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lequin Books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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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 혼 소 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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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마이클스
제 1 장
제시카 베닝턴은 숫자들을 세 번이나 검토했지만 매번 결과는 똑같았다.
그녀가 톨숍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업무과장으로 일한 지가 6개월이 되었는
데, 그동안은 액수는 적어도 약간씩 흑자를 보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
에는 달랐다. 아직 청구된 금액의 수표를 다 끊지도 않았는데 돈이 벌써 바
닥이 났다. 그 돈들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솔직히 난감했다.
그녀는 수표책을 서랍에 넣고 우편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회사가 그
많은 비용을 대기에는 벅찰 것 같았다. 그래도 약깐의 주문이 들어와 있으
니 앞으로 한두 주일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전화기의 빨간 불이 아직도 깜빡거리고 있었다. 카일이 전화를 대기상태로
돌려 놓았는지, 아니면 아예 무시해 버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전화
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녀의 사무실에서 내실이라 표현할 수 있는 그곳까지는 불과 몇 걸음 안
떨어져 있었다. 제시카는 그곳이 곰우리 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곰 우리
가 사장 사무실보다 더 깨끗이 정돈되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노크를 한 뒤에 대답도 듣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손바닥 만했다. 그곳엔 최신식 컴퓨터가 두 대 놓여 있고 복잡하
게 얽힌 선들이 커다란 구형 프린트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값비싼 근사한
컴퓨터들은 긁힌 자국투성이의 베니어 합판 위에 올려놓은 조잡한 웨크스테
이션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구석에는 책 더미 밑에 반쯤 가려진 회색 플라스틱 상자가 있는데, 초창기
개인용 컴퓨터를 담아 놓았다.
설명서, 초안, 긴 프린터 용지, 카탈로그들이 구겨진 소파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또 카펫 위에도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제시카는 전화기가 어
디 있는지는 몰라도 코드는 일단 찾아냈다. 코드는 종이 더미 사이로 뱀처
럼 늘어져 있다가 소파 근처에서 사라져 버렸다.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운 워크스테이션 앞에는 사장이 의자를 바짝 당긴
채 앉아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 ㄴ것도 모른 채 카일 선더스는 얼굴을 찡그
리고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다. 알 수 없는 깨알 같은 글자
들이 컴퓨터 화면 위로 지나갔다.
제시카는 방해가 될까 봐 문간에 서서 그가 알아챌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피곤해 보였다. 그곳에 꽤 오랫도안 앉아 있었는지 그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고, 청바지는 주름투성이였다. 암갈색 고수머리는 손으로 빗어넘겼는지
헝클어져 있다. 아니, 그의 머리는 늘 그랬다.
"사장님, 전화가 온 거 아시죠?"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직도 안 귾었나?"
"네, 부동산업자인데 지난주가지 끝내기로 한 소프트웨어에 관해 사장님과
꼭 얘기 좀 하고 싶대요. 전화를 받으시는 게 좋겠어요."
카일은 한숨을 내쉬고는 멈춤 키를 누르고 의자 뒤로 몸을 젖혔다.
"프로그램을 고치고 있었소, 제스"
지구상에서 그녀를 제스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직 카일뿐이다. 제시카는 꽤
오랫동안 그에게 정확한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지만 허사였다.
"어젯밤부터 이 녀석과 싸우고 있소. 이제 거의 다 되었소. 몇 시간만 있
으면..."
그의 얼굴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뺨에 난 거무스레한 수염 자국을 보
자 제시카는 안된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의 일을 하고 계신 건가요?"
카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오. 부동산 시세표나 쫓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이오"
"그 일은 돈과는 무관하다는 말 같은데요?"
제시카는 전화기를 발견하고는 카일 앞에 똑바로 올려놓았다.
"자, 일은 좀 그만 하고 잠깐만 쉿세요. 쉬는 동안 이 손님과 기분좋게 얘
기를 나누세요. 이 사람 비위를 맞추어야 일을 맡을 수 있다고요."
그는 전화기에 손을 올려놓았으나 집어들지는 않았다.
"우리가 또 재정상의 곤란을 겪꼬 있다는 말 같은데..."
"또라니요?"
제시카는 비꼬아 물었다.
"나쁜가 보군. 당신이 잘 해결할 수 있을 거요. 전에도 늘 그랬잖소."
"절 그렇게 믿으시다니 고맙군요, 카일. 하지만 ..."
"오, 그렇소, 제시"
그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마술을 부려 왔소. 당신이 일을 맡은 게 내겐 최대의 행운
이었소. 이젠 아무 걱정 없소."
그의 말에 깜박 넘어가는 바람에 그녀는 그가 다시 컴퓨터를 시작하는 걸
말릴 겨를도 없었다.
"잠깐, 찾았다!"
카일은 기쁨에 젖어 기쁨에 젖어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이게 말썽이었소. 몇 시간 동안이나 찾았었는데, 아까 당신이 들어와 잠
깐 멈췄던 바로 그곳에 숨어 있었소. 당신은 행운의 요정이오. 내 마스코트
지. 행운을 가져다 주는..."
제시카는 아무 말도 믿지 않았따. 그는 그녀가 사무실에서 나서자마자 그
녀의 존재를 까맣게 잊을 게 뻔하다.
"게다가 사장님의 양심이기도 하죠. 전화 받으세요. 참, 샌드위치를 사러
갈 건데, 사장님 것도 사다 드릴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안녕하시오, 본?"
잠시 후 그는 긴 팔을 뻗어 소파에 떨어져 있는 서류 뭉치를 집어들고는
파일 속에서 서류를 한 장 꺼냈다.
"지금 갖고 있소. 완벽하게 되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하오. 약간 모험이 되
겠지만 프로그램에 퍼지이론을 도입하려고 하오. 가격표 대신에 데이터를
넣으려면 매개변수를 변경해야 하고, 그리고..."
제시카는 머리를 흔들었다. 카일이 어떤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그는 필요하면 컴퓨터에서 정보를 얻기 때문에 파일
속에 있는 종이는 생전 들추어 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어떤 것에 관
해 얘기하든 그녀가 알 바 아니다. 퍼지이론이라고?
그녀는 코트를 꺼내 입고 10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내가 컴퓨터
일을 하지 않고 사무관리 일을 하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컴퓨터 프로
그램이나 짜는 천재가 아닌 게 정말 다행이다.
엉뚱한 카일 선더스에게도 좋은 점이 하나 있긴 있다. 트레버 맥킨타일과
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트레버의 장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
니까. 카일과 일을 마치고 트레버와 데이트하는 것은 정말 즐거웠다. 트레
버는 여자를 보물처럼 다루었고, 사무실에 비치된 편리한 부품이 아닌 한
여자로서의 진가를 인정해 주었다.
그녀는 식당으로 가려고 길을 건너며 찬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람
이 계속 이렇게 불다간 마지막 가을 잎새들을 싹 쓸어 버려 앙상한 가지만
남겠군. 벌써 공기가 얼어붙을 듯 싸늘하고,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같이
하늘이 회색빛으로 무거워 보인다. 캔자스 시에 겨울이 다가온 모양이다.
그녀는 식당 카운터에 다다랐다.
"매콤한 치즈 샌드위치 하나랑 마요네즈를 바른 블로냐 샌드위치를 하나
주세요."
점원 여자는 빵을 집어들고는 익숙한 솜시로 후다닥 속을 채워넣었다.
"사장님이 또 밤샘을 하셨나 보죠?"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죠. 지난밤 막 문을 닫을 시간에 와서는 젤리가 든 땅콩크림
빵을 사가셨거든요. 그 시간에 그런걸 주문하는 건 밤샘을 한다는 뜻이죠."
제시카는 진저리를 쳤다.
"그가 늘 먹는 볼로냐 샌드위치도 별로지만, 땅콩크림 빵도..."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점원은 샌드위치를 잘라 담으면서 기름종이를 집어들었다.
"당신과 같이 멋진 아가씨가 어째서 그런 살마 밑에서 일하고 있죠?"
제시카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건 무심결에 나온 질문이었겠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 아마도 그녀가 너무 예민한 탓이리라. 그녀가 졸업반 때는
이런 조그만 컴퓨터 회사에서 업무과장으로 일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확실하게 뭔가를 배워 놓는 건데. 그녀는 학교에 다
닐 때 세련되게 얘기하는 법, 자선바자회를 준비하는 것 등을 배웠다. 물론
그때 배운 바자회 준비를 통해 익힌 조직력을 지금은 유용하게 쓰고 있다.
아니, 그건 그녀 자신에게밖에 쓸 수 없었다. 카일에게 적용하는 건 무리
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폭풍을 다스리는 게 쉬우면 쉬웠지.
점원이 이상하다는 제시카를 쳐다보았다.
"제가 기분을 상하게 했나요? 사장님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에요. 머리도
자르고 면도도 좀 하시면 훨씬 보기 좋을 거예요. 청바지랑 그 끔찍한 회색
스웨터도 좀 벗어 버리고요. 아가씨 차림새를 보면 그런 하찮은 사무실엔
안 어울려 보이거든요."
"고마워요."
제시카는 조용히 말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고급스런 초록빛 정장을 알아보다니 기분이 좋았다. 할머
니가 주신 마지막 선물인 이 옷은 일년이 넘었는데도 선이 잘 살아 있었다.
툴숍 소프트웨어 회사의 재정 상태로 볼 때 이 옷은 너무 과분했다. 그리고
월급 인상은 오래전에 단념했다.
제시카는 차가 뜸해 지자 다시 길을 건너 툴숍 소프트웨어 회사가 들어 있
는 좁은 건물을 살펴보았다. 매우 낡고 쓰러져 가는 조그만 건물이었다. 하
긴 그녀를 채용하던 날 사장은 회사 규모에 관해 말해 주었다.
"모든 최고의 컴퓨터 회사들은 차고에서부터 시작했소. 나는 사정이 영의
치 않아 차고는 못되지만 그래도 이런 헛간을 구한 것이오. 하지만 언젠가
는 차고로 이사할거요."
카일은 그 말을 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그가 폐쇄
적이거나 엉뚱한 사람이란 생각은 전혀 못했다.
이 회사가 별 볼일 없다는 걸 그 당시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녀는 혼자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경험도 없었꼬 직업훈련도 받지 않았기 때
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카일은 의자에 등을 젖히고는 마치 상대가 보고 있기라도 하듯 손을 저으
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말하는 사람이니까... 손은 그의 신체
중에서 제일 멋진 부분이다. 길다란 손가락이 강하고 근사해 보인다는 걸
그도 알까?
그녀는 조용히 샌드위치와 콜라를 키보드 옆에 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
다. 그리고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아직 해결하지 못한 재정 적자를 메울
방도를 모색했다. 전기료, 사무실 임대료, 전화요금, 카일이 컴퓨터 통신으
로 써버린 엄청난 요금... 겨울이 다가오니 연료비도 마련해야 한다. 이 문
제를 카일에게 당장 의논해야겠다. 벌써 건물이 썰렁하다.
돈 문제로 경황이 없던 그녀는 전화 벨이 울리자 무의식적으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제시카?"
트레버 맥킨카일의 목소리를 듣자 온몸이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근무시간
에는 거의 전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트레버를 캔자스시에서 가장 큰 회사의 중견 간부로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이였다. 그래서 근무시간에는 개인적인 일로 시간을 낼 틈이 없었다.
그녀는 거의 자동적으로 목소리를 낮추어 부드럽고 허스키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트레버"
"거기 무슨 일이 있는 거요? 통화하려고 한 시간이나 애썼소"
"미안해요. 카일이 통화중이라서요"
"그럴 줄 알았소. 전화를 두 대 놓을 형편도 안되다니"
제시카는 회사에 전화가 두 대 있다고 늘 말했었다. 비록 한 대는 컴퓨터
에 연결되어 거의 쓸 수가 없긴 하지만. 그녀는 트레버가 깜빡 잊어버린 걸
꼬투리 잡고 싶지 않았다. 그 귀중한 시간을 전화하기 위해 한 시간이나 낭
비하다니.
"사업상 통화한 거예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일이죠? 뭐가 잘못된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 아니오. 오늘밤에 저녁이나 할까 하오."
"화요일인데요? 화요일엔 늘 라켓볼을 쳤잖아요?"
"파트너가 출장을 갔소."
그는 약간 멈뭇거리다가 대꾸했다.
"어쨌든 당신이 보고 싶소."
그는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전에는 한 번도 주중에 만나자고 졸라댄 적
이 없었다. 일년 가까이 사귀어 왔지만 미래라고는 고작 일주일 뒤의 일이
나 의논했었다. 제시카는 이제 진정으로 미래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
가 너무 신중해서 그런 것일까?
"일찍 만나야 하오"
트레버가 말했다.
"나중에 사장님댁을 방문하기로 했소."
이건 나를 초청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그가 모임에 그녀를 초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섯 시쯤에 사무실로 데리러 가도 되겠소?"
"물론이죠."
너무나 긴장이 되고 놀라워서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
려놓았다.
머리가 빙빙 돌아 숨을 깊이 몰아쉬었지만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
다.
그때 아르바이트 학생이 들어왔다. 방과 후 매일 와서 일을 도와주는 학생
이었다.
"뭔가 서광이 보이는 것 같은데요."
제시카는 미소지었다.
"고마워, 랜디. 아주 시적인데."
그녀는 책상 너머로 랜디에게 우편물을 건네주었다.
"오늘은 일거리가 별로 없을 것 같아."
"아, 잘됐군요. 이 프로그램을 복사하고 나서 내 프로그램을 만들게요.
참, 무슨 일이세요? 이렇게 환해 보이시는 걸 보니 굉장한 일이 있나 보죠
?"
그는 짓궃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카일과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제시카는 깜짝 놀라 랜디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카일이란 사람 때문에 내
가 행복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우리 사이에 로맨스가 있다고 여기지 않
는 이상은... 카일은 여자의 <여> 자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그는 컴퓨
터밖에 모른다.
랜디가 씽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모르는 척할게요."
"좋아."
제시카는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랜디가 의심하는 걸 애써 부정하
진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를 더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랜디는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있는 오래된 컴퓨터를 켜고 카일의 프로그램
몇 개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제시카는 다시 청구서들을 살펴보았다. 우편주문 광고료는 전부 치렀다.
그들이 만드는 제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명단만 입수한다면 광고료도
물지 않고...
그녀와 랜디가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남자 셋이 들어섰
다. 검은색 정장에 눈이 부실 듯 흰 와이셔츠, 근사한 검붉은색 타이를 맨
차림으로.
랜디는 눈이 휘둥그레져 그들을 바라보았고, 제시카는 연필을 떨어뜨렸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그들 때문에 사무실이 더욱 작아 보였다. 그들은 아
무 말 없이 방 안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맘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그들의 기분을 이해했다. 직업소개소의 안내로 처음 이 방에 들어
와 카일 선더스를 보았던 날 그녀의 느낌과 똑같으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툴숍 소프트웨어는 여전이 소액의 자본으로 꾸려 가고 있다.
그녀의 책상만 해도 니스가 다 벗겨진 문짝을 대신 사용했다. 그리고 맞은
편에는 찌그러진 캐비닛 두 개가 놓여 있다. 그래도 카일의 방에 있는 것보
다 상태가 좋았다. 어느 날 아침 카일이 무게가 꽤 나가는 문짝 하나를 들
고 와서는 그 용도를 일러 주었다. 그때 제시카는 눈을 흘기며 한쪽에 구멍
이 뚫렸다고 투덜댔다.
"당연하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공짜로 얻을 수 있었겠소? 목수가 실
수로 그곳에 문고리 자리를 뚫어 놓은거요. 그게 좋을 수도 있소."
그는 비닐백을 집어들고는 구멍 입구에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자, 당신 책상에는 쓰레기통이 붙박이로 달려 있게 됐소."
세 남자들이 아무리 놀랐다 해도 그녀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시죠?"
세 명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툴숍 소프트웨어 회사를 찾고 있소만..."
그녀는 미소지었다.
"잘 찾으셨어요."
"카일 선더스 사무실이라고요?"
"네, 사장님께 말씀드릴까요?"
"우리가 누군지 모르실 거요. 그냥 얘기할 시간이 있나 알아봐 주시오."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그건 협박조였다. 랜디도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 남자가 주머니
에 손을 넣자 랜디는 권총이라도 보는 듯 눈을 휘둥그레져 흠칫했다.
"앉으시죠."
아차, 의자가 두 개밖에 없다. 그것도 접었다 폈다 하는 접의자인데 둘 다
시원찮다.
"랜디, 이 신사분께 의자 좀 양보하지..."
랜디는 벌떡 일어났다.
"가야겠어요. 시간이 이렇게 된줄도 모르고..."
"내가 올 때까지 꼼짝 말고 있어, 랜디"
그건 낯선 소님들만 두고 떠나지 말라는 요청이었다.
제시카가 카일의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들은 계속해서 서 있었다.
키보드 옆에 놓인 반쯤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빼놓고는 아침과 똑같은 광
경이었다. 컴퓨터 화면 위로 코드가 올라가고 있고, 카일은 뚫어져라 들여
다보고 있었다.
"문제점을 찾은 걸로 아는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직 몇 개가 남았소. 큰 녀석도 있지. 하지만 지금 프로그램을 보호하는
장치를 하려는 거요."
"밖에 손님 세 분이 오셨어요."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지?"
"검은 정장에 흰 와이셔츠, 빨간 넥타이 차림이에요."
"정장? 나 같은 사람은 아닌가 보군."
"랜디는 마피아처럼 여기더군요. 그 중 한 명이 명함을 주었는데, 범법자
는 아니었어요."
카일은 두 손가락 사이에 명함을 끼웠다.
"모르는 이름이오. 회사도 그렇고."
"아마 파산 전문 법률가일지도 모르죠. 우리 상태로 봐선..."
"나쁘오, 제스?"
"랜디에게 오늘 일당을 주고 나면 당신 집세와 음식 살 돈도 없게 되죠."
"오, 그런 건 없어도 되오."
"뭐라고요? 음식도요?"
"아니, 아프트 말이오. 나는 거의 여기서 지내다시피 하니까 다른 곳에 돈
을 낭비할 필요가 없단 말이오. 여기 소파도 있고 샤워기도 있으니 더 바랄
게 뭐겠소?"
제시카는 놀라지 않았다. 이런 사람 밑에서 몇 달간 일해 온 게 어처구니
가 없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죠. 한 시간 전에 온도조절기를 올렸는데 더욱
바람이 나오지 않아요."
"보일러는 말썽을 잘 부리지. 스웨터를 입도록 해요."
제시카는 그의 무사태평한 말투가 싫었다.
"스웨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손님들을 만나려면 스웨터 좀 벗는게 어떠
세요?"
"왜? 여기가 춥다고 했잖소."
"식당 여자는 그 옷이 끔찍하다고 했어요. 당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더군
요. 좋은 인상을 주고 싶지 않으세요? 재킷 같은 건 없어요?"
카일은 누군가 찾아 주리라 기대하며 맥없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제시카
는 마침내 컴퓨터 사용서 파일 밑에서 재킷을 찾아냈다. 다행ㅇ히 코르덴으
로 만든 거라 주름이 덜 나타났다.
카일은 한숨을 내쉬고는 스웨터를 벗고 재킷을 입었다.
"돼쏘. 양복쟁이들을 들여보내시오."
제시카는 흘끗 시계를 보았다.
"제가 좀더 있을까요?"
그녀는 주저하며 물었다.
"오늘밤에 데이트 약속이 있지만..."
"승승장구하는 중견 간부하고 말이오? 아, 가시오... 괜한 심술을 부려 약
속에 늦게 만들고 싶지 않소. 게다가"
카일은 어깨를 펴고 문 쪽으로 가며 덧붙였다.
"랜디 말이 맞아서 양복쟁이들이 마피아라면, 이렇게 해야 당신이 살아 남
아서 증언을 할 테니까."
농담이시겠지. 최소한 그러길 빌어야지.
해가 지면서 바람이 불었다. 트레버가 세워 둔 스포츠카 쪽으로 걸어가며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에 올라타자 트레버는 계기반을 만지작거리
고 있었다. 가죽의자에 몸을 기대자 따뜻한 열기가 호사스럽게 주위를 맴돌
았다.
"죄송해요. 손님이 오는 바람에 좀 늦었어요."
그녀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따뜻하니 너무 좋아요."
"이상하군, 추운 것 같아서 작동시키려는데 작동이 금방 안되는군. 정비소
에 다시 가져가 봐야겠소."
"저, 내가 있던 곳과는 딴판인데요."
말을 하고 보니 후회스러웠다. 툴숍 회사를 또 얕잡아보게 하다니.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차를 몰며 말했다.
"펠리시티가 어떻겠소?"
"좋아요. 그곳 음식은 늘 훌륭해요."
그녀가 무척 좋아하는 식당이다. 테이블이 넓고 매우 조용했다. 또한 트레
버가 첫 데이트 때 데려간 곳이었다.
제사카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트레버를 감상적인 남자로 여기지 않았
는데 오늘밤은 확실히 뭔가 달랐다.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초조한 듯
윤기 나는 금발머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처음부터 그가 구애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트레버가 말까지
더듬고 있으니 일생일대의 중대사가 틀림없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물론
예스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말하지? 이런 절차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너무 값싸게 보여도 안되는데...
트레버가 갑자기 차를 돌려 큰길로 나갔다.
"아니, 그가 결국은 일거리를 맡은 거요?"
제시카는 갑작스런 말에 깜짝 놀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카일 말인가요?"
"그 사람이 사무실에서 고객과 만난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로군."
그녀는 그들이 고객일 것 같지는 않다고 얘기하려다가 참았다. 더이상 질
문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주로 통신주문을 통해 거래를 해요. 카일이 스프트웨어를 만들어
샘풀을 보여 주고, 그쪽에서 맘에 들면 주문을 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돈을 버는군."
이거 질문이 아닌니까 대답을 안해도 되겠지.
"그는 너무 순진해서 속아넘어가기 쉬울 거요. 사업에는 알아둬야 할 규칙
이 있소. 그런 인물이 큰 파티나 제대로 열겠소?"
그의 말이 맞다. 메뉴는 아마 볼로냐 샌드위치에 깡통 음료가 되겠지?
너무 일찍 왔는지 펠리시티는 한산했다. 하긴 자리가 없어 줄을 서서 기다
릴 때도 식당 안은 조용했었다.
물품 보관소에 코트를 맡기고 모직 스커트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 옷은
그녀가 가진 옷 중에서 제일 반반했다. 오늘 아침 옷장에서 이 옷을 꺼내
입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지배인이 트레버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미소를 띤 채 제시카에게 까딱 고개
를 숙였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쁘군요, 베닝턴 양. 오늘밤 정말 멋지네요."
"고마워요, 자나단."
그들이 안내받은 테이블은 보통때의 자리보다 더욱 아늑한 곳이었다. 트레
버가 특별히 부탁해 놓은 걸까? 그렇다면 청혼을 하려고...
정신 차리라고. 제시카는 다짐을 하고 저녁을 즐기는데만 신경쓰리고 했
다. 펠리시티는 그녀에겐 익숙한 곳이었으나 그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은 몇
번 안됐다.
"옛날 친구를 대하듯 하는군."
트레버가 투덜거랬다.
"아, 할머니랑 많이 왔었거든요."
"아첨꾼 친구로군. 구닥다리 옷을 보고도 멋지다고 하다니..."
조나단의 칭찬에 한껏 부풀었던 마음이 뻥 터져 버렸다. 얼마나 멍청해 보
였을까? 손님들에게 하는 형식적인 칭찬에 그렇게 좋아했으니!
"당신이 흉해 보인다는 게 아니오."
트레버가 얼른 듯붙였다.
"당신 오싱 한참 유행에 뒤진 걸 당신도 알잖소. 그도 뻔히 알고 있을 거
란 말이오."
그녀는 할머니가 가르치신 대로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싫어한다니 유감이군요."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고급스런 최신 유행의 옷을 사려니 돈이 없어서요."
"알고 있소. 내가 당신을 비난하는 게 아니오. 그저 옷이 좀 유행에 뒤처
진다는 거지."
말끝을 흐리며 와인 주문 판을 집어든 그는 웨이터에게 뭔가 주문을 하고
는 미소를 띤 얼굴로 의자 깊숙이 앉았다. 뭔가 결심을 한 듯 보였다.
"할머니가 앞날에 관해 아무 준비도 없이 세상을 뜨시다니 안됐소. 유산
한푼 남기지 못했으니..."
"재난이 닥치리라곤 생각지도 않으셨죠. 난 유산 따위엔 추호도 미련이 없
어요. 나 자신을 잘 꾸려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헛간 같은 회사에 다니는 거요?"
"툴숍 회사에요."
트레버는 놀란 듯 말했다.
"아니, 당신 지금 그를 감싸는 거요?"
그는 와인을 맛보고는 웨이터에게 제시카의 잔에도 채우도록 했다.
"전 카일에게 신세를 졌어요. 요즘 경력도 없는 사람을 누가 채용하겠어요
? 그가 기회를 준 거예요. 내가 받은 학위는 돈을 버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
이죠. 하지만 이젠 경력이 생겼으니, 결심만 하면 사장한테 추천서를 얻을
수도 있고..."
"그의 추천서가 무슨 힘이라도 쓸 줄 아나 보군. 아니면 그가 백만장자라
도 될 수 있을 걸로 착각하는 것 아니오? 그가 월급 대신 주식을 분배한다
고 했소?"
트레버는 혼자 묻고 답했다.
"아니지, 선더스 같은 인물이 그런 생각이나마 할 리가 없지. 주문하겠소
?"
제시카는 작은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의자에 깊숙이 앉아 와인을 맛보았다.
옆 테이블을 보니 오후에 사무실에서 봤던 정장차림을 한 세 명 중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이는데, 무슨 일로 왔을까?
제발 새 컴퓨터 프로그램을 주문해 주면 좋겠어. 이 어려운 고비에 큰 횡
재가 될 수 있으련만. 명함에 적힌 회사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슨
엔지니어링이 들어간 기술회사 같았는데.
자, 그만 생각하자. 그들이 일을 맡기려 왔다 해도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
사업에 관한 한 트레버가 옳다. 사업가들은 사업의 규칙을 이해하는 사람들
하고나 상대하니까. 한숨이 나왔다.
트레버가 시계를 보았다.
"음식이 얼른 나와야 할 텐데. 사장님과 약속이 있어서..."
"제게 일러둘 말은 없으세요?"
트레버는 깜짝 놀랐다.
"아, 이건 파티가 아니라 사업상의 모임이오. 저녁식사 후에 집에 바래다
주겠소. 당신에겐 정말 할 얘기가 있소. 빨리 음식이 나와야 하는데..."
제시카는 뱃속이 거북했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하면 안되나요? 식사중엔 음식이나 즐겁게 먹고 싶군
요."
와인 잔을 돌리며 그가 말했다.
"디저트가 끝난 후에 얘기하려고 했소. 하지만 지금이 더 적당하겠군. 아
까 한 말 기억나오? 사업상 필요한 규칙 말이오."
"물론이죠."
"알다시피 사업이란 사소한 것이 큰 영향을 발휘하지. 옷차람 하나가 성공
하는 데 큰 보탬이 될 수도 있소."
제시카는 고개를 끄떡였다.
"또 하나 아주 중요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제대로 갖춘 아내를 고르는
것이오."
그녀는 침을 삼키기가 힘들었다.
"가령 어떤 남자가 집안 배경이 별로라면, 아내를 맞는데 더 신중해야 하
오. 주요 인사들을 초대하고 잘 접대할 줄 아는 여자를 골라야 하니까. 상
황 판단이 빠르고, 저녁 파티를 준비하고, 완벽한 가정을 꾸밀 줄 알아야
하오."
즉, 그녀가 모든 걸 갖추었던 말이었다.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솜씨로 해
나가면 그가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만사 오케이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
다.
"트레버..."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제발 가만히 있어요. 제시카.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오."
속이 거북해 약간 어지러웠다. 이럴 줄 몰랐다. 신경이 날카로워져선 안되
는데. 그녀는 놀란 나머지 별안간 불안해졌다. 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왔으나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이건 너무 갑작스러워. 그에게 과연 내 인생을 바
칠 수 있을까?
트레버가 계속 말을 이었다.
"때로는 먼 장래를 위해 희생이 필요하오. 승진하는 데 도움을 줄, 제대로
갖춘 여자를 몰라보는 건 바보요. 모든 걸 갖춰야 하오. 그래서 오늘밤 당
신과 이 문제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거요.
그녀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무엇에 관해서요?"
"당신에 관해. 당신을 너무나 좋아하고, 당신이 아내로 적합하다고 믿으려
했으나..."
제시카는 아찔했다. 세상에, 이렇게 독선적이고 이기적인데다 째째하다니.
..
"당신은 접어 두기엔 너무 중요한 걸 하나 못 갖추고 있는 것 같아."
모든걸 갖춰야 한다고! 물론 돈 문제겠지. 전에는 베닝턴 가문도 부유했었
다. 이젠 한푼도 안 남았지만.
"말하기 힘들군, 제시카. 하지만 내가 이번 주말에 약혼할 거란 얘기를 해
야겠소."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만졌다.
"나도 당신과 결혼하고 싶었소."
제 1 장 끝...
.
Harlequin Books '96
┌───────┐
│ 결 혼 소 동 │
└───────┘
리 마이클스 지음 / 김은정 옮김
제 2 장
제시카는 와인 한 잔을 트레버의 얼굴 위에 끼얹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클레멘타인 베닝턴에게 배운 덕분이었다. 할머니는 공공장소에서 의연하게
처신하도록 가르치셨다. 물론 트레버는 그럴 만한 가치도 없지만.
내가 그의 결혼 계획 소식을 들으면 가슴 아파할 걸로 계산했겠지. 내가
소동을 부리면 그 예상을 확인시켜 주는 꼴이 될 것이고, 만일 의연히 행동
한다면 최소한 자존심은 지켜질 것이다.
그녀는 손을 빼냈다.
"그런 개인적인 일을 내게 말해 주시다니 고맙군요."
말 속에는 날이 서 있었지만 그녀는 짐짓 상냥하게 말했다.
트레버는 어깨를 으쓱했다.
"소문을 듣고 놀랄까 봐 미리 말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소."
"놀라다니요? 그런 기쁜 소식을 듣고 내가 왜 그러겠어요."
그는 어리둥절해했다.
"저, 아무튼 우리가..."
제시카는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가끔 데이트한 것뿐이었죠. 어쩌다 저녁에 만난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없
었잖아요."
"음, 그렇소. 아무 일도 없었소. 하지만 나하고만 만났기 때문에 당신이
뭔가 기대를...."
제시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일부러 염려해 주는 척했다.
"오, 맙소사.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당신이 우리끼리만 데이트하길 바라는
것 같지 않아 다른 남자들과도 많이 만났어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트레버는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니죠?"
제시카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당신도 나랑 만나면서 새 약혼녀와 데이트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약혼 발표도 하는 거고요."
그녀는 천천히 와인을 마셨다. 그건 소태 맛이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요. 그렇죠? 잘되길 빌어요. 두 사람이 행복하
길 빌겠어요."
트레버는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두 번이나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
래 봤자 본전도 못 찾을 테니까.
일회전은 그녀의 승리였다. 하지만 계속 순조로울 것 같지는 않았다. 미소
를 지으며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식사를 계속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와인 잔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칼라를 문질렀다.
"오, 이것 좀 보세요. 당신이 아까 말한 대로 좋은 옷이라곤 이것밖에 없
는데, 와인을 떨어뜨렸어요. 얼른 찬물로 닦고 올게요."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시카가 물품 보관소에서 코트를 받아들고 있을 때 지배인이 들어섰다.
"가야겠어요, 자나단."
그녀는 지배인에게 말했다.
"부탁 조 하나 할게요. 웨이터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맥킨타일 씨는 내가
곧 돌아올 걸로 알거든요."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베닝턴 양 말이라면 기꺼이."
그건 유치한 복수였지만 기분이 약간 나아졌다. 펠리시티의 웨이터들은 일
행 중 하나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음식을 내놓지 않
는다. 트레버는 얼마 동안이나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릴지 궁금했다. 잘하
면 약속시간을 넘길지도 몰라.
조나단을 보면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오늘밤 맥킨타일 씨가 팁을 안 줄 것 같네요. 다음에 제가 대신 드릴께
요."
조나단은 웃었다.
"필요없어요. 당신을 돕는 게 기뻐요."
그는 택시를 부르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제시카는 택시 뒷자석에 몸을 싣고 눈을 감았다. 조용히 평정을 되찾으려
고 애썼다. 하지만 너무 힘들었다. 머리는 가죽끈으로 조이는 듯했고, 손가
락은 덜덜 떨려 두손을 꼭 쥐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바보같이 그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니, 번지르르
한 모습에 어쩜 그렇게 깜빡 속아넘어갈 수 있었을까?
내가 너무 외로워서 그랬어.
할머니가 바로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너무 외로워할 때 트레버를 만났다.
클레맨타인 할머니는 오랫동안 아프셨었기 때문에 그녀는 기진맥진해했었
고, 유산이 한푼도 남지 않은 걸 알고는 너무 놀랐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트레버에겐 그런 얘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물론 숨기
려 한 적도 없지만, 아마도 얘기중에 힌트를 얻었거나 조사를 한 모양이다.
베닝턴 가문이 빈털터리가 된 걸 알고는 나만큼이나 놀랐겠군.
택시가 고급 벽돌 건물 앞에 멈춰서자 제시카는 마지막 남은 돈을 주고는
3층짜리 건물을 계단을 올라갔다. 그곳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사한 곳
이다. 원룸 아파트를 이제는 자신의 보금자리로 생각하려니 애썼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 자신이 자라 온 옛 집에 생각나곤 했
다.
