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테러리스트 카멜레온 <하권>
윌리엄 딜 저
----- < 차 례 > -----
<작가 소개>
1. 다니로프의 고백
2. 암호 해독
3. 후커 장군
4. 카멜레온을 찾아서
5. 습격
6. 또하나의 연인 다나
7. 검도 사범 오카리
8. 거대 기업 암란
9. 수수께끼의 여인
10. 카멜레온의 정체
11. 대결
12. 회의
13. 용의 보금자리
14. 1000일의 정진
<옮긴이의 말>
<작가 소개>
* 윌리엄 딜
윌리엄 딜은 1924년 미국 뉴욕 주 자메이카에서
태어나 미주리 대학을 졸업했다. <애틀랜타
콘스티튜션>의 기자, <애틀랜타 매거진>의 편집자,
카메라 맨 등의 직업을 거친 뒤 쉰 살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에 있는
텔레비전 방송국의 유명한 여성 뉴스 캐스터 버지니아
건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데, 이 책의 여주인공 엘리자
건은 그녀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테러리스트 양성 코스'에 10일 동안 참가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첫 장편추리소설이면서 영화로
만들어진 <샤키 머신>(1978)과 <Hooligans>(1984)
<Thai Horse>(1987) <27>(1990) 등이 있다.
1. 다니로프의 고백
[맞아.]
매지션이 말했다.
[라반더는 죽었어. 방금 킹스톤 라디오 방송을
들었어. 그들은 그것을 밀수 사건으로 취급하더군.
목에 구멍이 나 있고 주머니가 없어졌다. 그런
식이야.]
그날 아침 일찍 그들이 세인트 루시퍼로 돌아온 뒤
그는 컴퓨터에 매달린 채 라반더의 노트에 적힌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다.
[그리 놀랄 만한 일은 못되지.]
오하라가 말했다.
[아냐, 하지만 난 뭐가 어떻게 됐는지 자네한테
말해 주겠네.]
매지션이 말했다.
[또 다른 시체가 파도에 휩쓸려 몬테고 베로
흘러왔더군. 흰 양복의 남자였다네. 하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네. 그렇긴 하지만 그가 교살된
것처럼 보인다는군.]
[교살?]
[그렇네, 하지만 일단 한 명의 살인자를 생각해
보자고.]
[우리들은 자마이카에서 허탕을 쳤어. 문제는
우리들이 이곳에서 이젠 어디로 가느냐 하는 거야.]
[맞아요. 우린 관광을 할 시간은 없어요.]
엘리자가 말했다.
[죽은 사람과 우리가 읽을 수도 없는 노트.]
[난 그 암호를 해독할 수 있어.]
매지션이 자신 있게 말했다.
[난 오늘 오전 내내 작업을 계속했어. 시간 문제일
뿐이지. 그건 문자 암호야. 난 문장 구조로 알 수
있어.]
[무슨 뜻이죠?]
엘리자가 물었다.
[그 의미는 뭐냐 하면 그 암호는 한 문자를
대신하기 위해 다른 문자를 쓰는 식으로 돼 있소.
알겠소? 가령 a는 암호가 어렵게 돼 있든 상관없이
z나 b또는 g로 제시되는 거죠. 매우 간단하기 때문에
라반더는 그것을 암기 할 수가 있었소. 무슨 뜻인지
알겠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서로 다른 스물 여섯 개
문자를 대신하는 문자를 모두 암기 할 수 있겠소?]
[라반더는 암기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는
천재였으니까.]
오하라가 말했다.
[그러면 컴퓨터는 어떻게 이 문제를 푼다는 거죠?]
엘리자가 물었다.
[그건 글자 수수께끼야. 아주 간단한 수수께끼지.]
매지션이 말했다.
[몇 개 단어는 분명하지. 가령 'the'와 'and'는
언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세 개의 문자로 된
단어지. 그 다음에 다른 문자보다 더 많이 반복되는
모음과 합자(合字)로 배합되는 특성 문자들이 있지.
T, l, n 따위지.]
[있을 수 있는 모든 배합을 해독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거 아니에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건 문제가 안돼요. 한번 생각해 보시오. 내가
단순화 시켜 주지요. 내가 문장을 뽑아 주는 식으로
말이요. 그런 다음에 반복되는 문자를 찾아 달라고
컴퓨터에게 프로그램을 입력시키지요. 'the' 나
'and'처럼 3개의 문자로 된 배합을 한번 해 봅시다.
그것을 계속 범위를 좁혀 나가게 되면 어떤 의미를
갖는 단어가 세 개나 네 개쯤 나타나게 되지요.]
[그래도 이해가 잘 안가는 데요.]
[그렇겠지. 하는 것을 보여주겠소.]
[우리들이 돌아온 이후 누군가가 지금쯤
졸리코에르를 본 사람이 있을까?]
오하라가 물었다.
매지션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아마도 새로운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을
거야.]
컴퓨터는 그가 만들어 준 엄청나게 큰 벽장 속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앉아 있었다. T V 모니터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로 꽉 차 있었다. 매지션도
앉아서 스크린을 살폈다.
[좋아.]
그가 말했다.
[자네들이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를 따라올 수
있을까? 자, 봐. 내가 시험 라인을 선정하겠어.
노트에 직접 적혀 있는 걸로 말이야.]
그가 스크린에 한 라인을 가리켰다.
Cpl Zbwqn Mfclbngcmwngx Ygnj Xca
[아즈테크 문자처럼 보이는군요.]
엘리자가 말했다.
매지션이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체 했다.
[이것을 분석해 달라고 하겠어.]
그가 '분석'이라고 키보드에 타이프했다. 잠시후
컴퓨터가 모니터 스크린에 정보를 인쇄하기 시작했다.
단어 수 : 5
가장 긴 단어 : 13자
가장 짧은 단어 : 3자
기타 :
5자 : 1
4자 : 1
상이한 문자수 : 15
대문자 : 5
3개의 문자로 된 단어 : 2
반복 주기 :
13 : 0 ; 12 : 0 ; 11 : 0 ; 10 : 0 ; 9 : 0 ; 8 :
0 ; 7 : 0 ; 6 : 0 ; 5 : 0 ; 4 : 2 - c, n ; 3 : 1 -
g ; 2 : 5 - b, l, m, w, x ; 1 : 7 - a, f, j, p, q,
y, z
합자(合字)배합 : 0
3개 문자 단어 : Cpl, Xca ...
그 기계가 멈추었다. 또 하나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 서브 디렉토리를 찾는 중임...
[됐어.]
매지션이 말했다.
[컴퓨터에게 시간을 좀 주자고. 합자 배합은 없어.
그러니까 우린 두개 또는 3개 문자로 된 단어를
찾아야 하는 거야, 알겠어?]
[그건 요행일 수도 있지. 이 문장은 'and' 로
시작하거나 끝나는 문장일 수도 있고 또는 'the' 라는
단어로 끝나는 문장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알겠어?
자네들이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듯이 말야. 맞아,
그런 식이야. 문장이 'the' 로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자고. 그러면 이지가 시험 문장에서 'Cpl'
대신에 'The' 를 교체시켜서 다시 배합을 해 보라고.]
그가 'The/Cpl 상호 교체' 를 타이프했다. 그리고
나서 리턴키를 쳤다.
처음 문장이 즉시 나타났다.
Cpl Zbwqn Mfclbngcmwngx Ygnj Xca
교체된 새로운 문장이 곧 나타났다.
The Zbwqn Mftebngtmwngx Ygnj Xta
[자, 새로운 문자만 가지고 어떤 글자를 얻게
되는지 보자고.]
그가 '아랫 글자만 기록'을 타이프했다.
기계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The... te... t... t...
[이제, 어떻게 하지?]
오하라가 물었다.
[이것을 방금 저장시켜 놓았어. 이제 다음 문장으로
가게 되지. 그건 힘든 일이고 틀리게 마련이지.
하지만 컴퓨터가 골치 아픈 일을 모두 해주지. 그것도
신속하게 말이야. 그리고 나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종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 한두 개를 얻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교체하는 거지. 내가 이 암호들을
해독하겠네.]
[계속해 보게.]
오하라가 말했다.
[난 몇 년 동안 자네 뒤를 따라 다니면서
배워야겠군.]
하지만 엘리자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녀는 단어
처리기에 오랫동안 매달려 왔기 때문에 컴퓨터 언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배울 수 있을 거예요.]
그녀가 낙관적으로 말했다. 매지션은 허리를 앞으로
구부린 채 두눈을 빛내면서 그가 보는 가운데 장갑 낀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무언가를, 가령 고객
명단이라도 얻게 될지 알아?]
[해독을 할 필요가 있겠군.]
오하라가 말했다.
[지금 당장 빈손으로 돌아가게 생겼으니 말야.]
[너무 비관하진 마세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건 우리가 얻은 단 하나뿐인 자료니까요.]
[꼭 그런 건 아니야!]
졸리가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하얀 이빨이 온통
드러날 정도로 웃고 있었다.
[내가 자네들한테 하이티라면 노란 색 코끼리라도
숨길 수 있다고 말했었지. 그들은 그곳에서 벼룩 한
마리조차 내겐 숨길 수 없다니까. 난 숨어 있던 자를
찾아냈지.]
[다니로프를?]
오하라가 소리쳤다.
[아무렴?]
[하이티에서?]
그 조그만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자네 두 사람이 신속하게 행동해 줄
것을 제안하네.]
[두 사람이라구요? 나는 끼워 주지 않겠다는
건가요?]
엘리자가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당신은 이번 탐색에는 갈 수가
없소. 우리 두 사람은 뒷전에 머물러 있어야 해요.]
[왜죠?]
그녀가 뾰루퉁해서 물었다.
[나는, 하이티로 되돌아 갈 수 없기 때문이오.
그리고 당신이 갈 수 없는 것은 다니로프가 숨어 있는
곳이 남자들만 가는 곳이기 때문이오.]
[남자들만 가는 곳이라고요. 그는 어디에 있는
거죠? 포트아우프린스의 Y M C A 라도 되는가요?]
[아니오, 그는 수도원에 있소.]
[수도원이라고요?]
오하라가 말했다.
[그렇네. 캡하이티엔 근교지. 난 공항에서 자네들을
만날 친구 하나를 선정해 놓았네. 그가 자네들을
안내해 줄 것이고 필요한 수속을 받아 줄 거네.]
[언제이지?]
매지션이 물었다.
[가능하면 빠를수록 좋아. 어둡기 전에 거기에
도착하는 게 상책일 거야. 지금 시간이 - 그는 손목에
차고 있는 번쩍번쩍 빛이 나는 금시계를
들여다보았다. - 12시 30분이니까. 자네들이 3시에
출발하면 4시 30분이면 캡하이티엔에 닿을 수 있을
것이고 해질 무렵이면 그곳에 갈 수 있을 거야.]
[이곳에서 우린 다시 가야겠군.]
매지션이 말했다.
[우리가 리어 제트기를 타고 서쪽으로 간다면
어떨까?]
[제가 조종사를 찾아보겠어요. 그가 가까운 바다로
낚시를 가거나 하지 않았어야 할 텐데.]
엘리자가 말하고 방에서 달려나갔다.
[졸리.]
오하라가 말했다.
[어떻게 그토록 빨리 다니로프를 찾았지? 아마
카멜레온의 가장 우수한 부하라고 해도 그를 찾아내는
데는 몇 개월 걸렸을걸.]
[졸리는 하이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매지션이 대답했다.
[그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전화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네.]
[자넨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졸리?]
오하라가 물었다. 조그만 사내는 자부심으로 얼굴이
빛났다.
[그건 비밀인데.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다니로프를 알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지. 그는
거의 1년 동안 이곳 호텔을 여러 번 드나들었네.
매지션은 컴퓨터에 매달려 있느라고 너무 바빠서
신경을 쓸 수 없겠지. 하지만 졸리야! 나는 그를 알고
있지. 물론 업무를 통해서 아는 건 아니네. 그는 그런
것에 대해서 얘기도 안했거든.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이티를 여러 번 다녀왔다고 털어놓았지. 그래서
여러 친구들을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도록 했지. 만약
그가 하이티에 있기만 하면 난 그를 찾아낼 수
있다네. 그럼 찾아내고 말고!]
[수도원이라고. 유럽에서 으뜸가는 암살자가
수도원에 있다고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나!]
오하라가 말했다.
[맞아.]
매지션이 동의했다.
[콧대 높은 수사들이 그자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인 거지?]
[곧 알게 될 걸세.]
졸리가 건방진 투로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캡하이티엔은 바세 테레에 있는 조용한 도시였다.
그 도시는 북부 하이티의 산 아래에 위치한 좁고 긴
저지대였는데 오하라가 지금까지 본 것 가운데 가장
상태가 안 좋은 도로로 30마일을 달려 45분쯤 걸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매지션은 이곳을 선뜻
선택해서 카리브 연안에서 보낸 십 년의 세월보다
기억에 남는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마을의 북쪽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산 가운데
하나를, 먼지에 뒤덮인 낡은 셰비 자동차가 신음
소리를 내며 겨우 올라오곤 했기 때문에 매지션조차도
짜증을 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커먼 구름이 마치
송곳처럼 뾰족한 봉우리 위에 걸려 있었고 산 먼
쪽에서는 이미 비가 오기 시작했다. 도로는 암벽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갑자기 끊어졌다. 암벽 너머
500피트 이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홉 살이나 열
살쯤 돼 보이는 소년이 세 마리의 당나귀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저건 당나귀군!]
매지션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졸리는 당나귀를 타게 된다는 얘기는 안했잖아.]
[졸리는 아무 얘기도 안했지.]
[그 친구 참 웃기는데, 아주 놀랄 정도로 유머
감각이 있단 말씀이야. 나를 놀려 준 게 이번만이
아니야.]
[그럼 우리들이 앞으로도 더 당해야겠는 걸.]
오하라가 말했다.
빌리라는 이름의 그 안내원은 공항에서 두 사람을
데리고 나오는 동안 거의 몇 마디도 얘기를 안했다.
불친절한 것이 아니라 다만 얘기를 나눌 줄 몰랐다.
그는 키가 크고 바싹 여윈 사내였는데 초콜릿 빛을
닮은 피부에 팔뚝과 어깨에는 근육이 불끈 솟아올라
있었고 큼직하고 굳은살이 배겨 있는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각이 반듯하게 나 있는 데다 좀
긴 편이었고 광대뼈가 깊이 파져 있었다. 당나귀를
붙잡고 있는 소년은 그의 아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치
그와 닮은 모습이었다.
빌리는 밖으로 나온 뒤 두 사람보고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는 그 소년에게 불어로 간단히 몇
마디 했다. 그러자 그 소년이 차에 탔다. 그리고 나서
빌리는 두 사람에게 당나귀를 타라고 손짓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폭우가 내리기 전에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거기까진 얼마나 되죠?]
매지션이 물었다.
[산을 넘어 삼십 분쯤 가야 할 겁니다. 멀지는
않죠.]
매지션이 가엽다는 표정으로 오하라를 바라보았다.
[당나귀를 타고 산을 넘어 삼십 분을 가는데도 그는
'멀지는 않다'고 하는군.]
그들 세 사람은 각자 당나귀를 타고 절벽 옆으로
해서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겨우 5피트밖에 안되는
오솔길 바로 밑으로는 가파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세워져 있었다. 조금 가다 보니 산길이 다시 아래로
뻗어 있어서 수백 피트는 되어 보이는 계곡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절벽의 경사면을 따라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는데 축축한 수분이 담겨 있어서 곧
비가 내릴 것 같은 기분을 더해 주었다.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려 왔다.
[이번엔 졸리를 가만두지 않겠어. 정말이야. 그
녀석의 살점을 뜯어내서 내 피아노의 뚜껑 위에다
못으로 박아 놓고 말 거야.]
[무슨 말인가, 매지션. 그는 우리들을 위해
다니로프를 찾아 주었지 않나.]
[그는 우리들에게, 햄 조각만도 못한 오솔길을 따라
당나귀를 타고 산을 헤매게 될 거라는 얘긴 안했어.
유머 감각이라니 말도 안돼. 그는 완전히 개구리 같은
녀석이야. 나쁜 자식 같으니라구!]
[그는 개구린 아니야, 매지션. 그는 하이티인이지.]
[그는 개구리처럼 말하고 개구리처럼 행동하고,
아무튼 나쁜 자식이야.]
매지션이 소리를 버럭 질러 댔다.
[그가 없으면 자네 혼자 뭘 하겠다는 건가?]
오하라가 마주 고함쳤다.
[밤에 잠이라도 편히 자겠지.]
매지션이 다시 소리쳤다.
당나귀들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빌리가 일행을
인도했다. 쉴 사이 없이 욕을 해대는 매지션은 중간에
위치해 있었으며 오하라가 뒤에서 따라왔다. 바람이
그들을 향해 불어와서 그들이 입고 있는 바람막이
옷을 휘날렸다. 오솔길은 축축하게 젖어 있어
미끄러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서
오솔길은 훨씬 더 좋아졌다. 빌리가 플래시를 꺼내
앞뒤로 흔들어 대며 오솔길을 비추었다.
19세기 초 크리스토프 왕에 의해 축조된
산성(山城)은 라 키타델레 서편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북부 해안 쪽으로 쭉 뻗어 있었으며 높고 가파른
성벽들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개의 산 가운데
하나를 휘어 감고 있었다. 그 성벽은 오래 지나지
않아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허물어진 채 희미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더 높이 올라갔다.
오하라가 엘리자에 대한 생각에 푹 빠져 있는 동안
매지션은 졸리에 대한 욕설을 퍼부어 대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오하라는 엘리자가 몬테고
베이에서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그들은 이미
포기해 버린 암호에 대해 컴퓨터를 가지고 얼마나
열심히 작업에 매달리고 있던가 하는 따위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나름대로의 몫을 다하고
있으며 그 점에 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그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폭우를 뚫고 힘겨운 여행을 계속한지 45분쯤 지나서
그들은 한쪽이 나지막한 구릉지대로 막혀 있는
조그마한 평지에 도착했다. 오솔길은 이곳에서 끝나
있었다. 비바람이 그들을 내리쳤다. 그곳에는
동물들을 매 놓을 수 있게 되어 있는 말뚝과 당나귀
세 마리와 그들 셋이서 머무를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더 이상의 여지는 없었다.
오하라는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 절벽은 안개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이제 어쩐다지? 나머지 길을 날아갈 수도 없잖아?]
매지션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절벽의 경사면에는 벨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빌리가 그것을 몇 번 누르자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요?]
[빌리야.]
안내원이 고함을 질렀다.
[아, 빌리군. 잠깐만 기다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바구니가 매달려 있는 굵은
줄이 내려왔다. 바구니 위쪽에는 마치 지하철의 전력
공급선처럼 생긴 고리가 줄에 매달려 있었다.
[누가 먼저 타겠소?]
빌리가 물으면서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그런 식으로 올라가면 이번 길이 끝나게 되는
거요?]
매지션이 놀라면서 외쳤다.
[그렇소.]
빌리가 말했다.
[난 두번째로 가겠소.]
매지션이 비바람을 피해 어깨를 움츠리면서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난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겁이 나는가?]
오하라가 물었다.
[난 겁따윈 모르는 사람이야. 이 친구야.]
그가 말했다.
[내가 먼저 올라가겠소.]
그 하이티인이 싱거운 투로 말했다.
[그래야 그들은 모든 일엔 순서가 있다는 걸
알겠지.]
그는 오하라에게 플래시를 넘겨주고 바구니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앉은 후 두손으로 밧줄을
움켜잡았다.
[알레지, 당겨!]
그가 위쪽에 있는 사내에게 소리쳤다. 잠시 후
바구니는 어둠 속으로 올라갔다.
[알레지는 또 뭐야. 난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도대체?]
매지션이 말했다.
[자넨 나한테 따분하다고 하면서 자네의 삶을 좀
끌어올리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나. 이게 바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 일이라고 부르는 걸세.]
[이런 일은 오히려 꽁꽁 얼어붙게 만들 따름이지.]
그는 어둠 속을 쏘아보면서 위에서 밧줄을 당길 때
생기는 느릿하고도 일정한 리듬 소리에 귀를
곤두세웠다.
마침내 밧줄이 당겨지는 소리가 멎었다. 몇 초 후에
빌리가 밑을 향해 소리쳤다.
[올라오시오, 안전하니까.]
[알았소.]
오하라가 큰 소리로 응답했다.
흔들거리는 바구니가 어둠 속에서 내려왔다.
오하라는 매지션이 타도록 도와주었다. 매지션은 밧줄
손잡이를 잡은 채 밧줄에 매달렸다. 손아귀에 너무
힘을 꽉 줘 손가락 관절 사이가 하얗게 드러났고
두눈은 꼭 감았다.
[뭔가 일을 잘못한 것 같은데. 이런 곳에 올 줄
알았더라면 날씨라도 괜찮은 날로 잡는 건데 말야!]
그가 소리쳤다. 바구니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올라가고 있는 가운데 그의 목소리가 바람에 흩날리며
빗속으로 사라져 갔다. 산 위에서는 번갯불이
번쩍하면서 지그재그 모양으로 하늘을 갈랐다.
바구니가 세번째 내려왔을 때 오하라가 그 안으로
들어가 쪼그리고 앉으면서 손가락을 포개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자신이 절벽 측면을 따라 서서히 당겨져
올라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꼭대기 가까이 도달했을
때 그는 바구니를 동여맨 고리에서 쉴새없이
삐그덕삐그덕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구니는
마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고 있는 두레박처럼
오르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오하라는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바구니를 끌어올리는 기계
위쪽에는 얼굴 없는 유령처럼 두건을 뒤집어쓴 수사가
굽어보고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산봉우리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중세
시대의 형무소 같은 인상을 물씬 풍기는 벽돌집으로
된 수도원이었다. 아담하고, 비바람에 시달린 흔적이
엿보이는 그 건물은 지붕이 덮인 복도에 아주
위태롭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따금씩 들려오곤 하는
싸늘하면서도 흐느끼는 듯한 바람소리는 오하라에게
단테의 신곡에서 읽은 적이 있는 지옥의 절규를
생각나게 했다.
빌리와 매지션은 본채인 듯한 건물의 나지막한
아치형 현관 아래에 움츠리고 서 있었다.
[난 프레레 클레프라고 합니다.]
두건을 쓴 수사가 말했다.
[오하라입니다. 이쪽은 마이크 로스차일드라고
하지요. 당신은 빌리를 아시겠군요.]
[아무렴요.]
프레레 클레프는 오하라에게로 몸을 돌렸다.
[우리 영내에 들어오신 분들은 침묵으로 인사를
대신해야 합니다. 전 문지기랍니다. 관례적으로 저만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답니다.]
그는 여러 곳의 악센트를 뒤섞어 부드럽게 말했다.
영어의 악센트 같기도 하고 불어의 것 같기도 하고
스페인어를 조금 닮은 데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들은 당신들이 우리가 보호중인 사람을 만나러
이곳에 왔으며 당신들이 그의 곤경에 대해 안됐어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바로 맞추셨습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절 따라 오십시오.]
수사가 오하라와 매지션을 안내하는 동안 빌리는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옆방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들은 나무 창살로 되어 있는 문을 지나서 마치
지하 묘지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수도원을 통해
내려갔다. 그때 갑자기 오하라는 어디선가 구슬픈
바람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들으면서 그곳의 지명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생명이 없는 두 눈을 가진 산.
이름이 잘 어울렸다. 그들을 잡으려는 듯 두팔을
뻗친 채 통나무집 뒤쪽으로부터 생명이 없는 두 눈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번갯불이 번쩍거릴 때마다
시커먼 입으로부터 우우... 하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그 수도원은 정신병원 같았다. 문지기로 있는 말이
없는 수도승들.
매지션은 오하라에게 불안한 표정을 던지면서
두눈을 치켜 뜨고 한 바퀴 굴려 보았다.
또다시 번갯불이 번쩍 하는 순간 그 으스스한
울림이 다시 들려 왔다.
그들은 건물의 마지막 칸으로 들어서서 짤막하게
놓여져 있는 널찍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복도의
썰렁한 벽 위에 나와 있는 촛대에선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비바람으로 인해 냉기가 감도는 그 건물은
습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며 왠지 모를 불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두건을 쓴 사내가 첫번째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들이 온다고 그에게 얘긴 해 두었지요.
그렇지만 그의 반응은... 다소 뜻밖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프레레 클레프씨, 다니로프가 미친 겁니까?]
[당신들은 몰랐었군요? 네, 그렇답니다. 그
형제분은 완전히 미쳤답니다. 그는 자신이 미친
상태에서 참회를 구하고 있답니다.]
그 수도승이 통나무로 된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그가... 뭐라고나 할까...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현실 세계를 드나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를 치료하고 있는 겁니까?]
[이곳으로 보내진 사람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애석합니다. 이 형제분은 친구들이 우리들에게
보냈지만 그 자신도 이곳에 따로 떨어져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가 이곳에 오기를 요청했다구요?]
매지션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극도의 편집 증세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따금씩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곤 하지요.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는 자신이 숨어 지내는 것이 죽느니만도
못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럴 만도 하지! 오하라는 생각했다. 수도원의
수사들은 다니로프가 실제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고의로 숨겨 주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죽느니보다 못한
보호 상태가 아무런 해로움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여기 온 지는 얼마나 됐죠?]
오하라가 물었다.
[넉 달 됐죠. 이곳에 온 뒤로 그는 현실로부터 더욱
멀어졌죠.]
그는 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가리켰다.
[당신들이 용무를 마치고 나서 저 초인종을 울리면
됩니다. 그는 이곳이 자기 집이라고 믿고 있답니다.
그는 자신이 정신이상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그 수도승은 문을 열쇠로 연 뒤 큼직한 빗장을
옆으로 밀쳤다.
[손님이 찾아왔소.]
그가 계단을 조용히 톡톡 두들겨 대며 말했다.
그들은 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간 뒤 문 옆에 섰다.
그들의 눈에는 타오르고 있는 촛불이 확 들어왔다.
촛불들은 다니로프의 방, 아니 방들 - 왜냐하면 그
방은 석벽을 뚫고서 파낸 둥근 천장에 의해 서로
연결된 실제로는 두개의 방이었기 때문이었다. - 에
으스스한 노란 불빛을 뿌리고 있었다. 안쪽 넓은 방은
깜짝 놀랄 정도였다. 큼직한 굴참나무 테이블이 하나
있었는데 벽 한쪽으로 밀쳐진 채 서류와 노트 따위가
올려져 있었다. 다른 한쪽 벽에는 여러 나랏말로 된
책들이 꽂혀 있는 큼직한 책꽂이가 세워져 있었다. 그
맞은 편에는 베개 몇 개가 놓여 있는 간이 침대가
하나 있었고 그 침대 옆에는 조그만 탁자가 한 개,
책상 앞에는 등받이가 높게 되어 있는 걸상이 한 개,
그리고 한 쪽 구석에는 다른 두개의 걸상이 위태롭게
세워져 있었다. 벽 위에는 지도들, 꽃과 야생 동물이
그려진 그림들, 불가리아 수도인 소피아 시가지
모습을 담고 있는 조그마한 흑백 사진이 하나 걸려
있었다. 그 사진으로 본 소피아 시가지는 황량하고
으스스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또 다른 방에는 침대가 하나, 야간용 테이블이
하나, 큼지막한 벽장이 한 개 있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 가까운 쪽 마루 위에는 데이지 꽃이 꽂혀 있는
큼직한 꽃병이 하나 있었다. 지금 다니로프는 손에
펜을 잡고는 그 책상에 앉아 종이 한 장을 놓고
정신없이 무언가를 써 대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그가 한 쪽 손을 흔들어 대면서 말했다. 열심히
쓰고 있던 일을 다 끝내고 나자 그는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이야말로 모뜬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그
자신 속의 유령들에 의해 쫓기면서 나이, 양심,
그리고 공포감에 의해 정신이상으로까지 간 한
사내였으며 자기 자신의 별난 성격과 자학 증세에
의해 미쳐 버린 암살자였고, 자신의 곤경을 완전히
망각하는 증세가 있는 미친 사람 중에서도 아주
심하게 미친 사람이었다. 양배추형의 그의 얼굴은
주름이 진 채 많이 상해져 있었다.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가 다음 순간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내는
두 눈에는 자아 말살의 빛이 숨겨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순백색으로 변한 채 땀에 뒤범벅이 되어
엉클어진 모습으로 머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중풍에
걸린 두손은 관절염까지 걸려 있었다. 바싹 야윈
얼굴에는 땀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구겨지고 때가 묻어 있는 흰색 바지와
거의 허리까지 열어 젖혀 있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불어를 할 줄 아시오? 아니면 스페인어? 아니면
독일어?]
[영어요. 영어를 할 줄 압니다.]
[영어라고.]
그가 말했다.
[당신은 영국인이오?]
그는 악센트에 후음(喉音)이 섞이긴 했지만 영어
실력이 괜찮은 편이었다.
[미국인이오.]
[미국인이라고!]
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다소
열기를 띠고, 괴로움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아, 알았소. 무슨 일이오? 난 바쁜 사람이오.
당신은 내가 바쁘다는 걸 모르고 있소? 응? 이 책상을
보시오. 그걸 한 번 보란 말이오! 계획, 계획, 계...
하루종일 시간이 없단 말이오... 내 비서는... 난
보지도 못했소... 음, 그녀가 휴일날 떠나는걸
말이요. 빌어먹을.]
그는 미친 듯이 책상 위의 서류들을 흐트렸다.
[다니로프?]
오하라가 말했다.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사내가 타오르는 촛불을 통해
그를 응시했다.
[난 당신을 알고 있소.]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당신은 날 죽이려고 이곳에 온 거요.]
그는 가슴 앞으로 끄트머리가 예리하게 번뜩이는
우산을 꼭 잡은 채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훌쩍거리며
방 한 구석으로 도망쳤다. 오하라는 날카로운 우산
끝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난 당신을 돕고 싶소.]
오하라가 말했다.
[난 도움 따윈 필요없어. 내게서 사라져. 당신도
그놈들과 한패거리야.]
[어떤 사람과 한패란 얘기요?]
다니로프의 기분이 갑자기 바뀌었다.
[쓸데없는 짓 - 당신은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당신이 어떻게 알았지 - 좋아, 좋다고. 안전한 곳은
어디지? 안전한 곳 말야! 당신이 안전한 곳을 어떻게
알았지! 그들이 나를 팔았어... 나를 팔았어... 아,
그 자식들이...]
그는 두눈을 감은 채 한 쪽 손으로 무릎을
내리쳤다.
[아무도 당신을 판 사람은 없소, 다니로프. 내가
약속하오. 당신의 비밀은 우리들에겐 안전합니다. 나
자신도 수년간 피신 생활을 한 적 있소.]
다니로프의 기분이 다시 변했다. 그는 낄낄거리고
나서 리듬 있는 어조로 말했다.
[당신을 믿지 않소.]
그가 마치 노래라도 부르는 듯 말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소. 거짓도 예술이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소?]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대답을 기다리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KGB에서는 마치 사격술이라도 가르치는 것처럼
거짓을 가르치고 있지. 기본이야, 기본이라고!]
긴 침묵이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내가 당신들을 알고 있단
말이요?]
[우린 공식적으로 만난 적이 없소. 내 이름은
오하라요.]
[오하라... 오하라... 아일랜드 사람이군, 맞소? I
R A (아일랜드 공화국군)요?]
[미국인이요.]
[마, 마, 맞소. 다, 당신이 내, 내게 그, 그렇게
말했었지.]
그는 절망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잠시
후 곧바로 다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아, 잠시 바보 같은 짓을 했군.]
그는 우산을 바닥에 세우고는 그 주위를 맴돌며
지그(4분의 3박자의 빠른 춤)춤을 추었다. 그는
머리를 위로 치켜들고 마치 수탉처럼 울어댔다.
[아주 미쳐 버렸군.]
매지션이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나가지, 이 자식 완전히 물이 갔어.]
[우리들이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내려고 이곳에
힘들여 찾아온 건 아니잖아, 매지션.]
오하라가 목소리를 높이더니 다시 불렀다.
[다니로프?]
그 조그만 사내는 움직임을 멈추고 어깨 너머로
절망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며 오하라를 돌아다보았다.
[우리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소,
다니로프씨.]
조그만 사내는 춤을 멈추고 나서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오하라를 바라보았다.
[아, 정말이오? 완전히 썩었어, 이곳은... 끔찍해,
끔찍해. 하지만... 난 극복해 냈소.]
그가 데이지 꽃을 가리켰다.
완전히 바위만 있는 곳에서 자라고 있지. 이곳은
진실로 지브롤터요. 하지만... 난 해냈지...
극복했소.]
[내가 직면한 문제는 화초 가꾸기가 아니오.]
오하라가 말했다.
[오?]
[내 문제는 나를 담당한 사람이 내게 제재를
가했다는 점이오.]
다니로프가 의심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있다가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렴풋하게
말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항상 일어나는 일이지.]
그가 말했다.
[당신이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곧 믿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도 되지. 난 그걸 반대 이론이라고
부르지. 어떻소? 달리 표현할 방법이라도 있겠소?]
[우린 당신을 도와주고 싶소. 다니로프.]
[무슨 목적으로?]
[당신이 이곳에 어떤 이유로 왔는지 알고 있소?]
[평화. 평정 말이오. 난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소.
이곳에 있고 싶단 말이오. 더이상 놀랄 일도 없소. 난
놀라는 걸 참을 수가 없소. 참을 수 없고 말고...
왠지 모르겠소. 여기서는 날이면 날마다 똑같지.
음식도 똑같고. 사람들도 똑같소. 난 저쪽 편에
정원도 하나 가지고 있소. 그렇지만 비가 오는군.
어쩌면 조금 있다가 함께 나가 볼 수 있을 거요. 내일
아침에라도 볼 수 있겠지.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시간이 말해 주겠지요.
그렇지 않소? 당신들은 이곳에 온 손님이 아니겠소?]
그는 살며시 오하라에게 다가온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당신한테 한가지 알려 주겠소. 음식은 비참할
정도요. 하지만 서비스, 아, 서비스라면... 최상이오.
절대로... 최상이오. 자질구레한 잔소리는 없소.
그리고 아주 신속하기도 하구. 분명히 아니겠지...
물론 아니겠지... 플라자나 사보이는 분명 아니겠지.
하지만 음식이 이집트에서만큼 훌륭하진 못해. 당신도
여행을 해?]
[곧 여행을 떠날 거요.]
매지션이 속삭였다.
[난 이런 얘기를 좀 더 많이 듣고 싶소. 분명한
사실이오.]
오하라는 그의 말을 못들은 체하고 요점을 말했다.
[다니로프, 당신 내가 누군지 알겠소?]
다니로프가 다시 방을 가로질러 다가온 뒤 오하라의
촛불에 비친 얼굴 모습을 뜯어보았다.
[내 친구? 내 형제? 나의 선생, 신부, 운전사,
아니면 나의 적? 맞아. 나의... 나의...
사형집행인이군.]
[내가 누구인지 알겠소?]
오하라가 다시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미치광이 불가리아인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입술을
오므렸다.
[난 언제나 시험 보는 데는 뛰어났었지.]
그가 말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하더니 조금 있다가
말했다.
[당신은 그들이 '세일러'라고 부르는 친구구먼.]
[맞소.]
오하라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호텔을 갖고 있는 친구겠고.]
그는 매지션에게 말했다.
[이럴 수가.]
매지션이 말했다.
다니로프가 오하라에게 돌아섰다.
[당신 그 일에서 손떼시오.]
[다시 한번 말해 보시오.]
[그것에서 손을 떼시오. 암, 난 당신을 기억하고
말고. 나도 그 일에서 손을 뗐소.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
[당신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됐소?]
[그들이 그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건 위험한
일이오. 그들은 당신을 영원히 잠재우고 싶어할
거요.]
['그들'이 누구요?]
[얼굴 없는 자, 전화 목소리요. 이 놈도 죽이고 저
놈도 죽이지. 무슨 이유에서 그러느냐구? 신경 쓰지
마시오. 아, 미안하오.]
[카멜레온은 누구요?]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있지.]
[그가 어떻게 생겼소?]
[모든 사람이기도 하고 아무도 아니기도 하고. 그가
카멜레온이오. 카멜레온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마디로 말할 수가 없소.]
[당신, 매스터에 대해선 아는 게 있소?]
그가 다시 경계의 빛을 띠었다. 그의 두눈은 방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을 가볍게 본다는 건. 당신도 알겠지만 아주
위험하오.]
[누굴 가볍게 본단 말이오? 매스터 말이오?]
[그들은 이념적인 민족 차별 주의자들이오.
그래서는 안되는 건데.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이제... 나는 갈곳이 없소. 이곳밖에는. 이곳은
나의... 토끼굴이오.]
[당신은 왜 달아난 거요, 다니로프?]
[너무 늙었지. 관절염에 걸렸소.]
그가 자신의 못쓰게 된 두 손을 들어올렸다.
[감각이 없어. 너무나 많은 얼굴들. 빗속의
지독히도 뚱뚱한 사내... 당신은 물러날 수가 없소.
이런 일에 물러난다는 건 없지. 당신이 더이상 쓸모가
없게 되면 그들은 당신을 버릴 것이오. 이해하겠소?
그들은 당신을 떨어뜨리게 되는 거요... 어딘 줄
아시오?]
그가 '빠드득'하고 이를 갈았다.
[... 쓰레기 하치장이오.]
[매스터가 당신을 죽이려는 이유가 당신이 관절염에
걸렸기 때문이란 말이요?]
다니로프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용서 못할 일이오. 병이 난 후 그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겨 왔소. 하지만 결국... 내가 끝까지
숨길 수는 없었소.]
그는 두 손을 계속해서 떨고 있었다. 조금 후 그가
말했다.
[난 그들에게 실패를 안겨 주었소. 이런 일에...
실패란 없는 법이오.]
[당신이 어떤 일에 실패했단 말이오?]
[카멜레온.]
[카멜레온이 어떻다는 거요?]
[난 카멜레온을 놓쳤소.]
[그를 놓쳤다구요? 당신이 그를 죽이려고 했단
말이오?]
[바로 그렇소.]
[퀼이 당신더러 카멜레온을 죽이라고 한 거요?]
다니로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못
박히기라도 한 듯 촛불 가운데 하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게 당신을 죽이려는 이유란 말이오?]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패했기 때문이오. 그들은 하와이에서도 내가
일을 하나 해 주기를 바랬소.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소. 도저히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소.]
[하와이에서 무슨 일이요?]
['소로우'로부터 사진을 가져온 사내였소.]
오하라는 궁금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매지션을 바라봤다.
