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 (나의 어린시절)
알퐁스 도데
차례
랑그도끄에서의 어린시절
꼬마 철학자 다니엘
저주스런 전보
빨간수첩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까치머리 방방
사랑하는 사람들
괴롭고 긴 나날
끔찍한 풍문의 계절
신비 속의 쎄실리아
어린 돈 주앙의 눈물
눈덮힌 궁륭 속의 환멸
싸르랑드여, 안녕!
운명의 첫걸음
꿈의 도시 파리로
슬픈 당나귀 자끄
쌩 제르멩의 종소리
그립고 먼 추억의 겨울밤
고미다락방 속의 시인
엄마의 소꼽동무
붉은 장미와 검은 눈동자
푸른색 나비의 죽음
흔들리는 시인의 꿈
환상의 여인 이르마 보렐
회한으로 얼룩진 편지
몽빠르나스의 어릿광대
납치극
돌아온 탕아
겨울비 내리는 죽음의 길
환상의 끝
##랑그도끄에서의 어린시절
18xx 년 5월 13일, 나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랑그도끄 지방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남부지방의 여느 도시들처럼 그 마을도 햇빛이 쨍쨍
비치는 화창한 날이 많았고, 공기는 뿌연 먼지가 떠다니는 게 보일 만큼 혼탁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까르멜 수녀원과 그 옛날 로마시대 유적지도 몇 군데 있었다.
그 당시 비단장사를 하던 우리 아버지 에세뜨 씨는 도시의 성문 곁에 커다란
공장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공장 담의 한쪽을 허물어 넓은 뜰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으로 우리가 살 집을 지었다. 집 옆에 있던 무성한 플라타너스가 짙은
그늘을 드리워 주어 그 집은 아주 살기가 좋았다.
나는 그 집에서 태어났으며 내 생애에 있어서 유일하게 즐거웠던 어린시절도
그곳에서 보냈다. 그래서 나에게는 그 뜰과 공장, 플라타너스에 얽힌 어린시절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인해
그곳을 떠나야만 했을 때 나는 마치 다정한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만큼이나 무척
슬펐었다.
나의 출생이 우리 집안에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선 얘기
해야겠다. 자질구레한 집안 일을 맡아 하던 안누 할머니는 종종 내가 태어나던
때의 일을 회상하며 넋두리처럼 내게 사설을 늘어놓곤 했다. 그 당시 멀리
여행중이던 아버지는 세째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과 마르세이유의 고객이 4만
프랑이 넘는 거액의 돈을 가지고 오던 도중에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동시에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쁘기도 하고 비탄에 잠기기도 한 아버지는 마르세이유의
고객이 거액의 돈과 함께 사라져 버린 소식에 울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심정
속에서 한참을 망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버지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소리내어 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솔직이 말해서 나의 운명 역시 우리 부모님들의 나쁜 사주팔자를 그대로 타고난
셈이었다. 내가 태어난 날부터 두 분에겐 마치 도둑처럼 숨어 있던 끔찍한 불행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와 덮쳐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선 마르세이유의 고객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사건에 뒤이어, 두 번씩이나 연거퍼 불이 났으며, 방적기에
날을 거는 공장직원들이 갑작스럽게 파업을 시작했고 바티스트 삼촌과 사이가
틀어졌으며, 우리가 거래하는 상인들과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 재판을 벌이기도
했다. 마침내 18xx년에 혁명이 온 나라를 휩쓸게 되자 몰락해가던 우리 집안은
설상가상으로 타격을 받아 휘청거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날이 갈수록 공장의 모습은 황량하게 변해 갔다. 작업장은 차츰
썰물이 빠져나간 뒤마냥 텅텅 비게 되었으며, 일주일이 멀다하고 방적기가 한
대씩 부숴져 나뒹굴었고, 한 달이 지난 뒤에는 날염판이 하나씩 사라져 버렸다.
마치 병든 육체에서 서서히 생명이 빠져나가듯 집안이 기울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삼층에 있는 방에 더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되었으며, 다음에는 안뜰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런 일이 2년 동안
계속됐다. 그 2년 동안에 공장은 폭삭 무너져내리듯 망해 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뎅그렁거리며 사방으로 퍼지던 공장의 종소리는 더이상 울리지 않게 되었고,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던 우물의 도르래조차도 멈춰 버리고, 염색한 옷감을
헹구어 낸 갖가지 색의 물이 흘러 내리던 도랑은 바닥이 바싹 말라 붙게 되었다.
나날이 황폐해 가던 공장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안누 할머니, 자끄 형과 나만이
오롯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문지기 꼴롱브와 그의 아들 루제만이 폐허가 된
공장을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집안은 완전히 거덜난 채 망해 버렸다.
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되던 해였다. 나는 유난히 허약한 체질이어서
잦은 병치레를 해야 했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날 학교에 보내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허약하고 내성적인 나를 안쓰러워하여 틈나는 대로 읽기와 쓰기, 짤막한
스페인어를 가르쳐 주었으며 기타 반주에 맞추어 두세 곡의 아름다운 노래를
가르쳐 주곤 했다. 그 덕분에 난 일가친척 사이에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집안에서만 생활하며 자상한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난 집
밖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 보지 못했다. 바깥 세상에 나가볼 기회가 없었던
나는 우리 집의 최후를 낱낱이 목격할 수 있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집안의 불행한 일들을 지켜보면서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이젠 온 공장 안을 독차지해서 내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은근히 기분이 들떠 있었다. 공장이 문을 닫기 전에는 일을 하지 않는 일요일에만
공장 안에 들어가 놀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루제에게 한껏 목에 힘을 주며
점잖게 말하곤 했다.
"이제 이 공장은 전부 내꺼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여기서 놀려면 내 허락을
받아야 해."
그러면 순진하게도 맹하게 쳐다만 보던 루제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댔다.
얼간이 같은 그애는 내 말이라면 뭐든지 곧이곧대로 믿었다. 어쨌든 나만 빼놓고
집안식구들은 모두 우리 집의 파산을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갑자기 무서운 사람으로 변했다. 원래부터 허풍이 심하고 다혈질인
아버지는 일단 화가 나면 고래고래 욕설이 뒤섞인 고함을 지르며 무엇이던 닥치는
대로 집어던져서 깨뜨리는 난폭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걸핏하면 큰소리를 지르며
싸움질을 하거나, 마치 포악한 군주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성질만 빼놓으면 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이었다.
삽시간에 몰아쳐 온 불행의 회오리 속에서도 그는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끓어오르는 분노로 더욱 거칠어질 뿐이었다. 다들 잠든 고요한 밤에도
그는 미친 듯이 화를 내며 그저 닥치는 대로 화풀이를 해댔다. 태양, 북서풍, 자끄
형, 안누 할머니, 혁명, 그렇다! 아버지의 입에서 끊임없이 저주의 빛을 띠고
뱉아지던 혁명!... 옆에서 아버지가 퍼부어 대는 말만을 귀담아 듣고 있으면 그
18xx년의 혁명이야말로 유독 우리 집에만 들이닥쳐 우리를 불행의 골짜기로
떨어뜨렸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에서 오갔던 혁명가들에
대한 평판이 좋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당시 우리 식구들이 혁명은 일으켰던 신사양반들에 대해 어떻게 얘기했는지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죽지
않고 살아 꼬부랑 할아버지가 다 된 아버지는 신경통이 도질 때면 기다란 의자를
늘 독차지하고 드러누워서는 이렇게 투덜대곤 한다.
"아! 그 빌어먹을 혁명가놈들!"
그당시만 해도 아버지는 신경통 같은 잔병을 치른 적이 없었는데, 몰락의 길로
치닫는 자신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하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 누구도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무서운 인물로 변해 갔다. 화를 삭이지 못하고
혈압만 높아져 가자 그는 보름에 두 번씩 피를 뽑아내야만 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두려웠던 것이다. 우리는 식탁에서도 소곤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빵을 건네달라고 말했으며, 아버지 앞에서는 슬프다는 기색조차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지내야 했다. 어머니, 안누 할머니, 자끄 형, 그리고
신부인 큰형과 내가 한데 어울려 조금씩 슬픔을 전염시키면서 울기 시작하면
어느새 울음바다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머니가 불쌍한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나 큰형과 안누 할머니는 서럽게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울었다. 나보다 두 살 위였던 자끄 형은 우리 집안에
몰아닥친 불행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소변을
누듯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습관적으로 울었다.
자끄 형은 정말 이상한 아이였다. 타고난 울보였다. 지금도 자끄 형을 생각할
때면 가장 먼저 퉁퉁 부어오른 충혈된 두 눈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던 뺨이
눈앞에 떠오른다. 형은 해가 뜨는 걸 보고 울기 시작해서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울었으며,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온종일 눈물짓고 있었다. 심지어는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뿌려 댔다. 누군가 "도대체 무슨 일이니?"하고
물으면 그는 더욱 목청을 돋우어 엉엉 소리내 울면서 "아무것도 아녜요"라고
짤막하게 대꾸해 버리고는 또다시 울음 속에 빠졌다. 아무 이유도 없이 형이
그토록 울 수 있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감기에 걸려 코가 줄줄
흘러나오듯 형의 두 눈에선 언제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이따금씩 화가 난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불만스럽게 말했다.
"저 아인 정말 우습군. 저앨 좀 봐요. 눈물이 마치 강물처럼 흐르잖아."
그러면 어머니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전들 어떡하겠어요? 커 가면서 나아지겠지요. 저 나이 땐 저도 그랬어요."
자끄 형은 하루하루 성숙한 모습으로 자랐지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버릇은
여전했다. 오히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눈물을 펑펑 쏟아 낼 수 있는 기묘한
습관은 갈수록 더욱 심해져 갔다. 그래서 부모님들의 걱정과 슬픔은 나날이 더욱
커져 가게 되었다. 드디어 형은 하루종일 내킬 때마다 마음껏 울어 댔다. 이젠
"도대체 무슨 일이니?"하고 묻는 사람조차 없어졌다.
우리 집의 몰락은 나와 자끄 형에게 재미있는 일들을 가져다 주었다. 나로
말하자면 무척 즐거웠다. 일일이 간섭하며 귀찮게 구는 사람도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종일 루제와 함께 마치 교회당에서처럼 발을 구르면 쾅쾅 발자국소리가
울려퍼지는 텅 빈 썰렁한 공장과 벌써 잡초가 듬성듬성 돋아나는 버려진 허허로운
커다란 뜰을 온통 휩쓸고 다니며 놀곤 했다. 문지기 꼴롱브의 아들 루제는 열두어
살쯤 된 짜리몽땅하고 똥똥한 아이였는데, 황소처럼 힘이 셌고, 개처럼
헌신적이었으며, 거위만큼이나 멍청했다. 그는 특히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머리칼
때문에 눈에 금방 띄었다. 그가 '불그스럼한'이란 뜻의 루제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것도 그의 붉은 머리색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제는 내게 있어서만큼은 루제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명령만 내리면 로빈슨 크루소의 하인이었던 방드르디처럼
충실한 내 부하 노릇도 서슴지 않았고, 원시인이나 반란군이 되어 땀을 뻘뻘
흘리며 그들의 흉내를 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니엘 에세뜨가 아니었다. 나는
짐승 가죽으로 너덜너덜한 옷을 해입은 기괴한 모습으로 이제 막 모험을
시작하려는 로빈슨 크루소가 되었다. 난 괴성을 질러 대며 즐거운 기분으로 그
모험놀이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미쳐 있었다. 땅거미가 지고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저녁밥을 급하게 먹어 치우고 곧바로 "로빈슨 크루소"에 매달려 눈을
감고도 그 책을 술술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수십 번 읽고 잔 뒤 잠을 잤다. 그리고
동이 트자마자 나는 전날보다 더 훌륭한 로빈슨 크루소가 되어 아주 열심히
모험을 즐겼다. 내 주변에 널린 모든 것들은 모험의 무대로 변했다. 공장은
폐허가 된 채 내팽개쳐진 공장이 아니고 내가 처음으로 발견한 무인도가 되었다.
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살지 않는 무인도! 물이 고여 있는 분수대는 대서양으로
변했으며, 정원은 울창한 원시림이 되었다. 무성한 플라타너스 속에 숨어서
시끄럽게 울어 대는 매미떼들도 나의 모험에서 한몫을 했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매미들은 그저 맴맴거릴 뿐이었다.
루제 역시 매미들만큼이나 자기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누가 그에게 로빈슨이 누구냐고 물었다면 그는 매우 당황해서 허둥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굳은 각오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으며, 특히
원시인들이 흥분해서 요란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흉내내는 데는 그를 따라갈 만한
아이가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도 나는 고백해야겠다. 어디서 그걸 배웠을까?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까치집처럼 헝크러진 머리칼을 마구 흔들어 대면서
목구멍에서 토해 내는 우렁차고 난폭한 포효는 제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로빈슨 역을 맡은 나까지도 가슴이 떨려 그애한테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으니까.
"너무 크게 소리치지마, 루제. 무섭단 말이야."
유감스럽게도 루제는 원시인의 고함소리보다 말끝마다 쌍소리를 내뱉는
부랑아들의 흉내를 더 잘 냈으며 더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도 서슴없이
했댔다. 언제나 함께 살다시피 어울리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그런 욕지거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온 식구들이 모여 식사하고 있는 도중에 나는 참아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소리를 무심코 내뱉고야 말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내
쌍소리에 온 식구들은 입을 쩍 벌리고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너 그런 욕 어디서 배웠니, 응? 어디서 들었느냔 말이야?"
그건 일대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저 녀석을 당장 소년원에 집어넣어야 한다며
노발대발했다. 신부인 큰형은 내가 아직 철이 덜 나서 그러니 우선 고해를
시키겠다고 조용히 말했다. 결국 난 고해실로 끌려 가게 되었다. 정말 끔찍한
사건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7년 전부터 내 양심의 구석구석에 굴러다니던
쓰레기 같은 옛 허물들을 긁어 모아야 했다. 난 이틀 밤을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꼬박 새웠다. 그동안 저질렀던 못된 죄가 한 바구니를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많았던 것이다. 더이상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바구니를 꽉꽉 채웠다.
하지만 아무리 바구니를 채워도 또다른 허물들이 자꾸 그 모습을 슬금슬금
드러내는 것이었다. 떡갈나무로 만든 자그마한 옷장 같은 고해실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레꼴레 주임 신부에게 그 모근 것을 낱낱이 털어놓아야 했을 때, 난
두려움과 수치로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어 버리고 싶었다.
고해와 더불어 모든 게 끝났다. 난 더이상 루제와 놀고 싶지 않았다. 악마가
사자처럼 어슬렁대며 우리 주위를 영원히 맴돈다는 성 바울의 말을 레꼴레
주임신부가 내게 했을 때, 난 그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사탄이 우릴
유혹하기 위하여 갖가지 모습으로 변신한다는 사실도 생생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사탄이 루제의 살갗 밑에 숨어서는 내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말을
가르쳐 주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나의 충실한
방드르디에게 앞으로는 절대로 집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며 다짐을 받아
냈다. 불쌍한 방드르디! 가엾은 루제는 가슴이 메어질 만큼 괴로와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나의 명령에 따랐다. 이따금씩 공장 옆에 있는 자기집 문간에
기대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띄곤 했다. 그럴 때 그의
모습은 슬픔으로 가득 찬 채 외로움으로 얼어붙은 듯했다. 내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그 불쌍한 아이는 갑자기 생기가 돌아 붉은 머리칼을
나부끼며 원시인의 무시무시한 고함을 질러 대서 어느결에 내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그가 더욱더 크게 목청껏 소리를 지를수록 나는 점점더
그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불현듯 그가 고해소에서 신부님들께 들은 '악마가 변신한
사자'를 닮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외쳤다.
"꺼져! 난 네가 무섭단 말이야!"
루제는 그날 이후로도 며칠 동안 계속 고집스럽게 괴성을 질러 댔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그가 문간에 서서 계속 괴성을 지르는 데 질려 버린 그의 아버지가
남들 귀찮게 고함을 치고 싶어 미치겠거든 도제 노릇이나 하면서 네 맘대로
소리를 지르라고 그를 멀리 보내 버렸다. 나의 방드르디가 그렇게 훌쩍 떠나 버린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러한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났다고 해서 로빈슨 크루소 놀이에 대한 나의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즈음에 바티스트 삼촌이 갑자기 자신의
앵무새에 싫증이 났다고 하면서 그걸 내게 주었다. 그 앵무새가 나의 충실한
방드르디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나는 앵무새를 예쁜 새장에 넣어 겨울이면
거처하는 오두막의 한 귀퉁이에 매달아 두었다.
나는 그 흥미로운 새와 온종일 머리를 맞댄 채 '로빈슨, 나의 불쌍한
로빈슨!'이라고 그 새가 말할 수 있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다. 끝도 없이 지겹게 수다를 떨어 대는 게
지겨워서 바티스트 삼촌이 내게 주셨던 그 앵무새는 내게 온 뒤로부터 한사코
말을 하려 들지 않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불쌍한 로빈슨'이란 말은 입도 벙긋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사람처럼 말을 한다는 그 새에게서 단 한마디도 들어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앵무새를 무척 사랑했고 온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었다.
나와 앵무새는 눈물이 날 만큼 지독한 고독 속에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참으로 묘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완전 무장을 하고 일찌감치 오두막을 나온
내가 내 무인도를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멀리서 서너 명쯤 되는
사람들이 요란한 손짓과 함께 큰 소리로 떠들면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니, 이럴 수가! 내 섬에 사람들이 있었다니! 나는 재빠르게 협죽도나무
뒤에 배를 납작하게 깔고 몸을 숨겼다.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한 채 그대로 내 옆을
지나쳐 갔다.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가는 무리 속에서 문지기 꼴롱브의 목소리도
섞여 들려 왔다. 귀에 익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방망이질하듯 두근거리던 내
가슴은 조금쯤 진정되었다. 그들이 차츰 멀어지자 나는 협죽도나무 뒤에서 나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아 보고 싶은 호기심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조심스레
뒤따라갔다.
느닷없이 나타난 낯선 사람들은 내 무인도에 도착해 오랫동안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들은 내 동굴 속까지 침입해 들어갔고, 지팡이로 대서양의 깊이를
재어 보기도 하는 등 분주하게 몰려다녔다. 간혹 가다가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기도 했다. 그러자 그들이 혹시 내 거처를 찾으러 온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 왔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삼십여 분이
지나자 그들은 그 무인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는지 떠나가
버렸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고꾸라지듯 오두막으로 달려가 꼼짝 않고
웅크려 앉은 채, 그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길래 이곳에 몰려
왔는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그날 하루를 고스란히 다 보내고 말았다.
그날 저녁, 온종일 품고 있던 의문들이 모두 풀렸다.
저녁식사 때였다. 아버지는 오늘 낮에 드디어 공장이 팔렸기 때문에 한 달
안으로 서운하고 괴롭지만 이 정든 집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며 이제는 리용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할거라고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무서우리만큼 큰 충격이었다. 하늘이 다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공장이 팔리다니! 아! 나의 무인도와 동굴과 오두막을 아버지가 모두 팔아
버렸다니! 그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만 하다니!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한 달 동안 내내 집안식구들이 거울과 식기류 등 이삿짐을 분주하게 꾸리는
동안 나는 줄곧 슬픔에 잠겨 공장 구석구석을 홀로 거닐어 보았다. 이제 더이상
놀고 싶다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 결코 그렇지는 않아... 나는 공장의 이 구석
저 구석을 돌아다니다가 플라타너스나 분수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들을 보며
사람에게 하듯이 말을 걸었다.
"안녕, 사랑하는 친구야!"
"마지막이구나, 이제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없을 거야!"
나는 목이 메어 울먹였다. 뜰 한구석에 서 있는 석류나무에 따뜻한 햇살을 받아
활짝 피어난 빨간 꽃송이들이 짙은 향기를 그윽하게 풍겼다. 나는 석류나무 곁에
기대서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읊조렸다.
"석류나무야! 네 꽃송이를 하나만 주겠니?"
석류나무는 내게 꽃 한 송이를 주었다. 나는 그 나무에 얽힌 추억을 잊지
않으려고 그 꽃을 가슴에 달았다. 나는 정말 불행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토록 심한 고통속에서도 나의 마음을 부풀어오르게 해주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리용으로 이사갈 때 배를 타게 된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기슴이 뜁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모님이 앵무새를 데려가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던 것이다. 로빈슨 역시 지금의 나처럼 쓸쓸하고 외롭게 무인도를
떠났던 것을 생각해 냈다. 그런 생각해 하니 조금은 용기를 가질 수가 있었다.
마침내 떠나는 날이 되었다. 아버지는 일주일 전에 부피가 크고 무거운
가구들을 가지고 리용에 먼저 가 있었다. 그래서 그날은 나와 자끄 형, 어머니,
안누 할머니가 자잘한 세간살이를 꾸려서 리용으로 출발했다. 신부인 큰형은
보께르 합승마차 역까지 우리를 배웅해 주었고, 문지기 꼴롱브도 저만큼 앞장서서
트렁크를 실은 커다란 손수레를 끌면서 보께르까지 따라왔다. 조금 떨어진
뒤쪽에서는 큰형이 어머니를 부축하면서 걸었다.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불쌍한 큰형!
커다란 푸른색 우산을 든 안누 할머니가 다리를 질질 끌며 쫓아왔고 리용에
가는 게 아주 좋으면서도 계속 울고만 있는 자끄 형이 할머니와 나란히 걸었다.
나는 그 초라한 행렬 맨 뒤에서 온통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채 앵무새 새장을
들고 그렇게 좋아했던 공장 쪽을 자꾸만 뒤돌아보면서 힘겹게 걸음을 떼었다.
행렬이 점점더 멀어져 가자 석류나무는 좀더 오랫동안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려고 애쓰며 뜰을 두르고 있는 담장 위로 한층 발돋움을 하는 듯싶었다.
플라타너스가 무성한 나뭇잎을 단 가지들을 마구 흔들어 대며 작별인사를 했다.
헤어짐의 슬픔과 고통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나는 그들 모두에게 손으로
입맞춤을 보내며 떠나왔다.
18xx년 9월 30일, 나는 내 어린시절을 묻어 두듯 정든 무인도를 떠났다.
##꼬마 철학자 다니엘
아! 아름다왔던 나의 어린 시절이여!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은 내
마음속 깊이 자리잡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론 강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여행하던 그 사흘이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지금도 그때 탔던 배의 모습과
승객과 선원들의 생김새와 몸짓들이 눈앞에 생생하다. 타륜이 돌아가는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호루라기를 불어 대듯 호르륵호르륵하는 증기기관 소리가
귓가에 맴돌곤 한다. 그 배의 선장은 제니에라는 멋진 사람이었고 주방장은
몽떼리마르였다. 나는 아직도 그 두 사람을 내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지 않고
있다.
사흘 동안 계속 론 강을 항해하면서 나는 먹고 잘 때를 제외하고는 늘 갑판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는 커다란 닻과 입항할 때 울리는 큼지막한 경적이
달려 있었으며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밧줄더미가 널려 있었다.
나는 내내 앵무새와 함께 그 밧줄더미 위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는 순간 론 강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기곤 했다. 그러다가
벅차오르는 가슴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면 앵무새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높푸른 하늘은 웃음을 머금은 듯 활짝 개어 있었으며, 강물은 푸르디푸르렀다.
커다란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유유히 떠내려갔다. 노새 등에 올라탄 한 무리의
사람들을 태운 배가 우리 배 옆으로 지나쳐갔는데 그들이 불러 대던 노래는 몹시
흥겨웠다. 내가 탄 배는 가끔씩 등심초와 버드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찬 섬을
지나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낮게 신음소리처럼 "오! 무인도!"라고
중얼댔다. 그러고는 한시도 눈을 때지 않고 그 섬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어스럼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무서운 돌풍을 만날 것
같은 조짐이 보였다. 한떼의 먹구름이 몰려 와 삽시간에 하늘을 뒤덮어 버렸다.
때마침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가 강 위로 몰려 오더니 춤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칸델라 하나가 갑판 위를 환히 비춰 주었다. 나는 갑작스런 변화에
전율을 느꼈고 놀라움과 무서움으로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내 곁에 서
있던 누군가가 외쳤다.
"리용이다!"
바로 그때 거대한 경적이 울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리용에 도착한 것이었다.
두터운 안개 저편으로 강변에서 새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론 강의 지류에
들어선 것이었다. 우리 배는 두 개의 다리 밑을 지나갔는데, 다리 밑을 지날
때마다 그곳을 통과하기 위해 높은 굴뚝의 윗부분이 분리되고, 그러면 짧아진
굴뚝에서는 마치 급류가 기침을 해대는 것처럼 검은 연기가 뿔룩뿔룩 뿜어나왔다.
갑판 위는 온통 시끌벅적 북새통이었다. 승객들은 저마다 트렁크를 찾느라 수선을
피웠고, 선원들은 어둠 속에서 무슨 통인지 시끄럽게 굴리면서 알아듣지 못할
욕설을 퍼부어 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갑판 한쪽 구석에서 서성이던 어머니와 자끄 형 그리고 안누 할머니에게로
급히 달려갔다. 배가 부두의 도선장을 찾아 정박을 하고 하선이 시작될 때까지
우리 가족은 모두 안누 할머니가 들고 있는 커다란 우산 밑에 서로 꼭 붙어 서
있었다.
정말이지 아버지가 우리를 마중나오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노한 듯 퍼부어
대는 비 속에서 한 발자국도 옮겨 놓지 못하고 마냥 서 있어야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자끄! 다니엘!"하고 우리 형제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리저리 허둥지둥
뛰어다니다 드디어 우리를 찾아 냈다. 귀에 익은 "자끄!"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는 너무나 기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우리들은 한꺼번에
"여기예요!"하고 목청을 높여 대답했다. 아버지는 재빨리 달려와 우리를
포옹하더니 양손으로 형과 나의 손을 붙잡고 어머니와 안누 할머니에게 말했다.
"날 따라와요!"
그러고는 앞장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남자답게 보였는지,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란 존재의 소중함을 느꼈다. 어느새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고, 부두에 연결된 다리는 몹시 미끄러워 우리는 한발씩 조심조심 옮겨
놓으며 걸어야 했다.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흔들거리는 트렁크에 몸이 부딪쳐
몹시 아팠다. 그때였다. 갑자기 배 저편 끝에서 비 속을 뚫고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로빈슨! 로빈슨!"
"아니, 이럴 수가!"
나는 몸부림을 치면서 아버지에게 꼭 잡혀 있는 손을 빼내려고 애썼다. 그러자
아버지는 더욱 세게 내 손을 잡고 놓아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때 더욱 구슬프고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다시 내 귀를 파고들었다.
"로빈슨! 내 불쌍한 로빈슨!"
"내 앵무새! 내 앵무새!"
나는 울부짖으며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지금 앵무새가 말하는 거니?"
자끄 형이 물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앵무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소란스러워서 깜박 잊고 갑판에 있는 닻 옆에다 앵무새를 두고
왔던 것이다. 거기에 홀로 남겨진 앵무새가 있는 힘을 다해서 "로빈슨! 로빈슨!
내 불쌍한 로빈슨!"하고 울부짖으며 나를 찾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때 나는 앵무새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군다나 제니에
선장은 "서두릅시다, 여러분. 서둘러 주십시요"라고 외쳐 대며 승객들을 재촉하고
있어서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며 거슬러 올라가기는 무척 어려웠다.
"내일 앵무새를 찾으러 다시 오면 돼. 배 안에서는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아."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울고 있는 나를 끌고 앞으로만 나아갔다.
다음날 앵무새를 찾아 오라고 사람을 보냈으나 그는 그냥 빈 손으로 돌아왔다.
이젠 방드르디도, 앵무새도 모두 내 곁을 떠나 버렸다! 나는 더이상 로빈슨이 될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되돌아갈
수 없는 나의 무인도와 앵무새를 그리워하며 비탄과 실의에 빠져 하루종일
허공만을 바라보는 것뿐이란 말인가! 그것도 삭막한 랑떼른느 거리에 있는
지저분하고 습기찬 건물의 오층 방에 틀어박혀서....
그 집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정말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집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층계는 오물로 끈적거렸고, 마당은 너무 좁아서
마당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인 데다가 문지기와 가난한 구두장이가 마당
한구석에 있는 펌프 옆에다 집을 지어 마당은 더욱더 좁았다.
리용에 도착하던 날 저녁, 안누 할머니가 부엌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악! 바퀴벌레다! 바퀴벌레야!"
비명소리를 듣고 우리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니,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부엌은 온통 그 흉칙한 벌레로 가득 차 있었다. 사방의 벽뿐만 아니라
벽난로나 찬장서랍 등 어디를 둘러봐도 그 고약한 녀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득실대고 있었다. 우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자실해서 서 있다가 동시에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 듯 이 벌레들을 마구 짓이겨 죽이기 시작했다. 이미 안누
할머니가 죽여버린 바퀴벌레도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죽여도 죽여도
바퀴벌레들이 줄어들기는커녕 원군이 지원을 하듯 수채구멍에서 계속 기어나왔다.
우린 아예 수채구멍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러나 다음날 저녁이 되자 바퀴벌레들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지 끝없이 튀어나와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바퀴벌레들을 잡기 위해서 일부러 고양이를 사다가 키웠지만
헛수고였다. 저녁마다 부엌은 끔찍한 바퀴벌레의 도살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 극성스러운 바퀴벌레들 때문에 나는 첫날 저녁부터 그곳 리용을 증오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바퀴벌레들의 극성은 심해만 갔고 그 이전의 생활습관은
모조리 버려야만 했다. 심지어는 식사시간까지 바꿔야만 했다. 빵은 랑그도끄에
있던 집에서 먹던 것과는 모양부터 달라졌는데 식구들은 그것을 '왕관빵'이라고
불렀다.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름인지! 한번은 안누 할머니가 푸줏간에 가서
'불고기감 쇠고기'를 달라고 했더니 푸줏간 주인이 코웃음치면서 대놓고
비웃었다고 할머니는 펄펄 뛰면서 분개했다. 미개인 같은 이 리용 사람들은
도대체 불고기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른단 말인가? 랑떼른느 거리며, 바퀴벌레가
득실대는 집이며, 좁아터진 마당이며, 미개인처럼 멍청한 리용 사람들! 나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아주 진저리가 나기 시작했다.
일요일이면 우리 식구들은 지긋지긋한 그곳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모두들 양산을 받쳐 들고 론 강가로 산책을 나갔다. 우리 가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옛날 집 방향인 쁘라슈 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렇게 그쪽을 보고 걷노라면 우리가 살던 곳에 가까이 가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나보다 더 괴로와하고 있음에 틀림없을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모처럼 기분을 전환하기 위한 산책이었는데 어머니의 말에 오히려
모두들 우울해졌다. 아버지는 투덜거렸고, 자끄 형은 계속 눈물을 짜 댔으며, 나는
뒤에 처져 힘없이 걸었다. 그러나 아마 어머니의 말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이제 가난해졌기 때문에 거리에 나가는 것조차 창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리용에서의 생활도 어언 한 달이 흘러갔을 즈음에 안누 할머니가 병에 걸렸다.
항구 도시인 리용을 휩싸고 있는 지독한 안개 때문에 할머니는 숨쉬기조차 매우
힘들어 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다시 해가 하루종일 내리쬐는 남부로
보내야만 했다. 어머니를 끔찍이도 사랑하던 안누 할머니는 우리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슬퍼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이곳에 계속
머물러도 결코 죽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함께 살도록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건강을 위해선 남부로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우리 부모님은 안
가려고 발버둥치는 안누 할머니를 강제로 배에 태워 남부로 가게 했다.
안누 할머니가 우리 집을 떠난 후 새로운 하녀를 구하지 않았다. 하녀를 구하지
않고 어머니가 손수 집안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 집의 가난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땐 문지기의 부인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그토록 입맞추기를 좋아하던, 어머니의 부드럽고 하얀 손은 화덕불에 그을려
점점 검고 거칠어져 갔다. 시장에 가는 일은 자끄 형의 차지가 되었다.
"자끄, 가게에 가서 비누하고 소금을 좀 사와라. 그리고 햄도."
어머니가 커다란 바구니를 들려 주며 이렇게 일러 주면 자끄 형은 계속 눈물을
흘려 대면서도 사오라는 물건들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잘 사왔다.
불쌍한 자끄 형! 자끄 형은 점점 불행해져 갔다. 점점더 어려워져 가기만 하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짜증이 나서 못 견디게 된 아버지는 자끄 형이 항상 울고만
다니는 걸 이제는 더이상 못 참아 했다. 아버지는 마침내 자끄 형을 미워하고
때리기까지 했다.
"자끄! 이 멍청한 놈아! 이 덜 떨어진 얼간이야!"
아버지가 형을 구박하는 소리를 식구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들어야만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무섭게 돌변해 버리자, 불쌍한 자끄 형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쓰는
바람에 그의 얼굴은 몹시도 흉하게 일그러지곤 했다. 자끄 형은 날이 갈수록
완전히 불행해졌고 정신적인 안정도 잃게 되었다.
어느날 저녁이었다. 식사를 하려고 모두들 식탁에 둘러앉고 나서야 집안에 물이
한 방울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가 바라는 모양인데 제가 물을 떠오겠어요."
마음씨 착한 자끄 형이 이렇게 말하며 일어나서 커다란 사기 단지를 들었다.
아버지는 의외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떠오겠다고? 그런데 네가 간다면 틀림없이 그 단지를 깨뜨릴게다."
"자끄야! 단지를 깨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야 한다."
어머니께서 차분하게 타일렀다.
"당신이 그 아이한테 단지를 깨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고 해서 그 아이가 단지를
안 깰 것 같소? 아마 틀림없이 단지를 깨뜨리고야 말 거요."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자끄 형은 울먹이면서 말했다.
"아버지는 마치 제가 단지를 깨뜨리기를 원하시는 것 같네요."
"아니다. 난 네가 단지를 깨는 걸 바라지 않아. 다만 네가 반드시 단지를
깨고야 말 것이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말대꾸하는 것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자끄 형은 더이상 대꾸를 하진 않았으나, '흥! 내가 단지를 깰 거라구요?
좋아요, 어디 두고 봅시다'라고 속으로 삭이는 듯이 보였다. 그러고는 기분이 몹시
상해서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듯이 단지를 들고는 휭하니 나가 버렸다.
그런데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형이 들어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몹시 걱정이 되는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제발 그 아이에게 아무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아무렴, 당신은 그애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겠지. 하지만
그애는 분명히 단지를 깨뜨렸기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을 거야."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의자를 뒤로 탁 차버리고 일어나서는 자끄 형이 왜 돌아오지 않고
있는지를 밖에 나가 직접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현관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때 나는 우리 아버지를 따라갈 만큼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현관문을 확 열어 젖히자 문 앞 계단 위에
양손을 축 늘어뜨린 채 입을 꼭 다물고 화석처럼 굳어진 모습으로 서 있는 자끄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형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서는 다 죽어가는 비통한 목소리로 덜덜 떨면서 들릴 듯 말듯
머뭇머뭇 말했다.
"...단지를... 깨뜨리고... 말았어요."
불쌍한 형은 단지를 깨뜨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험상궂은 얼굴을
대하자 갑자기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쓰는 형의 표정을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우리는 그 이후 자끄 형이 단지를 깨버린 그 일을 두고 '단지 사건'이라 불렀다.
리용으로 이사온 지 두 달 가량 지났을 때야 비로소 부모님들은 우리의 학교
문제에 대해 거론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려면 많은 돈이 있어야 했다.
"저애들을 성가대 양성소에 보내서 공부하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그 제안에 동조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쌩 니지에 성당이
우리 집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와 자끄 형은 쌩 니지에 성가대
양성소에 가게 되었다.
그 성가대 양성소에서의 생활은 정말 재미있었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애들처럼
써먹을 데도 없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머리속에 꾸역꾸역 집어 넣는 대신에
우리는 예배하는 법과 찬송가 부르기, 무릎을 얌전히 꿇는 법, 품위 있게 향을
피우는 법 등을 배웠는데, 그런 학습은 몹시 까다롭고 어려웠다. 간혹 하루에 한두
시간 문법과 역사 수업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고 중요한
수업을 하기 위한 곁다리씩의 보충수업처럼 생각되었다. 그곳에서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종교의식을 가르치기 위한 수업을 중시했다. 우리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쯤 미꾸 신부님과 함께 장례식이나 결혼식,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영세를 주는
의식에 참석하여 성가를 불러야만 했는데 그런 날은 수업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의식에 참석하여 지체 높은 양반들을 보거나 임종의 순간을 맞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량을 준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었다. 성량!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성량을 준다는 것에 뿌듯한 보람과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성체할 때 쓸 빵과
성유를 양손에 드신 미꾸 신부님이 우산 같이 생긴 사제용 빨간 빌로드 닫집
아래에 서면 두 명의 성가대원이 그 닫집을 양쪽에서 받치고 걸었다. 나머지
단원들은 커다란 금빛 등불을 들고 신부님을 수행했는데 행렬의 맨 앞에서
다섯번째에 서게 되는 아이는 따르라기를 흔들게 되어 있었다. 따르라기 흔드는
일은 주로 내 임무였다. 성량의 행렬이 지나가면 그 연변에 서 있던 남자들은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로 모자를 벗어 들고 고개를 숙였으며, 여자들은 성호를
그었다. 행렬이 군인들의 초소 앞을 지나가게 되면 흩어져 있던 군인들도
보초병의 "총을 들엇"하는 고함소리에 따라 기겁을 하고 달려와서는 총을 어깨에
메고 열을 맞추곤 했다. 장교가 구령을 내질렀다.
"받들어... 총!"
"무릎 꿇어!"
철그럭대는 총소리가 진동하고 북소리가 저멀리 들판에까지 울려퍼져 나갔다.
나는 삼성창을 부를 때처럼 들고 있던 따르라기를 힘차게 세 번씩 연거퍼
흔들었다. 행렬은 주위에 몰려 선 사람들을 압도하고 군대마저도 감히 어쩔 수
없는 엄숙함을 자아내며 마을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이 모든 엄숙함과 경건함과
권위를 가진 성가대 양성소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었다.
우리들 모두는 자기의 작은 사물함 속에 성직자들이 지녀야 할 장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다. 긴 검은색 법의, 사제가 입는 장백의,
빳빳하게 풀을 먹인 커다란 소매가 달린 법의 겉에 입는 중백의와 명주로
만들어진 검은색의 긴 양말, 순모와 빌로드로 만들어진 빵모자 두 개, 가장자리에
조그맣게 하얀 진주무늬가 예쁘게 수놓아진 가슴 장식 등,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성가대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들이었다.
내게는 그런 복장들이 아주 잘 어울렸고 날 한층 돋보이게 해주었다.
"다니엘, 넌 정말 멋져 보여. 정말 잘 어울려. 아주 귀여워."
어머니는 곧잘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내게는 몹시도 속상하고 나 자신이
정말 한심해질 정도로 실망스런 점이 하나 있었다. 키가 너무 작았던 것이다.
조금만이라도 커지고 싶어서 아무리 발돋움하며 안간힘을 써봐도 우리 성당의
예장 순경인 까뒤프 씨의 길다란 흰 양말보다도 작았다. 게다가 또 얼마나
허약했는지! 언젠가 미사를 드릴 때였다. 복음서를 옮겨 놓아야 했는데 그
복음서란 것이 너무나 두껍고 무거워서 내가 책을 드는지 책이 나를 드는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나는 제단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 뒹굴듯이
널브러졌다. 책상은 넘어지고, 미사는 중단되었다. 더군다나 그날은 바로
'성신강림첨례일'이었다. 그 얼마나 꼴불견의 추태였겠는가? 나는 너무나
수치스럽고 창피해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감히 신부님을 쳐다볼 염두조차 나지
않았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 작고 허약해서 저지른 그 치욕적인 실수를 제외하면 난 비교적 성실하고
훌륭하게 내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하루의 모든 일과가 끝나고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밤이 되면 난 옆 침대에 누운 자끄 형에게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
"자끄 형, 이곳은 정말이지 훌륭한 곳이야. 난 여기가 정말 마음에 들어, 정말
행복해! 형도 그렇지?"
그러나 아버지와 절친하기 그지없는 친구분의 제안으로 우린 불행하게도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던 성스러운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분은 남부지방에 있는
어떤 대학교의 총장이었는데 만일 아들 중에 한 명만이라도 정규교육을 받게
되기를 원한다면 리용 중학교에서 실시하는 통학생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여 그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야! 이건 바로 다니엘을 두고 한 말이군."
아버지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럼 자끄는요?"
어머니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자끄 말인가? 그애는 내가 데리고 있겠어. 그애는 아주 쓸모가 많거든. 난
그애가 장사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우린 그애를 상인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 방면으로는 남다른 눈썰미를 가진 아버지가 자끄 형이 장사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눈치챈 것일까? 그때 어머니와 내겐 불쌍한 형이 예의 그
우는 것말고는 어떠한 소질도 없는 듯이 보였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그걸 잘
안다고 하시는 것일까? 만일 아버지와 우리가 자끄 형에게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 보았다면 그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러나 자끄 형에게는
물론이고 내게도 그 문제에 대해선 한마디도 묻지 않고 아버지는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며 리용 중학교로 나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맨 처음 리용 중학교에 등교하던 날 나는 셔츠를 입은 아이와 오로지 나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이나 놀랐으며 셔츠를 입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아주 형편없이 불량스러운 애로 취급되었다. 리용의 부잣집
아이들은 결코 셔츠를 입지 않았고 '곤느'라고 불리우는 거리의 불량아들만이
셔츠를 입었다. 나는 허름한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들에게는 내가 마치
'곤느'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히죽히죽 비웃어
대며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야, 저애 좀 봐! 셔츠를 입고 있잖아!"
"아니, 불결해."
"쟤 혹시 곤느 아니야?"
선생님마저도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를 마치 징그러운 벌레 대하듯 했다.
선생님이 처음 나를 봤을 때부터 그랬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교실 안이
웅성거림으로 소란해지자 그때부터 선생님의 태도는 아주 부자연스럽고
거북스럽게 변하며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선생님이 나를 부를 땐
경멸감과 혐오감을 나타내지 않으면 못배기겠다는 듯이 "헤이, 너!" "거기,
꼬마!"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주 침착하고 단정하게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제 이름은 다니엘 에 세 뜨입니다."
아마 스무 번도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열한 선생님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결국 우리 반 급우들도 나를 '꼬마'라고 불렀고, 어느새 "꼬마"가 내
별명이 되고 말았다.
내가 다른 아이들과 쉽게 구별되었던 것은 항상 셔츠를 입고 다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은 노란색의 예쁜 가죽 책가방,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회양목 잉크병, 두꺼운 판지로 장정이 된 값비싼 노트, 밑에 많은 주석이 달린
잉크 냄새가 펄펄 풍기는 새책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죽 책가방이나
회양목 잉크병은 커녕 책마저도 제대로 된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내 책들은
강둑을 따라 줄지어 있는 헌책방에서 산 너무나 오래되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고, 낡고, 찢어진 헌책들뿐이었다. 겉표지는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 버렸고
주석은커녕 군데군데 페이지가 찢겨져 읽기에도 아주 힘들 정도였다. 보다 못한
착한 자끄 형은 두꺼운 판지와 풀로 제본을 해주느라고 무척 애를 먹었다. 하지만
자끄 형은 안 그래도 될 텐데 풀을 너무 많이 덕지덕지 발라서 책에서는 고약한
풀 냄새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고 책을 볼 때면 항상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자끄 형은 또 내게 주머니가 많이 달려서 쓰기에 아주 편리한 책가방을 만들어
주었지만 그 가방 역시 풀을 너무 많이 발라서 고약한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그래서 내게서는 항상 풀 냄새가 진동하여 우리 반 아이들이 내 곁을 지날 때면
항상 코를 싸쥐고 다니거나 내 옆으로는 지나치지 않고 빙 둘러서 돌아가곤 했다.
어쨌든 자끄 형은 비상한 재주인 우는 일만큼이나 풀을 바르고 파지로 장정하는
일에 열중해 있었다. 자끄 형은 자기가 일하는 가게에서 빠져나오면 항상 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풀단지를 앞에 놓고 열심히 풀을 바르면서 제본을 하거나
판지로 장정을 해대는 것이었다. 정말 너무 열심이었다. 그가 그 일을 하고 있을
때면 옆에서 감히 얘기도 붙이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에 나는 항상 풀이 지나치게
덕지덕지 발라진 그 책을 울며 겨자 먹기로 가지고 다녀야만 했다. 그즈음 자끄
형은 낮에 시내에서 짐을 나르고, 불러 주는 대로 받아쓰는 등의 일을 하면서
장사꾼이 되는 데 필요한 예비지식을 배우고 있었다. 그는 점점 장사꾼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장학생이었기 때문에 한푼도 들이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끊임없이 조롱섞인 놀림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셔츠를 입고 다닐 수밖에 없었으며 아무리 '다니엘 에세뜨'라고
강조해도 그들 모두는 아마 별종동물인지 '꼬마'라고 불러 댔는데, 난 그 경멸섞인
야유를 그저 속으로 참아 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동등해지기 위해서,
아니 그들보다 내가 훨씬 더 똑똑하고 우수한 학생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열성을 다해 공부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불기도 없는 방에서 다리에 이불만 겨우 덮고 책상
앞에 오도마니 앉아 밤을 낮삼아 공부에 파고들던 어린시절의 내가
대견스러워진다. 그 방은 성에가 유리창에 아름다운 별무늬를 만들어 놓을 정도로
추웠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거실에서 아버지가 소리를 죽여 자끄
형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소리가 나즈막하게 들려오곤 했다.
"저는 이 달 8일부로 귀하가 보내 주신 서한을 잘 받아보았습니다."
두 눈 가득히 눈물이 고여 있을 자끄 형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저는 이 달 8일부로 귀하가 보내 주신 서한을 잘 받아보았습니다."
이따금 어머니가 들어와서 내게 다가와 내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다니엘, 공부하고 있니?"
"네, 엄마."
"춥지 않아?"
"아... 아니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렇지 않은데... 나는 몹시 추웠다. 어머니는 내 곁에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낮은 소리로 그물코를 세어 나갔다. 그렇게 어머니가 내 옆에
있으면 난 정말 포근함과 따사로움으로 추위를 잊곤 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책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어머니는 때때로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불쌍한 어머니, 어머니는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을 그 아름답고 정든 마을에서의 즐거웠던 날들 에 대한 향수에
늘상 젖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우리에게 몰아닥친 또 하나의 불행, 우리의 뇌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그 불행 때문에 곧 그 정든 마을로 가야만 했다.
##저주스런 전보
7월의 어느 월요일이었다.
그날 나는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술래잡기 놀이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니 보통때보다 훨씬 늦게 되었다. 나는 책가방을 허리에
단단히 차고 모자를 입에 문 채 떼로 광장에서부터 랑떼른느 가까지 쉬지 않고
단숨에 달렸다. 집에 도착해서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층계참에서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서 있었다. 평소에 아버지를 몹시 무서워하고 어려워했기 때문에
늦은 데 대한 핑계거리를 찾아 내려고 낑낑대다 이윽고 용감하게 벨을 눌렀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너무 늦었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무의식중에 거짓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를
품안으로 끌어안더니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아버지의 넓고 푸근한 가슴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나는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했졌다. 분명히 호된 꾸중을 들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근심에 싸여 있던 나는
문득 쌩 니지에 성당의 신부님이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와 계신 게 아닌가
생각했다. 신부님을 초대한 날이면 아버지는 절대로 우리들을 야단치지 않았다.
그런데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즉시 깨달았다. 식탁
위에는 아버지와 내 접시만 뎅그마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 엄마는 어디 계세요? 또 자끄 형은 어딜 간 거예요?"
나는 아버지를 올려보며 얼떨결에 큰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는 평상시와 달리 낮게 가라앉은 다정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와 자끄는 형에게 갔단다, 다니엘. 큰형이 몹시 아프다는구나. 그래서...."
내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본 아버지는 말끝을 흐리더니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쾌활하게 덧붙였다.
"내가 몹시 아프다고 말했나? 다니엘, 내가 말을 잘못한 것 같구나. 실은 오늘
형이 병석에 누워 있다는 편지가 왔거든. 너도 엄마가 요사이 어떤지 잘 알지?
엄마는 그곳에 가고 싶어 했잖니. 그래서 말이다, 자끄를 딸려 보낸 거야.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야! 자, 이제 앉아서 식사를 하자꾸나. 난 널 기다리느라고
배가 고파 혼났단다."
나는 말없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러나 머리속은 온통 신부인 큰형이
몹시 아프다는 생각으로 꽉 차고 가슴은 터질 듯 메어 왔다. 나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느라 무던히 애를 쓰며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아서 조용히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정말 배고픈 사람처럼 급하게 음식을 입 안에 넣고 씹는 둥 마는 둥
먹고 물도 꿀꺽꿀꺽 소리나게 마셔 댔다. 그렇게 급하게 먹다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충격을 받아 멍청해진 나는 식탁 끝에
꼼짝 않고 멀거니 앉아서 큰형이 공장에 와서 들려 주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고인 도랑을 건널 때면 치렁치렁한
신부복을 서슴지 않고 걷어 올리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 온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큰형이 처음으로 미사를 주재하던 때도 생각났다. 부드럽고
정감어린 목소리로 성경귀절을 읽어내리며 미사를 드리는 도중에 큰형이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향해 돌아섰을 때 그 멋진 모습에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했었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 홀로 병에 걸린 채 고통 속에 누워 있을 형을
그려 보았다. '아! 너무 아파!'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로 인해 나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슬픔 속에
잠겨들었다.
'하나님이 너를 벌하신 거야. 이건 순전히 네 잘못이다! 정직한 행동을 해야 해!
거짓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해!'
하나님이 거짓말한 나를 벌하기 위해서 큰형을 죽게 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고통과 절망으로 중얼댔다.
"이젠 거짓말은 절대로 않겠어요, 앞으로 다시는 학교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서 술래잡기 따위는 하지 않겠어요."
아버지는 식사를 끝내고 램프에 불을 붙여 식당을 밝힌 뒤 일할 준비를 했다.
아버지는 먹다 남은 디저트 접시를 한쪽으로 밀치고 식탁 위에 커다란 장부를
올려놓고는 소리내어 중얼대며 계산하기 시작했다. 바퀴벌레를 잡으라고 사들인
고양이 피네가 식탁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슬픈 듯이 울어 댔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창턱에 팔꿈치를 괴고서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창 밖에는 목을 조르려는 듯 안개가 몰려들고 있었다.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집 문 앞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멀리 로야쓰 요새에서부터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 오고 있었다. 큰형에
대한 생각에 잠겨 망연히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나는 무의식적으로 창문에서 몸을 뗐다. 불현듯 무서운
생각이 든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방금 나를 사로잡았던 불안과 두려움의
전율이 아버지의 얼굴에도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아버지도 몹시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왔구나!"
"그냥 앉아 계세요, 아버지. 제가 나가 보겠어요."
나는 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어떤 사람이 문턱에 서 있었다. 그 사람이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전봅니다."
"전보라고요? 무슨 일이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전보를 받아 쥐고 다시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발로 문을 못 닫게 힘을 주면서 쌀쌀맞게 말했다.
"서명을 해야지."
서명을 해야 한다고? 나는 전보를 처음 받아 봤기 때문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누구냐, 다니엘?"
아버지가 식당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아버지! 거지에요."
나는 여전히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그 남자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손짓하고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게 내 방으로 몰래 들어갔다. 나는 급히 펜을 찾아내 대충
잉크를 찍어서 그 남자에게 돌아갔다.
"여기다 서명을 해라."
그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층계를 밝히고 있는 희미한 램프 불빛을 받으며 떨리는 손으로 서명했다.
그러고는 문을 닫고 전보를 셔츠 속에 감추고 다시 돌아왔다.
아! 그렇다, 불행을 알리는 전보를 셔츠 속에 감춰 버려야만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보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그 전보가 무섭고 끔찍한
일을 우리에게 전해 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전보는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일까? 무엇이 적혀 있을까?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거지라고?"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보며 물었다.
"예, 거지였어요."
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이상히 여길까 봐 다시 창가로 가서 어두운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나는 두려움과 종잡을 수 없는 슬픔에 싸여 전보를 셔츠 속에 묻어둔 채 아무
말 없이 꼼짝 않고 창가에 얼마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그게 아닐 거라고 단정하면서 용기를 가지려고 애썼다.
'네가 뭘 안다고 이 야단이야? 좋은 소식일지도 모르잖아. 아마도 큰형이 다
나았다는 반가운 소식인지도....'
그러나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이상하게 상상의 나래는 자꾸
불길한 쪽으로만 펼쳐졌다.
이제는 우리에게 닥친 이 불운이 과연 사실일까를 정면으로 부딪쳐 알아 보기
위해 용기를 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무표정하게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식당을 빠져나왔다. 내 방에 들어섰을 때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고는 흥분되어 손을 덜덜 떨면서 서둘러 램프에 불을 켰다. 전보를 꺼내 확
펼쳐 본 순간 아무리 불길한 쪽으로만 상상했다고 할지라도 너무나 엄청난 사실
앞에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야, 이건 진정 사실이
아니야, 단지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야'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전보를 읽고 또 읽어
보았다. 하지만 그건 한치의 착오도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읽고 또 읽고,
심지어 뒤집어 읽어 보아도 소용없었다. 전보에 쓰여진 그 말은 도저히 다른 말로
바꿔지지 않았다.
첫째 애 사망. 깊은 애도를.
전보를 손에 든 채 별짓을 다해 보고 나서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하고 앉아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큰형...."
나는 갑자기 복받쳐오르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어 엉엉 울었다. 너무나 울어
눈이 금방 부어오르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지만 계속 울었다.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려야만 한다고 생각한 나는 방에서 나와 얼굴을 씻고
그 저주스런 전보를 든 채 식당으로 갔다. 나로서는 그 엄청난 사실을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그 끔찍한 소식을 알려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무슨 악마가 씌워서 아버지에겐 전보가 왔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으려고
했을까? 어차피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게 될 텐데! 어리석고 좁은 소견 덕분에
내가 직접 아버지에게 이 슬픈 사실을 알려야만 하게 되었으니, 나는 참 멍청하기
이를 데가 없는 놈이야. 차라리 전보가 왔을 때 직접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면
함께 전보를 읽었을 것이고 지금은 아버지도 이미 알고 계실 텐데.'
알 수 없는 답답함과 슬픈 심경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식탁에 가까이 다가가
주저하며 아버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정리하던
장부를 덮고는 펜의 깃털 끝으로 피네의 흰 주둥이를 간지르며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을 보자 내 가슴은 더욱
메어졌다. 아버지는 얼굴에 생기를 띠며 간간히 웃었다. 램프에 비친 아버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잘생겨 보였다. 나는 '아버지, 지금은 즐거워할 때가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슬픈 표정을 지은 채 손에 전보를 들고 아버지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아버지가 머리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 아버지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아버지가 내 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모른다. 다만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갑자기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아버지
가슴에서 느닷없이 터져나오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신음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마치 가슴이 터져나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 죽었구나, 그렇지?"
내 손에 들려진 전보가 미끄러져 발치에 떨어졌고, 엉엉 울면서 난 아버지
가슴에 쓰러졌다. 우리는 함께 얼싸안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피네는 발치에서
그 저주스러운 전보를 앞발로 툭툭 치면서 놀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큰형이 하늘나라로 떠난 지도 퍽 오래되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까지도 전보를 받을 때면 언제나 두려움에 떨지 않고는 펴볼 수가
없었다. '첫째 애 사망. 깊은 애도를'이라는 말을 다시 또 읽게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빨간수첩
언젠가 오래된 미사경본을 들추다가 일곱 가지 고통으로 인해 양볼에 골이 깊고
굵은 주름이 패여진 성모마리아 채색 삽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성모마리아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울었는지를 보여 주려고
의도적으로 강조해서 그 신성한 주름살을 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큰형의 장례식을 치르고 리용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어머니의 야윈 얼굴에서 바로
그 성모마리아의 볼에 패여 있던 주름을 보았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가엾은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그날 이후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어머니의 옷은 언제나 변함없이 검은색이었고, 늘 비탄에 잠긴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어머니의 가슴속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슬픔이 깊숙이
자리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슬픔은 어머니에게서 영원히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에세뜨 집안은 형편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침울하고
비통한 분위기가 집안 전체를 암울하게 뒤덮었다. 미꾸 신부님이 큰형의 영혼에
안식을 주기 위한 미사를 올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낡은 검정 웃도리를 뜯어
자끄 형과 내 상복을 만들어 주었다. 우울한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큰형이 죽은 후 얼마가 지난 어느날 저녁이었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자끄 형이 방문을 단단히 잠그고 문틈까지도 세심히 막은 후 다시 한번 일일이
확인을 해보더니 조심스레 내게 다가왔다. 나는 자끄 형의 엄숙한 표정과
이상스런 행동을 보고 깜짝 놀랐다.
큰형의 장례식을 치르고 랑그도끄에서 돌아온 이후 자끄 형의 행동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긴 했었다. 우선, 정말 신기하게도 자끄 형은 더이상 울지 않았다.
자끄 형으로부터 눈물이 사라졌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렇게도 열광적으로 제본을 하고 풀칠해 대던 그의 모습도 차츰 사라졌고, 간혹
불가에 놓여 있는 풀단지가 눈에 띄긴 했지만 전 같은 열의는 없어 보였다.
이제는 골판지로 만든 손가방을 하나 얻으려면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해야 될
판이었다. 그것은 정말 도저히 믿기지 않는 커다란 변화였다. 어머니가
모자상자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지 여드레가 지나도록 작업대 위엔 골판지
몇 장만이 눈에 띌 뿐 모자상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자끄 형의 변화를 벌써부터 주시해 왔다.
가게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이상한 몸짓을 하고 있는 자끄 형을 본 적도 몇 번
있고, 한밤중에도 자지 않고 뭐라고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침대에서 튕겨져
나가듯 일어나서 방안을 어슬렁 걸어다니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상인의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어서 그러한 형을 볼 때면 나는 무서움증이 확 들곤 했다.
자끄 형이 점점 미쳐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나를 안절부절하게
했다.
그날 저녁, 자끄 형이 갑자기 이상한 눈빛을 띠면서 조심조심 문을 잠그는 등
기이한 행동을 했을 때 내 머리속에는 형이 미쳤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면서 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
'아! 불쌍한 자끄 형.'
형은 지금 내가 어떤 심경인지도 모르고 힘을 주어 내 손을 꼭 잡았다.
"다니엘, 너한테만 할 얘기가 있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 비밀이야. 맹세할
수 있지?"
자끄 형이 분명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을 때 나는 형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숨을 몰아쉬면서 서슴지 않고 자신있게 말했다.
"결단코 맹세하겠어, 자끄 형!"
"그런데 넌 여짓껏 모르고 있었니?... 쉿!... 나는 그동안 시를 쓰고 있었다.
아주 위대한 시를!"
"시를? 형이 시를 쓰다니...."
자끄 형은 대답 대신에 웃저고리에서 자신이 제본을 한 빨간수첩을 한 권
꺼냈다. 표지에는 예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믿음이여! 믿음이여!
12편 장시
자끄 에세뜨 지음
제목부터가 너무 거창해서 현기증이 날 뻔했다.
항상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양손엔 온통 풀을 덕지덕지 묻히고 있는
모습만이 전부인 줄 알았던 열세 살짜리 자끄 형이 시를 쓰다니! '믿음이여!
믿음이여!'란 12편의 장시를 쓰다니, 상상도 못한 엄청난 일이었다.
자끄 형의 그런 숨은 일면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식구들은 계속 그의 손에
바구니를 들려 야채가게로 심부름을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에게
'멍청한 놈, 얼간이 같은 놈'이라고 소리를 질러 댔던 것이다.
아! 불쌍한 자끄 에세뜨! 그럴 수만 있다면 진심으로 자끄 형의 목을 끌어
안았으련만 나는 감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겉장을 넘겨
첫 페이지를 펼쳐 본 순간 '믿음이여! 믿음이여!'란 12편의 장시는 단 4행만이
쓰여진 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제
1편의 4행도 채 맺지 못하고 있었다.
"다니엘, 어때? '믿음이여! 믿음이여! 숭고한 믿음이여, 신비함이여! 쓸쓸하고
감동에 젖어 외치도다. 연민이여! 연민이여!' 아름답지 않아?"
그는 자기가 지은 시구를 감격에 차 나직이 읊조리면서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아직은 4행밖에 못 썼지만 나머지도 쉽게 쓸 수 있어. 식은 죽 먹기지,
시간문제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자끄 형이 말한 대로 이런 일이란 흔히 시작이 가장 어렵고
힘든 법이다. 그러나 자끄 형은 결국 12편의 장시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시인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 보아도 시란 원래부터 자기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모양인지 '믿음이여! 믿음이여!'란 시는 결국 빛을 못 보고 조용히
사그라들고 말았다. 시인의 자질보다도 시가 원래부터 갖고 있는 운명 때문에
결국 그 시는 참을성이 모자란 가엾은 자끄 형을 굴복시켜 그에게서 시적 영감을
완전히 앗아가 버렸다.
그렇게 되자 그는 또다시 눈물을 짜기 시작했고, 불 앞에 풀단지를 끼고 앉아
열심히 풀칠을 하며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옛날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빨간수첩 역시 자기 운명을 지니고 있었는지 자끄 형은 그 수첩도 내게
주어 버리고 말았다.
"네게 이걸 줄 테니 네 마음대로 해."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내게 빨간수첩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 수첩과 함께 자끄 형의 고심과 고통도 고스란히 내게 넘어왔다. 그 이후로
빨간수첩에는 나와 우리 에세뜨 집안에 몰아닥친 온갖 불운과 불행했던 나날들이
비통한 노래가락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도 어쩌다 그 수첩을 들춰보면 나와 우리 에세뜨 집안의 자취가
담긴 편린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그 시절의 아픔이 내 가슴에
되살아나곤 한다. 언제까지나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18xx년의 어느 봄날이나,
항상 침묵 속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던 나날들이나, 부진한 사업, 밀려만 가는 집세,
싸울 듯이 덤벼들고 고래고래 외쳐 대던 빚장이들, 팔아 버린 어머니의
다이아몬드, 전당포에 잡혀 버린 은그릇, 여기저기 구멍난 시트, 천조각을 대고
기운 누더기 바지, 궁핍함과 모욕감, 죽을 때까지 되풀이될 것 같던 "내일은
어떻게 하지?"하는 한탄 소리, 집달리가 무례하게 울려 대던 초인종 소리, 경멸과
비아냥거림으로 가득 찬 문지기의 경멸어린 미소, 빚과 부도난 어음 등... 늘
반복되는 눈물과 비참함으로 얼룩진 구슬픈 노래들이 빨간수첩의 페이지마다
빽빽히 채워져 갔다.
내가 철학반을 끝마치던 18xx년, 난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비록 여전히 키가 작고 턱수염 한 올 나지 않아 어린애 티를 벗지는
못했으나, 철학자나 시인처럼 아주 진지하고 점잖은 소년이었다.
어느날 아침이었다. 위대한 꼬마 철학자였던 내가 막 학교에 가려고 나서는데
아버지가 나를 가게로 불렀다. 내가 의아해 가면서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아버지는
아주 화난 듯이 목청을 돋구어 냅다 소리를 질렀다.
"다니엘, 이제 책이고 뭐고 다 집어치워. 넌 이제 학교 같은 덴 다닐 수 없어."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버지는 화난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듯 말없이 뒷짐을 지고
가게 안을 왔다갔다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몹시
격앙되어 있는 것 같았고 나도 역시 갑작스런 일에 깜짝 놀라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흥분이 좀 가라앉은 듯 침묵을 깨고
아버지는 다시 불쑥 말을 꺼냈다.
"얘야, 너한테 좋지 못한 소식을 알려야겠구나. 아주 나쁜 소식을 말이야... 우리
가족들 모두가 뿔뿔이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를테면
말이야...."
그순간 갑자기 반쯤 열린 문틈으로 귀청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자끄! 어휴, 저 멍청한 놈 같으니라구!"
아버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고함을 쳤다. 그러고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이 그 빌어먹을 혁명분자들 때문에 망해 버려 어쩔 수 없이 리용으로
이사온 이후 6년 동안 나는 열심히 일하여 다시 잃어버린 재산을 모아서 옛날의
안락하고 풍요로운 생활로 되돌아가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악마는 리용에서도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양이다. 난 식구들을
빚과 가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야 말았어... 이젠 모든 게 끝장이야. 우린
더이상 헤어나올 수 없는 진흙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어... 우리는 갈 데까지 다
갔고 이제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이상 까먹기 전에 아직 우리한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가재도구들을 몽땅 팔아서 각자 삶을 찾아야겠다. 이제
너희들도 클 만큼 컸으니까...."
문틈으로 스며드는 자끄 형의 울음소리가 아버지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아버지는 화조차 내지 않고 내게 문을 닫아 버리라고 손짓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 다른 일이 생기기 전까지 네 어머닌
남부지방에 있는 바티스트 삼촌 댁에 가 계실 게다. 자끄는 그대로 리용에 남게
될 거고... 자끄는 전당포에 조그만 일자리를 얻었지. 나는 포도주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들어갈 꺼야... 그리고 얘야, 안됐지만 너도 역시 네 생활비만큼은
직접 벌어야겠구나. 마침 내 처지를 잘 알고 있는 교육장으로부터 자습감독 교사
자리를 하나 얻어 주겠다는 편지가 왔더구나. 자, 읽어 봐라!"
나는 아버지가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서는 급하게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 망설이거나 신중하게 생각해 볼 시간조차 없을 것 같아요. 아주 급한
모양이에요. 갈 채비를 서둘러야겠어요."
"내일 떠나야 할 거다."
"좋아요. 떠날께요. 떠나겠어요."
나는 편지를 다시 접어서 아버지에게 돌려 주었다. 아버지 말대로 난 클 만큼
컸고, 그리고 이제 내 나름으론 아주 심오한 철학자였기 때문에 내 앞에 펼쳐질
어떤 운명도 헤쳐 나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자 우리의 얘기를 다 듣고 있었던 듯 어머니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으며,
자끄 형도 어머니 뒤를 따라 쭈뼛쭈뼛 들어왔다. 두 사람은 내게 다가오더니 아무
말 없이 나를 껴안았다. 나만 빼놓고 모두가 어제 저녁부터 이 일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애 짐을 잘 꾸려 주구려! 내일 아침 배로 떠나야 될 거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긴 한숨을 몰아쉬었고, 자끄 형은 소리를 죽이며
흐느꼈다. 이제 모든 것은 결정되었고 실행만이 남았다.
그동안 겪어온 숱한 일들로 인해 우리 가족들은 차차 불행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내가 가족들과 헤어지던 그날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날 아침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끄 형은 헤어짐의 아픔을 속으로 삼킨 채 나를
부두까지 배웅해 주었다. 우연하게도 나는 6년 전 우리 가족을 리용까지 태우고
왔던 바로 그 배를 타게 되었다. 제니에 선장과 몽떼리마르 주방장도 만났다.
우리 가족들에겐 무의식적으로 안누 할머니의 큰 우산, 갑자기 내린 비로 더욱
소란해진 갑판 위의 사람들, 그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배를 내리던 일,
그런 여러가지 일들이 떠오른 것 같았다. 그런 추억들은 우리 가족의 슬픔을
조금은 덜어 주었으며, 어머니의 입가엔 과거를 회상하는 서글픈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경적이 뿌 뿌 하고 울렸다. 드디어 떠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가족들의 품에서 빠져나와 부교를 건너 갑판으로 올라갔다.
"조심해라!"
아버지가 소리쳤다.
"조심해야 한다. 건강하고...."
어머니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자끄 형은 이별의 인사를 하려고 입을 달싹거렸으나 너무 울어서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전혀 울지 않았다. 나는 위대한 꼬마 철학자였으며, 철학자는 눈물
따위나 흘려 대는 연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슬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희뿌연 안개 속에 남아 슬픔에 싸여 있는 저 다정하고 착한 사람들을 내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을 위한 일이라면 아무리
위험한 일일지라도 내 몸을 송두리째 바쳐 가면서까지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다. 다만 나는 위대한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리용을 떠나는
기쁨, 여행한다는 즐거움 등이 뒤섞여 나를 미묘한 흥분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론
강의 부두 위에 서서 울고 있는 세 명의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슬픔도 잊은 채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세 사람은 철학자도 아니었으며 나와는 달리 야릇한 흥분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그들은 불안해 하면서도 애정어린 표정으로 마치 천식을
앓듯 뿌뿌거리며 떠나가는 배를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배의 굴뚝에서 솟아나오는 시커먼 연기가 수평선을 날으는 제비만큼이나 작게
보일 정도로 아득히 멀어질 때까지 그들은 "안녕! 안녕!"하면서 슬픈 목소리를
토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그들과는 달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면서 휘파람을 불거나, 침을 길게 내뱉거나, 뱃머리 쪽에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거나, 어깨를 으쓱거리는 등 어른 흉내를 내며 천천히 갑판 위를
거닐었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이 무척 멋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엔느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에 몽떼리마르 주방장과 주방에서 일을 거들어 주는 다른 두
사람에게 내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 쓰기 위해서 학교에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중이라고 떠벌려 댔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내가 아주 대견스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
칭찬을 듣자 나는 더욱 으쓱해지며 나 스스로도 내가 아주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여전히 거드름을 피우며 갑판 위를 거닐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걷다가 나는
그만 실수로 뱃머리 쪽의 경적 옆에 엉켜 있는 밧줄더미에 발부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6년 전에 무릎 위에 앵무새가 든 새장을 올려놓고 앉아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넋을 잃고 론 강을 바라보았던 바로 그 밧줄더미였다. 그것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찌나 웃어 댔던지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였다.
커다란 파란색 새장에 기이하게 생긴 앵무새를 넣고 어딜 가나 들고 다녔으니
그때의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그때만 해도 불쌍한 꼬마 철학자는 환상의 색깔인 파란색 새장과 희망의 색깔인
초록색 앵무새를 평생 동안 끌고 다녀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는 어린시절의 환상과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커다란 파란색 새장을 가지고 다닌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장의 파란색은 벗겨져 퇴색되고, 앵무새의 초록빛 털은 거의 다 빠져 점점 보기
흉하게 되었을 뿐이다.
아름다운 어린시절을 보낸 랑그도끄가 있는 비엔느에 도착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교육장을 찾아 보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교육장은 야위긴 했지만 훤칠한 키에 얼굴도 훤해서
첫눈에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민첩하게
행동했지만 학자의 분위기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그는 나를 친구의 아들로서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내가 교육장실에 들어섰을 때 그 친절한
교육장은 무척 놀라는 것 같았다.
"아! 이걸 어쩐다지! 이렇게 작을 줄은 미처 몰랐는데!"
사실이지 난 작은 체구인 데다가 어른스럽게 듬직한 인상이기는커녕 허약하기
그지없는 인상을 풍겼던 것이다.
면전에다 대놓고 내뱉는 교육장의 한탄소리는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두려워졌다.
'이분은 내가 이토록 작은 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야. 안 된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치더니 두려움으로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교육장은 그런 모습을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듯 말을
이었다.
"이리 와 보렴, 얘야!... 그래서 우린 말이야, 너한테 자습감독 교사 일을
맡기려고 하는데... 이렇게 작고, 허약한 인상으로는 자습감독 교사를 한다는 것이
다른 어떤 일보다 어렵고 힘들 게다... 하지만 지금 너는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만 할 형편이니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널 돕겠다... 그러나 처음부터 널 큰
학교에 보낼 수는 없지... 여기서 수십 리 떨어진 산으로 둘러싸인 싸르랑드란
마을에 공립중학교가 하나 있다. 우선은 너를 거기에 보내야겠구나. 그곳에
근무하면서 교사로서의 수련도 쌓고 교사라는 직업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해
보아라. 그러다 보면 키도 크고, 수염도 자라 남자다운 풍모를 갖추게 되겠지. 큰
학교에 가는 문제는 그때 가서 얘기해 보자꾸나."