몇 년 전 저택이 팔렸을 때, 제시카는 처음으로 기숙학교로 들어갔다. 그
당시 할머니는 큰 집이 너무 벅차다며 양로원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집을
구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훨씬 뒤에 안 일이지만, 집을 팔아서 그녀
의 학교 수업료와 대학 등록금을 충당했던 것이다.
처음엔 죄책감을 느겼다. 하지만 할머니는 작은 집에서 큰 행복을 느끼셨
다. 모든 걸 미리 치러 두셨기 때문에 돈에 관해선 한 번도 신경쓸 일이 없
었다.
집안의 재산을 다시 되찾으면 몰르까, 이제 그 저택에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종종 그 집에 관해 생각하면 그냥 기분이 좋았다.
아파트는 깜깜했으나 불을 켜지 않았다. 바람이 오후에 짙게 깔렸던 구름
을 날려보내 차가운 달빛 사이로 흑백의 풍격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녀는
창문 쪽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창밖을 내다보았다.
썰렁한 광경이 그녀의 기분과 딱 맞아떨어졌다. 맨 처음 느꼈던 분노는 전
부 녹아 버려 이제는 눈동자 너머로 아련한 아픔만 남아 있고 목구멍이 바
짝 말라 버렸을 뿐이다. 트레버를 좋아했었는데. 그와의 미래를 꿈꾸었는데
전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녀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이튿날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카일의 낡고 녹슨 차가 건물 뒤에 세워져 있
었다. 그가 사무실로 이사를 한 걸까? 지난 몇 주간 그녀가 아무리 일찍 사
무실에 나와도 카일은 벌써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가늠하기가 어
려웠다.
카일은 또 새 프로그램에 단단히 빠진 모양이다. 그가 매일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일하는 게 이젠 신기할 것도 없었다. 한 번은 문제가 생겨 해결해야
할 상황이 되자 모든 프로글매을 하나하나 차례로 검토해 완벽하게 만든적
도 있었다.
그녀는 커피를 만들어 그에게 한잔 가지고 갔다. 그가 너무 정신없이 빠져
잇는 듯해 컴퓨터 옆에 커피 잔을 내려놓곤느 조용히 서서 키보드 위에 놓
인 긴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카일은 보지도 않고 정확히 키보드를 눌렀다.
"제스, 무슨 일 있소? 왜 거기 꼼짝도 않고 서 있는 거요?"
"얘기 좀 하려고요, 카일."
"돈 얘기요? 아니면 부동산업자 건 때문이오?"
그녀는 종이 더미를 치우고 소파 가장자리에 걸터안았다.
"그건 나중 문제고요."
카일은 의자를 뒤로 밀고는 그녀를 마주 보기 위해 홱 돌렸다. 그러고는
커피 잔을 집어들며 말했다.
"곧 끝내겠고. 그러면 우린 돈방석에 앉게 될 거요."
정말 곧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왜 확실하게 내일까지 끝낸다고는 하지 않는 거죠?"
카일은 머리를 흔들었다.
"제스, 설마 피카소가 걸작을 그리는데 거기다 대고 일은 집어치우고 현관
이나 칠하라고 하지는 않겠지?"
"현관을 칠해야 할 때도 있는 거죠."
"오늘 아침엔 저기압 같은데?"
그의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어젯밤의 데이트는 어땠소?"
제시카는 입을 다물고 싶었다. 6개월간 일하면서 카일은 숱하게 데이트에
관해 물었다. 그래 놓고는 막상 대답은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
늘 아침에는 유독 큰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차갑게 대답했다.
"좋았어요."
적어도 처음 15분간은 정말 좋았잖아. 나머지는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정말 관심이 있어 묻는 거에요?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말로 묻는 건가요
?"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랜디가 어제 당신이 네온사인 불을 삼킨 것처럼 환했다고 하기에 뜨거운
데이트를 했는지 궁금했소. 늦게까지 있었나 보군."
제시카는 오히려 안된 마음이 들었다.
"그만 놀리세요. 언젠가 나도 이 원수를 꼭 갚을 테니. 당신은 또 24시간
내내 일했나 봐요?"
"얼른 이 일을 끝내야 당신이 원하는 부동산업자의 일을 할 수 있을 것 아
니오."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어제 사업 얘기는 어떻게 됐나요?"
"당신 데이트처럼 됐을 거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 양복쟁이들이 마피아는 아니었소. 그리고 씩 탐탁해하지도 않더군. 지
난봄에 인터넷에 띄웠던 별 볼일없는 프로그램 하나에 대해 말했소. 그건
지우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렸던 거요."
제시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웠다고요? 그들은 그걸 원하는 거예요, 카일. 안 그러면 올 이유가 없
죠."
"어쨌든 그들은 그것에 관해 얘기하는 것보다는 저녁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소. 난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서..."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어요?"
제시카는 비명을 질렀다.
"혹시 거절했나요?"
"바빠서 말이오."
제시카는 유치원생과 말하는 것 같았다.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세요? 할머니도 사업은 회의실이 아닌 저
녁 식탁 위에서 이루어진다고는 하셨어요!"
"정말이오?"
그는 흥미를 보였다.
"난 그들이 배가 고픈 줄 알았소. 한데 그때 난 배가 고프지도 않고, 또
일도 바빠서..."
"카일, 보호자가 있어야 되겠군요! 아니면 사교술을 배우든지 하세요. 통
신주문만 믿다간 파산할 거라고요. 툴숍 회사를 성장시키려면 고객들과 개
인적으로 찬해지게 자신을 변화시켜야 해요."
카일은 얼굴을 찡그렸다.
제시카를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사람들은 속으로는 강직한 걸 좋아하지만, 사업할 때는 피한다고요. 대하
기 편한 사람을 원해요."
"일리는 있소. 그러나 부동산업자 같은 사람들과 일하는 것보다는 나 같은
부류가 편하오. 일단 전화는 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굴어선 안돼요! 당신과 상대하다 보면 말이 통하지 않아 다
른 사람을 찾을 거예요."
"손해 보는 일일 텐데?"
"그걸 누가 알겠어요. 게임의 법칙을 알면 사업의 반은 성공한 거라고요.
옷도 잘 갖춰 입고, 공적이거나 사적인 일에 잘 처신할 줄 알아야 하고, 고
객들한테 애들 칭찬도 좀 해줘야 하고요!"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카일이 그녀를 뿔난 도깨비 보듯 했기 때문
이다.
"맥킨타일 선생께서 한 말이오?"
그가 조용히 물었다.
제시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트레버뿐 아니라 그녀의 의견이기도 했는
데, 괜히 앵무새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카일을 설득해야 했
다.
"그래요, 일단 양복쟁이들이 뭘 원했건 그건 이미 물건너 갔어요. 실례지
만 이 재정난을 어떻게 헤쳐나갈 건가요?"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스, 돈 문제에 관해선 쑥맥이란 걸 잘 알잖소. 내가 중요한 일에만 몰
두할 수 있으려고 당신을 고용한 거요."
"지금 꼭 해결을 보자는 건 아니에요. 그냥 자주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해결책도 나올 거 아녜요? 무슨 계획이 있으세요?"
제시카는 종이 뭄치를 옮기며 말했다.
"그렇게 사업에 취미가 없으면 툴숍을 처분하고 취직하지 그러세요?"
카일은 끔찍한 얼굴이었다.
"앞으로 30여 년을 돈벌이가 될 프로그램이나 만지작거리면서 썩으란 말이
오? 제스, 머리에 곰팡이가 필 거요, 난..."
"알았어요. 그런데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그녀는 계속해서 글자들이 올라가고 있는 컴퓨터 화면을 가리켰다.
"대체 이게 뭐죠?"
"정말 알고 싶소?"
"아니오, 그만두세요. 그저 돈벌이가 된느 건가 궁금해서요."
"아, 다 완성되면 그럴 수 있소."
"언제쯤 끝낼 건게요? 당장 급해요."
"프로그램이 잘 돼야 돈이 굴러올 것 아니오."
더 다툴 것도 없었다.
"얼른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경비를 줄이는 수밖에 없어요. 가령 월급 같
은 거요."
카일의 턱 근육이 긴장했다.
"랜디를 내쫓고 당신이 그일을 맡겠다는 얘기라면..."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나도 그런 짓은 못하오. 그애는 고민을 잊고 컴퓨터랑 놀 수 있는 곳이
필요하오."
제시카는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다. 랜디의 가정 형편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카일이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고, 또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했
다.
몸을 돌린 카일의 얼굴이 당황스러워 붉은빛을 띤 것을 보고 제시카는 깜
짝 놀랐다.
"게다가 안심하고 당신에게 컴퓨터를 맡길 수가 없소."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그녀는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딱 한 번 망가뜨린 걸 가지고 그러세요, 카일. 당신이 미리 잘 챙겨 뒀으
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시스템을 보강하는 중이었소."
"그래요. 얼마나 잘 고치길래 일주일씩이나 끌면서 돌리고 있었죠?"
"그럼, 그게 내 실수였소? 당신이 컴퓨터에 관해 그렇게 깜깜하지만 않았
어도..."
제시카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서 랜디 대신에 절 내보내야겠다는 얘기로군요."
이미 얘기는 옆길로 샜다. 해고해 달라고 부탁한 꼴이 되었으니... 절실하
게 직업이 필요한 여자가 해서는 안될 행동이었다.
"당신을?"
카일은 놀란 얼굴이었다.
"내가 왜 그러겠소? 행운의 여신이자 마스코트인 당신을 내쫓다니..."
"수호신은 아니고요?"
차갑게 말했지만 속으로 흐뭇했다.
"물론 그것도요. 당신을 해고하는 건 선택사항이 아니오."
"고맙군요."
"사실 나중에 공동으로 이익을 분배하자고 제안할 생각이었소."
"굉장한 생각이시군요. 결정적으로 이익이 없는 게 아쉽지만요. 현실을 좀
아세요. 사실 제 월급만 아니면 여기 돈 문제는 그리 심각할 것도 없어요.
모든 걸 정리해놔서 부기장을 보기도 쉬울 거예요. 랜디에게 가르치면 잘할
거고요. 그애한테 몇 시간만 더 일해 달라고 부탁하면..."
카일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여길 떠날 거란 얘기요?"
제시카는 망설였다.
"정확히 말해서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왜 그런 말을 하지?"
그녀는 깊은 숨을 몰아쉬고 조금 아까 결심한 것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최근에 여러 가지 생각을 했어요. 난 나 자신을 개발하고 싶어요. 입사할
때 제가 영원히 일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요. 이제 경험도 쌓았으니 일자
리를 얻기도 수월할 거예요."
카일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얼른 덧붙였다.
"은혜도 모른다고 생각지는 마세요, 카일. 하지만 제 형편도 생각하셔야
죠. 미래도 준비해야 하고요. 제 생활을 꾸려 나가려면 돈이 좀더 필요해
요. 그런데 당신은 월급을 줄 형편도 못되잖아요. 제게 큰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저도 솔직해지고 싶어요. 그래서 새 직장을 구할 거라고 미리 말씀
드리는 거예요."
카일은 길고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럼 랜디가 틀린거로군."
"뭐가요?"
"당신이 행복해 보였다는 것 말이오. 그 떠오르는 샛별이 어젯밤에 청혼하
지 않았나 보군."
"랜디는 트레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아니오, 랜디가 한 말이 아니었소. 랜디는 그저 당신이 나갈 때 미끄러지
듯 나긋나긋해 보였다고만 했소. 맥킨타일과 만난 걸로 봐서 뭔가 축하힐
일이 있겠거니 한거요. 그 떠오르는 샛별이 드디어 청혼을 했다만 당신이
돈 걱정이나 하고 있을 리는 없는 것 아니겠소?"
정말 유감스럽게도 제시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뿌연 시야 속에서
도 그의 동정 어린 얼굴이 비치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말해 봐요."
카일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그녀에게 커다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제시카는 눈물을 훌쩍이며 말했다.
"할머니는 절대 사람들 앞에서 울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직까진 한솥밥을 먹는 사이니까 우린 예외요."
"아니에요, 할머니는 어느 누구 앞에서도 울지 말랬어요."
그녀는 마스카라가 지워질까 봐 손수건 끝으로 눈물을 콕콕 찍었다.
"아무튼 내 사랑 타령에 관심이나 있겠어요?"
그녀는 얼른 일어섰다.
카일은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그 덕분에 여기서 계속 일하게 됐으니 잘된 거요."
그녀는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현기증이 나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어느 틈에 카일이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감싸안고 몸을 받쳐 주었다.
그와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현기증으로 어지러운
와중에도 그가 아주 다부지고 강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나는 회색 스웨터에 얼굴을 파묻꼬 몸을 기대자 자신이 작고 무기력하게 느
껴졌다.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방이 빙그르르 도는 것 같았다.
카일이 약간 몸을 떼고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지막 식사는 언제 한 거요?"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점심에 먹은 샌드위치가 전부였다.
"좀 됐어요."
"오늘도 굶었겠군. 이리 와요."
그는 그녀를 움켜잡고는 문 쪽으로 갔다.
"얘기 상대를 너무 잘 골랐나 보군요."
제시카는 투덜댔다.
"땅콩크림에 바나나, 젤리가 든 빵이나 먹자고 하다니."
"그게 어때서? 단백질에 비타민, 탄수화물까지 다 들어있소. 굶는 것보단
훨씬 낫소."
그는 그녀의 서랍 속에서 작은 금고를 찾아 열었다.
"우리가 얼마나 재정적인 위기에 몰렸는지 알겠군."
"돈이 약간 있기는 하지만 그건 사무실 운영비라서 쓸수가 없어요."
"차용증서라도 쓰겠소. 단돈 2만원에 우리가 파산하더라도 써버려야겠소."
그는 전혀 걱정하는 투가 아니다.
식당에 가느라고 찬바람을 쏘이자 얼굴색이 되돌아왔다. 이제 현기증은 사
라졌다.
"좀 낫군요. 저한테 한턱 낼것까진 없어요."
카일이 계속 걸으며 말했다.
"아무튼 먹어야 하오. 속이 거북할 때 여자들은..."
그가 한 말을 이해하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속이 거북하다뇨?"
그녀는 얼른 말했다.
"옛 시절에나 쓰던 방법으로 내가 임신했는지를 묻는 거라면..."
그녀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카일은 문을 열어 주고는 그녀를 테이블로 데려갔다. 그리곤 아무 말도 없
이 카운터로 가버렸다.
제시카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카일은 잠시 후 치즈버거와 오렌지 주스를 가지고 와서는 맞은편에 팔꿈치
를 괴고 앉아 물었다.
"사실이오?"
"아뇨!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결코..."
"그냥 추측일 뿐이오. 당신은 뜬금없이 앞날을 걱정하더니 사표까지 내려
했잖소. 그러고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굶었다고 하고. 이유 없이 눈물
이 나거나 식욕을 잃는 것이 임신의 징후라고 들었소. 그러니까 그 희소식
을 전하려고 어제 그렇게 좋아했던 것 아니겠소? 그런데 그가 탐탁치 않아
하자 앞날이 걱정스러워 새 직장을 구하려고..."
제시카는 이를 갈았다.
"그래요, 아주 논리적이시군요. 그런데 틀려도 한참 틀렸어요. 그리고 그
건 당신이 신경 쓸 일도 아니고요."
"자, 햄버거를 먹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요."
그녀는 햄버거를 잘게 써는 동안 곰곰히 생각했다. 어떻게 해명해야 카일
을 간단히 이해시킬 수 있을까?
"조금 아까 사업에 성공하는 비결에 관해 열변한 것 기억하시죠? 아니면
한 귀로 흘렸나요?"
"대강 기억하오."
"아마 앞으론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야심에 찬 젊은이가 쉽게 승진하
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하죠. 제대로 갖춘 옷을 입고, 잘 갖춘 머리모양을
하고, 상사에 대해 예의 바른 태도를 갖추고, 그리고 그밖에 한 가지 더 필
요한 게 있어요."
그녀는 꿀꺽 침을 삼키고는 말을 끝맺기 전에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제대로 갖춘 아내죠."
카일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건 생각해 보지도 못했소..."
"문제는 그 조건에 제가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는다는 거예요. 대화도 잘
이끌 수 있고, 우아하게 차 대접도 할 수 있고, 그림도 썩 잘 그리죠. 게다
가 전 베닝턴 가문의 사람이거든요."
"그게 그렇게 중요하오?"
"오, 그럼요. 베닝턴 가문은 초기에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하
지만 허허벌판을 진짜 도시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지요. 베닝턴 가문은
수백년간 캔자스 시에서 주요 행정기관이나 위원회에 큰 영향을 행사했어
요. 물론 재정이 바닥나 그런 것에서 손을 떼기 전 얘기지만요. 사회적 신
분도 굉장히 대단해 애석하게도 졸부 같은 이들과는 거래도 안했죠. 그래서
지금 요 모양 요 꼬로 사는 거예요."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결혼과 무슨 상관이오? 당신이 그렇게 완벽한데..."
"거의 완벽한 거죠. 문제는 돈이에요.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우리의 재산
은 바닥이 나버렸거든요."
"아, 이제 알겠소. 품위를 유지하려면 돈이 들고, 돈이 많아야 출세하기가
쉽다는 얘기 아니오."
"위험부담 자본이라고 하면 알아듣기 쉽겠죠."
그녀의 목소리는 씁쓸했다. 그녀는 카일을 보지 않으려고 햄버거만 집적거
렸다.
"그래서 새 직장을 구하려는 거요?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을 구해서 그 떠오
르는 샛별의 마음을 돌려 보려는 거요?"
제시카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런 별 볼일 없는 남자의 뒤꽁
무니나 쫓는 멍청이로 보이는 걸까? 어쩜 저렇게 둔하지?
"아뇨, 그건 제 능력으론 도저히 안될 거예요. 그저 회사에 황금이나 굴러
들어오기를 바라야죠. 그게 안되면 나라도 희생을 해야겠죠."
안 그러려고 애썼지만 말 속에 빈정거림이 담겼다.
그녀는 자제력을 잃은 게 화가 나서 접시를 밀치고는 일어났다.
"일하러 가는 게 낫겠어요. 오늘 황금이 굴러들어올지도 모르잖아요?"
카일은 좀더 얘기를 하고 싶은 듯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섰다.
툴숍 소프트웨어 회사의 앞문이 열려 있는 걸 본 순간 제시카는 가슴이 철
렁 내려앉았다.
"안에 누가 있어요."
카일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설마, 아마 나갈 때 문을 안 잠가서 바람에 열렸을 거요."
"안에 비싼 컴퓨터가 있는데 열어 놓고 나왔다고요?"
"제스, 제일 새것이라 해도 일년이 된 거요. 그건 벌써 구식이오. 아차,
방금 생각이 났는데, 버니에게 전화하기로 했소. 그가 차세대 새 모델을 원
가에 준다고 했는데."
"돈은 어떻게 마련하려고요?"
카일은 그녀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새 컴퓨터를 쓰면 일이 백 퍼센트 빨라질 거요."
그가 손잡이를 잡자 제시카는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았다.
"카일, 보통 도둑들은 컴퓨터가 새것인지 오래된 건지 모를 뿐더러, 개의
치도 않아요. 지금 저 안에서 도둑질을 하고 있다면, 당신이 들어가면 다칠
지도 몰라요!"
"황홀하군. 날 염려하다니."
카일은 싱긋 웃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물론 염려되죠. 아직 이달 월급도 주지 않았는데요. 추천서도 써줘야 하
고..."
갑자기 카일이 문간에서 딱 멈춰서는 바람에 제시카는 구르듯 그의 등에
부딪쳤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꽉 잡고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가 왜 멈춰서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지 곧 알았다.
어제 보았던 낯선 방문객 두 명이 어색하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제시카에
게 명함을 주었던 세 번째 남자는 책상에 기대어 달력을 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면, 여긴 개인적인 곳이라..."
카일이 말했다.
제시카가 팔꿈치로 툭 치자, 카일은 훅 하고 숨을 들이쉬고는 입을 다물었
다.
그녀는 무례하게 들어온 방문객들에게 화가 났지만 꾹 참고 미소지었다.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다른 고객과 만나느라고요. 무슨 일이시죠?"
카일이 눈을 크게 뜨고 나직이 속삭였다.
"뭘 하는 거요? 그렇게 아첨할 것까진 없잖소?"
"커피를 드시겠어요? 새로 끓여 방으로 가져 갈게요."
방문객 세 명이 그녀와 카일을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카일이 마침내 눈치를 채고 방을 가로질러 그의 사무실로 갔다.
"괜찮다면 들어오시죠?"
제시카가 얼른 커피를 끓여 얼음물과 함께 방으로 가져갔다. 방문객 세 명
은 지저분한 소파 위에 일렬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오늘은 감청색 양복에
포도줏빛 넥타이 차림이었다. 꼭 원숭이 세 마리가 순순히 보고, 듣고, 말
하는 것 같았다.
카링은 의자에 편안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가 들어가자 그는 일어나
서 커피 잔을 놓을 자리를 채워 주었다.
"커피 드시죠. 베닝턴 양은 아시죠?"
그는 배운 걸 봄내려는 학생처럼 자랑스럽게 싱긋 웃었다.
제시카는 겨우 웃음을 참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따금 얇은 문 저편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았다. 카일이 고객에게 아부하는 소리를
듣는다면 속이 쓰릴 것이다.
30분쯤 지나서 문이 열렸다. 진지한 사업 얘기를 하기에는 좀 짧은 시간이
었다. 물론 그녀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세 남자는 제시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죄수들이 걸어가듯 줄줄이
밖으로 걸아나갔다.
문은 여전히 열린 채였다. 그녀의 자리에서 보니, 카일은 워크스테이션에
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제시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컴퓨터를 모욕하
는 것일까? 그녀는 무슨 소식을 듣게 될지 약간 겁이 나서 잠시 문간에서
멈춰섰다. 카일은 의자에 푹 파묻힌 채 생전 처음 구경하는 사람처럼 천장
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일?"
그년느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 위에 나일강 삼각주 지도라도 있어요?"
"무슨 일일 것 같소?"
그는 꿈속을 헤매듯 고개를 돌려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황금을 찾았소. 아니, 적어도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아냈소."
"괜찮으세요?"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가 이마라도 짚으려는 듯 그에게로 다가갔다.
"오, 물론이오."
그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떻소, 제스? 반은 당신 몫으로 하는 게."
제 2 장 끝...
.
Harlequin Books '96
┌───────┐
│ 결 혼 소 동 │
└───────┘
리 마이클스 지음 / 김은정 옮김
제 3 장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저런 헛소리를 하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카일은 그녀를 소파 위에 앉히고 두 손을 꼭 쥐었다.
"이 일을 제대로만 하면 우린 돈방석 위에 앉게 되오. 다시는 재정적자 소
동 따윈 없을 거요. 당신도 뭐든 소신껏 할 수 있소. 떠오르는 샛별을 도와
줄 수도 있고 말이오."
"윗사람하고 얘기가 된 건가요, 카일? 혹시 모르잖아요. 당신이 다이아몬
드 광산에 투자하자는 재안을 받은 건지, 아니면 킬러로 고용된 건지 말이
에요. 제가 그 일에 말려들기 전에 확실히 알아둬야겠어요."
"제스, 바보같이 다이아몬드 광산에 투자하자고 당신을 끌어들이겠소?"
그럼, 킬러로 취직을 했다는 말인가?
"당신이나 툴숍 회사가 돈 한푼 없는데 뭘로 투자를 하오?"
"그건 안심이에요. 내내 걱정했어요. 그럼 누구를 죽일 거예요? 대체 독약
을 써서 죽을 거예요, 아니면 그 꿍꿍이 속을 털어놓지 않아 성질이 나게
해서 죽일 건가요?"
"뭐?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 제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기회를
줘야 하잖소..."
"바로 그 얘기예요."
이제 보니 그는 아직도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
치고 팔짱을 끼었다.
"세 양복쟁이들은 소프텍의 임원이오."
제시카는 얼굴을 찌푸렸다.
"명함에는 없었는데요."
"누가 얘기하겠소? 당신, 아니면 나? 소프텍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컴퓨터 개발회사라고 하던가?"
"조사해 달라는 거예요? 적어도 툴숍 회사랑 비슷한 처리가 아니란 건 알
아요."
"세 번째로 크던가? 아무튼 최고 수준임은 확실하오. 그런데 그런 위치에
있는 회사가 어떻게 자기네 연구개발 부서가 부실해어 프리랜서를 찾는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겠소?"
제시카는 혼란스러워 머리를 흔들었다.
"그 얘기를 그 사람들이 한 거예요?"
"똑같이는 아니오. 내 짐작이 그렇소. 비밀리에 협상을 하려고 소프텍이
양복쟁이들을 급파했소. 기술연구부 사람들인데, 내 새로운 극대화 기법에
관심이 있어서..."
제시카는 그의 말 중간에 끼어들었다.
"당신 짐작이 틀렸다는 게 아니고, 그동안 당신은 얘기의 속뜻 같은 건 전
혀 파악할 줄도 몰랐잖아요. 하지만 한 가지는 당신이 옳아요. 모든 계획이
너무 꿈같이 완벽해서 횡재를 한 기쁨에 도취되기 전에 깊이 생각해 둘 것
이..."
카일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들은 지난봄에 인터넷에 올렸던 고성능 기억운영 프로그램 권리를 사고
싶어하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찼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심쩍었다.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그대로 똑같이 말했소."
상황이 역전됐다. 그녀는 소프트웨어에 관한 한 눈 뜬 장님이라 컴퓨터에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밖에 몰랐다. 카일이 다시 설명하려고 연산방정식에
관한 얘기를 끄집어 내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녀는 그런 방법을
배워 컴퓨터를 사용하느니 직접 몸으로 때우는 구식 방법을 쓰겠노라고 말
했다. 카일은 실망스러워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일에 착수했다.
그때까지 제시카는 그가 말한 사업에 대강 감만잡고 있었으나, 갑자기 머
리가 컴퓨터처럼 휙휙 돌아가기 사직했다. 카일이 약간 과정한 것 같다. 그
거래 하나로 평생 먹고 살 만큼 돈을 벌 수는 없을 테지만 특허 사용료와
저작권료가 있으니 수익이 짭짤할 것이다.
우린 변호사가 필요해.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내가 왜 이러지?
"잠깐만요. 그들이 프로그램을 산다면 난 무슨 일을 맡는 거죠? 당신이 모
두 할 텐데요. 일이 잘돼서 보너스를 더 주면 거절하진 않겠어요. 그리고
받지도 않겠지만, 왜 반을 준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처음에 그녀가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카일은 약간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움직여 다시 천장만 바라보았다.
제시카는 그가 안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엉겁결에 그
런 얘기를 했으리라. 내가 그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일까 봐 고민하고 있
는 것이 분명하다.
"저, 알겠지만, 제스."
그는 약간 거북스럽게 말했다.
"그건 일괄거래요. 당신의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는 얘기요."
카일은 컴퓨터 화면을 보며 손을 움직였다.
"그들은 내 새로운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소."
"여태껏 뜯어고치던 거요?"
"나를 고용해서 시장성 있는 제품을 연구케 하려는 거요. 앞으로 5년 이내
에 전세계에 있는 개인용 컴퓨터에 그걸 장착시키련느 거지."
제시카가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카일의 재능을 믿어 의심치 않
았으나 소프텍은 그를 차세대 천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날 왜 필요로 하는지 모르겠어요. 작업하는 데 쓸모가 있다고 여
기는 건 아닌지..."
"물론 아니오, 제스 기술적인 건 당신이 신경쓰지 않아도 돼."
"그렇게 모욕할 것까진 없어요. 참, 아침엔 누구 밑에서 일하는 게 싫다고
했잖아요."
"멍청한 부기 프로그램이나 두드리면서 내 인생을 보내긴 싫다고 했소. 하
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대가를 받는 거라면..."
"이런 프로그램이나 만들면서요?"
"그렇소."
"거의 다 됐다고 하신 것 같은데."
"대강은 끝냈소. 하지만 좀더 손을 보면 완벽해질 수 있소. 몇 달간만 소
프텍에 몸을 담고 연구할 거요. 생산 라인을 새로 바꾸지 않고도 내 제품이
생산하도록 하는 거요."
"그럼 그동안은 당신에게 돈 벌라고 안달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알겠어요.
하지만..."
"이해가 됐소? 일을 제대로 하려면 내가 프로그래머팀장을 맡아야 할 거
요."
"다른 사람들을 지휘 감독한다고요? 카일, 당신은 그 방면엔 깜깜하잖아
요. 한달도 안돼서 불만을 품은 아랫사람이 중상모략을 해대면 당신은 절망
해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거예요!"
"아니, 아니오. 사람들을 지휘 감독하는 게 아니오. 그냥 조용한 구석 자
리에 앉아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연구하는 거요. 결과가 즉시 돈으
로 연결될까 고민하지 않고 말이오. 그래서 내가 맡을 수 있게 된 거요."
제시카는 아무 말도 못했다.
"게다가 사무실은 아주 따뜻할 거요. 이제 새 컴퓨터 값을 어떻게 치를 거
냐고 날 윽박지르지 않아도 되오."
카일은 그녀가 돈 걱정하는 걸 남의 일처럼 여겼지만 그녀는 이제 하도 익
숙해져서 아무 말도 안했다.
"왜 날 필요로 하는지 아직 확실히 이해가 안돼요. 그런 훌륭한 일을 하는
동안 난 사무실이나 지키고 당신 보디가드나 하라는 건가요?"
그는 다시 약간 불편한 기색이 되었다.
"약간 그런 면도 있지만..."
"그런 일이라면 쉽게 물러설 순 없지요. 보디가드 일이 좀 비싸서 그렇지.
.."
카일은 싱긋 웃었다.
"사실 생각해 둔 게 있소. 월급을 올려 주겠소. 반ㅆ기 나누는 게 아니고.
아니, 반씩 나눕시다. 그게 낫겠소. 날 믿어요."
그녀는 도전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이제 세밀하게 알아보죠. 소프텍이 그렇게 파격적인 대우를 할
거라면..."
"맞소. 하지만 아직 나랑 일할지 결정한 건 아니오."
그녀는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까도 카일 때문에
머리가 쑤셨지만 지금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었다.
"당신을 채용할지 결정 안했다고요? 카일, 제발 똑바로 얘기 좀 해보세요
?"
"그 양복쟁이들이 내 아이디어에 훌딱 반해서 사장한테 의논하러 갔소. 아
마 당장 사자고 그럴 거요. 그러니 그 프로젝트를 이끌어 완성할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확신시켜 줘야 하오."
컴퓨터가 윙윙거렸다. 제시카는 머리가 쿡쿡 쑤셨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
얼거렸다.
"다시 새 일자리나 알아봐야겠군요. 이미 그런 줄은 알았지만, 당신은 지
네만큼이나 끔찍해요."
카일은 마치 칭찬을 들은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난생 처음 듣는 얘기요, 제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 그러셨어요?"
"아침에 사업의 세계에서 지켜야 할 것들에 관해 강의하지 않았소. 고객들
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했지. 그런 것은 사장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것 아니오?"
"그렇겠죠."
그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의 말 속에 담긴 진의를 알 듯하면서도 도
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가 장차 나의 사장이 될 거라면 더욱 그럴 것 아니겠소?"
"모든 게 그 사람 손에 달린 거군요?"
"그렇소. 소프텍이 최근 실업계의 한 거물에게 넘어갔다는 기사를 읽었을
거요."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월터 와이어트죠. 지난달 잡지에서 그에 관한 소개를 실었더군요."
"나도 읽었소. 무슨 기계장치로 돈을 번 사람이오. 컴퓨터는 미개척 분야
인 모양이오. 그래서 당신이 아침에 말한 사업이라는 것에 대자본을 투자하
려는 거요. 어제 양복쟁이들이 왔다 그냥 간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소. 소프
텍의 새 감독 자리에 내가 적당치 않다고 여긴 모양이오."
카일은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제시카는 억지로 웃음을 찹았다.
"물론 다시 돌아왔지만 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다
고 확신한느 거요. 그들은 당신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은 모양이오. 당신이
빠진다니 섭섭해하더군. 그래서 얘긴데..."
"저보고 앞장서 달라는 건가요? 대변인 같은 거요?"
"그게 아니오. 가령 한 가지만 생각해 봐도 당신은 그 일을 해낼 수가 없
소, 제스. 누가 프로그램에 관해 물으면 뭐라 답하겠소? 하지만 오늘 당신
을 아무에게도 소개하지 않아서 그 양복쟁이들은 당신이 비서인 줄 모르고
있소."
"뻔한 거 아녜요? 내 자리는 밖에 있고, 당신 책상은 여기 잇는데. 커피까
지 날라다 주었고..."
"내 말은 그들이 당신이 비서라는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거요. 그러
니 이번 주말에 월터 와이어트를 만나러 갈 때 같이 갑시다."
"내가 왜 월터를 만나죠?"
"당신이 베닝턴 가문 사람인데다 품위와 미모를 겸한걸 보면 나도 같은 부
류로 알 거란 말이오."
그가 혼자서 하도 기뻐하니까 신경이 곤두서 도저히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
다.
"결국 당신 같은 여자와 결혼한 남자라면 뭔가 특별난 것으로 볼 거요."
제시카는 꿀꺽 침을 삼켰다.
"뭐라고요? 귓속이 윙윙거려 제대로 못 들었어요. 나랑 뭐라고요?"
"결혼이오."
카일은 아주 똑똑히 발음했다.
"오, 맙소사. 갖춰진 아내가 사업계에서 중요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당신
과는 상관없는 얘기라고요."
그는 낙담했다.
"왜 안되지? 뭐가 문제요?"
"오,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요. 아주 하찮은 거예요. 당신과 결혼할 마음
이 전혀 없다는 거죠."
"알고 있소."
그는 약간 실망한 듯했다.
"누가 진짜로 결혼하자고 했소?"
