! 말로는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하여튼 
그게 나로 하여금 당신을 따라 다니고 잊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나래는 말을 하다 멈칫, 입을 다물었다.
  백무명은 그녀의 말을 듣는 듯 듣지 않는 듯 그늘진, 어딘지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문 채 검게 비늘을 뒤집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어떤 강인한 느낌.
  그것은 얼마 전까지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나래는 기이한 표정으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라졌다! 그는 또 달라졌어! 처음엔 어린아이 같더니... 지금은 
깊은 고뇌를 간직한 철할자와 같은 모습... 대체 이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
  그들은 아직까지 알 수 없었다.
  백무명.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제5장 첫출발
  하늘은 점점 푸른 빛을 더해가고, 이따금 그 하늘로 솟아 오르는 
흰 야구공은 구름과 경쟁하듯 흰점으로 푸른 하늘에 빛나고 있었다. 
타자는 달리고 투수는 던지고... 아가냐의 스프링캠프인 메인 
야구장에서 레드 드래곤은 마지막 훈련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코치의 악쓰는 소리와 선수들의 땀이 날리는 가운데 유나래는 
벤치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임병권의 곁에 서 있었다.
  그 앞쪽, 불펜에서는 백무명이 포수 마스크를 쓰고 볼을 받고 
있었다.
  유나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임병권에게 물었다.
  "어때요? 괜찮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오. 저런 정도라면 우리 팀의 주전포수로 
키워볼까... 목하 심각히 고민중이오."
  "예?"
  유나래의 눈이 동그래졌다.
  핫핫하... 임병권이 유나래의 반응에 크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농담이오. 농담... "
  눈을 흘긴 나래는 정색을 하고서 입을 떼었다.
  "지금 태양상사 괌 지사에서 오는 길인데... 그의 신분을 
알아내는 건 간단하지가 않을 것 같군요. 지난 번 그 엄청난 
지진으로 인해 태평양 전역에서 발생한 해일 때문에 행방 불명된 
사람, 선박의 수효가 헤아릴 수도 없고, 현재까지 집계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에요."
  임병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요. 말세론자들이 심판의 날이 오고 있다고 
떠벌이고 다닐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
  그때, 털보 거한 박종옥 투수 코치가 임병권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현역시절에는 그렇게 이름을 얻지 못했지만 코치가 된 
이후 명조련사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었다.
  "투수 테스트를 해보자고? 저... 친구를 말인가?"
  임병권은 박종옥 투수코치가 와서 하는 말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백무명쪽을 바라 보았다.
  박종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 친구 운동신경이 뛰어난 건 내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야구라곤 해 본 적도 없는 친구를 투수 테스트를 한단 말인가? 
프로구단에서 자청해서?"
  "단순히 운동신경만 뛰어난 게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어깨가... 
"
  그때, 박종옥의 말을 중단시키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봐! 누구 밥통 부셔놓을 일 있어? 공을 그렇게 무식하게 
던지면 어떻게 해?"
  백무명에게 공을 던지던 투수 이순열이 펄펄 뛰고 있었다.
  백무명이 일어나서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그에게 머릴 숙이고 
있었다. 폼을 보아하니 사과를 하는 듯했다.
  "왜 저래요?"
  유나래가 그 광경에 박종옥을 돌아보았다.
  "투수에게 공을 너무 세게 던져서 선열이가 겁이 나 공을 못 
받겠다는 겁니다. 어제는 종철이가 손목을 삐었다고 지금 핫빽 
찜질중입니다."
  무슨 소리냐는 듯 유나래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포수 자리에서 앉은 채 던진 공에 말이에요?"
  "그렇다니까요. 처음엔 어쩌다 잘못되었겠지 했는데... "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던 임병권이 그 말을 잘랐다.
  "저 친구 불러봐."
  "제가 말입니까?"
  백무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홈 플레이트에서 일어났다.
  "음... 별다른 건 아닐쎄. 자네 어깨를 한 번 보자는 거니까... "
  "어깨라면 지금도 보이지 않습니까?"
  의아한 눈으로 자신의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백무명의 말에 
임병권은 얼떨떨해져서 말문이 막혔다.
  유나래가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무명씨는 아직 속어에 서툴러요. 곧이 곧대로만 해석하니까요."
  임병권은 피식 웃었다.
  "난 또... "
  백무명은 투수 글러브를 끼고서 마운드에 우뚝 서 있었다.
  홈에는 포수가 앉아 있고 그 옆으로는 유나래와 임병권 등이 
둘러서 있었고, 사방에선 선수들이 훈련을 멈추고 때아닌 
구경거리를 만난 듯 흥미로운 표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별거 아냐! 마음놓고 그냥 던지기만 하면 된다니까!"
  털보 박종옥이 백무명에게 소리쳤다.
  "정말... 그냥 던지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백무명이 공을 만지작거리며 묻자 박종옥은 다시 소리쳤다.
  "그렇다니까! 여지껏 투수들이 던지는 것 봤지? 그것처럼 그렇게, 
투수가 던지는 것처럼 그냥 던지기만 하면 돼!"
  그것은 흠잡을 데 없는 한폭의 그림이었다.
  공을 가지고 마운드에 우뚝 서니 태산이고, 와인드업에서 차고 
올라가는 발은 그야말로 질풍노도... 용수철처럼 튕겨지는 허리에서 
공은 광풍폭우와도 같이 그 손을 빠져 나와 질주했다.
  쏴아아앙―! 이 소리를 어찌 공이 날아드는 소리라 하랴.
  포수는 자신의 앞으로 마치 연기처럼 아른거리며 날아드는 공을 
보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건 공이 아니다!
  다음 순간, 포수는 자신의 머리쪽으로 날아드는 공을 보곤 공포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손이 반사적으로 올라가 공을 맞아갔다.
  파아―공이 그의 글러브를 세차게 스치며 날아갔다.
  타앙! 뭐가 끊어지는 소리가 나며 공은 포수 뒤의 철망을 때리고 
마치 방망이에라도 맞은 듯 다시 마운드로 튕겨져 나갔ㄷ.
  톡톡톡... 야구공은 홈베이스가 아니라 피처플래이트까지 굴러와 
백무명의 앞에서 멈추었다.
  "으으... "
  포수는 손목을 움켜쥐고 신음하고 있었다. 공이 스쳐갔음에도.
  경악의 물결이 야구장을 휩쓸었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결단코, 결단코 이런 위력의 
볼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한참 만에야 임병권이 입을 열었다.
  "엄청난 위력이로군... "
  옆에서 박종옥이 정신나간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안 돼... 170이라니... "
  "무슨 소리야?"
  임병권이 그를 돌아보았다.
  박종옥은 부릅뜬 눈으로 그가 들고 있던 스피드건을 가리켰다.
  "방금 그거... 시속 172킬로미터가 나왔습니다... "
  "172킬로미터?"
  임병권의 입이 절로 딱 벌어졌다.
  '맙소사! 172킬로미터라니 말도 안돼... !'
  유나래도 벌린 입을 가린 손을 떼지 못했다.
  1974년 8월 20일. 생애통산 324승, 노히트 노런을 7번이나 기록한 
불세출의 투수 놀란 라이언은 캘리포니아 아나 하임 스타디움에서 
162.3킬로밑터의 공을 던졌으며 그것은 현재까지도 사상 최고의 
구속으로 공인받고 있다. 오죽하면 스모그볼이라고 했을까.
  그런데 170킬로미터가 넘는 볼이라니... 그것도 동양권의 사람, 
야구라곤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서... 
  웅성거림이 야구장 전체로 퍼져갔다.
  "다시 한 번 던져 보겠나? 이번엔 포수가 받을 수 있게 가운데로 
말이야."
  백무명을 바라보며 임병권이 말했다.
  백무명은 마운드에 선 채로 임병권의 옆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유나래를 바라보았다.
  유나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던져 보세요."
  백무명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와인드업 모션으로 들어갔다.
  슈악! 그의 손에서 공이 불길을 토하듯 뿜어져 나갔다.
  그리고... 외마디 비명이 일었다.
  포수가 공을 받다가 뒤로 벌렁 넘어지며 두어 바퀴를 구르더니 
입에서 개거품을 게워내며 그대로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포수 마스크가 벗겨져 땅바닥으로 구르고 있었다.
  일순, 멍청히 굳어져 있던 동료선수들과 임병권과 코치들이 
벌떼처럼 포수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유나래가 정신을 잃어버린 포수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3루수 곽일도가 나래를 돌아보며 말했다.
  "공이 너무 빨라서 잡다가 빠지는 바람에 배를 맞은 겁니다! 
세상에... "
  "뭣들해! 빨리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정신을 잃은 포수의 눈을 까뒤집어 본 임병권이 소리쳤다.
  백무명은 굳은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가 받아 본 투수들의 공은 너무 약했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보다 강하면 포수들이 받을 수가 없을 것이므로... 
  "미안합니다. 이렇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
  백무명은 임병건에게 고개를 숙였다.
  임병권은 머리를 저었다.
  "이건 자네 잘못이 아냐. 포수 자질이 문제지... "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스피드건을 든 채로 아직도 멍청히 서 있는 
박종옥 코치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어떻게 됐나? 또 170킬로미터야?"
  언뜻 정신이 든 듯 박종옥 코치는 고개를 흔들었다.
  "스피드건이 고장났습니다."
  "고장? 방금가지 멀쩡하던 게?"
  박종옥은 혼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이 던진 공이 180킬로미터를 넘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배, 백팔십 킬로가 넘었다고?"
  임병권의 입이 저절로 딱 벌어졌다.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세상에... ! 모든 사람들이 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나래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 그들의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뭐라구요?"
  유나래는 경악한 표정으로 임병권을 쳐다보았다.
  "농담이 아니오. 난 그 친구를 귀국할 때 데려갈 작정이오!"
  임병권은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말하였다.
  유나래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임병권은 그녀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아가냐의 야외 레스토랑에 
데려와서는 폭탄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좀 전에 후식으로 먹은 
토마토가 뱃속에서 갑자기 살아나 움직이는 것 같았다.
  쏴아아... 귓가로 청량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유나래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말도 안 돼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세요? 그는 
기억상실증 환자예요. 국적도 과거도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에요! 
무슨 수로 우리나라에 입국을 시킬 거예요? 대체 무슨 이유로 그를 
우리나라로 데려가겠다는 거죠? 설마 그를 선수로 레드 드래곤에 
입단이라도 시키겠단 말인가요?"
  "그렇소!"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던 유나래는 임병권의 완강한 한 마디에 
얼어붙고 말았다. 입단이라니?
  "난 긴 말을 하지 않는 성미요! 분명히 그렇고! 난 그 친구를 
우리 레드 드래곤의 주전투수로 만들 작정이오! 국적문제는 
나래양이 알아서 하시오! 태산 그룹의 힘을 이용하든 어떻게 하든 
난 상관하지 않겠소!"
  임병권의 눈은 불을 뿜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유나래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있으면 우린 우승도 할 수 있소!"
  "우승이라구요?"
  임병권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승! 만년 꼴찌 레드 드래곤이 단숨에 우승을 
하는거요."
  임병권은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은 당신에게 달렸소! 유나래양!"
  임병권은 나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오! 당신이 바다에서 건진 
백무명이란 사내는 일생에 두번 다시 보기 힘든 특별난 존재이니까 
말이오. 당신은 그 순간 이미 엄청난 홍보가치를 지닌 용을 낚은 
셈이오... "
  유나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밤바람이 칵테일 핑크레이디 한 잔으로 붉어진 그녀의 뺨을 
더듬지만 유나래는 그 손길 마저 느낄 수 없었다.
  레밍턴 호텔.
  그 발코니에서 유나래는 칵테일 잔을 손에 든 채 마치 석고상처럼 
굳어진 채로 시간을 아낌없이 흘려보내고 있었다. 눈앞으로 보이는 
해안선이 굽이치고 주위의 네온사인들이 바다에서 보석처럼 
흔들거렸다.
  "이건 도박이야... "
  문득, 유나래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낮은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러했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기억 상실증의 사람을 데리고 간다.
  그것은 분명히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강렬한 유혹을 느끼게 하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웬지 해보고 싶어지는 도박이다!'
  유나래는 다집하듯 다시 한 번 입술을 세차게 물었다.
  그렇게 그녀의 운명은 예정된 길을 가고 있었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그 길을... 
  "의학협회에서 나오셨다구요?"
  닥터 월터스는 자신의 앞에 앉은 30대 후반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170센치미터 정도의 크지 않은 키, 몸무게는 70킬로그램도 되지 
않을 듯 호리호리한 체구. 하지만 깊게 가라앉은 푸른 눈에 
균형잡인 체격은 결코 가냘퍼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푸른색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보고하신 특이한 신체구조를 가진 인간에 대해서 몇 가지 
알아 볼 것이 있어서... "
  월터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 일이라면 지난번 의학협회 사람들에게 다 말했잖소? 더구나 
그 사람들은 나를 사기꾼 취급을 하면서... "
  "미안합니다. 그 일은 제가 대신 사과하죠. 그 친구들은 아직 
경험부족이라서 일처리가 서툽니다. 제 이름은 렌스입니다."
  사내가 명함을 내밀었다.
  월터스는 코넬대학 의학부 어쩌고하는 명함을 보는둥 마는둥 
하면서 렌스라는 사내를 보았다.
  "그래, 뭘 알고 싶은 겁니까?"
  "진료기록을 좀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특이한 신테구조를 
가진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좀 알고 싶구요."
  닥터 월터스는 술집에서 취객과 시비가 붙어 얼굴에 상처가 
났다고 둥동거리는 호스티스 엘렌의 뺨을 세 바늘쯤 꿰매주고는 
손을 씻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의 생활은 늘 그러했다.
  기껏해야 절벽에서 다이빙하다 목이 부러졌다고 실려오는 
응급환자가 가장 화급한 환자인 것이 이곳이다.
  막 손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던 월터스는 조금 전 자신에게서 그 
표류자의 진료기록을 받아간 코넬대학의 렌스라는 친구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때부터 얼마가 지났는데 이제 와서?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어딘지 의학계 사림이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어딘지 빈틈이 없어 보였었다. 분위기가 달랐다.
  알게 뭐야.
  잠시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에 빠졌던 닥터 월터스는 혀를 찼다. 
놈이 의학협회에서 왔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랴.
  닥터 월터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좁아 터진 창문 밖으로 바라보이는 바다는 드넓고 시원했다. 
하늘은 끝없이 펼쳐져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빌어먹을... !"
  닥터 월터스는 혀를 찼다.
  그 괴이한 신테구조를 가진 표류자를 연구할 수만 있었다면 이 
따분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전세계 의학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사방에서 밀려들어오는 특강요청에 정신이 
없었을 수도 있을 터였다.
  빌어먹을!
  월터스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 물보라가 하늘로 날아 오르고 무지개는 그 
하늘에 서리서리 맺힌다. 분당 50만톤의 물벼락이 쏟아지고 있다는 
나이애가라 폭포.
  1678년 네핀 신부가 발견한 이래, 세계적 명소가 된 이곳은 
미국쪽의 아메리카 폭포와 캐나다쪽의 폭포로 나뉘어 쏟아지고 
있다. 신혼여행의 메카라는 이름은 이곳이 그만큼 장관을 이루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이애가라를 아메리카와 캐나다 폭포로 나누는 것은 나이애가라 
강의 중간에 고트 섬이 있기 때문이다. 너비가 826미터나 되는 
캐나다 폭포에 비해 아메리카 폭포는 고트 섬을 돌아 흐르는 
지류이기 때문에 323미터의 너비밖에 되지 않지만 아메리카 
폭포쪽이 낙차가 더 크기 때문일까. 그 웅장한 멋은 오히려 더한 
감이 있다.
  사라는 코트깃을 세운 채 미국쪽 전망대에서 웅성거리는 
관광객들의 틈에서 조금 떨어진 채로 망연히 아메리카 폭포가 
곤두박질쳐 떨어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떨어져 있음에도 여전히 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는 
귀청이 멍멍할 정도였다. 가히 사람을 압도하는 자연의 웅장함! 
바로 그것이었다.
  평소라면 활달한 성격의 사라는 그 웅장함을 보고 즐거워했을 
것이었다.
  ―그래? 그럼 우리 신혼여행은 나이애가라 폭포로 가지! 폭포의 
물을 흠뻑 뒤집어 써 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거야―.
  안드레이 김의 말소리가 귓전에 쟁쟁하게 울려오고 있었다.
  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를 가도 그의 그림자가 밟히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그의 그림자만을 찾아 다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니문 여행을 하는 듯 보이는 몇쌍의 남녀가 폭포를 보며 연신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계속 눈에 박혀 왔다.
  다시 가슴이 아파왔다.
  폭포의 정경이 흐려지더니 눈앞이 흐려왔다.
  바보. 왜 나만 남겨두고... 
  문득, 그녀의 어깨에 손 하나가 올려졌다.
  흠칫, 놀라 눈을 드는 사라의 눈앞에 본 클라우스가 우뚝 서 
있었다.
  "또 안드레이 김을 생각하나?"
  클라우스가 사라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입을 열었다.
  사라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외면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 온 거야?"
  쿠쿠쿠... 폭포는 무심히 굉음을 토해대고 있었다.
  잠시 말없이 묵묵히 사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던 클라우스가 입을 열었다.
  "뮤즈 연구소가 있던 곳을 찾아 갔었다고?"
  그 말에 폭포를 바라보고 있던 사라의 얼굴에 아픔이 드러났다.
  "출렁이는 바다만 있고 아무것도 없었어. 연구소도, 산도... 
아무것도... "
  사라는 머리를 저었다. 깨문 입술, 불그레한 얼굴, 그 위로 다시 
눈물이 흘러내린다.
  "사라!"
  클라우스는 사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더 이상 자신을 학대하지 말아. 안드레이도 이런 것을 바라고 
있진 않을 거야."
  "... "
  사라는 말이 없었다.
  "우린 그 동안 공들인 모든 것들을 잃어 버렸어. 행여나 기대했던 
신인류의 생존가능성은 전무함이 판명되었고... 이젠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만 할 때야. 그렇기 때문에 사라는 일어서야 해! 그것이 
바로 안드레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 그의 유지를 계승하는 
일이기 때문에."
  안드레이...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라는 가슴이 아팠다.
  나이애가라는 그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염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물을 쏟아붓고 있었다.
  무심한 듯한 눈길로 한참을 그렇게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던 사라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럴까?"
  "그렇고 말고! 그가 얼마나 신인류 창조에 열심히었는지는 나보다 
사라가 더 잘 알잖아?"
  모를 리가 없다.
  잠자리에서조차 그렇게 열성이던 그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그러나 수척해진 옆얼굴을 쳐다보면서 
클라우스는 다시 말했다.
  "지금 나사와 펜타곤 관계자들을 만나보고 오는 길이야. 라이프 
프로젝트는 변함없이 추진되게 될 거야."
  사라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엄청난 피해가 났는데도 말이야? 그런 투자를 할만한 
여력이 지금의 연방정부에 있을까?"
  클라우스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선이 그어졌다.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있는 법이야. 그리고 
나사나 씨아이에이와 펜타곤은 이런 일을 할만한 비자금은 늘 있기 
마련이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사라가 필요해!"
  "... "
  사라는 말없이 클라우스를 보았다. 클라우스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남자의 저 당정한 눈길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난 지금까지 버티고 있을 수조차 없었을런지도 
몰라... 
  사라 오스먼드는 깊게 그리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 다시 해보자.
  어쩌면 그것이 비명에 간 그를 위한 길일런지도 모르니까.
  렌스 스탕달은 필요에 따라 제시할 수 있는 신분증을 기본적으로 
4개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레밍턴 호텔 객실과장에게 내보인 에프비아이신분증도 그 중 
하나였다. 물론 그 멍청한 괌 메디컬 센터의 월터스란 자에게 
보여준 신분증은 조직에서 그를 위해 새로 만들어 준 것이었다. 
만에 하나 의심을 하더라도 그가 알아낼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분증을 발급하는 순가, 모든 것은 
컴퓨터로 완전히 처리되어 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은 
오늘부로 존재하게 되니까.
  컴퓨터 사회의 가장 치명적인 맹점이었다.
  레밍턴 호텔 객실과장 칼은 그의 신분증을 보는 순간, 안색이 
굳어져 그를 보았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렌스 씨."
  "여기 투숙한 사람들의 명부를 보고 싶소. 아! 그보다 혹시 알고 
있으시오? 나이는 20대이고 상당한 동양미녀이고 한국 여자라는 것 
같던데... 이름은 유나래."
  객실과장 칼은 옆에 선 객실담당 재니퍼를 보았다.
  "알아?"
  "그 분이라면 오늘 아침에 체크아웃하고 떠났는데요?"
  늘씬한 키에 푸른 눈을 가진 금발머리 제니퍼가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풍만한 가슴이 제복을 찢어발기며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보이는 육체파였다.
  평소라면 저 글래머를 침대로 끌어들여서 저 가슴이 과연 얼마나 
큰지 알아 볼 렌스였지만 지금은 그럴 계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체크아웃?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소?"
  "귀국을 한다고 하는 것 같던데요?"
  빌어먹을!
  렌스는 내심 혀를 찼다. 한 발 늦은 것이다.
  그 멍청한 월터스란 자가 유나래의 인적사항만 확실히 
알아두었더라도 이렇게 헤매느라 시간을 보내진 않았을 터였다.
  "혹시... 그 여자와 같이 있는 남자를 본 적이 없소? 머리가 
상당히 긴 동양남자인데... "
  렌스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제니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분도 같이 떠났어요."
  그녀는 시계를 힐끗 보더니 그를 보았다.
  "어쩌면 지금까지는 공항에 있을런지도 모르겠군요. 오늘 칼기 
편으로 출국을 한다고 했으니까 알아 봐... "
  "됐소. 고맙소!"
  렌스는 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뛰기 시작했다.
  회전문을 부술 듯 거세게 밀치며 뛰쳐나가는 렌스의 뒷모습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객실과장 칼과 제니퍼는 바라보았다.
  괌 국제공항.
  렌스는 낭패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스웨스트 항공의 여객기 한 대가 하늘을 차고 올라가고 있엇다. 
하지만 그가 찾던 비행기는 이미 보이지조차 않았다.
  하긴 10분 전에 출발한 비행기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어디 그게 
사람의 눈이랴.
  "렌스입니다."
  5분 뒤, 렌스는 공항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놓쳤습니다. 하지만 방금 탑승객 명부를 확인해 그들이 같이 
한국으로 출발한 것을 알아냈습니다."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렌스는 전화를 끊었다. 조직은 늘 그렇듯 완벽함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또한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지난 35년간 조직에 
의해 키워졌다. 철저한 준비와 완벽한 일처리가 그에게 주어진 
명제인 것이다.
  하늘은 그윽한 청자 빛이었다. 시야에 펼쳐진 구름바다를 감싸는 
그 하늘은 끝없이 아스라한 그 빛이었다. 태양은 이글거리다 못해 
빛덩어리로서 그 하늘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그 빛은 창밖 시야에 
보이는 비행기의 날깨 끝에서 그 날카로움을 부스러뜨리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땅에서 바라보던 하늘과 이렇게 공중에 떠서 바라보는 그 하늘은 
너무도 다르다고 백무명은 생각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빛... 
  그 빛의 바다에 그는 떠 있는 느낌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요?"
  유나래가 그의 옆자리에서 물었다.
  백무명은 창밖 하늘에 두었던 시선을 돌려 빙긋이 웃어보였다.
  "그냥... 이것저것... 떠오르는 것이 많아서... "
  유나래는 미소하며 그를 보았다.
  "불안해요?"
  "... "
  백무명은 담담히 웃어보이고는 비행기의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옆얼굴이 강인한 바위와도 같았다.
  유나래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를 알게 된 지 이제 불과 보름.
  그런데 그는 그 짧은 시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엇다. 
더듬거리던 말투, 순박하던 표정들은 어느 새 완전히 사라져 완벽한 
무게로 자리하고...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유나래는 미묘한 마음의 
흔들림이 느꼈다.
  이 시간이 지나면 그는 또 어떤 모습으로 그녀의 앞에 서 있을까? 
유나래는 그것이 궁금했다.
  과연 그는 어떻게 어디까지 변해갈 것인가.
  그녀의 궁금증과는 관계없이 대한항공(케이에이엘) 에어버스 
300은 괌에서부터 이륙하여 한국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가르며... 
  김포공항은 근래에 들어 여행객들로 더욱 붐비고 있었다.
  신공항 건설이 예정보다 늦어져 아직 정식으로 문을 열지 않아 
폭주하는 업무량을 김포공항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리였기 
때문이다.
  국내선, 국제선 모두 마찬가지였다.
  2월달임에도 불구하고 쏟아져나오고 들어가는 인파로 인해 
대합실은 그야말로 장터를 방불케 하였다. 유월의 더위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 인파 속에 레드 드래곤의 선수단이 섞여 있었다.
  해마다 전지훈련을 갔다 오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친지들과 
가뭄에 콩나듯 체육부기자 한둘... 해마다 꼴찌에서 헤매는 팀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번쩍거리며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고, 기자들이 그들을 향해 
마이크를 들이대며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것이다. 좀체로 구경하기 
어려웠던 티브이방송국 카메라까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선수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이번 전지훈련에서 레드 드래곤에선 가공할 신빙기를 
개발해왔다고 하는데, 그게 뭡니까?"
  "듣기론 엄청난 능력을 지니 새로운 신인이라고 하던데요?"
  "그게 누구죠?"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임병권은 기자들의 질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기자들이 
벌떼처럼 그를 따라붙자 그는 못 이긴 듯 입을 열었다.
  "뭐... 아직은 특별히 말할만한 게 없습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시합날 모든 걸 알게 되겠지요!"
  "그러지 마시고 한 말씀만... !"
  "임감독! 우리 사이에... "
  "금년엔 탈꼴찌가 아니라 우승을 넘본다고 하던데요?"
  "그게 그 신병기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기자들이 다시 아우성을 쳤다.
  임병권은 멈추어서며 그들을 보앗다.
  "어디서 우승이란 소리가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 
히든카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시기가 될 때까진 그를 일단 
미스터엑스라고 해두죠... "
  임병권의 얼굴이 대형 프로젝션 티브이에서 배경화면으로 
좁혀졌다. 인기있는 스포츠 앵커 곽도진이 임병권의 얼굴을 
배경으로 깔고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지금 방송국과 신문사엔 그라운드의 승부사라고 불리우는 임병권 
감독이 말한 미스터 엑스의 정체를 묻는 팬들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화면에 괌에서의 레드 드래곤 훈련 캠프가 스쳐 지나갔다.
  태산 그룹의 총수. 정확히 말해서 레드 드래곤의 구단주인 
유대철은 거실 소파에 육중한 몸을 기댄 채 그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부인 공신애 여사가 조용히 앉아 과일을 깎고 
있었다. 자그마한 몸집의 그녀는 늘 그렇듯 대그룹 회장의 사모님이 
아니라, 충실한 가정주부로서 유대철의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평생은 늘 그러했다. 재계에서 사자라고까지 불리우는 
유대철이 원하는 바를 잘 따랐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거물급 스타를 스카우트 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마땅한 
신인이 입단한 것도 아닌 레드 드래곤! 전문가 누구나가 금년에도 
꼴찌라고 단정한 그 레드 드래곤이 전지훈련에서 돌아오며 우승을 
노리겠다고 호언한 것 때문에 오늘의 스포츠계는 들끓고 있습니다!"
  "어때요? 홍보 효과가? 만점이죠?"
  커피를 마시며 티브이화면을 보고 있는 유대철의 옆에서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유나래가 가벼운 차림으로 소파 곁에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미스터 엑스라고? 너다운 발상이다."
  유대철은 외동딸 나래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왜 웃으세요? 난 죽어라고 머리를 짜내서 사바에다 공작을 하고 
정보를 뿌린 건데... "
  유나래가 소파에 앉으며 눈을 흘겼다.
  "미스터 엑스가 네가 말한 그 기억 상실증의 백무명이란 
청년이냐?"
  공여사가 참견했다.
  사과를 집어먹으며 유나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바로 그 사람이에요."
  유나래는 눈을 들어 유대철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아빠! 그 사람 한 번 만나보지 않으실래요?"
  유대철은 담담히 웃으며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중에... 그런 친구까지 일일이 다 만나다간 내 몸이 백 개가 
있어도 감당할 수가 없지!"
  피... 유나래는 입을 삐죽였다.
  하늘의 별들이 아련히 반짝이고 있었다.
  서울 하늘에서 별을 보기 힘들어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무리 환경오염 방지를 외쳐도 이미 혼탁해진 대기는 쉽게 
깨끗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북악 골짜기에 별장처럼 세워진 유나래의 집은 
그런면에서 축복받았다 할 수 있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별이 
보였으니까.
  유나래는 아버지와 함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일은 할만 하냐?"
  유나래는 환하게 웃었다.
  "재미있어요. 이것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건든요."
  유대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을 하건 거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 네가 구단 홍보에 열성을 보이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유나래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는 곤란하다."
  유나래의 얼굴이 문득 굳어졌다.
  "그게 무슨 듯이죠?"
  "네가 태산 그룹의 후계자가 될 수 잇는 내 외동딸임을 잊지 
말라는 소리다! 특정인, 그것도 자신의 과거조차 모르는 자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를위해서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고... "
  "아빠!"
  유나래는 소리쳤다.
  "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설마 그 사람과... 
"
  항변하듯 입을 여는 유나래의 말을 유대철이 다시 막았다.
  "명심해라!"
  그는 사자 눈이라고 불리는 그 이글거리는 눈빛을 자신의 딸에게 
꽂아 놓은 채 힘있게 말했다.
  "구멍가게는 아무나 운영할 수 있지만 거대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임을... "
  유나래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도일 씨는 그것이 가능한 사람인 모양이죠?"
  유대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이 있는 친구다."
  "말도 안 돼... "
  유나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지금 왜 그런 말이 나와야 하는 거예요?"
  유나래의 격한 외침이 그녀의 입술을 뚫고서 와르르 쏟아졌다.
  황도일은 태산 그룹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그룹 기획실장이다. 
사장급인 그룹 기획실장을 불과서른 일곱의 나이에 맡을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능력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출중한 능력에 차고 이지적인 용모, 거기에 보장된 미래까지... 
누구나가 말하는 최고의 신랑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왜 
그의 이야기가 나와야 한단 말인가.
  유나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6장 스타 탄생

  199*년 4월, 프로야구 시즌 개막전.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부는 잠실야구장은 수용인원을 초과해 터질듯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야구장에 모인 사람 그 누구도 그 쌀쌀한 
바람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흥분과 기대, 열기로 야구장은 
뜨겁게 달아 있는 것이다.
  잠실 개막전의 카드는 작년 우승팀 화이트 호크와 꼴찌팀이었던 
레드 드래곤.
  작년 팀간 승패 18승 1패의 압도적인 우세를 보인 우승팀과 
꼴찌팀과의 개막전은 일견해선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관중은 잠실야구장을 완전히 채우고 넘쳐 밖에선 입장하지 
못한 팬들이 데모를 벌이고 있는 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레드 드래곤이 내세우고 있는 미스터 X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투수는 화이트 호크의 곽거명.
  그의 최고구속은 160Km로서 미국 최고의 투수로 불리던 놀란 
라이언의 전성기에 육박하는 스모그볼이다. 타자들은 뻔히 
바라보고도 삼진이고, 곽거명이 나와 볼팬에서 워밍업을 하기만 
해도 그때부터 상대팀은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오죽하면 메이저리그에서 그를 잡기 위해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LA다저스 등의 구단주들이 줄지어 한국으로 
날아왔으랴.
  레드 드래곤이 그러한 곽거명을 능가하는 투수가 미스터 X라고 
공언했으니 팬들의 호기심이 동하는 것은 당연했다.

  치어리더들의 환상적인 율동과 팡파레 속에서 개막전은 
시작되었다. 시구는 한국 최초로 미스월드에 선발된 전년도 
미스코리아 조혜린. 그녀가 던진 공은 아예 투수판에서부터 굴러가 
타자가 건드릴 수조차 없도록 만드는 가공할 위력을 보여 관중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경기는 시작되었지만 관중들의 기대와는 달리 레드 드래곤의 
선발투수는 미스터 X가 아니었다.
  미스터 X대신 등장한 레드 드래곤의 에이스 전삼태는 3회까지 
팀타율 3할 1리의 막강 화이트 호크의 타선을 잘 막아 내었지만, 
3회에 들어서자 연속 안타에 사사구를 허용해 무사만루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노스트라이크에 쓰리볼.
  볼 하나만 더 던지면 밀어내기인 상황에서 컨트롤은 극도로 
저조해 전 타석까지 합한다면 연속 8개의 볼을 던지고 있는 
셈이었다.
  타석의 화이트 호크의 3번이 밀어내기로 나간다면 그 뒤에는 작년 
시즌 3할 7푼, 홈런 31개를 친 박장타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상황은 가히 절대절명으로 진박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레드 드래곤의 벤치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관중석에서 야유가 파도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사기꾼이란 소리와 미스터 X 어디 갔느냐 외치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병이 날으고 캔이 운동장 안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마운드에 선 투수 진삼태의 얼굴엔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컨트롤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조건 가운데에다 집어 넣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화이트 호크의 3번 고용묵은 10개 구단 타자중 가장 정확한 
것으로 이름 높아 절대로 실투를 놓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임병권 감독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삼태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진삼태에게서 볼을 받아든 임병권은 볼펜을 바라보았다.
  푹 눌러쓴 모자에 긴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마치 서부의 장고와 
같이 백무명이 마운드를 향해 걸어나오고 있었다.
  배번 99번. 백무명이라는 이름이 전광판에 아로새겨졌다.
  백무명에게 공을 건네주고 뭔가 말을 하는 임병권의 모습에 
관중석에서 술렁임이 일어났다.
  야구선수라면 자신의 족보보다 더 잘 꿰고 있는 관중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 위기상황에 마운드에 올라선 것이다.
  '대체 백무명이 누구야?'
  몇 개의 연습투구가 시작되었다.
  팡!팡! 맹렬한 소리와 함께 포수의 미트에 틀어박히는 공은 
대체로 시속 140Km대의 빠른 공. 하지만 못칠 공은 아니다.
  화이트 호크의 3번 고용묵은 싸늘히 웃었다.
  당대 최고의 투수 곽거명을 보유하고 있는 화이트 호크의 
타자들은 빠른 볼이라면 아예 바베큐 요리를 해댈 정도라고 소문이 
나 있다.
  빠른 바람이 홈에서 외야로 불고 있었다.
  이런 바람은 투수에겐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중심에 맞히기만 하면 볼은 바람을 타고 가볍게 펜스를 
넘어갈테니까.
  백무명은 긴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타석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었다. 마사만루, 쓰리볼 노스트라크. 최악의 상황이 이어졌다.
  팟발이 땅을 박차고 하늘로 치켜 올라가고... 
  백무명의 손이 세트업 모션에서 원을 그리며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첫번째 공이 손에서 빠져 나왔다.
  펑! 공이 포수의 미트에 틀어박히는 소리가 짧고도 요란했다.
  고용묵은 눈을 크게 떴다.
  공이 날아들어 온 것 같음을 느낀 순간에 이미 스트라이크 선언과 
함께 심판의 손이 번쩍 올라가고 있었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마치 폭격기가 내려꽂히듯 투수 백무명이 거침없이 정 가운데에다 
세개의 공을 집어 넣어 순식간에 강타자 고용묵을 삼진으로 솎아 
내버렸던 것이다.
  상황은 4번 박장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타석에 들어선 그는 보이지 않는 공이란 것을 처음 경험했다.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저 래드 드래곤의 투수가 긴머리를 
날리며 공을 뿌리면, 어떻게 손을 댈 틈도 없이 이미 심판이 
스트라이크 선언을 하는 것이다.
  이건... 너무도 엄청났다. 본 적도 없는 공의 위력이었다!
  저 공을 치려면 한 템포 미리 휘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박장타는 이를 악물었다.
  백무명이 다시 세트업 모션에서 공을 뿌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박장타는 배트를 휘둘렀다.
  제아무리 강속구 투수의 공이라도 이런 정도로 배트를 휘두르면 
헛수윙이다. 공이 들어오기도 던에 이미 배트가 휘둘러졌을테니까.
  하지만 박장타는 과연 공이 배트에 부딪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는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봐야 했다.
  백무명이 뿌린 공이 배트에 맞느 순간, 공이 배트를 그대로 
두동강으로 쪼개버리며 포수의 미트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일순, 야구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박장타는 멍청히 서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 밑둥만 남은 
자신의 배트를 바라보고 마운드에 선 백무명을 바라보며... 그러고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동강이 나 부서진 배트의 잔해들이 뿌려져 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이 제정신을 차리고 콜을 했다.
  그리고 잠실이 떠나갈 듯 터져나오는 관중들의 함성.
  가히 천둥이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렇지 않겠는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던 무명의 투수가 나타나서 배트를 부수며 
포수 미트에 틀어박히는 공을 던지다니... 
  여기저기에서 미스터 X의 외침이 터져나오는 가운데, 백무명은 
무사만루에 구원으로 나서서 9개의 공으로 화이트 호크의 크린업 
트리오 3명을 삼진처리하고 말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9회말까지 맞이한 21명의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처리한, 믿기지 
않는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퍼펙트 게임이었다.
  결과는 8회에 한 점을 얻은 레드 드래곤의 1:0승.
  화이트 호크의 마지막 타자가 21번째의 삼진으로 무릎을 꿇는 
것과 함께 사방에서 신문기자와 방송국 카메라가 질풍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그 속도는 백무명의 투구 속도보다 더한 것 같았다.

