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 2
플루타르크스
카밀루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의 생애에 가장 이상스러운 사실은 단 한번도 집정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느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서 전쟁에서 여러번 대승을 거두었고, 다섯 번이나 대
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네 번 이나 개선식을 올려 마침내 로마 제2의 창건자라고 불렸는데
도 말이다. 그 까닭은 당시 로마의 정치적 사정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은 원로원과 뜻이 맞
지 않아 새 집정관의 선출을 거부하고, 그 대신 군사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하였다. 군사
위원회의 군정관들은 집정관과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원이 더 많았다. 그리허여
개인이 휘두를수 있는 권한이 그만큼 줄어들 것으로 생각되어 국민들로부터 미움을 덜 받았
다. 두사란의 집정관 개신 여섯 사람의 군정관으로 하여금 정무를 보도록 한 것은 과두정치
에 신물난 사람에게 하나의 위안이 되었다.
카밀루스의 권세와 영광이 절정에 다다른 것은 이러한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정부측에서
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집정관으로 선출하려 했지만, 그는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집정
관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하여, 전권이 자기에게 위임되었을때도
늘 다른 사람과 권력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처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처리하더라도 모
든 영광은 그에게만 돌아갔다. 그는 겸손할 뿐만 아니라 매우 지혜로워서 암과 언쟁을 벌이
는 일조차 없었다.
푸리아라는 집안은 카밀루스가 아이퀴 인과 볼스키 인들의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전까
지는 그다지 이름이 나 있지 않았다. 이 전쟁 때 그는 포스트미우스 투베르티스 장군 밑에
서 싸웠다. 그는 군대의 맨 앞에서 말을 타고 진군하다가 허벅다리에 적의 창을 맞았다. 그
러나 그느 본척도 않고 그냥 내달려 가장 용감한 적장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이러한 행둥으
로 그는 여러 가지 영예를 얻었으며, 특별히 대정관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상당한 명성과 권
위가 보장된 자리였다. 대정관으로 있을 때 그는 아주 훌륭한 조치를 내렸는데 그것은 미혼
남자들을 설득하거나 벌금 등의 방법으로 위협하여 전쟁으로 미망인이된 여자들과 결혼하도
록 한 일이었다. 또 하나 그가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조치는, 지금까지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던 고아들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해야 하는 일이었다. 잦은 전쟁 때문에 막대한 돈이 들
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가장 큰 골칙거리가 되었던 것은 베이이 시 포위작전이었다. 베이이는 투스카니
의 수도로, 로마 몾지않게 많은 군병을 가지고 있었다. 주민들은 부유하고 고상하며 호화롭
게 생활하였다. 베이이는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항상 로마와 영광과 권세를 다투었다. 이 당
시의 베이이는 큰 전쟁에서 몇차례 패배한후 높고 튼튼한 성벽을 새로 세워 도시를 에워싸
고 무기와 군량과 같은 전쟁물자를 충분히 장만한 상태였으므로, 장기간에 걸친 포위에도
끄떡없이 견디고 있었다. 하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그들은 진력나기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로마군이 겪는 고충도 대단했다. 로마군은 언제나 여름철에만 전쟁을 하고 겨울에는 휴식을
취해 왔던 것인데, 이번에 처음으로 적국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참호를 판 상태에서 7년 동
안이나 여름, 겨울 없이 지구전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로마의 장군들은 포위작전을 실업싱 오래 끌고 있다고 비난받았으며 결국 정부
는 새로운 장군들을 임명하였다. 카밀루스도 그들 중 한사람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2차로 군
정관에 임명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포위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제비뽑기를 통해 그가 맡
게된 임무는 팔라스카 인과 카페나테 인을 퇴치하는 것이었다. 이 두 나라는 로마군이 베
이이시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시종 로마의 영토를 침범하여 말썽을 빚고 있었는데, 카밀루
스는 이들에게 큰 손해를 입혀서 격퇴시켰다.
로마군이 베이이 전쟁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알반호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도무지 이유를 설명할수 없는 현상이라, 모두들 불가사의한 조짐으로 여기고 걱정이 대단했
다. 때는 초가을이어서 비가 많이 내리지도 않았고 남풍이 불어올 걱정도 없었다. 그리허여
이탈리아 전역의 호수와 시내와 샘들 중에는 아예 바싹 말라버린 것도 있었다. 이탈리아 지
방에는 여름에도 비가 별로 오지 않아서 운하에 물이 가득차 있는 법이 없었다. 알반 호수
는 울창한 산으로만 둘러싸여 있을 뿐, 그곳으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호수에 눈에 띄도록 갑자기 물이 불어 호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허리까지 올라오더니,
마침내 산꼭대기까지 물이 차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은 피해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야말로 신령한 힘에 의한 것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까닭을 알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호
수 인근에서 양이나 소를 치던 사람만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물이 자꾸 불어 마침내
호수를 가두고 있던 산지를 넘고, 그 아래 있는 기름지 평야로 쏟아져내려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되자, 로마 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이탈리아 사람까지도 무슨 큰 변동이 생길 징조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일도 가장 많이 웅성거리게 된 것은 베이
이 사람들에게도 이 이야기가 알려졌다.
성을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다 보니 양군이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 병사 주
에 한 사람이 베이이 시민 한사람과 친하게 되었다. 이 베이이 사람은 전설에 정통하였으며,
심지어 신을 업고 있다는 말까지 듣는 사람이었다. 그는 알반 호수가 넘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하며 이제는 로마군이 아무리 베이이 시를 포위하더라도 소용없게 되었다고 말했
다. 그러자 그 로마 병사는, 지금 로마 인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그 일 하나뿐만이 아니며
더욱 이상한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말하였다. 로마 병사는 베이이 사람에게 이제 로마의 멸
망은 피치 못할 일인 것 같으며, 자기 목숨만이라도 건지고 싶으니 무슨 방법이 있다면 조
언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베이이 인은 로마 병사로부터 자기가 미처 알고 있지 못한 큰 비
밀을 듣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로마 병사는 그를 차츰차츰 더 멀리
꾀어내어 마침내 성문으로부터 멀리까지 데리고 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 나서 병사는 그
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큰 소리로 다른 병사들을 불러모았다. 베이이 사람은 결국 포로로 잡
혀서 로마 장군 앞으로 끌려갔다.
이렇게 되자 베이이 사람은 어쩔 도리가 없음을 깨닫고 베이이에 관해서 비밀스럽게 전해
내려오는 신탁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이제 막 새로운 물길을 따라 흐러넘치기 시작한 알반
호수의 물이 바다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지 않는 한, 베이이 시는 함락되지 않는다는 것이
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로마의 원로원에서는 자못 흡족해 하였으며, 델포이로 사절을 보
네어 아폴로의 신탁을 받아오기로 결정했다. 사절단은 리키니우스 코수스, 발레리우스 포티
투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등 가장 아름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일행은 배를 타고 델포이
에 도착하여 신탁을 받고 무사히 돌아왔다. 신탁의 내용중에는 라틴 축전과 관련된 운동제
때 소홀히 한 행사가 있었다는 점이 지적되어 있었다. 그리고 알반 호수의 물을 바다로 흘
러가지 못하도록 하고, 되도록 이면 예전의 줄기대로 흐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운하나 작은 도랑을 많이 만들어 그 물이 모두 평야에 스며들도록 하라는 것
이었다. 신탁을 전해받은 사제들은 알맞은 제사를 드리고 시민들은 알반 호수의 물길을 돌
리기에 바빴다.
전쟁이 시작된지 10년째 되던 해에 원로원은 다른 장군들을 모두 소환하고 카밀루스를 대
정관으로 임명하였다. 카밀루스는 코르텔리우스 스키피오를 기병대장으로 삼았다. 카밀루스
는 제신께 만일 이전쟁을 영광스러운 종말로 이끌어주신다면 큰 축제를 올리고 로마 인들이
마투타 어머니라고 부르는 신에게 신전을 지어드리겠다고 맹세하였다. 이 여신에게 제사드
리는 방식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도 여신은 레우코테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다. 왜냐
하면 그들은 여종을 신전 깊숙이 데리고 들어간 다음 때려서 내쫓고, 자기 자식 대신 친 조
카들을 품에 안기 때움이다. 그리고 제물을 바치는 형식을 보면, 이노가 바코스를 기르던 것
과 이노가 남편의 첩 때문에 고생한 것을 암시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카밀루스는 그와 같은 맹세를 마친후 팔리스카의 영토로 진군해 가서 큰 싸움
끝에 그 나라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또 구원하러 왔던 카페나테 군도 무찔렀다. 그런 다음
베이이 시의 포위전에 주의를 돌렸다. 이 도시는 정공법으로 공략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
문에 그는 지하갱을 파라고 명령하였다. 성부근의 땅은 파기 쉬워서, 성안에 있는 사람들의
문에 띄지 않을 만큼 깊숙이 지하갱을 팔수 있었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을 때 그는
지상에서 일부러 군대를 이리저리 이동시키면서 적의 주의를 돌렸다. 한편 지하갱을 파는
부대는 베이이 시내에서 가장 크고 신령한 유노 신전 근처까지 파들어 갔다.
로마군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베이이 왕은 마침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물로 잡은 짐승의 창자를 조사해본 점술가가 소리 높여 외치기를, 유노 신은 그 제물을
먼저 올리는 편에게 이번 전쟁의 승리를 주겠노라고 하신다고 선언하였다. 그때 땅속에 있
던 로마군이 이 말을 듣고 일제히 마루를 들치고 솟아나와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휘둘렀다.
베이이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다. 로마군은 그 제물을 카밀루스에게 가지고 갔다. 그러나 이
이야기 중에는 꾸며낸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로마군은 물밀 듯이 시내로 쏟아져 들어와 닥치는 대로 약탈하여 어마어마한 전리폼을 얻
었다. 성루에 서서 그 관경을 바라보던 카밀루스는 동정심에 눈물을 흘렸다. 그는 곁에 있던
사람들의 축하를 받자, 두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이렇게 기도드렸다.
"거룩하신 유피테르 신이시여, 그리고 선악을 판단하시는 다른 모근 신이시여, 저희들이
무도한 원수의 도시를 점령하온 것은 대의 명분에 따른 것이며 불가피한 일이었사옵니다.
그러나 만일 이행운이 너무 커서 반대의 움명을 예비하신 바 있으시오면, 그것을 로마시나
그 군대에게 내리지 하시옵기를 비옵나이다."
기도를 마친 그른 로마 인의 방식에 따라 오른편을 향해 돌아서려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
았다. 좌우의 모든 사람들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면서
말하기를 자신이 기도드린 대로 커다란 행운에 대한 보상으로 조그만 불행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시를 점령한 다음 그는 미리 맹세한 대로 유노의 조각상을 로마로 가져다 옮기기로 결
정하였다. 카밀루스는 공사를 맡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유노에게 제사를 올리며 빌었다. 그는
유노신에게 이 제물을 거두어 주시고 로마의 신 가운데 와서 길이 안주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러자 신의 조각상이 낮은 목소리로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
나 리비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카밀루스가 조각상을 만지며 기도드릴 때 그 곁에 있던 누
군가가 "신께서 동의하고 가시겠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적을 즐겨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미약하던 로마가 오늘날과 같은 영광과 권세를 얻게
되기까지 신려한 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사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대 역사가들이 남
긴 기록에는 이와 같은 종류의 신기한 일들이 여러 가지 있다. 신의 조각상이 땀을 흘린다
던가, 신음 소리를 내었다던가 또는 인간을 외면하고 눙을 감아버리더라는 등의 이야기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신기한일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가볍게 부인해
버릴수 없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인간의 능력이란 본시 미약한 것이니, 그런 일을 너무 쉽
게 믿는 것도 또는 전적으로 믿지 않는것도 똑같이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미신과
광신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으며, 후자는 신을 소홀히 여기고 경멸하는 결과를 낳을수 있기
때문이다.
카밀루스는 로마의 라이벌이었던 도시를 10년에 걸친 포위 끝에 함락시티고 나자, 너무
기뻐서 그랬는지 또는 주변 사람들의 칭송이 너무 자자한데 우쭐해져서 그랬는지 자신을 평
범한 이간 이상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는 대단히 성개한 개선식을 올렸다. 그럿은 역사상
전무후무할정도였다. 그는 네 필의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타고 로마 시내를 행진했는데 이
는 신들의 왕이자 아버지가 되는 유피테르만이 누릴수 있는 영광으로 생각되었던 일이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민심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 같은 사치롸 거만함에 로마 시민들이 몹
시 놀랐던 것이다.
그 가 시민들과 두 번째로 충돌하게 된 것은 이민법 때문이었다. 호민관들은 로마시민과
원로원을 둘로 나누어 그 중 한쪽을 로마에 머무르게 하고 다른쪽은 새로 얻은 도시에 이주
시키자고 제안하였다. 그렇게 하면 영토가 둡로 넓어질 뿐만 아니라 두 개의 강대한 도시가
생겨남으로 인해서 식민지 경영에도 유리한 점이 많아질것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숫자의 빈
민들은 이 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으며, 매일 포품으로 몰려와서 함성을 지르며 속히 투
표로 결정짓자고 하였다. 그러나 원로원과 귀족들은 정무회가 요구하는 대로 하는 것은 이
민이 아니라 로마가 완전히 망하는 길이라고 반대하며, 카밀루스에게 몰려가서 도음을 청했
다. 카밀루스는 이 일을 당장 투표에 부칠경우에 발생할 결과가 두려워서 여러 가지 다른
일은 만들어 내었다. 그는 사람들의 주의를 다른데로 돌려버림으로써 간신히 이 위기를 넘
겼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불평은 더욱 심해졌다.
시민들이 그르 미워하게 된 가장 크고 뚜렷한 동기는 그가 전리품의 1할을 요구한데 있었
다. 이 일로 군중들이 흥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베이이시로 싸우러 갈 때 그느 전쟁에
서 승리하면 전리품의 1할을 아포로 신에게 드리겠다고 맹세한 바 있었나 보다. 그러나 그
는 병사들이 마음대로 약탈하여 사욕을 채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느 나중에 군정관의 지
위를 내놓은 다음 이일을 원로원에 호소하였다. 그러자 사제들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E대
바친 물건들을 조사해보았더니 신들께서 노하신 것이 분명하므로 노여움을ㄹ 풀어야만 한다
는 것이었다. 원로원은 어떻게 해서든지 제물을 거두어들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원로원은 정령을 내리기를 전리품을 다시 거두어 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다소라도
전리품을 얻은 사람은 사실대로 신로하고 그 값어치의 1할에 해당하는 액수를 내라고 하였
다. 이 조치는 병사들에게 심한 부담이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로 전쟁터에서
고생하여 간신힌 손에 엏은 전리품을 가져다가 급한대로 다써버린후였다.그런데 이제 와서
1할씩이나 갚으라는 것은 부당하기만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카밀루스를 맹
렬히 공격하였다. 카밀루스는 적당히 내세울 만한 구실이 없어 병사들이 그도시를 약탈할
때 자신이 잠시 그 맹세를 잊고 있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내세울뿐이었다. 사람들은 적의 재
산중 1할을 신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해 놓고 이제 와서는 시민들의 재산을 1할씩 빼앗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전리품에 대한 대가는 모두 각출되었다. 이거이 다 모아지면 금으로
사발을 만들어서 델포이로 보내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도시에 있는 금만으로는 매우 부족
하였으므로 원로원들은 나머지 금을 어디서 구해올것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때 로마의
부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더니 자기들 이 가지고 있던 금패물을 거두어 왔다. 그럿
은 8탈렌트 무게의 순금이었다. 원로원은 부인들의 공을 치하하는 뜻으로 남자들의 장례식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장례식에서는 영결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그때까지의 로마 풍습이
었다.
제물이 준비되자 시민들 가운데서 가장 덕망이 높은 사람 세명을 뽑아 성대하게 장비를
갖춘 군선에 태워 신에게 바칠 물건을 가지도 길을 떠나게 하였다. 바닷길은 물결이 사납거
나 잔잔하거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거의 죽을 변을 당하였다
가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왜냐하면 아이올리아 군도 부근까지는 바다가 잔잔하였으나, 그
들의 항구로 끌려들어가 해적선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원도 배에 실었던 물품도
모두 공매처분될 위기에 놓였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그 곳의 티마시테오스라는 장군 덕
으로 간신히 석방되어 항해를 계속하게 되었다. 티마시테오스는 자기의 군선을 몇척내어 그
들을 델퍼이가지 호송해주고 헌납식에도 함께 참석하였다. 이와 같은 은공에 보답하기 위하
여 로마측에서는 그에게 특별한 영예를 내렸다.
시민들고 정무회는 또다시 이민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때 마친 파리스카인과으리 전
쟁이 터지자 귀족들은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요직에 선출할수 있데 되었다. 전시라는 사정
상 전쟁경험이 많을뿐만 아니라 권세있고 명망높은 사람을 장군으로 삼아야 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이 임명에 동의하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팔리스카 인들의 영토로 진입하여 팔레리
이 시를 포위하였다. 왜냐하면 그 동안은 병사들은 본국에 돌아갈수 없으므로 호민관들이
내분을 일으킬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로마 인들의 상투적인 정책이었으니, 곧 이
웃나라를 공격함으로써 내분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팔리스카인들은 자기들의 수비가 강하다는 것만 믿고 포위 당한 뒤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그들은 당번이 되어서 성벽을 지미고 있을 때가 아니면 으레 사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녔으며 아이들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학교에 보냈다. 그뿐 아니라 선생은아이들을 데
리고 소풍을 갔으며 가끔씩 성밖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운동시키는 일도 있었다. 이곳
가람들은그리스 인들처럼 한선생이 여러 아이들을 맡아서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는 아이들
에게 어렸을 때부터 사회성을 길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학교선생은 아이들을 적군에게 넘겨주려는 반역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는 날
마다 아이들을 이끌고 성밖까지 나와 운동을 시키고는 도로 데리고 들었갔다. 처음에 그는
성 가까이에서 맴돌다가 멀리까지 나감으로써 아이들로 하여금 성밖에 나가더라도 아무런
위험이 없더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이윽고 그는 아이들을 모조리 데리고 로마군진지까지
오서 카밀루스세에게로 안내해달라고 하였다. 카밀루스 앞으로 인도된 그느 자신이 아이들
의 선생임을 밝히고, 자신은 오로지 카밀루스의 은총을 생각하며 다른 모든 것은 버릴생각
이니 이제 이 아이들을 카밀루스에게 맡김으로서 팔레리이 시전체를 넘ㄱ주노라고 말했다.
이 간악한 행동을 보고 카밀루스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옆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
며 말했다.
"전쟁은 고년 참혹한 것이며 야먼적이고 의롭지 못한 수단으로 행하는 것이구나! 그러나
전쟁중이라 할지라도 어진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법이 있으니 아무리 승리가 탐난다고 하더
라도 저열하고 불경스러운 수단으로 이를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위대한 장군은 자기힘
으로 승리를 거두어야지 다른 사람의 비열한 행동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 이와 같이 말
한 다음 그느 병사들을 시켜 학교 선생이라는 자의 옷을 찢어버리고 손을 뒤로 묶었다. 그
리고 아이들에게 작대기를 주어 그것으로 반역자를 심판하고 벌하며 시내로 몰로 들어가
도록 했다.
그제서야 팔레리이에서는 학교선생의 반역행위를 알게 되었으며, 시내는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들은 몹시 우왕좌왕하다가 문득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 꽁꽁묶인 선생에게 매질을
해대며 '카밀루스는 자기들의 그세주이며 신이자 아버이'라고 외치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아이들의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 광경을 직접보거나 전해 들은 팔레리이의 시민들은 모두 카
밀루스의 공정함에 찬탄을 보냈다. 드들은 즉시 회의를 열더니, 카밀루스에게 사절단ㅇ르 보
내어 무조건 항복을 청하였다. 카밀루스는 그 사절단을 로마로 보냈다. 그들은 원로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즉 힘에 있어서는 자기 나라 사람들이 로마인에게 족므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되지만 로마인이 승리보다 정의를 택하는 것을 본받아 자신들도 자유보다 복
종을 택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하면서 로마인들의 미덕을 칭찬하였다. 원로원에서는 모든
일을 카밀루스에게 맡겼다,. 카밀루스는 전쟁에 대한 배상을 돈으로 받고 팔리스카인들과 평
화조약을 맺은 다음 군대를 철수하였다.
그러나 팔레리이 시를 약탈항려고 노리고 있던 병사들은 빈손으로 로마에 돌아오게 되자
카밀루스를 중상하였다. 즉 그는 시민을 미워하기 때문에 어려둔 사람들에게서 가난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갔다고 하였다. 호민관들이 이민에 관한 안건을 다시 들고 나와 투표
에 부치자고 했을 때 카밀루스는 자신이 비난을 받을 것을 개의치 않고 떳떳이 반대하였다.
호민관들은 대단히 불만스러웠으나 단념하고 말았다. 그들은 카밀루스를 몹시 미워한 나머
지 그가 두 아들 중 한명을 병으로 잃는 가정적인 불행을 당하였을 때조차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그는 본시 성격이 온유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이러한 일을 당하자 지극히 상심하며
주야로 집안에 묻혀 부녀자들과 함께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를 탄핵할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그를 고발한 사란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라는 사람이었으며 죄목은 투스칸 전쟁때 전리
품을 착복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재산중 투스칸 전쟁때 가져온것으로는 청동으로 만든 문짝
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에게 매우 분개하고 있었으므로, 무엇이든지 가에 꼬
투리를 잡아서 그르 벌하려 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러명의 친구와 동료군인들을 모아 놓
고 자신이 부당하게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일을 막아달라고 호소하였다. 그의 많은 친구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그가 벌을 받게 될 때 막을 힘은 없으나 벌금형을 받는다면 그액수가 얼
마가 되든지 간에 도와 주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러한 치욕을 견딜수가 없었으므로 로
마를 떠나 망명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느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말없이 로마 시
의 문으로 걸어갔다. 그는 문에서 멈춰서더니 유피테르 신전을 향해서 두팔을 들어올려 기
도하였다. 만일 자기가 아무죄없이 시민들의 적의와 오해로 쫓겨나가는 것이라면 로마 인들
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그의 도움을 절실하게 원하여 그가 돌아오기만을 간구하는
것을 온 세상이 보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느 아킬레스 처럼 자기 나라사람들을 원망하여 본국을 떠나갔다. 그를 변호해줄 사람이
라고는 없었으므로 그느 궐석재판으로 1만 5천 아스으 벌금형을 받았다. 이것은 은화로 따
지면서 올린 기도에 대하여는 곧 정의의 대답이 있었는데 그가 당한 억울한 처사에 대해서
무서운 보복이 내린 것이다. 사람들은 온통 그이야기 뿐이었다. 무서운 징벌을 받은 로마는
살상 위험 치욕의 시대로 치달았다. 다만 그것이 우연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다.
다가오는 재앙의 첫징조는 대정관의 지위를 매우 존중하여, 거의 신성시 하였기 때문이다.
또하나의 징조는 카밀루스가 본국을 떠나기 직전에 마르쿠스키이디키우스라는 사람이 정무
위원회에 중대한 보고를 한 것이다. 이사람은 크게 이름난 사람도 원로원도 아니었으나 아
무런 흠잡을데없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그가 전날밤에 '새로
운 길'이라는 거리를 걸어가는데 누가 큰 소리고 자기 이름을 부르기에 돌아다보았더니 아
무도 보이지않고 다만 사람의 음성보다 훨씬 우렁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
다고 하였다.
'마르크스 카이이키우스 ,이른 아침에 호민관들에게 가서 말하여라. 이제 곧 갈리아 족이
쳐들어온다."
정무위원회는 이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조롱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카밀루스는 로
마를 떠났다.
갈리아인은 켈트족에 속하는 종족인데 좁은 땅에 비해 인구가 너무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살곳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젊은 무사들로 대부대를 이굴고 있었는데
중간에 두무리로 나뉘어 하나는 리피안산맥을 넘어 북해에 이르러 유럽에서 가장 먼 지방에
정주하였고 다른 한무리는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산맥사이에 자리잡아 오랫동안 세모네스 족
과 켈로리족에 이웃하여 살았다. 어느 날 그들은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나라가 아니 다른
모든 나라는 땅이 척박하여 쓸모없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들에게 처음으로 포오주의 맛을 보여줌으로써 이탈리아로 오게 한 것은 투스칸 사람아
룬스였다고 한다. 그는 결코 처음부터 나쁜 품성을 타고난 자는 아니었으며, 다음과 같이 불
행을 곁었던 사람이다. 그느 루쿠모라는 고아의 후견인인 되었던 적이 있는데, 이 아이는 투
스칸에서 가장 재산이 많고 잘생긴 아이였다. 그아이는 어릴 때 부커는 아룬스가족들 손에
자랐는데 장성한 후에도 그 집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고 그곳에 계속머물고 싶다고 하였다.
루쿠모는 아룬스의 아내와 오랫동안 간통하고 있으며 두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열정은 너무 뜨거워서 그만둘수도 없고 더 이상 자신들의 관계를 감출수도 없게 되
어버리고 말았다. 그느 결국 본국에서 떠나고 말았다. 아룬스는 갈리아 인들에 관한 이야기
를 듣고 그들을 찾아가서 이탈리아를 침범하도록 부추렸다.
갈리아인들은 첫 번째 침략에서 알프스로부터 이탈리아 반도의 양편 바다에 걸친지역을
제압하였다. 이지역은 옛날에 투스칸의 영토였느데 지명으로 보아도 그사실을 입증할수 있
다. 왜냐하면 그곳의 위쪽에 있는 바다는 투스칸인의 도시인 아드리아의 이름을 따서 아드
리아 해라고 부르고 아래쪽 바다는 그냥 투스칸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지방에는 과일나
무가 많고, 훌륭한 목장도 많으며 물줄기도 고루 퍼져있었다. 그시대에 이지방에는 아름답고
큰도시가 18개나 있었는데 산업이 매울 융성하여 시민 모두가 즐거운 삶을 누리고 있었다.
갈리아인들은 이도시를 침략하여 투스칸인들을 몰아내고 자기들의 도시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갈리아인들은 이때 투스칸의 도시 클루시움을 포의하고 있었다. 그곳 주민들은 로마에 구
원을 호소하며, 사절단과 서신을 통하여 야만인들을 회유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로
마에서는 파비아이라는 집안의 세사람을 갈리아인에게 보냈으니, 이들은 로마에서 가장 뛰
어난 인물들이었다. 로마의 이름으로 인해서 갈리아 인들이 갈리아 인에게 묻기를 클루시움
의 사람들로부터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하였기에 공격하였느냐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갈리아
왕 브렌누스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클루시움 사람들의 잘못은 영토를 너무 넓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오, 더 좁은 땅에서도
충분히 농사지어 먹고 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구는 많고 사정은 딱한 우리에게
조금도 나눠주려고 하지 않았소. 로마인들도 예전에 알반, 피데나테, 카페나테, 팔리스카, 볼
스키아 같은 곳 사람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았었소, 이곳의 사람들이 자기드읠 가진 바 좋은
것을 로마와 나눠쓰지 않으면 전젱을 해서 그들을 노예로 삼고 나라를 약탈하고 도시를 파
괴하였소. 이와 같이 한 것이 조금도 잔인하거나 부당하지 않았으니, 다만 로마가 모든 법중
에서 가장 유구한 법을 지켰기 때문이오, 그 법이란 하늘의 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들판의 짐
승들까지 다 같이 따르는 것이니 바로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등쳐먹고 살아간다는 법이오.
그법에 따라 지금 클루시움 사람들이 포위된것이니. 가엾이 여기지 마시오 당신들 역시 우
리 갈리아 인이 당신들에게 짓밟힌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
오"
이말을 들은 로마 인들은 브렌누스에게 전혀 휴전할 의사가 없음을 알 수있었다. 로마인
들은 클루시움시내로 들어가 자신들이 힘이 되어줄테니 용감하게 싸우라며 주민들을 고무시
켰다. 즉 야만인들과 싸워서 클루시움 사람들의 용기를 과시해보라고 한 것이다. 이에 클루
시움 인들은 반격을 가하여 성벽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로마에서 사절로 온 파
비이 킌투스 암부스투스가 말을 타고 앞장서서 나가 덩치 큰 적장과 맞붙었다. 서러 맹렬하
게 싸우느라 갑옷이 번쩍거렸으므로 처음에는 호마 인임이 발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파비이
가 갈리아 인 장수를 죽이고 갑옷을 벗기려고 말에서 띄어내릴 때 브렌누스는 그가 로마인
임을 알아버렸다. 브렌누스는 소리높여 하늘에 계신 신들도 이것을 눈여겨 보시라. 휴전을
성립시키러 왔다러니 적이 되어 싸우는 데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즉시 싸움을 그치고 클루
시움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군대를 로마로 이끌고 갔다. 그러나 로마인이 잘못한 것을 빌
미로 삼는 것처럼 보이기는 싫어서 브렌누스는 로마로 전령을 보내어 피비이를 처단할 테니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군대는 로마를 향해 천천히 이동시켰다.
로마에서는 원로원을 소집하였다. 대다수의 의원들은 파비이를 비난하였다. 그중에서도 패
키알이라는 사제들은 그를 적에게 인도하라. 로마시민전체가 그죄를 짊어질 이유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패키알이라는 제도는 로마의 역대 왕중에 가장 온유하고 공정한 왕이었다고 누
마 폼필리우스가 창시한 것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짓는 직분
이었다. 원로원은 이일을 시민들에게 물었다. 원로원 의원들뿐만 아니라 사제들까지 군중을
향해서 파비이의 행동을 비난했지만, 시민들은 그들의 말을 아주 무시하여 야유를 보내더니,
파비이와 그의 형제들을 군정관으로 임명하였다.
갈리아인들은 이 소식을 듣자 극도로 격분하여 로마를 향해 진군해왔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곳의 나라들은 많으 수의 군인들이 잘 갖춰진 무기를 번득거리며 맹렬한 기세로 진군해
가는 것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져서 자기들의 도시도 모든 것을 다 빼앗길 것으로 생각하였
다. 그러나 갈리아 인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고 밭에 있는 곡식조차 다치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를 지나갈때마다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로마를 치려고 가는 길이며, 로
마만을 적으로 생각할뿐이다. 따라서 다른 나라는 모두 우방이라고 외친 것이다.
야만인들이 이렇게 밀물같이 달음질쳐 오자 군정관들은 로마 시민들을 지휘하여 들판으로
나왔다. 그 인원이 4만명이나 되었으니 숫자상으로 조금도 갈리아 인에게 밀리지 않았다. 하
지만 그 대부분은 처음 출전하는 사람들로 이전에는 창한번 들어본적 없는 이가 허다했다.
이것만으로고 불리한데다가 그들은 종교적행사까지 소홀히 여겼다. 전쟁때마다 으레 올리던
제사도 올리지 않았으며 점술가들에게 자문을 구하지도 않았다. 또한 장군이 여럿이라 혼란
을 초래하였다. 종래에는 이렇게 중대한 전쟁이 아니었어도 한 사람의 장군으로 하여금 전
군을 지휘케하고 그를 대정관이라 불렀었다. 왜냐하면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사람의 책임있
는 통솔 아래 전체가 질서 정연히 복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카밀루스가 쫓겨나는 것을 지켜본 장군들은 이제 병사들에게 아첨이나 하며
환심을 사기에만 급급했을 뿐 누구 하나 막대한 책임을 짊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로마군은 이러한 상태로 도시를 출발하여 로마에서 10마일 쯤 떨어진 알리아 강가에서 밤
르 지내게 돠었다. 그곳은 티제르강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과히 멀지 않는 곳이었다. 이 소식
을 들은 갈리아 군은 즉시 그 곳으로 쳐들어 왔고 로마군은 서투른 작전과 훈련 부족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참패하였다. 갈리아 군은 고마군의 좌익을 상속에 몰아넣어 격
멸시켰다. 이에 비해 평지로 돌격해 오는 적을 피해 산위로 도망쳤던 로마군의 우익은 상대
적으로 피해를 덜 받았으므로, 대부분이 무사히 시내로 후퇴하였다. 적이 살생에 지쳐서 공
격을 늦춘 덕에 살아 남은 자들은 베이이시로 달아났다. 그들은 로마가 이제 다 망한 것으
로 생각하였다.
이싸움은 하지경의 음력15일에 있었는데 그날은 옛날에 파비이 가문에 큰 재난이 내려 그
집안 사람 300여명이 투스칸인들에게 살해된 날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패전으로 예전의 사
건은 잊혀지고 그때부터는 이날을 알리아의 액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알리아 강에서
딴 이름이다. 어떤 날을 액일로 또 어떤날을 길일로 삼을 것이냐하는 문제와 이에 관한 헤
시오스의 견해 및 헤아클러이토스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이미 자세히 살펴 본바
있다. 그러나 몇몇중대사건이 이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듯하다.
아테네의 달로 헤카톰바이온 제5일에 보이오티아 인들은 두 번이안 대승을 거두어 그리스
의 자유를 공고히 했었다. 한번은 레우크트라에서 스프르타군을 정복한것이고 또하나는 그
보다 300년전에 케레수스에서 라타미아스가 이끄는 테살리아군을 정복한 것이다. 그리고 페
르시아군이 마라톤에서 그리스군에게 패한 것은 보에드로미온달 제 6일이었으며 제3일에는
아르벨라에서 패하였는데 이사건들은 모두 같은 달에 일어난 일이다. 아테네군이 카브ㅇ아
스의 지휘로 낙소스해전에서 승리를 거둔것도 같은달 보름날이었으며 살라미스해전에서 승
리를 거둔것도 그달의 제 20일이었다. 이것은 모두<일운론>이라는 졸문에서 논한 바 있다.
타르게리온이라는 달도 야만인에게 액월인 것으로 생각된다. 알레산드로스가 다리우스의 부
하장군을 그라니쿠스에서 정복한 것이 그달이었으며 티몰레온이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 인
들을 대파한것도 그달24일이다. 또 에포로스, 칼리스테네스, 다마스테스, 필라르쿠스등의 사
기에 의하면 트로이가 함락된것도 바로 같은 달, 같은 날짜에 벌어진 일이다. 반면에 그리스
에게는 메타기트니온이라는 달이 액월인 듯 싶다. 왜냐하면 이 달 제7일에 그리스군이 크라
논에서 안티파네르 군에게 검멸되었으며, 그보다 오래된 일인 카이로네아에서 피리리프군에
게 패한것도 같은 달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같은해, 같은 달, 같은날, 아르키다무스는 군
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들어갔다가 섬멸당하였다. 카르타고 인들은 이달 제21일을 제1년중
의 가장 불길한 날로 알고있었다. 내가 잘아는 사실로는 테베가 알레산드로스에게 2차로 패
한 것이 신비의식을 행하던 날이었으며, 그후 아테네에 마케도니아군이 주둔한 것은 이아쿠
스의 신비의식을 행한 날인 보에드로미온 달 제20일이었다. 그리고 카이피오가 지휘한 로마
군이 킴블리아 군에게 진지를 빼앗긴 것도 바로 그날이었으며, 나중에 루쿨루스가 지위한
로마군이 아르메니아군과 티그라네군을 격파한것도 같은 날이었다. 아탈루스왕과 포페이우
스가 사망한 것은 바로 그들의 생일이엇따. 이처럼 같은 날짜에 길한 일과 흉한 일을 함께
당한 사람들의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그러나 로마인드은 이러한 날을 특별히 불길한 날이
라고 보며 미신이 더욱 심해짐에 따라 매달 또는 다른 두날을 액일로 본다. 이문제에 대하
여는 <로마소고>라는 글에서 좀더 소상히 취급해두었다.
알리아 전투가 끝난 뒤 만약 갈리아 군이 패주하는 로마 군을 추격하였더라면 로마 시를
점렬하고 그안에 있던 사람들을 전멸시킬수 있었을 것이다. 로마시민들은 겨우 살아 돌아온
군병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 전전긍긍하여 벌벌떨고 있었다. 그러나 갈리아 군은 자신들이
그 정도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채 다만 로마군을 격퇴한 것만 기뻐하며
진지에 흩어진 전리품으 나눠갖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로마를 버리고 패주한 자들은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고 로망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전의를 회복하여 오랫동안 포위당할
것에 대비하는 준비를 갖췄다. 그들은 로마 시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포기하고 오직 유피테
르 신전만 사수하기로 결심하고 담을 더 높이 쌓고 무기를 충분히 저장하였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먼저 신령한 기물을 신전 안으로운반하였다.
한편 베스탈들느 성화와 그밖의 신령한 기물을 지니고 시외로 도피했다. 어떤설에 의하면
베스탈들은 다른 물건은 전혀 가지지 않은채 꺼지지 않는 성화만 가지고 도피하였다고도 한
다. 불은 천지만물의 근원이라 하여 옛날 누마왕이 그들로 하여금 섬기도록 한 것이다. 생각
건데 불은 자연 문물중 가장 생동적인 것으로 어떤 작용을 하던간에 움직음을 동반한다. 다
른 모든 물질은 그 속에 불기운이 없으면 축 늘어져 죽은 듯 하며 생명의 정기인 불이 있어
야 비로소 생기를 띠고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식이 많고 지혜가 풍부하여
예술의 신들과 친교가 있었다는 누마왕은 불을 성스러운 것으로 삼고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영원한 힘의 상징으로 삼아 시간의 끝까지 불을 꺼뜨리지 말고 보존하라는 조칙을 내렸던
것이다.
어떤 설에 의하면 그리스에서와 같이 유피테르성전 앞에는 성화를 피워두었는데 이곳에는
베스탈이라고 불리는 처녀들외에는 아무도 보아서 안되는 신령한 기물이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속설에 따르면 그곳에는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로 올 때
트로이에서 가져온 여신 팔라스의 초상있었다고 한다. 다른설에 의하면 사모트라케인의 초
상이 놓여있었다는데 그것은 다르다누스가 트로이 시를 창건한 다음 그곳사람으로 하여금
섬기게 한 것으로 트로이가 망한 귀에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로 오면서 훔쳐온것이라고 한
다. 그러나 이런일에 관해서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이성ㅇ전 안에는 과히 크리 않은 항아리가 두 개 있었다고 한다. 그중의 하나는 뚜껑을 열
어두곤 했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고 다른 하나에는 무엇인가 가득 담겨 있었
는데 밀봉해 두었으므로 그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베스탈외에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
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와같은 낭설은 갈리아 인들과 전란때 이성전의
베스탈들이 신령한 기물을 두 개의 항아리 속에 넣어서 퀴리누스 성전밑의 땅속에 묻었던
일이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그 자리는 오늘날까지 '돌리오라즉 항아리라고 불린다.
사실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베스탈들은 가장 신령하게 여기는 기물을 가지고 티베를 강
을 따라 피신했다. 그런데 피난민 중에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과 약간의 살림살이를 수레에
싣고 가던 루티우스 알비니우스라는 평민이 있었다. 그는 베스탈들이 가련하고 지친 모습으
로 가슴에 신령한 물건을 감춘채 힘없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처지와 살림살이를 수레에서
내린후 그들을 태워서 무사히 그리스 인들의 도시 까지 갈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와같이
곤궁한 지경에서도 알비니우스가 보여준 깊은 신앙심과 경건함은 기술해 남길 만한 일이다.
반면에 다른 성직자들과 예전에 집정관을 지냈거나 개선의 영예를 가진 일이 있는 노년의
원로원 의원들은 차마 로마를 버리고 피난갈수 없었다. 그들은 최고의 성직자로 있던 파비
우스의 말을 좇아 법의나 관복을 입고 나라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칠 결심을 하였
다. 그들은 신들에게 기도를 드린 다음 광장에 놓이 자신들의 상아의자에 정좌하여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가 있은 지 사흘째 되는날, 브렌누스는 그들의 군대를 이끌고 시를 공격하기 위해 나
타났다. 그는 성문이 활짝 열려있고 성벽위에 보초병조차 서 있지 않는 것을 보고 로마군이
특별한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였다. 그는 로마군인들이 그렇게까지 심
한 절망상태에 빠져있는 줄 상상도 못하였다. 마침내 브렌누스는 실상을 파악하고 콜리네문
으로 진주하여 로마를 점령하였다. 이때가 로마를 창건한 지 360년 남짓한때의 일이다. 그러
나 그 시대의 연대란 매우 혼돈되어서 갈피를 못 잡을 지경이니 어느 정도 까지 믿을수 있
는것인지 의심스럽다. 로마가 함락되었다는 소문은 그리스까지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대략
그 시대의 사람이엇떤 헤라클래이데스 폰티쿠의 ,<<정기론>>에 보면 북방정토 사람들이
먼 대양으로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로마라고 불리는 그리스인의 이민 도시를 점령하였다는
소문이 서쪽으로부터 들여왓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헤라클레이데스는 미덥지 않은 전설을
즐긴 사람이었으니,로마가 함락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다 '북방정토'니 '먼대양'이
니
하는 공연한 수식어를 첨가해 넣은 것 같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로마가 갈리아인에게
점령된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해들은 것 같은나 그는 로마를 구해 낸 사람이 루티우스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카밀루스의 성은 마르쿠스지 루키우스가 아니다. 그러니 이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브렌누스는 로마를 점령한 다음 군대를 시켜 유피테르신전을 엄중히 감시하도록 하고 자
신은 광장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그는 아주 많ㅇ느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앉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매우 놀랐다. 그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 어느누구도 두려워하거나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관심조차 없다는 듯 얼굴색 하나 달라지지 않고
태연히 앉아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지팡이를 잡고 아무 말없이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었
다. 갈리아인들은 이상한 광경에 놀라 한참 동안 멍하니 선채 신을 만난 줄 알고 가까이 다
가가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용감무쌍하게도 마르쿠스 파피리우스에게 다가가 그
의 턱을 만지고 긴 수염을 쓰다 듬었다. 그러자 파피리우스는 잡고 있던 지팡이로 그 병사
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갈리아 군인은 칼을 휘둘러 파피리우스를 살해하였다. 이
를 신호로 다른 병사들도 기다렸다는 듯 로마 인들은 그에 대한 화풀이로 로마시에 더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들은 도시의 모든 건물에 불을 질러 파괴를 일삼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눈에 띄는대로 모두 죽여버렸다.
유피테르 신전이 단시일 내에 함락되지 않자, 갈리아군은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들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서 일부는 왕과 함께 머물러 포위를 계속하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사방을 돌아다니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였다. 이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겁 없이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그가운데 갈리아 인의 가장 큰정예부대는 아르테아로 향해갔다. 그곳에서는 로마를 떠나
온 카밀루스가 바깥출입을 삼가며 보통사람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드디어 자리
를 털고 일어나더니 적으로부터 어떻게 도망칠 것인가를 생각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그들을
웅징할 것인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카밀루스는 아르테아인이 인원은 충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했다. 로마군
이 변변치 못한 적에게 정복된 것은 어설픈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파괴를 일삼는 야만인의 무리를 물리침을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다들
용기와 자신감만 가져준다면 너희들의 손에 아무런 피해없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쥐어
주겠다고 한 것이다.
젊은이들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카밀루스느 아르데아의 정치가들을 설득하여 군무
에 종사할수 있는 모든 사람을 무장시켜 성내에 감춰두었다. 적이 가까이 오기까지 아무 낌
새를 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갈리아 군은 부근의 촌락을 약탈한 뒤 노획물을 잔
뜩 쌓아두고 평야지대에서 아무렇게나 노숙하고 있었다. 모두들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떠들
어 대다가 곯아떨어지자 주위는 한없이 조용해졌다.
척후병들의 보고를 들은 카밀루스는 어둠속에 아르테아군을 소리없이 이동시켰다. 마침내
진군의 나팔소리가 울리자 아르데아병사들은 큰소리로 함성을 지르며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
왔다. 술에 취해 곤히 자고 있던 갈리아 병사들이 미처 제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었다. 그들
중에서 두려움을 떨쳐 정신 차리고 저항할 자세를 취하는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자
들도 채 일어서기 전에 목숨을 잃었고, 대부분은 술고 잠에 취한채 무기를 잡아볼 겨를도
없이 도살되었다. 어둠을 틈타 간신히 도망친자도 다음날 기마대의 추격을 받아 소탕되었다.
전승의 소식이 퍼지자 이웃 여러 도시의 젋은이들이 무기를 들고 카밀루스에게 모여들었
다. 알리아에서 패전하고 베이이로 도주한 로마군은 자기들의 운명을 탓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 우리 로마가 카밀루스와 같은 장군을 잃은 것이야말로 천벌리 아니고 무엇이랴! 그의
공으로 지금 아르데아는 저렇듯 영광을 얻었는데 그와 같은 위인이 나서 자란 도시는 완전
히 멸망하였다. 우리는 지금 지도자가 없어서 낯선 도시에 틀어박혀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
며 온 이탈리아가 적의 손에 유린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다. 자 아르데아인에게 사람을 보
내서 우리의 장군을 돌려달라고 청하자. 응락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무기를 들고 그에게로
가자. 그는 이제 추방된자가 아니며 우리는 그의 동포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적의 수중에 들
어가고 없으니 말이다."
이와 같이 의견이 일치되자 그들은 카밀루스에게로 사람은 보내어 자기들의 장군이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유테르신전안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정식으로 임명을
받을 때 까지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살아있는한 그들이 아직 로마를 대표
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복종하겠으나 그들의 의사를 듣지않고서는 주제넘
게 나설수 없다는 것이었다. 로마군은 카밀루스의 겸손한 성품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유피테
르신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적군이 시내
를 점령하고 있는데 신전까지 연락병을 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로
마의 젊은 군병 가운데 주류계급출신인 포티우스 코미니우스라는 자가 무훈을 세우러 야심
에 이 위험한 일을 떠맡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그는 신전을 지키는 부대에게 전할 편지를
가지고 가지는 않았다. 적에게 붙잡힐 경우 카밀루스의 계획이 발각될까 염려해서였다.
그느 초라한 옷을 입고 그속에 코르크를 지니고 대담하게 출발했다. 그는 대부분 낮에 길
을 갔으나 로마시에 가까이 기르자 밤을 이용했다. 야만인들이 다리를 지키고 있었으므로
그느 롯을 벗어 머리에 동여매고 코르크의 부력을 이용하여 강을 건넜다. 그리고 불빛과 소
리를 고려하여 갈리아 군의 경계를 피해 카르멘탈문으로 다가갔다. 이문에서 보녀 신전은
가파른 바위절벽위에 서있었다.
그는 울퉁불퉁한 바위를 딛고 올라가 간신히 수비대에 도착하였다. 그느 먼저 인사를 한
후 자기 신분을 밝히고 장군들에게 안내되었다. 즉시 원로원이 소집되었다. 그느 우선 카밀
루스의 승리소식을 전했는데 그 곳 사람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는 군대의 결의를 설
명한 다음 카밀루스를 장군으로 임명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여 지금 로마시이외의 곳엔 거주
하는 시민들은 오로지 카밀루스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원로원은 이말을 듣고
사태를 숙고한 다음 카밀루스를 대정관으로 임명하여 폰티우스를 돌려보냈다. 그는 요행히
갔던 길로 다시 빠져나와 원로원의 결정을 밖에 있는 로마인들에게 전하였다. 모두들 이소
식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카밀루스가 베이이시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2만의 병력이 모여
있었으며 그를 따라 이웃의 여러도시에서 모인 군병도 상당히 많았다. 카밀루스는 적을 공
격할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한편로마셍서는 몇몇갈리아 군인이 폰티우스가 한밤주에 유피테르신전으로 올라간 곳 근
처를 지낟가가 누군가 바의를 타고 신전으로 올라간 한적을 발견하였다. 갈리아 병사들은
즉시 이사실을 왕에게 보고 하였다. 왕이 몸소 그 곳으로 가서 시찰하였다. 왕은 한동안 아
무말도 없더니 저녁이 되자 가장 민첩한 군병들을 소집하여 이렇게 말했다.
"저 벼랑으로 올라가는 길을 모르고 있었는데 적군이 스스로 그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
었다. 더욱이 그방법이 그다지 어렵지 않아 사내라면 누구나 해낼수 있다는 것도 가르쳐주
었다. 시작부터 순조로왔던 이번 전쟁을 여기서 중단하고 마지막 거점을 공략할 길을 적이
스스로 보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난공불락이라고 단념하는 것은 수치가 아닐수 없다. 한 사
람이 쉽게 올라간 곳이니 여러사람이 연달아 올라가기에도 어려울리 없다. 논공행상은 적절
히 할터이니 다투어 공을 세우도록 하라."
왕이 말을 마치자 병사들은 너도나도 그일을 떠맡겠다고 나섰으며 자정쯤에는 많은 병사
들이 소리없이 절벽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벼랑은 가파르고 험하였으나 그래도 올라가려
고 마음을 먹으니 요령인 생겼고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오르기 쉬었다. 그들의 선두는 이
미 절벽위에 다달아 망대에서 잠들어 있는 파수병을 공격하려는 찰라였다.
그런데 유노의 신전에서는 신령한 거위를 기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거위에게 모이를 잘
주었으나 지금은 사람먹을 것도 무족했으므로 다소 소홀히 취급하고 있었다., 거위는 본시
귀가 밝은데다가 굶주림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터라 갈리아 군사들이 기어 올라오는
소리를 재빨리 알아듣고 꽥꽥거리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로마병사들이 잠에
서 깨어났다. 한편 지금까지 소리없이 기어들던 갈리아군은 발각된 것으로 생각하고 소리를
지르며 사납게 덤벼들었다.
로마군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무기를 들고 나와닥치는 대로 적에게 달려들어 싸웠다. 누구
보다도 먼저 달려나온 사람은 만리우스라는 집정관이었다. 그는 신체도 강건하고 의기 또한
출천하여 두사람의 적병과 한꺼번에 맞붙었다. 그느 도끼를 치켜들어 내려치려는 적병의
얼굴에 일격을 가해서 적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고 함께 나머지 적을 절벽 아래로 밀어
뜨렸다. 그때까지 절벽을 완전히 올라온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와같이 해서 위기를 모면한 로마군은 날이 새자 잠들었다던 파수대장을 절벽아래 있는
적의 머리위로 밀어뜨리고 만리우스의 무훈을 표창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실질적인 이득
을 주었다기보다 이름을 높여준것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자기의 하루양식을
그에게 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빵 반 파운드와 포도주 8분의 1파인트였다.
그 후 갈리아 군의 형편은 나날이 약화되었다. 그들은 군량이 부족하였지만 카밀루스 군
이 무서워 전과 같이 약탈할수도 없었다. 또한 태우지 않고 쌓았둔 시체를 때문에 질병이
발생하였다. 폐허로 가득한 도시에는 잿더미만 쌓이고 그것이 더운 바람에 날려다녔는데 그
공기를 마시고 살자니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흐린 날씨가 많고 산악지대였던 본
국을 멀리 떠나 평지에 위치한 로마에서 가을을 맞았으니 자연의 조건변화에 적응하기가 힘
들었다. 게다가 일곱달째 유피테르 신전앞에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그 지루함과 피곤함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날마다 사망자가 속출하였으므로 이들을 일일이 매장할수도 없었다. 포
위당하고 있는 쪽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이 늘어만 가고 카밀루스
가 대체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소식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심한 무력감에 빠져 있었
다. 야만인들이 로마시를 엄중히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식이 두절된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서로 이와 같은 곤경에 처하여 있었으므로 종전이 거론된 것은 자연스런일이었다. 처음에
는 양편의 전위대끼리 이야기가 오가다가 나중에는 쌍방의 수뇌자들 간에 논의가 되었다.
따라서 갈리아 왕 브렌누스와 로마의 호민관 술피키우스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협상의 결
과 로마는 금 1천파운드를 내놓기로 하고, 갈리아 군은 그것을 받는 즉시 철수하기로 하였
다. 양측은 이 결정에 따를 것을 맹세하고 로마군은 금을 가지고 왔다. 처음에 갈리아 인들
은 몰래 저울눈을 속이더니 나중에는 함부로 저울대를 흔들어대었다. 로마인들은 분개햐였
다. 그러자 브렌누스는 얼굴 가득 조소를 띠며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혁대를 끌러 저울에
던졌다.
"이건 무슨 뜻이오?"
술피키우스가 묻자 브렌누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복받은 자의 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이 말은 후에 종종 인용되어지곤 하였다. 일부의 로마인들은 몹시 화를 내며 금을 가지고
신전으로 돌아가서 포위를 견뎌내자고 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일부는 이 정도의 모욕은 참
자,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한것부터가 모욕을 감수한것이니 얼마를 더 지불한들 어떠냐, 명예
는 이미 잃은 것이며, 이것은 피치못해서 하는 일 아니냐고 말했다.
이와같이 서로 언쟁하고 있을 때 카밀루스는 군대를 지휘하고 로마성 밖에 와 있었다. 그
는 안에서 무슨일이 진행중인 지에 관해서 전해들은 후, 군대에 명령을 내려 천천히 질서
있게 따라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자신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협상 중인 로마 인들에게 급히
달려갔다. 그들은 길을 비켜주며 자신들의 하나뿐인 대정관을 침묵과 존경으로 맞아들였다.
그는 금을 들어내게 한 후 갈리아 인들에게 저울만 가지고 어서 물러가라고 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로마인은 금이 나이라 철로써 나라를 지켜왔소." 브렌누스는 화를 내며 어떻게 이
런식으로 협정을 파기할수 있느냐고 따졌다. 카밀루스는 종전협정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자기가 대정관이었으니, 갈리아 인들은 협정을 채결할 권한도 없는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다. 그리고 협정을 체결하고 싶다면 새로운 조건을 제시해야 할 것이며, 지금부터는 용서를
구하는자를 용서하거나 만행을 뉘우치지 않는자를 처벌하는 모든 법적권한이 자기에게 있다
고 선언하였다.
브렌누스는 이말에 격분하였고 곧 싸움이 벌여졌다. 카밀루스와 브렌누스는 서로 칼을 뽑
아들고 덤볐지만 장소가 실내인지라 장애물이 많아서 군사전 행동을 전개할수 형편이 못 되
었다. 하는 수 없이 브렌부스는 분을 참고 부하들을 거느리고 돌아갔다. 밤사이에 그는 전군
을 무장시켜 시내에서 철수하고 8마일쯤 진군해 가서 가비이로 가는 길목에 진을 쳤다.
날이 샐무렵 카밀루스는 완전히 용기를 회복한 로마군을 지휘하여 갈리아군을 무찌르고
그들의 진지를 점령했다. 로마병사들은 도주하는 적병을 추격하여 목을 베었다. 갈리아군의
대부분은 사방으로 흩어져 헤매다가 이웃마을의 군대에 의해서 소탕되었다.
이리하여 로마는 이상스럽게 점령되었다가 더욱 이상스럽게 구제되었다. 야만인들은 일곱
달동안 로마를 점유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진군해 들어온 것을 7월 중순이요 쫓겨간 것은 다
음해 2월 중순이 된다. 카밀루스는 구국의 장군이요, 로마의 탈환자로서 당당히 개선하였다.
국외로 달아났던 사람들은 그를 좇아 처자를 거느리고 입성하였다. 신전안에 포위되어 근근
히 연명하던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며 그를 맞이하였는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
다는 표정들이었다. 사제들과 성직자들이 은밀한 장소에 묻어두었거나, 피난갈 때 갖고 갔던
신령한 물건들은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를 본 시민들은 마치 진짜 신들이 로마로 살아 돌
아온 듯한 기쁨을 맛보았다. 카밀루스는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고 사제들의 지시대로 도시를
정화하였다. 모든 신전을 수축하고 마르쿠스 카이디키우슷에게 갈리아 군이 온다고 알려주
던 소리가 들린 자리를 찾아서 그 곳에 새로 '아이우스 로쿠우디우스' 즉 소리의 신전을
새
로 세웠다.
잿더미 위에 신전을 재건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고된일이었다. 하지마 카밀루스의 열성과
사제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그 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철저히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는데 있
어서는 시민 모두 기가 질려버렸다. 도시를 재건 하는데 쓸 재료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들은
너무도 큰일을 치른 다음이라 아직 휴식이 필요하였으며 새로운 일에 착수할 기력도 재력곧
없었다.그들 사이에서는 다시 베이이 시로 이주하자는 생각이 되살아났다. 거기에 가기만 하
면 즉시 들아가 살수 있는 집도 있고 물자도 풍부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선동정치가들ㅇ
느 인민의 환심을 살 연설을 하며 카밀루스를 비난하였다. 시민들이 가기만 하면 그대로 들
어가 살수 있는 도시로 가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폐허가 된거리에서 그대로 노숙시키며 결
국 잿더미속에서 살림을 차리락고 하는 것은 카밀루스가 로마의 지도자요 장군임에 만족하
지 않고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의 지위를 탐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원로원은 내
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카밀루스에게 1년의 임기를 채워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
찍이 6개월 이상을 대정관 자리에서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원로원은 시민을 무마시키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조상의 분묘를 어찌버리며 로물루
스나 우마 같은 대대의 왕들이 세워서 물려준 신전들을 어찌 버릴수 있느냐고 시민에게 호
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피테르신전및의 땅속에서 갓 베어진 머리가 나왔는데 성직자들은
이것이야말로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리라는 계시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한 베스
탈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피운 성화까지 버리고 다른 도시로 이주하고 나면 로마는 이
방인의 소굴이 되거나 소들이 한가로이 풀이나 뜯어먹는 들판으로 변할것인데 그 얼마나 수
치스러운 일이내고 호소하였다. 그들은 공적연설이건 사적 대화에서건 늘 이와 같이 주장하
였지만 일반 시민들이 고통을 호소해올때는 동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시민들은 애원하다시
피 말하기를 그들은 바다에서 조난당한 뱃사람들처럼 아누것도 거진 것 없이 목숨만 겨운
건진 형편에 처해있다고 하였다. 이런 불행에 처한 사람들에게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라
며 언제라고 입주할 수 있는 도시로 가서 살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너무한 처사라고 하였
다.
카밀루스는 이 일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기로 결심하고 로마를 수호하자는 요지의 간곡하고
도 긴 연설을 하였다. 뒤이어 다른 많은 사람들의 연설이 있은 다음, 맨 먼저 투표할 권한을
가지 루키우스 루쿠레티우스를 불러내여 자신의 결정을 말해 보라고 하였다. 장내가 조용한
가운데 루크레티우스가 입을 열려는 찰나, 백부장이 그 날 당직을 맡은 병사들과 함께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군기수에게 큰 소리로 명령하는 것이 들렸다.
"기를 거기다 세워라. 이곳에 자리를 정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 루크레티우스는 장래의
일을 결정하려는 찰나에 들린 이말을 계시라고 생각하였다. 그느 이말에 따라 투표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한가지로 투표하였다.
놀랍게도 시민들의 마음조차도 완전히 바뀌었다. 로마인들은 서로 힘을 북돋우며 재건에
나섰다. 하지만 이일은 일정한 계획에 따라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가장 가깝거나 제
일 마음에 드느 장소를 골라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일은 매우 성급하게 진척되었다. 결
국 로마 시내의 골목길은 좁고 구불구불하게 났으며 집들은 다닥다닥 붙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1년도 패 못되어서 시를 둘러싸는 성도 민가도 다 새로 지어졌다.
카밀루스는 몇몇 사람을 지명하여 폐허속을 뒤겨서 신전이 있던 터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그들이 팔라티움에 이르러 군신 마르스의 신전을 둘러보았을 때 그것도 다른 모든 건물과
마찬가지로 갈리아 인드르이 손에 불타고 초석만 남아 있었다. 그 자리를 샅샅이 조사하던
사람들은 잿더미속에 깊이 파묻혀 있던 로물루스의 지팡이를 찾아냈다. 그것은 한쪽 끝이
구부러진 것이었는데 '리투우스'라고 불렀다. 로물루스가 새들이 날아가는 형상을 보고 점을
칠때면 이 지팡이를 이용하여 하늘을 나누었던 것이다. 로물루스는 점술에 조예가 깊어서
자기 스스로 점을 치고 하였다. 그러나 로물루스가 인간세상을 떠나자 사제들은 이 지팡이
를 신령한 물건으로 삼아 깊숙한 곳에 보존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것은 다 카버린
가운데 유독이 지팡이만 무사란 것을 보고 이거승ㄹ 로마가 대대손손 번영하리라는 계시로
받아들이며 로마의 미래에 희망을 걸었다.
숨돌릴 큼도 없이 다시 전쟁이 벌여졌다. 아이퀴 인,볼스키인 라틴인들이 한꺼번에 로마
영토로 침공해왔다. 투스칸인들도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는 도시인 수트리움을 포위하였다.
마이키우스산 근처에 진을 치고 로마군을 지휘하던 군사담당 호민관들은 라틴군에게 단단히
포위되어 진지를 빼앗길위기에 처하자 로마에 구원을 청했다. 로마에서는 카밀루스를 3차로
대정관에 임명하였다.
인 전쟁에 관하여는 두갈래의 이야기가 있다. 신빙성이 덜 한것부터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라틴인들은 단순한 구실로 그랬는지 또는 옛날처럼 두종족을 하나로 융합시키려고 그
랬는지 알수 없지만 로마시민으로 태어난 처녀들을 아내로 삼겠으니 보내라고 요구해왔다.
로마인들은 최근의 불해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터라 전쟁을 하기도 두려웠지만 또
말로만 결혼이다 동맹이다 떠들어대는 라틴인들이 여자들을 받고 나서는 그들을 볼모로 삼
아 더 큰 것을 요구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으므로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
다. 이때 투툴라 또는 필로티스라고 불리는 이름의 한여종이 호민관에게 와서 말하기를 자
기와 몇몇잘생긴 여종들에게 귀한 집안의 딸을 시집보내듯 옷을 입히고 적에게 보내주면 그
다음 일은 자기들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이 의견을 받아들인 호민관들은 투룰라이
지 필로티스인지가 필료하다고 말하는 만큼의 여종을 골라서 값진 옷과 보석패물로 치장하
여 라틴인들에게 인도하였다. 라틴인들은 로마시근처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여
자들은 적병들의 칼을 훔쳐내었고 그 동안 투툴라인지 필로티스인지 하느 여자는 야생의
무화과나무위로 올라가 두꺼운 털옷을 펼쳐 라틴인쪽을 가리고 횃불을 올려 로마시에 신호
를 보내왔다. 이신호는 그녀와 호민관들 사이에 이미 약속된 것이지만 다른 시민들은 모르
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놀란 시민들이 우왕좌왕하며 성문을 빠져나왔는데 대장들은 그들의
등을 막구가내로 떠밀었으며 대오를 갖출겨를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라틴군은 공격
이 있을것으로는 생각지도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인들은 쉽게 진지를 빼
앗고 적를 거의 섬멸할수 있었다. 이것은 7월 7일에 있었던 일로 오늘날에는 7월7일이면 그
때의 일들을 기념하는 행사를 연다.