[침몰해 버린 원유 굴착장을 말하는 거요?]
매지션이 물었다.
[맞소. 우린 톤리를 그곳에서 잃었소.]
[영국 정보원 톤리를 말하는 거요?]
오하라가 말했다.
[맞소. 그 친구만 운명을 달리했소. 바닷속에 묻힌
거요. 난 이해할 수 있지 한 편의 시(詩)처럼
느껴지지 않소?]
[톤리가 당신을 매스터에게 소개한 거요?]
[그렇소. 파리에서였소. 3년 전이오. 나의 첫
임무는... 시몬즈였소. 텍사스. 하우스톤에서. 그에게
우산 맛을 보여줬소. 6시간 만에 죽었소.
심장마비였지. 그들은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이오.]
그가 눈을 찡긋하며 미소지었다.
[잠시 '소로우' 얘기로 돌아갑시다. 그들이 정말로
소로우를 침몰시켰단 말이오?]
[그렇소. 여러 사람의 손을 빌었소. 죽은 사람이
수백 명은 될 거요. 8천만 달러... 1억불 쯤 손실이
났을 거요. 끔찍스러운 일이었소. 우리가 잃은
거라고는 톤리뿐이었으니 장사는 잘한 셈 아니겠소?
폭약으로 굴착장 다리 하나를 부셔 버렸지.]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원유 굴착장
도면을 당신이 가져오도록 원했던 도면 얘기로군,
맞소?]
[그 도면은 펌프 시스템에 대한 것이었소. 매우
획기적인 시스템이었소. 하지만 그들은 그걸 원치
않았소. 그들은 다만 그 도면과 그걸 가진 자들을
함께 매장시킬 생각뿐이었소. 그건 모두 같은
날이었소.]
[같은 날이란 게 무슨 뜻이오?]
[소로우가 침몰된 날이 바로 그들이 내게 하와이
암살을 수행토록 원했던 날이었소. 내 추측엔 그들이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할걸 미리 알고 있던 것
같소. 난 런던에 있었는데 빠져 나올 수가 없었소.
그날 날씨가 안 좋았기 때문이오. 놀랄 일도
아니지만.]
[다니로프, 카멜레온을 살해하라고 명령한 자는
누구요?]
[전화요.]
[퀼이었소?]
[그렇소.]
[퀼이 카멜레온을 해치우라고 했단 말이오?]
[그렇소.]
[무슨 이유로?]
[이유는 없소.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 법이오.]
[짐작 가는 게 있소?]
[그가 골치 아픈 존재가 된 거요.]
[그가 매스터에게서 도망친 거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퀼이 카멜레온을 제거하고 모든 작전권을
떠맡으려고 한 거란 말이요?]
다니로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엔 어떤 이유가 없소.]
그가 말했다. 바깥에서는 폭우가 그쳤다. 천둥은
아직도 산봉우리 사이에서 요란스럽게 치고 있었다.
[카멜레온은 어디 있소?]
[난 그를 놓쳤소?]
[당신이 어디에서 그를 놓쳤단 말이오?]
[도쿄요.]
[그가 도쿄에 살고 있소?]
다니로프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것 같소.]
[퀼이 당신한테 카멜레온을 찾아 해치우라고
지시했고, 당신은 그를 따라 도쿄까지 갔는데 그를
놓쳤단 얘기군요. 당신이 도쿄로 달려갔을 때 이미
그가 없어졌다는 얘기요?]
[아니오. 그를 도쿄에서 발견했는데 놓쳤다는
뜻이오.]
[어디에서? 어디에서 그를 놓쳤소?]
[거리에서. 빌어먹을! 그가 사라져 버렸소.]
[어떻게 그를 찾아냈소?]
[얘기하자면 너무 길지. 우여곡절 끝에, 내
이전에도 다른 사람들이 실패했소.]
[다니로프, 당신은 매스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소?]
[얼마나?]
[그렇소, 누구를?]
[하우스톤에서 시몬즈, 뉴욕의 리치맨,
로스앤젤리스의 가르시아, 테헤란의 한 사내,
그리스의 다른 놈, 그리고... 춥고 비가 오는
날이었소... 언제나 춥고 비가 오는 날이었지...
유쾌한 사내. 뚱뚱했었지. 보트를 만드는 친구였어.
이건... 에서...]
그의 기억이 다시 가물가물 해졌다.
[퀼 말고 다른 자가 당신한테 임무를 준 적이
있소?]
[컷아웃.]
[누구 말이요?]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호텔에 메시지를 남겼다. '당신의 축구 경기
티켓이 매표소에 있소.'어떤 지역에서 내가 그에게
접근하는 방식이었소.]
[이 일은 어느 걸 말하는 거요?]
[시몬즈요. 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소.
일본에서 있었던 빗속의 사건을 또 브리지드. 맞아,
이름이 브리지드였소. 유쾌한 선박 제조업자였소.
뚱뚱한 사내였지. 레스토랑에서 막 나오는걸
해치웠지.]
[다른 사람은?]
[기억을 못해...]
[다니로프, 당신은 도쿄에서 카멜레온을 어떻게
알아봤소?]
[난... 기억을 못해...]
[그럼 당신은 퀼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겠군.]
[퀼은 목소리뿐이었소. 카멜레온은 유령이오.
미다스는 사라졌소.]
[미다스? 미다스가 누구요?]
[미다스...]
[사람이오? 아니면 장소요?]
[난... 기억을 못하겠소...]
그는 아주 갑작스럽게 빤히 올려다보더니 옆에
우산을 세워 둔 채 무릎 위에 두손을 올려놓고 똑바로
의자에 앉았다.
[선생님이 이제 학과를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학과를 따라 읽으면 됩니다. 읽을 수
있죠? 얼마나 이상스러운 이름인가 - 에즈라. 어린
아들한테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지우다니.]
[다니로프...]
그러더니 그는 무릎을 꿇고 괴상한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파리의 거리에서 일하러 가는 도중에 나비코프,
이반. 런던 의사당 앞에서 그레고리, 게오르그...]
그러면서 자기 손에 죽은 자의 이름을 계속
주워댔다.
[자네 그를 또 놓친 것 같네, 세일러.]
매지션이 말했다.
[빌어먹을!]
[자네 많은걸 알아냈지 않은가.]
[그는 더 많은걸 알고 있어.]
[오늘밤엔 안되겠어. 그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토끼굴로 다시 들어갔어.]
다니로프가 두 사람을 쳐다봤다. 석고상처럼 푹
패인 그의 두눈에 다시 광기가 번뜩였다. 그러더니
숲속의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면서 그는 우산을 움켜쥔
후 촛대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돌아 버렸네. 어서 이곳을
나가야겠는데.]
오하라와 매지션은 그 미치광이가 계속해서 촛대를
내려치고 있을 때 문 쪽을 향해 뒷걸음질쳤다. 그들이
문에 이르렀을 때 그는 죽음의 우산을 마치 방패처럼
가슴 앞에 세운 채 어둠 속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문을 열고 빠져나온 뒤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후유!]
매지션이 내뱉었다.
[저런...]
출입문 창문을 통해 우산이 튀어나오면서 그 끝이
오하라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그는 옆으로 몸을
잽싸게 피하면서 빗장을 쾅 소리가 나도록 걸어
잠갔다.
다니로프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출구 쪽으로 난 꾸불꾸불한 통로를 통해
빠져나올 때 그는 소리를 계속 질러 댔고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와 그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
멀어져 갈 때도 비명에 가까운 괴성은 계속해서 들려
오고 있었다.
2. 암호 해독
[대단해, 라반더의 암호를 해독했단 말이지.]
매지션이 말했다.
[무엇을 알아냈는지 봅시다.]
샤워를 한 후 휴식을 취하고 나서 그들은 신선한
과일과 커피를 들며 컴퓨터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매지션은 손가락을 컴퓨터의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채 메모리되어 있는 정보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컴퓨터가 자기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도록 손을 쓰면서 '육체와 영혼'이라는
노래를 흥얼대고 있었다.
엘리자는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암호를
해독하려고 애쓴 끝에 라반더의 노트에 기록된 코드를
가지고서 컴퓨터를 이용해 몇 가지 문장 배합을
유도해 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매지션이 들려 준
말을 마침내 생각하게 되었다. 내용이 있는 그대로
기록되지 않는다면 암호 기록은 간단명료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스물 여섯 글자로 구성되는 모든
문장 배합을 기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스물 여섯
자의 알파벳. 그래서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는
모든 알파벳이 전부 들어 있는 문장 하나를 생각해
냈다.
'재빠른 갈색 여우가 게으른 개를 덮쳤다. (The
quick brown fox jumps over the lazy dog.)'
그녀가 다음에 취한 행동은 그의 알파벳 암호를
해독해 내기 위해 그 문장의 배열을 이리저리 바꾸어
보는 일이었다. 그 일이 생각대로 잘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말했다.
[저는 스물 여섯 글자의 알파벳을 모니터에
입력시킨 뒤 알파벳 한 글자씩 번갈아 가면서 문장
처음부터 끝까지 움직여 봤죠. 말하자면 b부터
시작해서 c, d, e 이런 식으로 l 까지 나아갔을 때
그게 바로 문제를 푸는 열쇠였죠.]
매지션이 말했다.
[그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문장은...
"The quick brown fx jmps v lazy dg..."
[a 대신에 l로 시작하는 알파벳 배열은 이렇게
되겠지.]
"lmnopqrstuvwxyzabcdefghijk..."
[얻어낸 모든 것을 정리해 보면 이렇게 되겠지.]
"Thequickbrownfxjmpsvlazydg..."
"lmnopqrstuvwxyzabcdefghijk..."
[그럼 이렇게 되지. l 은 t, m 은 h, 이런식으로
말야.]
그가 엘리자를 돌아다보았다.
[멋지군.]
[맞아, 아주 훌륭해, 건.]
오하라가 말했다.
[라반더(Lavander) 에게 L은 너무도 기억하기 쉬운
글자이지.]
[그럼 이제 당신과 같은 거물급 인사와 함께 일할
자격이 있는 거예요?]
[아무렴, 있고 말고.]
오하라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고맙군요.]
그녀가 말했다.
[암호를 해독한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들의 말장난을 못들은 체 하고 매지션이 물었다.
엘리자는 컴퓨터에 수록된 관련 기능을 찾아낸 후
키보드에 표시된 글자들을 암호 글자로 바꾸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라반더의 노트에 있는 거의
모든 정보를 컴퓨터에 입력시켰다.
[파일 명은 뭘로 할까?]
매지션이 그녀에게 물었다.
[L A V / 1 으로 하죠.]
매지션이 "L A V / 1" 를 타이프하자 스크린에는
단어와 숫자로 가득 찼다. 노트에 기록된 내용 중
대부분은 예금 내역이 담긴 머릿글자로 표기된 은행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은 회사명이었고 각
회사명 밑에는 암호로 표기된 기록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맙소사, 여기엔 그랜드 케이맨 명의로 보내 온
수십만 달러의 구좌도 있군!]
매지션은 정말로 크게 놀랐다.
[지금까지 거의 수백만 달러의 송금 기록이 있는
구좌도 있는데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정말로 흥미진진한 건 그게 아니오.
그는 생산량. 유전 용량, 정유 능력 아니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소. 가령, 그들이
원유 가격으로 얼마를 지불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얼마를 지불하고 있는가 하는 것 따위 말이요. 그는
온갖 귀중한 정보를 알고 있는 백과사전인 셈이오.]
그녀는 모니터 화면에 있는 두개의 수치를
가리켰다.
[공개된 보유 능력과 실제 보유 능력이군요.]
그녀가 말했다.
[기록을 보니까. 실제 보유량은 외부에 공개된
것보다는 수백만 배럴 이상 많군요. 그들은
대중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군요, 오하라.]
[그게 뭐 그렇게 놀랄 일이오? 그들은 사람들을
죽이고, 원유 굴착장을 날려 버리고, 정치인들을
암살하기도 하지요. 대중들에게 하는 하찮은
거짓말쯤이야.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들은
우리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뭔가 손을
써야만 할거요.]
[약간 냉소적으로 들리는군요.]
[사실이 그렇소.]
오하라가 말했다.
[이 모든 것들이 카멜레온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매지션이 물었다.
[내가 언젠가 말한 적 있었지. 이 일에는 어떤
정형화된 유형이 엿보이고 있네. 단순히 돈을 탐내
살인하는 것 말고 다른 목적 말일세. 내가 보기엔
우리들은 지금 모종의 국제 원유 스캔들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것 같네.]
[어쩌면 힌지도 이 노트를 손에 넣기 위해 라반더를
죽였는지도 모르지요. 당신이 그걸 손에 넣으려고
그를 쫓아갔듯이 말예요. 물론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말예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래요, 어느 경우이든 그 노트에 있는 모든
회사마다 그 늙은 양반을 죽여야 할 만한 이유로는
충분해요.]
엘리자가 말했다.
[우리들이 못된 녀석의 모습을 드러내야 해.]
오하라가 말했다.
[우리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 중에서 한 가지만
빠져 버려도 이야기는 싱겁게 돼. 사람들이 매스터를
고용하도록 만드는 동기가 무엇인가? 라반더를
암살시킨 자가 누구인가? 소로우는 왜 침몰됐는가?
마르짜의 자동차는 왜 폭파되었는가? 시몬즈와 나머지
다른 자들을 죽인 암살자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가?
반드시 공통적인 배후를 가졌다고 볼 수 없는
것이라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 개별적 이유는
무엇인가?]
[난 몇 가지 추측을 해 볼 수 있네.]
매지션이 말했다.
[전혀 터무니없는 일련의 사건들로 보이진
않는군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가 노리는 게 있을 것 같다는 얘기죠.]
[우리가 그걸 알 수 없는데도?]
매지션이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카멜레온 바로 그 자야.]
오하라가 말했다.
[자네, 육군과 해군 정보기관도 조사해 봤지?]
매지션이 고개를 끄떡였다.
[O S S에 대해선?]
[그들의 파일은 조직이 해체되면서 C I A로
넘어갔네.]
매지션이 말했다.
[난 이미 그것도 살펴봤네.]
[일선에서 물러난 요원들에 대해선?]
오하라가 말했다.
[어쩌면 그자들이 그를 어딘가 남모르는 곳에 숨겨
두었는지도 모르네. M I (군정보국)로 다시 가 보게.
뭔가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야.]
매지션이 M I 파일을 불러내 색인표를 조회했다.
[젠장.]
그가 말했다.
[여기 좀 보게. 미국, 유럽... 각 국의 일선에서
물러난 요원들의 명단이네.]
매지션이 컴퓨터의 키보드를 눌러 가자 한결같은
대답이 나타났다.
"찾는 파일 없음."
그러던 중 일본을 두들겼을 때 그들의 눈이 번쩍
빛났다. :
- 카멜레온. N / O / I. 정보원 일본어 교육부대장.
1945 - 1950년경 전범 명단에 기록된 자.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처형된 것으로
추정됨.
1950년 2월 12일 법적으로 사망선고 됨.
이상이었다.
[N / O / I 는 뭘 뜻하지요?]
엘리자가 물었다.
['기타 확인 내용 없음'이오.]
오하라가 말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기록 내용을 살폈다. 마침내
오하라가 말했다.
[그는 중요 인물 명단에 올라 있었던 게 분명하네.
그를 죽은 걸로 공표하기 위해 5년을 보냈어.]
매지션이 말했다.
[수록 내용이 너무 적군.]
[카멜레온이라는 공통 암호명이 있었던 것 같군요.]
엘리자가 말했다.
[어쩌면 여러 명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는 히로시마에서 죽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오하라가 말했다.
[그는 일흔 살 가까이 됐겠군. 35년 전이었으니까.]
[자네도 일흔 살까지는 충분히 일할 수 있을 거네.]
오하라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정보는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마음 한 구석에 넣어 두었다.
[다른 것을 한번 찾아보죠.]
엘리자가 말했다.
[컴퓨터로 다른 정보도 알아 볼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요. U P I, 뉴욕타임즈, 워싱톤
포스트, 다우 존즈, 월 스트리트 저널, C I A, 영국
첩보국, 라 슈레폐...]
[이 파일에서 다니로프로부터 들은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지. 몇 개 시험해 볼 수 있을까요?]
[그 이름에 꼭 맞는 파일이 있겠지만 여기에 반드시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 세일러.]
매지션이 말했다.
[여하튼 컴퓨터에게 한번 물어 보긴 하겠네. 이
멋진 친구는 좀 정중히 다루어야 하니까.]
그들은 작업에 착수해서 정보기관과 신문사에 대해
희생자들에 관한 정보를 탐색했다. 물어 보기만 하면
'이용할 수 있는 정보가 없음' 이라는 대답이 화면에
나타났기 때문에 지루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여러 시간이 흘러갔다. 관련이 없는 게
분명해 보였지만 그토록 많은 시몬즈와 리치맨이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데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마침내 한 건을 건져냈다.
그들은 1976년 10월부터 1977년 10월까지에 걸쳐
유나이티드 프레스 인터내셔널(UPI) 신문의 하우스톤
지역 판에서 메릴 웬델 시몬즈를 조회했다.
다니로프에 따르면 그는 3년 전 연초, 그러니까 봄쯤
돼서 시몬즈를 죽였다고 했다. 그러나 컷아웃은
자신의 '축구 경기 티켓'을 매표소에 남겼다고 했다.
그것은 다니로프가 날짜를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니까 그 일은 가을에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다니로프가 착각을 한 것이다. 그 일은 3년 내지
3년 반 전에 발생한 것이다.
컴퓨터에는 이렇게 나타났다.
- U P I / 참조 / 하우스톤 신문 / 11. 12. 76. /
p. l. C ⓐ File : HUCH / 76 / 11 / 12 / NWS. /
2555 - 242.
[그가 누구인지 보자구.]
오하라가 말했다.
매지션이 화일 번호를 타이프하자 스크린에 이렇게
나타났다.
-하우스톤, 11월 12일 한 때 포커판에서 획득한
적이 있는 오일 판매 회사를 아메리칸 피트로듐
상사에 내기로 걸기도 했던 백만 장자이며 원유업계의
거물인 메릴 웬델 시몬즈가 오늘 밤 하우스톤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향년 56세.
이 실업계의 거물은 뛰어난 건강상태를 보여왔으며
오후에는 동창회에 참석했다. 그는 자택의 후원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 몸이 불편하다고 투덜댄지 얼마
안돼서 쓰러졌다.
시몬즈는 하우스톤 제너럴 병원에 긴급
운반되었으나 오후 7시 25분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했다.
상당히 자세한 그의 일대기가 그 기사의 뒤를
이었다.
[이제, 다니로프가 말한 사망 발표는 얻은
셈이군요. 다음은 누구죠?]
그것은 그들이 얻어낸 최초의 성공이었으나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정보를 탐색하고 점검하고 각각의 명단을 대조해
나갔다. 서서히 정보가 쌓여 가기 시작했다.
-레드 브리지즈, 사장. 브리지즈 샐베이지 상사.
일본 도쿄. 심장마비로 사망. 77년 6월 21일.
-아놀드 리치맨. 선셋 오일 인터내셔널 사장.
뉴욕여행중 사망. 77년 9월 2일.
-에이브라함 가르시아. 헨셀 오일회사 사장겸
이사장. L A 여행중 심장마비로 사망. 78년 9월 18일.
[그들 가운데 4명이오. 그가 말한 것이 사실임에
틀림없소.]
오하라가 말했다.
[이 카멜레온이라는 자는 오일 회사에 대해 정말로
감정이 많은가 보군.]
매지션이 말했다.
[3명의 오일 회사 중역이 죽고 '소로우'호까지
침몰한 걸로 보면 말이야.]
[라반더를 잊으면 안돼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는 오일에 파묻힌 채 평생을 살다간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 자들이 일해 준 모든 회사들이 라반더의
노트에 다 기록되어 있고요. 한 번 보세요. 헨셀...
암 피트로... 선셋...]
오하라는 엘리자가 프린터에서 뽑아 낸 해독된
내용들을 바라보았다. 3개의 목록들의 두번째 줄에는
'암란'이라는 단어가 인쇄되어 있었다.
[암란은 뭐지?]
오하라가 물었다.
[모르겠어.]
매지션이 말했다. 엘리자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컴퓨터에게 물어 보면 안될까?]
[다우 존스를 알아보겠네.]
관련 자료가 즉시 튀어나왔다.
[야호!]
매지션이 소리쳤다.
[이제 뭔가 돼 가는 것 같군. 월 스트리트 저널에
관련 기사가 나 있어.]
[날짜는 언제로 돼 있지?]
오하라가 물었다.
[11월 9일이야.]
[아주 최근이군. 한 번 보자고.]
요약된 기사 내용이 화면에 나타났다.
-암란 주식회사. 1979년 10월 28일 결성된
콘소시움. 인터콘 오일회사. 아메리칸 피트로 회사.
헨셀 오일 프로덕스 회사. 선셋 오일 인터내셔널
회사. 알라모 오일회사. 스톤 코퍼레이션. 브리지즈
샐베이지 회사로 구성됨.
설립 목적 : 보다 강력한 시장 지위 확보.
첨단산업에 대한 합작투자. 상권의 결속도모. 재정력
확충.
이사장 : 알렉산더 리 후커. 퇴역장군.
운영 담당 부사장 : 젯세 W 가비. 퇴역장군.
마켓팅 담당 부사장 : (80년 1월 3일 랠프 그린트리
부사장의 유고로 공석중임)
주거래 은행 : 퍼스트 보스톤 코먼 은행.
본사 : 일본 다나베.
[이런 젠장. 난 후커가 죽은 줄만 알았네. 수년
동안 그의 소식을 전혀 못 들었네.]
오하라가 말했다.
[그들의 본거지는 일본인 셈이군.]
[다나베는 어디죠?]
엘리자가 물었다.
[교토에서 약 1백 마일쯤 떨어진 혼슈 동해안에
있지요. 외딴 곳이라고 할 수 있소.]
[카멜레온은 암란을 상대로 일한 게 사실인
모양이에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는 콘소시움 소속의 중역들 대부분을 살해했소.
소로우는 선셋 오일 회사 소유로 돼 있소. 마우이에서
살해된 자는 소로우의 도면을 가지고 있었소.]
[누군가가 랠프 그린트리가 몇 살에 죽는가 내기를
걸게 아닐까?]
매지션이 말했다.
[또 시작하시는 군, 매지션. 알라모를 조사해서
그들이 최근에 잇달아 일어난 고위층의 사망과 관련이
있는가 알아보게나.]
매지션은 알라모 오일에 대한 프로필을 컴퓨터에게
요청했다.
나타났다. 4줄로 된 것이었다.
-데이비드 피스케 트루만, 알라모 오일회사 이사장.
77년 4월 8일 텍사스주 달라스 교외에서 자동차
충돌로 사망.
[랠프 그린트리를 해 보게.]
-랠프 그린트리, 알라모 오일회사의 전직
부사장이며 암란사의 마케팅 부사장. 80년 1월 3일
호놀루루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익사.
[상황이 좀 나아지는 군.]
오하라가 말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 마우이에 누가
있었는지 추측해 보게나.]
[힌지예요.]
엘리자가 말했다.
[맞소. 힌지가 마우이에서 그 사내를 죽이고
소로우의 도면을 손에 넣고 난 뒤 사흘 후 그린트리가
물에 빠져 죽었소. 호놀루루는 마우이에서 비행기로
30분 걸리는 거리에 있소.]
[다른 것은?]
[한번 더 해 보게. 스톤 상사를 찾아보지. 뭔가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모니터에는 다음과 같은 화면이 나타났다.
-스톤 코퍼레이션. 전력 및 에너지 관련 회사를
소유하고 있음.
이 회사의 광범위한 계열사 가운데는 공식기록은
없으나 N. C. 의 Ga.와 Fla 의 Ala 에 있는 핵시설과
함께 국내외의 정유 공장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짐.
78년 6월 25일 개인전용 비행기의 폭발사고로
사망한 C.L.K.로버스톤 Ⅲ세의 후임으로 멜빈 제임즈
전무가 임시로 업무를 맡고 있음.
[제기랄.]
매지션이 말했다.
[나는 이 사람들 중 몇 명은 실제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정말로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
[이 마지막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들은 요약되어 있는 마지막 문장을 들여다보았다.
가장 최근의 보도 : 79년 5월 10일.
일본 회사 '산산'과 합병.
[산산이 뭐예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 지역에서 아주 막강한 회사요. 하지만 자세히는
몰라요.]
오하라가 말했다.
[내가 알고 있지.]
매지션이 말했다. 그가 벌떡 일어서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엘리자가 키보드 뒤로 돌아가서 디스크를
갈아 끼운 후 라반더의 노트에 기재된 나머지
사항들을 컴퓨터에 입력시키기 시작했다.
[당신은 지치지도 않소?]
매지션이 다소 지겹다는 투로 물었다.
[그게 바로 젊음이라는 거네.]
오하라가 말했다.
그들의 강한 정열이 몇 시간 동안 그들을 지탱해
주었다. 이제 그들 세 사람은 갑자기 힘이 다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이제 그만 끝내기로 하고
라반더의 노트 마지막 부분을 프린트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식사를 하러 가려고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엘리자가 말했다.
[오하라. 이것을 잘 들여다보세요.]
지금 막 인쇄되어 나오는 마지막 기재 내용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미다스 / IO. 354, 200 / 109, 12 / lgr. 가와르 /
es. 2bb. ld. O.-112
그들 세 사람은 프린터를 향해 몸을 구부린채 기재
내용을 한동안 응시하였다.
['미다스는 사라졌다...']
오하라가 말했다.
[뭐라구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건 다니로프가 한 말이요. '미다스는
사라졌다.'고. 미다스는 사람이 아니고 회사나 지명일
거요. 이 숫자들은 다 뭘까? 그리고 'Io.'는 또 뭐고?
그리고 '가와르'는?]
[난 이런 내용은 본 적이 없어요.]
엘리자가 말했다.
[당신은 숫자들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지 않아요?]
[그런 걸 알아내기엔 지금 난 너무 지쳤소.]
매지션이 말했다.
[난 지금 눈이나 좀 붙이고 싶을 뿐이오.]
[됐어요. 그걸 그대로 두시오. 컴퓨터가 알아서
모두 인쇄해 줄 테니까. 우린 우리 볼일이나 보면
되오.]
[그걸 가지고 어디로 가지요?]
엘리자가 물었다.
[일본이오.]
[일본이라고요!]
[그렇소. 암란은 일본에 있소. 후커도 일본에 있소.
브리지즈도 일본에 있고, 카멜레온과 산산도 일본에
있소. 그곳엔 무언가 있을 게 분명합니다. 모두 가서
휴식이나 좀 취합시다. 다음에 쉴 곳은 도쿄요.]
3. 후커 장군
오카리라는 이름의 고대 일본 사원의 벽에 걸려있는
금빛 액자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계절은 날이 감에 따라 변하고 인간의 기억은 해가
감에 따라 변한다.'
수세기 후에 한 영국 시인은 같은 생각을 보다
간결하게 표현했다.
'모든 역사는 기억과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후커 장군이 어두컴컴한 사무실에서 가슴에 있는
엉터리 기계를 벗삼아 지난날의 고통스러웠던
나날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면서 아련한 추억에 잠긴
채 몇 시간씩 혼자 앉아 있곤 하는 날이 있었다. 이런
날이면 그는 천둥 같은 대포소리와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 눈은 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르는 대포연기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영광의
그림자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병사의 이름과
얼굴들이 마치 석양 속의 유령처럼 하나씩 하나씩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 갔다. 거리도, 첨탑도, 공원도
하나 없는 지명들이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져 가곤
했다.
오직 가비만은 후커의 고뇌를 알고 있었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 노인이 이따금씩, 운명을 달리한 전우의
이름이나 지금은 잊혀진 전쟁터의 지명을 불러대며 큰
소리로 울부짖을 때면 그의 곁에 같이 있어 주곤 하는
사람도 가비뿐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장군님?]
그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면 장군은 그 이름을 다시 부르곤 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기억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가비는
기억을 되살려 그 이름에 맞는 얼굴, 사건 그리고
장소를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러면 후커는 아주
흡족해하며 왠지 어색해 보이는 그 공상에 다시
젖어들곤 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망록을
거의 10년 동안 줄곧 써 왔으며 그래서 이젠 방대한
분량이 되었다.
후커가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사실로부터
실제 있었던 사실을 구분하여 편집을 한다면 또 다시
10년이 걸릴 것이며 따라서 원고는 출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지난 날에 대한 어렴풋한 상태가 아닌 선명한
기억을 하게 되는 수도 아주 드문 경우긴 했지만 종종
있었다. 이러한 순간이야말로 그 노인에게는 절정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돋보기 안경을
쓴 채 나이가 들어 흐린 시선을 통해 그러한 순간들을
그려보며 거의 황홀경에 빠진 채 앉아있고 했다.
그래서 그가 적어둔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각색된
사실들 가운데에는 훌륭하게 재구성된 전투 장면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인물 묘사도 꽤 많이
들어가 있었다. 나머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상상력이었다.
후커는 단순히 지난 날의 포로는 아니었다. 맑은
정신으로 일에 몰두하느라고 수 주일을 보내는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가비에게
[대령, 난 오늘 비망록을 써야겠네.]
라고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사라지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가비는 약속을 취소하고 스케줄을
재조정하고 사과를 하면서 보통 때나 다름없이
대부분의 일들을 수행해 나갔다. 그런 일이 있게 되는
날이면 하루에 두 세 번씩 가비는 후커의 부름이 있을
때마다 들어가서 대답을 해 주곤 했다.
가비가 그날 오후 늦게 오하라와의 약속이 있다고
그에게 상기시켜 주었을 때도 바로 이런 날들 중
하루였다.
[그와의 약속을 취소할까요?]
[아니야, 그렇게 하는 건 신중치 못한 처사일세.]
후커가 말하면서 윙크를 해 보였다. 그는 기분이 좀
나아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후커가 방에 들어가고 난 뒤 몇 시간이 지난 뒤
가비는 그가 늘 상투적으로 외쳐대는 소리를 들었다.
[보비, 자네 어디 있나, 보비?]
가비가 그 큼직한 방안으로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장군님?]
[보비가 다시 나타났네, 배스타인에서.]
가비는 그 날을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사내도 마찬가지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배스타인. 1942년 3월 9일. 그날 가비는 그 악명
높은 수치 수용소에서 전범으로 3년간의 복역을
시작했다. 후커는 영광의 탈출을 한 뒤 나중에
배스타인으로 돌아가 그를 구해냈다. 그리고 보비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맞았어, 이 친구야.]
후커가 원기왕성하게 말했다.
[나도 이제 분명하게 기억나네, 고맙네.]
그는 화려한 흰색의 장교클럽 건물의 현관 앞에
그날 아침 서 있었다. 그가 쓰고 있는 중절모와 검은
안경이 매처럼 생긴 그의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으며 면도를 말끔하게 하고 목욕도 하고 다림질을
하여 말쑥한 군복차림으로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치욕스러운 날이 될지도 모를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일제 화기가 내뿜고 있는 둔탁한
발사음과 조금 있다가 쿵, 하는 폭발음을 듣고
있었다.
일본 군대는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패주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동안 후커의 작전권 아래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취약한 배스타인 반도를 지켜
싸우는 일뿐이었으며 퇴각하면서 수 마일에 걸쳐 수십
명의 병사들의 시체를 지면에 깔아놓는 일이었다.
그러나 간밤에 일본군은 야만적인 기습을 감행하였다.
지금 그들은 포위되어 있었으며 앞으로 한 두 시간만
지나면 식량, 탄약, 그리고 모르핀이 바닥날 것이다.
그건 다만 시간 문제였다.
후커 장군은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두려움, 폐허, 분노뿐이었다. 빗자루같이
하잘것없는 것을 가지고 전쟁에 이길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남아있는 모든
것들이 그 생각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3개월 동안 그의 병사들은 이 포위된 지역을 안간힘을
다해 지키고 있었다. 지금 막 일본군 포탄이 진지에
떨어지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정비창고가 시커먼
포연 속에 돌연 휩싸이면서 주변에 나무토막과
연장들의 파편을 흩날리고 있었다. 창고 안에 있던
잔디 깎는 기계, 가솔린따위가 폭파되면서 창고 안에
너저분하게 깔려있던 것들이 시뻘건 화염 속에 휩싸인
채 타올랐다.
후커는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돈상태
즉,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면서 불길이 치솟고, 나무가 쓰러지고 하는
모습을 망각한 채 방금 자신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
동안 접수된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면서 서 있었다.
귀하는 앨빈 레몬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오늘 새벽
7시에 두 척의 USN PT 보트를 타고 사령부로
집결하시오. 귀하의 작전 명령권을 젯세 W. 가비
대령한테 인계하고 그곳을 즉시 떠나시오. 보트 한
척에는 6명을 수용할 수 있소. 최후의 승리를 향해
진군함에 있어서 귀하를 도와줄 수 있는 병사들을
수행키 바라오.
행운을 빌겠소.
총사령관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그 메시지는 해독된 후 다시 확인되었으며 그는
참담한 기분을 느끼며 그것을 읽었다. 그는 패배라는
치욕을 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도주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일본군에 대한 훨씬 더 끔찍스러운
보복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돕고 있는 참모들 가운데 10명의 정예요원을
선발할 시간이 한시간밖에 여유가 없었다. 물론 그
사내는 그와 함께 갈 것이다. 그는 시간을 점검했다.
6시 10분. 그 아이는 연령, 성별, 신체장애로 인해
싸움을 할 수 없는 민간인들과 함께 방공호에
안전하게 대피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령부를 만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콘크리트
대포진지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가비를 발견했다.
가비는 퀭한 눈을 하고 몸에 상처를 입은 몸으로,
면도도 하지 않고,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채 배스타인
반도를 나타내고 있는 도면을 굽어보면서 야전용
전화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사용해 오던
전화는 몇 주일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비는 침통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일본군의 구축함 두 척과 순양함 한 척을
슬루이스에 배치시켰습니다. 그들은 바다에서
점령지역에 포를 퍼부어 대면서... 제기랄, 그곳에서
우리를 향해 상륙한 놈들의 수가 5만 명은 될
겁니다.]
[자네 짐작으로는 어떤가?]
후커가 말했다.
[아마 3시간 정도는 걸릴 겁니다. 그 이상은 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해상에서 우리들에게 포를 퍼부어
댈 겁니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 말입니다. 그렇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뭐 있겠습니까, 장군? 나머지
점령지역이 이곳까지 확대되어 오게 되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됩니다.]
그는 북쪽으로 수 백 야드 떨어진 반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우리들은 바닷속에서 헤엄을 쳐야 하겠죠.]
후커는 그가 하는 말뜻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며칠
안 있어 항복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만치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도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우리 병사들 중 대부분이 개인용 소총과 개인
화기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만. 그 나마도 곧 바닥날
겁니다.]
상황은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후커의
손에 들려 있는 문서에는 그런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후커가 그에게 그 명령문을 건네주자 가비는
읽어본 후 그것을 다시 되돌려 주었다.
[메시지가 만약 다른 사람에게 온 것이라면 난 그걸
무시했을 거네.]
후커가 말했다.
[이제 우리는 해군이 도착할 때까지 이곳을 지켜야
하네.]
[알겠습니다.]
가비가 말했다.
[적어도 우리들중 한 사람은 이 곳을
빠져나가겠지요. 누굴 원하십니까?]
[누굴 남기느냐가 문제겠지?]
[우리가 확보한 병사 중에서 가장 우수한 친구는
사케트야. 하지만 그는 지금쯤 죽었을 거야. 그가
죽지 않았다 해도 그가 이곳까지 뚫고 올 수 있을지
의문이네. 반 시간 전에 나와 통화했을 때 그는
삼면으로 포위되어 있었네. 그 친구만이 캐피스
사령부에 수십 명의 병사를 데리고 있네. 그는 자신이
버틸 수 있을 때까진 그곳을 지킬 걸세.]
육중한 포탄이 근처에 떨어졌다. 천둥소리 같은
폭발음에 뒤이어 소나기같이 파편이 떨어져 내렸다.
[빌어먹을!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겨우 한다는 게
이따위 명령이나 내리다니!]
[일본군들이 엊저녁 늦게까지는 캐피스 사령부를
돌파하지 못했네. 지금까지 우리들은 50 대 1의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훌륭히 싸워왔네. 우린 한 달 이상
공군이나 해군 지원없이 싸워왔지.]
[장군 말씀이 맞습니다. 그들은 이곳의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기랄! 이젠 정말 시간 문제야. 이처럼 신속하게
자네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걸 보면 적어도 안전문제는
걱정 안해도 되겠군. 난 병사들을 즉시 모아보겠네.
어쩌면 해군이 이곳으로 곧 올지도 모르겠군.]
[그 아이는 어쩌죠?]
[그는 물론 나와 같이 가야지.]
그들은 커피를 마시고 나서 부대원들중에서
정예요원 목록작성에 들어갔다.
[난 자네에게 이브 칼레르를 딸려주겠네.]
후커가 말했다.
[그는 훌륭한 야전장교지만 동시에 부대 내에서
일본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기도 하지. 앞으로... 몇
개월 동안 자네의 통역을 도와줄 수 있을 거네.
하지만 난 피니 상사를 원하네. 내겐 일류급
특무상사가 필요하니까.]
그들이 목록작성을 끝마쳤을 때 후커는 전령을 불러
병사들에게 알리도록 지시했다. 후커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시 25분. 또 하나의 포탄이 가까운
곳에 떨어지면서 지면이 흔들렸다.
후커는 한동안 출입문에 서 있다가 손을 내밀었다.
[난 자네가 나와 함께 갔으면 하네, 제스.]
그가 말했다. 맙소사, 가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노인네가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군. 가비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네 돌아와서 나와 함께 가게나.]
그가 말했다. 후커가 갑자기 조그마하고 강인한
대령을 포옹했다.
[연금을 청구할 수 있네, 장군.]
그가 말했다. 그가 자기 주머니에서 낡은 준장
계급장인 별 한 개를 꺼내 가비의 깃에 달아주면서
슬픔과 분노로 그의 음성은 떨고 있었다.
[난 자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을 기다려 왔는지
알고 있네.]
그가 말했다.
[좀 더 나은 상황에서 자네를 진급시키지 못해
미안하이. 내 언젠가 다시 기회를 마련해 보겠네,
제스.]
[기다리겠습니다.]
후커는 사령부로 되돌아가기 위해 다 망가져버린
낡은 티크재 건물을 통과해 걸어 나갔다. 마룻바닥에
흩어진 서류와 파일들은 이미 유리조각에 덮여
있었다. 문짝은 다 떨어진 채 걸려 있었고 망가진
창문 사이로는 엷은 연기가 흘러 들어오면서 마치
지저분한 솜뭉치처럼 천장아래 깔려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자기 방의 흐트러진 모습을 지켜보며
서 있다가 홱 돌아서더니 부두 쪽으로 향했다.
