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만난 어린왕자
장 피에르 다비트
이 지구에 들린 어린 왕자들에게
만일 금발머리를 가진 어떤 사내아이 하나가
당신에게 다가와 미소를 지어 보인다면,
그리고 말을 건네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아이가 누군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면, 제게 친절을 베풀어 주십시오.
날 이토록 슬픔에 잠겨 있게 내버려 두지 마시고
그 아이가 돌아왔다고 편지를 써서 알려 주십시오 ... .
앙트완 드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생텍쥐페리 선생님에게
오늘 이렇게 펜을 들게 된 것은 제게 아주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 제가
선생님처럼 여행광이라는 걸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정신적인 여
행광이지요. 전 여행을 많이 했거든요. 그렇지만 실제로는 제 의자를 떠나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무슨 애기냐구요?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꼼짝하지 않고도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지요. 전 집 안에서
여행하기로 했습니다. 지도, 여행 안내서, 기행문, 메모 따위로 무장한 뒤, 지구상에 있는
어떤 곳을 매일 한군데씩 방문하는 겁니다. 전 그 상상 여행을 제 의무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 셀레브 바다의 장엄한 석양, 엘스미어 섬 북쪽 지방에 커튼처럼 드리워지는 찬란한
오로라, 움직이지 않는 황금빛 파도 같은 사하라 사막의 강대들, 생명으로 우글대는 루이지
애나 지방의 강물, 그 지방의 늪지대를 둘러싸고 있는 사이 프러스나무들... 다른 여행가들이
들려주는 그 많은 추억담을 읽으며, 저는 얼마나 아름다운 밤들을 보내쓴지 모릅니다.
이 상상 여행을 하는 동안에 저는 이국적인 이름의 여행지들을 특히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이 적도처럼 펄펄 끓는 곳이든, 북극이나 남극처럼 얼어 붙은 곳이든, 그런 건 중
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지요. 글쎄요, 방 안에서는 기온이 별로 바뀌지 않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키욕퓨라는 곳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걸 말씀드려야 겠군요. 키욕퓨는 미얀마의
아라칸 연안 평양에 있는 곳인데, 발음하기 어려운 지역이지요. '키욕퓨'라는 발음은, 성대를
자극한 뒤, 입천장을 빠져나온 다음, 혀를 힘들게 굴리게 하고, 마지막엔 이빨에 부딪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틀림없이 방문하기에 즐거운곳일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보나마나
관광객들이 별로 찾아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시겠지만, 사람들은
복잡한 걸 싫어하니까요. 사람들은 그런 지명을 너무나 싫어하지요.
발음을 잘못해서 망신당하게 될까봐 요새는 망신당했다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도 여전히 마음의 상처는 입거든요. 그런 이름을 감히 입밖에 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존심을 지키느라고 그렇게 지명이 괴상한 곳은 아예 포기해 보리
는 거죠.
사람들이 그렇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여행을
떠날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나 여행 가네."
그러자 그들이 말했지요.
"부라보, 여행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바람도 쐬게 될 테고, 하루 종일 방안에 처박혀 지낸다면,
그게 어디 사는 건가? 그런데 어디로 가나?
이탈리아? 영국? 아님, 앙티유로 가나?
"키욕퓨에 가네."
그러자 그들의 얼굴표정이 금세 바뀌었습니다.
"키아 ... 음... 키요 ...흠! 아, 그래,"
언젠가 그곳 애길 들었네.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
그런데 어머니께선 어떻게 지내시나?
그래서 저는 생각했지요. 내가 짧은 인생살이 동안 의자를 떠나 딱 한 번 진짜로 여행을
하게 된다면, 그건 키욕퓨로 가기 위해서일 거라고 말입니다.
지도 위에서 하는 상상 여행이 아니라 진짜 여행을 해야 할 때 짜증스러운 것은,
다른사람들과 함께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전 인간혐오주의자는 아닙니다만, 다른사람이
옆에 있으면 불편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게다가, 집안에서 여행할때는, 키슬로포드스크나
쇠데탈예 같은 곳에 제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실컷 머물 수 있거든요. 그렇지만 제
여행 동료들은 저하고 생각이 다를 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들은 로만, 파리, 런던이나
뉴욕처럼 이름이 덜 괴상한 평범한 장소들을 더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여러 살마의 희망을 위해서 개인적 생각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점잔 빼느라고 괜히 한번 해보는 말은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키욕퓨를 방문하려면, 혼자 떠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의자에 앉아 지내기 때문에, 저는 불편한 걸 잘 참고 견디는 훈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란스러운 사치 대신에, 스파르타적인 효율서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편안하지만
느린 유람선 대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평범한 화물선을 타고 가기고 했던 겁니다.
생텍쥐페리 선생님, 선생님께서 전에 출간하신 책을 읽어 보니까, 선생님께선 비행사의
피를 가지고 계셨더군요. 선생님이셨다면, 그냥 휙 날아가셨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공기
보다 더 무거운 걸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게 별로 내키질 않아요. 하늘 높이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세상은 너무나 조그마해서, 마치 지도가 펼쳐지는 것같이 느껴지지요.
어떨 때는 지도를 보는 것보다도 못해요. 풍경은 양떼처럼 흩어져 버리고, 형태를 알 수
없는 구름 낀 산정밖엔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물과땅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그것들과 하나가 되는 것,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것입니다.
떠날 결심을 하고 가방을 꾸린 뒤, 제일 가까운 항구에 가서 그곳에 정박시켜 놓은 배의
선장에게 물었습니다.
"키욕퓨로 가십니까?"
"어디라구요?"
"키욕퓨요."
"어딘지 모르겠는데요."
"형편없군. 일 좀 제대로 하십시오."
"허 참. 별살마 다 보겠군. 예의를 지키시오."
나는 실망했습니다.
나는 정박지 맨 끝에 있는 배에 다가갔습니다. 그건 고물 화물선이었는데, 시커먼
선체에서는 시뻘건 녹물이 줄줄 흘러내려와 있고, 상감장식이 되어 있는 용골의 색깔은
희끄무레했습니다. 뱃머리에 스킵스크젤렌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는데, 어쩐지 예감이
좋았습니다. 나는 낡아서 건덩거리는 그 배의 사다리를 씩씩하게 올라 가서, 선장을
찾았습니다. 선장은 선장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찌나 털보였던지, 오랫동안 험한 파도에 시달려 움푹 패인 듯한 얼굴이 수염에 가려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닻 모양이 수 놓여 있는 마린 블루색 점퍼를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노련한 마도로스더군요. 그는 입에 파이프를 물고, 제조연도가
붙여 있는 럼주 잔을 홀짝대고 있었어요. 럼주의 호박빛이 마치 카리브해의 반영처럼
그의 어두운 푸른색 눈동자 속에 어른거렸습니다.
나는 덤벼드는 것처럼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키욕퓨에 가고 싶은데요.."
그는 고개를 들고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양쪽 뺨에 뒤덮고 있는 검은 해초 같은 구불구불한 수염이
옆으로 치워졌습니다.
"키욕퓨라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지. 통금시간이 끝나면, 내 취향으론 좀 지나치게
조용한 게 흠이긴 하지만 ... 승선을 축하하네. 풋내기 선원 양반. "
그 다음날 우리는 바다 멀리 나아갔어요.
생텍쥐페리 선생님, 그건 정말 너무 멋진 항해였습니다! 선장과 나는 당장 그 자리에서 형
아우 하며 친해졌습니다. 선장은 겉보기엔 무뚝뚝해 보였지만, 황금 같은 가슴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세계 이곳 저곳에서 겪은 모험담을 하루 해가 다 가도록 며칠씩
들려 주곤 했어요. 우리 두 사람은 각자 항진 상황을 점검했습니다. 근느 알쏭달쏭한
숫자들이 잔뜩 쓰여 있는 해군 제독의 지도를, 나는 바드르 후 나인, 라스 아시 - 샤르비탓,
스리바르단, 라크샤드윕, 티루바난타푸람,챠바카치케리, 파리파릿, 큔같은 야성적인 이름들이
줄줄이 쓰여진 내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말입니다.
해가 저물면, 나는 그를 만나러 선장실로 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우린 그의 파이프에서 솟아
나오는 향기로운 파르스름한 담배연기에 둘러싸여 이런저런 애기들을 주고받았습니다.
그 파이프는 당연히 '바다의 거품'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마그네사이트로 만들어진 파이프였지요.
선장은 싸구려 독주를 사나이답게 단숨에 쭉 들이켜고는 다시 한 잔 따른 다음, 황당한 모험담들을
들려 주곤 했어요. 나는 일곱 개의 바다와 사대양을 따라 멀리 극지방까지 헤매고 다녔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했습니다.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는 내 지도에 흩어져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지명들에게 마술처럼 생명력을 불어 넣었고, 그의 추억은 4도 인쇄된 내 지도책을 무지개 빛으로
물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안다남 해에 웅장한 석양이 드리워졌습니다. 석양은 마치 천상의 그림
같았습니다. 황토색과 붉은보라색, 그리고 쪽빛이 한데 섞여 수천 가지 미묘한 색깔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계절풍이 우리를 덥쳤습니다.
미친 듯이 날뛰는 바람과 파도가 배를 마구 뒤흔들었어요. 양쪽 방향으로 잡아당겨진 선체는
밤새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얼마큼이나 심각한 위험이 닥쳐왔는지도 모르고, 나는 파자마 위에다
방수복만 걸친 채 태풍 속으로 나섰습니다. 자기 작은 배가 침몰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선미 쪽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는 선장을 도울 생각이었지요.
함석판들과 으르렁대는 바람이 요란스러운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운이 나쁘려고
그랬는지, 나는 물이 들이닥치는 갑판위에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배가 좌초했고,
그 바람에 나는 파도에 휩쓸려 배 바깥으로 튕겨져 나왔습니다.
제 수영 솜씨라는 게 형편없습니다. 운좋게 나무판자 하나를 붙잡을 수 있었기 망정이지,
안 그랬더라면 바닷무을 실컷 마시고 죽었을 겁니다. 난 악착같이 내 구세주인 나무판자에
매달렸습니다. 이윽고 바다가 잔잔해지고, 하늘이 지저분한 색깔을 벗어버리고 다시
투명해졌을 때, 전 제가 어떤 작은 섬에 표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진 거라곤
신고 있던 슬리퍼 두 짝이 전부인 상태로 말이지요. 정말이지 그 순간에는, 의자 위에
앉아서 하는 상상 여행말고 다른 방식으로 여행하려면, 언짢은 일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건 마치 손수건처럼 조그만 섬이었지요. 모래더미 위에 심겨 있는 야자수 한 그루처럼
보였어요.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있는 아무곳도 아닌 곳. 한없이 펼쳐진 푸르른 망망
대해 위에 찍혀 있는 초록색 먼지 알갱이 같은 곳.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불행히도, 나의 새로운 왕국에는 나라는 신참 로빈슨 크루소에게 섬
생활의 에이비씨를 가르쳐 줄 프라이데이가 숨어 있지 않았습니다. 섬 한가운데에는,
자연의 조화인지, 바위더미 사이로 솟아오르고 있는 샘이 하나 있더군요. 샘물은 꼴록꼴록
재미있는 소리를 내며 알록달록 여러 가지 색깔의 열매가 달려 있는 열대 식물들에게 물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이 섬에서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파서 죽을 염려는 없게 된
것이지요.
생텍쥐페리 선생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께선 절 모래 바다에 표류하게
만드셨어요. 물로 만들어진 사막에 파묻히게 하셨단 말입니다. 바다에 둘러싸인 사막이라니
얼마나 아이로니컬한 이야기입니까! 전 예기치 않은 일을 겪게 되는 모험가각 되기에는
별로 적당한 인물이 못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상황 변화에 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선 그런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시겠지요.
인정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많건 적건 세계를 돌아다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저 같은 안방 모험가보다는 좀 나았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난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저는 그냥 가장 소극적인 해결책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불운에 기죽지 말고 구원의 손길이 뻗쳐올 때까지 가만히 웅크리고 기다리기로 한것입니다.
