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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토지3부2권

by Casey,Riley 2022.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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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부2권(8)
박경리


토지8 3부 2권

차례
제2편 어두운 계절
12장 강물에 띄워 보내고
13장 혼담
14장 탈 속에는
15장 인간으로서
16장 혼례
제3편 태동기
1장 동행
2장 오가다 지로
3장 산호주
4장 노령의 빙판
5장 종놈의 아들
6장 초대
7장 죽음의 자리에서
8장 형평사
9장 죄인들
10장 박제한 학
11장 고백
12장 제삿날
13장 돌아와서
14장 자살
15장 석이의 청춘
16장 군중심리
17장 뜨거운 모래
18장 환의 죽음
제4편 긴 여로
1장 사춘의 상처
2장 계명회
3장 내 땅에서
4장 진실
5장 아침 커피
6장 수모
[부록]
어휘 풀이

제2편 어두운 계절
12장 강물에 띄워 보내고
교회지기 큰오라비는 교회에서 잘 것이다. 두만이 경영하는 술 도매상을
그만둔다 하더니 눌러앉게 된 둘째오라비 역시 가게에서 잘 것인즉,
집에는 늙은 아비와 장이만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궁이며 방구들을 손불
적기여서, 메뚜기 한철 만난 듯 바빠진 장이아비 염서방은 하마 코가
비틀어지게  잠들었을 것이고, 홍이는 다리 위를 왔다갔다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부채를 들고 다릿거리를 서성대던 사람은 이제 없다. 행인이
별로 없다. 제법 밤바람은 썰렁했고 밤도 어지간히 깊었으니까. 부산서
떠나 진주에는 날이 저물어 도착했다. 홍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강가를
헤매 다니다가 이 다리까지 왔다. 한낮에 진주거리를 버젓이 나다닐 수
없는 것은 삼석이  때문이지만, 홍이는 그래서 참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진주에 발목이 잡히지 않아도 되는 구실이 생겨 안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주에는 뭣 하러 왔어.'
'장이를 만나러 왔지.'
그러나 홍이는 그 밖에도 볼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앞으로 열흘 남짓
지나면 추석이다. 추석은 평사리에 있는 아비 곁에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만은 확실하다. 부산을 떠나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그러나 평사리로
직행하지 않고 진주로 돌아온 이유는 막연하다. 아마 장이를 만나고 싶어
그랬겠지. 그렇다면 저만큼 보이는 장이 집으로 왜 달려가지 않고
민적거리는 걸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흥이는 죄의식 때문에 진주로 왔다.
장이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느낄 수 있는
죄의식이다. 다른 또 하나의 죄의식, 밟아 뭉개고 싶지만 훨씬 더 쓰라리고
괴로운 감정, 그것 때문에 진주로 왔다 하는 편이 옳을 성싶다. 어미에
대한 감정이다. 설령 어미가 바위 같은 강자요 자신은 모래알 같은
약자일지라도 자신이 거부하는 심정이라면 어미에게는 엄연한 가해자가
아니겠는가. 상대로부터 어떤 고통을 받든 피해를 받든 가해자는 거부하는
쪽이다. 하물며 상대는 생모인 것이다. 그러한 가해의식은 어미와 멀리
떠나 있을 때 홍이를 더욱더 괴롭혔다. 멀리 떨어져 있을 적에는 임이네의
사람됨을 생각하기보다 그의 이력, 그의 주변 사정을 더 많이 생각하게
한다. 비참하다는 느낌, 연민의 정도 느끼는 것이다.
개천을 끼고 한쪽에는 임이네가 잠들었을 집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장이네 집이 있는 것이다. 다리 위를 왔다갔다하면서 홍이는 임이네와
장이가 동일한 여자라는 착각을 한다. 하늘에는 초생달이 걸려 있었다.
날카롭고 기분 나쁜 초생달이다. 희미한 하늘에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은
비봉산의 과히 높지 않은 봉우리가, 하마 일어서서 밤을 헤치며 다가올
것만 같다. 뭔지 모르지만 웅크리고 지켜보는, 하마 일어서서 밤을 헤치고
다가올 것만 같은 괴물에게 사로잡힌 듯한 자기 자신의 운명을 문득
예감한 흥이 등골에 차가운 것이 타고 내려간다.
'저놈의 초생달!'
비수를 휘두르면 최참판댁 안방으로 뛰어드는 광경이 떠오른다. 비수를
들고-전율을 느끼면서 땀이 배나는 것을 느낀다. 부산서도 퍼뜩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맥락도 없는 생각이 왜 또 떠오르는지 알 수 없다.
자신에게는 원수도 상전도 아닌 아름다운 최서희의 모습이 눈앞에
지나간다. 임이네와 장이와 최서희와, 그것도 동일한 여자 같은 생각이
든다.
'왜 나는 여자를 이렇게 미워할까?'
숨을 돌리듯 천천히 발길을 옮겨놓는다. 장이네 집으로 발길을 옮겨놓는
것이다. 개천가의 좁은 길을 지나서 장이네 판자문 앞에 잠시 머물렀다가
내왕하기도 어려운 좁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다. 골목 쪽으로 난
들창에는 불빛이 없고 문살만 꺼뭇하게 떠 있다. 홍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의 초생달을 올려다보다. 장이 방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이 괘씸하다.
묘하게 배신당한 느낌이다.
'식충이같이 잠만 처자빠져 자는 구나.'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빚어진 일이면 그것을 수습할 능력도 없는
터에, 자신이 안겨준 고민을 고민하지 않고 잠을 자는 장이가 미운 것이다.
'밥 먹고 잠자고, 여자들은 돼지같이 그것밖에 모를까?'
어릴 적에 곧잘 보아온 광경이다. 아비와 싸운 어미는 방바닥을 치고 제
가슴에 주먹질을 하면 대성통곡을 하다가도 이내 코를 골면 잠이 들곤
했다. 그 코고는 소리가 얼마나 징그러웠는지 모른다. 숟가락으로 이리저리
다져가면서 산더미만큼 밥을 떠가지고 입 속 깊숙이 밀어넣던 모습.
"내사 아파도 밥이 묵고 저버서 못 누워 있겄더라."
김치 가닥을 손가락으로 찢어서 먹으며 황홀하게 웃던 얼굴, 잠 잘 때와
밥 먹을 때만은 아무 숨김이 없었던 어미의 얼굴이었다. 흥이 들창을 톡톡
친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자지는 않았던가. 들창 문이 이내 열렸다.
"누구요?"
반짝반짝 빛나는 눈 두 개가 홍이를 쏘아본다.
"나다."
"..."
"좀 나오너라."
"..."
"비봉산 그 나무 밑에 있을게."
홍이는 들창 밑에서 물러섰다. 싸구려 무명 양복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골목을 빠져나온다.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할 일이다.'
넓은 길을 곧장 걸어간다. 어둠이 김같이 서리며 골목을 지나가는 것
같다. 걸음을 빨리한다. 비봉산의 산자락, 장이와 밀회하던 나무 밑에까지
간 홍이는 엉덩방아를 찧듯 앉는다. 얼마간 앉아 있노라니 한기가 스민다.
양복깃을 세우고 팔짱을 끼고
'자식이란 뭘까?'
수수께끼만 같다.
'부모란 뮛일까? 왜 못 떠나는 걸까.'
알 수가 없다.
'조상은 무엇이며 백정 상놈 양반 임금... 족보도 부모형제 아무도 없었던
길상이아제는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길상이아제...'
길모퉁이를 돌다가 갑자기 마주친 그리운 사람처럼 길상의 얼굴이 크게
떠오른다.
'아제씨!'
언제였던지, 어렸을 때 용정촌에 살았을 무렵, 아비 심부름을 갔던 일이
생각난다. 들창문에 구멍을 뚫어놓고 길상이 구부정한 자세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일이. 그러니까 서희하고 혼인하기 전 총각 시절이다.
"아제."
홍이 의아하여 부르니까 길상은 손을 흔들며 가만히 있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홍이를 번쩍 안아올렸다.
"아제."
"가만히 있어. 가만히 내다보는 거다."
뚫어진 문구멍에다 눈을 갖다대주는 것이었다. 들창문 밖 뜨락에는
참새떼들이 모여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참새들이었다. 뜨락에는 수수알이
뿌려져 있었다.
"신기하지?"
길상은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참새들은 미친 듯이 모이를 쪼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어미새들이 제가끔 대여석
마리의 새끼들을 거느리고서 새끼들 주둥이에 모이를 넣어주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제 새끼한테 먹이려고 에미끼리 싸우기도
했다. 새끼들은 이리 날고 저리 뛰고 하며 주둥이를 있는 대로 벌리며
아우성이었다. 길상은 홍이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뒷짐을 쥔 채
"홍아."
"야?"
"어째 참새란 놈은 사람을 안 믿을까? 문을 열고 내다보면 다
달아나버리거든. 지금도 쫑긋쫑긋 사방에다 정신 파느라고 어미는 제대로
먹지 못한다 말이야. 벌써 여러 날째 수수알을 뿌려주는데 도무지 나하고
친하려 안 하는 거야."
길상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아제, 어미새가 불쌍하요."
"음, 날짐승이지만 거룩하다. 사람도 저만 못한 것이 있지. 자식을 낳아
버리는 부모도 있으니 말이야."
길상의 얼굴은 더욱더 슬퍼 보였다.
'아제씨!'
울음이, 소리도 낼 수 없는 울음이 밀려나온다. 언제나 다정한
아저씨였다. 조선 사람으로서 왜놈학교에 다닌다 하여 그애 책보를 뺏아
강물에 던진 사건 때도 길상과 송선생이 나서서 무마했었고 죽은 월선을
누님같이 대하던 길상이 홍이는 외삼촌이기나 한 듯 자랑스러웠는데, 멀리
떨어져서 생각을 하니 더욱더 그리운 것이다. 주갑이는 좋은 아저씨,
길상이는 그리운 혈육, 자랑스럽고 동경하면 사모하는 사람이다. 방금
비수를 들고 최참판댁에 뛰어드는 광경을 상상했었던 홍이는 길상이
최서희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실감할 수 없는 것이다.
"아제씨! 으흐흐흐..."
잡목이 맣은 비봉산 숲을 바람이 지나간다. 습기 없는 바람이 물기를
잃어가고 있을 잡목 잎새를 흔들며 지나간다.
"나, 왔거마는,"
양무릎에 묻었던 얼굴을 치켜든다. 장이가 장승같이 서 있었다.
"앉아라."
잠긴 목소리를 음미하듯 그냥 서 있다가 장이 옆에 와 앉는다.
장이에게선 쌉쓰름한 녹두가루 냄새가 났다. 세수를 하고 나온 것 같다.
"와 그라요."
"뭘?"
"우니께..."
"..."
"나도... 그만,"
하다가 이번에는 장이가 운다. 부엉이도 운다. 왜 부엉이는 울며 장이는
왜 우는가. 나는 또 왜 울었는가. 사람은 왜 울어야 하고 금수는 무엇
때문에 우는가. 초생달은 하늘에서 심장을 꿰는 갈고리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혼사는 결정됐나?"
"알면서 와 묻소! 인지 와서 우쩔 기라고, 으흐훗훗..."
"그렇게 됐고나. 마, 잘됐다."
"머라꼬요?"
"잘됐다고 했다."
"끝끝내, 아이구 옴마!"
장이는 소리를 내며 운다.
"시집은 갈 작정을 한 모양인데 그럼 잘못됐다 할까?"
홍이는 다시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믄 내가 작정을 해서 가게 왰다 그 말이요?"
울음을 그치고 홍이를 똑바로 쳐다본다.
"나하고 함께 죽겠다는 생각은 해보았나?"
"..."
"내가 니를 데리고 달아나지 못하면 할 수 없다. 시집갈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틀림이 없지?"
"우짜믄, 우짜믄, 모, 모두 그쪽 맘대로, 그라믄 내가 우짤 기요! 흔적도
없이 떠날 때 떠난다는 말 한마디 했소? 기다리라는 말 한마디 했던가요?
날 버리고 달아난 줄, 달아난 줄, 얼매나 우, 울었다고 이자 와서, 그때는
분하고 원통해서 보란 듯 살라고 했소!"
홍이는,
"그러면 혼삿날은 며칠인고?"
"혼사고 머고... 사람이 오믄 그냥 데리간다고,"
"왜 그런데?"
"우리 형편이 그러이까,"
"봉채는 받은 모양이군."
장이는 대꾸를 안 한다.
"사람은 언제 오는데?"
"며칠 안 남았소."
"하기는... 뻔하지. 나 같은 놈하고 살아봐야 평생 고생일 거다. 나는
아무데도 발붙이고 살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홍이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지금이라도 가자 카믄 가겄는데,"
"가겠는데?"
"오래비 장개 비용으로, 거기서 온 돈은,"
"작살을 냈다 그 말이구먼."
"..."
"동생 팔아서 장가드는 놈 불알이나 있으까?"
"내가 가고 나믄 조석 끓이줄 사람도 없는데 우짤 기요! 속 편한
소리마소!"
"핑계다, 핑계. 돈푼 있다니까 가서 편하게 살 궁리를 한 거지. 나는
여자 말은 안 믿어. 입술에서 나오는 말과 복장 속에 있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뼈가 아리도록 보아왔단 말이다."
"그라믄 내가 잘못이다 그 말이요?"
홍이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장이 앞가슴을 잡고 일으켜세운다.
"니 시집가믄 어쩔래? 니 서방보고 첫날밤에 나는 처녀 아니요 하고
말하겠나? 아마 안 할 거로?"
홍이는 한 손으로 장이 앞가슴을 움켜쥔 채 웃는다.
"그래 거짓말로 너는 평생 살아갈 거다."
"그기이 뉘 때문인데, 아무렇게 살믄 무신 상관이요! 핑계는, 핑계는
그쪽에, 아이고 옴마! 으흐흐흣."
장이는 몸을 흔든다. 홍이는 와락 떠밀어버린다.
"데리고 도망갈 생각도 없임서!"
"그래 그렇다! 너 잘 아는고나."
"장난 삼아서, 천하 바람쟁이!"
"그래 갖고 놀았다! 이 가시나!"
"옴마 옴마아! 나는 우쩌믄 좋소!"
"시집가서 잘살아라. 못살거든 날 찾아와."
홍이는 뛰어서 산길을 내려온다. 한길가로 나서자,
"아아리랑 아아리랑 아아라리요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아!"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부근다. 다릿거리까지 오는 동안 홍이는
계속하여 소리소리 지르며 아리랑을 불러대는 것이었다.
"문 열어주소!"
집 앞에까지 온 홍이는 만취한 것처럼 발길로 문을 걷어찬다. 사립문을
열어준 사람은 뜻밖에도 야무네다.
"아니,"
"니 어매 잠이 깊이 들었다."
"야. 웬일입니까?"
"볼 일이 좀 있어서 왔더마는 니 어매가 하도 자고 가라 캐서..."
"야아."
홍이는 야무네와 함께 방으로 들어간다. 그때야 비로소 임이네가 일어나
앉는다.
"아주 간 줄 알았더마는 그거는 아니든가배?"
빈정거린다.
"그간 별일 없었어요?"
사립문에 발길질할 때와는 달리 펴정한 음성이다.
"별일이 없었느냐고? 멀쩡한 정신이가?"
홍이는 어미를 빤히 쳐다본다.
"진주바닥을 시끄럽게 해놓고, 이놈아!"
임이네는 비녀를 뽑아 쪽을 단단하게 돌려 다시 비녀를 찌르며, 그
행동으로 단단히 따질 심산을 나타낸다.
"오래간만에 돌아온 아이를 보고 머를 그러노. 할말이 있이믄 새는 날에
하라모. 밤이 깊었다."
야무네는 말했다.
"모리거든 아무 말 말아라. 내 간장에 피가 진다. 자식놈 하나 있는
기이,"
"나 시끄럽게 해놓고 간 일은 없소. 추석이나 샐라고 왔는데 무슨
말이요."
홍이는 시침을 딱 뗀다.
"허허 참, 니 에미가 당한 수모, 한분 들어볼라나?"
"..."
"자식 덕에 호강은 못할망정 자식놈 따문에 더러운 연놈들한테 퍼붓기고
죄인 다루듯이, 지금 생각해도 이가 뽀독뽀독 갈린다. 와 남으 자식은 달고
갔노?"
"달고 가다니요?"
"삼석인가 오석인가 그놈아아를 니가 꼬아서 돈까지 들고 갔다는 말이
그라믄 헛말이라 그거가?"
"삼석이, 나는 모르는 일이요. 만난 일도 없고,"
"그 말 믿을 사람이 있일 성싶나? 한날에 없어진 두 놈이 함께 안
갔다고 누가 믿을 것꼬!"
"믿고 안믿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요? 나는 부산서 취직해 있다가
왔는데,"
"취직을 해?"
갑자기 어세가 누그러진다. 그 말대꾸는 없이,
"내일은 평사리로 가볼려구요."
임이네 얼굴이 순간 험악해진다. 홍이는 못 본 척 호주머니 속에서 돈을
꺼내어 삼십 원은 호주머니 속에 도로 넣고 이십 원을 내놓는다.
"추석이나 새도록 하소."
"그 동안 번 돈이 그것가?"
"기술이나 배울까 싶어 있었기 땜에,"
"객리에 가서 묵고 입고 무신 돈이 모였겄나. 그거라도 가지왔인께
얼매나 고맙노."
야무네 말에,
"니는 모리거든 가만있거라. 낫 놓고 기역자도 모리는 촌구석
무지랭이하고 같을 순 없인께."
너 아들하고 비교하니 아니꼽다는 투다.
"중학까지 나온 놈이, 보통학교만 나와도 면서기다 군서기다 하고
집에는 귀한 것 없이 싸가지고들 찾아가는 판국인데 피땀 흘려서 부모가
가르키놓으이께 머? 기술을 배운다고? 품에 넣은 거는 머꼬?"
"어머니는 이십 원 있으면 추석에 옷벌이나 장만할 거고 쌀가마나
들여놓을 겁니다. 나머지 삼십 원은 아부지 갖다드릴라고요. 제사도 지내고
성묘도 해야 안 하겠소?"
"하모 그래야지."
야무네는 그냥 기특하다는 생각만 한다. 임이네 얼굴이 새파래진다.
"그 돈, 좋기 있일 때 내놔! 남우 집에서 제사 모실 것가?"
"..."
"니 애비가 공부 시킸더나?"
"죽은 엄마가 시킸지요."
홍이는 흥분하지 않고 말했다.
"이 목을 쳐죽일 놈이, 그 화냥년 애기는 와 하노!"
홍이 침을 삼키며 아랫배에 힘주며 참는다. 임이네도 월선의 얘기가
길어지는 것은 원치 않는 눈치다.
"진주서 취직을 해도 한 달에 이십 원 벌이는 할 긴데 객리까지 가서
거반 일 년 만에 돈 이십 원이라? 내가 묵고 입고 쓸라고 그러나? 장개는
언제 들래? 좋기 있일 때 돈 인내놔. 에미한테 있는 돈 어디 안 가네라.
딴자식이 있어 줄 기가 어느 못사는 친정이 있어 줄 기가. 뼈빠지게
허리끈 조아가믄서 사는 것도 다 니 때문이다. 니 아배는 언제 죽을지
모리는데 니 아배 죽고 난 뒤를 생각해봐라. 최참판댁에서 땡전 한푼
나오겄나?"
달랜다.
"내 걱정은 하지 마소."
"그러니 니는 에미 걱정도 안 하겄다 그 말가?"
"..."
"전생에 무신 원수가 져서 니 겉은 것이 생깄노."
시작하는 것을,
"내일 아침에 얘기합시다. 자야겠소."
홍이는  불기 없는 작은방으로 들어와 불켤 생각도 않고 웅크리고
앉는다. 큰방에서는 여전히 떠들어대는 임이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홍이는
야무어매가 와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마 평사리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야무어매를 붙들었으리라는 짐작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느 때같이
어미의 그 속 빤히 들여다보이는 말이나 욕심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홍이는 우는 자이를 내버리고 온 것이 맘에 걸렸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서 상대를 괴롭힌 일이, 그러나 그보다 진득이 눌어붙는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 그를 외롭게 한다. 왜 장이는 좀더 자기에게 매달리지
않았는가, 정말 그렇게 했을는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장이 한사코
매달렸다면 오십 원을 앞세워 어디든 달아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잘됐다. 장이를 위해서도 그렇고 내 자신을 위해서도, 정 떠러지게
한 짓은 잘한 일이다. 나는 갈 거니까, 언제든 다 떨쳐버리고 어디를 가든
가버릴 테니까.'
"방이 추울 긴데, 이불 가지고 았다."
야무네가 방문을 열었다.L
"불도 안키고,"
야무네는 더듬거렸다. 홍이가 호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불을 켠다.
야무네는 마루에 놔둔 이불을 끌어들인다.
"니 내일 평사리 갈라나?"
"야."
"그라믄 나랑 함께 가믄 되겄네."
"그렇게 할까요?"
"홍아."
"야."
"머한다고 죽은 옴마 얘기는 들먹이노. 임이네 아니라도 누가 좋아라
하겄나? 앞으로는 어매 앞에서는 월선이 얘기는 하지 마라."
"진주는 무신 일로 오셨습니까?"
"딱쇠 따문에 왔더마는,"
"일은 잘됐십니까?"
"석이를 만내서... 일이 될 성싶은데 핵교 소사로,"
"석이형님이 그랬다면 될 깁니다."
"그것도 니 아부지가 가보라 캐서 왔다. 처음에는 땅이 될 성싶었는데
부치던 사람이 안 내놓은께, 나도 넘한테 적악함서까지 땅 얻느니보다...
이자는 살 길이 좀 트이는가 싶기는 하다마는, 그라믄 자거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웬일인지 임이네는 성이 잔뜩 난 얼굴이기는
했지만, 분명 할말이 남았을 텐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옛 친구
야무네한테는 몹시 올곧잖게 대하는 것이었다. 야무네는 임이네 눈치를
살피면서 아침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만일에 여기 일자리가 생기믄 야무네 니도 따라올 기가?"
임이네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부르튼 얼굴을 펴고 물었다.
"오기는, 비사리 겉은 그거 버는 것 치다보고 살겄나. 밭때기는 하나
있인께, 사우가 좀 돌봐준께,"
"언제꺼지 그러까?"
"사우가 착하고 그것들 금슬이 좋아서,"
"소나아 맴이사 변할라 카믄 하루아침이더라."
야무네는 입술을 물다가,
"그거는 나도 생각하고 있다. 젊은 사람이 언제까지 병든 가숙만
돌보겄나. 그것도 친정에 와 있는,"
"정이란 떨어져 있일수록 멀어지게 매련이거든."
아픈 곳을 찌르며 약을 올린다.
"내사 사우가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도 고맙기 생각한다. 푸건이도
그렇고, 발걸음 끊어도 원망은 안 할 기다. 지 말로는 섬에서 나와가지고
일자리 구해서 지 가숙 데리간다 해쌌지마는 무슨 대복으로 그걸
바래겄노."
"잘 생각한다. 나을 가망 없는 제집 믿고 소나아 앞길을 막으믄 안 되제.
남이 욕할 일이고오, 시가 식구들도 가만있을라 안 칼 기구마."
야무네는 입을 다물었고 홍이는 숟가락을 놨다.
"해도 짧은데 일찍 떠날까요?"
홍이 어미를 가로막듯 야무네에게 말했다.
"얼씨구, 거기 못 가서 미치고 기든는고나. 그 알량스런 애비, 하기는
일찍 떠나는 기이 좋기는 좋을 기다. 삼석인가 오석인가 그눔아아 에미가
알믄 그냥 안 둘 낀께, 경찰에 처넣겄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 판인데,"
위협하듯 말했다. 야무네가 움찔하며 쳐다본다. 홍이 눈에 칼날이 서다가
만다.
"흥, 우짜믄 애비 자식이 그리 천상 요절로 닮았이꼬? 하는 짓짓이 꼭
같거든. 이날 이적지 어디 한분 가숙 대우를 하까, 자식놈은 자식놈대로
에미를 발싸개만큼도 안 여기니, 내가 이가놈 집구석에 무신 빚을 많이
졌길래 괄시받고 악문을 당하는고. 이분에 갔다만 봐라, 다시는 이 문전에
못 올 긴께. 나는 서방도 자식도 없는 년인께 죽어도 니손에 송장
맽기지는 않을 기다! 길가다 만내도 에미라 부르지 말아라!"
하다가 넋이 오른 무당같이 두 다리를 뻗고 슬픈 울음을 운다.
"시끄럽다. 머를 그래쌌노. 오리새끼는 물로 가더라고 남이 낳은 자식가.
함께 낳은 자식, 아배 찾아가는 기이 머가 우때서,"
임이네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모리거든 말 말라 안 카더나! 저 목이 뿌러질 놈이 에미를 에미로
생각는 줄 아나? 애비 자식 똑같이 나를 못 면해서 환장인 거를, 무신
철천지원수가 졌는고, 원통하고, 아이고오- 내 가슴에 맺힌 한을 어디 가서
풀어볼꼬. 아이구 내 팔자야! 이런 팔자가 어느 세상에 또 있겄노.
아이고오! 아이고오! 내 팔자야!"
홍이는 우두커니 쳐다보고만 있다. 울면서도 곁눈질로 홍이 표정을 살핀
임이네, 다른 때처럼 빨끈하지 않는 홍이가 이상하고 조금은 불안해지는
눈치다.
"허허어, 참 공연스리 이러네. 나 겉은 사람도 산다. 일본 간 지두 해가
넘도록 펜지 한 장 없는 자식도 있다. 추석이라고 돈 매련 하여 어매 보로
오는 기이 얼매나 대견하노. 내사 마 똑 부러바서 죽겄거마는,"
자식 칭찬만큼 부모에게 듣기 좋은 말은 없다. 야무네의 넋두리는
무당같이 슬프게 우는 임이네를 위로하기 위 한 말이다. 그러나 임이네가
바라는 것은 위로도 아니요 자식 칭찬은 더욱더 아니다. 집게손가락을
하고서 코를 행! 푼 임이네, 코맹맹이 소리로
"뱁새가 황새 따라갈라믄 가랭이가 찢어지는 법이다. 예사 쇠 짧은 놈이
침은 길게 뱉을라 카거든. 자식한테 무신 공이 들었다고 내가 부러운고?"
언제 슬프게 울었던가, 임이네는 울음을 거두고 평소의 어투로
빈정거렸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고치면서,
"남들겉이 공부를 시킸단 말가, 개새끼 키우듯, 낳은 공도 가지가지라,
면판 바르게 낳아놓은 것도 에미 덕 아니든가?"
젊을 때부터 남의 비윗장 긁는 데 이골이 난 임이네 성미를 잘 알고
있는 야무네는 화가 나기보다 어이구 저 성미, 저 방정맞은 주둥이, 하며
마음속으로 혀를 찬다.
"별소릴 다 듣겄다. 인력으로 함사 선관선녀인들 못 낳았을라구? 하는
말도 참,"
하며 웃어버린다. 언제 나갔던지 마당에서,
"안 가실랍니까?"
홍이 음성이 들려왔다.
반백 머리에 초라한 몰골, 작은 보따리를 든 야무네를 앞세우고 거리에
나온 홍이는 문득 야무네에게 뭔가 추석 선물 같은 것을 사주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홍이는 장이를 위해서 수건 한
장을 사준 적이 없었던 일을 상기한다.
'왜 그랬을까. 왜 그리 몹시 굴었을까.'
그러나 홍이는 수건 한 장 분 한통 따위로는 마른 논에 물 한방울 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만큼 장이의 존재가 자신에게 큰 것이었다는 것을
절감하는 것이다. 홍이는 호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본다. 돈이 없다!
없어져버렸다. 통곡으로 한판 벌이기는 했으나 여느 때처럼 집요하게
달라붙지 않았던 어미의 행동이 비로소 이해된다. 홍이는 쓰디쓰게 혼자서
웃는다.
"아지매."
"와?"
야무네가 돌아본다. 얼굴이 파리하다. 아침바람이 좀 썰렁하기는 했지만
철 먼저 떨어진 가랑잎 같다. 나이는 한또래건만 어미는 유월의 신록
같은데, 그러나 가랑잎이 어디 추한가, 슬플 뿐이지.
"저기, 갑자기 볼일이 생각나서요."
"볼일이?"
"지는 볼일 보고 내일 갈까 싶은데 먼저 가실랍니까?"
"같이 갔이믄 좋았일 긴데 할 수 없제. 그라믄 니는 나중에 오니라."
몹시 아쉬워하는 얼굴이다. 야무네와 헤어진 홍이는 곧장 영팔이 집으로
갔다.
"아이고, 홍이 앙이가? 보소, 보소! 홍이가 왔소."
판술네가 소리를 질렀고 까대기에 들앉아 연장을 고치고 있던 영팔이
얼굴을 내밀었다.
"니 어디 있었더노."
묻는다.
"부산에 좀,"
"여관집 아아하고 함께 갔다고 시끄럽더마는 정말로 그 아아하고
갔더나?"
"아니요"
홍이는 또 잡아뗀다.
"일찍은데 벌써 일갔는가 부지요?"
삼형제는 다 나가고 없었다.
"홍아, 아침은 묵었나? 안 묵었거든 채리주께."
판술네가 홍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먹고 왔소."
"방에 들어가자."
영팔이 일손을 놓고 일어섰다. 홍이는 뒤따라가며 몸은 여전하게
건장하지만 영팔이아제 머리는 아버지보다 더 희다는 생각을 한다. 방에
따라들어온 판술네는,
"그래, 객리바람 쐬니께 어떻더노?"
웃으며 묻는다. 홍이도 웃기만 한다.
"실은 평사리에 갈라고 야무네 아지매하고 함께 나섰다가 돈을
잃어버려서..."
"야무네가 너거 집에서 잤던가배? 디다보로 간다더니, 나는 석이네
집에서 자는가 싶었다."
판술네 말은 제쳐놓고
"돈이 얼맨데?"
하고 영팔이 묻는다.
"삼십 원쯤, 부산서 월급 받았는데,"
영팔이는  당장 눈치를 챈다.
"얼매나 주꼬?"
"이십 원만 있으면,"
"그래라. 지금 갈래?"
"내일 아침 일찍 떠날랍니다."
"그라믄 석이 한분 찾아보고 가거라. 우리는 추석에 평사리서 만낼
기다마는,"
"그러까요? 보나마나 야단치겠지요."
"그것도 니를 믿기 때문이다. 니는 우찌 생각는지 모르것다마는 석이는
니를  친동기간겉이 생각는갑더라."
판술네는 맞장구를 친다.
"아제."
"와."
"길상이아제는 영 안 오까요?"
"뜬금없이 와 그런 말은 하노."
영팔이는 눈을 끔벅끔벅한다.
"어쩌다 생각이 날 때가 있지요."
"어디 쉽기 오겄나."
"오기만 하믄 세상에 부러울 거 없이 편할 긴데, 게울이믄 고추겉이 매
운 그곳에서 와 고생을 하는지 모리겄구마."
판술네 말에 영팔이,
"임자는 가만있는 기이 좋겄네. 머를 안다고,"
"그러니께 모리것다 안 합디까?"
"답대비, 여자란 소견머리가 넓어서 자꾸 얼라가 돼가요? 자석들 덕분에
편한께로,"
"임자는 나가아, 나가라고."
영팔이는 마누라를 쫓아낸다. 그리고 신중한 표정이 되며
"니는 앞으로 우짤 기고?"
"글쎄요."
"니 나이 이제 스물 앙이가. 니 또래에 아아 애비 된 사람도 많을기다.
장개는 니 아부지 생각이 있어서 늦잡는겁더라마는, 그라고 니가 간도로
갔이믄 하고 생각하는갑더라."
"..."
"내 생각  역시 그 편이 낫일 성싶다. 거기 간다고 저저이 독립운동만
하는 것도 아니것고, 공노인이 기신께 니를 옳게 안 끌어주겄나."
"..."
"이곳에 살기로는 차라리 우리 판술이 제술이겉이 식자가 시원찮은
아이들이 나은 기라. 머든지 벗어제치놓고 해묵으이께. 왜놈들 등쌀에
식자나 좀 들었다 하는 젊은놈 부지하기 심들어 그놈들 앞잡이가 되거나
하다못해 면서기질이나 한다믄 모리까, 자작으로는 아무 할 일이 없지.
자게 재산이나 있다믄 장시나 하지마는, 결국은 어정개비가 되고 세상일에
뜻이 없어지고 사람 베린다."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거는 아니지마는, 아직은 용정에는 가고 싶지가
않소. 아버지도 그렇고 어디 오래 사시겠습니까."
"니 맴이야 그렇겄제, 그럴 기다. 그러나 니 아부지는 생전에 니를
떠나보내고 싶어한다. 그 심정은 니도 잘 알 기구마, 니 아부지가 와 그리
생각는지."
"실은 지난번에 일본으로 떠나려 했지만,"
"하필이면 와 일본고."
영팔이는 펄쩍 뛰듯 말했다. 홍이는 잠자코 있었다.
"잔말 말고 공노인 살아 기실 적에 가는 기이 좋다. 그 노인들도 자식
없이 외로불 기고 반드시 니 앞길을 열어줄 어른인께, 혈육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제. 넓은 천지에 가서 머를 하든, 좋은 세상이 오믄은 아배
무덤이라도 찾는 기라."
"..."
"요새는 나도 우짠지 그곳 생각이 자꾸 난다. 고생도 할 만큼 했는데,
아마도 이곳 인심이 옛과 같이 않애서 그런지 모리겄다마는,"
해거름에 장으로 나간 홍이는 예쁜 당혜 한 켤레를 골라서 샀다. 신발을
살 때 홍이는 용정의 갖바치 박서방을 생각했다. 그리고 박서방이 짓던
신발보다 진주의 신발이 훨씬 세련되고 아름답다고 홍이는 생각했다.
홍이는 애틋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땅거미 지는 거리를 거닐었다. 장이를
만나 신발을 주리니, 거리를 헤매고 강변을 헤매고 밤이 깊어지는 것을
기다린다. 절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어떻게 하리라는 욕망도 목적도
없이, 그러나 홍이는 강물에 신발을 던져버리고, 옛날 용정서 일본인
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책보를 뺏아 강물에 던져 버렸듯 던져버리고 밤길을
돌아가는 것이었다.

13장 혼담

"푸건이가 나앉았고나."
서서방의 자부 복동네가 들어서며 말했다. 고추를 펴놓은 멍석
한귀퉁이에 팔짱을 끼고 쭈그려앉았던 푸건이 비시시 웃는다.
"좀 우떻노? 기동할 만하나?"
보리방아를 찧고 있던 아무네가
"기동은 무신, 오솔오솔 칩다 캐서 볕바른 데 나 앉으라 캤지."
"그래도 업히 올 때 생각을 하믄 대금산이요. 뼈만 남아서 참혹해 못
보것더마는 지금이사 볼때기가 제법 볼고데데 안 하요."
"얻어묵은 것도 시원찮거마는,"
"죽이라도 어매가 조신부리 먹인께 자식한테는 어미밖에 없소."
"앙이다, 품안에 있을 때지. 저 아아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은 지임자가
왔다갔기 때문이다."
"어매도 참,"
푸건이 얼굴을 붉힌다. 다시,
"내가 머 빈말 했나?"
빈정거리듯 말했으나 야무네는 한시름 놓은 듯, 그도 그럴 것이 푸건의
병이 하루이틀 새 나을 병이 아니며 완쾌될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그럭저럭 여름을 넘긴 데다가, 위험한 고비를 겪고 병이 나은 사위 소식에
우선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인연을 끊을 줄 생각했던 사위가 이따금 찾아와
딸을 보고 가는 것이 고마워 야무네는 한결 느긋해진 터였다. 복동네는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치마를 털면서
"이불솜을 좀 갈았더마는 온 전신에,"
"복동네는 올해 미영 많이 땄제?"
"예년하고 갔지요 머."
"올 게울에도 눈이 짓무르게 베를 짜것구나."
"놀고 묵을 팔자라야제요."
"하기는 그렇다. 일을 해도 끼니 잇기 어러분 사람이 많은께."
"성님"
"와."
"동네서 뜰 끼라 카더마는 우서방은 도로 주질러앉았다믄서요?"
"그랬다더마."
"성님만 허탕쳤소."
"그렇기 그 땅을 바래고, 이자는 그렁저렁 살랑가 했더니, 내 복에?"
"최참판 댁에서도 무르게 나왔지마는 우서방 그 사람들 좀 독종이요?"
"그래서 나도 어기야버기야 그 땅 얻을라고는 안 했다. 좋기 내놓으믄
모리까,"
"참말이제 우서방하고 마당쇠만 쫓아내믄 동네가 얼매나 잠잠하겄소.
건디리믄 시끄러분께 모두 쉬쉬하는 바람에 더욱더 기고만장 못된 짓은
독으로 안 하요? 때쟁이 봉기노인도 못 당하더마요."
"그래도 이자는 전겉이 그리는 못할 기다."
"성님, 이자 고만 찧으소. 좀 까끄러바도 너무 때기믄 반실이요."
"그러까?"
방아를 도구통에 걸쳐놓다 말고 딸을 힐끗 쳐다본다.
"푸건이 땜에 그러는가배요? 웃쌀만 걷어서 주믄 안 됩니까."
"웃쌀을 얹어야 말이제."
"보리곱삶이를 아픈 사람이 묵다니, 애닮기도 하지. 내가 한줄금
찧어주께요."
복동네는 절굿공이를 든다.
"복동네, 오늘이 니 생일가?"
"와요?"
"오늘은 편한 모앵이니,"
복동네는 공닥공닥 방아질을 하고 야무네는 딸 옆에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땀을 닦는다.
"무서리 나는 사림, 이자 딱 집어치웄으믄 싶소."
"복동이는 얻어온 아들이며 복동네는 청상과부, 딸 주는 것을 꺼리는
것은 사실이다.
"복동이가 올해 몇고오?"
"열여섯 아닙니까."
"벌써 그리 됐나? 그아아를 안고 오던 것이 엊그제만 겉은데,"
"성님 머리가 반백 된 거는 모리고요?"
"하기사, 니도 오십이 낼모레니께."
"세월이 한도 없이 길고 밤도 길더마는 지나고 본께 잠시오."
"니 팔자도 기박하다. 주모가 있어서 이날 이적지 살았제."
"친정을 의지하고 안 살았소."
"생각이 나구마. 이십 년은 됐는갑다. 와 그 해 숭년 들었던 해가,"
"꼭 십구 년이요."
"니가 곡식 자리를 이고 허불며떠불며 오는데 그 곡식 자리가 어찌나
부러벘던지, 와락 달기들어서 뺏고 싶더마. 숭년 들어 사람 잡아묵는다는
말도 빈말은 아닐 기라."
"어매도 참, 그런 숭측스런 말 머할라꼬 하요."
푸건이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 해 중년에 시어무니가 돌아가시고 시아부니도 실성하싰고, 말도
마이소. 친정서 곡식말이나 얻어가지고 미친 듯이 온께, 세상에 어무니는
송장이 되어 계시고 아부니는 이문가문, 엉겁질에 삼베치마에다가
보릿가루를 싸가지고 개울가로 쫓아가지 않았겄소? 보릿가루를 물에
적시어 아부니 입에 짜넣었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소."
"그때 윤보목수 아니더믄 온 동네에 송장 많이 났일 기다."
복동네는 방아질을 멈추고 보리쌀을 한주먹 집어서 문질러보더니 옆에
있는 사기에 퍼담는다.
"그랬을 기요. 우리집에 쌀 한 말을 가지고 왔는데 악이 받쳐서 막
퍼붓지 않았겄소? 사람을 굶기직이는 인심이 어디 있느냐고,"
"금년 추석에는 최참판댁에서 전곡이 많이 나올 거란 말이 있더마."
복동네는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나도 그 말을 들었소. 애기씨도 오시고,"
"애기씨가 멋꼬? 마님이지."
"육손이가 쫓기날 끼라고 울어쌌더랍니다."
"우는 거사 제 맘이 아닌께."
"멀쩡할 때도 있십니다."
"실성한 사람을 쫓아내기야 하겄나."
야무네는 보리쌀이 든 사기를 인다.
"아가, 내 보리쌀 씻거 오꺼마."
우물로 가는데 복동이가 따라온다.
"성님요."
"응"
"이서방 아들 참 좋데요."
"좋구말구"
"학식도 많이 들었다 카데요."
"보통핵교만 나와도 뭐한데 그 우엣핵교까지 나왔다 카이, 그 아아는
어릴 적부터 인물이 좋았네라. 아바니를 닮아서,"
"인물이야 임이네도 좋았지요."
"에미 얘기는 안 하는 기이 좋을 기다."
복동네는 우물가까지 따라왔다.
"복동네, 니 나한테 무신 할말이라도 있나?"
비로소 야무네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묻는다. 복동네는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어주면서
"장개보낼 나이가 넘었는데 와 이서방은 서둘지 않는지,"
그 말이 대답이다.
"누가 니보고 말 건네달라 카더나?"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머가 그리 미저지근하노."
"실은 말하기가 좀 어렵소. 혼사란 가이방해야 하는데,"
"대관절 말하는 사램이 누고?"
사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묻는다. 복동네는 두레박을 든 채,
"성님이 들으믄 놀랠 깁니다. 누군고 하니 김훈장 외손녀를 두고,"
"머라 카노?"
역시 놀란다.
"설마, 그쪽에서 그랬을 리는 없일 기고 이서방이 그러더란 말가?"
"아아니요."
복동네는 고개를 흔든다.
"그라믄,"
"그쪽에서 비치는 말이요."
"김훈장의 외손녀라믄 점아기, 산청으로 시집간 그 사람 딸 말가?"
"야. 지금 친정에 다리러 와 있소."
"그거는 나도 안다마는 그럴리 없다."
"그러니 내가 머라 캅디까? 혼사란 가이방 해야 한다고,"
"만일에 그기이 참말이믄 땅밑의 김훈장이 벌떡 일어날 기다."
"최참판댁 아기씨는 하인하고 혼인하지 않았소? 그러고 보면 될 얘기도
아닌 성싶은데,"
"그건 그렇다마는 어째서 얘기가 나왔이까?"
"홍이 가아가 요새 김훈장 댁을 자주 드다들다 하더마요. 만주서
김훈장이랑 함께 지낸 정리, 그라고 보통핵교를 나온 그 댁 아들이
말친구가 되는갑더마요. 그래서 점아기 그 사람이 홍이를 유심히 본
모양이라요. 딸 가진 사람이사 다 안 그렇겄소?"
"그러믄 니보고 중매를 서라 그러더나?"
"체면에 그렇기까지 말하지는 않지마는, 청혼을 하믄 하겄다 그런
말이더마요. 맏딸이 열여섯이라 카든지,"
이런 얘기가 오가는 것을 알 턱이 없는 홍이는 오늘도 범석이네
평사리에 올 때마다 용이는 아들에게 인사갈 것을 명령했고 홍이 역시
김훈장에 대한 정리를 생각하여 순순히 아비 의사를 따랐다. 그러니까
범석이네 집과는 상당히 구면인 셈이다. 이번에는 추석까지 꽤 오랫동안
평사리에 체류하게 되어 무료하기도 했었지만 범석이는 좋은 친구였기에
종종 놀러가곤 하는 것이다. 김훈장의 장손 그러니까 양자로 데려온
한경이의 큰아들 범석이는 올해 열여덟, 홍이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외모로는 홍이보다 숙성했다. 다소 모자라지만 마음씨 착한 아비를 닮아
유순한 성품인 데다가 아비보다는 월등하게 총명했고 읍내 보통학교는
마친 뒤 집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었다.
"범석이 있어?"
사랑으로 돌아간 홍이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들어와."
범석이는 싱긋이 웃으며 방문을 열고 손짓을 했다. 범석이네 식구들은
김훈장 신변에서 함께 지낸 용이 부자를 늘 존중하였고 특히 범석이는
그곳 얘기 듣기를 즐겨했으므로 언제든지 홍이가 나타나면 반가워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상대가 양반이어서 반말 쓰기에 저항을 느꼈던 홍이도
이제는 스스럼 없이 동생 대하듯 했다. 범석이도 인습상 홍이에게 공대는
하지 못했으나 꼭 형이라는 칭호만은 붙여서 말하는 것이었다.
"아부님은 어디 가셨나?"
"출타중이야."
"오늘은 한가하군 그래, 방구석에 있는걸 보니."
"추석 쇠고 나면 바빠지겠지."
"무슨 책을 읽고 있나."
"응, 읍내 선생님이 빌려주신 건데, 후꾸자와 유끼자라는 사람이 쓴
{가꾸몽노스스메(학문을 권한다)}. 좀 어려운 것 같애."
"열심이구나. 나는 책하고는 담쌌다."
"그래도 중학교는 나왔으니 나 같기야 할라구."
"용정서는 중학이었지만 진주의 협성학교 그게 어디 중학인가? 똥통
학교지."
홍이는 경멸하듯 웃는다.
"학교야 어떻든 공부만 하면 되는 거지."
"넌 서당 공부 했나?"
"학교 가기 전에,"
"한문에는 능통하겠구나."
"그렇지는 않지만,"
범석이는 겸손했으나 한문 공부는 꽤 했고 그것이 밑천이 되었던지 읍내
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홍이는 범석이를 볼 때마다 용정의
정호 생각을 한다. 범석이 정호같이 수재형으로 생기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외모는 둔재같이 보였지만, 속이 깊고 아주 순박했다. 홍이는 정호를
숭배하듯 범석을 숭배하진 않았으나 그의 향학열을 존중하기는 했다.
"후꾸자와는 뭐하는 사람이야?"
"글세, 교육자라 할 수 있겠지. 많은 인재를 길러내어 일본을 부강하게
하는 데 큰 공이 있다 하더군, 선생님이. 또 사회개혁가라 할 수도 있고.
갑신정변도 후꾸자와 영향이 있었다 하기도 하고,"
"반가운 인물은 아니군 그래."
"우리 조선으로선, 일본놈치고 반가운 인물이 어디 있겠어. 그렇지만
우리는 일본책은 읽어야 하니까."
"네가 그리 공부하고 싶으면,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전 같으면 쉬웠겠는데... 요즘엔 사람들이 깨서 공부하겠다는 축들이
많고 보니, 집의 보조 없인 어려운가 봐. 나로선 왜놈들 도움은 받고 싶진
않아."
"그건 그렇지만 너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완고하면 안 돼."
"그래도 나는 할아버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홍이는 순간 범석으로부터 벽을 느낀다. 어릴 때 상현에게서 느낀 강한
거부의 벽을, 그것처럼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문 밖에서
"범석아"
"네, 고모님."
"누구 왔느냐?"
"네."
점아기가 방문을 연다.
"아아, 홍이로구나. 고구마 삶았는데 먹어보아."
"안녕하십니까?"  홍이 일어서서 인사를 한다. 점아기는 여느 농가의
아낙과 다름이 없는 차림이다.
"응"
점아기는 찬찬히 홍이를 살펴본다.
"몸은 건강한가?"
"별로 병 같은 것은,"
하다가 홍이는 당황한다. 너무 자세하게 살펴보는 눈초리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너이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점아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놀다 가거라."
점아기는 방문을 닫아주고 안으로 들어온다. 안방으로 들어온 점아기는,
"올케."
"예."
범석의 모친 산청댁은 추석에 입을 옷을  짓고 있었다. 그 역시 양반댁
마님이기보다 농가 아낙과 다를 것이 없는 차림이요, 일에 이골이 난
몸집이다.
"아무래도 아이가 맘에 들어요."
"글쎄 당자는 나무랄 데가 없더군요. 행동거지도 수말스럽고,"
"이서방을 닮았으면 마음도 착하련만,"
아무래도 임이네 때문에 꺼려진다. 점아기에게는 딸이 삼형제, 막내가
아들이었다. 큰딸 보연이는 괜찮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이기적이고 성정이
과히 좋지 않았다. 사주를 보아도 팔자가 세다는 것이다. 점아기는 늘 큰딸
때문에 근심이었다. 나머지 두 딸은 얼굴이 보연보다는 못했지만 온순하고
마음이 넓어 어미 속을 썩이는 일이 없었다.
"우리끼리니 하는 말이지만 보연이가 걱정이요."
"뭐 커서 셈나면 괜찮겠지요. 아이들은 열두 번 변성한다 안 합니까?"
"지체로 말한다면 혼인할 처지는 못되나 학식이 있어서 처신이나 예의
범절은 되어 있을 것이요, 남자가 잘났으면 자연 안사람도 쑥어들 성싶고,"
"사랑에서 뭐라 하실지,"
"그 양반은 그런 데는 퍽 대범하지요.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아이
어민데 심성도 좋지 않지만 이력이 하도 험해서요. 전남편이 최참판댁
사랑양반 살해에 연루되어 처형된 것이,"
"그것은 그 아이하고 상관이 없는 일 아니겠소?"
시누 올케는 함께 바느질을 하며 얘기를 계속한다. 산청의 가난한
선비의 집으로 시집간 김훈장 외딸 점아기는 시집간 몇 해는 무척 고생을
했었다. 조석조차 잇기 어려운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런데 마침 남편의
외가에서 도움의 손을 뻗쳤던 것이다. 고성의 토박이던 외가가 무슨
연유에선지 어항인 통영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살림을 이룩한 것이다.
그런 연고로 현재 점아기네 식구들은 통영으로 옮겨가서 살고 있었으며
외가에서 지어준 위채 세 칸 아래채 두 칸의 초가집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새집 양반, 새집 처녀라는 호칭으로 대하였다. 넉넉하다 하기는 어려우나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은 면하게 된 것이다. 오래간만에 친정으로 온
점아기는 이번 추석 서희가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귀가를 늦추고 있는
것이다.
"이번 추석에는 동네가 좀 시끄럽겠소."
"어째서요?"
"광대라든지, 사당패를 부른다 하더군요. 시누님은 오광대 구경하신 일이
있소?"
"구경한 일 없어요."
"이번엔 한분 구경 안 하시겠소?"
"글쎄."
"이젠 나이도 들었고 세상도 개명 많이 했으니까요."
"빤히 모두 아는 얼굴인데 상사람들 앞에 체면이 서겠소?"
"참 시누님도. 아 상사람하고 사돈할라 하시면서도?"
"그러니 작정하기가 어렵지요."
"작정 아니 하셨소? 그렇다면 말썽 사납게 복동네보곤 왜 발설을
하셨소."
"..."
"사람의 인연이란 모를 일이긴 하지만,"
"혼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사댁이니 생원이니 하고 가져오는 혼담을
보면 당자가 형편없고, 그렇다고 뭐 우리 지첸들 별 것 아니지 않소? 지체
있고 당자가 쓸 만하면 처갓집 살림 따지거든요."
하면서 점아기는 마음속으로 열심히 저울질을 해보는 것이다. 인물
잘생기고 중학 과정을 밟았다는 것은 다른 혼처에 비하면 월등한
조건이었다. 미관말직의 쥐뿔도 아닌 문벌을 내세우며 건네는 혼담에는
서당공부도 변변치 못한 무식꾼이 있었고 상민 출신이 친일 하여 돈푼
모은, 그러니까 양반과의 혼인으로 자신들 지체를 높이려는 그런 사람도
있었다. 하나하나 꼽아보면 옛날과 달리 상민이 큰 장해는 되지 않았고
여러 가지 조건에서 홍이 만한 사윗감은 없다. 그러나 임이네가 치명적인
것이다. 처녀 시절 한마을에서 시종하여 임이네 행적을 보아온
점아기로서는 그런 여러 가지 사연을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불미스러운
가지가지 풍문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아버님은 그애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올케는 못 들으셨소?"
"글쎄요. 홍이 그 아이 말로는 돌아가신 어린 생각이 난다는 뭐 그런
얘기였소. 아버님께서 그 아이를 마땅찮게 생각하셨다면 찾아오기나
하겠어요?"
"그건 그래요."
"범석이가 더 잘 알지 모르겠군요. 그곳에서 지내신 할아버님 형편을
몹시 알고 싶어했으니까요."
"그렇겠군요."
"하지만, 저도 들은 얘기입니다만 괴정에 두 청상이 함께 돌아가신
김진사 댁 말입니다."
"아버님의 재종이었소. 이제는 집터마저 없어졌지만."
"누가 씨는 양반이니 한복이를 김진사 댁 양자로 삼으면 어떻겠느냐
그렇게 말했다면서요?"
"음... 그런 일이 있었지요. 이십 연도 훨씬 넘은 옛일이오. 죽은
윤보라는 목수가 그런 말을 했지요."
"아버님께선 노발대발하셨구요."
산청댁은 어디까지나 중립을 지킬 심산인 모양이다.
"우셨어요. 가세가 기우니 상놈들마저 우습게 본다고, 백정놈의 씨를
양자 삼았음 삼았지 살인 죄인의 씨를 어찌 양자 삼을까 보냐 하시면서,
아버님은 이십 세에 등제한 진사어른을 당신 몸보다 더 위하셨고 문중의
영광으로 생각하셨지요. 아주 영명한 어른이던가 봐요. 제가 어릴  적에도
두 청상이 계시는 집은 우리집보다 먼저 손질을 하셨어요. 여인네만
사시는 집이라 하여 늘 단속도 하였고."
산청댁은 인두질을 하고 나서 저고리를 뒤집는다.
"시누님."
"예."
"이번에는 어려운 걸음 하셨는데 오신 김에 절에 안 가시겠소?"
"절에?"
"예."
"불공드리러 가잔 말입니까?"
"실은 해마다 내는 무명 중에 두 필 몫만 따로 모았어요. 그리해서 모은
돈이 십오 원 가량 됐더구먼요. 금년에는 어쩔까 생각했던 참인데 시누님
오신 김에,"
"...?"
"철없이 시집와서 대소사가 분분한 중에 정성껏 아버님을 한번
모셔보지도 못하고 그것만으로도 자식된 도리가 아니거늘 무덤 한번
찾아보지 못하고 원통한 고혼이 얼마나 자식들을 원망하겠습니까. 지난
백중날에는 어짜까 생각했다가 명년으로 미루었지요. 자식들 정성이니
아무날이면 상관 있겠소? 망령의 천도나 빌어봅시다."
"올케, 고맙소. 딸자식은 자식도 아닌가 보오."
점아기는 눈물을 찍어낸다.
"자식 노릇 한번 못하고 아버님 은덕으로 사는 우리야말로 주제넘지요.
재를 하는 것도 아니겠고 불공이면 십오 원으로 족할 게요."
"족하구말구요. 선영봉사, 짐도 무거운데, 나는 참말 면목이 없소."
시누이와 올케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바느질을 하고 있는 동안
사랑의 범석이와 홍이는 낚시대를 들고 강가로 나갔고 읍내까지 볼일을
보러 갔던 한경이 나룻배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온다. 풀을 베 오던 마을
젊은이들은 지게를 진 채
"김훈장댁 어른 읍내 갔다 오십니까?"
인사를 한다. 마누라보다 훨씬 나이 많은 한경이는 지난날 김훈장이
그러했듯이 나이보다 늙어 보였고.
"요즘엔 매일 풀 베는구나."
"그래야 마음 놓고 추석을 쇠지요."
"그렇기는 해."
집으로 들어간 한경이는
"방에 없소?"
산청댁과 점아기가 나온다.
"오라버니, 이제 오시오."
"으음."
하다가
"임자, 생선 좀 사왔는데 누이한테 대접하구려."
어떻게든 성의를 표시하려고 애쓴 나머지 안 해도 좋은 말을 하고서는
쑥스러워서 웃는다.
"오라버니도 참, 대접이라니요? 제가 뭐 손님인가요?"
"쉽게 못 오니까 그렇지. 참, 내 오늘 읍내서 이부사댁 이공을
만났구먼."
"추석이라서 내려오셨는가 부지요."
"내 범석이놈 얘기를 했지."
"범석이 얘기는 무엇 땜에 하셨습니까?"
"공불 안 할라 해도 부모가 억지로 시키는데, 하고 싶어서... 그러는 놈을
집구석에 들어앉혔으니,"
"염치없이 무슨 그런 말씀까지 하시었소."
산청댁은 눈살을 찌푸린다. 남편이 못난 짓을 하여 웃음거리나 되자
않았을까 근심이 되었던 것이다.
"염치가 없기는, 인재를 촌구석에 썩이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옳잖은
일이요. 그 양반도 나라일을 하는 마당에,"
"그래 뭐라 말씀하시던가요?"
점아기가 묻는다.
"친구한테 부탁해보겠노라 하시더군."
"그 양반한테도 우리는 빚을 지고 있는 처진데,"
"임자는 어찌 그렇게 말하시오? 아버님도 나라를 위해 가신 것은
마찬가진데 신세졌다, 어이구 참,"
"올케, 그건 오라버니 말씀이 옳아요."
점아기는 웃으면서 말한다. 한경이도 아까처럼 피식 웃는다. 누이라지만
실은 남남이었고, 출가 전에 잠시 얼굴을 익혔을 뿐이어서 몇 년 만에 한
번씩 만날 때마다 스스러운 것이다.
"참 시누님, 제가 깜박 잊고 있었소."
"뭘 말입니까?"
한경이도 뭐 말이냐는 듯 입을 반쯤 벌리고 아내를 쳐다본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인편으로 보내온 기록 말입니다. 아버님이
기록하신 것,"
"예, 그건 알아요."
"읽어보시지는 않으셨는지요?"
"한문이 짧아서,"
한경이는 슬그머니 하늘을 본다. 그 자신도 학식이 부족하여 읽진
못했다.
"걸핏하면 범석이가 꺼내 읽곤 한답니다. 하니 범석이더러 읽어서 알기
쉽게 말해달라 하십시오."
"새삼스럽게 그거는 왜요?"
"아버님께서 그애를 어찌 생각하셨는지 아까 궁금해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아, 아."
"그곳에서의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하셨으니 그애에 관한 구절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임자, 그건 무슨 말이오?"
산청댁은 장난스럽게 웃는다.
"일이 시원찮을 것 같으면 모르시는 편이 낫고 성사가 된달 것 같으면
자연 아시게 될 것이오."
"모를 말을 하는구먼."
한경이는 중얼거리며 사랑으로 돌아나간다. 돌아가는데 나룻배에서 들은
이상한 얘기가 생각난다. 지리산 속에 수백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는
것이며 한번 치고 나올 것이라는 얘기다. 한경이 옆에 웅크리고 앉은 두
사내가 소곤거리듯 낮게 하는 말을 한경은 무심결에 들었던 것이다.
"관에 가서 고하기만 한다믄 큰돈 한분 손에 쥐어보는 것은 따놓은
당상인데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제."
"말이 의병이지 실상은 도둑떼 아니까?  도둑떼라믄 고한 것도 잘
한짓이고 게다가 상금 타고."
"허허어, 의병이라든데? 그깟 놈의 수백 명, 수천 명이라도 별수 없는
기라. 왜놈이 알기만 하믄 하리아침에 박살이다. 공연한 짓 해서 삼이웃이
시끄럽기만 할 기고, 나도 이 나라 백성인데 아무리 돈이 좋기로 고해바칠
수는 없지."
두 사내는 한경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펴가며 소곤거렸다.
사랑으로 들어간 한경은 갓을 벗어걸고 도포도 벗어 놓고 자리에
눕는다.
'미친놈들 공연한 소리지. 의병이 어디 있을 거라구. 왜놈이 이 잡듯이
다 잡았는데 이제는 아무 희망도 없지. 우리 대에는 선영 모시고 가만히
엎드려 있을밖에.'
도로 일어나 앉은 한경은 목침을 밀어버리고 담뱃대를 찾아든다.

14장 탈 속에는

거의 이십 년 만에, 평사리의 추석은 풍성하였다.
올벼를 베었을 뿐 논에는 황금물결이 이랑을 이루고 있었다. 평작은
넘은 농사여서 떡쌀을 담그는 마을 아낙들의 손길은 떨리지 않았고 옛
지주요 오늘날의 지주인 최서희가 모처럼 행차 선물인 듯 적잖은 전곡을
풀었으며 밤에는 오광대까지 부른다는 얘기였다. 홍이는 추석놀이를 위해
이틀 동안 아비에게 장고 치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했다. 차례 성묘가
끝날 무렵, 반공중에서 서편으로 해가 약간 기울 무렵 타작마당에 징이
울리면서 놀이는 시작되었다. 놀이꾼들 속에서 용이는 장고를 짊어졌고,
봉기와 성묘차 온 영팔이도 고깔을 쓰고 나섰다. 1903년, 보리흉년으로
거리마다 아사자가 굴러 있던 비참했던 그해, 마누라를 굶겨죽이고 그
자신도 실성하여 걸식하던 서금돌노인은 없지만, 가락에 겨워 굽이굽이
넘어가던 구성진 그 목청은 없지만 놀이는 옛적과 다름없이 가슴 설레이고
흥에 겨운 것이었다. 느릿느릿 징을 치던 두만아비도 없고 북을 치던
칠성이, 팔팔거리던 윤보, 한조는 모두 세월에 쓸려서 가고 없지만 놀이는
변함없이 흥겹고 가슴 설레이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무색옷이며 풀발 선
아낙들의 치마 스치는 소리며, 그러나 하얀 베수건 어깨에 걸고 싱긋이
웃으며 맴을 돌며 장고채를 잡던 인물 잘난 사나이, 이제는 늙고 병든
몸이, 장고도 어깨에 무겁고 맴을 돌 때마다 눈앞은 캄캄하다. 용이는
아들에게 장고를 넘겨주며 눈물  짓는다. 영팔이와 봉기도 고깔을
흔들어보다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고, 젊은 청춘들만이 아득한 갈
길을 오늘 하루나마 잊고, 내일은 보리죽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타악기에
말려들어 땅을 구르며 난무한다. 꽹과리는 경풍든 것처럼 빠르게, 드높게
울리고 징은 여음을 따라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장고와 북이 어울린다.
홍이는 자기 장단이 없다. 꽹과리를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저절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타악도 사람도 함성도 한덩이가 되어 울리고
움직인다. 구경꾼도 산천도 모두 한덩어리가 되어 울리고 움직인다. 깨갱
깨애깽! 더으으음- 깨깽 깨애깽! 더으으음- 날카롭고 둔중한 소리에
하늘과 산과 강물이 돌고 사람이 돌고 땅이 돌고 단풍든 나무들도
우쭐우쭐 춤을 춘다.
"아바이하고 영상이다. 젊었을 때 이서방이 꼭 저랬네라, 우짜믄 인물이
저렇기도 좋겄노."
상기된 홍이 맴을 돌면 장고채가 휘청거린다.
"참말로 세월은 눈 깜짝하는 새,"
"심 좋다든 영팔이도 나이는 못 속이는개비여."
"전에는 두리아배도 헤죽헤죽 잘 웃어쌌더마는,"
야무네와 복동네와 파파할멈이 다 된 영산댁의 말이다.
"다 늙어감서 싱겁거로 춤은 무신 놈의 춤고,"
봉기 마누라는 혀를 찬다.
"복동네야, 니 시아부지 생각나제?"
"야."
"목청도 좋더마는 가고 나니 못 듣는다."
"역발산 진시왕도 죽으먼 소용 있간디?"
"진시왕인가? 항우장사지."
구경꾼 속에는 범석이가 있었다. 한복이도 웃고 서 있었다. 산청댁과
점아기도 나란히 서 있다. 점아기의 눈은 홍이만 따라다닌다. 구경 나온
것도 홍이를 좀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선지 모른다. 처녀아이들의
화제는 강변 모래밭에서 밤에 벌어질 오광대에 관한 것이었고 며칠
동안이나마 홍이와 한집에 있는 언년을 부러워하며 놀려대는 그런
것이었다. 아이들과 강아지가 먼저 뛰어간다. 놀이꾼들은 타작마당에서
마을길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타악 소리는 어느덧 늘어졌고.

하늘에는 잔별도 많다.
쾌지나칭칭 나아네!

노래를 선창하는 사내는 사십대에 들어선 바우, 놀음을 좋아해서
자작농으로부터 소작농으로 떨어진 바우다.

시내 강변 잔돌도 많다,
쾌지나칭칭 나아네!

타악이 늘어지면서 노랫소리가 높아지니 춤은 멎게 된다. 노래를 위주로
한다. 갑자기 희열의 절정에서 비애의 나락으로 떨어진 듯, 오열하고
하소연하고 멍울 같은 한이 가락마다 굽이굽이 넘어간다. 다시 타악기는
신들린 것처럼 빨라진다. 선창은 사라지고 괘지나칭칭 나아네! 괘지나칭칭
나아네! 되풀이하며 보다 빠르게 놀이꾼들의 몸은 팽이같이 돌아간다.
하루의 해가 저물었다. 놀이꾼도 구경꾼도 각기 제집으로 흩어져갔다.
그러나 밤에 있을 오광대에 대한 기대 때문에 마을은 여전히 술렁거렸다.
노인층은 옛만 못하다 했다. 젊은층은 신풀이 자알 했다고들 했다.
아이들은 배탈이 나고 혹은 저녁을 마다했다. 그리고 젊은층과 늙은층,
여자들과 남자들의 화제는 최참판 댁 서희 모자와 오광대에 관한 것으로
갈리었다.
"비어묵어도 비린내 하나 안 날 것 같더마."
"비어묵을 소리 한다. 숭년 들었다, 사람 잡아묵게."
"이를테면 그렇다는 거지. 구신겉이 이삔께 해보는 말 앙이가."
"아들 형제는 우떻고,"
"씨도 좋고 밭고 좋은께 자연고로 그리 될밖에 더 있겄나."
"쓰는 좋을 것도 없지이."
"와 씨가 안 좋노. 내가 어릴 적에 보았는데 관옥 겉더라."
"그래도 하인 아니가."
"제에기, 아 하인이믄 아마빡에 도장 딱 찍어서 태어난다 카더나! 내가
족보 얘기는 안 했다. 아들 형제 인물 보고 한 얘긴께."
젊은층 사내들의 말이었고 젊은 아낙들은
"그 많은 복, 머리털 하나만큼이라도 뽑아주믄 아마 보리죽 신세는 안
면하겄나?"
"보리죽 신세만 면하까? 비단옷은 입게 될 끼다. 길쌈 안 하고 끌밭도
안 매고,"
왕사를 아는 장년 노년층의 남정네들은 서희가 평사리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무슨 변동이 있을 것이란 말들을 하며 수군거렸다. 전곡을 푸짐하게
내놔서 유감없이 신풀이를 했고 밤하늘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백사장에
벌어질 오광대 굿에 대한 기대도 컸으나 일말의 불안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점아기와 산청댁은 다른 농민들처럼 서희와의 사이에 이해 관계는
없었지만 김훈장과 서희와의 인연, 얽히고설켰던 인연을 생각하여
정성들여 지은 새옷으로 갈아입고 정중하고 경애스런 마음으로 최참판
댁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서희는 관례적인 것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어
두 여인네를 대하였다. 반가의 부인이라 예우는 했으나 살얼음같이
냉담하여 두 여인네는 자리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묵묵히 돌아오는
길에 점아기가 입을 떼었다.
"올케."
"예."
"야들야들한 그 손을 생각하니 우리네 손을 소나무 껍질이오."
얼마간의 울분을 머금고 음성이다. 그 말대꾸는 아니 하고 산청댁은,
"본시 성미가 찬가 부지요."
"최씨네 여인이니까,"

"..."
"하기는 여자몸으로 그것도 어린 나이에 좀해서 잃은 만석 재산을
찾았겠소? 우리는 손가락에 불을 켜서 하늘로 올라갔음 갔지..."
"..."
"기상이야 어릴 때부터 대단했지만,"
"우리가 뭐 잘못한 거는 아닐까요."
"잘못한 게 뭐 있겠소. 지체가 다르고 사는 풍도가 달라서 그렇겠지요."
달빛과 장작불과 백사장과 강바람, 오광대가 벌어진 강변으로 마을
사람들은 다 몰려갔다. 마을은 텅텅 비어 불빛이 새나오는 집이라곤 언덕
위의 최참판 댁뿐이었다. 갓을 이마 쪽으로 내려쓴 사내가 동저고리
바람의 사내와 소리를 죽이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최참판 댁 뒤채, 옛날에
김서방 내외가 거처하던 곳에서. 이윽고 사내는 마루 끝에 걸터앉고
동저고리 바람의 사내가 급히 안으로 들어간다. 대청마루에까지 간 사내는,
"마님."
"장서방이냐?"
"예."
"밤에 웬일이냐."
"급히 아뢸 말심이 있어서,"
"말하게."
"혜관시님께서 화급한 일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무슨 일로?"
"만나뵙고 여쭙겠다 하옵니다."
"사랑에 들게 하라."
"예. 허나 다른 사람이 알믄,"
"알았다."
갓을 내려쓴 사나이는 사랑으로 들어갔고 서희도 연학을 거느리고
사랑에 든다. 연학은 물러나 사랑과 안채 사이의 문을 지키고 선다.
사나이는 서희가 방으로 들어섰는데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길상이를
예감했던 서희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밤중에 무슨 일로 오시었소."
사내는 갓을 벗었다. 상투는 없고 자른 머리다.
"오래간만일세."
서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구천이, 아니 김환이었던 것이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
서희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용정에서 대면하고 몇 해 만인가?"
서희는 입술을 피가 나게 문다. 이 세상, 두 자식말고는 단 하나뿐인
혈연이다. 어미를 뺏아갔고 부친의 이부동생이며 간부인 사내, 하늘같이
우러러보았던 할머니 윤씨의 부정한 씨.
"감히, 어디라고 오시었소."
"글쎄, 가라면 가겠네. 쫓기는 몸이라서 왔다만,"
"..."
"허락한다면 잠시 이곳에서 피신하겠네만,"
얼굴은 쫓기는 사람 같지가 않다. 옛날같이 절망의 정열, 스스로
위기에다 몸을 내던지고자 하는 감정과 제어하려는 의지와의 싸움, 그
날카로움, 오뇌, 갈등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이다. 김환은 이제 자신을
자연으로 환원시킨 것일까. 서희는 그것을 느낀다. 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극히 높은 영혼의 경지를 느낀다.
"위에게 쫓긴단 말씀이오."
"왜헌병이네."
"이곳은 안전하겠습니까?"
"아마도, 이삼 일이면 족할 걸세."
서희는 연학이를 부른다.
"사당으로 가자."
집안 식구들 모르게 숨길 곳을 사당밖에는 없다. 사당의 마룻장을
들어내고 환이 그곳으로 들어간 뒤 다시 마룻장을 끼운다. 사당문에 쇠통
채우는 소리를 들으며 서희는 현기증을 느낀다. 김환이가 최참판댁 그
면면한 조상들의 위패를 뫼신 사당 안에 들다니, 서희는 대숲 사이에서
얼굴을 내미는 달을 올려본다.
"열쇠를 이리 주게."
"예, 마님."
연학은 깊이 고개를 숙인다.
강변 시장에서는 오광대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사방에서 호각 소리가 울리었다. 여남은 명의 왜병정들이 총대로
구경꾼들을 포위한다. 구경꾼들은 모조리 일어섰다. 마당쇠가 맨 먼저
뛴다. 아우성 속에 총성이 울렸다. 마당쇠는 곤두박질을 몇 번 치다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당쇠 마누라의 비명이 울린다.
"꼼짝들 말라이! 움직이는 놈들은 쏘아죽인다이!"
아이들이 울부짖는다.
"시끄럽게 구는 새끼들도 쏘아죽인다이!"
어른들은 울부짖는 아이들의 입을 틀어막는다.
"장작불은 끄지 말고오!"
총대를 들고 포위한 채, 소리지르다가 왜병정들은 구경꾼들을 한
가운데로 몰아붙인다. 안으로 몰려들어간 구경꾼들, 장작불 타는 곳만
남겨둔 채, 그것을 마치 똬리 같은 형상이었다. 그래도 총대는 계속하여
몰아붙인다.
"어떤 놈이든지 움직이면 쏘아죽인다이!"
왜병정들은 두 명의 감시병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마을로 향한다.
마을 요소마다 길목마다 왜병정들이 배치된 채 밤을 지새운다.
새벽안개가 걷혔을 때 왜병정들은 마을 빈집의 수색을 개시하였다.
기동이 어려운 노인이 몇 사람 남아 있었을 뿐 왜병정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마을의 수색이 끝나자 서녀 명은 최참판 댁 대문을
걷어찼다.
"무슨 일이시오."
연학이 고분고분 허리를 굽히며 묻는다.
"이상한 놈들이 안 왔소까!"
"예, 아무도,"
"살라거든 바린말이 해라이. 이쪽으로 여러 놈이 왔단 말이다이!"
"개미 한 마리도 못 보았소."
"이놈으 자식이 잔말이 많다이!"
사정없이 뺨을 후려친다.
"어이구우, 나으리 살려줍쇼."
연학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쥔다. 모두 오광대 구경에 나갔고
유모와 안자가 허로의 몸을 의지한 채 서 있었다.
"네놈이 주인이소까?"
"아, 아닙니다요, 나으리."
이때 긴 치마를 끌며 서희가 대청으로 나타났다. 아이들이 따라 나오는
것을 타이르며 방으로 들여보내고 나서
"내가 주인인데 무슨 일로 오시었소."
유창한 일본말, 엄숙한 눈빛에 뱃삥(미인)이라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킨
왜병정이 다소 정중하게 묻는다.
"당신이 주인이오?"
"그렇소."
"작전상 가택 수색을 해야겠소."
"여기는 적지가 아니지 않소? 선량한 국민이 평화롭게 사는 곳이오."
다소 멈칫하다가
"우리는 경찰이 아니오. 우리는 군인이오. 필요할 때는 이유 불문코
우리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소. 그러면 수색 전에 묻겠소. 이상한 놈들이
안 왔소?"
"이 집에는 이상한 놈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오."
"어째서 그렇소?"
"내가 설명하기는 거북하오. 하동 관청에 가서 물어보시오 더 정확히
알려거든 진주 관청에 연락하여 알아보시오. 그러면 이 집에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할 이유를 알게 될 것이오."
왜병정은 완연히 기가 꺾인다.
"그러나 우리 군대는 관청의 지시 따윈 받지 않소. 우리의 임무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못하오. 부인, 죄송하지만 가택수색은 해야겠소."
정중하게 나왔으나 가택수색은 포기하지 않는다. 서희는 빙그레 웃는다.
"직무에 충실한 군인이군요. 그렇다면 할 수 없소. 협조하는 뜻에서,
한데 무슨 일로 그러시오?"
"지리산 폭도들이 이리로 빠졌소."
"지리산에 아직도 폭도들이 남아 있었소?"
"모조리 소탕했는데 잔당이 재규합한 모양이오."
아주 누그러져서 어투는 친절하기까지 했다. 그는 수색을 개시하는 듯
집총한 채 서희 미모에 넋이 빠진 나머지 멍청이가 된 듯 세 명에게
손짓을 한다.
"예의를 지켜주시오. 집안에 오를 때는 신발을 벗어주시구요. 아시었소?"
"그, 그렇게 하겠소."
범치 못할 위엄에 눌린 듯, 왜병정들은 갈라져서 수색을 시작한다.
"마인, 저놈들한테 술이나 퍼 안길까요?"
연학이 다가와 나직이 말한다.
"그럴 필요 없네. 오히려 의심을 받는다."
비교적 조용하게 집안을 뒤져나갔다. 서희가 말한 대로 방안을 수색할
때는 벗기 귀찮은 군화를 벗었으며 집안 규모의 웅장함에 내심 놀라는 것
같았다.
"어머님, 군인들이 왜 저러지요?"
환국이와 윤국은 왜병정이 안방을 뒤질 때 어미 옆으로 쫓아나오며
날카롭게 말했다.
"걱정 말어라. 우리집뿐만 아니란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아까 서희와 얘기하던 병정이 나타났다.
"부인, 대숲 속에 있는 집엔 열쇠가 채워져 있소. 부술 수도 있는 일이나
예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했으니까요. 열쇠를 주시겠소?"
"열어드리지요."
"손수 안 그러셔도 좋소. 열쇠만 주시오."
"그곳에 어떤 곳인 줄 아시오? 이 집에서는 가장 신성한 곳이오.
나말고는 열 수가 없소이다."
"하하하, 보물이 있는 곳이구먼요."
서희는 잠자코 앞서 간다. 자물쇠를 열고 사당문을 활짝 열어젖힌
서희는
"이렇게 나는 협조하였소. 이곳은 신성한 곳이오."
병정은 머리를 디밀고 안을 한바퀴 둘러본다.
"뭘 하는 곳인가요?"
"조상의 사당이오."
"아 예. 실례했소이다."
대숲 길을 나오면서 왜병정도 임무가 끝난 안도감 때문인지
"부인은 대단한 부자신데 어째서 이런 시골에서 사시오."
"이곳은 내 본가요. 살기론 진주며, 사당에 참배하러 왔소이다. 당신들
때문에 조상들이 여간 노하지 않았을 게요."
서희는 천역스럽게 농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임무이니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부인은 굉장한
부자시고 아릅답고 또 일본말이 유창하시구먼요. 언제 일본말을
배웠습니까?"
"일본인 친구가 많아서 그런가 보지요."
"네, 그렇습니까."
왜병정들은 서희에게 경의를 표하고 나갔다. 아침해가 뿌옇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백사장에 마당쇠 시체는 그냥 나둥그러져 있었고,
장작불을 꺼졌으나 똬리는 풀리지 않은 채, 사람들은 돌같이 굳어버린
상태로 몸서리쳐지는 밤을 지샌 것이다. 여남은 명의 왜병정은 백사장에
집합했다.
"틀림없이 이 중에 폭도들이 있을 것이다! 가차없이 색출하라!"
처음 여자들과 아이들을 갈라내어 한곳으로 몰아붙인다. 추위와 공포
때문에 먹빛이 된 입술을 실룩거리며 아이들과 여자들은 허둥지둥
몰려간다. 마당쇠댁네는 붕어처럼 헛입을 놀리며 실신한 듯 기어간다.
왜병정들이 발길질을 하며 총대로 엉덩이를 갈긴다. 다음은 늙은이들을
가려내어 한곳으로 몰아붙인다. 청년과 장년들만 모래밭에 한 줄로 세운다.
광대들은 탈을 쓴 채, 그도 그럴 것이 광대놀이 도중에 꼼짝 말라
했으니, 탈을 쓴 채  본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물쭈물하는 놈은 죽여도 좋다! 철저히 조사하라!"
서희와 얘기하던 왜병정이 입이 찢어지게 고함을 지른다. 그러나 막상
심문이 시작되자 근거가 없는 것을 깨닫고 면장 면서기를 끌고 왔다.
면소에 기재된 사람들 골라내는 것이다. 영팔이와 용이는 면소에 이름은
없었으나 늙은이들 층에 끼여 제외되었고 점아기는 여자들 쪽이어서
제외되었고, 걸려든 것은 홍이었다.
오가던 나그네 몇 사람, 성묘차 왔던 사람 모두 합하여 열여섯명이
남았다.
"이놈들은 읍내 헌병대로 끌고 간다.!"
완전히 무시된 것은 광대들이었다. 소대장격인 병정이 생각난 듯 광대들
곁으로 다가간다. 말없이 탈바가지를 걷어올린다. 놀라운 일은 탈바가지
속의 얼굴을 사팔눈이 강쇠다.
왜병정들은 탈바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걷어나간다. 짝쇠의 얼굴도 있다.
조막손이 손가의 늙은 얼굴도 있다.
"하하아... 가하라고지끼까(천하게 부르는 광대의 칭호)."
의심하는 빛이 조금도 없다. 굽신굽신하는 면장과 면서기에 뽐내면서
왜병정들은 열여섯 명의 사내를 앞세우고 평사리를 떠난다.
"이 일을 우짜믄 좋노."
새파랗게 된 영팔이 식은땀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용이는
우두커니 강물만 바라본다. 망건 밑으로 비어져나온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낀다. 검버섯이 피고 탄력을 잃어버린 두 볼, 볼의 살가죽이 이따금
격렬하게 흔들리곤 한다.
"날벼락을 맞아도 유분수지,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노."
"호랭이한테 물려가도... 호랭이한테, 정신만 차리믄, 그놈이 보기보다는
어수룩하진 않은께."
혼잣말처럼 용이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해는 훌쩍 솟아올라서 싸늘하고
습기찬 대기에 볕살을 펴나가고 있었으며 빈 마을에서 익은 감을 쪼아먹던
까마귀가 밀려나온 언덕 위 천수답에서는 저와 같이 허수아비에 불과한
인간들을 비웃기나 하듯 비뚜름하게 서 있는 허수아비가 웅성거리는
모래밭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덧 따로따로 무더기로 모여 있던
노년층과 광대들이 그리고 한 줄로 기다랗게 세워졌던 장년층이 한곳으로
어울려졌고, 왜병정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아주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고함에 터져나왔다. 울음 소리가 이곳저곳d서 터져나왔다. 저주와 분노와
공포가 지쳐 자빠졌던 사람들의 눈을 불붙게 했으며 더러는 늙은 부모의
고목같이 메마른 손을 어루마지는 자식, 어린것을 껴안고 또 껴안으며
볼을 비비는 아낙도 있었다. 그러나 타다 남은 시커면 장작은 재앙의
잔재같이 불길해 보였으며 마당쇠의 시체는 악몽 같았던 지난밤이 또다시
달려들 것만 같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고함 소리 울음 소리에 왜병정들이
발길을 돌려 총대를 들이댈 것만 같다. 고함과 울음 소리는 차츰 낮아지고
무력한 자의 한탄, 체념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옮겨간다.
"어이구 명천의 하느님네! 기시오! 안 기시오! 금수라도 그러하까,
천하에 극악무도한 놈들! 우찌 벼락도 없십네까?"
북동네가 앓는 소리를 냈다.
"벼락이 없기는 워찌 없다냐? 있어도 그놈의 벼락은 없는 놈의 지붕땅
모랭이만 친다는디, 흥."
영산댁의 말이었다. 두리네는,
"대적놈들! 그놈들은 지 에미 지 애비도 없고 자식새끼도 없는 모앵이다.
늙은이, 어린것들도 의병질을 했단말가. 무신 죄가 있다고 밤이슬 맞히고,
내사 마 몸이 짚동겉이 무거바서 운신을 못하겄다."
"몸이 무거분 것은 고사허고 오금이 붙어서 떨어져야 일어서들
헐것인디."
"나는 오줌이 누고 저버서 불두둑이 터지는 것 겉소."
윗마을 오서방댁이 쫓아나가며 말했다.
"빌어묵을, 추석은 거꾸로 쇴다. 전게 없이 오광대 온다고
난리법석이더마는 우리 복에 구겡? 죽 묵든 창자에 개기 들어가문
설사하기 십상이제."
"아따, 태펭한 소리들 하고 있네. 사램이 죽어자빠지고 생때겉은
남정네들 줄응박 엮듯이 붙들어갔는데 오금이야 다리야 그런 소리하게
됐나?"
누군가가 나무란다.
"될 대로 되라 카지. 나부댄다고 살며 머리박 짓찧는다고 어디 죽든가?
마당쇠도 살라꼬 남 먼지 나부대다 죽었제. 살아 있이니 살았는갑다 싶은
기지 죽은 사람보다 우리가 나을 것 한푼 없는 기라."
"하늘하고 땅하고 그만 딱 붙어버맀이믄 좋겄네. 무서리 나는 세상,
빼빠지게 일해도 등 빠진 적삼에 보리죽인데 더 우짜라고 그 몹쓸놈들이
밤낮없이 저 지랄인고 모리겄다."
광대들이 맨 먼저 빠져나갔다. 노인과 아낙들은 절룩거리며 어린것들
팔을 잡아끌며 마을로 향해 간다. 장정들은 마당쇠의 시체를 떠메고
뚝길로 올라서는데, 마당쇠의 아낙, 그의 자식들이 울며 발버둥을 치며
따라간다. 강가에는 끌려간 사람들의 친지들이 남아서 웅성거린다. 화개에
있는 사돈댁에 기별하러 간다고 때마침 온 나룻배에 허둥지둥 오르는
사람이 있다. 용이는 여전히 강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실은 어젯밤 용이는
오광대 구경을 하려 하지 않았다. 방에서 영팔이와 함께 얘기하고 있었다.
얘기는 야무네가 영팔에게 귀띔해준 점아기의 의중에 관한 것이었다.
말하는 영팔이나 듣는 용이도 거짓말 같은 얘기라 했다.
"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고, 뜨물에도 아아 생긴다 카이. 만일에
그 말이 정말이라믄 용이 니는 우짤래? 니 생각은 우떻노 말이다."
"그러씨, 하도 생각지 않았던 말이 돼나서..."
"그거는 나도 그렇다마는 홍이를 위해서 해로분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과남하지... 만일에 그렇기 된다믄 아아가 기는 좀 필 수 있을 것 겉다."
"그렇제? 나도 그리 생각했다."
"영팔이는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그렇지마는, 설령 말이 있었다 캐도 그기 어디 쉬운 일이겄나."
"인연이란 모르는 기다. 인연이 있으믄, 생각해봐라. 뜬금없이 누가
들어도 깜짝 놀랄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노 말이다. 그렇기만된다믄
홍이를 위해서 아주잘되는 일이제. 첫째로 니 안사람이 관대로는 침노는
못할 기고, 점아기 그 아씨는 한동네서 커나는 것을 우리가 봤기 때문에
인품이사 속속들이 잘 아는 일이고, 그분의 딸이라믄 물어보나마나,"
용이 얼굴에는 어떤 희망 같은 것,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양반이라 해서 그러는 것보다도,"
묘하게 수줍은 표정을 짓던 용이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진다.
"나를 닮아서 오기가 강한 놈이라... 지 어미 일이,"
하다 만다. 평생 입 내지 않았던 것이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이지마는, 홍이가 너무 외롭다. 애비 눈 하나
없어지믄 붙일 곳이 있어야제. 명색이 어매라는 여자, 그기이 마목이라.
평생 지네겉이 들어붙어서, 아이 성미나 누긋하다 말가. 신세 조지지. 니가
장개보낼 생각을 안 하는 것도 내 다 알거마는. 처갓집이라도 든든해서
울타리가 돼준다믄, 그기이 젤 바라는 일 아니겄나? 온 세상에, 천하에
그런, 이번에도 흥이가 아배 줄라고 돈 삽십 원을,"
하다가 영팔이는 말끝을 맺지 않는다. 하나마나의 얘기였기 때문이며
임이네 말만 나오면 흥분하기 때문이다. 용이도 들으나마나 뻔한 얘기,
하는 투로 그냥 흘려버린다. 마침 연학이가 들어왔다.
"아제시들은 구겡 안 가십니까?"
"다 늙기, 구겡은 무신,"
입맛을 다시며 용이는 담뱃대를 찾았다.
"다 늙기라니요? 모리시는 말심입니다. 더 늙기 전에 구갱은
해두시야제요."
연학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 서둘듯이 말했다.
"그란해도 내가 구겡가자 했더마는 아이들겉이 싱거분 말 마라 캄서
태박만 주네."
영팔이 일러바치듯, 웃는다.
"구겡하는 데 아아 어른이 어디 있십니까. 그러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한분 가보기나 하지, 시들하믄 들어오더라 캐도."
"맞십니다. 들어오더라 캐도 가보기나 하시이소."
연학이는 전에 없이 집요하게 권한다. 용이는 담배를 붙여물며,
"몸이 좀 고단해서 일찍 잘라 캤는데,"
"영팔이 아제씨는 심심 안 하겄십니까? 동무따라 강남도 간다 카는데
아니 먼 강가까지, 늙을수록 운신을 해야 몸에도 좋고,"
"그라믄 그래보까?"
마지못해 일어섰던 것이다. 오광대라면 그것은 쓰라린 기억이다.
시집갔다가 못 살고 돌아온 월선이와 처음으로 함께 지난 밤, 그 밤은
오광대로 인한 것이었으며 끈질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리움도 미움도 다 떠나고 없는 빈터 같다고 믿어온 지금에도
옹이는 그 일을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장작불이 활활 타는
강가에는 나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는 겨울이었지. 초정월이었인께.'
옥색 저고리를 입고 명주 수건으로 얼굴을 싼 일선의 모습이 강가로
향해 걷는 것이 용이 눈앞에 뚜렷이 나타났었다.
'지금쯤 임자 무덤에는 찬서리가 내맀일 기요.'
둥근 달이 능선을 떠나, 그 얼굴이 맑고 창백해져가고 있었다.
'임자를 그곳에 두고 온 것을 원망 마소. 요새는, 맴이 착하고 절개가
굳은 사람이 그곳에 묻히는 기요. 나는 이제 임자 보로 가기가
어렵겄지마는 홍이가 갈 끼요. 임자나마 그곳에 있어야 홍이가 안 가겄소?
샐인자 계집의 아들이요, 또 무당의 딸의 아들인 홍이가 이 바닥에서 무신
행세를 하고 살겄소. 가는 곳마다... 흐우... 임자도 그렇지. 안 그런가? 섧게
나서 섧게 크고 섧게 산이 고장에 묻힐 이유가 없거든.'
그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용이는 강가까지 왔었다. 오광대가
아니었어도 추석이면, 성묘를 가는 길에서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월선이였고 그의 무덤에 찬 서리가 내렸을 거라 속으로 중얼거리는
용이였다. 내키지 않았던 오광대 구경, 그러나 용이 구경하러 나오고 안
나오고 그건 홍이가 잡혀간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홍이도
마찬가지다. 마을에 남았어도 잡혀가기는 마찬가지다.
"머를 우떡하든손을 써봐야지 이래 있어 되겄나."
옆에서 영팔이 조바심 낸다.
'판술이, 제술이가 따라왔으믄 큰일날 뻔 안 했나. 그 아이들은 만세운동
때 잽히가고 했이니 영락없이,'
마음속으로 안도의 숨을 쉰 자기 자신이 영팔은 부끄러웠던 것이다.
이차중에 제 자식 걱정만 했다 싶어 양심에 가책을 느꼈기에 다시
"이대로 있이믄 우짤 기고,"
발까지 구르며 또 조바심을 낸다.
"설마... 한 일이 없는데 제놈들이 이렇게 하기야 하겄나."
영팔이를 쳐다보고 이번에는 먼산을 바라본다. 천수답에 삐뚜름하게 서
있는 허수아비는
'살찐 돼지보다 죽지 부러진 한 마리의 송학이 초라한 것은 당연한
일이거니 옹이가 초라하게 뵈는 것도 당연하고, 조선의 백성이 다 같이
초라해 뵈는 것도 당연한 일이로다. 살찐 돼지는 옹졸하고 볼품없는
발톱에 편자를 끼우고 먹세 좋고 더러운 주둥이에 포문을 물리면은
현인신인들 아니 될까. 하여 유구한 문화에다 기원 이천육백 년의
대일본제국은 육일승천이라, 우러러보게 훌륭한 것은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로다. 송학의 부러진 죽지에서 썩은 냄새가 나고 한발짝도 날지
못하는데 반만 년은 또 무엇인고? 야만한 나라이며 미개한 백성이라,
허허어, 강물도 흘러가고 나뭇잎도 흔들리고, 물건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은 구르는 법이거늘 똬리를 틀고서 초대 앞에서 산송장이, 아아-
그렇게 되지를 않으려거든 친일파가 되어야 하느니라.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서해야 하느니라, 허기야 그것인들 뜻대로 아니 되지. 농부들
주제에 어디 빈 구멍이 있다고 고개를 쳐드누, 쯔쯔쯔... 글 잘하고 문벌
좋고 돈 많은 놈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인 것을, 허허어. 변절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농부들아! 허나 그것은 하늘이 내린 그대들의
복이니라.'
사람을 보고 타이르는 것처럼 허수아비는 벼 두 섬 나기 어려운
천수답에 삐뚜름히 서서 백사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체면불고하고 오광대 구경 나온 것부터 창피스러운 일인데 한밤의
고초를 겪고 풀렸으면 남 먼저 마을로 가야 했을 것을 점아기는 올케
산청댁만 보내고 남았다. 홍이 붙들려간 것을 보고 그냥 발길을 돌릴수
없었던 것이다. 남기는 남았으되 용이에게 위로의 말을 하는 것도
민망스러웠고,
'내 사람이 될라꼬 그런가, 왜 이리 가슴이 찡한지 모르겠구먼.'
점아기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영팔이 보았다.
"어이구, 생원님댁 아씨께서,"
그 말을 빌미 삼아 점아기는
"걱정이야 되겠지만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소?"
하며 서둘러 말을 한다.
"예, 고, 고맙십니다. 무신 일이야,"
순간 얼굴에 생기를 떠올리며 용이는 허겁지겁 고개를 숙인다.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허방하기 짝이 없는 착각인 것이다. 홍이의
혼인과 홍이 잡혀간 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점아기는 무슨 도술을 쓰는
사람인가. 영팔이 눈을 꿈벅꿈벅한다.
"그래도 그놈들이 법대로 해야 말이지. 어제밤 마당쇠가 그 꼴을 당하는
걸 본께 머리끄뎅이를 하늘로 당그라매는 것겉이 아찔하더마."
봉기가 말참견을 하고 나선다. 새삼스럽게 사람들 낯빛이 달라진다.