  렌스는 그가 묵고 있는 팔레스 호텔 객실에서 막 샤워를 마치고 
타월도 두르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엔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캔이 들려 있었다. 그의 눈앞에 놓인 팩스에서는 사진 
한장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전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송되고 있는 그것은 그가 바로 
조금전에 잠실야구장에서 찍어 온 사진이었다.
  전송을 마친 사진에 선명히 찍혀있는 얼굴의 주인공은 
백무명이었다.
  팩스의 옆에는 그가 보낸 여러 각도에서 찍은 백무명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제부터 그가 할 일은 조직으로부터의 지시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그가 부른 여자이리라.

  밤하늘엔 별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스모그로 인해 서울 하늘 아래서 별보기 힘들다지만 워커힐에 
가면 언제든 아직은 그런 행운이 가능했다.
  워커힐 호텔 스카이라운지.
  창가에 턱을 고이고 앉아 백무명을 바라보고 있는 유나래의 눈은 
창밖으로 보이는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탁자 가득 차려진 요리.
  고기를 몇 점 집어먹던 백무명이 어색한 몸짓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모습은 어쩌면 귀엽기조차 했다.
  과연 저 사람 어디에서 21명의 타자를 연속으로 스트라이크 
아웃으로 잡아낼 괴력이 나온 것일까.
  "스타가 된 기분이 어떠세요?"
  유나래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스타?"
  포도주를 마시던 백무명이 멈칫,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스타! 의식하지 못하겠어요? 당신은 이제 대중의 앞에서 
빛을 뿌리는 별이 된 거예요. 모든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
  "그게 중요한 겁니까?"
  "중요하냐구요?"
  유나래는 백무명의 물음에 어이가 없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은 돈과 명예를 위해 살아요. 대부분의 사람은 거기서 
성취감을 느끼고 살죠. 스타란 바로 그 두가지를 한꺼번에 쥘 수 
있는 보증수표와 같은 거예요!"
  유나래의 설명에도 백무명은 여전히 덤덤한 얼굴이다.
  아직까지 그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그것까지 기대하긴 어려운가.
  유나래는 묘한 한숨을 암암리에 몰아쉬곤 설득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스타가 된다는 것은 무명 씨에게도 매우 중요해요!"
  백무명은 위아한 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게 중요하다구요?"
  "그래요! 스타가 되면 모든 사람이 무명 씨의 얼굴을 알게 될 
거고... 그렇게 되면 무명 씨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무명 씨의 앞에 
나타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렇군요... "
  백무명은 이제야 대강 납득이 간 표정이었다.
  유나래는 문득 화재를 돌렸다.
  "난 오늘내내 무명씨를 스타로 만들기 위해서 바빴어요. 
야구구경도 못할 만큼이요."
  "어쩐지... 그래서 나래씨를 볼 수가 없었군요?"
  "그래도 9회에는 나타났잖아요?"
  그때였다.
  뭐라고 하려던 백무명이 돌연 신음소리와 함께 머릴 움켜쥔 
것이었다.
  "왜, 왜 그래요? 무명씨?"
  유나래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웅웅...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백무명의 뇌리 
깊은 곳에서 들릴 듯 말 듯 아득한 음성이 울리고 있었다.
  너만이 할 수 있다. 너만이... 
  백무명의 입에서 신음과 같은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만이... α7호... !"
  "α7호?"
  놀라 백무명을 부축하던 유나래는 흠칫해 그 말을 되뇌였다.
  "알파 7호란 말을 했단 말입니까?"
  백무명은 수은등 아래에서 유나래에게 물었다.
  수목이 우거진 워커힐 주변은 아직 밤바람이 차지만, 그것이 
유나래가 백무명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요. 기억나지 않아요?"
  유나래의 되물음에 백무명은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뭔지 알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엄청난 무게로 내 머리 
속에서 폭죽처럼 명멸해...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을 뿐이... "
  백무명은 머릴 흔들었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말하던 백무명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유나래가 그의 손을 잡고서 그윽한 눈으로,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어쩌면 그건 좋은 징조인지도 모르니까요!"
  "좋은 징조?"
  유나래가 백무명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누가 알아요? 기억이 되살아나려고 그러는 건지... "
  늘... 
  그러했다.
  백무명은 저 웃음을 바라볼 때마다 햇살과 같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두 사람의 주위에서 말이라는 음파가 사라져 버렸다.
  마주 잡은 손으로 서로의 체온만이 느껴져 올 뿐... 
  "나래... 당신에게 어떻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는지 
모르겠군요!"
  백무명이 참지 못하고 떨리는 음성을 뱉아냈지만 유나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은 전혀 필요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었기에... 

  다음날.
  백무명은 오늘도 4회초 1사만루에 등장해서 이후 17명의 타자를 
모조리 삼진으로 솎아내는 괴력을 발휘했다.
  결과는 2:0. 레드 드래곤의 승리.
  어제와 합해서 38연속 탈삼진이라는 있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가공할 기록이 세워졌다. 매스컴이 발칵 뒤집어졌다.
  거기다 기자와 만난 임병권 감독은 화이트 호크와의 3차전엔 
백무명이 선발로 나설 것임을 밝히자, 살판이 난 것은 
매스컴이었다.
  화이트 호크도 질 수 없었다.
  레드 드래곤 정도야, 간단히 생각하고 일이회 정도 몸이나 풀게 
하려던 곽거명을 선발 맞대결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필연적으로 표는 동이 나고 암표상은 천정부지의 값을 불러댔다.
  그리고 결전의 날은 다가왔다.

  타자는 들러리가 되기 위해서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시합 같았다.
  7회가 되도록 안타를 치기는커녕, 양팀 공히 1루로 나간 적조차 
없었다. 백무명은 계속해서 타자들을 삼진으로 잡고 있었고, 
곽거명도 뒤질세라 7회까지 21명의 타자를 맞아 무려 18명의 타자를 
삼진, 3명을 플라이아웃으로 잡아냈다. 양쪽 다 퍼펙트 게임.
  관중들에게서 함성이 사라진 것은 오래 전이다.
  그저 들리는 것은 심판의 콜과 공이 미트에 날아가 박히는 소리와 
헛스윙을 하고 아웃된 타자들이 투덜거리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관중들 자신에게 들리는 자신의 침넘어가는 
소리뿐이었다.
  그 시간, 주한 러시아 대사관.
  좀 넓어 보이는 거실에서 러시아인 남녀가 TV를 통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파에 않은 30대의 러시아인 남자와 그 소파의 
뒤에서 턱을 괸 채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갈색의 긴머리를 늘어뜨린 
20대 후반 러시아 미녀.
  "엄청나군! 저런 괴물들은 미국 메이저 리그에도 없어. 놀란 
라이언도 저런 위력을 보여주진 못했을 걸?"
  "멋있어요... "
  남자의 말에 러시아 미녀가 계속해 중얼거렸다.
  "저 남자들은 얼마나 힘이 좋을까요?"
  꿈꾸는 듯한 그녀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던에 차가운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우르줄라.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러시아 미녀, 우르줄라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뒤에는 바짝 마른 40대 후반의 러시아인 니콜라이가 
싸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회색빛 머리카락 아래 깊게 자리한 날카로운 눈빛조차 회색, 
깎아놓은 듯 곤두선 매부리코는 그의 성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게끔 
했다. 전직 KGB, 현 러시아 대사관 부관인 그는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서 직책으로는 다섯손가락에 들기 힘들지만 실제로는 가장 
무서운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니콜라이는 자신의 출현에 우르줄라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내가 말한 서류는 어떻게 됐나?"
  황급히 우르줄라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여, 여기... 니콜라이 부관께 서류를 가지고 가다가 잠깐... "
  그때, "스윙! 또 다시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는 백무명입니다.!"
  TV소리가 크게 들려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니콜라이의 전신이 
일순 굳어졌다.
  TV에는 마운드에 선 백무명의 얼굴이 바싹 클로즈업 되어 있었다.
  "저... 피쳐의 이름이 뭐지?"
  니콜라이는 백무명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백무명이란 신진 피처인데 대단한 피처입니다. 아는 
사람이십니까?"
  니콜라이의 미간이 천천히 찌푸려졌다.
  (그보다는 어려보이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닮았다구... !)
  3월이라고 해고 밤날씨는 을씨년스럽도록 찼다.
  하지만, 3일째 맞고 있는 프로야구. 그처럼 허허벌판인 
잠실구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야구장에서 온몸을 바람에 내맡기고 
있는 사람들은 추위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펑!펑! 외양에까지 들리는 공이 포수 미트에 박히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 구, 일 구가 던져질 때마다 신기록이 생겨나고 있었다.
  스코어는 12회 연장 말까지도 0:0.
  백무명은 볼펜에서 연장12회까지 노히트 노런으로 역투하고 있는 
곽거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드 드래곤의 6번 타자 송상주가 
150Km는 된직한 속구에 수윙 아웃되고 있었다.
  지명타자인 조대철 7번 타자가 배트 두 개를 휘둘러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자없이 2사. 이변이 없는 한 연장 13회가 이어질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 광경을 보고 포수 박거산이 한순을 쉬었다.
  "맙소사... ! 또 공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무명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가공할 속구를 받아내느라 박거산의 손바닥은 말이 
아이었다. 평소의 두 배는 됨직하게 퉁퉁 부어 있었던 것이다.
  "많이 아픕니까?"
  "많이 아프냐고? 봐!"
  무명의 물음에 부어오른 손바닥에다 냉동 스프레이를 뿌려대고 
있던 박거산은 불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마치 홍시처럼 보였다.
  저 손으로 더 공을 받으라면 그것은 죽으란 소리가 아니고 또 
무엇이랴!

  "뭐야?"
  임병권 감독은 눈을 부릅떴다.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제가 대신 나가겠습니다."
  임병권의 태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무명은 침착히 말했다.
  "정신이 있는 거야? 대철이가 죽고 나면 넌 바로 공을 던져야 할 
피처야! 그런데 지명타자 대신에 타석에 나간다니... "
  "포수가 공을 받을 수 없는데 어떻게 투수가 공을 던집니까?"
  무명의 말에 임병권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덕아웃 한쪽에서 연신 손바닥에다 스프레이에서 얼음도 모자라 
호호~ 입김까지 불어대고 있는 포수 박거산을 보고 있는 까닭이다. 
그가 아니면 백무명의 공을 받을 포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임병권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놈의 공이 그렇게 빨라서 받을 포수가 없단 말인가.

  지명타자가 바뀐다고 해서 마운드에서 천천히 공을 뿌려보고 있던 
곽거명은 타석에 들어서는 백무명을 보고 일순,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이건 미친 짓이었다.
  12회까지 공을 던진 피처를 타자로 내보내다니... 
  그 놀람은 곽거명뿐만 아니었다.
  관중 모두가 입을 벌렸고, TV 중계를 하던 해설자가 미친 
짓이라고 단언했다. 특별석에 앉아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나래는 까무라칠 듯 놀라 잰걸음에 덕아웃으로 달려 내려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전날에 이어 12회까지 공을 던진 
투수를 타자로 내보내다뇨? 어떻게 이런 일을?"
  "본인의 요청이었소."
  임병권은 팔짱을 낀 채 그라운드를 주시하면서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본인의 요청?"
  "그렇소. 거산이 말고는 무명이의 공을 받을 포수가 없어서 하는 
어쩔 수 없는 도박이오."
  임병권의 말에 나래는 박거산을 바라보았다. 거산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코끼리 발바닥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
  나래는 신음했다.
  곽거명은 사실 이미 한계점에 와 있었다.
  160Km대를 넘나들던 광속구가 이미 백사오십 Km대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명타자 대신 상대 투수가 자신의 공을 
때리려고 나왔다는 것은 그에 대한 모욕이었다.
  공을 뿌릴 때마다 거센 입김이 그의 폐 깊숙한 곳에서 쏟아졌다. 
구속은 154Km. 연달아 가운데에다 꽂아 넣어도 타석에 들어선 
백무명은 배트조차 휘둘러 보질 못했다.
  3구 3진!
  곽거명은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공을 던졌다. 공이 거센 회오리를 몰고 타석을 향해 날아왔다.
  무명이 배트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 배트에 맞은 공은 날아들 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무명의 배트에서 되뿜어져 잠실구장 개장이래 최초의 백스크린을 
넘기는 가공할 홈런이 되었다.
  잠시... 환호소리마저 없었다.
  모두의 고개는 하늘을 향해 그렇게 들어 올려져 있었다.
  니콜라이는 자신의 방에 설치된 TV를 통해서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돌아 동료들의 환호를 받는 백무명을 보고 있었다.
  화면 가득 무명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보였다.
  니콜라이의 얼굴은 바위처럼 무표정했다.
  하지만, TV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왼쪽 손에는 한 장의 낡은 
사진이 들려져 TV에 클로즈업된 무명의 얼굴과 비교되고 있었다. 
마치 몽타쥬로 무명의 얼굴을 그려놓은 듯한 사진이었다.
  틱, 리모콘으로 TV를 끈 니콜라이.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에 든 사진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닮았다.
  안드레이 김.
  지금은 해체된... 소련의 과학 아카데미가 설립된 이래, 최고의 
천재로 공인받던 그 안드레이 김.
  10여년 전, 돌연한 심장마비로 죽었다던 그 안드레이 김은 KGB의 
정밀조사 결과, 죽음을 위장해서 미국으로 망명했음이 이미 밝혀져 
있는 상태였다.
  소련에 이어 러시아까지 안드레이 김의 소재파악을 위해 모든 
루트를 다해 수배를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오늘 그와 완벽히 닮은 자가 그의 모국에 나타난 
것이었다. 러시아로서는 안드레이 김에 대한 일이라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대사관에는 본국과 직접 통할 수 있는 무전시설이 있기 마련이고 
러시아 대사관에는 모스크바와 바로 연결되는 핫라인이 가설되어 
있었다.
  니콜라이는 메모를 무전사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지금 즉시 C채널을 통해 전송하도록 해."
  무전사가 흠칫, 니콜라이를 바라보았다.
  "극비사항만 연락하는 C채널로 말입니까?"
  "제일급 보안사항이다. 투르넨코 국가 안전보장성(전 KGB)의장 
동지께서 직접 보실 수 있도록 처리해. 대지급이다!"

  63빌딩 스카이라운지.
  레드 드래곤의 3연승 축하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이곳은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시간이 갈수록 흥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만년 꼴찌팀이 프로야구 3연패의 최강을 맞아 비록 시즌 
초반이기는 하지만 3연승을 거둔 것이다.
  특히, 백무명과 유나래가 임병권 감독과 같이 자리하고 있는 
주위에는 기자들이 몰려들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 극성맞음에 
구단주는 머리를 흔들고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당하는 사람으로서야 학을 뗄 노릇이지만 기자들로서는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이 난데없이 나타나자마자 그런 대 
폭풍을 불러 일으켰으니... 
  이런 취재감이 또 어디에 있으랴.
  특집. 또 특집... 스포츠 기자들에겐 최고의 기사거리를 만난 
셈이었다.
  기자들의 뇌리에는 거대한 활자들만 아롱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나래가 손을 들었다.
  "자자 이제 그만 하시죠! 무명 씨는 피곤해요. 여긴 쉬려고 온 
거지, 닥달을 당하려고 온 건 아니잖아요?"
  나래는 무명의 손을 끌고 일어났다.
  그렇다고 포기할 기자들인가.
  "잠깐만!"
  "한 마디만! 백무명 선수의 신상내력에 대해서 한 마디만 
말씀해... !"
  벌떼 같이 따라붙는 기자들에게 나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기가막힌 자료를 드리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닭쫓던 개? 꼴이 된 기자들을 뒤로 하고 걸어며 무명이 넌즈시 
물어왔다.
  "무슨 기가막힌 자료를 준다는 겁니까?"
  나래는 무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웃어 보였다.
  "잊어 버렸어요? 무명 씨를 스타로 만들고 선전을 해 아는 사람을 
찾겠다는 말?"
  "그럼 왜 지금 발표를 하지 않고?"
  "지금은 안 돼요."
  나래는 간단히 고개를 내 저었다.
  창가에 면한 자리에 앉으며 나래의 말을 계속 이어졌다.
  "무명 씨의 신분, 다시 말해서 국적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되면 다른 팀에서 선수 자격 문제를 가지고 
이의를 제기하고 나올 거예요."
  나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아무리 해도 무명씨의 공은 칠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예요."
  "... "
  무명은 대꾸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래가 얼떨떨한 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얼굴을 만지는 나래를 보며 무명은 미소했다.
  "묻었어요. 아름다움이 너무 많이... "
  멈칫하던 나래가 곱게 눈을 흘겼다.
  "이젠 날 놀리기까지 하는군요?"
  그때였다.
  뭔가 부서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와창창! 레드 드래곤의 선수 하나가 테이블을 부수며 사정없이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그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비명을 질렀다.
  "뭐야? 네깟 놈들이 뭐길래 여길 다 산 것처럼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어? 피래미 같은 자식들이... "
  주물러 놓은 메주와 같은 얼굴의 거한이 드래곤의 또 다른 선수 
한 명의 멱살을 바짝 틀어쥐고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190은 
됨직한 거대한 덩치에 피멍이 들어 부어오른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 정도로 험상이었다.
  "이것 봐요! 우리가 뭘 어쨌다고 이래요?"
  우루루 몰려든 드래곤의 선수 중 혈기방창한 신인 이태선이 그의 
순을 잡았다.
  순간, 거한의 손이 다짜고짜 이태선의 턱을 갈겼다.
  "비켜! 어디서 쇠파리 같은 게!"
  콰작!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이태선이 날아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가 떨어진 테이블이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아니, 뭐 이따위가 있어?"
  참다 못한 드래곤 제일의 거한인 포수 박거산이 팔을 걷어 
붙이고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거한의 주먹 한 방에 박거산은 게거품을 게워내며 배를 
움켜쥔 체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가공할 펀치였다.
  거한이 여전히 외야수 최용선의 멱살을 움켜쥔 채로 웃어댔다.
  "덤벼봐. 어떤 놈이든지 세계챔프의 주먹 맛을 보고 싶으면 
말이야! 얼마든지 덤벼보라구... 얼마든지!"
  그를 본 기자들 한 사람이 소리쳤다.
  "맙소사! 전 WBA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조태강이야!"
  술렁거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조태강이라면 세계제일의 하드펀치로 인정받던 최고의 복서였다. 
더구나 아시아권에서는 보기 드물게 중량급의 세계 챔피언을 지낸 
선수가 아니던가. 하지만, 뒷골목에서 갑자기 부를 쌓게 된 
조태강은 스스로의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미국의 신예 리차드 엘비트에게 무너지고 말았고, 
매스컴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으면서 연일 술에 절어 지내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복서가 아니라 불량배에 불과했다.
  조태강은 주위를 돌아보며 벌겋게 취한 눈을 부라렸다.
  "왜 노려보고만 있어? 겁나니? 덤빌 놈 없어?"
  그때, 손 하나가 조태강의 팔을 잡았다.
  무명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뭐야?"
  무명이 침착히 말했다.
  "그 사람을 놓아주시오."
  무명의 뒤에서 겁먹은 얼굴의 나래가 서 있음을 보고 조태강은 
씨익, 웃었다.
  "뭐야? 계집애 앞에서 개폼을 잡아 보겠단 건가?"
  조태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놔주라면 놔주지... "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던 조태강의 발이 바닥을 박차며 돌았다. 
그의 손이 반원을 그리며 무서운 속도로 백무명의 배로 파고 
들었다. 일발필도를 자랑하던 조태강의 라이트 훅이었다.
  자기관리에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주먹은 여전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조태강의 얼굴이 달라졌다.
  그 가공할 펀치를 그대로 맞은 백무명이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새끼가!"
  욕설과 함께 조태강의 주먹이 무명의 얼굴에 작열했다.
  "꺄악!"
  이번에도 피하지 않고 그 주먹을 얼굴에 그대로 맞는 것을 본 
나래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정작... 그 주먹을 맞은 무명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의 얼굴에 붙어있는 거대한 주먹의 임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으으... 이건... 마, 말도 안돼... "
  비로소 공포의 빛이 조태강의 얼굴에 떠올랐다.
  싸늘한 웃음이 무명의 얼굴에 떠올랐다.
  "강한 것은 긍지일지언정 자랑은 아니지."
  다음 순간, 가공할 속도로 바람을 가르며 무명의 주먹이 조태강의 
턱에 작열했다.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작위적인 화면구성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 사람의 
주먹에 맞아서 날아갈 수 있음을... 
  와장창창... 무명의 주먹에 맞은 조태강은 대여섯 개의 테이블을 
뒤집어 엎어며 날아가고 있었다.
  ... 
  일대 침묵이 이어졌다.
  졸지에 장내는 조용해졌다.
  누구도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벌린 입을 다문 사람이 없었으므로... 
  조태강은 마치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간 볼링공과 같이 대여섯 
개의 테이블을 핀처럼 날려버리며 널부러져 있었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인사불성 그것이었다.
  그가 쓰러진 바로 앞에 테이블에는 흰양복을 입은 50대의 흑인 한 
사람과 남미인, 그리고 중년의 한국인이 앉아 그 조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데없는 소동에 기겁을 하고 사방으로 물러난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은 침착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앞에 쓰러진 조태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맙소사! 턱이 완전히 으스러졌어!"
  "이거 ... 죽은 거 아냐? 숨은 쉬냐?"
  사람들이 기식이 엄엄한 조태강을 둘러싸고 웅성거렸다.
  "뭐하고 있어? 빨리 앰뷸런스 부러지 않고!"
  한 사람이 뒤를 보고 소리쳤다.
  일순, 숨죽였던 주위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그 가운데 백무명은 무엇에 홀린 듯 멍청히 서 있었다.
  그의 눈길이 사람들에게 들려 나가는 조태강에서 자신의 주먹으로 
향했다. 힘을 쓸 것 같은 주먹이 아니다. 하지만 그 주먹은 저 
거한을 단 한 방에 인사불성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세게 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백무명은 낮게 신음했다.

  "세상에 무슨 주먹이 그렇게 세요?"
  엘리베이터 안.
  나래가 눈이 동그래서 백무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 챔피언이었다는 사람이 하마터면 죽을 뻔 했어요. 턱은 
완전히 으스러지고 뇌진탕 증세까지 있대요!"
  나래가 믿기지 않는 듯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백무명은 머릴 긁적였다.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설명할 수 없을 
때 나오는 버릇이다.
  "나도 그렇게 세게 칠 작정은 아니었는데... 사람을 쳐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큰 친구가 그렇게 허약할 줄은... "
  주춤거리는 그 태도 어디에도 조금 전에 그처럼 날뛰던 조태강을 
단 한 방에 날려보내던 늠인함은 없다.
  정말 이 사람은... 
  나래는 자신도 모르게 백무명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보고 또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대체 언제나 이 사람을 완전히 알 수가 있을까.

  "잠깐! 잠깐만!"
  나래가 백무명과 함께 63빌딩을 빠져 나오고 있을 때, 뒤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다급히 들려왔다.
  바로 조태강이 쓰러진 그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쫓아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나래의 물음에 그들 중 한국인이 말했다.
  "여기 이 분은 프로복싱의 국제적인 프로모터 제이킹이신대, 조금 
전의 그 광경을 보고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는 겁니다!"
  나래가 자신도 모르게 한국인의 앞에 선 신사복 차림의 50대 
흑인을 바라보았다. 제이킹이라니!
  나래는 자신도 모르게 한국인에게 되물었다.
  "저 분이 세계 프로복싱계의 대부라는 바로 그 제이킹이란 
말이에요?"
  한국인이 웃음을 보였다.
  "맞습니다."
  제이킹으로 소개된 50대 흑인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무명을 
바라보았다.
  "You have a great fist(당신은 위대한 주먹을 가지고 있소)!"
  한국인이 부연설명을 했다.
  "제이킹은 미스터 X가 권투를 하겠다면 모든 조건을 다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이건 쉽지 않은 기회로서... "
  나래가 칼같이 말을 잘랐다.
  "이 분은 권투따윈 하지 않아요!"
  제이킹은 한국인의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복싱... 못해... ? you're his wife?"
  제이킹의 말에 나래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난 단지 이 분이 권투따윈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거예요!"
  "No... No!"
  제이킹은 머릴 강하게 흔들었다.
  "미스터 X. 복싱해야 돼요. 대단한 사람... 복싱의 신화... 
타이슨 레너드 능가하는 위대한 복서 돼요."
  한국인이 옆에서 거들었다.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합니다! 미스터 X! 다른 사람이라면 
석달 열흘을 문 밖에 무릎을 꿇고 빌어도 거들떠 보지도 않을 
제이킹입니다! 나도 당신이 최고의 투수로 부상하는 사람인 것은 
알지만, 제이킹과 손잡고 일하게 되면 야구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돈을 벌 수가 있어요!"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던 무명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무명은 제이킹에게 손을 내밀었다.
  멈칫하던 제이킹이 그 손을 덥썩 잡으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어 보였다.
  "Good idea! 매우 잘 생각... Welcome to my world!"
  "무, 무명 씨... ?!"
  그 광경에 나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그때, 무명이 제이킹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좋은 말이지만 난 우리 나래씨가 원하지 않는 일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무명은 자연스레 나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어보였다.
  "자, 우리 이만 갑시다."
  그 웃음은 정말 비 온 뒤의 햇살 같았다.
  나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그래요!"
  나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그래요!"
  나래는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고급 승용차에 시동을 걸면서 
옆좌석의 무명을 바라보았다.
  "좀 전에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요?"
  무명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나래는 무명에게 눈을 흘겼다.
  "왜긴 왜에요? 무명 씨를 한 순간에 잃어버리나 해서죠... "
  나래의 말은 차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인해 끊어졌다.
  제이킹과 같이 있던 한국인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래가 창문을 내리며 쌀쌀맞게 물었다.
  "또 무슨 일이죠?"
  한국인이 창문 사이로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난 한국체육관의 배종욱이란 사람입니다. 제이킹 씨가 혹시라도 
마음이 변하면 이쪽으로 연락을 하라고... "
  한국 체육관의 배종욱이란 그 한국인의 뒤에서 제이킹이 여전히 
흰 이를 드러내고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질긴 사람들이로군!)
  나래는 입맛을 다셨다.
  아직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운명의 끈이 여기서 어떻게 이어지게 될런지...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있다면 귀신이 웃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제7장 다가오는 검은 손길
  지상 36층의 위용을 자랑하며 세워진 국제호텔에서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국제화시대에 발맞춘다는 이름아래 세워진 국제호텔은 문을 
열자마자 세계적인 모임. 행사를 계속해 유치하고 있었다.
  오늘 열리는 제21차 세계 과학학술대회도 그러한 유치계획의 
일환으로 참가자의 모든 경비를 호텔에서 부담해 이루어졌다.
  "실로 36억년! 실로 36억년 만에 인간은 신의 영역인 생명창조의 
문을 넘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이오 테그놀로지 
생명공학입니다!"
  좌석 천 개가 비치되어 있는 거대한 국제홀.
  단상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사람은 세계적인 유전공학의 
권위자인 모그크바 대학교수이며,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과학위원인 이반 로가체프였다.
  "78년 서독의 메르히아스 교수가 위에서 토마토, 밑에는 감자가 
열리는 포마토를 만들어내면서 시작된 바이오 테크놀러지 기술은 
초기의 1, 2세대를 거쳐 세포공학(Cell technology), 
발생공학(Developmental engineering), 바이오 
메카닉스(Biomechanics), 클론 기술(Cloning technology) 등으로 
분화되면서 이미 제3세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현황은 
베일에 가려져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이미 복제인간을 완성시킨 
연구소도 있는 것으로 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이미 
생명의 신비를 거의 해석해 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의 연구보고는 일반의 기대와는 달리 특별한 내용을 담지 않고 
일반론에 그치는 듯했다.
  하지만, 마지막 그의 한 마디는 과학담당 기자들의 촉각을 
곤두세우기에 충분했다.

  연설을 마치고 복도로 나오는 이반 로가체프에게 내외 기자들은 
마치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반 박사께서 말한 복제인간은 분명히 실험관 아기 같은 차원이 
아니라고 짐작되는데요?"
  "복제인간을 완성시킨 연구소가 있다고 했는데, 그곳이 
어디입니까? 혹 그곳이 러시아입니까?"
  "구 소련시절에 그 방면으로 가장 많은 연구를 한 것이 이반 
박사의 과학 아카데미 팀이었다고 들었는데 어떻습니까?"
  질문은 참으로 줄기찼다.
  그러나 이반의 태도도 또한 줄기찼다.
  회이장에서 복도를 걸어나와서 호텔 앞에 대기하고 있는 리무진에 
탈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서 미소만 지어보이고는 결국 
호텔을 떠나고 만 것이다.
  기자들의 맥빠짐이야 당연했다.
  허탈이 지나치면 분노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
  "빌어먹을... 혼자 떠들어대더니 한 마디도 않고 가버려?"
  "그러게 북극곰이라지... 달라서 그렇겠어?"
  "소련이 없어졌다고 러시아곰이 열대곰 되는 거 아니잖아."
  기자들이 제각기 투덜거리며 새로운 건수가 없나 하고 다른 
참석자들의 사냥에 나설 즈음이었다.
  거리 맞은편 길에 주차하고 있던 특징없는 감청색 콩코드 한 대가 
미끄러지듯 이반 로가체프가 탄 리무진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반 로가체프는 달리는 리무진의 뒷좌석에 깊숙히 파묻혀 
있었다. 그는 러시아국방성 과학위원으로 러시아 내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
  리무진의 창은 특수 멀티코팅이 되어 밖은 환히 보이지만 
밖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가 창에다 돌을 던져보면 
그 창이 방탄창까지 되어 있음을 알게 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본부에서는 미국 내에서 중대한 연구를 하고 있던 안드레이 김이 
이번 미국 대지진으로 실종되었다는 첩보를 입수했소."
  이반이 입을 열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러시아 대사관의 부관, 니콜라이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실종이란 말입니까?"
"그렇소! 본부에선 미국측이 이미 그의 생존가능성을 포기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소."
  이반은 니콜라이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안드레이 김이 한국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오?"
  니콜라이가 대답없이 옆에 있던 리모콘의 스위치를 눌렀다.
  소리도 없이 불투명의 간막이가 올라가 스크린이 되면서 운전석과 
뒷좌석을 차단했다. 동시에 뒷좌석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것과 함께 스크린에 막 공을 던지고 난 다음 모션으로 무명의 
얼굴이 나타났다.
  "어떻습니까?"
  니콜라이의 물음에 이반은 신음을 흘렸다.
  "정말 그대로군!"
  니콜라이는 굳은 표정으로 리모콘을 다시 눌렀다.
  "얼굴은 같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화면이 바뀌며 두 개의 지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지문은 화면에서 이동하면서 천천히 겹쳐졌다. 그것은 
마치 한 사람의 것인 듯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합쳐졌다.
  "같은 사람의 지문이군!"
  이반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스크린에는 다시 두 개의 파동 
그래프가 나타났다. 두 개의 파동 그래프는 먼저의 지문처럼 
합쳐졌지만, 일치하지는 않았다.
  "안드레이 김과 백무명의 지문과 성문입니다."
  니콜라이의 말에 이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지문은 같은데 성문이 다르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론 이건 불가능한 일인데... "
  "동일인이면서 동일인이 아니라... ?"
  니콜라이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신음을 흘리며 뚫어져라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이반을 쳐다보았다.
  "본부에서는 안드레이 김의 과학아카데미 시절에 가장 친했던 
사람이 이반 과학위원이시니까 그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만... "
  묘한 웃음이 이반의 입가를 비틀고 지나갔다.
  "친한 게 아니라, 영원한 라이벌이였지. 쫓아가기 힘든... "
  중얼거리던 이반이 돌연 정색을 하며 낮게 말을 잘랐다.
  "그를 납치하시오!"
  니콜라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납치란 말입니까? 그가 안드레이 김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마당에... "
  이반이 싸늘히 말했다.
  "안드레이 김은 소비에트 연방 과학아카데미 사상 최고의 
천재였소. 물론, 러시아 및 제연방이 해체된 다음에도 그런 천재는 
나타나지 않았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절대로 그냥 넘길 수 
없다는 것이 본부의 방침이오."
  이반의 얼굴이 음산하게 굳어졌다.
  "만약 그 자가 안드레이 김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를 본국으로 송환해 가야 하오! 반드시... .

  백무명은 양복을 입고서 어색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나래의 재촉으로 백화점까지 끌려나와서 나래가 골라주는 양복을 
입고서 두 팔을 벌린 채 패션모델이 된 양, 양복 코너의 거울 
앞에서 포즈를 잡고 서 있긴 하지만 어색한 모양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양복이라곤 처음 입어보는터라 도무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와이셔츠 칼라라는 놈은 왜 이렇게 목을 찌르는가. 그러나, 의외로 
거울을 통해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정말 멋져요! 무명 씨가 이렇게 멋진 사람인 걸 난 왜 예전에 
미처 몰랐었을까요?"
  나래의 칭찬에 무명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어째 움직이기도 그렇고... 영 거북하군요. 꼭 이런 옷을 
입어야만 하는 겁니까?"
  나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참으세요. 항우고집인 우리 아빠께서 무명 씨를 자진해서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기왕이면 잘 보여야 할 것 아니에요?"
  "이거야 원... "
  무명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 꼬마 하나가 불쑥 그들 사이에 머리를 디밀었다.
  눈망울이 유난히 초롱한 10살쯤 되어보이는 꼬마였다.
  "아저씨... 맞죠? 긴머리하며... 백무명 투수... 맞죠?"
  나래가 미소했다.
  "무명 씨 팬인가 본데요?"
  무명은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맞다."
  "와아 사인해 줘요!"
  꼬마가 펄쩍 뛰며 무명에게 매달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옆에서 기웃거리고 있던 꼬마였다.
  나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해주세요. 이제부터 스타로서 사인을 해줄 의무가 시작되는 
거니까요."
  하지만, 꼬마에게 사인을 하고 있던 무명은 돌연한 나래의 외마디 
비명에 놀라 고개를 들다가 입을 벌리고 말았다.
  맙소사!
  아이들이 손에손에 종이쪽지를 들고서 인산인해를 이루며 그들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인해 줘요!"
  "싸인... !"
  "와백무명 투수다!"
  "아저씨 사인... !!"
  백화점 진열대 통로에 쌓아두었던 물건들이 모조리 광풍낙화와 
같이 꼬마들의 돌진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는 
사인은 커녕, 꼬마들에게 깔려죽을 판이었다.

  콰아앙!
  격렬한 부딪힘과 함께 붉은색 스포츠카가 앞에서 오던 차의 
옆구리를 들이받으며 옆으로 튀어나갔다.
  졸지에 옆구리에 상처를 입게 된 고급승용차의 오너가 
노발대발해서 욕을 해댔지만, 붉은색 스포츠카는 이미 저만큼 
달아나고 있었다.
  그 만이 아니었다.
  스포츠카는 이미 몇 대의 차를 받으며 질주하고 있었기에 4차선 
도로는 일대 수라장이 되어 뒤엉키고 있었다. 클랙슨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뒤이어 패트롤카가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왔지만, 
경광등을 번쩍거릴 뿐 길이 막혀 뒤를 따를 수가 없었다.
  패트롤카의 경관이 다급하게 무전기에 부르짖었다.
  "여기는 순찰 12호차! A1지역에서 발생한 뺑소니 사고차량이 
계속해서 사고를 내면서 도주하고 있다! 신세대 백화점 방면의 전 
차량은 도주중인 붉은색 스포츠카을 프로텍터하라!"