15마일쯤 떨어진 곳에 두 척의 보트가 슬루이스를
거슬러 올라온 뒤 섬 기슭에서 가까운 곳에 정박했다.
갑판 위에 있던 선원들은 쌍안경을 통해 맞은 편
반도를 훑어보면서 끔찍스러운 전쟁터를 눈으로
목격하였다.
[제기랄.]
선원 하나가 말했다.
[주변에는 온통 일본 놈들 뿐이야. 마치 개미가
기어오르는 언덕을 보고 있는 것 같군.]
레몬 함장은 다른 보트에 있는, 아나폴리스 해군
사관학교에서 나온지 2년밖에 안되는 보스톤 출신의
피터 코우클리 중위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코우클리는 역겨우리 만치 지나치게 존 웨인의 흉내를
내는 경박한 구석이 있는 붉은 머리칼을 한
청년장교였다.
[자네에게 준 지시사항을 명심하게, 중위.]
레몬은 한 시간 전에 코우클리에게 말했다.
[우리는 배스타인으로 급히 서둘러야겠네. 어떤
이유에서든 적에게 개입하지 말게. 다만... 그들의
공격이 있을 때만.]
레몬은 쌍안경으로 세척의 일본 해군함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배스타인 부두에서 10마일도 채 안되네.]
그가 말했다. 코우클리도 역시 보고 있었다.
[그들은 수륙 양용 수송 트럭에 앉아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순양함이 우리들과 구축함 사이에 있을 겁니다.]
[내가 자네한테 또 다시 말을 해야겠나, 중위?
우리의 임무는 요인들을 배스타인에서 철수시키는
일이네.]
[말하자면 애 보는 일이라고나 할 수 있겠군요.]
코우클리가 씁쓸히 말했다.
[한바탕 전투를 하고 싶은 모양이군.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거네. 지금은 아니지만.]
[빌어먹을 놈의 운반책이라니.]
코우클리가 볼멘소리를 했다.
[대위, 자네 군사재판에 서고 싶나?]
[천만에요...]
[우리가 군함을 잊고 있었군. 제대로 보이는가,
중위?]
[네, 장군님.]
[그러면 눈을 크게 뜨고 잘 보게.]
두 척의 구축함과 순양함이 그들의 앞에서 채
1마일도 안되는 곳에서 협소한 반도에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대포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좋아, 내가 앞장서겠네. 자넨 해변에 가까이
다가가서 기다리게. 그리고 나서 자네가 뒤따라오면
되네.]
[알겠습니다.]
코우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수화기를
올려놓았다. 그는 소형의 고성능 보트를 해안에 댄 뒤
시동을 끄고는 나무가까이 멈추어 섰다. 레몬은 마치
박쥐처럼 슬루이스를 거슬러 올라갔다. 뱃고물은
수면위로 높이 걸린 채 선미는 물 속에 잠겼다.
죽음의 불꽃인 대포알은 머리 위를 날아 그들 주위의
바다를 향해 퍼붓고 있었다. 어뢰정이 슬루이스
연단을 번개같이 거슬러 올라오자 포격은 더욱
거세어졌다. 대인용 포탄의 연기로 하늘은 시커멓게
변했다. 레몬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개자식들.]
코우클리가 소리를 질러댔다.
[좋다, 거기 그대로 있거라, 여기 우리가 간다.]
그러면서 그는 보트를 해변에서 꺾어 돌려 비좁은
협곡으로 들어서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후커와 그가 거느린 병사들은 바다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부두 쪽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하나가 오고 있습니다.]
플리스터라고 불리우는 웨스트 포인트출신의 한
소령이 고함쳤다. 후커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아들을 방공호에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피니 상사.]
[넷.]
[민간인 방공호로 가서 그 아이를 내게 데려다
주게.]
[넷.]
피니는 강인한 직업군인이었다. 그의 셔츠는 단추가
떨어진 채 그의 혁대까지 열려져 있었고 한쪽 소매는
실이 뜯어진 채 어깨죽지에 걸려 있었다. 그는 갖고
있던 자동소총을 장교 한 사람에게 넘겨주고는 장군의
지프에 올라타고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방공호 쪽으로
다가갔다. 그 곳은 부두에서 500 야드도 안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는 포탄이 오솔길로 막 쏟아지고
있을 무렵에 그곳에 도착했다. 지프는 후진을 해서
샛길로 주춤대며 나아가다가 뒤집혔다. 피니는 앉은
채로 한 바퀴 구르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뒤 몇 바퀴
떼굴떼굴 굴렀다. 지프는 쭉 미끄러진 후 그로부터 몇
피트 떨어진 곳에 멈추면서 폭발했다.
[내가 그를 데려오지.]
그리소그리오 중위가 말하고 난 뒤 방공호로 향해
곧장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니는 벌떡
일어나서 머리를 흔들고 난 뒤 나머지 거리를 달렸다.
[자네 위치를 지키고 있게, 중위.]
후커가 지시를 했다.
레몬은 파손된 항해선박과 고기잡이배들 사이를
통해 나있는 좁은 항로를 향해 속도가 빠르고
조그마한 어뢰정을 몰고 나아갔다. 그 곳에는
어뢰정이 제대로 뚫고 나갈만한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는 길다랗고 폭이 좁은 어뢰정을 이끌고 파편조각과
잡동사니들이 물위에 둥둥 떠 있는 곳을 능숙한
솜씨로 통과해 나갔다.
[무전을 끊지 말고 기다리게.]
레몬은 깡마른 승무원에게 고함을 쳤다.
[장군한테 어서 빨리 배에 타라고 전하게, 우린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코우클리는 곧 우리 뒤를 따라
올 거네.]
후커는 부대원들을 둘러보고 6명의 장교를 선발한
후 그들에게 배에 타라고 지시했다. 그는 피니 상사와
자신의 아들이 방공호를 떠나 부두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군님의 명령에 따라 우리들은 이 부두까지
신속히 달려왔습니다.]
레몬이 소리쳤다.
후커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즉시 배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소그리오 중위, 자넨 두 번째 함정의 가장
고참 부관이네. 피니 상사에게 그 아이를 잘
돌봐달라고 좀 얘기해 주게. 우리가 정박하게 되면 그
아이를 내게로 데려오게나.]
[넷.]
그리소그리오가 대답했다. 그는 다리에 총상을 입어
목발을 하고 다녔다. 그는 후커에게 절도 있는 경례를
올렸다.
[좋아, 함장.]
후커가 레몬에게 말했다.
[출발하게.]
그들은 파편 속을 뚫고 되돌아 나갔고 레몬이
조종키를 잡았다. PT 보트는 물 속으로 깊이 잠기며
망망대해를 향해 기수를 잡았다.
후커는 부두가 점점 작아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보비와 피니가 나머지 장교들과 함께 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여덟 살 된 아이가 차렷 자세로 그에게 절도 있는
경례를 던졌다. 후커는 배에서 뿜어내는 연기가
짙어지면서 더 이상 그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를 지켜보았다. 후커는 퍼부어 대는 포탄을 피해
구축함 가까운 곳에서 슬루이스 만을 통과하면서 지금
막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는 두 번째 함정으로 주의를
돌렸다.
코우클리는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구축함
가까이에서 드넓은 대해를 달리고 있었다. 포탄세례는
보트의 측면을 망가뜨렸다. 꽤 강력한 타격이었다.
보트가 기우뚱하면서 갑판에 있던 잡동사니들이
바람에 의해 흩날렸다. 승무원 가운데 한 명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몇 초 후 고공 폭탄이
갑판위로 떨어져 내렸다. 갑판장이 선 채로
나동그라지면서 그의 가슴이 포탄의 파편으로
벌집처럼 구멍이 뚫렸다. 선실은 마치 종이 상자처럼
찌그러졌다. 코우클리는 뜨거운 공기가 확 밀려오는
걸 느꼈다. 열에 달구어진 뜨거운 금속이 그의
옆구리와 어깨로 파고들었다. 조종키의 손잡이 부분이
뒤틀려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갑판 위를 떼굴떼굴
굴러 난간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가 자신이 두 손을 배 밑에 깔고
무릎을 꾸부린 채 엎드려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고
갑판 위에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한 승무원이 "불이야!"하고 고함치는 소리와
바람을 타고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보트가 그가 서 있는 곳 가까운 곳에서 타고 있었다.
코우클리가 벌떡 일어나서 조종키를 잡았다. 그는
자기 몸의 상처도 잊어 버렸다. 더 이상 머뭇거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포탄에 맞은 보트의 키를
틀어 구축함을 향해 곧장 나아갔다. 보트가 달려간
뱃길을 따라 화염이 훨훨 타오르면서 보트의 측면까지
접근해 왔지만 보트는 여전히 마치 한 줄기
서풍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면을 가르며 달려서 연기
속을 뚫고 적의 군함을 향해 돌진했다.
[이런 빌어먹을.]
코우클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이런, 이런, 이런...]
레몬은 코우클리의 어뢰정이 구축함의 측면을 향해
곧장 돌진할 때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시간문제에 불과할
따름인 순간이 있었다. 그때 구축함이 움직이더니
거대한 포신이 방향을 틀었다. 구축함이 방향을
틀더니 수면을 가르며 달렸다. 구축함 측면에 실려
있는 포신으로부터 오렌지색의 포탄이 발사되었다.
조금 있다가 그들은 연달아 터지는 포성을 들었다.
[제기랄.]
레몬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자신의 곁에 서서
전함으로부터 뿜어 나오는 죽음의 불길을 지켜보고
있는 장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머지 대원들을 위해 다시 되돌아갈까요?]
후커는 배스타인을 돌아다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시커먼 연기, 끝없이 계속되는 폭발음과
화염뿐이었다.
[자네에게 지시해 둘게 있네.]
후커가 말했다.
[넷.]
레몬 선장이 말하고는 속도를 내서 배스타인에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지금 후커는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었고 뺨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날이야말로 그의 일생 가운데서 가장 잊고 싶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자는 오후 4시 30분쯤 되어서 도착했다.
어딘가에서 보내온 그것은 기차역으로 찾으러 나갔던
택시 운전사에 의해 전달되었다. 그것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추적하기가 불가능했다. '썩기 쉬운 것.'
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고 구멍이 많이 뚫려있는
하얀 상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설 때 장군은 어두컴컴한 곳에 앉아 있었다.
[실례해도 될까요, 장군님?]
[들어오게, 가비. 잠깐 졸고 있었네. 지난날을
생각하다가 말일세.]
[좋지 못한 소식입니다, 장군.]
[뭔가?]
[또 다시 선물이 왔습니다.]
[빌어먹을!]
가비가 그 상자를 후커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제가 한 번 열어 볼까요.]
[내가 하지.]
그는 서랍 안에서 상자를 여는 도구를 꺼낸 후 끈을
풀고는 맨 윗 부분을 열었다.
그 놈은 천천히 기어 나왔다. 그 놈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혀를 허공에 낼름거렸고 두 눈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젠장, 정말이지 추하게도
생겼다. 그는 그 놈이 상자의 위쪽으로 올라서서
책상을 가로질러 기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그
놈의 옆구리를 가죽이 뚫어질 만치 깊숙이 찔렀다.
카멜레온은 꼬리를 휘둘러 대면서 꿈틀대었다. 10
인치도 채 안되는 조그만 놈이었다. 그가 다시
찔러댔다.
카멜레온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찔러댔다. 그런 다음에 그는
상자여는 도구의 날카로운 쪽을 카멜레온의 목 위에
올려놓고 책상에 대고 힘차게 눌렀다. 그 놈의 혀가
입 속에서 툭 불거져 나왔다. 둥그렇게 말린 빨간
색의 신경조직이었는데 살짝 열려진 입속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메시지라도 있는가?]
후커가 말했다.
가비가 종이 쪽지를 꺼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물고기가 어부를 잡아먹을
것이다.']
후커의 목구멍에서 증오심이 끊어 올랐다. 그는
페이퍼 나이프를 힘껏 눌러서 카멜레온의 목을
잘랐다.
4. 카멜레온을 찾아서
그들은 마이애미에서 샌 프란시스코로 날아간 뒤
그레이트 써클 비행기를 타고 북극 상공을 지나
도쿄로 갔다. 그 곳에서 그들은 이틀을 날려버렸다.
감시원은 홀쭉한 편이었다. 매지션은 레드 브리지즈의
선착장을 살펴보고 나서 주변을 샅샅이 뒤져 뭔가
알아낼게 있는지 찾아볼 작정이었다. 엘리자는 암란의
배후에 관해 뭔가 알아내기를 바라면서 호웨 뉴스
서비스의 도쿄 지사장으로 있는 이라 예르케스와
점심약속을 해 두었다. 오하라는 일본 군사 정보국에
근무하는 옛 친구를 만나보기로 했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그들은 긴급한 경우의 연락수단으로 호텔의
전화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2년 전 예르케스가 휴가 중 보스톤으로
돌아왔을 때 그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깡마른 30대 후반의 사내로 혹평을 일삼는
자였다.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앉아 있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법이 없는 어두운
기색의 얼굴을 한 잘 생긴 용모였다. 그는 자신의
그런 습성을 조금도 바꾸지를 않았다. 그녀는 그에
대해서 약간 들떠 있으면서도 정력적인 데가 있으며
반드시 업무상의 목적은 아니지만 항상 어딘가 당장
가볼 데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내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습성이었으며 어쩌면 그런 습성
때문에 그가 호웨의 회사에서 가장 우수한 기자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미국식 레스토랑에서 샌드위치를 시켜 가지고 그의
사무실 가까이 있는 긴자 거리의 끝쪽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만 공원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곳에서
그는 소풍이라도 나온 듯이 샌드위치를 꺼내 먹은
다음 곧 바로 두 눈을 감고 드러누운 채 햇살을
쬐었다.
[난 정말이지 햇살을 좀 쬘 필요가 있소. 몸 속이
꽁꽁 얼었거든요.]
그가 말했다. 그의 길게 발음되는 영국식 모음은
이곳 일본에서는 왠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런 당신은 도쿄에서 뭘 하지요? 카메라와
소지품들은 어디 있구요?]
[그건 내가 가진 짐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내가
떠나기 전에 아마도 사진사 한 명과 트럭 한 대쯤은
준비해 둬야 할거요.]
[문제될 거 없잖아요. 그 노인네는 일본에서 가장
품질이 우수한 것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그가 필요로
하는 분량의 두 배쯤은 준비해 둘 거예요. 당신 어학
실력은 괜찮은가요?]
[물론이요.]
[그게 어쩌면 문제가 될지도 몰라요. 내가 통역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가 갑자기 쳐다보았다.
[뜨거운 차라도 한 잔 하시겠소?]
[아니에요.]
[당신이 어떤 남자들이랑 한 패가 되어 다닌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관광 온 거예요. 일본 산업체에 대해 볼일이
있기두 하고요.]
[일본 산업체에 볼일이 있다구요.]
예르케스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당신이 일본 산업체에 볼일이 있을 까닭이 없지
않소. 그 얘긴 마치 엉클 샘하고 볼일이 있다는
식이군. 당신 무슨 얘기부터 하고 싶소?]
[오일에 대해선 어떨까요?]
[일본에는 이렇다 할게 없소. 30초 정도면 얘기가
끝날 거요. 정유회사가 있지, 아마, 롯사
정유회사요.]
[암란에 대해선 알고 있어요?]
[그 불행한 후커에 대해 관심 있다는 얘긴 아예
하지도 마시오.]
[왜 그를 그런 식으로 부르죠?]
[후커에 대해서 모르시는가 보군요?]
[난 그가 전쟁시 고위 장성이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당신 내게서 뭘 원하시는 거예요. - 난
1949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음, 그건 역사요. 그는 훌륭한 공을 세웠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려움에 처했지요. 그는
일본군에 의해 필리핀으로부터 쫓겨났고 그의 아들은
전쟁 중에 죽었소. 그는 대통령 후보 자리에서도
물러났고 암란사에 있는 수 십 명이 그와 관련되어
죽었소. 그는 4년 간에 걸쳐 이 콘소시움을
결속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오.]
[난 그의 아들에 대해선 몰랐어요.]
[별로 알려지지 않았었죠. 미안하지만 당신이
햇볕을 가리고 있군요...]
[미안해요.]
[좀 나아졌군. 아무튼 후커는 재직 시에 남부지방의
한 지역을 맡았던 군 장성이오. 그는 그 지역의 여러
가지 고충들에 대해 매우 동정적이었고 그런 걸
해결해 주려고 애썼소. 지역 청소년들을 위해
얼마간의 헌금을 낸 적도 있소. 그는 지난 날에
대해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있죠. 비정한 정치의
세계라고나 할 수 있겠지.]
[암란이 이곳에 본사를 둔 이유는 뭐죠?]
[왜 이곳에 두지 않는단 말이요? 오일은 국제
비지니스요. 또한 나는 그 노인이 이곳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일본인들은 그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기 때문이죠.]
[그를 싫어하다니요?]
[젊은이들은 그가 독재자였다고 생각하고 있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무튼 그는
승리자였소.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바보였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죠?]
[그는 패튼이나 맥아더에 버금가는 전쟁영웅이오.
어쩌면 역사가 그에 관해 십 중 팔구 좋은 평가를
내려줄지도 모르죠.]
[그와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을까요?]
[당신이 운이 좋다면야. 난 일 년 전에 그에 관한
기사를 쓴적이 있소. 난 그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라고 썼죠. 국제부의 어떤
작자가 그걸 '가장 비극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바꾸었더군요. 아뭏든 당신이 암란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보스톤에 있는 자료 보관실을
살펴보시오. 내가 엊저녁에 그 문제에 관해 10페이지
분량의 요약을 작성해 두었소.]
[뭐에 관해서죠?]
[산산과의 합병에 관해서요.]
[산산은 뭐예요?]
[산산은 3인조. 다시 말해 세 사람을 말하죠.
전쟁시에 생겨났소.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곤
했죠. 가장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시찌 토모로는
전쟁시 일본 실업계의 거물중 한 사람이었소.
맥아더는 그의 수족을 자른 채 그를 몰아냈소. 그뒤
후커가 그의 모든 살림살이를 후원해 도와주었소.
지금은 일본 실업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그룹이
되었지요. 정치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록펠러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모았소.]
[어떤 종류의 산업이죠?]
[석유 정유공장, 조선업, 전자산업이오.]
[어쩌면 토모로와 얘기를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군요.]
예르케스가 햇살을 좀 더 많이 받으려고 자신의
뺨을 치켜들었다.
[당신은 너무 늦었소. 그는 몇 개월 전에 이미 짐을
쌌소.]
[그가 죽었단 말이에요?]
[죽었소,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가 버렸소.]
[어떻게...]
[그는 아오모리 근처에 있는 섬의 북쪽 끝에 멧돼지
사육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곳에서 갑자기 총으로
자살을 했소.]
카멜레온에 대해 다시 시작해야겠군.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문제가 마땅히 언급되어야겠지.
그래야만 모양이 제대로 갖추어 질 테니까.
[카멜레온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어요?]
[카멜레온이라구요? 그는 뭘 하고 있지요? 자주
색깔을 바꾸는 사람이요?]
[그건 별명이에요.]
[모르오, 왜 그러죠?]
[호기심에서요.]
[젠장.]
[젠장이라니, 무슨 뜻이죠?]
[그저 젠장일 뿐이오. 당신은 카멜레온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에 대해 결코 지나가는 길에 물어본 게
아니란 얘기요. 그가 뭐 하는 사람이오, 새로 출현한
록가수라도 된단 말이오?]
[펑크 록이죠.]
[아, 그 얘긴 그만 둡시다. 난 디스코에나 관심
있을 뿐이니까.]
그들은 자리를 뜨기 위해 일어섰다. 엘리자는
라반더의 노트에 적혀있던 '미다스'에 대해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또 한가지가 있는데 '가와르'는 무슨 뜻이죠?]
그는 쓰레기를 봉지에 담아서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가와르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소.]
그가 말했다.
[사우디 아라비아라구요?]
[분명히 그렇게 알고 있소.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원유 매립지역이오.]
* * *
첩보국 본부인 간초우찌는 정부청사의 한 쪽 구석에
있는 3층 건물에 있었다. 흰색 정장을 입은 젊은
여자가 오하라를 3층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그가
불안감을 느낄 만치 딱딱했다. 하다시는 사무실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하라는 3년 동안 빈 하다시를 보지 못했다. 그는
일본인으로선 키가 큰 편이 삼 십대 초반의
사내였는데 홀쭉한 몸매에 머리를 짧게 깎은
차림이었다. 그는 프린스톤을 졸업했다.
[어이, 가즈오. 자네 어디 있었나.]
하다시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도피 중에 있다고 들었네. 자네가 모시던
상관이 자넬 죽이려고 한다던데 맞나?]
[그와 비슷하지.]
[나쁜 자식.]
그는 오하라를 티 하나 없는 조그만 방으로
안내했다. 벽에는 그림하나 걸려있지 않았고 책상
위에는 전화기 하나와 사과 주스 캔이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자네 말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네.]
오하라가 동의했다.
[그가 살해명령을 취소했다면서.]
[그렇네.]
[얼간이 같은 녀석. 자네 지금도 글을 쓰면서
지내나?]
[하고 있는 중이네. 자네한텐 좀 더 손쉬운 방법이
있지 않나.]
[자네 이곳에서는 뭘 찾고 있나? 원하는 게
있나보군.]
[약간의 정보를 알고 싶어서.]
[이곳에서 뭘 알아낸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네.
자네도 일본인들이 어떤지는 잘 알지 않는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네.]
[내가 지금 찾고 있는 자야말로 정말로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라네. 스스로를 카멜레온이라고 부르는
일본인 정보원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가? 이건
전쟁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얘기이네.]
[어느 전쟁? 2차 대전?]
오하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가락 두개를 세워
보였다.
[카멜레온이 정보원이라는 말인가?]
[그는 일본 정보원에 대한 특수 훈련기관의
장이었네.]
[그에 대해선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네.]
[이 부근에 무엇인가 알만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자넨 그 자가 아직 살아 있을 걸로 생각하나?]
[예감 같은 걸세.]
[그토록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 얘기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죽었거나 은퇴했을 거네.]
[그렇다면 은퇴한 사람을 찾아보면 어떨까? 난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과 얘기라도 좀 나누었으면 하네.]
하다시가 자신의 콧잔등을 몇 번 톡톡 두들겼다.
[자네가 점심 사 주겠나?]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일본인이 사 주는 셈이지.]
[그렇다면 내가 한 번 생각해 보겠네. 그는 바로 이
곳에 있네.]
[그가 내게 얘기를 해 줄까?]
[그는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얘기를
들려주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실로 내려가 그
건물에 인접한 또 다른 건물의 지하실로 보이는
곳으로 어두컴컴하고, 희미하게 불이 켜져 있는
지하터널을 통해 빠져나갔다. 머리 위쪽의 증기관에서
쉿 -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이곳으로 내려보낼 만큼 싫어하고
있지. 그들은 어쩌면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까지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네.]
그들은 큼직한 한 개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파일 홀더, 책, 끝없이 널려져 있는 서류뭉치로
보이는 자료들로 가득 차 있는 철제 선반에 의해 둘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 노인은 다다미방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붓과 먹을 사용해서 대장에다
순서대로 적으면서 파일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방안에는 책상은 없었고 이부자리 하나와 그 노인의
어깨 위쪽으로 최신식 청동제 오리목 램프 하나가
있었다.
그는 쓰고 있던 글자를 다 쓰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야, 하다시 상. 이곳을 다 들려주다니 고맙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지난날의 메아리처럼
들렸다.
[만나 뵙게 되어 제가 오히려 기쁠 따름입니다,
카미 선생. 선생께 드리려고 조그만 선물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빨간 옷의 사내가
그려져 있는 선물 꾸러미 하나를 그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신이 언젠가 자네한테 복을 내려 줄 거네. 고맙네,
젊은 친구.]
그는 즉시 그 꾸러미를 풀고는 갈색의 염주를 목에
걸었다.
[이 사람은 제 친구인 오하라입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가즈오로 통하죠. 그가 여쭤 볼 말이 있다는
군요. 제 생각엔 선생님만이 대답을 주실 수 있을 것
같아서 데리고 왔습니다.]
[분명한 얘기일세. 자네는 내가 서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해해 주게. 난 서기 이상이었던 적이 없었네.
난 이 곳의 모든 서류들의 보호자일세. 컴퓨터에
수록된 자료들도 있네. 영화 속에서는 우리들의
역사가 너무나 많이 줄어져 있지. 하지만 이것들은
생생한 기록들이라네. 난 지금 그것들을 분류하는
중이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일을 해 오셨습니까?]
오하라가 물었다.
[음, 정확히는 잘 모르겠네만, 아마 십 년은 될
거네. 혼자서 줄곧 해 왔지.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사람들이 파일을 찾게 되기까진 말일세. 난 읽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서두를 일도 없지. 내가 이
일을 다 끝내고 나면 그들은 이제 됐으니 집에 가서
죽을 날이나 기다리라고 하겠지.]
[그 기록들에 관한 서기 일을 맡아본 것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1944년부터라네. 난 이 일을 하기엔 너무 늙었나
봐.]
그는 장부에 또 하나의 글씨를 쓰다가 멈추었다.
[모든 기록들은 전부 내 손을 거쳐 갔지.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선 생생히 기억하는 것도 있네.]
[선생께선 카멜레온이라고 불리는 정보원을
기억하시는지요?]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붓을 책상 위에 놓고
몸을 뒤로 젖힌채 천장을 뚫어져라응시했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카멜레온은 정말로
카멜레온이었네. 그는 끊임없이 색깔을 바꾸었지.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진정한 색깔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줄 수 있다네.]
[전 암호명이 카멜레온인 사내를 말합니다.]
[나도 알고 있다네. 어느 누구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지. 그와 함께 사라져 간 비밀이라네.]
[그가 그럼 죽었습니까?]
[1945년에 히로시마에서 죽었지. 그 사실은
자네들이 근무하던 정보부 사람들에 의해 확인되었지.
기록에도 그렇게 적혀 있고.]
[선생님께선 그에 관해 무엇을 알고 계신지요?]
[단지 기록에 있는 것뿐일세. 그런 자가 있었으며
죽었다는 것 말일세. 그것 말고는 아는 게 없네.]
[그러면 그가 죽었다는 유일한 증거가 일본
정보국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뿐인 셈이군요.]
[그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나?]
오하라가 종이쪽지를 꺼냈다. 그것은 카멜레온에
관한 C I A 보고서를 컴퓨터에서 뽑아낸 것이다. :
-카멜레온. N / O / I. 정보원 일본어교육 부대장.
1945 - 1950년경 전범자 명단에 기록된 자.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처형된 것으로
추정됨.
1950년 2월 12일 법적으로 사망선고됨.
[어쩌면 누군가가 그를 보호해 주려고 했겠죠. 미국
정보기관에서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 데 어째서
5년이나 걸렸겠습니까?]
[그렇다면 자네가 미군 정보기관에게 물어보게나.
하지만 난 그들이 잘못했다고는 생각지 않네. 그들은
그 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그의 죽음을 인정했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그가 누구죠?]
[후커 장군이네. 그는 카멜레온을 찾는데 열의가
대단했지.]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난 짐작도 못하겠네.]
[군 기관에 소속된 어떤 자가 그의 신분을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숨기는 것이 가능할까요?]
[어쩌면 그것도 그가 지닌 여러 가지 색깔 중
하나였는지도 모르지. 그가 군 기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네. 가령, 황실을 섬기는 민간인 중
한 명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일세. 실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어느 경우이든 그의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을 수도 있지.]
[그건 중요치 않네, 가즈오. 그 부서에 대한
기록들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 파기되었네. 그것들은
항상 그 부서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말일세. 난 그
기록들을 한 번도 본적이 없네. 내가 본 거라고는 텅
빈 파일을 매듭짓는 내용의 최종 보고서였네.]
[그 부서의 이름은 무엇이었죠?]
[알고 있지 - 카멜레온일세. 바로 자네가 찾는
카멜레온과 똑같은 이름이지. 그들은 남쪽에 본부를
가지고 있었네.]
[어디에 있죠?]
[산 속에 위치하고 있는 '용의 보금자리'라는
이름의 성채에 있네.]
[이상이 카멜레온에 대해 알고 있는 모두입니까?]
그 노인이 입에 담배를 피워 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는 게 더는 없네. 그가 카멜레온이었고
그는 죽었네.]
하다시가 오하라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카미 선생님.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단치 않은 일이었네. 다음에 올 때는 좀 더
어려운 걸 갖고 오게. 내겐 자랑하는 것 빼고 나면
남는 거라고는 통 없다네.]
두 사람이 건물을 벗어나고 있을 때 하다시가
말했다.
[어쩌면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겠군. 그렇긴
하지만 그 노인이 얘기하던 '용의 보금자리'는...]
[뭐라고?]
[그것은 다나베에 있네. 지금은 그 곳이 암란의
본사 건물이네. 그리고 후커는 암란의 총수라네.]
5. 습격
그는 점심을 서둘러 먹고 매지션과 엘리자를 만나서
정보를 교환하고 싶은 마음에 재빨리 인사를 마친 뒤
하다시와 헤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도쿄에 도착하고
나서 줄곧 그를 괴롭혔던 또 다른 생각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카미 선생이 말한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장차 필요한 경우에 대비해서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카멜레온이 히로시마에서 죽었다면 그가 죽은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는데 군 정보기관이 5년을
보낸 이유는 무엇인가?
이 골목 저 골목 지름길을 택하면서 그는 급해
시내를 가로질러 호텔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미행
당하고 있다고 처음 느끼게 된 것은 호텔로부터 세
블록 떨어진 곳에서부터였다. 그는 거리 한 구석에
멈춘 다음 아무일 없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발걸음을 천천히
하면서 자신이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기를 바라며
좀더 한적한 샛길을 통해 지그재그로 빠져나갔다.
오하라는 놀라는 것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직관은 왠지 틀린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진로를 변경해서
긴자에서 가장 붐비는 두 군데 거리인 소와도리와
주오도리를 서로 연결해 주고 있는 골목길을 향해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식으로 걸어갔다.
그 골목길은 어두컴컴하고 사람이 못 다니게 되어
있는 곳이었으며 몇 개월 전에 매스컴을 통해
비난받은 적이 있는 건물 사이로 통해 있었다. 그
지역이 음침하고 건물이 불안정한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찾아오는 적이 없었다. 단지 두개의
가로등만이 머리 위쪽으로 걸린 채 폐쇄되어 있고
길다란 통로를 비추고 있었다. 오하라는 그 골목으로
들어가서 소와도리 쪽으로 향했다.
그 건물에 대한 철거계획이 발표되기 전 수년동안
그 골목은 종묘사, 값싼 골동품 가게, 자질구레한
장신구점 따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어떤 곳은
창문이 뜯겨진 채 널판지로 대충 막아져 있었고 또
다른 곳은 건물이 폐쇄될 때 버려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문이 열려진 채 그대로 서 있었으며
판매 문구가 쇼 윈도우에 그대로 붙어있는 곳도
있었고 잡동사니들이 텅 빈 가게 안에 나뒹굴고
있었다. 오하라는 만약 자신이 미행 당하고 있다면 이
곳이야말로 확인해 보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라고
느꼈다.
그가 단순히 미행 당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일까?
골목을 내려가면서 그는 유리가 밟히면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자동차 소음이 멀어져 가면서 그는
자기 발자국 소리가 내는 것과 똑같은 반사음을
들었다. 하나, 그리고 조금 후에 자신의 뒤편에서
나는 또 하나의 반사음을 들었다. 둘.
세 번째 사내는 그의 앞 쪽 황폐한 가게 한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커튼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무심코
낸 숨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오하라는 입으로
천천히 숨을 가다듬으며 예민해진 의식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는 귀를 기울이면서 거리를
가늠했다. 두 놈은 뒤쪽으로 10야드쯤 떨어져 있었고
가게 안에 있는 놈은 조금 더 가까웠다.
그들은 아주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골목길은 에너지로 충만해졌다. 마치 파도에 휩쓸리는
해초처럼 오하라의 주변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조금
있다가 그들은 그에게 갑자기 덤벼들었다. 가게 안에
있던 사내가 걸어나온 뒤 그의 앞에서 6피트도 채
안되는 곳에 섰다.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 짤막한
머리칼을 한 건장한 체격의 흑인 청년이었는데 등은
쭉 펴 있었고 두 다리는 약간 굽어 있었다. 오하라는
재빨리 골목을 뒤돌아보았다. 다른 두 명의 사내는
골목 입구에서 비치는 희미한 불빛을 배경으로 산처럼
우뚝 선 채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이 자들은 거리의 싸움꾼들이 아니군, 하고
오하라는 생각했다. 그들은 너무나 여유 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앞에 서 있던 사내가 약간 움직였다.
어렴풋한 빛이 그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그의 미소와
인사하는 모습은 마치 아련한 추억처럼 묘한 느낌을
던져 주었다. 하지만 그는 도전을 해 온 것이다. 정식
무술수업을 한 사람이군. 하고 오하라는 생각했다.
아마 오키나와인인 것 같다. 그들은 3인조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오하라가 짐작하기로는 그의 바로
등뒤 가운데 위치한 자가 가장 뛰어나 보였고 앞에
있는 자가 가장 민첩해 보였으며 후방을 맡고 있는 맨
뒤에 있는 자가 가장 다루기 어려운 존재인 듯
느껴졌다. 그는 즉각적으로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자세를 취했다.
오하라가 그들을 공격할 차례였다. 그는 한 쪽 발을
돌려 차며 뒷편에 서 있는 두 사내에게 3개의
연속동작을 퍼부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을 공격해 온
자가 미끼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곧이어
오하라는 잠시 멈추었다가 3개의 히가루 기본동작을
거의 하나로 연결해서 두목격인 자가 미처 몸을
돌리기도 전에 그의 복부에 최초의 공격을
성공시켰다. 그가 한 동작들은 뒤쪽에 있는 사내를
현혹시키기 위한 것으로 자신이 중간에 위치한 사내를
공격하고 있는 것으로 그가 생각하게끔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신속히 몸을
돌리면서, 그 두목인 사내가 앞으로 돌진해 올 때
오하라는 완벽한 '우시로 게리' 동작을 구사해서 그의
머리가 거의 지면에 닿을 정도까지 몰아세운 다음
뒷발차기로 공격해 온 자의 복부를 세차게 걷어찼다.
오하라의 발은 사내의 단단한 복부근육을 찢으면서
그의 내장 깊숙히까지 파고들었다. 그 사내의
뱃속에서 무엇인가 파열되었는지 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뒷발차기의 위력을 줄여보려고 몸을
앞으로 구부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반사신경이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공격해온 동작을 가까스로 피했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몸을 굴렸다. 일련의
동작들이 너무나 빨랐기 때문에 나머지 두 명의
사내는 미처 손 쓸 시간도 없었다. 오하라는 그들 두
사내의 사이로 뛰어들며 몸을 한 바퀴 지면에 굴려 두
발로 굳게 선 다음 몸을 곧장 날려서 이마로 세 번째
사내의 턱을 가격했다. 그 공격을 받은 그 암살자의
몸이 붕 뜨면서 뒷 쪽으로 날아 텅빈 가게 중 한 곳의
창문을 깨고 유리조각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가운데 있던 사내가 골목길의 지면을 박차며
소리없이 몸을 날려 발길질로 공격을 해왔다.
오하라는 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몸을 살짝
돌려 피하면서 그 자의 손목을 잡아 비틀면서 그의
옆구리에 무릎을 한 방 먹였다. 그 자는 떼굴떼굴
몸을 구르다가 간신히 두 발로 버티고 선 다음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오하라의 이번 공격은
'운라켄'이라고 부르는 팔꿈치로 상대방의 턱을
가격하는 동작이었다. 그 동작은 완벽하게 구사되어
그의 주먹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날아간 다음
팔꿈치로 그 미국인의 턱을 세차게 후려쳤다. 그가
취한 일련의 세찬 동작의 반작용으로 오하라는
뒷걸음질 쳐 또 다른 가게의 앞에 세워 둔 널판지에
부딪쳤다. 그는 널판지를 와지직 부수면서, 따분하고
번지르한 여성용 속옷에 먼지가 자욱하게 쌓여있는
상품 진열대로 넘어지는 순간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의 어깻죽지에 못이 와서 박히는 것을 느꼈다.
가운데 있던 사내가 자신을 뒤쫓아 날아 들어와
공격을 가하는 순간 그는 계속 몸을 굴려 공격해 온
자를 가게 안쪽 깊숙히까지 유인했다. 갑자기 몸을
뒤로 회전시켜 그 자의 가슴을 두 무릎으로 짓누른
다음 오하라는 두 차례의 공격을 가했다. 첫 번째
것은 '관수'라고 하는 손바닥을 창처럼 곧게 편 다음
상대의 콧마루를 곧장 찔러 가는 동작이었고 두 번째
것은 목을 수도로 가격하는 동작이었다. 가운데 서
있던 사내가 기겁을 해서 그의 공격을 피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오하라의 세 번째 공격이
성공했더라면 그는 끝장났을 테지만 그 자는 강했다.
그는 몸을 굴러 오하라를 기우뚱하게 만든 후 한
쪽으로 격렬하게 몸을 비틀어 오하라의 몸을
내동댕이쳤다.
뒤쪽에 서 있던 사내가 산산 조각난 가게 문 앞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깨진 유리조각이 박혀
있었고 한 쪽 팔은 찢어진 채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오하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사잇길로
몸을 날려 어두컴컴한 가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순식간에 나머지 두 사내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하라는 어둠속에서 뒤쪽에 서 있던 자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그 자의 두 팔 사이를 교묘히 누비고
다니면서 조금전 그 자의 왼쪽 턱에 가격했던
상처부위를 공격하면서 그를 골목 한 구석으로 몰고
갔다. 조금후 그는 심장부위에 칼끝이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척추에 찌르르하는 고통이 전해져 왔고
순간 그는 어깨를 떨었다. 그 고통이 그의 몸을
앞으로 휘청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또다시 아무도
예상치 못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신속히 두 걸음을
앞으로 걸어나갔다가 얼마전에 취했던 동작을 다시
반복해 갑자기 뒤로 몸을 뒤틀며 가운데 서 있던
사내에게 덮쳤다. 오하라는 두 무릎을 구부린 채 두
손으로 그 사내의 스웨터를 꽉 움켜 잡은 뒤 머리위로
들어올려 부서진 창문을 통해 내던졌다. 그 사내는
완전히 거꾸로 선 모습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하라는 자신의 상처는 아랑곳없이 다시 공격을 해
들어갔다. 이번에는 자신이 즐겨하는 동작을 취했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옆차기와 앞차기를 하나로
융합시킨 것으로 완벽한 수련을 요구하는 동작이었다.