"하기사 그 개새끼들! 사람들을 예배당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러 직이는
놈들인데,"
"흥, 왜놈우새끼들만 개새끼들만 개새끼 소새끼든가? 제 백성을
닭우새끼 모가지 비틀듯이 마구잡이로 직이는 왜놈들 밑에서 군수 자리
하나얻으믄 옛적의 재상 자리 얻은 것맨치로, 이놈우 백성들 망해야
한다구. 의병질 해도 고해바칠 일이 못되는 거를 방안에 앉아 멀쩡하게 밥
먹는 사람 의병질했다고 고해바치는 이런 세상이믄은 망해도 홈싹 망해야
하는 기라. 내 이 소리 했다고 어느놈이 또 고해 바치서 붙잡아갈지
모르지마는 그까짓 독한 맘 한분 묵으면 혼자 죽을 시레비 자석도 없일
기고, 물구신맨치로 함께 끌고 가지 그냥가아?"
가래침을 돋우어 내뱉으며 말하는 사내는 윗마을의 오서방이었다.
의병질했다고 누군가의 밀고 때문에 읍내 경찰서로 붙들려간 일이 있는
오서방은 마을에서 독종으로 이름난 우가를 밀고자로 지목했으나 주변에서
건드리지 말라고 말리는 바람에 분풀이를 못하고 있다가 이런 기회다
싶었던지 으름장을 놓은 것인데, 당자인 우가는 입가에 냉소만 머금고
있었다.
"허허어, 그게 언제 일인데 나배샀는고, 주먹 쥐고 바우 치니께 내손만
아프더란다. 그만 하게."
그때 읍내에서는 말발이 선다는 허주사에게 부탁하여 오서방을
경찰서에서 꺼내어온 처남 끝봉이 제발 탈없기를 바라듯 말했다. 그러나
오서방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
"형니임! 그라믄 물어봅시다."
"물어보기는 멀 물어보노."
"우떤 놈이 주묵이고 우떤 놈이 바우란 말이요!"
"잔소리 말고 집에 가서 뜨거운 국물이나 끓이돌라 캐서 속이나 풀자."
"치믄 내 주묵만 아파야 하는 바우는 대체 우떤 놈이요! 그것부터 알고
넘어갑시다!"
"아아니, 자네 정히 이럴 끼가?"
"그놈 직이고 내 죽으믄 고만 아니요! 더러운 놈의 세상, 살믄 머할
기요?"
"어젯밤 얼쩡거리던 우가가 들으란 듯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멋이?"
오서방은 끝봉이를 밀어젖히고 나서며 눈을 부릅뜬다. 이때 연학이
모래밭으로 내려왔다.
"영에서 매맞고 집에 와서 계집 친다 카더마는 와들 이러요?"
연학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최참판댁 일을 전적으로 밭아보는
처지었으니까. 또 사람이 똑똑하고 일처리가 분명하다는 말을듣는
처지었으니까. 끝봉이는 슬며시 웃고 우가는 외면을 했으며 오서방은
주먹을 쥐었을 뿐 입을 다물어버렸다.
"밤을 새우며 고생을 하도고 심이 남아도는 것을 보이, 확실히 금년은
흉년이 아닌갑소."
연학이는 매우 태연해 보였다.
"흉년이고 풍년이고 간에 십년감수했다."
봉기가 아첨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대꾸는 없이 용이 곁으로 간
연학이는
"여기 이러고 기시면 머합니까. 들어가입시다."
"홍이가 붙들리 안 갔나."
연학이 탓이기나 한 듯 영팔이 볼멘소리다.
"듣고 왔십니다. 별일없을 긴께 들어가입시다."
용팔이, 용이한테도 연학의 말은 권위가 있다. 용이 연학이를 쳐다본다.
"실데없는 말 할 홍이도 아닐 기고 며칠 고생이야 하겄지마는 나올
깁니다."
"정말 그렇겄나?"
되묻는 영팔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돈다. 언제 갔는지 점아기는 가고
없었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한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15장 인간으로서

"쿠소(똥, 똥 같다)! 새끼들! 탕탕탕 갈겨버릴까 부다! 정체는 고사하고
꼬리라도 잡혀야 말이지."
하사관 출신 나카노 준위, 그러니까 서희하고 얘기를 나눈 왜정병이
책상에 주먹질을 하며 신경질을 낸다.
"대일본제국의 총알까지 쓸 것 있습니까? 일본도는 허리에 차라고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준위님?"
목덜미까지 여드름딱지가 따닥따닥 붙은 매부리코의 상등병 곤도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건방진 소리 말아!"
"몽둥이질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요. 시들해서, 한두 놈 시험 삼아
해치울까요? 일본도 쓸 것까지도 없고, 총검이면 훌륭하지요. 전쟁없는
요즘 같아서는 팔이 울어서, 사람 못 죽이는 군인같이 병신스러운 건
없지요."
"뭐?"
농담이 아니었다. 곤도의 눈알이 번들거린다. 사람 죽이는 데는 동지요,
손발이 잘 맞는 처지인데 나카노 준위 얼굴에는 혐오하는 빛이 떠올랐다.
'저새끼 얼굴은 피에 굶주린 야수 같다. 전쟁 때는 저런 놈을 최전방에
내세워야, 미친놈.'
담배를 꺼내 붙여문다.
"이제는 먹혀들어가지도 않는 몽둥이질 더 하면 뭐합니까."
"이새끼야! 재미로 몽둥이질 하는 줄 아냐! 하긴 너같이 우둔한 놈은
몽둥이질, 칼질밖에 못하지."
"준위님의 방법으로도 자백한 놈은 한 마리도 없었으니까요."
자백할 것도 없다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은 아니다. 서로 까놓고 얘기를
하지 않았다뿐이지 잡아온 열여섯 명 중에 혐의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이들은 깨닫고 있는 것이다. 총대로,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고문을
했었다. 단검을 목줄기에 들이대고 죽인다는 위협도 수차례 했었다.
나카노는 달래고 어르고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었다. 그러는 한편
혐의자들의 진술 내용에 따라 신원 조회를 하고 행적을 조사하고, 그러나
결과는 의문점을 남길 만한 것이 없었으며 폭도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양민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석방은커녕 고문의 손길마저
늦추지 않는 이유는 헛장단을 치지 않았나 하는 의심에서 본 분통과
아무튼 뭣이든 실마리를 찾아야겠다는 초조와 자신들의 오기, 체면 문제
그런 것 때문이겠는데, 천인이 공노할 이같은 횡포는 식민지 백성의
숙명이라 할 수밖에 없고 제 나라 주권 아래서도 천시당해온 농민이기
탓으로 더욱 자심하게 당하고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헌병과 경찰의 앞잡이들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에 의할 것 같으면 각기
내용에서 수효는 구구했으나 지리산에 의병이 있다는 것이며, 정보의
출처는 모두 지나가는 나그네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띠고 있었다. 처음에는
군에서 유언비어로 간주하고 비웃었다.
"도둑놈이 몇 마리 있었겠지. 바보 천치 겁쟁이들이 강 건너 달아난 게
언제라구 의병이야? 배꼽 빠질 얘기, 정보비가 아깝다."
그러나 비웃었다 하며, 유언비어로 간주했다 하여 불문에 부쳐버릴
그들은 아니었다. 은밀히 산속의 동정을 살피고 나무꾼 사냥꾼으로 변장한
밀정들이 산속에 투입했던 것이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한 처사였는데,
그러나 보고는 확실히 의병들이 있다는 것이었으며 근거지도 포착하기에
이르렀다. 군은 급거 나카노 준위를 파견했고, 나카노는 일개 소대를
이끌고 근거지를 급습했던 것이다.
"도망갔다!"
근거지로 지목한 동굴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당황하여 도망간
흔적이 역력했다.
"멀리 가진 못했다.!"
모닥불 피운 자리에는 아직도 불기가 남아 있었다. 한쪽에 굴러 있는 큰
사기에서 반쯤 남은 보리밥이 따뜻했다.
"방금 도망쳤다! 굴 밖에 나가 수색하라!"
왜병들은 일제히 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카노는 동굴 주변을
수색하다가 그들의 도피로를 발견했던 것이다. 숨가쁘게 추적, 도피하는
일군의 폭도를 육안으로 잡은 것이 화개 근방이었다. 화개에서 악양 쪽을
향해 달아나는 것을 본 나카노는 이제 그들은 독 안에 든 쥐라 생각했다.
그리고 평사리 마을을 포위한 것이었는데... 나카노 준위는 사실 구경꾼들
속에서 열여섯 명의 장정을 색출하여 하동읍으로 나오는 순간 헛짚고
엮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런데 어째 그랬던지
오광대의 광대들을 염두에 떠올리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뭐가 잘못된 것 같지 않습니까, 준위님?"
"..."
"상판을 보아도 그렇고 하는 짓거리, 눈깔을 보아도 돈바쿠쇼(농부를
얕잡는 말), 똥이나 싸는 놈들 같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게야? 돈바쿠쇼, 똥이나 싸는 놈들이 바로 폭도들이란
말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다.
"니깟 놈이 신참이 뭘 안다구. 일본같이 갈 찬 무사들이 모반하는 줄
알았어? 여기선 모두가 돈바쿠쇼란 말이야! 상놈들이란 말이야! 동학란을
몰라?"
"모르겠는데요."
"소위 농민전쟁이라는 게고 '재작년 삼월폭동 때도 젤 많이 만셀 부른
놈들이 바로 그 돈바쿠쇼란 말이다!"
"핫, 그, 그렇습니까."
그네들이 말하는 폭도, 혹은 난도들 토벌전에서 곤도 상등병이
신출내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는 삼일만세 후 투입된 병정 중 한 사람이며
나카노는 그 이전부터 의병들 소탕전에 참가해왔으므로 경험도 많고
노련한 축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조선말을 할 줄 알며 듣기로는 거의 다
가능했다.
'그럼 그놈들은 어디로 빠져나갔을까? 만일 그놈들이 귀신같이
빠져나갔다면 예삿일은 아니다.'
나카노는 담배를 비며끄고 군복 상의의 위쪽 단추 하나를 끄른 뒤 펜을
집어든다.
"뭐라 보고 하나. 사건은 좌초다. 좌초란 말이야."
"준위님."
힐끗 쳐다본다.
"준위님 말씀대로라면 제가 지목하고 있는 한 놈에 대해서는 손을
대햐겠습니다."
"뭐?"
"열여섯 명 중에 돈바쿠쇼 아닌 놈이 한 놈 있어서 말입니다."
"상판 밴드르르한 와까조(젊은놈) 말이냐?"
"핫! 계집 같으면 그냥 두겠습니까?"
"조회 결과 보면 진술과 다른 것이 없어. 빌어먹을..."
"눈깔이 이글이글 타는 것을 보면 그놈은 대일본제국을 증오하는
반역자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식자가 들었으니까 자존심 때문이겠지."
"조선놈 새끼들한테도 자존심 같은 게 있습니까?"
나카노는 픽 웃는다. 웃다가
"내 너한테 일러두겠는데 그놈 때리더라도 병신은 만들지 말어."
"그까짓 조선놈의 새끼 하나 죽인다고 누가 뭐래나요?"
"까불지 마. 종전하곤 달라."
"뭐가 다릅니까?"
"총독부 정책이 표면상으론 전과 달리 유화책이야."
"그런 것 우리 알 바 있습니까?"
"우린 군인입니다.. 우리에겐 두려웁게 천황폐하의 어명이 있을
뿐입니다."
"너 상당히 건방지구나."
"핫!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한 말은 평소 준위님 지론으로 알고
있습니다. 핫!"
"이새끼가! 누굴 약올리는 거야? 부글부글 끓는 판에, 혓바닥을
잘라버리기 전에 나가!"
"핫! 곤도 상등병 물러가겠습니다!"
경례를 붙이며 곤도가 나가버린 뒤 나카노 준위는 입맛을 다신다.
평지풍파를 일으키듯 지리산의 의병설이 어째 나돌았는가. 지리산에
의병 대부대가 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며 대부대는커녕 의병이 거의
없다는 것이 실정이다. 왕시 의병을 사칭했던 화적떼들마저 그 그림자는
지금 희미해졌다. 화적떼를 말할 것 같으면 일군과 내통하여 출병의
구실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조선독립군 토벌에 초롱도 들어주던 만주의
비적단만큼 이용 가치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동학 이후 양민둘을 괴롭힌
화적떼도 일군에겐 그런대로 이용 가치는 있었던 것이다. 의병을 화적떼로
몰아붙이는 점에서 그러했고 관대하게 봐주는 척하면서 의병 치는 데
앞잡이로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병의 활동이 폐쇄되면서
화적떼도 무대를 잃게 되는 것은 물론 자연스러운 일, 그러니 산에는
화적떼조차 그림자를 감추었다 보는 것이 정확하다. 김환의 조직은 의병의
성격을 띤 것도 아니요 화적떼는 물론 아니다. 그리고 무기를
소지하고있는 것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화전민이요 숯 굽는 사람이요
사냥꾼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사실무근의 의병설이 나돌았는가. 그
경위를 쫓아본다면 임실 지삼만이가 장본인이다. 그는 왜헌병 왜경의
앞잡이들을 겨냥하여 수라를 풀어 소위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다. 저의는
지리산을 주목하라는 것이며 환이의 조직 한 모서리라도 부수어버리자는
데 있었다. 실제 의병이 있었다면 지삼만은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주의 관수를 건드려보고 혜관을 건드려보고 하면서 신경전을 펴다가
김환에게 비수를 푹 찔러보는, 그로서는 그런 심정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환이라 체포될 것을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대간의 경위가 그러한데
그렇다면 밀정을 잠입시켰을 때 의병의 본거지와 그들이 떠난 흔적 같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첫째는 본거지를 전혀
새로운 곳에다 가장해놓고 왜병들의 손길이 산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확히는 환이 조직에 미치지 못하게 함이요. 평사리로 빠져나간 것은
미리부터 연학과 연락이 되어 오광대를 대기시켜놨기 때문이다. 조막손이
손가가 탈꾼 속에 섞여 있었던 것은 조막손이 손가가 오광대와 깊은
유대를 가진 탓이다. 아무튼 오광대라는 비상구를 마련해놓고서,
오광대놀이의 날짜는 추석을 전후하여 연락의 뜻대로 조정하게 돼
있었으니까 왜병정 습격에 때맞추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하여 평사리
쪽으로 유인한 뒤 산청, 임실, 그 밖의 몇 곳에서 한두 사람, 많아야 세
사람씩, 관공서나 경찰서 그중 하나를 목표하여 방화를 하거나 아니면
순사, 그들의 앞잡이, 또는 친일파를 살해하는 계획을 짰던 것이다. 행동은
거의 일 대 일이지만 여러 곳에서 동시에 감행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도주했다고 믿은 사건은 착각으로 증발해버릴 것이며 각처에 일어난
사건도 동시성 때문에 효과가 큰 대신 하수인들을 재빨리 장사꾼, 객줏집
노름꾼, 대장장이 등 갖가지 생업을 가진 양민으로서 일상을 계속하면
되는 것이다. 이같이 완벽한 계획과 준비가 되었다 하더라도 예외가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으나 한두 군데서 불상사가 있다 하더라도
엮은 그물코가 보이지 않게 돼 있으므로 일이 확대될 염려는 없는 것이다.
특히 임실의 경우 그곳을 계획에 넣은 것은 지삼만에 대한 위협이었다. 한
가지 작전으로 방어와 공세와 위협과 교란을 동시에 꾀하는 것인데 환히는
전과 달리 윤도집과 합의하에 면밀히 계획했고 실천에 옮긴 일이었다.
허술한 창고 같은 곳에 처넣어진 열여섯 명의 장정들은 연일 당하는
고문 때문에 초주검이 됐다. 게다가 극심한 굶주림이 이들을 괴롭혔다.
육신의 통증도 배고픔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의식이 몽롱하여 헛소리를
하고 깜짝깜짝 까무러치곤 하면서도 배고픔이 잊혀지지는 않았다. 인간이
인간에 의해 무력해지는가, 홍이는 뼈에 사무치도록 그것을 깨달았다.
고문을 당할 때는 무엇이든 했노라 외치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가 모르는데야 살이 찍혀 나간들 별수없는 일이었다. 한
덩이의 밥을 위해서라면 내일 죽고 말 얘기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고
말 그 얘기가 없는데야 어쩔 것인가. 사흘이 지나고 나흘로 접어드는 날
열여섯 명의 장정들 거의 모두는 고문의 고통, 배고픔의 고통도 한고비를
넘겼다. 이따금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다간 그것도 자맥질하듯
흘러가버리고 짐짝같이 음쭉달싹 못하게 됐다. 고문을 제일 많이 당하기론
홍이다. 처음엔 고분고분하지 않고 쓰는 말에 유식한 냄새가 난다 하여
남보다 많이 맞았고 다음은 얼굴 잘생긴 것이 매 하나 더 맞는 원인이
되었다. 육체적 고문뿐인가. 섬세한 감정에 결벽증인 홍이는 다른
누구보다도 심하게 정신적 고문을 받았다. 여름이 뚝뚝 불거지고 개기름이
흐르는 매부리코 곤도 상등병은 독사 같은 눈을 하고서 홍이의 변화하는
표정을 쳐다보며 상상할 수 없는 상소리, 더러운 얘기를 늘어놓으며
킥킥거리기도 했었다. 홍이의 여자관계를 캐묻는 등, 아비를 모욕하고
어미를 모욕했다. 침묵으로 대항하면 단검을 뽑아 덤벼들면서 남자의
그것을 짜르겠다 했고 눈을 부릅뜨면 막대기로 눈을 후려쳤다. 처음엔
이빨이 부러질 만큼 부드득부드득 갈아젖혔지만 홍이는 육체뿐만 아니라
의식 자체가 무저항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곤도 상등병의 얼굴은
원수로 뵈지 않게 되었다. 친구도 아닌 원수도 아닌 그냥 얼굴이었을
뿐이며,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그냥 얼굴이었을 뿐이며, 그 얼굴
반공중에 떠 있는가 하면 홍이는 자신의 몸뚱이가 꺾어져서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착각은 번갈아서 얼굴이 되고
몸뚱어리가 되고, 얼굴이 되고 몸뚱어리가 되고 되풀이되면서 의식은
새벽녘의 별같이 사라져가는 것이었다. 밤인지 낮인지 홍이는 실눈을 떴다.
전등불이 빨간 명주실같이, 핏줄같이 시야에 들어온다.
"일어나랏! 이새끼들아!"
굼벵이같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밥 안 처먹을 테야!"
여기저기서 꾸물꾸물 쓰러질 듯하며 일어나 앉다가 다시 쓰러지곤 한다.
하루 주먹밥 한 덩어리었는데, 어제 하루 그리고 오늘 하루 이틀동안은
그것마져 없었다.
"이 개새끼야!"
쓰러지는 사람에게 곤도가 발길질을 한다. 일등병 하나가 주먹밥이든
바께쓰를 방안으로 옮겨놓는다. 밥을 보고 무섭게 눈을 희번덕거리는
장정들에게 일등병은 묵묵히 주먹밥을 하나씩 집어 건네준다. 소년티가
남아 있는 일등병은 기계적인 빠른 손놀림으로 주먹밥을 집어준다.
간바야시라 불린 일등명이 마침 홍이에게 주먹밥을 건네주려는
순간이었다.
"좀 기다려!"
"네?"
간바야시는 주먹밥을 손에 든 채 얼굴을 들고 곤도를 바라본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소년티가 남아 있는 얼굴이 무표정하다면 그것은
힐난인 것이다. 출입문 쪽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곤도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지나간다.
"이새끼야, 넌 이리 와!"
"누구 말입니까?"
간바야시는 분명히 아는 것 같은데 묻는다.
"누구긴? 계집 섞은 것 같은 그놈의 상판 말이다."
간바야시는 홍이에게
"무조건 빌어요."
나직히 속삭인다. 홍이는 주먹밥을 받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말뚝처럼 걷는다. 빨간 명주실 같고 핏줄 같았던 전등불이 차츰 안개같이
번져난다. 곤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안개 속을 헤쳐나간 듯,
안개 속에 묻혀버린 듯, 안개는 허리께까지 덮여오는 것 같다. 허리께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얼굴까지 그리고 숨통을 막아버릴 것만 같았다. 구둣발
소리는 들렸다.
"잠거!"
곤도의 목소리도 들렸다. 쇠통 잠그는 소리. 그러니까 홍이는 소위
임시감방 밖의 복도에 서 있는 셈이다.
"상등병님, 이자의 주먹밥은 어떻게 할까요."
"돼지에게나 주어라."
"넷! 알겠습니다."
다시 두굿발 소리, 그리고 멀어지는 소리.
"자아, 그러면 아귀처럼 처먹는 저놈들 꼴이나 구경해라!"
홍이 뒤통수에 곤도 주먹이 날아왔다. 철창으로 막은 창문에 홍이
이마빡에 부딪는다. 역시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누르께하고
물그레한 안개에 있었을 뿐이다. 다음은 캄캄한 어둠이다. 홍이는 복도에
나자빠졌고 까무라쳤다.
"이새끼! 엄살이야?"
구둣발로 짓밟는다.
"간바야시! 간바야시!"
"넷! 상등병님!"
간바야시는 날 듯 달려왔다.
"찬물 한 바께쓰 가져와 끼얹어!"
"네!"
간바야시는 찬물을 가져와 홍이 얼굴에 끼얹는다.
"으음..."
신음과 함께 홍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행불행을 있는 것일까. 다 먹는 밥 한 덩어리 혼자만 못 먹는 것은
불행이다. 남이 한 애 얻어맞을 때 두 대 세 대 얻어맞는 것도 불행은
불행이다. 조물주가 부여한 은혜, 나보다 뛰어난 용모로 말미암아 이렇게
철저히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참 이상하다.
"끌어들 엿!"
"넷!"
간바야시는 홍이를 끌고 감방 안으로 들어간다. 곤도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간바야시는 몸을 기울인다. 그러고는 홍이 몸뚱이를 빙그르르
돌려서 엎어뜨린다. 문이 잠기고 발소리 멀어지고 그리고 조용해졌다.
"보래, 보래."
함께 잡혀온 화개의 동태라는 청년이 홍이를 흔든다. 그리고 홍이 배
밑에 깔려 납작해진 주먹밥을 끙끙거리며 꺼내어 홍이 손에 쥐어준다,
"일본병정이 몰래 주고 간 거다."
"..."
"왜놈들 중에도 사람이 있기는 있는갑다."
찬물 가지러 갔을 깨 간바야시는 품속에 주먹밥을 넣어온 것이다.
간바야시 일등병은 결코 홍이를 동정하여 그 밥덩이를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곤도를 증오했고 군대를 증오했고 인간의 추악한 면을
혐오하며 분노했던 것이다. 추악한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애국심이라면
그는 그 애국심에 침을 뱉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을 동정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동정했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외쳐볼
수 없는 군대 규율의 제물인 자기 자신을 동정한 것이다.
다음날이었다. 갑자기 열두 명이 석방되었다. 나머지 네 명은
진주경찰서로 인계되었다. 경찰서로 인계된 네 명 중에 홍이도 끼여있었다.
갑작스레 석방되고 경찰서로 옮기게 된 것은 엉뚱한 곳에서 사건이 확대된
때문이다. 임실에선 순사가 한 명 살해되었고 산청에서는 경찰서
방화사건이 발생하였고 합천에서 또 순사가 한 명 중상을 입었고,
엇비슷한 사건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발생했는데 모두 하동과는 먼
거리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결국 잡혀온 사람들은 지리산의 의병들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판명된 셈이다. 그럼에도 헌병대에서는 체면상
그랬던지, 네 명을 진주경찰서로 넘긴 것이다. 홍이말고 사십 안팎으로
뵈는 장돌뱅이풍의, 과히 천해 뵈지 않는 전서방과 소목꾼이며 먹고 살
만하다는 삼식대의 김가, 역시 그 나이 또래의 윤가, 윤가는 도시풍이 들어
뵈는 좀 날카로운 얼굴이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선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으나 요릿집에서 일을 보아준다 하는 것으로 미루어 건달인 것 같다.
홍이와 마찬가지로 추석이라 하여 성묘차 왔다가 일을 당한 사람들이다.
진주경찰서에서는 그간의 사정을 다소 알았음인지 엄중히 취조하는
척했으나, 어딘지 형식적인 면이 있었다. 고문도 하지 않았고 물론 굶기는
일도 없었으며 사식도 허용했다. 석방되나만 못했으나 하동서의 생각을
한다면 살아난 기분이었고, 군의 체면을 세워주는 선에서 적당한 시기에
석방될 것을 취조하는 조선인 형사가 암암리에 비쳤다. 그 형사에게
연학의 입김이 들어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돈이었지만. 그리고 가족들이
진주로 나와 있다는 소식이며 썰렁한 일기에 알맞는 의복도 들어왔고.
"허 참, 팔자에도 없는 호강 하는구마. 집안이 결단났일 낀데 진주까지
오기는 머하러 와."
꺼실꺼실 수염이 돋아난 전서방은 은근히 기쁘고 울먹여질 것도
같으면서도 겉으론 화난 체했다. 그러구러 며칠이 지난 뒤 족제비같이
생긴 홍이 또래의 절도범이 유치장에 들어왔다.
"니는 여기 와 왔노."
전서방이 물어본다. 좋지 않은 눈길로 흘끗 쳐다본 족제비상은
"도둑질을했다고,"
"젊은놈이 그래서 쓰나."
"했다는 것하고는 다른 기라요."
"머가."
"나는 도둑질 안 했인께."
"이눔아아야, 그래도 이곳은 극락이다."
"뭐라카요? 극락이라꼬요? 유치장을 극락이라 카는 사람은 처음보겄소."
눈길이 좋지 않고 입술이 쫑긋 나온 족제비상은 별난 소릴 다 듣는다는
듯 나온 입술을 더욱 쫑긋거린다.
"겪어보지 않았이믄 알 턱이 없제."
"흠, 유치장보다 더한 곳이 어디 있겄소.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어디 있겄소? 있지러. 가봐야 알겄나?"
"악담 마소. 여기도 죽겠는데 무신 그런 말을 하요."
"안 믿으니께 그렇제, 거긴 바로 생지옥이다. 옥사장이는 모두 뿔달린
도깨비고, 하하핫..."
"어딘데 그러요?"
궁금해 졌는지 묻는다.
"헌병대."
"아아."
족제비상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경찰서보다 그곳이 더 무섭단 것쯤은
그도 아는 모양이다.
"무신 일을 했길래 거긴 붙들리갔십니까?"
"무신 일로 갔는지 알기나 함사? 모른께 기가 차지."
김가의 말이었다.
"그런 일도 있십니까?"
"얼매든지 있는갑더마."
이번에는 윤가가 코웃음치며 말했다. 홍이만 얘기 속에 끼여들지 않고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쳇! 머가 먼지 모리겄소."
"이눔아아야, 니겉이 남우 것 다치서 잡혀온 줄 아나? 억울한 사람
많다는 걸 니는 모리는 갑다."
"난들 억울 안 하겄소? 남우 것 훔친 일이 없단 말이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족제비상은 화를 낸다.
"허허어, 그러믄 니도 와 붙잡히왔는지 모르겄고나."
세 사람은 낄낄 웃는데, 역시 홍이만은 웃지 않았다. 족제비상은
당황하다 말고
"그라믄 만세 부르다 들어왔소?"
"만세 얘기라믄 벌써 삼 년 전이다."
"팔자에 없는 의병이라네."
전서방은 벽에 기대며 이제는 말도 그만 하고 싶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하아, 그런께로 의병질 했구마요."
"의병질을 한 게 아니라 붙들어간 헌병놈이 나도 모리는 일을
가르쳐주데."
김가의 말이었고 전서방은 이제 족제비상을 의식 밖으로 몰아낸 듯
"사람이란 허약함서 잊임이 헐한 물건인갑다."
김가보고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런갑소."
"하동서 겪은 일도 꿈겉고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가 싶은데, 그라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기라믄 얼매든지 견디겄다 싶더마는 며칠을 지나고
본께 답답하구마. 맴이 조급해지고."
"와 아니라요. 그래서 사람우 맴이란 조석변동이라 안 합니까."
"또 그라고 처음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더마는 어제 오늘은 그
곤도란 놈의 얼굴이 떠올라서, 털어부릴라꼬 돌아눕기도 하는데, 사람이란
사세 여하에 따라 나빠지기도 하고 좋아지기도 한하더라라만 악족이란
따로 맨들어놓은 거나 아닌가 싶네."
"그놈, 그놈은 구신도 잡아묵겄십디다."
"그놈들, 돈바쿠쇼! 돈바쿠쇼! 해쌌더마는."
"돈바쿠쇼가 머요?"
족제비상이 묻는다.
"나도 왜말은 모린께, 농사꾼이란 말인갑더마."
대답해놓고 전서방은
"진주로 온 사람은 모두 뜨내기, 돈바쿠쇼 아닌 뜨내기란 말이다."
"이자부터는 사람 모이는 곳에는 가지 말아야겄소."
"자네 겉은 소목꾼이사 그렇기 할 수도 있겄지마는 나 겉은 장돌뱅이야
사람 모인 곳에 안 갈 수 없제."
"죽자니 청춘이 아깝고 살자니,"
윤가가 아까부터 코웃음을 치며,
"그 말하는 거 본께 이자는 살 만한가배."
"우선 배는 안 고픈께. 그는 그렇고, 아제씨."
"와."
"정말로 수천 수백의 의병이 산에 숨어 있었이까요?"
목소리를 낮추었다.
"수천 수백은 거짓말일 기다. 그러나 있긴 있었인께 그런께 우리를 잡아
안 왔겄나?"
"그건 그렇소."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죽을 고생을 하기는 했다마는, 안 죽었인께
다행이고, 아무래도 그 사람 축지법을 쓰는 모앵이라,"
"우째서요?"
"아 그러씨 생각해보라모. 우리다 당했인께, 개미 한 마리 기어나가겄나?
그리하도고 잡아온 사람 중에 의병은 한 사람도 없었인께 하는 말
앙이가."
"듣고 보이,"
"그놈들도 깨달은 기라. 그 사람들 놓친 것이 분해가지고 우리한테
분풀이하니라고 그리 혹독하게 했일 기다."
"야, 그기이 틀림없겄소. 그렇다믄 앞으로도 자꾸자꾸 그런 일이
일어나겄지요?"
"그런 일 하는 사람이믄 목심 붙어 있는 날꺼지, 다 잡지 못하는 한
그런 일이야 있을 거로 봐야 할 기다."
"그런다고 우리가 독립을 하겄소?'
"이 사람아, 우리 당해봤인께 알겄제? 왜놈 밑에서는 못 산다.
다항복하고 들어간다고 잘해줄 것 겉나? 아니지이,"
전서방의 목소리는 훨씬 더 낮았다.
"하여간에 머가 있기는 있는갑더라. 왜놈들도 너무 풀세기 날뛰믄은
질잖아. 뿌러질라 카믄 막대기가 회초리보다 쉽게 부러진께로, 어이구
담배나 한 대 피워봤이믄 똑 좋겄는데,"
"말 타니께 마부 부리고 싶다 캅디다."
윤가의 핀잔이다.
"하하핫핫... 배짱 편하게 웃기나 하지 머."
절도범으로 들어온 족제비상은 풀이 죽어서 두 무릎에 머리를 처박듯
앉아 있었고 홍이는 여전히 벙어리같이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세
사람이 홍이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저리다가
사람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목을 쳐죽일 놈,"
전서방은 벽에 들을 기댄다.
"오늘이 며칠이나 됐을까요?"
전서방을 갑자기 쳐다보며 홍이 입을 떼었다.
전서방은 얼른 몸을 일으키며
"낼모레, 구월 아닐까?"
"아 우리가 잽히온 지 보름만 됐겄소? 구월에 들어섰을 기요."
김가의 말이다.
"하긴 보름은 넘었을 기구마. 구월 초여드레가 제삿날인데 그대꺼지
나가겄나?"
"참, 아제씨."
김가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최참판댁의 곱새도령,"
"도령이 멋꼬? 삼십이 넘었을 긴데."
"아무튼 그 사람을 만냈소."
"자다가 봉창 뚜디리네. 별안간 곱새도령은 또 뭣꼬?
곱새도령이의병질이라도했나?"
윤가의 핀잔이다.
"생각이란 갑재기 떠오르는 일도 있인께. 평사리에 갔일 때는 그일을
까매기겉이 잊어부리고 말을 못했거든."
"이제 생각하니 억울하구나. 참 그 성미 하나 좋다. 평생 살은
안빠지겄네."
"반쪽이 된 사람보고 머라 카노."
"갑자기 윤가는 킬킬대며 웃는다.
"어이구! 몽둥이 맞고 나자빠지면서 손등에 묻은 밥 뜯어묵든 일이
생각나네."
"누가!"
"누구라는 그 사람."
"지랄하네. 오줌을 칠질 싸던 놈은 누군데. 그래도 밖에 나가믄 의병으로
잡혀갔다고 기생년들보고 자랑할 기라."
"아암 하고말고. 공술이 그리 쉬운가?"
김가는 화제를 돌린다.
"아무튼 통영에서 딱 마주쳤는데, 곱새도령을 말입니다."
"도령은 무슨 도령, 아이 애비이라 카는데 젊은 사람이 잊음이 헐해
큰일이구마."
"하여튼 딱 마주쳤는데,"
"만낸 기이 머가 대단해서 뜸을 들이샀노. 사람이 하늘 밑에 있는이상
만내는 거는 당연하지."
"만낸 기이 대단하다 그 얘기가 아니고,"
"자네가 그 사람을 우찌 알아서?"
"내가 열넷에 의지로 나갔는데 그거를 모리겄소?"
"그랬나?"
"한데 그 사람이 소목꾼이 됐습니다."
"머라꼬? 소목꾼이 됐다고?"
"야, 내 눈으로 봤인께요. 통영서... 내가 이초시라는 사람한테 일을
배웠거든요. 지나가는 길에 들맀더마는 아 그러씨 그 댁에서 일을 하고 안
있십니까?"
"사람팔자 참말로 기구하다."
음력으로 구월 초여드레는 지나갔고 십이일에 네 사람은 석방되었다.
경찰서 문 앞에 연학이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고생했제?"
"뻔한 얘기 아닙니까?"
의외로 홍이는 침착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연학이는 그들의 가족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세 사람을 데려다주고 홍이와 함께 영팔이 집을 향했다.
"그 사람들 뒷바라지를 연학이형님이 했군요."
"우짜겄노. 최참판댁에서 부른 오광대 구경하다가 그리 된 거를,"
연락이 웃는다
"그래, 골병은 안 들었나?"
"모르지요. 골병도 들긴 들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오?"
"영팔이아제 집에 기신다. 너거 어무니는 아무것도 모린께, 알믄
시그럽거든. 아무튼 잘했다."
"뭐 말입니까."
"간도 갔었다는 얘기는 안 했는갑데?"
"그 얘기 했다가는 일이 간단치 않았겠지요."
"니 아부지가 함부로 말할 아이는 아니라 하시기는 하더라만,"
홍이의 보조는 정확했다.
"연학이형님."
"응."
"앞 뒤 재가면서 기어라 하면 기고 서러 하면 서고 눈물 흘리라 하면
흘리고... 눈 부릅뜨다가 뺨대기 하나 더 맞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인가
그걸깨달았소."
"그래, 그걸 깨달았이믄 좀 덜 억울할 기다. 잘난 말 몇 마디 하는 것,
그건 아무짝에도 못쓴다. 바보 시늉, 미친 시늉 뭣이든 빠져나오는 게
젤이제. 싸움이란 그래야 이기는 법이거든. 감정 때문에 힘빼는 것,
그것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다. 앞으로 살아가자믄,"
"벌써 나뭇잎이 누우렇소."
"누우렇다뿐인가, 많이 떨어졌지."

16장 혼례
이듬해 음력 이월달, 물대 위의 물바가지 얼어 터진다는 바람 많고 변덕
심한 달에 홍이와 점아기의 맏딸 보연의 혼인날이 결정되었다.
초하루부터 열아흐레까지 어항인 통영은 어느 지방보다 풍신제가
성행하는 곳이다. 고사는 상청님이 내려온다는 초하루, 상청님이 올라가고
중청님이 내려온다는 아흐레. 중청님이 올라가고 하청님이 내려온다는
열나흘, 그 어느 날이든 한 번 택하여지내는 것이지만, 또 각기 고삿날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약 이십오 일간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저 집에서
이집으로 계속하여 시루떡, 쑥떡, 좁쌀떡, 반달떡, 고사떡이 오가는
분주하고 흥겨운 달이 새로도록 명정골은 각시와 쳐녀들이 길을 메우고,
달이 밝은 열나흘, 하청님이 내려오는 그 밤은 통영바닥의 각시 처녀들이
다 명정골로 모여든다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어떤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명정골의 우물, 통영 사람들의 식수를 대면서도 마르지 않는 우물은
옛날 충무공이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이곳 갯마을에 진을 쳤을 때 팠다는
전설이 있거니와 가히 동네 이름과 같이 명정인 것이다. 또 밝은 이월
열나흘의 밤, 농 밑에서 젤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단장도 어여쁘게, 비단
끈을 물린 새 똬리와 물동이를 들고 명정골 우물가 명정골 동백나무 밑에
모여들어 밤을 지새우며 끼리끼리 만나서 노니는 젊은 여자들, 간혹
비녀를 빼가고 옷고름에 찬 가락지를 끊어가고 그런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바람할만네는 변덕쟁이요, 심술쟁이요, 비위를
거슬러놓으면 바다에서 재앙이 온다. 고삿날엔 기하는 것이 많고 정화수를
길으러 올 때는 상제보고 말을 해도 안 되고 인사도 아니한다. 그럼에도
이월은 봄날인가 싶었는데 밤사이 물대 위의 박지가 얼어 터지곤 하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월에 혼삿날을 받았을꼬?"
동문 안의 시외숙모의 마땅찮아하는 말이었다.
"걸마잖는 혼사라서요."
점아기는 시외숙모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걸맞잖다고 서둘러!"
"보연이 성미도 그렇고... 시아버지 될 사람이 몸도 성치 않아서,"
변명치고는 구차스럽다. 곱상스럽게 생긴 시외숙모는 점아기보다서너
살은 위일까? 죽은 시어머니가 맏딸이었고 외상촌이 막내였으므로 조카와
외삼촌의 연평 차이가 적은데, 자연 안사람들도 그럴밖에 없다.
"걸맞지 않는 혼사는 안 하는 편이 낫지."
"..."
"이미 작정이 됐으니... 부모가 알아 하겠으나 상것하고 혼인하는 것도
반갑잖은 일이거늘 어미 된 여자한테 좋잖은 얘기가 많더구먼."
"보연이가 어른 공경할 줄 모르는 아이라서요. 칠칠한 시어머니 밑에
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당자 하나보고,"
"자네도 좀 실없는 데가 있네. 당자 하나 본다지만 얼굴 반반하다는 그
얘기 아니냐? 그래 남자가 인물 뜯어먹고 산다든가?"
"..."
"외가에서 이러고저러고 해서도 안 되겠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만
바람결에 들려오는 얘기가 아주 고약하더군. 혼사란 원래 말많은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듣고 버릴 말이 따로 있지. 생각해보게.
사돈이랍시고 상면하면 우리가 절을 해야겠나? 너무 흉측스런 소문이라,
한이웃에 살았으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을 터인데, 설마 몰랐다는 말은
못하겠지?"
"..."
"어찌 알고서 딸자식 줄 생각을 하였나. 나는 자넬 그렇게 보지는
않았네."
"해천에 용나더라고 당자만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시아버지 될
사람도 말이 상사람이지 예절 바르고 염치 차릴 줄 알고 착한
사람입니다."
"하기야 뭐 내가 이런다고 혼사 물리겠나."
"숙모님, 보연이 혼사만은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시외숙모 하씨는 더 이상 쏘아대지는 않았지만 불쾌한 빛을 감추지는
않았다.
"그럼 나는 가겠네. 지금 같아서는 혼삿날 오고 싶지도 않다만, 여기 돈
이십 원이다. 옷벌이나 장만해줄까 생각도 했으나,"
하씨는 전에 없이 심히 꾸짖은 편이었으나 생각 밖으로 후한 부조금을
내놓은 것이다. 마루에서 내려선 하씨는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네로서는 개혼인데 하느님이 날씨 부조나 해주셨음 좋겠다만,"하고
시외숙모는 돌아갔다. 점아기는 이번 혼사를 성사하는 데 사면초가의
입장이었다. 딸자식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는 남편 허윤균만이 보내고 나면
남의 자식인데 부인이 알아서 하라 했을뿐이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시가에서는 말할 어른들이 없었고 시외가는 의사 표시는 할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점아기로선 시외가의 은덕을 입는 형편이어서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시집갈 당자 보연의 불만도 그러했다. 어제만 하더라도
"어머님은 나를 버린 자식으로 아시는가 봐요. 시잡갈 곳이 없으면 중이
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이불 꾸미는 데 도와주러 온 이종사촌 시누이, 그러니까 시어머니 바로
동생의 소생인 김실댁을 보고 보연이 한 말이었다.
"우리 보연이 어디가 어때서 시집갈 곳이 없을꼬? 하긴 걱정은
걱정이구나. 명색이 의관의 집 딸자식인데 상것들하고 어떻게 어울릴지,"
"시누님도 참, 우리 사는 것은 뭐 별다른 절도가 있습니까?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신학문한 사람이 요즘에 큰소리친답니다."
손아래여서 그렇기도 하려니와 자신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고 하는 말이
얄미웠다. 남편은 의관 따위 벗어던진 지가 옛날이며 주정꾼에다
노름꾼이요, 살기 어려워서 자식들에겐 글 한줄 가르쳐주지 못했고
음식솜씨 있다 하여 부잣집을 전전하면서 혼사 때 장사 때 환갑잔치 때
음식장만이나 하며 생계를 겨우 이어나가는 형편인데 싶은 것이 점아기의
심정이었다.
"글쎄요, 세상이 달라지기는 많이 달라졌지요. 옛날 같으면 언감생심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앙혼이든 강혼이든 못할것도 없는 세상이긴 하지만
지체가 없다면 재물이라도 있어야지, 안 그래요, 올케?"
"재물이나 지체는 당자 하나 잘나면 따라오는 것 아니겠어요?"
"따라오는 거라구요?"
김실댁은 가소롭다는 듯 바늘에 실을 꿰다 말고 점아기를 쳐다 보았다.
"올케, 문서에다 도장 직고서 기다리시구려. 바라는 생각만으로 될
일이라면 세상에 상것 빈자가 어디 있겠어요?"
"왕빈들 될 수 없겠습니까?"
보연이 되바라진 말을 한다.
"보연이 너 그 성미 때문에, 바로 그 성미 때문에 이번 혼사를 내가
결정한 거다. 아무리 타이르고 가르쳐도 너 언동에 조신스러움이 없구나.
시집갈 규수가 어른 앞에서 그런 말버릇, 그러고도 법도에 엄한 시모
밑에서 지어미의 자리가 보존될 성싶으냐?'
점아기는 한탄스럽게 말하고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 어머님은 제가 소박당할 것다 그 말씀이세요?"
"아직 시집도 안 간 아이가 부끄럽지도 않느냐? 작은방에 가거라! 혼수
만지는 데 나앉는 것부터 당돌하구나."
김실댁도 그 말에는 동감이던지 역성을 들고 나오진 않았다.
시외숙모가 가고 난 뒤 점아기는 마루에 걸터앉아 하느님이 날씨 부조나
해주셨음 좋겠다던 시외숙모의 말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구 떠밀 듯
혼사날짜를 정하는 데까지 왔었건만 어쩐지 불안하다. 자신이 일을
잘못했다는 후회는 결코 아니다. 주변에서 들쑤시듯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혼사를 깨서는 안 된다는 결심이 굳어질 뿐이다. 그런데 왜 불안한가.
원인은 홍이 쪽에 있다기보다 딸 보연이 쪽에 있는 성싶다. 웬간히 남자가
너그럽지 않다면 보연이를 보아낼 것 같지가 않다. 점아기는 불안을
밀어버리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아랫방에서 딸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보연의 목소리가 젤 울린다. 동생들에게 역정을 내고 있는
눈치다.
'사주도 세다고 하던데, 외숙모님은 왜 날씨 걱정을 하셨을까?'
털어버린 생각이 또 떠오른다. 떠오른 생각을 다시 털어버리려고
점아기는 부친 김훈장 생각을 한다. 신분에 대하여 고루하기론 시외가
쪽보다 부친이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재물을 보기를 길바닥에
굴러 있는 개똥같이 보았고 땀 흘려 농사짓는 생활에 자족했었다. 선비가
돈을 알게 되면 시정잡배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고루하게
굳어버린 것이었다. 오히려 남편과 시외가의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는
트였다 할 수 있었다. 체면만 차리면서 굶어죽을 순 없다는 생각들이었다.
한데도 신분 문제에서만은 권위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라기보다 습관,
상민들을 하시하고 횡포하게 다루는 습관을 버리려 하지는 않는다. 지체가
없다면 재물이라도 있어야지 않겠는가 했던 김실댁의 말은 잔적으로
그들의 생리를 요약한 것이다. 시외삼촌의 경우도 돈 많은 친구와
표면상으로 동업이라지만 내막으론 수족 같은 존재로서 어장에 관여하고
또 윤선회사를 차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만큼 재리에는 밝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족 같은 존재, 그럼에도 양반의 자존심은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점아기는 남편까지 그렇다는 생각은 아니 한다. 오히려 재리에는
무능력한 사람이다. 돈을 길가 개동 보듯 하지는 않았지만 선천이
무능력한 사람인 것이다.
한편 평사리에서는 옛날 용이가 살던 묵은 집터에 삼간 초가를 새로
지었다. 신부를 진주로 데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마을 사람들이 품을
들어주었으며 목재는 산에서 베어왔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를 엮어서 치고
마을에서 거둔 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지붕을 덮었다. 시골 집이란 대개
그러했지만 목돈이 들기론 목수 품삯이었다.
"며누리보다 상전을 뫼시오는 꼴인데 이편찮아서 우짤라꼬 그러나."
"양반입네 하고 시가를 업수이여긴다면 그것도 어러분 일이라,"
"딸은 치넣고 며누리는 아래서 데리온다 카는데 없는 살람, 별난시어미
보고 살겄나?"
말들이 많았지만 아버지가 원한다면 하고 순순히 장가갈 것을 홍이가
동의한 후 용이도 거의 점아기와 같은 심정의 경로를 겪었다. 누가 뭐라건
떠밀 듯 혼사날짜를 정하는 데까지 왔는데 그로부터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잘한 짓이까?'
홍이를 두고 느끼는 불안이었다. 남들은 처녀 쪽을 두고서 얘기했었지만
뭐니 해도 부모만큼 자식을 아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성미가 별나니께 조금이라도 눌리는 기색이 있이믄 때리부실라안 칼까?
잽혀갔다 와서는 많이 변라기야 했지만 남들같이 가숙섬기고 살란가.'
용이로서는 괴로운 의문이었다. 자기 자신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소망도 간절하였다.
'멀리 떠나보낼라 캤는데 우찌 일이 이렇기 됐이꼬?'
용이는 새로 지은 집 뜨락을 거닐다가 문득 그 생각을 하면 뭔지모를
함정에 스스로 뛰어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거야 뭐 제 가숙 데리고는 못 가나 머.'
진주의 영팔이도 같은 생각을 했던지
"손주나 낳아서 한분 안아보고 그런 다음에 용정으로 보내부리라."
모하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었다. 임이네는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나 다음에는 나자빠지고 말았다.
"에미 모리는 혼사, 내 참니할 것도 없고 자식이고 서방이고 이자는 남
됐으니께,"
염불 외듯 돈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장가 말을 꺼내던 임이네였다.
혼사하는 마당에서 자나빠지듯 물러나 앉는 심산은 혼이 비용을 한푼도
내지 않려는 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참말이제 이서방 그리 볼 사람 아니네요."
우물가에서는 복동네가 혀를 내둘렀다. 두리네가 맞장구를 친다.
"그러기 말이다. 안부모도 그러기 어럽지. 골골 앓아샀더마는 아들장개
비용은 꽉 쥐고 있었던갑제?"
"봉채를 보냈다 카는데 아주 짭짤하더랍니다."
"벌써 봉채를 보내?"
"혼삿날이 며칠 남았건데요? 열이튿날인께 봉채가 이르지도 않거마는,"
"음, 그렇구나. 지난번 사주단자 보낼 때도 패물이랑 빠진 것 없이
보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마는,"
"기 안 꺾일라구 그러기는 했일 기요마는 봉채함에 든 옷이 여섯벌,
그것도 값진 비단이라 하니,"
"농사꾼이 염이나 낼 일이가?"
"포은이 져서 그랬일 기요. 어느 부모치고 맘이사 다 안 그러까마는,
이서방 심정 알 만하지요. 제집이 일부종사 못하는 것도 한이지마는
남자라꼬 안 그렇겄소? 심성 좋고 남자답고, 그런데 우찌 제집 복이 그리
없었는지,"
"그것도 팔자 아니겄나."
"그러나 이서방이 바라는 것맨치로 순조롭기 살란가?"
"그런 소리는 와 하노."
"우리끼리니께 하는 말 아니요? 임이네 전력을 생각하믄 양반사돈, 너무
칭아가 진단 말이요."
"시에미 보고 하는 혼산가? 옛날에도 임금이 딸이 거지한테 시집갔다는
말이 안 있더나. 바보 온달이 말이다. 홍이 그 아아사 바보는커녕 일등
신랑감이제."
"김훈장댁에서 들었는데 신부 될 처니도 인물이 좋다 캅디다."
"지체는 달라도 인물은 거의방해야 살제."
"이자는 친영만 남았구마."
우물가 여론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아닌게아니라 용이는 세심하게
혼사를 진행시켜왔던 것이다. 상대가 양반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납채에서부터 봉채에 이르기까지 붓글씨며 격식이며
소홀함이 없도록, 허물잡힐 일이 없도로그 장차 홀로 남을 아들을 위해
처가 울타리가 든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도 성의를 다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월 열하룻날, 늦은 아침을 먹을 시각쯤 드디어 홍이는 친영 기릉ㄹ
떠나려고 말에 올랐다. 통영까지는 당일에 갈 수 없었으므로 남해로
돌아서 그곳에서 하룻밤 중방에 들었다가 내일 아침뱃길로 통영에 갈
것이다.
"어이구, 신랑이 나이 들어서, 제법 의젓하구마."
봉기가 소리쳤다.
"신랑 조오타! 월구의 선녀라도 맨발 벗고 따라오겄고나."
바우의 격려하는 말이었다.
"대접이 미흡하믄 이미 내 사람은 됐것다, 내던져놓고 오는 기다!"
제각기 한마디씩 던질 때마다 상객을 따라나선 영팔이 벌죽벌죽 웃는다.
역시 상객을 수행하게 된 진주의 석이도 빙그레 웃곤 한다. 석이네,
판술네, 야무네도 사람들 속에서 발돋움하여 떠나는 홍이를 보랴고 애를
쓴다. 홍이는 의젓했던 게 아니다. 무표정했다. 용이도 긴장한 나머지
무표정했다.
"소동 가는 저눔아아는 누고오?"
마을 아낙이 묻는다.
"김서방 맏손자 앙이가. 소동 갈라꼬 진주서 옴서 데리왔단다."
야무네의 대답이었다.
"너무 어리다. 오줌 싸고 똥싸믄 우짜노?"
"다섯 살인데 오줌을 와 싸노."
마을 사람들은 동구 밖까지 따라나왔다.
"신랑! 첫날밤에 신부 길 자알 디리야 한다!"
들에서 봄갈이하던 사람들도 일손을 멈추고 격려하는 고함을 질렀다.
말등에서 흔들리며 홍이는 하늘과 산과 강물을 바라본다. 하늘과 산과
강물같이 홍이는 진정 무심핟. 별난 것도 없고 별나게 살아서도 안 될
것이며 두드러지게 보여도 안 될 것이었다. 세상은 살아가기 힘든
곳이지만 쉽게 살 수 없는 곳도 아닐 것이다. 뜨겁게 살 수 없다 하여
차갑게 살아야 한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사랑 할 수 없다고 미움으로
살아도 아니 될 것이다. 그러면은 지아비도 될 수 있는 것이요 아이
아비도 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얼굴들은 낡았고 살가죽은 헐거운데 진솔
옷에 새 신발, 영팔이는 남의 통영갓까지 빌려 쓰고 두 활개를 저으며
간다. 지아비가 되고 아이 아비가 되고 그리고 아이 할아배가 되고
버둥거리고 나부대어도 결국은 저 산천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을. 헌병대서
고초를 겪고 경찰서 마룻바닥에서 홍이 얻은 결론은 각박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혼인을 승낙한 것도 그 생각 때문인지 모른다.
남해서 하룻밤 중방에 들었다가 아침 일찍 일행은 배편으로 통영을 향해
떠났다.
배가 뭍에서 떠나자마자 바람이 거실거실 일기 시작했다. 영팔이 눈이
하늘을 힐끗 쳐다본다. 그름 흘러가는 곳이 심상치가 않다.
'제발 초례가 끝날 때꺼지...'
배가 나울을 타기 시작한다. 석이 얼굴빛도 흐려진다. 용이는 뱃바닥만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다.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물결은 드세어간다.
뱃멀미를 하는지 바다가 무서웠던지 아이가 운다. 영팔이는 타독타독 아이
등을 두드리며 달랠 뿐 날씨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날씨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통영에 당도했을 때 바람은 한층 기승을 부렸다.
빗방울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방금이라고 떨어질 듯 하늘은 짙은 잿빛,
찌푸리고 있었다. 하루 먼저 떠났던 연학이 말을 준비해놓고 갯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근심과 뱃멀미로 노오랗게 된 용이 얼굴에 연학을 보는
순간 다소 안도하는 빛이 떠오른다. 연학을 보는 순간 다소 안도하는 빛이
떠오른다. 연학이 역시 날씨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홍이 아래위를
훑어보며 싱긋이 웃는다. 사모관대에 목화를 신은 홍이는 잠시 눈길을
떨어뜨린다. 그러고 나서 말에 올랐다. 연학이는
"수고 많십니다. 욕봤지요."
하면서 석이 안고 있는 아이를 받아안는다. 용이은 우울하게 뒤따르고
영팔이 숨어보듯 하늘을 올려다본다.
'빌어묵을 날씨는 와 이리 지랄이지? 용이 속이 얼매나 끓달겄노.
빌어묵을, 에미년이 별난께로 아들 장개가는 날도 이 모앵이다.'
신랑 일행은 바람 소리에 쫓기듯 걸음을 빨리한다. 간창골을 지나서문
고개를 오르는 길을 가파롭다.
'바람은 불더라 캐도 제발 비는 오지 말아라.'
용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영팔이는 계속하여 마음속으로 임이네를
향해 옥지거리를 하며 걷는다.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면서도
신랑이 평사리를 떠나올 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임이네에 대한
미움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잘못한 거는 조상 탓이라 카더마는 잘못된
일만 있이믄 와 나를 들먹이노! 내가 동네 북가아! 하는 임이네 음성이
들려오는 것도 같다. 내가 바람 부라고 비러었나! 비오라고 빌었나! 생모를
박대하는 놈들! 하누님이 벌을 내리신 기지! 재가 안 가고 저버서 안
가건데! 생피겉이 싫어하고 안 왔이믄 좋겄다 생각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가아? 쓸개도 창지도 없는 년인 줄 알았던가? 하는 목소리도 귓가에 쟁쟁
울려온다. 딴은 그렇다. 속셈이에 어떻든 표면으론 임이네 말에 타당성이
있다. 그렇게 타당성 있게 자신을 은폐하는 데는 가히 천재적인
여자였으니까. 석이네, 판술네가 혼사를 치르려고 평사리에 왔고 두만네도
오겠다는 기별을 해왔다. 영팔이는 진작 왔기 때문에 뒤이어 온
판술네에게 물었다.
"임이네는 안 온다 카더나?"
"어디 오겄소?"
"가기는 가봤나."
"야."
"뭐라 카더노."
"머 밤낮 하는 그 얘기 아니요. 죽다 깨난다고 변할 사람이요?"
"와가지고 조신스리 있다믄 누가 머라 칼 기라고, 돈 아까바 그렇지.
잘묵고 잘살라 캐라."
"이녁은 무신 전생에 임이네하고 척이 졌는 갑소."
"아, 그라믄 합이 안 맞아 그렇지 그 제집이 나쁘잖다 그 말이가?"
"나쁘잖다는 기이 앙이라 남의 일에 펄펄 뚠께 하는 말 앙이요. 제
식구들보다 더하다 카이."
"시끄럽다! 용이는 내 친동기간이라 캐도 과언 아니고 홍이는 내 조카,"
하다 말고 영팔이는 그만두었다.
신부 집 앞에, 동네서 새집이라 이르는 허윤균의 집 앞에 신랑일행은
당도했다. 잠시 동안 숨을 들이켜고 나서 홍이는 문간에 깔아놓은
노적섬을 밟고 들어선다. 연학이 안고 온 아이를 들여 보내고 용이와
영팔이 들어간다. 연학은 잔칫집에 구경나온 사람같이 문 밖에서
얼씬거린다. 신랑을 맞이하는 주혼자는 수염과 눈썹이 새까만, 마치
관운장과 같아 보이는 중년이었다. 그는 홍이를 향해 세 번 읍하고 홍이를
초례청으로 안내해간다. 초례청은 마당에 쳐놓은 차일 안에 마련돼 있었다.
예탁을 중심하여 서편과 동편에 병풍을 둘러쳤고, 차일이 바람에 펄럭인다.
단단하게 돌을 달아서 쳐놓은 차일인데 연신 펄럭인다. 바람은 한층
속력을 내는 모양이다. 바다 쪽에서 짐승 울음 같은 바람 소리가 울려온다.
바람 탓이리라. 혼가에 사람들은 많아서 붐비는데 소리가 없다. 말소리가
도통 없다. 신랑이 들어서도 설레이는 기색없다. 긴장이 팽팽하게 넘치는
것만 같다.
"신부추울"
바닥에는 화문석이 깔려 있었다. 예탁에는 솔과 대를 꽅은 호리병 두
개와 밤, 대추, 쌀, 술병과 술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머리와 꼬리만
내놓고 비단 보자기에 싼 장닭 한 마리가 있었다. 홍이는 장닭의 눈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신부가 서 있었다. 다홍에 수가 현란한
활옷에 원삼을 끼고 족두리를 쓴 신부의 입술이 추위 대문에 파아랬다.
홍이는 비로소 자신이 떨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문득 갗물에 흘려보낸
꽃신 생각을 한다. 장이에게 주려고 산 꽃신, 그 꽃신은 어디로
흘러갔는가.
신부 곁에 얼굴이 두리넓적한 수모가 서 있었다. 홍이는 흘려보낸 꽃신
생각을 하며 전안의 절차를 따라 기러기 한쌍 앞에서 진삼배를 하고
퇴삼배를 했다. 수모가 나무 기러기를 신부 앞에 가자다놓는다. 흐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마당에 모여 섰던 사람들이 일제히 얼굴을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본다. 혼인날의 비는 불길의 징조다. 후드득 후드득! 빗방울
소리, 잦아지고 많아지는 빗방울 소리, 그러나 상견례는 시작 된다. 비단에
싸놓은 닭이 푸드덕거렸다. 마치 쌀을 쪼아먹으려는 듯 주둥이를 내민다.
수모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신부는 신랑을 향해 큰절을 두 번 한다. 홍이는
다시 꽃신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하고 생각한다. 홍이가 답례를 아니 하는
것을 본 안부가 낮을 소리로,
"답례하시오."
홍이는 답례의 큰절을 한 번 한다. 그리고 신부 신랑은 자리에 앉는다.
빗방을은 빗줄기로 변했다. 청실홍실을 늘어뜨린 술잔에 술을 부어 수모가
신랑 앞으로 가져온다. 술잔을 신랑 입술에 잠시 대었다가 떼고 술은 땅에
버린다. 수모는 다시 신랑 편에서 술을 부어 신부에게 가져가서 꼭같은
동작을 되풀이한다. 교배잔을 세 번 나눈 다음 신부는 재배하고 신랑을
일배한다. 그리고 상견례는 끝이 났다. 비단 보자기에 싸인 닭이 또
푸드덕거린다. 빗줄기는 장대비로 볐했고 뇌성벽력이다. 하느님은 이들을
위해 날씨 부조를 아니 한 것이다.
남편과 함께 신랑 신부의 절을 받는 점아기의 입술을 먹빛이었다.
갑자기 내려간 일기와 찬비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다. 애써 충격을 감추려
했으나 먹빛이 된 입술은 때때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명천의 하느님네, 어찌하여 이렇게 사나운 날씨를 주십니까. 못할혼사를
내가 치른 것입니까.'
그러나 허윤균은 태연했다. 날씨 따위는 아예 마음에 끼지도 않는
눈치다. 그는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위가 뜻밖에 훤칠하고 귀골로
뵈며 행동거지가 매우 침착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조용한 방안과는 달리
밖에서는 비바람 못지 않게 난리가 났다. 소리를 죽인 난리요 쉬쉬 하면서.
"이 일을 우짜믄 좋을꼬? 초례청에서 멀쩡했던 닭이 죽다니,"
김실댁이 젖은 옷을 털며 말했다. 드난꾼들은 빗설거지와 혼례식의
뒷수습을 하느라 빗속을 뛰어다니면서도
"참말 별일이제?"
"그러기 말이다."
"닭이 죽다니, 창대 겉은 비만 와도 좋잖은 긴데 닭까지 죽어부리니
무슨 변괼꼬?"
"징조가 안 좋아도 이만저만? 신랑 팔자가 센지 신부 팔자가 센지, 그
좋은 시링을 얻었는데 무슨 날벼락일꼬?"
"이댁 마님은 아직 모르제?"
"이댁 외숙모님이 암말 말라 하기는 하더라만 모리고 지날 일이 따로
있지."
이 구석 저 구석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히고 바람 소리에
날리고.
하씨는 김실댁이 내주는 우산을 쓰고 나간다.
"숙모님."
"왜."
"이 장대비를 맞고 어찌 가실라고 이럽니까."
"복통이 터져서 어디 더 있겠나."
"하누님이 하시는 일을 어쩌겠습니까."
"계집이 요망하면 솥뚜껑을 깬다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한사코 내가
말리는 건데,"
"노성벡력 하늘이 말맀건만 이제는 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들어가거라."
"지도 가슴이 벌렁벌렁 뛰어서 부엌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쯔쯔쯔... 어째 초례청 닭까지 죽는단 말이냐. 딸자식 하나 신세 버리는
것도 것이려니와 집안에 흉사 생길까 무섭다."
"왜 아니겠습니가."
"맘이 씌어 그랬던지 하느님보고 날씨 부조나 해주시라 했는데 참,
지내고 보니 방정맞은 말이었던 것 같다."
"그거야 뭐 좋은 날씨 줍시라고 빈 것 아니겠습니까."
"어서 들어가보아라. 상객 온 사람들 굶겨서 앉혀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 네가 두량해야지, 집안이 뒤죽박죽이다."
하고서 핬니는 우산으로 몸을 가리며 장대시 속으로 간다. 발 아래선
물보라가 일어 뿌옇게 보였다.
비는 해가 질 시각쯤 해서 멎었다.
신방에 촛불이 켜지고 신랑이 들었는데 불길한 여러 가지 징조에
공포심을 느꼈음인지 문구멍을 뚫고 신방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가에 왔던 손님들도 비가 걷히는 것을 보자 황황히 떠나버렸고
두세 사람이 남아서 집안은 갑자기 빈집처럼 조용해졌다. 상객방도
조용했고 허윤균 부부의 방도 조용해고 두 딸은 부엌에서 떡국이 끊고
있는, 아궁이의 불길만 바라보고 있었다. 혼가가 아니라 마치 상가 같았다.
밤은 그러나 깊어져서, 활욧에 원삼족두리를 쓴 채 정좌하고 앉았던
신부가 팔이 아팠던지 꼼지락러렸다. 보연이는 날씨 때문에 혼이 빠진 것
같았고 신랑이 너무 잘생기고 의젓하여 완전히 기가 눌리고 만 것 같았다.
그리고 돌부처처럼 말없이 앉아 촛불만 쳐다보고 있는 신랑 옆모습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소박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치밀어올랐다.
첫닭이 울었다. 그때 비로소 홍이는 제정신이 든 것처럼 신부 곁으로
다가앉으며 족두리를 벗긴다. 큰 비녀를 뽑아준다. 곱게 땋은 머리채가
뱀같이 어깨 위로 미끄러진다. 활옷을 벗기고 원삼도 벗겨준다.
"천둥 소리에 놀랬겠구먼."
처음으로 홍이는 입을 열었다.
"아니옵니다."
역시 방자한 성품이다. 홍이 얼굴을 찌푸린다. 잠자코 고개를 숙일 줄
알았다.
"천둥 소리에 놀라지 않았단 말이요?"
"예."
"하 참, 나는 놀랬는데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실수를 깨달았는지
"너무 긴장이 되어 그랬나 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실수를 만회하지는 못했다. 홍이는 다시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나 참고 홍치마 연두 저고리를 벗겨준다. 하얀 소복이
나타났다. 홍이는 마음속으로 용모는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소복의
보연이는 매우 아름다웠던 것이다.
"신부."
"예."
"어찌 나 겉은 상놈한테 시집을 생각을 했소?"
"부모님 뜻에 따랐습니다."
"하긴 그랬을 테지... 그리고 나는 상놈일 뿐만 아니라 집안이 가찹은데
가서 살 수 있겠소?"
"기찹은데 어찌 예물은 그렇게 흡족하게 보내셨습니까?"
이번에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보연이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고 나서
어이없다는 듯 픽 웃는다.
"집안 기찹은 것말고 또 있소. 시모 될 사람의 얘기는 들었겠지요?"
보연이는 그 말 대꾸는 하지 않는다. 홍이는 뭐라 말을 하려다 생각을
고쳐먹는 눈치다.
"밤도 저물었고 자리에 드시오."
"아니옵니다. 어머님이 앉아 새우라 하셨습니다."
홍이는 또 픽 웃었다. 그 말은 귀여웠고 사랑스런 것 같았다.
"그럼 나 혼자 자야겠구먼."
촛불을 불어 끄고 어둠속에서 옷을 벗어던진 홍이는 이불 속으로
기어든다. 반듯하게 누워서 캄캄해 보이지 않는 천자을 바라본다. 전신이
쑤실 만큼 피곤했으나 잠은 좀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아버지의
누리팅팅하게 부은 듯한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아버지가 무엇을
소망하였는가, 홍이는 갑자기 목이 메이는 것을 느낀다. 혼인날 첫날밤이
이렇게 쓸쓸하고 서러운 것은 비 탓이 아니다. 바람 탓이 아니다. 신부
탓도 아니다. 막연한 앞날 탓인지 모른다. 닭이 두 번째 운다. 빗소리, 바람
소리, 천둥 소리, 거짓말같이 사방은 조용하다. 무덤같이 조용하다.
눈길을 천장에서 떼었다. 소복이 어둠 속에 떠오른 것같이 보인다. 순간
여자 관례를 캐묻던 곤도의 여드름투성이 매부리코의 얼굴이 눈앞을
지나간다. 분노의 감정이 나울을 타고 온다. 피가 끓어 오르는 것 같다.
홍이는 화닥닥 몸을 일으켰다.
"오늘밤은 내 맘대로다."
소복의 보연이를 낚아채며 이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감정과 달리 홍이는 보연이를 거칠게 다루지는 않았다.
영롱하게 아침은 밝아온다. 새벽참으로 떡국이 들어왔다.
"저기, 떡국 잡수셔요."
"음, 음?"
홍이는 머리를 들다 말고 보연을 바라본다. 보연이 빙긋이 웃으며
얼굴을 숙인다. 홍이는 속적삼 섶을 모으며 상 앞에 보연과 마주앉는다.
"일찍 떠나야 하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하루 만에 갈 수 있습니까?"
"일찍 떠나면 저녁에는 도착한다 하더구먼."
"그러면 오실 때는 어째 중방에 드셨습니까?"
"어두운 곳에서 초례를 할 수 있소?"
친절하게, 비교적 친절하게.
"어두워 했었더라면 날씨는 개었을 텐데..."
옴속옴속 떡국을 떠먹는다. 홍이는 좀 안됐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는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필사적인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초례청에서 강물에
흘려보낸 꽃신 생각을 했던 자기 자신.
"날이 궃으면 좋지 않다는 것 그건 다 미신이오."
해가 떠오르기가 바쁘게 집안은 떠날 준비 때문에 떠들썩했다. 비로소
혼인집같이 웅성거렸다. 불길한 여러 가지 징조 때문에 상가 같았던
집안에, 신부의 확 트인 얼굴은 생기를 몰고 왔다. 신부가 떠나는 것을
구경하러 온 아낙들은 뒤늦은 감은 있으나 신랑 인물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것이었다.
"새집 처녀는 빤 적삼만 갈아입어도 서문고개가 훤하다 했는데 신랑
인물에 비하면 역부족이다. 두짜믄 저리도 인물이 좋을꼬?"
"옥골선풍이란 저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제."
"너무 신랑이 좋아서 하늘이 샘을 냈는갑다. 우짜믄 그렇기
노성벡력에다 장대 겉은 비가 내맀겄노."
"잘살고 못사는 것은 타고난 팔자고, 하룻밤이믄 어떤고?"
아낙들의 칭송을 들은 영팔이는 자기 아들이기나 한 듯 두 어깨를
으쓱하니 쳐들었다. 초례청의 닭이 죽은 것은 상객 일행이 알턱이 없었고,
그러나 용이 안색은 여전히 좋지가 않았다.
올 때는 업혀오고 안겨오고 더러는 걷기도 했던 영팔의 손자 정식이는
신부가 탄 가마에 함께 타게 되었다.
"하동까지 갈라 카믄 가마멀미 많이 하겄다."
"뭐 배편으로 갈 긴데 얼매나 걸을까 봐서?"
"신랑집에서 보낸 봉채도 짭짭했지만 신부집에서도 예단을 실팍하게
했다 카데."
"개혼이니께."
"개혼이라도 못하믄 못하는 기지. 어마님이 야물고 조촐해서 예단도
얌전할 까구마."
인심의 변화란 각일각인가. 어제와 오늘, 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르다. 가마는 떠나고 신랑 태운 말도 떠나고 점아기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물을 닦는다.
예정보다 빠르게, 해가 서산에 깜박깜박 넘어갈락말락할 때 가마는 동구
쪽에 당도했다. 마을 사람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모두들 오늘은
기막히게 쾌청한 날씬데 어제는 왜 그랬겠느냐는 말을 하고 있었다.
두만네, 석이네, 판술네 그네들의 아들딸들의 얼굴이 마을 사람들 속에
있었다. 혼인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던 산청댁이 먼저
쫓아왔다. 가마 문을 들고
"아가, 가마멀미는 안 했나?"
"외숙모, 괜찮소."
보연은 지친 기색도 없이 활짝 웃었다. 가마 문 드는 것을 본 아낙들이
확 모여든다. 신부의 얼굴을 보자는 것이다.
"신랑만은 못해도 그만하면 인물 좋다."
중평이 그러했다. 이곳의 인심도 마찬가지였다. 비바람 불고 뇌성벽력
때와 선들선들 미치게 좋은 오늘의 날씨, 날씨 따라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달라져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시에미가 없으니 신부보고 뭐라 칼 긴고?"
"몹쓸 제집이다. 머 그래봐야 지 손해지. 며누리 손에 따따스런 물이나
한모금 얻어묵겄나."

새로 지은 초가삼간은 새집이어서도 그랬겠으나 뭐 한 흩어진 곳 없이
깨끗하게 신부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다. 예탁에는 음식을 높이
괸 제기가 각각 놓일 자리에 놓여 있었고 폐백 드릴 자리도 깨끗하게,
신부는 가마에서 내려 작은방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잠시 쉬는 동안
따라온 하님이 분단장을 다시 해주었으며 산청댁은 옷매무새를 고쳐준다.
판순이, 제술이는 홍이를 붙잡고 장가든 기분이 어떠냐고들 집요하게 묻고
놀려대고 한다. 마당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서 폐백 드리는 광경을
구경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참새들도 덩달아 지저귀며 대숲 쪽으로
날아가고 어둠이 묻어오는 마당을 비춰주기 위해 석이네가 청사초롱을
내건다.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는 남자들이 모였고 술과 밥과 떡이
풍성하다.
"참 오래간만에 걸게 묵는다."
"하모, 그럴밖에 더 있겄나? 최참판댁에서 떡쌀 술쌀을 노놨다 카이."
"거 연학인가 그 사람 사람 됐더라. 이분에도 밖에 나서지는 않고
뒤에서 궃은일은 혼자 도맡아서,"
"이서방이 인심을 안 잃어 그렇지. 일가친천은 없어도 심덕을 입어서
외롭지 않고 우리 보기도 참 좋네."
"임이네 겉으믄 마당에 풀 날 기다."
"하여간 날씨가 궃어서 그렇지, 신부가 인물도 그만하면, 지체 높겟다,
이서방이 며누리는 잘 본 셈이제."
"신랑이 잘났으이 그렇지, 인물 덕이다. 그란했으믄 양반과의 혼인꿈이나
꾸어보겄나?"
폐백 드리는 것도 끝나고 배부르게 먹은 잔칫집 손님도 다 돌아가고
자정이 넘었을 때는 불도 꺼졌다.
어디서 밤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동기

1장 동행
"선생님."
신문으로 얼굴을 덮고 코를 골면서 자는 서의돈을 대학생 차림의 청년이
흔든다.
"용산입니다, 선생님."
"알고 있어."
퉁명스럽게 대꾸는 했으나 움직이지는 않는다. 맞은편 좌석의 중늙은
사내가 짐칸에서 보따리를 꺼내며 성급히 하차준비를 한다. 대전에서 탄
중늙은이와 동행인 젊은 여자는 병자인 듯 줄곧 신음 소릴 내곤 했었다.
"개새끼들!"
내뱉으며 신문을 접고 몸을 일으킨 서의돈은 걸레를 짜듯 신문을
비틀더니 바닥에 획 던진다. 눈은 핏발이 서서 시뻘겋고 험했다. 늙은이가
움찔하며 쳐다본다. 대학생 차림의 청년은 쓴웃음을 띤채,
"헤이죠오구리이(평양밤)!"
기계로 찍어낸 것 같은, 꼭같은 말을 되풀이 되풀이하며 다가오는 열차
판매원의 입모습으로 시선을 옮긴다. 눈꼬리는 위로 치올랐고 광대뼈가
솟은 탓인지 양볼이 다소 꺼진 것이, 일별할 적에는 여우상이라고나 할까,
냉정하고 날카로운 용모다. 그러나 청춘의 감미로운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청년은 선우일의 동생 신이었다. 영문학이 전공인 서운신은 동경 Y대학
문학부에 재적중이며 여름방학 때는 동경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거의
일년 만의 귀국인 셈이다. 서의돈과 함께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자면,
그러니까 지난 팔월, 중순도 지날 무렵의 일이었다. 선우일한테서 주소를
알았노라 하며 뜻밖에 서의돈이 하숙을 찾아왔던 것이다. 보따리 하나
달랑하니 들고 옷은 땀에 젖었으며 초라한 작은 체구하며 조선서 모집해온
노무자의 꼴과 흡사했다.
"나 이삼 개월 신셀 져야겠다. 밥값 내면 되겠지?"
그러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선우신이 묻는 말에는 대꾸가 없었다. 형의 선배요 서울 있을 때는 자주
집에도 찾아와 익히 알고 있는 처지고 보면 다다미 석 장의 좁은 방에서
공부에 지장은 있겠으나 선우신으로서는 그러라할밖에 없었다. 다행히
경위 바른 하숙집 여자가 두 사람분의 식비를 생각하여 다다미 넉 장 반의
좀 넉넉한 방을 내어주기는 했었지만. 한데 서의돈이 온 지 며칠이 안
되어 구월 초하루, 정확히는 열두시경 별안간 집이 흔들리면서 시작된
것이, 동경을 쑥밭으로 만든 그 관동대지진 이었던 것이다. 동경, 요코하마,
미우라 반도를 휩쓴 지진, 화재는 지진의 속성인데다 마침 점심때여서
집안에 불기가 있었고, 또 대부분 목조건물인 탓으로 시가는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던 것이다. 아비규환으로 몰아넣은 그 무시무시했던 재난이
일본이들에게 악몽이었다면 재일 조선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아니되는 조선인 살육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조선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혼란을 틈타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사실무근의 유언비어에 선동된 군중이 불탄 거리를 몰려다니며
죽창, 곤봉, 갈고리, 식칼까지 꺼내들고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참살했던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경찰서에서, 연병장에서, 공장에서, 총으로,
일본도로, 혹은 총검으로 수백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것이다. 서의돈과
선우신은 함께 그 참상을 목격했으며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으나
대향이 죽지 않고 살어서 지금 서울 향한 기찻간에 앉아 있다. 어떤 일인
식자는 미친 군중이라 했다. 그러나 군중은 미쳤을느지 모르지만 일본의
위정자는 지극히 예리하고 정확한 판든을 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민중선동으로 일어날 폭동을 예상한 위정자들이 유언비어의 바로 근원인
까닭이다. 배고픈이리들의 사나운 이빨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양을 내던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으로 미칠 군중을 앞질러서 조선인 학살로
미치게 하여 혼란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그들의 계산이야말로 민첩하고도
정확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천이 넘는 조선인들의 목숨따위,
그들에게는 양이기는커녕 빈대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속력을 줄인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용산역 홈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전등빛과 냉기와 밤안개가 떠도는 공간에 역원과 아까보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인다.
"개새끼들!"

도다시 서의돈이 뱉어낸다. 목소리는 낮았다. 서우신은 무릎에 팔꿈치를
괴며 머리를 붙안고 바닥에 눈길을 떨어뜨린다.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서글픈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늙은이의 짚신과 무명옷에는 걸맞지도 않는
여자의 지단신을 내려다보며 선우신은 어제 부산서의 일을 떠올린다.
개새끼들! 뇌면서 바다를 향해 침을 뱉는 것은 서의돈과 선우신이 거의
동시에 취한 언동이었다. 연락선에서 내린 부산부두, 두 사람은
어처구너없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꼬릴 감추고 도망온 주제에,"
서의돈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주린 배창자에서 나는 소리처럼 서의돈은
끼룩끼룩 웃었다.
"내 집 문전에 와서 짖어대는 우리야말로 개새끼치고도 똥개다. 안 그래,
선우야?"
"맞습니다."
하고 둘은 소리내어 웃었다.
"어서 나가자. 술이나 들이부어야지. 못 견디겠어."
"그거 좋지요."
부두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술집을 찾아들면서 또다시 개새끼들! 하며
동시에 침을 뱉었다.
"이거 왜 이러지? 일심동체도 아니겠고."
"이심전심 아니겠습니까."
"자네 조선사람인가?"
"틀림없는 조선 종자지요."
"거 이상하군. 피둥피둥하니 말이야."
두 사람은 신이 들린 것처럼 주점 앞에서 또 웃었다.
"희극이 비극보다 어려우며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선생님, 비로소 실감할 것 같습니다."
전등빛이 휑뎅그렁한 주점에서 술잔을 움켜쥐며 선우신은 말했다.
"미친 것처럼 희극적인 것이 어디 있을라구."
"네, 실성한 사람도 우는 것보다 웃는 편이 고치기 어렵다고도 하구요."
"덜 서러워야 눈물도 난다 하든가? 저기 보아, 눈감고 젓가락 두드리는
친구 말이야. 실성 아니면 환장이다."
"실성은 아닌 듯하고 아마 환장인 모양입니다."
"청루에다 딸이나 팔아먹었나? 아니면 땅문서 놓고 노름하다 고향을
등진 걸까?"
"오십 보 아니면 백 보겠지요."
"가락도 없는 젓가락 장단, 희극도 가지가지라."
"가지가지...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달아나는 모습에는 비극보다
희극적 요소가 더 많은,"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의돈은 마시던 술잔을 거칠게 내려 놓으며,
"우리가 영웅호걸 아닌 것만은 확실하지마는, 그렇게라도 자위하는 것은
아주 퍽, 유익하다. 특히 문학도인 선우신에겐 말이야. 아암, 그래야지.
따지고 보면 위에서 아래가지 온통 어릿광대, 그런주제에 조선사람들 너무
비극 좋아하는 것 탈이라구, 하하하..."
무안을 당한 선우신의 얼굴을 벌개졌고, 선의돈의 웃음 속에는 강한
모멸의 울림이 있었다.
"흥, 몇 놈이나 될까?"
화가 난 선우신은
"죽은 사람 숫자는 알아서 뭣 하시게요? 위령제라도 지내시렵니까?"
"대안의 불구경이다, 불구경. 이를 갈며 맹세코 떠날 놈이 몇 놈이나
되겠는가 그 말이야."
"..."
"죽어자빠진 놈들은 어떤 놈이며 살아남은 놈들은 또 어떤 놈들이야, 흥!
그게 항상 문제거든."
"그야 대부분, 신사복 학생복이 살아남았을 테지요. 죽어자빠지기론
일본말 못하는 족속들, 그들 처자였지요."
냅다 던졌다.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효행은 신사복 학생복이 한 셈인가? 하하하핫,
하하핫... 하긴 옛적부터 효행은 의관이 해왔지만,"
"..."
"고등관을 목표하여 일로매진, 사람들 낯짝이 책으로만 보이는 놈들,
알량한 글줄 써서 그것으로 애국한답시고 자부하는 놈들, 아무튼 그
말랑말랑한 혓바닥 세 치로 나불거리는 놈치고,"
"죽여주지 않는데야 별수 있습니까? 당꾸바지라고 죽고 싶어 죽은 것은
아니잖습니까?"
"누가 죽고 싶다 했어! 쥐새끼 같은 놈이 살아남았다 그 얘기야!"
"그렇담 선생님이나 저나 쥐새끼이긴 매일반이지요."
십 년이 더 넘는 연령의 차이지만 서우신은 공손하게만 대하려 하지
않았다.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인들은, 음... 내 백성들아! 할 적에 신이 들린 것
같았다. 조선의 신령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게에 내 백성들아! 해봤자 어항
속의 붕어 물 먹는 꼴이지, 제에기랄!"
서의돈은 딴전을 피우듯 했으나 결국 그 얘기가 그 얘기다.
"이스라엘인들이 외치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야 어디서 읽었겠지."
"구약성서를 읽으신 모양이군요. 뜻밖인데요?"
비웃었다. 서의돈은 목에 핏줄을 세웠다.
"염통을 꺼내먹을 놈들! 톨스토이, 셰익스피어가 어디 뼈다귄지 핏대
세우는 꼴이 가관이고, 한수 더 떠서 나쓰메 소오세끼가 뭐 어쨌다는
거야? 그 군국주의, 아아 참 자네가 존경해 마지않는 영문학자요
대소설가였던가?"
"좀 망발 아닐까요?"
"깃발 치켜들 줄 알았다."
"군국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랬어? 만철의 총재 나가무라의 초청을 받고 그자가 조선 만주를
여행하고서,"
"여행했다고 반드시,"
"나까무라의 초청도 좋고, 느긋하게 서울서 묵고 간 것도 좋고, 돌아가서
쓴 글도 좋다 이거야. 군국주의건 뭐건 다 좋다 그 얘기야. 조선놈 학생이
심취하는 꼴이 우습거든. 그자가 쓴 소설이라는 것도 기껏해야 인간의
이기적인 면을 파헤쳐본 것밖에 더 있어? 늘상 구경꾼 같은 그자의
글인데, 그 자신이 이기적 인간이었다 그것 이외 뭐가 있어? 일본놈들
죄악에도 아불과이요 내 옷이에는 핏자국이 없다,"
"그 사람은 정치가도 군인도 아닙니다. 소설가이며 영문학자일 뿐입니다.
외곬으로 나가는 예술가를 두고 군국주의 운운하시는 것은 지나치고,
아불관은 예술가들의 속성 아닐까요?"
"그러냐? 예술가는 양심에도 아불관이란 말이냐? 적어도 일본인들의
치부는 느껴야, 양심 이전의 감정 문제다. 차라리 영국의 키플링같이
들내놓고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편이 낫지."
서의돈이 박식하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유학자로 이름난
문중어른이 망나니짓만 하고 다니는 서의돈을 닦달하려고 불러들였다가
도리어 학문에 대한 문답에서 노인이 낭패하고 코를 싸쥐었다는 얘기는
유명하였고, 어러 해 전에는 일본으로 유학이 아니라 유람왔다 하면서도
광범위하게, 누구보다 빠르게 학식을 흡수했다는 얘기를 형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 일이지만 동경서 같이 묵으면서 선우신은 서의돈이 문학에 관한
독서도 적잖게 한 것을 알았다. 하여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꼬박꼬박
붙여온 터였다.
"염통을 꺼내먹을 놈들, 내 동포가 개같이 죽어자빠진 땅에 내일 해가
또다시 떠오르듯 경울방학이 끝나면 가방 치켜들고서 연락선을 탈 게야.
그러고는 또다시 나쓰메가 어떻고 톨스토이가 어떻고 셰익스피어가 어떻고
지껄여댈 거란 말이야."
기차는 홈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짚신과 비단 신발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 선우신도 생각에서 깨어나 얼굴을 든다. 견딜 수 없는 불쾌감,
좌절감이 기차가 멎는 순간 현기같이 엄습한다. 십이월도 막바지, 헐벗은
들판을 부지런히 달려온 기차는 허덕이듯 증기를 내어뿜는다.
"제가 들어드리지요."
선우신은 벌떡 일어서며 노인의 짐을 받아든다. 병든 여자를 부축하는
노인을 도와 기차 밖에까지 짐을 재다준 선우신은 잘 가라는 인사를 한다.
"학생양반, 고맙소."
노인의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다.
서의돈은 두 다리를 쭉 뻗고 늙은이와 병든 여자가 나가버린 빈 좌석을
컹청이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비어버린 좌석은 여행의 끝처럼 쓸쓸하고,
밤기차란 으레 그런 것이지만 희망도 없는 듯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선우신이 자리에 돌아와 앉자 서의돈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과 불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움직임이 선명한 그곳을 방금 내린
승객들이 얼기설기 자나간다. 조선사람, 일본사람, 더러는 중국인도 볼 수
있었다.
"엽전들은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상판들이다."
서의돈이 창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중얼거렸다.
"따뜻한 낙타외투야 이등칸에서 느긋하게 밤경치를 감상하고 있을
테지요."
선우신은 빈정거렸다.
"느긋하게 밤경치를 감상한다, 그럴까? 상해서는 외국인 식당에
중국인과 파리를 사절한다, 그런 팻말이 나붙어 있다 했고, 미국 같은
곳에선 백인이 탄 기차칸에 흑인은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얘기고 보면,"
"그렇다면 우리 모두 은혜로운 대일본제국에 감사 감사해야겠습니다."
"아암, 감지덕지할 일이지. 한데 자네 파상풍 환자를 본 일이 있나?
"못 보았는데요."
"이등칸 푹신한 자리에 앉은 엽전 신사 얼굴을 상상하면 될 게야."
"어떤 얼굴인데요?"
"왜놈들이 득실거리는 찻간에서 감사 감사하다보니 미소를 지울수가
없고 밫바닥이 웃음 때문에 빳빳해졌을 거란 말이야. 파상풍 환자는 원래
웃는 얼굴이거든. 얼마나 고통스럽겠나."
"그거 재미있군요."
선우신은 못 견디겠는 비애, 자기 혐오를 느낀다.
'졸장부들!'
피가 모여서 응어리진 것이 아닌, 눅진눅진한 아교풀이 응엉리 같은
것을 느낀다. 흐느껴지는 것을 꾹꾹 눌러다져서 감정이 종잇장으로
변해버린 것 같은 것을 느낀다. 하찮고 지엽적인 것 때문에 왈가왈부하며
물어뜯고 쥐어틀고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것이며 무슨 위안을 얻는단
말인가, 개미 쳇바퀴 돌 듯 그 얘기가 그 얘기요 요설 이외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자학이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에 갇혀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되고 결국 절망적이라는 결론밖에 내릴 것이 없는데,
그러면서도 결론으로 끝낼 수없는 분노는 꼬리를 물고 있었으니. 선우신은
서의돈이 미웠다. 물론 자기 자신도 미웠다. 자신까지 포함하여 지식인을
깡그리 매도하는 서의돈의 심정을 선우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또 자기 자신의 심정이기 때문이다. 깡그리 매도하고 경멸하고
증오하며 편견과 옹졸과 억지까지 동원하여 지식인들을 공격하여
지식인들을 공격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심정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엄청난 힘, 저돌적인 돌진이
제아무리 격렬하다 하더라도 결과는 공중으로 붕하니 떠버리고 마는
엄연한 역학은 느낌보다 훨씬 앞서 나타나는 현실이었으니. 자해할밖에
감정의 출구가 없는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국에서처럼 지식과
예술의 걸리버는 외포할밖에 없을 것이며 양심의 걸리버는 잡아먹힐
것이며, 정의의 걸리버는 밟혀 뭉개질밖에 없는 이제, 정복자는
여유만만하지 아니 한가.
'그러나 일본은 거인국이 아니다.'
선우신은 일본의 쇠망을 믿고 싶었다.
'조선이 거인국의 걸리버도 아니다.'
결코 민족의 소멸을 믿고 싶지 않았다.
선우신이 생각에 잠겨있는데, 서의돈은 철이 덜 난 사람같이 차 창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품평을 하고 있었다.
"어깻죽지가 축 처진, 보나마나 낯빛은 누리팅팅할 게고, 서류가방인지
뭔지, 초조하게 걷는 저 친구는 하급관리겠고, 반대로 필요 이상 두 어깨를
치켜들고서 잔뜩 찌푸린 저 학생놈, 마음속엔 열등감 비애가 일렁이고
있을 터인데 그나마 뭣 좀 배웠다고 애국의 꿈이라도 꾸는 겐가. 모두
으스스 추위 탄 상판들인데 예외는 저 중고품 신사라. 기찻간을 제집
드나들 듯, 이골이 난 뜨내기 장사꾼이구먼. 익숙하고 날렵하고 잘 누비고
나간다."
서의돈의 음성은 독이 빠진 듯 싱겁게 울렸다.
'왜 모두 이런 지경으로 되어가야 하는가. 처량하고 한심스럽다.'
서의돈이 품평을 하는 유리창 밖의 사람들은 사실 그 대부분이 장사꾼이
아니며, 하급관리가 아니며, 학생도 아닌, 낙타외투의 신사는 더더구나
아닌,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얼굴의 백성들인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는 모습이요 얼굴이며, 뽐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뽐내어볼 쥐뿔도 없는 백성들인 것이다. 나으리 살려주시오, 나으리
억울합니다, 옛날 옛적부터 모에 밴 언어를 지닌 백성들인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괴물, 귀청이 날아가게 기적을 울리며 당장에라도 허연 이빨을
드러내어 달려들 것만 같은 시꺼먼 기차에 쫓기듯 가고 있다. 어둠 속에
우뚝우뚝 선 건물이며 높은 쇠기둥이며 엿가락같이 휘어서 뻗어난 레일,
금테 모자를 쓰고 깃발을 든 사내,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역사여 어둠
속에 떠 있는 빨갛고 파아란 선호등이며, 생소하고 위협적인 모든 형체와
빛깔과 소리에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쇳덩이가 정수리를 칠
깃인지, 언제 어디서 굉음이 울리며 귀청을 찢을 것인지, 가난한 보따리를
마구 흔들며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바다에 떠밀면 물에 빠져죽을 수밖에
없고 불속에 던지면 타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백성들, 어느덧 그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기차는 서울역을 향해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선우신은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수미다가와, 나가요바시 밑으로 수없는
시체가 떠내려가던 광경을 생각한다. 연무장에서는 기병들이 총성에 놀랄
이웃을 고려하여 수용한 조선사람들을 칼로 베어 죽였다는 것이며,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울음 터뜨리는 태아까지 찔러 죽였다는 소문을
생각한다. 계엄령을 편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곳곳에
집결시켜놓고 도리어 미친 군중에게 매어주어 집단살해를 감행하였다.
미친 군중은, 뿐인가, 버젓한 군인 경관까지 합세하여 호송중의 조선인들을
대로에서 살육했으며 집합소를 찾아다니며 조선인들을 살육했다.
수미다가와에서 건져낸 시체 중에는 등에 업은 아이말고도 양팔에 아이
하나씩을 껴안은 여자의 시체가 있었다고 했다. 그 숱한 죽음, 숱한
송장들은 누구인가. 방금 종종걸음으로 역사를 향해 쫓기듯 가던 바로 그
백성들이다. 한민족의 구할을 차지하고 있는,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얼굴의
치와 땀밖에 팔아먹을 것이 없는 그들, 그들인 깃이다.
'죽어자빠진 놈들은 어떤 놈이며 살아남은 놈들은 또 어떤 놈들이야, 흥!
그게 항상 문제거든.'
서의돈이 내뱉은 말을 선우신은 되새겨본다. 항상 문제라는 것은 역사의
문젯거리라는 뜻이다. 서의돈이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직은
사회주의자가 아닌 선우신이지만 서의돈의 말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운명인 동시 운명이 다니다. 분명 운명이 아닌 쪽인지 모은다.
하느님을 섬길 적에 역사는 운명인 동시 운명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포옹일 수도 있고 신과 인간의 싸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몰아낸다면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던 고대의 노예나 노예선을 타야 했던
아프리카의 검둥이는 역사의 운명 탓이 아니다. 강자의 이빨이 찢어발긴
희생물일 뿐이다. 선우신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다.
밤이, 물빛이 연신 달아나고 있는 차창에서 눈길을 거둔 서의돈은
어지간히 낡아버린 자신의 양복을 내려다본다. 고물상에서 맞는 것이 없어
좀 큰 것을 샀는데 허릿말을 가슴 밑에까지 바싹 올려야만 즈봉 가랑이가
안 끌렸다. 선우신은  플린 같다면서 놀려대곤 했었다. 차창옆에 걸어둔
외투는 적당히 낡은 것이지만 서의돈과 갚은 왜소한 체격에도 선우신은
아마 아이가 입었던 것인가 보다 하며 올리는 것이었다.
"임마, 왜놈들 씨종자 작은 걸 몰라? 나보다 작은 놈이 있다는 것 그거
과히 기분 나쁘지 않다."
코트에 포개져서 걸려 있는 것은 신품, 진짜 신품의 캡이다. 약간
오렌지빛을 띤, 회색과 연갈색의 올이 도드라져 뵈는 멋진 칩이다. 신파극
배우가 씀직한 물건, 서의돈은 자신의 복장과 필요 이상 두 어깨를
치켜들고 잔뜩 찌푸리며 걷던 학생의 모습을 떠올린다. 자신이 속한
부류가 바로 그 학생 쪽이었다는, 문득 깨달아지는 생각에 도달한다.
'뭣 좀 배웠다고 애국의 꿈이라도 꾸는 겐가... 그렇담 희망은 있어.
치졸한 거야말로 삯일 테니 말이야. 흐흐흣 으흐흐흣! 사실은 그것도 더 간
게야. 주먹이면 돼. 우리 실력은 주먹뿐이다. 흐흐흣으흐흣...'
뱃속에서 웃던 웃음이 입 밖으로 나왔다. 낄낄낄 웃는다.
"또 개새끼들입니까, 선생님."
지겹다는 듯 선우신이 말했다.
"선생님이라구? 집어치워라. 난 학생도 되기 싫고 주먹이야 주먹,"
하며 주먹을 들어올린다. 선우신은 웃는다.
"선우야."
"네."
"왜놈들 말이야, 왜놈들 말인데 어떻게 보이지?"
"사람의 상판이긴 마찬가지죠."
"모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같이 뵈지 않나?"
"군고구마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배창자가 터지는 한이 있어도 다
먹어 치우겠습니다."
"그러면은, 따뜻하고 귀중품 숨기기에도 든든한 하라마끼라면 어떨꼬?"
"모두가요? 그렇지만도 않지요. 해꼬오비(허리띠)에다가 신갱부꾸로를
걸머진 늙은 것은 어떻고요? 눈에 눈곱이 끼어서 벌벌 떠는 꼴이야말로
거지 중 상거지, 아 저기 보십시오. 맨 종아리가 드러난 여자 말입니다.
쪽바리 여자 말입니다. 털이 다 빠진 목도리로 입만 막으면 추위가
도망가나요?"
"그거야 난타외투의 엽전 신사만큼 귀한 것이고,"
"조선이니까 그렇지요. 일본에선 저런 부류의 사람들이 따뜻한
배싸개보다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 것들도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고 보면 사정은 달라지거든.
게다짝을 쳐들면 아이들이 달아나고 길가에 오줌을 까지르면 모두
슬금슬금 피해가고, 술 처먹고서 조선놈 치고받아도 주재소 갈 염려는
없고, 하다못해 곡괭이를 들어도 값이 달라진다, 이거야. 잘하면 땅뙈기
얻어내어 머슴새끼 부려가면서 지주도 되고 말이야. 하등에서 중등으로
올아온 놈의 호기야 상상할 만 아니 한가?"
"총독이 지 할애비 같을 테지요."
"종놈이 종 부리는 신세가 됐으니 대일본제국에 좀 충성하겠냐? 쓰기
좋은 하수인들이지. 지진 때 칼 들고 대창 든 놈들이 바로 그런 계층이요,
군중의 중심이 또한 그런 것들이거든."
"그렇다면 삼일운동 때 군중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어 표현의 차이는 있겠으나 원칙적으론 선동되고 돌발적인 면에선 다
마찬가지야."
서의돈은 냉정하게 칼끝으로 찌르듯 말했다.
"그렇다면 군중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다는 얘기 아닙니까?"
"삼일운동은 실패였어. 보람이 없었지. 군중이란 모이기도 쉽지만
흩어지는 것은 더 쉽고 삽시간이야. 모이는 군중보다 물결처럼 끊임없이
오는 군중, 그때 비로소 군중은 뚜렷한 성격을 띠게 되지."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서의돈은 대꾸를 하지 않는다. 한참 후 어세는 본시로 돌아가서
"해꼬오비든 밑빠진 조오리든 말할 거야. 어째 멍텅구리들이 이리
많으냐 하항, 이제부터는 안량미 반 됫박에 낫빠후꾸(노동복) 한벌이면
철공소 방직공장 할것없이, 우리네 땀 흘릴 필요가 워 있느냐, 살찌고
양지바른 땅에 힘 좋고 먹새 적은 머슴새끼나 몇 좀 붙여서,
총독할아버지,"
서의돈은 주절대는 것이었다.
"생광스럽고 복되도다. 이것이 모두 오로지 우릿님의 명덕 탓이오니
거룩한 은혜에 젖은 이 몸 바다로 가면은 물풀이 무성한 공장이 될 것이요
산으로 가면은 산풀이 무성한 공장이 될 것이요 오직 우릿님을 위하여
죽으리다. 그리하여 우릿님의 세상은 조약돌이 바위 되고 푸른 이끼가
끼일 때까지 존속하소서, 왜 안 그러겠나, 추한 것도 아름답게 아름다운
것도 추하게, 참으로 무궁무진... 허파에 바람들게 웃기나 하지. 하하핫..."
주절대다가 웃다가, 웃음도 뚝 떨어진다. 그러고는 갑자기 서의돈은
선우신을 기피하듯 무거운 침묵속으로 가라앉는다. 서울역에 도착하여
서의돈은 짧고 꼭 끼는 외투를 입는다. 캡을 눌러 쓰고 언쟁이라도 벌렸던
사이처럼 두 사람은 우울한 낯빛으로 홈에 내린다. 개찰구를 향한
층계에는 사람들이 덩어리가 되어 밀려 올라가고 있었다. 홈은 다소
엉성했다. 두 사람은 굳게 입을 다물고 수많은 사람들이 덩어리져 가는데,
무성영화처럼 소리가 없는 것을 느낀다. 그 침묵에 자신들이 말려들고
있는 것같이 착각되기도 한다.
"눈이 내릴 것 같습니다."
저항하듯 선우신이 입을 떼었다.
"한박눈이라도 펑펑 쏟아져라."
막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신상! 신상!"
회색 외투를 입은, 안경 쓴 사내가 여행가방을 들고 급히 걸으며
불러댄다. 그의 뒤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주춤거리듯 여자가 따라온다.
성숙한 여잔데 얼핏보기엔 열일고여덟밖에 안 되는 여학생같이 앳되다.
나이를 나타내는 것은 큰 눈, 고통스러워 보이는 눈이었다.
"신상!"
의아해하며 선우신이 돌아본다. 다가온 사내는 활짝 웃는다. 남자치고는
굉장히 내혹적인 웃음이다. 머리통은 작은 편이었다. 중키보다는 크고 비쩍
마른 몸집, 매혹적인 웃음을 빼면 학구형의 인상이다.
"오가다상 아니오?"
선우신이 놀란다. 머플러로 얼굴을 싼 여자는 달팽이가 집 속으로
기어드는 자세를 취하며 우울하게 시선을 떨어뜨린다.
"왜 아닙니까. 내리자마자 신상을 만나다니, 기분 좋은데요?"
손을 내민다. 선우신도 손을 내어 악수를 한다.
"당신은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나는 기분이 나빠요."
오가다는 껄껄껄 웃는다.
"한데 웬일로 왔소."
"견문을 넓히기 위한 여행입니다."
"견문을 넓혀요? 위문 온 것 아니오. 그랬다간 당신한테 빰맞으려구요?
하하핫핫..."
선우신은 오가자 뒤에 서 있는 여자를 십분 의식하면서 모르는 척,
담배를 피위물고 서 있는 서의돈을 돌아본다.
"선생님, 이 친구한텐 인사 좀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우리
학생들 신세 많이 졌지요."
"그래?"
"오가다상, 소개하지요."
"예, 저는 오가다 지로입니다."
오가다가 꾸벅 절을 한다.
"서의돈이오. 이번엔 우리 동포에게 많은 도움을 주어서 고마웠소."
노회한 미소를 머금고 손을 내민다.
"사함은 모드 동폽니다."
하는데 오가다 얼굴에 어둠이 스쳐지나간다.
"이 친구, 세계주의자라니까요."
선우신이 옆에서 거드는데
"네, 저는 인간입니다."
바보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마음에 들었던지 서의돈의 표정이 좀
달라진다.
"그보다 인실씨는 웬일이지요?"
처음으로 여자를 주목하는 선우신의 음성은 평이했다.
"저는 집에,"
방학이니 집에 오는 것은 당연하다. 난처해하는 인실을 도와주듯
오가다가 얼른 말을 이어받는다.
"어수선한 시국 아닙니까? 기사 정신을 발휘하여 동행할 것을
자청했지요."
서의돈이 빙그레 웃는다.
"그럼 슬슬 나가보지."
네 사람은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갑자기 역 구내에서의 괴이했던 침묵이
무너지고 고함이 일시에 터져나온 듯 역 광장은 와글바글 시끄러웠다.
지게꾼들이 우왕좌왕 짐을 얻으려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오가다상, 우리집에 가는 게 어때요?"
돌아보며 선우신이 묻는다.
"아니오. 여관에서 다리 쭉 뻗어야 여행 온 기분이 드니까요."
"그건 그렇겠군, 님의 집같이 안 편한 곳은 없으니까. 결국 눈이
오시는구먼."
불빛이 비춰주는 역 광장에 하얀 눈이 날아 내린다. 꽃이 파리처럼
송이송이 눈이 날아 내린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누구에겐지도 모르게 유인실이 인사를 한다. 선우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가다상, 오빠가 여관에 가실 거예요."
한마디 남기고 인실은 눈 내리는 광장을 떠난다.
"여관은 정했소?"
서의돈이 묻는다.
"보오게쯔 여관입니다. 전에 한번 온 일이 있었지요."
"본정통의?"
"네."
"그렇다면 우리는 가는 편이 좋겠고 혼자 여행 기분 내시오."
"슬슬 걸어가보겠어요."
"유인성 형이랑 함께, 한번 마십니다."
오가다는 전찻길까지 함께 와서 전차에 오른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종로에서 내린 두 사람은 뭔가 작정이 안 된 마음으로 잠시 머문다.
"댁에서 걱정하실 테지만, 뭣하면 우리집에 가시지요. 형도 선생님 뵙고
싶을 것입니다."
"걱정은 무슨 놈의, 내가 일본에 있었던 것을 알기나 했을라구."
"그럼 저의 집에 가시지요."
"맥이 쑥 빠진다. 술이나 한잔씩하고."
"그렇게 합시다."
서의돈의 집은 효자동이었고 선우신의 집은 삼청동이다. 종로에서의
거리는 엇비슷한데 서의돈은 지기 집이 무척 먼 곳에, 외떨어진 곳에 있는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거기까지 언제 가나, 피곤이 엄습해왔고
태산준령같이 느껴진다. 두 사나이는 청운동 술집을 향해 발길을
떼어놓는다. 사방은 어두웠고 착잡한 심정에는 술이 고혹적인 여자처럼
유혹해온다. 그들의 걸음은 빨라졌다.
"인실이 그 아이, 유인성의 누이동생 아니야?"
"누이동생이지요. 일본여대에 지학중입니다."
"그 집안, 남자 여자 학벌 하나 대단하다."
유인성은 동경제대 문학부를 졸업했다. 전공은 사학이었다.
"전에 한번 본 일이 있는데 그 애는 인사를 안 하더군."
"어리게 뵈지만 여간 깍쟁이가 아닙니다."
"인사하고 깍쟁이가 무슨 상과이랴."
"오가다하고 함께 오는 것을 우리가 보았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랬을 겁니다. 지레 겁을 먹고,"
"소문 나서 시집 못 갈까 봐서?"
"배일사상 때문이지요. 우리가 오해할까 봐."
"그렇담 왜놈하고 함께 오기는 왜 와."
"오가다의 경우가 좀 다릅니다."
"다르긴 뭐가 달라."
"첫째는 인성형과 오가다의 관계가 단순한 선후배라기보다 아주 밀접한
사이지요. 그리고 지난번 지진 때 인실이는 오가다랑 함께 뛰었습니다.
오가다를 일본인으로 보기보다 동료로 생각했을 거구 사실 제 지신도
오가다에 대해서만은 일본인이란 저항을 안 느끼니까요."
"젖비린내가 좀 나기는 나더라만,"
"착하지요. 오가다 도움을 받은 친구 말이 감격했다는 겁니다. 이
자식아, 그리 쉽게 친일파 되지 마라 하고 농삼아 했더니 그런 암은 안
통하다 하더군요. 땀에 흠씬 젖어서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긴쌍 나랑 빨리
가요! 하며 하숙에 뛰어들더랍니다. 오가다 그자에겐 정말 맘을 꼬부릴
수가 없더군요."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서의돈이 물었다.
"인성일 만나본 지도 오래됐다. 요즘엔 뭘 한 대?"
"집에서 하는 제재소 일을 도운다 하든지,"
"대학 학부 나와서 제재소 일을 해?"
"생각이 따로 있겠지요."
"이삼 년 동안 세상 많이 변했다. 하긴 집안일 도우는 거야, 임명빈같이
우둔한 작자가 누이동생을 친일파한테 바치고서 교장자리 얻어내는
세상이고 보면,"
"아시면서 억지말씀만 하십니다. 작위를 받았다 해서 조병모 씨를
친일파라 할 순 없지요. 결혼도 본인 의사였다는 것은 선생님이 더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
"형하고도 얘길 했지만 임선생님이 그 집안에서 설립한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한 것은 피차를 위해 잘 맞아떨어진 일 아닐까요?"
"자네 형이야 으레껏 그랬을 테지. 황태수와 단짝이 되어 돈버는 것도
애국심이요 독립하는 방법의 하나다, 거창하게 민족자본의 육성
운운하지만 말이야. 방법은 뭐든 좋다, 결과만 얻는다면, 그따위지론, 독사
독이 오른 빈사자에게 화경 들이대어 문 자리 살피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일단은 그 지론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일고 있는 물산장려운동은 미약하지만,"
"미친소리 말어. 개미 한 마리 기어올라가는 격이다. 그것으로만 그칠 줄
아나? 아주 복잡해져."
"그렇게 말씀하실 것을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한 마리라도
기어올라가는 편이 안 기어올라가는 것보담이야 낫지요."
"나아? 어째서? 기어올라간 끝이 어딘 줄 알고나 하는 소리야? 내가
이런다고 무슨 사상의 사주를 받았다는 오해를 해도 별수없네만, 앞으로
그것이 안이한 구실, 자기 변명으로 쓰이게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물산장려운동의 지금 실정으로 본다면 극언하여 감상주의, 하나 더
붙이자면 감상주의적 애국심이 중심이 되어 있어. 오늘날 실정을 명확히
알기 위하여 중국과 인도를 예로 들어보겠네. 중국의 경우 오사운동과
올해 들어서 여대 회수 문제와 더불어 일어난 일화 배척, 일상품
불매운동을 두고 생각할 때 사실 중국에서의 민족자본이란 무시할 수 없고
, 세계대전 덕분에 중국의 공업이 장족의 발전을 했으며 시장도 확보한
셈이데, 하기야 구미 각국이 전쟁 뒷수습을 끝내고 산업을 정비하여
또다시 그네들 상품을 중국 땅에 쏟아부을 기미는 거의 확실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주권은 가지고 있고, 그런데도 일화 배척, 일상품 불매운동에서
학생, 지식인, 노동자, 자본가의 합세는 어디까지나 외형이요 내부에서는
엄연한 한계가 있는 게야. 자본가들 좋으라고 하는 운동인줄 알어? 인도의
경우는 성격이 달라. 그곳에서의 소위 물신장려란 민족자본 육성에 목적이
있기보다, 그러니까 물량이 아닌 간디를 중심한 저항 정신의 구심운동으로
봐야 할 게야."
"그렇다면 우리라고 다를 게 뭐 있습니까. 민족자본의 육성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저항 정신의 구심운동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선생님이 어째서 부정적으로 보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권이 없는 곳에 민족자본을 육성한다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에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되어가는 꼴을 보아, 저항
정신의 구심운동과도 거리가 멀어. 선우일의 이론대로라면 더욱 그러하다.
사실 물산장려회란 빛좋은 개살구야. 민족분열의 씨앗이지. 총독부놈들 그
일에 대해선 아주 소극적이거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살찐
돼지 몇 마리 만들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잡아먹자, 그놈들 내 땅을
먹었지만 국으로 먹은 줄알어? 횡재한 것도 아니구. 식민지 통치에는
귀신이 다 된 놈들인데, 정책면에선 상당히 길게 재다보는 게야. 쓸개 빠진
놈들은 삼일운동 때문에 왜놈들이 혼비백산하여 유화 정책을 쓰게
됐다면서 뭐 하나 따낸 듯 말하지만 어림없는 소리, 총칼보다 그놈의 유화
정책이라는 게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어. 우리 합방 시의
일을 생각해보자. 소위 매국노, 반역자, 그처럼 처참한 제물이 그리
흔할까? 그리고 떠 작의 받은 자, 연금 받은 자, 그자들이 평범했던 백성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지 않아? 그들이 반역자 대신 애국자였다면 상당히
비중이 나갈 인물인 것도 사실일 게야. 그게 소위 유화라는 올가미를 씌운
결과였지. 생각해보아, 총칼로 죽이느니보다 산송장을 만드는 것이
얼마만한 이득을 가져오느냐를. 첫째, 백성들의 분노가 손실되다. 일본에
대한 분노보다 매국노, 반역자, 친일분자에 대한 분노가 다 강한 것은
자네도 알 만한 일이 아니겠나? 백성들의 분노는 힘이야. 힘을 분열시키는
것은 정복자들의 금과옥조야. 둘째, 매국노 반역자, 친일파, 그런 자들도
있는데 내가 하는 일쯤, 하고 백성들 양심에도 타협의 소지를 마련하거나
또 힘이 약화됨을 느끼며 체념하는 것으로써 그나마 나는 깨끗하다는
자위에 빠져버린다. 만일에 그들이 매국노가 아니었더라면, 반역자가
아니었더라면, 친일파가 아니었더라면, 유화책의 올가미를 쓰지 않고
총칼에 쓰러졌다면 쓰러진 그 지체가 힘이었고 분노의 불덩어리는 똘똘
뭉쳐서 왜놈들 진지로 굴러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거지. 내가
물산장려운동을 반대하는 것도 바로 지금까지 말한 이유 때문이야."
물산장려운동 얘기가 나오자 선우신은 여전해 동의할 수 없다는 눈빛을
띠었으나 다음 얘기를 들어보자는 태도로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내 살림 재 것으로, 참 좋지. 구보다 이상적인 것이 또 어디 있을꼬?
민족자본의 육성, 그 얼마나 번듯한 얘긴가. 그러나 어떻게 민족자본이
육성되겠나, 왜놈들이 문틈을 내어주지 않는 한. 어째 왜놈이 문틈을
만들어주었겠나, 만들어주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주의 보호책과
비슷한 이유 말이야. 이미 국토는 그들 손아귀 속에 있고 이제 그들의
자본은 완벽하게 뿌리를 내렸다. 농민의 대가리 수에 비하여 지주가 몇 놈
되겠나. 또 노동자들 대가리 수에 비하여 기업가의 대가리 수가 몇이나
되겠나. 그래도 모르겠어? 특히 기업에 있어서는 불리한 조건 영세한
자본이 유리한 조건 풍부한 자본을 대항해나가자면 누가 희생을 해야
하겠나. 노동자야. 피땀을 싸게 팔아야 하고 피땀을 더 흘려야 하는 길밖에
없어. 몇 놈 살찌는 것으로 합방시의 양상이 그대로 되풀이되는 게야.
심각한 분열의 씨앗이 생기는 거지. 내 친구 황태수의 경우를 들어봐도 알
만한 일이다. 자본을 굴리자면, 경제적 독립을 외치자면, 영세한 이윤
분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황태수는 부자요 호의호식하고 수만금을
가졌으면서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결과밖에 얻는 것이 없다는 얘기야.
경제적 독립, 혹은 민족자본의 육성, 거룩한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혹사하며 착취한다는 치명적 고질을 안고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총독부가 노리는 바요, 소극적인 방해는 인도와 같은 정신운동으로 번질
것으로 고려하는 때문 아니겠나? 인도는 눈을 떠라! 눈을 떠라! 근대화를,
경제적 독립을 외치는 그런 시점에 서 있는 게 아니야. 물론 네가 나보다
거 잘 알겠지만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오히려 근대화의 물결을 막으려는
양상이지. 그렇기에 무저항의 투쟁 방법이 성립될 수도 있는 거구. 사실
일본은 사회주의의 물결에는 상당한 공포심을 가지고 대비하는데 이번에
겪은 진재에 있어서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을, 폭발하려는 군중들 본능의
제물로 삼은 것을 예로 들어도 알 만한 일 아니겠나.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혼란을 틈탄 폭동을 예상하고서 선수를 친한 미끼였고
자네도 알다시피 사회주의자 오오스기 사까에가 헌병에 의해 살해된 일만
하더라도, 하여간 머지 않은 미래에 필연적으로 부딪칠 사태를 생각하여
불리한 조건, 영세한 자본인 조선 기업가들에게 물산장려운동을 계기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젖줄을 물리면서 방패를 삼으려는... 내 생각이
극단일까? 과연 극단일까?"