교육장의 말을 듣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말을 끝내고 난
교육장은 싸르랑드 중학교 교장선생님에게 보낼 나에 대한 소개장을 써서 내게
건네주면서 그날로 싸르랑드로 떠나라고 말했다. 교육장은 다시금 몇 마디 충고의
말을 하고 내 뺨을 다정스럽게 어루만지더니 어서 가보라며 일어나서 문을 열어
주었다.
교육장실을 나오면서 안심도 되고 희망에 벅찬 나는 오래되어 무척 낡은 계단을
나는 듯이 단숨에 뛰어내려와서는 싸르랑드로 가는 합승마차를 예약하려고 서둘러
달려갔다.
오후에 출발하는 합승마차를 간신히 예약할 수 있었는데 출발하기까지는 아직도
네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기다리는 시간 동안에 랑그도끄 마을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우쭐한 기분으로 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꼭 만나 보아야 할 사람들도 있었다. 이곳으로 오게 된 첫번째 목적을
완수한 나는 허기를 느끼며 우선 배를 채우기 위해 주머니 사정을 헤아려 적당한
음식점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는 광장 한쪽에 있는
비교적 깨끗한 음식점을 찾아냈다. 그 음식점에는 '프랑스를 여행하는 친구를
위한 집'이라는 간판이 산뜻하게 붙어 있었다.
나는 그곳이 내 형편에 가장 적당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혼자서 식당에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밀치고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허연 석회가 깨끗하게 칠해져 있었고 홀에는 참나무 식탁이 몇 개 놓여
있었을 뿐 음식점 안에는 손님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는
장식용으로 세워 놓은 듯 구리 손잡이에 알록달록한 리본을 매단 긴 지팡이가
눈길을 끌었다. 카운터에는 주인인 듯한 디룩디룩 살이 찐 뚱뚱한 남자가 신문지
위에다 코를 박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아 대며 자고 있었다.
"이봐요! 주인 양반!"
나는 선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달들처럼 주먹으로 식탁을 탕탕 두드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뚱보 양반은 여전히 코를 골며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뒷방에 있던 여주인이
놀라서 급히 달려나왔다. 행운의 천사가 자기 식당으로 인도한 손님을 보자
그녀는 얼떨결에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 맙소사! 넌, 다니엘 아니냐!"
"아... 안누 할머니!"
아! 하나님! 뜻밖에도 안누 할머니였다! 우리 집안 일을 도맡아 하던 성실한
안누 할머니가 카운터에서 세상 모르고 골아떨어진 뚱보장 뻬롤씨와 결혼하여
이제는 음식점의 어엿한 여주인이 되어 있었다.
항상 다정하기만 한 안누 할머니는 자기네 식당에서 나를 만났다는 것이 너무도
놀랍고 뜻밖이어서 얼마나 나를 힘껏 껴안았는지 나는 하마터면 숨이 막힐
뻔했다.
그때 잠꾸러기 장 뻬롤씨가 부시시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마누라인 안누
할머니가 웬 낯선 젊은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을 보고는 무척 놀란 듯했다. 안누
할머니가 늘 얘기하던 다니엘이라고 나를 소개하자 그는 얘기로만 듣던 나를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된 것이 기뻤는지 아주 귀한 손님을 대하듯 갖은 친절을 다
베풀었다.
"다니엘 군, 점심식사는 어떻게 했나?"
"아직 하지 못했읍니다. 뻬롤 씨... 실은 점심식사를 하려고 음식점을 찾던 중에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들어 이 식당으로 들어왔어요. 그런데 안누 할머니의...."
"맙소사! 다니엘, 여지껏 식사를 안했다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니."
안누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갔고, 뻬롤 씨도 벌떡
일어나 뚱뚱한 몸을 뒤뚱거리며 지하실로 무엇인가를 가지러 내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식탁 위에는 멋진 식사가 차려졌는데 먹음직스럽고
맛깔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이 이것저것 풍성하여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나는 그렇게 많은 음식을 보자 순간 더욱더 허기를 느끼며 식탁에
앉았다. 안누 할머니는 왼쪽에 앉아 크림이 많이 들어 저절로 구미가 당기는 계란
반숙을 먹기 좋도록 잘라 주었고, 뻬롤 씨도 오른쪽에 앉아서 잔에다 홍옥 빛깔의
포도주를 따라 주는 등 그렇게 극진할 수가 없었다. 낮은 소리로 그동안의 얘기를
하면서 난 수도사처럼 단정하고 얌전하게 식사를 했다. 내가 방금 교육구청을
다녀왔으며, 이제는 자습감독 교사 일을 해서 생활비도 직접 벌게 되었다고
얘기하자 안누 할머니는 내가 무척 대견스러운 듯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지으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도 뻬롤 씨는 덜 놀라는 눈치였는데 왜냐하면 그는 다니엘보다 더 어린
너댓 살 되던 때부터 이 험난한 세상에 발을 들여 놓고 온갖 풍상을 겪어
고생쯤은 이미 몸에 배어 있는 노련한 사람이어서, 다니엘이 직접 생활비를
벌겠다는 것이 별로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의젓한 뚱뚱보 뻬롤 씨는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할 뿐 결코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찌 감히 뻬롤 씨가 자신을 에세뜨 집안의 아들과 견줄 수
있단 말인가! 뻬롤 씨가 그런 기미라도 보였다면 안누 할머니는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보! 다니엘과 함께 우리 모두 건배합시다."
뻬롤 씨는 잔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그리고 모두들 축배를 들었다. 우선
에세뜨 부인을 위해서 그리고 에세뜨를, 자끄를, 다니엘을, 안누를, 장 뻬롤을,
교육장을 위해서 건배! 그리고 또... 위해서....
우리는 옛날의 슬펐던 기억들과 장미빛 아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옛날의
추억이 어린 공장과 리용, 랑떼른느 거리, 가난하고 우울에 찌든 생활들, 불쌍한
큰형의 죽음 등을 얘기하며 함께 기뻐하고 슬퍼했다. 그렇게 웃고 건배하며
떠들다 보니 벌써 두 시간이나 흘러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왜? 벌써 가려고?"
안누 할머니가 섭섭하다는 듯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싸르랑드로 떠나기 전에 꼭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는데 아주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부득이 일어서야만 하겠다고 얘기하며 나는 안누 할머니와 뻬롤 씨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직도 나눌 얘기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헤어져야만 했다. 결국 안누 할머니와 뻬롤 씨는 그렇게 중대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다며 더이상 나를 붙잡지 않았고 우리는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여행 잘 해라. 다니엘!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하나님께서 항상 보살펴
주시고 인도하시며, 네게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자나 깨나 빌고 있겠다.
건강에도 유의하고...."
안누 할머니와 뻬롤 씨를 뒤에 남겨 둔 채 나는 발길을 재촉했다. 그들과
헤어진다는 아픔도 있었지만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사람들을 만난다는 희망에 벅차
발걸음은 경쾌하고 가벼웠다. 그렇다, 나는 곡 만나봐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어린시절의 즐거움으로 가득 찬 들이며 작업장이며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우람한
플라타너스와 협죽도, 그리고 석류나무와 돌멩이 하나하나까지도 만나서 반가운
재회의 인사를 나누어야만 했다.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나간 로빈슨 크루소도 훗날
자기가 살던 무인도를 찾아 보기 위해 수천리가 넘는 바닷길을 항해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한때 향유했던 즐거움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어 하는 본능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나는 공장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머리에 깃털 장식을 달고 흥미로운 듯 담 너머로 멀리 세상을 바라보고 있던
키다리 플라타너스들이 정겨운 옛 친구가 재빠른 걸음걸이로 자기들을 향해 오고
있는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라 반가운 듯 깃털 장식을 흔들어 대며 나를 반겨
주었다. 그러고 나서 서로 몸을 기울이며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저기 다니엘 에세뜨가 온다! 다니엘 에세뜨가 돌아오고 있어!'
나는 더욱 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공장에 거의 다다랐을 때 나는 전율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고는 석고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협죽도도, 삐죽 솟은 석류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도 없어져 버렸고,
작업장도, 예배당도 사라져 버렸다. 대문 위쪽으로 라틴어가 몇 마디 쓰인 커다란
십자가만이 보일 뿐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공장은 이제 더이상 공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남자들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까르멜 수녀원이 되어 있었다.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크고 작은 산봉우리 사이의 좁다란 골짜기에 자리잡은 세벤느 산악지방에
싸르랑드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그곳의 날씨는 변덕이 심해 해가 중천으로 높이
떠올라 산골짜기를 내리비칠 때면 푹푹 쪄대는 무더위로 숨통이 막힐 듯했고,
북서풍이 휘몰아치면 매서운 추위가 살을 에이는 듯했다.
계절은 이미 봄으로 접어들었지만 내가 도착한 날 저녁에는 아침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북서풍이 미친 듯이 마을 안을 휘젓고 있었다. 합승마차 윗 좌석에 앉은
나는 싸르랑드로 들어서면서 냉기가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인적이 끊어진 채 거리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썰렁한 광장 한켠에 윤곽만
어스름히 보이는 사무실 앞쪽에서 몇 사람이 추위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며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는 광장에서 그다지 멀지 떨어져 있지 않았다. 정적만이 감도는 거리를
두세 번 꺾어들자 트렁크를 들고 앞서 가던 짐꾼은 오래 전에 내버려진 듯한
황폐한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다 왔읍니다. 여기에요."
그는 문에 달린 묵직해 보이는 쇠로 된 커다란 문고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육중한 문고리가 밑으로 젖혀지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나는 짐꾼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둠에 잠긴 거물 현관에 서서 짐꾼이 트렁크를 땅바닥에 내려 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어둠 속에서 그가 내민 손바닥에 수고비를 쥐어
주었다. 뒤돌아 선 짐꾼은 깜깜한 어둠 속으로 유령처럼 사라져 갔다. 곧이어
쿵하며 문 닫히는 소리가 무섭게 들려 왔다. 잠시 후 수위 졸린 표정을 지으며
큼직한 램프를 들고 내게로 다가 왔다.
"새로 온 학생인가요?"
"저는 학생이 아니고 자습감독 교사로 여기 온 겁니다. 교장실까지 안내해
주시겠어요?"
수위는 내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잠이 확 달아나는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잠시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했다. 지금은
교장선생님이 학생들과 15분 동안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기 때문에 저녁예배가
끝나는 대로 교장실로 안내해 주겠다고 말했다.
수위실 안은 방금 막 저녁식사가 끝났는지 음식 냄새가 배어 있었다.
다부진 체격에 덥수룩한 금발 수염을 기른 잘생긴 남자가 브랜디를 마시고
있었다. 그 곁에는 마르멜로 열매처럼 노란색 피부에 비쩍 마른 야윈 여자가
빛바랜 허름한 쇼올을 귀까지 덮어 쓰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누굽니까, 까싸뉴 씨?"
덥수룩한 수염이 난 남자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수위에게 물었다.
"새로 오신 자습감독 선생님이세요. 선생님이 너무 작아서 전 처음에 학생인 줄
알았답니다."
수위가 웃음기어린 낯빛으로 대답했다.
"사실 이 학교에는 선생님보다 키가 크거나 나이가 훨씬 많은 학생들도 더러
있어요. 음, 누구더라? 그렇지 베이옹이라든지...."
수염난 남자가 브랜디 남자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끄루자도 그렇지요."
수위가 덧붙였다.
"수베롤도 있잖아요."
이번에는 잠자코 앉아 있던 야윈 여자가 거들었다.
그렇게 한마디씩하고 난 그들은 브랜디 잔에 코를 박고 나를 곁눈질하며
자기들끼리 낮은 소리로 무어라고 지껄여 댔다. 밖에서는 매서운 북서풍이
몰아치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 오고 성당으로부터 목청껏 기도문을 외우는
학생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건너왔다.
갑자기 어둠과 지루함을 깨버리려는 듯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현관 쪽에선
삽시간에 여러 발자국소리가 뒤섞여 시끄럽게 울렸다.
"예배시간이 끝난 모양입니다. 교장실로 올라가시죠."
까싸뉴 씨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나를 향해 말했다.
그는 램프를 집어 들고 앞장서서 수위실 밖으로 나갔다.
학교는 굉장히 넓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어두운 복도, 높다란 현관, 정교한
철난간이 달린 널따란 계단... 그 모든 것이 오래되어 검게 그을려 있었다.
1789년까지만 해도 그 건물은 귀족계급 출신의 학생만 입학할 수 있는
해군학교였으며, 한창때는 8백 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수용했다는 학교 역사를
수위는 낮은 목소리로 들려 주었다.
수위의 얘기가 거의 끝나갈 때쯤 우리는 교장실 앞에 다다랐다. 까싸뉴 씨는
묵중한 이중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가더니 또 하나의 안쪽 문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무게 있는 점잖은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수위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는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교장실은 사방 벽이 온통 초록색 벽지로 도배된 넓직한 방이었다. 방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는 커다란 책상 앞에 앉은 교장선생님은 밑으로 늘어진 램프갓
밑으로 비치는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무언가를 쓰느라고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교장선생님! 셀리에르 씨의 후임 선생님이 도착하셨읍니다."
수위가 내 등을 앞으로 지그시 떠밀면서 말했다.
"아! 그래요?"
교장선생님은 여전히 글쓰는 데 몰두한 채 말했다.
수위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총총걸음으로 교장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모자를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교장실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쓰던 일을 끝마친 듯 교장선생님이 내게로 몸을 돌렸다. 나도 교장선생님을
마주 바라보았다. 교장선생님은 창백해 보이는 얼굴색과 깡마른 체격이었다.
하지만 두 눈은 날카롭고 차가운 광채를 발했다. 교장선생님은 나를 좀더 자세히
보려고 밑으로 처져 있는 램프갓을 위로 끌어 올려 주위를 밝게 한 다음 흘러내린
코안경을 바짝 치켜 올렸다.
"아니, 어린애 아냐!"
교장선생님이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소리쳤다.
"어린애를 데리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실망과 불만에 가득 찬 교장선생님의 푸념을 들으니 나는 몹시 두려워졌다.
순간 먹을 것도 없이 길거리로 내몰린 초라한 모습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간신히
두세 마디 더듬거리고 난 나는 교육장이 써 준 소개장을 교장선생님에게
머뭇거리며 건네주었다.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을 지은 채 교장선생님은 편지를 받아 들더니 읽고 다시
읽고 편지를 접었다가는 다시 펴서 또 읽었다. 마침내 그는 교육장의 특별한
추천도 있고 아울러 가족들의 명예도 있고 하니 비록 어리고 작은 게 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자습감독 교사로 채용하겠노라고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는 이어
내가 해야 할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내 귀에는
그의 말이 한마디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더욱 더 중요했기 때문에 내 가슴은 터질 듯 기뻤고 어떠한 말도
그냥 흘러가 버렸다. 그가 아무리 많은 손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나는 그 손
위에다가 일일이 다 입을 맞췄을 것이다.
너무 기뻐 한동안 얼이 빠져 서 있던 나는 뒤쪽에서 들리는 쨍그렁대는 요란한
쇳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놀라서 눈을 휘둥그래 뜨고 돌아보니 그곳에는
붉은 구레나룻을 기른 껑충하게 키가 큰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머리가 옆으로 약간 기울어진 그 남자는 검지손가락에 크고 작은 열쇠들을 꿴
열쇠꾸러미를 들고 흔들어 대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미소를 대하자 방망이질하던 내 마음이 약간 진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신경을 거슬리는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하고 울려 대는 끔찍한 열쇠꾸러미
부딪히는 소리가 나를 두렵게 했다.
"비오 씨, 이분이 셀리에르 씨 후임으로 오신 분입니다."
교장선생님의 말에 비오 씨는 고개를 숙이면서 내게 예의 그 다감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열쇠는 '이 꼬마가 셀리에르 씨 후임이란 말이지?
꺼져라, 꺼져! 웃기지 말고!'라고 빈정거리듯 더욱 세차게 흔들거렸다.
교장선생님도 열쇠들의 쨍그렁거림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아차린 듯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덧붙였다.
"셀리에르 씨가 떠남으로 해서 우리는 여러가지 크나큰 손실을, 아니 회복할 수
없을 만큼의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비오 씨가 새로
오신 선생님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감싸주시면서 자습감독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할 사항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시고 준수해야 할 질서와 규율을 가르쳐
주신다면 엄숙한 학교 질서나 규율은 그다지 흐트러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서는군요."
비오 씨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성심껏
조언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열쇠들은 여전히 불친절하게 쨍그렁거렸다.
마치 '난장이 꼬마야, 조심하라구'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에세뜨 씨, 이제 가셔도 좋습니다. 오늘 저녁은 불편하시더라도 호텔에 가서
주무십시오. 그리고 내일 아침 8시까지 출근하셔야 합니다. 그럼...."
교장선생님이 내게 점잖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비오 씨는 조금 전보다 더욱 다정한 미소를 얼굴에 담고서 나를 현관까지
배웅해 주었다. 내가 돌아서려고 하는데 비오 씨가 내 손에 조그만 수첩을 쥐어
주었다.
"학교 규칙이 써 있소. 읽어 보시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러가지 잘
생각해 보시오."
내가 문을 열고 나가자 그는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소리가 나도록 열쇠를
일부러 더 힘껏 흔들며 현관문을 닫아 버리곤 유유히 사라져 갔다.
그 사람은 불을 켜 주는 것을 잊어버린 듯했고 나는 그 어두운 복도에 길을
찾기 위해 벽을 더듬거리며 한동안을 헤매야만 했다. 어스름한 달빛이 높은
창문의 창살을 통해 비춰 들어왔기 때문에 그나마 나는 간신히 길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힘겹게 복도 안을 허우적대며 나오는데 저쪽 켠에서 어슴푸레한
불빛이 흔들거리며 내게로 재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불빛을 향해 몇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갔다. 불빛은 점점 커지더니 내게로 바짝 다가와서는 내 옆을 그대로
지나쳐 뒤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 환영을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빛이 아주 빠르게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나는 그 불빛에 언뜻 어떤 환영을 보았다.
두 여자 아니 두 그림자가 바로 그 환영의 실체였다. 쭈글쭈글한 주름투성이의
얼굴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허리가 완전히 구부러진 노파와 날씬한 몸매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젊은 여자가 마치 유령처럼 날렵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걸 분명히
보았다. 노파의 손에는 조그만 구리 램프가 들려 있었고 검은 눈동자의 여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두 그림자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 재빠르게
발자국소리를 죽이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난 뒤 한동안
나는 흘린 듯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우뚝 서 있었다.
놀라움에 가슴이 마구 띠었고, 그 안경잡이 마귀할멈이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불안감에 떨면서도 나는 다시 더듬거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어쨌든 그 밤을 지낼 숙소를 찾아야 했고 마음은 조급했다. 낯선 곳에서 더구나
야밤에 잠잘 곳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신히 수위실에 도착해 한숨을 돌리고 나서 보니, 덥수룩하게 수염난 남자가
여전히 그곳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뻐끔대고 있었다. 내가 사정 얘기를 천천히
늘어놓자 그는 선뜻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귀족처럼 극진한 대우에 그다지
비싸지 않은 작은 여관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정중히 제의해 왔다. 나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구레나룻 남자는 아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함께 걸어가면서
그는 자기 이름은 로제이고, 싸르랑드 중학교에서 댄스와 마술, 펜싱 등을
가르치는 펜싱 교사이며, 아프리카 엽기병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었다는 것을 내게
들려 주었다. 나는 그가 아프리카 엽기병으로 근무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어린애들은 용감한 군인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로제가 안내해 준 여관
앞에서 우리는 힘차게 악수를 하면서 이제부터 절친한 친구가 되고자 굳게
약속하고 헤어졌다.
지금부터 나는 숨겨 놓고 싶은 얘기를 고백하려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낯선 마을의 누추한 여관 침대에 홀로 걸터앉아
위대한 꼬마 철학자라는 자부심도 팽개친 채 메어지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날 밤 나는 마치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삶이
무섭게 느껴졌던 것이다. 삶이라는 문제 앞에서 나는 자신이 무기력하고 허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복받치는 눈물을 참으려고 하지도 않고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한없이 흐르는 눈물 속으로 가족들의 얼굴이 어른거리며
떠올랐다. 가난으로 찌들어 버린 어머니는 바티스트 삼촌 댁으로, 아버지는 그
불운으로 가득 찬 리용에... 뿔뿔이 흩어져 버린 불쌍하고 초라한 가족들이
보였다. 지금 내겐 의지할 만한 가족도 없었고, 집도 없었다. 이젠 가난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나약하게 하는
슬픔 따위는 떨쳐 버리자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나는 거창하고 아름다운 결심을
했다. 거덜난 에세뜨 가문을 다 시 일으켜 세우고 혼자 힘으로 옛날처럼 부유한
집안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리고 나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비오
씨가 건네준 학교 규율이 적힌 수첩을 펼쳤다.
비오 씨가 손수 정성들여 베낀 그 규율은 조약문처럼 체계적이었으며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 상급자에 대한 자습감독 교사의 의무
둘째, 동료들에 대한 자습감독 교사의 의무
셋째, 학생들에 대한 자습감독 교사의 의무
거기에는 교사가 지켜야 할 규칙들이 총망라되어 일일이 설명되어 있었다. 창문
유리가 깨졌을 경우에서부터 두 학생이 동시에 손을 들었을 경우, 또한 교사들의
봉급 액수나 심지어 식사 때 얼마만큼의 포도주를 마셔야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규율집은 규율의 효율성을 찬양하는 한 편의 감동적인 연설로 끝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 부분에 나오는 연설문의 가장 감동적인 구절까지 읽을
여력이 없었다. 나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치며 악몽에 시달렸다. 이상야릇한 수많은 환영들이 꿈
속에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어떤 때는 쨍그렁! 쨍그렁! 끔찍한 소리를 내는
열쇠꾸러미를 든 비오 씨가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안경잡이 마귀할멈이
내 머리맡에 다가와 앉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뜨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매혹적인 그 검은 눈동자 아가씨가 침대 발치에 앉아서는 이상하게도 나를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8시에, 나는 학교에 도착했다. 열쇠꾸러미를 손에 든 비오 씨가
정문에 버티고 선 채 등교하는 학생들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감시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는 한껏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았다.
"현관에서 기다리세요. 학생들이 다 등교하고 나면 다른 선생님들께 소개시켜
드리지요."
그의 말대로 현관 밑에서 기다리던 나는 이리저리 거닐다가 선생님인 듯싶은
사람이 다가오면 고개를 땅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그들은 본체 만체 숨을 헐떡거리며 그냥 달려가 버렸다. 그런데 딱 한
사람 내 인사를 받아 주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을 신부이자 철학
교사라고 소개했다. "괴짭니다."라고 비오 씨가 내게 귀띔해 주듯 넌지시 말했다.
왠지 모르게 나는 그 괴짜라는 사람이 금세 좋아졌다.
그때 종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교무실 안은 시끌벅적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렇고 그런 평범한 얼굴에 볼품없는 남루한 옷을 걸친 스물 일곱 살
안팎의 키큰 청년 너댓 명이 촐랑거리며 뛰어들어오다가 비오 씨와 마주치자,
흠칫 놀라서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비오 씨가 나를 가리키면서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새로 온 동료인 다니엘 에세뜨 씨를 소개합니다."
그는 한마디 입을 내뱉고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서 있다가
미소띤 얼굴로 사라져 갔다. 여전히 위협하듯 쨍그렁대는 열쇠꾸러미를 흔들며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몹시 우스꽝스러웠다. 머리통이 어깨 위에 기우뚱하게
올라 앉아 있는 그는 목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참 동안 나는 아무 말 없이 눈치를 살피며 동료들을 슬금슬금 바라보았다.
그들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뚱뚱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바로
내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게 될 셀리에르, 그 유명한 셀리에르 씨였다.
그가 장난기어린 소리로 말했다.
"아무렴! 선생들이 계속 뒤를 잇긴 하지만 서로 닮지는 않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
그 말은 자신의 장대 같은 키와 짜리몽땅한 내 키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
분명했다. 모두들 못 참겠다는 듯 한꺼번에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그들보다 먼저
가장 큰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그순간 내 기분은 단 몇 인치라도 더 커질 수
있다면 내 영혼까지도 기꺼이 팔아넘기고 싶을 만큼 처절했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그 뚱보 셀리에르 씨가 내 손을 잡으며 덧붙였다.
"신경 쓰지 말아요. 키가 서로 차이난다고 해서 술 한 잔 같이 할 수 없는 건
아니니까. 우리랑 함께 갑시다, 친구. 수업 시작하기 전에 바르베뜨 까페에서
이별주를 가볍게 사기로 약속했소. 당신도 참석해 주었으면 해요... 모름지기 술을
한 잔씩 나누고 나면 원수지간도 친해지는 법이라오."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는 내 팔을 끼더니 나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동료들이 날 데려간 바르베뜨 까페는 광장의 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마을에 주둔한 부대의 하사관들이 그곳의 단골손님인 모양이었다. 까페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모자걸이에 걸려 있는 수많은 보병용 군모와 혁대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학교를 떠나는 날이라고 셀리에르 씨가 이별주를 한잔 사기로 해서였는지
까페에는 단골 손님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까페에
들어서자 셀리에르 씨는 멍청해진 나를 끌고 다니며 모두에게 소개시켰고 그들은
진심으로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나의 출연은 그다지 큰 신선함을
준 것 같지 않았으며 그들은 금세 내 존재를 잊고 각자의 기분에 빠져들었다.
나는 까페 한구석에 시큰둥하니 앉아 있었다. 술잔이 채워지는 동안 뚱뚱보
셀리에르 씨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코트를 벗어 붙인 채 그는 자기 이름이
새겨진 기다란 도자기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다. 바르베뜨 까페에서 열심히
떠벌리고 있는 다른 자습감독 교사들도 모두들 그런 파이프를 하나씩 물고
있었다.
뚱뚱보 셀리에르 씨가 내게 말했다.
"음 친구, 보시다시피 자습감독 선생을 하다 보면 이렇게 즐거운 시간도 갖게
되지요. 말하자면 싸르랑드는 당신의 초임지로는 안성맞춤이라는 얘기요. 우선
바르베뜨 까페의 압셍뜨 술맛은 아주 일품이거든. 게다가 저 감옥도 과히 나쁘진
않을 거요."
교사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은어로 감옥이란 학교를 이르는 말인가 보았다.
"당신은 하급반을 맡게 될 것입니다. 엄하게 다뤄야 해요. 내가 그놈들을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는지 보셨어야 하는 건데! 교장은 나쁜 사람은 아니오. 다른
동료 교사들도 다들 좋은 사람들이고, 다만 그 노파와 비오 영감만은...."
"노파라니요?"
내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 곧 다 알게 될 거요. 큼지막한 안경을 걸친 그 노파는 밤이고 낮이고 간에
상관하지 않고 학교를 어슬렁거리고 다니지. 교장선생네 아주머닌데 학교의
회계일을 도맡아 일하고 있소. 아! 하여간 지독하게 고약한 할멈이야!"
셀리에르 씨가 인상 착의를 설명해 주자 전날 밤 복도에서 만난 마귀할멈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열두 번도 넘게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고 '그럼 그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는요?'하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난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바르베뜨 까페에서 검은 눈동자의 매혹적인
아가씨를 들먹인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동안 술이 몇 순배 돌았고, 다시 잔들이 찰랑찰랑 채워졌으며, 건배를
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오! 하고 감탄을 연발하거나 아! 하는 소리를 질러 댔다.
당구 큐대를 공중으로 던지고 서로 떠밀고, 잡아당기고, 웃고, 욕설을 퍼붓고,
귓속말을 하고... 온통 난장판이었다. 술을 몇 잔 들이킨 나도 차츰차츰 대담해져
갔다. 까페 구석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술잔을 손에 든 채 그들에게
질세라 큰소리로 떠벌리며 여기저기 망아지처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때쯤 되자 하사관들은 나의 친구가 돼 있었다. 뻔뻔스럽게도 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우리 집은 대단히 부자인데 젊은 혈기에 그만 철없는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났다고 떠벌려 댔다. 그래서 먹고 살려고 원하지도
않는 자습감독 교사가 됐지만 학교에 오래 남을 생각은 전연 없다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지껄였다. 술기운에 취해서 나는 내가 굉장한 부자집 아들이라고
거짓말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아! 그순간 리용에 있는 가족들이 그 황당한 거짓말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지만 인간이란 가련한 존재여서 바르베뜨 까페에 있는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듯 내가 가난해서 선생질을 하는 게 아니라 방탕한 기질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괴짜 청년이라고 생각하고는 모두 나를 호감어린 눈길로 바라보기까지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하사관들까지도 감히 나한테 말을 걸려 하지 않았다. 어디
그것뿐인가! 술자리가 끝날 시간이 되자 전날 밤에 친구가 되었던 펜싱 교사
로제가 일어나더니 다니엘 에세뜨를 위해 건배를 하자고 모두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우쭐했었는지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를 위해 건배하고 나서 우린 술좌석을 털고 일어났다. 그때 시계는 9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이제 곧 수업이 시작되며 우리는 학교로 돌아가야만
했다.
비오 씨가 정문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이별주에 취해 비틀거리는 뚱보 셀리에르 씨에게 그가 말했다.
"셀리에르 씨, 마지막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자습실로 들어가도록 하세요.
학생들이 교실에 다 들어가면 교장선생님과 내가 새로 오신 선생님을 학생들에게
소개하지요."
잠시 후에 나는 교장선생님과 비오 씨의 뒤를 따라 엄숙한 표정으로 자습실로
들어갔다.
모두들 의자를 덜컹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장선생님이 약간 길고 지루하기는 하지만 위엄 있게 나를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그러고 나서 교장선생님은 교실을 나갔고, 이별주에 취해서 고주망태가
된 뚱보 셀리에르 씨도 그 뒤를 따라 비틀비틀 걸어 나갔다. 비오 씨만은
마지막까지 남아 교단에 서 있었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하고 울리는 열쇠꾸러미야말로 그 어떤
말보다 가장 무섭고 위협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모두들 책상 뚜껑
밑에다 머리를 처박았고, 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며 서 있었다.
드디어 그 무서운 열쇠소리가 사라져 버리자 장난기어린 수많은 얼굴들이 책상
뚜껑밑에서 하나씩 고개를 들며 나타났다. 어떤 아이들은 펜 끝에 달린 깃털을
입술에 갖다 대고 빈정거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어떤 아이들은 무척
놀란 듯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그마한 눈들을 반짝이며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후 교실 안은 앞, 뒤, 옆 책상으로 계속
쑥덕거림이 이어지며 술렁대기 시작했다.
약간 당황한 나는 천천히 교단 위로 올라섰다. 매서운 눈초리로 교실을 한번
쭉 휘들러보고는 위엄을 갖추려고 애쓰면서 힘껏 목청을 돋우고 책상 위를 세게
두 번 내려쳤다.
"공부합시다, 여러분! 공부합시다.!"
나의 자습감독 교사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까치머리 방방
내가 맡고 있던 하급반 아이들은 모두가 착했다. 그애들은 다른 반 아이들과는
달리 말썽을 부려 내 속을 썩이거나 마음을 아프게 한 적도 없었다. 나 또한
그러한 그들을 몹시 좋아하여 모든 애정을 다 쏟았다. 그들은 아직 중학생 티가
배지 않아 앳된 개구장이들처럼 보였다. 장난기어린 그들의 눈은 그들의 깨끗한
영혼을 송두리째 읽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맑았다.
내가 그들에게 벌을 준 적은 없었다. 벌을 줘서 뭐 하나? 새들을 벌 주는 법도
있나? 그들이 너무 시끄럽게 짹짹거리면 난 그냥 이렇게 소리치기만 하면 되었다.
"조용히 해!"
그러면 나의 새장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비록 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또다시 시끌벅적댄다 해도 말이다.
하급반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는 열한 살이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열 살도
안 된 올망졸망한 꼬마들이었다. 그런데 그 뚱뚱보 셀리에르 씨는 어린애들이란
호되게 다그치며 엄하게 다뤄야만 말을 듣는다고 으시대며 충고하듯 말했었다.
나는 그들을 엄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늘
친절하게 대해 주려고 애썼을 뿐이었다.
이따금씩 그들이 얌전하게 굴면 그 대가로 난 얘기를 해주곤 했다. 이야기...
라는 말만 해도 그들은 열광했다. 잽싸게 노트와 책을 덮어 버리고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는데 그러면 교실 안은 대번에 소란스러워졌다. 잉크병과
자, 펜대 등 온갖 잡동사니들은 책상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런 다음 책상
위에 팔짱을 끼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재미있어 할 만한 이야기를 대여섯 가지나 지어 냈다. '매미의 데뷔'
'토끼 장의 불행'등.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도 라 퐁텐느 영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가였다. 그래서 내가 아이들에게 들려 준 이야기는 그의 우화를
약간 바꿔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것에 불과했다. 나는 기분내키는 대로 내
자신의 얘기를 가미시켜 말해 주곤 했는데 나처럼 밥벌이를 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불쌍한 귀뚜라미나 자끄 형처럼 늘 훌쩍거리며 딱지치기하는 무당벌레들이
등장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아이들은 얘기에 푹 빠져 울고 웃고 하며
즐거워했다. 나 또한 얘기에 취해서 그들과 함께 감동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큰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비오 씨가 우리들이 이야기에
재미들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그러한 즐거움을
더이상 지속시킬 수 없었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쨍그렁거리는 무거운 열쇠꾸러미를 든 비오 씨가 수업이
정상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학교 안을 한 바퀴씩 돌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 토끼 장에 대한 이야기가 바야흐로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는데 비오 씨가 우리 자습실을 지나치다 무심코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오자 아이들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참 흥분해서 말하던 나도 순간 말을 그쳤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장도 당황하여 두려움에 떨쳐 큰 귀를 쫑끗 세우고 앞발을 공중에 쳐들고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능글능글 웃음기를 머금고 교단 위로 올라서던 비오 씨는 아이들의 책상 위에
종이 한 장 놓여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휘둥그래진 눈으로 오랫동안
교실 안을 휘둘러보았다. 할 말을 잃은 듯 그는 잠자코 있었지만 손에 든 열쇠는
심하게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잠시 후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고함을 쳤다.
"정말 놀라운 일이야. 이제 여기선 더이상 공부를 안하는군!"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열쇠꾸러미가 맞부딪치며 내는 끔찍한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이들은 요즘 들어 공부를 열심히 했읍니다... 그래서 그 상으로 짤막한
얘기를 하나 해주고 싶었어요."
비오 씨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희미한 미소를 띠며 몸을 숙여 한동안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던 그는 마지막으로 열쇠꾸러미를 몇 번 흔들더니 교실에서
휑하니 나가 버렸다.
드디어 오후 4시에 휴식시간이 되자 내게로 다가온 비오 씨는 여전히
능글거리는 웃음을 흘리면서 아무 말 없이 규율집의 12페이지를 펼쳐서 눈앞에
들이밀었다.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의무'라는 큰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더이상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그 이후로
다시는 이야기란 단어조차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며칠 동안 풀죽은 아이들을 위로할 길이 없어 나는 무척이나 고심했었다.
그들은 우리들의 토끼 장을 그리워했으며, 장을 그들에게 돌려 줄 수 없었던
까닭에 내 마음도 몹시 아팠다.
나는 그 장난꾸러기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 우린 결코 서로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다. 학교는 상급반, 중급반, 하급반의 세 반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 반은 운동장과 기숙사, 자습실 등을 따로 사용했다. 하급반 아이들은
당연히 나의 소유였다. 마치 내가 서른 다섯 명의 자식들을 거느리고 있는 아버지
같았다.
그 아이들을 제외하면 내겐 말을 걸 만한 친구라곤 한 명도 없었다. 비오 씨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휴식시간마다 다정하게 내 팔을 잡고는 규칙에 관해 충고를
해 주었지만 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도저히 그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열쇠꾸러미만 보면 겁부터 났다. 교장선생님을 만나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동료 교사들은 별종동물을 대하듯 나를 경멸했으며 얕잡아보았다.
열쇠꾸러미를 든 비오 씨가 내게 호감을 보이는 듯하자 동료들은 비오 씨만큼이나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첫 출근하던 날 하사관들을 만나본 이후로는
내가 바르베뜨 까페에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날 싸가지없는 놈이라 여기며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수위인 까싸뉴씨와 펜싱 교사인 로제까지도 날 따돌리는 듯하더니 이윽고 등을
돌려 버렸다. 특히 로제는 내게 깊은 악의를 품고 있는 듯했다. 어쩌다 곁을
지나갈 때면 그는 커다란 눈을 부라리고 자기 콧수염을 비비 꼬아대며
노려보았다. 마치 백 명도 넘는 아랍인들의 목을 시퍼렇게 날이 선 칼로
내려치려는 것처럼 무지막지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한 번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들으라는 듯이 자기는 염탐꾼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까싸뉴 씨에게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까싸뉴 씨의 표정에도 자기
역시 염탐꾼 같은 놈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염탐꾼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염탐꾼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비오 씨가 내게 다정하게 굴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쨌든 모든 사람들의 적의에 대해 대담하게 무시해 버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사층 꼭대기에 있는 고미다락방을 중급반 교사와 함께 썼다. 아이들이 정규수업을
받고 있는 시간중에는 그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같은 방 동료 교사는
바르베뜨 까페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 방은 내 독방이나 다름없었고
지구상의 유일한 내 안식처였다.
나는 항상 그 방에 들어가면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온통 잉크 자국이며,
깊게 파놓은 칼자국투성이인 낡은 책상 앞에다 의자 대신 트렁크를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앉아 공부하곤 했다.
때는 완연한 봄이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면 물이 올라 파릇파릇한
나뭇잎이 무성한 커다란 나무들과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밖은 조용했다. 어느 학생이 책을 읽은 단조로운 가락과 선생의 화난 목소리,
나뭇가지에 앉아 말다툼을 벌이는 참새들의 짹짹소리만 이따금씩 들려 올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어느결에 모든 소리들이 침묵 속에 잠겨들고 나면 학교는
마치 깊은 잠 속에 빠진 듯 적막에 싸였다.
나는 한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꿈을 꾸지 않았는데, 그것이야말로 잠을
푹 자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나는 쉴새없이 공부만 했다.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득 집어넣었다.
내가 그 무미건조한 공부에 한참 열중해 있을 때면 이따금씩 빨간수첩의
뮤즈여신이 찾아와 날 유혹하곤 했다.
'꼬마 철학자님! 당신의 빨간수첩에 있는 뮤즈여신이랍니다. 빨리 문을 열고
저를 맞아 주세요.'
나는 문을 열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했다.
'빨간수첩의 여신이여, 내 눈앞에서 멀리멀리 사라져다오! 지금은 무엇보다 열심히
그리스어를 공부해서 무난하게 학사 학위를 받아 정식교사로 임명되어야 해.
그래서 하루빨리 뿔뿔이 흩어진 우리 가족이 모여살 만한 멋진 집을 다시 지어야
한단 말이야.'
가족들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각박한 생활속에서도
흐뭇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누추하기만 한 방도 더욱 아늑하게 보였다. 아!
나는 그 골방에서 얼마나 멋진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거기서는 아무리
암기하기 힘든 것도 좔좔 외울 수 있을 정도로 공부가 잘 되었다. 그곳에 처박혀
지내는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이 내 자신을 격려하고 채찍질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즐거운 시간이 있으면 반드시 괴로운 시간도 찾아오기 마련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일요일과 목요일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로 나가야
했는데 그 야외수업은 내게는 형벌처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하급반 아이들을 인솔해서 싸르랑드에 2킬로쯤 떨어진 나즈막한
산봉우리의 발치에 푹신한 양탄자처럼 잔디가 펼쳐 있는 드넓은 곳으로
야외수업을 하러 갔다. 몇 그루의 아름드리 밤나무, 서너 채의 자그마한 노란색
별장, 짙푸른 녹음 속을 흘러가는 개울... 그곳은 마치 천국처럼 즐겁고 유쾌한
곳이었다. 세 반은 따로 떨어져 야외수업을 하게 되어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세
반의 학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적이 있었는데, 선생라곤 나 혼자뿐이었다.
다른 두 동료 교사는 상급반 학생들이 한턱낸다고 해서 근처 별장에 가버리고
없었다. 나는 한번도 초대받은 적이 없었고 남아서 학생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보살펴야만 했다. 그 아름다운 곳에서 힘겨운 일을 해야만 하다니, 생각만 해도
처량한 노릇이었다.
푸르른 풀밭 위나 밤나무 그늘 속에 드러누운 채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노래소리를 들으며 꽃향기에 취한다는 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하지만
감시하고, 소리지르고, 벌주는 짜증나는 일만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했으니,
학생들이 귀찮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 끔찍했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일은 잔디밭에서 학생들을 감시하는 일이 아니라 하급반
아이들을 이끌고 마을 안을 통과해 가는 일이었다. 중급반이나 상급반 학생들은
발을 썩 잘 맞추면서 마치 노련한 병사들처럼 구둣굽소리를 저벅저벅 내며
걸어갔다. 북소리에 발을 맞추며 훈련받는 병사들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하급반 학생들은 그런 폼나는 일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 그들은 열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제멋대로 서로 손을 맞잡고 종알거리면서 큰길을 따라 걸었다.
내가 아무리 목청껏 소리를 질러 대도 소용없었다.
"앞사람과 거리를 유지해서 걸어!"
하지만 그 아이들은 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딴청을 부리며 제멋대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래도 맨 앞에 앞장서 걸어가는 아이들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맨 앞에는
학생복 웃도리를 입은 얌전하고 키큰 아이들을 세워서 걷게 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흐지부지해지다가 끝줄에 가서는 아예 엉망진창이 되었다. 머리는
까치집처럼 헝클어지고, 손은 때국이 흐르듯 더러우며, 넝마 같은 반바지 차림의
조무라기들은 정말 미치광이 같은 모습이었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가끔씩 재치를 부릴 줄도 아는 비오 씨는 여전히 능글능글거리면서 그 모습을
보고 "거지떼들 같군"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끝줄은 한심한 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싸르랑드의 큰길에 나설 때의 내 절망스러운 기분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일요일에는 교회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지고 거리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그래서 우리가
행길을 들어설 때쯤이면 예배에 참석하러 가는 여자 기숙생들이나 장미빛 모자를
쓴 여성복 재봉사들, 진주빛 바지차림의 멋장이 남자들을 만나게 마련이었다. 나는
누더기처럼 옷을 걸친 우스꽝스런 몰골을 한 학생들을 데리고 그들을 헤집고
지나가야만 했다. 그때마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나와 함께 일주일에 두 번씩 야외수업을 하러 가야 했던 까치집 같은 머리의
개구장이들 중에 특히 지지리도 못생긴 데다가 보잘것없는 옷차림으로 날 항상
절망감에 빠뜨렸던 반 기숙사생 아이가 한 명 있었다.
그 아이는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우스꽝스런 모습의 난장이였다. 덥수룩하고
지저분한 머리에 남루한 옷을 걸치고 몸에선 더러운 시궁창 냄새를 풀풀 풍기며,
게다가 끔찍할 정도로 완전하게 다리가 휘어진 아이였다.
물론 그 아이도 학생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그의 이름은 그 지방 교육청의
학생명부에 실리지 못했다. 학교에서 마지못해 그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학교의
명예를 훼손시킨다는 이유로 그의 이름을 학생명부에 올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아이를 미워했다. 야외수업 때마다 그애가 마치 미운 오리 새끼모양
끝줄에서 뒤뚱거리며 쫓아오는 모습을 보노라면 나는 하급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 아이를 구두발로 힘껏 차서 내쫓아 버리고 싶은 난폭한 충동을 느끼곤 했다.
우리는 그 아이의 뒤뚱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에 절름발이라는 뜻의 방방이라는
별명으로 그를 부르곤 했다. 방방은 물론 부유한 집 자식은 아니었다. 그의
태도와 어투에서부터 그가 빈민가 출신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했는데 특히
싸르랑드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를 미루어 짐작해 보면 어렵잖게 그 점을
알아챌 수 있었다.
싸르랑드에서 사는 동네 꼬마들이 모두 방방의 친구였다.
우리가 야외수업하러 가는 날이면 구름처럼 떼거리로 모인 장난꾸러기들이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땅재주를 넘고, 너나 할 것 없이 이름을 불러 대며
손가락질하거나 그에게 먹다 버린 밤껍질을 집어 던지는 등 아우성을 치고 놀려
대면서 법석을 떨었다. 그걸 보면서 우리 하급반 아이들은 몹시 즐거워했지만
나는 도무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매주일마다 방방 때문에 발생하는 말썽들을
상세하게 적은 보고서를 교장선생님에게 올려 보았지만 불행히도 그 보고서는
매번 대답없는 메아리처럼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결국 날이 갈수록 더욱 꼴사납게
다리를 절름거리는 방방을 데리고 여전히 거리를 지나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일요일, 온 마을은 축제로 들떠 있었다. 그런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화장을 한 방방이 야외수업을 가겠다고 나타났다. 행여 꿈속에서라도
보게 될까 두려울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두 손은 새까맣고, 끈이 덜어져 나간
너덜대는 구두를 질질 끌면서 머리와 반바지에 온통 덕지덕지 진흙투성이를
해가지고 나타났다. 괴물 같았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 그날 방방을 학교로 보내기 전에 분명히 누군가가 그를
예쁘게 치장해 주었다는 것이 몸 구석구석에서 풍겨 나왔다.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짓이겨 발라서 빗질을 하였는지 머리카락들이 꼿꼿하게 서 있었으며, 목에
정성껏 맨 타이엔 어머니의 손길이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수많은 개울을 건너야 했다. 방방은 그 많은 개울을 엎어지고
뒹굴며 건너왔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웃으며 그가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 드는 걸 본
나는 두려움과 분노가 한꺼번에 왈칵 치밀어올랐다.
"꺼져 버려!"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방방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날 그는 자신이 아주
멋지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꺼져 버려! 꺼져 버리란 말이야!"
그러자 방방은 내 기세에 눌려 체념한 듯한 슬픈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그의 눈길은 애원하듯 끈질기게 내 눈초리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가차없이 그를 무시하고 하급반 아이들을 재촉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방은 길 한가운데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나는 오늘만큼은 그를 떨쳐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의 하늘은 날아오를 듯한 즐거운 웃음소리와 속삭임을 들으니 흥이 났다.
그런데 큰길을 빠져나오는 순간 아이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니
아이들의 행렬 맨 뒤에서 너댓걸음 떨어져서 방방이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맨 앞에 앞장서 가는 두 아이에게 말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절름발이 방방을 놀려먹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아이들은 힘껏 질주하기
시작했다.
방방이 따라오는지 보려고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며 달려가던 아이들이 이제는
아주 멀찌감치 떨어져 주먹만큼이나 작아 보이는 방방의 모습을 보며 배를 잡고
깔깔댔다. 방방은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큰길에서 과자와 레몬수 장사치들
사이를 헤집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난 방방은 어찌나 열심히 뛰어왔던지 우리와 거의 같은 시간에
잔디밭에 도착했다. 방방은 한꺼번에 몰려드는 피로 때문에 얼굴색이 백지창처럼
창백해져 있었으며, 가엾게도 다리를 몹시 끌며 걷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느닷없이 밀려오는 감동과 애처로움을 느꼈다. 잔인한 내
행동을 부끄러워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방방을 내 곁으로 불렀다.
방방은 터질 듯이 꽉 조이는 붉은색 체크 무늬가 현란하게 그려진 빛바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리용 중학교 시절에 입었던 셔츠였다.
나는 그 셔츠를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불쌍한 자식, 넌 부끄럽지도 않아? 네가 이렇게 즐기면서 학대하고 있는
아이는 바로 너, 꼬마란 말이야.'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일 듯이 가슴이 저며옴을 느끼며 나는 그 불우한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방방은 다리가 몹시 아픈지 내 곁에 와서는 땅 위에 주저앉았다. 난 그 아이
옆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를 건네 보았다. 오렌지도 한 개
사주었다. 발이라도 씻겨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날 이후로 방방은 내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 아이의 눈물겨운
사연도 알게 되었다.
방방은 자식을 교육시켜 보겠다는 일념 하에 온갖 희생을 마다 않는 한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하지만 슬프게도 방방은 학교 생활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아이였다. 아무리
학교를 다녀도 그에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가 처음 학교에 등교하던 날 한 선생이 그에게 글씨본을 주면서 "이걸 보고
한 획씩 그으면서 글시 연습을 하거라."하고 말했었다. 그래서 방방은 일 년
전부터 글씨 연습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맙소사! 방방의 글씨는 마구
엉킨 철조망처럼 괴발개발로 휘갈겨 놓은 것이었다. 도저히 글씨라고 할 수 없는
난해한 상형문자 같았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쏟질 않았다. 그는 특별히 어느 학급에 속하지도 않아
학교에 와서는 대개 문이 열려 있는 교실로 그냥 들어가곤 했다. 언젠가는
철학수업 시간중에 글씨 연습을 하고 있는 그를 발견한 적도 있었다. 방방은 참
이상한 아이였다.
나는 이따금씩 자습실에서 공책 위로 몸을 구부린 채 힘이 드는지 진땀을
흘리며 애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곤 했다. 혀를 내민 채 펜대를 꽉
움켜쥐고서는 마치 책상을 뚫어 버리겠다는 듯이 잇는 힘을 다해서 눌러 댔다.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그는 잉크를 새로 찍었으며, 한 줄이 끝나고 나면 혀를
집어넣고는 손을 비비며 한숨을 내몰아 쉬었다.
방방은 나와 친구가 된 이후로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한 페이지를 끝내고 나면 부랴부랴 교탁으로 기듯이 올라와서는 히죽 웃어 보일
뿐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걸작품을 내 앞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 아이를 다정하게 살짝 토닥거려 주며 말했다.
"참 잘 썼구나!"
사실 그건 끔찍히도 못 쓴 글씨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사기를 꺾고 싶지
않았다.
차츰 방방의 글씨는 나아져 갔으며 펜에서는 잉크가 덜 튕겼고 공책에도 잉크가
덜 묻기 시작했다. 이젠 그 아이에게 뭔가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운명이 우릴 갈라 놓고 말았다. 중급을 맡았던 교사가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교장선생님은 새로운 교사를
맞으려 하지 않았다. 턱수염이 난 수사학급 학생 하나가 하급반을 맡았고, 그 대신
나는 중급반을 맡게 되었다.
나는 그 일을 크나큰 불행으로 생각했다.
야외수업을 갈 때마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먼 발치에서나마 보아 왔는데 그들이랑 함께 계속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꽉 막히면서 답답해 왔다.
더군다나 나는 내가 무척이나 사랑했던 하급반 아이들과 헤어져야만 했다.
턱수염인 난 그 수사학급 학생이 그들을 어떻게 다룰지 눈에 보이듯 선했다.
방방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난 정말 불행을 타고난 인간이었다.
하급반 학생들도 나란 헤어지는 것을 나만큼이나 슬퍼했다. 마지막 수업시간을
끝내는 종이 울렸을 때 난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아이들은
충혈된 눈으로 내 주위를 어정대며 나를 한번 껴안고 싶어했고 어떤 아이들은
울먹이며 날 위로해 주기도 했다.
좀 떨어져 있던 방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줄곤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교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그는 얼굴이 홍당무같이 빨개져서는 내게
다가오더니 으젓한 몸짓으로 온 정성을 다해 쓴 멋진 글씨본을 내 손에 쥐어 주는
것이었다. 날 위해 쓴 글씨본을 말이다.
불쌍한 방방!
##사랑하는 사람들
그렇게 해서 나는 중급반의 자습갑독 교사가 되었다.
중급반 학생들은 통통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한 열두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산골 출신의 악동들로 약 오십 명쯤 되었다. 그들은 부모들은 대개 자식들이
자기들보다는 좀더 나은 경제적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교육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며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다. 수업료도 석 달에 백이십 프랑에
불과했다.
그들은 몹시 무례하게 행동했으며 교만하고 건방지기 이를 데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거친 세벤느 지방 사투리로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는 것도 그랬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변성기를 거치고 있어서 옆에서 듣고 있기란 정말 괴로운
노릇이었다. 동상에 걸려서 시퍼렇게 언 커다란 손, 병든 수탉 같은 목소리, 항상
흐리멍텅하기만 한 시선 등 그맘때의 중학생들의 모습 꼭 그대로였다. 그들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나를
경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습감독 교사인 나에게 적대감을 갖고 대했다. 내가
교단에 선 첫날부터 우리 사이엔 불꽃 튀는 전쟁이 벌어졌다. 그것은 휴전도 없고
끝도 없는 격렬한 전투였다.
매정하고 쌀쌀맞은 중급반 아이들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지금 나는 그들에게 어떤 앙심도 품고 있지 않다. 단지 그들과 보내야 했던
괴로운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뿐이다. 슬픔과 괴로움으로 뒤범벅된 그
시간들은 멀리멀리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내 손은 흥분과 감동으로 떨리고 있다. 마치 내가
아직도 그때 그곳에 있는 듯 한 생각이 든다.
어리고 말썽만 피우던 제자들도 이제 점잖은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수베롤은 세벤느 지방 어디에선가 공증인 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며, 그의 동생인
베이옹은 재판소 서기가 돼 있을 것이다. 그리고 루피는 약사가, 부장께는
수의사가 되었겠지.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 기반을 닦은 그들은 기름기가 끼어
불룩하게 배가 나오고 사랑하는 아내와 한두 명의 자식도 거느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내가 자습감독 교사였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더욱 근엄하게 보이려고 걸치고 다녔던 멋진 코안경도 그들은
더이상 기억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아무 걱정 없이 일상생활 속에 파묻혀 살다가 이따금씩 클럽이나 교회
또는 광장 같은 데서 자기들끼리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그 즐거웠던 중학시절을
회상하며 떠듬떠듬 얘기를 꺼내게 될 것이고 어쩌면 내 얘기를 한두 마디 내뱉게
될지도 모르겠다.
"야, 베이옹, 너 그 에세뜨라는 꼬마선생 생각나냐? 우리가 싸르랑드 중학교
다닐 때 자습감독하던 그치 말이야. 머리가 길고 머리가 파리하던 친구 생각나?
우리가 실컷 골려먹었지!"
이제는 신사가 된 그들이 아직도 낄낄거리며 오가는 말들엔 사실 옛날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잔뜩 배어 있으리라. 그들은 나를 실컷 골려 먹었던
학창시절을 아마도 잊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옛날 자습감독 교사였던 나 역시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 자습감독 교사 참 불쌍했어. 우리는 그치 때문에 정말 실컷
웃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 선생은 얼마나 또 얼마나 울었니. 그래, 많이도 울렸어!
하지만 울리면 왜 그리 재미있었는지 장난을 도저히 그치지 못하겠더라니깐.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참 안 됐어."
수난의 하루가 지나고 나면,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 나는 그들이 행여나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까 담요를 깨문 채 울곤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린 악동들에게 둘러싸여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려워하면서 잠시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사람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불공평한 짓을 하기 마련이다.
그 당시 나는 그들을 공연히 의심하고 벌을 주곤 했지만 그럴수록 도처에 더욱
많은 함정을 파놓고 그들은 여유를 부렸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조용히 마음놓고
식사 한번 제대로 할 수가 없었으며 잠도 잘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휴식시간중에도 '오! 하나님! 저 자식들은 날 골리려고 무슨 꿍꿍이짓을 하는
걸까?'하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해야 했으니 정말 끔찍한 나날이었다.
그렇다. 앞으로 백 년을 더 살고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기억이 희미해진다
해도 자습감독 교사 다니엘 에세뜨는 중급반 자습시간에 처음 들어갔던 그 음산한
날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고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하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옮겨 감으로써 내 인생에
새롭고 벅찬 또다른 계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가슴 깊이 묻어둔 그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를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에 두 번씩 휴식시간 때마다 중급반 운동장 구석에 있는 이층 건물의
창문을 통해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 아가씨를 멀리서나마 바라 볼
수 있었다. 흑진주처럼 빛나는 그녀의 눈은 더욱 커진 듯했다. 그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무릎 위에 바느질감을 올려놓고는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손을 늘려 댔다. 그녀는 온종일 오로지 바느질만을 해대면서도 조금도
싫증이 나지 않는 듯 그녀의 손놀림과 표정은 언제나 경쾌해 보였다. 잠망경 같은
안경을 쓴 섬뜩하게 생긴 마귀할멈은 고아원에서 그녀를 돈을 주고 데려와 잠시도
놀리지 않고 오직 바느질만 시켰다. 그녀는 일년 내내 쉴새없이 바느질만 했다.
그 옆에는 안경잡이 마귀할멈이 물레에서 연신 실을 뽑아 내면서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감시하며 앉아 있었다.
휴식시간만 되면 나는 이층 창문을 우두커니 올려다보며 슬픈 검은 눈동자
아가씨에 대한 애틋한 생각에 잠기곤 했다. 매번 휴식시간은 너무도 짧게
느껴졌고 아가씨가 바느질하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그 축복받은 이층창문 아래서
일생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살아도 부족할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녀 역시 언제나
그곳에 와서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는 내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이따금씩
그녀는 바느질감에서 눈길을 들어 내 쪽으로 애절한 시선을 보내곤 했다. 그녀는
한번도 내게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많은 사연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당신은 정말 불쌍하시군요., 에세뜨 씨.'
'당신은 너무 애처로와 보여요, 검은 눈동자 아가씨.'
'저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안 계세요.'
'우리 가족들도 뿔뿔이 헤어져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사시는지도 모릅니다.'
'당신도 보셨겠지만, 안경잡이 마귀할멈은 정말 무서워요.'
'학생들은 날 몹시 괴롭힌답니다.'
'용기를 가지세요, 에세뜨 씨.'
'그래요, 당신의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만 보면 새로운 힘이 솟는 것 같아요.'
휴식시간은 너무도 짧아 우린 더이상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아쉬운 작별을
고해야만 했다.
나는 비오 씨가 열쇠꾸러미를 흔들어 대면서 나타날까 봐 늘 두려웠고, 그녀
역시 자신을 감시하는 마귀할멈이 두려워 늘 마음을 졸여야 했다. 서로 무언의
대화를 나누던 행복한 순간은 잠시였다. 그녀는 그 순간들을 떨쳐 버리고 재빨리
고개를 숙여 커다란 강철테 안경을 걸친 마귀할멈의 매서운 눈총을 받으며 다시
바느질을 시작해야 했다.
나의 소중한 검은 눈동자 아가씨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직접 만나 얘기해
보지는 못했다. 다만 서로의 시선 속에서 마음을 읽어 내며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 가엾은 아가씨....
그곳에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제르만느 신부님, 바로
그분이다.
제르만느 신부님은 철학 교사였다. 그는 괴짜로 통했는데, 학교 안의 모든
사람이, 심지어는 교장선생님이나 비오 씨까지도 그를 두려워했다. 그는 늘
단호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하는 과묵한 인물로서 누구에게나 반말을 했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신부복 자락을 펄럭거리며 바람이 일 정도로 성큼성큼
걸어다녔다. 그러면 그의 구두 뒤축에 달린 박차는 마치 수많은 용기병들이
대열을 따라 씩씩하게 행군하는 것처럼 쩡쩡 울리는 것이었다. 그는 키도 크고
어깨도 떡 벌어진 듬직한 체구였으며 나는 한동안 그가 굉장히 남자답게
잘생겼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가까이에서 그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사자와도 같이 기세등등한 위엄 있는 그의 얼굴엔 온통 천연두자국이 끔찍하게
박혀 있었고, 더군다나 온통 찢기우거나 칼에 긁혀 꿰맨 자국이 얼굴 전체를
일그려뜨려 아주 흉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영원히 저주받게 될
혁명가놈들의 우두머리인 미라보가 신부복을 입고 있는 듯했다.
옛날에는 교실로 사용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다 낡고 음침해 보이는 건물이
운동장 한쪽에 서 있었는데 신부님은 그 건물 끝에 있는 자그마한 방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우리 중급반의 못돼먹은 말썽꾸러기 망나니 두 녀석들이 바로 그의
동생들이었는데 그 둘을 제외하고는 신부님의 방에 들어가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밤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다 쓰러져 가는 그 음침한 건물에서 가느다랗고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바로 제르만느 신부님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램프 불빛이었다.
그리고 졸린 눈을 비비면서 아침 6시의 자습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노라면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램프의 불빛이 어스름한 여명의 희뿌연 안개
속을 뚫고 흘러나오는 것이 보이곤 했다. 제르만느 신부님은 그때까지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것일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방대한
철학서를 집필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그 이상한 신부님과 친분을 맺기 이전부터 나는 그에 대해 일종의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칼자국과 곰보가 끔찍하긴 했지만 윤곽이 뚜렷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용모에서 난 아주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다만 보통사람과
다른 그의 괴벽과 거친 성격에 관한 소문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감히 그에게
접근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일단 몰두하기만 하면
빠져나오지 못하고 열중하는 성격 때문에 나는 어느날 그의 방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철학사에 완전히 심취해 있었는데 아직 어린 나로서는 그 철학사
공부란 것이 힘겹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꽁디악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욕망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사실 꽁디악의 철학세계는 아주 천박하여 값어치없는 보석반지의
작은 알에도 다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협소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꼭
읽어 봐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철학사상은 보잘것없는 것으로서 사람들은
그를 사이비 철학자라고까지 불렀다. 하지만,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한번쯤 객기를
부려 보기 마련이고, 모든 인간사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삐딱한 생각을 가지며,
무엇이든 자기가 직접 뛰어들어 경험해 보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 또한 꽁디악의 철학세계를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난
기어이 꽁디악의 작품을 구해서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학교
도서관에는 그의 책이란 단 한 권도 없었고 싸르랑드 시립 도서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책을 구하지 못해 고심하던 중 나는 언젠가 그의 동생들로부터
제르만느 신부님의 방에는 2천 권도 넘는 장서가 구비되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생각나다. 그래서 나는 제르만느 신부님에게 부탁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가
가진 2천 권도 넘는 장서 중에서 분명히 꽁디악의 책도 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책을 읽고 싶어도 괴팍한 성격을 지닌 그 사람이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에 그를
찾아갈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다. 꽁디악의 작품을 그렇게 열렬히 원하지
않았더라면 감히 그 음침한 구석진 방에 올라갈 마음조차 먹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도 몇 번을 망설인
끝에야 그 음침한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고 드디어 문 앞에까지 도착했는데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잠시 망설이며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 나는
조심스럽게 살짝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그 무시무시한 제르만느 신부님은 다리를 떡 벌린 채 낮은 의자 위에 말타듯이
걸터앉아 책을 복 있었다. 칭칭 걷어 올린 신부복과 검정색 비단 양말 사이로
굵은 다리 근육이 툭 불러져 나와 있었고 그는 의자 등받이에 팔꿈치를 기댄 채
무슨 책인지 붉은 장정이 된 이절판 크기의 책을 읽으면서 조그마한 갈색 도자기
파이프를 피워대고 있었다.
그는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치켜들고 나를 보더니 의외라는 듯 물었다.
"아, 아니 자네가!... 그래 잘 지내고 있나? 그런데 왠 일로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 책으로 꽉 들어 차 학구적인 검소한 분위기가
배어 있는 방안, 말타듯 앉아 있는 그의 위엄있는 모습. 연신 연기를 뿜어 내고
있는 그 짧은 파이프,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겨우 용기를 내서 찾아온 이유를 말하고는 꽁디악의 책을 빌려 줄 수
있겠느냐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부탁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꽁디악이라! 꽁디악의 책을 읽고 싶단 말이지? 참 이상한 데 관심을 갖고 있군
그래. 그렇지 않은가? 적에 벽에 걸려 있는 저 멋진 파이프로 한번 피워 보게...
이 세상의 어떤 꽁디악보다도 그게 훨씬 더 낫다는 걸 금세 알게 될 걸세."
나는 얼굴을 붉히며 사양한다는 몸짓을 했다.
"싫은가?... 그렇다면 맘대로 하게나, 그건 자네 자유니까... 자네가 찾는
꽁디악은 왼쪽 세번째 책장에 있다네. 가져 가도 좋아. 빌려 주지. 찢거나 낙서는
하지 말게. 그런다면 내가 자네 귀를 잘라 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왼쪽 세번째 책장에서 꽁디악의 책을 집어들고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깨끗이
보고 갖다 드리겠다고 말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신부님이 나를 잡았다. 그러더니
그는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가 철학에 몰두해 있단 말이지?... 자넨 우연히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겠지?... 그 빌어먹을 철학, 순수한 체하는 그 철학이 나를 철학
선생으로 만들려 했었단 말이야. 하지만 뭘 가르친단 말인가? 완전한 무를...
그놈의 철학은 날 운명의 총무감독관이나 파이프 담배 연기 심사관으로 임명할
수도 있었어. 내가 비록 그놈에게 심취되어 있긴 했지만 말이야. 아! 정말 불쌍한
신세지! 밥벌이를 하려면 이따금씩 원치 않는 일도 해야 하는 게지... 자네도 그런
건 좀 알 텐데, 안 그런가?... 아, 얼굴을 붉힐 것까진 없네. 우리 불쌍한 꼬마
자습감독 선생, 난 자네가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 아이들이
자넬 몹시도 괴롭히고 못살게 군다는 것을 말이네."
여기까지 말하더니 제르만느 신부님은 갑자기 말을 중단했다. 그는 무엇엔가
매우 화난 듯 보였으며, 손톱에다 파이프를 대고는 사납게 탁탁 털어 내고 있었다.
그토록 존경했던 사람이 나의 운명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나는 목이 메일 정도로
감격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솟아나오는 닭똥 같은 눈물을 감추느라 꽁디악의
책으로 얼른 눈을 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자네한테 물어 볼 게 있었는데... 자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나?
자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네, 알겠나? 여보게,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게.
그렇지 않으면 자넨 곤경에서 절대로 헤어날 수가 없어... 난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을 덜기 위해선 오로지 세 가지 치료 방법밖엔 없다고 믿고 있지. 일과
기도와 그리고 파이프... 흙으로 빚어 구운 작은 파이프 말일세. 자네도 잘 기억해
두게... 철학자들은 믿지 않는 게 좋아. 그들은 자네를 절대로 위로해 주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난 그 정도는 아니니까 자넨 날 믿어도 좋을 걸세."
"전 당신을 믿고 있읍니다. 신부님!"
"그럼 됐네. 이젠 나가 주게. 피곤하군... 책이 필요하면 그냥 와서 가져가도
좋네. 방 열쇠는 문턱 위에 있고, 철학책은 왼쪽 세번째 책장에 꽂혀 있다네.
더이상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게... 그럼 잘 가게!"
그러고 나서 다시 아까처럼 책에 빠져들더니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가 나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모든 철학자들을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제르만느 신부님의 방을 마치 내 집처럼 드나들 수 있었으며 숱한
철학자들이 잠들어 있는 그 세번째 책장 앞에 서서 무아지경에 빠지곤 했었다.
내가 그 방에 갈 때는 대부분 신부님이 수업을 하실 시간이었기 때문에 방은 비어
있는 적이 많았다. 그 자그마한 파이프는 책상 위에 잔뜩 널려 잇는 책과 서류
사이에 놓여 있었다. 읽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작은 글씨가 빽빽히 적힌 수많은
서류들과 옆이 붉은색으로 칠해진 이절판 크기의 많은 책들 사이에서 그 파이프는
신부님의 손에서 오랜만에 벗어나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듯했다. 이따금씩
제르만느 신부님과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는 성큼성큼 걸어다니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신부님과 마주치면 나는 수줍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인사를 하곤 했다.
"안녕하셨어요, 신부님!"
그는 거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왼쪽 세번째 책장에서 철학책을
집어들고는 살그머니 발자국소리를 죽이며 방을 나왔다. 한 해가 다 지나가도록
우리는 스무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내 가슴 속 깊숙이에는 우리가 이미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기쁨과 믿음이 굳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대화를 나누건 안
나누건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음악반 학생들이 데생실에서 방학식 때 부를 폴카곡과
행진곡을 연습하는 소리가 하루도 빠짐없이 들려 왔다. 아이들은 그 폴카곡을
들으며 즐거운 방학이 빨리 오기를 고대하면서 재잘거렸고 자습시간이 되면
책상에서 미니 달력을 꺼내서 하루하루 날짜를 지워가며 손을 꼽아 보기도 했다.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다!"
학교 운동장에는 연단을 만들 판자들이 널려 있었고, 아이들은 대청소를 하느라
의자를 들어 내고 양탄자를 터는 등 온 학교가 들썩거리며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들떠서 공부도 집어치우고 자습감독 교사를
놀려 대는 장난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드디어 방학날이 되었다. 방학이 조금이라도 더 늦게 시작되었더라면 나는 아마
더이상은 견뎌 내지 못했을 것이다.
방학식은 중급반 학생들이 사용하는 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해를 가리기 위해
쳐놓은 알록달록한 천막, 벽에 둘러 쳐진 눈이 부시도록 하얀 휘장, 녹음으로
짙푸른 거목들에 꽂힌 갖가지 깃발들, 그리고 기수모, 경관모, 보병용 군모, 투구,
꽃으로 장식된 헝겊 모자, 예쁘게 수놓아진 오페라 모자, 옷이나 모자에 장식되어
있는 깃털, 리본, 술장식 등 그것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학교의 지체 높은
양반들은 운동장 정면에 설치된 연단 위에 있는 다홍색 소파에 위엄을 갖추고
앉아 있었다.
아! 그 연단 앞에 서 있던 나 자신이 얼마나 왜소하게 느껴지던지! 얼른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연단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우쭐해져서 연단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양반들은 평상시와는
다른 아주 점잖은 모습을 하고 근엄하게 보이려고 무척 애쓰는 것 같았다.
제르만느 신부님도 연단 위에 앉아 있었으나 그들과는 달랐다. 그는 안락의자에
눕듯이 앉아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옆사람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아마도 짙푸른 나뭇잎 사이로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뻐끔뻐끔 번져 가는
파이프 담배 연기를 상상하고 있으리라.
연단의 하단에는 트롬본과 오피클레이드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세 반 학생들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교사들은 줄 끝에 서 있었다.
학생과 교사 뒤편으로 학부형들이 붐볐는데, 중급반 교사 한 명이 부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며 소리치고 있었다.
"잠깐 실례합니다. 지나가도 될까요? 잠깐 지나가겠읍니다!"
그때 비오 씨가 운동장 한쪽 끝에서 끝으로 서둘러 달려갔는데, 인파 속으로
사라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열쇠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왔다.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식이 시작되었다. 날씨가 무더웠고, 천막 밑은 바람 한점 통하지 않아 마치 찜통
같았다. 천막 밑에 앉아 있는 뚱뚱한 부인들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대머리 신사들은 진홍색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 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 양탄자, 깃발, 의자 등 방학식이 거행되는 운동장 안은
온통 붉은색으로 가득 찼다. 세 사람이 차례로 연설을 했고 운동장을 꽉 메운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 박수를 쳐 댔다. 하지만 나는 연설을 듣지 않았다. 이층
창문 뒷편에 앉아 언제나처럼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 아가씨를 바라보며
정신은 온통 그쪽으로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 기분 나쁜 안경잡이 마귀할멈은
불쌍한 검은 눈동자 아가씨를 오늘 같은 날도 놔두지 않고 부려먹고 있다니!
분노가 치밀며 가슴이 메어지듯 연민의 정을 느꼈다.
상급반과 중급반이 끝나고 하급반의 차례가 되어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받을
학생의 이름이 호명되고 나자 악대가 개선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모인
사람들은 제각기 일어나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운동장은 금세 난장판이 되었다.
선생들은 연단에서 내려오고, 학생들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가족들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발견하고는 서로 불러 대며 달려가서 껴안고 기뻐했다.
"여기다. 여기. 이리로 오렴!"