"당신이 그랬잖아요. 결혼을 해서 그 일이 성사되게 하자는 것 아녜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제스. 결혼을 하자는 게 아니라 약혼한
척하자는 거요."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결혼하는 게 훨씬 낫지만. 그게 좀더 안정돼 보이니까. 하지만 결혼
은 혼인신고도 해야 하고, 이번주 내로 한다는 게 좀 찜찜해 보이지 않겠소
?"
"놀랍군요. 왜 구청 컴퓨터로 들어가서 혼인신고 날짜를 조작하지 그러세
요?"
그는 그 문제를 잠깐 생각해 보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오, 그런 건 분명 범법 행위요. 암호를 알아내는 데도 몇 주 걸릴 테
고."
그는 정말인 줄 아나 보다. 너무 고지식하고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게 죄라
면 죄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그런 줄 알 거다.
"하지만 약혼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 아니오. 몇달 전에 약혼했다고
해도 누가 뭐라겠소?"
제시카는 그들 사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이 월터 와이어트에게 일러바칠 리는 없으니 무슨 문
제가 생기겠는가.
그녀는 누가 헛소리를 하는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모든 얘기들이 그럴
듯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흔들리는 걸 눈치챈 그가 말했다.
"돈을 생각해봐요, 제스. 세계일주도 할 수 있소. 평생 놀고 먹을 수 있는
거요. 참, 지금 몇 살이지?"
"스물다섯 살이예요."
그녀는 얼이 빠져 말했다.
"사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미안하오, 당신이 그 떠오르는 샛별과 결혼
도 할 수 있다고 말하려 한 거요. 하찮은 변화에 관해 말하려던 게 아니었
소."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무튼 손해 볼 게 뭐 있겠소?"
제시카는 생전 처음 보듯 그를 찬찬히 살폈다. 오늘 아침 그의 머리는 평
소보다 더 엉망이었다. 탄력있는 검은 고수머리는 샤워를 하고 나서 한 번
도 빗지 않은 것 같았다. 잘 손질하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몸매는 키가 크
고 잘 다듬어져 있어서 양복을 입혀 놓으면 꽤 폼이 날것 같다. 잘만 다듬
으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 앞에서 꽤나 주눅이 들겠군. 하지만 그의 말솜
씨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겠어...
"먼저 그 청바지나 벗어 버리세요."
카일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제스! 난 당신이 그런 부류인 줄은 꿈에도 몰랐소. 하지만 당신 생각이
정 그렇다면..."
그녀는 뒤늦게야 그의 말 속에 두가 뜻이 담긴 걸 깨닫고는 새빨갛게 물든
뺨을 어찌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카일은 신나하는 것 같았다.
"베닝턴 가문 사람은 어떤 일에도 얼굴을 붉히지 않는 줄 알았소. 내가 상
류사회에 관해 잘못 알고 있었던 거요?"
"그리고 깔끔한 양복으로 갈아입으세요."
그녀는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그 스웨터도 이제 그만 입으세요."
"이거 말이오?"
마치 자신이 뭘 입고 있었는지 몰랐던 사람처럼 그는 가슴을 자세히 들여
다보았다.
"그렇게는 못하오, 제스. 난 이 스웨터를 입어야만 좋은 생각이 떠오른단
말이오."
"그런 생각일랑 거지에게나 주세요. 모두 잘했다고 칭찬할 테니, 그게 바
로 우리 사업의 첫 시작이 될 거예요."
카일은 마음이 쏠린 듯했다.
"그럼 이게 거래요?"
제시카는 곰곰히 생각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손해 볼게 뭐야? 엉뚱하게도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쫓는 무지개가 환상이었던 것으로 드러
나면 다시 직장을 구하면 되지. 더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데 뭐.
"거래예요."
그녀는 그와 굳게 악수했다. 어쩐지 그 말이 약혼 서약 같았다.
결정을 하고 나자 카일은 금새 컴퓨터로 관심을 돌렸다. 아직도 얘기중인
데, 무심결에 키보드를 마치 애인이라도 되는 양 쓰다듬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해결이 안된 문제가 있었다. 그는 컴퓨터를 어떤 여자보다
도 더 매혹적인 양 대했다. 이 미친 가장무도회에서 그들이 거쳐야 할 마지
막 순서는 카일이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리라.
그녀가 자리로 돌아가려고 사무실에 나오기도 전에 그는 복잡한 프로그램
에 다시 빨려들어갔다. 제시카는 그의 집중력에 감탄했다. 정신이 혼란스러
워 일을 할 수 없어서 점심때가 되길 고대했다.
점심에 뭘 먹을지 묻는 게 방해가 될까 싶어 고민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
다. 그가 초라한 스웨터 위에 코트를 걸치고 차 열쇠를 두 손으로 이리저리
옮기며 장난치는 걸 본 제시카는 깜짝 놀랐다.
"버니를 만나러 갈 거요. 시간이 좀 걸릴 테니 편한 때에 점심식사를 해
요. 아마 돌아올 때쯤엔 손님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을 거요."
먹는 건 제시카와 상관없는 얘기였다.
"새 컴퓨터를 사려고요? 지금은 시기가 안 좋은데요."
"제스, 잘못 짚었소. 실은 오늘 컴퓨터를 사려는 게 아니라 팔려는 거요."
"판다고요?"
"버니는 내 초창기 컴퓨터에 2년간이나 군침을 흘려왔소. 그걸 팔려는 거
요."
"왜요?"
"제스, 왜 그러는 거요? 우린 자본금이 필요하오. 성공은 싸게 먹히지 않
는다고 했잖소."
"그 컴퓨터는 박물관에 줄 거리고 했잖아요."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소. 하지만 제자리를 찾느라고 기다리는 동안 내 사무실에서 먼지나
뒤집어쓰고 있는 것보다 낫소."
"버니는 그걸 어떻게 할 건데요?"
"아마 조각조각 해체할 거요. 그러나 더이상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오."
"하지만 그 컴퓨터를 사랑하잖아요."
"때론 그런 일이 초연하고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하오."
그녀가 했던 말을 이제 그가 그녀에게 하고 있었다. 굳이 차이점이 있다면
그땐 그녀가 트레버에 관해 얘기를 했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카일은...
그가 막 나가려고 할 때 그녀는 그를 소리쳐 불렀다.
"카일, 월터 와이어트와 만나기로 한 얘기는 했잖아요."
"토요일에 그의 집에서 파티를 열 거요. 오늘밤 저녁식사 후에 얘기해 주
려고 했소."
"저녁식사요?"
"버닝턴 사람들은 그렇게 안 부르오?"
"솔직히 말해서, 카일..."
"예행연습을 해야 하잖소. 안 그렇소? 적당한 장소나 물색해 놓아요."
"그건 때와 형편에 달렸죠. 올바른 포크 사용법부터 가르쳐 드릴가요?"
"제스, 달링..."
그는 갑자기 근심 어린 표정이 되었다.
"포크가 뭐요?"
그녀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는 사라져 버렸다. 괜히 이 일을 시작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카일은 오후가 한참 지나서 느긋하게 웃으며 돌아왔다. 간단한 일일 텐데
꽤 시간이 걸린 모양이다. 그녀는 한 시간 전부터 이 아슬아슬한 곡예에서
생길 위험성에 관히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일거리가 없어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돌았다.
물론 곧 나아질 거라고 자조 섞인 다짐을 했다. 카일이 웃는 걸 보니 옛날
컴퓨터 생각을 싹 잊어버리고 대신 새 컴퓨터를 산 모양이다.
"버니와의 일을 잘 성사시켰기를 바래요. 왜냐하면 펠리시티에 예약을 했
거든요. 거긴 비싼 편이지만 뭔가 배우기에는 안성맞춤이예요."
"나를 믿어 주니 기쁘오."
그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돈 뭉치를 꺼냈다.
제시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고철덩이, 아니 미안해요. 그 낡은 컴퓨터가 그렇게 비싼가 보죠?"
"오, 팔 필요가 없었소. 버니에게 내 계획을 몽땅 말해 주었소. 그는 대단
한 일이라며 대신에 돈을 빌려 주었소. 그 컴퓨터는 아직 별도로 남아 있
소."
"돈을 빌렸다고요? 우리가 실패하면 어쩌려고요?"
카일은 그녀의 얼굴 앞에 손가락을 갖다대고 흔들었다.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되겠소, 제스."
그는 주머니를 툭툭 쳤다.
"뭔가가 또 있는데 여기 있군."
그는 작은 봉투를 꺼내더니 책상 위에다 반지를 떨구었다.
제시카는 금반지가 핑그르르 돌다가 가만히 멈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
귀퉁이에 멈춘 반지에는 큰 눈동자 만한 초록색 보석이 불빛에 빛나고 있었
다.
"이게 뭐죠, 카일?"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에메랄드로 알고 있소만..."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에메랄드인 건 알아요, 카일. 제 말은 어디서 ㄴ나 거냐고요?"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 그건 버니 할머니의 거요."
"그가 팔았어요?"
"물론 판 건 아니오. 어렵게 얻은 우리의 자금을 약혼 반지를 사는 데 써
버릴 것 같소?"
"버니가 빌려준 돈은 있다는 말이죠? 이게 버니한테 빌린 거라면, 난 이런
반지에 아무 책임도 지지 않겠어요. 1캐럿에다 색깔도 아주 근사하군요. 저
만한 에메랄드라면..."
"너무 탐내지 말아요. 버니는 당신을 믿고 있소. 당신이 버닝턴 사람이라
니까 그런 장난감을 어떻게 간수할지 잘 알 거라고 하더군. 그렇잖으면 당
신은 오래전에 쫓겨난 사람이 분명할 거요."
그는 그녀의 왼손을 들어올리더니 반지를 끼워 주었다.
"어떻소? 꼭 맞는군."
그건 가는 손가락에 아주 잘 어울렸다. 은은하게 빛나는 초록색 에메랄드
는 세공이 훌륭했고 주위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를 박았다. 정말 그녀가
꿈꾸었던 약혼반지였다.
그녀는 버니에게 반지를 잘 간수하겠다고 전하라는 말을 하려고 카일을 바
라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카일이 그녀를 바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고 부드럽게 입맞췄
다.
그가 입술을 떼자 그녀는 자신없이 말했다.
"왜 그래요?"
그의 목소리는 약간 흔들렸다.
"그러면 좋을 것 같았소. 지금은 모르겠구려, 안녕, 랜디."
제시카는 숨이 막혔다. 랜디가 입을 딱 벌린 채 문간에 서 있었다.
카일은 제시카의 책상 옆에 편안히 서 있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짐작했었지?"
랜디는 정신을 가다듬는 것 같았다.
"물론이죠."
그는 억지로 무심한 척했다.
"그렇고 그런 줄 예산ㄹ에 알아봤죠."
"그래?"
카일은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이 사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거요."
카일의 차가 펠리시티의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지배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나단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흠칫 놀란 듯했다. 다시 평정을 되찾고 전처럼
차분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그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펠리시티에서는 카일의 차처럼 찌그러진
차는 거의 볼 수가 없으니까. 차를 주차시키려 온 직원은 조나단처럼 숙력
이 안되었기 때문에 벌레를 씹은 얼굴이었다.
조나단이 문을 열어 주려고 다가왔다.
"베닝턴 양, 이렇게 빨리 만나다니 반갑군요! 저..."
카일이 지배인의 손을 덥석 잡고 힘차게 악수했다.
"선더스입니다. 만나서 반갑소."
"저도요, 선생님."
조나단은 마치 레몬을 깨문 표정이다.
제시카는 조나단이 펠리시티의 자랑인 호젓하고 은밀한 곳으로 그들을 안
내하고 돌아갈 때까지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조나단이 자리를 뜨
자마자 카일에게 몸을 기울였다.
"조나단에게 자기 소개는 왜 했어요?"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야 다음번에 내 이름을 기억할 것 아니오."
"날 믿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훌륭한 지배인은 예약 명단이나 계산할 때
의 신용카드를 보고 이름을 외우죠."
"하지만 당신 이름으로 예약을 했고, 난 신용카드를 쓰지 않을 거잖소."
제시카는 혀를 깨물었다.
"아무튼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그럼 지배인을 잘 아는 척하고 한 번도 안 가본 곳에도 익숙한 척하란 말
이오?"
"이름을 알려 주는 거야 친구인 양 구는 거와는 차이가 있죠. 안 그래요?"
"좀 건방진 거 아니오?"
"너무 정중히 대해선 안돼요."
"좋아, 알겠소. 옛날에 내 집사인 듯 대하겠소."
"카일, 집사를 본 적이 있어요?"
"영화에서 말고 진자로 말이오?"
제시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참, 그가 당신 이름을 알더군. 그런데 왜 내 이름은 몰랐을까?"
"날 믿어요. 다음번에 올 땐 알 거예요. 난 어릴 때부터 왔으니까 아는 거
고요."
"음, 알았소. 베닝턴 사람들은 편의점 따윈 안 가나 보군. 어릴 때 여기서
감자튀김을 먹었소, 아니면 어른들처럼 달팽이 요리를 먹었소?"
그는 와인 담당자가 가져온 와인 주문서를 집어들더니 힐끗 보고는 매력적
인 미소를 지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A 줄에서 하나, B 줄에서 하나 가져오겠소?"
그는 깜짝 놀란 와인 담당자에게 주문서를 건네고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
었다.
"자, 오늘밤에는 뭘 가르칠 거요?"
제시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긴 저녁이 되리라는 건 불을 보듯 훤했
다.
제 3 장 끝...
.
Harlequin Books '96
┌───────┐
│ 결 혼 소 동 │
└───────┘
리 마이클스 지음 / 김은정 옮김
제 4 장
와인 담당자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선생님, 오늘 저녁에 뭘 드실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근사한 와인을 추천
하겠습니다."
제시카는 와인 담당자가 못마땅해하는 걸 알고도 참았다. 최고급 오인을
가져와도 카일은 떨떠름한 맛이라고 느낄 것이다. 와인 담당자의 얼굴에 비
웃는 기색이 보이자 그 불손한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갑자기 주위 환경이 확 바뀌어 버렸
다. 그후 신경이 예민해져, 비웃는 듯한 기색이면 대번에 알아차리게 되었
다. 카일이 와인에 관해서는 깜깜하지만 그렇다고 멍청이는 아니다. 이럴
때 도와주는 게 그의 임무가 아닌가.
아니, 내가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 전에는 펠리시티에서
이런 문제를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처지가 대번에 바뀌었어도
여전히 공손해 무척 맘에 들어하던 곳이다. 그래서 오늘도 이곳을 고르지
않았던가. 카일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듯, 웃으며 와인 담당
자를 바라보고 있다.
"어디 한번 골라 보지. 요리사 솜씨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주방장이오."
제시카는 혀를 깨물며 참았지만 어쩔 수 없이 끼어들었다.
"로제가 좋을 것 같군요. 아주 훌륭한 와인이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와인 담당자는 낌새를 알아채고 급히 가버렸다.
제시카는 냅킨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저, 백 덜라만 주세요."
"와인 값으로 말이오?"
그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 값이면 맛이 뛰어나겠군."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옷 값이오? 이 넥타이가 보기 싫은 기색인 건 눈치챘소."
"전자회로 무늬가 새겨진 넥타이는 생전 처음 봤거든요."
"그랬소?"
카일이 넥타이의 끝을 들어올려 자세히 살폈다.
"버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면서 모두들 홀딱 반할 거라고 했었소."
"토요일 밤이 되기 전에 그 문제를 좀 해결해야겠어요. 그런 차림으로 월
터 와이어트의 파티에 갈 순 없어요."
"난 이 넥타이가 맘에 들어요."
그럴 줄 알았어.
"이 돈은 그런 곳에 쓸게 아니에요. 조나단한테 뇌물로 쓸 거예요."
"그 별 볼일 없는 녀석에게 백 달러를 주겠다고? 뭣 때문에?"
"어떻게 해야 와인 담당자 같은 사람에게 수몰르 당하지 않는지 배우라고
요. 그가 승낙하기만 한다면 그 정도 대가는 충분하죠. 당신은 도저히 내
능력 밖이에요."
"당신은 베닝턴 사람이오. 당신이 못할 건 아무것도 없소."
그는 근처에 앉아 있는 조나단을 찾아 손짓을 했다.
지배인이 테이블 옆에 잠시 들렸다.
"네, 선생님?"
"숙녀께서 부탁할 게 있으시다오."
카일은 활달하게 말하고는 수표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와인 담당자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인상을 줄지 돈을 내고 배우라는 거
요."
지배인의 얼굴 표정을 읽는 것부터 배워야겠어. 조나단은 늘 감정의 기복
이 없어 똑같은 얼굴이다. 그는 눈동자 하나 흔들림 없이 이 놀랍고 엉뚱한
상황을 담담하게 극복하려는 듯했다.
그때 와인 담당자가 병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는 조나단을 발견하곤 히죽
거리던 기색을 싹 감추고 다가왔다.
"이건 어떻습니까, 선생님?"
그는 카일에게 상표를 보이며 물었다.
카일은 상표를 별로 쳐다보지도 않고 병을 받아들었다.
"내가 하겠소. 가서 병따개나 가져다 주겠소?"
조나단은 기가 막힌 듯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선생님."
제시카는 하도 조마조마해서 눈을 감았다. 맛을 보는 절차가 끝날 때까지
할 수만 있다면 귀까지 막고 싶었다.
"제스, 이제 눈을 떠도 되오."
그녀는 간신히 눈을 떴다.
와인 담당자와 조나단은 가버렸고, 카일은 잔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
었다.
"반쯤은 먹을 만하군. 생맥주만큼은 안되지만..."
그녀는 잔을 집어들었다.
"조나단은 별 부담 없는 와인이라고 하던데요."
"여러 예법들을 배우는 것도 좋을 것 같군."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난 그런 게 무례한 건지도 몰랐소. 당신한테도 망신이 된다는 걸 생각지
못했소."
제시카는 갑자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또 어떤 모습을 하건 어떤 행
동을 하건, 그건 그녀가 참견할 바가 아닌데 저렇게 주눅이 들게 하다니!
"조나단의 표정 좀 보세요. 백 달러 가치는 충분해요. 와인에 관해 하나도
안 배웠어도 저거 하나면 족해요."
카일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하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어릴 줄은 전혀 몰랐다. 눈빛은 괴로운 듯 빛났
지만 검게 그은 얼굴은 즐겁게 웃고 있엇다 그가 웃을 땐 정말 매력적이다.
제시카는 당황해 얼른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뭘 드실거죠? 볼로냐 샌드위치나 땅콩크림 샌드위치 말고요."
"달팽이나 생선회만 아니라면 뭐든지 먹을 수 있소."
"오, 카일, 생선회는 정말 훌륭해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번 먹은 적이
있는데..."
"우리가 횡재하고 난 다음에 한 번 먹으러 갑시다. 지금 여긴 샌프란시스
코가 아니니, 난 쇠고기로 하겠소."
그녀는 코에 주름을 잡으며 메뉴를 덮었다.
"모험심은 어디로 갔죠? 토요일 밤에 월터 와이어트가 굴회에 청어절임을
내놓으면 어떻게 하려고..."
"간단하오. 당신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하면 되니까. 반쯤은 그런 이유 때문
에 당신을 데려가는 거잖소."
저녁식사는 늦게서야 끝났다. 제시카가 카일에게 맛보이려고 바나나 플람
베(와인,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넣고 불을 붙여 만든 디저트)를 디저트로
주문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입을 먹고 나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은 좋아하겠지만, 다시는 땅콩크림 샌드위치에 바나나를 끼워 먹지
않겠소."
제시카는 힐끗 조나단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테이블 옆에서 불꽃이
이는 디저트를 만드는 중이었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금가지
계속해서 충격을 받았으니 저렇게 무감각해지는 것도 당연하지. 불쌍한 조
나단.
저녁식사는 생각보다 무척 즐거웠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주위가 너무
조용해 식당을 둘러보니 좌석이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조나단은 조금 떨어
져서 청구서를 만지작거리며 서 있었다.
카일이 청구설르 바라보자, 제시카는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는
무표정하게 돈을 꺼냈다.
"걱정 마세요, 카일. 이제 허리띠를 더욱 죌게요. 하지만 오늘밤음..."
"누가 걱정을 하오? 우린 백만장자가 될 텐데. 당분간은 버니한테 신세지
면 되오."
"좋아요."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핸드백을 집어들다가 트레버를 발견했다. 그는 건너편에
있는 제일 으슥한 자리에서 여자의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트레버의 몸에
가려 자세히 볼수는 없었지만 하늘하늘한 빨간 드레스 자락과 금발머리가
엿보였다. 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잇는 저 여자가 미지의 약혼녀임에
틀림없다.
저 여자도 트레버가 돈에만 관심이 있는 걸 알까? 어쩌면 신경을 안 쓸지
도 모르지. 아니면 그가 나를 떼어 버리려고 핑계를 댄 건지도 모르고.
카일이 청구서를 조나단에게 건넸다.
"이제 막 나간 사람이 떠오르는 샛별 맞소, 제스?"
"잘 모르겠는데요."
"음, 분명한데, 금발머리와 팔짱을 끼고 있었소. 물론 우리가 부자가 되면
그를 다시 찾을 수 잇을 거요."
내가 아직도 그를 원할 만큼 바보인 줄 아나 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렇게는 못하죠. 그는 약혼을 했거든요."
카일은 당황스러워했다.
"기가 막히는군. 머리는 염색한데다, 그가 좋아할 타입이..."
"카일, 문 닫을 시간이에요."
그는 천천히 일어나 그녀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걸로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오. 약혼을 깨질 수도 있소. 혹시 그가 끝
내 돌아오지 않으면, 새 짝을 구하면 되오."
"새 짝은 필요없어요."
제시카는 자기 말이 오해를 불러일이킬 것 같아 얼른 이를 악물었다.
"내 말은 아무도 필요없다는 거예요."
"제스, 제스. 그와의 일이 틀어졌다고 해서 모두 당신을 싫어한다고 생각
하면 안되오. 내 말은 당신이 그보다 훨씬 능력있는 누군가를 안달나게 할
수도 있다는 거요."
"카일, 그게 아니라..."
"돈은 많은 사람 말이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에게 어울리는 부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소."
"고맙군요. 하지만..."
"오, 아무 때라도 좋소. 기꺼이 당신을 돕겠소. 차라리 잘된 일이오, 제
스. 그는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소. 당신같은 베닝턴 사람한테 그런 부류는
안 맞아요."
"카일..."
"왜 그러오?"
그녀는 그가 정말 염려해 주는 듯해 그를 이해시키려다가 참았다.
"아니에요."
조나단은 현관 로비에 있었다.
카일은 다시 한번 그와 악수를 하려고 멈춰섰다.
"공부 고마웠소. 내가 여기서 일하지 얂게 되더라도 웨이터 교육을 시켜
주겠소?"
조나단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선생님. 아주 빨리 배우시던걸요."
"그래요?"
카일은 제이카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았나 보오."
그는 그녀에게 코트를 입혀주고 차 열쇠를 주차 직원에게 건넨 뒤 팔짱을
꼈다.
"녹슨 빛깔이네."
그는 참고가 되도록 말해 주었다.
"이건 목표를 위해 꾸민 수단이긴 했지만, 그동안 아주 즐겁게 고상한 분
위기를 즐겼소..."
정말 그랬다. 어떻게 보면 카일은 그녀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몇
몇 부분이 닮았다. 클레멘타인 베닝턴은 할아버지가 담배를 피우시거나 제
시카가 알 수 없는 짓궃은 얘기를 하시면 질색을 하셨다. 할아버지의 호탕
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시내로 차를 몰면서 카일은 부드럽게 서툰 휘파람을 불었다. 아마 자기의
실력을 잘 모르나 보다. 그녀가 옆에 있는 것도 잊어버린 듯했다.
그는 계단을 한참 올라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일할 게 많이 있소. 내일 봐요, 제스."
그는 커피도 사양하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토닥거리고 사라져 버렸다.
제시카는 아파트로 들어서자 불을 켰다.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차량 소
음들로 인해 집 안이 더욱 고요하게 느껴졌다. 공기는 곰팡내가 물씬 풍겼
다.
카일의 손길이 스쳤던 뺨을 손끝으로 어루만져 보았다. 물론 키스를 바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집까지 바래다 주는 맛도 괜찮은걸. 이렇게
외롭게 있으니 함께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며칠 사이에 변화가 많았다. 어젠느 트레버와의 미래를 꿈꾸었는데, 오늘
밤엔 제 각기 새 애인과 저녁을 먹으러 나갔고...
제시카는 버니의 할머니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흐뭇한 노란 불빛 속에서
에메랄드는 초록빛 불꽃을 일렁거렸고 다이아몬드는 반짝반짝 빛났다. 트레
버는 예비신부에게 어떤 반지를 주었을까? 그 반지엔 카일이 준 반지의 의
미보다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을 테지.
아무 의미도 없이 다른 사람과 약혼하느니 카일과 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적어도 그에겐 유머 감각이 있으니까. 그가 너무 엉뚱해서 함께 일을 벌여
놓은 것이 걱정됐다. 보통 엉뚱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겠는
가.
그런 우수꽝스런 면이 카일의 큰 단점이자 가장 큰 매력이다. 그리고 그
미소. 전에는 그가 미소짓는 게 그렇게 근사한 줄 왜 몰랐을까?
"거기에 홀딱 넘어가선 안돼!"
그녀는 굳게 다짐했다.
다음날 오후, 제시카는 턱시도를 고르러 카일과 외출했으나 쉬운 일이 아
니었다.
"이렇게 훼방을 놓으면 일이 늦어진다는 걸 당신도 잘 알잖소."
카일은 백화점 근처에 차를 세우며 투덜거렸다.
"아직 프로그램을 못 고쳐서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단 말이오."
"맘대로 하세요. 토요일 밤까지 턱시도를 준비해야 해요. 만약 소프텍과의
모든 거래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요."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일하라고 다시 달달 볶을 거 아니오? 사양하겠소. 지난밤 차라리 당
신과 커피를 마실 걸 그랬소. 일 하나 못하고 깜박 잠이 들었다가 악몽을
꾸었소."
"무슨 악몽이오? 커다란 펠리시티 청구서거나 아니면 프로그램에 나타난
벌레 꿈이겠죠."
"둘 다 아니오. 불에 탄 바나나가 쫓아오는 꿈이었소."
그는 차를 빙 돌아 그녀 쪽의 문을 열어 주었다.
"아무튼 왜 이런 곳에 와야 하는지 모르겠소. 대여점은 시내에도 많은데.
열 군대도 넘을 거요."
"옷 매무새가 틀리죠. 원래는 양복점에 가서 당신에게 딱 맞는 턱시도를
맞춰야 하지만..."
카일은 지겨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요. 게다가 한두 번 입을 옷에 비싼 돈을 치를 형편도
안되고요."
"두 번? 파티 말고도 또 입을 일이 있다는 거요?"
"남자들 세계에선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이해가 안되오. 일이 중요한 것과 제비처럼 쭉 뽑아 입는 게 무슨 관계가
있소?"
제시카는 카일의 투정을 무시하기 마음먹었다.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그가
도망치지는 못할 테니까.
"하고 많은 대여점 중에서 굳이 여기로 온 이유는 점원들이 옷이 잘 맞는
지 많이 신경을 써주기 때문이에요. 시간과 돈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충분
해요."
가게 안에서 카일은 턱시도를 둘러보았다. 모자까지 갖춘 새하안 양복을
보더니 팔꿈치로 툭 쳤다. 옷깃에는 금속장식이 번쩍였고, 바지에는 공단으
로 수가 놓여 있었다.
"제스..."
"절대 안돼요!"
카일의 눈동자가 경고의 빛을 띠었다. 그녀가 깜빡 잊고 목소리를 높인 것
이다. 어째서 그의 그물에 걸려들었을까?
그가 애원조로 말했다.
"날 돋보이게 하고 싶으면..."
"은장식은 안돼요. 나한테 맡기세요."
그는 고분고분해졌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소? 많은 남자들이 정장을 살 때면 당신을 이리로
데려왔었나 보군."
"틀렸어요."
"그래? 엄선해서 그 중 몇몇 하고만 왔다는 거요? 질투를 해야 하나? 아무
튼 현재는 ㅏ와 약혼중이니까..."
"쓸데없는 시간 낭비 마세요, 카일."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슬슬 실습을 해야 하잖소. 약혼자가 뭘 원하는지에 관해선 깜깜해도, 질
투하는 게 좀더 그럴 듯하단 걸 알고 있소."
"완벽하게 연기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어요. 하지만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느라 또 두통을 앓게 하느니 차라리 하지 마세요."
"또 두통이라고 했소? 가엾어라. 이곳은 어떻게 알았소?"
제시카는 카일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알았다. 이 연극이 끝나기 전
에 카일 선더스에 관해 확실히 알게 되리라.
"몇 년 전 학교 졸업반 때요. 파티에 입고 갈 정장을 이곳에서 급하게 빌
렸죠."
카일은 두 걸음 물러서서 신중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애써 아무렇
지도 않은 척했다. 전에도 많이 겪은 일인걸! 하지만 이번엔 아주 신경이
쓰였다. 카일의 눈길이 섹시해서가 아니다. 다른 남자들이 쳐다볼 땐 이렇
게 자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사실 그의 눈길
엔 호기심이 가득할 뿐이었다. 복잡한 수학문제를 풀려는 것처럼.
"그 옷이 보고 싶소."
그 말은 아주 평범했지만 목소리에는 뭔가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것이 담
겨 있었다.
판매원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녀는 제시카가 원하는 걸 얘기하자 길에
늘어서 있는 마네킹을 지나 탈의실로 안내했다. 제시카는 초조해하며 탈의
실 밖에서 기다렸다. 저 끔찍한 암갈색 공단 칼라가 달린 턱시도를 고르면
어떡한담! 카일이 농담하는 소리, 판매원이 강하게 권하며 알랑거리는 소리
들이 희미하게 들렸다. 제발 판매원의 아첨에 넘어가 내가 골라 준 검정 정
장 대신 연두색 옷을 입고 나오진 말아야 할 텐데.
가게문이 열리더니 어떤 젊은 여사가 급히 들어와 두리번거리다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안 늦은 것 같군."
여자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연한 크림색 턱시도가 진열된 아동 매장으로 갔
다. 그녀는 내내 주위를 맴돌더니 거울에 비친 제시카를 보고는 딱 멈춰섰
다.
"맙소사, 제시카 베닝턴 아냐!"
제시카는 한숨을 누르고는 암갈색 턱시도 뒤에서 걸어 나왔다.
"안녕, 슬로운."
슬로운 엘리어트는 챙이 넓은 검정 모자를 한쪽으로 젖혔다.
"오랜만이야, 제시카 버닝턴. 몇 년 만이야? 어디에 있었어?"
"여기저기."
그녀는 툴숍 소프트웨어에 관해선 아주 무관심했다.
"너는?"
"오, 너무너무 근사해..., 열흘 후에 결혼할 거야. 그래서 여기 온 거야.
신랑 들러리의 엄마를 만나서 치수를 다시 재려고. 쌍둥이거든. 걔들 때문
에 얼마나 속상한 줄 아니? 너무 빨리 자라서 세 번이나 가봉을 다시 했어.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하지만. 걔들은 정말 완벽할 거야. 내 신랑하고 잘
어울려. 아직 시내에 살면 내 들러리 좀 부탁하고 싶은데..."
믿을 순 없었지만 슬로운은 호의를 갖고 그러는 걸 것이다. 그들은 졸업반
시절부터 알았으나 가깝지는 않았다.
"네 검은 머리는 미리 정해 놓은 여섯 명과 잘 어울릴거야. 하지만 다른
문제가 좀... 그래, 네가 알아서 하는게 낫겠어."
제시카는 얼굴이 굳었다. 그녀가 형편이 어려워 들러리 경비를 댈 수 없다
는 걸 훤히 알고 잇는 것이다. 남자 들러리와 어울리는지, 그리고 머리칼
색까지 따지고 있으니, 세상에!
할머니가 곁에 안 계신 게 다행이다. 이렇게 모욕당한 걸 알면 기절초풍을
하셨을 거다. 적어도 그녀가 적인지 친구인지는 판단이 되었다. 애초부터
슬로운이 그런 줄은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도 네가 그런 일 당한 걸 모르더라. 그런데 마네킹 뒤에 숨어서 뭘
하고 있었니?"
제시카가 슬로운의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탈의실 문이 열리고 카일이 나타
났다. 검은 턱시도에 바지와 양말만 걸친채로.
슬로운은 숨을 멈추었다.
제시카는 머리가 조금 맑아진 것 같았다. 어제 그의 품에 안겨 울 때도 느
끼긴 했지만 그의 몸매는 정말 근육질이었다. 검게 그은 피부에 강하고 넓
은 어깨에서 가는 엉덩이에 이르기까지 탄탄했다.
정말 기대 밖이었다!
"제스, 한번 봐주겠소? 오, 미안하오. 당신 친구요?"
카일은 반쯤 벗은 차림으로 슬로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음, 제시카가 당신을 기다리느라 서성거렸군요!"
"그녀는 날 사랑하고 존중하니까 옷가게에서 기다리는 것쯤은 당연하죠.
그게 바로 결혼이 순조롭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제시카는 소리치고 싶었다. 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거죠? 뭐하러 슬로운에
게 가장무도회 얘기를 해요?
슬로운은 깜짝 놀랐다.
"결혼했니?"
"아직이오. 그건 내 책임이 아니죠."
이제 서로 도울 차례다.
"슬로운, 내 약혼자 카일 선더스를 소개할게."
그런 말을 해보니 재미있었다. 마치 소다수를 먹을 때 톡 쏘는 것처럼.
"카일, 이쪽은 슬로운 엘리어트예요. 학교 동창이죠."
슬로운은 가격을 매기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카일의 사회적인 지위
가 어떨지 가늠하느라 애썼다.
"선ㄷ스라고? 믿어지지 않는데..."