우선 사람들은 무리지어 성문을 달려나오면서 제각기 '타이우스!' '마르쿠스!' '루키우
스!'
등 흔한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는데 이것은 로마시민들이 황급히 성문을 나서며 서로의 이
름을 부르던 일을 흉내내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아름답게 차린 여종들이 나타나서 이리저
리 뛰어다니면서 아무하고나 만나는대로 웃으며 희롱한다. 그러다가 저희들끼리 승강이를
벌이는데 이것은 과거에 라틴군과 싸울 때에 그들이 가담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다음
은 다들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서 먹고 마신다. 이날을 노나이 카프로티나이라고 한다. 이
것은 그옛날 여종이 무화가나무에 올라가서 횃불신호를 보냈던 일을 기념하여 지은 이름일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말로 무화과나무를 카프리피쿠스라고 하기 때문이다. 다른설에 의하면
이행사는 전적으로 로물루스는 로마 시외로 나갔는데 별안간 사방이 어두워지고 폭풍이 불
어닥쳤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일식이라고 설명하는데 어쨌거나 tm
순간 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날을 노나이 카프로티나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염소를 뜻하는 라틴 말 '카프라'에서 온것이라고 한다. 로물루스가 사라진 곳의 이름이
바로 염소못이기엇기 째문이라고 한다. 이사실은 로물루스의 생애에 대해 말할때이미 기록
한 바와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ㅇ느 이 전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카밀루스는 3차로
대정관에 임명된 다음, 호민관들이 이끄는 군대가 라틴인과 볼스키인의 연합군에게 포위되
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직 출정한 나이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그 나이가 지난 사람들
까지 동원했다는 것이다. 그는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마이키우스 산을 우회하여 적의 배후
에 군을 배치하고 횃불을 올려 포위된 우군에게 그의 도착을 알렸다. 포위된 군은 용기를
회복하고 진지에서 나와 적을 요격시킬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라틴인과 볼스키인의 연합군
은 앞뒤에 적이 있는 것을 보고 나무로 단단히 바리게이트를 친 뒤 본국에서 올 원군과 연
합군이 투스칸구이 도와주러 올 것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 사정을ㄹ 안 카밀루스는 자기편의 군대가 포위될것이 염려되어 더 이상시간을 지체할
스없었다. 그는 적의 바리케이드가 모두 나무로 구축되어 있다는 것과 새벽에 산으로부터
강풍이 불어 내려온다는 것을 깨닫고 화공준비를 충분히 갖추게 하였다. 그는 날이 밝기던
에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일부는 시끄럽게 고함을 지르며 화살을 쏘아 적의 진지를 공격하
게 하고 자기느 화공준비르 갖춘 군대를 데리고 바림이 부는 방향에 숨어서 때를 노리고 있
었다. 선제 공격부대가 전투를 개시할 증음해가 뜨며 동시에 강한 바람이 일었다. 바로 그때
카밀루스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불화살이 구름같이 날아서 나무로 구축한 적의 바리케이드
에 가득 꽂혔다. 적진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엇다. 라틴인들은 불을 끌 장비를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만 동동 그르다가 진지 밖으로 떠밀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밖에서
는 무장한 로마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중 살아 도망친 자는 거의 없었으며 진지 속에
남아 있던 자들은 불에 모두 타 죽어가고 있었는데 로마군은 밀려들어와 불을 끄고는 남은
물건을 약탈해갔다.
싸움에서 승리한 카밀루스는 아들 루키우스로 하여금 포로와 전리품을 지키게 하고 자신
은 적국으로 쳐들어가 아이퀴인의 서울을 덤령하고 볼스키인들을 정복한후, 곧 군대를 이끌
고 수트리움시로 진격하였다. 그는 수트리움시가 아직 투스칸군에게 포위되어 있는 줄로만
알고 수트리움시민들을 도와주러 달려간 것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미 투스칸군에게 항
복하고 등에 걸친 옷밖에는 아무것도 가진것없이 쫓겨나고 있었다. 그들은 처자들을 데리고
서럽게 울며 깅을 떠나다가 카밀루스를 만났다. 카밀루스는 이처참한 광경에 심히 마음이
동하였다. 스트리움인들이 병사들의 소매를 붙잡고 매달리자 병사들 역시 애처로은 마음에
눔물을 흘렸다. 이에 카밀루스는 더 미룰 것도 없이 그날로 수트리움시를 향해 쳐들어가서
원수를 겊아주기로 결심하였다. 카밀리우스는 적군이 부유하고 물자가 풍부한 도시를 점령
하고 그곳 병사들을 남김없이 몰아낸 기쁨에 도취되어 파수병도 세우지 않고 흥청망청하며
있을것으로 생각하였다.
과연 그의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로마군은 저의 눈에 띄지 않고 들판을 가로질러 갈수
있었으며 도시로 접근하여 보초없는 성의 여러문들을 점령하였다. 이때 적병들은 모두들 민
가에 흩어져서 먹고 마시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므로 로마군이 도시를 장악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때도 모두 너무 취하고 배가 불러서 도주학 생각조하 없이 그대로 방안에 쓰러져
뒹굴다가 살해되거나 제발로 기어나롸서 항복했다. 이와같이하여 수트리움 시는 하루동안에
두 번 점령되고 아침에 아긴 군대가 저녁에 패하였으며 카밀루스덕에 쫓겨났던 자들은 다시
제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두 번의 개선때 못지않은 영광과 존경을 받았다. 그
를 몹시도 싫어하고 그의 승리가 모두 운이 좋아서 얻어진것이지 훌륭한 전술로 거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사람들R지도 이번만은 그의 탁월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영광을 가장 많이 시기하고 가장 심하게 욕하던 사람은 마르쿠스만히우스였다. 그는
랄리아군이 어줌을 틈타 유피테르신전으로 기어 올라오는 것을 앞장서서 막아낸 자로서 그
공로로 인해 빚에 쪼들리는 군중의 마음을 사려고 했다. 그는 로마에서 제1인자가 되고 싶
었으나 공정한 수단으로는 카밀루스의 막강한 권력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런때 흔히
쓰는 수법을 이용하여 빚에 쪼들리는 군중의 마음을 사려고 했다. 그는 자기와 친한 채권자
들에게 사정을 해서 몇몇 채무자들의 짐을 덜어 주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리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채무자드레 대한 법집행을 막아주기고 했다. 그리하여 짧은 시간 안에 사정
이 딱한 사람들이 상당수 그에게로 몰려들게 되었고 그들은 법정에서도 심한 소요를 일으켰
다. 이로 힌하여 다수이 시민들은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와같은 무질서를 수습하기 위
하여 퀸티우스 카피톨리누스가 대정관으로 임명하고 만리우스를 구속하였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나래에 큰 재난이 일어났다는 듯 즉시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원로원은 일
이 더 커질 것을 두려워하여 즉시 마리우스의 석방을 명하게 되었다.
석방된 만리우스는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행실이 더욱 사나워졌다. 이를본 로마시민들은
다시 패가 갈렸고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결국 카밀루스가 다시 군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하루 말으 잡아 만리우스르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갖가지 비난에
대해 스스로 변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르 벌하여는 사람들에게 매울 불리하였다. 왜냐하
면 만리우스가 갈리아 군과 싸워 공을 세웠던 유피테를 신전이 법정인 포룸을 똑바로 내려
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팔을 뻗어 신전을 가리키며 눈물로 그날 밤의 이야기를 쏟
아 놓았다.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동정하였다. 법정들도 당황하여 여러 차례 휴
덩르 선언핬다. 만리우슨느 분명히 불법을 자행하였으로 그것을 없던일을로 돌릴수도 없고
법대로 집행을 하자니 그가 큰공을 세운 장소가 발 윗편에 보여 그것 역시 여의치를 않았
다. 상황을 지켜보던 카밀루스는 법정을 시외에 있는 페텔리네솦속으로 옮겻다. 이곳은 유테
르신전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고소자들은 고발내용을 충분히 이야기
할수 있었고 재판관들도 예전의 공과 치ㅗ근의 불법을 공정하게 저울질 할수있었다. 그는유
죄판결을 받았고 유테신전으로 끌려가서 절벽 아래로 밀어뜨려졌다. 평생에 걸져 가장 훌율
한 공을 세운곳에서 비참한 종말을 물어뜨이고 거기에 몬타여신의 신전을 세우고 정령을 내
려 귀족은 누구를 막런하고 카피톨리네 언덕위에 집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
카밀루스는 6차로 군정관에 임명되자 간곡히 이를 고사하였다.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을
뿐 아니라 계속된 성공과 영광으로 신의 미움을 살것같아 두려워 한 것 같기도 한다. 하지
만 그가 내세운 이유는 건강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때 와병중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에게 말을 타고 출정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군사문제에 있어 자문과 감독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호소하였다. 하는 수없이 그
는 군정관의 직분을 수락하였다. 그 즈음 프라이네스티네 인들과 볼스인들이 대부대를 이끌
고 와서 적군 가까이에 진을 쳤다. 사실 그는 장기전을 염두에 두었고 큰 전투가 벌어지기
까지 자신이 기력을 찾을 수 있을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동료 장군인 루키우스는 푸리우스는 공을 세우고 싶어 안달난 사람으로 부하
장병들에게 어서 전투를 개시하자고 선동하였다. 카밀루스는 젊은 병사들에게 큰 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 싫어하는 것으로 비칠것이 염려되어 하는수 없이 루키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나
가 싸우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소수의 병력과 함께 뒤에 암
아 있었다. 결국 루키우스라 무모하게 밀고 들어가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카밀루스는 참
을수가 없어서 침대에서 뛰쳐나와 남아 있던 군사들과 함께 달려나갔다. 그느 저기 진영의
입구에서 쫓겨오는 군사들과 마주쳤다. 카밀루스는 그들을 헤치고 그냥 내달려 추격하여 오
는 적군과 마주쳤다. 카밀루스를 중심으로 뭉친군사들은 서로서로 격려하며 적의 추격대를
물리쳤다. 카밀루스는 다음날 병사들을 지휘하고 나가 큰 전투를 치룬 끝에 적군을 무찌르
고 도주하는 적을 쫓아 그들의 진지마저 점령하니 적군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얼마후 사트리쿰시가 투스칸군에게 점령되어 거기에서 살던 로마 이주민들이 모두 학살되
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군의 주력을 로마로 돌려보내고 젊고 용맹스러운 전사들만
뽑아 사트리쿰에 주둔하고 있던 투스탄군을 급습하였다. 카밀루스는 적병을 상당수 살해하
였으며 남은 자들은 모두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그느 많은 전리품을 싣고 로마로 돌아옴으
써 늙고 쇠약하더라도 역전의 용장은 여전하다는 사실을 증명시켰으며 군사령관이 되고 싶
어하는 젊은 장군을 물리치고 와병중인 그를 본인의 의사까지 꺾어가면서 출정시킨 사람들
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그들은 투스쿨룸이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접하였을 때 카밀루스에게 다섯
사람의 동료 군정관 중에서 아무나 한사람을 데리고 가서 함께 진압하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카밀루스는 출정하기를 원하는 다른 군정관들을 제쳐두고 루키우스 푸리우스를 택하였
다. 이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느 최근에 카밀루스의 의견을 좇지않고 성급하게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에 패할 뻔한 오류를 저지른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
구하고 카밀루스가 그를 선택한 것은 지난번의 실책을 감춰두고 치욕을 씻을 기회를 주려고
했던 뜻이었다고 생각된다.
투스쿨룸 시민들은 카밀루스가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언제 혁명을 기도했느냐는 듯
재빨리 태도를 일변하였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내보내어 밭일을 하게하고 가축을 돌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투스쿨룸들판의 풍경은 평화스러운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카밀루스
가 투스쿨룸시에 들어오니 성무은 열려있었고 아이들은 학교에 등교하여 공부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가게일에 여념이 없었고 시민대표들은 평상복을 입고 광장을 활보하고 있었다. 한
편 괸리들은 시애를 동분서분하며 로마군의 숙소를 마련하기에 바빴다. 어디를 보나 거리낄
것이라곤 조금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거셍 속을 카밀루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그
들이 개심한 것을 보고 동정심이 생겼다. 그는 시민들에게 로마로 대표를 보내어 원로원의
용서를 빌라고 명하였다. 카밀루스는 투스쿨룸시의 대표들과 함께 로마에 도착하여 스스로
주선하여 용서를 얻어주고 투스쿨룸시민에게 로마 시민과 같은 권리를 부여하게 하였다. 이
것이 그가 군정관으로 재차 임기에 있던 동안 남긴 중요한 업적이다.
그후 리키니우스는 스톨로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평민과 귀족사이에 마찰이 빚어졌다. 평
민들은 두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명은 평민중에서 선출해야지 두 사람 다 귀족중에서 뽑아
서 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군정관은 모두 임명되었으나 집정관선출은 평민들에 의해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행정부의 수반없이 이대로 지내면 더욱 혼란이 심해질 것을 염려하여 원
로원은 평민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카밀루스를 4차로 대정관에 임명하였다. 카밀루스 자
신도 그 자리는 썩 내키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전쟁에서 함께 치열한 전투를
치은 전우들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에게는 병사들과 함께 전지에서 보
내 세월이 귀족들의 정치적 책동에 가담한 세월보다 더 길었다. 그리고 귀족들이 지금 카밀
루스를 임용하는 것은 그가 만일 자신의 직분에 성공하면 평민의 소동이 진압될수 있을것이
고 실패하면 그가 망할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난국을 타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정무회의가 문제의 법안을 제출하려는
일자를 미리 알고 군무동원령을 내렸다. 그 날에 모든 시민을 군신의 광장에 소집함으로써
포룸에 모이지 못하고록 한 것이다. 그는 이소집에 불응하는 자에게 많은 벌금을 부과하겠
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정무회의는 이에 대하여 국민의 투표권 행사를 방해하면 은화 5만
드라크마의 벌금을 과하겠다고 하였다.
정세가 이와 같이 되자 카밀루스는 자택에 들어앉아 며칠을 보낸후 병을 구실로 대정관직
글 내놓았다. 그가 이와같은 행동을 취한 것은 일이 잘못되어 다시 형을 받고 cm방된다면
일생에 대공적을 세운 사람으로서 노년의 수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민의 세력
은 너무 강대하고 심지어 난폭해지기까지 하였으므로 자시느이 힘으로는 그것을 막을 수 없
다고 생각하고 단념한것이었다. 원로원은 다른 사람을 대정관으로 임명하였다. 글나 새대정
관은 평민측의 지도자인 리키니우스스톨로를 기마대장으로 기용하고 귀족들이 통탄해 할 법
안을 통과시켰다. 그법에 의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500에이커이상의 대지를 소유할수 없었다.
이일에서 성공을 거둔 스톨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후 얼마 되지않아 그
느 자기가 만든법에 따라 처벌되었다.
로마에선서는 아직도 집정관을 선거하는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었다. 이 문제야 말로 평민
과 귀족이 서로 등돌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때 갈리아 군이 아드리아 해안 지방으
로부터 다시 로마로 내습해 온다는소식이 있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피해 소식이 들려왔으
니 갈리아군이 로마로 오는 길목에 있는 지방을 약탈하였는데 주민들은 미처 로마까지 피해
올 여유가 없어서 뿔뿔히 산간지방으로 흩어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무서운 소식은 로마의 내분을 잠재웠다. 원로원과 국민은 만장일치로 카밀루스를 대정
관으로 임명하니 그로서는 다섯번째로 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는 이제 고령에 이르러 거
의 팔십에 가까웠으니 조국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지난번처럼 주저하는 일없이 즉시 군
을 동원하였다. 갈리아군의 강점은 칼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으로 상대방의 머리와 어깨를 무
지막지하게 내리치는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카밀루스는 미끄럽고 반들거리는 투구
를 만들어 대부분의 병사들에게 씌웠다. 칼로 투구를 내리치면 칼이 부러지거나 미끄러져버
리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방패에도 놋쇠로 가는 테를 두르게 하였다. 나무 방패만으로는 적
의 칼을 막아내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군사들에게 백병전에서는 긴창을
사용하여 적이 칼을휘두르는 것을 막아내도록 지시하였다.
적이 많은 물건을 약탈해가지고 로마시에 가까운 아니오강가에 와서 포진하자. 카밀루스
는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낮은 언덕레 군장을 풀었다. 이 언덕으로부터는 여러개의 작은 골
짜기가 뻑어 내려간다. 카밀루스는 군의 주력을 감추고 약간의 군대만 눈에 띄게 함으로써
마치 갈리라군이 무서워서 산지에 기어든 것처럼 보이게 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거기에도
적의 생각을 확신시켜주기위해서 그는 적이 그지방을 약탈하는 것을 일부러 방임하였다. 그
대신 그는 진지를 강화하였다. 적들은 마침내 무질서하게 흩어져 약탈을 자행하거나 날리
밝기 전에 가볍게 무장한 부대를 내보내어 적이 진지에서 나와 대오를 편성하는 것을 훼방
하게 하고 해가 뜰때쯤 주력부대를 이끌고 나가 저지대에서 공격준비를 완료하였다. 야만인
들이 생각하던것과는 반대로 많은 수의 군대가 용기백배하여 나타난 것이다.
로마군이 예상외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자 갈리아군은 기가 한풀꺾였다. 게다가 그들이
채 진용을 갖추기도 전에 가벼운 무장을 갖춘 적의 부대가 휘젖고 들어와 갈리아군의 병사
들은 산산리 흩어져 질서를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갈리아군은 카밀루스의 주력부대를 만났
을 때 닥치는 대로 싸우는 밖에 없었다. 로마군은 긴 창을 내밀고 들어오면서 튼튼한 투구
로 적의 칼을 막아내었다. 그리하여 무른쇠로 적당히 만든 갈리아군의 칼은 죄다 구부러지
고 그들의 방패는 로마군의 긴 창이 꽂힌 창을 뽑아 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사이 로마
군은 무기도 없이 맨손이 되어버린 적에게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결국 앞중에 섰던 적
은 거의 다 도살되어 버렸고 나머지는 산산이 흩어져 평지로 도망쳤다. 왜냐하면 카밀루스
는 미리 언덕으로 수비대를 보내놓았으며 갈리아 군은 지나친 자신감으로 진지도 제대로 구
축해도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로라가 점령된지 13년 만에 벌어졌다고 해며 그후로부터 로마인들은 담이 커져
서 더 이상 야만족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전의 전쟁에서 갈리아 인들이 승리
할수 있었던 것은 상대편이 질병으로 약하게 된데다가 행운이 따랐기 때문일뿐, 그들이 용
맹스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전에는 갈리아군을 매우 두려
원하여 다른 전쟁에서는 출정이 면제된 사제들이라 할지라도 갈리아인이 내습했을때는 반드
시 출정해야 한다는 법령까지 만들어 놓았을 정도 였다.
이것일 카밀루스가 수행한 마지막 군사행동이다. 왜냐하면 그 후에 있었던 벨리트라니 시
와 전쟁이 벌어졌을때는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일새에
가장 엄청난 정치적 사건은 그 뒤에 벌어졌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이기고 의기 충전하여 돌
아온 국민을 다루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의 헌법을 무효로 하고
두집정관중의 한사람은 평민출신으로 선출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극렬히 반대하
는 원로원은 카밀루스가 대정관직에서 물러나는거승 허락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그의 큰힘
으로 자기들의 특권을 지킬수 있을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카밀루스가 포룸에 앉아 공무를보고 있는데 정무위원회에서 보낸 사무원이
그에게 당장 일어나서 따라오라고 명령하였다. 심지어 그느 카밀루스를 끌어낼 듯이 손을
대기까지 하였다. 급기야 전례없는 큰소동이 포룸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카밀루스의 측근들
은 정무위원회에서 보낸자를 몰아내려고 하고, 밖에 모인 군중들은 그에게 어서 카밀루스를
끌어오라고 소리질렀다. 카밀루스는 몹시 당황하여 자신의 지위를 내놓지 않은채 원로원을
소집하였다. 그느 원로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들에게 이 사태를 원만한 결말로 이끌어 주
기를 간구하며, 지금의 혼란이 잘 수습되면 '화합의 신전'을 지어드리겠다고 맹세하였다.
열
띤 토론 끝에 원로원은 두집정관중의 한사람은 평민 주에서건출하기로 결정하였다.
대정관 카밀루스라 이결정을 선포하자, 국민들은 모두 크게 기뻐하였으며 곧 원로원과 화
해하였다. 사람들은 카밀루스의 사저까지 동행하면서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다음날 그
들은 모두 모여 카밀루스가 신에게 맹세한 '화합의 신전'을 이 개혁이 이루어지 장소인 포
룸을 마주보는곳에 세우기로 하고, 사흘간 개최하던 라틴운동제를 나흘간개최할것과 모든
시만은 즉시에 신들에게 감사드리느 마음으로 머리에 꽃다발을 얹고 다닐 것을 정하였다.
곧 이어 카밀루스의 사회로 집정관선출행사가 열였는데, 귀족출신으로는 마르쿠스 아이밀
리우스가 , 평민출신으로는 루미우스섹스티우스가 뽑혔으니 그느 평민으로서 처음으로 집정
관이 된사람이다. 이것이 카밀루스의 마지막 정치더 행동이었다.. 다음해에 로마에는 역병이
돌아 막대한 인명을 빼앗아갔다. 그중에는 평민들뿐만 아니라 관리들도 섞여 있었으며, 카
밀루스도 그중의 한사람이었다. 당시의 그느 고영의 나이에 영예도 높았으니 별다른 아쉬
움 없이 눈을 감았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그해 역병으로 둑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이 한
사람의 죽음을 더 슬퍼하였다.
페리클레스
언젠가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외국인 부자들인 강아지나 원숭이 등을 품에 안고 귀여워하
는 것을 보고 그 나라여자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냐고 물은 일이 있다. 마땅히 사람에게 쏟
아야 할 애정을 뭇짐승들에게 주어버리는 것을 꾸짖은 진실로 왕자다운 질문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인간의 영혼속에 새겨진 지식에 대한 욕구를 유용한 일에
들리지 않고 쓸데없는 일에 남용하는 사람은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감각이란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외부의 사물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용한 것들뿐 아니라 유용하지 않들 것들까지 어느 정도 사람의 주위를 끄는 것은 피치 못
할 일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의욕만있다면 자기가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일에 마음을 집중시
킬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상의 것만을 추구해야 하면 그것에 정신을 쏟는 동시에 노력
의 과정을 콩해 자기 자신을 고양시켜 나가야 한다. 아름답고 산뜻한 색채가 보는 눈을 즐
겁게 하듯이 누구난 자신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선하게 만드는 일에 지적능력을 기울어야 한
다.
이러한 일은 주로 미덕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에 대해서 듣기만 해도 본받아
행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러나 다른일에 있어서는 그렇듯 강렬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
는다. 왜냐하면 행동의 결과가 보기 좋더라도 그 일을 한사람은 볼품없는 경우가 흔하기 때
문이다. 향수난 지홍빛으로 물들인 옷감을 즐기되 향수 만드는 자나 염색동르 천시라는 것
이 그예다. 이스메니아스라는 자가 피리를 잘 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안티스테네스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 것은 실로 명언이다.
"그러나 그자는 아마 보잘 것 없는 사람일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피리의 명인이 되었을
리가 없소!"
이와 마찬가지로 마케도니아의 필리판왕은 태자 알렉산드로스가 어느 연회석상에서 아주
훌륭하고 매력적으로 하프를 연주하였을 때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그렇게 연주를 잘한게 부끄럽지 않는냐?"
무릇 임금이나 왕자 된자는 가끔씩 시간이 나면 다른 사람들이 노래 부르거나 악기 연주
하는 곳에 참석하여 듣는 정도만 되어도 예술의 신에게 충분한 존경을 표시한 것이 된다는
뜻이다.
이와같이 초란한 재주에 열중하여 헛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은 그 자신이 진실로 훌
륭한 일을 할 재목이 못 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통이 크고 영특한 젊은이라면
피사에 있는 유피테르의 조각상을 보고 피디아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거나 아르고스에
있는 유노의 조각상을 보고 폴리클레이토스 같은 사람이 되기를 열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작품이 훌륭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존경받아 마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본받고 싶다는 욕구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작품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
그 반면에 현명한 젊은이들은 미덕을 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찬탄을 금치 못하고 그
렇나 행동을 본받고자 한다. 우리는 좋은 운세를 타고 나서 평생토록 누리기르 바란다. 그리
고 우리는 좋은 미덕을 끊임없이 행하기를 원한다. 복을 받고자 하는 동시에 덕을 베풀고자
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은거세 접하면 우리도 그와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우리가 눈앞의 미행을 볼때는 물론 책에서 그것을 읽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유명한 사람들의 인생을 글로 남기려는 것이다.
이부분에서는 페리클레스와 파비우스 막시무스르 논하기로 한다. 이 두 사람은 모드 한니발
과 싸웠으며 똑같이 성격이 온후하고 강직했다. 그리고 국민과 동지들의 몰이해를 인내로
참아냄으로써 국가의 이익을 증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제 우리가 상슬한 바 목적을
달성할수 있는가 하는 것은 독자들이 판단할일이다.
페리클레스는 아카만다스 부족사람으로 출생지는 콜라르구스였으며 부계와 모계가 모두
아테네네서 으뜸가느 명문이었다. 아버지인 크산티포스는 미킬레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
하였으며 어머니인 아가리스테는 클리스테네스의 손녀였다. 클리스테네스는 피시스트라투스
의 아들들을 아테네에서 몰아내어 그들의 포악한 독재정치에 종말을 고한후 새로운 법을 제
정하고 모범적인 정부체계를 확립함으로써 국민들을 편항하고 조화롭게 살아갈수있도록 만
든사람이었다.
페리클레스의 어머니는 사자를 낳는 꿈을 꾼 며칠후에 그를 분만하였다. 그의 신체는 대
부분 균형이 잘 잡혔으나 유난히 머리가 길었다. 그의 초상화난 조상을 보면 모두 머리에
투구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장인들이 그의 흠을 덮어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테
네의 시인들은 그르 '두근머리'라고 불렀으며 희극시인 크라티노스는 <키론>이라는 극에
다음과 같이 쓴 바있다.
늙은 왕 크로노스가 한번은 '난동' 여왕을 아내로 맞아들인 후 새 생명이 탄생하니
두고두고 폭군으로 그 이름이 남아 있으며, 신들은 그를 가리켜 운명을 좌우하는 높은머
리라 부르더라.
그리고 <네메시스>라는 극에서는,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 신들의 머리 요베여 이리로 오시라.
텔레클레데스도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페리클레스가 당혹스러워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고민에 싸여 그의 머리가 한없이 무거운 듯하더니
문득 그 거대한 머리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것이 있었으니
국가에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더라.
그리고 에우폴리우스도 <데미>라는 극에서 선동정치가들을 지옥으로부터 불러올려서 차
례로 질문하다가 마지막으로 페리클레스가 나타나자 이렇게 외쳤다.
이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볼 요랑이니
요컨데 저길 보라 모든 이들의 머리가 저 한사람 속에 들어 있나니.
대부분의 역사가들에 의하면 페리클레스는 다몬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는 피토클리데스로부터 음악을 베워 통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문은 소피스트로서 음악을 가르친다는 것은 세상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었
다. 실제로 그는 운동경기의 코치가 선수를 훈련하듯이 페리클레스에게 정치술을 가르쳐준
것이다. 아테네사람들은 음악을 가르친다는 다몬의 말에 속지 않고 패각투표로 그에게 10년
추방형을 내렸다. 그를 독재정치를 지향하는 위험인물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들은 그를
조롱하였으며, 플라톤의 극중에는 누가 다몬에게 이렇게 묻는 구절이 있다.
그대는 페리클레스를 가르친 키론이니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시라.
페리클레스는 또한 엘레아 사람 제논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제논은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방법으로 자연과학을 탐구한 사람이다. 제논은 토론의 기술과 상대방의 말문을 막는 기술을
열심히 연구하여 그방면에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었다. 플리우스사람 티몬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을 거짓으로 몰아붙일수 있는 제논의 힘센 혀에는 양쪽으로
날이 서 있었노라.
그러나 페리클레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클라조메나이의 아낙사고라스였다. 그
는 페리클레스에게 신중함과 위엄을 심어주었는데 사람들은 페리클레스의 그러한 점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또한 페리클레스가 지고한 목표와 고매한 인품을 갖도록 가르쳤다. 당시 사
람들은 아낙사고라스를 지성인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가 남다르게 뛰어난 과학적 지
식을 가진것에 탄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세상만사를 운이나 우연, 필연이나 의무 탓으
로 돌리는 것에서 벗어나 철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천지만물의 복합적인 작용이 오로지 순수
이성의 법칙에 따른다고 주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아낙사고라스를 매우 존경하며, 이와 같은 원대한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그의 정신은 고매해졌고 그의 웅변은 저속함을 완전히 초월하고 고상해졌다. 또
그의 표정은 태연자약하여 연설 도중에 어떤일이 생기더라도 침착성을 잃지 않았으며 무슨
소동이 발생하더라도 음성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와같은 특성은 국민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
다. 하루는 어떤 저속한 자가 지극히 심한 욕설을 퍼붓는데도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하
루 종일 포룸에서 정사를 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그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자택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그의 뒤를 따라오며 욕설을 하였다. 페리클레스가 집앞까
지 왔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뒤였다. 그는 하인에게 횃불을 밝혀 그사람을 집까지 바래다주
라고 하였다.
그러나 시인 이온은 페리클레스를 가리켜 지나치게 교만하였으며 다른 사람을 매우 경멸
하였다고 평하면서 반면에 키몬은 정중하고 세련되게 타고난 사람이었다고 칭찬하였다.그러
나 이온은 위대한 사람을 보면 꼬집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없었으니 재기가 지나친 시인으
로 간주하고 도외시해도 무방하다. 제노능ㅇ 페리클레스의 품성이 고매한 것을 가리켜 인기
를 끌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도 그와 같은 수단으로 인기
를 끌어보라고 마랬다. 그렇게 행동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매한 성품을 사라하게
되고 결국 자기 것으로 익히게 된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것이었다.
페리클레스가 아낙사고라스를 따름으로써 얻은 이점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그느 하늘이나
다른 어떤 곳에서 벌어지는 경이로운 일을 보고 그원일을 모르는 까닭에 흥분하고 미신에
의지하려는 행위를 어리석은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이처럼과학에 관한 지식은 불확실하고 겁
에 질린 미신을 몰아내고 그대신 건전한 소망과 신에 대한 경외심을 길러준다.
여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시골 농장에서 페리클레스에게 뿔이
하나뿐인 숫양의 머리를 보내온 적이 있었다. 예언자 람폰은 양의 이마 한가운데 단단한 불
이 하나 나 있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정계는 크게 투키디데스 파와 페리
클레스 파로 양분되어 있는데 이신기한 짐승을 가지 편이 결국은 정부의 주도권을 잡게 되
리라고 예언한 것이다. 아낙사고라스는 그 양의 머리를 쪼개었다. 그런데 그 양의 뇌는 머리
전체에 가득 차 있지 않고 뿔이 나 있는 쪽에 계란모양으로 모여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얼마후 페리클레스가 정권을 장악하자 람폰도 그에 못지 않은 칭찬을 받
았다.
이것은 사견이지만, 이사건의 원인을 밝힌 과학자나 의미를 밝힌 예언자를 모두 옳가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사람은 그와 같이 된 의미와 목적을 가르쳐준 것이다. 경이롷운
일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은 그 일의 깊은 뜻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신의 손길이 닿은 일뿐 아니라 인간의 재주로 만들어낸 일까
지 설명하지 못하도록 막는 셈이다. 예를 들어 종이 울리거나 봉화가 타오르거나 해시계에
그림자가 지는 것 등은 모두 그 나름의 원인이 있으면서도 그이상의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하지만 이문제는 다른 기회에 논하는게 좋을 듯하다.
페리클레스는 젊었을때부터 국민을 두려워했다. 사람들이 그를 전제군주 피시스트라투스
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시스트라투스를 기억하는 노인들은 페리클레스
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유창한 말투를 들었을 때 어쩌면 저렇게 닮은 사람이 있을까 하고 놀
랄 정도 였다. 그는 부쟈였고 귀족 출신이엇으면 친구들도 모두 권문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추방되지나 않을까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하여 그느 정치를멀리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전쟁에 나아가서는 물러설 줄 모르는 용감한 군인이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사망하고 테미스토크레스가 추방되고 키몬이 멀리 출정하여 그리스를
오랫동안 떠나 있게 되자 페리클레스는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귀족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가 적은 부자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수가 많은 가나한 사람들편에 서는 정책을
폈다. 그느 전제 군주가 되려고 한다는 의심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 같다. 또한 키몬이 귀족
편에 서서 유력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에 대립하여 자신은 대중편에 섬으로써 안저늘
도모하고 동시에 키몬에게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을 키워나간 것이다.
그는 즉시 자신의 생활방식을 바꾸었다. 정무를 보는 장소였던 포룸이나 의사당외에는 일
절 아무데도 다니지 않았으며 친구들의 저녁초대에도 전혀 응하지 않았다. 그느 친구집을
방문하는 일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로건 친구들과 교류를 나누지 않았다. 단
한번 가까운 친척 에우리프톨레무스의 결혼식에 들러 신에게 술을 따라드릴 때 까지만 지체
한 적은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제외하고는 긴 정치생활동안에 어느 친구와도 저녁식사 한번
같이 한일이 없었다. 친구들과 모이게 되면 지나친 위엄을 지티기가 힘들다. 더욱이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기란 어렵기만 한 일이다. 진정한 미덕은 솔직히 들러
날 때 더욱 광채가 나는 것이다. 또한 참으로 어진 사람에게는 멀리 있는 일반대중보다 매
일 만나는 친한 벗들의 칭찬이 더 값진 것이다.
한편으로 페리클레스는 일반대중들과 너무 가까워지거나 그들이 자기에게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는 대중들 앞에 자주 나서지 않았고 연설도 간혹 했으며 모임에
도 다 참석하지는 않았다. 크리톨라우스의 말을 빌릴 것 같은며 페리클레스는 군선 살라미
스 호처럼 처신하였다고 한다. 즉 그는 중대한 때만 나타나고 덜 중요한 일에는 친구나 다
른 사람들에게 대신 연설을 시켯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도맡아서 해준 친구로 에피알테
스를 들수 있는데 그는 아레오파구스가 이끄는 정무회의 권세를 타파하였고 시인 플라톤이
말한것처럼 시민들에게 순수한 자유를 마음껏 나실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자유란 지나
치면 길들이지 않은 망아지마냥 제멋대로 뛰쳐다니게 마련이다. 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모든 울타리를 뛰어넘고 에우보이아를 공격하더니, 많은 섬들 사이로 사납게 내달렸다.
페리클레스느 자신의 생활과 고매한 정신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연설ㅇ르 하디 위해서 아
낙사고라스로붙터 물려받은 지식을 활용하였는데 주로 과학적 지식을 많이 인용하였다. 그
는 웅변에 소질을 타고 났을 뿐만아니라 이른바 플라톤의 '고상한 지성과 절대적 진리의 힘
을 인용함에 있어서 그 누구 보다도 탁월하였다. 그 외에도 자신의 웅변에 도움이 되는 것
은 모두 끌어다 썼으니 웅변술에 있어서만큼은 단연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그가 올리피아
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아름다운건물을 많이 지어 도시를 잘 그민 사실에서 그이유를 찾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정치가로서 군인으로서 큰 역량을 발휘한것에 그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모든 이유로해서 그에게 올림피아라는 별명이 생겼다고 보는게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연극에서는 그를 겨냥하여 흑평을 내뱉기도 했는데 재미삼
아 그러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심각한 경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그의 웅변술에
처점을 맞추고 있었다. 열변을 토하는 그를 가리켜 '천둥번개'라고 하거나 혀끝으로 무시무
시한 벼락을 휘두른다고 하는 경우가 그 예다.
멜레시아스의 아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의 웅변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익사을 부렸는
데 그이야기는 두고두고 기록속에 암아있다. 투키디데스는 보수파의 지도자였는데 페리클레
스로서는 가장 부담스러운 정적이었다. 어느 날 스파르타왕 아르키다무스가 투키디데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즉 그와 페리클레스와 씨름을 하면 누가 이기느냐는 것이었다. 그느 이
렇게 대답했다.
"정정당당히 경기를 해서 내가 그를 내던지러라도 그는 넘어진 일이 없다고 중장하여 나를
바보로 만들고, 구경꾼들로 하여금 눈으로 뻔히 본사실을 저버리고 그의 말을 믿게 할것입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리클레스는 말을 할 때면 매우 조심하였다. 그는 연단에 올라설때면
언제난 먼저 기도를 하였다. 연설 도중에 단 한마디라도 실수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
이다.
그는 법령을 제외한 다른 저술을 전혀 남기지 않았으며, 다만 간단한 어록이 전해지고 있
을 따름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피라이우스 항이 눈이라면 아리기나는 그눈에 난 종기와도
같으니 도려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펠로폰네소스로부터 전쟁이 다가
오는 것을 보았다'는 거싱다. 이런예도 있다. 동료장군 소포클레스가 그와 함께 배를 타러
갈 때 길가에 서 있던 미남 청년을 보고 칭찬을 늘어놓자 페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
다.
"소포클레스, 장군은 두손뿐 아니라 두눈을 깨끗하게 해야하네" 스케심브로스투스의 기
록을 의하면,그느 STKAHTM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장례식에서 '그
들은 신처럼 영생을 얻었다'고 연설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을 볼수는 없지만 그들은 우리가 바치는 앙모의 마음과 그
들이 우리에게 내려주는 축복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
을 바친 사람은 이처럼 누구나 영원히 살아남는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의 정치
를 가리켜 이름만 민주정치였지 실상은 귀족정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
의 기록을 보면 그와는 반대다. 페리클레스는 국민에게 해외식민지를 나누어주고 극장에
입장시켰으며 공공사업에 종사시켜 보수를 잘받게 하였다.
그 결과 그전까지 강직하고 근검했던 사람들이 낭비를 일삼고 생활방식이 해이해지게 되었
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된 이유를 알아보려면 실제적인 사실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페리클레스는 키몬에 대항하여 민심을 다독하겨야만 했다. 그런데 키몬
은 큰 부자였다. 그는 많은 재산을 이용하여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날마다 식사를 제
공하고, 연로한 사람들에게 의복을 나누어주고 자기땅의 울타리를 허물어서 누구든지 들어
와 과실을 따먹게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돈으로 키몬
을 따를수 없었으므로 오이아 출신인 다모니테스의 의견을 좇아 공금이 국민에게 고루 돌아
가도록 하는 정책을 썼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짧은 시간내에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살수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이런 방법으로 얻은 국민들의 힘들 빌려 아레오파구스의 정무회를 공
격하였다. 그는 이 정무회의 회원이 아니었으며 아르콘이나 테스모테테나 폴레마르크로 선
출된 일고 없었다. 이러한 공직에는 추첨을 통하여 임명될수 있었으며 그 직책을 잘 수행한
사람만이 아레오파구스의 일원이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어느 정도 지지기반을 다진후 심복인 에피알테스를 시켜 이 정무회의 세력
을 꺾어버리도록 하였다. 에피알테스가 이일을 얼마나 감쪽같이 해치웠는지 그 방법이나 과
정에 대해서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페리클레스의 정적인 키몬ㅇ느 스파르타롸 내
총하였으 뿐 아니라 국민들의 적이라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키몽느 재산이나 문벌에 있어
아테네의 다른 누구에게도 뒤지지 뒤지지 않았다. 또한 야만인들과 싸워 수차례의 영광스런
승리를 거두면서 국민들에게 전리품을 듬뿍 안겨주었지만 그러한 키몬도 어쩔수가 없었다.
그만큼 국민대중은 페리클레스를 신임한 것이다.
패각투표로 추방된 사람은 10년 동안 외국에 나가 있어야만 했다. 이처럼 키몬이 추방되
어 있는 동안에 스파르타의 대군이 타나그라 지방으로 침공해왔다. 아테네 군은 즉시 싸우
러 나갔다. 키몬은 형기를 다 채우지 않은채 아테네로 돌아와서 무기를 들고 조국의 부대에
합류했다. 그는 전곡을 세움으로써 스파르타인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의심을 씻어내고 싶었
을 뿐 이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무리는 림을 모아 그를 다시 국외로 추방하였다.
페리클레스는 다른 어느 전쟁에 있어서보다 더 용감무쌍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
타롸 내총하고 있다고 비난받았던 키몬의 측근들은 대부분 전사하였다. 또한 아테네 군은
접경지대에서 벌어진 큰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여름ㄹ철을 당하여 스파르타군의 공격이 더
욱 심해질 것을 감안하니 아테네 인들느 키몬에 대한 생각이 한결 간절해졌다. 그를 내쫓은
것은 걸 후회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이를 알아챈 페리클레스느 지체없이 대중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고, 키몬이 돌아올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키몬이 돌아오자 스파르타
와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스파프타는 헤리클레스 및 그밖의 평민 지도자들과는 사이가 나빴
으나 키몬에게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일설에 의하면 페리클레스느 키문을 소환하기전에 키몽늬 우니인 에피니케와 비밀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키몬으호 하여금 200척의 배를 이끌고 나가서 페르시아 군 접령
지를 침략하고록 유도하고, 페리클레스는 평민들이 선출한 위원회의 일원으로 키몬에게 사
형을 구형한 적이 있다. 이때 페리클레스르 찾아와 선처를 부탁한 사람이 있었느데 그녀가
바로 에피니케였다는 설명도 있다. 그때 페리클레스느 미소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엘피니케, 연로한 당신이 어려운 걸음을 하였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위원회의 일원이었
으므로 재판정에서 적어도 한 번은 발언해야 했다. 그느 자리에서 일어나 가능한 한편견
을 배제한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나서 곧 법정을 떠났다.
이러한 일들로 보아 페리클레스가 친구이자 동료인 에피알테스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시기하여 그르 살해하도록 시켰다는 이도메네우스의 주장을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이것
은 저열한 중상모략이다. 이도메네우스는 확실치도 않은 사실을 근거로 삼알 이런 이야기를
짜맞춘 셈이다. 페리클레스 역시 인간이라 결점이나 과실이 없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그는
고귀함을 타고난 사람이라 명예를 매우 중시하였으니 그토록 야만적인 행도은 결코 용납하
지 않을 사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피알테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에피알테스
는 평민들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문제에 있어서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는 에피알테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에피알테스는 평민들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문제
에 있어서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민들에게 해끼치는 사람을 예외없이 처단했기
때문에 귀족들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에피알테스의 적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타
나그라 사람 아리스토디쿠스를 시켜 에피알테스를 해치우게 했다.
키몬은 키프로스 섬에서 아테네 군을 지휘하던 중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아테
네 시에서는 이제 페리클레스의 권세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귀족들은 누군가 나타나서 그의
세력을 견제하고 독재를 막아주기를 원했다. 귀족들은 누군가 나타나서 그의 세력을 견제하
고 독재를 막아주기를 원했다. 귀족들은 결국 알로페케출신의 투키디데스를 그의 정적으로
내세웠다. 투키디데스는 키몬의 친척으로서 키몬만한 전공을 세운 적은 없었지만 분별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화술이 뛰어났고 정치감각이 남달랐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와
정책대결을 벌여 순식간에 페리클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또한 투키디데스는 소
위 정지하고 선량한 사람들, 즉 능력 있고 뛰어난 사람들이 대중속에 묻혀 그 역량이 퇴색
되어 버리는 걸 못 마땅하게 여겼다. 투키디데스는 그렇나 사람들을 모아 조직을 결성한후
세력을 키워 나갔다.
애당초 평민과 귀족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틈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페리클레스와 토키디
데스가 공공연히 세력 다툼을 벌이자 그 틈은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은 평민파와 소수
파로 갈라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리하여, 페리클레스는 그 어느 때보다 국민들을 느슨
하게 풀어주고 만인에게 기쁨을 줄수 있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는 많은 볼거리와 제전, 연
회, 가두행진 등을 끊임없이 베풀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국민들을 즐겁게 해준 것이다. 하
지만 이러한 일들이 바람직하다고 만은 할수 없다. 또한 그는 해마다 60척의 군선을 내보내
어 순항하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그일에 채요하였다. 여기에 채용된 사람들은 여덞달동안
보수를 받으며 항해기술을 배울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케르소네르로 1천명을 이주시켰다.
이주민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토지를 나누어 가졌다. 또한 그는 낙소스섬으로 500명을 안
드로스로 250명을 각각 이주시켰으며, 트라키아 지방에는 1천명을 이주시켜 비살타이 인들
과 어울려 살아가도록 하였다. 또한 당시에 투리이라고 불리던 이탈리아의 도시 시바리스
시가 이민을 받아들일 때 그도 역시 아테네의 국민을 이주시켰다. 이와같이 함으로써 하는
일 없이 불평불만을 일삼는 사람들을 국내에서 제거하였으며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
다. 그리고 동맹국에 아테네인들을 이주시킴으로써 그 나라들의 동향을 감시케 하였다.
페리클레스는 공공건물과 신전들을 지음으로써 아테네 시를 쾌적하고 아름답게 꾸몃다.
그리하여 다른 나라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이것들
을 보면 그리스의 권세와 영광이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페리클레
스의 반대파 사람들은 이 사업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들은 아테네가 그리스 전체의 공동
기금을 델로스섬에 그냥두면 페르시아 군에게 빼앗길 염려가 있으므로 아테네로 가져다 보
관해야 한전하다는 구실도 페리클레스의 소행으로 보아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
은 그리스 전체에서 거둔 공공기금을 아테네에서 함부로 유용하는 것을 보고 그리스연합국
의 각 나라들이 공공연하게 무시당한 것으로 생각하여 분격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페르시아 군을 막기 위한 전쟁기금을 유용하여 아테네의 도시를 치장하고 마치 아테네
가 허영에 들뜬 여자인 것처럼 값진 대리석과 조상과 신전을 세우는 데 1천여 탈렌트의 대
금을 남용하고 있다고 페리클레스를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페리클레스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쟁기금을 어떻게 쓰든지 아테네가 페르시아 군을 막아주는 한 연합국은 상관할것이 없
다. 그들은 군마, 군선, 군인중 그 어느것도 제공하지 않고 단지 돈만 내었다. 따라서 그들
이 돈으로 사려는 안전을 아테네가 제공할수 있는 한 아테네는 그돈을 임의로 쓸권리가 있
다.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춘 뒤 남은 돈으로 건물을 지어 아케네의 영광을 길이길
이 남기며 또 이러한 공사를 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일을 줄수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모든
종류의 공예기술이 장려되는 동시에 아테네 시민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셈이므로 하나의 사
업을 통하여 도시가 아름다워지면서 경제적인 이득도 얻게 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당
시에 젊고 힘센 사람은 외국에 나가 군무에 종사하였으며, 공동의 전쟁기금에서 나오는 보
수를 받았다. 반면에 특별한 기술없이 국내에 남아있는 일반 대중도 소득이 있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하는 일 없이 가마히 앉은 채로 돈을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하
여 페리클레스는 대규모 건축공사를 시작하였고 원하는 사람에게 모든 종류의 기술을 익히
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본국에 남아있는 사라들도 먼 바다나 주둔지, 토벌대에서 군무에
종사하는 사라들처럼 공공기금에서 부수를 줄수 있도록 한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돌, 청동, 상아, 금, 흑단재목,사이프레스나무 같은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하
여 여러 사람들에게 일을 분배해주었으며 금이나 상아일을 하는 사람, 수를 놓는 사람, 선반
공등 온갖 기술자에게 맡겨지는 다양한 일거리가 만들어졌다. 재료를 운반하는 사람, 즉 해
로를 통하여 전해지는 물건일 경우 선눠, 선장, 수로안내자라는 직업을 만들어냈고 , 육로를
따라 오는 물건인 경우에는 수레를 만드는 사람, 구두를 만드는 사람, 길을 닦는 사람, 채석,
채광하는 사람의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뭉쳐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결국
남녀노소 모두에게 일이 분배되고 소득이 돌아간것이었다.
사업이 진척되어감에 따라 건물들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웅장하고 정교하기가 달
리 비할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일하는 사람들이 설계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덩성
르 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일을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내었다는
것이다.
이 건물들을 둘러보면 어느것이라도 수십년은 걸려 완성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없
다. 그러나 이것들은 실제로 한 사람의 정치인이 이름을 떨치고 있던 짧은 시간내에 오두
지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화가 아가타르코스가 얼마나 짧은 시일내에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
해서 자랑하는 것을 듣고 재욱시스라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시간을 더 들이지요"
제욱시스가 이렇게 말한 것은 단시일 내에 쉽게 만든 작품은 흔히 지속적인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결여하기 쉽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임으로써 만고불변의 성
과를 거둘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페리클래스의 사업은 더욱
놀랍다. 이 건축물들은 짧은 시간안에 완성되었으나 장구한 생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모든
결과물들은 그 당시에 이미 우아하고 고픙스런 아름다움을 갖추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변함없
이 갓 피어난 생명력과 시들줄 모르는 기상을 품고 있기때문인 것 같다.
이 사업 전체를 감독하고 운영한 사람은 피디아스였으며 그외에도 칼리크라테스, 엘레우
시스에 파르테논 신전을 지었다. 이 곳에서 신비한 의식이 거행되고 한다. 이 신전의 공사를
시작한 것은 코로이보스였는데 그는 신전을 착공한 후 돌기둥을 시작한 것은 코로이보스였
는데 그는 신전을 착공한후 돌기둥을 세우고 들보를얹고 난 뒤 사망하였다. 그 후 크시페테
사람 메타게네스가 그위에 부족한 들보를 더 얹고 주열을 올렸다. 또한 콜라르규스 사람 크
세노클레스는 신전의 둥근 지붕을 씌었다. 그리고 칼리크라테스가 성벽을 세웠다. 페리클레
스가 국민들에게 이 성벽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자리에서 소크라테스도 참석했노라고 말했다
고 전해진다. 크리티누스는 공사가 이토록 오래 걸린것에 대해서 다음처럼 풍자하였다.
그후 오래도록 페리클레스느 말뿐이었으니
그의 말만 쌓일 뿐 땅위에는 돌멩이 하나 쌓이질 않았네
음악당으로 쓰이던 오데움 내부에는 많은 좌석과 주열이 있고 외부 지붕 모양은 중심에서
사방으로 경사지어 내려오도록 지었다. 이것은 페르시아 왕의 막사를 본뜬 것으로 역시 페
리클렛의 지시에 의하여 지은것이라고 한다. 크라티노스는 그의 연극<트라키아의 여인> 중
에서 또 다시 다음과 같은 야유를 쏟아내었다.
우리가 여기서 지켜보고 있자니
제우스 신이라도 된 듯 장대한 머리의 페리클레스가 나타나 패각투표가 시작되자 자기
머리를 옆에 내려놓고 대신 오데움을 그 자리에 얹어 놓는구나
페리클레스는 뭔가 남다른 일을 하고 싶어고심하다가 정령을 선포하였다. 파니테나이아에
서 매년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본인이 심사위원으로 임명되어 출연
다들의 노래, 플루트, 하프등을 연주하는 순서와 방법을 규정하였다. 그때 이래로 음악경연
대회는 항상 이 음악당에서 열렸다.
아크로폴리스의 입구 프로필라이아는 5년만에 완성한것인데 므네시클레스가 총책임자였
다. 그 공사기간중 신기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로 말미암아 페리클레스는 여신이 이 공사
로 불쾌해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일이 완공을 할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인부들 가운데 가장 날쌔고 일잘하던 사람이 발을 헛딛는 바람에 매우 높은데서 떨어졌는데
상태가 매우 심각하여 의사들이 모두 단념할 정도였다. 페리클레스가 이일로 근심하고 있
을 때 아테네 여신이 꿈에 나타나서 치료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그
사람이 곧 씻은 듯이 나았다. 이일이 있은후 그느 청동으로 아테네여신상을 만들어 '건강'이
라 이름짓고 제단 근처의 성채위에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있지않다.
금으로 된 이조상은 피디아스가 만든 것으로 그의 이름이 받침대에 새겨져 있다. 그느 모
든 일을 맡아 지휘하여 기술자들을 감독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페리클레스와 각별한 사이였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이제 피디아스를 시기하게 되었고 그의 후원자에는
괘씸하게도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날조해내기 까지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아테네의 부인
들이 공사를 구경하러 온다는 것을 빙자해서 페르클레스와 만나곤 했는데 이것은 다 피디아
스가 눈감아주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이와같은 이야기를듣게되자 극작가들은 가능한 한 일을 크게 부풀려서 페리클레스가 그의
친구요 군의 부관이었던 메니포스의 부인과 사랑하는 사이라고 떠들어댔다. 페리클레스와
가깝게 지내던 피릴람페스는 새를 많이 길렀는데 그는 페리클레스의 여자친구들에게 공작새
를 선물로 보낸다고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비꼬기를 일삼는 사람들이 언제나 자기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중상하여 대중의 미움을 사도록 하는 것은 드문일이 아니다. 트라키아 살마
스테심브로투스조차 페리클레스가 며느리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해괴망측한 거짓말을 지어냈
으니 말이다. 오래전의 일들을 더듬어 올라가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그려내기란 여간 힘
든일이 아니다. 긴 세월 동안 많은 일들이 잊혀졌기 때문이며 그 시대 사람들이 저술한 기
록이 남아있다 할지라도 시기나 악의,아첨이나 호의등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서 사실을 왜곡
해놓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쿠키디데스 파의 웅변가들이 나서서, 페리클레스는 공금을 남용하고 나라의 제원
을 고갈시킨다고 비난하였다. 페르클레스는 그 자리에 모인 군중을 향하여 일어서서 자신이
많은 돈을 썼다고 생각하는가 물었다.
"너무 많이 썼소, 막대한 돈이오."
군중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면 공금이 아니라 이 사람의 개인재산으로 부담하겠소. 하지만 모든 공공건물에 이
사람의 개인재산으로 부담하겠소, 하지만 모든 공공건물에 이사람의 이름을 새기겠소." 이
말을 들은 군중은 그의 큰 도량에 감동하였음인지 또는 새건물을 지은 영광을 함께 나누고
싶었음인지, 국고에서 얼마만큼의 돈을 꺼내 쓰더라도 상관하지 않을테니 일이 끝날때까지
아낌없이 쓰라고 외쳤다.
사태가 더욱 험학해wu서 결국 페리클레스와 투키디데스 두사람중 누구하나가 패각투표로
추방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투키디데스를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을뿐만 아니라 그의 조직
까지 와해시켜버렸다. 그리하여 그와 대립할만한 반대파는 사라졌다. 그는 아테네의 재정과
군사 및 여러섬들과 바다에 관련된 모든 일, 그리고 그리스뿐 아니라 그 밖의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은 데서 오는 막강한 권세를 혼자서 행사할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전처럼 국민들 앞에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느
키잡이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뱃길을 돌려버리듯 이제는 더 이상 국민들에게 수순히 양보하
지 않았다. 또한 그들의 기분을 살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느 지금까지의 해이하고 방종했
던 민주주의를 버리고,엄격한 귀족정치와 군주정치로 정치체제를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 전체를 위한 결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국민에게 정책을 설명하고 제안하여 흔쾌히
찬동을 얻었다. 때로는 일부 국민이 극렬히 반대하는 일을 강행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민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그를 내과 의사에 비유할수있을 것이다. 고질병에 걸린 환자를 맡
았을 때 환자가 원하는 대로 적당히 치료를 해나갈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심한 고통이나 쓴
약을 주어 질병을 다스릴수도 있다. 아테네와 같이 그렇게 큰 역량을 가지 국민에게는 온갖
종류의 폐단이 있는 법이다. 그것을 다스린다는 것은 페리클레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의 방법은 공포와 희망을 섞어서 주는것이었으니, 국민의 지아친 자신감은 꺾어버리고 반면
에 그들이 의기소침하여 있을때는 용기를 북돋워주는것이었다. 그리하여 페리클레스는 플라
톤의 말처럼 웅변술이란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기술이며 사람들의 애정과 열정을 잘 다스려
야 성공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악기의 현고 건반을 잘 다루기 위해서 능슥한 기술
이 필요한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권세의 비결은 단순히 웅변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투키디데스가 말한것처럼
그이 청렴결백한 생활태도와 자신감 넘치는 성격도 한몫했다. 그느 부정부패로 손을 더럽힌
적이 한번도 없으며돈에 관하여는 완전히 초연하였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사실이다 그느
본래 큰 도시였던 아테네를 그누구도 상상하지 못할만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그 자신은
자손대대로 권좌를 물려준 왕이나 절대 군주보다 더 세력이 강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친
으로 물려받은 사재에서 단 1드라크마도 늘리지 않았다.
투키디데스는 그의 권세를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비꼬기좋아하는 시인들은 페
리클레스의 동료와 친구들을 신피시스트라티다이 파라 지칭하였고 그는 대중민주주의와 조
화를 이루기에는 너무 막강해지 인물이라 평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전제정치가 되지 않는다
고 서약하라고 요구하였다. 한편 텔레클리데스에 의하면 아테네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그에게 주었다.
도시의 조세와 함께 도시 전체를 그의 손아귀에 쥐어주었고, 그가 원하면 성벽을 쌓고
또다시 그가 원한다면 그성벽을 허물었으며, 조약과 동맹, 권력, 제국, 전쟁과 평화, 자기
네들의 영원한 부와 성공, 그이상의 것들까지도 모두 그에게로.
그런데 이것은 특별히 운이 좋을때나 그의 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좋은 평판을 얻고 있을
때만 실현된 것이 아니다. 그가 에피알테스,레오크라테스, 미로니데스, 키몬,톨미데스,투키디
데스등과 같은 인물중에서 선두를 지키고 있던 40년 내내 이와 같은 일들이 실현되었던 것
이다. 특히 그는 투키디데스가 채각투표를 통해 실각하고 추방된 이후 15년 도안 계속 자기
자리를 지키며 매년군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는데 그 오랫동안 자신의 성실성에 한 치의 오
점도 없이 잘 관리하였다. 하지만 그는 공무로 바쁜탓에 그것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
로 그느 가장 단순하고 정확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택하였다. 해마다 생산되는 소출을 전
부 팔아서 그 돈으로 집안 살림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시장에서 구입한 것이다.
자식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러한 방식에 대해 불만을 느꼈다. 집안의 부인들은 가
계의 수입과 지출을 조금의 오차도없이 맞추어 나가다 보니 유복한 명문짐나 사람들답지 않
게 여유있는 생활을 누릴스 없다며 불평을 하였다. 집안의 경리는 에반갤루스라는 하인이
모두 도맡아 보았다. 그는 가정경제를 꾸려나가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이러한 재능은
타고난 것이 아니면 페리클레스에게 훈련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 있어 그는 스승 아낙사고라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철학자인 아낙사고라스
는 위대한 정신이 이끄는 것을 따라 집을 버리고 떠났으므로 가사는 허물어지고 그의 집에
서는 뭇 짐승들이 풀을 뜯어먹었다. 그러나 사견을 말한다면, 명사을 즐기는 츨학자는 오로
지 자신의 지성에 의자하여 위대한 사색에 파묻혀 있을뿐 물질적 여건에 무관심하다. 반면
에 정치가는 덕망으로써 인간의 참다운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여념이 없으니 재물을 생필품
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페리클레스의 경우가 그러한데 그
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페리클레스가 공무로 바쁠때였다. 이제 돌봐줄 사람도 없이
늙어버린 아낙사고라스가 머리에 헝겊을 뒤집어쓰고 이사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페리클레스는 크게 충격을 받고 즉시 그에게로 달려가서 설득하고 애원하였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아낙사고라스의 말로를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소중한 정치고문을 잃게 된 자기
신세를 한탄하였다. 그러자 아낙사고라스는 머리에 썼던 천을 벗어던지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페리클레스, 등잔불하나를 켜려고 해도 기름이 필요한 법이오." 스파르타사람들은 아테
네의 세력이 번창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그반면 페리클레스는 국민정신
을 더욱 양양하고 거대한 사업을 할수있다는 자부심을 주기 위하여,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
는 모든 그리스인을 소집하고 유럽이나 아시아에 있는 모든 크고 작은 도시에서 아테네로
대표를 파견해주기를 창하였다. 페리클레스는 각국의 야만인들이 태워없앤 여러 그리스 신
정르 재건할것과 그리스를 야만인들에게서 구원해주면 바치겠다고 맹세한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는 방법과 바다에서 어떻게 하면 모두가 위협을 느끼지 않고 평화롭게 항해하고 교역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서로 토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일을 실행하기 위해서 50세 이상의 시민 20명을 선출하여 사방에 파견하였다. 그중5명
은 아시아에 있는 이오니아와 도리아 방면과 레스보스와 로데스같은 섬까지 갔다. 다른 5명
은 헬레스폰트, 트라키아의 전 지역을 거쳐 비잔티움까지 갔으며 또 다른 5며은 보이오티아,
포키스, 펠로폰네소스를 경유하여 로크리아와 그부근의 지역을 지나 아카르나니아와 멀리
암브라키아까지 갔다. 그리고 나머지 5명느 에우보이와 오이타이아를 거쳐 말리아 만을 지
나 아카이아와 테살리아로 갔다. 그들은 이러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설득하였다. 이
번대회에 참석하여 그리스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법을 토의해보
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페르클레스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고, 바라던 대회도 결국 열지 못하였다.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비밀공작을 펼쳐 이 계획을 수포로 돌아
가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여기에 싣는 것은 페리클레스의 고매한 사
상과 웅대한 정신을 보이려는 까닭이다.