상을 받은 아이들의 여동생들은 오빠의 월계관을 쓰고서 보란 듯이 뽐내며
걸어다녔다. 비단옷이 의자를 스치면서 살랑살랑소리를 냈다. 나는 나무 뒤에
꼼짝 않고 서서 예쁜 부인네들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낡아 빠진
옷들이 그들 앞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게 했으며, 나 자신이 부끄럽고 왜소하다고
생각되어 아무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운동장을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교장선생님과 비오 씨는
교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아이들을 쓰다듬거나 머리를 깊이 숙이며 학부형들에게
인사를 했다.
교장선생님은 간사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즐겁고 알찬 방학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머니께서 수고 좀 하셔야겠네요.
잘 부탁합니다."
비오 씨도 열쇠를 흔들어 대며 맞장구를 쳤다.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자, 다음 학기에 보자꾸나. 잘 지내거라!"
아이들은 건성으로 포옹을 하고 단숨에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들은 자기 가문의 문장이 박힌 멎진 자동차에 올라탔고, 부인네들과
여동생들은 갈아입을 옷이 든 트렁크를 차 안에 챙겨 넣었다.
그들은 이제 제각기 별장으로 갈 것이다. 드넓은 동산과 잔디밭, 아카시아
나무에 매달아 놓은 그네, 그리고 예쁜 새들이 지지배배거리며 사이좋게 살고
있는 새장이며, 백조가 노니는 연못, 저녁때면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더위를
식히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곤하던 테라스를 생각하며 그들은 서둘러 떠나가고
있었다.
아이들과 부인네들의 얼굴에서 즐거운 방학을 보낸다는 설레임들이 가득 풍겨
나왔다.
어떤 아이들은 가족석이 있는 이륜마차로 기어 올라 가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는 흰 모자를 쓴 예쁜 소녀들 옆에 앉았다. 목에 금목걸이를 두른
중유 가정의 한 여인네가 마차를 몰았다.
"전속력을 내, 마뛰린느! 우린 이제 농장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들은 그곳에서 버터빵을 만들어 먹고, 사향포도주를 마시고 종일 새 사냥을
다니거나, 구수한 내음의 건초더미 속에서 뒹굴며 휴가를 보낼 것이다.
행복한 아이들! 그들은 가버렸다. 그들은 모두들 떠나갔다. 가족과 함께 즐거운
방학을 보내기 위해....
아! 나도 떠날 수만 있다면....
##괴롭고 긴 나날
아이들은 모두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고 이제 학교는 텅 비었다. 모두들 떠나
버렸다. 고양이만큼 큰 쥐떼들이 마치 기병대가 행군을 하는 것처럼 밤이건
낮이건 온 기숙사 안을 설치고 돌아다녔다. 아이들의 잉크병은 잉크가 말라 붙은
채 책상 속에 처박혀 있었다. 운동장의 나뭇가지에선 참새떼들이 짹짹거리며
축제를 벌였다. 참새들은 학교의 주인이나 된 듯 주교와 군수의 대저택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모조리 초대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짹짹거렸다.
나는 지붕 밑에 있는 다락방에서 그 짹짹거림을 참아가며 공부했다. 참새떼와
나만이 남아 그 큰 학교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내가 방학 동안 그
방을 써도 된다고 허락하며 대단한 자비를 베푼다는 듯이 교만을 떨었었다.
어쨌든 나는 홀로 남아 그 방에서 그리스 철학을 죽어라 파고 있었다. 하지만
천정이 너무 낮은 그 다락방은 내리쬐는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 숨이 막힐 정도로
푹푹 쪘고 덧문도 없는 창문으론 횃불을 들이대듯 햇빛이 들어와서는 방안
구석구석에 불을 질렀다. 대들보에 발라 놓은 석회가 와지끈소리를 내며 깨지더니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더위에 지쳐 기력을 잃은 커다란 왕파리들이 창문에 착
달라붙어서 꼼짝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숨이 막혀 헉헉거리며 잠을 쫓느라
갖은 애를 다 썼다. 머리는 천근이나 되는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눈꺼풀은
바들바들 떨렸다.
'공부를 해라, 다니엘 에세뜨! 다시 집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아무리 다짐하고 애를 써 보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책 속의 글씨들이 눈앞에서
춤을 추더니만 책이, 책상이, 방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참으려고 애써도
자꾸만 밀려오는 졸음을 쫓기 위해 나는 일어나서 몇 걸음 걸어 보았다. 문
앞까지 갔을 때 다리가 휘청휘청하더니 중심을 잃고 바위덩어리모양 방바닥에 쿵
쓰러졌다. 조수같이 졸음이 밀려 왔다. 견딜 수가 없었다.
참새들의 짹짹거림과 매미들의 노래소리가 아련히 들려 왔다. 하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플라타너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비늘처럼 부숴져 내렸다. 대기는
들끓고 아른아른 아지랑이가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다니엘! 다니엘!"
그 목소리는 옛날엔 매일 들을 수 있었던 정다운 목소리, "자끄, 이 당나귀같이
멍청한 놈아!"라고 소리치던 그 목소리였다.
그는 더욱 세게 문을 두드렸다.
"다니엘, 니 애비다. 빨리 문 열어라."
나는 반가움에 겨워 얼른 대답을 하고 빨리 문을 열고 싶었다. 하지만
일어서려고 아무리 팔꿈치를 딛고 안간힘을 써도 머리가 너무나 무거워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얼마나 잤을까? 깨어 보니 주위는 온통 그늘을 드리우는 푸른색 커튼이
둘러쳐져 있었고 나는 순백색 침대에 몸을 쭉 뻗은 채 길게 누워 있었다. 커튼
사이로 한 줄기의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방안은 정적에 감싸여 무척
조용했다. 어디선가 벽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와 수저가 그릇에 부딪쳐
쨍그렁하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 왔다.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머리도 무겁지 않고 마음은 착 가라앉아 아주
평온했다.
한쪽 커튼을 살짝 들치며 누군가 들어왔다.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입에는
미소를 띠고, 손에 잔 하나를 든 그분은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다가와서 내게
몸을 숙이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했다.
"아... 아버지세요? 정말 아버지시죠? 맞죠?"
"그래, 그렇단다, 다니엘. 맞아, 우리 귀여운 아가, 바로 나란다."
"아니, 어떻게... 그리고 여긴 어디죠?"
"의무실이야. 벌써 여드레나 됐다... 이젠 다 나았어. 그동안 다니엘, 넌 무척
아팠단다. 한번도 깨어나지 않고 고열에 시달리며 신음소리를 내고...."
"아니, 꿈을 꾼 것 같아요. 전 전혀 기억이 없는데요? 그런데 아버지, 아버진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아! 아버지 저를 안아 주세요! 아버지를 보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아버지는 나를 껴안아 주었다.
"자! 이젠 그만 얘기하려무나! 자, 착하지? 의사선생님이 네가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
내가 말하지 못하도록 이르고서, 아버지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 자세히 말해 주었다.
"여드레 전에 지금 다니고 있는 포도주 회사에서 세벤느 지방으로 출장을
가라고 하더구나.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넌 알 수 있을 거다. 사랑하는 너를
만나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얼마나 기쁘던지. 그래서 세벤느에 도착하자 말자
널 보려고 학교로 달려왔어... 네 이름을 마구 부르며 찾았지만 너는 보이지
않더구나. 그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네 방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어. 그런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은 없고 방문은 안으로 잠긴 채 열쇠도 안에 있는지
도저히 문을 열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네 방문을 발로
걷어찼단다. 들어가 보니 너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고 머리가 펄펄 끓으며 열이
대단히 심하더구나!... 얼마나 애처롭던지, 차마 볼 수가 없었어... 넌 닷새
동안이나 헛소리를 해댔어. 난 단 일 분도 네 곁을 떠나지 않고 너를
지켜보았는데 무슨 집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던가, 집을 다시 짓겠다던가
하는 소리를 계속하더구나. 도대체 무슨 집 말이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헛소리까지 하는 거냐, 응? 그리고 또 말이야. '열쇠 없어요? 자물쇠에
열쇠를 빼내요!'라고도 소리치더라. 비오 씨란 그 사람 때문이냐? 비오 씨, 맞지?
미오 씨? 그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그 사람은 날 학교에서 못 자게
하더라! 규정을 들먹여 가면서 말이야... 그래 그 규정이란 거 말이야. 내가 그
사람이 말하는 그 규정을 다 알아야 되냐? 그 몰상식한 유식쟁이는 내 코 밑에다
열쇠를 흔들어 대면 내가 겁을 먹으리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나는 그 인간한테
따끔한 맛을 보여 줬단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고 아주 정중하게 말이야!"
나는 아버지의 대담한 행동이 고소하면서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나 잠시 후
그 몸서리나는 비오 씨의 열쇠를 금방 잊어버렸다.
나는 마치 곁에 있는 어머니를 껴안으려는 듯 팔을 내밀며 물었다.
"어머니는요?"
"그렇게 이불을 차내고 그러면 아무 말도 안해 줄 테다! 자, 얌전하게 이불을
잘 덮어야지... 네 어머닌 잘 계셔. 지금도 바티스트 삼촌댁에 있어."
"자끄 형은요?"
"자끄? 자끄는 당나귀같이 멍청한 놈이야! 아니,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내가
자끄를 당나귀라고 불러 대는 건 순전히 내 습관일 뿐이다... 자끄는 아주 착한
아이지... 그렇게 이불을 끌어 내지 말라니까,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하지만
자끄의 그 버릇은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어딜 가나 질질 짜는 그 빌어먹을
버릇 말이야. 그러면서도 그앤 늘 자기 생활에 만족하고 있지... 그저 불러 주는
대로 받아쓰기만 하면 되는 거야... 썩 괜찮은 일자리야."
"그 불쌍한 자끄 형은 평생 동안 불러 주는 걸 받아쓰기만 해야 하는 무거운
벌을 받았군요!"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거리낌없이 웃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나를 따라서 껄껄
웃었다. 내게 제발 이불을 차내고 흐트리지 말라고 계속 투덜대면서 껄껄 웃었다.
아픈 것이 어쩌면 축복인지도 모른다. 그 지긋지긋한 찜통 같은 방을 벗어나
의무실에서 난 정말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는 한시도 떠나지 않고 내 곁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보살펴 주었고 이것저것 여러가지 얘기를 해주면서
꼬박 내 머리맡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아버지가 영원히 가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속으로 자꾸만 되뇌였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이 짙고 강할수록
더욱더 슬퍼졌다. 아버지는 여기에 회사일로 출장을 오신 것이며 그래서 세벤느
지방을 순회해야만 했고 내 곁을 떠나야만 했다.
아버지가 떠나고 나자 나는 적막한 의무실에 홀로 남게 되었다. 나는 의무실
창가에 있는 커다란 둥근 소파에 몸을 파묻고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 아침과
저녁에는 노란 빛이 감도는 얼굴의 까싸뉴 부인이 직접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
나는 오목한 접시에 든 스프를 마신 다음 닭 날개 뼈에서 고기를 발라먹고는
"고맙습니다, 부인!"이라고 간단히 뚝 잘라 말했다. 그뿐이었다. 노란빛이 감도는
얼굴로 보아 그 부인은 황달을 앓고 있다고 생각되었고 그래서 나는 그 부인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부인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나는 그 부인이 맘에
걸렸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는 책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평소처럼 아주 냉랭한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부인!"이라고 막 말하고 난 나는
"오늘은 좀 어떠세요. 다니엘 씨?"라고 묻는 다정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였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까싸뉴 부인이 아프기 때문에 자기가 부인의 일을 대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내가 건강을 회복하고 또 직접
마주 대할 수 있게 돼서 무척 기쁘다는 말을 덧붙이고는 저녁때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공손하게 방을 나갔다. 그날 저녁 그녀는 진짜로 다시 왔으며, 그 다음날
아침도, 그리고 그 다음 날 저녁에도 식사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내가 마치
이 세상을 모두 차지한 듯이 무척 기뻤다.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까싸뉴
부인이 황달로 무척 아프다는 것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각종 질병을
다 축복하고 싶었다. 만일 애당초 이 세상에 병이란 게 없었다면 나는 결코
그녀와 이렇게 단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 그 축복받은 의무실 창가의 둥그런 소파에 파묻혀 나는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가! 아침이 되면 마치 햇살을 받고 반짝이는 금가루처럼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였으며, 밤이 되면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선 어둠을 은은하게
밝혀 주는 달빛이나 초롱초롱한 별빛이 비춰나왔다. 나는 밤마다 그녀의 꿈을
꾸느라 잠을 설쳤다. 동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오기 시작하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내 비밀이야기를 머리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호감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그녀를 맞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곤 했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의무실에 들어오면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의 그런 침묵을 기이하게 생각하며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고 의무실 안을 서성거리면서 내 곁에 좀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방법들이 없을까 고민하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내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어
주기를 무척 바라는 듯했지만 소심한 나는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여전히 입을
곡 다물고 있었다.
이따금씩 나는 잔뜩 용기를 내서는 그녀에게 말을 붙이기도 했다.
"아가씨!"
금세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거리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와 미소를 보면 불행히도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져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상투적인 인삿말만을 할 수 있었을 뿐 내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그 숱한 얘기들은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저에게 이렇게 친절히 대해 주셔서 대단히 고마와하고 있어요. 오늘 아침
스프는 정말 맛있군요."
그러면 그녀는 실망한 듯 그녀의 검은 눈은 빛을 잃고 자그맣고 예쁘게
변하면서 불만의 빛을 나타냈다.
'아니, 겨우 그 말뿐이에요?'
그러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나면 나는 내 자신이 정말 한심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아! 내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을 해야지, 하고 말 거야.'
그렇지만 아무리 굳게 결심을 해도 그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여전히
똑같은 일만 되풀이되었다.
우리가 함께 마주 보고 서로에 대한 얘기를 속시원히 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먼저 말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그런 용기를 낼만한 위인이 아님을
자각한 나는 어쩔 수 없이 편지를 쓰기로 작정했다. 어느날 저녁, 나는 그녀에게
잉크와 종이를 가져다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이때까지 내가 쓴 어떤
편지보다도 중요한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틀림없이 내가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녀는 영리하고 또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순수한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잽싸게 잉크와 종이를 찾아서는 나에게
건네주고 웃음을 지으면서 서둘러 방을 나갔다.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쓰고 또 썼다. 그러나 온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었을 땐 내 소파 옆에는 꾸겨진 종이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을 뿐
그렇게도 쓰고 또 쓴 장문의 편지에는 겨우 세 마디밖에 쓰여 있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말들을 쓰고 또 써 보았지만 이 세 마디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이라 생각되었으며 그녀에게도 분명히 그러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드디어 그녀가 올 시간이 되었다. 나는 무척 흥분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즉시 떨지도 않고 침착하게 이 편지를 건네주리라 다짐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어오고 나서 이 방에서 벌어질 광경을 머리속에
한번 그려 보았다. 그녀는 문을 열고 방에 들어와서는 탁자 위에 스프와 닭
요리를 내려놓고 '안녕하세요, 다니엘 씨!...'하고 말하며 나를 쳐다보겠지. 그러면
나는 즉시 용감한 기사처럼 '친절하신 아가씨, 여기 이 정성이 담긴 편지를
당신에게 바칩니다.'라고 말하며 공손하게 그녀에게 편지를 건네주는 거야. 그러면
그녀는....
누군가가 복도를 사뿐사뿐 걸어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들었다. 방망이질하듯 가슴이 마구 뛰었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
대신에 그 안경잡이 마귀할멈이었다.
나는 감히 웬일이냐고 물어 볼 수조차도 없었다. 그저 맥이 탁 빠져 넋이 나간
채 아연실색해질 뿐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녀는 오지 않을까? 아니면 올 수가
없는 것일까? 궁금함으로 터질 듯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밤이 도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밤에도 그녀는 오지 않았으며, 그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날도,
영원히 그녀는 오지 않았다. 아니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위해 설탕을 훔쳤고 그 때문에 여기에서 쫓겨나 다시 고아원으로
돌려 보내졌다. 그녀는 어른이 될 때까지 4년 동안 고아원에 갇혀 있어야만 하게
되었다. 불쌍한 아가씨....
의무실의 아름다운 나날들과도 이제 안녕을 고해야만 했다.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는 떠나 버렸고, 설상가상으로 그 말썽꾸러기 망나니들이
꾸역꾸역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게는 두 가지 불행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것이었다.
나는 6주일 만에 처음으로 운동장에 내려갔다. 핼쓱하고 야위어 전 보다 더
작아진 모습으로....
학교는 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양탄자를 털고, 의자를 들어
올리고 걸레질을 하는 등 대청소를 하느라 복도는 흥건히 젖어 있었고 학교
전체가 술렁거렸다. 그리고 옛날처럼 똑같이 비오 씨의 열쇠가 사납게 설쳐 대기
시작했다. 아니 더 큰소리로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울려 댔다. 비오 씨는 방학
동안에도 쉬지 않고 자기가 만든 규칙에다 몇 개의 조항을 덧붙이는 한편
열쇠꾸러미에다가도 열쇠를 몇 개 더 달아 놓았다. 다만 나만이 그 꿈틀대는
학교의 술렁거림 속에서도 그저 얌전하고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학생들이 속속 도착했다. 부르릉! 부르릉! 달그락! 딸그락! 덜커덕! 방학식 때
봤던 이륜마차와 문장 달린 차들이 교문 앞에 다시 그 모습을 나타냈다. 출석을
불러 보니 안 나온 아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 자리는 새로 온 아이들로
메꿔졌다. 학급도 새로 편성되었다. 나는 다시 중급반을 맡게 되었는데 벌써부터
바짝 주눅이 들어 떨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 나는 이번 아이들은 저번 아이들보다
덜 심술궂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개학날, 예배당에서는 성가대의 합창소리가 드높이 울려퍼졌다. 성신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은 단추구멍에 자그마한 은빛 훈장이 달린 예복을
입고 있었고 그 뒤로는 교수 예복으로 단장한 교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공과목을 맡은 교사들은 흰색 담비 교수복을 입고 있었다. 다만 중급반
담임만이 색다르게 생긴 챙 없는 모자에 연한 색깔의 장갑까지 끼었다. 그걸
보고 비오 씨의 얼굴은 몹시 불만스러운 듯이 붉으락푸르락 경련을 일으켰다.
예배당 한구석에 학생들 사이에 끼어 앉은 나는 그 멋진 예복과 은빛 훈장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난 언제 정식 교사가 되나? 언제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모여 사는 우리 집을
다시 짓게 될까?'
나는 무척 서글퍼졌다. 우울하고 찌들리고 자신이 왜소하게만 느껴질 불행한
나날들이 얼마 동안이나 계속되어야 할까... 내 자신이 무척 불쌍한 놈이라고
생각되었다. 오르간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슬픔이 복받쳐오며 엉엉 울고
싶어졌다. 그 순간 나는 저쪽 성가대 한모퉁이에서 나를 보며 미소짓고 있는
초췌한 차림의 잘생긴 얼굴을 발견했다. 제르만느 신부님의 미소 띤 온화한 얼굴을
보자 내 마음은 편안해졌다. 오래간만에 제르만느 신부님을 다시 만나 보게 되니
생기가 돌면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성신미사가 있고 난 이틀 뒤 다시 새로운 의식이 거행되었다. 영세명 성인을
기념하는 본명첨례일이었다. 이날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래 왔듯이 모든
학생들은 냉동육과 리모산 포도주가 잔득 쌓인 풀밭에서 쌩 테오필 축제를
거행했다. 여느때처럼 이번에도 교장선생님은 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
조촐한 축제가 흡족한 결과를 낳도록 하기 위해 뭐하나 아끼지 않았다.
학교에는 전혀 누를 끼치지 않으면서 성심성의껏 준비했는데 그럴 때의 그는
무척 자비로운 사람처럼 보였으며 그 자신도 아주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동틀 무렵이 되자 시를 상징하는 깃발로 장식된 대형 합승마차들이 학생과
선생들을 가득 태우고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포도주 광주리와 음식 바구니를
가득 실은 두 대의 운송차가 그 뒤를 이었으며 맨 앞에 가고 있는 꽃마차에는 지체
높은 양반과 악대가 타고 있었다. 악사들이 오피클레이드를 힘차게 연주하기
시작하자 아름다운 노래소리가 채찍소리, 방울소리, 접시들이 양철 반합에 부딪는
소리 사이로 광장에 울려퍼졌다. 아직도 나이트캡을 쓰고 있는 싸르랑드 사람들이
모두들 창가로 몰려들어 축제행렬을 구경했다.
축제는 풀밭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학생들과 야외수업을 나가곤 하던
그 풀밭에 도착하자마자 풀밭 위에는 식탁보가 펼쳐졌고, 마치 애들처럼 그늘을
찾다가 제비꽃 위에 앉은 선생들을 보고는 아이들이 배꼽을 잡고 웃어 댔다. 파이
조각을 담은 접시가 돌려졌고, 병마개가 튀어올랐다. 흥분과 기쁨으로 눈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여기저기서 왁자지껄 웅성거리며 들뜬 분위기였다. 모두들
즐거워하는데 오직 나만은 불안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여러분, 나는 방금 누군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느 무명 시인의 시를 받았습니다.
핀다로스같이 훌륭한 서정시인인 비오 씨가 금년에는 호적수를 만난 것 같소.
나는 이 시를 재미있게 읽었읍니다만,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려야 할지...."
"좋아요, 좋아요... 읽으세요! 읽으세요!"
그러자 교장선생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시를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교장선생님과 교사들을 찬양하는 아주 훌륭한 시였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꽃을 바치듯 찬사를 보내는 내용이었다. 시인은 안경잡이 마귀할멈도
빼놓지 않고 그녀에게 '식당에서 일하는 천사'라고 찬사를 보냈는데, 그 표현은
아주 썩 잘 된 표현 같았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며 그 씨를 쓴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아우성을 쳐 댔다. 나는 마치 석류열매처럼 얼굴이 빨개져서 마지못해 머뭇머뭇
일어나서는 겸손하게 절을 했다. 모두들 감탄을 연발하며 환호를 했다. 나는 그날
축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교장선생님은 나를 껴안으려고 했으며 나이 든 선생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내 손을 꼭 잡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급반
담임 교사는 내 시를 신문에 실어야 한다고 하며 꼭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교장선생님에게 부탁했다. 불안감이 가시고 대단히 기분이 흡족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르만느 신부님과 비오 씨의 얼굴이 떠올랐는데 신부님이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고, 이 방면에 있어서만큼은
대등한 위치가 된 비오 씨의 열쇠도 사납게 쨍그렁거리는 것 같았다.
온통 시끌벅적거리며 흥분되어 있는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교장선생님은
손뼉을 치며 조용히 하라고 한 다음 말했다.
"자, 자, 여러분. 이제 비오 씨 차례입니다. 익살스런 뮤즈여신의 차례가
끝났으니 이제 근엄한 뮤주여신의 시를 들어 봅시다."
약속어음책처럼 두툼하게 제본되어 있는 수첩을 호주머니에서 꺼낸 비오 씨는
나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비오 씨의 작품은 학교 규율에 경의를 표하는 내용으로 로마시인 버질 풍의
목가적인 전원시였다. 학생인 메날크와 도릴라가 한 귀절이 끝날 때마다 다시
거기에 답하는 시를 읊었다. 메날크는 규정이 아주 잘 지켜지는 학교의 학생역을
했고, 도릴라는 규정이 전혀 지켜지지 않는 학교의 학생역을 했다. 메날크는
엄격한 규율을 지킬 때 느껴지는 책임감 있는 자유에 대해, 도릴라는 어리석은
자유의 보잘것없는 즐거움에 대해 읊었다.
결국 각본대로 도릴라가 졌고, 자기를 정복한 자의 손에 싸움의 성과물을
갖다바치면서 메날크와 함께 목소리를 합쳐 규율의 영광스러움을 찬양하는 환희의
노래를 부름으로써 시를 끝맺고 있었다.
시낭송은 모두 끝났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만이 흘렀다. 아이들은 시를 읊는
동안 접시를 들고 풀밭 끝으로 가서는 메날크와 도릴라가 뭐라고 떠들어 대건
상관없다는 듯 파이를 먹어 댔다. 비오 씨가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교사들은 비록 잘 참아 내긴 했지만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은 전혀
아닌지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비오 씨는 완전히 패배했다. 교장선생님이
그에게 위로를 하노라고 한마디했다.
"주제가 너무 딱딱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 딱딱한 주제도 아주 아름답게
표현했군요."
"저도 아주 아름다운 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마지못해 이렇게 뻔뻔스럽게 말했다. 나는 비오 씨의 참패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승리했다는 것에 대해서 겁이 나기 시작했다.
비겁한 패배자인 비오 씨는 위로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계속 쓰디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는 그날 하루종일, 박자도 안 맞는
악대의 반주에 맞춰 부르는 학생들의 노래소리에 어우러져 잠든 도시의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합승마차의 바퀴소리가 거리에 울려퍼질 때까지 내내 그러고만
있었다. 나는 내 라이벌의 열쇠뭉치가 쨍그렁거리며 투덜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시인 선생, 언젠가는 꼭 복수하고 말겠어!'
##끔찍한 풍문의 계절
쌩 테오필 축제와 함께 방학은 끝나 버렸다.
그 이후로는 우울한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사육제가 끝나는 '참회의 화요일'
다음날 같은 쓸쓸하고 허전한 분위기였다. 마지 못해 학교로 끌려 온 듯한
선생이나 학생들의 모습 속에 모든 의욕을 상실한 권태로운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두 달씩이나 푹 쉬고 났으니 그동안 몸에 배어 버린 나태한 습관을 떨쳐
버리고 이전과 같이 팽팽한 생활리듬을 되찾기란 몹시 힘든 일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태엽을 감지 않아 녹슬기 시작하는 벽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모든 일이
삐걱거리며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비오 씨가 설치고 다니며 게으름을
피우는 그들을 다그치는 바람에 학교는 서서히 기지개를 켜듯 질서를 잡아 가기
시작했다. 등교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운동장의 곁문이 열리면서
아이들이 나와선 병정개미떼처럼 어색한 걸음걸이로 둘씩 짝을 지어 나무 밑을
줄줄이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 수업을 끝내는 종소리가 땡! 땡! 울리면 아이들은
아침에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기상 종소리와 취침 종소리가 일정한 시각에
어김없이 울리면 모두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기계처럼 움직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아이들이나 선생들의 몸 구석구석엔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고치기 힘든 습관처럼 규칙이 배어들었다.
모범적인 싸르랑드 중학교에서 메날크 같은 학생들이 비오 씨의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규칙대로 그날그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보기에도 썩 훌륭했다.
다만 비오 씨의 그 그림에 오직 나만이 오점을 찍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중급반
아이들은 도무지 그런 규칙에 쉽게 길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산악지방에 있는
자기 집에서 뒹굴다가 방학 전보다 더 보기 흉한 몰골로 더욱 악랄하고
사나와져서 내게로 돌아왔다. 나 또한 긴 방학 동안 더욱 까다로운 성격의 인물로
변해 있었다. 병을 앓고 난 뒤로는 모든 게 짜증스러웠고 툭하면 성을 내는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고통스런 삶에 지쳐 버린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견뎌 낼 수 없었다. 방학 전만 해도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온순하기만 했었는데
새학기가 시작된 후에는 모든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엄격하게 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심술궂은 악동들을 굴복시켜 보고 싶은 충동을 강렬하게 느끼곤 했다.
아이들이 조금만 엉뚱한 짓을 하거나 삐딱하게 나가는 듯싶으면 감당하기 힘든
숙제를 내주거나 쉬는 시간에 교실에 남아 반성문을 쓰는 벌을 주곤 했다.
그러나 벌을 주어 그들이 내게 복종하도록 하려는 방법은 성공하지 못했다.
매번 그런 벌을 계속 남발하다 보니 아무런 효과도 거둘 수 없었고 마침내는
1797년의 아씨냐 지페만큼이나 가치가 떨어졌다. 그렇게 서로 무감각하게 지내던
어느날이었다. 교실 안에선 마치 내가 아이들에게 포위당한 듯한 낌새가 풍겨나고
있었다. 중급반 아이들은 내게 정면으로 들고 일어나 반란을 일으켰고 나는 그
폭동을 진압할 만한 무기를 더이상 갖고 있지 않았다. 아이들이 질러 대는 야유와
불평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교단 위에 서서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고함을
지르며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저 꼬마 선생을 거부하는 시위를 벌이자!... 다들 일어서라!... 이제 폭군은
물러나야 한다!... 이런 부당한 벌을 받으며 더이상 공부할순 없다!"
그러자 교단 위로 잉크병과 책들이 비오듯 쏟아졌고, 꼬깃꼬깃 구겨진 딱딱한
마분지 뭉치들이 교실 안을 온통 휩쓸었다. 그 녀석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마치 장글 속의 원숭이들처럼 괴성을 지르며 떼거리로 내게 달려들어 몸에
매달렸다. 부당하게 내려지는 벌에 대한 항의라고 고래고래 외치며 나를
마구잡이로 몰아붙였다.
이따금씩 생각다 못해 나는 무기력한 자신을 저주하며 비오 씨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쌩 테오필 축제 때의 그 쓰라린 패배 이후로 그 인간은 독한
앙심을 품고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가 곤경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보며
은근히 기뻐한다는 걸 나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가 손에 열쇠꾸러미를 든
채 부랴부랴 교실로 들어서면 교실은 마치 개구리가 들끓는 연못에 돌멩이 하나가
던져진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들은 순식간에 제자리에 돌아가서는 책에다 코를
처박고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면 교실 안은 파리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날아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비오 씨는 열쇠꾸러미를 흔들어
대면서 그 고요한 침묵 속을 잠시 여유 있게 이리저리 거닐며 아이들의 뒤통수를
하나씩 노려보았다. 그러고 나서는 빈정거리듯 경멸어린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싸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휑하니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다 내게 주어진 듯싶었다. 동료 교사들까지도 대놓고 나를
비웃었으며 교장선생님도 나와 우연히 마주칠 때면 말을 건네려고 쭈뼛대는 나를
냉담한 표정으로 잠시 쏘아볼 뿐 아무 대꾸도 없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내게
유감이 많은 비오 씨가 그들에게 농간을 부렸음이 분명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끄와랑 사건까지 터지는 바람에 그나마 지탱하고 있던 자습감독 교사로서의
권위와 자격마저 위태롭게 휘청댔다.
부끄와랑 사건은 틀림없이 그해의 가장 큰 사건으로 그 학교의 연감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싸르랑드 사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로 그 사건을
들먹일지도 모른다. 더욱 흥미있게 윤색되고 과장이 덧붙여져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을 게다. 그들처럼 즐거운 기분은 아닐지라도 나 역시 가슴에
응어리처럼 남은 그 끔찍한 사건의 내막을 모조리 털어놓아 홀가분해지고 싶다.
넓적하고 뭉툭한 발에 개구리처럼 툭 불거진 눈과 솥뚜껑 같은 손을 지닌
열다섯 살 된 부끄와랑은 뻔뻔스럽고 싸가지없는 녀석으로 중급반 운동장을 자기
집 정원마냥 휩쓸고 다니는 깡패였다. 그는 싸르랑드 중학교에 다니는 유일한
세벤느 지방 귀족이었다. 교장선생님은 그 아이가 다님으로 해서 그 학교가
귀족적인 냄새를 풍긴다고 생각하고는 그 아이를 깍듯이 대하며 무척 아꼈다.
하교에서는 그 아이를 '후작'이라고 불렀다. 모두들 그를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했다. 나 또한 알게 모르게 그런 전체적인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그
아이한테 말을 할 때는 될수록 신중을 기하며 조심했다. 나의 그러한 노력으로
얼마동안 우리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후작 녀석은 이따금씩 오만불손한 태도로 나를 쳐다보거나 말대꾸를 서슴지
않았다. 마치 귀족계급에서 온갖 권리를 부여하던 혁명 이전의 봉건시대로
되돌아간 것처럼 귀족계급이란 점을 내세워 거들먹거렸다. 나는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자식의 태도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척했지만 내심 강적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수업시간중에 그 깡패 같은 후작 녀석이 불손한 말로
대꾸를 하는 것이었다. 속이 끓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지만
나는 냉정해지려고 애쓰면서 그 녀석에게 말했다.
"부끄와랑 군, 책을 챙겨서 지금 당장 나가시오."
그것은 그 녀석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권위 있는 행동이었다. 그 녀석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멍청하게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순간 그 녀석의 태도가 나를 곤경에 빠뜨렸다는 것을 알아챘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가시오, 부끄와랑 군!"
나는 다시 한 번 명령했다.
삽시간에 교실 안에 불안감이 감돌았고 아이들은 근심스런 표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이들을 침묵시킨 것이었다.
나의 두번째 명령에 정신을 차린 후작 녀석은 느긋한 표정을 되찾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안 나가겠어요!"
감탄스런 수근거림이 온 교실 안에 퍼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는
교단에서 일어섰다.
"안 나가겠다는 거요?... 어디 두고 봅시다."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나는 교단을 내려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폭력을 사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그저 내 단호한
태도를 보여 줌으로써 그 녀석에게 겁을 주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교단에서 내려서는 걸 본 그 녀석이 가소롭다는 듯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계속
이죽거렸기 때문에 나는 그 녀석을 의자에서 끌어내려고 와락 멱살을 움켜잡게
되었다.
그 야비한 녀석은 웃도리 속에다 커다란 쇠자를 감추고 있었다. 내가 손을
들어올리는 순간 그 녀석이 내 팔을 쇠자로 힘껏 후려쳤다. 예기치 못한 일격에
고함을 내지르며 나는 아픈 팔을 움켜쥐고는 몸을 비틀어 댔다.
학생들은 교실이 떠나가도록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후작, 잘한다!"
아이들의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다가 순간적으로 나는 머리가 홱 돌아 버렸다.
단숨에 책상 위로 뛰어오른 나는 후작 녀석에게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녀석의 목덜미를 틀어 쥐고 발과 주먹, 이빨 등 하여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 녀석을 자리에서 끌어 낸 다음 교실 밖 운동장 한가운데로 밀쳐 내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내 힘이 이렇게 센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
사태가 너무 갑작스럽게 돌변해 버리자 아이들의 얼굴에선 핏기가 싹 가시고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잔뜩 겁을 집어 먹고는 오들오들 떨었다. 학교에서 가장
강력한 위치에 있는 부끄와랑이 난장이같이 생긴 자습감독 교사한테 꼼짝
못하다니 이건 놀랍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실추된 권위를 되찾았고, 후작
녀석은 위신을 잃어 우리의 위치는 완전히 역전된 것이었다.
내가 여전히 흥분되어 온몸을 떨면서 창백한 얼굴로 교단으로 올라가자 모든
학생들이 얼굴을 책상 위로 푹 숙였다. 완전히 기가 죽어 있는 꼴을 보니
아이들은 이제 나에게 한풀 꺾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교장선생님과 비오 씨는 이
사건을 어찌 생각할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결국 학생에게 손찌검을 하고 말았으니! 쫓겨나려고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감히 이런 행동을...!'
이것저것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얄미운 후작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 준 통쾌함과
아울러 공포와 초조감이 겹쳐 점점 불안해졌다. 이번에는 내가 두려워진
것이었다. 후작 녀석이 지금쯤 분명히 어디다 하소연하러 갔을 거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파랗게 질린 교장 선생님이 교실 문을 박차고
당장이라도 들이닥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자습시간이 끝날 때까지 나는 내내 마음을 졸이며 이제나 저제나 교장선생님이
들이닥칠까 조바심했지만 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되어 부끄와랑이 다른 아이들이랑 어울려서 웃고 뛰노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걸 보니 약간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무사히 하루가
지나가자 나는 그 녀석이 그 일에 대해 입을 다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괜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낼 필요가 없을 성싶어 그날 일은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불행히도 외출이 허용된 목요일이었다. 후작 녀석은 이슥한 밤이
되어도 끝내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며 그 긴 밤을
꼬박 새우고야 말았다.
다음날 첫번째 자습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부끄와랑의 빈 자리를 바라보면서
수근대기 시작했다. 나는 함부로 내색하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불안하고 초조하여 죽을 지경이었다.
아침 7시가 되어 막 자습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교실문이 느닷없이 드르륵
열렸다.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라 정신이 확 달아났다.
맨 앞에 교장선생님을 위시해서 비오 씨가 따라 들어오더니 곧이어 턱까지
단추를 채운 투박해 보이는 긴 외투에 20센티 정도의 말총 깃 넥타이를 늘어뜨린
키큰 노인이 차례로 들어왔다. 맨 뒤에 들어선 노인네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나는 부끄와랑의 아버지 드 부끄와랑 후작이라는 걸 즉각 알아차렸다. 그는 긴
콧수염을 신경질적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양반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교단에서 내려설
용기조차 내게는 없었다. 그들 역시 내게 인사하지 않았다. 교실 한가운데 버티고
선 세 사람은 나갈 때까지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시종 아이들만 휘둘러보며
더이상 할 말이 없을 때까지 떠벌여 댔다.
교장선생님이 자기 임무에 충실해야겠다는 열의로 먼저 포문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는 괴로운 , 아주 괴로운 임무를 수행하려고 여기 왔읍니다.
여러분의 선생님 한 분이 꽤 무거운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읍니다."
일단 입을 열어 비난을 쏟아붓기 시작한 그는 15분 동안이나 쉬지 않고 계속
나를 매도했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온 모든 말들은 왜곡된 거짓말이었다.
후작 녀석은 항상 품행이 단정한 모범생인데,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트집을
잡아서 학대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자습감독 교사로서의 의무를 망각해 버리고 애매한 학생만 다그치는
같잖은 선생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이따금씩 나는 변명을 하려고 애썼다.
"천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장선생님!"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들은 체도 않고 끝까지 날 공개 비난하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드 부끄와랑 후작이 뒤를 이었다. 그
노인네는 마치 검사가 논고를 하는 것처럼 지껄여 댔다. 그의 모습은 자기
자식밖에 모르는 불쌍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자기 아들을 내가 살해하기라도 한 듯한 태도였다. 아무런 방어태세도 갖추지
못한 불쌍한 나를 향해 그들은 마치... 마치 물소떼처럼 마구 덤벼들었다.
더이상은 도저히 형용할 수도 없이... 정말 치떨리는 일이었다. 후작 녀석은 아예
병석에 드러누웠으며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멈추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간호하고
있다고 했다.
'아! 만일 내가 어른이라면 그런 자식은 가만 두지 않을 텐데... 아직 내가
어리기 때문에 오히려 난폭한 선생에게 동정을 베풀어 용서해야만 하다니
서글퍼요.'
후작 녀석은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며 헛소리를 해대는 모양이었다. 드
부끄와랑 후작은 그런 아들이 몹시 애처로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며 앞으론
누가 됐건 자기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리면 그 녀석의 두 귀를 싹뚝 잘라
버리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외쳐 댔다.
귀를 틀어막고 싶은 그들의 연설이 계속되는 동안 학생들은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비오 씨의 열쇠꾸러미는 기쁨으로 쨍그렁거렸다. 분노로 얼굴이
창백해진 나는 교단에 선 채 그 모든 욕설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들이 결코
끝내 줄 것 같지 않은 모든 모욕을 감수해 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이를 악물고
대꾸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자칫 잘못하다가 한마디라도 대꾸하게 되면
이 학교에서 쫓겨날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렇게 한 시간 동안을 떠벌리고 나더니 이야기거리가 떨어졌는지 같은 말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다가 그들은 나가 버렸다. 그들이 나가자 교실은 온통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이들은
나를 맞대놓고 비웃었다. 부끄와랑 사건은 간당간당 지탱해 왔던 나의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정말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싸르랑드의 모든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크고 작은
모임이나 까페 등 어딜가나 그 사건에 대한 얘기가 난무했다. 누구보다도 그
사건에 관해 자기가 가장 정확하게 안다고 자부하면서 사람들은 머리칼이 곤두설
만큼 황당하게 풍선처럼 부풀려 낱낱이 묘사했다.
'그 자습감독 교사는 유령이나 식인귀임에 틀림없어. 우린 상상도 못할 교묘한
방법으로 잔인하게 어린아이를 고문한다지 뭐야....'
그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퍼져 갔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할 땐
나를 그저 '냉혈한'이라고 불렀다. 온통 부풀려지고 과장되어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무서운 인간으로 비춰졌다.
부끄와랑 녀석은 하루종일 침대에만 있는 게 지겨워지자 자기네 집 응접실의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침대 의자를 옮겨 놓으라고 시켜서는 거기서 내내 빈둥댔다.
그 응접실에는 여드레 동안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흥미로운
희생자야말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던 모든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문턱이 닳아 빠지도록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에게 찾아와 그 사건을 직접 듣고
싶어했으며, 그 비열한 녀석은 그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서 흥미진진하게
떠벌렸다. 그 녀석이 꾸며대는 거짓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부인네들은 부르르
치를 떨었고, 노처녀들은 그 녀석을 '불쌍한 천사!'라고 혀를 차며 슬그머니
사탕을 쥐어 주기도 했다. 큰 사건이 터지기만을 기다려 온 신문이 때마침 이
사건을 특종으로 다루어 인근의 종교학교와 비교해서 싸르랑드 중학교의
비인간적인 교육을 맹렬히 비난하는 기사를 실어 그 사건은 더욱 크게 확대되어
온 마을을 휩쓸었다.
신문과 거리거리에서 싸르랑드 중학교를 비난하는 소리가 드높아지자
교장선생님은 노발대발했다. 그가 나를 해고하지 않은 것은 오직 교육장이
보호해준 덕분이었다. 난 차라리 해고를 당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지도 몰랐다.
이젠 자습감독 교사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더이상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쩌다 입만 벙긋해도 그들은 자기도
부끄와랑처럼 아버지한테 일러바치겠다고 을러 대는 것이었다. 난 결국 그들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겐 부끄와랑 집안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그 늙은 후작이 불손한
태도로 나를 윽박지르던 당시의 광경을 떠올리면 분노로 귀까지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당한 모욕을 잊어버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있는 야외수업일이 되어 에베쉐 까페 앞을 지나갈 때마다 드
부끄와랑 후작은 모자를 벗은 채 손에 당구 큐대를 든 몇 명의 주둔군 장교들에
둘러싸여 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야유하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목소리가 들릴
만큼 학생들이 가까와지면 후작은 도전적인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며 큰소리로
외쳐 댔다.
"오늘은 괜찮냐, 부끄와랑?"
"네, 아버지!"
그 고약한 어린 녀석은 열 가운데서 태연하게 소리쳤다. 그러면 장교들과
학생들, 까페의 급사들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웃는 것이었다.
'오늘은 괜찮냐, 부끄와랑?'이라는 그 말은 내게는 너무나 끔찍한 형벌이었지만
그걸 피할 방법이 없었다. 풀밭에 가려면 어쩔 수 없이 에베쉐 까페 앞을
지나쳐야 했으며 그 늙은 후작은 단 한번도 야외수업 가는 날을 걸러 본 적이
없었다.
이따금씩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도전을 해보고 싶은 무모한 충동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내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그 충동을 억누르는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은 학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후작이 차고 다니는 파랗게 날이 선 긴 칼 때문이었다. 밑쪽이 굵고 끝이 뾰족한
괴상한 모양의 그 칼은 그가 경비대에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어 버린
무시무시한 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더이상 그들의 수모를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펜싱 교사인
로제를 찾아갔다. 나는 후작에게 결투를 신청해서 한번 겨뤄보겠다는 결심을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오랫동안 서로 얘기를 나눠 보지 못했던
로제는 처음으로 아주 신중하게 내 말을 듣는 듯했다. 그렇게 내 말을 모두 듣고
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입에 침을 튀기면서 내 두 손을 맞잡아 힘껏 쥐었다.
"다니엘 씨, 정말 훌륭한 결심을 하셨소. 당신 같은 사람은 결코 염탐꾼 노릇을
못하리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었읍니다. 당신은 왜 비오 씨한테 늘
쩔쩔맸읍니까? 앞으로 두고 보십시오. 모든 일은 잊혀 질 거요. 당신이 주도권을
잡게 될 겁니다. 이렇게 당신과 직접 상대해 보니 참 의젓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려. 이젠 당신이 복수할 차례요. 모욕을 당했다구요? 좋아요! 사죄를 받고
싶지요? 좋아요! 당신은 펜싱의 초보도 모르지요? 아뭏든 좋아요, 좋아! 그래도
좋다구요! 그 늙은 바보 녀석의 칼에 찔리지 않도록 내가 도와 주기를 당신이
바라는 거죠? 잘 됐어요! 연습장으로 갑시다. 여섯 달 만 연습하면 당신은 그
늙은이를 이길 수 있을 거요."
그 뛰어난 인물 로제가 열을 내가며 마치 내 결투를 떠맡으려는 듯한 기세에
나는 기쁨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일주일에 세 시간씩 그에게서
펜싱을 배우기로 합의를 보는 한편, 교습비는 특별히 따로 정했다. 사실
어이없게도 엄청난 교습비를 지불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내게서
사람들보다 두 배나 많은 교습비를 받았던 것이다. 펜싱을 배우는 데 필요한 모든
계약에 관해 얘기를 끝내고 로제는 정답게 내 팔짱을 꼈다.
"다니엘 씨, 오늘은 첫 수업을 하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하지만 바르베뜨 까페에
가서 계약을 조인할 수는 있어요. 갑시다! 자, 이제 어린애 같은 짓은 하지
마세요. 혹시 바르베뜨 까페에 가기가 겁나는 건 아닌가요?... 그러니까 가야 되는
겁니다. 제기랄! 유식한 체 그만하시고... 거기 가면 호탕하고 점잖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요! 그들이랑 함께 있으면 당신은 그 여자 같은 티를 벗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방탕의 늪 속으로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바르베뜨 까페에 갔다. 그곳은 여전히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고함소리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찬 담배 연기, 새빨간 바지를
입은 하사관들로 가득 차 있었다. 똑같은 모양의 보병 군모와 혁대가 모자걸이에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로제의 친구들은 열렬히 나를 환영했다. 로제의 말대로 그들은 고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나와 후작 사이에 있었던 일과 내가 내린 결정을 로제에게 듣고
나서는 그들은 한 명씩 내 손을 굳게 잡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훌륭해. 아주 훌륭한 결심이오."
나는 그들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해서 한턱 사겠다고 호기롭게 내뱉고는
펀치술을 한 병 시켜서 서로 돌려가며 내 승리를 위한 축배를 들었다. 술기가
오를수록 나는 학년 말쯤에는 드 부끄와랑 후작을 한 칼에 쓰러뜨려서 지금껏
참아 왔던 모든 수모와 모욕들을 깡그리 되돌려 줄 거라는 확신으로 들뜨고
있었다.
##신비 속의 쎄실리아
겨울이 어느덧 성큼 다가왔다. 세벤느 지방의 겨울은 온통 음울한 회색빛이었고,
건조한 데다가 끔찍하게 추웠다. 잎이 다 떨어져 버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이 꽝꽝 얼어 버린 운동장에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모습은 서글프게
보였다. 모두들 동이 트기 전에 기상을 했다. 날은 추웠다. 세면대에까지 얼음이
얼 정도였으니까. 선잠에 빠진 학생들은 한없이 늑장을 부렸다. 그들을 다
모으려면 수차례나 종을 울려야 했다.
"서둘러라, 제군들!"
선생들은 옷 속으로 매섭게 파고드는 추위를 조금쯤 덜어 보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움직여 댔다.
학생들은 그럭저럭 엉성하게 줄을 서서는 어둠침침한 넓은 계단을 걸어내려가
혹독한 삭풍이 휘몰아치는 길고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에게는 괴롭고 긴 겨울이었다.
나는 공부를 그만두고 말았다. 자습실에 있는 화력좋은 난로 곁에서 노곤해진
몸을 주체 못해 꾸벅꾸벅 졸기가 일쑤였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되어 버린
고미다락방은 너무나 추웠기 때문에 나는 수업시간중에는 바르베뜨 까페에
틀어박혀 있다가는 문을 닫을 때쯤 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늦은 저녁나절에
바로 그 까페에서 로제가 내게 펜싱을 가르쳐 주었다. 시간 관계상 펜싱연습실을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까페 한가운데서 펀치술을 마시면서 당구
큐대로 펜싱연습을 했다. 하사관들이 심판을 봐 주었다. 그들은 내가 아주 잘해
낼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우며 그 가증스런 드 부끄와랑 후작을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새 검술을 매일 하나씩 배우라고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압셍뜨술에 어떻게 단맛을 내는가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 그 대가로
난 그들이 당구를 칠 때 함께 어울리며 끝까지 점수를 계산해 주곤 했다.
그해 겨울은 내겐 참기 힘든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 우울한 겨울 어느날 아침의 일이었다. 추위를 피해 따뜻한 바르베뜨 까페
안에 뛰어들듯 들어섰다.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듯한 당구를 치는 요란한 소리와
사기 난로에서 나오는 코를 고는 듯한 소리가 한데 뒤섞여 문을 열자 더운 열기와
함께 한꺼번에 왈칵 밀려들었다. 나를 발견한 로제가 급히 다가와서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할 말이 있소, 다니엘 씨!"
그는 나의 팔을 잡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은밀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구석방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여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를 침통한 표정으로
내게 다 털어놓았다. 로제가 자기 가슴 속에 숨겨 놓은 비밀 이야기를 숨김없이
들려주자 나는 갑자기 그와 대등한 인물처럼 생각되어 다소 우쭐한 기분에
빠졌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 조금씩 성숙해져 점잖은 어른이 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펜싱 교사는 자신의 긴 사랑 얘기를 되도록이면 감동적으로 말하려고 애쓰는
듯했다. 호탕하게 생긴 펜싱 교사는 장소를 밝힐 수 없는 어떤 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 여인은 싸르랑드에서느 무척
고귀한 가문 출신으로 자신이 결코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본 격이지만 그녀를
몹시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여인은 고귀한 귀족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래서 편지를 써서 사랑을 고백해야겠는데 불행히도 펜싱
교사인 자신은 펜을 놀리는 일에는 그다지 능숙하지가 못하다고 어물거렸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바람난 쳐녀만 같아도 별문제가 없을 텐데 상대는 무척 높은
지위의 여자이므로 술좌석에서나 써먹는 스타일로는 어림없으니 그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침통해 하면서 늘어놓은 얘기의 뜻을 모두 알았다.
"무슨 말이지 알겠어요. 당신은 그 여자에게 보낼 점잖은 연애편지를 써줄 만한
사람으로 저를 생각한 거로군요."
펜싱 교사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바로 그 말이오."
"자아, 난 당신 편이오. 당신이 원할 때 시작하기로 합시다. 하지만 누군가가
써준 듯한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면 그 여자에 관해서 좀더 상세하게 말해
주셔야겠어요."
펜싱 선생은 몹시 경계를 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콧수염을 내 귀에
바짝 붙이고는 소곤소곤 말했다.
"파리 출신의 금발 여인이오. 마치 은은한 꽃향기를 풍기는 듯한 쎄실리아라는
여인이오."
그는 그 여인의 높은 지위 때문에 더이상 자세한 얘기를 해줄 수가 없노라고
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정도의 정보로도 충분했다. 바로 그 날, 저녁 자습시간
동안 나는 쎄실리아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그 금발 여인에게 내 첫 편지를 썼다.
이렇게 해서 나와 그 신비감에 감싸인 여인 사이에 기묘하고 설레이는 편지
왕래가 시작된 지 거의 한 달 가량이 흘러갔다. 한 달 동안 나는 하루에 평균 두
통씩 사랑의 열정이 가득 담긴 편지를 썼다. 그 편지들 중에는 마치 라마르틴느
델미르의 편지처럼 감미롭고 부드러운 안개가 깔린 듯이 모호한 내용도 있었으며,
미라보 드 소피의 편지처럼 열정적이고 사랑의 고통으로 울부짖는 듯한 내용도
있었다.
"오, 쎄실리아, 이따금씩 황량한 바위 위에서..."로 시작해서 "그래서 죽을 것만
같소... 당신의 사랑을 목말라하는 로제"로 끝나는 편지도 있었다. 이따금씩 이런
시를 써넣기도 했다.
오! 그대의 입술, 그대의 뜨거운 입술!
그 입술을 내게 주오! 내게 주오!
지금이니까 웃으면서 그 얘기를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엔, 맹세컨대 나는 전혀
웃지 않고 아주 심각하게 그 편지를 썼었다. 편지를 다 쓰면 나는 그걸 로제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하사관다운 멋진 필체로 그걸 베껴 쓰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련한 여인은 그 편지에 감동하여 자기도 사랑하고 있다는
답장을 보내왔는데 그때마다 그는 그걸 즉시 내게 가져왔고, 나는 그 내용에
의거하여 또다시 지난번보다 더 농도 짙게 사랑을 고백하는 긴 편지를 써보냈다.
날이 갈수록 난 은근히 연애편지 쓰는 일에 만족해 하며 꽤나 그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하얀 라일락이 풍기는 은은한 향기처럼 금발 여인은 한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멍청히 앉아서 그녀의 모습을 눈에 그리며 나날을 보내곤 했다.
편지 쓰는 일에 몰입하다 보면 나는 어느새 흥분해서 그 편지는 내 자신이
그녀에게 직접 써보내는 거라는 착각을 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내 개인적인
비밀스러운 사연까지도 써보냈는데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야비하고 졸렬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내 운명을 저주하는 말로 편지를 가득 메우기도
했다. 밤에도 낮에도 나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통스러웠다.
"오, 쎄실리아, 내가 얼마나 당신의 사랑을 갈구하는지 아신다면!"
이따금씩 로제가 내게 와서는 콧수염을 배배 비틀어 꼬면서 말했다.
"괴롭군! 괴로와! 그런 식으로 계속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은근히 그를 경멸하면서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열정과 우수로 가득찬 이 걸작을 쓴 사림이 바로 아둔해 보이는 빨간 콧수염의
뚱보라는 사실을 어떻게 그녀는 믿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어느날 펜싱 교사가 의기양양해서는 방금 받은 답장을 내게 가져왔다.
"오늘 저녁 9시에 군청 뒤에서 만나잡니다!"
내 감동적인 편지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기다란 콧수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드디어 그가 금발 여인을 만나 은밀하게 사랑의 행위에 취해 있을 그날
밤에 나는 골방에 처박혀 어수선한 꿈자리를 맞이 하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멋진
콧수염을 기른 내게 귀부인들이 군청 뒤에서 만나자고 몰려드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로제가 희희낙락한 얼굴로 나를 찾아와 달콤한 행복감에 젖도록 해준
지난 밤에 대해 쎄실리아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나는 파리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였던 지난 밤 꿈에서 깨어나 쓰디쓴 웃음을 지어야 했던
아침을 떠올렸다.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까닭모를 분노를 억누르며 '꿈결처럼 행복한
하룻밤을 보내도록 허락하신 천사여...'로 시작하는 감사의 편지를 썼다. 다행히도
편지를 써야 할 내 임무는 그날로 끝이 났다. 그 이후 나는 '아름다운 금발의
쎄실리아! 고귀하고 높으신 사랑하는 이여!' 어쩌구 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열정과
우수로 가득찬 편지를 써야 할 내 임무는 다시는 쓰지 않아도 되었다.
##어린 돈 주앙의 눈물
2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어 18일 아침이 밝았다. 일어나 보니 밤새도록 눈이
내렸는지 무릎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아침
자습시간과 첫 수업시간 사이의 휴식시간 동안 눈 쌓인 운동장으로 나가지 말고
강당에서 놀라고 했다. 강당 안은 마치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이 밖을 나가거나 말썽을 피우지 못하게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그 강당은 옛날 해군학교였을 당시에는 체육관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쇠창살이 쳐진 자그마한 창문이 수십 개 붙어 있었고, 사방 벽에는 변변한 장식품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썰렁하게 크기만 한 방이었다. 군데군데 못이 떨어져 나가
덜렁덜렁한 꺾쇠가 보였고, 사닥다리가 있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천정의 대들보에 매달린 커다란 쇠고리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강당 창문에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유리창에 코를 박고 밖을
내다보았다. 눈 치우는 사람들이 운동장을 뒤덮은 눈을 삽으로 퍼서 덤프차에
휙휙 던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무척 즐거운 표정으로 떠들어 댔다.
하지만 강당이 떠내려 갈 듯한 소란스런 아이들 뛰는 소리와 아우성 소리도 내
귀엔 전혀 들어 오지 않았다.
아이들과 떨어져 홀로 한구석에 자리잡은 나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편지 한
통을 읽고 있었다. 아마 그 순간 아이들이 체육관을 송두리째 부숴 버렸다
하더라도 나는 그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내 손에 들려져 눈물로
번지고 있는 편지는 자끄 형이 보낸 것이었다. 그 편지에는 파리 소인이 찍인
우표가 붙어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동생, 다니엘!
이 편지를 받고 아마 너는 몹시 놀라겠지. 전혀 뜻밖이지, 응? 난 2주일 전부터
파리에 와 있단다. 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몰래 리용을 떠나왔어. 일시적인
기분에 좌우된 행동이었지... 어쩔 수가 없었어. 특히 네가 떠난 이후로 난 그
끔찍한 도시에 있기가 너무 지겨웠어.
나는 39프랑과 미꾸 신부님이 내게 써 눈 대여섯 통의 소개장만 가지고 여기에
왔어. 신이 보호해 주신 덕분에 나는 한 늙은 후작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단다. 그분이 회고록을 출판하려 하는데 나는 그분이
불러 주는 대로 받아쓰기만 하면 돼. 그리고 한 달에 백 프랑씩 받기로 했어.
너도 알겠지만 대단한 액수는 아야. 하지만 그걸 아껴쓰면 가금 집에
얼마씩이라도 보내줄 수 있을 거다.
아! 사랑하는 다니엘, 파리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야, 네가 직접 봐야 하는 건데.
여긴 안개가 끼지 않는단다. 이따금씩 비가 오기는 하지만 그런 날조차도 햇살이
비치면서 부슬부슬 내리는 즐거운 비야. 넌 아직 한번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겠지? 그리고 나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됐단다! 난 이제 절대로 울지 않아. 아마
너는 믿지 못하겠지?
여기까지 읽고 났을 때 갑자기 창문을 뒤흔들며 귀청을 찢는 듯한 자동차
엔진소리가 울려 왔다. 자동차가 학교 정문 앞에서 멈추고 사람이 내리자
아이들은 입을 모아 목청껏 함성을 지르며 소리쳤다.
"군수님이다! 군수님이 오셨다!"
군수의 방문은 분명히 뭔가 특별한 일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 년에 한두
번 싸르랑드 중학교를 방문하곤 했는데 그의 방문이 있을 때마다 학교가 온통
난리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싸르랑드 군수의 방문으로 갑자기 바빠진 학교가
야단법석을 떠는 아이들에게조차도 나는 아무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 순간
만큼은 나에게는 자끄 형의 편지만이 전부였다. 신바람이 난 학생들이 자동차에서
내라는 군수를 보려고 창문 앞에서 서로 밀치고 곤두박질치고 있는 동안 나는
한구석으로 되돌아가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 착한 다니엘, 아버지는 지금 브르따뉴에서 회사를 위해 능금주 장사를
하고 계시단다. 내가 후작 비서로 일한다는 것을 아신 아버지는 후작 집에다가
능금주를 몇 통 들여놨으면 하고 바라셨지. 하지만 불행히도 후작은 아직까지도
포도주만, 그것도 스페인산 포도주만 마신단다. 그래서 난 그런 사실을 편지에
써서 아버지한테 보냈지. 그런데 그분이 뭐라고 답장을 써 보낸 줄 아니? '자끄,
넌 바보 같은 녀석이야!'라고 쓰신 거야. 하지만 상관없어.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아버지는 마음속 깊이 날 사랑하신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지금 혼자 계신다. 너도 어머니한테 편지 쓰도록 해. 너한테 아무
소식도 없다고 걱정하시더구나.
틀림없이 네가 기뻐할 소식을 빠뜨릴 뻔했구나. 난 라땡 구역에 방을 하나
얻었단다... 라땡 구역에 말이다! 생각 좀 해봐!... 내가 살고 있는 방은 소설책에
나오는 시인의 방처럼 자그마한 창문이 있고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면 계속
이어지는 지붕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침대는 크진 않지만 필요할 경우에는 우리
두 사람이 잘 수 있을 정도는 된단다. 방 한구석에는 책상이 있는데, 거기서 네가
시를 쓰면 좋을 것 같구나. 아! 네가 지금 너와 함께 있으면....
네가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지금이라도 당장 날 만나러 오고 싶어할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 역시 너랑 함께 있고 싶어. 언젠가는 오라는 연락을 보낼께.
그때까지는 늘 날 잊지 말고 사랑해 줘. 그리고 학교 일은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가끔씩 쉬기도 하렴. 병이 나면 큰일이니까.
네게 따뜻한 키스와 사랑을 함께 보내며.
네 형 자끄 씀.
자끄 형은 정말 훌륭했다. 형의 편지는 감미로운 아픔을 안겨 주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격한 감정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지난 몇 달 동안 방탕하게 보냈던 내 생활이 떠올랐다. 펀치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거나 하사관들이 어울려 치는 당구 게임에 끼어들어 점수를
계산해 주며 하고많은 날을 보냈던 바르베뜨 까페에서의 생활은 정말 악몽처럼
생각되었다.
'그래, 이제부터라도 모든 걸 청산해야지. 이젠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어. 자끄
형처럼 용기를 갖고 말이야.'
그때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학생들은 군수에 대해 뭐라고 계속 떠들어
대면서 정문 앞에 서 있는 자동차 앞을 줄지어 지나갔다. 학생들이 수업을 받으러
교실 안으로 들어간 후 나는 일단 그들에게서 벗어나 두세 개씩 계단을 뛰어
단숨에 고미다락방으로 올라갔다. 혼자서 조용히 자끄 형의 편지를 읽고 싶었다.
"다니엘 씨, 교장실에 손님이 와 있읍니다."
'교장실에?... 교장선생님이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서 있자 수위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불현듯 군수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군수님이 와 계신가요?"
희망으로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끼며 나는 계단을 네 개씩 뛰어올랐다.
살다 보면 당치도 않은 허황된 생각을 하는 날도 있는 법이다. 군수가 날
기다린다는 전갈을 받은 순간 내겐 허무맹랑한 생각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그런 엉뚱한 생각 말이다. 그 양반이 쌩
테오필 축제 때 내 시를 듣고 날 좋게 봐두었다가 이제야 자기 비서로 삼으려고
급히 학교로 달려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는 그가 날 찾을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의당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 늙은 후작 얘기를 쓴 자끄
형의 편지 때문에 머리가 잠시 돌았던 게 틀림없었다.
하여튼 계단을 올라가면서 나는 군수의 비서가 될 거라는 생각을 점점 확고히
굳혔다.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기뻤다.
복도를 막 꺾어 돌아서던 나는 로제와 마주쳤다. 그는 얼굴이 백지창처럼
하얘져 있었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댔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를 그대로 지나쳐 갔다. 군수는 나를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댔다.
교장실 앞에 도착한 순간 내 가슴은 숨이 넘어갈 듯 뛰고 있었다. 군수의
비서가 된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나는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 나는 한번 더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고는
손잡이를 살짝 돌렸다.
교장실 안에서 나를 기다리던 군수는 멋드러진 구레나룻을 기른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벽난로의 대리석판에 지그시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실내 가운을 입은
교장선생님은 빌로드 모자를 손에 든 채 군수 옆에 공손하게 서 있었고, 급히
불려온 비오 씨는 한쪽 구석에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군수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양반이 우리 집 하녀를 유혹했단 말이오?"
그는 계속 미소를 지으며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처음에 나는
군수가 농담하는 줄 알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들떠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나 군수는 농담을 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지 나를
쏘아봤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다시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난 지금 당신에게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 이렇게 직접 찾아오게 되었소,
다니엘 에세뜨 씨. 당신이 바로 내 아내의 몸종을 유혹한 다니엘 에세뜨 씨가
맞소?"
나는 군수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하녀라는
말이 군수 입에서 내뱉아지는 순간 나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너무도
분개한 나머지 나는 목에서 튀어 나오는 대로 소리쳤다.
"하녀라구요?... 난 결코 하녀를 유혹한 적이 없읍니다!"
군수는 계속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벽난로의 선반 위에서 자그마한 종이
꾸러미를 집어들었다. 언뜻 보아서는 그게 뭔지 몰라 흥분을 삭이고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다. 내 쪽으로 몸을 돌린 그가 그 꾸러미를 건성으로 흔들어 댔다.
"선생, 이게 바로 당신의 죄를 밝혀 주는 뚜렷한 증거요. 그 문제의 하녀 방에서
찾아 낸 편지란 말이오. 서명도 돼 있지 않고, 또 그 하녀도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았지. 이 편지에는 중학교 얘기가 자주 언급되어 있더군. 당신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비오 씨가 당신 필체와 문체라는 걸 확인했단 말이오."
그러자 구석진 곳에서 열쇠꾸러미가 사납게 흔들리며 쨍그렁댔다. 군수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담겨 있었지만 목소리는 똑똑 부러지고 있었다.
"싸르랑드 중학교의 모든 교사가 시인은 아니란 말이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리속으로 번개처럼 지나가는 어떤 생각을 붙잡았다.
그 종이를 더 자세히 보고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군수 쪽으로 돌진해
들어가듯 뛰어갔다. 소란이 일까 두려워진 교장선생님이 나를 제지하려는 동작을
취했다. 하지만 군수는 침착하게 내게 그 종이꾸러미를 내밀며 말했다.
"보시오!"
하나님 맙소사! 그것은 내가 쎄실리아에게 쓴 편지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있었다. '오, 쎄실리아. 이따금씩 황량한 바위 위에서'로
시작되는 편지와 '꿈결처럼 행복한 하룻밤을 보내도록 허락하신 천사...' 어쩌구
하며 쓴 감사 편지까지 몽땅 다 묶여 있었다. 밤을 지새고 머리를 쥐어 짜며
아름다운 꽃 같은 미사여구를 만들어 겨우 하녀의 발 밑에다 갖다바쳤다니!...
고귀한 귀족계급인 그 여인이 사실은 군수 부인의 나막신에 묻은 흙이나 터는
하녀였다니! 내 얼굴에는 분노와 놀라움이 뒤범벅되어 떠올랐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방안에 있던 다섯 사람을 짓눌렀다. 군수가 히죽거리며
침묵을 깼다.
"흠, 어떻소, 돈 주앙 공? 그 편지들을 당신이 정말 쓰지 않았단 말이요?"
대답 대신 나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수그렸다. 물론 한마디쯤 변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로제의 이름을 밝히느니
차라리 내가 그 모든 비난을 받을 각오가 돼 있었던 것이다... 그 헤어날 길 없는
재난의 와중에서도 나는 친구의 정직함에 대해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고 있었다.
그 편지를 보는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머리에 떠올렸던 것이다.
'로제는 아무 생각 없이 내 필체를 흉내내서 그대로 베껴 썼을는지도 몰라.
차라리 당구 게임이나 하면서 당구공을 치는 게 나았을 텐데!'
나는 정말 순진하게도 동료 교사인 로제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군수는 편지를 호주머니에
다시 집어넣더니 교장선생님과 비서에게로 몸을 돌렸다.
"여러분은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아시겠죠."
이 말에 비오 씨의 열쇠는 구슬픈 소리를 냈고, 교장선생님은 머리를 땅에 닿을
정도로 숙이면서 죽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에세뜨 씨는 지금 당장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소란을 막기 위해서는
여드레쯤 더 남아 있어야 해요."
새 교사를 데려오는 데 여드레가 필요했던 것이다.
'쫓겨난다'라는 끔찍한 말에 나는 모든 용기가 다 빠져나가 버리는 듯싶었다.
맥이 쭉 빠진 나는 아무 말 없이 절을 하고는 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밖에
나오자마자 눈물이 한꺼번에 왈칵 쏟아졌다. 나는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단숨에 내 방까지 달려갔다.
다락방에서는 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방안을
거닐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는 걸 본 그가 황급히 내게로 다가왔다.
"다니엘 씨!"
그는 곁눈질로 계속 나를 살피며 내게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트렁크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린애처럼 눈물을 흘리다니!... 그래 무슨 일인지 한번 말해 보시오. 자, 빨리
말해 봐요!... 무슨 일이 있었지요?"
나는 교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울먹이며 그에게 얘기해 주었다.
내 말을 다 듣고 나더니 로제는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더이상 깔보는 듯한
거만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지 않았다. 결국 내가 자기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학교에서 쫓겨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내게 손을 뻗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다니엘 씨, 당신은 정말 고귀한 마음씨를 가졌어요."
그 순간 밖에서 자동차소리가 들려 왔다. 군수가 떠나는 것이었다.
"당신은 고귀한 마음씨를 가졌어요. 난 이 말밖에 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나는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는 그런 몹쓸 놈이
아니오."
내 좋은 친구인 펜싱 교사가 내 손목을 부서질 정도로 힘껏 쥐면서 말했다.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울지 말아요, 다니엘 씨. 난 가서 교장선생님을 만나겠소. 맹세코 당신이
쫓겨나도록 내버려 두진 않겠소."
그는 나가려고 한 발자국을 옮기더니 뭔가를 잊은 듯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모든 사실을 밝히기 전에 내 말대로 해줘요.
사실 난 혈혈단신이 아니오. 외진 산골에서 병을 앓고 계시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오로지 나만 믿고 의지하시는 어머니!... 불쌍한 어머니!... 모든 일이
끝나면 제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편지를 써주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그는 차분하면서도 심각하게 말했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듣던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아니, 어떻게 하려구요?"
로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웃도리를 들쳐 보이며 호주머니 속에 있는
피스톨의 반짝거리는 손잡이만을 슬쩍 보여 주는 것이었다.
나는 혼비백산해서 그에게 덤벼들었다.
"자살하려는 거요? 당신 자살하려는 겁니까?"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친애하는 친구여, 내가 처음 교사라는 직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혹시
내가 경솔하게도 내 자신의 위신을 추락시키게 된다면 굳이 불명예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살아남진 않겠다고 다짐했었소...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순간이
왔어요... 5분 내로 난 학교에서 쫓겨날 거요. 불명예를 감수해야 된단 말이오. 한
시간 후면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이오! 나는 마지막 총알을 삼키겠소."
그 말을 들은 나는 나가려는 그를 두 팔로 막고 문 앞에 버티고 섰다.
"안 돼요! 로제, 당신은 나갈 수 없어요... 당신이 죽도록 내버려 두느니 차라리
내가 그만두겠소."
"내 의무를 다하도록 날 내버려 둬요."
그는 완강한 어조로 말하며 말리는 나를 떠밀고는 문을 조금 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의 어머니, 궁벽한 산골 어디엔가 살고 있다는 그의 불쌍한
어머니 얘기를 그에게 해줘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당신 어머니를 위해서도
살아야 한다는 것, 나는 어렵잖게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어쨌든 앞으로도 여드레가 남아 있다는 것, 그토록 어마어마한 결심을 내리기
전에 최후의 순간까지 기다리는 건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차근차근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마지막 말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았다. 그는
교장선생님을 찾아가는 일과 또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을 몇 시간 늦추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때 종이 울렸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나는 교실로 내려갔다.
인간이란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에 휩싸여 다락방에
들어갔던 내가 다소 즐거운 기분이 되어 다락방을 나오다니! 나는 절친한 친구
펜싱 교사의 목숨을 구했다는 생각에 우쭐해졌다.
하지만 일단 의자에 앉고 나서 친구를 구했다는 감격이 사라지고 나자 나는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로제는 살기로 작정했으니 그건 일단 잘 된 일이야. 하지만 난 어떻게 하나?
그렇게 남을 위해 내 목을 헌신한 덕분에 학교에서 쫓겨나고 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절대로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다.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족을 위해 멋진 집을
마련하기는 이미 글렀다. 눈물을 흘릴 어머니와 노발대발하실 아버지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자끄 형이 생각났다. 형의 편지가 마침 아침에
도착했으니 얼마나 잘 된 일인가! 어쨌든 이런 곤경에서 헤어날 길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형의 침대는 두 사람이 잘 수도 있다고 편지에 쓰여 있지 않았던가?
여하튼 파리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먹고 살아갈 방도가 있다니까....