2장 오가다 지로

바람 소리가 스산스러웠다. 곡선의 바람 방향을 느낄 수 있는,
스산하지만 흐르는 소리. 인실은 열심히 뜨개질을 한다. 우울하게 가라앉는
마음, 마음을 바늘이 실을 감아올리는 반복의 동작으로 제자리에 놓아주는
것 같은, 그래서 조반이 끝나자마자 손에 든 뜨개질을 인실은 영 놓질
못한다.
"무슨 놈의 바람이 밤새껏 불더니만 여직도 자질 않는구."
할아범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실은 실뭉치를 끌어당기며
들창문을 흘끗 올려다본다.
하늘은 흐려 있지 않았다.
'내가 뜨개질이나 하고 있을 처진가?'
공부도 해야 하고 찾아갈 곳도 많았다. 그러나 인실은 두문불출하고
있는 것이다. 집안 사람들은 동경서 너무 끔찍한 일을 겪어서 그런가
보다고들 근심이었지만 인실은 서울역에서 선우신과 서의돈을 만난 일이
머릿속에 눌어붙어 좀처럼 지워버릴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사소한 일인데
왜 그 일에 집착을 하며 생각할 때마다 불쾌한지, 어쩌면 오가다와 함께
온 일이 후회스러웠는지 모른다. 오가다의 삼정이 호의 이상의 것이라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일본인 아닌 조선청년이었다면? 때때로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에 인실이 선우신과 서의돈을 만난
일이 잊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문간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아씨, 계동 큰아씨가 오십니다요."
할아범 말에,
"애고머니나. 큰아씨 오신다구?"
오라범댁 양순의 음성이다.
'언니가 날 보러 오나 봐.'
그러나 인실은 뜨개질을 계속한다. 문간에선 여자들 웃음소리, 인사를
주고받는 목소리가 얽힌다.
"인실이 보러 온다온다 하면서도 말예요,"
"그러잖아도 왜 한번 안 오실까 했어요."
"글세, 아이가 아프질 않나, 나들이 가신 시어머님은 전에 없이 더디
오시고, 속이 상했어요."
인경의 푸념이다.
"그런데 이 반가운 손님은 어떻게 함께 오시게 됐어요?"
'누가 함께 왔나?'
"우연히, 오다가 만났지 뭐예요? 그냥 헤어질 순 없잖겠어요? 막 끌고
왔어요."
"네, 바로 끌려왔어요. 하하하..."
목이 쉰 듯 남자 목소리 비슷한데 귀에 선 음성이며 웃음소리다.
"잘 오셨소. 이렇게라도 해서 만나야지. 자아, 추운데 어서, 작은아씨
방에 계세요."
"그럼 인실이 방에 들어가서 잠시 기다려줄래? 안에 들어가서 어머니
뵙고 갈게."
인실이 방으로 오는 기척이 난다.
"요즘엔 어떻게 지내시지요?"
양순이 묻는 말이다.
"누구 데려가는 사람도 없고 삼십 넘은 생과부 뻔한 것 아니겠어요?"
"데려갈 사람이 없는 게 아니겠지요. 안 가시는 게지. 일전에 쓰신 글
저도 읽었어요.『신여성』에 쓰신 글 말예요. 속이 시원합디다."
"아아,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 그런 글썼다 해서 난 독신주의자는
아니랍니다."
거침없이 얘기하며 인실의 방으로 쑥 들어선 여자는 뜻밖에 강선혜였다.
"젊은 아이가 무슨 청승이냐? 시간이 아깝다, 뜨개질이라니,"
인실이는 발딱 일어서며
"안녕하셨어요."
인사를 한다.
"왜 아니랍니까. 한창 좋은 시절인데 두문불출이지 뭐예요."
호기심에 가득 부푼 양순이 따라 들어서며 말했다.
"코흘리개 인실이가 언제 이렇게 컸지? 길에서 만나도 좀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세월이 빠르고 나도 늙었는가 보다."
외투를 벗고, 실크 양말을 신은 날씬한 다리를 뻗으며 선혜는
새삼스럽게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날 기억하겠니?"
"기억하실 거예요. 큰아씨 출가 전에 노상 오시지 않았어요?"
양순이가 대신 말했다.
"그래도 선혜씬 조금도 늙지 않았어요. 옛날 그대론 것 같아요. 여자가
혼자 살면 다 그런가 보지요?"
갈색 체크무늬 투피스에 노란 색 스카프를 맨 강선혜 차림을 이모저모
살펴보면서 양순은 이야기에 굶주린 여자같이, 인실의 존재는 잊은 듯
도맡아 말을 한다. 강선혜는 인경하고 영성여학교의 동기동창이다. 학교
다닐 때는 단짝이었고 졸업 후 엇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했는데 선혜는
내소박을 하고 동경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오라범댁 석양순은 이들보다
이태 전에 다른 여학교에 입학하여 이 년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유인성에
시집을 왔으니까 시누이와 강선혜하고 선후배의 관계는 아니었다. 양순은
호기심이 많고 허영도 적잖은 여자다. 살결이 고운 것 이외 별 특징이
없는 용모였으나 인성은 아내를 매우 사랑했다. 강한 호기심과
허영심까지도 철부지도 간주하며 너그럽게 감싸주었고 최고학부까지 나온
자신에 비하여 학력이 모자라고 때론 무식꾼같이 아는 것이 없는 아내에게
불만을 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인실은 올케를 싫어했다.
'만풍수 집안 망친다더니 저런 여자를 두고 한 말일 거야.'
살림 살고 아이 기르며 바깥세상을 모르는 양순이지만 여학교를 이
년까지 다녔으니 나도 신여성이라는 자부를 항상 지니고 있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를 좋아했고 지식이 많은 여자를 존경하면서 자신도 애써 그
대열에 끼여들려는 경향이 짙었다.
"오면서 인경이한테 얘길 들었다만 이번엔 혼났었지?"
선혜는 양순이를 뿌리치듯 인실에게 말을 했다.
"좀... 혼이 났어요."
인실이 웃었다.
"씹어먹을 놈들, 인실이 네가 무사히 돌아온 것은 다행이다만 지진이
그만 정도로 그친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몽땅 둘러 빠졌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니."
"선혜씨도, 끔찍스런 말씀 마세요."
양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왜요? 내가 못할 말 했나요? 죄 없는 조선사람들 개 잡듯이 잡아죽인
놈들, 무슨 악담인들 못할라구요? 나도 일본서 한 삼 년 지냈지만
그놈들이 그렇게 악독할 줄은, 씨를 말려야 해요, 씨를!"
"그런 말하면 잡혀가요."
"잡아가라지요. 나 무섭지 않아요."
"약소민족이니까 할 수 없어요."
" 이 댁 유선생은 항일의 기수라 들었는데 언니는 형편없는
겁쟁이군요."
"그러니까 최고학부까지 나와가지고 남처럼 출세도 못하니 않아요."
인실이 바람 부는 들창 밖을 올려다본다.
"하기야 뭐 내 아무리 지껄여본들 이불 밑의 활개치기지만 말예요. 처음
동경서 돌아온 사람한테 얘기를 들었을 적에는 나 만주로 가려고 했어요."
"만주는 왜요? 독립운동 하시려구요?"
하고는 양순이 깔깔 웃는다. 선혜도 싱긋이 웃는다.
"독립운동도 미적지근했죠. 중국하고 만주 같은 곳에선 여자들도
큰소리친다니까 비적단의 여두목이나 될까 하고 생각했지요. 하하핫
하하하."
"잘 어울릴 것 같애요."
두 번째 인실이 입을 뗀다.
"그렇지? 첫째 내 목소리에서부터 덩치도 크겠다. 어째 잇몸이
근질근질해지는군."
"하긴 선혜씬 배짱이 있어서 남자 같으니까, 여자도 인간이 되자하며
용감하게 남자를 공박하고 쓴 그 글만 하더라도,"
"글 얘기를 하면 나 같은 여자도 부끄러운 생각이 든답니다."
"부끄럽기는요, 당당하지요."
"실은 쓰려고 해서 쓴 게 아니랍니다. 언니는 모르시겠지만 본정통에서
찻집을 하나 차렸지요. 지금은 때려치웠지만 오아시스라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대개 학생, 문인들인데, 나도 그런 사람들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래 우리 찻집을 드나들던『신여성』지의 김상태, 시도 쓰고
하는 사람인데 글 하나 써보라고 권하지 않겠어요? 못 쓸 것도 없다,
그것도 배짱이었어요. 문장은 김상태가 좀 고쳤지만 모두들 읽고 문재가
있다 하더구먼."
선혜는 코를 벌름거렸다.
"인실아."
인경이 들어왔다.
"언니!"
"어디 얼굴 한번 보자."
인경이 인실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들여다본다.
"수척하구나.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 무사하다는 편지가
왔다 하길래 겨우 맘은 놓았다만 진작 오지 않고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방학 때까지 버텨본 거예요."
"고집은 여전하군."
"얼굴을 보아. 콧대 높게 안 생겼는가. 잘했어. 여자라도 오기와 고집은
있어야 해.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온 사내자식들보다 월등하다."
선혜는 인실을 추켜세운다.
"특히 인실이는 눈이 좋다. 이지적인 아름다움이 있어. 어릴 적에도 눈이
좋다 생각했는데 눈 하나가 얼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단 말이야."
"선혜 네가 아무리 그래도 인실인 좋아 안 할걸? 찬물 한 모금도 가는
게 없을 텐데?"
했으나 인경이는 동생을 칭찬하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인실이는 쑥스럽게
웃는다. 인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양순은 새초롬한 얼굴이었고.
"아닌게아니라 찬물 한 모금도 나오는게 없군. 언니,"
"네."
"뭣 좀 주십시오. 십여 년만에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푸대접하깁니까?"
"성미도 급해라. 어련할까 봐요?"
양순이 나간다. 찬모에게 점심을 지으라 일러놓고 급히 되돌아온다.
인경이는 마치 어머님처럼 인실의 손을 쓸러주면서,
"나도 대강 네 형부를 통해서 듣긴 했다만 굉장했다며? 조선 사람들
많이 죽었다는 얘긴데 그게 사실이냐?"
"사실이에요."
"너는 그때 숨었는냐?"
"아니오."
"그럼,"
"여자, 또 학생이니까 조선 여잔 줄 몰랐던 게지요. 학생들은 대부분
무사했어요. 일본 사람들이 숨겨주기도 했었고,"
"나도 그런 말 듣기는 했다만, 아이 밴 여잘 배를 갈라 죽였다 그런
얘기도 돌던데, 사실이니?"
"사실이에요."
"짐승만도 못한 놈들!"
인경의 얼굴이 벌개진다.
"끔찍스러워서 온,"
양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선혜는 미리 힘을 뺀 탓인지 잠자코
있었다.
"나야 뭐 집안에서 아이나 기르고 살림하는 여자니까 뭘 알겠나만. 네
형부 말이 앞으로 점점 더 나빠질 거라 하더구나. 이젠 왜놈들 마음놓고
차근차근 다 해먹을 가다 그러지 않겠니?"
"형부 말씀대로예요. 조선민족을 깡그리 없앨 수도 있겠지요. 그러고도
노예매매를 안 하는 저희들은 미국인보다 신시라 하더군요"
"망해도 말이야, 어쩌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기척도 없이 이리 망했느냐
말이야."
선혜는 콤팩트를 꺼내어 콧등을 두드리면서
"대궐 안에서 쓱싹 해버렸으니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망할밖에. 상감이고
고관대작이고 정신 차릴 겨를이나 있었겠어? 동학란 때 꽝! 청일전쟁으로
꽝! 노일전쟁이 또 꽝! 기부터 죽여놨으니 망해도 창피하게 망했지. 맨날
해봐야 그 얘기가 그 얘기, 이젠 흥미도 없어. 뜯어먹든지 찢어먹든지 식성
좋은 놈들 맘대로 하라지. 저라고 천년 만년 그러겠나? 망할 날도 있겠지.
그렇게라도 맘먹어야 살지 화통 터져서 못 살아."
"요즘엔 다 그런 것 같애. 될 대로 되라는 기분,"
"그렇지만도 않아요. 전쟁 때 경기가 좋아서 재산 모은 사람도 많고
생활 수준도 나아진 편 아닙니까?"
"그래요?"
놀려대듯 선혜가 반문한다. 인실과 인경이는 오라범댁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터여서 뚱딴지같은 말엔 관심 없다는 듯 잠자코만 있다.
"새 양옥을 짓고 벽장도 마련하고 우리 친구들 중에는 그런 사람도 더러
있어요. 우리 그 양반도 의사 공부나 했더라면, 아무리 어쩌구저쩌구 해도
할 구 없어요. 조선 사람은 그저 의 사, 변호사, 업신여김 안 받고 돈벌고.
검사 판사도 좋지만 친일파 소리들을 거구요. 하기야 뭐 군수 한다고
욕하는 사람도 없더군요. 대우만 받데요.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중인
계급은 옛날보다 훨씬 좋아진 것 아니에요?"
"인실인 무슨 과야?"
선혜는 양순의 말은 안 들었다는 투로 인실에게 물었다.
"가사과예요."
"너도 가사과야?"
"요즘 와서 후회하구 있어요."
"너의 올케언니 말씀대로 의학이나 할 것 그랬나? 소질이 있다면
미술이나 음악도 괜찮은데,"
"그런 것엔 소질 없어요."
"전부, 너도나도 유학했다 하면 가사과야. 여학교는 어딜 나왔어."
"어디긴요, 명화여학교예요. 우리 작은아씬 우등만 했답니다."
양순은 화제에 끼여들려고 애를 쓴다.
"그렇담 이명희한테 배웠겠구나."
"배우다마다요? 애제자였다나 봐요. 얘기가 났으니, 잘 아세요?"
"알다뿐이겠어요? 동경서 한 기숙사에 있었어요."
"아아, 그러세요?"
양순이 감탄하듯 말했다.
"잘사니?"
인경의 말이다.
"잘살겠지 뭐,"
"어째 말이 그러냐?"
"어련하겠어요? 소문이 자자하데요. 명희선생의 오라버니하고 우리집
그분하고는 친분이 두터워서, 새로 설립한 학교의 교감으로 와달라는
교섭도 있었어요. 교육도 최고로 받고, 명희선생같이 행운인 사람도 드물
거예요. 가지는 물건은 모두 박래품이요, 다이아 반지도 젤 큰 걸 갖고
있다나요? 흠이라면 재취라는 것뿐이지. 명희선생도 노처녀였으니까
그거야,"
숨이 가쁘다. 질투 때문에 헐뜯지는 않는다. 그저 선망과 동경일 뿐,
그런 면에선 부해무익한 여자다.
"요즘도 명희선생님을 만나세요?"
인실이 궁금한 듯 묻는다.
"요즘엔 별로 찾아가지 않지. 조용하가 날 싫어하거든."
"명희선생님이 그런 사람하고 결혼할 줄은, 너무 기대 밖이었어요. 만나
뵙고 싶지만 공연히 배반당한 기분이 들어서,"
"작은아씨,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여자 치고,"
계속하려는데,
"그렇게 된 데는 약간의 책임이 내게도 있어."
"그게 무슨 말이냐?"
인경의 말이다.
"글세 그렇다니까."
"애두 참, 묘한 말을 하는군."
양순은 눈을 깜박깜박한다. 이해 못하는 얼굴이다. 이때 마침 안에서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양순은 아쉬운 듯 일어섰다. 그가 나가자
"옛날과 달라진 곳이 없네. 조금도 닦여지지 않았어. 그 훌륭한 남편의
부인이 왜 저 지경이냐? 날 것도 아니고 익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일자무식인 편이 훨씬 낫겠다."
"입이 나쁘기론 여전이구나. 식구들 앞에서 흉보는 것 좋잖아."
"인경이 넌 역시 이 집의 큰딸답다. 아암 그래야지, 하하핫... 나 사실은
그래서 이 집 식구들이 좋더라. 너의 오빠 아니더면 너 올케 영락없는
소박감이야."
"내소박한 주제에 무슨 소리야."
"참 그랬었지."
"그러니까 조용하라는 사람도 널 싫어하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내소박할 것을 사주할까봐. 그러나 그럴 형편은
아니야. 수대로 이어져 내려온 그놈의 양반 기질 때문이지.
양반이다뿐인가? 귀족 아니야?"
"너 채임이라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얘길 하려면 길어."
"그러니까 더 궁금하네."
"너도 별 수 없는 여자로군. 실은 나도 얘기하고 싶었지만 너 올케
뭉개고 앉는 꼴이 보기 싫어서,"
"너무 그러지 마. 한 가지 버릇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실은 지금 명희 처지가 말이야, 꽃구름 탄 것처럼 그리 행복하질 못해."
"좋잖은 일이라도,"
"애당초부터 그럴 요소가 충분히 있긴 있었지. 실은 말이야, 그들 인연은
나 때문이었어."
"네가 중매라도 들었어?"
"중매 든 거나 마찬가지 결과였지. 넌 잘 모르겠지만 조용하에게
윤덕화라고 사촌누이가 있었거든. 그애하곤 일본서 함께 공부를 했으니까
신분은 달라도 친구인 셈인데 죽으려고 그랬던지 자궁암으로 죽었지만, 병
때문에 외가집에 와 있었지. 하도 오라오라 하길래 명희하고 찾아간 것이,
조용하 형제를 만나게 된 계기였다 이거야. 그때는 덕화도 자기 병이
무엇인지 몰랐지. 외삼촌과 친한 미국인 의사가 귀국하여 없었기 때문에
외가에서 의사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말하자면 심심했던 시기였단 말이야.
그것으로 그쳤다면 몰라. 명희도 저렇게는 안 됐을는지, 덕화가 입원하게
되고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는데 안 가볼 수 있겠어? 명희하고 또 갔었지.
그때 병실에서 두 번째 마주치게 된 것이 또 그 형제라. 형은 금슬이
좋잖지만 부인이 있는 몸이었고 동생은 미혼이니까 설령 로맨스가
벌어지더라도 그 동생이거니, 지금 생각해보면 조용하가 맨 먼저 동생
찬하의 감정을 알아차렸던 것 같단 말이야."
인경과 인실의 얼굴이 순간 심각해진다.
" 그야말로 전광석화였지. 이혼 말이야. 상당한 위자료를 내놨다는 거야.
그러고는 덕화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학교에다 전화질이니
명희와 조용하는 병실에서 또 몇 차롄가 만나게 됐었지. 명희의 결혼은
한마디로 비극이야. 아들 형제 두 사내가 명희를 만나는 순간 연정을
느꼈다는 것은 참말로 짓궂은 운명 아니겠니?"
"그럴 수가,"
"소설 같지?"
"뭔가 으스스해지는는군. 형이 나쁘다, 이애. 동생의 감정 알았으면 응당
미혼인 동생을 위해,"
"애정이란 어디 그런 건가? 또 우리 사회에선 장자의 권위의식,
독선적인 기질은 공통이 아니겠니? 조용하는 그런 면에서 더했으면
더했지."
"그럼 명희선생이 큰아들하고 연앨 했단 말이니?"
"그랬다면 문제는 간단했지."
"그럼? 동생을!"
"그것도 아냐. 내가 보기엔 노처녀의 처지를 청산하는 기분, 그랬기
때문에 쉽사리 이루어진 혼인이었을 거야."
"약간의 까다로움이 있긴 있겠지만 그렇담 명희선생한텐 잘못이 있는 건
아니지 않아?"
"그게 그렇지 않은 것이 인간사라. 그래서 예술도 있고 고통도 있고
기쁨도 있고,"
"그래, 그럼 동생은 어떻게 됐어."
"현해탄으로 막혀버렸지."
"...?"
"동경서 돌아오지 않는 거야.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집안에서 조금씩은
알게 됐다. 그래 명희 앉은자리가 편하겠어? 편하겠느냐 말이야. 바로
바늘방석이,"
"명희선생의 잘못인가?"
"그러나 여자 하나 때문에 아들 하나 잃는다는 기분이 안 들 부모가
어디 있겠어? 집안이 망한다는 생각도 들 거구 말이야."
"그건 그래."
"그러니 비극이다 그 얘기야."
인실은 남의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애제자였다는
지난날을 생각한 때문도 아니다. 인실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고통의 실감
속에 오가다의 모습이 자맥질하듯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인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뜨개질 감을 손에 들고 손가락에 실을 감는다.
"이 애가 얘길 듣다 말고 뜨개질은?"
인실은 깜짝 놀라며 뜨개바늘을 떨어뜨렸다.
"충격을 받았구나. 하니만 인실이도 이제 어린애는 아니니까."
"공부 때문에 인실이도 혼처 늦어질까 걱정이야."
"무슨 소리, 인실인 아주 줏대가 강해 보여. 저 턱 좀 보라구.
여자치고는 선이 여간 강하질 않아. 명희는, 그 애는 만사에 소극적이며
답답한 면이 있었지. 연애 한번 못하고 그야말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결혼을 하고 보니 가시 면류관이라. 만남이라는 것은 항상 그렇게
운명적이란 말이야."
하는데,
"작은아씨! 작은아씨!"
양순이가 허둥지둥 쫓아온다.
"일본 사람이 찾아왔어요!"
선혜와 인경이 어리둥절한다. 인실이 일어났다.
"밖에 있어요?"
"오라버니도 안 계시고 어쩌겠어요? 할아범더러 오라버니 오시라
할까요?"
"아니에요. 제가 제재소까지 데리고 가지요."
인실이 외투를 걸치고 목도리를 두르는데,
"누구니? 할아범더러 데려가라면 될 거 아냐? 네가 갈 갓까지는,"
"일본인이지만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될 사람이에요. 그랬다간 오빠가
화내실 거구요."
"네, 큰아씨, 그렇답니다. 그 일본 사람은 조선학생들의 은인이래요.
오라버니가 동경 있을 때도 젤 친한 가리였다나 봐요."
양순은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말했다.
인실이밖에 나갔을 때 오가다는 두둑한 반코트에 털실로 짠 모자를
깊숙이 쓰고 호주머니 속에 두 선을 찌른 채 거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왠지 쓸쓸한 모습이다.
"오가다상."
"아, 히토미상,"
인실의 한자식 일본어 발음은 닌지쯔렸다. 그러나 일본식 이름으로
부르자면 인자는 히토 실자는 미가 된다.
"닌지쯔라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괴상하지요. 나는 앞으로 히토미상이라
부르겠어요. 조선말로 불러드리는 것이 젤 좋겠지만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 내가 바보로 보일 테니까요."
언젠가 오가다는 그런 말을 했다. 아닌게아니라 한자식 일본어 발음인
닌지쯔란 일본식 마술사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가다는 히토미라는
호칭을 남의 앞에서의 사용하지 않았다. 인실이는 일본 여자가 된 것
같아서 싫다고 했지만 둘이 있을 때는 꼭 히토미라고 불렀다.
"오빠, 제재소에 계세요. 거긴 한번도 안 가보셨지요?"
"안 가봤습니다."
"저랑 가세요."
"그럽시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섣는다.
"조선의 추위란 생! 하니 뭔지도 모르게 쇠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정신이
번쩍 나는 듯 상쾌하지만요."
"상쾌하지만 어떻다는 거지요?"
"히토미상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제가 쇠 같은 여자로 보이나요?"
"쇠같이 보이진 않지만 생! 하니 소리가 날 것같이 찹니다."
"사실 조선 사람 기질에 그런 것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인실은 얘기의 방향을 돌려버린다.
"여행이란 이래서 좋은 건지 모르지요."
"네?"
"고아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내 친구들이 많고 모두 나에겐 민족적
편견 없이 대하는데 말입니다. 하기는 고아 같다는 느낌은 전혀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건 그러실 거예요. 저도 동경 있을 때는 그랬으니까. 어떠세요?
황량하지요? 우리 나라가,"
오가다는 인실의 옆모습을 쳐다본다. 한참 있다가,
"겨울인 탓만은 아니겠지요. 화량합니다."
인실은 오가다의 눈길을 느끼며 시선을 떨어뜨린다. 명륜동에서 창경원
돌담을 끼고 걷는다.
"여기 들어가 보고 싶군요."
"아직, 안 가보셨어요?"
"아직, 옛날 임금님이 사시던 곳이지요?"
"임금님 사신 곳은 저 넘 경복궁이에요."
"그렇습니까."
오가다는 창경원의 정문을 미련스럽게 바라보곤 하면서도 들어가자는
말은 안 하다. 인실은 방금 고아 같다는 오가다의 말이 생각났고 옆에서
걷고 있는 여윈 사내가 실제 고아같이 뵈기도 했다.
"그럼 창경원 구경하고서 오빠한테 가볼까요?"
"그래주시겠습니까? 오빠 만나는 것 조금도 바쁘지 않소."
갑자기 기운이 생겨난 듯 오가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입장권 두
장을 사들고 두 장을 사들고 두 사람은 창경원 안으로 들어갔다.
겨울철이어서 사람들이 있을 리 없다. 그새 바람은 가라앉고 푸른 하늘은
차갑고 맑았다. 창경원 안의 나무에는 더러 눈이 실려 있었다. 인실이는
이내 후회를 한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서는 안 되는데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두 사람만의 호젓한 장소는 두 사람 사이에 굴이 소름으로
하여 울둑불둑한 것처럼 느껴진다. 아이처럼 좋아하던 아까와는 달리 몹시
추위를 타는 듯 두 어깨를 움츠리고 걷는 모습은 을씨년스럽고도 쓸쓸해
뵌다.
"히토미상."
"네."
"춥지요? 춥지 않습니까?"
"별로 춥진 않아요."
"내 반코트 안 입으시겠어요."
"춥지 않다니까요."
"그러세요..."
다시 침묵에 빠진다. 길이 미끄럽지는 않았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은
길켠에다 쓸어 붙여 언 채 있었다.
"히토미상."
인실은 으스스 떤다. 오가다의 음성은 두려움에 질려 있는 것만 같이
전해왔던 것이다.
"히토미상은 일본인을 싫어하지요?"
"네."
"나도 싫어합니까?"
"아니오."
"나도 일본인인데,"
"..."
순간 오가다는 두려움에서 빠져나온 듯 엉뚱한 말을 했다.
"나는 오오스기 사까에를 좋아했습니다. 이번 진재에 학살당한 오오스기
말입니다. 히코미상도 아시지요."
"네, 알아요."
"물론 직접적인 면식은 없습니다마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고독했던
시기, 한 십 년 전의 얘긴가요? 삼각연애 사건 후 동지들과도 헤어져
고민하던 시기를 좋아합니다."
"왜요?"
"그 인간적인 아픔 때문이지요. 그 사람은 물론 아니키스트지만
조직적인 노동운동가이기보다는 사상가요, 보다는 문예평론가로서의
특색이 짙은데... 인간작인 약점을 들낸 것이 가미 가미찌까 이찌꼬한테
칼질을 당한 사건이었지요. 삼각 관계한 어휘 자체가 지극히 불결한
느낌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노회한 사람, 계산이 빠른 사람은 빠지지
않는 함정 아니겠습니까. 이찌꼬라는 이미 있는 애인을 두고 이또오
노에를 사랑했다는 것은 도덕적인 면에서 볼 때 규탄 받을 일이긴 했지요.
그러나 사람에겐 진실이라 하고 잡았는데 진실이 아닐 경우가 왕왕 있는
일 아니겠어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오스기는 위선자가 아닙니다.
정직했던 거지요. 더군다나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본다면 정직한
만용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히려 확실했던 것이지요.
노회했더라면... 잘한 일이라 생각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 운동하는
사람의 심장 문제에서 볼 때, 사상으로 심장에다 시멘트벽을 쳐놓은
것보다는, 나는 오오스기 편을 취하겠어요. 그 사람도 이제는 죽고 없는
사람이며 그의 처 이또오 노에도 함께 참살 당했지만,"
오가다는 걸음을 멈추고 나뭇가지에 쌓인 눈, 얼어서 반짝거리는 눈을
손바닥에 털어서 받는다. 인실이는 오가다가 왜 그 말을 하는가 알 수
있었다.
3장 산호주