그는 군사적 행동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운 것으로 유명하다. 결과를 예측할수 없거나
위험이 따르는 작전은 반드시 피하였다 어떤 장군이 무리한 모험을 감행하여 요행히 성공을
가두고 아면 남들은 다 칭찬하지만 페리클레스는 그영광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더
욱이 그런사람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느 늘 시민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실권을 잡고 있
는 한 단 한사람의 국민도 헛되이 희생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톨마이우스의 아들 콜미데스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장군으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자 의
기양양해졌다. 그는 보이오티아를 무모하게 침공하려고 가장 용감하고 진취적인 1천명의 장
정을 설득하여 자기를 따르도록 하였다. 페리클레스는 이 일을 저지하려고 공중앞에서 연설
을 하였다. 여기서 그는 톨미테스가 페리클레스 자신의 충고르 듣고 싶지 않다면 조금만 기
다려 최선의 충고자인 시간의 뜻에 따르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이 연설을 그당시에는 전
사하였다는 소식이 왔다. 페리클레스는 현명한 애국자라고 더욱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성공적인 작전은 케르소네세 사람들과의 전투였다. 이승리로 그 지역에 사는
그리스인들의 안전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에 이민 1천명을 보냄으로써 그 지역
에 활력을 불어넣을뿐만 아니라, 빈도가 대륙과 연결되는 부분의 좁은 지협을 가로지르는
요새를 구축하여 케르소네세근처에 퍼져 살고 있던 트라키아 인들의 침입경로를 막았다. 그
리고 약탈을 일삼는 사나운 야만인들과 이웃한 까닭에 끊이지 않던 전쟁과 소규모의 국경분
쟁에 종말을 지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큰존경과 명성을 얻은 것은 100척의 군선을 거느리고 메가라의 항구 페
기이를 떠나 펠로폰네소스 반도주위를 순항한일이다. 그느 과거에 톨미데스가 한것처럼 해
안지방을 초토화하였을 뿐만아니라 함께 배를 다고 온 병사들을 이끌고 내륙 깊숙이 침입해
들어갔다. 주민들은 어찌나 두려웠던지 모두 성안에 클어박힌채 나오려 하지 않았다. 페리클
렛는 네메아에 이르러 시티온사람들을 맞아 전투를 벌이게 되었으며, 이들을 정복하고전승
기념비를 세웠다. 그다음 그는 우방국인 아카이아의 군대를 지원받아 코린트만을 가로질러
건넜다. 그는 아켈로우스 강의 하구를 지난 해안을 따라 향해 하여 아카르나니아를 공략하
고 오이니아다이인들을 성안에 몰아 넣은 다음 그 지방을 약탈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
일로 그는 적을 위압하고 아케네에 큰 이익을 가져왔다. 그의 지휘로 인해서 군대은 인명손
해는커녕 아무 사고도 없이 돌아왔던 것이다.
그는 또한 중무장을 갖춘 대선단을 거느리고 묵해롤 가서 그 곳에 있는 그리스인들의 도
시를 돕고 주민들을 보호하였다. 또한 대군으로써 이 지방의 야만인들과 그 괴수들을 은연
중에 위압함으로써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는 시노페에 13척의 군선과 지상군을 남
기고 라마코스를 지휘관으로 삼아 그곳의 독재자 키메실레우스를 견제하게 했다. 나붕에 키
멜실레우스와 그의 일파가 축출되자 정령을 내려 600명의 지원자를 아테네부터 이곳으로 이
주시켜 축출된 자들이 소유하고 있던 가옥과 토지를 나누어 갖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여러 경우에 있어서 그는 아테네인들의 충동적인 제안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테네 시민들이 막강한 군사려과 혁혁한 전과로 의기양양해져서 이집트를 다시 공략하고
페르시아 왕국의 해안을 공격하자고 할 때 그는 반대하였다. 시민들중에는 시칠리아를 고략
하자고 선동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알키비아데스와 그밖의 사람들의
열변으로 폭발되었다. 심지어는 투스카니와 카르타고를 정복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아테네
의 위세와 승리가 절정에 도달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의견이 제시되는것도 무리는 아니
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이와 같은 충동을 억제하고 다른 나라들과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허
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테네가 일찍이 보유하고 있던 영토를 보전하고 수호하는데 힘을
모았다. 그느 스프르타의 세력을 억제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파
르타에 대해 상당히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한 사실은 신성전쟁을 통해서 잘 드러난
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델포이군을 파견하여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포키아인들을 몰아
내고 아폴론 신전을 델포이인들에게서 전해 받은신탁을 신전에 서있는 청동늑대의 이마에
새겨두고 갔다. 이에 페리클레스는 포키아 인들이 아테네 인에게 전해준 신탁을 늑대의 오
른쪽 허리에 새겨 넣었다.
페리클레스가 아테네의 세력을 그리스 안에 묶어두기를 잘했다는 것은 그 이후의 사태를
보면 잘 알수 있다. 우선 에우보이아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그는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나
서야 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메가라 인들이 아테네와의 동맹관계를 깨고 스파르타왕 플
리스토아낙스는 아주 젊은 사람이어서, 장관들이 그의 고문으로 딸려보낸 클레안드리데스라
는 사람의 말에 전적으로 좌우되고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이 사람의 성실성을 은밀히 시험
해보았다. 클레안드리데스는 뇌물을 받는 즉시 동맹군을 이끌고 아티카에서 철수해갔다.
군이 돌아와 해산되자 스프르타인들은 매우 격분하여 자기 나라의 왕에게 엄청만 액수의
벌금을 부과하였다. 왕은 이를 지불할수 없어서 스파프타를 떠났다. 이미 국외로 도주한 클
레안드리데수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클레아드리데스의 아들 길리푸스는 시칠리아로 보
낸 아테네원정군을 궤멸시킨 사람이엇다. 그런데 탐욕이란 것이 대를 이어 전해지는 유전병
인지, 길리포스 역시 나중에 더러운 뇌물을 받은 죄로 스파르타에서 추방되었다. 이 이야기
는 리산데르 편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페리클렛가 스파르타 동맹군 토벌을 그만두고 느닷없이 군비명세서를 제출하였을 때, 그
중에는 '필요한 목적을 위하여'라는 항목으로 10탈렌크을 스파르타에 보내어 장군들을 매
수 함으로써 전쟁을 미루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는 평화를 샀다기보다 여유를 갖고 전쟁준
비를 할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다.
이런 조치를 취한 후 그는 곧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에우보이아 섬으로
향했다. 그는 50척의 범선과 5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그곳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
하였다. 그는 칼키디아 시를 제압한후 히포보타이라고 불리던 그곳의 말사육자들을 추방하
였다. 그들은 칼티이다 시에서 가장 부유하고 세력이 강한 다들이었다. 그는 또한 히스티아
이아 주민을 모두 국외로 내쫓고 그 대신 아테네인들을 이주기켰다. 페리클레스가 이곳 사
람들을 가차없이 엄하게 다른 것은 하나의 본보기를 남기기위한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ㅇ
느 아테네의 배 한척을 나포하여 선원들을 모조리 죽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30년간위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런데 페리클레스는 사모스섬으
로 원정군을 보내게 되었다. 그곳 사람들이 밀레시아와의 전잰을 그치라는 아테네의 지시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처럼 페리클레스가 사모스로 군대를 보낸 것이 아스파시아를 기쁘게
하기위한 것이었다고들 생각하였다. 여기서 아스파시어란 여자에 대해 얘기하고 넘어가야겠
다. 아스파시아는 재능과 매력이 뛰어난 여자였다. 그녀는 당시의 정치지도자들을 뜻대로 움
직였다고 한다. 철학자들은 두고두고 그녀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결코 그녀를 헐뜯지 않았
다. 아스파시아는 밀레시아출생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악시오쿠스였다는 사실만이 확인될뿐
이다. 아스파시아는 그리스에서 가장 권세있는 사람들만 골라서 상대하였는데 이것은 옛날
에 이로니아여인 타르겔리아의 흉내를 낸 것이라고 들 이야기 한다. 타르겔리라는 찬하일색
에 매력이 흘러넘쳤을 뿐만아니라 총명하기까지 하였다. 그리스인들중에는 타르겔리아를 사
모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녀는 그들로 하여금 조국을 저버리고 페르시아의 이익을 도모
하게 하였다. 그 애인들은 모두 권세와 지위가 높았던 까닭에 그리스의 많은 도시에 페르시
아의 세력이 스며들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페리클레스가 단지 아스파시아의 지혜와 정치적 수완에 이끌린 것이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도 친구들과 함께 이 여자를 자주 찾았다고 하며 어떤 사람들ㅇ느 자기 부
인까지 데리고 가서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고 한다. 아스파시아는 젊고 수준
높은 창녀들을 집안에 두고 있었으니 그녀의 직업은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아이스키네스에 의하면, 출생도 성품도 보잘 것 없던 양장수 리시클레스가 페리클레스가
죽고 난 후 아스파시아와 가깝게 지내 까닭으로 아테네에서 저명인사가 되었다고 한다. 플
라톤이 쓴 <<메네크세누스>>의 서론 부분을 심각하게 받아들일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 글에 따르면, 아테네의 많은 사람들이 아스파
시아를 찾아와 수사학에 대해서 배워갔다고 한다. 하지만 페리클레스가 아스파시아에게 마
음을 쏟게 된 것은 사랑의 열정 때문인 것 같다. 본시 그는 가까운 친척관계가 있는 여자와
결혼하였다는데, 이 여자는 전 남편인 히포니쿠스와의 사이에 부자로 이름난 칼리아스라는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페리클레스와 함께 살면서 크산티포스와 파랄루스라는 두아들
을 두었다. 후에 두 사람사이가 틀어지고 결국 합의함에 헤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다른 남편
을 얻어 갔고 페리클레스는 아스파시아와 살게 되었다. 그는 아스파시아를 끔찍이도 아꼈다.
그는 날마다 집에서 나갈 때,그리고 포룸에서 돌아오깨면 반드시 아스파시아에게 키스를 해
주었다.
그시대의 희극에서 아스파시아는 새로운 옴팔레또는 데이 아니라 또는 헤라라고 불렸다.
크라티누스는 아스파시아를 노골적으로 창녀라고 불렀다.
그에게 헤라만한 욕저으이 여신을 선물하려고
수치도 모르는 창녀를 내리셨으니
그 이름이 아스파시아였도다.
두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에우폴리스가 지은 <시가지>라는
극에서 페리클레스가 이 아들의 안전을 묻자 미로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 아들이요? 살아있어요. 명이 긴 사람지만
어머니가 창녀라 그성명은 더러울 수밖에요.
아스파시아가 하도 이름을 떨쳤으므로 페르시아 왕위에 오르려고 형제간에 전쟁을 일으켰
던 키루스는 가장 사랑하는 후궁밀토의 이름을 아스파시아라고 고쳐 불렀다. 이 여자는 본
시 포카이아 태생으로 헤르모티무스의 딸이었는데, 키루스가 전사한 뒤 왕의 후궁이 되어세
도를 떨쳤다. 이 이야기는 모두 내기억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기록해둘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져서 여기 적어본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밀레시아 사람들을 구해내야 한다며 사모스와의 전쟁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스파시아의 간청에 따른 것이라 하여 비난을 받았다. 이 두나라는 프리에네으 ltl
의 소유권을 놓고 전쟁르 일으켰는데, 승리한 사모스측은 아테네의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
으려고 했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는 군선을 이끌고 가서 사모스의 독재정부를 무너뜨리고
그 도시의 주요인물 500명과 아이드 500명을 볼모로 잡아 멀리 렘노스섬에 가두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볼모로 잡힌 자들은 일인당 1탈렌트씩 모아 페리클레스에게 줄터이니 석방
새 달라고 청하였다고 한다. 또한 민주정권이 들어서는 것에 반대하는 자들도 많은 선물을
제의 해왔다고 한다. 그 밖에 페라스아 장군 피수트네스도 사모스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
었던지라 사모스 시를 관대히 보아달라며 금 1만 조각을 보내어 왔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이모든 뇌물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일을 이미 결정한대로 처리하고 사모스에 민주
정부를 수립한 후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러나 사모스 인들은 곧 반기를 들었다. 피수트네스가 볼모로 잡혀갔던 사람들을 볼래
구출해내고 사모스 인들에게 전쟁자금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는 군선
을 이끌고 다시 한번 사모스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도착해보니 사모스 인들은
순순히 항복할 의사는 전혀 없이, 아테네와 해상권을 놓고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이세였다.
페리클레스는 트라기아 섬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44척의 배로 적선 70척을 격파하였는
데 그중20척을 군인 수송선이었다고 하니 실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셈이다.
페리클레스는 이승리로 적을 격퇴함과 동시에 사모스 항을 수중에 넣은 후 사모스성르 완
전히 포위하였다. 그러나 사모스 인들은 여러방법을 동원하여 도전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러
다가 아테네로부터 많은 숫자의 증원군이 도착하자 사모스성은 철저히 봉쇄되었다. 페리크
레스느 60척의 함대를 이끌고 멀리 지중해로 나아갔다. 대부분의 기록에 의하면 사모스르
구하러 오느 포이네키아 함대와 싸울 생각으로 그런서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테김부로투
스에 의하면 키프로스를 공략하려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이말은 실로 믿기 어렵다.
그의 진짜 생각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은 오산이었던 것 같다. 철학자 이타게 네스의
아들 메릴수스는 당시 사모스군의 장군이었다. 그는 페리클레스가 떠난 뒤 남아있는 아네네
군선의 수가 적고 장군들도 미숙한 것을 보고 자신감을 얻어 아테네 군에 공격을 가하였다.
이 전투에서 사모스 인들은 승리를 거두고 아테네 군병을 포로로 잡았으며 여러척의 배를
파괴하였다. 이로써 사모스 군은 해상권을 장악하고 전보다 더 많은 전쟁용품을 가지게 되
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페리클레스 자신도 일찍이 멜리수수와의 해전에서 패한 일
이 있다고 한다.
사모스인 들은 지난번에 진 빚을 갚기 위해 포로로 잡힌 아테네 군병들의 이마에 올빼미
모양의 낙인을 찍었다. 아테네군이 군병들의 이마에 올빼미 모양의 낙인을 찍었다. 아테네
군이 그들에게 '사마이나'의 낙인을 찍었던 것에 대한 복수였다. '사마이나'는 배 이름인
데 뱃머리가 낮고 평평한 돼지의 코모양으로 생겼고, 배의 폭이 넓어서 많느 짐을 실을수
있으면서도 빨리 달릴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배를 사마이나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배가 사
모스의 폭군 폴리크라테스이 명령에 의해서 최초로 만들어졌디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
는 다음의 시에서 사모스인드으리 이마에 새겨지 낙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오, 사모스 인은 글이 새겨진 족속이기 때문이니라.
페리클레스는 사모스에 남겨두고 온 군대가 괴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되돌아왔다.
그가 군대를 이끌고 나온 멜리수스를 격파하니 적군은 정신없이 달아나 버렸다. 그는 사모
스시를 포위한후 주위에 진지를 구측하고, 힘들더라도 시간을 끌어서 항북을 얻어낼 생각을
하였다. 교전을 힘으로써 자기나라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아테네 병사들은 싸우고 싶어 못 견딜지경이 되었다. 그것을 억제하
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군을 8부대로 나누어 제비를 뽑게 하였다. 흰콩을 집
은 부대는 잘먹고 편히 쉬게 하고, 나머지 일곱부대들은 전투에 임하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즐겁고 편히 쉴수 있는 날을 '하얀날'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역사가 에포로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페리클레스는 공성기라는 신무기를 이 전쟁에 사
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무기를 매우 신기하게 여겼는데 이 무기를 만들어낸 사람은 아르
테몬이라는 기사였다. 그는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필요할때마다 가마에 태워서 이리저리 모
시고 다니며 감독하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별명은 페리포레투스였다. 그러나 헤라클레이데
스 폰티쿠스는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아나크레온의 시를 읽다 보면 아르
테몬 페리포레투스는 사모스 전쟁이 일어나기 여러 세대전의 사람임을 알수 있다고 주장하
였다. 그의 설에 의하면 아르테몬은 편안한 것만 좋아하고 자기자신에게 위험이 닥치지나
않을까 몹시 두려워하여 항상 집안에만 들어박혀 있었으며 자기 머리 위로 무엇이 떨어질까
드려워한 나머지 두 사람의 종을 시켜 청동으로 만든 방패를 자신에게 씌우고 다니도록 하
였다.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외출하게 될 때는 들 것을 타고 다녔는데, 그것을 거으리 땅
에 닿을 정도로 낮게 들도록 하였다. 이까닭에 그가 페리포레투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는 것이다.
포위된지 9달만에 사모스 인들을 항복하였다. 페리클레스는 시의 성벽을 헝물고 그들의
군선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무거운 벌금을 부과하여 그 일부는 즉시 지불받고 나머지는 정
기적으로 지불한다는 보증과 함께 볼모를 잡았다. 사모스 인두리스는 이 사실을 하편의 비
극처럼 기록하여 페리클레스와 아테네 군이 매우 잔인하였던 것처럼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투키니데스, 에포로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기록에는 전혀 그런 이야기가 없다. 두리스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사모스군의 힘장과 수병들을 밀레투스의 시의 저잣거리고 끌고 가서
10여 일간 널빤지에 꽁꽁 묶어둔 다음, 그들이 초죽음에 이르자 몽둥이로 멀리를 때려 죽게
하고 시체는 묻지고 않고 길거리와 들판에 내팽개쳐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리스는 개인
적인 감정이없는 경우에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만 쓰는데 만족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므
로 이번 경우에는 아테네에 저주를 퍼붓기 위해 자기 나라에 닥친 재난을 과장했을것이 틀
림없다
페리클레스는 사모스를 정벌하고 아테네로 돌아와 전사자들의 장례를 각별히 성대하게 치
루어 주었다. 그리고 관례에 따라 무덤가에서 추모연설을 했는데 그것으로 큰 찬탄을 받았
다. 그가 연설을 마치고 단에서 내려오자 여자들이 몰려와서 그의 손을 잡으며 칭찬을 아끼
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운동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선수를 환영하듯 그의 머리위에 화환과
리보는 얹어주었다. 그런데 엘피니케는 그에게로 와서 이렇게 말했다.
"페리클레스, 당신은 정말이지 용감한 분이에요. 과연 꽃을 받으실 만해요. 제 오빠 키몬
처럼 메디아인이나 포이니키아 인과 싸우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피를 나눈 동맹국을 명망시
키느라고 우리의 훌륭한 시민들을 많이도 죽이셨으니까요." 엘피니케가 이런 말을 하는 동
안 페리클레스는 지그시 미소를 띠며 다만 아르킬로쿳의 시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나이든 여인은 향수를 뿌리지 않는 법이니라.
이온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사모스 인들을 정복한 일을 스스로 매우 자랑
스러워했다고 한다. 아가멤논은 야만인의 도시를 점령하는데 10년의 세월을 소모한 반면 페
리클레스 자신은 9달만에 이오니아 최대의 도시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또한 펠리클레스
가 이 승리의 영광을 전적으로 자기에게 돌린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투키디데스가 전하는대
로 이 전쟁은 승부를 점치기가 매우 어려웠으며 양쪽 다 많은 위험을 무릅쓴것이었는데, 이
전쟁이 끝난후 아테네 인들은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건이 있은 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였다. 페리클레스는 아
테네 인들을 설득시켜 코린트의 침략을 받은 코르키라이로 구원군을 보내서 강한 해군을 가
진 섬나라를 동맹국으로 얻고자 했다. 펠로폰네소스인들은 예외없이 아테네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여 구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페리클레스는 키
몬의 아들 라케다이모니우스를 장군으로 삼아 겨우 10척의 군선을 파견하였으니, 이것은
라케다이모이우스를 고의로 모욕하려는 것이었다. 키몬의 일족은 스파르타인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까닭이었다. 그가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라테다이모이우스에게 몇 척의 배를 딸려
내보낸 것은 만일 이렇다 할 공을 세우지 못하도록 스파르타인들돠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더욱 심각한 지경을 만들어버리려는 의도에서 였다. 실로 그느 모든 수단을 다하여 키몬의
아들들이 득세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는 키몬의 아들 이름들이 라테다이모이우스, 테살루
스, 엘레우스 등으로 지어진 사실을 지적하며, 이들의 어머니가 아르키디아 사람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외국인지 순스한 아테네 사람이 아니라고 동언하였다. 이 일로 해서 페리클레
스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별다은 도움이 될수 없는 겨우 열척의 배를 보냈다고 비난
을 받았다. 그리고 공연히 남의 나라 전쟁에 끼여든다는 불평이 높아졌다. 페리클레스는 시
간이 흐른뒤에야 증원군을 코르키라로 보냈지만, 이 군대는 싸움이 끝난뒤에 그곳에 도착하
였다.
코린트 인들은 아테네인들의 행동에 매우 분개하였다. 그들은 스파르타의 의회로 가서 아
테네 인들을 공공연하게 비난하였다. 메가라 인들도 이에 합세하여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리
스인이라면 어느 나라 사람이나 기본권리와 평화를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테네 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저잣거리나 항구로부터 메가라 인들이 모두 축출되었다고 호
소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코린트의 이민지면서 당시 아테네가 점령하고 있던 포티다
이라 시가 반란을 일으켰다. 포티다이아시는 아테네군대에 의해 포위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전쟁의 시작을 재촉한 결과가 되었다.
이모든것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왕 아르티다무스느 아테네로 사신을 보내어 모든 분재을
중재하고, 여거 나라간의 평화협정을 공고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아테네가 메
가라 인들을 축출하기로 한 법령을 파기하고 그들과 화해하기로 하였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전쟁은 오로지 페리클레스 한사람 때문에 일어났다
고 할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스파르타 왕의 중재안에 심히 반대하고 국민들을 부추
겨 메가라 인들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의 사절단이 이 문제로 아테네에 왔을 때, 페리클레스는 매거라 인 추출령을 새
긴 석판을 뜯어내는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사절단의 일원으로 온
폴리알케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그것을 뜯어 내리지 말고 돌려 붙이십시오. 그럿마저도 금지하는 법령은 없을
테니까요." 이것은 현명한 대답이었으나, 이미 결심을 궅힌 페리클레스스의 마음을 움직일
수느 없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페리클레스는 메라가 인들에게 어떤사적인 감정이 있었더 것 같다.
어찌 됐건 그느 메가라 인들이 접경지대의 신성한 토지를 함부로 사용하였다고 비방하였는
데 그것은 표면상의 이유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그는 메가라고 사신을 보낸후, 그 사신이
그 곳에서 다시 스파르타로 가서 메가라 인들을 규탄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했다. 스파르타
로 보낼 공문의 내용은 공정하고도 우호적으로 작성하였다. 그런데 사신으로 간 안테모크리
투스가 죽고 말았다. 아마도 메가라 인이 아테네에서 눈에 띄기만 하면 사형에 처할 것, 장
군들은 연례선서를 할 때 1년에 두 차례씩 메가라 영토를 침공하겠다는 내용을 첨가할 것,
그리고 아테모크리투스를 트라키아 평원으로 나가는 문, 즉 지금 '이중의 문'이라고 부르는
문 가까이에 매장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반면에 메가라 인들은 결코 앝테모크리투스를 살해한 일이 없다고 반반하였다. 그리고 모
든 일은 페리클레스와 아스프시아가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르스토파네스의 <아카
르니아 인들>로부터 유명한 시구를 인용하였다.
메가라로, 어떤 녀석이 정신없이 달려오더니
고급 창녀 시모이타를 훔쳐갔다네.
메가라 사람들은 분격하여
아스파시아의 집으로 가서 창녀 둘을 데려와 버렸지.
이 논쟁이 어떻게 시작된것인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페리클레스가 고집스럽게 ㅁ
그 법령을 고수한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비난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가 단호한 태
도를 취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고 하며 사신들이 평화를 요청해 온 것은 다만 그를 시험하
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가 조금이라도 양보하였다면 그것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으리라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가 스파르타에
서 온 사절단을 그렇게 가볍게 대한 것은 오만하게도 자기 힘을 과시라고 싶었기 때문이라
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마음속ㄱ에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결과
를 가져왔다는 데에 동의한다. 위에서 말한바, 조각가 피디아스는 수호신 아테네의 조각상을
만드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페리클레스와 가까운 친구사이로 그의 신임이
두터웠던지라 많은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다. 이들은 페리클레스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시험
하기위하여 피디아스와 같이 일하던 메논을 매수하였다. 장터에 앉아 피디아스르 공격하고
규탄하며 국민들의 보호를 호소하게 하였다. 국민들은 메논의 말에 따라 그를 보호해 주고,
피디아스를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러나 아무언 혐의사실도 증명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피디
아스는 조각상을 만들어나갈 때 헤리클레스의 충고에 따라 금으로 된 부분은 언제든지 떼어
서 정확한 무게를 달수있게 해두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와 같이 되자 페리클레스는 고소
자들에게 그것을 한번 달아보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피이다스의 작품이 너무도 훌륭했던
까닭에 그는 도리어 사람들의 시기를 받게 되었다. 특히 아테네여신이 들고 있는 방패에 새
겨넣은 아마존군과의 전투장면이 그러했다. 그는 두손으로 큰 돌을 들어올리는 대머리의 늙
은 전사를 자기와 닮게 만들었으며, 또한 페리클레스와 매우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아마존
의 전사와 싸우는 모습과 있었다. 페리클레스와 매우 비숫하게 생긴 사람이 아마존의 전사
와 싸우는 모습도 있었다. 페리클레스와 닮은 자는 차을 든손에 얼굴이 가리워지기는 하였
으나 그래도 알아볼수 있었다.
긜하여 피디아스는 투옥되어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정적들이 그를
독살함으로써 그 일을 마치 페리클레스가 꾸민 것처럼 의혹을 불러일으키려고 하였다는 설
도 있다. 제보자 메논은 글리콘의 제안에 따라 세금을 면제받고 장군드에 의해 신변을 보호
받았다.
이와거의 때를 같이 하여 아스파시아는 신을 모곳하였다는 혐의로 고발되었다. 고발자는
희극배우 헤르미푸스였는데, 그녀는 아스파시아가 노예 아닌 아테네 여인들을 자기 집에 창
녀로 받아들여 페리클레스와 관계시켰다고 폭로하였다. 디오피테스도 나서서 종교를 소홀히
하는 자를 공개처벌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것은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를 겨냥한 것으로 결
구근 페리클레스를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국민들은 여러 가지 고발과 제안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드라콘티데스는 색다른 법령을 제안하였다. 즉 페리클레스로 하여금 공금출납에
관한 명세서를 제안하였다. 즉 페리클레스로 하여금 공금출납에 간한 명세서를 정무회의에
제출하게 하고 이것은 아크로폴리스에 모여서 심리한 뒤 국민총회에서 최종판결을 내리자고
하였다. 하그논에 의해 이 제안은 부결되었으나 1천5백명의 배심원앞에서 페리클레스에 대
한 공금사용, 뇌물수납 등의 부정사실을 추궁하기로 하였다.
아스피시아는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이스티네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페리클
레스가 눈물을 흘리며 위원들에게 개인적으로 호소한 덕택에 석방되었다고 한다. 페리클레
스는 또한 아낙사고라스가 고발될 것을 염려되어 그를 국외로 도피시켰다. 피디아스의 일로
민심이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탄핵당할것이 두려워 전쟁을 일으켰다. 그동안
아테네에는 계속 전운이 감돌았는데 페리클레스 자신이 거기에 불을 당긴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불만과 비판의 소리를 일소하고 시기심을 잠재울 생각이었다. 나라가 중대하
고 위험한 지경에 빠지면 국민들은 어김없이 그에게로 의지해 올것이었으니 그의 권위와 영
향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인들로 하여금 스파르타사절단의 제안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말라
고 한 이유는 이상과 같이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과연 진실인지는 알수없는 것이다.
스파르타는 페리클레스만 제거하면 아테네를 쉽게 다룰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리하여 아테네 인들에게 '부정한 놈'을 쫓아내라고 공작을 펼쳤다. 역사가 투키디데스에 의
하면 이것은 페리클레스가 모계쪽으로 알크마에오니다에 계동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러나 이 공작은 오히려 정반대의 효과를 내었다. 국민들은 페리클레스를 의심하거나 질책하
는 대신 적군이 가장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더욱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아르키다무스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군이 아티카로 침입해 오기전에 국민들에
게 말했다. 만일 아르키다무스가 모든 것을 아 유린하고도 그의 저택만을 남겨둔다면, 그것
이 호의로 그런것이든 정적으로부터 규탄받을 근거를 남기기 위해 그런것이든 간에, 자신의
토지와 저택을 모두 나라에 바치겠다고 하였다.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은 아르키다무스의 지휘하에 아테네 영토로 침략해 와서 촌락을
황폐시키며, 아카르나이까지 진군해 와서 진을 쳤다. 여기까지 왔으니 아테네 군은 참지 못
하고 뛰쳐나와 명예를 걸고 싸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와 보이오티아의 6만 대군과 아테네의 운명을 걸고 결전을 감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그렇게 많은 수의 대군을 향해 선제공격을 하는 것은 있을수도 없는 일
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당장에 달려나가 싸우고 싶은 마음에 불만이 가득한ㄴ
사람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 달래었다.
"나무는 벌목하면 곧 다시 새것이 자라나지만 사람은 한번 잃으면 그것을 쉽게 회복할 수
가 없소."
그는 국민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는데 이는 국민들이 자기의 판단과 배치되는 행동을 강요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폭풍을 만난 노련한 선장처럼 만사를 꼼꼼히 점검하
고 위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만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자기의 경험과 수완에 따라 행동
하였다. 또한 멀미나고 공포에 싸인 선객들의 눈물과 애원울 뿌리치듯이 아테네 시의 각 문
을 굳게 닫고 요소요소에 병역을 배치한 뒤 사방에서 들려오는 으르렁거리는 불평에 귀를
막은채 자신의 판단력을 믿었다. 친구들 가운데 공격을 권유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정적들은
협박과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를 일컬어 비겁한 장군이라느니, 나라를 적의 손에 떠엄
리겨고 한다느니 하는 온갖 야유와 조롱을 노래로 만들어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페리클레스의 반대편에 가담한 클레온도 국민들이 페리클레스에 대해서 품
고 있던 나쁜 감정을 발판삼아 지도자로서의 자기우위치를 확보하였다. 그것은 헤르미푸스
의 다음의 시구에 잘 나타나 있다.
사티르 족속의 왕이여, 그대는 창검 휘두르기가 겁나서 언제난 혀만 휘두르나요? 그들이
용감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텔레스가 그들 뒤에 잠복해 있어요
그대가 단지 이를 가는 모습만 보여주려고 할 때 조차 자그맣고도 예리한 단도는 매일
매일 새로이 날이 서니 그대는 날카론운 클레온의 맛 좀 볼거예요.
이와 같은 공격을 받고도 페리클레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소나기철머 퍼붓는 중상모
략들을 조용히 참았다. 그는 100척의 군선을 보내어 펠로폰네소스를 공격하게 하였다. 한편
그 자신은 본국에 남아서 시민들을 굳게 장악하고 펠로포네소스군이 철수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중에도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국고에서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또 아이기나 섬의 주민을 모조리 몰아낸후, 제비뽑기를 통해 아테네 인들에게
그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아테네 인들은 적들도 역시 자신들처럼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생
각에 어느 정도 위안을 삼았다. 아테네 함대는 펠로폰네소스반도를 돌며 크고 작은 촌락과
도시를 파괴하고 광범한 지역을 약탈하였다. 페리클레스 자신도 메가라를 정벌하여 사정없
이 파괴하였다. 그러므로 스파르타연합군은 아테네에 큰 피해를 끼친 것 못지않게 해전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가 처음부터 예측한 대롤 전쟁을 오래끌지 못하고
곧 물러갈 것 같았다. 그러나 하늘의 힘에는 인간도 당할 수가 없었다.
아테네 시내에는 질병이 돌아 꽃 같은 젊은 생명을 무수히도 빼앗아갔다. 심신양면으로
고초를 당한 사람들은 상태가 심한 환자가 제정신을 잃고 아버지나 의사를 공격하듯이 페리
클레스를 공격하였다 그들은 페리클레스의 적들이 사주하는 대로 질병의 원인이 페리클레스
에게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시원안 시골바람을 마시며 살던 사람들은 시내로 몰아넣고
더운 여름철에 좁은 방과 숨막히는 천막속에서 가축들마냥 우굴우굴 들끓으며 하는일이 지
내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로 병을 옮기게 해놓고서, 이고생을 덜어줄 구
제책은 전혀 강구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모두 페리클레스의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고생을 다소라도 덜면서 적국을 괴롭히기 위해서 페리클레스는 150척의 군선에 수
병뿐만 아니라 많은 보병과 기병을 태우고 출정하려 하였다. 그러자 아테네 인들은 이 출저
에 큰 희망을 걸었다. 그준비가 대단했기 때문에 적들은 매우 두려워하였다. 모든 준비가 다
되어 페리클레스 자신이 막 배에 탔을 때, 갑자기 난데없는 일식이 생겨 온 세상이 암흑천
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것으 극히 불길한 징조로 여기고 모두들 겁을 집어 먹었다. 키잡
이들이 무서워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음을 보고 페리클레스는 외투를 벗어 그 키잡이가 아
니라고 대답하자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과 일식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 일식은 다만 내 외투보다 더 큰 무엇으로
해가 가리워져서 생기는 것이 아니더냐>"
헤기클레스의 이말을 철학자들에게 큰 논의의 주제를 던져 준 결과를 낳았다.
페리클레스는 함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으나 열심히 준비한데 비해서 성과는 대수롭지 않았
다. 그는 성스러운 도시 에피다우로스를 포위하였고 곧 함락시킬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질병이 돌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는데 이로 인해 아테네는 많은 군병을 잃었
을뿐만 아니라 군과 접촉하는 모든 사라들에게 까지 병이 전염되었다.
그후에도 아테네인들은 그르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다시 한번 아테네 인들은 고
무하고 격려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해싿. 하지만 그는 시민들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릴수 없었
으며 어떤방법으로도 그들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임투표로 장군직을 파면
당하고 벌금형을 받았다. 그 액수는 15탈렌트였다는 것이 최소요, 50탈렌트였다는 것이 최대
다. 이도메네우스에 의하면 페리클레스를 고발한 사람은 클레온이라고 되어있고, 테오프라스
투스에 의하면 고발자가 심미아스며, 헤라클레이데스 폰티쿠스에 의하면 라크라티다스에 의
해서 고발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곧 종래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마치 단 하나의 침만 갖고 태어나는
벌처럼 국민들은 한번의 처벌로 자신들의 분노를 다 풀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인
사정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많은 친구들이 질병으로 세상르 떠난 데다가 가정에서도 불화가
있었다. 그의 맏아들 크산티포스는 본시 낭비를 즐렸고 그아들은 에필리쿠스의 손녀이자 티
산데르의 딸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그녀는 젊고 낭비벽이 심했다. 크산티포스는 돈
을 조금씩밖에 주지 않는 아버지의 인색함에 더 이상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아들은
마침내 페리클레스의 허가를 얻은 듯 가장하여 어떤 친구로부터 돈을 빌렸다. 나중에 이 사
람이 돈을 돌려달라도 하자 페리클레스는 돈을 갚기는커녕 그 사람을 고소하였다.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크산티포스는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버지
를 욕하고 다녔다. 그느 우선 아버지를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페리클레스가 집안에서 대
화를 나누는 방식과 집에 찾아온 소피스트나 학자들과 토론하던 모양을 이야기하였다. 예를
들어 5종경기 선수가 무심코 창을 던졌는데 파르살리아 사람 에페티무스가 이에 맞아 죽어
버린 일을 두로 그의 아버지와 프로타고라스가 하루종일 심각하게 토론을 벌인 일을 들 수
있다. 즉 살인을 저지른 것은 창인가, 그것을 던진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경기진행위원이
었는가를 엄밀히 따져보자더라는 것이었다. 스테심브로투스에 의하면 아들은 자기의 아내와
아버지가 정을 통하였다는 이야기를 직접 퍼뜨리고 다녔다고도 한다. 아테네에 전염병이 돌
때 크산티포스는 그병으로 죽었다
이때 페리클레스의 누이와 친지, 친구들도 대부분 사망하였다. 게다가 그의 국정운영에 큰
힘이 되어주던 동료와 측근들도 세상을 떴다. 이러한 그는 큰불행을 당하고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보이거나 슬퍼하지 않았고 친구나 친척중 그누구의 장례식에도 참석하
지 않았다. 그러나 정식 결혼에서 얻은 막내 아들 파랄루스가 죽은 것은 그에게 커다란 충
격이었다. 그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장례식때 시신의 머리에 화
환을 씌워주는 순서가 되자 치밀어오르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 평생
에 걸쳐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아테네 정부는 장군이나 정치가 중에서 그를 대신할 만한 역량을 갖춘 사람이 있는지 찾
아보았다. 그러나 그가 맡았던 주임을 짊어질 마한 역량과 명성르 가지 사람은 없었다. 그러
므로 비탄과 점망감에 쌍니 채 바깥출입을 꺼리고 있던 페리클레스를 다시 모셔와서 정무와
군사를 통괄하도록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알키비아데스와 그 밖의 지기들이 찾아가 설득한
결과 페리클레스는 다시 대중앞에 섰다. 이에 국민들은 고마운 생각을 갖고 그를 괴롭혔던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였다. 다시 정무를 맡고 장군으로 선출된 그는 과거에 자기 자신이
제안했던 사생아에 관한 법률을 보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페리클레스 자신의 이름과 대를
이을 적법한 상속자가 없었으므로 집안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위기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그 법률이란 다음과 같았다. 페리클레스는 예전에 자신의 세력이 절정에 달하고 적출의
자식들이 있을 때, 부모가 모두 아테네 사람인 자만 아테네 시민이 될수 있다는 법안을 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후 이집트 왕이 밀4만 메디므니를 선물로 보내면서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한일이 생겼다. 그러자 그법이 생기기 전에는 문제도 되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시민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려달라는 많은 소송이 제기 되었다. 몇몇 사람들
은 근거 없는 모함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 5천에 가까운 사람이 사생아로 판결되어 노예
로 팔려 갔다. 한편 진정한 아테네 인으로서 시민권을 그대로 보유할수 있는 사람은 1만 4
천40명이었다는 조사 결과가 남았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법이 그것을 만든 장본인을 위해 무효화된다는 것은 실로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지금 당하고 있는 재난과 불행이 너무
나 크나든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가 지난
날의 교만과 자부심에 대해 충분히 벌을 받았다고 결론내렸다. 사람들은 그를 동정해 마땅
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의 요청은 그가 처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하여 서자를 호적에 넣어 성을 주도록 허락하였다. 나중에 이 아들느 아르기누사이 해
전에서 페로코네소스군을 물리친후 동료장군들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이 아들이 전쟁터에 나갔을 즈음 페리클레스는 질병에 걸린 듯하다. 그러나 심하고 급작
스러운 병이 아니었으니, 여러 가지 증세와 함께 기력이 서서히 소모되었다. 테오프라스투스
는 윤리에 관한 논문에서 사람의 성격이 환경에 의해 달라지는것인지, 덕성이 신체의 건강
에 좌우되는것인지를 논하였다. 이 대목에서 그느 페리클레스가 와병중에 있을 때 한 친구
가 문병가서 본 사실을 예로 들었다. 즉 페리클레스는 여인네들이 가져다준 부적을 목에 두
르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된 것으로 보아 그는 과연 병이 심하였다
고 테오프라스투스는 적고 있다.
페리클레스가 마지막 병석에 눕게 되자 아테네의 면사들과 그때까지 살아남은 지기들은
페리클레스의 곁에 모여서 그의 높은 지조와 큰 권세를 칭송하며 그의 대공과 전승기념비의
수를 헤아렸다. 페리클레스는 총사령관으로 적어도 9번의 전스을 거두면서 아테네의 명성을
드높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페리클레스 본인은 무슨
말을 하든지 알아듣기는커녕 들을 기력도 없는 지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느
의외로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있다가 별안간 자신의 전공은 모두 운이 좋아서 거둔것이며
그 정도의 일이라면 과거에 다른 장군들도 여러번 거둔 바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무엇 때
문에 자신이 이룬 공적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것은 언급도 하지 않은것인지 몹시 이
상하다고 하였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나로 인하여 상복을 입은 아테네 인은 한 사람도 없지 않소." 페리클레스는 성
질이 어질고 온유하여 가장 심한 정치적 위기에 처하였을 때나 사적인 증오를 받을때도 흔
들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페리클레스는 언제나 긍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모든
사람의 찬탄을 받기에 합당하였다.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서고 시가나 미움에 좌우된 일
은 한번도 없었으며 비록 지금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도 언젠가 화해할수도 있다는 가
능성을 버린적이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페리클레스의 어처구니 없는 별명에 어느 정도 타당성을 주는 것 같다. 페
리클레스처럼 온유하고 공정하며, 커다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패하지 않았던 인물
은 '올림피아 인'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의
개념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신은 모든 선한 일을 지어내고 인간에게 해로운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인간과 세상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다. 무지한 시인들은 몽상을 통해 거짓된 시를
읊어내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신이 있는 곳은 아늑하고 조용한 나라로, 그곳에는
위험도 혼란도 없고 바람이나 구름 때문에 고통받는 일도 없으며 항상 잔잔한 날씨에 광명
이 넘쳐흐르는 영원히 축복받은곳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곳에 사는 산을 묘사할때는 고
통과 미움, 분노, 시기 등에 사로잡혀있는 것처럼 말하는 데, 한낱 인간이라 할지라도 지각
을 갖추게 되면 사사로운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고찰은 여기서 할거시이 아
닌 듯싶으니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자.
페리클레스가 사망하자 아테네 인들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된다. 생전에는 페리크레스의
권세 때문에 자기들이 그늘에 숨어 빛을 내자 못한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다른 웅변가나 정치가들의 역량을 시험해본 다음에는 페리클레스만한 사람이 없다
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였다. 페리클레스는 높은 권좌에 앉아 있을 때 조차 겸손하고 사리
에 맞게 행동하였으며, 외면적으로는 온유한 듯 하면서도 매우 진지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하여 왕정이니 독재니 하고 비난하던 페리클레스의 절대권력이, 실
은 아테네로 굳건히 지켜주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곧 이어 심한 부정부패의 물
결이 홍수처럼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생시에 이런일을 근절하고 억제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그것이 자라나 불치의 화근인 되지 않도록 미연에 방치하였던 것이다.
파비우스
페리클레스의 업적 가운데 기억할만한것들을 더듬어 보았으니, 이제부터 화제를 바꾸어
파비우스의 삶에 대하여 적어보고자 한다. 먼저 파비우스 가문의 조상을 살펴보자. 그의 아
버지는 헤라클레스다. 그런데 어머니는 요정이었다고도 하고 어떤 이탈리아 여인이었다고도
한다. 그 여인은 티베르 강둑에서 파비우스르 낳았다고 한다. 파비우스는 후손이 많고 이름
높은 가문의 시조가 된다. 이 가문 사람들은 처음에 포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함정을 파서 야생동물을 사냥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라틴어로 '구덩이'를 '
포사', '판다'라는 의미의 동사를 '포데레'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두 단어가 변하여
파비우스가 된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오랜 세월동안 이가문에서
이름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된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사운데 막시무스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처음으로 얻은 사람은 파비우스 룰루스였다. 지
금 이야기하려는 파비우스 막시우스는 이 사람의 4대손이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별명은
베루코수스였는데, 윗입술에 사마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양이라는 뜻으로 오비쿨
라라고 불렀는데, 성질이 지나치게 온순하였던 까닭이다. 그는 말이 느렸으며 똑같은 것을
베우는 데도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다른 아이들과 섞여 놀때도 매우 조심스러
웠으며, 누구 말이건 고분고분 잘 따랐으므로 소신이 없어 보였다. 얼핏 보념 준하고 멍청하
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행동이 느린 것은 안정된 성격에서 온것이고, 그의 정신
속에 위대함이 숨어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없었다. 그러나 그가 정계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그의 미덕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기 기백이 부족하기로 유명했던 것은 이제
격정에 휩싸이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말과 행동이 굼뜬 것은 신중하고 빈틈
없는 것으로, 기민하지 못하고 게으른 것은 성실하고 확고부동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당시에는 로마의 판도가 강대했던 만큼 도처에 전쟁의 위험이 숨어있었다. 파비우스는 자
기 신체를 자연이 내린 무기로 생각하고 열심히 단련하였다. 또한 웅변연습도 열심히 하여
자신의 일상생활이나 타고난 성격에 걸맞은 연설을 할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의 연설에는
인기를 끌기 위해 일부러 집어넣는 수식어구가 없었으며 진중한 맛이 있었다. 또한 투키디
데스의 방식을 좇아 힘차고 의미심장한 격언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의 연설로 남아있는 것
이 있는데, 집정관을 지내던 중 그의 아들이 죽자 장례식에서 영결사를 한 것이다.
그은 집정관을 다섯 번 지냈는데, 첫 번째 임기중에 리구리아인을 정벌하고 개선식을 올
리는 영광을 누렸다. 리구리아인들은 혈전 끝에 패배하고 알프스 산중으로 도중하였으며 다
시는 이웃 나라를 약탈하지 않았다.
그후 하니발이 이탈리아를 침략하였다. 한니발은 트레비아 강가에서 벌인 전투에서 이탈
리아 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투스카니을 휘젓고 지나가 주변지역을 완전히 황
폐화시키니 로마 시내는 경악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게다가 여러 가지 무서운 흉조가 나타
났다. 가장 일반적인 흉도라 할수 있는 천둥벼락이 쳤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전대미문의 이
상한 이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람들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과녁에 화살을 쏘
아 맞추니 피가 나더라는 이야기고 있었고, 안티움에서는 옥수수를 거둬들이고 보니 열매마
다 피가 드렁차 있더라는 아야기, 또 하늘에서 벌건 불덩이가 우박처럼 내렸닥고도 했다. 팔
레이 족들이 사는 지방에서는 하늘이 갈라지더니 족자가 여러개 내려왔는데, 그중 하나에
'군신이 무기를 휘두르다'라고 선명하게 씌어 있더라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징조가 있어도 집정관 카이우스 프라미니스의 불같은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갈리아 군이 쳐들어왔을 때 원로원의 명령이나 동료들의 충고를 무시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둔후 타고난 조급함이 더 심해진 상태였다. 그와는 달리 파비우스는
당장에 전투를 벌이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파비우스가 여러 가
지 징조에 좌우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불길한 징조들로 겁을 먹고 있었지만 파비
우스는 왠지 석연찮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카르타고 군대는 규모가 매우 작고 군자금과
군량이 부족했지만 여러 번의 전쟁을 통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잘 훈련되거 있었다. 파비
우스는 한시바삐 전투를 벌이려고 하는 한니발과 맞붙을 것이 아니라, 동맹국들에 원구은
보내고 로마에 예속되어 있는 도시들의 결속을 다져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승승장구
하는 한니발의 군대로 하여금 펄펄 타오르다가 기름이 부족하여 꺼져버리는 등잔불처럼 저
절고 절멸하게 하는게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설득을 하여도 플라미니우스는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프라미니우스
는 적군이 로마를 향하여 진격해 오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겠으며, 과거에 카밀루스
가 그랬던 것처럼 로마 시내에서 전쟁을 치를스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플라미니우
스는 군사위원들에게 군대를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기도 말에 뛰어 올랐다. 그런데
그 말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몸을 떨고 날뛰는 등 심한 발작을 일으키더니 결국 플라미니우
스를 땅에 거꾸로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처음과 같은
기세로 한니발을 치러 나갔다. 한니발은 그때 투스카니에 있는 츠라시메네 호수근처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두군대가 만나 싸울 때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 여러도시가 파괴되고 강
의 흐름이 바뀌었다. 높은 절벽까지도 무너져 내렸으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군병들은
어떤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전투에서 프라미니우스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로마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
들이 그의 주위에서 쓰러져 갔다. 이 전쟁에서 무려 1만 5천명이 전사했고, 포로가 된 자의
수도 그에 못지 않았다. 한니발은 프라미니우스의 시체를 찾아 의례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
주려고 했으나, 아무리 찾아도 시체를 찾을수 없었다. 그는 나중에 까지 시체를 찾아냈다는
소식을 들을수 없었다.
트레비아 전투에 대해서는 보고서를 쓴 장군이나 그것을 가지고 온 전령은 양쪽이 비슷한
피해를 입은 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정확한 상황을 알수
없었다. 이 전투의 소식이 도착하자마자 폼포니우스는 시민들을 소집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연설하였다.
"로마 시민들이여, 우리는 대전에 패했고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전사하였습니다. 그러므
로 각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할지 생각해보시오." 그 결과로 인하여 넓은
바다위에 한 차례 강풍이 지나가고 나 것처럼 대단한 혼란이 찾아왔다. 로마 시민들은 매우
놀라 생각의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그래도 위험이 코앞에 닥치니 대정관을 선출하여 전권
을 위임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중책을 담당할 사람은 지혜와 용기가
절륜한 인물이어야 되겠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파비우스르 선택하였
다. 그의 고매한 인품은 중책을 떠맡기에 적당했으며 연륜도 충분히 쌓인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력적인 활동을 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도 아니었다. 또한 자신이 품은 뜻을
실천하기에 충분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감과 조심성이 그의 마음속에 조화롭게 자
리잡고 있었다.
파비우스는 대정관에 임명되자 우선 루키우스 미누키우스를 기병대장에 임명하였다. 그리
고 말을 타고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하였다. 고대 로마법은 장
군들이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이유는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보병대를 군의 주력부대로 편성하였기 때문에 장군들이 늘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며, 둘째는 장군들이 제 아무리 강력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국민들과
원로원이 장군들 위에 군림함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병사들이 자
신의 권위에 좀더 일사불란하게 복종해주기를 원했고 국민들 역시 자기 뜻을 잘 따라주기를
원했다. 그는 24명의 수행원을 전부 거느리고 있다가, 한 명 남은 집정관이 그의 집을 방문
하자 부하 하나를 내보내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도록 하였다. 우선 데리고 온 호위병을
모두 돌려보내고 집정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파세스를 버린 뒤 시민의 자격으로 자기 앞에
오라는 것이었다.
파비우스가 대정관 집무를 시작하며 우선 종교의례를 올린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지난
번에 로마군이 패한 것은 병사들의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장수 된자가 종교행사를
소홀히 한 결과라는 사실을 널리 경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병사들로 하여금
적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을 존경하며 그 가호를 바라게 하였다. 이것은 미신을 장려하기
위함이 아니라 종교의 힘을 빌려 병사들의 용기를 붇돋우고, 신은 우리편에 있다는 믿음으
로 적에 대한 모든 공포심을 없애고 희망을 주어 좋은 일은 신의 가호라고 생각하게 한 것
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비밀스런 예언서 시빌경을 꺼내서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그 책에는 당시의
사건들이나 운세에 관한 예언이 많이 담겨 있었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책을
살펴본 관리들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대정관은 대중 앞에 나타나서, 다음 계절에 이
탈리아 전역에서 나는 생산물을 모두 제물로 바치겠다고 선언하였다. 거기에는 산이나 들에
서 자라는 소, 염소, 돼지, 양, 송아지 등이 포함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음악제를 개최하기
로 하고 그 비용으로 정확히 333세스테르티아. 333데나리이 그리고 삼분의 일 데나리우스
가량을 사용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 액수를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8만3583드라크마 2오볼에
상당한다. 이렇듯 수치를 정확히 정한데 어떤 신비스런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3'
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들은 '3'을 완벽한 숫자로
여겨 매우 가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것은'3'이 곱셈에 의해 자기 자신이 불려나갈 수 있
는 첫 번째 홀수이면서 다른 수자들이 갖고 있는 모든 일반원리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다.
파비우스는 이러한 방법으로 국민들에게 신이 우리 편에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미
래에 희망을 걸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본인은 자기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였으니, 천신
은 오직 용맹스럽고 세심한 자를 통해 승리와 행운을 내리신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렇듯 준비가 갖추어지자 그는 한니발을 맞으러 나갔다. 그러나 그는 일전으로 승부를 결정
할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지연작전을 통해 적의 군사력을 소모시킴으로써 자신들이 군비와
숫자에 있어서 더 유리해졌을 때 적군을 쉽게 정벌할 계획이었다. 파비우스는 이 전략을 늘
견지하여 한니발의 기병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고지에 진지를 마련하곤 했다. 그렇다고 적군
과 아주 멀어지지는 않았으니, 적이 이동하면 싸움이 붙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따
라서 이동하였다. 그러면서도 항상 언덕위에 진을 쳐서 적의 기병들이 덤벼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적군은 이래저래 마음을 놓지 못한 채 끊임없이 경계태세를 갖추어야만 했다.
파비우스가 이와 같은 지연작전을 쓰자, 휘하의 장병들은 그의 용기가 부족한 것이 아닐
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한니발의 장병들도 대부분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한니발 한 사람만은 속지 않았다. 그는 파비우스의 전략과 전술을 눈치챘다. 그러므로 자기
편에서 기교와 완력을 동원하여 전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우세한 군장은 사용해
보지도 못한채 병력과 군량의 부족에 시달리다 끝내 괴멸되고 말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므
로 그는 모든 군략과 전술을 다 동원하여 파비우수와 전투를 벌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치
약삭 빠른 씨름꾼처럼 한니발은 파비우스 군의 덜미를 잡아 끌어낼 기회를 쉴 새 없이 엿보
았다. 한니발은 적진으로 공격해 들어가거나 적군의 주의를 흩트리려고 노력했으니 이는 모
두 파비우스의 신중한 결심을 흐려놓으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니발이 갖가지 전략을 써봐도 파비우스의 판단력이나 확신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일반군병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사람이 기병대장 미누키우스였다. 미누키
우스는 앞 뒤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성격으로, 대담하고 자신감에 넘쳤으며 군인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병사들을 선동하여 과격한 흥분감과 헛된 소망을 품게 하였다. 병
사들은 결국 파비우스를 조롱하며, 한니발의 머슴이라고까지 하였다. 파비우스가 한니발이
이동하기를 기다려 늘 따라다니기만 한 까닭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미누키우스야말로 로마
군을 호령할 만한 장군이라고 하였다. 허영심에 들뜬 미누키우스는 더욱 무례해져서 파비우
스가 산꼭대기만 골라 주둔하는 것을 가리켜, 대정관님께서는 적이 이탈리아를 불사르고 약
탈하는 광경을 잘 구경하려고 좋은 자리만 골라 앉으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때때로 동료
장군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파비우스가 산에서 산으로 군대를 이끌고 다니는 까닭은 땅 위
의 일들에 모든 희망을 버리고 결국 병사들을 하늘 위로 데리고 올라가려는 것인지, 아니면
한니발의 눈에 띄지 않게 군대를 구름 속에 감춰 버리려는 것인지 알아맞춰 보라고 한 것이
다.
친구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대정관에게 보고하며 이러한 치욕을 씻기 위해서는 적군과 일
전을 치러야 할 것이라고 설득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람들의 중상과 조소가 두려워 이미 결심한 전략을 버린다면 나는 더 나약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오. 나라의 안전 때문에 몸을 사리는 것은 수치가 아니지만, 사람들의 그릇
된 비난에 자기 뜻을 굽힌다면 중책을 맡을 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업소. 본시 내 소임은
백성들이 그릇된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인데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 처신하다가는 결국
백성들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오."
한니발은 그 후 실책을 범하게 된다. 그는 목초지로 가서 말들을 충분히 먹이고 병사들에
게도 잠시 쉴 틈을 주려고 길 안내자에게 카시눔으로 가자고 일렀다. 그런데 한니발의 발음
이 나빴던지라, 안내자들은 캄파니아 접경지대의 카실리눔 마을로 군대를 이끌고 갔다. 로마
인들이 불투르누스 강이라고 부르는 로트로누스 강이 이 마을을 가로질러 흘러가고 있었다.
이 지역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하나 있는 골짜기도 바다를 향하여 트여 있었다.
하구에서는 강이 범람하여 늪지대와 깊은 모래둑이 형성되어 있으며 해안선은 거칠어 배를
댈수도 없다. 한니발의 군대가 이리로 이동해 가는 것을 보았을 때, 지형을 잘 알고 있던 파
비우스는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병사 4천 명을
선발하여 퇴로를 차단하게 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그 근처에 있는 몇몇 언덕에 적절히 배치
했다. 그러면서 가볍게 무장한 부대를 보내서 한니발 군의 후미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들
은 적 800명을 살해하고 전군을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임무를 완수하였다. 한니발은 자신의
실책으로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안내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러나 적들
이 이미 매우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므로 뚫고 나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반면에
병사들은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생각에 겁을 먹고 기가 꺾여 모든 것을 단념해버렸
다.
이렇듯 궁지에 몰려 있던 한니발은 묘안을 짜냈다. 그의 진중에는 소가 2천 마리 가량 있
었다. 한니발은 그 소들의 뿔 끝에 마른 나뭇가지를 단단히 묶어두었다가. 밤이 되자 거기에
불을 붙여서 로마 군이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하여, 몰고 가도록 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어
둠속에서 천천히 그 뒤를 따르도록 했다. 소들은 처음에는 천천히 질서정연하게 앞으로 나
아갔는데 머리 위에 불을 이고 가는지라 마치 일개 부대가 어둠을 틈타 이동하는 것 같았
다. 그리고 근처 언덕에 사는 목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뭇가지에 붙여둔 불길이 삽시간에
뿔까지 타고 내려오자 소들은 그 고통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날뛰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이마에 달린 뿔은 주위의 나무에 옮겨 붙었다.
고지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로마병은 이 광경을 보고 겁에 질렸다. 그는 대군이 횃불을
들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줄로 알고 이미 적에게 포위되었다고 생각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
다. 그러므로 자리를 버리고 적의 퇴로를 열어둔 채 언덕 위의 본대를 향해 달려갔다. 이때
를 틈타서 한니발의 특공대가 고지를 점령하자 주력부대는 약탈한 물건까지 그대로 가지고
무사히 탈출하였다.
파비우스는 날이 새기 전에 이미 적의 계략을 간파하였다. 소들이 더러 로마군의 수중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둠 속에 매복해 있을 복병대를 염려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진지를 지키도록 했다. 날이 밝자마자 파비우스는 적의 후미를 공격하고 산지에서
여러 번 작은 전투를 일으켜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 하지만 한니발은 산악전투 경험이 많은
스페인 부대를 뒤에 남겨두었다. 이들은 동작이 날쌔고 재빨랐으므로 중무장을 하고 있던
로마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주었다. 결국 파비우스의 부대는 추격을 포기하였다. 이 일이 있
은 다음 파비우스에 대한 비방과 경멸은 극에 달했다. 사람들은 이제 모든 일이 명백해졌다
고 외쳤다. 즉 파비우스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해온 대로 용기에 있어서 한니발만 못했으며
큰소리만 쳤지 지도력이나 예지력, 전술에 있어서 모두 한니발에게 뒤졌다고 떠들었다.
한니발은 로마 시민들이 군정관에 대해 갖고 있던 불평을 더부추길 심산으로 파비우스 소
유의 토지 부근으로 군대를 이끌고 갔다. 그리고 근처의 모든 것들에 불을 지르고 파괴를
일삼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파비우스의 사유재산에는 일체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감시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한니발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호민관들은 파비우스에게 온갖 종류의 비난을 퍼부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메틸리우스의 선동은 효과가 있었다. 이 사람은 파비우스에 대한 증오심에서 대중을 선동한
것이 아니라 기병대장 미누키우스에 대한 우정에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그는 미누키우
스의 친적으로 파비우스를 깎아내림으로써 미누키우스가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원로원측에서도 파비우스를 불쾌하게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는 파비우스와 한니발이 체결
한 포로교환협정 때문이었다. 협정에 의하면 양측은 포로를 일 대 일로 교환하다가 어느 한
쪽의 포로가 남으면 한 사람 당 250드라크마씩 받고 돌려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교
환을 하다 보니 로마 인 포로가 240명 더 많았다. 원로원은 그 돈의 지출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비겁해서 포로가 된 자들을 도로 사오기로 한 파비우스의 행위는 공화정의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이라고 비난 하였다. 파비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도 흔들맂 않았으며 모든 것을
인내로써 참았다. 당장 그의 수중에 돈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니발과의 협정을 위배하거
나 포로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아들을 로마로 보내어 토지
를 팔고 그 돈을 가지고 돌아오도록 하였다. 아들은 충분한 돈을 가지고 제때에 돌아왔다.
파비우는 한니발에게 그 돈을 보내고 포로들을 찾아왔다. 나중에 이들은 대부분 자기 몫의
돈을 갚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파비우스는 한 푼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무렵 사제들은 대정관의 직책에 정해진 제사를 오리라며 파비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였
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군 지휘권을 미누키우스에게 위임하며, 자기가 없는 동안에는 절대로
한니발과 전투를 벌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미누키우스는 그러한 명령과 간곡한 충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
는 파비우스의 뒷모습이 사라지기도 전에 공격계획을 세웠다. 마침 한니발의 군사들이 대부
분 약탈하러 나가는 것을 보고, 남은 군대를 공격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진지로 도망쳐
들어간 적들은 로마군이 대거 내습해 오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이 대단했다. 미누키우스는
한니발이 흩어진 병사들을 진지로 불러모으자 철수했다. 아군이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그
정동의 전공을 올리자 미누키우스는 예전보다 더 거드름을 피우며 뻐기게 되었다. 병사들도
별 생각 없이 의기충천하였다.
이 소식은 로마까지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들은 파비우스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바
로 미누키우스의 성공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반대중은 기쁨에 들떠 포룸으로 달려나왔다.