왜냐하면 옆차기를 하면서 몸을 날리고 있는 짧은
순간을 포착해서 말 그대로 공중에서 몸을 틀어
상대방의 코밑을 공격해 가는 앞차기로 전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공격이었다. 그가 몸을 솟구쳐
공격을 해 오는 모습을 보며 가운데 서 있던 사내는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뒤 쪽에 서 있던 사내는 여전히 지칠 줄을
몰랐다. 선채로 그는 두 팔로 수비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아주 신속하게 오하라의 옆구리에 옆차기로
공격해 들어오며 동시에 연속동작을 취했다. 자신의
머리를 공격해 들어오는 오하라의 뺨밑을 두
손가락으로 찔러가는 것과 동시에 팔꿈치 공격을 한
것이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 공격은 빗나갔다. 뒷
쪽에 서 있던 사내의 지나친 자신감이 초래한
결과였다. 오하라의 머리가 뒤로 제켜졌을 때 그
사내는 한 걸음 다가서면서 한 주먹강타를 날리려고
했던 것이다.
오하라는 몸을 수평으로 뉜 채 공격을 해 가면서
이상스러운 각도로 주먹이 날아오는 것과 동시에
후속동작이 뒤따라오는 것을 보고는 뺨을 살짝 돌려
피한 후 자신의 한쪽 팔을 들어 그 주먹을 쳐 내리고
그 사내의 팔꿈치를 자신의 팔꿈치로 막았다.
오하라는 그 자의 몸 주위를 한 바퀴 돌아서 무릎으로
그의 사타구니를 공격했다.
그 자가 몸을 활처럼 둥그렇게 구부리며 피하자
그는 다른 한 쪽 손으로 그 자의 턱밑에 있는 한 손을
낚아채서 비틀었다. 팔꿈치로 쳐서 그 자의 동작을
빗나가게 한 뒤 그의 한 쪽 팔을 풀어주고는
수도(手刀)로 그 자를 두 번 내리쳤다. 그 자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동그라졌다. 오하라는 나머지 두
명쪽으로 몸을 돌렸다. 게임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
순간 고통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고 세 명의
공격자들을 뒤쪽에 남겨둔 채 비좁은 골목길을 마구
내달리면서 신장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완화시켜
보려고 애쓰면서 호텔로 향했다.
그는 호텔 안으로 들어가서 로비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석조정원 근처의 조용한 장소를
발견했다. 그는 물위에 눈길을 주면서 벽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머리 속에
그려보기 시작했다. 연결관계가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카멜레온, 후커, 다니로프 - 그들이
핵심인물들이었다. 아니 하나 더 있었다. 용의
보금자리.
모든 것이 교토로 집중되어 가고 있었고 다나베까지
범위가 미쳤다. 그것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격이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그는 세 명의
암살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뒤를 따라왔는지 알
길 없었지만 그들이 엘리자와 매지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난했다. 따라서 세 사람은
모두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그를 깨어나게 한 사람은
엘리자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녀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찢어진 재킷과 턱
가장자리에 언뜻 눈에 띄는 두 군데의 상처에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우리들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소. '그들'이
누구이든 간에 말이오.]
오하라가 말했다.
[난 방금 이곳에서 몇 블록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세 명에게 습격을 받았소.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내 뒤를 밟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시지는
명백하오. 누군가가 불안해하고 있소.]
그녀는 그들 셋이서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보다는 오하라에 더 관심이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난 괜찮소. 며칠동안 목을 좀 앓긴 하겠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소. 매지션한테서는
연락이 있었소?]
[아뇨, 하지만 몇 가지 재미있는 소식이 있긴
해요.]
그녀가 말하고 나서 예르케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들려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어요.]
그녀가 덧붙였다.
[뭔데?]
[당신, 라반더의 노트에 적혀있던 미다스라는 말
기억하고 있지요? 그리고 'lgr.가와르'라는 말도
있었지요. 생각나세요?]
오하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하라, 가와르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오일 매장
지역이라는군요. 그 곳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대요.
아마도 미다스는 오일 매장지역이고 'lgr.'은
가와르보다는 더 큰 곳을 의미할 것 같군요. Larger
Than Ghawar말이에요.]
[미다스가 세계에서 가장 큰 원유 매장지역이란
말이군.]
[맞아요!]
[그럼, 그곳이 어디에 있지?]
[그 점에 대해선 대답을 할 수 없군요.]
[세계에서 가장 큰 원유 매장지역이라면 끝내
비밀로 남아있을 순 없겠지.]
[아마 매지션이 뭔가를 밝혀낼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뭔가 메시지가 왔는지 알아보겠어요.]
[기다려요.]
오하라가 말했다.
[만약 매지션을 만나거든 당신하고 둘이서 빨리
도쿄를 떠나기 바랍니다. 호웨씨의 차를 타고 오늘밤
교토로 내려가요. 난 기차로 먼저 갈 테니까.]
[모두 함께 갈 순 없어요?]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난 후커와 만나기로 했소. 빨리 가면 빨리 갈수록
좋지.]
그녀가 그의 목에 난 상처를 매만졌다.
[당신 정말 괜찮은 거예요?]
[난 괜찮소. 난 당신들 두 사람이 도쿄를 빨리
떠났으면 해요. 게다가 문제의 해답은 이곳에 없소.
'용의 보금자리'에 있소.]
그녀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알겠어요. 메시지가 왔나 보겠어요.]
[난 지금 가야겠소.]
그가 말했다.
[자칫하면 기차를 놓치겠군.]
[그렇지만...]
[내가 로얄 호텔에 당신의 방을 예약해 두겠소.
내일 아침까지 거기서 지내면 될 거요.]
[그렇지만...]
[차를 알아봐요. 매지션을 찾아내서 조금 전 내
말대로 해요.]
그가 그녀의 뺨에 키스를 해 주었다.
[그렇지만...]
그가 떠났다.
젠장, 그녀가 생각했다. 그가 완전히 미친 사람
같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성미가
급해. 그녀는 데스크로 가서 자신과 오하라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녀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거리에서 매지션을 만나겠다는 긴급
메시지였다. 그녀가 오하라를 못 가도록 하기 위해
뛰쳐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아뿔싸.]
그녀가 크게 소리를 질러 택시를 세웠다. 그 곳은
철길건너 석탄을 쌓아둔 장소를 지나 더럽고 지저분한
길을 내려가서 부두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곳은
"해리 T.'s"라고 빨간 색, 흰 색, 파란색으로
씌어있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쓰레기 하치장이었다.
그 뒤편으로 선착장이 희미하게 드러내놓고 있었다.
매지션은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은 채 씁쓸한
표정으로 쓰레기 하치장 입구 근처에 서 있었다. 그의
양복 소매는 찢어져 있었고 바지에도 째진 구멍이 나
있었다.
[맙소사.]
엘리자가 말했다.
[당신 모습이 꼭 18세기의 짐수레꾼처럼
보이는군요.]
[더 나쁜 게 있소.]
그가 말했다.
[더 나쁘다니요?]
[더 나쁘고 말고. 난 곰 한 마리한테 습격을
당했소.]
[곰이라구요?]
[내 그 얘기를 당신한테 들려주겠소. 오하라는 어디
있지?]
[그는 지금 비상이 걸려 있어요. 그는 교토로
갔어요. 우린 내일 밤 그를 만나기로 했어요.]
[젠장,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매지션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자 말하고는
허공을 응시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은 곰이야. 내가 그 얘길
들려주겠소.]
[매지션, 당신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부두술집을 이곳에서 줄곧 운영해 오면서
레드 브리지즈에 대한 실마리를 풀려고 노력했소.
이곳에는 한 군데뿐만 아니라 50군데도 넘는 술집이
있소. 당신도 알다시피 난 뭔가 행운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소. 결국 난 피아노 연주자이지 프런트
페이지 해리가 아니란 말이오.]
[아마 언젠가는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가 있을
거예요.]
[피아노 비슷한 거라도 있으면 난 연주할 수 있소.]
그가 장갑을 낀 손으로 '해리 T' 표지판을 톡톡
쳤다.
[아무튼 이 근처에는 온갖 많은 유형의 미국인
선원들이 이 곳 선착장에서 일하고 있소. 내가
브리지즈에 대한 정보를 원하면 모든 사람들이 내게
이야기를 들려줄 거예요. 난 크래프트 아메리칸에게
얘기를 해 봐야겠소.]
[누구라구요?]
[크래프트 아메리칸이오.]
[그게 누구 이름이에요? 아니면 점심식사용
메뉴에요?]
[어떤 녀석의 이름이요, 내가 잘 아는 친구요.
그러니까 문제는 이곳에서 내가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가느냐에 달려 있소.]
[어째서 이곳이죠?]
엘리자가 물었다.
[크래프트 아메리칸이 이곳에 합작회사를 가지고
있소.]
[그래요?]
[더 알아봐야 돼요. 난 아직 모든 내용을 파악하진
못했으니까.]
[그건 왜죠?]
[난 그곳에서 이 곰을 만났었소. 당신도 알 테지만
4개의 다리, 덥수룩한 머리카락, 길다란 코, 정말로
무지막지하게 큰 코를 가지고 있었소.]
[어떤 종류의 곰이죠?]
[나도 모르오. 내가 짐작하기로는 일본 곰이었소.
그는 테두리에 "닉슨과 함께 승리를"이라고 쓰여 있는
조그마한 밀짚모자를 쓰고 있더군요.]
엘리자가 웃기 시작했다.
[난 이런 얘긴 믿지 않아요.]
[내 정신 좀 봐. 우리가 여기서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곰이
있단 얘기요. 당신이 직접 한 번 가서 보시요.]
[내 지금 당장 들어가서 보겠어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휴우, 정말로 곰이더군요! 정말로 큰 곰이었어요!
저 사람 좀 보세요!]
엘리자가 말했다.
[난 그 사람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얘기하진
않겠소.]
매지션이 말했다.
[도대체 곰이 어떻게 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거죠?]
[난들 어떻게 알겠소? 바텐더에게 물어보시오, 그는
브리지즈를 위해 일한 적이 있으니까. 그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얘기를 나누어 봐야 하겠소.]
[그 사람이 크래프트 아메리칸이예요?]
[내가 알기로는 그렇소.]
바텐더는 머리를 짧게 깎고 있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여러 번 부러진 적이 있는
코를 가지고 있었으며 타이어 튜브만큼이나 굵직한
팔을 갖고 있는 뚱뚱한 사내였으며 앞쪽에 진노랑색
글자로 "부다칸에서 멋진 한 판을"이라고 인쇄된
검정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의 왼쪽 팔뚝에는
장미와 함께 한 개의 닻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고
"USS Billfish"라는 표제가 붙어 있었다. 그는
이쑤시개 하나를 입에 문 채 잊고 있었다.
[곰이 맥주집에서 일하는 게 불법은 아닐까요?
당신이 미국으로 돌아가서 보면 알겠지만
슈퍼마켓에서 개를 살 순 없잖아요.]
엘리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은 개를 가지고서도 멋지게 둘러대는 재주가
있군요.]
매지션이 말했다. 그 말은 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곰이라는 말만큼이나 요령 없는 말이었다.
[만나게 되어 반갑소.]
바텐더가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크래프트 아메리칸이라고 부르지요.
이 가게의 주인이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난 좀 진한 걸로 하고 싶군요. 피나 코라다로. 내
친구에게는 맥주로 주시오.]
매지션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피나 코라다는 러시아산 럼주로
만듭니다.]
크래프트 아메리칸이 말했다.
[러시아산 럼주요?]
매지션이 다소 놀란 듯이 말했다.
[내일 아침 배달해 올 때까지는 이게 전부요.]
[됐소.]
매지션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이 가게에는 그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군요.]
[음... 저기 있는 곰은 뭐예요?]
엘리자가 물었다.
[모자를 쓴 놈을 말하는 거요?]
[곰은 저것밖에 없잖아요.]
[사실 저것은 가게에 붙어왔지요.]
크래프트 아메리칸이 사과하듯 말했다.
[전에 이 가게를 하고 있던 남자는 애국심이
강했지요. 그 하나가 바로 저 곰입니다. 아직
화장실에는 안 가본 모양이시군. 변기에 앉으면 '갓
블레스 아메리카 (신이여, 미국에 은총을)'의 곡이
흘러나오게 되어있지. 그 남자는 어쨌든 가게를
그만두고 싶어했고, 내게 이 가게를 양도하고 싶다고
말했지. 단 한가지 조건이 저 곰을 그대로 두는
것이었지. 저 미국만세의 모자와 애국화장실을
포함해서 말이야.]
[그의 이름은 뭐요?]
[해리 S. 트루먼이오.]
[그는 자주 사람의 옷을 찢곤 합니까?]
매지션이 약간 화가 난 표정으로 물었다.
[문제는 피아노였소. 난 당신한테 주의를
주었는데도 당신이 앉아서 연주를 하는걸 못 봤소.
해리 S. 와 관련해 갖게 되는 유일한 문제는 그 곰이
단조로운 음악을 듣게되면 거의 미쳐버린다는
사실이오. 그의 귀와 신경을 괴롭힌다는 이유에서죠.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 후 피아노의 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소. 그가 그런 식으로 해리를 무마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국가를 휘파람으로 부는
거요.]
['레드 브리지즈'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엘리자가 물었다.
[그를 알고 있느냐고?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여기서
쫓아냈소. 레드는 매일 밤 이곳에 마시러 왔소. 그는
해리 S.를 좋아했소. 그들은 친구였지. 레드는 그곳에
앉아서 곰한테 자신의 골치 아픈 문제들을 털어놓고는
했죠. 곰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언제나 원반에 대해 예기했어요.]
[원반이요?]
엘리자가 물었다.
[네, 커다란 원반에 대해서였죠. 아마 축구장
넓이의 반 정도는 될 겁니다.]
[그런 것을 무엇에 쓰죠? 수 천 명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저녁이라도 먹겠다는 건가요?]
매지션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웃었다.
크래프트 아메리칸도 웃었다.
[그것은 멋진 얘기군.]
해리 S. 가 트림을 하고 나서 입술을 축인 다음
모든 사람을 보며 웃었다.
[사실은 해저의 주택 같은 것이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커요.]
엘리자가 물었다.
[난 확실히 모르오. 소문일 뿐이요.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이 비행접시 형태의 장소에서는 열 두 명
내지는 열 다섯 명이 잠을 잘 수 있소. 마치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듯이 말입니다. 그건 그리스인이
설계했죠. 당신도 바닷속의 일이라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을 들어본 적 있을 거요.]
[니콜라우스 카기나카스 말이에요?]
엘리자가 말했다.
[바로 그 사람이오. 그는 이미 죽었소. 그는 한동안
여기에서 지내다가 그리스로 돌아간 뒤 어느 날 물에
빠져 죽었소.]
[이 원반을 만들기 전에 브리지스는 무엇을
했지요?]
엘리자가 물었다.
[그는 인양사업을 열심히 했지요. 그때 레드가
인양한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한 '리버티'선(船)은 15,
16척 이 되지요. 낡기는 했지만 적재량은
톤급이었지요. 그는 탱크를 부착하고 여러 가지
개조를 했지요.]
[무엇 때문이죠?]
[배 안의 것을 빼내고 수송 탱크를 넣어,
석유탱크로 만든 거예요. 그것들은 매우 독특해서
잠수함처럼 부력조정용 탱크가 붙어 있었소.]
[부력 조정용 탱크라구요?]
매지션이 말했다.
[그렇소. 내가 추측하기로는 그렇게 해야만 그
탱크들이 비어있든 차 있든 간에 떠 있도록 말이오.]
해리 S.는 손가락 사이에 빈 찻잔을 잡아 선반 위에
대고 톡톡 두드렸다. 크래프트 아메리칸은 내려가서
또 한잔 맥주를 가지고 왔다.
[어떻게 생각해요?]
매지션이 엘리자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다니로프가 그리스에서 어떤 남자를 죽였다는
얘기를 했었지요?]
매지션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래프트 아메리칸이
피나 코라다 한 잔과 생맥주 한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원반처럼 생긴 것을 어디에서 가지고 왔는지
알겠소?]
매지션이 물었다.
[모릅니다.]
[그럼, 레드 브리지즈는 그 일이 끝나기 전에 죽은
거요?]
[네, 늙은 레드는 그 일에 신물을 내더군요. 일이
그가 계획했던 것보다 커졌소. 한번 들어보시오.
레드는 정말 훌륭한 해적인 동시에 난파선
인양전문가였소. 그는 낡은 난파선을 즐겨 찾아
다녔소. 만약 그가 무수한 얘깃거리가 담겨 있는 낡은
보물선이나 전쟁선박을 운 좋게도 찾았다면 그는
돼지보다도 더 행복했을 거요. - 그 프랑스인을
이해해 주시오, 숙녀분. 그렇긴 하지만 낡은 통나무를
유조선으로 변경시키거나 물 속을 달리는 비행접시를
만드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었소. 그런 일은 분명
그의 일이 아니었소. 그는 거물급 사업가가 되기를
원했소.]
[그가 난파선 인양작업을 할 때 뭔가 발견한 게
있소?]
매지션이 물었다.
[그렇소. 그가 그 일을 그만두기 직전에 우리는
남쪽에 있는 화산섬에서 근처에 침몰해 있는 일본군의
낡은 수송선을 발견했소. 그 배는 1945년, 유황도에서
도망중 미국의 폭격기에 침몰 당한 것이었소. 그런데
레드는 곧 그 원반사업에 손을 대서, 그 침몰선 건은
그대로중지됐소. 지금도 그 배는 바다 밑에서 녹슬고
있을 거요.]
[다른 사람이 인양하지 않았나요?]
[레드는 침몰선에 대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소. 그는 은퇴하면 인양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 절망적으로 머리를 흔들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그는 25년이나 키워온 조선소를 파는 것을 정말
싫어했소. 어느 날 밤 그 가 해리 S.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지요. 그는 늙은 해리에게 모든 얘기를
털어놓았죠. 아무래도 전쟁후 함께 일을 하던 친구가
사려고 한것 같아요. 가엽게도 그는 결심을 하기 전에
죽었지요.]
[결심을 하기 전이라니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렇소. 죽기 이틀 전날 밤 그는 가방을 든 채
이곳에 나타났지요. 그는 어떤 사람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더군요.]
[그럼 그 원반에 대해서 그후 못 들었나요?]
[이곳에서 운반되어 나간지 삼 사개월은 되었소.
그게 없어진 걸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조용히 해결되고 전과 다름없이 손님들이 찾아오고 그
문제는 얘기되지도 않으니까 말이오. 그들이 많은
일본인들을 고용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오.]
해리가 다시 트림을 했다.
[조선소는 누구 소유죠?]
엘리자가 물었다.
[일본의 대기업이요. 당장 생각이 안 나는군요.
서쪽 어디에 있는 회사요.]
[암란이 아니에요?]
엘리자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아니오, 그렇지는...]
[그럼, 산산?]
매지션이 말했다.
[그렇소, 바로 그거요. 산산주식회사요.]
해리가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어쩐 일이야, 해리. 자네가 해군 제복 입은 친구를
봤다구?]
크래프트 아메리칸이 말했다.
[그 친구는 해군제복을 입고 있었지, 자네도 알
테지만 안경을 쓴채 약간 술이 들어간 얼굴로 저쪽에
앉아 있었지.]
[여자가 필요할거요.]
매지션이 끼여들었다.
[미처 생각 못했군.]
크래프트 아메리칸은 카운터 끝의 해리 S.에게로
가서, 어두운 표정으로 맥주를 보고 있는 곰에게
'자네, 여자가 필요한가?'하고 말을 걸었다.
[모뜰게 점점 들어맞아 가는군요.]
엘리자가 말했다.
[한 가지 더 있어요, 크래프트 아메리칸씨. 레드가
'미다스'라는 말을 꺼낸 적이 있어요?]
[그렇구 말구요, 여러 번 들었소.]
[정말이에요?]
[그렇소. 그들이 그 원반 모양의 배를 그렇게
불렀소.]
6. 또하나의 연인 다나
그가 교토에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자정
무렵이었다. 그가 문을 살며시 열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정원까지 가기도 전에 개들이 눈치를 챘다. 그
개들은 미친 듯이 그를 반기었다. 수컷인 가즈오란
놈은 목을 뒤로 젖힌 채 달빛을 노래하는 한 마리의
늑대처럼 낮은 목청으로 끙끙댔다.
[조용히 해.]
그가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기무라가 지금
시간이면 잠이 들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미의
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는 뒤쪽에 있는 집으로
갔다. 타나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어깨 위에 드리운 채
다다미방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오하라는 여행으로 지쳐 있었다. 그들 셋이
헤어진지 3일이 지났다. 그는 타나의 침실에서 복도를
따라 수련실로 내려갔다. 그곳은 큼직한 침실정도의
크기였으며 마루에는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한 쪽
벽은 마치 발레 스튜디오처럼 거울로 되어 있었다.
그는 꽃을 바라보았다. 타나는 그가 집에 있든 없든
간에 그를 위해 그 방에 싱싱한 꽃을 꽂아주곤 했다.
꽃병은 노란 카네이션이 꽂힌 채 한쪽 구석에
놓여있었고 문득 그리움 같은 것이 솟구쳐 올랐다. 그
방은 어두컴컴했으며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약간의
불빛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타나가 잠들어 있는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에게는 심신을 맑게 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채 직관만이 남아있는 상태로 들어가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카멜레온.
유령이 근처에 있었다. 그는 그 유령을 가리고 있는
장막으로 인해 질식할 것만 같았다. 다른 것들은 모두
중요하지가 않았다.
그는 셔츠를 벗은 후 방 한 가운데 참선하는 자세로
앉은 채 눈동자를 굴리거나 깜박거리지도 않고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벽면을 바라보며 10분
동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침 햇살에
잠이 깬 한 마리의 뱀처럼 서서히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 뒤 마치 상당히 어려운 묘기를 선보이는
발레리나처럼 신속하면서도 부드러운 동작들을 통해서
4단계의 자세를 취해나갔다.
뛰면서 옆차기.
신속하게 움직이기 위한 고양이 자세.
주먹으로 치기 위해 전굴 자세.
측면 공격을 위한 기마 자세.
그리고 나서 그는 아주 신속히 네 차례의 격파
동작을 펼쳤다.
그는 수십 번씩 그 동작들을 반복하면서 매번 할
때마다 속도를 더해갔다. 그리고나서 그는 신속하게
장면을 바꾸어 아주 천천히 한 동작 한 동작씩을
연습했다. 조금후 그는 본래의 참선자세로 돌아간후
움직이지 않는 자세로 다시 10분정도 앉아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흔들었다. 그는 이제
심신이 안정된 것이다. 바로 그때 그는 타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벌거벗은 몸으로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두손을 양쪽 허리에 올려놓은채 입구에 서
있었다.
[개들이 내게 당신이 이곳에 있다고 알려
주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곳으로
가서 두 손으로 그녀가 볼 수 있도록 손동작을 했다.
[네가 너무도 평화스럽게 잠을 자는걸 보고 깨우질
않았어. 개들이 있다는 걸 그만 깜박했군.]
그녀가 웃었다.
[그럼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여기서 잠을 잘
생각이었어요?]
[아마 그랬을 거야.]
[난 아무때나 자면 돼요.]
그녀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당신 머무르려고 돌아온 건 아니군요.]
[아니야. 도껜루이선생님에게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아버지는 내일 저녁 식사시간까지는 돌아오지
않아요. 그렇지만 난 당신하고 얘기도 나누고 싶고
당신의 입술도 보고 싶군요.]
그는 두 팔을 뻗쳐 그녀의 입술에 아주 가볍게
입맞춤을 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손끝을 끌어당겨 자신의 혀로 가져갔다.
[슬픔이 당신의 얼굴에 씌어 있군요.]
그녀가 말했다.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난 알아요.]
[지금은 그런걸 얘기할 시간이 아니야.]
그녀는 그의 말에 대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적절한
시기를 말하고 선택하는 건 그가 알아서 할 일이었고
그의 권리였다. 게다가 비록 한 순간이긴 하지만 그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가즈오. 당신의 팔에
포근히 안기지 않으면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나도 당신 생각 많이 했어.]
그녀는 자신의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당신의 얼굴을 다시 만져 보게 되어 정말 좋아요.]
그녀의 두개의 젖꼭지가 그의 앞가슴에 닿으며
단단해졌다. 그녀는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저는 나비가 되어 당신을 찾아 헤매다 지쳐 울음을
터뜨리곤 했어요.]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그녀의 동작이 점점 적극성을 띠어 가는 걸 느꼈다.
그녀의 손길이 그의 바지로 미끄러지면서 벨트를
풀었다. 그녀는 손길을 그의 남성 앞으로 미끄러뜨린
순간 손아귀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고 손가락으로
꼬옥 움켜 쥐어주자 그것이 발기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바지 지퍼를 내린 후
벗겨냈다. 그녀는 그의 한 쪽 손을 이끌어 자신의 두
다리사이로 가져가고 그의 나머지 손 손가락들은
자신의 입술로 이끌어 간 뒤 그의 두 손으로 그녀
자신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대며 그를 점점 더 거칠게
애무해갔다.
그는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발뒤꿈치로
선 채 바르르 떠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조그마한
신음소리가 목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듯 했다.
그녀는 곧 입을 벌렸다. 그의 딱딱하게 굳어진 성기가
준 충격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비명이었다.
그녀는 그의 성기를 자신의 깊숙한 곳으로
안내하면서 몸속 깊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한 쪽 발로 그의 허리를 감싸며 한 쪽
발로 선 채 자신의 몸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했다.
그녀는 그의 성기를 감싼 채 자신의 몸 깊숙한
곳으로 빨아들인 후 꼬옥 죄었다가 풀어주었다.
한동안 같은 동작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그도 몸을
펴기 시작했다. 그는 신음을 했다. 아니 마치
고함소리 같았다. 그러자 그녀는 다른 쪽 다리로 그의
몸을 감쌌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부여잡은 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가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으며 자신도 모르게 그는 고함을 지르면서
그녀의 몸속에서 사정을 했다. 그가 고함을 지를 때
그녀는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천천히 두 무릎을 꾸부리면서 한 쪽 팔로
마루를 짚고 몸을 앞으로 숙인 채 그녀를 마룻바닥에
눕혔다. 그녀는 그곳에 드러누운 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호흡은 아직도 헐떡거리고
있었다.
[너무 빨라서 이미 옛 기억이 돼 버린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침대로 가요, 가즈오. 밤새도록 당신을 내 품에서
안 놓아줄 거예요. 우린 함께 기쁨의 환성과 함께
아침해를 맞이하는 거예요.]
7. 검도 사범 오카리
키가 자그마한 한 일본 여자가 울타리가 쳐져 있는
거리를 생기발랄하게 걸어 내려가 검도 도장을
향했다. 그녀는 큼직하고, 밝게 불이 켜져 있는
방으로 들어서기 직전 대나무 검으로 서로 겨루면서
내지르는 짧은 기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방 한쪽 옆을 따라 앞쪽에 세워져 있는
칸막이 벽까지 걸어가서 한 쪽 구석에 조용히 선 채
마치 방안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검도
사범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각 팀들은 서로 맞붙어
싸우다가 가끔씩 득점을 하곤 했다. 죽도(竹刀)는 네
개의 대나무 조각을 가죽끈으로 묶어서 만들어지며
학생들이 머리 위나 오른쪽 손목, 오른쪽 몸통 또는
목을 치거나 해서 득점으로 연결될 경우에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곤 했다. 검도 선생은 시범을 통해
가르쳤다. 그가 어떤 학생을 지도하고 싶을 때는 그를
앞에 마주 세워 놓고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우는
식이었다. 그의 동작은 정말 놀라웠다. 그녀는 그가
한 개의 동작처럼 보이는 것으로 3점을 얻는 걸
보았다. 그는 학생한테 마주보고 인사를 하고 난 뒤
자리를 떠나 방을 가로질러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죽도를 벽에 세워놓았다.
[실례합니다, 오카리씨. 선생님의 수업을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소, 이시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도쿄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가 아니오?]
[네, 맞아요. 가즈오라고 하는 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강한 것 같아요?]
[그래? 케이와 그의 친구들이 그를 꺾지 못했단
말이요, 그럼?]
[케이는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턱이 부서졌어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부상을 입었어요. 그의
얘기로는 마치 바람하고 싸우는 것 같았다더군요.]
검도 사범은 얼마동안 아무말도 없었다. 그는
학생들이 서로 대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그가 많이 늘었나 보군. 가즈오라는 자가?]
[그런 것 같아요. 그는 먼저 레코드가게도 갔고 그
다음에는 간ㅉ우찌에 있는 하다시라는 자를
찾아갔어요. 그는 가부끼 공연장으로 가서 지난 날 그
곳에서 일했던 배우들과 구성에 대해 물어 봤습니다.
지금 그는 이 곳에 있답니다.]
[교토에 말이요?]
[네, 그는 도껜루이의 집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는 내일 다나베로 갈 계획인 것 같구요.]
[재미있군.]
[그는 우리 나라와 행동방식을 잘 알고 있어요.
아주 손쉽게 움직이고 있거든요.]
[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애. 그는 CIA에 근무한
적이 있지. 그들은 다 그런 식이니까. 그 영국인은
어찌됐소?]
[그는 훨씬 더 세심하더군요. 마치 그들이 서로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나머지 둘은?]
[그들은 어제 저녁에도 도쿄에 있었어요.]
[난 나중에 그들을 상대하겠소. 고맙소. 케이가
안됐군. 하지만 곧 나을 거야. 내가 그 친구들을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놓이는군.]
이시다라고 불리웠던 그 일본여자가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계속 그를 뒤쫓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도쿄에 있는 두 놈은 계속
감시해. 난 우선 기자로 있는 오하라라는 자부터
해치워야겠소. 그리고 나서 다른 놈들을 상대해야지.]
그리고는 몸을 돌려서 무용수처럼 우아한
몸놀림으로 학생들 틈을 비집고 들어간 뒤 모든
학생들을 한 명씩 번갈아 가면서 상대를 해주며
연습경기에 몰두했다. 다 끝내고 나서 그는 호면을
벗어던지고 크게 웃었다.
8. 거대 기업 암란
그들이 다나베로부터 굽이진 길을 차로 달려
올라왔을 때, 오하라는 산 한쪽 모퉁이에 있는
절벽위로 그 성채를 볼 수 있었다. 그 성채의 드높은
석벽 사이로 각종 침엽수와 활엽수가 자라나고
있었다. 성채 아래쪽으로는 이오나다 만(灣)의 일부가
들어와 있었고 위쪽으로는 시코쿠 섬, 그리고 서쪽
방향으로는 히로시마가 위치하고 있었다. 아래쪽 저
멀리 산기슭에는 동그란 케이크 모양의 유미사와
정유공장의 저장탱크가 한낮의 태양아래 빛나고
있었다.
그들 머리 위의 성채는 17세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남쪽에서 일본을 침입하는 모든
적들에게 경고를 주는 의미에서 축조된 것이었다.
후커장군은 '용의 보금자리'를 국제적인 콘소시움
본부로 탈바꿈시키기 위하여 일본정부와 암란사
사이에 장기계약을 체결할 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있었다. 주변 경관이 참으로 훌륭했다.
아래쪽 멀리에는 고기잡이배와 화물선들이 만의
푸른 물결 위를 수놓고 있었으며 성채까지 올라가는
진입로의 양쪽으로는 장미덩굴과 진달래로 뒤덮여
있었다. 무성하게 풀이 덮여있는 지난 날의
화산(火山)길을 따라 20분 가량 올라가자 택시는 현관
앞에 도착하였다.
그 곳을 들어설 때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20피트 높이 석벽의 거대한 목조 대문 앞에 경비원
한 명이 나타나서 증명서와 소개장을 요구하고 나서
오하라의 몸을 수색했다. 그는 일본인이었고 마치
스모선수처럼 몸이 비대했다. 새까만 터틀넥 스웨터
위로 감색 정장차림의 그의 제복은 그 거대한
몸집으로 인해 이음매가 곧 터질 것만 같았다. 그의
오른 팔에 매달린 조그만 완장의 문구는 간단했다.
암란 경비원.
그는 또한 앞가슴 주머니 위에는 신분을 나타내주는
뱃지 하나가 달려있었다. 처음에 그는 오하라가
서류가방을 들고 있지 않은 점이 마음에 걸리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곧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걱정을
털어버렸다. 그가 점검을 끝내고 나서 오하라한테
자신을 뒤따라 오라고 손짓을 하고는 조그만 문을
통해 들어갔다.
오하라는 택시 운전수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나서 그 경비원을 따라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은 축구장 넓이의 반 크기였으며 조약돌이 바닥에
깔려 있었으며 나무, 정원 또는 새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당의 한 쪽 구석에는 단층가옥 세 채가
있었다. 오하라는 고전적 분위기를 감지했다. 한
가운데 것은 '신신전'이라고 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본채였고 오른쪽은 장군들의 거실로 쓰였던
'세리료전'이라고 하는 청정한 방이었으며 왼쪽은
'가이쇼 전'이라고 부르는 막사였다. 그 건물들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는 기와 지붕을 하고
있었으며 처마 끝은 곡선을 이루고 있었고 진한 빨간
색으로 채색된 두꺼운 목조 기둥이 받쳐주고 있었다.
그 건축물의 고전적 아름다움은 단 두 가지만
제외하고는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었다. 오솔길은 세
채의 건물을 서로 연결해 주고 있었으며 <신신 -
덴>으로 들어가는 현관을 제외하고는 모든 문이
폐쇄되어 있었다.
의식을 거행하는 건물의 지붕 위에는 세 개의
위성형 원판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벽 위에는 약간의
조명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오하라는 남모르게
바깥쪽을 세심히 살펴보면서 뜰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새까만 작업복을 입고 있는 몇 명의 남녀 인부들이
마당에서 청소를 하거나 갈퀴질을 하고 있었다.
암란은 그 곳을 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손질해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때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리고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돌렸다. 경사진 지붕의 한 쪽 모퉁이 그늘진
곳에 한 사내가 있었는데 햇살에 드러나 섬뜩한
느낌을 주는 한 쪽 눈만 보았을 뿐 신체의 다른
부위는 희미해서 볼 수가 없었다. 그 사내는 번개처럼
모습이 감추었지만 그 짧은 순간 오하라는 이마에서
턱까지 쭉 그어져 내린 상처와 함께 다른 한 쪽 눈이
그저 구멍만 뚫려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저 우연히 지켜본 것인가 아니면 어떤 의도를
가지고서 바라본 것인가? 그는 어쩌면 자신이 이
사내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언제, 어디에서 그를 만났는지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본 채로 들어섰을 때 이런저런
생각들은 그에게서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마치 꿈을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 생각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응접실은 현관을 개조해서 만든 것이었다.
빛은 20피트 높이의 천장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굴참나무 기둥은 깨끗이 닦아주어서
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벽은 계단천에 그려져
있는 고대의 정교한 그림들로 덮여져 있었다. 하지만
방안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가구라고는 전형적인 미국식
스테인레스 책상이 전부였다. 그 책상은 방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는데 손님용 비망록 하나와 여러 개의
버튼이 달려있는 전화기가 하나 있었다. 대들보가
있는 천장높은 곳에는 소형의 T V 카메라 하나가 방을
비추고 있었다. 사면의 벽 아래에도 금속과
전자칩으로 만들어져 있는 탐지기들이 놓여져 있었다.
그 사내는 책상 뒤에 앉아 있었는데 초록색
정장차림에 소매에 줄무늬 세 개가 나있는 경호원용
터틀넥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총구가 거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서구형의 권총집을 차고 있었다.
그는 어깨가 넓었으며 허리는 잘록했고 권총
총열만큼이나 쭉 뻗은 몸매였으며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의 가죽빛 얼굴은 심하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그에게서 뚱뚱한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표정으로 판단해 볼 때 그가
웃는다는 건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오하라는 그런 타입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은퇴한
무술 고수이거나 특공대 교관일 것이다. 그는 그
경비원 옆에 있는 사내를 보자 지난날 역사책이나
뉴스 영화 속에서 본 적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거기서 그는 감옥에서 3년을 보냈기 때문에 바싹 말라
마치 유령처럼 보였었다. 푹 들어간 두 눈에는 희미한
기쁨 같은 게 빛나고 있었고 카키색 군복은 앙상한 뼈
위에 걸쳐져 있었다. 지금 앞에 서 있는 그 사내는
몸이 조금 더 건장했고 흰 머리카락과 흰 수염이 거의
얼굴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었으며 수염 끝은 천장을
향해 꼬부러져 있었다. 그는 단장(短杖 : 군인 등이
산책하거나 할 때 들고 다니는 지팡이) 으로 풀을
먹여 빳빳한 카키색 바지를 톡톡 치면서 오하라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수치 수용소의 희생자인
젯세 가비장군이었다.
[오하라씨입니까?]
[그렇소.]
['용의 보금자리'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난
가비장군이오. 이 쪽은 트래버즈 하사요.
경호원이죠.]
[반갑습니다.]
오하라가 가비에게 말했다.
[당신을 한 눈에 알아봤습니다, 장군. 정말
영광이군요.]
[고맙소.]
[군대 막사에 온 기분이 드는데요.]
오하라가 트래버즈를 돌아다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후커 장군님은 군대식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습관의 힘이라고나 할까요.]
[알 것 같습니다.]
[자, 그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갑시다.]
그들이 거대한 대기실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오하라는 벽 뒤쪽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전동식 타자기, 컴퓨터의 윙윙소리,
녹음 테이프가 다시 감기는 소리였다. 낡고 거대한
건물 안 어딘가에서는 수많은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비는 그를 안내해서 방으로 들어간 뒤 문을 꽝
닫았다. 그 곳은 갑자기 한밤중의 교회처럼
조용해졌다. 그 방은 거대하였는데 막부시대의
집회장소 일거라고 오하라는 생각했다. 매우
어두컴컴했다. 햇빛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방에
달린 창문들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햇빛가리개로
가려져 있었으며 맞은편 벽은 밀폐된 온실로 변형시켜
사용되고 있었다. 고대의 사찰 수호용 개와 경비용
사자의 동상이 어두컴컴한 구석에 조용히 웅크리고
앉아있는 가운데 식물재배용 전등이 희미하게
비치면서 붉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단단한 목조 마루 위에 뚜벅뚜벅
울리고 있었다. 그 곳은 후덥지근했으며 파이프
담배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오하라는 방으로 들어오는 입구 가까이에 있는 여러
개의 큼직한 의자가운데 한 곳에 걸터앉았다.