나는 만일 스킵스크젤렌이 침몰하지 않았다면 -침몰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으므로 -선장이
달려와 나를 구해 줄지도 모르며, 그렇지 않더라도 조만간 운명의 여신이 미소를 보내
준다면, 어떤 선박이 이곳을 지나다가 모래 뗏목처럼 바다에 동동 떠 있는 이 작은 섬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난파당한 사람은 인내와 낙관주의라는 두 개의
젖으로부터 양분을 위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가능한
한 편 한 자세로 야자수 밑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자 피곤이 엄습해 와서, 나는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얼마 동안이나 꿈의 신 모르페우스의 품에 안겨 있었던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갸날픈
목소리가 무엇인가 물어보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아저씬 호랑이 사냥꾼이야?"
나느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 아이를
발견했던 겁니다.
생텍쥐페리 선생님, 그 아이의 모습을 굳이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요? 선생님께서 그
아이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다만, 그 애가 황금빛 태양으로 가득
찬 7월의 밀밭 같은 금발머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만 분명히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또
그 아이의 옷차림에 대해서도요. 파도가 스며든 단단한 모랫덩어리 위에서 그런 옷을 입은
아이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 아이는 궁전의 대리석 기둥
사이에 있어야 어울릴 것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아이 곁에서는 양 한 마리가
야자수 잎사귀 하나를 느긋하게 오물오물 씹어먹고 있었습니다. 양의 두 눈 속에는
무심함이 가득차 있었어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고통에 물들지 않게 만들어 주는
그 무심함 말입니다.
내 머리에 처음 떠오른 생각은,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배 한 척이 해안에
도착했나 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위를 둘러보고, 눈을 가늘게 뜨고 수평선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작은 미지의 인물에게 부탁했습니다. 내
은둔의 땅에 그를 데려다 준 배가 어디 있는지 나에게 가르쳐 달라고 말입니다.
그 조그만 아이가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곤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아저씨는 호랑이 사냥꾼이야?"
어떨 땐 어린아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어른을 설득할 때 보다도 훨씬 더 복잡한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이 녀석을 윽박 질러서 억지로 말하게 만드는 건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반대로, 같이 놀아 준다면, 아이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배가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나는 아이의 말에 대답해 주기로 했습니다.
"아니, 난 호랑이 사냥꾼이 아냐, 부모님은 어디계시니? 배에 계시니?"
아이가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아저씨도 모른 모양이지?"
"안됐지만 모르겠구나. 우리 이제 배로 돌아가야 하지않을까? 엄마가 걱정하시겠구나. "
"이 근처에 어디 호랑이 사냥꾼이 살고 있는지 아저씨 몰라?"
나는 숫제 허공에 대고 말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파자마 바람에 슬리퍼를 신고, 작업 테이블에 아서, 조용히 지도를 뒤적거리는 우리
집이 아니라 적도에 보베르성(악마가 출몰한다는 전설이 있는 파리 근교에 있는 성) 같은
먼 곳에 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이가 자꾸 호랑이며 호랑이 잡는 사람들 애길 하는
게 정말이지 참기 힘들 정도로 짜증스러웠습니다.
아이는 따지듯이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이 근처에 어디 호랑이 사냥꾼이 살고 있는지 아저씨 몰라?"
나는 결국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몰라, 여기엔 호랑이 사냥꾼 같은 거 없어. 호랑이 사냥꾼은 호랑이가 사는 곳을 더
좋아하고, 호랑이는 이 섬처럼 웃기지도 않는 조그만 섬보다 울창한 밀림을 좋아한단 말야!"
아이가 내 말에 항의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밀림이 아냐. 그건 아주 작아. 그렇지만 호랑이는 살고 있단 말야."
그 말을 듣자, 내 마음에 의심이 생겨났습니다.
"넌 배를 타고 이곳에 온 게 아니구나. 그렇지?"
"배를 타고 왔냐구? 그거 재미있는 생각이네."
아이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하하 웃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심각해지더니 이렇게
물었어요.
"만일 호랑이를 만난다면, 아저씨는 어떻게 호랑이를 잡을 거야?"
그 문제가 아이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 주기
전에는 계속해서 물어댈 것 같았습니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모르겠다. 난 그런 거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적 없다. "
아이는 내 대답을 듣고 실망한 눈치였습니다.
"어떡하지. 큰일났네."
난 그 아이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는지 물어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그 수수께끼를 나 혼자서 풀어볼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이 조그만 아이가 성령의
기적으로 태어난건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양까지 한 마리 데리고 있는 걸 보면
더더욱 그럴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섬을 다시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 수평선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객선도,
요트도, 돛단배도, 대형 보트도, 소형 보트도, 카누도, 쪽배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태풍이 난 같은 희생자를 또 하나 이 섬으로 실어온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 시련을 겪으면 제 아무리 침착한 모험가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 아이가
호랑이가 허허벌판에 출몰한다는 둥 앞뒤 안 맞는 아야기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
이 섬의 표류자 인구가 갑자기 두 배로 늘어났다는 생각이 들자, 한숨이 나왔습니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나는 샘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습니다. 어린 왕자가 내 뒤를
졸졸 따라왔습니다.
생텍쥐페리 선생님, 그 당시에 저는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제 불행의 동료에게 '어린 왕자'라는 별명을 저절로 붙여 주게 된 겁니다. 괴상한
옷차림과 오연한 태도, 세련된 말투 등, 아이는 어딘가 왕자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어린왕자는, 길잃은 어린아이들이 처음 만난 사람이 기꺼이 이야기를 들어 주고
조금이라도 다정함을 보여주면, 그 사람에게 매달리듯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던 것입니다.
나는 내가 화를 냈다는 사실을 뉘우쳤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똑같이 난파당하게 된 것이
어린왕자의 잘못은 아니니까요.
약간은 미안하기도 솔직하게 말하면 호기심이 동하기도 해서, 나는 어린왕자에게 다시
말을 걸어 보았습니다.
"어째서 호랑이를 죽이려고 하니?"
"죽인다고? 난 호랑이를 죽이고 싶지 않아! 그냥 잡으려는 거야."
나는 어린왕자가 '잡는다'는 말을 그냥 '다른 데로 옮긴다'라는 뜻으로 쓰고 있다는 걸
갑자기 알아차렸습니다. 잠깐 동안이나마 어린 아이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니, 부끄러워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그 생명이 아무리
호랑이처럼 사나운 짐승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어디에서나 악을 찾아내려 드는 건
어른들의 나쁜 버릇입니다. 특히 악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어른들은 악을 찾아내려
들지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에 대해서 내가 둘러댈 수 있는 한심한 핑계라는 게 고작
그런 거였죠.
내 경솔한 말이 어린왕자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한 것 같아서, 나는 솔직하게 사과한
뒤, 머릿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해결책을 제안해 보았습니다.
"덫을 놓으면 어떨까?"
"덫을 놓는다구?"
"그래. 구덩이를 파서 호랑이를 잡는거야."
어린 왕자가 다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안 돼! 내 별은 너무나 작아서 그랬다간 구멍이 나 버릴 거야."
별이라니! 나는 어린 왕자가'별'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걸 듣고 기절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렇지만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엔, 그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게 솟아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이 조금만 아이가 양 한 마리를 데리고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왔다는 것이
나에겐 그야말로 말도 안된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데카르트적 논리로 교육받은 내 정신은
아이의 우연한 출현을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해 로려고 선생님의
작품들을 읽어보았습니다만, 이 주제에 관한 제 생각은 아직도 확고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린왕자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태풍 때문에 떠밀려온
나무를 보고,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지피면, 꽤 큰
모닥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죠. 성냥이 없었기 때문에 내 안경 렌즈를 이용할
생각이었습니다. 렌즈를 돋보기로 이용해서 이글거리는 적도의 태양열을 끌어모으면,
잔가지들을 모아 불을 지피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 겁니다. 불을 피우고, 거기다
싱싱한 나뭇잎들을 던져 넣으면,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날 테지요. 그러면, 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이 근바을 항해하는 배에 타고 있는 망보는 선원이 연기
신호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는데다가, 또 내가 알고 있는 생존 기술이라는 것이 초보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에, 당장은
우리를 구출해 줄수 있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불을 지피기 위해서 부지런히 준비하는 동안, 온갖 질문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이 괴상한 아이는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누굴까? 여기에 어떻게 도착한 거지? 그리고
어째서 양 한 마리를 데리고 어슬렁거리고 있는 걸까? 풀고 싶은 수수께끼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불행하게도, 나의 동료는 별로 말이 없었고, 질문을 던져도 대답하기는커녕,
자기가 오히려 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 식으로 내 질문을 교묘하게 피해
버렸습니다.
그는 이리저리 왔다갔다가 하는 내 뒤를 가만히 따라다녔습니다. 조용한 눈길로 내가 불
피울 준비를 하는 걸 지켜보았어요. 내가 낮은 곳에 있는 야자수 잎사귀를 잡고, 그걸
뜯어 내려고 잡아당기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내가 야자수 잎사귀를 잡아당기자, 어린왕자는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는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걸 왜 잡아당기는 거야?"
나는 참을성 있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잎사귀로 덮어놓으면 불에서 연기가 많이 나거든, 운이 좋으면, 우리가 보내는 신호를
누군가 알아보고 우릴 구해 줄 거야."
"그건 나무를 아프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없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나무들은 아무것도 못 느껴."
어린 왕자는 그런식으로 말하는 걸 참지 못했어요. 아이는 정말 화가 난 얼굴이
되어갔습니다.
"내 별에는 아주 예민한 꽃이 하나 있어."
난 더 이상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왕자가 어른들의 합리성을
아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린 왕자는 계속해서 주장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냐."
나는 어린 왕자가 한 말에 숨겨져 있는 지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어린 왕자는 덧붙여 말했습니다.
"내 꽃은 가시 하나를 잃어버렸어.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난 장미가 아팠다는 걸 알아. 잎사귀 끝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리는 걸 봤거든."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의 장미가 어쩌다가 가시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자존심 때문이었어."
내가 자기 장미에 대해 보여 준 관심이 열려라 참깨처럼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어린 왕자가 갑자기 말문을 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어린 왕자는 지금까지 거의
수도사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고는 도조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호랑이 이야기를 알게 되었던 겁니다.
생텍쥐페리 선생님, 어린 왕자의 별에 대한 묘사를 늘어놓아 선생님을 귀찮게 해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오! 서커스단이 그 별에 오래 머물렀던 건 아닙니다. 별이 너무나
작아서, 코끼리 한 마리, 단봉낙타 한 마리, 말 두 마리, 물개 세 마리, 그리고 호랑이
한 마리를 포함해서 그렇게 많은 식구들이 머물기엔 너무나 좁았거든요.
서커스 단장은 서커스 공연에 박수를 쳐줄 관객이 한 사람밖에 그것도 어른 요금의
절반 요금을 내는 어린이 관객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그는
요즘엔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들어, 어쩌고 하면서 투덜댔어요.
그는 짐을 꾸려 가지고 관객이 더 많거나, 아니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당장 떠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호랑이 우리가 잘 닫혀 있지 않아서 호랑이가 도망쳐 버린 거예요. 어린 왕자는
불이 커져 버린 자기 화산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이런 자연 현상에 대해선
아무리 신중을 기해도 지나치지 않죠.'을 청소하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호랑이가 화산 분화구에 숨어 있었던 거예요.
어린 왕자가 호랑이에게 물었습니다.
"안녕, 넌 왜 숨어 있니?"
"쉿! 단장이 듣겠다. 그가 날 잡으러 올 거야. 날 우리에 다시 집어넣으려는 거지.
그런데 난 우리로 돌아갈 생각이 조금도 없어."
"무서워하지 말고 나와. 서커스단은 떠났어."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호랑이는 숨어 있던 곳에서 껑충 뛰어 나와서, 몸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습니다.
그리고 공기를 깊이 들어마셨습니다.
"이상하군. 창살 사이로 마실 때마다 공기가 휠씬 더 좋은 것 같애. 쇠 때문에 공기가
나쁘게 느껴졌나?"
"왜 우리에서 도망쳐 나왔니?"
"우리안에 있으면 기분이 안 좋아?"
호랑이는 바닥에 앉았습니다. 그는 앞발을 들고 앞뒤로 살펴보더니, 그 크고 까칠까칠한
혀로 정성스레 닦았습니다.
"난 이제 여행하는 게 지겨워. 이틀이나 사흘쯤 머물다가 짐을 몽땅 다시 꾸려가지고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는 게 너무 피곤해.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그 연습은 또
어떻고, 지겨워 죽겠어! 짧은 휴가 기간에나 좀 쉴 수 있을 뿐이야."