이때 호민관인 메틸리우스가 연단에 올라서서 미누키우스의 용맹함에 대해 끝없이 찬사를
늘어놓고, 파비우스는 비겁할 뿐만 아니라 반역자라고 까지 매도하였다. 그러자 명망 있는
다른 지도자들까지 파비우스를 공격하였다. 바로 이 사람들이 카르타고 인을 이탈리아로 끌
어들였는데 이는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그러
한 의도에서 한 사람의 수중에 절대권력을 위탁한 후 지연작전을 쓰게 하고 있으니, 한니발
은 여유 있게 이탈리아에 뿌리를 내렸으며 아프리카로부터 충분한 원조를 받아 이탈리아를
완전히 정복할수 있게 되었다고 비난하였다.
파비우스는 앞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 호민관의 공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다만
가능한 한 속히 제사를 마친 다음 전선으로 급히 돌아가서 명령을 어긴 미누키우스를 처벌
하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미누키우스는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게 되
었다. 왜냐하면 대정관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감금하거난 사형에 처할 권한이 있었기 때문
이다. 파비우스는 원래 성격이 온유해서 좀처럼 화를 내는 일이 없었지만, 일단 화가 나면
쉽사리 누그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걱정스러워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큰 소리로 반대의 뜻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틸리우스만
은 호민관으로서의 특권이 있었으므로 얼마든지 자기 의사를 표시할 수 있었다. (대정관이
군림 하던 시절에도 호민관의 권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대담하게도 미누키우
스를 위한 연설을 하였다. 그는 미누키우스를 이대로 저버림으로써 적의로 가득 찬 파비우
스에게 제물로 던져주어서는 안 될뿐더러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처럼 용감히 싸워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아들을 단지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목을 베어버려서는 안 될것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또한 파비우스를 대정관이라는 최고의 권좌로부터 몰아내고, 공공의 안녕
을 중시하고 충분한 역량을 갖춘 사람 손에 대정관의 권력을 맡겨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이 연설은 대단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파비우스를 대정관직에서 물러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군사상의 문제에 있어서는 미누키우스도 대정관과 동등한 권한을 가지
게 된다는 정령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로마군이 칸나
이에서 패배하고 나자 이런일이 또 발생했다. 대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전지에 나가 있을 때, 로마시민들은 파비우스부테오를 또 한 사람의 대정관으로 임명하여
전사자들로 인해 공석이 생긴 원로원을 다시 채우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에 빈
자리를 다 채우는 대로 호위병이나 수행원들을 다 물리쳐버리고, 한낱 평민처럼 국민대중
속에 섞인 채 포룸에서 자기 일을 보았다.
파비우스의 정적들은 미누키우스를 격상시켜 파비우스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파
비우스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성격을 잘
못 판단한 것이었다. 그는 이 일로 대중의 무지가 드러났을 뿐 자기 자신의 명예가 훼손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철학자 디오게네스에게"선생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습
니다."라고 말했을 때 디오게네스는"그러나 나는 조롱을 받지 않았다네"라고 대답하였듯이,
조롱을 받고 나서 마음에 동요를 느끼는 사람만이 진실로 조롱을 받게 된느 것이다. 마찬가
지로 파비우스는 마음을 잘 다스려서 모든 모욕을 말없이 인내하고 그로부터 초연해지니,
정당하고 선한 사람에게 수치란 없다는 철학적인 금언이 사실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한 셈이
다. 그가 오로지 마음을 쓰고 있던 것은 이번의 조처로 병적인 야심가 미누키우스가 국익을
손상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파비우스는 성급한 미누키우스가 무모하게도 파멸로 돌진해 들어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
웠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도 모르게 로마를 떠나 전지로 달려갔다. 그 곳에 도착해보니 미누
키우스는 새로 얻은 권위로 인해 벌써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교만해져 있었다. 그는 공동지
휘구너에 만족하지 않고 파비우스에게 하루건너 하루씩 군의 지휘권을 교대하자고 요구해왔
다. 파비우스는 이것을 거절하는 대신 군대를 둘로 나누기로 했다. 군의 지휘권을 나누는 것
보다 군을 나누어 지휘하는 것이 더 좋다고 본 것이다. 그는 제1군단, 제4군단을 맡고 제2군
단, 제3군단은 미누키우스에게 넘겨주었다. 보저병력 역시 똑같이 나누었다.
미누키우스는 나라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대정관이 자기로 인해 위신이 깍인 것을 통쾌
히 여기고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 파비우스는 그에게 조용히 충고하였다. 물리여야 할 적은
내가 아니라 한니발임을 잊지 마라. 동료와 다툴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로마의 안전
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자가 국민에게 학대받고 모욕당한 자보다
도 나라의 안위를 소홀히 하였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젊은 장군 미누키우스는 이러한 충고를 단지 늙은이의 하잘 것 없는 소리로 무시
하였다. 그는 곧장 자기가 맡은 군대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서 진을 쳤다. 한니발은 이와
같은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므로 로마 군의 모든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파비우
스 군대와 미누키우스 군대 사이에는 언덕이 하나 있었다. 그 언덕은 전략상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을뿐더러 그 곳에 진을 치기도 어렵지 않을 듯해 보였다. 그리고 이 언덕을 둘러
싼 벌판은 멀리서 보면 아주 평탄한 것 같았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도량과 홈이 곳곳에 산
재해 있었다. 한니발은 마음만 먹으면 이 지역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는 이 곳을 미끼로 해서 로마 군을 끌어들일 생각으로 여태껏 방치해두었다. 그런데 이제
파비우스와 미누키우스가 서로 갈라선 것이다. 한니발은 과연 기다리던 때가 왔다고 생각
했다. 그는 밤시간을 이용해 위에서 말한 도랑이나 홈에 적당한 수의 복병을 배치하고 새벽
을 기다려 소수의 군사들을 내보냈다. 이들은 일부러 미누키우스의 눈에 띄게 한 후 언덕
으로 올라가도록 했다.
한니발의 작전은 그대로 들어맞아서 미누키우스는 미끼를 삼켜버렸다. 미누키우스는 처음
에 특공대만 내보내더니, 이어서 기병대도 내보냈다. 그리고 한니발이 직접나서서 병사들을
지원하는 것을 보고서는 마침내 전군을 이끌고 나왔다. 언덕위로부터화살이 빗발치듯 쏟아
져 내렸지만 미누키우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잘 싸웠다. 한동안 양쪽은 백중세를 보이는 듯
했다. 로마군이 충분히 진군해 왔다고 생각되 순간 한니발은 복병대에게 공격신호를 보내
서 로마군의 후미를 치도록 했다. 이 신호와 함께 복병들은 벌떼처럼 뛰쳐나와 고함을 지
르며 로마군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로마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로
마군전체는 공포에 빠져 우왕좌왕하였다. 미누키우스마저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이리저리 자
기편 장군들을 둘러보았으나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지라 너나 없이 도망치기
에 급급했다. 그렇다고 목숨을 건질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미 기세가 등등해진 누미디
아 인 기바대가 벌판을 달리며, 도망치는 로마군을 마구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파비우스는 자기 나라병사들인 위험에 처한 것을 이미 일고 있었다. 그는 미누티우스의
경솔함과 한니발의 간교함을 간파하고 있었으므로 항시 군대의 무장을 풀지 않고 만일의 사
태에 대비했다. 더욱이 그는 다른 사람들의 보고를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그자신이 막사
밖에 나와서 무슨일들이 벌어지나 살폈다. 미누키우스의 군대가 적에게 포위된후 병사들의
표정이나 움직임으로 보아 반격을 하기보다 도망칠 생각들인 것을 깨닫고 파비우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허벅다리를 내리쳤다. 그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 저런! 미누키우스가 제 무덤을 팔줄은 알았디만 저렇게 빨리 당할줄이야! 하기야 저
런 작전을 쓴 것치고는 오래 버틴셈이지만!"
파비우스는 선두에 서서 적군을 향해 나아갔다. 우선 벌판을 잘려가 누미디아 병사들을
모두 해치웠다. 그리고는 로마군의 후미를 공격하고 있던 자들에게 덤벼들어 반격하는 자들
의 목을 모조리 베었다. 그러자 나머지는 저희들이 방금 긍지에 몰아 넣었던 로마군 신섹
될듯하자 황급히 도망쳤다. 한니발은 전세가 눈깜빡할 새에 역전된것과 파비우스 자신이 미
누키우스를 구출하기 위해 나이를 의심할 정도로 분전하며 언덕위의 군사들을 격파하는것ㅇ
르 보고, 현명하게도 군대를 거두어 진지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로마군도 한숨돌리게 되었
다. 한니발을 군을 거둬들이며 친구들에게 온담삼아 이런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소. 그렇게 오랫동안 산꼭대기에 걸려있던 구름이 언젠가는 태풍
을 몰고 내려올 거라고 말이오."
병사들이 들판에 흩어져 있던 전리품을 챙기자 파비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자기 진지로 돌
아왔다. 그는 미누키우스에게 심한 소리나 비난의 말을 단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누키우스
는 자기 군대를 한데 모으더니 이와 같이 연설하였다.
"훌륭한 일만을 행하면 전혀 실수하지 않는 것은 보통사람이 할수 있는 일이 아니오. 그러
나 실수를 교훈삼아 더 다은 방향을 모색하다 보면 선하고 현명한 사람이 될것이오. 나 자
신으로 말하자면 운이 나빴다로 탓할수도 있겠지만 본인은 오히려 운명의 여신에게 감사할
따름이오. 운명의 여신은 불과 서너시간만에 나의 고질적인 실수를 깨우쳐 주셨소. 즉 본관
은 남을 지휘할 만한 재목이 못되고, 도리어 다른 사람의 지휘를 받은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된것이오. 우리는 그분과 승리를 다투어서는 안되며 당연히 그분에게 가서 머리를 조아려야
할것이오 앛으로는 모든 일에 있어서 대정관의 명령을 따르도록 하시오. 그러나 한 가지에
있어서만은 내 명령을 들어야 할 터이니 그것은 그분 앞에 가서 감사를 드리는 일이오. 본
인은 또한 항시 솔선하여 그분의 명령에 복종할것이오." 그는 연설을 끝낸후 명령을 내려
로마를 상징하는 독수리군기들을 높이 치켜들고 전군은 자기를 따라 파비우스의 진영으로
향하라고 하였다. 그 곳 병사들은 밑누키우스가 도착하자 눈이 휘둥그래져서 쳐다볼 따름이
엇으며 미누키우스가 또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하고 걱정하는 눈치들이었다. 미누키
우스가 대정관의 막사 가까이로 왔을 때 파비우스가 나올서그를 맞았다. 그러자 미누키우
스는 자시의 군기를 발치에 내려놓고 큰소리로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의 장병들도 파비우스
의 병사들을 보호자라고 불렀다. 이것은 해방노예들이 자기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준 사람들
을 부르는 말이었다. 주위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려 미누키우스는 말했다.
'대정관님께서는 오늘 두개의 승리를 거두셨숩니다. 무용과 지도력으로 한니발ㅇ르 정복
하
셨고 지혜와 선량함으로 동료를 정복하셨습니다. 전자로서는 우리 생명을 구해주시고 후자
로서는 우리 본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한니발에게 패한 것은 수치이오나 장군에게
패한 것은 은총이며 영광입니다. 더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장군을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저를 낳아주신 아버지의 은혜도 장군읠 크신 은혜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분으로부터 받능
것은 저 한사람으리 목숨이지만 장군으로부터 받은 것은 제목숨은 물론 저희들 모든 병사들
의 목숨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파비우스의 품에 가서 안겼다. 양쪽 장병들 역시 서로서로 얼싸안으며 기
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얼마후 파비우스는 대정관직을 내놓았고 새 집정관들이 선출되었다. 파비우스의 전법을
답습하여 어떤 경우에라도 한니발과 정면승부를 벌이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동맹국들ㅇ르
지원하고 주변도시가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었다.
그러나 출시니이 미천하지만 성격이 대담하고 일반대중들 사이에 인기가 대단하던 테렌티
우스가 바로가 집정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성급함과 무지함으로 국가 전체를 위험한 지
경에 몰아넣을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대중앞에 나서서 연설할때면 언제난 되풀이
하여 주장하기를, 파비우스 같은 인물이 장군으로 있는 한 로마에는 전쟁이 그칠날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럼면서 자기는 전쟁터에 나가면 그 날로 이탈이라 전역에서 적군을 몰
아내 버리겠가도 허풍을 떨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호언장담에 넘어갔는지, 그는 로마에
서 일찍이 구경도 하니 못했을 정도의 대군을 모았다. 그 병력은 실로 8만 8천에 달하였다.
군중들이 자신감에 가득 찰수록, 현명하고 연류있는 사람들은 불안을 느낄 뿐이었다. 파비우
스의 불안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일 꽃다운 나이의 로마 청년들을 이렇게 많이 잃는
다면 로마는 영영 다시 일어설수 없을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걱정 끝에 또 한사람의 집정관인 아이밀리우스 팡룰루스를 찾아갔다. 전쟁경험이
많았으나 인기가 없었으며 국민대중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국민들로부터 벌금형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이 뭐라고 부추기기전에는 동료집정관의 무모함을 제지
하지 못할입장이었다. 파비우스는 아이밀리우스에게 국가의 안전으리 도모하려면 테엔티우
스 바로와 한니발이 획책하고 있는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바로는 무지한 탓에
한시바삐 싸우려 들것이며 한니발은 자기편의 약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고 싸울
준비를 갖추고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파비우스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니발에 관한 한 바로의 말보다 내 말을 더 믿어야 하오. 지금이라도 말이오. 우리가 1
년 동안만 전투에 응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그의 군대는 이땅에서 저절로 궤멸하거나 자기
나라로 철수해 갈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의 군대가 승리를 거듭하면 이탈리아 전역을 휩쓰
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 그에게 투항한 나라는 하나도 없으며, 본국에서 데려온 군대는 이
제 삼분지 일도 남아있지 않소."
파울루스는 이말을 듣고 아래와 같이 대답하였다고 전해진다.
" 내 한몸만 생각하자면 또다시 동포들의 심판대에 오르느니 차라리 적의 창에 찔려 죽는
것인 더 낫소. 국민들 중 어느 두가 당신 생각에 동조해주겠소. 그러나 우리 로마가 위태로
운 지경에 놓여있으니 누가 뭐라하건 파비우스 당신말에 따르겠소." 그러나 바로는 파울루
스를 끈덕지게 설들하여 그의 결심을 꺾어벼렸다. 그리고 두 집정관이 하루건너 하루씩 군
을 지휘하기로 결정하고 매우 흡족해 했다. 바로는 자기 차례인 날, 아우피두스 강가에 있
는 칸나이라는 촌락에 진을 쳤다. 한니발의 군대도 바로 그부근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날이
새자마자 그는 자기막사위로 진홍빛 웃옷을 내걸었다. 그것은 전투시호였다. 카르타고 군은
집정관의 대담함과 자기들의 갑절이나 되는 대군에 기가 질렸다. 그러나 한니발을 무자을
갖추라는 군령을 내린다음 몇사람의 막료를 데리고 말을 타고 높은 지대로 올라가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있던 적을 내려다 보았다. 로마군은 대열을 정돈하고 있었다. 한니발과 동등
한 지위에 있던 기스코라는 장군이 적의 수효가 놀랄만하다고 말하였을 때, 한니발은 정색
을 하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기스코, 그보다 더 놀랄 만한 일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눈치채지 못했구려." 기스코 그것
이 뭐냐고 묻자 한니발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것은 당신이 바라보는 저 많은 사람들중에 기스코라는 이름을 가지 사람은 한명도 없
다는 것이오."
한니발이 이렇듯 뜻하지 않게 농담을 던지자 일행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드은 또한
언덕에서 내려오면서 만나는 사라들에게 이이야기를 전했다. 따라서 모두들 참지못하고 웃
음을 터뜨렸다. 병사들은 한니발과 막료들이 이렇듯 기분좋게 돌아오는 것을 보고 적군이
실로 보잘것없기 때문일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전투에 임할때면 한니발은 보통 몇 개의 묘책을 썼다. 이번에는 첫째로 병사들을 잘 배치
하여 바람을 등지게 하였다. 때마침 태풍과 같은 강한 바람이 일어서 들판의 모래를 쓸어오
리더니 먼지구름이 되어 강한 바람이 일어서 들판의 모래를 쓸어올리더니 먼지구름이 되어
로마군을 향해 정면으로 몰려갔다. 전투에 나선 로마 병사들의 고충은 대단하였다. 두 번째
로 한니발을 가장 강한 부대를 좌우의 끝에 두었다. 그리고 가장 훈련이 덜되고 약한 부대
를 중앙에 둔 훈 전진 배치했다. 로마군이 전진배치된 중앙부대를 치고 들어오면 중앙부대
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뒤로 밀릴것이며, 로마군이 그들을 추격하여 충분히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면 좌우의 부대가 로마군의 측면에 공격을 가하여 포위할 생각이었다.
로마군은 이때 실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것같다. 그들은 한니발의 중아부대로 몰려갔
는데 이 중앙부대가 물러서자 한니발의 군대는 완전히 반달모양이 되었다. 따라서 좌우의
선발부대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왔다. 그들은 로마군을 측면으로 공격해서 닥치는 대로
목을 베었다. 카르타고 군이 로마군대를 완전히 에워싸기 전에 도망쳐나온 자만 간신히 목
숨을 건졌다. 이렇듯 대대저긴 재난을 당한 것은 로마 기병대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도 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다. 집정관 파울루스의 말이 상처를 입자 그는 말에서 내렸다.
이것은 본 로마 기병들은 전체 병사들에게 말에서 내려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받
아들였다. 이것을 본 한니발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 있다.
"적의 손발을 모조리 묶어서 내게 넘겨준들 이보다 더 반가우랴." 이 전투의 세부사항을
알고자 하는 독자들은 전쟁에 관해서 상세히 기술하는 역사가의 기록을 참고하기 바란다.
집정관 바로는 몇몇 부하를 데리고 메누시아로 도주하였다. 파울루스는 로마군의 도주를
막다가 그런것인지. 적군의 추격을 막다가 그런것인지 온몸에 상처를 입고 비탄에 젖은채
바위에 걸터 앉았다. 그는 어서 적군이 자기를 죽여주었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
굴은 엉망이었으며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으므로 친구들이나 우군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
하고 그냥 지나쳤다. 다마 귀족 출신의 젋은 전사 코르텔리누스 렌툴루스만이 그를 알아보
고, 말에서 내려 그를 태우려고 했다. 그청년은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한 이때 훌륭한 장
수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완강히
거절했다. 파울루스는 눈물을 흘리면 어서 말을 타고 떠나라고 애원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더
니 청년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렌툴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만나거든 이렇게 전해주오. 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지시를 따랐고 서로간에 협약한 바를 조금도 어기지 않았소. 그러나
나의 운명은 너무도 가혹하여 우선 바로에게 제압당하고 그 다음에는 한니발에게 제압당했
소. "
렌툴루스에게 이렇게 당부해서 보낸 다음 사방을 둘러보더니 살상이 가장 심하게 행해지
는곳을 찾아서 적병의 칼에 몸을 내던졌다. 보고된 바로는 이 전투에서 로마군 사망자는 5
만명,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힌 자는 4천명,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 두 집정관의 진지에서 잡
힌자가 근 1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한니발의 막료들은 이번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아예 로마시내까지 적군을 추격해 들어가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하면 닷새 안에 유피테르 신전에서 축배를 들 자신이 있다고
하였다. 한니발이 무슨 이유로 그와 같이 하지 않았는지 알수 없다. 초자연적이거나 신령한
힘이 그를 가로막고 지연시킨 것 같다. 이에 카르타고 사람 바르카스는 한니발 장군에게 화
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승리하는 법은 알지만, 그것을 이용할줄은 모르시군요." 그러나 이전투가 있은 다음 정세
는 일변하였다. 한니발은 그때까지는 이탈리아에서 단 하나의 도시, 저잣거리, 항구도 손에
넣지 못하고, 마치 커다란 도둑의 무리처럼 군대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을 뿐 아
무런 거점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탈리아에서도 부강한 여러 도시들을 거느리게 되었으
며 로마 다음가는 도시 카푸아도 그에게 지배권을 순순히 넘겨주었다.
"역경을 당하여 친구를 알수 있다."
이러한 에우리피데스의 말은 장수에게도 해당된다. 이 전투가 있기 전까지는 파비우스를
천하에 겁쟁이라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를 초인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떠받들
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사실을 예언하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모두 사
실과 맞아떨어진 것은 그에게 신령한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식이었다. 사람들은 오로지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그의 지혜는 만인이 의지할수 있는신성한 제단이요 신전이라고
생각했다. 옛날에 갈리아 인과 전쟁할때와 같은 위험에서 로마를 구할수 있는 것은 파비우
스의 지략일뿐이라고 한다. 모두들 사정이 좋을때는 그를 너무 조심성이 많고 겁이 많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누구나 다 한없는 절망과 혼란에 빠져 있는 지금은 오직 파비우스만이 확
신을 잃지 않은 온화한 표정으로 거리를 다니며 동포들을 위해 연설하고 비탄에 빠진 여자
들을 달래주었으며 한자리에 모여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군중들을 위로 해주었다. 그는 원
로원의 소집을 권유하며 국정을 맡아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북돋워줌으로써 모든
이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그는 로마 시 각 대문에 파수병을 세워 겁에 질린 사람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걸 막았다.
또한 상복을 입는 기간과 장소도 축소하여 누구나 자기 집안에서만 한달 동안 상복을 입은
다음 자취도 없이 치워버리게 하였다. 케레스 명절이 마침 그 기간중에 끼여 있었는데 이번
만은 모든 행사를 다 중지시켰다.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이 슬픈 표정으로 행사에 참가할
것인데 그럴 경우 로마시가 받은 타격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신들은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숭배의 뜻을 아뢸 때 가장 반기기 때문이다. 그런 신들의 노여움
을 풀고 무서운 재난을 피하기 위한 행사라면 점술가들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파비우스의
가까운 친척 파비우스 픽토르를 델포이로 보내어 신탁을 받아오게 하고 성화를 섬기는 베스
탈들 중에서 순결을 잃은 여자 두사람을 찾아내어 한사람은 관례에 따라 생매장하고, 한사
람은 자살하게 했다.
로마시민들의 고양된 정신과 침착성을 잘 보여주는 일이 있었는데 이는 가히 칭찬할 만하
다. 패전한 집정관 바로가 수치심에 몸둘 바를 몰라하며 돌아왔다. 어리석은 행동으로 큰 재
난을 초래하고 도망쳐 온 사람이었느나 원로원과 시민들은 성문까지 나가 영접하고 환대하
였다. 파비우스와 그 밖의 고위 공직자들은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한 다음 많은 사람들 앞에
서 그를 칭찬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큰 재난을 당하고서도 나라의 안위를 저버리지 않
고 정사를 떠맡으러 돌아왔으니 이제 법률이 집행하고 동포를 도와 나라를 구하는데 온 힘
을 다할것이기 때문이다.
칸나이 전투가 있은 다음 한니발은 로마로 쳐들어오지 않고 이탈리아의 타지방으로 향했
다는 소식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용기를 회복하고 다시 군대를 내보낼 준비를 해나갔다. 가
장 뛰어난 장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였다. 둘다 명장이었으나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다. 마르켈루스는 그의 전기에서 논한대로 활동적이고 과
감하였으며 정면충돌을 즐겨서 마치 호메로스의 작품중에 나오는 장수와도 같았다. 그는 한
니발에 버금가는 대담함과 용맹성을 갖춘 사람이라 눈에 띄는 전략을 고수하여 적군을 바싹
추격하되 결코 정면대결은 벌이지 말아야 할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한니발과 그병사
들은 지치고 기력이 쇠해질것이니 이는 마치 지나치게 기운센 씨름 선수가 쉽게 기운이 빠
지고 마는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포시도니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마르켈루스를 '로마의칼', 파비우스를 '
로
마의 방패'라고 불렀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용맹성과 후자의 침착함이 잘 조화되어
로
마를 구해냈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여러번의 경험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마르켈루스 군대는 급류와 같은 기운으로 몰아닥쳐서 한니발의 군대에 여러 차례 타격을 가
하였으며,, 파비우스는 고요히 흐흐는 물결처럼 은연중에 스며들어 기운을 빼놓았다. 한니발
군은 마침내 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으니 마르켈루스와 싸우기에 지치고 싸우지 않는 파비
우스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전쟁동안 한니발은 언제나 이두사람과 혹은 둘중 한사람과 대적하였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대정관 집정관 집정돤대리로서 늘 군대를 지휘했기 때문이다. 두사람 다 다섯 번씩
집정관을 지녔다. 그러나 결국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이 쳐놓은 덫에 걸려 전사했다. 그가 제5
차로 집정관에 재직중일때의 일이다.
하지만 모든 계략과 전술을 다 써도 파비우스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다만 한번
파비우스를 위험에 빠뜨릴 뻔한 일이 있었다. 그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한니발은 메타폰툼시
의 요인들이 쓴것처럼 서신을 위조하여 파비우스에게 보냈다. 내용은 군대를 이끌고 그리고
오면 항복할것이니 어서 오기만을 고대한다는것이었다. 이계락은 거의 성공하는 듯해 보였
다. 파비우스는 군대의 일부를 이끌고 그리고 진군해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도중에서 새
를 가지고 점을 쳐본 결과 좋지 못한 징표가 나왔다. 파비우스는 지체하지 않고 되돌아왔다.
얼마뒤에 알고보니 한니발은 그 서신을 위조해서 보낸후 메타폰툼시 근처에서 매복한 채 파
비우스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위험을 모면한 것은 파비우스가 신중해서
라기 보다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파비우스는 로마에 예속되어 있거나 동맹을 맺고 있는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정당한 대우를 해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반란을 일으켰을 경우에도 엄하게 처단하는일이 없
었으며 사소한 혐의사항까지 샅샅이 조사하지도 않았다. 마르시아 출신으로 집안이 좋고 전
공도 많이 세운 자가 몇몇 병사들과 반란을 꾀하였다는 사실이 파비우스 귀에 들어갔을때의
일이다. 파비우스는 노하기는커녕 그 자를 불러다가 전공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으니 반
란을 이르티는것도 당연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에게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보사
을 해준 장군의 잘못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불만사항이 있으면 반드시 나에게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파비우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에게 훌륭한 말 한필과 다른상을 많이 주었다. 그 자는 그
때 이후로 누구보다 충성을 다하여 파비우스를 섬겼다.
파비우스의 판단은 옳은것이었다. 말이나 개를 훈련시미는 사람은 채찍이나 몽둥이를 사
용하기 보다 자상하게 보살펴줌으로써 동물의 사나운 성질을 길들인다. 마찬가지로 야생식
물을 기르는 정원사들은 세심하게 정성을 들여서 타고난 야생성을 차차 줄이고 훌륭한 열매
를 얻어낸다. 하물며 사람을 다스리는 장군이 온유하고 정당한 방법을 쓰지 않고 부하들을
동물이나 식물보다 더 혹독하게 대하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또 한번은 루카니아 출생의 한 군병이 수시로 자리를 비우며 밤이면 몰래 외출한다는 복
고를 받았다. 그는 이 군병이 대체 어떤사람인지 알아보았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보다 더
용감한 전사는 없다고 하며 그의 무훈담을 늘어놓았다. 결국 내막을 알고 보니 그 병사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병사는 그녀를 찾기위해 늘 위험을 무릎쓰고 부대에서 빠져나간
것이었다. 파비우스는 그 군병 몰래 수소문해서 그 여자를 찾아내고 사람을 시켜 은밀히 자
기 막사로 데려오게 했다. 그리고는 그 루카니아 전사를 불러다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한밤중에 종종 부대를 빠져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로마군이 예전부터 지
켜오는 엄격한 군율을 어긴 것이다. 그런데 네가 용감한 전사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는 사
실 또한 알고 있다. 그 점을 감안하여 기꺼이 너의 죄를 용서해준다. 그러나 앞으로 네가 군
율을 잘지키도록 하기 위해 특별 감시인을 두기로 했는데 이 감시인은 네가 선행을 바칠만
한 사람이다."
그리고 애인을 불러낸후에 놀라서 입을 버리고 있는군병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이분이 너의 행동을 책임질 것이다. 그 동안의 무단외출이 사랑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
른 나쁜 동기에서 그런것인지는 앞으로 너의 행동을 통해서 밝혀질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전해지는데 이를 통해 파비우스가 타렌툼 시를 점령하게 된 경위를 알 수 있
다. 군사들중에 타렌툼 출신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 젊은이에게는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거
다들어주는 누이가 있었다. 이 누이가 적군이 점령하고 있던 타렌툼시에 남아있었다. 그런
데 이 젊은이는 한니발 군의 수비대장이 누이를 무척 사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
관계를 이용하여 타렌툼을 탈환해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파비우스에게 자기 생
각을 털어놓고 탈영병인 척하며 부대를 도망쳐나와 고향으로 갔다. 처음 며칠 동안은 수비
대장이 집으로 누이를 찾아오지 않았다. 수비대장이나 그 누이나 이 젊은이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기회를 봐서 누이에게 말하였
다.
"부대에 있을 때 들은 바로는 네가 지체 높은 수비대장과 친하다던데 실제로 어떤 사람이
냐? 만일 그가 용감하기고 이름난 전사라면 어느 나라 사람이면 어떠냐? 지금은 칼인 통하
는세상이니 말이다. 이제 의리라고 하는 것은 한푼의 가치도 없고 힘있는 자만이 명예를 얻
을수 있는때가 왔으니 힘 가진 자가 우리에게 친절의 눈길을 돌린다면 그저 감사할따름이
지."
이말을 듣고 누이는 애인을 불러 오빠에게 소개하였다. 그 후로 누이는 한층 더 그를 사
랑하고 그에게 더 많은 친절을 베풀었다. 오빠와 수비대장 사이의 우정도 두터워졌다. 그런
데 이 수비대장이라는 자는 원래 돈을 벌생각으로 전쟁터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
랑에 빠지고 보니 애인의 오빠가 충분한 보상을 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파비우스의 지시
를 따르라고 하자 흔쾌히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그들 사이에 이해 관계가 잘 맞아떨어져
서 타렌툼 시를 탈환할수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기록은 이상과 같이 전하고 있으나 일부
의 설에 의하면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자는 타렌툼 출생이 아니라 수비대장과 같은 나라사람
으로 파비우스의 첩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녀와 고향도 같은데다가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수비대장에게 뇌물을 전달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 공작이 진행되는 동안 파비우스는 한니발의 주의를 다른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레기움에 있는 군대에 명령을 내려 브루타이 지방을 약탈하고 카우로니아를 포위하여 가능
한한 큰 혼란을 일으키라고 했다. 레기움에 있던 군대는 그 수가 8천명에 달했지만 탈영병
들과 마르켈루스가 시칠리아에서 데려온 오합지졸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잃
더라도 로마에는 별 타격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을 잃더라도 로마에는 별 타격이 되
지 않았다. 파비우스는 이들을 미끼로 던져서 한니발을 타렌툼에서 멀리 꾀어낼 전략이었다.
그랬더니 한니발은 과연 군대를 이끌고 카우로니아로 이동하였다. 그러는 동안 파비우스는
줄곧 타렌툼시를 지키고 있었다. 포위에 들어간지 엿새째 되는 날 상술한 바 타렌툼의 젊은
군병은 어둠을 틈타 도시를 빠져 나와서는 수비대장이 합의한대로 로마군을 맞아들일 준비
를 마쳤는가 하나하나 점검하였다. 그리고는 파비으스에게 모든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두사람의 계략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마음을 놓을수는 없었다. 약속된 지점으로
부대를 이끌고 가고 다른 장군들은 딴 방향에서 우선 수륙양면으로 공격하도록 명했다. 타
렌툼군이 그공격을 막으려고 달려간 틈에 파비우스는 적군 수비대장의 신호를 받아서 사다
리로 성을 올라가 손쉽게 점령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파비우스는 이 당시 야심에 눈이 먼것같다. 그는 자신이 타렌툼시를 점
령한 것은 모략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힘과 솜씨에 의한것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만인
이 보는앞에서 적군의 수비대장을 참사기켰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기대한 효과를 얻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잔인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많은 타렌툼사
람들을 학살한후 3만명을 노예로 팔아 넘기고 군대를 시켜 도시를 약탈하여 국고에 3천 탈
렌트의 수입을 올렸다. 병사들이 모든 것은 마구실어 내갈때에 물품목록을 작성하던 군병이
신들의 초상화면 조각상등을 가리키면 이들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었다. 그때 파비우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노한 신들은 이 곳 사람들에게 남겨주기로 하자."
그러나 그는 거대한 헤르클레스 신조각상을 로마로 옮겨 유피테르 신전에 세울고 그곁에
는 말을 타고 있는 자기의 조각상을 청동으로 만들어 세웠다.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마
르켈루스는 훨씬 더 현명하게 처신하여 자신의 관대함과 인자함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
렸으니 이런한 사실은 그의 전기에 잘 나타나있다.
한니발은 타렌툼을 구하러 급히 돌아왔으나 그가 5마일 밖에 당도했을 때 그곳은 이미 로
마군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한니발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로마에도 한니발 같은 사람이 있었구나. 우리가 타린툼을 점령한것과 같은
방법으로 이 도시를 빼앗아 갔다."
그리고 막료들만 듣는 자리에서 비로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를 정복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은 벌써부터 하고 있었는데 이 지경까지 이르렀
으니 아주 단념해야 되겠소."
이번 승리로 파비우스는 두 번째 개선행사를 가졌는데 이는 먼젓번보다 훨씬 성대하게 거
행되었다. 그는 마치 훌륭한 운동선수처럼 상대방이 맥을 못추도록 하는 방법을 잘알고 있
는 것 같았다. 사실 한니발의 군대는 한편으로 계속되는 근사작전으로 기력을 소모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갖가지 전리푸으로 사치에 젖어버려 군기가 해이해졌다. 하니발이 타렌툼을
공격해 왔을 때 마르쿠스 리비우스라는 자가 그 곳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성채안으로
후퇴하여 로마 군이 이 도시를 되찾을때까지 빼앗기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그느 파비우스
가 영광을 독차지하는 것을 시기하였다. 한번은 원로원에 출두하여 타렌툼을 도로 찾은 것
은 파비우스가 좋은 작전을 펼쳐서가 아니라 자기가 계속 저항을 했기때문이라고 주장하였
다. 그때 파비우스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과연 옳은 말입니다. 마르크스 리비우스가 타렌툼을 빼앗기지 않아더라면 파비우스 막시
무스가 도로 찾을수 없었을 테니까요."
로마 인들은 파비우스에게 여러모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중 하나가 그의 아들을 그 다
음해에 집정관으로 선출한 일이다. 아들이 취임하여 얼마되지 않아 몸소 걸어다니며 어떤
군사문제를 처리하고 있을때였다. 파비우스는 노쇠하여 그랬는지 또는 아들을 시험하고자
그랬는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호위병을 내보내서 말하기를, 만일 집정관에게 용건
이 있거든 말에서 내려 걸어오시라고 하였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연세 많고 지체
높은 아버지에게 어찌 저기 무엄하게 행동할수 있을까 싶어 모두들 숨을 죽인채 파비우스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러나 파비우스느 당장에 말에서 내려 두 팔을 벌린채 뛰다시피 아들
에게 다가가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들아 정말 장하구나. 네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잘 아는구나. 우리들이 그리고 우리 조
상들이 로마의 위엄을 떨칠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태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
지나 자식보다 나라의 영광을 더 존중해야 된다는 것이지." 사실 파비우스의 증조부도 살
아 생전에 로마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었으니 다섯 번이나 집정관을
지냈으며, 전쟁에서 여러 차례 큰승리를 거두고 개선의 영광을 누렸으나 아들이 집정관이
되어 군대를 지휘하게 되자 기꺼이 아들을 상관으로 섬겼다.
전쟁이 끝나고 개선할 때 아들은 네필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입성하였는데 늙은 아버지
는 아들의 수행원으로서 말을 타고 그뒤를 따랐다. 그 자신이 로마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
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였으며 아버지로서 당연히 아들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
나 그는 법을 존중하고 상관에게 복종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파비우스 막시우스는 이
외에는 칭찬받을 만한 일을 많이 하였다. 그는 후에 아들을 잃게 되었으나 그 서러움을 놀
랍게도 잘 참아냄으로써 경건한 아버지로서 그리고 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로마에
서는 관례상 저명한 사람이 죽으면 가장 가까운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영결사를 하곤 했는
데 파비우스는 자청하여 그 역할을 맡고 포룸에 나와 연설을 했으며 나중에 그 내용을 글고
정리하고 남겼다.
한편 스페인으로 파견된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여러번의 전투를 통해 그곳에 있던 카
르타고 군을 격파하고 나라 밖으로 몰아내어 여러 도시와 나라들을 다시 로마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므로 그는 본국에 돌아와서 전례없이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국민들은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그를 그 다음에 집정관으로 선출해주었다. 스키피오는 국민들이 자기에게
거는 기대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탈리아에서 한니발과 싸우는 것쯤은 노인에게나
맡겨야 할 시시한 일이라고 여기며, 자기 정도 되는 사람은 전쟁의 무대를 카르타고 본토로
옮겨서 아프리카 전역을 제압함으로써 한니발인 제나라를 지키기에 급급하여 다시는 다른
나라를 침공하지 못하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그는 이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각 방면
에 걸쳐 자신의 영향력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이일을 맹렬히 반대하였으며 자신의 끓는 피만 믿는 젊은이가 나라를
위태롭게 할 모양이니 시민들은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스키피오의 계획이 채택되는 걸 막았다. 파비우스가 원로원에서 열변을 토한
것은 큰효과를 보았으나 평민들은 파비우스가 스키피오의 명성을 시가하는 것으로 생각하였
다. 만일 이 젊은 장군이 대단한 전공이라도 세우거나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냄으로써
전쟁을 종식시키기라도 하면 그렇게 오랫동안 전쟁을 질질 끌어온 파비우스의 입장이 난처
해질것이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해서 파비우스가 처음에 스키피오의 계획을 반대할때만 해도 국가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진지한 우려에서 그렇게 행동한 듯하다. 그러나 스키피오의 인기가 날로
높아만 가자 파비우스의 경쟁심에 불이 붙었었다. 이렇듯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자 파비우스
는 한층 더 격렬하게 반대입장을 취하였다. 파비우스는 심지어 스키피오의 동료 크라수스를
찾아 가서 스키피오에게 지휘권을 양도하지 말라고 촉구하였다. 그리고 만약 크라수스 자신
이 아프리카 원정에 뜻이 있다면 반드시 자신이 군대를 지휘하라고 하였다. 파비우스는 스
키피오가 군자금을 타 쓰는 것도 방해하였다. 그러므로 스키피오는 전쟁비용을 스스로 조달
하는수밖에 없었으니 그르 적극 지지하던 에트루리아의 여러 도시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한
편 크라수스는 스키피오와 대립할 의사가 없었을뿐더러 이탈리아를 떠날 생각도 없었다. 그
는 본시 전쟁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며 고위 성직자로서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해야 했으니
이래저래 로마에 머물어 있고 싶어했다.
그러자 파비우스는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았다. 그는 로마의 장정들이 스키피오 군대에 징
발되는 것을 방해하려고 원로원과 시민들앞에서 스키피오를 통렬히 비난하였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무서워서 도피하려는 것일 뿐이며 이탈리아의 모든 군대를 국외로 끌고 나가기 위
하여 청년들을 꾀는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된다면 무방비 상태로 남겨진 부모, 아내,
자식들, 그리고 로마시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적의 손에 그대로 넘어갈것이라는 게 파
비우스의 주장이었다. 이말에 공포를 느낀 로마 인들은 스키피오에게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에서 300명을 뽑아 그들을 데리고 출더하라고 하였다. 스키피오는 이 군대를 각별
히 신임하여 스페인 원정에도 데려갔다. 파비오스가 이처럼 행동한 것은 조심성 많은 성격
탓으로 보인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로 건너가자 마자 곧 대승하였다는 소식이 로마로 날아왔다.
스키피오는 확실한 증거로서 많은 전리품을 보냈다. 또한 그는 누미디아 왕을 포로로 잡았
으며 적의 진지 두 개에 불을 질러 완전히 파괴하였고, 그곳에 있던 병사와 말, 그 밖의 군
용물자에도 상당한 손실을 끼쳤다. 하는수없이 카르타고에서는 한니발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탈리아땅에서 벌이고 있는 결말 없는 전쟁을 중단하고 돌아와서 카르타로를 지키라고 하
였다. 로마 사람들은 그토록 눈부신 스키피오의 활약을 보고 너나없이 그를 칭찬하였다. 하
지만 이번에도 파비우스는 스키피오를 불러들이고 대신 다른 사람을 내보내자고 주장하였
다. 그 이유로는 오로지 오래 된 금언을 들먹이며, 운명의 여신을 변덕이 심하여 한 사람을
오래 좋아하지 않고 반드시 곧 싫증을 낸다고 하였다.
이말을 듣고 기분 나빠한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가 들어서 아주 망령이 난 것이 아니라면
한니발의 전술에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는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한니발의 군사를 배에 태
워서 이탈리아를 떠나자 로마인들은 하나같이 기뻐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여전히 못 마땅
해 하며 자신의 두려움과 불길한 예감을 털어놓았다. 그는 로마의 운명이 그 어느때보다 위
태롭다고 주장하였다. 또 이제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갔으니 어마어마한
기량을 발휘할것이라고도 말했다. 스키피오는 로마 장군들, 대정관들, 군정관들의 채 식지
않은 피가 묻은 적군의 칼과 맞서 싸워야 하니 로마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선 형편이라고 하
였다. 이 말을 들은 시민들은 어느 정도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한니발이 점점 더
먼곳으로 옮겨 갈수록 위험은 로마에 한발 더가까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러나 스
키피오는 곧 한니발에게 완전한 패배를 안겨주고 카르타고인들이 자존심을 짓밟아 버렸으
며, 로마인들로 하여금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쁨과 환희를 맛보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대양에서 표류하던 조국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전쟁이 이렇듯 화려하게 막을 내릴 때 까지 살지 못하였으니
한니발의 패전도 보지 못했을뿐더러 로마가 활기와 안정을 회복한것에 기뻐할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철수할 무렵에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테베스에서는
에파미논다스가 죽은뒤에 그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남은 물건이라고는 작은 쇠동전 하나뿐
이것을 보고, 공공비용으로 그의 장례를 치러주었던 예가 있다. 파비우스는 그와 같이 공공
비용으로 장례를 지내줄 필요는 없었지만, 시민들은 각자 애정의 표현으로 가장 작은 동전
하나씩을 장례비용에 보탰다. 파비우스를 국부로서 받든다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
므로 파비우스는 죽음을 맞이한후, 생전의 업적에 합당한 영광을 받았다.
페리클레스와 파비우스의 비교
이제까지 페리클레스와 파비우스의 일생을 충분하게 살펴보았다. 두사람은 모두 훌륭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다. 우선 두사람의 전공부터 비교하도록 하자.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위세와 번영이 절정에 달했을 때 권좌에 올랐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가 큰 패배나 재난을
겪지 않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로마가 최악의 상태에
놓여있을 때 정권을 잡았으므로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유지해나갈 수는 없었지만, 침울한
상태에 빠져 있던 국민정신을 어느 정도 까지 끌어올리는 일에는 성공하였다. 그뿐만 아니
라 페리클레스가 키몬, 미로니데스, 레오크라테스, 톨미테스 등을 내보내서 여러차례 전승을
올리고 돌아오도록 한 것은,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기
보다는 국민들에게 여러 가지 행사와 제사를 즐길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에 파비우스는 로마 군대가 패전하는 것과 집정관이 살해당하는 것, 산과 들과 숲에 흩어진
시체들과 동포의 피로 물든 강물을 두 눈으로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혜와 의지로써 허
물어져 내리는 국가를 짊어졌으며 모두들 실의에 빠져 두손을 놓고 있을 때 거의 혼자의 힘
으로 위기를 극복해나갔다.
갖은 역경에 시달리다 현명한 지도자의 충고를 받아들임으로써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믿게 된 백성들을 다스리기가 오히려 쉬울 수 있다. 그리고 오래 지속되어 온 번영에 취하
여 방자해지고 오만해진 국민을 통제하고 다스리기가 더 어려운 일이라면, 페리클레스 시대
의 아테네는 후자에 해당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로마인을 짓누르고 있던 무서운 시련을
생각할 때, 그것에 동요되지 않고 뜻한 바 정책을 펼쳐나갈 수 있었던 파비우스는 불요불굴
의 큰 인물이었다.
페리클레스가 사모스를 공략한 것과 파비우스가 타렌툼을 탈환한 것, 페리클레스가 에우
보이아를 정복한 것과 파비우스가 캄파니아 지방 정벌 붕 카푸아 시를 탈환한 것은 집정관
풀비우스와 아피우스였다. 파비우스는 리구리아 사람들을 정벌할 때 외에는 정공법을 써서
싸운 적이 없었다. 페리클레스는 해륙 양면에서 아홉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페리
클레스의 전공 중에는 파비우스가 미누키우스를 구해주고 전멸의 위기에 처한 로마군을 구
출한 것에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파비우스의 이렇듯 고귀한 행동은 그의 용기와 지혜와
인간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파비우스가 한니발이 불붙은 소를 이용했을 때 큰 실책을 범하는데 비해서페리클
레스는 그런 실수를 보이지는 않았다. 파비우스는 그때 우연히 적군을 포위하게 되지만 밤
중에다 빠져나가게 하고, 날이 밝은 뒤에는 머뭇거리다가 오히려 패배를 당하였다.
다만 현재 상황에 잘 대처할 뿐 아니라 미래를 올바로 예견하는 것이 훌륭한 장군의 조건
이라면, 이 점에 있어서 페리클레스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지
나치게 욕심을 내다보면 결국 아테네의 국력이 쇠해지고 말것이라는 페리클레스의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카르타고로 출정할 경우 로마가 망하고 말것이라고 한 파
비우스의 예언은 빗나갔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의 불길한 예언은 적중했지만 파비우스는
승리를 예언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자신감이 부족하여 유리한 기회를 놓친 장군은 선
견지명이 부족하여 타격을 받은 장군만큼이나 비난받아 마땅하다. 두 가지 실책은 성격상
정반대이지만 공통점이 있으니 둘 다 판단력과 경험이 부족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페리클레스의 명성에 대한 큰 타격이었다. 왜
냐하면 이 전쟁은 그가 스파르타의 중재안에 만족할 수 없다고 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
다. 파비우스도 카르타고에게 어떠한 양보를 하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
르르 수호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위험이라도 무릅썼으리라고 본다. 파비우스가 미누키우스에
게 보인 온화한 태도는 페리클레스가 키몬이나 투ㄱ키디데스를 추방한 것과 좋은 대조가 된
다. 이 두 사람은 명문 출신이며 보수파에 속했으나 패각 투표롤 쫓겨났는데 페리클레스는
이 일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페리클레스느느 식견이 부족한 장군들의 실수로 나라가 위험
에 처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오직 톨미데스 장군만이 유일하게 그의 뜻을 거
슬러가며 보이오티아인들과 전쟁을 벌였는데 그는 결국 그 전쟁터에서 살해당했다. 페리클
레스의 영향력은 대단하여 다른 모든 장군들은 오로지 페리클레스의 판단에 따라 행동했 .
반면 파비우스는 자기 스스로는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없었지만 페리클레스만한 영향력을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다른 장군들이 실수를 범할 듯해도 어쩔수가 없었다. 로마 전체로 봤
을 때 파비우스의 권력이 그다지 강하지 못했던 것은 커다란 불행이었으니 파비우스의 말을
따랐다면 피할 수도 있었을 재난을 너무나도 많이 당하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성격에 대해 말해보자면 페리클레스는 선물을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파비우스는 자기 돈으로 포로가된 부하들의 몸값을 치러주었다. 그러나 이 금액은 6탈레트
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각국의 왕과 왕자들 그리고 여러 동맹국들로부터 오는 선물을 다
받기만 했어도 페리클레스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그만한
부자가 될 기회를 가져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그런 기회를 눈 앞에 두고도 페리클
레스만큼 초연할 수 있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다. 페리클레스가 아테네를 아름답
게 꾸미기 위해 지은 성전과 공공건물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해보자. 화려함이나 구조에 있
어서 로마에는 이를 따를 만한 것이 없으며, 웅대함이나 비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카
이사를 시대까지 지어진 로마의 건물들을 다 합쳐도 페리클레스 집권당시에 세워진 것들보
다 못하다.
알키비아데스
알키비아데스의 가문은 부계위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웅 아약스의 아드 에우리사케스
사 그조상인 것 같다. 또 그의 어머니는 메가클레스의 딸 디노마테이무로 모계로 말하자면
알크마이온 집안의 혈통이라고 할수 있다.
아버지 클리니아스는 자기 재산으로 3단범선을 만들어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눈부신 활
동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보이오티아군과의 코로네아 싸움에서 전사했다.
클리니아스가 전사하자 알키비아데스에게는 친척인 크산티포스의 두 아들 페리클레스오
아리프론이 후견인이 되었다.
세상에서는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의 귀여움을 받고 있던 까닭에 세상에 널리 아려지
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예를 들자면 니키아스, 데모스테네스, 라마
코수,포르미온, 트라시불루스, 테라메네스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그와 동시대의 저명한 인사
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하난 그들의 생모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알키비아
데스에 관하여는 생모이름은 말할것도 없고, 스파르타 여자인 아미클라라는 이름의 유모와
가정교사였다는 조피루스라는 이름까지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각각
안티스테네스와 플라톤이 전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의 미옥구비가 잘생겼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제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으
리라. 여기서는 그저 그의 외모가 수년, 청년, 장년의 모든 시기룰 통하여 꽃처럼 활짝 피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홀딱 반해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할줄 안다. 에우리피데스의
"모즌 아름다운 것은 늦가을에도 아름답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다. 다만 알키비아데스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어 이 말이 지당해지게 된다. 알키
비아데스에게는 말이 좀 새는 버릇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것이 맹력으로 인정됨
으로써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요소가 되었다. 그의 말버릇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패네스가 테
오루스를 가리켜 테올루스라고 부른 것이 있다. 이것은 'r'을 'l'처럼 소리낸 알키비아데스을
흉내낸 것이다. 또한 아르키푸스도 알키비아데스의 아들을 조롱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저녀석,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 흉내를 내고 싶어서 옷자락을 질질 끌며 어슬렁 어슬렁
걷고 있구먼, 게다가 실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말이 좀 새는 것처럼 이상하게 발음하는군."
알키비아데스의 성격은 나주엥 이상한 변화와 모순을 보이게 된다. 그것은 그가 손댄 사업
의 거대한 규모와 파란만장한 우명으로 보앙 충분하게 수긍이 가는 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정열이 파도치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심했던
것은 남과 경쟁하여지지 않으려는 야망이었다.이것은 그의 소년 시절이야기에 잘나타나 있
다.
그가 씨름하며 놀때의 일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상대방에게 밀려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누은 채로 자기에게 달려드는 상대방의 팔에 입을 갖다대고서 덥석 물려고
하였다. 깜짝 놀란 상대방이 자기고 모르게 팔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임마! 계집애처럼 물거야?"
이말에 알키비아데스는 다음과 같이 도받아쳤다.
"아니야! 사자처럼이야."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알키비아데스는 아이들과 거리에서 공기놀이를 하며 놀
고 있었다. 그의 차례가 되었는데 때마침 저쪽에서 짐 실은 수레가 오고 있었다. 알키비아데
스는 마주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졸랐다. 수레가 지나가는 길위로 공깃동을 던져야 했
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부는 들으체오 않고 계속 수레을 몰고 왔다. 다른 아이들은 일제히
길을 비켰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수레앞에 덜컥 나자빠져 "갈테며 가봐요!"하고 외쳤다.
그러자 마부는 겁이나서 황급히 말을 세웠으며 다른아이들도 그를 구하려고 달려왔다.
학교에 다니 나이가 되자 알키비아데스는 선생님의 말씀을 대부분 잘들었다. 그러나 피리
를 부는것만은 쓸데 없는 일일뿐 도처히 자유인이 할만한일이 아니라고 연습을 거부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하프나 라이어 같은 악기를 연주하느것은 그다지 자유인다운체면을 손상
시키는 일이 아니지만 피리 부는 사람의 입은 뒤틀리기 때문에 친한 사람들의 얼굴까지도
분간할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프를 연주하는 사람은 반주삼아 노래를
부를수도 있지만 피리를 연주하려면 입을 막고 있어야 하므로 노래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테베스의 아이라면 피리을 불어라, 놈들은 지껄일줄 모르니까. 그러나 우리 아케네 사람
들은 옛날부터 아테네 신을 수호신으로 삼았으며, 아폴론 신을 섬기고 이TEk. 그런데 아테
네 신을 피리를 보기 싫다고 내던지셨으며, 아폴론 신은 피리쟁이 마르시아스를 죽여버리셨
다."
이런말을 농담 반 진담반으로 하고 나서 그는 피리배우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다른 친
구들에게도 피리배우기를 그만 두라고 충동하였다.
"알키비아데스를 피리불기를 아주 싫어해. 게다가 그런 것을 배우는 사람을 비웃거든. 대
단한 놈이야."
이말은 삽시간에 아이들 사잉로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피리느 자유인니 습득해야 할 예능항목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오히려 경
멸을 받게 되었다.
아티폰(기원전 480-411의 아테네 웅변가. 이<알키비아데스 바난>은 남아 있지 않다.)의
<알키비아데스 비난> 에는 이런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것은 알키비아데스가 소년일때의 일
이다. 어느 날 그는 몰래 집을 빠져나와 데모크라테스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 그의 후견인인
아리폰음 '알키비아데스 실종'이라는 포고령을 내리고 대대적인 조사를 벌여야겠다고 생각
하
였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아리폰을 만류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만일 알키비아데스가 벌써 죽었다면 시체를 하루쯤 일찍 찾는일이 될것이고,무사
히 있다면 일생 동안 수치를 당하는 일이 될것이오."
또한 안티폰은 알키비아데스가 시비르티우스의 레슬링 도장에서 자기 하인 한사람ㅇ르 몽
둥이로 때려죽인 일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알키비아데스를 미원하는 사람들이 그의 명예를 훼손시키기위하여 날
조한 이야기라고 본인 밝히고 있으므로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은 못된다.
이 무렵에는 많은 명사들이 알키비아데스 주위로 몰려와서 그의 젊은이다운 기상에 놀라
워 하며 아첨의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한사람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
가 알키비아데스를 사랑한 것은 이 젊은이에게 나면서부터 부여받은 뛰어난 덕성과 소질이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아름다운 소질이 젊은이의 잘생긴 이목
구비에 반영되어 찬란히 빛나고 있음을 간과하였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가 풍부한 부와 명
성에 의하여 마치 화려한 꽃처럼 금세 시들어버리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또한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이첨을 일삼고 충고의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이 젊은이의 마음만
을 사로잠으려고 하는 아테네 시민들과 동맹국의 사람들과 그밖의 외국인 때문에 걱정에 싸
였다. 그는 자진하여 알키비아데스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이처럼 한참때의 과일이 익지도
못한채 푸른 열매로 떨어져 말라죽는거은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알키비아데스만큼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 반면에
그에게는 비난이나 충고의 말 한마디를 던져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많은 아첨자에게 둘러싸여 건전한 충고와 비난을 들을 길이 막혀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
는 자신의 훌륭한 천성에 의하여 소크라테스라는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고는 그를 양모했다.
그리고 더 이상 알키비아데스 자신을 따르는 부자나 명사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순식간에 소크라테스와 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의말에 항상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가슴을 졸이고 있었으나. 여느 경우처럼 틀
에 박힌 나약한 쾌락따위를 좇지는 않았다. 그리고 키스나 애무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그저
이젊은이의 타락한 영혼을 탓하고 부풀어오른 허영심을 제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트라테스가 하는일은 젊은이에게 마음을 쓰고 그들은ㄹ구하려는 신들
의 배려와 다를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애서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
고
생각하고 소크라테스에게 외경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인정이 깃든 마음씨
를 기쁘게 생각하고 그 덕성앞에서 초라해진 자기의 모습을 부끄럽게 샹각하였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느 사랑의 반영, 즉 플라톤의 '갚는 사랑'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
는 소크라테스와 식사를 하며, 함께 씨름을 하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같은 천막에서 잠을
잤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을 따르는 다름 모든 사람들에게 아테미온의 아들아니투스(아테네의
민주파의 부자, 소크라테스 고발의 중심인물)에게 하는것과 같이 무뚝뚝하고도 무례하게 대
하였다 .아니투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몹시 마음을 태우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느 sclsrn들을
대접하는 자리에 알키비아데스를 초대하였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이 초대를 거절하였따.
그리고 나서 알키비아데스는 자기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거냐하게 취한채로 패거리
들을 이끌고 아니투스의 집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아니투스의 방뭄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
니 식탁에 놓여있는 금은 집기를 보았다. 그는 노예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여봐라 저기 있는 것의 절반만 집으로 가지고 오너라." 그리고 자신은 안으로 들어가지
도 않은채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아니쿠스의 손님으로 왔던 사람들은 노발대발하면 오만
불손한 알키비아데스의 행동을 비난하였따. 그러나 아니투스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자기몫을 알아서 챙긴점잖은 행동이지요.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므로 심한 말으 하지 마
시오. 몰래 다 가지고 갈수도 있는걸 그래도 절반은 남겨두지 않았소?" 알키비아데스에게
마음을 태우는 다른 사라들도 대개 이러한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중에는 예외의 인물이
하나 있었다. 전해호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사나이는 아테네에서 살고 있는 타지방의 사람
이었는데 그다지 부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전재산을 처분한 돈 100스타테르를 알키비
아데스에게 가지고 가서 '제발 이돈을 받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하여 그
를 대접한 다음 돈은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내일 세금처우에 대한 입찰이 있을것이니 어느 상대보다도 많이 입찰하여 낙찰시키도록
하시오."
그러자 그 사나이는 울상이 되어 대답했다.
"청부계약에는 몇 탈렌트의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것만큼은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그러
나 알키비아데스는 단호허게 말했다.
"그렇게 안 하면 나는 채찍으로 당신을 때리겠소."
이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 무렵 알키비아데스는 우연한 일로 조세 청부인등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는수없이 이 사람은 다음날 아침 일찍 장터로 나가서 평소보다 1
탈렌트를 더 높여서 입찰하였다. 그러자 청부인들이 화를 내면 그에게 몰려들어 추궁하였따.
"보증인은 누구요? 이름을 대보시오"
그는 도대체 누구의 이름을 대야할지 몰라 그저 어물거리면서 도망치려고만하였다. 그때
먼발치에 서 있던 알키비아데스가 입찰관을 향하여 소리쳤다.
"내 이름을 기입해 주시오. 이사람은 내 친구니 내가 보증인이 되겠소." 이말을 들은 청
부인들은 모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언제나 금년도의 청부이득으로 전년도의 부
채를 갚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찰이 이렇게 되면 그들은 또다시 부채
를 지게된다. 청부인들은 그 사나이에게 뇌물을 주며 제발 입찰을 포기해달라고 간청하였
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그에게 1탈렌트 이하를 받고 입찰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일렀
다. 할수없이 청부인들은 그만큼의 돈을 사나이에게 주었다. 긜고 어서 그곳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결론적으로 알키비아데스는 무일푼인 그사나이를 도와준것이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알키비아데스르 둘러싼 힘든 경쟁상대가 여러명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
테스의 우정은 알키비아데스를 거의 독점하다시피하였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천성이 뛰어난
알키비아데스를 사로잡았으며 그의 미움을 누르며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때로는 쾌락을 미
끼로 하여 알키비아데스의 횐심을사려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에 넘어간 알키비아데스가 소
크라테스를 뿌리치고 뛰쳐나가는수도 있었다. 그럴때면 소크라테스는 노예를 잃느 사람ㄹ처
럼 그를 찾아다녔다. 알키비아데스는 다른 모든 사람을 경시하여 오만하게 대하였으나 소크
라테스는 만은 매우 두려워하였다. 이를 두고 스토아학파의 클레안태스가 조롱하기를, 소크
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귀만 잡고 조롱하고 있으며, 다른 친굳르은 그의 모든 지체를 차
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투키디데스이 사기에 보면 알키비아데스는 쾌락에 약하였던 것 같아.
그의 허세와 공명심을 이용한 자들은 그의 나이에도 맞지않는 지나친 일을 시사하면 그가
정치에 일찍 투신하면 할수록 다른 장군이나 정객들은 물론 페리클레스의 권세와 명성까지
도 능가할수 있다고 말하였다.
쇠는 불속에서 연해지지만 찬물속에 넣으면 또 다시 굳어지다. 그리하여 팽창하였던 각
부분이 다시 응결됨으로써 처음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헛된 자부심으로 허세부리는 것을 볼때마다 대화를 통하여 그를 다시 올바른 상태로 돌이키
려고 노력하였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부족한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르 겸
허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할 때 마다 자신이 얼마나
결점투성이의 덕성이 모자라는 인간인지에 대해서 깨달았다.
소년 시절이 지난 어느때였다. 알키비아데스는 학교로 가서 선생에게 호메로스의 책을 빌
려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호메로스의 책은 한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알키비아데스는 갑자기 주먹으로 선생을 때리고는 가버렸다.
다른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내손능로 수정을 가한 호메로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자 알키비아데스가 말했다.
"호메로스를 수정할수 있는분이 어찌하여 아이들에게 읽기 쓰기를 가르치십니까? 호메호
스를 수정할 정도의 실력이 있다면 어째서 청년들을 교육시키지 않는거죠?" 어느날, 알키
비아데스는 페리클레스를 만날 생각으로 그의 집 문앞까지 갔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다
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은 바쁘다. 지금 민회에서 해야 할 보고로 골치를 앓고 있는중이다." 알키비아데스
는 발길을 돌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차라리 어떻게 하면 보고를 하지 않아도 될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아직 젊었을 때 그는 포티다이아 원정에 종군하였다. 그때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텐트에서 기거하였고 싸울 때도 나란히 서서 싸웠다. 전투가 치열해지자 두 사람 다
전공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다가 알키비아데스가 부상을 입고 쓰러지자, 소크라테스는 그의
앞을 가로막아 방어하며 한층 더 눈부신 활약을 보였고 그의 생명과 무기를 적으로부터 구
해주었다. 따라서 무공에 대한 상은 소크라테스가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장군들은 알키비아
데스의 명성ㅇ르 빙자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게 전공을 돌리려는 듯한 눈치였다. 이것을
눈치챈 소크라테스는 그의 공명심을 돋구어주기 위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유리한 증언
을 하였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에게 유고으이 월계관과 완벽한 갑옷을 상으로 줄 것을 장
군에게 권유하였다.