오래간만에, 원고료를 받은 상현은 기자, 시 쓰는 친구, 평론한다는
사람들과 어울려 기생집으로 갔다. 청진동에 새로 생긴 집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갔는데 상현은 그곳에서 산호주를 만났다. 전주에 갔을 때
상현을 기화 있는 집까지 데려다준 기생이다. 그때와 다름없이 안색은
검고 깡마른 몸매였으며 여전히 성깔께나 있어 뵈는 얼굴이었다. 놀란
것은 상현이보다 산호주였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기생한테 정한 곳이 따로 있겠습니까? 서방님께선 웬일이시오."
산호주같이 뻑센 여자가 놀라는 것도 수상쩍거니와 어투에도 뭔지
석연찮은 것이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네. 동가식 서가숙, 정한 곳이 따로 없기론 마찬가지야."
"내, 이내서 상현이하곤 기생집 오기 싫단 말씀이야."
전작이 있어 얼굴이 벌건 사내가 말했다.
"계집들 눈엔 매끄럼한 상판, 두둑한 속주머니밖엔 보이는 게 없지."
얼굴이 삼각형인 사내의 말이었다.
"가나오나 들러리 신세, 조선 은행이나 한번 털어먹을까 부다."
"한탄 마라. 박색 보구 침 삼킬 것도 업다구,"
초장부터 거칠다. 일류 기생집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호주머니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허세를 부려보는 것이다. 산호주는 색죽하지도 않고 도리어
경멸하는 웃음을 띤다.
"그러면 이 박색은 물러가겠나이다. 대신 절색을 들여보내겠어요."
"어어, 그럴 것 없다구."
일행은 갑자기 당황한다. 발이 저리기 때문이다.
"가난뱅이 문사, 자네면 족하네. 돈 많은 기름덩이같이 번드르르
못하기론 매일반 아닌가. 절색이 내 치지 되겠느냐?"
"아니옵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상현이
"나가! 나아가!"
냅다 소리를 질렸다. 하마 성깔을 무리지 않나 싶었는데 의외로
공손하게 절을 하고 나서 산호주는 물러난다.
"저런 계집은 톡톡 쏘는 맛이 있어야 좋은 건데 맥풀리는군."
예쁘장한 어린 기생이 아나 들어와서 술시중을 들었다. 사내들은 마시고
떠들고, 마시고는 떠들었다. 박색이니 어쩌니 하고 투정하는 것과는 달리
사내들은 도통 기생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허겁지겁 술을 마셨고 허겁지겁
논쟁을 했고 마치 누가 쫓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좌불안석인데, 그렇다고
쉬이 자리를 뜰 것 같지도 않다. 아까 기화 생각이 문득 났을 때 상현은
산호주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상현은 기화뿐만 아니라 방금
만난 산호주도 잊고 말았다. 뭉뭉한 공기와 열기, 담배 연기, 술 냄새,
나락과도 같은 자포자기가 팽배해 있는 분위기, 그것은 상현에겐 언제나
아편과도 같은 망실의 쾌감이다. 작년 삼월달, 노령 연추에서 오십구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부친을 잊을 수 있었고, 잔인하게 버린 기화도 잊을
수 있었고, 공방을 지키며 시모를 모시고 아이들을 기르는 아내도 잊을 수
있었고, 세상일 모두를 잊을 수 있었다. 마시고 떠들고 이야기는
이어지는가 하면 뛰어넘기도 하고,작가 이모에 대한 성토와 공격은 특히
이들 햇빛 못 보는 문인들에겐 비애와 울분을 해소하는 데 효력이 있었다.
"지가 무슨 성자라고 설교야. 예술은 예술일 뿐 누구를 지도하고
계몽하는 따위, 그건 구역질나게 불순한 거란 말이야. 그럴 양이면 문학
따위 집어치우고 운동으로 나가는 게야."
"엄격히 말해서 문학이란 어느편에 서서도 안 된다. 그게 내 지론이야.
오늘 이시점에서는 비겁자로 몰아붙일 테지만, 비겁자라는 말에도
불사하고 자신의 문학관을 지키고 나가는 거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 할 수
있지. 비겁자 소리 듣는 것 두려워하고 설교 따위,왜놈에게 안 잡혀갈
정도의 저항문학을 하면서 젊은치들의 갈채를 기대하는 그따위야말로
비겁자와 위선자 아니겠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그건 나도 동감이네. 치졸한 것에 애국이다, 독립이다, 혹은
사회주의자다, 하는 옷을 입혀서, 뭐 대단한 것처럼, 득을 보려는,
그것이야말로 사기 행위지. 그것은 결국 옷일 뿐 몸뚱이는 아니란 말이야.
그것들이 몸뚱이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게지만 말씀이야. 한마디로
치졸해.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람도 그렇지. 사실 계몽을 받아야 할 사람
같으면 엄격히 말해서 문학독자의 자격이 없다 그렇게 봐야 해. 안
그런가?"
"흥! 그걸 우리 세대에서 바랄 수 있겠나?"
"때려치우는 거다. 아니면 길바닥에 내놓고 파는 염문소설이나 쓰지".
"그것도 아무나 하는 줄 아나?"
이야기는 또 뛰어서 작년 칠월에 공판이 열린 의열단사건으로 넘어갔다.
상해의 의열단원이 국내폭동을 모의하고 폭탄을 반입하다 발각이
되었는데,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가 관련된 데서 크게 파문을 일으켰고,
아직 공판은 마무리되지 않고 있는 사건이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 이성우가 조직한 항일 단체로서 이미 밀양경찰서 습격
사건, 총독부 습격 사건의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폭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노선이다. 폭탄 반입, 누구나가 그랬듯이 기생집에 앉은 이들도
사건에 관련된 열두 사람 중 황옥 경부에 대해서 왈가왈부,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양론으로 갈리어 한참 떠들썩 하게 핏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공판에서 자신은 가담하지 않았다고 변명한 황옥을 두고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극단적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공판정에서 애국투사로서
면목을 나타내던, 종전까지의 그런 태도를 검토해볼 시기가 되지 않았는가.
이미 의병 시대는 갔어. 유교를 바탕으로 한 개인의 완성이 주되었던
시절은 가벼렸다 그 얘기야. 의롭게 죽는 것도 나쁠 것이 없고 법정에서
재판장을 꾸짖으며 독립을 주장하는 것도 그 영향력을 생각할 때 물론
잘하는 짓이긴 하지만, 그러나 모두가 의인이 되는 동시 자폭한다는 것
말이야, 죽고 나면 그만큼 일꾼도 줄지 않겠느냐, 죽느니보다 살아서 일 좀
더 하고 , 음, 징역 십 년 살거면 오 년 살아서 오 년을 덕보고 기왕지사
우리네야 천하에 없는 졸장부니 술이 창자를 썩게 하고도 음, 그러고 나면
개죽음을 할 것이다마는 그네들이야 좀더 살고 봐야."
"그럼, 그, 그럼, 투쟁에 나선 이상은 이미 버린 목숨이요 그것은
백성들의 목숨인 만큼 아껴야 하는 것이, 그, 그럼, 힘을 막 쓰는 것
아니라구,"
"내 말이 그 말이야. 황옥이 고분고분했다고, 변절을 했는지 그야
모르지이. 그러나 고분고분할 것까지는 없어도, 팔팔 뛸 필요는 없고
능구렁이,"
"듣자듣자하니 모두 제 맘대로 지껄이는군."
상현이 실실 웃는다.
"뭐라구?"
"봉사 코끼리 만지듯 제각기 한마디씩 하긴 하는데 어디 그게 코끼리
모양인가?"
"흥! 잘난 친구야, 그러면 자네 코끼리는 어떠한고?"
"열두 사람 중에 황옥만 빼고 나머지 사람들이 팔팔 뛰었단 말이야?
능구렁이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 자알할 거라구. 비굴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고 형량이 문제될 것 없는 게야. 밖에서 조잘조잘 해봐야 사또
지나간 뒤 나발 부는 격이지. 혁명가들의 모습은 자네들 말보다 훨씬
앞서서 새롭게 틀이 잡혀가고 있는데, 뭐 자네들보다 등신인 줄 알어?
우물 안의 개구리들 집어치워. 시시하다."
시시하다는 상현도 시시했다. 시시한 자신에 대하여 혐오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가. 만주 길림에서 조직된 항일 단체 의열단,
의열단의 얘기가 나와도 상현은 부친 이동진의 생각을 아니 했고 십여 년
전의 그 쓰라린 만주 벌판, 시베리아 벌판의 기억독 되살리지 아니 했다.
새까맣게, 새까맣게 잊은 것이었다.
"거룩한 얘기는 우리들 관내가 아니야. 술은 더 없어? 걱정들 말고 마셔!
얼마든지. 길 가다 옷깃이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라 했는데, 그렇지, 뭐야,
이건 뭐야? 아아 맞어. 낯짝 익은 기생년 하나 있으니까 주머니 걱정 말구,
마시자구."
상현의 술 취한 꼴은 몇 해 전하고도 또 달랐다. 보가 터져서 흐르는 물
같이 낭자하고 흙탕이었다. 또다시 얘기는 이모로 돌아갔고 그의 개인적인
문제까지 들추어 욕직, 그 누구누구의 돈을 떼어먹었느니, 누가 누구 집에
목적으로 술병 들고 갔는니 시시풍덩한 화제들을 늘어놓는데 상현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내가 왜 소설을 쓰는지 알어?"
"알구말구."
"알어?"
"주색잡기, 잡놈, 술값 벌려고 쓰지."
"하하핫 핫핫핫..."
연방 웃으며 방문을 열고 나간다. 달이, 빈 대합실에 전등 하나 매단
것처럼 휑뎅그렁하니 떠 있다. 처마끝과 처마끝이 입맞춤하듯 물려 있는
사각의 하늘, 사각의 마당이 눈도 쓸어버렸는데 달빛을 받고 하얗게,
상현의 취안에는 부시다.
"많이 마셨다. 이놈의 집구석 뒷간이 어디야."
상현은 신발을 걸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이봐! 아무도 없느냐구!"
"네, 서방님."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산호주가 나타났다.
" 너 산호주 아니냐?"
"네."
"이름 한 번 좋았다구. 내 그래서 기억을 했지."
"고맙습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거 참 잘되었다. 한데 볼일 보는 곳이 어디냐?"
저 모퉁이로 돌아가보십시오."
산호주는 방향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상현이 소피를 보고 나왔을 때 산호주는 팔짱을 끼고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춥지 않는냐?"
"춥습니다."
"날 기다리는 게야?"
"네."
"나를 기다려줄 계집이 아직 있다니 기분 나쁘지 않은데? 왜상술은
문제없겠군."
상현은 술냄새를 피우며 산호주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서방님."
"왜 그래? 사랑 고백이냐? 기둥서방만은 관두자."
"보아하니 하도 차림이 허랑하여 제가 많이 참고 있습니다."
"호오? 참는 이유가 허랑한 차림에 있고... 못 참는다면..."
상현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고개를 흔든다.
"서방님, 왜 묻지 않으십니까."
"저를 보시면 기억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하항, 이제 보니까 기생년들 의리로구나. 그래, 기화는 잘 있느냐?"
"잘 안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허랑하게 떠도는 놈이 뭘 어쩌겠나. 그런 얘기는 만석꾼집 아들 놈
보고나 할 일이지. 아아 참 만석꾼 얘기가 났으니 생각이 나는 데에, 하동,
아아 아니지, 진주 최부잣집에 가면 먹여살려줄 게야. 거기 가라고 해."
"참아드리는 거예요."
"안 참으면 어떡허나? 그까짓! 처자식도 버린 놈이 기생 나부랭이,
흘러간 계집 생각하게 됐어? 아이구 취한다. 기화한테 의리 다 하려면
지체없이 술이나 들여보내는 거다. 기화가 사랑하던 이상현 서방님,
하하핫..."
상현이 일어서는데 산호주는 옷깃을 찢어발기듯 강하게 잡아젖혔다.
할말을 아직 못했기 때문에 또 한 번 참는 게요. 앉으시오!"
"이게, 미쳤나? 감히,"
"그래 장하오. 아직 양반님네 기개가 남아 있는 모양이니 희망도 있겠소.
고함 질러서 망신당하기 전에 앉으시오!"
산호주는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쓴다.
"잘 들으시오. 기화언니가 얘기를 낳았소."
"뭐라구?"
상현이 얼굴을 번쩍 쳐든다.
"기화언니가 얘기를 낳았단 말입니다."
"얘기를 낳아?"
바보같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펄쩍 뛰듯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악을 쓴다.
"이상현의 아이니까."
"미친소리 말어. 기생년도 애비 있는 자식을 낳아? 일없어!"
"이 개자식이!"
산호주의 손이 상현의 뺨따귀를 갈긴다. 반사적으로 상현의 손도 산호주
뺨을 향해 날았다. 그리고 다시 덤비려는 산호주의 손목을 꽉 잡는다.
상현의 눈은 미치광이처럼 번쩍번쩍 빛났다.
"잘 들어. 차후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그런 말 했다간 주둥이를
찢어버릴 테다!"
"개자식!"
산호주는 으르렁거렸다.
"뭣이!"
상현이 손목을 놓고 산호주 목에 두 손을 감는다. 안에서는 떠들고
노래하고, 영하 십도가 넘는 밖에는 두 사람말고 얼씬거리는 그림자 하나
없다. 산호주는 상현의 손을 풀려고 버둥거린다.
"죽일 테야! 죽여주겠다!"
짐승같이 이빨 사이로 밀려나오는 상현의 신음 소리. 냅다 밀어 붙인다.
그리고 상현은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간다.
길모퉁이까지 돌아나온 상현은 담벽에 머리를 처박고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살인을 했나? 살인을, 살인을 했나?'
몸은 흔들어본다. 그림자가 따라서 흔들린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좋다 이거야! 기화가 애를 낳아? 낳아? 낳았음 낳았지 내가 살인할 것
없잖아... 애를 낳았다구, 애를 말이지... 낳았다, 나았다....'
상현은 길바닥에 픽 쓰러졌다.
상현이 눈을 떴을 때 피부에 닿은 이부자리의 촉감이 보드러웠다.
그러나 목은 타는 것 같았다.
"물, 물,"
눈은 떠지지 않았다. 힘껏 손을 뻗쳐 물기를 찾는데 입술을 적셔 주는
손길이 있다.
"물, 물,"
남자의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눈을 떠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다시 고통스러운
잠에 빠져들어갔다.
상현이 누워 있는 곳은 산호주가 거처하는 방이다. 산호주의 목을
조르다 말고 외투를 벗은 채 뛰쳐나가다가 쓰러졌는데, 상현이 달아난
것으로 오해한 술친구들이 욕지거리를 하며 기생집을 나섰는데 길에
쓰러진 상현을 발견했던 것이다. 엉겁결에 떠메고 기생집을 되돌아온
그들은 어쩌겠는냐 좀 봐달라, 하고 도망치듯 가 버렸다. 산호줃 술
친구들도 과음으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짜증스런 기분이기도 했다. 자고
나면 정신을 차리겠지. 그러나 상현은 밤새껏 신음했다. 몸은 불덩이 같이
달아서 헛소리를 질렀다. 사흘을 그렇게 앓았다. 왕진 가방을 든 의사가 몇
번 들락거렸는데 병은 급성폐렴이라는 것이다.
"겨우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소. 그러나 며칠은 더 안정해야 할
게요."
의사는 왕진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의사가 나간 뒤
"딱한 양반,"
얼음주머니를 갈아주며 산호주는 혀를 끌끌 찬다. 기화가 아이를
낳았다고 했을 때 그 사실을 떨쳐버리듯 길길이 뛰었고 목을 조를 때
몸서리치게 눈빛이 무거웠던 사내, 가다가 얼음판에라도 미끄러져 뒈져라!
하며 뛰쳐나가는 뒤통수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던 사내, 그러나 이제
산호주 마음에 증오는 없어지고 말았다.
'눈감고 누워 있는 모습은 철 안 든 아이 같다. 이러다가 눈을 뜨면 날
원수 보듯 할 거야. 딱한 양반,'
산호주는 씁쓰름한 웃음을 머금는다. 아버님! 불효자식을 용서하소서,
상현은 계속하여 헛소리를 했었다. 간간이 내가 잘못했어, 봉순이,
용서해주게, 그런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자기
변명도 없이 알몸을 드러낸 사나이의 고뇌를 산호주는 느낄 수 있었다.
작년 가을이었던가, 산호주가 기화를 만난 것은. 만났기보다 찾아갔었다.
산호주에게는 수향이라는 친언니가 하나 있었다. 일찍이 장사꾼의 소실로
들어갔는데 이 삼사 년 동안 장사를 곧잘하여 재산이 불어난 것을 기화로
남편을 졸랐다. 하나 있는 동생에게 요릿집을 차려주자고. 수향의 말인즉
"천서방만 죽어봐, 내 신세가 어찌 될 것인가. 제밋대 잃은 나룻배야.
눈이 화등잔 같은 아들 삼형제, 나한테 돌아올 숟가락몽댕이 하나 있겠냐?
그러니 서울 올라와서 요릿집을 네가 맡아 해주어. 동기간에 니것 내것
따질 것 없이,"
"실패하면 어떡허우?"
"실패할 리도 없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집은 남겠지."
해서 산호주는 군산에 있다는 기화를 찾아갔던 것이다. 들어선 집은
초라한 오막살이였다. 장독대에는 항아리 하나, 단지 세 개가 덩그마니
먼지를 쓰고 있었다. 산호주는 기화가 앓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
빨랫줄엔 또 웬 기저귀가 즐비하게 널려 있지 않은가.
"내가 집을 잘못 찾아왔나?"
중얼거리는데 눈이 불거진 계집아이가 어린 것을 업고 쫄랑쫄랑 삽짝을
들어왔다.
"얘야, 이집이 기화언니 집이냐?"
"몰라라우. 아짐씨 말이여라?"
하는데
"누구 왔냐?"
방문을 열고 기화가 내다보았다.
"언니!"
"아니, 넌 산호주 아니냐."
기화는 완연히 당황해하고 있었다.
"드, 들어와라."
산호주는 팔을 잡힌 채 천장이 낮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짐씨, 아기는 어쩐다요?"
"데리고 들어와."
산호주ㅜ를 흘낏 보며 아까처럼 기화는 당황한다. 산호주는 영문을
몰랐다. 계집아이로부터 어린 것을 받아안은 기화는
"넌 말이야, 음,  가게에 가서 사과 좀 사다주겠니?"
아이를 안고 자리걸음으로 다가서서 이불 사이로 손을 넣는다. 지갑을
꺼내어 오십 전짜리 동전을 계집아이에게 건네준다. 그애가 나간 뒤
"언니, 대체 어떻게 된 거유? 이 애는?"
오륙 개월쯤 됐을까, 아이는 분홍색 저고리에 누분 양회색 두렁이를
둘렀는데 누추한 집에 비하여 차림새가 지나치게 깔끔하다.
"언니, 이애가 누구예요? 설마,"
"내가낳았단다."
"뭐이라구요?"
"..."
"어디서 하나 얻어왔군요. 언니도 참 어쩌려구,"
"아니야, 내 딸이야."
기화는 조심스럽게 젖을 문지른다. 산호주를 빤히 쳐다보던 아이는
얼굴을 돌리고 강아지처럼 젖을 찾는다. 기화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웃었다. 산호주는 벌렸던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젖 넘어가는 소리,
쉴새없이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는 기화의 손길, 배불리 먹은 아이는
젖꼭지를 문 채 잠이 들었다. 기화는 배게를 고르게 고쳐놓고 아이를 누인
뒤 포대기를 덮어주고 옷매무새를 고친다.
"놀랬겠지."
"기가 막혀서,"
"기생이라고 애 못 낳으란 법이 있니?"
"언니 나이 몇이우?"
"서른둘,"
산호주는 새삼스럽게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깜찍하게 생겼수. 크면 천하절색이겠네."
"천하절색이면 뭘 해. 잘못 생겨난걸."
"애아버지는 누구유?"
"..."
"이상현이 그 사람이군."
"....."
"애 낳은 것 알기나 해요?"
기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알면 뭘해. 술만 더 마실걸."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원하던 아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생겨난 건 거두어주어야지요."
"거두어주어? 일신도 감당 못하는 사람이,"
기화는 아주 낡아버린 사람같이 보였다. 다시 기생으로 나서지 못할 것
같았다. 방에는 반닫이 위에 이불 한 채, 가방 두 개가 포개져 있을 뿐,
그리고 아이의 옷가지며 반듯하개 개켜놓은 기저귀가 눈에 띄었다.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수."
"가진 것 팔아가면서 그럭저럭 사는 거지 뭐."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앞으로 어떡헐래요?"
"나도 몰라. 서울서 운삼어른이 조금씩 도와주시지만."
"정성도 지극해라. 말 듣기론 평생을 여자 덕에 한량이라던데, 기생들도
많이 울렸다 하던데 언니한테만은 각별하구려. 허신한 사이도 아닌데
말이유."
"남녀의 정으로 어디 그러시냐? 운삼어른께서는 내게 희망을 많이
거셨지. 끝내 말을 안 듣고 내 마음대로 이렇게 됐지만,"
"그건 그렇수. 언닌 제 손으로 눈 찌른 거유. 언니보다 못한 기생이 지금
좀 날리우? 요즘엔 그왜 소리판, 뭐 그런게 있어서 한 번 부르면 기백 원,
누워서 떡먹기랍니다. 기왕지사 기적에 들었으니, 가무도 못하고 얼굴도
별난 것 아닌 나 같은 나무 기생도 아니겠고, 언닌 잘못한 거유."
"이제와서 그런 말 하면 뭘 하누. 지나간 날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겠고."
마침 계집아이가 사과를 사왔다.
"그럼 넌 집에 가보아."
쟁반하고 칼을 가져온 기화는 잠자코 사과껍질을 벗긴다.
"데리고 있는 애 아니우?"
"이웃집 아인데 틈틈이 와서 애기를 업어주곤 하지."
껍질을 벗긴 사과쪽을 쟁반에 놓는다.
"사과나 먹으렴."
"목이 마르고 속이 답답해서 좀 먹긴 먹어야겠수."
장지문에 가을햇빛이 함빡 들쳐들고 있었다. 어디선지 닭이 한가롭게
낮울음을 잡히고 있었다.
"언니?"
"왜."
"서울 안 가시려우?"
"서울? 안 가겠다."
기화는 잘라말했다. 고집스러움이 그의 얼굴을 딱딱하게 한다.
"안 가겠다는 까닭이 뭐유?"
"하여간,"
"기생질은 안 하겠다는 뜻인 모양인데 살아갈 방도도 없이 이곳에 묻혀
있자는 것은 살다가 막히면 죽는다 그 생각이우?"
"어떻게 되겠지."
"세상에, 이리 답답할 데가 있나."
"나 이부사댁 서방님, 그분이 알까 두려워서 그래."
"그렇담 어재서 이 지경까지 됐수."
"서로가 외로웠던 게지. 우린 애당초 그럴사이가 아니었는데..."
기화는 쓸쓸하게 웃었다.
"내가 이리 된 건 내 탓이야. 그 양반이 그리 된 건 또 그 양반탓이고,
피차 빚진 것도 갚을 것도 없어. 그 양반은 여자복이 없었고 나는
남자복이 없었다, 그래야 할까? 다지나간 얘기지만, 그나 저나 다 늙게
생긴 아이가 걱정이야."
자는 아이에게 측은해하는 눈길을 보내며 칼을 놓고 쟁반을 산호주
앞으로 밀어준다.
"피차 빚진 것 갚을 것 없다 하지만 아이는 달라요. 핏줄을 찾아야지요.
아일 위해서도 할 수 없잖우? 본가에 갖다 맡겨요. 아일 달고서 언니 같은
사람이 어떻게 살우."
"무슨 소릴 하는 게야? 그렇게는 못해! 넌 본시부터 인정머리가 없었어.
어찌 그리 마구잡이로 함부로 말을 하니,"
얼굴이 시뻘개졌다. 기화의 기세가 하도 험악하여 산호주는 멈칫하고
말았다.
"내 성미는 언니가 잘 알지 않우. 늘 말투가 그런 걸 어떻게 해."
"이런 오막살이, 네 눈에는 우습게 하고 사니까 내일부터라도 당장
굶어죽을 것같이 보이겠지만 이삼 년은 넉넉히 살아갈 수 있어.옛날같이
생각 없는 계집은 아니야."
기화는 별안간 흐느꼈다.
"네, 네, 알았수. 내숭스럽긴, 그러고도 운삼어른 도움을 받았나요?
아닌게 아니라 달라지긴 달라졌수."
산호주는 흐느껴 우는 기화에게 일부러 핀잔을 안겼다.
하룻밤을 함께 묵으면서 산호주는 집안을 치워주고 암침엔 마당도
쓸어주고 올 겨울을 대비하여 장작을 몇 짐 들여주곤 떠나왔던 것이다.
상현은 산호주 방에서 사흘을 더 보냈다. 병보다 마음 때문에 몸살이
나고 답답해 견딜 수 없는 사흘이었다. 겨우 회복기에 들어서긴 했으나
완쾌되진 못했는데 상현의 고집에 못 이겨 인력거를 불러온 산호주는
"떠나면 다시 오시겠어요? 하니 아시고나 가세요. 아이는 딸이구요. 언닌
군산에 살아요. 삼합이란 기생집을 찾으면 언니 사는 곳을 가르쳐줄
거예요."
"나한테 든 비용 갚으러 오겠다."
상현의 대답이었다. 산호주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으나 이내 사라졌다.
'딱한 양반,'
소용없는 짓인 걸 알면서 인력거에 오르는 상현에게 산호주는 또
말했다.
"저한테 비용 갚으러 오시지 말구 기화언니한테 한 번이라도 가보셔요."
"어서 가잔 말이야!"
상현은 차부에게 소리를 질렀다.
4장 노령의 빙판
"상현아! 자네 소리 소문 없이 죽을 뻔했다면서?"
부산하게 떠들며 선우일이 방으로 들어왔다. 방 앞에서 신발을 벗던
성삼대는
"호강했지 뭐. 기생방에 일주일 넘게 누워 있었다면. 하여간 인복있는
작자는 병이 나도 기생품속이라, 부럽네 부러워."
말쑥한 양복의 선우일과는 반대로 무명 두루마기에 수염도 안깍고,
목수건을 끄르며 성삼대는 선우일 옆에 앉는다.
"인복이 아니라 여복이네."
상현이 이불을 걷고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얼굴이 축갔군. 앓기는 되게 앓은 모양이야."
선우일이 상현의 얼굴을 쳐다본다.
"본바탕으로 돌아온 게지. 술살이 쪼옥 빠졌던 게야. 바은 따뜻하군."
성삼대는 방바닥을 짚어본다. 농담부터 앞세우며 얼렁뚱땅 넘기고
있으나 상현은 이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요즘 재미가 어때?"
상현도 딴전을 피우듯 물었다.
"재미? 죽을 지경이지. 재미는 자네가 톡톡히 보지 않았나. 그래
지성으로 병간호했다는 기생은 쓸만한 계집이든가?"
"박색이야. 성깔 고약하구,"
담배를 붙여물었던 상현은 심한 기침을 하다가
"제에기랄!"
담배를 눌러 꺼버린다. 태연스럽게 말은 했지만 심중이 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화에 대한 죄택감보다 최참판댁의 침모 딸이며 기생인 기화
몸에서 자신의 핏줄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치욕감 없이 되새길 수가 없는
것이다. 뭣이든 닥치는 대로 두들겨 부수고 싶었다.
"당분간은 담배 안 피우는게 좋을 게야."
선우일은 험악해지는 상현의 얼굴에서 벽면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늘
그러했다. 두려운 것도 아닌데 정면으로 대하기만 하면 벼르고 별렀던
충고를 못하고 마는 이상현의 분위기다. 잇몸이 근질근질하지만 결국 그의
행사에 대해서는 말을 못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은 충고 아닌 병문안을
위해 온 터이기는 했다.
"태수형님이 걱정을 하시더군."
겨우 선우일은 얘기를 이었다.
"무슨 걱정?"
"자네가 앓는다는 소문을 들었지."
"이젠 괜찮어, 나가기 싫어서 누워 있을  뿐이지."
"몸도 다스리고 글도 쓸 겸 절에 가볼 생각 없나?"
"태수형이 그러라 하든가?"
"그러라기보다 그러는 편이, 말하자면 심기일전하는 뜻에서 말이야. 나쁠
것도 없잖겠나?"
상현은 쓴웃음을 띤다. 살빛이 검은 편인 상현은 앓고 난 뒤라서
그랬던지 얼굴빛이 노오랬다. 좋지 않은 안색이었다.
"난 틀렸어. 죽을 용기도 없는 놈이라구. 값싼 동정심보다 훨씬 더 값싼
인간이거든."
"자학하는 게 바로 자네 병일세."
들은 척 만 척 상현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아주머니! 아주머니!"
신경질적으로 불러댄다.
"네  가요오."
하숙집 여자가 신발을 끌며 다가오자 뭔가 귓속말을 하더니 방문을
닫는다.
"요즘 선우일이 자넨 물산장려운동인가 뭔가 때문에 상당히 바쁜 모양
아니야?"
순간 선우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성삼대는 상현을 흘깃 쳐다본다.
"왜? 그 일 땜에 바쁘면 안 되겠나?"
시작부터 흥분한다.
"안 된다는 말 안했다. 덕분에 황태수 같은 사람 돈벌게 됐다는 얘기는
할 수 있겠지."
"자네도 공산당이야?"
"민족 전체가 호응하는 운동을 공산당만이 반대하니까 하는 말일세."
"흥부나지 말게. 공산당이라고 다 반대한 것도 아니었고 나도 반대하진
안았다구. 고무공장 설립에 열올리는 황태수형이 부자 되겠다는 얘기,
그것뿐이야."
"그러면 태수형이 그 운동을 이용한다, 그 말인가? 왜들 이러지? 왜들
이러느냐 말이야. 모두 삐딱하니, 사촌이 땅 사면 배아픈 상판들 하구서,
그러니 조선놈들 될 일도 안 되는 게야."
"절에 가라니 마라니, 불쾌해서 그런다 왜! 값싼 동정보다 훨씬 더 값싼
인간이지말 말이야, 나 비럭질은 안 해!"
"공과 사를 혼동하니까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게야. 어째서 이
운동을 몇몇 기업가를 살찌우는 운동으로 보느냐 말이다."
"결과가 그렇다면 그런 말 들어도 별수없지. 아무튼 팔방미인
황태수보다 찧고 볶고,ㅡ 천하 망나니 서의돈 쪽이 내게는 매력이 있어."
"서의돈? 흥! 그 사람 공산당이야. 맹랑한 소릴 하고 다니더군."
눈살을 찌뿌리며 선우일은 씹어뱉듯 말했다.
"공산당이면 어떻고 사회주의면 어때?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거야 팔자
좋은 사람들의 일, 양반놈들 백정하고도 야합하는 세상인걸. 하지만
말이야, 의돈형은 무정부주의자지 공산당은 아니다."
"백 보 오십 보 아닌가."
"이 친구 자본가 다 됐군."
"오핸 말게, 내 근본은 알다시피 응시 자격이 없었던 조상의 후손이고
보면 양본놈들 백정하고 야합했다하여 혐오감을 느낄 까닭이 있겠나."
"흥, 백정하고 쌈질하는 놈들은 농청놈이더군 그래."
모멸의 웃음을 띤다.
"나는 남의 얘길 하는 게 아니야. 내 얘기란 마일세. 내가 공산당 아니라
하여 무산계급을 옹호하고 나서는 공산당을 송충이 보듯할 하 등의 이유도
없지. 다만 물산장려운동을 방해하고 나서는 일만은 용서할 수도 없거니와
반대하는 놈들은 다아 총독부하고 붙어먹은 놈이다! 그렇게 말하겠어."
"나는 자네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네."  처음 농담 몇 마디 하고는
뭔지 모르게 우울한 얼굴로 듣기만 하던 성삼대가 말했다.
"어째서!"
선우일은 날카롭게 반문한다.
"특히 의돈형님이 반대하는 이유 중에는 타당한 것이 있어."
"타당한 것이 있다? 천만에! 민족 분열 운운하는 서의돈이야말로 민족의
대동단결을 저해하는 해독분자다!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겠다 어떠한
이론으로도 반대의 이유는 못되는 게야!"
핏대를 세운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 왜 그리 감정적으로 몰고 가누. 도무지
자네답지가 않단 말이야."
"물산장려운동이 단순한 경제적 자립에 한한 것이야? 자네 말마따나
경제를 한 나야. 뭐 인도식이다, 중국식이다, 남의 형편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지만 우리에게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는
일제에 대한 저항 아니겠느냐, 그 말이야. 중국과 다르다하여 반대하는
놈들, 별무소득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설사 일본놈 자본에 눌리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가정하더라도 삼일 운동 이후, 이 시기에, 어떻게 일으킨
불꽃인데? 그걸 끄려고 덤비는 놈들은 다 반역자다! 몇 사람의 기업가가
돈 좀 벌게 된다는 건 아무거도 아니라구. 새발의 피라구. 그걸 못 새겨서,
아 그래 초가삼간 타는 것보다 빈대 타죽는 것이 시원하다는 심보 아니고
뭐겠냐 말이야. 일본놈이건 조선놈이건 착취당하기론 마찬가지야. 길가에
쫓겨나 앉아서 집찾을 생각은 않고 싸움질하는 꼴밖에 더 되겠느냐
말이다. 계급투쟁을 나쁘다 하는 게 아니야. 계급투쟁 그 자체도
투쟁대상은 일본이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 이 시기엔 말이야."
선우일은 자제심을 잃고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그건 정설이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고, 삼일운동 하곤
성격이 다르지만 우리 민족을 동원할 수 있는 활력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순 없지. 허나 불길이 지나간 뒤에 솟아날 것을 일단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의돈형님을 만나기 전에는 나도 자네 의견과 비슷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산장려운동을 방해하고 비난을 퍼붓는 이곳
좌파 과격분자들의 이론과 의돈형님의 이론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표면으론 일치하는 것 같지만 의돈형님은 심층을 찌르고 있고
이곳 좌파들은 일반론을 펴고 있단 말이야. 어느 곳에 가져가도
적ㅇ요되는 이론 말이야. 의돈형님은 동경서 지진을 겪으면서 목격한
현실을 토대로하여 이 운동의 성격과 결과에 판단을 내린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총독부의 속셈이야. 문화정책이라는 미명아래 소극성을 띤
방해의 방습이란 말이야. 아까 자네는 중국식 인도식 오라가왈부하는 것이
우습다 했는데, 총독부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 인도식일 게야.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지금 조선에서 불고 있는 근대화 바람이란 상당히
오래 전부터였으며 지식인들의 구십구 프로가 계몽주의거든. 그게
먹혀들어가고 있는 게야. 물산장려운동만 하더라도 근대화라는 용어는
아주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그것도 적당한 시기에 불을
꺼야 한다는 총독부의 심산이라면 뭘 의미 하는 걸까? 미구에 올 사회주의
혼란기를 대비하는 일환이라 본다면 비약일까? 형님 말씀이 영세한 자본,
불리한 조건으로 풍부한 자본, 유리한 조건, 그리고 뿌리를 깊이 내린
그들과 경쟁하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고 존립하는 것조차 그들
뜻대론데 자본이 최소한도 유통을 유지하려면 노동자들 임금에서
재주부릴밖에 달리길이 있겠느냐는 거지. 사실이 그렇다구. 일본인 업체나
일본인에게 고용되면 일자리 잘 얻었다 하는 것이 일반의 인심 아니야?
왜냐, 든든하고 조선인들보다 임금이 후한 때문이 아니겠어? 일자리는
모자라고 노동력은 많고 결국 남아나는 노동력을 임금이 싸도 흡수되게
마련인데, 불평불만은 싼 곳에 있지, 비싼 곳은 적어도 싼곳이 쓰러질
때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 아냐? 장차 노사 문제로 혼란을 겪게 될
때 제일 먼저 칼 끝에 올려지는 것이 조선인 기업가인 것은 뻔한 일이지.
그러니 몇 사람을 살찌우는 대신 그들은 일본 자본가의 방패가 되는 동시
민족 분열의 원천도 될 수 있다는, 나는 의돈형님이 말한 중에서 이 한
가지만은 경청할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그건 무산계급 쪽에서
서서 한 말은 아니었어. 착취하는 데 일본놈 조선놈 다를 것이 없다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란 말이야. 일본이 지금 사회주의의 물결을 두려워하고
골머릴 썩이는 것도 사실이지. 중국이 러시아를 업고 공산화되는 것을
누구니 누구니 해도 젤 무서워하는 것은 아마 일본일걸?"
마침 술상이 들어왔다. 선우일이 반론을 제기할 겨를이 없어진 것이다.
병문안 온 처지에 술상을 받아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다.
"너 미쳤어?"
성삼대가 소리를 질렀다. 하숙집 여자는 쓴 웃음을 띠며 술상을 놔두고
급히 나가버린다.
"다 나았다고 했잖아. 나가기 싫어서 누워 있는 거라구."
"그러면 이 술 자네도 마시겠다 그 얘긴가?"
선우일이 묻는다. 상현은 피시시 웃으며,
"조금은 마실 수 있겠지."
"구제받을 수 없는 사내로군."
"구제는 자네들 같은 애국자나 받아라. 지금 내게는 이 술만이
구세주야."
상현을 술상을 질질 끌어당겨 술잔에 술을 친다.
" 별수 없다. 제 몸 제가 아껴야지 남이 어떻게 해. 괜찮다는 말 믿기로
하고, 아닌게 아니라 맨입으로 지껄였더니 입이 마르던 참이었는데,
마시자."
성삼대가 술을 들이켠다. 두 사라도 따라 술잔을 든다.
"의돈형님 동경에 있었던가?"
상현이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응, 이십 일이 넘었나? 신이놈하고 함께 왔다더군."
"지진을 겪었단 말이지?"
"음,"
"몸뚱이가 작아서 숨기엔 좋았겠다."
"상현이 어쩌고 있느냐고 묻더군."
"중국에 있는 줄 알았지. 태수형이 쓰디쓰겠다."
"숨바꼭질이지, 서로가."
성삼대가 말이었다.
"안 만났단 말인가?"
"음, 욕을 해쌌더마는 임명빈 씨는 만난 모양이더군."
"임명빈 씨..."
"그야 앞뒷집인데 안 만날 수 있어?"
선우일의 말이다.
"어쩐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
"뭐가,"
마땅찮은 것을 삭이려고 애를 쓰며 선우일은 성삼대에게 반문했다.
"의돈형님 말이야."
"왜."
"이곳저곳 분주히 나다니는데 그래도 될지 모르겠네."
"걱정 마라. 잡아가진 않아. 물산장려운동의 반대잔데 무슨 걱정인고?"
"지랄한다."
"날보고 황태수 사냥개라 하더군."
"들어 싸지. 너무 두둔하고 다니더라니,"
"길게 그런다면 늑대가 될까 부다. 어디 일자리 없어서 태수형님을 돕는
줄 아나?"
"일자리 없을 턱이 있나. 경제학 학사신데, 은행에 들어가면 장차의
두치감이요 전문학교 교수 자린들 어려울 것 없지. 뼈빠지게 일 하고서
장사꾼 시녀 노릇 한다는 소리 듣는 건 확실히 억울한 노릇이야."
성삼대는 약을 올린다.
"자네 생각을 해서 참아야지. 나보다 억울한 자네 말이야."
"가만있자, 내가 남한테 돈 빌려주고 못 받은 일이라도 있었던가?"
"나는 장사꾼 시녀지만 자넨 안사람 시녀란 말일세."
순간 성삼대의 얼굴이 구겨진다. 큰소리는 쳤지만 병 후 처음 마신 술은
고통스러웠다. 비스듬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상현이 선우일에게
눈짓을 한다. 어지간히 약이 올랐던 선우일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과연 그렇군 그래."
성삼대는 헛웃음을 웃었다. 너무했나 싶었던지 선우일이 당황한다.
성삼대의 결혼 생활이 불행한 것은 친구들간에 유명했다. 부모가 시킨
결혼이었지만 성삼대는 혼전에 여학교를 다니던 차만소녀를 본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성삼대로선 만족한 마음으로 신붕를 맞이했던 것이다.
온순하고 소극적이며 여학교를 나왔어도 구식의 사고 방식에서 헤어나질
못한 여자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남편을 싫어하는 것이었다.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며 안 살고 가겠다는 용단도 내리지
못하면서 거의 본능적으로 남편을 싫어하는 것이다. 계집아이를 하나 낳은
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남자에게는 거의 치명적인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고통을 청산 못하는 것은 성삼대가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또 피차를 위해 비극이었다. 그리고 무한한 인내이기도
했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 사는 여자의 경우도 그러했고 사랑이 없는
여자를 옆에 두어야 살 수 있는 남자의 경우도. 언젠가 선우일과 상현은
폭음을 하고 우는 성삼대를 본 일이 있다.
"역시 좀 무린 것 같군."
상현은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쥔다.
"당연하지. 이제 마시지 마. 내가 대신 처분하겠다."
성삼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나 비애와 분노를 짓씹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의돈형님은 일본에 뭣 하러 갔을까?"
머리를 싸쥔 채 상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화제를 돌려보려는
노력이었다.
"목적없이 갔을 리가 없지."
선우일이 덤비듯 말꼬리를 잡았다. 성삼대에게 깊이 상처를 주었을
자신의 말이 무산되기를 바란 나머지 서둘렀던 것이다.
"무슨 목적이 있었을까."
"글세... 뭔지 심상찮은 것은, 박열이 지난 시월에 체포되었거든."
"그래서?"
"그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아니키스트 박열."
"아지가 무슨 소릴 하려는 게야? 의돈형님은 아직 한 번도 자신의
입으로 무정부주의자란 말을 한 일이 없어. 함부로 어디 가서 그 따위
소리 지껄였다간,"
성삼대는 의혹 자체를 휘저어버리듯 강한 어세로 말했다. 무정부주의자
박열 박열을 두고 말할 것 같으면 독립운동에 관련되어 경성제이고보에서
퇴학을 당했고 지식청년들에게 매혹적인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일본으로 건너간 후의 일이다. 비밀 결사 흑도회에 가입, 일녀 애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다 거사 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것이 작년 시월이었다. 공산주의와 상충하면서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무정부주의가 독립운동과는 계열이 다른 것은 물론, 상당한
조직과 위 을 내포하고 있는 일본의 무정부주의 사상을 토양으로 한
박열의 거사 계획을 두고 만주, 중국을 떠돌던 서의돈을 연관시켜보는
것은 사실 모호한 얘기였다. 또 서의돈을 아나키스트로 단정하는 것도
분명찮은 일이긴 했다. 성삼대가 강력히 부인하는 것은 그런 판단에 의한
것이기보다 천황 암살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 그 사건이 지닌 무게
때문에 서의돈 신변을 근심했던 것이다. 선우일도 평상시 같으면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도 않았을 테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까?"
선우일 말에 성삼대는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든다.
"사상을 입에 올리지 않고는 앞으로 지식인 대접 못 받을걸. 흥!"
상현이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럴 게야. 노령에서 불어오는 공산주의 바람, 일본서 불어오는 무정부,
사회주의 바람, 맞불어젖히니 말씀이야. 불어오는 바람도 바람이거니와
바람맞이를 할 여건도 조성되어가고 있으니, 근간에 와서만 해도
소작쟁의가 전남을 비롯하여 각처에서 일어났고 백정들의 형평운동또한
전국적으로 번질 기세, 특히 일본 니이가타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백 명
가까이 학살한 사건, 동경진재 때도 그러하였고."
"새로운 단체도 우후죽순처럼 많이 솟아오르고."
상현은 관심없다는 듯 말하고는 머리를 긁적긁적 긁는다.
"자금도 많이 흘러들어왔지. 이동휘를 통해서 말이야. 모스크바의 돈은
중국공산당, 일본 좌익 단체에까지 미쳤으니, 국내만 하더라도 흘러들어온
자금 때문에 말썽이 많긴 했지만 이렇게 단시일내에 공산주의 세력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도 돈의 위력이 컸었다는 얘길게야. 조직이란
주둥이나 손발 가지고 되는 건 아니거든."
선우일은 돈의 위력을 강조하는 것처럼 말했다. 상현이 이어,
"그 이동휘도 이제는 숨통이 막혀버린 것 아닐까? 작년에
이르코츠크파가 조선공화국이라는 것을 조직했으니.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놈이 먹고,"
"이동휘는 이미 흑하사변때 간 사람이고 꽤 일은 많이 했는데 결국
이르크츠파가 승리한 것은 텃세가 주효한 것 아니겠어?"
"텃세나 재주가 어디 있어? 승리는 또 어디 있고? 조선독립군이 주축이
되 원동혁명군의 편성을 두려워한 일본의 입김이 흑하사변으로 몰고 간
게야. 이르크츠파의 중상 모략, 자금 약탈, 사할린 군대의 이탈 같은 것은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야."
성삼대가 매듭짓듯 말했다.
이르크츠파란 1921년 6월 비참했던 흑하사변으로하여 사람들 귀에 익은
명칭이다. 귀화인이 중심되어 조직된 러시아내의 조선공산당인데, 성품이
강건하고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발엘리야가 이끄는 사할린 부대, 저 유명한
1920년 겨울 니항사건때 적군계 빨치산과 합세하여 니항을 습격하여
일인을 전멸시켜버린 사할린 부대하고는 다 같이 귀화인으로 조직되었어도
앙숙이며, 이동휘가 장악한 상해파하고도 심각하게 대립해온 터이다.
흑하사변을 말할 것 같으면 그 배경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요인에 대한
관점도 구구하지만, 러시아 형명에 성공한 레닌이 장차있을 중국과 일본의
적화를 염두에 두고 구상한 원동혁명군에 조선독립군을 모두 흡수하여
소위 '인터내셔널 오트랴드'를 편성하는데 조선, 중국, 일본, 몽고 등의
혁명적 청년들을 참가시켜 전초병을 훈련하자는 것이었다. 당면 목적은
대일전쟁이었으니 만주 일대에 흩어져서 일군 토벌대에 쫓겨야 하는
독립군이 노령으로 넘어간 것은 당연했고, 일찍이 막대한 자금을 받아
상해에서 공산당을 조직하고 국내와 일본, 중국에까지 손을 뻗쳤던
이동휘가, 전적으로 독립군을 받아들일 것이며 보다 강력한 군대로
훈련시키겠다는 러시아 혁명정부의 약속을 믿고 독립군의 노령행을 독려한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자유시에 군대를 집결해놓고 진작부터 꼬릴르 물고
오던 상해파와 이르크츠파사이에 주도권 쟁탈의 불이 붙은 것이다.
살기등등한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고 결국 고려공산당대회를 열자는 결정을
보았는데, 대회 참가 대표에 관한 심사에서 이르크츠파의 일방적 심사,
이동휘와 노백린의 대회 참가 거부 등, 결국 대회에서 상해파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몰고온 각 군대들에 대한 실권마저 잃게 된 것이다. 반발한
사하린 부대가 이탈을 선동하고 집결한 독립군이 동요하고, 그러나 일본의
압력으로 정세가 변해버린 러시아 혀명정부는 이미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고 있었다. 무장 해제에 앞장선 것이 이르크츠파의 사할린 부대와는
앙숙인 자유대대였으니 피비린내나는 참극은 결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쌍방간의 총격전에서 사할린 부대는 대부분 살상대고 말았다. 무장
해제를 하는 쪽이 승리한 것은 당연하다. 결국 박엘리야, 그밖에
혼성부대의 인솔자는 체포되어 처형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일전쟁과 독립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또 그것은 조선
독립사상의 일대 오욕이었으며 약소민족의 피눈물나는 비극이기도 했다.
"이동휘가 왜 당했을까? 왜 실패했을까...:
"자네 부친 생각을 하나?"
선우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상현은 그 말 대꾸는 아니 한다.
다시 선우일은
"글세 이동휘가 당한 원인... 무골의 로맨티스트, 한말의 그림자가 감도는
로맨티스트의 당연한 결말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는데, 일리일교의
계몽주의자이기도 했었지. 아무튼 의병의 마지막 흐름이 이제 산송장이 된
게야."
순간 상현의 얼굴에 그간 찾아볼 수 없었던 분노의 빛이 떠오른다. 역시
부친 이동진으 ㅣ죽음을 생각했던 것이다.
"독립투사들 중에서 이동휘만큼 변신을 거듭한 사람도 드물 게야.
아전의 아들로 태어나서 궁전진위대장, 참령에 까지, 기독교의 전도사가 된
일도 있었고, 교육 사업에 정열을 쏟았는가 하면 상해 임정을 요리하였고,
또 공산당을 조직하였으니, 기구하다면 참 기구한 생애 아니겠나."
성삼대는 주전자를 들어보다가 빈 것을 알고 술상에서 물러나 앉는다.
"그러나 그 사람을 변절자라 할 수는 없어. 독립투쟁의 신념만은
투철했으니까. 그런 민족적인 의식 때문에 패배했다 할 수도 있을게야.
민족자본주의자니, 기회주의자니 하고 욕을 먹은 것도 그 때문인데, 과연
이동휘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면 러시아 혁명정부로부터 그 많은 자금을
받아냈을지 의문이야."
"이제 그만 일어나자. 패장에 대한 찬송가는 그만 하고,"
성삼대는 얘기를 계속하려는 선우일을 툭 치며 일어섰다.
"몸조리 잘하게. 술 마실 수 있을 때 다시 만나자."
성삼대는 모자를 눌러쓰며 나갔고, 선우일은
"절에 가는 것, 생각이 있거든 알려주게, 태수형님의 호의를 삐두름하게
생각하지만 말고. 그럼 가네."
그들이 돌아간 후 상현은 쭈그리고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무슨 생각이
났던지 벌떡 일어섰다. 목도리를 두르고 자리옷으로 입었던 한복 우이에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쓴 뒤 휭하니 하숙을 나섰다. 뒤에서 하숙집
여자가 뭐라 하는 말이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무턱대고 걷다가
상현은 얼굴을 들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 해거름이었다.
'하여간 걸어보자. 아직 안 왔으면 기다리는 거구.'
그는 임명빈을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어쩌면 서의돈을 찾아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왜 가는지 가면서 생각하기로 하고 나선 길이다.
산호주의 마지막 말이 바늘끝처럼 심장을 계속 찔러댔으며 목덜미에
스며드는 바람이맵고 차가운데 어쩐지 몸이 날아갈 것 같은 해방감,
상쾌한 것을 느낀다. 무슨 까닭일까. 새로운 천지가 저만큼 서서 손짓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은 또 어디서 온 것인지, 그것도 아직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왜 오늘 갑자기 부친의 죽음이 그처럼 뼈에 사무치게
슬퍼했더란 말인가. 춥고 뼈를 깎는 듯한 만주 벌판의 바람과 끝없이
번들거리는 노령 빙판이 어찌 그리 가깝게 가슴에 와닿았는가. 생전의
부친은 상현에게 천근 같은 납덩어리의 무게였었다. 죽은 후 오늘까지의
부친은 상현에게 회한이요 죄의식의 고통이었다. 그 무지무지하게
고통스러웠고 무거웠던 구각을 오늘 돌연히 벗어던진 것은 홀연히 찾아온
기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구, 이거 몇 해 만이지요?"
임명빈의 처 백씨가 놀란다.
"선생님 돌아오셨습니까?"
"곧 돌아오실 거요. 어서, 사랑에 드시오."
"어머님의 병환은 어떠신지,"
"차도가 있을 리 없지요. 지금 잠드셨어요."
"네, 제가 여기 온 지 한 삼 년 되겠지요?"
상현은 쑥스럽게 웃는다.
"그렇게 됐을 거요. 이선생도 얼굴이 많이 달라졌군요."
"저야 뭐, 사모님께서는 오랫동안 병간호에 수고가 많겠습니다."
"어느 집이나 노인을 뫼시면 으레 그렇지요."
상현은 옛날과 조금도 달라진 곳이 없는 사랑, 명빈의 서재로 들어갔다.
반신불수가 된 노인, 출가한 명희,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지난일들이
뿌듯하게 가슴에 치민다. 임명빈은 조병모가 설립한 영화중학의 교장으로
취임한 후 인편을 통해서 학교에 오지 않겠는냐는 전갈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때 상현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것이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차르
끓여 왔다.
"명희아씨는 친정에 더러 오시느냐?"
"가끔 오세요."
아이가 나가고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산호주의 말을 생각한다. 고개를
젓는다. 명희의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과 성삼대의 괴로워하던 얼굴을
생각한다. 성삼대의 아내와 명희의 경우, 그 성품도 비슷한 점이
깨달아진다.
'최서희는 다르지. 어느 여자 어느 사내보다 그의 삶은 강렬하다.'
"상현이 왔다구?"
문 밖에서 들려운 음성이다. 이내 방문이 열렸다.
"이 사람아, 안 죽고  살아 있었구먼."
사십이 다 된 임명빈은 옛날과는 퍽 달랐다. 교육자 특유의 안정감을
풍겨주었고 나이보다 늙은 것 같다.
"죄송합니다."
"하여간 잘 왔어, 잘 와. 앉으라구."
명빈은 고수머리의 큰 두상에서 모자를 벗어 걸고 외투도 벗어걸고
자리에 앉는다.
"그새 많이 늙어습니다. 교장 선생님 다 됐군요."
"별수 있겠나? 나같이 능이 없는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님 말씀대로야."
서글프고 좀 미안해하는 표정이다.
"글쓰는 놈들이라고 별수 있습니까? 저같이 성격파탄자 아니면
허풍꾼들이 아니겠습니까?"
임명빈은 지난날을 생각하는가, 어쩌면 명희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새삼스럽게 상현을 바라본다. 상현의 근황에 대하여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폐렴을 앓아 죽을 뻔했던 소식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매부 되기를 원해던 사내, 차림새와 얼굴이 다 피폐할 대로 피폐한 것
같은데 눈빛은 맑다.
"요즘도 술 하나?"
"얼마 동안 못했습니다."
아팠다는 얘기는 안 한다.
"그럼 나하고 술이나 하세. 놀다가 천천히 가아."
순간 명빈의 얼굴에 외로움이 스쳐간다.
"선생님, 술 늘었습니까?"
"별로, 조금씩 하지만,"
"저도 오늘은 많이못합니다."
"그래? 그건 환영할 일이다. 신문사에 나가나?"
"때려치웠습니다."
"그렇담 글 많이 써야겠지."
"글쎄요."
"내게 자네만큼 재질이 있었다면 결코 훈장은 안 됐을 게야."
"무의미한 일입니다. 의의가 없어요. 그보다 의돈형님을 만나셨다구요."
"음."
"댁에 계실까요?"
"아마 없을걸. 어쩌다 한 번씩 오기는 오는 모양이지만. 자네 아직 못
만나보았나?"
"네."
"꼭 만나봐야 할 일이라도 있는가?"
"의돈형님 따라가려고 생각했습니다."
"뭐?"
놀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른안주에 따듯하게 데운 정종, 술상이
들어왔다. 상현은 명빈의 술잔에 술을 붓고 명빈은 주전자를 받아 상현의
술잔에다 술을 채운다.
"깊이 생각해보았나?"
"..."
"즉흥적으론 안 돼."
"이 문제는.... 제가 노령에서 돌아온 그때부터 마음에선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가겠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마는 가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건 이해할 만하다구."
"솔직히 말해서 가겠다는 생각은 돌발적인 것입니다. 가서 뭘 하겠다는
작정도아직 하지 않았고,"
"의돈이하고 자넨 맞지 않을 텐데... 감정 문제를 말하는 건 아니라구."
"압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명빈은 술을 마신다. 상현이
문학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지 않고 있다는 불만은 늘 있었던 것이지만
재질에 대한 기대와 안타까움은 떠나겠다는는 마당에서도 여전히 남는다.
그리고 묘하게 질투 같은 감정, 자기 혼자만 동그마니 남는 것 같은
외로움,사돈댁 그늘에 덮여서 사는 비굴감, 그의 입에서 다시 한숨이
ㅅ어나온다. 그런 명빈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는 상현의 마음속에는
악마와 같은 해방의 환희가 스쳐가곤 하는 것이다.
'이젠 도망간다. 도망치는 게야.'
"세월이 빨라."
"네?"
"진주 최여사 큰아들이 중학에 들게 됐으니."
상현의 낯빛이 순간 달라진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길상을 생각한
것이다.
"선생님 학교로 옵니까?"
"명문도 아닌데 우리 학교에 오겠나? 다만 서울서 공부하는 동안
우리집에 맡겼으면 하는 의사를 비췄더구먼."
5장 종놈의 아들
선생님댁에서 돌아오는 길에 환국이는 책방에 들렀다. 달마다 나오는
소년잡지 한 권과 노구치 우죠의 동요집 한 권을 산다. 잡지에 간간이
실리는 노구치 우죠의 동요가 참 좋았기 때문이다. 수염이 검실검실한
책방 아저씨가 책방 아저씨가 책을 포장하면서 묻는다.
"환국이는 서울로 공부 간다믄서?"
"합격이 돼야지요."
다른 책을 들춰보며 하는 대답이다.
"합격이사 문제없일 기구마는. 늘 일등만 해왔는데 무신 걱정고. 우리집
학성이가 니 반만 돼도 발뻑도 자겄다마는,"
"학성이가 어때서요?"
"마, 돌대가린 기라."
"중간 성적인데 돌대가릴까요? 씨름도 잘하고 마음씨가 좋습니다."
"씨름꾼이나 된다믄 모릴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오늘도 남강에 얼음
타로 가서는 감감소식, 함흥차사아이가."
포장한 책을 내준다.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오냐, 잘 가거라."
바람이 몹시 차다. 땅이 꽁꽁 얼어서 발바닥이 톡톡 튀는 것 같다.
일주일만 지나면 서울에 시험치러 가야 한다. 나이보다 환국의 키는 좀 큰
편이다. 며칠 전에 두만네, 석이네가 만났을 때 환국이 얘기가 났었다.
"길상이 어맀일 적하고 우짜믄 그리 꼭 같겄노. 걸음새까지 닮았더구나.
깨끗하게 잘생깄더마."
"옛말에 안 그랍디까? 씨는 못 속인다고요."
"그러시. 저분때도 두만이 가게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깜짝
놀랐다 카이. 하마 길상아 하고 부를 뻔 안 했겄나? 이제는 내머리가
백발인데 세월 간 거를 깜빡 잊었구마."
하고 두 사람은 웃었다. 착각할 만도 했다.
"우리 석이가 그라는데요, 환국이도련님 별명이 작은 공자라 카든지,"
"공자야, 공자지. 한 다리가 짧기는 해도 최참판댁 핏줄이믄 귀공자제."
"성님도, 그런 공자각 아니 기라요. 공자 맹자 하는 그 공자 말입니다."
"아아,"
"그라고 또, 공부는 말할 것도 없지마는 아바니를 닮아서 그림 재주가
비상하다 하더마요."
"씨도 좋고 밭도 좋은데 와 안 그렇겄노. 이런 말 하믄 우리 며누리가
섭하게 생각할 기다만 일 잘하고 맘씨 좋다고 인물을 너무 안보는 것도
아닌 기라. 너거 며누리는 참하게 생깄이니 손자 인물걱정은 안 해도
좋겄더라."
"그래도 복 많은 기이 제일이제요. 아들들 낳고 살림이 불티겉이
일었는데 그기이 다 그 며누리 복 아니겄소?"
촉석루 가까이까지 간 환국이는 집으로 가려다 말고 촉석루 쪽으로
내려간다. 강바람은 더욱 차가웠다. 그러나 깊숙이 눌러쓴 털모자는
따뜻하였고 털실장갑 속에 든 손도 시렵지는 않았다. 하얗게 얼어붙은
강바닥에 새까만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있다. 연을 띄워놓고 얼레를 든 채
뛰어가는 아이도 있다. 강가에는 얼음을 깨고 빨래하는 여자들도 볼 수
있었다. 윤국이도 썰매를 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가깅 퍼뜩 들었다. 책을
겨드랑이에 낀 환국이는 외투 주머니 속에 두손을 지르고 눈으로 윤국이를
찾아본다.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윤국이는 없는 것
같았다. 맞은편 대숲에서 바람지나가는 소리가 쏴아  하고 들려온다.
대숲이 마구 흔들린다. 햇빛은 서쪽에서 빛나고 남강 다리 위로 자동차가
지나간다. 다구지가 지나간다. 사람들이 지나간다.
"니 여기서 머하고 있노?"
동급생 이순철이었다.
"음, 저어."
애매하게 말하며 환국이는 골치 아프게 됐다, 하고 생각한다. 두둑한
회색 재킷을 입은 순철이는 혈색이 좋고 몸도 좋았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겁나서 구겡만 하고 있는 거제? 사내 자석이,"
"..."
"흥! 나 다 알고 있다. 알랑방구 뀌고 오는 길 앙이가."
"알긴 뭘 알어?"
"밤낮 갖다바치는 것 말이다. 우리집에도 너거만큼은 돈 있어. 없어서 안
갖다바치는 줄 아나? 더러바서 안 그런다."
"무슨 소리야?"
"어멍 떨지 마라!"
"떼거리 쓰는 것 아니야."
"흥! 니 가는 학교 와 내가 못가노? 너거 돈으로 지은 학교가?"
"못 가라 안 했다."
"떨어지는 것보다 좀 낮추어서 원서를 내자고? 선생이 그러더라. 와! 와
그라제? 뻔한 기라. 니는 갖다바치는데 나는 안 갖다바친다, 그거 앙이가.
일등? 그것 다 그렇고 그런 기라. 누가 모릴 기라고, 그까짓 일등 부러워할
줄 아나? 우리 외삼촌이 선생 다리몽댕이를 뿌질러놓을라 카다가 눈이
불쌍해서 그만두었다 카더라. 어디 두고보자. 니가 붙나 내가 붙나."
이빨을 드러내며 험악한 표정이 된다. 환국이는 으스스 떤다. 우리집에도
너거만큼은 돈 있다, 한 거은 허풍이 아니다. 토지 가진 부자는 아니지만
양조장, 화물회사, 정비소 등 사업체를 많이 가진, 진주에서도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부잣집 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몸이 좋고 성미가 괄괄하고돈 잘
쓰고 해서 순철을 따르는 똘마니들이 많다. 뭣이든 제일이라야 직성이
풀리는 그는 공부도 곧잘 한다. 늘 환국이를 육박해가고 있었지만 육 년
동안 한 번도 환국이를 물리칠 수 없었다는 것은 이가 갈리게 분통 터지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상급학교 진학 문제 때문에도 옥신각신이 있었다.
환국이 지원한 공립학교  K중학에는 좀 힘이 부칠 터인즉 그보다 B중학에
원서를 내는 것이 좋겠다는, 담임 선생의 충고였는데 순철의 외삼촌이
노발대발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의 고집대로 K중학에 원서를 내긴 냈으나.
"둘 다 붙으면 될 거 아니야?"
환국이는 되독록이면 싸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눈치다.
"뭐? 둘 다 붙어? 육 년을 낯바닥 치다보고 댕긴 것만도 속이 부글부글
끊는데 또 함께 댕기?"
"그럼 나는 떨어져라 그 말이야?"
"말해 머하노."
"심술 꾸러기,"
"겨드랑이에 낀 그건 멋꼬?"
"책이다."
"이리 내놔라. 잡지지?"
"나 보고 난 뒤 비려줄게."
"와 이라노? 누구 거렁뱅인 줄 알아? 잔말 말고 내놔. 지금 보고 싶어서
그런다. 이리 내놔."
"싫다."
"와 싫노!"
팔을 뻗쳐 겨드랑이에 낀 책을 낚아 채려 한다. 그 손을 뿌리치며
"내 마음대로지. 내 꺼니까."
"이새끼 바라? 내 마음대로?"
"지나쳐! 참는 것도 한도가 있어."
"제법 양반 같은 소리 하네? 하지만 니는 니 마음대로 못한다."
순철이는 씩 웃는다.
"왜 못해!"
"못하는 까닭을 가르쳐주까? 내 가르쳐 주께. 니는 말이다, 니는 종놈의
자식이니까 그렇다는 거다. 알았나? 농청사람들이 백정한테 몽둥이질한
것도 모르나?"
환국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니 어매는 양반인지 모르겄다마는 니 애비는 종놈이다 그 말이라구."
겨드랑이에 끼었던 책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느새 그랬는지 눈 깜짝할
사이였다. 돌을 주워든 환국이는 순철이를 밀어뜨리고 깔고 앉은 채
얼굴을 내리찍고 있었다. 사색이다. 순철의 비명을 들은 사람들이
달려왔다.
"와 이라노, 이눔아이들이?"
환국의 멱살을 잡고 끌어낸다.
"말로 하지 와 싸우노? 다 큰놈들이,"
몸을 휙 돌린 환국이 쏜살같이 뛴다. 순철의 얼굴에서 피가 흐른다.
책꾸러미는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대문을 열어주는 안자가 사색이 된 환국이 얼굴을 보고 놀란다.
"도련님, 어디 아프세요?"
아무말 없이 쑥 들어온 환국이는 사랑으로 쫓아들어가 버린다.
"왜 저러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안자는 살금살금 사랑으로 들어간다. 방안에선 아무 기척이 없다.
"도련님, 도련님!"
"..."
"도련님."
신돌 위에 신발은 있다.
'전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프면 아프다 하실 건데 무슨 일일까?"
아무래도 그냥 돌아갈 수 없다. 안자는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간다.
"도련님."
살며시 방문을 연다. 책상 앞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었다. 동그라미, 네모꼴, 별, 그런 것만
되풀이 되풀이 그리고 있는 것이다.
"도련님."
돌아본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을 듯 그렇게
험악하고 날카로운 눈빛이다. 불고 부드러운 입술은 새파랗게 떨고 있었다.
"어머님한테 말하지말아요. 부탁이야. 나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거든
사랑에서 그림그린다고 말해줘."
"그렇게 하겠지만 저한테는 말씀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안자는 계속해 물었으나 환국이는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
수없이 안자는 물러난다.
"환국이 웬일이냐?"
저녁상 앞에 앉으며 서희가 물었다.
"형님은 사랑에서 그림 그리나 봐요."
윤국이가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땐데 그림을 그린다는 게냐? 그림을 그린대도 그렇지.
저녁을 먹어야지."
서희는 잔심부름꾼 세양이를 부른다.
"사랑에 가서 저녁 먹고 그림 그리란다고 일러라."
귀엽게 생긴 계집아이는 네, 하고 쫓아간다. 이윽고
"마님, 배가 아파서 안 자시겠다 합니다."
"배가 아프다?"
"네,"
이때 대문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모르겠습니다."
안자가 허둥지둥 쫓아온다.
"마님."
"무슨 일이냐?"
안자는 서둘며 방안으로 드어왔다.
"도갓집 아들, 그애 어머니가 마님을 만나뵈자고 합니다만,"
"무슨 일로?"
육 년 동안 환국에게 짓궂게 굴어온 도갓집 아들, 순철이르 서희도 알고
안자도 안다.
"저기, 도련님이 아무말 말라 하시기에, 아까,"
안자는 환국이집에 돌아왔을 때의 상태를 설명하고 나서,
"아마 도련님 때문에 그러나 봅니다. 그 아이 어머니의 기세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대문간에서는 여전히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서희는 잠시
생각하는 듯
"윤국아, 저녁은 좀 늦게 먹도록 하고 배고프면 사랑으로 날라달라고
해."
"형님한테 가 있으란 말씀이지요?"
"오냐. 안자도 같이 가 있게.밖에  있는 부인네는 유모더러 안내하라
이르고, 알았느냐?"
"네, 마님."
서희는 심상찮은 것을 느꼈다. 찾아온 여자의 목적이 궁금하기보다
환국이가 걱정스러웠떤 것이다. 말썽을 부린 일이 없는 아이였다. 참을성이
강하였고 부드러웠으며 매사에 분명했으므로 누구든 종중을 했었다. 그런
아이가 어째 새파랗게 질려서 돌아왔을까.
"마님, 손님 뫼시고 왔습니다."
"오냐."
서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모가 방문을 열었다. 그의 뒤의 뚱뚱한
중년여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노기등등해 있었다. 순철의 어머니다.
"유모는 가게."
"네."
순철이 엄마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앉으십시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러나 선 채
"몰라서 묻소!"
악부터 쓴다.
"아니, 말씀을 하십시오."
환국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서희는 참을성 있게 공손하다.
"아이구 기가 차서,"
순철엄마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친다.
"세상에 무신 억하심정에서 금옥 같은 내 자식 얼굴을 짓이겨놨는가,
한분 물어봅시다!"
"네? 서, 설마,"
"당신 아들이! 당신 아들이 말이요!"
손가락질을 한다. 서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 환국인 나비 한 마리도 못 잡는,"
"병원에 가보믄 알 기요! 도, 돌로 얼굴을 쳐서, 긴말 할 것 없고 내
자식 본시대로만 해놓으소! 당신도 자식 키우는 사람이믄 억장이 무너지는
부모 심정 모리겄소? 아이구, 이기이 세상에 무신 날벼락인고? 평생 남
때리고 들어오는 걸 봤이믄 봤지 맞고 들어오는 걸 본 일이 없는 그놈이
맞아도 유분수지. 어이구, 이 일을 우짜믄 좋을꼬? 보소! 장석같이 그리서
있이믄 우짤 기요! 우릴 몰작하게 봤다가는 큰코 다칠 기요. 내 아들
얼굴에 험만 갔다 봐라, 당신자식 얼굴인들 말짱할 줄 아요! 우리도
짓이겨놓을 기요!"
서희의 굳어졌던 얼굴이 흔들린다.
"만일 그랬다면,"
"만일은 무슨 놈의 만일! 피를 철철 흘리는 아이를 병원에 업어다 놓고
치가떨리서 쫓아왔는데 만일이라니!"
"그러면 우리 환국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순철엄마는 제 가슴을 또 한 번 친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께, 그놈 아아를 내놓으소! 와 그런 숭칙한
짓을 했는가! 내아들이 지 할애비 핼미를 잡아묵었단 말가!"
"아이는 집에 없습니다. 아무튼 함께 병원에 가보기나 하지요."
모욕을 감내하며 두루마기를 입는다.
"상처가 어느만큼 났는지, 빨리 손을 써야 흠집도 작을 거고, 어서
가시지요."
소리 안 나는 북을 계속 내리친 것처럼 순철엄마는 멍하니 쳐다본다.
한바탕 분탕을 치려고달려왔는데 맥이 풀리는 것이다. 오만하고
도도하고웬만해서는 사람을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그 파다한 소문과는
너무나 딴판이아닌가. 이렇다 할 문벌도 없이 개화 바라을 타고 번 돈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았고 당대에 와서 이것 저것 손댄 사업이, 때가맞아
그랬던지 운이 트여 그랬던지 이제는 이름난 부자로 자리는 굳어졌으나.
달려올 때는 단단히 별렀다. 열등감이 노여움에 채찍질을 해따. 여차하면
욕설도 불사할 것이요, 아이를 끌어내어 매질도 하리라. 그러나 최서희는
공손하게 순철엄마더러 앞장설 것을 몸짓으로 나타낸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침통해 하는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순철엄마로 하여금 발을
떼어놓게 했다. 밖은 어둑어둑했다. 따라 나서려는 유모에게 손짓으로
저지한 서희는,
"환국이가 제정신 아닐테니 유모가 잘 살피도록,"
나직이 속삭이고 나간다. 찾아간 곳은 서희네 식구들의 주치의이기도 한
박효영의원이었다. 순철의 외삼촌이라는 청년이 대합실에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서희를 보자 불쾌한 듯 외면을 한다. 험악하게 노려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처는 대단치 않다, 하고 서희는 판단한다.
"야아야! 우리 순철이, 순철이는 우찌 됐노?"
"들어가보소. 제에기랄!"
청년은 대합실 바닥에 침을 뱉는다. 급히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철엄마의 뒤를 따라 서희도 들어간다. 순철이는 오두마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간호원이 이마에 눌러놓은 가제에다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으며
박의사는 한가하게 회전의자에 앉아 있었다.
"놀라셨지요?"
박의사는 순철엄마를 보며 미소했다.
마른 체격에 테가 굵은 안경을 썼고 갸름한 얼굴이다.
"애들은 싸워가면서 크는 겁니다. 사내애들이니까요."
"사, 상처는 우떻습니까?"
"머리 쪽에 두어 바늘 꿰매었지요. 별로 흠집은 남지 않을 겝니다. 또
머릿속이니까 상관없어요. 피는 거기서 좀 흘렀지요."
그러고 보니 왼쪽 귀에 가까운 머리에 가제를 눌러놨다.
"저, 저기 이마빡은요."
"약만 발랐습니다. 찰상이지요."
턱밑과 왼편 뺨에 옥도정기를 바른 흑적이 있다.
"환국이 어머님께서도 놀라셨겠어요."
"네, 그만 되기 다행입니다."
여유가 생기니까 오히려 반감이 살아나는가 순철이엄마는 심한 적의를
나타낸다.
"다행은 무신 다행이요."
순철이는 힐끔힐끔 곁눈질말 한다.
"죄송합니다."
서희는 고개를 숙이다.
"그, 공자같은 아이가, 뜻밖인데요?"
박의사는 껄껄걸 웃는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면 그만이요?"
"치료비는 물론,"
"그까짓 치료비가 뭐길래, 남의 자식을, 매 한 번 안 때리고 기른 남의
자식을,"
우두커니 얼굴을 숙이고 있던 서희는 박의사의 시선을 느끼며 얼굴을
든다. 박의사 눈빛속에는 놀라움이 있었다. 그런 서희의 모습을 상상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철아."
눈을 치뜨며 쳐다보다가 순철이는 그의 외삼촌처럼 외면을 한다.
"환국이가 너를 왜 때렸지?"
"..."
"말해 보아."
"..."
"덮어놓고 때리더냐?"
"아니요."
"그럼?"
"선생한테 알랑방구 끼고 댕기는 기이 미벘소."
"그래서 네가 먼저 때렸느냐?"
"아니요. 부애질을 했소."
서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말로 부애질했지?"
"어디 두고보자, 니가 붙나 내가 붙나, 함께 둘 다 붙으믄 될 거 아닌가,
그러드마요, 환국이가. 육 년 동안 함께 학교 댕긴 것만도 지긋지긋한데,
내가 말한께로 그라믄 나는 떨어져라 그 말이냐고 함서,"
"함서 때리더란 말이냐?"
순철이는 고개를 숙인다.
"그 말 때문에 때린 거는 아니고요, 니 아부지는 종이라 했더니,"
"그랬었구나. 말한 대로 들려주어 고마워."
서희의 음성은 잠긴 물처럼 조용했다.
"순철아."
"야"
"그랬다면 환국이 잘못한 것은 없구나. 네 잘못이야. 왜냐하면
환국이아버님은 종이 아니었거든. 그리고 나라 위해 몸 바친 분이었단다."
박의사는 눈길을 떨어뜨렸다. 강인한 억제, 마지막의 말은 모든 것을 건
모성의 승리였다.
"순철어머니, 순철이 상처가 빨리 아물었으면 좋겠군요."
통통하게 살찐 손을 잡아주고 미소지으며 서희는 돌아섰다. 병원문을
나서는 순간 서희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나왔다. 거리는 어두웠다. 아주
어두웠다. 강가까지 온 서희는
'여보, 당신이 그곳에 남은 뜻을 이제 확실히 알겠소. 하지만 장하지
않아요, 당신 아들 환국이가?"
찬바람 속에 서서 서희는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6장 초대
혜관이 찾아온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말로는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는 것이었다. 환국이 서울로 공부 간다는 말을 들었기에 가고 나면
당분간 보기 어려울 것 같아서 한 번 보려고 왔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서희는 혜관이 왔다는 말ㅇ르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철에게
한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나라 위해 몸 바친 분이란다, 소용돌이처럼
되살아나는 자신의 목소리, 무슨수로 그말을 감당하랴. 모든 것이 흔들려도
상관이 없고 아이의 영혼만은 지켜주자, 그것은 어미로서의 승리였는지
모르지만 길상을 위해서는 경거망동 이외 아무거도 아니었다. 그간
계속하여 고통스럽기만 했던 문제가 혜관은 출현으로 표면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아서 서희는 무서운 망상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고을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구두쇠 첨지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사랑이 춥다하여 윤국이와 환국의 침실인 건넌방으로들어간 혜관이
아이들을 상대하여 예날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렁우렁 울려퍼지는
혜관의 음성은 안방 서희 귀에까지 들려왔다.
"어느 날  중이 동냥을 하러 왔지. 구두쇠 첨지가 중이라고 시주를
하겠나? 어림도 없는 얘기라. 시주만 안 했던 게 아니야. 처음에는 목탁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하여 마구 욕설이었고, 그래도 중은 문간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더란 말씀이야. 화가 난 첨지는 물바가지를 중한테
안기며 썩 물러나라! 허허어, 그러나 여전히 목탁 치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첨지는 도끼를 쳐들고 나와서 이 중놈아!
목탁 소리 안 나게 해주겠다.! 목탁을 빼앗아 난도질을 한 게야. 그리고
첨지는 안심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음씨착한 며늘아이가 딱하게
생각했음인지 시아버지 몰래 품판 돈으로 시주를 하더라는 게야. 했더니
중이 말하기를 그냥 가려 했으나 며느리 심성이 고와서 알려주노라, 아무
달 아무 날 댁의 시부는 소 우자 짐승엑 해를 입어 죽임을 당할 것인즉
그날은 각별하게 조심하라, 그러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게야."
"소 우자 짐승이 뭐지요, 스님?"
윤국이 묻는다.
"소 우자 짐승이라면 소지 뭐겠어?"
그 말은 환국의 음성이었다.
"얘기를 다 듣고 보면 자연히 알게 도리 것이야. 그리하여 중이 일러준
그 날이 왔고 구두쇠 첨지라고 제 목숨이 아깝잖을 리가 없지. 그날은
출입을 아니 하고 복더위의 찌는 날씬데도 불구하고 방문을 닫아건 채,
물론 외양간의 소도 밖으로 내몰았지. 한나절이 지나고 해질 무렵, 아이고
내가 그놈의 땡땡이중한테 속았구나, 첨지는 한증막 같은 방에서 벌떡
일어났지. 방문을 여니 해거름의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서 살 것 같더란
말씀이야. 문지방을 베개 삼아 누우니 눈까풀이 가물가물, 달콤한 잠이
오기 시작한 게야. 한데 또 귀가 간질간질해. 귀이개를 찾아서 다시
누웠지. 바람은 시원하고 귀이개로 귀를 후비니 기분 좋고, 한데 때마침
일진의 강풍이 불어와서 열어놓은 방문을 탁 닫아버리더란 그얘기지."
"그런데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모르겠냐, 윤국아?"
"네."
"귀이개가 귓구멍을 찔러서 죽었다는 얘기야. 그 귀이개가 뭔고 하니
쇠뿔로 만든 것이었거든."
"하하하, 그렇구나아."
윤국의 감탄하는 목소리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는 참으로 기기묘묘하여 크고 힘탄 두 개의 뿔과
튼튼한 이빨, 몸뚱이를 말할 것 같으면 사람의 몇 배요 힘도 몇 곱절인
황소에게는 죽음을 아니 당하는 사람이 쇠뿔의 가느다란 한 가닥으로
죽임을 당하니 말씁이야."
서희는 혜관이 아이들에게 왜 그런 얘기를 들려주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이들을통해서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길상에 대한 불안이 쌓인다.
환국은 K중학교에 합격이 되었다. 한사코 겨루던 순철이는 낙방했고.
사흘후면 짐을 챙겨서 환국이는 서울로 가야 한다. 시험칠때는 연학이가
따라갔으나 이번에는 서희가 함께 가기로 작정이 돼 있다. 임명빈에게
맡기기로 한 만큼 서희가 함께 나서 인사하고 부탁하는 것이 예의상 좋고
몇 달을 집 떠나 있을 환국이에게도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그간
환국이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순철의 말이 독침같이 가슴에 박혀
있을 것이 틀림없다. 난생 처음 남을때려본, 그것도 유혈이 낭자하게 때린
기억은 악몽같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수습이 되었는지
환국은 그것을 알려 하지 않았다. 서희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환국이는 어머니가 어떻게 했으리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으며 서희도
환국이 짐작하고 있을 것을 안다.
이윽고 혜관은 하직해야겠다면서 서희에게 들렀다.
"모레 떠나신다던가요?"
"네."
"가시면서 임씨댁에 묵으시렵니까?"
"저까지 폐를 끼쳐 되겠습니까? 여관에 들겠습니다."
"그러면 유모나 안자가 함께 가겠구먼요."
"유모랑 갈까 합니다."
"네에... 임씨댁이 효자동이니까 가까운 곳에 잡으셔야겠습니다."
"네."
"효자동 어귀에 선일여관이란 게 있습지요."
서희는 혜관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혜관도 서희의 눈을 응시했다.
서희는 그 여관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직감한다.
"아닙니다. 나는 거기 들지 안겠소."
뒷걸음치듯 서희는 말했다. 여자의 한계점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최서희가 어머니기 때문에 부딪쳐야 하는 한계점, 이제 다시 지어미이기
때문에 부딪치는 한계점을 보아야 한다. 서희는 거기 들지 않겠다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환국이와 순철이 싸운 경위를 간략하게 얘기한다.
만일 마지막에 한 자신의 말이 발설되었다면 그것은 자신만이 책임질 일인
것이다. 길상이 그곳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상상은 지금 서희에게는 고통
이전의 공포인 것이다. 혜관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심각한
얼굴은 아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있습니다."
혜고나이 눈을 내리깔았다. 눈 밑으로 처진, 마치 주머니처럼 처진
근육이 흔들린다.그것은 마음의 동요 때문은 아니었다. 근육이 탄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못난 백성들인데 그런 말은 좀체로 입밖에 내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경찰관 아니면은 그것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소이다."
혜관은 효자동 어귀에 있다는 선일여관에 대해서 다시 말을 잇지
않았다.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는지, 그는 떠났다.
삼월말의 철도연변은 봄이 완연했다. 바람이차기 때문에 봄은 더 신선한
것 같았다. 차창에 기댄 서희 가슴에는 위험을 동반한 환희가 아우성을
치고있었다. 낯선 역을 맞이하고 낯선 거리를 기차가 지나칠 때마다
서희는 그 거리에서, 정거장에서 길상을 만났다. 홈에 우뚝 서 있는가 하면
거리를 지나가는 뒷모습이 있었고, 서울에 닿을 때까지 줄곧 차창 밖만
내다보는 조용한 자세였으나 서희는 봄에 눈뜬 유충같이 세상이 경이에
가득 찬 것을 느낀다. 아무것도 실증은 없다. 그러나 실증 이상으로 길상이
서울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서희는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역에는 임명빈이 마중 나와 있었다. 서로 첫대면이었지만 두집 사이의
연고 관계로 처음부터 스스럼이 없었다. 환국이는 지난번 연학이와 함께
임명빈 집에서 묵었기 때문에 구면이었다.
"일부러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겠습니다. 환국아,"
"네."
"합격을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선생님."
"열심히 해야 돼."
"네."
역두에서 최서희는 차도 인력거도 마다했다. 전차를 타고 가겠노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리하여전차를 타고 종로에서 내린 일행은 효자동 어귀에
다다랐다. 어귀에는 과연 이층으로 된 선일여관이라는 것이 있었다. 서희는
몸으로 느끼면서 여관 옆으로 지나갈 때 그곳을 쳐다보지 않았다.
명빈의 집안은 손님맞이의 준비를 끝낸 것처럼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싸. 그러나 식구들이 서희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하여
조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두루인사를 끝내고 나서
"노마님께서는,"
"아 네, 사람을 못 알아보셔서,"
명빈이 인사를 생략하라는 뜻으로 말해따.
"옛날에 제가 쓰던 사랑이 한적하고 해서 환국이 거처를 그곳으로
정했습니다. 방이 넓고 작은 방도 하나 있어서 며칠간은 묵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명빈은 자신이 옥중에 있었을 때 서희가 베푼 호의에 대한 보답인 듯
성의를 다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저까지 폐를 끼쳐 되겠습니까. 여관으로 가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래서느 안 됩니다."
명빈의 댁네 백씨가 펄쩍 뛰듯이 말했다. 서희는 몇 번 사양하다가 권에
못 이긴 듯
"폐스러워서 어떻게 하지요?"
미소하며 슬그머니 동으로 표한다. 여관에는 가지 않으리라, 처음부터
굳힌 결심이었다. 그러나 서희는 위험이 따르는 환희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물론 길상을 만나리라는 기대는 아니었다.
나흘을 서울서 묵는 동안 서희는 환국의 입학식에 따라갔다. 유모와
함께 서울거리에 나가 물건을 사기도 했으며 창경원에는 환국이와 함께
가서 구경을 했다. 그러면서 그 여관 앞으로 오가는 동안 서희는 눈길을
돌리지 아니 했다. 이층 창가에 어느 사내가 서 있으리라는 상상만으로
서희는 하루하루의 양식을 마련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것인가를 깨달았을  때 서희는 가파로운
고갯길에서 땀을 닦으며 쉬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엿새를
보내고 떠날 예정이었는데 닷새째 되는 아침에
"국이어머님."
부르기가 거북했던지 되도록 호칭은 빼고서 말하던 명빈이 또 환 자를
빼고서 국이어머님이라 불렀다.
"제 누이가 매부랑 함께 저녁 초대를 해왔습니다. 피곤하시겠지만 그
사람들 성의를 봐서 가시지 않으렵니까."
"고맙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안 하셔도 되는데,"
명희에게는 서희도 적잖은 관심이 있었다. 명희에관한 얘기는 오래
전부터 공노인을통해 들은 바 있었으며 조선으로 나온 후에도 그 집에
관한 것과 더불어 그에 관한 얘기도, 상현과의 감정 갈등만 모른다뿐이지
대개는 듣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명희로부터 도움을 주어서 감사하다는
서신을 받은 적이 있었다. 명빈은 저녁 초대에 관한 얘기 끝에
"참, 잊었군요. 이상현 군과는 집안끼리 잘 아신다지요?"
"네."
서희는 별로 큰 동요가 없는 자신에 오히려 놀란다. 말을 해놓고 당황한
것은 임명빈이 편이었다. 동시에 서희를 초대한 명희 심정은 어떠한
것인지 갑자기 의혹을 느낀다.
"요즘엔 어떻게 지내시는 지요. 더러 소설을 쓰신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부친께서 별세하셨는데 아시는지요."
"네, 본가를 통해 들었습니다."
우울하게 서희 얼굴이 가라앉는다.
"고생만 하시다가, 상현이도 부친 생가을 하면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용정에 있을 때 제가 그 어른께 잘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혹, 만나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요 다음 기회에,"
"네 알겠습니다. 술이 과해서, 재주가 아깝습니다."
명빈으로서는 서희에게 상현의 근황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본가에서는 사시기가 어떤지 모르겠군요."
은근히 비춘다. 좀 도와주라는 뜻으로. 서희는 말이 없었다.
약속한 시간, 해가 좀 남아 있었다. 조용하가 자동차를 보내주었다.
조병모 남작 내왜가연만했을 뿐만 아니라 남한테 말 못할 집안 갈 등을
피하여 주로 별장에 가 있었으며 따라서 본가를 비롯하여 재산에 관한
것,사업에 관한 재량이 조용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명희가 친정에 온
손님을 위해 자동차를 보내는 것쯤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조병모
남작의으리으리한 집 앞에 자동차가닿았을 때 대문이 활짝 열렸다. 차고는
뒤꼍에 있었던지 손님을 내려놓은 뒤 담장을 따라 돌아가 버렸다. 명빈과
서희를 안내한 곳은 처음 명희가 왔을 때처럼 별채에 있는 서재 겸
응접실이었다. 명희가 다가서서 서희의 손을 잡았다.
"처음 뵙지만 우린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요? 반갑습니다."
"네, 안녕하셨어요."
조용하는 여간하여 감정을 잘 나타내지 않는 인물인데, 또 서희를
초대한 목적이 사무적인 것이었는데도 뜻밖이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소개하지요. 인사하게. 우리가 신세를 많이 졌던 최참판댁 부인이네.
여기는 저의 매부 되는 조용하올시다."
"잘 오셨습니다. 앉으십시오."
네 사람은 각각 소파에 앉았다. 조용하는 회색 싱글에다, 늘 그는 회색을
애용해온 터인데, 청동색과 노란 줄무늬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소쇄한
그 모습은 귀공자의 풍모가 역력했고 냉담해 보이는 인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검정에 가까운 감색 양복을 입은 임명빈은 시골
면장같이 보였다. 명희는 기장이 길고 넉넉하게 만든 분홍과 보라의중간색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 마디로 쌍벽이라고나 할가, 아름다움의
차이를 말한다면 최서희는 기품이요 명희는 지적인 세련이다. 그리고
명희는 놀랄 만큼 달라져 있었다. 행복하고 불행하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변모였다. 레몬 한 쪽을 띄운 홍차를 날라왔다. 홍차를 들면서
조용하는
"처남한테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한테서도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조용하는 다른곳에서 최서희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그것은 퍽
오래된 일이었다. 조준구가 폐광을 속아 샀을 때 그 폐광의 임자는
이모대감이었고 이모 대감이 조병모 남작과 선이 그어지는 그런 처지였다.
그 폐광을 일인과 공동명의로 산 조준구가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일인을
물리치고 독점하려 마련한 자금의 출처, 그것으로 인하여 최서희라는
여자가 화제에올랐던 것이다.물론 그얘기는 공노인이물러가고 최서희라는
숨은 진주가 표면화되면서 나온 얘기였다. 만석 토지는 최서희 손아귀에,
폐광을 판 막대한 돈은 이대감 손아귀에, 그리하여 비오시는 날의 개 신세
같았던 옛날의 조준구로 되돌아간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화젯거리였던
거이다.
"이번에는 아드님께서 K중학교에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쁘세요?"
명희가 말했다. 조용하는
"우리 학교도 상당한 명문인데 거 섭섭하군요."
"왜 아니겠나."
네 사람은 함께 웃었다. 조용하는 다시
"서울에는 며칠이나 계실 계획입니까."
"내일 내려가겠습니다."
"오신 김에, 뭐 별 볼 것은 없겠습니다만 천천히 계시다 가십시오.
효자동이 불편하시면 우리집에 오셔도 좋고, 이사람도 할 일 없이 심심한
시내 안내도 해드릴 것입니다. 차도 있고 하니,"
임명빈은 내심 초대한 것은 명희라기보다 매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럴 처지가 못 됩니다. 어린 것이 있고해서,"
조용하는 말보다 분위기에서 얼마나 도도한 여자인가를 실감한다. 명희는
의사 표시가 명확한 가 하면 때론 거세당한 사람같이 멍하니 눈빛이
흐려질 때가 있었다. 대충 그 정도에서 얘기는 명희와 서희가, 조용하와
임명빈이 나누게 되었다. 여자들의 얘기는 주로 신변에 관한 것이었고
남자들의 얘기는 사회문제, 국제 정세, 그리고 경제적 동향에 관한
것이었다. 서희는 말하기보다 듣는 편이었다지만 대충 조용하의 사람됨을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저녁 초대를 한 것에목적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조용하는 귀공자의 풍모가 역력했지만 세지에 능하고 타산가이며
사무적이라는 서희의 판단이었다. 그것은 사실 그러했다. 귀족들
자제로서는 좀 드문 형, 미련한 욕심을 경멸하고 상큼하고 속빠르게
목표물을 낚아채는, 말하자면 속결주의요 사정거리를 잘 겨냥한다고나할까.
능력 있는 사내, 명희를 손에 넣을 때 도 그는 그러한자기 식을 발휘했던
것이다. 찬하처럼 얼굴 붉히며 인사하지는 않았다. 냉담하고 무관심한 척,
한눈을 파는 척, 하다가 찬하를 앞질러 어느덧 명희에게 활시위를
당겨버렸던 거이다. 아내하고 이혼을 성립시킨 것도, 많은 위자료를
군더더기 없이 사무적으로 내밀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서희는
조용하라는 인물을 갈간파했으나 명희에 대해선 그렇지 못했다. 명희에
대해선 무방비의 상태이긴 했으나 뭔가막연하게 종잡을 수 없다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옛날의 명희를 보았더라면 소극적이요 재래종의
여성이라는 것을 알았을 터인데, 서희가 종잡을 수 없다고 느낀 것은
옛날과 달라진 것이 없는 성품에다가 귀족의 부인이라는 의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명희를 변했다고 한다. 귀족의 부인으로서 그렇게
확실하게 틀이 잡히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명희는 실상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손가락에 낀 두 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 작은
다이아몬드를 박아서 만든 백금 팔지, 그리고 더욱더 뽀오얗게 빛나는
목덜미, 그것이 변화라면 변화일 뿐이다.
사나이들의 얘기는 예외없이 물산장려운동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임명빈은 주로 물산운동의 성격이나 영향에 대하여 말했으며 조용하는
실제적인 동향, 누가 무슨 회사를 설립했으며 그 자본금의 내력에 관하여,
또 누가 무슨 회사를 지금 설립하고자 준비중이며, 누구의 자본이 어디로
투입되는가 그런 테두리에서 얘기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러더니
조용하는 얘기를 일단 끝내었다.
"이거 남자끼리만 흥미도 없는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여보,"
"네."
"식사 준비는 어찌 되었소?"
"제가 가보고 오겠습니다. 그런 잠깐만,"
명희는 조각처럼 보기 좋은 허리를 약간 구부리듯 방에서 나간다.
"진주는 어떻습니까. 살기좋은 곳이지요?"
조용하는  번번이 서희한테 화제를 돌리고 신경을 쓰는데 자를 재듯
어딘지 딱딱했다. 서희의 미모에 대한 감탄, 그러나 조용하에게 명희에
대한 정열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생 찬하의 존재로 말미암아
명희에게 가는 집착이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찬하는 용하의 애정에
자극제였었다고나 할까. 그런 만큼 서희의 미모는 어디까지나 그에게는
풍경화적인 가치였지만 자신의 목적의식에 저해가 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살 만한 곳이지요."
"부인께서도 그렇습니다만 대개 지주들이 많은 곳 아닙니까?"
"좀, 그런 셈이지요."
"어떻습니까. 부인께서는 모험 좀 해보실 생각이 없으신지,"
서희는 그 말의 뜻을 어렵잖게 알아차린다. 임명빈만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그리고 평소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욱 냉담한 용하 성품에
비추어 처음부터 예상 밖의 태도를 취하는 데 석연찮은 느낌을 짙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이 퍽이나 난처하게 된 것을 깨닫는다.
'멍청이 바보같이 내 꼴이 왜 자꾸 이리 되어가나. 오십만 되면 허리
꼬부라지겠다.'
임명빈이 바라서 한 혼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풀고
나오기에는 너무 자신의 인생이 황혼 쪽으로 기울어버린 것 같다.
"모험이라면,"
"부인께서도 아시겠지만 물산장려운동이 일고 있는 이 시기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지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토지에 잠긴 자본을
공업 내지 상업 쪽으로 돌리는 일인데, 토지를 중심한 화폐유통이란 일
년에 한 번으로 불 수 있고 상공업에 있어서의 화폐유통이란 시시각각인
것 아니겠습니까?"
"..."
임명빈의 좁혀져 있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석연찮았던 것이 일시에
확 풀어졌던 것이다.
"부인께서는 용정 계실 적에 무역을 하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해서 제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이해하시고 투자할 생각이 없으신지요."
"너무, 생각지 않았던 일이어서,"
"물론 만나 뵙고 보니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입니다만 우리가 지금
설립 준비를 하고 있는 회사는 자본금이 가장 크고 참가할 자본주의
면면이 모두 거물급이지요."
서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용하에게 제동을 걸었다.
"하 참, 저도 모르게 약장수 노릇을 한 것 같습니다. 하하핫...요즘엔
자나깨나 그 일 생각을 하다보니,"
"이 사람, 여기가 사무실인가?"
임명빈이 얼버무린다. 서희는 여자가 어떻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저는 농토에 대해서 집착이 강합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그리고 지루하다는 생각을 한다. 환국이가
기다린다는 생각, 효자동의 그 여고나 옆을 지나가는 생각. 조용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오른다. 한방 호되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 그런 웃음으로
나타났다.
음식맛보다 빛깔이 화려한 저녁 대접을 받고 다시 내어주는 자동차를
탔을 때 거리에는 불빛이 나돋아 있었다. 운전석 옆에 앉은 임명빈과
뒷좌석에서 혼자 흔들거리고 있는 서희는 서로의 생각에 잠겨 있기는
했으나 오늘 저녁 초대에 대하여 불쾌감을 느낀 것은 공통점이다. 여관
옆을 차가 지나갈 때 차 속에서 서희는 처음으로 여관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층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한 사내가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희는 갑자기 자신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상상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혜관은 효자동 어귀에
선일여관이 있다고 했지 그곳에 누가 있을 것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확실하게 물어보지는 못했을까? 어느쪽이든 확실하게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희망도 절망도 깡그리 뭉개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상상 속으로 모든 것을 가두어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없는 창문,
실제 아무도 없었을 것이란 절망, 차가 멎었을 때 서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밤에 잠자리에서 서희는 물었다.
"환국아, 너 아버님 기억하느냐?"
"합니다."
"보고 싶으냐?"
"네."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잠긴 목소리였다.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시다."
비로소 순철이가 환국이에게 던진 말에 대하여 서희는 아들에게 해답을
준 것이다.
7장 죽음의 자리에서
외상환자의 치료를 끝내고, 환자가 치료실에서 나가는 것을 본 뒤 조수
허정윤은
"배고프다."
하며 가운 호주머니 속에 두 손을 푹 집어넣는다. 간호원 김숙희는
기구를 닦다 말고 힐끗 쳐다본다.
"선생님, 아직 점심 안 드셨는데,"
"환자는?"
"이제 없어요."
호주머니 속에 찔렀던 두 손을 뽑아서 정윤은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토한다.
"고단해요, 정윤씨?"
안쓰러워하는 표정이 되며 숙희는 나직이 묻는다.
"응."
시무룩하게 대답한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간밤에는, 또 늦게까지 공부했나 부지요?"
"공부하면 뭘 해."
"..."
"희망도 없는걸."
"왜 희망이 없어요."
"무슨 희망!"
"학교 가는 것 말예요."
"차라리 숙희하고 결혼해서,"
순간 숙희 얼굴이 빛난다.
"다른 길로 나갈까 부다."
"아니예요. 정윤씨는 꼭 붙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 준비해오지
않았어요?"
"공부만 해서 되는 일 아니잖아."
두 사람의 눈이 부딪는다. 감싸주고 안타까워하고 사모하는 숙희 눈빛을
바라보는 정윤의 눈은 숙희를 지나서 더 먼 곳에 가 있는 것 같다. 숙희가
어떤 마음을 담고 자기를 바라보는가, 그런 인식보다 자신의 미래를
추구하는 정열과 비애만이 가득 찬 눈빛이어었다. 정윤의 얼굴은 깨끗하고
수려한 편이었다. 숙희는 노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여식다게 생겼다 할 수
있고 도투름한 입술이 특히 귀여웠다.
"학비는...저도 도울 수 있어요."
정윤이 다가섰다, 일그러진 얼굴로. 포옹할 듯이 어깨를 꽉 자다가 말고,
치료실을 나가버린다. 환자가 뜸해진 병원 안은 음산하리만큼 조용했다.
박효영 의사는 멍청히 진찰실에 앉아 있었다. 회전의자에 걸친 두 팔은
힘을 다빼버린 듯 축 늘어져서, 편안한 자세이긴 했다. 가장 좋은 방향으로
자리잡은 진찰실은 밝고, 얼마 전에 난로를 걷었으나 실내는 알맞은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벼원의 규모는 꽤 큰 편이다. 진찰실, 수술실,
대합실, 약제실, 그리고 입원실이 세 개 있었다. 지방에서는 병원이나
의사는 매우 희귀한 존재일뿐더러 대개의 경우 전문의아닌 의사가 과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환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설령 전문의라 하더라도
모든 환자를 보아주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박효영 의사는 외과 전문의였다.
진주에서 박의사의 명망이 높은 것은 수술을 잘한다는, 바로 외과
전문의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병은 한약으로 다스리려 했고 신령의 힘을
빌리고자 굿을 한다거나 불공을 드리는 기습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만큼
서민 층은 째고 자르고 하는 외과에 속한 병이거나 마지막 단계이른 병이
아니면 병원을 찾지 않았다. 박의원이 번창하는 이유는 외과를 필요로
하는 서민층, 일반 환자인 상류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해서 박의사는 늘 바빴다. 조수 허정윤과 간호원 김숙희 그리고
약제실에서 처방대로 약을 짓고 치료비, 약값을 수납하는 강남, 도합 네
사람이 질서 있게 움직이는데 그래도 손이 달릴 때가 많았다. 점심 시간이
가까운 이런 때만 환자가 뜸해 지는 것이다. 치료실에서 숙희가 기구를
챙기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들이 부딪는 소리가 꽤 귀에 거슬린다고
박의사는 생각한다. 썰물같이 빠져버린 환자들, 소음, 아이의 울음 소리,
후텁지근한 사람들의 입김, 병원은 잠긴 듯고요하고 다만 기구들의 부딪는
금속성 음향만이 살벌하게 들려온다. 박의사는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간다.
봄이 한가운데까지 와 있는 거리를 내다본다. 초봄은 흙바람 때문에
스산했었다. 이제는 완전하게 자리잡은 하늘과 대지 사이의 계절은
청초하고 무엇보다도 한가롭다. 박의사는 진주의 이 계절을 사랑했다.
여자보다, 아니 아내보다 사랑했는지 모른다. 아내 익란은 청초한 여자는
아니었다. 한가로운 마음을 가지게 하는 여자도 아니었다. 새빨간
다알리아처럼, 송이가 너무 커서 가는 줄기가 휘듯, 우선은 그런 인상의
여자였다. 그러나 신학문을 했다하여 꽤나 요란스런 자존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은 철판 같은 이기심과 잡초같이 무성한 허영이었을 뿐이다.
평범한 결혼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의사라는 점에서, 남자는 여자가 고등
교육을 받았다는 정부와 함께 달아난 여자, 그것도 집을 드나들던
박의사의 후배와 함께. 배신감은 터럭만큼도 일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헤어질 것을 예감하며 지속한 결혼 생활이었으니까.
'이번만은 아주 영리했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박의사는 쓰디쓴 웃음을 띤다. 말하자면 익란이
박의사를 한발 앞지른 것이다. 승부를 따지자면 판정패라고나 할까. 아무튼
박의사는 익란을 생각할 때 불쾌감을 떨쳐버릴 수 가 없는 것이다. 한
남자의 권위에 먹칠을 하고 그는 떠났다. 높이 받드는 의사의 위신을
구겨놓고 익란은 떠났다. 왜 진작 이쪽에서 이혼을 제기하지 않았더란
말인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민적거렸다. 그 결과는 그보다 더한 불명예를
안겨준 것이다. 그런 자신의 속셈을 알고 보복하기 위한 행위였다면
익란에게 타당성이 있고 또 그가 노렸던 것이 적중된 것도 사실이다.
익란의 애정 행각이 사랑을 위한 용기로써 결행된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얼마 안 되어 헤어지고 말았다는 소문이었다.
요란스런 자존심, 적잖은 위자료를 받아낼 수 있는 이혼보다 배신이라는
시끌벅적한 화제들을 제공한 저의는 박의사에게 망신을 주고 박의사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리겠다는 그것이었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익란이 자기를
사랑한 때문에 반발했거나 보복했다고 박의사는 생각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이건 그 자신의 수준과 비등한 인물이면 남편이요 남자라는데 뜻이
있을 뿐이다. 특별히 익란이 음란한 여자라는 얘기도 아니다. 이조 오백
년이 만들어놨던 재래식, 본질은 그 재래식의 여자였던 것이다. 카르멘도
노라도 아니면서 신학문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머릿속에 먹물이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자존심이란 것이 요란스럽게 거론되는 것이며, 나는
이혼당하지 않았다, 내 쪽에서 발길질을 했다 할 수 있는 방법도 착상할
수가 있엇을 것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생각한다면 박의사로서는 초연할
수도 있는 일이련만 그렇지가 못했다. 계집이 달아났다,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서 달아났다, 그런 뒷공론은 끔찍스럽고 소름끼치게 싫은 것은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옥도정기를 얼굴 한가운데 바르고 길을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환자들이 득실거리고 바빠
돌아갈 때는 잊는 그 미열과도 같은 불쾌감이 이렇게 환자들이 빠져나가고
없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찾아든다.
'나도 어지간히 자신없는 인간이구먼.'
비웃어보지만 불쾌한 것은 불쾌할 뿐이다. 박의사는 담배를 붙여 문다.
뚱뚱한 여자가 창 밖 거리를 지나간다. 금봉채, 말뚝잠, 나비잠, 국화잠,
금붙이를 쪽머리에 가득 찌르고 꽂고 가는 뚱뚱한 여자는 순철이엄마다.
수박색 치마에 미색 저고리를 입고, 하얀 버선발에는 자주색 당혜, 어디
나들이 가는 모양이다. 박의사는 싱긋이 웃는다. 언젠가 아들 하나만 더
낳게 해달라던 말이 생각나서다.
'저 뚱뚱한 몸 해가지고선 임신하기 어렵지.'
활갯짓도 부산스럽다. 치맛자락이 펄러덕거린다. 그가 지니간 뒤신행
가는 신부의 가마 행렬이 지나간다. 하늘은 봄빛에 취한 듯 약간은 뿌옇고
멀리 지붕 너머 버드나무 주변에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다. 박의사
눈앞에 최서희가 떠올랐다. 수모 속에서 인내하던 그날의 모습이다.
'이상한 여자다.'
박의사가 서희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탱자나무의
울타리다. 서울 태생인 박의사는 남쪽으로 내려와서 처음 탱자나무
울타리를 본 터이지만 강인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밀생한 탱자나무
울타리를 바늘 하나의 출입도 거부하듯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저승의 사자를 출입 못하게 막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지만 박의사는 서희를 처음 만났을 때 어째 그랬던지 그 탱자나무의
울타리를 생각했던 것이다.
"선생님, 점심 드셔야지요."
숙희가 조심스럽게 등뒤에서 말했다.
"응? 응,"
돌아본다.
"나는 좀 있다 하기로 할까? 먼저들 하는 게 좋겠구먼."
"네. 그러면,"
숙희는 나가고 박의사는 창가에서 떠나 의자에 파묻히듯 앉는다. 병원
뒤켠에 붙은 살림집에 익란이 떠난 후 중늙은 식모가 혼자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곳으로 세 사람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고 한층 더
적막해진 병원에 박의사 홀로 생각에 잠긴다. 찌꺼기 같은 불쾌감이 다시
치민다. 이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선 재혼을 서두는 방법밖에 없다. 일 년
넘게 지내본 독신 생활도 불편한 것이었다. 올해 나이 삼십칠 세, 성공은
빨랐다. 그 동안 의사로서 병원일에 전념해온 그에게 사생활의 비중은
가벼운 것이었다. 결혼 초기에 잘못된 결합을 깨달은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애당초 자신에게 주어진 의업에 대하여 야망과 포부에 넘쳐
있었던 그는 결혼 그 자체를 소홀히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방 도시라는 한계는 있으나 자산과 명성을 얻었으며 자신의
능력과 기량을 발휘할 환자는 항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번창뒤의
외로움, 한편의 소리가 크면 클수록 한편의 침묵이 더욱더 두드러지듯이
박의사는 사생활의 공허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새 여자 쪽에서
보내온 혼담도 더러 있었다. 별 병도 아닌데 진찰 받으러 온 젊은
여자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용모에 자신 있는 과부도 있었으며 과년한
딸을 가진 어머니가 노골적으로 심중을 떠보려고도 했다. 나이 많고
재취라는 것 이외 침을 삼킬 결혼 상대였으니까. 그런데 우스운 것은
학력이 모자라거나 인물이 좀 못하거나 재산이 없는 경우, 또 한 번
결혼한 일이 있는 쪽에선 박의사가 소위 내소박을 당한 일을 들추어
자신들의 약점을 상쇄하려 들었고 모든 것을 갖춘 상대들은 우위에서
자선하는 듯 그런 태도로 나오는 일이었는데, 박의사는 일종의 조롱하는
심정으로 그런 것을 적당히 회피해온 것이다. 한 번은 밤에 위급한
환자라하여 왕진을 갔었는데 돈푼이나 있는 과부가 환자였다. 본인의
말로는 가슴앓이라 했지만 별 이상이 없었다. 언젠가 식중독으로 인한
두드러기 때문에 병원에 온 일이 있는 여자였다. 엷은 화장까지 하고
화려한 이불에 파묻혀서 여자는 말했다.
"선생님, 왜 자꾸 가슴앓이를 할까요?"
박의사는 청진기를 말아 가방 속에 넣으며
"글쎄요, 결혼하면 나을 병 같군요."
여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밤길을 돌아오면서 투덜대는 정윤을 보고
박의사는
"의사란 몸의 병을 고치는 동시 마음의 병도 고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게야. 자네 같은 의사 지망생은 특히 명심해야 할 일이지."
필요 이상 엄숙하게 말하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을 비웃었고 날이 갈수록
사람의 마음을 손바닥 위에 놓은 듯 환하게 볼 수 있는 일이 쓰디썼던
것이다. 마음이 눈에 띄는 순간마다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이 자신의 감정을
고갈시키는 것이었으며, 편협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수술대 앞에서 메스를
들고 절개할 부위를 내려다볼 때처럼 그렇게 냉엄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박의사는 재산과 명성을 물론 원했었다. 그러나 의사로서의 사명감이
마비되는 것을 결코 원치는 아니 했다. 사실 그는 환자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순수하게 열중해왔으며 그 과정은 그의 생활의 전부였다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숙달된 의술, 적절한 치료를 한다 하여도
필경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보면 실수나 착오나 오진을 보완하는 것은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성실해야 하는 것인데, 성실한 만큼 자라고
꽃피어주는 식물과도 같은 것이 환자다. 인간 멸시,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위험을 가장 많이 안고 있는 것이
의사이고 보면 병과 죽음이 항상 동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환자의 구십구
프로가 죽음의 공포로 하여 인간의 존엄성따위를 내동댕이쳐버린,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모습을 서슴없이 의사 앞에 드러낼 때 의사는 그들 앞에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의사에게 함정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튼
인류를 위한 사도로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지 않는 이상 박의사는 자신의
고갈된 사생활이 이제는 의사로서의 의욕까지 위축시킬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박의사는 가끔 생각한다, 내색을 한 일도 없고 주의를
준 일도 없지만 정윤과 숙희의 관계에 대하여. 정윤의 모습에서 옛날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런지 모른다. 가난한 선비집 자손으로 겨우
중학 과정을 마친 정윤은 의전진학을 꿈꾸며 박의사 밑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숙희는 상민 출신의 기독교 집안의 딸이었다. 목사의 천거로
채용하여 벌써 이 년이 지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던
박의사는 부모의 유산으로 중학까지는 마칠 수 있었으나 일본으로
건너가서 의학을 공부 할 때 그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고모가 한 분
있어서 얼마간 보조는 받았지만 전문의를 따기까지 기막힌 고학을 했던
것이다. 정윤이 의전으로 간다면, 그리고 의사가 된다면 그 경로는 자신과
매우 흡사하리라, 박의사는 생각하는 것이었고 의사가 된다면 정윤이는
과연 숙희와 혼인할 것인지 궁금한 숙제처럼 생각되기도 했던 것이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럴 경우 숙희하고 결혼하지 않을 것이란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있었다. 불우한 청년이 미래의 큰 꿈을 바라보면서
다만 현재가 쓸쓸하고 외롭기 때문에 모든 순정을 바치는 여자를
의지한다...
'정윤이 그놈도 필경 무엇인지 모르지만, 누구인지도 모를 여자를 찾게
될 게야.'
그러면서도 박의사는 젊은 그들에게 묘한 선망을 느끼는 것이었다. 젊은
남녀의 애정의 비중이 어떤 것이든 애정이 갖는 윤기가 부드러운 것이다.
그 윤기를 얻기 위해 향라적인 방법을 취할 수도 없는 결벽증, 적당히
타협하기엔 너무나 쉽사리 정체가 눈에 띈다.
"선생님, 점심 드십시오."
박의사는 몸을 일으켰다.
"먹어야지."
숙희를 쳐다본다. 숙희 윗입술에 고춧가루가 묻어 있었다 박의사는
눈살을 찌푸린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늙은이를 보았을 떄처럼
혐오감을 느낀다. 갑자기 싸늘해진 그 눈빛에 숙희는 어쩔 줄 몰라한다.
약제실 옆에서 박의사는 정윤과 마주쳤다.
"삼호실 환자 또 야단났습니다."
정윤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왜 또 그래."
"선생님 불러달라고 막 악을 쓰지 않겠어요?"
"그럼 가보지."
"가시지 마십시오. 뻔합니다."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 소원 좀 들어주어야지."
박의사는 점심 생각이 없었다. 늘 식욕이 없는 것이다. 되도록 이면
미루고 싶은 마음에 때문에 입원실로 발걸음을 돌린다. 하는 수 없이
정윤도 뒤다른다.
"어떠시오, 아주머니."
삼호실의 환자는 임이네였다. 천년을 살 것 같았던 그 무성한 생명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참혹한 몰골이다. 복막염 수술을 한 지 열흘이 지난
것이다.
"좀 괜찮은 것 겉기도 합니다."
"그러면 됐어요."
"그런데 보혈 주사는 와 끊었습니까?"
어제 물었던 말을 되풀이 묻는다.
"이제는 끊어도 괜찮소."
어제와 같은 대답이다.
"내 생각에는 그거를 좀더 맞았이믄 싶은데요."
"그럴 필요 없어요. 곧 퇴원하게 될 겝니다."
"다 낫기 전에는 안 나갈 깁니다. 안 나가고말고요."
임이네 눈에 불기둥이 서는 것 같다.
"아주머니는 돈이 많은가 보지요."
"그만한 돈이사 없겄십니까? 그래도 배를 쨌이믄 의사가 책임지야제요.
안 그렇겄소?"
"입원비로 허비하느니보다 퇴원해서 몸을 보하는 편이 훨씬 낫지요."
"그렇기 사알살 꼬아도 내는 안 나갈 기구마는,"
"수술할 환자가 또 있는데 그러면 안 되지요. 수술 자리는 썩 잘
아물었소."
"그러믄 묻겄는데요, 나는 살 수 있십니까, 못 살 깁니까."
임이네 목소리에는 울음이 가득 차 있었다.
"수술은 잘됐다고 하지 않았소? 죽고 사는 일은 아무도 몰라요. 의사도
다 마찬가지로 죽으니까요. 물에 빠져 죽는 일도 있고 언덕에서 떨여져
죽는 일도 있고 사람이 어디 병으로만 죽는 건가요?"
박의사는 임이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은 습관이었다.
환자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환자에게 불안감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익혀진 버릇인 것이다. 임이네의한 팔이 허공을 가르듯 내려왔다. 박의사의
손을 덥석 잡은 것이다. 박의사 등골에 서늘한 것이 타고 내린다. 환자를
대할 때 흔히 있는 일인데 회복의 가망조차 없는 중늙은 여자의 힘에는
살기마저 느껴졌던 것이다. 죽음의 심연까지 끌어들이는 것 같은 아주
기분 나쁜 힘이었다.
"선상님요, 나 나이가 이자 겨우 쉰다섯입니다. 나는 못 죽십니다.
참말로 못 죽십니다. 무신 남 못할 짓 했다고 멩대로 못살겄십니까. 디건이
목에 피 내묵고 살덧기 살았는데 한이 첩첩산이요, 선상님, 살리주시이소!"
울을음 터뜨린다. 눈물이 펑펑 솟아오른다. 철색을 띤 얼굴이 흠뻑
젖는다. 박의사는 꽉 물려드는 손가락을  뜯어내며 간신히
"맘을 단단하게 먹어야 병도 항복을 하는 법이오."
"선생님,"
정윤이 혀를 찬다. 박의사는 시계를 본다.
"점심 드셔야지요. 환자가 곧 들이닥칠 텐데."
"그럼 점심이나 먹어볼까?"
울음을 뚝 그친 임이네, 정윤을 무섭게 노려본다.
"야 이놈아! 머리빡이 허여질 때까지 이 집에서 종질하고 살아라! 예사,
나그네보고 먼지 짖는 거는 개새끼라 카더라마는, 흥!"
"보자보자 하니,"
정윤의 얼굴이 시뻘개진다.
"나가자. 환자하고 그러면 쓰나,"
정윤의 등을 밀고 박의사는 복도로 나간다.
"영악한 아낙이야. 자기 죽음을 예감하는 것 같다."
"환자치고 저런 환자 처음 봤습니다. 어떤 떄는 반미치광이같이
날뜁니다. 사는 것이 저리 추악한 것이라면 살아서 뭘 합니까?"
"젊은 사람들은 다 그렇게들 말하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천당이든 지옥이든 내세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정말 퇴원 안 하려고 떼를 쓰면 골칫거립니다."
임이네의 병은 결핵성 복막염치고는 급성이었다. 삼십구도의 고열인데다,
환자는 심한 복통을 호소했다. 복막염으로 진단했으나 결핵성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죽더라도 원이나 없게 수술을
해달라는 가족과 본인의 의향도 있고, 또 화농성 복막염일 경우 화급을
요하는 일이었으므로 착수한 수술이었다. 개복한 결과는 의심했던 바로 그
결핵성 복막염이었던 것이다. 장벽에는 이미 별만큼 무수한 결절이 형성돼
있었으며 군데군데 궤양을 일으키고 있었다. 환자가 복통을 호소하고
고열인데다 병력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헛소리만 지껄였기 때문에 배를
도로 꿰맨 뒤 비로소 박의사는 환자가 늑막염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환자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삼 년 전에 시나브로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해서, 옆구리도 결리고 해서 자라를 삶아 먹었느니, 흰
비둘기를 털 있는 채 고아먹었느니, 다릅나무의 잎을 달여 먹었느니. 굿을
했다는 애기만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말짱하게 나았소. 씻은 듯이 나았단 말입니다. 본시 무병한
편이라서 그러고느 아무 일 없었는데,"
임이네는 씻은 듯이 나았다는 말을 되풀이 되풀이하였다. 마치 그것을
빌미 삼아 병을 고쳐주지 않고 의사가 도망이라도 칠까 두려워하듯이.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장결핵이란 폐결핵의 말기
현상인데..."
정윤에게 하는 것도 아닌 그런 말을 하고 박의사는 안으로 들어간다.
차려놓은 점심상 앞에 앉은 박의사는 우두커니 밥상을 내려다본다.
먹는다는 일이 무슨 사무 절차와 같이 귀찮고 짐스러운 생각이 든다.
산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의 차이란 어느 만큼이나 될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수저를 드는데 윗입술에 고춧가루가 묻었던 숙희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내 탱자나무 울타리와 더불어 서희의 모습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어쩐지 서먹하고 경원하고 싶은 여자였던 서희가 요즘에 와서
번번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의사가 겪은 범위 안의 여자가 아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환하게 들여다뵈는 여자가 아니다. 박의사는 자신의
취향이 입술에 고춧가루 묻힌 여자보다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여자 쪽이
아닌가 하고 쓴웃음을 띤다. 일본 있을 때 머리를 짧게 깎고 소년 같은
차림새를 한 젊은 여자를 더로 본 일이 있다. 대개 전찻간에서였고 그런
유의 여자는 거의가 학생들이었다. 차림새뿐만 아니라 말씨도 거칠었고
상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박의사는 불쾌감이 없었다. 매우 신선하고
발랄한 젊음의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익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활발하고 화제는 이론적으로 거칠었지만 신선하기는커녕
부패한 냄새를 맡는 것 같았다. 청춘조차 없었던 젊은 날을 겪은 그에게
자존심이니 지성이니 여자의 인격이니 따위의 남발되는 용어를 메스껍게
느낀 것은 애정도 싹트기 전 결혼 시초부터였다.
저녁 때 홍이가 박의사를 찾아왔다. 수술하던 날 잠시 만나고는 처음
대면이다. 홍이에게선 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처가곳 통영에서 화물차
운전수, 그것이 홍이의 직업이었다. 부산 나가서 운전 기술을 배운 그는
처외가의 주선으로, 차주는 일인이었지만 화물차를 굴리게 된 것도 일년이
넘는다. 행선지는 진주, 마산, 부산 등지다. 그중에서도 해로가 없는 진주를
자주 온다. 생선을 싣고 오면 야채, 과실, 곡식 등을 싣고 가게 된다.
홍이는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퇴원은 언제쯤 하게 될까요."
"더 이상 병원에 있을 필요는 없겠는데, 환자를 만나보았소?"
안경 속의 눈이 똑바로 홍이를 쳐다보며 묻는다.
"아닙니다. 선생님 말씀 들은 후에 가보려구요."
"자세한 얘기는 수술 후 들었던가요?'"
"그때 잠시, 가망이 없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뭐라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의외로 끌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지금
의술론 별도리 없지요... 그런데 퇴원을 하자면 환자가 좀 말썽을 부릴 것
같소."
"그건 저희들도 압니다."
시무룩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인다.
'귀공자같이 잘생겼군. 참 이상하다. 이 청년이 돼지 목 따는 소리를
질러대던 그 환자의 아들이라니,'
박의사는 유심히 홍이를 바라본다. 요즘 세태엔 새로운 직업운전수가
상당히 인기 있고, 따라서 다분히 건달기도 있는 것이 운전순데 귀티가
나고 세련되고 어딘지 모르게 저력을 숨기고 있는 듯한 인상, 특히 청년의
눈빛에는 교육을 받은 흔적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매우 침착하며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하기는 병간호를 위해 통영서
왔다는 며느라라는 여자만 해도 그러했다. 전혀 가족이라는 분위기가 없는
것이다. 시초부터 정윤이나 숙희는 삼호실 환자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환자 쪽에서 불만이 많아 광태를 부리기 때문인데, 박의사 역시 이색적인
환자라는 것은 느끼고 있다. 대개의 환자는 의사에게 목숨을 위탁하는
복종심을 있는 법이다. 매달리는 눈빛, 심약한  미소, 혹은 겁먹은 반항,
그러나 삼호실의 환자만은 의사의 권위 같은 것은 서푼짜리도 못되었고
당당하게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주장했다. 수틀리면 행패부리겠다는 늘
그런 자세인데 꼼짝 못하고 누워 있을 적에도 입에서는 계속 돌팔매질하듯
말이 튀어나왔고 눈물을 흘릴 적에도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시위요
저주요 협박이었다. 신에게조차 날 살려내지 않으면 물어뜯겠다는, 그렇게
철저하고 완벽한 아집을, 그러나 박의사는 그 앞에서 서글프게 웃고 만다.
죽음은 절대적인 승리자요, 거대한 암벽에 모래알을 던지는 환자는
눈물나게 측은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윤과 숙희는 번번이 끔찍스럽다고들
했다.
"삼호실 환자 말인데요, 어떻게 생각하면 좀 불쌍하기도 해요. 더러 문병
오는 사람이 있긴 있지만 한결같이 구경온 사람 같지 뭐예요?
미치광이처럼 막 지껄여대는데 대꾸조차 하는 사람이 없어요. 어떤 할머니
한 사람만 불쌍하다 하며 울데요."
"그것 다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 게야. 죽음을 맞이할 때야말로 어떤
형태로든 숨김없는 한 인간의 결산이 나온다고들 하지."
숙희에게 무심히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박의사는 회전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내일이라도 퇴원하는 것은 무방하니까 가족이 잘 설득해보슈."
"그렇게 하겠습니다."
홍이는 일어섰다.
"환자를 위해서도 그렇지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살풍경한 병원에
있기보다는... 아무튼 안됐소."
진찰실을 나온 홍이는 입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죽을 쑤어가지고 막
도착한 모양이다. 보연이 죽그릇을 챙기고 있었다.
"아니, 당신 짐 싣고 오셨어요?"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응, 내일 아침엔 가야 해."
홍이는 모자를 던지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반듯하게 누운 임이네는
벽 쪽으로 얼굴만 돌려놓고 꼼짝하지 않았다. 잠이 든 모양이다.
"아아, 고단하다."
"그럼 집에가서 좀 주무세요."
"어때? 지치지 않았어?"
"..."
"상의는 잘 놀아요? 보고 싶어요."
"왜할머니가 잘 거둬주시는 모양이요."
"내일은 아침 일찍 떠나야 해요?"
홍이는 입맛을 다신다.
혼인날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 때문에, 또 대례청의 닭이 죽었다하여
초상집처럼 근심에 싸였던 혼가, 이래저래 말도 많았는데 이들 부부는
햇수로 삼 년, 작년 가을에는 딸을 낳았고 별탈없이 살아왔다. 방자하고
분별없는 말을 곧잘 하며 이기적인 보연의 성품이 달라진 것은 아니나
세상 물정을 모르던 단순함과 순진성이 그의 성격의 결함을 많이
덮어주었고 무엇보다 보연이는 홍이를 좋아했으므로 늘 명랑하여 집안에
잡음이 없었다. 홍이도 그런 집안 분위기에 안주하는 듯 보였다. 용이는
아직 생존해 있었다. 그 자신이 최참판댁 고옥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며느리르 아들 옆에 가 있기를강력하게 주장하였고 다만 명절과 제삿날,
생신 때만 아들 며느리가 와서 그들의 집, 평사리의 그 집에서 가정
행사를 치르곤 했었다.
"아침에, 떠나기 전에 퇴원을 서둘러야겠는데 한소동 벌이겠다."
홍이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그때 자는 줄만 알았던 임이네가 고개를
휙 돌렸다.
"머라꼬? 이놈아, 니 여기 머하로 왔노? 머하로 왔노 말이다!"
벽력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다른 방에 있는 환자 생각도 해야지 여긴 병원이란 말입니다."
"우세스럽나? 그거는 아네? 잔소리 할 것 없다. 팔자에 없는 며누리, 머
몰라 죽은 기이 며누리고. 아들 없는 며누리가 어디 있노? 데리고 썩
가거라! 실데없인께. 체면치레 할라고 연놈들이 애쓴다. 내 돈 가지고
너거들 체면을 세워? 흥! 퇴원? 어림없다! 송장이 돼서 나갔임 나갔지
어느 연놈들 좋은 일 시킬라꼬 내가 나가노! 똥 묻은 중우 팔 때까지
병원에 있일 낀께,"
"어머니도 참, 퇴원하셔가지고 하시고 싶은 것 다 하면 될 거 아닙니까."
보연의 말이었다.
"눈감고 아웅하는 기가? 하고 싶은 것 다 하라꼬? 남의 눈이 있인께
죽물이라도 끓이오지. 너의 연놈들이 날 집구석에 콕 처박아 놓고
굶기직일 걸 내가 모릴 줄 아나! 언선스런 말 해도 나는 꼭대 위에 서
있인께, 내가 우찌 살아왔다고 그거를 모리까. 자식이 아니라 불구대천의
원수놈, 비단가리 하나 냉기고 내가 죽을 줄 아나?"
이를 부드득 간다.
"어머니도 참, 그걸 바랄 사람입니까."
"니는 상관 마라! 넘찐 것이 말대꾸는. 야 이놈아! 네놈이 평양감사라도
내 속에서 나왔다!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아나? 땅에서 솟은 줄 아나?
진자리 마린자리 가리감서 손발 잦아지게 키웠더마는 악문을 해도 우짜믄
그렇게 하겄노. 네놈은 내 가심에 맷돌을 얹었다!"
"어매는 나한테 공 안 들였소."
하다 말고 홍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그는 순간 임이네의 여명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어머니, 너무 그러시지 마시오. 자식 낳아 호랭이밥으로 던져버리는
부모는 없으니까요."
보연의 당돌한 말이었다.
"시끄러!"
홍이 소리를 질렀다.
"오오냐! 양반년 행토 좋구나."
임이네는 일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더니 바바리의 휘파람 같은
한숨을 내쉰다.
"오오냐! 쇠 한분 물어끓으믄 고만이다. 하동 땅에 그놈의 인사 살아있는
동안은 내 저승차사 애목을 물고라도 안 죽을라 캤더마는, 쇠 한분
물어끓으믄 고만이다! 하늘 밑에 낯짝 치키들고 댕길긴가 어디
두고보아라!"
"어머니!"
보연의 얼굴에 겁이 더럭 실린다. 홍이는 잠자코 입원실을 나간다.
"상의아버지! 상의아버지!"
보연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홍이는 급히 나간다. 이삼 년 동안, 만 이
년인데, 그 동안 임이네는 병으로 굿을 쳤다. 며느리를 두고 안 들어올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병이 난 것이라 하여 굿을 하고 보연이는
나타나지도 못하게 했다.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은 빈말이었다. 좋다는
약은 다 먹었고 좋다는 한의는 다 찾아다니며 법석을 피웠다. 심지어는
새끼 낳은 고양이의 안태까지 뺏어다가 날것으로 먹었을 지경이었으니까.
병원에 입원하던 그날도 지나놓고 보면 홍이가 왔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급성복막염도 아닌데 방금 죽어가듯 소동을 피웠던 것이다. 홍이는
걸으면서, 입원하던 그날 어미를 업고 병원으로 가던 길에서 어깨를
물어뜯던 이빨의 섬찟함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한다.
어깻죽지의 남아 있는 아픔과 함께.
8장 형평사
"벌받을 얘긴지 모리겄다마는, 그놈의 할망구가 어서 죽어야, 세상에
겪다겪다 별일을 다 겪는다."
관수는 손바닥을 털면서 쓴웃음을 띠었다. 연학이와 합세하여 병원에서
임이네를 집까지 데려다놓은 뒤 홍이는 화물차를 몰고 떠났고. 연학이도
웃는다.
"학 뗐지요. 그러나 입심만 있지 힘 다 빠졌습디다."
"병에 이기는 장사가 어디 있더나."
"술이나 한잔씩 하고 갈까요?"
"그러자. 쪼깐이집에 가는 기이 좋겄다. 가서 찍짜 좀 부려야겄다."
두 사람은 함께 걸음을 옮긴다.
"두만인가 그 사람 영 나이값을 못하더만요."
"죽일 놈이다. 농청놈들하고 한당이 돼가지고 술말이나 퍼내는 모양인데
그새끼를 그만,"
"동생 영만이 그 사람은 안 그런데, 꼭 갈밭 쥐새끼겉이,"
"그놈 아배 어매도 안 그렇는데 누구를 닮아 그런지 모리겄다. 하기사
두만아배가 약기는 약은 사람이었제. 그러나 남한테 해꼬지하고 경위 없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내사 마 서울넨가 쪼깐인가 그 계집만 보믄 노린내가
나는 것 겉애서. 사나이도 계집 한분 잘못 만내믄 신세 망치는 거고,"
"신세를 망치기는커냥 쌓이는 기이 재물이고 장터 안에 땅 사가지고 집
지을 기라 하더마요."
"머? 누가 그러더노?"
"우리 형수가요."
"참 그렇제? 두만이하고 사돈간이라는 거를 내가 잊어부리고 있었고나."
"아무튼 두만인가 두만강인가 하는 사람 실업쟁이요. 그 입으로
최참판댁, 환국이아부지를 두고 이러니저러니 실데없는 말을 하고 댕기는
모앵인데,"
"길상이 말가?"
"야."
"머라꼬 했는고?"
관수는 긴장한다.
"뭐라긴, 종이니 어쩌니 하고 나발을 불어서 지난번에도,"
연학은 환국이 순철이를 때린 사건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그까짓 일이사 만판 해봐야 별수도 없는 일이지마는, 하 참, 그놈아아가
바로 박쥐고나. 백정이 미버서 농청놈 역성들고 나오더마는, 백정이 미브믄
양반은 안 미블 긴데 와 그라제?"
"쪼깐이를 계집 삼더니 그래 마음보가 노래미 창자로 줄어드는
모앵이요. 하야간에 하동서 온 사람이라 카믄 덮어놓고 송충이같이 고개를
흔들어대니께,"
"그건 맞다. 그놈아아가 백정을 미버하는 것도 아마 나 때문인 것 겉고,
석이를 두고도 핵교서 이러쿵저러쿵 했는갑더라."
"아들내미가 그 핵교에 댕기지요. 핵교서 유지로 행세할라 칸께 와 아
안그러겄소."
"그렇다고 하동 사람을 진주서 몰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용렬하다는 거 아니요. 누가 할 일이 없어서 최참판댁
노비였었다고 말을 하고 댕기겄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누가 내 말
안하나, 내 근본을 들추지 않나, 하하핫핫 참,"
"하기사 말 타믄 마부 부리고 싶은 기이 인심인께, 돈벌었으니 양반
되고 저븐데 답대비 그놈의 하동 사람이 눈에 거슬린다 그 말이구마. 허허
참, 하여간 오늘 가서 기름을 좀 짜놓자구."
"그럽시다. 그는 그렇고 형님,"
"와?"
"정선생 그 사람 말인데요."
"석이가 와?"
"형평사운동에 끌어넣지 마시오."
"그건 나도 알어."
"핵교서 말썽이 많은 것 같소. 학부형들이 좀 극성이라야지요."
"형평사 때문에 백정의 세도도 늘었지마는 그놈의 학부형이라는 것들도
세도 되게 늘었지."
현재 관수의 아들은 아무도 몰래 부산서 공부를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갖은 짓을 다 해보았으나 진주서는 아들을 취학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년 오월 진주서 조직된 형평사는 자제에게 교육을 시키겠다는 치열한
희망을 표시하는 백정과 그것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시민들 간의 투쟁의
산물로 보아야 하는데, 백정의 사위 관수는 물론 선봉에 선 투쟁파였다.
형평사가 진주서 조직된 것을 물론 인간의 대접을 받고자 한 백정들의
자각 때문이지만 조선노동공제회, 현재는 조선노동연맹과 합동했지만, 그
회원들의 열성적인 후원 없이는 조직과 운동의 전개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여간 작년부터 금년에 이르기까지 어수선한 사태가 지속되고 있는데,
그런 만큼 백정 쪽의 세력이 커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농청원을
선두로 한 시민들은 백정에게뿐만 아니라 백정들의 강력한 후원자며
지도자로 볼 수 있는 청년, 진보 사상가 강상호,『조선일보』 지국장
신현수 등에게도 새 백정이라는 칭호와, 발기 대회가 열렸던 청년회관을
도살장으로 규정하고서 치열한 증오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형평사운동은 바야흐로 전국에 확산되는 과정이었고 역사가 빚은 공통된
피해 의식이 구심점을 찾은 만큼 날로 증대하고 공고해질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우육파매운동이나 노동공제회원과의 절교, 신백정,
도살장 따위의 명칭으로 응징하려 드는 농청 쪽의 방법은 실질적 효과를
거두게 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간의 도랑이 깊이 파내려져가고 있는
것을 간과할 순 없다. 법률적인 보장이나 제재보다 훨씬 끈질기고
직접적인 것은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이를 형평사운동에서
제외하자는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은 석이라는 인물 자체를 아끼기
때문이다. 형평사와는 선이 닿지 않는 다른 조직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관수와 연학이는 쪼깐이 비빔밥집을 찾아들었다. 잔주름이 생기고 좀
늙은 서울네는 완연하게 싫은 표정을 지었다. 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아침나절이어서 손님이 없었던 것이다. 관수가 먼저 자리에 앉으며
"여기 머 좀 안 줄라요, 아지마씨?"
"아직 준비를 못했어요. 아침 아니에요?"
"설마, 김치도 없다 하겄소? 술도 엎어지믄 코 닿을 곳에 얼매든지 있일
기고, 아 참, 술 가지로 보내거든 두만이 좀 보자 카소."
서울네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서울 장안도 아니겄고, 아니 먼 곳에서 옛친구 낯짝도 잊어부리믄
쓰겄소?"
서울네는 이죽거리는 관수 말을 들은 척 만 척,
"여문아! 여문아!"
하고 심부름 아이를 신경질적으로 불러댄다.
"야."
하고 턱이 짤막하고 다붙은, 눈썹이 짙은 계집아이가 쫓아온다.
"김치하고 술하고, 여기 손님한테 갖다드려."
하고는 돌아앉아서 북어를 찢는다.
"아지마씨요."
여전히 개운찮은 표정인 채 돌아본다.
"솥에서 북적북적 끓고 있는 기이 선짓국인 모앵인데 맞돈 드릴기니
국부터 두 그릇 떠놓으소. 허 참, 그러고 본께 백정이 없어도 안 되겄네.
백정이 없이믄 이 집 장사 못할 거 앙이가."
"남의 걱정까지 할 것 없어요."
서울네가 응수한다.
"무신 그런 섭섭한 말심을, 아지마씨는 내력을 몰라서 그러지마는
두만이하고 나하고 말하잘 것 겉으믄 그럴 새가 아닌 기라요. 또 여기
연학이를 푸대접한다믄 그거 김두만이 안사람으로선 이만저만 배포가 아닐
기요."
비로서 서울네는 찔끔한다. 통 오가고 하는 일이 없어서, 관수에 대한
미운 생각 때문에, 저도 모르게 서울네는 연학이 사돈간이란 것을
등한했다. 뭐 연학이라고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지만. 서울네는 생각을
고쳐먹는다. 큰댁 역성만 드는 시누이 선이가 밉기도 했으나 그렇기
때문에 앞이 막히는 짓은 아니 하라라. 국 두 그릇을 뜬 서울네는 술판에
그것을 놓으며
"진주서 살면서도 인사가 없었습니다."
하며 변명 비슷한 말을 한다.
"아, 예. 지도 마찬가지지요. 바깥사돈은 안녕하십니까?"
"네."
"아이들도 잘 크지요?"
"네."
"아지마씨."
시비 걸듯 관수가 또 불렀다.
"말씀하시오."
"아침나절이라 손님도 없고 옛친구에다가 사돈 아니겄소? 아아들 보내서
두만이더러 좀 오라 카소. 술값이야 내가 낼 것이니. 요즘 백정들 살
만한께요."
"거 백정 백정, 말말이 그러지 말아요. 국맛 떨어지겠수."
주걱으로 뺨을 치듯이 당돌하게 응수한다. 그러나 관수는 넉살 좋게
"여문이라든가? 야아! 여문아! 여문아!"
아이 이름을 불러댄다.
"와 그라요?"
심부름 아이가 놀라서 달려왔다.
"와 그라나 마나, 니 가게에 가서 아제씨 좀 불러온나. 사돈이 좀
보잔다고,"
"야."
"안 오믄 찾아간다고 해라!"
"야."
서울네는 가라 마라 참견은 안 했지만 눈살을 찌푸린다.
"아지마씨."
숫제 대꾸를 안 한다.
"요새 말입니다, 새 백정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심심치 않게 새
부자라는 말도 나돌고 있십니다."
"관수는 술을 들이켜고 나서
"아지마씨도 이자는 이 장사 그만 하이소. 두만이가 양반 되자믄
안사람한테 술장사 시키서 되겄소? 안 그렇십니까?"
"온 세상에, 낙지, 문어를 장복했나?"
서울네는 눈이 곤두선다.
"낙지, 문어를요?"
"말말이 감고 드는데 유감이 있으면 까놓고 얘기하슈."
"없는 것도 아니제요."
"형님, 그만두소."
뭘 여자를 가지고 그러느냐는 듯 연학이 옆구리를 찔렀다.
"이 사람아, 그런 말 말게. 이 장사를 몇 해 했다고, 치마를 두르긴 해도
아짐씨 봇장이 두만이보다 월등하단 말이다. 농청넘한테 두만이가 술 한
말 내면 아짐씨는 열 말 낼 봇장이거든. 여자남자 할 것 없이 사람이란
작을수록 간뎅이가 큰 법이니까."
정수리에 매질하듯 내리치는 말에 서울네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 같다.
"하하핫... 내 말이 틀렸소, 아지마씨?"
"우리도 장산데 돈 주는 사람이면 열 말 아니라 백 말인들 못 내겠소?"
슬쩍 비켜선다.
"내 참 이렇다 카이. 참말이지 두만이가 마누라 잘못 얻었다 소리는
못할 끼구마는. 하하핫..."
웃는데 두만이가 들어섰다. 배가 나오고 몸이 불어서 돈 있는 태가 절로
난다.
"아침부터 무신 술고?"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지."
관수를 힐끗 쳐다보다가 마지못한 듯 연학에게 눈길을 옮긴다.
"오래간만입니다."
"예. 자주 만내보지 못해서, 바쁘지 않십니까?"
"일 년 열두 달 바쁘다보이 노는 그 시간이 안 바쁜 기지요."
연학과 두만이는 사돈간의 예의를 차리며 얘기를 주고받는다. 속으론
마땅치 않으면서.
"하야간에 바람 한분 잘 불었다."
관수가 시죽시죽 웃는다. 두만이는
"그보다도, 사돈에 대한 예절도 있고오, 이보래?"
나가려는 마누라를 불러세운다.
"안방에 술상 채리는 기이 좋겄다."
"알았어요."
서울네는 획 나가버린다.
"뭐라꼬? 안방에다 술상 채리?"
관수는 두만이의 속셈을 안다. 연학이 혼자였다면 없다든가 해서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끈덕진 자신의 성미를 알고 무슨 말이 나올지
가게가 시끄러워질 것이 싫었을 것이다. 술상을 안방에 차리라 한 것도
표면으론 연학을 대접하는 척, 그러나 역시 손님이 모여들 가겟방에서
관수가 떠들어젖히는 것은 달갑잖은 것이다.
"사또 덕에 나발 불더라고 연학이 덕분에 새 부자 안방 구겡을 하니
이거 영광이구마."
관수 말에 두만이는 경멸하듯 픽 웃었다. 가게와는 딴판이었다. 안방은
굉장했다. 하기는 몇 년을 비빔밥 장사를 하면서 번 돈도 많았지만 그만큼
노력도 컸으니 안방 세간의 호사쯤이야 별것도 아닐 테지만 의걸이며
경대며 모두가 최상급이요 이불장에는 양단 요이불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연학이는 좀 놀라는 듯, 그리고 거북해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관수는 방안
세간 따위는 개의치 않고 털썩 주저앉았다. 이윽고 술상이 들어왔다.
그러나 으리으리한 방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술상은 초라하였고 술도
텁텁한 막걸리다. 사돈에 대한 예절 운운했던 두만이는 초라한 술상,
막걸리에 대하여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같이 술잔에 술을
쳤다. 연학과 관수는 잠자코 술잔을 비우는 것이었다.
"어떻십니까? 여수 소식은 듣습니까?"
연학에게 묻는다.
"큰집 말입니까?"
"그러니께 사장어른께서는,"
"큰아부집니다."
"그렇다믄 멀지도 않구마요."
"그런 셈이지요."
"좀 이해할 수가 없십니다."
"머가 말입니까?"
"구태여 최부잣집의 일을 봐주지 않아도,"
"큰아부지가 아니고 우리 아부지라믄 최참판댁 일을 봐주지는
않았겄지요."
"아아 예. 그래 여수의 일은 잘돼가는지요."
"개기를 건진다기보다 돈을 건진다 해야 하까요?"
두 사람이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술만 마시고 있던 관수가
"두만이 너 기부 좀 안 할래?"
불쑥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한다.
"머?"
"정확하게 지금으로부터 십팔 년 전에 서울서 윤보목수가 평사리로
돌아왔지."
"무신 소리를 하노? 자다가 봉창 뚜디리나?"
두만이는 완연하게 싫어하는 기색을 나타낸다. 목수일은 오래 전에
집어치운 직업이었고, 목수라는 말 자체도 상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진주바닥에서 내노라 하고 댕기는 처지고 보면 지난날의
은인을 생각하는 것이 씁쓰름할 기다마는 일이란 선후좌우가 있는 만큼
잊어부리고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제. 은앙새겉은  마누라를
만낸 것도, 오늘 이렇기 두만이가 훌륭해진 것도 뿌리를 캔달치믄
윤보목수를 밀어젖힐 수는 없는 일 아니겄나?"
"그래서 그기이 우쨌다는 것꼬? 윤보목수가 우리한테 유산이라도 남기고
갔다 그 말가?"
"그 얘기는 그만두자. 흙 속에 묻혀서 다 썩었일 사람이 은혜 갚으라
하지도 않을 긴께."
"삼대 구년 묵은 얘기 새삼스럽게, 술맛 떨어진다."
"술이야 머 얼마든지 내가 마시줄 긴께,"
관수는 술을 쭉 들이켜고 김치 조각을 꽉 찍어서 입에 넣는다. 연학은
사돈간이라는 처지를 깍듯이 유지하고 있었으나 입가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그러니께 십팔 년 전에 윤보목수가 평사리로 돌아왔을 때 너거
아부지는 영만이를 데리고 장배 부리는 장서방, 그러니께 자네한테는
사돈댁이요 연학이한테는 큰아부지인 그 집으로 갔더라 그 말인데,
그러니께 평생 집을 비운 일이 없는 너거 아부지가 작은아들까지 데리고
우째서 며칠씩이나 사돈댁에서 묵었느냐, 그 이유를 평사리 사람치고 모릴
자 하나 없지."
두만이 얼굴이 벌개진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기에 마음에 대비가
없었다.
"자네는 그때 서울 있었인께 사돈댁 신세를 면하기야 했지. 너거
아부지가 영만이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온 것은 그러니께 마을 장정들이
산으로 들어간 뒤였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두만이는 지
아부지를 따라갈라믄 아직 멀었다, 아암 멀었고말고. 돈은 좀 모았을지
모르지마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는 어림없다! 이봐라 두만이, 너거
아부지가 사돈댁에 갔기 때문에 산에 간 윤보목수 꼴이 안 됐고 마을에서
죽은 한조아제씨, 삼수 꼴도 면하게 된 거 아니겄나? 정작 나는 그렇게
살지는 못했다마는 자네는 세상을 살살 달래감서 살아야 한다, 그
말이구마. 농청놈들한테 술을 퍼멕있이믄 형평사에도 기부 좀 해야 안
하겄나. 안 그렇나?"
"술을 퍼멕이기는 누가 퍼멕이!"
화를 낸다.
"안 멕있다믄 우리로서는 반가운 얘기고 형평사에 기부 좀 하게."
"새 백정 소리 들을라고 기부를 해?"
"아따 이 사람, 백정이나 노비나 엇비슷한데 억울해할 것도 없거마는
하하핫..."
"멋이 어째?"
술잔 든 손이 파들파들 떤다.
"와? 내 말이 글러서 그러나?"
두만이는 술잔을 관수 얼굴에 던진다.
"이거 이래도 되는 것가?"
관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아내며 두만이를 노려본다. 그러고는 피식
웃는다.
"백정놈한테는 칼 가는 재주 하나 비상하지. 하하핫핫핫..."
두만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시비를 걸고 이죽거릴 것을 예상은
했으나 두만이는 자신이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다.
"내하고 무신 원수가 졌다고, 응? 듣자듣자 하니! 그래 칼 갈아서 내
목을 베겄다, 그 말가? 응?"
일어서는 것을 연학이가 끌어앉힌다.
"허허허, 사돈 참으시오. 친구간에 못할 말이 머 있겄소. 그것도
흉허물없이 어릴 적부터 한 마을에서 자란 처지고 보믄. 말이 났으니 하는
얘긴데 최참판댁 환국이도련님을 보고 종놈의 자식이라 희롱한 아이가
있었지요. 환국이아버님이 어디 종놈이었소? 내가 알기론 그 댁
마나님한테 우관선사가 맡겼다는 것인데, 세상을 살다보믄 별의별 놈의
말을 다 듣지요. 어째서 환국이아버님이 종입니까?"
연학이는 등신같이, 무척이나 어리석은 사람같이, 일부러 길상이 종이
아닌 것을 강조한다.
"어떤 못된 놈이 그런 말을 퍼뜨맀는지 지 똥이 꾸린께 한 말
아니겄소?"
이것은 또 난데없는 매질이다. 두만이는 비로소 두 사람이 짜고, 단단히
벼르고 찾아온 것을 똑똑히 깨닫는다.
"필경 하동서 온 사람 중에 누군가가 헐뜯기 위해서 한 말인 모앵인데
그런 죽일 놈이 어디 있겄소? 짐승도 구하믄 은혜를 안다는데 최참판댁
덕을 본 놈이 그따우로 했을 기니, 우째 사람이 짐승만 못한지
한심스럽소."
술을 많이 했는데 연학이는 천연스럽고 말간 표정으로 억양도 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관수는
"아따 마, 한솥에 밥 묵는다고 어지간히 역성이다. 집우치아라. 농청놈도
이갈리는데 참판은 또 멋꼬? 길상이 종놈은 아니지마는 길상은 길상인
기라. 제에기랄!"
자포자기한 것처럼 술을 연거푸 마시던 두만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쓴다.
"사촌이 논 사믄 배아프다, 그 말이 하낫도 안 틀린다. 내가 못살았이믄
관수 네놈이 와서 이러겄나? 나도 고집 있고 밸이 있는 놈이다."
"그거 좋지. 사내자석이 안 그렇다믄 어디다 써묵게? 다만 내 좋은 말
할 직에 들어두는 것이 신상에 해롭짆을 기다. 제발 하동서 온 사람들
쑤시고 댕기지 마라. 누가 옷 도라 카나, 밥 도라 카나. 도움은 못 줄망정
그래 쓰겄나? 그런다고 자네가 정승 되는 것도 아니겄고 노비든 참판이든
똑같은 사람, 내 비록 백정의 사위지마는 하늘에 낯짝 쳐들고 안
부끄러우믄 되는 기라."
그럼 말이 두만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피땀으로 구축했다고 늘
주장하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념과 두 사내가 가해자라는 것 이외
달리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노비, 노비 할 적마다
쳐죽이고 싶지만 그러나 자제하는 것이 보신책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튼 그들은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것이다. 재산이 불어나면
불어날수록, 장래의 야망이 크면 클수록 그것 따라서 자신의 근본이
혐오스러워지는 것을, 두만이는 체념할 수가 없었다. 분수대로 살라던
평소의 어미 말도 상기되어 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피땀의 은덕은
누가 보았기에! 손바닥만한 남의 땅, 간난할매 제위답까지 조준구한테
빼앗기고 사발 바닥의 죽이나 핥아먹을 기막힌 가난을 구제한 아들의
피땀나는 싸움을 부모조차 외면을 하는가! 내가 혼자 일어섰을 때 무엇을
했고 이 날강도 같은 놈들은 나를 핍박하고 위협하는가! 이놈들은 나를 떡
주무르듯 하는데 나는 어째서 할말을 못하며 면상에 주먹질을 못하는가?
"이자는 우리 나이도 사십이라, 길상이 두만이도 내 동갑이니, 참말로
덧없이 세월이 흘러간다. 천년 만년 살 것겉이 나부대던 임이 어매도
사잣밥을 지을 날이 얼매 안 남았고, 이자는 우리들 자식대가 오는 기라.
우리 당대에 좋은 세상 바라기는 다 글렀다. 다만 자식들 뽄배기라도
됐이믄 싶지마는 그러씨... 새것에 눈떴다는 사람들 역시 벼슬길 탐내기는
매일반이다. 더 음흉하게 돈버는 재주도 가지가지, 지주나 소작인은 접방
가라는 세상 아니가? 눈이 짓무르게 싸래기를 골라봐도 하루 품삯이 오
전, 십 전, 아니믄 싸라기 됫박이나 얻어서 시래기죽이니 두만이가 뽐낼
말도 하지. 흥하기도 쉽고 망하기는 더욱 쉽고."
"그만 하고 안 가실랍니까?"
연학이 말에
"응, 가야제."
관수가 벌떡 일어섰다.
"사돈, 잘 묵었십니다. 다음은 제가 술 한번 사지요."
연학이는 두만에게 정중이 인사한다. 두만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두
번 다시 이들과는 대면하지 않으리라 맹세하는 것이었다.
"잘 있게. 아들 공부 자아알 시키고오,"
아들 공부 잘 시키라는 말을 할 때 관수 얼굴은 일그러졌다. 백정
자식의 취학을 맹렬히 반대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 김두만에게 던진
원한에 찬 말이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온 연학이는 엉거주춤 거리를
바라보다가 걷는다.
"형님, 바쁩니까?"
"와."
"그러씨..."
"할 얘기라도 있어?"
"특별히 할 얘기는 없십니다마는,"
"술 좀 더 하까?"
"술은 고만둡시다. 대낮에, 마시도 취하기나 하겄십니까."
"우째 뒷맛이 안 좋다."
"지도 그렇십니다. 자자부레한 일 가지고 너무 심했이까요?"
"심했기보다 말해야 소용없는 일이었제. 외골수의 성미는 아배 닮아서,
제 앞만 가리믄 그만이라는 생각이고. 옛날에 윤보목수가 두만아배를 뭐라
캤는지 아나? 번갯불에 콩 꾸어 묵을 놈이라 했다. 갈밭 쥐새끼라고도
하고. 그러나 두만아배는 푼수를 알고 산 사람이다. 한여름에 똥장군을
지고 밭에 가다가 언덕 밑의 봉기노인 집에서 허연 쌀밥 해묵는 거를
보고, 그놈의 늙은이도 보통 너구리가 아니었지, 조준구가 들어서는 바람에
삼수놈하고 짜고서 풍청거릴 때였거든. 그래 쌀밥 묵는 거를 본
두만아배가, 기야! 니 하늘 안 무섭나? 했다 하데. 두만이가 지 아배만큼
세상을 산다믄 덕은 없어도 세상에 해는 끼치지 않지."
"그렇지요. 일 년 묵을 곡식을 땅에서 얻어내믄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지요. 지금도 그 나이에 머슴 안 데리고 농사를 지으니,"
"대체로 우리 나라 농민들이란 그런 사람들 아니까?"
"그런 처지가 되기를 바라는 농민들이 모두라 해도 과언 아니겄지요.
묵고 살 만한 땅, 부지런히 일하고, 그기이 꿈이겄지요. 부지런히 일해도
묵고 살 만한 땅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두 사람은 천천히 걷는다. 화사한 옷차림의 여자들이 지나간다.
"완연한 봄이고나. 하늘 땅을 보믄 살아볼 만한 세상인데 우째 사람들
맴이 눈비겉이 질척거리는지 모리겄다. 우리들 할 일이 이자는 없는 것
같고,"
"관수아저씨! 아저씨!"
부르는 소리와 함께 길모퉁이에서 청년 한 사람이 뛰어온다.
"마침 잘 만났어요."
관수는 청년에게 악수를 청했다.
"언제 왔소?"
"어젯밤에 왔습니다."
하면서 청년은 옆에 서 있는 연학에게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잠시,"
관수는 소매를 끌었다. 관수는 따라간다. 그들이 얘기하는 동안 연학은
일본 오복점 유리창 안에 내걸린 일본 옷감을 아무 뜻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 관수는 돌아왔다.
"가자."
그 음성은 묘하게 한숨같이 들렸다.
"강가에 바람이나 쐬로 가까?"
"그렇게 하까요?"
옥봉 쪽 둑길로 해서 두 사람은 강가로 내려간다. 사람의 그림자라곤
없었다. 모래밭은 가지런했다. 강물은 봄볕에 희번덕거리고 강 맞은켠
사천으로 빠지는 벼랑길 밑의 대숲이 기막힌 빛깔을 자아내고 있었다.
모래밭에 주질러앉은 두 사내는 강변 풍경을 바라본다. 관수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낚시질이나 해봤이믄..."
"하시지요."
"맴이 한가로바야제."
"..."
"길상이 그놈아아 참말로 옹골차게 산다."
"무신 뜻입니까."
"아들 둘 낳아놨것다 가숙한테 미안한 마음이야 있겄지마는 우리겉이
절절하까? 넓은 곳에서..."
관수는 전에 없이 의기소침해 있는 것 같았다.
"요즘 우리 형편을 우떻기 보십니까."
"싼싼조각이 날 기다."
"그냥 우리는 생업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
"아니믄 달리 갈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분간은 아무것도 못하게 돼 있지. 그 당분간이 얼매나 될 긴지
그거는 모리겄다."
"결국 만주로 빠져나갈 길밖에 없겄소."
"만주로 빠져나갈 사램이 몇이나 되겄노. 다 늙었고 죽었고... 차라리
도시로 빠져나가는 것이 낫지. 그러나 산속에서 발이 익은 놈들이 도시에
나가 머 제대로 하겄나? 죽 묵기도 코가 빠질 긴데,"
"윤도집만 살아 기시도,"
"다 마찬가지다. 윤도집이건 조막손이 손가건, 사람이 우짜기에는 너무
세월이 빠르다. 모두 늙어갔는데 젊은놈들 끌어들이기에는 동학도
형편없이 낡았거든."
"그나저나 어째 소식은 없는지..."
"환이형님 말이가?"
"예."
"..."
"강쇠가 조바심을 내고 있던데,"
"만주 벌판에서 이리밥 되기 십상이제."
역시, 관수가 의기소침한 직접의 원인은 환이의 소식이 끊어진 때문인
것 같다.
"만일에 그렇다믄 환국이아부지하고 줄을 댈밖에 없겄지요."
"니 만주에 가고 접나?"
"가고 저븐 것도 아니고 이렇게 엉거주춤 있는 것이, 갈 바를 못 잡겄소.
매 잃은 사냥꾼맨치로 그냥 허둥지둥 걷고 있는 것 겉고, 이럴 양이믄
차라리 싹 때려치우고 여편네나 불러와서, 환국이어머님이 집 한칸을
매련해주실 모앵이니까... 그런 생각이 없지도 않소."
"이삼 년 사이에 바싹 시들었다. 환이형님이 계신대도 마찬가질 기다.
이자는 산속 촌구석에선 별무소득이라. 내가 아까도 도시로 나가야 한다
했지마는, 이곳저곳 뚝뚝 떨어져서 봉화 올리는 식의,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차라리 한곳에 밀집해야 일이 되든 안 되는, 소리라도 지를 수 있는
기지. 이곳저곳 이제는 허세비란 말이다."
그것은 연학이도 느낀 일이다. 철통 같은 비밀, 비밀의 조직, 그 것이
아무리 철통 같은 비밀이라 하여도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려면 그만한
결과를 계산해야 한다. 그만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한번의
폭발마다 조직은 늙어가고 줄어드는데 보충이 없다는 것이다. 줄어들고
늙어가는 만큼 폭발력도 줄어들고 늙어갈밖에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요 환이 머리 하나의 정열로 이끌기엔 지리산은 이미 무대가 아닌
것이다. 그것을 다 막연히 느끼고 있다. 환이를 기다리는 마음도
마무리짓거나 아니면 큰 변동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빠르게 옆으로 퍼져나가야지, 느리게 앞뒤 재는 것이 이제는 안 묵힌다.
그거를 형평사운동을 함서 깨달은 긴데 서울서 온 젊은 사람들 얘기를
들을 것 겉으믄 지주와 소작인들이 변동된 때문에, 자작농이 줄고 지주도
줄고 대신 수가 적어진 지주는 땅이 자꾸 넓어지는데, 그 적어진 지주에
왜놈들이 또 끼여든다는 게야. 그뿐인가. 왜놈의 농민들이 합류하게 된께
간신히 소작 자리를 거머잡은 축이 움직이겄나? 쥐꼬리만한 소작지나마
빼앗기고 농촌에서 떨리나간 사람들의 갈 곳이 어딘가. 만주, 일본, 그리고
꾸역꾸역 몰려가는 곳이 도시 공장인데 움직일 수도 있고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 그들이라 하더마. 일리가 있는 것 겉기도 하고 모릴 것 겉기도
하고, 독립운동하고는 우떻게 되는 긴지. 우리 생각을 어떻게 고치야 하는
건지. 다만 이제 동학으론 안 된다. 자리도 없고 사람도 없다. 동학은 낡고
무너졌다. 그래서 우리도 무너져가고 있는 기라."
9장 죄인들
일본으로 시집간 장이가 친정에 다니러 왔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임이네를 병원으로 업고 간 그 전날이었다.
용이가 하동으로 옮겨갔고 홍이 역시 장가든 후 평사리에서 부산,
통영을 전전하였으므로 임이네는 작은방을 세놓고 살고 있었는데 세든
아낙과 이웃 아낙이 주고받는 얘기를 듣고 홍이는 가슴에 칼질을 당한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아낙들의 얘기는 장이로부터 들은 일본에 관한
것이었다.
"촌으로 가믄 인심이 후하고 벌어묵고 살 만하단다."
"내가 듣기로는 모집해 간 노동자들을 많이 직있다 카든데,"
"그거는 지진이 나서, 촌에서는 그런 일 없었단다. 그 사람들은 과실도
땅에 떨어진 거는 안 묵고,"
"아이고 얄궂어라. 와 그라꼬?"
"가을이 되믄 떨어진 감을 한 가마씩이나 줏어서 광산에 가지가 팔고 또
추수 때는 이삭을 몇 말씩이나 줍는단다. 우리 조선에서야 어림이나 있나?
밀주를 해서 광산 노동자들한테 팔아 돈번 사람도 많다 카든가,"
"그렇기 살기 좋은 곳이라믄 우리도 가봅시다."
"질을 끄어주는 사램이 있어야 가제."
"하기는 남정네 없는 여자들이 사고무친한 곳에 말이나 할 줄 안단
말가."
"죽으나 사나 때묻은 고장서 살밖에 없지."
"조선사람도 그렇다믄 일본사람은 다 부자겄네요."
"장이 말로는 못사는 사람은 조선 사람들보다 더하다 카데. 더럼고, 지
피 빨아묵었다고 벼룩을 잡아 묵는단다."
"아이구 더러바라, 세상에."
그런 등등의 얘기였다.
이튿날 수술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이는 화물차를 몰고 통영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장이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병간호를 위해 보연을 진주에 보내고 어린것은 처가 장모에게 맡기고
홍이는 차고 안에 있는 석 장짜리 다다밋방에서 잤다. 보연을 보내지
않더라도 석이네나 판술네가 대신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홍이는 보연을
보냄으로써 방패를 삼는 그런 기분이었다. 통영으로 돌아온 후 낮에는
줄곧 바빴기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한다던 의사의 말이며 수술실로 들어가던
어미의 모습이며 친정에 왔다는 장이 일도 잊었으나, 기름 냄새가 밴 차고
안의 더러운 방에서 밤이면 잠을 청하기가 어려웠다. 어미에 대한 의사의
선고는 충격이었다. 까맣게 잊었던 장이의 귀향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어머
때문에 받은 충격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놀라움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장이에 대해서는 몹쓸 짓을 했다는 희한이
홍이로 하여 잠들지 못하게 하였다. 장이에게도 물론 메울 수 없는
상처였겠으나 홍이는 자신에게도 얼마나 깊은 상처였는가를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젊음의 실수, 시기가 청춘이며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기
때문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을 홍이는 깨달은 것이다. 보고 싶고 그립고,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몹쓸 짓을 하였구나, 다만 아픔이었다. 두 번째
진주로 갔을 때, 그러나까 퇴원 문제를 의사와 상의했던 그날, 보연이를
병원에 남겨놓고 집으로 돌아온 홍이는 뜻밖에 마루 끝에 걸터앉은 장이를
보았다. 세든 아낙과 잡담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장이도 놀랐다. 그는
홍이가 일별하는 순간 허둥지둥 달아났던 것이다.
"어이구 참, 와 저럴꼬? 처녀도 아니겄고 일본물까지 묵은 여자가
내외하나?"
세든 아낙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는 그렇고 어매는 좀 어떤고 모리겄네? 말 들은께 별로 좋지 않다
카더마는,"
건성으로 홍이에게 물었다.
"내일 퇴원해야지요."
짤막하게 대답한 홍이도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등지고 서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 온 장이 심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장이는 옛날보다 아름다웠다.
내 보란 듯이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뭣하러 왔을까? 뭐하러!'
홍이는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웠다. 뭣하러 왔을까, 왔을까? 하다가 그는
잠이 들었다. 꿈도 없는 잠이었다. 퀭하니 뜷린 캄캄한 곳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잠이었다.
"자는가배."
"저녁도 안 잡숫고..."
"저물었는데 언제 저녁 하겄노?"
"그래도 해야지요. 내일 차 몰로 갈 건데,"
"우리 아아 밥 한 그릇 있는데 그거라도 좋다믄 주까?"
"아들 오면 어쩌게요?"
"지금꺼지 안 오는데 저녁 묵고 들어올 기구마는, 밤일 할 때는 거기서
밥을 준께,"
"미안해서,"
"한집에서 미안하다니, 그기이 무신 말인고?"
한참 있다가 다시
"새댁,"
"예?"
"신랑 성미가 무서분가 보제?"
"왜요?"
"그러씨..."
"무섭기는요, 얼마나 자상하다고요. 왜요? 아지매 보기는 성미가 무서운
것 같소?"
"좀 꽤 까다롭게 보이누마. 말도 없고 웃는 일도 없고,"
"어머님 때문에 근심이 돼어 그렇지요."
"어매가 입원하기 전에도 그렇더마는. 아까도, 새댁 신랑을 보고 기겁을
함시로 달아난 사람이 있었인께."
"누가요?"
"전에 우리 앞집에 살던 장이라 하는 아이가, 이자는 일본으로 시집가서
각시지마는 나한테 놀로 왔다가 새댁 신랑 오는 거를 보자 그냥
달아나부맀거든."
"글쎄요. 남 보기는 좀 그럴는지 모르겠소."
방문 밖에서 어슴푸레 들려오는 보연과 아낙의 주고받는 음성이다.
"어매 성미도 그렇긴 하지마는 아들에 대한 노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마는, 평생 낯 피고 말 한분 하는 일이 없다 캄시로,"
"부모가 자식 헌혜하는 법이 어디 있소? 그러니까 아들한테 대접을 못
받지요. 하동 계시는 시아버님한테는 얼마나 잘하신다고요? 효자라고
소문이 자자하답니다."
보연이 발끈해서 남편을 변호하고 나선다. 이윽고 보연이 저녁상을 들고
왔다.
"상의아버지,"
상을 놓고 흔들어 깨운다.
"저녁 잡숫고 주무시요, 내일 일찍 가실려면."
"날 자게 내버려두어, 제발."
홍이는 돌아누웠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관수, 연학이와 함께 임이네를
강제 퇴원시켜놓고 진주를 떠난 것이다.
홍이 통영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장모는 처가에서 다니지 않고
그런다고 언짢아했지만 홍이는 여전히 차고 안에 있는 더러운 방에서 잠을
잤고 매식을 했다.
고성에 짐을 풀고 되잡아 통영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죽림고개에
이르렀을 무렵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홍이 눈앞에 장이
모습이 설핏 지나갔다. 순간 홍이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와 그랍니까?"
조수석에 앉은 일주가 물었다.
"내려가봐."
일주는 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허리를 구부린 일주는 허여끄름한 것을
주워들었다. 그것을 길가 보리밭을 향해 힘껏 집어던지는 것이다. 손을
털고 조수석에 올라앉은 일주는
"가입시다."
"뭐야?"
"닭우새끼구마요."
"재수없겠다."
다시 차를 몬다. 통영에 들어섰을 때 사방은 아주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부둣가 번화한 한길에는 전등불, 가스불이 바닷바람에 젖듯 어둠
속에 배어나 보였다. 부둣가 한길에서 화물차를 멈춘 홍이는
"기름집에 들렀다 갈 터이니 차는 차고에 넣어라."
일주에게 핸들을 넘겨주고 내린다. 기름집이란 일인 오오따가 경영하는
가게였다. 부두에 모여든 기관선에 기름을 대주는, 말하자면 이 지방에서는
거상이다. 그리고 화물차의 차주이기도 했다.
"리이상, 어서 오세요."
금전출납부를 맡은 오오따의 딸 미야꼬가 먼저 홍이에게 인사를 했다.
홍이는 웃기만 했다. 그리고 고성서 받아온 전표를 내민다.
"어머니 병환은 좀 어떤가요?"
미야꼬가 물었다. 밤이어서 가게는 한가한 편이었다.
"그저 그래요."
"안 좋은가 보지요?"
상냥하고 정답게 말했다. 미야꼬는 홍이에게 처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때론 대담한 추파를 보내곤 했었다. 턱이 짧고 고수머리의 노처녀였다.
"두고봐야겠지요."
"고생하는군요. 안됐네요. 뭐 내가 도와드릴 일은 없어요?"
"나 대신 운전해주시겠소?"
"아이구 참, 그건 안 되는 장사 아니에요? 호호호... 양말이나 짜달라면
모르겠지만,"
"솜씨에 자신이 있거든 우리 딸 모자나 짜주슈."
홍이는 늘 그런 식으로 미야꼬의 추파를 감당해냈던 것이다.
"그럼 잘 있어요."
홍이는 가게를 나왔다. 부둣가 한길에서 지름길로 접어든다. 여관이 있고
창고 따위가 있는 지름길은 어두컴컴했다. 차고로 들어간다. 차를 손질하던
일주는 차 밑에 드러누운 채
"형님, 누가 찾아왔던데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높은 천장에 소리가 울렸다.
"누가 찾아와?"
"젊은 여잔데 인물 좋더마요."
장이로구나 하고 홍이는 생각했다.
"처젠가?"
"아아니요, 형님 처제를 내가 모를까바서요?"
"그럼 누구 아는 사람이겠지."
"짐작이 안 갑니까?"
"무슨 소리 하는 게야."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그리고 닫은 홍이는 팔다리를 쭉 뻗으며
눈을 감는다. 본시 조수가 거처하는 방인데 홍이 묵으면서부터 일주는 제
집으로 갔다. 싼 월급에 일이 많은 자동차 조수, 일주는 운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잘 견디었다. 부산 가서 운전을 배울 집안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수가 적고 마음씨도 괜찮은 일주는 그러나 약간의 건달기가
있었다. 눈을 감은 홍이는
'아닐 거야. 설마 그럴라구? 남편이 있는 여자가 그럴 리 있나.'
"갑니다. 형님, 문 잠그이소."
얼마 동안이나 지났을까. 일주는 갔는데 홍이는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애 때문에도 안 되겠다. 상의네를 내려오라 해야겠군.'
부스스 몸을 일으킨 홍이는 차고의 큰 문 한귀퉁이를 뜷어서 만든
쪽문을 잠그러 나간다. 차고 안은 방문에서 비치는 불빛으로 더듬으며
나갈 수 있었으나 거의 캄캄했다. 쪽문을 더듬었다. 뒷길이어서 밖은 더욱
어두웠다. 밤도 저문 모양이다. 쪽문을 잠그려 하는데 밖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
"누구요!"
"..."
"누, 누굽니까."
홍이는 문을 열고 내다볼 수가 없었다. 강도라도 만난 것처럼 등골에
땀이 흐르는 것만 같다.
"저, 접니다."
의외로 뚜렷한 음성이다.
"밤중에 무신 일로,"
"문 좀 열어주이소."
홍이 팔에서 힘이 쑥 빠졌다. 쪽문을 열고 장이 재빠르게 들어왔다.
홍이는 저도 모르게 쪽문을 잠갔다. 방안에서 마주앉은 장이는 울기부터
했다. 우는 장이를 홍이는 넋빠진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울음을 거두자
처음으로 홍이는 입을 떼었다.
"여기는 어떻게 왔지?"
"저기, 시고모가 살아요. 시가 어른이라고는 시고모뿐인께 시부모
맞잽이요."
그 말은 납득할 수가 있다. 친정에만 있다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날, 날 왜 찾아왔을까... 나는 장이한테 못할 짓 한 사람인데,"
"나도 모리겄소. 일본 있는 그 사람하고는 아, 아무리 해도 살 수 없일
것만 같애서, 죽어도 살기가,"
또다시 흐느낀다.
"장이를 학대하나?"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왜."
홍이 눈이 고개를 빠뜨린 장이 이마며 턱을 더듬어 내려간다.
"잘해주기사 잘해주지마는 정이 안 붙어서 살 수가 없소. 아이라도
있이믄 그냥 참고 살겄지마는,"
"..."
"내 맘을 알고 조선에 안 보낼라고... 울기도 많이 울었소. 이분에는 밥을
안 묵고 드러누벘더마는 한 달만 가 있어라, 그, 그래서 온 깁니다."
무르팍에 눈물방울이 쉴새없이 떨어진다.
"안 살면 어쩌려구."
"그, 그거는 나도 모리겄소."
"사는 형편이 딱한가?"
"그렇지는 않소. 세탁소를 해서 묵고 살 만한께."
"나도 장가든 것을 물론 알겠지."
"아, 알아요."
장이는 또다시 흐느껴 운다. 철부지처럼 운다.
"처자 있는 나는 찾아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홍이 목소리는 쌀쌀한 편이었다.
"우떻게 하, 하자는 기이 아니고 통영 올 때만 해도 이럴라고는 안, 안
했는데,"
"돌아가. 참고 살아야지. 못 살고 오면 너는 끝장이다. 자아, 남이 알아도
큰일이지. 자아,"
일으켜세우려 하는데 장이 몸이 홍이에게 와락 실려왔다. 울음 때문에
두 어깨가 격렬하게 흔들린다. 홍이는 저도 모르게 포옹하고 머리결을
만져준다. 더할 수 없는 애처로움과 회한과 그리고 새로운 그리움이
가슴을 지져대는 것만 같다.
"이제 우리는 할 수 없다. 남남이야. 제발 가서 살아주는 것만 빈다,
빌어."
"아, 알아요."
"한번 못 살고 오면 여자는 마지막이다. 자아, 어서 가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장이는 울면서 돌아갔다. 그러나 장이는 다음날
밤에 또 찾아왔다.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작정했으면서도, 작정을 했기
때문에 더욱 장이는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 것 같았다.
그런 심리는 홍이에게도 있었는지 모른다. 장이를 피하려면 처가에 가서
잘 피하려면 처가에 가서 잘 수도 있었다. 비탈진 곳에 방 한칸을 얻어
사는 자신의 거처에 가서 잘 수도 있었다.
"왜 또 왔어."
"가믄 못 만날 긴데,"
두 번째 밤엔 울지 않았다. 세운 한쪽 무릎에 깍지 낀 두 손을 올려놓고
장이는 하염없이 홍이를 바라보았다. 멀고도 가까운 것이 남녀의
사이라든가. 아무도 없는, 외부와 단절된 차고가 유죄였는지 모른다. 불이
붙으면 태워야 하는 것이 이치였었는지 모른다. 사랑은 여하한 경우에도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치욕과 멸망의 결과가 크면 클수록 더욱
치열하게 타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예감하면, 강하게 예감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깊어지고 말았다.
사랑의 환희는 슬픔이었다. 다음날 밤, 한숨과 애무와 눈물과 그리고
조속한 이별을 바라면서, 또 그 이별을 두려워하면서 말없는 포옹 속에
차고문이 부서질 만큼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 홍이 화닥닥 일어났다.
"숨어!"
장이는
"어, 어디로!"
비명이었다.
"차고, 차고, 자동차 속으로 드, 들어가아!"
장이는 치마저고리를 걷어들고 달려나갔다. 차고문은 쉴새없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누, 누구요."
엉겁결에 속바지 바람으로 뛰어나간 홍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쪽문
틈새로 불빛이 새들었다.
"문 열어라! 안 연다믄 순사를 불러오겄다!"
쪽문을 열었을 때 홍이는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초롱을 바싹
들이댔던 것이다.
"무, 무슨 일이요."
"무신 일? 몰라서 묻나?"
중늙은 여자의 눈이 번들거렸다.
"들어가서 찾아라!"
그의 아들인 듯 두 청년이 뛰어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장이의 시고모,
사촌 시동생이었던 것이다. 홍이의 어깻죽지가 축 늘어졌다.
"이년 어디 갔노! 이 화냥년이 어디 갔노 말이다!"
방문을 열고 초롱을 치켜든 중늙은 여자가 외쳐댔다.
"으응, 가도 밖에까지는 못 갔다."
중늙은 여자는 장이 버선을 집어들었다.
"차고 안을 샅샅이 뒤지봐라!"
두 청년은 발에 걸리는 쇠붙이 기구들을 걷어차며 마치 성곽을 점령한
병사같이 위풍당당하게 차고 속을 뒤져나갔다. 이윽고
"어매! 여기 있소오!"
전리품을 발견한 듯 한 청년이 환성을 울렸다.
"그년을 이리 끌고 오너라!"
중늙은 여자는 일족을 거느린 족장같이 위엄 있게 추상 같은 명령을
내렸다. 미처 치마도 입지 못했고 저고리도 벗은 채 속치마 바람의 장이가
송장같이 두 사내에 의해 끌려왔다.
"네 이년! 네가 이러고도 살아남을 성싶나! 오늘밤 내 손에 죽어봐라!"
차고 밖에는 소란에 놀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차고 안에는
들어서지 못했다. 도망갈 것에 대비하여 그들은 쪽문 문고리를 걸어잠갔던
것이다. 중늙은 여자 앞에 끓어앉은 장이는
"죽이주시이소."
"죽이다마다, 그러나 니 남편 손에 죽어야 할 기다. 이년! 눈이 시퍼런
지 소나아를 두고 그새를 못 참아서 외간놈하고 붙어묵어? 이년!"
이 뺨 저 뺨 번갈아가며 친다.
"징역을 가도 내가 가겠소!"
갑자기 홍이는 황소같이 달려왔다.
"오오냐 이놈아! 징역이사 따놓고 당상이고, 저놈을 반죽음시키놓지
못하고 머하노!"
두 청년이 달려든다. 간부와 간부를 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이 없는 불문율이다. 홍이와 장이는 비참하게 맞았다. 그러나 육신의
아픔이 무엇인가. 반죽임이 될 만큼 코피가 쏟아져서 낭자한테 중늙은
여자는 또다시 명령을 내렸다.
"징거가 있어야 한다. 야아들아! 그 쪽문 열고오, 이웃 사람들 들어와
구겡하라 캐라! 간통한 연놈들 얼굴을 똑똑히 구겡하라 개라."
문이 열렸다. 우르르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제각기 한마디씩 했다.
"콩밥을 믹이야 하는 기라."
"서방은 여기 없는 모앵이제?"
"사내놈이사 오오따 집 운전수다마는 제집은 못 본 얼굴인데?"
"곱상하게는 생깄고나. 얼매나 바빴이믄 치마도 못 걸칬노."
낄낄낄 웃는 소리.
"정통으로 맞았구나. 한참 좋았겠는데."
사내들의 음탕한 웃음소리.
"구겡치고는 점심밥 싸가지고 댕김서 볼 만한 구겡이구마는,"
"하는 행실이사 죽어 마땅할지 모리지마는 좀 너무한 것 같다. 개
패듯이 사람을 저리 때리는 벱이 있나."
동정의 소리도 있다.
"법으로만 해도 안 되는 기라요. 징역 살고 나오믄 그만이고, 그라고
나믄 떴다바라 하고 살 긴데 누구 좋은 일 시킬라꼬?"
"그렇다믄 직이믄 살인죄요."
"직이는 것보다, 징역을 살리는 것보다, 나 같으믄 악대값을 물리겄소.
그것도 평생 벌어 갚을 만한 돈으로,"
"그래도 오기가 어디 그런가? 악대값 물린다고 헌계집 데리고 살렀소?"
"그나저나 이런 일이사 제 임자가 와서 할 일 아니겄소?"
"그야 그렇지요."
새벽녘까지 실랑이는 벌어졌다. 그러나 날이 밝기 전에 장이는 그들에게
끌려갔고 홍이는 기다시피 비탈진 셋방으로 돌아와 쓰러지고 말았다.
육신의 고통이 무엇이랴! 시궁창과 같은 오욕, 홍이는 혀를 물어끊고 죽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홍이는 어디든 도망을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징역이 무서워서도 아니요, 죽음이 무서워서도 아니요,
보연이와 장인, 장모, 처제들, 기름집의 오오따며 미야꼬며 일주며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의 눈길이 무서웠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었다. 아비의
깊고 깊은 눈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그리고 장이르 두고 갈 수 없다. 혀를
물어끊고 죽을 수 없는 것은 장이 때문인지 모른다. 장이의 결과를 보지
않고는 죽을 수조차 없는 것이다.
홍이는 큰방 여자가 쑤어주는 죽을 마셨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사흘이 지났을 때 보연이가 왔다.
"들어오면 죽여버리겠다! 제발 부탁이다! 친정에 가 있어."
홍이는 애원하고 위협하고 울고 또 소리쳤다.
장모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열흘이 지났을 때 보연이는 또다시 왔다.
"인제 잘됐어요. 인제 걱정 없소."
하며 한결 생기가 돈 목소리로 말했다.
"전보받고 남편이 왔답니다. 고소도 안 하고 악대값도 내버리고 계집을
달래서 일본 데리고 갔답니다. 제발 이젠 마음잡고, 망신은 이미 당한 것
아니겠소. 진주 가서 삽시다."
남편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놓여난 보연이는 관대했다. 제 임자가
여자를 데리고 일본으로 갔으니 이제 기우는 다 사라졌다고 보연은 생각한
것이다. 징역도 악대값도 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이었지만 보연은 그
어느것보다 소박당할 것을 무서워했던 것이다.
홍이는 울었다. 진정 악몽이었다.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다.
먹던 죽을 거부했다. 사람만 찾아오면 미친 듯 날뛰었다. 석이도 연학이도
영팔이도 허해하고 돌아갔다. 다만 보연이만은 곁에 있어도 무방했다. 한
달을 홍이는 앓았다. 어디 계집이 없어 그런 계집을 데려가느냐는
것이었다.
"쓸개 빠진 놈이지. 아니믄 벵신이거나. 계집이 아이 배태도 못했다 카이
사내 구실도 못하는 긴지 모를 일이구마."
"흥! 예사 똥 뀐 년이 성내더라고 개망신 당할 짓을 해놓고 밤낮없이
소리지르는 놈도 한심한 놈이다. 뒈지게 내부리두지 머할라꼬 그리 벌벌
떠는지 모르겄더라."
"그런 말 마소. 가장은 하늘이라 안 카요. 사나아들이사 흔히 있는
일이고 재수가 없어서 그렇지. 아 그러씨 사내들치고 열 계집 마다는 것
보았소? 계집이 꼬리를 치는데 안 넘어갈 사램이 어디 있일기라고.
아무튼지 망신살이 들믄은 독 안에 있어도 면할 수 없는 기라요."
"사람이 좀 작이 없고 요망하다 싶었는데 이분에 본께 그럴 사램이
아니더마, 그 댁네 말이요."
"신랑한테는 공자요."
"그러믄 천생배필이지 머. 그럭저럭 세월이 가믄 아물기고 남의 흉도
한때니께."
소란하고 분분하고 그런 중에 홍이 일가가 진주로 옮겨간 것은 초여름
녹임이 짙어질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임이네는 실낱 같은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10장 박제한 학
주일 예배를 보면서 명희는 눈물을 흘렸다. 오늘따라 왜 그랬는지,
무엇이 서러워서 우는 것인지 그럴 특별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집안에 변화가 좀 있긴 있었다. 사업 관계로 남편 조용하는 일본으로
떠났고, 대신 별장에 가 있던 시부모가 돌아왔을 정도의 변화다. 애초
계획으로는 남편과 함께 명희도 가기로 돼 있었지만 시부모가 돌아온다는
기별이 있어서 명희는 여행을 취소하고 조용하만 떠난 것이다. 남편이
떠났고 시부모가 돌아왔다 하여 집안이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긴 물 속같이 조용하기론 마찬가지였다. 표면적인 것이긴 했지만
식구들은 제각기 자신의 성곽을 고수하듯이, 또 남의 성 따위를 공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듯이, 냉랭하고 이기적이며 점잖게, 법도가 시끄러운
보통 반가와는 달랐다. 분위기에 세련이라는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겠으나
어떤 경우에도 감정을 위장한 온유함이 유지되는 것이다. 물론 다시
말하거니와 표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면면한 그들 계보 속에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현관을 지낸 선조들은 기라성 같았고,
친일을 아니 했어도 오늘 현재까지 대일본제국의 귀족인 조병모 일가. 이
빛나는 명문이 비록 재취라고는 하지만 일개 역관의 딸을 맏며느리로 삼은
것이 치욕일 것은 뻔하다. 못생긴 풋살구 같은 인물에 친정 살림이
빈한했던 조용하의 이혼을 제기했을 때 집안에서는 명희를 소실로
데려오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물결을 남
먼전 탔고 영국신사를 표방한 조용하는 그런 조건으론 명희가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구심에서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집안의 의견을 물리쳤다.
부모의 성품이 유약하고 장자숭상의 인습이 각별했던 집안에서는 결국
명희를 정실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그랬는데 집안 처지에서 본다면 명희의
등장은 설상가상이었다. 형제간의 갈등과 불화의 원인이 명희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경악했다. 요망한 계집이로고, 이러다가 집안이
어찌 안 망하겠느냐, 그런 혐오감과 불안이 시부모 감정 속에 팽배해 있을
것은 뻔한 일이다. 함에도 그들은 방관하며 침묵을 지키며 보다 빈번하게
별장으로 도피하곤 했을 뿐이다. 심지어는 유교 사상이 뼛속까지
박혀버렸으며 선영봉사야말로 가장 중요한 집안 행사인데도 불구하고
며느리의 교회출입에 대해서조차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일종의 방치
상태라고나 할까. 십여 년 전 아들 조용하가 세례를 받았을 때는 집안이
꽤 시끄러웠었다. 여하튼 그러한 집안 사정은 한결같은 것이었으니까
새삼스럽게 예배를 보며 명희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될 수 없다. 하기는
예배를 보면서 눈물을 흐리는 사람이 명희 혼자만은 아니었다.
회당 밖의 봄날은 아름다웠다. 조물주의 은혜처럼 신록의 나뭇가지는
창가에서 흔들리고 있었으며 자연과 생명은 더없이 사랑스럽고 충실한
것같이 보였다. 싱그러운 푸르름, 문득 명희는 자신의 모습이 박제한 한
마리의 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필이면 많은 새 중에 학이라니,
옛날에 부친이 생존해 있을 때 어떤 관상쟁이가 명희를 보고 학상이라
말한 일이 있다. 귀하게 되겠으나 외로운 상호라는 것이었다. 회색에
가까운 푸른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자신의 모습, 하늘거리는 옷감은 박래품
새틴이었고 조그마한 비즈백은 남편이 일본 갔다 오면서 사다준 불란서
제품이다. 심미적이며 감성이 섬세한 조용하는 명희 의상이나 소지품을 그
자신이 선택하거나 자신의 취향에 따르도록 해온 터인데 그러한 남편에
불만이 있어서 명희는 자신을 박제품 학 같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소유한 신체와 영혼 그 자체를 두고, 친정이나 시가의 환경이나
자신이 처한 외적 상황과는 관계없이 자기 스스로 박제품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 누군가가, 어떤 상황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상대적이요 따라서 상대적인 경우 필경 어떤 반응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으니, 그런 면에선 명희라고 시가
식구와 맞먹는 무관심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조용하가 사금같이
마지막 빛깔인 양 반짝이고 있지만 늙고 낡아버린 명문 조씨네 일가가
박제된 부엉이라면 명희는 박제된 학, 박제된 상태는 매한가지인 셈이다.
예배는 끝이 났다. 회중에 휩쓸리며 남의 눈을 끌며 명희는 교회당 밖을
향해 나간다.
"명희."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온 여자가 불렀다. 여학교의 동기동창인
길여옥이다. 그는 빨개진 명희 눈을 쳐다보며 픽 웃는다.
"네가 웬일이냐?"
당황하는 명희 어깨를 사내같이 활발한 동작으로 툭 친 여옥은
"소식은 다 듣고 있었지. 요즘 열심히 교회 나온다는 얘기도,"
"열심히 나오긴,"
소위 말똥머리의 전도부인이다. 짧은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고
투박한 검정 구두하며 실로 짠 망태 비슷한 손가방, 몸은 뚱뚱한 편이었다.
햇볕에 그을은 자취는 있었으나 살빛은 희고 깨끗하다.
"하여간 좋은 현상이야."
다시 한 번 어깨를 치고 나서
"안 나가겠니?"
"응, 나가자."
반가움과 곤혹스런 두 표정이 명희 얼굴을 교차한다. 교회당 뜰에까지
나오는 동안 여옥은 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쾌활하게 한두 마디
인사를 교환하곤 했다. 그러는 동안 명희도 더러 아는 얼굴과 마주치면
목례를 했지만 선망과 적의와 찬탄과 모멸의 가지가지 빛깔을 담은 수많은
시선이 괴로웠다. 여옥이 행복하고 자신이 몹시 불행하다는 묘한 착가에
빠지기도 한다.
"오래간만이야. 저기 나무 밑에 가서 얘기 좀 안 하겠어. 언제 또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여옥이 앞서간다. 교회 뒤꼍의 한 그루 수양버들은 햇볕과 연두 빛이
어울리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무 밑에 선 명희는
"이젠 서울로 온 거니?"
"아니, 또 내려가야 해. 너는 여전히 아름답구나. 그렇지만 남자에게
희망을 안 가질 땐 아름다움이 불편해질 때도 있을 거야."
"전도부인께서 무슨 말씀,"
"이애, 그런 소리 말어. 전도의 비결 중 하나가 솔직 대담이야. 얌전하고
정숙한 건 상대가 불편을 느껴서 안 된다는 걸 알아두어."
"내가 뭐 전도부인 된다 했니? 그런데 넌 서울로 옮겨올 순 없어?"
"올려면 못 올 것도 없겠지."
"그렇담 시골서 고생할 건 뭐람."
"오고 싶지 않아. 어쩐지 서울 오면 안일해지고 마음에 벌레가 생길 것
같아서 말이야."
"많이 쫓아다니나 부지?"
"쉴새가 없지. 시골로 들어갈수록, 나 자신 개척자가 된 기분이 들어서
보람이 있고... 또 몽매하고 가난한 사람일수록 일단 교회에 들어오면
믿음은 확실한거야. 순수하고,"
"어째 그럴까?"
"돈 많고 아는 것 많은 사람들에겐 종교란 늘 불투명한 거거든."
"그, 그건 그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겐 종교가 전부일 수도 있으니까. 타협해야 할
일이 없거든. 또 한편으론 육체 노동이란 대개 신성한 것 아니겠니?
마음으로 죄를 범할 여가가 있어야 말이지. 해서 주님 앞에 서는 것이
즐거운 거야."
"그럼 가난한 사람은 다 착하고 부자는 다 악하단 말이니? 하긴 부자가
천당에 들어갈려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하셨지만,"
"사람 나름이라 할 수는 있지. 가난하다고 다 착하고 부자라고 다 나쁜
건 아니지만 비율로 봐서 그렇다 그 말이야. 서울서 차려내는
진수성찬보다 따끈따끈한 옥수수 한 개가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그 속에
담겨진 소박한 성의 때문일 거야. 뭐 그런 얘긴 관두자."
"넌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나 보구나."
"글쎄, 만족한다기보다 기쁜 마음으로, 주께서 늘 가까이 계시다는 믿음
가지고 일하는 거지."
"그래...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고,"
하다 말고 명희는 낭패한 듯 얼른 눈길을 딴곳으로 돌려버린다.
"아마, 아마 잊어버리게 될 거야. 아직은 잊었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여옥은 쓰디쓰게 웃었다. 그것은 솔직한 말인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런 실수를 할까? 무신경도 분수가 있지.'
그렇게 친했던 친구, 반가워야 할 친구가 당황스럽고 서먹한 것은 명희
자신의  처지 때문이다. 여옥은 학교 시절 무척 총명했으며 명희보다
적극적이었고 사고력도 명쾌했다. 일찍부터 개화하여 남 먼저 기독교인이
될 여옥의 부친은 같은 교인으로서 신앙이 독실하고 장래가 유망하다 하여
삼남매 중 외 딸인 여옥을 오선권이라는 청년에게 주었다. 사위를 아들
못지않게 사랑한 여옥의 부친은 넉넉하지도 못한 재산을 쪼개어 사위를
동경 유학까지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독실했던 오선권은 유학중에
사귄 여자로 말미암아 여옥에게 이혼을 요구하였고 종교도 버렸으며
방학에 귀국했음에도 여옥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보내어 유학에 소요된 비용은 변상하겠다는 심히 모욕적인 제의를
해왓던 것이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이었다면, 그, 그랬었다면 차라리 참을 수 있을
거야. 또 그, 그 여자 집이 우, 우리집보다 못했다면 나 요, 용서할 수
있었을는지 몰라. 명희야. 이, 이렇게 이런 식으로 배신을 당하는 일도
있니? 으흐흣흣흣... 양의 가죽을 쓴 이리를, 아, 아버지가, 으흐흣흣흣..."
몸져누워 있는 여옥을 찾아갔을 때 여옥은 명희를 거머잡으며 통곡을
했었다. 유학을 끝내고 명희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오선권을 만나본 일은 없었지만 동경서 명희는 그간의 사정을 소문으로
들었으며 상대편 여자를 선혜가 안다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좀 매력이 있긴 있지. 뭐라 했음 좋을까? 요부형은 아니지만 매섭고
다부지고 남을 휘어잡는 그런 형의 여자야. 심약한 사내들은 오히려 그런
형의 여자에게 끌리는 거 아닐까?"
"매력에 끌렸다기보다 좋은 조건에 끌린 것 아닐까요?"
명희는 여옥이 불쌍하고 분한 마음에서 꼬집듯 말했다.
"그야 모르지. 여자 집이 괜찮은 모양이니까."
"그렇담 사기꾼 아니에요?"
"순진하긴. 그럴 수도 있지 뭐. 하여간 날아간 새를 잡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남자건 여자건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소박한 그 사내 꽤 괜찮았던가 봐. 생각해봐라? 마포 강서방 재산을
통째로 먹을 판인데, 안 그러냐?"
선혜는 낄낄대며 웃었다.
"거머리같이 달라붙었담 그나마 이런 생각도 안 할 텐데 말이야. 아무튼
처가 덕으로 유학한 사내라면 뭐 별볼일 없는 게야. 그 댁 네도 일찌감치
단념하고 팔자 고치는 게 현명할걸."
선혜는 여옥의 처지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 후 이년 동안을 이혼 문제
때문에 옥신각신, 오라비와 사내동생이 오선권을 때려죽이겠다고 여자
집에 쳐들어간 일이 있었고 여옥의 자살미수사건하며 참담했다. 그러나
피신 작전을 쓴 오선권의 말인즉
"연애의 자유는 인간의 정당한 권리며 애정 없는 사람하고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일본 유학생치고 이혼하자는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인가요? 세상이 아는 저명인사 중에도 이혼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나만 죽을 죄를 졌단 말이오? 학비에 관한 것도 변상하려 했고,
다른 일이면 또 몰라. 은혜 때문에 싫은 여자를 평생 데리고 살 순 없어요.
흥, 배은망덕이라고? 은혜, 은혜 하면서 강아지 목 매달듯 그러지들 말라고
해요! 나 그 집에 팔려간 사람 아니니까."
결국 단념은 여옥의 부친이 먼저 했다.
"봉사 개천 나무랄 것 있나. 내 눈 멀었던 게 잘못이지. 잊어버리는
게야."
이혼장에 도장을 찍은 여옥은 악몽 같은 세월을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전도 사업에 투신했던 것이다. 여옥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미국인 선교사
미스 헤이워드의 영향이 컸다. 학교 시절 영어를 가르친 미스 헤이워드는
특히 여옥과 명희를 귀여워했었다.
"그런데 명희 너 서방님께서는 교회 나오는 것 반대 안 하냐?"
서먹한 침묵이 흐른 후 여옥이 물었다. 목소리가 까칠했다. 명희는
여옥을 힐끗 쳐다본다. 이혼한 남자가 정식으로 청혼을 하여 그것에
응했을 뿐이지만 남편 조용하의 경우는 오선권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본처를 버렸다는 점에서. 그러나 물론 일방적이긴 했지만 명희와 결혼할
야심 때문에 아내와 이혼한 것도 사실이고 보면 공범자라는 묘한 죄의식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여옥이 앞에서는.
"반대는 안 해."
"으응?"
"오히려 나가라고... 권하는 편이야."
"그러니? 그거 다행이구나."
빈정거리듯, 여옥의 눈은 차츰 어둡게 타는 것 같다.
"그이도 세례는 받았는걸."
"그랬었니?"
다시 따지듯
"언제? 너하고 결혼한 후 받았니?"
"아니 그 전에, 오래됐나 봐."
"그런데 어째 함께 안 나오느냐?"
"늘 바빠서,"
"주님을 섬기는데 바쁘다는 게 이유가 되는가?"
"그건 그래. 거의 한번도, 안 나왔으니까 신심이 약해진 거지 뭐."
"아니지. 그게 아닐걸? 나오지 못하는 게, 그건 당연해. 간음한 자가
어찌 교회를 더럽힐 수 있겠느냐."
별안간 들린 것처럼 여옥의 음성은 강렬하였다. 눈은 더욱 어둡게 타는
것 같았다.
"그렇담 나도 간음한 여자가 아니겠니?"
"누구든지 간음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하는데 여옥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얼굴이 시뻘겋게 충혈된 명희는
여오긔 눈물을 날카롭게 주시한다.
"기만이야! 주를 욕되게 하는 수단이야!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교회에다
묶어두는 건 아주아주 안전한 방법 아니겠니? 가히 사탄의 일급
제자로구나."
눈물 젖은 얼굴에 끔찍한 미소를 띤다. 혼란이 빚은 비약이다. 감정이나
얘기, 몸짓과 웃음, 모두가 혼란의 물결 속에서의 자맥질이다. 하늘은
푸르고 교회당 뜨락은 텅 비어 있었다. 여옥은 쓰러지듯 땅 위에 무릎을
꿇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딸을 지켜주시옵고 미움을 멎게
하시옵소서. 죄인들을 용서하시옵고 주님과 같이 저도 용서하게
하시옵소서."
여옥은 오랫동안 기도를 드린다. 이윽고 일어섰다. 명희는 돌부처 같이
서 있었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네가 반가우면서 그러면서도 초월할 수가 없었어.
그 일에 대해서만은 걷잡을 수가 없어. 어째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꼬박이
밤을 새워가며 기도드리던 그때 내 모습을 아픔 없이 되새길 수가...
참으로 길은 아득한 것 같구... 가자."
여옥은 명희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은 타는 듯 뜨거웠다.
"어디로 갈 거니?"
"너는?"
하고 여옥이 묻는다.
"나 헤이워드 선생을 만나뵐려구, 시간 약속을 했는데,"
"무슨 비밀 얘기니?"
"그런 것 없어."
"그럼 나도 함께 가야겠다."
활기를 되찾은 듯 여옥의 동작이 발랄해졌다. 미스 헤이워드가 거처하는
집은 교회에서 과히 멀지 않았고 목사관의 이웃이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여옥은
"왜 찾아가니?"
하고 물었다.
"그냥,"
"너도 고민이 많은 모양이구나."
"..."
"아까는 너 속이 상했지?"
"응."
"난 널 이해한다. 너를 경멸하고 비난할 순 없어. 허지만 실망한 것도
사실이야. 그래도 명희가 행복해주었으면, 그건 내 진심이다."
"알어."
"자동차는 어떻게 했니? 너 자동차 타고 다닌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교회에 나올 때는 그냥, 주일은 내 자유야."
여옥이 웃는다.
"마치 자동차가 감옥인 것 같구나."
"사실 감옥이지 뭐."
"남이 들으면 안 믿겠다."
"그 속에 앉아 있으면 남과 동떨어진 것 같아서 외로워. 견딜 수 없이
외로워져. 내가 뭐 왕족이냐?"
"귀족이지."
"너나 나나 근본은 뻔하잖니. 개발에 편자지 뭐."
"..."
"자동차 속에 앉아 있을 때만 그러한가? 어디를 가든 누구를 대하든
외롭긴 마찬가지야. 밀가루 뒤집어쓴 까마귀처럼 백로한테 가도 이단자,
까마귀한테 가도 이단자, 차라리 가문이나 금력에 대한 정열이라도 있담...
귀부인으로 뽐내고 살아본들 시간은 말갛기만 하고,"
"그러면 뭣하러 시집을 갔누."
"어쩌다보니, 노처녀가 별수 있겠니? 가고 보니까, 하긴 시초에는
기왕이면 했었지."
"후회하니?"
"후회하는 건 아니야. 어차피 어디 가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다만
어쩌다가 돌부리에 채어 몸이 휘청하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 땐
있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니?"
"누구?"
"조용하, 네 남편 말이야."
"그렇다고 생각해. 그 집에서 내게 인간적 체취를 풍겨주는 사람은
그이뿐이니까."
하는데 명희 눈앞에는 시동생 찬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집가기 전에는
찬하가 호의 이상의 것을 자기에게 가졌으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덕화의 병 때문에 몇 번 만났었지만. 하기는 청혼을 받기까지
명희는 조용하의 감정도 알아차리진 못했으니까 형보다 수줍고 내성적인
찬하의 마음을 알 턱이 없었다. 이미 결혼은 했다. 비교나 선택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시동생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생각한 일도 없다. 그러나
명희는 조씨 집안에서 인간 본연의 순결함을 가진 사람은 조찬하 한
사람일 거란 생각은 했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상하게 보살피며 또
집안의 냉랭한 분위기에서 단호하게 격리시키려 드는 남편에게서 인간적인
체취를 느끼지만 조용하는 철저한 귀족주의요 타인에게 비정하며 또
귀족성과는 이질적인 타산가인 것을 명희는 너무 잘 안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교회에다 묶어두는 건 아주아주 안전한 방법 아니겠니? 아까
여옥이 말했을 때 명희는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를
것이다. 내막을 모르고서 막연히 다른 남자의 유혹을 막는다는 뜻으로, 또
신경질적인 상태에서 여옥이 쏟은 말이겠지만 명희는 찬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도 쏘일 겸, 나는 바빠 못 나가지만 당신은 나가구려."
권하는 남편의 자세는 늘 부산스러웠다. 뭔가 석연찮은 것이 있었다. 또
그는 말하기를,
"환경이 달라졌다 하여 기왕의 것을 버릴 필요는 없지. 자신의 종교를
지켜 나가는 게 좋고, 마음을 안전하게 하는 데 종교만큼 적절한 것도
없을 게요."
신자로서의 경건한 말투도 아니거니와 종교를 통해 보다 공고해지는
도덕으로 구속하려 드는 저의가 역력하였다. 남도 아닌 동생과 겨루어야
했으며 동생을 밟고서 얻은 명희의 존재가 조용하에게는 불안했을 것이
분명했고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것도 아닐 것인즉 자신을
포기하다시피 한 신앙을 명희에게 강요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희는 그런 권고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너하고 이 길을 걸어보는 것도 오래간만이구나. 그러고 보니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르게 변했고 세월도 많이 흘렀다. 너희 친정은 모두
안녕하시냐?"
"어머니 병환 땜에 그렇지, 이럭저럭 옛날과 다름없어. 너희 아버님은?"
"그분이야 강건하시지. 신앙과 애국심이 두루. 아버님 따라가려면 나는
아득하다. 내가 다시 살기로 작정하고 작은 힘이나마 복음을 전하리라
결심한 데는 헤이워드 선생의 도움이 컸지만 아버님의 힘이 더 컸었지.
어떤 면에선 아버님이 나보다 상처가 더 컸었다 할 수 있겠는데 그분은
실망하시지 않았어. 믿음은 반석 같고,"
"네가 그러니까 돌아가신 내 아버지 생각이 나는구나. 아버님 살아 계실
때는 나도 자신이 좀 있었는데,"
명희는 다소 명랑해져서 웃는다.
"명희 너랑 난 계집애라구 구박 안 받고 자랐는데 말이야. 우리들
아버님은 딸을 별나게 사랑하셨지. 생각이 나. 너희 아버님 모습이,"
철쭉과 황매가 한창인 뒷벼랑을 등진 빨간 벽돌 양옥이 가까워진다.
모종을 옮겨 심은 꽃밭에 앙증스런 팻말이 꽂혀 있다. 검붉은 흙이
건강하고 싱그러워 보였다.
"여전하구먼. 봄을 기다리기가 무척 지루했을 거야."
여옥이 꽃밭을 바라보며 말했다.
"좀더 있다 왔으면 맛난 딸기를 얻어먹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서양사람들 합리적이라지만, 한철의 꽃을 보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하는 걸 보면 그런 면에선 오히려 조선 사람들이 현실적이다. 안
그러니?"
"글쎄 우리는 늘 가난했으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즐길 힘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게고 부유한 사람은
노동을 천하게 여겼으니. 미스 헤이워드 생각할 땐 남자같이 힘센 여자,
남자 하는 일이면 뭐든지 다 하지 않니? 아주 즐겁게 말이야. 집칠에서
목수일까지,"
"덩치도 크니까."
미스 헤이워드는 겨울 한철만 빼면 초봄에서 가을까지 꽃밭 손질에 보통
정열을 쏟는 것이 아니었다. 휴일도 꽃밭 손질 때문에 기쁘다고 했다.
"헤이워드 선생한테서 꽃 심을 땅을 뺏어버린다면 아마 무척 하느님을
원망할 거야."
"인생이 사막 같겠지."
지껄이며 포치로 들어갔을 때 낯익은 가정부가 재빨리 문을 열어준다.
"오십니까요?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정부 콧등에는 땀방울이 송송 나 있었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네, 고맙습니다. 여옥선생님도 함께구먼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교회에서 만났어요."
여옥은 제 집 드나들듯 거실로 쑥 들어간다. 창가 책상 앞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던지
"미세스 조, 어서 오십시오. 여옥이도 함께 오시오?"
미스 헤이워드는 펜을 놓고 일어섰다.
"네, 선생님. 교회서 만났기 함께 왔습니다."
여옥은 거칠 것 없이 말했다. 명희는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이렇게 보다시피 아주아주 건강합네다."
팔을 벌려 보인다. 유창한 조선말이었다. 두 사람보다 십 년은 훨씬 위인
듯, 키가 크고 깡말랐으며 갈색 머리에 푸른 눈, 얼굴은 못 생겼다. 그러나
가느다란 눈썹 밑의 푸른 눈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대개 얼굴은
잘생겼어도 눈동자, 눈언저리가, 그리고 빛이 엷은 눈시울하며, 서양인은
동양인들 눈에 동물적인 느낌을 주는데, 그 못생긴 얼굴에 눈동자만은
누가 보아도 보석같이 아름다웠다.
"두 사람 다 오래간만입네다."
미스 헤이워드는 두 사람을 함께 포옹하며 뼈마디가 굵은 커다란 손으로
등을 다둑다둑 두드려준다.
"헬렌은 어디 갔나요?"
여옥은 두리번거리며 묻는다.
"오오 헬렌, 교회일로 여행 떠났습네다, 순천으로."
"어머, 그럼 올라오고 내려갔나 부지요?"
"참, 여옥이 만난다 하던데 실망 컸겠습니다. 자아, 앉으십시오."
만나기로 시간 약속은 명희하고 했는데 이야기는 주로 여옥과 미스
헤이워드 사이에서 오고간다. 날라온 커피를 마시며 교회에 관한 것,
지방에서의 전도 상태, 명희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서 참 편하다는
생각을 한다. 제 집도 아니요 친가도 아닌데, 그것도 이질적인 외국인이
사는 집인데 마음이 그리 편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얘기는
들으나마나, 화제에 끼여들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안하다. 너무 답답하고
그 답답함이 뭣인지, 의식 구조가 다른 외국인과 터놓고 얘기하리라,
즉흥적 생각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명희는 터놓고 얘기하지 않더라도
이대로만이라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고 타인치고는
철저하게 타인인 이민족 앞에서 졸라맨 허리띠를 풀어놓은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미스 헤이워드의 인품 때문인지, 가로세로 아무런
유대 없는 이방인이기 탓인지.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와서, 아니야, 낯선 공원에 와서 편안하게
쉬는 것 같다.'
명희는 모종을 옮겨 심은 꽃밭 생각을 한다. 사철 정원사가 가꾸는 넓은
시집의 정원을 바라보는데 어째 흙 냄새를 맡은 것 같은 기억이 없었는지.
한여름에도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땀을 흘리며 꽃밭에서 일하는 미스
헤이워드, 그럴 때 찾아가면 못생긴 이빨을 활짝 드러내고 화려하게
웃었다. 찻잔을 놓고 흔들의자에 앉아서 인생을 찬미하듯 만발한 꽃밭을
바라보던 미스 헤이워드, 그는 식물학자만큼이나 식물에 관하여 아는 것이
많았고, 그의 합리적인면은 동양의 중용과 통하는 것이 있었다. 일체의
감상을 배격하면서 한 송이 꽃이나 지저귀는 새들을 삶의 일부같이
존중하고 즐기는데, 그러나 그는 신비주의자며 신비에 대하여 정열적이다.
그의 입에서 천당이라는 말을 좀처럼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신의
위대함을, 그 무한한 능력을 찬미한다.
'어째서 우리 조선 여자들은 결혼 못하는 것을 그렇게 수치스럽게
여기는 걸까. 독신주의를 이단시하며 모멸과 조롱으로 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몽달귀신이니 처녀귀신이니들 하고
사후까지 액신으로 처우하는 것은 결국 독신자를 사악한 존재로 보기
때문일 게야. 중을 보고 흔히 중놈이라 하는 것도 독신자를 경멸하는
의식에서 나온 말이나 아닐까? 외국에서는 신부님을 아버지라 하는데
말이야.'
엷은 빛깔의 커튼이 미동하고 있다. 창가에 심은 백목련 잎의 독특한
연두색은 가장 우아하고 부드럽다.
'천주교, 가톨릭, 천주교, 가톨릭... 그건 까치가 첫신호로 까까거리는
새볔 같은 빛깔일까. 여옥이가 말똥머리 전도사라면 난 수녀가 됐어야
하는데, 수녀...'
명희의 생각은 물결 위에 떠 있는 작은 배같이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떠밀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배를 보며 눈물을 흘렸는데 집 떠나온
사람이 집을 생각하듯 기억은 눈물의 순간같이 절실하지도 밀착해오지도
않는다. 낯설고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명희는 종교나 신앙심이 전혀 낯선
것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자신의 모든 기억과 상황과 마찬가지로. 수양의
수단으로, 간의 필요성 때문에, 혹은 호기심 때문에 종교를 생각하는 남편
조용하와 자기 자신의 차이점이 어떤 것인가를 명희는 생각한다.
"미세스 조."
대화의 권 밖에서 자기자신 속에 푹 가라앉아 잇던 명희는 놀라며
"네, 선생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네까?"
"여러 가지, 막연하게요."
미스 헤이워드는 웃는다.
"지금 우리 하는 얘기 못 들었습네까?"
"집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합네다, 생각 방해해서,"
"아니에요. 이제 대화 속에 끼워주세요."
"지금 여옥이 중요한 얘기 했습네다. 여옥이 신도를 지도하고 우리
기독교 모르는 길 잃은 양들한테 복음 전하는 사업 하고 있습네다. 그러나
여옥이만이 아니고 우리 이곳에 와 있는 선교사, 상류 사회 사람들, 그리고
명희 의견도 있을 것입네다. 들어보고 싶습네다."
"무슨 문제인데요?"
"선교 사업 하는 데, 특히 조선에 있어서 신앙과 애국심에 관한
얘깁네다."
하자 여옥이 받아서,
"어째 그 얘기가 나왔는고 하니 양근환 씨가 민원식이를 동경서
찔러죽이지 않았어? 그리고 일본 천황을 박열 씨가 암살하려 했고,
의열단원이 일본 궁성에 폭탄을 던지는, 이런 일련의 폭력적 수단은 우리
기독교 정신과 위배되는가, 그래 얘기가 발전된 거야."
헤이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일파 민원식이 총독 치하에 있는 조선을
일본 영토에 편입하고 지방자치, 다시 말해서 참정권을 얻어내자는
목적으로 도일했는데 고학생 양근환이 동경 역전 스테이션 호텔에 묵고
잇는 민원식이를 비수로 찔러죽인 것이 이월 십육일 일이요, 그보다 앞서
정월달에는 의열단원 김지섭이 동경의 궁성 니쥬바시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있었다. 의열단 사건은 지난해에도 있었는데 폭탄 밀수에 경기도
경찰부의 황옥 경부가 관련되었다 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으며 1920년의
밀양경찰서 습격 사건, 이듬해의 총독부 습격 사건, 작년 정월에는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투탄 했고, 이와같이 끊임없이 일본 위정자들을
괴롭혀온 것이다. 독립을 위한 폭력 수단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가,
아니면 합당한가, 과연 중요한 의론이다. 미스 헤이워드는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두 손을 깍지끼고 있다가 다 식어버린 커피잔을 들었다. 한모금
마시고서 입을 뗀다.
"언젠가 한번 닥터 오엔하고 그와 비슷한 논쟁을 벌인 일 있습네다.
우리 선교 사업 방향 잡는데 중대한 문제입네다. 약소국이나 식민지에서
우리 선교 사업 매우 곤란합네다. 고충 많습네다. 우리도 독립전쟁 겪었고
남북전쟁 상처 아직 남아 있습네다. 나라 잃은 백성들 슬픔 우리 충분히
이해합네다. 그러나 우리 미국에서도 선교는 개인의 영혼을 그리스도로
이끄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진실 알게 되고 복종하면 사회개혁 저절로 되는
거라 해왔습네다. 그렇다면 사회개혁 무관심했다 할 수 없습네다. 그리고
지금은 그 생각 한층 발전했습네다. 사회가 자꾸 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네다. 개인 영혼 회개시키는 일하고 함께 핍박받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옳지 못한 법률 고치는 데 참여하는 일, 부르짖는 성직자를 소리
있습네다. 그러나 이곳은 내 나라가 아닙네다. 우리는 손님입네다.
이해하고 동정할 뿐입네다. 우리 기독교 큰 조직은 모두 조선 사람이며
일하는 사람 조선 사람입네다. 외국인 몇 명 안 됩네다. 교육 사업 의료
사업 이상 우리 하지 못합네다. 선교밖에는 아무 일 안 한다는 본시
취지에서 본다면 그거 발전입네다. 선교밖에는 아무 일도 안 한다, 특히
남의 나라서, 그럴 만한 이유 있습네다. 선교사들 정치 관여하여
핍박받았습네다. 또 약소국 침략하는 데 앞잡이 죄 저질렀습네다. 그런 일
때문에 선교는 개인 영혼을 그리스도로 이끄는 일만 해야 하느냐,
사회에까지 참여하는냐 매우 어렵습네다. 내 개인으로는 참으로 돕고 싶은
심정 간절합네다마는,"
"선생님, 제 말씀 들어보세요."
여옥이 입을 열었다. 심각해진 그의 얼굴은 지적으로 빛났다.
"저는 독립운동가가 아닌 전도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선각자 지식인들과는 동떨어진 산간 벽촌을 찾아다니며 일을 하는
처지입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복음 전도에 있어서 어떤 방법이
효과적인가 많이 생각해보았고 또 체험에서 얻어진 것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애국 사상과 복음을 함께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간 벽촌에 있어서 기독교란 아주 생소하고 서양사람 종교라는 의식이
강합니다. 그리고 미신적으로 믿어지는 불교며 무당들, 점쟁이를 통한 귀신
신앙도 뿌리 깊은 것입니다. 유교에서 오는 조상 숭배도 그렇고요. 그러나
아무리 몽매무지한 사람에게도 내 나라를 잃었다, 내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말은 대단한 호소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일지라도 심정적으로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조선에 있어서 독립 사상과 기독교 정신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순수한 전도 정신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각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그 선각자들은 모두
애국자, 우국지사들이었습니다. 깨우치지 않아도 이미 깨달은 사람이며
학생들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 수는 우리 민족 전체를 볼 때 매우
적습니다. 저의 생각으론 보다 확실하게 두 가지를 합쳐서 밀고 나가야
구석가지 스며들 수 있고 공고해질 것이며 헐벗고 굶주린 백성, 그리고
보살필 주권과 나라를 잃은 백성들을 구제하고 깨우치며 나라 사랑을
불어넣은 것이 곧 주를 향한 합당한 우리의 봉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찌 나라를 저버린 자가 반역자 아닐 것이며 반역자가 어떻게 지순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여옥이 매우 영리해졌습네다."
"선생님 설득하려는 것 아닙니다. 저는 진실로 그리 생각하니까요.
양근환의 폭력은 지순한 것입니다. 민원식의 죽음은 우리 민족이 살아남아
무궁하게 주를 경배하기 위하여 마땅한 일이구요. 그러한 무리 때문에
우리 민족이 곤욕을 겪어야 하며, 남부여대,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하는
슬픔을 생각할 때 주의 이름으로 그런 악의 뿌리는 잘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희는 의견 없습네까?"
"의견을 말할 자격도 없지만 여옥이 말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폭력적 수단 말입네까?"
"어쨌든, 친일파 아닌 조선 사람은 모두,"
미스 헤이워드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저는 아까 여옥이하고 전혀 다른 뜻에서 신앙 문제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저 개인에 관한 신앙 문제를,"
"어떻게?"
하며 여옥은 물었다.
"전혀 내 자신에 관한 얘기야."
"말해봐."
"음... 수녀 생각을 했어. 그런 굴레를 써야만 신앙이 순수해질 거라는..."
여옥이보다 미스 헤이워드가 먼저 말뜻을 알아차린 듯 빙그레 웃는다.
"우리 주변은, 내가 아는 우리 주변 신자들의 믿음이 독실한 것은
알지만, 그렇지만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처지에서, 모두 제각각의
처지에서 종교와 접근하는 게 아닐까 하구, 물로 외국인의 경우는 잘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무의식 속에 예수가 늘 계실 것 같고 우리들에게는
의식을 해야만 예수를 느낄 수 있다, 그런 얘길까? 그리고 과연 영혼의
구제를 어느 정도 희구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구..."
두 사람은 말이 없었고 명희는 더듬더듬 말을 계속한다.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 무서워하게 되고 무서워하다보면 떠나게 될 거
아니에요? 그런가 하면 형식적으로 되어버리기도 하는 것 아닐까요?
영혼이 존중되지 않는 합리적 사고 방식은 오히려 메마르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예수를 생각하는 마음은 서양과 같지 않으면서 그 밖의 것만
따라간다는 것은... 전에 생각한 일입니다만 적선이라는 말과 자선이라는
말인데요, 적선이라는 말은 참 공리적인 것 같아요. 해서 안심도 되는
말인데 자선이라 하다면 뭔지 마음의 진실을 추구하고 채찍질하는 것
같거든요. 한데 진실을 추구하고 또... 또 채찍질하는 느낌을 못 가질 때는
적선이라는 말보다 못할 듯도 싶구요. 결국 밀착이 돼야 하는데."
"세상에, 주눅든 사람같이 왜 저 모양이야?"
여옥이 핀잔주듯 했으나 명희의 말뜻은 알았던 것 같다.
"선생님, 명희 말예요, 학교 땐 꽤 똑똑했잖아요? 귀족한테 시집가더니
바보가 됐다 부지요? 아니 말더듬이가 됐나 봐요."
세 사람은 깔깔 웃는다.
"두 사람이 한 얘기 모두 중요했습네다. 여옥이는 복음전도 하는 면에서,
명희는 신앙 문제, 이런 대화 앞으로 가끔 가졌으면 좋겠습네다."
"선생님, 선생님은 말씀 안 하셨습니다."
여옥이 항의하듯 말했다.
"저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 안 하셨습니다. 지난날 성도들은 싸우지
않았습니까? 싸웠습니다. 종교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독립 위한 폭력적 수단이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가 아니 되는가 그
말입네까?"
"네."
"나는 지난날 성도들의 행적을 옳다 그르다 아니 할 것이요. 내게는
오직 예수 한 분이 가장 옳았습네다. 그리고 나는 내가 옳다 생각한 일
하겠습네다. 만일 내가 당신네 나라 사람이라면 양근환이 옳다 할 것이요,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 아니 하겠습네다."
"..."
"예수께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 그렇게 말씀하시었습네다."
미스 헤이워드는 깍지끼고 눈을 감으며 말했다.
11장 고백
미스 헤이워드의 집을 나와 여옥하고도 헤어졌을 때 해는 많이 기울어
있었다. 명희는 잠시 거리를 바라보다가 효자동 친정으로 향한다.
치맛자락과 옷고름이 바람에 나부낀다. 바람은 부드러운데 옷천이 가벼운
때문일까. 초여름이 내일모레 닥쳐들듯 멀리 가까이 보이는 수목의
잎새들은 짙어간다. 작정하고 집을 나섰던 것은 아니었지만 명희는
망설이지 않고 걷는다. 의사조차 통하지 않는 모친에 대해서는 이미
희망을 버렸고, 명희는 불현듯 조카들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조카들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서희의 아들 환국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얼마 전 친정에 갔을 때 본 일이 있었다. 마침 환국이는 가방을 들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한 뒤 작은사랑으로
들어가던 뒷모습, 얼핏 보았을 때 명희는 서희를 그러나 서희를 닮지 않은
아이였다. 어딘지 위엄을 풍기면서도 조용하고 어질어 보였다.
"퍽 내성적인 성격인가 봐요."
명희는 울케 백씨에게 말했다.
"아이지만 어딘지 두려워요. 저런 자식 둔 것도 큰 복이지요."
올케의 말이었다. 명희는 한번 더 봤으면 싶었다. 나도 저런 아들 하나
두었으면 하는 마음과 동시 명희는 일순간 착각을 했던 것이다. 마치
상현의 아들인 것처럼.
'동경에 함께 안 가기 참 잘했지.'
조용하에 대한 혐오감이 치민다. 교회에서 왜 울었는가 그 이유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다. 동경에 함께 가자 했을 때 섬뜩했던 느낌에서
명희는 내내 도망쳐왔었다. 왜 동경엔 함께 가자고 했을까. 동경에는
시동생이 있다.
'잔인한 사람이다.'
동생에 대한 조용하의 감정은 상당히 복잡하지만 대체로 구분해 본다면
죄의식,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생각이 이십 프로, 경계심이 사십 프로,
그리고 나머지가 질투다. 전혀 일방적인 것이지만 명희를 사랑하는 동생
찬하의 감정을 질투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은 가끔 나타내는
감정이었고 경계심은 늘 가지는 것 같았다. 조용하가 찬하에게 경계심을
가지는 한에서는 명희의 존재가 소중하고 도적 맞아서는 안 되는 보물인
것이다. 대신 질투는 명희를 사랑하는 데 광적인 정열로 나타나지만 때론
정신적 학대로 변할 때가 있다. 이번 동경 여행에 명희를 동반하려 했던
것은 질투 때문인지 모른다. 찬하를 괴롭혀주고 명희를 시험하고자 한
속셈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찬하도 보지 못했으니 이번 가서 만납시다. 당신도 시동생
만나보고 싶을 게요."
묘하게, 차갑게 웃었다. 부모가 귀가한다 하여 명희와의 여행을 포기할
조용하는 아니다. 질투가 경계로 변하였을 것이다. 명희는 그러한 남편의
복잡한 심리를 얼마간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도 괴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을 사랑한 때문이라면, 냉정히 비판할 수 없었다. 아픔 같은
것, 공범자 같은 죄책감을 함께 느끼기도 했으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저주받은 것 같은 비애를 짓씹기도 했었다. 그러나 명희는 차츰 남편의
그러한 심적 갈등은 애정 때문에 비롯됐다기보다 절대군주적인 독점욕과
한 오라기의 불복도 용납하지 않으려 드는 본래 성품 탓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번, 명희는 묘한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그 자체,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비인간적인 요소, 명희는 여러
날을 두고 자신에 대한 혐오, 죄책감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그 생각이란
시동생 찬하에게 화살이 가고 있는 동안은 자신의 위치가 안전하리라,
만일 찬하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조용하의 차가운 웃음 밑에 감추어진
폭군적인 잔인함이 자신을 어떻게 처우했을 것인가.
'남편과 다를 것이 뭣이겠나, 나도 그와 같이 비정한 계집이다.'
비정했다기보다 현실적이며 지극히 타산적이며 저질의 속성이었는지도
모른다. 명희가 예배를 보면서 울었던 이유는 조용하를 혐오하는 마음과
또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찬하에 대하여는 어찌
일말의 따뜻함도 없었더란 말인가. 지극히 인간적인 동정까지 견제해야
했던 것은 도덕이 가지는 강박 때문이었다, 그렇게 변명이야 할 테지만 또
사실이 그랬으니까. 그러나 도덕의 굴레를 썼다 하여 인간 본연의
선량함도 배제해야 하는 것은 비겁한 자의 소행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
내부에서 판단한 도덕적 결정이기보다 명희의 경우는 형제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비정상의 관계를, 설혹 자신이 결백하다손 치더라도 사회에서
어떻게 보겠느가, 오로지 외부에서 실려오는 무거운 짐짝 같은 도덕에
공포를 느낄 뿐이었으니까. 조용하의 경우도 어쩌면 도덕이 가지는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고의적 몸짓이 이상한 심리로 발전해갔는지 모를
일이다. 그랬었다면 조용하에겐 아직 인간적인 것이 남아 있는걸까.
명희는 전차도 타지 않고 줄곧 걸었다. 효자동 어귀에 이르렀을 때,
"제영이고모님 아닙니까?"
하고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있었다.
"네?"
"역시, 아까부터 그런 상싶어서, 급히 왔지요."
상현이였던 것이다. 명희의 낯빛이 변한다.
"오래간만입니다."
상현의 안색도 파리했다. 몇 해 만인가, 상현의 하숙에서 빗길로 나간
그날 이래 처음 대면이다. 명희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상현이 당황하고
놀란다. 명희의 눈물은 두 사람에게 다 같이 불의의 습격 같은 것이었다.
"정말 얼마 만인지..."
눈시울을 흔들어대며, 그러나 눈물은 명희의 의지 밖에서 혼자 마음
대로였다.
"어딜 가세요?"
할 수 없이 명희는 눈길을 떨어뜨린다.
"선생님 댁에 가는 길입니다."
상현은 눈을 들어 먼 건물의 지붕을 바라본다. 상현의 옷차림은 여느
때보다 단정했다. 그러나 여위고 잔주름까지 잡히기 시작한 얼굴은 초라해
보였다. 다만 눈동자가 옛날과 같은 패기로 빛나고 있었다.
"저도 친정 가는 길인데 그럼 함께 가세요."
"그럭허지요."
두 사람은 조금 거리를 두고 걷기 시작한다.
"요즘엔 어떻게 지내세요. 여직도 약주 많이 드세요?"
"배운 술이 어디 가겠습니까?"
"신문사에는 나가시나요?"
"아닙니다."
"그럼 시골 가셨드랬습니까?"
"아닙니다. 떠나려구요."
"떠나다니요?"
걸음을 멈춘다. 명희의 머릿속에는 기존의 것이 일시에 모습을 감추고,
눈앞에 있는 모든 사물까지 다 잊어버리고 상현과 함께 걷고 있다는
현실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완벽한 망각과 완벽한 소생이라고나 할까.
"함께 떠납니다."
"함께 라니, 뉘하고,"
"의돈형님하구요."
"그, 그러세요..."
명희는 휘청거리듯
"돌아오시지 않을 건가요."
"누가 그걸 알겠습니까."
"하, 하긴, 그렇지만 그쪽으로 가신 분들 돌아오는 일 드물지 않아요?"
"지금으로선 작정도 없고 하여간 가보는 거니까,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기 합니다만."
눌렀기 때문에 오히려 한숨은 길게 나왔다.
"그렇다면 여기서, 친정까지... 그리고 마지막이겠네요."
"명희씨"
"네."
"명희씬 행복하지 못합니다."
"..."
"그렇지요?"
"그래요. 행복하지 못해요!"
날카롭게 내뱉는다.
"비웃는 건가요? 행복하지 못한 것이 제 탓이란 말인가요?
"그럼 내 탓이다 그 말입니까?"
상현은 어색하게 웃는다.
"그때 제가 선생님 하숙을 찾아간 일이 있었지요?"
"빗길로 내쫓았지요."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그 일을 창피하다 생각한 줄 아셨던가요?"
명희는 서두는 것 같았다. 친정 집까지의 거리를 숨가쁘게 의식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저는 선생님을 비겁한 사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하며 상현도 초조한 듯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린다.
"오히려 안심하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닐까요?"
"...?"
"저도 그렇고 이 선생님도, 다 같이 장래는 이미 결정이 돼버렸으니까요.
아무 변동이 없을 거예요. 두려워할 아무런 것도 없는 거 아닐까요?"
상현은 꿈틀하듯 한순간 걸음을 옮겨놓지 못한다. 명희는 어느새 이렇게
당당해졌는가. 자신의 불행에 대하여 어떻게 이처럼 당당해 질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외적인 풍요가 이 여자를 당당하게 한 것은 아니겠지. 자기는
무엇인가. 명희는 눈에 보이게 자란 나무 같다. 대신 자신은 찌들었다.
지렛대같이 버텨온 자포자기의 호언을 버리니까 갑자기 어떻게
찌들어버리지 않았는가. 내 찌들어버린 꼴에 명희는 자신을 가졌더란
말인가. 애당초 행복 운운한 것부터 유치하였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말을
한 것부터 실없는 짓이었다. 상현은 뜻밖에 명희를 만나 혼란에 빠진
자신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지요. 두려워할 아무것도 없는 거지요. 나는 떠나니까요!"
떼쓰는 아이같이 화를 낸다.
"맞습니다, 명희씨 말 대로요. 잘 들어두십시오. 명희씨, 내가 명희씨
행복이나 빌 그런 사내인가요? 불행하라고 빌었음 빌었지, 사실
불행하리라 믿기도 했구요. 만일 행복했더라면 질투 때문에 몸이 타버렸을
겁니다.!"
상현은 별안간 악을 썼다.
"나는 여자를 하나도 얻지 못했어요. 처음 여자는 나보다 딴 사내를
좋아했구요. 두 번째 여자까지 딴 사내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나는
악마가 됐들지도 모르지요! 내 지금 기분이 그렇다는 얘기요! 네, 장래가
정해져 있으니까 두려울 것이 없다! 피장파장 비겁하고 회피하는 상태는
매일반이오!"
"서희씨는 아이 아버지를 무척 사랑했나 부지요?"
"..."
"어떻습니까? 질투 때문에 몸이 타오릅니까?"
"잊었습니다. 어처구니없게... 생각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상현은 껄껄껄 소리내어 웃는다. 뜻밖에 그는 홀가분해하는 표정이다.
명희도 웃는다. 사랑의 고백 치고 피차가 지나치게 격렬하고 거칠기조차
했는데 그들은 심각해지는 대신 웃은 것이다. 속을 털어 버린 시원함이
그들을 웃게 했을까. 입으로만 태워버린 정열의 허무함 때문에 웃었을까.
상현은 명희가 자신의 불행한 자리를 지킬 것이란 확신을 얻었다. 명희는
상현이 떠날 것이며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웃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임명빈의 집으로 들어갔다.
"아니, 어, 어떻게?"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본 올케 백씨는 안색이 달라지면서 당황했다.
"오는 도중 우연히 만났어요, 언니. 그래 함께 왔어요."
명희는 천연스럽게 말했다.
"네, 오래간 만에 만났습니다. 임선생님 계시는지요."
상현도 천연스럽게 말했다.
"네, 지금 사랑에서 환국이하고 바둑 두시나 봐요."
"제영이랑은 모두 어디 가구요?"
"일요일이라구 해서,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해서요, 외가에 갔어요.
고모, 들어가세요. 어제는 어머님께서 정신이 드시는지 고모를 찾지
않겠어요?"
명희는 등을 밀다시피 하다가 백씨는 돌아본다.
"사랑으로 들어가십시오, 이선생."
상현은 사랑에 올랐다.
"이게 누구야? 어서 오게."
"애하고 무슨 바둑입니까? 엿장수 불러올까요?"
"무슨 소리이, 소질이 대단해서 길러보는 게지."
"선생님 실력을 누가 모릅니까?"
임명빈은 껄껄 웃으며 바둑판 앞에서 물러난다.
"선생님, 치울까요."
"음, 그래라. 그보다 환국아?"
"네"
"인사 먼저 해야겠다. 아버님 어머님이랑 절친한 아저씨다. 자네 알지,
이애가."
"네"
실없는 말을 하면 상현의 사선은 방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환국에게
쏠려 있었던 것이다. 환국이는 공손하게 절을 한다.
"아버지 편을 많이 닮았군."
길상이라 하지 않고 아들 앞에서 그 아비를 존중하듯 말했다.
"그래, 바둑은 배울 만하느냐?"
환국이는 웃는다.
"바둑 두기에 아주 알맞은 성미지. 침착하고 치밀하고 임기응변에도
능하고."
"그렇담 선생님께서 배우셔야겠군요."
"에키, 이 사람."
"어련하겠습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어디 보통 사람이라지요."
"저기, 아저씨는 저의 아버님을 잘 아시는지요?"
환국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알다마라. 어릴 적부터, 감나무를 오르내릴 적부터였지. 간도에도 함께
갔었고."
"간도에도요?"
환국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나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곳을 기억하느냐?"
"합니다."
"해란강 생각나느냐?"
"네"
"봄부터 가을까지 강물이 풀려 있는 동안 뗏목이 흘러가던 강이었지."
"네"
길상을 몹시 닮은 환국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얘기하며 상현은
쓸쓸하게 웃는다. 양반? 뭐 말라죽은 게 양반이냐! 지금 눈앞에는 그 옛날
하인이었던 사내의 자식이 어느 귀공자 못지 않게 슬기를 가득 채운
눈망울을 빛내며 앉아 있는 것이다. 아비에 대한 숭배감,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아비, 한치의 의혹도 없는 강하고 또 강한 핏줄의 연결, 저
슬기로운 눈망울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질 않는가.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세월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변한 것이 인사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길상의 얼굴과 안방에 앉아 있을 명희의 얼굴이 번갈아 눈앞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또 환국이 아비를 못 보는 형편과 하동서 아비를 못
보는 아들 형제의 형편이 같지 않음을, 그것은 깊은 패배, 비애를 몰고
온다.
'내가 아빈가? 내가 한 여자의 지아비란 말인가? 참으로 거미줄 같은
인연이로고,'
그런데 생각지 않으려고 머리를 흔들어대던 얼굴이 또 솟아오른다.
봉순이, 그가 낳았다는, 아직도 본 일이 없는 자기 딸아이.
"선생님."
"음."
"함정에 빠지면 속시원하게 뛰다가 죽기라도 하겠지만, 거미줄에
걸려들면."
"사람이 거미줄에도 걸려서 죽나."
"나비라고 생각하지요."
"파닥거리거나 길길이 뛰거나 고통은 다 마찬가지라구. 그리고 또
환국아."
"네"
"이 아저씬 소설가다. 너도 책은 많이 읽지?"
도무지 근엄한 교장 선생이 아니다. 여전히 문학청년 기가 남아 있는
임명빈. 상현은 그 화제를 떠밀어버리듯
"이 애야,"
"네."
"너 공노인을 알겠구나."
"네! 할아버지, 그분 아, 알아요!"
얼굴에 피가 모였다. 환국이는 흥분한다.
"나는 말이다, 실은 너의 아버지하고 사이가 별로 안 좋았거든. 아마
내가 나빴던 것 같애."
의아하게 쳐다보는 환국이한테서 시선을 거둔 상현은 담배를 꺼내었다.
"저어, 그럼 제 발에 가 있겠습니다."
예민하게 상현의 심정을 느낀 환국이는 황황히 일어섰다.
"그럴래?"
임명빈의 말이었다.
"아저씨, 그럼 가보겠습니다."
"오냐."
상현은 어둡고 적막한 눈빛으로 방을 나가는 환국을 쳐다본다.
"저런 아이들이 자라서 자질과 포부를 펴는 세상이 됐으면 얼마나
좋겠나. 암담하고 답답하고 교육이 무슨 쓸모 있으랴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구."
임명빈의 한탄이다. 상현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오늘은 그래 뭣하러 왔나."
"이별주 나누려구요."
"결정했나?"
"네. 의돈형님도 오실 겁니다."
"언제?"
"어두워지면 오시겠다 하더군요."
"이별주라..."
"..."
"모두들 빠져나가는군. 낡은 상여틀 같은 나만 남겨놓고."
"대식가는 남는 편이 좋고 소식가는 떠나는 편이, 그래야 합리적이지요.
그곳 군량미는 아껴야 하니까."
"큰소리치는 거 아니라구."
"오면서 제영이고모님을 만났습니다."
"명희를 만나?"
"네."
"어디 간다든가."
"함께 왔습니다."
"여길?"
"네."
"음... 남편을 동경에 보내놓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여기 오긴 뭣하러
와."
우울한 빛이 재빨리 지나간다.
"선생님은 망아지로 파셨습니까, 명희씨를?"
임명빈은 쓰거운 듯 입맛을 다신다. 그러더니
"그게 뉘 잘못인고? 다아 자네 탓이라구! 몰라서 묻는 게야!"
소리를 버럭 지른다. 어색한 침묵 끝에
"모두 같은 말만 하는군요. 이놈만 죽일 놈 됐습니다."
"뭐라구?"
임명빈은 두 귀를 바짝 세운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더 추궁하지 않았다. 짐작이 간 모양이다.
"자네도 이제 조심하게!"
"네"
"밖에 나가거든 여자 따위 유념 안 하는 게 좋아."
"명심하지요."
상현의 생활이 문란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서희와 명희의 경우는 다
이루지 못한 사이니까 없던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연민 때문에 접근한
봉순에게는 아이까지 낳은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 동안 폭음하듯 이리저리
하룻밤 관계를 맺은 여자가 적지 않았다.
"가서 자리잡거든 가족들 데려가게."
"..."
"아껴야 할 군량미 걱정은 말고. 보나마나 자넨 군량미 먹지 않을
테니까. 늙으신 어머님께서 고생이 되시겠지만 아들 곁에 계시는 것만
하겠나? 내가 왜 이런 얘길 하는고 하니, 자넨 의돈이하곤 달라. 그곳에
떨어지면 며칠이 안 가서 갈라설거?"
"..."
"자넨 자네 부친께서 쌓아놓으신 기반이 있을 테니 의식의 해결책이야
설마 없겠나. 중국하곤 달라서 간도나 연해주 방면에는 우리 조선인들의
기반이 탄탄하고, 사업이나 하는 게다. 그러고 돌아오지마라. 희망 없는
거라구."
"돌아오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생활의 되풀이지 무슨 변화가 있겠나?"
"그보다 누이동생이 걱정되어 그러시지요?"
상현은 빤히 쳐다본다. 임명빈의 낯색이 싹 변했다.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쓴웃음을 띤다.
"미친소리, 옛날 같았음 그런 말도 곧이듣겠다만,"
"이제는 반석 같다는 얘깁니까?"
"웬 트집이야? 서로 눈 부릅뜨며 이별주 나누어야겠나?"
"네. 선생님 맘 이해합니다. 그러나 농담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몰매맞게 된다면 선생님을 잊지 않고 기억할 테니까요."
"관두어, 관두어."
임명빈은 팔을 내저었다.
"미진하게 이러시깁니까? 제가 만일 백작이나 공작, 소위 일본
귀족가문의 큰아들이었다면 위자료 톡톡히 주어서 정실 내어쫓고
명희씨한테 청혼 못하란 법 있습니까? 뭐 있어야지요? 적게 먹고 가는 똥
싸는 시골 청백리 자손이라."
"술도 안 마시고서 멀쩡한 정신으로 이러긴가?"
"실은 그 얘기보다."
하다가 상현은 아까 명희하고 함께 웃었던 것처럼 웃는다.
"명희씨 말입니다. 시집은 한번 갔고 뭐 별 행복한 것 같지도 않은
모양인데, 선생님, 제가 업고 달아나면 어떨까 하구요. 시베리아
벌판에까지 그 귀족 자손께서 찾아올까요?"
"자네는 그러지 못하네. 명희는 어떨지 모르지만."
노발대발할 줄 알았다. 펄쩍 뛸 줄 알았다. 그러나 임명빈은 어눌한
어조로 말했다.
"술이나 주십시오."
하는데 마침 반주를 곁들인 저녁상이 들어왔다. 심부름아이에게 상현이
"반주 가지고 안 돼. 술부터 더 가져와."
명희는 안방에서 저녁상을 받는다.
"오늘 주무시고 가는 거지요?"
겸상으로 함께 수저를 들며 백씨가 물었다.
"아니에요, 친정 간다는 말도 안 하고 나온걸요. 가야 해요."
"그렇담 누구 하나 데리고 다니실 일이지 혼자 다니시긴."
"교회에 나온 길에."
"돌아가려면 저물 텐데 어떡허지요?"
"분순이를 데리고 가죠 뭐. 내일 아침에 보낼게요."
"아참, 그럼 되겠어요. 하지만 매사에 조심하셔야지요."
"..."
"얼마나 계시다 오실 건가요?"
"보름은 넘기겠지요."
"고모가 보고 싶어서 오래 계시지도 못할 거예요."
올케는 그러고 나서 명희의 기색을 힐끔 살핀다.
"뭐 신혼인가요?"
"우리 보기엔 그 양반 항상 신혼 기분 같던데요?"
눈살을 찌푸린다. 백씨의 얼굴이 빨개진다.
"걱정은 무슨, 걱정될 일이 있어야 걱정이지요."
명희는 씁쓰름하게 웃으며 말머리를 돌린다.
"언니, 이 미나리무침 참 맛나요. 향기가 여간 짙지 않네요. 향기가 쇠할
때도 됐는데."
"많이 잡수세요. 많이 잡수시고 얼른얼른, 금년에 아들 하나 보았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언니도 참! 오늘은 별의별 걱정을 다 하시네요."
"그 일만은 걱정이지요. 안 그래요? 삼십이 훨씬 넘은 장자한테 아직
장손이 없다는 건, 여자는 아들부터 하나 낳아놔야 안심을 하지요.
집안에서는 또 얼마나 기다리겠어요?"
"저만 못 낳았나요? 먼젓분도 그런걸, 제 책임 아니에요."
내쏜다.
"설마..."
"뭐 그이한테 아이가 없을 거란 얘긴 아니에요.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인가요?"
명희는 감정의 발톱을 오므리며 입 밖에 내뱉은 자신의 실언을
수습한다.
"그야 그렇지요. 미나리무침 더 가져와요?"
"됐어요."
명희는 상 앞에서 물러나 앉는다.
"일전에 말예요."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명희는 올케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고모가 가르친 그 인실이라는 아이."
"아아, 유인실이 말이에요?"
"예, 그 아이가 무슨 일인진 몰라도 오라버닐 찾아왔더구먼요."
"그랬어요?"
"이젠 다 큰 처녀가 됐는데 여간 다부져 보이지가 않습디다."
"똑똑한 애였지요. 한데 뭣하러 왔을까? 일본엔 아직 안 갔는가?"
"글쎄요, 고몰 한번 만나 뵙고 싶다, 그런 얘길 하더군요."
그 말대답은 없이 명희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오라버니 뵙고 가야지요."
"손님이."
다시 백씨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지난 일을 생각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여자는 그런 데 예민하다. 명희가 아직 상현을 잊지 못하는 것을 눈치챈
탓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명희가 상현을 좋아한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었지만.
"손님이랄 수 있나요? 내외할 사이도 아니지 않아요?"
여느 때와 달리 명희의 어세는 강했다. 뿌리치듯 강했다.
"저녁 드실 건데."
백씨는 불안스럽고, 또 힐난하는 눈초리로 명희를 올려다본다.
명희가 사랑으로 건너갔을 때 밥상 위의 밥그릇은 뚜껑이 닫혀진 채였고
그들은 계속하여 술만 마시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임명빈은 명희를 보자
얼른 일어서서 명희 앞으로 다가올 몸짓을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자리에 도로 주저앉아버린다.
"왔다는 얘기는 들었다."
"오라버니 안 뵙고 갈 수가 없어서, 이 선생님한테 작별 인가도 올리고
할려구요."
"임자 없는 새 나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오라버니 저를 종으로 내다 파셨나요?"
우스갯소리 같았지만 강한 심지 같은 것이 있는 말이었다.
"이거 사면초가로구나. 누군 망아지로 팔았느냐고 따지더니 이번엔
종으로 팔았느냐고?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평등 사상의 기독교 신도도
날로 늘어만 가는데 중인 가문의 설움은 여전들 한 모양이지? 하하하..."
명빈은 고삐를 풀어버린 듯 웃었다. 그는 그의 아내와는 생각이 달랐다.
"우리 지금 이별주 마시고 있는 게야."
"이 선생님께서는 언제 떠나세요?"
"내일 아니면 모레 떠나게 될 겁니다."
"명희야"
"네."
"오라비 대하듯 지내온 사이니까 너 이 군한테 이별주 한잔 부어
주겠느냐?"
너무나 파격적인 제의가 아닐 수 없다. 명희나 상현이 다 같이 깜짝
놀란다.
'불쌍한 것들,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이별주 한잔 부어준들 어떠랴.'
임명빈은 예의 그 낭만적인 문학청년 같은 동경에 빠져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는 신기루 같고 꿈같이 불가능한 일이지만 소위
플라토닉러브에 대한 감미로운 비애를 그는 누이와 상현을 통해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상현이 지껄여댔을 때 경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왕사 매부로 욕심내던 사내요, 영희 혼자 짝사랑했던 사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을 때 상현의 고백 아닌 고백, 그 말은 영희를 위해
만족스럽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다 흘러갈 것이요,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영희에게 실연의 쓰라림보다는 상대편도 영희를
사랑했었다는 추억은 아름다울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헤어지면
언제 다시 또 만나게 될지 임명 빈의 마음을 감상으로 몰고 간 것은 그의
성품상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수신 도덕을 일러야 하는 교장으로
있으면서 임명빈은 도무지 문학청년적 기질만은 벗어 던질 수 없었던가.
"이 선생님 잔 드십시오."
상현이 술잔을 내밀었다. 술을 받아 마신다.
"몸 성히 뜻대로 되시길 빌겠습니다."
"명희씨도 제 술 한잔 받으십시오."
빈 술잔을 내민다. 받는다. 술을 부으면서
"울지 마십시오. 견디지도 마시고요."
"그러겠어요."
임명빈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천장을 올려다본다. 이것도 사랑의
의식인가.
그러나 상현도 명희도 그리고 임명빈도 간음자요, 간음을 방조한
죄인이다.
부산하게 떠들며 들어서는 의돈의 목소리를 들은 명희는 일어서 나왔다.
"친정 왔어요, 귀부인?"
명희는 허리를 굽히며
"안녕하셨어요. 그럼 오라버니, 전 가보겠어요."
"오냐. 살펴가거라."
"이 선생님도 안녕히 가세요."
안방으로 돌아온 명희는 성경과 핸드백을 들었다. 노모의 방, 방문을
열어 잠이 든 얼굴을 한번 내려다본 명희는
"분순아, 날 데려다다오."
"네, 아씨."
명희는 심부름아이 분순이를 데리고 대문을 나선다. 밤바람도 차지는
않았다. 달이 남산에 걸려 있었다.
12장 제삿날
"삶아 젖히네. 임석이 퍽퍽 씨어 나가겄소."
밤을 치면서 연학이 말했다. 노리끼한 얼굴에 기름 같은 땀이 흐른다.
"와 아니라."
함께 밤을 치던 용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건성으로 대꾸한다.
"보리죽도 없어서 못 묵는 농사꾼 처지에 이 오뉴월, 무신 놈의 제사는
집집마다 찾아드는지 온."
삐뚜름한 음성이다.
"찬물 떠놓고 지낼 수도 없는 일이고 보믄 세전지물 없는 농사꾼의
자손들 불쌍하지요."
"호열자 덕분 아니가."
"떼죽음을 당한 사람들이야 저승길이 심심찮아서 좋았을지 모르지마는
산 사람이 어디 할 짓이요?"
"저승 흥! 있는지 없는지..."
"맘으로 맨든 기지 저승이 있긴 어디 있겄소. 산 사람 입에 풀칠하기도
어러분 세상, 성영봉사는 뭐 말라죽을, 농사꾼들한테는 골병이오."
연학의 음성이 좀 격렬했다. 윤씨부인의 기일이라 하여 평사리 넓은
집안이 온통 법석인데 그것에 대한 반발이지, 용이는 기름땀이 흐르는
연학의 노리끼한 얼굴을 쳐다본다.
"사람 사는 기이 다 그런 거 아니겄나."
"..."
"죽으믄 그만이제. 그러나 답대비, 그놈의 잊임이란 것이 홀해서 제사
때가 닥쳐와도 무심상하니, 제사도 없다믄 죽은 사람 생각이나 해보겄나?"
며칠 전에 용이는 자부와 함께 호열자에 죽은 강청댁의 제사를 지냈다.
세 여자를 앞세운 자신의 팔자도 어지간히 드세다는 생각을 용이는 제삿날
밤 했던 것이다. 본처 강청댁이 죽은 지는 이십년이 넘었고 월선의 죽음은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옛일이다. 그리고 작년 초봄엔 임이네가 죽은 것이다.
연학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좀 심한 말을 했나 싶었던지 화제를 바꾸었다.
"호열자 나던 해는 지도 어렴풋이 기억을 하는데 한 이십 년 넘었지요?"
"임인년의 일인께, 보자아... 이십사 년, 이십오 년 됐구마."
"맨날 집 앞을 관이 지나가는 것을 문구멍으로 내다본 생각이
나누마요."
"그 이듬해는 또 보리흉년이 들어서 길바닥에 송장이 나동굴곤 했제."
"떼죽음도 물물이 오는가배요. 이래 죽고 저래 죽고."
"물물이..."
"생각해보믄 별 희맹이 없는 기라요. 아예 그만 인종을 싹 쓸어가
부맀으믄 좋겄소. 아이구 더버라. 비나 한줄기 쫙 쏟아졌이믄, 한증막도
유분수지 바람 한점 없구마요."
일손을 놓고 물러나 앉은 연학은 부채를 집어든다. 앞가슴을 벌리고
신경질적으로 부채질을 한다.
"빌어묵을 매미 소리 귀청 찢어지겄네."
잔망스런 참새들은 시원한 대숲을 놔두고 처마밑을 맴돌며 시끄럽게
지저귄다. 채마밭 너머 싸리나무 울타리에 기대읏 핀 능소화, 청참외
속빛깔 같은 능소화, 그것을 바라모던 용이는 등바닥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간밤의 꿈을 생각한다.
'뜻밖에 수동이 꿈은 와 꾸었이꼬? 이상한 일이다.'
"남의 제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일은 아니지마는 범퍽시럽게 입석을
멋 땜에 그리 장만는지, 아이구 더버라."
역시 최참판댁에 대해 심히 불만인 모양이다. 용이는 투덜거리는 연학의
음성과 짜증스런 부채질 소리를 들으며 계속 꿈 생각을 한다. 수동이
다리를 절룩거리고 초당을 향해 급히 걷고 있었다. 한쪽어깨를
기우뚱거리고 있었을 뿐,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와 그라노?"
용이 물었다.
"아 그러씨, 저기 저 미친년 따문에 길이 맥힌 기라."
"길이 맥히다니?"
"허허어, 길이 맥했이믄 맥힌 기지 되묻기는? 아무튼지간에 그놈의 동학
서학 따문에 풍지박산이 난 것만은 틀림이 없인께."
"밑도 끝도 없이 그기이 무신 소리고?"
"허 참 말귀도 어둡다. 저기, 저기서 산발한 미친년이 청포 장시노래를
부르고 안 있나 말이요."
초당 쪽을 올려다보았다.
"녹두꽃이 떨어지믄 청포 장시 울고 간다아, 녹두꽃이 떨어지믄 청포
장시 울고 간다아-"
산발한 또출네가 우뚝하니 서서 되풀이 그 구절만 부르고 있었다.
"이 미친년아! 이리 못 내리오겄나!"
수동이 외쳤다. 또출네는 허공에다 주먹질하며 잔뜩 화가 난 시늉을
하더니
"이히히힛힛... 이히힛힛..."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이 미친년아! 정 못 내리오겄나? 오냐, 그라믄 가만 거기 있거라! 꼼짝
말고! 내 올라가기만 하믄 니를 직이부릴 긴께."
"이힛힛힛... 내 원수야! 이힛힛힛... 내 낭군아아- 천년 만년을
기다맀구마는. 백년을 기다맀단 말이요! 아이고오, 내 원수, 내 낭군아!"
이빨을 드러내고 웃던 또출네, 별안간 그의 손에서 오랏줄이 수동의
발목에 뱀처럼 착 감긴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수동이 나자빠졌다.
도출네는 그물을 당기는 어부처럼 오랏줄을 당기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주야장천 긴긴 밤에 임의 얼굴 보고지고오, 옥 겉은 임의 얼굴 달 겉은
임의 거동 지리상사 보고지고-"
또출네의 노랫소리는 꿈을 깬 뒤에도 꼬리를 물고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용이는 그 노랫소리가 하도 끔찍하여 귀를 털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좋은 꿈은 아닌 것 겉다.'
뜰안 채마밭의 열무는 짙푸르고 악세게 어우려져 있었다. 비가 내리던
날 언년이가 고추 모종을 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게 엊그제만 같은데,
울긋불긋하게 물들기 시작한 고추, 주렁주렁 매달린 풋고추, 용이는 이십여
년 전의 사람들을 꿈꾼 일과, 비 오는 날 뜨문뜨문 고추 모를 심어나가던
언년의 하얀 종아리, 자신의 늙음과 자신의 세월과 자신의 역정과는
동떨어진,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일인 것처럼. 미구에 닥쳐올 자신의
죽음까지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마치 낯선 나그네가 자기 옆을
스쳐갈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부채를 던지고 일손을 잡은 연학이
"어디 몸이 불편합니까?"
하고 묻는다.
"응?"
어리둥절하게 연학을 본다.
"으음."
비로소 넋 나간 듯 채마밭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안색이 안 좋십니다. 고단하거든 좀 드러누우이소."
"그런 기이 아니라 꿈자리가 시끄러버서."
"꿈자리가 나쁘거든 개꿈이거니 생각하이소."
"제사 때가 된께 그런 꿈을 꾸었는가."
"이 댁 식구를 봤십니까?"
"아니, 식구라믄 식구랄 수도 있지만... 수동이라고, 죽은 지가 하
오래돼서 까맣게 잊어부리고 있었는데."
"수동이가 누굽니까."
"이 댁 하인이었제."
"..."
"어른들이 다 돌아가시고 집안이 온통 낭태질이 됐일 적에, 그러니가
환국이도련님 부친하고 수동이가 천애 고아, 그런께 지금의 마님을
지켰구마. 대들보 노릇을 한 기라. 참말이제 이 댁에서는 비라도 세우줄
만한 충직한 사램이었다."
"자식은 있고요?"
"자식이 다 멋꼬?"
"물은 누가 떠놓소?"
"응?"
어리둥절한다.
"제사 임석을 썩어나게 장만하는 이런 대가댁에서 종이기로 대들보
노릇한 망인의 기일을 그냥 지낼 순 없지 않습니까."
"그, 그게... 아무도 챙기는 사램이 없었구나."
당황한다.
"주, 죽은 날을 알아야제. 이 댁 바깥주인이나 돌아오믄 죽은 날도
알기다마는, 우리들이 범연해서..."
"다 그런 기이 인심 아니 겄소."
"..."
"얼어죽은 구신 홑이불이 웬말이며 굶어죽은 구신 배맞이밥이 웬말이냐,
기일도 모르는 종놈의 비는 세워서 머하겄소."
면전에서 용이를 공박하고 나온다. 세를 따라서 정리 같은 것은
뒤돌아보지도 않는 간교한 인간으로 몰아붙이는 것만 같다. 왜 연학이가
그러는지 헤아려볼 사이도 없이 용이는, 사실 자신은 그런 인간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서 한순간 허우적거린다.
'이 사람아, 와 날보고 그러노. 그때 사정을 니가 모린께 그러지. 그라고
또 지난 정분을 생각한다 캐도 그렇지. 나한테 수동이보다 더한 사램이
어디 한둘이건데. 수동이는 주제넘게 내가 설동할 계제도 아니거니와 그,
그거야 이 댁 마님 하시기 탓이고, 날보고 그라믄 우짜노?'
그러나 용이는 개운치가 않다. 더욱 기분이 나쁘고 찝찔하다. 자신이
배신자만 같다. 나쁜 놈 같고 야박하기 짝이 없는 놈 같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처참했던 윤보의 죽음, 어느때든 내 반드시 돌아오리, 와서 뼈라도
우려서 양지 바른 마을 뒷산에 묻어주리라, 그 굳은 맹세도 세월 따라서
까맣게 잊어버렸으며 윤보를 생각하는 일조차 드물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것은 사람이구나. 용이는 쓴웃음을 띤다. 죽음은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것
같았다. 무더기 무더기 널려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까지 지난 세월은
자신과 아무런 인견이 없고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조차 낯선 나그네처럼
지나갈 것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세월은 살아서
몸을 일으키고 그 수많은 죽음들이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어 용이에게
육박에 오는 것을 느낀다. 부모와 누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강청댁의
얼굴이며 월선의 얼굴이며 임이네 얼굴이며 최치수, 윤씨부인, 별당아씨
얼굴이며 노비들, 윤보에 한조, 서금돌, 김훈장, 어찌 다 셀 수 있을
것인가. 삼월이며 김평산, 귀녀, 칠성이, 핏자국 같은 그들 생애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넓은 가을 들판에 베어서 눕혀놓은 볏가리들처럼
멀리 가까이, 그것은 모두 죽음들이며, 죽음에 이른 무수한 삶의 이력,
삶의 잔해만 같은데 용이에게는 그것들에 둘러싸여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이 엄습해온다. 저승과 이승의 끝없는 벌판을 무엇들이 그렇게
애타게 살다갔더란 말인가. 그리고 혼자 살아남았는가.
"꿈에."
하고 용이는 잃은 실마리를 찾아서, 생각을 다 털어 버리고, 연학의 심사
틀린 말도 아불관인 듯 얘기를 시작한다.
"절룩거리며 수동이가 초당 쪽으로 가는데... 그러니께 이 댁 서방님이
살아 기실 적에 그 양반이 강포수를 데리고 사냥 간 일이 있었제. 그때
강포수 잘못으로 선불 맞은 멧돼지가 떠받아서 수동이 다리 벵신이
됐는데."
"강포수라 카믄 지도 생각이 나는데요."
연학이도 변덕이다. 언제 화를 냈는가 싶게 말했다.
"이 근동에서는 모리는 사램이 없는 명포수였구마."
"그보다도 어릴 적에 들은 얘기로는 그, 왜, 옥에 갇힌 계집종 있지
않십니까? 샐인에 가담한 그 계집종이 낳은 아이를."
"음 하기는 그 일 때문에 강포수 명이 더 놓이 나긴 했다마는."
"그 아이가 누구 씨였을까요? 그때 벌어진 일을 미루어본다믄 칠성이."
"그거를 누가 알겄노."
용이 말을 막듯이,
"사람마다 집집마다 알고 보믄 사연이야 기맥힌 것 아니겄나."
하고 덧붙이면서 화제를 잘라버린다. 그리고 꿈 얘기도 덮어둘 심산인지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꿈 얘기엔 별 관심이 없었던 연학이 역시 말을
잇지 않는다. 뒤늦게 칠성이가 임이네의 전남편이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기복이 심한 연학의 마음 상태는 찌는 듯한 무더위 탓만은 아닌
성싶다. 얘기가 끊겨버린 방안 분위기는 더위와 함께 숨이 막힐 것 같았고
연학의 표정은 몹시 울적해 보인다. 침착하고 매사에 신중했으며 표현이
간략했던 그가 근자에 와서 무슨 까닭인지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이고, 이기이 누고오?"
풀발 센 삼베 치마를 서걱거리며 급히 걸어오던 야무네가 놀란다.
별채로 돌아가는 뒤안길에 흰 노타이 셔츠에 감색 양복바지를 입은 석이가
주춤거리듯 땀을 닦고 서 있었다.
"석이 앙이가? 여기는 니가 웬일고오?"
광우리를 옮겨 들며 야무네는 놀라는 한편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석이는 좀처럼 평사리에 나타나지 않았고 최참판댁에도
오는 일이 드물었다.
"별일없습니까."
손수건을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으며 인사를 한다. 석이는 옛날, 한 십
년이나 되었을까, 진주서 물지게를 지던 무지렁이 시절, 처음 관수랑 함께
구례를 다녀오던 나룻배 안에서 야무네를 만났던 생각을 한다. 읍내
고공살이 하는 야무의 옷을 해간다고 했다. 하동에 내렸을 적에
나루터에서 떡을 사 가지고 뛰어오던 야무네, 그 후 몇 번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석이는 그때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별일이사 있겄나마는,"
"살기는 어떻습니까."
"딸아아 따문에 그렇지 요새는 훨씬 허리가 피있네라. 다 여러 사램이
붙들어준께 안 사나. 그래 설마 제삿날 알고 온 거는 아니겠제?"
"지가 뭐."
석이는 쓴웃음을 띤다.
"다른 일이 좀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아무튼지 잘 왔다. 다른 사람들은 고향 떠나도 추석이믄 더러
만낼 수 있는데 너거들이사 니 아부지 산소가 여기 있는 것도 아니겄고,
자아 가자. 이 서방이랑 연학이 그 사람이 뒤채에 있다. 집에는
별일없겄제?
"네."
"나도 파적 부치는데 고치가 모자란다 캐서 고치 따로 간다."
야무네는 석이 뒤를 따라 별채 채마밭으로 나간다.
"홍이아배, 석이가 오요."
야무네 말에
"석이가 와요?"
용이와 연학, 동시에 밖을 내다본다.
"야이야 올라가바라."
석이는 신돌 위에 신발을 벗고 야무네는 고추밭으로 간다.
"정선생 웬일이오?"
석이는 그냥 웃기만 한다.
"아저씨, 절 받으십시오."
"절은 무신, 그만두어라."
용이 손을 내저었으나 석이는 절을 하고 자세를 바로한 뒤
"지도 밤 좀 칠까요?"
"거지반 다 됐인께 손댈 것 없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무신 볼일이 있어 왔소?"
연학이는 약간 긴장하며 묻는다.
"진주로 바로 가려다가 모두 여기 계시다는 말을 듣고,"
"절에 갔십디까?"
"네"
"그라믄 서울서 바로 내려오는 길이구마는."
"그런 셈이지요."
"선생들은 방학이 있어서 할 만하겄소. 그래 서울서는 머 달라진
일이라도 있십디까?"
소극적이지만 연학은 기대를 가져보는 얼굴이다.
"글쎄요. 그보다도 우연찮게 조가놈을 만났지요."
"조가를?"
용이 되묻는다.
"네"
"한바탕 소동이 났겄소."
연학이 웃으며 하는 말에
"소동 벌일 새도 없었고, 버러지만도 못한 놈을 이제는,"
그러나 역시 덤덤해지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눈빛이 날카로워진 것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었고 가정을 가졌으며 남을 가르치는 처지, 세상 물정을
환하게 알게 되어 자신이 가야 할 깃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는 석이지만
조준구에 대한 원한만은 극복할 수 없는가 보다.
"뜻밖에 그놈을 전당포에서 만났어요. 친구가 옷을 잡혔다기에
찾아주려고 갔는데 그놈이 있더군요, 나를 보자 그냥 달아나는 겁니다."
연학이 킬킬대며 웃는다.
"이자는 전당포 출입을 하게시리  그자가 망했단 그 말가?"
"그게 아니지요."
용이 말에 연학이가 부정한다.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으면서 석이
말했다.
"옷을 찾으면서 전당포 서기한테 물었더니 주인이라 나요? 기가
막혀서,"
"머라 카노?"
"아제씨는 모릴 깁니다. 나도 그 얘긴 들었는데 정선생을 보고 말 안
했던가요?"
"못 들었소."
"하 참, 그런께 정선생이 쳐들어갈까 싶어서 말 안 했일 기요."
"쳐들어가기는요. 죽일 생각이었다면 벌써 옛날에 죽였겠지요. 그럴
값어치나 있는 놈입니까."
더러운 것을 내털듯이 말한다.
"그라믄, 살아 있는 것도 멋한데 그자가 전당포 주인이다 그 말가?"
용이는 석이 때문인지 일손을 빨리하며 물었다. 연학이도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저승 염라대왕도 그런 악종은 마다하는가 부지요, 세상일 참말로 귀떡
맥히요. 살아서 좋은 일 할 사람은 모조리 잡아가고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은 도사리겉이 살아남아서."
"그놈, 또 없는 사람 피 많이 빨아묵겄고나."
"전당포에다가 고리대금도 하고, 온갖 풍상 다 겪은 뒤라 양반이고
계집이고 일없다 한다던가요? 소문난 구두쇠가 됐답니다. 그런 추물이
없지요."
"다 늙어감서, 그만 죽은 딧기 들엎우리고 있일 일이지."
"들엎우리고 있어요? 풋돌겉이 이만 갈고 있답니다."
"아, 멋 때문에?"
"죽기 전에 한분 일어설 거랍니다. 원수를 갚는다 카든가. 기가 맥히서,
정선생 열나지요?"
석이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놈을 직이겄다고 칼을 품을 사람이야 많겄지마는 제놈이 이갈 사람이
어디 있어서? 참말로 염치도 좋다. 그래 그 원수가 누군고?"
"환국이어머님을 두고 하는 말이겄지요."
"거금 오천 원을 주었다고 그런다 카더나? 그놈 미쳐도 한두 분 미친
기이 아니거마는 그러기 애시당초부터 돈을 준 기이 잘못이라. 와 그렇기
하싰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릴 일이다. 그 개놈한테 던져주느니, 이 집의
공로자 수동이 양자나 세워주시지. 그 돈 가지고 인재를 키웠어도 여러
사람 안 되겄나?"
용이의 심정도 고르지가 못해서 평소와 달리 말이 많은데다 흥분도 하고
있었지만 수동에 관한 얘기가 겸연쩍어서 얼굴을 붉힌다. 그리고 겸연쩍기
때문에 수습이 안 되는 것이다. 말을 계속한다.
"김훈장의 양손자 경우를 생각해도 그렇지. 그 어른하고 이 댁의 인연이
좀 깊으나? 보통핵교를 나와서 농사일을 하는데 조금만 잡아주믄,"
"아따, 아제씨도, 사돈간이라고 그러요?"
연학은 아까 용이를 몰아붙인 것이 미안했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말
많은 것이 불안하여 농으로 얼버무린다.
"하기야 목심을 구해주니 옷보따리 내놓으라 하더라고, 내 처지에
말하는 것부터 주제넘고 낯짝 두꺼운 일이다마는, 하여간에 조가놈,
쇳바닥을 길가에 끌박고 뒈져도 시원찮을 놈이, 지은 죄 많은데 그럴 수가
있나."
"개터럭이 굴뚝에서 삼 년을 묵어도 털믄은 제 털이라 안 캅디까?
타고나믄 할 수 없는 기라요. 삼신도 노망 들 때가 있어서 그럴 때 점지한
종자는 그렇기 되는 거 아닐까요?"
"하기야 다 소앵이 없는 일이제. 이치를 따져서 될 일이라믄, 천성으로
쓰고 나오믄 할 도리가 없지."
한숨을 내쉰다. 용이의 밤 치는 손은 더욱 빨라진다. 그는 자리에서 뜨고
싶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속으로 고개를 저어댔지만 임이네
죽음이 되살아난 것이다. 한번도 따뜻하게 대해준 일이 없는 여자,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회한을 남기게 마련이다. 좋지 않은 추억들을 다
떠내려보내기 위해선 임이네 생각을 말아야 하고, 그것이 그 고독하고
처참한 죽음에 대한, 불쌍한 망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다. 임이네의
죽음은 슬픔이나 애통보다 용이에게는 충격이었다.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
밑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절망, 죽음은 모두 그럴 것이지만 뼛골까지
스며드는 그 외로운 죽음을 용이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연민이었으나 임이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절망이었고, 그 절망감은 죄의식을 몰고 오는 것이다.
"수울찮이 손잽히는데요?"
연학이 손을 털고 물러나 앉았다. 수건으로 칼날을 닦아 칼집에 칼을
꽂은 뒤 용이도 물러나 앉는다. 그리고 곰방대를 꺼내어 담배를 잰다. 밤
치는 일이 끝난 것이다.
"아지매! 아지매!"
연학이 고추를 따는 야무네를 부른다. 목석같이 앉아 있던 석이 비로소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와?"
야무네가 쫓아왔다.
"밤 이거 안으로 날라가고요, 점심 채리달라고 하소."
"그러지"
"거 풋고치하고 고치장도 좀 놔 오라 카소."
"개기가 만산 초목 겉은데 이런 날 하필이믄 풋고치가?"
"상놈들한테는 풋고치가 제격 아니겄소?"
"별소릴 다 하네."
야무네가 채반에 가득 실린 밤을 들어서 나가려 하자 용이 불렀다.
"야무어매."
"야?"
"내 점심은 채리지 마소."
"와요?"
"속이 까끄름하고, 집에 가봐야겄소."
"아아니 아제씨,"
"으으음, 영 생각없네."
손을 내저으며 일어섰다.
"석이도 오고 했으니 술상 먼저 채리는 기이 좋겄소."
야무네보고 이른다.
"야. 그만 홍이아배도 함께 하믄 좋을 긴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야무네를 떠밀 듯,
"내 걱정은 말고, 석아, 그라믄 나중에라도 우리집에 오너라."
"아제씨도 참, 젊은 사람들 술 마시라고 자리 비우는 겁니까?"
연학이 어색하게 웃는 석이는
"나중에 들르지요."
하며 굳이 잡으려 하지는 않는다. 야무네와 용이 나간 뒤 잠시 동안 두
사내의 눈이 마주친다.
"무신 일로 왔소."
낮은 목소리다.
"여기 온 일은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김선생이 오셨소."
"예?"
노리끼한 연학이 얼굴이 시뻘개진다.
"언제요?"
"함께, 쌍계사까지, 서울서 만났소."
"별일은 없고?"
"자세한 말슴이야 안 하시지요."
"돌아오싰으믄 앞으로 형편이 좀 달라질란가..."
"글쎄요"
떨떠름한 석이 대답이다. 어색한 침묵 속에 빠진다. 두 사람은 상당한
세월을 한뜻에서 출발하여 지내온 동지라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개인적으론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서로가 조심스럽고  성질이 맞지 않는다고나 할까,
아니 어떤 면에선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우선 고지식하고 재미가 없는 성미, 그러니까 농이 없고 객기부릴 줄도
모르며, 치밀하고 정확하기로는 학식이 없어 그렇지 연학이 편이 승하였고,
잠재된 상태지만 정열은 석이 편이 강하였다. 아무튼 어느편이든 관수하고
어울리면 틈이 없는데 두 사람만 마주하게 되면 늘 서먹서먹한 것이다.
"늦었제? 모두 눈코 뜰 세 없이 바빠서, 술 떠오는 데 시간이 걸맀다."
야무네가 술을 가져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발껍질이랑 보늬가 잔뜩 떠 있는 물그릇을 마루로 내가며
"세상에 별일이 다 있제."
"와요?"
연학이 술잔에 술을 부으며 물었다.
"장서방은 모릴 시다. 석이는 알제?"
"머 말입니까?"
"와 개똥이, 죽은 김서방의 천치 아들 말이다."
술을 들이켜고 안주를 집으며
"알지요. 침을 질질 흘리고 다녔지요."
"지금도, 침이사 여전히 흘리더라."
"어찌 살아 있었던가 부지요?"
"방금 왔다."
"네?"
"시상에 그 벅수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조가네 식구가 여기 사는 줄만
알고 있었단다."
"어디 가 있었는데요?"
"머 정한 곳이나 있었겄나. 지 말로는 머슴살이도 하고 강주리 장사도
했다 하더라마는 성상이 거지 중의 상거지더라. 하기사 말도 잘 못하는
벵신이 그 고생이 오죽했겄나."
"나이가 사십 다 돼갈걸요."
"얼굴은 늙지 않았더마."
"바보 천치치고 늙은 사람 봤소?"
"장서방 말이 맞구마. 그러고 보니."
"식구 하나 늘었구마요. 두 바보가 생깄소."
정신 나간 육손이한테 개똥이를 보태면 두 바보란 얘기다.
"술이나 함께 마시게 오라 하지요."
차분한 음성으로 석이가 말했다.
"오라 캐도 안 올 기다. 지금 떡 찌는 솥에 불때고 있다."
"오자마자 무슨 짓들이요."
"아니다. 누가 시킨 기이 앙이고 버릇인가 보더라. 밥이나 묵고 하라
캐도 배부르다믄서 솔가지를 툭툭 뿐질러 불을 때네."
"옛날 식구라믄 손님 대접 할 것도 없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리두는
기이 편할 기구마는 아지매는 가보소."
연학이 냉정하게 말했다. 야무네가 가고 난 뒤
"저 아지매도 편할라 카믄 딸이 죽어야 할 기요."
"어쩔 수 없지요. 사는 날까지는 살아야지. 부모 맘이야 어디."
"유별나게 자식이라믄, 요즘에 일본 간 큰아들한테서 돈이 오고 사위도
살림에 보태는데 아마 약값으로 다 나갈거요. 아는 병을 가지고 좀더 살게
한다뿐이지 나을 병이라야제."
석이는 빈 잔에 술을 부어주며
"땅은 일 년 양도 할 만한가요?"
"넉넉기야 하겄소? 그놈의 땅때기 때문에 말썽 많았지요. 인심
무섭십디다. 그 아지매 험담이 막 쏟아져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봉기 그
늙은이가 젤 엉큼스릅더마요."
"본래 그 늙은이 욕심이 많았지요. 어릴 적에 그 집에 연장 빌려주면 못
받는다 했지요. 그런데도 왜 부자가 안 되는지 모르겠소."
"상놈이라 그렇지요. 양반이 됐더라믄 토지조사 때 한 됫박뿐이겄소?"
"...?"
"도장을 한 말은 팠을 기요. 문서 없는 남의 논밭, 그 먹성이야 조준구
유가 아닐 기요. 조준구는 간이 작은 편이거든. 하하핫..."
할 수 없이 석이도 웃는다.
"다만 다른 점은 하는 짐승이고 하나는 짐승보다 못하다 그거지요. 자식
일이라 카믄 범겉이 덤비는 봉기 늙은이, 자, 술 드리오, 정선생."
"네"
"생각해보믄 조씨 문중의 지체 높은 양반이 동저고릿바람, 짚신 뒤집어
신고 변릿돈 받으러 댕기는 터수에 백정이 임금인들 못 나오란 법 없지.
세상이 용수철겉이 마구 뛰고 솟고 물레방아 겉이 돌아가는 판국인데,
젠장!"
술을 꿀꺽꿀꺽 들이켠다. 설마 조준구가 동저고릿바람에 짚신 뒤집어
신고 다녔을까마는 그만큼 구두쇠가 됐다는 뜻인 모양인데 진일 마른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도맡아서 빈틈없이 해온 연학이 근래에 와서
자포자기한 듯한 그 심중을 석이는 다소 알고 있었으므로 방문 밖의
하늘을 한번 쳐다본다. 어쩌면 연학의 고민이 자신의 고민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기가 차서, 그 주제에 소목일 하는 아들을 두고 가문에 똥칠한 놈이라
했다든가?"
"장형은 어찌 그리 조강의 동태를 잘 아시오?"
"아는 수가 있지요."
"아직도 염탐꾼을 붙여둘, 그런 값어치가 있소?"
"참, 옛날에는 정선생이 그 염탐꾼이었지요?"
"다 지나간 일, 덕분에 선생 소리도 듣소만."
"조가가 광산 때문에 땅문서를 몽땅 잡힌 거는 아니었은께."
"...?"
"아마 절반은 거간을 통해서 팔았일 기요, 쥐도 새도 모르게 산 사람이
환국이어머님이었고, 그 거간이 바로 우리 아부지였다 그 말이요."
"그랬던가요?"
"해서 조가하고 인연이 있지요, 아니 친분이 있다 해얄 기요."
"말하자면 양다리를 걸쳤다 그 말이오?"
하고 석이 피식 웃는다. 연학이도 웃는다.
"조가놈 귓구멍 대기 건지럽겄소. 다 실데없는 소리고, 김선생이
오셨다믄 그런께 관수형님을 만나바야 먼가 좀 알겄구마요."
"아직은 관수형님도 모르지요. 서울서 곧장 왔으니까."
"여기 온 일은 머요?"
"글쎄... 그걸 어쩔까 지금 생각는 중인데."
"정선생."
"네."
"김선생이 오싰다고 해서,"
연학이는 아주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하여간 답답하고 머가 먼지 모리겄소, 뿌러질거믄 딱 뿌러지고."
하다가 어세를 떨구었다.
"이자는 매인 송아지 꼴이 된 것 겉소. 식구들꺼지 진주로 끌고 왔이니
말이요. 정선생이라고 식구가 없을까마는, 깨질 바에야 살아 남는 편이,
이건 중도 아니고 속도 아니고 언제꺼지 최참판댁 종질이나 하고 있으란
말이요? 되는 게 머 있소? 요새 같아서는 팔난봉겉이 사는 놈이 제일이다,
그런 생각이오. 김선생이 오싰다 하지마는 백만 대군을 끌고 왔겄소?
제기랄! 이놈의 백성, 농사꾼들조차 모조리 장돌뱅이 심보로 변해 가는
것이 날로 훤하게 드러나는데 무신 희맹이 있겄소. 저눔이 죽어 없어지믄
저 땅은 내가 부치게 된다. 그런 맘들이 역력하게 보일 때는 말짱 하는
일이 헛일 겉고 독립이고 개떡이고 내 가솔이나 챙기자는 생각이 절로
나는 기라요!"
연학은 젓가락으로 판을 쳤다.
13장 돌아와서
최참판댁의 기둥 군데군데 초롱이 내걸려 있고 행랑이 불빛도 환하게
밝았다. 제상에 멧밥이 올라갈 무렵 윤씨부인 무덤에는 쉬어가는 방
나그네같이 한 사나이가 묘비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덤벼드는 풀모기를
쫓다 말고 사내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담배를 빨아 당길 때마다
아직은 망가지지 않은 얼굴의 윤곽이 나타나곤 하는데 사내는 환이였다.
골짜기에서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쪽에선 이따금 개 짖는
소리, 여름밤의 별들은 황홀하게 반짝이고 뻐꾸기는 계속하여 운다.
"제삿밥 잡수러 가셨겠군요."
어둠 속에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먼 곳에서 제삿날 생각하고 온 것은 아닙니다만 와보니, 제야 뭐
빈집에 찾아와서 절 한번하고 가지요."
풀섶에 담배를 비벼 끄고 엎드려 절을 한다. 무덤 앞에서 일어서는 순간
환이는 불이 환하게 켜졌을 최참판댁 넓은 대청과 제상과 서희와 그의 두
아들의 모습이 불덩이 같은 열도를 띠며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낀다.
단숨에 달려가서 제상 앞에 꿇어앉고 싶은 유혹은 가슴을 메이게 한다.
환이는 풀섶을 지신지신 밟으며 산을 내려간다. 적막한 어둠과 마음 끝을
간질여주는 갈대 같은 외로움이 스며든다. 마을의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모깃불 연기 속에 뿌옇게 비치는 불빛도 볼 수 있다. 차가운 빙하 같았던
생애, 먼 곳에서 찬란하게 빛을 내던 사람들, 인생은 보석의 빛이 결코
아니요 뿌옇게 타오르는 모깃불, 목화씨 같은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발자취는 순전히 역행이었다는 생각도 한다.
"무슨 놈의 밤도깨비 같은 짓이었나."
허허 하고 웃는다. 생모 무덤에서 절한 것이 그랬었고 자신의 인생
전부가 허허헛 허허, 하고 계속 웃는다 김평산의 외딴집에서도 물빛은
새나오고 있었다. 한복 내외가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고 있는 걸까. 환이는
마을에서 발길을 돌린다. 발길이 빨라진다. 역풍을 향해 달리듯이, 그렇게
한참 달리다가 우뚝 서며 돌아본다.
"뭣 땜에 따라다녀!"
소리를 버럭 지른다.
"성님 한 말이 맘에 끼여서요."
길섶 수풀 속에 반쯤 몸을 가리고 앉아 있던 강쇠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그리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무슨 말을 했기에?"
"머 기분 좋은 말도 아닌데 꼽씹어서 머하겄소."
"어느 놈한테 칼 맞아 죽을 거라 하든가?"
"점점 한다는 소리가."
"네가 날 낳아준 어미야? 어미! 웬 잔걱정이 그리 많아!"
"어이구 참, 천지개벽을 해도 그런 촌수는 없겄소. 남자가 애기 낳는
법도 있다 캅디까?"
"강쇠야"
"허허 참 성님도, 사십 다 된 가장, 이자는 대접 좀 해주었이믄
좋겄거마는."
"내가 뭐라 하든가."
"말한 사램이 날보고 물으믄 우짤 기요? 성님도 늙었소. 총알 겉은 그
명념은 다 어디 갔소? 자개 한 말을 잊는 거를 보이."
되뇌기가 싫은 모양이다. 강쇠는 걸음을 빨리하며 어둠 속을 살피듯
목을 뽑는다.
"죽을 자기 찾아온 것 같다는 말이 무서운 걸 보니 너도 간덩이는
줄어든 모양이다."
"늙을수록 간덩이는 줄어들게 매련 아니겄소?"
"걱정 말어. 죽을 자리 죽을 자리 하면서 삼십 년 사십 년 이 지나갔다.
어느 산천, 묘소로 보이지 않는 것은 한군데도 없었느니라. 실은 죽을
자리도 시기도 다 잃은 셈인데, 그는 그렇고 임실의 지나는 지금 어떻게
돼 있지?"
"시님이 말심 안 하시던가요?"
"잠시 동안 만나서 말할 새도 없었다."
"교주 노릇을 하고 있소."
"교주?"
"야아."
"...?"
"그놈을 직이야 하는데 직일 수 없게 돼 있는 기라요."
"교주라..."
"백일굔지 청일굔지 흥, 상말로 X 같은 잡신을 내걸어놓고, 머지 않아서
천지개벽이 있일 긴데 살아남을 연놈들은 내게로 오라! 해서 간이 디비진
연놈들이 집 팔고 땅 팔고 딸년꺼지 바치는 미친 지랄이 시작된 기라요.
졸지간이지요. 이삼 년 동안에 신도들을 거머들인 기라요."
"그놈으로서는 최상으로 궁릴 잘했구먼."
"무신 소리 하는 기요? 남의 일로 아요?"
강쇠는 화는 낸다.
"흑세무민하기로 그까짓, 내 백성을 원수에게 넘기는 것보담이야 낫지."
"깜깜한 한밤중이거마는."
"노상 한밤중이지. 소상히 안들 그게 머 대수겠나."
"속 편한 소리 그만 하소! 꾹꾹 누르고 참아온 기이."
"백보 오십보야. 본시부터 싸우느냐 교세 확장이냐, 그래서 갈래가 난 것
아니었나. 그자가 잡신이든 뭐든 윤도 집의 주장을 이어받은 셈이군."
별안간 환이는 자신의 뺨을 찰싹 친다. 풀모기를 때린 것 같다. 강쇠는
한동안 말없이 걷는다. 환이가 돌아왔다 하여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란
기대를 할 수 없다. 지삼만의 일로 열올리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놈을 쳐죽일 라고 별의별 계책을 다 꾸밌지마는 다 허사였소. 그놈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제요. 옥황상제겉이 깊숙한 고에 틀어박히서
신도들한테 목소리만 들리준다 카이, 미칠 지경이지요."
"..."
"그놈이 흉악한 교주 노릇을 시작하믄서부터 우리 사람들을 재물로
꼬시내고 그것으로도 안 될 적에는 뽄배기로 찔러 넣고, 간악한 수단은 다
써 묵은 기라요. 그놈이 내막으로 왜놈하고 손잡았다는 소문이 빈말은
아닐 기구 마는."
"그렇다면 넌 어떻게 된 건가?"
"그놈이 웃따까리만 남긴 기지요. 성님이 있었다믄 방법이 달랐일기고
사정도 달랐겄지요. 그놈은 성님이 못 돌아오거나 죽은 줄 알고 있일 기요.
약은 놈!"
겉으론 태연하게, 담담하게 얘기하는 척했으나 지삼만의 악랄한 수법과
그의 의도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못하는 것은 전달에 적합한 어휘가
부족한 탓도 있겠으나 내심 굉장히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분과
실망도 있었다. 울분은 보람이 없다는 생각에서, 실망은 환에 대한 것이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강쇠는 지렛대가 빠져버린 것 같은 환이를 느꼈다.
"나 그렇잖애도 성님보고 따질라 했구마요. 이곳 형편이야 며칠만 더
기시믄 알게 될 기지마는, 대관절 앞으로 우짤 심산이요?"
바싹 다가서듯, 던지는 말이다. 그러나 환이는 그 말 대꾸는 하지 않고
"좀 앉았다 갈까?"
하자 환이보다 강쇠가 먼저 주저앉는다. 환이는 천천히 엉덩이를 내린다.
길켠의 버드나무가 선들선들 움직였다. 열기가 남아 있는 어두운 땅과
수풀에 강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은 물결같이 오고 또 온다.
"강쇠야"
대답 대신 한숨만 내쉰다.
"몇 년을 소식 없이 뭘 했느냐, 물어볼 만도 한데... 왜 묻질 않는가
모르겠어."
두 팔로 허벅지를 꽉 껴안듯이 그리고 어두운 땅바닥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더니
"묻는다고 대답하는 성미 건데요?"
"..."
"자개가 하고 저버야 얘기를 하니께, 물으나마나, 설마 왜놈들으밀
정이야 했겄소."
"그보다 더한 짓을 했는지 모를 일이지."
강쇠는 들은척만척, 허벅지를 양팔로 껴안은 채 발바닥으로 땅을 몇 번
구른다.
"가입시다."
팔을 풀고 일어섰다. 화개까지 온 두 사내는 어느 편이랄 것도 없이
불빛이 새나오는 주막 앞으로 다가섰다. 강쇠가 먼저 들어섰다.
"비연이 없나?"
대답 대신 불이 꺼져버린다.
"비연아!"
대답이 없다.
"이런 떡을 칠 놈으 행사를 봤나? 정 이럴 기가? 기둥뿌리 뽑기 전에 불
못 키겄나?"
"밤늦기 누고?"
겨우 졸려 죽겠다는 시늉의 늘어져빠진 여자 목소리가 술청 뒤켠
방안에서 들려왔다.
"밤늦기? 초지녁부터 무신 지랄 하노."
"새는 날에 오소. 잘라 카는데 술은 무신."
환이는 마당에서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모서리에서 술 팔아묵고 살 작정이믄 속곳 걸치고 나오는 기다.
소나아만 밝히가지고 아가리에 밥 들어 가겄나."
강쇠는 술청에 올라가 앉는다. 방안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소곤거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이윽고 등잔을 켜든 삼십을 넘은 여자가
나왔다. 사내는 뒷방 문을 빠져나가는 기색이다. 그러나 뒤란을 돌아
나오려던 사내는 뒷벽에 쌓아 올려놓은 솔가지에 얼른 몸을 감춘다.
술청에서 새나오는 불빛을 받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는 환이를 본
것이다. 방에서도 강쇠 음성을 알아차리고서 여자를 내보냈고 뒷방 문으로
빠져나온 눈치다.
"오밤중에 이기이 무슨 짓이요? 술장수는 당신네들 종이요?"
쨍쨍 울리는 여자 목소리.
"넘찐 소리 마라. 부애 돋구믄 대가리를 깨부릴 긴께. 사당년이 주모로
출세했이믄 옛날 행사는 버리는 기이 우떻노? 더러바서 술 마시겄나."
"더러분 술 안 마시믄 될 거 아니요!"
"그라믄 주막 뜯어 개라. 다른 사람이나 해묵고 살게."
"누구 맘대로, 이녁이 내 서방이요?"
"별탈 없이 오늘밤을 지낼라 카거든 술상이나 잘 채리 내. 시끌 버끌한
참에 성미 나오믄, 알겄나? 성님, 안 들어오고 머하요?"
환이 술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내는 슬그머니 주막을 빠져 나간다.
주모 비연은 환이 기색을 슬쩍 살피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서 오소."
하고 눈웃음을 친다.
"이년이 또 꼬리를 치네. 제 버릇 개 못 준다 카더니."
여자는 강쇠의 사팔뜨기 눈을 노려본다.
"말말이 이년 저년, 입정 고약한 사내 구마."
"그렇기 나오이 제법 머엇 겉다. 니 이모가 이 주막을 했일 적에는
임석이 깨반하고 오밤중이라도 나그네가 들믄 군담 없이 술상 밥상 다
채리 냈고 행신이 조신스러바서 어는 누구도 넘보거나 업신여기진 않았다.
이모 죽은 덕분에 이만한 집칸이라도 물리 받아서 사당패 생활을 걷었이믄
죽은 이모 반몫은 해얄 거 아니가. 이놈저놈 집적이는 대로, 그래서는
못쓰지. 이거 다 죽은 니 이모하고의 정리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니 새겨서
들어라."
강쇠는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고개를 돌리며 입을 비쭉거린다.
이렇게 해서 밤을 새가며 환이과 강쇠가 술타령을 하고 있을 때 주막에서
빠져나온 사내는 남원을 향해 줄달음을 치고 있었다. 동이 훤하게 틀 무렵
남원에서도 훨씬 더 깊숙하게 들어간 곳, 그러니까 지삼만이 창설한
청일교의 소위 교당까지 사내는 왔다. 똥짤막한 키에, 팔이 길어서 마치
원숭이만 같은 사내는 꽤 건각이다. 피로한 기색도 없이 교당의 뜰 안을
이리저리 살핀다. 누각도 비각도 아닌, 묘하게 생긴 건물이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홍살문이 중앙에 있고 벽면에는 (삼국지)의 관운장, 장비 따위의
요란스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행랑 같은 건물이
즐비하게 서 있고 그와 마주본 곳, 그러니까 큰 건물에 가려진 곳에
돌담을 친 꽤 큰 기와집이 있었다. 모두 나무 냄새가 날 만큼, 신축한 지
얼마 안 되는 집들이다. 그림자라곤 없다. 벽면의 요란한 그림 탓인지,
관례를 깨뜨리고 건물 중앙에다 갖다 붙인 홍살문 탓인지 요괴스런
분위기가 감도는 청일교의 본거지. 도대체 지삼만은 이 삼사 년 동안
어떻게 해서 이만한 기틀을 이룩하였는가. 아무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 그것도 막연한 추측인데 전주의 어느 부자가 막대한
비용을 내어 교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며 그것도 신심에서가 아니라 그
부자의 무서운 범죄의 비밀을 지삼만인 알고 있어서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거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환이가 심어놓은 하부조직을
부수기 시작했으며 위협과 감언이설로 포교사로 둔갑시켜 신도들을
포섭하며 지반을 넓혀간 것이다. 그는
배일사상을 적당히 가미하여 직설적이며 조야한 변설로써 인심을
사로잡았고 동학의 교리를 약간씩 변조하여 설법함으로써 심오한 성자
행세를 했다. 그러나 언동으로써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일본이 망할
서이며 그리하여 동방의 새로운 횃불이 조선 땅에서 높이 솟아오를 것인즉
그때 동방을 다스릴 자 누구일 것인가, 하늘로부터 인을 받을 자 누구일
것이가, 지금은 비어 있는 옥좌인데 장차 그곳에 좌정할 어른을 위해 백미
열 섬의 공덕을 쌓으면 그날이 왔을 적에 홍포도사가 될 것이요, 백미 백
섬의 공덕을 쌓으면 청포도사가 될 것이요, 백미 천 섬의 공덕을 쌓으면
황포도사가 될 것이요, 그러나 청일교를 믿지 아니하고 교주를 믿지 않는
자는 그때를 기하여 금수로 환생될 것이며 청일교를 비방하고 교주를
비방하는 자는 생을 다시 받지 못하리라, 대충 그런 골자의 주장이었다.
친일파라든지 뒷구멍으로 일본 경찰과 손을 잡았다는 풍설은 사실
신빙성이 없었고 교당을 지어주었다는 전주의 모 부자가 친일파라는 말이
있었다.
"제에기랄! 모두 끼고 누워서 자알들 한다."
엄지손가락으로 코끝을 튀기며 원숭이 같은 모습의 사내는 행랑같이
기다랗게 칸칸으로 된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셋째칸
툇마루에 한 손을 짚고 방문을 열려는 순간
"거 뉘시오."
"굵은 음성이 뒤통수에서 들려왔다. 사내가 고개를 획 돌린다. 그러고는
얼굴색이 싹 달라진다.
"아아니, 그게 무슨 짓이오!"
머리털이 하얀, 그러나 몸은 장대하고 튼튼해 뵈는 늙은이가 시퍼런
칼을 들고 서 있었다.
"내가 워쩌는디 그러요?"
"이 영감탕구 눈까리가 멀었나? 사람이 눈에 안 보이요!"
"아아 나는 또, 이 칼 땀씨 그런다요? 헤헤헤헤..."
"새벽부터 재수 더럽게시리."
"칼이 사람 쳐다보들 않겄소? 도무지 들지를 않는단 말씨. 혀서 뒤꼍에
나가 도둑눔맨치로 쓰윽쓰윽 가느디."
"아, 아 알았소."
사내는 손을 내젓는다.
"헌디 한서방은 신새벽부터 무슨 일이요?"
"그런 알 것 없고."
열려던 방문을 두드린다.
"오서방! 오서방!"
"아따, 참 시끄럽네. 우떤 놈이 와서 잠도 못 자게 지랄을 하노."
"급한 일인께 오서방이 일어나 나오든지 아니믄 내 들어가네."
"기다리라! 내 나가서 급한 일 아니믄 골통을 깨부릴 긴게."
옷을 주워입는 기색이다.
"아아니, 그놈의 칼은 언제꺼지 들고 거기 서 있을 기요?"
아무래도 칼이 꺼림칙했던지 한서방이라 불리던 사내는 작은 눈을
부릅뜬다.
"헤헤헷..."
늙은이는 한 눈을 찡긋하고 음탕한 웃음을 웃으며 어슬렁어슬렁
걸어간다.
"대관절 무신 일고?"
삼베 고의적삼을 입은 오가가 굵은 맨상투 머리부터 들내고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한가는 잠자코 걷는다. 같은 또래의 사십대 오가는
중키였고 턱밑에 칼자국이 있었다. 투덜거리며 따라간다. 행랑과 마주
보이는 돌담, 일각 대문 앞에까지 온 한가가 걸음을 멈춘다.
"내 지금 화개서 오는 길인데 급히 교주를 좀 만나야겄다."
음성을 낮추며 말한다.
"만나 잔다고 하믄 만날 수 있나? 무신 일인지를 알아야제."
"김환이가 왔다."
"머라꼬?"
"김환이가 왔단 말이다."
"그거 정말가!"
"이 눈으로 똑똑히 봤다. 안 봤다믄 미쳤다고 밤길을 걸어왔이까?"
오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오가는 지삼만의 심복이었고 한가는
강쇠의 수하로서 등을 돌린 인물이며 환의 얼굴 정도는 아는 처지였다.
그러니까 한가가 밤을 새워가며 남원까지 달려온 것은 지삼만에 대한
충성심보다 환이에 대한 공포의식과 자기 보신을 위한 본능이 더 강했을
것이다. 한가하고 사정은 다르지만 김환에 대한 공포심은 오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마주본다. 인가도 없는 주변의 숲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괜히 으스스하다.
"죽었는 줄 알았는데... 하여간에 물구신 겉은 사램이다."
"앞으로 우떻기 나오까?"
"모르지."
"무사할 수는 없일 기라."
"하기야 머 이제는 수족이 있이야제, 도술을 쓴대도,"
"이러고 있일 기이 아니라 교주."
하는데 일각 대문, 그 안에서 빗장 빼는 소리가 들렀다. 육십 가까운
안늙은이가 저자 바구니를 들고 나온다.
"여기서 워째 이러고들 있는 기여?"
"예, 저기."
두 사내가 굽신거린다. 지삼만한테 딸을 바친 신도, 그러니까 장모격인데
교주의 조반상을 위해 아침장을 보러 가는 길이다.
"워째 말을 못혀? 무슨 일이 생깄는감?"
위세가 당당하다. 눈꺼풀이 아래로 처져서 사납게 생기기도 했고,
"교주님한테 급히 알려야 할 일이 생겨서요."
"그럼 얼쩡거리지들 말고 들어가보랑께요. 아직 주무시는디."
"예. 그러면 다니오시이소."
늙은이가 가버리자 두 사내는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한가는
엄지손가락으로 코끝을 튀기면서 문간에 처지고 오가만 안으로 들어간다.
꽤 오랜 시간 한가는 대문 안뜰을 서성거린다.
'어디 있다가 나타났이까? 맨 먼저 등돌린 우리들한테 칼끝을 돌리는 거
아니까? 제에기랄! 별 수 없는 일이었제. 언제꺼지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었고 줄타기 같은 생활도 젊은 한 시절, 옳고 그른 기이 어디 있더노.
좋아서 지가 놈한테 붙어사는 것도 아니겄고, 순야바우꾼, 지가 무신
교주라고. 아이유! 머가 먼지."
오래 기다리니까 기다리는 것만큼 불안해진다. 밤길을 뛰어올 적에는
빨리 가야지 빨리 가야지, 했을 뿐인데 한가는 오줌 마려운 사람같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다. 오가는 집안으로 들어갔지만 자기는 의붓자식처럼
밖에 서 있어야 하는 차별 대우도 전에 없이 못마땅하다. 그렇다 하여
청일교에서 나오고 들어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인가. 김환의 칼끝과
지삼만의 칼끝이 동시에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은,
'빌어묵을! 머를 하고 있노.'
이때 저만큼 모습을 나타낸 오가는 손짓을 했다.
"우떻게 됐노?"
"오라 하신다. 가자."
"머라 카더노."
"말조심해. 머라 카더노가 멋꼬? 안전에서 그랬다가는 모가지가 날아갈
기다."
"..."
대문 앞에서 한참 돌아나간다. 난간으로 둘러진 쪽마루가 양켠에 있고
복판은 큰 대청인데 신발을 벗고 대청으로 올라서며 오가는 왼편 방을
향해 말했다.
"데리고 왔십니다."
대답 대신 큰기침 소리가 났다. 오가를 따라 한가는 방안으로 들어간다.
지삼만은 웃통을 벗은 채, 여름에 실내용으로 쓰는 평상에 앉아 있었다.
오가는 선 채였고 한가는 이마에 두 손등을 붙이고서 절을 한다. 지삼만이
노려본다. 본시 땅땅하게 되바라진 체격인데 그새 옆으로만 벌어졌는지
주둥이가 좁은 항아리만 같다. 노리끼하고 성긴 수염은 옛날과 같이
초라했다.
"네 눈으로 그자를 똑똑히 보았다 그 말이 틀림없는감?"
"예."
"좀 자세히 말해보더라고."
"예. 지가 하동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화개주막에서 술을 마셨십니다.
그러다 보이 밤이 되고 해서 자고 갈라고,"
하다가 우물쭈물한다.
"계속혀"
"불을 껐는데 술꾼이 찾아왔십니다. 주모가 술을 안 판다고 해도."
"흐흠, 그런께로 제집을 끼고 누웠더라 그 말인디."
씩 웃는다.
"예, 그, 그거야 머 오다가다."
"그럴 수도 있지. 계속혀."
"밤이 늦었으니 새는 날 오라 해도 술상 차리라고 야료를 부리는
기라요. 방에서 듣자니께 강쇠더마요. 그냥 물러갈 것 겉지도 않고 거기서
맞닥뜨리도 골치가 아플 기고해서, 계집더러 나가라 하고 지는 뒷방 문을
열고 빠지나온 깁니다.
"했더니?"
지삼만은 다시 한가를 쏘아본다.
"마당으로 돌아서 나갈라 카는데 김환이 서 있더마요. 똑똑히
보았십니다."
"그자도 니를 보았남?"
"아니요, 보았다믄 여기 왔겄십니까."
"음."
"먼저 술청으로 들어간 강쇠가 성님, 하고 부르니께 김환이가
들어가더마요. 강쇠가 성님, 하고 부를 사램이 어디 또 있겄십니까?"
"성상은 워쩌드냐?"
"옛날 그대로, 밤인께 자세히는 보겄십디까?"
"그놈이 오기는 온 모앵인디. 뭣이냐, 대단헌 일은 아녀. 거 담배."
오가가 얼른 다가가서 긴 담뱃대에 담배를 재어서 내민다. 지삼만이
빨대를 입으로 가져가자 담뱃불을 붙여준다. 두세 모근 빨아서 연기를
뿜어내던 지삼만이 별안간 큰소리를 내어 껄껄껄 웃어젖힌다.
"그놈이 나한케 기어온 다면은 내 그놈을 내 옆에다가 앉힐 아량은
있는디. 하하핫... 으하하핫핫..."
"그렇기 할 사램이 따로 있지 설마 그러겄십니까?"
"뭐 어찌여? 그렇게 헐 사램이 따로 있어?"
너털웃음을 멈추고 눈을 부릅뜬다. 살기가 돈다.
"저기, 저 무신 계책이 이, 있일 성싶어서 지, 지는 걱정이 돼서 마,
말심디린 것입니다."
한가가 목을 움츠리면서도 꾸역꾸역 말을 내뱉는다.
"한심스런 일이여. 새 세상이 와도 네놈은 게우 개돼지나 면허겄어.
허기야 그것만이라도 고마운 일 아니여? 헌 일이 있이야제."
들난 상체, 자신의 굵은 팔뚝을 찰싹찰싹 치며 지삼만은 모멸의 웃음을
머금는다.
"그, 그게 아니고 갬히 교주님을 우떻게 하겄십니까마는, 우리 겉이,
등돌린 처지고 보믄 언제 어디서 앙갚음을 할라 칼지 그, 그기이."
"알 만혀, 이 줄때기 겉은 놈아, 허나 내 날개 밑에 있이니 워쩔것이여,
걱정 말어, 걱정 말더라고, 날고 기어도 이제는 별 재간 없일 거여.
들판에다 세우놓은 허세비란 말씨. 참새가 낯짝을 쪼아먹는다 혀도
꼼짝없이 당할 긴께로. 흥, 가만히 내버려두면은 말라서 죽을 것이여. 암,
암 그렇제. 재 그놈을 없이헐 맴을 가졌다면은 벌써 옛날 옛적에 그랬을
거여. 불쌍헌 인생 죽을 자리 찾아서 제 고장으로 왔는디 가만히, 가만히
내비리두더라고. 알았지야. 으흐흣흣 으하핫..."
"그렇기만 말심."
"어허! 모두들 나가서 한상 자알 차려먹고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는 거여.
밤이슬 맞고서 쫓아올 것까지는 없었는디. 자아, 나가더라고, 나가란 말씨."
독기가 빠져버린 듯한 지삼만의 말에 한가는 맥이 풀리는 모양이다.
일어서서 비실비실 뒷걸음질치며
'저러다가 뒤통수 빠개지는 거 아니까? 말하는 기이 너무 쉽구마. 그
사램이 우떤 사램이라고? 하룻밤에 몇 백 리를 뛰고, 참말 이제 직일라
캤으믄 그 손에 자개 모가지가 남아 있일 성싶든가?'
"헌디 이보더라고."
"예, 옛!"
"놀라기는 워찌 놀란다냐?"
"..."
"거 주모라는 제집 말여."
"예."
"자네허고 전부텀 잘 아는 사인감."
"아닙니다."
"나제가 누군지는 알겄제?"
"모릴 깁니다. 통성명도 안 했고 그새 그곳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인께요. 옛날 주모 아니더마요."
"그려? 그것은 잘된 일이여. 만일에 자네가 방에서 나간 것을
알았다면은 그자들, 살려놓으려 허지를 않았일 것이고, 왜 그런고 허니,
배신혔다는 그런 사감은 별거 아닌디 숨어 다니는 몸이고 보니 발설이
무서울 것이여. 호옥 또 관가에 찔러넣길도 헌다면은? 입을 없이 혀얄 것
아니더라고?"
살살 만지면서 독침을 찌르는 것이다.
"허니  내 이르는디 그놈 만낸 이야그를 아무보고도 발설 혀서는 안될
것이여. 그것이 보신책이라는 거여. 그것만 명념헌다면은 걱정할 것
없인께로. 잘 알아들었지라?"
"하, 하지마는 무신 계책을 꾸미고서 왔다믄 앉아 당할 수만 없지
않겄십니까."
"허허어. 네놈만 못헌 사람이 우리 청일교에 있다 그말이여? 잔소리가
많아 못쓰겄단께. 쇳바닥 더 이상 놀리지들 말고 일들이나 열심히
허더라고. 어여 나가아."
"이제 나가지."
말 한마디 없이 있던 오가가 한가의 팔을 잡아끈다.
두 사내가 나간 뒤, 지삼만은 대청을 질러서 맞은편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딸 뻘이나 돼 보이는 젊은 여자가 웅크리고 앉았다가 일어선다.
"한잠 더 잘 것인디 워찌 자리를 걷었단가?"
"저, 월궁형님."
"거 찢어 죽일 것이 아직도 새를 보는 거여?"
"..."
"그러면은 어쩐다아? 임가가 안 가고 있던가?"
"예."
"그럼 좀 불러오라 허게."
한참 후 옛날의 보부상 임가가 나타났다. 머리칼이 더러 희끗거렸고
주름살도 생긴 얼굴이다. 눈 가장자리며 입술은 여전히 푸르스름했다.
옛날보다 훨씬 더 음흉해 보인다. 그는 현재 지삼만의 왼팔 노릇을 하고
있었다. 지삼만도 이자에게는 함부로 대하질 않았다.
"무슨 일로 아침부터."
"긴 이약은 두었다 허고 임서방."
"예, 말씸허시시오."
"김환이가 왔다네."
"김환이가 와요?"
임가는 그리 놀라지는 않는다. 지삼만은 한가한테 들은 얘기를 대충
들러준다. 그러고 나서
"서둘러야 하네. 서둘러야 할 까닭을 말헌달 것 겉으면 두 가진디,
우리는 왜놈한테 대항하는 단체로 알고 있으며 또 장차 신도가 수십만을
넘을 시, 왜놈을 치고 나갈 것인께 김환이를 찔러 넣었다는 이야그를
알어서는 안 될 것이여. 그러고 다음 그놈이 우리가 찌를 것을 눈치챈달
것 겉으면은 우리를 끌어들일지도 모를 일 아니겄소?"
"그러자면은 제놈 편도 쑥밭 되는 거 아니겄소?"
"그렇다고 장담은 못혀. 그러니 서둘러야 의심을 덜 받는다 그 말
이여라. 두 놈헌테는 발설 못하도록 입을 꼭 막아놨인께."
"서두는 거야 어렵잖은 일 아니겄소?"
"그러고 또 한 가지 명념헐 일이 있는디 반드시 우리가 밀고를 혀야
한다, 워째 그러냐 헐 것 겉으믄 저리 돌아댕기다가 다른 연줄로 김환이가
붙잡히게 되는 날, 그때 우리까지 주렁주렁 매달리어 나온다믄 그냥 가는
거여. 경찰에다 우리가 고한 것을 명백히 해둘 필요가 있단 말씨. 그것이
최악의 경우 우리 보신책이 될 것이여. 내 말 뜻 알 만혀?"
"알겄소"
지삼만은 씩 웃는다.