  신세대 백화점은 강남의 새로운 생활권을 겨냥해 만들어진 지상 
21층, 지하 5층의 최신식 건물이다.
  특히나 백화점 뒤편으로 조성된 공원은 각종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날이 풀리면서 백화점에 쇼핑하러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놀이터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한쪽에 나래와 무명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간만에 사입은 무명의 양복은 백화점을 탈출하면서 걸레가 된지 
이미 오래였다.
  무명이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이 옷은 내게 맞질 않는 모양인 걸?"
  나래가 그 모양을 보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게 바로 유명세라는 거예요."
  바로 그때, 그들의 뒤쪽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공원에 모여 놀던 사람들이 미친 듯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붉은색 스포츠카가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서 공원 저쪽에서 
질주해 오고 있었다.
  "맙소사!"
  나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스포츠카의 앞쪽으로 솜사탕을 든 서너 살 정도의 꼬마가 
엎어져 버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던 엄마가 
사색이 되어 아이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지만 마음만 급하고 손이 
떨려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이렌을 울리며 뒤를 쫓는 패트롤카의 추격을 받는 
붉은색 스포츠카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품에 부둥켜 안으며 눈을 감았다.
  사방에서 비명이 합창하듯 일어났다.
  그때, 나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진정으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나래의 곁에 있던 무명이 한 발을 내딪는가 싶더니 마치 바람과 
같이 단숨에 십여 미터를 가로질러 아이를 부둥켜 안은 엄마의 앞을 
막아섰고, 다음 순간에는 그처럼 무섭게 돌진해오는 스포츠카를 
맨손으로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굉음이 스포츠카와 백무명의 부딪힘에서 일어나는 듯했다.
  늘 그처럼 선량하게 웃고 있던 무명의 두 눈이 무섭게 부릅떠져 
쇠라도 꿰뚫어 낼 듯한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깨 위로 
늘어뜨려졌던 무명의 머리카락이 마치 살아있기라도 하듯, 그렇게 
꿈틀거리며 휘날리고 있었다.
  치이이익... 스포츠카의 타이어가 미친 듯이 도로를 긁어대며 
비명을 질러댔다. 고무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하지만, 스포츠카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정말로 그는 맨손으로 달려오는 스포츠카를 세운 것이다.
  마치... 그러했다.
  마치 영화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으랴.
  나래는 자신이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흡사 물을 끼얹어 놓은 듯 조용해졌던 주위가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와 경찰들을 토해놓자 불이 난듯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너무나 놀라운 광경에 일순간 굳어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몰려오고 있었다.
  "무명 씨!"
  나래 또한 무명을 부르며 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전설의 헤라클레스와 같이 우뚝 버티고 서서 달려오는 
스포츠카로부터 아이와 엄마를 구한 무명이 돌연, 괴로운 신음과 
함께 머리를 움켜잡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미국을... 세계를 그들의 손에서 구해야 한다... 너만이... 
너만이 할 수 있다. α7호! 너만이... )
  머리가 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아득한 심연 저편에서 
예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시간, 도쿄의 CIA 극동지국장 로버트 박은 지국 사무실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갓 40대에 접어든 그는 190cm에 100Kg에 육박하는 거한이지만 그 
감각의 날카로움은 CIA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인 2세인 그가 그 나이에 CIA의 극동지국을 총괄하는 
스테이션치프(Station chief)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물론, 그도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커버타이틀(Cover title)을 
가지고 있었다. 커버타이틀이라는 것은 형식적으로 내거는 
위장신분이다. CIA극동지국에 걸린 모 무역회사의 동경지점을 맡는 
지점장이라는 것이 로버트 박의 겉포장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치열한 정보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정보기관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가 CIA극동지점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캡틴!"
  창가에 서서 안개낀 도쿄의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로버트 박의 
뒤에 늘씬한 금발의 미녀가 나타났다. 그의 개인비서이자, 
CIA요원인 마리 스미스였다.
  "기다리시던 보고가 막 서울에서 도착했습니다!"
  마리가 내미는 암호문을 바라보던 로버트 박의 얼굴이 일순 
굳어지더니 마리에게 지시했다.
  "안드레이 김이 누군지 알아봐쥐. 최우선 상항으로!"
  톱 프라이어러티(Top priority), 최우선 사항이라는 것은 
이제까지 내려진 모든 명령을 무시하고 이 일에 전념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리가 밖으로 나간 뒤, 로버트 박은 다시 서울에서 날아온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제우스의 감시보고 A3. 러시아 국가안전보장성의 서울지국장 
니콜라이와 이반 로가체프와의 접촉은 대사관 차 안에서 
이루어졌음. 고감도 집음기를 사용, 그들의 대화를 도청한 결과 
그들은 안드레이 김이란 사람을 찾고 있으며 그를 납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료됨... 

(안드레이 김... 안드레이 김... )
  로버트 박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창가를 선불맞은 멧돼지와 
같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은 이름인 것 같았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제2인자인 이반 로가체프가 직접 나서야 
할 거물이라면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어디서 들은 
이름인지 머리에 언뜻 감이 오질 않았다.
  그때였다.
  "캡틴! 랭글리의 데이터베이스 컴퓨터와 위성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모니터로 자료검색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OK!"
  로버트 박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얼굴사진이 주마등처럼 지나는가 싶더니 한 
사람의 얼굴이 모니터에 선명히 나타났다.
  바로 안드레이 김의 얼굴이었다.
  "안드레이 김. 한국계 소련인... 바이오 테크놀러지 분야의 
최고권위자. 그의 능력은 다른 학자들에 비해 20년 이상 앞선 
것으로 평가되며... 맙소사! 그 사람이야!"
  모니터에 나타난 이력을 읽고 있던 로버트 박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폭발하듯 떠올랐다.
  "10년 전에 우리 CIA의 극동지국을 통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소련 
제일의 과학자 안드레이 김! 그의 이름이 어떻게 지금에 와서 
한국에서 거론되고 있는 거지?"
  로버트 박은 다급하게 인터폰을 누르며 소리쳤다.
  "마리! 서울로 간다! 비행기를 준비해 줘! 그리고 제1급 보안 
체널로 지금 당장 본부와 연결해 줘! 지급이다!"
  인터폰에서 손을 땐 로버트 박의 얼굴에 곤혹의 빛이 떠올랐다. 
미국 어디에선가 최고기밀의 연구를 하고 있다는 그가 한국에서 
납치가 거론되고 있다니... 
  (설마 그가 지금 한국에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신음이 로버트 박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의도에 위치한 태산 빌딩은 지상 25층 지하 6층이나 되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 강남 테헤란로에다 다시 제2사옥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계열기업 34개사. 그 계열기업에 딸린 자회사가 세계각지 
53개국에 132개... 국내재벌이 아니라 이미 범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의 대열에 발돋움하고 있는 거대기업이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태산 그룹의 위상이다.

  무명은 나래와 함께 여의도에 위치한 태산 그룹 본사 사옥에 
도착해서 간부전용의 고속 엘리베이트를 타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나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면서 묻고 있었다.
  "이상이 있는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죠? 아빠한테는 
사정이야기를 하고... "
  무명은 나래의 걱정이 점점 심해지자 얼굴을 펴고 웃어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잠시 머리가 아팠을 뿐이니까."
  "... "
  나래는 입을 다물고서 무명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무명은 정말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처음 발견했을 때, 말조차 제대로 하니 못하던 그 순박한 사람, 
그는 시간이 갈수록 유나래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대체 그는 어떤 
사람인 것일까.

  태산 그룹의 총수 유대철은 기획실장 황도일에게서 미국의 대지진 
복구사업에 태산 그룹이 참여해 올린 실적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오늘 현재 13억 2천만 달러.
  그것이 태산 그룹이 미국대지진 복구사업에 참여해 올린 
실적이었다. 기실 이번 대지진이야말로 최악의 것으로서, 그 정확한 
피해 액수는 아직도 추정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니만치 임시복구가 끝난 이제부터 추진될 복구사업에 투자될 
자금은 가히 천문학적일 수 밖에 없었다.
  각국의 모든 기업들이 복구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판이었다.
  보고를 받은 유대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이번 복구사업 참여도에 따라 세계기업들의 
판도가 달라질 테니까."
  "물론입니다. 그래서 우리 첨단연구소에서 서둘러 슈퍼 4SK를 
개발한 겁니다."
  황도일의 자신만만함에 유대철이 황도일의 곁에 묵묵히 앉아있는 
고백문 박사를 바라보았다.
  "고 박사, 설명해줄 수 있겠소? 내가 듣기론 이번에 개발한 슈퍼 
4SK는 오염정화용 박테리아라고 하던데 그것이 어떻게 이번 지진 
복구사업에 사용될 수 있는지 말이오."
  이제 막 45세에 들어선 고백문은 작달막한 몸 집에 눈빛이 
날카로웠다. 미국 스텐포드대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하고 미 
국립위생연구소(NIH)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스카웃되어 돌아온 
그 방면의 세계적인 권위자중의 하나였다.
  "그러죠."
  침묵을 지키고 있던 고백문이 입을 열었다.
  막 말을 꺼내던 고백문은 나래가 무명과 함께 들어서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나래를 보고 황도일이 일어섰다.
  "오랜만이군요?"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래는 힐끗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약속한 시간인데, 아직도 손님이 있군요?"
  유대철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무명군. 잠시 기다려주겠나? 곧 끝날 테니까 말이야."
  "제 걱정은 마시고 일 보십시오."
  나래가 눈을 흘겼다.
  "아빠는... 아빠가 약속을 하시고는... "
  "헛헛... 미안, 미안! 하지만 급한 일이라서 말이다!"
  유대철의 너털웃음을 귓전으로 흘리며 황도일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무명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인정 받는 태산 그룹의 실세였다.
  날카로운 감각과 빠른 머리, 과감한 결단력까지 경영자로서의 
자질은 한 몸에 갖춘 것으로 평가되는 그. 당연히 무남독녀 
외동딸을 가진 유대철의 눈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백무명의 출현 이후, 그는 왠지 나래가 자신에게서 
멀어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나래에게 적지 않은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그에게 있어 그 일은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쉽게 손에 들지 않던 나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백무명이 나래와 함께 유대철의 앞에. 그것도 
다정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는 것이다.
  대체 저 촌뜨기 같은 야구선수가 나보다 나은 점이 어디에 
하나라도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자연계에는 화학물질을 분해하는 박테리아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분해라는 현상이 있을 수 있으며 자연은 유지될 수 있다. 
만약 물질이 썩지 않는다면 세계는. 지구는 이내 쓰레기와 생물의 
시체로 뒤덮히고 말 것이었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박테리아. 즉 미생물은 한 가지 
물질만을 분해할 수 있기 때문에 날로 복잡해져 가는 현대의 
공해에는 속수무책. 대기와 토양, 바다가 오염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자연적인 분해 미생물에 유전자 조작이나 형질접합으로 
복합적인 공해물질을 분해할 수 있게 만든 것을 슈퍼버그(Super 
bug)라고 하며, 1972년도에 미국 GE사의 차크라바티에 의해 
처음으로 특허등록이 되었다.
  태산 그룹의 첨단연구소 고백문 박사팀이 만든 4SK도 바로 그런 
슈퍼버그였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4SK는... "
  고백문이 눈을 빛내며 학문적으로 설명을 시작하려 하자 유대철이 
손을 들었다.
  "간단하게 어떤 점이 좋은지만 설명해 주시오."
  거두절미란 학자에게 가장 골치아픈 소리다.
  고백문은 일순 말문이 막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연구개요를 
유대철의 앞으로 밀어놓으며 더듬거렸다.
  "그, 그러니까 이게 그 개요인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 슈퍼 
4SK는 기존의 어떤 슈퍼버그보다 뛰어나다는 겁니다... "
  이래서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황도일이 거들었다.
  "이번 미국 대지진으로 미 서해안에 집중된 유전과 정유시설, 
공장 등이 파괴되어 미국 서해안의 해양오염은 지난날 걸프전 때 
이라크가 걸프 해역을 오염시킨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각합니다."
  "그러니까 뭔가. 우리가 개발한 슈퍼 4SK로 미국의 해양오염을 
제거하자... 그말인가?"
  "그렇습니다."
  황도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백문이 거들었다.
  "기존의 슈퍼버그로서는 COD(화학적산소요구량) 1백PPM의 용액을 
30PPM으로 정화시키는데에는 30시간 이상이 걸렸지만 우리의 이 
슈퍼 4SK는 불과 5시간이면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
  일단 그 방면으로 나가면 일사천리였다.
  황도일이 다시 말을 받았다.
  "지난날 걸프 해역의 오염을 학자들은 몇십년이 걸려야 겨우 
원상회복이 될 거라고 했었지만 그때 우리 슈퍼 4SK가 있었다면 
문제는 간단했을 겁니다."
  "음... 그런 정도란 말이지?"
  유대철의 눈에 흥미로운 빛이 떠올랐다.
  이건 확실히 물건이 될만 했다.
  그때였다.
  정말 아무도 생각지 못한 말이 불쑥 옆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슈퍼 4SK가 여기 적힌 공식을 응용해서 만들어졌다면 
한 가지 문제가 있을 것 같군요?"
  "... "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서 무명을 바라보았다.
  말을 한 것은 백무명이었던 것이다.
  그는 고백문이 유대철의 앞으로 밀어놓은 연구개요를 나래가 
들여다 보는 것을 건너다 보다가 불쑥 입을 연 것이다.
  "무명 씨... !"
  나래가 황당해 무명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문제라니?"
  유대철이 어이가 없는 듯 무명을 바라보았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의 과거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일개 야구선수가 최첨단의 
생명공학 분야에 대해 뭘 하는 것처럼 지적을 하고 나섰으니 기가 
막힌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명은 태연했다.
  "이대로라면 이 슈퍼 4SK는 오염물질을 무해한 유기물질로 분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럼 유해물질로 분해를 해야 한단 말인가?"
  황도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쳤다.
  무명은 고개를 저었다.
  "유기물질은 생물의 영양이 됩니다. 슈퍼 4SK가 유기물질을 
쏟아내게 되어 수질에 급격하게 영양분이 많아지면 물의 부영양화가 
초래되어 프랑크톤 등이 대량번식하게 되면서 DO(용존산소량=물에 
녹아있는 산소량)가 부족하게 되어 물속의 생물은 질식해 죽어가고 
물을 썩게 됩니다."
  "... ?"
  난데없는 유창한 해설에 유대철과 나래는 얼떨떨해져서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오염 전보다 더 큰 오염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죠. 생각해 
보셨습니까?"
  고 박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건... "
  황도일이 냉소를 터뜨렸다.
  "물의 부영양화란 하천이나 호수처럼 좁은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어디서 짧은 지식을 가지고... "
  "4SK가 오염물질을 급속도로 분해하는 것은 장점이지만 오히려 
급속한 분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바다를 오염시킬 수 있는 
겁니다."
  "그, 그따위 말도 안되는... !"
  황도일이 일순 말문이 막혀 고백문을 바라보았다.
  고백문이 학술적으로 저 무식한 백무명의 말을 묵살해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고백문은 입을 꽉 다문 채 
이마에 식은 땀만을 매달고 있었다.
  "... "
  유대철과 같은 사람이 어찌 그런 기색을 모르겠는가.
  "가능성이 있는 일이오?"
  그의 물음에 고백문이 입술을 깨물었다.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 
  회장실 내에 돌연 침묵이 흘러갔다.
  한참 있다가 유대철이 고개를 저었다.
  "어이가 없군! 이런 치명적인 결함을 지닌 물건을... "
  그의 말은 무명의 말에 의해 다시 단절되었다.
  "방법이 조금 잘못되었을 뿐, 치명적인 결함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분해된 물질을 유기물이 아니라 무기물로 만들면 
될테니까요."
  고백문이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 그건 이미 수차례 시도를 했지만 실패... "
  "몇가지 공식을 첨가하고 형질접합 후의 4SK에 유전자 조작을 
하면 의뢰로 간단한 작업이 될 겁니다."
  고백문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어떤 공식을 말이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무명과 고백문과의 사이에 교환되는 단어들은 
유대철이나 나래, 황도일로서는 백날을 고민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용어들의 나열이었다.
  유대철과 나래, 황도일은 졸지에 한쪽으로 밀려나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저 친구 원래 직업이 뭡니까?"
  황도일이 참지 못하고 나래에게 물어왔다. 무슨 저런 야구선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래인들 알게 뭔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저 놈... 도대체 어디서 굴러 떨어진 낯도깨비야?)
  유대철이 묘한 눈빛으로 백무명을 보고 있었다.

  로버트 박은 현해탄 위를 날고 있는 KAL 여객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한국이 가까워 올수록 점점 더 
청자빛으로 푸르러 가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그윽해지는 하늘 빛... 
  누가 본다면 그가 그 하늘빛에 취해 넋을 잃고 있는 것으로 
여길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뇌리는 칼날과 같은 감각이 쉬지 않고 굴러가고 있었다.
  최우선 사항으로 한국에 있다는 안드레이 김에 대한 조사를 명함. 
지금 즉시 조사에 착수할 것!

  그의 보고와 더불어 날아온 랭글리의 명령이었다.
  앞으로 30분 후면 서울에 도착한다.
  러시아측은 대체 어디에서 안드레이 김의 종적을 발견한 것일까. 
아무리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국에 있던 안드레이 김이 어떻게 한국에 있단 말인가.
  랭글리 본부에서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그거 참...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난 걸까?"
  아까부터 신문을 들여다 보고 있던 옆자리의 남자가 중얼거렸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던 로버트 박의 안색이 굳어졌다.
  옆자리의 중년남자가 들고 있는 스프츠 신문에 야구선수 하나가 
공을 뿌리고 있는 사진이 일면 톱으로 실려 있었던 것이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은 마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듯했다.

  폭풍의 거인 연속 5게임 퍼펙트를 기록하다!!

  (맙소사! 대체 저건... ?!)
  신문의 머릿기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투수의 얼굴이야말로 안드레이 김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서울의 밤은 어둠 속을 네온과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불야성을 이룬 건물 어디에도 네온사인이 없는 곳은 없다.
  드넓은 주차장에 서구풍의 넓은 정원을 자랑한 채 서초동에 
자리하는 레스토랑 로즈가든(ROSE GARDEN)의 호화로움도 그 외관을 
장식한 네온사인에서 비롯하고 있었다.
  "고 박사님이 뭐래요? 무명 씨 말이 맞대요?"
  별실에서 막 식사를 마친 나래가 유대철에게 물었다.
  백무명은 그들의 앞자리에 마주앉아 포도주 글라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가 보여준 한수(?)로 말미암아 태산 그룹의 
회장 유대철과의 만남은 저녁식사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웨이트가 포도주를 따르는 것을 보며 유대철이 대꾸했다.
  "맞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으로선 2~3년 이상 걸려야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이라고 벌린 입을 다불지를 못하고 있더군... 그렇게 
어려운 연구결과는 단숨에 해독해 내면서도 자신의 과거는 정말로 
생각나지 않는단 말인가?"
  나래의 물음에 대꾸하던 유대철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무명에게 
물어왔다.
  "그렇습니다."
  "그거 참... 불가사의한 일이로군!"
  유대철이 묘하다는 듯 혀를 찼다.
  "잘 생각해 보게! 아무리 봐도 자네는 야구선수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까."
  "참 아빠도... 무명 씨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고 있는 줄 
아세요?"
  나래가 답답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허긴... "
  고개를 끄덕이던 유대철은 문득 생각난 듯 무명을 보았다.
  "자네 혹시... 안드레이 김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
  나래와 무명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방금 안드레이라고 하셨어요?"
  나래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 고 박사가 무명군의 얼굴이 구 소련의 과학자였던 
안드레이 김이란 사람과 닮았다고 하더구나. 비록 10년 전에 
행방불명된 사람이긴 하지만... "
  유대철의 대답에 나래와 무명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가요! 무명 씨!"
  나래가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난데없는 사태에 얼떨떨해서 유대철이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무명 씨가 처음 깨어났을 때 한 말이 안드레이였어요! 그런데 
지금 안드레이란 이름을 들었는데 그냥 있을 수 있어요?"
  나래가 무명의 손을 잡아끌고 달리며 외쳤다.

  밤거리의 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고마워요! 고 박사님!"
  나래는 기어를 삼단을 바꾸어 엑셀레이터를 밝으면서 어깨에 끼운 
휴대폰에다 대고 소리쳤다.
  그녀가 몰고 있는 승용차는 어느 새 관악산을 끼고 자리한 
서울대학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안드레이 김이란 사람의 얼굴이 정말 무명 씨와 흡사하게 
닯았대요! 처음에 보면 쌍둥이라고 할 정도로요. 하지만 그는 이미 
10년 전에 소련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군요?"
  "죽었다고... "
  "그래요! 하지만 그이 얼굴이 타임지 표지에 나온 적이 있다니까 
사진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10년 전의 타임지를 어디서 구한한 말이오?"
  나래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도서관이죠!"
  그들의 눈앞에 서울대학의 도서관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대학 도서관의 불은 꺼지지 않고 있었다. 한때 격렬한 
시위의 와중에 전 국토가 휩쓸려 있을 때에도 꺼지지 않았던 그 
불빛이었다. 그것은 이 나라의 지성이라 자처하는 서울대학의 
자존심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서울대학은 나래의 모교였다.
  렌스는 불을 끈 콩코드 안에서 도서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품속에서 천천히 권총을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루가 레드호크 44매그넘은 탄환이 6발밖에 들어가지 
않지만 그 위력은 황소도 한 방에 잡을 수 있도록 강력했다.
  사실, 습격을 위해서는 전혀 불필요한 위력을 가진 것이 바로 이 
루가 매거넘이다. 하지만 조직은 그렇게 하도록 명령했다. 장전된 
6발의 총탄을 모두 백무명의 심장에다 박아 넣도록.
  루가 권총에 차가운 금속질감을 확인한 렌스는 운전석 시트에 
깊숙히 몸을 기대며 도서관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먹이를 앞에 둔 맹수와 같이 빛나고 
있었다. 감정조차 서리지 않은 차가운 얼음 같은 눈빛이었다.

  나래와 무명은 손에 한 장의 복사된 사진을 들고 담쟁이 덩굴이 
벽을 뒤덮은 서울대학 도서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어때요? 이 사람? 머리만 길다면 영락없는 무명 씨인데요?"
  나래가 타임지에서 복사한 사진을 들고서 흥분해서 말했다. 
나래의 손에 들린 사진에는 10년 전의 안드레이 김의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미 10년 전에... "
  "죽은 사람일런지는 몰라도 무명 씨와 관계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다면 무명 씨가 이 사람의 이름을 알 리 없을 
테니까요! 더구나 이렇게 닮았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던 무명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그의 뇌리 깊은 곳에서 예의 외침이 다시 울려오고 있었다.

  '나는 안드레이 김... 알파 7호. 기억해야만 한다! 세계를 구할 
책임이 네게 있다는 것을 ... 기억해야만... '

  차 앞에서 돌연 굳어져 있는 무명을 보고 나래가 놀라 물었다.
  "왜 그래요?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
  무명은 말을 하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팟! 그들에게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쏟아졌다.
  "무슨 짓이야!"
  나래가 눈을 뜨지 못하고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굳은 얼굴로 우뚝 선 무명의 앞에 한 대의 검은색 그렌져가 
헤드라이트를 그들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텅! 소리와 함께 
그랜져에서 두 사람이 내려 그들에게 다가왔다.
  무명이 반사적으로 나래의 앞을 막아서며 나직히 말했다.
  "빨리 차에 타요!"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눈을 가렸던 나래가 손을 내리며 의아한 
빛으로 무명을 보았다.
  "왜요?"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서... 어서 타요!"
  "당신이... 백무명... 입네까?"
  무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딘지 어색한 말투를 가진 음성이 
들려왔다. 그들의 앞에 두 사람의 서양인이 우뚝 서 있었다.
  바바리 차림의 두사람 중 조금 뒤에 선 한 사람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습니다만?"
  무명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같이 가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을 만나고 시퍼 하는 
분이 있는데... "
  앞선 큰 키의 서양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래가 차의 문을 열며 차갑게 말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필요하면 직접 오라고 하시죠? 죄송하지만 우린 
지금 바빠요! 가요, 무명 씨!"
  척 무명의 손목을 잡아끌던 나래의 얼굴이 갑자기 백지장처럼 
하얗게 굳어졌다.
  권총.
  그러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소음기가 달린 차가운 금속질감을 
어둠 속에서 뿜어내고 있는 권총이 그녀를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뒤에 서 있던 서양인이 바바리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그가 꺼낸 권총이 미국에서 만들어진 
스미스웨슨인 것을 알아 볼 능력도 정신도 지금의 나래에게 있을 리 
없었다.
  앞선 키 큰 서양인이 휜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크 분은 칙첩 움직이는 것을 싫어합네다."
  "당신들은 누구요?"
  무명의 물음에 키 큰 서양인이 여전히 침착히 말했다.
  "칙첩... 카보면 알게 될 겁네다. 카실카요?"
  "가면 안돼요!"
  나래가 소리쳤다.
  크릭!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권총이 나래의 머리를 향해 
겨누어졌다.
  "한 펀만 더 소리 친다면 난 팡아쇠를 탕길찌토 모르오. 아름다운 
아카씨... 이컨 장난캄이 아니오."
  나래가 하얗게 질려 입을 다물었다.
  키 큰 서양인이 무명을 보며 다시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차에 타키만 하면 아카씨에겐 아무 해토 없을 커요."
  그들의 앞에는 어느 새 그랜저가 다가와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랜져의 안에는 운전수 하나가 있었다.
  그도 서양인인 것 같았다. 사람들의 눈길을 우려한 것인지 차의 
헤드라이트는 이미 꺼진 상태였다.
  "... "
  무명은 잠시 그들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총을 치우시오. 같이 갈테니까!"
  키 큰 사양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총을 겨누고 있던 서양인이 총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가져갔다. 치웠다고는 하지만 주머니가 
불룩하게 앞으로 솟아나온 모습은 겨누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공포감을 주고 있었다.
  무명이 나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돌아가시오, 나래."
  "무, 무명 씨!"
  무명이 그녀를 보며 웃어보였다.
  그 웃음은 이런 상황에서도 기이하게도 밝게 빛나는 듯했다.
  "난 괜찮을 거요. 약속하겠소!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걱정말고 
집에서 기다리시오."
  키 큰 서양인이 옆에서 음산하게 말했다.
  "지큼 본 것은 다 잊쳐퍼리도록 하시오. 알켓소? 만약...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면 저 사람을 타시는 보지 못할치도 
모르니까!"
  부우웅 그랜져가 무명을 싣고서 어둠 속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래는 마치 넋을 잃은 듯 멍청히 서서 사라져가는 자동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마구 떨려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다른 곳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소음권총에다 납치라니?
  그녀는 공포에 질려 검은색 콩코드가 불을 끈 채 백무명을 실은 
그랜져의 뒤를 따라기 시작했음을 알아 볼 수 없었다.
  거기에는 굳은 표정의 렌스가 홀로 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직에서조차 예상치 못하 뜻밖의 사태였다.

    제8장 시작되는 싸움
  미국, 유타 주 솔트레이크 사막.
  그 옛날 보네빌이라고 불리던 거대한 호수가 말라붙으며 한 방울 
눈물처럼 길이 120km, 너비 40km의 그레이트 솔트레이크 호수를 
남겨두고 이루어낸 세계 최대의 염류사막이다.
  지평선이란 말대신 사평선이란 말이 어울리도록 솔트레이크 
사막은 그렇게 맘껏 드러누워 있다.
  기실 그 사평선조차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 하늘거리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시야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 하지만 마치 생명선인 듯 한가닥 
도로는 그 사막을 가로지르며 하염없이 뻗어 있었다.
  국립 환경과학 연구소(NATIONAL ENVIRONMENT SCIENCE LABORATOR). 
도로에서 뻗어난 갈래길이 끝나는 곳에 걸려 있는 안내판이다. 
바위산을 배경으로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듯 둘러쳐진 철조망.
  철조망에는 수만 볼트의 고압이 숨을 죽이며 흘러가고 
요소요소에는 감시용 카메라가 눈을 번뜩이고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저 평범한 연구소 건물에 불과했다.
  부타타타... 요란한 소리가 그 일대의 정적을 깨뜨리며 들려왔다. 
헬기 한 대가 날아내리고 있었다.
  국립 환경과학 연구소 검물에 마련된 헬기 착륙장에 ... 군용토타 
헬기가 내리고 나자, 거기서 나온 것은 존 빅터였다.
  CIA의 과학기술차장 존, 바로 그였다.
  연구소 건물은 평범했다.
  하지만 그 연구소의 건물 200m 지하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동으로 조절되는 첨단 인텔리전트 방식으로 건조된 
연구소 지하는 현대과학의 집결체와 같았다.
  사라 오스먼드는 바로 그 지하연구소에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지난날 그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던 
뮤즈연구소의 그 시설들이 거짓말처럼 복원되어 있었다.
  사라의 눈앞에 자리한 성장 켑슐들은 이곳이 무엇을 하기 위한 
곳인가를 명확히 의미하고 있었다.
  신인류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곳이 바로 이곳 국립 환경과학 
연구소의 실체였다.
  사라는 자신의 눈아래 잠자듯 누워있는 비너스1호를 바라보았다. 
늘씬한 나신을 드러낸 미녀였다. 긴머리에 나이는 이제 열대여 섯 
정도로 보이는... 전형적인 금발의 미녀인 비너스1호의 실제 나이는 
아직 한 살이 채 안 된 상태였다.
  "성장 촉진 호르몬이 잘 작용하는 것 같지?"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본 클라우스 프리드만이 흰가운을 입은 채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언제 보아도 친근한 웃음이었다.
  저 웃음이 곁에 없었더라면 사라는 아마도 다시는 연구실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안드레이 김의 죽음은 너무도 거대한 충격이었다. 
그것은 가히 생의 의욕마저 잃어버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 사라를 연구실로 돌아오게 물심양면으로 돌봐준 것이 
클라우스였다. 그가 없었다면 사라는 어쩌면 영영 일어나지 
못했을런지도 몰랐다.
  사라가 마주 웃음지었다.
  "아주 좋을 것 같아. 비너스1호는 배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성장을 했으니까! 우려했던 부작용도 전혀 없고 말이야... "
  "지능 프로그램은 어때?"
  클라우스가 차트를 들여다 보며 물었다.
  사라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모든 걸 한꺼번에 다 해버릴 생각이에요? 욕심하곤... "
  "그런가?"
  클라우스도 마주 웃었다.
  그때, 문득 사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반가운 손님이 온 것 같군요?"
  존 차장보가 활짝 웃음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클라우스의 얼굴이 시큰둥해졌다.
  "반가운 손님 다 죽었군... "
  존 차장보가 주위를 둘러보다 성장 캡슐 안의 비너스1호를 보곤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한 미녀로군... "
  사라가 싸늘하게 눈을 흘겼다.
  "쓸데없는 생각말아요! 그 아이는 이제 불과 1살 된 젖먹이니까."
  존 차장보가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물론이죠!"
  당연한 듯 받아넘기긴 하지만 그의 눈길은 금발미녀... 누가 
보아도 20대로 보이는 비너스1호의 청순한 얼굴과 폭발할 듯 풍만한 
나신에서 좀체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이라도... 그래. 마음만 먹으면 내일이라도 애를 낳고도 
났겠는데 무슨 젖먹이야?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키며 존이 클라우스를 보았다.
  "잠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는데... "

  차오르는 발.
  그리고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손길을 떠나는 공은 마치 
발사관을 떠나는 미사일과 같다.
  사진에 자리한 백무명의 얼굴은 너무도 선연했다.
  김머리를 휘날리며 다이나믹한 투구를 하는 백무명의 사진을 
클라우스는 하얗게 굳은 얼굴로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내가 보기엔 그때 안드레이 김의 복제라던 그 알파 
7호인 것 같은데... "
  클라우스가 신음하듯 말했다.
  "그런 것 같군요."
  클라우스가 고개를 들어 존을 보았다.
  "이 친구가 한국에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거기까지 가서 야구선수를 하고 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지금 러시아 국가안전 보장성에서는 그를 
안드레이 김으로 오인해 납치하려 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그들의 손에 넘어가게 하면 안 됩니다!"
  클라우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물론입니다!"

  사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이야기하고 있는 존 차장보와 
클라우스의 모습을 유리벽 너머로 바라보았다.
  클라우스의 저런 심각한 모습은 뮤즈 연구소가 무너진 이래 
본적이 없었ㄷ4ㅏ.
  문득 불안한 느낌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갔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었다.
  하던 일을 다른 연구원에게 맡기고 사라는 클라우스가 있는 
통제실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새 클라우스와 존 차장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야?'
  사라는 클라수스를 찾아 다시 발길을 돌렸다.
  "절대로 그렇게 그냥 둘 순 없습니다!"
  클라우스는 자신의 방에서 전화에다 격렬하게 외치고 있었다. 
부릅뜬 두 눈에서는 무서운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클라우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였다.
  "놈은 파괴되어야만 합니다! 알파 7호는 안드레이 김의 완벽한 
복제입니다! 안드레이 김이 우리 조직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놈에게 어떤 프로그램을 해두었을런지 모른단 말입니다!"
  클라우스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완전히 죽어 없어졌던 안드레이 김.
  생애에 있어 유일하게 그의 존재를 가로막았던 그 존재의 망령이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소리치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한국에 요원이? 그럼 놈이 나타난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아니, 그런데도 내게 알리지 않았단 말입니까?"
  일순 말을 멈추었던 클라우스는 상대에게 격하게 소리쳤다.
  "확인? 무슨 그따위... 놈이 어떤 존재인지 몰라서 그런 어설픈 
짓을 한다는 말입니까? 놈에게는 총알 따위는 애들 장난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클라우스는 정말 분노하고 있었다.
  대체 항성탐험을 위해 만들어진 신인류를 어떻게 보고 이따위 
짓을 한단 말인가. 제아무리 훈련받은 요원이라 할지라도 딱총 
따위를 가지고 가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놈은 위험물입니다! 한국으로 
디스트로이어(파괴자)를 보내 놈을 파괴해 버려아만 합니다! 놈이 
아무런 말도 할수 없도록... !"
  사납게 말을 쏟아내고 있는 클라우스였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지신이 전화에다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 그의 뒤쪽으로 조금 
열려진 문틈에 사라의 모습이 보이고 있음을... 
  사라의 눈은 경악과 의혹으로 충만해 있었다.

  어둠 속에 환하게 불 밝혀진 레드 드래곤의 연습구장은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펑펑! 밤 12시가 넘어가는 시간에도 타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아맨 타이어를 못 살게 두드리고 있었다. 부릅뜬 두 눈에서는 
불꽃이 이글거리는 듯했다.
  박종옥 수석 코치는 흐뭇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완전히 상승 무드야! 작년의 그 패배감에 절은 표정들은 
약에 쓸래도 없군... 
  "이봐 박 코치! 백무명이는 어디 간 거야?"
  임감독이 뒤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아까 낮에 나래양과 같이 나갔잖습니까?"
  임병권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고는 아직 안 들어왔단 말이야? 내일부터 화이트 호크랑 
재차 3연전인데 대체 무슨 짓이야? 무명이가 사랑놀음하는 
애완동물인 줄 알아?"
  '앞에서는 모는 척 하면서 뒤에서 큰소리는... '
  으르렁거리는 임병권을 보고 박종옥은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아! 뭐해? 빨랑 나가서 찾아오지 못해? 지금이 몇신 줄 알고 
그러고 있어?"
  대강 알아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박종옥의 실룩거리는 
엉덩이에서 시선을 돌리며 임병권은 입맛을 다셨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영 꿈자리가 좋지를 않단 말이야... '

  나래는 불도 켜지 않은 자신의 방에 웅크리고 있었다.
  세운 무릎을 깍지낀 손으로 감싸안은 체 웅크린 그녀의 앞에는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스며드는 달빛을 받으며 하늘색 전화기는 
무거운 실루엣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일까.
  나래는 피가 터지게 입술은 다시 깨물었다.
  깨물고 깨문 입술은 부르터 이젠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아다.
  전화기는 무심하게 그저 달빛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112 범죄신고 센타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수화기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순, 나래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 만일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면 다시는 저 사람을 볼 
수 없을 거요.

  총을 겨눈 그 푸른 눈의 말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귓전에서 
맴돌았다.
  "여보세요? 112입니다! 말씀하세요. 여보세... "
  냐래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얼굴을 무릎 사이로 파묻었다.
  뭔지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따갑게 찌르는 듯하더니 이내 
눈물이 쏟아졌다. 일단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그것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폭포수와 같았다.
  흐려져 보이지도 않는 눈앞에 백무명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 
순박하게 웃는 얼굴을 눈앞에 떠올리자 왜 이렇게 가슴이 아파오는 
것일까.
  비로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무명이 그녀의 마음속에 어떠한 존재로 자리하고 있었던가를. 
그것은 이미 과거를 잊어버린 한 남자에 대한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 그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래는 무명이 자신의 눈앞에서 납치당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의 가슴 속에 무명의 존재가 어떠한 무게로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나래는 백무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녀의 앞에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다.
  곁에 있을 때 모르던 그 존재의 가치를, 그 존재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서러움이 해일과 같이 밀려왔다.
  일찍이 이렇게 온세상에 나만 남겨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 
본적은 없었다.
  "나래야."
  조용한 음성과 함께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잠옷차림의 공여사가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엄마아!"
  엄마를 발견한 나래는 와락! 그를 끌어 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서러움이 걷잡을 수 없이 북받쳐 올라 터져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갑자기 외 이러는 거니?"
  공여사는 목을 놓아 우는 나래에 당황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대체 왜 그래? 무명군과 싸우기라도 한 거냐? 혹시 그 녀석이 
네게 무슨 나쁜 짓이라도... ?"
  "아니예요, 그게 아니예요... !"
  나래가 세차게 도리질했다.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혼자 울고 
있단 말이냐? 자자... 진정하고 말해보렴."
  공여사가 나래의 등을 토닥였다.
  엄한 아버지, 그 밑에서 평생을 조용히 자리한 엄마였다. 그녀야 
말로 나래에게 있어서 마음의 고향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다 받아줄 수 있는 존재, 그녀가 바로 나래의 어머니였다.

  서울근교.
  구리시에 못 미처 한강변을 끼고 세워진 별장이 있다. 사람의 
눈에 띌 정도로 거창한 규모는 아니었고, 2층인 그 별장은 앞으로는 
한강이 바라보이고, 뒤로는 숲으로 둘러 싸여 가히 천혜의 경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별장은 늘 비어 있었고,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밤은 달랐다.