그런데 여기서 어떤 두려운 생각 때문에 나는 주저하게 되었다. 떠나려면 돈이
필요했다. 우선 기차삯이 있어야 하고, 수위에게 빚진 58프랑도 있어야 하며,
상급생한테서 빌린 10프랑도 갚아야 하고, 바르베뜨 까페에 내 이름으로 달아놓은
외상도 꽤 많았다. 어떻게 그 많은 돈을 구한단 말인가?
'쳇! 겨우 그깟 일로 불안해 하더니 나도 참 어리석군. 로제가 있잖은가? 로제는
부자인 데다가 시내에서 펜싱을 가르치고 있으니 자기 목숨을 구해 준 나한테 몇
프랑쯤은 빌려 줄 수 있을 거야'
일단 돈 문제를 해결하고 나자 나는 좀전에 있었던 그 끔찍한 사건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즐거운 파리 여행만을 생각했다. 나는 너무도 즐거워서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절망에 빠져 있는 모습을 즐기려고 자습실에 내려왔던
비오 씨는 내 즐거운 표정을 보고는 실망하는 빛을 띠고 돌아갔다. 나는 왕성한
식욕으로 점심식사를 잽싸게 집어치웠다. 나는 학생들이 눈 쌓인 운동장에서 노는
것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드디어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우선 로제를 만나는 일이 시급했다. 나는 단숨에 구의 방까지 뛰어 올라갔다.
그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좋아! 바르베뜨 까페에 가 있을 거야.'
그날 아침부터 그런 엄청난 일을 겪었으니 그도 가만히 방에 처박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방이 비었다는 데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바르베뜨 까페에 뛰어가 문을 왈칵 열어 젖히고 안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그를 찾자 하사관들이랑 풀밭에 갔다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
'제기랄, 이런 고약한 날씨에 거긴 뭐하러 갔담?'
나는 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당구를 치자는 제의도 거절하고 나는 바지를
걷어 붙인 채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풀밭 쪽으로 달려갔다. 내 좋은 친구
펜싱 교사를 만나기 위해서....
##눈덮힌 궁륭 속의 환멸
싸르랑드 성문에서 풀밭까지는 족히 2킬로는 되었다. 하지만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 15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그 거리를 주파했다. 나는 무엇보다 로제가
걱정되었다. 그 불쌍한 친구가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교장선생님에게 깡그리
털어놓지는 않았을까 두려웠다. 내 머리속에는 그가 가지고 있던 피스톨의
손잡이가 아직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런 불길한 생각과 두려움 때문에 나는
발이 닳도록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런데 풀밭에 점점 가까와지자 나는 눈 위에 여러 사람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는 걸 발견했고, 펜싱 교사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늦추면서 파리와 자끄 형,
그리고 기차 여행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다시
불안감으로 가슴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아니야. 로제는 틀림없이 자살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이 황량한 곳까지 찾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 바르베뜨
까페에 들러서 친구들을 데리고 간 건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이별의 술잔을
최후로 나누고 싶어서였을 거야. 아! 로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난 다시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와 삽시간에 나는 풀밭에 다다랐고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커다란 나무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불쌍한 친구! 내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진 발자국을 따라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온 나는 드디어
에스뻬롱 별장에 도착했다.
그 별장은 평판이 별로 좋지 못했다. 싸르랑드의 난봉꾼들이 거기서 파티를
벌이며 벼라별 해괴한 짓거리를 다한다는 곳이었다. 나도 몇 번 거기 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날처럼 그렇게 음침해 보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순백색으로 덮여
있는 벌판 한가운데 페인트는 누렇게 탈색되고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추잡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는 그 별장은 키작은 느릅나무에 가려 있었다. 문은 낮았고, 벽토가
군데군데 벗겨져 볼상 사나운 모습이었으며 창유리에는 먼지가 덕지덕지 앉아
있었다. 그 자그마한 집은 아마 자기가 그 불유쾌한 일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몹시 부끄럽기도 하고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 별장의 추잡한 겉모습은
마치 그러한 심경을 항변하는 듯이 보였다.
별장으로 점점 다가가니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소리,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순간 몸이 떨려오며 불길한 생각이 전신을 휩싸는 것을 느꼈다.
'아! 어쩜 좋아! 이별주를 마시고 있는 거야.'
나는 어떡해야 할지 몰라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침착해지려고 애를 썼다.
그때 나는 별장 뒤편에 서 있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나는 살문을 살짝
밀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정원의 말은 꼴은 말이 아니었다. 커다란 산울타리는
나뭇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초라해 보였고, 은은한 향기를 풍기던
라일락은 말라 비틀어졌고, 정원 한구석엔 지저분하고 악취를 풍기는 한 무더기의
온갖 쓰레기들이 소복이 쌓여 마치 쓰레기무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치형의 정자인 순백색의 궁륭도 마치 에스키모인들의 집처럼 황량하게 보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정도로 서글픈 광경이었다.
손뼉소리가 일층 거실에서 들려 왔다. 먹고 마시느라 한참 열이 올랐는지 창문
두 개가 활짝 열려 있었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층계에 막 발을 올려놓았을 때였다. 나는 집안에서 들려
오는 말소리를 듣고는 기분이 섬뜩해져서 발을 멈추고 말았다. 내 이름이
거론되자 모두들 폭소를 터뜨리며 죽어라 웃어 대고 있었다. 로제가 내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다니엘 에세뜨란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포복절도를
했다. 무언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섬ㅉ한 호기심에 자극되어 나는 뒤로 물러섰다.
뭔가 특별한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양탄자처럼 발자국소리를
없애 주는 눈 덕분에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심스레 궁륭 안으로 슬그머니 스며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고는 창문 바로 옆에 몸을 바싹 붙이고 숨소리를 죽이며
섰다.
나는 평생 그 궁륭 밑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궁륭을 뒤덮고 있던 누렇게
메말라 버린 나뭇잎, 진흙투성이가 된 더러운 바닥, 녹색이 군데군데 벗겨진
자그마한 탁자, 들이닥친 눈이 반쯤 녹아 물이 흥건히 배어 있는 나무 벤치... 그
황량함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궁륭 안에는 밤새도록 들이닥친 눈이
잔뜩 쌓여 있었고 햇빛은 거의 비쳐들지 않았다. 눈이 서서히 녹아내리면서 머리
위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인간이 얼마나 비열하고 야비할 수 있는가를 배우게 된 것은 바로 그곳,
햇빛조차 비치지 않아 무덤 속처럼 어둡고 차가운 궁륭 안에서였다. 내가 인간을
의심하고, 멸시하고, 증오하는 방법을 확연히 배운 곳이 바로 그곳이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겐 절대로 그런 곳으로 가지 않도록 인도해 주고 보호해 주기를
절실히 바란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수치로 귀까지 빨개진 나는 숨을 죽이면서
에스뻬롱 별장 안에서 새어나오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내 좋은 친구인 펜싱 교사는 계속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는 쎄실리아 사건과
연애 편지, 군수가 학교를 방문한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폭소를 터뜨리며 열광하는 걸로 봐서 우스꽝스런 몸짓을 섞어가며 떠들어
대는 모양이었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말이야. 왜 그 알제리에 있는 보병들을 위한 극장에서 3년
동안 코메디를 공연했었잖아. 그러나 그건 결코 무료공연이 아니었다네. 그러나
내 얘기는 공짜로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을 거네. 으하하하... 나는 잠시
패자가 돼 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했었지. 이젠 더이상 자네들과 함께 에스뻬롱
영감의 맛좋은 포도주를 마셔 보지 못할 거라는 절망감에 빠졌어. 그런데 말이야,
그 꼬마 에세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든. 지금쯤 일러바쳤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걸. 그 꼬마는 내가 명예스롭게 스스로 자수를 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으니까. 설사 그 꼬마가 이실직고를 했더라도 누가 믿어
주겠어? 또 나는 절대로 자수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선수를 쳐서 미리 연극을
벌이는 게 수라고 생각하게 되었지."
그렇게 말하고 난 펜싱 교사는 스스로 연극이라 칭한 그 모든 것을 공연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내 방에서 그와 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 야비한
녀석은 단어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금세 애절함과
비통함에 젖어 있는 비극 배우가 되어 소리치기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 우리 불쌍하신 어머니!"
그러더니 곧 그는 내 목소리를 흉내내서 외쳤다.
"안 돼요, 로제! 안 돼요! 당신은 쫓겨나면 안 됩니다!"
그 연극은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정말 재미있는 코메디였다. 관객들은
바닥을 두드리고 손뼉을 쳐대면서 모두들 떼굴떼굴 굴렀다. 내 뺨 위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이빨이 딱딱 맞부딪치며 떨렸다.
그제서야 나는 아침에 내 방에서 로제가 절규에 가까운 울음을 토해 내던 것이
사실은 가증스런 코메디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피해가 올지도
모른다고 계산한 그는 사전에 세심하게 계획을 짜서 일부러 내가 쓴 편지를 옮겨
쓰지 않고 그대로 부쳤으며, 그의 불쌍한 어머니는 이미 20년 전에 죽었고, 권 총
손잡이라는 것도 사실은 파이프 케이스였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쎄실리아는 어떻게 됐나?"
"그 여잔 아무 말도 안했어. 벌써 떠나 버렸지. 꽤 괜찮은 애였는데."
"그럼 다니엘은 이제 어떻게 되지?"
"쳇, 될 대로 되겠지 뭐!"
그가 술에 취한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뱉아 내는 말을 듣고서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나자 나는 당장 궁륭에서 뛰쳐나가 마치 유령처럼 느닷없이
그들 앞에 나타나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이미 충분히 조롱거리가 되었으니까.
고기가 다 구어진 모양이었다. 모두들 술잔을 부딪치는지 쨍그랑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로제를 위하여! 로제를 위하여!"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괴로왔다. 나는 정원을 가로질러 뛰쳐나왔다.
단숨에 살문을 지나친 나는 미친 놈처럼 내닫기 시작했다.
소리없이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눈 덮인 거대한 벌판은 황혼녘의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까닭모를 깊은 우수에 잠겨 있었다.
나는 마치 상처입은 미친 개처럼 얼마 동안을 그렇게 정신없이 달렸다.
산산조각난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나의 심경은 시인의 몇 마디 상투어로는 절대로
표현될 수 없는 절박한 것이었다. 그날 누군가는 분명히 그 은백색 벌판에 길게
이어져 있는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서 돈을 구한단 말인가? 어떻게 갈 것인가? 자끄 형은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 로제의 일을 폭로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고 이미 쎄실리아도
떠나 버린 이후니 그는 오리발을 내밀 것임에 틀림없고....'
난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피로와 고통에 짓눌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나는 밤나무 밑의 눈밭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는 완연한
어둠 속에서 밑도끝도없는 아득한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아마 나는
생각할 기력조차 잃은 채 그렇게 쓰러져 언제까지라도 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저 멀리 싸르랑드 쪽에서 종소리가 아련히 들려 왔다. 학교에서
울리는 종소리였다. 그 종소리를 듣고는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는
돌아가서 강당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감독해야 한다. 바로 그때 강당을 생각하는
순간 내 머리속으로 번개같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울음을
즉시 멈추고, 자세를 가다듬으며 냉정을 되찾았다.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힘찬 발걸음으로 그 은백색의 드넓은 벌판을
가로질러 싸르랑드로 접어들었다.
나는 마을의 어둡고 꽁꽁 언 큰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서 학교정문에
다다랐다. 그리곤 아이들이 휴식시간을 즐기고 있는 강당으로 한걸음에 뛰어갔다.
강당에 들어선 나는 천장 한가운데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커다란 쇠고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휴식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렸고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자습실로 가서 조용히 자습을 하라고 이른 다음 교단 위의 책상에 앉아 자끄
형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떼거리로 모여 앉아 왁자지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통한 심경으로 차근차근 편지를
써나갔다.
자끄 에세뜨
라땡 구역, 보나파르뜨 가, 파리
사랑하는 자끄 형! 형을 괴롭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나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날 용서해 줘. 이젠 울지 않는 형을 내가 다시 한 번 더 울릴 것 같아. 이
편지가 아마 마지막이 될 거야... 형이 이 편지를 받을 즈음이면 난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여기까지 썼을 때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나는 펜을 멈추고는
이리저리 다니면서 몇몇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타일렀다. 나는 아이들에게
벌을 주지도 않았고 화도 내지 않았다.
알겠어? 자끄 형, 난 너무 불행해. 자살하는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어. 내
미래는 온통 잿빛이고 전혀 가망이 없는 것 같아. 난 학교에서 쫓겨났어, 형!
여자문제 때문인데 얘기를 하자면 너무 길어. 그러나 밝혀 두건대 그건 전혀 내
잘못이 아니야. 그 야비한... 아냐. 아냐. 그만두겠어... 게다가 빚진 돈도 많아.
공부도 할 수가 없어. 부끄러워. 내 자신이 혐오스럽고 인간들에게 대한 경멸감...
아 정말 견딜 수가 없어. 산다는 것이 두려워...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어....
나는 또다시 펜을 멈춰야 했다.
"수베롤! 이 시를 5백 번 베껴 써서 나에게 검사를 맡도록 해라. 그리고 거기
푸끄와 루피는 이번 일요일은 외출 금지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 난 나는 편지를 마무리지었다.
안녕, 자끄 형! 할 얘기는 많지만 울어 버릴 것만 같아 도저히 쓸 수가 없어.
학생들도 날 보고 있고, 엄마한테는 내가 산보를 하다가 잘못하여 바위에서
미끄러졌다거나 아니면 멱을 감다가 익사했다고 말씀드려 줘. 아니면 형 맘대로
꾸며 대든지. 여하튼 불쌍하신 엄마가 진짜 이유는 모르시도록 해야 돼!
부탁이야... 그리고 내 대신 사랑하는 어머니를 껴안아드려 줘. 아버지도... 그리고
두 분한테 아주 멋진 새집을 지어 드리도록 해....
안녕! 난 형을 사랑해. 다니엘을 기억해 줘.
형한테 보내는 편지를 끝낸 나는 또 한 통의 편지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신부님, 제발 이 편지를 제 형 자끄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
머리칼을 잘라서 저희 어머니에게 소포로 부쳐 주십시요. 부탁드립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제 신세가 너무 불쌍하고 산다는 것에 환멸을
느껴서 전 죽을 수밖에 없읍니다. 용서하세요. 신부님, 유일하게도 신부님만이
제게 잘 대해 주셨읍니다.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니엘 에세뜨 드림.
펜을 놓고 나는 자끄 형에게 보내는 편지와 신부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커다란
봉투 속에 함께 집어넣고 겉봉투에다 '내 시체를 처음으로 발견하시는 분은 이
편지를 제르만느 신부님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라고 썼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자습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자습시간이 끝나고 밤참을 먹고 난 아이들이 저녁기도를 마치고 기숙사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하나씩 하나씩 내 생애를 정리하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곧 비오 씨가 순찰을 돌 시간이었다. 그의 열쇠가
쨍그렁거리는 소리, 마루바닥 밟는 요란한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안녕히 주무세요, 비오 씨!"
"안녕히 주무시오, 선생!"
그가 복도에 발자국소리를 남기며 멀어져 갔다.
이제 모두 잠들고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살그머니 문을 연 나는 층계참에
서서 혹시 아이들이 깨지나 않을까 잠시 두리번거렸다. 기숙사는 찬물을 끼얹은
듯 숨소리조차 들려 오지 않았다.
발자국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간 나는 종종걸음을 치며 미끄러지듯 복도의
어둠 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나는 복도의 어둠 속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창문
밖으로 황량한 북풍이 불어 대고 있었다. 계단 밑쪽의 회랑을 지나가다가 나는
어둠에 잠긴 네 채의 건물 사이로 빛을 발하는 눈 덮인 운동장을 얼핏 보았다.
운동장 저편의 찌그러진 건물에서 불빛 하나가 어슴푸레 새어나오고 있었다.
제르만느 신부님의 방이었다. 신부님은 일생일대의 역작을 저술하느라 모두가
잠든 이 밤을 홀로 밝히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친절한 신부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인사를 보냈다. 그러고는 강당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강당 안에서 음침하고 차가운 냉기가 확 밀려 왔다. 창문의 창살을 통해서 한
줄기의 달빛이 흘러들어와서는 굵은 쇠고리를 비춰 주고 있었다. 마치 나를 위한
것처럼... 나는 몇 시간 전부터 줄곧 오직 그 쇠고리만을 생각했다. 굵은 쇠고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한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강당 한 모퉁이에 의자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들고 쇠고리 밑으로 가져 와서는 조용히 내려놓은
후 그 위에 올라섰다. 짐작대로 딱 알맞은 높이였다. 나는 늘 리본 모양을 만들어
목에다 매고 다니던 구겨진 긴 자주색 비단 넥타이를 천천히 풀어 넥타이를
쇠고리에 잡아매고서 올가미를 만들었다... 1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땡... '자!
지금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올가미를 느슨하게 풀었다.
흥분 같은 전율이 전신을 감쌌다.
'안녕, 자끄 형! 안녕, 엄마!'
그때였다. 갑자기 억센 손 하나가 달려들어 내 몸둥아리를 꼭 붙잡았다. 다음
순간 나는 걸상에서 끌어 내려졌고 내 발은 강당 바닥에 닿았다. 동시에 누군가가
무뚝뚝하고 거친 목소리로 한껏 빈정거리면서 말했다.
"이 시간에 그네를 타다니 무슨 당치 않은 경운가?"
제르만느 신부님이었다.
나는 그만 아연실색해져서 몸을 돌렸다. 그는 신부복을 입지 않고 짧은 바지
차림이었는데, 조끼 위로 가슴장식이 나부끼고 있었다. 달빛에 반쯤 드러난
칼자국이 더욱 선명해 보이는 험상궂은 얼굴이 서글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방금 운동장의 급수장에서 물을 떠왔는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물병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한 손만으로 자살일보 직전의 나를 의자 위에서
끌어내린 것이었다. 물병을 내려놓고 말고 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나의 놀란 얼굴과 눈물이 그득 고인 두 눈을 본 제르만느 신부님은 미소를
거두고는 정답고 애정어린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이 시간에 그네를 타다니 무슨 당치 않은 경운가?"
나는 어리벙벙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네를 타는 게 아닙니다, 신부님. 전 죽고 싶어요."
"뭐라구?... 죽는다구?... 죽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슬픈 일이라도 있나?"
"저...."
나는 복받쳐오르는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흐렸다.
"다니엘, 함께 가세.
나는 싫다는 손짓을 하고서 넥타이를 매어 놓은 쇠고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제르만느 신부님이 낚아채듯, 내 손을 붙잡았다.
"자! 내 방으로 올라가세나. 자살하고 싶다면 거기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오히려 방안은 따뜻하니까 자살하기엔 더욱 쾌적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절 죽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신부님. 제가 죽는 걸 방해할 권리가 신부님에게는
없읍니다."
"아! 그래?"
이렇게 말하고 난 그는 느닷없이 내 혁대를 움켜쥐더니 몸부림을 치며 애원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바싹 들어 마치 짐꾸러미처럼 팔 밑에 끼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제르만느 신부님의 방은 벽난로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벽난로
가까이에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램프가 훤히 켜져 있었는데 그
불빛 아래로 파이프 몇 개와 파리똥이 묻은 낡은 종이 뭉치가 보였다.
신부님은 나를 벽난로 한쪽 모퉁이에 앉혔다. 나는 무척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꽤 많은 말을 주절거렸다. 나의 짧은 인생 동안 내게 밀어닥친 불행에 대해서
그리고 그 불행을 헤쳐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쳐 보았지만 이제는 인간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고 마침내 내 인생을 끝장내려고 한다는 것을 얘기했다.
신부님은 시종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을 들었다. 울음을 삼키며 떠듬떠듬 쓰리고
답답한 심경을 털어 놓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해졌다. 선량한 신부님은 내 손을
꼭 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네. 살아가다 보면 더 험난한 일도 겪게 되는 법이야.
그런 대단찮은 일로 죽으려 한다면 자넨 정말 어리석고 하찮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아야만 해. 자네 얘기는 아주 행운일지도 몰라... 음, 그래 떠나는 게 좋아.
지금 당장 말일세. 여드레씩 기다릴 필요도 없어! 내가 책임지지... 자네가 그
망나니 같은 녀석한테 빌리려고 했던 돈은 내가 빌려 주겠어. 지금은 아무 말도
말게! 난 일해야 하고 자네에겐 휴식이 필요하니까... 자네가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네. 자넨 거기 가면 춥고 또다시 두려워질 거야. 내 푹신한 침대에서
깨끗한 이불을 덮고 자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테니 그렇게 하도록 하게! 난 밤새
글을 써야 하고, 설사 잠이 오더라도 소파에서 자면 되니까... 그럼 잘 자게! 아무
말 말고."
나는 아무 말 못하고 신부님의 침대에 가 누웠다. 마치 꿈 속을 오랫동안 헤맨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 동안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가! 내
목숨은 거의 끊어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지금은 그렇게도 좋아하는 신부님의
조용하고 푸근한 방에서 안락한 침대에 누워 있다니!... 아, 항상 지금만 같다면!...
난 이따금씩 눈을 뜨고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빛을 받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친절한 제르만느 신부님을 바보라곤 했다. 신부님은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흰 종이를 소리 없이 메꿔 가고 있었다.
신부님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벌써 아침이 밝아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신부님은 그러한 내 모습을 보더니 껄껄 웃어 대면서 말했다.
"자! 종이 울렸으니 서둘도록 하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평상시처럼
학생들을 데리고 나오는 거야. 그리고 아침 휴식시간에 다시 여기서 만나
얘길하도록 하세."
신부님의 말을 듣자 갑자기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인자한 신부님은 막무가내로 날 밀어 냈다.
자습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운동장에 채 나가지
나가지 않았는데도 급히 발걸음을 옮겨 제르만느 신부님의 방으로 갔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가 보니 신부님은 책상서랍을 활짝 열어 놓고 금화를 세어
정성스레 나누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돌려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그는 아무 말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일을 다 끝낸 신부님은 서랍을 닫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짓했다.
"이걸 자네에게 전부 주겠네. 내가 계산을 해놓았지. 이건 여행비이고, 이건
수위한테 갚을 돈, 이건 바르베뜨 까페에 진 빚, 이건 자네가 학생한테 갚을 돈
10프랑일세...."
내가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신부님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 작별인사를 하세... 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는군. 내가 수업을
마치고 나오기 전까지 자넨 여길 떠나야 하네. 바스티유 감옥 같은 학교 분위기는
자네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어... 빨리 파리로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파이프 담배도 피우면서 남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네. 알겠나? 남자가
되어야 해. 왜냐하면, 다니엘 군, 자네도 알겠지만 자넨 아직 어린애에 불과해. 난
자네가 평생 어린애같이 행동할까 봐 무척 걱정된다네."
신부님은 하나님과도 같은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함빡 띠우며 내게 팔을
벌렸다. 하지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격으로 눈물을 쏟으며 그의 발 밑에
무릎을 꿇었다. 신부님은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크고 부드러운 손으로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런! 이러다 늦겠는 걸."
신부님은 급히 책과 노트를 챙기면서 방을 나서려고 했다. 그러다 생각난 듯
뒤돌아보고 다시 한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도 파리에 형이 한 분 계시지. 선량하고 인자한 신부님이야. 가서 만나
뵈면 좋을 텐데... 하지만 자넨 지금 정신이 얼얼할 테니 형님 주소를 가르쳐 준들
곧 잊어먹을 거야...."
그러고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오른손에는 검은 신부 모자를, 왼쪽 겨드랑이에다가는 서류 뭉치와 책을 끼고
걸어갔다. 신부님의 옷자락이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인자하신 제르만느 신부님의
체취와 온정을 오래 간직해 두려고 떠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의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는 커다란 책장과 자그마한 책상, 반쯤 깨진 벽난로, 내가 거기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신부님께 내 심경을 털어놓았던 안락 의자, 편안히 누워 푹
잠을 잔 침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신부님에게 용기와 선의와 헌신과
인종이 내재해 있고 다만 드러나지 않을 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내게 베푼 신부님의 따뜻한 배려와 자비로움을 대하고 나서는 더욱더 신부님이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러한 신부님 앞에서 더욱더 비겁하고 왜소해 보이는
나 자신을 깨닫고는 수치스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죽을 때까지 제르만느
신부님을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나는 신부님의 방에서 보냈다. 이제 트렁크도 꾸리고, 빚도
갚고, 합승마차 좌석도 예약해야 했다.
방을 나서려는 순간, 벽난로 한 모퉁이 위에 놓인 새까맣게 된 낡은 파이프 몇
개가 언뜻 눈에 띄었다. 나는 가장 낡고, 가장 새까맣고, 가장 짧은 파이프를
집어들고는 마치 성인의 유골이나 되는 것처럼 소중하게 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계단을 내려왔다.
강당 문은 여전히 살짝 열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눈길을 돌린 나는
흠칫 놀라며 온몸을 휩싸는 전율을 느꼈다.
어둡고 냉기 도는 강당 안에선 그 쇠고리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둥그렇게
매어진 내 자주색 넥타이는 쓰러진 의자 위에서 흔들거렸다.
##싸르랑드여, 안녕!
방금 본 그 섬뜩한 광경에 얼이 빠진 채 허겁지겁 학교 정문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수위실 문을 왈칵 열어 젖히고 누군가가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에세뜨 씨! 에세뜨 씨!"
바르베뜨 까페의 주인과 그의 친구 까싸뉴 씨가 당황한 듯 아주 불손한 태도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까페 주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떠나신다는 게 사실인가요, 에세뜨 씨?"
나는 되도록 침착하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오늘 떠납니다."
바르베뜨 씨가 얼굴색이 하얘져서는 팔짝 뛰었고, 옆에서 잠자코 있던 까싸뉴
씨도 몹시 놀란 듯했다. 하지만 바르베뜨 씨는 까싸뉴 씨보다 훨씬 놀라고 당황한
듯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다. 나는 그동안 그의 까페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며
술을 퍼마시고 질탕하게 놀아 댔기 때문에 갚아야 할 외상값만도 엄청나게
많았다.
"뭐라구요? 오늘 떠난다구요?"
"예, 오늘 떠납니다. 그래서 지금 좌석을 예약하러 가는 중입니다."
그들은 내 목덜미를 잡아쥐려는 듯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며 내게 덤벼들려는
자세를 취했다.
"외상값은요?"
바르베뜨 씨가 물었다.
"그럼 내 돈은 어떡합니까?"
까싸뉴 씨도 목청을 높여 질새라 소리쳤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먼저 수위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굳어진 표정으로
제르만느 신부님이 준 금화를 호주머니에 한줌 가득히 끄집어 내어 책상 위에다
올려놓고 두 사람에게 갚아야 할 돈을 계산해 건네주었다.
돈을 받아 쥔 그들은 최면에서 풀린듯 잔뜩 지푸려져 있던 오만상을 펴며
온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행여나 돈을 받지 못할까 봐 잡아 먹을 듯
다그쳤던 자신들의 행동을 조금쯤 부끄러워하면서도 돈을 받아 냈다는 데
즐거워진 두 사람은 돈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우정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에세뜨 씨, 정말 떠나시는 겁니까?... 아 정말 유감이로군요! 학교 측으로
봐서는 크나큰 손실입니다."
그들은 계속 혀를 차면서 오! 아! 하는 한숨을 연거퍼 내쉬었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그들은 울먹거리며 나를 포옹하고 손을 맞잡고 흔들어 대며 법석을
떨었다.
어젯밤만 같았어도 나는 그들의 입바른 우정에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는 감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도가 트이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만큼 성숙해 있었다.
15분 동안 궁륭 밑에서 보낸 지난 밤의 처절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나는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룻밤 사이에
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고 전혀 새로운 각도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 가증스런 인간들이 싹싹하게 굴수록 나는 그들이 더욱 혐오스러워졌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우스꽝스런 수다를 중간에 가로막아 버렸다. 나는 학교에서
잽싸게 빠져나와 나를 그 괴물같은 인간들로부터 멀리멀리 데려갈 합승마차에
자리를 예약하러 부리나케 뛰어갔다.
역마차 매표소에서 돌아오던 중에 나는 바르베뜨 까페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난 들어가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지난 몇 달 동안 그곳에서 보낸 방탕한
나날이 떠올라 치가 떨렸다. 그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못된 호기심에 이끌려
진열장 너머로 그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을 뿐이었다. 까페는 그야말로 장날처럼
복작대고 있었다. 그날은 내기 당구가 벌어지는 날이어서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모양이었다. 파이프 담배 연기 사이로 모자걸이에 걸린 기병
모자와 술장식이 달린 혁대가 칸델라 빛을 막아 번쩍이고 있었다. 양의 가면을
뒤집어 쓴 인간들이 전부 모인 듯한 그 무리 속에 펜싱 교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나는 유리창에 코를 박고 피둥피둥 살찐 불그레한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술잔마다 가득 찬 압셍뜨술이 넘실넘실 춤추고 있었으며, 한쪽 식탁 구석에는
브랜디 술병이 주둥이가 깨어져 나간 채 넘쳐 흐르고 있었다. 시궁창 같은 곳에서
몇 달 동안을 살았다고 생각하자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당구공을 굴리고,
점수를 기록하고, 펀치술 값을 지불하고, 모욕과 경멸을 받으며, 날이 갈수록
타락해 갔었다. 나는 파이프를 끊임없이 씹어 대며 군거를 진창 불러 대던 내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한 과거의 환상들은 강당 안에 매달린 자주색
넥타이가 흔들거리는 모습을 봤을 때 느꼈던 그 섬뜩한 환상보다 더욱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나는 몸을 돌려 마구 달음질쳤다.
트렁크를 운반해 줄 짐꾼과 함께 학교 쪽으로 걸어가다가 펜싱 교사가 광장
위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손에 든 지팡이를 휘두르며 그는 펠트 모자를
삐닥하게 쓴 채 가느다란 콧수염을 반짝반짝 윤기나는 멋진 구두에 비춰 보면서
즐거운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경악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저렇게 잘생긴 인간이 그토록 못된 성품을 갖고 있다니!'
마침 나를 알아본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예의 그 후덕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가 점차 내게 가까와질수록 지난밤 궁륭에서
들었던 끔찍한 얘기가 되살아났다.
"당신을 한참 동안 찾았읍니다. 내가 무슨 얘길 들었는 줄 아십니까? 당신이...."
내 눈치를 살피며 떠벌리던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뚫어지게 쏘아보는 내
시선을 의식한 그는 거짓과 미사여구로 가득 찬 말을 어물어물 얼버무렸다.
분명히 그 비열한 인간은 자기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내 눈 속에서 많은 것을 읽어
냈을 것이었다. 그의 낯빛이 갑자기 창백해지는가 싶더니 허둥지둥 당황해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일순간에 불과했다.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다시 의젓함을
되찾은 그가 마치 강철과도 같이 차갑고 반짝이는 눈길로 내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단호한 표정으로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불만스런 것이
있으면 자기한테 와서 얘기하라고 중얼거리면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악당 같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가벼운 전율이 온몸에 퍼져 드는 걸
느꼈다.
학교에 돌아와 보니 모두 수업에 들어가고 학교 구석구석이 적막에 쌓여
있었다. 짐꾼을 데리고 나는 고미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짐꾼이 한 꾸러미로
싸놓은 트렁크를 어깨에 걸머지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얼음 창고처럼
으시시하게 소름이 돋는 골방에 잠시 머물렀다. 나는 장식품 하나 없는 더럽고
지저분한 벽과,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하게 파여진 새까만 책상을 휘둘러보고
창가로 가서는 흰눈이 소복이 쌓인 운동장의 플라타너스들을 무심히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정들어 버린 모든 것들에게 하나씩 마음 속으로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바로 그 순간, 천둥을 치듯 우렁찬 고함소리가 교실에서 들려왔다. 제르만느
신부님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자 내 마음은 아주 푸근해 졌으며, 눈가에선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뭔가 잃은 듯한 허전함에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두 번
다시 찾아 보지 못할지 모르는 그곳의 모습을 내 눈에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담아가고 싶었다.
나는 철망이 쳐진 높다란 창문이 연이어 나 있는 긴 복도를 지나갔다. 내가
처음으로 어둠 속을 더듬으며 헤매다가 검은 눈동자 아가씨를 봤던 그 복도
말이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언제까지나 신의 가호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는
이중문으로 된 교장실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가자 비오 씨의 방이
나타났다. 나는 그 방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열쇠, 그 끔찍한 열쇠꾸러미가 자물통에 매달린 채 바람결에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두려움에 몰아넣곤 하던 그 무시무시한 열쇠꾸러미를 잠시
노려보았다. 범하기 힘든 어려움이 밀려들자 갑자기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살그머니 열쇠 뭉치를 빼낸 나는 그걸
외투자락에 감추고는 황급히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중급반 운동장 끝에는 썩은 물이 고인 꽤 깊은 우물이 하나 있었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모두 수업을 받고 있을 때라 그 시간엔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안경잡이 마귀할멈도 아직 커튼을 걷어올리지 않았다. 범행을
하기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날 그토록 괴롭혔던 그 빌어먹을 열쇠꾸러미를
외투자락 안에서 꺼낸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힘껏 우물 속에다 집어던졌다...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던 열쇠꾸러미가 우물벽에 부딪쳐
튀어 올랐다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물 속으로 잠겨 버렸다. 이전에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범행을 저지르고 난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곳을 유유히 떠났다.
학교에서 막 빠져나오는데 정문 앞에서 비오 씨와 맞닥뜨렸다. 그는 빈손으로
얼이 빠진 듯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내 곁을 지나치던 그는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불쌍한 인간은 내가 그 열쇠를 혹시 봤는지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입만 달싹댈 뿐 아무 말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바로
그때, 수위가 계단 위편에서 몸을 기울이고 소리쳤다.
"비오 씨, 아무리 찾아도 열쇠가 안 보여요!"
비오 씨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저런!"
그러고는 그는 탐험여행을 떠나는 미친 사람처럼 사라졌다.
비오 씨가 곤경에 처해 허둥대는 꼴을 좀더 오래 즐기고 싶었지만 아름므 광장
쪽에서 합승마차의 출발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나는 마차가 나만
남겨두고 떠날까 봐 조급해 하며 다 녹슬어 버린 철근과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돌로 된 학교를 뒤로 한 채 서둘러 광장으로 뛰어갔다.
이제 가면 나는 음침하게 웅크린 싸르랑드 중학교도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다.
무례하고 말썽만 피우며 지긋지긋하게 속만 썩혔던 중급반 학생들도 내게서
멀어져 가고, 터무니없는 규율로 옥죄던 비오 씨의 규정집도 다시는 안 봐도 될
것이다. 악몽 같았던 한 시절을 추억 속에만 묻어 둘 뿐 결코 이곳을 찾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재수좋은 드 부끄와랑 후작은 오랫동안 바르베뜨 까페에서 갈고 닦았던 내
복수의 칼을 피하게 되었으니 내가 떠난 것을 몹시 좋아할 것이다.
나는 모든 걸 훌훌 떨쳐 버리고 세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최고 속력으로
달려 바티스트 삼촌 댁으로 향했다. 나는 어머니를 만나 뜨거운 포옹을 하고
파리의 라땡 구역에 있는 사랑하는 자끄 형의 방에서 하루빨리 형을 만나 보고
싶은 마음에 한없이 부풀어올랐다.
##운명의 첫걸음
어머니의 오빠인 바티스트 삼촌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둥글둥글한 성격의 소유자로 오래 전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결혼했는데 숙모를 몹시 두려워하는 공처가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사실 숙모는
비쩍 마르고 지나치게 인식해서 사람들이 밉쌀스럽게 생각하는 여장부였다.
삼촌은 그림 그리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4년 전쯤부터 그분은 물과 접시, 붓 등
그림 그리는 데 사용되는 온갖 잡동사니들 속에 파묻혀 신문의 삽화에다가 색을
칠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삼촌 집에는 낡은 '일뤼스 뜨라씨용' 신문과
'샤리바리' 신문, '마가쟁 삐또레스끄' 잡지 그리고 온갖 지도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일단 눈에 띄기만 하면 닥치는 대로 뭐든지 색칠부터 하려고 붓을 들고
달려들었다. 지독하게도 궁핍했던 시절엔 삽화가 있는 신문을 사려고 숙모에게
손을 내밀다가 심한 잔소리만 잔뜩 들었고 그럴 때마다 삼촌은 아무 책에나
색칠을 했다. 한번은 내 스페인어 문법책에다 삼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장도
빠짐없이 색칠 해 놓은 적도 있었다. 형용사는 푸른색으로, 명사는 분홍색으로,
그야 말로 알록달록한 현란한 포장지처럼 책 한 권을 온통 색칠해 놓았던 것이다.
여섯 달 전부터 어머니는 그 늙은 기인 삼촌과 앙칼지고 사나운 숙모 사이에
끼어 살아야 했다. 주눅이 들어 후줄그레한 모습으로 어머니는 하루종일 삼촌
옆에 앉아 뭔가 할 만한 일거리가 없을까 궁리하면서 하릴없이 하루를 보내곤
했다. 이따금 어머니는 삼촌이 색칠하다 내팽개친 붓을 빨거나 그림물감 접시에
물을 담아 두는 등 잔일을 해 주곤 했다. 우리 집안이 망한 뒤로 바티스트 삼촌은
툭하면, "에세뜨는 더 이상 쓸모없는 인간이야! 무능한 밥벌레라구!"하는 말을
입에 올리며 아버지를 무척 증오했다. 그래서 불쌍한 어머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삼촌이 떠벌리는 아버지에 대한 욕지거리를 들어야 했는데 어머니에겐 그것이
가장 서글픈 일이었다. 그 늙어 빠진 바보 같은 삼촌이 자기는 스페인어
문법책에다 색칠 따위나 하고 있으면서 의기양양하게 점잔을 빼며 그 말을 내뱉는
꼴이란 정말 가관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별볼일 없다고
무시하면서 스페인어 문법책에다 색칠하는 따위는 일에만 심혈을 기울이는 소위
점잖은 인간들을 많이 보아 왔다.
바티스트 삼촌 집에서 어머니가 이런저런 일들로 고달프고 서글프게 지냈다는
사실을 나는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삼촌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마음
편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긴 했다. 내가 불편하신 게
없느냐고 물어 보았을 때 어머니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아무런 기색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 집에 들어 섰을 때는 마침 저녁식사를 하려는 참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를 보자 기뻐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힘껏 껴안았다. 하지만 우리
불쌍한 어머니는 곧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더니 거의 말이 없었다.
접시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묵묵히 앉아 있던 어머니는 마지못해 한 두마디
내뱉았는데 낮게 가라앉은 어머니의 목소리는 온화했고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덜리고 있었다. 땟국물이 배이고 몸에 꽉 끼는 어머니의 옷은 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남루하여 나는 고개를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삼촌과 숙모는 몹시 못마땅한 듯 나를 냉랭하게 맞아들였다. 숙모는 무슨 일로
이렇게 갑작스럽게 왔느냐며 저녁은 먹었는지 건성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이미 먹었다고 대답하자 숙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숙모는 내가
저녁을 안먹었으면 어떡하나 하고 잠시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대충 차려진 저녁
상에는 완두콩 한 접시와 대구 요리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바티스트 삼촌은 내가 휴가를 얻어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나는, 자끄 형이
파리에다 나를 위해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 놨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형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내 장래를 걱정하신 어머니를 안심키고 또한
나를 삼촌이 나를 깔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내가 좋은 일자리를 갖게 된다는 걸 안 숙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다니엘, 네 엄마를 파리로 모셔가야 한다... 네 불쌍한 엄마는 너희들이랑
떨어져 있으니까 갑갑한 모양이야.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네 엄마는 우리한텐
부담스럽구나! 네 삼촌이 언제까지나 네 가족들을 먹여살릴 수는 없잖니?"
바티스트 삼촌이 입 속에 음식물을 잔뜩 집어넣은 채 볼멘소리로 말했다.
"사실 난 온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지...."
'온 가족을 먹여살린다'는 그 말이 무척 맘에 드는지 삼촌은 점잖은 표정으로
여러 번이나 되풀이했다.
늙은이들끼리 먹는 식사가 으례 그렇듯 그날의 저녁식사는 꽤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음식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고 나를 힐끗힐끗 바라보면서
겨우 몇 마디 궁금한 말들을 물었다. 숙모는 그러는 어머니를 감시하듯 살피고
있었다.
들으라는 듯이 숙모가 삼촌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 여동생은 아들을 만나니까 입맛이 없나 봐요! 어제는 빵을 두 덩어리나
먹었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는군요."
그날 밤 나는 정말 당장이라도 사랑하는 불쌍한 어머니와 함께 떠나고 싶었다.
인정머리 없고 삼촌과 숙모로부터 어머니를 당장 모시고 자끄 형이 있는 파리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 자신도 운을 하늘에 맡기고 무작정 형을 찾아가는 마당에
어머니를 모시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수중에 있는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는 내 여비도 빠듯했고, 세 사람이 함께 살기엔 자끄 형의 침대가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단 일분이라도 좋으니 어머니를 껴안고
속시원히 모든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틈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삼촌과 숙모는 어머니와 단둘이서만 있도록 놔두질 않는
것이었다. 저녁식사를 끝내자마자 삼촌은 스페인어 문법책에 색칠하는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고, 숙모는 은그릇을 덜그럭거리며 설겆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계속 곁눈질하며 어머니와 나를 감시했다. 어머니와 나는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다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
드디어 떠날 시간이 되어 나는 바티스트 삼촌 집을 나섰다. 내 마음은 너무도
서글프고 쓰라렸다. 역으로 이어진 가수로 길에 내린 어둠 속을 홀로 걸어가면서
나는 앞으로는 남자답게 행동하며 어서 빨리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꿈의 도시 파리로
바티스트 삼촌은 너무 연세가 많아 지금쯤 중앙 아프리카에 있는 5천 년 된
바오밥나무만큼이나 늙었을 것이다. 설사 내가 삼촌만큼 오래 산다 해도 3등
열차에 몸을 싣고 난생 처음 파리까지 여행을 하던 그 이틀 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2월 하순이었다. 아직도 날씨는 꽤 추웠다. 차창 밖으로는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과 바람, 싸락눈, 헐벗은 언덕, 물에 잠긴 들판, 길게 늘어선 마른 포도나무가
휙휙 스쳐 지나갔다. 기차 안에는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술 취한 선원들, 죽은
생선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자는 뚱뚱한 농부들, 장바구니를 무릎에 올려놓은
노파들, 아이들, 계집애들, 젖먹이는 여자들 그리고 파이프 담배와 브랜디, 마늘을
넣은 소시지가 든 상자, 썩은 지푸라기 냄새를 풍기는 짐짝이 한데 엉켜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객차 안의 너저분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기차가 출발할 당시 나는 하늘을 보려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한
8킬로쯤 갔을까, 한 간호병이 자기 아내와 마주 앉아야겠다고 우기면서 내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나는 수줍어서 불평 한마디도 못한 채 자리를 내주고는 좌석의
가운데 쪽으로 밀려와 린네르 씨앗 냄새를 풍기는 뚱뚱하고 못생긴 간호병과 그의
어깨에 기대어 계속 코를 골아 대는 상파뉴 출신의 키다리 북치기의 틈 밑에 끼어
앉아서 8천 킬로를 가야만 했다.
나는 머리를 등받이에 딱 고정시키고 입을 꾹 다문 채 원수 같은 두 인간
사이에 끼어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이틀을 보냈다.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 이틀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물론 내 수중엔 40쑤우짜리 동전이 하나 남아 있긴 했었다.
하지만 나는 파리의 기차 역에서 자끄 형을 못 만날 경우를 대비해서 그 동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배가 고프고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 그 동전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내 주위에 앉은 사람들은 내게
먹어 보란 한마디 권유도 없이 쉬지 않고 먹어 댔다. 내 무릎 밑에는 무지하게
크고 무거워 보이는 둔탁한 바구니가 놓여 있는 무척 불편했는데, 내 옆에 앉은
그 간호병은 거기에서 맛나게 조리된 돼지고기를 쉴새없이 꺼내서는 자기 아내와
나눠 먹는 것이었다. 그 바구니에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와 시장기를
부추겼고 내게 남은 마지막 동전을 써 버릴까 하는 고민을 하게 했다. 특히 둘째
날에는 더 심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여행을 하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배고픔이 아니었다.
싸르랑드를 떠날 때 나는 구두를 신지 않은 채 아주 얇고 목이 짧은 고무장화만
신고 있었다. 그 고무장화는 내가 기숙사를 순찰할 때 신던 것이었다. 그
고무장화는 아주 멋지게 생겼지만 겨울에, 그것도 3등 열차칸에서 그걸 신고
있자니 발이 시려 눈물이 찔끔찔끔 날 정도였다. 밤이 되어 승객들이 모두 잠들고
나면 나는 발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하려고 밤새도록 두 손으로 발을 주무르곤
했다. 어머니가 내 그런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그러나 나는 배가 등가죽에 붙어 버릴 정도의 허기가 끔찍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마냥 행복했다. 상파뉴 북치기와 간호병 사이의 내 자리가 숨이 막힐 정도로
비좁고 불편했지만 나는 고통을 모두 감수할 수 있었다. 파리에 도착하면 그 모든
고통은 끝날 것이고 자끄 형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날 밤이 지나고 새벽 3시 무렵, 나는 선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드디어 기차가 멈추고 기차 안은 술렁거렸다.
간호병이 자기 아내에게 "다 왔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눈을 부비며 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파리요!"
나는 황급히 승강구로 달려갔다. 집 한 채 보이지 않았다. 헐벗은 들판과 몇
개의 가스등과 석탄더미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멀리에서 붉은 불빛 하나가
주변을 밝히고 있었고 파도소리같이 우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 왔다.
조그만 램프를 든 남자가 큰소리로 외치며 승강구마다 돌아다녔다.
"자, 파리에 다 왔읍니다. 승차권을 미리 준비하세요!"
나도 모르게 갑자기 이 거대한 도시 파리에 도착했다는 것에 야릇한 흥분과
두려움을 느꼈다.
거대하고 잔인한 도시에 첫발을 닫은 내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5분 뒤 나는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자끄 형은 거기서 한 시간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깨를 약간 꾸부정하게 구부린 형이 전신주 같은 기다란 팔을
높이 쳐들고 철책 뒤에서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단숨에 형을 향해 달려갔다.
"자끄 형! 형!"
"야! 다니엘!"
개찰구를 막 통과한 나는 힘껏 자끄 형을 껴안았다. 그러나 역은 수많은
여행객과 화물로 들끓어 몹시 혼잡했기 때문에 우리들이 서로를 껴안고 오랜만의
해후를 즐기며 진심을 토로하고 영혼의 대화를 나눌 그러한 곳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떠밀며 발을 밟고 지나갔다.
"거기 서 있지 말고 빨리 나가요!"
개찰구 직원이 우리에게 고함을 쳤다.
"자, 어서 가자. 네 트렁크는 내일 찾도록 하고."
자끄 형이 내게 말하며 팔짱을 꼈다. 형과 나는 우리의 호주머니만큼이나
가벼운 걸음으로 라땡 구역을 향해 걸었다.
나는 그 이후에도 그날 밤에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의 감상과 역에서 받은
인상을 기억해 내려고 무던히 애쓰곤 했다. 사람들은 흔히 낯선 풍경에 접하면
특별한 인상을 받게 마련이지만 점차로 익숙해지면 차차 그때의 감상을
잊어버리게 되는 모양이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받은 강렬한 인상은 점차로
희미해져 갔고 지금은 그러한 강렬함을 다시는 맛볼 수 없게 되었다. 수년 전
어린애에 불과했던 내가 파리의 거리를 걸었을 때 파리는 온갖 흥미거리와
설레임과 아울러 잔인함과 폭력의 이중성을 가진 거대한 야수처럼 안개에 뒤덮여
나를 흥분과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시커먼 강을 가로지른 나무다리, 인적이 끊긴 강둑, 그 강둑을 따라 펼쳐진
널따란 공원이 기억난다. 우리는 그 공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철책 너머로는 짚으로 엮은 오두막집들, 잔디밭, 군데군데 패여
있는 물웅덩이, 서리가 내려앉아 반짝이는 나무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동물원이야. 흰곰도 있고, 원숭이, 보아뱀, 하마 그 외에도 얼마나 많다구."
형이 다정하게 말했다.
실제로 동물들의 냄새가 풍겨 왔고, 이따금씩 어둠 속으로 동물들의 날카로운
외침소리가 목쉰 듯한 울부짖음이 울려퍼졌다.
나는 형 옆에 바싹 붙어 철책 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파리의 밤, 두려움과 흥분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그 신비스런 공원을 보자 내가
마치 시커멓고 커다란 동굴 속에 혼자 내버려 진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게 느닷없이 덤벼들지도 모를 야수들이 득실거리는 거대한 동굴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자끄 형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다. 아! 자끄 형! 왜 그동안 우리는 함께 지낼 수 없었을까?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오랫동안 걸었다. 그러다가 형은
성당 하나가 우뚝 서 있는 자그마한 광장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쌩 제르멩 데 프레 광장이야. 우리 방은 저 위에 있어."
"아니 자끄 형! 그럼... 종탑 속에 방이 있단 말이야?"
"그래, 맞아... 시계를 보기엔 아주 안성맞춤이지."
자끄 형은 과장을 섞어 말했다. 사실 자끄 형은 성당 옆에 육칠 층쯤 되는 집의
고미다락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 방의 창문은 쌩 제르멩 종탑의 시계판과 거의
평행을 이루고 있었다.
방에 들어선 나는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야 따뜻한 불이다! 정말 행복해!"
나는 벽난로 쪽으로 달려가 고무장화가 녹아 버릴 정도로 가깝게 불길에 발을
쪼였다. 그때서야 내 신발이 이상하게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자끄 형이
폭소를 터뜨렸다.
"다니엘, 파리에는 나막신을 신고와서도 뽐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단다.
그런데 너는 고무장화를 신고 왔으니 정말 참신하구나. 자, 내 슬리퍼를 신거라.
그리고 배고플 텐데 우리 파이를 먹도록 하자."
자끄 형은 방 한쪽 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식탁을 벽난로 앞으로 끌어 왔다.
##슬픈 당나귀 자끄
그날 밤 자끄 형의 방은 얼마나 아늑했었는지 모른다. 벽난로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식탁 위를 밝게 물들였으며 방안은 온통 오래된 포도주를 두 번
다시 먹어 보지 못했다.
식탁 반대편에 나와 마주 앉은 자끄 형이 내게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눈을
치켜들 때마다 나는 어머니처럼 정겨운 형의 눈길과 마주치곤 했다. 나는 너무도
행복했기 때문에 흥분해서 계속 지껄여 댔다.
"어서 먹어."
형이 내 접시에 먹을 것을 담아 주면서 먹으라고 재촉했지만 나는 계속
횡설수설 떠들기만 했다. 그러자 형은 잠자코 저녁이나 먹으며 자기 얘기 좀
들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형은 체념한 듯한 순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와
떨어져 지내던 동안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차분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네가 떠나고 나자 집은 초상집같이 변해 버렸단다. 아버지는 일손을 놓고
가게에 앉아 온종일 혁명분자들에게 욕과 저주만 퍼부어 대셨어. 그리고 나더러는
바보 같은 놈이라고 고함을 치시는 거야. 그러나 장사가 될 리가 없지. 부도난
어음이 매일 아침 수북이 쌓이고, 집달리는 이틀에 한 번씩 들이닥쳤어.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우린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단다. 넌 마침 적당한 때 떠난 거야.
그런 생활이 한 달쯤 계속되고 난 뒤 아버지는 포도주 회사에 취직해서
브르따뉴 지방으로 떠나셨고, 어머니는 바티스트 삼촌 댁으로 가셨지. 두 분이
떠날 때 나는 역까지 쫓아가 차에 태워 드렸단다. 내가 얼마나 울었겠나 상상이
되겠지? 두 분이 떠나신 뒤 그나마 우리 집에 남아 있던 변변찮은 가구는 모두
팔렸지. 집달리가 우리 집 문 앞 큰길에다 내다 놓고 팔아 버렸어. 가구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가는 내복을 넣어 두던 장농 말이야. 나는 그걸 산 사람
뒤를 쫓아가서 '그걸 내려놔요!'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려고까지 했단다. 넌 내
마음을 이해하겠지?
결국 다 낡은 의자 하나하고 담요와 빗자루만이 남았단다. 그 빗자루는
랑떼른느 가의 우리 집 한구석에다가 모셔 두었지. 집세는 두 달치가 미리 지불돼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불기 없는 썰렁한 집에 혼자 남게 된 거야. 내가 얼마나
슬퍼했겠니? 매일 저녁, 사무실에서 돌아 오면 새록새록 슬픔이 솟아났단다.
시멘트로 사방이 둘러싸인 차가운 벽 속에 홀로 갇혀 있다는 걸 느낄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어. 그럴 때마다 나는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문을 힘껏
소리나게 여닫곤 했단다. 무덤 속 같은 적막을 참을 수 없었던 거야. 이따금씩
가게에 누가 오는 듯한 기척을 들으면 '가요!'라고 소리치며 뛰쳐나가곤 했지.
집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어머니가 창문 근처의 안락 의자에 앉아 서글픈
표정으로 뜨개질을 하고 계시는 듯한 착각을 하곤 했단다.
엎친 데 덥친 격으로 바퀴벌레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지. 우리가 리용에
이사와서 없애느라고 애깨나 먹었던 그 끔찍한 벌레들은 아마 네가 떠났다는 걸
알았는지 더 무섭게 들끓었어. 처음엔 나도 잡아 보려고 했어. 촛불과 빗자루를
든 채 밤새 부엌에서 마치 사자처럼 싸웠지만 늘 울음만 나왔지. 유감스럽게도 나
혼자서는 아무리 애써 봐야 소용없었어. 안누 할머니와 함께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 살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거야. 결국 바퀴벌레는 점점더 불어났지.
아마 그 습기찬 도시에 사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바퀴벌레들이 일제히
궐기해서 우리 집을 공격했던 게 틀림없어. 부엌 안은 금세 발도 들여놓지 못할
정도로 바퀴벌레들이 들어차 나는 두려움에 떨며 열쇠 구멍으로 우글거리는
벌레들을 들여다볼 뿐 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어. 아마 수십 억 마리는 족히 됐을
거야...아마 너는 그 저주받을 곤충들이 설마 그렇게 많을라구 하고 생각할 거다.
그래, 넌 그놈들을 잘 모를 거야. 그놈들은 어디든지 침략한다구. 문도 꼭꼭 잠가
놓고 열쇠 구멍까지 막아 놨는데도 그놈들은 부엌에서 기어나오더니 내가 침대를
가게로 옮겼다가 다시 응접실로 끌고 다녀야 했어. 너 웃는구나! 네가 그 광경을
봤어야 하는 건데.
빌어먹을 놈의 바퀴벌레들은 드디어 나를 복도 구석에 있던 우리 방에까지 몰아
냈어. 그놈들은 내가 거기서 이삼 일 동안 숨을 돌리도록 내버려 두더라. 어느날
아침 눈을 뜬 나는 수백 마리나 되는 바퀴벌레들이 빗자루를 타고 기어오르는 걸
보게 됐어. 그뿐만이 아니야. 줄지어 침대로 몰려오는 거야. 무기도 없이 내
최후의 보루에까지 몰린 나는 도망을 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지. 결국
의자와 담요, 빗자루를 몽땅 바퀴벌레에게 내주고 만 거야. 랑떼른느 가의 그
끔찍한 집에서 그렇게 쫓겨났어. 다시는 그 집에 돌아갈 엄두가 안 났지.
리용에서는 그 후에도 몇 달을 더 지냈단다. 하지만 그건 지루하고 암울하고
눈물로 지샌 세월이었어. 사무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울어 대는 나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렀지.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았어. 친구도 없었고.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란 네 편지를 읽는 거였단다... 아! 다니엘, 네 편지는 정말 멋지더구나!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넌 분명히 신문에다가도 글을 발표할 수 있을 거다. 넌
나랑은 틀리니까. 부르는 대로 받아쓰는 바람에 나는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재봉틀 같은 사람이 되고 말았어. 그러니 아버지가 '자끄, 이 당나귀보다
멍청한 놈아!'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 하지만 당나귀 같은 바보가
되는 것도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야. 당나귀는 충직하고, 끈기 있고, 부지런하고,
마음 착하고, 허리 힘도 센 짐승이거든... 이런 얘기는 집어치우고 아까 하건
얘기로 돌아갈까?
넌 우리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고 늘 편지에다 써보내곤 했었지. 나도 네
편지에 감동을 받아서 너처럼 훌륭한 생각을 갖게 되었단다. 하지만 내가
리용에서 버는 돈으로는 나 혼자 먹고 살기도 빠듯했지. 그래서 파리로 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파리에서 돈벌이를 하게 되면 우리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을 것 같았던 거야. 그래서 파리에 가기로 결정을 내렸단다. 그리고 나는
미리 준비를 했지. 깃털 빠진 참새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파리 거리를 무턱대고
헤매고 싶지는 않았거든. 다니엘, 너처럼 하나님 은총을 받은 애는 괜찮겠지만 나
같은 울보는 어림도 없지 않겠지?
그래서 나는 쌩 니지에 성당의 주임 신부인 미꾸 신부님을 찾아가서 소개장을
부탁드렸어. 쌩 제르맹 구역에선 꽤 영향력이 센 분이셨거든. 신부님은 어느
백작과 공작에게 보내는 두 통의 소개장을 내게 써주셨어. 너도 알겠지만 난 아무
옷이나 걸쳐도 폼나는 편이잖니? 그런데 마침 어떤 양복장이가 나를 보더니 잘
빠진 체격이라면서 검은색 정장 한 벌과 조끼, 바지를 몽땅 외상으로 맞춰 준
거야. 나는 소개장을 양복 속에 집어 넣고는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리용을
떠났지. 호주머니에는 단 돈 60프랑밖에 없었어. 35프랑은 기차삯이었고,
25프랑은 교제비였지.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7시경 나는 검은색 정장에 노란색 장갑을 끼고
거리로 나갔지. 다니엘, 넌 내가 꽤나 모자란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겠지. 파리에서
아침 7시라면 모든 사람이 잠자고 있거나 잠이 깼더라도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을
시간이거든. 하지만 난 그걸 몰랐어. 나는 어깨를 으쓱대며 새로 맞춘 무도화를
신고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를 내며 그 큰거리를 걸어다녔어. 또, 그처럼 이른
시간에 거리에 나오면 행운의 여신을 만날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지. 하지만 파리에서는 행운의 여신도 아침에는 늦게 일어나는가 보더라.
그래서 나는 호주머니에 소개장을 집어 넣은 채 쌩 제르멩 구역을
종종걸음으로 왔다갔다했단다.
우선 나는 릴르 가에 있던 백작 집으로 갔다가 쌩 귀욤므 가의 공작 집으로
갔어. 두 집의 하인들은 정원을 쓸거나 구리 초인종을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닦고
있더라. 그 하인배들한테 내가 미꾸 신부님 소개로 주인을 만나러 왔다고
말하니까 그들은 콧방귀를 뀌면서 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내 다리에 물을 끼얹는
것이었어... 왜 그랬는지 알겠니? 내 불찰이었지. 그 시간에 그런 집을 찾아간다는
것은 바로 티눈을 치료하는 의사밖엔 없었거든.
아마 너 같으면 다시 그 집에 찾아가지 않았을 거야. 더군다나 그런 하인배들의
멸시하는 듯한 눈길을 견뎌 내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바로 그날 오후
뻔뻔스럽게 다시 찾아가서 하인들에게 나를 주인에게 데려다 달라고 요구했지.
여전히 내가 미꾸 신부님 소개로 왔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내가 그렇게 용감하게
군 게 나로서는 다행이었어. 결국 그 두 사람을 만나 볼 수 있었거든. 하지만 나를
맞은 두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딴판이었어. 릴르 가의 백작은 아주 냉랭하게 나를
맞아들였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백작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어 잔뜩 겁을
집어 먹은 나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어. 백작 역시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 그는 미꾸 신부님의 편지를 읽어 보고는 그대로 호주머니에 수셔넣어
버리는 거야. 그러더니 쌀쌀맞은 표정으로 주소를 적어 놓고 가면 조만간 연락해
주겠다고 한마디 뱉고 마는 거야.
참 더러운 인간이었지. 나는 완전히 기가 죽어 그 백작 집에서 나왔단다,
다행히도 쌩 귀욤므 가에서 받은 환대 덕분에 내 마음은 훈훈해졌지. 거기서 만난
공작은 세상에서 가장 상냥하고 유쾌해 하는 뚱뚱보였어. 게다가 그분은 미꾸
신부님을 몹시 존경한다는 거야. 신부님과 관계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쌩
귀욤므 가에서는 환영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정말이지 그 공작은
선량하고 좋은 사람이었어.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지. 베르가모뜨 담배를 한
움큼 내게 쥐어 준 공작은 내 귀를 잡아당기더니 뺨을 토닥거리면서 말했단다.
'자네가 일할 만한 자리를 책임지고 찾아 보겠네. 곧 적당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게야. 틈나는 대로 와서 나와 이런저런 얘기나 하자구.'
나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몹시 기뻐하며 공작 집을 나왔어. 그리고 이틀
동안 그분을 찾아가지 않았어. 가볍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세째 날이
되어서야 쌩 귀욤므 가에 있는 공작 저택을 찾아갔단다. 곤색 바탕에 금박이 있는
옷으로 정장을 한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가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내 이름을
묻더라구. 그래서 나는 으쓱대며 미꾸 신부님 대리인이라고 말했지.
잠시 후에 그 남자가 되돌아 와서 뭐라고 했는지 아니?
'공작님께서 지금은 몹시 바쁘니 미안하지만 다른 날 찾아오시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얼마나 무안해 했겠는가를 생각해 봐라. 다음날 같은 시각에 나는 다시
공작을 찾아갔지. 그 우락부락한 문지기가 마치 금강잉꼬처럼 층계참에 버티고 서
있더구나. 멀리서 나를 알아 본 그가 '공작님은 외출하고 없어요'라고 소리치더군.
그래도 난 공작이 들어오면 오늘도 미꾸 신부님의 대리인이 다녀갔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왔어.
그 이후로도 계속 찾아갔지만 한번도 공작을 만날 수가 없었단다. 그때마다
공작은 목욕중이거나, 미사를 올리고 있거나 아니면 정구를 치고 있다는 거야.
심지어는 사교계 사람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못 만난다고 핑계를 대더군. 사교계
사람들과 말이다! 그건 틀에 박힌 핑계일 뿐이야. 솔직이 말해서 나는 사교계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결국 나는 내가 끊임없이 되풀이했던 '저는 미꾸 신부님의 대리인입니다'라는
말 때문에 내 처지가 우스꽝스럽게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
나는 더이상 내가 누구의 대리인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층계에
버티고 서 있던 덩치 큰 문지기는 내 뒷모습에 대고 미꾸 신부님의 대리인이
분명하냐고 묻는 거야. 그러면 정원에 나와서 빈둥거리던 푸른 옷을 입은 몇몇
하인들이 폭소를 터뜨렸어. 고약한 놈들이었지. 내가 미꾸 신부님 대리인만
아니었더라면 그 녀석들을 몽둥이로 후려쳤을 텐데.
파리에 도착한 지 열흘쯤 지난 저녁이었어. 그날도 창피한 기분으로 쌩 귀욤므
가에서 돌아왔지. 그때만 해도 나는 쫓겨날 때까지 그곳을 찾아가겠다고 속으로
단단히 결심했었거든. 그런데 그날 수위실에 짤막한 편지가 와 있는 거야.
누구한테서 왔을 것 같니? 글쎄, 릴르 가의 그 무뚝뚝한 백작한테서 온 거였어.
당장 자기 친구인 다끄빌 후작에게 찾아가 보라는 거야. 후작이 비서를 한 명
구한다면서 말이야. 생각해 봐라. 내가 얼마나 기뻐했겠니! 또한 내가 얼마나 많은
교훈을 얻었겠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차갑고 인정머리 없는 백작은 나한테
신경을 써줬는데 반면에 그렇게 친절하던 공작은 아예 자기집 층계에서 나를
따돌리다니. 미꾸 신부님의 대리인인 내가 푸른 옷을 걸친 무례한 하인들의
조롱거리가 된 거라구... 다니엘, 그게 바로 인생이야. 파리 같은 삭막한
도시일수록 인생에 대해선 빨리 터득하게 되지.
그 즉시 나는 다끄빌 후작 댁으로 달려갔지... 그렇게 해서 나는 비쩍 마른 키
작은 후작을 만나게 되었단다. 노인네답지 않게 그분은 벌처럼 민첩하고 쾌활한
성격이시더구나. 참 희안한 양반이었지. 갸름하고 창백한 귀족적인 얼굴에
머리칼은 칠흑처럼 검었는데 눈은 하나뿐이었어. 한쪽 눈은 아주 오래 전에 칼에
찔려 실명하고 말았다는 거야. 하지만 하나 남은 눈이 너무나 강렬해서 아무도
후작을 애꾸눈이라고 무시할 수가 없었어. 두 눈을 가진 사람보다 더 완벽하게
꿰뚫어볼 수 있기 때문이야.
그 자그마한 괴짜 노인 앞에 선 나는 이런저런 시시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어. 그러자 그분은 내 말을 도중에 자르면서 이렇게 말하더구나.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두게. 난 그런 건 좋아하지 않아!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구. 난 내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네. 불행히도 일을 늦게 시작했고 난
이제 늙었기 때문에 더이상 허비할 시간이 없어. 3년 동안 쉴새없이 일을 해야
겨우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올해 내 나이 일흔이야. 더군다나 다리도 편치 못해.
하지만 정신은 말짱하니깐 앞으로 3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회고록도
끝낼 수 있을 거야. 내겐 허비할 시간이 단 일 분도 없다네. 그런데도 전에 데리고
있던 내 비서 녀석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지. 내가 매료될 정도로 무척 영리했던
녀석이야. 그 녀석이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려고 했어.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아. 한데 갑자기 오늘 아침 내게 찾아와서 결혼식을 올려야 되니 이틀 동안
휴가를 달라고 그러질 않겠나 글쎄. 나는 이틀 동안의 휴가는커녕 단 일 분도 줄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지. 그랬더니 그 녀석은 '하지만 후작님...' 어쩌고 하면서
한사코 내게 휴가를 달라고 매달리더군. 나는 내 사전에는 '하지만 후작님...'
따위의 말은 없다고 대꾸해 주었지. 그러면서 홧김에 이틀 동안 휴가를 가려거든
아예 영원히 휴가를 가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그 녀석은 '정 그러시다면 당장
그만두겠읍니다, 후작님'하고 나가 버리더군. 그 녀석 뒤통수에 대고 잘 가라고
말해주었지. 그렇게 해서 그 녀석이 그만두게 된 거야... 자, 이제 그 녀석 대신
믿을 사람은 자네뿐이네. 몇 가지 꼭 지켜 주어야 할 조건이 있어. 우리 집에는
꼭 아침 8시까지는 와야 되네. 점심은 지참하도록 하게. 정오까지 내가 부르는 걸
받아쓰고 정오가 되면 혼자식사를 해야 하네. 난 점심을 암 먹거든. 점심식사를
재빨리 끝내면 다시 일이 시작되네. 내가 외출을 할 경우엔 자네도 날 수행해야
해. 연필과 종이를 들고 말이야. 아무 데서나 언제라도 부를 수가 있으니까.
마차를 타거나, 산보하거나, 공식적인 방문을 하거나 간에 어디서라도 내 말을
받아써야 한단 말이야. 저녁식사는 나와 함께 드세. 저녁식사가 끝나면 내가 낮에
불러 줬던 것을 읽어 확인을 해야 하네. 나는 8시에는 잠자리에 드니까 자넨
다음날까지는 자유일세. 봉급은 저녁식사를 제공하고 월 백 프랑이야. 대단한
액수라고는 할 수 없지만 3년 후에 회고록이 끝나면 그 대가로 아주 큰 선물을
주지.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결혼을 하지 말 것이며,
부르는 것을 빨리빨리 받아써야 한다는 것일세. 부른대로 받아쓸 수 있나?'
'그럼요!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해낼 수 있어요, 후작님!'
대답하면서 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혼났단다. 평생 남이 부르는 것을 받아써야만
하는 내 가혹한 운명이 너무도 우습게 생각되었어.
그러자 후작이 다시 말했어.
'음, 그렇다면 가기 앉게. 여기 종이와 잉크가 있네. 지금 당장 일을 시작하도록
하세. 24장을 부르지. 제목은 '드 비렐르 씨와의 분쟁'일세. 쓰도록 하게.'
그는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지친 매미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읖조리기
시작했단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 괴짜 양반 집에 들어가게 되었지. 알고 보니 그분은 참
좋은 분이더라. 지금까지는 서로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어제 저녁에
네가 도착한다는 것을 안 그분은 네게 주라고 오래된 포도주 한 병을 주시더구나.
나는 그런 고급 포도주를 매일 저녁식사 때마다 마신단다. 나는 늘 점심식사를
준비해 가지고 가는데 문장이 새겨진 식탁에 세련된 무스띠에르 접시를 놓고 그
위에 2쑤우짜리 싸구려 이태리제 치즈를 담아서 먹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넌
웃지 않을 수가 없을 거야. 후작님이 점심을 싸오라고 하시는 건 그분이
인색해서가 아니라 늙은 요리사 밸로아 씨가 내 점심을 준비하는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해서야... 지금 내 생활은 나쁘지는 않아. 난 아주 만족스러워. 후작님의
회고록은 매우 교훈적이야. 언젠가는 내게 도움이 될 드 까즈 씨나 드 비렐르
씨에 관한 많은 지식을 배우고 있단다. 밤 8시가 되면 그때부턴 자유야. 도서실로
신문을 읽으러 가거나 아니면 친구 삐에로뜨 씨에게 놀러 가기도 해... 너,
삐에로뜨 씨 생각나니? 알겠지? 어머니의 소꼽동무였던 세벤느 지방의 삐에로뜨가
아니야. 지금은 점잖게 삐에로뜨 씨라고 불리지. 그는 아주 유명한 도자기 가게를
갖고 있단다. 그는 우리 엄마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아무때라도 그 집에
드나들 수가 있었단다. 이렇게 추운 겨울 밤에는 그가 내 말동무가 돼가지고
외롭고 실의에 찬 나를 많이 위로해 주었어... 하지만 이제는 네가 왔으니 겨울
밤을 어떻게 보낼까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구나... 너도 그렇지, 안 그러니,
아우야? 오! 다니엘, 난 정말 기분이 흡족해! 우린 정말 행복하게 살 거야!"
##쌩 제르멩의 종소리
자끄 형의 얘기가 다 끝나고 이제 내가 얘기할 차례가 되었다. 사그라드는
벽난로 불이 마치 '이제 그만 자야지'하고 손짓하는 듯이 보였고, 촛불은 '이제
제발 좀 자라! 이러다간 촛대 받침대까지 타고 말겠어'라고 고함을 지르는 듯이
보였으나 우린 개의치 않았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정도로 넘쳐 흘렀다.
싸르랑드 중학교에선 보낸 암울하고 서글픈 생활에 대한 내 얘기는 자끄 형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자끄 형은 팔꿈치를 식탁 위에 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선 내 얘기가 끝날 때까지 한번도 끼어들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사납고 비열한 망나니들과 박해와 증오, 멸시와 모욕, 늘 화난 사람처럼 열쇠를
흔들어 대던 비오 씨,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한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숨이
막힐 정도로 비좁은 지붕 밑 고미다락방, 눈물로 지새웠던 밤들... 바르베뜨
까페에서 하사관들과 마셔 댄 압셍뜨 술, 폭주와 빚으로 나날이 타락해 가던 생활,
그 끔찍한 생활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되어 준 제르만느 신부님, "자넨 평생
어린애로 남아 있을 걸세"라던 신부님의 충고... 난 그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자끄 형에게 들려 주었다. 성품이 착한 자끄 형은 중간중간 몸을
부르르 떨면서 안타까와했다.