필리핀제 바구니형 갓이 씌어져 있는 한 개의 등이
의자 맨 끝쪽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
읽을거리는 하나도 없었다.
그는 기다렸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방 어딘가에서
나는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가 짐작하기로는
실내습도가 1백 퍼센트는 될 것이며 온도는 80도는
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신을 통일하고서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슬이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소리, 조그만 발이
달려있는 곤충이 마룻바닥을 기어가는 소리, 식물
재배용 등에서 나는 미약한 웅웅소리, 괘종시계에서
일정하게 들려오는 똑딱소리. 그리고 다른 소리도
들려왔다. 느릿하면서도 나즈막한 숨소리였다. 그
자신 말고 누군가가 방안에 또 있었다.
오하라는 곁눈질로 어둠 속을 주시했다. 그
숨소리는 온실가까이 위치해 있는 유난히도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나고 있었다.
성냥이 그어졌다. 노란 색 불꽃이 팍하고
일어나면서 깜박거리는 불꽃이 켜졌다. 흔들거리는
불빛아래 그는 후커의 인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매부리 코, 야무진 턱, 길다한 목.
[정말로 훌륭하오, 몹시 탄복했소! 일 분도 채
안돼서... 나를 알아보다니. 믿기 어려운
집중력이오.]
그는 램프의 스위치를 켰다.
뚱뚱한 모습의 불상의 모습을 한 램프였다. 붉은
색으로 니스 칠을 한 불상의 배가 불빛을 받아
번쩍거리고 있었으며 받침대 위에 결가부좌를 한
모습으로 신비스러운 빛이 감도는 눈으로 방안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어두컴컴한 곳에서 장난을 친 점을
사과드리겠소. 내 눈은 빛에는 아주 약한 편이오.]
그 노인은 거대한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 책상
위에는 고풍스러운 갓과 스위치 당김줄이 달려있는
불상모습의 램프와 편지따위를 넣을 수 있게 된
장식용 나무 상자가 하나, 그리고 비망록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책상의 앞으로는 여덟 개의 높직하게
등받이가 달려 있는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너무 후덥지근한 점도 사과하겠소. 다음 번
생일이면 내 나이가 여든이오. 혈압이 좀 낮아진
탓인지 82도가 안되면 난 춥소. 한 잔 하시겠소?
그러면 좀 나을 거요.]
[차가 좋을 것 같군요?]
[뜨거운 걸로 하겠소. 아니면 찬 것으로 하겠소?]
[찬 것으로 하지요.]
그가 책상 아래쪽 어딘가에 달려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트래버즈가 문 앞에 나타났다.
[오하라씨에겐 찬 걸로 드리게, 하사. 난 소다수를
한 잔 주게나.]
[네, 장군님.]
그가 사라졌다.
[아마 바꾸기 힘든 것도 있는 모양이오.]
후커가 말했다 .
[난 오랫동안 군대생활에 익숙해서인지 내 조수들을
직함보다는 계급으로 부르는 버릇이 있소.]
[이 곳에 많은 안전요원이 있는 것 같더군요.]
[뭐 그런 것까지 신경을 다 쓰시오.]
그가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실, 이 곳은 성채요.]
그가 얘기를 이어나갔다.
[1607년에서 1612년까지 축조하는데 5년 정도
걸렸소. 막부에서 마을을 봉쇄시킨 다음 외국인들이
일본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소. 당신도 길을 올라오면서 보았을 거요. 이
성채는 만(灣)전체와 큐슈 섬을 지켜주고 있소.]
[아주 인상적이더군요.]
[5년 동안의 힘든 공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이
완성되었을 때는 미처 보지도 못한 채 죽은 노인도
있소.]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모든 것이 그들의 노력의 결실이었는데도 말이오.
사실, '용의 보금자리'는 한 번도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소.]
[장군은 어떻게 이 곳을 이용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감상적인 생각에서 그랬던 것 같소. 지금 생각해
보면. 전쟁이 끝난 후 내가 군 사령관이었을 때 내
여름철 별장으로 삼았었소. 그 이전에는 일본의 한
정보기관이 이 곳에 머무른 적이 있소.]
일본 여자가 마실것을 가지고 종종걸음으로 방에
들어와서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떠났다. 그녀는
이십대 초반의 젊은 여자였고 무척 예뻤다. 그녀는
마룻바닥에서 한 번도 눈길을 뗀 적이 없었다.
[자, 오하라씨. 당신의 얘기를 좀 들어봅시다. 내가
뭘 도와드려야겠소?]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후커의 얼굴을 덮고 있는
피부에는 깊은 주름이 있었다. 그의 높이 솟아오른
광대뼈는 마치 절벽의 꼭대기처럼 드러나 보였다.
그의 피부는 나이가 들면서 거의 투명하리만치
희어졌으며 그의 두 눈은 백설같이 새하얀 두 눈썹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는 파이프 끝에 달린
동그란 담배통에 담배를 눌러 담으면서 선글라스를
통해 오하라를 날카롭게 주시했다.
[전 오일업계에 관한 어떤 이야기의 배경을 좀
들어보고 싶습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장군의 콘소시움은 아주 새로운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젊은이, 말해주겠소. 사실, 이 그룹에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많이 있소.]
후커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당신은 조사를 하려고 그토록 먼길을 왔단 말이
되겠군.]
[전 일본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알겠소. 당신은 조국을 사랑하오?]
[전 이곳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요? 어느 곳이요?]
[도쿄, 그 다음엔 교토입니다.]
[아 그러면 우리 둘 다 조국애를 가지고 있겠군요.]
이건 완전히 난센스로군, 하고 오하라는 생각했다.
지금 저 늙은이는 뭔가 장난을 치고 있다. 그는 왜
장난을 치려고 하는 것일까?
오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토는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입니다.]
[나처럼 늙은 군인에게는 마음 편한 곳이오.]
후커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말하고 나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 너머로 오하라를 응시했다.
[당신들은 일본에서 기반을 갖고 있는 유일한 미국
석유회사입니다. 그 점이 바로 제가 관심을 갖는
이유입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그렇소, 그 점에 대해선 신기할 게 하나도 없소.
우리가 특히 이 곳에서 자리잡은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소.]
오하라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제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 가운데 하나죠. 전
그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좋소. 말해 보시오.]
오하라는 종이철과 펠트펜을 꺼냈다. 그는
어딘가에서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어디에서 나는 지 알 길이 없었다.
그 소리는 장군한테서 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시계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당신 뭔가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나보군요.]
후커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디서 시계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 같군요.]
[아, 그 시계는 여기에 있소, 오하라씨.]
그가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시끄럽긴 하지만 아주 쓸모 있는 심장박동
조절장치라오. 내 의사는 지금 그것을 만지는 걸 원치
않고 있소.]
그가 웃었다.
[똑딱거리는 소리를 멈추고 싶으면 내 의사한테
부탁해 보시구려.]
오하라는 후커와 그가 암란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분명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난 인터콘 오일회사의 사장이었소. 우리가 맨 처음
콘소시움을 제안했소.]
[언제부터 오일 사업에 관여하셨습니까, 장군?]
[음, 15년에서 20년 이전부터요. 내가 대통령
후보였을 때였소. 나의 열렬한 지지자중 일부는
텍사스인이었소. 내가 선거에서 패했을 때 인터콘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해왔소. 그 회사는 곤경에 처해
있었지. 강력한 최고 관리자가 없었기 때문이었소.
2년이 지난 뒤 우린 그 회사를 제대로 굴러가게
만들어 놓았지.]
[당신은 어떤 이유에서 콘소시움을 제안하신
겁니까?]
[그렇게 하면 가입 회사들이 새로이 막강한
재정능력을 보유하게 되기 때문이었소. 어떤 사업이든
다 그렇듯이 돈이 돈을 버는 거요.]
[콘소시움의 회원사들은 정보를 공유합니까?]
후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회원사들의 기술은 서로 공유되는 거요.
하지만 각기 나름대로의 독립성을 가지고 운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소. 그들의 이익금은 그들 자신의
것이오. 암란사는 이익을 목표로 한 중심기관이
아니고 음... 관련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기구라고 할
수 있소.]
[당신은 지금도 인터콘에 관여하고 있습니까?]
[다만 자문역을 맡고 있을 뿐이오. 이 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암란의 운영에 보내고 있소.]
[콘소시움이 실제적으로 결성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우리들은 한 일년 전쯤 약관을 만들었소. 이 모든
걸 함께 짜 맞추느라고 꽤나 시간이 걸렸지. 같은
우산 밑에 몇 개의 굵직한 회사들을 끌어모으다 보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는 당신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거요. 각 회원사들의 다양한 요구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협상을 하느라고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단 말이오.
내 거듭 말하지만 오하라씨, 각 회원사마다 독립성을
가지고 있소.]
[그렇군요. 협상하는 데는 얼마나 걸렸습니까?]
[우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는 셈이군... 그러니까,
음. 75일 가량이오.]
[어떤 회사들이 최종적으로 가입했습니까?]
[우리 인터콘이 먼저 들어가고 그 다음 선셋 오일,
헨셀, 아메리칸 피트로듐...]
지난 날을 기억 속에서 순간적으로 되살리다 보니
무의식중에 후커는 집중력이 흩어지면서 정작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을 잊어버렸다.
[미안하오.]
그가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뭐더라... 음,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
[암란 회원사들 명단을 말씀해 주시고 있었습니다.]
[아, 그랬었지! 내 정신 좀 봐.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기억의
힘은 묘한 데가 있어서 그로 하여금 그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곳은 시드니였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가 시드니에서 거래를 시작한
직후에 그 첫 번째 상자가 왔지.'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생각을 지워버렸다.
[인터콘, 아메리칸 피트로듐, 헨셀, 선셋...]
오하라가 그를 위해 명단을 다시 되풀이했다.
[물론... 내 정신 좀 봐, 브리지즈 샐비지
코퍼레이션, 스톤 코퍼레이션, 그 뒤 우린 조그마한
이태리 자동차 회사 계약을 체결했소.]
[선착장은 무슨 이유로?]
[오일 탱크였소, 오일 저장소 말이요. 우리가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왜 그리스 선박업계까지
끌어들였겠소?]
[자체적으로 공급을 할 생각이었군요?]
[그런 의미요.]
[그럼, 스톤 코퍼레이션은요?]
[그 회사는 플로리다, 조지아, 앨라바마, 그리고
남부지방에 몇 개의 공장을 가지고 있소.]
[그 회사는 정유공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장군은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붙이면서 오하라를 좀 더 자세히 뜯어보았다. 이
사내를 얕보아서는 큰 코 다치겠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소.]
[이 곳 일본에 있습니까?]
후커가 머리를 끄덕였다.
[산 아래로 곧장 내려가면 보이는 곳이요. 유미사와
작업장이오. 우린 그 곳을 아주 바쁘게 운영하고
있소. 그 곳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공장이기
때문이오.]
[그럼 이 곳에서 정유를 하려면 세계 곳곳에서
오일을 배로 실어오고 있겠군요?]
[물론이오. 관심 갖고 있다면 여행을 주선해
주겠소.]
[아마 주말쯤이면 시간이 나겠죠.]
후커는 천장을 향해 담배연기를 한 모금 천천히
뿜어냈다.
[좋소.]
그가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당신한테 많은 공부가 될 거요.]
[유미사와는 잘되고 있습니까?]
오하라가 물었다. 후커가 미소를 지었다.
[우린 자선단체가 아니오. 우린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하고 있다는 뜻이오. 유미사와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소.]
[당신 일본으로 오게된 데는 어떤 까닭이라도
있습니까?]
[암란은 국제적인 회사요. 우리는 몇 개의 일본
정유공장을 이용하고 있소. 또한 내게는... 음, 이런
일이...]
후커가 얘기를 할 때 두 눈이 몽롱해지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마치 백일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곳에서 사는 게 좋기 때문이오.]
그 노인은 마음을 집중시키기가 어려운 듯 했다.
어두운 기억들이 자꾸만 뇌리에 떠오르면서 맴돌았다.
강렬하고도 끈질긴 기억이었다. 그는 그런 모든
기억들을 의식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애쓰면서
오하라의 말에 의도적으로 귀를 기울이려고 했지만 그
기억들은 그대로 남은 채 현실 속으로 고개를
내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두 번째 - 아니, 세 번째
카멜레온이었다. 그는 그 상자가 하얀 상자에
불과했을 뿐 이렇다할 특징은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그
상자를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 상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마치 자신의
가슴속에서 증오심이 용솟음치듯이 이 자그마한
생물체가 상자 속에서 살금살금 기어다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는 두 달 동안 시드니에서 지내며 그들을 혼슈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그 섬을 교두보로
삼겠다는 구상을 세웠다. 그 집은 한 때 총독 소유로
되어 있었던, 흰색의 빅토리아식 대저택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자신의 사업본부로 이용했던 굉장히 크고
앞이 확 트인 곳이었다.
모든 곳에 헌병들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상자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녀는 호수처럼 평온한 얼굴로 그 거대한 방에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표정에는 아무것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인생이란 것은 축복 받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피부는 깨끗하고 부드러웠으며 아몬드
모양의 눈은 빈틈이 없어 보였다.
[당신은 훨씬 더 예뻤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가 거짓말로 둘러대었다.
[무슨 말씀을 하셨죠?]
오하라가 말했다.
[아, 실례... 내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나보군.
일이...]
그의 목소리가 끝을 맺지 못했다.
[저는 당신이 암란을 맨 처음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물었습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건 음... 필요했기 때문에
함께 결속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 몇몇
회사들은 협상도중 그들의... 실무자들을 잃었소.
매번 그런 일이 있게 된 시기는 우리가 새로운
사람들과 거래를 막 해보려던 때였소.]
[이 핵심인사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죽었소. 주로 자연사로 처리됐긴 하지만. 그들
가운데 세 명, 아니 네 명이었을 거요. 심장마비였고,
한 명은 자동차 사고였소... 아무튼 상당히
지연되었지. 당신도 알 테지만 관리자들이 이러한
갑작스러운 사고로 이 회사들을 결속시키려는 일이
좌절된 거요...]
그는 마치 암기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이야기를
해나갔다. 일이 진행된 순서대로 그가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이었다.
필리핀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녀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정치적 수단과 한 달에 미화
1백불. 그의 경력에 오점을 남길 수도 있는 한 건의
스캔들을 피할 수 있는 대가치고는 너무나 싼
가격이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그녀는 어떤 수단을 써서
루존에서 호주로 가는 길을 찾아낸 것일까?
그 상자가 그 문제의 해답이었다.
카멜레온이 그러한 준비를 해 준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 의심할 나위가 없다. 전에도 두 번이나 상자가
보내 왔다. 각각의 상자 안에는 그의 명판과 한
마리의 카멜레온이 들어있었다. 첫 번째 상자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고 다만 도쿄의 신사 앞에
서있는 한 소년의 조그만 스냅사진 하나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그는 깜짝 놀란 듯이 보였다.
후커의 정보원들이 카멜레온의 거처를 알아내려고
몇 개월을 허비했다. 심지어 일본에 있는
정보원들조차도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는 일본에
있는 한 정보국의 장으로 있었다. 그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두달쯤 지나서 온 두 번째의 카멜레온 상자에는
후커가 처음으로 받는 메시지가 넣어져 있었다.
조그마한 종이쪽지에 깔끔하게 타이핑된 메시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 문제는 협상의 여지가 있소'
더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그 뒤 두 달 동안 곤혹스러운 기다림끝에 그녀가
구두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극도의 모욕이었다.
스냅사진은 잔혹스러운 것이었다. 보비, 그 아이가
어린이용 관에 앉아 있었다. 그 소년은 지친 듯이
보였으며 아마 약을 먹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가 원하는 게 뭐요?]
[그 일은 신속히 이행돼야 해요. 다음 주 안으로.]
[그가 원하는 게 뭐요?]
후커 자신이 몸소 나서서 한 일본 관리와 한 명의
내연의 처와 함께 협상에 나서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요구사항을 물었다.
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마치 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복했다.
[그는 영국이 지금 이곳 호주에 감금하고 있는
아시다 장군과 몰리노를 교환하려는 거예요.]
신에게 맹세코 그가 그녀를 얼마나 증오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그녀의 성적매력에
이끌렸다. 그는 그녀의 육체가 지난 몇 년 동안
변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면서 그는 벌거벗은 채
자기 옆에 드러누워 있는 모습을 생각해 봤다. 3년
동안 그일은 국가 기밀사항이었다.
다만 가비만이 알고 있었다.
장군은 그때 아내를 잃은지 겨우 6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는데 당시 17세였던 양가집 처녀와 잠자리를 함께
한 후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갖게된 후 보내버렸다.
아, 장교클럽에 있는 수다쟁이들이 얼마나 그 문제를
가지고 떠들어 대고 했던가. 그리고 그의 상관들은 또
어땠었나? 그들은 그를 완전히 파멸시키려고 했다.
지금 그는 훨씬 더 그녀를 미워했다. 자신의 약점
때문에 그는 3년 동안 거짓말을 하며 지내왔는데
이제는 그 사실이 오히려 그 자신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죄책감에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당신은 적들처럼 총에 맞아 죽었어야 하는 건데.]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난 내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 비행기 사고로.]
오하라가 말을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해 주겠소.]
후커가 문득 현실로 돌아오면서 말했다.
[스톤 코퍼레이션의 로버트슨이 자가용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지.]
[당신도 아시겠지만 혼자서 비행기를 타도록
허용되지 않소. 회사정책상 말이오. 하지만 당신이
회사의 사장으로 있다면 누가 그 일을 문제삼을 수
있겠소? 그 일은 당연히 우리들을 지연시켰소. 사고가
일어났을 때는 우린 스톤사와 계약을 막 하려던
참이었소. 달라스에서 음, 한 명이 또 있었는데...]
[데이비드 피스케 트루만이죠. 알라모 오일 사의.]
후커가 그를 쳐다보았다. 깜짝 놀란 기색이
완연했다.
[당신 숙제 하나는 확실히 해 두었나보군, 젊은
친구. 트루만은 항상 뒷전에 머물러 있던
미치광이었소. 내가 만약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몇 번쯤 찾아왔을 텐데.]
오하라는 카멜레온에 대한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전에 정보를 분명히 해 두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장군이 다시 이야기를 살짝 돌려버렸다.
얼마나 화가 났던가. 그에게 태평양 지휘권을
휘두르는 제 2 위의 자리를 내 주다니. 그는
격노했다.
[여기서 내가 그 작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겠소.]
후커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그는 그 도마뱀을 한
손으로 꼭 움켜잡고서 꿈틀거리는 그 놈의 몸을
짓누른 채 죽을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 생물체는
그의 손아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상자 속으로 다시 집어던졌다.
[그걸 그 작자한테 다시 되돌려주고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해주시오.]
[그럼 당신은 그가 몰리노를 죽이도록 버려둘
셈이에요?]
[그 아이의 이름은 보비요.]
[당신이 내게서 그 아이를 훔쳐가기 전에는
몰리노예요. 당신 같은 겁장이가.]
[이 여자야,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명심하시오.]
그녀도 또한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난 그 계약서를 원해요. 그건 적어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예요. 당신이 일단 그를 버린 이상...]
[그를 버리다니! 그건 운명의 장난이었소. 내가 그
아이를 버린 건 아니잖소. 난...]
[그 아이, 그 아이. 당신이 그애를 위해 고작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 아이라는 말뿐이군요. 당신은
그 애를 내게서 빼앗아갔던 적이 있지요. 당신이 이번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배스타인에 있는 당신
집에서 나를 농락한 사실을 모두에게 털어놓고
말겠어요, 그러면 당신은...]
[당신을 농락했다고! 나 살다보니까 내 눈앞에 쫙
벌리고 있는 한 쌍의 다리를 본 것뿐이오. 그 아이는
내 아들이고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겠소. 당신이
그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권리는 없소. 그는
호적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내 아이오. 다른 기록들은
모두 폐기되었소. 당신이 증명할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소.]
[그는 내 아들이에요. 그들은 그 애를 죽일 거예요.
당신은 요구한대로 해야해요...]
[빌어먹을, 당신이 감히 나한테 거짓말과 출처도 알
수 없는 편지 한 장으로 협박을 하겠다는 거요?
그들이 뭘하든 말든... 그런 얘긴 아예 집어치시오.]
분노와 죄의식이 그를 짓눌렀다. 온갖 영상들이
그의 이성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육욕(肉慾)의
죄, 캘빈과 그가 세워놓은 계율, 미국 국기 그러한
영상들이 그의 증오심을 북돋워 주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적과 한편이 되어 그의 앞에 선 채 출처를 알
수 없는 편지 한장으로 위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을만치 타올랐다.
[당신이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이제 끝장난 줄 아시오. 난 당신을 반역죄로
체포하겠소. 당신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고야 말겠소.]
[내가 당신 아들의 어머니라는 것을 들통내지 않고
무슨 수로 나를 체포하겠다는 얘기죠?]
[아무도 당신을 믿지 않을 거요. 필리핀 출신의
매춘부가 일본 정보원으로 변신했다? 근사하군!]
그녀의 새까맣고 빛나는 두 눈에 격노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홱 젖히고는 책상
너머로 그의 얼굴에 침을 퇘 하고 뱉었다.
그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가서 그녀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존중하고 있는 것을 소중히 생각하도록
본때를 보여주겠소. 당신은 사팔뜨기 갈보야!]
그녀는 증오심이 이글거리는 얼굴로 다시 뒤를
돌아다보았고 그의 증오심 역시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쳐 그녀의 목 언저리를 조였다.
그의 큼직하고 야윈 손아귀는 먼저 그녀의 비명소리를
틀어막고 다음에는 목구멍, 그 다음에는 후두를
죄어갔다. 그는 계속해서 목을 조이며 비틀어댔다.
그는 잔가지들이 서로 부딪치고 꺾이는 것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장군?]
[네!]
[장군, 괜찮으세요?]
[그럼, 그럼, 나는... 내 정신이 음, 잠시 멀리
떨어져 나갔었다네. 내겐 정말 어려운 나날이었소.]
[죄송합니다. 몇 가지 질문이 더 있습니다.]
[좀 더... 귀를 기울여 듣겠소.]
[다른 얘기로 넘어가고 싶군요.]
오하라가 말했다.
[자, 슬슬 시작해 볼까.]
['카멜레온'이라는 말은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그의 눈에 어렴풋이 동요하는 빛이 나타났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고 턱이 굳어졌다. 그의 뺨에 색깔이
나타나는 듯 했다.
[이건 정말이지 오일 사업과 아무런 관련이 없소.]
[그건 당신의 사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난 솔직히 말해 기분이 편치 못하오, 오하라씨.]
그가 일어서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장군. 하지만 난 카멜레온에 관해
알고 있습니다. 우리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커가 불쾌한 안색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게 당신이 이곳을 찾아온 진정한 이유요?]
[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거요?]
[그 카멜레온은 민간부문에 대한 아주 유능한
정보기관의 장이지요. 그의 정보원들이 살인을 하고
회사 기밀을 훔쳐냈으며 수 백명 이상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시설물을 파괴하기도 했죠.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암란과 그 동업자들이 그의 단골
희생자들인 것처럼 보이죠.]
후커는 자신의 파이프에 담배를 끼워 넣고나서 불을
켰다.
[당분간 그걸 보도자제 하는 게 어떻겠소?]
오하라가 망설였다. '보도자제'라는 것 때문에
훌륭한 수많은 정보들이 사라져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카멜레온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테러리스트일거요.]
후커가 말했다.
[그의 수법은 예측을 불허하고 그가 희생자로 삼는
대상 또한 마찬가지로 예측할 길이 없소. 그는 온갖
방법을 모두 구사하고 있소. 공갈, 납치, 강도, 살인,
파괴. 하지 않는 짓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거요.]
[이러한 행동들의 배후에는 당신의 경쟁자들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들 또한 희생자들에 지나지 않소. 그들 가운데
일부는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고 있소. 각 회사들은
카멜레온의 독특하다고나 할까... 할수 있는 서비스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게 분명하오. 하지만 나로서는
누가, 무엇때문에 그런 덕을 보고 있는지는 알길이
없소.]
[하지만 암란은 두드러진 표적이 되고 있는 것
같군요.]
[나도 모르겠소...]
[이런 말씀을 드리기 뭐하긴 하지만, 카멜레온이
시몬즈, 리치맨, 트루만... 등의 암란과 관계가 있는
회사들의 죽음에 대해 혐의가 있는 것 같군요?]
[확실한 증거도 없이 함부로 얘기할 수 있겠소.]
[전 그들 모두를 죽인 사내를 알고 있습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가운데 대부분을 죽인
사내라고는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말해보시오. 당신은 증거를 가진
셈이로군. 그렇게되면 당신 이야기는 신용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오.]
[전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내말 좀 들어보시오, 오하라. 만약 당신이 이...
흡혈귀를 밝혀내고 그가 어떤 자인지 세상에 알려줄
수만 있다면 나보다 더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소.
하지만 지금까지 당신이 말하거나 암시한 모든 것이,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없다면 우습게
되고 말 거요.]
후커는 담배파이프에서 빨아들인 연기 한 모금을 입
한쪽 가장자리로 천천히 뿜어냈다. 그는 방의 맞은
편을 응시하면서 거의 일 분 가량 앉아 있었다.
[이 사람들 대부분은 자연사 혹은 사고로 죽었소.
심장마비가 직업상 위험이 되고 있는 곳에선
심장마비도 있을 수 있소. 오일사업이라는 것은
스트레스를 크게 받을 수 있는 업종이오. 이들은
예외없이 상급직 인사요. 모두 50대 혹은 60대의
나이에 있기도 하고 말이오.]
[브리지즈는 어떻습니까? 그는 오일 사업과 관계가
없습니다.]
[레드 브리지즈는 선박 수리업자였고, 난파선
인양인부였고, 동시에 도박꾼이었소. 전쟁이 끝나고
나서 4,5년 동안 그는 일본 근해에서 해저 인양작업을
했소. 선박 수리업은 아주 천한 일이오. 그리고
게다가 레드는 과중한 체중문제가 있었소. 60세가
넘은 나이에 1백 파운드가 넘었던거요. 심장병이
걸리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었소. 내말 알겠소,
오하라씨? 어떤 증거가 없으면 아무도 당신 말을 믿지
않을거요.]
[그게 바로 카멜레온이 늘 해온 방식대로 계속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죠. 제기랄,
우리들의 지금 얘기도 그 놈의 '보도자제'에 걸려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 개인적 이해관계라도
있소?]
후커가 그의 갑작스러운 분노의 표출에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저는 기자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내 임무를 수행하려고 합니다. 저는 카멜레온이
존재하는걸 알고 있습니다. 당신도 알고 있습니다. 수
십명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업가들도
분명히 그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주요한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건 왜죠?]
[우리들은 그들의 금전요구를 거절하고 있소. 그게
바로 그 이유인 거요. 당신도 알지 않소? 두려움을
이용한 공갈 말이요.]
[하지만 왜 하필이면 암란이죠? 어째서 암펙스나
블루 다이아몬드사는 표적이 안되는 거죠?]
[나도 모르겠소. 내 짐작으로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우리들이야말로 오일 연합기구 중에서 가장
신출내기이면서 취약하다고 보는 게 아닌가 싶소.]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얼굴을 닦았다. 심장박동 조절장치가 심하게 째깍째깍
소리를 냈다.
[이거 미안하오, 음, 오한이 좀 나는 것 같소.
걱정할 정도는 아니오. 혈압이 너무 낮을 뿐이오.
늙어가는 사람들이 흔히 겪게되는 위험중 하나일
뿐이오.]
오하라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그는 두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 이년쯤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그의 두 눈에는
생기가 없어졌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무리이실 줄로 압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제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멜레온에 대한 이야기는 적어도 후커의 마음을
개운하게 해 주었다. 지금 그의 관심은 오하라를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있었다.
[아마, 다음에 또 다시 시간을 낼 수 있을 거요.]
그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묻겠습니다. 카멜레온이
소로우와 아퀼라 자동차를 파괴시킨 겁니까?]
장군은 담배파이프를 옆에 놓고 손가락으로 한 개의
첨탑 모양을 만들었다. 그는 책상을 가로질러 앞으로
몸을 숙였다.
[오하라씨, 앞서도 당신한테 말했듯이 오일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카멜레온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소.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소.
그는 복수심이 강한 사람이오. 내 동료들 대부분은
만약 자신들이 그를 무시하면 그도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행동을 하게끔 인정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고 있소. 아무도 그런 짓을 하려고
들지를 않고 있소.]
[용기도 없고, 명예도 없단 말이군요, 장군.]
[카멜레온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오.]
[당신은 '소로우'나 아퀼라 사건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었습니까? 제 말뜻은 어떤 금전요구 같은 것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파괴에 불과한 것인지 묻는
겁니다.]
후커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얘기 중에서 어느 것도 발설해서는
안되오, 젊은이. 그 얘기 가운데 어느 것도 증거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오. '소로우'는 북극해의 4백
피트 지점에 있소. 아퀼라는 계기판 위에 설치된
폭약으로 폭파되었소.]
[카멜레온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일을 저지를 겁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오하라가 말했다.
[그는 일을 계속 해 나가기에 아주 좋은 조건에
있습니다. 이 사건들 중 단 한 가지만이라도
카멜레온에게 혐의가 있다는 것은 입증할 수 있는
증언 하나만 제게 들려 주십시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할 겁니다.
툭 터놓고 공개하십시오. 이 작자는 비밀을 먹고
자라는 놈입니다.]
[오하라씨, 당신은 카멜레온이 누구인 줄 알고
있소? 그가 어디에 살며 어떤 식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도대체 그에 대해 뭘 알고 있단
얘기요?]
[그는 1945년에 전범자 명단에 있는 바로 그
카멜레온 아닙니까?]
오하라가 물었다. 후커는 파이프의 재를 톡톡 털고
나머지 담배를 눌러 담았다.
[당신이 말한 사내는 히로시마에서 죽었소.]
그가 말했다.
[그의 이름은 1950년에 목록에서 지워졌소.]
[당신은 정말로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그의 이름은 아시다였소. 그의 신분은 전쟁 중 1급
비밀사항 중 하나였소. 그의 특기는 첩보활동이었고
그는 천황에게만 해명할 책임이 있었소. 그는 모든
일본 정보원들을 훈련시켰소.]
[아이러니컬하군요?]
[무슨 뜻이오?]
[우리들이 찾고 있는 자와 전범자 명단의 이름이
똑같이 카멜레온이라는 게 말입니다.]
[아이러니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성채가 그의
본부였다는 사실이오. 그는 바로 이 건물에서 자신의
정보원들을 훈련시켰소. 그리고 우리들이 있는 바로
이 곳 아래에 있는 3층으로 된 지하감옥에서 어떤
범행이 저질러졌는지는 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오.
문제는 내가 그 곳을 어떻게 찾아냈는가 하는 것이오.
난 1975년에 점령군과 함께 이곳으로 왔소. 하지만 이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소. 모든 기록들이 파괴되었던
거요. 사실, 카멜레온이 전쟁 기간동안 어디에서
활동했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소. 군대에 관한 한 그는
결코 존재하지 않소. 그건 이미 마무리가 끝난 거나
다름없소.]
[아무튼,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가 누구이든 간에
카멜레온이 이곳 일본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이곳에 있다면 전 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후커가 일어섰다. 키가 큼직하고 위압적인
자세였다. 그의 등은 그가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할
때나 다름없이 쭉 곧은 모습이었다. 그가 자신의 손을
불쑥 내밀었다.
[좋은 날이오, 오하라씨. 당신이 단순한 혐의나
가설 이상의 것을 얻게 될 때 증언 문제는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용기는 두뇌보다도 더욱 훌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당신의 행운을 빌겠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장군이 문 쪽으로 안내할 때 오하라가 말했다.
[미다스라고 불리고 있는 거대한 유전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그 노인은 오하라에게 등을 보인 채 입구에 멈추어
섰다. 오하라가 질문을 했을 때 그의 두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심장박동 조절장치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숨길 수 없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감추려고 기침을 해댔다.
['미다스'말이오? 유전지역이라.]
그는 평정을 다시 되찾자 오하라에게 돌아섰다.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소.]
[아마 세계에서 가장 큰 것 같습니다.]
후커가 낄낄 웃었다.
[그럼 이제 어디에 있을 것 같소?]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오. 오일은 내 사업이오. 오하라씨. 난
당신의 상상력에는 그저 탄복할 따름이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당신이 말하는 정도 크기의
유전지역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인 것
같소. 아무도 그런 걸 모르니까 말이오.]
[전 그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좋소. 그럼 왜 당신이 찾아 나서지 않는 거요. 난
당신이 뭐라고 변명을 할지 궁금하오. 난 낮잠을 잘
시간이 됐소.]
9. 수수께끼의 여인
가비는 오하라를 '용의 보금자리' 밖으로 안내한 후
후커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 노인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는데 심장박동 조절장치는 마구 방망이질을
해대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
[진정하십시오, 장군님. 저는 모니터로 방을 보고
있었습니다. 얘기하는 것도 모두 들었습니다.]
[그가 미다스에 대해 묻는 것을 들었나?]
후커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계획을 조금 바꿔야겠네.]
[어떻게 그가 모든 정보를 알아냈을까!]
노인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핏기가 얼굴을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였다.
[그 친구 대단하더군요, 장군. 이 곳을 제발로 찾아
오다니요. 위험을 각오한 것 같았습니다.]
[그럼 우리도 새로운 작전을 짜야겠군.]
[몇 시간 안으로 그를 해치우겠습니다.]
[카멜레온에 대해선 어찌 됐나?]
[장군, 우린 그에게 상당히 가까이 다가간 것
같습니다.]
가비가 말했다. 그는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를
1인치쯤 벌리고서 치켜들었다.
[그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서 있는 것 같군.]
후커가 말했다. 그는 일어서서 두 손으로 뒷짐을 진
채 방의 어두운 구석으로 걸어갔다. 등뒤 쪽으로부터
온실 재배용 전등이 불빛을 받아 그의 커다란 몸짓이
윤곽을 드러냈다.
[내가 그놈의 아이젠인가 뭔가 하는 작자대신에
대통령이 됐어야 하는 건데.]
그가 말을 계속 이어갔다.
[놓쳐서는 안돼는 거였는데. 그 놈의 ... 그 놈의
내 목에 걸린 제약 때문에. 빌어먹을 놈. 빌어먹을.]
그가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의 앞가슴에 매달려
있는 온전치 못한 기계장치도 서서히 속도가
죽어갔다.
[그들 두 사람을 죽이자.]
그가 말했다. 마치 끈끈한 침처럼 그의 입술에
독약이라도 발라져 있는 듯이 보였다.
기차역 주변에는 안개가 자욱했고 서늘하게
불어오는 미풍에 약간씩 흔들거렸다. 역 한쪽 끝에
키가 큰 코르시카인이 기탄 담배를 피며 앉아있었다.
그의 바로 옆에는 공중전화박스가 있었는데 첫번째
벨이 울리자 그는 못들은 체 했다. 벨은 한 번밖에
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서 다시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두번째 벨이 울리자 그는 일어서서
전화를 받았다.
[히가시야마 역이오.]
그가 부드러운 일본사람 억양으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전화를 잘못 걸었군요.]
[누구를 찾으시죠?]
[이탈리아 신사분이오.]
[이름은?]
[팔마우스.]
[안녕하시오, 퀼씨.]
[전화상태는 괜찮소?]
[기차역 공중전화요.]
[잘됐군. 계획에 변경이 생겼소.]
[알겠소.]
[오하라가 골칫거리가 되었소. 그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소. 그리고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말이오. 그를 죽이는 일이
시급해졌소. 그를 찾을 수는 있겠소?]
[그는 3분만 있으면 이곳에 올 겁니다.]
[가능한 한 신속히 해치우시오. 당신의 단골수법을
써서 말이오.]
[다른 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우선 이 일부터 해치우시오. 나머지 모든 걸
재껴두고 말이오.]
[잘 알겠소.]
[미안하게 됐소. 당신은 A-1을 써야겠소. 그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똑똑한 놈이오.
우선적으로 해치워야겠소.]
[알겠소.]
[가능한 한 곧바로 알려주시오.]
[물론이오. 안녕히 계시오.]
[수고하시오.]
토니 팔마우스는 수화기를 건 뒤 기차를 기다리기
위해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았다.
오하라는 교토의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는 토후키지
역에서 기차를 탔을 때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는
자신이 세 개의 역을 지나 히가시야마 역에서 기차를
내리기 위해 일어섰을 때 그녀를 다시 곁눈질로
보았다. 그는 기차 한 구석 창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문이
열리자 그는 서둘러 빠져나갔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기무라에게 후커와 만난 얘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그 여자가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선 뒤 다른 승객들
틈을 비집고 그의 옆에 바싹 다가섰다.
[저를 따라오세요.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그녀가 조용히 속삭이면서 앞장섰다. 오하라는 그
여자한테 주의를 빼앗겨 역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로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토니 팔마우스는 한 쪽
구석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가로등이
즐비하게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곳을 지나 오하라에게
재빨리 다가왔다.
오하라는 그녀의 뒤를 따라 생선가게를 지나
상가지역을 통해 들어갔다. 그는 자신을 향해
소리치며 뱀장어와 문어를 치켜올리고 흔들어 대는
상인들의 외침을 못들은 채 지나가며 마루야마 승원
쪽으로 갔다. 그녀는 동양인치고는 키가 제법 큰
여자였으며 가운을 걸치고 있었으며 분칠을 한 얼굴이
게이샤처럼 보였다.
[이 곳에 있는 건 위험해요.]
그녀가 속삭였다.
[저를 가리고 서주세요. 버스가 곧 올 거예요. 그
버스를 타시고 한 두 구간쯤 가서 내려주세요.]
오하라는 순간 망설였다. 어두컴컴한 거리, 안개,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서있는 것이다.
뭔가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는 아주 조용히
서서 그녀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단지 그녀의 숨쉬는 소리만 들었지만 조금 후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그것은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야릇한 흥분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볼 수
없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전류가 흐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자신이 이끌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안개 속에서 가물거리는 불빛과
버스의 헤드라이트, 그리고 아주 먼 곳에 비치고 있는
희미한 후광을 통해서 거리를 둘러보았다.
[당신 원하는 게 뭐요?]
그가 물었다.
[도쿄의 가부끼 극장에서 정보를 원했던 사람은
당신이 아닌가요?]