  별장의 거실은 완연한 북구풍으로 꾸며져 있었다. 벽난로하며 
주위 장식들은 이곳이 한국인지 유럽인지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백무명은 바로 그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방 창문은 모조리 거튼으로 가라워져 있고 입구에는 백무명을 
데려온 서양인 중 하나가 그를 감시하듯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30분쯤 전이다.
  리더인 듯 하던 키 큰 서양인은 그를 기다리게 하고 위로 
올라가더니 종 무소식이었다.
  문득, 짝짝짝...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백무명이 고개를 들어보니 2층 계단에서 서양인 하나가 박수를 
치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계단의 중간쯤에서 활짝 웃으며 무명을 
향해 두 손을 벌려 보였다.
  "조국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하오! 안드레이 동지!"
  '안드레이 동지?!'
  그의 말에 무명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서양인은 무명의 앞에 서서 다시 말했다.
  "어떻게 되어서 안드레이 동지가 이 한국 땅에서 야구선수로 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긴말은 하지 않기로 합시다. 조국은 
안드레이 동지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말이오!"
  "러시아어... 당신은 러시아인이오?"
  마치 동이물을 쏟아 붓듯 단숨에 말을 끝낸 서양인은 너무도 
뜻밖인 무명의 대꾸에 멍청해지고 말았다.
  서양인, 러시아 대사관의 무관 미콜라이는 말문이 막힌 듯 무명은 
노려보다가 싸늘히 내뱉았다.
  "날 놀릴 작정이오?"
  그의 어조는 날카로운 가운데 위협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백무명의 안색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침착했다.
  "당신들이 날 안드레이 김으로 생각했다면 틀렸소. 그는 이미 
10년 전에 죽었으니까 말이오."
  "으핫하하하하!"
  백무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니콜라이가 크게 웃었다.
  그리고 웃음을 그친 그의 안색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당신이 죽음을 가장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것을 우리가 아직도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세계제일의 두뇌답지 않은데!"
  그의 말에 무명의 안색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그렇다면 안드레이 김은 아직 살아 있단 말인가?'
  니콜라이는 소파의 팔걸리에 반쯤 걸터앉아 고압적인 태도로 
백무명을 바라 보았다. 싸늘한 웃음이 그의 입꼬리를 비틀고 
있었다.
  "자  지제 세계제일의 과학자라는 당신이 왜 한국 땅에서 
야구선수를 하고 있는지 어디 한 번 들어봅시다.
  백무명의 입가에 웃음 한 줄기가 떠올라왔다.
  "한 번 알아내 보시오."
  그의 말은 너무도 뜻밖인지라 나콜라이의 안색이 일시에 
굳어졌다.
  "지금 나랑 농담을 하자는 거요?"
  백무명은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내가 야구를 하고 있는 것은 나도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오."
  니콜라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끝까지 나를 놀릴 생각인가! 안드레이!"
  백무명은 침착히 고개를 다시 저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사실이오."
  쾅! 니콜라이가 탁자를 후려쳤다.
  "닥치시오! 기억 상실도 아닐텐데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
  그의 말은 백무명의 말에 의해 다시 끊어졌다.
  "의사는 그렇게 진단했소."
  "... !"
  니콜라이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 돼. 그런데 어떻게 한국에를 오게 된 거요?"
  그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백무명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므로.
  "이젠 가봐야겠소."
  "뭐라고?"
  니콜라이가 너무 뜻밖의 말에 귀를 의심해 되물었다.
  백무명은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들은 따라온 것은 내 신분에 대해 알아낼 것이 일을까 
해서였는데 그렇지 않음을 안 이상, 여시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소."
  백무명은 할 말은 마친다음, 태연히 걸음을 옮겨 문을 향했다.
  니콜라이는 러시아 KGB의 후신인 국가안전 보장성에서도 우수한 
공작원이다. 하지만 이런경우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당한 
적은커녕,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백무명이 문으로 다가섬을 보자, 입구에 있던 러시아인이 그에게 
권총을 겨누었다. 얼굴은 무표정했다.
  니콜라이가 그 광경을 보고 싸늘히 웃었다.
  "설치지 않는 게 좋을 걸... 세계제일의 두뇌라도 총을 맞으면 
죽게 되니까 말이야."
  하지만 백무명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자신에게 권총을 겨눈 
러시아인에게 계속 다가서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눈앞에 겨누어진 
총이 보이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쏘겠다."
  러시아인이 권총에서 안정장치가 풀리는 차가운 금속음을 울려 
내면 내뱉았다. 움직임 하나하난가 프로패셔널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순간에 경악으로 눈을 부릅떠야 했다. 
놀랍게도 백무명이 그가 말은 하는 순간에 대체 언제 다가왔는지 
이미 그의 총을 쥔손목을 움켜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내 우두둑! 하는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지독한 고통에 못이겨 총을 떨어뜨려야 했다.
  "으아악!"
  참혹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백무명이 그의 손을 잡아 비틀어 
총을 떨어뜨리게 한 다음, 그를 마치 어린아이가 곰인형을 
집어던지듯 맞은편 벽에다 집어던진 다음이었다.
  꽝...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러시아인이 온몸으로 벽의 
강도를 시험해보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 널부러질 때, 백무명은 
이미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탕!
  뱍무명의 귓전을 스치며 총탄이 한 방 날아와 문에 틀어박혔다.
  니콜라이가 소파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뜻밖의 사태에 납더이처럼 굳어 있었다.
  "죽고 싶은가, 안드레이?"
  무섭게 굳은 음성이 니콜라이에게서 흘러나왔다.
  백무명은 손잡이를 잡은 채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무릇, 생명채란 본능적으로 삶을 원하게 되는 법이지... "
  그의 어깨가 격렬하게 문으로 부딪쳐간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몸짓에 잠겨진 문이 수수깡으로 만든 것처럼 통째로 
부서져 나간 것은 너무도 간단했다.
  '맙소사 ... 이럴 수가?'
  눈앞에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사태에 니콜라이가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반사적으로 총을 쏜 것은 백무명의 모습이 부서진 문과 
함께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잠겨진 문밖으 몇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현관이었으며, 그리고 그 
바깥은 이 별장의 정원이었다. 소나무와 잣나무, 거기에 측백까지 
각종 상록교목이 울창한 숲과 같은 정원이었다.
  백무명은 문을 부순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계단을 
굴러내려와 현관 앞에서야 몸을 세울 수 있었다. 그도 자신이 문을 
그처럼 간단히 부술 수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탕!
  총소리와 함께 막 몸을 일으켜 세우는 백무명의 오른쪽 가슴에 
뜨거운 불길이 파고 들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백무명은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했다.
  불과 3미터도 되지 않았다. 현관의 앞에서 러시아인 하나가 
자동권총을 겨누고 그를 향해 무표정하게 러시아어로 소리치고 
있었다.
  "얌전히 안으로 들어가.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는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다!"
  그는 백무명의 머리에다 총을 겨누며 위협했다. 러시아제 군용 
권총인 PM은 가장 파괴력이 강한 권총 중 하나다. 그것은 위협이 
아니었다. 이정도의 거리에서는 제아무리 소형권총이라도 머리를 
팝콘처럼 날려버릴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총에 맞은 백무명이 그 거리를 단숨에 도약하여 지신이 채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의 턱을 걷어찰 수 있으리라는 것을.
  퍽!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서 
허수아비처럼 5, 6미터를 날아가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그는 
움직이지조차 않았다.
  백무명은 공중으로 도약하여 그의 턱을 걷어차고는 마치 
고양이처럼 사뿐히 땅으로 내려졌다. 도저히 총에 맞은 사람 같지 
않은 놀라운 동작이었다.
  타앙!
  그러한 그의 등에 다시 한 발의 총탄이 작열했다.
  꿈틀했던 백무명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다.
  현관에서 니콜라이가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니콜라이가 무서운 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에 
놀람이 깃든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그러나 게임은 끝났어. 더 이상 나를 화나게 
한다면 정말... "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백무명이 놀라운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았으므로.
  "이런 미친 ... 죽으려고!"
  동시에, 그의 손에 있는 자동 권총이 미친 듯이 불을 뿜었다. 
그는 탄창이 비도록 자신을 덮쳐오는 백무명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쏜 총탄이 모조리 백무명의 가슴에 
작열함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무명의 주먹이 그의 턱을 
치고, 구겨진 휴지조각처럼 바닥에 처박히면서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총알릉 맨몸으로 받아내면서 달려와 한 주먹에 레슬링과 권투로 
다져진 자신의 턱을 이렇게 간단히 날려버릴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할 수가 없으므로.
  백무명은 니콜라이의 턱을 날려버리고는 그 자리에 서서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희미하게 드리워지는 달빛 아래, 그의 가슴팍 
옷이 마치 걸레처럼 뻥뻥 뚫려 있었다.
  니콜라이는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쏜 총알은 모두 백무명에게 적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백무명의 피부에 흔적을 남겼을 뿐, 그의 가슴에 상퍼를 입히진 
못했다.
 신인류의 몸은 보통의 총알로는 해를 입힐 수 없다. 라이프 
프로젝트에 의해 탄행된 신인류의 신체는 염기조작으로 강화되어... 
  백무명은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 보며 자신의 뇌리를 스쳐가는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신인류... ?"
  신음처럼 한 마디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는 시선을 돌려 피투성이로 쓰러진 사람들을 일별했다. 참혹한 
모습이었다. 모두 가공할 힘에 의해 피투성이로 누워 있었다.
  무명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자신의 손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아니, 피로 
물들어 있는 듯 느껴졌다. 사람을 죽이다니... 이 손으로.
  무명은 이를 악물며 몸을 돌렸다.
  렌스는 정원 숲속 어둠 속에서 떠나는 무명의 등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손가락이 긴장으로 굳어들고 
있었다. 무명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렌스는 한숨을 쉬며 권총을 내리고 말았다.
  그가 조직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백무명을 살해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루가 레드호크 44메그넘이 소련제 군용권총인 
PM보다 강력하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한 발 앞서 백무명을 납치한 러시아인들의 화력은 
자신보다 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차가운 이슬을 맞으며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확신이 서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조직의 율법이다.
  이 일은, 이 믿기지 않는 일은 조직에 보고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지시를 따를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를 죽이라면, 그때부터 그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부우웅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그렌저 한 대가 별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별장의 현관에 도착한 그랜저에서 내린 사람은 이반 
로가체프였다. 그는 부서진 현관문과 나뒹굴고 있는 러시아인을 
발견하지 안색이 변해 황급히 별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현관 안에는 니콜라이가 턱이 부서진 채 피투성이로 신음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안드레이는 어디 있나? 어떻게 된 거야?"
  이반은 그를 안아 일으키면서 소리쳤다.
  "가... 가 안드레... 이... "
  니콜라이가 목에서 가래끓는 소리를 내면서 중얼거렸다. 거의 
감겨진 풀린 눈에는 한 가닥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
  "안드레이란 말인가? 안드레이가 이렇게 했다고?"
  "초... 총에 맞고도... "
  니콜라이는 안간힘을 다해 말을 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반의 눈에 저쪽 벽을 피칠하고 나가떨어져 있는 라시아인이 
들어왔다. 벽에 부딪힐 때 그린 듯 머리가 부서지고 팔뚝이 부러져 
있었다. 즉사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반의 눈에는 경악이 물결치고 있었다.
  '총에 맞고도 이들을 이렇게 했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가는 한 생각에 그는 문득 
전율하고 말았다.

  지문은 같으나 성문은 틀린, 동일인이면서 또한 동일인이 아닌 
것은... 

  '클론(clone;복제)?'
  이반은 눈을 부릅뜨고서 바깥 어둠을 노려보았다.
  '미국을로 망명한 뒤에 복제인간을 연구하고 있다고 하더니, 그럼 
그것이 안드레이의 복제였단 말인가?'

  다음날, 잠실구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암표상이 제철은 만난 듯 설치고 미처 입장하지 못한 팬들이 이미 
닫힌 문앞에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작년 꼴찌에서 올해 일위로 뛰어오른 레드 드래곤과 작년 최강 
화이트 호크와의 복수 3연전이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백무명에게 잇달은 패배를 당한 화이트 호크.
  한국최고의 투수 곽거명, 메이져리그에 가도 당장 20승 이상이 
가능하리라던 화이트 호크의 그 곽거명이 백무명과의 선발 맞대결을 
외치고 이를 갈고 있음이 스포츠 신문 1면을 도배한 것은 벌써 며칠 
전부터였다.
  하지만 백무명은 등장하지 않았고, 선발 등판한 곽거명의 역투에 
눌려 레드 드래곤은 4:0으로 리드당하고 있었다. 그나마 6회 
들어서는 3실점 이후에 다시 무사 2, 3루의 절대위기에 직면하였다.
  백무명! 백무명... ! 입추의 여지없이 잠실구장을 매운 팬들이 
백무명을 연호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분노가 깃든 함성이었다. 
하나 줄 이물질들이 그라운드로 날아 들어오고 있었다.
  임병권 감독은 납덩이 같은 얼굴로 팔짱을 낀 채로 벤티에 깊숙히 
박혀 있었다. 관중들의 소란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무명은 아직 연락 없나?"
  "아직... "
  옆에 있던 기록원이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 순간, 화이트 호크의 4번타자가 친 타구가 까마득히 하늘을 
날아 그대로 센터를 넘어갔다. 스리런 홈런이었다.
  스코어는 순식간에 이미 7:0.
  레드 드레곤의 팬들에게서 미스터 X는 어디 갔느냐는 욕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백무명을 찾던 흥분한 
팬들이 팬스를 넘어 레드 드래곤의 덕아웃으로 가서 항의를 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경기가 중단되었다.
  그 광경을 나래는 초췌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가다렸지만 경찰까지 출동해서 사태를 진압할 단계에 
이르는 이젠 도저히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와와! 마치 태풍과도 같은 함성이 쫓기듯 야구장을 빠져 나오는 
나래의 뒤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계속된 경기에서 화이트 호크가 
다시 홈런을 쳐 스코어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더 이상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
  나래는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차문에다 키를 꽂으며 결심했다. 
이렇게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유나래씨죠?"
  막 문을 여는 나래의 뒤쪽에서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흠칫, 놀라 몸을 돌린 나래의 뒤쪽에 얼핏 봐도 180은 충분히 
넘는 거구의 사내 하나가 우뚝 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누구신지... 전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로버트 박이라고 합니다. CIA에 있습니다."
  "CIA"
  거구의 사내의 대답에 나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일반인에게 있어 CIA란 늘상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단어다. 
그런데 그런 조직의 사람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미국 사람이 아닌 동양인이... 
  "백무명의 일로 찾아왔습니다. 잠시 시간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말은 정중했다. 하지만 그가 백무명을 찾아왔다는 말은 나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CIA에서 무엇 때문에... ?"
  나래의 물음에 로버트 박은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우린 그가 어젯밤에 납치를 당했고, 그를 납치한 자들이 러시아 
국가 안전보장성 요원인 것과 그가 납치된 곳에서 탈출한 것까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 국가 안전보장성 요원이라는 말이 귀를 자극했지만, 
지금의 나래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탈출했다는 말이었다.
  "탈출했다구요?"
  "그렇습니다."
  "어, 언제요? 그는 지금 어디 있나요?"
  다급한 나래의 물음에 로버트 박의 눈에 실망의 빛이 스쳐갔다.
  "그것은 아직 우리도 모르고 있습니다. 혹시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까?"
  로버트 박의 되물음에 나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만약 그에게서 연락이 오면 바로 내게 연락해 주십시오. 
러시아측에 먼저 발각되면 큰일이니까요."
  로버트 박이 명함 한 장을 꺼내 나래에게 내밀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CIA와 러시아에서 그를 찾는 거죠?"
  나래가 그 명함을 받으며 물었다.
  로버트 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중요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부아아앙!
  나래의 차가 격렬히 소리치며 올림픽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세찬 바람이 격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었다. 100km, 110km, 130km... 엑셀레이터를 밟아대 속도계가 
마구 올라가지만 답답한 가슴을 마찬가지였다.
  난마처럼 헝클어진 나래의 뇌리에 무명의 지난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달려오는 차를 맨손으로 세우는 것에서부터 태산 그룹의 
첨단연구소 고백문 박사팀이 만든 4SK의 단점을 단숨에 짚어대는 
놀라운 능력들과 그 가공할 폭풍투... 
  그는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로버트 박의 마지막 말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그래... 그가 평범한 사람일 리는 없어!'
  나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그 순간, 나래의 후태폰이 낮게 울렸다.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나래가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무명 씨?"
  후대폰을 든 나래의 눈에 반가움과 놀람이 한데 뒤엉키며 
폭죽처럼 솟아올랐다. 반사적인 외침이 그녀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터져나왔다.
  "... 거기 어대에요? 괜찮아요?"

  쏴아아... 갈매기가 낮게 날고 있다.
  그 배경으로 파도가 느물거리며 천천히 밀려왔다. 다시 물러나는 
모습이 저 멀리 보이고 있었다. 개펄에 앉아 어구를 손질하는 
어부들의 손길이 어딘지 모르게 여유롭게 보이는 곳. 불과 수십 
호의 어촌이지만 그래도 구멍가게형 슈퍼가 있고, 거기에는 
공중전화도 있었다.
  백무명은 거기서 나래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무명은 갈매기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미미하게 웃었다.
  "별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어디냐구요? 왜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격하게 소리치던 나래의 전신이 다음에 들려오는 무명의 말에 
의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내 과거가 생각났소! 난 안드레이 김이 아니오. 난... α7호라고 
불리는 신인류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명이 암울한 빛으로 굳어진 얼굴로 쓰게 웃었다.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사실이오."
  "바닷가요."
  무명이 푸르른 수평선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끼이익! 나래가 급격하게 차를 갓길로 뽑아 급정차시키며 
소리쳤다.
  "그냥 바닷가라고 하면 어떻게 찾아가요?"
  무명은 등을 슈퍼의 벽에다 기댔다. 그의 눈은 고뇌로 굳어 
있었다.
  "우린... 더 이상 만니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무슨 소리예요? 대체 왜 그래요"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
  무명은 입술을 깨물었다. 러시아인들의 수중을 벗어나자, 자장 
먼저 생각난 것은 나래였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음성을 듣자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해져 왔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대ㅊ에 무슨 
이유일까. 그의 뇌리에 프로그램된 것에는 이러한 느낌에 대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연락하겠소... "
  무명은 시음하듯 중얼거렸다.
  그 순간
  "안 되요! 끊지 말아요! 무명 씨! 난 당신을 사랑해요! 알겠어요?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단 말이예요!"
  전화기를 통해 터져나온 나래의 외침은 정녕 거대한 힘으로 
무명의 고막을 뒤흔들고 있었다. 무명의 뇌리에 프로그램된 모든 
지식들을 다 동원해도 전화를 통해서 그러한 거대한 힘을 가진 
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해석이 불가능했다.
  지식이 어찌 인간의 마음까지 해석할 수 있으랴.

  노을이 불타고 있었다. 푸르른 바다가 온통 금빛이 되는 
듯하더니, 하늘이 모조리 불바다가 되고 솜사탕 같은 구름들이 
현란한 빛깔로 몸을 뒤채고 있었다.
  갈매기들이 집으로 돌아가려는 듯 울어대며 삼삼오오 바쁘게 날오 
있는 석양의 바다... 통통배는 집을 찾아 그 바다를 숨가쁘게 
건너오고 있었다. 만선의 비릿한 내음을 풍기며.
  그 바다를 등진 무명의 긴머리는 석양을 받아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듯 했다.
  나래는 눈부신 듯 그를 보고 있었다. 숨이 턱에 닿게 달려온 
스포츠카에서 막 내린 그녀의 눈, 바다의 황금빛에 반사된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격동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억겁인 듯 찰나인 듯, 더대한 침묵이 벽으로 그들의 앞에 
바티고 서 있었다.
  하지만, 쏴아아... 파도소리가 들리는 순간에 그 침묵은 
모래성처럼 간단히 부서져 나가고 말았다.
"  무명 씨... "
  그녀의 입에서 무명을 부르는 말소리가 흘러나온 것과, 그녀가 
무명의 가슴으로 뛰쳐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정말, 정말로!"
  그녀는 무명의 가슴을, 등을 부둥켜 안으며 부르짖었다. 그 
외침은 구천에서 떨어져 내리는 은하수보다 더 격렬했다.
  무명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렇게 소리치는 나래를 
안고서 묵묵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향기로운 그녀의 
머리내음이 바다의 비릿함을 씻어주었다.
  가슴 가득 뭔가 할말이 많앗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본 
순간, 그녀를 품에 안은 이 순간에는 머리 속이 텅 비어버린 듯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도 그랬소... "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겨우 그 한 마디였다.

  그 휘황했던 노을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묻혀 들어가고 있었다. 
파도가 흰 포말로 그들의 발밑까지 말려왔다가 가무러치곤 했다.
  나래의 스포츠카를 등지고 앉은 두 사람은 노을이 떨어지는 
바다를 그렇게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연락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기다렸는데... "
  나래는 무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입을 열었다.
  "... "
  무명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래가 고개를 들어 무명을 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신인류라는 말이?"
  무명은 여전히 바다에 시선을 둔 채로 대꾸했다.
  "만들어진, 창조된 인간이란 뜻이오. 아마... 내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과거가 없기 때문일 거요."
  "무슨 그런 말이 있어요? 과거가 없다니... "
이어지는 무명의 말에 나래는 기가막힌다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이요. 살아 온 사람에겐 과거가 있지만 말들어진 
사람에게는 과거가 존재할 수 없으니까."
  나래는 이해할 수 없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가 있어요? 
사람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거예요... !"
  "현대과학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있소."
  무명은 말하다 갑자기 소리쳤다.
  "아직도 모르겠소? 내가 안드레이 김과 닮은 이유를? 난 그와 
닮은 것이 아니라, 그의 복제인간이란 말이오!"
  나래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뜻은 이해가 되지만 상황은 전달이 되지 않았다.
  복제인간이라니... 그것이야말로 SF소설 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무명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삐어져 나오는 
머리카락들이 그의 고뇌를 상징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도 모르겠소. 뭐가 뭔지... 하지만 지금 내가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내게 할 일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이제부터 누군가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뿐이요. 그것밖에는 더이상 생각이 나질 않소."
  무명의 선이 일그러진 얼굴은 그의 심중 괴뇌를 대변하고 남음이 
있었다.
  문득, 무명은 따듯한 체온이 자신의 등으로 전해오는 것을 
느꼈다. 나래가 등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입을 열고 있었다.
  "당신이 지난날 무엇이었어도 상관없어요... "
  그의 등에 얼굴은 묻고 눈을 감은 나래의 얼굴은 환하게 빛을 
뿜고 있는 듯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백무명, 내가 이름을 
지어준 바로 당신이니까요!"
  소리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진실이 담긴 인간의 말소리, 사랑하는 여인의 진정어린 
말소리에는 실로 가공할 힘이 담겨있음을 무명은 오늘 분명히 알게 
되었다. 가슴이 터지는 듯했다.
  무명은 나래의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그를 보고 있었다.
  이젠 알 수 있었다.
  듣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읽고 들을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나래... 당신은 바보로군."
  마치 신음과 같은 음성이 무명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적어도 백무명이란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를 사랑하기 
전까지는 똑똑하단 소리를 들었었어요."
  그를 보며 싱그럽게 웃던 나래의 얼굴이 문득 굳어졌다.
  한 사람. 석양이 무너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백사장을 거구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요?"
  그를 보면서 무명이 물었다.
  "로버트 박이라고... CIA의 사람이예요."
  "CIA"
  무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로버트 박이라고 합니다."
  로버트 박은 쾌활하게 말하며 무명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여기를 어떻게 알고... ?"
  나래의 말에 로버트 박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선이 그어졌다.
  "그 정도를 모른다면 CIA는 이미 오래 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겁니다."
  "나를 찾아온 이유는?"
  무명이 로버트 박을 바라본 채로 입을 열었다.
  로버트 박은 자신의 내민 손을 내려다 보더니 씨익,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모시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안드레이 김이 아니오."
  "당신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무명의 얼굴에 싸늘한 웃음이 스쳐갔다.
  "데리고만 가면 된단 말이로군... !"
  무명은 나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갑시다."
  하지만 차를 향해 걷던 두 사람은 불과 몇 걸음을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야 했다. 어느새 나래가 타고 온 스포츠카의 앞에는 
동양인 2명과 서양인 3명이 석상처럼 늘어서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 "
  무명이 차가운 눈길로 로버트 박을 노려보았다.
  "같이 가야만 합니다."
  담담한 미소를 띠운 채 말하던 로버트 박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드러났다. 무명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모를 찰나에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비키게 하지 않으면 저들은 다치게 될 거요."
  "그럴 순 없소. 이건 명령이니까... "
  마지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버트 박의 입에서 토막치는 듯한 
기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의 손이 무명의 손을 부여잡는가 싶더니, 
마치 솜인형을 집어던지듯 무명을 모래바닥에다 집어 전져 버린 
것이다.
  "무명 씨!"
  나래가 그 광경에 비명을 질렀다.
  모래를 뒤집어쓰고서 얼떨떨한 듯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키는 
무명을 나래가 부축하는 것을 내려다 보며 로버트 박이 자신있는 
웃음을 떠올렸다.
  "나를 멍청한 러시아 국가 안전보장성의 애들로 착각하지 않는게 
좋은 거요. 태권도 6단에 유도 4단, 검도 3단 등등해서 내가 가진 
단수는 총 20단이 넘으니까 말이오."
  피식, 미묘한 웃음 한 줄기가 무명의 입가에 매달렸다.
  "그렇긴 하군! 하지만 얼마나 다른지 봐야겠군!"
  그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맹세코, 로버트 박은 그처럼 빠른 도약을 본 적이 없었다. 모래 
바닥에 쓰려져 있던 무명이 땅을 박차는 순간, 이미 그를 자신의 
어깨로 받아버리고 있었다.
  붕!
  로버트 박은 자신이 날아갔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더니 이내 강렬한 충격이 전신에 
엄습해왔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고 잠시 
동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이건 아이스하키 전 미대학 선수권전 때 당한 보디체크보다 더 
엄청나군... 비교조차 할 수 없어!"
  무명은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로버트 박을 내려다 보며 차갑게 
말했다.
  "난 당신을 죽일 수도 있소.'
  "나를 죽인다 해도 CIA를 피할 수는 없을 거요."
  로버트 박의 침착한 대답에 무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몸을 일으킨 로버트 박이 무명을 바라보며 침착히 말했다.
  "장담하건데, 살아있는 한 CIA의 추적을 피할 순 없을 거요. 
더구나 러시아 국가 안전보장성에서까지 당신을 쫓고 있는데 어디로 
갈 생각이오? 내가 아는 한, 이 두곳에서 추적을 시작하면 
지구상에는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소."
  "... "
  한 가닥 신음이 무명의 가슴속에 스쳐갔다.
  그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저들을 따라간다구요? 왜요?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죠? 당신은 
당신이 살고 싶은 곳에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나래가 입술을 깨물었다.
  "필요하시면, 그룹의 모든 힘을 기울여서라도 법적 투쟁이라도 
하겠어요! 무명 씨... "
  무명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이건 내가 가는 거요. 내 스스로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시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나래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시키다니... ? 누가요?"
  무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안드레이 김이오!"
  무명은 나래의 얼굴을 보며 한 자 한 자 천천히 힘주어 말했다.
  "그가 내 니리 속에서 내게 명령하고 있소. 미국을... 세계를 
구하라고... "
  알 수 없는 소리다.
  무명조차도 아직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저 지금은 헤어지는 이 순간만이 새롭게 탄생한 연인의 가슴을 
아프게 헤집어 놓을 뿐이다.
  어둠이 이별을 서러워 하듯 그렇게 그들은 감싸며 온통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천지가 어둠뿐이다.
  나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9장 습격
  CIA는 전세계 도처에 안가라고 불리우는 크린룸을 마련해두고 
있다. 그것은 한국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한남동 외국인 주택가.
  뒤로 남산을 끽 앞으로 한강을 둔 그곳에 CIA가 마련한 안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안가라고는 하지만 따로 자리한 주택이 아니라 
15층의 외국인 아파트였다. 동양계인 한국사람들고 표가 나지 않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마련된 곳이라고나 할까.
  외국인 아파트 7층의 701, 702, 703호 세 곳은 모두 CIA의 
안가였고 그 중 실제로 사용되는 곳은 가운데 위치한 702호였다.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어둠이 깔린 강변이 희뿌연 안개에 묻혀들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달리는 차들의 불빛도, 가로등의 불빛들도 흐르는 빗물에 젖어 
가물거리고 있었다.
  백무명은 발코니에서 강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차츰 굵어져 소리를 내며 
뿌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와이셔츠바람에 멜빵을 멘 로버트 박이 
홈바에서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한 잔 하겠소?다
  로버트 박이 발코니의 무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 핫카우보이(Hot Cowboy) 란 놈을 매우 좋아하는데 말이오. 
생각이 있다면 한 잔 만들어 주겠소."
  "핫 카우보이라면 위스키를 올드패션 글라스에다 따르고 따뜻한 
우유를 섞어 마시는 것일텐데... 복잡한 걸 싫어하는 모양이군."
  무명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로버트 박은 우유를 들고서 흠칫하더니 이내 껄껄 웃었다.
  "맛소! 언제 어디서나 우유만 있으면 만들 수 있으니 편한 거지. 
탐앤드제리(Tom & Jerry) 처럼 럼에다 브랜디에다 설탕, 거기다 
계란까지 집어 넣게 된다면 그거야 어디 칵테일이라 할 수 있겠소? 
비빔밥이나 비빔탕이겠지... 생각있소?"
  "생각없소."
  "그럼 오늘은 일찍 자두는 게 좋을 거요. 내일 아침 일찍 
공군기지에서 특별기편으로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게 될테니까 
말이오."
  그 말에 무명은 고개를 돌려 로버트 박을 바라보았다.
  "내일?"
  로버트 박은 칵테일 잔을 들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그래서 지금 당신을 위해 특별기가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는 중이오."
  "... "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무명은 다시 시선을 밖으로 던졌다. 
보이는 것은 비에 젖은 한강... 아니 그도 아니었다. 어둠에 묻힌 
한강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 줄은 꿰듯 그렇게 
달려가고 잇는 가로등의 불빛들만이 안개 속에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무명은 그 속에서 나래의 얼굴을 찾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나래가 활짝 웃으며 달려올 것만 같았다.
  아주 여러 해 전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이 알지도 몰ㄹ 한 소녀가 살았다.
  그녀의 이름은 애너벨 리.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은 받는 일 밖엔
  소녀는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았다네... 
  문득, 무명의 뇌리에 포우의 애너벨 리가 또올랐다.
  지금 이 시각에 왜 그 시가 떠올랐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 
애너벨 리를 그에게 세포를 주고 생명을 제공한 안드레이 김이 
좋아했던 시임을 그가 알 리 없었다.
  그가 사라 오스먼드에게 그 시를 읊어주길 좋아했다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 여자를 생각하시오?"
  로버트 박이 그의 곁에 서며 물었다.
  무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로버트 박은 수중에 든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잊어버리는 게 좋은 거요. 그 여자는 한국사회의 
귀족계급이니까.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신을 잊을 거요."
  "... "
  무명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보았다.
  "기분 나쁘게 생각할 것 없소. 난 일반론을 말한 것 뿐이니까. 
그리고 어느 나라나 상류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속성이 추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도 하고. 물론, 그 여자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
  무명은 그늘진 얼굴로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문득 그에게서 흘러나온 말소리.
  "골든 게이트(Golden Gate) 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소?"
  로버트 박의 표정에 기이한 빛이 스쳐갔다.
"골든 게이트?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말하는 거요?"
  무명은 고개를 저었다.
  "단체의 이름이오. 세계를 노리는... "
  "세계를 노리는 단체? 그게 무슨 소리요? 누가 세계정복을 
꿈꾸기라도 한단 말이오?"
  "그럴지도... "
  일순, 어이없다는 빛이 로버트 박의 얼굴에 스쳐갔다.
  "지금 농담하는 거요? 일개 단체가 세계정복을 노린다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공상영화나 소설 속의 세계인지 알고 있는 거요? 
거기 내재된 복잡미묘한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 "
  "만약 미국이 장악된다고 해도 말이오?"
  "!"
  로버트 박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무명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소. 아직은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르니까."
  '골든 게이트? 세계정복을 꿈꾸는 단체라니? 대체 이 친구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로버트 박은 눈을 끔벅이며 무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명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외룹게 찾아왔다.
  외롭게 떠나오.
  오월은 꽃이 피어
  향기로웠건만
  사랑한다는 소녀 그 어디에 갔나
  사랑한다는 그 소녀 어디에 갔나.
  아 어두운 이 세상 눈으로 덮였네
  아 어두운 이 세상 눈으로 덮였네.
  나 언제 길 떠날지
  그때를 모르네
  나 홀로 어둠 뚫고
  정처없이 가네... 