호랑이는 주위를 돌아보았어요.
"이 화산들 그런대로 근사한데...
그런데, 네 별엔 나무가 별로 없구나. 난 우거진 숲이 좋은데, 내가 태어난 밀림을
생각나게 하거든. 하지만 현재에 만족할 줄 알아야지. "
어린 왕자가 말했습니다.
"그럼 난 이만. 할 일이 있어서."
"내가 도와 줄게. 마비된 발을 좀 풀어 줘야 하거든. 우리 안에 갇혀 지내다 보면,
빙빙 돌기만 하니까 똑바로 걷는 법을 잊어버리게 돼."
생텍쥐페리 선생님,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어린 왕자는 일종의 생물학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죠. 자기 별을 집어삼키려고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는 바오밥나무 싹을
모두 뽑아 버리는 일 말입니다. 나중엔 편지를 써서 양의 도움을 청했지요.
우리 주위에 어슬렁거리고 있던 양이 바로 그 놈이죠. 매일 저녁, 어린 왕자는 양을
조심스럽게 상자에 다시 집어넣었지요. 한편으로는 양 같은 동물들은 밤에는 자기
집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양이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어린 왕자각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꽃을 무심코 먹어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양을 발견하자, 호랑이는 윗입술을 씰룩거리며 위로 말아 올렸습니다. 야수들이 먹이를
발견했을 때 그러는 것처럼 말예요.
" 이 별에는 정말 놀라운 일투성이군. 어린 왕자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양도 한 마리
있네. 난 언제나 양순한 짐승들을 좋아했지."
호랑이의 상냥한 말투가 어린 왕자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호랑이의 태도를 잘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겉으로는 상냥해 보이는데, 어쩐지 그런 태도 아래에 어두운 그
무엇이, 위장된 위협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에는 쓰레기가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양을 상자 속에 안전하게 넣은 뒤, 어린 왕자는 꽃을 돌보러 갔습니다.
"흥, 일찍도 왔구나."
꽃이 불평했습니다. 어린 왕자가 지나번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도 꽃은 똑같은 불평을
늘어 놓았었지요. 꽃은 '널 만나게 돼서 너무나 기뻐'라든가 '너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나
않았나 하고 걱정했어'라고 말하는 대신에, '일찍도 왔구나'라고 말했어요. 물론 그 꽃은
가시 네 개를 가지고 있는 아주 자존심이 강한 장미였지요. 꽃은 자기가 사실은 조금 걱정
했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털어놓지 않았을 거예요. 어린 왕자가 꽃에게 물을 주고 있는동안,
꽃이 물었습니다.
"누굴 데레온 거지?"
"아무도 아냐, 그냥 호랑이 한 마리야."
바람도 분 것도 아닌데, 장미 잎사귀가 파르르 떨렸습니다.
"호랑이를 달고 다니다니! 정신 나갔니? 그건 너무나 위험한 짓이야! 자, 빨리 내 뒤에
숨어. 내 가시로 널 보호해 줄게."
장미가 그렇게 반응하는 걸 보고 어린 왕자는 감동했습니다. 그는 장미가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체햇던 것이라고, 그리고 장미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호랑이는 어린 왕자와 장미가 주고 받는 대화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모두 듣고는
잔인하게미소지었습니다. 으르릉 거리며 송곳니까지 사납게 드러냈습니다.
하,하,하! 꽃이 호랑이를 상대로 싸우려고 한다구!
그렇게 웃기는 애기는 처음 들어본다.
분노와 수치심으로 빨갗게 달아오른 장미는 더욱더 오만하게 아름다웠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장미는 줄기를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자기 가시를 당당하게 내밀었습니다.
호랑이가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웃어요. 마음껏 웃어봐요. 하지만 이 가시들은 아주 뽀족한 바늘처럼 날카롭다구요.
악어 가죽처럼 제 아무리 단단한 가죽이라도 뚫을수 있어요.
그러자 야수는 터커의 언월도 처럼 생긴 발톱을 들어보이며 빈정댔습니다.
그 가시를 가지고 내발톱과 싸워 보겠다구?
자기 가시로 그런 무기에 대항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장미도 모르지 않았지요.
그러나 장미는 자존심을 지킬 줄 아는 용감한 꽃이었어요. 장미가 대답했습니다.
난 무섭지 않아요.
호랑이는 미소가 사라졌습니다.
유감이군. 무서워하는 게 더 나을 텐데.
호랑이는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더니 장미 가시 하나를 부러뜨렸습니다. 꽃은 비명을 지르지도,
신음소리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수액 한 방울이 상처난 자리에 맺혔을 뿐입니다.
어린 왕자는 당장 항의했습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장미 가시가 네에게 아무 해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몰라서 그래?
호랑이가 발을 핥으면서 가소롭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네 꽃이 잘난 체했잖아. 마땅한 벌을 받은 거라구. 분수를 지킬줄 알아야 곤란한 일들을
피할 수 있는거야. 그나마 네 꽃은 운이 좋았던 거야. 장담한건대. 나나 되니까 그렇게
관대하게 행동한 거야. 다른 호랑이였다면 훨씬 더 가혹한 벌을 내렸을 걸.
그게 변명거리가 될 것 같아? 꺼져 버려. 다시는 여기서 널 보고 싶지 않으니까.
겁주는 거야? 우리네 호랑이들은 말이지. 무서워하는게 없다구. 뭐,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지. 날 귀찮게 하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할걸. 너라고 네 꽃보다 더 강할 것도 없으니까
말야. 어쨌든, 이 별은 내 맘에 들어. 양도 늘어날 테고, 또 양들이 다 없어진다고 해도
어린 왕자들이 남아 있을 테니까. 또 바오밥나무 싹을 본 것 같기도 한데. 그 나무들이 자라면,
이곳은 더 기분 좋은 곳이 될 거야. 내가 태어난 밀림과 비슷해질 테니까.
그리고 나서, 호랑이는 별의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동이 터오고 있었어요. 호랑이는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쪼이고 싶었던 거예요.
호랑이는 사라지고 난 뒤, 어린 왕자는 자기 꽃의 줄기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액을 조심스럽게
닦아내었지요. 가시가 떨어져나간 자리에 수액 한 방울이 맺혀 있었어요. 껍질 아래로 부드러운
살이 드러나 보였어요.
장미가 당당하게 말했어요.
내버려둬, 벐서 아무렇지도 않은데 뭘. 그러지 말고 빨리 떠나기나 해. 호랑이가 곧 돌아올
테니까. 호랑이는 양을 집어삼킬 거고, 다시 배가 고파지면 그땐 널 잡아먹을 거야.
호랑이는 못돼서 그런게 아냐. 그냥 본성이 그런 것뿐이야.
난 널 지켜주고 싶어. 하지만, 불행하게도 호랑이 말이 맞아. 난 한송이 꽃에 불과한걸.
양을 데리고 어서 이곳을 떠나,
그렇지만 내가 도암ㅇ치면 넌 어떡하구?
괜찮아. 걱정하지마. 호랑이가 날 좀 괴롭힐지도 모르지. 힘센 자들은 다 그러니까.
그들의 힘이라는게 약한것들을 괴롭혀서 얻어지는 거니까. 하지만 걱정 마. 호랑이는 날
잡아먹지 못해. 내 가시가 아무리 별 볼일 없어 보여도, 날 삼키면 가시가 목구멍에 걸릴
테니까. 그리고, 난 바오밥나무 뿌리들 사이에서 언제나 숨을 만한 곳을 찾아낼수 있어.
그 나무들이 날 너무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말야. 자, 이제 얼른 도망쳐!
여기까지 말하고, 어린 왕자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나는 그의 얼굴에 깊은 슬픔이 드리워지는 걸
보았어요. 나는 그의 침묵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멀리 떨어져 있는 자기 별에서,
야수의 자비에 맡겨져 있는 자기 장미를 생각하고 있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지요. 어린 왕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깊은 사랑으로 자기 장미와 맺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생텍쥐페리 선생님, 선생님의 책을 읽어보니, 선생님께서는 저보다 먼저 그 사실을 알고
계셨더군요.
어린 왕자가 이렇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걸 보면, 자기 꽃의 현명한 충고를 따랐던 모양입니다.
너무나 여행을 좋아하는 저는, 그의 여행이 어땠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몽상에서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하던 얘기를 게속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침묵속에 빠져 버린
겁니다. 그의 별에선 침묵도 타고난 본성인 모양입니다.
생텍쥐페리 선생님, 말씀드리기 부그러운 일입니다만, 저는 어린 왕자가 자기 얘기를 더 털어놓게
만들기 위해서, 한 가지 계략을 사용했습니다. 다시 그의 꽃에 대해서 물어 보았던 겁니다.
기대했던 대로, 그 얘기는 어린 왕자의 말문을 열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내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만큼 많은 애기를 쏫아 놓았습니다.
장미의 충고를 듣고 나서, 어린 왕자는 양이 잠자고 있는 상자를 들고, 그때 마침 그의 별을
스쳐지나가고 있던 별에 올라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의 별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떠난 거지요. 그는 가능한
빨리 돌아가 침입자를 쫓아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쫒아낼 섯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왕자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보를 얻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누군가 틀림없이 그에게 방법을 가르쳐 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만난 별에 내렸습니다.
수평선을 한번 휙 살펴보았더니, 잡초들이 드문드문 자갈투성이 땅을 어지럽게 덮고 있었고, 군데
군데 키 작은 관목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관리 상태가 좋지 않은 별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알 수
있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다시 떠나려고 발을 막 드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소리를 버럭 질러
질러댔습니다.
거긴 안돼, 이 멍청아!
어린 왕자는 멈추어섰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동그란 구식 안경을 코 끝에 걸치고, 누더기옷을
입고 있는, 수염과 머리털이 텁수룩한 사나이가 서 있었지요. 새로 등장한 이 사나이는 자연의
품에 안겨 살기 위해서 동료들을 떠난 환경주의자였습니다. 그가 다가와서 다짜고짜 야단을
쳐댔습니다.
도애체 뭘 보고 다니는 거냐? 하마터면 인시그니피카 미누스쿨라를 밟아 죽일 뻔했잖아.
지난번 조사때 보니까, 육십삼만오천십칠 개밖에 안 남았던데 말이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는 인시그니피카 미누스쿨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걸요.
자, 봐라.
시커먼 손톱이 달린 빼빼 마른 손가락으로 환경주의자는 회색 바위에 찍혀 있는 초록색 점처럼
생긴 이끼 하나를 가리켰습니다. 어린 왕자는 그렇게 조그만 식물이 뭐가 그리 중요한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육십삼만육천오백육십개나 남아 있는데 뭘 그런담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렇지만 감히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환경주위자가 말했습니다.
자, 가자. 여기 더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왜요?
사나이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림자 때문이지! 우리 그림자 때문에 환경체계에 혼란이 생기잖느냐. 네가 오기 전에는
그림자가 없었단 말이다. 네가 여기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식물들은 햇빛을 빼았기는
거야. 그 때문에 식물들은 고통을 받고,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단 말이다. 우리 별에선 자연을
괴롭히지 않으면서도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있다. 자, 내가 하는 대로 하면서 나를
따라오너라.
환경주의자가 앞장섰습니다. 어린 왕자는 환경주의자가 시키는대로 하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걸음걸이가 너무나 괴상했기 때문입니다. 코가 따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구부리는 바람에, 안경이
계속 긴 매부리코 위로 흘러내렸어요. 그런 자세로 그는 한 발 앞으로 내딛기 전에 자기 앞에 있는
땅을 꼼꼼히 검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선, 지금 막 검사를 끝낸 땅 위에 발가락 끝을
살그머니 내려놓았습니다. 그렇게 달팽이 걸음으로 지그재그로 걸어가느라고, 겨우 1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가는 데 거의 세 시간이나 걸렸지요. 그리고 나자, 거대한 너럭바위가
나타났습니다. 매끄럽고 텅 빈 너럭바위 위에 이것저것 긁어모아 지어 놓은 엉성한 집이 비스듬히
서 있었고, 흙을 집어넣은 바위 틈에서는 비실비실한 당근과 무가 자라고 있었지요.
그 괴상한 체조 같은 지그재그 걸음 때문에 지친 환경주위자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털썩 주저
앉았지요. 그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습니다.