슬로운이 더 말하기 전에 제시키는 카일의 팔짱을 끼고 수줍은 듯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아무리 그래도 말을 그렇게 해서야 되겠어요, 달링? 가게에서 날 기다리
게 만든 사람은 당신뿐이라고요."
카일은 싱긋 웃었다.
"우리가 결혼하기만 하면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든 당신을 기다려 주겠소.
"
그는 그녀를 좀더 가까이 끌어당기고는 관자놀이에 키스했다.
거의 벌거벗은 그의 가슴의 온기가 그녀의 팔에 느껴졌다. 부드러운 피부,
은은한 비누향, 얼굴에 스친 입술의 감촉이 제시카의 몸을 뜨겁게 달구었
다. 그녀는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그의 팔에 매달렸다.
카일이 킥킥거리며 다른 팔로 그녀를 감사안았다.
"제스, 사람들이 보잖소. 할머니의 말씀을 기억하오, 달링?"
"오, 제발 내 앞에서 애정 표현은 그만 좀 해라. 널 제스라고 부르게 하는
걸 보니 사랑에 빠진 게 틀림없구나. 저기 친구가 있어서 그만 가볼게, 제
시카."
"결혼식이 언제라고 했죠?"
"열흘 후에요."
"아, 이걸 어쩌지? 제스와 난 그 주말에 약속이 있어서요."
"유감이군요. 기대했었는데."
슬로운은 방금 막 들어온 여자한테 급히 가버렸다.
"멋진 사람들을 많이 아는군, 베닝턴 양." 카일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시카는 잠시 이성을 잃었는지 얼굴이 빨개졌다. 슬로운의 행동이 너무
지나쳐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카일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비난을 하
겠는가. 그녀는 화를 꾹 삼키고 담담하게 물었다.
"뭘 봐줄까요, 카일?"
"아무것도 없소. 일이 더 나빠지기 전에 여기서 나갑시다."
"그래요. 그런 생각을 하다니 고맙군요, 카일. 하지만 날 구해 줄 필요는
없어요."
"오, 당신을 구해 주려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조심하려는 거요. 이렇게
차려입고 그 하이에나가 결혼한다는 걸 보고 싶지 않소."
"그렇게 반만 차려 입고서요?"
카일은 자신이 뭘 입고 뭘 안 입었는지 점검하기 위해 옷매무새를 살폈다.
"제스, 이런 차림을 한 나를 보는 게 역겨운 모양이군."
"천만에요. 반쯤 벗은 채로 활보하는 남자들을 보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요!"
"정말이오? 기억해 두겠소."
그는 다시 탈의실로 사려져 버렸다.
20분 후,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땐 또다시 청바지 차림이었다. 턱시도는 판
매원의 팔에 걸쳐져 있었다. 제시카는 옷이 맞는지 안 맞는지 참견하지 않
았다. 만일 일이 잘못돼도 그건 카일 탓이다.
그들은 아무 말도 않고 툴숍 사무실로 돌아왔다.
마침내 카일이 사과했다.
"제스, 끼어들어서 미안하오. 당신에 대해 헐뜯는 말을 듣자..."
제시카는 똑바로 앞만 바라보았다.
"맞아요, 하지만 내가 먼저 등을 돌렸기 때문이에요."
"그들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소?"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카일은 툴숍 건물 뒤에 차를 주차시켰다.
제시카가 차에서 내릴 때, 카일이 처음 들어 보는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
다.
"진짜 친구는 등을 돌리게 하지 않아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카일은 이해했다. 그래서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제 4 장 끝...
.
Harlequin Books '96
┌───────┐
│ 결 혼 소 동 │
└───────┘
리 마이클스 지음 / 김은정 옮김
제 5 장
클레멘타인 베닝턴은 항상 여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검정 드레스 한 벌쯤
은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제시카에게는 할머니의 장례식 때만 입
고 한 번도 입은적이 없는 드레스가 한 벌 있었다. 트위드 재킷과 검은 모
자가 한 세트로 된 옷이다.
토요일 밤, 제시카는 드레스를 꺼내면서, 카일이 쓰라고 주는 돈을 거절한
것을 잠시 후회했다. 새 드레스는 이제 불가능한 일이니, 용기를 갖고 오늘
밤 월터 와이어트의 미션힐 저택을 방문하는 거다.
월터 와이어트를 감동시킬 만한 옷이라면 그들의 능력으론 도저히 불가능
했다. 요즈음 버니한테 얻은 돈으로 흥청거리기는 했지만 그건 한푼도 공짜
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카일처럼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고 제품의 질은 유행보가 낫다. 운만 좋
으면 그녀의 드레스가 유행에 두지는 줄 아무도 모를 수도 있다. 만일 눈치
채도 그녀가 괴짜 베닝턴인 줄 알 테지. 가난뱅이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할
것이다.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카일이 너무 일찍 왔다. 얼른 지퍼를
올렸지만 허리 부근에서 딱 걸렸다.
"잠깐만요!"
전면거울을 준비하는 건데... 또 후회가 되었다. 그녀는 좀더 지퍼와 씨름
을 해보다가 포기하고 문을 열었다.
카일을 팔짱을 낀 채 현관의 난간에 기대서 있었다. 그는 정장차림인데도
편안해 보였다.
제시카는 그가 침착한 게 부러웠다. 클레멘타인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차
분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이 상황에선 그 가르침이 허사였다.
그가 발길을 옮기며 머리를 만졌다.
"저, 어떻소?"
그도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걸 보자 제시카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
졌다. 그녀는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았다. 고수머리가 차분해졌
고, 구두는 거울처럼 빛났다.
"근사해요. 그 대여점이 해냈군요."
"그렇소."
그는 부드럽게 칼라를 잡아당겼다.
"판매원이 나비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 주느라 늦게까지 고생했소."
그는 여유있게 그녀를 훑어보다 끈이 흘러내려 훤히 드러난 어깨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이윽고 스타킹을 신은 발끝까지 살피더니 말했다.
"당신한테도 칭찬을 해야 될 텐데, 이런 말을 해도 되겠소? 약간 흐트러져
보이는데..."
"알려 줘서 고맙군요."
그녀는 비아냥거리며 돌아섰다.
"이것 좀 도와주시겠어요?"
"목이 근사해서 어깨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군..."
"지퍼나 올려 주세요, 선더스."
"새 스타일을 유행시킬 것 같군."
그는 손가락 끝으로 넌지시 드레스 자락 밑을 가리켰다.
"오, 지퍼가 뜨겁군. 드레스도 따뜻한데 뭘 하고 있었던 거요, 제스?"
제시카는 간질이는 그의 손길을 밀쳐 버렸다.
"주름이 지잖아요. 아직 안됐어요?"
"얼른 하겠소."
그녀는 어깨 너머로 그를 살폈다.
카일이 싱긋 웃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등을 활짝 열어젖히겠소."
그가 지퍼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그녀는 어마어마한 인내력을 발휘했다. 그
의 손끝이 스치는 곳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손길이 사라졌는데도 감각
은 여전히 남았다.
마침내 지퍼가 다 올라가자 제시카는 그에게서 떨어져, 통이 좁은 스커트
에 손을 대고 검정 하이힐을 신었다. 높은 구두를 신었어도 머리가 카일의
귀 근처밖에 안닿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재미있게도 전에 그와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자신이 자그마하고 연약하
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가 요 몇 주만에 우쑥 커버린 것도 아닐 텐데...
정장을 입어서 인상이 확 바뀐 걸까? 카일 때문에 아파트가 꽉 찬 느낌이었
다.
물건이 많아서가 아니라, 방이 너무 작아 얼마 안되는 살림살이가 혼잡해
보였다. 방 한편에는 침대 겸 소파가 베개와 함께 놓여 있고, 벽 끝에는 좁
은 부엌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옷장 만한 욕실이 이 방의 전부였다.
카일은 훌륭한 가구들을 보고 아주 재미있어했다. 골동품인 흑단빛 장식장
은 클레멘타인 할머니의 것이었다. 윗부분에는 다양한 색깔과 무늬가 아로
새겨져 있고, 손으로 깎은 문짝엔 몇 개의 장식이 붙어 있어 원 소유자의
안목을 느끼게 한다.
"정말 굉장한 가구요."
"집안이 망하고 나서 몇 개 남지 않은 가구 중 하나에요."
제시카는 서랍을 열고 전에는 케이크를 담았던 플라스틱 그릇을 커냈다.
그녀는 뚜껑을 열고 진주 목걸이를 꺼내어 손바닥에 놓았다.
"멋진 목걸이요. 하지만 베닝턴 사람들은 보석함을 못믿는 모양이군."
"싸구려 아파트에 자물쇠도 신통치 않으면 뭐든지 조심해야죠. 도둑이 맨
먼저 노리는 게 뭐겠어요?"
"진주 목걸이 같은 건 가져 본 적이 없어 모르겠소."
"값진 것은 늘 별 볼일 없는 곳에 두세요. 그래야 도둑이 그냥 지나치거든
요."
제시카는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었다.
"우리 일이 수포로 돌아가며 이걸 저당 잡혀야겠어요. 진짜거든요."
그는 아무 대답도 안했다. 대신에 느긋하게 물었다.
"그렇게 값진 거라면 왜 아직까지 갖고 있었소?"
그런 얘길 꺼낸 게 후회가 됐다.
"엄마의 것이었으니까요. 열여섯 살 생일 받았는데, 그땐 위대한 베닝턴
가문이 몰락할 줄은 꿈도 꾸지 못했죠. 이 목걸이는 엄마의 유일한 유품이
에요."
마지막 말이 목이 메었다.
카일이 그녀의 뺨에 손을 대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당신 어머니의 유품을 저당 잡히진 않겠소."
그가 이해해 주는 게 고마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된 것 같아요."
그녀는 문에 걸린 코트를 잡으며 말했다.
"이건 저녁 만찬 파티장에 입고 갈 만한 옷이 아니니까 차 안에 둬야겠어
요. 여기로 이사올 때 옷을 둘 공간이 없어 옷을 싹 정리했거든요. 검은색
벨벳 망토나 털 목도리, 흰 공단 장갑은 쓸모 없을 줄 알고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카일은 아무 대답도 안했다. 단지 다시 한번 칭찬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풍스런 테이블보가 덮인 탁자 위에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의 눈길이 멈추었다.
제시카는 처음 보는 방인 듯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카펫은 얼룩이 졌
고, 벽지를 오래되어 색이 바랬다. 수도꼭지는 지난 주말부터 새기 시작했
는데 집주인이 아직까지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슬퍼 보이지 않아요?"
카일은 그녀 손에서 코트를 받아들고는 입혀 주었다.
"나에겐 용감해 보이오."
제시카가 놀라서 어깨 너머로 살펴보며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팔을 잡고 문을 잠근 뒤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 바로 맞은편 거리에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흰색 포르셰가 서
있었다. 카일은 곧장 그곳으로 걸어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제시카는 너무 놀라 길가에 멈춰섰다.
"그 포르셰는 어디에서 났어요, 카일?"
"근사하지 않소? 버니 거요. 당신이 흰 차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부탁한
거요..."
제시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버니가 이 차를 빌려줬다고요?"
요즘 포르셰 값이 얼마나 하는지는 몰라도 이 차가 새 모델에 최상급인 것
은 확실하다.
"왜 아니겠소? 그는 군함도 가지고 있는데, 파란색이라 당신과는 어울릴
것 같지가 않았소."
제시카는 거의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버니를 만나야겠어요."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소, 소개해 주겠소. 그도 기꺼이 만나 줄 거요. 여자라면 늘 양옆에 끼
고 사니까. 당신에게 소개할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는 으스대며 그녀에게 차문을 열어 주었다.
가죽의자에 몸을 싣는 순간 손에 부드럽고 따뜻한 털같은 게 잡혔다. 놀라
서 비명을 지르고 보니 옆자리에 모피코트가 놓여 있었다.
"버니의 여자친구가 놓고 간 모양이오."
카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손님용 옷장에서 꺼낸 건데, 버니 말이 당신이 유용하게 쓸 것 같다고 했
소."
빨간 공단으로 끝을 박은 검은 양가죽 외투였다. 제시카는 어깨에 걸쳐 보
았다.
"이걸 놓고 가다니, 미친 모양이군요."
"급하게 떠난 모양이오. 버니가 커피를 던져서 그랬다는 것 같기도 하고."
"커피를요? 전 그를 안 만나는 게 낫겠어요."
"그게 그 사람 단점이오. 솔직히 말하면 그는 당신 타입이 아니오. 물론
당신 하기 나름이지만, 제스."
차가 너무나도 조용히 미끄러져 나가 차를 탄 느낌이 안 들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승차감과 어깨에 걸친 따뜻한 모피의 촉감을 즐기기 위해 몸을 의
자 깊숙이 파묻었다. 외투에서 향기가 좋은 향수 냄새가 살짝 풍겼다. 그녀
가 쓰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그 여자를 아세요?"
"누구 말이오? 버니의 여자친구? 모르요. 그들 뒤꽁무니를 쫓을 형편도 아
니잖소. 빨강머리 여자가 입었던 것도 같지만..."
카일은 재미없다는 투로 말했다.
"베닝턴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살았다고 하지 않았소?"
포르셰가 너무 부드럽게 달려가 벌써 워드 파크웨이에 도착한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곳은 사람의 통행이 많았고, 차량들 뒤편으로 넓고 고풍스
런 저택들이 보기 좋게 늘어서 있었다. 집집마다 넓은 정원에 분수와 조각
들이 꾸며져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근사하군. 적어도 조용하긴 하겠어."
"그런 것 같군요. 돌라 만든 집에다 벽들은 두꺼우니 잡음이 전혀 안 들릴
거예요."
"이젠 당신 아파트에도 익숙할 때가 되지 않았소?"
"거기로 곧장 이사를 갔다면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몇년간 학교에 있었
고, 그 다음엔 할머니랑 살았거든요. 아, 저기예요."
포르셰는 천천히 달렸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그곳을 지나치고 말았다.
"동네나 한바퀴 둘러보겠소? 시간이 좀 남았소."
"그럴 필요 없어요."
그는 포르셰의 방향 지시등을 켰다.
"음, 나는 좀 둘러보고 싶소."
제시카는 흘끗 그 저택을 바라보곤 눈길을 돌렸다. 비스듬한 유리창은 다
이아몬드처럼 빛났고, 높은 철문은 주인을 기다리는 듯 열려 있었다. 벽돌
과 돌로 불규칙하게 쌓은 건물 외관이 대문 기둥에 달린 노란 불빛 속에 어
렴풋이 드러났다. 차가 스스로 지나가자 낙엽이 차도로 뿔뿔이 흩어졌다.
클레멘타인이 거실 유리창 밑에 키우던 장미덩굴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저택은 동네에서 제일 크진 않았지만 경사진 지붕과 현관 기둥을 덮은
담쟁이 덩굴 때문에 더욱 견고하고 유서가 깊어 보였다.
"훌륭하오."
카일이 공원도로 쪽으로 차를 돌리며 말했다.
"아주 멋지군."
"그래요, 전에도 늘 그랬죠."
제시카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졌다.
"새 주인이 어떻게 꾸며 놨는지 모르겠군요."
그가 미심쩍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집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거요, 제스? 하나도 그립지 않아서요? 아니
면 너무 그리워서요?"
"그런 건 실례되는 얘기란 걸 모르세요?"
"대개의 사람들은 나를 고집쟁이라고 하오. 자, 어느쪽이오?"
"둘 다 아니에요. 그 집은 과거의 일부일 뿐이에요. 옛날에 사라진 것에
매달릴 이유가 없죠. 그래서 여기에 발걸음도 안했어요."
"바꿔 말하면, 너무 그립다는 얘기로군."
제시카는 포기했다.
"물론 그리워요. 내 말은 기억까지 몽땅 지웠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이제
이런 얘긴 그만 하죠, 카일?"
포르셰는 공원도로를 떠나 캔자스 시의 보석인 미션힐을 향해 서쪽으로 달
렸다.
"왜 할머니랑 살았소?"
잠시 후 카일이 물었다.
"할머니가 아프셨거든요. 아, 그전에요? 내가 세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
어요. 그때 엄마가 날 외갓집에 데리고 가셨어요.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시
자 할머니와 산 거죠."
"아버지하고 안 살고?"
"음, 부모님이 이혼한 뒤 거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죠. 열두 살 때였는
데, 낯선 사람한테 간다는 게 너무 싫었거든요."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포르셰가 좁고 바람 부는 길을 벗
어나 멋진 차량들을 즐비하게 세워 놓는 보호구역으로 접어들었다.
"여기로군."
이상하게도 카일의 숨가뿐 목소리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긴장이 되면
평상시보다 더 조심했다. 그러면 일이 잘 해결됐다.
여긴 내 구역인데,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곳엔 그녀가 알던 사람들이
살았다. 예산ㄹ에 불이 났던 집, 우박이 떨어졌던 집, 전부 생각이 났다.
"이제 잘될 거예요."
그녀는 자신에게, 그리고 카일에게 말했다.
그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주었다. 제시카는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
렸다. 그런데 카일이 뒤로 물러서지 않아 그녀는 차와 카일 사이에서 샌드
위치가 되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워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차 안에서 나오는 불빛과 그의 머리 위에서 어렴풋이 빛나는 달빛
을 빼고는 깜깜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의 눈 속에 비친 표정을 읽을 수
는 없었지만 뭔가 기다리는 듯한 고요함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속삭였다.
"행운을 비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지그시 누르는 그의 입술은 나비가 숨을 쉬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그래서
립스틱이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제시카는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어지러웠
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기 때문이야. 이래야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을 거야. 카일이 생각보다 불안한가 보다.
그는 그녀와 팔짱을 끼고 월터 와이어트 저택으로 걸어올라갔다. 잘 다듬
어진 정원과 수영장 사이에 있는 정자를 지나 커다란 현관문에 다다랐다.
저택은 현대식으로 디자인되었다. 어마어마한 거실에 난 커다란 창을 통해
이미 파티가 시작된 게 보였다. 카일이 벨을 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흰색 타이에 연미복을 입은 집사가 문을 열고 거만하게 살펴보았다.
카일은 악수를 하는 대신 자신의 이름을 댔다.
"와이어트 씨는 거실에서 접대중이십니다."
거실은 얿게 쭉 뻗어 있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제시카는 실업계의
거물인 그를 쉽게 알아보았다. 어젯밤 잡지에서 사진과 프로필을 자세히 공
부한 덕분이었다. 실물이 좀더 나이 들어 보였다. 아직도 잘생긴 인물이었
으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졌고, 머리칼은 하얗게 세었다. 몸집은 사진에서
보다 약해 보였고 작달막했다.
그는 손에 칵테일 잔을 들고서 통나무가 타닥거리며 밝게 타고 있는 벽난
로 곁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훨씬 젊어 보이는 여자가 새빨간 드레스를
몸에 꽉 끼게 입고는 그의 팔에 기댄 채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여자가 월터 와이어트보다 먼저 그들을 발견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큼 대화에 빠진 게 아닌 모양이다. 그 여자는 제시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눈에 냉소를 띠었다.
제시카는 턱을 약간 치켜들었다.
그 여자는 살짝 미소지으며 시선을 돌려 카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월터 와이터가 뭐라 말해도 금발머리 여자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뭘 보는
지 눈길을 쫓았다.
"당신이 선더스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월터 와이어트는 금발머리 여자한테 말했다.
"이분이 내가 말하던 사람이야, 로나. 컴퓨터 천재지."
금발 머리 여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손을 내밀었다.
"전 홀딱 반했어요."
그녀는 느긋하게 말했다.
"나에게는 몽땅 말해 주셔야 해요."
"오늘밤은 안돼."
월터 와이어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빈 잔을 지나가는 웨이터의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은 맘껏 즐기러 오신 거야, 로나."
"누가 즐기지 말랬나요?"
여자가 중얼거렸다.
월터 와이어트는 그 여자를 무시하고 제시카에게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
가 가까이 다가서자 아까 마시던 스카치 냄새가 풍겼다.
"여긴 제 약혼녀입니다. 와이어트 씨. 제시카 베닝턴이에요."
월터 와이어트는 홀짝 미소지었다.
"약혼녀라고? 아내가 아니고? 태평도 하군. 젊은 양반."
그가 손에 힘을 주었다. 제시카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직 결혼은 안했습니다. 하지만 제스가 날을 정하기만 기다리고 있죠.
제 맘 같았으면 벌써 했을 겁니다."
그 말은 진지하게 들렸지만 그의 눈만 보면 거짓말인지 알 수 있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땐 눈빛이 흔들리니까. 그러나 지금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
았다. 정확한 진실을 말했으므로.
"그렇게 열심인 이유를 알겠소."
월터 와이어트는 제시카의 얼굴에 홀딱 반한 것 같았다.
"영광스럽게도, 저..."
그는 말을 꺼내다가 멈추었다.
"그렇게 형식적으로 얘기하려니 우습군. 이제부터 제시카라고 부르겠소.
앞으로 훨씬 친하게 지낼 테니. 친구들을 소개하지."
그는 금발머리 여자를 불렀다.
"얘는 내 딸 로나요."
"만나서 기뻐요."
로나가 중얼거렸다.
제시카는 손을 빼고 싶었으나 월터가 놔주지 않았다.
"로나, 두 분을 다음 주말 피크닉에 초대하는 게 어떻겠니?"
"좋아요. 그건 아빠 파티니까,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든 초대할 수 있어요.
"
월터 와이어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내 딸이라니까. 어떻소, 제시카?"
제시카는 카일의 반응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답은 하나였다. 카일이 좀더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려면 이 기회를 저버릴 수가 없다.
"멋진 계획이군요. 아주 기뻐요."
"좋소. 미주리에 있는 별장으로 갈 거요. 편안하게 지낼 거니까, 수영복하
고 간단한 옷가지만 준비해요. 로나, 지도 좀 가지고 오겠니?"
그는 제시카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금요일 저녁에 나랑 같이 차를 타고 가지 않겠소? 같이 가고 싶군."
주말 내내라고? 느낌이 불길해서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며
칠 동안 연극을 한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오, 죄송해요."
그녀는 얼른 대답했다.
"주말 내내인 줄은 몰랐어요. 다른 일이 좀 있거든요."
그녀는 카일이 맞장구를 쳐주길 바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오히려 얼굴을 찡그렸다.
"다른 일이라니?"
제시카는 다음 같아선 발로 차고 싶었으나 월터 와이어트가 여전히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잊었어요? 당신 어머니가 만나고 싶다고 했잖아요."
카일은 얼굴을 폈다.
"오, 아니오, 달링. 그 기념파티는 그 다음주요. 피크닉 때는 와전 자유
요."
제시카는 기가 막혔다. 일부러 파티 초대를 거절하려고 한 걸 눈치 못했나
?
"됐소! 아주 재미있을 거요. 오늘밤 새 손님을 너무 독차지하면 안될 것
같군."
제시카는 손이 해방되자 안도의 한숨을 감추려고 애썼다. 이제 카일을 1초
도 혼자 내버려 둬선 안된다.
"모두에게 소개하겠소."
월터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름을 너무 빨리
대는 바람에 기억할 수가 없었다.
여자들 중 하나가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지가 무척 아름답네요. 요즘엔 그렇게 고풍스럽게 세공된 에메랄드를
보기 힘들어요. 특히나 젊은 여자들은 별로 안 끼거든요."
제시카는 에메랄드를 보며 월터에게 감사했다. 왼손을 잡지 않은 게 얼마
나 다행한 일인가? 안 그랬으면 그의 손에서 반지 낀 손가락이 잘렸을 것이
다.
"집안 소장품이거든요."
그녀는 하나도 안 떨고 대답했다.
"약혼자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내려온 거로군요?"
월터가 물었다.
"대부분의 젊은 여자들은 자기가 가질 반지를 더 좋아하잖소? 그가 그 반
지 하나만 갖고 있었다면 모를까..."
그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를 데리고 가, 한 남자의 어깨에 커다란 손
을 올려놓았다.
"여기 인사해야 할 사람이 또 있소, 제시카. 내 친한 친구인데, 중역실 임
원이요. 프레드 잭슨, 제시카 베닝턴이네. 제시카는 내가 말한 컴퓨터 도사
랑 같이 왔지."
월터는 큰 소리로 웃었다.
"실은 그와 약혼중이지만 시간낭비란 걸 깨닫게 해주겠네."
잭슨은 미소를 띤 얼굴로 사람들한테서 돌아섰다. 그러나 제시카를 본 순
간 미소는 사라지고 눈썹이 찡그려졌다. 제시카는 심정이 얼어붙는 것 같았
다. 마지막으로 소개받은 남자는 트레버 맥킨타일의 사장이었다. 그러나 어
떻게 그녀를 알아봤는지 이해가 안 갔다. 프레드를 생전 본 기억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 트레버와 함께 있는 걸 목격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트레버가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거나.
두 경우 다 불이 붙은 폭탄을 안고 있는 형국이었다. 프레드 잭슨이 그녀
가 트레버와 데이트한 걸 안다면 카일과의 갑작스런 약혼을 믿을 리 없다.
게다가 트레버의 말처럼 냉혹하기까지 하다면...
그녀는 근처에 카일이 있기를 바라며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등을 돌린 채 로나와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혼자 최선을 다해 이 난국을 헤
쳐 나가리라. 그녀는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훨터가 잡고 있
지 않은 너머지 손을.
"당신이 유니온 공업의 프레드 잭슨이신가요?"
그는 우쭐해하면서도 약간 당황했다.
"그렇소. 회사 이름을 어떻게 알았소?"
"명성 때문이죠. 제 친구가 거기서 일하거든요. 트레버 맥킨타일이라고."
월터가 큰 소리로 외쳤다.
"트레버를 아오? 이거 재미있잖소?"
제시카는 왜 그런지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집사가 나타나
월터의 귀에 뭔가 속삭였다. 월터는 곧 실례한다는 말하고 자리를 떴다.
그녀는 카일을 찾아 개인적인 일을 상의하기 위해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
때 프레드 잭슨이 웨이터를 불러 삼페인 잔을 하나 집어들더니 그녀에게 건
네며 말했다.
"컴퓨터 친구와 함께 온 거로군요? 프로그램 짜는 일을 전부 알고 있소?"
그녀는 숨이 탁 막혀 삼페인을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오늘밤은 더이
상 침착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아뇨, 하지만 토스터를 써서 냄새 좋고 맛 좋은 빵을 굽는데 원리를 알
필요는 없잖아요?"
프레드 잭슨은 약간 어리둥절해했다.
카일의 팔이 어깨를 감싸자 그녀는 기쁜 듯 그에게 기댔다.
"제스 째문에 일을 못해요. 아시겠지만 사업상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가끔
쉬는 게 무척 중요하죠. 아까 집에서 떠나기 전에도 제스에게 말했지만요.
드레스의 지퍼를 올려 주면서요."
제시카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 팔굼치로 카일의 옆구리에 일격을 가하고 싶
은 욕구를 애써 참았다. 저 남자가 어떻게 생각할까? 그녀는 프레드를 보며
미소지었다.
"실례 좀 할까요? 카일은 관심을 끌고 싶으면 이렇게 별별 얘기를 다 하
죠. 그런 허튼 소리는 아무도 못 듣게 데리고 나가는 게 상책이에요."
프레드는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시카는 이를 악물고 베란다로 나가는 프랑스풍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생전 처음 듣는 미친 소리로군요!"
"지퍼 얘기 말이오? 사실이잖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구조를 요청하는 것 같았소."
"그렇다면 잘못 짚었어요. 아까 도와줬어야죠!"
"저, 질투하는 척하지 말라고 해서..."
"질투나 허위선전 말고 다른 방법도 많잖아요. 이제 생각하니 결혼하는 것
도 그리 나쁘진 않겠어요. 공식적으로 카일 선더스의 아내가 되면 월터 와
이어트도 날 불쌍한 토끼 몰 듯하진 않겠죠."
"파티에서 날리더군. 그는 당신한테 침을 질질 흘리는 것 같았소. 사장을
흘리는 것도 사업의 일부라면, 떠오르는 샛별이 말한 갖춘 부인이 뭘 의미
하는지 알겠군."
"아무렴 트레버가 그런 걸 의미했겠어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가
얘기하고 있던 사람이 트레버의 사장이에요. 그리고..."
"정말이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제시카는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트레버가 여긴 있어요?"
트레버는 현관과 로비 사이에 서서, 방금 도착했는지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조명이 머리에 비쳐 황금빛으로 빛났다. 로나 와이어트가 그를 맞
으러 천천히 걸어갔다.
제시카는 카일과 팔짱을 끼고 프랑스식 문을 통해 베란다로 나갔다.
"도망가는 거요?"
"아니오, 아직은 만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잠깐만요. 당신은 그를 본
게 놀랍지 않은 것 같은데요."
"조금 전에 봤었소."
"나한테는 말 안했잖아요?"
"얘길 어떻게 하겠소?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잠깐만,
달링, 당신이 끔찍히 사랑하는 남자가 왔소.> 하란 말이오?"
제시카는 그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그의 사장이 우리 얘기를 의심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그럴 수만 있다면요."
"물론이오. 최소한 그렇게 되면 그 순간부터 월터 와이어트 걱정은 끝이잖
소?"
제시카는 절망스러워 낮게 소리쳤다.
"제스, 제스. 당신은 뭐든 잘해 나갈 수 있소. 얼른 다시 최선을 다해 봅
시다."
제시카는 턱을 쳐들었다.
"이 난리통에 뭘 어떻게 하려고요?"
"저, 당신이 물어 봤으니까..."
그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갑자기 끌어당겼다. 제시카는 너무 놀
라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뭘 하는..."
그녀가 미처 묻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다가왔고, 그는 당연하다는 듯 키스
했다. 그녀는 몸을 지탱할 기력마저 잃고 말았다. 중심을 잃고 기우뚱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카일이 키스를 멈추자 뭔가 아쉬웠다.
그는 아쉬운 듯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가 계속해서 키스를 하려고 했을 때 제시카의 등뒤에서 월터가 말했다.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안 보인는군, 젊은이."
키일은 그녀에게 부드럽게 키스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눈길은 계속
제시카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멍하게 매달려 있었다.
카일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축하를 하고 있어요. 제스가 마음을 바꿨답니다. 가능한 한 얼른 결
혼하자고 하는군요."
제시카는 심장이 딱 멎는 것 같았다.
"벌써 서류도 준비해 뒀거든요..."
카일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놀라 새된 소리를 내었다. 카일이 경고조로 어깨에 올려놓은 손에
힘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열광하듯 다시 물었다.
"그래요?"
"그렇소."
카일은 사랑스럽게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니 기다릴 게 전혀 없소."
제 5 장 끝...
.
Harlequin Books '96
┌───────┐
│ 결 혼 소 동 │
└───────┘
리 마이클스 지음 / 김은정 옮김
제 6 장
"저, 기분좋은 계획 아니에요?"
로나가 점잔을 빼며 말했다.
"주말에 호수에서 자유롭게 신혼여행을 보내다니요. 다른 사람들은 분명
이르다고 하겠지만요."
제시카를 바라보는 폼이 누구 얘긴지 뻔했다.
제시카는 아직도 머리가 혼란스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리 앞에 남은 인생 자체가 신혼여행이 될 거요."
카일은 제시카를 보고 미소지으며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입술을 애무했다.
제시카는 그걸 꽉 물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클레메타인이 가르친 것이
어디 가겠는가? 자제심을 유지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으리라.
"아빠, 이제 우리 모두 파티에 참석해야죠? 그런 사소한 얘기는 끝내고요.
"
월터는 제시카를 외면했다.
"그래, 물론이지, 얘야. 모두 모이시오."
그는 거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러나 마음은 발표하는 게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모두들 베란다를 떠났다. 제시카는 자신이 계속 카일의 품안에 있는 걸 알
고는 깜짝 놀랐다. 그가 너무 세게 안는 바람에 갈비뼈 부근에 그의 양복
단추 자국이 움푹 새겨졌다. 그녀는 몸을 빼내고 그를 구석으로 밀쳐 버렸
다.
"대체 무슨 짓이에요?"
"트레버 걱정을 하는 것 같아서 이게 최상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소. 아까
당신이 결혼도 과히 나쁘진 않을 것 같다고 하길래..."
"그렇긴 하지만 서류까지 들먹일 건 없잖아요!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
"지금 갖고 있지는 않소. 하지만..."
"결혼허가증을 증인도 없이 얻을 수는 없어요. 모르세요?"
"그렇긴 하오. 하지만 식은죽 먹기요."
제시카는 작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농담하는 거예요? 아니면 당신이 해결사라도 되는 줄 아세요?"
"그건 버니가 생각해 낸 거요."
"그 사람이 정말 싫어지는군요."
"유감이오. 우리 결혼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좋아요. 더이상 방법이 없군요. 어쩌면 그렇게 나쁘진 않겠어요. 그냥 갖
고 있는 척만 하면 될 테니까요..."
카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우린 벌써 꼬리를 잡혔으니 신중해야 하오."
제시카는 할 수 없이 그가 옳다고 인정했다. 로나만 하더라도 증명서를 꼭
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보니 꼭 초대해 달라고 할 게 뻔했다...
"아무튼 이건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오."
가바기 월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내 사윗감을 소개하겠소. 장차 로나의 남편이 될 트레버 맥킨타일이
오!"
제시카는 자신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졌다.
카일이 손가락을 그녀의 턱 밑에 대고 부드럽게 닫아주었다.
"달링, 할머니께서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 하시겠소?"
"할머니께선 생전에 이런 상황은 꿈도 꾸지 못하셨을 거예요."
트레버가 로나 와이어트와 결혼한다고? 며칠 전에 트레버가 저녁식사 후에
말했었다. 주말에 약혼할 거라고. 가짜 약혼자 곁에 서서 진짜 약혼 발표를
듣다니, 악몽이 따로 없다.