델리움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당시의 일이다. 아테네 군을 패전하여 도망치고 있었다. 이때
알키비아데스는 말이 있었으나 소크라테스는 얼마되지 않는 동료병사들과 함께 걸어서 후퇴
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알키비아데스는 말을 타고 소크라테스의 곁에 바짝 달라붙어서 달
렸다. 알키비아데스는 밀려드는 적의 세력에 몰려 마치 추풍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져 가는 아군의 한가운데서 소크라테스를 지켜주었다. 이것은 나중에 있었던 이야기다.
칼리아스(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 사람으로 부유한 가문출신, 스파르타와의 평화교섭에 활
약한 인물)의 부친 히포니쿠스는 가문이 좋고 부유했던 관계로 대단한 명성과 권력을 마음
껏 누리고 있었다. 이것은 화가 나서 그런것도 아니었고 어떠한 gakfekzmdRmx에 그런것도
아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그저 까닭없이 동료들에게 그렇게 해보이겠다고 큰소리로 농을
친 뒤 이를 실제로 옮긴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장난으로 한 이행돋이 온시내로
펴져 나갔다. 그리하여 누구 하나 알키비아데스를 비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알키비아데스는 날이 밝기를 기라렸다가 히포니쿠스르 찾아갔가. 그리
고는 속옷을 벗고 분이 풀릴때까지 마음껏 자기의 알몸을 채찍으로 때려 잘못을 응징해다랄
고 청하였다. 그러자 히포니쿠스는 화를 풁고 알키비아데스를 용서해주었으며, 나중에는 사
위로 삼았다. 다른 경로의 전하는바에 따르면 10탈렌트의 지참금을 낸다는 조건으로 알키비
아데스에게 히포니쿠스의 딸 히피레테을 준 것은 히포니쿠스가 아니라 그의 아들인 칼리아
스였다고 한다.
그는 잔중에 히파레테가 아이를 낳으면 알키비아데스에게 가시 10탈렌트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칼리아스는 알키비아데스의 계락이 무서운 나머지, 민회로 나가서 만일 자기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을 경우에는 집과 재산을 모두 나라에 바치겠다고 말하였다.
히파레테는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정이 많은 여자였다. 그러나 남편이 아테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기생들과도 차례로 관계를 맺는 것을 보고 가슴이 터질것만 같아서 마침내는
남편의 집을 나와 오빠의 집으로 돌아갔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런 일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여전히 바람을 피웠다. 히파레테는 본인이 직접 법정에 출두하여 이혼소송을 제기하지 않으
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히파레테는 법이 정한 수속을 밟으러 법정으로 가던붕에 불쑥 나타
나 알키비아데스를 만나고 말았다. 알키비아데스는 막무가내로 아내를 끌고 광장에서 자기
집까지 갔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누구 하나 용기내어 대항하려는 사람도 법정으로 다시 데
려다려는 사람도 없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죽을때까지 남편의 집에서 살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후 그녀는 알키비아데스가 에페소스를 향하여 배를 다고 떠났을 때 죽었다.
이러한 알키비아데스의 폭행은 마치 무법의 깡패들이나 저지르는, 용납할수 없는 불법이
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아내가 직접 법정으로 출정하여 이혼을 제기
하도록 제정된 법의 목적이 아내로 하여금 남편을 만나서 화해할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데
있는 것으로 생각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키비아데스의 집에서는 아주 크고 잘생긴 개를 기르고 있었다. 그 개는 70미나라는 큰
돈을 들여서 사 온 것이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이 개의 훌륭한 꼬리를 잘라버렸다.
친구들은 이러한 그의 행동을 탓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두들 자네 개의 일을 가엾이 여겨 자네를 비난하고 있네." 그는 히죽 웃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한대로 됐다는 거야.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이야기를 옮기느라고 나에
관한 더 나쁜 소문을 퍼뜨리지는 않을게 아닌가."
알키비아데스가 공중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시에 현금을 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
다. 그것은 미리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아테네의 시민들이 민회 앞에 모여서 웅성거리는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는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왜들 저렇게 떠들고 있소?"
그 사람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헌금은 내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알키
비아데스는 '그럼 어디 나도 좀 내볼까' 하는 생각으로 안으로 들어가서 헌금을 내었다. 그
런데 많은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갈채를 보냈기 때문에 그의 기분이 아주 좋아졌
다. 그때 알키비아데스는 속옷에 품고 있던 메추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작 거기 모인 사
람들은 다시 한번 와와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일어서서 메추리를 쫓았다. 이것을 잡아서 주
인에게 돌려준 사람은 선장인 아티오코스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아주 친한사
이가 되었다고 한다.
알키비아데스의 가문과 부, 무용담 등은 그에게 정계입문의 문을 열어주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에게는 많은 친구와 친척이 있었지만 대중들 사이에서 세력을 뻗쳐나가는데 절실
히 필요한 것은 웅변술뿐이었다. 그의 연설이 박력 있었다는 것은 희극작가들이 다 인정하
는 바다.. 또 웅변계의 제1인자인 데모스테네스도 <미디아스 비난연설>에서 알키비아데스에
게는 여러 가지 소질외에도 실로 놀랄 만한 웅변재주가 있었다고 말하였다.
어떠한 지자와 비교해볼 때, 특히 이야기 듣는것을 좋아하고 역사에도 조예가 깊은 테오
프라트스의 말을 믿는다면 알키비아데스에게는 그때그때 가장 필요한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그것을 이해하는데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그는 이야기의 내용뿐만 아니라 표현의
어구에도 신경을 썼다. 그리고 표현이 잘 되지 않으면 이야기가 뒤죽박죽 되었기 때문에 도
중에서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그,리고는 얼마간 쉬었다가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바른말을 찾
았다. 그는 올바른 표현이 머리에 떠오를때까지 연설을 계속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일은
한두번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알키비아데스가 경기용으로 기릐고 있던 말에 대한 평판을 경기용 수레와 함께 세상에 널
리 알려져 있었다. 왜냐하면 알키비아대스 외에는 시민이건 왕이건간에 아무도 올림피아 운
동경기에 네필의 말이 끄는 전차를 일곱 대난 가지고 출전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투키
디데스와 에우리피데스에 의하면 그는 우승뿐만 아니라 2등은 물론, 3등과 4등까지 모두 거
머쥐었다고 한다. 그의 빛나는 면성은 이뿐야의 야망이라는 야망을 모조리 독차지 하였다.
애우리피데스는이러한 알키비아데스의 승리를 칭찬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그대를 찬양하여 노래 부르리, 클리니아스의 아들이여.
승리는 아름다워라.
그러나 아름다움의 극치란 그리스의 누구도 하지 못한 그대의 승이여라.
그대는 전차를 몰아 1등, 2등, 3등을 독차지하였도다.
그대는 피로의 기색도 없이 걸어나와 제우스의 월계관을 쓰고, 자기의 이름을 세 번이나
섬포함ㅇ르 들은
진실로 진실로 영광이어라
알키비아데스의 훌륭한 승리를 한층 더 빛나게 한 것은 그리스의 각국이 앞을 다투어 그
를 축하한 일이었다. 에페시아 인은 그를 위하여 호화로운 천막을 치고 그의 막사로 쓰게
하였다. 키오스 인은 말의 사료와 제물로 바칠 짐승을 잔뜩보내왔다. 또한 레스보스인으 그
가 많은 손님들에게 대접할수 있을 만큼의 포도주와 식료품들을 보내왔다. 이러한 나라들의
선물공세와 때를 같이하여 그의신변에 심한 비난의 소문이 떠돌았다. 이것이 밑도 끝도 없
는 중상에 의한 것인지, 알키비아데스의 잘못이었는지 아니면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꾸면
낸 일이었는지는 알수 없는 일이다.
그것에 관하여는 이런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아테네 시에 알키비아데스의 친구인 디오메
데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매우 지체가 높은 사람으로서 알키비아데스와 마찬가지로 올
림피아 운동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디오메데스는 아르고스 시
가 좋은 경기용 전차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알키비아데스가 아르고스에서
인기도 좋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디오메데스는 알
키비아데스에게 전차를 사달라고 부탁하였다. 알키비아데스는 그전차를 사기는 하였지만 막
상 올림피아경기에서는 그것을 자기 전차로 등록해버렸다. 그리고는 디오메데스의 신과 사
람을 증인으로 내세워 알키비아데스의 비행을 비난하였다. 이 사건은 재판에 까지 이르렀던
모양인데, 소크라테스가 알키바아데스의 아들을 변호한 <전차에 관하여>라는 재판영설엥서
다루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는 고소인이 티시라스였으며 디오메데스가 아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어린나이로 정계에 투신하여 순식간에 그 시대의 쟁쟁한 정치인들보다 더
높이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에라시스트라토스의 아들인 파이악스와 니케라토스의 아들인
니키아스(이 무렵 아테네의 대표적인 정치가, 대부호이며 온건민주화의 지도자) 이두사람과
는 늘 라이벌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니키아스는 나이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명장군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인 파이악스는 알키비아데스와 마찬가지로 명문 출신이다. 그 무렵에 가서야 겨우 세력
을 뻗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중에서고 특히 웅변에서는 알키비아데스의 적수
가 못되었다. 그는 민회에서 당당한 논전을 벌이기 보다는 개인적인 담화에서 인기가 좋았
으며 설득력도 있었던 것 같다. 희극작가인 에우폴리스가 말하고 있는것처럼 말이다.
사담은 그렇게 잘하면서도 연설때가 되면 벙어리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파이악스의 <알키비아데스 비난연설>에는 여러가지 이야기와
함께 알키비아데스를 공격하는 다음과 같은 말도 들어있다. 즉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시
소유의 무수히 많은 금은 집기를 마치 사유물처럼 매일의 식사용으로 쓰고 있었다는 것이
다.
또한 아테네의 페리토이다이에는 히페르볼루스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투키디데스는 그를
깡패였다고 하며 다른 모든 희극작가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를 일년 내내 무대에서 조롱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람은 남들이 자기를 무엇이라고 하든지 또는 자기
의 체면이 어떻게 되든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후안무치한 소치였다. 어떤사람들은 그가 결
심이 굳고 용기 있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실은 진실로 후안무치한 바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이 누구의 마음에도 들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
세 있는 사람을 규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그는 매우 유용하게 이용하였다. 실제로 아테네
의 시민들은 히페르볼루스의 사주를 받고 패각투표를 실시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늘 이방법
을 사용하여 권세있는 명사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는데 그것은 세도가에 대한 공포심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단순한 시기심을 달래기 위한것일수가 많았다.
이 투표의 결과로 추방될 사람은 파이악스, 니키아스,알키비아데스 셋중의 하나일것이 분
명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니키아스와 의논하여 당파를 하낭로 규합하였다. 그리고 오
히려 투표의 화살을 히페르볼루스에게 돌림으로써 그를 추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전하는 사람도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니키아스가 아니라 파이악스와
결탁하여 그 일파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때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
으로 히페르볼루스를 추방하였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명성이 없는 천한 사람이 패각투표를 통하여 추방의 형벌을 받은 예는
없었다. 희극 작가 플라톤은 히페르볼루스를 언급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 사나이는 자기 팔자에 어울리지 않는 운명을 타고 났다. 과연 벌을 받을 만한 사람
이기는 하였으나 패각재판이 그런 자를 대상으로하여 만들어지 것은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좀더 소상히 기술하였다.
알키비아데스는 니키아스가 아테네의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국
에서 조차 존경받는 것을 시기하였다. 거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에 있는 스파르타인의 보호역을 맡고 있었으며 필로스 전쟁에서 포로가 된 스파르타인도 돌
봐주고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은 자기들이 평화의 날을 맞이할수 있었던 것과 포로들
가지 귀국하레 된 것을 오로지 니키아스의 덕택이었다고 생각하여 그를 양모하는 마음이 보
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무렵의 그리스인들은 모이기만하면 이렇게들 떠들어대고 있었다.
"우리들을 전쟁으로 끌어넣은 것은 페리클레스, 그러나 휴전을 성립시켜준 것은 니키아
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평화를 '니키아스의 평화'라고 불렀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러한 사실에 터무니 없이 시기가 나고 화가 나서 결국에는 스파르타와
맺은 평화의 맹세를 깨뜨릴 계략을 짜기 시작하였다. 그느 아르고스인이 스파르타를 미워하
고 겁내며 항상 반기를 들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키비아데스는 아무도
몰래 그들을 충동하여 아테네가 아르고스를 지지할수 있도록 비밀협정을 맺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아르고스의 민중지도자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이런 말로 그들을 격려하였다.
"우리 아테네인은 스파르타와 평화 맺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이것을 파기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그러니 그대들도 스파르타인 따위에게 겁내거나 굴하지 말고, 아테네측에 의존
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리시오."
이럭저럭 하는 동안스파르타인을 보이오티아와 단독동맹을 맺었다. 게다가 그들은 일찍이
파낙툼 성벽을 원형대로 아테네에게 돌려주겠다는 협정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성
벽을 엉망진창으로 파고한뒤에 아테네측으로 인도하였다. 스파르타의 이러한 소행에는 아테
네인들도 화르 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기회를 놓칠세라 그들의 노여움을 더욱 격렬하게 부
채질하였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인 그럴듯한 말로 니키아스를 공격하였다.
'니키아스는 그때 군사령관이었으면서고 스파크테이사 섬에 갇힌 적군을 포로로 잡지 않
았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장군이 사로잡은 포로까지 석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스
파르타를 도와주었다. 이와 같이 그는 스파르타와 가까우면서고 정작 스파르타가 코린트와
동맹을 맺는 것이나 보이오티아와 동맹 맺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파르타가 싫
어할 것을 방해하였다."
이로 인하여 니키아스는 난처한 함정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스파르타에서
보낸 사신이 왔다. 그는 아테네와의 교섭을 진전시키고 두 나라사이에 서로 무리가 없을 조
건이기만 한다면 어떠한 제의에도 응할스 있을 만큼의 전권을 위임받고 왔노라고 말하였다.
원로원은 이들의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였고, 민회도 별다른 무리없이 받아들였다. 회의는
다음 날 개최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어가자 알키비아데스는 큰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회의가 열리
기전에 스파르타의 사신과 비밀이에 만났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
다.
"스파르타 양반들, 이것은 대체 어찌된일입니까? 이도시의 원로원은 여러분에게 늘 친절
하지만 민회는 건방진데다가 야망과 긍지만 대단하다는 것을 모르시오? 만약 당신들께서 전
권을 위임받고 여기에 오T다는 말을 하는 날엔 큰일입니다. 민회 사람들이 당신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큰 양보를 얻으려고 할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의 아닌 양보를 원치 않으
신다면 아테네 시민들과의 교섭을 대충하기고, 전권을 위임받지 않았다는 태도로 올바른 해
결책을 모색하시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이사람도 있는 힘을 다하여 스파르타를 돕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사신들에게 진의를 보이기 위해서 선서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스파르타 사신들을 니키아스측으로부터 완전히 절연시키고
말았다. 스파르타의 사신들은 알키비아데스를 철석같이 믿었고 그 빈틈없는 지모와 민활성
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키비아데스를 두고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다음날 민회가 소집되고, 스파으타의 사신들이 회의 장소에 나타났다. 알키비아데스는 극
히 정중한 말투로 이렇게 물었다.
"여기 오신 여어분들은대체 어떠한 자격으로 오셨습니까?" 사신들은, 자기들이 전권을
위임받고 온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알키비아데스는 갑자기 화난 목소리로 고
함을 지르며 사신들쪽으로 바짝 달려들었다. 그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스파르타 사신
들이 배신한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즉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사신들이 정직한 태도로
협상에 임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날마다 다른 소리를 해대는 믿을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규
탄하는 듯해 보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노하였고 민회는 어리둥절하였다. 한편 니
키아스는 이 모든 일이 자기를 곤구의 힘정으로 빠뜨리기 위하여 꾸면진 음모라는 것도 모
른채 그저 스파르타의 사신들의 변심에 깜짝 놀라 낙심천만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뿐이
었다.
이와 같은 경위로 스파르타의 사절단은 추방되었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는 장군에 임명
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임명받은 즉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 만티네아, 엘리스 등
의 도시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알키비아데스의 정책에 찬성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일의 성과는 매우컸다. 왜냐하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모든 나라들이
결속하여 스파르타에 대항하였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을 스파르타 군을 맞아 만
티네아에서 싸웠다. 전쟁의 무대를 그것레 수반되게 마련인 위험과 함께 아테네로부터 멀리
떼어놓은것이었다. 이 전쟁에서는 스파르타 군이 승리하였지만 그리 큰 이득을 얻지는 못하
였다. 그러나 만일 스파르타가 패배하였다면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게 되었을 것이다.
이전쟁이 끝난 다음 아르고스 정예군 1천명은 즉시 민중파 정부를 전복시티고 아르고스
시를 스파르타인의 지배 아래 두려는 공작에 착수하였다. 스파르타 군도 아르고스 정예군과
한패가 되어 민중파 정부를 붕괴시켰다. 그러나 또다시 민중이 무기를 들고 봉기하여 우세
하게 되자 알키비아데스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지원해주었다. 이로써 민중의 승리는 더욱
완전하게 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르고스 민중을 설득하여 바다에 까지 이르는 긴 성을
구축하게 하였다. 이것은 아르고스 시를 아테네의 해상지배에 동조시키려는 계획에서 기인
한 소치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축조공사를 독려하기 위하여 아테네로부터 목수와 석공을 데
려다 주었다. 이처럼 공사에 대한 자신의 열의가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는
아테네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르고스 인들로부터 호감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의 세력
을 계속 신장시켜 나갔다.
알키비아데스는 파트라이 인에게도 바다까지 이르는 큰 성을 구축하여 도시를 바다와 연
결히키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파트라이 인중의 한사람이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아네네 인은 당신을 삼키려 하고 있소."
그러자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마 그들은 다리부터 차츰차츰 삼키겠죠. 그러나 스파르타인에게 걸려보시오. 그들은 단
숨에 머리부터 삼킬것입니다."
한편 아리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시민을 향해서 이렇게 권고하였다.
:육지에서도 국력을 떨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르라울로스 신전으로 가서 장정들
이 하는 선서를 말로만 그칠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아테네 젊은이들은 밀,
고빌, 포도, 무화과, 올리부 등이 자라는 곳을 국경으로 삼겠다는 아그라울로스 신전에 맹
세하였다고 이렇게 경작함을로써 수확을 거둘수 있는 땅을 모두 아테네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탁월한 정략과 웅변, 흘러넘치는 기개와 기민성을 보인 반면에 지극히 연
약한 생활태도를 보였다. 그는 주색에 빠졌고 여자처럼 빨간 옷을 질질 끌며 광장을 휩쓸고
다닌데다가 흥청망청 돈을 썼다. 그리고 3단범성인 군성을 타고 출전할때는 다른 사람들처
럼 갑판의 단단한 널판위에 눕지 않았다. 그는 갑판을 잘라낸 자리에 푹신푹신한 침대를 달
아메어 잠을 잤다. 그리고 방패를 만들때는 황금칠을 한 다음 집안대대로 내려오는 문장을
상징하여 벼락 몽둥이를 휘두르는 에로스상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일키비아데스의 행동을
바라보는 아테네의 병사들은 속이 메스꺼워서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알키비아데스의 안
하무인격인 태도는 전제왕과 다름없었다. 시민이 알키비아데스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
지고 있었는지 다음의 이르스토파네스의 말을 통하며 잘 알수 있다.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미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아테네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그는 또한 한단계 더심하게 풍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한다.
"시내에서는 사자새끼를 기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일단 기른 이상, 그 비위를
거슬려서는 안된다."
알키비아데스의 헌금, 코러스의 후원, 주민들을 위하여 발휘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너그
러운 도량, 조상의 명성, 씩씩한 웅변술, 강한 체력, 미모, 거기에 덧붙은 풍부한 저쟁의 무
용에는 아테네 시민들이 홀딱 반한 생태였다. 아테네 인들은 그의 모근 실수를 가볍게 생각
하였고, 이를 젊은 사람의 혈기에서 온 실수이자 선한 공명심의 소치라 하면 눈감아 주었다.
그는 자기집에 화가 아가타르토스를 감금해 놓고 방안을 그림으로 장식하도록 명령한 다
음 상금을 주어 돌려보냈다. 또한 타우레아스라 코러스를 후원하여 그와 우승을 다툴려고
하자 알키비아데스는 경쟁에서 이기고 싶다는 일념으로 상대방을 때리기도 하였다. 그밖에
도 멜로스 인의 포로 가운데서 여자 하나 골라 사귀고 거기서 낳은 아이들을 자기가 맡아서
키웠다. 이를 보고 세상사람들은 알키비아데스가 항복한 멜로스 섬의 성년남자를 모두 죽인
일은 비록 그것이 민회의 정령을 받들어서 한일이라 할지라도 최대의 책임을 면하지 못할일
이다.
아리스토폰은 기생 네메아가 알키비아데스를 안고 있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을 구경하려
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적이 있었다. 이때 나이 들고 지각 있는인사들
은 알키비아데스의 전제왕 못지않은 무법행위에 노발대발하였다. 이 그림을 평하여 시인 아
르케스트라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정곡의 찔렀다.
"그리스에 알키비아데스 같은 놈이 둘만 있다면 그야말로 큰 일이다." 어느 날 알키비아
데스가 시민대회에서 웅변을 한 다음 친구들과 의기양양하게 자기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였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늘 피하던 티문이 다가와 알키비아데스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여보게 벌써 어른이 다 되었구먼 이런식으로 나가면 나중엔 남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
겠네."
이 말을 들은 사람의더러는 웃고 더러는 티몬을 욕하였다. 그러나 그말을 마음에 새겨들
은 사람도 없지 않았다.
이렇긋 알키비아데스를 둘러싼 평판은 구구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그의 천성이 모순투성
이였기 때문이다. 아테네 인은 페리클레스가 살아 있을때부터 어떻게 해서든지 시칠리아 섬
을 수중에 넣으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에 드디어 그계획
이 착수되었다.
아테네 인들은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가 시라쿠사인으로부터 위해를 받을 때 마다 구원군이
나 동맹군의 명목으로 아테네의 소부대를 파견함으로써 후에 본격적으로 시칠리아 원정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시칠리아를 정복하겠다는 아테네인의 야망에 부채질을 하여 발화시킨 것은 알키비아데스
였다. 그는 만약 일을 일으킨다면 지엽적이고 미온적인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일거에 대함대
를 편성하고 시칠리아를 공격함으로써 정복을 이루어야 한다고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였
다. 그는 이설득으로 시민들의 가슴 속에 큰 희망을 불어 넣었으며 본인의 가슴속에는 그보
다 더 큰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시칠리아 따위는 그의 목적하는바 원정의 출발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것과 같이 그의 최종목표는 원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니키아스는 시라쿠사를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시민들에게 그 계획을 단면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의 꿈은 이미 시칠리아를 넘어서 멀리 카르타고와 리비아
까지 뻗어 있었다. 이 지방들을 수중에 넣은 다음 일거에 이탈리아와 펠로폰네소스를 포위
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칠리아 따위는 군사보급기지에 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에게 희망의 불을 질렀다. 청년들은 선배
들의 원정담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레슬링 도장이나 공회당에 모여앉아 시칠리아 섬의
지도와 리비아,카르타고의 위치등을 모래위에 그릴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철학자 소크라테스나 천문학자 메톤등은 이 원정을 통하여 얻을수 있는 아테네의
이익이 아무것도 없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그 전부터 단골로 나타
나는 수호신이 출현하여 앞으로 재난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계시해준것만 같다. 메톤역시 그
만의 특수한 셈법으로 앞으로의 일을 계산한것이었던지, 아니면 점술을 써서 앞으로의 일을
알아낸 듯싶다. 메톤은 자기가 알아 낸 앞으로의 일이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미친 시늉을
하면서 횃불을 들고 자기집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음과 샅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메톤은 미친 시늉을 한 것이 아니라 밤중에 셀
제로 자기 집에 불을 지른후 날이 밝기를 기다려 민중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불행
한 재난을 당했으므로 아들의 출정만큼은 면제해 달라고 청하였다. 어느 쪽이었든지 간에
메톤은 감쪽같이 시민을 속이고 자기의 뜻을 이루었다.
니키아스는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서도 원정군의 장군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특히 알키방
데스가 동료로 함께 임명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테네 인들
은 알키비아데스의 저돌성을 니키아스의 신중성으로 억제한다면 전쟁은 자기 편에 퍽 유리
하게 진전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세 번째의 장군인 라마코스는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싸
움이라면 알키비아데스 못지않게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성질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장
군으로 선출되었다. 원정용 군비의 규모와 성격에 관하여 논의가 시작되자 니키아스는 또
다시 반대의견을 내어 전쟁을 중지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니키아스의 의
견에 반론을 제시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그 후 니키아스의 의견에 반론을 제시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웅변가인 데모스트라투스가 법의 초안을 작성하여 민회에 제출하였다. 그
법의 내용은 군비와 전쟁의 전반에 걸쳐 장군이 전권을 장악한다는것이었다.
민회는 이 법안을 의결하였고 원정군은 출발준비를 모두 갖추었다. 그런데 꼭 있어야 할
길조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조그마한 징조만 나타났을 뿐이다. 그때는 공교롭게도 아도니스
제가 거행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여자들은 매장하러 가는 시체처럼 꾸민 인형을 안고 머리
를 풀어해친 채 거리를 돌아다니며 만가를 부르고 장례 지내는 시늉을 하는 습관을 치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룻밤 사이에 헤르메스 신의 초상들이 파괴된 사건이 일어났다. 즉 헤르
메스 신의 초상들이 모두 망가져서 얼굴들이 볼품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 일은 펴옷 전
쟁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까지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것은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를 식민지로 가지고 있는 코린트 인이 아테네로 하여금 시칠리아 원정을 연기하거
나 중지하도록 그와 같은 흉조를 획책하여 꾸민 공작이라는 풍문도 떠돌았다.
대중들은 이런 풍설이나 그와 같은 전조 따위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말에
동요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사건은 장난치고 싶은 나머지 결국은 터무니 없는 행동을 하
게 마련인 형편없는 젊은이들이 독한 술에 취한 후 늘 하고 싶어 했던 짓을 한것이라고 생
각하였다.
원로원이나 민회는 이 사건들이 나라의 대사를 반대하는 조직적인 음모라고 분개하면서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며칠 동안에 여러번 모여서 의심스러운 일을 끝까지 샅샅이 조사하였
다.
그동안 민중지도자인 안드로클레스는 노예 몇 명과 체류중인 외국인들 증인으로 데리고
와서 알키비아데스와 그친구들이 헤르메스이외의 초상을 파괴하고 있으며 또 만취된 끝에
황송하게도 엘리우시스의 비식을 흉내내는 등 큰일날짓을 하고 있다고 고소하였다. 그 소환
에 의하면 테오오루스알는사나이는 그 흉내낸 비식행렬의 전령의 역을 맡고 폴리티온은 횃
불드는 사람의 역을 맡았으며 알키비아데스는 제사장역을 맡고 그밖의 친구들은 비식의 초
신자라고 칭하며 그곳에 나와서 구경하였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키몬의 아들 테살루스가
엘레우시스의 두 주신 즉 케레스와 프로세르피네의 두 신을 모독한 죄로 알키비아데스를 고
소한 고소장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민중들은 흥분하였고, 알키비아데스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거기에다 설상가상
으로 그의 숙적인 안느로클레스가 다시 민중의 분노에 부채질을 하였다. 따라서 저돌적인
알키비아데스도 불안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로 출발하기 위하여 군선을 타고 있는 원정군의 선원이나
병사들이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아르고스와 만티네아의
중장보병 1천명이 분명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소리도 들었다.
"우리들은 단지 알키비아데스를 도우려고 멀리 바다 건너 원정길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에게 못된 짓을 하려는 자가 있다면 우리들은 당장 물러설 것이다." 이후부터 알키
비아데스는 다시 힘을 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호출된 날짜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서 출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또다시 낙심한 것은 정적들이었다. 알키비아데스를 대신할 인
물이 없다는 이유로 시민들이 관대한 판결을 내릴것디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를 궁리한 끝에 꾀를내어 웅변가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택하여 민회로 파
견하였다. 그는 공공연하게 알키비아데스의 적이라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키
비아데스의 적이다."라고 공언하고 있는 사람 못지않게 알키비아데스를 미워하고 있는 인
물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대군단의 전권을 쥔 장군을 이미 임명했고 더욱이 자기 나라의 군대 및 동맹군단
의 편성도 다끝났는데 하필이면 그장군을 재판에 회부해놓고 재판인을 제비로 선출한다거나
물시계로 법정변론의 사간을 재는 행위등으로 인하여 출진의 시기를 놓치게 하는 것은 rm
무슨 어리석은 짓이오?"
그리고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어쨌든 이제는 알키비아데스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면서 일단 원정의 배부터 내보내기로
합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 다시 이 자리에 서서 지금과 똑같은 법에 의한 재판을
받도록 합시다."
알키비아데스가 이러한 지연작전의 속셈을 모를 리는 만무하다. 그는 민회에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런식으로 사건을 종말짓지 못하고 고발과 비난으 그대로 남겨둔채 대군의 장으로서 원
저의 장도에 오를수는 없으니 어서 판결을 내려주시오 만일 무죄로 판명된다면 중상을 받지
않는 가벼운 마음으로 적을 무찌를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상책 아니겠습니까?" 그러
나 그는 민회를 설득하지 못한 채 당장 출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140척에 가까
운 3단범선 중장보병 5천100명, 궁병, 투석병, 경장병등 거의 1천3백명의 병사와 이에 필
요한 무기와 군량 등 만반의 준비를 같추고서 동료장군들과 함께 원정의 장도에 올랐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원정대는 우선 레기움 시를 함락시키고 나서 앞으로의 작전에 대한 의
견을 내놓았다. 알키비아데스의 안에 대해서는 니키아스가 반대하였고 라마코스는 찬성하였
다. 마침내 알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 섬으로 함대를 이끌고 가서 카타나 시를 강제로 자기
편에 끌어넣었다.
이때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부터 호출명령을 받는 즉시 아테네로 돌아와서 법정에 출두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알키비아데스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테네 시에서는 노예와 체류중인 외국인의 입을 통하여 알키비아데스에 관련되 애매
한 혐의나 중상모략이 떠돌았다. 그러나 정작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 시를 떠나 원정길에
오르자 정적의 공격은 한층 더 심해졌다. 그들은 헤르메스 주상에 대한 폭행사건에다 예의
그 비식사건까지 결부시켰다 그리고 그 일들이 모두 혁명으로 정체를 개변하려는 도당이 저
지른 동일한 소행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들은 모두 재판을 거치지 않
고 투옥되었다. 그리고는 당시에 그 만큼 중대한 혐의로 고발당한 알키비아데스의 재판에서
판결내리지 않는 것을 새삼스럽게 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키비아데스의 친척과 친구는
말할것도 없고, 그를 알기만 하면 모두 잡아다가 엄벌하였다.
투키디데스는 그의 사기에서 알키비아데스를 규탄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디오클레스와 테우케르하는 이름을 드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희
극작가 프리니쿠스는 그들에 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 그리운 헤르메스여,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무언가 흉계를 꾸미고 있는 또 하나의 디오크리데스 같은자에게도 있지도 않은 중상의 씨
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러자 메르쿠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정말 조심하련다. 저더러운 떠돌이인 테우케르 같은 자에게 고발한 대가로 상을 주지 않
으련다.
그러나 고발자들이 제시하는 증거들 중에서 확증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예를
들자면 고발자중의 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서 헤르메스 주상 파괴범의 얼굴을 알게 되었느냐
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달빛에 비쳐서"
그런데 헤르메스 주상 파괴사건이 있던 날 밤은 그믐이라 달이 뜰리 만무하였다. 이러한
예와 같이 고발자들의 증거는 모두가 말도 안되는 소리뿐이었다. 사리를 깨닫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의혹을 가졌지만 그 중상모략을 감쪽같이 믿고 있던 민중들은 의심을 풀
비 않았다. 그들은 사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던 무렵의 마음상태를 바꾸지 않고 이 사건으
로 기소된 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감금하였다.
이렇게 체포된 재판을 받기 위하여 투옥된 사람들 중에는 웅변가인 안도키데스도 있었는
데 역사가 헬라니코스는 그를 오디세우스의 자손으로 치고 있다. 안도키데스는 민중을 싫어
하는 과두정치파로 알려져 있었는데 헤르메스주상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만한 헤르메스의 주상이라고근 겨우 손가락을 꼽아 셀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그
사건의 오중에서 거의 상처를 입지 않고 있던 것은 바로 그의 집 근처에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도 그 주상은 '안도키데스의 헤르메스'라고 불리고 있다. 이는 거기에 새겨
진 비명과는 상반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 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안도키데스는 그때 우연히 같은 죄목으로 기소되어 투옥된 사람들 중에서 특히 티마이우
스라는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그는 안도키데스만큼 유명하지는 않았으나 지혜나 용기면에
서는 그를 능가하였다, 그는 안도키데스에게 이렇게 말하면 설득하였다.
"당신은 자신과 그 밖의 몇 사람의 죄를 자수하여 감옥에서 나가도록 하십시오. 민회의
결의에 의하여 자백하는 자는 무죄 석방될수 있으니까요. 재판을 받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특히 당신과 같은 유명인사에게는 무서운 결말이 오게 될것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생명을 건지는 편이 누명을 쓰고 죽는것보다 나을뿐더러 크게 보면 이름없는
사람 몇을 격노한 시만에게 희생으로 바치고 많은 착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더 나은 상책입
니다."
티마이우스가 이허게 설득하자 안도키데스는 그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과 몇 사람들
의 죄를 자백하였다. 그는 민회의 결의에 따라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허위고발한 사람
들은 도망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안도키데스는 자기의 자백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 자기 집 하인들까지도 신고하였다.
민중의 분노는 그 정도로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헤르메스 주상 파괴자들을 처치
하자 비로소 분출구를 찾았다는 듯 알키비아데스를 향하여 분노를 터뜨렸다. 마침내 알키비
아데스를 소환하기 위하여 특무선 살라미니아 호가 파견 되었다. 알키비아데스를 체포하는
임무를 띠고 가는 사람에게는 빈틈없이 다음과 같은 명령이 내려졌다. 알키비아데스에게 절
대로 강권을 행사하거나 그의 몸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극히 부드러
운 말투로 다음과 같이 권유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서 재판을 받아 누명을 벗도록 하시오.' 이렇게 세심한 마음을 쓴
것은 만일 그를 거칠게 다루었다가는 적지에 있는 아테네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고 염려한 탓이었다. 만일 알키비아데스가 생각만 있었다면 그런 일쯤이야 식은 줄 먹
기였을 것이다. 알키비아데스가 없자 병사들은 완전히 풀이 꺾였다. 니키아스의 지휘하에서
는 행동의 원동력이 제거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무로 병사들은 전쟁이 수수방관된 채
그저 오랫동안 하는일 없이 질질 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정군에는 니키아스 외에
라마고스라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호전적이며 용감하였지만 가난한 사람이라 덕망이나 존
경과는 인연이 없었다.
알키비아데스는 특무선 살라미니아 호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에 메세네 시가 아테
네에 투하아려는 것을 방지하였다. 메세네에는 자기의 도시를 아테네에게 넘겨주려고 기도
하고 있는 일파가 있었다. 이사실을 안 알키비아데스느 친 시라쿠사파의 사람들에게 그계락
을 밝힘으로써 반역공작을 좌절시켰다 투리이에 배가 닿자 알키비아데스는 배에서 내려 그
대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 곳에서 어떤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알키비아데스, 당신은 태어난 고향도 믿지못합니까?' 이말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
였다.
'다른 일이라면 무엇이든 믿지요. 그러나 일단 내 목숨에 관한 일이라면 비록 나의 어머
니라 할지라도 흑백을 잘못알고서 투표할지 누가아오?" 그 후 아테네인들이 궐석재판으로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소식을 듣자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속삭였다. "제기랄, 이렇
게 무사히 내가 살아 있는 것을 놈들에게 알려줘야지." 기록에 의하면 그에 대한 고소장에
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리키아 구민 키몬의 아들 테살루스가 고소한 바에 따르면, 스캄보니다이 구민 클리니아
스의 아들 알키비아데스는 엘레우시스의 두 주신인 케레스와 프로세르피네를 다음과 같은
행동으로 모독하였다. 즉 알키비아데스는 자기 집에서 엘레우시스의 비식을 흉내내었고 이
것을 친구등에게 보였다. 게다가 제사장이 비식을 거행할 때 입는 옷을 입고 자기 자신을
제사장, 폴리티온을 횃불 드는 사제, 페가이아 구에 거주하는 테오도루스를 전령, ,그밖의
친구들을 비식의 초신자 및 입시자라고 불렀다. 이것은 에우몰피다이 가와 전령 역을 맡
은 집안 그밖에 엘레우시스 출신의 사제들이 정한 율법과 의례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그
리하여 아테네에서는 궐석재판으로 알키비아데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 밖에도 남녀사제에게 명하여 알키비아데스를 공식으로 저주하라는 추가결의까지 내렸
다. 그러나 아그라울레 구민 메논의 딸 테아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결의를 거부하였다
고 한다. "나는 기도드리는 사제입니다. 저주하는 사제가 아닙니다." 아테네 시에서 알키비
아데스에게 이러한 결의와 선고가 내려지고 있을 때 본인은 펠로폰네소스의 아르고스 근방
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는 투리이를 떠나서 곧장 펠로폰네소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아테네 인들에게 잡힐것이 겁났다. 그는 자기의 조국인 아테네에 대해서 이미 절망하고 있
었다. 그느 스파르타에 사자를 보내어 정치적 망명자가 되겠으니 받아달라고 요청하였다.
"나의 신병을 보증하고 신회를 주시오. 그대신전에 귀국이 받은 손해보다 훨씬 더 큰이익
과 원조를 약속하겠소."
스파르타는 두말없이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를 망명을 허락하여 스파르타에 나타난 알
키비아데스는 곧 하나의 일을 해냈다. 즉 시라쿠사 구원을 주저하면서 질질끌고 있던 스파
르타인을 격려하여 길리포스를 지휘관으로 삼은 뒤, 이들을 시칠리아에 파견함으로써 그곳
에 있는 아테네 군을 철저하게 격파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아티카본토의 아테네 인에게
전쟁을 선포하도록 하였다. 세 번째로 그가 한일은 아테네 북쪽의 요충지인 데켈레아에 성
채를 구축케 한 것이었다. 이이상 더 차네네에 큰 타격을 준 일은없었다.
알키비아데스의 공적인 명성은 스파르타 내에서 대단하게 퍼졌고 온 세상을 놀라게 하였
다. 또한 사생활에 대한 평판도 이에 못지 않았다. 그는 스파르타인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따
름으로써 당시의 민중을 끌어 당겨 현혹시켰다. 그는 머리를 면도칼로 민 것처럼 짧게 깎았
고, 냉수욕을 하고, 보리빵을 즐기고, 검은 수프를 마셨다. 이러한 그의 생화태도를 본 사람
들은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이 인물이 과연 옛날에 자기 집에 요리인을 두고, 향소로
몸을 가꾸고, 밀레시아 산 값진 외투를 걸치고 다니던 그 사람일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
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알키비아데스의 탁월한 천성중의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수한 기술이었다. 즉 그는 카멜레온보다도 민활하게 변신할수 있었으며, 다른 사람의 습관
이나 생활방식을 쉽게 자신의 것으로 융화시킬수 있었던 것이다. 카멜레온은 자기의 색깔을
휘게 만들 수는 없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어떠한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라고 꼭 그애고 모방
할수 있었다. 그는 스파르타에 있으면서 즐겨 신체를 단련하고 생활은 근검절약하였으며, 언
제나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오니아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사치를 즐기는 쾌활
한게으름뱅이였다. 또한 트라케에서는 주정뱅이에다 승마에 미친 난봉꾼이었고, 페르시아의
군정관 키사페르사스와 어울릴때면 페르시아 인도 무색할 정도의 호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시시각각으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성격이 바뀔때마
나다. 그의 천성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천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였
다. 그 동안에 만일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는 것 같으면 언제난 상대방의 마음에 들도록 어
떠한 모양으로든지 생활방식을 바꿈으로써 자기의 정체를 숨겼다. 어쨌든 스파르타에서는
그를 겉만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것은 아킬레스의 아들이 아니라, 바로 아킬레스 본인이다. 리쿠르고스가 몸소 길러내기
라도 한 것 같은 스파르타인이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의 거짓없는 기분과 행동을 알았다면 사람은 에우리피데스와 더불어
이렇게 탄식했을 것이다.
"역시 옛날과 다름없는 여자로군,"
예를 들면 스파르타 왕 아기스가 원정을 나가 부재중이었을 때 알키비아데스는 왕비 티마
미아를 유혹하여 마침내 임신까지 시켰다. 왕비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윽고
사내아이가 태어나자, 왕비는 아들의 공적인 이름을 레오티키데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비
가 측근이나 시녀에게 몰래 귀띔한 그 아이의 이름은 알키비아데스였다. 이처럼 열렬한 사
랑의 불꽃이 이 여자의 가슴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알키비아데스 본인은 농담으
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그런 짓을 한 것은 음탕한 생각에서 한 것이 아니오. 또한 쾌락에 굴복한 짓도 아
니오. 그저 내 씨를 스파르타인의 왕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오." 스파르타의 여러 사람
들은 이 사건을 아기스 왕에게 일러바쳤다. 왕은 날짜를 세어 보고 나서야 그 사실을 믿었
다. 왜냐하면 스파르타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깜짝 놀란 왕이 왕비의 침실을 뛰쳐나간 뒤
로는 여러 달 동안 왕비와 동침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기스 왕은 그 후에
태어난 레오티키데스를 자기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오티키데스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되었다.
알키비아데스가 투리이에서 행방을 감춘지 2년이 흘렀다. 시칠리아 섬에서 아테네 군이
패배의 쓴 잔을 마시자 키오스, 레스보스, 키지쿠스의 세 도시는 맹주인 아테네에 반기를 돌
기 위한 의견을 토의하기 위하여 사절단을 스파르타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레스보스를 위해
서는 보이오티아 인이, 키지코스를 위해서는 페르시아 인 파르나바조스가 중간의 위치에서
스파르타와의 교섭을 맡았다. 그러나 스파르타 인은 알키비아데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키오
스를 돕기로 하였다. 알키비아데스도 직접 군선을 이끌고 나왔다. 그는 이오니아 지방의 거
의 모든 도시로 하여금 아테네에게 반기를 들게 하는것과 동시에 스파르타의 장군들과 손을
잡고 아테네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스파르타 왕 아기스는 전에 있었던 왕비의 일로 알키비아데스에게 나쁜 감정을 품
고 있었다. 더욱이 이 무렵에 자꾸만 고조되고 있는 알키비아데스의 명성으로 인하여 한층
더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스파르타의 성공은 알키비아데스 전력의 결과라는 소문이 자자하
게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스파르타 사람 중에서도 뛰어난 세도가로서 야심만만한
사람들은 알키비아데스를 시기하고 그의 존재에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머지않아 이들이
권력을 쥐게 되자, 그들은 본국의 고관들을 움직여'알키비아데스를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이오니아에 내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넌지시 느끼면서 겁을 먹은 알키비아데스는 여전히 스파르타 인과 협력
하면서도 그들의 수중에 빠져드는 것은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다. 그때 알키비아데스는 페르
시아 왕이 이 지방으로 보낸 군정관 티사페르네스네게로 가서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는 순
식간에 군정관의 측근인물 제1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본시 티사페르네스라는 인물은
만만치 않은 심술쟁이로 건달과 사귀기를 좋아하는 사나이였다 그 러한 그도 알키비아데스
의 빠른 변신과 빈틈없는 지략에 탄복하고 말았다. 사실 알키비아데스와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생활을 같이 하고 있으면 그에게 매혹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알키비아데스를 두려워하거나 시기하던 사람들조차도 일단 그와 상종하여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면저도 모르게 기쁘고 그리운 생각이 쌓이고 마는 것이었다.
이렇듯 평소대로라면 페르시아 인 중에서도 뛰어나게 야만적이며 그리스 인을 미워했을
티사페르네스도 알키비아데스의 교언영색에는 저도 모르게 머리가 수그러들었다. 이번에야
말로 그가 이제까지 받아온 찬사를 그대로 갚는셈이었다. 한 예를 들자면, 티사페르네스는
자기가 소유한 정원 중에서도 특히 시원한 초원과 졸졸 흐르는 시내가 있고 뛰어나게 아름
답게 장식한 놀이터와 정자가 갖춰진 정원을 '알키비아데스 정원' 으로 부르라고 명령하
였
다. 그 후로부터 사람들은 모두 그 정원을 그렇게 불렀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의 동정을 믿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끝에 결별하고 말았지만 아
기스 왕은 계속 무서워하가 있었다. 그는 티사페르네스에게 스파르타 인에 대해서 비웃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티사페르네스에게 진언하여 스파르타 군을 원조함으로써 아테네
를 정복시키려는 정책을 버리라고 하였다. 즉 스파르타 군을 보급부족으로 아사시키고, 아테
네와 스파르타 두 나라가 서로 싸우다 지쳤을 때를 노려 손쉬운 방법으로 둘 다 정복하라고
말했다.
이 말에 티사페르네스는 감쪽같이 설득당하고 말았다. 그가 알키비아데스에게 감탄하여
맥도 못추고 있다는 소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그
리스 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에 아테네 인들은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
여 일찍이 알키비아데스에게 언도한 사형선고를 후회하기 시작했다. 알키비아데스 역시 그
나름대로 만일 아테네 시가 스파르타 군에 의하여 완전히 망하게 된다면 스파르타 인의 미
움을 사고 있는 자신은 반드시 그들의 수중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사모스 섬에는 아테네의 모든 병력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그들으 srm 곳을 기지로
삼았다. 아테네는 해군력을 바탕으로하여 아테네에 배반한 동맹국들을 다시 자기 편으로 끌
어들이기도 하고, 그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도 있었다. 이 무렵의 아테네는 아직도 해상에
서 적과 싸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테네 인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적은 티사페르네
스였으며 또한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는 소문이 떠도는 3단 돛단배150척으로 편성된 포이니
키아 함대였다. 이 함대가 나타나는 날이면 아테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 사정을 알고 있던 알키비아데스는 사모스에서 아테네군을 이끌고 있는 장군들에게 비
밀리에 사자를 보냈다. 자기라면 티사페르네스를 아테네 편으로 끌어넣는데 자신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아테네 민중들의 환심을 사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으며, 그들을 용
서하고 있는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귀족들이 용기를 내어 씩씩하게 일어서서 민중의
무법행위를 누르고 아테네 시의 위급을 구하려고 한다면 자기는 협력 할 마음의 준비가 되
어 있을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의 조치에도 응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귀족들 거의 모두는 알키비아데스의 말에 마음이 기울였다. 그러나 오직장군 중의 하나,
디라데스 구의 프리니코스만이 알키비아데스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그는 알키비아데스의 관
심은 아테네에 어떠한 정권이 서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본국에 돌아갈 수 있는 길
만을 꾀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을 비난하고 귀족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반대의견은 무시당했다. 프리니코스는 이제 알키비아데스의 적이 되었다. 그는
비밀리에 스파르타의 적장 아스티오쿠스 제독에게 사자를 보냈다. 알키비아데스라는 인물은
속과 겉이 달라 어떤 일을 꾸밀지 모르므로 감시의 눈을 게을리하지 말고 조심하라고 경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리니코스는 이것이 배반자끼리의 거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왜냐하면아스티오쿠스는 페르시아의 티사페르네스에게 벌벌 떨고 있었으며, 티사페르네스의
측근이 알키비아데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스티오쿠스는 프리니코스의 일을 두사람에
게 털어놓았다.
알키비아데스는 곧 사모스로 사람을 보내어 프리니코스를 반역죄로 몰았다. 프리니코스의
태도에 사모스에 있는 아테네 인은 모두 격노하였다. 그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프리니코스를
적대시하였다. 이렇게 되자 프리니코스도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가
지 남은 길을 택하여 자기에게 불어닥친 이 재난을 더욱 큰 재난으로써 보복하려 하였다.
그는 또다시 스파르타의 아스티오쿠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의 배신행위를 비난하는 한편
아테네의 함대와 진영을 그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프리니코스의 배반행위는 또다시 아스티오쿠스에게 배반당하고 말았다. 따
라서 아테네 군은 별다른 손해를 입지는 않았다. 아스티오쿠스가 프리니코스의 일을 알키비
아데스에게 알려 왔기 때문이다. 이 일은 프리니코스도 그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알
키비아데스가 다시 반역죄로 고발해 올 것을 염려한 나머지 선수를 쳤다. 즉 적이 해상으로
부터 쳐들어 오려 하고 있다고 아테네 인에게 경고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공격에 대비하여
군선에는 승무원과 수병을 태우고, 진지 주위는 벽을 쌓아서 엄하게 경비하라고 권고 하였
다. 아테네 인들이 프리니코스의 권고를 이행하고 있을 때 또다시 알키비아데스에게서 편지
가 왔다 프리니코스는 해군기지를 적에게 넘겨주려는 배반자이므로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테네 인은 이 편지를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적의 모든 동작과 의도를 알고 있는
알키비아데스가 프리니코스르 모함하여 없애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변경순찰병의 하나인 헤르몬이 광장에서 프리니코스를 단도로 살해하였을
때, 아테네 인은 재판을 열어 고인인 프리니코스에게 반역죄를 선고하고, 헤르몬과 그 동지
들에게 칭찬과 꽃다발을 주었다.
이렇게 하여 사모스 섬에서는 알키비아데스 일파가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아테네
시로 피산데르를 파견하였다. 그 임무는 아테네의 정치체제를 변혁하여 귀족의 지도자들을
격려하고 시의 정권을 장악케 함으로써 민주정치의 종말을 지으려는 것이었다. 이 일파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이러한 조건이 성취될 때 비로소 알키비아데스는 티사페르네스를 귀
족파의 동맹자로 끌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테네의 지배권을 장악한 소수의 귀족들이 내세운 표면상의 구실이었다. 그들은
힘을 얻어 5천 인 회를 결성한 뒤 시의 정권을 장악하자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생각을 거의
잊어버렸다. 그리고 전쟁 그 자체에도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시작한지 얼
마 되지 않은 신정권에 대하여 시민들이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늘 과두
정권을 지지해온 스파르타 인이 아테네에 새로 수립된 귀족파의 정권에는 보다 부드러운 조
건을 내세울 것이라고 기대하 였기 때문이다. 아테네 시에 있는 민주파 사람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40인' 전권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
항했다가 살해된 시민의 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모스 섬에 있는 아테네 군 지휘관들은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격분하여 즉시 아테네의
외항 피리이우스로 쳐들어가려고 서둘렀다. 그들은 알키비아데스를 데오라고 사람을 보낸
다음 그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대를 이끌고 400인의 전제자를 타도하라고 명령하
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민중의 천거로 일약 대인물이 되었을 때 그들의 비위를 맞추
기 위하여 노력했을 것이다ㅣ. 더욱이 알키비아데스처럼 떠돌이 추방인이었던 사람을 이러
한 대함대와 대군대를 이끄는 장군으로 임명해주지 않았는가. 민중이 하라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에 들게하고 추호라도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짓을 하지 않
아야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그런 점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답게 그들의
흥분을 꺾음으로써 그들의 실책을 방지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대실
책을 범하지 못하도록 하여 당시의 아테네가 겪고 있던 어려움을 구하였다. 만약 사모스의
아테네 군이 섬을 떠나 본국으로 갔다면 아테네 동족끼리의 참극이 벌어지고, 아테네 시는
전화속에 휘말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오니아 지방전체를 위시하여 헬레스폰트와 에
게 해에 있는 모든 섬들이 싸움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단번에 적의 수중으로 넘어갈 것이
뻔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한 것은 알키비아데스의 공이었다. 그는 공식석상
에서 연설하여 민중을 설득하고 현실을 깨닫게 하였다. 그뿐만아니라, 그들 하나하나를 붙잡
고 사모스를 떠나지 말라고 호소하였다. 이때 그를 도와준 사람은 스티리아 구의 트라시불
루스다. 그는 알키비아데스를 따라다니며 목소리 높여 그를 도왔다. 그느느 아테네에서 가장
큰 목소리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알키비아데스가 세운 두 번째 공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당시 스파르타 인은 페르시
아 왕이 파견한 페니키아 함대의 도착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이 함대
를 아테네 편으로 돌리거나, 적어도 이 함대가 스파르타 쪽으로 넘어 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일을 위해서 재빨리 배로 떠났다. 문제의 페니키아 함대는 이미
아스펜두스 먼 바다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티사페르네스는 이함대를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스라프타 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알키비아데스는 페니키아 함대를 양군, 특히 스파르타측으로부터 빼았아 다른 곳으로 돌
리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페르시아 인 티사페르네스에게 건의하여 그리스 인들끼리
싸움을 붙임으로써 결국은 모두를 망하게 하려는 페르시아의 정책을 좌절시켜야겠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만큼 강대한 해군력이 한쪽으로 가세한다면 다른 쪽의 제해
권은 뿌리 째 뽑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알키비아데스측은 성심성의껏 민주파를 도와 400인 지배를 붕괴시키고 말았다. 아
테네의 시민들은 자진해서 알키비아데스로 하여금 아테네 시로 돌아오게 하라고 지령을 내f
렸다. 그러나 본인은 다음과 같이 마음 속으로 다짐하였다.
'별로 뛰어난 공적도 못 세우고 그저 민중의 동정과 감상에만 매달리 채 고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빛나는 명성을 선물로 가지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 ' 이러한 생각으로 그는 얼
마 안 되는 군선을 이끌고 사모스섬을 떠나 남하하였다. 그리고는 크니도스와 코스섬의 먼
바다를 순항하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자 스파르타 장군 민다루스가 전 함대를 이끌고
헤레스폰트로 떠나고 아테네 해군이 그 뒤를 쫓아갔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는 아테네 군
을 돕기 위하여 급히 그쪽으로 향하였다. 그가 3단범선 18척을 이끌고 도착한 것은 때마침
양군이 아비도스 섬 근해에서 만나 전 함대를 투입하고 대격전을 벌였을 때였다. 승패는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저녁까지 격전이 계속 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 곳에 나타난
알키비아데스 함대는 양군에게 각각 엇갈린 생각을 주었다. 적군은 이들을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여 용기를 얻었고, 아테네 군은 알키비아데스 함대를 적의 원군으로 오인하고서 벌
벌 떨었다. 알키비아데스는 기함에 아테네 우군의 깃발을 올리고 적을 향하여 덜려들었다.
그리고 스파르타 군을 몰아쳐서 해안으로 배를 대게 한다음, 그들의 배를 산산이 부수어버
렸다. 바닷속에 내동댕이쳐진 병사들은 헤엄을 쳐서 도망쳤다. 그때 페르시아의 장군 파르나
바조스가 보병을 이끌고 달려와 함선을 지키며 바닷가에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아테네
군은 적함30척을 나포하고, 아군의 병사를 바닷속에서 구출하였다. 그리고는 그 곳에 전승
비를 세웠다.
이 빛나는 전과에 힘입어 알키비아데스의 공명심은 급속하게 타올랐다. 그는 곧 페르시아
의 군정과 티사페르네스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선물과 공물을 고루 갖추고 위풍당당하게 시
종들을 거느려 그에게로 갔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전혀 뜻하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티
사페르네스는 오래 전부터 스파르타 인의 공작에 말려들어 있었다. 그는 이사건으로 페르시
아 왕의 진노를 사지나 않을까 하고 벌벌 떨었다. 그때 마침 알키비아데스가 찾아왔으므로,
그는 웃음을 머금으며 알키비아데스를 나포하여 사르디스 섬에 감금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
면 스파르타 인이 자기를 중사하려는 모략이 사실무근으로 판명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
문이다.
그러고 나서 30일이 지났다. 포로신세가 된 알키비아데스는 어디선인지 말을 얻어타고 감
시병의 눈을 피하여 클라조메나이 시로 도망쳤다. 그리고 앙갚음을 하려는 생가가에서 자기
가 도망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티사페르네스의 비밀지령에 힘입은 것이라고 나발을 불어대
었다. 이로 인하여 티사페르네스의 체면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후 알키비아데스는 자진하
여 아테네 군의 진영으로 스파르타의 제독 민다루스가 파르나바조스와 함께 키지쿠스 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병사들을 선동하였다.
"그대들은 이제야말로 해륙 양면에서 적과 싸우고 있으며, 성 공격까지도 감행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르 거두지 못하는 한 보수는 없는 줄 알아라." 그는 병사들을 배에
태우고 출항하였다. 다음날 아침 알키비아데스는 프로콘네수스 섬에 함대를 세웠다. 그리
고 항구에 잇는 배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나포해 엄하게 감시하였다. 또한 아테네 함대에게
이제부터 적군을 기습할 것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때 갑자기 호우가 쏟아졌다. 그리고 천둥번개와 어둠까지 합세하여 아테네 군의 작전을
감추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후변화는 적의 눈만 가린 것이 아니다. 아테네 군에서도 알
키비아데스가 갑자기 나타나서 전원에게 배에 오르라고 명령한 뒤 키지쿠스를 향하여 출격
하라고 하였을 때에는, 이미 병사들이 전의를 잃고 있어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전혀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후 어둠이 걷히자, 찬란한 햇빛 속에 떠오른 것은 키지쿠스
항구 앞 바다를 왔다갔다하고 있는 적 펠로폰네소스 함대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적이 아테네 군 선단의 위용에 질려서 해변가로 도망치지 않을까 하고 염
려하였다. 그래서 다른 장군들에게는 나중에 함대를 이끌고 자기 뒤를 따라오라고 넌지시
일러 두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은 40척의 군선만 이끌고 적 앞에 나타나 싸움을 걸었다. 이
규모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간 적의 함대는 알키비아데스를 깔보고 성급하게 쳐들어왔다. 이
것을 본 알키비아데스 함대도 즉시 적의 함대로 육박하여 들어갔다. 쌍방간에는 치열한 전
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때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테네 함대가 교전중인 적의 함대를 향
하여 쳐들어 갔기 때문에 적은 겁을 집어먹고 육지를 향하여 도주하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쾌속선20척을 이끌고 나아가 적의 한가운데를 뚫고 상륙했다 병사들은 배
에서 내려 배에서 도망치는 적병을 추격하였고, 그 결과 많은 적을 살해하였다. 적을 도우러
왔던 민다루스와 파르나바조스도 도주하고 말았다. 아테네 군은 무수히 많은 적의 시체와
무기를 획득하고, 함선 또한 한척도 빼놓지 않고 나포하였다. 그리고 파르나바조스가 버리고
간 키지쿠스 시를 정복하고, 그 곳에 진주하고 있던 페로폰네소스 수비대를 괴멸시켰다 그
결과 아테네 군은 헬레스폰트를 눌렀을 뿐 아니라, 그 밖의 다른 해역에 있는 스파르타 군
도 힘으로 몰아내버렸다 이 비운을 나중에 본국의 감독관들에게 보낸 스파르타의 간결한 보
고서가 아테네 군에게 압수되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배들을 잃음. 민다루스 전사. 병사들은 아사상태에 있음. 방도가 없다. ' 그러나 알키비
아데스의 부하병사들은 이번 승리로써 의기양양하게 콧대가 높아졌다. 그리고 패배를 모르
는 자신들이 여러번 패전한 다른 병사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아서야 되겠느냐고 호언 장담하
였다 왜냐하면 오래 된 과거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트라실루스가 에페소스 싸움에서 패했
을 때 에페소스 인은 청동으로 만든 승리의 기념비를 세워 아테네 인이 겪은 패전의 치욕을
새겨 넣었던 적이 있었다. 이에 알키비아데스의 병사들은 트라실루스의 병사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자신들과 그들의 장군을 몹시 자랑하며, 트라실루스와 같은 자들과는 몸을 같이 단
련하거나 진영 내의 부서를 같이 하는 일은 딱 질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보병과 기병으로 편성된 대군을 이끈 파르나바조스가 이며 아비도스를 침공한 트
라실루스의 부대로 쳐들어갔을 때, 알키비아데스는 트라실루스를 구해내기 위해서 적을 무
찔렀다. 그리고 트라실루스와 협력하여 도주하는 적에게 추격을 갛라며 해질 무렵까지 이르
렀다. 이렇듯 두 장군의 병사들은 서로 전우가 되어 기뻐하며 진지로 돌아왔다.
다음날 알키비아데스는전승비를 세웠다. 그러고 나서 누구하나 저항하는 사람 없는 파르
나바조스 영내를 약탈하며 돌아 다녔다.. 이때 알키비아데스는 남녀 사제들까지 포로로 잡았
으나 그들은 그냥 돌려보냈다.
또한 그는 이미 아테네를 배반하고 스파르타의 수비대사정관을 받아들이고 있던 칼케돈 시
에 대하여 싸움을 걸었다. 그런데 칼케돈 시는 아테네와 우호적으로 지내오던 비티니아에게
모든 물자를 맡기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군대를 이끌고 비티니아 국
경으로 가서 전령을 보내 비티니아 인을 힐책하였다. 그러자 비티니아 인은 겁을 내어 칼케
돈 시에 맡겨두었던 물자를 알키비아데스에게 바치는 동시에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다.