"불쌍한 것, 불쌍한 것."
그러고는 내 얘기가 다 끝나자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르만느 신부님 말이 맞아. 다니엘, 넌 아직 어린애야. 혼자 힘으로 내 인생을
개척하기엔 넌 너무 어려. 내 보호를 받으며 이곳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야. 오늘부터 난 네 형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도 해야 되고
어머니의 역할도 대신해야겠구나. 어때 괜찮겠지? 말해 봐, 다니엘! 내가 엄마
역할을 한다고 해도 널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귀찮게 하진 않을 거야. 다만 나는
어머니나 아버지 같은 네 인생 행로를 따라 걸으면서 네 손을 잡고 이끌어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해야만 너도 다른 애들처럼 안심하고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으로서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래야만
인생에서 패배하지 않고 승자가 될 수 있지. 그렇지 않을까?"
나는 형의 목에 매달리며 울먹였다.
"아, 자끄 형. 형은 정말 내게 엄마와 같은 존재야!"
나는 옛날 리용 시절의 자끄 형처럼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제 자끄
형은 더이상 울지 않았다. 형 말대로 형의 눈물샘은 다 말라 바닥이 난
모양이었다. 이젠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형은 절대 울지 않을 것이다.
그때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왔다. 동창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왔다.
희미한 햇살이 수줍은 듯 흔들리며 방안으로 스며 들어왔다.
"날이 밝았구나. 이제 좀 자거라... 빨리 자리에 누우렴... 넌 잠을 자야 해."
"그럼 형은?"
"아, 난 너처럼 이틀 동안이나 기차 안에서 시달리지 않았잖니? 게다가 후작님
댁에 가기 전에 도서실에 들려 책도 몇 권 반납해야 되거든. 늑장부릴 시간이
없어... 다끄빌 후작님은 농담을 하지 않으셔... 이따가 저녁 8시에 돌아올께... 푹
쉬고 밖에 거리구경하러 나가도 좋아. 너한테 충고할 게 있는데...."
자끄 형은 마치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나 같은 시골뜨기에겐 대단히 중요한
여러가지 충고들을 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아직 잠들진 않았지만
벌써 정신이 가물가물 흐려지며 비몽사몽 헤매기 시작했다. 피로와 눈물, 허겁지겁
허기를 채운 파이... 이젠 완전히 긴장이 풀리고 점점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근처의 레스토랑과 내 조끼 호주머니 속에 돈을 넣어 두었다는 것과 거기선 그
다리를 건너야 하고, 그 길을 쭉 따라 올라가고, 혹시 잘 모르면 순경들에게 물어
보고, 돌아올 땐 꼭 쌩 제르멩 종탑을 찾아야 한다는 것 등등 형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반쯤은 잠든 상태에서도 특히 내게 와 박히는 말 한마디는 쌩
제르멩 종탑에 대한 것이었다. 마치 도로 푯말과 같이 일렬로 늘어선 두개, 다섯
개, 열 개의 쌩 제르멩 종탑이 내 침대 주위에 우뚝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형이 그 종탑들 사이로 왔다갔다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은 불을 들쑤셔
일으키고, 십자형 무늬의 커튼을 쳐서 아침햇살을 가려 주었다. 그러고는 내게
다가와서 발에다가 외투를 덮어 주고,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문을
닫고는 조용히 나갔다.
얼마를 잤는지 언뜻 잠에서 깨어났다가 자끄 형이 돌아올 때까진 계속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울리는 종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그만 잠이 싹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싸르랑드 중학교의 종소리,
시도때도 없이 울려 대던 그 끔찍한 쇠 종소리였다.
"땡! 땡! 빨리 일어나! 땡! 땡! 빨리 옷을 입어!"
후다닥 뛰쳐 일어난 나는 방 한가운데 우뚝 서서 기숙사에서처럼 입을 벌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 어서 서둘러라!"
잠시 후 정신이 든 나는 자끄 형의 방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에 겨워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미친 듯이 이리저리 깡총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싸르랑드의
종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그곳의 종만큼이나 무자비하고 메마른 소리를
내는 근처 공장의 종소리였다. 하지만 싸르랑드 중학교의 종소리는 더 심술궂고
혹독했었다. 다행히도 그 종은 8천 킬로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종이 아무리
크게 울려 댄다 해도 그 소린 이제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앙상한 가지를 드리운 나무들이 우울하게 서 있는
상급반 운동장과 벽에 바싹 붙어 걸어가는 비오 씨를 보게 되리라는 상상을 하며
창문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창문을 열었다.
바로 그때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거대한 쌩 제르멩
종탑에서는 매일 아침, 낮, 저녁에 한 번씩 예수강림을 기념하기 위해 올리는
삼종기도를 알리기 위해 종소리가 열두 번 연속적으로 울렸다. 그 무겁고 장중한
소리는 열려진 창문을 통해 들어와서는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듯 온 방안에 하나씩
내려앉았다. 쌩 제르멩 종탑의 삼종기도 종소리에 답하듯 파리의 다른 구역의
종들도 장엄하게 울려 댔다. 파리는 아직 제 모습을 속속들이 들어내지 않은 채
마치 포효하는 한 마리의 맹수 같았다. 나는 잠시 창가에 서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둥근 지붕과 종루 그리고 종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도시의
소음이 갑자기 커지면서 내게로 올라왔다. 나는 그 소음 속에, 군중 속에, 삶
속에, 열정 속에 빠져들어 뒹굴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마치 술에 취한 듯 중얼거렸다.
"자! 파리를 만나러 가자!"
##그립고 먼 추억의 겨울밤
그날 밤 파리 시민들 중에는 저녁식탁에 둘러 앉아 "오늘 낮에 별 이상한 꼬마
녀석을 다 봤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긴 머리칼에 껑충하게 올라간 짧은 바지, 해괴하게 생긴 고무장화, 푸른색 양말,
촌스런 깃털 장식, 어린애에게는 도저히 보기 힘든 팔자걸음걸이 등의 그 볼상
사나운 내 모습은 파리 사람들의 주목을 끌 정도로 괴상망칙했다.
마침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어서 그날은 마치 봄날씨처럼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아주 포근했다. 거리에는 완연한 봄기운이 돌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몰려 나와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쉴새없이 떠들면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때문에 약간 얼이 빠진 나는 담장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어쩌다가 누구랑 부딪치기라도 하면 금세 얼굴이 빨개져서 "죄송합니다!"라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그래서 되도록 사람이 많은 가게 앞에선
걸음을 멈추지 않으려고 주의했고, 길을 묻지도 않았다. 비록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기는 했지만 어쨌든 쉬지 않고 걸었다. 사람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난 몹시 거북했다. 어떤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는 내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며 신기하다는 듯 웃기도 했다. 한번은 어떤 부인네가 나를
가리키며 옆의 부인에게 "저 사람 좀 봐"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만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더욱 나를 당황하게 했던 것은 경찰의
의심스러워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뿐만 아니라 거리 구석구석에서 그 빌어먹을
시선들이 소리없이 나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총알처럼
날아오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나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을 걷다 보니 가느다란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는 큰길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곳에는 사람도 차도 무척 많았고 게다가 너무 시끄러워서
나는 완전히 겁에 질린 채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간담? 집으로 어떻게 돌아간다지? 내가 쌩 제르멩
종탑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면 사람들은 날 무시하겠지. 부활절날 로마에서 왔다가
길을 잃어버린 거지처럼 보일지도 몰라.'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좀더 생각해 보려고 극장 포스터가 붙어 있는 안내판
앞에서 마치 저녁에 어떤 연극을 볼까 망설이며 포스터를 보고 있는 사람 같은
자세로 잠시 서성거렸다. 그 극장 포스터들은 아주 흥미진진해 보였지만 쌩
제르멩 종탑으로 가는 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여차하면
통금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힘차게 울려퍼질 때까지 거기 그렇게 서 있어야 할
판이었다. 그때 갑자기 내 옆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나만큼이나 놀란 표정으로
잽싸게 다가왔다.
"이런! 세상에... 다니엘 너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니?"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대답했다.
"보면 몰라? 산보하고 있잖아!"
자끄 형은 감탄하는 듯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너 벌써 파리 사람이 다 됐구나?"
내심 나는 형을 만난 것이 너무너무 기뻐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옛날에
우리가 리용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마중 나오셨던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형의 팔에 매달리며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참 기쁘구나! 후작님은 목이 잠겨 버리고 말았어.
몸짓을 보고 받아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니? 그래서 난 내일까지 휴가를 얻게
된 거야. 그러니 우리 맘놓고 산보를 해보자꾸나...."
자끄 형이 내 손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우리는 팔짱을 꼭 끼고 파리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렇게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형이 곁에 있어서 그런지 거리를 나다니는 게 두렵지 않았다. 만약에 날 보고
비웃거나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만 안 두겠다고 다부지게 마음을 먹고,
나는 식민지 알제리에 주둔한 프랑스 보병처럼 잔뜩 위엄을 부려 근엄한 표정으로
으시대며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끄 형은 나를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왜 그러냐고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드디어 형이 입을 열었다.
"고무장화가 편하니?"
"그럼!"
"그래! 그렇겠지... 그렇지만 내가 부자가 되면 네가 밖에 신고 나다닐 만한
멋진 구두를 사줄께."
비록 자끄 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악의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듣자 마자 나는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밝은 햇살이 쨍쨍 내려쬐는 그 큰길에서 고무장화를 신은 내 자신이 너무나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며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형이 멋진 구두를
사 준다면서 다정한 말로 위로했지만 난 당장 돌아가 버리고 싶었다.
우리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벽난로 가에 앉아 우리는 처마 밑의 두 마리
참새모양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 무렵에 누군가 문을 두드려 나가
보니 후작네 하인이 내 트렁크를 들고 서 있었다.
자끄 형이 트렁크를 받아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말했다.
"잘 됐다! 네 트렁크를 한번 열어 보기로 할까?"
자끄 형이 내 변변찮은 트렁크에서 이것저것 여러가지 잡동사니를 꺼내면서
하나씩 하나씩 큰소리로 열거할 때는 민망스러워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한편으론 재미있기도 했다.
"사전, 넥타이... 음 사전이 또 있네. 아니! 파이프잖아! 너 담배 피우는구나?
아니 또 파이프, 맙소사! 웬 파이프가 이리도 많아? 이 두꺼운 책은 또 뭐냐? 야!
이 '학생징계일지' 꽤 재미있겠는데... 부끄와랑 5백 줄, 수배롤 4백 줄, 부끄와랑
5백 줄, 부끄와랑... 부끄와랑... 이게 사실이냐? 부끄와랑이란 애는 아무도 못
말릴 정도로 심한 말썽꾸러기인가 보구나."
그러더니 갑자기 자끄 형은 놀란 듯이 고함을 쳤다.
"와! 다니엘, 이게 뭐니? 시잖아, 시야! 아직도 시를 쓰는구나? 넌 참 숨기는
것이 많아! 왜 편지엔 그 얘길 하지 않았어? 옛날에는 나도 시를 썼었지. 너
'믿음이여! 믿음이여!'라는 내 시 기억나니? 12편으로 완성하려고 했던 시 말이야.
야! 우리 서정시인 다니엘의 시를 좀 보기로 할까?"
"아! 안 돼, 형! 제발, 그러지마, 정말 대단찮은 거야."
형이 웃으며 말했다.
"시인들은 누구나 다 똑같단 말이야. 자! 여기 앉아서 시를 읽어 주렴. 안 그럼
내가 직접 읽는다. 내 글읽는 솜씨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너도 알고 있겠지?"
형이 막무가내로 날 몰아 붙이는 바람에 난 울며 겨자 먹기로 내 시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가 싸르랑드 중학교에 있을 때 야외수업 나갔다가 풀밭의 밤나무
밑에서 학생들을 감시하며 지은 시였다.
그 시들이 썩 잘 된 것인지 아니면 시시한 것이었는지 지금은 잘 생각이 안
난다. 다만 난 그 시를 읽었을 때 많은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만이 기억날 분이다.
사실, 단 한번도 남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고 게다가 자끄 형은 보통사람과는 달리
어느 정도 시를 아는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처음엔 분명히 형에게 우습게 보일
거라고 생각되어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읽어가면서 점점 나는 마치 부드러운
음악과도 같은 내 시에 도취되었으며 목소리도 차분히 안정되어 갔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채 형은 꼼짝도 하지 않고 내 시를 듣고 있었다.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노을이 창문을 붉게 물들였고 건너편 지붕 위에선 고양이 한
마리가 선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형의 표정은 마치 한 편의 비극을
보고 있는 꼬메디 프랑세즈 극장의 지배인같이 몹시 심각해 보였다. 나는 그런
형의 표정을 힐끔힐끔 보면서 내 시를 쉬지 않고 낭송했다. 내가 시를 다
낭송하고 시집을 조용히 덮은 순간, 형이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
목에 매달렸다. 뜻밖이었다.
"오! 다니엘! 정말 멋져! 정말 멋진 시야!"
나는 약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형을 쳐다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굉장해! 굉장하다구! 트렁크 안에 이렇게 귀중한 걸 놔두고는 아무 말 않다니!
그럴 수가 있니?"
자끄 형은 입 속으로 무언가를 웅얼웅얼하면서 줄곧 손짓해 가며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주저할 필요가 없겠어, 다니엘. 넌 시인이야, 넌 앞으로 유명한 시인이 될
거고, 그 방면으로 네 인생을 설계해야 돼."
"아, 안돼! 그건 정말 힘든 일이야... 특히 데뷔를 하기도... 그때까진 거의
수입이 없거든."
"그까짓것! 내가 두 사람 몫을 벌 테니 걱정할 것 없어."
"그럼 우리가 다시 짓기로 한 우리 집은 어떡하고?"
"집? 내가 책임지지. 내겐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어. 난
그걸 확신해. 넌 우리 집안의 이름을 빛내야 해. 그렇게 되면 부모님께서도 그런
훌륭한 자식을 두었다는 데 대해서 얼마나 흐뭇하고 자랑스러워하시겠니!"
그래도 난 몇 가지 이의를 제기하며 형을 말리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형의
열정이 나를 설득시키고 말았다. 결국 나는 슬그머니 형의 의견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속엔 이미 시에 대한 동경이 용솟음치고 있었으며, 평생을
바쳐서라도 라 마르띤느처럼 위대한 시인이 되겠다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형은 계속해서 내가 서른다섯 살이 되기 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들어가야
한다고 얘기했다. 나는 형과는 달리 보수적이고 낡은 사고방식으로 가득 찬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그곳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형의 그 의견에
대해서는 완강히 거부했는데 그럴수록 형은 더욱 집요해졌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곳에 들어가야지. 그래서 그 늙은이들의 혈관에 진취적인
새 세대의 젊은 피를 조금씩 집어넣어야 해... 그리고 말이야, 어머니는 또 오죽
기뻐하시겠냐? 그러니 생각을 잘 해보라구!"
어머니를 들먹이며 얘기하자 내 완강한 거부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가엾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도대체 이의를 달 수가 없었다. 별수없이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만약 회원들이 너무 그 유명한 메리메처럼
탈퇴해 버리면 그만이라고 위안했다.
이젠 노을도 다 사라지고 밖은 깜깜했다. 쌩 제르멩 종탑의 종소리가 마치 내가
이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된 것을 축하라도 하려는 것처럼 경쾌하게 울려
왔다.
"자, 이제 저녁 먹으러 가자!"
마치 아카데미 회원과 동행하는 것처럼 형은 아주 자부심을 느끼면서 나를 쌩
브느와 가의 한 간이식당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자그맣고 초라한
레스토랑이었는데 단골손님들을 위한 식탁 하나가 구석자리에 놓여 있었다.
접시와 수저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는
낡은 옷을 걸친 가난한 사람들 틈에 끼어 우리는 저녁을 먹었다.
형이 나지막이 말했다.
"거의 대부분이 문인들이야."
형의 그 말에 문인이란 늘상 이렇게 가난해야 하는가를 새삼 느끼며 나는 좀
우울해졌다. 그러나 형의 열정을 식힐까 봐 두려워 내색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꽤 즐겁게 식사를 했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된 듯한 기분으로
나는 열심히 먹어 댔다. 식사를 마치고 우린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창문
위에 말타듯 걸터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동안 자끄 형은 책상에 앉아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형은 몹시 불안해 하는 것 같았다. 손톱을 깨물기도
하고 뒤치락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꼽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환성을 지르며 일어섰다.
"만세!... 성공이다!"
"뭐가 성공이야, 형?"
"우리들의 예산을 짜는 데 성공한 거야. 내 빠듯한 수입으로 예산을 짜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그렇지 않겠니? 조금만 아껴쓴다면 우리 둘이 살아가는
데 한 달에 60프랑만 있어도 되겠어."
"뭐, 60프랑?... 형은 후작님한테 한 달에 백 프랑씩 받지 않아?"
"그래. 그런데 그 중에서 40프랑은 엄마한테 보내드려야 돼. 그래야 우리
가족이 다시 모여 살 수 있지... 그럼 나머지 60프랑 중에서 방세 15프랑 내고...
그리 비싼 건 아니야. 그저 잠이나 자고... 유지비도 많이 드는 방은 아닌
데다가... 별 신경쓸 일도 없을 정도로 작은 방이지. 자고 나서 침대시트나
정리하면 돼. 그것도 내가 하면 되고."
"나도 그쯤은 할 수 있어, 형."
"아냐, 그럴 순 없지. 아카데미 회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야. 그건 그렇고
다시 예산 문제로 돌아가자꾸나... 그러니까 방세가 15프랑, 석탄값은 5프랑만
들여도 돼. 내가 매달 공장에 가서 직접 석탄을 가져오니까. 그럼 40프랑이 남지?
네 식비로 30프랑을 쓰자. 넌 아까 갔던 그 간이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도록 해라.
디저트 없이 한 끼에 15쑤우인데, 너도 먹어 봐서 알겠지만 그다지 나쁘진 않아.
그런데 점심은 5쑤우짜리로 때워야 한다. 괜찮겠니?"
"그럼! 난 괜찮아."
"좋아, 그래도 아직 10프랑이 남지? 세탁비로 7프랑이 필요할 거고... 내가
시간이 있으면 직접 해도 될 테지만, 유감이야... 그러면 3프랑이 남는데 그 중
30쑤우는 내 점심식사에 들어갈 거고... 참, 너도 알지? 난 후작님 댁에서 매일
훌륭한 저녁식사를 하니까 너처럼 영양가 많은 점심식사를 할 필요는 없단
말이야. 마지막으로 남은 30쑤우는 잡비나 담배값, 우표값으로 쓰고 그리고
예비비로 좀 남겨 두는 거야. 이렇게 되면 정확히 60프랑이 맞아 떨어지지? 자,
어때?"
자끄 형은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우뚝 섰다.
"아니야, 예산을 다시 짜야겠는데... 뭘 빠뜨렸어."
"뭘?"
"초값 말이야!... 초가 없으면 밤에 네가 어떻게 시를 쓰겠니? 그건 꼭 필요한
지출이고, 한 달에 최소한 5프랑은 있어야 해... 어디서 5프랑을 빼낸다지?
엄마에게 보내는 돈에선 절대로 안 돼... 음... 그래, 그거야! 이제 3월이 되면 곧
봄이 되고, 그러면 따뜻할 거야."
"그래서, 형?"
"그럼, 다니엘, 날씨가 따뜻해지면 석탄이 필요없잖아? 석탄 살 돈 5프랑으로
초를 사는 거야. 그럼 문제는 해결됐지. 분명히 난 타고난 재무부 장관감이야...
어때? 이번엔 빠뜨린 것 없이 딱 들어맞지? 쯧, 아직 구두하고 옷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해결해 보기로 하고... 난 매일 저녁 8시부터는
자유의 몸이니까 어디 자그마한 가게의 경리자리를 찾아 봐야겠어. 틀림없이 내
친구 삐에로뜨 씨가 쉽게 자리를 얻어 줄 거야."
"아! 그럼 형이랑 삐에로뜨 씨랑은 꽤 친한가 보구나? 그 집에 자주 가?"
"그럼, 거의 매일 가다시피 하지. 밤에는 음악을 연주하거든."
"야! 삐에로뜨 씨는 음악가인 모양이지?"
"아냐! 그가 아니고 그의 딸이 음악가지."
"딸이라구? 딸이 있단 말이야? 형! 삐에로뜨 양은 예뻐?"
"아이 참, 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묻는구나. 나중에 대답해 줄께. 지금은
너무 늦었다. 자도록 하자."
형은 무척 당황한 듯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아주 큰
동작으로 마치 아가씨처럼 정성스럽게 침대시트의 가장자리를 매트리스 밑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 침대는 우리가 옛날 랑떼른느 가에 살 적에 함께 쓰던 것과 거의 똑같은
일인용 쇠침대였다.
"자끄 형, 랑떼른느 집에 있던 우리 침대 생각나? 우리가 밤에 몰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아버지가 '빨리 불 꺼라! 안 그러면 내가 달려갈 테다!'라고 고래고래
소릴 지르셨잖아!"
형이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추억에 잠겨 옛날을 더듬어
보았다. 쌩 제르멩 종탑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우린 두
눈이 더욱 말동말똥해지고 있었다.
"자, 이제 그만 자자!... 잘 자!"
형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형은 이불 밑에서
킥킥거리고 웃어 댔다.
"왜 웃는 거야, 형?"
"미꾸 신부님 때문에... 후후후... 너 그 성가대 양성소의 미꾸 신부님 생각나지?
생각나니?"
"물론이지!"
그러고 나서 우린 쉬지 않고 웃어 대며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이번에는 내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형 이제 그만 자자구."
그런데 잠시 후에 오히려 내가 또 입을 열고 말았다.
"그리고 루제 말이야, 형! 그 아이 생각나?"
그러자 다시 웃음이 터져나왔고, 다시 얘기가 끝없이 계속되었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주먹으로 힘차게 벽을 치는 바람에 우린 깜짝
놀랐다.
형이 내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꾸꾸블랑이야."
"꾸꾸블랑? 그게 뭔데?"
"쉿!... 목소리를 낮춰... 옆방에 사는 여자의 이름이야. 우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고 투덜거리는 거야."
"얘기해 줘, 형! 옆방 여자는 왜 그렇게 이상한 이름을 갖고 있지? 흰
뻐꾸기처럼 생겼어? 왜 꾸꾸블랑이야? 젊어?"
"왜 그런진 보면 알게 돼. 언젠가는 계단에서 마주치겠지. 여하튼 빨리 가자. 안
그러면 꾸꾸블랑이 더 화를 낼지도 모르니까."
형이 촛불을 끄고 눕자 나는 어릴 때처럼 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고미다락방 속의 시인
쌩 제르멩 데 프레 광장의 쌩 제르멩 성당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육층 건물의
지붕 바로 밑에는 손바닥만한 창문이 하나 나 있다. 그 밑을 지나칠 때마다
창문을 올려다보면 나는 가슴이 메이곤 한다. 그 창문이 달린 방이 바로 자끄
형과 내가 살았던 방이다. 그 옛날 그 창가에 식탁을 끌어다 놓고 앉아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먼 훗날 내가 처량하고 허리 굽은 할아버지가 되어 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동정의 미소를 지었던 일이 생각난다.
저 높은 곳에서 어머니 같은 자끄 형과 살 때 쌩 제르멩 종탑의 낡고 커다란
벽시계는 매시간마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게 들려 주었었다. 젊음과 용기로 가득
찼던 그때의 그 시간들 중 몇 시간만이라도 또다시 누릴 수 있도록 시간을 되돌려
볼 수는 없을까! 그때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온 정열을 다해 열심히 시
쓰는 데 몰두했던 시절이었다.
매일 아침 자끄 형과 나는 창문으로 비춰드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자끄 형은 눈 뜨자마자 집안 일을 시작했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형은 물을 길어 오고, 방을 청소하고, 책상을 정돈했다.
"형, 조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형은 웃으면서 단 두 마디로 빗대어 말했다.
"그런 생각하지 마, 다니엘. 이층에 사는 부인이 또 보면 어쩔려구?"
그러면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입을 다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형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고 나서 처음 며칠 동안은 아침 일찍부터 내가
마당으로 물을 길러 내려갔었다. 다른 시간만 같았더라도 나는 감히 물동이를
들고 내려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른 아침인 그 시간에는
모두들 잠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한 손에 물동이를 든 내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깨어나면 곧바로 대충 옷을 걸친 채
계단을 뛰어내려가곤 했었다. 그 시간이면 마당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따금씩 붉은 조끼 차림의 마부가 펌프 근처에서 마구를
씻을 때가 있었다. 그는 이층에 사는 부인의 마부라고 했다. 혹시라도 그 마부와
우물 곁에서 마주치게 되는 날이면 난 몹시 거북해 하며 서둘러 행동했다. 그런
날이면 부끄러워 벌개진 얼굴로 후다닥 펌프질을 해서 물이 반 정도밖에 차지
않은 물동이를 들고는 뛰다시피 올라오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올라오고 나서는
허둥대던 내 꼴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하지만 다음날, 마당에서 그
마부를 보면 또다시 거북해져 허둥댔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이었다. 그날따라
다행히도 그 마부가 우물가에 없었다. 그래서 느긋해진 나는 물동이를 가득 채워
가볍고 유쾌한 기분으로 계단을 올라왔다. 그런데 이층 계단을 막 올라왔을
때였다. 어떤 부인이 바로 내 앞으로 걸어내려오는 것이었다. 이층에 사는 바로
그 부인이었다. 우아한 자태로 그녀는 책을 읽으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얼굴빛은 다소 창백했지만 비단 리본을 머리에 단 모습은 아름다와
보였다. 그녀의 아랫입술 가에 있는 자그마한 하얀 흉터가 눈길을 끌었다. 내
곁을 지나치려다 그 부인이 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 채 물이 찰랑대는 물동이를 여전히 손에 들고 벽에 찰싹 붙어
그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때의 내 모습은 마치 물장수처럼 빗질을 안해
부시시한 머리에 셔츠 단추는 풀어져 목을 다 드러내 놓은 채 마치 물에 흠뻑
젖은 생쥐 같은 몰골이었다. 나는 너무나 창피해서 정말 쥐구멍 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부인은 너그러운 여왕처럼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대로 계단을 밟고 내려가 버렸다. 허겁지겁 방에
올라온 나는 미칠 듯 흥분해서 형에게 그 얘기를 횡설수설 늘어놓았고 그러한
나를 형은 한참이나 놀려 댔다. 하지만 다음날 형은 아무 말 없이 물동이를 들고
물을 길러 내려갔다. 그때부터 형은 매일 아침 손수 물을 떠왔다. 나는 형에게
말한 것을 후회하며 미안해 했지만 형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층의 그
부인을 또 만날까 봐 너무도 두려웠던 것이다.
집안 일을 끝내면 자끄 형은 후작 댁에 가서 하루종일 받아쓰는 일을 했다.
형은 이슥한 밤이 돼서야 지쳐 돌아왔다. 온종일 나는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뮤즈여신과 단둘이서만 보냈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열려 있는
창가에 식탁을 갖다 놓고 앉아 쉬지 않고 시를 써 내려갔다. 이따금씩 참새 한
마리가 우리 방 낙수 홈통에 날아와서 물을 마시곤 했다. 참새는 잠시 뻔뻔스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는 다른 참새들한테 가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참새들이 가냘픈 두 다리로 지붕 위를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낮에는 쌩 제르멩 종탑의 종소리도 여러 번 우리 방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 종소리가 나를 찾아올 때마다 무척 기뻤다. 우렁찬 종소리는 창문으로
날아들어와 방안을 음악으로 가득 메꿔 주었다. 이따금씩 아름답고 즐거운
종소리가 16분 음표에 맞춰 노래 부르거나, 우울하고 구슬픈 종소리가 마치
눈물을 흘리듯 뚝뚝 방안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곧이어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왔다. 정오 삼종기도 종소리가 들려 오면 태양의 옷을 입은
천사장이 우리 방으로 들어와서 온 방안을 눈부신 빛으로 가득 채웠다. 저녁
삼종기도 종소리가 울리면 우울한 천사가 달빛을 타고 내려와서는 그 큰 날개를
흔들면서 온 방안에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키곤 했다.
뮤즈여신과 참새들 그리고 종소리만이 우리 방을 찾아올 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파리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쌩 브느와 가의
간이식당에 갈 때마다 나는 늘 다른 손님들과 멀찌감치 떨어진 식탁에
자리잡으려고 신경을 썼다. 그러고는 접시만 내려다보면서 재빨리 먹어치우곤
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나는 모자를 집어들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가서 실컷 기분을 푸는 일도 없었고 산보를 하는 법도 없었다. 룩상부르 공원으로
음악을 들으러 가지도 않았다.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그 병적인 수줍음은
볼품없는 고무장화와 남루한 의복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눈에 띄게 초라한 내
모습 때문에 바깥에 나가는 일이 두렵고 부끄러워 난 고미다락방에서 결코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씩 파리 특유의 습기 찬 봄날 저녁이면 나는
간이식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쾌한 모습의 젊은이들과 마주치곤 했다. 커다란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문 채 연인들과 함께 팔짱을 끼고 거들먹대며 걸어가는
그들을 보면 나는 다시 생각을 다잡아 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육층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촛불을 켜고 자끄 형이 돌아올 때까지 미친 듯 공부에 매달리곤 했다.
형이 돌아오면 방의 분위기가 대번에 바뀌었다. 노래하고, 웃고, 낮에 있었던
일을 서로 떠들어 댔다. 소란스럽게 두런거리면서 즐거운 밤을 보내곤 했다.
"공부 많이 했니? 시는 잘 써지구?"
형은 이렇게 묻고는 괴짜 후작이 그날 불러 준 이야기를 해주거나, 날 위해
호주머니에 넣어 온 과자를 꺼내 주고 그걸 내가 와작와작 씹어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즐거워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책상으로 돌아앉아 시 쓰는 일에
몰두했다. 방안을 두세 번 여기저기 휘둘러보고는 내가 시 쓰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방을 나가며 말했다.
"네가 공부하는 동안 난 '거기'나 가서 놀다 올께."
'거기'란 삐에로뜨 씨의 집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끄 형은 틈나는 대로 삐에로뜨
씨의 집에 찾아가곤 했는데 나는 첫날부터 형이 왜 그렇게 자주 그 집에
들락거리는지 알아차렸다. 형은 나가기 전에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매만지고
넥타이를 서너 번씩이나 고쳐매며 옷차림에 몹시 신경을 섰는데 그러한 형의
행동을 보고서 모든 걸 짐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형을 거북하게 하지
않으려고 모른 척하며 속으로 웃어 버리곤 했다.
형이 방에서 나가고 나면 나는 혼자 시 쓰는 데 파묻히기 시작했다. 그럴
때쯤이면 방안에는 정적이 감돌고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아 괴괴하기조차
했다. 새들이나 삼종기도 종소리 등 모든 친구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오로지 뮤즈여신과만 머리를 맞대고 있는 셈이었다. 9시쯤 되면 누군가 큰
계단에서 갈라지는 자그마한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웃사촌인 꾸꾸블랑 양이 돌아오는 발자국소리였다. 그때부터 나는 시 쓰는 일을
포기해야 했다. 내 모든 신경이 이웃 여자의 방으로 옮아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 신비로운 여인 꾸꾸블랑이 도대체 뭘 하는 여자인지 곰곰 생각해
보곤 했다. 나는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형한테 그녀에 대해
물어보면 형은 약간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만 말했다.
"저런! 그 굉장한 이웃 여자를 아직도 못 만났단 말이니?"
'내가 그 여자랑 알고 지내는 걸 형은 원치 않나 봐... 그 여잔 아마 라땡
구역에서도 소문난 바람둥이 여공일지도 모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바람둥이 여공에 대해서 즐거운 공상을 하곤 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귀를 기울이면서 늘 변함없이 들려
오는 소리를 즐겼다. 우선 병마개를 뽑았다가 다시 막는 듯한 소리가 여러 번
들려 오고 나면 쿵 하며 마루바닥에 무겁게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흘러 왔는데 마치 병든 귀뚜라미 같은 목소리였다. 생전
처음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슬픈 곡조였다. 그 곡이 끝나고 나면
무슨 말인가가 계속되었지만 난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톨로꼬또티깡!
톨로꼬또티그낭!'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음절만이 들려 올 뿐이었다.그러고는
후렴구인지 그 부분만을 가장 뚜렷하고 힘차게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부르다가 마지막으로 "톨로꼬또티강!"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 오고 나면
그때부터는 느리고 둔탁한 숨소리만 들려 왔다. 나는 그녀가 내는 소리
하나하나에 무척이나 호기심을 느꼈다.
어느날 아침, 막 물을 길어 온 자끄 형이 신바람이 나서 방에 뛰어 들어오더니
내게 소곤거렸다.
"너 그 이웃 여자를 보고 싶으면... 쉿! 저기 아래에 있어."
단숨에 나는 층계참으로 달려나갔다. 형의 말대로 꾸꾸블랑은 방문을 활짝 열어
젖힌 채 방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드디어 그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지금껏 내가 그려온 그녀의 환상은 무참하게 깨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실제 모습은 정말 끔찍했다. 그 방은 벽에 장식품 하나 걸려 있지
않아 썰렁했고 바닥에는 짚을 넣은 매트 한 장이 내팽개쳐지듯 깔려 있었다.
벽난로 위에는 빈 브랜디 병이 몇 개 놓여 있었고, 매트 위쪽으로는 어디에
사용되는지 알 수 없는 큰 절구가 마치 성수반처럼 벽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누추한 다락방 한가운데는 소름끼치게 섬ㅉ한 흑인 여자가 서 있었다. 왕방울같이
커다란 두 눈, 검은 암양털처럼 짧고 숱이 많은 곱슬머리, 그리고 낡고 터질 듯이
꽉 조이는 붉은색 치마를 입은 꾸꾸블랑이 처음으로 내게 그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음, 그 여자 어떻던?"
형은 낭패한 얼굴로 돌아온 내 모습을 보고 말하다 말고는 폭소를 터뜨렸다.
나도 형을 따라 목이 아파 말을 못할 만큼 속 후련하게 웃어 댔다. 바로 그 순간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넓적한 검은 얼굴 하나가 쑥 안으로 들어왔다가는 이렇게
외치며 금방 사라졌다.
"백인놈들이 검둥일 놀리는군! 재밌다!"
우리는 더욱더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웃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자끄 형이 그 흑인 여자인 꾸꾸블랑은 이층에 사는
부인을 모시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요술을 부린다고 믿고
있었다. 메트 위에 걸려 있는 철구는 요술을 부리는 데 사용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매일 밤 여주인이 외출하면 그녀는 그 고미다락방에 틀어박혀
고꾸라져 쓰러질 때까지 브랜디를 마시며 흑인 영가를 부른다고 했다. 그래서
병마개를 따는 소리,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 단조로운 노래소리가 옆방인 우리
방에까지 들려왔던 것이다. 또한 그 '톨로꼬또티강'이라는 소리는 희망봉 근처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일종의 의성어인 듯했다. 마치 '랄랄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날부터 꾸꾸블랑이 옆방에 산다는 사실 때문에 내 기분은 완전히 잡쳐 버렸고
그전처럼 상상의 나래를 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다. 밤이 되어 그녀가
계단을 올라와도 내 가슴은 쿵쿵대며 뛰지 않았다. 벽에 귀를 기울이는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이따금씩 밤의 침묵을 뚫고 그 '톨로꼬또티강'소리가 들려 오면
나는 그 슬픈 후렴을 들으며 까닭모를 서글픔을 느끼곤 했다. 그 구슬픈 후렴은
서러움과 우울함으로 가득 찬 내 인생을 미리 보여 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즈음 자끄 형은 철물공장에 한 달에 50프랑씩을 받는 경리자리를 얻게
되었다. 매일 저녁 후작 댁에서 나오면 그곳으로 곧장 가서 일해야 했다. 불쌍한
형은 만족스럽기도 하고 화나기도 한 표정으로 내게 그 소식을 알려 주었다.
"그럼 '거기'는 언제 가지?"
형은 내 말에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대답했다.
"일요일에 가면 되지 뭐."
그날부터 형은 자기 말대로 일요일에만 '거기'에 갔다. 하지만 그건 형으로서는
너무도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형은 한번도 내게 '거기'에 같이 가자고 권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형을 그토록 사로잡는 '거기'가 어떤 곳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나는 자존심
때문에 같이 가자고 부탁하지 않았다. 고무장화를 신고 어딜 간단 말인가? 하지만
어느 일요일, 삐에로뜨 씨의 집에 가려던 형이 다소 머뭇거리며 내게 말했다.
"나랑 같이 '거기' 가고 싶지 않니? 네가 가면 무척 기뻐할 텐데."
"형, 지금 농담하는 거야?"
"그래, 난 잘 알아... 삐에로뜨 씨의 응접실은 시인이 있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낡은 토끼만 잔뜩 쌓여 있거든...."
"아냐! 그래서 그런 게 아냐, 형! 다만 내 옷이 이래서...."
"오! 정말... 그 생각을 못했구나."
형은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는 지자 이유를 발견해서 기쁘다는 듯 방을
나섰다.
그런데 계단을 막 내려서던 형이 숨을 헐떡거리며 되돌아왔다.
"다니엘, 보기 흉하지 않은 자켓과 구두가 있으면 나와 삐에로뜨 씨 네 집에
가겠니?"
"그럼 가구 말구!"
"그렇다면 가자... 네가 필요한 걸 모두 사줄께. 그리고 '거기' 가는 거야."
"월말이라 돈이 좀 있어."
나는 새옷 생각에 너무 기뻤던 나머지 형의 감정이나 이상한 어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훨씬 뒤에 가서야 나는 그때 형의 속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나는 형의 목에 매달리며
좋아했었다.
그날 형은 로얄 궁 앞을 지나가다 그 부근에 있는 헌옷가게에 들러 비교적
깨끗한 옷을 내게 사주었다. 우린 의기양양하게 삐에로뜨 씨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엄마의 소꼽동무
삐에로뜨 씨가 스무 살 정도의 청년시절엔 장차 그가 쏘몽 가의 라루트
도자기상회를 이어받아서 연간 20만 프랑의 거액을 벌어들이는 큰 상회를
경영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당시 삐에로뜨는 한번도 마을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고 세벤느 지방
사투리밖에 할 줄 몰랐다. 정직하고 건실한 젊은이였던 그는 누에를 쳐서 연간
5백 프랑을 모으기도 했다. 게다가 오르베뉴 지방의 춤도 썩 잘 추는 호탕한
기질이었으며, 찬송가도 잘 불렀다. 하지만 다른 청년들처럼 술을 먹고 술집
주인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 또래의 청년들처럼
삐에로뜨에게도 아주 착한 성품을 가진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는 일요일마다
저녁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를 뽕나무 밑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가보트 춤을 추곤 했다. 그녀는 유난히 키가 커서 꺽다리 로베르트라고 불렸다.
로베르트는 열여덟 살로 그녀 역시 삐에로뜨처럼 고아였는데 가난했지만 성실하게
누에를 쳤고 읽고 쓰는 것도 아주 능숙했다. 세벤느 지방에서는 지참금보다도
이러한 능력이 더 값어치 있게 여겨졌다. 로베르트를 매우 자랑스러워하던
삐에로뜨는 자기가 당첨만 되면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
번씩이나 성수에 손을 담그고 기원한 후에 뽑았는데도 당첨되지 않았다. 불쌍한
삐에로뜨는 로베르트와 결혼할 비용을 마련하지 못했고 실망하여 비탄에 잠겼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유모였던 삐에로뜨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소꼽동무인 그를
도와 주기로 결심했다. 그때만 해도 에세뜨 집안은 부자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에게 2천 프랑을 빌려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삐에로뜨는 로베르트와 결혼할 수
있었고 이 세상의 행복을 몽땅 차지한 행운의 사나이처럼 보였다. 항상 어머니의
착한 마음씨에 고마와하며 은공을 갚으려고 고심하던 그들 두 사람은 고향에서는
도저히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돈을 벌기 위해선 파리로 가야 한다고
용단을 내렸다. 고향을 떠난 지 일 년이 지나도록 그들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이었다. 어머니는 '삐에로뜨와 그의 아내'라고 서명이
된 감동적인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편지에는 저축하여 처음으로 모은 돈 3백
프랑도 동봉되어 있었다. 다음해에도 그들은 '삐에로뜨와 그의 아내'라고 서명이
된 편지와 함께 천 이백 프랑을 보내왔다. 편지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에세뜨
가족들에 대한 축원이 쓰여 있었다. 그 편지가 배달되었을 당시엔 우리 집은
완전히 거덜난 상태였다. 공장을 막 팔아치웠으며, 이번엔 우리가 고향을 등져야
할 판이었다. 어머니는 비탄에 빠져 '삐에로뜨와 그의 아내'에게 답장을 쓰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소식이 두절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자끄 형이 파리로 가서 그를 찾아갔을 때 그 착한 삐에로뜨 씨는 그의 아내가
파리에 와서 생활을 일구기까지의 이야기들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시적이었다.
파리에 도착하자 삐에로뜨 씨의 아내는 일을 가리지 않고 남의 집 하녀 일부터
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들어간 집이 바로 라루트 상회였다. 라루트 집안은
인색하고 편집광적인 부유한 상인 집안이었는데 점원도 하녀도 두려고 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손수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선생, 난 쉰 살 때까지만 해도 내가 직접 바지를 만들어 입었단 말이요!"
라루트 영감은 늘 그렇게 자랑했다고 한다. 말년이 되어서야 겨우 그들은 바로
그 자리에 로베르트가 들어간 것이었다. 12프랑밖에 못 받고도 해야 할 일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가게, 가게 뒷방, 오층에 있는 아파트, 매일 아침 가득 채워야
하는 물통 두 개... 그런 열악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 세벤느 지방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다. 세벤느 출신인 로베르트는 젊고, 민첩하고, 어린
암소모양 허리 힘도 좋았고, 일도 열심히 했다. 그녀는 단숨에 그 많은 일들을
해치웠고 게다가 힘든 기색은 전혀 내보이지 않고 하루종일 두 노인을 보며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인들은 싹싹하고 꿋꿋한 성격의 로베르트를 차츰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그녀의 사생활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라루트
영감은 어느날 자진해서 삐에로뜨 씨가 원한다면 장사 밑천을 약간 빌려 주겠다고
제의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아무리 쌀쌀맞은 인간도 이렇게 느닷없이 친절을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삐에로뜨 씨는 늙은 조랑말 한 마리와 짐수레를 사서 고물장사를
시작했다. 그는 온 파리 장안을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휩쓸고 다녔다.
"쓸모없는 물건들을 몽땅 치워 드립니다!"
꾀바른 삐에로뜨 씨는 팔지는 않고 사들이기만 했다. 깨진 항아리, 고철, 헌
종이, 병조각,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가구, 낡은 장식즐 등 이젠 값어치도 없고
쓸모도 없으면서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이면 뭐든지 모조리
달갑게 사들였다. 거저 얻는 것들도 상당히 되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돈도 받지
않고 그냥 가져가기만 해도 고마와했다.
"쓸모없는 물건들을 몽땅 치워 드립니다!"
삐에로뜨 씨는 몽마르뜨르 거리에선 꽤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기반을 닦으려는 모든 행상인들처럼 그 또한 안 주인이나 하녀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을 독특하고 기묘한 노래가락을 하나 만들어 냈다.
"쓸모없는 물건들을 몽땅 치워 드립니다!"
삐에로뜨 씨는 조랑말에게 아나스타지한테 느릿느릿 구슬픈 어조로 주절주절
얘기를 하며 다녔다.
"자! 가자, 아나스타지! 가자, 아가...."
착한 아나스타지는 머리를 푹 숙인 채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아나스타지와 골목을 누비며 외쳐 댈 때마다 이 집 저 집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봐! 여봐! 아나스타지!"
순식간엔 짐수레엔 고물이 수북이 쌓였다. 그러면 아나스타지와 삐에로뜨 씨는
몽마르뜨르 거리에 있는 고물 도매상에 가서 짐을 부려놓고 꽤 많은 돈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겐 전혀 쓸모없고 귀찮은 물건을 팔아 상당한
수입을 벌어들였다.
그 기발난 장사로 비록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먹고 살기에는 넉넉할
정도는 되었다. 첫해에 그는 라루트 영감에게 빌린 돈을 갚고도 우리 집에 3백
프랑을 보냈다.
세월은 흘러서 삐에로뜨 씨가 파리에 온 지도 3년째에 접어들었다. 그해는 바로
혁명이 일어나던 18xx년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쓸모없는 늙은 왕을 몰아
내기에만 너무나 열중해서 삐에로뜨 씨의 외침에는 더이상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루종일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 대도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매일 저녁 빈 수레를 끌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아나스타지도
죽어 버렸다. 그래서 그는 고물장사를 때려 치웠다, 그때 노약해진 라루트 부부는
가게에 점원을 한 명 두기로 결정했는데 그 일을 삐에로뜨 씨에게 맡기고
싶어했다. 삐에로뜨 씨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그 보잘것없는 일을 오래
하지는 않았다. 파리에 온 이후로 로베르트는 삐에로뜨 씨에게 매일 저녁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는 글을 쓰는 데 별 불편이 없을 정도로는 실력이
있었고 사투리도 많이 고쳐져 파리 시민들과 대화도 제법 잘 통했다. 라루트
상회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더욱더 노력했고 학원에 다니면서 계산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런 덕분에 그는 일자무식이나 다름없는 라루트 영감을
대신해서 장부정리를 하게 됐고 늙어서 다리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라루트
부인 대신 물건을 팔기도 했다. 그럴 즈음 삐에로뜨 양도 세상에 태어났고, 재산도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처음에는 라루트 상회의 장사에만 관계했는데 좀 지난
후에는 동직조합에도 가입했다.
그러던 어느날,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된 라루트 영감이 장사에서 손을 떼면서,
자신의 영업권을 삐에로뜨 씨에게 양도했다. 영업권을 인수 받은 그는 사업을
더욱 확장시켜 3년 만에 가게를 완전히 자기 소유로 하고 드디어 꽤 번창한 멋진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더니 그 즈음에 마치 남편이 자길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으면
죽으려고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로베르트는 그만 병에 걸렸고 시름시름 앓더니
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 삐에로뜨 씨의 집으로 가면서 자끄 형은 내게 이 소설 같은 삐에로뜨
씨의 이야기를 쭉 들려 주었다. 자끄 형은 내게 새 웃도리를 사준 것이 무척
뿌듯했던지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빙 돌아서 삐에로뜨 씨의 집에
갔다. 그래서 그 집에 도착할 때쯤엔 그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자끄 형의
귀띔으로 그 착한 삐에로뜨 씨는 자기 딸과 라루트 씨를 우상처럼 떠받들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그가 약간 말이 많아 상대방을 피곤하게 한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그는 말하는 도중 할 말을 찾느라고 세 마디가 끝날 때마다
반드시 이렇게 덧붙인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그가 왜 그런지도 이해가 갔다.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지 못한 세벤느 지방
사람들은 사투리가 너무나 심해 파리 시민들이 사용하는 고급 프랑스어엔 쉽게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래서 뭐든지 그가 생각하는 것은 우선 랑그도끄 사투리로
입에서 맴돌았기 때문에 말을 하기 전에는 속으로 되뇌이면서 단어 하나하나마다
고급 프랑스어로 바꾸어야만 했다. 그래서 딴에는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라고 말하며 내심 시간을 벌려는 말버릇이었다. 자끄 형의 말을 빌자면
그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번역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은 삐에로뜨 양에
대해선 그녀가 열여섯 살이며, 이름은 까미유라는 것만을 말했을 뿐 마치
철갑상어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9시쯤 되어서야 그 유서깊은 리루트 상회에 도착했는데 막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빼꼼이 열려진 문 앞의 인도에 나사못과 덧문, 쇠막대기 등 신기한
장치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가게 안에선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올 뿐
어두컴컴했다. 도자기 램프 하나가 카운터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불빛을 받으며 뚱뚱하고 혈색이 좋아 보이는 삐에로뜨 씨가 웃으며 금화를 세고
있었다. 누군가가 가게 뒷방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자끄 형이 카운터로 다가가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삐에로뜨 씨!"
계산을 하고 있던 삐에로뜨 씨가 자끄 형의 목소리에 눈을 들었다. 그러더니
램프 불을 받으며 형 옆에 서 있는 나를 보고는 두 손을 맞잡으며 고함을
내질렀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러고는 놀란 듯이 입을 쫙 벌린 채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자끄 형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그랬어요?"
그 착한 삐에로뜨 씨가 중얼거렸다.
"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응, 이게...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마치
에세뜨 부인을 보는 것 같군."
자끄 형이 말했다.
"특히 눈이 닮았어요. 눈을 보세요, 삐에로뜨 씨."
"턱도 닮았군 그래. 오목하게 들어간 게 꼭 닮았어."
삐에로뜨 씨가 이렇게 대답하더니 날 더 자세히 보려고 램프갓을 걷어 올렸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은 나를 바라보면서
눈짓, 손짓을 계속 해대는 것이었다. 삐에로뜨 씨가 갑자기 카운터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다니엘, 어디 한번 껴안아 보세...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마치
에세뜨 아가씨를 보는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나는 모든 걸 알아차렸다. 그맘때에 나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었고
오랫동안 어머니를 보지 못했던 삐에로뜨 씨로서는 젊은 시절의 어머니의 모습을
내게서 발견했던 모양이었다. 그 착한 사람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계속
내 손을 잡고, 날 포옹하고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우리 어머니와
2천 프랑, 자기 아내, 딸 까미유, 아나스타지에 대해 띄엄띄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밤새도록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자끄 형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말을 중도에서 끊으며 말했다.
"자, 이제 그만 카운터에 앉으세요, 삐에로뜨 씨!"
삐에로뜨 씨가 무안해 하며 말을 그쳤다. 그는 자기가 너무 많이 말을 한 것이
창피한 모양이었다.
"자네 말이 옳아. 자끄. 내가 너무 떠들었어...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군...
그리고 또 우리 딸아이가... 이런 경우에 곡 들어맞는 말인데... 우리 딸아이가
너무 늦는다고 투덜댈 거야."
"까미유가 안에 있나요?"
자끄 형이 지나치는 말투로 흥미 없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네, 자끄... 딸애는 안에 있어...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딸애는 다니엘과 만나게 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네. 그러니
어서 올라들 가게나... 계산이 끝나면 나도 곧 올라가지...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더이상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끄 형은 내 팔을 잡고 플루트소리가 들려 오는
안쪽으로 끌고 갔다. 삐에로뜨 씨의 가게는 꽤 넓었고 시설도 잘 돼 있었다. 어둠
속으로 불룩한 물병과 오팔 빛의 구형 유리 덮게, 보헤미아산 담홍색 술잔, 커다란
크리스탈 술잔, 오목한 스프 그릇, 양 옆으로 천정에 닿을 정도로 쌓아 놓은
접시들이 반짝거렸다. 그것은 마치 도자기 요정의 궁전 같아 보였다. 가게 뒷방의
반쯤 열린 문 틈으로 가스등의 불빛이 끄물끄물 흘러나왔다. 방안에서 금발의
키큰 청년 하나가 침대 겸용인 긴 소파에 앉아 구슬프게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었다. 자끄 형이 그 방 앞을 지나치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안녕하쇼"라고
인사를 하자 금발 청년도 아주 냉랭하게 플루트를 두 번 불어서 대답했다. 마치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형이 나직이 속삭였다.
"여기서 일하는 점원이야... 그 키큰 금발 녀석은 언제나 플루트를 불어서 우릴
못살게 굴지... 너는 저 플루트소리가 좋니, 다니엘?"
나는 '이 집 딸도 그 소리를 좋아해?'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형을
괴롭히기는 싫었기 때문에 아주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아냐, 자끄 형, 난 플루트소리를 좋아하지 않아."
삐에로뜨 씨의 아파트는 가게 건물의 오층에 있었다. 무척 품위가 있고 교양이
넘치는 까미유는 가게에는 내려오지 않고 항상 아파트에서만 생활하면서 식사때나
아버지를 본다고 했다.
"야, 좋지? 이건 굉장한 집이야. 그리고 까미유 곁에는 말이야 트리부 부인이
항상 붙어 있지. 그녀는 과부인데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몰라도 삐에로뜨 씨가 그
부인을 아주 잘 봤기 때문에 까미유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어... 다니엘, 다
왔어! 벨을 눌러."
나는 벨을 눌렀다. 커다란 실내모를 쓴 세벤느 지방 여자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오랜 친구라도 되는 듯 형에게 미소를 짓고는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삐에로뜨 양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한쪽에선 좀 뚱뚱한
라루트 부인과 트리부 부인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끄 형이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를 소개하자 모두들 따뜻한 인삿말을 하며 우리를 반겼다. 자끄
형은 삐에로뜨 양을 그냥 까미유라고 불렀는데 계속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겠냐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트리부 부인과 라루트 부인은 다시 카드놀이를 계속했고
자끄 형과 나는 삐에로뜨 양의 양켠에 섰다. 그녀는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서 계속 우리랑 얘기하며 웃어 댔다. 나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동안 내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흰살결에 작은
귀, 장미빛 머리는 꽤 아름다왔다. 그녀의 머리결은 비단처럼 부드럽게 윤기가
흘렀다. 그러나 뺨이 너무 통통하여 지나치게 건강해 보였다. 또한 손은
불그스레했고, 방학을 맞은 기숙생처럼 약간 거만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쏘몽 가에 자리잡은 우아한 아파트에서 자라난 한 송이 꽃, 삐에로뜨
양의 모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첫인상은 그저 그랬다. 그런데 내가 한마디하자 그녀가
내리깔고 있던 눈을 살며시 치켜뜨며 나를 바라본 순간 갑자기 마술이라도 걸린
것처럼 속물 같은 모습의 평범한 삐에로뜨 양은 사라지고 그녀의 두 눈, 그
눈부신 커다란 두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눈을 즉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싸르랑드 중학교의 벽 속에 갇혀 있던 나를 바라보며
반짝이던 검은 눈동자, 안경잡이 마귀할멈에게 붙잡혀 있던 바로 그 검은
눈동자였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나는 마구 소리치고 싶었다.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 바로 당신인가요? 다른 얼굴을 한 당신을 내가 만난
것인가요?"
너무도 곡 닮은 눈동자였다.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똑같았다. 똑같은
눈썹, 똑같은 눈빛,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똑같은 광채... 이 세상에 그렇게도
똑같은 눈을 가진 사람이 둘씩이나 있다고는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단지 옛날의 그 검은 눈동자의 겉모습만 닮은 다른 또하나의 눈이 아니라 바로 그
검은 눈동자였다. 검은 눈동자 역시 나를 알아 보고는 옛날의 그 무언의 아름다운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생쥐가 뭔가를 갉아 먹는 듯 이빨을 가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
왔다. 기이하게 느껴 돌아보니 뜻밖에도 피아노 옆 한켠에 놓인 소파에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창백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머리는 새머리만큼 작았고, 이마는
벗겨지고, 코는 뾰족하며, 동그랗고 흐리멍텅한 두 눈은 사이가 무척 떨어져 있어
거의 관자놀이에 붙어 있었다. 각설탕을 이따금씩 갉아 먹고 있었는데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잠들어 있는 줄로 착각할 판이었다. 그 모습에 약간
당황하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늙은 유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노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끄 형이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널 보지 못하셔... 눈이 머셨거든... 라루트 영감이셔...."
'그야말로 이름대로군.'
그렇게 생각하며 새처럼 작은 머리를 가진 그 끔찍한 노인을 보지 않으려고
잽싸게 피아노 족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마술은 풀려 버렸고, 피아노 걸상엔
평범한 아가씨만이 앉아 있을 뿐 검은 눈동자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면서 삐에로뜨 씨가 요란스럽게 들어왔다. 아까 본 금발
청년도 겨드랑이에 플루트를 낀 채 뒤따라 들어섰다. 그 청년을 본 자끄 형은
마치 불타는 적개심을 품은 듯한 경계의 눈초리를 그에게 던졌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 플루트 주자는 태연을 떨며 서 있었다.
삐에로뜨 씨가 자기 딸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음, 얘야, 기분은 좀 어떻니? 그렇게도 고대하던 다니엘이 오니 반갑지?
다니엘은 아주 얌전하지?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에세뜨 부인을 꼭
빼닮았단다."
그러고 나서 나를 억지로 응접실 한가운데로 데려가더니 내 눈과 코와 움푹
패인 턱을 가리키며 우리 어머니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거북했다. 카드놀이를 그만둔 라루트
부인과 트리부 부인은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조목조목 나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마치 팔기 위해 시장에 내다 놓은 영계에서 내뱉듯 큰소리로 내 생긴 모습의
이모저모를 내려깎거나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 트리부 부인은 영계에 대해서는
아주 많이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행히도 자끄 형이 삐에로뜨 양에게 우릴 위해서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한 덕분에 나의 형벌은 끝이 났다. 그러자 그 금발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힘차게 말했다.
"그래요, 뭘 좀 연주해 보죠."
놀란 자끄 형이 소리쳤다.
"아녜요... 아냐... 듀엣은 필요없어요! 플루트는 안 불어도 돼요!"
금발 청년이 마치 카리브인의 화살처럼 독기가 서린 새파란 눈초리로 형을
쏘아봤다. 하지만 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계속 소리쳤다.
"플루트는 연주할 필요 없어요!"
결국 형이 이겼다. 그래서 삐에로뜨 양이 혼자서 아주 유명한 '로젤린의
꿈'이라는 이태리 풍의 트레몰로 곡을 우리들에게 들려 주었다. 그녀가 연주를
하는 동안 삐에로뜨 씨는 감동에 겨워 울고 있었고, 자끄 형은 황홀경에 헤매고
있었다. 그 금발 청년은 플루트를 입에 물고 있을 뿐 소리를 내지 않고 어깨를
들썩이며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속으로 플루트를 부는 듯했다.
'로젤린의 꿈'을 끝낸 삐에로뜨 양이 내게로 몸을 돌리고 눈을 내리깔면서
말했다.
"다니엘 씨, 시 하나 읊어 주시지 않겠어요? 당신은 시인이시라고 하던데...."
"훌륭한 시인이죠."
자끄 형이 그만 경솔하게 이렇게 말해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 앞에서 시를 읊을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거기 있었다면 혹시 사정이 달랐을지 모르지만 검은 눈동자는
이미 한 시간 전에 사라져 버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꺼리낌없이 삐에로뜨 양에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아가씨, 유감스럽게도 오늘 저녁에는 제 칠현금을 가지고 오지
않았군요."
"다음에는 꼭 칠현금을 가지고 와야 하네."
그 착한 삐에로뜨 씨는 은유적인 표현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렇게 말했다.
그는 내가 진짜 칠현금을 가지고 있어서 그 금발 청년이 플루트를 연주하듯이
나도 그 칠현금을 연주하는 걸로 믿고 있었다. 자끄 형이 여기 오기 전에 이
기괴한 세계에 대해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11시쯤 차가 나왔다. 삐에로뜨 양이 응접실을 왔다갔다하면서 설탕과 우유를
부어 주었다. 그녀가 내 앞으로 온 순간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환한 빛을 발하며 그 귀여운 모습을 갑자기 나타냈다가는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삐에로뜨 양에게 아주 뚜렷이 구분되는 이중적인 모습이 내재해 있는 것
같았다.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내리고 유서깊은 라루트 상회에서 뻐기고 있는
아담한 몸매의 평범한 처녀의 모습이 그 하나였다. 또하나는 익살스런 철물장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잠시 빌로드 빛의 두 송이 꽃처럼 되었다가 금세 사라져
버리는 시적인 커다란 검은 눈동자의 그녀의 모습이었다. 나는 삐에로뜨 양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그 검은 눈동자만은....
밤이 꽤 깊어 가고 있었다. 라루트 부인이 커다란 격자 무늬 모직 쇼올을
덮어서 마치 붕대 감은 미이라처럼 보이는 라루트 영감을 부축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일어서서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삐에로뜨 씨가 층계참에
우리를 세워 두고는 또다시 그 끊임없는 사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 다니엘! 이젠 이 집을 혼자서도 찾아올 수 있겠지?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하네. 난 상류사회 사람들은 전혀 모르지만 좀 특별난 사람들은 몇 알고
잇지...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우선 주인 양반 라루트 부부가 계시고,
그 다음에는 본받을 점이 많은 트리부 부인... 트리부 부인과 대화가 잘 통할
거야. 그리고 이따금씩 우리들에게 플루트 연주를 들려 주는 가게 점원과... 이런
경우에 꼭 들어 맞는 말인데... 자네가 그와 듀엣으로 연주를 한번 해보면 참
멋있을 거네...."
나는 내가 너무 할 일이 많아서 그러고는 싶지만 그리 자주 올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머뭇거리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러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바쁘단 말이지? 다니엘... 나는 두 사람이 라땡 구역에서 무슨 일을 하느라
바쁜가를 잘 알고 있네...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그곳에서는 젊은
처녀들 몇 명쯤 친하게 사귀는 게 다반사라며...."
역시 웃으며 자끄 형이 대꾸했다.
"사실 꾸꾸블랑 양은... 매력이 없지도 않거든요."
꾸꾸블랑이라는 말을 듣자 삐에로뜨 씨는 더욱더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자끄? 꾸꾸블랑이라구? 이름이 꾸꾸블랑이란 말인가? 허허허, 음탕한
사람 같으니라구... 그 나이에...."
그는 자기 딸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걸 알고는 말을 멈췄다. 하지만 우리가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까지도 그는 계단 난간이 흔들거릴 정도로 폭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집을 나서자 마자 자끄 형은 내게 물었다.
"저 사람들 어때?"
"라루트 씨는 불쾌한 인상이지만 삐에로뜨 양은 매력적이야."
"정말?"
사랑에 빠진 우리 불쌍한 형이 너무도 쾌활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끄 형! 형은 본심을 드러내고 있군."
그날 밤늦게까지 우리는 강변을 산책했다. 발 밑으로는 시커먼 강물이 마치
아름다운 은하수처럼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커다란 배에서 닻줄을 내리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 왔다. 어둠 속을 여유있게 거닐며 자끄 형의 사랑 얘기를 듣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형은 사랑에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형을
사랑하지 않았다. 형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형, 그 아가씬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지도 몰라."
"아니야, 다니엘. 오늘 저녁까지만 해도 그녀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어."
"오늘 저녁까지만 해도? 형,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제기랄, 사람들은 모두들 다니엘 너를 좋아해... 그녀도 역시 널 좋아하는지
모르고."
불쌍한 자끄 형은 그 말을 하면서 체념한 듯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형을
위로하기 위해서 나는 큰소리로, 점점더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형도 참!... 내가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되거나 삐에로뜨 양이 쉽게
달아오를지도 몰라... 하지만 형, 안심해! 삐에로뜨 양은 지금 이렇게 내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듯 내 마음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런 걱정은
안해도 돼, 형."
나는 삐에로뜨 양에게 전혀 관심이 없노라고 진지한 태도로 형에게 말해
주었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라면 다르겠지만....
##붉은 장미와 검은 눈동자
라루트 상회를 처음 방문한 이후로 나는 얼마 동안 '거기'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형은 일요일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거기'를 찾아갔다. 그때마다 형은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며 넥타이를 매혹적인 모양으로 고쳐 매곤 했다. 자끄 형이
정성껏 맨 그 넥타이야말로 겉으론 표출되지 않은 열정적인 사랑의 시였다.
그것은 또한 알제리의 최고 지휘관이 연인들에게 갖다바칠 때 가장 은밀한
열정까지도 표현해주던 상징적인 꽃다발이기도 했다.
내가 만일 여자였다면 형이 그렇게 몇 번이고 넥타이를 고쳐 매는걸 보고는
아마도 말도 사랑의 고백을 받는 것보다 더 감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런 사실에 무감각한 것 같았다. 그러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일요일이 돌아올 때마다 불쌍한 형은 출발하기 전에 꼬박꼬박 내게 물어 왔다.
"다니엘, 나 '거기'가는데... 너도 갈래?"
"아냐, 형. 난 공부할래...."
늘 변함없는 똑같은 내 대답을 듣고는 형은 재빨리 사라져 갔다.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된 채 책상에 몸을 기울이고 시를 썼다.
나는 삐에로뜨 씨네 집에 가지 않기로 이미 굳은 결심을 했다. 삐에로뜨 양의
검은 눈동자가 두려웠다.
'다시 그 검은 눈동자를 보게 되면 파면할지도 몰라.'
나는 다시는 검은 눈동자를 보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악마처럼
검은 눈동자는 한시도 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어디를 가나 그 검은
눈동자는 나를 따라다녔고 눈앞에 떠올라 어른거렸으며 심지어 꿈 속에도
나타났다. 빨간수첩을 펼쳐 들어도 거기엔 기다란 속눈썹을 가진 커다란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그려져 있곤 했다. 검은 눈동자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착각의
세계를 헤매는 것이었다.
자끄 형이 처음 선보이는 넥타이를 매면서 기쁨으로 눈을 반짝이고 넘어질 듯
방을 나가고 나면 나는 형을 뒤쫓아 계단을 뛰어내려가서 '기다려!'라고 소리치고
싶은 미칠 듯한 충동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오는 '거기'
가선 안 된다고 경고하는 소리가 내 발목을 묶어 버리곤 했다. 마음 한구석엔
방에 남아 시를 써야 한다는 각오가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냐, 자끄 형. 난 공부하겠어."
이렇게 대꾸하면서 몇 주가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결국 뮤즈여신의
도움을 받아 내 머리에서 검은 눈동자를 쫓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어처구니없는 경솔한 짓을 저질러 검은 눈동자를 또다시 만나고 말았다. 형을
위한 나의 결심은 허물어지고, 결국 내 머리와 가슴은 온통 검은 눈동자에
빠져들었다.
강가에서 모든 걸 고백한 이후로 자끄 형은 자신의 사랑 얘기를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형이 바라는 대로 일이 잘 안된다는 사실을 형의
태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일요일에 삐에로뜨 씨 집에서 돌아오는 형의 얼굴은 늘
우울한 그림자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밤마다 형이 긴 한숨을 내쉬며 뒤척이는
소리를 듣곤 했다. 어쩌다 내가 "형, 무슨 일이야?"하고 물으면 형은 "아무것도
아냐"라고 한마디 내던지는듯 대꾸해 버리곤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말투만
듣고도 형에게 심각한 일이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한없이 착하고 참을성 많던
형이 곧잘 내게 버럭 화를 내곤 했으며 이따금씩 마치 싸우고 나서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대하기도 했다. 나는 형이 사랑의 상처를 입어
열병을 앓고 있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형이 그 문제에 대해 입을 꼭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감히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형이 삐에로뜨 씨 집에서
밤늦게 돌아온 어느 일요일이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알아나 보자고
작정했다.
나는 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 좀 봐, 형! 도대체 무슨 일이야?... '거기' 일이 잘 안 돼?"
불쌍한 형은 풀죽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잘 안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삐에로뜨 씨가 뭔가 눈치챈 거야? 형이 자기 딸을
좋아하는 걸 원치 않는 거야?"
"아, 아냐! 다니엘. 삐에로뜨 씨 때문에 그러는 게 아냐... 그 애가 날 좋아하지
않아. 절대로 날 좋아하지 않을 거야."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자끄 형? 그 여자애가 형을 절대로 안 좋아하리라는
걸 형이 어떻게 알아? 그애한테 사랑을 고백해 보기라도 했어... 아니지?...
그렇다면...."
"그애가 좋아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 말 없어. 그 사람은 아무 말 안해도
그애에게 사랑받고 있지...."
"그렇다면, 그앤 그 금발 청년을?"
형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은 듯했다. 잠시 후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다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애가 좋아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 말을 않고 있어."
그 이상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쌩 제르멩 종탑의 종소리가 자정을 알릴 때까지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끄 형은 내내 창가에서 하늘의 무수한 별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내가 "거기" 가서 사태를 좀더 정확히 파악해 봐야겠는데... 어쨌든 형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몰라. 삐에로뜨 양은 형이 정성껏 매만진 넥타이 주름 속에
사랑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거야... 자끄 형은 분명히 자기
마음을 그녀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만 속을 끓이고 있음에 틀림없고, 내가
대신 얘기해 주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래, 찾아가서 그 속물 같은 처녀애한테
얘길하면 모든 게 수월하게 풀릴 거야.'
다음날 나는 형에게 아무 말도 않고 그 멋진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맹세코
'거기' 가면서 나는 흑심 같은 건 전혀 품지 않았다. 자끄 형을 위해서, 오직
불쌍한 자끄 형을 위해서 나는 그곳에 갔던 것이다. 하지만 쏘몽 가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진 라루트 상회가 '도자기 크리스탈 판매'라는
간판을 보자 내 가슴은 가볍게 뛰었다. 내게 뭔가를 경고하는 듯 말이다. 나는
힘껏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가게 안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한구석에는
금발청년이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옆에는 플루트가 놓여 있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저 떠돌이 청년과 우리 자끄 형을 놓고 까미유가 저울질을 하다니 그럴 리가
없어... 어쨌든 가 보면 알겠지....'
삐에로뜨 씨는 딸과 트리부 부인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삐에로뜨 양이 거기에 다소곳이 앉아 있을 뿐 내 검은
눈동자는 없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들은 의외라는 듯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삐에로뜨 씨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오셨군!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우리와 함께 커피 한 잔
하지."
트리부 부인은 금색 꽃무늬가 있는 멋진 찻잔을 내게 갖다 주겠다며 잠시
밖으로 나갔다. 나는 삐에로뜨 양 곁에 앉았다.
그날따라 그녀는 꽤 예뻐 보였다. 그녀는 자그마한 붉은 장미꽃 한 송이를 꽂고
있었다. 그 장미를 보자 난 또 마술에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속물 같은
그녀는 단지 붉은 장미 때문에 무척이나 아름다와 보이는 것이었다.
삐에로뜨 씨가 예의 그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다니엘, 그동안 한번도 찾아 주질 않다니!"
나는 시를 쓰느라 좀 바빴다고 변명했다.
"암, 알지. 라땡 구역엔...."
다 안다는 듯 잔기침을 해대는 트리부 부인을 바라보며 그는 더욱 요란하게
웃어 대기 시작하더니 탁자 밑으로 내 발을 툭툭 차는 것이었다. 선량한 그
사람들은 '라땡 구역'하면 폭음과 바이올린, 가면, 소란스러움, 깨진 항아리,
광란의 밤만을 연상하는 모양이었다. 만일 내가 쌩 제르멩 종탑 옆 건물의
고미다락방에서 수도사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얘기해 준다면 그들은 펄쩍
뛰며 거짓말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나이엔 방탕하고 끼 있는 젊은이로
취급받는다 해도 별로 화가 나지 않는 법이다. 삐에로뜨 씨가 지레 짐작으로
엉뚱한 비난을 해도 나는 얌전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한두 마디 했을
뿐이었다.
"아녜요! 아닙니다! 정말이예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아마 자끄 형이 내 그런 모습을 봤더라면 신나게 웃었을 것이다.
차를 마시고 났을 때 아래층에서 플루트소리가 들려 왔다. 삐에로뜨 씨는
가게에 찾는 사람이 있어서 내려갔고, 트리부 부인도 요리사와 카드놀이를 한다고
부엌으로 가버렸다. 그 부인의 유일한 장기는 카드를 아주 능란하게 다룬다는
것이었다.
그 자그마한 붉은 장미를 꽂은 그녀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때다!'
내 입안에서는 벌써 자끄라는 이름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삐에로뜨 양은
내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갑자기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을 여기 못 오게 한 사람이 꾸꾸블랑인가요?"
처음에 나는 그녀가 농담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두 뺨이 연분홍으로
점점 물들고 그녀의 얇은 조끼가 들썩이는 걸 보니 꽤나 흥분된 듯이 보였다.