"좀 앉아야겠어요."
"부채질 좀 해야지, 기절할 것 같소."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진지해 보세요, 카일. 우린 이런 우스꽝스런 짓을 할 필요가 없어요. 트레
버는 우리에 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랬다간 자기가 더 곤란해
지거든요. 그러니 그럴 필요가 없죠..."
"그의 사장은 어떻게 하지? 걱정을 많이 했잖소?"
"그래요, 하지만 제가 잘못 짚은 것 같아요. 제 인상이 낯익어 보일 뿐 다
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에요."
"음, 잘못 짚었건 잘 짚었건 이미 늦었소. 다시 마음을 바꿨다고 하면 더
이상할 거요."
"당신이 바꿨다고 하세요."
"당신한테 홀딱 빠졌다고 해놓고서 말이오? 그런 사람을 누가 믿고 일을
맡기겠소?"
그는 그녀르 끌어당겼다.
"자, 살살 걸어 봐요. 행복한 얼굴로 말이오. 하루가 이틀 후엔 결혼하는
거잖소!"
제시카는 파티장 분위기가 갑자기 답답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사람들 사이
를 걸어다니는 일분이 한 시간 같았다. 로나와 트레버에게 축하를 하고 로
나의 왼손에 끼워진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칭찬하고 한 모든 행동들이
꿈결 같았다.
트레버는 눈이 휘둥그레져 제시카를 바라보았으나, 다른 사람들이 축하의
말을 건네며 다가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리를 피했다.
"잘했소."
카일이 다시 사람들 속에 섞이며 중얼거렸다.
"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하셨을 거요."
"아니에요, 역정을 내셨을 거예요. 베닝턴 사람은 이런 야단법석엔 끼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 곧 빠져나올 수 있을 거요. 한두 달이면 모두 끝날 거요."
디저트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트레버가 나타났다. 그는 제시카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뭣 때문에 파티를 끝장내려는 거요?"
"손님으로 초대받았어요."
그녀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저 남자도?"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카일을 가리켰다.
"절 데려온 살마이에요."
"좋소. 재수도 좋게 명단에 끼었나 보군! 이봐요, 제시카. 뭣 때문에 저런
광대와 코미디를 하는 거요? 날 고생시키려는 거람녀..."
카일이 점잖게 말했다.
"내 약혼녀에게 그런 태도로 말하지 마시오."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것 같은데..."
트레버가 빈정거렸다.
"소원이라면." 카일이 되받았다.
제시카는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일에 절대 개입하지 마시오. 알겠소? 둘 다."
트레버는 거친 목소리로 경고하고는 급히 사라졌다.
카일은 케이크 조각을 집어들어 과일 과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맛 좀 보겠소?"
"집에 가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면 트레버는 당신이 도망친 걸로 여길 거요."
"트레버가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에요?"
카일은 웃었다.
"좋소, 월터에게 가서 결혼식 날이 임박해서 할 일이 산더미 같다고 하겠
소. 그를 초대해도 되겠소? 증인이 되어 달라면 어떻겠소?"
제시카는 근처의 숟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건 초코크림이오, 제스."
카일이 일러 주었다.
"할머니는 그런 걸 던지지 못하게 하셨을 거요. 그리고 이건 빌린 옷이잖
소."
그녀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카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월
터를 찾으러 사라졌다.
5분 후, 제시카는 부드러운 베란다 가죽의자에 푹 기댄채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다. 몇 시간 사이에 상황이 확 바뀌어 버려 어안이벙벙했다. 성공
으로 가는 길인 줄 알았는데, 최고 인기 드라마가 되어 버린 꼴이다.
카일이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오?"
"왜라뇨? 난 결혼하기 싫어요."
"날 믿겠소?"
그녀는 그의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성대하고 하얀 결혼식은 끝장이에요. 여자
가 한번 결혼하면, 그게 아무리 순식간에 살짝 치른 거라 해도 다시는..."
"정말 성대한 결혼식을 원하는 거요?"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거예요? 많은 사람드로 가득찬 커다란 성당에서 진
정 사랑하는 사람과 한 손엔 오렌지꽃을 들고 하얀 웨딩드레스를 길게 끌면
서..."
"그 많은 사람들을 어디 가서 초대하려는 거요? 당신 집안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도 목욕탕 만한 크기면 족할거요. 그래도 코끼리 세 마리와 폭스바겐
한 대는 더 들어갈 수 있을 거요."
"그렇게 비아냥거릴 것까진 없어요."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거요. 그리고 그렇게 성대하고 하얀 결
혼식을 올리려면 누가 돌봐 줄 사람이 있어야 할 거 아니오. 그런데 베닝턴
가문에선 당신이 유일한 핏줄 아니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나도 그런 게 좋진 않소. 게다가 당신 손은 누가 잡아주지? 대신 잡아 줄
오빠나 삼촌도 없으니, 당신 계획은..."
"난 아무 계획도 없어요. 설사 그런 계획을 세우더라도 누구한테 부탁하겠
어요? 당신한테나죠."
카일은 허를 찔렸다.
"음, 날 믿어 줘서 고맙소. 하지만 전남편이 아내를 시집 보내는 얘기는
소설에나 나올 법하오."
"맞았어요. 그래서 형식적인 결혼에 크게 기대를 갖지 않는 거예요. 어차
피 제대로 된 남자는 못 만날 것 같으니까요."
"그럴 거요."
그는 긴장한 목소리였다.
"우리 손에 돈이 굴러들어오면 당신을 사귀려고 남자들이 줄을 설 거요.
그들이 당신과 돈 중에서 어느 것에 관심이 있는지 알아내는 게 얼마나 재
미있겠소?"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카일. 우린 이번 주말에 어떻게 하든 모면해야 해
요. 무의미한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바보 같지만 주말 내내 연극을 하는
건..."
"잠깐, 제시."
카일이 갑자기 금속처럼 냉정해졌다.
"지금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소. 애당초 이 연극을 무엇 때문에 했는
지 잊었소?"
그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거미줄에 단단히 걸려 거미에게 잡힌 벌레처럼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그녀는 이성을 잃고 되받았다.
"맙소사, 카일. 제스도 끔찍하지만 제시라고 부르는 건 더 못 듣겠어요."
그는 놀란 듯했다.
"좋소. 당신 말대로 하겠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둘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
제시카는 아파트에 도착하기 전에 말했다.
"우리에겐 또 문제가 생길 거예요."
"내가 그걸 왜 모르겠소."
카일이 중얼거렸다.
"오늘밤 파티는 어쩔 수 없었지만, 주말 내내 즐기자는 월터의 초대는 거
절해야겠어요. 그리고 우리가 접대하는 것도 힘들 것 같아요."
"호적에도 베닝턴이라고 올렸소? 계속해서 당신 성에 대해 생각해 봤소."
"생각할 게 꽤나 없군요. 가령 이 난리법석을 어떻게 해결할지나 생각해
보시죠."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그래요, 가능한 한 빨리요. 이 계획에 관해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도박하
는 것 같아 불안해요, 카일. 오늘밤 월터가 한마디라도 얘길 비쳤나요?"
"물론이오. 인사도 나누고..."
"일에 대해선 아무 말도 없었죠. 당신이 만드는 소프트웨어나 컴퓨터에 관
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잖아요."
"음, 파티였잖소. 한참 파티를 즐기는데 그런 얘길 꺼낼 수 있겠소?"
"그가 나중에 관심없어지면 어떡하죠? 모든 게 일장춘몽으로 끝나면요? 그
양복쟁이들이 당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얘기했으면 어떡해요? 파티는 그저
형식적으로 초대했을 수도..."
"그럼 우리를 왜 별장에 초대했겠소? 조만간 사업에 관해 논의할 것이오.
당장은 태연한 척하는 거요."
제시카는 아무 말도 안했다. 월터처럼 사업에 노련한 사람은 관심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그녀도 깜빡 속아넘어간 것이다.
"아마 주말이 지나서야 그 문제에 관해 얘기하자고 할거요. 진짜 사업은
회의실이 아닌 사교모임에서 결정된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서 우리가 가는
게 중요하다는 거요."
제시카는 항복했다. 월터 와이어트 별장에서 주말을 보내는 게 운명이라니
했다. 이제는 운명에 순종할 차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 성은 베닝턴은 아니잖소?"
이 남자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나? 왜 괜히 남의 성을 갖고 저렇게 물고
늘어지는 걸까?
"물론 제 성이에요."
"하지만 아까는 클레멘타인 베닝턴이 당신 엄마의 어머니라고 했잖소? 그
런데 어떻게 해서..."
"엄마는 이혼 후에 처녀 성을 다시 썼어요. 제 성도 법적으로 바꾸어 버렸
고요."
카일은 휘파람을 불었다.
"깨끗이 정리를 하셨군. 당신 아버지가 딸의 성이 바뀐 걸 알고 얼마나 상
심하셨겠소?"
"거의 10년에 한 번씩 들르시던 분인데요. 그래서 성이 바뀌었다고 말씀도
못 드렸어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어요."
"그럼 아버지 이름은 기억하오?"
"물론이죠. 브라이언 마샬이에요. 가운데에 C가 들어가죠."
"흔하지 않는 성이군."
"그래요."
아파트 정면에 베란다가 보였다.
"난 안 들어가겠소."
"누가 초대한데요."
"할머니가 그렇게 가르치셨소? 당신과 함께 남은 저녁을 보내고 싶지만 할
일이 너무 많소. 우리 결혼을 주례할 판사를 찾아야 하오. 혹시 당신은 성
당에서 하고 싶은 건 아닌지 모르겠군."
"농담이죠? 성당에서 거짓말로 결혼하는 건 정말 양심에 찔려요. 고마워
요."
"그건 가짜가 아니오. 그리고 에메랄드와 잘 어울릴 결혼반지를 준비해야
겠소."
"버니한테 부탁해 소장품 중에 하나를 골라 오세요."
"오, 아니오. 결혼반지들은 버니가 마지막으로 모으게 될 품목이오. 그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체질적으로 싫어해요. 빨강머리한테 커피포트를 던진 것
도 결혼하자고 했기 때문이오."
"그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줄 알았는데요."
"버니가 얘기하는 걸 안 들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몽땅 생각나는군."
"저, 괜찮다면 자세한 얘기는 더 듣고 싶지 않아요. 아, 버니한테 포르셰
를 주말까지 써도 될지 물어 보세요."
"왜? 내 차는 미주리까지 가지 못할 것 같소?"
"월터한테 차에 대해 해명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겠군요."
"언젠가 원형대로 복구시킬 클래식카라고 하면 믿을 것 같지 않소?"
"카일,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얘기를 꾸며댈 수 있을 거예요."
"고맙소."
그는 그녀를 현관까지 바래다 주었다.
"결혼 날짜를 정하는 대로 전화하겠소."
"누가 기다린대요?"
희미한 가로등 불빛 속에서도 카일의 눈 속엔 장난기가 훤했다. 그는 일부
러 목이 쉰 것처럼 꾸몄다.
"나랑 똑같은 생각이오."
"그러니 그때까지 날 붙들어 놓으려면..."
미처 피하거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제시카는 기우뚱하며 정통 할리
우드 영화의 포옹 장면을 연출했다. 중심을 잃고 카일의 품에 안긴 그녀는
완벽하게 당하고 말았다. 그는 느긋하게 그녀의 입술을 탐색했다.
이제 그를 볼 때마다 이 키스가 생각나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그리고 얼
굴이 상기된 신부는 그가 마음속에 그리는 이상형이리라.
카일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전화기 옆에 앉아 열렬히 내 전화를 기다리는 모습을 그리겠소."
그리곤 그는 사라져 버렸다.
월요일 아침이 돼서야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러나 너무 이른 시간에 전
화 벨이 울려 제시카는 겨우 잠을 깼다.
"버니는 판사 한 명쯤 알 거예요."
그녀는 전화기를 집어들자마자 말했다.
"몇 명은 되는 것 같았소. 그런데 판사 친구들이 속도위반으로 걸리는 바
람에 전부 보직이 바뀌었소. 다른 사람을 구해야 될 것 같소. 누가 교통위
반 즉결 재판소에서 결혼하겠소?"
제시카는 하품을 했다.
"그냥 하지 그래요."
"아무튼 다른 판사를 찾았는데, 오후에 결혼 일정을 잡아 놨소. 미리 얘기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일찍 전화하는 거요..."
"아주 고맙군요. 인정도 끔찍이 많으셔라."
"그러려고 하오."
카일이 겸손하게 말했다.
"카일, 굳이 서둘러서 오늘 할 거 있어요?"
"주말까지 기다리면 와이어트 부녀를 증인으로 초대해야 하고..."
"그건 저도 사양하겠어요. 하지만 중요하지도 않은 결혼식 대문에 점심을
포기하란 말이에요?"
"제스, 달링. 식이 끝난 후에 기념으로 회식을 할 계획이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동하는군요."
"점심은 간단히 때울 거요. 소프트웨어를 고쳐서 주말전까지 돌려 봐야 하
오."
"그럼 지금이라도 일을 하셔야죠."
제시카는 냉정히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담요를 밀치고 작은 방을 가로질러 천천히 싱크대로 갔다. 그리고
는 인스턴트 커피를 한잔 타서, 아파트 건물 뒤에 있는 텅 빈 주차장을 내
려다보며 마셨다.
그녀가 꿈꾼 결혼식 날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결혼식이 문제가 아니라,
그녀의 마음 자세가 문제였다. 지난밤 그녀는 결코 정식 결혼을 할 수 없다
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꿈꿨던 결혼식 날이 연극 때문에 사라져 버렸다.
그 아침은 신부 들러디르이 잠옷과 파자마 차림으로 한데 모여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와 함게 시작되리라. 그런 뒤 길고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매니큐
어를 바른 뒤에 미장원에 가리라. 머리손질과 화장을 하고는 미색 공단과
레이스로 몸을 치장하고, 오렌지꽃 부케를 손에 든다. 리무진을 타고 밖에
서 기다리는 신문기자들한테 미소지으며 교회로...
그녀는 눈까풀이 따금거리자 눈을 깜빡거려 눈물을 떨궈 버렸다. 그리고
침울하게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떻게 소녀가 여성이 될 수 있지?"
이미 수년 전에 그런 많은 꿈들을 포기했었다. 그녀는 결혼식을 위해 옷을
준비하며 베닝턴 저택을 그려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이미 10여년 전에 사라
진 과거일 뿐...
그녀가 꿈꾼 다른 장면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연금이 끝나자 함께 사라
져 버렸다. 정교한 꽃과 드레스, 사진에 쓸 돈은 더이상 없었다. 신부 들러
리를 서줄 진정한 친구도 없었다. 그녀는 하나를 잃으면 나머지 하나는 잃
는다는 걸 너무도 빨리 깨달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와 함께 교회 통로를 걸어가 줄 사람이 필요
했다. 사랑과 행복을 비는 마음으로 사윗감을 대할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다.
꿈이 산산조각 난 것도 카일 탓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비난하고 싶지 않
았다.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계획에 임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꿈은 오랫동안 너무 집착했었기 때문에 쉽게 버리기가 힘들었
다. 트레버가 그렇게 몰인정하게 차버리기 전만 해도 그 꿈을 포기하진 않
았었다.
그렇게 채이고 난 지금은 몹시 혼란스럽다. 어떻게 사람을 그리도 잘못 보
았을까? 한 번 잘못 판단했으니 앞으로 나 자신을 어떻게 믿겠는가? 아니,
마음이 가는 데로 다시 믿어도 되는 걸까?
그녀는 커피 찌꺼기를 하수구에 버린 뒤, 초록 정장을 옷장에서 꺼내 놓고
샤워를 하러 갔다.
카일과 치를 그 계획에 좋은 점이 하나 있긴 했다. 그가 돈에 눈이 뒤집하
긴 했지만 적어도 베닝턴 가문의 돈을 노리고 결혼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었다.
제시카는 결혼식 날 점신은 펠리시티에서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카일은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작고 조용한 식당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의자는 색
이 바랜 무명 천을 씌어 놓았고, 메뉴를 몇 가지 안되었다. 판사가 늦게 오
는 바람에 점심시간이 넘어 도착했기 때문에 단골손님만 몇 명 있었다. 펠
리시티보다 훨씬 그들 형편에 마즌 곳이었다 적어도 카일은 이곳이 훨씬 편
안한 모양이었다.
그는 말로는 일하러 가야 한다고 해놓고선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와인을 주문했다.
제시카는 코끝을 스치는 향을 흠뻑 들이마시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
였다.
"조나단 말이 맞았어요. 당신은 아주 빠른 학생이에요."
카일은 잔을 들어올렸다.
"조나단도 초대할 걸 그랬소."
그 지배인이 초대를 받고 나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다.
"참, 버니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요? 판사 사무실에서 만날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이 결혼하는 것도 체질상 못 보는 거예요?"
"당신은 썩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잖소? 오늘 사무실에 나오지 않은 모양이
오."
카일은 약간 딴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후다닥 식을
치르고 나자 얼마나 엉뚱한 짓을 했는지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판사는 둘
을 골똘히 쳐다보더니 몇 마디 했었다. 이제 막 시작된 결혼이 얼마나 신성
하고 중요한지를. 제시카는 등뼈를 타고 얼음덩이가 쭉 미끄리져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은 카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뭘 하는 사람인데요? 버니 말이에요."
"주식시장에서 뭔가 하는 것 같은데, 더는 묻지 말아요."
웨이트리스가 샐러드를 가져오자 카일은 의자에 기대었다.
"요즘엔 직업들이 하도 많으니 어떻게 일일이 알수 있겠소?"
"그래요, 당신 직업도 그 중 하나지만요."
"오, 맞았소. 난 컴퓨터 전문지식을 제공하고 당신은 수완을 부리면 되오.
"
목소리엔 유머가 깃들여 있었으나 눈은 진지했다.
"내가 제대로 말했소?"
"그런 것 같아요."
샐러드는 훌륭했다. 씹을 때마다 아삭아삭했고 맛있는 향기가 풍겼다. 제
시카는 커다란 올리브 조각을 음미하면서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어떤 말을 할까 곰곰히 생각했다.
"좋아요, 카일. 이 모든 게 영원히 계속되진 않을 거예요. 당신도 눈 깜짝
할 사이에 끝날 거라고 했잖아요?"
"곧 끝날 거요."
그는 수긍했으나 마치 마음으론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월터는 꼭 일을 맡길 거예요."
"당신 말이 맞소. 이제 판사 말대로 내 것은 당신 거요."
"카일, 농담 그만 하세요. 일단 이 일을 발을 들여놓았으니 설사 잘못되더
라도..."
"제시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신도 몰랐다.
그들에게 닥친 운명에 관해 우울하게 ㅇ얘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은 걱정할 것 없소."
카일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생애 최고로 맛있는 해물요리를 먹으면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했
다. 그리곤 마침내 수긍했다.
"이상하게 저도 걱정이 안돼요. 내 새로운 삶에 적응이 되려나 봐요. 보금
자리가 생긴 것도 과히 나쁘진 않고요. 월급 문제가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
"앞으로는 일하지 않아도 되오."
"옛날처럼 자선파티나 야외 쇼로 가득 찬 생활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물론 할머니를 탓하는 게 아니에요. 할머니는 그런 일에 훤하셔서 제게 일
러 주셨지만, 전 직업을 갖는 게 훨씬 보람되고 좋아요."
그가 무슨 직업을 갖고 싶냐고 물으려 할 때, 헐랑한 노란색 낙하산복을
입은 여자가 테이블 옆에 멈춰서서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저..."
그녀는 그 한마디로 얘기를 꺼냈다.
제시카는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기억을 뒤져 그 모습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거친 눈썹, 강한 콧날, 약간 구부러진 이, 부스스한 머리카락...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저 검은 눈동자는 꼭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이었지만 두 눈은 다정했다.
클레멘타인 쪽으로 친척 뻘이 되거나 전에 가입했던 수많은 여성클럽 회원
중 한 명이겠지. 그러니 그녀가 누군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이리
라.
"반지가 무척 아름답군요."
제시카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입은 진녹색 정장에 반사되어
오늘 따라 에메랄드의 빛이 더욱 뚜렷했다. 그리고 그 옆에 가늘고 수수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 반지는 둘레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한 빼면 정말 평
범했지만 분명 새것이었다.
클레멘타인의 친구가 당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도저히 소개받지
않고는 궁금해서 못 견딜 것 같았다. 제시카는 이름을 까먹은 게 탄로나지
않길 바랐다.
"제 남편이에요."
제시카는 공손하게 말했다.
카일이 숨이 막힌 듯 신음소리를 냈다. 당황한 제시카가 그를 힐긋 바라보
자 그는 의자를 빼고 일어서서 그 여자의 볼에 키스했다.
"안녕하세요, 리디아."
그 여자가 미소지었다.
"날 기억하는구나, 카일."
"물론이죠."
"이젠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 거란다. 네가 결혼한 얘기를 맨 끝으로 듣게
됐으니.."
"일이 좀 그렇게 됐어요.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서요."
"한나한테 잔소리 좀 해야겠구나. 알리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신혼여행은
방해하지 않겠어. 한나한테 둘이 너무너무 행복해 보이더라고 전할게, 카
일."
"고마워요. 정말 친절하시군요."
카일은 그 여자가 가자마자 자리에 앉아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한나가 누구예요?"
"어머니요."
"그 여자는 당신 어머니의 친구로군요? 난 내가 알던 사람인 줄 알았어요.
"
"제장. 제스, 아까 그런 얘긴 뭐하러 했소?"
제시카가 자존심이 상해 마음이 아팠다. 카일이 나를 창피하게 여기다니!
그녀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어머니가 계시다는 얘기군요? 지금 생각해 보니, 요전 날 파티 때 확실히
물어 봤어야 했어요!"
카일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미안하오, 제스."
그는 테이블 너머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제시카가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어머니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든 신경 안 쓰겠어요. 나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요!"
"내 말을 오래하지 말아요. 이런 식으로 어머니한테 알려 드리고 싶지 않
았던 거요. 그뿐이오."
"리디아가 전화를 걸기 전에 사무실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제시카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 옆으로 가, 그가 계산하기를 기
다렸다. 한나 선더스는 절대 만나지 않으리라. 이 결혼이 영훤한 게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곧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
그런데 왜 이리도 울고 싶은 걸까?
제 6 장 끝...
.
Harlequin Books '96
┌───────┐
│ 결 혼 소 동 │
└───────┘
리 마이클스 지음 / 김은정 옮김
제 7 장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제시카는 카일에게 퍼부어댄 게 두려워졌다. 카일이
평범한 결혼을 한 것도 아닌데 나를 자랑스럽게 집에 데려다 주길 기대했는
가?
사실 그런 복잡한 문제는 전혀 예상 못했다. 툴숍에서 몇 달간 일했지만,
카일이 자신의 집안에 관해선 전혀 말도 꺼내지 않아서 그녀는 카일도 자신
처럼 가까운 친척이 하나도 없는 줄 알았다.
그녀는 사무실에 도착해서 사과하려고 굳게 마음을 먹었으나 이미 한 발
늦었다. 그곳엔 벌써 랜디가 와 있었다. 그는 손을 뒤로 깍지 낀 채 제시카
의 자리에 벌렁 기대 앉아 있었다. 노랫말이 시싷나 록 음악이 소프트웨어
를 복사하는 컴퓨터에서 꽝꽝 울려퍼졌다. 스크린에는 여러 가지 색깔로 된
점을 음악과 함께 쌩쌩 지나갔다.
제시카는 귀를 막았다.
"어제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낼 줄은 몰랐어."
랜디가 싱긋 웃었다.
"대단하지 않아요? 스피커랑 그래픽 기능이 조금만 좋으면 더 크게 할 수
도 있엇요. 있잖아요..."
"랜디, 제시카한테 의자나 돌려주지 그래."
카일은 아직도 그녀에게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전에는 이름을 정확히 불
러 달라고 했지만, 우습게도 지금은 그가 제스라고 불러 주었으면 싶었다.
랜디는 얼른 일어났다.
"오, 미안행. 오후 내내 어디들 가셨어요?"
"결혼하러."
카일이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사무실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다운 행동이로군. 아까는 내가 폭로했다고 신경질을 내더니 이제는 자기
가 폭로를 하고 있어!
물론 이제 비겼다고 하기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랜디는 월터 와이어타나
그 대리인들한테 잘 대답하려면 그 사실을 알아야 하지만, 리디아에겐 좀더
신중하게 대처해야만 했었다.
랜디는 아직도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날 놀리는 거죠?"
제시카는 그에게 왼손을 흔들었다. 에메랄드고 반짝거렸고 결혼 금반지가
살짝 비쳤다.
"정말이군요? 두 분 정말 결혼했어요? 오, 맙소사. 최고예요! 이렇게 빨리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어요. 선물도 준비 못했잖아요. 뭘 선물해야 할지 모
르겠네요.
"그런 건 신경쓰지 마.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랜디는 못 믿는 듯했다.
제시카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생활필수품이 생각났다. 카일이 사무실
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필요해 보였을 것이다.
"음악 좀 꺼주겠니? 중요한 일을 해야 하거든."
그러나 거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통화중 표시가 된 빨간 불을 뚫
어져라 쳐다보았다. 카일이 어머니와 통화중인 게 틀림없다. 통화가 아주
길었다.
마침내 전화기의 불이 꺼지자 그녀는 커피를 한잔 들고서 카일의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카일은 목이 뻣뻣한지 주무르고 있
었다.
"고맙소, 제스."
그는 컵을 들고서 단숨에 마셔 버렸다.
제시카는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어머니는 어떠세요?"
"생각했던 대로요."
들으나마나 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카일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처음엔 리디아가 한 말이 뭐냐고 물으셨소. 그러곤 말을 못하시더니 결혼
식에 왜 부르지 않았느냐고 하셨소..."
"진짜가 아니라고 말하지 그랬어요?"
"말할 틈이 없었소. 당신하고 엄마는 똑같은 재능을 가진 것 같소."
그의 목소리에 빈정거리는 기색은 없었다. 단지 고통스런 느낌만이 있었
다.
제시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일, 리디아한테 말한 거 미안해요. 당신한테 화낸 것도 정말 후회스러
워요. 날 부끄럽게 여기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거든요."
그녀는 억지로 웃으려고 했으나 신경질적은 목소리만 나왔다.
"나도 이런 끔찍한 일은 가족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그
일이 알려졌을 때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카일은 아무 대답도 안했다.
제시카는 씩씩하게 휴지를 꺼내 눈 주위를 꾹꾹 눌렀다. 그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당신 어머니가 흥분하시는 게 당연하죠..."
그는 거칠게 말했다.
"제스, 아무도 당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인물도 아니잖아요. 직업도 변
변찮고, 가진 재산도 없고요. 집안 좋은 것 배고는 뭣 하나 내놓을 게 없어
요. 베닝턴이라는 가문도 당신 어머니한테는 무용지물이겠죠. 당신도 처음
알았을 때 무덤덤했잖아요."
"당신 말이 맞다고 인정해야겠소."
카일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제시카는 휴지를 뭉쳐 쓰레기통에 넣고는 일어섰다.
"일하시는 데 더 방해하지 않을게요. 내가 문제를 일으킨데 대해 사과하고
싶었어요."
"제스..."
그가 너무 조용히 움직였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등뒤로 다가온 걸 눈치채
지 못했다. 몸을 돌린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안기는 꼴이 되었다. 카일
이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얼굴으 그에게 돌렸다. 제시카는 온몸을 긴장
했다.
카일은 아주 천천히 그녀를 끌어당겨 가슴에 꼭 껴안았다. 그녀는 피가 솟
구치는 듯했고, 그의 심장박동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키스
를 뿌리치려고 했으나 그의 입술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다가왔다. 이
제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방이 빙
빙 도는 것 같아 그에게 매달렸다.
"아이쿠! 미안합니다. 일이 다 끝나서 집에 가려고요. 전 방해하지 말고
가야겠어요. 참, 나가면서 문은 잠글게요."
랜디가 사라지자마자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방이 아직도 흔들렸지만 제시카는 침착하려고 애쓰며 그에게서 몸을 떼었
다.
"우리가 해야 할 건."
그녀는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랜디에게 이런 우스운 행동을 들키는 거예요."
카일은 그녀의 어깨에 얹힌 팔을 스르르 풀었다. 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
았다.
"주말을 위한 예행연습으로 생각해요."
몸의 긴장이 조금 풀렷으나, 그의 눈길이 아직도 먹이를 노리는 고양이 같
아 약간 떨렸다.
"벌써 퇴근시간이에요? 벌써 사무실 문을 닫을 시간이..."
"아니오, 랜디가 배려를 하려는 거요."
"네."
그녀는 너무 추어 아무 생각 엇이 팔을 문질렀다. 벌써 몸이 굳어 버린 것
같았다.
"괜찮다면 퇴근하겠어요. 너무 힘든 날이었거든요."
그 말은 그해의 최고로 멍청한 말에 수여하는 트로피 감이었다!
"왜 아니겠소? 내일 봅시다."
그녀가 방을 나오기도 전에 카일은 컴퓨터를 시작했다.
그에게 컴퓨터는 일이 아니라 휴식이었다. 이따금 제시카는 그가 부러웠
다. 모든 세상 시름을 접어 두고 정말 논리적으로 뭔가에 몰두할 수 있는
혼자만의 은신처가 있었으면 싶기도 했다.
카일이 프로그램을 짜는 일로 도망치는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
리고 그녀가 결혼식날 밤 텅 빈 싸구려 아파트로 돌아가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는 다른 어떤 식의 결혼생활도 원하지 않았다.
금요일 아침 툴숍에 도착한 제시카는 건물 뒤에 포르셰가 세워져 있고, 사
무실에서 커피 잔을 씻고 있는 걸 보고 안심했다.
"주말에 쓸 차량은 확보가 됐군요."
그는 타월을 집어들었다.
"버니는 내가 완전히 미쳐 버린 줄 알더군."
"결혼한 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쾌하게 말했다.
"당신은 결국 날 좌줄 거라고 했소."
"그에게 전하세요. 걱정 마시라고."
"이미 말했소.당신에게 부자에다 제대로 갖춘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
이나 때워 줄 거라고 했소. 그때까지 우릴 도와주지 않으면 일 달러도 안
갚을 거라고 했지."
"오, 아주 큰 위로가 됐겠군요."
"그랬더니 갑자기 인정 많은 사람처럼 주말엔 포르셰를 쓸 일이 없다더군.
그러니 우리가 쓰면 되오."
커피가 다 만들어지자 카일은 두 잔을 따라 들고 왔다.
"점심을 먹고 곧 떠나야 할 거요. 호수까지 네 시간은 족히 걸릴거요."
"기다려지는군요."
카일은 싱긋 웃고 그녀의 코에다 살짝 키스했다.
"나도 그렇소. 어쨌든 우리의 신혼여행이니까 말이오."
그는 휘파람을 불며 커피를 마셨다.
곧 오후가 되어, 그들은 사무실을 잠그고 그녀의 아파트로 짐을 가지러 갔
다.
"월터가 무슨 계획이 있는지 피크닉 때까지는 결판이 났으면 좋겠어요."
제시카는 마지막 준비물을 이름이 새겨진 가준 가방에 집어넣었다. 대학시
절에 쓰던 그 가방은 여기저기 긁히고 닳았지만 아직 쓸 만했다.
"소위 말하는 평상복 파티에 간 적이 있었는데, 밍크와 다이아몬드로 도배
를 했었죠."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두 가지 전부 없으니 걱정할 게 없잖소."
"알려 줘서 매우 고맙군요."
"고맙다니 좋소."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덧붙였다.
"버니 말이 일리는 있지만, 난 내 생각대로 해야겠소. 돈 많은 남자가 안
나타나면 마음을 바꿔 날 붙잡아요."
"차라리 그물로 물을 잡겠어요, 카일."
그녀는 가방을 닫았다.
"그런데 그 일을 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무튼 그들이 잘 봐줘
야 할 텐데요."
"수영복은 넣었소?"
"호숫물이 너무 차서 수영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럴 거요. 하지만 야회복 파티 때 그걸 입고 진주 목걸이를 달면 아무도
밍크나 다이아몬드가 없다고 쑤군대지 않을 거요."
카일은 트렁크를 열고 거칠고 낡은 가방옆에 그녀의 짐을 내려놓았다. 그
리고 그녀를 차에 태웠다.
"아무튼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우리가 와이어트 부녀를 잘 대접하면 좋은
조건으로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거요."
"뭐라고요?"
"답례로 한번 초대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물론이죠. 하지만 내 말을 안 들은 줄 알았어요."
"당신이 말한 근심 걱정을 전부 들었소, 달링."
"오, 정말이오? 처음에 그 얘기를 꺼냈을 때는 당신이 화제를 돌렸잖아요.
당신은 일주일 내내 그런 얘긴느 입밖에도 꺼내지 않았어요."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일로 바빴었소. 게다가 특별히 할 얘깃거리도 아니잖소."
"난 괜찮으니, 말이 나온 김에 그 문제에 관해 얘기 좀 해요..."
"제스..."
그녀는 말꼬리를 잡하지 않으려고 얼른 말했다.
"우리가 최소한 위험을 모면하는 길은 점심에 초대하는 거예요. 개인적인
파티면 더 좋고요. 집에서 대접하는 게 사장한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
테지만 식당으로 초대해야 될 것 같군요."
"펠리시티 말이오?"
"이런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의 방법을 거예요."
그녀는 엄지손톱을 물어뜯다가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와이어트 부녀에겐 집을 뜯어고치느라 집으로 초대할 수 없다고 하면 되
잖아요."
"음, 당신 아파트는 별로 적당할 것 같지가 않소."
"안되죠. 당신도 집이 없으니..."
"여기서 포기하는 건 너무 성급하지 않소?"
"좋은 방법은 다 얘기했잖아요. 당신 집이야 종이더미고요."