14장 자살
복동네 집이 바라보이는 타작마당에 마을 아낙들이 모여들어 수군거리고
있었다. 고추잠자리가 해진 줄도 모르고 제비와 경주라도 하듯 땅을
거슬러오르며 날고 있었다.
"그 동안 동네가 잠잠하더마는 궂인 일이 생기고 시끄러버서 온,"
"해필이며 최참판댁 제삿날 밤에 죽노 말이다."
"실데없는 소리 마라. 우짜다가 그리 됐겄지."
"우짜다가가 그리 되다니? 양잿물 마시고 지 목심을 지가 끊었느데
우짜다가 그리 돼?"
"지랄 겉다. 누가 죽은 것을 두고 한 말가. 죽은 날을 가지고 말을
맨들라 카이 그런 기지."
"아따, 충신 났고나. 그라믄 땅마지기 얻어걸릴까바서?"
"참 네,그래서 땅마지기 얻을 것 겉으면 밤새도록 경문 읽듯 하겠다."
"시끄럽다, 이 사람들아. 넉들은 살아 있인께 신둥건둥 남의 일갈제?
그러는 기이 앙이다. 내사 마 불쌍해서 가심이 아프다. 세상에 설네, 설네
해도 과부 설움보다 더한 거는 없일 기다."
야무네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연신 눈물을 찍어내며 나무라듯
말했다.
"와 아니라요."
"말로는 그래도 알기는 어디로 알아. 너거들은 모리네라. 당해본사램이
아니믄 모리고말고."
"야, 당해본 사램이 아니믄 모리지요."
왜현병한테 총맞아 죽은 마당쇠의 댁네가 혼잣말같이 뇌었다.
"나는 사십질에 과부가 됐다마는, 굽이굽이 그 설운 애기를 우찌다 할
기든고? 제집이 어디 사람가. 남자 한마디믄 될 일이라도 제집은 열
마디로도 안 되는 세상 매사가 다 그렇제. 아이 배태 한분 못해보고
청상과부로 곱사시 늙은 북동네, 한을 풀기는커녕 애참하게 죽었으니,"
"그러기 말입니다."
"실성한 시아부지 모시고 근근하게 살다가 복동네 거상을 혼자서 치르고
양자를 얻어서 장개까지 들여 대도 있어고, 어이구, 그 무서리나는 길쌈,
며누리 손에 밥 얻어묵고 이자는 편할 긴데."
"며누리 봤다고 어디 편합디까."
눈알이 새까만 불들이댁네가 입술을 삐쭉거린다.
"다 늙어서, 가리늦기 세상에 그런 벼락맞일 누명이 어디 있겠노."
"구설수가 있으믄 할 수 없는 기라요."
"깔끔코 엄전하든 그 여편네가 하필이믄 그런 누명을 쓰고 그렇게 죽을
줄은 참말이제,"
야무네는 자기 설움도 곁들여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다.
"구설수 따문에 죽었이까요? 내 낳은 자식도 멋한데 남의 자식,
며누리가 시어미를 대수로 여깄겄소?"
분들이댁네는 묘하게 북동네의 사인을 며느리 쪽으로 몰고 가려 한다.
"그러씨, 이 일 저 일 다 겹쳐서 살기가 싫은께 갔겄지."
고부간의 불화가 전혀 근거 없는 일은 아니었던지 야무네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노소간의 죽음에 무신 사정이 있일까마는 한참 살 긴데, 지가 지를
직이다니 애참타."
야무네는 악센 삼베 치마를 끌어당겨 눈물을 닦고 일어선다.
"이러고들 서 있이믄, 나는 갈란다."
다른 아낙들은 우두커니 서 있었고 마당쇠댁네만 야무네랑 함께
타작마당을 떠난다. 강 건너 산허리는 어느덧 검게 하늘과 강물에 선을
긋고, 노을이 꼬리를 감춘 하늘과 강물은 흰빛으로 퇴색돼가고 있었다.
"말인 났으니,"
야무네 옆을 우죽우죽 따라오던 마당쇠댁네가 말을 꺼내었다. 경우없는
욕심꾸러기이며 억지를 썼다 하면 당할 사람이 없었던 마당쇠와는 달리
차분하고 말이 적은 마당쇠댁네는 뭔가 애기를 하지 않으면 못 배기겠는
그런 표정이다. 그는 과부가 되면서부터 복동네와 무척 가까이 지낸
사이였다. 깔끔하고 부지런하고 선량한 사람됨이 비슷했다. 그는
야무네처럼 눈물을 짜지는 않았으나 복동네의 자살로 충격은 더 받은 것
같았다.
"이 애기를 안 하믄은 죽은 북동어매가 나를 원망할 것 같고 해서..."
야무네는 비로소 마당쇠댁네가 따라온 까닭을 알아차린다.
"그렇지만 애기를 하고 보믄 그 뒷감당을 내가 우찌 하꼬 싶어서,"
"내사 말해서 안 될 일이믄 입을 봉할 기다마는 무신 일인지 몰라도
말은 함부로 할 거는 아니제."
"너무 억울해서,"
"..."
"살았일 직에 참으라꼬 말린 것도 한이 되고,"
"그라믄 복동네 죽음이 미심쩍다 그 말이가?"
"그거는 아입니다. 실은 야무어매도 알 깁니다마는, 이상한 그 소문
말입니다."
"그거사 말로 안 되는 일이다. 이십 연도 더 되는 옛날 일, 말 같지도
않다. 어느 연놈의 주동이가 그런 말을 했는고."
소문이란 이십여 년 전, 최참판댁의 종 삼수가 최참판댁 살림을
송두리째 가로채어 평사리에 들앉은 조준구에게 빌붙어서 제법 마을
작인들에게 호령하던 시절, 과부 북동네한테 쌀마씩이나, 져다주고서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는데, 북동네의 인품을 아는 마을
사람들은 출처 모르는 그 말을 쉬쉬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문은 북동네가
없는 자리에선 괘 화젯거리가 된 것도 사실이다. 곧이듣건 곧이듣지 않건
사람이란 항상 남의 일에 대해선 무책임하게 마련이다.
"지도 처음 그 말을 들었일 적에 혼자 사는 것도 서러운데 별 더러운
소리를 다 듣는다 싶었습니다. 그런 소문이 있는 것도 모리고 북동네는
요새  와 나를 만내믄 모두 이상한 눈으로 보는지 모리겄다고 푸념을 할
적마다딱해서 겐딜 수가 없데요. 북동네는 며누리하고 가끔 다투는 일
땜에 그러는가 그리 생각는 눈치였십니다. 그랬는데 어느 날 새파랗게
돼서 찾아왔더마요. 그때 죽는다는 말을 합디다. 그러나 이 애먼 때는 벗고
죽어야 안 하겠느냐고 울더마요. 그러잖애도 내놓은 그자식이 아니라서
아무리 공이 들어도 며누리가 시어미를 대수로 안 여기는데, 하믄서 설게
울더마요. 참으라고 달랬지요. 남이사 머라 카거나 말거나 나만 청백
겉으믄 고만 아니냐고, 그랬는데 북동네는 그 소문의 출처를 종구고 댕긴
모양이라요. 소문을 맨든 사램이 누군지 아요?"
"원수진 사람도 없일 긴데 그러씨,"
"봉기 그 늘근이 아니겄소"
"머라꼬?"
"그래서 북동네는 봉기 그 늙은이를 찾아갔는데,"
"그 늙은 것이 미쳤던갑다."
"말도 마이소. 말을 캐로 간 북동네는 말을 캐지는커녕 세상에 그럴 수
없는 수모를 당했지 멉니까? 누한테 그런 애기를 들었으면 그런 짓 한
것을 어느 눈구멍이 보았느냐고 한께 그 늙은이 말이 삼수, 예, 삼수라
카데요. 그 삼수한테 들었다믄서 도리어 입에 못 담을 욕을 한 기라요"
"저런 세상에,"
"어째서 그런 말을 하믄서 북동네를 퍼부었는가 하믄 그 와 시집간 큰딸
안 있습니까?"
"두리 말가?"
"야. 그 딸을 삼수라는 최참판댁 종놈이 수수밭으로 끌고 가서 욕을
보있다, 그 말을 복동네가 했다는 겁니다.,"
"그, 그렇다믄 우리가 시집가기 전의 일이구마. 생각이 난다. 삼수
그놈이 보고 침을 흘리믄서 댕기든 일이. 그래서,"
"이년아, 쌀 몇 말에 니가 붙어묵고서 천금 겉은 내 자식한테 덤턱을
씌우느냐 하고 칠 듯이 덤비더랍니다. 반쯤 죽게 돼서 집으로
기어왔더마요. 기가 넘고 입술이 말라붙어서 처음에는 말도 못하데요.
삼수한테 들었다는 말 때문에, 내가 황천에 가서 그 일을 밝히겠나,
방바닥을 치믄서, 그라고 수수밭에서 욕밨다는 말 역시 듣도보도
못한일이라,"
"그런께 알 만하다. 봉기 그 늙은거이 능히 그랬을 기다. 제 자식
일이라믄 무신 짓이라도 할 사람이제. 그래 지 딸의 말이 걸려 있어서
그런 소동을 감쪽같이 덮었구나. 그런데 복동네도 모리는 일이 우째서
일이 그쯤됐일꼬?"
"알고 보이 북동네 며누리한테서 말이 났던 모양입니다. 그 아아성이,
말은 그 아아 성 입에서 났는데, 뭐 삼수한테 들었다 카든지봉기 늙은이
딸아아한테 들었다 카든지,"
"자식 낳고 사는데 그것도 보통일은 아니다."
"그래 그 말이 그 늙은이 귀에 들어가서 며누리가 닦달은 당했는데 지
성한테 들었다는 애기는 쑥 빼고 시어머니한테 뒤집어씌운 기라요."
"나쁜 년! 그러이 늙은 것이 죄 없는 북동네를 잡았구마. 지 딸 말막음도
하고 원하도 풀고, 세상에 아무리 제 자식이 귀하기로 몹쓸짓을 했제.
그러기 옛말에 사람 무서분 거는 범보다 더하다 안 하더나."
"그러니 며누리하고 봉기 늙은이가 사람 하나 직인 거지요."
"음, 그보다도 이십 년 넘기 옛말에 죽은 놈이 산 사람을 직인기다.
생전에도 숭악한 놈이더니 삼수 그놈이 화근이었제. 세상 무서버서
이래가지고는 어디 살겄나? 그렇지마는 이대로 있일 수는 없다. 너나 내가
안 기이 붙찰이제. 안 이상 복동네 애먼 때는 벗겨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자면 우리가 안 당하겄소?"
"말깨나 하는 남정네들이 설동해서, 빌어묵을 여핀네, 죽기는 와죽노.
살아서 흑백을 가릴 일이지."
두 아낙은 자신들도 모르게 마을길에 멈추어선 채 애기를 하고 있었다.
"그 일도 그 일이고 복동네는 낳지만 않았다 뿐이지 그래도 공이 든
복동이라 어미가 당한 수모, 분풀이를 해줄 줄 알았는데 며누리가 수수밭
애기를 뒤집어씌운 것은 제쳐놓고 그 늙은이 한 말이 사실이 아닌가
의심을 했다는 깁니다. 며누리가 역시나 그 말을 믿고, 그것이 더 서럽고
억울했던 모앵이라요. 남의 자식 소용없다,내가 헛살았고, 신령이 어디
있노, 이 세상에 믿을 것 하나 없다, 몇 분씩이나 그런 말을 하더니만
기어,"
길섶 풀밭에서 풀벌레가 몹시 울어쌌는다. 마당쇠댁네는 숫제 길 바닥에
주저앉아버린다. 논둑길을 아이들이 소를 몰고 돌아간다. 방울 소리, 또
개구리 울음, 후텁지근한 강바람, 길바가에 주질러앉은 마당쇠댁네가
흐느껴 운다.
"남의 일 겉지가 않소. 임자가 있었다믄 갱히 누가 그런 말을 했겄소.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위해서 그리 애발스럽기 살고 나부대었는고.
참말이제 남의 일 겉지 않소. 으흐흣흣... 혼자 사는 것도 뼈가 저리게
설운데, 이놈의 세상, 머릿기름 한분 바릴라 캐도 남의 눈치 보고, 옷 한분
갈아입을라 캐도 남의 눈치 보고,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믄 또오, 남정네들
보믄 마주칠까 길을 돌아가고, 이것저것 귀찮아서 남을 기하고 살믄
신들맀다 카고, 말도 많고, 어이구 과부 팔자, 직일 놈 살릴 놈 해도 가장
겉은 그늘이 또 어디 있겠소,"
"와 아니라. 벽을 지고 있어도, 그러이 악처보다 효자가 못하다는 말이
안 있나.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진 기라."
"우짜다가 이웃이라고 안쓰러워하믄 남의 남정네기 따문에 고마우믄서도
모린 척하고, 마구잡이로 나오믄은 임자 없는 하시려니, 안 그렇십디까,
야무어매,"
"마찬가지다. 늙으나 젊으나,"
"여자끼리는 우떻고요? 같은 여자믄서, 아이고 시장스러바라. 제임자
누가  뺏아가까봐서, 손이야 발이야 빌어도 어림없는 것을 두고, 그럴 때는
오장이 틀어져서 속앓이를 한다 카이. 덮어놓고 흘뜯고 몹쓸년을
맨들어놔야 맴이 놓이는가. 누가 우쨌기에, 가만히 있는 사람을,"
마당쇠댁네는 울분이 한꺼번에 터진 것 같다. 쌓이고 쌓인, 참고견딘
분통의 둑이 터진 것 같다. 조신하고 말수 적었던 여자가 미친 듯이
지껄여대는 것이다.
"엎어진 놈은 발로 걷어차고 그런 인심 아니더믄 복동네가 죽었겄소?"
"죽자사자 길쌈을 해서 봄이믄 절 많이 베를 냈제. 그래서 시기도
받았네라."
"야무어매."
"와."
"생각해본께 그냥 있일 수 없는 일이요."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놈의 늙은것한테 무신 봉변을 당해도 좋소. 나 나설라요. 사람이
죽었는데,"
마당쇠댁네는 성난 닭처럼 푸르륵 일어섰다.
"며누리년부터 족쳐야, 아무리 세상이 옛날 겉지 않다 캐도 이런일은
동네서 판결을 내야,그래야만 앞으로 그런 일이 없지."
"맞십니다."
"우리 둘이, 그러니께 과부끼리 설친다 해도 멋하니, 내사 다 늙어무신
소리를 들어도 좋다마는, 우짤꼬? 무신 방도가 없일까? 옳지, 훈장댁으로
가자. 산청댁한테 가서 의논을 한 뒤 남정네들을 설동해서,"
"야, 그기이 좋겄소. 가입시다."
두 아낙은 선걸음에 김훈장댁으로 달려간다, 가면서 야무네는 숨찬
목소리로
"이럴 적에 두만네 성님이 있었이믄 얼매나 좋겄노. 니사 잘 모릴
기다마는,"
김훈장댁에 갔을 때 마침 한경이는 읍내에 가고 없었으면 한경이댁네
산청댁은 마루에 나앉아서 풀먹인 삼베 고의적삼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서 오게. 둘이서 웬일인가."
"의논할 일이 좀 있어서, 남의 일이라고 물리치지 마시고 들어주시이소."
야무네는 깍듯하게 말을 꺼낸다.
"어째 그러니 가슴이 설렁하네?"
산청댁이 웃는다.
"다름이 아니라 죽은 복동네 일입니다."
"나도 그 애기는 들었네. 양잿물을 마셨다 하던데 그게 정말인가?"
"지 목심을 지가 끊었지요."
하고 나서 야무네는 대강의 사정을 설명하고 모자라는 점은 마당쇠댁네가
보충한다.
"기가 막혀서,"
"이러고도 그만 있겄십니까?"
"안 되지."
산청댁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래 우떻게 하믄 좋겄십니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우리 셋이 간다면 무슨 행패를 부릴지 모르겠고 봉기 늙은이를 누를
만한 남자 두 사람하고 가는 게 좋겠구먼.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마을 사람들 앞에서 복동네 누면은 벗게 해야지."
"그라믄 누구를?"
"내 생각 같아서는 우리 바깥사돈하고, 얘길 들으니 그 집에 선생하는
석이가 와 있다 하든데,"
"장서방은 우떻십니까? 장서방 앞에서는 그 늙은것도 꼼짝 못하지요."
"최참판댁 마름 말인가?"
"예."
"그 사람은 아무래도, 타곳 사람이니께,"
"그렇긴 합니다."
산청댁은 굉장히 분개한 것 같았다. 체통 문제도 한번쯤 생각해
봄직한데 그는 머리를 매만지고 나서 앞장서 나간다. 늙은 과부, 중 늙은
과부, 두 아낙은 백만 원병을 얻은 듯 의기양양해서 따라나 간다.
"아니, 사부인께서 우짠 일이십니까."
초상집에 다녀와서, 그렇잖아도 석이하고 함께 얘기를 하고 있던 용이
몸을 일으키며 정중하게 인사한다.
"숙모님이 무슨 일이십니까?"
부엌에서 뒷설거지를 하던 보연이 앞치마로 손을 닦으며 나온다.
이웃간이어서 자주 내왕이 있었으나 왔다가도 용이 있는 기척이면
돌아서곤 했던 산청댁이었기에 보연은 좀 의아해한다.
"오늘은 자네 시아부님한테 청이 있어서 왔네."
"예?"
"할머니!"
뒤뜰에서 놀던 용이 손녀가 뛰어온다.
"오냐, 밥 먹었냐?"
"예, 할머니."
"애비 언제 오니? 손을 얹는다.
"옳지, 애비 곧 오겠구나."
산청댁은 아이를 안아올려 볼에다 입을 맞춘다. 임이제가 죽은뒤 홍이는
평사리 용이 있는 곳으로 솔가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돈 좀
벌어야겠다면서 일본으로 들어간 것이다.
"올라오시지요."
마루에 앉아 있던 석이 물러나 앉으며 말했다.
"무신 일입니까?"
야무네와 마당쇠댁네는 산청댁을 대접하여 말문을 먼저 열지 않는다.
산청댁은 아이를 내려놓고 마루 끝에 걸터앉으며 간략하게, 그러나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찾아오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용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듣고 석이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잖아도, 그 이상한 소문이 어디서 나왔는가, 뜻밖의 삼수 얘기는 왜
나왔는가,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냥 있일 수 없는 일 아니겄소."
야무네가 섣둘듯 말했다.
"조져야지요."
석이 내뱉었다.
"삼일장이믄 내일이 출상인데, 시체가 나가기 전에 밝히야 할 깁니다."
야무네가 또다시 말했다.
"아제씨,"
석이가 말했다.
"제가 가지요 아제씨는 계십시오."
"그 늙은놈 성질이나 알고 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할 것도 없고 하여간에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복하게 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나 그기이 쉬울까?"
"어림없다. 석이 니는 그 늙은것을 몰라서 그렇다. 우리 다섯 사람이
가도 당적하기 심들 긴데,"
야무네 말이다.
"안 될 적에는 다시 여러 사람이 가더라도 지가 한번 부딪쳐보지요. 다
늙은 사람을 동네서 내쫒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
"언성 안 높이고 조용하게 해보다가, 오히려 그 현을 원할지도 모르지요.
시집가서 사는 딸을 생각해서라도 많은 사람이 가고 시끄럽게 떠들게
되면은 도리어 궁한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격이 되겠지요. 또 한편 말없이
살고 있는 한 여자, 신세 망치게 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저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한번 시험삼아서, 부인네들이 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말을 듣고 보이 그 말도 옳은데, 우떻십니까?"
용이 여자들한테 동의를 구한다.
"그렇게들 하는 게 좋겠소."
산청댁이 동의하고 야무네도
"여자들이 아무리 해도, 남자들겉이 생각이 안 깊으다. 쇠뿔은 단김에
빼더라고 그라믄 색히 가봐라."
"네."
석이는 부채를 놔두고 일어섰다. 가면서 석이는 당부한다.
"아무한태도 말씀 마십시오."
"그러지."
석이 울타리 옆을 지나가는데,
"아무래도 배운 사람은 다르요. 석이네는 고생하고 산 보램이 있어서
좋겄소."
석이는 쑥스레 웃는다. 상갓집의 초롱이 보인다. 하늘에는 은하가
뚜렷하게 흐르고 있었다. 석이는 비극적인 복동네 죽음을 묘하게 희극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봉기에 대한 증오감조차 묘하게 절실치가 않았고, 사람의
사는 모습들이 모두 광대만 같다. 무궁한 곳에 무궁한 은하가 흐르는데-
석이는 봉순이 문제를 아직 꺼내놓지 못하는 자신의 감정을 다시
되씹어본다. 서울서 함께 내려온 김환의 모습도 눈앞을 지나간다.
형평운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청년들과 부단히
접촉하고 있는 관수의 근황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김환이 돌아왔기 때문에
관수의 현위치를 검토해보는 것이지도 모른다. 늙어서, 아주 늙어버렸기
때문에 기대할 수 없는 혜관의 모습도 눈앞을 지나간다.
'평양에서 기화를 만났네. 폐인이 됐더군. 아편쟁이가 됐더란 말이야.'
서울서 우연히 만난 서의돈의 말이었다.
'황태수한테 부탁해볼까 싶었으나 돈만 가지고 될 일인가? 누군가가
아이는 거주어주어야 하는데, 자네가 주선 좀 해보게. 최부자댁에다가.'
봉기 집 앞에까지 왔다. 집안이 괴괴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계십니까?"
대답이 없다. 아주까리잎만 바람에 너울너울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무신 일로 왔노."
풀이 죽은 봉기의 목소리다. 소리나는 곳을 보니 아주까리나무 밑에
불도 꺼진 곰방대를 물고 봉기는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복동네의 죽음
때문에 떨고 있었던 것 같다.
"저녁 잡수셨습니까?"
"저녁? 응, 저녁 묵었지. 무슨 일고?"
불안해하는 음성이다.
"네, 좀... 두리아버지."
"어?"
두리아버지라는 어세가 강하기는 강했었다.
"두, 두리아버지라꼬?"
"네. 그 두리누님은 시집가 잘살지요?"
"그, 그건 와 묻노!"
"아이들도 몇 되겠지요?"
"뜬금없이 무신 소리고?"
봉기는 곰방대를 뽑아들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저랑 애기 좀 하실까요?"
"무신 얘기! 아무 할말도 없다!"
"저하고 얘기 좀 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내일이면 아주 시끄러워질
테니까요."
"그, 그기, 그기이 나하고 무신 상과고!"
"자아, 그러시지 말고 조용한 곳으로 갑시다."
팔을 잡는다. 봉기는 기겁을 하고 석이 손을 뿌리친다.
"와 이라노!"
"허허어 참, 이러면 안 되는데, 두리아버지, 죽음 복동이어머니보다
두리누님 장래가 더 길다는 생각을 왜 못하십니까?"
"머, 머 머라꼬? 복동이네하고 우, 우리 두리가 무신 상관고!"
하기는 했으나 곰방대를 이 손에 뒤었다 저 손에 쥐었다 하며
안절부절이다.
"복동이어머니가 정말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죽었습니까?"
"그, 그거를 와 나보고 묻노!"
"말이 사람을 죽였지요. 그렇다고 보면 두리누님의 경우도 말로써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대답을 못하고 봉기는 후들후들 떤다.
"두리누님의 소문을 막을 생각이면 내일, 출상 전에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복하십시오."
"자, 자복을, 내가 멋 땜에 자복을 하노!"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근거가 있든 없든 말이란 나고 보믄
복동이어머니처럼, 제가 여기 찾아온 일도 사후 약방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는 날 마을에서 들고일어나면은,"
"드, 들고일어나아?"
"예. 복동이어머니가 왜 양잿물을 마셨는가, 왜 그런 소문이 돌았는가,
그렇게 되면 두리누님 얘기가 나오게 돼 있어요."
"..."
"자아, 갑시다. 시원한 강가에라도 가서 어떻게 하면 두리누님을 다치지
않고 복동어머니의 누명도 벗겨드릴 수 있는지 의논해봅시다. 제가 여기
올 적에는 속속들이 내말을 다 알고 왔을 거 아닙니까. 갑시다."
봉기는 슬며시 따라나섰다. 강가 모래밭에까지 간 석이는 돌연봉기의
등바닥을 내리친다.
"짐승만도 못한 늙은 것 같으니라구, 사람 백정은 유도 아니다!"
"아야! 아이구! 이놈이."
네댓 번을 후려갈긴 뒤
"한 소위를 생각하면 멍석 밑에서 죽어야,"
"날, 날, 살려도고. 그, 그라고 제발 그 불쌍한 것,어이구우, 간을 끄내어
회를 쳐 묵어도 씨원찮을 그놈 삼수놈!"
"그러면 내 시키는 대로 하겠소?"
"하, 하지, 하지러."
"이 말 저 말 할 것 없고 내일 출상할 때 가시오."
"가서?"
"자복하시오."
"어이구 내 가심이야!"
봉기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다가
"자, 자복을 우떻게 하꼬?"
"내가 일러드릴 테니,"
"우, 우떻게?"
"소싯적에,"
"음, 소싯적에,"
"복동네한테 내가 욕심을 내어서 월장한 일이 있었다."
"으, 음,"
"그때 복동네는 식칼을 들고 쫒아나왔다,"
"으,"
"내 꼴을 당한 놈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놈이 삼수라."
"그, 그래서,"
"이십 년이나 지난 일을 가지고 복동네가 야무어매한테 귀띔을 했고
야무네는 또 우리집 할멈한테 귀띔을 했기에 너무 괘씸해서 그런 말을
만들어 퍼뜨렸다."
"..."
"알아들었습니까? 집에 가서 두리어머니하고 말을 맞추어놓으시오. 나는
야무어머니하고 말을 맞추어놓을 테니까요."
"아, 알았네."
"어떻습니까? 두리누님 말은 한마디도 안 나왔지요?"
"그, 간을 끄내어 회를 쳐 묵어도 씨원찮을 놈!"
"양잿물 마시고 죽은 사람도 있소!"
석이는 소리를 바락 질렀다. 그리고 뒤도 보지 않고 모래밭을
걸어나오면서 배를 움켜잡고 웃고 싶은 것을 참는다.
"제에기, 그런 말 들었다고 죽을 건 뭐람."
15장 석이의 청춘
석이는 둑길 쪽으로는 가지 않고 강물을 따라 상류를 향해 곧장 걷는다.
걷다가 돌아본다. 유난스럽게 하얀 모래반을 마치 거미처럼, 게처럼 봉기는
기어가고 있었다.
'저 늙은이, 나한테 등짝 맞은 일은 입 밖에 내지 못할 거라.'
모래밭을 지나서 봉기는 둑을 기어올라간다. 웃음 때문에 배창자를
움켜쥐고  싶었던 충동이 일시에 가신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치민다.
산다는 것이 통곡인 것만 같다. 오뉴월, 커가는 새끼를 먹이려고 야위어진
까치 생각을 한다. 봉기 늙은이도 그 야위어지는 가치 한 마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강물이 휘번덕인다. 밤에도 쉬지않고 흐르는 강, 세월의
눈금도 없이 흘러가고 잇다. 오만하고 냉정한 젊은 여자같이 강물은 혼자
흐르고 있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석이는 야무네와 용이 기다릴 것을 생각했으나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 옛날 아비 정한조가 낚시질하던 낚시터까지, 그곳에
가서 주질러 앉는다.
'흠, 내 어머니는 빨래꾼이어서 다행이든가.'
담배를 붙여문다 석이는 어머니가 혼자 됐을 때 갓서른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세한탄할 새도 없었다. 남의 눈치 살피며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검정 빛 돔방치마에 누덕누덕 기운 흰저고리 하나로 가을, 겨울을
보내면서 먹고 살기에 쫓겼던 시절이었다. 산더미 같은 삯빨래를 이고
와서 개천의 얼음을 깨야 했던 겨울 한철의 어머니 손은 늘 빨갛고
피딱지가 앉았으며 잠자리에 들 때는 들기름을 바르고 버선목을 양손에 낀
채 잠을 잤다. 여름에는 양잿물 내고 빨래 삼고 풀쑤느라고 청솔가지 매운
연기에 눈은 항상 짓물렀었다.
'어머니!'
선생님의 자당이라 하여 학부형들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 지금도
어머니는 그저 부끄럽고 황송하여 얼굴이 벌개지곤 했다. 도망갈
구멍이라도 찾듯이 허등지둥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아범아, 자당이 무신 말고?"
"인자한 어머님, 어머니를 높여서 남이 하는 말입니다."
"아이고, 내사 마, 처머니라는 말도 황감한데,"
면소 서기질만 해도, 경찰서 급사질만 해도, 내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알기나 하느냐, 하기야 경찰서 면소가 다 무서운 곳이기는 하나, 경위없는
짓 경위없는 호령을 일삼는 그런 부모가 하다한데.
"아범아, 단단히 해라이. 님으 귀한 자식들 말아서 가리키는 일이,
그기이 예삿일가? 그저 직심으로 달래감서, 성난다고 야단치기 말고,
그라고 또 니 어릴 적 일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없는 집 자석이 라고
차벨하믄 못씬다."
"엄니도 참,"
아내가 혀를 찼다.
"머가 자랑이라고 지난 일을 자꾸 들먹입니까."
"그, 그러씨."
며느리 말에 어머니는 자라같이 목을 움츠렸다.
"옛날에도 선생이라 카믄 제자는 그 그림자를 안 밟았다 카는데 그리
썰썰맬 것 머 있십니까?"
"무식해서 안 그렇나. 하기사 너거들이 더 잘 알 긴데, 늙으믄 실데없는
걱정이 많아지네라."
아내는 언제나 지난 일에 대해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남의 아목이 있는데, 아들 체면은 안 생각하시는가, 엄니는 지난 애기를
와  자꾸 하시는지 모리겄소,"
"창피해서?"
"그라믄 머, 자랑스런 일이겄소? 빨래꾼이 무슨 벼슬이줄 압니까? 장차
성환이가 알까 무섭십니다."
"알면 어때. 애비도 물꾼이었어!"
"아아니 이분이, 지가 무신 해될 말을 했다고? 공연히 화를 내시네?"
"할머니는 정부인이었다, 자식보고 그런 말 할 수 있는 곳으로 시집갈
거지, 잘못했어. 당신 말이야!"
"억지소리 말아요. 사람 사는 기이, 그러믄 벌거벗고 나가란 말입니까?"
아내는 작은 코를 벌름거렸다.
"나는 어떤 놈같이 그렇게는 안 살아. 병신 같은 놈, 옛날의 종이었음
종이었지 오늘 잘산다고, 그따위로 노니까 가난을 면하고도 천해지는
게지."
누구란 말은 하지 않았으나 석이는 두만의 치지를 들먹이며 화를 내곤
했었다. 그럴 때 아내는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여자 같았다. 아니 그
이상으로 더불어 살 수 없는 절망과 적의까지 느꼈던 것이다. 3.1만세 때
함께 잡혀갔으며 청년운동에 앞장섰고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처남
양필구, 친구요 동요지지만 끝내 뭔가 이질감을 버릴 수 없었는데, 그의
이복 누이동생인 양을례는 오라 비에게 없는 교만과 허식이 있는 여자다.
물질적인 허영이라 할 수 는 없지만 의식적인 허영은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결혼 전에는 몰랐던 상풍이다.
"백정이다, 와! 백정놈이 니 할애비 간을 내묵었나! 와 이라노!"
우뚝 서서 뱃속에서 밀어내던 목소리, 관수의 작은 눈의 살기, 석이는
그럴 때 관수가 좀 안 그랬으면 싶었다. 그러나 처자식을 제등으로 가리고
선 듯이 격렬한 관수의 그 신경질과 아내가 나타내는 신경질적 반응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석이는 아내는 타인같이 느낄 때마다 관수의
위치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이 아니며 진실과
허식에서 온 차이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장차 아내는 아들에게 무엇을
원할 것인가.
"하긴 미꾸라지 용 됐지."
담뱃재를 떨며 석이 중얼거렸다. 밤낚시를 하는지 강 건너편에 불빛이
두셋 깜빡이고 있다.
돈푼 있다 하여 참봉 벼슬을 산 전아무개, 벼슬을 사고도 전서방에서
전참봉으로 호칭되는 데 참 많은 시일이 걸렸었다. 그 사내 생각이 난다.
'고향에 와서, 오래간만에 돌아와서 진주 일은 왜 자꾸 생각는 걸까.'
전참봉 손목의 털토시가 눈앞에 떠오른다. 이 개쌍놈이 눈구멍에 말뚝을
박았느냐 하며 인사 안 한다고 욕설을 퍼붓던 위인, 덩치에 비하여 작은
손이었으며, 그 손목에 낀 털토시는 얼마나 따스할까하고 부러웠던 일이,
들기름 바른 손에 버선을 끼고 자던 어머니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모두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십여 년 전, 자석에 붙어나오는 녹슨 쇠붙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옛일들, 불앞에 와서 손 좀 녹이라던 봉춘네는
당목 솜저고리를 입은 깨끗한 중년의 여자였으며 기화가 인색한 전참봉의
소실로 있을 적에 기화랑 함께 살았었다. 석이 물독에 물 한짐을 붓고
나면 따끈한 숭늉에 찬밥을 말아주며 봉춘네는 말했다. 허기가 들믄 더
춥네라. 숭늉에 만 흰밥은 꿀맛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봉춘네는
요즘도 진주서 가끔 만난다. 기화 얘기를 활 때는 언제나 잔주름진 눈
가장자리에 눈물이 넘치곤 했었다.
"고맙다. 참말이제 석이 니가 잘돼서 얼매나 고마분지 모리겄다. 다 니가
근하고 신실한 덕분이제. 어이구 참, 내가 선상님을 보고 이름을 불러서,
이래 되거나?"
하기도 했다.
"세상에 믿을 기이 있어야제. 나는 요새 예배당에 나간다. 예수님만 믿고
안 사나."
봉춘네는 성경과 돋보기가 들었을 조그마한 손가방을 들고 있을 때도
있었다.
잉어가 뛰는가, 물살 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다시 조용해 진다.
'미꾸라지 용 되고말고,'
석이는 새 담배를 붙여서 깊숙이 빨아당기며 쓴웃음을 띤다. 미꾸라지
용 됐다는 말은 어제 마을에 들어섰을 때 들었다. 아버지 생전에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은, 희미한 기억을 더듬게하는 사내가 석이를
보고 내뱉은 말이다. 사내는 마을에서 노름꾼이라 했다. 제삿장 보아오라고
아비가 내준 돼지를 팔아서 노름판에 날리고 빈 망태 들고서 돌아왔다는
얘기며, 그 사내는 아버지를 형님이라 불렀다. 아버지는 바우 그놈 사람
되기 글렀다 하며 욕을 햇었다.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이다.
'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일어선다. 걸으면서 석이는 담배를 피운다. 담뱃불이 바람에 날린다.
코끝의 빨간 담뱃불과 강 건너의 등불 두셋.
'희망이 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자각하기는커녕
옛날같이 상부상조하던 소박한 인심마저 잃어가고 있어. 장사꾼처럼
약아진다는 장서방의 말은 맞는 말이다.'
발길을 돌려놓지 않고 석이는 강 상류 쪽을 향해 걷는다. 김환이와 함께
서울서 내려왔는데 그 사람을 만난 것이 어째서 절망감을 안겨주는지
석이는 알 수가 없었다. 소박한 인심마저 잃어가고 장사꾼처럼 약아졌다는
말은 연학만의 견해는 아니었다. 관수도 그런말을 했었다. 사회주의운동들
하는 서울의 이범준이 내려 왔을 때 술자리에서 그 얘기가 나왔던 것이다.
이범준은 석이 또래, 전문학교 중퇴의, 말하자면 인텔리였고
형평사운동으로 관수하고 알게 됐으며 석이와도 스스럼없게 된 인물이다.
"학식이 깊어서 이론으로는 꽉 째여 있다 캐도 실정이란 그런 이론이 척
들어맞는 거는 앙이라구. 서울 사람 중에는 쌀은 쌀 나는 나무에서 연다.
그렇기 생각는 사람이 있드끼 농민들을 쌀 나는 나무맨치로, 그래가지고는
일 안 되네
사실 농민혁명, 농민혁명 하고 너거들이 자주 들먹이는 그것도 이자는
쓴물 단물 다 빼묵은 고목이고, 그거를 모리고 설친다믄 운동은 한날
놀음에 불과한 기라."
관수 말에 범준은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관 짜놓고 죽을 날 기다릴 일밖에
없겠습니다."
"허 이 사람 보게? 농민들 집적이는 일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말가?
아서. 너거들 농촌에서 설쳐봐야 백해무익이다. 호박줄기에 달라붙은
비리밖에 안 될 기다."
"너무 심한데요? 형님 말씀대로 하자면 우리는 해충인데 쓴물 단물 다
빼먹은 고목이라면 진딧물이 좀 달라붙은들 어떻습니까."
"고목에 달라붙으믄 비리가 굶어죽을 기고 호박줄기에 달라붙으믄
호박이 안 열린다. 마 그런께 총독부 앞의 나무에나 가서 잎사귀나
갉아묵어."
"농민들을 쓴물 단물 다 빨아먹힌 고목이라지만 내가 보기엔 서당옆에
핀 복사꽃 같습니다. 몇 다리나 건너야 진짜 말이 나오지요?"
"어느 미친놈이 날보고 농사꾼이라 말하든고? 나야 너거들의 말을
빌리자믄 룸펜이라 카든가? 그거제. 아부튼지간에 쌀은 함지박 들고
나무서 따내는 열매가 아니고 낫으로 벼야 하는 풀에서 나는 열매다, 그
정도는 알아야. 혁명이고 나발이고, 일없어!"
"알고 모르고의 얘기가 아니잖습니까. 죽 먹고 밥 먹는 게 문제가
아니지요. 쌀이 나무에서 나건 풀에서 나건 우선 제쳐놓고 원칙적인
얘기를 한 겁니다. 혁명의 주력 부대는 농민이며 농민의 봉기없이는, 특히
조선에서는 혁명이고 독립이고 불가능하다 그 얘기가 아닙니까?"
"그 얘기는 옳아. 그러나 주력 부대 아니라 심장 부대라도 그렇지.
살았이야 말이제. 숨을 쉬야,"
"그게 소위 비관론이란 말입니다. 어째서 우리 조선의 농민들이 죽어
있다는 말만 자꾸 하시지요? 근자에 와서는 각처에서 소작쟁의도 활발하게
일고 있으며 동학란에 있어서 그 규모 큰 농민전쟁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할 것입니다."
"아암, 생생하고말고. 동학란에 아비를 잃은 내게도 참말로 잊을수 없제.
이군."
"네, 말끔하십시오."
"너거들 일본 가서 공부해가지고 농민전쟁이다, 농민혁명이다 하는 그런
말 가져와서 동학란이 난 줄 아나? 또 농민들의 봉기 없이는 독립이고
혁명이고 안 된다, 그 얘기도 그렇다. 와 농민의 봉기 없이는 안 되는가?
그거야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수가 많은께, 수가 많아야 이기는 거
아니겄나?"
이범준은 머쓱해졌다.
"젊은 오기에 내 하는 말이 아니꼬울 기다. 그러나 그거는 피장파장인
기라. 자네가 사회주의인가 머 그런 운동을 안 한다믄 이런 말소용없제.
아니꼬운 말 들을 이유도 없고, 나는 알다시피 핵교는커냥 서당 문턱도
넘어본 일이 없는, 게우 언해 꼬꾸랭이를 끼적일정도니 무식꾼이다. 그러나
너거들 유식쟁이들의 새로운 사상이며 세계가 우찌 돌아가고 있는지 그런
거는 항상 귀담아들어서 요새는 제법 유식해진 셈인데, 한다믄 무식쟁이만
귀담아들어야겄나? 유식쟁이도, 더 많이 귀담아들어야 한다, 그 얘기구마.
자네가 농민 어쩌고저쩌고, 무산계급이 어쩌고저쩌고 할라 카믄 한데
엉키야만되는 기다. 기름하고 물맨크로 따로따로 돼 있다믄 그는
호박줄기에 엉겨붙은 비리밖에 아니다 그 말이구마. 내가 이군 자네한테
똑똑히 일러두고 저븐 것은 너거들 식자나 물 위에 뜬 기름이 돼서는 안
되겄다, 그리고 너거들이 무식쟁이 농부, 노동꾼들한테 멋을 주고 있다,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부터 싹 도리내야 하고. 서로 주고받으믄서 운동을
하든 투쟁을 하든, 너거들만 주고 있는 기이 앙이다, 그 말인 기라. 너거들
목적이나 야심, 그기이 아무리 옳은 일이 라 캐도 무식꾼들 바지저고리
맨들믄은 천년 가도 그렇고 골백분정권이 배끼도 달라지는 거는 없일
기다. 마, 이거는 과외말이고,"
말을 일단 끊은 관수는 이범준에게 곁는질을 했다.
"아까 내가 농민들을 두고 쓴물 단물 다 빼묵은 고목이라 캤는데 그
얘기를 하지. 뼈다구만 추리서 내 얘기할 것이니, 너거들이 생각는 것하고
내가 말하는 것하고 얼매나 차이가 나는가 생각해봐라. 그러니께 한 십여
년 전만 해도 내가 생각하기로는 대체로 농민들한테는 두 가지 면이 있지
않았나 싶다. 양맨크로 어진 면이 있고 늑대겉이 사나운 이 두 면인데,
그라믄 우떤 때 어질고 우떤 때 사나운가. 입에 풀칠을 하는 동안은
어질다. 입에 풀칠밖에 못하믄서  어질다믄 그것은 실개도 간도 없는 기이
앙이가, 겁쟁이요 비굴하고 남우 옷실 앞에 떨어진 밥풀이나 줏어묵는
거렁뱅이 근성 앙이가, 너거들은 대뜸 그렇게 욕하고 나올 기다. 안
그렇나?"
관수는 또 곁눈으로 이범준을 본다.
"그, 그야."
관수는 씩 웃었다.
"사람이란 가난하다 해서 실개도 간도 없어지는 거는 앙이다. 숫제
실개를  빼부리고 사는 놈이야 돈맛 들인 그런 놈 아니겄나? 가난은 죄가
앙이다. 좀맛 아는 놈이 죄인인제. 죄인은 비굴하고 천해지기 매련이거든.
한시절 전만 해도 농사꾼이 어디 돈을 알고 살았더나? 농촌에서는 물물을
바꾸어서 살았인께. 그래서 농촌은 가난해도 도끼뿌리 맞일 인심은
아니었제. 장사꾼 보리 한 됫박하고 농사꾼 보리 한 됫박에는 한 흡
가량의 칭아가 잇었인께. 도부꾼한테는 됫박 후하게 주고도 잠재우주고
죽솥에 물 한 바가지만 더 부으믄 객식구 죽 한 그릇이사, 목마른
길손에게 무시 하나 뽑아주기 예사요, 그래도 인성이 비굴해졌다 하겄나?
죽물 묵어도 맴이 떳떳한 기이 농사꾼이라. 자고로 도둑질 잘라는 놈이
벼슬 밝히는 법, 부자치고 세도에 아부 안 하는 놈 없고, 와 그럴꼬?
욕심이 사람을 잡는 기라. 노비들이야 애시당초 실개 뽑아놓지 않으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요, 장사꾼은 노상 돈을 만지는 푼수고,
쟁이바치나 막일꾼은 일용을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고 보믄, 살기가
농사꾼보다 낫다 한들 밭에서 무시 하나 뽑아주듯기 배고픈 나그네한테 돈
한푼 주기는 어려운 일이제. 해서 농사꾼들 맘은 항상 넉넉했다고
봐야겄지. 그거는. 새 소리 물 소리 들으믄서 사철이 변해가는 들판이며
산이며 강이며 바라보고 사는 탓도 있일 기다마는. 농촌에서는 도방겉이
도둑이 없고 사람의 도리를 중히 여기며 인류대사도 양반 못지않게,
오히려 더 정성 딜이서 지키니 비록 까막눈이라도 성현의 말실을 잘
지키기론 농사꾼이 으뜸이제. 그러나 이렇기 어진 농사꾼들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러버지믄은 사나분 늑대가 되는 것은, 그거야 부처님이
아닌께 당연한 일이고 해서 미련한 위정자는 백성을 굶기지만 간교한
위정자는 굶어 아 죽을 만치 백성을 믹이는 기라. 내가 이렇게 말한께
농민들 칭송만 하고 있다, 생각을 한다믄 이군 자네 머리는 과히 좋다 할
수 없을 기구마. 그 머라 캤제? 너거들이 노상 말하든, 응 농민들은
봉건적인 사상이다, 내 칭송은 그렇기 받아야 한 기구마."
"그러니께 그 머냐,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도방하고 농촌은 별로
내왕이 없었고 서울 천리길이라 카믄 지금 기차 타고 만주 가는 것보다 몇
배나  더 멀었인께. 그래 외지 소식은 장날에나 가서 귀동냥 하고 아니믄
도부꾼 방물장시한테나 들었제. 소식이 캄캄하믄 별난 일도 없는 기고
농촌이란 본시부텀 사계절이 가고 오고, 풍년 흉년, 그런 거로나 달라질까
변하는 기이 없는 곳인데 누가 죽고 누가 태이나고, 누구네 집에서 삼베
몇 필을 짰는가, 누구네 집 고추 밭이  절단났으며 간밤에 멧돼지가
내리와서 고구마밭을 낭태질했다, 마 그런 거야 수백년 되풀이해서 내리온
일들이고 다 어슷비슷, 변하는 기이 머 있었겄노. 개화바램이 불고 왜놈이
와서 우리 땅을 묵어 치우기 전까지만 해도 이놈의 나라부텀 그랬인께.
임금이고 신하고 간에 좀더 나아지는 일보다는 더 못하게 되는 일에만
겁을 묵고 똥을 쌌인께. 웃물이 흘러서 고이는 곳이 농촌인데 하여간 난리
굿은 맘에 안 내킨다, 적기 묵고 가는 똥 싸자, 가는 똥도 안나올 직에
별수 있겄나? 쇠스랑 들고, 낫 들고  도끼 들고, 수효만 많으믄 그까짓
사또 모가지 하나 베는 기이 대수겄나? 그 판국에다 동학이 민란 아닌
전쟁으로 바뀌어갔으니 농민들도 자신이 생기서 나라까지 둘러엎을라
했거든. 한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전쟁은커녕 민란도 안 돼! 온갖 잡것들이
농촌으로 들어가고 나오고 뿌리를 내리서 수백년을 지킨 토지가 이놈 손
저놈 손, 빼앗기고 뺏기고, 엄청난 변화, 시시각각 흥하고 망하는 꼴을
눈앞에 겪는데 모진놈을 만났거나 억지도 못쓰는 치들은 결국 보따리 싸서
간도로 가고 도방에서 비럭질하고 모집으로 일본에 가고 남은 사람조차
흔들리는 가지 끝에 게우 매달린 형국이다. 그래도 어질겄나? 자아, 그라믄
쇠스랑 들고 낫 들고 도끼 들고 나서겄나? 베아 할 사또 모가지는 어디
있노? 동학란이 농민들의 자신에서 발전한 거라믄 동학란은 또 왜놈으 그
최신 무기와 수효에 농민들 자신을 꺾어버린 끝말이었다. 어질지도 못하고
늑대도 못되고 죽도 밥도 아니게 됐다. 중도 속도 아니게 됐단 말이다.
더욱이나 삼일만세는 우떤 면으로 봐서는 농민들한테 물을 끼얹은 기라.
동학이 농민들의 전쟁이었다믄 삼일만세는 조선 사람 전부의 반항이었네.
그러나 농민들은 왜놈이 철갑선이라는 것을 다시 전부의 반항이었제.
그러나 농민들은 왜놈이 철갑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
왜놈앞에서는 쇠스랑도, 낫도, 도끼도, 만세 소리, 방화, 파괴 그 모두가
아무 소앵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본기라."
"그러면 삼일운동을 부정한다 그 말씀입니까?"
"나는 지금 농민들 얘기를 하고 있다. 조선 사람 얘기를 하는 것은
앙이다. 아까 내가 말했듯기 농민들은 변화를 싫어하고 또 농민들은
확실한 것을 찾는다. 쉽게 달뜨지 않는다는 말도 되겄지. 장사꾼들은 셈이
빠른 것 겉지마는 짐을 두고 이문을 예상하는 것은 확실찮은 일이고,
농민들은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생각이며, 장사꾼은 한
장을 기다리지마는 농민들은 일 년을 기다린다. 그러니께 내 말은 뭔고
하니 쉽게 불이 안 붙는다는 얘기다.
더욱이나 이 시기에는 절대로 불이 안 붙는다. 양도 아니고 늑대도 아닌
요새 농부들, 양도 아니고 늑대도 아니라믄 그거는 고앵이다, 고앵이라. 제
편한 자리 찾을라 카고, 속으론 늑대, 겉으로는 양, 그런께로 해코지나
해서 울분 푸는 고앵이란 말이다. 아까 고목이라 했는데 그거는 내 잘못된
말이었고, 움이 틀 때꺼지 기다리야 하네. 지금은 헛수고,힘을 낭비해서는
안 되제. 빨리 달고 식더라 케도 풍각 잡힐 곳은 도방이다."
"그러는 동안 기독교 세력이 뻗칠 것이오."
"아무도 못 묵어! 농촌은 아무도 못 묵어. 못 묵는다 카믄 못 묵는 줄
알아! 농촌은 맨 마지막이다. 상투도 남아나는 곳은 농촌이 니께."
물줄기를 따라가다가 석이는 맨 마지막이다. 상투도 남아나는 곳은
농촌이 니께."
물줄기를 따라가다가 석이는 발길을 돌려놓는다.
'각도는 다르지만 김선생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
"농촌엔 음폐물이 없어. 산속은 공격해야 할 목표가 멀고."
김환의 말을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석이 돌아왔을 때 모깃불을 피워둔 채 용이와 한복이 미루에 앉아
있었다. 아낙들은 돌아가고 없었다.
"우찌 됐노?"
무척 기다렸던지 곰방대를 성급하게 떨며 용이 물었다.
"출상 전에 동네 사람들 앞에서 발명하기로 했습니다. 형님 오셨어요,"
"음"
한복은 모깃불에 쫓기어 날아드는 나방을 한 손으로 쫓음 거북한 듯
대답했다.
"그 음흉스런 인사가 참말로 발명하까?"
미심쩍은 듯 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 겁니다, 틀림없이."
신발을 벗고 미루로 올라가며 석이 말했다.
"그렇기만 하다믄 동네가 안 시끄러바서 좋겄다마는,"
"그런다고 안 시끄럽겠습니까? 돌매는 좀 맞일 깁니다."
"그러씨... 그놈은 늙은 것이 지 버릇 개 못 주고 생사람 잡은 생각을
하믄 좀 맞아야 할 기다."
한복은 잠자코 있었다. 용이와 석이도 그 문제를 그 이상 말하지는
않는다. 복동네의 죽음은 마을  사람들에게 까맣게 잊어버렸던 함안댁의
죽음을 불러일으켰다. 남들이 그러한데 아들이 한복이가 어미의 죽음, 그
괴로운 과거를 생각 안 했을 리가 없다. 동네가 죽끓듯 했으나 한복은
여느 때와 달리 온종일 집 밖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동네에서 비명에 간 여자가 함안댁과 복동네만은 아니다. 미친 또출네는
불길 속에서 죽었고, 삼월이는 물에 빠져 죽었으며, 귀녀는 현장에서
죽어다. 그러나 맑은 정신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함안댁과 복동네는
매우 비슷했다. 하나는 지아비의 죄과를 부끄러워한 나머지 목을 매었고,
하나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여 양잿물을 마신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복동네 자살과 관련이 있다는 보이 노인,
돌매를 맞을 거라는 석이 말에서 한복은 옛날을 생각한다. 어미가 목맨
살구나무가 약이 된다 하여 맨 먼저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서 목맨
새끼줄을 걷고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분지르던 봉기, 눈 언저리에
푸르스름한 달무리가 져서 올빼미 같았던 얼굴, 샐인 죄인 샐인 죄인,
입버릇같이 하던 말, 세월이 흘러서 다 잊었던 그 한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관수형님은 별고 없는 지 모리겄네."
생각을 밀어붙이고 한복이 말했다. 어정쩡한 어조다. 아랫도리 벗었을
때부터 보아왔고 나이도 훨씬 위여서 반말은 하지만 석이는 교육을 받았고
선생님이라는 데서 마음까지 만만해질 수 없는 모양이다.
"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관수 본 지도 오래구나."
용이 말이다.
"그러잖아도 홍이 소식 있었느냐고 물어보더군요."
"지난 적에 펜지하고 돈이 좀 왔더마."
돈이 왔다는 용이 말에 한복이 껌쩍 놀란다.
"쉬이 나올 기란다. 갈 때도 질기 있지는 않을 기라 했지마는,"
용이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관수형님 아들이 부산서 공부한다 캤제?"
한복이 관수에게로 얘기를 되돌린다.
"진주서 싸워봤자 안 되는 일이니 할 수 있습니까."
"다 같은 사람인데 머 그래 싸울 것도 없지 싶으다만,"
한복이 말에 용이는
"싸우다보믄 서로 어깃장 놓게 매련이데 그것도 머 차차로 나아지 겄지.
옛날겉이 서얼이나 상놈은 과거 못 보게끔 법으로 돼 있는 거는 아닌께,"
"그렇지마는 형평사운동은 그리 단순하진 않습니다. 일본에서도
백정들로부터 수평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그게 어디 백정만 의
문제겄습니까? 얼핏 생각하기론 백정하고 농청의 싸움이다, 그러니
조선사람들 신분끼리의 쌈질이다 할 수 있지요. 형평사의 조직이 전국으로
퍼질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조선 사람끼리의 싸움이라는 점이 크게
유리했던 겁니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왜경들도
감시를 늦취지 않고 있겠지만 조직된 힘이란 특히 우리와 같이 일제
압제하에 있는 형편에는 절대로 필요한 거지요. 관수형님이 백정네 사위기
때문에 열 올리는 거만은 아닙니다."
"관수는 좀 보통사람하고는 다르제."
용이는 이십 년 전 자기 자신도 혈기가 왕성했던 그 시절, 산으로
들어갔을 때 양반이라면 치를 떨던 관수의 그 강한 기질을 생각하는
것이다.
밤은 깊어간다. 더위 때문에 잠 못 이루던 마을 사람들은 잠이 들었는가
사방은 조용하다.
"실은,"
"석이 너하고 의논 좀 하까 싶어서 왔는데,"
"...?"
"우리집 둘째놈, 핵교를 우짤고 싶어서."
"네, 몇 살입니까?"
"열세 살인데 명년에 보통핵교를 졸업한다."
"그러면 상급학교로 보낼려구요?"
석이 놀란다.
"그래볼까 싶은데,"
"힘들 겁니다."
"내 처지에 심들 거는 알지만 설사 중도지폐를 하더라 캐도 하는 데까지
시키볼 생각으로,"
"둘째라 하셨는데 큰아들은요?"
"큰아들은 여러 해 전에 잃어부맀지."
용이 대신 말했다.
"그놈아 살았이믄 올해 열여섯이제."
눈을 껌뻑거리며 한복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석이 말머리를 돌린다.
"공부는 잘합니까?"
"응, 공부를 잘한께 아까바서 안 그러나. 그거 하나라도 사람 맨들어보까
싶다. 다만 어느 방면으로 택해서 보내야 할지 니는 선생질을 한께
알겄제?"
"본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되도록 원하는 대로 해야겠지요."
"지야 머, 나이가 어리고 머를 알겄나? 어른이 끌어주어야지."
"대학이나 전문학교까지 갈 생각이면 그냥 보통중학교로 가는 것이
좋게고,"
"그, 그거는 꿈이나 꿀 일이가?"
"그렇다면 사업학교 농업학교 또 사범학교가 있는데
"상업핵교라 카믄 장사 같은 거를,"
"졸업 후 은행이나 금융조합 같은 데 취직이 되지요."
"그러씨 그래도 ... 내 생각 겉애서는 진주에 있는 농업핵교가 우떨고
싶은데,"
"아아니,미리 작정을 해놓고서 그럽니까?"
석이 웃느다.
"작정을 한 거는 아니고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마침 니가 왔다기에 니는
선생님이기께 그런 질수는 잘 알 거 아니가."
석이는 한복이가 아비의 행적을 고려에 넣고 배수의 진을 치듯
농업학교를 택한 것을 알아차린다.
"농업학교, 좋습니다. 본인 하기에 따라서 더 하려면 농과대학도
있습니까.?
"그런 소리 하믄 남이 웃는다. 우리 처지에 농업핵교만 시키도,
그농아아가 공부는 잘하지만 영 얼되놔서,"
"생각 잘했다. 시키는 데꺼지 시키봐라. 그놈 사람 되겄더라."
용이 말에 한복은 기쁜 듯 웃는다.
"형님."
"음,"
"간도에나 한번 가시지요."
"가, 간도에는 머하로."
당황한다. 아까 홍이한테서 편지와 돈이 왔다는 말이 있었을 때도
한복이는 당황했다. 그에게도 몇 달 전에 두수로부터 돈과 편지가 왔던
겄이다. 그건 간도롤 오든지 아니면 그 마을을 뜨라는 편지가 여러 번
왔으나 한복은 묵살해왔다. 돈이 오기론 이번에 처음 이었다. 일금 삼백
원, 한복은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읍내 우편국에 저금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처한테 자식한테도 알리지 않았다. 석이로서는 매국노든 역적이든
더러운 돈이든 형제니까 도움 못 받을 것 없다, 오히려 그런 돈은
받아쓰는 편이 낫고 올바른 인물 하나 만드는 데 써주어야 한다, 그런
저의로 말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당황하는 한복을 보자 다시 말을 잇지
않는다.
과묵한 세 사나이는 멋없이 우두커니 앉았다가 한복이는 돌아가고
용이와 석이는 등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잠자리를 마련하고 등잔불도
껐다. 석이는 몇 번이나 몸을 뒤채다가
"아저씨, 주무십니까?"
"안 잔다."
비로소 석이는 기화에 대한 얘기를  꺼내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용이 말없이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부시럭거리다가 곰방대에 성냥을
그어댄다. 한모금 깊숙이 빨아 당긴다. 밖에선 모깃불, 그 매캐한 냄새도
가시지 않았는데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거들이 말 못하겄이믄 내가 얘기하지."
"..."
"아무리 대범한 양반이라도 봉순이 일을 가심에 맺히 있을 기다.
주종이라도 예사 주종가."
석이는 잠이 오는 것처럼 돌아눕는다. 그러나 잠이 올 리도 없고 가슴은
답답했다. 기화를 위해 자신은 무엇을 할 것이며, 아니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데, 미진한 마음은 그칠 줄 모르게 내부 깊은 곳에
항사 도사리고 있는가. 빗방울 소리를 듣는 머릿속엔 안개가 자욱한 것
같고, 심장 복판을 타고내리는 뜨거운 것. 기화는 동색같이 생각했을
테지만 석이에게 옥색 치마 분홍 저고리의 기화는 사랑이었고 청춘이었다.
입 밖에 내서도 안 되는 마음이 었고, 비취서도 안 되는 마음이었다. 그
감정이 석이 청춘에서 가장 찬란하고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이었다.
처참했던 소년기에서 절도를 배우고 사명감을 갖게 된 청년기, 사막했던
터전에, 견고하게 다 져졌던 마음의 터전에 한떨기  핀 꽃이던 기생 기화.
증오와 저주와 분노로 치닫던 감정의 황막한 지대를 뜨겁고 감미로운
눈물로 젖게 한 그 불행한 여자. 석이는 서울서부터 평야의 기화를
찾아가고 싶었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줄곧 계속하여 평양으로 갈 생각을
했었다. 몸은 더 멀리 떠나오면서 마음은 더욱 가깝게 평양으로 치닫는
것이었다. 그 욕망을 묻어둔 채 석이는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다른 일들으
생각했던 것이다. 빗방울은 어느덧 조용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로 변해
있었다.
16장 군중심리
"동네 사람들이 이넉을 나무에 매달기라도 하믄 우짤 기요?"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첫닭 우는 소리에 일어난 봉기의 마누라
두리네는 등잔에 불을 켜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말했다. 역시 잠을 못
이루고 멀뚱멀뚱 천장만 보고 누워 있던 봉기는 획 돌아누우며
"석이놈이 그리 되지 내비리두지는 않을 기구마는. 식자깨나 들었다고
넘찐 소리는 해도 지각을 있인께."
하다가 화를 벌컥 낸다.
"신새벽부터 제수 없게끔. 방정 그만 떨어라!"
"강약이 부동인데 동네 사람 성나서 서둘믄은 석이 혼자 감당할
기든가."
"속타는 사람한테 와 이리 불을 지르노!"
"그라믄 임자가 가서 맞아라."
"그렇기만 됨사. 그러이 내가 머라 캅디까. 애먼 소리 마라고 그렇기
말을 해도 안 듣더마는,"
"모리거든 아가리 닥치라! 다 내 깊은 생각에 한 짓이데 그리 쉽게 죽을
줄 누가 알았더나!"
"그래서 참 잘됐소! 남으 생목심 끊게 하고 내사 마, 얼구 치키들고 동네
나갈 수 없일 기요."
"부끄러분 생각을 한께 임자는 청풍다억이구마. 남부끄런 생각백분 해도
좋으니까네 자식 낳고 사는 두리 신세나 안 궂있으믄 좋겄다."
"언성은 와 높이요! 며누리 들으까 무섭소."
"..."
"참말이제 남사스러바서 우찌 살꼬."
"매맞는 것 구겡 안 하믄 될 거 앙이가."
"매맞일 생각은 하누마요. 매만 맞고 말김사?"
"그라믄 머가 또 있단 말고오! 사지를 찢을 기가!주리를 틀 기란 말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
"동네서 쫓아내믄 우짤 기요."
"멋이 우짜고 우째?"
방바닥에 두 손을 짚고 엉덩방아르 찧어대던 봉기는
"그렇긴는 안 될 기다! 그렇기는 안 되고 말고! 불을 싸악 질러부리제,
불을! 권석들 끌고 어디로 가아! 가기는 어디로 가아!"
입에 거품을 문다.
"그만 복동네가 찾아왔일 적에 잘못 했다고 빌었이믄 이런 일은 없었일
깉데 아이고 무써리야, 그놈의 계집아아 하나 따문에 인벵 든생각을 하믄,
시집을 보내놓고도 하마 쫓기오나 애간장을 태웠는데, 그 생각을 하믄
삼수 그놈, 그 숭악한 놈을찢어서 포를 맨들어도 내 맘이 안 차겄소. 그
목이 뿌러질 놈!"
"그놈 얘기는 와 하노! 누구 복장 터져서 죽는 꼴 볼라고 이라나?"
"욕심이 사람 잡제. 욕심만 안 부맀이믄 그놈이 두리한테 눈독을
딜있일까. 다 이녁 욕심,"
"이 제집이!"
달려들어 가슴을 쥐어박는다. 두리네는 쥐어박힌 가슴을 제 주먹으로도
한 번 치고 소리를 죽이며 운다.
"일은 벌어진 기라요. 매는 매대로로 맞일 기고 두리 험집도 한 사람 두
사람, 말이란 건니다보믄, 그 아아 시집까지 가는 거사,"
제 가슴을 또 친다.
"그런께 내사 나가서 발명하기로 한 거 앙이가. 그 일 아니라믄
미쳤다고 내 발로 발명하로 가까? 잡아떼믄 그만이제. 밤새도록 생각을
해봤는데 석이가 일은 씩 잘 꾸민 기라."
풀이 죽는다. 그러나 말만은 희망적이다. 봉기에게는 복동네의 죽음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죄의식도 태산 같은 근심 앞에 지푸라기만도 못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모면할까, 딸자식 흠집을 어떻게 가려줄까, 다만 그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벽이 뿌옇게 걷히기 시작했을 때 며느리가 조반을 지으러 나왔는지
부엌 쪽에서 달거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때 간으면 벌써 일어나
논물을 대러 가든지 풀이나 한짐 베어왔을 터인데 아들의 기척은 없고
손주놈도 숨을 죽인 듯, 말할 기력이 빠져버린 늙은 내외는 서로 외면한
채 바깥 기색에 귀를 기울인다.
한나절이 지나서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보여들기 시작했다. 덩달아서
아이들도 몰려나왔다. 강아지들도 쫄랑거리며 쫓아온다.
"데끼놈들! 여가 어디라고 나와노. 집에들 못 가겄나?"
남정네가 아이들을 몰아내는가 하면 아낙은 아낙대로 아디들 오는 곳이
아니라면서 참새 쫓듯 휘여! 하고 팔을 벌리곤 했다. 들내놓고
시시덕거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마을에 굿거리가 든 것처럼 들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밤사이 사발통문을 돌린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마을
사람들 중에 봉기가 자복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이러쿵저러쿵 예삿말로 주고받던 마을 사람들 화제는 사람들이
불어나면서부터 분개하고 규탄하고 처단하자는 공론으로 들끓었다. 출상을
본다는 생각은 깡그리 내던져버리고 오로지 흥미는 나타날 봉기한테
집중되는 것이었다. 타작마당은 마치 신풀이 한풀이의 장소로 변해간다.
상대가 심술궂기로 이름난 봉기였고, 안 좋은 꼬투리는 대개 한두 개쯤
갖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고소해하고 한층 신이 나는 모양이다. 말뚝같이,
송곳같이 복동네 심장을 때려박고 찌르지는 않았다손 치더라도 뒤꼍에서
바늘 하나쯤은 복동네 심장을 꽂았을, 그런 위인일수록 이상하게 남보다
분개하고 규탄하고 처단하자는 주장이 강했으니. 그것도 양심인지 모를
일이다.
"늑대 겉은 그 늙은것 동네 가운데 두어서는 안 된다. 동네가 시끄러버,
대소사에 그놈의 주둥이 안 내미는 곳이 없고오,"
"동네 가운데 두고 안 두고는 고사하고 돌로 쳐직이야지 그냥 두어?"
흥, 열분 죽는다고 복동네가 살아올 기든가? 허물을 벗으믄 머하노.
시상에 그기이 제집도 앙이고 소나아가 할 짓가? 똥물에 튀길 놈의
인사지."
"그런 기이 있인께 동네 인심이 말이 아닌 기라. 이곳저곳 쑤시고
땡기믄서 이간질, 쌈질이나 시키고, 그 늙은 것 옛적부터 그랬네라. 그래도
우리 동네 인심이 좋아서 그나마도 멩 보존하는 그거를 모리고 억지만
쓰믄 다 되는 줄아니께, 남들도 그 뽄 볼라 아 키나? 그렇기도 못하는
사람은 울믄서 게자 먹는다고,"
"간에 붙었다가 실개에 붙었다가 그기이 어디 사람이건데?"
"계묘년 보리흉년 때만 해도 온동네 사람이 다 죽는다고 소동인데
그놈의 집구석에서는 쌀밥만 처묵었지. 의리고 우애가 있어야제. 약 할라
캐도 없다. 조가한테 알랑방구나 뀌고 삼수놈한테는 찰떡겉이 붙어서 행여
문전옥답이 내 차지나 안 될까, 그런 놈이라고, 우리끼리니 하는
말이지마는 최씨네가 들왔이믄 마땅히 그런 표리부동한 놈의 땅은
거뒤딜이야 하는 게지. 땅을 못 얻어서 기갈인데 멋 땜에 그런 놈한테 땅
주노."
"실가락만한 것이라도 남을 칠 건디기만 있이믄 신나제. 남 먼저
설동하고 몰아세우는 데 앞장 앙이가. 홍, 이분에는 뜨거운 맛 좀 봐야 할
기요."
"이분에는 제 편에서 맞아야제. 언젠가 그 와, 주막 앞에서, 최참판댁
머슴 하든 구천이 안 있나? 지 제집을 뺏긴 것도 아닌데 동네 사람들을
몰고 가서 개 패듯이 패서 죽었다는 소문도 있더마."
대개 연령이 높은 층의 얘기였고 젊은 층도 무조건 신나는 그런
얼굴들이다. 간밤의 비 때문에 햇빛은 유난히 부시다. 일을 꾸민 장본인들,
마당쇠댁네와 야무네는 죽 끓듯 하는 타작마당에 끼여들지 않고 좀 처진
밭둑에 걸터앉아 말이 없다. 오히려 불안하 눈으로 타작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밭둑 찔레꽃 덤불 밑으로 미련스런 두꺼비 한 마리가 뒤뚝뒤뚝
기어간다.
"야무어매."
"음."
"동네 사람들이 저리 기승을 부리는데 봉기노인 맞아죽기라도 하믄
우짜것소?"
"설마, 나이를 처묵었인께 그러기야 하겄나."
"기왕에 죽은사람은 죽은 기고, 잘못한 짓이나 아닌지 모리겄소. 내 입만
다물고 있었이믄 벨일없이 지내는 거를,"
"..."
"만일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믄 쥐 잡을라 카다가 독 깨는 쪼가 안
되겄소?"
"걱정 마라. 젊은놈 겉으믄 혹 모리겄다마는 늙었이니 마구잡이로야
하겄나. 울림장으로 그칠 기다."
"그는 그렇고 동네서 쫓아내는 일이라도 있이믄 두고두고,"
그 말에는 야무네도 풀이 죽는다. 보복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 영악한 거는 범보다 무섭다 카는데 악이 받치믄 무슨 짓을 할지,"
"이자는 할 수 없는 일 앙이가."
"빌어묵을 제집, 죽기는 와 죽노. 살아서 애먼 때 벗으믄 될 긴데 그렇기
죽는 것도 남 못할 짓 시키는 기라요."
"평시는 순한 제집인데 죽고 보이 독하구마."
드디어 타작마당에 낡은 상여가 나온다. 얼마 안 있어 복동네 집에서
장정 몇 사람이 관을 들고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재최 굵은 삼베 상복을
입고 상장을 짚은 양자 복동이와 며느리가 곡을 하며 따라나온다. 관은
상여에 실리지 않았다. 멍석 위에 놓여졌다. 언제 왔는지 봉기는 도살장에
끌려온 송아지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이따금 치뜨고 사방을
살피는 눈알이 불면 때문에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곡성이 멎고
와글바글 벌집 쑤셔놓은 듯했던 타작마당이 일시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봉기의 그 흥미진진한 자복의 광경을 기다리는 것이다.
까마귀가 공중을 선회한다. 열기를 타고 벼 익는 냄새가 풍겨온다. 침묵은
하마 폭발할 것처럼 무겁게 사방을 누른다.
"머하노! 해 지겄다!"
누군가가 외쳤다. 그리고는 또다시 침묵이다.
"오밤중에 등불 들고 묏구덕 팔 기가!"
두 번째 외치는 소리다. 봉기는 뱃등 위에 두손을 깍지끼고 비실비실
걸어나온다. 어굴은 누우렇게 떴고, 입술은 하얗게 바래졌으며, 진저리치듯
몸을 한번 떨었다.
"내가,"
하다가 봉기는 제 가슴에 주먹질을 몇 번 한다.
"내가 직일 놈이제."
이번에는 제물에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냉혹한 눈들이 일제히
쏘아본다. 비비대볼 수 있는 눈동자는 한 개도 없다. 고개를 숙인다.
"남으 생목심 끊어놓고 내가 우, 우째 살기를 바라겄노."
밤새껏 외어온 말을 시작한다. 눈물을 줄줄 흘린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제자리를 잡은 듯한다. 주먹으로 눈물을 씻어내며
"그렇지마는 죽은 사람 허물을 벗기주어야 안 하겄나. 다 늙어빠진 기이
앞으로 살믄 얼매나 살 기라고, 우짜다가 한분 마음 잘못 묵어 한 짓이
이렇기 될 줄은 꿈에나 생각했겄나."
울먹이는 소리가 곧 잘 나온다.
"목이 메이서 차마, 그런께 이십 연도 더 되는 옛적 일이구마. 나도
그때는 한창 나이였고 해서, 그 멋꼬 그런께 욕심을 품었다 그 말인데, 그,
그런께 달이 밝은 밤에 청상과부 서금돌이 자부가 혼자 자는 집으로 간
기라. 이 나이 해가지고 낯뜨거운 마, 말이지마는 전후 사정 얘기를 하자
카이, 흉년에 시어매는 죽고 실성한 시아비는 집 비우기가 일쑤라. 그런데
그런 일이 더러 있었던가 방에 들어서자맞, 머리맡에 둔 식칼을 들고
복동네가 고래땅 겉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만 혼겁을 했구마.
ㄷ망쳐나오는데 삼수놈이 오더란 말이다 마음속으로 생각했제. 옳다꾸나,
저눔하고 정을 통했구나 싶었제. 그래서 살금살금 되돌아가서 싸리
울타리를 비집고 들여다보이 삼수놈도 내 꼴을 당하더란 말이다."
청산유수라 할까, 시뻘건 거짓말을, 밤새도록 얼마나 뜯어맞추었던,
사람들 뒷전에 서서 바라보고 있던 석이는 매창자를 움켜쥐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다. 한편 진실에 가깝게 재주를 부리는 봉기 모습에
서글프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도 같다.
"밤새도록 얼마나 연습을 했으면."
미워할 수가 없었다. 한철을 사는 나비가 부드러운 속잎을 찾아서 알을
까는 일이며, 파헤쳐진 흙더미 속에서 알을 먼저 피난시키는 개미며, 벌레
중에서 애벌레의 먹이가 되는 수컷이 있다던가. 석이는 문득 구 신비한
조화를 생각한다. 도시 본능은 무엇인가 생각 한다.
"그 챙피스렁 일을 뉘한테 말하겄노? 혼자 꽉 묻어두었는데, 그러다가
다 잊어부맀는데, 이십 년이난 지난 오늘에 와서 얼굴은 조그랑바가지가
된 주제에 어디서 그 얘기가 난 기이 돋더마. 말이 났다믄 복동네말고
입이 없었인께, 요것봐라? 싶더마. 그래서 삼수놈하고 그렇다고 뒤집어씌운
기라. 그런 일이사 흔히,"
"야 이 도둑놈ㅁ아!"
봉기 또래가 외는 위동네 윤서방이, 평소 봉기하고 사이는 좋지
못했으나, 그러나 진심에서 욕설을 퍼붓는다.
"네놈의 낯가죽은 쇠가죽으로 맨들었드나? 머이 우째?"
"그, 그거야, 사, 내들 욕심 묵기 예사 앙이가. 또오 과부가 험담좀
들었기로 저저이 다 죽나?. 내 운수가 나빴든 기지."
사이가 나쁜 윤서방의 욕설이었기 때문에 순간 봉기의 오기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 말을 다 해버리고 나니 실수 없이 치른 것이 대견하였고,
배포가 커졌으며, 생래의 생떼도 동했다. 늙은 것을 어쩌랴. 석이를 믿는
마음도 있었고, 말을 하고 보니 운수나 나빴고 억울한 것은 자신이라는
착각도 들었다.
"아 생각해봐라. 세상에 애먼 소리 안 듣고 사는 사램이 있나? 애먼
소리 들었다고 다 죽을 것 겉으믄 사람으 씨가 남을 끼든가? 말한마디
잘못한 죄로 이러크름 경을 치는 벱이 어디 있노? 내가 도둑질을 했나 칼
들고 샐인을 했나? 다 늙어서 낼모레 황천객이 될이 나를 끌어다놓고
닦달질을 해야 하겄나!"
딸의 일은 장보에서 싹 지웠다는 생각을 하는지 별안간 봉기는 두
주먹을 불끈불끈 쥐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싸움의 태세로 들어간다.
"말 가지고는 안 되거마는."
누군가가 말했다.
"직일라 카믄 직이라! 복동네 애먼 때는 벗기주었으니 이자 나는 할링
다 했다. 세상에 무신 놈의 인심이 이렇노? 응? 남을 핑계하고 너거들이
사감들이 사감으로 이러는 줄 나 다 안다. 안단 말이다아! 무신 죄를 졌노!
말 한마디 잘못하기 예사지. 너거놈들은 성인군자가! 밑낑이 들쳐보믄은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이, 네놈들이 날 우짤 기고!"
"이보시오. 낼모레 황천객이 될 영감님, 내 말 좀 들어보소."
바우가 척 나선다. 격에 맞지도 않는 제법 점잖은 거동으로
"영감님 말심일 듣고 보이 복동네가 와 죽었는고 확실하게 알겄소.
그러나 애먼 때 벗은 거를 알아야 할 사람은 복동네 아니겄소?"
봉기는 어리둥절하다가 말뜻을 새겨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니 아무래도 죽은 사램이 일어나 앉아야 안 하겄소?"
구경꾼들 속에서 낄낄대며 웃는 소리가 났다.
"바우 네 이놈! 이 사기꾼 노름꾼아! 니가 머 잘났다고 애비뻘되는 나를,
나를 놀리묵어?"
삿대질을 한다. 제 얼굴빛을 찾았던 봉기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다.
"염치도 좋다! 주리팅이가 없어도 유분수지 어느 아가리서 그런 말이
나오노!"
돌멩이가 날아왔다. 그것이 신호인 양 두 번째 세 번째 돌멩이가
날아왔다.
"아이구우."
세 번째 돌멩이는 이마를 쳤다. 당장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봉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바로 대놓고 때릴 수 없는 젊은 사람, 아낙들에게
돌은 참 편리한 것이다. 누가 던졌는지 알 수 없는 돌멩이는 그 수가
많을수록 군중의 심리를 폭력으로 이끄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삽시간에
돌멩이는 우박이 되어 봉기한테 쏟아진다. 얼굴을 가린 손등에서 피가
흐르고 머리를 감싸면 얼굴에 돌이 날아오고, 봉기는 쓰러진다. 석이가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는 것과 동시 타작마당 한곁에 있는 물방앗간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쓰러진 아비를 가리고 서서
"날 때리라! 날 때리란 말이다!"
호랑이 울음 같은 소리, 입이 찢어질 것 같다. 순간 팔매질하던 마을
사람들은 주춤한다.
"야 이놈들아아! 너거들은 애비 에비도 없나아! 다 늙은 울 아부지
쳐죽이야 시원컸나아! 아이구우 아부지이!"
통곡을 한다.
"아이구우 아부지이 아이구우우 ---- 말 한마디에 죽은 사램이 모질고
독하지이! 야, 이 연놈들아! 너거들은 없는 말 지어서 안 하고 살았더나!
아이구! 아부지, 아부지이!"
아비를 흔들며 안아 일으키려 한다.
"이놈들아! 또 쳐라! 이놈들아, 사생결단 해보잔 말이다! 우리 부자
죽으믄 그만 앙이가! 직이라, 직이! 와 안 치노오! 너거들 손에 죽을라
카는데 와 안 치노오!"
고함은 강을 넘어 멀리까지 퍼진다.
"도식아, 이자 그만 해라. 어서 아버지 업어라."
어린 때 친구간인 석이 도식의 등을 두드린다.
"어서 업으라 카이, 자아,"
"늙은 사람이 제 발로 걸어와서 자복햇으믄 그만이지! 그 이상의 망신이
어디 또 있일 기라고, 야 이놈들 내 똥 묻은 중우를 내다 팔더라도 재판
걸 기다아! 어허허홋."
목이 쉬었다. 도식은 미친 사람 같았다.
"자아, 자 출상도 해야 안 하겄나. 아무리 억울해도 죽은 사람만이야
할라구. 자아."
석이는 억지로 봉기를 아들 등에 업혀준다.
"아이구 아부지, 다 큰 자식 두고 이기이 무신 꼴이요."
도식은 어이어이 울면서 타작마당을 떠난다. 마을길로 접어들자 봉기는
등뒤에서 신음 소리를 냈다. 도식이는 계속하여 울면서
"아부지가 동네서 인심을 잃어 아 그렇소. 이자는 제발 남우 일에 챙견
마소."
꺽쉰 목소리로 말한다.
"이자는 다 치르었인께. 아, 아야! 어이구우, 니 누부 땜에, 그 그랬지.
내가 마, 맞일 사람가. 아이구 아야아!"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푹 기울어져 있었다. 관은 상여에 실렸다. 상여
앞에 놓인 제상에 제수를 차리고 상주는 제사를 지낸다. 남정네들은 일단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낙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상주 두
사람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어이구우, 어이구우."
"아이고 아이고오,"
높고 낮은 음성이 곡을 시작한다.
"우는 아가리에 똥이나 퍼넣지."
아낙들 속에서 야무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와 아이라. 너거들 상주 된 덕 톡톡히 보는 줄이나 알아라. 상주
아니더믄 몸뚱이 성해나지 못했을 기다."
다른 아낙이 받아서 메어친다. 곡소리가 기어든다.
"남의 속에서 빠졌기로 키운 공이 있는데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있노?
늙은놈하고 어울리서 짝짜꿍을 쳤이나 복동네 공든 세월이 원통해서
죽었을 기다."
곡소리는 더욱더 기어들어간다.
"이 사람들아, 내 말 명념해두는 기이 좋을 기다. 초상 끝나거든 집이고
전답이고 팔아서 너거 양보 회원굿 해주어라. 야장스럽게 너거들 떠주는
물 얻어묵을라고 복동네가 오겄나."
"얻어묵고 산 것만도 은공이 태산인데, 너거들 것이 어디 있노. 하모,
회원굿 해야 하고말고. 비명에 갔으이 해도 크게 벌이야 할 기구마는."
아낙들의 말을 듣고 보니 남정네들도 새삼스레 깨달아지는 것이있다.
"어헛! 자석 없는 놈은 사람도 아니다. 죽을 죄를 져도 자석 있인께 업고
가네. 애비 대신 한사코 안 덤비더나? 헛 참, 자석 많다고 지천을
해싸았더마는  그기이 앙이고나. 복동네한테도 자석이 있었다믄 봉기가
자석 등에 업히 갔것나?"
"그렇고말고. 자석이 있었다믄 밟아직이든지 찢어직이든지 했겄지. 만판
공 딜이봐야 남의 속에서 빠진 것 아무 소앵이 없다."
"하기야 눈이 등잔 겉은 자석이 있었다믄 복동네가 그런 허물을 쓰지도
않았을 기고, 차라리 중이나 돼 가지, 남의 핏덩이는 머할라꼬 받았는고."
"그거 다 사람 나름이제. 김훈장댁 양자는 친자식이 그러하까? 참말로
정성이 지극하데. 얼매나 정성스리 선영봉사를 한다고?"
"그라믄 여기는 상놈이라 그런가?"
"상주들은 고개만 빠주고 있일 일이 앙이다. 곡이라도 크게 해주었이믄
좋겄네."
"가소롭다. 맴이 없는 곡소리만 크기 하믄 머하는고? 아이고오 불쌍한
복동네, 말짱 헛지랄하고 살았제."
사방에서 마구 꼬집어댔으나 장사는 치러야 했다. 한이 많은 생애,
사연이 복잡했던 영결식, 애통하는 혈육 하나 없는 망자를 실은 상여는
고개를 넘어간다. 혼령의 흐느낌 명정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더러는
장지까지 따라갔고 나머지는 타작마당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한바탕 죄인
없는 성토를 벌이다가 하나씩 둘씩 빠져나가고 빈터만 쓸쓸히 남는다.
갈가마귀가 무리를 지어 날아간다.
석이 장지에서 돌아왔을 때 하늘에는 가득하게 노을이 져 있었다.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던 홍이의 딸 상의가
"아져찌, 우리 할배 기와집에 갔다와?"
하며 쪼르르 달려와서 석이 손을 잡았다.
"안 울고 놀았나?"
"응."
홍이댁네 보연이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온다.
"거기, 최참판댁에 아버님이 가 계시는데 그리로 오시라는 전갈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석이는 상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발길을 돌리다. 몸이 아주 온전치
못한 용이는 장지는 물론 타작마당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새 최참판댁으로
올라간 모양이다. 기화 문제 때문에 그럴 거라는 짐작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눈금 없는 강물처럼 온갖 사물은 매듭없이
흐르고 있다. 아이들은 소를 몰아붙이며 밭둑길을 걸어오고, 늙은이는
채마밭에서 서성거리고, 장정들은 풀을 베어서 돌아온다.
"석아!"
우렁우렁한 목청이 올려왔다. 배추밭에 거름을 냈는지 똥장군 옆에
앉아서 곰방대를 빨고 있던 사내가 목청껏 불렀던 것이다.
"으음, 거름 내나아?"
성큼성큼 걸어가며 석이 대꾸한다.
"니 정말로 우리집에 한분 안 올 기가?
"일 바쁠 건데 가면 뭘 해. 이리 보면 됐지 머."
다가간 석이 걸음을 멈춘다. 어릴 적 친구다.
"농사꾼은 상종 아 하겄다 그 말가? 그래 봐라."
"무슨 소리를 하노. 내가 찾아가봐야 폐만 끼치지."
석이는 궐련에 불을 붙여 내민다.
"이것 피우라고."
"응."
사내는 기쁜 듯 얼른 받는다.
"그래도 그러는 거 앙이다. 망해서 고향 돌아온 사람은 우리가
청해야겄지마는 잘돼가지고 고향 온 사람은 그쪽에서 찾아야제. 만내서 씬
술 한잔이라도 나누어묵는 기이 친구된 우애 앙이겄나."
석이는 자신도 담배를 붙여물고 그 당여한 말에 미소 짓는다.
"알았네. 지금 볼일이 좀 있어서 가는데 밤에라도 찾아가지."
"그래야지. 있거 없고 간에 정이사 다르겄나."
"날 저문에 자네도 일 그만 하게."
"머 다 끝났다. 한 고랑만 남았인께. 다른 일 따문에 배추밭 돌볼새가
없어서 내비리두었더마는 장에 내기는커녕 김장도 못하겄다."
"지금이라도 늦잖지. 그럼 나중에 보자."
"응, 꼭 오니가."
최참판댁을 들어서려는데 뒤에서
"정선생님."
돌아본다. 환국이다.
"낚시질 갔었댔나."
"네."
"좀 잡았어?"
"조금요."
키가 훤칠했다. 중학교 삼학년이다.
"방학도 얼마 안 남았다."
"네. 온종일 어디 가셨어요?"
"초상집에 가고,"
"아아 참, 초상이 났대지요."
환국은 그 이상 일은 모르는 것 같다.
"선생님은 진주 언제 가십니까."
"내일은 가야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간다. 용이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둡지도
않았는데 마루엔 모깃불 대신 향을 피워놨다. 뒷마루, 후원을 바라 볼 수
있게 활짝 문을 열어놓고 발을 쳐놓은 채 그 발을 등지고 서회가 앉아
있었다. 환국이는 고기가 든 바구니를 언년에게 건네준다. 그리고 용이와
얘기하는 듯한 어미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서는 사랑으로 돌아간다.
"석이 오나. 저기 마님께서,"
용이 일어섰다.
"그라믄 지는 가보겄십니다."
절을 하고 물러간다.
"정선생 올라오시오."
"네."
석이는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오른다.
"뭐 시원한 것 들겠소?"
"아닙니다."
"그러면, 방금 이서방이 봉순이 얘기를 했는데 정선생은 서울서 뉘에게
들었소?"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의돈이라고 임역관댁 바로 뒷집에 사셨지요
임역관댁 교장 선생님, 또 이부사댁 이선생님하곤 막연한 사이올시다."
"그분이 어째서 봉순이를 아는고?"
"처음 서울 갔을 때 이선생님 면을 봐서 그분들이 모두 후원했지요."
서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봉순이가 병을 앓고 있다는데 무슨 병이라 하든가요?"
석이는 고개를 숙인다. 용이한테는 신병이라 했지만 대답이 없자 서희는
순간 눈살을 찌른다 하더군요."
"뭐라구!"
"그분 말씀이, 봉순이누님보다 아이 걱정을 하더구먼요. 그러니까 가망이
없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아이 걱정...계집아인가?"
"네."
"음... 그러면 개학까지 며칠이나 남았을까?"
"칠팔 일, 남았지."
"칠판 일, 평양은 다녀오겠구먼."
"..."
"어떻소? 정선생이 좀 다녀오겠소?"
"네?"
석이 고개를 쳐든다.
"장서방은 여기 일이 많기도 하지만 정선생님보다 생소할 게요. 형편
보아서 재량껏 하는 것도 정선생이 나을 게구."
"네."
"가시겠소?"
"..."
"웬만하면 가주시오.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일이니까."
"제가 힘이 있을는지요."
석이는 혼란에 빠진다.
"하는 데까지 해볼밖에 없질 않소?"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17장 뜨거운 모래
산청장 객줏집 주인 석포는 오십 고개를 넘고도 중반기에 접어들긴
했지만, 좀체 늙을 것 같지 않았던 곱상한 그 얼굴은 주름투성이였다. 병을
앓는지 안색도 좋지 않았다.
"이서방 오래간만이요."
삼베 동저고릿바람에 보릿짚 모자를 쓴 환이, 목에 걸친 수건을 걷어
땅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
석포는 확인 줄 알면서, 그래도 반신반의의 눈으로 바라본다.
김환이요."
광주리면 목기를 잔뜩 실은 지게를 삽짝 옆에 내려놓은 강쇠도 머리를
동여맨 수건을 끌러 얼굴에 빡빡 문지르면서
"요새는 좀 우떻십니까?"
하고 석포에게 묻는다. 석포는 그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듯
"어,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다."
허리를 펴지 못하고 구부정한 자세로 석포는 허둥대며 뒤꼍으로
돌아간다. 뒤꼍을 향해 방문이 있는 방의 발을 걷어올리며
"자아, 들어가시지요."
장날이 아니어서 객줏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방에 들어와서 마주보고 앉으며 석포는 그 말부터 물었다.
"오기론 한 삼사 일 됐을 게요. 한데 이서방 어디 아프시요?"
"속병이 좀 있어서,"
버릇인 듯 가슴을 쓸어 보인다.
"얼굴이 말 아니구먼."
"먹는 게 통 받질 않소."
석포는 심약하게 웃는다. 반갑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반가운데,
몸이 마음을 따라와주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웃음이다. 흙 묻은 발을
씻었는지 강쇠는 뒤늦게 와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얼굴 닦던 수건으로 발을
닦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그 동안 무슨 변이나 당했을까, 걱정했지요. 변만 당하지 않았다면
다요량이 있을 터인즉,"
하며 석포는 환의 기색을 살핀다.
"요량은 무슨 요량이요. 하기는 내 나이 사십마 돼더라도, 하하핫...
마적질인들 쓸모가 없었겠소?"
"무슨 말씀을, 오십을 갓 넘기고서. 이제부터 무르익을 겝니다."
환이보다 다섯 살 위인 석포는 개주업으로 처신하고 있을망정 상당한
학식이 있고, 지금은 죽고 없는 유도집에 비등할 만한 동학의 이론가지만,
환이에게는 전과 다름없이 깍듯한 예로써 대한다.
그리고 마적질이란 말에는 개의치도 않았다.
"돌배가 무르익은들 얼마나 무르익을 것이며,"
환이는픽 웃는다.
"이제는 지릿대를 가져오셨을 것이고 하니, 나도 산에 들어가서 약수나
마시며 병으 고쳐야겠소."
"이서방 병 고치는 거야 찬성이요만 그까짓 다 썩은 초가삼간
일으켜세우면 뭐하겠소."
차갑게 말한다. 가쇠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지금 형편이 고약하게 돼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것은 앞으로 하기
나름이지요. 지삼만이 그자 처분에 달려 있는 거 아니겠소? 그 놈만
묻어버리면 오히려, 그 식솔들이 많이 불어났으니까."
"그거는 이서방 생각하고 내 생각이 다르구마요."
강쇠가 끼여든다.
"나도 한때는 그놈을 때리직일라고 벼르기도 많이 해지마는, 그 미친놈
밑에 빌붙어 사는 놈들이야 미친 우에다가 천치가 됐는데 머에다 씹니까?
어리석은 생각이라요. 윤도집 생전에, 신도들을 많이 모으자는 주장 따문에
시비가 많았는데, 그 신도까지 심 안 딜이고 물리받을 심산을, 그거는
이서방이 생각을 잘못한 기요. 옥황 상제 노릇, 그짓 할 시비자석도 없일
기고, 하기는 환이성님이 눈 딱 감고 얼마간 구신 노릇 해주신다믄은 혹
모르지요. 미친 연놈들이 갖다바치는 가시나들, 궁뎅이나 뚜디리믄서,"
신랄하다. 강쇠는 현재 상황에 대한 울분과 환에 대한 불만을 한꺼번에
메치는 것 같았다.
"막말을 하면 쓰나. 그렇게 몰아서 얘기할 것만도 아니네."
"속터지는 소리 이자는 듣고 접지도 앉소."
"그러면 멋하러 왔나?"
"내가 아요? 성님이 가자니께 왔제요 속시원한 소리나 들을까 하고,
하마나 하마나, 미련한 놈이 별수 있겄소?"
하다가 제풀에 파시시 웃는다. 다소 머쓱해진 석포는환의 기색을 또
살핀다.
"구신이고 대신이고 하라면 못할 것 같은가? 누워 떡 먹기지. 객쩍은
소리는 그만 두고,"
하다가 환이는 석포를 향해 말을 잇는다.
"운봉어른과 윤도집, 그 밖의 연로한사람들이 다 떠난 마당에서...그때는
시절이 좋았지요."
"네?"
어리둥절한다. 석포는 환이 무슨 말을 하려는가, 비로소 의혹을 느끼는 것
같다.
"우리도 불원간 죽을 것이며 새 사람들은 제 갈 길로 갈 게요."
"말뜻을 어떻게 새겨야 할지 모르겠소만 김장수가 전주 감영에서
효수당하고 녹두장군이 처형된 지 삼십 년이 더 지났소이다."
석포의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만일 환이가 일을
포기한다면 삼십여 년 전에 죽은 부친을 생각하라 하는 의도가 있었으며,
거두들이 다 죽은 뒤 동학당은 지리멸렬, 친일파로 정좌했으며, 매국노로
타락했으며, 거듭되는 분파에다 동학란 때 중추를 이룬 농민들은 대부분
탈락했고, 또 3.1만세 때 삼십삼 인의 서두를 장식한 손병희의 이름은
찬연하였지만, 지방마다 기독교의 조직이 강렬하게 들난 데 비하여 동학은
참담한 약세였으니, 대가리뿐이 동학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매, 그러한
삼십 년 세월 속에서도 무명노장 양재곤을 돛대 삼아 소링 없이 일해오지
않았느냐, 새삼스럽게 상황 얘기 할 까닭은 없다, 그런 뜻도 있었을
것이다.
"삼십 년이면 강산이 세 번을 바뀌었을 터이고 이서방의 마음도 세 번쯤
변했을 거요."
환이는 왜 그러는지 석포를 빤히 쳐다본다. 석포는 고개를 흔들었따.
강쇠가 말했다.
"계속 이런 식이라요. 복장이 터질 일이제. 이것저것 좀 잊어부리 구로
술이나 주소."
석포는 다시 고래를 흔들었다. 환이는 다음 말을 이으려 하지 않았다.
"체머리는 와 그리 흔들어 쌌습니까? 술 못 주겄다 그 말이요?"
사팔눈이 석포를 노려본다.
"덤비지 말게. 술이 대순가? 소라도 한 마리 잡고 싶은 심정이다. 나도
오늘은 술 좀 마셔볼라네."
"그란다고 지가 사양할 것 같십니까? 속병 앓는 사람 사정 봐주게 안 돼
있단 말입니다."
"이 사람이, 나도 자네 사정 봐주게 안 돼 있어! 끝장이라는 건 어떤
꼴이든 끝장이니 매국노든, 열사든, 도둑놈이든, 하기야 뭐 나도 순
사기꾼일 게야."
석포는 갑자기 헛바닥이라도 굳어버린 듯 횡설수설하닥 술 시키러
나간다면서 등을 구부리며 방을 나갔다.
"사람이란 다 저렇게 발라맞추며 살게 마련이야."
환이 벽에 등을 기대고 한 다리를 뻗은 채 웃는다. 그리고 물었다.
"병을 앓은 지 얼마나 됐는고?"
"한 이년 남짓 됐을걸요."
"이서방은 죽는 걸 두려워하고 있어."
"다마찬가지 아니겄소?"
"...."
"꼿꼿하기가 대쪽 겉고 초기도 초롱초롱한가 싶으면 별안간 허리가 확
꺾여부린 사람겉이, 저래가지고는 이서방도 얼매 못 갈 기요."
얼마 후 술상이 들어왔다. 석포도 와서 술상 앞에 앉는다.
"정말로 마실 깁니까?"
강쇠가 묻는다. 술잔에 술을 치면서 석포는
"사팔뜨기 호걸이 제법 심약한 말씀이라. 자아 김장군, 우리 동학을
위하여 북만주 우리 독립군을 위하여,"
묘하게 허황하고 가장 된 것 같은 말이다. 그는 술을 주욱 들이켠다.
환이는 석포말에는 일고의 관심도 나타내지 않고 가만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정말로 괜찮겄십니까?"
소심하게 상쇠가 또 물어본다.
"병이란... 좀더 살고 더 사는 것쯤 맘먹기에 다린 게야. 하기야 뭐 일이
년 더 살아본들 그게 그거지 병을 앓으면서 죽을 날 기다리는 건 사실
목에 칼 대놓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게 어디 사는 건가?"
정말 병은 마음먹기에 달린 걸까, 술을 몇 잔 마신 석포 얼굴에 생기가
돈다.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김장군."
석포 입에서 김장군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물론
비꼬아서 한 말이겠지만. 그간 석포는 김환을 대할 때마다 호칭을 어떻게
하 것인가 늘 거북해왔다. 거북해하는  이유는 김환의 신분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동학의 풍운아 김개주의 외아들, 최참판댁 머슴으로서 패륜의
악명 높은 존재, 그런가 하면 생모는 어는 지체높은 양반댁 규수였다는
풍문이 있어고, 신분만 복잡했던 것은 아니었따.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서
그의 행적은 안개 속에 가려서 알수 없었다. 양재곤을 끌어내어 동학의
잔당을 모았을 때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틀림 없고, 모든 계책이
그에게서 나온 것도사실이며, 암암리에 강한 발언권을 가졌음에도
그에게는 아무런 직명이 없었다. 일을 도모하는 데 전술적인 면으로 보아
조직의 종횡을 흐려놓은 것은 당연한 일이나 환의 동태는 어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여 석포는 늘 호칭을 생략하고 그를 대해왔다.
그런 환에 관한 여러 가지 면을 이해 될 수 없었지만 그런 만큼 실제 이상
의 기대를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고, 그 기대는 불만으로 변하기도 했으며,
실제 이상의 의혹을 품고 경계 인물로 지목받기도 했었다. 환이는
김장군이라는 말을 시답잖게 듣는 듯 대답은 아니 하고 술을 마신다.
석포는 밀고 들어오듯이 말했다.
"내 오늘은 기필코 김장군의 얘기를 좀 들어야겠소이다."
"무슨 얘기가 듣고 싶소."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왔으면서도 일을 떠나서 얘기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소. 김장군의 경륜도 한번 들어보고 싶고 먼 곳을 다녀 왔어도 그곳
사정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소.”
“율도국의 왕이 된 홍길동도 아니겠고 내게 무슨 경륜이 있겠소.”
“그러나 강쇠 같은 사람은 김장군을 홍길동이라 생각할걸요?”
강쇠는 술을 마시다 말고 힐끗 쳐다본다.
“그래요? 홍길동은 임금한테 재롱 피우는 강아지였지요.”
“허허허,”
“북쪽 나라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없소이다. 중국, 노국 그 어느 나라든지
일본하고 박이 터지게 싸우는게 좋다는 말밖에는.”
“좀 소상히 말씀하지요.”
그 말 대답은 없이
“조선놈한테 쌈 잘 붙이는 재간 있는 놈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소.
약자에겐 어부지리 얻는 길 밖에,
안 그렇소, 이서방?”
“네,”
하는데 석포는 눈에 띄게 풀이 죽는다.
“자아, 내 술 한잔 받으시오. 이서방한테는 김장군이요, 밭에서는
똥장군이요, 북군에서는 말장군, 마적말씀이오. 하하하핫... 뭐 그런 거지요.”
석포는 입술을 문다. 화가 나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이서방.”
환이를 쳐다본다. 생기가 돌던 석포의 얼굴은 종전과 같이 누리 팅팅했다.
“무슨 변화를 바라시오? 무슨일이 있기를 바라시오?”
“새삼스럽게, 다 아는 일을 왜 물으시오? 내가 무슨 일확천금의 꿈이라도
꾸는 줄 아십니까?”
“애국 애국, 민족 민족 하고 떠드는 놈치고 몽상가 아닌 놈이 없는데, 나는
여태까지 이서방을 그런 몽상가로 보지는 않았소. 꼭지가 덜 떨어진 그런
시기도 지났거니와 본시 그런 사람도 아니었는데 목에 걸린 칼이 그렇게
무섭소?”
석포 얼굴에 놀라움이 나타난다. 그리고 당황한다.
“병자만 목에 칼 걸어놓고 사는 건 아니잖소. 산다는 것은 목에 칼 걸어놓은
거요. 사는 것 아니라니까요.”
“그거는 성님 말이 맞소. 항상 칼 든 놈이 뒤따라오는 것 같은 생각을
했인께요. 이서방이 허약해져서 그 생각을 많이 하는 깁니다.
강쇠가 거든다.
“무서운 게 아니요. 외로운 거요. 뭐이든 거머잡고 싶은 심정이요.”
목소리는 낮았다.
“성님, 이서방 병난 연유 모리지요?”
술이 웬만큼 돌았는지 갑자기 어세가 달라지고 들뜬 것같이 말한 강쇠는
킬킬대며 웃는다.
“미친놈,”
석포는 허겁지겁 술을 마신다.
“서울서 내리온 어떤 전도부인을,”
“이 미친놈아!”
“히히힛 흐흐흣... 말도 마이소. 거 저 나이 해가지고, 꼭 선머심아이 안
겉십니까?”
“그런 게 아니요.”
하다가 다시 석포는 환이를 보고,
“그 여자 때문에 병난 것은 아, 아니요. 병이 났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더군요. 술자리니께 뭐 이런 얘기 하는 편이 낫겠소.”
석포는 처음으로 씩 웃는다.
“아시다시피 정한 여자도 없이, 보따리 싸서 나가고 들어오고 마 그런
형편인 것은 다 아는 일 아닙니까? 내 처지가 그러하니 바람둥이라는 것도
은폐물이었지요. 한데 병이 들고 보니 당황해집디다. 계집을 계집으로 아니
보고 물건 보듯이 살아온 내 생각이 무너지더란 말입니다. 젊은 시절 동학에
투신하여 별의별 고초를 다 겪으면서 내 열기가 그곳으로 모두 쏠린 탓으로...”
하더니 석포는 메치듯
“뭐가 뭔지 알 수 없소. 나를 쥐어짜는 게 이젠 하낫도 없지요.”
석포는 폭음을 했다. 몸도 마음도 와해되어가는 과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목마른 사람같이 무슨 일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필시 서울서 왔다는
전도부인에 대해서도 그러했으리. 발버둥을 쳐보는 것이다. 환이는 뭔지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 와해되어가는 석포모습은 동학 잔당에게 다가오는 운명인
것을 환이는 예감한다. 몇 사람이나 살아남아서 어느 물줄기를 찾아 흘러갈
것인다. 들판에는 은폐물이 없고 산속은 공격 목표하고 너무나 멀다. 도시는
동학의 것이 아니다.
이튿날 아침 석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성님, 나 짝쇠한테 가보고 오겄소.”
늦은 아침을 먹은 뒤 강쇠가 일어섰다. 3.1만세 때 옥고를 치른 강쇠의
이종사촌 짝쇠는 석포의 연비로 산청정에 와서 대장간을 하고 있었다. 장가도
들고 아이도 생기고, 여전히 어딘가 모자라는 그런 푼수였지만. 강쇠가 나가고
난뒤 도로 자리에 든 환이는 살폿잠이 들었다. 시커먼 공간에 달무리 같은,
날카롭고 기분 나쁜 빛이 다가오고 멀어지고, 잠결에도 그것을 피해보려고
돌아누우면 불그죽죽하고 마치 쇠고시 썩은 것 같은 물체가 꾸물꾸물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 빛깔 물체와 실랑이를 하다가 환이는 눈을 떴다. 골 반쪽이
지끈지끈 쑤신다. 간밤의 폭음 탓이겠는데, 꿈도 아니요, 맑은 정신에서 본
것도 아닌 그 기분 나쁜 빛깔과 물체는 아주 좋잖은 뒷맛을 남긴다.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란 의식의 경고인 것이다. 입맛을 다시며 모기에
물린 팔뚝을 긁고 있는데 밖에서 누구 없느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순사 였다.
“네가 김환이지.”
“...”
“너를 체포한다..”
순사는 쳐다보기만 하는 김환에게 포승을 채우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요.” 환이와 함께 끌려나오면서 석포는 중얼거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요!”
이번에는 외쳤다.
“이놈이 찔렀구나.”
석포의 이놈이란 누구를 두고 한 말인지 그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객줏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 강쇠를 두고 한 말같이 환이는 생각되었다.
그들은 곧장 경찰서로 끌리어갔다.
그들이 잡혀간 것을 강쇠는 객줏집에 못 미쳐서 알았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잡혀간 그들을 두고 화젯거리를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필시, 나도 종구고 있을 기다.’
강쇠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곧장 짝쇠 대장간으로 되돌아온다.
마침 짝쇠댁네가 물동이를 들고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계수씨, 집에 누구 안 왔십디까?”
“아니요, 아무도 안 왔는데?”
“그러믄 짝쇠보고 좀 나오라 카소.”
안색이 달라진 강쇠를 본 짝괴댁네는 겁을 먹으며 비실비실 뒷걸음치듯
“저어. 예, 예.”
비로소 여자는 몸을 돌려 뛰어간다. 이윽고 짝쇠가 나온다. 그의 뒤를
짝쇠댁네가 주춤주춤 따라나온다. 강쇠는 손을 흔들어 짝쇠댁네한테 들어가란
시늉을 하고
“큰일났다.”
“와요.”
어리둥절하는 짝쇠 팔목을 잡고 강쇠는 급한 걸음으로 걷는다. 곧장 걷는다.
“무신 일이 있소?”
“객줏집 이서방이 잽히갔다.”
“야?”
“그러니 잠시 피신해 있다가 형편을 살피자.”
환이 붙잡혀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이거 큰일났소.”
두 사내는 대장간과는 반대 방향으로 접어들어서 한참 쉬다가 길목 주막으로
들어간가. 그들은 온종일 그곳에 묵으면서 술을 마셨다. 밤리 되기는 기다린
강쇠는
“나가자.”
“야.”
두 사내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강쇠는
“니는 말이다, 객줏집 근처까지 가봐라. 내일이 장날인께 필시 주변에는
장사꾼들이 나돌기다. 무신 말이든 잠자코 들어보아라. 그라고 저기 저어기 산
밑으로, 그 큰 바우 있는 곳으로 오는 기다. 와서 내가 없어도 기다리라.”
“야.”
하다가,
“집식구는 모리는데 이야기 좀 하고 오믄 안 되겄소?”
“거기는 내가 가볼 것인께.”
두 사내는 헤어졌다.
밤이 깊어서 일러준 대로 짝쇠가 산 밑의 바위 있는 곳까지 왔을때 강쇠는
거기 서 있었다.
“집에는 별일 없더라. 그러나 나를 찾을라 카믄 그곳이 들날 기다.”
“그라믄 우짤 기요.”
“볼일이 있어서 며칠 못 들어온다는 말을 해놨인께 니는 곧장 진주로
가거라. 가서 관수보고 얘기하는 기다.”
“머라 카꼬요.”
“음... 객줏집 이서방하고 구천이가 잽히다는 말만 하고... 피신하라 카믄 알
기다.”
“지금 갑니까?”
“가다가 주막에 들더라도, 다문 한 발이라도 더 떼놓아라. 자아, 여비.”
하고 강쇠는 지전을 쥐어준다.
“성님은 우짤라요.”
“여기 돼가는 형편을 봐야제.”
함께 걷다가 두 사람은 헤어진다.
‘이상한 일이다. 성님 온 지가 사나흘밖에 안 됐는데, 그라믄 만주서 묻어온
길까?’
강쇠는 고개를 흔든다. 그러나 어떻게 알고 잡아갔는냐는 것보다 석포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었다. 관수더러 피신하라, 그 말을
짝쇠에게 이를 때 강쇠는 석포를 염두에 두었다. 과연 석포가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환이가 잡혔다는 것이 가장 큰 충격이다.
산청서 사흘 만에, 강쇠는 환이와 석포가 진주로 압송돼간 것을 알아냈다.
‘일 커졌구나.’
산청에 더 머물 필요가 없었다. 강쇠는 곧장 진주로 달려갔다. 광주리를
장에서 받아 광주리 장수로 가장하고, 그야 몸에 밴 광주리 장수였지만,
최참판댁을 찾아간 강쇠는 연학이를 찾았다. 연학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다.
“우선 쪼깐이집, 그 비빔밥집에서 밥 사묵고 있으소. 내 이내 갈 것인께.”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알았소.”
강쇠는 엮은 광주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돌아선다.
‘이거 끝장나는 거 아니가? 혜관스님한테는 알렸는지 모리겄네.’
쪼깐이집이 어디내고 물어서 강쇠는 찾아갔다. 마당 한구석에 짐을 내려놓고
가겟방으로 들어간 그는
“여기 비빔밥 한 그릇 주소.”
서울네가 힐끗 쳐다본다. 심부름 아이가 밖을 향해
“비빔밥 하나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술부터 먼저 주소. 무신 술이 있노.”
아이한테 묻는다.
“소주, 정종, 탁배기도 있소.”
“소주를 도라.”
소주를 마시고 날라온 비빔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드는데 연학이 나타났다.
강쇠가 뭐라 하려는 순간, 외면을 한 연학은
“안녕하심니까, 사부인.”
“바같사돈은 안 계시네요.”
“늘 점방에 계사지요. 약주 드시겠어요?”
“예 한 잔만 주이소.”
그새 살이 쪄서 그런지 서울네는 별로 늙은 것 같지 않았다. 따뜻한 정종을
마시며 연학은
“지나다가 술생각이 나서 들리는데 사돈간에 서로 보기가 어렵소.”
“왜 아니겠어요. 가끔 오십시오.”
연학이 수작을 하는 동안 비빔밥 그릇을 비우고 물러나 앉으며
“잘 묵었다. 꿀맛이구마는,”
하고 너스레를 떤다. 두 번째 술잔을 비운 연학은
“낮술은 과하믄 안 되지묘. 일간 또 찾아오겄십니다. 바깥사돈한테 안부
전해 주이소.”
하고 일어선다. 속으로 피차 꼬투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네, 또 오세요.”
술값을 내도 받지 않았겠지만 속으로 당황해 있던 연학이는 술값내는 일을
까맣게 잊고 나가버린다. 성냥개비로 이를 쑤시고 있던 강쇠는 부시시
일어난다. 돈을 내고 돤주리 꾸러미를 주워들어 어깨에 걸머진 뒤 나간다.
연학의 뒷모습이 저만큼 보인다. 강쇠는 잡자코 뒤따라간다. 연학이는 남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남강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피해서
연학이는 강 하류 쪽으로 내려간다. 강쇠가 멀찌감치 따라간다. 모래밭은
뜨거웠다. 고무신에 넘쳐 들어오는 모래도 뜨거웠다. 긴장의 연속, 강쇠의
눈에서 눈물이 울컥 쏟아진다. 환이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현실로서 뜨거운
모래열기와 함께 강쇠의 가슴을 쳤던 것이다.
‘빌어묵을, 오기는 와 오노, 고만 그곳 구신이 될 기지, 오기는 와오노
말이다.’
일 그르쳤다는 원망은 아니었다. 모두 잡혀갈지 모른다는 원망도 아니었다.
환이에 대한 뜨거운 정, 그를 기둥 삼아서 살아온 자신의 생애가 가슴
저리도록 아팠던 것이다.
‘산놈으로 태이나서, 사람으로 맨들어주더마는, 이자는 다 틀린 기라.’
계속 눈물이 흐름다. 흐려진 눈에 연학의 앉는 모습이 보인다. 다가간
강쇠를 올려다보는 연학은 피시시 웃는다.
“우는 꼴 좋소. 한 두 살 묵은 아아요?”
“마 이자는 끝장이 났는가 싶구마.”
모래밭에 펄썩주질러 앉는다.
“진주로 압송된 거를 알고 왔소?”
“몰랐다믄 거기 있었제. 연학이는 우찌 알았노?”
“손을 썼지요.”
“그라믄 가맹이 있단 말가?”
바싹 다가앉는다. 연학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라믄 우찌 되는 기고?”
그 말 대꾸는 없이
“혜관스님한테도 알렸십니다.”
“...”
“관수형님은 피신하고 석이는 평양 갔인께,”
“평양?”
“사사로운 일로 갔은께, 머 우선 이곳에 없는 기이 좋으니께요, 마침
잘됐지요.”
“니는 괜찮겄나?”
“아마, 괜찮을 깁니다.”
“앞으로 우찌 하믄 좋겄노. 성님이 우찌 될꼬?”
“그거는... 김선생이 가진 힘밖에는 믿을 기이 없겄소. 우떻게 안에서 요량을
하고 기신지.”
“흐음...”
“환국이어머님한테 말심을 디릿십니다마는, 환국이아버님 일도 있고 해서,
참말이제. 이분 일은 집안에
머리 푼 꼴이 됐지요.”
“연루될 것이 없일 긴데?”
“그러씨,”
“나는 답대비, 석포 그 사람이 걱정이다. 벵나고부터 영 사램이 갈피를 못
잡고 허약해져 있인께, 배신할
사람은 아니지마는 고문을 심하게 하믄... 환이성님이 징역살이 일이 년 하는
거사 기다리믄 되는 거지마   는,”
“...”
“돌아와서도 이상한 소리를 자꾸 해싸아서 맴이 씨었는데 겔국 이런 일이
있일라꼬. 그는 그렇고 우찌 알고 그놈들이 잡으로 왔는가 그거를 아무리
생각해도 모리겄다.”
“나도 그 생각은 많이 했십니다. 온 지 며칠도 안 되고, 관수형님도 내가
하동서 와가지고 이야기를 해서 알았을 정도지요. 지가 놈이 손쓸 새나
있었겠소?”
“내 생각으로는 만주서부터 따라붙친 거 아닌가 싶은데... 그렇다믄
절에서부터 당했을 거 아니겄나?”
“하여간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고 강쇠형님도 안전한 곳에 기시야 한께
가입시다.”
“어디로,”
“우선 영팔이아제 집으로 갑시다.”
“영팔이라 카믄,”
“형님은 모립니까?”
“잘 모리겄는데?”
“ 그 집에는 삼일만세 때 형제가 잽히가고는 했지마는도, 이자는 벨일 없을
기오. 임시니께.”
“참, 짝쇠는 우찌됐노?”
“관수형님 따라갔소.”