아마도 누군가가 꾸꾸블랑 얘기를 하자 그녀는 제멋대로 사태를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단 한마디로 그녀의 오해를 풀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어떤 어리석은 자만심이 솟아올라 그만두었다. 내가 아무 대꾸도 없이 잠자코
있자 그녀는 내게로 돌아서더니 내리깔고 있던 눈을 치켜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또다시 일어났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는 삐에로뜨양이
아니었다. 눈물에 젖은 채 부드럽게 비난하는 빛을 담은 그 옛날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사랑스럽던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 내 영혼에 환희를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일 뿐이었다. 그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자 금방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내 옆에는 삐에로뜨 양의 얌전한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또다시 환상의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나타날까 두려워진 나는 자끄 형
얘기를 정신없이 지껄이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형이 얼마나 착하고, 성실하며,
용감하고, 관대한가를 얘기했다. 그리고 형의 헌신적인 사랑과 늘 깨어 있는 모성,
우리 어머니가 질투할 만큼 내게 쏟은 깊은 애정까지도 주절댔다.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는 것은 자끄 형이라는 사실도 말했다. 형이 나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하는지도 낱낱이 얘기해 주었다. 형이
아니었더라면 아직도 싸르랑드의 그 우울한 감옥에 갇힌 채 끝없이 고통받고 있을
거라는 얘기도....
내 길고 긴 연설이 그쯤에 이르자 삐에로뜨 양은 깊은 감동을 받은 듯했다.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의 눈물이 자끄 형에 대한 연민을
의미한다고 믿고는 내심 몹시 기뻤다.
'자! 일이 잘 돼 가는구나!'
그래서 나는 목청을 돋구어 더욱 열을 내며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헤어날 길
없는 고독과 가슴을 바짝바짝 타게 만드는 그 깊고 신비로운 형의 사랑에 대해
말했다. 나는 형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녀가 몹시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삐에로뜨 양의 머리에 꽂혀 있던 그 자그마한 붉은 장미가 미끄러져
내리더니 내 발 밑으로 떨어졌다. 그때 나는 자끄 형이 반한 그 행복한 여자가
바로 그녀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킬 만한 기발난 수단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발 밑에 떨어진 장미를 보자 그 방법이 떠올랐다. 천천히 그걸 주워든 나는 가장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 장미는 자끄 형을 위한 것이로군요."
그러자 삐에로뜨 양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원하신다면 자끄에게 드리세요."
바로 그 순간,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나타나더니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녜요! 그건 자끄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거란 말예요!'
뿌리치기 힘든 순진함과 정숙함을 가득 담은 검은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때까지도 머뭇거리며 아무 대답이 없자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래요! 그 장미는 당신을 위한 거예요!... 당신을 위한 거란 말예요!'
나는 흘린 듯 그 자그마한 빨강 장미에 입을 맞추고 천천히 가슴에 꽂았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자끄 형이 평소처럼 책상에 엎드려 시를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내가 그날 하루도 꼼짝 않고 방안에만 있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웃도리를 벗을 때 속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붉은 장미가 침대 발치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 장미에 마술을 건
요정은 악의에 가득 차 있는 게 분명했다. 장미를 본 자끄 형은 그걸 주워들더니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내 얼굴은 난로불처럼 화끈 달아올랐다.
"난 이걸 본적이 있어 '거기'의 응접실 창가에 놓여 있던 장미꽃이야."
형은 이렇게 말하며 장미를 내게 되돌려 주었다.
"그애는 단 한번도 내게는 장미꽃을 주지 않았는데...."
형이 들릴 듯 말듯 서글프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이윽고 내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형, 자끄 형, 맹세코 오늘 저녁 이전에는...."
형이 가만히 내 말을 가로막았다.
"미안해 할 필요없어, 다니엘. 네가 날 배신할 짓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난 확신해... 난 알아. 그애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어. 내가 한 말 생각해 봐.
언젠가 말했잖아. '그애가 좋아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 말이 없어. 그 사람은 아무
말 안해도 그애에게 사랑받고 있지'하는 말 말이야."
불쌍한 형은 방안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난 손에 장미를 든 채 꼼짝 않고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난 오래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지. 그애가 너를
보게 되면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처럼 오랫동안 널 '거기' 데려가지 않았던 거야. 난 널 몹시 질투했어. 용서해
줘. 그애를 너무도 좋아해서 그랬던 거야!... 결국 어느날 나는 시험해 보기로
작정하고 널 데려갔었지. 바로 그날 나는 모든 게 끝나리란 것을 직감했지. 5분도
채 못 되었는데 그애는 전혀 새로운 눈길로 너를 바라보더군. 너도 아마 눈치
챘을 거다. 아, 부인하려고 하지 마. 넌 분명히 눈치챘어. 네가 한 달씩이나
'거기'를 찾아가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야. 하지만 딱하게도 너의 배려가 내겐
전혀 도움이 안 됐단다... 그애에게 나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지. 내가 갈 때마다
그애는 네 얘기만 했어. 존경과 사랑이 가득 찬 꾸밈없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한 그애를 바라보는 건 끔찍한 형벌이었어. 이젠 끝났어... 차라리 잘 됐지."
자끄 형은 여전히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상냥하게 말했다.
형의 말은 내게 고통과 기쁨을 한꺼번에 안겨 주었다. 불쌍한 형을 생각하면
고통스러웠지만 형이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떠올라
기뻤다. 검은 눈동자는 내 온 존재를 환히 비춰 주고 있었던 것이다. 형이 말을
마치자 나는 여전히 붉은 장미를 든 채 약간 부끄럽고 멋쩍은 표정으로 형에게
다가갔다.
"형, 그래서 형은 이제 날 사랑해 주지 않을 테지."
형이 미소를 지으며 날 힘껏 껴안았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난 널 더욱더 사랑할 꺼야."
그것은 사실이었다. 붉은 장미 사건에도 불구하고 자끄 형의 애정이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형은 무척 괴로와하며 속으로만 앓을 뿐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옛날처럼 형은 일요일마다 '거기'에 갔으며 누구에게나 환한
얼굴로 대했다. 넥타이는 더이상 매지 않았다. 결국 형은 여전히 침착하고 자신감
있게 열심히 일했으며,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운다는 단 하나의 목적에만 매달린
채 실의에 빠지지 않고 용기 있게 살아 갔다... 자끄 형은 여전히 내게 엄마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어떠한 꺼리낌도 갖지 않고 자유롭게 검은 눈동자의 그녀를 좋아할 수 있게 된
날로부터 나는 열정 속에 내 몸을 송두리째 내맡겼다. 나는 삐에로뜨 씨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나는 그 집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갖가지
비열한 짓거리를 서슴지 않았다. 라루트 부인에게는 각설탕을 갖다주고, 트리부
부인을 상대해서 마지못해 카드놀이를 하는 등 나는 어떠한 희생도 불사했다.
그 집 사람들에겐 '사랑받고 싶은 욕구'로 충만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보통
나는 한낮에 그 집을 찾아갔다. 그 시간이면 삐에로뜨 씨는 가게에 있었고,
삐에로뜨 양은 트리부 부인과 함께 오층 응접실에 있었다. 내가 가면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바로 나타났고, 트리부 부인도 우리 두 사람만 남겨 놓은 채
나가 버렸다. 그 부인은 내가 가기만 하면 자기가 삐에로뜨 양에게 더이상 해줄
것이 없다고 믿는 듯했다. 그녀는 내가 가자마자 잽싸게 부엌으로 가서 요리사와
카드놀이를 했지만 나는 그에 대해 전혀 불평하지 많았다. 오히려 검은 눈동자의
그녀와 단둘이만 있을 수 있게 해준 데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매일 담홍색으로 꾸며진 작은 응접실에서 그녀와 둘이서 멋진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시집을 가지고 가서 검은 눈동자의 그녀에게 읽어
주었다. 그러면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눈물을 흘리거나 흥미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귀기울이며 듣곤 했다. 삐에로뜨 양은 아버지의 슬리퍼에 수를 놓거나 '로젤린의
꿈'을 들려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부분 얌전히 앉아서 내가 낭송하는 시에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씩 감동적인 대목에선 자신이 느낀 감상을 소리높여 말하곤
했다.
"조율사를 데려와야겠어요"라든가 "실내화에다가 수를 두 코나 더 놨어요"같은
엉뚱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하는 그녀를 보면 나는 울컥 경멸감이 치밀어서 시집을
덮어 버렸다. 그녀의 시에 대한 무식함 때문에 더이상 읽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랬다가도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면 다시 기분이 풀어져서
계속 시집을 읽어 내려갔다.
그 담홍색의 작은 응접실에 늘 우리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실수였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와 나는 두 사람의 나이를 합쳐 봤자 서른
다섯도 채 안 되는 젊은 혈기를 가진 연인이었다. 다행히도 평범한 비에로뜨 양은
검은 눈동자의 그녀와 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마치 화약고를 지키는
창고지기처럼 아주 조심성 있고 신중하게 늘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날이었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와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5월의 푸근한
오후였기 때문에 창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방바닥까지 끌리는 길다란 커튼은
젖혀져 있었다. 그날 나는 파우스트를 조용히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 다 읽고 난
나는 슬그머니 책을 내려놓았다. 주위는 고요했고 기울어 가는 햇빛이 응접실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살짝 벌려진 조끼의 깃장식 사이로 자그마한 은메달이 보였다... 나는
무심코 검은 눈동자의 그녀 가슴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삐에로뜨 양이
갑자기 우리들 사이로 끼어들더니 재빨리 나를 소파 끝으로 밀쳐 냈다. 그녀는
우리들에게 일장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당신은 지금 아주 나쁜 짓을 한 거예요...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렸어요... 아빠한테 당신 계획을 말씀드리세요... 언제쯤 말할 거죠, 다니엘?"
나는 가까운 시일내로 시를 끝마치면 즉시 삐에로뜨 시에게 얘기하겠노라
약속했다. 그 말을 듣자 우리의 감시자는 다소 누그러졌다. 뭔가 확약을 받아놓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날로부터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내 곁에 오기를 더욱 꺼려했다. 편지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그나마 내게 배달된 편지엔 온통 나를 실망시키는 말만이 써
있었다. 불행히도 삐에로뜨 양의 질투는 점점더 심해져만 갔다.
"...오늘 아침 나는 정말 슬프다. 내 농장에서 거미를 한 마리 본 것이다.
아침의 거미, 슬픔."
"복숭아 뼈와 결혼하는 법은 없다...."
그리고 언제나 똑같이 이런 후렴이 첨부되어 있었다.
"당신 계획을 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해요...."
그러면 나 역시 변함없이 똑같은 대답을 했다.
"내 시를 끝내면!"
##푸른색 나비의 죽음
마침내 나는 시를 끝냈다. 넉 달 만에 완성을 본 것이었다. 마지막 행을 쓰고
났을 때 나는 펜을 쥘 힘도 없이 기진맥진해 버렸다. 내 손은 흥분과 긍지, 기쁨과
초조감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날 쌩 제르멩 종탑 옆 건물의 고미다락방은 대사건이라도 터진 듯
시끌벅적해졌다. 자끄 형은 다시 옛날의 자끄 형으로 되돌아가 하루종일 판지와
조그만 풀단지를 끼고 앉아 내 시를 멋진 시집으로 제본해 주었다. 다 만들어진
시집을 들고 내가 한 행 한 행 읽어 나가자 형은 감탄의 고함을 내지르고 발을
구르며 열광했다. 난 내 작품에 대해 별로 자신이 없었지만 형은 내 시가 굉장히
훌륭하다며 너무나 좋아했다. 난 형의 비평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어 좀더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만한 사람이 내 시를 읽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간이식당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있긴 있었다. 자끄 형과 나는 그 간이식당의
단골이 되었고 경제적 여유가 생긴 뒤로는 내실의 공동식탁에서 식사를 해오고
있었다. 내실엔 이십여 명의 젊은 작가와 화가, 건축가 등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지금은 그 당시에 만난 그들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꽤나 출세를
했다. 몇몇은 이따금씩 신문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아직도 별볼일
없이 비실대는 현재의 내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지는 듯하다. 어쨌던 그
식당에 갈 때마다 그들은 모두들 어서 오라고 한마디씩 건네며 나를 환영했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수줍어해서 그들 얘기에 끼어들지 못했기 때문에 난 그들
관심에서 금세 멀어져 버리곤 했다. 나는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서 그들과
동떨어져 내 방의 책상에 앉아 있을 때와 다름없이 혼자가 되어 버렸다. 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매주 한 번씩 우리는 유명한 시인과 식사를 했다. 그 시인의 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가 쓴 시 제목을 따서 그냥 바가바라고 불렀다. 그런
날이면 내실에 모인 사람들은 18쑤우씩 하는 보르도산 포도주를 마셨다. 디저트가
나올 때쯤 바가바가 시를 한 편 낭송했다. 그는 주로 인도 시만을 지었는데 그
제목은 '락싸마나' '다싸라타' '칼라트쌀라' '바기라타' '쒸드라' '크노세파'
'비쒸바미트라'등 완전히 인도어 일색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가바'였다. 그가 시를 낭송할 때면 내실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때마다 흥분한 청중들은 고함을 지르고, 발을 굴러 대며, 심지어는 탁자에
뛰어오르기까지 했다. 내 오른편에는 주독에 걸린 듯 딸기코에 키가 자그마한
시인이 앉아 있었는데, 첫 행을 읽자마자 눈물을 짜기 시작하더니 내 냅킨으로
내내 눈물을 찍어 냈다.
나도 은연중에 거기 이끌려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요란하게 고함을 질러 대긴
했지만 속으로 바가바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시엔 한결같이 하얀 연꽃과
콘돌 독수리, 코끼리, 물소 등이 등장했다. 이따금씩 하얀 연꽃을 뜻하는 로투스란
단어가 로토스로 변할 뿐 그러한 변화를 빼놓으면 그의 시는 늘 그게 그거였다.
열정도, 진실도, 환상도 없고 운에다 다른 운을 슬쩍 덧붙인 속임수일 뿐이었다.
나는 바가바를 별볼일 없는 삼류시인쯤으로 생각했다. 혹시 내가 내 시를 한 번쯤
그들 앞에서 읊어 보기라도 했더라면 그를 그렇게까지 깎아 내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내 시를 발표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남의 시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혹평을 가했다. 그 식당을 드나들던 사람들 중에서 내 왼편에
앉아 있던 사람도 그 인도 시인에 대해 나와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역시 바가바의 시에 아무런 흥미도 없는 듯했다. 대머리인 그는 다 해진
허름한 옷을 걸치고 그나마 몇 올 안 되는 머리칼은 오랫동안 감지 않아 기름기가
잘잘 흘렀으며, 기다란 수염은 마치 국수가락처럼 흘러내려 있었다. 그는 좌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아는 것도 많은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현인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는 거의 말이 없었으며 자신을
드러내놓거나 과시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했으며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굉장한 분이야... 사상가라고."
바가바의 시가 낭송될 때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빈정거리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고상하신 분이야... 저분이 내 시를 한번 읽어 봐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날 저녁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나는 브랜디 한 병을
들고 그 사상가에게 가서 함께 한 잔 하자고 청했다. 그가 내 청을 받아들여 함께
술을 마시면서 얘기해 보고 나서 나는 그가 시에 대해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바가바쪽으로 화제를 이끌어 갔다. 하얀 연꽃과
콘돌 독수리와 코끼리와 물소에 대해 대담하게 악평을 하기 시작했다. 코끼리는
반드시 원한을 갚는 동물이란 점을 익히 알면서도 나는 주저하지 않고 혹평을
가했다. 내가 열을 내며 얘기하는 동안 그 사상가는 아무 말 없이 술만
들이키다가 이따금씩 미소를 지으며 동의한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곤 했다.
"저런... 저런...."
나는 신이 나서 계속 말했다. 나 역시 시를 쓰고 있는데 내 시를 좀 읽어 보고
평을 해줄 수 없는지 부탁했더니 그 사상가는 여전히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며
"저런... 저런..."만 되풀이했다. 그의 기분이 몹시 좋은 것처럼 보여 나는
'이때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호주머니에서 얼른 내 시를 끄집어 냈다, 그
사상가는 태연히 다섯번째 술잔을 들어 입 안으로 털어넣더니 시 원고를 펼치는
내 모습은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늙은 주정뱅이처럼 떨리는
손으로 내 팔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우선 한마디 묻겠소, 젊은이... 당신이 쓴 시의 기준은 뭐요?"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무시무시한 사상가가 목소리를 한층
높여 물었다.
"당신 시의 기준이 뭐냐니까! 당신 시는 뭘 기준으로 삼고 있느냔 말이요?"
내 시의 기준을 말하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시의 기준 따위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애당초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내 눈이
놀란 토끼 눈이 되고, 뺨이 붉어지고, 당황해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상가는 화가 난 듯 벌떡 일어섰다.
"도대체 기준이 없다니!... 그렇다면 당신 시는 읽을 필요도 없소... 대충 어떤지
안 봐도 다 아니까."
그 말을 마치 그는 병에 남아 있던 두세 잔의 술을 연거퍼 따라 마시더니
모자를 집어들고는 노기등등한 눈초리를 굴리며 나가 버렸다.
그날 저녁에 자끄 형에게 그 얘길 했더니 형은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 사상가란 놈은 정말 바보로구나... 기준 같은 걸 가져서 뭐 한다니? 벵골
사람들은 기준을 하나씩 가진다니? 기준이라구? 기준이 뭐야? 그거 대체 누가
만들어 낸 거냐? 너 그거 본 적 있어?... 기준을 파는 상인이라도 있나 보지? 참!"
착한 자끄 형은 내 시와 내가 당한 모욕 때문에 분개하며 눈물을 흘리고 어쩔
줄 몰라했다.
잠시 후, 화가 가라앉은 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단엘!... 내게 생각이 있어... 일요일에 삐에로뜨 씨 집에서 네 시를 읽지
않을래?"
"'거기'서? 아! 자끄 형!"
"왜 안 되니! 글쎄, 삐에로뜨 씨가 비록 시에 대해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까막눈도 아니야. 그는 투명하고 건전한 의식의
소유자라구... 까미유도 약간 편견을 갖고 있긴 하지만 꽤 괜찮은 비평가라고 할
수 있어... 트리부 부인도 책을 꽤 읽었고... 그 새머리 라루트 영감님도 그렇게 꼭
막힌 사람은 아니고... 게다가 삐에로뜨 씨는 파리에서 꽤 점잖은 사람들을 알고
있으니 그들도 초대하면 더욱 좋겠지... 어때? 한번 말해 볼까?"
나는 쏘몽 가에서 내 시를 평가해 줄 비평가를 찾아 보자는 자끄 형의 생각이
전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시를 발표해 보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였으므로 잠시 얼굴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자끄 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다음날 즉시 형은 삐에로뜨 씨에게 그 이야기를 건냈다. 사람좋은
삐에로뜨 씨는 그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감을 잡지 못했지만 에세뜨
부인의 아이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는 주저없이
승낙했다. 그리고 즉시 초대장을 띄워 보냈다.
그 담홍색의 작은 응접실에서 그런 축제는 단 한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삐에로뜨 씨는 내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도자기업계에서도 제법 한가닥한다
하는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날, 그 응접실에는 그 집 식구들 외에도 여러 사람이
모였다.
알포르 학교의 우수한 학생이자 수의사인 아들과 함께 파싸종 부부가 왔으며
프루이아 형제도 와 있었다. 프리메이슨 단원인 동생 프루이아는 구변이 좋아
프랑스 프리메이슨 본부의 집회소에선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었고 형 프루이아는
문학서클인 까보의 멤머인데 사람들과 모여 떠들며 노는 걸 좋아했다. 푸즈루
부부는 마치 파이프 오르간의 음관처럼 딸을 줄줄이 여섯이나 달고왔다. 그런
굉장한 인물들 앞에 서자 나는 몹시 흥분되었다. 나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한 편의 시를 평가하시기 위해서 모이신 겁니다."
점잖게 앉아 있던 그들은 제각기 냉랭하고, 실망스럽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들을
지었다. 그들은 마치 법관이나 되는 것처럼 머리를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맞대고 쑥덕거렸다. 삐에로뜨 씨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웅성대는 그들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더 와서 제각기 자리를 잡았다. 나는
피아노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각설탕을 갉아먹고 있는 라루트 영감만이 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옹기종기 앉아서 내 주위에 반원을
이뤘다. 잠시 자리잡느라 소란을 피우더니 곧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내 시의 제목을 읽었다.
터무니없게도 '전원시'라고 거창하게 제목을 붙인 극시였다. 싸르랑드 중학교에
있을 때 귀뚜라미와 나비, 그리고 기타 자그마한 동물들이 등장하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 주기도 했었다. 나는 그 동물들의 이야기를 대화
형식의 시로 만들어 '전원시'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그날 삐에로뜨 씨의 집에는 제 1부만 읽었다. 여기서 나는 그
부분만 옮겨 쓰려 한다. 하지만 그 부분이야말로 바로 '내 자전적 이야기'를
여실히 나타내 주고 있었다. 담홍색의 작은 응접실 안에 둥그렇게 앉아 점잖은
사람들 앞에서 시를 읽으려니 좀 긴장이 되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시를 읊어
내려갔다.
어느 푸른 나비의 모험담
무대는 전원이다. 해는 이미 넘어가고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6시쯤 된
시각이다.
막이 오르면 둘 다 숫놈인 푸른 나비와 무당벌레가 고사리 위에 말타듯
걸터앉아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둘은 아침에 만나서 오후를 함께 보냈다.
날이 어두워지자 무당벌레는 가려고 한다.
나비:아니!... 벌써 가려구?
무당벌레:이런! 돌아가야 해. 너무 늦었어. 생각을 좀 해보라구!
나비:잠깐 기다려, 제기랄! 집에는 천천히 돌아가도 결코 늦지 않아. 난 집에
있으면 답답해, 넌 어떻니? 문과 벽, 유리창이 난 싫어. 태양과 이슬, 개양귀비꽃
그리고 이 포근한 공기만 있으면 난 충분해. 개양귀비꽃이 네 맘에 들지 않으면
얘기해....
무당벌레:아아! 난 개양귀비꽃을 무척 좋아해.
나비:음! 그럼 얘. 아직 가지 마. 나랑 여기 있자꾸나, 응? 날씨도 포근하고
좋잖아.
무당벌레:하지만....
나비:(무당벌레를 풀밭으로 떠밀고 가며) 자! 풀밭에서 굴러 봐. 풀밭은 우리
거야.
무당벌레:(몸부림치며)안 돼! 날 놔줘. 맹세코 난 가야 해!
나비:쉬! 들리니?
무당벌레:(놀라며) 뭐가?
나비:자그마한 메추리가 옆쪽 포도밭에서 거나하게 취한 채 노랠 하고 있군...
자, 어때! 오늘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엔 썩 어울리는 노래야. 여기서 들으니 무척
재미있는데!
무당벌레:그렇긴 한데....
나비:조용히 해.
무당벌레:또 뭐지?
나비:인간들이야.
(인간들이 지나간다)
무당벌레:(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낮은 목소리로) 인간은 사나와, 그렇지?
나비:아주 사납지.
무당벌레:인간이 걸어가다가 날 밟아서 납작하게 만들까 무서워. 인간들의
발은 무지하게 큰데 내 허리는 무척 연약하거든. 넌 크진 않지만 날개가 있어.
하기야 나보다 훨씬 크기도 하지!
나비:제기랄! 만일 저 둔한 농부들이 무섭다면 등으로 기어야겠군. 난 허리
힘엔 자신이 있어! 내 날개는 아가씨들의 얇고 가벼운 드레스와는 달라. 그래서
난 네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고 싶은데.
무당벌레:오! 고마와. 하지만 그만둘래! 그러고 싶지 않아!
나비:내 등에 기어오르기가 힘드니?
무당벌레:아니, 하지만....
나비:그럼 기어올라가 봐, 이 바보야!
무당벌레:넌 물론 날 우리 집에 데려다 주겠지. 만일 데려다 주지
않는다면....
나비:금방 도착할 거야.
무당벌레:(나비에게 기어오르며) 우리 집에서 밤에 기도를 해야 하거든. 그렇게
해주겠지?
나비:글쎄... 좀더 뒤로 가. 그래... 이제 조용히 해! 날아오를 테니.
(짠! 그들은 날고 있었다. 대화는 공중에서 계속된다)
나비:참 놀랍구나. 전혀 무겁지 않아.
무당벌레:(놀라서) 아!... 저런....
나비:음! 뭐야?
무당벌레:이젠 안 보여... 머리가 어지러워. 정말 내리고 싶어.
나비:바보 같으니라구! 머리가 어지러우면 눈을 감아. 감았니?
무당벌레:(눈을 감으며) 응....
나비:괜찮아?
무당벌레:(애를 써가며) 조금 나아졌어.
나비:(속으로 웃으며) 너희 무당벌레들이 날아다니는 것은 형편없더라. 기술이
없어서 그래.
무당벌레:응! 그래....
나비:그건 너희들의 잘못은 아냐.
무당벌레:응! 그래....
나비:자, 나으리, 내리시지요.
무당벌레:(눈을 뜨며) 미안해... 여긴 내가 사는 곳이 아니야.
나비:알아. 하지만 아직 시간이 일러서 널 내 친구들이 있는 은방울꽃네
집으로 데려온 거야. 입 좀 축이고 가자고! 괜찮지....
무당벌레:아! 난 시간이 없어....
나비:무슨 소리야! 1초면 된다구....
무당벌레:게다가 난 거기 들어갈 수도 없고....
나비:이리 와! 내 사생아라고 하고 들어가면 돼. 넌 환영받을 거야. 가자!
무당벌레:그리고 시간도 늦었어.
나비:에이! 아냐! 안 늦었어. 매미 우는 소릴 들어 보라구....
무당벌레:(낮은 소리로) 그리고... 난... 돈도 없어....
나비:(무당벌레를 끌어당기며) 가자! 은방울꽃이 한턱낼 거야. (그들이
은방울꽃 속으로 들어간다)
2막이 오르면 어두컴컴한 무대. 그들이 은방울꽃 속에서 나온다. 무당벌레는
약간 취해 있다.
나비:(등을 내밀며) 자, 이제 길을 떠나자!
무당벌레:(용감하게 기어오르며) 가자!
나비:음! 은방울꽃 어떻니?
무당벌레:매력적이야. 날 잘 알지도 못하는데 포도주를 대접하다니....
나비:(하늘을 바라보며) 오! 오! 쉐베가 창가에 얼굴을 내밀고 있어. 서둘러야
해....
무당벌레:서두른다구? 왜?
나비:넌 니네 집에 빨리 돌아가야 하잖아?
무당벌레:아! 기도시간에만 맞추면 돼... 게다가 우리 집은 멀지도 않고... 바로
뒤편인데 뭘.
나비:그렇다면 나도 서두를 필요가 없지.
무당벌레:(진심을 토로한다) 넌 참 좋은 친구야!... 난 왜 다른 친구들이 널
친구로 삼으려고 안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누가 그러더구나! 넌 방랑자이고,
반항아이고, 시인이고, 방정맞게 군다고!
나비:뭐라고? 누가 그런 말을 했어?
무당벌레:저런! 풍뎅이가....
나비:아! 그 땅딸보가 날더러 방정맞다고 하더라구? 자긴 배불뚝인 주제에....
무당벌레:널 싫어하는 건 풍뎅이뿐만이 아니야....
나비:아! 말해 봐.
무당벌레:달팽이도 네 친구가 아냐. 그리고 전갈도, 개미도 네 친구가
아니라고.
나비:정말?
무당벌레:(은밀하게) 절대로 거미의 맘에 들려고 애쓰지 마. 그 친군 너를
고약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비: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무당벌레:흠! 딱정벌레도 너랑 의견을 약간 같이하고 있던데....
나비:그럴 거야!... 하지만 말해 봐! 네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내가 그렇게
못 보였나?
무당벌레:제기랄! 그건 다 나름이지. 넌 젊어. 대개 늙은이들은 네가 도덕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나비:(서글프게) 난 날 이해하는 친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결국....
무당벌레:정말 그렇더라구. 이봐! 쐐기풀은 네게 악의를 품고 있어. 두꺼비도
널 증오하고 있고, 귀뚜라미까지도 네 얘길 할 때면 '그 나... 나... 나비
녀석!'이라고 그러지.
나비:너도 그 못된 녀석들처럼 날 미워해?
무당벌레:난... 난 널 사랑해. 네 어깨 위에 있으면 정말 편안해. 그리고 넌 날
은방울꽃네 집에 데려다 주었잖아. 참 재미나는 일이야!... 그러니 혹시 나 땜에
피곤하면 어디 가서 잠깐 쉬었다 가자... 피곤하지?
나비:조금 무겁게 느껴지긴 하지만 곤란한 지경은 아냐.
무당벌레:(은방울꽃을 가리키며) 자, 저기 들어가서 좀 쉬자.
나비:아! 고마와... 은방울꽃은 그게 그거야. 난 옆집이 더 좋아....
무당벌레:(얼굴을 붉히며) 장미네 집에? 오! 안 돼, 절대로....
나비:(무당벌레를 잡아끌며) 가자구! 보는 애들도 없어.
(그들은 조심조심 장미 속으로 들어간다)
막이 내린다.
제3막에서는....
하지만 응접실에 모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 자신도 그 긴 시 낭송이 아주
지루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재미있는 시라도 낭송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더
흥미를 잃게 마련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3막에서 5막까지 간단히 내용만 간추려
밝힌다.
제3막의 무대는 칠흑 같은 밤이다. 두 친구는 장미네 집에서 함께 나온다.
나비는 무당벌레를 자기 부모 집에 데려가려고 한다. 하지만 무당벌레는
거절한다. 고주망태가 된 무당벌레는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풀밭 위에서
깡총깡총 뛴다. 나비는 무당벌레를 집까지 데려다 주어야 한다. 두 친구는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무당벌레의 집 문 앞에서 헤어진다. 나비는
밤길을 혼자 돌아간다. 나비도 약간 취했다. 하지만 그는 슬프다. 무당벌레가
귀띔해 준 이야기를 생각한 그는 자기는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왜
모두들 자기를 싫어할까 하고 씁쓸한 질문을 해본다. 달도 뜨지 않은 잔뜩 찌푸린
하늘, 바람 부는 들판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다. 나비는 무섭고 춥지만 친구가
따뜻한 침대 속에서 잘 자고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한다. 하지만 커다란
밤새들이 어둠을 뚫고 소리없이 무대로 날아든다. 번개가 친다. 바위 밑에 숨어
있던 못된 동물들이 나비를 가리키며 히죽거린다. '혼내 주자!' 겁에 질린 불쌍한
나비가 길을 가는데 엉겅퀴꽃이 나타나 그를 칼로 찌르고, 전갈은 발톱으로 그의
배를 가른다. 그리고 커다란 털투성이 거미는 나비의 푸른색 날개 외투자락을
찢어내 버렸다. 마지막으로 박쥐가 날개로 그의 허리를 부러뜨려 나비는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나비가 풀밭 위에서 헐떡거리는 동안 그 곁에서 쐐기풀이 즐겁게
놀고 있었고 개미 두 마리는 '잘 됐다!'라고 말한다.
새벽이 되어 일을 나가던 개미들은 길가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한다. 개미들은
그 시체를 힐끗 바라볼 뿐 묻어 줄 생각도 않고 가버린다. 개미들이란 쓸데없는
일은 안하니까... 다행히도 송장벌레들이 그곳을 지나가게 된다. 시체를 묻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자그맣고 새까만 벌레인 송장벌레는 정성스럽게 나비를 묘지로
끌고 간다. 모두들 호기심 때문에 나와 보고는 큰소리로 한마디씩 한다. 자기 집
문 앞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갈색 귀뚜라미는 심각하게 말한다.
"그는 꽃을 너무 좋아했어!"
"그는 밤에 너무 나다녔어!"
달팽이도 이렇게 한마디 거든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풍뎅이는 자기의 금빛 옷
속에서 몸을 흔들며 중얼거린다.
"생활이 너무 무질서했어! 너무 무질서했다구!"
죽은 나비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 벌판에서는 오직
백합꽃만이 문을 닫고, 매미만이 노래를 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은 나비의 묘지에서 일어난다. 송장벌레들이 일을 끝마치고 나면
근엄한 표정의 풍뎅이가 묘지 구덩이로 다가가서 등을 대고 누운 채 죽은
나비에게 찬사를 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풍뎅이의 기억력은 형편없다.
풍뎅이는 그렇게 누운 채 한 시간 동안 바둥거리다가 횡설수설하고 만다. 연설이
끝나면 모두들 물러가고 묘지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처음에
등장했던 무당벌레가 무덤 뒤에서 나타난다. 무당벌레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거기 잠들어 있는 불쌍한 친구를 위하여 감동적인
기도를 올린다.
##흔들리는 시인의 꿈
내가 '전원시'의 마지막 행까지 낭송을 끝마치자 자끄 형이 열광하며 벌떡
일어나서는 브라보를 외쳐 댔다. 그런데 곧이어 좌중을 휘둘러본 형은 그들의
놀란 표정을 보자 흥분에 들뜬 몸짓을 우뚝 멈췄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묵시록에 나오는 불의 말이 담홍색의 작은 응접실에
느닷없이 뛰어든다 하더라도 내 푸른 나비만큼은 그들을 아연실색하게 느닷없이
만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싸종 부부와 푸즈루 부부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동그랗게 치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루이아 형제는 서로
손짓을 해대며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근거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몹시 처참한 기분을 느끼며 그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때 갑자기, 무겁게 짓누르는 침묵을 깨며 유령의 외침 같은 메마른 노인의
목소리가 피아노 뒤쪽에서 울려 오는 바람에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새머리 라루트 영감은 2년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었다. 각설탕을
갉아 먹던 악귀처럼 생긴 흉칙한 노인이 외쳤다.
"나비가 죽은 건 정말 잘 된 일이야. 난 나비를 좋아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리자 무겁던 분위기가 차츰 사라지고 내시에 대해
한두 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형 프루이아는 시가 지나치게 길다며 한두 개의 짤막한 풍자시로 줄이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파싸종 부부의 아들은 시에 등장하는 무당벌레에게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 때문에 시의 진실성이 결여됐다고 평가했다. 형
프루이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 시를 어디선가 읽어 본 적이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자끄 형이 내게 소곤거렸다.
"신경쓸 거 없어. 네 시는 걸작이야."
삐에로뜨 씨는 정신이 나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시를 읽는 동안
그는 자기 딸 곁에 붙어 앉아 감동으로 떨리고 있는 딸의 자그마한 손과 이글이글
타오르는 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몹시 놀란 듯했다. 삐에로뜨 씨의
말마따나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 맞는 말인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그는 아주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딸의 속적삼을 저녁 내내 들여다보고 있는 통에 나는
검은 눈동자의 그녀에게 한마디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그곳을 빠져나왔다. 뿐만 아니라 형 프루이아가 낭송하는 짤막한 풍자시를 듣는
것조차도 내키지 않았다. 그 이후 이 일로 인해 그는 나를 결코 용서하지 않고
앙심을 품게 되었다.
내 생애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시 낭송의 밤 이후, 이틀 뒤에 삐에로뜨 양은
의미심장한 짤막한 쪽지를 내게 보내왔다.
'빨리 오세요. 아버지가 모든 걸 알고 계세요.'
그리고 구 밑에다 내 사랑하는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
솔직히 나는 뜻밖에 받아본 그 굉장한 소식에 다소 황당했다. 이틀 전부터 나는
내 시를 출판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어서 검은 눈동자의 그녀보다는 내 시에
정신을 더 팔고 있었다. 게다가 삐에로뜨 씨에게 까미유와의 관계를 일일이
설명해야 한다는 점이 전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검은 눈동자의
그녀부터 받은 급한 전갈에도 불구하고 얼마 동안 '거기'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아 있는 불안을 없애려고 나는 종종 이렇게 생각했다.
'내 시를 팔고 나면 가지 뭐.'
불행히도 나는 내 시를 팔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당시의
출판업자들은 매우 친절하고 정중하고 관대하고 상냥했다. 그런데 그들은
공통적으로 못된 결점을 모두 지니고 있었는데 한시도 집에 붙어 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천문대의 망원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별처럼 그들은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찾아갈 때마다 언제나 그들은 부재중이었고,
나중에 다시 오라는 대답일뿐이었다.
"제기랄!"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매번 그런 식으로 골탕을 먹이는 것이었다.
난 정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쫓아다녔다. 수없이 출판사 문 손잡이를 돌렸다.
행여나 하는 기대로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출판사 문 앞에서 망설여 대던 초라한
내 모습은 정말 그 자체였다. 일단 사무실 안에 들어서면 더운 열기와 갓 인쇄된
새책에서 풍기는 냄새가 어찔할 정도로 달려들기도 했다. 그곳은 몹시 분주한 키
작은 대머리 남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판매대 뒤편의 쌍사다리에 올라선
채 "편집장께서는 외출중이십니다"라고 말해 버리곤 그만이었다. 매일 저녁 슬픔과
짜증이 뒤섞인 가슴을 안고 지친 몸을 끌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자끄 형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위로했다.
"용기를 가져, 내일은 선공할 거야."
다음날이 되면 나는 다시 원고뭉치로 무장하고 전선에 나섰다. 날이 갈수록
원고뭉치는 더 무겁고 귀찮게 느껴졌다. 처음에 나는 마치 새로 산 우산처럼 그
원고뭉치를 자랑스럽게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 원고 뭉치가
부끄러워져 나는 외투 속에 집어넣어 보이지 않게끔 숨은 뒤 단추까지 채우곤
했다.
여드레가 그런 식으로 훌쩍 흘러가 버렸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언제나처럼
자끄 형은 혼자 삐에로뜨 씨 집으로 저녁시간을 보내러 갔다. 보이지도 않는 별을
쫓아다니느라 지쳐 있던 나는 종일 집에 누워 있었다. 저녁때 집에 돌아온 형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는 내게 가볍게 투덜거렸다.
"야, 다니엘! 네가 오늘 '거기'에 가지 않은 건 잘못이야. 까미유가 울면서 몹시
섭섭해 했어. 네가 보고 싶어 죽겠다는 거야. 오후 내내 네 얘기만 하더라구... 아!
그애는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불쌍한 자끄 형은 그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삐에로뜨 씨는 ? 삐에로뜨 씨는 뭐라고 그랬어?"
내가 머뭇거리며 물어 보았다.
"아무 말도 안했어. 네가 안 나타나니까 꽤 실망하는 표정이더라... 다니엘, 넌
거기 가봐야 해. 가겠지?"
"내일 갈께, 자끄 형. 약속할께."
"톨로꼬또티깡! 콜로꼬또티그낭!"
우리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방금 돌아온 꾸꾸블랑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형이 갑자기 웃으며 내게 소곤거렸다.
"까미유가 저 여자를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는 모르지? 그애는 꾸꾸블랑이
자기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애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어... 그애가 꾸꾸블랑을 질투하다니! 참 웃기는 일이지?"
나도 형처럼 웃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만일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꾸꾸블랑을
질투한다면 그건 순전히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날 오후, 나는 삐에로뜨 씨 집을 찾아갔다. 나는 곧장 오층으로 올라가서
검은 눈동자의 그녀와 얘기를 나눈 다음 삐에로뜨 씨를 만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피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 뒤편에 있는 옆자리에 앉아야 했다. 이따금씩 가게
뒷방에서 플루트를 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삐에로뜨 씨는 더듬거리지도 않고 거침없이 빠르게 말했다.
"다니엘,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니 굳이 말을 돌리지 않겠네.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우리 딸은 자네를 사랑하고 있는데...
자네 역시 그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나?"
"물론입니다. 삐에로뜨 씨."
"그렇다면 됐네. 한 가지 제안을 하겠는데... 내 딸이나 자네는 나이가 아직
어리니 결혼은 3년 후에나 하기로 하자구. 그러니 앞으로 3년 안에 자네는 직업을
구해 안정된 생활 기반을 닦아야 하네. 자네가 앞으로도 계속 '푸른 나비 장사'를
할 생각인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만일 내가 자네 입장이라면 말이야...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나라면 그 시를 팽개쳐 버리고 라루트 상회에
들어가겠어. 그래서 도자기 장사에 익숙해진 3년 후 삐에로뜨 사위인 동시에
상속인이 되겠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삐에로뜨 씨는 날 팔꿈치로 툭툭 치더니 킥킥 웃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를 도와
도자기를 팔도록 내게 권유하면 내가 무척 기뻐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화낼 용기도, 대답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나는 두려워졌다.
접시와 색색의 잔들, 반구형의 대리석 덮개들이 내 주위에서 춤을 췄다. 카운터
앞쪽의 진열대 위에 놓인 연한 색깔의 유약을 입히지 않고 구운 도자기에 그려진
목동들이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다가 지팡이를 휘두르더니 내게
외쳐 댔다.
'너는 도자기나 파는 게 어울려!'
그 뒤편에 있는 자주빛 사기 인형들도 목동들의 말에 찬성한다는 듯 커다란
머리를 흔들어 댔다.
'그래... 그래... 넌 도자기나 파는 게 어울려!'
또한 가게 뒷방에서도 음험하고 비웃는 듯한 플루트소리가 슬며시 흘러나오고
있었다.
'넌 도자기나 파는 게 어울려! 넌 도자기나 파는 게 어울려!'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삐에로뜨 씨는 내가 흥분과 기쁨 때문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는 내게 확신을 주듯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세... 지금은 딸애에게 올라가 보게나...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그 아이는 아마 지금쯤 자네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는 삐에로뜨 양에게 올라갔다. 그녀는 트리부 부인과 함께 담홍색 응접실에서
아버지의 슬리퍼에 수를 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내 기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그녀는 자기 아버지 삐에로뜨 씨를 영락없이 빼다박은
듯이 보였다. 살그머니 바늘을 빼내더니 몇 코나 수놓았는지 큰소리로 세고 있는
태평한 태도에 나는 부아가 잔뜩 치밀어올랐다. 자그맣고 불그스레한 손가락,
화색이 도는 두 뺨, 근심걱정 없는 태평한 표정의 그녀는, '넌 도자기나 파는 게
어울려!'라고 소리치던 도자기 속의 여자 목동과 꼭 닮아 보였다. 다행히도 검은
눈동자의 그녀도 거기 있었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다소 흐릿하고 우울해
보였지만 무척 흥분한 내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내 뒤를 따라 삐에로뜨 씨가 들어왔다. 아마도 그는 우리를
감시하는 트리부 부인이 믿기지 않아 쫓아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 순간부터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사라지고 도자기 속의 목동 같은 삐에로뜨
양만이 남아 있었다. 삐에로뜨 씨는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며 수다를 떨었다.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라는 말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요란스러운 식사가 평소보다 훨씬 더 오래 계속되었다. 식사를 끝마치고 삐에로뜨
씨는 나를 따로 불러 내더니 자신의 제안을 상기시켰다.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이렇게 중요한 문제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므로 한 달 뒤에 대답하겠다고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는 내가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 무척 놀라와하는
듯했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알았네. 한 달 후에 대답을 듣기로 하지."
삐에로뜨 씨에 대해선 아무것도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커다란 충격으로 오후
내내 그 끔찍하고 치명적인 '넌 도자기나 파는 게 어울려'라는 말이 귓전을 울려
댔다. 나는 자기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와 피아노 옆에 자리잡은 새머리
노인이 각설탕을 갉아 먹는 소리에도 그 말을 들었으며, 금발 청년이 플루트로
룰라드 곡을 연주할 때도 그 말을 들었다. 심지어 삐에로뜨 양이 피아노 앞에
앉아 '로젤린의 꿈'을 연주할 때에도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나는 거기
모인 인형처럼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부유한 사람들의 몸짓과 의상 속에서도,
벽지의 화려한 그림 속에서도, 커다란 시계추에 그려진 장미꽃을 꺾고 있는
비너스와 그 장미에서 사랑의 신이 날아오르고 있는 그림 속에서도, 값비싼
가구에서도, 그 담홍색의 끔찍한 응접실에 자리잡고 있는 온갖 자질구레한 물건
속에서도 그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매일 저녁 똑같은 사람들이 모여 똑같은 곡을
연주하며 그날그날을 즐기며 살아가는 그 응접실은 내게 그 말을 전해 주고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그런 고루한 응접실에는
없었다.
그 지겹고 괴로운 집에서 돌아온 나는 자끄 형에게 삐에로뜨 씨의 제안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형은 나보다 더 심하게 분개를 했다.
"다니엘 에세뜨가 도자기 장사를 한다고? 생각해 보렴! 그건 마치
라마르띤느에게 성냥을 팔라거나 쌩뜨 뵈브더러 말총 빗자루를 팔라는 이야기와
똑같아. 그 바보 같은 삐에로뜨 씨는 정말 미쳤군!... 하지만 그를 원망할 필요는
없어. 뭘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네 시집이 성공을 거두고 네 이름이 신문을
장식하면 그 사람도 태도를 바꿀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자끄 형, 하지만 신문에 내 이름이 오르려면 내 시집이
출판되어야 하는데, 그건 가능성이 없잖아... 왜 그러는지 알아? 출판업자를 찾을
수가 없고 또 그 사람들은 시인들이라면 만나려고 하지 않아. 그 위대한 바가바도
자기 돈을 들여가면서 시집을 인쇄해야 했어."
자끄 형이 식탁을 톡톡 두드려가면서 말했다.
"음, 우리도 그 사람처럼 하면 되지? 우리 돈으로 네 시집을 인쇄하는 거야."
나는 놀란 눈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우리 돈으로?"
"그래, 우리 돈으로 출판하는 거야. 마침 후작님이 요즈음 회고록의 1부를
인쇄하고 있거든... 난 그 회고록의 출판업자를 매일 만나고 있단다. 그는
딸기코에 어린애같이 순진한 알자스 출신이야. 그는 틀림없이 네 시집을 외상으로
인쇄해 줄 거야... 그렇고 말고! 네 시집이 팔리면 그 돈을 갚으면 돼... 자! 됐어.
내일 내가 그 사람을 만나겠어."
다음날 자끄 형은 그 출판업자를 만나 보고는 희색이 만면해서 돌아와
개선장군처럼 말했다.
"됐어! 네 시집을 내일 인쇄에 걸기로 했어. 모두 9백 프랑쯤 될 거야. 대단치
않은 돈이지. 한 달에 3백 프랑씩 세 번에 걸쳐서 갚기로 했어. 이제 계획을 좀
세워 보자. 천 부를 찍어서 한 부에 3프랑씩 파는 거야. 내 말 알아듣겠니? 3천
프랑이라구. 그러고 나서 출판업자에게 빚을 갚은 다음 시집을 팔아 주는 서점에
한 권당 1프랑씩 넘겨 주고 신문기자들에게도 몇 부 주고 나면 우리에게는 천백
프랑의 이익이 떨어지는 거야. 알겠니? 그렇게 되면 성공적인 데뷔가 되는 거야."
그렇게 성공적인 데뷔만 하게 된다면 더이상 보이지도 않는 별들을 쫓아다닐
필요도 없고, 출판사 문 앞에서 창피하게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날 쌩
제르멩 데 프레 광장의 우리 방은 멋진 계획과 화려한 꿈으로 가득 찼다. 그
이후로 나는 출판사에 가서 교정지를 고치고, 표지의 색깔을 의논하고,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인쇄된 종이를 보고, 두세 번이나 제본소를 뛰어다녔다. 드디어
처음으로 나온 시집을 받아들고서 떨리는 손끝으로 책장을 열었다... 자! 세상에서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전원시' 시집을 들고 자끄 형과 함께 삐에로뜨 씨 집으로
향했다. 형과 나는 기쁨에 들뜨고 당당한 태도로 그 담홍색 응접실에 들어섰다.
"삐에로뜨 씨, 내 첫 작품을 까미유에게 바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이렇게 외쳐 대며 기쁨으로 떨고 있는 그 사랑스런 자그마한 손 위에 내
시집을 올려놓았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표지에 쓰여 있는 내 이름을 보자
반짝반짝 광채를 발하며 감사의 눈길을 내게 보냈다. 삐에로뜨 씨는 검은
눈동자의 그녀만큼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식으로 책을 찍어 내면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는지를 자끄 형에게 물어 보았다. 자끄 형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천백 프랑은 너끈히 벌 수 있죠."
"아니, 그게 사실인가?"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오랫동안 얘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그 비단 같은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깐 채 내 책을
읽다가 감탄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하는 검은 눈동자의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너무너무 기뻤던 것이다. 시집과 검은 눈동자의 그녀, 이 두 가지 즐거움을
내게 안겨 준 것은 어머니 같은 자끄 형이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는 '전원시'가 서점에서 어떤 반응을 받고
있는지 알아 보기 위해 오데옹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자끄 형의 여전히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 얼마나 팔렸는지 보고 올께."
나는 길에서 서성거리며 형을 기다렸다. 서점 진열대 안에 검은색 줄이 쳐진 내
시집 표지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면서 말이다. 얼마 후에 형이 돌아왔다. 형은
흥분으로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 보였다.
"야, 벌써 한 권 팔렸어. 이건 좋은 징조야."
나는 아무 말 없이 형의 손을 꼭 쥐었다. 너무도 흥분이 되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파리의 누군가가 자기 지갑에서 3프랑을 꺼내 내 시집을 사서 그걸 읽고 나를
심판한다. 과연 그 사람은 누굴까? 그 사람은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그러나 다음날 불행히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내 시집이 나온 다음날, 그 사나운 사상가 옆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있는데 자끄
형이 숨을 헐떡거리며 식당으로 뛰어들어와 다짜고짜 나를 밖으로 잡아 끌며
말했다.
"굉장한 소식이야! 난 오늘 저녁 7시에 후작님과 함께 떠나게 됐어... 니스에
사는 다끄빌 양이 곧 죽게 된다나 봐. 아마 오래 머무르게 될지도 몰라... 네
생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후작님은 내 봉급을 두 배로 올려 주셨어. 한
달에 백 프랑씩 네게 보내줄 수 있을 거야... 왜 그래? 안색이 아주 창백하구나.
자! 다니엘, 어린애처럼 굴지 마. 다시 들어가서 마저 식사를 하면서 보르도산
포도주를 반 잔쯤 마시면 용기가 날 거야. 난 삐에로뜨 씨에게 달려가서
작별인사를 하고 출판업자에게 네 시집을 신문사에 보내도록 부탁하겠어... 난
시간이 없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아. 5시에 집에서 만나도록 하자."
형이 성큼성큼 쌩 브느와 가를 내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포도주는 그 사상가가 이미 다
마셔 버렸다. 몇 시간 후엔 어머니 같은 자끄 형이 내게서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힘이 쭉 빠져 버렸다. 내 시집과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를 생각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자끄 형이 떠나고 나면 나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형은 약속한 시간에 나를 만나러 왔다. 형은 무척 걱정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즐거운 표정을 잃지 않고 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마지막까지 보여
주었다. 형은 오직 나와, 나의 행복과, 나의 생활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기 짐을
꾸린다는 핑계로 형은 내 속옷과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살펴 주었다.
"네 셔츠는 이 안쪽에 있고... 잘 봐, 다니엘... 손수건은 이쪽 넥타이 뒤에
있어."
"형이 뒤적대는 건 형 옷장이 아냐. 그건 내 옷장이라구."
짐을 다 꾸리고 나자 형은 마차를 부르러 내려갔다. 우리는 역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자끄 형은 내게 여러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글을 자주 쓰도록 해... 그리고 네 시집에 관한 기사는 모두 내게 보내 줘.
특히 귀스따브 쁠랑슈가 쓴 기사는... 내가 수첩을 만들어서 그 기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붙여 놓을 테니까. 그 수첩은 에세뜨 가문의 가보가 될 거야... 그리고
세탁부는 화요일에 온다... 성공에 너무 집착하거나 눈이 어두워지거나 하지 마...
분명히 넌 큰 성공을 거둘 거야. 하지만 파리에서의 성공이란 대단히 위험한 거야.
다행히도 까미유가 모든 유혹으로부터 너를 지켜 줄 거야... 다니엘, 특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까미유가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거기' 자주 가 보도록 해."
마침 우리는 동물원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형이 킬킬대며 웃기
시작했다.
"한 너댓 달 전에 우리가 여길 지나갔던 일 생각나니? 어때?... 그날 밤의
다니엘과 지금의 다니엘은 무척 달라졌지?... 아! 넌 넉 달만에 성공한 거야!"
착한 자끄 형은 내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믿고 있었다. 나 역시 바보처럼
그렇게 믿고 있었다.
우리는 역에 도착했다. 후작은 벌써 와 있었다. 흰 고슴도치 같은 머리모양에
대합실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그 자그마한 괴짜 노인을 난 먼 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자, 이제 작별이다!"
자끄 형이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힘껏 감싸안아주더니 주인에게 뛰어갔다.
사라지는 형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몸을 떨었다.
갑자기 나는 더욱 작아지고, 연약해지고, 수줍어지고, 어린애 같아지는 것 같았다.
형이 떠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 사고력과 힘과 대담함과 능력이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다시 꼬마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날 밤 길고 긴 파리 거리와 인적이 끊긴 강변을 따라 나는 천천히 걸음을
떼며 우리 방으로 돌아왔다. 휑덩그레하게 빈 방에 혼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끔찍이도 슬퍼졌다. 아침이 될 때까지 그냥 밖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우리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위실 앞을 지나려는 데 수위가 내게 소리쳤다.
"에세뜨 씨, 편지가 와 있어요!"
그것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향기가 풍기는 멋진 편지였다. 여자가 쓴 듯한
필체는 검은 눈동자의 그녀의 필체보다 더욱 세련되고 감미로와 보였다... 그 누가
보낸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서둘러 봉투를 뜯어서 계단을 밝히고 있는
램프 불빛에 비쳐 가며 읽었다.
이웃 친구에게
'전원시'는 어제 이후로 제 책상에 놓여 있읍니다. 하지만 그 시집에는 헌사가
빠져 있답니다. 오늘 저녁에 오셔서 헌사를 직접 써 주시고 차라도 함께 드신다면
저로선 무한한 영광이겠어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예술가들끼리 말예요.
이르마 보렐
이층에 사는 부인
이층에 사는 부인이라는 서명을 보고 나는 온몸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계단에서 마주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입가에 흰색의 자그마한 흉터가
있는 그녀는 아름답지만 차갑고 위압적인 태도였었다. 그런 여인이 내 시집을
샀다고 생각하자 내 가슴은 자부심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는 편지를 손에 든 채 계단에 못박힌 듯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내 방으로
그냥 올라가야 할 것이지 아니면 이층에서 걸음을 멈춰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끄 형의 충고가 떠올랐다.
'다니엘, 특히 까미유를 울리지 마.'
만일 이층에 사는 부인의 방에 가게 되다면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울게 될
것이고 자끄 형 또한 고통스러워 할 것이라는 예감이 스쳤다.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중얼거렸다.
"가지 않겠어."
##환상의 여인 아르마 보렐
도저히 흘러갈 것 같지 않던 5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서야 건방진 나는 이르마
보렐의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꾸꾸블랑이었다. 그 끔찍한 흑인
하녀는 나를 보자 기분이 좋은 듯 식인귀같이 능글능글 웃으면서 번쩍번쩍 빛나는
검은 손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꾸꾸블랑은 나를 데리고 으리으리한 방을 두서너 개 지나더니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문 앞에 멈춰섰다. 문 안에서 목 쉰 고함소리, 흐느낌소리,
주문을 외는 소리, 발작적인 웃음소리 같은 것이 어렴풋이 흘러나왔다. 꾸꾸블랑이
문을 두드리자 즉각 대답이 들려 왔고 나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연보라색 비단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져 있는
화려한 방이었다. 이르마 보렐은 혼자서 큰 걸음걸이로 왔다갔다하면서
무엇인가를 큰 소리로 읽고 있었다. 레이스가 달린 풍성한 하늘색 실내복 때문에
마치 구름이 그녀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내복 소매 한쪽을
어깨까지 걷어 붙이고 있어 순백색 팔이 드러나 있었다. 한 손엔 종이칼을 들고
단검인 양 휘두르고 있었고 다른 쪽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나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 이웃집 부인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는 덜 창백했고 베일에 감춰진 듯 신선한 장미빛을
띠고 있는 얼굴은 마치 예쁜 편도나무 꽃송이 같아 보였다. 그 때문인지 입가의
하얀 상처도 더욱 희게 보였다. 그리고 원래 자신감에 넘쳐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던 얼굴도 흘러내린 아름답게 빛나는 머리칼 때문에 부드럽게 보였다. 분을
바른 듯한 잿빛 금발의 부드러운 머리결 때문에 그녀의 모습에선 마치 머리
주위에 황금빛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그녀는 나를 보자 낭독을 멈추고 들고 있던 책과 종이칼을 뒤에 놓인 의자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한껏 교태를 떨어가며 무례하리만치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친구!"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군요! 난 지금 끌리뗌네스트르의 역을 연습하고
있던 중이예요. 아주 감동적이지 않아요?"
그녀는 나를 소파에 앉히더니 자기도 내 옆에 앉았다.
"연극에 심취하셨나 봐요, 부인?"
나는 감히 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아, 당신은 환상이 뭔지 아시는 것 같군요. 난 조각과 음악에도 열중한 적이
있었죠. 하지만 이번엔 완전히 사로잡힌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떼아뜨르 프랑세 극장에서 화려하게 데뷔할 거예요."
그 순간 거대한 노란색 오디새 한 마리가 후드득 날개짓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 무서워 말아요."
그녀가 내가 질겁을 한 꼴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내 앵무새랍니다. 마르케이자스 군도에서 데려온 용감한 새에요."
그녀는 새를 안고 쓰다듬으면서 서반아어로 몇 마디 하더니 한구석에 놓인
황금색 횃대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내심 감탄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흑인 하녀, 떼아뜨르 프랑세 극장, 마르케이자스 군도... 참 특이한 여자야!'
그녀는 다시 내 옆자리에 와 앉더니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전원시'를 화제에 올렸다. 그녀는 그 시집을 어젯밤부터 쉬지 않고 계속 읽어서
거기 나오는 시구들을 거의 외다시피 했으며 열정적으로 그 시구들을 낭독했다.
내 허영심을 만족시킬 정도의 그렇게 완벽한 향연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어느 지방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사교계에 드나들고
있는지, 사랑을 해 본적이 있는지... 등등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때 이르마 보렐은 자끄 형, 에세뜨 가문의 내력, 우리
집에 몰아닥친 불행 그리고 우리가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무척 애쓰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난 삐에로뜨 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다만 나를 향한 일편단심으로 열병을 앓으며 죽어가고 있는
상류사회의 한 젊은 아가씨가 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열렬한 사랑을
방해하고 있다고만 얘기해 두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에게
조각을 가르치던 백발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늙은 조각가였다.
그는 심술궂은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면서 속삭이듯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말한 그 나포리 산호채집꾼인가 보지?"
"맞았어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그렇게 불려진 데 대해 당황하고 있는 나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만났던 그날 아침, 생각 안 나요? 그날 아침엔 셔츠도 풀어 헤치고,
머리는 산발을 해가지고선 손에는 항아리를 들고... 난 나폴리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호채집꾼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 내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했었죠. 하지만 우린 그 어린 산호채집꾼이 위대한
시인이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그리고 그 물항아리 안엔 분명히 당시의
그 '전원시'가 들어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내가 그들에겐 존경과 감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무척 기뻤다. 나는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겸손한 몸가짐을
가지려고 애썼다. 꾸꾸블랑이 또 한 명의 손님을 안내해 왔다. 그는 다름아닌
바가바였다. 바가바는 들어오면서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가 초록색 표지의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당신이 말한 그 푸른 나비 어쩌구 하는 시집을 가져왔소. 참 해괴망칙한
시야!"
그녀가 손짓을 해보이자 그는 하던 말을 멈췄다. 그는 그 시의 저자가 그
자리에 있음을 알아차렸고 계면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안의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졌다. 그때 세번째 손님이 도착하여 다행이 분위기가
바뀌었다. 세번째 손님은 그녀에게 연극대사의 발성기법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그는 안색이 몹시 창백하고, 붉은색 가발을 쓰고 있었으며, 웃을 때면 썩은 이빨이
다 드러나 보이는 꼽추였는데 모습이 아주 끔찍했다. 꼽추만 아니었더라도 당대의
위대한 연극배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꼽추란 사실 때문에
그는 무대에 설 수 없었고 학생들이나 가르치고, 당대의 모든 배우들에 대해
악담을 늘어놓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르마 보렐은 그가
나타나자마자 큰소리로 물었다.
"이즈라엘리뜨를 봤나요? 오늘 저녁엔 어땠어요?"
이즈라엘리뜨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유명한 비극 여배우 라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꼽추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녀는 갈수록 못해. 그앤 영 별볼일 없단 말이야. 더구나 그앤 창녀라구. 진짜
창녀란 말이야."
"그래요? 진짜 창녀예요?"
그녀가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그녀 뒤에 서 있던 나머지 두 사람도 확실한
어조로 따라 말했다.
"진짜 창녀야...."
얼마쯤 지나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뭐든지 낭송을 한번 해보라고 했다.
그녀는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종이칼을 쥐고 실내복
소매를 걷어 붙이고는 낭송하기 시작했다.
잘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순백색
팔과 고개짓을 할 때마다 살랑거리는 그녀의 금발에 매료되어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낭송을 끝마쳤을 때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크게 박수를 쳐대고 이번에는 내가 라셸은 진짜 창녀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날 밤 나는 온통 순백색과 황금빛만이 출렁대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시를 쓰려고 탁자 앞에 앉으려고 하는데 그 황홀한 팔이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유혹하는 통에 시를 쓸 수 없었다. 외출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 포기하고 자끄 형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는 이층 부인 이르마
보렐에 대한 얘기로 채워졌다.
아, 자끄 형! 이르마 보렐은 굉장한 여자야! 그녀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어.
그녀는 소나타도 작곡하고 그림도 그려. 벽난로 위에는 테라코타로 만든
산비둘기가 있어. 자기 작품이래. 석 달 전부터는 연극을 하고 있는데 그 유명한
라셸, 라셸은 정말 창녀처럼 보이는데, 라셸보다 훨씬 잘해. 정말이지 형은 꿈
속에서라도 그런 여자를 보지 못했을 거야. 그녀는 안 본 게 없고, 또 가보지 않은
곳도 없어. 갑자기 그녀는 이렇게 얘기하는 거야. '내가 쌩 페테르스부르그에
있었을 때엔...' 그랬다간 또 '나폴리보다 리오의 항구가 더 좋지'하고 말하는
거야. 마르케이자스 군도에서 데려온 앵무새도 있고, 흑인 하녀는 프랭스 항구를
지나다가 만나게 되었데. 형도 잘 알지? 왜 그 꾸꾸블랑 말이야. 좀 사나와
보이긴 해도 꾸꾸블랑은 조용하고, 얌전하고, 성실해. 아주 훌륭한 여자야.
돈키호테의 그 사람좋은 산초처럼 속담을 섞어 가며 말을 하는 게 버릇인가 본데,
평소엔 말수도 적어서 거의 말을 안하지. 그런데 사람들이 이르마 보렐에 대해서
알아 보려고 유도질문을 하거나 하면, 가령 그 여자가 결혼을 했는지, 어디엔가
보렐이라는 남편이 있는 것인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진짜 그 여자가 그렇게
부자인지를 물어 볼라치면 꾸꾸블랑은 특유의 은어로 이렇게 대답하지. '염소가
하는 일을 양이 알 리가 없지'라든가 '양말에 구멍이 났는지를 알아 보려면 구두를
벗겨 봐야 한다'라고 말이야. 그녀는 이런 속담들을 백여 개도 넘게 알고 있어서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녀를 당할 수는 없어... 그런데 말이야. 내가
이르마 보렐의 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알아?... 글쎄, 바가바를 만났지
뭐야? 그치는 그 부인한테 굉장히 빠져 있는 것 같았어. 그는 그녀를 콘돌
독수리나 백련, 물소에 비교하는 아름다운 시를 지어 바치지. 하지만 그녀는 그런
류의 찬양 따위엔 신경도 쓰지 않아. 게다가 그녀는 그런 아부에는 아주 익숙해져
있거든. 그녀 집에 드나드는 예술가들은, 아주 유명한 사람들도 있는데, 모두
그녀를 사랑하고 있어.
그녀는 아름다와. 뭔가 아주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 나는 내 마음이
벌써 그녀에게 사로잡힌 것 같아서 겁이 나.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나를 지켜 주고는 있지만 말이야. 그 사랑스러운 검은 눈동자! 오늘
저녁은 그녀를 만나서 형 이야기를 해야겠어. 자끄 형!
내가 편지를 다 써갈 무렵 누군가가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이르마 보렐이
꾸꾸블랑을 시켜 그 창녀의 연극을 보러 떼아뜨르 프랑세 극장에 가자고 초대를
해온 것이다. 나는 그 초대를 기꺼이 승낙하고 싶었는데 입고 갈 옷이 마땅치
않아서 초대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끄 형이 옷 한 벌쯤은 사주었어야 했어... 그건 꼭 필요한 거란 말이야...
내가 쓴 시가 신문에라도 소개되면 기자들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하러 가야 하고
말이야. 옷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나는 아주 기분을 잡쳐 버리고 말았다.
저녁에 나는 삐에로뜨 씨의 집에 들렸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삐에로뜨 씨는 지나치게 웃어 댔고 삐에로뜨 양도 오늘따라 거무잡잡해 보였다.
"나를 사랑해 줘요!"
검은 눈동자가 그렇게 부드럽게 속삭여 봤자 허사였다. 나는 배은망덕하게
별처럼 아름다운 속삭임도, 그 어떤 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에 라루트
부부가 외출에서 돌아와 나를 반겼을 때도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슬프고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소곡을 연주할 때도 이르마 보렐이 순백색 팔로 부채를
흔들면서 귀빈석에 앉아 있는 모습,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일 황금빛 머리칼
등 생각만 해도 황홀한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속이 가득 찼다.
'그녀가 만약 여기 이렇게 초라하게 앉아 내 모습을 본다면... 상상만 해도
수치스러운 일이야!'
별다른 일 없이 며칠이 지났다. 이르마 보렐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기척도
없었다. 이층과 오층 사이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바다가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밤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그녀의 마차가 돌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마차가 굴러오는 무거운 소리, 꾸꾸블랑을 부르는 종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무심코 앉아 있다간 그 종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꾸꾸블랑이
현관문을 열어 주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소리까지 나는 고스란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게 용기가 있었더라면 그녀의 소식을 물어 보러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나의 주인은 여전히 검은 눈동자였다. 나는 많은 시간을
검은 눈동자와 함께 보냈고 나머지 시간엔 방에 처박혀 시를 쓰며 지냈다. 이따금
이 지붕 저 지붕에서 원을 그리며 날아드는 참새들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이 도시의 참새는 기품 있는 부인과도 같아서 학생들의 다락방 위로 날아와서는
그들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까르멜 수녀회 수녀들처럼 수도원 한구석에
다소곳이 서서 한마디 불평도 없이 종을 울려 대는 충실한 쌩 제르멩 종탑의
종들은 절친한 친구인 내가 변함없이 책상에 앉아 있기를 바라며 열심히 종을
울려 댔다. 나의 용기를 북돋우려는 듯 더욱 아름다운 소리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 자끄 형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니스에 자리를
잡았다며 자세한 소식을 알려 왔다.
다니엘,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야. 네가 내 창문 아래쪽으로 펼쳐져 있는 바다를
본다면 저절로 시상이 떠오를 텐데! 난 그런 걸 거의 즐기지 못하고 있어. 외출을
전혀 않고 있거든... 후작은 매일매일 받아쓰기를 시키지. 아, 너무 지루해.
받아쓰면서도 때때로 고개를 들어 수평선 위를 떠가는 붉은 돛단배들을 쳐다보곤
하지만 곧 종이 위로 돌아와야 해... 다끄빌 양은 여전히 아프단다... 이층에선
끊임없이 기침하는 소리만 들려 오거든... 나 역시 배에서 내리자마자 심한 감기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어.
그리고 좀 다른 얘길 하다가 형은 이층 부인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내 충고를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면, 이젠 그 여자 집엔 가지 말았으면 한다. 그
여잔 너무 복잡미묘한 여자야. 그리고 이런 말을 네게 해도 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그 여잔 약간 끼가 있는 것 같더구나... 그런데 말이다. 어제 나는
항구에서 네덜란드 돛단배 한 척을 보았어. 세계 일주여행을 마치고 방금 돌아온
배였는데 돛대의 천은 일본산이고, 받침대는 칠레산 재목이고, 또 마치 지도처럼
얼룩덜룩한 장비들이며 아주 현란한 배였어... 잘 들어 봐, 나는 너의 그 이르마
보렐이 이 배를 닮았다고 생각했단다. 그 험난한 여행마저 치러 낸 배야 좋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자는 달라. 일반적으로 그렇게 많은 나라를 본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겐 많은 고통을 주는 법이야... 조심해, 다니엘. 조심해야 해. 무엇보다도
부탁하고 싶은 것은 까미유를 결코 울리지 말라는 것....
그 마지막 말이 내 가슴에 찡하게 와 닿았다. 자신을 사랑하기를 거부했던
여자의 행복에 신경을 쓰는 자끄 형의 인간다움에 난 정말 감격하고 말았다.
'자끄 형 걱정 말아. 그녀를 물리진 않겠어.'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이젠 더이상 이층 부인에게 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그날 저녁 마차가 현관에 도착했을 때도 난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꾸꾸블랑의 소래소리가 전처럼 기분을 돋구어 주지도 않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음산한 9월의 밤이었다... 나는 방문을 반쯤 열어 놓고
공부하고 있었다. 갑자기 내 방으로 이어진 나무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가벼운 발자국소리와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누구일까?
꾸꾸블랑은 자기 방으로 돌아간 지도 오래 됐는데... 어쩌면 이르마 보렐이
꾸꾸블랑에게 할 말이 있어 오는 건지도 모르지....
이르마 보렐이라고 생각하자 내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책상
앞에 그대로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자국소리는 점점 가까와 오고 있었다.
갑자기 소리가 멈췄고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가볍게 꾸꾸블랑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대답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여자야."
나는 온 신경을 거기에 집중시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환한 불빛이 내 방으로 퍼져들었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섰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회한으로 얼룩진 편지
자끄 형이 떠난 지 두 달이 흘렀지만 아직 그는 돌아올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다끄빌 양은 죽었고 후작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끄 형을 데리고 이태리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자신의 회고록을 구술하는 지긋지긋한 일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 일에 무척이나 혹사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끄 형은 내게
편지를 쓸 짬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배달된 편지에도 짤막하게 몇 줄만 쓰여 있을
뿐이었다. 겉봉투엔 로마, 나폴리, 피사, 팔로마 등지의 소인이 찍힌 다양한
우표가 붙어 있었지만 편지 내용은 한결같이 똑같았다.
"공부 열심히 하니?... 까미유는 잘 지내는지 궁금하구나!... 귀스따브 쁠랑쉬의
기사가 신문에 소개됐는지, 이르마 보렐의 집에는 다시 안갔겠지...."
언제나 똑같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나는 변함없이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며
책도 잘 팔리고 있고 또 그녀도 잘 지내고 있다. 그리고 이르마 보렐은 그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고 귀스따브 쁠랑쉬 건은 잘 되어 가고 있지 않다고 답장을
썼다.
그러나 답장 내용처럼 그렇게 별 변화 없이 흘러간 나날은 결코 아니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밤, 나는 장문의 편지를 자끄 형에게 썼다. 털어놓지 않으면
터져 버릴 것 같은 내 심경을 토로하기 위해서....
자끄 형에게
자끄 형! 난 거짓말을 했어. 지난 두 달 동안 난 거짓말만 늘어놓았던 거야. 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편지를 썼지만 내 잉크병은 말라 붙어 버렸어. 책이 잘
팔리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지난 두달 간 단 한 권의 책도 팔리지 않았고,
이르마 보렐은 결코 만나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어. 자끄
형! 왜 난 형 말을 듣지 못하는 걸까? 왜 앙 그 여자의 집에 다시 가게만 되는
걸까?