  빌헬름 뮐러(Wihelm Myller)의 시에서 슈베르트가 발췌해 
만들어낸 이 겨울나그네  원래 이 겨울나그네의 원제는 
'Winterreis'로 영어로 'Winter Journey'이므로 겨울여행이나 겨울 
나그네길이 옳바르지만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C단조가 운명이라고 
굳어져 있듯이 겨울나그네로 통칭되고 있다. 는 나래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
  세계적인 콤비라 불리던 벤저민 브리튼의 피아노에 어우러진 테너 
피터 피어즈의 이 겨울나그네는 늘 나래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창가에 넋을 잃은 듯 기대선 나래에게 있어 
이 노래소리는 가슴을 찢어내는 아픔ㅇ르 더 하게 했다.
  열린 창문에서는 간간히 빗방울이 튀고, 밤바람이 커튼을 
뒤흔들며 그녀의 얼굴을 쓸고 갈 때마다 그녀는 가슴저미는 슬픔이 
전신을 파고듦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흘러낼니 것일까.
  눈물이 그녀의 빰을 흘러내려 목덜미의 잠옷을 적시고 있었다.
  나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깨물어도 아프던 입술이었다.
  하지만 피가 배어나오게 깨물어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가슴만이 그렇게 아팠다.
  바보! 그렇게 갈 바에는 왜 내 앞에 나타나 가지고... 
  마침내 나래는 얼굴을 감싸쥐고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비는 점점 더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이 먹장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김포공항.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하늘을 덮고 있었다.
  간혹 이슬비가 흩뿌려진 하지만 비는 개이고 공기는 싱그러웠다. 
해가 뜨려면 아직 조금은 시간이 있었다. 안개를 뚫고서 동녘이 
희뿌옇게 밝아져 오고 있었다.
  활주로 끝에는 사업용 제트기 하나가 안개 속에 사뿐히 자리하고 
있었다.
  늘씬한 동체를 뽐내기라도 하듯 서 있는 비지니스용 제트기는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 사의 BAe 125800, 전장 15.59미터 
날개길이 15.66미터에 최대 탑승인원 8명인 BAe 125800은 가렛사의 
TPE 7315 터보팬 엔진 2개를 탑재해 746km/ h의 속도로 4910km를 
순항할 수 있다. 연료주입 한 번으로 무려 4910km를 날아갈 수 있는 
비지니스 제트기의 최신 기종이었다.
  어젯밤, 숨가쁘게 태평양을 날아 온 그 BAe 125800은 기다리더 
ㄴ사람을 태우고 이륙을 위해 엔진추력을 높이고 있었다.
  관제탑의 이륙허가를 받자, BAe 125800은 맹렬하게 활주로를 
니끄러지더니 있는 힘을 다해 대지를 박차고 떠올랐다.
  이륙한 제트기는 김포공항을 비스듬히 한 번 돌고는 방향을 잡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대체 저기 누가 타고 있기에 예정에도 없다가 돌연 대기하고 있던 
KAL기와 노스웨스트를 젖혀두고 먼저 이륙을 시키는 겁니까?"
  관제탑에서 부관제사가 다음 이륙지시를 내리고 있는 관제사에게 
물었다.
  "낸들 아나?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는 지시니까."
  부관제사는 까마득히 사라지고 있는 비지니스 제트기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겨우 몇 사람이 타고 가는 것 같던데... 미국 정부요인이라도 
왔다가 가는 건가? 어쨌든 팔자좋군! 자가용 제트기라니."
  일단 하늘에 떠오르게 되자, 구름이 저 만치 눈아래 깔리게 
되면서 안개가 사라졌다. 태양이 눈부시게 떠오르고 있었다.
  조종사는 비행고도가 순항고도인 25000피트에 이르게 되자 
자동비행장치를 작동시키고 조종간에서 손을 뗏다.
  덩치가 큰 여객기의 경우 순항고도는 35000피트다. 35000피트라면 
1만5백미터 정도의 높이다. 공기의 저항이 적고 시속 500노트로 
날아가도 1천5백미트를 200노트로 날아가는 것에 비해 연료소모가 
절반에 불과하다.
  비지니스 제트기인 이 비행기는 25000피트가 적정한 고도였다.
  그는 나머지 조종을 부조종사에게 맡기고 조종석에서 일어나 
자신의 비행기에 탄 손님들에게 다가갔다.
  "불편한 것은 없으십니까?"
  "전혀. 아주 훌륭한 이륙이었소."
  로버트 박이 그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고맙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조종사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창밖을 내다보는 
백무명을 힐쓰ㅅ 바라보았다. 그는 훈련합든 사람인지라 고객에게는 
일체의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다시 조종석으로 돌아갔다.
  자리는 썩 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좋았다.
  목표지점에 도달할 때까지는 비행기는 저절로 나아갈 것이고 
나머지는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될 것이다.
  화물칸에 처박아둔 조종사의 시체는 발견될 가능성이 없었다. 
비행기조차 발견되지 않을테니까.
  렌스는 음산히 웃었다.
  "덕분에 자가용 제트기를 다 타보고... 호사하는데."
  로버트 박이 옆의 백무명을 보고 웃었다.
  묵묵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백무명이 그를 보았다.
  "이 제트기도 CIA의 소유요?"
  "물론, 기밀유지를 위해 여객기가 아닌 개인전용기를 동원했는데 
이걸 어디서 빌려요게 된다면 의의가 없지 않겠소?"
  그는 힐끗 간막이가 된 조종석을 바라보곤 다시 말했다.
  "음악을 듣던지, 아니면 영화를 볼 수도 있을 거요. 그것도 
아니면 어젯밤에 못 잔 잠을 잘 수도 있을 것이고... 자는 게 제일 
좋겠군! 자고 나면 미국에 도착해 있을테니까."
  "... "
  무명은 대답대신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딘지 쓸쓸했다.
  '여자를 생각하나?'
  보기보다 더 순진한 친구로군.
  그 모습을 보고 로버트 박은 씨익, 웃었다.
  그리곤 그는 팔짱을 끼고는 길게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오랜 시간 긴장되 ㄴ생활에 젖어 온 그는 시간이 있으면 몸에 
휴식을 주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푸른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와 같이 비행기는 조용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비행기의 안에는 세미클라식이 은은히 흐르고 있어 고요했다.
  렌스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잠든 것 같았다.
  그는 부조종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부조종사는 175cm의 탄탄한 체구를 지닌 삼십대 후반의 
독일계로서 이번 일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었다.
  그는 렌스의 눈짓에 몸을 일으켜 고양이처럼 조용하고도 날렵하게 
무명과 로버트 박이 잇는 객석으로 다가갔다.
  이 비행기는 비지니스기이지만 사람이 활개를 치고 걸을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세미클라식은 자장가처럼 기내에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두사람은 곤한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진 듯한 로버트 박을 일별한 부조종사는 
품속에서 육중한 형태의 권총을 꺼내 백무명의 머리를 겨누었다.
  바로 그순간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인다면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
  사늘하고도 날카로운 음성이 숨막힐 듯한 긴장을 깨뜨리며 
들려왔다.
  로버트 박이 어느 새 권총을 꺼내들고 부조종사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그는 잠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 그 총을 내려놔."
  로버트 박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의 주문에 부조종사는 멈칫하는 것 같더니 이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 그의 손에서 권총이 백무명을 행해 불을 뿜었다.
  그것은 단숨에 탄창을 다 비워버리려는 듯 격렬했다.
  로버트 박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어찌 이러한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었으랴.
  부조종사의 최초 일발이 발사된 것과 거의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권총도 그를 향해 불을 뿜었다. 찰나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단숨에 탄창을 다 비워비릴 듯 총을 싸댄 
부조종사가 천천히 몸을 돌려 로버트 박을 쳐다 보는 것이 아닌가. 
음산한 눈빛에는 고통의 빛조차 없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로버트 박은 오싹 소름이 끼쳐왔다.
  총을 맞고도 끄떡도 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니.
  그는 반사적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부조종사의 가슴에다 나머지 
총탄을 다 쏟아부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부조종사는 정말 끄떡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손을 내밀어 로버트 박의 손에 들린 권총을 덥썩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괴이한 금속성과 함께 그의 손에 움켜쥐인 권총이 장난감처럼 
우그러져 부서졌다.
  "마,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런... ?"
  로버트 박이 입을 딱 벌렸다.
  수십년 총칼 위를 오가는 생활을 한 그도 이러한 경우는 당해 
본적이 없었다.
  "그는 특별난 존재지. 아마 당신의 총으로는 그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걸?"
  나직한 웃음소리가 조종석 쪽에서 들려왔다.
  렌스가 그를 보며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면 그는 로버트 박이 부조종사에게 총을 겨누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으리라.
  "너도 한패냐?"
  로버트 박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조종사가 손에 들린 
권총을 로버트 박의 머리에다 갖다댔다. 가공할 힘이었다. 갖다대는 
동작만으로도 머리를 부수고 들어오는 듯했다.
  와장창 뒤로 밀린 로버트 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것을 보고 렌스가 크게 웃었다.
  "자세한 것은 지옥에 가서 알아보는 게 좋겠군!"
  부조종사가 로버트 박의 머리에 댄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주먹 하나가 옆에서 튀어나와서 
부조종사의 손을 나꿔 챘다.
  타앙! 그의 손에서 권총이 중심을 잃고 천정으로 발사됨과 동시에 
다시 손 하나가 날아들어 무서운 기세로 부조종사의 턱을 쳐 
올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부조종사가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과 같이 
나가떨어졌다. 그의 등에 부딪힌 의자가
우지끈 부서져 나갔다.
  죽었구나 했던 로버트 박의 얼굴에 경악이 드러났다.
  그를 구한 것은 백무명이었던 것이다.
  백무명의 가슴팍은 총격으로 인해 걸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맙소사! 괜찮은 거요?"
  로버트 박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무명은 대답대신 쓰러진 부조종사를 덮쳐갔다.
  그처럼 가공할 타격을 받고 의자를 부수며 나가떨어졌던 
부조종사가 꿈틀하더니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무명이 그를 덮친 순간, 부조종사가 발을 들어 무명을 걷어찼다. 
그것은 무명이 덮치는 힘에다 가속을 붙인 꼴이라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무명이 훌쩍 나가떨어졌다.
  "으악!"
  무명이 나가떨어진 곳에서 참담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가 떨어진 곳은 조종석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의외의 
사태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며 총을 뽑아들던 렌스를 덮쳤던 
것이다.
  무명에 부딪힌 조종석 의자의 등받이가 그대로 꺽어져 나갈 
정도의 타격이었다.
  그러니 그 가운데 끼인 렌스의 처경이야 불문가지일 수밖에... 
  비명과 함께 찢어질 듯 두 눈을 부릅뜬 그의 입에서는 한순간에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총이 손에서 굴러 떨어졌다.
  허공을 헤집은 손가락 끝이 경련을 일으키다 굳어져갔다.
 그것은 렌스의 허망한 최후를 의미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볼 여유를 갖고 있지 못했다.
  부조종사가 번개처럼 무명을 덮치고 있었던 것이다.
  무명은 조종석 의자를 깔아뭉개며 벽에까지 밀려나 있었다.
  부조종사가 헌 손으로 덥썩 무명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로버트 
박의 권총을 으스러뜨리던 힘을 가진 손이었다. 무명의 얼굴이 
단숨에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그리고 부조종사는 및에 갈린 렌스는 
아랑곳도 하지않고 주먹을 휘둘러 무명의 얼굴을 무섭게 후려 
갈겼다.
  쾅! 소리와 함께 그의 주먹이 마치 종이장처럼 비행기의 벽을 
뚫고 팔뚝까지 박혀들었다.
  무명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틀어 주먹을 피한 것이다.
  둘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사납게 얽혀들었다.
  로버트 박이 전율했던 그 음산한 부조종사의 눈빛이 무명을 향해 
음산히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으야아!" 일성 기합을 토하며 부조종사의 뒤에서 
로버트 빅이 두 손을 깍지낀 상태로 격렬하게 그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벽돌도 박살내는 그의 주먹이었다.
  그러나, 부조종사는 괴물과 같았다.
  여전히 끄덕도 없을 뿐 아니라 그는 오히려 한 손을 휘둘러 
로버트 박을 날려보내고 말았다.
  마치 팔랑개비처럼 로버트 박이 날아갔다.
  콰다당 소리와 함께 어린아이가 인형을 집어던진 듯 훌쩍 날아 
올랐다가 로버트 박은 의자너머로 나가떨어졌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
  로버트 박은 이를 악물며 버둥거려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가슴팍이 무너지는 듯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갈비뻐 몇개는 
온전치 못할 듯하였다.
  입에서 울컥 피가 솟구쳤다.
  그때, 그의 눈에 조금 전 부조종사가 떨어뜨린 권총이 들어왔다.
  총기전문가인 로버트 박은 한눙에 그 총이 미군 군용권총인 M1911 
A1을 개조한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강력한 위력을 가진 권총을 통칭 매그넘(magnum)이라 한다. 37, 
44매그넘이 그 종류다. 하지만 이 M1911 A1은 45구경이다.
  현대에 이르러 총탄의 위력은 계속 증가되어 구경의 의미는 
지난날과 달라졌다고 하지만 구경이 크면 위력이 강한 것은 
여전했다. 더구나 저M1911 A1을 개조했다면 위력을 강하게 했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저걸로 놈의 머리통을 쏜다면 혹시?!"
  로버트 박은 이를 악물고서 권총을 집어들었다.
  부조종사는 무명을 무섭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목을 움켜쥔 채로 
틈을 주지 않고서 그를 벽에다 쾅쾅! 밀어대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격렬한지 비행기의 벽이 금이가고 부서져 나가면서 
세찬 바람이 강하게 비행기 안으로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무명의 긴머리가 깃발처럼 세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무명은 안간힘을 다했지만 그이 목을 조이고 있는 부조종사의 
힘은 너무도 완강했다.
  초두랄루민 합금으로 만들어진 벽이 힘을 못이기고 양철조각처럼 
찢어져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몇초가 지나지 않아 그는 정말 
비행기 벽 밖으로 밀려나가고 말 것 같았다.
  세찬 바람이 미친 듯 그의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었다.
  부조종사가 음산히 웃으며 무명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불끈 
가했다. 와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 벽이 더 크게 갈라지며 
무명의 몸이 밖으로 밀려났다.
  바로 그 순간, 탕! 타앙! 총소리와 함께 부조종사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로버트 박이 부조종사의 머리에다 총을 쏜 것이다.
  무명은 일 순간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는 힘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쾅!
  그는 몸을 비틀며 있는 힘을 다해 부조종사의 턱을 갈겼다.
  괴이한 신음과 함께 부조종사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맙소사! 저게 뭐야?"
  그 모습을 보고 로버트 박이 놀라 부르짖었다.
  머리가 터져나간 부조종사.
  그 머리는 터져나간 것이 아니었다.
  머리가죽이 너덜너덜하게 터져 나간 그 머리, 일견하기에 반쯤은 
부서진 듯한 그 속에서 드러난 것은 
허옇게 드러난 뼈나 뇌수가 아니라, 차가운 금속 질감을 느끼게 
하는 금속 반구였다.
  게다가 무명의 일격에 얻어맞으며 더욱 찢어진 그 머리 가죽 아래 
드러난 왼쪽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카메라 렌즈와 같은 것이 
박혀 번쩍이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로군!"
  부조종사의 놀라운 모습을 본 무명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안드로이드라고?!"
  경악해 로버트 박이 부조종사를 보았다.
  안드로이드라는 것은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미래형의 
개조인간이다.
  그런데 현대에 무슨 안드로이드란 말인가.
  하지만 더 이상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 찰나적인 틈에 부조종사는 해머롸 같은 펀치를 휘둘러 무명이 
배를 갈겼다. 퍽소리와 함께 무명이 붕 떠서 나가떨어졌다.
  부조종사는 끔찍한 그 모습으로 바람같이 달려들어 몸을 
일으키려는 무명의 턱을 쳤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무명이 다시금 조종석쪽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하필이면 거의 죽어있던 렌스를 또 다시 깔아뭉개며 나가 
떨어졌으므로 렌스는 영원히 눈을 뜰 일이 없게 되었다.
  무명이 떨어진 곳은 계기판인지라, 삽시간에 불꽃이 투며 조종석 
계기판에서 비명이 일어났다.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지진을 만난 듯 요동치며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더욱 세차게 비행기 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와 비행기 안은 
태풍에 휩쓸린 듯했다. 종이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날아 올랐다. 
사람조차 서 있기 힘들 정도였다.
  탕탕탕!  로버트 박이 부조종사의 등뒤에서 미친듯이 부조종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코끼리라도 잡을 듯한 총탄이 부조종사의 뒷머리와 등줄기에 
작열했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 없이 대뜸
두 손을 내밀어 다시금 무명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무명의 얼굴은 이미 엉망이었다. 코피는 물론이고 입에서조차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특별난 존재가 아니라면 부조종사의 
가공할 주멱에 이미 살아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무명의 멱살을, 움켜쥔 부조종사는 다시금 무섭게 그를 벽에다 
부딪히기 시작했다. 비행기의 벽이 부서져가고 바람은 미친 듯 
비행기를 휘감을며 날아들었다.
  피가 튀며, 무명의 반항이 점점 약해졌다.
  상대는 신인류인 그로서도 상대하기 힘든 무서운 존재였다.
  로버트 박은 무명이 이미 견디기 힘든 상황에 도달한 것을 알아 
보았다.
  미친 듯 방아쇠를 당겼지만 상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나마 이젠 총알이 다 떨어져 버린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로버트 박이 이를 갈며 대뜸 권총을 부조종사의 머리통에다 집어 
던졌다.
  땅! 하는 금속음이 울리며 무섭게 무명을 몰아붙이고 있던 
부조종사가 힐끗 로버트 박을 쳐다보았다.
  카메라렌즈와 같은 눈알이 괴이하게 번뜩였다.
  공포!
  로버트 박은 생전 처음 공포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뿐, 부조종사는 시선을 돌려 이미 거의 반항을 하지 
못하는 무명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 무명의 생사였다.
  렌스의 죽음이나 로버트 박의 존재 같은 것은 그의 안중에는 없는 
것이다. 기실, 무명만 죽인다면 로버트 박을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카메라렌즈와 같은 그의 눈과 무명의 눈이 마주쳤다.
  음산한 웃음이 순간적으로 그의 입가에 스쳐가는 듯했다.
  가공할 위력, 그의 전력을 깃들인 일격은 이미 무명의 얼굴을 
향해 작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명의 눈속에서 기이한 빛 하나가 폭죽처럼 떠오르며, 무라 
형언할 수 없는 일성 기합이 무명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그것은 장관이었다.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
  정녕, 그러했다. 무명을 행해 마지막 주먹을 뻗던 부조종사는 
돌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마치 폭풍
에 휘말린 가랑잎과 같이 붕 떠 날아가 격렬하게 비행기의 문에 
부딪혔고, 그 다음 순간에 폭음과 함께 비행기의 문짝이 뜯겨져 
나가면서 그 또한 문밖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무명은 두 눈을 부릅뜨고서 부서져 나간 문짝, 부조종사가 튕겨져 
나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명의 긴 머리카락, 그 긴머리카락이 마치 살아있는 듯 굽이치며 
그이 전신에서 기이한 힘이 일어나고 있었다.
  가뜩이나 바람이 휘몰아치던 비행기 안이다. 아예 문짝이 뜯겨져 
나가자 세찬 바람이 무섭게 소용돌이치며 쏟아져 들어왔다. 
시베리아 북풍이라한들 이보다 차고 이보다 강할까.
  눈앞에 벌어진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로버트 박은 좌석을 
움켜잡아 버티고 선 채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대체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도, 도대체 이게... ?"
 그 순간, 무명이 피를 토해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윽!"
  그리고 무명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윙윙윙 머리 속에서 강렬한 외침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너는 최고의 능력을 지닌 신인류... 내 능력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그를 찾아야 한다. 명심해라. α7호... 그를 찾아야만 네 
능력이 완전해질 것임을... 그를 찾아라. 그를... 
  "대체 누굴 찾으라는 거요?"
  무명은 머리를 움켜쥔 채로 도리질했다.
  "무슨 소리요? 괜찮은 거요?"
  무명을 부축하던 로버트 박이 얼떨떨해 물었다.
  "그런대로... 견딜만은 하오."
  무명은 눈을 뜨고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한국계라는 것 때문일까.
  무명은 이 덩치의 사내에게서 그새 묘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정이라기에는 너무 이른 감정이었지만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일 것 같았다.
  "대체 어, 어떻게 그런 힘을? 어떻게 된 거요? 당신 초능력자요? 
내가 알기로는 그런 힘은 염동력이라던
가? 영화에서 보던 뭐 그런 것처럼 보이던데?"
  일단 입을 열자. 로버트 박의 입에서는 의문이 폭포수처럼 줄줄이 
쏟아졌다.
  "내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소... "
  무명은 쓴 웃음을 짓는 것은 보곤 로버트 박은 문득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과 급강하하고 있는 비행기를 느꼈다.
  박살이 난 조종석과 거기 죽어있는 조종사 렌스가 눈에 들어왔다.
  "대체 CIA의 특별기에 어떻게 저런 놈들이 탈 수가 있었지? 
한놈도 아니고 그런 괴물까지...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릴 노리고... 
"
  "우리가 아니라 나를 노린 것이오."
  무명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쾅! 충격이 비행기에 전해지면서 
비행기의 천정이 터져 나갔다.
  문밖으로 사라졌던 부조종사가 비행기 천정을 부수며 몸을 들이 
밀고 있었다. 어깨와 머리가 들어왔다.
  비행기는 이미 통제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원을 그리며 추락하고 
있었다. 아래는 까마득한 바다, 망망대해였다.
  그 와중에 그 부조종사는 비행기에 매달여 다시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징그러운 놈이로군!"
  그를 본 로버트 박이 몸서리를 쳤다.
  콰앙! 무명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나렸다. 들어오려는 부조종사의 
머리가 무섭게 그이 주먹에 뒤흔들렸다. 금속이 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부조종사가 멈칫거렸다.
  무명은 그의 머리를 다시금 있는 힘을 다해 후려쳤다.
  그가 다시 들어온다면 무명은 정말 그를 막을 자신이 없었다.
  연달아 타격을 받은 부조종사, 비행기의 천정에서 버티고 있는 
부조종사의 렌즈가 박힌 눈에서 괴이한 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붉은 빛이었다.
  그 의미를 알았다면 무명과 로버트 박은 만사를 젖혀두고 몸을 
날려 비행기에서 빠져 나갔을 것이었다.
  상황 데드존(dead zone) 발생! 자폭 카운트 다운 실시!
  붉은 빛의 의미는 그러했다.
  그리고 카운트의 숫자가 제로를 가리키는 순간, 부조종사의 몸은 
섬광과 함께 폭발했다.
  그 뒤를 이어 비행기도 공중에서 폭발했다.