당근 하나를 네게 주고 싶다만, 드로소필라 메가루시퍼가 모두 갉아먹어서...
드로소필라 메가루시퍼가 뭔데요?
성깔이 돼지 같은 조그만 파리인데, 어찌나 시끄럽게 왱왱대는지, 귀를 막아봐야 소용이 없어.
유색 채소만 보면 찌끄러기 하나 남가지 않고 악착같이 먹어치운단다.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이야. 난 당근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거든. 그런데 나만 계속 지껄여대고
있구나. 여기 온 목적이 뭐냐? 네가 들고 있는 그 상자속에는 뭘 그렇게 귀하게 모셔 놓은 거냐?
어린 왕자가 천진난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양이에요.
환경주위자의 얼굴이 시커매졌습니다.
그 안에다? 부끄럽지도 않니? 만일 누군가 널 거기다 가두어 놓는다면 기분이 어떻겠니?동물들은
바깥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도록 창조된존재들이야. 그렇게 좁은 곳에다 넣어두면 안 돼.
어린 왕자가 변명했습니다.
여행하느라고 그랬을 뿐이에요. 지금 당장 풀어줄게요.
그 말을 듣자, 환경주의자의 머리카락이 쭈볏쭈볏 일어섰습니다. 안 그래도 고슴도치처럼
생겼는데, 머리카락이 일어서니까 진짜 영락없는 고슴도치처럼 보였어요.
이런 동물을 아무데나 풀어놓는다구? 대체 머리가 어떻게 된 거냐? 그건 재난을 불러오는
짓이다.
아저씨, 왜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거예요? 아저씬 자기가 붤 원하는지도 모르고 계세요.
아까는 양을 가두어 놓았다고 야단치시더니, 이젠 양을 풀어 주지 못하게 하시잖아요.
여기선 안 돼, 원래 양이 살았던 별에서 풀어 줘야지.
그건 안 돼요. 호랑이가 한 마리 있거든요. 호랑이부터 치워 버려야 해요.
취워 버린다구? 한 마리밖에 없는데 말이야? 그렇게 하면 호랑이가 멸종된다는 생각은 안 하니?
어린 왕자는 이런 식으로 야단맞는 것이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이끼를
밟을까봐 벌벌 떨고, 그러면서도 파리가 자기 야채를 다 갉아먹어도 내버려 두는 사람이 자기에게
무슨 대단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지요. 어쨌든, 어린 왕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호랑이가 내 양을 잡아먹을 거예요.
그거야 뻔한 일이지. 양은 호랑이 같은 육식동물의 먹이니까.
그래요. 하지만 내겐 양이 한 마리밖에 없는걸요. 호랑이가 내 양을 먹어 버리면, 양도 멸종해
버리게 돼요.
물론이지, 물론 그래. 하지만 네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내 말을 들어. 자연이 흘러가는대로
놔두란 말이다. 게다가 양을 잡아먹고 나면, 호랑이는 어쩔수 없이 별을 떠나야 할 거야.
굶어죽을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네 문제는 해결되는 거지.
어린 왕자는 그 해결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양이 없으면 바오밥나무가
자라는 걸 막을 수 없으니까요.
환경주의자는, 자연은 자기에게 무엇이 적합한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자연을 거스르는 어설픈 마술사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서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 연설을 듣는 동안, 어린 왕자는 환경주의자 정원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곤충에게
해가 되지 않으려고 환경주의자가 먹지 않는 당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어린 왕자는
환경주의자에게 충고를 해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한 뒤, 제일 먼저 온 혜성에 뛰어올랐습니다.
그가 두 번째로 만난 별은 첫 번째 별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번쩍거리는 총천연색 간판들이 표면을
거의 덮고 있었지요. 간판이 어찌나 많았던지, 겨우 발을 딛을 자기밖엔 없었어요.
어린 왕자는 생각했습니다.
이건 바오밥나무보다도 더 지독하네.
그때 어린 왕자 등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알아맞혀 보마. 넌 롱다리 외투걸이를 좋아하겠구나.
어린 왕자가 몸을 돌렸지요. 바둑판 무늬 싱글 정장을 입고, 만화영화 캐릭터가 그려진 넥타이를
맨 사나이가 반짝이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면서 누부시돌고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난 롱다리 외투걸이가 필요없는데요.
이런! 그게 무슨 말이야. 나처럼 경험이 풍부한 광고맨을 가르치려들다니. 내 말을 믿어. 몇 주
뒷면 아무도, 분명히 말해두는데, 아무도 롱다리 외투걸이를 사지 않곤 못 뱃길 거다. 물론,
당장은 수요가 별로 없지. 그렇지만, 롱다리 외투걸이는 미래의 가치니까. 모든 전문가들이 그
점에 동의하고 있지.
어린 왕자가 그의 말을 반박했습니다.
외투걸이에 걸 외투가 없다면 누가 롱다리 외투걸이를 사겠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지.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만 사는 게 아니란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사는 거지. 롱다리 외투걸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사람들이 믿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내가
하는 일이지.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롱다리 외투걸이를 사러 살려가게 만드는 거야.
난 호랑이에 관심이 있어요.
호랑이라구?
광고맨이 머리를 긁적거렸습니다.
이 일을 해오는 동안, 아직 한 번도 호랑이 광고는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전자 목소리
광고는 해봤다. 바퀴 달린 다리미판 광고도 해봤고. 하지만 호랑이 광고는 해본 적이 없어. 그건
새로운 분야인데... 완전히 미개척 분야로군.
그가 한숨을 내쉬었어요.
광고 아이템 선택, 그게 바로 가장 어려운 점이란다. 아이템 선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게 아냐. 사람이 원하지 않는 상품을 광고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일을 해야 하거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그 상품을 필요로 하는지 안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상품 광고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 광고보다 훨씬 더 어려워. 미안해, 꼬마 친구.
도와 줄 수가 없겠는데. 내가 확보하고 있는 호랑이 재고량은 지금 최저 수준이거든. 네에게 팔 수
있는 호랑이는 한 마리도 없구나.
어린 왕자는 광고맨의 말을 정정했습니다.
난 호랑이를 사려는 게 아녜요. 난 벌써 한 마리 가지고 있는 걸요. 난 호랑이를 치워 버리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광고맨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아, 그렇다면 얘기는 다르지. 자, 보자.
호랑이가 얼마나 유행인지 증명한는 광고를 만드는 것으로 충분해. 요새 제일 잘 나가는 스타들과
발달된 미디어를 이용해서 우주에다 계속 때려대는 거야.
신문 광고, 텔레비젼 광고도 하고, 항성과 항성 간 중요 통로에다 입간판도 세우고 말이지.
장담하건대, 얼마 지나지 않아서,누구다 다 호랑이가 없으면 사는게 의미가 없다고 느끼게 될걸.
그때부터 네 호랑이들은 빵처럼 팔려나갈 거다. 서로 뺏고 난리를 칠거야.
내겐 팔 수 있는 호랑이가 많지 않아요. 내 별엔 한 마리밖에 없는 걸요.
오, 그렇구나!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다른 호랑이들을 찾아내면 되지 뭐. 호랑이를 잡아오라는
임무를 주고 사방으로 원정대를 보내는 거야. 호랑이를 더 잡고, 또 잡고 하면 돼. 일 년 뒤에 너는
호랑이들의 왕 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거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흥분한 어조로 신이 나서 떠들어대던 광고맨의 열기가 갑자기
식었습니다.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어요.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호랑이가 무슨 소용이 있지? 이번엔 어린 왕자가 한숨을 내쉬었지요.
아무 소용도 없어요. 호랑이는 양을 잡아먹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잠만 자요.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쓸데없는 물건을 파는 건 쉬운 일이란다. 물건에 먼지가 많아
앉아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들은 그걸 껴안고 있으려 들지. 잘난 체하거나 이웃에게 과시하려고 그런
물건들을 잔뜩 사들인단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거추장스럽게 호랑이를 데리고 있겠어요? 어디다 놔둬요?
왜 그렇게 모든걸 언제나 복잡하게 생각하니? 호랑이는 자리도 별로 차지하지 않아. 아무데나
대충 정리해 두면 돼. 자동차 엔진 속이나 콘플레이크 상자 속에다 말야. 내가 알게 뭐냐?
그런데... 내가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지? 완전히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기다려봐라.
이 문제를 생각할 시간을 잠깐만 다오.
광고맨은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가 더 이상 자기에게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자. 어린 왕자는 그곳을 떠났습니다. 어린 왕자는
호랑이 한 마리를 치워 버리는 일이 그렇게 복잡하리라곤 상상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혜성을 탔다가, 별똥별로 갈아타고, 어린 왕자는 우연히 세 번째 별에 도착했습니다. 별 전체가
거의 종이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시끄러웠어요. 톱니바퀴 삐걱이는 소리,
이빨이 부딪치는 듯한 뿌드득 소리, 기계장치 맞물리는 소리, 어린 왕자는 양이 다리를 좀 펼 수
있도록 상자에서 꺼내 주었지요. 그리곤 이 시끄러운 소리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찾아보았습니다.
얼마나 덩치가 어마어마했던지, 바오밥나무가 보았더라면 약이 올라서 새파래졌을 겁니다.
흰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들기면서 바쁘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반대쪽 끝에서는, 기계가 끊임없이 종이를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어린 왕자가 남자에게 다가갔지요.
안녕하세요? 뭐하시는 거예요?
남자는 하던 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습니다.
계산하고 있다.
그의 손은 마치 나비가 꿀을 모으듯이 글자와 숫자들을 번갈아 찾아다니면서, 볼록볼록한 상아색
자판 위로 날아다녔습니다. 그러면 형광빛을 내는 모니터 화면 위에서 신비스러운 글자들과
애벌레처럼 꼬물대는 숫자들이 생겨나는 거예요. 컴퓨터는 글자와 숫자들을 아귀아귀 집어삼키고는,
배가 부르다는 듯, 꺽하고 트림을 했어요.
뭘 계산하는데요?
이것저것 여러 가지, 에스키모인들은 겨울보다 여름에 아이스크림을 더 먹나, 개구리들은 10년
전 보다 지난 봄에 더 시끄럽게 울었나, 뭐, 예를 들면 그런 것들이다.
어린 왕자가 하하 웃음보를 터트렸습니다.
무지 이상하네. 왜 그런 걸 계산하세요?
왜냐하면, 난 통계학자거든, 그게 내 작업이야.
이상한 직업이네요. 요즘에 개구리들이 10년 전보다 더 시끄럽게 운다는 걸 알아서 뭘 하게요?
개구리들이 더 시끄럽게 운다는 것 자체는 중요할 게 없지. 중요한 건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사실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에 또, 그러니까, 개구리들이 더 시끄럽게 운다는 걸 알면 여러 가지 예상을 할 수 있다는
얘기야.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어대면, 사람들이 밤에 잠을 잘 못 잘 거고, 그러면 아침에는 더
피곤해지지. 그러면 일의 능률이 떨어지고, 그결과 생산에 차질이 생기고, 그건 국민 총생산액의
감소로 이어지지. 그걸 조기에 잡아 주지 않으면, 나라가 꼼짝없이 파산하게 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지. 또 이런 예상도 가능하다. 시끄러운 소리를 안 들으려고 사람들은 귀마개들을 구입할 거다.
그러면 귀마개를 만드는 데 필요한 밀랍을 확보하기 위해서 벌을 더 키워야겠지. 벌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면, 항공 운송에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면 관광과 국제 무역에 엄청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지.
어린 왕자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개구리 울음소리라는 단순한 사실이 그렇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어요.
자기 말을 너무나 열심히 들어 주는 청중이 하나 생겼다는 게 신이 나서, 통계학자는 즐겁게
설명을 계속했습니다. 그 사이에도 계속 자기 괴물에게 데이터라는 먹이를 먹여 가면서 말이지요.
사람들은 계산하고, 재고, 비교하는 걸 아주 좋아하지. 무가 이웃나라에서보다 자기 나라에서
더 잘 자라는 지. 어느 국민의 머리가 더 긴가 하는 것 따위를 궁금해한단다. 통계학은 그걸 확실히
알게 해주는 거야. 통계학 덕택에, 문제가 생기기 훨씬 전에 문제를 예상하게 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조처를 즉각 취할 수 있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어린 왕자가 방긋 웃었습니다.
그럼, 만일 나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아저씨가 도와 줄 수 있겠네요?