그후 알키비아데스는 해협에 있는 도시 칼케돈을 바다까지 닿는 바리케이드를 쌓아 봉쇄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파르나바조스는 이 봉쇄를 풀기 위하여 아테네로 쳐들어왔다. 더욱이
이에 호응하여 시내에서는 스파르타로부터 파견된 사정과 히포크라테스가 부하들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알키비아데스는 동시에 양쪽의 적과 대적하여 싸울 수 있도록 전열ㅇㄹ 가다
듬었다. 그리고는 파르나바조스를 격파하고 히포클라테스와 무수히 많은 병사들을 격파하여
죽였다.
그 다음, 그는 직접 헬레스폰트로 건너가서 돈을 챙겼다. 그러고 나서는 셀림브리아 시로
갔으나, 너무 서두른 나머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 곳에서는 이러한 경위가 있었다. 셀
림브리아 시에서는 시내에 있는 내통자들이 심야에 횃불을 올려 그에게 신호하기로 되어 있
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갑자기 변심하고 말았다. 음모가 탄로날까 겁이 난 그들은 약
속 시간이 오기 전에 횃불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알키비아데스의 군대가 준비
도 되기 전에 횃불이 오르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신호를 본 알키비아데스는 그 즉시 부하30
명을 이끌고 성벽쪽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는 나머지 병사들에게 곧 따라오라고 명령하였다.
성문은 그를 맞이하여 활짝 열렸다. 그러나 30명의 병사와 뒤쫓아온 20명의 경무장병까지
합쳐서 성내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무장한 셀림브리아 병사들이 그들을 향하여 TK우려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적과 싸워본들 도저히 살아 남을 것 같지 않았다. 그
렇다고 해서 그 날까지 싸움을 지휘하면서 패배라는 것을 전혀 몰랐던 알키비아데스가 도망
치는 것도 수치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조용하라는 나팔을 불게 한 다음 옆에 있는 병사를 시
켜 셀림브리아 군에게 아테네 군을 향하여 무기를 들지 말라고 통고하였다. 이 통고를 들
은 셀림브리아 군은 아테네의 전 군이 벌써 성 안으로 쳐들어온 것으로 오인 하였다. 그리
하여 그들은 전의를 상실하였으며, 화평을 하여 일을 수습하려던 자들은 힘을 얻었다.
결국 쌍방이 모여 담판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 알키비아데스의 잔류부대 병력이 도착
하였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셀림브리아 군이 화평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으므
로 오히려 트라키아의 병사들이 셀림브리아 시내를 약탈하며 돌아 다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였다. 왜냐하면 지원군의 대부분이 그에게 끌려 모여든 사나운 자원병들이기 때문
이다. 그는 이 병사들을 모두 시외로 철수시키고, 셀림브리아 군의 간청을 받아들여 시민들
에게는 전혀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 다만 돈만을 걷고 수비대를 주둔시킨 뒤 그 곳을 떠났
다. j
이야기가 바뀌어, 칼케돈 시를 포위하고 있던 장군들은 파르나바조스와 화평을 맺었다. 그
조약의 내용은 아테네가 칼케돈시와 파르나바조스로부터 배상금을 받을 것, 칼케돈 시는 또
다시 아테네에 복종할 것, 파르나바조스는 이 곳에 대하여 보복행위를 취하지 말 것, 그리고
페르시아 왕에게 보내려는 아테네 사절단의 안전을 보장할 것 등이었다 알키비아데스가
돌아오자, 파르나바조스는 그에게도 또한 그 조약을 지킬 것을 맹세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러나 알키비아데스는 파르나바조스 자신이 그 맹세를 하기 전까지는 싫다고 고집을 부리며
듣지 않았다.
결국 서로간의 맹세가 끝나자,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게 배신행위를 한 비잔티움 시로
가서 그 곳을 포위하여싿. 그러나 비잔티움측의 아낙실라우스와 리쿠르고스와 그밖의 몇 사
람들은 만일 시가 약탈당하지만 않는 조건이라면 비잔티움을 넘겨줘도 괜찮다는 협상안을
제의해 왔다. 그러자 알키비아데스는 이오니아에서 일어난 새로운 상대를 찾아 떠난다는 소
문을 퍼뜨렸다. 그는 한낮에 전 함대를 이끌고 출항한 뒤 그날밤 가만히 되돌아왔다. 그리고
는 직접 중장병부대와 함께 상륙하여 소리 없이 성밑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는 성 안으로
부터 내통자의 신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나머지 아테네 함대는 항구를 향하여 전군이 쳐들
어온 것처럼 요란한 환호성을 지르며 항구로 쳐들어갔다.
갑자기 발생한 이 일에 깜짝 놀란 비잔티움 시민 전체는 한 덩어리가 되어 항구와 항구에
있는 자기 편 함대를 수호하려고 달려 나갔다. 그리하여 시내에 있던 아테네파의 사람들은
무난하게 알키비아데스를 맞아들여 입성시킬 기회를 얻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테네 군이 전
혀 싸우지 않고 이 도시를 수중에 넣은 것은 아니어싿. 빋잔티움을 수비하고 있던 펠로폰네
소스, 보이오티아, 메가라 병사들은 군선에서 내려온 아테네 군을 격파하여 도로 배 안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의 별동대가 성내로 쳐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은 즉시 군대의 일부를 시내로 되돌려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 들은 아테네 군과
싸우려고 아테네 군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리고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에 알키비아데
스는 우익을 맡고 테라메네스는 좌익을 이끌어 적군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살아 남은 적병
약 300명 가량을 포로로 잡았다.
싸움이 끝난 다음 비잔티움의 시민 중에서 피살되거나 추방당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
다. 왜냐하면 알키비아데스에게 내통한 자들은 이러한 조건으로 이 도시를 넘겨주었던 것이
다. 또한 그들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에 기인하여
나중에 아낙실라우스가 스파르타에서 반역죄로 기소되었을 때, 자기는 무엇 하나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다고 변명하고, 자기의 행동이 정당하였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의 진술
내용은 이러하였다.
"나는 스파르타 인은 아니다. 비잔티움의 인간이다. 그리고 이 눈으로 본 것은 스파르타가
아니라, 우리들의 비잔티움이 위험을 당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의 시 주의는 완전히 적
에게 포위되어 무엇 하나 가지고 나올 수가 없었고, 얼마 안 남은 양식은 시를 수비하는 펠
로폰네소스 군과 보이오티아 군이 다 먹어 치워버린 후였다 . 비잔티움의 시민은 처자와 함
께 모두가 다 기아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시를 적에게 팔아넘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과 재난으로부터 시민들을 구해낸 것이다. 그리고 비잔티움의 이익이야말로 절
대적인 선과 정의라고 보는 스파르타의 가장 고결한 정신을 본받은 것이니, 자기 나라를 섬
기는 것이 가장 고귀하고 정당한 정신이다."
스파르타 인들은 이 말을 듣고 정말 훌륭하다고 감탄하며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ㅛ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
이상으로 몇 번씩 적을 격파한 자신의 장한 모습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보이고 싶었다. 생각
이 여기에 마치자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고향을 향하여 배를 돌렸다 그 선단으로 말할 것 같
으면 배의 주위에 방패와 그 밖의 전리품을 가득 걸어 장식하고, 무수히 많은 포로를 실은
배를 밧줄로 끌고 갔다. 거기에는 알키비아데스가 격파하여 수중에 넣은 전리품으로서 적
함에서 빼앗은 이물 장식물이 많이 실려 있었는데 그 수를 합치면 200여 개난 되었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는 사모스 인 두리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여기 피티아 경기의 피리 우승자 크리소고누스가 부는 피리 소리에 맞추어 모든 배들이
노를 젓고, 비극배우 칼리피테스가 가락을 맞춘다. 두 사람은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과 헐렁
한 저고리를 입고, 무대 위에 설 때처럼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이렇듯 기함은 새빨간 돛
을 달고 입항하였는데, 그 꼴은 마치 주정꾼들이 술에 만취되어 밀려들어온 것과 진배없는
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역사가 테오품푸스도, 에포로스도 또 크세노폰도 쓰고 있지 않다.
추방된 뒤 고생을 겪다가 겨우 고국으로 돌아오는 알키비아데스가 그렇게까지 교만한 태도
로 아테네의 시민들을 대하였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 그는 벌벌 떨며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배가 항구에 도착한 뒤에도 갑판에 그
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는 사촌 에우리프톨레무스의 모습이 보이고, 그 밖의 친구와 친척들
이 큰 환성을 올리며 모두들 마중나온 모습이 보이자 겨우 배에서 내렸다. 마침내 알키비아
데스가 아테네의 땅을 밟자, 마중나온 사람들은 다른 장군은 본 체도 않고서 '와!' 하고 환
성을 올리며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면서 반갑게 껴안았다. 그리고 그의 신변을 둘러싼 채 가
는 길을 지켰고, 옆으로 다가온 사람들 역시 그의 목에 화환을 걸어주었다.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 사람은 멀리서 그의 모습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나이먹은 사람들은 젊은이들에게 그를
가리키며 '저분이 알키비아데스다' 라고 가르쳐주었다.
아테네의 시민들은 눈앞에 있는 이 행복을 보고서도 과거 비운의 나날이 회상되어 뛰어오
를 듯한 기쁨 속에 눈물이 섞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가슴 속 깊이 다음과 같은 생각
을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때 만일 시칠리아 원정을 알키비아데스에게 그대로 군의 지휘를 맡겨더라면, 시칠
리아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밖에 우리가 가졌던 기대도 온통 깨지지 않았을 것
이다. 그리고 그 밖에 우리가 가졌던 기대도 온통 깨지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사실 바로
어제까지 우리 아테네는 바다의 세력이 끊기고, 육상에서도 겨우 아테네 주변에만 힘이 미
칠 정도였다. 더욱이 시내에서도 집안 싸움이 잦았다. 그러나 무참히 눌려 폐허가된 이 아테
네를 알키비아데스가 건져내었다. 그는제해권을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육상의 적과도 싸워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기 때문에.'
이보다 앞서 알키비아데스를 추방에서 불러들이자는 결의가 민회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
결의안을 제출한 것은 칼라이스크루스의 아들 크리티아스였다. 그는 자작시 속에 다음과 같
이 노래불러 자기가 한일을 남겨 놓고 있다.
그대를 추방에서 부르도록 회의에서 의견을 제출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가 이것을 초안하여 결의케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로 돌아오자, 시민들은 곧 민회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알키비아데스는 그 자리에 모습을 나타내고 자기가 지금까지 겪은 갖가지 고생을 눈물을 머
금은 채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새삼스럽게 거칠고 긴 말로 시민을 비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된 걱이 결국 자신의 운이 나빴던 탓이라고 하였다. 또한 나면
서부터 따라다니는 시기 많은 신령의 조작이라고 하였다. 그는 다시 하고 싶은 말을 다하여
시민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희망의 불꽃을 사르고 용기를 북돋아준 것이었다.
시민들은 그의 머리에 황금관을 얹어주고 해륙 양군의 전권을 장악하는 장군으로 추대하
였다. 그리고 과거에 그를 추방하면서 몰수했던 재산을 다시 돌려 주었다. 그리고 민회의 명
령에 의하여 에우몰피다이 가와 전령역을 맡은 집의 사람들이 그에게 퍼부었던 저주를 취소
하라는 민회의 결의가 통과되었다. 민회에서는 사제들로 하여금 그를 저주하였던 것을 취소
하게 하였다. 그런데 다른 사제들은 모두 다 그것을 취소하였으나 오로지 한 사람, 즉 사제
장 테오도루스 하나만 이에 응하지 않았다.
"만일 그 사람이 나라에 대하여 이제까지 무엇 하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에
게 나쁜 저주의 말을 했을 리가 만무했을 게 아니오."
이렇듯 알키비아데스의 나날은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 중에는 그가 돌
아온 날짜를 보며 불길한 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알키비아데스의 배가
아테네로 돌아온 그 날에는 공교롭게도 아테네 여신 플린테리아 제사가 한참 거행되고 있는
주이었기 때문이다. 이 제사의식은 사제인 프락시에르기다이 가가 아테네 여신 초상의 옷과
패물일체를 벗기고 깨끗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날에는 여신의 벗은 초상을 사람들이 보
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었다. 이 행사는 타르겔리온 달 제25일에 행하였는데 이 날은 1년중
가장 불길한 날로 생각되어 왔다. 이 날이 되면 시민들은 하루 내내 일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러한 시기에 알키비아데스가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아테네 여신
이 알키비아데스를 반겨 맞이하지 않고, 모습을 감춘 채 그를 쫓아버리려는 증거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은 알키비아데스의 뜻대로 되어갔다. 그는 3단범선 100척에 병
사들을 싣고, 함대를 이끌어 또 다시 출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때 한 가지 큰 야망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알키비아데스는 엘레우시스 비식의 날까지 그대로 시내에 머
물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러한 까닭이 있었다. 그 무렵 데켈레아에는 이미 적 스파르타의 성
채가 구축되고, 거기 모여 있는 적군에 의하여 엘레우시스 성도는 차단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엘레우시스로 가는 제전의 행렬은 해로로 가야만 했고, 그 때문에 행사는 이채
로운 준비를 많이 갖추지 못하였다 장엄한 행렬을 짓고 가는 것과 이아쿠스 신을 모시고 갈
때의 관례였던 제사와 가무, 그 밖에 도중에서 드리던 갖가지 의식도 부득이하게 생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알키비아데스는 제전의 행력을 적으로부터 지키면서 행력을 육로로 유도하여 엘
레우시스 신 참배를 실천함으로써 이 제사의 고전적 영광을 부흥시킨다면, 그야말로 신들에
게 영광을 드리는 동시에 그의 명성을 더욱 떨치게 될 터이니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스파르타의 왕 아기스가 제전의 행력을 무사히 통과시켜준다면 그의 위신을 잃게 되는
일이고, 그와는 반대로 제전의 행력을 공격한다면 알키비아데스 자신은 아테네 시민드이 지
켜보는 앞에서 조국의 가장 성스러운 대사를 위하여 신들이 기뻐하는 신성한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결국 시민들은 알키비아데스의 무용을 지켜보는 증인이 될 것이다.
마음 속으로 결정을 마친 알키비아데스는 에우몰피다이 가와 전령 가에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엘레우시스로 가는 길가의 산정에 초병을 배치해 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전위대를 선발시켰다. 그리고 그 뒤를 비식의 사제와 사제장, 그리고 초신자
들이 따르게 하였다. 이러한 제전행렬의 주위를 중장병사들로 둘러싼 후 엄숙하고도 질서정
연하게 한 치의 헝클어짐 없이 행렬지어 앞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알키비아데스가 장군으로
서 연출해 보인 이 광경은 정말로 엄숙하고도 신성해 보였다 그를 시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것을 바라보며'제사장 알키비아데스, 비식의 사제 알키비아데스'라고 부를 정도 였다.
그러나 걱정했던 적은 누구 하나 쳐들어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알키비아데스는 엘레우시
스에 도착한 행력을 다시 아테네 시까지 무사하게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제전행력의 경비에
성공하자 그는 의기충천하여, 자기가 지휘하는 이상 아군에 대적할 적은 하나도 없다고 말
하며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는 미천하고도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인망이 매우 높았다. 이들은 이상스러울 정도롤
그가 통치해주기를 원하였다. 그 중에는 실제로 알키비아데스를 찾아와서 자신들의 염원을
입밖으로 내어 권고하는 사람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남들이 시기하는 것에 조금도 개의치 마십시오. 그리고 민회의 결의나 법이나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일소하여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게 한다음, 뜻대로 정치해 주십시오." 그러
나 본인인 알키비아데스가 독재지배라는 것을 도대체 어떠한 모양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 점은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당시 시의 유력자들은 알키비아데스가 독재정치를 하게 돌
것을 무서워하였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알키비아데스를 출전케하려고 조바심을 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 드는 장군을 선출하는 일이나 그 밖의 일들을 그가 원하는 대로 결의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100척의 함선을 이끌고 아테네를 출발하여 안드로스 섬으로 쳐들어
갔다. 그리고 안드로스 섬의 시민들과 거기에 배치되어 있던 스파르타 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다시 전진하여 시를 점령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것은 나중에 그의 정적이 그를 규
탄할 때 사용한 단서가 되었다.
만약 자신이 명성이 너무도 커서 망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보다도 알키비아데스였
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수많은 성공의 원인이 된 배짱과 지략은 너무나도 유명했기 때문
이다. 그가 무엇에 실패했을 경우, 그것은 고의로 저지른 것처럼 의심을 받았다.
세상 사람들은 알키비아데스가 못한는 것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만일 알키비아데스가 하고 싶은 생각만 있다면 무엇 하나 실패할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하였
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오니아 전체와 더불어 키오스 섬까지 아군의 수중에 들어왔
다는 뉴스를 언제 듣게 될지 무척 고대하고 있었다. 그만큼 사람들은 모든 일이 생각한 대
로 척척 이루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신경질을 부렸다. 그런데 아테네가 페르시아 대와이라는
커다란 부력을 뒷받침으로 가진 적을 상대로 하여 싸우기 위해서는 항상 자금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알키비아데스는 병사들의 봉급과 양식을 구하려고 몇 번씩 본부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러한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마지막으로
치명적인 공격을 받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용무로 인하여 군을 떠나 동안에 생긴 일이다.
그 무렵 스파르타 인의 함대사령관으로 파견된 리산테르는 페르시아 왕의 아우인키루스에
게서 받은 돈으로 병사들의 급료를 하루 3오불에서 4오불로 인상하였다. 그러나 알키비아데
스 쪽의 3오불의 급료도 지출하기가 곤란한 상태였다. 더욱이 그는 군자금을 각출하기 위해
서 카리아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카리아에 다녀오는 동안 함대의
지휘를 안티오코스에게 맡겼다. 그는 그는 항해술은 뛰어났으나 그 밖의 일에는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그는 알키비아데스로부터 적이 쳐들어오더라도 맞서서 싸우지 말라는 엄명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교만함에 젖어 적을 깔보고 있던 안티오코스는 알키비아데스의 명령을
무시한 채 자신의 배와 또 다른 군함에 병사를 태우고 에페수스로 향하여 떠났다.
그리고는 바닷가에 끌어올려져 정렬되어 있는 적의 함대 앞을 왔다갔다하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몸짓을 해보였다. 화가 나나 리산데르는 몇척의 배를 출항시켜 안티오코슬
르 추격하였다 그러나 아테네의 구원군이 오는 것을 보고는 리산데르도 전 함대를 이끌고
출격하였다. 그는 아테네 군을 격파하고 안티오코스를 살해하였다. 또한 많은 군선과 병사를
포로로 잡고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알키비아데스는 즉시 사모스 섬으로 돌
아와 전함대를 이끌고 리산데르에게 도전하였다. 그러나 리산데르는 먼저 거둔 전과에 만족
하며 이 도전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테네 군의 진영에는 알키비아데스를 미워하는 일파가 있었는데 그 중에 트라손의 아들
트라시불루스가 있었다. 그는 아테네로 건너가 알키비아데스를 고발하였다. 그리고 민회에서
시민들을 선동하며 이렇게 연설하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시를 파멸시키고 함선을 잃었다. 왜냐하면 그가 장군직을 소홀히
하고 술이나 전원생활을 누리는데 유력한 측근에게 군의 지휘를 맡겼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로 코앞에서 적의 함대가 호시탐탐 우리 나라를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이때 장군이
라는 자는 군자금을 모금한다는 명목으로 한가롭게 배를 타고 돌아다니며 술타령을 하고,
아비도스와 이오니아 주변의 기생들과 주색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 알키비아
데스의 정적들은 이에 덧붙여 그가 자기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거나, 또는 살고 싶지 않을
때를 대비한 은신처로 트라케의비산테 근처에 성채를 구축하였다고 규탄하였다 시민들은
이 말을 감쪽같이 믿고,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노골적으로 나타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장군으로 선출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겁을 집어먹은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군과 깨끗이 작별하였다. 그리고는 용병을 모집하여 새로운 군을 편성하고 행동에 지조가
없는 트라키아 인들과 싸워 이김으로써 그들을 정복하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이 싸움에서 획
득한 포로와 전리품을 팔아서 돈을 장만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가 이웃한 여러
나라들을 외적인 아테네로부터 구하였다.
그후 알키아데스의 뒤를 이은 티테우스, 메나데르, 아디만투스 등의 장군들은 아테네에 남
은 전 함대를 헤리스폰투스의 아이고스포타미에 집결시키고 있었다. 날이 밝자 그들은 대안
인 람프사쿠스에 정박하고 있는 리산데르 함대에 도전하였다. 그리고는 즉시기지로 돌아와
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며 지냈다. 마치 적을 완전히 경시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이때 그 근처의 성채에서 살고 있던 알키비아데스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상태를 바
라보며 단지 자기와는 관계없는 일로 여긴채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말을 몰고 아테
네군 진지로 가서 장군들을 책망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귀하들이 이런 곳에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은 잘못이오. 여기는 항구와 도시가 없으며 양
식도 멀리 세스토스로부터 장만해와야 하지 않소, 또 병사들이 육지에 올라 마음대로 돌아
다니며 뿔불이 흩어지는 것을 내버려두고 있소. 그런데 저 대안인 람프사쿠스에는 적의 대
함대가 정박 중이며, 이미 단 한사람 장군의 명령에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도록 훈련된 병사
들이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로 적의 함대를 상대하고 있는 것은 위험 천만이오." 알키비
아데스는 충고를 마치며 아테네 함대를 세스토스로 옮기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아테네
장군들에게 이 충고는 쓸데 없는 것이었다. 장군들은 알키비아데스의 충고를 실행하기는커
녕 오히려 비웃었다. 장군 중의 하나인 티테우스는 거만한 태도로 이렇게 말하였다.
"미안하지만 지휘관은 귀하가 아니라 우리들이니 어서 물러 가시오." 알키비아데스는 그
들 사이에 무슨 음모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곳을 물러났다. 그는 군문 밖까지 자신을 배웅해준 사람에게 말했다.
"장군들이 나를 모욕하지만 않았다면 반드시 이 손으로 며칠만에 스파르타 함대로 하여금
아군과 싸우게 하거나, 아니면 그 함대를 버리고 도망치게 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하게
하였을 텐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생각은 여러 가지였다.
"저건 그 사람이 늘 잘하는 호언장담에 지나지 않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
면, 다른 사람은 다르게 말하기도 하였다.
"알키비아데스가 트라키아의 투창병과 기병을 대거 이끌고 육상에서 쳐들어가 적의 진영
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다면 그렇게 호언장담할 가치가 있겠군." 알키비아데스가 아테
네 군 작전의 허점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은 실전에서 곧 입증되었다. 왜냐하면
난데없이 리산데르가 아테네 군을 향하여 기습작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허를 찔린 아테네
군은 대규모의 함대 중에서 오직 여덟 척만 코논 장군과 함께 도주했을 뿐이다 나머지 200
척에 가까운 함선은 모두 리산데르에게나포된 채 유인되어 갔다. 더욱이 리산데르는 아테네
병사 3천명을 생포하였으나 모두 죽여 버렸다. 그 여세를 몰아 리산데르는 얼마 후 아테네
를 정복하여 군함을 불사르고, 시내의 장성을 파괴하였다. 정세가 이렇게 되고 보니 알키비
아데스마저도 해륙 양면을 지배하는 스파르타 인이 무서워졌다. 그는 비티니아로 옮겨갔다.
그는 미리 재물과 보석들을 그 곳으로 몰래 보내놓기도 하였고, 또한 자신이 떠날 때 직접
가지고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챙긴 재산보다 더 많은 양의 재물이 그가 살고 있던 성
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챙겨가지고 간 재물과 보석의 대부분도 비티니아에서 트라키
아 인들에게 약탈당함으로써 잃어버렸다.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를 찾아가겠다고 결심하엿따. 대왕이 자기를 시험해본다면 일찍이 자기에게 피신 온 테미
스토클레스 못지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신뢰를 줄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오
히려 명분이라는 점에서는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해보기로 하였다. 왜
냐하면 그는 테미스토클레스처럼 아테네 시민에게 복수하자도 않았고, 단지 이 나라를 위
하여 스파르타를 상대로 페르시아 대왕을 도왔으며, 또한 대왕의 군대를 제공해달라고 부탁
하려는 것이므로 별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파르나바조스가 자신을
페르시아 대왕에게 잘 안내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프리기아로 찾아간 그는 얼마 동안
묵으며 후대를 받았다.
이때 아테네는 동맹의 지배권을 박탈당한 처지라 시민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리산데르에 의하여 자유가 박탈되고, 조국이 30인 독재자들의 수중으로 넘어감으로써 사태
가 벌써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시민들은 구국의 길이 완전히
막히지 않았던 과거의 국난에서 느끼지 못했던 비분에 참을 수 없이 눈물을 흐렸다. 그들은
일찍이 자신들이 저지른 실책과 잘못을 하나하나 회상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심
했던 것으로, 자신들이 알키비아데스를 또 다시 학대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꼽았다. 알키비
아데스는 잘못한 일이 전혀 없었는데 나라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시민들은 얼마 안 되는 군
함을 단지 알키비아데스의 부하가 잃었다는 이유로 그 책임을 알키비아데스에게 덮어씌우고
이를 빌미로 하여 그와 같은 절세의 명장을 잃은 것을 큰 수치로 삼았다. 절망적인 국치를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인들은 알키바아데스만 어딘가에 살아 남아 있기만 한다
면 아직도 살아남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알키비아데스는 과거에
처음 추방당했을 때에도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힘만 충분히 있다면 무지막지한 스파르타 인과 주정뱅이 30인 독재자를
그대로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시민들이 이러한 희망을 꿈꾸고 있던 것은 전혀 허망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 무렵에는 30
인 독재자들도 알키비아데스의 생각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알키비아데
스의 생각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알키비아데스의 행동을 중시하며 조샇
게 되었다. 마침내 30인 독재의 수령 크리티아스는 스파르타의 장군 리산데르에게 이렇게
충고하였다.
"아테네의 민주적 색채를 완전히 일소하지 않으면 스파르타는 절대로 안심하며 그리스를
지배할 수 없소, 설령 아테네가 30인 독재정권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하더라도 저 알키비
아데스가 살아 있는 이상 아테네 인들을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오." 리산데르가 크
리티아스의 충고에 겨우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스파르타의 본국 정부로부터 '알키비아데
스를 없애라' 하는 밀서가 왔기 때문이다. 이 명령은 스파르타의 정부가 알키비아데스의 역
량과 지모는 물론 뭔가 예측할 수 없이 큰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성격을 두려워 한 것인
듯하다. 혹은 한때 알키비아데스에게 혼쭐이 난 아기스 왕의 원수를 갚으려는 의도였거나.
이러한 이유들 중의 어느 하나였을 것이다.
리산데르는 파르나바조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알키비아데스를 없애라는 명령을 전하였따.
그러자 다시 파르나바조스는 그 일의 집행을 그의 동생 마가이우스와 숙부 수사미트레스에
게 맡겼다.
그 무렵 알키비아데스는 프리기아의 어느 촌락에서 티만드라 라는 애첩과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는 이런 꿈을 꾸었다. 그가 티만드라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여자가 팔 안에
그의 머리를 껴안은 뒤 얼굴에는 흰 분을 발라주고 누까풀에도 아이새도우를 칠해주는 등
그의 얼굴을 마치 여자처럼 화장해주고 있는 꿈이었다. 또 다른 사람은 알키비아데스가 메
가이우스에게 동체를 깔린 채 목이 잘리는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그
가 죽기 직전에 꿈을 꾸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를 암살하기 위하여 찾아온 자객들은 차마 집안으로 침입하지는 못하였다.
그 대신 자객들은 알키비아데스의 집을 한 바퀴 빙 둘러서 불을 질렀다 이것을 깨달은 알키
비아데스는 옷과 침구를 타오르는 불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왼손으로 겉옷을 걸치고, 오른
손으로 단검을 뽑아든 채 집어던진 옷이 다 타기 전에 화상도 입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왔
다. 페르시아 인들은 그를 보자 산산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누구 하나 그와 맞서 싸우려는
사람도 그를 뒤쫓으려는 사람도 없이 , 그저 멀리서만 그를 둘러싼 채 창과 화살을 퍼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알키비아데스는 쓰러지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임무가 끝나자 페
르시아 자객들은 떠났다. 알키비아데스의 애첩 티만드는 그의 시체를 안아 일으켜 저고리에
싸고,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정성껏 장례식을 치렀다. 사람들은 티만드라의 딸이 유명
한 기생 라이스라고 전한다 그녀는보통 코린트 태생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은 시칠리아의
작은 도시 히카라에서 포로로 끌려온 여자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알키비아데스가 죽은 원인이 파르나바조스나 리산데르나 라케다이몬 인에
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알키비아데스 그 본인에게 있었다고 한다. 즉 알키비아데스는 어느 명
문집안의 처녀를 유과하여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에 격분한 여자의 친척들이 밤중에 알키
비아데스가 살고 있던 집으로 찾아가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타오르는 불 속을
헤치고 밖으로 뛰어나오는 그를 쏴 죽였다고도 한다.
코이올라누스
로마의 명문인 마르키우스 집안에서는 많은 저명한 인사들이 배출되었는데,툴루스 호스틸
리우스가 세상을 떠난 후 왕위를 계승한 안쿠스 마르키우스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
로마에 풍부한 물을 공급한 푸볼리우스 마르키우스와 퀀투스 마르키우스도 이 가문에서 난
사람들이었다. 인민에게 선출되어 집정관을 두 번이나 지낸 뒤, 이후로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지위에 두 번 다시 오를 수 없도록 시민으로 하여금 법을 통과시키게 만든 켄소리누스도
역시 이 가문 출신이다.
그러나 내가 이제부터 쓰고자 하는 카이우스 마르키우스는 유복자로 태어나 편모 슬하에
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출세에 불리하게 작용될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방해
가 된다거나, 덕성함양에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준
하나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악인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책임을 그들
이 어렸을 때 겪었던 불행과 사회의 냉대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관대하고도 고결한
천성도 적절한 훈련 없이는 발휘되지 않는다. 마치 비옥한 땅이라 할지라도 잘 경작하지 않
으면 잘 익은 열매와 신통찮고 덜 여문 열매가 같이 열리게 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도 같
다. 마르키우스야말로 바로 그러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강한 정신력과 용맹성, 끈질긴 인내력은 그로 하여금 훌륭한 업적을 많이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지나치게 자아를 고집하고 주변사람들의 기분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
에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사귈 수가 없었다. 그는 쾌락도 고난도 다 안중에 없었고, 뇌물에
도 관심이 없어서 사람들은 그를 절제와 인내, 정의라는 각각의 이름으로 부르며 칭송하였
다. 그러나 한 시민으로서는 성격이 엄격하고 매서웠으며 고압적이고 거만하여 사람을 업신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남의 미움을 샀다. 그러므로 교육을 받고 학문을 연구하며 묵
상을 즐기는 것이, 정해진 규범에 의해서 우리의 본성을 복종하고 극단적인 야만성을 피하
여 인간답도록 교화시키는 가르침보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시 로마에서는 모든 덕목 중 무용이 가장 존경을 받았다. 덕을 뜻하는 라틴 어에서 이
것을 증명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덕과 용을 동의어로 보았던 것이다. 용기와
모든 덕이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던만큼 이 말들은 매우 탁월한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같은 또래의 누구보다도 전쟁놀이에 정열적으로 몰두하던 마르키우스는 아주 어렸을 때부
터 무기를 곧잘 다루었다. 기물에 지나지 않는 무기는 그 본래의 고유한 성질을 잘 파악하
고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만큼 훈련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는 이러한 사
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모든 경기나 활동에서 단련에 주력하였다. 그는 몸이 날쌜 뿐 아니라
적과 맞붙어 싸울 때도 힘이 대단하였다.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그에게 한번 붙잡히면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러므로 국내에서 개최된 격투기 같은 시합에 출전한 경쟁자들은 자신들
이 시합에 지면 열등함을 인정하기 싫어서 불가항력적인 그의 체력에 당해 낼 길이 없다고
핑계를 대었다.
마르키우스는 아직 풋내기였을 때 처음으로 전쟁에 풀전했다. 그것은 망명중이었던 로마
의 왕 타르퀴니우스와 병사들은 대부분 라틴 족이었지만 그 밖의 다른 여러 이탈리아 사람
들도 많이 가담하고 있었다. 이들은 타르퀴니우스를 지지해서라기보다 로마가 날로 강력해
지는 것을 시기하고 두려워하여 그것을 저지하고 굴복시켜버리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양쪽 병사들이 응전하여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전세가 엎치락뒤치락하던 중 군정관
의 앞에서 용감하게 싸우던 마르키우스는, 자기 가까이에 있던 동료병사 하나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즉시 달려가서 그를 보호하며 달려드는 적을 처치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장군은 마르키우스의 용맹한 행동을 칭송하며 일등공신의 한 명으로 대접하여 떡갈나무로
만든 관을 씌워주었다. 이는 시민의 목숨을 구출한 자를 찬양하는 로마의 관례였다.
이 관을 떡갈나무로 만든 이유는 대략 이러하다. 첫째, 떡갈나무 열매를 먹고 사는 사람들
이라고는 신탁에 지칭되어 있는 아르가디아 인들을 기리기 위하여 관례상 떡갈나무에 특별
한 명예를 부여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어느 지방에서 싸우든지
관을 만들기 위한 떡갈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셋째, 떡갈나무 관이
도시의 수호신인 유피테르에게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시민의 생명을 구한 사람에게 주는 장
신구로서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그랬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들 중에서 어떤 것이 근
본적인 이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떡갈나무는 자생하는 나무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가장 많이 맺으며 사람
이 지배하는 나무들 중에서 가장 튼튼하다. 최초의 인류는 떡갈나무의 열매인 도토리를 주
식으로 먹었고, 그 나무 속에서 찾아 낸 꿀도 즐겨 마셨다. 또한 떡갈나무에서 자라난 겨우
살이 가지는 새나 짐승들을 유인하는 덫의 역할을 하여 인간들은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
었다.
이러저러하는 동안 전투 중에 쌍둥이 신 카스토르와 폴룩스가 나타났으며, 또 전투가 끝
난 직후에는 두 신이 지금은 공회당이 세워진 로마의 샘터에 비지땀을 뻘뻘 흘리는 말을타
고 나타나서 승리의 소식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 후 승리의 날인 7월 15일을 쌍둥이 형제
는 기념하기 위하여 엄숙한 경축일로 삼았다.
젊은이들이 너무 일찍 명성을 떨치게 될 때 공명심이 그다지 강하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인생에 대하여 열정을 잃게 되고 쉽게 안주해 버린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좀더 분별력이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마치 바람처럼 스스로를 격려하고 분발시키며 명예를 추구하는
데 매달리듯이 더욱 공을 세우려고 조바심하는 법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공은 이미 과거에
그들이 이룩한 일에 대하여 그들이 받는 보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후에 그들이
수행할 일에 대한 보증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이미 얻은 명예를 욕되게 하거나 내세우지
않을뿐더러 보다 더 빛나는 새로운 것을 성취하려고 결심한다.
이렇게 당당한 성격을 소유한 마르키우스는 늘 먼젓번보다는 더 큰공을 세워야겠다는 야
심에 불탔다. 또한 어떤 대단한 경우에 처했을 때 아무 일을 하지 않더라도 다음에는 반드
시 그것을 능가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끊임없이 새롭게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 잇달아 전공을 세우고 전리품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그 결과 장군들 사이의
경쟁의식을 자극하였다. 장군들은 그와 겨루었으나 결국 그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시하고 그
의 용맹을 칭찬하게 되었다. 그 당시 로마는 수많은 전쟁을 치렀는데, 마르키우스는 포상과
영예를 받지 않고 돌아온 경우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영예를 얻기 위하여 싸웠지만 그는 혼자 계신 자기의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용감히 싸웠다. 아들이 칭송 받는 것을 듣고 영예로운 관을 쓰고 있는 모습
을 보고, 어머니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맞아 안아 주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영
광이며 행복이었다. 에파미논다스도 레우크트라 전투에서 자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소식
을 부모님이 살아계셔 전해들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고 고백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에게는 양친이 다 살아 있어서 행운의 기쁨을 같이 나누게
되었으므로 더 행운이었다. 그러나 마르키우스는 아버지에게 바쳐야 할 감사와 의무를 그의
어머니 볼룸니아에게 바쳐야 한다고 믿고, 싫증을 모를 정도로 어머니에게 애정과 존경을
다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요구와 희망에 따라 아내를 맞이하였고 자식이 생긴 후에도 어머
니를 모시고 가족들과 함께 한집에서 살았다.
그가 청렴하고 용감하다는 평판으로 당시의 로마에서 상당한 영향력과 세력을 갖게 되었
을 때, 원로원과 평민들 사이에는 분쟁이 일기 시작하였다. 원로원은 부유한 시민 편을 들었
고, 평민은 채권자들에게서 받은 비인간적인 대우에 항의한 것이다. 이러한 평민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채권자들은 평민이 어떠한 종류라도 재산만 소유하고 있다면 저당이니 매매니
하는 형식으로 빼앗아 가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착취로 말미암아 이미 극도의 빈궁상태에
빠져 더 이상 착취당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전투에서 입은 부상에도 불구하
고 다시 끌려가 감금되는 억울함을 당하였다. 가장 최근의 일은 사비니인과의 전투가 있었
을 때였다. 채무자들은 부자인 채권자들이 전쟁이 끝나면 아주 관대하게 대우해주겠다는 약
속을 믿고 전쟁에 참가하였다.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이 일을 완수
하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평민들이 용감하게 싸워 적을 무찌르고 돌아왔는데도 대우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
았다. 또다시 평민들이 노예처럼 끌려가고, 그들의 물건이 그전처럼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서
도 정치가들이 방임하고 있었으므로 도시 여러 곳에서는 공공연히 소요가 일어났다. 위험한
집회도 계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와 같은 대중의 혼란을 의식한 적은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정부는 군에 복역할 연령에 이른 장정들에게 소집령에 응하라는 공고를 냈다. 그러
나 그 소집령에 응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부의 요인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될 것인지 격렬하게 토론하였다. 결국 또다시 의견이 둘로 갈
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빈민들의 억눌린 권리를 회복시켜 주고, 법의 극단적인 시행을 다소
누그러뜨림으로서 그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어느 쪽이든 돈이 논쟁의 요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평민들의 무질서한 행동은 법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라고 경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은 더 이상 자라기 전에 시기를 놓치지 말고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난국을 해결하기 위하여 원로원 전체 회의가 거듭 소집되었지만 아무런 해결책도 나오
지 않았다. 그것을 지켜본 평민들은 도저히 이들이 자기들의 딱한 사정을 구제해 줄 수 없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민들은 돌연 집결하여 한 단체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이 취
한 결정을 서로 격려하여 로마 시를 떠나 아니오 강가에 있는, 지금은 성산이라고 불리는
산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 곳까지 가는 도중에 그들은 어떠한 종류의 폭력이나 선동적
인 분노도 폭발시키지 않았다. 다만 '오랫동안 행해진 부자들의 횡포에 못 이겨 로마에서
쫓
겨나왔지만, 이탈리아는 우리에게 공기와 물과 죽으면 묻힐 땅 정도는 줄 것이다. 더 이상
로마에 머물러본들 우리가 얻을 것이라곤 부자들을 위하여 싸우다 얻은 부상이나 살해되는
길밖에 없다'라는 구호를 회치며 로마 시를 벗어났을 정도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원
로원은 의원들 중에서 가장 온건하고 평민들의 사정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을 보내서 그들을
달래게 했다.
이 사절단의 단장인 메네니우스 아그리파는 아주 간곡한 말로 평민들을 달랜 뒤, 원로원
의 입장을 간곡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우화를 예로 들며 연설을 끝마쳤
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인간의 다른 모든 기관들이 배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
켜, '당신이야말로 전신 가운데서 유일하게 빈둥거리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부분'이라고 비
난 하였습니다. '몸에서 당신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신체를 기르기 위하여 음식을 공급하
느
라고 고통을 견디고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자 배는 다른 식구들
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면서, '여보시오, 내가 빈둥빈둥 놀고 있다구요? 천만의 말씀. 몸 전체
의
영양을 받아서 그것을 다시 다른 모든 식구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것은 누군지 아시오?'하
고 따졌습니다. 시민 여러분! 이 이야기는 여러분과 원로원 사이의 경우와 같습니다. 원로원
에서는 여러 안건과 계획이 충분히 소화되어 국민 전체에게 이익과 안전을 가져다주게 됩니
다. 이것이 원로원의 역할입니다."
그리하여 얼마 동안 재타협안을 놓고 쌍방간에 의견대립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화
해하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이는 원로원이 평민들의 요구에 동의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그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다. 즉 평민 중에서 매년 다섯 명을 선출하여 호민관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함으로써 평민의 권익을 수호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최초의 호민관으로 선
출된 다섯 명 중에는 평민들이 로마 시를 빠져나올 때 앞에서 지도하던 유니우스 브루투스
와 시킨니우스 벨루투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듯 로마 시가 하나로 통합되자, 평민들은
곧 무기를 들고 기꺼이 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며 전쟁터로 나갔다. 마르키우스로서는 평민
이 이렇게까지 세력을 얻고 원로원 위원들의 찬성을 얻게 된 것이 몹시 못마땅했다. 그는
맣은 쉬족들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이번 결정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서 그는 귀족들에게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보이는 열의와 진취성에 있어서 적어도 평민들에
게는 뒤지지 말아야 하고, 권력이나 부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전공에 있어서도 평민보다 우
월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간청하였다.
로마는 이때 볼스키아와 전쟁 중에 있었는데, 볼스키아의 수도는 코이올리였다. 로마의 코
미니우스가 이 요충지를 포위하고 있었을 때 남아 있던 볼스키아 인들은 그 요충지를 빼앗
길 것을 두려워하며 전국에서 끌어 모을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소집하였다. 그들은 도시를
수호하기 위하여 수도 앞에서 로마 군과 싸울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성 안팎 전체가 호응
하여 포위군을 협격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코미니우스는 군대
를 둘로 나누었다. 그 중 한 부대는 적의 원병과 대적하여 외부로부터 접근해 오는 원군의
전진을 막게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로마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 중의 하나인 티투스 라르티
우스 장군에게 잔류부대를 지휘토록 하여 코리올리 포위작전을 계속 수행하게 하였다.
코리올리 성 내의 볼스키아 군은 포위군의 수가 적은 것을 깔보고 로마 군에게 일제히 공
격을 가해 왔다. 그들은 아군의 우세한 병력을 믿고 로마 군을 추격하여 그들을 참호 속으
로 몰아놓었다. 이때였다. 마르키우스는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노도와 같이 달려나
와 불스키아 선봉부대를 순식간에 격파하였다. 그러고 나서 공격의 속도를 늦추고 우렁찬
목소리로 '로마 군이여 힘을 내라'하고 외쳤다. 실로 그는 카토가 말한 바와 같이 병사의 귀
감이었다. 완력과 강타하는 힘뿐만이 아니라 목소리와 풍채만으로도 그는 적에게 공초의 대
상이었다. 마르키우스가 이끄는 정예부대는 일제히 공격을 가하며 적에게 바싹 따라붙었다.
적은 곧 후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르키우스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패주하는 적의 후
미에 공격을 가하여 허겁지겁 성안으로 몰려들어가는 적을 성문까지 몰아 냈다. 그후 로마
병사들은 성 위에서 우박처럼 날아오는 화살과 창 때문에 추격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도주
하는 적을 추격하여 안전무장을 갖춘 적의 병사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갈 엄
두도 내지 못하였다. 이를 본 마르키우스는 우뚝 서서 부하 장병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고
함쳤다. 그리고 운명의 여신이 문을 열고 적과 우리를 다 같이 부르고 있다고 외쳤다. 그는
자신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용감한 몇 명의 병사들이 호위를 받으며 도주하는
적을 무찔렀다. 마르키우스가 무사히 성 안으로 들어서니 처음에는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
었다.
그러나 볼스키아 군의 적의 수가 너무도 적은 것을 보고서 용기를 얻어 일제히 공격을 가
해 왔다. 그리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격전이 벌어졌다. 그 수라장 속에서 마르키우
스는 주먹의 힘과 날쌘 걸음걸이, 그리고 대담무쌍한 정신력으로 공격하는 적을 제압하여
그 대부분을 성안으로 몰아 넣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도망치지 못한 적의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 마르키우스의 활약은 뒤에 남은 라르티우스가 로마 병사들을 이끌고 별
탈 없이 입성케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듯 코리올리가 기습 점령되자 대부분의 병사들은 파괴와 약탈을 일삼기 시작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마르키우스는 노발대발하여 그들을 나무랐다. 집정관과 그가 이끄는 동포
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원군과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병사들이 전리품에 혈안되어 동분
서주하며 야비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국가를 부유하게 한다는 구실로 위험을 피하고 있는 것
은 수치스럽고도 무가치한 일이라고 호통을 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말에 귀를 기울
이는 병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마르키우스는 그들 앞에 서서 집정관의 부대가 앞서서 진격
한 길을 따라 포기하지 말고 빨리 달리라고 설득하였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전투가 끝나지 않기를 바랬다. 그는 적절하게 코미니우스 집정관을 도우며 전투에 동참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그 시대 로마 인의 풍속에는 전투대열로 정돈하고 전투 시작을 위해 무장을 갖출 때, 3~4
인의 증인이 듣는 앞에서 구두로 유산상속자를 지명하는 행사가 있었다. 마르키우스가 도착
하였을 때는 마침 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 참이어서 로마 군이 바로 이 행사를 하고 있
는 중이었다. 그들은 마르키우스가 소수의 부하만 이끌고 온몸에 피와 땀투성이가 되어 나
타난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러나 그가 기쁨에 넘쳐 집정관에게로 달려가 손을 내밀며 코리올리가 점령되었다는 것
을 보고하고, 집정관이 그를 끌어안아 맞이하는 것을 본 병사들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집정관과 가까이 있던 병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들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병사들은 느낌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이에 병사들은 자극을 받아 일제히 싸우러 나가자고
외쳤다.
그러나 마르키우스는 우선 볼스키아 군이 어떻게 군대를 배치하였으며, 그 졍예부대가 어
디에 배치되어 있었는지를 물었다. 집정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주었다. 볼스키아 군
중에서는 용감무쌍하여 누구에게도 굴복할 줄 모르는 정예부대로 구성된 안티움 인 부대가
가장 강한데, 그들이 바로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르키우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를 그 놈들과 대치하게 해주십시오."
집정관은 그의 용맹성에 감탄하여 요구를 승낙하였다. 곧 병사들이 화살을 쏘며 전투를
개시하고, 마르키우스가 병사들의 선두에서 일제사격을 가했다. 이에 맞서 싸우던 볼스키아
군은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그는 어디로 나서든지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찔러 대열을
흩뜨렸으며 적병 사이로 길을 만들었다. 좌우의 적군은 또다시 진로를 바꾸어 무기를 들고
양쪽에서 그를 포위했다. 그가 위험에 빠진 것을 본 집정관은 그이 정예부대 중 몇 명을 급
파하여 마르키우스를 위기에서 건져냈다. 전투는 마르키우스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되었
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로마 군은 적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어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마침내 적은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였다. 승리의 서광이 보이자 병사들은 과로로 지치고 출혈로 의식이 몽롱해진
마르키우스에게 진지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피로는 승리자
에게 아무 소용도 없다고 대답하며 적을 추격하는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결국 볼스키
아 군은 잔여부대까지 패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며, 그에 못지 않은 수가 포로로 잡혔다.
다음 날, 마르키우스가 생존 병사들을 이끌고 집정관의 막사에 오자 집정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 전투의 대승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마땅한 감사를 돌렸다. 그리고 마르키
우스를 돌아다보며 무엇보다도 자기가 직접 목격하였고 마르티우스의 증언으로도 증명된 그
의 훌륭한 전공에 대하여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나서 집정관은 다른 사람들에게 분
배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그에게 전리품으로 얻은 모든 보화와 말들과 포로들의 10분의 1을
택하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집정관은 그의 용맹을 칭송하는 뜻에서 마구와 장식물을 갖춘
말 한 필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전 군은 마르키우스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마르키우스는 앞으로 걸어나와 포상의 군마
를 받으며 집정관의 찬사에 감사했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것은 명예라는 의의를 떠나서
돈이 개입된 불순한 것이라며 사양하였다. 그는 다른 병사들이 받는 상 이상의 것을 받지
않겠다고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오직 한 가지 은총만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부디 이 특별한 청을 거절하지 않으
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볼스키아 사람 가운데 성실하고 덕이 있는 제 친구
한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부자이
고 자유인이었던 처지로부터 이제는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의 많은 불행
중에서 제가 하나 정도 덜어주는 것을 허용해주시기 원합니다. 이제 노예의 신세가 되어 팔
려가게 된 그의 불행을 면해주셨으면 합니다."
수많은 재물은 받기를 꺼려하면서 이러한 요구를 하는 마르키우스를 향하여 병사들은 한
층 더 큰 갈채를 보냈다. 그들은 마르키우스가 전투에서 보여준 용기보다도 사리를 초월한
의로운 행위를 더욱 찬양하였던 것이다. 마르키우스에게만 특별상을 주는 것을 보고 시기와
원망을 느꼈던 사람들조차도, 그렇듯 상을 거절할 수 있었던 사람이야말로 다른 사람들 이
상으로 상을 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그들은 마르키우스
가 세운 그 어떠한 공보다도 사리를 경멸케 한 그의 덕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무기를 잘
쓰는 것보다도 재물을 옳게 쓴다는 것이 더욱 영광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재물을 전혀 바라
지 않는다는 것은 재물을 옳게 쓰는 것보다도 더욱 귀한 일이다.
칭찬과 갈채의 소리가 가라앉자 집정관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전우 여러분, 본인이 그것을
달갑게 받으려고 하지 않는데 우리가 다른 선물을 받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
다. 그러므로 그가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선물을 하도록 합시다. 즉 앞으로 마르키우스에게
코리올라누스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전원 투표로서 통과시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여
러분은 그가 그가 이런 일을 예측하고 코리올리에서 전공을 세웠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
시겠지만 말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코리올라누스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의 개인이름은 카이우스이고,
둘째이름 즉 성은 마르키우스가 되는 이것은 그의 집과 가족에게 공통된 이름이다. 보통 세
번째 이름은 성장한 후에 특별한 업적이나 성공, 신체적 특징이나 인품 등에 의하여 붙여지
는 것이었다.
그리스 인들도 예로부터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제 3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예를 들자면 소테르, 칼리니쿠스 따위가 그것이다. 외모에 의한 이름은 피스콘과 그
리푸스 따위고, 인품에 의하여 붙여지는 에우에르게테스, 필라델푸스며, 공을 좇아 지은 이
름은 바투스 제2대 왕의 병명이 붙여진 왕들도 있었으나, 안티고누스는 도손, 프톨레마이오
스는 라티투스라고 불렀다.
이런 종류의 칭호는 로마 인들 사이에서 더욱 흔히 사용되었다. 메틸루스 집안의 한 사람
은 디아데마투스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머리의 상처를 감추느라고 오랫동안 붕
대를 감고 다녔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집안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켈레르라는 별명이 있었
는데, 그것은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지 불과 며칠만에 격투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부친의
명복을 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그의 속도와 정력이 매우 이채로
웠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태어날 때의 어떤 우연한 사건이 기연이 되어 이름을 짓는 수도
있다. 아버지가 집을 비우고 타국에 가 있을 때 태어난 아이는 프로쿨루스라고 불리고, 아버
지가 죽은 후 태어난 아이는 포스투무스라고 불렸다. 또한 쌍둥이로 태어나서 하나만 살아
남은 아이를 보피스쿠스라고 부르는 예가 그것이다.
신체적 특징으로 지은 이름으로는 술라스, 니게르스, 루푸스 같은 것이 있으며 이 외에도
카이키, 클라우디이 같은 것이 있다. 시력을 잃었다거나 그 밖의 어떤 신체적 결함이 그들에
게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되지 않고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아
무런 수치심을 느끼는 일없이 이러한 이름에 대답하게 하기 위하여 국민들을 습관들이려는
현명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른 곳에서 논하는 것이 낫겠다.
볼스키아 인과의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평민 선동자들은 다시 국내 문제를 들고 나왔
다. 그들은 새로운 이유나 불평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종전의 분쟁에서 자연적으로 발생
한 좋지 못한 결과를 가지고 평민을 선동함으로써 귀족을 공격할 구실로 삼았다. 당시 경작
할 수 있는 당의 대부분은 파종이나 경작을 안 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또한 전시였으므로
외국에서 식량을 수입해 올 방법이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국민들은 극도의 궁핍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평민 선동자들은 곡식도 살 수 없고, 곡식이 있다 하더라도
살 돈이 없다는 이야기를 꾸며 부자들을 헐뜯었다. 그리고 이것은 부자들이 평민에 대한 묵
은 원한을 갚으려고 일부러 굶겨 죽이려 하는 수단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렇게 정세가 심각한 때 마침 벨리트라니 시에서 사절단이 왔다. 이들은 자기들의 시를
로마 인들에게 개방하겠다고 제의하고 거기에서 살 새로운 이주민을 얼마 보내주었으면 좋
겠다고 하였다. 최근에 발생한 전염병으로 인해 주민의 대부분이 죽었고, 살아 남은 주민이
전체의 10분의 1도 못 된다는 것이었다. 벨리트라니 시민들의 요구를 들은 로마의 신중한
사람들 중의 일부는 이것이야말로 현재 처해 있는 난국을 수습하는 데 가장 적절한 방법이
라고 생각되었다.
왜야하면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인구의 일부를 시에서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난
폭하고 과격해진 평민들을 제거함으로서 나라 안의 병폐와 무질서의 요소들을 척결해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정관들은 불순분자들을 가려 내어 이민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에
게 벨리트라이를 재건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소집하여 국내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정치
적인 계획을 세운 것이다. 곧 이들에게는 볼스키아를 향해 진격할 준비를 하라고 통고되었
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평민도 귀족도, 동일한 군대 안에서 혹은 똑같은 진영에서 또다
시 서로 엉켜 나라를 위하는 하나의 공통된 목적으로 복무한다면 그들을 타협과 우정으로
이끌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평민출신 호민관 시키니우스와 브루투스는 이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들은
집정관들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도 야만적인 행동을 이민이라는 미명하에 은폐하여 가행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병균으로 가득 찬 공기와 시체로 가득 덮여 있어 냄새고 코를 찌르
는 땅으로 가난한 평민들을 이주시켜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으며, 이들을 노한 귀
신들에게 내던져 꼼짝달싹 못하고 죽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고 나서도 성에 차
지 않아서 자신들의 야욕을 위해 나머지 사람들을 전쟁터로 몰아 내었다는 것이다. 이는 시
민들이 부자들에게 노예상태로 있기를 거절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하였다.
즉 부자들이 어떠한 천벌을 가하여도 시민들에게는 부족하다는 발상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
냐고 격렬하게 반발한 것이다.
이러한 연설로 말미암아 시민들의 감정은 극도로 격양되었고, 아무도 집정관의 요구에 응
하여 전쟁터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뿐더러 새로운 땅으로 이민 가라는 제의에도 전적
으로 반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원로원은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를 몰라 당황했다. 마르키우스는 과거에 세운 자신의 업적 때문에 정계에서 발언권을 갖기
시작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로마의 저명인사들이 자기를 숭배하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고
있었다. 마르키우스는 평민의 주동자들을 반대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이주민이 벨리트라이로 파견되었다. 제비로 뽑힌 사람들은 반드시 이주해야
만 했고, 이를 거부했을 때는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볼스키아와의 전투에 참전
하는 것은 평민들이 완강히 거부했으므로, 할 수 없이 마르키우스는 자기에게 예속된 평민
들과 그의 설득에 응한 소수의 인원만으로 군을 편성하였다. 마르키우스는 이들을 이끌고
안타움의 영토로 침입하였다. 그 곳에서 마르키우스는 상당히 많은 양식을 획득하였고, 가축
과 포로를 포함한 많은 전리품을 모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자기 몫으로 하지 않고 전리품을 고스란히 실은 채 군을 이끌어 로마로
돌아왔다. 한편 그를 따라 함께 종군하였던 사람들이 수레 가득 약탈품을 싣고 가축들을 몰
면서 오는 것을 본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집을 후회하였다. 그리고
부자가 된 동포시민들에게 시기를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마르키우스가 평민의 이익을 희생
시키면서 자기의 명성만을 드높이고 권력을 얻었다고 더욱 그를 미워하며 적의를 품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만 되지 않아 마르키우스가 집정관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 그러자 평
민들은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출생으로 보나 전공으로 보나 제일 가는 사람인 그를
공격하였던 것을 뉘우치고 다시 그를 두둔하였다.
공직의 후보로 나서는 사람은 직접 시민들 앞으로 나와서 정견을 발표하는 것이 관례였
다. 그러한 경우 후보는 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속옷을 입지 않고 두루마기처럼 생긴
옷만 몸에 걸친 채 공회당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와 같이 간단한 옷을 입은 것은 마음이
겸손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때는 뇌물을 주고받는 부패
를 모르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몸에 거의 옷을 걸치지 않고 나타났다는 것이 유권자들에게
한 표를 얻기 위한 행위였다고는 볼 수 없다.
투표권을 사고 팔아 선거가 돈 거래로 이루어지고, 돈이 표를 얻는 데 필수가 된 것은 이
보다 훨씬 뒤, 아니 몇 세대가 지난 후의 일이다. 그 후 뇌물을 받는 버릇은 법원에서까지
침투하고, 심지어 군부까지도 휩쓸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용사들을 매수하였고, 강한 의지의
사람마저 금품 앞에 굴복시켰다. 결국 그들은 공화국을 군주 제왕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그러므로 최초로 뇌물을 준 사람이 나라를 망친 최초의 자유의 파괴자였다는 것은
지당한 말이다.
이 악습이 몰래 로마로 스며 들어와 조금씩 로마를 침식하였는데 처음에는 눈에 띄지도
않고 주목을 끈 것 같지도 않다. 누가 최초로 시민에게 뇌물을 바쳤는지, 최초로 법원을 부
패시킨 자가 누구였는지 확실히는 알려져 있지 않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에 아테네에서
필로스의 요새를 적의 수중에 넘겨준 것이 발각되어 재판을 받을 때 최초로 판사들에게 뇌
물을 준 사람은 안테미온의 아들 아니투스였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까지도 로마에서는 청렴
한 인사들이 정권을 쥐고 있었다.
마르키우스는 입후보자들의 관례에 따라 7년 동안 치른 무수한 전투에서 탁월한 전공을
세운 것을 대변해주는 것, 즉 그의 육체에 아직도 남아 있어 똑똑히 보이는 크고 작은 상처
를 시민들에게 보여주었다. 시민들은 이를 보고 부끄러워하며 겸손한 태도로 그를 집정관으
로 선출해야겠다고 말하였다. 선거일이 되자 원로원의 성대한 행렬이 마르키우스의 뒤를 따
랐다. 또한 이전에 있었던 여느 행사보다 더 관심과 정성을 기울인 듯해 보이는 귀족들을
거느리고 마르키우스가 공회당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을 본 평민들은 자신들이 그에게 품고 있던 호의를 순식간에 저버리고 얼마 전까지
그에게 느꼈던 동정심마저 분노와 시기로 일변해 버렸다. 이처럼 권력 지향적인 경향을 띠
고 있는데다가 귀족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에게 집정관이라는 자리를
준다면, 그나마 자기들에게 남아 있는 자유마저 박탈당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
은 공포와 분노를 느꼈고, 결국은 마르키우스를 선출하지 않았다.
투표 결과 마르키우스가 아닌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이 공포되자, 원로원은 원로원 자체가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커다란 치욕감을 느꼈다. 마르키우스 본인도 수치감에 참을 수 없
이 격분하였다. 이제까지의 삶이 옹고집으로 점철되어 온 그였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여 자
신의 인간성이야말로 가장 고상하고도 도량이 넓은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는 정치가의 덕
행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침착성과 성실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정치 생활을 시작하여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집부리
면 고독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마르키우스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서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천성이 단순하고도 솔직한 마르키우스는 자기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쳐부수는 것만
이 용기의 진수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즉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분노에 휩쓸려 시
민에 대한 원한을 폭발시키게 된 원인이 나약한 자신의 천성 탓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이다. 콧대만 높은 로마의 귀족 청년들은 귀족 출신이라는 자만심에 젖어서 무조건적으로
그에게 헌신하였다.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맹목적인 충성심은 그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하여, 결과적으로는 누구보다도 더 큰 해를 그에게 끼쳤을 뿐이다. 청년들이 그를 지
지하게 된 것은, 그가 출정 시에는 지도자였으며 무예를 가르쳐주는 친절한 스승이었기 때
문이다. 그는 추호도 남의 무훈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일없이 적절한 찬사로써 표창하고
남의 능력을 애호 해주는 모범을 보였다.