    제10장 골든 게이트
  "앗!"
  나래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잠을 이루지 못했었는데 그새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등이 
축축했다. 이마에도 식은 땀이 맺혀 있었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새벽 6시반.
  거의 6시가 되기까지 잠이 들지 못해 뒤척였었다.
  무슨 꿈이었을까?
  피바다 속에서 무명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니, 피가 아니었다. 콜타르처럼 아교처럼 끈적거리는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피인 것 같기도 했다.
  무명은 그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 그 눈은 무엇을 말하려던 것일까.
  나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근래에 들어 생긴 불면증으로 인해 그녀는 늘 이렇게 깜박 잠이 
들었었다가 놀라 깨곤 했다.
  창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곧 해가 뜰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날씨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침침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했다.
  When eyes meet eyes and the feeling is strong.
  I turn away from the will, 
  I stumble and fall, but I give you it all.
  I am a women in love... 
  잠들기 전에 듣고 있던 CD에서 바바라 스트라이젠드의 Women in 
lov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신과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사랑을 느꼈어요... 
  사랑에 빠진 사람들만이 유행가라는 것이 가슴에 와닿는 법이다. 
그것이 올드팝이라면 더더욱... 더욱이 나래는 해비메탈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요란하고도 작위적인 사운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창문을 연 나래는 서늘한 아침공기를 마시자 두통이 조금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골목길로 우유배달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가고 있었다.
  대체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시금 아련한 그리움에 가슴이 아파왔다.
  그날 바닷가에서 헤어진 지 불과 며칠이 지났다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
  먹물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의 바다는 검게 출렁이고 있었다.
  미 해군의 연안 고속초계정인 엘도라도 호의 선장 로빈슨은 굳은 
표정으로 갑판에 서서 어두운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는 
미 해군의 구조용 헬기인 시누크가 서치라이트를 켜고 바다를 
헤집고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무심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하지만 출렁이는 파도 사이로 힐끗 
드러나는 부유물은 그 무심한 바다가 무엇인가를 삼켰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은빛의 금속조각은 그것이 비행기의 날개조각의 일부임을 
말해주기에 충분했다.
  "한 사람뿐입니다."
  갑판장인 켈빈이 다가와 보고했다.
  "상태느느?"
  "생명이 위독할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켈빈이 바다 위를 강아지처럼 헤집고 다니는 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적이로군! 그런 폭발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니... 즉시 
타전해. 생존자 1명 구출. 그외 생존자 없다고."
  HH47d는 보잉의 CH47(시누크)의 변형헬기다. 시누크의 인명구출 
인원은 5명에 불과한 반면, HH47d는 무려 30명을 구출할 수 
있는데다 행동반경도 배에 이르는 월등한 능력을 자랑한다.
  로버트 박은 그 헬기에서 해군수병이 둘러준 모포로 몸을 감은 채 
검은 파도가 치고 있는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헬기의 강렬한 
서치라이트에 비치는 밤 바다는 어둠에 잠긴 채 헬기의 프로펠러 
바람에 쏠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비행기의 잔해는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폭발한 후 정신을 잃고 바다에 떨어졌던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바다였다. 비행기는 산산조각 
나서 보이지 않고 그는 어떻게 된 셈인지 파편 한 조각을 부여잡고 
바다에 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살아 있을 수 있었으랴.
  대체 어떻게 해서 정신을 잃고서 부유물을 잡은 채 바다에 떠 
있을 수 있었던 것일까.
  로버트 박은 폭발의 폭풍에 짓이겨진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살아났는데, 그 친구가 죽었단 말인가?'
  헬기와 보트들이 계속해 바다를 수색하고 있었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살아 있다면, 무엇인가 이미 발견되었어야 한다.
  랭글리는 유명하지도 거대하지도 않은 조용한 도시이지만, 
첩보계에 있어서는 가장 유명한 곳이다.
  이유는 단 하나, CIA가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1942년 창설된 전략정보국(OSS)은 1946년 중앙정보단(CIG)을 
걸쳐, 1947년에 국가안전보장볍(NSA)에 의해 중앙정보부(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로 개편되어 랭글리에 자리한다.
  존은 랭글리 자신의 사무실에서 굳은 표정으로 클라우스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사고 해역을 철저히 수색했지만 그를 호송하던 우리 쪽의 
극동지국 캡틴을 찾아낸 것 외에 더 이상의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습니다. 물론, 우리 해군 초계정이 아직 주위를 
수색하고 있지만 사건발생 이미 하루가 지난 시점이라 더 이상의 
수색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입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사고가 발생할 
줄은... "
  "됐습니다."
  클라우스의 말소리가 존의 말을 잘랐다.
  "빌어먹을!"
  존은 전화를 끊고는 털썩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대체 날아오는 비행기가 갑자기 왜 폭발을 했단 말인가.
  자세한 것은 극동지국의 스테이션치프인 로버트 박을 만나보면 
알게 될 것이었다.
  담배를 질근질근 깨물고 있던 존은 벌떡 몸을 파묻혔던 소파에서 
일으켜 열쇠로 잠겨진 서랍을 열었다.
  그 속에는 도청방지된 전화가 들어 있었다.
  수화기를 든 그는 평소에는 연락이 금지되어 있는 곳에다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본 클라우스는 국립 환경과학연구소 지하, 자신의 연구실에서 
잡아먹을 듯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α7호, 안드레이 김의 복제인 놈을 호송하던 비행기가 폭발했다는 
것은 한 가지 이유일 수밖에 없다.
  '디스트로이어가 자폭을 했단 말인가?'
  클라우스는 신음했다.
  그가 만들어낸 디스트로이어는 신인류 창조의 노하우를 곁들인 
인체공학상의 최고의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내용을 세상에 공개한다면 그는 단숨에 노벨상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까짓 것은 클라우스의 안중에도 없었다.
  클라우스는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신인류, 안드레이 김의 유전자로 창조된 신인류 α7이 
생존해 있음을 알게 되자 바로 디스트로이어를 파견했다.
  그리고 그는 디스트로이어가 α7호를 파괴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유는 디스트로이어가 전투용으로 개조된 막강한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이었다.
  디스트로이어가 신인류와 다른 점은 신인류가 인체의 능력향상에 
중점을 두어 창조된 반면에 디스트로이어는 오로지 전투력 강화를 
위해 제조된 것이다.
  "신인류 중에 가장 우수한 것이 α7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투용의 디스트로이어를 당할 수는 없다!  그런데 파괴도었을 
때에만 작동되도록 되어 있는 디스트로이어의 자폭장치가 
작동했음은 α7호가 디스트로이어를 파괴할 수 있을 만큼 강했다는 
것일까?"
  그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답은 도출되지 않는다.
  "말도 안돼... !"
  클라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건 말도 안된다.
  안드레이 김이 만든 α7은 내구성이 강한 폐물에 불과했다.
  그의 수준은 뮤즈 연구소가 파괴되던 그 날, 안드레이 김이 
생존해 있던 그 당신의 수준을 분명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런데 그까짓 폐물이, 안드레이 김이 만든 놈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신인류가 어찌 내가 만든 디스트로이어를 파괴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에 불이 들어왔다.
  외부 직통회선이다.
  전화를 받던 클라우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회장님이 말입니까?"
  "그렇소. 아마 그 신인류의 생존가능성과 이번 일에 대한 박사의 
의견을 듣고 싶으신 모양이오. 그리고 놈이 우리 조직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런지에 대해서도... "
  "알겠습니다. 곧 가 뵙도록 하죠."
  클라우스는 전화를 끊고 일어셨다.
  사라는 실험실에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안드레이 김이 게놈해석을 해놓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게놈의 5% 
정도를 차지하는 유전자 정보였고 사람의 게놈, 30억쌍의 배열은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어떠한 경우에도 완벽할 수가 없었다.
  안드레이 김이 존재하던 그 때에는 명쾌하던 답들이 시간이 
갈수록 모호해지는 듯했다. 수퍼컴을 써도 간단한 문제의 
연산시간마저 오히려 더 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근래에 들어 그녀는 혼자 이렇게 컴퓨터와 씨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히 침식을 잊는다고나 할까.
  안드레이 김의 죽음을 잊기 위해 전신을 내던지는 것 같았다.
  문득, 손길 하나가 그녀의 등뒤에서 뻗어와 그녀의 가슴을 
싸안았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귓볼에 와닿았다.
  사라는 가볍게 목을 비틀어 그 입술을 피하며 눈을 들었다.
  뜨거운 숨결을 뿜는 클라우스의 얼굴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클라우스가 어느 새 방에 들어와 있었다.
  "뭘하는 거지?"
  클라우스가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만해요, 클라우스.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
  사라가 몸을 비틀며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클라우스는 완강한 힘으로 그녀를 포홍했고 
그녀의 입술을 점령했다. 잠시 가벼운 저항을 하던 사라는 천천히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그녀의 탄력있는 유방이 그의 손길에 뭉개지고 있었다.
  침실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연구를 새로 시작한 이래, 끊임없는 
클라우스의 구애를 사라는 무작정 거절할 수가 없었다.
  기실 클라우스는 매력있는 사나이였다.
  서양여성으로는 드물게 사랑에 있어 고지식한 사라가 아니었다면 
이미 그에게 몸을 맡겼으리라.
  게다가 클라우스는 늘 정중했다.
  정중하고도 기품있는 사나이의 구애를 무작정 거절할 수 있는 
여자는 없다. 게다가 휘청거리는 그녀를 받쳐준 클라우스인 것이다. 
안드레이 김에 대한 사랑이 그토록 깊고 뜨거운 것이 아니었다면 
이미 클라우스의 사랑을 받아들였을 사라였다.
  한 차례 강렬한 키스를 한 클라우스는 뜨거운 눈빛으로 품속의 
사라를 내려다 보았다.
  "언제 나를 받아줄 거지?"
  사라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보았다.
  "이미 난 당신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지금 당신은 누구랑 
있는거죠?"
  클라우스는 피식 웃었다.
  "여전히 그 말... 좋아. 논쟁은 내가 다녀와서 종식시키기로 
하지!"
  "어딜 간다는 거죠?"
  "연구실을 부탁해. 우리 연구실을 후원하고 있는 유니버셜 
재단에서 호출이야. 그들도 신인류에 관심이 만거든."
  그의 품에 안겨있던 사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도 신인류를 안단 말이에요?"
  "관계자들만. 유니버셜 재단은 극비사항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곳이라더군. 자세한 건 나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연구는 계속될 수 없었을 거야. 이 상황에서 
연구를 계속 지원할 여유자금이 지금 미국에는 없으니까."
  클라우스는 사라의 이마에 키스했다.
  "다녀올게."
  사라는 굳은 표정으로 방금 클라우스가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니버셜 재단?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던 사라는 빙글 의자를 돌려 컴퓨터에 
연결된 헤드폰을 썼다.
  그리곤 키보드의 엔터키를 치고는 의자에 깊숙히 파묻혔다.
  헤드폰을 통해 말소리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회장님이 말입니까?"
  "그렇소. 아마 그 신인류의 생존가능성과 이번 일에 대한 박사의 
의견을 듣고 싶으신 모양이오. 그리고 놈이 우리 조직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런지에 대해서도... "
  "알겠습니다. 곧 가 뵙도록 하죠."
  대체 이건 무슨 소리일까.
  헤드폰을 쓴 사라의 얼굴이 바짝 굳어 있었다.
  유니버셜 재단이 아니라 우리 조직이란 말인가?
  우리 조직... 
  도대체 그건 무엇일까?
  뭔가, 틀림없이 그녀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잠시 입술을 깨문 채 생각에 묻혀 있던 사라는 빠른 속도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숫자배열이 명멸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화면 하나가 
떠올랐다.
  Input PassWord(암호를 입력하시오)
  사라는 암호입력 대신 자신의 손바닥을 모니터에다 갖다댔다.
  모니터가 잠시 명멸이더니 화면이 둘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래픽으로 선명히 디자인된 여자의 나신이 화면에 
떠올랐다. 천천히 모니터에 선회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놀랍도록 
사라와 닮아 있었다.
  code 01017. DNA 스타일 변형 SUPER4. 게놈 조작시스템 α7. 
모세포 제공자 사라 오스먼드. 라이프 프로젝트 BATBLE3A와 
부합하는 재창조 시행.
  단숨에 입력을 끝낸 사라는 엔터를 치고 시스템 진행상황을 
오프했다.
  이제 그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 시스템 진행상황은 알아볼 수 
없을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 경춘가도는 짜증이 날 정도로 체증이 심했다. 
드라이브 코스라는 것도 이젠 옛말이었다.
  하긴 셋방에 살지라도 자가용이라는 등식이 통용되고 있는 
마당이니 토요일 오후에 경춘가도를 드라이브 한다고 나온 자체가 
잘못이었는지 몰랐다.
  유나래는 드라이브를 포기하고 핸들을 꺾어 눈앞에 보이는 막국수 
집으로 향했다.
  춘천 진짜 막국수. 흙벽에 시골 정취가 풍기는 집이었다.
  집주인네의 꼬마인 듯한 서너살 먹은 계집아이가 엄마인 
주인아줌마의 치마꼬리를 잡고서 칭얼거리는 가운데 아줌마가 
기계에서 막국수를 뽀아내는 것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그런 
집이었다.
  국수는 집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맛있었다.
  무명이 CIA의 로버트 박이라는 사나이를 따라 미국으로 간 이후 
처음으로 나선 나들이였다.
  그나마 엄마인 공여사의 닥달에 할 수 없이 쫓기듯 집을 나선 
나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싸늘했던 것 같은 바람에는 어느 새 훈풍의 
느낌이 스며 있었다. 나뭇잎들도 초록의 정도를 넘어 생명을 숨쉬고 
있었다.
  경춘가도를 달리는 젊은이들은 차 속에서 밝게 웃고 있었다.
  과연 난 저런 때가 있었던가?
  나래는 문득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자신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발랄하고 생기에 차 있고 야심만만했던 나래였다.
  그런데 왜 그러한 모습들이 이렇듯 생경하고 낯선 것일까.
  절해고도에 홀로 버려진 듯한 느낌.
  "레드 드래곤은 이제 경기에서 블루 버펄로에게 연장 12회말에 5: 
6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어 미스터 X, 백무명 투수가 실종된 
이후 9연패 만에 첫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막국수집 구석에 높다랗게 설치된 때묻은 TV에서 스포츠 뉴스 
캐스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연장 12회말의 승리라면 의미가 있었다.
  무명이 사라진 이래, 레드 드래곤은 다 이긴 시합도 9회에 가서 
역전패하곤 했다. 연장전 끝에 승리라면 의미가 있었다. 임병권 
감독의 말마따나 응집력이 생기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구단 홍보를 위해 그처럼 열성적으로 뛰어다녔었는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아득히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기실 현재 문제의 집점은 레드 드래곤의 승패가 아니라 백무명의 
신분이었다.
  백무명의 돌연한 실종 이후, 스포츠한국의 기자 한 사람이 
끈질기게 백무명의 뒤를 추적하여 그가 백화점 앞에서 달려오는 
차를 세운 일에서부터 그가 괌에서 합류한 것까지 밝혀내고는 그의 
신분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벌어진 사태였다.
  그렇게 시작된 백무명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백무명이란 사람이 존재했던 흔적을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프로구단의 뉴 스타.
  그것은 과연 미스터 X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했지만 근본적으로 
자격이 없는 사람을 승부에 급급해 선수로 기용했다는 비난이 일고 
있어서 자칫 태산그룹의 도덕성에 누가 될 우려가 있었다.
  상황은 간단치 않았다.
  모든 것이 백무명의 돌연한 실종 때문이었다.
  동해바다는 그 옛날부터 탁 트인 조망으로 늘 유명했었다.
  높지 않아도 그 넓은 바다를 보는데에는 충분했다.
  설악비치호텔도 그런 곳이다.
  나래는 설악비치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냘픈 쪽배 하나가 금방이라도 파도 속에 파묻힐 
듯 곡예를 하고 있었다.
  마이페어레이디 한 잔을 시켜 앞에 둔 그녀는 하염없이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바다에서 처음 그를 만나고, 저 바다에서 그와 헤어졌다.
  그녀의 뇌리에는 무명이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활달한 성격의 
그녀인지라 남자친구도 많았다. 하지만 이때가 되도록 어느 
누구에게도 이러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마치 
그렇게 결정되어진 운명과도 같았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무거운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나래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정말 뜻밖에도 그녀의 앞에는 황도일이 서 있었다.
  "어떻게 여길?"
  황도일이 그녀의 앞에 앉으며 빙긋이 웃었다.
  "집에 연락했더니 사모님께서 나갔다고 해서... "
  "그렇다고 여기를 어떻게 알고서?"
  "알아내기 위해서 힘이 좀 들었습니다. 다행히 이쪽에서 나래씨를 
봤다는 사람이 있어서... "
  나래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아버지가 당신을 신뢰하는 이유가 있군요. 서울도 
아닌 강원도에 있는 날 찾아내다니... "
  "식사 전인 것 같은데, 어때요? 나래씨를 찾기 위해서 헐레벌떡 
달려왔더니 난 지금 배가 몹시 고픈데."
  황도일이 허기에 지친 표정으로 배를 움켜잡은 채 나래를 보며 
물었다. 그가 화제를 바꾸는 솜씨는 늘 일품이다.
 "시키세요. 나도 시키죠."
  간단한 스테이크가 그들의 앞에 놓여졌다.
  황도일이 허겁지겁 스테이크를 잘라대는 것을 보던 나래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는 백포도주 잔을 들었다.
  열심히 고기를 썰던 황도일은 문득 손을 멈추었다.
  나래의 눈길이 창문너머로 망연히 향하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나래는 따가운 눈길을 느꼈다.
  황도일이 조용히 그녀를 보고 잇었다.
  방금까지 보여주었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차고 날카로운 평소의 
황도일이 거기 있었다.
  "백무명을 생각합니까?"
  나래가 자신을 보자 황도일이 입을 열었다.
  "... "
  그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올 줄은 몰랐던터라 나래는 
멈칫하다가 말없이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백무명의 돌연한 실종은 그룹 전체에 막대한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그가 일츠켰던 그 엄청난 돌풍에 비례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무책임한 자인 줄 알았다면... "
  "도일씨가 그가 무책임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죠?"
  나래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그의 말을 잘랐다.
  "편을 들 생각입니까? 그의 어디가 그렇게 나래씨의 마음에 드는 
겁니까? 그 자로 인해 지금 우리 태산의 도덕성이 얼마나 타격을 
받고 있는지 설마 모른단 말은 하지 않겠지요?"
  "그를 한국으로 데려 온 것은 나였어요!"
  "사라진 것은 그자입니다!"
  "당신이 그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거예요?"
  나래의 음성이 날카롭게 날이셨다.
  마주 말을 쏟아내면 베일 것 같은지 황동일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소. 나래."
  바뀌어진 그의 어조에 나래의 얼굴이 조금 변했다.
  "그 자의 어디가 나보다 나은 것인지 난 이해할 수가 없소."
  "내가 그걸 당신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있소!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오."
  싸늘한 웃음이 나래의 얼굴을 스쳐갔다.
  "왜 내가 당신에게 필요하죠? 태산그룹을 차지하기 위해서?"
  나래는 일순 굳어지는 황도일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쉬지 않았다.
  "꼭 내가 필요할까요? 당신은 내가 없어도 태산그룹을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황도일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내가 당신을 원하는 것이 고작 출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그것을 정말 조금도 느끼지 
못하겠소?"
  "난 모르겠어요."
  나래의 한 마디에 황도일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래요 어쩌면 당신이 날 사랑하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냉철한 
당신의 뇌리에는 나를 사랑함으로서 얻어지는 반대급부 정도는 
저절로 계산이 되어 있을 거예요."
  나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의 능력이라면 나 없이도 원하는 것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거예요."
  황도일은 자신에게 미련 없이 등을 보이며 멀어지는 나래의 
늘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 있었다.
  "빌어먹을?"
  문을 열고 사라지는 나래의 모습을 보고 있던 그의 입매가 
일그러지며 새어 나온 말이었다.
  서울대학을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나오고 하버드에서 
MBA(경영학석사)를 따고 태산그룹의 기획실에 특채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좌절을 겪어 보지 못한 그였다.
  좌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이 좌절을 용납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 있는지 보자... "
  황도일은 담배의 필터를 으스러지게 깨물었다.
  나래가 집을 떠날 때부터 그녀의 뒤를 사람을 시켜 미행케 해 
비행기를 타고 쪼ㅎ아 온 그였다.
  오리건 주 서부해안 산악지대.
  지난날 그렇게 불리웠던 그 곳은 이제 출렁이는 바다였다.
  거대한 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그 곳은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갈라져 곳곳에 거대한 계곡이 서고 그 계곡은 바다 가운데의 
절해고도로 변해 있었다.
  해안선도 대부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해안 부근의 
암초는 가히 칼날과 같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번뜩였다.
  파도는 줄기차게 그 암초군을 공격하다가 이내 비명을 지르며 
포말로 부서져 다시 바다로 후퇴하곤 했다.
  그 바다에 지난날, 전세계 인류의 신기원을 이루는 연구를 하던 
뮤즈 연구소가 가라앉아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석양이 노을을 드리울 때, 그 바다 그 절벽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남자임에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머리카락을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그의 눈은 아득히 먼바다, 뮤즈 연구소가 있었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무명이었다.
  그는 폭발의 순간에 디스트로이어의 눈빛을 보고 심상치 않은 
상황이 일어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음 순간에 그는 로버트 박을 감싸안으며 몸을 날렸고 비행기는 
폭발했다.
  그가 감싸지 않았다면 보통의 인간인 로버트 박은 결코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었다. 항성탐험을 위한, 우주의 악조건을 이기기 위해 
창조된 백무명조차도 상처투성이가 된 폭발이었다.
  로버트 박을 구한 그는 미 해군함정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 
자리를 피했다.
  웬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되어졌던 것이다.
  비행기 파편 한 조각을 잡고 바다에 몸을 맡긴 백무명은 파도를 
타고 흘러가 그 곳에서 무려 100해리나 떨어진 곳에서 지나가던 
미국행 이탈리아 상선에 구축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철저하게 중국인으로 위장했다. 그의 내부에 
프로그래밍된 언어는 영어를 비롯, 러시아어에서 프랑스어와 중국어 
일본어까지 모두 8개국어에 달했고, 억양도 그가 처음 나래의 
앞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와는 달리 완벽했다.
  그리고 배가 미국 근해에 이르자 그들 모르게 바다로 뛰어들어 
미국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다음, 그가 찾은 곳은 바로 뮤즈 연구소가 있던 그 바다였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비행기의 폭발에서 받은 충격으로 기억의 일부를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캡슐에 있었던 그의 기억과 세상의 종말이 온 듯 마구 
무너져 내리던 돌더미들... 
  마지막 순간에 숨을 거두며 자신을 쳐다보던 안드레이 김의 
얼굴과 그 눈빛, 그리고 붕괴하는 지하에 휘몰아쳐 온 암측의 
소용돌이, 이것이 광란하는 바닷물임을 깨닫기도 전에 거기에 
휩쓸린 자신이 거대한 암벽에 머리를 부딪히던 일까지... 
  모든 것이 생생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안드레이 김. 너는 창조한 사람이며 너는 나의 세포를 받아 
태어난 신 인류이다. 현재 너의 분류번호는 α7호... 이제부터 너는 
골든 게이트를 막아야 한다. 그들은 미친 자들... 
  그것을 위해 난 너에게 특별한 힘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레이트 황을 만나기 전에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만난 
이후에야 너는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과 그들 골든 게이트의 
정체에 대해서 모두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쏴아악! 촤촤... 
  파도가 조금도 쉬지 않고 광란하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무명의 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안드레이 김의 유언과도 같은 당부를 떠오린 그의 얼굴에 쓰디쓴 
그늘이 스치고 지나갔다.
  "골든 게이트... "
  무명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신을 습격했던 괴물과도 같았던 안드로이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안드로이드가 골든 게이트에서 자신을 말살하기 위해 보낸 
것이라면 생각의 비약일까?
  자신은 그 존재조차 제데로 알지 못하는 골든 게이트가 벌써 
자신의 존재를 알고 움직인 것이라면 안드레이 김의 말마따나 그 
조직은 실로 간단치 않은 힘을 지닌 것이 틀림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단체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가 왜 그들과 싸워야 
한단 말인다.
  자신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인위적으로 태어난 그가 
무엇을 위해서,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무명은 바다를 바라보며 다짐하듯 입술을 깨물었다.
  "안드레이 김. 당신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창조주일지는 
모르지만 나를 당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오. 나는 
사유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지, 창조주의 뜻대로 움직이는 
로보트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바다는 말없이 그저 굼실대고만 있다.
  그러했다.
  그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한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필요에 의해 
창조되어졌다. 오로지 그들의 의사대로 만들어지고 프로그래밍 
되어진 것이다.
  그것도 안드레이 김이라는 사람의 세포 일부로서... 
  과거조차 없고 현재밖에 없는 돌연변이와 같은 자신이 왜 그들을 
위해 싸워야 한단 말인가.
  그는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가 아니었다.
  그는 사유하고 추론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들이 비록 신 
인류(New Mankind)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할지라도 그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임에는 틀림없었다.
  어쩌면 그 이름마저 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라고 불리워져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더구나 그는 아직 안드레이 김이 그에게 기억시켜 둔 프로그램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자신이 기억하는 내용이 
전체의 얼마인지도 알지 못했다.
  탕!
  바로 그 순간, 일발 총성이 백무명을 꿰뚫었다.
  무명이 휘청이며 뒤로 돌아섰다.
  타앙! 다시 총성이 터져나왔다.
  무명이 곡예를 하듯 흔들거리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서는 듯하더니 
그대로 45미터 높이의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무명이 있던 자리에서 10여미터 가량 떨어진 바위 뒤에서 사파리 
차림의 사내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푸른 눈빛에 금발의 그들의 
손에는 망원라이플이 들려 있었다.
  "놈을 잡았어!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군!"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 너무 서두른 게 아닐까 
몰라. 보통 놈이 아니라고 하던데."
  "자넨 너무 소심해서 탈이야. 이건 코끼리도 잡을 수 있는 고성능 
라이플이란 말이야!"
  무명은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져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면 될 게 아닌가."
  키가 조금 크고 날카롭게 생긴 자가 음산히 웃더니 대뜸 다시 
라이플을 무명에게 겨누고 발사했다.
  귀청을 찢는 총소리가 파도 소리를 부수며 울려 퍼졌다.
  무명의 등에 총탄이 작렬하며 무명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굴러 내렸다.
  "흐흐... 아직도 미심쩍어?"
  자신을 보며 음산히 웃는 동료의 웃음에 먼저 입을 열었던 
사파리는 입맛을 다셨다.
  "누가 뭐라나? 가서 확인해 봐야지."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명이 쓰러져 있는 곳에 도달했다.
  무명은 죽은 듯 엎어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거 별거 아니잖아. 하긴 지가 로보트 할아버지라도... "
  라이플을 내밀어 쿡, 무명을 찌르던 키 큰 사파리 사내의 얼굴이 
흙빛으로 굳어졌다.
  놀랍게도 백무명이 그가 내민 라이플의 총신을 움켜잡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지만 난 로보트 할아버지가 아니라네."
  무명이 입을 열자, 키 큰 사파리의 사내는 공포에 질린 기색으로 
주춤 뒤로 물러섰다.
  철컥! 다른 사파리의 사내가 번개처럼 무명에게 라이플을 
겨누었다.
  하지만 무명의 손에서 날아간 라이플이 그의 가슴을 때리는 것은 
그보다 한 순간 더 빨랐다.
  퍽소리와 함께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벌렁 나가 떨어졌다.
  그의 손에서 날아간 라이플이 헛되이 하늘을 향해 불을 뿜었다.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해 봐. 너희는 누구지? 왜 나를 노린 것인지."
  무명은 키 큰 사내의 멱살을 움켜잡은 채 싸늘히 말했다.
  캑캑 키 큰 사파리는 무명의 손길에 숨이 막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캑캑거렸다. 그의 평생 처음 보는 무서운 힘이었다.
  "우, 우리는 관광객의 돈을 뺏는 강도들... "
  어이없다는 냉소가 무명의 입가에 떠올랐다.
  "나와 지금 농담을 하자는 건가?"
  무명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우두둑 소리가 나며 사내의 고개가 
뒤로 꺾어졌다. 무서운 고통이 가해젼ㅆ다.
  "명령을 받고 나를 기다렸다고 하는 너희들의 말소리를 들었다. 
부인하겠나?"
  "으으... 그, 그건... "
  사내는 고통에 겨워 전신을 떨었다.
  "말하지 않으면 네 목은 부러진다. 경추(목뼈)가 부러지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전신마비가 된다. 한 번 시험해 볼까?"
  무명이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그의 목을 다시 힘주어 
잡았다.
  우둑우둑 소리가 나며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그만! 마, 말하겠... 소오... !"
  "말해 봐."
  무명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헐떡거리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싸늘이 다그쳤다.
  "우, 우리는... "
  사내가 무명의 눈빛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그들을 덮쳤다.
  바위가 정을 맞은 듯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나가고 사파리의 
사내들이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주위 일대가 단숨에 아수라장이 
되며 박살이 났다.
  무명은 번개같이 몸을 굴려 단숨에 20여 미터나 그 자리에서 
벗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헬기 한 대.
  아파치라고 불리는 AH64 공격헬기가 하늘에 떠 있었다.
  방금의 가공할 사태는 바로 아파치에서 30미리 체인건을 쏴 대어 
일어난 일이었다.
  '아파치라니?!'
  무명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1985년에 처음 일선 배치된 AH64 아파치는 대전차용 공격헬기다. 
전차킬러라는 헬파이어 미사일을 16기까지 장착할 수 있는데다 
70미리 항공로켓포 76발, 30미리 체인건을 1천2백발까지 무장 
운용할 수 있다. 거기에 반경 8킬로미터 내의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헬기다.
  차세대 공격헬기로 선정된 RAH64 코만치가 취역하고 난 다음에도 
그 역할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아파치 헬기가 가진 가공할 
능력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백무명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무런 표식도 달지 않은 채.
  미국 내에 떠오른 아파치 헬기가 피아표식조차 없는 것이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여유는 정말 조금도 없었다.
  다시금 귀청을 찢는 굉음이 터지면서 아파치에서 무명을 향해 
30밀리 체인건이 불을 뿜기 시작했던 것이다.
  백무명이 있던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날아갔다. 가히 천지개벽의 위력과도 같았다.
  무명은 바람과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체인건이 숨바꼭질하듯 무서운 속도로 쫓아왔다. 
그것은 죽음의 경주였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추월을 허용한다면 그 
순간 무명은 산산조각이 나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될 것이었다.
  바람과 같이 체인건을 피해 달리는 무명을 보고 헬기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맙소사!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니, 저게 설마 600만 불의 
사나이라도 된단 말인가?"
  TV에서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600만 불의 사나이가 
달릴 수 있는 속도는 60마일, 시속 100킬로미터다.
  하지만 지금 무명이 달리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 속도를 능가하고 
있는 듯했다.
  문자 그대로 한달음에 바위를 뛰어넘고 시내를 건나뛰며 가공할 
속도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섭게 불을 뿜으며 그처럼 공포스럽게 무명을 쫓아오던 체인건이 
일순간 침묵했다.
  의아한 무명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는 아파치에서 자신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름해서 헬파이어, 바로 지옥의 불이라고 불리는 전차도 한방에 
파괴해 버리는 가공할 무기. 그것이 꼬리를 물고 그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콰아앙! 연속 폭음과 함께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무명이 있던 
주위 일대가 순식간에 불바다로 화해버렸다. 얼마 전 가공할 
지진으로 인해 지형마저 바뀌었던 이곳은 삽시간에 전쟁터로 
화해버린 듯했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리며 일어났다.
  아파치는 현장을 선회하고 있었다.
  "계기에 생체반응이 나타나지 않는군!"
  "당연하지! 제아무리 괴물 같은 존재라도 헬파이어를 맞고서야 
베겨날 재간이 있겠나?"
  아파치 조종석에 앉은 두 사람이 폭발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려가자구. 시체를 확인해야 보고할 것 아닌... !"
  말을 하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현장으로 내려가려던 
조종사가 갑자기 입을 딱 벌렸다.
  핼밋 선글라스 안의 그의 눈에 경악과 불신, 그리고 공포가 
폭죽처럼 피어올랐다.
  조금 떨어진 곳, 불쑥 튀어나온 바위벼랑 위에 무명이 우뚝 서 
있음을 본 것이다.
  그것도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끈, 치켜든 두 손에는 거대한 바위가 들려 있었다. 집채만한 
바위라면 과장이겠지만 어른이 두팔을 둘러야 안을 수 있는 바위를 
번쩍 치켜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파치와 무명과의 거리는 불과 20여미터. 선회하다 하강하던 
참이라 무명이 서 있는 바위의 높이는 아파치보다 별로 낮지 
않았다.
  "피해!"
  조종사의 뒤에 있던 자가 발악하듯 외치는 순간, 무명의 손에서 
바위가 날아 올랐다.
  조종사가 조종간을 잡아당기는 것과 바위가 아파치의 조종석을 
때리고 튕겨져 헬파이어가 매달린 미사일 발사기를 친 것은 거의 
동시라 해도 좋았다.
  거대한 폭음.
  가히 장관이라 할 불꽃놀이가 공중에서 벌어지며 아파치가 
산산조각으로 화해 흩어졌다.
  무명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 광경을 보고 서 있었다.
  헬기파편들이 불꽃처럼 꼬리를 물고서 우박처럼 줄줄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무명은 시선을 돌려 자신의 옆구리를 보았다.
  옆구리에서는 선혈이 뭉클뭉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체인건이 관통한 자리였다.
  쓴 웃음이 무명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 몸도 30미리 체인건까지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로군... "
  옆구리를 움켜쥔 무명은 암벽을 내려갔다.
  30미리 체인건으로 인해 거의 걸레가 되다시피한 앞서 
사파리차림의 두 살망의 시체의 앞에 선 무명은 그들의 시신을 
뒤지기 시ㅈ가했다.
  참혹했다.
  그들의 시신은 거의 고깃덩이에 불과해 목불인견이었다.
  그 끔찍한 시신을 뒤졌지만 그들에게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크린(clean)한 상태였다.
  "철저하게 신분을 숨기고 있다."
  몸을 일으키던 무명은 문득, 나직히 신음했다.
  키 큰 사파리의 시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총탄에 찢어져 반쯤 
남은 사진이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사진에는 투구동작에 
들어가 있는 무명의 얼굴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이들이 그들이란 말인가?!"
  무명은 믿을 수 없는 듯 다시 신음했다.
  골든 게이트.
  안드레이 김이 말한 그 단어 외에는 이러한 사태는 설명될 수 
없다. 자신이 여기에 올 줄 알고 사람을 보내 기다리게 한 자들.
  그것은 그들이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게 하는 것이었다.
  목적을 이룰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까지.
  무명은 바닥에 떨어져 불타고 있는 아파치 헬기의 잔해를 쳐다 
보았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미국내에서 아파치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라면 
그들은 실로... 
  "끝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말인가. 나로 하여금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몰고 갈 셈인가... 무엇 때문에?"
  몇몇 설치류를 제외하고는 인간 이외의 그 어떠한 포유류도 
상습적으로 자기 자신의 종족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인간들은 그 종족파괴를 전쟁이라 표현한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백무명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 일을 
해야 할런지도 몰랐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제11장 데드 크로스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 주립병원.
  로버트 박은 그 병원 외과병동 709호실에 입원해 있었다.
  그가 입은 상처는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왼쪽 다리는 금이 가고 
오른쪽 팔은 골절상이었다. 전신에 화상과 타박상을 입은 상태라 
의사는 전치 3개월 이상의 중상이라고 진단했다.
  늑골에도 금이 갔다고 하던가.
  바다에서 구조되어 해군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는 이곳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고 병실로 온 지 이제 한 나절.
  도무지 이렇게 처박혀 있을 때가 아니건만 꼼짝도 못하고 있자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이 게으름뱅이들은 뭘하고 자빠져 
있기에 아직껏 연락도 없단 말인가.
  신속을 요하는 첩보계의 생리상 이런 처사는 허용조차 될 수 
없었다.
  그의 맞은편 침대에 있는 켈빈이 펜트하우스에 있는 음단패설을 
읽으면서 킬킬거렸다.
  그는 올해 24살로 컴퓨터 프로그래머라고 하는데 홍수 속에서 
자라난 콩나물처럼 키만 멀쭉 컸다. 하긴 저렇게 가물었으니 자전거 
타다가 다리를 부러뜨렸겠지.
  생각할수록 한심했다.
  저런 친구랑 나를 같은 방에다 집어 넣어두다니.
  그때 "안녕하세요?"
  맑고 톤 높은 남부지역 악센트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근깨가 많은 금발의 담당 간호사 리타라고 했던가? 그녀가 
로버트 박의 앞에서 웃고 있었다. 목소리답지 않게 그녀의 체구는 
놀랄만큼 거대했다. 아마 장래 간호부장감일까?
  그 손에 들린 트레이에는 주사기 일습?이 준비되어 날카로운 
바늘끝을 보이며 진열되어 있었다.
  "주사맞을 시간이에요."
  로버트 박은 미간을 찡그렸다.
  "몇번을 말해야 되겠소? 난 주사따윈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오. 사내자식이 뼉다귀 한쪽 부러졌다고 누워있는 것만 해도 
좀이 쑤시는데 그까짓게 뭐라고 주사까지 맞겠소? 돌아가시오."
  "이곳은 병원이에요!"
  쌀랑한 한국어가 리타의 뒤에서 들려왔다.
  돌연한 한국어에 로버트 박은 눈을 크게 떴다.
  이제보니 리타의 뒤에 165센티미터 정도의 키를 가진 동양계 
간호사가 하나 서 있었다. 날씬한 몸매이긴 했지만 그리 작다고는 
할 수 없는 체구였음에도 리타의 거구에 가리워져 있었던 것일까.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는 활달했고 웃는 
얼굴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아름다웠다. 서양풍의 느낌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순혈의 동양인이 틀림없었다.
  가슴에 달린 명패에는 KIM SuYoung(김수영)이란 이름이 세겨져 
있었다.
  "한국인이오?"
  로버트 박이 한국어로 물었다.
  리타에게서 트레이를 건너받아 침대 한쪽에다 놓으며 김수영은 
환하게 웃어보였다.
  "엄마 아빠가 다 한국인이니까 나도 미국인일 수는 없겠죠?"
  김수영이 주사기를 쳐드는 것을 보곤 로버트 박은 미간을 
찡그렸다.
  "좀 전에 한 말 못 들었소? 난 주사맞길 싫어하오."
  간호사 김수영은 로버트 박을 쳐다보며 말했다.
  "좀 전에도 말했죠. 여긴 병원이라고, 주사맞길 싫어하는 것과 
맞아야 한다는 건 별개문제에요. 의사선생님의 처방이 내린 이상 
주사는 맞아야 해요."
  피식, 로버트 박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나왔다.
  "그렇소? 그렇다면 난 퇴원하겠소."
  "퇴원?"
  "그렇소. 병원이란 의사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난 퇴원하겠소. 
당신도 한국인이라니까 알런지 모르겠군?  절이 싫다면 중이 떠나면 
된다는 속담을... "
  그때였다.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느닷없이 간호사 김수영이 들고 있던 트레이로 냅다 로버트 박의 
머리를 후려갈겨 버린 것이다. 그것도 인정사정 없이.
  양철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로버트 박이 눈을 부릅떴다.
  골이 휑하니 울려와 일시지간 정신이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그 와중에 간호사 김수영이 로버트 박의 눈 한쪽을 까뒤집어 
보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퇴원은 안 되겠군요? 뇌진탕 증세가 좀 있는 것 
같아요. 우선 주사부터 맞고 안정을 해야겠어요."
  말이 정말 느렸다. 로버트 박이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그녀가 그를 훌렁 뒤집어 버렸던 것이다.
  다리는 금이 가고 팔은 골절인 로버트 박이다.
  제아무리 강골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다루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신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신음보다 더 빨리 터져나온 것은 비명이었다.
  그가 신음을 토해내려는 순간에 이미 그의 궁둥이에는 간호사 
김수영이 찔러대는 주사기 바늘이 박히고 있었던 것이다.
  으악!