통계학자가 배를 앞으로 쑥 내밀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했습니다.
뭐든지 말해 봐라. 통계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떤 문제냐?
호랑이가 한 마리 있는데 처분하고 싶어요.
통계학자가 손가락을 깍지 꼈습니다.
호랑이라구? 한 마리뿐이냐?
예.
너무 적구나. 더 많아야 하는데.
어린 왕자가 또박또박 말했지요.
한 마리밖에 없어요. 그리고 한 마리도 제겐 너무 많아요. 어쨌든 아저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다른 호랑이들을 찾으러 다닐 생각은 없어요.
흠.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넌 그 호랑이를 오래 전부터 데리고 있었니?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요.
아하! 그렇다면, 호랑이 숫자가 1년도 안 돼서 두 배로 늘어날 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네 별의 주민은 몇 명이나 되니?
장미랑 양도 아저씨 계산에 들어가요?
아니.
그럼 한 명이에요. 나말고는 아무도 없어요.
으음. 별로 낙관적이질 않구나. 1인당 호랑이 한 마리의 비율로 인구가 정체되어 있다는 얘기군.
자, 그럼, 통계학을 이용해서 이렇게 예상할 수 있다. 10년 뒷면, 1인당 1,024마리 호랑이가 생겨날
거다. 내 생각엔, 지체없이 그별을 떠나는 게 현명한 방법인 것 같다.
통계학자가 작업복 칼라를 마치 멜빵처럼 앞으로 잡아당기며 거만하게 단언했습니다.
어린 왕자는 항의했지요.
이사가라구요! 내 별을 포기하란 말예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난 내 별이 좋아요.
석양이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그리고, 내 장미도 그 생각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장미는 내 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너무 늦기 전에 호랑이가 증가하는 속도를 늦추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어떻게 해야 하죠?
통계학자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코끝을 문질렀습니다.
아주 긴 코였어요.
특별한 이유도 없이 호랑이는 계속 불어나지. 놈들에게 겁을 준다면 모를까...
어린 왕자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호랑이는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 내 기억이 맞는다면, 지난번에 조사해 보니까 많은 호랑이들이 사냥꾼들을
무서워한다고 대답했던걸.
어린 왕자는 다시 희망이 생겨나는 걸 느꼈지요.
어디 가야 호랑이 사냥꾼을 만날 수 있는지 아세요?
모른다. 하지만 그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직업이 뭔지 물어보는 설문지를
작성하기만 하면 되지. 그 다음엔 조사원들을 보내서 설문지를 거두어들이, 그 다음엔 직업을
호랑이 사냥꾼 이라고 대답한 사람들을 찾아내서 어느 별에 사는지 알아낸 뒤, 자료들을 컴퓨터에
입력시키면, 컴퓨터가 별 하나에 평균 몇 명의 호랑이 사냥꾼이 살고 있는 지 알려 준단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호랑이 사냥꾼을 찾아낼 확률이 제일 큰 별을 찾아보면 되지.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요?
당장 시작한다면, 10년이상 걸리진 않을 거다.
10년이라구요! 난 당장 호랑이 사냥꾼이 필요하단 말예요! 10년 뒤가 아니구요.
그 점이 바로 통계학자의 비극이지. 준비하는 데만 시간이 너무 걸려서, 결과를 얻어내기도 전에
벌써 구식이 되어 버린단다.
그 순간, 통계학자와 어린 왕자가 대화를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기계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불만스러운 딸국질을 하면서 죽어 버렸습니다. 온갖 시끄러운 소음
뒤에 찾아온 침묵은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습니다. 뚱뚱한 사나이는 공포에 질려서, 기계를 다시
작동시키기 위해서 미친 듯이 자판을 두들겨댔습니다. 자판을 두들기자 개미같은 글씨가 꼬물거리며
기어나왔습니다. 통계학자가 손을 놓고 있는 동안, 개미집 같은 기계가 망가졌던 거예요. 그는
기계를 살려내기 위해서 너무나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린 왕자에게 신경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그가 법석을 떨어대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별 여기저기에 어찌나 하얀 종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던지, 하얀종이에 파묻혀 있는 하얀
양을 찾아낼 수가 없었어요. 한참 동안 참을성 있게 종이 더미를 뒤진 뒤에, 어린 왕자는 양을
찾아냈습니다. 양은 여기저기 널려 있는 하얀색 맛없는 샐러드를 열심히 오물오물 씹어먹고 있는
중이었어요. 그렇게 욕심사납게 종이들을 먹어치우면, 통계학자를 햇갈리게 만들 위험도 있었어요.
그렇게 뜯어먹은 서류를 분석하다간 개구리와 에스키모를 혼동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비록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어린 왕자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호랑이를 치워 버리기 위해선, 사냥꾼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사냥꾼이 어떻게 생겼는지, 더군다나 호랑이 사냥꾼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다음 별에 가면 누군가 알려 줄지도 모르지요.
다음별에서 어린 왕자는 대리석처럼 하얀 얼굴을 가진 남자를 만났어요. 그 남자는 책상 앞에
뻣뻣하게 앉아 있었는데, 책상 위에는 각각 긴급 , 매우 긴급 , 매우매우 긴급 , 무엇보다도 긴급
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는 엄청난 서류 더미가 놓여 있었지요. 무엇보다도 긴급 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는 서류들은 나머지 세 가지 종류의 서류들보다 훨씬 더 많았는데, 어찌나 많이 쌓여 있었던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형편이었어요. 어린 왕자가 도착했을 때, 그 사람은 첫 번째 서류 뭉치를
두 번째 서류 더미 위에다 올려놓고, 두 번째 서류더미에 있는 서류들을 세 번째 서류 더미 위에
올려놓고, 또 나머지 두 개의 서류 더미를 가지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진 어린 왕자가 그 남자에게 다가가, 상냥하게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
남자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답했습니다.
아저씬 호랑이 사냥꾼인가요?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멍청한 놈! 말을 잘 골라 써야지. 호랑이 사냥꾼이라고 하지 말고 호랑이를 사냥하는 남자라고
해야 한다. 그렇게 말했다간 여자 사냥꾼들이 따지고 든단 말야. 그런데 네가 궁금해 하는 것
같으니까 말인데, 나는 호랑이를 사냥하지 않는다. 난 관리인이야.
관리인은 자기 앞에 쌓여 있는 서류들을 가지고, 다시 그 이해할 수 없는 곡예를 시작했어요.
어린 왕자는 관리인이 자기 일을 끝낼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려고 했지만, 조금 뒤엔 타고 난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어서 질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관리인이 뭔데요?
관리인이 뭐냐구? 에, 그러니까...에, 말하자면,에...그건, 에...그건 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남자는 눈썹을 찡그리고,연필로 책상을 톡톡 두들기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서 마른기침을
했습니다.
예를 하나들자. 네가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돌봐줄 사람을 하나 찾는다고 가정해보자...
환자들 말인가요?
아이구,아이구,맙소사! 누가 들을까봐 겁난다. 넌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요즘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 사람들은 누구나 다 건강 문제를 가지고 있거든. 그리고 내가
말할 때 그렇게 자꾸 끼여들지 마라.
미안합니다.
어디까지 말했지? 아,그래. 자기 힘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상상해 보란 말이다.
너는 그 일을 관리인에게 맡겨서 너 대신 그 일을 하게 할 수 있다.
어린 왕자는 이 별에 들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연히 관리인을 만나다니, 이건 대단한
행운인데! 그의 문제는 이제 곧 옛날 일이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아저씨한테 말하기만 하면 아저씨가 어디 가서 호랑이 사냥...아니 참,호랑이를
사냥하는 남자를 찾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단 말이죠?
남자가 잔기침을 했습니다.
흠.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서류 절차를 밟아야 하니까.
그래요?
그럼. 우선 AZ270350bis 서식을 세 부 작성한 뒤, 한 장은 이사회에, 한 장은 법무과에, 또 한
장은 책임 담당 부서에 보내야 한다. 그러면 그 세 부서에서 검토해서 승인해 주지. 서류 검토가
끝나고 나면, 네 신청서는 관리 이사회로 넘겨져서 우선 순위가 논의된다. 그리고 난 다음엔
업무부장이 적당한 관리인에게 네 신청서를 넘겨 주는 일만 남게 되지.
시간이 많이 걸리나요?
석 달 이상은 걸리지 않을 거다. 어쩌면 석 달 안에 끝날 수도 있지.
그런데 전 시간이 없거든요. 당장 대답을 들어야 해요. 아저씨 자신이 관리인이니까, 아저씨가
절 도와 주실 순 없어요?
글세... 너무 예외적인 경우라서, 이일은 내 권한 밖의 일이다. 게다가 이건 인사 계통을
거스르는 해위야. 일을 할 때는 밟아야 할 절차와 지켜야 하는 위계질서가 있는 법이다. 사람들이
다 제멋대로 한다면,위계질서는 곧 엉망이 되어 버릴 거다. 그러면 세계 전체가 혼란에 빠자게
되지. 어쨌든,나에겐 시간이 중요하다.아주 바쁘거든.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일거리들이 안보이냐?
관리인은 신경질적으로 서류 한 상자를 집어들더니 다른 곳에다 옮겨 놓았지요. 그 다음 몸을
숙이고, 발치에 놓여 있는, 뻘건 꼬리표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공책을 집어들고 그 공책을 긴급
서류 더미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유능한 관리인은 일에 치어 죽기 싫으면 자기 자신을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단다. 치밀한 계획,
그것이 바로 이 직업의 성공비결이지. 불행히도, 계획을 세우는 데 시간을 다 잡아먹히기는 하지만
말야.그러고 나면,긴급 업무를 처리할 시간도 빠듯하지. 그때문에 그 업무들이 점점 더 긴급해지고,
나중엔 처리 시한을 넘기게 되지. 그러면 더 이상 긴급한 일이 아니게 된단 말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없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이 생기니까. 그런데,그 상자 안에다 뭘 넣어 가지고 다니는 거냐?
양이에요.
관리인이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런 기생충을! 그런 끔직한 동물을! 이 망할 종자는 아무데나 끼어든단 말야!
관리인은 양을 보기만 해도 일종의 가사 상태에 빠진다는 걸 모르니? 제 아무리 용감한
관리인이라도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켜서 결국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말이다. 혼수상태에서
회복되는 관리인은 별로 없어. 그래서 옛날엔 잘 나갔는데, 겨우 한나절 만에 완전히 망해 버린
관리인들이 있어. 자기자신을 너무나 과신한 나머지, 이 망할 짐승의 사악한 영향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사람들은 자기 사무실에서 채소처럼 쪼그라들어 버린 관리인들을
발견했어. 그들의 정신이 심지를 잘라 버린 촛불처럼 꺼져 버린 거야. 헤 벌어진 그들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꾸르륵꾸르륵 새어나왔거든. 여기서 나가! 내가 죽기 전에 꺼지란 말야!
어린 왕자는 얼른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는 그토록 온순한 동물에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면이
있다는 데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 왕자는 관리인처럼 유식하지 못하니까요.
이렇게 어린 아이가 이 모든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논리적 비약이 심한 어린 왕자의 이야기가 정말로 있었던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저물고 있었습니다. 내 어린 동료의 마음을 좀 달래 줄 생각으로 나는 그에게 석양이 지는 걸
보러 가자고 말했습니다. 둥근 산호초로 이루어진 이 작은 섬은 재미있는 곳입니다. 아침이 바다
이쪽에서 태양이 찬란하게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저녁이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타는
여행을 끝마친 태양이 반대편 해안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어린 왕자가 불쑥 말문을 열었습니다.
해가 지는 걸 보니까 내 별이 생각나. 하지만 조금 달라. 내 별에선 해가 지는 걸 보기 위해서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돼.
자기 별에 대한 추억 때문에, 어린 왕자는 깊은 슬픔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쩌면 위험에 처해
있는 자기 장미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가냘픈 가시만 가지곤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가지고 있는 호랑이에 저항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바오밥나무도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호랑이가 있는 틈을 타서 뻔뻔스럽게 자라나서 모든 걸 집어삼키려 들겠지요. 평소 버릇대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장미에게 양분을 공급해 주는 금빛 햇살을 빼앗아 버리겠지요.