18장 환의 죽음
“계십니까?”
대문간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
“누구십니까?”
머슴 배서방이 대문간으로 가며묻는다. 문을 열고 내다 본다. 노타이 셔츠를
입은 사내가 눈을 치뜨듯 하며 배서방을 노려본다.
“누구를 찾십니까?”
“경찰에서 왔다”
“야?”
“장연학이 있지?”
“겨, 경찰서 말입니까?” 배서방 얼굴에 겁이 더럭 실린다.
“있나, 없나!”
“예, 예, 나갔십니다.”
“어디 갔어!”
“일보러 나, 갔겄지요. 곧 돌아올 깁니다.”
“무슨 일보러 갔나.”
“모리겄십니다.”
“간 곳은 어딘데?”
“그, 그것도 모리겄십니다.”
“흥, 이새끼도 도망친 거 아니야?”
“머라꼬요?”
사내는 열려진 대문사이로 고개를 쑥 디밀며 안을 살핀다.
“안주인은 있겠지?”
“마님 말입니까?”
비로서 전세를 가다듬은 병사처럼 배서방은 불손한 사내에 대하여 까끄름한
어투로 되묻는다.
“하면은 다른 안주인이 또 있냐?”
“마님은 기시요.”
“내가 좀 만나보잔다고, 서에서 나온 나형사라고 해.”
배서방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쭝얼쭝얼하며 일부러 늦장을 부리듯
안으로 들어간다.
‘마님인가 지랄인가 그 기상 세단은 여자를 어떻게 다룬다?’
담배를 붙여문다.
‘보자고 한 건 잘못한 일일까? 도리어 코떼이는 짓 아닐까 모르겄네.’
들추다보면 어떤 결과가 될지 그것은 알 수 없으나사실 장연학이한테
혐의가있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은 관수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하여,
우선은 그렇다.
배서방은 유모와 함께 나왔다.
“마님께서 무슨일로 오셨는지 여쭈어 보라 하십니다.”
유모가 말했다. 순간 나형사는 당황한다.
“저기, 장연학에 대해서 말씀 좀 드리려고 그럽니다.” 표변한 태도로 말한다.
배서방은 수문장 같이 뻐치고 서 있고, 유모만 들어간다. 이윽고 유모는 다시
나왔다.
“들어오십시오.”
나형사는 손에 든 담배를 문간에 버리고 구둣발로 밟은뒤 유모가
인도하는데로 대청에 올라가 앉는다.
“좀 기다리시오.”
유모가 물러간 뒤 아무 일도 없는 듯 집안은 괴괴하니 가라앉는다. 정적은
마치 나형사의 뺨따귀를 갈기듯 엉덩이를 걷어차듯, 그러한 조롱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것을 느끼게한다. 천박하게 사방이 번쩍번쩍 빛나는, 이름바 새
부자의 집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나형사는 위축당하지 않으려고 양무릎에
손을 얹은채 꾸부정했던 상체를 일으켜세우며 헛기침을 한다.  그러나 육중한
대청대들보가 머리를 누르는 것 같았다. 섬세하고 단정한 장지문 문살은
냉랭한 눈초리만 같았다. 앉을 자리에 꽉 들어찬 것처럼 엄격하게 배치된
가구며, 분명 못 올 자리에 와서 자신이 앉아 있는 것 같은, 묘한
강박관념이다. 지방의 상민 출신인 나형사  의식속에는 아직도 명문거족, 만적
살림을 아울러 가진 그 저력에 대한 공포가 남아 있는 것이다. 어릴적에
양반댁에서 하정배하던 아비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나형사는 활짝 열어젖혀놓고 발을 내려놓은 후원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물을 뿌렸는지 후원의 수목은 푸르고 시원해 보였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후텁지근하다.
‘제에기랄, 언제까지 기다리나.’ 하는데 기척이 나면서 하얀 모시옷 입은
서희가 안방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나형사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쳐들고
일어서려다 만다. 서희는 발을 등지고 화문석 위에 앉는다. 자세를 바로 한 뒤
서희는 넌지시, 그러나 정면으로 나형사의 눈을 바라본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하시오.”
“저기,”
형사 노릇을 하다보니 안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나형사는 얼음장 같이 찬
서희 시선을 이겨내지 못한다. 막상 말해보라니까 서희보고 할 말은 아닌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앞선다.
“저기, 이 되게 있는 장연학이란 사람에 대해서 여쭐 말씀이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만,”
“...”
“그러니까, 그 사람은 이댁의 마름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집사요.”
“집사라면, 집사가 뭡니까?”
서희는 쓴웃음을 띤다. 마음속으로 아주 못쓰게 막돼먹은 인간이 아닌가
보다고 가늠을 해보면서
“집의 안팎 일을 내 대신 다 맡아서 하는, 시쳇말로 지배인인가요?”
서희는 의식적으로 연학의 처지를 높여서 말을 한다.
“아 네에, 마름하고 엇비슷한 일이군요. 그러면 부인의 심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막돼먹지는 않았어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오륙 년의 이력이 있는 나형사다.
그는 다음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면은 부인께서 장연학에 대하여 의심 같은 것 가져보신 적이
없었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게요?”
“아, 아니,”
“장서방이 내 소유 재산을 횡령이라도 하였다 그 말이오?”
“아, 아니올시다.”
“그러면 도둑질이나 사기를 하여 지금 장서방이 졍찰에 구금된 거요?”
“아, 아니,”
“그러면은,”
서희의 어세는 강했다.
“그게 아니올시다.”
“그게 아니라면 어째 내게 와서 심문을 하는 게요.”
“시, 심문이라니요?”
나형사는 펄쩍 뛰듯 말한다.
“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지금 불온한 일에
관련된 돤계로 수배된 자가 있습니다. 그자하도 장연학이 그 사람하고 가까운
사이라는 말이 있어서, 일차적으로 그자 행방에 대하여
수소문해야했기에,”
“내 아랫사람이 범행한 것도 아닌 터에 나를 보자 한 것은 말단포졸의
횡포치고는 존 심한 편이구먼.”
“그, 그렇겠습니다만 일단은 장연학이도 의심 안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상부의 지시란 말이오?”
“아, 아닙니다. 절대로 그건 아닙니다. 장연학을 찾아왔는데 마침 없어서,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돌아가시오. 일에는 순서가 있고 예절도 필요한 게요.”
서희는 일어섰다. 나형사는 별수없이 문밖으로 쫓겨난 셈이다.
“제에기랄! 아닙니다, 아닙니다로 볼일 다 봤군.”
예상항 대로 코를 떼인 꼴이라 화도 났으나 대항할 상대가 아닌 것을
실감한다. 나형사가 대문 앞에서 막 떠나려는데 저만큼, 발이고운 삼베
고의적삼에 흰 모시 조끼, 회색 대님을 친 연학이 보릿짚 모자를 쓰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봐!”
나형사는 저도 모르게 악쓰듯 고함을 친다. 연학은 힐끗 한번 쳐디보고는
시답잖다는 듯 걸을을 빨리하지 않았다.
“부르는 소리가 안 들려!”
“귀머러기는 아닌께요.”
다가왔다.
“제에기랄! 어디 갔다 오는 게야?”
“그건 와 묻소?”
좁은 지방이라 인사하고 지내는 처지는 아니지만 서로 면식은 있다.
“물을 만하니 묻는 게지.”
“거 너무 그러지 마소. 엇비슷하게 나일 묵어 감서 반말할 것까지는 없일
성싶은데요?”
장연학은 화가 난 얼굴이디.
“대관절 이 집터가 어떻게 돼먹었기에 입김들이 그리 드세나. 하인까지 이
지경이면 용꼬리라도 묻혀있는 거 아니야?”
“하인? 뉘보고 하는 말이오?”
“그럼 하인 아니던가?”
“실없는 소리 마소. 나형사가 계속 반말을 하믄 친구건니, 나도
반말해야겄고.”
“좋소. 그러면 내 동대하지. 장서방, 어디 갔다 오는 거요?”
해놓고 나형사는 피식 웃는다.
“장작을 딜이야겄기에 강가로 나가봤더마는 나뭇배마다 성냥개비 겉은 거만
있어서 그냥 돌아오는 길이
오. 이러믄 됐소?”
“음, 여기 서서 얘기할 수 없고 서장대로 올라갑시다.”
“무신 얘긴데 그러요?”
연학은 초조한 마음을 털끝만큼도 내보니지 않고 나형사를 따라 어슬렁거리듯
서장대로 올라간다.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이 없지 않았으나 그런대로 서장대는 한적했다.