"더 생각이 나지 않는군."
"펠리시티밖에 없어요. 그게 유일한 방법 같아요."
"아니, 아니오. 제스, 아파트를 빌리는 거요."
"빌린다고요... 왜 그 생각을 못했죠? 버니네 집 맞죠?"
"아니오, 버니네 집 벽지는 당신 마음에 안 들 거요. 그걸 떼어내고 저녁
식사 초대를 했다간 버니가 우리한테 길길이 날 뛸 거요."
"그럼 누구네요? 부동산업자요? 싼값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면 12칸짜
리 빈 아파트를 소개해 줄지도..."
"그럼 가구를 들여놔야 하오. 게다가 2주밖에 안 남았소."
"그게 문제예요. 어디 가서 구할 시간이 없어요."
"그렇긴 하오. 이제 생각났는데, 당신 친구는 어떻소? 턱시도 대여점에서
우연히 만난 그 친구에게 하루 저녁만 집 좀 빌려 달라고 해요."
"슬로운 엘리어트요?"
제시카는 그 말을 듣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싫어요. 절대 안돼요."
"그럼 버니 여동생이 출장을 간다는데, 우리가 그 아파트를 서야겠소."
"카일, 대단해요!"
간단한 저녁 파티 때문에 벌벌 떠는 것이 우스웠다. 카일이 운전만 하고
있지 않았다면 꽉 끌어안았을 것이다. 그래도 장소를 먼저 확인하기 전까지
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버니가 열쇠를 갖고 있소. 일요일 오후에 돌아가는 데로 이사를 갑시다."
제시카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이사요? 잠깐 들러 쓸모가 있나, 필요한 건 뭔가 알아보는 게 아니고요?"
카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을 봐주는 것도 일종의 거래요. 사실 버니 말이 캐롤은 집이 비는 걸
싫어한다고 했소."
"좋아요, 하지만 우리 둘 다 있을 필요는 없겠죠."
"제스, 결혼한 부부가 한지붕 밑에 사는 건 당연한 행동 아니오?"
"진짜로 결혼한 부부라면 그렇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진짜 부부로 보아 주길 원하는 사람들도 그렇소."
제시카는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서로 같이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내 아파트랑 사무실이 있잖아요.
아무도 당신이 사무실에서 생활하는 걸 모를 거예요."
"지금까지 잘해 왔잖소. 그리고 캐롤의 아파트에도 익숙해져야 하잖소?"
제시카는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을 초대하려면 세간 두구가 어디에 있는지 훤히 알아야 하오."
"월터한테 우리 아파트라고 거짓말을 하자고요?"
"우리 맘에 드는 집을 장만할 때까지 친구한테 빌렸다고 하면 되오. 그곳
에서 몇 주만 살면 자연스럽게 보일 것 아니오?"
그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이치에 맞아 그녀는 약간 약이 올랐다.
"2주 동안 만이오?"
"캐롤은 출장을 갔지, 놀러 간 게 아니오. 하지만 좋은 의견이 있으면 다
시 조정할 수 있소."
"당연히 좋은 의견이란 없죠!"
그가 궁금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는 걸 보고 그녀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렸
다.
"게다가 버니도 너무 오래 머무는 걸 싫어할 거예요."
"아, 그렇소. 깜빡했군. 자, 함께 2주 동안 사는 건 결정된 거요."
"같은 지붕만 쓰는 거죠."
"그야 당연한 거 아니오?"
마자, 더이상 있을 이유가 없지. 그녀는 점점 둔해져 갔다. 그녀가 같이
살고 싶은 것만큼 그는 같이 살기가 싫은 것이다.
제시카는 월터 와이어트가 말한 대로 호숫가 별장이 오두막보다는 약간 크
려니 했다. 그러나 미션힐 저택만큼이나 웅장했다. 그녀는 카일이 차고에
포르셰를 세우는 동안 방이 몇 개인지 세다가 포기하고 창문이 몇 개인지
세었다.
카일은 운전대를 잡고 저택을 자세히 살폈다.
"저것보다 작은 병원도 있던데."
"하지만 저런 건축양식을 한 건물은 없을걸요."
카일이 기가 막힌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진정이오?"
"멋있다고는 안했어요. 그냥 독특하다는 거지."
카일은 안심했다.
"괜히 걱정했소."
건물은 별로 멋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주위 환경은 훌륭했다. 집에서 완만
한 경사를 따라 내려가면 부드럽게 휘어진 호수가 나타난다. 그곳엔 찰랑거
리는 물결이 모래를 때리고 있었다. 멋진 자장가가 따로 없었다.
"이렇게 방이 많으니 좋은 점이 하나 있군. 월터도 우릴 일일이 감시하지
못할 거요. 우리도 좀 편안히 주말을 즐길 수 있겠지."
제시카는 카일의 말처럼 그렇게 안심이 되진 않았지만 왠지 온몸에서 맥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로나의 약혼파티 때 보았던, 목에 깁스를 한 집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카
키색 바지에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사파리풍 차림이 흰 타이에 연미복
차림일 때보다 불편해 보였다.
"제가 들어 드릴까요, 선더스 부인?"
집사는 거만스럽게 묻고는 읍내 근처에서 산 꽃다발을 성큼 받아들었다.
제시카는 처음으로 듣는 부인이라는 호칭에 약간 놀랐다. 이곳에 있는 한
결혼한 부인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겠다.
"와이어트 씨는 테라스에서 칵테일을 듣고 계십니다. 기운을 차리시는 대
로 합석하자고 하셨어요. 당장 이층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급사가 짐을 즉시
날라다 드릴 겁니다."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꽃을 하녀에게 건네받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후에 로나 와이어트가 어깨 끈이 없는
빨간 수영복에 가운을 걸치고 나타났다.
"고마워요, 벤슨. 내가 손님들을 안내할게요."
집사가 고개를 까딱하고 계단으로 사라지자 로나가 그들을 넓은 홀로 안내
했다.
"이번 주말은 피크닉 때문에 손님들로 꽉 찼어요. 하지만 아빠가 신혼부부
의 방이라고 부르시는 곳을 내드리죠. 방이 맘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로나가 아치형으로 된 이중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온통 흰색으로 꾸며진 방
이 나타났다. 침대보는 면으로 누빈거였고, 배갯잇엔 수가 놓여 있었다. 네
기둥 침대 위에는 레이스 커튼이 아치형으로 드리워져 있고, 의자 두 개는
느슨하고 시원해 보이는 리넨 천으로 씌워 놓았다. 발코니로 통하는 프랑스
식 창문은 열려 있어서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편히 쉬세요."
제시카는 로나의 목소리에 빈정거리는 기색이 있었는지 분간을 할 수 없었
다. 로나가 질투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로나는 좋아하는 남자와 약혼중
이고, 트레버는 약혼녀에게 절대로 다른 여자 얘기는 입밖에도 안 꺼냈을
것이다. 설사 얘기했더라도 제시카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리라.
그녀는 방 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말 내내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집이 큰데 설마 방을 같이 쓰라고 하진 않겠지.
옛날 베닝턴 저택에는 모든 손님방에 침대가 두 개씩 있었던게 생각났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밖에 없는데다 침대 대신으로 쓸 소파도 없었다. 그래
도 침대가 킹사이즈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방이 두 개도 안 남았단 말이야?"
그녀는 투덜거렸다.
"대체 몇 사람이나 온 걸까?"
카일은 벌써 짐을 다 풀었는지 빈 가방을 옷장 바닥에 내려놓고 문을 닫았
다.
"신혼여행중인 부부에게 뭐하러 방을 두 개씩이나 주겠소?"
그는 분별있게 말하고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던지겠소? 이긴 사람이 침대 어느 쪽에서 잘지 고르는 거요."
집사가 말한 테라스에서 열리는 칵테일 파티는 제시카와 카일이 들어섰을
때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월터가 마티니 잔을 손에 든 채 손짓했다. 그는
제시카를 발견하고 테라스 저편에서 큰 소리로 환영했다.
월터가 막 껴안으려고 하는 순간 제시카는 그를 피하기 위해 재발리 손을
내밀었다.
"유연하군."
월터가 집사를 부르려고 잠시 등을 돌린 틈을 이용해 카일이 중얼거렸다.
"그를 너무 호락호락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현명한 방법이오."
제시카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너무 호락호락이 무슨 뜻이지? 하지만 그에
대해 토론할 시간이 없었다. 월터가 음료를 권하고 그들을 소개하기 위해
테라스로 데려갔다.
로나가 손님의 수를 과장한 게 아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방의 수보
다 두 배는 많은 것 같았다.
로나는 긴 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빈둥거렸다. 의자 옆에는 거품이 보글거
리며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수영장이 있었고, 그녀는 가운을 열어젖히고 10월
의 약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
"꽃을 가져오셨다고 벤슨이 말해 줬어요. 친절도 하시지."
결코 감명받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제시카는 부당한 대우는 받기 싫었다. 그녀는 상냥하게 미소를 띠고 접의
자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한테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트레버의 사장이 전혀 애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마
음을 놓아야 할지, 아니면 계속 걱정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프
레드 잭슨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트레버한테는 꼬치꼬치 캐물었을 게
뻔했다.
그가 예의 바르게 일어나 악수를 하고는 자기 부인한테 그들을 소개했다.
매디 잭슨이 떠들어댔다.
"오, 베닝턴 사람이세요! 집이 너무 멋지더군요. 안에는 어떻게 꾸몄는지
정말 보고 싶었어요."
"매디." 프레드 잭슨이 조용히 말했다.
"오, 이런 말을 하면 안되는 거예요, 프레드?"
매디는 의아해하더니 얼굴을 살짝 붉혔다.
"초대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베닝턴 양. 난 그저..."
로나가 손을 얼굴로 가져가며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웃어 버렸다.
"한번 초대하면 좋겠지만, 그 저택은 이제 우리 집안것이 아니에요, 잭슨
부인."
"얼마나 망신이었겠어요?"
로나가 점잔을 빼며 말했다.
"한 사람이 쓰기엔 너무 크죠.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 다시 사려고 알
아보고 있어요."
카일이 덧붙였다.
제시카는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호수까지 산책하고 싶어요, 달링."
그녀는 카일의 팔짱을 끼었다.
"같이 갈 거죠?"
테라스에 나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호숫가가지 편안하게 걸을 수 있
었다. 그곳에서 보니 별장이 좀더 웅장해 보였다. 카다란 유리창들만 없었
으면 요새 같았을 것이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까지 오자 제시카는 두 손을 카일의 가슴
에 올려놓고는 누가 테라스에서 봐주기를 바라며 친숙하고 사랑스런 자세로
말했다.
"세상에 처음 들어 보는 미친 소리더군요. 그 집을 도로 산다는 게 무슨
소리죠?"
카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두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미풍에 살랑거
리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황금빛으로 반짝거렸다.
"그 말에 로나의 얼굴빛이 싹 달라졌잖소?"
"잠깐 그랬죠. 하지만 그런 모험을 해선 안돼요. 그 집을 팔려고 내놨는지
알아보는 건 아주 쉬워요. 그 다음엔 어떡하려고요?"
카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제로 산다고는 안했소. 그리고 우리 사업이 끝나기 전까지는 잭슨 부인
을 초대하는 일이 없을 거요. 난 알아보고 있다고만 했소. 집주인에게 전화
를 걸어 팔 거냐고 물어 보면, 내가 했던 말에 책임을 다하는 거요."
"집을 팔려고 내놨으면 어떡하죠? 완전히 바보가 되는 거잖아요."
"그런 이상한 일이 일어나겠소? 백에 하나나 있을까? 지난 주말에 보니까
집 앞에 판다는 팻말이 없었소."
"그 동네에서는 그런 걸 안 내놓는 경우가 많아요. 판다고 팻말을 내놓는
집은 비교적 싼 거예요."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가격이 매우 높거나 아니면 집을 망가뜨려 값이 싸졌거나 둘 중
하나겠군. 이제 더이상 미련을 갖지 못하겠군. 게다가 그런 일은 매듭을 짓
는 데에 시간이 걸리오, 제스. 집을 사고 어쩌고 하기도 전에 모든 일이 해
결될 거요."
"버니한테 빌린 돈 문제는 큰일 축에도 못 드네요. 카일. 계속해서 이런
미치광이 같은 일을 막지 못하면 얼마 안 있어 우리는 아주 호된 맛을 보게
될 거예요."
"하지만 베닝턴 저택을 산다고 한 덕분에 우리가 통쾌하게 한방 먹인 건
인정해야 하오."
그는 손에 힘을 주어 교묘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좋은 인상을 남기려면... 테라스에서 우리가 보일 테니, 월터한테 유리해
지려면 날 보고 웃어야 하지 않겠소? 우릴 계속 보고 있을 텐데 말이오."
제시카는 순순히 싱긋 웃는 척했지만 그를 바라본 순간 숨이 탁 막히고 미
소가 얼어붙어 버렸다. 카일의 눈동자는 호수보다 진한 파란색이었고, 그녀
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길은 유혹적이었다. 그의 눈 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당신은 치통을 앓는 호랑이 같군."
그는 그녀의 등에 놓여 있던 손을 서서히 아래로 내리더니 엉덩이를 꽉 잡
고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얘기가 끝났으면, 제스..."
육감적으로 그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호수에서 천천히 밀려오는 찰랑거리
는 물결처럼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한순간 온몸을 그대로 그에게 맡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키스 정도야 눈을 감아 줄 수 있다. 결국은 전부 각본
일 뿐이니까.
그녀는 애써 냉정을 되찾았다.
"당신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에요. 월터에 관해선데, 너무 호락호락
그를 가까이 한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죠?"
"그는 당신이 아까운 장래에 만나고 싶어하던 최고로 부자인 남자요. 하지
만 매우 경험이 풍부한 것 같으니 요령껏 다루어야 할 거요."
제시카는 기가 막혔다. 그가 그녀를 잘 잡고 있지만 않았어도 발로 차버렸
을 거다.
"그런데 그를 잡으려면 너무 호락호락하게 보여서는 안되오."
"뻔뻔하게도 내가 정말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로나는 그렇게 생각하더군. 당신을 쳐다보는 눈길을 봤소?"
이제 실마리가 잡혔다. 제시카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곰곰히 생각했다. 카
일이 옳은 것 같았다. 로나가 아버지 때문에 질투하는 줄은 전혀 몰랐었다.
그 생각은 하도 해괴해서 마음에 담지도 못할 것 같았다.
"자, 똑바로 들어요. 난 월터 와이어트한테 추호로 로맨틱한 감정이 없어
요."
"오, 로맨스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했는데."
제시카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내가 분위기를 조성하면 사업이 바라는 대로 잘될 것 같아서요?"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해본 소리요. 당신은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잘 알 거요. 나한테는 아니지만. 당신 맘이 내키는 대로 행동해요, 제스.
나한테는 그저 비결이나 알려 줘요."
제 7 장 끝...
.
Harlequin Books '96
┌───────┐
│ 결 혼 소 동 │
└───────┘
리 마이클스 지음 / 김은정 옮김
제 8 장
너무 화가 난 제시카는 누가 보건 말건 카일을 뒤에 남겨 두고 호숫가를
떠나 버렸다. 그러곤 저녁식사가 끝나 때까지 아무 말도 안했다. 그러나 그
는 눈 하나 깜빡 안했다. 그는 컴퓨터 역사에 관해 매디 잭슨 부인에게 설
명을 하면서 쇠고기 요리를 맛있게 즐겼다.
제시카는 얼떨결에 월터의 옆자리에 앉아서, 그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작
은 공장 하나로 어떻게 제조 왕국을 이룩했는지 자랑하는 성공담을 얌전히
듣고 있었다. 아예 좌석을 지정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면서... 차
라리 컴퓨터 얘기를 듣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마지못해 로나 와이어트나 프레드 잭슨과 얘기를 나누었는데 썩 도움이 안
되었다. 로나는 정신이 온통 제시카와 자신의 아버지에게 팔려 있었기 때문
이다.
카일의 말이 맞았다. 로나는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까 봐 신경을 곤
두세웠다. 로나가 그녀를 감시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렸다 하더라도 약혼자
의 상관을 무시한 건 그리 세련된 행동이 아니었다. 트레버도 같은 생각인
듯 화난 얼굴로 미래의 신부감을 노려보았다.
마침내 저녁식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브리지 게임을 하러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카일은 느긋하게 웃으면서 잘하는 게 컴퓨터밖에 없다면서 산책을
하러 나갔다. 제시카는 꾹 참고 재치있게 두 사람 몫을 했다.
밤이 이슥해지도록 파티는 계속됐다. 산책에서 돌아온 카일은 제시카의 의
자에 팔을 두르고 브리지 게임을 구경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
다. 그녀는 브리지 게임에 열중하려고 애썼으나 정신이 산란해져 발끈했다.
그러자 로나가 말했다.
"카일, 그러러면 아예 침대로 데려가지 그러세요?"
월터는 깜짝 놀란 것 같았고, 매디 잭슨 부인도 약간 흥분한 듯했다.
카일은 웃으며 제시카를 꽉 끌어안았다.
"예의 바른 손님은 늘 안주인 말씀에 따르는 법이오, 제스. 안녕히 주무세
요, 여러분."
제시카는 계단에서 중얼거렸다.
"지금이 당신이 말하던 예의범절을 배우기에 딱 좋군요."
"알겠소, 제스. 당신이 브리지 게임을 하랴, 로나를 신경쓰랴, 게다가 월
터는 흠모하는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니 너무 피곤한 것 같았소."
"그런 얘기가 아니라...오, 관두세요."
그녀는 아직 풀지 않은 가방을 들고 욕실로 갔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
게 이를 닦고 팔이 저리도록 머리를 빗질했다. 그리고는 콜드 크림으로 얼
굴, 목, 손, 팔꿈치, 무릎, 뒤꿈치, 발가락 하나하나를 전부 마사지했다.
이제 더이상 피할 도리가 없이 욕실에서 나가야만 했다. 그녀는 거울을 들
여다보고 얼굴 표정을 정리했다.
그녀가 욕실에서 발끝으로 살금살금 나오자 침실은 조용했다. 침대 위에
달린 스탠드 불빛만이 아주 희미하게 비쳤다. 누비이불을 침대 발치에 깔끔
하게 개켜져 있고, 카일은 눈을 감은 채 시트를 어깨까지 덮고 누워 있었
다.
제시카는 피식 웃었다. 난 카일이 영화에 나오는 신랑처럼 신부를 기다리
며 욕실문을 뚫어져라 쳐다보길 원했던 건 아닐가? 너는 바보야. 그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너에게 월터 와이어트나 쫓아다니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편안하게 침대에 들어가 똑바로 누웠다. 순간 천장 전체가 거울인
걸 보고는 앗 하는 비명을 얼른 삼켰다. 흰 공단 이불과 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한 스탠드 불빛에 반사되어 로맨틱한 황금 연못처럼 보였다.
"왜 그러오?"
제시카는 흘긋 그를 살폈다. 그는 눈을 감은 채였고 뱜에는 빈정거리는 기
색이 떠올라 있다.
"아니에요."
그녀는 스탠드를 끄고는 원래대로 조용히 누웠다. 이렇게 깜깜한 어둠 속
에서 왜 자꾸 감시당하는 느낌이 드는 걸까? 심지어 침대가 기울어져 곡 붙
들지 않으면 공단 이불 위로 데굴데굴 굴러가 카일의 품안으로 직행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건 말도 안돼. 그건 상상에 불과해. 기분좋은 공상이었지만 그녀도 카일
처럼 잠들기 위해 공상을 멈추었다.
"편안하오?"
그녀는 깜짝 놀라 머리 밑에서 공단 베개를 꺼내 그의 얼굴을 쳐버렸다.
"미안해요."
그녀는 곧 사과를 하고는 베개를 머리밑에 억지로 쑤셔넣으려고 했다.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어요."
"뭘 말이오? 말도 걸지 말라는 거요? 그 자리가 싫은 건 아니오?"
"아니, 좋아요. 동전 던지기에서 당신이 지는 바람에 내가 고른 거잖아요.
당신이 규칙을 정했으니까 그대로 따르세요. 그런데 왜 묻는 거죠?"
"난 그쪽에서 자던 버릇이 있었소."
"카일, 소파에서 자 버릇 했잖아요!"
"내 말은 침대에선 늘 그쪽에서 잤다는 거요. 그러니 밤에 깜박 잊고 당신
쪽이 내 자리인 줄 알고..."
"팔꿈치로 갈비뼈를 꽉 눌러 줄게요."
"그런 것에 어디 꿈적이나 하겠소?"
다시 방 안에 정적이 감돌자 제시카는 그가 내쉬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
다. 몸이 약한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신경 하나하나가 제각기 경련을 일이
키는 것 같았다. 근육이 쑤시고 얼얼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잘못했다
간 아까 자신이 했던 그대로 당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는 디지털 시계를 보려고 머리를 돌렸다. 어두운 방
안에서 빨간 불빛이 봉화처럼 밝게 시간을 나타냈다. 그녀는 숫자가 조용히
1분마다 바뀌는 걸 지켜보았다. 이래 가지고는 하룻밤이 몇 년처럼 길게 느
껴지리라.
카일은 꼼짝도 않은 채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다른
한 팔은 마치 다른 사람이 손을 잡기를 바라는 듯이 느슨하게 손바닥을 편
채로.
제시카는 그가 느긋하게 쉬는 걸 보자 질투가 나서 베개를 산산조각 내버
릴 뻔했다. 그는 그녀와 같이 자는데도 전혀 흥분이 되거나 신경이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시트를 젖히고 그에게 들키지 않게 천천히 문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오, 제스?"
그녀는 뒤돌아섰다. 눈이 어둠이 익숙해지자 그가 가슴을 드런내 채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편할 것 같지가 않아서요."
"거울 때문이오? 아니면 침대를 같이 쓰는 게 낯설어서 그러오?"
"웬 참견이세요?"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검은 고수머리가 아까보
다 더 헝클어졌다.
"어딜 가려는 거요?"
"책이나 보려고요."
"이 시간에? 이 집에서? 농담하는 거요?"
"저녁을 먹으러 내려갈 때 서재에 책이 있는 걸 봤어요. 읽을 만한 게 있
을지도 모르죠."
"안되오, 제스."
"도대체 왜 안돼요? 집을 지키는 개들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까 봐요?"
"당신이 책이나 들추고 있는 걸 월터가 보면 뭐라 생각하겠소? 당신은 지
금 신혼여행중인 거요."
"오, 그 생각을 못했군요. 하지만 신혼여행중이라도 잠을 못 자는 사람은
있어요."
"그렇다고 책을 보진 않소."
카일은 손을 뻗어 스탠드를 켰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긴장했지만 갑자기 대낮처럼 밝아져 손으로 눈을 가렸
다.
"뭘 하는 거예요?"
카일이 침대에서 빠져나오자 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읽을 것을 찾아 주겠소. 여긴 호텔만큼 커서 집사가 각 방마다 안내서를
비치해 놓았을 거요. 짐을 풀다가 서랍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그를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보고 말았다. 파랑과 흰색 줄무
늬 파자마를 입고 있어서 그의 몸이 더 늘씬해 보였다. 그가 서랍을 열려고
몸을 굽히자 좁은 엉덩이가 드러났다.
그는 곧 종이 표지로 된 책을 흔들면서 몸을 일으켰다.
"안내책은 아니로군. 먼젓번 손님이 두고 간 모양이오. 고매한 당신 취향
에는 맞지 않겠지만..."
"12일간의 살인? 괜찮겠군요."
"월터가 갖고 있는 책들도 별로 나을 건 없을 거요."
카일은 그녀에게 책을 건네고 침대로 올라갔다.
제시카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깡패가 거의 홀딱 벗은 금발머리 아가씨와 껴
안고 있는 표지를 들여다보았다.
"월터가 갖고 있는 책이 이것보다는 나을 것 같군요."
"잘됐소. 그걸 읽으면 지루해서 곧 잠이 올 거요."
카일은 베개를 얼굴을 묻고 말했다.
"당신을 깨우고 싶지 않아요. 발코니에 가서..."
"동태가 되려고? 내 걱정은 말아요. 어차피 많이 잘 생각은 안했소. 불을
켜놓는다고 못 자는 게 아니오."
제시카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도 이 끔찍한 상황이 편치 않은 모양이
다. 그녀는 스탠드를 알맞게 돌려놓고 남은 베개를 쌓아 자리를 만들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 보니 몸이 덜덜 떨렸다. 반쯤
열어 놓은 프랑스식 창문으로 불어 들어오는 차가운 산들바람 때문인지 아
니면 얘기가 으시시해서인지 분간이 안됐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자도 무서
워 어깨까지 시트를 덮고 책장을 넘겼다.
카일은 잠에 푹 빠졌다. 이번엔 확실한 것이 그는 약간 코를 골았다. 거울
로 지켜보니, 그는 코를 비벼대다 손을 그녀 가까이로 뻗어 더듬거렸다. 그
의 몸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저러다 슬며시 넘어오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그를 홱 밀쳐 버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팔꿈치로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곁에 듬직하고 강
한 누군가가 있는 게 훨씬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지금 아무 정
신도 없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따뜻한 온기를 즐겼다. 그리곤 일어나서
창문을 닫고 이불을 덮었다.
제시카가 눈을 떴을 때는 햇살이 프랑스식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겨우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니 약간 어리둥절했다. 꿈을 꿨는데 자세한
것은 생각이 안나고, 새끼고양이였던 것만 기억났다.
그녀는 머리속이 뒤숭숭해 고개를 흔들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직까지도
정신이 들지 않은 모양이다. 어젯밤 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어느새 불을 끄
고 책을 테이블 위로 치워 놓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종이 표지로 된
책엔 비단 꽃이 다 읽은 책장 사이에 꽂혀 있었다.
그녀는 책에서 꽃바구니로 시선을 옮겼다. 분명 책에 표시를 하려고 데이
지 꽃을 따러 간 기억은 없었다. 그런 걸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그럼 카일
이 했다는 결론인데...
그녀는 등을 돌려 똑바로 누워 거울을 쳐다보았다. 카일이 누었던 자리는
텅 비어 있고 베개만 침대 한가운데에 바로 놓여 있었다. 그녀의 머리가 그
걸 베고 있었으니 누가 보면 얼마나 감미롭고 다정해 보였을까?
그 생각을 하자 으악 소리가 절로 났다. 껴안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 않
지. 그녀는 부드러운 누비이불을 덮고 좀더 꿈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자
는 동안 따뜻하고 마음이 푹 놓여 만족스러웠다.
내가 느꼈던 부드럽고 감각적인 손길이 꿈이 아니었다면?
더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그녀의 베개가 있
는 곳으로 갔다. 더이상 그의 베개를 쓸 필요가 없었다. 카펫 위에서 그녀
의 베개를 찾았으므로!
뜨거운 물로 오랫동안 샤워하고 나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녀는 짧은 흰
원피스에 소매 없는 감청색 겉옷을 걸치고 카일을 찾으러 내려갔다. 그를
곡 만나고 싶었다기보다는 혼자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일과 트레버는 식당에 마주앉아 있었고, 월터는 맨 앞자리에서 막 일어
서고 있었다. 제시카는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잘 잤소? 내 마음을 읽었군. 당신도 테니스를 치러 갈 모양 같은데. 아침
먹고 복식으로 칩시다."
월터가 말했다.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월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같이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사업상 전화할 데가 있어요. 어른 끝내겠소.
테니스가 기대되는군."
카일이 일어나서 옆자리의 의자를 빼주었다. 그의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보
고 그녀는 긴장했다.
"안녕."
그는 월터와 트레버가 듣게끔 큰 소리로 허스키하게 말했다.
"잘 잤소? 당신이 마침내 잠드는 걸 보고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물론 책에 관한 얘기하는 거겠지... 제시카는 뺨이 붉어졌다. 어젯밤 몸
간수를 정말 잘했었을까? 그렇다면 카일은 무슨 맘을 먹고 저러는 걸까?
속아선 안돼. 그녀는 단호히 결심했다. 그는 단지 사랑하는 연인 사이인
척하려고 그러는 거다. 그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반짝였으나 그녀만이 알아
챌 수 있었다.
트레버가 쓴웃음을 지었다.
"날 완전히 바보 취급을 했었군, 제시카."
그는 접시를 옆으로 치우고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카일이 부드럽게 웃더니 그녀의 잔에 커피를 부어 주고 자기 잔에도 다시
채웠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었다.
"규칙대로 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그러는 거예요?"
"무슨 일이라는 게 뭔지 알고 싶소. 지난밤의 당신 규칙은 날 꼼짝 못하게
유혹하는 것도 포함됐더군."
"지난밤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게 확실하오? 그럼 걱정 없소. 규칙을 다시 바꿀 마음은 없소? 결국 월
터한테 가기로 정했소?"
"물로 아니에요."
"음, 좋소. 하룻밤을 보냈으니 좀 힘들겠지."
"카일..."
그녀는 묻고 싶지는 않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죠?"
"아."
그는 아주 만족스럽게 말했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소? 당신 정말 꼭 붙어 자더군. 당신은 모를 테지.
누구랑 침대를 같이 쓰지 않았다면 알 수가 없는 거니까..."
"됐어요."
제시카는 일어섰다.
"지난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게 확실하고, 더이상 헛소리는 듣고 싶지 않
아요."
"제스..."
그녀는 문에서 멈춰섰다.
"사과하려는 거라면 너무 오래 끌었어요. 어서 하시죠..."
"오, 사과하려는 게 아닌데. 집에서는 곰인형하고 자지 않는지 궁금하오."
"물론 아니에요!"
"그럼 캔자스로 돌아가는 대로 하나 사줘야겠군."
제시카는 입을 꾹 다물려고 했지만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왜요?"
그는 빙그레 웃었다.
"나를 더이상 껴안을 수 없을 테니 당신이 너무 가여워 보이는군."
제시카는 테니스를 안 친 지 몇 년이 되었다. 클레멘타인이 아픈 이후로는
테니스 클럽게 가입할 시간이 없었고, 그 다음에 돈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첫 시합에서 점수를 따내기도 전에 숨쉬기가 곤란해진 것도 당연했
다. 너무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않아서 로나롸 트레버 조가 월터와 제시카
조를 이기고 있었다.
두 번째 시합이 끝나자 월터가 웃으면서 끝내자고 말했다. 젊은 사람들을
당해내기가 어렵다고는 했지만, 제시카가 그 덕분에 구원을 받은 건지, 아
니면 그가 그녀를 염려해서 그런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적어도 코트에
서는 얘기할 기회가 없어서 좋았는데.
그녀는 목에 타월을 걸치고 트레버에게 말했다.
"심술궂게 백핸드를 치더군요. 라켓볼을 치면서 터득하셨나보죠?"
로나가 수건으로 얼굴을 살살 문질렀다.
"트레버는 라켓볼을 치지 않아요."
"제가 실수했군요."
목소리가 차가왔다. 그가 로나한테 라켓볼과 같이 별것 아닌 것에 대해 거
짓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그게 위험한 운동도 아니고, 그렇다고 로나가 경
명하는 운동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그가 화요일마다 라켓볼을 치러 갔다는
것은 완전히 꾸며낸 얘기라는 뜻이다.
그가 로나를 사귀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렇다면 트레버의 사생활에 아직
숨겨진 얘기가 있다는 걸까? 그에게 화요일에 관해 물으면 어떻게 나올까?
그녀는 마지못해 그 생각을 물리쳤다. 진실을 밝히는 데 그렇게 열렬히 마
음쓰는 건 아니지만 트레버가 허우적거리는 꼴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아 생수를 병째 막 마시려는데 카일이
말했다.
"저희가 테니스같이 재미있는 걸 계획하거나 아니면 이번 주말처럼 근사하
게 대접해 드려야 하는데요, 월터. 하지만 이번엔 그냥 조촐한 저녁 파티나
열까 합니다. 이번주에 날을 잡아 저희 아파트에 들러 주십시오."
제시카는 숨이 막혔다. 버니의 여동생네 아파트는 아직 구경도 못했다. 그
건 카일도 마찬가지일 텐데, 사람들을 저녁에 초대하다니!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걸까?
"아주 좋은 생각이로군. 자네가 아내의 요리솜씨를 뽀내고 싶어할 줄 알았
네."
카일이 말했다.
"게다가 미식가죠."
"놀랄 것도 없군. 어머니께선 늘 말씀하셨네. 훌륭한 주부는 모든 걸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래서 어랫사람들도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야. 당
신 집안에서도 그런 걸 가르치셨겠군, 제시카."
제시카는 아직까지도 말문이 막혀, 그저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였다.
"고대하고 있겠소."
월터는 기쁨에 들떠 손을 비벼댔다.
"화요일은 어떻소?"
그녀는 안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잘 안 나왔다.
카일이 말했다.
"물론이죠. 일곱 시는 어떠세요? 주소는 나중에 알려 드리죠. 로나와 트레
버도 함께 왔으면 좋겠어요."
"친절도 하시지."
로나가 중얼거렸다.
"잭슨 부부도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테라스 너머로 소리를 높여 잭슨 부인을 불렀다.
"오, 매디 부인, 제시카의 집을 볼 기회가 생겼어요!"
그녀는 제시카를 보고 미소지었지만 눈에는 전혀 따뜻한 구석이 없었다.
"이젠 저택에 살지는 않지만 메디가 즐거워할 거예요..."
그녀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차분히 덧붙였다.
"오, 내가 경솔하게 사람들을 더 초대했군요. 식탁에 여유는 있나요?"
한순간 제시카는 진실을 말해 버리고 싶었다. 카일이 그들 거라고 주장하
는 아파트는 생전 보지도 못했다고 말해 버리면 그 반응이 궁금해졌다. 그
녀는 버니의 여동생이 몇 인용 테이블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녀는 도움을 바라며 카일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월터와의 얘기에 열중했
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성호를 긋고 말했다.
"물론이죠."