뜨내기 광대처럼 요란한 분장을 한 태양이 물속에 잠겼습니다. 태양은 무대 효과를 아끼지 않고
찬란한 빛을 사방에 뿌려댔습니다. 무대를 떠날 때도 화려한 모습으로 떠나는 거지요. 마치 자기가
얼마나 멋진 배우인가를 관객들에게 상기 시켜 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가장자리가 거품으로
장식되어 있는 파도는 호박색과 진홍색으로 머리 장식을 하고, 수평선에서는, 쪽빛과 짙은 빨강색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밤의 검은 수의가 내려와 덮이자, 그들의 치열한 전투로 생겨
났던 불이 꺼져 버렸어요. 수많은 별들이 우리의 머리를 덮고 있는 까만 빌로오드 천개에 반짝이는
보석을 박아넣었습니다. 은하수의 다이아몬드 강물이 멀리에 평화로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게 네 별이니? 궁금하구나.
나는 어린 왕자가 어떤 점이나 방향을 나에게 가리켜 보여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들어올리지 않았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땐, 집은 언제나 여기 있는 걸.
그는 가슴이 뛰고 있는 곳에 손을 올려놓고 철학자처럼 말했습니다.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지도 않던 일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이번 여행은 즐거웠습니다. 그래도 나 역시 내 의자, 내
작은 정원, 잿빛 하늘 아래 있는 내 작은 집이 그리웠거든요.
어린 왕자가 말했습니다.
옛날에 아저씨랑 닮은 사람을 만났었어. 그 아저씨도 길을 잃어버렸었지. 저녁이 되면, 우리는
별을 바라보곤 했어. 지금처럼 말이야. 별들은 고독한 사막에서 그아저씨에게 제일 좋은 친구였어.
생텍쥐페리 선생님, 어린 왕자는 선생님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그리곤 불쑥 선생님의 안부를 묻는
겁니다. 선생님 소식을 어린 왕자에게 전해 줄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린 왕자는 제가
선생님을 전혀 모른다고 말하자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구는 넓고, 지구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걸 설명해 주었지요. 모든 사람을 안다고 주장한다는 건 주제넘은 짓이고, 또 모든
사람을 다 알고 싶다 하더라도, 그러려면 평생이 걸릴 것이라는 말도 해 주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우울한 기분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구에 도착하기
전에 다른 별에 들렀느냐고 물어보았어요.
어린 왕자가 대답했습니다.
두 군데에 들렀어. 그중 첫 번째 별에서 장미 한 송이를 만났어.
중간 정도의 크기를 가진 별이었다고 합니다. 어린 왕자의 별보다는 넓었지만, 걸어서 한 바퀴
돌아보기 힘들 정도로 넓지는 않았습니다. 별 한가운데에 두 가지 색깔로 금이 그어져 있엇는데,
장미는 바로 그 금을 따라 피어 있었어요.
그가 별에 착륙하자마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초록색으로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그가 금속 막대기를 어린 왕자를 향해 겨누면서 단호한 말투로 물었습니다.
거기 서라! 초록색이냐, 빨간색이냐?
그 사람이 자기 옷차림에 대해 묻는 줄 알고, 어린 왕자는 아무 생각 없이 초록색 이라고
대답했지요. 초록색사나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막대기를 아래로 내렸습니다.
미안하다, 동지. 용서하라. 그러나 조심은 안보의 어머니니까. 그대가 변장을 했기 때문에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
어린 왕자는 자기 옷차림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여행을 떠날 때면 자주 입는 옷과 망토 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초록사나이가 어린 왕자가 들고 있는 상자를 보더니 눈빛이 험악해졌습니다.
그 안에 숨긴 게 뭔가?
양이에요.
사나이가 막대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그래? 무슨 색인가?
어린 왕자가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지요.
흰색이지요. 흰색 말고 어떤 다른 색이겠어요?
이번엔 초록사나이가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조금 노란 웃음이었어요.
하!하! 내가 바보 같은 소릴 했군. 좋아.
어린 왕자가 이 이상한 사나이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아저씨가 들고 있는 이건 뭐예요?
사냥총이지. 보면 모르나.
그 대답을 듣고 어린 왕자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드디어 사냥꾼을 만나게 되었구나 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아저씨는 호랑이를 잡아요?
호랑이를 잡냐구? 내겐 빨간색으로 충분하다.
실망한 어린 왕자의 어깨가 축 늘어졌습니다. 그럼 이 별에서도 아무 소득도 얻을 수 없단 말인가?
행군하자. 나는 국경을 순찰해야 한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초록색과 빨간색 금을 따라 걸었어요. 그렇게 얼마 동안 걷자.
장미가 눈앞에 나타났어요.
아주 어린 장미였어요. 정숙함과 수줍음을 아직도 꽃봉오리 속에 감추어 놓은 것 같았지요.
초록사나이는 장미를 의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동지, 그대 생각엔 이게 초록색인가, 빨간색인가?
어린 왕자는 솔직하게 말했어요.
나는 초록색 장미는 본 적이 없어요. 노란 장미는 봤어요. 흰 장미도 봤구요. 하지만 초록색
장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럼 안됐지만 할수 없지.
그렇게 말하더니 사나이는 커다란 초록색 장화로 꽃을 마구 짓밟았습니다.
어린 왕자는 공포의 비명을 지르며 장미를 구하기 위해 무릎을 끊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어요.
사나이 발에 짓밟혀 장미 줄기가 이리저리 흩어져 버렸지요. 이제 빌로오드 같은 장미의 입술은
결코 아침 이슬을 마실 수 없을 거예요. 이제 장미는 절대로 햇빛의 축복을 받으며 꽃을 피우지 못
할 거예요.
어린 왕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사나이를 비난했습니다.
왜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거예요?
이 꽃은 초록색이 될 수 없으니까. 그대 자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이 꽃은
빨간색 편이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예요?
색깔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 말인가?
물론이죠. 다정함과 우정만 해도 색깔보다 중요해요.
초록사나이가 눈썹을 찡그렸습니다. 이마에 주름이 잡혔어요. 그가 총을 반쯤 위로 들어올렸어요.
동무, 그대는 지금 초록으로서는 매우 반체제적인 말을 하고 있다. 그대는 적과 내통하고
있는가?
적이라니, 누구 얘길 하시는 거예요?
물론 빨간색들을 말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그들을 미워하세요? 그들이 아저씨에게 나쁜 짓을 했어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빨갛고 나는 초록색이다. 비난받아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이렇게 색깔을 나누어 놓은 자연이지. 초록색은 빨간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빨간색은 초록색을
좋아하지 않고, 모든 것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고, 너무나 분명하다. 그대만이 혼란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동지, 곤란한 일이 생기기 전에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
어린 왕자는 잛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사나이를 설득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관대하고 용감한 마음으로 대한다 하더라도,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기를 사용하는 비열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말입니다.
어린 왕자는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생텍쥐페리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제 생각에 동의하실
겁니다. 한 번동 증오를 접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런 경우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됩니다.
물론 어린 왕자 역시 어리석음이나 악의에 접했던 적은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영혼 깊은 곳까지 올올이 박힌 그렇게 지독한 편협함은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받은 충격 때문에 어린 왕자의 마음은 메말라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금 쉬면서
힘을 회복할 수 있는 따뜻한 장소를 찾게 되었지요.
그는 알록달록한 꽃들이 별처럼 흩뿌려져 있는 초록색 카펫이 깔린 별을 택했습니다. 높은나뭇가지
위에서 새들이 아름답고 경쾌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강물은 바닥에 흩어져 있는 조약돌들 위로
미끄러져 가며 작은 소리로 웃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풀밭에 눕기가 무섭게 잠들어 버렸습니다. 마음 고생을 해서 지쳐 버렸던 겁니다.
무언가 뺨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어린 왕자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눈을 뜨니, 어떤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안녕.
소녀가 말했습니다.
안녕.
어린 왕자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지요.
너무나 단잠을 자길래 깨우고 싶지 않아서 기다렸어. 그리곤 생각했지. 못 보던 소녀이네.
누굴까? 하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네 뺨에 살짝 손을 대어보았어. 그랬더니
네가 눈을 뜨더구나. 넌 어디서 왔니?
어린 왕자는 손을 들어 하늘 한 귀퉁이를 가리켰어요.
멀리서. 저기 저 별.
네 별은 내 별이랑 비슷하니?
오, 아냐! 꽃 한 송이밖에 없어. 하지만 화산 세 개랑 호랑이 한 마리도 있어.
그 이야기를 듣고 소녀의 눈이 둥그래졌어요. 그녀는 두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습니다.
호랑이라구! 끔찍해라! 그런 동물과 함께 살아가다니, 정말 용감하구나.
어린 왕자의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난 정말 그렇게 용감한 걸까? 장미가 떠나라고 하긴 했지만,
별에 머물면서 야수와 정면대결해야 했던 게 아닐까?
어린 왕자는 자신의 나약함이 부끄러워서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도 않아. 난 호랑이가 내 양을 잡아먹을까보 무서웠어. 그래서 호랑이를 치워 줄 사냥꾼을
찾아 길을 떠난 거야.
여기 호랑이 사냥꾼은 한 사람도 없어. 이 별엔 나 혼자뿐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소녀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더니 고쳐 말했어요.
아니, 이 별엔 나 혼자뿐이었지. 이젠 네가 왔으니까.
어린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망토의 먼지를 털었습니다. 정말 더할 나위 없이 빛나는
날이었습니다.
양을 풀어 주지 그러니? 마음껏 돌아다니게 말야. 그동안 우리 얘기를 나누면서 산책이자.
상자에서 나오자마자, 양을 풀을 적당한 높이로 가지런히 깎아 놓는 것이 자기 의무라는 듯,
열심히 풀을 뜯어먹었습니다. 소녀는 풀밭으로 뛰어들었고, 어린 왕자는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데이지꽃과 미나리아재비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강가에 달려가서 둑을 따라 걸었습니다.
폭폭에서 소용돌이에 이르기까지 지칠 줄 모르고 부글대는 강물의 놀이를 감탄하며 지켰보았습니다.
어느순간인가, 소녀가 어린 왕자의 손을 꽉 잡았어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을 하듯
하지 못했어요.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어색하긴 했지만, 전혀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이모순된
감정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모순된 감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
였습니다. 그들은 얼마 동안 그렇게 돌아다녔어요. 소녀는 자기 별의 아름다움과 고요함을 자랑
했습니다. 소녀는 지나가는 길에 특별한 아름다운 꽃 한 송이와 다른 나무들보다 더욱더 고결한
자태를 가진 나무 한 그루를 어린 왕자에게 보여주었죠. 그가 감탄하며 바라보았어요. 정말 잘
각구어진 별이었어요. 자기 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껏해야 화산 세 개,
호랑이 한마리, 장미 한송이밖에 없는데다, 그나마 화산 한개는 꺼져 있는 형편인걸요. 어린 왕자의
마음은 장미와 장미 가시 세 개를 향해 달려갔어요. 그 오죽잖은 가시를 가지고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으로부터 자기를 지켜보겠다고 허망한 꿈을 꾸며 있는 장미에게로 말입니다.
난 떠나야 해.
어린 왕자는 불쑥 말했습니다. 목소리 속에 슬픔의 눈물이 가득 차 있었어요.
왜? 나랑 여기 있는 게 싫어?
아냐. 그럴 리가 있니. 하지만 내 별엔 내 꽃이 있어.
꽃이라면 우리 주위에 가득 피어 있잖니? 이 꽃들이면 충분하지 않니?
그건 다른 얘기야. 여기 있는 꽃은 그 어느 것도 내 꽃과 같지 않아. 내 꽃은 오말하고 또
경박해. 때로는 너무 잘나 체하기도 해. 그렇지만 바로 그런 결점 때문에 내 꽃은 오히려 나에게
친근해진 거야. 게다가 내 꽃은 내 별에서 혼자서 슬퍼하고 있을 거야. 자기가 슬퍼했다는 걸
죽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네가 가 버리면 나도 혼자 남을 거고, 그러면 심심해질 거야.
하지만 너는 널 지키기 위해서 내가 필요한 건 아니잖니. 내 장미에게는 내가 필요해. 난 내
장미에 대한 책임 있어.
소녀는 외면하며 말했습니다.
내 꽃은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지도 못해. 여기 좀 더 머물 수 없니?
아냐. 벌써 너무 오래 지체했어. 또 호랑이 사냥꾼도 찾아 봐야하고.