이러한 판국에 다량의 곡식이 로마에 도착하였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각지에서 사들인 것
이었으나, 일부 곡식은 당시 시라쿠사의 왕 겔로가 선물로 보내 온 것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많은 시민들의 기근은 급한 대로 모면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귀족과 평민 사
이의 분쟁도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즉시 원로원이 소집되었다. 평민들은
원로원의 사당 문 밖에 운집하여 곡물 가격이 내리는 것은 물론 기증해 온 곡식이 무상으로
분배되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원로원 의원 중에서도 그렇게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마르키우스는 대중을 지지한다고 발언한 의원들을 통렬히 공격하였다. 그리고 그
들을 폭도들의 첩자이며 귀족계급에 대한 반역자라고 부르고, 이러한 자들 때문에 평민들이
자신들의 편견에 사로잡혀 대담하고도 건방지게 귀족들을 향하여 덤벼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 싹이 자라기 전에 근절시켜 버렸어야 했는데, 평민에 의한 호민을 구성할 정도
의 큰 세력이 되기까지 내버려둔 것부터가 실책이었다고 주장하였다. 평민들이 요구하는 것
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의 국가에 대하여 엄청난 영향력을 행
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평민에 대한 억제책은 그들에게 가해지지 않아 그들의
의사를 누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집정관의 명령도 소용이 없었고,
모든 법률과 행정 명령도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평민의 지도자에게 호민관이
라는 칭호를 주었다는 것이 마르키우스의 주장이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원로원이 이렇게 모여 앉아 곡식이나 전리품을 무상으로 나눠줄 조치나 취하는 것을 일
삼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마치 평민들이 절대적인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는 그리스에서
처럼 이것은 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잘 살게 해 주는 결과가 되고 결국
은 나라는 망하게 만드는 길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 평민들은 이러한 상이 나라에 대하여 충성을 다한 결과로 얻어
진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 알면서도 나라에 대한 충성을 거듭 저버렸던 것입니다. 나
라를 공공연히 배반하고 분열을 일삼은 상으로, 아니면 원로원에 대하여 사실무근인 온갖
추문을 유포시킨 공을 들어 평민들에게 곡식을 무상으로 주어 구제하려는 것입니까? 그들도
이러한 상을 탈 이유나 근거가 자신들에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우리
가 자신들을 두려워하여 아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이대로 놓아두면 그들은
무한정으로 국법을 어기게 될 것이고, 이 나라에는 폭동과 소요가 그칠 날 없게 될 것입니
다. 양보는 미친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현명하고 결단력이
있다면,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호민관 제도를 다시 빼앗아 올 때까지 그들과 싸워야 합
니다. 지금과 같이 집정관 제도를 위태롭게 하고, 시민들의 분열을 일으켜 종전과 같이 일체
가 되지 않고 다시 결속할 수도 없게 만든 원인은 호민관을 설치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키우스는 대세를 이끌기 위하여 자기와 똑같이 과격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을
동조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로마시의 부유층을 거의 다 자기편으로 끌어넣었다. 그리하여 로
마 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에게 폭력과 아첨에도 굴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갈채를 보
냈다. 그러나 연장자들 중에는 마르키우스의 말에 의혹을 품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회의의 결과는 좋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마르키우스의 제안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깨닫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호민관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군중 속으로 뛰
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결속하여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큰 소리로 호소하였
다.
곧 시민들의 집회가 열렸다. 그리고 연이어서 소요가 일었다. 마르키우스의 연설 내용이
시민들에게 보고되자 민중은 극도로 흥분하였다. 그들은 이제라도 당장 원로원으로 쳐들어
갈 기세를 보였다. 호민관들은 이것을 저지하며 그 책임을 마르키우스에게 전가하였다. 그리
하여 시민 대표가 원로원에 본인이 나와서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마르키우스에게
소환장을 가지고 간 대표들은 무참하게 쫓겨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호민관들이 시장과 동행
하여 마르키우스를 강제로 끌어내려고 하였다. 그 반면 귀족들은 마르키우스를 구출하기 위
해서 달려들었다. 귀족들은 호민관들을 밀쳐 내고 보안 대원들을 구타하였다. 그 바람에 회
의장은 삽시간에 온통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날이 어두워지다 싸움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날이 밝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몹시 격
분한 시민들이 공회당으로 몰려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집정관들은 시가지 전체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겁을 내었다. 그리하여 집정관들은 원로원 의원들을 소집하였다. 그리
고 그들에게 온유한 말과 유화적인 조치로 격분된 민중을 진정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여 달
라고 요청하였다. 정황을 비춰 보건대 지금의 상황은 위신만 생각하고 버틸 수 있는 사정이
아니니 부디 온화한 대책을 강구하고 너그러운 정책을 취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대다수의 원로원 의원들이 이 요구에 응했다. 그리하여 집정관들은 최선을 다하여 평민들
을 달랬다. 그들은 기분에 거슬리도록 건방진 평민들의 언사에도, 또는 과거에 원로원에 가
해진 것 같은 공격이나 경고, 비난에도 부드럽고 신중하게 대답하였다. 곡식 가격에 관해서
도 절대로 이중 가격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평민들이 다시 평정
을 되찾게 되었다. 그들이 질서 있고 평화스럽게 행동하자 원로원의 의견이 아주 설득적이
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때 호민관들이 일어서서 평민의 이름으로 선언하였다. 즉 원로원이
진지라고 이치에 맞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공정하고도 타당한 자세로 모든 일을 원
로원에게 양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르키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혐의에 대하여 답변할 것을 촉구하였다. '
첫
째, 정부를 전복시키고 평민의 기본 인권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원로원을 충동질한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가? 둘째, 원로원에 출두하여 그것을 해명하고 요청하였을 때 왜 그 소환에
응하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보안 대원을 구타하고 공공 장소에서 그들에게 모욕을 가함으
로써 내란을 일으켜, 동족상잔의 참극을 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호민관들이 이렇게 요구한 것은 마르키우스로 하여금 시민에게 사과하게 함으로써 교만한
그의 성미를 누그러뜨리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찬성을 따른다면 불 같은 성미
때문에 시민과 마르키우스 사이가 절대 불화를 일으키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르키우스는 호민관들이 요구한 사항들을 이행하기 위하여 시민들 앞으로 나왔
다. 호민관들의 말을 믿은 시민들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게 그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마르키우스는 사과는커녕 오히려 질타하는 어조로, 음성도 표정도 청중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시민들은 격분하였고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적나라하게 드
러내었다. 호민관 가운데서 가장 난폭한 시키니우스는 동료들과 감시 의논한 다음 엄숙하게
걸어나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즉 마르키우스에게 사형을 선언하는
바. 보안 대원들은 그를 타르페이아 절벽으로 끌고 가서 지체 없이 아래로 내던져 버리라고
하였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보안 대원들이 마르키우스에게 달려들어 체포하려 하자 많
은 사람들, 심지어는 평민들까지도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한편 극도로 흥분한 귀족들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마르키우스를 구출하기 위해서 달
려들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완력으로 마르키우스가 체포되는 것을 막았다. 즉 그를 둘러싸
고서 보안 대원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난장판에서는 아무리 소리를 질
러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일부 귀족들은 시민들에게 손을 내밀며 극단적인 행동만은 삼
가 달라고 호소하였다. 마침내 호민관의 측근들은 수많은 귀족들을 죽이지 않고서는 마르키
우스를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시민들을 설득하여 전례 없이 가혹한 행
동을 삼가라고 설득하였다. 또한 돌발적인 폭력을 쓸 것이 아니라 정규적인 방법인 시민의
총 투표로 결정하자고 설득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시키니우스는 귀족들을 돌아다보며 시민들
이 마르키우스를 처벌하려고 하는데, 시민의 손에서 강제로 그를 구출해 내려는 당신들의
저의가 무엇이냐고 따졌다. 귀족들은 즉시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묻겠소. 로마에서 가장 훌륭한 분 가운에 하나인 마르키우스를 끌
어다가 재판도 받지 않고 야만적이고도 불법적인 방법으로 처단하려는 발상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이며 그 저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사 말이오?" " 좋소, 그러나 당신들의 질문에 대
해서는 대답할 필요가 없으며 단지 시민들이 당신들의 요구를 허용하는 것뿐이오. 당신들이
원하는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소."
여기서 호민관들은 마르키우스에게 말머리를 돌렸다. "마르키우스, 우리가 당신에게 약속
하니 돌아오는 제 3장날 법원에 출두하여 가능하다면 로마 시민에게 당신의 무죄를 증명하
시오. 로마 시민들이 당신의 진술을 듣고 투표로서 판결할 것이오."
귀족들은 투표에 부친다는 날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협상 내용에 만족하
며, 마르키우스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리고 돌아갔다. 그런데 재판이 열리기까지 며칠 사이에
안티움과 전쟁이 일어났다. 귀족들은 이 전쟁으로 얼마간 시간을 끌다 보면 시민의 분노가
어느 정도 사라질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또한 시민들은 전쟁을 치르면서 곧 유순
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시민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점령과 전쟁에 집념을 갖게
하여 오랫동안 전쟁을 끌다 보면 그들의 분노도 자연히 감소되다가 결국에 없어지고 말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귀족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안티움과의 휴전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군
대가 로마로 돌아오게 되자, 귀족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들은 빈번하게 회의를 열어 이 사
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논의하였다. 마르키우스를 구하고 시민의 선동자 두 명을 어떻
게 제압할 것인지에 대해서 토의한 것이다. 원로원에서 시민에게 가장 많은 적대감을 품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공표하였다. 만일
원로원에서 귀족을 재판하고 언도하는 권한을 인민에게 맡긴다면 원로원 스스로도 정부를
배신하는 행위를 자행하는 것에 다름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원로원에서 시민을 지지하는 편인 연로한 의원들은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였다.
즉 그돠 같은 권한을 시민에게 부여한다 하더라도 일부 위원들이 상사하는 것처럼 귀족에게
참혹하고도 가혹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오히려 그러한 권력을 양보 받
는다면 더욱 부드러워지고 자비로워질 것이하고 하였다. 더욱이 시민들은 그들이 원로원을
모욕한 것이 아니라 원로원이 그들을 모욕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재판할 권한을 그들에
게 준다면 그 원한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르키우스는 원로원이 둘로 갈라져 한편은 자신을 지지하고 또 한편은 시민을 두려워하
며 고통과 불안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 호민관들이 어떠한 죄과로 자기를 기소할 생각이며,
시민들 앞에서 무엇을 변명하라고 강요하는지 하는 기소의 항목들과 그들의 의중을 알고 싶
었다. 그리고 시민들로부터 그가 국가 찬탈을 기도했으니 탄핵을 받아 마땅하며, 절대적인
전제자가 되려고 기도한 죄과를 그에게 입증해 보이겠다는 시민 측 답변을 들었다. 이에 마
르키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죄목이라면 당신들의 집회에 나가 당장 해명하겠고. 그리
고 어떠한 종류의 재판이라 해도 달게 받겠으며 그 벌이 무엇이든지 거절하지 않겠소. 다만,
다른 이상한 죄목을 내세워 원로원을 기만하지는 마시오."
이러한 조건을 시민들이 받아들임으로써 마르키우스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시민
이 모이자 호민관들은 종래의 관례인 백인조 제도에 따르지 않고 종족별로 투표해야 한다고
강요하였다.
호민관들은 반역 죄목으로 그를 기소하려 했는데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호민들관은 방향을 바꾸어 마르키우스가 원로원에서 곡식 가격 인하를 반대하고 호민관 제
도를 없애자고 발언한 것을 문제삼았다. 또한 새로 추가된 죄목은 다음과 같다. 마르키우스
가 안티움을 침략하였을 때 거둬들인 약탈품과 전리품은 당연히 국고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
인데, 그는 자신을 따라 종군한 부하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주었다는 것이다. 이 고발내용은
마르키우스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므로 다른 죄목 이상으로 그를 당황하게 하였
다. 그는 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만족스럽게 답변할 수 없었다. 사전에 충분히 준비를 못 했
지 때문이다. 마르키우스는 이 질문에 대한 변명의 한 방도로, 그를 따라 전투에 참가한 부
하들의 전공을 확대하여 칭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투에 참가했던 수보다 훨씬 더 많
은 수의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그의 말을 가로막고 말았다. 그들은 국내에 남아 있던 사
람들이었다. 결국 표결이 진행되었을 때 세 부족의 대다수는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형
벌은 종신 추방이었다.
종신 추방이라는 언도가 내려지자 시민들은 적에게 승리했을 때보다 더 기뻐 날뛰며 법정
을 나섰다. 한편 원로원은 슬픔과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그들은 시민에게 큰 권력을 부여함
으로써 이토록 무모하게 행사하도록 만든 자기들의 실책을 후회하였다. 이때에 귀족과 평민
을 구별하려면 의복이나 특별한 다른 흔적을 찾아볼 필요가 없었다. 물오볼 것도 없이 기뻐
날뛰는 것은 평민이요,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은 귀족이었으니까 말이다.
마르키우스 본인은 태연자약하였으므로 굴욕을 당했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의 태도나 행동, 표정에는 조금도 동요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측근들이 모두 초주검
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낙심해야 할 그만이 전혀 불행에 동요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기의 행동을 반성하여 판결에 복종하게 되었다거나 또는 마음이 순하
여 자연스럽게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겉보기에는 아주 침착
한 것 같았지만 내심으로는 격렬한 분노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냉정한 그의 태도가 큰 울분의 증세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말하
자면 격정에 불이 붙어 분노로 화할 때 좌절감이나 나약함이 사라지고 마는 것과도 같다.
열병에 걸린 사람이 끙끙 앓는다면 화난 사람은 그 행동이 민활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러
한 행동은 병이 들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팽창을 일으켰다거나 타올랐다거나 하는 것
을 밖에 볼 수 없는 증상이다. 마르키우스는 그가 이러한 정신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
여주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불행한 소식을 듣고 슬픔에 겨워 큰 소리로 울고 있는 어머니
와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마르키우스는 그들에게 꿋꿋한 마음으로 슬픔을 참으라고
권고한 다음, 모든 귀족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성문 쪽을 향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몸에 지니
지 않았을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무엇하나 달라는 말 없이 서너 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길
을 떠났다.
마르키우스는 시골에 있는 어떤 집에서 혼자 며칠을 보냈다. 하지만 너무나 분한 나머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마음만 뒤숭숭해질 뿐, 이렇다 하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는 어떻게 하면 로마인들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마침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나라로 하여금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는 이
웃나라인 볼스키아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우선 볼스키아의 의향을 떠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나라는 인구에 있어서나 재력에 있어서 아직도 막강하다는 것을 마르키우스는 알고 있었
다. 그리고 얼마 전 로마에게 패하여 입은 피해로 말이암아 그들의 원한과 분노가 더 커졌
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안티움 시에는 툴루스 아우피디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재력과 용기와 좋은
문벌로 볼스키아 인들 사이에서 왕자와 같은 존경과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마르키우스는
툴루스가 로마 사람 이상으로 자신에게 특별한 적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귿
르 사이에는 위협과 도전이 쌍방 사이의 전투에서 몇 번씩 오고갔으며, 두 사람의 불 같은
적개심은 급시야 젊은 병사들마저도 격분시키는 격전으로 번졌으니, 국가간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키우스는 툴루
스의 성품이 너그러운 것과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가 로마로부터 받은 굴욕을 씻고 싶어한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음의 시를 보면 마르키우스의 행동이 잘 나타난다.
분노를 꺾기는 심히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일을 하게 한다.
율리시스처럼 길을 가다 만나는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복장으로, 그의 살아
있는 적의 도시로 들어섰다. 그가 안티움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거리를 지날 때
몇 사람을 만났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곧장 툴루스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집안으로 들어가 난롯가에 앉은 후 얼굴을 가렸다. 하인들은 그의 행
동을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그의 풍채에 배어 있는 위엄 때문에 감히 일어서라거나 누구냐고
물어 볼 용기를 내기 못했다. 하인들은 저녁식사 중인 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렂3k
툴루스는 즉시 식사를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툴루스는 마르키우스를 불러 그의 정체와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물었다. 마르키우스는 얼굴을 드러내고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를 보고도 생각나지 않으시거나,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되신다면 저 스스로 소개를 올
리겠습니다. 툴루스 장군님, 저는 볼스키아 국민에게 몹쓸 짓을 많이 한 장본인인 카이우스
마르키우스입니다. 볼스키아 국민을 괴롭혔다는 표적으로 코리올라누스라는 이름 하나를 남
보다 더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일평생 겪어 온 모든 고난과 위험의 대가로 받은 단 하나의
보상은, 볼스키아 국민에게 적개심을 자아내게 하는 그 칭호 하나뿐입니다. 그 밖의 다른 모
근 기득권은 로마 시민의 시기와 분노, 그리고 정치가들이 비겁성과 반역 행위로 인하여 박
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조국에서 쫓겨난 뒤 유랑민 신세가 되어 장군의 난롯가에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기로 온 것은 일신의 안전이나 보호를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
다. 죽음이 두렵다면 어찌 이 곳으로 왔겠습니까? 다만 저를 추방한 자들에게 원수를 갚고
자 할 따름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몸을 장군께 맡김으로써 이미 원수를 갚은 것과 다름없
습니다. 만약 장군께서 로마를 침공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의 불행을 이용하시어 그 일
을 돕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받은 수모와 치욕이 이 나라 모든 국민의 행복이 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저는 진정 장군을 적으로 삼고 싸웠던 것 이상으로 장군을 위하여 싸울
것입니다. 제가 로마의 내부 사정에 밝다는 것이 이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장군께서
더 이상 전쟁을 하실 의향이 없으시다면 저를 죽이십시오. 과거에 장군의 적수였던 제가 이
제 와서 충성을 보인다 하더라도 별 쓸모가 없게 된 이용할 가치도 없는 사람을 오래 살려
두는 것은 장군에게 쓸데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툴루스는 아주 기뻐하며, 오른손을 그에게 내밀면서 외쳤다. " 일어나시
오, 마르키우스 장군. 그리고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 나라에 장군께서 가져오신 가장 큰 선
물입니다. 당장 쓸 수 있는 장군 자신을 가져오셨으니까요. 우리 국민들이 장군에게 친절을
베풀 테니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툴루스는 곧 축연을 베풀어 정성을 다해 그를 환대
하였다. 그리고 며칠 동안 두 사람은 전쟁을 수행할 방도에 관하여 논의를 거듭하였다.
볼스키아에서 이러한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로마에서는 마르키우스를 추방한 시민과 원로
원 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평온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점성가들과 사제들, 심지어는 민
간인들까지도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징조와 괴변을 보고해 왔다. 그 중의 하
나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티투스라티누스는 평범한 일개 시민에 지나지 않았으나, 인품
이 얌전하고 후덕하여 미신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허둥
대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가 꿈에 유령 하나를 보았는데, 마치 유피테르 신 같
았다. 그 유령이 자기에게 원로원으로 가서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내 행렬에 앞장 선 춤꾼이 언짢고 못쓰겠더라.
처음 그 꿈을 꾸었을 때 그는 유령의 모습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두세 번
같은 꿈을 꾸고서도 유령의 명령을 무시하다가 갑자기 앞날이 창창한 아들을 잃었고, 본인
도 별안간 중풍에 걸려 수족을 못쓰게 되었다. 그제서야 라티누스는 들것에 실려 원로원으
로 가서 자신이 연거푸 꾼 꿈이야기를 소상히 전했다. 그러자 곧 수족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일어서 스스로 집에 돌아왔다. 깜짝 놀란 원로원 의원들은
이 일을 이상하게 여겨 열심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라티누스의 꿈이 암시한 바는 다음과 같
다.
어떤 노예가 극악한 죄를 저지른 일이 있었다. 주인은 이 노예를 다른 노예들에게 맡겨
시장을 돌며 채찍으로 때리게 하였다. 결국 죄를 지은 노예는 절명하고 말았다. 주인의 명령
을 수행하던 노예들은 불쌍한 노예를 어찌나 심하게 때렸던지 죄를 지은 노예는 고통에 못
이겨 보기 흉한 몰골로 몸을 꿈틀거리고 비틀었다. 마침 공교롭게도 유피테르를 기념하는
엄숙한 행렬이 그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행렬을 따라가던 구경꾼들 중에서 몇 사람은 그
비참한 광경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아무도 간섭하지는 않았다. 그저 잔인한 벌을 준
주인에게만 형식적인 말로 나무라거나 증오감을 나타낼 정도였다. 왜냐하면 당시의 로마 사
람들은 아주 다정하게 노예를 대했고, 주인과 노예가 서로 엉켜서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자연히 주인과 노예의 사이는 친했다. 범행을 저지른 노예에게 주는
가장 엄한 벌은 짐마차를 떠받치는 재목 하나를 뽑아 등에 지우고 마을을 돌아다니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수모의 꼴을 가족들이나 이웃들에게 보이게 된 노예는 신용을 잃게 되어 '
버
팀목'으로 불리게 된다. 'furca'라는 말은 버팀목 또는 지주의 뜻인 고대 로마 어다.
라티누스의 꿈 이야기를 들은 원로원에서는 이 불쾌하고도 볼품 없는 춤꾼이 대체 누구일
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드디어 몇 사람이 그때의 일을 생각해 내었다. 그리고 거리를
끌려 다니며 매를 맞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 그 불쌍한 노예를 떠올렸다. 원로원 의원들은
서로 죽은 노예가 누구였냐고 물었다. 사제들도 의논한 결과 당시 노예에게 벌을 준 주인을
벌하기로 결정하고 그대로 시행하였다. 그리고 신을 기념하는 새로운 축하 행렬과 운동 경
기를 다시 개최하였다.
누마는 성사의 현명한 제정자였는데, 시민을 의식하면서 자기가 나아갈 실에 특히 신중하
였다. 즉 고관이나 사제들이 종교적인 의식을 행할 때, 전령이 앞장서서 'Hoc age'라고 외
치
게 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다. 이 말은 '이 일을 행하라'는 뜻인데, 그들이 행하는 성사
에
만 정성을 쏟을 뿐 다른 어떠한 속사에도 전혀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경고였다. 왜냐하면 사
람들은 생각에 어떤 제약을 가해야만 성스러운 일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이러한 사고뿐만 아니라 그보다 못한 일이 있어도 제사나 행렬이나 운동경기
같은 것을 다시 개최하는 관습이 있었다. 신상을 실은 텐사이라는 전차를 끄는 말들 가운데
한 마리라도 넘어지거나, 말을 모는 전사가 고삐를 왼손으로 잡더라도 행사를 다시 시작하
라는 추상간은 명령이 떨어진다. 후세에는 똑같은 제사를 서른 번이나 다시 드린 예까지 있
다. 이러한 일은 로마 인의 오랜 관습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사를 드릴 때 발생
한 사고나 실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
럼 로마인들은 종교적인 행사를 치르는 데 있어서 온갖 정성과 주의를 기울였다.
마르키우스와 툴루스는 안티움의 요인들과 비밀리에 의논을 하여 로마인들이 분열을 일으
키고 있을 때 침범해 들어가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볼스키아와 로마 사이에는 2년간
의 휴전 조약이 체결되어 있었다. 안티움 인들은 이 조약 때문에 차마 선제 공격을 감행치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로마에서 운동경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로마인들은 운동경
기를 구경하러 온 모든 볼스키아 인에게 일몰 전에 로마 시를 떠나라고 했다. 이 선언으로
로마는 안티움에게 휴전협정을 파기할 구실을 먼저 제공한 셈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것이 마르키우스가 비밀리에 집정관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꾸민 일이라고 한다. 즉 볼스키아
인들이 경기 도중에 로마로 쳐들어가서 불을 지르려고 하니 그 전에 그들을 몰아 내라고 꾸
민 거짓 연극이라는 것이다.
로마인들이 볼스키아 인을 쫓아 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볼스키아 인들은 로마인들에게
불 같은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툴루스는 이러한 국민들의 분노를 이용하여 마침내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툴루스는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하여 얼마 전의 전쟁에서 로마가 볼
스키아로부터 빼앗아 간 영토와 도시들을 반환하고 요구하였다. 이 통첩을 전해 들은 로마
인들은 노발대발하였다. 그들은 볼스키아 인이 무기를 드는 날엔 자신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통첩이 반환되자 볼스키아에서는 전체 시민대회를 소집하여
로마를 침략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마르키우스를 불러들여 과거에 있었던 서로의 원한에
대하여 묵은 기억을 떨쳐 버리고, 앞으로는 친구로서 또는 동지로서 서로가 적이었을 때 못
지 않은 위력을 발휘하자고 제의하였다.
볼스키아 인들은 마르키우스를 대회장으로 초청하여 그의 연설을 들었다. 그리하여 과고
의 행적뿐만 아니라 현재의 웅변을 통하여 드높은 용기와 능력과 기량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툴루스와 함께 전쟁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마르키우스는 볼스키아가 전쟁준비를 하는 데 너무 오랜 시일을 보내어 공격할 시기를 놓
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였다. 그는 다른 준비를 행정관과 시장에게 일임한 뒤, 가장
용감한 지원병만 이끌고 불시에 로마 영토로 침입하였다. 그 결과 마르키우스는 수많은 전
리품을 획득하여 진지로 가지고 왔다. 그 양은 너무나 많아 볼스키아 시민들이 나누어 쓰기
에도 지칠 정도였다. 그러나 마르키우스의 목적은 많은 양식을 얻는 것도 아니었고, 로마의
국토를 황폐화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의도한 가장 큰 목적은 로마의 귀족들로 하여금 평민의 의심을 받게 함으로써 양자
간의 사이를 악화시키고자 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르키우스는 평민들의 토
지를 모두 황폐화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였다. 그 반면에 귀족들의 농장이나 땅은 손
도 대지 않고 특별히 명령하여 조심히 보존하게 하였다. 이에 로마에서는 귀족과 평민 상호
간에 욕설과 싸움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국내 상황은 그 전보다 훨씬 더 심
각해졌다. 원로원은 평민들이 마르키우스에게 부당한 처사를 하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
났다고 비난했다.
그런가 하면 평민들은 귀족들이 원한을 품고 복수하기 위하여 마르키우스로 하여금 본국
을 침공하게 했다고 으르렁거렸다. 그랬기 때문에 평민들이 모두 나가서 싸우고 있을 때 귀
족들은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귀족들은 전쟁으로부터 피해도 받지 않
아 그들의 토지나 재산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규탄하였다. 이와 같이 마르키우스가 로마를
급습하여 전공을 세운 후 전세는 볼스키아 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들은 더욱 용감해
져서 로마 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마르키우스는 볼스키아 군을 철수시켜 무사
히 귀환했다.
그러나 볼스크아에서는 전국의 장정들이 앞다투어 싸움터로 나가겠다고 자원하였기 때문
에 곧 대군이 편성되었다. 이렇게 하여 편성된 군대의 일부는 볼스키아의 여러 도시를 지키
는 수비대로 분리하여 국내에 남기고, 나머지 병력은 로마 침공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되었
다. 마르키우스는 툴루스에게 어느 곳을 지휘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말했다. 툴루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즉 마르키우스가 자기 못지않게 용감하고 자기보다 훨씬 더 운이 좋은 사람이
므로 출정군을 맡고, 자신은 뒤에 남아서 국내의 여러 도시를 방어하며 출정군의 보급을 담
당하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이리하여 증원부대를 얻음으로서 훨씬 더 강해진 마르키우스는
가장 먼저 로마의 식민지인 키르카이움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하지만 키르카이움에서는 항
복만 받아 내고 주민들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곳을 지나 라틴 지방으로
진군하여 그 곳을 초토화시켰다. 이 나라는 로마와 동맹국 원군을 얻기 위하여 과거에도 몇
번씩 로마에 사절단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마르키우스는 이 곳에서 로마 군과 싸우
게 될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형편은 달랐다. 평민들은 싸울 의사를 거의 보이지 않았고, 집정관들도 임
기가 거의 끝나 가고 있었으므로 전쟁이라는 위태로운 일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라틴
의 사절단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리하여 마르키우스는 적 지원군의 반격을 받지도 않고
여러 도시로 진격하여 톨레리아, 라비키, 페다, 볼라 등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은 마르키우스에게 저항하였다. 하지만 마르키우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들의 가옥을 약탈하였으며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 버렸다. 그러나 볼스키아 군에게 항복해
온 자들에게는 특별하게 배려하였다. 그들에게는 도시에서 가장 떨어진 곳에 징을 치도록
하고 절대로 그들의 재산에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군병들이 명령을 어기고 그들에게 무슨
해를 끼칠까 봐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키우스가 이끄는 볼스키아 군은 로마에서 채 10마일도 떨어져 있지 않은 도시 볼라를
점령한 뒤, 그 곳에서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였으며 거의 모든 장정들을 참살하였다. 그때 후
방에서 그의 전공 소식을 들은 볼스키아 장병들이 국내에 남아 있지 않고 무장을 갖춘 채
달려와 마르키우스에게 합류했다. 그들은 마르키우스만이 유일한 사령관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과 명성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졌다. 단 한 사람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고 간 것이 두 나라의 운명에 이렇게까지 급작스럽도고 강력하게 작용한 데는 온 천하
가 놀랐다.
한편 로마 전역에서는 혼란이 감돌았다. 시민들은 싸우기를 전적으로 거부하였으며, 거의
모든 시간을 상대방을 헐뜯고 비난하는 데 허비하였다. 그때 라비니움 시는 로마 건국의 요
람이며, 아이네이스가 창건한 이탈리아 최초의 도시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그때까지
나름대로 가지고 있던 생각과 성향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그리고 귀족들도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다. 평민들은 마르키우스에 대한 추방령을 취소하고 본국으로 소환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원로원은 의원총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이 안건을 토의한 결과는 부결이었다. 그 이유
는 여러 가지로 추정된다. 평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부한다는 이유였던지, 또는 시민
의 지지를 받는 마르키우스가 귀환하게 되는 것이 싫어서였던지, 또는 그가 평민에게서만
배척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계급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
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로마의 귀족들이 모두 마르키우스를 동경하며 그와 같은
시련을 당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 스스로는 국민 전체의 원수로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서 무엇 때문에 마르키우스를 소환하자는 안건이 부결되었는
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부결된 결의안이 공표되자 평민들은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원로원을 통과하
지 않은 안건을 평민들이 표결하여 법률로 제정할 권한이 없었다. 이 소문을 들은 마르키우
스는 여느 때보다 더욱 격분하였다. 그는 라비니움의 포위를 풀고 로마를 향하여 노도와 같
이 진군하였다. 그리고 로마 시 전방 5마일의 지점에 있는 클루일리아로 근처에 진을 쳤다.
그가 로마에 접근하자 로마는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 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의
소요는 일절 그쳤다. 왜냐하면 더 이상 집정관이든 원로원이든 감히 마르키우스를 다시 불
러들이자는 평민의 의결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녀자들은 놀라서 거리를 갈
팡질팡하였고, 노인들은 사원에 모여 눈물로 호소하며 평화를 원했다. 결국 귀족들도 이와
같은 위기를 막아 낼 방비책을 강구할 용기와 지혜가 자신들에게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르키우스와 휴전할 것을 제의한 시민들의 의견이 옳다고 인정했다.
원로원에서는 모든 불화를 잊어버리고 마르키우스를 달랠 방도를 연구한 끝에, 그와 싸움
을 시작함으로써 중대한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원로원,m
평민 집정관이 만장일치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그의 귀국을 종용하였다. 그리고 부디 휴전에
응하여 자기들로부터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편지
를 가지고 가도록 원로원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마르키우스의 친척과 친구 사이에서 뽑혔다.
하지만 이들을 처음 만나자마자 마르티우스가 아주 반갑게 맞아줄 것이라는 기대는 무참하
게 깨지고 말았다.
사절단들이 볼스키아 진영으로 안내되어 가보니, 좌우로 볼스키아의 장군들이 시립하고
있는 가운데 마르키우스가 교만스럽고도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사절단의 목
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절들은 가장 부드럽고 공손한 말투와 태도로 자신들이 파견된
까닭을 설명하였다. 이 설명이 끝났을 때, 마르키우스는 몹시 화를 내며 노한 목소리로 자신
의 처지와 과거에 그들로부터 받은 학대에 관하여 신랄하게 따졌다. 그리고 그는 볼스키아
장군의 입장으로 지난번 전쟁에서 로마에서 빼앗긴 볼스키아의 여러 도시와 땅을 반환할 것
과 로마에 거주하는 볼스키아 인을 라틴 인과 동등하게 대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조건이 쌍방에게 공정하게 이행되지 않으면 영속적인 평화는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마르키우스는 사절들에게 30일 간의 여유를 주고 신중히 결정하라고 하였다.
로마의 사절단이 떠나자 마르키우스는 볼스키아 군을 로마의 영토에서 철수시켰다. 이 일
을 구실로 하여 오랫동안 마르키우스의 명성을 시기하고, 시민들에게 끼치는 그의 영향력에
불안을 느끼던 일부 볼스키아 인들이 그를 공격하였다. 그 중에는 툴루스도 포함되어 있었
다. 이것은 그가 마르키우스에게 어떤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약점 대
문에 비롯된 것이다. 툴루스는 자신의 영광이 마르키우스 때문에 전적으로 무시당했다는 것
을 알게 되자, 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르키우스 때문에 자신이 국민들 사이
에서 완전히 명성을 잃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온 국민은 마르키우스만을 그들의 위
대한 새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마르키우스만이 전부라고 보는 것으로 생
각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마르키우스가 임명하는 지위를 그저 고맙게 여기고 안
주할 위인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서부터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최초의 불평과 비난의 시가 사방으로 뿌려지게 되었다.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서로 모여 울분을 터뜨렸다. 그들은 마르키우스의 행위가 어떤 도시
나 무기를 적에게 넘겨준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로마로부터 철수한 것도 실질적인 반역
행위라고 하였다.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실수는, 모든 것이 결정되는 중요한 전투에서 귀중한
시간과 기회를 적에게 넘긴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30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적인 로
마에게 주었는데, 그 30일 이내에 온 천하가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마
르키우스는 그 30일 동안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즉 그는 로마의 동맹군을 공격하여 그
영토를 유린하였으며, 인구가 많고 영토 또한 넓은 일곱 개의 도시를 그들로부터 빼앗았다.
그 동안 로마 군은 감히 이들 우방국들을 도울 생각조차 못하였다. 겁에 질려 마치 중풍
에 걸린 환자처럼 의식과 행동을 잃은 듯 싸우려는 기백과 능력을 보이지 않았다. 30일이
지나자, 마르키우스는 또다시 그의 전 군을 이끌고 나타났다. 로마에서는 다시 사절단을 그
에게 보내어 분노를 풀고 군을 철수해 줄 것과 양국이 다 같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을 제안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로마는 비록 위협에는 양보할 수 없지만 볼스키아가 요
청하는 양보에는 무기를 버리고 화의에 응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르키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볼스키아의 장군으로서는 이에 대하
여 대답하지 않겠으며, 그러나 아직 로마의 한 시민으로서 충고를 겸한 경고를 하자면 지금
은 로마가 그렇게 도도하게 굴 때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분고분하고 겸손한 태도
로 조건에 대한 결정을 3일 내에 제시하라고 말했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쓸데없는 조건을
제시한다면 더 이상 아무도 그의 진지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할 것을 각오하라고 하였다.
사절단이 돌아와 이 소식을 원로원에 보고하였을 때. 로마는 폭풍 전야를 맞이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다는 걸 알게 된 그들은 부득이하게 최
후의 수단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제와 성직자와 로마의 고대 관습에 따
라 새들의 동향을 보고 예언하는 점술가들에게 제각기 행사 때 입는 제복을 입고 관습에 따
라 행렬 지어 마르키우스에게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들의 목적은 지난번에 요청한
것처럼 전쟁을 그치고 로마인과 볼스키아인 사이에 휴전 조건을 협의하는 것이었다. 마르키
우스는 이 사절이 그의 막사로 들어오는 것까지는 허용해주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것
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항복도 후퇴도 할 것 없이 먼저 제의한 조건을
수락할 것인지, 아니면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여 그 중의 하나를 택하
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사제들 일행이 돌아오자, 로마인들은 시내에 농성하
면서 적이 공격해 올 만한 성벽 주위를 감시하였다. 오직 시간과 운에만 그들의 희망을 걸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밖의 살아날 길이라곤 아무 것도 생각해 내지 못하고 로마인들은 수
수방관에 빠졌다. 혼란과 공포와 흉조만 이 시내를 지배하였다. 그때 마침 호메로스의 시에
서나 진리라고 인정될 수 있는,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호메로스의
시에 나오는 구절에는 대단하고도 색다른 사건이 나오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푸른 눈의 여신이 그에게 영감을 주셨다.
또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러나 어떤 신께서 내 마음을 돌려놓으셨나니, 공훈을 세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 것인
가를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또다시 이렇게 나타나 있다.
스스로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신께서 명령하신 것이었거나.
이러한 시구를 보고 사람들은 시인을 경시하거나 무시하였다. 마치 시인은 불가능한 일이
나 터무니없는 신화 따위를 만들어 냄으로서 인간의 신중한 사상이나 자유의사를 부인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경우에는 그와 같은 점이 조금도 없다.
그의 시작에서는 조리 있고 가능성 있는 일을 모두 인간의 소행으로 보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시구로도 능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의 위대한 영혼과 의논하였다.
또 하나의 시구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말하였다. 심한 고통에 사로잡힌 아킬레스는 그의 가슴 속에 있는 두 가지 목적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시구에서도 같은 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자의 애걸하는 말에 꺾이지 않았다. 용감한 벨레로폰의 고결한 마음은.
사람의 행동이 이상하고 특이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의 계시로 보이는 어떠한 충동
이나 돌발적인 영감이 요구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신은 인간에게 힘을 만들어 주는 것
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힘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생각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만약 신
이 인간에게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나 힘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신이 인간을 돕거나 힘을 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은 물론 신이 실제로 우
리들의 몸을 이리저리 돌리거나 우리들의 수족을 이리저리 움직여 옳은 일을 하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신은 우리 마음에 생각과 지혜를 넣어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옳은 일
을 행하고 사악한 일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의미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로마의 부녀자 일부는 신전으로 갔다. 그들의 대부분과 특히 지체
높은 귀부인들은 의사당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으로 갔다. 그 중에는 포플리콜라의 누이로,
평상시나 전시를 가리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여 온 발레리아가 끼여 있었다.
포플리콜라는 그의 전기에 기록되어 있듯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누이인 발레리아는 아직 로마에서 일생 동안의 업적과 좋은 문벌로 인하여
대단한 존경과 명예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 이 부인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영감에 사로
잡혀 신의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나라를 건져 낼 올바른 방법을 찾아 내었다. 그녀는 몹시
분기하고 다른 부인들도 분기케 하여, 그들을 데리고 마르키우스의 어머니인 볼륨니아의 집
으로 찾아갔다.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볼룸니아는 며느리와 함께 앉아서 어린 손자들을 무
릎에 안고 있었다. 발레리아는 일행을 대표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오! 볼룸니아, 그리고 베르길리아. 우리가 찾아온 것은 여자라는 입장에서 온 것이지, 원
로원의 지시나 집정관들의 명령이나 다른 어느 장관의 임명을 받들고자 온 것은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신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한덩어리가 되게 하여 댁으로 이끌어
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들 자신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는 문제를 간
청하도록 하셨나 봐요. 만일 우리들의 제안에 동의하신다면, 사비니 여자들이 자기들의 아버
지와 남편을 설득하여 치명적인 적의를 평화와 우정으로 돌리게 한 것보다 더 큰 영광을 누
리세요. 일어서서 우리와 함께 마르키우스 장군을 찾아가 주십시오. 우리의 탄원 행위에 동
참해주세요. 그리고 조국을 위하여, 조국에 이득이 되도록 참되고도 공정한 증언을 해주세
요. 이 나라는 장군으로부터 받은 피해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조국은 당신에게 해를 끼
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분하면서도 당신을 학대할 생각조차 가져본 일이 없지요. 그러므로
이 나라에 아무런 이로울 것이 없는 당신을 장군에게 무사히 되돌려드리려 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증언해 주세요."
발레리아가 이렇게 말하자, 다른 부인들도 일제히 동의를 보냈다. 이 말에 볼룸니아는 다
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여러분, 나와 며느리 베르길리아는 당신들과 똑같은 비참한 처지에
빠져 있어요. 우리에겐 오로지 우리들만의 슬픔이 있어요. 우리들은 마르키우스의 공과 명성
을 잃었어요. 그는 지금 적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금되어 있는 것과 다름없어
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큰 슬픔은, 이 나라가 이렇게 까지 약해져서 이제는 우리 두 여자
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는 사실이군요. 그 아이는 우리의 말조차 들어줄 것 같지 않
군요. 그 아이가 예전에 자기 어미나 아내나 아이들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던 나라를 이
렇게까지 욕되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돕겠어
요. 어서 그의 앞으로 가십시다. 가서도 별 도리가 없게 된다면 나는 자식의 발 아래 엎드려
조국을 위하여 애원하다가 죽으렵니다."
이렇게 말한 그녀는 며느리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부인들을 따라 볼스키아 군 진지로
갔다. 이처럼 너무도 가련한 광경은 적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말없이 그 모
습을 우러러 보았다. 그때 마르키우스는 다른 장군들과 함쎄 자리에 앉아 있다가 여자들의
일행이 자기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을 보고 수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자신
의 어머니가 선두에 서서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른 때처럼 위엄 있
는 태도를 지키려고 하였으나 감정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는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당황했
다. 그리고 차마 그대로 거만하게 앉아서 그들을 맞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달려가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어머니에게는 절을 한 다음 오랫동안 껴안았다. 그 다음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껴안았다. 그는 가족들을 쓰다듬는 애무와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했다. 또한 복받쳐 오
르는 격정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아서야 비로소 마르키우스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말하
고 싶어한다는 눈치를 알아차렸다. 그는 우선 볼스키아 장군들을 불러들여 함께 듣기로 하
였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우리들이 입은 옷과 우리들의 꼴을 보면,
네가 집을 버리고 떠난 이래 집에 남은 우리들이 얼마나 비참한 꼴로 살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여자들보다 먼저 우리의 불행이 얼마나 켰겠는지 생각을 해보아라. 우
리가 가장 기뻐해야 할 이 순간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렇게도 비참하구나. 내 아들인
네가, 또 네 아내의 남편인 네가 무장을 하고 자기 나라의 성을 포위하고 있는 꼴을 보다니.
지금까지는 아무리 비참한 경우에 처하였다 하더라도 기도만 올리면 위로를 얻을 수 있었고
마음이 풀렸는데, 이번의 경우에는 아무리 기도를 올려도 혼란과 고통만 더할 뿐이구나. 우
리의 기원도 당치않은 짓이로구나. 우리는 로마의 승리와 너의 무사함을 동시에 신께 기원
할 수는 없다. 너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조국의 적이 되어 로마를 저주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네 아내와 아이들은 너를 잃거나 나라를 잃거나 해야 할 슬픈 필연성에 놓여 있
다.
나는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므로 친목과 화합이 싸움이
나 적개심보다 더 좋다는 것과, 또한 어떤 나라의 파괴자가 되기보다는 두 나라의 은인이
되라는 이 어미의 충고를 네가 들어주지 않는다면 너는 너를 낳아 준 이 어미의 시체부터
짓밟아 쓰러뜨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네가 로마로 쳐들어가지 못할 줄로 알아라.
왜냐하면 이 어미는 내 나라 사람들이 내가 낳은 자식을 꺾고 기뻐하거나, 혹은 내가 낳은
자식이 자기 조국을 정복하고서 기뻐하는 꼴을 보게 되는 날까지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너에게 볼스키아 사람들을 무찌르고 네 나라를 구하라는 요구를 한다면, 내 아
들아, 그런 네가 참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동포에게 빈곤을 가져다주는 것은 야비한
일이고, 우리들을 믿는 사람들을 배반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행위다. 그러나 실제로 우린ㄴ
두 나라가 같이 살아나기를 바랄 뿐이다. 이 일은 볼스키아측에 더 많은 영광과 명예를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군대가 더 우세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평화와 화목이라는 가장 큰
복을 줄 수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 혜택은 우리뿐만 아니라 두 나라 백성이 고루
받게 된다. 그것을 우리가 받았을 때 그 치하를 받을 사람은 바로 너다. 그러나 네가 그것을
받지 못했을 경우, 두 나라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사람도 바로 너다. 모든 전쟁의 결
말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이것만이 확실하다. 즉 로마를 정복함으로써 너는 네
조극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볼스키아가 지게 될 경우, 너의 복수심을 만족시키
기 위하여 너는 친구이자 은인인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 마르키우스는 한 마디의 대꾸도 없이 묵묵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말이 끝났는데도 아들이 한 마디 말도 없이 오랫동안 벙어리처
럼 서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오, 내 아들아, 네가 말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은
무슨 뜻이냐? 남에게 모욕감을 자아낼 만큼 모든 것을 질질 끄는 것은 남자의 할 일이고,
어미의 애걸을 대답함으로써 어머니의 마음을 속시원하게 해주는 것은 잘못이냐? 과거에 자
기가 당한 학대를 잊지 않는 것의 위인의 특색이고, 자신의 어버이에게서 받은 은혜를 잊지
않음으로서 명예와 존경심으로 보답하는 것은 위대하고도 선한 사람의 한 부분이 아니란 말
이야?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들을 벌하는 데 그렇게까지 무자비한 너는 남보다는 너 자신을
고맙게 여기는 데 관심을 갖도록 하여라. 너는 이미 네 나라를 벌하였다. 그러나 네 어미의
은혜는 아직 갚지 않고 있다.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는 신께서는 이렇게 의롭고 올바른 내
간청에 너를 동의케 하셔야만 할 일이다. 그러나 꼭 그래야만 한다면 나는 이렇게 하는 도
리밖에 없다."
이렇게 말한 다음 그녀는 아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마르키우스의 처자도 울
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오, 어머님, 이게 웬일이십니까!' 마르키우스는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를 땅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어머니의 오른손을 여는 때보다도 더 꼭 움켜잡으
며 말했다. "어머님은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로마에 있어서는 다행한 일이겠지만, 당신의 아
들에게는 멸망입니다. 역시 어머님께서 저를 패배시키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마르키우스는 어머니와 아내와 조용히 의논을 한 다음, 본인들의 희망에
따라 그들을 로마로 돌려보냈다. 다음 날 아침, 마르키우스는 진지를 철수하였다. 그리고
볼스키아 군을 이끌고 볼스키아로 돌아왔다. 볼스키아에서는 그가 한 일에 대하여 여러 가
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 중에는 마르키우스에게 불평을 품고서 그의 행동을 규탄하는 사
람도 있었다. 그리고 평화를 원하는 사람은 어느 쪽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진지를 철수하는 것은 몹시 싫어했지만, 마르키우스를 배반자로는 보지 않았다. 어머니의 탄
원이라는 대단한 간청에 의하여 마음이 흔들림으로써 부득이 항복한 것은 용서해야만 할 일
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의 명령에 거역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그의 위신
에 억눌려서라기보다는 모두가 그를 숭배하는 마음으로 그의 덕에 의하여 순순히 그를 따른
것이다.
전쟁에서 해방되자 로마 사람들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자신들이 얼마나 큰 공포와 위험
속에서 살아왔던가를 절감하였다. 성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적군이 철수했다는 사실을 시
민들에게 알리자마자, 시민들 모두는 일제히 성문을 열고 밀물처럼 신전으로 밀려들었다. 그
리고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기뻐 날뛰며 머리에 화환을 얹고 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로마 시가 기뻐 날뛰는 것은 원로원뿐만 아니라 시민들 전체가 부인들에게 바치는 명예와
애정의 표시 속에 특히나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시민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로마
가 평화를 되찾은 것은 부인들의 은공이라고 찬양하였다. 그리고 존경을 표시하는 뜻에서
법을 다하여 대접해 주라는 정령을 통과시켰다. 그녀들은 오직 행운의 여신에게 신전을 짓
기로 결의하고, 그 비용은 자신들이 걷을 것이니 신전의 유지비만 국가에서 맡아달라고 요
청하였다. 원로원은 그녀들의 공익심에 크게 감동하여 신전을 공금으로 짓기로 하고, 그 안
에 조각상도 하나 세우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은 자기들이 걷은 돈으로 제 2의 행운의
여신상을 신전 안에 하나 더 세우기로 했다. 그것을 안치할 때 여신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
한다. "오, 부인들이여, 그대들의 선물은 신의 축복을 받을지어다."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거의 믿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에는 이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조각상이 땀이나 눈물을 흘리고, 붉은 핏빛이 도는 이슬방울로 덮여
있었다는 말은 능히 있을 법한 일이다. 왜냐하면 목재나 돌이 오래 되어 썩게 되면 습기가
생기고 얼룩 같은 것이 흔히 눈에 띄게 되기 때문이다. 또 내부나 외부로부터의 작용에 의
하여 여러 가지 색깔이 그 표면에 띠게 되는 수도 있다. 이러한 흔적을 보고 신이 인간에게
미리 경계하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한 초상이나 조각상의 재료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바람에 조각상이나 초
상이 흐느껴 울거나 신음 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말 역시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나 명백한 낱말, 또는 아주 명확하고도 정교한 말이 생명도 없는 물체
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말할 수 있는 기관을 갖추지 않
은 인간의 영혼이나 신 자체가 말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야기에는
믿을 만한 증거가 무수히 많아서 우리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동의할 것을 강요한다. 마치
우리들이 실제로 보지도 않은 사실을 꿈속에서 보고 들었다고 상상하듯, 우리들의 상상력에
영향을 줌으로서 그것이 감각이라고 믿는 판단력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마르키우스가 안티움으로 돌아왔을 대, 철저하게 그를 미워하고 두려워했던 툴루스는 어
떻게 하면 그를 죽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 궁리하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더 좋은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툴루스는 많은 사람들을 모아 마르
키우스에 대한 위증을 하도록 모의하였다. 그리고 마르키우스에게는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볼스키아 인들에게 사령관으로서 한 일을 보고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마르키우스는 자
신이 민간인이 되면, 툴루스가 장군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므로 볼스키아 시민들에게 가장
큰 세력을 행사할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볼스키아 전 국민이 임명한 군사령관직은 전 국민
이 내 놓으라고 할 때 언제라도 기꺼이 반환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사령관으로서 한
행동에 대한 해명은 당장에라고 할 용의가 있으며, 안티움 시민에게만 하라면 그 요구에도
응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곧 집회가 소집되었다. 선동자들은 이미 군중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마르키우스에게 불리
한 선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키우스가 해명하려고 일어섰을 때 우매한 군중들은 갑
자기 조용해졌다. 그들은 마르키우스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조금도 동요되는 일없이 그의 연
설을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평화에 만족하는 상류 사회의 사람들과 평민들은 진지하게 그
의 연설을 경청하였다. 툴루스는 마르키우스가 방어태세를 점점 굳게 다지고 있다는 데 겁
이 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마르키우스는 훌륭한 웅변가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그가
볼스키아에 바친 봉사가 그를 아끼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행동 때문에 그가 받
고 있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존경은 아직도 여전하였다. 실은 이번에 그가 받게
된 비난도 그의 전공이 너무 큰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시민들의 불평의 소지나 자기들이 로마에 당했다고 생각할 만한 소지는 말
소되었다. 그들은 일당 중에서 가장 대담한 자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도록 사주하였다. 즉 우
리들은 반역자의 변명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에게 아직도 군사령관직을 그대로 줌
으로서 우리들에게 횡포를 부리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고함을 지르도록 한 것이다. 그
들은 하나가 되어 막을 사이도 없이 그 자리에서 그를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
이 일은 시민 대다수에게 불만의 씨가 되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에 존경을 표하기 위하여
전국의 각 도시에서 운집한 시민들의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볼스키아 인들은 성대한 장
례를 지내고, 무기와 전리품으로 그의 무덤을 장식하고, 고상한 영웅이요 명장의 기념물로서
경의를 표하였다.
로마인들의 귀에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들은 마르키우스에 대하여 경의도
분노도 표하지 않았다. 다만 부인들의 요청에 따라 열 달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허용했을
뿐이다. 이것은 로마에서 흔히 어머니나 형제나 아들을 잃었을 때 행하는 관례였으며, 그에
관한 기록에 충분히 표시되어 있듯이 누마 폼필리우스가 제정한 최대의 애도 기간이었다.
마르키우스를 잃자마자, 볼스키아는 그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
었다. 그들은 동맹국이자 우방인 아이퀴아 인과 동맹군의 사령관직을 어느 쪽이 맡느냐는
문제로 크게 다투었다. 마침내 그 논쟁 끝에는 살생과 살육의 참극이 생겼다. 그 다음에는
로마와의 정정당당한 싸움에서 패배를 당하여 툴루스를 잃었을 뿐 아니라 전군의 중요한 인
물들을 거의 잃고 말았다. 볼스키아 인들은 하는 수 없이 항복하여 아주 불명예스러운 조건
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가 마침내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스스로 굴복을 감수하였다.
알키비아데스와 코리올라누스와의 비교
알키비아데스와 코리올라누스 두 사람을 두고 칭찬할 만한 모든 업적을 비교해 보면 군사
적 업적에 관해서는 거의 동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 두 사람 중에서 알키비아데스
쪽이 육 해전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로 그에게 더욱 완전한 사령관이라는 호칭을
주어야 한다는 점이 있다. 이 점을 제외하면 두 사람은 무수히 많은 경우에서 거의 동등할
정도로, 군인으로서는 대담성과 용기를, 장군으로서는 전략과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
모두는 자기 나라에서 사령관으로 전 군을 지휘하고 있을 때 나라의 운명을 크게 증진시켰
다. 또, 한 망명자의 신세로 있을 때에는 본국을 상대로 하여 이전의 공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를 끼쳤다는 사실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공공생활에 있어서, 알의 건방진 태도와 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갖은 수단을 막론하
는 그의 야비한 태도는 절제 있는 시민들의 혐오감을 샀다. 그리고 마르키우스가 보여준 무
례한 태도와 자존심, 안하무인격인 교만한 태도는 로마 민중의 미움을 받았다. 두 사람은
이러한 행위는 모두 칭찬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남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사람은, 오히려
남에게 아첨한다는 평 듣기를 두려워하여 남을 모욕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므로
권력을 잡기 위하여 평민에게 아첨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공포와 폭력과 억압으로
써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그릇된 일이다.
우리들이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마르키우스의 성격은 단순하고도 고지식하였으며, 공인으
로서의 알키비아데스는 파렴치하고도 간사한 전략가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알키비아데스가
보다 더 비난받는 이유는, 투키디데스도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스파르타에서 온 사절단
을 권모술수로 속임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휴전 협상을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
나 아테네를 또 다시 전쟁 속으로 휘몰아 넣은 이 정책은, 아르고스와 만티네아 등의 나라
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아테네를 강력하고도 무서운 국가로 만든 알키비아데스의 공이었다.
디오니시우스가 말한 바와 같이, 마르키우스도 로마의 운동 경기를 구경하러 간 볼스키아
인에 관하여 거짓 사실을 유포시키는 부당한 방법으로 로마와 볼스키아 사이의 전쟁을 유발
시켰다. 그러므로 마르키우스의 경우는 그 행동의 동기가 두 사람 중에서 더욱 불순한 것
같다. 왜냐하면 마르키우스의 행동은 알키비아데스의 경우처럼 정치적 질투심이나 투쟁심이
나 경쟁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인 디온도 말했듯이, 마르키우스는 백해무익
한 분노로 말미암아 이탈리아 전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고, 조국을 배반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죄 없는 도시들을 개인의 분노에 대한 희생물로 삼았다.
알키비아데스의 분노도 조국에 커다란 재난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포들의 감
정이 일변되었음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전비를 뉘우쳤으며, 두 번째로 추방된 후에도 조
국에 남은 사령관들의 패전을 통쾌하게 생각한다거나, 그들이 처한 위험을 모른 체하지 않
았다. 그는 테미스토클레스에게 한 행동 때문에 아리스테이데스가 남에게 칭찬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정적인 장군들을 찾아가서 충고와 전략을 지적해 주었다.
이에 비하여 마르키우스는 일부의 동포들이 자신에게 피해를 끼쳤을 뿐, 그 나머지 귀족
들은 실제로 자기와 고통을 같이 나누고 그에게 동정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 전체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동포들이 몇 번씩 사절단을 보내어 그들이 저지른 단 한
번의 노여움과 무례한 전비를 뉘우치면서 화해를 간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옹고집에 사로잡
혀 이를 허용치 않았다. 그가 조국에 대하여 참혹하고도 무서운 전쟁을 감행한 것은 로마를
완전히 파괴해 버리려는 의도에서였지, 로마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간에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국민들 사이에
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또다시 아테네로 돌아온 것이지만, 마르키우스는
볼스키아 인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저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즉 볼
스키아 군 사령관의 위치에서 그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마르키우스는, 스파르타 인
들이 요직에 앉히려고도 하지 않고 단지 위급한 전쟁에서 기용했다가 목적이 달성되자 버리
고 만 d라와는 아주 다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낯선 도시의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
장군의 진지에서 저 장군의 진지로 쫓겨다니던 알키비아데스는 결국 티사페르네스의 수중에
서 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향인 아테네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구하려는 뜻에서 티
사페르네스에게 아부했다고는 단언할 수는 없으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에서 그에게
충성을 바쳤다는 사실만은 상상할 수 있다.
재물에 있어서 알키비아데스는 뇌물을 받아 축재한 돈으로 사치를 즐기고, 돈을 물 쓰듯
썼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마르키우스는 사령관들이 무공에 대한 상으로 그에게 강
요하다시피 준 돈도 굳이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민들의 부채를 탕감 해
주자는 논의에서 그가 빈민들을 반대함으로써 대중들의 미움을 사게 된 하나의 큰 이유가
있다. 즉, 그때의 마르키우스는 자기의 사리를 도모하기 위해서 빈민에게 반대한 것이 아니
라 자존심과 오만에서 기인한 소치로 그랬던 것이다.
안티파테르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에 관하여 쓴 어떤 편지에서 '고인은 여러 가
지 천부의 재능 중에서 특히 사람을 설득시키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은공을 입은 사람들조차도 그의 위대한 행동과 고상한 기질을 달
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플라톤의 말을 빌면서 이야기하자면 마르키우스의 자존심과 고집
과 고독의 애호는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알키비아데스는 누구하고나 친하게 지내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
러므로 모두들 그가 성공하면 자기가 성공한 만큼 기뻐했고, 때때로 그가 실수를 범했다 하
더라도 애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알키비아데스는 동포들에
게 번번히 피해를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들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마르키우스는 많은 전승과 공훈을 세운 다음 마땅한 자격을 얻어 집정관 후보에 나
섰음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지 못하였다. 즉 알키비아데스는 동포에게 해를 끼쳤음에도 불구
하고 동포에게서 미움을 사지 않은 반면, 마르키우스는 모든 존경을 받으면서도 동포들의
사랑을 받는 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여기서 한 마디 해 두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마르키우스는 장군이었지만 자기
나라를 위해서 세운 공훈은 별로 없고, 자기 조국과 싸운 적을 위해서 큰공을 세웠다. 그러
나 알키비아데스는 군인이나 사령관으로서 거듭 조국을 위하여 공을 세웠다. 알키비아데스
는 국내에 있을 때 자신의 정적을 완전히 무찔렀지만 아테네에서 나간 다음에는 중상만 당
했다. 마르키우스는 로마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진실로 억울하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의
행동이 빚어 낸 결과에 의해서 볼스키아에서 살해되었다.
마르키우스는 로마가 공적으로 제시한 모든 평화 조건을 거부한 후, 어머니와 아내의 간
청에 굴복함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맺지 못하고 전쟁의 씨앗을 남겨 놓았다. 마르키우스가
진정으로 자신에 대한 가족들의 요구가 가장 적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군대를 철수시
키기 전에 마땅히 자신을 신임한 사람들에 의한 동의를 구해야만 했다. 그러한 일을 조금도
상대로 전쟁을 감행한 것이었다면, 모친을 위하여 조국을 살릴 것이 아니라 조국과 모친을
동시에 구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내도 위험에 처한 조국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
이다. 로마의 공적인 간청 즉 두 번에 걸친 사절단의 애원이나 사제들의 기도까지 가혹하게
거절한 다음, 단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군대를 철수했다는 것은 그가 이미
버린 조국이나 사랑하는 어머니에 대해서 다 같이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로
마를 한 국가로 생각하여 구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단 한 사람의 눈물을 본 뒤에 구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조국에 대한 은총은 우군이나 적 모두의 눈에 모두 거슬리며
탐탁치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철수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설득에 응하
거나, 친우들의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철수를 감해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모두 그의 비사교
적이며 교만하고도 고집 센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눈에는 모든 일과 대부분
의 사람들이 괘씸하게만 보인다. 또한 그런 성격이 명예욕과 결합하게 되면 아주 난폭하고
도 무자비한 사람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세평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세평에 무척 신경을 쓴다. 그리고 좋
은 평을 얻지 못하게 되면 화를 낸다. 메텔루스, 아리스테이데스, 에파미논다스 등의 사람들
은 모두 세평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것은 세상이 무엇을 주건 무엇을 거절하건 전혀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러 번 추방되고, 선거에서 패배하고, 법정에서 유죄판결
을 받았어도 동포들의 학대에 분개하지 않았으며, 동포들의 감정이 풀려 조금도 연연하지
않는 사람은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분개하지 않는다.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함을 상
심하는 것은 지위를 갖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에서 오는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남에게서 존경을 받으면 기쁘고, 멸시를 당하면 불쾌하다는 것을 공공연
히 고백하였다. 따라서 그는 늘 자신과 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애썼
다. 그러나 마르키우스는 자존심이 강하여 그의 승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
을 갖지 않았다. 또한 명예를 애호하는 마음은 그가 무시를 당했을 때 불쾌감과 분노를 폭
발시켰다.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성격의 결점이었으나 다른 점에 있어선 고상한 사람이었다
절제를 지키며 금전을 탐내지 않고, 전혀 명예를 돌보지 않는 점에 있어서 마르키우스는 그
리스의 가장 훌륭하고도 고결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므로 조금도
꼼꼼하지 않고 세상사에 있어 남에게 전연 관심이 없는 알키비아데스와는 어떤 점에 있어서
나 비교가 되지 않는다.
티몰레온
내가 처음 전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남을 위한 것이었지만, 쓰다보니 어느 새 나 자신을
위하여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인들의 덕행을 거울로 삼아 내 인생을 조절하고
장식해 나가려고 노력하게 된 것이다. 진정으로 전기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그 상호관계를
다루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전기란 위인들의 생애를 연구함으로써 그들의 재능과 품성을 알
고, 반가운 손님을 맞아 환대하듯이 그 인생의 모든 면을 환대하며, 그들의 행동을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뽑아 낸 것이다. 아, 우리가 그보다
더 큰 기쁨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들의 덕성을 함양하는 데 이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이 무
엇이겠는가? 데모크리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우리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유령들
중에서 길조로 나타나는 유령에게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이나 불운보다는
우리의 천성에 맞는 선한 유령을 만나도록 해주십사고 기도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
였다. 그는 진리가 아닌 주장을 철학 속에 유도하였으며, 철학을 미신의 영역으로 이끌었
다. 나의 방법은 이와는 다르다. 나의 방법은 역사를 연구하여 기록하는 도중에 얻어지는 인
물들을 잘 알게 됨으로써 나의 마음속에 가장 선하고도 훌륭한 인물들의 상으로 받아들여지
는 것을 오랫동안 잊지 말자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사회에 섞여 사는 동안에 오
염된, 천하고 사악하고 야비한 인생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나에게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평온 무사한 기질로 전환시켜 준 고상한 인물들의 모범이 있다. 이러한 모범
으로 내가 택하려는 사람은 코린트 사람 티몰레온과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다. 이 두 사람
은 그들의 덕행뿐만 아니라 성공을 이룬 점에서도 유명하다. 그들이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
룬 것은 행운이었던지 아니면 그들의 신중한 행동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남겼을 정도
니 말이다.