목이 간질거려서 여전히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매디, 당신과 당신 남편도 함께 와주시면 기쁘겠어요."
집사가 점심시간임을 알려 모두들 테라스를 가로질러 나가자, 제시카는 머
뭇거리며 몸짓으로 카일을 불렀다. 그가 작은 복도로 통하는 프랑스식 창문
옆에 서자, 그녀는 매우 즐거워하는 그에게 화를 냈다.
"깔끔하게 매듭짓지 않았소."
"교수형 집행인의 올가미만큼 깔끔해요. 아파트에 가본 적은 있어요?"
"가끔씩."
"그럼 약간 안심이 되는군요."
"무슨 일이요, 제시카?"
"오, 대단치 않아요. 저녁파티 계획을 짜기 전에 그곳에 진짜 식당이 있는
지 알고 싶어서요."
"물론 있소."
"진짜 테이블과 의자도 있어요? 내 말은 버니의 여동생이 고대 로마인들처
럼 소파를 식탁 대용으로 쓰는 건 아닌가 해서요."
"내가 마지막으로 거기에 갔을 땐 잘 꾸며 놓았어소. 난 그녀가..."
"버니의 여동생네라니까 뻔할 것 같아서요. 당신이 이 일로 얼마나 놀라게
했는지..."
"하지만 저녁 파티는 당신 생각이었소, 제스."
"네, 그래요. 그러나 최소한 아파트를 보고 나서 결정해야 했어요. 그래야
계획 B로 넘어갈지 아니면 펠리시티로 데려갈지 결정할 수 있죠."
"캐롤은 버니랑 달라요."
"그거 놀랍군요. 버니도 저녁 파티에 초대한 모양이죠?"
"아직 아니오. 그렇게 했으면 좋겠소?"
"벌써 대접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당신 말이 맞소. 사람들이 우릴 찾기 전에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게 좋겠
소. 참, 월터와 내가 아침을 먹으며 얘기했던 소프트웨어에 관해 듣고 싶으
면..."
제시카는 빙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나한테는 일언반구도 없었잖아요?"
"그러려고 했지만 나랑 가까이 있는 것보다 월터와 테니스 치는 걸 더 좋
아하는 것 같길래..."
"그가 뭐랬어요?"
카일은 시계를 흘끗 들여다보았다.
"아, 관심을 보이더군. 그래서 저녁 초대를 서두른 거요. 당근을 그의 코
앞에 좀더 바짝 들이대고 흔들어야 하오. 그건 그렇고, 아직 결단을 안 내
렸소?"
제시카는 더이상 못 참았다..
"당근이 될지 말지를요?"
"난 그런 걸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오."
카일은 부인했다.
"난 그저 당신이 그에게 갈지 나에게 올지를 묻는 거요."
"둘 다 아니에요. 실은 둘 다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
주말을 지내느라 완전 기진맥진해진 제시카는 캔자스시로 가는 차 안에서
내내 자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거의 다 왔다. 그녀는 목이 뻣뻣
해 꾹꾹 주무르며 신음소리를 냈다.
"금방 괜찮아질 거요. 사람들은 아마 당신이 주말 내내 쉬지도 못하고 시
달린 줄 알 거요."
"그 책 때문이에요."
"너무 신나게 읽은 모양이군. 곰인형에다 그 저자가 쓴 책 한 질도 사줘야
겠소."
"오, 좋아요. 지금은 사업에 관해 전혀 신경쓰고 싶지 않으니까 그 책을
읽기가 아주 좋겠군요."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가에 살짝 미소지었다.
"먼저 당신 아파트에 들러 나머지 옷가지를 챙겨오겠소?"
"아뇨, 먼저 그 아파트를 본 다음에 내 집으로 가죠. 그리고 내 집에소 나
혼자 갈 거예요!"
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마음이 바뀌었소, 제스?"
정말 걱정하는 투였다.
"지난밤에 꼭 붙어 자지 않길래 뭔가 변화가 일어났나 했소. 오늘 차 안에
서도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지 않고 차창에만 기대더군. 그래서 목이 아팠
던 거요. 내가 뭘 화나게 했소?"
"그냥 그러고 싶어 그랬지 시위한 게 아니에요."
"오, 그 말을 들으니 좀 낫구려."
카일이 중얼거렸다. 차는 고급 아파트 단지로 미끄러져 들어가 수위실 앞
에 멈춰섰다.
"버니가 경비원한테 열쇠를 맡겼을 거요. 어디 물어 봅시다."
경비원이 웃으며 내다보았따.
"안녕하세요, 선더스? 모건 씨가 그러는데 당신이 캐롤 양의 열쇠를 가지
러 올거라더군요."
카일은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꼬불꼬불한 길을 내려가 많은 코너를 돈 뒤
에 가장 멀리 있는 단지 쪽으로 갔다. 복잡한 길을 막힘 없이 잘도 가는군.
수위실에서 길도 묻지 않았는데. 그러니 경비원이 포르셰를 보고 버니가 아
니라 카일로 알아본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녀는 카일이 차를 건물 앞에 세우자 물었다.
"캐롤양과는 얼마나 연애했죠, 카일?"
카일이 웃었다.
"달링, 정말 질투하는 것 같은데. 결국 당신이 관심을 보이니 얼마나 기쁜
지 모르겠소!"
파티를 얼마나 자연스럽고 세심하게 준비해야 할지 신경쓰느라 소화가 안
됐다. 손님들이 즐겁게 지낼까? 최고로 대접할 수 있을까? 손님들이 불편해
할 점들은 미리미리 체크할 수 있을까? 수십 번 파티를 치렀지만 늘 불안하
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화요일 저녁, 와이어트 부녀가 고착하기 전에 마지막 점검을 하느
라 아파트를 둘러보니 더욱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시카는 파티가 잘 진행되도록 모든 조치를 다 취했다. 그렇지만 파티가
끝나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적어도 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녀는 햇살이 가득한 방을 둘러보면서 안도
의 한숨을 내쉬고는 깊고 푹신한 의자에 푹 파묻혔다. 캐롤 모건의 아파트
는 제시카가 평소에 간절히 꿈꾸던 곳이었다. 편안하고 젊음과 활력이 넘치
는 느낌을 주면서도 여성스런 분위기였다. 장식들은 파스텔조여서 마치 봄
날 정원 같았다. 하지만 가구들은 지나치게 야하거나 공들여 꾸민 것 같지
는 않았다. 카일은 그곳이 정말 편안한 듯했다.
그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려 했지만 조금은 괴로웠다. 특히 침
실 있는 곳은 훤히 알면서 부엌 살림은 까맣게 모런다는 게 좃금 신경이 쓰
였다.
물론 그녀가 질투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캐롤 모건
과는 친구처럼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차라리 카일이나 버니가 캐롤에게
진실을 말해 주면 좋겠다.
그녀는 그랜드 피아노 쪽으로 걸어가서 젊은 커플 사진이 들어 있는 은제
액자를 집어들었다. 캐롤과 오빠 버니가 함께 찍은 사진인데, 지난 일요일
저녁에 처음 들렀을 때 카일이 말해 주었다. 그곳엔 다른 남자들과 찍은 사
진들도 여럿 있었다. 카일은 그 안에 없었지만 느낌상 한 번은 끼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그 잘생긴 남자의 사진들은 뭐냐고 묻기 전에 치워 놓
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녀가 피아노 칸막이 뒤쪽에 사진을 조심스럽게 숨겨 놓고 있을 때 카일
이 아래층 거실에서 불렀다.
"제스! 바쁘지 않으면 좀 도와주겠소?"
안방 문은 열려 있고, 그 안에서는 카일이 풀 먹인 와이셔츠 소매와 씨름
중이었다.
"도와줘요. 한쪽은 했는데 이쪽 것은 똑바로 끼우지 못하겠소. 단추들도
구멍에 꿰어지지가 않는군."
제시카는 화장품 냄새와 손끝에 스치는 손목의 촉감을 무시하려고 애쓰면
서 소매에만 온통 정신을 집중했다. 새하얗게 빛나는 와이셔츠 때문에 길쭉
하고 잘생긴 손이 좀더 섬세하고 육감적으로 보였다.
"이렇게 많은 녹말풀은 파스타 식당에서 보고 처음이군."
카일이 불평했다.
"남자들은 이런 걸 무엇 때문에 쓸데없이 자주 입는지 모르겠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그녀는 소매단추를 억지로 꿰고는 와이셔츠 가슴판에 붙은 장식단추들을
살폈다. 그건 좀더 은밀한 일이었다. 클립들을 가슴속에 밀어넣어야 했는데
가슴에 난 털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그리고 와이셔츠 가슴판을 단추 두 개
로 고정시켜야 하는데 너무 빳빳하게 풀을 먹여 힘으로 밀어붙여야 했다.
그가 그녀를 지켜보면서 너무 고개를 숙여 그의 숨결이 그녀 머리를 간질
이는 바람에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그만 단추 하나를 떨어뜨렸지
만 결국은 모두 해내고 말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으나 카일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꼼짝 못하
게 하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어둡고 격렬해 보
였다.
"드레스가 멋지군."
그녀는 엉덩이를 쓸어내렸다. 연두색 실크 드레스의 촉감이 숨결만큼 가벼
워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렸다.
"내가 이걸 입어도 캐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
"물론이오. 버니한테 필요한 건 뭐든지 쓰라고 했다더군."
"가구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옷은 좀...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군요. 월터
를 만날 때마다 똑같은 옷을 입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런 옷을 사려면 우리
전 재산을 날려야 할 거예요."
"걱정은 그만 해요, 제스. 캐롤은 정말 무던하니까."
목소리에 따스함이 깃들여 있어 제시카는 약이 올랐다.
"그렇게 대단한 여자를 어째서 안 만나는 거죠?"
카일은 짓궂은 표정이었다.
"누가 안 만난다고 했소?"
"저... 그냥 그런 것 같아서..."
카일은 미소지었다. 자만하는 게 아니라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는 알아차
린 모양이다. 그걸 보자 제시카는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났다.
그는 어느새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키스를 해도 괜찮다는 듯이. 디
디어 그녀는 그와의 진지한 관계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풀
먹인 와이셔츠가 그녀의 손바닥 밑에서 매끈거렸다.
"카일, 왜 캐롤한테 이 역을 맡아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파리에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소?"
제시카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가 궁리해 낸 게 이거라니. 그녀는 가짜 아
내도 못되고 대용품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정말 비슷한 감정이 솟아났다.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
다. 이 아파트로 돌아오던 날 밤 카일이 했던 말이 옳았다. 그녀는 질투를
한 것이다. 캐롤 모건에게도. 그의 생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여자라면
모두 원망스러웠다. 그가 그녀를 잊자마자 그 여자들이 그의 미래를 차지할
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자신에게 초라하게 물었다. 언제 그와 사랑에 빠져 버렸지?
제 8 장 끝...
.
Harlequin Books '96
┌───────┐
│ 결 혼 소 동 │
└───────┘
리 마이클스 지음 / 김은정 옮김
제 9 장
곧 그들 사이에는 한치의 빈틈도 없어졌다. 카일은 제시카를 바짝 끌어당
기고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이 온몸을 애무하
는 듯해 그 힘에 쑥 녹아 보리고만 싶었다. 또한 짜릿한 키스에 그녀 자신
을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가 원하는 만큼 그녀도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짜는 아무것도 아니리라.
그를 밀쳐 버릴 힘은 없었지만 그녀는 겨우 자제심을 발휘해 강인하게 유
혹하는 그의 눈길을 떨쳐 버리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카일이 좋아하는
낡은 회색 스웨터에 눈길을 던졌다. 그 옷은 침대 발치에 있는 담요 상자
위에 아무렇게나 얹혀져 있었다.
"저."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내 짐을 손님방에서 여기로 옮겨다 놓으면 어떨까요?"
"좋을 대로 해요."
카일은 중얼거리면서 그녀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입맞췄다.
"아무 때나 원하는 때에 침대 위에 공단 드레스를 걸쳐 두어도 상관없소."
그녀는 고통스러워 눈을 감았다. 얼마나 원하던 말인가.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지금 옮기게 도와주겠소."
"난 그저..."
제시카는 목소리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방 전체 분위기가 남성스럽게 느껴져서요. 손님들이 이곳 욕실도 사용할 텐데, 화장
품도 여기저기 굴러다녀야 좀더 그럴 듯하잖아요."
"너무 시시하군."
카일은 중얼거리더니 그녀를 놓아 주었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번엔 당신이 이긴 것 같군. 언제 그들이 벨을 누를지 모르니까."
오늘 저녁은 진짜 사업에 대해 논의하는 중요한 날이리라.
"오늘 어머니와 다시 얘기를 했소."
카일이 소매를 바로 하면서 유쾌하게 덧붙였다.
"당신을 만나기로 하셨소."
제시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의 가족을 만나는 게 이제는 별로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기다림과 공포가 뒤섞여 버렸다. 만일 상황이 조금
만 달랐더라도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거기서 그만.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불가능한 꿈은 꾸지도 말라고. 카
일과 사랑에 빠진 것도 끔찍한데. 정상적인 것이라곤 하나 없는 이 모든 상
황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정말 쓸데없는 일이에요, 카일."
그녀는 애써 목소리를 담담하게 꾸몄다.
"나중에 질문거리만 생길걸요."
"어머니를 확신시켜 드리고 싶소."
"좀더 연기할 수 없을까요?"
카일은 머리를 흔들었다.
"안될 것 같소. 이번 주말에 안 나타나면 툴숍에 들르실 거요. 부지불식간
에 만나든지 미리 준비하고 만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오."
제시카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번 주말에 꼭 만나야 되나요? 다음주나 그 다음주로 연기하면..."
"그때가 부모님 결혼기념일이오."
"오, 들은 것도 같아요. 하지만 월터와 사업얘기를 매듭지어야 하잖아요?
저,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그는 미소지으며 그녀 뺨을 느긋하게 톡 건드렸다.
"당신은 바위 같군, 제스."
그는 칭찬이라고 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더 신경이 곤드섰
다. 그녀는 결코 듬직하다거나 믿을 만 하다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드레스가 멋지다거나 머리가 보기 좋다는 칭찬이 더 소중했다.
"이제 저녁이로군. 숨은 능력을 맘껏 발휘해 봐요."
보통 상황이었다면 그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게 된 사실을 깨
달은 지금 어떻게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겠는가? 어떻게 그를 사랑하는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저녁을 보낼 수 있겠는가? 그와 헤어진다는 건 아직
꿈도 꾸지 않았는데.
프레드와 매디 잭슨이 제일 먼저 도착했다. 카일이 그들에게 칵테일을 대
접할 때 와이어트 부녀와 트레버가 도착했다. 월터는 기분이 최고로 좋아
마티니 잔을 치켜 들고는 건배했다.
"미안하네, 프레드. 너무 맘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자네 손실이 내겐
이득이 되는군. 자, 축하를 하자고."
제시카는 어리둥절했다. 카일을 쳐다보았으나 그 역시도 일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 모르는 듯했다.
프레드가 웃었다.
"아니, 아니네. 트레버가 명성을 떨칠 걸 생각하니 기쁘다네. 소프텍에서
잘해 나갈 걸세. 이젠 중간직에서 승진해 책임있는 역량을 발휘할 때지."
제시카는 심장이 얼어붙었다. 트레버가 소프텍의 새로운 우두머리가 될 거
라고? 카일의 계획이 성공을 해도 결국은 트레버 밑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
다. 그건 최악이다.
월터가 형식적인 건배를 하는 동안 제시카는 손님들 너머로 카일을 쳐다보
았다. 순간 그의 입이 굳는 게 보였다기보다는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를 띠고 축하를 했다.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와인 잔을 치켜들
었다.
카일은 미리 알지 못한 게 분명하다. 그 소식을 듣고는 그녀처럼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제시카는 그가 얼른 마음을 수습하는 걸 보고 놀
랐다. 그 일과 돈이 그렇게 탐나는 걸까?
물론 그럴 거다. 지금까지 투자한 게 얼마인데. 트레버 밑에서 일한다 해
도 별 상관은 없으리라. 카일이 그 사람한테 굽신거릴 것도, 미워할 특별한
이유도 없다. 그가 그녀를 차버렸다는 사실이 카일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
가?
그녀는 부엌으로 에피타이저를 가지러 갔다. 잠깐 혼자 있게 되자 싱크대
에 기대어 숨을 깊이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가슴이 너무 쓰
라렸다. 모든 것이 그녀를 너무 아프게 했다. 지난주엔 잘 견뎌냈는데 침착
하지 못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갑자기 그의 부모님과 하루 저녁을 보내는 게 아주 우스워 보였다. 진짜
문제가 되는 건 어떻게 약속을 지킬 수 있는가였다. 다음주는 카일의 사업
이 결정되느냐 마느냐 기로에 서는 때다. 그녀는 이 모든 게 게임인 양 여
겨졌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일단 모든 게 매듭지어지면 우린
헤어지게 될 텐데, 어떻게 이별을 견뎌야 하지?
코코뱅을 먹고 나서 로나는 베닝턴 집안에 관해 화제를 돌렸다.
"아파트치고는 그리 나쁠 건 없지만..."
그녀는 우아하게 아스파라거스 줄기를 펴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도 저택이 그립겠죠? 게다가 그에 따른 모든 것들도 그렇고요.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하니, 얼마나 귀찮겠어요? 난 벤슨이 없으면 옴짝달싹도
못한다니까요."
"너야 그렇겠지, 로나."
월터가 말했다.
"얘야, 네가 결혼한다고 집사까지 딸려 주진 않을 거란다."
로나가 아무 말도 못하게 귀엽게 토라졌다. 그러나 제시카는 담담하게 있
었다.
"세상에,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아요."
매디가 끼어들었다.
"프레드와 내가 처음 결혼했을 땐 모든 게 얼마나 신났는지 몰라요. 사랑
에 빠지면 접시 닦는 것도 재미있죠."
로나는 미심쩍게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베닝턴 저택을 다시 사려고 하세요, 제시카?"
"오, 그건 카일에게 달렸어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조정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죠."
연습한 것처럼 술술 말이 나왔다.
"적어도 안 판다는 얘긴 안했으니,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러나
봐요."
테이블 너머로 카일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가 사실과 비슷하게 얘
기한 게 고마운 듯했다. 잠깐 동안 그녀는 아주 흐믓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다시 내려앉았다. 단지 재치있는 답변 때문에 이렇
게 순간적으로 그와 마음이 통한 게 아니란 걸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우정 이상이란 걸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같은 배를 탄 게 뭘 의미하는지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제시카의 말대로 적당한 가격에 내놓았더군요."
카일이 말하면서 매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려는 사람도 없겠네요. 당신 가문엔 당신밖에 없으니까요."
로나가 중얼거렸다.
"사람들한테는 별 마음 없는 것처럼 해요."
월터가 충고했다.
"그랬다간 값이 하늘 높이 치솟을 테니."
프레드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친척이 없소, 제시카? 사촌도?"
"네, 없어요."
대답이 무뚝뚝했다. 제시카는 애써 상냥해지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없어요."
프레드가 싱글거렸다.
"내가 왜 신경을 쓰는지 궁금하지 않소?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낯익은 느
낌이 들었소. 하지만 아직까지 기억해 낼 수가 없군."
제시카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얼굴이 굳어지려고 했다. 이런 뜻밖의 위
험은 이미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지난 주말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제서야 그 얘기를 꺼내는 건 뭐람? 그는 그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걸
까? 트레버가 그녀와 함께 있는 걸 보고 친척인 줄 착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프레드가 덧붙였다.
"당신 이름을 듣고서 생각이 난 거요. 제시카 베닝턴이라니까 뭔가 생각이
날 듯한데,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소."
로나는 넋을 잃고 프레드를 바라보았다.
"계속하세요, 프레드. 말해 주세요."
그녀는 카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했다.
"어쩌면 최근에 우리 회사에서 찾고 있는 사람과 관계가 있을 것 같소."
용두사미처럼 돼버린 그 말에도 제시카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미안해요, 프레드. 생각이 안 나서..."
"연합공업사에서 행방불명된 사람을 찾는 줄은 몰랐어요."
로나가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주주가 안 나타날 때만 그렇지."
프레드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월터가 코웃음을 쳤다.
"그게 걱정이 된다는 건가? 모든 회사에는 여러 주주가 있는 법이네. 한
주주의 소유권을 넘기는 게 마땅치 않으면 인수자를 찾으려 하지 말고 어떻
게 처리할지를 생각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우리도 그러고 있다네. 이 경우는 예외지. 연합공업사는 전임 주주들이
공동출자를 해서 세웠는데, 그 계좌는 그때 만들어졌다네. 몇 년 전에 그
계좌의 소유주와 연락이 끊겼는데, 주식 계산을 잊은 모양이야. 아니면 소
유권이 이전되어 가치가 상실된 걸로 여기는 거든지. 어쨌든 그 계좌는 쓸
모가 없어도 이익 배당금은 매 분기별로 재투자되고 있다네."
"회사가 합병되고 재조직되면서 그 재투자는..."
월터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상당한 액수가 되어 회사측에서 인수하려고 한다네. 주주 대리인
이 계약을 이행시킬 수가 있지."
프레드는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당신 이름을 들었을 때 우리가 찾는 사람이 떠올랐소. 그녀도 제
시카 베닝턴이지만 다른 이름도 갖고 있어요."
카일이 코코뱅을 잘게 잘라 입으로 가져갔다. 손동작은 완전히 침착했고
목소리도 차분했다.
"설마 마샬은 아니겠죠? 가운데에 C가 들어 있는?"
프레드가 입을 쩍 벌렸다. 그는 대답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눈이 확실
하게 말해 주었으니까. 제시카는 갑자기 손에서 힘이 빠져 와인 잔을 넘어
뜨렸다. 섬세한 손잡이가 딱 부러지면서 포도주가 흘러넘쳤지만 그녀는 알
아차리지 못했다.
카일의 눈이 그녀 눈과 마주쳤다.
"제스, 결혼식때 했던 <내 것이 당신 거>라는 말이 생각보다 좋은 발상이
었던 것 같소."
마지막 손님까지 전부 보내고, 제시카는 치워도 끝이 없을 수북한 일거리
를 그냥 놔둘까 생각했다. 그러나 신경이 예민해져 잠도 올 것 같지 않자
힘을 내어 달려들었다.
카일이 쟁반을 가져와 식당 테이블을 깨끗이 치워 주었다.
"그럴 것 없어요. 파티가 끝난 뒤에 청소하는 게 제 취미거든요. 모든 게
깨끗해지고 다시 정돈이 되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게 나한테는 해당될 것 같소? 난 내버려 둬도 잘 쉴 수 있소."
그는 함부로 접시들을 포갰다.
"저, 크리스털은 조심해서 다뤄야 해요. 알았죠? 벌써 내가 잔 하나를 깼
으니 그걸로 충분해요."
그녀는 싱크대에 따뜻한 물을 받아 브랜디 잔을 씻기 시작했다.
카일은 꽉 찬 쟁반을 부엌으로 나르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흥겨운 소리를
들으니 제시카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행복한가 봐요. 소프텍 문제를 생각하면..."
"무슨 문제 말이오? 월터하고는 얘기가 잘되고 있소. 저녁식사 후에 나를
구석으로 데려가 관심이 꽤 있다고 했소."
그녀는 할말을 잃었다.
"어안이벙벙한 모양이군, 제스. 그가 떠오르는 샛별한테 모든 권한을 줄까
봐 그러오?"
"당연한 거 아녜요? 월터가 트레버를 꽉 믿고서 최고 자리에 앉히게 되면.
.."
"분명히 말하는데, 그렇게 되진 않을 거요."
그는 휘파람으로 다른 간단한 노래를 부르다가 말았다.
"게다가."
그는 명랑하게 덧붙였다.
"오늘밤 프레드 얘기를 듣고 보니 당신은 벌써 황금을 캔 거요. 소프텍 일
이 제대로 안 돼도 이젠 걱정할 필요가 없소."
그가 무심결 두 가지를 연관짓자 제시카는 자존심이 상해 목소리가 날카로
워졌다.
"벌써 당신이 배당금을 챙길 줄 몰랐어요, 카일."
그는 와인 잔을 닦아 옆으로 치웠다.
"그런 소리 듣는데엔 취미가 없소."
그녀는 화를 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 돈에 관해 알고 있
었다. 그러나 카일이 그 돈에 그렇게 집착할 줄은 몰랐다.
"난 그저 그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란 거예요. 지금까지 돈 없이도 잘 지
내 왔어요. 내가 깬 잔 값이나 캐롤의 드레스 세탁비 정도는 댈 수 있어요.
"
"정말 그렇소? 그럼 프레드가 당신을 찾지 말았어야 했군. 그래서 당신 할
머니도 그걸 베닝턴 재산으로 여기지 않으셨던 모양이오. 내 말은 비웃는
게 아니오."
그의 목소리엔 그녀가 이해 못할 날카로운 점이 있었다. 물론 그녀는 그
돈을 우습게 여기진 않았다. 사실은 돈이 꽤 많은 줄 알았다가 얼마 되지
않는 걸 알고 실망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 떠오르는 샛별은 결코 사양하지 않을 거요."
카일이 계속 말했다.
아직도 그녀가 트레버를 원하는 것처럼 말하자 제시카는 얼굴이 벌개지도
록 화가 나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녀는 그를 물어뜯을 뻔했다. 바보가 아
닌 다음에야 트레버에게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관심
이 있다면 그가 망하는 꼴이나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마음속에 그려 놓았다. 그녀의 속마
음을 숨기고 변심한 척하기로 했다.
머잖아 그녀의 운명이 좀더 갈가리 찢어지느니 차라리 트레버를 아직도 중
요시하는 척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지
만.
그녀는 마지막 와인 잔을 헹구고 식기 건조대에 걸쳐 놓았다.
"그거 생각해 볼 문제로군요. 당신을 반쪽만 차지하느니, 그 문제에 관해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게 낫겠어요."
다음날 아침, 제시카는 연합공업사의 사무실에서 프레드 잭슨으로부터 주
요 내용을 설명 들었다. 좀더 개인적이고 자세한 내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제시카가 아기였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예금 계좌를 개설했다. 그녀의 엄
마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나 보다. 그 당시 베닝턴 집안에서 볼 때는 가난
한 브라이언 마샬이 딸을 위해 한푼 두푼 모은 돈은 우스운 거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혼을 너무 오래 끌어 나중엔 둘 다 마음이 상했었다. 그
래서 아버지는 개인적인 사생활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나 보다.
그러나 아버지는 예금계좌에서 단돈 1 달러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만 가슴이 뭉클했다. 그때는 딸을 거의 보지도 못하던 때였는데, 법적으
로 그녀에게 모든 조치를 취해 놓으셨다.
프레드 잭슨은 주주 업무국에서 브라이언 마샬에게 정기적으로 사업 보고
서를 보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하도 이사를 많이 다녀 연락이 잘 안되
었다고 했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이 되지 않다가 결국엔 우편물이 사망이라
는 도장이 찍혀 되돌아오자, 회사는 그제서야 새로운 소유주가 될 제시카의
주소를 확보하지 못했던 것을 알아차렸다.
10여 년 전이었다. 모든 주식회사는 비활동 계좌와 자기 몫을 잃어버린 맹
한 주주들이 있었다. 회사에겐 그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그 계좌는 놀고 있는 상태로 방치되었고, 과거 10년간의 합병, 소
유권 인수, 새로운 작품 개발 등을 통해 그 액수가 불어났다. 게다가 주식
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합계는 더욱 커졌다.
제시카의 몫은 최소한 수십 억은 되었다. 카일은 잘만 하면 소프텍하고 손
을 끊어도 되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그 정도면 굉장한 돈이다.
제시카는 느긋하게 평생 직장을 고를 수 있으리라.
그녀는 멍하니 사무실을 나섰다. 그가 이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자고 청했
으나 거절했다. 그녀가 무엇을 먹든 목에 걸려 안 넘어갈 게 뻔했다. 그녀
는 혼자 있고 싶었다. 그녀의 생활이 돈에 구애를 받게 될지 곰곰이 생각좀
해야 했고, 아버지를 주위에서 하는 말 때문에 왜곡했었는데 다시 평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그를 알 기회도 없었는데... 그 사실이 그
녀의 가슴속 깊이 숨겨져 있던 앙금들을 말끔히 지워 버렸다.
그녀는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로비에서 트레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
만 부딪칠 뻔했다.
"아, 실종됐던 상속녀로군. 한참 찾았었는데."
"당신이 조사를 게을리 해서 그렇지, 내 잘못은 아니에요, 트레버. 어쨌든
지금은 로나보다 내가 더 좋다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소. 당신은 그 돈을 혼자 마음대로 쓸 수 있잖소. 아침에 주주
업무국에 문의했더니..."
제시카는 그의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
"내 말 잘 들어요. 로나가 나보다 훨씬 돈이 많다고요."
트레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도 않소. 그녀가 가진 거라곤 아버지한테 아양을 떨어 뜯어낼 수
있는 게 전부요. 나머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고."
"오, 소프텍에서 좋은 자리를 줄 거예요. 월터는 당신의 능력을 잘 알아볼
거라고요."
트레버는 소프텍에 관해 솔직한 의견을 말했다.
카일만 관련되지 않았어도 욕 대신 살짝 기뻐했을 것이다. 얼마나 잘된 일
이겠는가. 가만히 앉아 트레버에게 복수하는 셈이 되었다. 그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는 사업에 모든 책임을 맡게 되었다니 얼마나 고민이 되
겠는가.
사실 그 시나리오는 너무 완벽해 월터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월터는 너무 교활해서 딸의 의향을 대놓고 반대하지 않을
것이고, 또 바보같이 앉아서 구경만 할 사람도 아니다. 그도 트레버가 방금
말해 준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면, 트레버에게 올가미를 씌워 로나 스스로
파혼을 하도록 각본을 짠 것이리라. 어쨌든 무슨 일이 일어나건 제시카 자
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카일에게 닥칠 결과에 관해서는 예외지만, 월
터가 음모를 꾸몄건 안 꾸몄건 간에 소프텍의 주가는 실권을 쥔 중역으로
인해 떨어질 게 뻔했다. 그러나 카일이 소프텍에 닥친 위험을 알지도 못한
채 연루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테지?"
트레버가 기대에 차서 물었다.
"난 여기 남아 당신의 연합공업사 주식에 표를 던지겠소. 결국 프레드 자
리엔 내가 앉게 되겠지."
제시카는 어안이벙벙했다. 저 남자의 이기심은 끝도 없는 걸까? 그녀는 대
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채 그를 지나쳐 로비를 나왔다.
그녀는 거리에서 무심결에 버스 정류장 쪽으로 발길을 돌리다가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아탔다. 첫 이익 배당금을 탔으니 그럴 여유가 충분했다.
택시 밖으로 거리의 풍경들이 휙휙 지나갔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버니 할
머니의 반지에 박힌 에메랄드를 찬찬히 살폈다. 보석에 햇살이 비쳐 파란빛
노란빛으로 갈라지다가 진한 초록색이 되었다. 그 옆엔 에메랄드의 화려함
에 눌린 가는 순금 결혼반지가 그녀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들의 약혼이 진짜였다면 카일은 어떤 반지를 사주었을까?
"아마 담뱃갑에 붙은 노란 띠 같은 거나 주었겠지."
그녀는 중얼거렸다.
택시 운전사가 말했다.
"뭐라고요?"
제시카는 자신이 큰 소리로 말한 줄도 몰랐다.
"아녜요. 저 건물 앞에 세워 주세요. 길 중간에 있는 조그만 건물이오."
툴숍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사무실은 스산했지만 책상 위에 뜯지
않은 우편물이 약간 쌓여 있었다. 제시카는 우편물을 쓱 살펴보곤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녀는 식어
버린 커피를 버리고 새로 만들었다. 커피가 다 되지 잔에 부어 카일의 사무
실로 가져갔다.
그는 컴퓨터 화면에 쏙 빠져 있었다. 제시카는 잠시 동안 서서 그의 뒤통
수를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눈여겨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못 느끼고 매일매일 이렇게
서 있었는데!
그녀는 말을 꺼내기 전에 큰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몇주 전만 해도 아무
렇지 않게 그와 같이 있었는데, 그때가 그립다. 그녀는 꼭꼭 숨겨 둔 속마
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야 했다.
끔찍하게도 그를 사랑하게 됐다니. 그에게 그 사기극을 알려 주게 되면 그
녀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게 될 것이다.
카일은 목이 뻣뻣한지 손으로 문질렀다. 제시카는 그의 뭉친 근육들을 마
사지해 주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를 만지고 싶은 성적 갈망 같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녀는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방을 가로
질러 그에게로 다가가 손바닥으로 그의 피부를 느끼고 싶은 욕구가 강렬했
다. 지난 주말 호숫가 별장에서 책을 읽는 대신 그에게 몸을 돌렸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났을 테지? 그랬다면 후회했을까, 아니면 추억으로 간직했을까?
더이상 생각하지 말자. 기회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사랑을 나누었다면
더욱 괴로웠으리라. 그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녀는 키보드 옆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녕. 그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소."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던걸요. 종이에 사인만 하면 되던데요."
"볼일은 잘 보았소?"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지만 제시카는 그 말 속에 긴장감이 맴도는 걸
눈치챘다.
"당신 말대로 할머니는 그 돈이 베닝턴 가문에 별 도움이 안되는 줄 아셨
나 봐요."
그의 어깨가 축 쳐졌다. 긴장이 약간 풀렸나 보다. 그녀는 그의 소유분 절
반을 그의 것으로 작성해 놓았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벌써 컴퓨터에 빠져들고 있었다.
"잘됐군, 제스."
그는 키보드를 끌어당겼다.
"자세히 듣고 싶지 않으세요?"
"나중에 하지. 지금은 다른 일을 해야 하거든."
그녀는 화면을 들여다보았으나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새 프로그램인가요?"