“장서방.”
“말하소.”
“장서방은 무슨 단체에 가입한 일 있지요?”
“단체라 카믄, 가만있자, 단체라... 그런 일 없는데요?”
“독립운동하는 단체 말이오!”
비수를 들이대듯, 그 순간 나형사의 눈살이 실뱀같이 물결친다.
“머라꼬요? 그, 그런 기이 어디 있소? 사람 간떨어지게 그런소리 마소!”
연학은 내심 경악했다.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낭떠러지 아슬아슬한
곳에서 몸을 날려 안전지대로 내려서듯 당황한 그 자체를 역이용한다.
“살다가 별꼴 다 보겄네. 그런 일을 저저이 다 할 수 있일 기든가? 내가 할
수 있다믄 나형사라고 못할
게 없제. 그따우 실없는 소리는 집어치우소.”
“그러면 형평산가, 그 단체하고는 관련이 있는 거지요?”
“내가 와요? 머가 답답해거 새 백정 소리 들어감서 그 짓을 할기요?”
나형사 눈이 풀리면서 실실 웃는다.
“에이 여보시오! 그런 말, 만에 일이라도 최참판댁 귀에 들어가믄은,”
“마님 아니구먼.”
“사람 우습게 보지 마소. 알고 보믄 당신도 대접이 좀 달라질 거로요.”
“그럼 좀 압시다.”
“아까도 하인 어쩌고 하길래 내 돋는 것을 억지로 참았소만, 여수의 장아무개
하믄 모릴 사램이 없고 어
장배가 수심 척, 이름난 부자가 내 큰아부지요.”
“그렇담 우습군. 뭣 때문에 최씨네 일을 보아주나.”
“내 아부지가 그렇다믄 남의 일 보아주겄소? 한 다리가 천리라고, 그러나
그보다 의리가 있인께.”
“의리라면?”
“옛날부터 내 부친이 그 댁 땅덩이 오고 가는데 참니를 했이니께요. 말하자믄
거간인데 팔거나 사거나
그 댁에서는 내 부친 이외 딴사람한테 매ㅌ기지 않았소. 그것도 그렇고,
말이야 바로 하지, 실상 의리라
는 것도 실속이 없이믄 지키기 어러분 것 아니겄소? 시쳇말로 지배인이라
카믄 과히 나쁘지 않고 수입만
하드라도 은행 서기보다 월들한께 큰아부지 도움이야 내 급할 때 쫓아가믄
되는 기고,”
“아주 큰 보따리 푸는구먼.”
“아, 만석이 넘는 큰 살림인데 그 재산 관리가 적은 일이오?”
“그 얘기는 그 정도로 하고 당신 송관수 간 곳 알지?”
“가기는 어디로 가요?”
“음흉 그만 떨고 나중에 며칠 경칠 때 후회한들 소용없으니,”
나형사의 눈살은 다시 실뱀같이 흔들린다.
“그라믄 관수 그 사람이 이곳에서 떴다, 그 말이오?”
“어허! 왜 이러나, 응?”
“영문도 모리는 사람한테 다짜고짜로 이러믄 우짜요?”
“정말 몰라?”
“알고 모리고가 어디 있겄소. 대관절 무신 곡절이오? 형평산가 먼가 그것
땜에 그러요?”
“그런 것은 알 것 없고 송관수하고는 어떻게 된 사이지?”
“여보시오, 나형사.”
연학은 노기를 띠고 나형사를 노려본다.
“내가 도둑질을 했단 말이오? 강도짓을 했단 말이오? 살인을 했소? 아니할
말로 독립운동을 했소? 나
는 그 흔한 예수쟁이들 찬송가도 불러본 일이 없단 말리오! 죄인
추달하듯기, 반말로는 대 대답 못하겄
소.”
화를 버럭 낸다.
“아, 알았소. 버릇이 돼서, 하하핫...”
“오며가며 서로 면대하고 지내는 처지, 그러는 기이 아니라요. 당신이 칼 찬
순사보다 높은 줄을 아요만,
죄없는 백성한테까지 마구잡이로 굴라는 법은 없인께.”
“내가 잘못했소. 송관수 그놈을 못 잡고 보니 나도 모르게 신경질이 된
모양인데, 자아, 송관수에 대한
얘기나 해주시오.”
“그야 머 어럽잖지요. 그 사람은 본시 백정은 아니었소. 장돌뱅이
아들이었지요. 아까 나하고 우떻게 된
사이냐고 물었는데 좀 대답하기가 어렵구마요. 친구간이랄 수도 없고
호형호제하는 사이랄수도 없고, 그
렇다고 해서 고향 사람이랄 수도 없으니 말이오.”
“그럼 대체 뭐요?”
“그러니께 내 본가가 하동인데, 관수 그 사람 옛적에는 아비랑 마찬가지로
장돌뱅이였소. 우리집이 장터에 있기 때문에 내 어릴 적 에는 장날이믄 관수
그 사람이 우리집 앞에 전을 폈지요. 우리집이야 거간이지 장삿집이 아닌께
난전을 쫓을 까닭도 없고, 그래 그랬던지 나한테 엿도 사주고 떡도 사주고,
예적 일이지요. 그러고는 까맣게 잊었는데 뜻밖에 여기서 만났지 멉니까? 고향
사람은 아니지마는 머 비슷한 처지고 보니 만나믄 더러 술도 마시고,”
“알았소. 송관수에 대해서 아는 대로 얘기 좀 해주어야겠소.”
“아는 기이 머 있겄소. 처지가 처지인 만큼 좀 상종하기가 어렵지요.”
“어렵다면?”
“백정의 일이라 카믄 비늘만 거슬리도 천길 만길 뛴께, 말조심 안하믄은
대가리 깨질 판국이지요. 그래서
피할라 카믄 또 거머리겉이 달라붙어서 백정이 사는 술은, 머 그것도
심술이겄지마는,”
나형사는 입맛을 다신다. 신경질을 내려다 참으면서
“살기는 넉넉한 편 아니오? 집안 살림의 푼수는 어떻소.”
“그러씨요. 어럽지는 않는 모앵입니다마는 자세한 내막이야 모리지요. 집에
가본 일도 없고 집에 가자는 소리도 못 들었인께. 나도 아닌게아니라 밥술 떨
만하믄 잠잠히 있지 쌈에는 와 끼여드노 싶기도 했소. 사실 농청하고 배정들의
그 충돌이 좀 심했소? 백정하고 이야기만 해도 농청 쪽에서 쌍불을 키는데,
그러나 그 사람ㅁ들한테 못을 걸거나 원한을 사도 그거 좋은 일 아니거든요.
백정이 무서분 거는 나형사도 잘 아는 일 아니오? 니 죽고 나 죽겠다는 대는
당할 재간 없인께. 소 잡는 백정이 사람인들 안 때리잡겄소?”
“아따, 약기는,”
상대가 형사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마치 친구지간인 것처럼
차분하게 얘기하는 연학의 분위기는 말려든 나형사는 다소 친근해진 투의 말을
던지고 나서
“하여간에 골치 아프게 생겼어. 이놈을 어디 가서 잡아오지?”
“...”
“웃대가리들 날이면 날마다 불호령인데 형사징 해먹기도 어려워. 수십 척
어장배 가진 부자한테나 태어
났더라면,”
“일본 유학이나 했겄지요.”
“장서방 사촌들은 유학했다 그 말이오?”
“모두 나보다 나이 많은데 유학은 무신, 조카들은 보내겄지요.”
나형사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연학의 눈이 날카롭게 나형사 등바닥을
쏜다. 그러나 이내 사람 좋고 고지식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놈을 잡아야 일의 실마리가 풀리는데 이래가지고는 오리무중, 어디 단서가
잡혀야 말이지. 화통 터져
서 못 살겠다.”
“화통 터지는 거는 술로 달래야지요.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자 안할라요?
새귀놓고 보믄 피차 손해볼 것 없일 성싶은데,”
“그럴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바빠서 오늘은 가봐야겠소.”
연학을 돌아보며 과히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 나형사는 웃는다.
“그럼 요다음에 만납시다. 나는 먼저 가야겠소.”
손을 쳐들어 보이고 나서 나형사는 급히 서장대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가면서 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곤 한다. 나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학은
중얼거린다.
“네놈을 잡아묵으까 우찌 하까?”
고등계에는 연학과 줄이 닿는 형사가 하나 있긴 있었다. 오륙 년 전 홍이가
하동서 진주경찰서로 넘겨졌을 때 약을 먹여놓은 사람인데, 그 동안 부산으로
가 있다가 요즘 다시 진주로 돌아온 오형사, 그러나 연학은 이번 사건을 위해
그에게 접근하지는 않았다. 홍이의 경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홍이 진주로
넘어왔을 때는 이미 혐의가 없다는 그네들 심증이 있었고 사실 캐봐야 캐낼
건더기, 근거가 없었으니까 형사를 매수하는 데 위험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표면상으론 오늘 나형사가 찾아옴으로써 그것도 막연하게 들나기
시작한 것이지만 저변에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깔려있는 것이다. 냉정하게
차단하는 방법 이외 도리가 없다. 그런만큼 연악은 무슨 영문인지 모른다는
연극을 당분간 지속할 필요가 있고, 이쪽에서 접근해서도 안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보를 캐내려는 행동은 더더구나 금물인 것이다. 하여 연악은
오형사와 아는 사이라는 말을 나형사 앞에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앞으로
사태변화가 있을 적에 오형사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만일 필요하다면 다른
대상을 물색해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등계의 형사는 약을 먹이기도
어렵거니와 만약 먹었다 하면 연학의 독백처럼 잡아먹히는 꼴이 된다. 환이와
석포가 진주경찰서로 이송된 정보를 알아낸 것은 연학이 하동서 가족을 데려와
살림을 차린 봉산정집 뒷집에 세든 윤순사에게서다.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매수한 것은 아니었다. 평소부터 친해둔 터이라 눈치채지 않게 교묘히
유도해서 얻어낸 정보였다.
연학은 서장대를 내려오면서 관수와 친한 사이라는 말이 김두만이 입에서 나온
것을 짐작한다. 그러나 괘씸하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안전하다는 결론을 먼저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관수와 연학이 친하다는 것 이상으로 나형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 명확했기 따문이다. 관수와 자신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았던
두만이가 얼씨구나하고 내뱉었겠지만 다음 순간 그는 후회했을 것이다. 수십
척의 어장배를 가진 거부, 여수의 장서방을 적대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 한 말을 후회했다면 앞으로는 말조심을 할 것이요, 또 최참판댁 일만
하더라도 두만이는 이미 진주서 유지로 자리를 굳혔으며 경찰의 간부들과도
교류가 있는 만큼 동의 집안이라는 약점을 들내지 않기 위해서 관여 않을
것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어미의 압력도 고려에 넣을 것인즉,
생래의 약고 제 앞가림에는 절도가 있는 위인이라, 연학이 그 점 저 점을
종합하여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한편 경찰서 유치장의 환이는 연일 계속되는 심문과 고문에 시달리어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마룻바닥에 늘어져 있었다.그러나 고문보다 금식(禁食) 때문에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가고 있는 것이다. 의식은 맑았다.
방금 절도범의 코를 핀셋으로 집어서 장난삼아 끌고 나가던 왜형사 소노의
유들유들한 얼굴을 뚜렷하게 보았고, 연신 울려오는 밖의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도 똑똑하게 들려온다. 핀셋에 코를 집힌 절도범이 어기정어기정 소노가
가는 대로 따라 걷는 모습, 그것을 보고 웃는 경찰서 놈들, 하기는 고춧가루
탄물을 콧구멍에 들이붓는 일보다 훨씬 고마운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절도범은 자백을 했고 조서도 꾸몄으며 감옥에 넘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억울한 덤이다. 높다란 곳에 뚫린 철창문 사이로 구름 한송이가
지나간다. 환의 눈이 오랫동안 구름에 머물다가,
‘죽기는 잘 죽었다.'
눈을 감는다. 고문과 신병으로 석포가 죽은 것은 어제 일이다.
“나, 나는 모르오. 지, 진주 있는 송관수한테 물어보소.”
고문에 못 이긴 석포 말에 관수가 체포 대상이 되었고, 관수를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은 물론 환이와 석포는 더욱더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석포는 어제 숨을 거두었다.
환이는 이제부터 자신에게 가해질 고문의 손길이 늦추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단서를 잡지 못할 때 석방을 결정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무혐의로 낙착 짓지 않는 한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궁지임은 뻔한 것이다. 입을 열게 하기 위하여 살려두는 것이나,
연루를 찾기 위해 놓아주는 것이나 다 마찬가지로 환이에게는
진퇴양난이다. 그렇다고 해서 환이 그럴 경우를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것은
아니었다. 체포되는 순간부터 살아서 나오리라는 희망을 그는 버렸던
것이다. 어쨌거나 환이는 석포 죽음에 대하여 뼈에 사무치는 서글픔과
햇볕 못 본 그의 생애를 애도했으나,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홀가분한
마음이 된 것도 사실이다. 석포와의 동행은 마지막의 오기를 꺾고 말았다.
석포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사건이 심상찮음을 왜경에게
입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석포에게는 주사를 찔러가면서도 살아남게 하여
기름 짜듯 짤 것이요, 피해는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할 입은 석포의
죽음으로 닫혀버렸다. 눈치채지 않게 금식함으로써 서서히 죽어가든
아니면 혀를 물고 죽든 이제는 홀가분하게 된 것이다. 아주 홀가분하게.
뒷일을 위해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죽음이 적절할 테지만 사세
여하에 따라 자살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죄상을 내놓은 기결로
가서는 절대 안되기 때문이며 오로지 미결, 영원한 미결, 무혐의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구름송이가 지나가던 높다란 철창문에 노을이 타는데,
온종일 환이를 불러내가지 않는다. 어젯밤에도 불러내가지 않았었다.
노을이 타는 철창문을 바라보다가 환이는 다시 눈을 감는다. 홀가분하다.
말할 수 없이 홀가분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 밑바닥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은 무슨 바람인가. 모골을 쑤시는 것 같은 허무.
'더 늙으면 추해진다.'
눈을 뜨고 노을이 타는 철창문을 또 바라본다. 생애를 통하여 철창문에
비치는 저 노을만큼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조용히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환이는 자신의 생애가 성인의 길이 아니었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투쟁과 방랑, 애증과 원한의 가파로운 고개를 넘은, 평지가 오히려 발끝에
설었던 오십 평생은 마음과 몸이 피로 물들었던 것처럼 격렬했었다.
환이는 무엇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인지 그것을 생각한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여장을 다 꾸려놓고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그 얼마 남지 않았을
시간에 열리지 않을 벽을 두드려 본들 모슨 소용인가. 눈을 감은 채 환이
싱긋이 웃는다. 여러 해 전부터 진달래꽃의 여인은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저고리를 벗어 시체를 싸고 묘향산 골짜기에 묻어버린
여자, 묻고 나서, 지나간 지상의 세월은 여자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진
바람인 것이며,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있을 저 머나먼 곳에서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는가고, 환이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던 푸른 은빛의 그 밤하늘.
'그 꽃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 이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 바다, 그 속을 걷고 있다는
환가에 빠져 쓰러지면은 꿈속에서 오열하였고 꿈속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처음에는 번번이 꿈속에서 울었고, 몇 달 만에 한 번씩 몇 년
만에 한 번씩, 그리고 삼십여 년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굼속의 울음을
잊었고 여자도 잊었다. 지금은 꿈속도 아니요 진달래의 눈보라, 붉은
빗줄기, 구름바다의 환각도 아닌데 환이는 눈을 감은 채 오열한다. 눈물도
아니 흘리고 몸짓도 아니 하면서 환이는 통곡하는 것이다. 만주 벌판
마적단에 사로잡혀 두목의 두호를 받으며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였던
우스꽝스런 세월, 상해거리를 아편쟁이 거지처럼 헤매던 세월이며, 포부는
있었으나 그 세월은 이미 가을이었다. 연해주를 건너가 권필응을 만났을
때 환이는 더욱더 짙게 가을을 느꼈다. 권필응의 주름진 얼굴에서 지난날
보았던 이동진의 모습이 어른거렸던 것이다. 그 수많은 독립투사
애국열사들의 마지막 운명의 그늘이 권필응만 피해가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없는데 발바닥 몇 치, 안좌할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뛰어야 하고
뛰지 못할 때 냉엄한 것은 인심 탓이 아니다. 망명의 풍상은 눈물을
마르게 하고 사정은 누구나가 죽이고 왔으니 말이다.
"마적질 할 만하든가요?"
함께 술을 마시다가 권필응이 웃으며 물었다.
"할 만하더이다. 화적떼 출신인 줄 모르셨소?"
"그랬던가요? 하핫핫..."
두 사내는 공허하게 웃었다.
"신라놈들이 못나서 빼앗긴 그 땅인데, 아직도 우리 것이라면 못해도
장작림, 설마한들 김형이 마적의 종자 노릇이야 하였겠소?"
"죽은 자식 고추 만지는 격이지요."
"신라의 경우를 우리 역사상 오류라 지적한다면 일본의 대륙 진출을
비난하기도 어렵고, 아전인수로밖엔 논리가 성립되지 않을 것 같소. 먼
앞날을 내다볼 때 민족주의라는 것도 한낱 고물이 돼버리지나 않을는지..."
권필응은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권필응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환이는
모르지는 않았다.
"핏줄이란 본능인데, 생명이 있는 한 애비 어미를 부정할 수 있겠소?"
"그렇지요. 문제는 거기서 잘라버려야 할 게요. 우리는 철학자가
아니니까,"
"성인도 아니구요. 저승에 가면 아마 바늘산으로 내몰릴 거요."
두 사람은 껄껄걸 하고 한바탕 웃어젖혔다. 모스크바에서 불어오는 바람,
민족주의자 권필응이 인터내셔널의 고개를 넘기 얼마나 어려운가를,
연해주에 거주하는 독립지도자 권필응은 나이에서보다 그 양편의 갈등으로
하여 급속하게 구세대로 탈락되어가는 것을 환이는 느꼈다. 이동진보다
훨씬 앞섰던 사람, 기존 가치를 깡그리 부정했던 과격분자 권필응, 그는
공산주의자는 될 수 있었을지언정 민족주의, 독립에 대한 갈망만은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마적놈들이 쉴새없이 들쑤셔주어야 하는데, 왜놈과 내통을
하든 아니 하든 왜놈 군대를 대륙 깊숙이 끌어들여 불을 질러야,"
"중국인들이 들으면 김형을 타살하려 할 게요."
"뭉개고 있다고 해결이 나겠소?"
"..."
"어차피 어느때든 치러야 할 일이라면 빨라서 나쁠 것 없겠지요. 상대가
쇠하기를 바라고 싶겠지만 바람이 차서 절로 터지는 불통은 아닐 테니까,
차라리 그리 되면은 국공합작이다, 봉천토벌이다 할 것도 없고 내 잘났다
너 잘났다, 쫓고 쫓기는 그 대가리들도 별수 있습니까? 손잡을 도리밖엔,"
"그럴까요? 쉬운 일일까요? 변절자도 함께 사는 이 대륙의 특성을
김형은 모를 게요. 땅덩어리가 좁은 조선이나 일본의 신경질적인
결벽증하고는 양상이 딴판이오. 우리네들은 목적을 위해 과정에 대해서는
비정해져야 한다는 다짐이 필요하나, 그들은 목적을 위해 과정을 대수롭게
여기질 않는 편이라 봐야 할 게요.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수많은 혁명가, 집권자까지 숙적인 일본을 등에 업고자 한
사람들을 얼마든지 예거할 수 있지요. 장작림을 보시오. 어차피 왜놈 손에
갈 게요만,"
"장작림이 뒈지든 어쩌든 그건 남의 집 사정이고, 러시아, 중국이 일본의
출병을 송충이같이 싫어하는 것도 작금의 일이 아닌데 따지고 보면 그것도
미봉책에 불과한 거지요. 아무튼 조선은 중일전쟁이든 노일전쟁이든 전쟁
없이는 결과가 나지 않소. 지난날 청일전쟁, 노일전쟁의 결과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니 또 다시 중일전쟁, 노일전쟁으로 빚을
갚아주어야 하는 게요."
"그 결과가 문제지요. 해서 우리 자리가 필요한 건데... 결국 사람과 돈
아니겠소? 내국의 성금은 기대할 게 못되고 중국과 소련에서 짜내는 것이,
그러나 중국은 자중지난이요, 소련은 흑하사변에 데었으니, 허허헛... 김형
말씀대로 전쟁에 기대해볼밖에 없구려. 우리도 함께 피를 흘리는 전쟁
말씀이오."
길상은 또 이런 말을 했다.
"중국만 자중지난이겠습니까? 내 나라도 잃은 주제에 우리 쪽은
어떻고요? 그러나 저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정치나 지도자들이 그
지랄발광이라도 백성들은 자라고 있으니까요. 문물이 발달하는데 인성이
발달 안 하겠습니까? 세계대전 후, 자중지난속에서도 중국은 상당한
국력을 회복했으니까요. 자란 것이 어떻게 자리를 잡을 것인가, 그때
지도자의 역할이 큰 것 아니겠습니까? 민중은 지도자가 키우는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스스로 크는 거지요. 저는 중국이나 조선이 결코 정복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환이는 몸을 돌린다. 창살문 밖이 캄캄했다. 꿈속에서 울다가 깨어난
것처럼 목이 꽉 잠긴 듯했고 가슴은 맷돌에 짓눌린 듯 답답하다.
"저놈 눈깔 보통 아니야. 이건 의외로 큰 수확인지 몰라. 여간해서
저새끼 입 열지 않을 게야. 그러나 두고 보면 알게 된다."
고등계 주임은 계속 내리깔거나 눈을 지레 감고 있는 환이에게 그런
말을 했다. 눈깔이 보통 아니라는 그의 말은 직감에서 온 건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환이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고문과 심문은 이석포에게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얻어낸 것이 송관수의 이름이었다. 환이 고문과
끈질긴 심문을 당하기로는 관수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한 데서 시작되었다.
도둑질을 했다든가 살인을 했다든가 그런 답변에는 증거 제시가
뒤쫓아오고, 그러다보면 오히려 시끄러워질 것인즉 환이는 계속 묵비권을
사용할밖에 없었다. 사실 호적도 없었고 어디 기재된 주거지도 없었고
연고지는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 물론 호적이 있고 기재된 주거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묵비권을 행사하는 한 알 도리가 없는 일이지만,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설사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간주한대도 환이로서는 이런
경우 빠져 나가기 위해 어떤 교묘한 재주를 부린들 그게 함정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느덧, 유치장의 빨가숭이 전등이, 파리똥이 무수하고 거미줄이 늘어진
천장을 비춰주고 있었다.
'장횡거는 우주의 본체를 태허라 했다. 태허는 기체로서 기에는 음양이
있고, 기가 응결하여 고요함이 음이요 기가 흩어져서 움직이는 것이
양이라, 하여 만상은 음양이기의 부침승감이며, 모여서 만물이 되고
흐트러져서 태허로 돌아가며 생멸은 불증불감이라. 허허헛... 허허헛...
귀신은 음이요 신은 양이라 하였던가?'
장횡거는 중국의 철학자, 송대의 사람이다. 그가 즐겨 병사를 논함을
보고 범문공이 그의 재주를 아껴 중용을 내어놓으며, 유생은 높은
가르침을 즐길 것이어늘 어찌하여 군변의 담론으로 일을 삼느뇨 하고
꾸짖었기 때문에 대오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한다.
환이는 갑자기 왜 장횡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생사의 벽을
생각다보니 장횡거의 태허설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귀신은 음이요 신은 양이라...'
묘하게 환이는 그 말에 매달린다. 오십년 생애에 수많은 사람들과
작별을 하였다. 이제 작별하였던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나 그리움하고도
작별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전주 감영에서 효수된 부친, 제삿날 밤 무덤을
찾아갔었던 무덤 속에 잠든 모친, 묘향산 골짜기의 불여귀 같은 여자,
생애를 피로 물들였던 그 사람들의 추억도 버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있을 저 머나먼 곳에서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던 푸른 은빛 그 밤하늘이 아직 가슴에
있어서 환이는 귀신은 음이요, 그 말에 집착해보는 것일까. 귀신은 음이요
신은 양이라, 음양의 이기가 굴신하여 자연의 묘용천지만물을 낳게 한다면
환이는 여자를 꽃이 되게 하고 자신은 나비가 되고자 하는가. 아비, 어미는
길잡아주는 도요새가 되고 자신은 새끼 도요새가 되어 머나먼 창공을 날자
하는가. 아니면 불륜, 패륜의 어미와 아비와 여자와 자신이 손잡고 피
흘리며 바늘산을 걷고자 하는가.
한밤중이다. 유치장의 문이 열렸다.
"김환이 나와."
환이는 엎드린 채 꼼짝 않는다. 다른 잡범들은 잠에서 깬 모양인데 숨을
죽이며 자는 시늉이다. 형사가 들어와서 환이를 일으킨다.
"기운없어?"
어조가 부드럽다.
"자, 내 팔 끼라구."
"어디 가는 거요?"
"여기는 냄새도 나고 더러우니까 깨끗한 독방으로 간다. 대우해주는
거야."
"그래요?"
이끌리어 방을 나가면서 환이는 돌아본다. 실눈을 뜨고 쳐다보는
잡범들을 향해
"잘 있게."
독방에 들여주고 형사는 가버렸다.
"흠, 이젠 밥 줄 사람도 없군."
그간 취조관들은 환이 금식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금식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속이 안 좋다는 변명을 하며 아주 소량만 취했을 뿐 잡범들한테
나누어주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금식이라기보다 감식이라 해야 옳겠다.
"허허헛... 허허허허어헛... 이 날 대우해주는 거라구?"
이튿날 아침, 환이는 스스로 목을 졸라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제 4편 긴 여로
1장 사춘의 상처
생인손의 치료를 받고 환국이 박외과의원에서 나올 때 일이다. 앓는
생인손이 오른편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왼손으로 좀 세차게 문을 밀기는
했었다.
"앗!"
열려진 문밖에서 비명과 함께 휘청거리던 소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세차게 밀어젖힌 문에 얼굴이 부딪친 모양이다.
"미, 미안합,"
사과를 하다 말고 환국은 자신도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도망을
치려는 자세로, 그러나 선 자리에 못박힌 채 시야를 빨아당기는 물체를
응시한다. 그것은 확실히 괴물이다. 소녀의 한쪽 손등에 꾸물거리고 있는
것만 같은 자두알보다 훨씬 큰 혹은 푸른빛과 자줏빛이 얽섞인 울퉁불퉁한
징그러운 형체였다. 환국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으나 다음 순간 두 손을
등뒤에 감춘 소녀의 얼굴은 거의 잿빛이었다. 크고 뚜렷한 눈동자가
환국이를 노려본다. 그 눈빛은 살기였으며 어둡게 타는 불꽃이었다. 언제
그랬는지 소녀는 병원 안으로 사라졌고 환국이는 병원 밖에 나와 있었다.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르고 차가웠다. 환국은 토할 것만 같은 현기를
느끼며 걸음을 옮긴다. 소녀가 양소림이 아니었던들 기분은 다소 안
좋았겠지만 그 불구자를 위해 가슴이 아픈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충격은
너무나 컸었다. 충격이기보다 일종의 공포였는지 모른다. 순간적으로 느낀
혐오감, 또 계속해 남아 있는 징그럽다는 느낌에 자기 불신,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진주 지방의 일각을 점유한 지주이며 또 한말까지
고관대작은 아니었지만 벼슬길에 있었던 양씨 집안의 딸 소림에 대하여
환국이 알고 있는 것은 서울 K여고를 다닌다는 것뿐이다. 소학교에 다닐
적에는 그를 한 번도 본일이 없었다. 서울에서 소학교를 다녔는지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방학이면 간혹 정거장에서, 진주거리에서 한두
번인가 그 소녀를 본 일이 있었다. 지난 겨울방학, 그러니까 방학을 집에서
보내고 상경했을 때다. 기차를 탈 적에는 보지 못했는데 서울역 플랫폼에
내려서 몇 발짝이나 걸었을까? 트렁크를 땅바닥에 내려놓은 채 두 손을
외투 호주머니 속에 찔러넣고 서 있는 여학생의 뒷모습이 있었다. 그가
양소림이었던 것이다. 때때로 장서방이 서울을 내왕했으므로 필요한 것은
날라다주었고 또 대개는 임교장댁에서도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늘
홀가분하게 책과 옷 한 벌 정도로 귀성하고 상경했던 환국은 마음속으로
'저 가방이 무거워서 저러고 있는 걸까? 좀 들어주겠다면... 그랬다가
화라도 내면 어떡허지?'
땅바닥에 놓인 가방이라는 것도 실은 과히 큰 것은 아니었다. 환국이
망설이며 서 있는데 갑자기 양소림은 장갑 낀 한쪽 손을 번쩍 쳐들었다.
"...?"
감색 양단 두루마기를 맵시 있게 입고 진갈색 여우 목도리를 두른 젊은
여자가 사람 속을 헤치며 웃는 얼굴로 다가온다. 품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화장이 짙었다.
"미리 들어와 있지 않고서, 엇갈릴까 싶어서 혼났단 말예요."
투정부리듯 소림이 말했다.
"좀 늦었구나. 어이구 이 애기, 혼자 오면 누가 업어갈까 봐서?"
환국이 걸음을 떼어놓으려는 순간 여우 목도리의 젊은 여자가 환국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여자의 시선을 쫓아서 소림이도 되돌아보았다.
"어머!"
검정 외투 위에 둥글고 눈매가 뚜렷한 소림의 흰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
볼에서 귀밑 뒤에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대하기론
처음이지만 소림의 당황하는 태도는 의외였고, 반사적으로 환국이도
걸음을 옮겨놓는데 발바닥이 땅에 닿는 것 같지가 않았다. 소림의 태도는
환국이를 얼마나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준 것이다. 허둥지둥
걷는데 뒤에서 여우 목도리의 여자가
"누구니? 너 아는 학생이냐?"
하고 묻는다. 소림은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알기는, 진주 최참판댁,"
"아드님이냐?"
"..."
"그래애? 애들도, 서로 알고 지낼 만한 집안끼린데 그리 놀라자빠질 것
뭐 있니?"
"이모도 참, 제발 떠들지 말아요."
낄낄낄 웃는 여자 웃음 소리,
"아, 아야! 이애가?"
소림이 꼬집은 모양이다. 그러고는 아무 소리 없이 그들도 뒤따라 걷는
기색이다.
"아니, 저기 저분은, 아이구머니나, 언니!"
환국은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여우 목도리의 여자는 소림을 이끌고
대열에서 빠져나간다. 여자를 향해 잠시 손짓을 한 사람은 명희였다.
명희는
"환국아!"
하고 이번에는 환국에게 손짓을 하는 것이다.
"아주머니, 웬일이지요?"
환국이 다가가며 묻는다.
"응, 평양 가시는 친척 전송하러 나왔는데 네가 온다기에 널 데리고
효자동 가마고 했다."
"그럼 전 밖에 나가서 기다리겠습니다."
환국은 어리둥절해하는 여자와 민망해하는 소림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러겠느냐? 차가 있으니 그 옆에서 기다려라."
소림의 이모가 소림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명희는 환국에게
다정스러웠다. 임교장댁에 사 년 넘게 묵는 동안 이따금 친정에 들르는
명희는 조카들보다 오히려 환국이를 더 사랑했었다. 환국이 역시 이모나
고모처럼 명희를 대하게 된 것이다. 환국이 조병모 남작댁 자가용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니 기차가 떠나는지 기적이 울렸다. 겨울방학은
끝났어도 겨울은 아직 머물고 있는 서울의 거리, 환국은 얼마 전 소림을
보았을 적에 그 강렬했던 느낌과 소림의 모습이 가위로 잘려진 듯,
우중충한 서울의 거리,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을씨년스런 모습만
의식에 실려온다.
'왜 그 기차에서 내렸을까. 기차로 곧장 갔으면 아버님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을...'
언제부터였던지 환국이는 기차에서 내려 역 광장에 나오면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임교장은 아버지를 만나러 가고 싶다 했을 때 공부해야지,
서의돈아저씨는, 부친을 찾아가기엔 나이 어리다는 말을 했었다.
"오래 기다렸지?"
회색의, 거의 발끝까지 내려온 망토를 입은 명희가 다가왔다. 여우
목도리의 여자도 함께, 그리고 소림은 주춤거리듯 뒤따라왔다.
"어쩌면 저리 조각을 한 것같이 잘생겼수?"
명희를 보고 소림의 이모는 환국이를 칭찬했다.
"조각 같다는 건 칭찬으로 안 들리는데?"
명희는 웃는다.
"아니에요 언니, 저런 아들만 하나 둔다면 결혼한 것도 과히 밑지는 일
아닐 거예요."
"환국아."
"네."
"이분은 내 후배 홍성숙 씨, 성악가시다. 인사해라."
환국이 꾸벅 절을 한다.
"얘기를 듣고 보니 저 여학생도 진주서 왔다는데 서로 안면은
있겠구나."
이번에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으나 소림의 눈에 겁이 더럭 실렸다.
반대로 환국의 목덜미가 벌개진 것이다.
"그럼요 언니, 얘들이 아직 순진해서, 서로 알 만한 집안인데 말예요.
최참판댁 아드님도 잘생겼지만 우리 소림이도 좀 예뻐요?"
했으나 말을 끝낸 홍성숙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소림은 달아나듯이
돌아서다 말고 이모의 팔을 꽉 끼는 것이었다.
"성숙이 함께 타서 가지, 응?"
"그랬으면 좋겠는데 방향이 다른걸요."
명희는 다시 권했으나 홍성숙은 굳이 사양한다. 자동차가 떠날 때
환국의 눈은 소림의 겁먹은 눈과 부딪쳤다.
"환국이 너 이제 보니 상당히 부끄럼쟁이구먼. 그래 어머님은
안녕하시냐?"
"네."
"집에 별일은 없고?"
"별일 없습니다."
그날 밤 환국은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새카만 외투 위에
마치 복사꽃이 핀 듯 새빨개졌던 소림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방학이 되어 집으로 내려간다는 것에 다른 또 하나의 의미와 새로운
기대를 가졌었는데, 그 몇 달 동안의 꿈이 박외과의원 문 앞에서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동경에 대한 배신, 그리움에 대한 배신, 양소림에
대한 배신, 환국은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양소림에 대하여 실망했다고
간단히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다. 그 끔찍스런 결함을 몰랐기 때문에
기만당한 것 같은 기분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방금 느낀, 지금도 느끼는
혐오감은 진실에 대한 배신 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고, 자기 자신을
배신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 소년을 담은 거울이 길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형!"
환국은 듣지 못하고 그냥 걷는다.
"형!"
겨우 돌아본다. 수건과 수영복을 똘똘 말아쥐고, 남강에서 수영하다
돌아오는가 윤국이 다가온다.
"병원에 갔다 오는 거요?"
"응."
"손가락이 몹시 아파요? 얼굴이 노오래."
"..."
"참, 형."
"왜 자꾸 불러."
"강에서 순철이형 만났수."
"그래서."
"형 안부 물으면서 한번 놀러 오겠다나요?"
"그래?"
새까맣게 탄 윤국은 형의 눈치를 힐끔 살핀다. 네 살 터울인 윤국이는
올해 열세 살, 두 아들을 다 서울로 보내기가 안됐던지 윤국이는 금년
이곳 중학에 입학했다. 그러니까 환국이와 함께 서울K중학에 시험을
쳤다가 낙방한 이순철은 서울 진학을 단념하고 이곳 중학에 들어갔으니까
윤국에게는 상급생이다.
"형은 아직도 순철이형하고 감정이 안 좋아?"
"안 좋을 게 뭐 있니? 잘 만나지도 못하는데,"
"순철이형 우리 학교에선 이거요."
윤국은 엄지손가락을 내보인다.
"실력이 있으니까."
"공부도 잘하지만 기운도 세거든요. 장사같이 몸집이 커요."
"너한테는?"
"잘해주느냐 그 말이오?"
"응."
"그 형은 오학년이구 나는 일학년인걸. 잘 만날 수나 있나요? 하지만 나
순철이형 과히 싫지 않아. 씩씩하고 공부도 일등하는걸. 형한테는 못
당하겠지만 그 대신 힘이 세거든요."
"힘센 게 좋아?"
건성이다. 건성으로 묻는다.
"남자라면 힘은 세야지요. 형, 나는 장차 검사가 될래요."
"뭐라구?"
"나쁜 놈들 혼쭐 내주게요. 사정 안 둘 거예요."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은 어쩌고,"
"그때까지 우리가 독립하면 될 게 아니오?"
"기가 차서,"
환국은 하는 수 없이 웃는다.
"우리 친구들 중에는 힘이 있는데도 모범생 아니라 할까 봐서
나쁜놈하고 싸우려 안 하는 놈이 있는데, 나는 그런 비겁한 자식은 싫어."
"힘만 가지고 싸운다고 이기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맨날 강에 가서
사니까 어머님이 걱정하시잖아."
"강에 간다고 뭐 공부 안 하는 줄 알아요?"
"무슨 소릴 하는 게야?"
"굉장히 엄하시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눈 한번 까딱하지 않으시면서,
우리들한테는 잔걱정을 하시니까 그렇지."
"그게 어째서 이상하니?"
"대개 사람들은 약하거나 강하거나 좋거나 나브거나 어느 한편, 안
그래요, 형?"
"글세..."
"맥빠지네. 형은 너무 착한 게 탈이란 말이오."
"건방진 소리 마."
"남들이 다 그러던걸?"
"바보라는 얘긴가 부지."
"학자밖엔 못될 거래요."
"그렇담 바보라는 얘기는 아니구먼."
"어이구 배고프다."
형제는 집 앞에까지 와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집안으로 들어간다.
"도련님, 점심도 안 드시고 여태 강가에 계셨드랬어요?"
안자가 나오며 묻는다.
"배고파서 빵은 사먹었지만, 밥 빨리 차려주어."
환국은 아무 말 않고 사랑으로 들어간다.
"목간통에 가셔서 몸부터 씻고 나오셔야지요."
"귀찮아. 안 씻으면 어때서 그래?"
"피부병 옮아요."
책상 앞에 앉으며 환국은 두 손으로 얼굴을 빡빡 문지른다.
'어째서 그럴까? 병원에서 수술로 잘라내버릴 수는 없는 걸까?'
책상 위에 팔을 얹고 그 팔 위에 턱을 고인다. 독서로 인한 지적 수준은
상당한 높이에 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나이는 나이다. 환국이는 계속
자신을 미워하는 감정에만 사로잡힌다. 그리고 계속 착각하는 것이다.
끔찍스런 그 혹을 본 뒤 혐오를 느꼈다는 것이 큰 배신이라고. 마치
소림을 깊이 사랑했던 것처럼, 둘이 서로 같이 사랑하다가 양소림을 버린
것처럼.
이튿날 새벽, 볼일이 좀 생겼다면서 유모를 데리고 부산으로 떠나는
어머니를 전송한 환국은 돌아오면서
"무슨 일일까?"
궁금하고 일말의 불안도 있었으나 전에도 더러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그러려니 했다.
환국은 반나절을 낙서도 아니요 그림도 아닌, 얼굴이며 손이며 발이며
그런 것을 그리며 보낸다. 생인손은 아물 단계이긴 했지만 박의사는 내일
한번 더 오라 했었다. 그러나 환국은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다시는 그
병원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거리에도 나가기가 싫었다. 거리에 나가면
양소림을 만날 것만 같아서 두려웠던 것이다.
'만일 내가 양소림하고 결혼한 사이라면? 그 혹 때문에 도망쳤을까?
도망쳤다면? 그래, 그건 성한 여자를 버리는 것보다 더 못할 짓을 한 게야.
눈을 감고 뒤통수를 감싸고 달아나는 남자처럼 못나고 겁쟁이고 비정한 게
또 있을까? 바로 내가 그런 놈이다. 절대로, 절대로 양소림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두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환국은 주먹으로 책상을 꽝! 친다.
'어디로 달아날까? 어머님을 따라 함께 부산으로 갈 걸 그랬나? 아니야,
하동에나 갈까, 섬진강에서 낚시질이나 할까?'
더 이상 그려볼 수 없게, 새까맣게 된 종이를 뿍 찢어버리고, 새
얼굴같이 하얀 종이에 다시 얼굴이며 손이며 발이며 그런 것을 계속
그리며 하얀 여백을 메워나간다. 그린다는 의식도 없이 쭉쭉 선을
그어나간다.
저녁때가 거의 가까워졌을 무렵
"형! 형!"
하며 윤국이 소란을 떨며 사랑으로 들어온다.
"나와봐요, 형! 순철이형 오셨수!"
환국은 본능적으로 화닥닥 몸을 일으킨다.
"환국아!"
완전히 변성을 해버린 우렁우렁 울리는 음성이다.
"순철이 네가 웬일이냐!"
우울했던 환국이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순철도 씩 웃는다.
"수영하다가 만났어요."
윤국은 쫑알대듯 말한다.
"임마, 니는 꺼져라."
순철은 윤국이 머리에 알밤을 먹이는 시늉을 한다. 윤국은 낄낄거리며
쫓아나간다.
"들어와."
"응."
방에 들어온 순철은
"오래간만이구나."
"앉어."
순철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앉는다.
"니는 변함없이 약골이고 꽁생원이구나."
환국이 피식 웃는다.
"하기는 내 대가리를 깬 놈은 너밖에 없다마는."
"미안하다."
"그거 다 한때 앙이가. 자라느라고 그랬일 기다. 하기는 그랬기 때문에
너한테만은 내가 경의를 품고 있지. 하하핫 하하하하... 이기기만 한다믄
무신 재미가 있겠노."
"이기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어."
"니도 지는 성미는 아니제. 그는 그렇고 배고파 죽겠는데 머 나오는 것
없나?"
"저녁 차리라 할까? 좀 이르지만."
"널 만냈으니 술 한잔 하고 싶네."
"뭐? 너 술 하나?"
"와? 남아 대장부 열여덟이믄 어른이다."
"나는 아직,"
"뻔한 일이지 머,"
하다가 순철이는 "윤국아, 윤국아!"
하고 큰 소리로 부른다.
"네에!"
윤국이 달려온다.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너 말이다아, 소주 한 병 사오너라. 몰래, 알았나?"
"소주를요?"
"허허 참, 이래서 이 집엔 오고 싶지 않았다. 윤국아, 동생은 형을 위해
봉사하는 게야. 돈 주까?"
"있어요."
갑자기 신이 난 듯 쫓아 나간다.
"걱정 말아. 내 주정 안 하께. 도둑술을 배워서 이래도 술버릇은
얌전하다. 생각해봐. 모범생은 아니지만 나 우등생이야. 우등생 체면이
있지. 하하핫..."
"하긴 그래. 네가 여태 술을 안 배웠다면 그게 이상하지."
환국이는 밖으로 나가 안자를 부른다.
"친구가 배고프다니까 저녁상 빨리 차려주어요."
하고 방으로 들어온다.
"그는 그렇고 명년에는 우리 진학해야 하는데 환국이 너 우짤 것고?"
"또 한번 머리 깰려고 이러나?"
"이번엔 너 따라 안 간다. 넌 작정했나?"
"아니,"
"그럼?"
"차차 의논을 해야지."
"지가 가는데 지하고 의논하믄 되는 기지."
"글세."
"나는 집에서 경의전 가라고 하는데 의사는 취미 없다. 의사가 싫으면
고등상업으로 가라, 그것도 취미 없고 정통 코스를 밟고 싶다."
"...?"
"내 지망은 법과다. 고등학교냐 대학교 예과, 어느쪽을 택하는가 그거는
생각중이지만, 넌 어느 과로 가겠나? 우리 다시 경쟁하자, 좋은 뜻으로.
서로 자극을 받는 건 나브지 않지. 넌 명문 중학의 학생, 난 지방이지만,
실력이 문제 아니겠나? 대학만은 내 세상없어도, 아카몬 아니면
경도제대라도 들어갈 작정이다. 넌 우짤래?"
"나는, 어머님이 반대하실 것 같아서 아직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미술을 할까 싶어."
"뭐라구? 임마, 니 정신 있나?"
"소질대로 하는 거지 뭐."
"맥빠지는 소리 집어치아라, 환쟁이 될라고 니 명문 중학에서 일이 등
했나?"
그 말은 순철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환국이 자기와
꼭같은 코스로 갈 것을 믿고 있었던 눈치다. 사실 환국이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속으로 은근히 고민해온 터이다. 주변에서는 거의가 다 순철이와
같은 기대를 하고 있었으니까.
"너도 알겠지만 내 성격이, 활동적이 못되거든."
"공부하는 데 활동이 무신 상관고."
"공부에 그치는 일이 아니잖아."
"젠장, 해놓고 보는 거지."
"적성에 안 맞으면 허송 아니겠어?"
"그렇담 니는 아주 딱 작정을 했구나."
"..."
"형, 형, 술 사왔수."
윤국이 방문을 조금 열고 소주병을 디민다.
"저녁상 차리라 했으니 윤국이 넌 아무말 말어."
윤국이는 낄낄대며 재미가 나 죽겠다는 시늉을 하며 나간다.
"너 동생은 딴판이다."
"그앤 공격적이지, 늘."
"자식이, 한자리 하겠어."
"한자리 하면 뭘해. 나라 없는 백성이,"
"너 그래서 미술하겠다는 건가?"
"반드시 그런 건 아니야. 그림이 좋으니까,"
"좋다고 업을 삼는다믄 난 씨름꾼이 돼야겠구나."
저녁상을 가져오는 모양이다. 밖에서 기척이 났다. 순철이는 얼른 술병을
들어 책상 밑에 감춘다.
"이력이 나서 잘하는구나."
환국이 웃는다.
"아이구, 도갓집 도련님 오셨네요."
안자는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찾아온 것을 반가워한다.
"이거 미안합니다."
순철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쑥스러운 듯 웃는다.
"잘 오셨수."
"상이나 어서 디밀어주소. 배고파 죽겄거마는,"
상을 내려놓고 안자는
"사람은 열두 번 변성한다는데 참말 많이도 변했어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안 있십니까?"
모두 웃고, 그리고 안자는 나갔다. 한 살의 차인데도 순철의 사람을
대하는 품은 아주 능숙했다.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게 자란
탓인가 보다. 그러나 내면적 성장은 환국이 편이 훨씬 빨랐고, 문제를
세분해가는 치밀한 면과 풍부한 정서는 순철에게는 아득한 것이다.
밥상을 당겨놓고 책상 밑의 술병을 꺼내려던 순철은 책상 위에 그려젖혀
놓은 그림을 본다. 한 장을 슬쩍 집어든다.
"아서, 낙서한 거야."
"허어, 낙서가 이만하믄 진짜 그림은 기차겠구나. 알 만하다, 이걸 보니."
"어릴 적부터 그렸거든."
"그런데 이 얼굴은... 아아니, 이 얼굴은 양소림이 아니가?"
"뭐라구?"
"응, 양소림이다! 이 손, 손은,"
"어디 보아!"
환국이 종이를 획 낚아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하얗게 질린다. 그려놓은 손등 위에 선명하게 그려진 괴물, 그
징그러운 혹, 순철이 낯빛도 달라졌다.
"너 양소림하고 알고 지내나?" 대답 없이 종이를 확 꾸겨 쥔다.
"알고 지내느냐고 물었다."
"몰라!"
"그러면 어떻게 그림으로 그렸나?"
"어제, 병원에서 봐, 봤거든."
환국은 궁지에 몰린 듯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서울을 함께 오르내리면서..."
순철이는 하다 말고 눈살을 잔뜩 찌푸린다.
"먼빛으로 보기는 했지만,"
"불쌍하게 생각했나?"
"..."
"불쌍한 애다. 얼굴이라도 못생겼다면 얼마나 좋았으까."
"..."
"앞날이 불행할 거다."
"수술이 안 될까?"
"수술해서 될 일이라믄 아무도 혹 붙이고 다닐 사람은 없제?"
"..."
"술이나 마시자."
제법 주호같이 말했으나 사기 밥그릇의 뚜껑에다 술을 붓는 순철의
행동거지는 매우 서툴다. 환국이는 난생 처음 밥그릇 뚜껑에다 부어주는
술을 정신없이 들이마신다.
"사양도 않고 마시네? 처음 아니가?"
"처, 처음이다."
속이 타는 듯했다. 쓰고 뜨거운 맛이 입안에서 창자로 타고 내려 간다.
"술이란 급히 마시면 안 된다."
순철은 자신도 뚜껑의 술을 비우고 나서 이번에는 환국의 뚜껑에다 아주
소량의 술을 부어준다.
"순철아."
"와."
"넌 나보다 인간성이 좋은갑다."
"그건 무신 소리고?"
"나는 아찔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달아나고 싶었다. 그런데 넌 불쌍한
애라 했지?"
"그, 그거야, 나는 양소림이를 짝사랑했거든. 그애 때문에 밤잠 설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알고서 그랬나?"
"몰랐지."
"알고 나서는 그애를 잊었나?"
"잊고 자시고가 어디 있노? 양소림은 나한테 관심 없었다."
"관심 있다면?"
"관심 없었어!"
순철이는 괴로운지 술을 마신다.
"젠장, 도둑술 마시려니 이 술잔이 멋꼬?"
하다가
"실은 집안도 좋고 여러 가지 면에서 나한테는 넘치는 상대거든, 그
손등만 아니라믄. 그래서 우리집에선 혼인 문제로 말이 많이 있었다. 우리
또래에 장가간 사람 많거든. 명년 봄엔 졸업이고 양소림도 사년제니까
졸업이지."
"그쪽 집에서?"
순철은 고개를 저었다.
"집안에서 애기가 다 돼가다가, 어머니가 고개를 흔든단 말이다."
"너는?"
"불쌍해. 양소림이는 서울 외가에서 소학교를 댕깄기 때문에 그 손등에
대해선 모리는 사람이 많다."
순철은 딴전을 부린다.

2장 계명회
"이리 오너라, 거 누구 없느냐?"
누리끼한 마직 양복에 수수한 갈색 계통 넥타이를 맨 신사는 황태수다.
묵직한 몸집에 사심이 넘은 근화방직회사 사장인 황태수가 임명빈 집 앞에
와서 하인을 부른다. 심부름 아이가 쫓아나오며
"네."
"임교장 계시느냐?"
"안 계시옵니다."
"그래?"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난감하군, 다시 오기도 어려운 일이고. 부인께서는 계시겠지?"
"네."
"그러면 가서 좀 뵙잔다고 아뢰어라. 황태수라 하면 아실 것이야."
"네."
얼마 안 있어 임명빈의 아내 백씨가 황급하게 나온다.
"아니, 황사장님께서 어쩐 일이시지요?"
몹시 놀란 얼굴이다.
"안녕하십니까. 그간 한번 찾아뵙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별말씀을,"
시어머니도 별세하여 삼년상을 치렀고 이 집을 덮쳤던 3??·1운동의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지 십 년, 이제는 평탄한 일상과 안정된 중년을 엿볼
수 있는 백씨를 바라보며
"오래간만에 왔더니,"
"어려운 걸음 하셨는데 애아버지가 없어서 정말 애석합니다."
"귀가가 늦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하마 올 때가 됐는데,"
"그러면 잠시 기다려볼까요?"
"바쁘시지 않다면, 어, 어서 드십시오."
황태수는 임자 없는 사랑으로 안내된다.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이 방은 시원하군요.'
"네, 시원한 편입니다."
백씨는 부채를 내밀어주고
"그럼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하고 물러난다. 곧이어 심부름아이가 얼음을 띄운 화채를 날라왔다. 시원한
화채를 한모금 마시고 부채질을 하면서 황태수는 착잡한 표정으로 방안을
둘러본다. 그리고 입맛을 다신다. 황태수가 임명빈을 찾아온 것은 계명회
회원 모두가 검거된 사건 때문이다. 서의돈을 필두로 하여 성삼대, 선우일
선우신 형제, 유인성과 유인실의 남매, 일본인 오가다 지로, 간도의 김길상,
그 밖의 회원 칠팔 명이 체포된 것이다. 일본인 오가다는 조선에 나와
중학교 교사직에 있으면서 계명회에 관계했으므로 연루되었고, 길상은
용정촌 공노인이 경영하는 여관에서 서의돈과 만난 자리에서 함께 끌려온
것이다. 황태수로 말하면 거의가 친구며 후배들일 뿐만 아니라 선우일은
측근이라 말할 수 있었고, 비밀리에 한 짓이지만 선우일을 통해서
계명회의 운영비를 내준 일이 있었다. 계명회란 사회과학의 연구 단체
비슷한 것이다. 1920년 합법적 사회운동 단체로 노동공제회가 조직된 후
무산자동맹회, 서울청년회, 화요회, 북풍회, 고려공산청년회, MR등 좌경한
모임이 많이 조직되었는데, 상호 알력과 파쟁을 면치 못하였다 하더라도
무력해지는 민적전선에서 사회운동으로 활력을 찾고자 하는 경향이 짙었던
것만은 확실하였고,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 역시 사회주의가 팽배하는
추세여서 지식의 온상지로 되어 있는 일본의 유학생이나 유학하고 돌아온
청년층이 사회주의적 방향을 잡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거센 것이었다. 그것은 상해
임정이 약체화되어가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계명회라는
것도 그와 엇비슷한 비밀결사 같은 것이다. 대개 일본 유학생으로 구성된
회원 중에 일본인 오가다가 끼인 것이 이채였으나, 그보다 뜻밖의
김길상의 출현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겠다. 멀리 거슬러올라가보면
공노인이 서울 임역관 집을 드나들 적에 조준구를 파산지겨에
몰아넣는사람 중 서의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서의돈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현과의 친분, 기화와의 정사에
얽혀 다소는 그 일에 가담햇었다. 그러니까 공노인과는 지기랄 것까지는
없어도 면식은 있었던 것이다. 북만주 연해주 방면의 망명객 혁명가들이
관문인 용정촌을 거쳐가는 것은 상식이며, 하여 서의돈도 그곳을 거치는
동안 여과업을 하는 고령의 공노인과 만나게 된 것은 조금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이곳에서 길상을 만나게 되었고, 연해주도 내왕한 서의돈은 그러나
연해주의 권필응과 깊은 유대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여
서의돈은 그들에게는 객원이었고, 그 자신도 떠돌이별로 자처한 터였다.
서의돈과 함께 끌려온 길상은 표면상 두 사람이 우연하게 만난 것으로 돼
있었으나 길상도 계명회와 관계가 있다. 계명회는 길상에게는 국내를 향한,
말하자면 디딤돌이었던 것이다. 계명회를 디딤돌로 하여 그의 손길은,
김환의 자살 이후 유야무야가 된 사건으로 하여 형평사운동에서 퉁겨나온
관수가 부산서 상점의 주인으로 변신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닿아지게
해놓은 것이다.
황태수는 양복저고리를 벗어놓고 담배를 붙여문다. 계명회 회원이
체포된 사건의 발단은 지하 인쇄물인 책자가 경찰 손에 들어갔고, 책자에
실린 논조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황태수가 운영자금을 내준 것은 그들
사회주의사상에 동조한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방관자의 입장에서
서의돈에게 우의를 표했을 뿐이다. 자본주의 타도를 목표하는 그네들에게
자본가인 황태수가 돈을 냈다는 것은 그의 인품이며 도량이라 할 수
있었고, 주의 사상은 어떻든 반일운동에 일조를 가하고 싶은 황태수
자신의 외로움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황태수는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다. 임명빈이 씨근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거 큰일나지 않았나."
황태수가 뭣 때문에 방문했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 임명빈이 들어 서자마자
뇌인 말이다. 황태수는
"시끄럽게 됐다."
하고 잔기침을 한다. 임명빈은 마주앉으며
"회원 명단은 어디서 입수했을까?"
"그야 모르지."
"사후책을 어떻게 하면 좋겠나?"
"글세... 나도 그래서 찾아왔네만,"
"생때같은 놈들을 몽땅 잡아갔으니, 십 년 동안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다닌다 싶더니만... 의돈이 말일세."
"어떻게 생각하면 가볍게 넘어갈 것도 같은데,"
"잡혀간 사람들 하기 나름 아닐까? 일이 년 사는 건 각오해야겠지."
"요새 사람들 무모하게 객기야 부리겠나? 그리고 일이 년 같으면 별
문제 없겠다만,"
"그럼 자네는 더 이상으로 생각한다, 그 말인가?"
"그야 모르지. 어떻게 덮어씌우려는지. 그놈들 정책에 좌우되는 거지
죄질이야 뻔한 것 아니겠나?"
"하긴 그래. 어때? 술이나 하면서 애기할까?"
"아닐세. 술 마실 기분도 아니고, 좀 앉았다가 곧 가야지."
두 사람은 한동안 마주본 채 침묵을 지킨다.
"거 왜놈이 하나 끼여 있어서 찜찜하다."
황태수가 내뱉 듯 침묵을 깬다.
"첩잘 거다 그 말인가?"
"그렇게는 생각 안 하지만 일이 커질 가능성도 있거든."
"선우일이는 언제 끼여들었지?"
"글세... 처음에는 맞서서 갑론을박하더니 친구 따라 강남 간격이겠지.
자네도 점잖은 교장 선생님이 아니더면 얼씨구나 하고 끼여들었을 걸.
읊은 풍월이 있는데 가만있었겠나."
"사지를 꽁공 묶여버린 게지."
"묶인 게 아니라 철이 난 게야. 그래, 매씨는 잘사시나?"
"잘사는지 못사는지 온,"
"매씨가 들어서 자넬 구제해준 셈이야. 두고두고 감사하게."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아무리 쓸개를 빼놓고 살기로 친구가 그런 말
할 수 있어?"
"용렬하기는, 자네 적성에 맞는 자리 찾아갔다는 애기야."
"그래도 그런 말 들으면 열난다."
"무풍지대니까 잠자코 있는 거야. 제발 매부가 하는 방직에는 손대지
말구."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 못 들었어? 화통 터지면 방직에 비비고
들어가서 자네하고 맞서볼 거라구."
"그렇게만 된다면야, 하루아침에 내가 집어삼켜버리지."
"엿장수 마음대로?"
"다 실없는 애기고 땀이나 닦게. 예나 지금이나 덤비는 성질만은
여전하구먼."
"중국놈같이 늘어져빠지는 것도 여전하구."
두 사람은 별수없이 껄걸 웃는다.
"그나저나 운수 불길하면 나도 콩밥 먹게 될지 모르겠군."
"돈푼 내놨다고 떠는 건가?"
"떨기는 누가 떨어? 콩밥 먹을지 모른다는 애기지."
"세상에 황태수가 사회주의자라 한다면 관 속에 든 송장이 웃을
일이지."
"관 속의 송장이 웃고 치울 일이라면..."
"하기야 근화받직 정도, 뺏으려고 든다면야 눈만 흘겨도,"
"그러면 자네 매부는 대일본제국 만세를 부를 테지."
"왜 자꾸 들먹이나. 시류 타기론 피장파장인데, 조선 사람끼리 그러지들
말라구."
"자네가 처남이니 하는 소리 아니겠나. 조용하 그 사람 경계인물이야.
얼빠진 양반놈 집구석에서 어디 그런 요령 도둑 같은 인사가 생겨났는지
모르겠단 말씀이야."
지금까지는 농담이었는데 이번만은 황태수도 진지하게 말했다. 황태수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임명빈은 입을 다문다. 조용하
인간성이 비정한 것은 황태수보다 명빈이 더 잘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래가지고는,"
"안 되지, 나도 오늘날까지 힘닿는 대로 푼수를 지키며 살아왔네만
앞으로의 일이 난감하네."
"머리 졸고 똑똑한 놈들 갈 곳 없고, 이러다가 앞으론 말짱
사회주의자판 날 거라구. 하기야 그것이나마 힘을 모아준다면, 입만 살아서
밤낮 쌈질이니, 그놈의 쌈질 때문에 왜놈들이 좀 봐주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러다가 만일에 독립이라도 된다면 대가리 터질 게야. 도시
이론투쟁이라는 그 말부터 나는 맘에 안 들어."
"자네도 늙었구먼. 왕시 이론투쟁이라면 자네가 가장 즐기던 기호품
아니었던가? 하하핫..."
"자네도 말 많이 늘었네."
"개쩍은 소리 이제 그만 하고 명빈이 자네 수고 좀 해주어야겠어."
"어떻게."
"우리 주변에서 계명흰가 뭐 그것에 관련이 없는 사람은 자네뿐일세."
"음."
"그리고 자네 위치가 구애될 세 없으니 들어간 사람들 뒷바라지라면
우습고, 각자 자기 집안에서도 나설 일이지만 발이 맞아야 할거 아니겠어?
변호사 문제도 있고 아니 자네 재량껏,"
황태수는 양복 주머니 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낸다. 임명빈은 황태수의
의도를 충분히 양해하고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아닌게아니라, 내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긴 돼 있지. 이번에
의돈이랑 함께 간도에서 잡혀온 김길상이란 사람은 내가 데리고 있는 진주
최부잣댁의 아들, 그러니까 그애 부친이거든."
"뭐?"
"기별을 해놨으니까 오늘낼 새 부인이 올라올 게야."
"조준구 땅문서, 아니 잃은 땅을 다 찾았다는 그 여장부의 남편이 다 그
말인가."
"그렇다네."
"어떤 인물인데?"
"나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
"똑똑하고 잘났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들을 보면 짐작이 가는데,"
"큰짐 짊어지는군."
"뒤에서 좀 뛰어주기라도 해야 면무식을 하지. 아무튼 고맙네."
"고맙다는 말 말게. 나도 관련자라구."
"허허허, 뽐내는 겐가?"
"당했으니 별 수 없는 일 아니겠나?"
"어때? 저녁이나 함께 안 하겠어?"
"아닐세, 가봐야겠네. 사돈 될 사람이 찾아오기로 돼 있으니까."
"사돈 될 사람이라니?"
"내 딸년이 벌써 그렇게 됐네."
"자네가 붙잡혀가면 파혼될 그런 자리는 아닌가?"
"친일파는 아니지만, 그야 모르지."
"세월 빠르다."
"빠르긴 뭐가 빨라, 내 나이 해서는 늦은 편이야."
황태수는 일어섰다. 문간에서
"참, 잊었구먼. 명빈이 자네, 나한테 도 받았다는 애기는 말게. 들어간
사람들 가족한테도."
"그러겠네."
황태수를 전송한 뒤 임명빈은 곧장 서참봉댁을 찾아갔다. 집안은
조용했으나 약 달이는 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어서 오십시오."
행랑아범이 겁먹은 얼굴로 나오다가 임명빈을 보자 마음을 놓은 듯 꾸벅
절을 한다.
"누구 편찮은 분이 계신가 본데?"
"네. 나으리께서,"
"어르신네가?"
"아침에 쓰러지셨습니다."
"저런."
"형사놈이 떠밀어서,"
"낙상하셨느냐?"
"낙상하신 게 아니라 진노하셔가지고,"
"그럼 만나뵐 수 없겠구먼."
"네. 하지만 작은서방님이 계십니다."
"응, 큰일이다."
"머리 푼 집안 꼴이지요."
"그럼 영돈일 만나고 갈까?"
명빈이 작은사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형과 같이 작은 몸집의 영돈이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나타났다.
"형님 오셨습니까."
"응, 걱정되겠네. 아버님께서 쓰러지셨다구?"
"네, 형사한테 역정을 내시다가, 그만 그놈들도 불손햇지요."
"문중의 골칫거리, 버린 자식으로 치부하셨는데 뭣 때문에
심로하시는지,"
"말씀으로만 그러셨지요. 그리고 경찰에 잡혀가기론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자네가 안됐구먼."
명빈은 형만한 체구지만 얼굴은 훨씬 곱상하게 생긴 영돈의 눈치를
살핀다.
"저야 뭐 젊은놈인데,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형수씨가 딱하지요."
"자네가 이해할밖에, 차남이 장남 몴까지 해왔으니 힘들었겠으나 형을
원망 말게."
가산도 빠지고 영돈이 은행원으로 있으면서 이럭저럭 가사를 꾸려나가고
있는 실정을 명빈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원망은요, 원망 안 합니다. 옛날엔, 왜 아시지 않습니까?"
영돈은 쓴웃음을 띠었다.
"개차반이었지."
"지금은 형을 알 듯합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도리어 패기도 없고
용기도 없는 제 자신에 실망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소리 말게. 자네는 큰 희생을 하고 있는 게야. 세상 만 사람한테
큰소리쳐도 의돈이 자네한테만은 할말 없을걸?"
"아버님인들 큰뜻 가진 자식을 이해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옛적
분이라 원통해하시지요. 그놈이 의병장 노릇을 해서 경찰에 잡혀갔다면
저승 가서 자랑거리라도 되련만 쓰러진 왕실은 아랑곳없이 양반 치자는
사상이냐 하시면서,"
"그러시겠지. 그런데 지금 어떻게 돼 있나?"
"그저 옥바라지를 하고 있는 정도지요. 형수님 가시게 할 수 없어서
제가 틈 봐가면서 갑니다마는,"
"변호사는? 작정 안 했겠지."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의논들을 해야 않겠습니까? 사건 하나에 여러
사람이 묶여 있으니까요."
"그렇지. 나도 그 생각에서 찾아왔네만 누구든 주동하는 사람이
있어야겠고 그러자면 내가 나설밖에 없겠기에,"
"형님이 말씀입니까?"
"음,"
"그,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듯 영돈은 허둥지둥 말했다.
"비용도 마련됐으니까 걱정 말구."
"고, 고맙습니다."
영돈이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친구니까 나도 앉아 있을 수만 없지. 강도짓을 한 것도 아니겠고
사기친 것도 아니겠고,"
서참봉댁에서 나오는데 임명빈은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 머리통을 땅속으로 내리 누르는
것만 같다. 두 손을 활짝 쳐들고 그 압력을 떠밀고 싶은 충동, 이민족의
힘이 얼마나 비정한가를 가슴 저리게 실감한다. 은행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아가며 형무소로 달려가는 초라한 영돈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내 땅 내나라에서 어찌하여 숨도 한번 크게 못 쉬는
행랑아범의 신세가 되었더란 말인가. 헐벗고 굶주리는 것보다 시시각각
주변을 살펴야 하는 마음의 무게는 질병치고도 가장 무서운 질병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다간 다 미치겠다.'
미쳐 있기보다 미칠 것을 예감하는 고통, 그런 뜻에서 차라리 옥에 갇힌
사람, 뛰는 사람, 목적이 멀더라도 목적을 향해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속
편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까.
'그렇지. 미치지 않을 사람이 있다. 미치는 것을 예감 안 하는 사람,
조용하 같은 인물이다.'
집 앞 가까이 갔을 때는 아내 백씨가 밖을 내다보고 서 있다.
"임자, 왜 나와 있소."
"어디 가셨드랬어요?"
"서참봉댁에,"
"아침나절에 형사들이 다녀갔었나 봐요."
"그랬다더군."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그런 일 뭣 때문에 생각하나."
"잊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어머님이랑 그릇 닦던 생각이 났어요."
"쓸데없는 소리, 들어갑시다."
"혹시..."
"혹시?"
"당신이 관련된 건 아니겠지요?"
"걱정 마오. 내 나이 몇인데? 교장이 그런 푼수없는 짓 하겠소?"
두 팔을 뻗고 압력을 떠밀어보고 싶던 방금 느낀 총동을 생각하며 명빈은
헤아릴 수 없는 비애를 느낀다.
'처성자옥이라 하든가? 헛헛헛...'
"그럼 서참봉댁에 뭣 하시러 가셨어요?"
안 하려고 참다가 하는 말 같았다.
"당연히 가봐야잖소? 당신도 틈나는 대로 가보시오. 가서 위로도
해드리고,"
"저야 매일 간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은 삼가십시오."
"허허어?"
하다가 명빈은 아내를 떠밀 듯 냉담한 몸짓을 하며 사랑으로 들어
와버린다.
'오늘내일 최참판댁 부인이 올 터인데 아내는 모르고 있다. 명희한테
원병을 청해야겠구나.'
명빈은 옷을 벗고 모시 고의적삼으로 갈아입은 뒤 팔베개를 하고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체중같이 다 무겁다. 학교도 무겁고, 가족도 무겁고,
앞으로 해야 할 옥중 사람들을 위한 자신의 소임도 무겁다. 그리고 그
무거운 것은 무거운 잠으로 그에게 떨어져내린다. 잠결에 저녁 들라는
소리를 들었다. 아내 얼굴도 보았다. 밥상을 들고 서 있었다. 손을 흔들며
강렬한 몸짓을 했던 것 같다. 소리를 지른 것도 같다. 날 제발
내버려두라고. 그러고는 또 무겁고 끌어당기는 잠속으로, 땀이 전신을 흠뻑
적시는 것을 느끼며 잠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버지!"
이번에는 열 살짜리 막내아들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아주 먼
곳이다.
"아버지 일어나세요."
"음, 으음, 좀 내버려두어."
"아니에요. 진주서 손님 오셨어요."
명빈은 벌떡 일어나 앉는다. 전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진주서 환국형님 어머니가 오셨어요."
"음."
"굉장히 깊이 잠드셨나 봐요."
"왜?"
"얼마나 오래 깨웠다구요."
"그랬어? 손님 어디 계시냐?"
"안방에요. 어머님이랑 애기하고 계세요."
"알았다. 내 곧 올라가마."
명빈이 안방에 들어갔을 때 백씨는 좀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었고, 서희는
침착했으나 어두운 낯빛이었다.
"올라오시느라 고생하셨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래간만입니다."
"놀라셨지요."
"네."
"편지로는 자세한 말씀 드릴 수가 없어서,"
백씨의 얼굴에는 더욱더 의아해하는 빛이 돈다. 서희는 백씨가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여서 편지 받고 왔다는 말을 안 한 눈치다. 명빈은
아내 얼굴을 훔쳐보다가
"환국이아버님 일이라고만 썼습니다만 실은 지금 서대문 형무소에
계십니다."
뿌지르듯 말한다. 서희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백씨의 낯빛도
달라진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무슨 행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요즘 흔히 만드는 단체 때문인데, 말하자면 환국이아버님은 연루되신
거지요."
"임선생님께서는 그 일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노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아마 그곳에서 잡힌 모양이지요. 여러
가지 배려 때문에 댁에는 직접 알리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공노인의 처사는 충분히 알 만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어찌 걱정이 안 되시겠습니까?"
백씨 말이다.
"여보, 부인께서 저녁 드셔야지."
명빈도 괴로웠다.
"아닙니다. 기찻간에서,"
했으나 저녁을 먹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럼 마실 것을 만들어오겠어요."
백씨는 허둥지둥 일어섰다.
"아, 아닙니다. 그보다,"
"쉬시겠습니까?"
명빈이 묻는다.
"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푹 쉬었다가 내일 상의하도록 하지요."
서희는 환국이 쓰던 작은사랑으로 안내받으며 간다. 다른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모는 서희 표정에서 심상찮은 사태를 짐작하는지 말없이
뒤따르다가 휘청거리는 서희를 얼른 부축해준다.