  비명의 여운이 아직도 병실 안을 맴돌고 있을 때, 김수영은 
로버트 박을 향해 활짝 웃어보이며 병실문을 나서고 있었다.
  "또 봐요. 큰 아가."
  "... ?"
  문이 닫히고 김수영이 사라지는 것을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던 로버트 박은 문득 캘빈을 돌아보았다.
  "저 여자 정말 간호원이오?"
  아직도 머리통과 궁둥이가 얼얼했다.
  캘빈이 배를 잡고 웃으며 대꾸했다.
  "버지니아 주 최고의 명물간호원이죠! 파워골드라면 모르는 
환자가 없어요!"
  "파워골드?"
  "킴이라는 게 한국어로 금(gold)이라면서요? 거기다 파워가 붙은 
거래요. 워낙 가공하게 환자를 다뤄서요. 다루기 힘든 환자는 
모조리 파워골드 차지가 되죠!"
  캘빈이 다시 킬킬거렸다.
  로버트 박은 다시 한 번 문쪽을 보았다.
  기가 막혔다.
  세상에 자신을 어린애 다루듯 할 수 있는 여자가 존재할 수 
있다니. 저 여자야말로 직업을 잘못 택한 것 같았다.
  로버트 박은 욱씬거리는 궁둥이를 다시 부볐다. 그 순간, 이마가 
욱씬 쑤셔왔다. 아무래도 혹이 난 모양이다.
  문득 로버트 박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갔다.
  재미있는 여자로군!
  그날 저녁.
  리치몬드 주립병원 후원 잔디밭에서 로버트 박은 휠체어에 앉은 
채 CIA과학기술차장보 존 빅터와 마주하고 있었다.
  어둠이 흐르는 가운데 그들이 있는 벤치 나무그늘은 매우 
은밀했다. 앞쪽에는 면회를 온 듯한 말쑥한 양복차림의 청년 한 
사람이 담배를 피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가 CIA의 용원이며, 주위를 경계하고 있음은 거의 표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로버트 박은 존 빅터의 출현이 전혀 예상밖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성격상, CIA 공작차장보인 폴이 나타났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추진했던 일이 그의 장악하에 있었음을 알고는 
로버트 박은 더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명령은 하달될 뿐, 의문을 제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그 누구와도 싸워서 진 적이 없었던 납니다. 그런데 단 
한 방에 이 보양이 되다니, 대체 그 괴물은 뭡니까? 정말 현재 
그러한 안드로이드가 존재하고 있는 겁니까?"
  존은 담배를 문 채 간단히 말했다.
  "조사중일세."
  "그럼 그 안드레이 김이란 친구는 또 어떻게 된 겁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게. 자네의 
보안등급으로서는 알 수 없는 최고 기밀이니까!"
  "최고 기말? 어떤 것이 그렇다는 겁니까? 그의 능력이 그렇다는 
겁니까? 아니면... "
  "그에 관한 모든 것이 다 최고 기밀이야."
  존은 간단히 말을 자르고는 깊게 빛나는 눈으로 로버트 박을 
보았다.
  "그 밖에 다른 말은 들은 것이 없나?"
  "... "
  묵묵히 그를 바라보던 로버트 박은 무섭게 입을 열었다.
  "골든 게이트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존 차장보의 얼굴이 일순 굳어지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말을... 그 친구가 하더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갑자기 말이 끊겼다.
  "그 골든 게이트의 존재도 최고 기밀입니까?"
  휙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려 존이 로버트 박을 쏘아보았다.
  "경고하지! 더 이상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게. 그리고 오늘 
내게 보고한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도 노출시켜서는 안 돼. 알겠나? 
이 일은 블루코드를 취급할 수 있는 사람만이 상관할 수 있는 
사안이니까."
  로버트 박의 안색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브루코드라니.
  이것은 CIA 내부에서조차 언급 할 수 없는 사안임을 의미한다.
  최고 기밀(Top secret)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블루코드다.
  최고 기말 가운데에서 다시 CIA가 내부적으로 철책을 친 것이라는 
뜻이다. 로버트 박도 말만 들었지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것이 
블루코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골든 게이트가 블루코드란 말인가.
  본 클라우스 프리드만은 서독의 수도였던 본에서 태어났다.
  예비역 육군 소장이었던 아버지와 변호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독일귀족이었다.
  일찍부터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그는 나이 15살에 독일 
최고의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추천 입학했다.
  전공은 핵물리학.
  하지만 채 일년이 지나지 않아 그의 전공은 유전자공학으로 
바뀌어졌고 17살이 되던 해에는 석사학위를 따내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19살이 되던 해에는 하이델베르그 과학아카데미 
연구원으로 초청되었으며 그때는 이미 박사학위를 따내고 있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엉뚱하게도 유전자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생체공학 분야였다.
  그러한 그가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것은 조직의 뜻에 의해서였다.
  그는 다섯 살 때 조직의 눈에 띠었고 그때부터 조직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최고의 선생이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그는 안드레이 김과는 달리 선택받은 인간이었다. 
필요한 모든 것이 늘 그의 곁에 있었다.
  솔트레이크 시티는 청결한 도시로 이름높다.
  이유는 시민의 절반 이상이 술 담배를 하지 않는 몰몬교도이기 
때문이다. 1867년에 세워진 몰몬교도의 총본산인 템플 스퀘어가 
솔트레이크에 있는만큼 솔트레이크는 몰몬교도의 총본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술집은 찾아보기 힘들고 대중 교통수단인 그레이하운드가 
유타주에 들어서면 모든 좌석이 금연석이 될 정도로 도시의 청결은 
대단하지만 그 때문에 도시는 오히려 작막할 정도로 고요하다.
  클라우스는 솔트레이크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베어호수 별장에 
차를 주차하고 가지고 있던 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호수 주변은 산장과 별장, 별장형식의 아파트들이 숲 사이로 
보이고 있었다. 휴식에는 그만인 곳이었다.
  문을 잠근 클라우스는 벽난로 앞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곁에 
있는 TV리모콘을 집어 들었다.
  그가 몇 단위의 예약버튼을 누르자, 그의 앞에 있던 장식장이 
천천히 옆으로 밀려나며 그 자리에 50인치 가량의 대형 스크린이 
나타났다.
  "기다리고 있었소. 클라우스."
  잠시 기다리자, 스크린에 한 사람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각진 얼굴에 강한 회색 눈빛을 가진 60대의 금발남자였다. 
겉보기에는 60대이지만 그의 실제나이는 72세였다. 높게 치솟은 
매부리코가 양쪽 광대뼈와 어울려 섬뜩하도록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좀 늦었습니다."
  "괜찮소. 우리가 기다린 것은 1분이니까. 방금 우리는 놈이 CIA 
극동지국장에게 우리 조직에 대해 언급했다는 보고를 받았소."
  클라우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화면이 깜박이더니 말발굽 형상의 탁자에 다섯 명이 앉아있음이 
보여졌다. 그 가운데에 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자체적으로 개발된 원격화상회의 시스템이었다. 이중보안회선을 
사용하기 때문에 도청되거나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최상의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멤버 다섯 명은 지금 워싱턴에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조직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집행위원들 중의 
핵심멤버라 할 수 있었다.
  "결국 안드레이란 자가 우리에 대해 뭔가 알고 있지 않는가 하는 
클라우스의 우려는 기우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되었소."
  "생각을 말해 보시오. 클라우스 위원."
  클라우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데드 크로슬ㄹ 발동해 주십시오."
  일순, 스크린 안의 다섯 사람들의 표저정이 굳어졌다. 침묵이 
살처럼 화면을 흐르는 듯 보였다.
  매부리코의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중앙의 노인이 미간을 굳힌채 
클라우스를 보았다.
 "대업을 눈앞에 둔 시점이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겠소?"
  왼쪽의 다른 남자 하나가 계속해 말했다.
  "놈은 아파치를 파괴하긴 했지만 체인건에 치며억인 부상을 입은 
것 같다는 현장 조사팀의 보고가 있었소. 그런데... "
  "놈은 신인류입니다."
  클라우스는 간단하게 말을 잘랐다.
  "신인류, 특히 알파7호라면 목이 날아가지 않는 한 어떠한 
부상이라도 열 시간 이내에 정상으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체인건에 의한 부상으로 스스로 그 자를 떠날 정도라면 1시간 
이내에 부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까지나... ?"
  나직한 신음이 스크린을 흘러갔다.
  "그렇다면 놈은 불사신이나 다름없군!"
  집행위원중 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불사신은 아닙니다. 총알 정도는 막아낼 수 있지만 로켓탄 
정도의 화력에 정통으로 맞으면 견뎌낼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현재 우리에게 있는 디스트로이어보다는 약하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놈을 파괴하고자 디스트로이어를 
보냈지만 우리가 보낸 디스트로이어가 파괴도어 자폭한 것을 상기 
해주시기 바랍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중앙의 매부리코 남자가 음침히 가라앉은 회색빛 
동공으로 그를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대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데드 크로스를 발동 
시켜야 할 정도로 그 알파7호가 우리 조직에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거대한 댐도 바늘구멍의 누수에서 붕괴에 이르게 됩니다. 조직은 
저의 출생 이전부터 오늘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한 준비가 사소한 
실수 하나로 사상누각이 되는 것을 저는 우려합니다."
  클라우스의 싸늘하고도 거침이 없는 대답에 매부리코의 노인은 
주위의 집행위원들을 바라보았다.
  "반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입을 열자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로써 알파7호를 추적, 파괴하기 위한 데드 크로스를 
발동할 것이 결정되었소! 회장님께 보고는 내가 직접 드리도록 
하겠소."
  매부리코의 노인이 내뱉듯 말했다.
  그는 조직의 핵심멤버로서 조직계통에 이상이 생기면 최고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클라우스는 흔들의자에 깊숙히 몸을 묻은 채 방금까지 스크린이 
있었던 장식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드 크롯. 죽음의 십자가는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조직의 모든 힘을 다 기울여 최우선으로 표적을 추적 살해한다는 
것이 데드 크로스의 뜻이기 때문이다.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클라우스는 의자의 손잡이를 으스러지게 콱! 움켜쥐었다.
  안드레이 김.
  결코 너의 분신이 세상에 활개를 치게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그것은 너의 망령이 세상에 나래를 드리우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밤은 이 세상 어디라도 찾아간다.
  리치먼드 주립병원도 어둠에 잠겨 있었다.
  로버트 박은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으 조금 
올려세운 침대에 기댄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지난 며칠 
내버려둔 수염이 자라나 얼굴을 시커멓게 도ㅍ고 있는 가운데 그 
눈만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와 같은 병실에 있는 캘빈이란 덜떨어진 친구는 조금 전까지 
상류사회(High Society)란 포르노 잡지를 보고 침을 흘리고 잇더니 
잡지를 움켜쥐고서 화장실로 달려간 모양이었다.
   경고하건데, 더 이상 거기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말게. 그건 
불루코드를 취급할 수 있는 사람만 상관할 수 있는 사안이니까!
  존 차장보의 말소리가 귓전에서 맴돌고 있었다.
  블루코드. 국가안보와 관계되는 최고급 비밀에 부여되는 
특별코드네임. 골든 게이트란 이름이 블루코드란 철책속에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백무명이 한국에서 했던 그 말같지 않은 말이 이러한 비중으로 
다가올 줄을 어찌 상상이라도 했으랴.
  그의 눈에 왼쪽 다리를 싼 석고붕대가 들어왔다. 오른손도 
마찬가지였다. 팔다리를 동여매고 얽어맨 침대에 처박아 놓았다고 
해서 그의 감각마저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뭔가 알 수 없는 어떤 느낌이 머리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세월, 그를 지켜온 본능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 죽었을까?'
  문득 로버트 박은 중얼거렸다.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는데, 그러한 
능력을 지녔던 그가 정말 죽었을까.
  그때, 문 소리가 나더니 금발에 푸른빛 눈을 가진 처음 보는 
간호사 하나가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안경을 썼고 170이 넘을 듯한 늘씬한 키에 상당한 
미인이었다.
  전형적인 코카서스계 백인의 특징을 가진 여자였다.
  로버트 박과 눈이 마주치지 간호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주사맞을 시간입니다."
  간호사가 트레이를 내려 놓았다. 소독솜과 주사기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방 담당은 미스 김인데?"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제가 대신 왔어요. 전 또 다른 병실에 
가봐야 하니까 빨리 맞으셔야겠어요."
  "싫소!"
  로버트 박의 말에 주사기를 들고 다가서던 간호사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뭐라구요?"
  로버트 박이 그녀의 표정을 보고 씨익, 웃었다.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난 그 말괄량이가 아니면 주사를 맞지 
않소. 그러니 돌아가시오."
  당황한 기색이ㅣ 간호사의 얼굴에 스쳐갔다.
  "지금 농담하시는 거예요? 여긴 개인전용 병원이 아니에요. 
어서... "
  간호사가 다가섰다.
  그때였다.
  "안녕! 즐거운 주사맞을 시간이에요!"
  짤랑짤랑한 맑은 음성의 한국말과 함께 예의 간호사 김수영이 
별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병실에 들어선간호사 김수영은 먼저 와있는 간호사를 보곤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손에도 주사기가 놓인 트레이가 
들려있었다.
  "바쁘다더니... ?!"
  광경에 로버트 박이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리다 갑자기 전신이 
굳어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직감한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금발의 간호사가 들고 있던 주사기를 로버트 박을 
향해 들이댔다. 움직임은 비할바 없이 빠른데다, 그와는 
지척간인지라 피할 여가조차 없었다.
  더구나 지금의 로버트 박은 다리와 손에다 기브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가 험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순간에 그는 몸을 굴렸고, 주사기는 
간일발의 차이로 그를 스치며 그가 있었던 시트에 깊숙히 박혔다.
  쾅!
  로버트 박이 그 간호사의 얼굴을 부상당하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후려갈겼다.
  전광석화와 같은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간에 간호사는 몸을 비틀며 손을 들어 로버트 
박의 주먹을 막았다. 간호사가 그 충격으로 비틀, 뒤로 물러났다.
  "틀렸군!"
  간호사가 물러나는 발짓에 리듬을 실어 훌쩍 뒤로 물러나며 이를 
악물었다. 간단한 몸놀림 하나로 이미 그녀가 상당한 훈련을 받은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의 디에는 놀란 눈을 크게 뜬 김수영이 있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금발의 간호사가 표독한 눈빛을 떠올리며 품속에서 소형권총을 
번개처럼 꺼냈다.
  로버트 박의 얼굴이 굳어졌다.
  총기 전문가인 그는 그것이 여자들이 호신용로 휴대하게 만들어진 
2연발 권총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메리칸 데린저(American 
derringer)류의 한 손에 들어갈 수 있는 초소형 권총이었다.
  제아무리 소형 권총이라 할지라도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는 
그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피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데린저는 22구경이라도 매그넘의 파워였다.
  총을 본 김수영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에서 트레이가 
떨어져 바닥에서 같이 비명을 질러댔다.
  "닥치지 못해!"
  금발의 간호사가 사납게 소리치며 김수영에게 총을 겨누었다.
  너무도 뜻밖의 광경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벌벌 떨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듯 하던 김수영이 느닷없이 
기합과 함께 몸을 빙글 차돌리더니 늘씬한 다리를 쭉 뻗어 금발 
간호사의 손에 들린 권총을 걷어차 버렸던 것이다.
  금발 간호사가 신음과 함께 권총을 떨어뜨리는 순간에 김수영의 
발은 허공에서 쉬지 않고 다시 그녀의 목덜미를 걷어차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금발간호사가 맥없이 구석으로 나동그라졌다. 
바닥으로 금발이 벗겨져 나뒹굴었다. 간호사의 금발은 가발이었던 
것이다. 간호사의 머리는 가색 커트였다.
  충격이 심한 모양인지 엎어진 간호사는 일어나지도 못했다. 말려 
올라간 치마자락 사이로 허벅지와 펜티가 드러나 있었다.
  너무도 뜻밖의 광경에 로버트 박은 눈만 끔벅이며 김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권도 검은 띠에요."
  그의 눈길에 김수영이 치켜들었던 다리를 내리며 말했다.
  바로 그 순간, 엎어졌던 간호사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서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창문이 산산조각 나며 간호사의 모습이 
순식간에 로버트 박과 김수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맙소사!"
  그 광경에 김수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꼬리를 물고 비명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퍽!하는 소리와 함께 
아내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로버트 박과 시선을 맞추고 잠시 주춤거리던 김수영은 로브트 
박이 겅중거리며 침대에서 창가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볼게요."
  볼 것도 없었다.
  산산조각이 난 창문 아래는 화단이었다. 로버트 박이 입원하고 
있는 병실은 7층. 화단에 파묻히듯 엎어져 있는 간호사의 모습이 
보였다. 선혈이 낭자했다.
  "말도 안 돼... "
  그 광경에 김수영이 눈을 감으며 시선을 돌렸다.
  금발 간호사는 마치 화단에 반죽을 해놓은 것 같은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이미 숨이 멎어 버렸다고나 할까.
  공교롭게도 떨어지면서 곁에 세워져 있던 석조상에 부딪힌 듯 
머리가 부서진데다 그 부서진 머리통에서 눈알까지 튀어나와 있으니 
그 어디에도 방금 전까지의 아름다웠던 여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은 모습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로버트 박은 굳은 표정으로 그 죽은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끔찍한 모습에도 그의 눈빛은 냉정하고도 침착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로 이 여자가 자신을 습격한 것일까. 
그리고 무엇이 그처럼 간단히 자신의 목숨을 버리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제아무리 엄격한 훈련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이렇게 쉽게 자살을 
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었다.
  사람들이 몰려 나오고 병원 경비원들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입원실 여기저기에서 창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고개를 
밀었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있을 거죠?"
  그의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를 이곳, 화단까지 데려온 김수영이 로버트 박의 휠체어 뒤에서 
고개를 돌린 채 입을 연 것이었다.
  "갑시다."
  로버트 박이 머리를 들면서 말했다.
  "바로 지금! 그래요! 바로 지금 나를 죽이려는 킬러가 왔었단 
말입니다! 실패하자 다짜고짜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알겠습니까? 이건 장난이 아닙니다!"
  로버트 박은 병원 휴게실의 공중전화에다 낮게 소리치고 있었다.
  병실의 전화는 그 북새통에 불토이 된터라, 현장에서 들어오다가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공중전화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는 존 차장보였다.
  존은 즉시 수사에 착수하고 사람을 보내 그를 안가롸 
이송하겠다고 했다.
  로버트 박은 전화를 끊고서 마치 전화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할듯이 전화통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이 습격을 받은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전화걸 곳이 있나요?"
  전화통을 노려보는 로버트 박의 디에서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김수영이 조금 떨어진 엘리베이터 옆에서 팔짱을 낀 채로 등을 
벽에 기대고 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둥근 안경 뒤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가지 않았소?"
  "환자를 두고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이죠. 수칙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그 말에 문득 로버트 박의 입가에 실소가 흘러갔다.
  '수칙에 어긋난다구?'
  김수영이 그를 노려보았다.
  "왜 웃는 거죠?"
  로버트 박은 미소를 띄운 채 성한 왼손을 들었다.
  "아무 것도. 갑자기 우스운 일이 생각나서... 그런데, 그 여자 
정말 이 병원 간호사가 아니오?"
  "이미 말했잖아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라구요. 병원 
전체라면 몰라도, 우리 병동에서 주사를 놓을 사람이라면 내가 
모를리 없지 않겠어요?"
  그녀의 대답에 로버트 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왔었던 것이다.
  "어서 들어가세요. 또 무슨 일이 있으면 큰일이니까!"
  김수영이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바로 앞에 
있었다. 로버트 박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김수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미스 김은 그 광경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은 것 같군, 정말 
그렇소?"
  "환자를 보호하는 것은 간호사의 임무죠. 언제 어디에서나 환자를 
보호해야 하니까 환자 앞에서는 놀라도 놀라지 않은 척 해야 하는 
거죠."
  희미한 웃음이 로버트 박의 입가에 떠올랐다.
  "하긴... 숭영이 다운 말이로군!"
  김수영이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그를 보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햇죠?"
  "수영이. 미스 김이니 파워골드니 하는 어줍잖은 호칭보다야 
수영이란 이름이 얼마나 듣기가 좋... 으앗!"
  김수영의 가슴에 달린 명패를 가리키며 말하던 로버트 박이 
갑자기 당황해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녀가 대뜸 막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휠체어를 
밀어버렸던 것이다. 겨우 한 손을 쓰는 로버트 박이다. 게다가 
휠체어에는 익숙하지도 않은 그였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그는 여지없이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폭풍처럼 
굴러 들어가 처박히고 말았다. 비명이 뒤를 이어 그의 앞에서 
터져나왔다.
  "이, 이게... "
  너무 황당한 사태에 구석에서 죽을 상이 되어 로버트 박이 고개를 
들었다. 벽에 부딪히는 것을 막으려 손을 들었었는데, 어디가 
어떻게 된 건지 머리가 휑했다. 필시 머리를 부딪힌 모양이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안에서 쩔쩔매는 로버트 박을 보며 
김수영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밝게 웃어보였다.
  "또 벽에다 키스하기 싫으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이름은 
아무나 부르라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그럼에도 로버트 박은 넋잃은 놈처럼 그렇게 엘리베이터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수영은 그 혼자 엘리베이터에다 처박아 놓고는 
가버린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멍청히 있던 로버트 박은 엘리베이터가 7층에 
도착해 땡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정신을 차렸다.
  씨익,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맹랑한 여자.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병원 응급실 앞에는 
캘리포니아넘버의 벤츠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검은색 유리창의 
내부는 밖에서 들여다 보이지 않았다.
  벤츠의 앞에는 휠체어 한 대가 있고, 그 휠체어에서는 로버트 
박이 벤츠로 옮겨타고 있었다. 신사복차림의 남자 둘이 벤츠의 문 
옆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존이 보낸 CIA요원들이었다.
  벤츠로 옮겨탄 로버트 박이 벤츠의 앞, 정확히 말해서 휠체어의 
옆에 선 김수영을 보며 미소했다.
  "정말 인상깊은 병원생활이었소!"
  김수영이 마주 환하게 웃어보였다.
  "누구나 그래요. 나와 헤어질 때는 다... 평생 잊지 못할 
거라구요."
  로버트 박이 크게 웃었다.
  "맞아! 잊고 싶어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을 거요!"
문득 웃음을 그친 로버트 박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미혼이란 얘기는 들었는데, 애인 있소?"
  "왜 그런 걸 묻죠?"
  "관심이 있어서요. 회복되는 대로 나는 여길 다시 찾아 올 
작정이오."
  "다시 입원을 하고 싶은가요?"
  김수영의 되물음에 멈칫, 하던 로버트 박은 그 의미를 깨닫고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벼원신세를 져야 한다면 필히 이 
병원으로 당신을 찾아오겠소."
  멀어져 가는 벤츠를 바라보고 있던 김수영은 몸을 돌렸다. 그녀의 
앞에는 주인없는 휠체어가 있었다.
  무의식중에 김수영은 벤츠가 간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벤츠는 
이미 모퉁이를 돌아 병원을 벗어나고 있었다.
  회복되는 대로 다시 찾아오겠소.
  그의 마지막 말이 귀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의 웃는 얼굴이, 그의 곰과 같이 거대한 체구가 눈에 밟히듯 
선연히 떠올랐다.
  묘한 느낌이었다.
  로버트 박은 웬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국에서 백무명을 발견한 이래, 일이 어렵게 꼬이고만 있는 
듯했다. CIA의 극동지국장은 결코 간단한 자리가 아니다. 각국의 
대통령만이 취급할 수 있는 극비사안까지 처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였다.
  그런데, 그날 이후 자신은 국외자가 된 기분이었다.
  일선 에이전트 시절 아무 것도 모르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목숨을 내걸고 뛰던 바로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분명히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젠 자신을 노리는 자까지 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생각에 잠겨 있었던 로버트 박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벤츠가 고속도로를 벗어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
  조수석에 있던 신사복차림의 CIA요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리치먼드 교외에 잇는 세이프하우스로 모시고 가는 길입니다. 
그렇게 명령받았습니다만?"
  딱 벌어진 체구였다.
  "전화를 좀 쓸 수 있을까?"
  난처한 빛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전화가 지금 고장이라... 세이프하우스에 곧 
도착하게 될테니까, 그때 쓰십시오."
  "... "
  로버트 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기 도착하면 깨워주게."
  그는 피곤한 듯 눈을 감으며 뒷좌석에다 몸을 깊숙히 파묻었다.
  그를 잠시 자라보던 조수석의 요원이 시디플레이어의 버튼을 
눌렀다. 음악이 차내에 흐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숲이 우거진 길이 보였다.
  로버트 박은 그새 잠에 빠진 긋했다. 그를 보고 운전사와 요원이 
서로를 보고 씨익, 웃고는 시선을 앞쪽으로 두었다.
  로버트 박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손을 움직여 도어록을 잡아당겨 
보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겨 있었다.
  좀전에 해제버턴을 눌렀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운전석에서 조종하게 되어있는 모양이다.
  한쪽 팔은 골절에다 또 다른 한쪽다리는 금이 간 상태였다. 
평소의 그라면 몰라도 두놈이라면 쉽지 않았다.
  로버트 박은 자신의 생각이 기우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예감은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예감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기다린다는 것은 
바보짓이나 다를 바 없다. 아니 미친 짓이었다.
  벤츠의 앞에는 점점 더 깊은 숲이 나타나고 있었다. 
세이프하우스가 있기에는 부적절한 곳이었다. 너무 외따로 떨어진 
곳은 오히려 외부인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로버트 박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백미러를 
통해 앞좌석의 두 사람이 서로 눈짓을 주고 받는 것이 보였다.
  차가 커브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속력이 늦춰졌다.
  그는 성한 오른쪽발을 들어 거세게 문을 걷어찼다.
  차가 기우뚱하며, 놀란 앞좌석의 두 사람이 일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잠들어 있었던 사람의 잠버릇치곤 너무 
고약했다.
  로버트 박은 다시 문짝을 걷어찼다.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활짝 열렸다. 동시에 그의 몸이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열린 문으로 굴러나갔다.
  놀란 외침이 로버트 박의 귓전에서 멀어졌다.
  덤블링을 하듯 땅위로 구른 로버트 박은 극심한 통증에 절로 이를 
악무어야 했다. 빌어먹을! 부러진 걸 꿰미ㅈ춘 게 언제인데 
스턴트맨 흉내를 내야 한단 말인가.
  앞쪽에서 끼익! 소리와 함께 벤츠가 급정차를 했다.
  로버트 박은 통증을 참고 이를 악물고서 몸을 일으켜 절룩거리며 
길가로 뛰어갔다. 숲이 우거진 길가는 비스듬한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간, 총소리가 들리며 어깨가 화끈 달아올랐다.
  차에서 내린 놈들이 총을 쏘며 달려오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할 틈이 없었다.
  로버트 박은 다이빙하듯 길아래로 몸을 굴렸다.
  비탈진 길로 몸이 마치 팽이처럼 굴러갔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운동으로 단련된 그의 
전신이건만 기절을 할 고통이 전신으로 엄습해 왔다.
  쿵 소리와 함께 그의 구름이 멎었다.
  위에서 보기보다 아래까지는 상당한 거리였다. 늑골에 금이 가고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이 구를 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부딪힌 등짝이 부서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가 부딪히며 
멈춘 것은 계곡에 솟아나온 바위였다. 평소라면 거기다 부딪힐리가 
없었겠지만 손발이 자유롭지 않은 그였다.
  빌어먹을!
  로버트 박은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화끈거리는 어깨를 
살펴보니 선혈이 낭자한데, 다행히도 총일은 스친 듯했다.
  억지로 숨을 가다듬은 그는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가지고 절룩거리며 뛰어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로 도망가봤자 
저들이 쫓아 온다면 독아네 든 쥐꼴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수없게도 정말로 예감이 들어맞았던 것이다.
  계곡은 길에서 20여미터 가량 떨어져 잇었고 맑은 물이 물소리를 
내면서 흘러가고 있었다. 폭은 2, 3미터 가량이었다. 밤이니까 물을 
끼고서 몸을 피한다면 어쩌면 만에 하나 가능성이 있을런지도 
몰랐다.
  헉헉... 로버트 박은 턱까지 차올라 온 숨을 헐떡이며 몸을 
바위에 기댔다. 눈앞으로 물살이 세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폭은 4, 
5미터 가량으로 넓어져 물소리도 제법 세찼다.
  다리가 부서져 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차에서 뛰어내린 것은 채 5분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쉴 틈도, 그럴만한 계제도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던 로버트 박의 얼굴이 굳어졌다.
  "겨우 여기까지 온 건가?"
  그의 앞에서 조수석에 있는 스테인이란 자가 권총을 겨눈 채 
차갑게 웃고 있었다. 그가 쫓아 온 것은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었다. 로버트 박 스스로 자신의 지금 속도가 얼마나 느린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왜지?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건가?"
  로버트 박이 체념한 듯 다시 등을 바위에 기대며 물었다.
  "미안하지만 그 대답은 내 소관이 아니로군."
  스테인이 총을 겨누는 것을 보고 로버트 박은 미간을 찡그렸다.
  "한 가지만 말해주게. 나를 죽이라고 지시한 것이 존인가?"
  "영혼이 되거든 하늘에서 보게. 내가 누구에게 가서 보고를 
하는지... !"
  스테인이 차갑게 말하며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한 태도는 
그가 철저한 훈련을 받은 전문가임을 의미하고 있었다.
  탕! 총소리가 울렸다.
  스테인은 믿을 수 없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그 눈에는 고통과 
경악, 불신이 한데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핏줄기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
  짚더미와 같이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시냇물이 그의 몸주위에서 붉게 물들며 흘러갔다.
  로버트 박은 천천히 손바닥을 폈다. 그 손바닥 안에는 아메리칸 
데린저, 그 금발 간호사가 가지고 있던 초소형 권총이 들려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권총이 그를 살린 것이다.
  그는 스테인의 손에서 떨어진 권총을 집어들면서 중얼거렸다.
  "훌륭한 요원이라면 냉정함에다 철저함까지 갖추어야 하지. 넌 
나를 얕보았다. 총소리르 들은 이상, 나머지 한 놈도 이리고 올 
것이 틀림없었다.
  남은 것은 한 놈 뿐이었다.
  지금 현재로서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수도였던 리치먼드는 버지니아 주의 
수도이지만 거대한 도시가 아니다. 하늘을 꿰뚫는 마천루도 없고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다.
  인구 20여만의 도시를 흐르는 것은 운하의 낭만과 고풍스러운 
도시의 풍경이었다.
  김수영이 살고 잇는 곳은 바로 그러한 리치먼드의 외곽에 세워진 
단독주택이었다. 단풍나무가 집을 둘러싼 이 집은 그녀가 리치먼드 
주립병원에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살게 된 곳이었다.
  미국인들은 나이가 차 독립을 하게 되면 부모와 떨어진 곳에 사는 
경우가 많았다. 김수영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녀의 부모가 다 
한국인이지만 그녀 자신은 미국에서 태어났으니 사고 자체는 
미국인이라 해도 틀릴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곳에 혼자 사는 것은 그러한 관점이 아니었다.
  원래 이곳은 그녀의 숙부가 살다가 평소에 귀여워 하던 
김수영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집이었던 것이다. 안성맞춤이었다고나 
할까.
  김수영은 야간근무를 마치고 집에 있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세찬 물줄기를 알몸으로 흠뻑 두들겨 맞는 
중이었다. 희게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잇었던 비누거품들이 
혼비백산해 흩어져 배수구로 사라져갔다.
  간호사복을 입었을 때와는 달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그녀의 몸매는 놀라울 만큼 늘씬하고 탄력 있었다.
  수건으로 감아올린 머리결 아래로 드리워진 목덜미의 선은 
부드럽고, 알맞게 부풀어 오른 유방은 탄력으로 팽팽히 솟아 
있었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덥게 군살없는 아랫배도 아름다웠다.
  늘 서서 돌아다니는 간호원들이 가지기 쉬운 무우다리도 
아니었다. 국부에서 갈라져 나온 허벅지와 종아리도 날씬했다. 하긴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국민학교 2학년때부터 시작해온 태권도를 아직도 거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가스렌지에서 주전자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준비된 커피잔에다 물을 따른 김수영은 스푼으로 
커피잔을 저으며 커피잔을 든 채로 소파로 갔다.
  켜놓은 TV에서는 CNN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민주당의 리처드 J. 앤드슨 후보가 예비선거에서 잭슨 빌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후보로 당선될 것이 확실시 되고 있습니다. 이번 
워싱턴 주의 압승으로 리처드 후보가 잭슨 후보에게 역전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벌써 서거철이 다가오나?"
  김수영은 소파에 다리를 개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리모콘을 찾아 
채널을 돌렸다. NBC에서도 같은 내용의 방송을 하고 있었다. 요즘은 
온통 대통령선거 이야기 뿐이었다.
  하긴 2월초부터 예비선거(Primary Election)와 당원집회에서부터 
시작된 민주당 7월, 공화당이 8월에 시작되는 전국당대회(National 
Convention)에서 대통령후보를 선출하고 11월의 최초 월요일 
다음날인 화요일, 보통 말하는 슈퍼튜즈데이에 가서야 끝이 나게 
된다.
  그러니 일년내내 선거의 연속이라 할 수 있었다.
  김수영이 커피를 마시며 크랙커 한 개를 막 집어들었을 때였다.
  딩동! 차임벨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 20분. 이걸 새벽이라고 해야 하나, 
한밤중이라고 해야 하나. 대체 이 시간에 누구란 말인가.
  김수영은 긴장된 안색으로 알몸에 타월을 두른 위에다 가운을 
걸치고 허리를 질끈 동여맨 다음 문쪽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기분이 섬뜩해졌다.
  "누가 장난해요?"
  김수영이 소리쳤다.
  "나... 요... "
  나지막한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나라니?'
  "내가 누구에요? 확실하게 말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문을 좀... "
  밖에서 무엇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말소리가 끊어졌다.
 "누구예요? 누가 장난을 치는 거죠?"
  "... "
  밖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 외쳐도 여전했다. 망설이던 김수영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었다고는 하지만 문고리가 걸려 있어 문이 다 열린 것은 
아니었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그녀의 얼굴에 경악 떠올랐다.
  문앞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안에서 새어나간 빛으로 그가 피투성이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세상에!"
  김수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입을 벌리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 사람은 지난 밤에 퇴원했던 로버트 박이었던 
것이었다.
  총알이 격렬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놈은 앞이 아니라, 뒤에 
있었다. 그의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놈이 흉물스럽게 웃고 있었다. 
절대절명. 그는 놈에게 전신을 내던졌다. 총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리며 그의 가슴을 다시 파고들었다. 그래, 기왕 죽을 거라면 네 
놈이라도 데려가겠다! 그는 금이 간 팔까지 휘둘렀다.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놈의 꿈틀거림이 멎었다. 그래도 그는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놈은 그의 밑에 깔려 
이미 참혹하게 맞아 죽어 있었다.
  악몽에 시달리던 로버트 박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벌떡 몸을 일츠킨 로버트 박은 지독한 통증이 가슴으로 엄습함을 
깨달았다. 아픔을 느낀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전신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음을.
  잠시 멍청하게 앉아 아픔을 누른 그는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여자의 방이고 여자의 침대였다.
  남자의 침대, 방에서는 결코 이러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저런 멍청하게 큰 곰인형을 곁에다 놓는 남자도 없을테니까. 
최소한 그는 그러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로버트 박은 미간을 찡그렸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과음으로 인해 필름이 끊긴 듯 지난 일이 생각나질 않았다.
  "정신이 들었어요?"
  문이 열리며 김수영의 얼굴이 나타났다.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요?"
  일순, 어이없다는 빛이 그녀의 얼굴에 스쳐갔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어쨌든 좋아요. 움직일 수 있다면 
나와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거 같군요. 당신은 종일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까요!"
  그녀의 얼굴이 문에서 사라졌다.
  그제서야 자신이 공중전화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고 주소를 알아 
낸 것이 생각났다. 그렇군... 
  로버트 박은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문밖은 주방겸용의 거실이었다. 싱크대에서는 김수영이 
칙칙소리와 함께 뭔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가 문으로 고개를 
내밀었을때, 김수영은 후라이팬에다 계란을 깨놓는 중이었다.
  "옷은 입고 나오는 게 좋을 거예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는 그녀의 말에 흠칫, 놀라 아래를 내려다 
본 로버트 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래에는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웃통은 아예 처음부터 벗은 줄 알고 있었다. 가슴팍과 어깨를 
붕대로 칭칭 동여맨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트에 가려져 
있던 하체에 아무 것도 없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자신의 남성이 흉물스레 흔들거리고 있었다.
  제아무리 낯두꺼운 남자라 해도 치한이 아닌 다음에야 이러고 
태연할 사람은 없다.
  로버트 박은 황급히 침실로 돌아갔다.
  전혀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과 같은 날쌘 몸놀림이었다.
  그는 네 발로 기다시피해 침실로 들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옷은 어디 있나?
  "내가 왜 이렇게 홀랑벗고 있는 거요?"
  "어이가 없군요. 그럼 피투성이에다 흙투성이인 사람을 씻기지도 
않고 내 침대에다 눕힌단 말이에요? 치료는 어떻게 하구요?"
  그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씻긴다고?
  "무슨 소리요? 그럼 나를 씻겼단 말이오?"
  "당연하죠!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치료를 해요? 도대체 왜 
그렇게 무겁죠? 코끼리도 그렇게 무겁진 않을 거예요."
  맙소사?
  로버트 박은 이마를 쳤다.
  그녀의 말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난 그런 거 수없이 봤으니까요. 
내 직업이 간호사인 거 잊지 않았겠지요?"
  수없이 봤다고? 그런 거?
  로버트 박은 머리를 짚었다. 깨어날 때 아프던 두통이 대체 
언제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반역자?"
  경악한 표정으로 로버트 박이 신음했다.
  전화선 저쪽의 음성이 말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무슨 짓을 했기에 국가반역의 죄목으로 
자네가 말살리스트에 올라간 거야?"
  "말살리스트에까지 올라갔단 말입니까?"
  "오늘 아침에 자네 기록파일에 추가되었네. 지금 어디있는 건가? 
대체 무슨 일이야?"
  로버트 박은 전화를 끊었다.
  10초만 더 경과한다면 이쪽의 위치가 노출될 우려가 있었다.
  상대는 CIA의 차장 글렌 스미스였다. 그를 믿고 봐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살리스트에 올랐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단은 누구든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정신을 잃은 지 거의 하루가 지난 시점이었다.
  와이셔츠를 대강 걸친 그는 고뇌에 찬 표정으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던 자들... 
  태평양상에서 처음 습격을 받은 다음, 그를 향한 습격은 
병원에서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상황은 명백했다.
  골든 게이트가 그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골든 게이트에 대해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그의 입을 막을 
작정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떠한 말로도 이러한 사태는 
설명되어질 수 없었다.
  '존 빅터! 놈이 그들의 끄나풀이었을 줄은... '
  로버트 박은 신음했다.
  그가 상대의 끄나풀이라면 그는 절대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적이 CIA 어디에 어느 정도로 침투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일이 잘못된 모양이죠?"
  김수영이 식탁에다 냄비를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아주 크게."
  로버트 박이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일단 밥부터 먹죠! 꼬인 걸 풀려면 힘이 있어야 할테니까 
말이에요."
  김수영이 환하게 웃었다.
  "... "
  로버트 박은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러한 타입의 여자는 맹세코 한 번도 만나 적이 없었다.