형 말대로 그 여자에게 끼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난 그 여자가
지적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렇지 않더군. 그 여잔 자기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다 남에게서 주워들어
건성으로 지껄이는 것뿐이었어. 그 여잔 영리하지도 않고, 아주 박정한 인간이야.
교활하고 파렴치한 데다가 얼마나 악독한지... 그 여잔 화가 치밀어오르면 그
분풀이를 꾸꾸블랑에게 하는 거야. 꾸꾸블랑을 채찍으로 사정없이 때리고,
방바닥에다 넘어뜨려서는 발로 짓밟는 거야, 글쎄. 너무 끔찍하지 않아? 정말
하나님도 악마도 믿지 않고, 단지 커피 찌꺼기 같은 걸로 점이나 치는 몽유병자의
예언만을 무조건 믿는 지독한 인간으로 보여. 그 여자가 비극 여배우가 될 만한
재능이 있다고? 천만에. 아무리 꼽추선생의 강의를 들어 봤자 향상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입안에 꽈리를 물고는 하루종일 방안에만 처박혀 있는 꼴을
보면 어떤 극장도 선뜻 그녀를 써 준다고 나설 것 같지가 않아. 그 여잔 스스로가
아주 유능하다고 자신감에 차 있는 모양인데 그런 꼴을 보면 그야말로 완전히
희극 배우인 셈이지.
어쩌다 그토록 선한 것과 순수한 것만을 좋아하던 내가, 그 여자의 손아귀에
쥐여 버렸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자끄 형, 하지만 결단코 맹세하는데, 이젠 그 여자에게서 빠져나왔고 이젠 정말
모든 걸 정리했어. 완전히 끝냈다구... 내가 그동안 얼마나 비겁했었는지, 그리고
그 여자가 날 어떻게 다뤘는지 형이 알게 된다면!... 난 그 여자에게 내 모든 걸
다 이야기했어. 형 얘기, 우리 어머니 얘기, 그리고 까미유에 대한 얘기를, 모조리
다 말이야. 아, 정말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죽을 지경이야....
나는 그 여자에게 내 옴 마음을 다 바쳤고 속마음을 송두리째 털어놨었지.
하지만 그 여잔 결코 자기 속마음을 내보이려 하지 않더군. 나는 그녀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어디 출신인지 아직도 몰라. 언젠가 그 여자한테 결혼했었냐고
물었더니 마구 웃어 대는 거야. 자기 입가의 상처도 자기 나라인 쿠바에서 칼에
찔려 입은 거라나? 누가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짤막하게 대답하더군.
"파셰코라는 스페인 사람."
그리곤 더이상 한마디도 않는 거야.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잖아? 내가 그 파셰콘지 뭔지 알게 뭐야? 무슨 설명이든 간에 해줘야 할
게 아냐... 그리고 칼에 찔린다는 게 보통 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칼로
찔렸겠느냔 말이야. 참, 기가 막혀.
그런데... 그 여자 주변에 몰려드는 그 어줍잖은 예술가란 작가들이 그 여자에게
이방인이란 별명을 붙여 주어서 그때부터 그 여잘 그렇게 불렀지. 아, 그 예술가란
사람들, 내가 그치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그치들이 어떤 작가들인지 말한다면
말이야, 그치들은 동상이나 그림 따위하고나 살아온 덕택에 이 세상엔 그런
것들밖엔 없는 줄 알아. 언제나 형이 어쩌구 선이 어쩌구, 색상이 어쩌구, 그리스
예술이 어쩌구, 판테온 신전, 평면과 돌출부 따위가 어쩌구 저쩌구 하며 주절주절
늘어놓는 거야. 그치들은 항상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이리저리 뜯어보고는
형이니 곡선이니 특징 따위만 찾아 내려고 하는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의
내면세계잖아? 우리의 가슴속에 뒤고 있는 열정, 눈물, 번뇌 같은 것들 말이야.
그치들은 죽어 있는 것들만을 찾아 내려 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세상을 본단
말이야. 정말 한심한 작자들이야. 그치들이 내 얼굴을 보면서 어떤 특징을 찾아
냈는진 모르지만 난 그치들로부터 어떤 시상도 전혀 얻지 못했어.
그 여자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여잔 자기가 어떤 비범한 사람, 말하자면
아직은 묻혀 있지만 위대한 시인을 찾아 냈다고 생각했었나 봐. 내가 다락방 같은
데에나 있을 인물이 아니라며 얼마나 추켜 대던지...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나를
시들하게 여기더니 이젠 내 얼굴 특징을 갖고 물고 늘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여자 집에 드나드는 작자들에게 포즈를 취해 주는 건데 그치들은
벼라별 포즈를 다 요구하더군. 어떤 땐 내가 이태리 사람 같다고 하면서 플루트를
부는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하거나 또는 제비꽃을 파는 알제리 상인의 포즈를 취해
달라고 했었지. 그리고 또... 내가 뭔지 어떻게 알겠어?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지.
그 여자와 함께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어깨에다 번질거리는 장식을 달고는 앵무새
옆에 하루종일 서 있기도 하고 말이야. 우린 거의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냈어.
터키 사람으로 변신한 내가 긴 의자 한쪽 끝에 앉아 긴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 그
여잔 꽈리를 입 안에다 집어넣고 대사를 외우는 거야. 그러다가 때때로 이렇게
말을 하곤 했지.
"다니당, 당신 얼굴은 정말 특징적이에요!"
내가 터키인 분장을 하면 그 여잔 날 다니당이라고 부르고 이태리인 분장을
하면 다니엘로라고 불렀지. 결코 다니엘이라고 부른 적은 없었어... 게다가
비참하게도 얼마 있으면 나를 모델로 한 두 개의 작품이 전시될 것 같아. 아마,
팜프렛엔 이렇게 쓰여지겠지. '젊은 플루트 연주자. 이르마 보렐 부인에게 바침'
'젊은 농부, 이르마 보렐 부인에게 바침'... 아, 얼마나 창피한 노릇인지!
자끄 형, 잠시 창문을 열고 밤공기를 좀 마셔야겠어. 숨이 막혀... 편지를 쓰는
이 순간에도 답답해 미칠 지경이야.
벌써 밤 11시가 넘었어.
밤공기를 쐬니까 좀 나아. 창문은 그대로 열어 두고 계속 편지를 쓰고 있어.
밖은 어둡고 비가 내리고 있어. 종소리가 들려 와. 이 방은 너무도 쓸쓸해!... 정든
작은 방! 난 옛날엔 이 방을 무척 좋아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싫증이 나, 그
여자가 이 방에서 풍겨나던 품위 있는 분위기에 똥물을 끼얹은 셈이지. 그 여잔
내 방에 너무 자주 와서 나를 자기 맘대로 하는 거야... 아, 이제 이 방은 더 이상
공부방이 아니야....
그 여잔 내가 방에서 뭘 하든 내가 있든 없든 간에 상관않고 아무때나
들어와서는 이곳저곳을 마구 들쑤셔 놓는 거야. 언젠가 저녁에는 그 여자가 내
상자를 뒤지고 있는 걸 보았지. 난 그 상자 안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것들,
어머니의 편지, 그리고 형의 편지와 까미유의 편지를 넣어 두었었단 말이야.
편지는 형도 알고 있는 황금색 상자 안에 들어 있었어, 어느날 내가 방에
들어서는 순간 이르마 보렐은 그 강자를 들고 막 뚜껑을 열려는 참이었어. 잽싸게
몸을 날려서 간신히 낚아챘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분개해서 고함을 쳤어.
그 여잔 아주 비참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군.
"당신 어머니의 편지를 존중해요. 하지만 이 편지는 이제 내 거예요. 그걸 보고
싶어요... 그 상자를 돌려 줘요."
"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편지를 읽어 보고 싶어요...."
"그건 안 됩니다. 난 당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데 당신은 나에 대해선
모든 걸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선 이런짓을 하다니...."
"오, 다니당! 그렇다고 날 비난할 수 있어요? 당신도 원할 땐 내 방에
들어오잖아요? 또 내 방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구요."
그렇게 온갖 아양을 떨어가며 내 손에서 상자를 빼 가려고 했지.
"그렇담 좋아요. 상자를 열게 해주죠. 단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이죠?"
"매일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에 어디에 가는 건지 말해 봐요."
그러니까 그녀는 하얗게 질리더니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더군... 나는 단
한번도 그녀에게 그걸 물어 본 적이 없었거든. 그걸 물어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 다만 매일 아침 그녀가 외출하는 것, 그 입가의 상처,
파셰코란 사람, 안개에 휩싸인 듯한 그녀의 생애, 이 모든 것이 불가사의한
것이라서 그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면 그녀에 대한 환상이 깨질까 봐 두려웠던
것뿐이야.
그런데 그날은 결단을 내려 감히 그걸 물어 보게 된 거지. 무척 당황한 그 여잔
잠시 망설이다가 들릴 듯 말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어.
"내게 그 상자를 주세요. 그럼 모든 걸 말하겠어요."
그래서 난 상자를 주었지. 그 여잔 무척 기뻐하며 상자를 열더군. 상자 안엔
편지가 스무 통 남짓 들어 있었지. 그 여잔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한 줄도
빠짐없이 편지를 읽기 시작했어. 신선하고 정숙한 사랑이 담긴 편지가 몹시도
재미있었는가 봐. 나는 내 사랑에 대해선 벌써 얘기했지만 실은 사실과는
동떨어진 내멋대로 꾸민 얘기였지. 까미유가 상당한 귀족 출신이며, 그녀의
부모님들이 다니엘 에세뜨라는 보잘것없는 평민과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었거든. 형은 내가 허영심의 노예란 점, 그 치사한 내 일면을 잘 알 거야.
편지를 읽다간 때때로 이렇게 말하기도 하더군.
"어머, 이건 참 좋은 일인데!"
"어머, 귀족 처녀치고는...."
그 여잔 편지 하나하나마다 다 읽고 나면 제멋대로 촛불에다 태우면서 편지가
타들어가는 모습을 쳐다보더군. 정말 잔인한 여자야. 하지만 난 그냥 내버려
두었어. 매일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에 그녀가 대체 어디를 가는 것인지를 꼭
알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그 편지들 가운데엔 라루트 상회의 상호가 인쇄된 종이에다 쓴 편지도
하나 있었어. 종이 위쪽에 세 개의 작은 초록색 접시 그림, 그 밑에 '도자기
크리스탈 제품, 라루트의 후계자 삐에로뜨'란 글귀가 인쇄되어 있는 종이 말이야.
아마도 까미유는 어느날 아침 일찍 아버지의 눈을 피해 가게에 내려와 내게
편지를 쓰게 된 모양이고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손에 잡힌 이 종이가 그녀 눈엔
무척 괜찮아 보였던 거겠지... 그런데 그 여자에겐 이것이 얼마나 굉장한
발견이었겠어! 그 여잔 그때까지만 해도 귀족 처녀나 영주인 그녀의 부모님 등
내가 꾸며낸 얘기를 정말이라고 믿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이 편지를 보고는 모든
걸 다 알아차렸지. 마구 웃어 대면서 이렇게 지껄이는 거야.
"그랬군요. 고귀한 진주 같다던 그 귀족 처녀, 교외의 대저택에서 산다던 그
처녀의 이름은 삐에로뜨이고, 그녀는 쏘몽 가에서 도자기를 판다 말이죠... 아!
이제야 왜 당신이 이 상자를 주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겠어요."
아! 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어. 수치심, 경멸감, 그리고 분노... 갖가지
감정이 뒤섞여 더이상 눈에 보이는 게 없었어. 그 여자에게 달려들어 편지를
빼앗았고 꼼짝 못하게 했지. 그 여잔 무서워하면서 뒤로 물러서서 비명을
지르더군, 무시무시하게 생긴 흑인 하녀가 옆방에서 비명소리를 듣고는 즉각
달려왔어. 옷도 입지 않아 그 검은 피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머리는 산발을 한 채
아주 흉악한 몰골로 말이야. 나는 그 흑인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어. 그 큰 손은 힘이 엄청나게 세서 나를 벽 쪽으로 밀어 붙이더니
나와 자기 주인 사이에 버티고 서는 거야.
그러자 이르마 보렐은 정신을 좀 차렸는지 훌쩍거리더군. 아니면 우는
척했는지도 몰라. 울면서도 계속 상자 속을 뒤졌으니까. 그러면서 울먹이는
소리로 주절댔지.
"저 사람이 왜 나를 때리려 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지? 왜냐하면 내가 자기의
귀족 아가씨가 사실은 귀족이 아니라 길가에서 접시나 파는 하찮은 여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 냈기 때문이야....
어머, 이것 좀 봐, 그 귀족 처녀라던 여자가 준 사랑의 정표가 겨우 이거라니...
머리카락 4개와 1쑤우짜리 제비꽃 한다발이라... 꾸꾸블랑, 그 촛대 좀 이리
가져와."
흑인 하녀가 촛대를 갖다 주니깐 글쎄, 그 여자가 머리칼과 꽃잎을 태워
버렸어. 그래도 난 저지할 수가 없었어.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거든.
비극 여배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되지 못할 그 여자가 비단 종이를 펼쳐
보면서 말했어.
"아, 이건 뭐지? 이빨인가?... 아니야! 사탕 같아 보이는데... 맞아, 그래... 하트
모양의 사탕이야...."
맞아, 그건 언젠가 까미유가 쌩 제르멩 광장에 있는 가게에서 사준 것이었어.
자기의 마음을 준다는 뜻으로 말이야.
꾸꾸블랑이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지.
"갖고 싶은 게로구나, 꾸꾸! 자 받아라...."
그러면서 그 여자가 강아지에게 던져 주듯이 그걸 꾸꾸블랑의 입안에 던져
넣었지 뭐야? 탐욕스럽게 보이는 그 흑인 여자가 사탕을 깨무는 소리를 듣는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가 떨렸지. 이빨까지도 검어 보이는 저 괴물이
그토록 즐겁게 깨물어 먹는 사탕은 바로 까미유의 순수한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소중하게 아껴왔던 건데... 정말 참을 수가 없었어.
자끄 형, 형은 그걸로 우리들 사이가 완전히 끝장났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아!
나도 몰라... 내가 왜 그러는지... 그 일이 있은 다음날도 여자가 꼽추선생과
에르미온느 역을 연습하고 있을 때 그 여자 방의 한쪽 구석에서 여전히 긴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앵무새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젊은 터키인, 다니당이
있었거든....
자끄 형! 형은 정말 묻고 싶겠지? 그런 엄청난 굴욕을 참아 내면서까지 알아
내고자 했던 그 불가사의, 매일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에 그 여자가 어딜 가는지
난 그걸 알아 냈어. 하지만 오늘 아침, 그 무시무시한 일이 있은 다음에 말이야,
이것이 마지막 사건이 되겠지만... 그래,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할께... 아 쉿!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 만약에 그 여자라면, 또다시 날 달달 볶으려고
오는 거라면?... 오늘 아침처럼 그렇게 무시무시한 일이 있은 다음에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낯 두꺼운 여자니까... 잠깐!... 문을 잠가야겠어 단단히.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어.
자정
그 여잔 아니었어. 꾸꾸블랑이었어. 내가 이렇게 놀라다니. 바보같이... 아직도
마차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말이야. 꾸꾸블랑이 자기 방으로 돌아온 거였어.
'톨로꼬또티강! 톨로꼬또티그낭!'이라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 와. 이제 잠든
모양이군. 코를 고는데....
그럼 우리의 슬픈 사랑이 어떻게 끝났는지 얘기해 줄께.
한 3주쯤 전에 꼽추가 그 여자에게 아주 원숙해졌다면서 비극을 하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 그래서 자기의 제자들과 함께 연극을 출연시켜
주겠다고 했어.
그러자 그 여잔 뛸 듯이 기뻐했지... 극장을 빌릴 수 있는 여건이 안되기 때문에
그 집에 드나드는 작자들 중 한 명의 작업장을 극장으로 개조하고 파리의 모든
극장 지배인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기로 했지... 데뷔작은 논란 끝에 '아딸리'로
하기로 결정을 봤어... 여러 레퍼토리 중에서 그 꼽추의 제자들과 호흡을 맞추려면
같이 모여서 연습해야만 했지. 이르마 보렐은 그들에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직접
나다니게 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부인이었으므로 연습은 그 집에서 하기로 했지.
매일 꼽추선생은 제자들을 데리고 왔지. 비쩍 마르고 점잔을 빼는 너댓 명의
처녀들은 13프랑짜리 케시미어 쇼올을 목에 두르고 있었고, 검게 물들인 종이
옷을 입고 피난민처럼 보이는 작은 악마 같은 서너 명의 남자아이들도 있었어.
연습은 하루종일 계속되었어.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는 제외하고 말이야, 그
바쁜 연습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사의한 외출은 중단되지 않았어. 어쨌든
이르마, 꼽추선생, 그리고 제자들, 모두가 광적으로 연습했지. 앵무새 먹이 주는
것을 이틀 동안이나 잊어버렸을 정도니까 말이야. 그들은 내게도 더이상 신경쓰지
않았어... 간단히 말해 모든 게 잘 되어 나갔지. 작업장을 단장해서 극장이
만들어졌고 의상도 준비되었고, 초대장도 모두 발송되었지. 공연을 삼사 일 정도
남겨 두고 있을 때 꼽추의 조카로 어린 엘리아쌩 역을 맡은 열 살쯤 먹은
계집아이가 병에 걸렸어... 그래서... 그래서 말이야, 삼사 일 만에 그 역을 소화할
능력이 있는 어린애를 어떻게 찾아냈느냐 하며 말이야, 실로 경악할 노릇이지만,
글쎄... 갑자기 이르마 보렐이 내 쪽을 보는 것이었어.
"다니당, 당신이 그 역을 맡을래요?"
"내가요? 농담 마세요... 내 나이에!"
"당신들 어른이라고는 안할 거예요. 이것 봐요. 당신은 열다섯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인다구요. 의상을 입고 분장을 해서 무대에 서면 열 두살 정도로 밖에는 안
보일 거예요... 게다가 그 역은 당신 얼굴의 특징하고 잘 맞는단 말이에요."
내가 뭐라고 변명해 봤자 소용이 없었어. 언제나처럼 그녀가 원하는대로 되기
마련이었어. 난 항상 왜 그럴까....
그렇게 해서 드디어 연극이 개막되었지... 내게 웃을 여력이 남아 있다면 그날
이야기로 형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 텐데....
사람들은 짐나즈 극장 지배인과 떼아뜨르 프랑세 극장의 지배인을 중요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다른 데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우리는 극이 끝날
무렵에야 모습을 드러낸 근교의 극장 지배인 하나로 만족해야 했어. 하지만 이
가족극은 그렇게 크게 실패한 것은 아니었어... 이르마 보렐은 대단한 박수갈채를
받았지... 난 이 쿠바 여인이 맡은 아딸리가 지나치게 격찬되었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표현력이 부족했고, 불어를 마치... 스페인산 꾀꼬리같이 말한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여자의 친구들인 그 예술가란 작자들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나 봐.
의상 고증이 정화했다는 등, 여사의 발음은 아주 세심했다는 등... 떠벌려 댔지. 나
역시, 내 독특한 얼굴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었어. 벙어리 유모 역을 맡은
꾸꾸블랑보다는 못했지만 말이야. 확실히 꾸꾸블랑의 얼굴은 내 얼굴보다 훨씬
독특해. 그리고 그녀가 5막에서 사납게 툭 불거진 허연 눈을 놀란 듯이 굴리는
괴상망칙한 앵무새를 손에 얹고 나타나자 장내는 박수갈채와 환호로 들끓었어.
아마 그 비극 여배우는 다니당, 꾸꾸블랑, 앵무새가 모두 연극에 등장하기를 내심
무척이나 바란 것 같아.
눈부시게 빛나는 아딸리는 말했었지....
"굉장한 성공이야!"
아, 자끄 형! 그 여자의 마차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어. 불행한 여자! 이렇게
늦은 시각에 어디서 오는 걸까? 아마 그 여잔 소름끼치는 아침의 일을 잊어버렸나
봐. 나는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온몸이 떨리는데!
문이 닫혔어... 지금 그 여자가 여기로 올라오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렇게도
가증스런 여자를 이웃으로 삼고 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조금 전에 말한 연극 공연은 사흘 전의 일이었지.
그때부터 사흘 동안 그 여자는 명랑하고, 다정하고, 온순하고, 사랑스러웠어.
꾸꾸블랑을 한 번도 때리지 않았고 말이야. 그리고 내게 형 안부를 여러 번 묻기도
했지. 지금도 여전히 기침을 하는지 걱정된다고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 여잔
형을 좋아하진 않아. 다만 건성으로 물어 보는 거고 진심이라곤 하나도 없어...
그때 뭔가를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오늘 아침 9시 종이 울렸을 때 그 여자가 내 방으로 들어왔어. 9시에 말이야!...
그 시간은 그녀가 외출하는 시간인데... 그녀는 내게로 다가와서 웃으면서 말했어.
"9시에요!"
그리곤 갑자기 엄숙한 표정이 되어 말하더군.
"이것 보세요, 내가 승리했어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자유의 몸이
아니었어요. 한 남자에게 속박되어 있는 몸이었죠, 그리고 그 남자 덕분에 부와
풍요를 누릴 수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내 인생에 끼어들었어요."
자끄 형, 그 불가사의 속에는 뭔가 야비함이 숨겨져 있다고 내가 여러 번
말했었지.
"당신을 알게 된 날부터 난 그 관계에 역겨움을 느꼈죠... 내가 그 얘기를
당신에게 하지 않았던 것은, 당신은 나를 다른 남자와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용납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그
관계를 청산하지 못했던 것은 , 나한테 그렇게도 잘 어울리는 화려하고 게으른
생활, 내 모든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그 일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이제 더이상 그런식으론 살아갈 수 없어요. 그 허황된 생활이
나를 짓누르고, 내가 스스로를 배반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매일매일 미칠 것만
같아요... 방금 내가 한 고백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나를 원하신다면 난 모든 걸
포기하고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살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내가 원하는 곳'이라는 마지막 말을 그 여자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
바로 내 옆에서, 거의 내 입술에 대고, 나를 마취시키려는 듯이 말이야....
하지만 다행히도 내겐 그 여자에게 대답할 수 있는, 그것도 아주 냉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용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가난하고, 생활비도 벌지 못하는 데다가
자끄 형의 도움을 빌어서까지 그 여잘 먹여 살릴 수는 없다고 말이야.
그 대답을 듣자 그 여잔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지.
"그래서 말인데요. 만일 당신과 나 둘이 서로 헤어지지 않고서도 먹고 살아갈
확실하고 정당한 방법을 찾아 냈다면 어떡하겠어요?"
그러면서 그 여잔 호주머니에서 필적이 난해한 편지 한 장을 꺼내선 읽기
시작했지... 그건 우리 두 사람을 근교의 극장에서 채용하겠다는 계약서였어. 그
여자에겐 월 백 프랑을, 그리고 내겐 50프랑을 주겠다는 거였어. 그리고 우리가
서명만 하면 일이 말끔하게 해결되는 거였지.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그녀를 쳐다보았어. 나는 그녀가 나를 암흑의 구렁텅이로
끌고 가고 있다고 느꼈어. 그리고 순간적이나마 내겐 저항 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지. 대답할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그 알아 보기 힘든 편지를 다
읽고 나더니 그 여잔 열에 들뜬 듯이 연극이라는 직업의 화려함과 우리들이
앞으로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인생에 대해 떠들어 대기 시작하는 거야. 자유롭고,
자신에 찬, 그리고 모든 세속적인 것과 결별을 고하고 오직 우리의 예술과 우리의
사랑만을 위해 살아가게 될 그런 인생을 말이야.
그 여잔 너무 오래 말을 많이 했지. 그게 실수였어. 그동안 나는 정신을 좀
차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항상 어머니와도 같았던 자끄 형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거야. 그 여자의 장광설이 끝났을 때 난
아주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어.
"나는 배우가 되고 싶지 않아요...."
물론 그 여잔 잡았던 고삐를 늦추지 않았어. 그 여잔 더욱 열렬하게 그 달콤한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지.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어... 그 여자가 내게 하는 모든 말에 대해서 내 대답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어.
"나는 배우가 되고 싶지 않아...."
드디어 그 여잔 자제력을 잃기 시작했어.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말하더군.
"그럼, 당신은 내가 매일 8시에서 10시 사이에 늘 거기에 그렇게 가고 모든 게
하나도 변함없이 예전과 똑같기를 바라는 건가요?"
그 말에 나는 좀 수그러져서 대답했어.
"난 그 어느것도 바라지 않아요.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이 스스로 돈을 벌게
되기를... 8시에서 10시 사이에 이루어지는 그 신사의 관용에 더이상 매달리지
않는 것이 당신에겐 더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하죠... 다시 말하지만 난 단지
연극에 대해선 눈꼽만큼도 사명감 같은 걸 느끼고 있지 못할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배우가 되지 않을 겁니다."
이 말에 그 여잔 폭발하고 말았어.
"아! 그래 넌 배우가 되고 싶지 않다, 이거지... 그럼 대체 뭐가 될 거야? 설마
네가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시인이라고 생각하다니!... 네겐 시인이
될 소질이 전혀 없어. 가엾은 미치광이!... 당신이 그 잘난 시집, 어느 누구도
사보고 싶어하지 않는 시집을 찍어냈기에 하는 소리야. 당신은 자신이 시인이라고
믿고 있겠지... 멍청하군. 불행하게도 네 시집은 엉망이야. 모두들 그렇게 얘기하고
있어... 두 달 동안 그 책은 딱 한 권이 팔렸을 뿐이야. 그 한 권의 책마저도 바로
내가 사주었단 말이야... 자, 시인.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그런 어리석은 사실을
믿고 있는 건 네 형밖에 없다구... 그치 역시 천진난만한 가엾은 멍청이지!...
너한테 그 잘난 아름다운 편지를 써보내는 그치 말이야... 그 귀스따브 쁠랑쉬의
기사는 우스워 죽을 지경이라구... 그걸 기대하면서 네 형은 널 먹여 살리느라
기진맥진해 있구 말이야. 그런데 넌, 그동안 넌... 넌... 과연 넌 뭘 했지? 그걸
알고 있어? 네 얼굴이 좀 독특하다는 것, 넌 그걸로 만족해야 해. 넌 그 따위
터키 옷차림이나 하고 모든 게 다 잘 되어 간다고 생각했겠지!... 얼마 전부터는
네 얼굴의 그 독특함마저도 사라져 가고 있다는 걸 알려 줘야만 하나? 넌 추해,
정말로 추하다구. 자, 네 모습을 한번 똑바로 보라구... 네가 그 삐에로뜨인지 뭔지
하는 여자에게로 돌아간다 해도 널 받아들이지 않을 걸... 하기야 너희 둘은 서로
잘 맞아... 너희 둘 다 쏘몽 가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도자기나 팔 운명을
타고 났다구. 배우가 되는 것보다 장사를 하는 게 너한테는 더 잘
어울린단 말이야!"
그 여잔 입에 거품을 물고 숨을 몰아쉬었어. 형은 아마 그런 미치광이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거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넋을 잃고 그 여잘
쳐다보기만 했어. 그 여자가 말을 끝내자 난 그 여자에게로 다가갔어. 난 온몸이
떨렸어. 그리고 조용히 말했지.
"난 배우가 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면서 난 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 보였어.
"나가 달라 이건가?"
그 여잔 여전히 히죽거리며 말했어.
"난 아직 당신한테 할 얘기가 많은데...."
이번에야말로 그 여자에 대한 애착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었어. 모든
피가 얼굴로 확 솟구치는 것 같더라구. 벽난로에서 장작 받침쇠 하나를 집어들고
그 여잘 향해 달려갔지... 그 여잔 도망쳤어... 형, 그 순간 나는 파셰코라는
스페인 남자를 이해할 수 있었어.
나는 모자를 집어들고 계단을 뛰어내려 그 집을 나와 버렸어. 하루종일 술취한
사람처럼 사방팔방을 헤매고 다녔지... 형이 그때 있었더라면... 일순 삐에로뜨 씨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검은 눈동자의 그녀, 그녀의 발아래 엎드려
용서를 빌고 싶었어. 나는 그녀의 가게 문 앞까지 갔지만 감히 들어갈 수는
없었어... 두 달 동안이나 그녀 집에 가지 않았단 말이야. 그녀는 내게 편지를
썼지만 난 답장도 안했었어. 날 찾아오면 숨어 버렸었거든. 어떻게 그녀가 날
용서해 줄 수 있을까?... 삐에로뜨 양은 카운터 앞에 앉아 있었다. 슬퍼 보이더군...
나는 유리창에 기대어 선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울면서 그 자리를 떠나왔어.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지. 창가에서 한참 동안을 울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형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거야. 이 밤을 꼬박 새워 내내 형에게
편지를 쓸 거야. 형이 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리고 그렇게
느껴지니까 무척 안심이 돼.
그 괴물 같은 여자! 어쩌면 그 여잔 나를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형은 이해할 수 있어? 나를 근교의 극장에서 연극이나 하게 하려고
했단 말이야!... 형! 뭐라고 말 좀 해줘. 나는 이제 지쳤어. 너무 고통스러워...
그녀는 충분히 나를 괴롭혔어. 아! 이젠 더이상 나 자신을 믿지 못하겠어. 나
자신에 대해 회의가 들고 ... 나도 내가 무서워. 뭘 해야 하지?... 공부?... 그래! 그
여자가 옳아. 나는 시인이 아니고 내 시집을 팔리지도 않아... 이런 보잘것없는
나를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형은 또 얼마나 오래 고생해야 하지?
내 인생은 엉망진창이 돼 버렸어. 뭐가 뭔지 모르겠어. 칭 밖은 캄캄하고...
세상에는 숙명을 타고난 이름이 있어. 그 여자의 이름은 이르마 보렐. 보렐은
사형집행인을 의미하는 단어지. 사형집행인 이르마!... 그 여자에게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이사를 하고 싶어. 이제 이 방은 지긋지긋해... 계단에서 그
여자와 마주칠 수도 있잖아... 침착해야지. 그 여자가 올라오기만 하면... 하지만
그 여자는 오지 않을 거야... 그 여잔 나를 잊어버리겠지. 그 여자에겐 자기를
위로해 줄 예술가들도 있으니까....
아니, 세상에! 저게 무슨 소리지?
자끄 형! 그 여자야! 그 여자가 오고 있어. 여기로 오고 있다구. 그 여자의
발자국소리야. 그 여자가 아주 가까이 있어. 그 여자의 숨소리도 들리는 걸... 열쇠
구멍에 눈을 갖다 대고 날 쳐다보고 있어. 날 태워 버리려고 말이야. 날....
그러나 결국 난 이 편지를 부칠 수가 없었다.
##몽빠르나스의 어릿광대
드디어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암울했던 시절에 접어들었다. 그 당시에
나는 파리 근교의 어느 극장 여배우가 된 이르마 보렐과 함께 수치와 불행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던 끔찍한 나날들이 추억보다는 쓰라린 회한으로
먼저 떠오르곤 한다.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내 삶의 편린들이 두서없이 온통 뒤범벅이 되어 버려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해 낼 수 없다. 하지만 눈을 감고 '톨로꼬또티강!
톨로꼬또티그낭!'하는 이상하고도 구슬픈 후렴을 두서너 번 읊조리면 마치 마술에
걸린 듯 잠들어 있던 내 기억이 깨어나고 죽었던 시간들이 무덤 속을 빠져나와
예전의 나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몽빠르나스 가에 갓 지어진 초라한 아파트 방에
처박혀 맡은 배역을 연습하는 이르마 보렐과 끊임없이 '톨로꼬또티강!
톨로꼬또티그낭!'하고 노래를 불러 대는 꾸꾸블랑 사이에 끼어 살던 그 당시의 내
모습이 눈앞에 또렷이 떠오른다.
후우! 정말 끔찍하고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아파트였다. 수천 개도 넘는
창문, 끈적거리는 초록색 층계, 쩍 갈라진 하수구, 일련 번호가 죽 붙여진 문짝들,
페인트 냄새를 풍기는 을씨년스런 흰 복도... 지은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그
아파트는 벌써 더럽혀져 끔찍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그 아파트에는 자그만치
방이 백팔 개나 있었다. 그리고 방마다 한 세대씩 세들어 살았다. 아파트의
겉모습만큼이나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정말 끔찍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비명소리와 물건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으며 아귀다툼과 볼만한 구경거리들이
연일 끊임없이 일어났다. 밤이면 밤마다 어린애들은 빽빽 울어 대고, 맨발로 타일
바닥을 걸어다니고, 아이들을 요람에 넣고 흔들어 대며 부르는 암울하고 단조로운
자장가 소리가 들려 왔다. 때때로 변화를 주려는 듯 경찰이 찾아와 한바탕 휩쓸어
지겨운 아파트의 일상을 깨곤 했다.
이르마 보렐과 내가 사랑의 도피처로 삼은 곳이 바로 그 끔찍한 소굴과도 같은
칠층짜리 아파트였던 것이다. 초라한 숙소였지만 나 같은 보잘것없는 주인에
비하면 그 아파트는 차라리 안락하고 호사스런 집이었다. 우리가 그 아파트를
택하게 된 것은 극장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당시 서민을 위해 새로
지은 아파트들은 대부분 집세가 그리 비싸지 않았다. 회칠하는 사람의 한 달
봉급인 40프랑 정도로도 삼층에 거리 쪽으로 발코니가 있는 꽤 쓸만한 방 두 개를
구할 수 있었다. 매일 밤 연극이 끝나고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얌전한 여공들이나 바람난 처녀들, 긴 회색 외투를 걸친 경찰들이 치며
밤길을 걸어오곤 했다.
그 시간에 집에 돌아오면 차갑게 식은 고기 몇 점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고
꾸꾸블랑은 그때까지 자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에 은총을 베풀어 주던 신사는 마부와 마차, 식기, 가구를 모두 도로
가져갔다. 이르마 보렐은 꾸꾸블랑과 앵무새, 보석 몇 가지, 그리고 무대용
의상만을 갖고 왔다. 그녀가 가져온 물결무늬의 빌로드 옷들은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옷자락이 치렁치렁하게 긴 의상들이었다. 방 하나는 그 의상들로 꽉
들어찼다. 그 의상들은 모두 옷걸이에 걸려 있었고, 그 의상들의 화려한 색상과
비단 주름들은 불그죽죽한 타일과 빛바랜 가구와 기이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꾸꾸블랑은 의상을 넣어 둔 그 방에서 잠을 잤다. 그 방에는 속에 짚을 넣은
싸구려 매트와 철구 그리고 생명수병 등 꾸꾸블랑의 몇 안 되는 짐이 있었다.
그녀는 불을 몹시 무서워해서 램프도 켜지 않고 어두운 방안에서만 지냈다.
밤늦게 우리가 돌아갈 때면 꾸꾸블랑은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보이는 의상들에
둘러싸여 짚을 넣어 만든 매트에 웅크리고 앉아 있곤 했다. 그녀는 마치 푸른
수염의 마법사에게 일곱 명의 교수형에 처해질 사람들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마녀 같아 보였다. 그보다는 좀 작은 또다른 방에서 나와 이르마 보렐이 앵무새와
함께 지냈다. 침대 하나, 의자 세 개, 탁자 하나, 그리고 커다란 황금색 횃대가
놓여 있는 그 방은 더이상 발 들여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우리는
거의 외출도 하지 않고 그 초라하고 좁아터진 방에 틀어박혀 뒹굴었다. 연극에
출연하는 시간 외에 우리는 방안에서 맡은 배역을 제각기 떨어져서 연습했다.
우리 둘이 연습하는 방안 모습은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내 딸, 내 딸을 돌려 줘요! 여기에요, 가스빠르! 그 이름, 그 이름,
비차--암--한!"
우리가 연극 대사를 외우느라 울부짖는 소리와 앵무새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 끊임없이 읊어 대는 꾸꾸블랑의 '톨로꼬또티강! 톨로꼬또티그낭!'하는
노래소리로 그 좁은 방은 벽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이르마 보렐, 그녀는 행복해 했다. 그녀는 이런 식의 삶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는 가난한 예술가 부부 행세를 하는 것을 즐거워했던 것이다.
"나는 하나도 후회하지 않아요."
그녀는 종종 그런 말을 내뱉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젠가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비참함으로 피곤해질 때, 1리터 들이 병 포도주를 마시는 일에 싫증이
날 때, 싸구려 식당에서 배달해 오는 갈색 소스를 친 보기에도 끔찍한 식사에
싫증이 날 때, 교외의 초라한 극장에서 연극하는 일이 지긋지긋해질 때, 바로 그날
그녀는 옛날의 자신의 생활 방식을 다시 찾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아직도 자신이 포기한 모든 것들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다시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잠자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내면에 숨겨진 그러한 믿음이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서슴없이 말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지만 나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그녀와 나는 '어부 가스파르도'로 연극에 발을 들여놓았다. 멜로드라마치고 그
작품은 꽤 괜찮은 평을 받았으며 그녀 또한 굉장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재능 때문이라기보다 그녀의 순백색 팔과 화려한 빌로드 의상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의 목소리는 연극에 부적당했으며 그녀의 연기 또한
우스꽝스러웠다. 그곳의 관중은 눈부시게 이름다운 육체와 미터당 40프랑이나
하는 값비싼 의상이 만들어 내는 황홀한 전시회에 익숙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공작부인이야!"
사람들은 그렇게 수군댔다. 그리고 불량기 있어 보이는 젊은이들은 귀가
터져나갈 듯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쳐댔다.
나는 그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사람들은 나를 난장이 취급했으며, 나 자신도
관객 앞에 나서는 게 두려웠고 수치스러웠다. 나는 은밀한 고백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대사를 읊조리곤 했다.
"더 크게 해! 안 들려! 더 크게 하라구!"
관객들은 야유하며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나 목구멍이 꽉 막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며 야유와 욕지거리를 퍼부어 댔다.
이르마가 아무리 부탁하듯 내게 말해 보았자 허사였다. 내겐 연극적 소질이 전혀
없었다. 시 나부랑이나 끄적대는 하찮은 시인이 훌륭한 배우가 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당신 얼굴에서 나오는 독특한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녀는 종종 그렇게 말하며 나를 위로하곤 했다. 지배인은 내 독특한 얼굴을 잘
알아 보았다. 두 번의 공연이 휘파람과 야유가 뒤범벅되어 소란스레 끝난 후에
지배인은 나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이것 봐, 멜로드라마는 자네에겐 맞지 않는 것 같아. 자넨 지금 길을 잘못
들어선 거야. 통속 희극을 한번 해보도록 하지. 자넨 통속 희극을 하면 아주
어울릴 것 같네."
그래서 나는 다음날부터 통속 희극 배우가 되었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젊은이
역이나, 사람들이 샴페인 대신에 로제 레몬수를 마시게 하면 배를 움켜쥐고 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얼빠진 선멋장이 역, 붉은색 가발을 쓰고 마치 황소처럼 울어
대는 바보 역, "아그씨, 증말로 좋아하는구만유!... 증말유. 무지무지하게
좋아한다닝께유"하고 말하면서 눈을 껌벅거리는 사랑에 빠진 시골뜨기 청년 역
같은 것을 했다. 못생긴 바보라든가 겁장이의 역을 맡아 무대 위를 누비고 다니면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어 댔다. 사실 나 자신은 내가 아주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불행히도 나는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결코 원하지 않았는데 결국 내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얼굴에 회반죽을 바르고 주름살을 그려 넣고 번쩍거리는 싸구려 장식품을
단 채 무대에 설 때마다 나는 자끄 형과 검은 눈동자의 그녀를 생각했다. 인상을
쓰거나 익살을 부리는 도중에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비겁하게도 배반해 버린
보고 싶은 그들의 모습이 돌연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느날 저녁 우스갯소리로 장광설을 늘어놓아야 했을 때에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 말도 못하고 입을 헤 벌리고 서서 관객들을 휘둘러보았던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내 영혼은 육신을 빠져나와 무대를 박차고 날개짓을 하며 극장의
천장을 뚫고 나가 자끄 형과 어머니를 만나러 갔었다. 또한 검은 눈동자의
그녀에게 용서를 빌러 멀리멀리 날아가곤 했다.
"오매, 증말유! 무지무지하게 좋아하는구만유."
갑자기 대사를 읽어 주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고, 난 환상에서 깨어나,
하늘에서 떨어져 버린 듯한 비참한 표정으로 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표정엔
너무도 자연스럽고 너무도 우스꽝스러운 불안이 담겨 있어 온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연극 용어로 말하면 극적 효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원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우연히 그런 극적 효과를 창조해 낸 것이었다.
우리가 속해 있던 극단은 다양한 계층을 상대로 연극 공연을 했다. 유랑
극단처럼 그르넬, 몽빠르나스, 세브로, 쏘, 쌩끌루 등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공연했다. 다른 지방으로 갈 때면 극단 합승마차에 빼곡히 끼어 앉아 이동하곤
했다. 그 마차는 폐결핵에 걸린 말이 끄는 밀크커피 배달 마차처럼 낡아 빠져
삐끄덕댔다. 단원들은 마차 속에서 노래도 부르고 카드놀이를 하기도 했다. 아무
역도 못 맡고 극단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은 마차 안쪽에 자리를 잡고는 구겨진
팜플랫을 다렸다. 나는 그들과 함께 앉아 그 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동료단원들이 내뱉는 유치한 얘기들에는 귀를 막은 채 그들 틈에 끼어 나는
말없이 슬픈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비록 비천한 상황에 이르렀다고는 해도
저속한 욕을 내뱉는 따위의 서투른 연기는 내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런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존심으로 꽉 찬 데다가 광대뼈가 툭 불거진 초췌한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해서 부자연스러웠으며 지껄이는 말 속엔 허풍과 거짓말이 흘러넘쳤다.
미래에 대한 이상도 없고, 철자법도 모르는 무식한 남자단원들은 흔히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미용사나 망한 장사꾼의 후손들로 심심풀이로
또는 일하기 싫고 게을러 극단에 뛰어들었거나 아니면 화려한 무대 의상이나 나비
넥타이가 좋아서 배우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연한 색깔의 수와로프 풍의
외투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무대에 드러내기 위해서 배우가 된 사람들이며, 여자
건드리기 좋아하고, 언제나 옷매무시에 노심초사하며 한달치 봉급을 머리
손질하는 데 날려 버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섯 시간 동안 내내 기름먹인
종이로 연극에 사용할 루이 15세 장화 한 켤레를 만들면서도 "오늘은 참 일을
많이 했는데"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런 합승마차에서 초라한
꼬락서니로 있으려고 음악이 흐르는 삐에로뜨 씨의 응접실을 비웃었던가....
다락방에 처박힌 학생 같은 내 분위기와 침묵을 지키는 도도해 보이는 자만심을
동료단원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저놈은 엉큼한 놈이야."
나는 바보 취급을 당했지만 그녀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녀는
합승마차에 마치 공주처럼 뻐기고 앉아 고르고 흰 예쁜 치아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으며, 섬세한 목덜미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머리를 뒤로 젖히기도 했고, 모든
사람들과 말을 놓고 지냈다. 그녀는 남자들은 모두 '늙은이들'이라고 불렀으며
여자들은 '내 귀염둥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심술궂은 사람들마저도 자기를 '참
좋은 아가씨'라고 부르게 만들 줄 아는 여자였다. 좋은 아가씨라니, 그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렇게 웃고, 유치한 농담을 열심히 지껄이면서 마차는 굴러굴러 공연할 다음
장소에 도착했고 공연이 끝나 익숙한 솜씨로 의상을 벗고는 다시 마차에 올라
파릴 돌아올 땐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컴컴한 마차 속에서 무릎을 맞대고 앉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소리 죽여 웃기도 했다. 맨느 근교의 세관에
마차를 넣어 두기 위해 멈추면 모두들 마차에서 뛰어내려 떼지어 이르마 보렐을
호위해서는 집 앞까지 바래다 주는 것이었다. 집에서는 꾸꾸블랑이 술취해
널부러져 우리를 기다렸다. '톨로꼬또티강! 톨로꼬또티그낭!'하며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다.
언제나 붙어다니는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우린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우린 서로
사랑하기에는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냉혹하고 인정머리
없는 거짓말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녀는 내가 나약하고 비겁할 정도로
우유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늘 불안해 했다.
'어느 개인 아침, 그의 형이 찾아와 내게서 그를 빼앗아 도자기 파는 여자에게
데려갈 거야.'
나 또한 그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초조해 했다.
'이러다가 자신의 인생에 싫증이 나면 8시에서 10시에 만나던 그 신사에게
날아가 버리겠지. 그러면 나는 이 구렁텅이에 혼자 남게 될 거고....'
서로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 끊임없는 불안이 우리들 사랑을 가로막는 가장
확실한 공통분모였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이 존재하지 않은 곳에 질투가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녀가 극단에서 일하는 누군가와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모습만
봐도 내 안색은 창백해졌다. 내가 편지라도 한 통 받을라치면 그녀는 고꾸라지듯
달려와 떨리는 손으로 채가서는 겉봉을 뜯어보곤 했다. 편지는 대부분 자끄
형에게 왔다. 그녀는 히죽거리면서 그 편지를 끝까지 읽었고 그러고 나선
아무데나 휙 내던져 버렸다.
"항상 똑같은 이야기로군."
그녀는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그렇다! 언제나 자끄 형은 변함없는 친절과 관용 희생으로 가득찬 편지를
보내왔다. 그녀가 그토록 자끄 형을 미워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착한 자끄 형은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가며 '전원시'도 4분의 3쯤 팔렸고 어음기간이
만기가 되면 결제할 만한 돈은 서점에서 수금 할 수 있을 거라고 답장을 썼다.
남을 잘 믿는 사람좋은 형은 매달 보나파르뜨 가로 백 프랑씩 꼬박꼬박 돈을 부쳐
왔으며 꾸꾸블랑이 그 돈을 찾아왔다.
자끄 형이 부쳐 오는 백 프랑과 극장에서 받는 봉급은 우리가 살아 갈 수 있을
충분한 돈이었다. 그 돈은 가난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꼬방동네 같은 그
아파트에선 쓰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나 나나 돈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번도 돈이란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고, 그녀는
언제나 너무 많은 돈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우리의 낭비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매달 5일이 되면 금고로 사용하는 옥수수 짚으로 만든 자바 풍의
작은 슬리퍼는 텅 비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장정 한 사람이 먹는 분량을 먹어
대는 앵무새를 먹여살려야 했고 갖가지 색의 분이며 화장품, 화장분, 치약, 토끼풀
등 연극 분장에 필요한 도구 일체를 사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연극 선전
팜플렛이 너무 빛이 바래고 낡았다며 새 팜플렛을 만들고 싶어했다. 또한 그녀는
차라리 안 먹는 한이 있어도 꽃병에 꽃을 늘 풍성하게 꽂아 두어야 직성이
풀렸다.
두 달 만에 우리는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다. 우리는 집 주인에게도 빚을 졌고,
식당주인에게도, 극장의 수위에게도 돈을 빌렸다. 때때로 외상으로 물건을 대어
주는 사람이 기다리는 데 지쳐서 꼭두새벽부터 찾아와 외상값 갚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런 날이면 우리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전원시'를 출간해
준 출판업자에게 달려가 형 이름을 대고는 통사정을 해서 몇 루이를 겨우 꾸어
오곤 했다. 그 유명한 회고록 제 2권을 손에 들고 출판업자는 자끄 형이 여전히
다끄빌 후작의 비서로 있는지 물어 보고는 별 의심 없이 돈을 빌려 주었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빌린 것이 어느새 4백 프랑이 됐고, '전원시'를 출판할 때
빌린 9백 프랑의 빚까지 합하면 형 이름으로 빌린 돈이 총 천 삼백 프랑이나
되었다.
불쌍한 자끄 형이 돌아오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끔찍하고 엄청난 일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나는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고,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밤낮을 눈물로 지새우고 있고, 시집은 한 권도 팔리지 않았고, 갚아야 할 빚은
천삼백 프랑이나 되니 말이다. 이렇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그러한
걱정으로 짓눌려 있어도 이르마 보렐은 걱정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고 늘
태평했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나는 그 걱정들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강박관념으로 머리속에 박혀 한시도 떠나지 않고 날 괴롭혔다. 걱정거리를
조금이라도 잊어버리려고 도형수처럼 일에 몰두해 보기도 하고, 새로운 익살을
연습하기도 했으며, 거울 앞에서 참신한 표정을 연구해 보려고 별짓을 다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거울을 보면 거기엔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불쌍한 자끄
형의 모습만이 어른거렸다. 내가 해야 할 역할들인 랑글뤼모나 조시아스, 또다른
통속 희극의 인물 모습 대신에 자끄 형의 얼굴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나는 겁에 질려 달력을 쳐다보며 어음만기일을 계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았어, 이제 3주일밖에 남지 않았군!"
어음만기일이 되면 모든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고 바로 그날로 형은
희생양이 되어야 할 것임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강박관념은
잠자리에서까지 나를 괴롭혔다. 때때로 나는 심장이 방망이질치고 눈물과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끔찍하고 기이한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매일
밤 되풀이되는 똑같은 악몽에 시달렸다. 덩굴 모양의 낡은 편지가 박힌 큰 장농이
놓여진 어딘지 알 수 없는 방안에서 자끄 형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창백한 얼굴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는 조금 전에 숨을 거두었다. 까미유 역시 그 방안에
있었는데 장농 앞에 서서 수의를 꺼내려고 장농문을 붙잡은 채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장농을 열지 못했다. 열쇠를 자물통에 맞추려고 애쓰며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심장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문을 열 수가 없어서... 너무 울어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무슨 수를 써서든 꿈을 꾸지 않으려고 해보았지만 그 꿈은 이성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눈을 감는 순간부터 눈앞에는 소파에 드러누운 자끄
형의 모습과 장농 앞에 서 있는 장님이 된 까미유의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그 모든 회한과 공포가 나를 하루하루 더욱 침울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르마 보렐 역시 참을성이 없어져 갔다. 더우기 그녀는 내가 어디로
도망치는지는 모르지만 자기의 품안에서 빠져나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그녀를 짜증나게 했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끊임없이 끔찍한
장면들이 연극처럼 연출되었다. 고함소리와 욕지거리로 가득 찬 방안은 마치
요란한 세탁통 속 같았다.
"네 그 도자기 파는 삐에로뜨에게나 가버려. 그래서 하트 모양의 사탕이나
달라고 그러지 그래!"
그녀는 이런 식의 말들을 고래고래 질러 댔고 그러면 나 또한 질새라 외쳤다.
"파셰코한테나 가 보지 그래, 가서 입술이나 찢어달라고 그래!"
막판에 이르면 그녀는 내게 '속물'이라고 욕했고 나는 그녀를 '거지 같은
년'이라고 욕설을 퍼부어 댔다.
한참을 그렇게 아귀다툼을 벌이고 나선 둘다 주루룩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관대히 용서해 주고 다음날을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아니, 그런 식으로 함께 썩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철판에 꼼짝 못하게 고정된 것처럼, 같은 배를 탄 사람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꾸꾸블랑이 흥얼대던 그 기이하고 우수에 젖은 후렴 '톨로꼬또티강!
톨로꼬또티그낭!'을 읊조리다 보면 어느새 내 눈앞에는 그 진흙투성이의 삶, 그
비참했던 시간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톨로꼬또티강! 톨로꼬또티그낭!'
##납치극
밤 9시쯤 나는 첫번째 출연을 마치고 분장실로 돌아오던 참이었다. 그때 무대
쪽으로 가고 있는 이르마 보렐과 마주쳤다. 쎌리멘느처럼 한 손에 부채를 들고
레이스가 달린 화려한 빌로드 드레스로 성장을 한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장내로 와요. 지금 내가 나가거든요... 굉장히 아름다와 보일 거예요."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서둘러 분장실로 돌아와 재빨리 옷을 벗었다. 다른 동료단원 두 명과 함께
쓰고 있던 분장실은 천정이 낮고 창문도 없이 램프가 흐릿하게 켜진 조그만
방이었다. 가구라곤 고자 밀짚으로 만든 의자 두서너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한쪽 벽에는 거울, 굽실굽실한 가발, 금박이 다 벗겨져 버린 빛바랜 남루한 빌로드
의상 따위가 너절하게 걸려 있었으며 바닥 한 구석에는 뚜껑도 덮지 않은 붉은색
분이 든 항아리며 낡은 화장분첩이 널려 있었다.
내가 거기서 화장을 지우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한 기술자가 나를 불렀다.
"다니엘 씨! 다니엘 씨!"
나는 분장실을 나와 축축한 나무 난간에 몸을 내밀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대답이 없었으므로 나는 노란색 가발을 눈썹까지 내려 쓰고 분가루와 루즈를
덕지덕지 칠한 채 벗다 만 광대옷을 걸치고는 그대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 아래쪽에서 올라오던 사람과 마주칠 뻔한 나는 한발짝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자끄 형!"
우리는 잠시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자끄 형이 내 손을 잡더니
눈물을 글썽거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 다니엘!"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가슴속 깊은 곳까지 감동되어 겁많은 아이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나 작은 목소리로 말해서 간신히
알아들을 정도였다.
"날 여기서 데리고 나가 줘, 형."
자끄 형은 떨면서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우리는 현관에서
기다리던 마차에 올라탔다.
"담므 가로 가주시오."
자끄 형이 마부에게 소리쳤다.
"마침 거긴 내 구역인데!"
마부가 즐거운 듯 대답했고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자끄 형은 이미 이틀 전에
파리에 돌아왔다. 마차 안에서 형은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내게 얘기해 주었다.
형은 팔레르모에서 돌아오자마자 부친 지 석 달이나 되는 삐에로뜨 씨의 편지를
발견했다.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모두 생략된 그 편지에는 다니엘이 증발해
버렸다는 간단한 말 한마디만 써 있었다. 그 편지를 읽고 자끄 형은 모든 것을
짐작했다.
"녀석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군... 내가 가봐야겠어."
자끄 형은 곧장 후작에게 달려가 휴가를 신청했다.
"휴가라고!"
후작은 펄쩍 뛰면서 말했다.
"자네 미쳤나?... 내 회고록은 어떻게 하고?"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까지 합쳐서 8일이면 됩니다, 후작님. 제 동생의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내가 자네 동생을 비웃는 건 아닐세... 하지만 자네를 쓸 때 말해두지
않았었나? 우리의 계약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후작님,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은 집어치우세. 자네도 다른 사람들이랑 마찬가지일 거야. 8일
동안이나 자네 자리를 떠나게 되면 다신 돌아오지 못하게 될 걸세. 잘 생각해
보게. 부탁일세... 참, 자네가 생각하는 동안 거기 좀 앉아 있지. 내 말을
받아써야지."
"충분히 생각했읍니다. 후작님, 전 가겠읍니다."
"지옥에나 가버려!"
고집불통의 그 늙은이는 모자를 집어들고 새 비서를 알아 보러 프랑스
영사관으로 갔다.
자끄 형은 바로 그날 밤 출발했다.
파리에 도착하자 곧바로 형은 보나파르뜨 가로 갔다.
"내 동생 있어요?"
형은 마당의 물탱크 위에 걸터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수위에게
소리쳤다. 수위는 웃음을 터뜨리며 교활하게 말을 돌려 댔다.
"달리기하기엔 좋은 날씨로군."
수위는 입을 열려 하지 않았지만 자끄 형이 백 쑤우짜리 동전을 건네주자 누런
이를 드러내 보였다. 오층에 사는 학생과 이층에 사는 부인이 꽤 오래 전부터
사라져 버렸다는 것,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꾸꾸블랑이 매달 그들
앞으로 배달된 것이 있는지 확인하러 오는 것으로 보아 파리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것, 둘이 함께 있다는 것을 확실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게다가 다니엘
씨는 떠날 때에 자기가 집을 나간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자잘한 비용은 차지하고 지난 넉 달 동안의 집세가 밀려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알았어요. 모두 지불해 드리겠읍니다."
자끄 형은 여행에서 묻은 먼지를 털 시간도 없이 1분도 지체하지 않고 나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형은 제일 먼저 출판업자를 찾아갔다. '전원시'의 보관소가 거기였으므로
다니엘이 종종 그곳에 들르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출판업자는 형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자 대뜸 화색이 돌며 말했다.
"편지를 쓰려고 했읍니다. 나흘 후면 첫번째 어음 만기일이 된다는 건 알고
계시죠."
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읍니다. 내일부터 서점들을 찾아다녀야죠. 나한테 돌려 줄 돈이 있을
거예요. 책이 많이 팔렸다고 하더군요."
출판업자는 알자스인 특유의 푸른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라고요?... 책이 잘 팔렸다고요? 누가 그런 말을 합디까?"
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재난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알자스인은 말을
이었다.
"이곳을 좀 보십시오. 여기 빽빽이 들어 찬 책들을 좀 봐요. 이게 '전원시'란
말입니다. 이 책을 팔기 시작한 지 다섯 달이 됐지만 딱 한 권이 팔렸을
뿐이에요. 결국 지친 서점주인들이 자기들이 갖고 있던 책들을 나한테 반품한
거라오. 이제 이 책들은 종이값이나 쳐서 파는 수밖에 없어요. 참 이상하기도
하지. 인쇄는 아주 잘 됐는데 말이야."
출판업자의 말 한마디가 형에게는 쇠지팡이로 머리를 두드려 대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내가 형의 이름으로
출판업자에게서 돈을 꾸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매정한 알자스인은 계속
이야기했다.
"어제던가, 다니엘이 2루이를 빌려 오라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흑인 하녀를
보냈더군요. 딱 잘라서 거절했읍니다. 우선 굴뚝청소부 같은 얼굴의 그 하녀가
미더워 보이지가 않더라구요. 에세뜨 씨도 아시겠지만 난 부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당신 동생이 꾸어간 돈이 벌써 4백 프랑이나 된다 이 말입니다."
"알겠읍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 돈은 곧 갚아드리겠읍니다."
형은 대담하게 말하고 자신이 받은 충격이 드러날까 봐 재빨리 그곳을 나왔다.
길거리로 나와서 형은 담 모퉁이 근처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여자와 함께
도망가 버린 동생, 출판업자에게 갚아야 할 빚, 말란 방세, 수위, 모레로 다가온
어음 만기일, 그 모든 것이 형의 뇌리를 맴돌며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형은
홀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빚을 갚아야 해. 그게 급선무야."
그리고 내가 삐에로뜨 씨에게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은
주저하지 않고 그의 집으로 갔다. 형이 라루트 상회에 들어서자 카운터 뒤쪽에
앉아 있는 얼굴이 누렇게 뜨고 푸석푸석 부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누구인지 알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문소리를 들은 그 얼굴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보고 중얼댔다.
"이런 경우네 꼭 들어맞는 말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형은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가엾은 삐에로뜨 씨였다. 자기
딸의 슬픔이 그를 딴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토록 쾌활하고 명랑하던
예전의 삐에로뜨 씨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자기 딸이 다섯 달 전부터 줄곧
흘려온 눈물 때문에 그의 눈 또한 빨갛게 충혈되었고 뺨은 짓물러 버렸다. 예전에
맑은 웃음을 터뜨리던 입술은 갈라터졌고 차갑고 조용한 미소, 과부나 버림받은
여인의 미소 같은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예전의 삐에로뜨 씨 모습이
아니었다.
가게 안에서 변한 것이라고는 삐에로뜨 씨밖에 없었다. 진열대 위쪽에는 채색한
목동과 통통한 보라색 중국인 인형이 보헤미아산 유리잔과 큰 꽃무늬가 그려진
접시들 사이에 놓여진 채로 태평스럽게 웃고 있었다. 오목한 스프 그릇과 자기
카르셀 등은 여전히 진열장 뒤쪽에서 반짝이고 있었으며 가게 뒷방에는 예전의 그
플루트소리가 여전히 은은하게 울려나오고 있었다. 형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삐에로뜨 씨, 나에요. 어려운 부탁을 하러 왔어요. 천오백 프랑을 좀 빌렸으면
합니다만...."
삐에로뜨 씨는 아무 말 없이 금고를 열고 돈을 찾았다. 그러더니 서랍을 열어
보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이곳엔 현금이라곤 한푼도 없군. 좀 기다려 보게나. 위층에 갔다올 테니."
그가 나가려다 말고 주춤하며 덧붙였다.
"자네에게 올라가 보라고 않겠네. 딸애가 자네를 보면 꽤나 힘들어 할 거야."
형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요, 삐에로뜨 씨는 천 프랑짜리 수표 두 장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형은
그걸 받지 않으려 했다.
"천오백 프랑만 있으면 됩니다."
형이 한사코 거절했지만 삐에로뜨 씨 역시 고집을 부렸다.
"자끄, 부탁이야. 이걸 다 받아 가게나. 난 2천 프랑을 꼭 주고 싶네. 자네
어머님이 내게 빌려 줬던 그 돈이란 말일세. 만일 거절한다면 난 평생 자넬
원망하게 될 거야. 내가 자네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좋은 기회야."
형은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형은 돈을 호주머니에 넣고는 삐에로뜨 씨의
손을 잡고 아주 짧게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삐에로뜨 씨. 고마워요!"
삐에로뜨 씨 역시 형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잠시 묵묵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채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다니엘이라는 내 이름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밖에 내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노릇을 해야 하는 형과 삐에로뜨 씨는 서로의 처지를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이 먼저 가만히 손을 뺐다. 눈물이 쏟아졌다. 형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삐에로뜨 씨가 큰길까지 쫓아나와 그를 배웅했다. 길가에
이르러 불쌍한 삐에로뜨 씨는 가슴 가득했던 슬픔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힐난하는
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 자끄... 자끄...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그러나 그는 너무나 감정이 격해 있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똑같은 말만을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삐에로뜨 씨를 남겨두고 형은 출판업자에게 되돌아갔다. 알자스인이 괜찮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은 그 자리에서 내가 빌린 4백 프랑을 돌려 주려고 했다.
게다가 그 알자스인이 계속 걱정해 댈까 봐 지불만기가 된 세 장의 어음도 결재해
주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형은 중얼거렸다.
"이제 다니엘을 찾아야겠다."
불행하게도 나를 찾아나서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여행으로 인한
피로와 충격, 그리고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온 기침 때문에 가엾은 자끄 형은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어서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러 보나파르뜨 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10월의 저녁 햇살을 받으며 다락방에 들어섰을 때 형은 방안에 있는 물건들
모두가 내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창가에 놓인 시를 쓰는 책상,
유리컵, 잉크병, 대가 짧은 제르만느 신부님의 파이프, 그 모든 것을 보니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안개 때문에 약간 탁하게 여겨지는 쌩 제르멩의 종소리를
듣자 형은 내가 늘 서글픈 저 종소리를 몹시도 좋아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젖은
유리창에 저녁기도 종소리가 와 닿을 때, 형이 느꼈던 감정은 오직 어머니만이 알
수 있으리라....
형은 방안을 두서너 바퀴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살펴보고, 장농 서랍은 모조리
다 열어 보았다. 혹시 도망가 버린 동생의 흔적 같은 거라도 찾게 될까 하는
희망을 갖고 말이다. 하지만 장농은 텅 비어 있었다. 낡은 속옷과 남루한
옷가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방 전체에서 타락과 파탄만이 가슴이 서늘하도록
느껴졌다. 방바닥 한구석에 촛대가 나뒹굴고 벽난로에는 타버린 종이더미 밑에
금실로 묶은 하얀 상자가 버려져 있었다. 형은 그 상자를 알아 보았다.
까미유에게 온 편지를 넣어 두던 상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상자가 잿더미 속에
내팽개쳐져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은 섬ㅉ한 일이었다.
여기저기 살펴보던 형은 책상 서랍에서 열에 들떠 마구 휘갈겨 쓴 듯한
글씨체로 빼곡히 채워진 종이 몇 장을 발견했다. 영감을 받았을 때 정신없이
휘갈겨 쓴 내 글씨체였다.
"아마 시일 거야."
형은 그걸 읽어 보려고 창가로 갔다. 사실 그것은 한 편의 서글픈 시였다.
"자끄 형, 난 형에게 거짓말을 했어. 지난 두 달 동안 난 거짓말만 해왔어...."
이 편지는 부쳐지지 않고 내버려져 있었으나 결국 운명의 여신은 우체부 역할을
맡아 그것을 수신인에게 보내준 셈이었다.
자끄 형은 단숨에 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이르마 보렐이 아무리 강력히
주장해도 내가 강경하게 그럴 수 없다고 거부하는 몽빠르나스의 계약서 얘기가
나오는 부분에 이르러 형은 뛸 듯이 기뻐하며 외쳤다.
"이제 다니엘이 어디 있는지 알았어."
형은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극도로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빌어먹을 기침이 끝없이
나오는 바람에 쿨룩거리며 엎치락뒤치락했다. 뜸을 들이듯 천천히 게으름을
피우며 싸늘한 바람을 몰고 오는 가을의 새벽 녘, 형은 재빨리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계획을 이미 다 짜 놓았다.
형은 장농 속에 남아 있던 몇 가지 물건을 챙겨 트렁크에 넣었다. 금새 실로
묶은 상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곤 낡은 쌩 제르멩 종탑에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하고는 창문, 장농문 할 것 없이 모든 문들을 다 열어 놓고 그곳을 떠났다. 이제
타인이 살게 될 그 방에 나와의 아름다웠던 삶의 흔적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였다.
아래층에 내려와 형은 방을 내놓겠다고 말하고 밀린 집세를 지불했다. 그리고
수위의 호기심에 찬 엉큼한 질문에는 대꾸도 없이 지나가는 마차를 소리쳐
불렀다. 그러고는 마부에게 바띠놀의 담므 가에 있는 삘르와 호텔로 가자고 했다.
그 호텔은 후작 집의 요리사인 늙은 삘르와 씨의 동생이 경영하고 있었다. 그
호텔은 믿을 만하다는 추천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3개월씩 방을 빌려 주어 그
근방에서는 색다른 평판을 얻고 있는 유명한 호텔이었다. 그래서 삘르와 호텔에서
산다는 것은 생활이 착실하고 품행이 방정하다는 보증서나 다름없었다. 다끄빌
후작 집의 요리사의 신임을 얻은 형은 마르살과 포도주 한 바구니를 가지고 그
호텔을 찾아갔다. 그래서 그런지 삘르와 씨는 형이 방 하나를 빌려야겠다고
수줍게 말하자 선선히 일층에 있는 전망좋은 방을 내주었다. 호텔 정원 쪽으로
창문이 나 있는 방이었다. 정원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아카시아나무가 두세
그루 있었고 바띠놀 지방 특유의 초록색 잔디가 깔려 있었으며 열매가 열리지
않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 병든 포도나무 한 그루, 국화 몇 포기가
전부였다. 그러나 조금은 우울하고 습기찬 방 분위기를 명랑하게 바꾸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형은 잠시도 지체 않고 짐을 풀고 벽에 못을 박았다. 속옷을 챙기고, 내 파이프
걸이를 마련하고, 침대 머리맡에 어머니의 초상화를 걸고, 마지막으로 아늑한
분위기가 들도록 방 구석구석을 꾸몄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꾸며 놓고 나서 형은
자리에 잠시 앉지도 않고 서서 급히 점심식사를 했다. 그러고는 황급히 방을
나왔다. 그는 삘르와 씨에게 그날 저녁만은 급한 일로 좀 늦어서야 돌아올 것
같다고 말해 두고 맛있는 포도주와 두 명 분의 시사를 자기 방에 준비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형의 특별한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면서도 사람좋은 삘르와
씨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수사처럼 귀밑까지 얼굴을 붉히며 난감한 듯이
말했다.
"저, 실은... 이곳의 규칙이 좀 그런데... 우리는 여자분을 모셔...."
자끄 형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읍니다... 두 명 분의 식사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시나
보군요. 삘르와 씨. 안심하십시오. 여자는 아닙니다."
몽빠르나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형은 혼자 중얼거렸다.
"다니엘이 여자였다면 정말 용기도 없는 연약한 여자일 테지. 사실 그애는
절대로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될 철부지 어린애야."
자끄 형이 몽빠르나스에서 나를 찾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게 됐는지 모를
일이다. 발송하지 않은 그 끔찍한 편지가 쓰여졌던 때 이후로 내가 연극을
그만두었을 가능성도 있었고, 또 몽빠르나스에서 나를 찾아 낼 것이며 바로 그날
저녁에 나를 데려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애를 빼내 오려면 그애 혼자 있을 때여야 해. 그 여자가 눈치채면 안 돼.'
그런 생각이 미치자 자끄 형은 곧장 극장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무대 뒤쪽은
시끌벅적해서 사람을 찾아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형은 오히려 연극
포스터를 보고 언제 출연하는지를 먼저 알아내는 편이 한결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다.
파리 근교의 연극 공연 포스터들은 알자스 지방의 결혼식 안내처럼 포도주 파는
가게의 문 창살에 따닥따닥 붙어져 있었다. 형은 그 포스터들을 훑어내리다가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날 저녁 몽빠르나스 극장에서 공연될 '마리쟌느'라는 5막짜리 연극에 이르마
보렐, 데지레, 르보노, 귄느 등의 출연자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안내 포스터에서 그에 앞서 '사랑과 자두'라는 단막 통속 희극에서 다니엘과
앙뜨완느, 레옹띤느가 출연한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잘 됐군. 둘이 같은 연극에 등장하지 않는군 그래. 만사가 잘 풀릴 것
같은데...."
형은 룩셈부르그 까페에 들어가 납치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저녁이 되자 그는 연극이 시작되고 있는 극장으로 갔다. 그는 한 시간 동안이나
순경이 지키고 선 복도와 문 앞을 서성거렸다.
때때로 극장 안에서 터져나오는 박수소리가 멀리서 들려 오는 우박 소리처럼
들려 왔으며 사람들이 그렇게 박수를 쳐대는 것은 동생이 지어내는 표정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저며 왔다. 9시쯤 되자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통속 희극이 끝난 모양이었다. 길가에 나와서까지 계속 웃어 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어 대며 떠들어 댔다. 그들은 파리의
동물원에 갇혀서 울부짖는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자끄 형은 혼잡한 틈바구니에서 좀더 기다렸다. 그리고 막간 휴식시간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장내로 들어갈 때쯤 형은 배우고 드나드는 어둡고 끈끈한 통로로
미끄러질듯 들어가서 이르마 보렐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안 되겠는데요. 지금 무대 위에 계신대요...."
형은 완전히 속임수를 썼던 것이다. 침착한 어조로 형은 대답했다.
"이르마 보렐 부인을 만날 수 없다면 다니엘 씨를 불러 주시오. 부인에게 전할
말을 그 사람한테 말해 두겠읍니다."
그렇게 해서 잠시 후, 자끄 형은 나를 만나게 되었고 재빨리 나를 마차에
태우고 절망과 불행의 몽빠르나스 극장에서 나를 건져내 주었던 것이다.
##돌아온 탕아
"자, 다니엘 잘 봐."
삘르와 호텔 방에 들어섰을 때 자끄 형이 말했다.
"네가 파리에 처음 도착하던 바로 그날 밤 같잖아!"
정말 그날 밤처럼 새하얀 식탁보 위에 깔끔한 저녁식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맛좋은 냄새를 풍기는 파이, 오래된 포도주, 유리잔에 비친 촛불의 영롱한
불꽃... 그러나 예전과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의 그 행복은 다시 시작될
수는 없었다. 저녁식사는 그때와 다름없이 똑같았지만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는
희망도 없었고, 파리에 도착했다는 부푼 꿈과 아름다운 열정도 없었으며 우리
집안을 세워야 한다는 앞날에 대한 계획도, 영광에 대한 환상도, 웃음과 시장기를
느끼게 해주던 소박한 감상도 없었다. 파리에 갓 도착했던 그날 밤의
저녁식사에서 느낄 수 있었던 기쁨이 삘르와 호텔 방에서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시절의 기쁨은 이제 모두 쌩 제르멩 종탑 속에 고스란히 묻어 두고
떠나온 것이었다. 다시는 우리 형제에겐 축제 같은 분위기를 느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끄 형이 나를 유심히 살펴보는 눈길을 피했다.