그럼 행운을 빌어. 몸 조심하고, 네가 보고 싶어질 거야. 네 장미가 위험에서 벗어나면 날
만나러 와.
어린 왕자는 그러마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맛있게 생긴 꽃들 사이로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던 양을 다시 붙잡아서 상자에다 집어
넣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소녀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별을 떠났습니다.
우연히 발길이 닿았던 모든 별들 중에서 이 별은 정말이지 떠나기가 가장 힘든 별이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소녀와 우정으로 매여 있었던 그 짧은 기간 동안, 어린 왕자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지난번 여행에서 길들였던 여우랑, 그리고 여우가 들려 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던 겁니다. 여우는 사냥감을 찾아 총을 들고 지구를 돌아다니는 사냥꾼들 이야기를 했었지요.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어린 왕자는 첫 번째로 도착한 운석을 타고 지구로 오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 지구는 그 장엄한 모습을 전혀 잃어버리지 않은 것처럼 보았습니다. 사파이어
빛 드레스를 입고 구름 레이스를 두른 지구의 모습은 옛날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지구 표면에서
깜빡이고 있는 수많은 전등들은 여전히 축제의 느낌을 주었지요. 옛날에 어린 왕자는 그 즐거움
느낌을 너무나 좋아했었지요. 하지만, 생텍쥐페리 선생님, 이야길 꼭 해야 할까요? 사실, 그것은
가면일 뿐, 그 가면 아래에서 지구가 전혀 딴판이 되어 버렷다는 걸 말입니다.
가스등 켜는 사람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스등은 조그만 알전구로 바뀌어 버렸지요.
임금님들이 겪은 운명 역시 그들의 운명보다 나을 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백성은 걱정스러운 정도로
줄어들어서, 이제 겨우 한줌이나 남아 있는 정도지요. 대통령들과 독재자들에게야 참을 수 없이
기쁜일이지만,
반면에, 사업가들은 얼마나 늘어났는지, 하늘에 있는 별을 다 합쳐도 그들의 숫자만큼 되지 않을
거예요. 허영장이들이 사업 감각을 발달시켰던 모양이에요! 주정뱅이들은 술을 점점 더 마셨는데,
술에 취하면 세상이 두 개로 보이니까, 자기들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독주를 마셔대는 주정뱅이들의 증가에는 그런 식으로 어딘가 황당한 구석이 있었어요.
지리학자들만이 7000명의 수를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리학이 워낙 시류를 타지 않는
학문이니까, 변할게 별로 없었던 게지요.
어린 왕자는 이번엔 다른 장소를 착륙지점으로 정했습니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울창하고 어두운 숲이었습니다. 얼마나 키가 컸던지, 나무 꼭대기에 닿아 구름이 흩어져 버릴
정도였어요. 호기심이 너무 많은 구름들이 무심코 그곳까지 내려오기도 했거든요.
밀림 속에선 온갖 소리들이 웅웅댔습니다. 날카롭게 찍찍대는 소리, 재잘거리는 소리, 지지배배
지저귀는 소리, 으르렁대는 소리, 어린 왕자는 두터운 나무 껍질로 뒤덮인 거대한 나무 기둥들
사이를 지나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나무줄기들은 마치 추위를 타는 것처럼 이끼로 된 숄을
친친 휘감고 있었습니다. 주위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숲 속에는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쇠뜨기와 고사리 덤불 사이에 있는 그늘 속을 찾아보고, 칡덩굴과
덩굴손이 뒤엉켜 있는 덩어리를 헤집어 보았지만 한 마리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어린 왕자의
가벼운 발자국 아래에서 잔가지들이 밟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고 겁이 나서 모두 도망쳐 버린 것
같았습니다.
어린 왕자는, 누군가 만나서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틀려 버린 모야이라고 생각하며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강물이 돌아나가는 지점에서 뱀 한 마리를 만났어요. 과식하는 바람에 몸이
무거워져서, 빨리 도망치지 못했던 겁니다. 어찌나 배가 빵빵하게 불러 있었던지, 코끼리 한 마리가
뱃속에다 집을 짓고 들어앉았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어요. 양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어린 왕자가 상냥하게 뱀에게 인사했습니다.
안녕.
안녕.
뱀이 쉭쉭대는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뱀은 괜히 음식 욕심을 부리다가 곤란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어린 왕자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웃긴다. 넌 모자처럼 생겼구나.
뱀이 투덜대며 대답했습니다.
능력보다 욕심이 클 때 생겨나는 일이지 뭐.
넌 숲을 알고 있으니까 가르쳐 줄래? 동물들이 어디로 가 버렸니?
모두 네 주위에 있어. 겁이 나서 숨어 버렸기 때문에 안 보이는 거야.
어린 왕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습니다.
말도 안 돼! 난 동물들을 해칠 생각이 없어.
알아. 네가 다가왔을 때, 난 네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생긴 건 조그만 인간처럼
생겼지만 말야. 다른 동물들은 나처럼 똑똑하질 못해. 그들은 네가 다른 인간들이랑 다른 걸 모르고
도망쳐 버린 거야. 뭘 원하니
어린 왕자는 그 문제에 대해서 지구에 오기 전에 이미 곰곰이 생각해 보았었지요. 그리고 호랑이를
잡으러 찾아 다니는 사람에 대해서는 호랑이가 그 누구보다도 더 확실한 정보를 줄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려두었었지요. 그래서 그는 뱀의 질문에 얼른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난 호랑이를 찾아.
난 호랑이는 한 마리도 몰라, 어쨌든, 숲을 가로질로 북쪽으로 가 봐. 숲이 끝나는 곳에 초원이
있을 거야.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사자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니까. 사자는 호랑이랑 비슷한
종이니까. 호랑이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어린 왕자는 뱀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양 상자를 챙겨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빽빽하게 모여 있던 커다란 나무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키가 큰 나무들 대신에
좀더 작은 나무들이 나타나고,또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가자,작은 나무들 대신에 관목들과 가시덤불이
나타났어요. 그리곤 마침내 키 큰 풀숲이 나타났습니다.
사자들은 줄기가 거대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가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어요. 어린 왕자는 그
나무가 바오밥나무라는 것을 알아보았어요. 그는 자기 별에 있는 바오밥나무가 많이 자랐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오밥나무는 일단 어는 정도 커 버리면 뿌리를 뽑아내기가 힘들었습니다. 왜냐
하면, 일단 자라 버린 바오밥나무 뿌리는 죽어가는 사람이 생에 매달리는 것처럼 악착같이 땅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어린 왕자는 사자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안녕.
안녕. 너 우리 동네에서 뭘하고 있냐?
사자떼의 우두머리가 하품을 참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굴이 껍질을 쩍 벌릴 때보다도 더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했어요.
난 호랑이를 찾고 있어.
사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으르렁댔습니다.
사자가 너에게 마땅치 않단 말이냐?
어린 왕자는 얼른 시자를 달랬습니다.
널 화나게 할 생각은 없어. 사실은 말야. 어딜 가면 사냥꾼을 만날 수 있는지 호랑이에게 물어
보려는 거야.
흠. 여기서 사방 몇십리 안에는 사냥꾼들이 없어. 우린 보호구역 안에 살고 있으니까.
보호구역이라는 게 뭐야?
동물들을 가두어 놓는 장소를 말하는 거지.
어린 왕자는 깜짝 놀라서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쇠창살도 울타리도 없는데...
사자가 갈기를 흔들었습니다.
우리가 커서 그래. 하지만 내 말을 믿어. 이것도 우리의 일종이야.
왜 너희들을 가두어 놓았는데?
인간들은 동물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주장하지.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거야. 어쨌든
내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는 달라,난 그들이 우리 동물들은 더 잘 통제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해.
인간이란 이상한 족속이야. 인간은 무엇이든 굴복시키지 않으면 작성이 풀리질 않아. 자기들끼리도
그래.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조직되고, 정리되고, 구획되고, 합리화되어야만 해.
사실은, 자기 자신도 통제할 능력이 없는 주제에 말야. 인간은 자기 생각만 하면서, 가장 추악한
잔혹행위들을 저지르지. 이렇게 행동하는 이면에는 교만이 숨어 있어. 인간은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우주는 너무나 크고, 인간은 너무 작은 존재야. 우주는 인간
없이도 돌아간다구. 그걸 인정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인간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한군데에다 모아놓고 좌절감을 해소시키고 있는 거야.
내 별에선 누구나 아무 제약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어. 하지만 사실 나는
그곳에서 내 꽃이랑 양과 함께 혼자 살아가고 있어.
넌 운이 좋구나.
어린 왕자는 사자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번에도 우여의
인도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조만간 확실한 정보를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양 한 마리만 친구 삼아 오랫동안 걸었습니다. 한없이 계속되는 사막을 건너고,
까마득히 높은 산을 올라가고, 넓은 평원과 울창한 숲을 지났습니다. 이 별은 어찌다가 동물이나
사람을 만나기도 했어요. 어린 왕자는 그들에게 길을 물어 보았어요. 그러면 그들은 엉터리로 대충
가르쳐 주었어요. 하기만 어린 왕자도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는걸요.
어린 왕자의 순례 여행은 그를 어떤 길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 길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틈바구니처럼 보였습니다. 그 틈바구니가 황폐한 지역을 둘로 나누어 놓고 있었습니다. 앞,뒤,왼쪽,
오른쪽, 눈길이 닿는 곳 어디에다 까마득히 자갈 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몇 그루 나무가 어떻게든
돌멩이들 사이로 뿌리를 내려서 활짝 잎을 피워 보려고 안타깝게 애를 쓰고 있었지요. 식물 특유의
순수하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던 겁니다.
어린 왕자는 대지 위에 칼자국처럼 그어져 있는 창백한 상처자국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마치 태초부터 그 길을 따라 걸어왔던 것 같았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았다면, 어린 왕자의
모습은 두 개의 지평선 사이에 꼼짝도 하지 않고 꽂혀 있는 핀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그렇게 걷고 있을 때, 부릉부릉하는 자동차 소리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왔습니다. 그 소리가
침묵을 깨버렸어요. 귀가 멍멍해질지경이었습니다. 시간이 그곳에 쌓아 두었던 먼지를 일으키며,
자동차 한 대가 어린 왕자 옆에 다가와 섰습니다. 가스분진에서 악취가 풍겨 나와 어린 왕자를
메스껍게 했습니다. 자동차에서 남자 하나가 머리를 내밀더니 걱정스러워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얘야, 길을 잃어버렸니?
아니오.
어린 왕자가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황폐한 길에서 혼자서 무얼 하고 있는 거냐? 털북숭이 친구 하나만 데리고, 이 길은 아무
데도 이르지 않아. 끊임없이 되돌아나오게 되어 있는 길이거든.
난 호랑이 사냥꾼을 찾고 있어요.
그 대답을 듣고 그 낯선 남자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이마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찡그린 이마에 잡힌 주름이 그가 난감해하고 있다는 걸 나타내는 글씨 같았거든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설명해 주겠니?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다는 듯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어린 왕자는 흔쾌히 그의 부탁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별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화산들,꽃, 양, 예기치 않았던 호랑이의 등장, 그리고 그 때문에 생겨난 혼란, 이 별에서 저 별로
여행하며 겪는 여러 가지 일이며, 지구에 도착하게 된 일등.
남자는 어린 왕자의 말을 중단시키지 않고 심각하게 들었습니다. 이따금 머리를 끄덕였을
뿐이에요. 어린 왕자의 이야기가 끝나자, 남자는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았어요. 그러더니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날 따라오너라. 난 호랑이 사냥꾼은 모른다만, 친구들이 많거든. 내 친구들에게 네 이야기를
들려 주렴. 틀림없이 그들 중 누군가가 너를 도울 수 있을 거다.
어린 왕자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까 말까 하고 생각해 보았어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보다더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는 고맙다고 말하며 그
제안을 받아들였지요. 여행 때문에 지쳐서 더욱더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가능한 빨리 집에 돌아가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장미가 견딜 수 없도록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어린 왕자의 양을 데리고 가서 자기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사치와 부로 지은 굉장히 큰 화려한 저택이었어요. 어린 왕자의 옹호자가 곧 친구들을 불러
모았어요.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자기 이야기를 되풀이했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따금 머리를 끄덕여 어린 왕자의 말에 공감한다는 내색을
하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 중에 호랑이 사냥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처음에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이 가고 나자, 호기심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오고, 그들이 가며 또 다른
사람들이 왔어요. 저택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댔습니다. 그리고는 어린 왕자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또 듣기 위해서 찾아와 문을 두들겼지요. 듣고 또 들어도 지겹지도 않은 것
같았습니다.