그가 다시 주저했다. 그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이 무척 강했기 때문에 그는 하마터면 돌아다 볼
뻔했다. 안개가 마치 밀물처럼 두 사람을 에워쌌다.
[그렇소.]
그가 마침내 말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카멜레온이라는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군요?]
[그렇소.]
[무엇 때문이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이야기라구요? 아하! 당신은 그를 죽이려고
하는군요.]
그는 다시 돌아서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의
신경이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이상스럽게도
끌려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건 뭐라고 형언할 길이
없는 느낌이었다. 그는 운동을 하고 있던 어제
저녁으로 다시 되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카멜레온이라는 존재가 실로 위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 와서 그는 새삼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여자는 카멜레온의 냄새가 온 몸에
배어있는 듯 느껴졌다.
[난 암살자가 아니오.]
그가 말했다.
[그를 만나면 당신은 알게 될 것예요.]
[언제나 가능할 것 같소?]
그녀가 좀 더 가까이 기대어왔다.
[카멜레온은 이곳에 있어요.]
지금 그는 거의 미칠 듯한 기분이었다. 온 몸의
피가 혈관을 타고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고 뜨거운
기운이 팔과 다리를 휘어 감았다.
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가까스로
알아챘지만 이상스럽게도 그는 어떤 직접적인 위협은
느끼지 못했다.
[이 곳이라는 말은 일본어라는 뜻이오?]
[교토예요.]
[교토 어느 곳이오?]
[제가 이 종이에 시가현에 있는 집 주소를
적어놓았어요. 그는 오늘 밤 아홉시에 돌아올 거예요.
그리고 그는 혼자 올 거구요.]
[어떻게 이걸 알았소?]
[난 알고 있죠. 아는 방법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는 그 곳에 있을 거예요.]
버스 불빛이 두 사람을 비췄다.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요?]
잠시 말이 없었다.
[전 갇힌 몸이고 풀려나고 싶기 때문이에요.]
[갇힌 몸?]
[그래요. 여기, 이 쪽지를 받으세요. 주머니에
넣으세요. 빨리요. 그는 곳곳에 정보원을 깔아두고
있어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오하라가 말했다.
[난 알아야겠소... 어떻게 내가 카멜레온을 찾고
있는 지 알게 됐지요?]
버스가 골목을 돌아 다가와서 멈추었다.
[제발 제 말을 흘려듣지 마세요.]
그녀가 말했다.
[지금 가세요. 아홉 시예요. 늦지 않도록 하세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오하라는 버스 위로 뛰어
올랐고 뒤쪽에서 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10. 카멜레온의 정체
1백 피트쯤 떨어진 공원의 나무들 사이에서 토니
팔마우스는 오하라가 버스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귀에서 원거리용 파라볼라 마이크에 부착되어
있는 소형 스피커를 떼어냈다. 그는 모든 얘기를
완벽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따라가서
오하라를 순식간에 해치우기로 즉시 결정을 내렸다.
오하라를 따라잡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이
여자가 문제 해결의 열쇠라는 걸 그는 느꼈다. 그의
수신기는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그 소형 도청기는
아코디언 모양의 가는 막대로 신호를 보내왔다. 그는
그걸 주머니에 집어넣고 나무 사이를 뛰어가며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는 시장에서부터 마루야마 공원의
가장 자리를 따라 그녀를 쫓아갔다. 그녀는 시내
한복판을 지나 자그마한 변두리 지역으로 들어섰다.
그가 높은 담장이 주택들을 에워싸고 있는 골목길을
따라 이 집 저 집을 지나갈 때 수만 가지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아기가 우는 소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또 한 가닥의 부드러운 록 음악, 두 명의
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어대는 소리, 한 사내가
이탈리아어로 오페라를 부르는 소리, 코카콜라의
TV광고. 전등이 머리위로 한가롭게 걸린 채 부드러운
미풍에 살랑살랑 흔들거리고 있었고 담장에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녀는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주택들로부터
가끔 들려오는 잡음을 제외하곤 장례식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매우 조용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앞쪽에서 조약돌이
박혀있는 블록을 걸어가며 내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때 그녀가 미처 예상치도 못한 행동을 했다.
그녀는 간선도로를 횡단해서 후지다 호텔 근처에 있는
니조-도리 거리의 한 조그만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여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지배인인가? 그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오하라에게 주소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팔마우스도 그
주소를 원했다. 그는 몇 분 기다렸다가 그녀를 따라
들어섰다. 그다지 화려하게 꾸며진 곳은 아니었지만
깨끗하고 시원하였으며 어두운 편이었다. 그 곳이
어두컴컴했기 때문에 비록 텅 비어 있다시피 했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뒤편에서 혼자 앉아있었다. 창유리가 열려져 있었고
창문 가까이에는 금빛 고기들이 노닐고 있는 연못과
함께 뒤편에는 이끼가 낀 정원이 있었다. 그녀는 금빛
또는 검정색의 수많은 잉어들이 먹이를 찾아 물
밑바닥을 헤엄쳐 다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팔마우스는 그녀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실례합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영어를 할 줄 압니까?]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팔마우스가 재빨리
일본어로 바꾸었다.
[난 이 곳을 찾아 온 관광객이오.]
그가 말했다.
[난 교토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늘
들어왔죠. 그러다가 당신을 보고 나서는 난 교토를
잊어버렸소. 이런 식으로 당신한테 접근하는 게 아주
어색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선(禪)구절에 이런
말이 있소. '시간을 내어 정원을 감상하라, 그것은 한
순간이 지나면 스쳐 지나가노니.' 나는 ... 음,
어쩌면 당신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죠. 그래서 시장에서부터 당신의 뒤를
따라왔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틀어막고 그가 아무
말도 못하게 했다.
[난 방해받고 싶지가 않군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그는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전 미국에서 살았어요. 전 서양 사람들의 수법을
알고 있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시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아주 잘 했어. 이제 좀 더 큰 동작을
취해보는 거야.'
그는 세련되면서도 간절한 염원이 담긴 음성으로
사랑에 빠진 구혼자의 연기를 해냈다.
[내 이름은 존 로비. 런던에서 왔소. 난 정말로
당신에게 홀딱 반했소. 물론 난 당신한테 내가 외로운
사람이며 친구를 원한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소.
그렇지만 사실 난 당신과 함께 지내고 싶소. 저녁
식사라도 살 수 있을까요?]
그녀는 가볍게 킥킥거리며 웃고는 어깨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핀의 옥으로 만들어진
손잡이부분이 그녀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배경으로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할 때 희미한 불빛 아래 그녀의 두 눈이
빛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네, 런던에서 온 존 로비씨, 그렇게 하세요.]
오하라가 들어왔을 때 기무라는 외출 중이었지만
사미는 정원에서 명상 중이었다. 오하라는 그의
명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도껜루이선생님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 언제
돌아오시지?]
그가 말했다.
사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네도 그 분을 알고 있지 않나, 그 분은 마치
바람처럼 옮겨 다닌다는 걸.]
[아주 훌륭한 표현이야.]
기무라가 말했다. 두 사람이 돌아다보았다. 입구
쪽에 한 노인이 서있었다.
[그토록 긴급한 용무라는 게 뭔가, 가즈오?]
[난 잠깐 실례해야겠군.]
사미가 말했다.
[그렇게 하게.]
오하라가 말했다.
[자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
기무라가 말했다.
[난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번거롭게
해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당신은 제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시니까요.]
[나도 그걸 알고 있네. 가즈오. 자네 안색으로
보아하니 몹시 걱정되는 일이 있나보군. 말해보게. 난
그 일이 자네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네.]
[카멜레온을 알고 계시지요?]
기무라는 그 질문에 대해 한참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세계는 수많은 카멜레온으로 온통 뒤덮여 있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얘기하는 건 그 카멜레온이 아닙니다. 전
당신이 전쟁이 있기 전과 전쟁 도중에 비밀장소에서
황국 군대의 주요 간부들을 훈련시킨 걸 알고
있습니다. 카멜레온은 황제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비밀정보 기관의 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히가루다시'의 경지에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건 논리의 비약이네. 지난 날이라고 해서 아무도
그런 경지에 오르지 않았다고는 믿지 않네.]
[지난 날에는 아무도 걱정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은 뭐가 다른가?]
[전 지금 걱정이 됩니다. 이 사람 때문에 죄도 없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겁니다.]
[자넨 똑같은 카멜레온이라고 확신하나?]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 답을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카멜레온은 아직 살아
있습니까?]
기무라는 오하라의 두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자네가 카멜레온이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은 죽었네.]
[하지만 당신은 그를 훈련시켰습니다. 그는 비밀
용사들의 양성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기무라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는 지금 죽었네. 난 자네한테 그 말을 해주어서
신뢰를 저버리고 싶지 않을 따름이네.]
[그는 죽은 지 얼마나 됐습니까?]
[기록상으로는 야무치 아시다가 히로시마 원폭 때
사망한 걸로 돼 있네.]
[전 기록 따위엔 관심이 없습니다. 그 기록 얘긴
하지 마십시오.]
[그럴 수는 없는 거네, 가즈오. 그들이 생존해
있다고 해도 상황을 바꾸어서 얻을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네.]
[전 2차 대전의 전범자 명단을 공개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
[진정하게나.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자네가
카멜레온으로 알고 있는 야무치라는 사내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네. 그는 우리들에겐 한 사람의
전범자가 아니고 자신의 조국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
사람이었네. 내가 알기로는 그는 잔혹한 행위를 전혀
한 일이 없네. 그는 '간쪼'를 훈련시켰고 그들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었지. 이보다 더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나. 그가 매우 훌륭했던 한 가지 이유는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는 점에 있네.
그는 사람들에 대해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해 왔고
그게 바로 그들이 그에게 이끌렸던 이유라네. 그게
바로 그가 으뜸가는 사람이 된 이유이기도 하지. 그는
또한 매우 영리했으며 거미줄에 걸리기에는 너무나
민첩한 파리같은 존재였네.]
[그는 무엇인가 행동을 했던 게 분명합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데 5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럼 자네는 그들이 이토록 시간과 돈을 소모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들은 그가 정말로 나쁜 사람이 되기를 바랬을
겁니다.]
[그들이라고?]
[군대, 정보기관, 그 누구이든간에...]
[누구이든이라고 말했나, 자넨. 어쩌면 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얘긴가?]
오하라는 잠시 생각했다.
[네, 제 생각으로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한
사람일 수도 있겠죠.]
[음, 영향력이라구, 요술같은 말이군...]
영향력, 하고 오하라는 생각했다. 어떤 이름을
전범자의 명단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영향력 말이다.
[어쩌면 장군같은 사람일 수도 있겠죠?]
오하라가 말했다.
[음, 자넨 뭔가 분명하게 가닥을 잡기 시작했군.
'그들'이 아니고, 얼굴 없는 어떤 조직도 아니고, 그
자 한 사람이라고.]
[후커는 6년 동안 이 곳의 군 사령관이었습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1945년부터 1951년까지이죠.]
[그렇네.]
기무라가 말했다.
[카멜레온에 대한 열렬한 증오심을 가진 채
말일세.]
[왜죠?]
[지난 날의 상처 때문이겠지. 그들은 숙적이었겠지,
생각해 보게.]
[전쟁은 끝났습니다. 선생님, 수많은 적들이 모두
용서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모두는 아닐세.]
[하지만 그가 후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똑같이 증오심을 불태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노인은 그 질문을 아주 오랫동안 골똘히 생각한
후 말했다.
[어쩌면 그는 카멜레온의 신분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에 좌절감에 빠진 건지도 모르지. 아무런 기록도
없고 게다가 아무도 그의 신분의 비밀을 누설하지도
못하고.]
[당신이 생각하시기엔 후커가 모종의 보복조치를 할
수 있는 동기가 있다고 봅니까?]
기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분명한 가능성이 있는 얘기네.]
[후커는 카멜레온을 공갈꾼, 금품 요구자,
테러리스트라고 하더군요. 당신도 그 회사들의 이름을
아시겠지만 그의 말로는 모든 회사들이 카멜레온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 자신들은 그의
희생자라는 겁니다. 그들은 그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네한테 분명히 말하네만 자네가 아시다로 알고
있는 카멜레온은 죽었네.]
기무라는 차 테이블 앞에 앉은 다음 납작한 담배
곽을 꺼냈다.
[이것들은 뉴욕산 셔만이라네. 내가 보기엔
최고품인 것 같더군.]
그가 하나를 꺼냈다. 그 담배는 금박지를 싼 휠터가
달린 분홍색이었다.
[난 이것들의 미적 정서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네.]
그는 담배를 꺼내 그걸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담뱃불을 붙인 후 아주 깊숙이 한
모금 빨아들인후 아주 천천히 뿜어냈다.
[하루에 다섯 개피일세. 그 정도가 내 심신이
허용해 주는 수량이라네.]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오하라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그들에게 물어봤지.]
[선생님은 카멜레온의 수수께끼를 풀어주실 수
있습니다. 전 그걸 확신합니다. 그 사람이 죽었다면
이... 죽음의 군대를 끝장낼 수 있도록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오하라가 말했다.
기무라는 참선하는 자세로 두 발을 꼬고 마루 위에
앉았다.
[야무치 아시다는 도쿄에서 아주 부유한
수입상이었고 황실의 피를 이어받았으며 명예로운
사내였네.]
그가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도껜루이의 열렬한 지지자로
1939년에 '히가루다시'에 들어갔네. 새처럼 민첩한,
검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사내였으며 거의 신비로울
정도의 제 7 단계 수준에 도달했었다네.
야마무치 아시다는 전쟁이 달갑지 않았다네. 그가
벌여놓은 일 때문에 그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고 큰
도박이나 내기를 어떻게 하는 지도 알고 있었네. 그는
전쟁을 일으킨 자도 암살자도 아니었네. 그는 보석,
그림, 드레즈덴 도자기를 사랑했던 사내였지. 그러나
황제 폐하가 아시다에게 비밀정보국의 정보원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몸소 맡기신 것이라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지. 아시다는 세계 도처에 동업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정보망을 구축하는 일에
착수했네. 황제께서도 그의 신분이 결코 드러나지
않도록 하겠다는데 동의하셨지. 그는 카멜레온이라는
암호명을 지녔고 그 자신의 본부로 '용의 보금자리'를
선택했네. 그 곳은 외딴 곳이고 아무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네.
그의 진정한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전쟁 협의회
회원 네 명뿐이었고 그들 모두 히로시마에서 죽었네.
전쟁이 끝났을 때 아시다는 유랑인이 되어 섬을
떠돌아 다녔고 그의 신분은 전쟁의 잿더미 속에
영원히 묻혀버렸네. 그는 몇 년 전에 죽었네. 그렇기
때문에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이 사람은
테러리스트도 암살자도 아니네. 난 자네에게 더
이상은 말해 줄 수가 없네, 가즈오. 만약 그렇다면 내
말은 신용이 떨어지고 말 것이네.]
오하라는 그를 더 추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에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기차에서 저의 뒤를 따라온 여자가 제게 준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기무라에게 건네주었다. 그 노인은
아무말도 않고 그 쪽지를 살펴본 후 다시 돌려주었다.
[그녀의 말로는 카멜레온이 오늘밤 그곳에 혼자
온다고 하더군요. 9시에 말입니다.]
[그 여잔 누군가?]
[저는 잠깐 그녀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녀는
게이샤처럼 보였습니다. 기차에서부터 제 뒤를
따라왔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웠습니다.
제가 그녀한테 왜 그에게 되돌아가느냐고 물었더니
그녀가 갇힌 몸이라고 했으며 풀려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기무라는 분홍빛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로 공중에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올가미인 게 너무나 분명하네. 태도는 좀 덜
분명히 하는 편이 분명한 것보다 나을 때가 있는
법이네.]
[선생님...]
[오늘 밤 가지 말게. 이 문제를 좀 생각할 수
있도록 내게 하루 이틀 정도의 시간을 주게나.]
[선생님, 저는 선생님에게 침묵의 맹세를
저버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제게 겁쟁이들의
게임을 하도록 시키진 말아주십시오. 그녀는 저를
그에게 안내할 겁니다.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넨 그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네. 그 집에
대해서도, 카멜레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세.
그런데도 자넨 이번 일에 뛰어들 텐가?]
[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카멜레온이 자네가 상상한 대로라면 자넨 등에
칼을 맞거나, 목에 밧줄을 감기거나, 머리에 소리
없는 총을 맞을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얘긴가?
자네에 대한 나의 신뢰를 저버리지 말게.]
[지금은 오늘입니다. 전 오늘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영혼이 내일은 날아가 버린다해도 전 떳떳할 수
있습니다.]
기무라는 더이상 아무말도 안했다. 그는 오하라가
벽을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오하라가 마침내
일어난 것이다.
[전 선생님의 침묵을 존경하고 있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가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보라도 상처를 많이 입게되면 현명해 질 수도
있는 법이네.]
기무라가 여전히 벽쪽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조심하게.]
오하라가 문밖으로 나서자 그 노인은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이 이야기를 글로 쓸 때 기억해 두게나,
리듬이야말로 작가의 폭과 여유를 가늠하는 척도라네.
솜씨가 없으면 조화의 빈곤 때문에 당장 들통나는
법이라네.]
[그 말씀을 기억해 두겠습니다. 텐다이가 한
말입니까?]
[아니네, 에머슨이 한 말이네.]
웃으면서 오하라가 그 집을 나섰다.
[저도 그를 따라갈까요?]
사미가 물었다.
[물론.]
그녀는 식사하는 동안 줄곧 말을 거의 하지 않은 채
다소곳하게 생선회를 집어먹거나 국물을 마시거나
하면서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홀아비이며 서점 경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이 그 혼자서 여행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교토에 오는걸 꿈꾸어 왔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여행이 훨씬 더 쓸쓸하다고 했다.
그녀는 동정하는 눈치였다.
지금 그녀는 보다 많은 담장이 나 있는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서 좀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곳을 지나
조용하면서도 그림 같은 주택가로 그를 인도했다.
그녀는 높은 담장의 집 대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인도했다. 주변의 다른 집들과는 달리 큼직한 이층집
하나가 거리에서 오십 피트쯤 떨어진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붕과 기둥의 정교한 모습을 통해
팔마우스는 그 집이 부유한 사람의 집이라는 걸 알수
있었다. 지면은 완벽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키가
자그마한 버드나무와 소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서 그를 건물
한쪽으로 인도했다. 조그마한 실개천 하나가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바닥을 흘러 그늘진 곳으로 사라져
갔으며 뒤뜰 어딘가에서는 풍경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팔마우스는 드러나지 않게 그 곳을 아주 세심하게
살폈다. 그 집은 L자형이었다. 단 하나뿐인 등이 벽
한쪽 구석진 곳에 걸려 있었다. 호젓했다.
아름다웠다.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좀 거친
수법을 동원하기라도 해야 했다. 그에게는 그
여자한테 정보를 알려달라고 조르고 있을만한 시간이
없었다. 신속히 손을 써야 했다.
그녀는 그 집의 여러 개의 방 가운데 한 곳을
찾아가 그 앞에 서서 판자로 된 문을 조용히 밀어서
열었다. 그 방은 본 청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 있었고 지면 위로 1,2 피트도 채 안되는
높이로 솟아나 있는 나즈막하고 두꺼운
지주(支柱)위에 세워져 있었다. 두 사람이 안에
들어갔을 때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아버님은 뒤쪽에 살고 계세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을 꺼야 해요.]
그녀가 판잣문을 밀어서 닫았지만 거리로부터의
불빛이 얇고 투명한 유리문을 통해 스며들어왔다.
그녀는 그의 재킷의 단추를 풀고 나서 그것을
벗겼다. 그 다음에 그의 넥타이를 풀고는 그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
이게 웬 행운이란 말인가. 이처럼 멋진 여자를 손에
넣으려면 비즈니스라는 걸 해야 하는구나.
그녀는 그의 금시계를 풀어 다다미 옆 마루 위에
살며시 내려 놓았다.
아홉 시였다.
그녀는 드러누운 후 그를 자기 곁으로 끌어당겼다.
자신의 입술로 그의 입술을 핥았다. 그녀가 뒤로 손을
올려 머리핀을 뽑았다. 옥으로 된 손잡이에는 6인치
길이의 단검이 달려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어깨위로 늘어뜨려졌다.
'도대체 몇 분을 기다려야 하는 거야.'
거기까지밖에 그는 생각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 구부렸을 때 그녀는
팔을 뻗으면서 단검을 그의 귀밑으로 쑤셔 박았다.
그는 목뒤 깊숙이 뜨거운 기운을 느꼈고 뇌가
마비되었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의 비명소리가
자지러지게 어둠을 갈랐다. 그는 그녀로부터
나동그라지며 무릎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귓속에 꽉 박혀있는 옥으로 된 머리핀을 뽑아내려고
떨리는 손길을 귀뒤로 가져갔다. 뜨거운 기운이 더
심해졌고 마치 강철로 내리치는 듯한 두뇌의 고통은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두 발로 일어섰지만 방은 이미 가물가물해
보였으며 목구멍의 고통은 이미 멎어 있었다. 그는
덫에 걸린 여우처럼 으르렁댔다. 방바닥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는 몸을 뒤척거리며 균형을 잡고 서 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문을 통해 마구 돌진했다. 유리창이
수 백 개의 파편을 흩날리면서 깨어졌다. 창틀은
부숴졌고 문짝도 그와 함께 정원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뿔싸, 당했구나, 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머리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마치 끓는 기름처럼 상처부위로 고통이 엄습해왔다.
그는 연못 쪽을 지나 비틀거리며 걷다가 암석이
뒤덮인 정원에 고꾸라졌다. 단검이 그의 손가락을
벗어나 실개천으로 떨어져 내렸다.
'풍덩'
오하라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주소를 찾아갔다.
그는 문을 밀어보았지만 잠겨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홉 시였다. 정확했다.
그가 비명소리를 들었을 때는 대문으로 막 들어설
때였다. 그것은 밤하늘을 가르는 괴로움에 가득 찬
느닷없는 사내의 비명소리였다. 그는 비명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 집 모퉁이를 막 돌아섰을 때
그는 한 사내가 창문을 뚫고 뛰쳐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사내는 두 손으로 머리 양쪽을 감싼 채 연못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와서는 땅에 쓰러졌다.
오하라는 그에게로 달려가서 그의 몸을 젖혔다.
[이럴 수가.]
그가 외쳤다.
[토니!]
그 여자는 등뒤로 빛을 받아 시커먼 형상을 하고,
어깨위로 길다랗게 머리카락을 드리운 채 산산 조각난
입구 쪽에 서 있었다.
[그는 죽었어요. 어쩌면 곧 죽게 되겠지요.]
그녀는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검에는 비소가 묻어 있었어요.]
그녀는 팔을 올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는
잡아당겼다. 숱이 많고 새까만 머리카락이 떨어져
내렸다.
가발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마룻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고 있던 블라우스를 잡고는 찢어냈다. 셔츠
자락이 보였다. 그녀는 그것도 던져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는 더이상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돼버린 것이다.
손목에서부터 가슴까지 그리고 복부에서 양쪽
가슴사이에 카멜레온들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의 왼쪽 젖꼭지는 살아있는 듯 생생한 도마뱀 중 한
마리의 기묘한 모습의 눈을 이루고 있었다. 도마뱀은
코발트의 푸른색에서 레몬의 오렌지 색, 그리고
새빨간 색으로 가느다랗게 온 몸을 두루 감고
있었으며 두 눈은 사악한 빛이 번뜩였고 창처럼
뾰죽한 혓바닥은 그 사내의 단단한 복부를 핥고
있었다.
오하라는 카멜레온과 정면으로 마주섰다.
11. 대결
그가 바로 진정한 카멜레온이었던 것이다. 지독한
여자에서 악마로 탈바꿈한 것이다.
다니로프가 뭐라고 말했던가?
[나는 알기도 하고 모르고 있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기도 하고 아무도 모르고 있기도
하다... 카멜레온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 그대로가
결코 아니다.]
[그렇소, 둥그런 눈. 마침내 나를 만난 셈이군.]
문신을 한 그 사내가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보다는 훨씬 재수가 좋은
편이라는 데 감사해야 할거요.]
오하라는 팔마우스의 등을 뒤로 젖혔다. 그의 갈색
두 눈은 마치 죽음의 얼굴이라도 보고 있는 듯이
공포를 가득 담은 채 부릅뜨고 있었다. 그의 귀, 코,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나비가 꽃에
앉아 나풀대듯이 그의 입술이 경련하듯 떨렸다.
[악마.]
[토니, 내 말 들리오?]
[악마... 브래들리, 나를... 우리 모두를 해치웠군.
말도 안돼... 그럴 리가.]
[토니?]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생기가 되살아났다. 그가
오하라를 보고 웃음지었다.
[내게 주게나... 12만 5천불을, 오하라.]
그가 말한 후 죽었다.
오하라는 입구 쪽을 돌아다보았다. 카멜레온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두
다리를 약간 벌린 채 서 있었다.
이 자는 노인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는
오하라보다도 나이가 안 들어 보였다. 그의 몸은
단단하고 늠름했으며 머리는 삭발을 하고 있었다.
오하라는 어디선가 이 사내를 본 적이 있었다.
[오카리.]
오하라가 말했다.
[당신은 검도 사범이 아니오, 오카리.]
[그렇소. 당신은 가즈오라는 이름의 백인이고.]
[그렇소. 난 미국인이오. 영어를 잘 하시는군요.]
[훌륭한 선생을 가진 덕분이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이는 법도 그가 가르쳐
준거요?]
[죄가 없다고. 무슨 소리! 그의 정강이를 보시오.
그의 소매를 걷어올려 보시오. 그도 똑같은 짓을 했을
거요. 암살자는 명예로울 게 없소.]
[그는 내 친구요.]
[그러니까 당신은 친구 고르는 법을 더 배워야겠소.
사실 당신의 교육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참이오.
당신이 검의 달인이라는 게 사실이오?]
오하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원에서는
바위틈 사이로부터 연못으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집 뒤꼍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풍경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오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조금 만져 본 적이 있긴 하죠.]
그가 말했다.
[너무 겸손하시군, 자, 한 수 가르쳐 주시오.]
카멜레온이 뒤로 돌아서서 조그만 방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오하라는 부서진 문 쪽으로 걸어가서 안을
들여다 봤다. 그 곳은 침실이었다. 방 한 쪽 구석에는
다다미가 정갈한 모습으로 깔려 있었다. 이부자리의
머리맡에는 부적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침대옆에는
낮은 테이블이 있었고 향수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머리 위쪽에 호롱불이 하나 있긴 하였지만 방에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을 뿐이었다. 카멜레온은
벽장문을 열고는 두 자루의 사무라이 검을 꺼냈다.
카멜레온은 옆구리와 등에도 문신을 하고 있어서
문신을 새기는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거의
한 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돌아서서 오하라를
마주 보았다.
그는 기묘한 느낌을 주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신투성이의 온 몸은 호롱불의 누런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으며 아이새도우와 루즈 그리고 립스틱은
여전히 그의 진정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방
한 가운데 무릎을 꿇은 채 마루 위에 두개의 검을
놓았다. 손잡이는 오하라를 향하고 있었다.
[당신이 고르시오.]
카멜레온이 말했다.
[난 당신을 죽이려고 이 곳에 온건 아니오.]
[좋은 말이오, 실은 나도 같은 생각이오. 나도
당신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소.]
[당신은 팔마우스를 죽이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난 그 사람처럼 수많은 사람을 죽였소. 그들은
피를 찾아 온 거고 난 그들에게 피를 준거요.]
[그럼 당신은 여자로 변장을 해서 그들이 눈을 감고
있을 때 공격을 하는 식으로 그들 모두를 죽였단
말이오.]
카멜레온의 턱 근육이 떠는 듯 했지만 그는 곧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당신들 두 사람은 나를 죽이려고 왔소. 그는
실패했지만 말이오. 난 당신한테 그의 죽음을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얘기요. 검의 달인이 검을
들기를 두려워한다면 내가 믿을 성싶소?]
[난 법을 따르고 싶을 뿐이오.]
오하라가 말할 때 카멜레온이 일어섰다. 그는 검 한
자루를 집어서 나무로 만든 칼집을 벗겨낸 다음
오하라를 향해 몇 걸음 다가서서 그의 앞에서 삼
피트쯤 되는 곳에서 멈추어섰다. 그는 칼날의
끝쪽으로 오하라의 목을 겨누고는 오하라의 손목까지
서서히 그어내렸다. 칼날은 그의 셔츠단추를
뜯어버렸고 단추는 마룻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카멜레온은 검끝으로 셔츠를 도려냈다. 오하라의
목에서 배꼽까지 가느다랗게 금이 그어져 있었다.
[검을 들어, 둥근 눈.]
카멜레온이 명령조로 말했다.
[아니오, 검을 들지 않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겠소.]
[당신 자신을 지킨다고? 이건 명예의 상징이오.
가지고 놀기 위해 검술을 배웠다면 그거야말로 나의
조상을 모욕하는 거요.]
[내가 당신을 상대로 검을 드는 거야말로 검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오.]
오하라가 말했다.
[당신은 명예를 얘기할 자격이 없소. 당신은
등뒤에서 사람을 죽이니까 말이오.]
[당신은 겁쟁이의 증거가 뭔지 아시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두려워하는 자들은 얼굴에 표시를
남겨야 하지 않겠소?]
그는 사무라이검 끝으로 오하라의 광대뼈를 찔렀다.
핏방울이 맺혔다.
[난 당신이 겁쟁이라고 생각하오.]
오하라가 말했다.
카멜레온의 얼굴에 분노가 일어났다. 독사같이
매서운 눈으로 오하라를 응시했다. 분칠을 하고 있는
얼굴, 주홍빛의 입술, 새까맣게 아이새도우를 한
눈까풀에 증오의 빛이 서렸다. 그는 검의 가죽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불끈 주었다. 살갗과
가죽이 맞닿으면서 나는 소리가 오하라의 귀에
들렸다.
카멜레온은 6인치 가량 뒷걸음으로 물러섰다. 그는
머리위로 검을 치켜올리고 나서 옆으로 비스듬히 검을
눕혔다. 그는 전형적인 공격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
번 내리긋는 날이면 손쉽게 오하라의 목을 날릴 수
있을 것이다.
오하라의 턱 근육이 씰룩씰룩 움직였다.
카멜레온으로 하여금 오하라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는 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카멜레온은 오른발에 약간 체중을 싣고 있었다.
그의 두 팔은 어깨로부터 곧장 들어올려져 있었고
검은 비스듬히 누운 채 쭉 뻗어있었다. 그는 체중을
실은 채 공격해 들어왔다.
빛나는 검날이 허공에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오하라는 그것이 느린 동작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는 그것이 아담의 사과라고 느꼈다.
카멜레온의 자세 전환은 완벽했다. 단 한 번의
동작으로 그는 공격자세로 돌아섰다. 황소의
자세였다.
오하라는 자신의 목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카멜레온은 자신의 체중을 다시
오른쪽으로 실었다. 그의 눈에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오하라는 다음 동작이 떨어지는 날이면 목이 날아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는 수비가 문제였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손을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카멜레온의 검을
피하며 인사를 했다. 그는 나머지 검을 집었다.
카멜레온은 서 있는 자세로 돌아가며 검날을
낮추었다.
오하라는 검을 먼저 오른손으로 들었다가 다음에는
왼손으로 옮기면서 검의 무게를 느낌으로 알아보았다.
그 검은 그가 늘 사용해오던 것보다는 무거웠지만
훌륭했다. 손잡이 부분에는 망가진 자국이 남아있고
좀 낡기는 했지만 검날 부분은 면도날처럼 예리했다.
그는 검도 사범이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턱에서 어깨부위나 아니면
엉덩이 쪽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카멜레온은 뒷걸음질로 방을 가로질러 가서 검을
자신의 허리부근에 세웠다. 그는 아주 나즈막한
기합소리를 냈다. 그의 시선은 방의 바깥쪽 어딘가에
초점을 맞추고 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수많은
기억들이 맴돌았다. 마음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마구
일어났다. 시커먼 연기와 불꽃,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강철, 갈가마귀의 처량한 울음소리, 종이안에
나타나는 화가난 목소리의 그림자, 어두운 거리를
가는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 시커먼 공기를 내뿜는
골리앗, 혼돈의 순례자, 지진의 울음소리, 화산의
분출, 쇠에 쇠가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울림, 철길을
달리는 기차의 바퀴소리, 뒷 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하늘 높이 매연을 뿜어 올리고 있는 도시.
그의 마음속에 온갖 악몽들이 그려졌다. 그것들은
한꺼번에 와락 밀려 왔다가 사라져 갔다.
그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하라는 딸랑딸랑 들려오는 풍경소리에 마음을
집중시키고서 그 소리로 마음을 깨끗하게 했다. 그는
육신에서 마음에 빠져 나와 공중 높은 곳에서 방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귀는 늑대의
귀처럼 예민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공기가 방안을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카멜레온의 에너지가
그 공기에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공기에 마음이 몰입되어 공기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두 발을 약간 벌리고 서서 카멜레온을 마주
했다. 검은 팔길이만큼 그의 몸 앞으로 세운 다음
서서히 지면을 향해 낮췄다. 도전적인 자세였다.
카멜레온은 신속하게 오하라를 정면으로 찔러갔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울리며 최초의
동작을 취한 것이다. 오하라는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서며 공격을 피해 버렸다.
강철로 된 검날이 조그만 방안에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그는 손목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카멜레온은 바람처럼 움직였고 오하라도 그에
맞추어 동작을 취했다. 두 사람이 생명을 내 건
결투를 계속 하면서 두 개의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방안은 은빛으로, 그리고 쉿,
하며 공중을 가르는 쇳소리로 가득 찼다.
카멜레온을 눈으로 보려고 했다면 치명상을 면치 못
할 것이다. 문신을 하고 있는 그 사내는 너무나
빨랐다. 오하라는 그의 동작들을 보았다기보다는
느꼈고 공기의 흐름이 자신에게 밀려오고 카멜레온의
에너지가 미치는 범위를 느낌으로 알아냈다. 오하라의
동작은 전형적인 수비 동작이었고 카멜레온의 급격한
돌진과 회전 동작을 무마시켰다. 그는 카멜레온이
매번 공격을 가해 올 때마다 검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순간적인 빈틈을 이용해서 일곱
가지 연속 동작을 취해 나갔다. 각각의 동작들이 마치
느린 것처럼 보였다. 그는 카멜레온의 번쩍거리는
검끝이 왼 쪽에서 찔러 오는가 하면 중앙으로, 그
다음에는 다시 왼 쪽으로, 다음에는 아래쪽을 베어
오고 곧이어 다시 찔러 들어오는 걸 느꼈고 그에
맞추어서 그의 검도 피하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했다.
카멜레온은 또한 남이 갖지 못한 감각을 가진 듯이
보였다. 그의 검은 마치 환상처럼 보였고 사람은
보이지 않은 채 검이 춤추는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위력은 치명적이었으며 소리는 들렸으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그만 침실 안은 죽음의
소리만 가득했다.
카멜레온은 아무 말도 없이 다가오는 피할 길 없는
유령이었다. 오하라는 춤추듯 움직이며 옷깃이 스치는
소리, 침실 안 공기의 흐름, 검이 허공을 가르면서
내는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가 문신을
하고 있는 그 사내를 맞아 수비적인 싸움을 해 나갈
때 그의 두 눈은 구름이라도 낀 듯이 뿌예 보였으며
거의 고정된 듯이 보였다. 그는 날렵하게 피하기도
하고 방어 자세를 하며 펄쩍 뛰어 오르기도 했으며
카멜레온의 12년 동안이나 배우고, 연습하고,
가르쳐온 각각의 동작들에 본능적으로 대응을
해나갔다.
그 일본 사내는 너무나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고
공격적이었다.
검은 그의 손안에서 물 흐르듯이 움직였다. 그는
통로에 있던 나즈막한 테이블이 발에 닿자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몸을 틀어 그것을
날려보냈고 곧이어 꽈당 하면서 벽에 가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서로가 상대의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며 두 사람이
침실 안을 맴돌 때 그들의 검날은 끊임없이
맞부딪쳤다. 방안은 두 사람이 뿜어내는 열기로 가득
찼다. 그러다가 카멜레온은 필사적인 일격을 가해
왔다. 몸을 펄쩍 날리면서 상대를 현혹시키는 동작이
뒤따르는, 검날을 회전시키면 찔러오는 동작이었다.
오하라는 그 일격을 옆으로 비껴서 피했으며 두
사람의 몸이 서로 떨어져 나갈 때 자신의 검 손잡이
부분에서 가까운 곳에 카멜레온의 검이 위치해 있는
순간을 포착해서 손목을 신속히 한 바퀴 회전시키면서
카멜레온의 어깨를 내리쳤다.
정면으로 맞았다기보다는 스쳐 지나갔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카멜레온의 어깨위로
가느다랗게 붉은 금이 그어졌다. 그는 동작을 멈추고
두 발로 굳게 선 채 가만히 있었다. 그의 팔뚝 근육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앞가슴에 새겨진
도마뱀들이 저마다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는 위험한 순간이 왔다는 것을 직감하면서
오하라를 응시했다.
오하라는 신중하게 한번 찔러 갔다. 그리고 나서
다시 왼 쪽, 오른 쪽, 왼쪽으로 번갈아 가면서
찌르고, 베어갔다. 카멜레온은 옆으로 몸을 계속
회전시키면서 거의 꿇는 자세를 취했다가 다시
일어서면서 찔러왔다. 그의 사무라이검이 오하라의
검을 비집고 안쪽 깊숙이 느릿한 동작으로 찔러 들어
왔다. 오하라는 순간 검끝이 바로 자신의 눈앞으로
곧장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머리를 약간 들면서
검날이 자신의 귓불을 스치며 불에 덴 듯 화끈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카멜레온이
자신의 가슴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그에게 접근한
다음 또 한번 손목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그러나 문신을 한 사내는 그러한 동작을 미리
예상하고 몸을 비틀어 피한 다음 다시 몸의 균형을
잡고는 검 손잡이를 아래 쪽으로 끌어 당겼다. 순간
두 사람의 검이 서로 걸린 채 몇 차례 부딪치고 난 뒤
그 사내는 손목을 거칠게 비트는 순간 어깻쭉지에
거대한 힘이 밀려 오는 걸 느끼고는 팔을 안 쪽으로
구부리면서 좀 더 힘을 주어 손목을 회전시켰다.
오하라는 자신의 검이 휘어 감기면서 손아귀를
벗어나는 걸 느꼈다 싶은 순간 검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벽에 가서 부딪쳤다가 떨어져 내렸다.