"아니오, 부동산업자가 주목한 프로그램이오. 아침에 오늘까지 끝내 주겠
다고 약속했소."
"새 프로그램인가요?"
"아니오, 부동산업자가 주문한 프로그램이오. 아침에 오늘까지 끝내 주겠
다고 약속했소."
"그럼 일하세요. 이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죠."
"커피 고맙소, 제스."
그녀가 방에서 나가려고 할 때 그가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얘기했다.
"들어올 때 약간 초조해 보이던데."
그녀는 순간 긴장했다.
"내가요?"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두겠다고 말하려던 것 아니오?"
그를 놔줘? 그 생각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내가 왜 그만두죠? 아직 끝나지 않은 일도 있는데요. 잊었어요? 우리 계
약은 소프텍 사업이 잘되든 안되든 끝이 날때까지 유효하잖아요..."
"몇 주 전엔 새 일자리를 찾겠다고 했잖소."
그건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 줄 몰랐을 때으 얘기죠. 그 말이 너무
도 또렷하게 머리를 올려 하마터면 큰 소리로 말한 뻔했다.
"안 떠날 거예요."
그녀는 마침내 말을 하고는 뭉개진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덧붙였다.
"적어도 잠시 동안은요."
그녀는 일을 시작했다. 우편물들은 주로 청구서들이었는데, 가뭄에 콩 나
듯 주문도 약간 있었다.
잠시 후 카일이 손에 디스켓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조금만 있으며 일이 끝날 거요."
그는 디스켓을 이리저리 돌리며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오늘밤 펠리시티에서 저녁을 먹는 게 어떻겠소?"
그들이 처음으로 함께 외출했던 곳에서 길고 낭만적인 저녁을 먹는 거다..
.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 저녁이 그에게도 그녀만큼 의미있는 게 아니라
면 어떻게 그걸 견딜 수 있겠는가?
카일은 그녀가 염려하는 걸 눈치챈 듯했다.
"프레드에 관한 모든 얘기를 해줘요."
"펠리시티에서 말고요."
그녀는 겨우 말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당신이 정해요. 곧 돌아오겠소."
문이 탕 닫혔다. 제시카는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런 일로 얼마나 시달
려야 할까?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리 고통이 심하
다 할지라도.
저녁 파티를 준비하느라 미루었던 일들을 열심히 처리하다 보니 몇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카일이 그렇게
발리 볼일을 끝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아니었다. 월터 와이어트가 솔직하게 관심을 드러내며 약간은
무시하는 듯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월터. 지금 카일은 사무실에 없어요. 기다리시겠다면..."
"당신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거요, 제시카."
그녀는 커피를 권하고 호기심에 차 그를 바라보았다. 말투가 약간 이상하
긴 한데...
"이렇게 지내는 게 정말 행복할 것 같소?"
그가 물었다.
제시카는 떨리는 손으로 머그 잔에 뜨거운 커피를 찰랑찰랑 넘치게 따랐
다.
"월터, 저는..."
"그 남자느 약간 재능이 있더군. 그건 맞소. 그리고 당신의 힘과 결단력이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더군. 그도 언젠가는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하오. 하지
만..."
"월터, 제발 카일을 모욕하지 마세요."
"그를 모욕하려는 게 아니오. 솔직히 묻겠소, 제시카. 이런 식으로 살고
싶소?"
그는 머그 잔을 들어 옆으로 치우고 그녀의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커피를
닦으려고 흰 손수건을 꺼냈다.
"당신을 좀더 일찍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겠소."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요 몇 년간 찾아헤매던 바로 그런 여자요."
제시카는 손이 덜덜 떨렸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아오. 그건 상관없소. 하지만 뭔가 나아
지려고 결혼하는 거라면 최소한 훌륭한 걸 줄 수 있는 사람을 고르시오."
문간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처럼요, 월터?"
카일이 방으로 들어와 식어 버린 커피잔을 집어들었다.
월터는 그 머그 잔을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그래, 나처럼 말일세. 이리 오게, 카일. 합리적으로 생각하자고. 이 난리
법석을 바로잡기엔 너무 늦었다네."
"어떻게 하실 거죠? 포커 게임에선 승자가 모든 걸 갖잖아요? 아니면 간단
히 동전던지기로 정할까요?"
제시카는 겨우 말했다.
"대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예요, 카일? 난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모
든 게 제게 달렸다고 당신이 그랬었죠? 당신 보호는 필요 없어요."
"이런 구역질 나는 소리가 듣고 싶다는 거요?"
"당신이 끼어드니 정말 우습네요, 카일. 내 자신은 내가 책임져요. 당신은
날 염려하는 게 아니라 꽤 괜찮은 주식의 절반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카일의 사파이어빛 눈이 갑자기 푸른빛이 도는 잿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목소리 역시 딱딱해졌다.
"제시카, 난 당신이 차지한 돈에는 전혀 욕심이 없소."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돈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카일. 그녀에게 주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에게는 그 의미가 틀리겠지만.
모든 건 적당한 가격에 파린다. 그 안에는 진리가 숨어 있다. 아마 카일도
팔릴 것이다.
그녀는 그가 일 달러짜리까지 전부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할까 생각했다. 대
신에 그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그는 동의하겠지. 그렇게만 되면 재정적으
로 완전 자유의 몸이 될 테니까.
그러나 그를 살 수는 있겠지만 뒷감당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돈보다 더
한 희생을 치르고 결국에는 행복해질 기회마저 박탈당할 것이 뻔했다. 그녀
와 마찬가지로 그도 사랑을 하지 않는 이상 축배를 들 미래는 없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를 돈이 방해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웃기는 얘기인가. 둘이 황금을 캐러 나갔다가 지금은 그녀만이 그
걸 차지하게 되었으니. 돈이란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그에게서 떠난다는 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안다. 그렇다고 돈을 써서 그를
붙잡는 것도 결국에는 그와 그녀 자신을 모두 잃게 되리라.
제 9 장 끝...
.
Harlequin Books '96
┌───────┐
│ 결 혼 소 동 │
└───────┘
리 마이클스 지음 / 김은정 옮김
제 10 장
제시카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카일이 판에 박힌 사과를 했고, 그녀는
끔찍이 싫기는 했지만 이기적인 척했다. 그가 진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게
차라리 나았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면 가문을 찾는 거겠죠. 한번 베닝턴 사람이면 영원한 베닝턴 사람
이예요."
카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길이 얼마나 차가웠던지 그녀는 등골이 오
싹했다. 그를 쳐다볼 수 없어 월터에게 주의를 돌렸다. 월터는 입을 딱 벌
린 채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정신을 가다듬는 것 같았다.
"저, 난 가는게 낫겠소."
월터는 모호하게 말하고 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내가 문제를 일으켰다면 미안하오."
"아니에요."
제시카는 중얼거렸다.
"별것도 아닌데요."
카일이 동시에 말했다.
월터가 문을 쾅 닫고 나가자 사무실은 침묵에 잠겼다. 카일은 제시카에게
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따가왔다.
그건 아주 잠깐 사이였으나 영원한 시간이 지난 느낌이었다. 그녀는 겨우
안정을 되찾고 물었다.
"뒤쫓아가서 설명을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무슨 설명? 아직 그 사업을 원한다고 말이오? 왜 그러요, 제스? 나의 남
자로서의 자존심이 방해가 되어 기회를 놓칠까 봐 걱정이 되오?"
"이 사업은 반반씩 나누기로 했으니, 당신 때문에 내 몫을 손해 볼 수 없
어요. 빨리 서두르세요, 더 늦기 전에."
"당신 말대로 할 테니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있어요. 월터에게 할 얘기가
약간 있지만, 우리도 할 얘기가 좀 있소. 얼른 돌아오겠소. 우린 너무 늦어
버린 것 같소."
싸늘한 공포가 제시카의 가슴을 후볐다.
"내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죠."
그러나 카일은 이미 문을 나서서 못 들은 것 같았다.
그가 올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그
녀가 가진 무기라곤 깨지기 쉬운 가면뿐인데 이젠 더이상 쓸 수 없을 것 같
아 손이 덜덜 떨렸다. 안 그래도 집중력이 뛰어난 그가 꼬치꼬치 물어보면.
..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도망뿐이었다. 한쪽 눈으로는 문을 흘끔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몇 줄 적어 사표를 썼다. 그리고는 카일의 사무실 키보드에
기대 놓고 버니 할머니의 에메랄드 반지를 눌러 놓았다. 그러곤 작은 옷장
에서 코드를 꺼냈다.
문이 바져나왔을 땐 월터가 타고 온 캐딜락이 건물 옆에 세워져 있었는데,
거리로 나오자 그 자리가 텅 비었다. 델리 식당의 커다란 판유리를 통해 그
와 카일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열심히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델리 식당은 이 모든 계획이 시작된 곳이었다. 트레버가 대선언을 하고
난 다음날 아침에 그녀가 눈물을 흘리자 카일이 다독거려 주었다. 아침을
먹으려고 데리고 나가, 물론 착각이었지만 그녀가 임신한 걸로 짐작하면서
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가 자신을 임신으로 오해한 걸 알고 나서 얼마나 길길이 날뛰었던가. 그
생각을 하자 슬픈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친절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차라리
사고를 쳐버릴것을 하고 후회가 되었다. 이게 진짜 결혼이었다면 아기를 고
대하고 있었을 텐데.
카일의 아기... 아빠를 닮아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끔찍이 정확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깜빡깜빡 잊어벌리 거야. 아기들은 늘 묻곤 하지. 풀은
왜 초록색인지, 하늘은 왜 파란지. 일일이 대답해 줄 생각을 하면 겁이 나
기도 하지만 가슴이 설렜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맛보고 싶은 완벽한 직장
이었다.
켤코 가질 수 없는 아기를 바라는 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일 뿐이다. 자신
을 좀더 비참하게 할 뿐 무엇을 얻겠는가. 다시 내 자신의 삶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전에 클레멘타인이 죽은 후에는 혼자만의 삶을 살았었다. 트레버의 배신으
로 끝나긴 했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 적어도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
리라 확신했다. 먼 훗날 카일은 그저 기억의 한편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녀가 백 살이 되어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로든 이사갈 수 있는 지금 우습게도 이 아파트
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서둘러서 다른 아파트를 구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서로 연락 안하는 거야 똑
같을 것이다.
그녀는 캔자스 시를 떠나고 싶었다. 그곳에 머무를 이유도 없었고, 베닝턴
이라는 이름을 전혀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들
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 곳을 정하고도 떠날 채비는 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작은 아파트에 머무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
다. 그녀가 만일 이사를 가면 카일이 어디에서 그녀를 찾아야 할지 모를 것
같아서였다.
그는 찾지도 않을 거야.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가 그럴 거라는 생각
은 그녀 자신을 우롱하는 것이었다. 그가 정말로 얘기를 하겠다고 마음만
먹었다면 편지를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그녀를 찾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도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떠날 때 그런 마음을
확실하게 적어 놨었다. 뭔가가 그의 마음을 바꿔 버린 게 확실했다. 아마도
월터와의 일이 잘 진행되어 너무 바빠 시시한 그녀가 더이상 필요 없는 결
혼 따위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시간이 흘러 주말이 다가오자 그녀는 카일의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트레버가 소프텍에 관해 한 얘기
들을 카일에게 말했어야 했다. 그 사업은 조만간 빠른 속도로 곤두박질 칠
것 같아고 일러 주었어야 했다. 그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했으나, 결국 법정
에서 이혼할 것을 생각하자 그런 마음은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와 월터가 이미 사업을 시작했다면 경고해 봤자 너무 늦은 것이리
라. 카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금요일 오후가 될 때까지 그 생각이 그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녀는 더이
상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녀는 카일에게 조심하라고
말해 줘야 했다. 이미 거래 계약을 맺었어도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으리
라. 그가 듣지 않더라도 일단 시도는 해봐야겠다.
그녀의 옷장에는 여전히 결혼식 때 입었던 초록색 정장 외에는 다른 옷이
없었다. 새 옷을 입을 일도 없으니 쇼핑할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카일에게 얘기하러 갈 때 굳이 옷을 차려입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
나 그녀는 최대한 자신만만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그 정장을 입었다.
그녀는 작은 차를 장만했다. 첫 배당금을 받은 후 요 며칠 사이에 그녀 자
신에게 최대한으로 관대하게 군 게 바로 그 차였다. 가고 싶은 곳에 갈 때
차편과 시각을 알아보지 않아도 되는 게 신기했다.
막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녀는 워드 파크웨이에 있는 베닝턴 저택
앞에 지나갔다. 자신이 뭘 하려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녀는 골목길로
들어가 대문 앞 차도에 차를 세웠다.
잔디를 깎아 주는 용역업체 트럭 한 대가 차고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집
뒤 어딘가에서 낙엽을 터는 소리가 들렸다. 유니폼을 입은 일꾼 한 명이 월
동준비를 하느라 클레멘타인의 장미 덩굴을 싸매 주고 있었다. 제시카가 바
라보고 있자, 현관문이 열리면서 한 여자가 나와 그에게 말했다. 제시카가
기대하던 그런 여자였다. 키가 크고 병약해 보일 정도로 마른데다 비싼 맞
춤옷을 입고 있었고, 자기 위치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어서 다른 사
람들의 평에 대해서는 무심한 여자 같았다.
제시카는 주춤했다. 그러나 물어 보는 게 뭐가 나쁘랴 싶었다. 그래서 차
에서 내려 잔디밭을 갈로질러 걸어갔다.
그 여자가 돌아섰다. 그녀는 차를 흘끗 건너다보더니 제시카를 평가했다.
"길을 묻는 거라면 도와주기가 힘들거 같군요. 일자리를 찾는다면 알선업
체를 알려 줄게요."
"집을 내놓지 않으셨나 궁금해서요."
그 여자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뇨."
"고마워요."
제시카는 중얼거렸다.
다연한 얘기였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사람들은 이런 저택을 가볍게 사
고 팔지 않는다. 설사 저택을 팔려고 내놓았다 하더라도 제시카는 그런 걸
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격이 너무 비싸 있는 재산이 꽤 많이 쓰게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그건 가족이 살 만한 집이지, 여자 혼자서 살기엔 벅찼다.
결혼반지를 끼고도 혼자 사는 것을 상상하다니.
사실 그녀가 차를 세운 건 카일을 다시 만나게 될 순간이 두려워 꾸물대며
시간을 끌어 보려고 그런 것이었다.
툴숍은 이틀 전보다 더 낡아 보였다.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
그녀는 건물 앞에다 차를 세우고는 용기가 꺾여 주저주저하면서 사무실로
가는 대신 길을 건너 델리 식당으로 갔다. 제시카는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무시하려고 했다. 너는 지금 화해하러 온 것도 아닌데 왜 도망가는
거지?
점원이 신문에서 눈길을 떼고 주문을 받으러 왔다.
"요 며칠 안 보이더니, 휴가를 갔었나 봐요?"
"대충 그런 거예요. 땅콩크림에 젤리와 바나나를 끼운 샌드위치 좀 포장해
주세요."
"당신 게 아니죠?"
점원은 그렇게 묻고는 땅콩크림 통을 열었다.
"사장한테 갖다주려는 거죠?"
"계속해서 이것만 먹었나요?"
제시카는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애썼다.
"사실 매일 밤마다예요. 지난 며칠간 그곳에 일이 많았나 봐요."
점원이 기름종이에 샌드위치를 싸서 봉지에 집어넣고는 계산대 위에 올려
놓았다.
많은 일이라고?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카일에게 할말이 뭐가 있으랴. 그러나 이 멀리까지 왔는데, 게다가 그에게
전하러 가지 않으면 이 샌드위치는 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오래된 컴퓨터는 제시카가 쓰던 책상에 임시로 올려놓았고, 랜디는 그녀의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발을 올려놓은 채 뭔가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어
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사인 것 같았다.
랜디는 그녀를 발견하자 벌떡 일어나서 이어폰을 뺐다.
"오, 제스! 돌아왔군요!"
"너는 더럽히는 데는 선수구나, 랜디. 어디서 새로 추가 주문을 했지?"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서명을 가리켰다. 선적부라고 크고 거칠게 쓰여 있
었다.
"오, 결국 주문을 약간 받았어요."
"잘됐군. 카일 안에 있지?"
랜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책상을 점령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바빠서요."
그는 몸을 앞으로 굽혀 팝송 디스크를 컴퓨터에서 꺼낸 뒤 천천히 다른 디
스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작업을 하기 위해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
면서 다시 아까와 같은 자세로 돌아갔다.
그때 안쪽의 사무실 문이 열렸다
"랜디, 새 컴퓨터 말이야..."
카일이 그녀를 보고는 문간에서 멈췄다.
그는 적보다 차림새가 훨씬 나아졌다. 적어도 사무실 안에서 입는 차림새
치고는 멋있었다. 낡고 오래된 스웨터는 어디에도 안 보이고, 짙은 회색 바
지에 청색 재킷 차림이었다. 전에 턱시도를 입었을 때만큼 근사해 보였다.
거래가 성사된 거야. 그래서 회사라는 조직에 어울리는 차림새를 한 거야.
"음, 당신 몫이 어떻게 되는지 조사하러 들렀소?"
거의 자동적으로 제시카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불안이 엄습하자 속이 메슥
거렸다. 카일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이미 물 건너 간 뒤라면
그에게 경고해 줘밨자 좋은 소리도 못 들을 것 같았다.
"법적으론 어떻게 처지할지 걱정이 돼서요."
카일은 옆으로 비켜서더니 그의 사무실을 가리켰다.
제시카는 종이가방을 방패막이라도 되는 양 꽉 움켜쥐고서 안으로 들어갔
다.
"이혼청구는 하셨어요? 아니면 제가 할까요?"
그는 문을 닫고는 기대섰다.
"카일? 결혼한 상태로 영원히 있을 순 없잖아요."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소. 어서 착수해요. 다른 사랑은?"
제시카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녀는 결국 이 문제 때문에 온 것이다.
"당신에게 말해 줘야, 아니 경고해 줘야 할 것 같아서요. 트레버는 새 일
에 그렇게 기뻐하지 않더군요."
그녀는 종이가방을 열고 키보드 옆에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카일은 모른 체했다.
"그는 당신한테 속마음까지 털어 놓는가 보군?"
그는 그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떠오르는 샛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알아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요?"
"저, 그 사람 밑에서 일할 거라면..."
"아니오."
그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그럼, 그 일이 실패했다는 건가요? 하지만..."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월터가 그 싸움을 보고서... 미안해요."
"당신이? 쓸 돈도 있을 텐데 왜 그러지? 늘 가욋돈이 굴러들어오잖소?"
"맙소사, 카일. 내가 그 돈이 탐나서 그러는 게 아녜요!"
그녀는 소리쳤다.
"당신이 그 일을 간절히 원했던거 알아요. 돈 걱정 없이 프로그램에만 몰
두할 수 있었는데..."
스트레스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그의 몸이 팽팽히 긴장되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저, 소프텍에서 제시했던 게 뭐 그리 대단한 거였겠어요. 아마 내가 도움
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연합공업사 주식을 팔고 나면..."
"당신 아버지는 당신의 미래를 위해 그 돈을 투자했던거요."
"그럼 난 당신에게 투자하겠어요."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왜? 책임감 때문이오?"
그녀는 주저하다 진실을 말해 버렸다.
"아뇨,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요."
"만일 당신 돈을 날리게 된다면?"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봤자 전보다 더 나빠지기야 하겠어요?"
"진주 목걸이가 날아가도?"
그녀는 아주 차분히 대답했다.
"목걸이가 날아가도요."
그녀는 돈으로 그를 사려는 게 아니었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그가 그녀
를 좋아하게만 된다면,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제스."
그가 말했다.
그가 그렇게 불러 주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러나 지금 그의 목소리에
는 전에는 전혀 듣지 못한 부드러움이 배어 있었다. 그 부드러움에 그녀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그건 단지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뿐일 텐데도.
"그럼 됐어요. 주식을 현찰로 바꿀 수 있나 알아보죠. 시간이 약간 걸리겠
지만 일주일 내지 이주일이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제스. 당신은 정말 마음씨가 곱군. 그러나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소."
잠시 동안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만일 그녀의 돈을 거절한다
면 이제 희망은 없다. 둘 사이를 이어줄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제시카는 여기서 나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자존심을 아끼려면.
그러나 그녀를 그럴 수가 없었다.
"어쨌든 반은 당신 몫으로 해놨어요."
그녀는 웃으며 얘기하려고 애썼다.
"내 것은 당신 것, 기억하죠?"
그가 살짝 웃었다.
"오늘밤 당신과 저녁식사를 하고 싶군."
"저녁이오요?"
그 제안은 너무 뜻밖이라 웃음이 나왔다.
"왜요?"
"오늘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오."
"오, 안돼요. 계속 티격태격하면 가족들이 우리가 깨진걸 전부 알게 될 거
예요."
그녀는 맡은 역할을 잘 연기하기가 힘들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카일."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어떻게 하고 싶소, 제스?"
그녀는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얼이 빠져 그가 먹을 샌드위치
반쪽을 집어들고는 한입 베어물었다. 샌드위치의 내용물이 혀에 뻑뻑하게
달라붙자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걸 말해도 되겠소?"
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 문이 홱 열리더니 책상에 꽝 부딪쳤다. 검은 머리칼의 한 남자가 커
다란 책상을 어깨에 짊어지고 랜디를 지나치며 기분좋게 말했다.
"안녕, 카일. 새 컴퓨터는 눈이 빠지게 기다린 거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내
것은 풀지도 않고 이것부터 가져왔어."
제시카는 캐롤 모건이 살던 아파트에서 그의 사진을 본 기억이 났다. 드디
어 버니를 만났다.
그는 계속해서 즐겁게 말했다.
"결혼기념일 모임에 입고 갈 옷은 아니지? 이제 그런 차림으로 다니지만
않으면 어머니도 후원자가 되실 거야. 이번엔 아주 신경써서 준비하시느라
고 펠리시테에서 조나단을 부르셨다고..."
제시카가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일어서자 버니가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다.
"오, 안녕하십니까? 제시카 맞죠?"
"당신은 버니고요."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캐롤 모건의 오빠, 버니죠. 내가 바로 맞힐지는 모르겠지만, 카일의 동생
아닌가요?"
"반은 맞혔어요. 아버지는 틀리거든요. 이제는 그런 관계들에 대해 더이상
신경쓰고 싶지 않아요. 카일과 가까이 있었으니 그런 것들에 대해선 잘 이
해하시겠지요."
"물론 이해해요."
"버니, 나가."
카일이 명령했다.
"하지만 난... 알았어. 컴퓨터는 어디에 놓을까?"
"아무 강에다 던져 버려. 알았어? 나가라고!"
버니는 컴퓨터를 든 채 나갔다.
카일이 문을 닫았다.
"제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언제 말해 주려고 했죠, 카일?"
"며칠 전 펠리시테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던 날이오."
그날 밤은 그녀가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그날 밤 그녀는 펠
리시티에 담긴 추억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었
다. 그날 밤 그들은 아무 데도 못 갔다. 월터가 나타나는 바람에 싸우기만
했었다.
"펠리시티 얘기가 나왔는데, 버니가 말한 게 무슨 소리죠? 당신 어머니가
조나단을 임시로 쓰신다고요? 아니에요, 일부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 그가
당신한테 와인을 맛보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당신은
배울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이란 걸 훤히 알고 있었던 거죠!"
"나는, 제스..."
"당신은 사교계 규칙을 나한테 배울 필요가 전혀 없었어요."
"전부 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모든 게 다 거짓이었죠? 아니면 완전
히 장난이었다고 말하겠어요?"
"약간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오. 하지만 재미있으려고 그런 건 아니었소."
"그럼, 왜 그랬어요, 카일? 내가 망해 버린 불쌍하고 초라한 여자애라서요
? 그렇게 해서 내게 돈을 주려고 한 거예요?"
"제스, 아니오."
"내게 대단한 자선사업이라도 베푼 건가요? 그 노력이 가상하군요. 하지만
더이상 당신 도움은 필요없어요. 당신도 더이상 필요없고요!"
그건 그녀에게 있어 제일 커다란 거짓이었다. 눈에 눈물이 글썽거려 무턱
대고 휴지를 집었다.
"왜 그랬죠, 카일?"
"당신이 내 곁을 떠날까 봐 두려웠소."
그가 차분히 말했다.
"내가 끔찍하게도 훌륭한 업무과장이라서 놓치기가 싫었나요?"
"아니오."
그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보다 약간 더 컸다.
"당신은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기 때문이오."
갑자기 바닥이 내려앉은 것처럼 그녀는 비틀거렸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그런 식으로 본 적이 전혀 없었소. 안 그렇소, 제스
?"
"난..."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가 말한 게 옳았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으
랴? 몇 달 동안 그런 눈치 하나 못 챘으니 얼마나 바보였던가?
"당신을 채용하던 날, 인터뷰가 끝나자 그 떠오르는 샛별이 데리러 왔더
군. 당신은 차를 타기 전에 축하의 포옹을 했었소. 그건 언제나 그의 몫이
었지. 그가 당신을 찼을 때도..."
"난 그를 원하지 않았어요. 난 그런 바보가 아니라고요."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그게 날 원한다는 의미는 아니잖소. 당신이 내
게 비밀을 털어놓던 날,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면..."
"커피를 당신 머리에 붓고는 나가 버렸겠죠."
"내 직감이 맞았군. 하지만 당신이 툴숍을 그만두고 더 나은 직장을 찾겠
다고 얘기했지... 난 당신을 붙잡아 둬야 했소. 그 양복쟁이들이 나타나지
만 않았어도 다른 걸 제안했을 거요."
그녀는 잠시 동안 생각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를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죠?"
그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아주 혁신적인 전략을 짜놨었소. 나중에 말해 주리다. 계획대로 성공하면
약혼이나 결혼을 할 생각을 계속 품고 있었소. 그랬다면 최소한 당신도 이
런 미친 짓에 말려들지 않았을 거요."
"그래요. 하지만 당신과 결혼하는 게 미친 짓 같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 당신이 오로지 관심있어 하는 건 그 거래를 성사시켜 백만장자가
되는 것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마침내 재정 형편이 바뀌면서, 바로 끄때
거래가 깨어지려고 했었죠..."
"프레드 잭슨의 목탄이 나를 세차게 쳤소. 제스, 갑자기 당신은 더이상 나
를 필요로 하지 않고 돈만 끔찍이 여기는 것 같았소."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이 있었죠. 내 이름과 베닝턴 가문의 돈 때문
이었어요. 난 당신이 그런 부류라고 생각하기 싫었어요."
"결코 아니오. 난 괴로웠소. 당신을 잘못 봤다고 생각하지 않았소. 당신은
지금도 날 밀어내면서 돈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얘기했잖소..."
"당신을 돈으로 매수하는 게 두려웠어요. 당신이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면 우리 사이가 비참하게 끝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다는 게 말이에요."
"모든 소동이 그 돈 때문이군. 이제 그런 문제로 서로 왈가왈부하지 맙시
다."
그녀는 어느 틈에 그의 품안에 안겨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게 흐뭇했다. 언제나 그에게 기댈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돌려 부드럽게 키스했다. 오랫동안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욕망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사랑해요."
그녀는 속삭였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으나, 뺨을 그녀의 머리에 대고 더욱 바짝 끌어
안았다.
"우리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머니가 정말 화내실 거요. 내가 소프텍과 계약
한 걸 아시기 때문에 사업 핑계를 댈 수도 없고..."
"계약이오?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는데요."
"오, 대내적으로 계약하려던 일은 이미 끝장났소. 월터가 애초에 원했던
게 있었는데, 그것을 계약했소. 전에 인터넷에 올려놓았던 걸 보고는 그 권
리를 샀지. 그리고 내겐 새로 개발한 프로그램이 하나 있소. 지난주에 시장
조사를 해보려고 샘플을 뽑아 알아보았소. 랜디가 내내 고생한 덕분에 결과
가 괜찮은 것 같더군."
"주문이 좀 들어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벌써 우편주문이 가방 두 개 분량만큼이나 들어왔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우편물이 배달되면 랜디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소. 그게 도깨비불처럼 인
기가 치솟고 있는데 뭐하러 소프텍을 기웃거리겠소? 월터에게 받은 돈을 가
지고 이 모든 사업에 투자했소. 통쾌하지 않소?"
그는 싱긋 웃고는 그녀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는 내게서 당신을 빼앗으려고 한 대가를 치른 거요."
"당신은 전혀 관심도 없어 보였어요."
"관심이 있었소. 당신이 그를 진정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걸 안 다음에야
웃어넘겨 버릴 수 있었소. 하지만 당신이 내 서업 걱정을 해주는 순간..."
그는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더니 손으로 감싸안았다.
"당신이 필요하오, 제스."
"업무과장으로 복귀하란 말 같은데요?"
"그렇기도 하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맡길 거요. 당신이 허
락한다면, 난 아내가 필요하오."
그녀는 말을 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결혼식에 대해선 미안하오, 달링. 원한다면 새로 할 수도 있소."
"결혼식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카일. 중요한 건 결혼이에요."
그가 천천히 웃자 그녀의 가슴은 그의 대한 사랑으로 꽉 찼다.
카일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에메랄드 반지를 꺼냈다.
"다시 받아 주겠소?"
그녀는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았다.
"버니가 뭐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앤 루비를 갖고, 캐롤은 사파이어를 가졌소. 어머니는 아직 다이아몬드
반지를 갖고 계시오."
카리은 약간 쑥쓰러운 듯 말했다.
"반지가 버니의 것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소, 제스. 할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만 했지."
"그리고 당신 할머니도 되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에메랄드 반지가 내 것이라고 똑바로 말을 할 수가 없었소. 당신이 이
것저것 너무 물어 볼 테니까. 하지만 당신에게 내 반지를 끼워 주고 싶었
소. 당신을 볼 때마다 나 혼자 은밀하게 가슴을 설랬지. 당시은 내 아내요.
"
그는 천천히 길게 키스했다.
"당신은 땅콩크림 맛이 나는군."
"당신도 그 맛인데요."
그녀의 목소리가 허스키해졌다.
"이러니 캐롤을 감시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내가 좋아하는 하나뿐인 여동생이니까."
그는 제시카를 소파로 끌어당기며 꼭 껴안았다.
"참, 오늘 오후에 당신 아파트를 덮치려고 했소. 이틀 동안 마음을 가라앉
혔을 테니 내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었소. 결혼반지는 되돌려 주지 않았
으니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소..."
그는 그녀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키스했다.
"모든 걸 고백하고 결혼기념일 파티에 가서 내게 중요한 몇몇 사람들과 만
나자고 할 작정이었소. 조만간 당신도 가족의 일원이 되어야 하니까 말이
오."
"조신하게 굴겠어요."
"그러길 바라오."
그가 놀리듯 말했다.
"단지 하루 저녁인데다 베닝턴 가문 사람이니 오궂하겠소. 그건 그렇고,
아직도 그 저택을 원하오?"
제시카는 거의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입술로 그녀의 귓볼을
애무하면서 부드럽게 숨결로 온몸의 감각을 일깨워 다른 데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원한다고 다 되는 건가요? 팔려고 내놓지도 않았는데."
그는 그녀를 바라보기 위해 잠깐 뒤로 몸을 젖혔다.
"당신 말이 맞소.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았소?"
"오늘 그곳에 들러 주인에게 물어 봤거든요.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난 알고 있소. 그 저택은 우리의 아름다운 집에 될 테니까 말이오."
"네."
그녀의 속삭임엔 슬픔이 깃들여 있었다.
"그곳엔 다른 많은 집들이 있으니까요. 언젠가는..."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과 입술이 맞닿게 그의 머리를 끌어당
겼다.
잠시 후, 그가 물었다.
"잔디 깎는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소?"
"할머니의 장미를 싸주고 있었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카일?"
"왜 그러오, 내 사랑?"
"잔디 깎는 사람들을 어떻게 알았죠?"
"당신은 주인하고 얘기한 게 아니오. 전 주인하고 얘기했던 거요. 다음주
까진 그곳에 살겠지만."
"당신..."
그녀는 주먹을 쥐고 그의 코 밑에다 대고 흔들었다.
카일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키스했다.
"어디서 돈이 나와 그 저택을 샀죠? 새 프로글매 주문이 쇄도했다지만..."
"오, 그 얘기는 안했던가? 신용기금이 좀 있었소. 할아버지께서 말이오...
"
"당신 할머니께 에메랄드 반지를 주신 분 말이죠?"
"그리고 버니한테는 루비 반지를, 캐롤에게는 사파이어를, 어머니에게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셨지. 할아버지는 보석상을 소유하셨소."
"그거 편리하군요."
"돈도 많이 벌린다오. 실은 아직도 갖고 있소. 사회적으로는 베닝턴 가문
에 못 미치지만 재정적으로는..."
"그래서 당신이 돈에 관해 그렇게 무관심했군요. 늘 풍족했으니..."
"정말 돈에 아무 생각이 없었소. 당신이 당신 자신을 염려해 일자리를 그
만두겠다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깨달았던 거요. 툴숍을 혼자 힘으로 꾸릴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게 재미있었소. 돈이 줄 수 있는 엄청난 부산물들이
내겐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소. 물론 지금은..."
"나를 위해 그 저택을 살 필요는 없어요. 이 사무실로 이사올 생각도 없지
만요. 당신이 원한다면 잠시 동안 내 아파트에서 살면 돼요."
"아늑하겠군. 하지만 그 저택을 지니고 있는 게 낫겠소. 벌써 이곳은 임대
쟤계약을 포기했소. 이제 내가 원하던 차고를 갖게 됐소."
그는 다시 한번 아주 천천히 키스했다.
"제스, 우리가 결혼해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소?"
그녀는 신중히 생각했다.
"음,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 저도 노력하겠어요."
"좋소. 진짜는 지금부터 시작하오."
제시카는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제 10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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