이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호랑이 사냥꾼들은 단연 빛나는 존재였습니다. 그곳에 없었으니까요.
조금 뒤에 청중들은 어린 왕자에게 질문을 던져대기 시작했습니다.
꽃은 무얼 의미하는 겁니까?
어린 왕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아요.
그건 그냥 꽃나무예요. 잎사귀랑 가시를 가진 장미지요.
하지만 장미들은 말을 할 줄 몰라요.
내 꽃이 특별한다는 건 사실이에요.
그럼 호랑이는요? 호랑이는 무엇을 의미합니다까?
다른 호랑이들과 똑같은 호랑이에요. 서커스 생활이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었던 거예요. 도망친
다음엔 내 별에 눌러앉은 거죠. 때로는 신비의 후광에 둘러싸인 질문이 나오기도 했어요.
양은 천주의 어린 양입니까?
어렸을 땐 어린 양이었어요. 양들은 전부 그렇지 않아요?
이 설명들은 사람들에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왕자의 말을 분석하기 위해서
몇 사람씩 옹기종기 모여앉아 토론을 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장했습니다.
호랑이는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는 사악함을 표현하는 겁니다. 처음에 인간은 자신의 천박한
본능을 통제했죠. 호랑이가 우리에 갇혀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모든 통제력을
상실하고 온갖 추잡한 짓에 탐닉하고 있죠.
다른 사람은 이런 주장을 펼쳤어요.
장미는 선을 의인화한 겁니다. 악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부서지기 쉬운 귀한 선물을
말하는 거죠. 우리 마음속에 웅크려있는 사악함을 쫓아내고 쳐부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호랑이
사냥꾼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이 자라서 씩씩하고 튼튼한 어른이 되었어요. 우리도 우리의 미덕을 함야하고 깊이
숨겨진 우리의 가치를 보다 굳건하게 만들고, 호랑이가 예고하고 고난에 대비하면서 자신의 인격을
도야해야 합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토론을 벌인 다음, 그들은 어린 왕자에게 돌아왔습니다. 자
기들의 사색의 열매를 어린 왕자에게 보인 뒤, 자기들이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잘못 이해한 점이 있으면 바로잡아 달라는 것이었죠.
어린 왕자는 늘 그러는 것처럼 정중하게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론 끈기 있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어요.
장미는 식물이에요. 호랑이랑 양은 동물이구요. 그렇지만, 그들은 어린 왕자의 설명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어린 왕자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단순해 보였거든요.
그가 하는 말은 틀림없이 다른 것을 감추고 있다. 너무나 깊고 오묘해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진리를 숨기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명상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들은 더 이상 어린 왕자에게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여러 날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어린 왕자는 자기를 둘러 싸고 있는 사람들 역시 자기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도 잡을 수 없는 것을 찾기 위해서 머리를 쳐들었다 숙였다
하면서 헛되어 정신 구석구석을 뒤져 보지만, 모든 노력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을 뿐, 자기처럼
해답을 얻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겁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 어린 왕자는 그들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사색에 매달려 있도록 내버려
두고 길을 떠났습니다. 조금은 실망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현실 도피적이고 비현실적인 빛을
배우려고 그토록 열렬하게 갈망하면서도, 정작 그들 중 누구도 어린 왕자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까요.
생텍쥐페리 선생님, 또 하루가 저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도 배 한 척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멀리서 하늘과 바다를 꿰매 놓고 있는 가느다란 선 위에 개미처럼 꼬물거리는 모습으로
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자연이 늘 우리에게 넉넉하게 베풀어 주는 과일 몇 개로 배를 채우고, 언제나 우리를
매혹하고 석양을 보려고 바닷가 모래펄에 앉았습니다. 그날 저녁, 어린 왕자는 향수때문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내 별에 있을 땐, 의자를 하나 끌어다 놓고, 그위에 앉아서 해를 바라보곤 했었어. 해는 수평선
너머로 조금씩 모습을 감추기 시작할 때면, 내가 언제 한 가지 색깔이었담 하는 듯이 변덕을 부려.
하늘에다 수천 가지 색깔을 마구 칠해 놓는 거야.
나는 나도 집에 있을 때는 어린 왕자처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내 경우에는, 석양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도 책을 뒤지느라고 의자 위에 앉아 있다는 점이 다르지만요.
어린 왕자가 독백하듯이 말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런 일들에 시간을 투자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야. 석양이나 지도책에
간을 투하는 건.약간은 우리가 그걸 귀하게 여긴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거야. 그 귀중한 순간만큼은
삶에 대해 우리가 진 빚을 갚는 거야.
우리는 백열 덩어리를 집어삼키고 있는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금빛과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 빛이 철철 흘러 넘쳤습니다. 우리는 초콜릿 우유 같은 바닷물에 취에 있었어요. 커다란 평화가
내 마음속에 밀물처럼 밀려들어왔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어린 왕자가 이제 곧 자기를 볼 수 없게 될 거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너무 오랫동안 꾸물댔다고 말했어요. 그의 별에서 의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장미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너무나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난 어떤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무언가 비극적인 일, 그것도 가장 바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어요. 난 그가 계획을 바꾸도록 해 보려고, 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일단
실행에 옮기고 나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말려 보려고 서투른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그럼 호랑인 어떡하구?
어린 왕자가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나를 안심시키며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걱정해선 안돼. 처음엔 조그만 먼지 알갱이 같은 걱정거리가 나중엔 산더미처럼
커지거든. 너무나 힘들다고 생각되는 문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힘든 건 아냐. 문제가 마치
마술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또, 이젠 다 틀렸어, 하고 모든 기대를 포기했을 때
기적처럼 해결책이 제시되기도 하거든.
그럼 네 양은?
이 점에 관해서만은, 내가 제대로 짚고 있다는 것을 지나가던 천사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실 그래. 양을 데려간다면, 호랑이가 양을 잡아먹어 버릴 거야. 그러면, 난 살아 있는 동안
내내 후회하게 될 거야. 내가 내 꽃을 보호해 주고 싶어했듯이 양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야. 그래서 그는 내게 한가지 부탁을 했고, 나는 부탁을 흔쾌히 들어 주었지요.
마술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밤이 내렸습니다. 파도가 우리 발 아래에 와서 죽어가며 은빛 찬란한
제물을 바쳤어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의 송곳으로 흑단처럼 검은 하늘의 궁륭에 송송 구멍을 뚫어
놓았던 수많은 별들이 그 은빛 제물안에 섞여 있었지요. 부드러운 고요가 세계의 끝에 있는 그 섬에
내려왔어요. 그토록 다르면서도 그토록 비슷한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이 장난처럼 맺어진 그 섬에...
우리는 야자수의 무성한 팔 아래 나란히 누웠습니다.
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눈을 감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거든
요. 어린 왕자가 지난 며칠 동안 나에게 재미있게 들려 주었던 별과 별사이의 여행 이야기를 내가
정말로 믿었기 때문에 그랬던 건 아닙니다. 이성이 어린 왕자의 말을 믿지 못하게 했어요. 나는 그
이야기가 재치 있게 꾸며낸 이야기나, 몽상가의 잠꼬대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어린 왕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 때문에 마음이 정말로 불편해졌을 따름입니다. 그 말 속엔 어떤 깨달음이 들어
있었거든요. 그러나 야자수 잎사귀 사이로 살랑대며 불어가는 무역풍과 모랫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잠을 자지 않고 어린 왕자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다시 외로운 표류자의 위치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섬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보았지만-이렇게 조그만 섬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말입니다-나는 어디에서도 어린 왕자의 흔적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 왕자가 물의
벽으로 둘러쳐진 이 섬에서 헤엄을 쳐서 빠져나가려고 했던 건 아닐까 하고 겁이 나서, 나는 바닷물
속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목까지 바닷물에 담그고 어린 왕자를 찾다가, 나는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스킵스크젤렌의 실루엣을 발견했습니다.
선장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를 찾아내겠다고 결심했던 겁니다. 여생 동안 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암초와 산호초로 이루어진 군도를 체에 치듯 뒤지고 다녀야 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는 자기
쌍안경 끝에서 정신없이 팔을 흔들어대는 내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 두 팔은 그때 신호기 역할을 한 것이지요. 조금 있다가,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보트 한 척이
물에 내려졌습니다.
내가 갑판 위에 발을 올려놓자마자, 선장이 특유의 활달한 말투로 소리쳤습니다.
풋내기 선원 양반, 메두사의 주방에 걸고 말한건대, 난 자네가 넵튠을 따라서 정어리 뒤를
쫓아다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네. 자, 내 방으로 가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
럼주를 한 잔 앞에 놓고 앉아서, 나는 내가 겪은 일들을 선장에게 자세히 들려 주었습니다. 그는
한 마리 말도 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했을 때, 그의 날카롭고 호전적인 눈매에는 어떤 의심의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내가 이야기를 끝내자, 그는 두 사람의 술잔 가득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황금빛 불타는 액체를
따르고, 파이프를 꺼내더니, 담배통이 다 타서 없어질 정도록 깊이 연기를 빨아들였습니다. 그리곤
잠시 의심장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난 사분지 삼이 물로 뒤덮인 이 망할 놈의 지구를 엔간히 빨빨거리고 돌아다녔다네. 난 믿을 수
없는 일을 많이 겪었어. 자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들이지. 난 자네가 만났다는 그 어린
왕자라는 아이가 누구인지, 또 어디서 왔는지 모르네. 그러나 자네가 그 아이를 만났다는 걸
확신한다면, 거기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겠네. 난 자네를 믿네. 자, 이젠 말해보게나. 여전히
키욕퓨에 갈 생각인가?
나는 처음으로 힘든 일을 겪었을 뿐인데, 벌써 모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선장님, 괜찮으시다면, 집에 돌아갔으면 하는데요.
선장은 빙긋이 웃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어깨를 툭툭 쳤습니다. 그리고는 선원들에게
뱃머리를 돌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주일 뒤에는, 제 헌 슬리퍼와 의자, 그리고 지도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지요.
생텍쥐페리 선생님, 어린 왕자는 선생님과 그의 첫 번째 지구 여행에 대해서 저에게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쓰신 작품을 모두 구입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되풀이해 말씀드리기가 면구스럽습니다만, 저는 선생님 작품들을 거의 모르고
있었거든요. 우리 두 사람의 친구인 어린 왕자와 선생님의 이야기, 그리고 거기 곁들여진
수채화들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저는 그 작은 아이를 추억하기 위해서 생명이 꺼져 버릴 때까지
선생님의 작품을 사랑할 겁니다. 이제 저는 그 아이를 만났다는 드문 특권을 선생님과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걱정하시는 어린 왕자의 소식을 전해 드리려는 것만이 이 편지의 유일한
목적은 아닙니다. 사실 저는 어린 왕자의 급한 부탁을 받고 선생님께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왕자는 양을 자기 별로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호랑이가 양을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제가 양을 맡아 주겠노라고 제안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 정원이 별로 넓지 않아서 양이 곧 지루해 할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작다고 해도, 별
하나 전체를 돌아다니며 놀던 녀석이니까요.
그래서 어린 왕자와 저는, 양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 주는 것이 제일 좋겠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양은 조금 나이가 먹고, 뚱뚱해졌어요. 제 생각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건 같아요. 거의 바오밥나무 싹만 먹었으니까 말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친구가 아주 정성스레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양은 아주 건강하답니다. 양을 상자 안에 담아서
선생님께 보내 드립니다. 어린 왕자에겐 이제 양 상자가 필요없고, 또 요즘 우편 업무라는 게
어찌나 까달로운지 제대로 포장하지 않으면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배달해 주지 않겠다고
튕기거든요.
어쩌면 선생님께서 저보다도 먼저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생텍쥐페리 선생님,
그 아이를 만나시거든 저를 대신해서 따뜻한 인사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그를
그리워하셨던 것만큼 저도 그를 그리워한다는 말도 같이 전해 주십시오.
제가 감히 바라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어린 왕자가 저에 대해서도, 선생님에 대해서만큼
생생하고 즐거운 추억을 간직해 주었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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