6피이트쯤 떨어진 곳에 있는 그 검의 손잡이는 땀으로
번들거렸다.
카멜레온은 발목이 거의 전부 드러날 듯 한 쪽 발을
들어올린 채 한발로 서는 자세가 되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을 잃은 것이다. 오하라는
카멜레온에게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두 무릎으로 그의 앞가슴을 짓눌렀다.
카멜레온이 또다시 검으로 공격해 오기 전에 서로의
검을 'v'자로 세운 채 선제공격을 해 간 것이다. 두
사람은 벽에 꽈당하고 거세게 부딪쳤다. 오하라는
카멜레온의 두 다리 사이에 자신의 한 쪽 발을 밀어
넣고 들어올리며 동시에 그의 발을 걸었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카멜레온은 몸을 한 바퀴
돌리면서 쓰러졌다. 그러나 카멜레온이 쓰러진 것은
잠깐이었고 곧 몸을 구르면서 두 발로 벌떡 일어서서
또 한차례 공격을 가해왔다. 이번에는 카멜레온이
돌진해 온 것이다. 오하라는 조금 전 카멜레온이
취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손목을 한바퀴
회전시켰다. 그의 이번 동작은 카멜레온의 손목에
부서질 듯 거센 충격을 주었지만 그는 검을 놓지
않았다. 그는 동작을 변형시켜 한 쪽 발끝으로 선 채
오하라의 다리를 검으로 베어왔다.
오하라는 공중으로 펄쩍 뛰어 올라 두 발을
오므리는 순간 자신의 발밑으로 검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걸 느꼈다. 카멜레온은 풍차처럼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면서 검날을 꼿꼿이 세운 채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오하라는 자신의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지만 360도 회전시키면서 검을 내리친
위력은 대단했다. 오하라의 손가락에 고통이 엄습해
왔고 그 다음 손목, 팔 쪽 그 다음에는 어깻죽지도
고통이 퍼져갔다. 검은 한 쪽 손에서 자칫하면 벗어날
뻔했지만 다른 손으로 옮겨 잡은 뒤 몸을 돌려 숨을
돌릴 만한 곳을 찾았다.
그러나 카멜레온은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검을
머리위로 치켜든 채 번개같이 뛰어 오르면서 방을
가로질러 다시 공격을 해 왔다.
오하라는 공격권을 신속하게 벗어 나와 균형을 잡는
순간 산산 조각난 방문 앞에서 인기척을 느꼈고
매서운 호통소리를 들었다.
[멈추시오!]
그들 두 사람은 마치 동상처럼 얼어붙었다.
카멜레온은 자신의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정지했고 오하라는 몸 앞쪽에 검을 세운 채 낮게
숙이고 있었다. 기무라가 방으로 들어섰다. 사미는 문
옆에 서 있었다. 기무라는 그들 사이에서, 오른 팔을
어깨 위로 올리고 손바닥을 아래로 편 채 마치
심판관처럼 자세를 취한 채 서 있었다.
[상대방에게 피를 흘리도록 하는 건 '히가루다시'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이 싸움을 계속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나를
죽이시오.]
오카리가 두 손으로 잡고 있는 검을 흔들며
기무라를 응시했다.
[난 이해하지 못 하겠소.]
그가 말했다.
[자네들이 서로를 죽이기 전에 먼저 나를 죽이라는
뜻이네.]
그 노인이 다시 반복했다.
[왜 우리들 사이에 끼여드는 거요? 이 일을
'히가루'와는 아무 관계가 없소.]
오카리가 따졌다.
[뭐요? 자네는 이 도껜루이의 말을 신용할 수
없다는 얘기요?]
[아닙니다.]
카멜레온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 사람은 백인이 아닙니까?]
[그렇네, 그는 미국인이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넨 무기를 갖지 않은 사람을 공격할 셈인가?]
[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전 그에게 무기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무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면
무기를 갖지 않은 건 당연하겠죠.]
[난 오하라를 알고 있네. 사람들은 가즈오라고
부르고 있네. 그는 검을 알고있네. 난 그를
가즈오라고 부르지. 그를 내 아들처럼 여겨왔네.
그리고 그도 역시 '히가루다시'일세.]
카멜레온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기무라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근육이
굳어지면서 그의 시선에 엄한 기색이 스쳤다.
[나는 자네들 두 사람이 그냥 싸우는 정도를 넘어
섰다고 생각했네. 자네들은 이 결투가 명예롭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러한 결투가 과연 현명한 건지
의문스럽네. 그 점은 내가 판단하겠네. 만약 도전을
하려거든 그것은 정당하게 해야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판단을 해 주겠다는 얘기일세.]
[전 정당한 도전을 했습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기무라는 오하라의 앞가슴에 난 얇은 상처자국을
바라보았고 그 다음에는 마룻바닥에 떨어진 단추로
시선을 돌렸다. 카멜레온을 돌아다보면서 그가
말했다.
[그럼, 오카리, 자네가 그를 핍박한 것인가?]
[네.]
[자네 두 사람이 나를 모욕하는군.]
[왜죠?]
오하라가 물었다.
['히가루-다시'의 가르침을 어겼기 때문이네. 우린
모두 형제들이고 명예를 아는 사람들은 형제에게 검을
겨누지 않는다. 자네들 두 사람은 비밀 용사로서의
맹세를 했던 명예로운 자들이 아니었던가.]
오카리와 오하라는 기무라의 소중한 깨우침을
생각하면서 조그만 방에서 양쪽으로 마주 서 있는
서로의 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응시했다. 기무라는 두
사람 사이에 서 있었고 자신의 팔을 여전히 내뻗은
자세였다. 두 사람 모두 그의 그러한 개입에 반대를
하지 못했다. 그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도껜루이에게
도전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오카리는 자신의 검을 아주 신중하게 검집에
넣었다.
[고맙네.]
기무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맞습니다.'둥그런 눈'은 비밀용사의 길을
배웠습니다.]
오카리가 말했다
[이 사람은 자네의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여전히 '둥그런 눈'이라는 모욕적인 표현을 쓰고 있군
그래.]
기무라가 말했다.
[오카리, 자네는 텐다이의 다섯 번째 가르침을
잊었나? 자네의 무례한 태도는 내게 충격을 주었네.
여러 해 동안 자네는 겸손이라는 가르침을 받아
왔는데도 어리석게도 한 순간에 그 가르침을 팽개치려
하고 있네.]
[그는 저를 죽이려 왔습니다!]
[자네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가?]
그는 방 한 쪽 구석으로 걸어가서 그의 앞에 선
다음 뒷짐을 지고 돌아섰다.
[자네들에게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우리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라고 배워왔네. 왜냐하면 자네들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연마할 때에만 상대를 맞이해 싸울
준비를 갖추게 되기 때문이네.]
오하라와 오카리는 기무라가 자신들을 꾸중하자
스스로를 돌이켜 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오카리가 말했다.
[미처 생각지 못했 --]
[미처 생각지 못했다구! 몇 년 동안 자네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서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내다보라고 가르침을 받아오지 않았는가. 이제와서
한다는 얘기가 생각을 못 할 수도 있단 얘길세. 그럼
자넨 눈에 명확히 보이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지금까지 본 적이 있는가?]
그는 방에서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다시
걸어와서 그들 앞에 섰다.
[자네 두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히는
잘못을 범해서 스스로를 속인 셈이네. 자네들은 제
7단계까지의 신비스러운 경지에 검술이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이번 사건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자기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말이 틀렸나? 어쩌면 자네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도 도껜루이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네.]
두 사람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렇네 언젠가 나는 자네들 가운데 한 사람을
도껜루이로서 내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거네. 이제서야
알겠나? 난 자네 두 사람이 성년이 되기 훨씬 전부터
자네들을 만나게 되어 가르쳐 왔네. 그런데도 일이
이렇게 된 지금에 와서 나는 자네들 가운데서 선택을
할 수 없게 되었네.]
[제겐 자격이 없습니다.]
오카리가 말했다.
[좋아, 기특한 얘기군. 이제서야 자넨 겸손을
배우게 된 셈이군.]
[사미가 어떻겠습니까?]
오하라가 말했다.
[그도 후보자가 아닙니까?]
[불행스럽게도 그 아이는 세 번째가 되네. 자네 두
사람이 도껜루이로서 선택되지 않으면 별도리 없이
나머지 다른 한 사람이 되게 될 수밖에.
[내가 '불행스럽게도' 라는 말을 쓴 건 사미가 내
손자이고 그애도 자네 두 사람만큼 열심히 수련을
했기 때문이네. 하지만 그애는 겨우 5단계까지
도달했을 뿐이네. 결과가 어찌되든 자네 셋은
형제들이고 그 점은 변함이 없을 것이네. 자네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그러한 유대관계가
깨지게 되면 자네들은 불명예스럽게도
'히가루다시'로부터 영원히 추방될 것이네.]
[이 외국인도 우리들의 형제라 불러야 합니까?]
오카리가 말했다.
[한 마리의 호랑이가 다른 한 마리의 얼룩무늬를
탓하겠는가?]
기무라가 엄한 표정으로 오카리에게 말했다.
그 젊은 사내는 오하라를 힐끗 돌아보고 나서
기무라에게 돌아섰다.
[저 백인이 절 죽이려 들 겁니다.]
그가 말했다.
[자넨 저 미국인이 자넬 죽일 거라고 확신하는가,
아니면 단순히 마음속의 두려움을 얘기한 건가?]
오카리는 초록색 눈동자의 미국인을 쏘아보면서
망설였다.
[그는 정보원이 아니고 자네를 죽이지도 않을
거네.]
그 노인이 말했다.
[그는 정보원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들을 폭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네.]
[그는 자신이 카멜레온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그렇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네.]
기무라가 말했다.
[그는 카멜레온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네.]
[네, 카멜레온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는 분명
아니니까요.]
오하라가 말했다.
[이제서야 정확한 얘기를 했군. 카멜레온은
자네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분명히
아니라네. 자네 두 사람은 더 배워야하네. 자네 두
사람이 천일 기도를 통해서 선의 신비스러운 힘이
나타나게 되면 그 때 가서는 자네들의 지혜를 가리고
있는 구름이 좀 걷혀질 걸세. 이제 우리들은 다음
단계를 생각해 두어야 하네. 우리 다함께 차나 한잔
마실까 -- 얘기를 많이 한 탓인지 갈증이 좀 나는군.]
12. 회의
[이 사람이 카멜레온이네. 하지만 자네가 찾고있는
카멜레온은 아니라네.]
기무라가 손을 오카리의 어깨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오하라는 호텔을 찾아갔다. 계획대로 엘리자와
매지션은 오후 늦게 기차를 타고 교토로 가서 술집에
않아서 그가 다나베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하라는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무슨 일이
생겼는지 설명하지 않은 채 주소만을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그들은 모두 한 자리에 않았다.
오하라와 건은 기무라와 오카리와 마주 않았고
매지션은 사각형의 좌석 배열에서 맨 끝쪽의 사미와
마주 앉았다. 오하라와 오카리 사이에는 여전히
긴장이 흘렀지만 기무라가 이야기를 할 때는 모든
사람이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내게 상자 몇 개가 있다네.]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두 유리로 만들어져 있고 그래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데 상자들마다 사건이 하나씩 들어
있지. 각각의 상자 속에 우리들은 역사적인 순간들을
집어 넣었다네. 하지만 올바른 순서대로 이러한
순간들을 생각해 보려면 상자들을 활짝 열어 보아야
하겠지. 그래야만 그 역사적인 순간들의 상호 연관성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나. 그렇게 할 경우에만
우리들은 무슨 일이 왜 생겼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네. 또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겠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없을 경우에는 당연히 대번
드러나겠지.]
[그렇다면 우서 첫 번 째 상자를 열어 보도록
하겠네. 우리가 가장 분명히 볼 수 잇는 것이니깐
말일세. 그 속에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걸 담아
보도록 하게. 가즈오, 그러면 자네부터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건 빼놓고 알고 있는 것을 한 번 말해
보게나.]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몇 개의 석유 회사들이
콘소시움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착상은
인터콘 오일 사장으로 있던 알렉산더 후커 장군에
의해 가장 먼저 이루어졌죠. 삼 사 년 동안 후커는
이러한 일들을 추진해 오면서 이 회사들의 중역들이
심장마비나 사고로 죽었습니다. 이들 중엔 일본인
합작투자 회사인 산산의 사장인 시찌 토모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험 가동 중에 있던 오일
굴착장이 알래스카 해안에서 또한 침몰되었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엘리자가 말했다.
[마르짜가 운전 도중에 그의 자동차였던 아퀼라
밀레나에도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 그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죠. 우린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어요. 그리고 아퀼라 자동차 공장은 현재 암란의
일부가 되어 버렸고 콘소시움은 자동차 관련 사업에
자금지원을 해 주고 있습니다.]
[하와이에 있는 친구를 잊지 말아야 하네.]
매지션이 말했다.
[맞는 말이네.]
오하라가 말했다.
[한 사내가 오일 굴착장 도면들 때문에 분명히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했던 건 다만 그
도면을 찍은 필름을 파기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기무라는 두 손으로 팬터마임을 하듯이 손짓을 해
가면서, 그들이 새로운 의견을 내놓을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상자에 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순서대로 기억을 해 두는 게
중요하지. 날짜는 순서만큼 중요하지는 않아.]
그가 말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일본에서 난민으로 지냈죠.
그 뒤 그는 선박 수선업을 맡아 일하다가 거대한
해저생활 공간을 개발하는 일에 관여했죠. 스쿠버
과학자인 카기나카스에 의해 설계된 것이었어요. 그
과학자와 브리지즈는 똑같이 심장마비로 죽었죠.
비행접시라 불려지곤 했던 그 작품은 훗날 완성되어
어디론가 보내졌어요.]
[그는 또한 낡은 여객선을 수리해서 유조선으로
바꾸는 일도 맡아서 한 적이 있습니다.]
매지션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브리지즈가 산산의 일원이었고
콘소시움의 일원이라는 것을 어제 알아냈어요.]
엘리자가 덧붙였다.
공중에 더 많은 상자들이 남아 있었다. 기무라는
자신이 만들고 있는 가상의 작품에 열중하면서 등을
뒤로 젖혔다.
[한 가지, 사망한 회사 중역들이 우산을 가진
미치광이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점에 어떤 의문이
생기지는 않는가?]
오하라, 엘리자 그리고 매지션은 모두 머리를
흔들었다.
[교통사고에 의한 죽음은 다니로프 이외의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것 같습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팔마우스 아니면 새디스트로서 잘 알려져 있는
얼굴 없는 프랑스인 레 크로와일 거요. 그렇지만
심장마비는 다니로프에 의한 것이죠. 그 점은 의문이
없습니다.]
[그럼 왜 암란만이 카멜레온의 희생자로 선택된
것일까?]
오카리가 말했다.
[강제적 기부요구랍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암란은 기부금 납부를 거절했다는군요.]
[기부금 납부라구?]
오카리가 말했다.
[백인들의 표현이네.]
기무라가 설명했다.
[그 말은 그들이 협조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뜻이라네.]
[여기 또 하나의 상자가 남아있군요.]
엘리자가 말했다.
[오일 고문으로 있던 라반더 말이에요. 그는 지난
몇 년간 산산을 포함해서 몇 개의 회사를 위해
일했지요. 그들이 남미에서 테러범들로부터 온갖
어려움 끝에 그를 구해낸 직후에 그도 역시
살해되었어요.]
[자네 생각엔 두 개의 테러집단, 라반더를 납치한
테러집단과 그를 구해낸 테러집단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다고 보는가?]
[아닙니다.]
오하라가 대답했다.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자는
어느 한 석유회사에게 위험인물이 된 게 분명합니다.
그들은 한 사람을 보내 라반더를 시험했는데 라반더가
걸려든 거겠죠. 그는 누군가에게 위험한 존재가 된 거
같습니다.]
[우린 그가 가지고 있던 노트를 하나 구했지요.]
엘리자가 말했다. 거기에는 그가 일해준 회사들뿐만
아니라 암란의 모든 석유회사들과 관련되어 있는 아주
비밀스러운 숫자들이 담겨 있었어요. 그 숫자들을
그들이 알아내면 막대한 손실을 입게될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왜 그렇지?]
기무라가 물었다.
[모든 석유회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원유량을 속여서
발표한 게 탄로날 테니깐요.]
[그들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석유가격을 조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연간 이윤 폭이 사 오백 퍼센트를
웃돌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원유가 남아도는 데도
사람들은 오일이 부족하다고 믿는 거죠.]
[알겠네. 계속 얘기해 보게.]
[미다스라고 부르는 암호가 또 있습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그리고 다니로프는 제게 미다스라는 말을 한 적
있습니다. '미다스는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더군요.]
[그럼 현재 미다스는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의문점으로 남은 셈이로군.]
기무라가 말했다.
[그럼 우린 이제 풀리지 않은 여섯 개의 의문점을
갖게 되는 셈이요. 우선 첫째로, 그 남자가
하와이에서 살해된 건 무엇 때문인가? 둘째,
브리지즈의 비행접시는 어디로, 무슨 목적으로 옮겨진
것인가? 셋째, 미다스는 무엇인가? 넷째, 라반더는 왜
살해됐는가? 다섯째, 원유 굴착장은 왜 침몰되었는가?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에서 자동차는 왜 폭파되었는가?
누군가에 의해 폭파된 게 분명한가?]
[맞습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다른 얘기가 있는가?]
[있습니다. 토니 팔마우스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오하라가 말했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궁금한 의문점인 듯 싶군.]
기무라가 말했다.
[허지만 우리들은 얼마동안 더 기다려야 할걸세.
자넨 지금도 카멜레온이 살아 있다고 믿는가,
가즈오?]
[지금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자네가 찾고 있는 카멜레온은 2차 대전 때 일본의
정보원 말인가? 맞나?]
오하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무라가 오카리를
바라보고 물었다.
[이 친구가 2차 대전 때 활동했던 사내로
보이는가?]
오하라가 웃었다.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그들이 서로 다른 카멜레온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겠나?]
오하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들은 조사해 봐야만 하는 많은 상자들을
마련했네. 그렇지만 우리들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자네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세.]
[난 누굴 죽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온 거요.]
오하라가 오카리에게 말했다.
[그럼 그 진실이라는 게 뭔가!]
기무라가 물었다.
[카멜레온은 아무런 감정이 없으면서도 돈을 탐내서
살인을 일삼는 괴물입니다.]
[이보게, 자네들은 이름만 쫓아서 찾아온 셈이군,
사람이 아니고 말일세. 자네 두 사람 모두 속은
셈이야.]
[속다니요? 누구한테 말이죠?]
[밖에 죽어 있는 외국인이지. 그는 자네가 오카리를
적으로 오인하도록 유인한 셈일세. 그리고 오카리,
자네는 오하라가 자넬 죽이려고 온 걸로 믿게끔 속인
셈이고 자네 두 사람은 눈에 분명히 보이는 것을
믿기로 했겠지만 진실은 거짓 뒤에 흔히 숨어 있다는
걸 알아야 하네.]
[그러면 무엇이-]
[오하라. 자네가 카멜레온을 찾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에게 진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오카리. 자네는?]
[그들은 전에도 저에게 암살자들을 보냈습니다.
이자가 그런 자들과 다르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즈오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세.
자네들 두 사람은 같은 목적을 가진 셈이네. 두 사람
모두 똑같은 악마를 무찌르려고 하면서도 악마한테
자네들이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게끔 유인 당한
셈이네.]
[그렇다면 팔마우스는?]
오하라가 말했다.
[도구인 셈이네. 그는 자네를 따라 카멜레온을 찾은
다음 자네 두 사람을 죽일 셈이었네.]
[어떻게 그걸 아시죠?]
[나는 가슴이 아닌 머리를 가지고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네.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자네도 내게 말하지
않았나. 그 영국인이 자네한테 이 돈을 탐내는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카멜레온이라고 말했다고
말일세. 그는 자신이 직접 카멜레온을 찾기는
어려우니까 자네를 보낸 거네. 자네의 뒤를 밟은
까닭이 그것 말고 또 있겠나?]
[팔마우스가 그런 사내라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난 자네의 성실성은 높이 평가 하지만 자네의
인식능력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네. 자네가 아직도
그를 믿고 있는 이유는 뭔가? 그는 돈을 탐내 살인을
했네. 이런 자가 명예로울 수가 있겠나? 그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겠나? 그리고 자네가 가고 있는 길에
악마가 함께 갈 수 있다고 정말로 믿고 있나?]
[그런 점에서까지 제 자신이 끝내 호인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기무라가 사려 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네, 하지만 자네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있네. 그는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진실인 척
꾸몄네. 게다가 산 속에 있는 그 미치광이도 심신
상실 상태에서 그 거짓말을 뒷받침 해 준 셈이네.]
[그럼 팔마우스가 카멜레온을 찾기 위해서 저를
이용한 것일까요?]
[그건 그의 임무였네, 가즈오. 영원한 적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네.]
[하지만 왜죠? 카멜레온이 그들 중 한 사람이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그를 죽이기 위해 그토록
필사적이었을까요?]
[그 까닭을 알게 되겠지. 그 문제에 대해 계속
얘기를 더 해 보기로 하세. 팔마우스는 자네가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이려고 했을 거네. 자네가
계속 캐내도록 내버려두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자네가 알지 못하도록 손을 쓴 것이지. 자네들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했던 거네.
자네들과 엘리자가 말일세.]
[그러면 그는 엘리자와 매지션을 같은 이유에서
죽이려고 했군요.]
[그럴 것이네.]
[옳으신 말씀입니다. 팔마우스는 저를 손쉽게 죽일
수 있었을 겁니다. 제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생각입니다.]
기무라가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덧붙였다.
[오카리가 내게 그 영국인이 자네 뒤를 밟고 있다고
말하더군. 그는 자네가 같은 패거리라고 믿고 있었네.
자네가 바다 위에서 만난 이후로 팔마우스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그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지 알아챘지.]
[그랬었군요. 저는 카멜레온 덕분에 목숨을 건진
셈이군요!]
오하라가 말했다.
[그렇네, 자네들은 그를 시험하게 되고 그는
자네들을 시험한 거네. 결국 자네들은 형제가 될
테지만 그러기에 앞서 이 힘겨운 관문을 통과해야
할걸세.]
[시험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맞습니다.]
오카리도 동의했다.
[저는 이런 골치 아픈 문제들에 개입하기에는
너무나 짐이 무겁습니다.]
[그건 우리 모두의 짐이라네, 오카리. 우리 모두
이미 발을 들여놓은 셈이네.]
기무라가 말했다.
[저는 매스터가 오카리를 그토록 필사적으로
죽이려고 하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엘리자가 말했다.
[오카리는 카멜레온이 아니오. 그 점을 명심해
주시오.]
[왜죠?]
[그걸 이해하려면 상자로 되돌아가야만 하오.
당신도 카멜레온이 당신의 적이 아니라는 걸 안 이상
상자들이 무슨 얘기를 당신한테 들려주겠소? 사건들의
순서를 살려 보시오. 그 회사들이 암란에 의해
통합되기 전에 모든 중역들이 죽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지 않겠소?]
[브리지즈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에게는 맞는
얘기죠.]
매지션이 말했다.
[그는 거의 처음부터 산산의 일원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하라가 말했다.
[대답은 상자에 있네.]
기무라가 말했다.
[자네가 찾는 카멜레온은 영웅의 탈을 쓰고 있지만
족제비의 심장을 가지고 있네.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써야 할 때 화관을 쓰고 있지.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군대조직을 이용하고 있네. 그는 암살, 강도, 파괴를
일삼고 있지.]
[후커 말이군요.]
엘리자가 말했다.
[우리들의 전쟁 영웅이 이 모든 일을 일으키고 있는
우두머리라는 뜻이군요.]
[진정한 카멜레온이군요.]
오하라가 말했다.
[왜 그들이 팔마우스를 시켜서 결국 자신들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준 결과를 초래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건 간단하네.]
매지션이 말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암살자 가운데 한
사람을 시켜서 자네를 제거하도록 한 거네. 그들은
자네를 제거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
거네.]
[저를 따라온 이 자가 실제로는 당신을 따라온
셈이군.]
오카리가 말했다.
[난 그를 역에서 보았소. 난 실수로 당신이 같은
패거리라고 생각했소. 그리고 그가 나를 따라오기
시작할 때 그런 확신이 더욱 굳어졌소.]
[일이 공교롭게 되었군.]
매지션이 말했다.
[자네가 후커와 만난 직후이니까 팔마우스는 자네가
어디로 가는 지, 언제 돌아오는 지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네. 그는 역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그때
그는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서 자네가 아닌
오카리를 따라가기로 작정한 거네.]
오하라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게임을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늙었으며
실수를 할 것 같다고 내게 말했네. 조만간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만 셈이 되었네.]
[자, 그럼 이제 유리 상자를 들여다보기로 하세.
우린 지금 후커 장군과 그가 살인에 의해 이룩한
석유제국을 보고 있네.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네.
지금 중요한 건 자네들이 신속히 후커를 제거해야
한다는 점이네. 그는 자네들이 얼마나 위험한 지 알고
있지. '만약 당신이 왕을 놀라게 했다면 당신이 먼저
그를 죽여야 한다' 는 말이 있지 않나.]
[좋은 생각을 가진 분이 있소?]
매지션이 물었다.
오카리가 말했다.
[진실은 독약보다도 빨리 죽음을 가져온다고
텐다이에 쓰여 있소.]
[좋은 얘기네.]
기무라가 동의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 말이 이 문제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엘리자와 가즈오가 진실을 밝히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가 말했다.
[네, 그래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진실은 증거를 필요로 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지금까지 아무런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마지막 상자가 해답을 줄지도 모르겠군.]
기무라가 말했다.
[그렇지만 사건들의 순서를 맞추려면 전쟁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네. 우선, 첫번째 카멜레온인
야무치 아시다로부터 생각해 보세.]
[아시다는 결혼을 하지 않았네. 황국 해군의
장군이었던 그의 형은 전쟁 초에 전범으로
체포되었지. 팔리핀이 함락되기 직전 후커는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배스타인 사령부를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네. 그러는 동안에 후커의 양아들이 뒤에 남게
되어 결국 나중에 일본으로 돌아온 아시다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네.]
[반쯤은 필리핀 사람이 되었던 그 아이는 그의
어머니보다도 더 일본인처럼 보여 이곳에서 사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었네. 아시다는 그 아이를 '용의
보금자리'로 데리고 가서 흥정을 하기로 했지. 아시다
자신의 형과 그 아이를 말일세. 그는 상자 속에
카멜레온을 넣어서 후커에게 보내는 걸로 대화를
시작했네. 그러다가 그는 그 아이의 어머니를
찾아내어 그녀를 보내 협상을 시도했지. 후커는
그녀를 죽여버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네. 아시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협상이 전혀 불가능했던 거네.
하지만 그가 후커의 아들을 어찌 하겠는가?
기억해 두게나, 이 친구는 전쟁을 일으킨 폭군이
아니라 매우 친절한 사내였네. 후커의 아들을 몇 달
동안 붙잡아 두면서 그 아이에게 그만 정이 듬뿍 들어
버렸지 뭔가. 그 아이도 마침내 아시다와 함께 지내는
걸 마음 편해했지. 그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네. 카멜레온이 직면한 진실로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는 자신의 철천지원수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는 사실에 있었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전쟁 위원회 위원들이
선임되었지. 카멜레온의 아들이 실제로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 있는 몇 몇 사람이 히로시마에서
열린 모임에 초대되었네. 전쟁이 일단 끝난 이상 그
아이를 흥정의 도구로 이용하기로 계획을 세웠네.
물론 아시다는 동의하지 않았지. 그들은 그 일로 서로
싸웠지. 그 날밤 카멜레온은 여자로 분장을 해서 그의
아들을 데리고 몰래 빠져 나온 뒤 그 도시가 폭파되기
두 시간 전 먼동이 틀 무렵에 기차를 타고 떠났네.
아시다와 젊은 후커는 기차에서 작별을 했지.]
[그와 그 아이는 유랑생활을 했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두 가지 있었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또한
후커를 다같이 미워했다는 점이었네. 결국 그들은
호카이도 섬에 있는 쿠시로에 정착했지. 아시다는
어부가 되었네.]
[아시다는 후커를 결코 편히 내버려두지 않기로
맹세했지. 그는 후커가 자신의 정부인 보비의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걸 알았지. 그는 후커가 자신의
군사적 지위를 이용해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는
것도 알았지. 그는 장군의 약점을 모두 알아냈네.
많은 약점이 있었지. 카멜레온은 어떤 사람보다도
후커장군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네. 그리고 그는
양심적으로 행동했지. 후커가 군정을 시작했을 때
그는 산산그룹과 그 그룹의 모체 역할을 했던
토모로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지. 그런데도
토모로는 5년 동안 카멜레온을 제거하려고 했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네. 카멜레온의
정보원들이 결코 그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그들은 모두 '히가루-다시' 의
일원이었네. 그의 진정한 신분을 알고 있는 몇 명의
전쟁위원회 위원들은 모두 히로시마에서 죽었네.]
[아시다도 히로시마에서 사망한 걸로 보도되었죠.]
오카리가 말했다.
[그 뒤, 후커는 30년 동안 카멜레온이라는 유령에
시달렸네. 물론 그는 유령이 아니었고 자신의 적을
심리적으로 노련하게 공격할 줄 아는 한 사내였을
뿐이었지. 양심의 소리를 끊임없이 들려주어 그
비열한 사내에게 복수를 하기로 맹세한 한 사람의
어부에 불과했지. 그의 옛 동료 정보원들이 그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네. 정부 쪽에서 일하는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도움을 주었네. 복수는 두 가지
측면으로 작용했지. 후커가 카멜레온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암살자를 보냈네. 몇 명은 포기했고 몇 명은
죽었지. 마지막으로 찾아온 암살자는 자네 친구인
팔마우스였네. 아시다는 4년 전에 평화롭게
잠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카멜레온은 지금도 살아있네.
그의 아들이 그 복수를 떠맡은 거네. 그건 후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네. 아니면 그들이 나를 죽일
때까지.]
[그럼 당신이 보비 후커로군요.]
엘리자가 말했다.
[난 오카리 아시다요.]
문신을 한 사내가 말했다.
[보비 후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죠.]
그는 전에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는
개인적인 감정들 즉, 자신이 몇 달 동안 아시다를
미워하고 두려워했으며, 인내심과 지혜를 갖추고 있는
아시다가 마침내 자신을 굴복시켰으며 텐다이와 고대
신화의 깊은 뜻을 그에게 설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숲 속에서 지내는 방법과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얘기를 그들에게 들려
주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 그 분이 천일(千日)의 정진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 분과 함께 선의 지혜를 찾아
일본 곳곳을 누비며 문전 걸식을 했지요. 그리고 그
도중에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셨소. 그 분은 내게
비밀 용사의 길, 검술, 동물들의 언어를 가르쳐
주셨소. 그 분은 내게 명예, 존경 그리고 사랑을
가르쳐 주셨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분은
'히가루다시'의 7단계를 전수해 주셨지요.]
[그가 공갈이나 금전 요구를 한 적이 없소?]
매지션이 물었다.
[그 분은 형님이 죽은 후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소.]
오하라는 등을 뒤로 기댄 채 자기 앞 허공에 놓여
있는 마음속의 상자를 응시하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여러 개의 조각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순서가 그에게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후커와 그의 엘리트 친구들이 필요로 한 건 그들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다. 그러한 동기에서 그들은
관계되어 있는 다른 회사들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
경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독점이
불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각 회사들이 독자적인
자주권을 가진 오일 콘소시움이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해결의 열쇠는 암란이 쥐고 있었다.
그들은 콘소시움을 결성한 후 가입회사들의
핵심인사들을 살해하고는 자기편 사람을 배치시켰다.
결국 그들은 모든 회사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들은
헨셀, 알라모, 선셋, 인터콘, 암 페트로, 산산과 모든
계열회사들을 소유했다. 그들은 보스톤의 한
은행까지도 장악했다. 공통적인 실마리는 오일이었다.
아직도 빈 상자가 몇 개 있었다.
[저는 그들이 마르짜의 자동차를 폭파시킨 이유를
모르겠어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렇게 해야만 아퀼라를 장악하기가 더
손쉬웠겠지요.]
매지션이 말했다.
[당신은 그 차가 매우 특별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소?]
엘리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차는 갤론 당 50-60마일 정도는 되죠. 자동차
업계에선 혁신적 성능이었군요. 당신 그 경우에
암란의 수입이 얼마나 늘어나는 지 아시오?]
[맙소사.]
엘리자가 말했다.
[그들이 그토록 탐욕스럽단 말이에요?]
[더이상 돈이 게임의 내용이 될 순 없지.]
오하라가 말했다.
[그들은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벌었어. 이제부터의
게임은 권력일 뿐이요.]
[그럼 그들은 왜 소로우를 침몰시켰을까요?]
엘리자가 물었다.
[암란이 선셋 오일회사를 콘소시움의 잠재적
회원으로 생각했다면 그들은 언젠가는 자신들의
손안으로 굴러들어 오게될 8천만불의 자산을 파괴시킨
셈이에요. 그건 성질을 부려 공연히 자신들에게
손해를 초래한 게 아니겠어요?
[어쩌면 그건 스퀴즈 플레이 (카드놀이에서
으뜸패로 상대방의 중요한 패를 내 놓게 하는
수법)일지도 모르지.]
매지션이 말했다.
[아마 선셋은 몰래 숨겨 놓은 카드였을 거야. 원유
굴착장이 침몰된 후에는 숨겨놓은 카드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는지도 모르지.]
[그건 좋은 의견이야.]
오하라가 말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기로 하세.
하와이에서는 무엇 때문에 도면을 빼앗아 파기
시켰을까?]
[아무도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세.]
매지션이 말했다.
[그럼 왜 그것들을 찾은 것이지?]
[그야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안되기
때문이겠죠!]
엘리자가 말했다.
[내 생각도 그거요.]
오하라가 말했다.
[누군가가 그 사내를 살해했다는 의미는 그것이
소로우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일세.]
[원유 시추 장소네.]
매지션이 말했다.
[틀림없어!]
[그렇다면 소로우를 파괴시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거네. 하나는 선셋 오일의 재정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지. 또 다른 이유는 암란에서는 이미 시추 장소에
대한 계획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이네. 그들을 그
도면을 제거하려고 했던 거지. 그래서 암란은 시추
장소를 이용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네.]
[재미있군.]
오하라가 말했다.
[후커는 미다스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고 하더군.
[미다스는 뭐요?]
오카리가 물었다.
[우리 생각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오일
매장지역인 것 같소. 하지만 우린 정말로 그게 어디
있는지는 모르고 있소.]
[그러면 그 이유를 알 것 같은데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들 모두 백만 불짜리 미소를 짓고 있는 조그마한
여기자를 돌아다보았다.
[그렇다면?]
오하라가 말했다.
[그건 해저예요. 크래프트 아메리칸은 브리지즈가
만든 해저 비행접시가 미다스라고 불렀다고 했어요.
미다스는 오일 매장지역의 심장부예요. 그건 전반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시추 장소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건 모두 해저에 완벽하게 숨겨져 있는 장소죠.]
[하지만 그곳이 어디죠?]
매지션이 물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도움이 돼 줄 수 있을 것
같소.]
오카리가 말했다.
[난 그들이 모든 것을 지휘하고 있는 방을 본 적이
있소. 그 방은 거대한 규모였으며 놀이가 40미터쯤은
돼 보였소. 그리고 거기에는 이상한 모양의 TV화면이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지도가 있었소.]
[그런 것을 다이오드 화면이라고 합니다. 자유로운
형태의 화면이죠.]
매지션이 말했다.
[이 TV화면은 전 세계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활동을
보여주죠. 그들은 그들의 제국 전체에서 진행되는
모든 걸 볼 수 있는 겁니다. 당신이 얘기한 해저용
비행접시가 있는 특수 지역이 보신 근처에 있소.
그들은 안팎을 TV화면을 통해 보고 있죠. 그리고
그곳에는 배가 내려오기도 하지요. 그곳은 낡은
유조선들의 거대한 무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굉장하군.]
매지션이 말했다.
[그건 유조선들에 대한 해답이 될 것 같군요.
그들은 그 유조선을 잠수시켜 그 속에다 오일을
저장하고 있는 것 같군요. 지난 수 년 동안 몇 명의
잠수부가 대양의 그 곳 근처에서 사라져 버렸소.]
[그리고 유미사와는 1백 마일이 채 안되는 보신
섬에 새로운 정유공장을 가지고 있소.]
오카리가 말했다.
[그러면 그들은 필요 할 때마다 해저
저장선으로부터 오일을 퍼서 정유공장으로 운반하는
식이겠지요. 이 얼마나 교묘한 수법이요.]
오하라가 말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음 -- 30년 동안 기다려
왔다는 거요?]
매지션이 말했다.
[그러면 그들이 그 때부터 오일 시추를 시작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왜 기다린 것일까요?]
[그들은 지금까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엘리자가 말했다.
[원유의 노다지가 있다는 게 탄로될까봐 두려웠던
거지요. 그곳은 그들의 1급 비밀사항인 셈이죠. 그
곳은 그들에게 거의 무한정한 오일 공급원인 셈이기도
하구요. 그게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한 번 생각
해 보세요. 그들은 실제 원유매장량을 숨기면
숨길수록 더욱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되죠.]
[맞소.]
기무라가 대답했다.
[코코넛을 파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에게
코코아나무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법이지.]
[대단히 끈질긴 사람들이군요.]
오하라가 끼여들었다.
[누가 아니랬소?]
매지션이 말했다.
[얼마나 버티는지 봅시다.]
[그들이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라반더가 원유매장
지역을 평가하기 위해 개입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었어요.]
엘리자가 말했다.
[그건 그가 적어둔 노트를 봐도 알 수 있어요. 그는
잠재매장량을 알고 있었어요. 그 가엾은 노인네는
너무나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게 된 거예요.]
[어쩌면 그들은 그를 고용하기 전부터 그를
제거하려고 작정했는지도 모르오.]
매지션이 말했다.
[그들에겐 단지 한 가지 문제 즉, 그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카멜레온이라는
걸림돌이 있었소.]