    제12장 무서운 추격

  로즈볼은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멕시코 국경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식당이었다. 말은 식당이지만 
실은 햄버거 가게라 불리워야 옳을 규모였다.
  인스턴트의 대명사인 맥도널드 등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지만 
로즈볼에는 인스턴트 음식이 없었다. 모두 주인이 손으로 직접 
만드는데 맛이 있어 다섯 개의 테이블은 늘 손님들로 붐비고 
식사시간대에는 스탠드에 기대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대단히 영업이 잘 되는 것도 아니었다.
  도시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인지라, 동네 사람들과 
이따금 멕시코 국경을 넘나드는 여행객들이 주된 손님이기 
때문이다.
  제인 스미스는 구석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손님은 30분 전쯤에 피자를 사간 세 블럭 떨어진 곳에 사는 낸시 
모건이 마지막이었다.
  풍성한 몸집의 할머니 로렌 스미스는 스탠드 안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11시 25분
  가게 안에는 켜놓은 TV에서 심야쇼의 사회자 데이비드가 대지진에 
대해 관계자들과 뭐라고 떠들고 있을 뿐이었다. 저녁 때부터 
음산해지기 시작한 날씨는 밤이 되면서 바람이 불더니 지금은 
창문을 덜컹거리며 비가 뿌리고 있었다.
  제인은 읽고 있던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매우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는 호수와 
같았고 반짝이는 눈빛은 활달해 보였다.
  아무렇게나 걸친, Don't Touch Me!라는 영문이 우스꽝스럽게 
새겨진 흰 티셔츠는 172센티미터 키에 56킬로그램의 날씬한 몸매를 
감추기에는 부족했다.
  "할머니! 그만 가게 문 닫죠. 손님도 더 올 것 같지 않는데."
  제인이 소리쳤다.
  졸고 있던 할머니가 멈칫하더니 밖을 내다보았다. 그 바람에 쓰고 
있던 모자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러렴. 비가 오려고 그랬나? 온몸이 그렇게 쑤시더니만.... 
제임스는 아직 안 왔니?"
  "아직요."
  "망할 녀석 같으니 지금이 몇신데 아직도 집에 들어 올 생각을 
않는 거야?"
  혀를 차는 할머니를 향해 제인은 웃어보였다.
  "걱정마세요. 제임스도 이젠 19살이에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나이죠. 화이트는 어디 갔어요?"
  제인의 물음에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할머니는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아까 쓰레기 버리러 간다고 간 것 같던데."
  "그때가 언제인테 아직 안 오는 거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제인이 몸을 일으켜 문으로 가는 것을 보고 할머니가 웃었다.
  "그 친구는 제임스보다 10살은 더 먹었어. 제임스 걱정은 
않으면서... 쯧쯔... 그저 계집애들이란...."
  제인은 문의 손잡이를 잡으며 할머니를 돌아보며 웃었다.
  "할머니는 계집애인 적 없었어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왁자지껄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활짝 열렸다.
  놀란 외침과 함께 제인이 뒤로 물러섰다.
  가죽재킷을 걸치고 찢어진 청바지에다 무쓰를 떡칠해 
고슴도치처럼 염색으로 얼룩덜룩한 머리카락을 세운 사내가 문을 
밀고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노브라에 엷은 셔츠 하나만을 달랑 걸친, 얼굴에까지 
괴상한 칠을 한 펑크스타일의 여자가 뒤따르고 있었고, 문밖에서는 
같은 차림의 몇 명이 부다당거리며 오토바이를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비는 이제 제법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앞장 선 사내는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다 문앞에서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제인을 발견하곤 뜻밖인 표정이다가 이내 씨익, 
웃었다.
  "이런 동네에도 미인이 있었군 그래."
  "생각있어? 재는 당신 취향이 아니쟎아?"
  뒤를 따르던 여자가 날카롭게 낄낄거렸다. 비에 젖은 셔츠는 몸에 
착 달라붙어서 유방이 선명히 드러나 흔들렸다.
  사내는 괴상한 웃음을 터뜨리며 제인에게 말했다.
  "이 가게에서 일하나?"
  "제인! 넌 안으로 들어가거라."
  할머니가 미간을 찡그리며 나섰다.
  그때, 오토바이를 로즈볼의 앞에다 세운 자들이 우르르 가게 
안으로 들이닥쳤다. 머리를 가운데만 남기고 박박 민 놈부터 머리 
가운데로 고속도로를 개통한 놈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갑자기 웬 비가 쏟아지고 지랄이야!"
  "여기 주문 안 받아? 손님을 뭘로 알아?"
  아무렇게나 자리를 차고 앉으며 그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하나가 들고 들어 온 대형카세트에서 찢어지는 헤비메탈이 
흘러나와 로즈볼을 졸지에 뒤흔들고 있었다. 처음 나타난 사내와 
여자를 포함해 모두 여섯 명이었다.
  "여기 햄버거하고 보자, 뭐가 있나! 베이버, 너 피자먹을 거냐? 
그래 피자도 좀 주고... 여기 뭐 맛있어? 메뉴에 있는 거 다 가지고 
와 봐."
  리더인 듯한 처음 나타난 자가 메뉴를 보다가 소리쳤다.
  "피자는 지금 곤란해요. 그리고 우리 가게는 선불이에요."
  카운터로 물러나 있던 제인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선불?"
  리더가 펑크 머리를 쓱쓱 긁어 대며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우리가 돈 떼먹을까 봐 그러는 건가? 이 슈퍼라이온이 
말이야?"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영업하는 ... 앗!"
  제인이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엉덩이를 탁자에 걸치고 있던 리더가 다짜고짜 손을 내밀어 덥썩 
제인의 얼굴을 움켜잡은 것이다. 제인의 볼이 그의 손에서 
일그러졌다. 얼굴이 부서지는 듯했다.
  "내가 누군지 아직 모르는군 그래? 장사는 손님이 왕이야. 그런데 
그 왕을 기분나쁘게 하면 쓰나?"
  자칭 슈퍼라이온이라는 리더가 제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서 
음산히 웃었다.
  뒤로 물러서는 제인의 눈에 공포에 질린 빛이 떠올랐다.
  "무, 무슨 짓이예요?"
  리더가 다른 손으로 제인의 풍만한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냐. 여기다 왜 만지지 말라구 써놓았을까 생각 좀 
해보느라구 말이야. 이건 만지라는 소리보다 더 한데?"
  제인의 가슴팍에 씌인 Don't Touch Me를 본 리더가 크게 웃더니 
돌연 제인의 티셔츠를 거칠게 아래로 잡아당겼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제인의 티셔츠가 목에서부터 아래로 단숨에 
찢어졌다. 안에서 풍만한 가슴을 가린 검은색 브래지어가 드러났다.
  "이런, 안에는 또 검은색이야? 밑에도 그런가?"
  리더가 쿡쿡 웃으며 제인의 국부를 청바지 위로 대뜸 움켜쥐었다.
  그 광경을 보고 일행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크게 웃어댔다.
  "그것도 벗겨 봐! 벗겨보라구."
  그순간, 탕! 총소리가 들렸다.
  침묵.
  리더가 고개를 돌렸다. 그를 향해 할머니가 라이플을 겨누고 
있었다.
  "당장 나가. 그렇지 않으면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
  할머니가 눈을 부릅뜨고서 소리쳤다. 여장부라 불리던 
할머니였다. 나이가 지긋한 지금도 그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거칠고 어려웠던 시대를 살아왔던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런... 장난이 조금 지나쳤나?"
  리더가 손을 떼며 씨익, 웃었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할머니가 철컥 소리를 내며 라이플을 겨누자 리더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가겠소! 간다니까...."
  그순간, 탕! 다시 총소리가 터지는 가운데 비명이 뒤를 이었다. 
할머니가 총을 떨어뜨렸다.
  일행 중 하나가 어느새 뒤로 돌아가 할머니를 덮쳤던 것이다.
  "총이란 게 할멈 같은 늙은 계집이 쓰는 게 아니지!"
  무지막지하게 주먹으로 할머니를 쓰러뜨리고 라이플을 뺏은 자가 
쓰러진 할머니를 내려다 보며 킬킬거렸다.
  "할머니!"
  그 광경을 보고 제인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철썩! 다짜고짜 리더가 제인의 뺨을 거세게 후려갈겼다. 비명과 
함께 제인이 비틀거렸다.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리더가 제인의 한쪽 팔을 잡았기 때문이다.
  "시끄럽게 굴지마. 죽인 건 아니니까!"
  리더는 제인의 브래지어를 거칠게 잡아당겨 땅에다 패대기쳤다. 
풍만한 제인의 유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두가 놀라 바짝 곤두서 
흔들리고 있었다.
  리더는 조듬도 망설이지 않고 제인의 유방을 움켜잡았다. 제인이 
비명을 질렀다.
  "만지지 말라고 한 이유가 있었군! 감촉이 좋아!"
  그의 눈은 욕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제인을 거세게 
벽으로 몰아붙였다.
  "빨리 끝내. 우리도 맛 좀 보자구."
  할머니를 쓰러뜨린 놈이 소리쳤다.
  "넌 그 늙은 계집이나 가지고 놀아."
  리더가 소리쳤다.
  일행이 와하고 일제히 웃었다.
  할머니를 쓰러뜨린 대머리가 주저없이 손을 뻗어 할머니의 늘어진 
젖을 잡아 흔들어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계집이 그리워도 이건 곤란한데...."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그 순간, "무슨 짓들이야! 그만두지 못해!"
  고함소리와 함께 앳된 생김의 청년 하나가 문을 열고 뛰쳐 
들어왔다. 격렬한 분노가 얼굴에 들끓고 있었다.
  "제임스! 들어오지 마! 가서 사람들을 불러!"
  그를 보자 제인이 소리쳤다.
  나타난 것은 그녀의 동생인 제임스였다.
  "넌 또 뭐냐?"
  머리 가운데로 고속도로를 지나보낸 자가 제임스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입을 딱 벌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제임스가 번개처럼 그의 명치를 가격했던 것이다.
  제임스는 원래 주대표로 출전했던 적이 있는 권투선수였다.
  제임스는 다시 주먹을 날려 할머니를 친 놈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링에서는 뒤에서 의자를 휘두르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의자에 맞고 쓰러지자 무차별한 발길질이 
그에게 가해졌다. 졸지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제임스!"
  제인이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아직도 모르겠나? 넌 다른 데 신경쓸 겨를이 없어!"
  리더가 제인의 청바지를 끌어내리며 웃어댔다.
  제인은 새우처럼 배를 움켜잡고 몸을 웅크렸다. 반항하다가 
무지막지한 주먹에 배를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제인의 삼각팬티가 사정없이 찢겨져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총소리까지 났지만 아무도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날씨라면 누가 와줄 가망은 없었다. 로즈볼은 마을 입구에 
있기 때문이다.
  제인은 벽에 몰린 채로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두 팔을 웅크려 
유방과 국부를 가리고 있었다. 이미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발치에는 청바지가 내려져 있었다. 그것은 이미 그녀의 
몸을 감싸주던 옷이 아니라, 족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 리더가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있었다.
  "제, 제발...."
  제인이 웅크린 채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리더가 손을 뻗어 제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겁먹지마. 베이비. 겁낼 건 하나도 없어."
  다음 순간, 제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그녀를 테이블에다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신을 
모조리 드러낸 채로 허깨비처럼 테이블 위에 누워야 했다. 
스물세살의 유방이 구름처럼 흔들렸다.
  약속이나 한 듯이 다른 한 놈이 위에서 제인의 팔을 잡았다.
  리더가 잔뜩 오므린 제인의 넓적다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질기군. 그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다음 순간, 그는 사정없이 테이블 위에 누운 제인의 아랫배를 
주먹으로 갈겼다.
  쥐어짜는 신음과 함께 제인의 늘씬한 두 다리가 힘없이 벌어졌다. 
모든 것이 리더의 눈앞에 있었다.
  리더의 눈은 욕정으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때였다.
  "넌 뭐야?"
  그의 등뒤에서 동료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와 다시 숨이 막히는 듯한 신음, 
욕지거리가 잇달아 들려 오며 테이블이 뒤집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일어났다.
  리더는 제인의 팔을 잡고 있던 자가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서 주춤 물러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갑자기 전신에 긴장이 살처럼 흘러갔다.
  그는 번개처럼 몸을 뒤로 돌렸다.
  한 사람이 비에 흠뻑 젖은 채,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젖은 
몸으로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 긴머리의 동양인 한 사람을 그는 
볼 수 있었다.
그의 뒤로 마치 휴지처럼 구겨져 쓰러진 자신의 동료들이 보였다. 
뒤집어진 테이블이 배경그림처럼 보이고 있었다.
  "너, 넌 뭐냐?"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리더가 주춤 물러나며 말했다. 이미 
바지를 내린 터라 남성이 흉물스럽게 건들거렸다.
  리더는 동양인이 대답도 없이 자신의 멱살을 움켜잡는 것을 
느끼고는 대뜸 손을 휘둘러 그의 옆구리를 찔러갔다. 어느 새 그는 
재킷에서 재크나이프를 꺼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좀전까지 제인의 
팔을 잡고 있던 동료의 위에 무서운 기세로 나가 떨어졌다.
  우지끈 소리와 함꼐 다시 비명이 터졌다.
  "제인...."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동양인이 테이블 위에 아직도 못 박힌 듯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제인을 불렀다.
  그를 발견한 제인이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화이트!"
  그는 조용히 매끄러운 제인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제인. 이젠 끝났소...."
  그때였다.
  탕! 총소리가 들리며 그의 전신이 움찔했다.
  그는 제인을 안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서 그자들 중의 홍일점이었던 여자가 할머니의 라이플을 
쥐고서 서 있었다.
  그가 총을 맞고서 전혀 흔들림없이 태연히 자신을 돌아보자 
여자의 눈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남자의 눈은 기이하도록 조용하고 맑았다.
  그 눈에 주눅이 든 여자는 갑자기 소리치며 다시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철컥! 라이플의 격철이 헛되이 용쓰는 
소리가 잇달아 났다.
  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제인의 등을 두드렸다.
  "옷을 입어."
  남자가 제인에게서 몸을 돌려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본 
여자가 공포에 질린 외침과 함꼐 라이플을 그에게 집에던지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주한 것은 그녀 혼자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결과로 나타나게 될런지 아는 사람은 
아직은 아무도 없었다.
  비는 아직도 쏟아지고 있었다.
  로즈볼에서 제일 먼저 출발한 것은 앰뷸런스였다. 그 뒤를 따라 
붉은 빛 경광등을 번쩍이며 보안관들의 패트롤이 로즈볼을 떠나기 
시작했다.
  "잘 부탁하겠소."
  보안관 릭은 차문을 잡은 채 앞에 선 백무명에게 말했다.
  "제임스나 잘 보살펴 주십시오."
  릭이 무명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큰일날 뻔 했소. 화이트, 그럼 내일 봅시다."
  무명은 보안관이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떠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 잃은 오토바이들이 흉물스럽게 그 
자리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로즈볼의 안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치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명은 주방의 뒤로 통한 계단을 통해 로즈볼의 이층으로 
올라갔다. 로즈볼의 이층은 제인 가족의 살림집이었다. 무명이 지난 
며칠간 지낸 곳이기도 했다.
  할머니 로렌은 자신의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제인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무명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왈칵 그의 품에 안겨왔다.
  무명은 조용히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할머닌 어떻소?"
  "잠이 드셨어요. 진정제가 이제야 효력을 발휘하나 봐요."
  제인이 숨죽여 울면서 말했다.
  "다행이군. 이제 제인도 가서 자요. 여긴 내가 지킬테니까."
  "아니에요. 내가...."
  "제인은 쉬어야 해요. 어서."
  제인은 무명을 바라보았다. 무명은 조용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처음 나타났을 때의 그 눈빛 그대로였다.
  늘 조용하던 그가 오늘은 거대하게 변한 듯 보였다.
  제인은 나직히 한숨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께요. 제임스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소. 타박상일 뿐이니까. 걱정은 
연로하신 할머니이신데, 굳이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니...."
  제인은 잠든 할머니를 돌아 보았다.
  "할아버지를 병원에서 잃어서 그러세요. 살릴 수 있는 분을 
병원에서 잘못한 바람에... 그 뒤로는 할머니는 병원에 간 적이 
없거든요."
  무명은 제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서 쉬어요. 할머니께선 강한 분이라 한잠 자고 나면 괜찮으실 
거요."
  "...."
  제인은 무명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명은 잠든 할머니의 옆, 창가에서 비가 쏟아지는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한참 있어야 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진다면 날이 밝는 것은 볼 수 없으리라.
  그가 로즈볼에 온 날도 비가 내렸었다. 
  아파치 헬기의 습격을 받은 지 일 주일째 되던 날, 그는 이곳에 
도착했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낮에는 쉬고 밤에는 산길을 재촉한 
지 일 주일 7시간이 흐른 뒤였다.
  로즈볼이 멕시코 국경을 바라보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그가 일주일 
만에 산길을 가로질러 여기에 도달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명의 뒤를 추적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반인을 사막에 버려두면 제아무리 강한 체력을 지난 사람도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십수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무명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과 같은 거대한 나라에서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무명과 같은 
사람이 몸을 숨긴다면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산속을 전전한 무명이 로즈볼에 이르렀을 때는 밤이었다.
  로즈볼의 간판인 햄버거가 무명의 눈길을 끈 것은 전혀 우연일 
수가 없었다. 그는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즈볼에 들어선 무명은 햄버거의 가격을 보곤 난감해지고 
말았다. 2달러 95센트. 결코 비싼 가격일 수가 없었지만 그의 
수중에는 달러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달러뿐 아니라, 원래 그에게는 
돈이 별로 없었다.
  로즈볼을 나서는 무명을 잡은 것은 할머니 로렌이었다.
  "돈이야 나중에 갚아도 좋지! 뭘 먹고 싶수?"
  일 주일간을 산에서 헤맨 무명이었다. 차림이 온전할 리 없었다. 
문자 그대로 산도적놈 같은 모습의 무명에게 돈은 나중에 갚아도 
좋다고 할머니는 햄버거를 비롯한 음식을 제공했고 무명은 로즈볼에 
머물게 되었다.
  햄버거 값을 일을 해서 갚겠다는 무명의 제의를 할머니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제인과 제임스는 반대했었다.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었다. 사람은 겉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의 눈빛을 보라고.
  얼떨떨한 빛으로 자신의 눈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눈빛을 무명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무명은 할머니의 잠든 이마를 조용히 짚었다. 미열이 있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그렇듯 사람 좋은 분을, 그때 쓰레기를 버리러 가지 
않았더라면.... 무명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아니, 갔었더라도 
주유소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래에게 전화를 갈까말까 갈등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늦게 돌아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때,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제인의 방에서 나가 번개처럼 제인의 
방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인의 방은 할머니의 방 맞은편에 
있었다. 
  제인이 침대에 앉아 이불을 쓴채로 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오, 제인!"
  제인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창문을 가리켰다.
  "차, 창밖에...."
  무명은 더 이상 듣지않고 창가로 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쏴 빗소리가 크게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로즈볼의 뒷마당에 
심어진 은행나무가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데?"
  무명이 제인을 돌아보았다.
  잠옷차림의 제인이 창백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뭐, 뭐가 일렁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정말이예요."
  무명은 창문을 닫고 제인의 앞에 가 조용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겁먹지 말아, 제인. 제인이 늘 보던 은행나무야. 나무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야."
  "저, 정말 그럴까요? 누, 누가 들어오려고..."
  무명은 미소하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젠 괜찮아, 제인. 모든 건 끝났어. 지금 이 집안에는 제인을 
해칠 사람은 없어. 안심해. 내가 제인을 지켜줄테니까!"
  제인이 무명을 바라보았다.
  "저, 정말이죠?"
  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한잠 푹 자고 나면 좀 나아질 거야."
  무명은 제인을 다둑거려 그녀를 침대에 뉘였다. 그리고 그가 몸을 
돌릴 때, 제인이 그의 손을 잡았다.
  "화이트."
  화이트라는 것은 무명이 나래가 자신에게 지어준 백(백)이라는 
성에서 따온 무명이 지은 그의 영문 호칭이다.
  "옆에 있어줘요. 너무 무서워요. 제발...."
  제인이 무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영은 조용히 그녀를 내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의자를 가져오려고 하자 제인은 다시 고개를 저으며 갑자기 
그의 목에 팔을 걸고 매달렸다.
  "나를 안아줘요. 화이트!"
  무명은 그녀가 잠옷 안에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단단하게 뭉쳐진 제인의 가슴이 느껴졌다.
  "제인...."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하지말고!"
  제인이 소리치며 거세게 무명의 입술을 점령했다.
  무명은 천천히 그녀를 안아 조용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아니, 불 같은 느낌이 제인의 
입술에서 그의 전신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창 밖으로 빗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다이아나는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멕시코인의 거리라 불리는 올베라 스트리트에 있는 검둥이 굿의 
지저분한 아파트의 소파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마약판매상인 검둥이 굿은 그녀의 몸위에서 세차게 그녀를 
유린하고 있었지만 다이아나는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는 것은 육체의 쾌락이 아니라, 그녀가 
방금 전에 굿에게 받아 피운 헤로인의 약효였다.
  전신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황홀경에 이따금 검둥이 굿이 
부딪혀와 파도를 치게 했다.
  "좋아, 좋아... 다이아나! 넌 멋진 계집인데!"
  검둥이 굿이 헐떡거리며 다이아나의 탱탱한 유방을 움켜잡았다. 
소파에 내던지듯 벌려진 다이아나의 갈색빛 넓적다리가 갓 잡아올린 
물고기처럼 꿈틀거리며 그를 감아왔다.
  돈이 없다고 몸으로 때우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검둥이 굿은 
다이아나가 이처럼 대단할 줄은 몰랐었다.
  로스앤젤레스 마약루트의 최종 소비자들에게 마약을 파는 굿은 
조직의 말단인지라 여자다운 여자를 만나기 쉽지 않았다.
  물론,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일단 마약에 빠진 여자는 언제든 다리를 벌린 준비를 하고 있음을 
굿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벌린 다리가 힘이 없음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 다이아나라는 계집은 달랐다.
  웬지 모르게 공포에 질려 있던 이 계집은 일단 마약에 빠져들자 
폭풍이 치듯 그를 집어 삼켰던 것이다.
  굿은 어디선가 문소리 비슷한 것이 들리는 듯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세차게 하체를 움직였다.
  평소라면 좀 달랐을지 모르지만, 흥분한 굿은 다닥다닥 붙은 
옆방의 소리라고 생각을 흘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생각이었다.
  퍽
  강렬한 충격을 머리에 느끼며 굿은 그대로 다이아나의 품속에다 
머리를 박고 말았다.
  "으응, 벌써 끝이야? 하다가 마는 게 어디 있어... 더 해. 아직 
멀었어. 라이온은 그렇지 않았어... 그렇지 않았다구."
  다이아나는 몸을 비틀다 돌연 굿이 훌쩍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마약에 취한 그녀의 시야에 희미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 어떻게 된... 거야?"
  다이아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몽롱했다.
  다리를 벌린 채, 격한 정사로 번들거리는 음부를 그대로 드러낸 
채 자신을 바라보며 소파에 누운 다이아나를 크린트는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차고 냉혹한 얼굴. 그에게서 마흔둘의 나이를 느끼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를 보고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 회색빛 눈동자로 무표정하게 다이아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크린트의 앞에는 벌거숭이의 굿이 인사불성이 
되어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굿의 뒤통수를 친 신사복의 사내가 앞에서 물었다.
  "깨워."
  크린트가 간단히 말했다.
  신사복의 사내가 다짜고짜 소파에 늘어진 다이아나의 뺨을 후려 
갈겼다. 그 손길은 무지막지해 다이아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소파에서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헤로인에 취한 다이아나는 굴러 떨어져서도 꿈인지 
생시인지 얼떨떨한 듯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물을 끼얹어라."
  그 모습을 보고 크린트가 싸늘하게 말했다.
  다이아나가 알몸 그대로 양변기의 물속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푸다닥거리는 다이아나의 머리를 사납게 나꿔챈 사내는 
다이아나의 눈을 들여다 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다이아나의 
머리를 눌러 변기통에다 처박았다.
  궁둥이를 드러낸 채 퍼덕거리던 다이아나가 비명을 지르자, 
사내가 다이아나의 머리채를 낚아채 음산한 눈으로 다이아나의 눈을 
쏘아보았다.
  "정신이 드나?"
  "누, 누구예요? 왜...?"
  다이아나는 채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그 앞에는 크린트가 서 있었다.
  그는 사진 한 장을 다이아나에게 내밀었다.
  "이 사진의 남자를 안다고 했나?"
  "그, 그게 누군데...."
  더듬거리는 다이아나의 머리에 권총이 쿡 찔러왔다.
  "생각나지 않으면 네 머리통에는 바람구멍이 난다."
  그녀를 변기통의 물에다 처박은 사내가 감정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다이아나의 눈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의 앞에 벌거숭이로 쓰러져 있는 굿을 볼 수 
있었다.
  흰빛이 많은 은발의 크린트의 좌우에는 세 명의 신사복이 굿의 
아파트에 들어서 있었는데, 험한 세상을 살아온 그녀는 대번에 
그들이 어떤 방면의 전문가들임을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알몸으로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 사진에는 다이나믹한 폼으로 공을 던지는 긴머리의 야구선수 
한 사람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찍혀 있었다.
  "이 사람은...?!"
  새파랗게 질려 사진을 들여다 보던 다이아나의 눈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알아 보겠나?"
  다이아나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아요. 그날... 그때 그 사람...."
  크린트가 그녀의 손에서 사진을 낚아챘다.
  "네가 이 친구를 라이플로 쐈는데 끄떡없더라고 한 것이 
사실이나?"
  "그, 그래요. 내가 이, 이 사람을 등 뒤에서 쐈는데... 그런데 
총을 맞지 않은 것처럼... 그래요. 내가 다섯 방이나 연달아 
쐈는데도..."
  다이아나가 갑자기 떠벌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날, 비오던 밤. 슈퍼라이온이라는 폭주족 리더와 같이 
로즈볼에 갔었다. 거기서 그녀의 일행은 모두 그 괴이한 사내에게 
당하고 말았었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그 곳을 도주하자 오토바이를 타고서 바로 
로스앤젤레스까지 와 친구들에게 떠벌였던 것이다. 아무리 총을 
맞아도 끄떡없는 괴물을 봤노라고.
  그녀는 너무도 간단히 자신의 동료들을 해치우는 무명에 대한 
것을 과장해 사방에다 얘기했고, 자신이 그에게 쏜 총탄도 처음보다 
몇 배나 되었다.
  "좋아. 그럼 말해 봐. 놈이 지금 어디 있나?"
  크린트가 감정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알몸으로 엉켜있는 다이아나와 굿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그날로부터 사흘이나 지난 뒤였다.
  경찰은 그들의 시체를 검시한 뒤, 그들의 사인이 헤로인 
과용이라고 단정했다. 사실이었다.
  그들의 체내에서는 치사량 이상의 헤로인이 검출되었던 것이다. 
수사는 그렇게 종결되었다.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멜리사?"
  TV를 보고 있던 제임스는 초인종 소리에 반갑게 문을 열다가 
돌연, 굳어졌다.
  문 밖에는 차가운 안색, 아니 무표정한 얼굴의 회색신사복을 
착용한 40대 남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오늘 영업 안 해요."
  제임스는 뭔지 모를 기분나쁜 느낌에 문을 닫으려고 했다.
  턱. 그 손을 가로막으며 회색의 그 남자가 제임스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 남자가 여기서 일하고 있니?"
  "화이트?"
  무명의 사진을 본 제임스가 부지간에 중얼거렸다.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문으로부터 다섯 명의 신사복차림의 
사내들이 번개처럼 로즈볼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무, 무슨 짓이예요?"
  뒤로 밀린 제임스가 놀라 소리쳤다.
  40대 남자, 크린트는 침착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우린 FBI에서 나왔다."
  "FBI?"
  제임스가 놀라 크린트를 보았다.
  "그 자는 범죄자야. 희대의 살인마로 국제적인 킬러다."
  "없는 것 같습니다!"
  안으로 들어갔던 신사복 하나가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크린트는 감정없는 회색빛 눈동자를 제임스에게 꽂았다.
  "어디로 갔니?"
  "누, 누구 말입니까?"
  그 기세에 눌린 제임스가 더듬거렸다.
  크린트가 아무 말없이 제임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한 손임에도 
불구하고 제임스는 목이 부서져 나가는 것 같았다. 대번에 얼굴이 
대춧빛처럼 붉게 달아 올랐다.
  크린트가 싸늘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꼬마친구. 우린 농담을 할 여가가 없어. 그 자가 도주하면 그 
책임은 네가 져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할런지 
몰라."
  이층에 올라갔던 자들이 내려와 아무도 없음을 보고했다. 
움직임이 질서정연했고 모두 귀에는 이어폰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차가운 빛을 발하는 권총이 들여 있었다.
  제임스는 숨이 막혀 캑캑거렸다.
  지난번 폭주족들에게 맞은 전신타박상이 아직 가시지 않은 
그였다. 공포의 빛이 제임스의 눈에 떠올랐다.
  크린트가 제임스의 멱살을 풀어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디 갔지?"
  말은 간단하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 간단한 한 마디의 말이 사람에게 어떠한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얼마나 공포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지를 오늘 
처음 절실하게 깨닫는다.
  "벼, 병원에...."
  제임스는 다급하게 더듬거렸다.
  "병원?"
  "그, 그래요. 누나랑 할머니 때문에 병원에 갔어요. 정말이예요."
  제임스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꼬마친구. 그 병원이 어디지?"
  "새, 샌디에이고 시립병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사복들이 썰물처럼 로즈볼을 빠져 
나갔다.
  순식간에 이제 남아있는 것은 제임스의 앞에 선 크린트 분이었다.
  그의 눈빛에 마치 독사 앞에 굳어진 들쥐와 같이 제임스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크린크는 눈빛을 거두고 로즈볼을 나섰다.
  바깥에서 차들이 출발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제임스는 다급하게 문을 닫아 걸었다.
  창문의 커튼을 조금 젖히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세단들이 로즈볼을 떠나고 있었다. 모두 3대였다.
  제임스는 가쁜 숨을 내쉬며 등을 벽에 기댄 채 털썩 주저앉았다.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들에게서 느껴지던 공포감은?
  불현듯 한 생각을 떠올린 제임스는 미친듯이 달려 전화기를 
들고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가 퇴원한 것은 어제였다.
  그리고 계속해 상태가 좋지 않았던 할머니가 그 대신 입원을 
했다. 할머니에게 가기 위해 제인과 화이트가 병원으로 출발한 것은 
한 시간 전쯤이었다.
  그는 여자친구인 멜리사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병 문안을 
겸해서 오는 터라, 오늘은 아무도 없는 집안의 자신의 방 침대에서 
진하게 데이트를 즐겨볼 참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화이트가 범죄자라니? 더구나 국제적인 킬러라구?'
  고개를 설레설게 흔들며 전화를 걸던 제임스의 전신이 돌연 
굳어졌다.
  대체 어디로 들어왔을까.
  아니, 처음부터 나가지 않았던 것일까? 예의 신사복 하나가 
유령과 같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조금 둔탁하게 
보이는 제임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무, 무슨 짓...?"
  제임스의 외침이 채 새어나오기도 전에 권총이 불을 뿜었다.
  무엇을 느끼기도 전에 제임스는 거대한 불덩이가 자신의 머리속을 
관통함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샌디에이고 시립병원입니다! 
말씀하세요. 말씀...."
  제임스가 떨어뜨린 전화기에서 교환의 말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신사복은 전화기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곤 전화기를 
전화기에다 올려놓았다.
  10분 뒤, 제임스를 만나러 로즈볼에 도착한 멜리사는 거대한 
화염에 휩싸여 있는 로즈볼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할머니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놀란 것은 이미 괜찮았고 다만 늑골에 두 군데 금이 가 기브스와 
요양이 필요한 상태였다.
  "자네에게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할머니 로렌은 무명의 손을 부여잡고서 말했다.
  "언제까지 그런 말씀을 하실 생각이죠? 화이트는 그 말을 제일 
싫어해요. 그렇게 말하면 남 같쟎아요."
  옆에서 제인이 눈을 흘겼다.
  무명이 담담하게 웃었다.
  사람좋은 그 웃음을 지은 채 조용히 무명을 바라보고 있던 로렌은 
나직히 한숨쉬었다.
  "떠나지 않을 수는 없겠나?"
  "...."
  무명의 얼굴에 미동이 일어났다.
  "떠나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화이트가 어딜 가요?"
  놀란 제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로렌이 혀를 찼다.
  "녀석하구... 이번 사건으로 인해 화이트는 난처하게 되었을거야. 
보안관 릭이 봐주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을테고."
  "할머니가 회복되실 때까지는 있겠습니다."
  "화이트! 무슨 소릴하는 거예요?"
  제인이 놀라 다시 소리쳤다.
  "난 자네가 맘에 들어. 죽은 영감이 살아있었더라도 그랬을 거야. 
자네를 사위로 삼자고. 한번 생각해 보게. 제인과 결혼하면 자네 
문제는 모두 해결될 수 있을 거네. 시민권이 나올테니까 말이야."
  할머니의 말이 이어지자 제인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누구나 짐작하면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화이트는 시민권이 없는 
밀입국자였다. 그것이 이번 사건으로 인해 보안관들을 만나면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밀입국자에 대한 입장은 엄격하고 단호했다. 추방이 
원칙인 것이다.
  "떠나지 말아요!"
  제인은 병원 벤치에서 무명에게 말하고 있었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그늘 아래 선 무명은 대답이 없었다. 그의 
문제라는 것이 단순한 밀입국자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이 필요하다면 내가 위장결혼이라도 해 줄께요. 당신이 
원한다면 시민권이 나온 다음에 이혼을...."
  무명은 제인의 말을 막았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제인. 난 떠나야 해."
  "화이트!"
  "난 제인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난 쫓기고 있어."
  무명의 말에 제인의 얼굴에 흠칫하는 빛이 일순 스쳐갔다. 하지만 
그것은 한 순간일 뿐이었다.
  "내가 로즈볼에 계속 머무른다면 제인 가족들에게 해가 될 수도 
있어. 난 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아."
  "당신이 무엇 때문에 누구에게 쫓기고 있는지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난 당신이 결코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으니까요!"
  희미한 웃음이 무명의 얼굴에 스쳐갔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맴을 돈다고 해야 할까. 애꿎은 잔디를 
차고 돌멩이를 차고 땅바닥을 내려다 보고....
  "그날 밤... 나를 안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인가요?"
  제인은 병원건물을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무명은 그녀를 보았다. 제인은 애써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날 밤 제인은 알몸으로 그에게 안겨 잠이 들었었다. 그렇듯 
그를 열망했음에도 그는 그녀를 어린 동생을 싸안아주듯 그렇게 
조용히 보듬어 재워주었을 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뜬 제인은 자신이 무명의 품에 알몸으로 안겨 잠들어 
있었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깰 것을 우려하듯 무명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그렇게 
그녀를 안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지매하는 것은 윤리의식이 아니었다. 그러한 교육이나 
프로그램도 그에게 제대로 심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와의 
육체적인 관계가 나래에게 미안한 일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돌연 무명의 안색이 굳어졌다.
  입원실 쪽으로 급하게 달려들어와 급정차하는 세단을 보았기 
때문이다. 1993년식 포드였다. 한 대가 아니었다. 잇달아 세 대가 
미친 듯이 달려와 급정차를 했고 앞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 세번째 차가 서기도 전에 첫번째 차에서는 신사복차림의 
사나이들이 쏟아져 나와 병원으로 뛰어들어갔다.
  무명은 제인의 손을 잡아당겨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다.
  "무슨 일이예요?"
  무명의 안색이 갑자기 달라진 것을 보고 제인이 눈을 크게 떴다.
  "잘 들어, 제인 이제부터 제인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빠져나가는 거야. 그리고 경찰에 가."
  "무슨 소리예요?"
  "설명할 시간이 없어."
  무명의 눈빛을 본 제인은 그제서야 입원실 쪽에 들이닥친 세 대의 
세단을 발견했다. 선글라스를 쓴 크린트가 마지막 차에서 내려 
주위를 쓸어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예요? 화이트를 쫓는 사람들이? 뭣하는 사람들이죠?"
  제인이 크린트를 보자 무명에게 물었다.
  "나도 몰라."
  바로 그 순간, 크린트가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보이고 그 사람이 이쪽을 손가락질 하는 것이 보였다. 
크린트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빨라 가!"
  무명이 소리쳤다.
  "떠, 떠날 거죠? 그렇죠?"
  제인이 움직일 생각을 않고 다시 물었다.
  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떠나야 해!"
  일순, 제인의 전신이 굳어졌다.
  "내가 여기 있으면 할머니와 제인까지 위험하게 돼. 물론 
제임스까지... 그럴 순 없어!"
  신사복들이 이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권총을 꺼내는 것을 본 제인의 안색이 달라졌다.
  "어서! 날 여기서 죽게 할 셈이야?"
  무명의 외침에 마침내 제인이 주춤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제인이 물러나는 것을 본 무명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에게 
다가오고 있는 상대들이 가진 것은 겨우 권총이었다. 제아무리 
강력한 권총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위협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무명은 몸을 돌렸다.
  그들이 누구이건 그는 쓸데없이 싸우고 싶지 않았다. 싸우고자 
했다면 그들의 이목을 피해 산속을 전전하며 로즈볼까지 흘러오지 
않았을 무명이었다.
  "서랏! 서지 않으면 쏘겠다!"
  등뒤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이 마당에 그 소릴 듣고 설 사람이 어디 있으랴. 더구나 상대는 
총을 맞아도 끄떡없는 백무명인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달리기 시작한 무명은 불덩이가 다리를 
지지는 통증을 느껴야 했다.
  경악으로 굳어진 무명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를 향해 권총을 
쏘고 있는 신사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무명은 지독한 
통증이 가슴을 관통하는 것을 깨달았다.
  무명은 믿을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 
보았다.
  피. 그러했다.
  체인건을 맞았을 때를 제외하곤 보지 못했던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총알은 등을 뚫고 가슴까지 관통해 나간 상태였다.
  '이건 평범한 권총이 아니다!'
  무명은 절실한 위기감이 엄습함을 깨달았다.
  사방에서 권총을 겨누고 신사복의 사나이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놀란 병원 환자들과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대오는 그들이 엄격한 훈련을 받은 자들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했다.
  무명은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귓전으로 총알이 스쳐 
날아가는 소리가 귀신의 외침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병원 잔디를 넘어서다 멈추어야 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권총을 겨누고 서 있는 신사복의 사나이들 
둘을 발견했던 것이다. 뒤에는 그들의 일행이 총을 겨누고 따라오고 
있었다.
  크린트는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백무명은 포위된 상태였다. 상황은 이미 끝이 난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타이어가 격렬하게 아스팔트에 짓이겨지는 비명을 
지르며 차 한 대가 그들의 앞으로 돌진해 왔다. 놀란 외침과 함께 
크린트의 부하들이 흩어졌다.
  "화이트 빨리!"
  그 순간, 타앙! 탕! 크린트의 부하들이 총을 쏴대기 시작했다. 
무명은 다시금 팔뚝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려 제인이 운전하는 차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가 문을 열고 한 발을 차에 올리는 것을 본 제인이 격렬하게 
차의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짓밟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몸짓이었다. 차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무섭게 질주해가는 차를 향해 크린트의 부하들이 총을 쏴댔다. 
제인이 차를 모는 솜씨는 뛰어나 병원잔디를 넘고 나무사이를 
질주하는 바람에 그들의 총질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상황이 졸지에 끝나 버리자 크린트는 이를 
갈고는 다급히 차를 출발시켜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의 
부하들도 뒤를 따랐다.
  병원은 졸지에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크린크는 고속도로에 차를 세워두고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불과 10여분 전까지 고속도로에서 쫓고  쫓기는 경주를 벌였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셈이진 갈래길로 들어선 다음에 제인의 차를 
놓치고 만 것이다.
  "아무래도 어디 샛길로 중간에서 빠진 것 같습니다."
  부하가 옆에서 말했다.
  "비상망을 쳐라."
  크린트가 싸늘히 소리쳤다.
  데드크로스가 발동된 지 이미 보름이 넘은 시점이었다. 그처럼 
심혈을 기울여 찾아낸 놈인데 놓칠 수는 없었다. 조직은 과오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젠 됐어, 제인. 그들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아."
  바깥을 보고 있던 무명이 말했다.
  그들은 갈래길 바위 뒤쪽에 숨어 있었다. 고속도로를 언덕에서 
넘어서자마자 나타나는 그 갈래길은 그 지역 사람이 아니라면 얼핏 
알아 볼 수 없는 길이었다.
  무명의 말에 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무명이 돌아다보았다.
  운전대의 제인이 한쪽으로 고개를 떨구고서 비스듬히 창쪽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선혈이 번져나오고 있었다.
  "제인!"
  무명이 놀라 소리치며 그녀를 부둥켜 안았다.
  제인은 말이 없었다. 그가 그녀를 흔들어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의 품에 그저 온몸을 맡기고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제인!"
  무명이 소리쳤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라스베가스는 기회의 도시다.
  사방에서 눈부시게 명멸하는 네온사인들 안에는 늘 기회가 숨어 
있다. 살아있는 듯 전광판에 튀어오른 바니걸이 남자들을 유혹하고, 
레버 하나에 걸린 일확천금의 기회가 꾼들을 유혹한다.
  기회가 널려있는 곳, 그래서 미국을 기회의 나라라고 부르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기회에는 늘 함정이 숨어 있음을 사람들은 
간과한다.
  천국과 지옥이 교차하는 곳.
  일컬어 라스베가스이다.
  라스베가스 스트립은 사하라 호텔에서 시작해 길이 6킬로미터에 
달하는 네온사인의 거리다. 따로 호텔의 거리라고 불리는 이곳에 
세워진 모든 호텔은 호화롭고 거대하다.
  시저스펠리스등의 유명호텔들이 모두 이 거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일층은 대부분 카지노로 꾸며져 있어 이 거리는 카지노의 
거리이기도 했다.
  오늘 밤 시저스펠리스 야외 특설링에서는 WBA, WBC 통합 헤비급 
타이틀매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챔피언 조지 알렌에게 23전 21승 20 KO승의 하드펀처 릭 보먼이 
도전하는 경기였다. 릭 보먼의 2패는 바로 조지 알렌에게 당한 
것이었다. 설욕전이었고 이번이 3번째 도전이었다.
  제이킹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연신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릭 보먼은 링에 올라서면 무섭게 상대를 몰아붙여 링의 
난폭자라는 닉네임을 얻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헤비급에서 보기 
드문 백인이라 상품가치가 뛰어났다.
  33전 32승 26KO의 챔피언인 조지 알렌은 흑인이었지만 강력한 
인파이팅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있었다.
  자연히 이 두 사람의 경기는 불꽃 튀는 접전으로 늘 흥행이 
보장되는 보증수표였다. 하지만 릭 보면에게 있어 조지 알렌은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다.
  도전 세 차례. 이번에도 진다면 릭 보면의 상품가치는 끝이다. 
피라미들에게 싸워 이기는 것은 백 번을 이겨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 부담감 때문인가.
  릭 보먼의 몸놀림은 예전 같지 않았다.
  두 번 다 난타전 끝에 KO로 졌던 보먼인지라 몸을 사리는 기색이 
역력했고 절치부심 이를 갈았던 도전자의 기세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바보 같은 놈!
  제이킹은 다시 중얼거리며 거칠게 시가를 질근 씹었다.
  해글러와 레너드 같은 수퍼스타가 없는 현재는 관중들에게 선명한 
인상을 심어주면 지더라도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해갈 수 있다. 
하지만 저렇게 몸을 사린다면 끝이다.
  보먼은 그가 보유한 선수중에서 가장 유망했다. 그가 지고나면 
제아무리 유능한 프로모터인 그라 할지라도 내세울 카드가 없었다. 
카드를 가지지 못한 꾼은 싸움판에서 할 일이 없다. 그러자 상황이 
아니었다면 한국까지 날아가 조태강을 스카우트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경기장이 소란스러워졌다.
  5회를 넘긴 가운데 세불리를 느낀 릭 보먼이 뒤늦게 인파이팅으로 
나왔지만 챔피언의 정확한 컴비블로에 걸려 다운되고 만 것이다. 
간신히 일어선 릭 보먼은 챔피언의 무차별 펀치에 피를 토하고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관중들의 함성 속에 주심이 카운트 아웃을 선언하고 있었다.
  제이킹은 입술을 깨물며 일어섰다.
  그는 이 한 판을 위해 모험을 걸었었다. 결과는 참담했고 그의 
프로모터로서의 지위도 이 한판에서 빛이 바랜 셈이었다.
  날아가 버린 천문학적인 돈은 논외였다.
  카드만 있다면 돈은 언제든 만들 수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에게는 지금 내놓을 카드가 없었다.
  "핫하어째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구만?"
  웃음소리와 함께 제이킹의 앞에 배불뚝이 백인 남자가 나타났다. 
스틱을 빙글 돌리는 제스처를 가진 50대. 웃는 얼굴에 턱이 몇 
개인지 얼핏 분간이 가지 않는 뚱보. 조지 알렌의 프로모터인 H. 
젠슨이었다.
  그는 제이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프로모터계의 거물이었다. 
  그가 떠오르는 해라면 제이킹은 지는 해라고 할까.
  젠슨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링 위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조지를 힐끈 보곤 말했다. 보먼은 부축을 받아 링을 내려가고 
있었다. 선명한 영욕의 엇갈림이었다.
  "보먼으로는 다시 도전을 받아줄 수가 없겠어. 좀 그럴 듯한 
물건을 구해 보라구. 그래야 싱겁지를 않을 게 아니겠나?"
  젠슨은 껄껄 웃더니 스틱을 빙글 돌리곤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네몸이 언제부터 내 앞에서....'
  그의 넓직한 등짝을 바라보면서 제이킹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가 세계를 주름잡고 있을 때, 젠슨은 그에게 와서 경기성사를 
간청하던 보잘것 없던 자였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상황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제이킹은 격하게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밑에 깔린 멜리사가 비명을 질렀다. 눈부시게 흰 나체를 드러내고 
제이킹의 허리를 늘씬한 다리로 휘감고 있는 멜리사의 몸매는 가히 
뇌쇄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는 플레이보이지의 누드모델을 거쳐 
톱클라스를 향해 뻗어나고 있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175의 키에다 36, 23, 35의 가공할 몸매를 가진 그녀는 
코스타리카 출신으로 제이킹이 뒤를 봐주기 시작한 이래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승부는 제이킹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돈은 승부에서 
이기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고 여자는 돈이 있으면 자연히 따르게 
되어 있었다.
  그는 일이 풀리지 않으면 여자를 상대하는 버릇이 있었다. 릭 
보먼이 참패를 당하자 LA 패션쇼에 참가하고 있던 멜리사를 
불러들여 호텔방에서 거세게 욕정을 풀고 있는 중이었다.
  풍만하다 못해 넘치는 멜리사의 유방이 제이킹의 가슴에 깔려 
터질 듯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와는 달리 이미 
1년이상을 제이킹과 함께 했다.
  그것은 여자에게 변덕스러운 제이킹을 그녀가 충분히 만족시켜 
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가닥 전율이 제이킹의 뇌리에서 일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발끝까지 치달려갔다. 동시에 제이킹은 전신의 모든 힘을 다 그녀의 
몸 속으로 쏟아 부었다.
  ....
  폭풍이 치고 난 다음의 정적이 침실에 흐르고 있었다.
  제이킹은 활개를 펴고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탄탄한 몸매였다. 멜리사는 그의 가슴에 황금빛 머리카락을 
물결처럼 흐트러뜨린 채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젠슨 때문인가요? 당신이 이렇게 거친 것이?"
  멜리사가 열락이 채 가시지 않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건방진 놈...."
  제이킹이 시가를 하나 집어 들었다.
  멜리사가 시기에 불을 붙여주며 눈웃음을 쳤다.
  "너무 속상해 하지 말아요. 당신은 능력이 있으니까 틀림없이 
젠슨의 콧대를 꺾어버릴 사람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놈은 너무 강해. 당년의 알리가 와도 이긴다고 할 수 없을 거야. 
멍청한 놈!"
  제이킹은 멜리사의 손길에 몸을 내맡긴 채 가시 시가를 질근 
씹었다. 기분이 좋으면 시가를 피우지만 기분이 나쁘면 시가를 
씹어대는 것이 그의 습관이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조지 알렌은 너무 고지식했다. 회유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이길 수 있는 카드는 어디에도 없다.
  "그 놈만 있었으면...."
  불현듯 제이킹이 중얼거렸다.
  "그 놈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예요?"
  멜리사가 몸을 일으키며 그를 쳐다보았다.
  풍만한 유방이 물결처럼 출렁였다. 곧두선 유두가 아직도 단단히 
뭉쳐 고개를 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나신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있어. 그 놈은 정말 물건인데...."
  제이킹은 생각에 잠겨 중얼거리다 왈칵 손을 뻗어 멜리사의 
음부를 움켜잡았다. 축축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손을 통해 전해지자 
다시 정욕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맙소사! 저 망아지가 다시 고갤 드네! 또 생각이 있는 거예요? 
우린 벌써 세 번째라구요."
  멜리사가 다시 살아나는 제이킹의 남성을 핑크빛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 끝으로 살짝 튕기며 깔깔 웃었다. 그의 남성은 선천적으로 
거대했다. 검은 해마와 같다고나 할까.
  "몇번이면 어떠냐?"
  제이킹이 다른 한 손을 뻗어 멜리사의 풍만한 유방을 움켜잡았다. 
그의 손질은 우왁스러웠다.
  아야. 나직히 신음한 멜리사는 눈웃음을 치며 제이킹을 보았다.
  "오늘 우리 끝을 볼래요? 당신이 나를 처음 침대에 끌여 들였을 
때는 다섯 번이었는데!"
  멜리사의 음부를 움켜쥔 제이킹은 자신의 검은 손가락 사이로 
멜리사의 황금빛 음모가 하늘거리며 숨쉬고 있는 것을 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좋아! 오늘 끝을 보자구! 네가 죽을지 내가 죽을지!"
  다음 순간, 제이킹은 멜리사를 넘어뜨리며 그녀의 몸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숨넘어가는 비명이 멜리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또 다시 격랑이 침대를 뒤흔들며 몰아치기 시작했다.
  제이킹의 움직임마다 멜리사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늘씬한 
다리를 뻗어 그의 허리를 감아당기고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움직임이야말로 제이킹을 매혹시키는 것이었다. 늘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세찬 부딪힘이 격렬하게 이어지고 있을 때, 돌연 멜리사가 그의 
허리를 감은 다리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내가 할게요."
  제이킹이 대답도 하기 전에 멜리사는 그의 몸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풍만한 유방을 제이킹의 눈앞에서 
출렁이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남성이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러운 멜리사의 몸속으로 다시 
밀려 들어가고 있음을 느낀 제이킹이 또 다른 느낌에 부르르 
몸서리를 치며 나직한 신음과 함께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날카롭게 전화벨이 울려 퍼졌다.
  눈을 감았던 제이킹이 눈을 뜨는 것을 보자 멜리사는 그의 몸 
위에서 율동을 멈추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구름과 같이 고개짓에 펄럭였다.
  "하필 이때! 그냥 둬요."
  자신의 눈앞에서 멜리사의 풍만한 유방이 물결처럼 출렁이는 것을 
보고 제이킹은 다시 눈을 감았다.
  환락이 그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오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벨은 끈질기게 울리고 있었다.
  제이킹은 멜리사의 율동에 몸을 맡긴 채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잡았다. 울리고 있는 것은 호텔전화가 아니라 그의 핸드폰이었다.
  "렐로우... 후(Who)?!"
  눈을 감고 전화를 받던 제이킹이 돌연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몸을 일으킨 것은 그것과 거의 동시였다.
  "앗!"
  교태롭게 제이킹의 위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던 멜리사가 그의 
몸에서 굴러 떨어졌다.
  "저, 정말 당신이오? 정말?!"
  제이킹은 침을 삼키며 소리쳤다.
  수화기 저편의 상대는 믿을 수 없게도 방금 전까지 그가 생각했던 
결코 잊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미, 미국이란 말이오? 좋소! 내 바로 그리로 가지! 말하시오. 
거기가 어디요?"
  멜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킹이 
저렇게 흥분하는 것을 본 적이 없던 그녀였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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