3장 내 땅에서
사천서 진주로 가는 길 연변은 황금 물결의 들판이 계속이다. 이제
들판은 낫 들고 들어설 농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때만은 풍요하다.
마음만으로도 풍요하다. 파종에서 결실까지 숱한 고비를 넘고 또 넘어서,
마치 험한 항로에서 항구에 닻을 내린 배처럼 느긋하게, 농부들의 마음은
그랬으리라. 들쥐를 보았는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높은 하늘에서 소리개
한 마리 팔매같이 땅을 향해 급강하한다. 이따금 배추밭이 지나가곤 한다.
끝물까지 다 따버린, 앙상한 고추밭도 지나간다. 담배를 꺼내문 홍이는
잠시 핸들을 놓고 두 손을 모아 담뱃불을 붙인다.
'이럴 때가 젤 좋네라. 들판만 보고 있어도 배부른 것 같은께,
추수해봐야 땅 임자한테 가고 도지빚 갚고 남은 곡식 쳐다보믄 허전하기만
하지. 일 년 양도를 우찌 댈꼬 싶으믄 손이 떨리서 쌀 한됫박 떠내기가
무서버진다 카이.'
언제였던지 새를 쫓으며 하던 아낙의 말이 생각난다.
'너거 집은 아무 걱정이 없일 기다. 일본 가서 돈벌어 땅도 장만했것다,
직덥이 좋은께 어디 가도 묵고 사는 거사, 무신 걱정이겄노. 어놈의 농사
밤낮 해봐야 남 좋은 일이제. 보릿고개를 넘고 오뉴월 땡볕을 지내믄서
생된장에 왕치기 꽁보리밥, 세상없는 장골이라도 허리가 휘지.'
일본서 돌아온 지 일 년 남짓, 화물회사에 취업하여 핸들을 잡은지도 일
년이 가까워온다. 아는 사람들은 모두 홍이가 직업을 잘잡았다고 부러워들
한다. 조수석에 앉은 천일이도 운전수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요 금실 든
문장의 운전모 쓰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다. 올해 열아홉 살,
평사리의 마당쇠댁네가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홍이가 데려왔다. 마천일,
욕심 많고 떼쓰는 데는 당할 사람이 없었던 마당쇠가 만복이라 지으려던
아들 이름을 마가 성에 안 맞는다 하여 천일로 낙착이 되었는데, 이름
하나 큼직했으나 아비를 닮아 좀 우둔하고 철이 덜 난 편이었고, 어미를
닮았음인지 마음은 착했다.
'최참판댁에 한번 가봐야 하는데...'
홍이는 클랙슨을 울리고 핸들을 꺾으며 언덕에 가려진 길모쿵이에서
커브를 돈다.
"바까노 마산, 신다 신슈, 시센니 다쯔 시센, 고맞다 고죠, 도우스 루까
도오에이, 후에루 후잔,"
아까부터 천일이는 왜말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번역을 하자면 바보의
마산, 죽은 진주, 서선에 선 사천, 딱하다 고성, 어떡하나 통영, 불어나는
부산, 그런 뜻인데 왜말로는 지명의 첫음과 형용사의 첫음이 같고,
마산만은 첫 글자가 다르다.
사 년 전의 일이다. 경남의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가는,
진주로서는 사활에 관한 큰 사건이 있었다. 진주뿐만 아니라 종전까지
진주의 영향권 속에 있었던 마산, 사천, 고성, 통영조차 큰 변동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부산일보"에
게재되었던 일종의 풍자 비슷한 글귀가 지금 천일이 흥얼거린 왜말이다.
그 기사 때문에 진주서는"부산일보"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던 것이다.
도청이라면 물론 행정구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청사요, 이미 청사의 임자는
일본, 제반 행정을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지만, 그러나 영남에서 가장 유서
깊었던 고도로서 긍지 높았던 진주 사람들에게는 도청을 부산에
빼앗긴다는 것은 날벼락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빛나던 항쟁 정신과
민란의 전원지였던 만큼 확실히 이곳 사람들은 다혈질이었으며, 지난날
일본에 의해 영문이 깨어지고 주권을 잃었을 적에 진노하고 비통해하던 그
격력한 감정을 되씹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거세되고 낙후될 현식적 문제도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신문 불매운동 같은 것도 그 당시, 격랑 속에
일었던 하나의 여파였다.
"바까노 마산,"
"임마, 그 옴대가리 찜쪄먹는 소리 그만 못 두겠나?"
모자를 비뚜름하게 쓰고 담배도 비뚜름하게 문 홍이가 나무란다.
"재미 안 있십니꺼?"
"시사니 나을장 간다 하더라."
"심심해서요. 잠이 자꾸 올라 캐서,"
"..."
"형님."
"..."
"진주서 도청을 뺏길 때 왜놈 하나가 배 가르고 죽었다믄서요?"
"왜놈이 왜 죽어?"
"그라믄 뜬소문입니까?"
"건방지고 주제넘은 짓이지. 죽어도 조선놈이 죽지 왜놈이 왜 죽어? 지
땅인가? 지 고향이건데? 무산 상관 있다고, 미친놈!"
내뱉는다.
"하하아, 그라믄 죽기는 죽었구마요."
일본인 이시이 다카아케를 두고 한 말인 모양이다. 아름다운 고도, 진주를
사랑했다는 사내.
"그렇지마는 진주를 위해서 죽었다믄 제법 아닙니까?"
"그새끼들 배때기 가르는 거를 밥 먹기보다 쉽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전쟁에 강한 거야."
"그래도 그렇지요. 목심이 두 개 있는 것도 아닐 긴데 장난으로는
했겄십니까."
홍이 입에 문 담배를 뽑아 차장 밖에 던지면서
"말 시키지 마. 왜놈 애기라면 이가 떡떡 갈린다!"
힐끗 눈치를 살피며 천일이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홍이 화를 내는 것은
간도에서 몸에 밴 배일사상과 혼인 전에 평사리 강가에서 불문곡직
왜헌병한테 붙들리어 갖은 고초를 다 겪은 때문이지만, 일본에서 지낸 이
년 동안의 기억이 결코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존심 강한 홍이가
조선인이라 하여 수모를 당한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거니와 그보다
일본인에 대한 뿌리 깊은 경멸로써 결산하고 그는 조선으로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 홍이에게 혐오감을 안겨준 것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일본인은
속바지를 안 입는 일이었다. 주반이라는 것을 한겹 알몸에 감아버리고
기모노를 입은 그들 풍습이 홍이는 메스껍도록 싫었다. 그 혐오감을 한층
짙게 한 것이 여자들의 정욕이었다. 혼전의 계집애, 유부녀 할 것 없이
하숙집 여자들이 한밤중에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체험을 여러 번
했었다. 그러나 홍이는 심리적으로 일본 여자에게는 손을 eof 수 없었다.
그래서 하숙을 전전하지 않으며 안 되었다.
"긴쌍, 소레 데끼나이노(김씨, 그것 못하나요?)?"
수치도 체모도 없이 거절을 당한 계집이 그런 말을 묻기도 했었다.
'더러운 짐승 같은 년!'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면서, 그러나 홍이는 화내지 않았고 실실
웃기만 했던 것이다. 왜헌병한테 끌려가서 죽을 만큼 당한 고문과 정신적
학대를 받았던 옛일을 홍이는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다. 결창서에서
풀려나왔을 때
"앞 뒤 재가면서 기어라 하면 기고 서라 하면 서고 눈물 흘리라 하면
흘리고... 눈을 부릅뜨다가 뺨따귀 하나 더 맞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인가
그걸 깨달았소."
누우런 나뭇잎이 뚝,뚝, 떨어지는 거리에서 홍이는 그런 말을 했었고,
연학은
"잘난 말 몇 마디 하는 것, 그건 아무짝에도 못쓴다. 바보 시늉, 미친
시늉, 뭣이든 빠져나오는 게 젤이제. 싸움이란 그래야 이기는 법이거든.
감정 때문에 힘 빼는 것, 그것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다."
홍이는 자신이 한 말, 연학이 한 말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이 년, 장이를 만난 일은 없었고 소식도 몰랐지만 홍이는 이따금 장이
생각을 했다. 왜 일본에는 왔을까 하고 자신에게 물어 보기도 했었다.
만날지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는 있었는지 모른다. 조선으로 돌아온 후
아내 보연이는 마치 숙제처럼 일본에서 장이를 만났느냐고 물었다. 홍이는
그 말에 대하여 대꾸를 한 일이 없었다. 별안간 홍이 클랙슨을 울린다.
천일이 졸다가 눈을 번쩍 떳고, 한길을 걷던 노파가 머리에 인 보따리를
거머잡으며 허둥지둥 길가로 피한다. 화물차는 멎었다.
"저 할마씨 태워드려라."
천일이 차창에서 고개를 내밀며
"할매요!"
귀를 잡수셨는지 멍하니 쳐다본다.
"할매요!"
"아이구 가심이야, 길을 비킸는데 와 안 가노!"
"어디까지 갑니까?"
"진주, 진주까지 가누마."
천일이 뛰어내린다.
"어서 타소!"
"..."
"어서 타라 카이! 진주까지 실어다줄 긴께요!"
아주 귀머거리로 작정했는지 천일이는 귀청 떨어지게 소리를 지른다.
"아아, 아아앙 참, 그렇제? 아이구, 젊은 양반 고마바서 우짤꼬?"
천일이 노파를 밀어올리며
"아따, 할매 보기보다 무겁소."
엉겁결에 차를 타기는 탔는데 화물차가 노파에게는 몹시 불안한
모양이다.
"딸네 집에 가십니까?"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홍이 말을 걸었다.
"딸네 집? 딸이라도 있임사? 얼매나 좋을꼬."
"자식들이 없습니까?"
"에미 없는 손주새끼 둘 데리고 사는데,"
손등으로 콧물을 닦는다.
"안됐습니다."
"아 애비가 시비 끝에 경찰서로 붙들리가고 보이, 아침 저녁 날씨는
차고, 옷이라도 받으믄 넣어주까 싶어서 나선 길인데,"
"시비를 우떻기 했기에요."
호기심에서 천일이 묻는다.
"금년 신수에 관재수가 없더마는, 무신 날벼락인지, 시비는 도지빚
따문에 그렇기 됐구마. 추수하믄 갚겄다고 그렇기 사정사정했는데 빚준
사람들은 추수를 저거들이 해가겄다고,"
"그래서 치고받고 쌈을 했구마요."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깎아지른 벼랑, 푸른 남강을 내려다보며
달리고 있었다.
"서로 치고받고 쌈이사 꼭같이 했는데 우리 아아가 더 맞았이믄 더
맞았지, 빚진 죄인이라... 논에 나락을 세우놓고 그거를 다 가지겄다 하니,
우리는 머 묵고 살라는가, 난 평생 남하고 다투는 성미가 아니건마는,
붙이가 꺼꾸러 서서, 다 같이 싸와도 없는 놈만 가두고, 나도 마, 살고
저븐 생각은 한푼 없지마는 어린 손주새끼들 불쌍해서 비럭질을 해서라도
믹이기는 믹이얄 긴데,"
노파는 울지도 않고 앞만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모요. 할매가 맘을 단단히 묵어야제요. 산 입에 거미줄을 치겄소?"
"천일이 너, 오래간만에 사람 같은 소리 하는구나."
홍이 쓴웃음을 띤다.
"억울한 거사 우리도 겪었인께요. 죄없이 총맞아 죽은 울 아부지 생각이
나서요."
강가 모래밭에 쓰러지던 마당쇠, 그 총 소리 고함 소리는 아직도 홍이
귓가에 쟁쟁하다. 우둔하고 철이 덜 난 천일이를 신경질 안 부리고
보아주는 것은 그의 아비 마당쇠 죽음을 목격한 때문인지 모른다.
'처처에 억울함이구나. 눈 떨어진 병아리 같은 어린것들, 고목 같은
늙은이는 갈 길도 바쁜데 어느 문전에서 또 비럭질을 해야 하나.'
진주 시내로 들어가서 천일이가 노파를 부축하여 내려준다.
"아이구, 어지러버라."
"좀 있이믄 괜찮을 깁니다."
바까노 마산, 어쩌구 했던 천일, 노파를 바라보는 눈이 어둡다.
"아이들 떡이나 사다주소."
홍이 일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는데 차멀미에 노오래졌던 노파 얼굴에
놀라움이 떠오른다. 노파는 지폐라는 것을 만져본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기는 떡을 사자면 백 개를 넘게 살 돈이었으니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또 하다가 돌아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홍이 눈앞에 생모 임이네의 얼굴이
떠오른다. 임종 때의 그 비참한 얼굴, 눈을 뜬 채 숨을 거둔 얼굴, 생명의
빛을 잃은 눈동자.
'왜 좀 따뜻하게 못했을까? 난생 처음 보는 저 노인을 위해서 내 마음이
이리 아픈데 생시 어머니를 위해 이만큼이나 맘 아파한 일이 있었을까?'
견딜 수 없는 죄책감, 죽은 어미를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고통스런
일이다. 어쩌면 일본으로 간 이유 중에는 모친에 대한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참한 죽음을 잊고 싶었는지 모른다.
병석에서 병으로 갔지만 임이네의 죽음은 월선의 죽음과는 달랐다. 이 두
죽음에서 비로소 홍이는 월선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놓여났으며, 월선이
점령했던 자리에 생모의 죽은 모습이 낙인과 같이 찍혀버렸던 것이다.
임이네의 죽음은 죽음과의 무참한 투쟁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체념 못한
죽음과의 투쟁이었다. 애증을 넘어선 그 모습은, 견딜 수 없는 연민으로
종전까지의 홍이를 파괴하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죽음과
모든 사람의 운명으로 확대되어간 허무의 깊이 모를 심연이었다. 원선이
축복받은 죽음이라면 임이네는 저주받은 죽음이요, 근원적으론 죽음이란
저주받은 것일 거라는 공포는 홍이 마음을 깊이 지배하였다. 홍이는
노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또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불쌍한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실까?'
갑자기 검은 바람이 발끝에서 전신을 덮쳐씌우는 것 같은 느낌이
엄습해온다.
시장 입구에서 짐을 푸는 동안 홍이는 천일이를 데리고 음식점으로
갔다. 국밥 한 그릇으로 요기를 하는데 천일이도 기분이 안좋았던지 말이
없었다.
"임마, 기운내!"
"야."
입을 닦으며 홍이 음식점에서 나오는데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금시곗줄을 늘어뜨린 두만이와 딱 부딪친다.
"안녕하십니까?"
홍이는 얼굴도 보지 않고 꾸벅 절을 한다.
"음."
두만이는 고갯짓만 하고 지나가버린다. 인사라도 하니 제법이다하는
투의 고갯짓 같았고, 더 이상은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고갯짓인 것도
같았다. 홍이는 으레 그러려니 생각한다. 빈차를 차고에 몰아넣고 세수를
한 홍이는 옷을 갈아입는다.
"천일아."
"야아."
"나 간다. 저녁은 집에 가서 먹어."
"그라믄 형님은 집에 안 들어가실 깁니까?"
"아마 저녁 늦게,"
"상의어무니 또 야단하겄십니더."
"사무실에 가서 차고에 차 들여놨다는 얘기 잊지 마라."
"야아."
고개를 숙이는데 천일의 양볼이 축 처진다.
'저놈자식 또 어머니가 보고 싶은 모양이다.'
어슬렁어슬렁 거리에 나왔을 때 해는 아직 남아 있었다. 쭉 뻗은 신작로,
자전거가 오고 간다. 시장 입구편의 상점은 조선인들 경영이요 그 맞은편
동남편을 향한 곳에 즐비한 상점들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상점은 대개 안이 깊었다. 전등을 켜놓고 있는 곳도 더러
있었다.
"보래? 보래! 야 이눔아아야! 홍이 앙이가!"
고함 소리에 돌아본다. 양복을 입은 삼석이 양복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목이 길고 얼굴이 긴데다 왕방울 같은 눈에 입매가 느슨한
근태는 한복 차림으로 팔을 휘저으며 걸어온다.
"자알들 어울렸구나. 어디 갔다 오나?"
"차머리서 만났다. 그란해도 니 말 함시로 오는데, 와 그리 니 보기가
어렵노."
근태 말이다.
"시세 좋은 운전수 나으리, 만내보기가 어디 그리 쉽겄나."
면도 자국이 검실검실한 삼석이 건들건들 몸을 흔들며 말했다.
"지랄한다.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입에 밥 들어가는 너거들하고
처지가 같은가?"
"그래 일 끝났나?"
삼석이 어깨를 비틀 듯 한번 뒤돌아보고 묻는다.
"끝은 났지만,"
"끝은 났지만 우떻다는 거고? 달아날라꼬? 그거 안 될 기다."
"가볼 데가 있긴 있는데,"
"잔소리 마라. 사람이 아주 딴판으로 변했다 카이."
"나만 변했나? 자네들은 어떻고?"
홍이 웃는다.
"온 세상에, 옛날 일 생각 안 나? 부산까지 함께 가가지고 복장터지게
애멕인 생각 안 나느냐구. 그 생각만 하믄 이눔자식을 한분패주겄다, 이를
덜덜 가는데 이리 점잖아서야 어디, 때리는 내가 미친놈 되겄제? 근태야,
안 그렇나?"
근태는 목이 부어서 나오는 것 같은 웃음을 웃는다. 얼굴에는 옛날과
다름없이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홍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리 셋이 만나기도 어렵고, 내 오늘 술 샀다."
"하모, 그래야지."
삼석이 말에 근태가
"어디로 가꼬?"
"그야 우리집이지."
"너거 어무니 몽둥이 들고 나설라?"
"답대비, 근태 저눔아아는 지 나이 묵는 것도 모리니 탈이다."
"아따, 큰소리 치네. 아아 애비가 돼가지고도 종아리 맞인 거는
잊어부렸는갑다.
"하하핫... 하지마는 별수 있나? 기력이 있어야 날 때리제? 이자는 울
어매도 속절없는 뒷방차지 앙이가."
"근태는 몰라도 나는 좀 떨리는데? 일본 바람 잡은 것을 내 탓으로
생각한 네 어머니가 야단났었지."
"흐흐흣... 니 어무니하고도 대판 싸웠다 카데. 울 어매를 이긴 사람이
바로 니 어무닌데 흐흐흣... 볼 만했을 기구마는,"
하다가 갑자기 삼석이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간 곳은 일본인 식료품
가게였다. 갑작스런 그의 동작이어서 나머지 두 사람의 시선도 그곳으로
따라간다.
"노랑김치, 이거, 이거 말이요. 좀 팔라 카는데 와 그라요?"
중년쯤 보이는 아낙이 안쪽에 노랑물이 든 통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우란요, 우라나이. 앗찌니 이께(안 판다, 안 팔아. 저리 가아)!"
기름 방울이 둥둥 떠 있을 것만 같은 살찐 일본 여자가 팔을 내저었다.
"무신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제. 거기 젊은이들 통변 좀 해주소.
빌어묵을 자석이 원족가는데 벤또 반찬에 노랑김치를 싸오라 해싸아서
왔더마는,"
아낙은 울상이다.
"보소, 오까미상,"
삼석의 눈빛이 험상궃다. 일본 바람을 쐬었으니 일본말이야 유창했고.
"아니, 오까미상이라니!"
여자의 눈이 까끄름해진다.
"오까미상이지 그라믄 오꾸가다(??:부인의 존칭)라 할까요?"
악의적인 비꼼에 여자는 머쓱해진다.
"장사는 물건을 팔게 돼 있소. 조선 사람 돈엔 똥이 묻었나? 와 안
팔겠다는 거요."
삼석이 바싹 다가선다.
"고노 바까야로우(이 바보새끼), 뭐라 카노!"
얼굴이 벌개져서 여자가 떠든다.
"아주머니, 안 팔려 하는데 살 것 없소. 시장 안에 들어가보시오."
홍이는 우선 아낙을 밀어낸다.
"아이구, 얄궂어라. 물건 안 팔라 카는 장시가 어디 있노? 아이구,
얄궂대이. 아니꼽고 더러바서,"
아낙이 비실비실 물러나고 삼석은 두 주먹을 불끈 쥔다. 근태는 얼굴이
노오래져 있었다.
"삼석아, 그따위 왜년 상대할 것 없다. 미친 짓 하지 말고 가자, 가아.
허허어, 이 사람이, 오기도 부릴 때 부리는 거지, 자아 자,"
홍이 삼석의 팔을 잡아끄는 것을 본 일본여자는 약해서 꽁무니 빼는 줄
알았던지 한층 기승해져서 소매가 미끄러져 내려간 허연 팔뚝을 내두르며
찢어발기는 소리를 질러댄다.
"내 것 안 판다는데 무슨 건방진 소릴 짖어대는 게야! 일등국민인
우리가 너거들 야만인한테 네, 네, 고맙습니다, 하게 돼 있느냐구!
오까미상? 혓바닥을 잘라줄까? 고노 쿠소다레(이 똥싸개)! 일본인한테
덤비는 조선놈의 새끼는 모조리 부다고야(돼지우리, 유치장이란 말)에
처넣어버릴 테다!"
"아니, 저, 쪽바리 쌍년이 뭐라 카노! 야 이년아! 이 똥돼지 겉은 년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삼석이는 부지중에 조선말로 욕을 퍼붓는다.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와 그라노? 무신 일이고?"
삽시간에 사람들은 울타리를 쳤고 상점 안에서 아들인 듯 열일곱 여덟쯤
돼뵈는 사내아이가 놀라서 쫓아나온다.
다부지게 생긴 몸집이다.
"엄마, 뭐야!"
"저 조선놈의 새끼가 날보고 오까미상이라 하는구나. 어이구 분해! 물건
안 판다 했다고 굿대 가까루노요(덤빈다는 뜻)."
"경찰을 부를까, 엄마!"
"훗도께(내버려두어). 센진노 야쯔라와 미나 안나 자마다요(조선놈의
새끼들은 모두 저 꼴이야)."
"나니 유우까!고노 인바이메(뭐라 카노! 이 매춘부야)!"
삼석이 홍의 팔을 착 뿌리치고 앞으로 나선다.
"안 팔 것을 상점은 왜 차렸어! 상점이란 간판 뜯어! 뜯어내란 말이다!
손님보고 폭언하는 게 너희 나라 상도가!"
이번에는 유창한 일본말이다. 이들녀석이 욕설을 하며 달려들듯하고
여자는 입에 거품을 물며 욕이란 욕은 모조리 꺼내어 퍼붓고 아우성이다.
"그만하면 네년 근본은 알 만하다!"
삼석이도 그에 못지않게 욕을 퍼붓는데 사람들을 헤치고 교복을 입은
순철이 나타났다. 몸집이 좋아서 이내 사람들의 눈을 끈다.
"하야세!"
삼석의 멱살을 잡으려던 사내아이는 멈칫한다.
"손 내려!"
엉거주춤한다.
"너 그 사람한테 사과해라."
하야세라 불린 사내아이와 순철이는 잘 아는 사이다. 방학때도 아닌데
그가 어찌 집에 돌아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일본아이들만 다니는
부산의 중학교에 재학중이었고 방학 때면 유도를 배우는데, 순철이 역시
유도를 배웠고 해서 그들은 도장에서 알게된 사이였던 것이다. 순철의
집은 부유했고 우등생에다가 힘도 장사여서 조선인이지만 하야세는 순철을
만만히 대해오지는 못하였다.
"장사하면서 안 팔았다면 그건 전적으로 너거 잘못이다. 그보다도 너
엄마 욕설에는 놀랐다. 몰상식한 데는 참말 놀랐다. 적어도 넌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빌어!"
여자는 욕설을 중지하고 순철을 바라본다. 뭐라고 또 외칠 차비를 하는
모양인데 아들이 어미를 떠밀어내고
"싸움은 않겠지만 빌지는 않겠어!"
"너 나한테 혼 좀 나볼래?"
"비는 것은 싫다!"
하야세는 어미의 팔을 낚아채어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데 얼굴이
새파랗게 돼 있었다. 순철은 집요하게 빌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야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하는 눈치다. 잘못하면 사건이 크게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홍이는 윽박지르듯 삼석을 끌고 간다. 얼굴이 샛노오래진
채 근태도 따라간다. 여차하면 함께 덤빌 기세였던 구경꾼들은 흩어지고
구경꾼들 속에 더러 끼여 있던 이웃 일본인들도 눈살이 찌푸려지게
외쳐대는 상스러운 욕설에 넌더리가 났던지 중립을 지키다가 그들 역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흩어진 구경꾼들은 각기 한마디씩 했다.
"어느 연놈이고간에 저 왜년 집에서 물건을 사기만 해봐라. 정강이를 딱
뿌질러 앉힐 긴께. 한시절 전만 해도 어림이나 있어? 달랑 집어다가 그
왜년을 남강물에 퐁당 집어넣었을 기다. 진주사람들 기 다 죽었다, 기 다
죽었어."
"참 더럽다, 더러바. 더러바서 못 살겄다. 굴러온 돌이 본돌
친다카더마는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
"와 아니라. 아무리 강약이 부동하다고는 하지마는 저따우로 더런 것이
우릴 하시해?"
"여관집 아들, 그 성미도 예사 성미가 아닌데 꿀떡꿀떡 삼키노라 애썼을
기다. 팔팔한 젊은놈이 주먹부터 먼지 나갈 긴데 참는 거를 보이 나도
속이 부글부글 끓더마는."
"왜년치고도 순 쌍년이더구마. 아따, 욕도 모지락시럽게 하데. 하기사 머
사내놈 같았으믄 왜놈 아니라 왜눔우 할애비라도 크게 벌어졌을 기다.
아무튼지간에 나라 없는 우리만 섧지. 일본놈 세상인데 어쩔긴고?"
"염치 좋고 주제넘지. 남우 땅에 와가지고 물건 사주는 것만도 감지덕지
해얄 긴데,"
"호랭이 담배 묵든 시절의 얘기네. 아닌게아니라 그 왜년의 말도 빈말은
아닌 기라. 일본인한테 덤비는 조선놈의 새끼는 부다고야에 처넣겄다 안
하든가배? 팔은 안으로 굽더라고 말썽이나 안 생길는지 모리겄다."
"칼로 배애지를 쑤시 직일 년!"
"도갓집 아들, 거 똑똑하더마. 부잣집 아들치고는."
"힘도 장사란다."
"그 아아야, 어디로 보나 큰소리 칠 만하지."
삼석이는 홍이와 근태랑 함께 제 집인 신일여관으로 돌아왔다. 육십이
다 되기까지 머리털이 세지 않았다 하여 까마구 할매라는 별명을 가졌던
삼석의 모친은 이제 칠십이 다 된 늙은이로서 여관 경영의 실권을 포기한
터이지만 삼석이도 삼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식이 셋이나 딸렸고 일본
바람을 잡은 뒤 집에 죽치고 있는 것만도 가족은 다행으로 여겼던지 집에
들어서는 품이나 가족들이 눈치를 보는 태도로 미루어 삼석은 집안에서도
호랑이를 잡는 모양이었다.
"술상 차려."
아내에게 퉁명스레 말한 삼석이는 친구 두 사람의 등을 밀고 손님이
들어 있지 않은 뒷방으로 들어간다.
"앉아."
"응."
홍이와 근태는 엉거주춤 앉는다. 도저히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지만,
기분이 상해 있는 삼석을 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이다.
"제에기랄! 이럴 때마다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싶단 말이다!"
하다가 삼석은 열기가 남아 있는 얼굴에 쓰디쓴 웃음을 띤다. 울적 하기론
홍이나 근태도 마찬가지였다.
"니 주제에? 앞으로는 공연히 실데없는 상관 말아라. 똥이 무서바서
피하나 더러바서 피하지."
소심한 근태는 아직 마음이 제자리에 없는가 뒤죽박죽의 얘기를 한다.
"이새끼야, 챙피스럽다, 챙피스러바! 그 낯짝이 멋꼬? 흿배 앓는 놈겉이
노오래가지고, 실개 빠진 놈!"
내뱉는다.
"그건 근태 말이 맞다."
이마빡에 줄이 발딱 서는 삼석을 쳐다보며 홍이 말했다.
"홍아, 니 거 칼날 겉은 성질 어이다 버맀노?"
새삼스럽게 삼석은 홍이를 응시한다.
"근내는 그렇다 치고 니도 그러기가?  ㅏ짱 실개 빠진 놈뿐이다!
비겁한 놈들! 살믄 몇백 년을 살 기라고. 어이구, 열나서 나 못산다!"
"실개가 빠진 거는 아니다. 단단해졌지. 진주 바닥을 들엎을 만한일이
아니면, 어리석은 짓이라구. 거지 같은 왜년 하나 깔봐서 멀쩡한
사내자식이 병신 왜야겠나? 밟아죽인다 해도 그게 뭐 떳떳한 일일꼬?
감정으로야 밟아죽이고 싶지. 나 역시 벌레처럼 꽉 밟아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이겨야 해."
"흐음."
홍이 말이 옳았다.
"왜년 아니라 조선 여자라도 그런 것 만내믄 못 이긴다. 마구잡이로
나오는데야 우짜겄노? 쌍년도 보통 쌍년이 아니든데,"
근태도 거들어서 말했다.
"마 이 일은 그 정도로 해두자."
"앞으로 열내지 말게."
"후우."
홍이는 담배를 꺼내어 삼석이와 근태에게 하나씩 뽑아주고 자신도
피워문다. 연기를 뿜어내면서
"아까 그런 일이야 사실 다반사지. 우리 조선 아이들이 그네들 집앞에
잠시 서 있어도 왜놈의 애새끼까지 가라고 악쓰고 욕하고, 머리에 핏줄이
뻗치지만 새끼들하고 쌈하겠나? 아까 경우도 꼭같애. 여러 해 전에
헌병놈한테 붙잡혀서 자네들은 생각도 못할 고초를 겪었는데, 그때 기라면
기고 서라면 서고, 공매 하나 욕설 한마디 안 듣겠다는 결심을 했지. 오기
부려서 그놈들 낯짝에 침 뱉는다고 구멍이 뚫리겠나? 힘은 모아두었다가
할 수 있는 한 속을 파묵는게야. 실질적인 이득을 보자 그 말이다. 참말로
마음으론 그놈들한테 꿀릴 것 하나 없다고. 일본것들 하층사회를
들여다보면 우리네 하층사회가 훨씬 양반이지. 그거는 삼석이 너도
가봤으니까 알게야."
"그런 그래. 짐승이다. 하여간 별수없긴 없지. 나도 여관인가 뭔가 이걸
하다 보이 아니꼽고 더럽지만 형사놈들 술잔도 사주고 하지마는, 어이구
모리겄다, 술이나 마시고 취해야지."
삼석의 아내가 술상을 들여왔다. 주근깨가 더러 있었지만 양순해 뵌다.
그는 남편의 기분이 안 좋은 것을 눈치채었던지 술상을 내려놓고 고개를
한번 숙인 뒤 아무말 하지 않고 나간다.
술잔을 나누면서 한동안 침묵을 지킨다. 울적한 마음은 세 사람이 다
같다.
"참, 남수는 요즈막에 우찌 사나? 본 지도 오래됐다."
"촌에 가서 면서기질 한다든가,"
홍이 말에 근태가 대답한다.
"모두 이럭저럭 사는구나. 자아, 술들 마시자. 초상집에 온 것도
아니겠고,"
세 사람은 생각난 듯 술을 마신다.
"홍이아부지는 진주로 안 오셨제?"
근태가 억지로 화제를 만든다.
"음, 오실려고 해야지."
"어어참, 그렇지. 아까부터 물어본다는 기이,"
삼석이는 허둥대듯 입을 뗀다.
"최부자댁 말인데, 그 댁 바깥양반이 붙잡혔다는 소문이 있던데
참말인가?"
"그런 모양이다."
"별놈의 소문이 아 돌더라. 독립군 우두머리라며?"
"사람 잡을 소리 말어."
"그라믄."
"좀 관계가 있긴 있었겠지."
"니는 그 사람을 아나?"
"어릴 적에."
"우떤 사람고,"
"마음씨 좋고 남자답고 인물 잘생기고, 뭐 그렇지."
홍이는 의식적으로 회피한다.
"그래? 소문으론 거물이라 카든데, 안 그렇다면 와 만주서 안 돌아오노."
"사정이 있겠지."
"이 자식아 너 우릴 의심하는구나."
"의심이고 자시고 알아야 말이지."
"제에기랄! 뭐 재미나는 일 없나? 눈이 번쩍 띄는 일 말이다."
"허파에 바람 또 드는구나."
벌써 눈이 거슴츠레해진 근태가 목이 부어서 내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삼석이 느끼는 권태로움과 흡사하다.
"이 자리꼽재기야, 구들만 지키고 앉았는 놈아."
"그거는 내 아부지 별명이제. 내가 와 자리꼽재기고."
"해마다 땅이 불어난다는데 넌 아직도 잎담배를 사서 종이에 말아
피우는 놈 앙이가."
"그거는 버릇이다."
"사철 소금에 절인 시커먼 김치밖에 모리는 입에 우리 김치맛이
우떻노?"
"잘 묵을라 카믄 한이 없제."
"무신 재미로 사노."
"재미로 사나? 그저 참고 사는 게지. 누구는 머 바람잡고 싶은 맴이
없는 줄 아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을 주고받는데 밖에서
"보소."
하고 삼석이댁네가 부른다.
"와."
"좀 나와보이소."
"와 그라노? 할말 있으믄 해."
"저기, 잠시만,"
"제에기랄!"
삼석이는 일어서서 나간다. 잠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댁네와
함께 돌아나가는 기색이다. 밖으로 나간 삼석이는 좀체 들어오지 않았다.
홍이는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일으켜세우듯, 그럴 때마다 내키지도 않는
술을 들었다. 근태 역시 그런 눈치였다. 이윽고
"이자 삼십질에 들어설 긴데 삼석이 그눔아, 돈을 몰라서 큰일이다."
하며 근태가 한마디 했다. 홍이도 근태가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홍이 들은 말로는 삼석이가 더러 손장난을 한다는 것이었다.
"차차, 지도 생각이 있겟지."
"말이사 바로 하지, 삼석이는 이런 여관업이나 함서 죽치고 앉았을
성미가 아니거든. 그러자 카이 울증이 나서 노름도 하는 모앵인데, 몰라,
언제 훌쩍 떠날는지. 이번에는 중국 바닥에 가서 헤갈고 댕기지 않을까?"
"글세... 만주 벌판에 가서 소장사나 벌목업 같은 것, 그런 게 제격인지
모르지."
"나도 집에서 그눔의 농사일 따문에 바빠 돌아갈 직에는 별 생각을 안
하는데 이렇게 한분 나오믄 속이 답답하고 안개가 낀 듯기번갈증이 난다.
홍이 니사 직업이 좋아서 어디든지 몸 하나만 가믄 되지마는... 남들은
땅마지기가 있다고 편케 앉아 묵는다 생각할지 모리지. 그러나 내 밑에
딸린 권속이 많고, 남 준 땅 추수해가지고 곶감 빼묵듯기 산다믄 벌써
들통났일 기고, 그나마 우리 양도될 만큼은 자각을 한께,"
"너이 기풍을 나도 좀 알지. 집안에서 근검절약하는 거야 좋지만거
소작인들한테는 너무 심하게 굴지 말어."
"아아, 아니다. 나, 나는 안 그런다. 알다시피 내 성미가 허약한
편이라서, 머 남 준 땅이 얼매 되기나 해야지."
얘기를 하고 있는데 삼석이가 돌아왔다. 낯빛이 창백했다.
"무신 일고."
"빌어묵을, 재수가 없일라 카이,"
"와."
"형사가 다니갔다."
"아까 그 일 따문에?"
묻는 근태 얼굴이 시비할 때처럼 노오랗게 변한다. 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해?"
홍이가 묻는다.
"머라긴? 우리가 머 잘못한 거 있나? 아는 형산데, 경위를 묻더구만.
지도 사람이고 또 조선놈 앙이가. 상부서 진상을 알아오라 해서
왔다더구나."
"잡아간다는 거는 앙이고?"
"잡아가기만 해봐라, 니 죽고 나 죽고 해볼 기다!"
"또, 또 저놈의 오기, 잡아가긴 누굴 잡아가. 상해를 입힌 것도 아니요
물건을 파손한 것도 아닌데 언쟁 가지고 잡아가나?"
홍이도 흥분이 되었던지 얼굴이 벌개진다.
"형사 말이 그런 일로 난동이 일어나기 쉬우니까 신경을 쓴다는 기야.
내 그랬지. 간판 걸어놓고 물건 안 파는 것은 법에 걸리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은근하게 협박을 하더구마. 여관업을 하는데 빗뵈어서
쓰겄느냐고, 에이, 참말이제 숨통 맥히서 못 살겄다!"
삼석은 술을 연거푸 몇 잔 들이켠다. 홍이는 담배를 붙여물고 연기를
뿜어내며 간도 퉁포슬의 들판을 생각한다. 용정촌이 아니고 왜 퉁포슬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4장 진실
창 밖이 어두워졌을 때, 곯아떨어진 삼석이를 내버려두고 방을 나섰다.
걱정이 되어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지 삼석이댁네가 당황하며
가느냐는 인사도 잊은 채 달아나듯 가버린다. 신일여관을 나선 홍이는
근태하고도 헤어졌다. 돌아서가는 근태 뒷모습에서 홍이는 주갑을
연상한다. 실제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싶으리만큼 기억은 아득히 멀었다.
사실 근태의 뒷모습은 주갑을 닮은 데가 있었다. 발길을 돌려놓으며 석이
집을 향한다. 오늘밤말고는 좀체틈이 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석에는 평사리에 가야 했고, 추수가 시작되면 화물차도 바빠진다. 바람은
제법 선선하고 어둠도 한결 빨라졌다. 중심가에는 불빛이 많고 오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변두리로 나갈수록 불빛은 희미하고 사람의 그림자도
드물다.
'막대기가 걷고 있구나.'
홍이는 자기 자신이 막대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릎이 꺽이지 않고
걸음을 옮기고 이T는 것만 같다. 피곤하기도 해T다. 술을 어지간히
마셨는데 취해오지 않았다. 막판에는 악쓰듯 술을 마셨고, 그리고
나가떨어진 삼석이는 삼석이 나름대로 고독했을 것이며, 나, 나는 안
그란다, 알다시피 내 성미가 허약해서, 하며 약점을 찔렸을 때처럼
당황하던 근태도 근태 나름대로 고독했을 것이다. 홍이는 새삼스런 일도
아닌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가 약해져가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
간도에 있을 때 혈육같이 짙고 강했던 동포들 사이의 유대를 지금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간도요 이곳이 조선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결코 아니리라. 핍박도 지나치면 인성을 마비시키는가.
차츰 죄어드는, 차츰 그들의 수효가 많아지는 대일본제국의 힘, 어느 곳에
가도 그것을 목격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회피하는 경향,
무관심해지려는 경향, 일본 생활 이 년 동안 홍이는 똑똑히 그것을
확인하였다. 더구나 모집으로 일본 간 조선의 노동자와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간 학생들은 동포이면서 이민족만큼이나 두터운 의식의 벽으로 갈라져
있었다. 노동력으로 고학을 하는 학생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그들
스스로의 성곽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다 같은 남의 땅인데, 다 같은
동포인데 간도와 일본의 형편이 그렇게 다를 줄이야. 정당한 논리의
전개는 아니겠지만 일본의 힘이 큰 곳이면 큰 곳일수록 생존이 그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동포의 유대가 약화되는 거라고 홍이는 결론지었다.
오늘, 삼석이와는 달리 흥분하지 않았던 자기 자신, 그랬기 때문에
고독했을 삼석이, 이성으론 타당했겠지만 외로움이란 감정의 산물이다.
그러나 삼석이와 근태처럼 홍이도 오늘밤 자기 나름대로 고독한 것이다.
생활이 삭막하다는 느낌과 더불어 외로움이 엄습해오는 것이다.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간도에서는 친삼촌 같았던 영팔이아제도
이제는 타인이거니 생각한다. 형, 형 하고 따랐던 영팔의 아들 삼형제도
분명 타인이긴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홍이를 그렇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모르게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나이 탓일까,'
장이를 생각할 때는 더욱 그러하였다. 모든 것을 허용하고 가장편하게
쉴 곳이던 원선의 경우도 그렇다. 살을 찢어내는 것만 같았던 그 아픔들을
이제는 실감할 수가 없다. 아내와 딸애, 그리고 머지않아 태어날 아이에
대하여 옛일을 잊을 만큼 그렇게 강한 정애를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그와
동시, 결코 비천한 짓만은 아니 할 자존심은 그대로였지만 생모 임이네의
역정에 대한 수치심이 이제는 없는 것이다. 통영에서 장이 시가식구들이
차고로 습격해왔을 때, 그때 일도 장이를 위해 아판 추억이지만 홍이는 그
수치스런 기억도 극복한 것을 느낀다.
그런데 통증을 진통제로 마비시키듯 홍이 취기도 그런 상태였을까,
도무지 취기를 느끼지 않으면서 석이 집을 향하던 그의 발길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처음 장이를 범했던 장소이며 마지막 작별도
그곳이던 숲을 향해 걷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과 변함이 없었다.
걸터앉았던 바위도 그대로, 다만 가난한 백성들이 얼마나 갈퀴질을
하였는지 땅은 딱딱하고 메마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qkn이에 걸터앉아
담배를 붙여문 홍이는 어둠 속을 뚫어보듯 숲 사이를 바라본다. 아무도
없고 바람조차 별로 없다. 아주 멀리 길 쪽에 등불이 하나 가는 것이 보일
뿐이다. 허기진 듯 계속 담배를 빨아대던 홍이 담뱃불을 끄고 일어서려는
듯하다가 별안간 무릎 사이로 얼굴을 처박고 운다. 흐느껴 울다가 나중엔
어흐흥 어흥 하고 소리까지 내며 운다. 소리를 내고, 통곡을 하면서 홍이는
날아야지, 날아야지, 마음속으로 외쳐대는 것이었다. 날아야지.
홍이 석이 집 앞에까지 왔을 때는 밤이 꽤 저물어 있었다.
"홍아, 니 참 오래간만이구나."
그새 이가 더러 빠졌는지 양볼이 홀쭉해진 석이네가 반가워서 손을 덥석
잡았다.
"오셨습니까."
석이댁네 을례는 건성으로 인사했다. 아이들은 벌써 잠이 든 모양이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꼬 우리 정선생이 아즉 안 오네."
하다가 석이네는 며느리 눈치를 힐끗 살핀다.
"아마 볼일이 있어서 그런 모앵인데 어서 올라오니라."
신발을 벗고 석이네가 거처하는 큰방으로 들어간다.
"아아는 잘 크제?"
"예."
"참, 아즉 순산 안 했나? 그쯤 됐일 긴데?"
"아직 멀었습니다."
"이분에는 아들을 낳아야지."
"머 아들이나 딸이나 상관 있습니까?"
"그래도 너 아부지가 얼매나 기다리겄노."
"인력으로 되는 일이라야지요."
"하기사 그렇다."
아이가 깼는지 작은방에서 을례의 야단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석이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잠시 얼굴을 숙인다. 석이네의 무명
치마저고리가 심한 편은 아니지만 거무죽죽하게 때가 묻고 깃이 너덜너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어딘지 모르게 이 집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형님이 늦게 돌아오실 것 같으면 지는 가볼랍니다."
"아, 아니다. 곧 올 기구마는, 이내 올 기다."
팔을 꽉 잡는 석이네 표정에는 뭔지 필사적인 것이 있다.
"그래, 무신 의논이라도 할 기이 있어서 왔나?"
"의논이라기보다,"
"좀 기다리믄 올 기다."
"최참판댁 일이 걱정돼서요. 소식이나 좀 들어볼까 싶어서 왔더니,"
최참판댁 일이라기보다 홍이는 길상이 걱정되어 온 것이다.
"어이구, 그러게 말이다. 내사 머 무식한 늙은이, 머를 알겄나마는
큰일이제. 그 댁 마님이 또 서울로 올라가신 모앵인데, 그 좋든 얼굴에
기미가 쓸고."
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어째 금년은 이리 스산한지 모리겄다."
홍이는 석이네 말이나 집안 분위기도 그렇고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한다. 석이 부부의 불화설은 홍이가 진주로 돌아왔을 때부터 나돌았다.
기화 때문에 그렇다는 말도 있었다.
"석이어매가 며느리를 잘못 보았어. 남녀 할 것 없이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있어서는 집안이 화목하기 어러버. 의심이라는 것도 거이
방해야제? 참 기가 차서, 아 그래 봉순이가 지금 온전한 사람가? 온전한
사람이라야 얘기도 되는 거 앙이가."
곰방대를 두드리며 영팔이 한 말이었다.
"설마 봉순이누님을 두고 의심이야 했겠습니까."
"말 마라. 남정네 얼굴에 똥칠했다. 아니할 말로 설사 석이가 한눈을
팔았다고 하자, 남우 이목이 무서분 교사 신분인데 안에서 아홉폭 치마로
덮어주지는 못할망정, 말 같지도 않은 것을 트집잡아서 보따리 싸가지고
친정으로 왔다갔다, 사느니 안 사느니, 장모까지 덩달아서 이러니저러니,"
"그러니께 석이어매만 양새 긴 나무맹크로 못할 짓이제요."
판술네가 덧붙인 말이었다.
"너무 심히 그러믄은 남자란 있던 정도 떨어지는 법이다."
"성환이 외할매는 처음부터 사램이 좀 경하다 싶었지마는 성환네는 그리
안 봤는데 사람 차별이 심하고 땡알맞은 곳이 있더마요. 처음에사
그쪽에서 몸달아가지고 한 혼사 아니든가배? 그렇기 속이 깊고 착실한
신랑감이 어디 있일 기라고,"
"석이 그 아아가 겉보기에는 용한 것 겉지마는 성이 한분 나문 여간해서
안 꺽일 성미니께, 자식 낳아 나를 우짤 긴고 했다가는 크코 다치지. 그런
점에서는 상의네가 잘하는 편이다. 아망을 부린다믄 상의네도 못할 기이
없지. 신식 공부는 못해도 김생원의 외손녀 아니가."
"집안을 말한다믄야,"
늙으면 말이 많아지는가 내외가 입을 모아 쫑알쫑알하는 것이 우습고
미운 생각도 들어서 홍이
"본시 성미야 상의에미도 못됐지요. 사람이 좀 됐는가 싶더니 요새는
바가지를 긁습니다."
"허 참, 석이가 홍이 같애봐라. 성환네 말라서 죽었게?"
"아저씨도 참, 아 지가 그렇게 몹쓸놈입니까?"
"지금 얘기가. 옛날에야 큰소리 못하게 돼 있지. 하하핫... 하기사 머
사내자식이 그렇게 못해보믄 벵신이다, 벵신이라,"
"어이구구? 자알 가르치요. 며누리가 들어보소. 시아부지 죽고 나믄
묏상도 안 들라 카겄소."
멍청하니 앉았던 석이네가 다시 말을 꺼내었다.
"저분때 내 평사리에 갔다 왔네라."
"무슨 일로 가셨던가요?"
"바람도 쐬일 겸 그냥 훌쩍 가봤지. 너거 아부지는 잘 있고,"
"봉순이누님은 어떻게 지내시든가요?"
그 말 대꾸는 없이
"안 가니만 못하더라. 푸건이가 안 죽었나."
"기여 죽었구만요."
"울어쌌는 야무네도 보기가 안왰더라만 울타리 앞에 등을 돌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남정네 꼴은 눈에 심이 찌이더라. 부모 형제랑 등지고
나와서 여편네를 살리보겄다고 버둥거리더마는, 저승차사가 어디 사정을
두더나."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아가아, 성환아!"
며느리를 부른다. 불안해하는 음성이다. 대답이 없다. 듣고도 대답을 안
하는 것 같다.
"성환네! 자나아!"
"머할라꼬 그러십니까."
"아, 저기, 홍아."
"예."
"저녁 안 묵었제?"
"지금이 몇 신데 저녁을 안 먹었겠습니까."
"그, 그렇게 됐나? 벌써... 성환네, 괜찮다. 자거라. 나는 또오,"
어색하게 웃는다. 그러고는 다시 멍하니 말을 잃는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대하더니, 다음은 안절부절 못하더니 이제는 홍이에게 마음 쓸
여유조차 없어졌는지 침묵을 지속한다. 밤은 자꾸 저물어가는데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게 온통 신경이 쏠렸는가, 아니면 작은방에서 기척이 없는
며느리가 목이라도 맨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인가. 홍이는 숨이 막힐 것
같고 흡사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아무래도 늦을 모양인데 지는 그만 갈랍니다. 다음에 또 오지요."
"음? 음,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사람을 앉히놓고,"
일어서려다 만다.
"자식이란 삼십이 되고 사십질을 바라보아도 근심되기로는 강보때나
매한가진갑다."
한숨을 내쉰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형님이야 실수할 분입니까."
"그거사 알지마는, 사람이란 살다보므는 이 일 저 일로,"
목소리를 낮춘다.
"그라믄 갈라나?"
"네."
"조금만 더 기다리볼 거로?"
"오늘 마산 갔다 왔는데 아직 집에 못 갔습니다."
석이네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아가아, 그러믄 말이다, 가는 길에 판술네 집에 한분 들맀다 가거라. 내
생각엔 성환애비가 거기 있지 싶다. 만내거든 집에 어서 가라고 권해봐라."
"그러지요."
"쯔쯔쯔... 남우 집 자식 데리다놓고 잘하나 못하나 애비를 나무라야지
우짜겄노?"
조금 실토를 한다. 홍이는 왜 그러느냐고 되묻지 않고 일어선다. 홍이를
따라 석이네도 마당으로 내려섰다. 팔짱을 끼고 허리를 구부리고
"성환아, 아가아, 이서방이 간다. 내다보아라."
대꾸가 없다. 방의 불도 꺼져 있다.
"야아야, 성환네야!"
불안해하는 음성이다.
"아이구 참, 자는데 와 그라십니까."
올곧잖은 대꾸다.
"음 그래, 자, 잠이 들었는갑다."
석이네는 허둥지둥 홍이를 따라 문밖까지 나온다.
"아이구 내가 그만, 이 꼴 저 꼴 안 보고 그만 죽었이믄 좋겄다."
울음이 북받치는지 치맛자락을 들고 입을 막는다.
"이러지 마십시오. 집집하다 근심 없는 집은 없습니다. 형님이 다 처리를
잘해나갈 겁니다. 울기는 왜 웁니까. 이제 들어가십시오."
겹저고리 밑의 가뿐한 두 어깨에 손을 dsw고 석이네를 빙그르르 돌려서
집안에 밀어넣은 홍이는 삽짝을 닫아주고 그 집 앞을 떠난다.
'일이 좀 심상찮구나. 왜 이리 사람 사는 게 복잡하나.'
홍이 영팔이 집에 갔을 때 과연 석이는 그곳에 있었다.
"뭐 하십니까 형님, 집에서 걱정하든데."
"그래?"
방안은 담배연기가 꽉 차 있었다. 석이의 얼굴은 평정했다.
"아따, 홍이 니 보기가 와 그리 어렵노?"
영팔이 서운해하듯 곰방대를 입에 물고 말했다. 재작년에 환갑을 지낸
영팔의 머리는 반백이 넘었으나 전과 다름없이 머리숱이 많아 상투는 컸고
몸은 건장했다.
"빌어먹고 살라니까 어쩌겠습니까."
"그거는 늙은 사람 하는 투정이고 야물게 사니께 얼매나 고마분지, 니
아부지가 늦복이 있어서 그런갑다."
"한번 안 온다고 직일 놈 살릴 놈 해쌌더마는 면대한께 꼼짝 못하요."
판술네는 눈을 흘기고 함께 앉아 있던 판술이 껄걸 웃는다. 판술의
나이도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게 되었다. 제술이와 또술이는 각각 분가를
했고 손자 둘, 손녀 둘, 아들 부부, 늙은 내외 여덟 식구가 단란하게 살고
있다.
"늙어갈수록 변덕이 늘어서 우떤 때는 남 놓은 내 자식이야 함서니
칭찬에 입의 침이 마르는가 하면 우떤 때는 오리새끼 물로 가고 우짜고
섭섭하니 서글프니 함서, 주책도 이만저만이건데?"
"추석에 가면 평사리에서 만나뵈거니 하고 생각했지요."
"아직 소식은 없나?"
"..."
"니 댁 말이다."
"멀었습니다."
"하마,"
"아지매가 오셔서 태 가를 건데 혼자 놓겠습니까."
"생남해얄 긴데, 생남을 해야 너거 볼일은 본 셈인데,"
"홍이 너 할말이 있어서 날 찾아왔나?"
석이 묻는다.
"할말이 있기보다 길상이아제 소식이나 좀 들어볼까 싶어서요."
들떠 있던 방안 공기가 싹 가라앉는다. 사건의 경위, 전말은 석이편이
소상하겠으나 석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길상과 함께 모두 간도에서
풍설을 겪은 처지다. 어릴 적에 본 기억조차 희미한 석이에 비하여 나머지
사람들에겐, 살 비비고 체온을 느끼며 짙은 정애와 강한 유대를 지녔던
길상과의 추억은 생생하다. 어떤 뜻에선 길상은 아들에게 지도자요
우상이었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크게 걱정할 거는 없고, 일심에서 이 년을 받았는데 항소를 했으니
어찌 될지, 무죄석방은 어려울 거다."
"결국 징역을 산다 그 말입니까?"
"응, 모두 그렇게들 생각하는 모양이야. 몸만 건강하다면 일이 년 사는
거야, 무죄석방을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의지가 굳은 분 이라서, 또
혁명가로서 그만한 각오가 없겠나?"
"집행유예가 된 사람도 많다 하든데,"
"서의돈이라는 분이 삼 년이고 그분이 이 년, 서선생은 주모자라 그렇고
그분은 간도에 계셨다는 것 때문에 불리했던 거지. 그것 때문에 왜놈들이
신경을 쓴 것 같다. 우연히 서선생과 용정촌에서 만났다는 것이 안
통했거든. 회원 명단에 이름이 있었으니까."
애기를 듣고 보니 별로 새로운 소식은 아니었다.
"면회는 됩니까?"
"된다더라."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소."
고개를 숙이고 깍지끼고 있는 판술의 큰 손을 쳐다보며 홍이 뇌었다.
"글쎄...이제 가야지."
"네."
홍이와 석이 일어선다.
"석이가 괜찮다, 괜찮다. 한께 괜찮다고 생각해야지 우짜겄노. 큰일하는
사람이 당하는 고초니게 그러려니 맘을 달랠밖에 없겄다."
영팔이 곰방대를 재떨이에 털고 일어섰다. 판술네는 남폿불을 들면서
"그만 조선에 나와서 편히 살 긴데 머가 기러바서 그 고생을 하노."
"어허어! 여자들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니께. 남아대장부, 큰 재목이
썩어서 될 기든가? 흠, 강우규, 그런께 총독을 직일라 칸 그 양반도 내가
만내본 일이 있는데, 침술 가지고,"
"또 그 소리, 귀에 목이 박이겄소. 아는 얘기를 와 또 하요."
간도 퉁포슬에 살 때 주갑의 급체를 침으로 고쳐주던 강가라던
중늙은이가 바로 강우규 열사였었다는 얘기는 그때 한복이를 따라 왔던
주갑이한테 들은 것이다. 영팔이는 걸핏하면 식구들한테 그 얘기를 하곤
했었다.
구두를 신고 신돌 아래로 내려선 석이는
"영호야."
아이들이 있는 아랫방 문이 열리면서
"네에!"
얼른 신발을 신고 소년이 쫓아나온다. 다름아닌 한복의 아들 영호였다.
"아저씨, 안녕하십니까."
홍이에게 인사를 한다.
"응, 영호구나."
"천일이형 잘 있습니까."
"그래 잘 있다."
"영호야."
영호는 석이에게로 돌아선다.
"그러면 여기 좀 있어 봐라, 공부 잘하고."
"네."
"추석에는 집에 갈래?"
"안 갈 깁니다."
"그래. 내 집이거니 생각하고... 나 간다."
영호는 꾸벅 절을 한다. 식구들이 모두 문간까지 따라나왔다.
"어두분데 조심해서 가거라이."
판술네가 남폿불을 쳐들어올리며 말했다.
"걱정 말고 어서 들어가십시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소 경사진 길을 내려간다.
"영호 그 아이 형님댁에 안 있었습니까?"
"음, 집안이 시끌시끌해서 오늘밤 데리고 나왔다. 오히려 우리집에 있는
것보다 아저씨댁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영호는 이곳 농업학교의 이학년이었다. 농업학교에 들면서 한복이
간청하는 바람에 석이가 데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저기 아래 내려가서 술이나 한잔씩 하고 가자."
"그럽시다."
석이 심정은 아주 복잡하고 괴로운 것 같았다. 그래서 홍이는 술생각이
없었지만 응한 것이다.
일조의 암투라고나 할까. 석이와 을례 사이에 계속돼오던 일이 오늘
사소한 일로 폭발했다. 평양에서 기화를 데려온 후 석이는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행위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심정적으로 기화에겐
헌신적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고지식하고 양심과 윤리적인 문제 때문에
고민해온 석이는 을례가 기화와의 사이를 지적한 데 대해서 강경하게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 암투의 발달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아가아, 봉순이는 성환이애비 은인 아닌가. 오늘날 면무식을 하고
선생질이라도 하는 기이 다 봉순이 은공인데 우째 사람으로서 내모른다
허겄노. 성한 사람이믄 또 모리겄다마는,"
"당자는 아무말 못하는데 와 어무니가 나서서 변명을 하십니까!"
을례는 악을 썼다. 평양서 갓 내려온 기화는 그 당시 환이가 체포되고
자살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전전긍긍하던 중에 박외과에 입원을 시켰고,
석이가 보살펴주엇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을례와 석이 사이에 언쟁이
가실 날이 없었고 피차간의 감정이 해소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는데,
석이는 을례 인간성에 대한 염증과 기화 대한 자기 감정의 가책에
시달려왔다. 을례는 을례대로 여분이 없는 생활, 시모나 남편 전적에 대한
모멸감, 그런 것들을 합쳐서 시집을 잘못 왔다는 후회와 아울러
떠받쳐주어도 묏한체 아편쟁이 기생한테 진실을 쏟는다는 것에 광란적인
질투를 느끼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살도 피도 안 닿는 생판 남이데
돌보아줄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주장은 엉뚱하게 영호에게 가서 불꽃을
튀기는 일이 번번이 있었다. 살도 피도 안 닿은 남의 자식 맡아 있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하숙비는 준다지만 우리가 하숙 치는 사람이냐,
기화에 대한 악감정을 간접적으로 영호를 통래 발산했지만 어지간히
심하게 굴어도 아이가 참을성이 있고 비뚤어진 곳이 없어서 지내왔는데
오늘 저녁, 저녁상을 받았을 때 그것은 순전히 악의에 찬 짓이었다. 영호와
석이는 늘 겸상을 했었다. 한데 석이 밥그릇은 보리알갱이 하나 볼 수
없는 쌀밥이었고 영호 밥그릇엔 쌀알 하나 구경 할 수 없으리만큼의
보리밥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시뻘겋게 부풀은 석이는 잠자코
밥그릇을 바꾸어놨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밥상머리를 맴돌던 을례는
"밥그릇을 바꾸는 법이 어디 있소? 제가끔 자기 밥그릇이 따로 있는데,"
"뭣이! 이년아!"
순간 밥상을 때려엎고 벌떡 일어선 석이는 을례의 뺨을 후려갈겼다.
때린 것은 혼인 후 처음 있는 일이요 년자를 놓고 욕을 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을례는 악을 쓰며 덤벼들었다. 석이네는 눈을 껌벅거려놓고
아들을 나무랐고, 어린 것 둘은 왕왕대며 울었다.
"가자, 영호야."
아연실색한 영호의 팔을 끌고 석이는 집을 나왔던 것이다.
변두리 살풍경한 주점에 마주앉아 술을 마시면서, 석이는 집안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때? 현재 직업이 맘에 드나?"
"괜찮은 편입니다. 좀 고되기는 하지만요.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직업
아닙니까?"
"그런 그래, 기술이니까. 더 공부를 하려 했으면 할 수도 있을 건데 후회
안 하나?"
"후회 안 합니다. 했으면 우습게 됐겠지요."
"누가 이런 말을 하더군. 인간의 목적, 어떤 형태로는 목적에서 초월하는
것은 성인의 길이요, 사람은 각기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는 법인데 물론
최선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겠지. 차선은 목적에 비하여 자신의 능력으론
감당할 수 없을 때 깨끗이 포기하는 일인데, 능력이 못 미쳐 탈락한
사람들은 대개 반드시 그 목적 자체를 경멸한다는 게야. 홍이는
어느편인가."
"글쎄요. 우습게 됐을 거라 했지만 뭐 저한테는 공부하는 것을 목적
삼았던 일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능력은 못 따르지만 끝까지 포기
안 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요?"
"그건 나 같은 경우일 게다, 허허헛 허허헛."
"그건 두고봐야 알 일이고, 형님 술 드십시오."
술을 부어준다. 술을 마시는 것을 쳐다보고 있다가 홍이는
"형님."
"왜."
"형님네 내외분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은 봉순이누님 때문이라는 말이
있어요. 어찌 된 일입니까?"
슬쩍 던져본다. 흥미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석이의
절망감 같은 것을 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석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건 왜 물어."
"술자리라 그냥 물어본 겁니다."
석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술을 부어 한 잔 더 마시고 나서
"기화 그 사람 때문에 싸움이 잦은 것은 사실이다. 나한테도 책임은
있어."
"최참판댁 부탁 때문에 한 일 아니었습니까? 얼마든지 알아듣게 얘기할
수 있는 일 같은데,"
"그렇게 할 수도 있었겠지."
"그렇다면?
"나는 최참판댁 부탁 때문에 그 사람 일을 돌보아준 건 아니다."
"과거 은혜 때문에 그랬겠지요."
"그것만도 아니고,"
"그렇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마음대로 생각하게. 설명하기도 싫고, 설명하기도 어렵다."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석이의 얼굴 근육이 전율하듯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옛날에 간도에 있을 적에 봉순이누님이 한번 온 일이 있었지요. 소학교
땐가, 그 때 나는 학교 때문에 용정에 있었고 영팔이아제랑 아버진
퉁포슬이란 곳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때 봉순이누님이랑 함께
퉁포슬로 찾아갔는데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들판이 훤한 것 같았지요. 영
그때 일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형님도 뭐 그런 것 아닙니까?"
"음, 그런 거다. 하하핫 하하하."
마치 유쾌한 것처럼 웃었으나 뭔지 목메이는 것 같은 것이 있다.
"진심으로 그 사람이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서 딸애를 키우며 잘살 것을
바라지. 그것뿐인데 그 진심이라는 것이 아마 아내에게 가는 것보다 더
절실하여 불화가 생기는 것, 나도 잘 알어."
그것은 어던 고백 같은 것이었다. 어떤 고백 같은 그 말을 듣지
않았어도 홍이는 이미 짐작이 갔었다. 자신의 입에서는 쉽사리
봉순이누님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석이는 두세 살은 위인 봉순이를 두고
누님이란 말을 붙이지 않았다. 기화 그 사람, 누님이라 부르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호이는 아까부터 생각한 것이다.
"그나저나 그 아이는 어떻게 합니까."
"소학교 들어갈 때는 진주로 데리고 오겠다 하시더군."
"환국이어머님이요?"
"음."
"대여섯 됐을 걸요?"
"일곱 살이지."
"이제 가셔야지요. 어머니가 안절부절입니다."
"그러시겠지. 나도 나쁜 놈이다. 푼수 모르는 나쁜 놈이지."
석이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홍이는 오늘 하루가 굉장히 길었던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5장 아침 커피
극히 소수의 가까운 사람들을 응대하기도 하는 별채의 조용한 서재는
침실이 하나 붙어 있었고, 목욕탕, 화장실을 신축했으므로 사실상 조용하
부부의 거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근자에 와서는 독서라는 것을 도통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실 전용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잠옷 위에 감색
바탕과 갈색 무늬가 있는 가운을 걸치고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신문을 읽던 조용하는
"당신 오라버니는 왜 그러지요?"
보라색 한복을 입고 커피잔에 커피를 붓던 명희는
"네에?"
하고 돌아본다. 머리칼이 희고 묵직해진 목덜미에서 흔들렸다.
"당신 오라버니 말이오."
"..."
"무산 상관이 있어서 그 사건에 머리를 디미느냐 그 말이오."
"디밀기는요,"
커피잔을 용하 앞에 하나 갖다놓고 맞은편에 자기 몫을 놓은 명희는
남편과 마주앉는다.
"그 사건 때문에 요즘엔 동분서주 바쁘신 모양인에, 그래도 머릴 디밀지
않았단 말인가?"
"들어간 사람들이 모두 친구, 후배들이니까 그렇지요."
"친구, 후배?"
"커피 드세요."
"교육자의 입장에서 그래 되는 건지 모르겠군."
신문을 접어서 사회면으로 눈길을 옮기며 조용하는 커피잔을 든다.
"파렴치해서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 아니잖아요? 도울 수 있다면
도와주는 것이 도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요?"
이마에 주름 세 개를 잡고 눈을 치뜨며, 마치 명희의 소상같이 창백한
얼굴을 들어올리기라도 하듯 쳐다본다. 냉랭한 눈빛이다. 조롱의 빛도
지나간다. 그러나 그런 눈에 익숙해져 있는 명희는 태연하게 커피를
마신다. 명희를 쳐다보던 조용하는 신문을 팽개치듯, 그러고 나서 커피
한모금을 삼킨다.
"일본 가서 대학까지 나온 여성이 퍽이나 단순하구먼. 임명빈 씨만 해도
그렇지. 내일모레면 머리털이 하얗게 될 터인데 젖내나는 아이들 일에
끼여들어서, 유치하기는 온, 그러고도 애국지사연 할 터인즉 딱한 일
아니겠소?"
"제가 오라버니한테 사표를 내시라고 권고하겠어요."
"어디다 사표를 낸다는 거요?"
"어디긴요, 학교지요."
"겨우 그게 의견이오?"
"..."
용하는 커피잔을 든 채 일어섰다. 책장 앞에, 명희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
서 있다가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기 시작한다.
"나는 임명희 씨 의견을 듣고 싶었던 거요.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당신의 소견 말이오."
그 말은 명희 등뒤에서 들려왔다. 명희는 시트에 깊이 몸을 묻은 채
커피잔을 놓고
"가사과 출신이 그런 것 알 턱이 있겠어요?"
"임명희 씨는 귀족의 부인이오. 그리고 그네들이 타도를 외치는
자본가의 부인이지요. 진정 자신의 처지가 그렇다는 것을 자각한다면은
원시적으로라도 의견이 있을 법한데, 안 그렇소? 내 말이 옳지 않소?"
"저는 그들이 자본가만을 적대하여 비밀단체를 만들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주권을 찾으려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위장전술일수도
있잖겠어요?"
"하하핫 하핫하 으으하핫핫... 소견치고는 걸작이오. 하하핫핫..."
치밀하고 냉정한 성품에는 전혀 걸맞지 않는 웃음 소리를 울리며
웃는다. 그래도 명희는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조용하는 소파로 돌아와
앉으며 커피잔도 탁자에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내 말이 과했소? 속이 상했으면 내 사과하리다. 나는 아직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으니까 다치게 하고 싶지 않어. 그는 그렇고,"
일단계는 끝난 듯 이단계로 옮겨갈 기색이다.
"며칠 후면 동경의 찬하가 신부감을 데리고 귀국할 터인데 일본 여자를
동서로 맞는 당신 기분은 어떻소?"
"제 기분 따라서 혼사가 좌우되나요?"
"허허허, 항상 당신은 비약하는구료."
"아무튼 축복해드려야지요."
"아무튼?"
"..."
"아무튼이란 말이 왜 붙지요? 내키지 않는다는 거요? 형식적으론 그렇게
해야 한다, 그 말이오?"
"집안 여러 어른께서 제가 이 댁으로 시집을 때처럼 괴로워하시니까
그렇지요."
"흠 듣고 보니, 그도 그렇겠군. 여하튼 동생 얼굴을 지척에서 보게되어
다행이오. 당신도 그리 생각하는 거요?"
"오늘 기분이 안 좋으신 모양이군요. 잘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
"왜?"
"기분이 안 좋으실 때 늘 이러시지 않아요?"
"그랬던가?"
"..."
"별로 기분 나쁜일 없는데?"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흔들어 보인다.
"그럼 됐어요. 오늘 g평양에 가시는 거지요?"
"갔으면 싶은 게로군."
"..."
"또오 그는 그렇고, 누구라든가? 당신 후배라든데? 노래하는 여자
말이오."
"홍성숙이오?"
"아, 맞아요. 홍성숙이라 하더구먼. 그 여자 결혼한 사람이오?"
"했지요."
"뭐 하는 남잔데?"
"그건 알아 뭐하시려구요."
"질투하는 거요?"
"아니오."
"그럴 테지."
"..."
"그런데 그 여자 남편은 지지리 가난뱅이인 모양이군?"
"어째서요?"
"일전에, 그러니까 조선 호텔에서 식사를 했지요. 마침 그 여자도 그곳에
와 있었소. 나하고 동석했던 친구가 그 여자하고 잘 아는 사이라더구먼.
그래서 내게 소개를 해주었는데 그쪽에서 당신 얘기를 하더구먼요."
말을 끊고 힐끗 쳐다본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일간에 독창회를 열게 왜 있으니 후원 좀
해달라나? 당돌하기도 하고 매력도 있긴 있어요."
"후원 좀 해드리세요."
"당신이 부탁하는 거요?"
"후배니까."
"남편이 있다 해서 금단의 열맨 줄 아오?"
"그런 말씀 저한테 하셔야 시원하시겠어요?"
"당신 날 좋아해서 결혼한 것 아니잖아!"
별안간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조용하는 이성을 잃은 것도 아니요
약이 올랐던 것도 아니다. 명희는 눈살을 찌푸린다. 또 시작이다 싶었던
것이다.
"말해봐요!"
"제가 그럼 당신을 속였나요?"
"항상 하는 그 대답이군."
"당신도 항상 하시는 그 말씀 아니에요?"
할 수 없다는 듯 씩 웃는다.
"아이가 없어서 어른들이 권하는 대로 소실 하나 둘까 생각했는데
당분간 보류해야겠소."
"왜요?"
"아직은 매력이 있소. 또 매력이 있어질 게요."
매력이 있어진다는 말은 시동생의 귀국에서 비롯된 말이리라. 명희는
우울한 눈을 들어 창 밖을 바라본다. 나뭇잎이 지고 있다. 갈색으로 변한
커다란 목련잎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마음 바닥에 기차바퀴가 갈고
지나간 것처럼 쓰라림이 지나간다. 조용하의 정신적인 학대를 어떻게
피하는가, 그것에는 이미 이골이 나 있었지만, 그러나 당할 때마다 마음은
황폐해가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명희를 괴롭히는 데 세 사람이
동원되었다. 오빠와 시동생과, 그러고 홍성숙은 처음 등장이다.
조용하를 전송한 명희는
"아버님께서 쓰실지 모르니까 돌아가요."
운전수에게 이르고 그는 전차를 탔다. 전차에서 내린 명희는 또 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걷는다. 발밑에서 가을이, 낙엽이 아우성치듯, 스산한
냉기를 느끼며 걸음을 빨리한다. 그리고 강선혜를 찾아갔다.
"어이구, 우리 귀부인께서 무슨 바람이 불었나?"
"방해 안 됐어요?"
"아아니, 이애 좀 봐? 방안에 애인이라도 감추어두었단 말이냐? 어서
들어가자."
방으로 들어간 명희는 코트를 벗어놓고 옆으로 다리를 뻗으며
"나 오면서 말이유,"
"응."
"언니 안 계시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무슨 소리야?"
"창경원에라도 가려구요. 호자 가서 벤치에 앉아 있음 얼마나 편할까
하구,"
"아 그러면 곧장 갈 일이지."
"글쎄...언닌 아무 변화도 없는 모양이지요?"
"있다가 없다가, 어이구 말 말어. 죽을 지경이야. 이젠 어린애 노릇도 할
수 없잖아, 집에서 말이야."
여전히 방안은 화려하고 얼굴엔 화장이 한층 짙어졌다.
"시집가세요."
"시집가니까 좋데?"
선혜 얼굴에 비웃음이 지나간다.
"시집가서 좋은데 뭣하러 여긴 왔어? 창경원엔 뭣하러 가려 했나."
"그이 평양 가는데 전송하고, 가을이잖아요."
"그래도 깡다리는 있어서... 하기야 뭐 안 가도 걱정, 가도 걱정, 이애
명희야,"
"..."
"나 잡지 하나 낼 생각이다."
"뭐요?"
"빌어먹을 자식들, 내 원고는 밤낮 퇴짜야. 괘씸해서 잡지 하나 내려고
해. 그러면 내로라 하는 작자들, 하하핫..."
사내처럼 웃다가 싱거워졌던지 그만둔다.
"그는 그렇고 왜 그 계명회사건 말이야,"
"그래서요."
"너도 알다시피 유인실이 그애가 말이야,"
"집행유예로 나왔잖아요."
"그는 아는데 어쩌면 그리 엉뚱하냐? 참, 너 제자였었지?"
"여학교 때 좀 가르쳤어요."
"이지적으로 아주 단단하게 생겼든데, 어쩌믄 그렇게도 대담하지?"
"학교 때부터 똑똑했지요."
"계집애가 어쩌자고 공산당을 해?"
"중상 말아요, 언니. 그애가 무슨 공산당이에요. 또 공산당이면 어때요?"
"이애 좀 봐? 귀부인께서 그런 말 해도 돼?"
"우리 남편하고 의견일치군요."
"뭐..."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뿐인 줄 아니?"
"그만두세요, 언니."
명희는 선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듯 제지한다.
"옛날엔 그렇지도 않았는데 언닌 많이 변했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물론
이번 경우는 비합법적인 모임이었지만요, 독립당이다, 뭐 그런 명칭으로
정당하게 단체를 구성할 수 있어요?"
"없지."
"그렇담 무엇이든 단체를 만든다는 것은 중요한 일일 거예요."
"만들어서 되는 일이 뭐 있어? 밤낮 머리빡 깨지는 쌈질이 고작인데,
조선놈들 해서 되는 일 하나 없어! 모두 개새끼들이야! 저주 받은
민족이야!"
강선혜는 악을 쓴다. 그 동안 이 여자가 얼마나 피폐해 있었는가, 명희는
몽롱한 상태에서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깨닫느다. 단순했던 머리는 더욱
단순하게, 적당히 천기 어렸던 모습은 더욱 천덕스럽게, 어리광기는
어리광대로, 무식함은 바닥을 드러내었고, 짙은 화장 밑에 붕괴되어가는
생활의 소리가 들리는 듯, 명희는 모골이 송연해옴을 느낀다.
'임명희는 더욱 고상하게, 침착하게, 여유 있고 교양은 쌓이고 생활은
굳어져가고,'
강선혜는 아래를 향해 떨어져가고 있었으며 명희는 위를 향해 솟구치고
있었는데, 그러나 명희는 그 아래위가 곡선이 되어 서로 마주친다는
생각을 한다. 더욱 멀어졌는데 그것은 더욱 가까워진다는 얘기도 되겠다.
"사내새씨들은 좁쌀같이 좀스럽게 깔근적거리고 계집들은 불여우 같이
빨간 혓바닥으로 사람의 간부터 뜯어먹지. 내 주먹이 철권이라면 일격으로
내려치고 가구로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 어이구우, 마포 강서방 딸
미쳐!"
몸을 쩔쩔 흔든다.
"태어나길 잘못 태어난 거야. 사내로 태어나든가 계집으로 태어날
양이면 공주나 아니면 통지기로나 태어날 일이지."
"남녀평등주의는 어디 갔수? 백기 든 거예요?"
"이애, 말 말어. 백기 드는 정도가 아냐. 그것 땜에 시집을 못 간다,
이애."
"안 가는 게 아니고 못 가는 거유."
"소심한 사내들이 다 달아나니까 안 가는 게 아니구 못 가는
것아니겠니?"
명희는 웃는다. 겨우 옛날 같은 웃음을 띤다.
"식자깨나 든 사내는 마포 강서방 딸인 것도 싫은 게고 말이야, 재산
보고 덤비는 사내는 내가 싫어. 우리 아버지도 불쌍하지. 아들을 두었으면
판사나 검사 만들어서 지체를 높일 건데 재물이 쌓여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마포강 강서방 아니냐? 참, 판사 검사 얘기가 났으니
생각나는데 너 정상조 그 사내 기억하니?"
"독설가 말이지요?"
"음, 입정 나쁜 그 사내 말이야, 고문 패스해서 검사 됐다더라."
"잘됐네요."
"그뿐인 줄 아니?"
"뭐가 또 있어요?"
"친일파 거두의 사위가 됐다는구나."
"출세하겠어요."
"이애, 검사면 조선인으로선 출세 다한 거야. 그 이상 어디로 올라가니?
그 약은 갈밭 쥐새끼 같은 자식이 유산이나 분배받으려고 장가갔겠지.
친일파 거두란 것은 친일파 부자하고 같은 말 아니겠니? 너한테
열올리더니 서로가 다 비슷하게 낙착이 된 셈인데, 그 보다 명희야,"
불러놓고 힐끗 쳐다본다.
"너 좀 이상한 것 같다."
"뭐가요."
"우리집엔 왜 왔지? 새삼스럽게 이상해지는군. 너의 남편 나랑 만나는
것 싫어하잖아?"
명희는 깨어진 자기 자신을 주워모아 그릇에 담아버린 듯 평소의 안정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명희는 웃기만 했다.
"좋아. 다 관두자. 모험하듯 왔을 테니까 귀족 평민 없기야. 난 안편한
게 젤 싫어. 넌 내 후배, 난 너 선배, 귤이나 까먹자꾸나."
구석지에 있는 바구니를 끌어당겨 귤을 집는다.
"자, 가먹자."
명희도 함께 귤을 깐다.
"일본 있을 때 생각 안 나? 밤에 너랑 귤 까먹던 생각,"
"나요."
"서로 많이 변했다. 너는 명실공히 귀부인이 됐고 난 미친년 다됐지. 흠,
막 대놓고 저게 대학 나온 여자냐? 하는 사내도 있어. 개떡 같은 글
한조각 써놓고 문인 행세, 망신스럽다고 면전에서 욕하는 사내도 있지.
그러면 난 웃는다구, 대들기도 하구. 그러고 나면 슬슬 피하는 거야. 똥
피하듯 피한단 말이야."
거짓말을 전혀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시 꾸며대어 말하는 일이 없는
선혜였는데 지금 한 말은 보다 솔직한 고백이다. 생각 없이 기복이 심한
선혜 화제 중에서 가장 절실한 말이기도 하다.
"나가지 마세요. 안 나가면 될 거 아니에요?"
"그래도 안 나가면 선들선들 미칠 것 같아서 말이야. 한데 내가 아까
무슨 말을 하다 말았지? 오오라, 유인실이 얘기를 하다 말았구나."
"애들 얘기 뭐할려구 해요? 관두세요."
"지금도 애들이야? 당당한 여자야. 너보다 당당하구 나보다 당당해.
특이한 여자지. 철두철미한 배일사상에다 최신식인 공산주의자, 쟁쟁한
두뇌들만 모인 계명회의 홍일점 유인실, 게다가 더욱 특이한 것은 왜놈
애인을 갖고 있다는 점일 게야."
"언니야말로 빨간 혀로 사람의 간부터 뜯어먹는구려."
"뭐야?"
"그렇잖아요? 계명회 성격에 대해선 왈가왈부 않겠어요. 인실이 사상에
대해서두요. 그렇지만 인신공격은 안 하는 거에요. 무슨 근거로
단정하지요?"
"어이구, 옛날 제자랍시고, 히지만 경찰서에서 조사 때 다
드러났다던걸?"
"언니가 담당한 취조관이었나요? 매번 언니도 당하면서,"
"왜놈을 애인으로 가진 것을 누가 나쁘다 했니? 특이하다 했지."
"나쁘다 좋다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사실이냐 거짓이냐, 하기야 뭐 전혀
근거 없는 얘기도 누가 그러더라는 정도면 약과지요. 내가 보았다, 그러는
지경이니,"
"..."
"오빠가 그 일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어서 진상에 대해선 언니보담은
내가 더 잘 알 거예요. 일본인 오가다라는 사람은 유인실이 오빠 유인성
씨의 후배였었고,"
"그건 나도 알어. 동경지진 때 조선인 학생들을 숨겨주었다는 얘기,
그리고 뭐 그 일본인 세계주의자라나? 글세 요즈음엔 주의라는게 하도
많아서,"
비꼬듯 말하고 선혜는 부지런히 귤을 까서 입속으로 집어넣는다. 서먹한
분위기 속에 그 얘기는 중단되고 말았다. 명희는 선혜가 인실에 대하여
악의적인 것을 느꼈다.
'왜 그럴까?"
그 순간 느닷없이 아침에 남편이 얘기하던 홍성숙이 생각이 났다. 꽤
노골적인 남편의 표현이 새삼스럽게 되새겨진다.
'금단의 열매가 아니라구?'
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홍성숙이 조용하의 유혹에 넘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넘어가지 않는다면 두번째 이혼을 감행하여 홍성숙에게 미끼를
던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조용하에게 홍성숙을 취할
가치가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을 때 그것은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다.
홍성숙은 능히 남편과 이혼하고 조용하의 구혼을 받아들일 것이다. 야망이
강한 홍성숙이며 성악에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있는 여자, 성악가로서
대성하고 싶은 욕망에는 조용하가 안성맞춤의 배후자이기 때문이다.
남자에게도 성악가라는 것은 새로운 매력이 될 수 있다. 정규적인 교육을
받은 성악가 홍성숙은 조용하의 부인으로서 손색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명희의 상상은 차츰 기정사실 같은 방향으로 옮겨간다.
"너 무슨 생각을 하니?"
"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너 지금 이루지 못한 사랑 생각했지?"
"미쳤수?"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니? 안 그렇지."
"엉뚱하긴,"
"창경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고 싶었다는 얘기가 그거 아니니."
"기가 막혀서,"
"너 상현이 그 사람 좋아했지? 나 알어."
명희는 낯빛이 변한다.
"거봐. 얼굴이 새파래지는구나. 걱정 말어. 나 발설 안 할 거야. 했다면
벌써 옛날에 했게?"
"무슨 근거로?"
화를 낸다.
"아이구 몰라. 다 쓸데없는 얘기고, 영화나 보러 가자."
"싫어요. 곧 가야,"
"너이 남편 어디 갔다며?"
선혜는 일어서서 외출할 준비를 한다. 양복장 문을 열고 무슨 옷을
입을까 잠시 궁리를 하는 듯하다가 자줏빛 비로드 원피스를 꺼내어 입고
회색 코트를 걸친다.
"언니, 나 영화 보러는 알 갈 거예요."
머플러를 두르다 말고
"그럼 어디 갈래?"
"아무데도, 집에 가야지요."
"너 우니?"
"내가?"
"너 울고 있지 않니."
"울긴,"
명희는 화닥닥 일어선다.
"나 갈래요, 언니."
"이애 봐라? 명희야!"
선혜 집을 뛰쳐나온 명희는 한참 걷다가 돌아본다. 핸드백을 찾느라
허둥대는지 선혜는 뒤따라 나오질 않았다.
"미쳤구나, 내가, 울기는 왜 울어?"
중얼거리며 걸음을 빨리한다. 도시는 가을이었고 또 석양의 시각이다.
상현이 때문에 울었는지 남편과 홍성숙의 미래에 대한 공상 때문에
울었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다. 메마르고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았던 황폐했던 마음 어느 구석에 눈물방울이 남아 있었더란
말인가. 그런 중에도 명희는
'선혜언닌 심술궂은 늙은이가 될 거야. 사람이 자꾸 달라져가고 있어.'
하며 덧없는 남의 생각을 하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이 집의 수호신같이 늙어온 찬모 달이어멈이
"마님, 큰일났습니다."
"왜?"
"큰서방님이 오셨습니다요."
하는데 찬모 낯빛이 질린 것을 깨닫는다.
"평양으로 떠나신 양반이 그럴 리 있나."
"아닙니다요. 가신다고 함께 나가신 뒤 몇 시각 지나서 오셨습니다요."
"도중에 하차했구나. 왜 그랬을까?"
"마님을 찾아오라고 벼락이 떨어졌지 뭡니까? 효자동에 사람을 보내고,
진노하고 계세요."
"알았네."
별채로 명희가 들어갔을 때 조용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찌 된 일이에요?"
"..."
"찾으셨다구요."
"..."
"저 선혜언니 만났어요."
그래도 대답이 없다. 할 수 없이 코트를 벗고 남편과 마주보고 앉았다.
명희도 더 이상 그쪽에서 말이 잇기 전에는 말 안 하리라 결심한 듯,
노려보는 조용하 눈과 맞선다.

6장 수모

청조 잡지사 사무실 문을 밀고 강선혜가 푸른 머플러를 너풀거리며
들어섰을 때 둘어앉아서 얘기를 하며 웃곤 하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가을인데, 책상과 의자와 사람 이왼 별다른 비품이
없는 사무실 안은 초겨울같이 썰렁했다.
"얘기를 하다가 왜들 그러시오?"
환영하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강선혜는 비윗살 좋게 빈 의자를
끌어당겨 둘어앉은 사람들 속에 끼여든다. 극단 산호주의 회원, 그러니까
여배우 애란이 외면을 한다. 그의 품 넓은 보랏빛 코트에 갈색 베레모를
쓴 모습과 조각같이 아름다운 콧날이 강한 거부와 모멸감을 나타낸다.
연희색 실크 장갑을 뽑으며 선혜 눈이 날카롭게 애란의 옆모습을 쏜다.
"내 흉이라도 보고 있었나? 하던 말을 꿀꺽 삼키고 왜들 벙어리
놀음인가요?"
다시 soqoxdjhT다.
"강선혜 씨가 무슨 거물이라고 우리가 흉을 보았겠소."
다리를 꼬고 앉았던 시인 이정백이 다리를 풀고 바지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찌르며 하품하듯 말했다. 안경을 쓴 삼각형 얼굴이 섬세한 느낌을
준다.
"그래요? 거물 아니면 흉을 안 보나요?"
이정백이 멈칫한다.
"애란인 밤낮 식모 흉을 보던걸요."
"어머? 그렇담 선혜언닌 식모란 말예요?"
고개를 비틀 듯 선혜를 쳐다보며 애란이 비웃는다.
"거물 아니면 흉 안 본다기에 한 말이야. 속들이 반히 들여다뵈는
말재간 가지곤 배우도 시인도 못 된다구."
"좌충우돌이군."
이정백은 웃고 넘기려 한다.
"나도 이젠 별볼일없는 여자지만 말이야,"
"그럴 리가 있어요?"
청조사의 기자 최인기의 말이었다. 선혜는 힐끗 곁눈질을 하고 나서
"애란이 너, 낯판때기 반반하다구 너무 까불어."
"왜 또 이러실까?"
"우리 조선사회에선 말이야, 무대에 한두 번 섰다간 별볼일없는 여자가
된다구. 김 안 나는 물이 더 뜨겁다는 말 못 들었나? 조선놈의 사회가
그런 거라구."
끼여들지 않고 신문을 읽고 있던 캡 쓴 사내가 말했다.
"그럼 일본이나 미국 가서 살아야겠수다."
그 말도 묵살하고 선혜는
"화려한 꿈은 꿈일 뿐이지. 연극이 어떻고 셰익스피어가 어떻고 고상한
인텔리처럼 자처해보았자 이곳에선 에잇! 얏! 하는 말광대 계집 이상으론
생각 안해."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지."
신문만 훑고 있던 사내가 이번에는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요, 배선생?"
"조선에서는 아직 여선생, 여의사, 전도부인말고는 그렇지요. 인텔리
여성들은 시닉 기생이지요."
이정백이 낄낄 웃는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군."
선혜는 머쓱해진다. 대적하기 어려운 상대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자신의 한 말이 있어 응수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사내는 책상을 들이엎고
신문사를 그만둔 배형광인데, 신문을 접어호주머니에 찌르고 일어선 그는
캡을 앞으로 쑥 내리며 간다온다 말도 없이 사무실에서 나가버린다.
"최기자."
힐끗 쳐다본 최인기
"왜요?"
퉁명스런 대답이다.
"권선생 어디 갔수?"
순간 애란과 이정백의 시선이 마주친다.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진다.
"모르겠는데요."
권선생이란 다재다능하다는 평이 있는 극작가 권오송이다. 그가 대포로
돼 있는 극단 산호주는 단골로 드나드는 청진동의 요릿집 반월, 그곳
여주인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고, 일 년에 서너 번 나올까? 명색이
문예지인"청조"도 권오송이 주재하는 잡지다. 이 밖에 사무실 아래층의
다실이 권오송의 소유였다. 극단과 잡지에 사재를 다 털어넣었다는 말이
있었고, 자금 끌어들이는 재간이 상당하다는 소문도 있는 사내다. 강선혜는
다실에 나온 김에 은근히 권오송을 만날 목적으로 사무실을 찾았던
것이다.
"권선생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 오시었소?"
이정백이 실실 웃으며 묻는다.
"이정백 씨가 그건 알아 뭐 하실래요?"
"글쎄올시다."
"강선혜가 권오송 씨를 짝사랑한다, 소문 내려구요?"
"누굴 참샌 줄 아시오?"
"거물이 아닌 건 나랑 마찬가지겠지만 남자가 참새여서는 너무
귀엽잖겠어요?"
"허 참,"
"어때요? 잇몸이 근질근질하신가요?"
"남자가 아닌 것이 유감천만이군."
"장갑을 던질 텐데 말씀이죠? 영국까지 유학은 안 가신 줄 알지만 당신
꽤 신사군요."
"이럴 땐 어줍잖게 배운 것이 여자한테 유죄거든."
"어줍잖게 지식인인 탓으로 주먹을 휘두르지 못해 참으로 유감이오.
그보다 여자, 여자 하는 사내치고 잘난 놈 못 봤으니까."
이정백의 얼굴이 시뻘개진다. 명확하게 판정패다. 여자가 대등하게
싸우려 들면 망나니처럼 주먹을 휘두르든가 말재주를 부릴밖에 없는데, 두
경우는 다 이로울 것이 없고 사내가 치사스럽게 되게 마련이다. 애초
무관심했으면 좋았을 것을 깔보고 들었기 때문에 당한 봉변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리를 차고 일어서지지는 않았다. 제에기,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하며 문이라도 꽝! 닫고 나가고 싶지만 애란의
아름다운 콧날이 도망가는 용기를 저해한 것이다. 어색하고 민망스런
침묵이 흐른다.
"어젯밤 홍성숙 씨 독창회에 가셨더랬어요?"
침묵을 휘저어버리듯 최기자는 애란을 보고 물었다.
"갔었어요."
"잘하지요."
"글쎄요, 그런 것 같더군요. 사람들도 많이 오구요."
"얼마나 부러웠을꼬?"
가시 돋친 강선혜의 말이 날아왔다.
"누구 얘길 하는 거예요?"
"너 얘길 한 게야."
"흥! 뭣 땜에 내가 부러워하나요?"
태연하다는 듯 픽 웃는다.
"청중이든 관객이든 사람들 대가리 수를 믿고 사는 여자들이니까
말씀이야. 하긴 홍성숙이 편이 훨씬 고급이긴 하지만,"
"관객을 믿어요?"
"안 그런가?"
"기가 막혀. 별 희한한 소릴 다 듣겠네."
애란의 눈꼬리가 치올라간다.
"안 그렇다면 애란이 넌 배우 아니구나. 흐흐흣... 세상에 사는 것도
가지가지, 돈 많은 사내 낚으려는 수단인가 부지?"
"뭐라구요? 그 말 취소하세요!"
"못하겠다면 어쩔 테야? 너 오늘 잘못 걸렸어."
애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게다가 말이야, 조용하 씨의 그 어마어마하게 큰 꽃바구니까지 무대
복판에 떡 버티고 있었으니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만큼 부러웠을 게야.
하하핫 하하하핫."
사내같이 웃어젖히는 강선혜 웃음 소리는 여느 때와 달리 자포자기,
신경질적인 것이었다.
"누가 보내온 꽃바구닌지 그걸 알기는커녕 난 꽃바구니조차 못 봤어요!"
"아, 그래? 여자는 원래 거짓말을 잘한다더군. 눈 감고 아웅이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타이핀을 한 조용하 씰 눈이 빠지게 쳐다본 것도 아니라 할
게고,"
"시시콜콜 알고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만큼
부럽고 탐났던 것 아니에요?"
전세를 가다듬듯 냉정해지며 핸드백 속에서 콤팩트를 든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내가 배우야?"
"..."
"내가 사수냐 말이야. 왜 이래. 내가 시시콜콜 아는 것은 그들, 그러니까
조용하 씨 부부를 맺어준 바로 그 장본인이기 때문이야."
대란이뿐만 아니라 다른 두 사내도 좀 의외란 표정이다.
"뭐 그렇고 그런 처지, 언니 덕분에 오빠 덕분에 여학교 문턱이나 겨우
밟고 나온 처지, 상판때기만 반반하다구 도도해지나?"
관전하던 최기자가
"허허어, 왜들 이러지요? 치사하게들 싸우는군."
애란의 언니가 기생이요, 오라비가 순사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비밀이다. 애란은 울면서 사무실을 쫓아나갔고,
"돈 아깝다! 마포강에서 번 돈이지만 동경까지 가서 뭘 배웠나."
이정백도 욕지거리를 하며 애란을 뒤쫓아 나가버린다. 최기자는 책상
앞으로 돌아가서 책으로 책상을 탕탕 친다.
"비위가 노래기 회쳐 먹겠다. 도대체 얼굴 가죽들이 얼마나 두꺼운지
모르겠구먼."
누구라 칭하진 않았지만 물론 선혜를 향한 비난이다. 강선혜도 좀
지나쳤다 싶었던지 최기자한테 대들지는 않는다. 나이도 저보다 훨씬 어린
남자에게, 어쩌면 강선혜는 최기자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놈의 계집애 재수가 없었던 게야. 잘못 걸렸지. 하지만 고게 가불긴
까불었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으나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는 말은 아니었다.
까닭없이 멍해지는데 새로운 분노가 치미는 것이었다. 선혜는 자신을 나쁜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남을 해친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남한테 해될
것도 없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좀 했을 뿐인데 어째서 지탄을 받아야
하며 소외를 당해야 하는가 싶었다.
"최기자."
"왜 그래요?"
"내 그럴 일이 있어서 물어보는 건데, 앞으로도 잡지가 계속 나올 것
같아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스럽게 묻는다. 최기자는 한번 쳐다보고
대답 없이 책상 서랍을 연다.
"묻는 말에 대답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럼 최기자는 밥도 안 먹고 사나? 얼급 타먹는 직장 일도 모르게?"
"남의 걱정 할 것 없어요."
"흠,"
"남의 걱정 관두고 자신의 일이나 생각하슈. 사람꼴 우습게 됩니다. 그럴
나이도 아니잖소?"
"충고하는 게요?"
"네에, 충고하는 겝니다."
하는데 중키에 다부지게 생긴 권오송이 들어왔다.
"어이구, 강여사가 우리 사무실에, 웬일이시오?"
알은체를 하는데 깔보는 기색은 없다.
"무척 바쁘신 모양이죠?"
저기압, 혼란, 그런 것에서 몸을 일으키듯 자리에서 일어선 선혜는 제법
여자답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어색한 몸짓이었다.
"별 성과도 없으면서 바쁘군요. 아, 앉으세요."
친절했으나 의례적인 것이었고, 권오송의 눈빛은 싸늘했다.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어째 분위기도 안 좋구,"
"아, 네,"
잠시 생각는 것 같더니 권오송은
"최군."
"네."
"자네 점심은 했나?"
"아직, 사무실이 비어서 못했습니다."
"또병이는 어딜 가고?"
"배가 아프다기에 집에 가라 했습니다."
"그래? 그럼 점심하고 오게. 점심값 있나?"
"있습니다."
뿌루퉁해서 최기자는 나간다. 권오송은 선혜와 마주보고 앉으며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아무렇게나 맨 넥타이, 별로 손질도 안 한 것 같은 양복,
그러나 분위기가 세련되었고 피곤해 뵈는 것이 오히려 맑은 느낌을 준다.
"권선생님."
"네."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를 바라보던 권오송이 시선을 선혜에게 옮긴다.
차가운데 눈길이 강하다. 종잡을 수 없는 눈빛이다.
"올 가을엔 공연 없나요?"
"지금 준비중입니다. 지금은 빠듯해서 위축감을 느끼긴 합니다만,"
"선생님 작품인가요?"
"아닙니다. 번역물인데, 입센,"
""인형의 집"인가요?"
권오송이 웃는다.
"그래서 애란이가 여기 와 있었군요."
"애란이가요?"
"아까, 제가 울려 보냈어요."
"그건 또 왜요?"
"애가 좀 건방져서, 저도 못 참는 성미 아니에요?"
"남의 소중한 상품을 그래 쓰겠습니까?"
"애란의 무슨 역을 하지요? 노라인가요?"
그말 대꾸는 없고 씁쓰름하게 웃을 따름이다.
"그애를 울려보낸 건, 질투의 감정도 있었는지 모르지요."
"젊어서 말입니까? 예뻐서요?"
"권선생님 애란이한테 관심 있으시죠? 그렇지요?"
대담한 고백이다. 배짱 좋고 냉정한 권오송도 순간 머쓱해진다. 선혜도
조금은 쑥스러웠는지 고개를 숙이고 구두 끝을 내려다본다.
"하하핫 하하하하..."
'이거 또 형편없이 당할 모양이구나.'
선혜는 발끈해지며 고개를 쳐든다.
"나는 일밖에 모르는 사내올시다."
"네?"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본 일도 없었지만 만일 그렇다손 치더라도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
"부자도 아니고 자식이 둘이나 딸린 홀아빈데 젊고 아름다운 여자
찍어본들, 나 그렇게 우둔한 사내는 아닙니다."
"하지만 애란이한테 야심이 왜 없겠어요? 선생님이 밀어주신다면 대단한
힘이지요."
"야심은 그 자신 능력에 달린 거지요."
권오송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야심을 위한 수단이라 한다면 더더구나 그럴 경우는 이쪽에서 사절해야
하는 일 아니겠소? 이용물이 된다는 것은 모욕이지요."
"죄송합니다."
갑자기 선혜는 조그맣게 줄어든 듯, 사과하는 목소리도 낮았다.
"하여간에 영광은 영광이군요. 강여사가 저를 위해 애란이에게 질투를
느꼈다니 말입니다."
선혜의 귓부리가 새빨개진다, 얼굴은 말짱한데.
"강여사 강여사 하는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어요."
"듣기 거북합니까?"
"별로, 어쨋든 전 결혼에 한번 실패한 여자니까요."
"그는 그렇고, 용건은? 아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했는데,"
"실은,"
"말씀하십시오."
"오늘은 못하겠어요. 한번 기회를 만들어주십시오."
"네..."
권오송은 선혜를 빤히 쳐다본다. 강한 눈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서을 보는 눈은 아니었다.
"내일,"
쳐다본 채
"창경원 문 앞에서 만날까요?"
선혜의 얼굴이 활짝 핀다.
"몇 시에 나갈까요?"
"세시쯤, 어떻습니까?"
"저는 언제든 좋아요."
"그럼 세시에,"
사무실에서 나온 선혜는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층계를 밟고 내려오는데
희색이 만면하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일이 진전되어 만족했던 것이다.
'안 될 것도 없지. 어느 모로 보나.'
그간 갈피를 못 잡고 의기소침했던 선혜에게 자신이 생긴다.
처음부터 권오소을 결혼 상대로 선혜가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상처한 사람이라는 것도 최근에 안 일이었다. 되지 못한 글줄이나
써가지고 문사연하고 다니는 꼴 보기도 싫다는 모멸과 생각나는 대로 마구
지껄이는 성미를 위험시하여 당한 경원, 심지어
"비오는 날 강아지처럼 쏘다니지 않게 누구 데려갈 사람은 없나?
귀엽지도 않은 게 기어오르고 걸핏하면 체모없이 짖어대고,"
그런 말까지 들어야 했던 그간의 사정은, 비록 문벌은 없으나 풍요한
속에서 제멋대로 버릇없이 자란 선혜에겐 굉장히 괴로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고기처럼 예술을 한다, 문학을 한다
하는 그들 변두리를 떠나 살 수도 없었던 선혜였다. 문명을 날리겠다는
야망 때문은 아니다. 무료하고 남아나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서 생각해낸 게 잡지를 내볼까 하는 것이었다. 순전히
보복심리에서 온 착상이었다. 그러나 경험이 없었다. 자금만 가지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여자인데다가 원만치 못한 대인 관계도 문제였다. 이때
권오송이 발행하는 "청조"를 공동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청조"에 대하여 대부분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얼마 못 갈
거라는 것이었다. 극단과 잡지와 다실 세 가지 중에 어느 하나를 정리해야
한다면 잡지사가 맨 먼저 나가떨어질 거라는 얘기였다.
'나하고 합자한다면 잡지는 살아남을 게고, 그러면 난 상당한 세력을
갖게 된다.'
잡지가 살아남고 죽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세력을 갖게 된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따돌림을 받는 아이가 사탕을 나누어주면서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을 만들어보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선혜의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귀찮은 일은 싫어하고 게으른 타성에 빠져 있었으며 모든 일이
용두사미, 완수한 것이라고는 일본서 전문학교를 졸업한 것밖에, 자식으론
딸 하나뿐일망정 자수성가하여 셈이 빠른 아비한테 자금을 짜내는 것도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해서 미적거리고 있었는데 선혜 tlarud이 요즘 와서
갑자기 변했던 것이다. 집에서는 양자를 들이느니 어쩌니 하고 기류가
심상찮았다. 그것은 선혜에게 재산상 적잖은 위협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의 잔주름, 함박꽃이 빨리
시드는 것처럼 덩치가 크고 화려한 용모는 남달리 연령의 무게가 빨리
실리는 것을 선혜는 깨달았던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웬만하면,'
권오송은 웬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결혼에 성공만 한다면 꽤 괜찮은
상대였다.
선혜는 아래층 다실에 의기양양해서 들어간다. 애란과 이정백이 그곳에
이마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다 같이 들어선 선혜를 못 본
척했다. 일부러 그들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은 선혜는
"애기야? 나한테도 커피 한잔 주겠니?"
푸른색 가운을 입은 소녀는 덧니를 보이고 웃으며
"네."
커피를 가지러 간다. 선혜는 컴팩트를 꺼내어 얼굴을 비쳐보며 눈썹
옆에 난 뾰루지에 신경을 쓴다. 애란과 이정백과 언쟁을 한일은 말끔히
잊어버린 듯이. 다실 안의 사람들은 대개 알 만한 얼굴들이었다. 홍성숙의
동창회를 두고 왈가왈부하고 있었다. 그 얘기를 귓가에 흘려들으며
'홍성숙이도 이제 치마 벗고 나온 꼴이군. 피래미 같은 자식들, 여자가
좀 어떻다 하면 산산조각으로 찢어발긴단 말이야.'
선혜는 중얼거리다가 날라다준 커피잔을 든다. 한모금 마시며 입속에서
액체를 굴려본다.
'아직 멀었어. 권오송 씨가 아무리 첨단을 가는 멋쟁이라지만 커피맛은
모르는 모양이야. 저기 눈깔 허옇게 뜨고 앉은 작자, 흥! 지까짓 게 무슨
놈의 커피야? 맛이나 알고서 마시는 겐가? 이정백이 저녀석도 그렇지.
블랙커피라면 커피 종륜가요? 하던 녀석이, 나원,'
"거 남편이 기분 안 좋겠든데?"
"안 좋기는 뭐가 안 좋아? 잘난 여편네 뫼신 덕분에 영광이지."
"임교장 누이동생하고 신물이 날 때가 됐으니 하는 얘기야. 동부인하지
않고 혼자 오지 않았어?"
"글쎄에, 그건 좀 두고봐야 알 일이고,"
"점찍었다 하면 여지없을 게야. 자존심 강한 조용하가 남의 눈
피해가면서 바람 피우겠나? 당당하게 도전할걸?"
"그러나 용모는 현재 부인이 월등하지?"
"대신 이쪽은 가수거든. 딴따라가 아니잖아?"
"그래서 남편 있는 여잔데,"
"헤어지게 하는 것도 흥미거리 아닐까?"
'자알들 논다, 자알들 놀아. 음, 명희한테 한번 가볼까?'
갑자기 호기심이 동한다. 그리고 창경원 문 앞에서 만나자던 권오송에
대하여 자랑하고 싶은 생각도 치민다. 명희를 미워한 일은 없었다.
불행해지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선혜는 전광석화식으로
조용하가 명희에게 구혼을 했을 당시 자기에게는 일고의 값어치도 없는 것
같던 조용하 태도에 분노를 느꼈고, 겉과 달리 명희에 대하여 선망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명희의 전성 시대만 해도 그러했다.
귀부인으로서 틀이 잡혀가는 명희에게 위압당했으며 명희 결혼은 실패요
불행이다, 하면서도 그 집 문턱이 높은 데 대하여 섭섭함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명희와 자신의 처지가 전도될지 모를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홍성숙의 독창회에 보내어진 꽃바구니
일에서부터 조용하 혼자 독창회에 나타난 그 진상을 알고 싶고, 입이
무거운 명희에게 권오송에 대한 일을 쏟아붓고 싶은 심정, 선혜는 황황히
거리로 나왔다. 조남작댁 문전에는 전과 다름없이 행랑아범이 나타나서
어디서 왔느냐, 누굴 찾아왔느냐 하고 물었다.
"나 이 댁 젊은 부인의 친구요. 강선혜가 왔다 하면 알 거요."
얼마 후 다시 나타난 행랑아범은 무표정한 그대로의 얼굴로 선혜를
별관으로 안내해주었다. 안에서 얘기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깥양반이 계신가요?"
"아닙니다. 손님이 계시오."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손님은 뜻밖에 홍성숙이었다. 짙은 화장에
진자줏빛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아아니, 이게 누구야?"
"누구긴요? 언니도 아실 텐데요?"
명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알구말구, 어젯밤에도 보았는데 모를려구. 너무 뜻밖이라,"
"안녕하셨어요?"
성숙이 뒤늦게 인사를 했다.
"앉으세요 언니, 성숙이도 방금 왔어요."
"독창회가 끝나자마자 이 집을 방문한 걸 보니 양가의 인연 보통 아닌
모양인데?"
명희와 성숙의 얼굴을 번갈아본다.
"이 댁 언니랑 조선생님께서, 저에게 분에 넘치는 후원이었지요. 인사도
드리고 또 중매 좀 들어줍시사는 청도 있고 해서,"
"아니, 그럼 미혼이든가요?"
홍성숙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호 하고 웃는다.
"아니에요, 제 조카 땜에요."
명희는 어리둥절해한다. 명희는 연보랏빛 새틴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서방님은 안 계셔?"
"나갔어요."
"원통하다."
"네?"
"두 여성을 나란히 앉혀좋고 보니 볼 만하군."
명희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그러나 선혜 말은 액면대로는 아니었다.
억울하다 한 것은 물론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여자를 조용하가 보지 못해
그렇다는 얘기지만, 선혜는 학과 닭이라 생각한 것이다. 명희와 성숙을
비교할 때, 그러니까 명희 편에 서서 억울하다는 얘기다. 마침 심부름꾼이
차를 날라왔다. 차를 나누는 동안에도 어색한 분위기는 가셔지지 않았다.
"어젯밤엔 어째서 서방님 혼자 보냈나?"
"언니도, 무슨 실례의 말씀이에요?"
"왜?"
"보내다니요? 그인 완전히 자의로 간 거예요."
명희는 담담하고 정직하게 말했다.
"음악 애호가인 것은 미처 몰랐군. 그럼 넌 왜 안 왔니? 너하곤 선후배
아니야?"
"저하고만 선후밴가요? 언니하고도,"
"동창이지만 제가 학교 다닐 적엔 졸업하고 안 계셨지요."
선혜의 악의를 느끼면서 성숙은 침착하게 말했다.
"왜 안 왔지?"
다잡아 명희에게 묻는다.
"전 몸이 불편해서 못 갔어요."
"먼저 왔으니까 얘기해요."
선혜는 손을 들어 보이며 홍성숙이게 양보하는 척했으나 할 얘기 있으면
어서 하고 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방약무인의 선혜 태도에도 불구하고
성숙은 질리는 구석이 없다. 서로 얘기하기론 처음이지만 성숙이는 선혜에
대하여 많은 얘기를 들었으므로 경의를 표할 이유가 없다고 처음부터
생각한 터였다.
"아까 중매 얘길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여전히 덤덤하게 명희는 물었다.
"실은 말예요, 최참판댁 있잖아요?"
"음,"
"왜 그 작년 겨울이든가요? 역에서 최참판댁 아드님을 만나지
않았어요."
"그랬지."
"그때 제 조카도,"
"그 예쁜 소녀 말이지?"
"네. 몇 달 안 있으면 우리 소림이도 졸업이구요, 그 댁 아드님도
일본으로 유학하게 될 거 아니에요?"
"음."
"그러니까 중매 좀 드시라구요. 서로의 집안은 다 아는 거구요."
"어린애를 가지고,"
"어린애기는요? 결혼이 빠르다면 약혼이라도 해두는 게 어떨까 하구요."
"글쎄,그게 될까? 그 댁이 요즘 좀,"
"너무 부담은 가지지 마세요. 모처럼 찾아온 김에 한 말이에요. 언니께서
유념해두시라구 여쭙는 말이에요."
"하긴 적령기가 되면,"
"요즘 애들이 부모 시키는 대로 시집장가 가나 뭐? 교육받은 애들은
더욱 그렇지."
선혜가 혼담에 티를 넣는다. 또 사실 혼담이 핑계이기도 했었다.
당자들의 나이를 봐서는 홍성숙이 자신 요행을 바라는 기분인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소림이 지닌 결정적인 결함은 희망을 가질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무성의하게 늘어놓는 말이라는 것은 아니다.
환국이를 사모하는 소림의 고민, 우울증은 곁에서 보기 괴로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인연이란 알 수 없는 거예요."
홍성숙은 자신 없이 뇌었다.
"그야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 괴롭고, 비극도 탄생하는 거
아니겠어? 처녀 총각이 만나기도 어렵지만 해로하는 건 더욱더 어려운
게야. 한 번 실패는 두 번 세 번 실패할 가능성을 가지는 거니까."
선혜는 더 단단히 조심하여 명희를 침노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말하는데
홍성숙은 선입관이 있었고, 교양 없는 말투에 눈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뜻밖의 적극적인 조용하 후원에 들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착잡한
심정이기도 했었다.
"뒤늦게 철났수?"
명희가 빈정거렸다.
"다 겪어봐야, 그런 뒤 알게 되는 게야."
"그럼 언니, 다른 데 또 들러야 하니까 가보겠어요. 조선생님한테 고마운
인사 전해주시구요, 앞으로 종종 놀러올래요."
한복 위에 코트를 걸치는데 선혜는
"이 집 문턱이 얼마나 높다구? 종종 놀러오게 안 될걸?"
비양치듯 말한다. 홍성숙은 선혜를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그가 가버린 뒤
"고거 여간내기가 아냐?"
"언닌 그 말투 때문에 큰일이에요. 나 창피스러워서 앞으론 언니 상종
안 할래."
명희는 화를 낸다.
"이 위선자야, 소깅 부글부글 끓었을 텐데 참 천연스럽기도 하지."
"언니가 내 맘을 어떻게 알아요? 왜들 야단인지 모르겠어?"
"모두 두드러진 사람들이니까 그렇지. 귀족과 미인과 가희 배역이
그럴싸하지 않아?"
결코 명희의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 과잉 방어를
하는 것 같은 선혜의 태도는 싫었다. 홍성숙의 독창회를 둘러싼 조용하의
적극적인 태도라는 것도 그 목적은 명희를 괴롭혀 주자는 데 있는 것을
명희는 안다. 얼마 전에 평양 간다고 기차를 탔던 조용하가 도중하차하여
집으로 돌아왔던 사건은 의처증 같은 양상을 띤 것이었지만 그것은 소위
시위에 지나지 않았고, 어젯밤 독창회에 명희를 못 나오게 하고서 혼자 간
것도 일종의 시위인 것이다. 명희가 그런 일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 한
조용하는 그 짓을 계속할 것이며, 명희가 고통을 느끼게 될 때 조용하는
명희에게 흥미를 잃어버릴지 모른다. 물론 그것을 노려서 명희가 고통을
안 느끼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자연이지 인위적인 것은 아니다.
"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병은 너의 서방님한테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명희야,"
"..."
"병은 너한테 있지? 그지? 창경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고 싶다던, 바로
그 병 말이야."
"제발 그 시시한 얘기 관두세요."
"난 그렇게 안 생각한다. 어째서 시시하니? 소위 신여성이라는 게
연애의 자유, 하다가 굴러떨어지는 곳이 돈푼 있는 늙은것들 소실이요,
아니면 배배 말라꼬여서 여자도 아니게 된 교육자, 전도부인, 이건 정말
너무 극단적이란 말이야. 낭만이 어디 있어? 홍성숙이 같은 여자는
유부녀라도 야심 때문에 너의 신랑한테 혈안이고,"
"마구 하는 것 아니래두요!"
"그러니까 너 같은 애는 가슴에 묻어둔 게 있어서 행복하다 그 얘기야.
아까 창경원 벤치 얘기가 났으니 말인데 나, 나 말이야, 아무리 쏘다녀도
가슴에 묻어둘 불씨는 안 나타나고, 결혼할래."
놀라며 명희는 선혜를 쳐다본다.
"실은 나 긍Orl 하러 온 거야. 의논할려구."
"상대는 누군데?"
"너도 알 만한 사람이야."
"누군데? 정했어요?"
"그럴 단계는 아니야. 나도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았어. 진작맘을
잡고 시집갈 생각 했으면 조촐한 사람 만났겠지. 내가 결혼못한 건 나보다
내 아버지 재산을 노린다 그 생각 때문이었어. 그 생각 때문에 난
남자한테 대해선 철저히 인색했다. 장난삼아, 쓸쓸해서 더러 사귄 사람도
있었지만 넥타이 하나 선물한 일이 없었거든. 그러나 사랑이니 연애니
그런 것 체념해버리면 어차피 생활이란 공법자로 시작되는 거 아니겠니?
허황한 소리 하지만 말이야,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잔뜩 부풀어 있었다.
너한테 허풍 떨려고 말이야. 한데 가라앉는구나. 남자는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난 나를 보호해주고 아내라는 자리에 앉혀줄 사회적 지위,
매력도 있는 그런 남자를 필요로 하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는데 왜 이리
가라앉는지... 모르겠어."
"상대는 누구예요?"
"권오송 시."
"아, 그 사람..."
"그 정도면 나도 승복할 것 같다."
"오빠하고 잘 알아요."
"그럴 거야."
"굉장히 냉정한 사람이라든데? 그 사람 상처했지요?"
"그렇다는구나. 아이가 둘 있고,"
"어느 정도 진전된 거예요?"
명희 눈에는 의혹이 있었다.
"넌 희망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난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너 눈은... 내일 창경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게 진전의 전부야. 난
그 자리에서 잡지에 출자하겠다는 얘길 할 거구."
명희는 눈을 내리깔았다.
"솔직히 말해서 미지수야. 권오송 씨는 극단과 잡지를 위해, 자신의
야심을 위해 결혼이란 도박을 할까? 창경원에서 만나자, 그게 이성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는걸, 그걸 왜 내가 모르겠니?"
"언니,"
"너도 동감이지?"
"..."
"최소한도 그 사람 확실하겐 할 거야."
"네, 그분 언닐 속이진 않을 거예요."
선혜는 깔깔깔 웃는다.
"여기 올 때는 어런 얘기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난 내 자신도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비참하니까 말이야. 나 뭐 시원한 것 좀 다오."
명희는 바구니 속에서 배를 골라내어 깎는다. 배껍질이 끊어지지 않고
솔솔 접시 위에 쌓인다. 선혜는 자신과 권오송의 인연을 점치듯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며 이어지는 배껍질을 바라본다. 절반 이상 깎였을 때
배껍질은 끊어졌다.
선혜 입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배를 깨물면서 선혜는
"우리 말이야, 권오송 씨한테 희망이 없을 때, 명희 너도 홍성숙이 한테
당한다면 그땐 말이야, 우리 상해로 달아나지 않을래?"
"그때 가서 생각해요."
명희는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그러는 한편 일말의 희망 같은
것도 느껴져서 그냥 무의미하게 웃는다.
[3부 3권으로 이어집니다.]

어휘 풀이
*괄호 속의 숫자는 본문 속의 면수와 행수를 가리킴.
봉채(17:12):혼례 전에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내는 채단과 예장
객리(20:8):[방언]객지
적악(22:19):악을 쌓음.
비사리 겉은(22:28):'비사리'는 '싸리의 껍질'을 뜻함. '시원찮은, 별볼일
없는'의 뜻.
이날 이적지(23:25):[방언]이날 이때까지.
악문(23:27):배신, 보복.
까대기(25:30):건물 벽이나 담 따위에 덧붙여서 임시로 만든 허술한
건조물.
디다보로(26:22):[방언]들여다보러.
대금산(29:19):[방언]비하여 훨씬 낫다는 뜻.
조신부리(29:22):[방언]신경 써서.
너무 때기믄 반실이요(30:26):[방언]너무 찧으면 반은 없어진 다는 뜻.
웃쌀(30:29):잡곡으로 짓는 밥에 조금 얹어 안치는 쌀.
무서리(31:9):[방언]몸서리.
곡식 자리(31:26):[방언]곡식 자루.
이문가문(32:3):[방언]숨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수말스럽고(37:6)[방언]자연스럽고 세련되다.
영상이다(44:22):[방언]흡사하다. 꼭 닮다.
전게 없이(55:14):[방언]전에 없이.
소목꾼(72:13):소목장이. 나무를 다루어 가구 등을 짜는 목수.
질잖아(76:9):[방언]길지 않다.
이편찮아서(84:10):[방언]마음이 편치 않아서.
포은이 져서(85:24):[방언]한이 맺혀서.
칭아(86:2):[방언]층위. 차이.
납채(86:11):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혼인을 청하는 의례. 또는 그때
보내는 예물.
소동(87:1):혼례 때 따라가는 어린아이.
나울(87:28):[방언]놀. 바다의 사나운 큰 물결.
수모(90:12):전통 혼례에서, 신부에게 딸리어 단장을 해주고, 예절을
거행하게 도와주는 여자.
전안(90:13):전통 혼례에서, 신랑이 신부집에 기러기를 가지고 가서 상
위에 놓고 절하는 예.
기찹은데(93:26):[방언]가난한데.
제밋대(143:9):[방언]상앗대. 배질하는 데 쓰는 장대.
두렁이(144:14):어린아이의 배와 아랫도리를 둘러주는 치마같이 만든 옷.
허신한(145:27):몸을 허락한.
두치(155:20):은행장
몰작하게(172:17):[방언]물렁하게. 가볍게.
부애질(175:7)[방언]'부아'를 돋게 하는 행위.
소쇄한(183:2):맑고 깨끗한.
디건이(197:5):[방언]두견이, 두견새.
중우(202:14):[방언]바지.
언선스런 말(202:20):[방언]아첨.
비단가리(202:22):[방언]하찮은 살림.
행토(203:9):[방언]행티. 행짜를 부리는 버릇.
비바리(203:10):바다에서 해물을 채취하는 처녀.
애목(203:13):[방언]목 한복판.
실업쟁이요(204:30):[방언]실없는 사람이다.
봇장(209:17):[방언]배짱.
접방(215:14):[방언]곁방.
헌혜(223:9):[방언]험담
떳다바라(230:24):[방언]보란 듯이.
악대값(230:26):나쁜 짓에 대한 벌로 물게 하는 돈.
작이 없고(232:16):[방언]주책없다.
포치(224:22):현관.
액신(246:22):재액을 가져오는 악신.
세전지물(268:25):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물건.
잊임이란 것이 홀해서(269:9):[방언]쉽게 잘 잊어버림.
설동(273:12):주도적으로 일을 벌여 움직임.
보늬(281:21):밤 따위의 속껍질.
벅수(282:4):바보.
변릿돈(283:18):변리(이자)를 무는 빚돈.
깨반하고(290:30):[방언](음식이)정갈하다.
애먼 때(303:13):[방언]누명.
종구고(303:13):[방언]찾고.
애발스럽기(305:21):이끝을 좇아 발밭게.
자복(309:24):스스로 지은 죄를 고백함.
비리(319:10):[방언]진딧물.
쟁이바치(321:29):갖바치, 독바치 등 물건 만드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
풍각 잡힐 곳(324:4):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할 곳.
발명(324:17):죄나 잘못 따위가 없을 말하여 밝힘.
질수(328:5):[방언]방법.
권석(331:9):[방언]권속. 식구.
인벵(331:12):[방언]인병. 사람으로 인하여 드는 마음의 병.
재최(334:20):상사에 입는 오복의 한 가지.
주리팅이(337:27):[방언]주책.
야장스럽게(340:1):[방언]서글프게.
연비(352:14):사람을 사이에 넣어 간접으로 소개함.
하정배(36:10):지난날, 신분이 낮은 사람이 양반을 뵐 때 뜰 아래에서
하던 절.
양도(405:5):양식을 마련하는 방도.
통변(414:12):통역.
자리꼽재기(421:10):[방언]구두쇠.
땡알맞은(427:27):[방언]당돌한.
아망(428:2):아이들이 부리는 오기.
소상(439:1):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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