오하라는 허공에 세워둔 추상적인 상자들을 구체적
현실 속에 연결시키려고 애쓰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들의 모든 의문들에 대한 대답이 그
상자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확신했고 이제 그는
그것들을 명확히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로서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후커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분명히
할 수가 없었다. 위대한 전쟁 영웅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은 역사를 손상시키고, 미국의 승리를
더럽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후커는 스스로 명예를 더럽혔던 것이다. 그의
가슴속의 증오와 좌절감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영혼의 어둠속에서 안식처를 구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고서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러운 엘리트주의자들에 의해
자금이 뒷받침되는 탐욕의 기념비를 세웠고 독사같은
사람들 -힌지, 다니로프, 레 크로와, 팔마우스.- 에
대한 살인과 강도가 태연스럽게 자행되는 악몽같은
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후커는 반드시 파멸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답은 간단했다. 진실의
힘으로. 어떻게 그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우리들은 그 원유 저장소, 특히 원유 시추장소의
세밀한 사진을 입수해야 됩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문제는 어떻게 그 일을 해내느냐 하는 것이죠.]
[왜 좀 더 일찍 이 문제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은 거요?]
매지션이 오하라에게 물었다. 오하라가 재치 있게
웃어버렸다.
[그건 개인적인 문제였소.]
그가 말했다.
[게다가 나는 이러한 모든 문제의 중요성을
몰랐었소. 이시다상도 마찬가지였소. 우리들은
쓰레기통에 버린 것들이나 책상 위에 널려있는 메모를
통해 주워들은 것뿐이오. 그들은 우리들이 실제보다도
훨씬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소.]
매지션은 'C잼 블루스'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웃고
있었다.
[내게 생각이 하나 있소. 이 곳은 돌로 된 집이
맞소?]
그가 말했다.
오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벽에 금속은 없소?]
오하라가 머리를 저었다.
[목재요.]
그가 말했다.
[아주 잘됐소.]
[자네가 우리들을 몰래 안으로 데려갈 수 있겠나?]
오하라에게 물었다.
[그들은 이 방을 감시할 수 있는 폐쇄회로 카메라를
설치해 두지 않았소?]
매지션이 오하라에게 물었다.
[그렇소, 천장 근처에 있소. 어떤 것은 고정되어
있고 어떤 것은 족제비처럼 방을 훑어보고 있소.]
[그렇다면 우리들에게는 생방송용 중계차가 있소.
그 안에는 몇 대의 녹화기가 실려 있소.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건 두 개의 소형 송출기요. 그들이
설치한 모니터를 찾아내서 송출기를 탐지기 돌출부에
장치시키는 거요. 그렇게 하면 그들의 탐지기는
카메라 역할을 해주겠지요. 우린 바깥에 있는
생방송용 트럭에서는 그것이 보내준 신호를 잡아
비디오 테이프에 담는 거요. 그러면 그 곳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화면을 통해 볼 수 있소.]
[이런 송출기를 어디서 구한단 말이요?]
기무라가 물었다.
[네, 아무 전파사에나 가면 구할 수 있소.]
매지션이 여전히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 이곳에 들어가겠소?]
오하라가 오카리에게 물었다.
[벽 밑으로 나있는 돌로 만들어진 큼직한 배수관을
통해 올라가는 거요. 그 배수관은 지하감옥으로 뻗어
있소. 그곳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소. 지하감옥의
쇠창살은 낡아 있소. 일단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근무자들이 제복을 넣어두는 로커룸으로 올라가면
되는 거요. 그곳에서 옷만 제복으로 갈아입으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소. 난 휴지통을 뒤져서 후커의
책상을 찾은 다음 그를 꼼짝 못하도록 나의 참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찾아내겠소. 그런 다음 난
카멜레온을 보내겠소.]
[그럼, 명백히 알 수 있는 것들 이외에 어떤 위험이
있지?]
[그곳에는 한 때 지하감옥으로 쓰이던 곳이
있습니다.]
오카리가 말했다.
[너무 오랫동안 꾸물거리면 위험합니다. 경비원들은
모두 스모선수이고 그들의 우두머리는 동물의 후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를 두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주 부지런한 자입니다. 경비견을 데리고
밤새도록 홀과 지하감옥을 돌고 있지요. 나는 항상
그가 나를 알아챌 수 없도록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려고 주의하곤 했죠. 난 그를 애꾸눈이라고
부르고 있죠.]
오하라가 날카롭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애꾸눈이라고 했소? 그는 안대를 하고 있었소?]
그가 말했다.
[그렇소. 아주 심한 상처자국이 있었소.]
오카리가 자신의 얼굴 한 쪽으로 금을 쭉 내리그어
보였다.
[난 오늘 그를 보았소.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는
느낌과 함께 전에 그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소.
하지만 난 다만...]
오하라는 잠깐 본 그의 얼굴 윤곽을 머릿속을
떠올리면서 뭔가 생각에 잠겼다. 그는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니오, 내가 그를 알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친근한 ...데가 있어요.]
그는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사실, 어쩌면 ... 아니, 얼굴 자체는 분명 본 적이
없어.]
그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팔마우스와 보트 위에서
나눈 대화를 생각해냈다. 암살자들...
[레 크로와.]
그가 말했다.
[누구요?]
오카리가 물었다.
[프랑스인이오. 레 크로와는 그의 별명이오. 그는
알제리에서 한 쪽 눈을 잃고 그 대가로 수십 명의
폭동자들을 처치했소. 그 사람일거요. 현재는 그의
사진이 없소. 그가 모든 사진들을 없애버렸소. 만약
그가 레 크로와라면 조심해야 할 거요. 이번 여행을
하려면 우린 그에게 여유를 많이 줄 필요가 있소.
다른 문제는?]
오카리가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알아냈소?]
엘리자가 물었다.
[배수관을 통해 올라가면 된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에요?]
[아주 간단하죠.]
오카리가 말했다.
[당신은 내가 전에 그 곳에 살았다는 걸 잊고 있소.
3년 동안 그곳은 나의 운동장이었소. 난 그 곳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소.]
13. 용의 보금자리
레 크로와는 '용의 보금자리'에 있는 지하감옥으로
들어가 넓은 돌계단을 내려갔다. 못생긴 잡종이긴
했지만 그 개는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았다. 그 개는
그의 앞으로 달려가서 먼저 허공에 코를 치켜들더니
땅을 따라 킁킁거리며 경계를 했다.
레 크로와의 본능은 낮에 성채에서 오하라를 본
이후 줄곧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위협을 느낀
것은 매스터에 발을 들여놓은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3년 동안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실수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일이 다소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톤리가 살해되었을 때 '소로우'에
관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라반더가 납치되었다.
그리고나서 가비와 후커가 안전을 위해 그를 '용의
보금자리'로 끌어들였다. 그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수세로 몰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레 크로와의
게임은 항상 공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카멜레온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는 역활을 맡게 되었다. 이
기자는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더 접근해 오고
있는듯이 보였다.
그는 이 곳의 지하감옥을 싫어했다. 지하감옥은
냉기로 가득하고 축축했다. 그리고 시멘트 벽 틈새로
나는 바람소리 때문에 신경이 거슬렸다. 여기서는
개조차도 유령같이 느껴졌다.
그 곳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그는
경호실에 가서 따뜻한 난로나 쬐겠다고 생각하며
위층으로 되돌아갔다. 그곳에 앉은 다음 카메라가
지하감옥의 계단을 탐지하여 비쳐주는 모니터
스크린을 살펴보았다. 뭔가 이상한 공기가 느껴졌다.
저 아래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외풍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커피를 조금
들고는 삼 사십 분에 걸쳐 다시 점검을 했다. 그는
전차 장치들을 믿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용의 보금자리'의 담벽은 거대한 회색 장막처럼
그들의 위쪽에 있는 나무들 위로 치솟아 있었다.
그들은 아래쪽에 나있는 길을 따라 산 위로 올라왔다.
이제 그들은 수 백년이나 된 이끼가 끼어 초록색으로
뒤덮여 있는 대리석 배수관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배수관 입구에서는 물방울이 아래쪽의 바위위로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자그만 산짐승 하나가
살금살금 기어 나오다가 구멍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배수관 입구에서 나무 덩굴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들이 이 배수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분명해 보이는군요.]
오하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데까지 신경을 쓰라고 하면 미치는 편이
낫겠군.]
[미치고 말고.]
카멜레온이 말을 하면서 덩굴 사이를 해치며 배수관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오하라가 두 손으로 이끼가
뒤덮여 있는 바위 위를 더듬으며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 배수관은 직경이 4피트쯤 되었고
길었다. 그것은 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는
가운데 꾸불꾸불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뒤 쪽 먼
곳에서, 오하라는 굴속에 메아리 소리를 울려대며
수십 가닥의 물줄기가 졸졸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쉿소리를 내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카멜레온은 앞장을 선 채 마치 고양이처럼 움직여
갔다. 속도가 빨랐다. 그들은 모두 시커먼 바지와
터틀넥 스웨터 그리고 시커먼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카멜레온은 한 쪽 끝에 조그만 갈고랑쇠가
달려있는 로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네 개의
전자파 송출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스티로폴을 두껍게
싼 다음 각자의 스웨터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플래시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두 개의 하수구를 지나 배수관 꼭대기
부분으로부터 심하게 구부러진 지점까지
기어올라갔다. 세번째 하수구에서 카멜레온은 멈춰
섰다. 그는 위쪽을 가리켰고 오하라가 천장을 향해
플래시를 비추었다. 성쪽을 향해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맞은 편 쇠창살까지는 3,40피트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 카멜레온은 한 쪽 벽에 등을 기댄 채
다른 쪽 벽에 두 발을 버티고서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통로의 벽이 미끄러웠기 때문에 뒤척거리며
가까스로 올라갈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 번갈아 떼어
놓으면서 비좁은 통로를 조금씩 올라갔다. 그는
꼭대기에 도착했을때 쇠창살에 갈고랑쇠를 팽팽하게
걸고는 가지고 있던 로프를 풀었다. 로프는 손끝까지
닿았다.
그는 로프를 손을 번갈아 잡아가면서 위로 타고
올라갔다. 카멜레온이 쇠창살을 아주 조심스럽게 받쳐
올리고 있는 동안 오하라는 두 발 사이에 로프를 꽉
끼운 채 계속 위로 올라갔다.
지하 통로는 음침했다. 단 두개의 램프만이 천장이
나즈막한 지하감옥을 비추고 있었다. 전에는 방이었던
곳이 창고로 사용되고 있긴 하였지만 마치 역사가
살아서 속삭이기라도 하는 듯 그 곳에서는 고통과
절망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돌벽의 틈
사이로 한 줄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복도를 통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신속히 홀로 올라온 다음 쇠창살을 원래의
상태대로 고쳐놓았다. 그들은 갈고랑쇠를 숨겨놓고
바람이 불고 있는 넓은 복도로 달려갔다. 카멜레온은
오하라에게 기다리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들은 머리를
치켜들고 복도와 홀 위쪽을 감시하면서 전면 돌출부를
앞뒤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카메라가 복도쪽을 향해 돌아가고 있을때 카멜레온은
계단을 달려 올라간 뒤 카메라 바로 밑에 가서
멈추었다. 그는 카메라가 자신의 머리를 지나
복도쪽을 향할때까지 등을 벽에 바싹 밀착한채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홀의 나머지 계단을
달려내려가 방화문까지 이르렀다. 로커룸은 바로
안쪽에 있었다. 그는 카메라가 이쪽 방향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에 동작을 취해야만 했다. 문맞은 편 쪽
복도에 만약 누군가 있을 경우에는 그들이 곤란하게
될 것이다.
그는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그의 뒤편에서는 오하라가 카메라 밑의 한
지점으로 재빨리 달려간 뒤 카메라가 방향을 바꿀
때까지 기다리고 섰다가 다시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로커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문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한 사내가 그들 앞에 서 있었다.
밖에서는 엘리자와 매지션이, 산꼭대기로 차를 몰아
도로가 절벽가장자리까지 커브가 져있는 지점까지
올라왔다. 엘리자는 길 한 쪽 옆에 차를 주차시켰다.
그들은 그 곳에서는 '용의 보금자리'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매지션은 이 정도면 수신 상태가 양호할 걸로
확신했다. 그는 밴의 뒤쪽에 앉은 채 세 사람이
신호를 송신할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 데크, 모니터,
트위스팅 다이얼을 설치할 때까지 기다렸다.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들이 아직 그 곳에 도착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가 말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서 일을 끝내고 그 곳의
그럴듯한 모습을 보내주기만을 기다리겠어요.]
엘리자가 말했다.
[나는 그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스모선수들과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오. 4백 파운드나 나가는
아주 골치 아픈 친구들이오.]
그들은 산밑에다 도요다 한 대를 세워 두었다.
그들이 이 곳을 떠날 때 만약 추격을 받게 되면
엘리자는 테이프를 가지고 그 차로 옮겨 탈 것이다.
오하라, 매지션 그리고 카멜레온은 트럭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추격자들은 그녀를 놓치고
말 것이다.
암란사가 미다스에 있는 원유시스템에 대한 계획을
훔쳤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시스템에 대한
비디오 테이프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낸
사람은 오하라였다. 그 테이프와 미다스라는
원유노다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암란사에 얽힌 이야기를 널리 알릴 경우 그들의
공로는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매지션은 시계를 보았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이것만 보아도 카멜레온이 대형 지도 뒤에 있는
통제실 안으로 들어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얼마나
많이 잡았는가를 알 수 있었다. 매지션은 트럭 뒤에
실려있는 비디오 화면을 수시로 살펴보면서
화면상태를 조정하곤 했다.
각각의 송출기들은 화상이 겹치지 않도록 서로 다른
주파수로 신호를 발사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들이 잊어버린 게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라커룸에 있는 사내는 50정도는 돼 보였다.
그의 두 눈은 희미해져 있었고 그의 피부는 나이가
들어 쭈글쭈글했고 하얀 머리카락은 한 줌의 솜처럼
숱이 적었다.
[자네 빠르기도 하군.]
그가 일본어로 말했다.
[그렇소. 에어컨이 고장났소.]
카멜레온이 재빨리 말했다.
[자네 둘이 고치러 왔나? 내 시절은 갖나보오. 그
일은 나같이 수위로서는 너무 벅찬 일이오.
수고하시오. 너무 늦게까지 일하진 마슈.]
그가 떠나갔다.
[가까이 오시오. 그가 밖에 나가서 누굴 만났다는
얘기를 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오.]
오하라가 말했다.
[다음엔 뭐요?]
[열려 있는 라커룸을 살펴봅시다. 근무자들은
근무복에다 신분 증명용 뱃지를 달고 있소.]
카멜레온이 말했다. 수리 담당 근무자들의 숫자는
경호요원의 숫자만큼 많지는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은
몸에 꼭 맞는 근무복을 찾았다.
카멜레온이 오하라에게 작업모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걸 쓰시오. 카메라가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머리를 숙이시오.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고개만 까딱해 보이고 계속 걸어가시오. 위쪽에
올라가면 얘기를 거의 나누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
거요. 계단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본 채로 들어가게
될 거요. 상황실은 바로 왼편에 있고 상황실 바로
뒤에는 복도가 있소. 우린 운이 좋은 편이오.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오.]
[카메라가 우리가 원하는 곳을 비추고 있는지
상황실을 살펴봅시다.]
오하라가 말했다.
[쓰레기통을 뒤지려고 서성댈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오. 안 그렇소?]
[스스로를 통제하도록 노력하겠소.]
상황실 뒤쪽에 다가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문은 열려 있었다. 벽에는
수많은 T V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상황실용 모니터를 찾는 건 어려울 것 같소.]
오하라가 말했다.
[표시가 되어 있소, 보시오.]
각각의 모니터에는 펜으로 해당되는 곳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위치 설명서를 쭉 점검해 가다가
오하라와 카멜레온은 별로 어려움 없이 상황실에 있는
두개의 탐지기에 해당되는 모니터를 찾아냈다. 그들은
각각의 모니터 박스의 '비디오 아웃'단자에 코드를
꽂고, 5인치 송출기에 플러그를 꽂았다. 송출기까지
클립을 연결시켜 주고 있는 전선이 길었기 때문에
오하라는 모니터 아래쪽 보이지 않는 곳까지 박스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그때 오하라는 다른 모니터를 발견했다.
가비의 사무실을 감시하는 모니터였다. 오하라는 그
모니터에도 송출기를 연결시켰다.
[좋았어. 이 곳을 나가서 게임 룸을 한 번 봅시다.
그들이 바깥에서 뭔가를 잡아내길 바라면서.]
방송차에서 매지션은 모니터의 조그만 노브를
서서히 돌리고 있었다. 갑자기 화면이 나타났다. 그는
오카리가 설명해 준 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도는
30피트의 높이에 20피트 길이였다. 그 안에는 수
십개의 다이오드 스크린이 들어있었다. 카메라가
움직이고 있었고 매지션은 카메라가 방을 이리저리
비추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나머지 두개의
모니터를 틀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사무실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다.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조그마한 사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중이었다.
매지션은 오하라의 설명을 통해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가비 장군이 틀림없었다.
[우린 해냈소, 엘리자. 당신은 이걸 믿을 수가 없을
거요. 우린 두 개의 서로 다른 각도에서 지도를 볼
수가 있소.]
[미다스가 보여요?]
[그럼, 하지만 카메라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군.
오하라가 지금 그 곳으로 들어가서 화면을 잡고
있소.]
그는 모니터가 선명하게 보이도록 화면을 조정했다.
카메라는 방 한 가운데를 훑어간 다음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것이 나타났다. 미다스 소재지에는 네 개의
스크린이 있었다. 두 개는 바깥쪽, 두 개는 안쪽을
비추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
매지션이 말했다.
[소리가 들려요?]
상황실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소. 모두 세 개의 모니터에 백만 불짜리
화면이오.]
그는 도중에 말을 멈췄다. 그는 가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퀼, 925, 4월 8일. 730 - 037 - 370. 매우 긴급.
우린 24시간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음. 즉시 연락주기
바람.]
그는 수화기를 걸었다.
[잘됐군, 보너스를 얻은 셈이오.]
매지션이 말했다.
[퀼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 거요, 화면으로. 그가
누구인 것 같소?]
[후커 아니에요?]
[가비요.]
[어떻게 카메라에 접근할 수 있겠소?]
오하라가 물었다.
[그것들이 너무 높지 않소?]
[상황실 안에 바퀴가 달려 있는 사다리가 있소.
거기엔 기껏해야 4,5 명쯤 있을 거고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을 거요. 그들은 늘 바쁘니까 말이오.
미다스에 대한 모든 것이 통제되는 곳이 바로 이
곳이오.]
[당장 들어가 보는 게 어떻겠소?]
오하라가 말했다. 카멜레온이 끄덕였다. 그들은
큼직한 방안으로 들어섰다. 오하라는 그 곳의 크기에
놀랐다. 곧이어 두 개의 다이오드 스크린을 통해서
처음으로 미다스를 보았다.
바깥 모습은 둘 다 괴상했다. 바닷속의 소리 없는
갈색의 화면이었다. 하나는 접시모양의 둥그런 형태의
구조물이었는데 바다 밑으로 발을 뻗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더욱 괴상한 모습이었다. 녹이
슬어있는 선박들이 길다랗게 줄을 선 채 모래 속에
깊숙이 파묻힌 채 카메라 앞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강력한 수중 탐조등이 시커먼 바닷속을 비추자 온갖
형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면 하나에는 모든
시스템의 심장부라고 할수 있는 시추장소의
확대사진이 나타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이 찾고 있던 명백한
증거물이 생생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거대한
작업장 앞에는 네 명의 사내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들어서자 어깨 너머로
돌아다보았다. 그러고는 하고 있던 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두 개의 카메라를 조작할 수 있는
방법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중요 지점인 원유 시추장소의 T V 화면을
보여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들로서는 송출기가 제대로
작동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 그들로서는
귀로 소리를 들어서 그것이 작동중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오하라는 사다리를 올라갔다. 카메라 밑에는 탐지를
중단시키고 제 자리에 가만히 있게 해 주는 스위치가
있었다. 오하라가 일단 카메라를 멈추면 경호실에서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아채고 점검해 보기 위해
뛰어들어오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아마 매지션도 함께 가야할 걸...]
오하라가 막 제안을 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녀는
브레이크를 밟고 나서 차를 빠져나간 뒤였다.
계획했던 대로 그녀는 차에 타고서 시동을 건 뒤
출발했다.
[자네한테 말해줄까? 난 그녀와 함께 차를 타고
교토로 돌아가진 않겠네. 그녀는 이 트럭을 얼마나
빠르게 몰던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반밖에 시간이
안 걸렸네. 그녀가 차를 몰고 있는 건지 차가 그녀를
몰고 있는 건지 모르겠더군.]
그들은 별탈없이 3시간동안 차를 몰아 교토에
도착했다. 불이 가비와 그의 동료들의 정신을 빼놓는
바람에 그들을 괴롭힐 여유가 없었던 게 분명했다.
그들이 교토의 중심부에 도착했을 때 카멜레온은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난 이제 그만 가봐야겠네.]
그는 손을 뻗은 후 오하라의 손을 잡았다.
[기무라님이 누구를 도껜루이로 지명하든 간에 난
기꺼이 따르겠네. 만약 자네라면 자넬 위해 일하게 된
걸 영광으로 알겠네. 만약 자네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나는 언제든 자네의 부름에 응하겠네.]
[나도 똑같은 생각일세.]
오하라가 말했다.
[고맙네, 친구.]
그는 오카리가 완전히 어둠 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의 뒤 지켜보았다. 그 기자는
트럭의 바닥위에 들어누웠다. 놀라운 사건들로 가득찬
기나긴 밤이었다. 손목이 찢어지고 갈비뼈는
부러졌을망정 그는 갑자기 생기가 솟아오르는걸
느꼈다. 진실이 테이프위에 담겨있는 것이다. 호웨는
그의 엄청난 이야기를 싣게 될 것이다. 리지는 그녀가
가져온 것을 뉴욕에 알릴 것이다. 카멜레온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이 줄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하라에게는 그러한 승리가
이상스럽게도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배반한 팔마우스를
생각했다. 그 일은 어쩌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교훈이 될 것이다. 기무라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현명한 자는 수많은 상처를 갖고 있는 자이다.]
그렇지만 그는 또한 이렇게도 말했다.
[행복한 자는 자신의 상처를 잊는다.]
매지션이 말문을 열었다.
[이상하더군.]
그가 말했다.
[뭐가 이상하지?]
[그 문신들이 말이야.]
그들은 차를 몰고 호텔로 돌아왔다.
[우린 아침에 떠나는 첫 차를 타는 거야.]
그들이 트럭을 주차시키고 났을 때 매지션이
말했다.
[내일 밤 이때쯤이면 미국에 있을 걸세.]
오하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가 이곳으로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로 죽지
않기를 기도하겠네.]
그는 호텔 로비에 들어가서 부리나케 전화기를
잡아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번호를 돌렸다. 벨이
울리자 오퍼레이터가 나왔다.
[누굴 바꿀까요?]
[엘리자 건.]
[건양 말이군요. 그녀는 체크아웃 했습니다.]
[체크아웃이라구요!]
[네, 20분쯤 되었습니다.]
[고맙소.]
그의 우편함에 쪽지가 있었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운이 좋았나 봅니다. 오늘 밤 젊은 조종사 한
사람이 나를 도쿄로 데려갈 것입니다. 당신은 큼직한
이야기를 쓰고 난 테이프를 갖는 거예요. 공평한 것
같지 않아요? 아무튼 그 트럭을 도쿄의 호웨 지사로
좀 갖다주세요. 고마워요. 그럼 보스톤에서 뵙겠어요.
엘리자.]
그는 그것을 매지션에게 건네주었다.
[이런, 빌어먹을.]
매지션이 말하고 나서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특종기사를 차지했군 그래. 친구!]
14. 1000일의 정진
찰스 고든 호웨는 자신의 널찍한 사무실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회사에서 가장
우수한 두 명의 기자들 덕분에 아주 바쁜 하루였다.
'용의 보금자리'에서 일어난 화재가 신문의 첫장을
장식했고 후커의 죽음은 지면의 대부분을 온통 가득
채웠다. 그 모든 얘기들은 신문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강렬한 호기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했고 그들은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읽어나갔다. 엘리자는 15분짜리
긴급뉴스에 출연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밤새도록 편집한 것이었다. 그는 오늘 밤 뉴스에서
큼직한 몫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오하라는 그
'스타'에 대한 표제를 생각하며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기사들과 함께 그 노인은
휠체어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자신의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훌륭했다.
엘리자의 총명해 보이는 얼굴이 T V화면에
나타났다. 그러나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벼운
구석은 전혀 없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시작했다.
[6시 뉴스의 엘리자 건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녀는 멋지게 해낼 겁니다.]
호웨는 그 목소리를 즉시 알아차렸다. 목소리는
사무실의 어두컴컴한 구석에 놓여 있는 식물들
뒤편에서 들려왔다.
오하라가 밝은 곳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넨 거기서 날 놀려줄 셈이었군, 대위. 도대체
자넨 그 화초들 사이에 숨어 뭘 하겠다는 건가?]
[전 공중에 상자들을 들고 있습니다.]
[뭐요?]
[그건 선(禪)에서 흔히 쓰는 수법이죠. 가상적인
것일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요?]
호웨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기자가
매스터와 그 일당들로 알려져 있는 범죄집단들에 관한
기사를 써내려 가고 있는 동안 T V뉴스를 바라보면서
이따금씩 곁눈질로 바라보곤 했다.
[그녀의 얘기보다 훨씬 더 많은 얘기가 있습니다.]
오하라가 말했다.
[그녀가 얻어낸 기사들 가운데 잘못된 건 없는 것
같군.]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아무튼, 이 뉴스가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 주겠나,
대위?]
호웨가 아주 입맛이 당기는 눈치였다.
[전국의 모든 방송국에서 이 기사를 얻고싶어
한다네. 도대체 자네의 얘기는 얼마나 계속돼야 끝이
나는가?]
[그건 다 끝났습니다.]
[잘됐군. 그녀가 얘기를 어떻게 하고 있나 한 번
보기나 하게. 그런 다음에 자네얘기를 들어보자구.
됐나, 이 친구야?]
[전 지금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빌어먹을, 뉴스 끝나고 나서 하자구, 대위. 끝나고
나서 말일세.]
[기다리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T V를 꺼버렸다. 호웨가 고개를 들고
노려보았다.
[자넨 방금 한 말 다시 한 번 해 보겠나?]
[더는 기다릴 수가 없다구요. 이건 나중에 보실
수도 있습니다. 테이프를 통해서 말이죠. 가비는 지금
그의 기록들을 모두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는
그가 지금 망가뜨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죠. 다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만 했습니다. 우린 나머지는
역사가들에게 맡겨야겠죠?]
[가비라구? 그가 어떤 사람이지?]
[그는 퀼이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그가
암살자들을 조종했습니다.]
[잘 하셨군, 젠장. 자넨 금세기에서 가장 훌륭한
얘기 하나를 못 듣게 꺼버렸단 말일세. 자, 우리 T
V를 다시 켜자구.]
오하라가 그의 말을 막았다.
[안됩니다.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제게 이야기가
있다구요.]
[그건 그거고, 이 친구야. 신에게 맹세코 우린 그
'스타'에 대해 모든 것을 완전히 폭로하는 거야.
그리고 자네에게 모든 전면기사를 내주겠네. 자,
자네가 만약...]
[아닙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구요.]
호웨가 뭔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이 T
V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듯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제 말씀은 당신이 두 가지 방법을 취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두 가지 방법이라구?]
호웨가 정말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들은 처음부터
계획했던 대로 텍사스에 있는 조그만 회사를 인수하는
일로부터 시작했죠. 그들은 누구를 죽여야 하며
회사에서 누가 어떤 장점과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그 암살자들에게 말해주었죠. 지난 날 닉슨
사건 때처럼 그것들이 정부 조직 내에서 제때에
매듭지어지지 못하면 그것은 음모라고 불리게
됩니다.]
호웨가 자신의 머리를 흔들어댔다.
[난 아직도...]
[제가 기사를 쓰는 방법은 후커의 죽음이죠. 가비와
두 사람의 텍사스의 백만 장자가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개입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거대한 연합조직이 배후에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몇 차례의 국제적 살인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르죠. 전세계의 정보기관들이
한결같이 매달리게 될 테죠. 하지만 이야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결코 드러나지 않을 겁니다.]
[그럼 그건 왜 그런가, 대위?]
[아무도 그걸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호웨가 두 눈을 빛내면서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렇지만 전 그걸 파헤치겠습니다.]
오하라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전 그
문제에 대해 제 나름대로의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전 우연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팔마우스가 보스톤의 '스타'지를 즐겨 읽었다고 해서
그가 당신을 찾아오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꼭두각시였습니다.]
[난 자네 얘기를 통 모르겠군, 대위.]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당신은 제 얘기를
아주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호웨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두 눈에 노여움이
일어났다.
[자네 얘기는 내가 이 일에 어떤 관련이라도 있다는
얘긴가?]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자네 좀 독선적인 데가 있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호웨의 책상 한 구석을 치우고 나서
걸터앉았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간에 제가 생각을 하도록
만든 사람은 퀼 또는 가비였습니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당신은 모든 일들을 정말로 누가 시작했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가엾은 레드 브리지즈는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전혀 생각도 안했던 거죠.
1945년 3월에 '키라 마루'라고 하는 일본의 공급선이
우리의 수중 어뢰에 맞은 후 도쿄로 간신히 돌아갔죠.
그 배가 건조되고 나서 승무원들이 그것을 보닌
섬으로 운반해갔죠. 5년 뒤에 레드 브리지즈라는
이름을 가진 선원 한 사람이 일본 근해에서 어선
구조작업을 하고 있었지요. 그는 '키라 마루'위에
타고 있던 두 명의 선원들에게 서명을 했구요. 그들은
그에게 화물선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고 그 뒤 화산섬
가운데 하나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수심이
얕은 바다 속으로 그 배를 끌고 들어갔죠. 그는
살펴보러 내려갔고 거기서 그가 발견한 것은
120피이트도 채 안되는 바닷속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기름 방울이었습니다. 레드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죠. 그는 자기가 본 사실을 승무원에게 누설하지
않았고 자신의 옛 친구인 알렉산더 후커에게만
알려주었던 거죠. 그 당시 그는 남부 혼슈의
군사통치자였지요. 그 일이 있게 된 후 레드는 부자가
되었고 결국 그 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죠. 그리고
그 일로 인해 후커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원유매장지역인 곳을 알고 있는 이 세상에서 단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죠.
그래서 후커는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던
거죠. 그는 그 일과 관련하여 부유한 친구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았지요.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엘리트들이었죠. 부패한 자들이 승리자가 된다는 걸
누가 알았겠습니까? 호웨씨. 당신이 존경해 마지 않는
도둑 실업가들처럼 말입니다. 피스크, 도헨리,
모르간, 그리고 나머지 다른 해적들, 당신의 보트에
걸려있는 사진 속에 있는 당신의 친구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요점을 말해보게.]
호웨가 말했다.
[요점이라구요? 요점은 당신도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중요한 직책에 수많은
사람들을 앉혀 두었죠. 제 생각에는 당신이 이
흥청거리며 마셔대는 놀이판 위에 서있는 은행가 중
한 사람이라고 보입니다. 당신은 카멜레온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윈터맨이 손을 떼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구요. 후커는 카멜레온이 정말로
위협적인 존재라고 당신을 설득시켰지요. 그리고
팔마우스는 내가 그 카멜레온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후커를 설득했던 것이구요. 후커는 몇
년동안 계획을 하고 난 뒤 너무나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기때문에 손을 뺄래야 뺄수가 없었던거죠.]
[무엇 때문에 손을 뗀단 말인가?]
[재정적 파탄 때문이었죠. 첫째도, 오일가격을
올렸기 때문에 자동차업계를 파산시켰지요. 그 뒤
프라임 레이트를 계속 올려서 부동산 업계를
침체시켰지요. 노동조합들이 무릎을 꿇도록
강요했습니다. 전반적인 공황을 초래하기에
충분했지요. 그럼 그 일이 끝났을 때 돈을 번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바로 당신이 돈을 번 것입니다.
매스터에 대한 대주주로서 말입니다.]
[터무니없이 단순화시켰군 그래, 대위. 자네 얘긴
들을게 없군.]
[후커는 실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생각지 않았던
거죠. 그는 남을 위해 일을 해주고 있었을 뿐이죠.
저로서는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여러 가지 변수가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후커야말로 모든 걸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누구라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아무도 알 수가 없겠지요.]
호웨는 휠체어에 깊숙이 앉았다.
[꿈같은 얘기를 하고 있군.]
[야심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호웨씨. 이제 더
이상의 암란도, 더 이상의 매스터도 없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암살자들을 풀어놓는 퀼도 이제는
사라졌습니다.]
[난 그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당신들 중에는 누군가가
일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알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당신이 원했던 건 결과였지요.
그렇지만 당신은, 내가 팔마우스를 카멜레온에게
데려다 주었는데도 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호웨씨.]
오하라가 바라보았을 때 그 노인은 의자 속에 축
처진 채 앉아있는 모습이 훨씬 더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자네가 이번 기사를 취재하면서
자네의 옷깃에다 어리석음이라는 벌레를 달고 온 것
같군.]
오하라는 머리를 흔들었다.
[벌레가 아닙니다. 당신과 제가 얘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난 그들이 자넬 죽이려고 했다는 걸 몰랐네.
엘리자가 오늘 아침 내게 얘기할 때까진 말일세. 내가
한 일이라고는 자네와 팔마우스를 연결시켜 준 일
뿐이라네. 후커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네. 이 카멜레온
얘기는 이제 그만 끝내는 게 좋겠군.]
[그럼 당신은 소로우에 대해서 몰랐단 말입니까?
마르짜 건에 대해서도?]
호웨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이 사건들에 대해서 완전히 결백하단
말입니까, 호웨씨? 다만 한 가지만 택하십시오.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취하진 마십시오.]
[자네의 두 가지 입장이 뭔가? 자네는 두 번씩이나
그 말을 하는군 그래.]
[제 말은, 당신은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언론인입니다, 호웨씨. 탐욕이 뒤따르고 있단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당신은 어쨌든 간에
그런 탐욕에 사로잡힌 채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카멜레온을 찾아내면 팔마우스가 그
카멜레온을 제거하고 나면 건이나 아니 어쩌면 두
사람 모두가 그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주겠지요.
만약 팔마우스가 서로 죽이면 건이 그 얘기를
당신한테 해 주었을 거구요. 두 가지 입장이라는 제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호웨가 낄낄 웃었다.
[이보게, 이 친구야.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있는지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걸세. 그렇지만 그건 그런
식으로 나타나 보일 뿐일세. 어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전혀 안 그렇습니다.]
[그래.]
호웨가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럼 어째서 안 그렇다는 건가?]
[전 당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겠습니다.]
호웨가 얼마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뒤 말했다.
[들려주지 않겠다고?]
[전 그 얘기를 저의 옛 친구에게 주겠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아트 해리스죠. 그 얘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충분한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현실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도대체 자네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오하라?]
[전 그 얘기를 워싱턴 포스트지에 주겠습니다,
호웨씨.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제 그 얘기는 당신
손에서 완전히 떠났다는 얘기이죠. 그건 당신이
원했던것 아닙니까? 익명으로 말입니다. 그건 당신이
잘 아는 방법이죠.]
호웨의 표정이 불신에서 혹시로, 그리고 현실로,
마지막으로 분노로 변해갔다.
[빌어먹을, 그럴 수는 없...]
[반드시 합니다.]
[자넬 고소하겠네, 만약...]
[불가능한 일이죠. 당신이 엎어버릴 수 없는 벌레가
가득 들어있는 깡통을 엎어버리지 않고는 말입니다.]
[자넨 도둑놈이야. 내 돈을 통째로 삼켜버리다니.]
[당신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게 있습니다.
케이프 코드에서 우리들이 했던 거래를 생각해
보시죠. 저는 원하는 때는 언제든지 그 얘기를 피할
수 있고 다른 어떤 사람이 그걸 매듭짓도록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분명히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호웨씨. 제 자신이 그 얘기를 매듭지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호웨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 미쳤군. 자네 그 모든 걸 겪어놓고는 이제 뭘
매듭짓겠다는 건가?]
[저는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습니다, 호웨씨.]
[그럼 난 뭘 가졌단 말인가?]
[익명이죠. 그러면 98 퍼센트는 당신 몫입니다.
적어도 오늘밤에는 말입니다.]
엘리자가 그녀의 사무실로 되돌아왔을 때 엘리자의
타자기 위에는 두개의 메시지가 있었다. 하나는
호웨에게 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봉투 속에
들어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찢어서 열었다. 메시지
내용은 간단했다.
사랑하는 엘리자에게!
당신이 보여준 뉴스를 보았소. 무시무시했소.
당신은 금년의 특종기사 상을 타겠지요.
나로서는 당신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더군요.
오하라.
키누가사 야마 기슭의 텁수룩한 사자의 갈기털이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 서풍은 그날 새벽에 비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토후쿠지의 탑 너머로 해가 저물어 갈 무렵에는 비는
그친 채 숲이 울창한 공원사이로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해를 뿌옇게 가리우고 있었다. 공원은
겨울에도 늘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곳을
들어섰을 때 그는 앙상하게 야윈 채 피부는 까칠했다.
그렇지만 날이 어두워지려면 아직 한 시간남짓 시간이
남아있었다. 일을 시작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가 교토의 집에 돌아왔을 때 그가 없는 동안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새로운 꽃들이
피어나지도 않았고 어떤 꽃이 떨어진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도껜루이가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들은 무한한 시간 속에 한 점의
그림자일뿐이다. 변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의 수련실에 있는 꽃병에는 싱싱한 꽃이 꽂혀
있었다. 개들이 그의 발 밑에 앉아서 쳐다보며
쓰다듬으면서 격려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가방을 열고서 자신이 사 온 '고겐세이'를
꺼내었다. 그것은 원면으로 만든, 손목이 잘록하게
되어 있는 갈색의 상의였다. 그는 자신의 옷을 벗고
그 '고겐세이'를 입었다. 피부에 느껴지는 감촉이
좋았다. 그때 그는 개들이 짓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입구에서 그를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 옷을 보고는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 다시 시작하려고 하는군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자신의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매만지고는
자신의 입술로 핥았다.
[너무 늦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내일은 그렇게 멀게 아니에요.]
그러면서 그녀는 그에게 기대었다. 그는 잠시 서
있다가 두 팔을 들어 그녀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천 일의 정진(精進)을
시작하기에는 내일이 더 나을 것이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윌리엄 딜-공포의 테러리스트 카멜레온 (1) (0) | 2023.01.24 |
---|---|
윌리엄 딜-공포의 테러리스트 카멜레온 (2) (0) | 2023.01.24 |
일게보르크 바하만 삼십세 (0) | 2023.01.24 |
잉게보르크 바하만 동시에 (0) | 2023.01.23 |
자크린느 클랭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 90가지 (0) | 2023.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