자끄 형 역시 마음속으로는 울고 싶으면서도 의연하게 자신을 자제하며 쾌활하게
말했다.
"이봐, 다니엘, 실컷 울었잖아. 한 시간 전부터 내내 넌 울기만 했어. 마차
안에서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내 어깨에 기대어 계속 울며 왔잖아. 참,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환영파티가 되어 버렸구나! 너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나. 그 풀단지하며 네가 날더러 얼간이라고 놀려 대던 시절 말이다. 이제 그만
눈물을 닦고 거울 좀 봐봐. 아마 웃음이 날 걸."
나는 거울을 보았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노란 가발은
이마를 덮고 허연 분과 빨간 루즈로 범벅이 된 얼굴, 그 위로 땀과 눈물이 얼룩져
있는 내 모습은 흉칙한 꼬락서니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혐오스러워 나는 가발을
벗어선 내던지려다 조심스레 벽에 걸었다.
자끄 형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왜 거기다 걸어 놓는 거니, 다니엘? 아파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같은 그
가발은 몹시 천해 보이는데... 인디언에게서 벗겨 낸 머리가죽 같은 느낌이
든다니까."
"아니 자끄 형, 이건 전리품이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내 회한의 모습이야.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내 회한이란 말이야. 그래서 늘 볼 수 있도록 여기에 걸어 놓고
싶은 거야."
자끄 형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건 내버리자꾸나. 이젠 넌 어리석은 꿈에서 깨어났고 나는 네 귀여운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잖니. 자, 우선 굶주린 배를 채우자.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사실 형이나 나는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먹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형을
생각해서 나는 억지로라도 기분좋은 얼굴을 해보이고 싶었지만 먹을 것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참아 내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도 결국 나는 파이
위에 눈물을 쏟고 말았다. 자끄 형도 눈시울을 적시면서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꺼냈다.
"왜 우니? 이곳에 온 걸 후회하고 있는 거냐? 너를 납치해 와서 나한테 무슨
감정이라도 있는 거야?"
"자끄 형, 그런 말 하지마! 그게 아니란 걸 알잖아! 형은 내게 무슨 말이든 할
권리가 있지만 말이야."
우리는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아니다, 단지 먹는 시늉만 냈을 뿐이었다. 잠시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고 자끄 형이 접시를 밀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할 것 같구나. 잠이나 자는 게 좋겠어...."
'번뇌와 고민은 잠자리 친구가 아니다'라는 속담처럼 그날 밤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어머니 같은 자끄 형이
내게 베풀어 준 온갖 사랑에 대해 나는 고작 이런 식으로 보답을 하다니... 나의
악행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형과 내 삶을 연결해 준 고리들, 형의 끝없는 희생과
내 이기주의, '이 세상에서 유일한 행복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형의 헌신적인 영혼과 내 비겁하고 어린애 같은 영혼을
비교하는 일은 진정 고통이었다.
'이제 내 인생은 엉망이 돼 버렸어. 이제 자끄 형의 사랑도, 검은 눈동자의
사랑도 잃어버리고 내 자존심마저도 잃어버리고 말았어. 이제 난 뭐가 될까?'
동창이 희끄무레 밝아 오고 있었다. 나는 끔찍한 고통으로 인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형벌을 받는 듯했다. 자끄 형 역시 잠들지 못했다. 나는 형이 이리저리
뒤척이는 소리와 끊임없이 계속되는 마른 기침소리를 들었다. 한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끄 형, 기침을 그렇게 심하게 하는데, 어디 아파?"
"아무렇지도 않아. 어서 자...."
형이 짤막하게 대꾸해 버려서 혹시 속으로 내게 몹시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더욱더 가슴이 메어지면서 슬픔이
복받쳐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죽여 가며 울기 시작했다. 울다 지친 끝에 나는
어느결엔가 어렴풋하게 잠이 들었다. 고통은 잠을 방해했지만 눈물은 마취제처럼
잠을 몰고 왔다.
내가 선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날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
옆자리를 더듬어 보았지만 자끄 형은 없었다. 나는 형이 벌써 나간 줄 알았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려다가 문득 방 한켠의 소파 위에 잠들어 있는
창백한 얼굴의 형을 발견했다. 형의 얼굴은 백지장같이 하ㅇ다.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형 품에 뛰어들며 소리쳤다.
"자끄 형!"
형은 깊은 잠에 빠져 내 외침에도 깨어나지 않았다. 정말 두려운 일이었다.
잠들어 있는 형의 얼굴에는 전엔 한번도 보지 못했고 슬픈 고통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뼈만 앙상한 야윈 몸매, 홀쭉해진 얼굴, 창백한 뺨, 병색이 완연한
투명해 보이는 손, 형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고통스러웠다. 언젠가 형의
그런 모습을 보고 무척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었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언제일까? 자끄 형은 한번도 아파 본 적이 없었고 또한 한번도 저렇게 뼈만
앙상하게 남고, 눈 밑에 푸르스름한 반점 같은 것이 떠오른 적은 없었는데... 그럼
대체 나는 언제 어디에서 지금과 똑같은 형의 환영을 보았던 것일까? 그 순간 내가
그토록 시달렸던 악몽이 되살아 났다. 그렇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창백한 자끄
형이 소파에 누워 죽어 있던 바로 그 꿈, 형을 죽인 건 다니엘 에세뜨 바로
나였다. 그 순간 한줄기 햇살이 창문을 통해 조용히 스며들어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창백한 형의 얼굴 위를 도마뱀이 기어가듯 비춰 부었다. 그 따스한 햇살을 받은
누워 있던 자끄 형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 곁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잤니, 다니엘! 기침이 너무 심해서 널 깨우지 않으려고 소파에서 잤어."
형이 아무렇지 않게 조용히 말했지만 방금 본 형의 그 끔찍한 모습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울부짖고 있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자끄 형을 지켜 주세요!'
깨어날 때는 침울했지만 아침나절은 기분이 꽤나 유쾌해져 즐거웠다. 지난밤
그곳을 빠져나올 때 입고 있었던 무대의상을 다시 입었다. 마직 반바지,
땅바닥까지 옷자락이 끌리는 긴 빨간 조끼... 그러한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면서 옛날처럼 밝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내 준비가 부족했군. 세련되지 못한 돈 주앙들은 미녀를 납치할 때
혼수품을 생각해 둔다던데. 어쨌든 걱정하지 마. 새옷을 사러 가야겠구나... 그것
또한 네가 파리에 처음 올 때와 꼭 같구나."
자끄 형은 날 웃기려고 그런 말을 했다. 형 역시 이젠 나처럼 이젠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형이 말했다.
"자, 다니엘, 지나간 일은 더이상 생각하지 말자. 이제부터 앞으로 올 새로운
인생을 생각해. 후회나 자기비하 따위의 생각은 지워 버리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거야. 지나간 전철을 다시 밟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는 거야... 이제부터
무엇을 하려는지 묻지는 않겠어. 하지만 네가 다시 시를 쓰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호텔 방은 시쓰기엔 좋은 장소야. 주위도 조용하고 정원엔 새들이
지저귀고 창가에다 책상을 갖다 놓으면...."
나는 형의 말허리를 끊고 외쳤다.
"아니야! 형. 이제 더이상 시는 쓰지 않겠어. 그건 형한테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게 했던 헛된 꿈이었어. 이제 난 형처럼 일을 하고 싶어. 우리 집을 일으키기
위해 나도 돈을 벌어서 형을 힘껏 돕겠어,"
형은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좋은 계획이로구나.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돈을 버는 게
문제가 아니야... 그만두자꾸나!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네 옷이나 사러
가자."
나는 자끄 형의 외투를 뒤집어서 입었다. 외투자락이 발목까지 내려오 모습이
마치 하프만 하나 들려 놓으면 영락없이 삐에몬떼 지방의 음악가 같았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런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거리에 나섰다면 아마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수치심의 내용은 달라져 있었다. 여인네들이
그런 우스운 몰골로 지나가는 나를 보고 웃어 댄다 해도 몇 달 전 고미다락방에서
살던 시절 순수했던 내가 느꼈던 그런 수치심은 아니었다. 그랬다, 나는 변해
있었다.
옷가게를 나오면서 자끄 형은 어머니처럼 말했다.
"이제 널 삘르와 호텔로 데려다 줄께. 나는 장부정리를 해주던 철물점 주인한테
가봐야겠어. 아직 나한테 일을 시킬 의향이 있는지 알아봐야지... 삐에로뜨 씨에게
빌린 돈은 언제까지나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않으니까. 이제 먹고 살
길을 찾아 봐야 하지 않겠니?"
'알았어, 형. 철물점에 가 봐. 나 혼자서도 호텔에 돌아갈 수는 있어.'
나는 형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입밖에 꺼내지 못했다. 행여나 내가 몽빠르나스로
돌아갈까 봐 형은 걱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형이 내 생각과 영혼을 읽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형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호텔까지 얌전히 따라갔다. 하지만 형이 나가자마자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나 역시 볼 일이 있었다.
내가 삘르와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어두운 정원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불안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자끄 형이었다. 형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니엘, 오길 잘했다. 지금 막 몽빠르나스로 가려고 했었어...."
나는 짐짓 화를 발칵 내며 소리쳤다.
"너무 날 의심하는 군, 자끄 형. 너그럽지 못하게 왜 그러는 거야? 우리 계속
이래야 해? 이제 나를 믿지 않기로 한 거야? 맹세하지만 형이 생각하고 있는
그곳에서 온 게 아니야. 그 여잔 이제 내겐 죽은 존재야. 다시는 그 여자를 만나지
않을 거야. 맹세해. 이제 형은 나를 다시 찾은 거라구. 그 끔찍했던 과거의
나날들이 내게는 통한으로 남아 있었어. 형의 도움으로 난 거기서 탈출할 수
있었지. 미련 같은 건 손톱만큼도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형이 날 믿어 주지?
정말 야속해! 내 가슴속만 열어 보일 수만 있다면 좋겠어. 그러면 내가 거짓말
하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형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형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래 널 믿고 싶다...."
그때 나는 속으로 정말 진지하게 모든 것을 되짚어 보고 새로운 생활에 대해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아마도 나 혼자였다면 결코 그녀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와 나를 얽어맸던 사슬이 끊어져 버리자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가벼웠다. 마치 탄 가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다가 죽음이 눈앞에 성큼 다가서자 삶에 대한 미련이 짙어지며 자살을 후회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고 질식상태에 빠져 숨을 헐떡이고 몸은
점점 마비되어 가는데 갑자기 이웃 사람들이 달려와 문을 활짝 열어 젖혀 구세주
같은 신선한 공기가 방안에 퍼지면 가엾은 자살미수자는 허겁지겁 그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느닷없는 고마움을 느끼며 다시
새롭게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해진다. 이처럼 나도 다섯 달 동안
도덕적인 질식상태를 보내고 난 뒤 성실한 삶이라는 강렬하고 순수한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던 것이다. 나는 그 공기로 내 허파를 가득 채우고 또다시 타락의
길에 들어서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했던 것이다. 자끄 형조차 그것을 믿지
못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어찌 내 진심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날 밤 형과 나는 추운 겨울 밤처럼 불가에 앉아서 지새웠다. 방안에는 습기가
차 있었고 정원의 안개가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로 찌뿌둥하게 추운 날씨였다.
슬픈 때에는 무엇보다 불꽃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훈훈해지고 아늑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자끄 형은 장부를 정리했는데 그 결과 아주 엉망진창이 되어서
차변과 대변이 뒤죽박죽되었다. 그걸 제대로 정리하려면 한 달은 족히 걸려야 할
정도로 큰일거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형의 일을 도와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붉은 선과 기이한 상형문자 같은 숫자들로 꽉 찬
두꺼운 상업장부와 한 시간쯤 씨름하다가 결국 나는 펜을 내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자끄 형은 복잡하게 얽힌 그 일을 참을성 있고 훌륭하게 해냈다. 그는
빽빽하게 들어찬 숫자 위에 머리를 묻고 아무리 복잡한 사항에도 머뭇대지 않고
일했다. 이따금씩 형은 고개를 들어 말없이 꿈꾸고 있는 듯한 내 모습이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걸곤 했다.
"괜찮지? 심심하지 앉니?"
나는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형의 모습에서 어쩐지
슬픔과 쓰라림을 느꼈다.
'나는 왜 살아가는 것일까? 이 멀쩡한 두 팔로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다니...
나는 인생의 절정기에 내 자리값 하나 지불하지 못하고 있어. 그저 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밖에 못하더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검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자끄 형의 의도적으로
괘종시계 위에 얹어놓은 듯한 금색 끈으로 묶인 작은 상자를 고통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당시는 내게 참으로 많은 것들을 말해 주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는 네게 자신의 마음을 주었어. 그걸로 너는 무얼 했지? 너는 그걸
짐승의 사료로 썼어, 그러면서 내 잘못을 좀 줄여보려고 위안하듯 생각했다.
'내가 아냐! 꾸꾸블랑이 먹어 버렸어!... 꾸꾸블랑이 먹어 버렸어!'
벽난로 앞에 앉아, 일과 회상 속에서 보낸 그 길고 우울한 밤은 형과 내가
걸어온 인생과 앞으로 걷게 될 삶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가올 매일매일도 그날
밤과 엇비슷한 모습으로 지나갈 것시다. 물론 회상에 잠겨
눈을 꾼 것은 자끄 형이 아니다. 형은 10시간 동안이나 숫자 속에 파묻혀 두꺼운
장부와 씨름을 했다. 그가 일하는 동안 나는 불을 쑤셔 일으키며 금색 끈으로
묶인 작은 상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검은 눈동자, 우리 이야기를 하자! 괜찮니 ?'
자끄 형에게는 차마 내가 먼저 검은 눈동자의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형은 의식적으로 그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조심스레 피하곤
했다. 형은 삐에로뜨 씨에 관해서조차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작은 상자를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궁금함으로 꿈꾸듯 작은 상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정오쯤 되면 자끄 형의 기분이 한결 좋아진 듯해서 나는 문쪽으로 살며시
다가가서 조용히 말하곤 했다.
"잠깐 나갔다 올께, 형!"
한번도 형은 내가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형의 서글픈
표정에서, "나가니?"하는 걱정어린 말투에서, 나를 전적으로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을 형은 떨쳐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다니엘이 그 여자를 만나게 되면 우린 서로를 잃게 돼.'
형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형의 생각처럼 내가 마녀 같은 그 여자를 다시
보게 된다면 어쩌면 나는 매력적인 황금빛 머리칼과 입가의 하얀 흉터 때문에
다시 그녀에게 빠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로 그 여자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에 자선을 베푸는 신사를 만나는
그녀는 지금쯤 그 재미에 빠져 이미 다니당을 잊어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누군지
모르는 그 신사 덕에 나는 그 여자가 읊어 대는 찢어지는 듯한 연극대사나
꾸꾸블랑의 구슬픈 후렴구도 다시는 듣지 않게 되었다.
며칠 동안 나는 형에게 사실을 밝히지 않고 외출해 왔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이었다. 그날 난 돌아와서 너무나 기뻐 형에게 소리쳤다.
"자끄 형! 형! 좋은 소식이 있어. 일자리를 찾았어. 그동안 형한테 아무 말도
안하고 열흘이나 길거리를 휘젓고 다니면서 일자리를 구하러 돌아다녔어. 드디어
됐어. 일자리를 구했다구. 내일부터 몽마르뜨르에 있는 울리학원의 사감으로
일하게 됐어. 여기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야...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하게
될 거야... 형하고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이제는 나도 돈을
벌게 됐어. 형을 조금은 도울 수 있을 거야."
자끄 형은 숫자 속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며 냉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대답했다.
"나를 도와주겠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야... 요즘 들어선 나 혼자서
감당하기엔 좀 힘겹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무슨 일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꽤
오래 전부터 내 몸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심한 기침 때문에 형은 말을 잇지 못했다. 형은 펜을 힘없이 내려놓고 소파
위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창백한 형이 소파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자 또다시 꿈에 보았던 끔찍한 모습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번개처럼 짧은 순간이었다. 자끄 형은 눕기가 무섭게 몸을 일으켜 앉아서 당황해
하는 내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 일도 아니야, 이 소심한 녀석아! 좀 피곤할 뿐이야. 요즘 들어 좀 무리한
것 같아. 네가 일자리를 구했다니 이제 좀더 휴식을 취하면 일주일 후엔 말짱해질
거야."
형이 아주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로 말했기 때문에 죽음의 검은 날개짓소리를
내던 불길한 예감은 자취를 감췄다.
그 다음날 나는 울리학원에 들어갔다.
울리학원은 외관은 번듯하고 호화스러워 보였지만 우스우리만치 규모가 작은
학원이었다. 그 학원은 윤락녀였다가 새 삶을 살고 있는 늙은 부인이 경영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녀를 '좋은 친구'라고 불렀다. 그 학원에 다니는 스무 명
정도의 어린 꼬마들은 간식 바구니를 손에 들고 셔츠자락이 삐죽 빠져나온 정말
개구장이 꼬마들이었다.
울리 부인은 아이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쳤고 나는 알파벳을 가르쳤다. 게다가
나는 휴식시간에도 그애들을 보살펴 주어야 했다. 정원에 암탉 몇 마리와 인도산
수탉이 한 마리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 닭들을 몹시 무서워했다.
'좋은 친구'가 감기라도 걸릴라치면 교실 청소를 하는 등 사감이 하기엔 민망한
자질구레한 일들도 모두 내가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짜증내는 일 없이
열심히 그러한 일들을 해냈다. 나는 돈을 번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삘르와 호텔에 돌아오면 형이 저녁식사를 준비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식사 후엔 형과 함께 정원을 거닐다가 벽난로
가에서 도란거리며 밤을 보내곤 했다. 그것이 형과 나의 변함없이 반복되는
생활이었다. 이따금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곤 했는데 그것이 형과
내게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바티스트 삼촌 댁에 살고 있었고
아버지는 포도주 회사 일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 사정은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라서 리용에서 진 빚을 거의 4분의 3쯤은 갚을 수 있었다.
일이 년 후면 빚문제가 말끔히 해결되고 온 가족이 모여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번은 빚을 몽땅 청산하기 전에 일단 어머니만 삘르와 호텔로 모셔와 같이
사는 게 어떻겠냐고 자끄 형에게 물어 보았다.
"안 돼! 아직은, 아직은 안 돼... 잠시만 기다려."
형은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한사코 안 된다는 대답만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이 몹시 상했다.
'형은 아직도 나를 믿지 않는 거야... 어머니가 이곳에 와 계시면 내가 또 미친
짓거리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분명해. 그래서 좀더 기다리자고 하는 걸
거야...."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끄 형이 기다리자고 했던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겨울비 내리는 죽음의 길
만약 아주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고, 꿈 이야기를 들으면 코웃음만 치거나,
어떤 야릇한 예감에 단 한번도 흘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또한 현실만을
인정하고 미신 따위는 절대로 없다는 믿음을 한순간이라도 버리지 않은 강철 같은
머리를 가진 실증주의자라면, 그래서 또한 여하한 경우라도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고 논리로서 설명해 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면 어떤 것이라도 부정해 버리는
사람이라면 내가 겪은 이 불행을 절대로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험난한 세상이라도 진실은 존재하며 또한 그 진실성은 영원하듯이 내가 겪은 이
엄청난 일은 사실 그대로이며 조금의 과장도 없음을 꼭 밝혀 두고 싶다.
12월 4일, 나는 평소보다 일찍 울리학원을 나왔다. 아침에 몹시 피곤해 하는
자끄 형을 홀로 남겨 두고 나왔기 때문에 어떻게 됐는지 몹시 걱정됐다. 허둥지둥
삘르와 호텔의 정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그만 실수를 하여 무화과나무 옆에 서
있는 삘르와 씨의 밟고 말았다. 그는 키가 작고 똥똥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똥똥한 사람은 장갑의 단추를 채우려고 몹시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사과하고 나서 곧장 갈 했는데 삘르와 씨가 나를 불렀다.
"잠깐만요, 다니엘 씨!"
그러고는 똥똥한 사람에게로 몸을 돌리며 그에게 덧붙였다.
"이 청년이 바로 그 사람의 동생입니다. 이분에게 말씀해 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나는 몹시 당황하여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이 똥똥한 사람이 내게 무얼 알려 주겠다는 것인가? 자기 손에 비해 장갑이
너무 작다는 걸 알려 주겠다는 것일까? 그건 말하지 않아도 벌써 알고 있는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였다. 삘르와 씨는 고개를 위로 쳐들고
열리지도 않은 무화과를 찾기라도 하려는 듯이 무화과나무를 쳐다만 보았다.
장갑을 낀 남자는 여전히 단추를 채우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러더니 결국
망하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당히 초조한 듯 여전히 장갑 단추를
채우려고 애쓰면서 안절부절했다.
"나는 20년 전부터 삘르와 호텔의 주의치로 일해 왔읍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나는 그가 말을 끝마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의사'라는 말만으로도 나는
말만으로도 나는 모든 걸 짐작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제 형
때문에 오셨군요... 많이 아픈 거지요?"
그 의사가 나쁜 사람인지 선량한 사랑인지 처음 보고서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그 순간 의사는 자기 입장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자끄의 동생에게 얘기하려 한다는 사실도 망각해 버렸고 따라서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기 위한 어떠한 노력이나 배려에는 잠시도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이기적인 인간처럼 보였다. 그가 뱉아낸 그 말은 너무 잔인하게
들렸다.
"아프냐구요! 아픈 정도가 아닙니다...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그럴 수가!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었다. 집이, 정원이, 삘르와 씨가, 의사가, 그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나는 무화과나무에 몸을 기댔다. 쓰러질 것
같았다. 삘르와 호텔의 그 주치의는 참으로 강한 주먹을 가진 모양이었다. 더구나
내 심경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장갑 단추를 끼우려고 애쓰면서 아주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급성 질구성 결핵입니다...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전혀 없어요... 게다가
너무 오래 방치해 두어서... 내게 너무 늦게 알려 주었어요."
"그, 그건 내 실수가 아닙니다. 의사 선생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이 사람좋은 삘르와 씨가 여전히 조심스럽게
무화과를 찾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제 잘못이 아니예요. 나는 그가 아프다는 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요.
가엾은 에세뜨 씨. 나는 충고했었지만 그는 결코 그러려고 하지 않았어요. 자기
동생이 겁을 먹을까 봐 그랬던 것이지요. 참 대단한 우애를 가진 형제들이지
않습니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절망적인 흐느낌이 솟아나오려고
했다.
"이봐요, 용기를 가져요! 누가 압니까!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도 낫게 되는
경우가 있죠. 의학으로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자연의 그 오묘한 이치는 아직
모르는 거라오... 내일 아침에 다시 오지요."
의사는 몸을 돌리더니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드디어 장갑의
단추 하나를 채웠던 것이다.
나는 잠시 넋을 잃은 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곤 눈물을 닦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용기를 내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파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자끄 형은 내가 침대를
쓰도록 하려는 배려에서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아! 형... 그의 얼굴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창백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 얼굴, 그 모습 그대로 그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우선 소파로 가서 형을 침대로 옮기는 것이 가장 급선무란 생각이 떠올랐다.
어쨌던 간에 소파 아닌 다른 데로 옮기고 싶었다.
'소파 위에 누워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곧 또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넌 못할 거야. 자끄 형은 너무 크단 말이야!'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죽음의 장소에 누워 있는 자끄 형을 바라보자 내
용기는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형은 위독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소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자끄 형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로구나 다니엘... 의사를 만난 거지? 널 낙담시킬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네 얼굴을 보니 그 의사가 내 부탁을 들어 주지 않은 것
같구나. 넌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모양이지... 손을 잡아 다오... 누가 이렇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었겠니? 누구는 니스로 폐병을 고치러 가는데 나는 그곳에서
병에 걸려 왔구나. 참 야릇한 일이야! 다니엘... 네가 그렇게 상심하는 모습을
보면 힘이 하나도 없어진단다. 아직은 괜찮아... 오늘 아침에 네가 나가고 난
다음에 이젠 다 됐다는 걸 알아차렸어. 그래서 쌩 삐에르 주임 신부님을
모셔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좀 전에 신부님이 왔다 가셨어. 이따가 종부성사를
베풀어 주시러 다시 오실 게다... 나한테는 기쁜 일이란다. 알겠니? 아주 좋은
분이야... 그분의 성이 네가 싸르랑드 중학교에 있을 때에 알게 됐다던 신부님의
성하고 같더구나...."
형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더니 눈을 감았다. 그가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이 되었다. 나는 미친 듯이 큰소리로 형의 이름을 외쳤다.
"자끄 형! 형! 아! 자끄 형...."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잡은 손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삘르와 씨가 한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는 소과 쪽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이게 웬일이야, 자끄...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안녕하셨어요, 삐에로뜨 씨?"
형이 눈을 뜨면서 힘없이 말했다.
"삐에로뜨 씨! 당신이 달려올 줄 알았어요... 다니엘은 저쪽에 좀 가 있거라.
삐에로뜨 씨와 할 이야기가 있어."
삐에로뜨 씨는 다 죽어 가는 자끄 형의 새파랗게 질린 입술에 귀를 갖다댔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런 모습으로, 아주 작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방 한가운데 꼼짝 않고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여전히
책을 겨드랑이에 낀 채로 서 있는 것을 보고 삘르와 씨가 조심스레 책을 빼주면서
뭐라고 말을 했지만 내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촛불을 켜고 탁자
위에 하얀 식탁보를 깔았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왜 식탁보를 깔까?... 식사를 하려는 건가?... 하지만 난 배고프지 않아....'
밤이 되었다. 밖에선 호텔에 사는 사람들이 정원 쪽에서 우리 방을 가리키면서
손짓을 해댔다. 자끄 형과 삐에로뜨 씨는 아직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때때로
삐에로뜨 씨는 굵은 목소리로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그래, 자끄, 그래...."
나는 감히 그쪽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드디어 형이 나를 불러 자기 머리맡
쪽의 삐에로뜨 씨 옆에 앉게 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형이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다니엘, 너를 남겨 두고 가게 돼서 뭐라 말할 수 없이 슬프구나. 하지만 너
혼자 남겨 두진 않아. 그게 네겐 위안이 될 거야... 삐에로뜨 씨가 네 곁에 있게
될 거다. 삐에로뜨 씨가 널 용서하고 나 대신 너를 돌봐 주기로 약속했다...."
"말해서 무엇하나, 자끄! 약속하지...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결단코 약속하지."
"불쌍한 다니엘, 너 혼자 힘으로는 결코 우리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우지 못할
거야... 널 무시하거나 괴롭히려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넌 우리 집을
일으켜 세우기엔 적합하지 못해... 하지만 삐에로뜨 씨가 도와 준다면 우리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 거야... 너보고 어른이 되라고 요구하진 않겠다. 제르만느
신부님 말처럼, 넌 영원히 어린애 같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착하고 용감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좀 가까이 오렴. 이건 네 귀에다 대고
이야기를 해야겠다... 무엇보다도 까미유를 울리지 않도록 해...."
형은 말을 하기가 몹시 힘든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모든 게 끝나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도록 해. 하지만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알려드려야 할 거야... 한꺼번에 모든 걸 알게 되시면 너무 큰 충격이 될
거야... 이제 알겠니? 왜 내가 어머니를 이곳에 오지 못하게 했는지를 말이야. 난
어머니가 이곳에 계시게 되는 걸 원치 않았던 거야. 이런 일은 그 어떤
어머니에게라도 엄청난 고통이란다...."
형은 말을 멈추고 방문 쪽으로 바라보았다.
"하나님이 도착하셨구나!"
형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보고 떨어져 달라는 손짓을 했다.
신부님이 종부성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흰 식탁보 위에 양초가 켜지고 그
사이에 성체의 빵과 성유가 놓여졌다. 그런 다음 신부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서
의식을 시작했다....
그 의식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을 것처럼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의식이
끝나자 형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날 안아다오."
너무도 힘없이 작게 말해서 형의 목소리는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들려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사실 그 무서운 질구성 결핵이 야윈 형의 등 뒤에서 형을
죽음으로 몰아붙였던 그때부터 난 형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너무 멀리에....
형을 안으려고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았다. 형의 손은 임종의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인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그 손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한 시간,
아니면 영원이란 시간이 이미 흘러가 버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형은 더이상 날
바라보지도, 더이상 말을 하지도 않았다. 단지 내 손 안에 들어 있는 형의 손이
마치 '아직도 네가 내 곁에 있구나'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때때로 미미하게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형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형은 벌떡 눈을 뜨더니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때
나는 형에게 몸을 굽히고 있었으므로 형이 아무리 조그만 목소리로 하는 말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끄, 넌 당나귀처럼 멍청한 바보야. 자끄는 바보야!...."
그리고 더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을 거둔 것이었다.
아! 그 꿈이....
그날 밤은 바람이 몹시도 불었다. 바람을 타고 싸락눈이 날아와 유리창을
때렸다.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탁자 위에는 은십자가 두 개의 촛불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웬 낯선 신부님이 큰 목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심한 바람소리 속에서도 신부님의 기도소리는 내 귀에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기도하지 않았다... 내겐 오직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자끄 형의 손을 꼭 쥐고 언제까지나 식지 않도록 덥혀 줘야겠다는 생각밖에...
그러나... 아침이 가까와질수록 형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거워만 갔다.
한쪽에선 라틴어로 기도를 하고 있던 신부님이 갑자기 일어나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기도를 해봐... 좀 나아질 테니...."
그때서야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 보았다... 칼자국과 상처투성이에도 불구하고
멋져 보이던 용모와 신부복 자락을 펄럭이며 걸을 땐 하늘을 나는 용처럼 보이던
그 모습... 그는 바로 싸르랑드 중학교시절의 내 친구 제르만느 신부님이었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고통으로 완전히 허탈감에 빠져 있던 나는 신부님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그럴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고 내겐 그저
단순한 일로 여겨졌을 뿐이다... 종부성사를 하고 가신 쌩 삐에르 신부님이 바로
그의 형이었다.
내가 학교를 떠나오던 날, 제르만느 신부님은 파리에 형이 한 분 계시다고
말했었다.
사람의 운명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인지 그즈음에 마침 제르만느 신부님은
파리에 들러 사제관에 묵고 있었다.
"여기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사망한 가엾은 젊은이의 종부성사를 해주고 오는
길이야. 그를 위해 기도해 주게나."
"내일 미사를 올리면서 기도하도록 하지요. 이름이 뭔가요?"
"글쎄... 남부지방 출신인 모양인데, 외우기 꽤 힘든 이름이었어... 자끄 에세...
아, 그래... 자끄 에세뜨라고 하더군..."
제르만느 신부님은 그 이름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서 긴가민가하며 지체 않고
삘르와 호텔로 달려왔던 것이었다... 들어오면서 신부님은 형의 손을 꼭 쥐고
엉거주춤 서 있는 사람이 바로 나란 것을 알아봤단다. 신부님은 슬픔에 빠진 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나와 함께 밤을 새우겠노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방에서 내보냈고 무릎을 꿇고 앉아 밤새 기도하다가 내 어깨를 두드렸던
것이었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고통스런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고... 그리고 밤과 낮이 바뀌며 많은 날들이 흘러갔어도
희미하고 모호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 선명한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내
기억의 필름이 완전히 꺾여 버린 것이었다. 다만 검은 마차 뒤를 따라 파리의
진흙탕 속을 끝없이 걸어가던 기억은 마치 몇 백 년 전에 있었던 잊혀진 역사의
한 장면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나는 모자도 쓰지 않고 채 걷고 있었고 내
앞에는 삐에로뜨 씨와 제르만느 신부님이 걸어가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섞인
차가운 비가 얼굴을 때렸다. 삐에로뜨 씨는 큰 우산을 갖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받지 못했고, 빗줄기가 너무도 세차게 쏟아져 제르만느 신부님의 사제복이 흥건히
젖어 버렸다.
비가 내렸다!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도저히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처럼
차가운 겨울비를 맞으며 끝없이 걸었다!
마차 옆을 따라서 검은 옷을 걸치고 흑단 지팡이를 든 키큰 신사가 걷고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장례식을 관장하는 사람으로 주검의 시종들처럼 비단
외투를 입고 칼을 차고 짧은 바지에 동그랗고 긴 모자를 쓰고 있었다...
환각이었을까?... 나는 그 신사를 보고 싸르랑드 중학교의 비오 씨를 연상했다.
키가 매우 크고 한쪽 어깨로 고개가 약간 기울어진 모습하며 나를 바라볼 때
입가에 번지던 위선적이고 차가운 미소도 꼭 같았다. 그 신사는 분명 비오 씨는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그림자일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검은 마차는 앞으로만 나아갔다. 느리게, 느리게... 결코 장지에 다다르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끝없이 걸었다. 드디어 우리는 몽마르뜨르 언덕의 공원 묘지에
다다랐다. 공원 묘지에 들어서서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탕을 걸어 이미
파놓은 커다란 구덩이 앞에 가서 행렬은 멈췄다. 짤막한 외투를 걸친 남자들이
굉장히 무거워 보이는 관을 옮겨 와 조심스레 구덩이 옆에 내려놓았다. 하관
작업은 어려웠다. 밧줄이 비에 흠뻑 젖어 도무지 미끄러지지 않았다. 나는 그
남자들 중 한 명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발을 앞으로 내려! 발을 앞으로 내리라니까!"
내 맞은편에는 비오 씨의 그림자가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나를
지켜보았다. 큰 키에 야윈 얼굴, 목이 꽉 조일 정도로 상복을 조여 입은 그 모습은
메뚜기를 연상케 했다. 하늘 전체를 꽉 뒤덮은 잿빛 구름을 억지로 뚫고 굴러
떨어진 비에 젖은 검은 메뚜기....
장례식의 모든 절차가 끝났다. 그 차가운 땅 속에 형을 홀로 남겨두고 나는
삐에로뜨 씨와 단둘이 몽마르뜨르 언덕을 내려왔다... 삐에로뜨 씨는 마차를
잡으려 애썼지만 허탕만 쳤다. 나는 모자를 손에 들고 잠자코 걸었다. 나는
여전히 영구마차 뒤를 따라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울면서 마차를
잡으려고 뛰어다니는 뚱뚱한 삐에로뜨 씨와 억수같이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 속을
모자도 쓰지 않고 묵묵히 걷고 있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우리는 쉬지 않고 걸었다. 피곤했고 머리도 무거웠다.
쏘몽 가에 다다랐다. 저만치에 빗방울이 송송 맺혀 빛나고 있는 라루트 상회의
진열장이 보였다. 우리는 가게엔 들르지 않고 삐에로뜨 씨의 집으로 곧장
올라갔다... 이층까지 올라갔을 때 온몸에서 힘이 쏙 빠져나가 버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계단에 주저앉았다. 도저히 더이상 올라갈 수가 없었다. 머리가
몹시도 무거웠다... 삐에로뜨 씨가 나를 안아 들고 오층으로 올라갔다. 오싹
한기가 들며 죽어 가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문에 와 닿는 싸락눈
소리와 정원에 떨어지는 두둑두둑 빗방울소리가 아스라히 들려올 뿐이었다.
비가 내렸다!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차가운 겨울비가 쉬지 않고 내렸다!
##환상의 끝
나는 아팠다. 죽어 가고 있었다... 이틀에 한 번씩 못 보던 마차가 쏘몽 가에 와
서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수군댔다.
"저 집 오층의 돈 많은 늙은이가 죽어 가는 모양이야...."
그러나 죽어 가는 것은 돈 많은 늙은이가 아니라 바보 나였다. 모든 의사들이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내렸다. 싸르랑드 중학교에서의 여름 방학 이후 2년 만에
나는 또다시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몸은 허약할 대로 허약해지고 정신은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내게 장티푸스란 이기기 힘든 병이었다.
'빨리! 검은 마차를 준비해! 시종장, 그대는 흑단 지팡이를 들라. 그댄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흘리겠지.'
나는 아팠다. 죽어 가고 있었다.
나는 의식을 잃고 저승 근처를 헤매고 있었다. 그동안 삐에로뜨 씨의 집에선
모두 침통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삐에로뜨 씨는 잠도 자지 않았으며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상심하여 내내 안절부절 못했다. 불행에 빠진 사람들에게
항상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을 느끼며 선행을 많이 베푼 트리부 부인은 내게
또 한 번 기적을 베풀어 주십사고 쌩 샤르프에게 기도를 올리며 라스파이를 한 장
한 장 탐독했고, 담홍색이 감도는 응접실에는 죽음의 그림자만 감돌 뿐, 단 한번도
피아노와 플루트의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누구보다도 심한
비탄에 빠져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뜨개질을 하면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방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삐에로뜨 씨의 집은 무거운 침묵과 흐느낌, 비통에 잠겨 모두가 우울했는데,
다만 나만이 닭털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식물처럼 누워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지각은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었다. 어떤 물체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들만 윙윙거릴 뿐
사람의 말소리라고는 전혀 들려 오지 않았다. 마치 소라껍질을 귀에 대면 들려
오는 그런 먼 바닷가의 파도소리 같은 소리만이 우르릉댈 뿐이었다. 더구나 나는
말도 하지 않았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의식을 잃고
누워 있던 내 모습은 소생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시들어 버린 한떨기 병든
꽃과 같았으리라. 내가 원하는 것은 차가운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 주거나 입 안에
얼음조각을 넣어 주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얼음조각이 다 녹아 버리거나
물수건이 불덩이 같은 이마에서 말라 버릴라치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의사표시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시간을 알 수 없는 나날들, 천지가 창조되기 전 하늘과
땅이 아직도 갈라지지 않은 그런 혼돈상태의 나날들을 얼마나 헤맸을까... 아침인
것 같았다. 날씨는 맑은 듯했다. 야릇하고 모호한 느낌이 내게 서서히 찾아왔다.
마치 바다 깊숙한 곳에서 방금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눈을 떴다. 말소리도
들려 왔다. 숨도 고르게 쉬었다. 의식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대까지 깊이 잠들어
있던 생각하는 기계의 미세한 톱니바퀴가 서서히 깨어나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간 조금 속도가 붙고, 좀 지나서는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다 부숴 버릴 기세였다. 딱! 딱! 딱! 그 신통한
기계는 잠들 것 같지 않았으며 이때까지 잃어버렸던 시간을 몽땅 보상하려는 것
같았다... 딱! 딱! 딱! 기억들이 마구 되살아나면서 비단실처럼 서로 엉켰다.
'여기가 어디지?... 이 큰 침대는 또 뭐야?... 저기 창가에 앉아 있는 세 여인은
뭘 하고 있는 걸까?... 내게 등을 돌리고 있는 저 검은 옷의 여인은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그래... 꼭..."
어디선가 본 듯한 그 검은 옷의 여인을 자세히 쳐다보려고 나는 팔꿈치를
침대에 괴고는 침대에서 벗어나려고 힘을 주었다. 그런데 방 한가운데에 놓인
자물쇠가 달린 큰 농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만 공포에 사로잡혀 힘이 빠져
도로 눕고 말았다... 그 농장! 꿈속에서, 무시무시한 그 꿈속에서 본 그
장농이었다. 딱! 딱! 딱! 내 머리속에 들어 있는 기계는 쏜살같이 돌아갔다... 아!
그제서야 모든 것이 기억났다. 삘르와 호텔, 자끄 형의 죽음, 장례식, 그리고 비를
맞으며 삐에로뜨 씨 집으로 왔던 일,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아! 내
인생의 새출발은 뼈아픈 기억의 고통으로 인한 한탄으로 시작되었다.
내 신음소리를 들었는지 저쪽 창가에 있던 세 명의 여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네들 중 가장 젊은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얼음, 얼음!"
그녀는 재빨리 벽난로 쪽으로 가서 얼음조각을 집어서 내게 가져왔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내 눈에 보인 그녀의 손은 사람을 간호하는 데는 안 어울리는 너무
가냘픈 손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까미유!"
까미유는 다 죽어 가는 내 목소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당황한 나머지 팔을
축 늘어뜨려 손에 들었던 얼음조각을 떨어뜨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안녕, 까미유! 당신을 잘 알아 볼 수 있군요!... 이젠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어요... 앗! 그런데 당신 지금 나를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보입니까?"
까미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당신이 보이냐구요, 다니엘!... 그럼요. 이렇게 당신을 보고 있잖아요!"
그때 꿈속의 장농은 환각이었으며, 까미유는 장님이 되지 않았다는 것, 그
무시무시한 꿈이 더이상 현실화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나는 용기를
얻었다.
"내가 몹시 아팠었지요, 까미유?"
"그래요, 다니엘. 몹시 아팠어요...."
"오래 전부터 잠들어 있었나요?"
"내일이 되면 꼭 3주가 돼요...."
"세상에! 3주 동안이나!... 그럼 불쌍한 자끄 형이 죽은 지도 3주가 되었...?"
나는 말끝을 잇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삐에로뜨 씨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또다른 의사를 데리고 오던
중이었다. 만일 내가 깨어나지 못하고 계속 병을 앓았다면 의학 아카데미 회원
전부가 이곳을 거쳐갈 뻔했다. 새로 온 의사는 브룸브룸이라는 유명한 의사로
성격이 호탕하고 일처리가 빠르며 환자 머리맡에서 장갑단추나 채우는 일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의사는 아니었다. 그는 내게로 다가와 맥박을 재고 눈을
까뒤집어 보고 입을 벌리게 해서 혀를 살펴보고는 삐에로뜨 씨 쪽으로 돌아섰다.
"왜 나한테 그렇게 말씀하셨읍니까? 이 청년은 다 나았는데요...."
"아니, 뭐... 뭐라구요? 다 나았다구요!"
사람좋은 삐에로뜨 씨는 두 손을 맞잡고 뛸 듯이 기뻐했다.
"다 나았으니 이 얼음들랑 창 밖에다 내던져 버리고 환자에게 성수를 축인 닭
날개 요리를 주도록 하시오... 자 귀여운 아가씨, 이젠 상심 말아요. 일주일쯤
지나면 죽을 고비를 넘긴 이 청년은 완전히 회복되어 아주 건강해질 것이오. 내가
장담하지... 이젠 이 사람이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도록 해주시오. 충격을 주건
흥분시키지 말고, 절대 안정을 요합니다. 그 점이 제일 중요해요... 요란을 떨거나
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는 겁니다. 저절로 차츰 회복되어 갈 거요. 자연의
이치는 신비한 거라오. 이제 자연의 힘에 맡겨 두는 겁니다."
유명한 의사 브룸브룸은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긴 내게는
손가락을 튕겨 보였고 까미유에게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삐에로뜨 씨는 의사를
배웅하면서도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끊임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의사 선생님,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까미유는 이제 안정하고 더 좀 푹 자라고 했다. 나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가지 말아요, 까미유. 제발... 날 혼자 내버려 두지 말아요... 어떻게 내가
이토록 큰 슬픔을 간직한 채 잠들 수 있겠어요?"
"다니엘, 자야 해요... 잠을 자야만 해요. 지금 당신에겐 안정이 필요해요.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이봐요. 이제 냉정을 되찾아요. 눈을 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가끔 당신을 보러 올께요. 그리고 당신이 잠들고 나면
오랫동안 당신 곁에 앉아 있겠어요."
"그, 그래요... 자겠어요."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말했다.
"한 가지만 더, 까미유!... 조금 전에 저기 있던 검은 옷을 입은 부인은
누구예요?"
"검은 옷의 부인?"
"그래요! 검은 옷의 부인 말이에요. 당신하고 같이 창가에 앉아 뜨개질하고
있던 검은 옷을 입은 키 작은 부인 말이에요... 지금은 안 보이는군요...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 부인을 봤어요. 확실해요...."
"아니... 다니엘! 잘못 본 거예요... 트리부 부인과 나만이 아침부터 내내 여기에
있었어요. 당신도 아시잖아요. 왜 그 당신이 선행을 많이 한 부인이라고 늘
칭찬을 아끼지 않던 분 말이에요. 하지만 트리부 부인은 검은 옷을 입진
않았어요. 언제나처럼 초록색 옷을 입은 걸요. 아니에요. 이 집엔 검은 옷을 입은
부인은 없어요. 아마 꿈을 꾼 걸 거예요. 자, 이젠 가보겠어요. 푹 주무세요...."
까미유는 왜 그런지 거짓말을 한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져서는 정신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혼자 남았다. 하지만 깊이 잠들자 못했다. 미세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잘
돌아가고 있는 내 머리속의 기계가 떠들어 댔다. 비단실이 꼬이고 엉켰다. 나는
몽마르뜨르 풀밭에 잠들어 있는 자끄 형을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서둘러 밝혀 주신 것만 같은 아름다운 불빛, 그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생각했다.
그때 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주 조용히.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오려는가
보았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까미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들어가지 마세요. 충격을 받으면 안 돼요. 그가 깨어나면...."
그러자 문이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닫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검은
옷자락이 문 사이에 끼어 버려 그 순간 나는 그 검은 옷의 여인을 알아보게
되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면서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큰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 왜 절 안아 주시지 않는 거예요?"
문이 활짝 열렸다. 검은 옷의 여인이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러나 침대
쪽으로 오지 않고 방 저쪽 끝으로 가 팔을 벌리고 나를 불렀다.
"다니엘! 다니엘!"
"여기에요,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향해 손을 내밀고 웃으면서 소리쳤다.
"여기에요 어머니! 왜 여기로 오시지 않고... 여기에요."
그때서야 어머니는 침대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리고 떨리는 팔을 뻗쳐 자기
주위를 더듬으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내 귀여운 아가... 네 모습을 볼 수 없다니... 이제 더이상 네 모습을 볼
수가 없다니... 난... 난 눈이 멀어 버렸단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배게 위에 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된 세월, 자식 둘이 죽고, 가정은 풍지박산나고 남편과는
생이별을 하여 20여 년의 세월이 격한 후, 가엾은 어머니의 눈은 눈물로 타버린
것이 확실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설마
어머니가... 아, 꿈이라면... 그렇다. 꿈! 어쩌면 그렇게도 꿈과 현실이 꼭
맞아떨어지는 것일까! 운명의 여신은 나를 강타하기 위해 이런 엄청난 충격을
미리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죽음을....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을 수가 없다. 내가 죽고
나면 가엾은 어머니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세째 아들마저도 죽어 버리면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포도주 회사의 부속품처럼 완전히 자기 자신은
내던져 버려야 했던 가엾은 희생자 아버진? 포도재배장을 떠돌며 아픈 자식을
보러 올 시간도, 죽은 자식에게 꽃 한 송이 바치러 올 시간도 없는 아버지는 어찌
되겠는가? 내가 죽으면 누가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킬 것인가? 이 다음에
부모님이 노후를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따뜻한 가정은 누가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아!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죽어선 안 돼! 아무리 가늘고 희미하다
해도 난 생명줄에 매달릴 거야. 온 힘을 다해서... 빨리 회복되려면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지? 생각하지 않으리라. 울어서는 안 된다면 울지도 않으리라. 거센
폭풍우가 몰아친 뒤의 잔잔한 바다처럼 솜털 이불 가장자리의 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안식을 취하고 있는 평온한 내 모습을 되찾는 것은 기쁨이리라.
점차 회복되어 가는 증거일 것이므로....
집안 전체가 내게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 침대발치에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매일매일을 보냈다. 눈이 멀었어도 어머니는
긴 대바늘을 하도 익숙해져 있어 눈이 멀지 않았을 때만큼이나 뜨개질을 잘했다.
선량한 트리부 부인도 항상 옆에 있어 주었다. 삐에로뜨 씨도 자주 찾아오곤
했다. 그 금발의 플루트 연주까지도 하루에 너댓 번은 문안차 올라오곤 했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 두고 싶은 것은 플루트 연주자가 하루도 빠짐없이 올라오는
이유는 환자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염두에 둔 사람은 바로 트리부 부인이었던
것이다. 까미유가 자신을 원하지도 않고, 자신의 플루트 연주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후부터 그 다혈질 연주자는 과부인 트리부 부인에게로
방향을 돌렸던 것이다. 트리부 부인은 삐에로뜨 씨의 딸보다는 덜 예쁘고 재산도
적긴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전혀 매력이 없다거나 무일푼은 아니었다. 이 환상적인
분위기의 귀부인과 함께라면 플루트 연주자의 인생 연주는 흥행에서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항간에는 이미 결혼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부인이 저금해 둔 돈으로 롬바르디 가에 건재상을 차리게 될 거라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이런 좋은 계획을 방치해 둘 수 없었기에 금발 청년은 문안 인사차
그렇게 자주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면 삐에로뜨 양은? 그녀에게도 다른 좋은 계획이 있는 것일까? 그녀가 이
집안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있었다. 단지 환자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자 거의 그 방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그 방에 들어오는
것은 단지 눈 먼 어머니를 식탁으로 데려가려 할 때 잠시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핑크빛 장미 같던 황홀했던 시절,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검은 눈동자가 빌로드 꽃처럼 반짝이던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린 아득한 옛날 일이었다. 침대에 누워 나는 한숨을 쉬며 날아가
버린 지난날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녀가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멀리하고 있다는 낌새가 역력했으며 나는 서글펐다. 그러나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바로 나였다. 내겐 불평 할 권리가 전혀 없다. 그렇게 깊은
슬픔과 비탄에 잠긴 생활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사랑을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다는 설레임은 내게 얼마나 신선한 행복감을 주었던가!
외로울 때 기대어 울 수 있는 다정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내게 얼마나 많은
위안이 되었던가.
'그래! 이미 저질러진 일이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연연해 하지 말자. 그리고 걱정도 당분간은 하지 말아야지. 이제 나 개인만의
행복 같은 것은 염두에 두어선 안 돼.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내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 내일 삐에로뜨 씨에게 한번 부탁해 보아야지.'
다음날 나는 새벽녘부터 조심스레 삐에로뜨 씨의 동정을 살폈다. 그가 막
가게로 내려가려 할 때 그를 가만히 불렀다.
"삐에로뜨 씨, 삐에로뜨 씨."
삐에로뜨 씨는 내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때 매우 흥분이 되어 진정하려고 애쓰면서 눈도 뜨지 않고 말했다.
"삐에로뜨 씨, 전 이제 다 나았읍니다. 당신하고 진지하게 상의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제 어머니와 제게 베풀어 주신 일에 대해 감사...."
그가 재빨리 말을 가로막았다.
"아, 그런 말이라면 한마디도 하지 말게 다니엘! 난 내가 해야만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자끄와의 약속을 지킨 것뿐이야."
"알고 있어요, 삐에로뜨 씨. 어떤 누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한다 해도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시리라는 건 잘 알고 있죠... 다만, 전 또 한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라루트 상회의 점원 하나가
곧 나갈 거라고 알고 있는데... 그래서 저... 절 그 후임으로 써주시지
않으시겠냐는... 그런 부탁입니다, 삐에로뜨 씨.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주세요.
알아요. 내가 비열한 행동을 했다는 것, 당신들과 함께 살 권리도, 뻔뻔스럽게
부탁할 권리도 없다는 걸 잘 알아요. 내가 이 집에 있음으로 해서 고통스러워하고,
나를 역겨워 할 사람이 한 사람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런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요. 하지만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이곳엔 절대로
올라오지 않고 늘 가게에만 있겠어요. 집안에는 들어오지 않고 마당에만 있는
개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내 할 일만 하고 지내겠다는 걸 약속드립니다.
그런 조건으로 절 받아 주실 수는 없으시겠읍니까?"
삐에로뜨 씨는 그 큰 손으로 내 곱슬머리를 부둥켜안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자제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저런! 다니엘 내 말좀 들어 봐.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딸애랑 상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나는 기꺼이 수락하겠지만... 딸애가 어떨지 몰라서... 그애도
일어났을 테니... 까미유! 까미유!"
꿀벌처럼 부지런한 까미유는 응접실 벽난로 위에 놓인 붉은 장미에 물을 주는
중이었다. 그녀는 아침 실내복 차림에 머리를 중국풍으로 틀어 올려 싱싱하고
어여쁜 한 떨기 꽃같이 느껴졌다.
"얘야, 다니엘이 우리 집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싶어하는구나... 그는 혹 네가
너무 힘들어 하지나 않을까 몹시 걱정이 되는 모양인데...."
"너무 힘들다구요?"
까미유는 안색이 확 변해서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결코 말을 길게 늘어놓지 않았다. 그녀의 속마음을 모두 표현해 주는
것은 항상 그녀의 검은 눈동자. 그렇다! 깜깜한 밤처럼 심오하고 별처럼 빛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였다. 그 검은 눈동자가 불꽃 같은 정열로 "사랑! 사랑!"을
말했었고 내 마음을 그 불꽃으로 타오르게 했던 것이다.
삐에로뜨 씨는 딸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둘이서들 이야기해 봐... 아마 내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는 장식장으로 가서 세벤느 지방의 전래 무도곡을 틀었다. 그리곤 우리들이
충분히 서로의 입장을 설명했다고 생각해서인지 다시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우리는 단 세 마디밖에 나누지 못했다.
"어떻게 됐나?"
"삐에로뜨 씨, 까미유도 당신만큼이나 착한 사람이군요. 나... 나를 용서해
주었어요!"
그 순간부터 한걸음에 삼십 리를 가는 장화를 신은 것처럼 병은 빨리
회복되었다. 검은 눈동자는 방을 나가지 않았다. 우리는 앞날의 계획을 세우며
나날을 보냈다. 결혼, 우리가 일으켜 세워야 할 집안, 자끄 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자끄 형의 이름만 떠올려도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삐에로뜨
씨의 집에는 사랑이 충만했으며 저절로 푸근함이 우러나왔다. 그런 비탄과 눈물
속에서도 사랑이 꽃 필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덤에
피어나는 작고 예쁜 꽃들을 한번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사랑에 빠져 내 의무를 잊어버리거나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어머니와 검은 눈동자의 간호를 받으며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어서 빨리 회복되어
가게 일을 보게 되기를 학수고대했다. 물론 단순히 도자기만을 파는 일에 내
관심이 집중되긴 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예전에 자끄 형이 모범을 보였던
희생과 노동의 인생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다. 나처럼 의지가 빈약한
사람이 도자기 파는 일조차도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러나 비극배우 이르마가
말했던 것처럼 울리학원에서 청소를 하거나 몽빠르나스 극장에서 야유를 받은 것
보단 내겐 도자기 파는 일이 훨씬 더 어울리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뮤즈여신에
대해선 더이상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나는 여전히 시를 좋아했지만 내 시만큼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자기 집에 999권의 '전원시'를 보관해 두기에
싫증을 느낀 출판업자가 그 책들을 쏘몽 가로 가져왔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할
정도로 대담했었다.
"모두 불태워 버려요."
사려깊은 삐에로뜨 씨가 대답했다.
"모두 불태운다고! 그건 절대 안 돼! 이걸 가게에다가 보관해 두고 싶은데.
쓸모가 있을 거야...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얼마 안 있어서
마다가스카르에 계란 반숙 그릇을 보내 줘야 하지. 한 영국인 선교사가 달걀을
반숙해서 먹는 것을 보더니 그쪽 지방 사람들은 다른 식으로는 계란을 먹지
않으려고 한다더구만. 자네가 허락한다면 그 책으로 계란 반숙 그릇을 포장했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서 2주일 후 내 '전원시'는 볼로를 향해 떠나갔다. 그곳에서는
파리에서 받은 냉대를 떨쳐 버리고 큰 성공을 거두게 되길 충심으로 바랬다.
햇빛이 내려비치는 화창한 일요일 오후, 밖은 쌀쌀했다. 나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뚜렌느 지방의
백포도주를 친 굴 열두 개를 제물로 바치는 등 삐에로뜨 씨의 집안 전체가
기쁨으로 들썩였다. 모두들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날씨도 좋았고 벽난로에서는
기분좋게 불꽃이 타올랐다. 서리가 낀 창문 위로 태양은 은빛 풍경을 비춰 주고
있었다. 응접실은 그 무엇보다 충만된 사랑으로 훈훈했다.
나는 벽난로 앞에 접는 의자를 펴고 앉아 눈먼 어머니의 발치에서 낮은
목소리로 까미유와 담소하고 있었다. 까미유의 얼굴은 그녀 머리에 꽂힌 붉은
장미꽃보다도 더 빨갰다. 너무 불 가까이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때때로 쥐가
무언가를 갉아먹는 듯한 소리가 들리곤 했다. 라루트 영감이 한쪽 구석에 앉아
각설탕을 깨물어 먹는 소리였다. 그리고 트리부 부인이 카드놀이에 져서 건재상을
차릴 돈을 축내게 되자 아쉬운 듯 한탄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금발의 플루트
연주자는 카드놀이에서 이긴 라루트 부인이 즐거워하는 표정과 게임에서 진
트리부 부인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삐에로뜨 씨는 응접실의 커다란 커튼에 반쯤 가려 무엇을 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창가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조그만 원탁 위에 콤파스와 연필, 자, 직각자, 중국제 잉크, 붓 같은 것을
늘어놓고 긴 플래카드에다 뭐라고 적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5분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 자기의 서투른
솜씨를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드디어 삐에로뜨 씨는 일을 끝냈다. 그는 남 몰래 숨어 있던 곳에서 조용히
나와 까미유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긴 플래카드를 눈앞에 펼쳐
보이며 말했다.
"자 봐요! 연인들, 이게 뭔지 알겠어?"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오, 아빠!"
"오, 삐에로뜨 씨!"
"무슨 일이에요?... 그게 뭔데요?"
가엾은 눈먼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물었다.
삐에로뜨 씨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냐구요. 에세뜨 부인?... 이건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우리
가게에다 내붙일 새 간판을 써 본 것이랍니다. 자, 다니엘. 이걸 큰 소리로 읽어
보게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구만."
그때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마지막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 이젠 정말 어른이 되어야지.'
플래카드를 두 손으로 잡고 자신에 찬 목소리로 크게 읽었다. 그 플래카드에는
굵은 글씨로 나의 미래가 쓰여 있었다.
도자기 크리스탈 판매
라루트 상회
에세뜨와 삐에로뜨
알퐁스 도데
낭만의 삶, 환상의 문학
님므에서의 어린시절
꼬마 철학자 다니엘처럼 도데는 1840년 5월 13일 님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벵상 도데는 비단장사를 했었지만 혁명기를 거치는 동안 점점 몰락의 길을
걷더니 마침내 파산해 버렸다. 그의 어머니 아드린느 레이노는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도데의 문학적 재질은 어머니로부터 그대로 물려 받은
것이었다.
알퐁스 도데의 형 에른스트 도데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다음과 같은 글로
남겨 놓았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가냘프고 허약했으며 올리브빛이 감도는 얼굴색에
애수에 찬 큰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하여 늘
책과 함께 살았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어머니는 마치 주변의 실제 인물들보다도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영웅적인 인물들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순수한 영혼과 온후한 성품의 소유자였다."(에른스트 도데의 동생과 나)
갓태어난 알퐁스에게 젖을 먹일 수 없을 정도로 어머니의 건강상태는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알퐁스는 프로방스에 있는 작은 마을 베조스로 보내져 6년 동안
트랭기에 유모와 그녀의 남편 장 마마르 밑에서 자랐다.
"미스뜨랄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그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들의 삶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으며 면면히 이어져 온 그곳 주민들의
전통적인 놀이와 노래, 전설 등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게으름을 피우는 일 없이
사시사철 아주 열심히 일했다. 비록 그들과 함께 힘겨운 노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누렇게 익은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포도송이가 터질
듯이 익어갈 때면 행복에 넘친 그들의 풍요함을 공유했다. 노을이 곱게 물들고
사방이 정적으로 감싸이는 저녁이 되면 그들은 집 앞 돌벤취에 앉아 수화의
즐거움을 도란도란 얘기하며 저녁나절을 보냈다. 그럴 때면 포도즙 향기에 취해
나는 그들의 정겨운 얘기에 귀기울이곤 했다."(알퐁스 도데의 베조스에서의 추억)
안개 낀 항구도시 리용
그의 아버지는 너그럽기는 했지만 변덕이 심하고 성을 잘 냈으며, 다혈질의
성격이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끈기있게 버티며 비단 공장을
운영했으나 파산해 버리고 1848년엔 온 식구가 님므를 떠나 리용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에드몽 드 공쿠르는 1874년 2월 16일 일요일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저녁 느지막이 플로베르의 집에 가니 알퐁스 도데가 와 있었다. 그는 자기의
어린시절에 대해 조용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조숙했고, 어린시절은 온통 눈물로 얼룩진 나날이었다.
태양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이 젊은이는 늘상 사람의 목을 조를 듯이 몰려드는
리용의 안개 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공장을 차렸다 장사를 했다 변덕을 부리는
아버지와 함께 돈 한푼 없는 집에서 우울하게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그는 아직 열두 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엄청나게 많은 책과 시집에
파묻혀 머리속을 온통 갖가지 상상력으로 가득 채웠다고 한다. 그는 종종 집안에
있는 포도주를 몰래 훔쳐내어 술에 취해 책을 읽었으며, 심지어 산책을 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부두에 정박한 배 위에서도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론 강가에 앉아 그는 책과 포도주에 취해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채 꿈과 환상 속에서만 살았다고 한다."
알퐁스에게 있어서 리용은 행동의 제약 없는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문학을
수련했던 도시였다. 우울하고 호기심 많으며 자유분방한 이 리용의 이방인은
작가로서의 문학적 감수성의 토대를 그곳에서 획득했다. 비록 허약한
체질이었지만 대담한 성격이었던 그는 때때로 론 강에서 수영을 즐겨 했으며
위험한 화재 현장에도 뛰어들곤 했다. 한번은 그의 집 옆건물에 불이 나 깡그리
타 버린 일이 있었다. 그가 불 끄는 데 어찌나 열성적이었던지 소방수들조차 그를
동료로 착각할 정도였다.
"내가 연기 자욱한 계단으로 뛰어들려니 찰나 한 소방수가 내 손에서 호스를
빼앗아가더니 땅에 놓인 물동이를 집어들어 내 머리에 물을 확 끼얹었다.
그러고는 나를 격려하면서 부축해 주었다. 그때 계단이 무너져내렸고, 난간에서는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정신이 아찔했다. 그 와중에서 꾸지람을 듣고 따귀도 한 대
얻어맞았는데 곧 누군가의 팔에 안겨 집으로 돌아왔다. 방금 멱을 감고 나온
것처럼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말이다...."(알퐁스의 둘째아들 뤼시엥 도데의
알퐁스 도데의 삶)
그는 나무가 우거진 도시의 거리를 쏘다닐 때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천진한
국민학생 같았다. 학교 공부에 그다지 취미를 붙이지 못한 그는 중학교에서
수사학 수업까지 받았지만 집안이 파산하는 바람에 더이상 정규 학교를 계속할 수
없었다.
꼬마 철학자 알퐁스 도데
그는 1856년 알레스 중학교에서 자습감독 자리를 얻었다. 그때 그는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였다. 도데는 신체적으로 보아서나 문학적 감수성으로
보나 아직 꼬마였고 세상에서의 좌절도 실패도 맛보지 못한 순진한 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썰렁한 교실과 음침한 복도로 된 그 학교의 세속적이고도
강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우울함과 쓰디쓴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도데에게 있어서
그 시절은 절망을 배워나가던 시기였다.
"그렇다. 꼬마였던 나는 열여섯의 나이에 궁벽한 지방에서 자습감독 교사를
하면서 먹고 살아야만 했다. 그곳 산악지방의 거칠기만 한 아이들은 세벤느
지방의 무뚝뚝하고 노골적인 사투리를 내뱉으며 나를 멸시했다. 나를 업신여기는
위선자들과 유식꾼들한테 둘러싸여 그 유령만큼이나 끔찍한 아이들의 박해에
내맡겨진 채 나는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저열한 굴종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감옥 같은 곳을 떠나온 이후에도 오랫동안 나는 눈물에 젖어 한밤중에
소스라치게 깨어나는 일이 많았다. 나는 아직도 자습감독 선생으로 박해를 받는
악몽을 꾸곤 했던 것이다."(알퐁스 도데의 내 책들의 이야기)
고미다락방에서 보낸 젊은시절
알퐁스에게 헌신적으로 애정을 쏟았던 형 에른스트는 외롭게 자습감독을 하며
살아가던 그를 파리로 불렀다. 그리하여 그는 1857년에 알레스를 떠나 파리행
3등 열차에 몸을 실었다. 철로 위를 구르며 울리는 바퀴소리, 삐걱대는 성문의
찬란하고 거대한 유리 천정, 덜컹대며 거리를 달리는 짐마차들, 불안하고 바쁜
표정의 파리시민들, 세관원들... 파리!
"형은 역 층계참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잠든 쓸쓸한 강둑을
따라 라땡 가로 향했다...."(알퐁스 도데의 내 책들의 이야기)
쌩 제르멩 데 프레의 시대
그는 보나파르뜨 가에 있는 형의 고미다락방에서 살았다. 프로방스 촌놈이었던
그가 자유분방한 파리 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는 문학적 명성에 대한 꿈과
궁핍이 함께 어우러진 힘들긴 했지만 아무런 욕심도 갖지 않고 시 쓰는 데
몰입했던 시절이었다. 또한 젊은 혈기로 인해 뭐든 성급하게 서둘러 대며 문학적
편력을 거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 당시 라땡 가는 유명한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거기 한몫 끼어 보려는 무명의 젊은이들로 복작거리는 예술과 야망의 거리였다.
알퐁스는 오데옹의 회랑과 쌩 제르멩 데 프레 광장에 자주 가서 시간을 보냈다.
1830년 혁명의 열기 속에서 낭만이 물결치던 파리는 1848년 봉기가 분쇄되자
이미 새로운 형식과 유행을 추구하느라 열중하고 있었다. 또다른 새로운 한
세대가 자리를 잡으려고 꿈틀대며 그 이전의 구세대와 교체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알퐁스 도데는 글을 써야겠다는 갈망을 끊임없이 충동질하던 파리의 문학적
풍토 속에서 젊은시절을 보냈다. 그는 1858년 사랑하는 여인들이란 시집의 출판을
계기로 드 모르니 공작의 비서 자리를 얻게 되었다. 1860년, 예술과 문학의
후원자였던 위제니 황후가 자신의 살롱에서 무명의 젊은 시인이었던 도데의
시낭송을 듣고 완전히 심취하여 그를 그 공작에게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결혼과 함께 가난하기만 한 그의 젊은 시절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는
1867년 파리의 부르조아의 딸인 쥘리아 알라르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자유분방한
젊은 '보헤미안'을 단련시키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녀는 남편에게 꾸준히
쓰는 습관을 갖도록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후세까지 오랫동안 이름을 전하는 위대한 작가가 되지는 못했으니라....
펠리브리쥬 문학운동 시대
"미주르어로 하루종일 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펠리브리쥬 운동의 목표였다.
문학인의 권리로서 우리는 미주르어로 하루종일 말하고 싶다."
미스뜨랄의 이 연설은 펠리브리쥬 선언을 가장 훌륭하게 요약한 것이다.
펠리브리쥬란 1854년 퐁쎄리느에서 발기한 문학운동의 명칭이다. 이 운동은
오크어를 재건함으로써 이 언어가 중세에 이룩했던 진정한 문학적 지위를
회복시키겠다는 선언으로 시작됐다. 중세의 음유 시인들이 이 언어를 사용하여
시적 풍취를 유감 없이 끌어낼 수 있었던 점을 본받기 위한 것이었다. 완벽하게
체계적인 문법으로 된 훌륭한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 이 언어는
사투리로 격하되고 말았다.
펠리브리쥬 운동 발기 당시의 회원은 일곱 명이었다. 처음 이 운동을 창안해 낸
프레데릭 미스뜨랄을 중심으로 오바넬과 브뤼네 마띠유, 루마니으, 타방, 지에라
둥이 구들이었다. 후에 위오와 그라, 베른느 무즈가 가세했는데 이들을
펠리브르라고 부른다.
프로방스어로 이룬 도데의 문학
도데는 펠리브리쥬 문학운동에 직접 가담한 적은 없었으나 미스뜨랄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느꼈으며 그의 작품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물론 미레이유의 작가에
대해 이따금씩 빈정거리기도 했지만 그는 마리안느의 집에서 종종 펠리브리쥬의
핵심인 미스뜨랄을 만나거나, 다른 펠리브리쥬 멤버들과도 밤늦게까지 즐거운
모임을 갖기도 했다. 이들은 목구멍을 즐겁게 해주는 달콤한 고급 포도주를
마시며 시를 읊거나 문학에 대한 토론을 벌이며 밤을 보내곤 했다. 알퐁스 도데의
큰아들 레옹 도데는 그 즐겁고 우정어린 문학인들의 만남에 대해 경탄스런 글을
남기고 있다.
"파리의 동료 문학인들은 흔히 서로 헐뜯곤 했다. 하지만 루마니으와 오바넬
사이에 다반사로 벌어지는 하찮은 말다툼과 뽈 아렌느의 욕설을 빼면 이 시인들
사이에는 늘 따뜻하고 깊은 애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녹색수첩에 담긴 고향 프로방스
도데의 대부분의 작품 속에는 프로방스 지방에 대한 깊은 애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따라스꽁의 따르따랭", "풍차간에서 보낸 편지들", "아를르의 여인" 등은
프로방스를 배경으로 한 주옥 같은 서정 소설이다.
그는 프로방스를 이렇게 묘사했다.
"수년 동안 나는 늘 수중에 조그만 녹색수첩을 지니고 다니며 깨알 같은 글씨로
고향의 기후와 풍습, 기질, 악센트, 몸짓, 끔찍하게 내리쬐는 태양에 대해
끄적대곤 했다. '남부지방'이라고 제목을 붙인 그 수첩에 한껏 부풀은 상상력을
펼쳐 호의적인 거짓말로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를 가득 채워 넣었다. 하지만
그러한 거짓말은 북부지방에서 이따금씩 듣는 사악하고 계산된 거짓말과는 질이
다른 것이었다. '따라스꽁의 따르따랭', '뉘마 루메스땅' 그리고 최근의 '알프스 산맥의
따르따랭'의 힌트를 얻은 것은 바로 이 수첩에서였다."
알퐁스 도데의 목요회
"목요일마다 샹프로세에서 하는 저녁식사는 파리에서보다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솔직한 감정표현으로 진실한 대화를 나누었다. 몇
명이나 모이는지 미리 알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식사준비를 해주시던
어머니는 오늘은 여섯 명 정도 모이겠거니 짐작했는데 스무 명씩이나 몰려오는
경우도 있었다."(레옹 도데의 죽은자와 산자)
알퐁스 도데의 집은 누구에게나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를 만나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우아하고 명랑하며
익살스럽기까지 한 주인이어서 허식적이고 딱딱한 분위기의 사교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대화도 풍부한 재치와 익살로 이끌어 갔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예술가와 문학가들이 조그만큼이라도 비열함을 드러내거나 가식이나 거드름을
피우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알퐁스를 마치 애인처럼 좋아했다."
플로베르는 이렇게 고백했다. 어느 유파에도 참가한 적이 없긴 했지만 호기심이
많고 너그러웠던 도데는 상반된 입장의 인물까지도 받아 들였다.
목요회의 손님들
탁 트인 개방적인 성격과 온후한 인격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다양하고 개성적인
여러 분야의 재주꾼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집에는 왕당파와 빠르나스파, 음악가,
비평가, 신출내기와 노장들로 붐볐다. 조금은 근엄하고 이론적인 데다가 멋대가리
없는 모랄리스트인 에밀졸라는 세련된 멋장이 에드몽 드 공쿠르 곁에 앉곤 했다.
'빠르나스파의 불량소년'이라 불렸던 인간성 좋은 빠리지엥, 프랑스와 꼬데는
끊임없이 익살을 피웠다. 펠릭스 뚜르나쏭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특징을 잡아내어 나중에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곤 했다. 그리고
플로베르와 삐에르 로띠, 바르베 도르비아 등도 그곳을 즐겨 찾던 인물이었다.
낭만과 문학이 풍미했던 19세기의, 지금은 사라져 버린 위대한 유령들이 거기
모여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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