티몰레온이 시칠리아로 파견되기 전에 있었던 시라쿠사의 사태는 다음과 같았다. 디온은
촉군 디오니시우스를 추방한 직후 배신자들의 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그리고 디온과 협력
한 시라쿠사 인들은 저희들끼리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시라쿠사 시는 한동안 통치자들이 계
속 바뀜으로써, 일련의 분쟁이 그칠 날 없었다. 시라쿠사는 거의 버려진 상태로 있게 되었
다. 시칠리아 섬 안에 있는 다른 곳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일부는 전란에 의하여 파괴됨으
로써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대로 남아 있는 도시들도 대부분 야만인과 실
직한 군인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이들은 정부를 좌지우지할 기세를 보였다. 디오니시우
스는 이러한 정세를 틈타 추방된 지 10년만에 모병해 두었던 외국인 용병을 이끌고 들어왔
다. 그는 당시 시라쿠사의 통치자였던 니사이우스를 몰아내고 복귀하여 권좌의 자리를 차지
하였다. 처음에는 그는 가장 크고도 강했던 나라의 통치자였으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어이없
이 나라를 빼앗긴 뒤 추방되었다. 그리고는 거지의 신세로 유랑하다가, 이번에는 더욱 이상
하게도 그를 내쫓은 자들의 왕이 되었다. 시라쿠사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천성이 부드럽지
못했는데, 이제는 타향에서 온갖 불행과 재난에 시달림으로써 야만인처럼 난폭해진 폭군을
섬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상류 사회의 시민과 병사들은 레온티이 시
의 통치자 히케테스에게로 달려가서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리고는 그를 장군으로 모셔 전쟁
을 하기로 하였다. 히케테스는 공공연히 이름난 폭군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위인이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라쿠사 사람들은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의지할 수밖
에 없었다. 또한 그가 시라쿠사 태생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믿을 만한 근거를 주었다. 더욱
이 히케테스는 디오니시우스의 군대를 상대로 하여 싸울 만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이때 카르타고 군은 대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섬 앞에 나타나 상륙 지점과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이 함대를 보고 겁에 질려 그리스로 사절단을 보내 코린
트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시라쿠사와 코린트는 가까운 친척 관계였다. 시라쿠사 인들은 코린
트 인에게 큰 혜택을 여러 번 받았다. 과거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자유를 사랑하
고 폭정을 미워한 그리스 전체의 자유를 위하여 여러 차례 정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
여 시칠리아 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코린트 인들을 신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린트의 사
령관직에 앉은 히케테스는 시라쿠사 인을 폭군으로부터 구제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자기 앞에 굴복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비밀리에 카르타고 군의 사령관들고 내통하
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공공연하게는 시라쿠사 인들의 계획을 칭찬하였다. 그는 시라쿠사가
코린트로 보내는 사절단에 자기의 하수인을 섞어 페로폰네소스로 보냈다. 그의 속셈은 코린
트 군의 원조를 요청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코린트 인들이 그리스가 당면한 국난과 국
내 문제 때문에 시라쿠사의 원조를 거절할 것이 뻔하다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자기들과의 이해관계 때문에 쉽게 자기의 제안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시
라쿠사 인들도 왕위를 노리는 이들을 이용하여 그들의 폭군과 싸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
나 이 음모는 곧 탄로 나고 말았다.
코린트 인들은 시라쿠사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지원을 요청하자 쉽게 결의안을 통과시켰
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식민지와 농원에 대하여 관심이 깊었으며 특히 시라쿠사에 대해
서는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코린트 인들은 평화와 여가를 즐기던 자기 나라에
서는 괴로울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하여 시라쿠사를 원조하자는 결의안을 만장일치
로 통과시켰다. 그리고는 원정군을 이끌 대장의 선출을 숙고하였다. 코린트의 고관들이 이름
을 떨칠 기회를 노리는 사람을 찾고 있을 때 군중 가운데서 한 사람이 일어나 티몰레온을
지명하였다. 티몰레온은 티모데무스의 아들로, 오랫동안 공무에서 손을 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성격의 일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암암리에 밖으로 그런 일을 해보고
싶다는 내색을 보인 적도 없었다. 오히려 어떤 신이 그를 지명하도록 하는 계시를 군중 한
사람의 머릿속에 넣어 주었던 것만 같다. 행운의 여신이 은총과 선의로 그를 장군으로 선출
해준 것만 같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일부러 그의 장점을 칭찬 해주고 그의 덕성에 은총
과 빛을 더해 주려는 듯 그의 모든 행동에 나타났던 듯하다.
티의 아버지인 티모데무스와 어머니인 데마리스테는 모두 명문출신이었다. 티은 촉군이나
악인을 극단적으로 미워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애국심과 유순한 기질로 더 유명했다. 또한
전쟁에 대한 그의 선천적인 능력은 두드러지게 발휘되었다. 그는 젊었을 때 출정한 모든 전
쟁에서는 보기 드문 신중성을 보여주었고, 노년이 되어 적을 대했을 때도 젊었을 때와 마찬
가지로 용기를 보여주었다. 티몰레온에게는 티모파네스라는 형이 있었다. 그는 모든 점에서
동생인 티몰레온과 아주 달랐다. 티모파네스는 신중하지 못하여 경솔했다. 그는 친하게 지내
는 친구들이나 외국 군인의 부추김에 현혹되어 국왕이 되려는 야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는 모든 군무에서 힘과 열정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위험에도 굴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장군의 지위까지 올라 용감하고도 유능한 전사라는 평
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직책과 승진을 얻는 데 있어 동생인 티몰레온은 형을 많이 도왔
다. 즉 그는 형의 여러 가지 과오를 감추거나 적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형의
장점을 힘껏 칭찬해 주었으며 형이 세운 공은 되도록 이면 크게 보이도록 노력하였다.
코린트가 아르고스 및 클레오나이와 싸울 때 티몰레온은 보병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기
병의 지휘를 맡고 있던 티모파네스가 큰 위험을 당하게 된 적이 있었다. 부상당한 말이 적
의 한복판에다 그를 거꾸로 내던지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부하들의 일부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즉시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또한 소수의 남은 병력도 수적으로 압도된 채 위급한
상황을 버티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이를 본 티몰레온은 형을 구출하기 위해서 급히 달려들
었다. 그는 쓰러진 형을 자신의 방패로 덮어 주고, 몸과 갑옷 위로 무수히 날아오는 화살과
칼의 난타를 받으면서 가까스로 적을 무찔렀다. 그리고는 형을 안전하게 구출하였다.
코린트 인들은 과거에 동맹국에게 수도를 빼앗긴 적이 있었다. 그들은 이번 전쟁으로 또
다시 수도를 빼앗기지 않을까 염려하여 400명의 용병으로 하여금 수도방위를 담당케 하고,
사령관으로 티모파네스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티모파테스는 명예와 형평을 모두 저버리고
즉시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즉 권좌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는 수도를 자신의 지
배 아래 놓고, 자신의 계획을 가장 방해할 것 같은 많은 저명인사들을 재판 없이 처형하였
다. 티모파네스는 스스로를 코린트의 독재자라고 칭하였다. 이러한 형의 행동은 티몰레온을
무던희 괴롭혔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형의 죄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과 재난이었다.
티몰레온은 형에게 사리를 밝힘으로서 그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즉 그와 같은 흉악하고도
불행한 야심을 버리고 시민들에게 사죄하는 방법을 강구함으로서 그들에게 저지른 죄악을
사죄받을 수 있는 방도를 찾으라고 권유한 것이다. 그러나 티몰레온의 단 한번의 충고는 형
에게 멸시와 함께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방법을 달리하여, 자신의 친척이며 티모파네스의
처남인 아이스킬로스와 자기의 친구인 점술가를 불러 며칠 동안 의논한 다음 다시 한 번 티
모파네스에게 충고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에 또다시 이 친구들을 데리고 형을 찾아갔다. 그
들은 티모파네스를 둘러싸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당장 이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생
각을 고쳐먹으라고 진지하게 간청하였다. 그러나 티모파네스는 세 사람의 태도를 어리석은
수작으로 치부한 채 비웃었다. 그리고는 화를 내었다. 그러나 티몰레온은 형의 곁은 물러나
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그 동안에 다른 두 사람은 칼을 뽑아 티모파네스를 죽여 버렸다.
이 소문이 곧 사방으로 퍼지자 코린트 사람들 특히 그 중에서도 선량하고 관대한 사람들
은 티몰레온을 찬양했다. 그는 성격이 부드럽고 가족을 사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에 대한 의무감을 혈육에 대한 유대감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그는 일신의 이익보다
진리와 정의를 더욱 사랑하였으므로 악에 대한 증오감이 강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넓은 도
량에 감탄하여 그를 몹시 칭찬하였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용감하게 싸울 때는 형의 생명을
구하였지만, 그 후에 형이 야비한 찬탈 행위를 자행하며 나라를 노예로 만들려고 하자 과거
에 못지 않은 진정한 용기를 발휘하여 형을 살해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민주주의 체제에서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굽신 거리는 버릇에 젖어 있는
자들은 폭군이 제거된 일에 대하여 기뻐하는 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티몰레온이 인륜에 어
긋나는 짓을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일은 티몰레온으로 하여금 우울과 실의에 빠지게
하였다.
티몰레온은 그 일 때문에 모친이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그에게 무서운 저주가 내리기를
기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고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어머니에게로 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문을 꼭 닫은 채 그를 만나 주지도 않았고 그를 집안
으로 들여놓지도 않았다. 이에 티몰레온은 비애에 잠겼다. 그는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으며 이를 위로받을 길마저 잃어버린 처지를 탄식하였다. 그는 목숨을
끊음으로서 마음의 고통에 종지부를 찍으리라 결심하였다. 그러나 친구들이 걱정과 간청에
못 이겨 동료들을 멀리한 채 혼자서 살기로 결심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상을 버린 후 그는
오랫동안 공적인 일과 모든 세상과의 거래를 끊었다. 그는 코린트에서 떠나 근심 걱정에 사
로잡힌 채 인간사회를 절연하였다. 그는 인간과는 연이 없는 가장 쓸쓸한 곳에서 산야를 헤
매며 세월을 보냈다.
우리의 판단력이나 목적 의식이 이성이나 철학의 뒷받침을 받는 확고부동한 것이 못 될
경우, 인간의 마음은 남의 무심한 칭찬이나 비난에 쉽게 동요되어 자기의 주관을 잃어버리
기 쉽다. 행동이란 그 자체가 정의로워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행동의 뒷받침이 되는 동기나
원리 또한 확고 불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을 굳게 정한 뒤에 신념을 갖고 행동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진 후, 마음의 약점에서 비롯된 행동
때문에 괴로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즐겁고 행복하게만 느껴졌던 행동이 곧 비애와 후
회로 일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탐스러운 음식도 잔뜩 먹고 나면 어떠한 대식가라도
금세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군침이 돌던 음식이 이제
보기만 해도 싫증이 나서 가장 훌륭한 행동도 망치게 된다. 또한 마음에 후회가 생기면, 고
결한 행동도 천하고 결점 많은 것이 되고 만다. 그와 반면에 지식과 이성에 뿌리를 박은 행
동은 실패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결과가 탐탁치 않다 할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후회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레오스테네스의 계획에 늘 용감하게
반대해 온 아테네의 포키온은 그 계획의 성공이 예상됨으로써 동포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았
다. 그들이 승리를 기념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을 포키온은 자신이야말로, 레오스테네스가 여
러 사람들을 위하여 이룩한 일의 장본인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자신도 기쁘지만, 지금
도 같은 충언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더욱 적절한 대답은 플라톤의 친구인 로크리아
사람 아리스테이데스가, 대 디오니시우스로부터 받은 구혼에 대한 대답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는 내 딸을 폭군의 궁전에서 보기보다 차라리 그 아이의 무덤 속에서 보고 싶습니
다." 디오니시우스는 이 모욕에 격분하여 아리스테이데스의 아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
고는 무례한 태도로 다시 한 번 아직도 딸을 자기에게 주는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느
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전하의 행위에 대한 잔인성은 슬퍼하지 않을 수
없지만, 제가 마음대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아르스테이데스의 대답은 그가 숭고하면서도 훌륭한 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티몰레온은 형의 운명을 불쌍하게 여겨 그랬는지 아니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
에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거의 20년 동안 존경받을 만한 아무런 공적인 일에도 전혀 종
사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긴 채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시민 투
표에 의하여 장군으로 지명되고 마침내 모두에게 기쁨을 주며 선출된 것이다. 그가 장군으
로 선출되었을 때 당시의 코린트에서 가장 세력이 강하고 저명한 인사였던 텔레클리데스가
일어나 그에게 이제는 훌륭하고도 용감한 사람처럼 행동해 달라고 권고하였다.
"만일 잘 싸워 이기면 당신이 한 폭군이 수중에서 우리를 구해 주었다고 믿겠지만, 그렇
제 않다면 우리는 당신을 형을 죽인 사람으로 믿을 것입니다."
그는 출항 준비를 갖추며, 함께 출전할 병사들을 모집하였다. 그런데 그 동안 히케테스가
보낸 반역과 음모의 내용이 들어 있는 편지가 코린트 시민에게 도착했다. 히케테스는 사절
단이 코린트를 향하여 떠나기가 무섭게 공공연히 카르타고 인들과 결탁하여 디오니시우스를
축출하고 자기가 시라쿠사의 주인이 되는 협상을 시작하였다. 만약 일이 성사되기 전에 코
린트에서 군대와 사령관이 도착하면 그의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 버리게 될 것이었다. 이에
히케테스는 허겁지겁 코린트로 편지를 보내어 그들의 출발을 막으려고 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코린트 인들은 나를 위하여 어떠한 희생이나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카르타고 군이 함대를 이끌고 길목을 지키고 있으니 도착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
로 자기는 기다리다 못해 할 수 없이 카르타고 군과 합세하여 폭군 디오니시우스를 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편지로 공표되자, 원정대를 파견하는 일에 냉담하였던 사람들까
지도 히케테스에 대하여 크게 격분하였다. 코린트 인들은 기꺼이 티몰레온에게 군자금을 대
주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만장일치로 시칠리아를 원조하는 데 찬성하여 티몰레온을 떠나 보
내기로 하였다. 원정을 떠나 배에 시설이 갖추어지고 군인들까지 만반의 준비를 끝냈을
때의 일이다. 프로세르피나 여신을 섬기는 성녀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와 그녀의 어
머니 케레스에게 여향 복장을 한 여신들이 나타났다. 여신들은 티몰레온과 함께 시칠리아로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 꿈이야기를 들은 코린트 사람들은 성스러운 갤리 선을 만들어 여
신들에게 바쳤으며, 이 배를 '여신들의 갤리 선'으로 불렀다. 한편 티몰레온은 직접 델포이
로
가서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러고 나서 신탁을 받는 곳으로 내려갔는데, 그 곳에서 다
음과 같은 이상한 사건을 겪었다. 즉 그곳에 걸어 두었던 신성하고도 많은 헌납품들 중에서
유난히도 승리의 관과 초상을 수놓은 리본이 하나 벗겨져 곧장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
었다. 이 일로 보아 아폴론 신이 벌써 승리의 관을 씌워 그를 전쟁터로 내보내는 듯해 보였
다. 그러므로 계시대로 해석하자면, 티몰레온에게는 이미 정복과 승리가 주어진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티몰레온은 코린트의 배 7척, 코르키라의 배 2척, 그리고 레우카디아가 준 배 1척만을 이
끌고 바다로 나왔다. 그가 밤에 순풍을 받고 멀리 바다로 나왔을 때였다. 하늘이 별안간 갈
라지는 것 같더니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빛은 티몰레온의 함대 뒤에서 맴돌았다.
그리고는 전기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횃불이 함대 앞에 나타나 그들이 상륙할 예정지인 이
탈리아로 앞장서 안내해 가는 것이었다. 점술가들은 이 현상이 성녀의 꿈과 부합되는 것이
라고 확언했다. 그것은 여신들이 원정대를 따라 종군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징표였다.
그들 앞 하늘로부터 그 빛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인들이 상상하듯이 시칠리
아 섬은 프로세르피나 여신에게는 신성한 곳이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지하의 세계로 강제
로 잡혀가서 하이데스 신과 결혼했을 때 선물로 받은 것이 바로 시칠리아 섬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출발할 때부터 신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계시는 티몰레온 군의 사기를 크게 북
돋워 주었다. 이에 힘을 빌려 티몰레온 군은 넓은 바다를 가로질러 전속력으로 이탈리아의
해안을 통과했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 들려 오는 소식은 티몰레온을 몹시 괴롭혔으며, 전군
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즉 히케테스가 벌써 디오니시우스를 싸움터에서 격파하였으며
시라케테스가 벌써 디오니시우스를 싸움터에서 격파하였으며 시라쿠사의 대부분 지역을 점
령하였다는 것이었다. 또한 히케테스는 디오니시우스 군을 디오니시우스의 아성이자 소위
'디오니우스의 섬'이라고 일컫는 마지막 피난처로 몰아넣은 뒤 그 주변을 봉쇄하고 있는
상
태였다. 한편 카르타고 군은 히케테스와의 협정에 의하여 티몰레온 군이 시칠리아의 어느
항구에도 상륙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카르타고는 티몰레온과 그의 부대를 물리친 다음,
함께 힘들이지 않고 한가로이 시칠리아 섬을 나눠 갖자는 심산이었다.
이 계획을 이행하기 위하여 카르타고 군은 레기움으로 20척의 갤리 선을 파견하였다. 이
배에는 히케테스가 티몰레온에게 보내는 사절단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간악한 목적을 호도
하기 위하여 겉만 번지르르한 내용이 담긴 친서를 전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내용인즉 '
귀
하께서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와서 나의 고문이 되어 주시오. 그리고 나의 모
든 정복 행위에 동참해 주시오. 그러나 귀하의 배와 병력은 코린트로 돌려 보내야 하오. 왜
냐하면 전쟁이 어느 정도 끝났을 뿐만 아니라 통로를 봉쇄한 카르타고 군이 귀하가 강제로
상륙하려 할 때 귀하를 막을 것이기 때문이오'라는 것이었다. 코린트 군은 레기움에서 히
케
테스의 사절단을 만났다. 티몰레온은 그들이 가져온 친서를 받고 또한 카르타고 함대가 만
에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배반당했다는 치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면서
도 한편으로는 시칠리아 인들의 처지를 무척 염려하였다. 시라쿠사는 이제 히케테스의 배신
과 카르타고의 야망으로 말미암아 희생물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하였기 때문이다. 코린트군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기들보다 몇 배나 되는 배와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로 그 앞에
포진하고 있는 카르타고의 함대를 격퇴하고, 시라쿠사로 가서 자기들의 원군이 될 것으로
알고 있던 히케테스의 강병을 적군으로 맞아 정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
태가 이러했으므로 티몰레온은 히케테스의 사절단과 카르타고의 제독들과 회담한 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였다. 다만 티몰레온은 코린트로 돌아가기 전에 그들 사이에서
비공개적으로 오간 회담의 내용을 레기움 시민 앞에서 엄숙하게 선포하자고 제안했을 뿐이
었다. 레기움은 그리스의 도시이면서 카르타고와 코린트 양국에는 우방이었기 때문이다. 티
몰레온은 레기움 시민을 증인으로 삼아 안전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또한 협정 내용을 시라
쿠사를 위하여 이익이 가는 쪽으로 협상을 더욱 굳히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티몰레온의 모
든 제안은 실상 히케테스오 카르타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 뒤 그 사이를 이용하여 자
기 함대를 이끌고 몰래 도망칠 기회를 갖자는 것이었다. 레기움의 주요 인물도 모두 티몰레
온의 계략에 은밀히 관여하여 그를 돕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국
가가 코린트의 수중으로 들어가기를 크게 희망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카르타고와 같
은 야만 국가를 우방으로 삼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레기움에서는 곧 집회가 소집되었다. 레기움 시의 성문은 모두 닫히고 시민들은 다른 일
을 보러 갈 수 없었다. 집회에 나온 연사들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별다른 안건도 없이 아
무런 결론도 얻지 못한 채 서로 양보만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코린트 함대는 항구에서 빠
져나갈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카르타고의 장군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
었다. 그도 그럴 것이 티몰레온이 거기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차례가 되면 연설할
것 같은 인상으로 앉아 있었다. 마침내 다른 배들은 모두 무사히 항구를 떠났고 그의 배만
이 남아 있다는 전갈이 왔다. 그러자 연단 주위에 있던 레기움 인들이 감추어 주며 그의 출
발을 도왔다. 그는 군중들 사이를 슬쩍 빠져 나와 항구 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는 허
겁지겁 돛을 올리고 출항하였다. 티몰레온의 배는 곧 먼저 떠난 배들을 쫓아갔다. 그리하여
코린트 군 모두는 무사히 시칠리아의 타우로메니움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서 코린트 군은
안드로마쿠스 왕의 친절한 영접을 받았다. 이 사람은 사학자 티마이우스의 아버지였는데, 당
시의 시칠리아에서 세력을 휘둘렸던 모든 사람들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민들을 법과 정의에 따라서 다스렸으며, 모든 독재자들에게 증오심과 반
감을 가지고 있다. 티몰레온은 군대를 그 곳에 주둔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시민들에게 수
도를 근거지로 삼아 코린트 군과 같이 싸워 시칠리아 해방 계획에 동참하라고 설득하였다.
한편 레기움에 남아 있던 카르타고 군은 집회가 끝났을 때 즈음에서야 티몰레온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레기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깜빡 속아넘
어간 것을 깨닫고 크게 화를 내었다. 이처럼 카르타고 군이 속은 것을 분해하며 툴툴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레기움 주민들은 조소를 금할 수 없었다. 카르타고 인들은 사신 하나를 군
함에 태워서 타우로메니움으로 급파하였다. 그는 안드로마쿠스를 찾아와서 무례한 태도로
협박하였다. 그는 한 손을 내민 뒤 손바닥을 엎어 보이며 만약 지금 당장 코린트 군을 내쫓
지 않으면 이 도시를 엎어놓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렇게 하기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주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드로마쿠스는 사신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비웃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신의 손짓을 흉내내면서, 너를 여기까지 실어다 준 배를 그
렇게 해줄 터이니 그 꼴을 당하기 싫거든 어서 떠나라고 응수하였다.
티몰레온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히케테스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
여 크게 겁을 내었다. 그는 사신을 카르타고에 보내, 많은 수의 갈리 선을 해안선 일대에 배
치하여 해안선을 확보하도록 명령을 내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자 시라쿠
사 사람들은 자기들의 안전에 대하여 절망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카르타고 군이 자기들의
항구를 점유하고 있었고 히케테스는 수도를 지배하고 있는가 하면, 디오니시우스는 아직 성
채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티몰레온은 시칠리아의 벽지인 타우로메니움 소도
시에서 어떤 희망도 친구도 없이 겨우 시칠리아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
가 보유하고 있는 것은 고작 1천 명 정도의 병력뿐이었고, 그나마 병력의 급료를 충당하기
에도 부족한 재력이었다. 그 동안 너무도 많은 폭력과 폭행의 세례 받아 왔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구원해 주겠다던 장군들이 오히려 배신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한층 더 비참하게 당하기만 했던 시칠리아의 많은 도시들은 티몰레온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
다. 그와 같이 시칠리아 시민들을 배신한 자들로서는 아테네 사람인 칼리푸스와 스파르타
사람 피라크스를 들 수 있다. 두 사람 다 시칠리아로 왔을 때는 자유를 위하여 폭군들을 몰
아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폭군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역사를 비교
해 보면 현재의 전관이 명관이요, 과거의 노예로 죽은 사람이 그 후로 오래 살아서 현재의
이러한 침울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보다 행복하다고 시칠리아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시칠리아 시민들은 코린트 장군도 이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단정짓고 있었다.
또 감언이설로 자기들을 부추겨서 새로운 주인을 섬기게 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짓에 지나지
않으며 허울만 좋은 구실이고, 거짓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티몰레온의 권고에 의심을 품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되 여러 가지 제안도 거절하였다.
티몰레온의 의견에 호응한 것은 오직 아드라눔 시민들뿐이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시칠리
아 시민들의 높은 존경을 받는 아드라눔 신을 섬기고 있었다. 그런데 아드라눔에서는 공교
롭게도 동족간의 분쟁이 발생한 상태였다. 그 중의 한 패는 티몰레온에게 원조를 구하였다.
이들 양군은 서로 빨리 아드라눔에 도착하려고 앞을 다투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히
케테스와 티몰레온은 동시에 아드라눔에 도착하였다. 히케테스는 5천 명이 넘는 병력을 이
끌고 왔다. 이에 비해서 티몰레온이 모은 병력은 고작 1천2백 명을 넘지 못하였다.
이 병력을 이끌고 티몰레온은 아드라눔에서 340퍼얼링 떨어진 타우로메니움을 출발하였
다. 첫날 티몰레온은 천천히 행군하다가 진을 치고 쉬었다. 그러나 다음날에는 속도를 가하
여 아주 힘든 지대를 통과하였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는 히케테스가 아드라눔 가까운 지점
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러한 정보에 접한 코린트 군의 지휘
관과 장교들은 전위대를 멈추게 하여 밥을 먹이고 잠시 쉬게 해주자고 티몰레온에게 건의하
였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 힘차게 적과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티몰레온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휴식을 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적은 행군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지금쯤은 막사를 짓고 저녁 식사를 준비
하느라 정신없을 것이며, 이 틈을 타서 공격을 가해야 적이 혼비백산하리라는 것이었다. 말
을 마친 티몰레온은 곧 무장을 갖추고 승리는 내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듯이 선두에 서서
내달렸다.
이러한 지휘관의 용기를 보고 부하들도 똑같이 용기와 확신을 얻었다 코린트 병사들은 장
군 티몰레온의 뒤를 힘차게 따라갔다. 히케테스 군은 아드라눔 전방 30퍼얼링도 못 되는 지
점에까지 와 있었다. 코린트 군은 곧 그 곳으로 육박하여 적을 덮쳤다. 적은 혼비백산하여
처음부터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전과는 다음과 같았다. 저항은 별로 받을 것도 없었다. 처음
패주에서는 300명 정도 적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포로로 잡은 수는 이의 2배가 넘었다. 그리
고 히케테스 군의 진지와 군사물자도 모두 몰수하였다.
이 공격에서 얻은 행운은 곧바로 이어져 아드라눔 시민들로 하여금 성문을 열게 하였다.
그들은 티몰레온에게 항복하였다. 아드라눔 시민들은 공포와 존경이 뒤섞인 마음으로 그에
게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하였다. 즉 전투가 시작되자 모든 신전의 문이 저절로 활짝 열
렸으며, 그들의 신이 손에 쥐고 있던 창의 끝이 부르르 떨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땀방
울이 신의 얼굴에서 줄줄 흘러내리더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조짐은 전투에 이긴
것을 예시하였을 뿐 아니라, 전투가 끝난 후에 이루어질 티몰레온의 훌륭한 업적을 예언하
는 전조였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제는 이웃 도시의 정부와 권력자들도 서로 앞을 다투어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들은 일
제히 코린트의 동맹국이 되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 중에서 카타나의 폭
군 마메르쿠스는 경험이 풍부한 전사이자 돈이 많은 왕자이기도 하였는데, 티몰레온과 동맹
관계를 맺겠다고 제의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디어니시우스 조차도 자신이
다 죽게 되어 부득이하게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되자, 이처럼 수치스러운 완전 참패를 당한
히케테스를 경멸하고 티몰레온의 용기를 칭찬한 사실이었다. 디오니시우스는 티몰레온에게
항복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성과 함께 자기 자신까지도 기꺼이 바치겠다고 제안하였다.
티몰레온은 뜻하지 않은 이 행운을 기꺼이 수락하였다. 그리고는 코린트 장군 에우클리데
스와 텔레마쿠스에게 400명의 병사를 끌고 가서 디오니시우스의 성을 지키고 있는 한 성 안
으로 들어갈 수 는 없을 터이니, 또한 코린트 군들은 아무도 몰래 조금씩 떼를 지어 들어가
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전쟁의 장기화를 위하여 디오니시우스가 준비하고 비축해 둔 모든
물자와 무기와 아울러 디오니시우스의 요새와 궁전을 인수하였다. 또한 코린트 군들은 아주
많은 말과 각종 병기와 다량의 투창 등 7만 명을 무장할 수 있는 무기를 발견하였다. 이 밖
에도 디오니시우스와 함께 있던 2천 명의 병사도 나머지 병사와 함께 티몰레온에게 바쳐졌
다.
디오니시우스는 배에 보물을 싣고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히케테스에게 들키지 않고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곧 티몰레온의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처음에 디오니시우스는 초라한 복장
으로 나타났다가 잠시 후 배 한 척과 얼마 안 되는 돈과 함께 코린트로 다시 이송되었다.
디오니시우스는 찬란한 궁중에서 태어나 최고급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부왕이 서거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가장 심한 전제 군주국을 10년 동안이나 유지했다. 또한 디온
의 원정 이휴 12년 동안을 크고 작은 전쟁의 소용돌이와 여러 가지 행운 속에서 보냈다. 그
에게는 통치하던 시절 남에게 끼친 학대보다 더 심한 천벌이 내려졌다. 그는 한창 나이의
아들들을 잃었고 꽃 같은 딸들을 약탈당했으며, 누이동생과 아내는 군인들에게 갖은 무법한
모욕을 당한 후 아이들과 함께 살해되어 바닷속에 던져졌다.
디오니시우스가 코린트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호기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서운 폭군으로서의 명성이 자자했던 그에게
아무 말이라도 걸어 보고 싶어하였다. 그의 몰락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그의 처지를 짓밟아
주고 싶다는 원한과 증오에서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운명을 동
정하였다. 사람들은 디오니시우스의 운명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섭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위대한 힘이 약점 많은 인간이나 그 밖의 생물들에게 작용하는 증거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칠리아의 제일 가는 제왕이었던 디오니시우스가 이제는 코린트의
어시장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선술집에서 물을 탄 묽은 포도주를 마시고, 향수 가
게에 앉아 있기도 하고, 평범한 여자들과 거리에서 말다툼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여자 가
수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는 시늉을 하면서 극장에서 연주된 음악의 운율과 화성법에 관하
여 토론하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여러 가지로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선천
적으로 게으르고 심술궂은 성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야말로 시민들에게 경멸을 사기 위한 연극이라고 생각
하였다. 코린트 인들로 하여금 그가 불운한 운명 때문에 벌벌 떨며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놓고 걱정하게 만들고 의심하게 하려는 술책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을 놓고 걱정하게 만들고 의심하게 하려는 술책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이러한 위
험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사교나 오락에서 바보처럼 굴었고 풀이 죽은 체하였다.
제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전하는 기록에는 재치 있는 그의 말고 즉답이 남아
있다. 그것을 보면 디오니시우스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달라진 운명에 비열하리만
큼 자신을 부합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시라쿠사와 마찬가지로 코린트의 식
민지였던 레우카디아로 오자마자,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자백하였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바
와 같이, 잘못을 저지른 한 젊은이에게 비유하였다. 이러한 사람은 형제들과는 잘 섞여 지내
나 아버지를 만나기는 부끄러워하는데, 자기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주민들에게 말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코린트만 보아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런
곳에 가기는 겁이 나니, 모두에게 다같이 인자한 어머니 격인 이 섬에서 당신들과 함께 즐
겁게 살겠다고 하였다. 코린트의 어떤 사람은 그를 보고 다음과 같이 조롱하였다. 즉 그가
제왕의 자리에 있었을 때 누리던 즐거움 중의 하나인 철학자들과의 사귐과 그들과의 그 상
례적인 모임을 조롱한 것이었다. 그는 디오니시우스에게 플라톤과 그 고상하고 유식한 대화
를 하고 나서 얻은 소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한 디오니시우스의 대답은 다음과 같
다. "내가 이렇게 역경을 참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당신은 내가 플라톤으로부터 얻
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오?"
음악가 아리스토크세누스와 다른 몇 사람은 그에게 플라톤 철학의 단점이 무엇이며 그 원
인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절대적 권력에 밀착되어 있는 많은 병폐 중의 하
나인 가장 큰 불행은 소위 친구라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말해 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즉
진실을 토로해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러한 무리들 때문에
플라톤과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또 어떤 때는 머리가 좋은 것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명랑한 친구 하나가 디오니시우스를 조롱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하였다. 아
직도 그가 폭군인 것처럼 자기가 몸에 무기를 감추고 다니는 것이 아닌지를 확인해 보이기
위해서 디오니시우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갈 때마다 외투의 주름을 흔들어보인 것이다. 디오
니시우스는 그자가 방을 나갈 때 다시 한 번 그렇게 해보라고 응수하였다. 아무것도 훔쳐가
지 않는다는 증거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조롱을 갚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마케
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은 어떤 술자리에서 디오니시우스의 부왕이 남긴 시와 비극을 조롱하
였다. 정무를 보기도 바쁜데 무슨 여가가 있어서 그처럼 정교하고도 오묘한 시를 지을 수
있었는지 참 신기한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때 디오니시우스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적절
한 것이었다.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과 소위 팔자 좋다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허송하는 시간을 이
용해서 지으신 거랍니다." 플라톤은 코린트에서 디오니시우스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디오니
스우스가 코린트로 오기 전에 벌써 플라톤은 고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노페
의 주민 디오게네스는 그를 거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애매한 표현으로 이렇게 인사하였다.
"오, 디오니시우스, 어쩌면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생활을 하시오?" 이 말에 디오니시우스는
걸음을 멈추고 대답하였다. "고맙습니다, 디오게네스. 선생의 위로의 말씀이." 그러나 이 말
에 디오게네스는 펄쩍 뛰었다. "위로의 말씀이라뇨!" 디오게네스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대
처럼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은, 그대의 선친이 그랬던 것처럼, 혼자 늙어서 독재 상태로 죽
는 게 마땅한데 당신은 우리들 틈에 끼여 청빈한 생활을 즐기고 있으니 유감이구려."
디오게네스가 디오니시우스에게 한 이 말고, 피리스투스가 렙티네스의 딸이 공주의 신분
으로부터 초라한 신세로 전락한 것을 두고 한 말을 비교해 보다. 필리스투스의 말은 마치
늙은 여자의 향수가 들어 있는 상자와 자줏빛 옷과 여러 가지 황금 장신구를 잃은 여자의
통곡처럼 생각된다.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삽화들이, 다른 일에 몰려 바삐 서두르지 않는 독
자들을 위해서 전기를 쓰는 나의 목적에 과히 어긋나거나, 전혀 무용한 일을 아니라고 생각
된다.
이처럼 디오니시우스의 불행이 이상하고도 특이한 것처럼 생각된다면 티몰레온의 행운은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더 많다. 티몰레온은 시칠리아에 상륙한 지 50일만에 시라쿠
사의 아성을 수중에 넣었고, 디오니시우스를 펠로폰네소스로 추방하였다 이 행운의 시초가
코린트 인들의 기세를 높여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2천 명의 보병과 200필의 말을 티몰레온
에게 더 보내 주었다. 이 병력은 일단 투리이에 도착한 후 거기서부터 시칠리아로 갈 계획
이었다. 그러나 바다 전체가 카르타고의 함대로 포위되어 항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은 부득이하게 그 곳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그들은 호시탐탐 시칠리아로 갈 기
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 동안에 아주 훌륭한 일을 하였다. 이때 투리이 인들은 부루티 인
들과 싸우러 출정 중이었으므로 자기들의 수도를 코린트의 손님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손님들은 투리이 인의 수도를 마치 자기 나라처럼 잘 지키고 충실히 보호해 주었
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히케테스는 아직도 시라쿠사 성을 포위한 채, 그 성안에 있는 코린트 인들을
위하 식량이 국내로 반입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는 또한 미지의 외국인을 2명 고용하여
티몰레온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아드라눔으로 보냈다. 이때 티몰레온은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믿고 자기 신변을 지키는 호위병 하나 없어도 아무 걱정도 없이 그 곳 시민들
사이에서 자신을 즐기며 아주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아드라눔에 파견된 두 사람은 우연히
티몰레온이 제사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 외투 속에 단도를 감추고 직접 신전 안으로 들어왔
다. 그들은 군중 속에 숨어 조금씩 제단 앞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
하여 서로 신호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제3의 사나이가 나타나 칼로 암살자들 중 한 사람의 머리를 내리쳤다.
칼을 맞은 암살자는 곧 쓰러졌다. 그 순간 머리를 내려친 사람이나 나머지 암살자 한 명은
그 자리를 피하였다. 그리고 암살자를 살해한 범인은 피 묻은 칼을 든 패 군중들 사이를 헤
치고 도망쳐 어떤 높다란 절벽 꼭대기로 몸을 피했다. 한편 암살자 중에서 남은 한 사람은
제단을 꽉 붙잡고 떨며 모든 음모를 죄다 털어놓을 터이니 목숨만 살려 달라고 티몰레온에
게 애원하였다. 그리고는 이내 사실을 털어놓았다. 자기와 죽은 짝은 티몰레온을 죽일 목적
으로 그곳으로 파견되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모든 음모가 이렇게 탄로 나고 있는 동안 바위 뒤로 피신했던 자도 잡혀 내려왔다. 그는
잡혀 내려오면서도 가끔 큰소리로 항의를 해대었다. 그 소리를 들어보니, 자기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을 따름이니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죽인 사람은 과거
에 레온티니 시에서 자기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아 사실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너무나도 신기하고 교묘한 운명의 장난에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운명의 여신은 거침없이 서로 다른 두 사건을 결합시키고, 흩어진
모든 사건과 느슨하고도 특수한 관계가 없는 듯해 보이는 행동을 하나로 통합하고 서로 결
합시켜 자기의 뜻을 이룬다. 그러므로 아무런 관계나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여신의 수
중에서는 서로 연관성을 갖게 마련이다.
이 멸사봉공의 행동에 만족한 코린트 인들은 그를 칭찬하고 그에게 10파운드에 상당하는
상금을 주었다. 왜냐하면 운명의 여신은 티몰레온을 보호하고 수호신에게 공분의 칼을 뽑아
휘두르도록 허용함으로써, 그토록 오랫동안 품어 온 그의 분노를 미리 써 버리지 않고 가장
필요할 때 가장 적절하게 발휘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운은 미래에 큰 증오성과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 이 일은 티몰레온에게 가장
큰 희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마치 그를 시칠리아의 원수를 갚아
주고 자유를 되찾기 위하여 하늘이 보낸 성자인 듯싶게 존경하고 보호해 준 것이다.
티몰레온을 암살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사람이 자신을 떠나 티몰레온을 지
지하는 것을 본 히케테스는 자신이 이제까지 소극적인 태도만 취했던 것을 후회하였다. 그
는 상당히 많은 수의 카르타고 군 병력을 대기시켜 놓고서도 조금밖에 활용하지 못했던 것
이다. 더욱이 티몰레온과의 싸움이 부끄러운 작전인 것처럼 은밀하게 증원 부대를 투입시킨
자신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그는 이제까지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기로 하고, 카르타고의 제
독인 마고에게 연락하여 전 함대를 이끌고 오게 하였다.. 이 통첩을 받은 마고는 곧 출항하
여 150척이 넘는 함대를 이끌고 와서 위협적으로 항구를 점령하였다. 마고는 그 곳에 6만
명의 보병을 상륙하게 하고, 시라쿠사 시내에 진을 쳤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제
야말로 시라쿠사는 오랫동안 떠돌던 소문대로 야만인들에게 정복되는 운명의 시기를 맞이하
게 되었다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시칠리아와 여러 번 치른 전쟁이나
결사적인 싸움에서 한 번도 히케테스로 인하여 시내가 야만인의 진지로 변하고 말았기 때문
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성에서 농성 중인 코린트 군은 큰 위험과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 양식
도 부족하게 되었다. 모든 항구는 카르타고 군의 엄한 감시 아래 봉쇄되었고, 적들은 성 주
변에서 하찮은 싸움을 걸어 대며 코린트 군을 괴롭혔고 코린트 군은 쉴 새없이 무장을 갖추
어야만 했다. 또한 포위군이 자행하는 온갖 종류의 공격 수단을 격퇴해야만 했다.
티몰레온은 고통에 처해 있는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서 방법을 강구했다. 조그마한 어선과
배를 이용해 곡식을 카타나로부터 날아온 것이다. 곡식을 실은 배들은 폭풍우가 일고 풍파
가 심하여 봉쇄 선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틈을 타서 위험을 무릅쓰고 카르타고의 함선
사이를 몰래 빠져 나왔다. 마고와 히케테스는 이 사실을 탐지하고, 카르타고에게 물자를 수
송해 주는 카타나를 공략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는 전군에서 정예부대를 선발하여 시라쿠
사를 떠났다.
성채의 수비대장인 코린트 사람 네온은 이 광경을 보고, 후방에 남은 적군의 방어상태가
매우 소홀한데다가 그들마저 흩어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온은 적에게 기습 공격을
가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아크라디나라고 부르는 곳을 점령하였다. 이 도시는 시라쿠사에서
가장 강하고 공격하기 어려운 도시로 생각되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여러 촌락이 합쳐서 이
루어진 도시였기 때문이다. 네온은 아크라디나에서 양곡과 돈을 많이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 곳을 버리고 또다시 성채로 돌아가지 않고, 아크라디나 주위의 방비를 강화하고 방
벽을 쌓았다. 이로써 진지와 아크라디나 성채를 연결하여 두 곳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 소식은 마고와 히케테스가 카타나에 접근하였을 때, 시라쿠사에서 파견된 기병이 아크
라디나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이 급보에 그들은 빼앗으려던 도시
를 미처 손대지 못한 채, 이미 가지고 있던 것마저 잃고 허겁지겁 아크라디나로 돌아왔다.
이러한 코린트 군의 성공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용기의 덕택이다. 그러나 운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건은 순전히 운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투리이에 주둔하고있는 코린트 군은 한노의 지휘 아래 있었다. 한노 군은 그들을
기다리며 정박하고 있는 카르타고의 함대가 무서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바다를 위험하게 만
드는 풍랑이 며칠씩 계속되는 심한 날씨 때문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브루티 인들의 영토를
지나 육로로 행군하기로 결심하였다. 바다는 여전히 풍파가 심했다. 한노 군은 때로는 상대
를 설득하고 때로는 무력을 쓰면서 카르타고의 야만인 사이를 빠져 나와 레기움 시까지 잘
전진하였다. 이 곳에서 한노는 코린트 군이 오리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 하고, 더이상 원군을
기다려 보아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노는 적을 속여서 유혹해
낼 만한 매우 현명하고도 영리한 전략 하나를 생각해 냈다. 이 전략에 따라 그는 부하 장병
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즉 모르는 병사들에게 명하여 화환을 머리에 쓰게 하고, 그
리스 군이나 카르타고군이 하는 행동을 흉내내라고 한 것이다. 한노는 군함들을 방패로 장
식한 뒤 마치 승리라도 거둔 것처럼 시라쿠사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변장한 한노 군은 고
함치고 웃어대며 성 아래를 지나갔다. 그들은 온갖 노를 다 사용하여 일부러 포위 당한 코
린트 군의 사기를 꺾으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야말로 시칠리아로 돌아오는 도중에 바다
에서 만난 코린트의 원군을 정복하고 그들을 나포하여 돌아오는 승리자인 듯한 시늉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이처럼 얼토당토않은 연극을 시라쿠사 앞에서 해 보이고 있는 동안 코린트 군이 레기움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해안에는 아무도 없고, 바람도 그쳐서 기적이라고나 해야 할
상황에 마주쳐 있었다. 바다는 겉보기에 평온한 항해를 허용할 아량을 베풀고 있는 것처럼
잔잔해 보였다. 그리하여 코린트 군은 부근에서 구할 수 있는 어선이나 그 밖의 작은 배들
을 많이 모아 아주 완벽하고도 안전하게 보기 드문 고요 속에서 시칠리아로 건너갔다. 그들
은 말의 고삐를 붙잡고 배와 나란히 헤엄치도록 하면서 바다를 건넜다.
그들이 모두 안전하게 시칠리아에 이르러 상륙하였을 때 티몰레온이 와서 반갑게 맞아 주
었다. 그리고는 이 증원 부대에 힘입어 즉시 메세네를 점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
유하고 있는 전군의 수는 4천 명을 넘지 않았다. 티몰레온은 질서 정연하게 군을 정비하였
다. 그리고는 현재의 힘보다는 지금까지 성공을 이루도록 도와준 행운을 믿고 기회를 놓칠
세라 시라카사를 향하여 돌격하였다.
한편 마고는 티몰레온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해 하며 겁을 내었다. 더욱이 다음과 같
은 사정으로 걱정이 커지고 티몰레온을 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시라쿠사 주변에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호수와 강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샘에서도 맑은 물이 많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 많았는데, 이러한 못에는 장어가 많았기 때문에 고기잡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 그리하여 양쪽의 용병들은 전투가 그쳐 한가할 때 늘
여럿이 나와 함께 고기잡이를 즐겼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인들이었고, 사적으로는 서로 아무
런 적의를 가질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싸울 때는 서로 목숨을 걸고 열심히 싸
웠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서로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그들은 장어 잡이를 같이
하다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누군가는 주변의 바다가 참 아름답다고 이야기
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시가지에는 편리한 시설이 많고 널찍한 건물과 공공시설이 많
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코린트 군인 하나가 끼여들어 이렇게 물었다.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당신들이 어떻게 이처럼 크고 아름다운 도시를 야만인들엑 넘겨주
기 위하여 자진해서 싸울 수 있단 말이오?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잔인한 카르타고 놈들이
우리 곁으로 좀더 가까이 오도록 놈들을 도울 수 있단 말이오? 오히려 놈들과 그리스 사이
에 시칠리아 같은 나라들이 좀 더 많기를 당신들이 바라야 할 텐데 말이오. 놈들은 히키테
스를 잘 살게 하려고, 자기의 목숨마저 희생해 가면서 대서양에서 군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
협으로 왔다고 믿을 만큼 당신들은 그렇게도 머리가 나쁘시오? 만일 히케테스가 왕이 될 만
큼 깊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티몰레온이나 코린트의 다른 장성들의 동의를 얻고,
거기에 알맞은 모든 예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지휘권을 보유했을 것이오. 지금처럼 자기의
조상이나 나라의 창건자들을 몰아내고 자기 조국에 적군을 불러들이지는 않았을 것이오."
히케테스에게 팔려 온 그리스의 용병들은 자신들의 부대에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러나 떠
나 버릴 구실을 오랫동안 찾고 있던 마고는 누군가 자기에게 모략을 꾸며대고 있다고 의심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고는 히케테스가 그대로 있어 달라고 간청하면서 자기들이 적보다
몇 배나 강하다고 설명하는 데도 불구하고, 비록 수에 있어서는 티몰레온보다 우세할지 모
르나 용기와 운에 관한 한 티몰레온에게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마고는 닻을 올
리고 곧 아프리카로 떠나 버렸다. 그는 출발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큰 수
치만 안은 채 다 얻었다고 믿었던 시칠리아를 포기한 것이다.
그가 떠나버린 다음 날 티몰레온은 전투 태세를 갖추고 시 앞으로 진격해 갔다. 그러나
티몰레온 군은 마고가 갑자기 도망쳤다는 소문과 함께 항구가 텅 비어 있는 것을 직접 확인
하였다. 티몰레온은 마고를 조롱하며 카르타고의 함대가 어디로 도망쳤는지에 대해서 알려
주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는 포고문을 퍼뜨렸다. 한편 혼자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굳게 한 히케테스는 그가 장악하고 있는 시를 전투 태세로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수중에
들어 있는 진지와 요새화 되어 있어 공격이 그리 쉽지 않은 곳들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그러고 나서 가장 강하고 접근하기 곤란한 아나파스 강의 측면은 자기가 맡고, 코린트 인
장군 이시아스가 지휘한 부대에 명하여 아크라디나 주둔지로부터 공격을 가하라고 했다. 또
한 코린트에서 마지막 증원 부대를 이끌고 온 디나르쿠스와 데마레투스에게는 제 3사단을
이끌고 가서 에피폴라이라는 진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코린트의 각군이 사
방에서 맹공격을 가하자 히케테스는 패배하여 도주하였다. 이와 같이 번개같은 공격을 받음
으로써 적이 패배하고 도주하였으니, 시를 점령하게 된 공은 공격자들의 용기와 장군의 현
명한 작전에 돌리는 것이 정당하겠다. 코린트 병사들은 단 한 사람도 전투에서 죽지 않고
부상 또한 입지 않았다. 이러한 일은 그의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의 행운은 마
치 그의 용기와 내기하는 듯하였다. 따라서 그의 훌륭한 행위를 칭찬하는 말을 듣는 사람들
은 그의 공보다는 운에 더욱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의 명성은 시칠리아 전역에 퍼지고, 이탈리아를 놀라움으로 가득 차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는 그리스 전역으로 그의 승리가 알려지게 되었다. 코린트 인들은 그들이 보
낸 증원 부대가 시칠리아 섬에 도착했는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아 초조해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들이 안전할 뿐만 아니라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모든 일이 순조
롭게 이루어진데다가 금상첨화 격으로 운이 따라 대승을 거두게 된 것이었다.
티몰레온은 시라쿠사 성채를 손에 넣은 뒤에도 디온이 범한 것 같은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는 성의 구조가 아름답고 화려하다고 하여 그대로 보존하지는 않았다. 티몰레온은
시라쿠가 인이라면 누구든지 괭이나 곡괭이 등과 같은 도구를 들고 나와서 독재자의 성채를
파괴해 버릴 것을 공표 하게 하였다. 이에 시라쿠사 시민들은 만장일치로 호응하였다. 이윽
고 성 앞에 운집한 군중들은 티몰레온의 명령이 내려지는 그날이야말로 자신들의 자유를 위
하여 가장 확실한 기초가 되어 주었다고 간주하면서 성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성뿐만 아니
라 궁전과 그 옆에 있는 기념물 등 전 전제자들을 연상케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헐
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 평평하게 닦고 정의를 수호하는 법정을 세웠다. 시라쿠사는 이제 폭
군의 정권을 타고 하고 공화국을 건립함으로써 시민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막
상 시를 점령하고 보니 시내에는 보이지 않았다. 더러는 내란과 폭동으로 죽어 버렸고, 남은
사람들마저도 폭군을 피하여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시내가 텅 비어 있었다. 시라쿠사의 큰
시장 자리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목장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이 곳에서 말들이 풀을 뜯고
있는 동안 마부들은 풀 위에 누워 있었다. 시칠리아의 다른 도시들도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노루와 산돼지가 우글거리는 도시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가
끔 시내로 사냥이나 하러 나오든지 아니면 교외나 성 근처에서 짐승을 찾아냈다. 또한 시골
에 가지고 있는 성이나 요새를 만들어 살던 사람들은 현재 살고 있는 집을 버리고 시내로
돌아오라는 초청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위를 빼앗는 자들을 산출한다는 명
목으로 계속 숨을 조여 오는 집회나 여러 형태의 정부, 또는 공중 연설이라는 단어 자체만
들어도 치를 떨고 무서워하였던 것이다. 티몰레온은 남아 있는 시라쿠사 인들과 이처럼 광
대한 황폐를 고려하여 시라쿠사 시내를 되살릴 만한 방법을 궁리하였다. 그러나 다른 방법
으로는 도저히 이 참상을 구제할 길이 없었으므로, 티몰레온은 코린트 인들에게 편지를 보
내 그리스로부터 시라쿠사로 이민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라도 하지 않
으면 땅이 그대로 묵을뿐더러, 카르타고의 내습을 받음으로써 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로 돌아간 마고는 자살하고 말았는데, 원정대의 실책으로 노발대발한 카르타고
인들은 마고를 십자가에 못박아 매달았다. 그리고 다음해의 여름을 기하여 다시 시칠리아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대군을 편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이 적힌 티몰레온의 편지가 코린트로 전달되고, 시라쿠사의 사절단이 방문하
여 그토록 가엾은 사정에 놓인 도시를 다시 한 번 재건해 달라고 간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코린트 인들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여 시라쿠사를 수중에 넣으려 고는 하지 않았다. 코린트
인들은 우선 그리스에서 신성하게 거행되는 운동경기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종교 집
회마다 전령을 보냈다. 그리고는 시라쿠사의 전제 정권을 타도하고 폭군을 몰아낸 다음 시
라쿠사의 유랑민을 초청하고 있다고 알렸다. 또한 그 밖의 다른 시칠리아 인들도 돌아와서
그들 자신의 법 아래 완전한 자유를 즐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땅을 공정하고도 동등한 비율
로 분배해 줄 것이므로 모두들 시라쿠사로 가서 평화롭게 살라고 공표 하였다. 그런 다음,
소아시아와 흩어진 도망자들의 대부분이 아직도 살고 있다는 몇 개의 도시로도 사신들을 파
견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코린트로 오기만 하면 코린트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여 배를 내고
무사히 시라쿠사까지 호송해 주겠다고 초청하였다. 이처럼 관대한 제안이 사방으로 퍼지자,
코린트와 모든 시칠리아 사람들은 정당하고도 명예로운 칭찬과 축복의 보상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코린트 인들은 폭군들로부터 자기 나라를 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야만인들에
게 빼앗겼던 모든 것들을 되찾아 정당한 소유자에게 돌려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국으로
가기 위해서 코린트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너무도 적었다. 그들은 코린트 뿐만 아니라 그
밖의 그리스 각지에서 온 동포들도 함께 이민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인 사람들의 수호가 1만 명 가량 되자 드디어 시라쿠사로 떠났다. 그리고 이탈
리아와 시칠리아에서 이미 모인 사람들도 있었는데, 아타니스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그 수
가 6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티몰레온은 이 사람들에게 영토를 분배해 주었다. 그리고
본디 자기 집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자기 집을 찾아 다시 살게 하였다. 그러고 나
서 남은 집들은 팔아서 1천 탈렌트의 수입을 올렸다. 시칠리아는 재정이 아주 궁핍해져 있
었기 때문에 국가 운영에 따른 제반 비용을 지출할 능력이 없었다. 특히 전비를 지출할 능
력이 없는 국가로 하여금 국비를 충당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의 초상
마저 팔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도 티몰레온은 정상적인
과정을 밟아 나갔다. 그것은 마치 많은 범죄자들이 재판을 받는 것과도 같았다. 많은 사람들
은 투표에 의하여 그 하나 하나의 경매 가격을 결정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런 과정
을 통하여 모든 초상에게 낙찰언도가 내려지는 중에서도 유독 고대의 찬탈왕인 겔로의 초상
이 제외되었다고 한다. 히메라 강에서 카르타고 군을 무찌른 그의 공적에 대한 존경과 명예
와 승리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각지에서 주민들이 모임으로써 시라쿠사는 생기를 되
찾았다. 시라쿠사 시내가 주민으로 가득 차게 되자, 티몰레온은 이와 똑같이 구속당하고 있
는 다른 도시들까지 구제함으로써, 다시 한 번 시칠리아의 전제 정부를 전멸시키기로 결심
하였다. 팅ㄴ 전제 정치를 하는 국가로 진격하였다. 그는 가장 먼저 히케테스로 하여금 카
르타고와의 관계를 단절케 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그가 계속 보유하고 있는 요새를 파괴한
뒤 그를 레온티니에서 일개 평민으로 살게 하였다. 레프티네스 또한 아폴로니아와 몇몇 조
그마한 도시의 독재자였다. 그는 티몰레온에게 얼마간 저항하다가 자신이 당면해 있는 위험
이 무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티몰레온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서 티몰레온은
그의 목숨만을 살린 채 코린트로 쫓아 보냈다. 시칠리아의 전제자들이 유랑인이라는 천한
신세로 사는 모습을 그리스 전국민에게 보여줌으로써 나라의 영광을 빚낸 것이다. 이 일을
처리한 후 티몰레온은 시간을 내어 신 헌법을 제정하는 것을 보러 시라쿠사로 돌아왔다. 시
라쿠사에서는 코린트에서 온 케팔루스와 디오니시우스가 헌법 제정을 도와주고 있었다. 티
몰레온은 용병들을 하는 일없이 놀리지 않고 정복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적을 무찔러 얻은
약탈품으로 용병들의 비용을 충당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디나르쿠스와 데마레투스로
하여금 용병들의 일부를 이끌고 가서 카르타고 군에 속해 있는 섬의 일부를 정복하라고 명
령하였다. 또 그곳에 있는 몇 개의 도시를 부추겨 야만인에게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그들로
부터 이탈케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병사들은 전리품을 얻어 부자가 되었고 정부는 앞으로
일어날 전쟁의 기금을 얻었다.
그러는 동안 카르타고 군이 200척의 군선에 7만 명의 병사를 싣고 시칠리아에 나타났다.
이들은 그 밖에도 화물선 1천 척에 무기, 전차, 군량과 또 다른 군사물자를 가득 싣고서 릴
리베움시의 곶에 상륙하였다. 카르타고 군은 종전과 달리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시칠리아
에 있는 그리스 군을 일거에 소탕할 작정이었다. 카르타고 군대는 시칠리아에 와 있는 그리
스인들이 똘똘 뭉치더라도 그들을 정복하기에 충분한 병력이었다.
카르타고 군은 자기들에게 예속되어 있는 영토의 일부가 코린트 군에게 유린당하고 있다
는 소문을 듣고 노발대발했다. 그들은 당장 하스드루발과 하밀카르를 장군으로 삼아 코린트
군쪽으로 진격해 왔다. 이처럼 막강한 군대가 갑자기 시라쿠사 쪽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은
시민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하여 무수히 많은 시민 중에서 무기를 들도 티몰레온을 따른
사람은 겨우 3천 명 정도였다. 거기에다 용병들은 전부 합쳐야 4천 명을 넘지 못했는데, 그
나마 1천 명은 도중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 버렸다. 그리하여 5천 명도 안 되는 보병과 1
천 명의 기병으로 7만의 적과 싸우러 나가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제정신을 잃은 미치광이
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맞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 병사들은 적 쪽으로 진격해 가는 도중에
그를 버리고 되돌아가 버렸다. 그들은 전군을 투입하여 시 방위에 전념해야 할 때 병사들을
이끌고 시라쿠사에서 8일간 행군을 계속하였다고 티몰레온은 비난하였다. 사실, 싸우다가 지
더라도 피신할 곳이 없고, 싸움터에서 죽더라도 묻힐 데가 없는 곳으로 병사들을 몰고 간
티몰레온을 정신나간 미치광이라고 헐뜯을 수밖에 없었다.
티몰레온은 비겁한 자들이 싸움을 하기도 전에 미리 도망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나머지 남은 병사들을 격려하며 전속력으로 카타르고 군이 집결해 있는 크리메수스
강 쪽으로 갔다.
티몰레온이 고개를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그는 꼭대기에 올라가면 적군의 전모가 잘 보
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거기서 그만 미나리를 잔뜩 실은 노새의 행렬과 맞부딪쳤다.
이것을 본 병사들은 흉조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은 사람의 무덤을 미나리로
장식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습관에서 속담이 하나 나왔는데, '병이 위독하면 미나리
를 받을 때가 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티몰레온은 병사들의 마음을 안심시킨 뒤 미신
이
나 흉칙한 예감을 몰아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전군에게 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이 경
우에 딱 들어맞는 연설을 했다. 즉 다행스럽게도 승리의 화환이 싸움도 하기 전에 우리들에
게 미리 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미나리는 신령한 풀이기 때문에 조국 코린트와는 유서
가 깊다고 하였다. 코린트 사람들은 이스트미안 운동경기에서 승리자들에게 미나리 관을 씌
워준다. 당시의 미나리는 이스트미안의 운동경기 대회에서 승리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네메
안 운동경기 대회에도 그와 같은 습관이 있다. 소나무가 미나리 대신 등장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티몰레온은 병사들에게 연설한 다음, 미나리를 집어들고서 손수 관을 만들어 머리에 썼다.
그러자 장병들도 모두 따라서 그와 같이 하였다. 바로 그때 점쟁이는 두 마리의 독수리가
자기들 쪽으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한 마리는 발톱으로 뱀 한 마리를 움켜쥐고 있었고,
이를 본 병사들은 모두가 신에게 간청하며 자기들을 도와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때는 초여름으로, 하지가 그리 멀지 않은 타르겔리온이라는 달의 후반이었다. 강에서는 짙
은 안개가 하늘로 떠올라 주변의 들판을 검게 뒤덮고 있었다. 처음에는 적의 진영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대군이 저 멀리서 움직이며 떠들어대었기 때문에 분간할 수 없는
무기들을 내려놓고 숨을 돌리며 휴식을 취했다. 그때 멀리서 해가 떠올랐다. 안개는 서서히
걷히어 산골짜기에 모이더니 곧 구름이 되어 산꼭대기에 걸리고, 그 아래로 크리메수스 강
이 나타났다. 적군은 강을 건너고 있었다. 똑똑히 보였다. 선두에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무시
무시한 전차가 건너왔고, 그 다음으로는 1만 명의 보병이 방패를 든 채로 따라오고 있었다.
모두들 훌륭한 무기를 들고 질서 정연하게 천천히 행군에 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카르타
고의 전규군인 것처럼 보였다. 그 뒤로는 각국의 혼합군이 소란하고도 질서 없이 몰려들어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은 티몰레온 군이 상대할 적의 수를 얼마든지 가려 뽑을 기회를 주
었다. 티몰레온은 강 때문에 적의 대열이 헝클어지면서 더러는 건너오고 더러는 건너오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장병들에게 지적했다. 그런 다음 데마레투스에게 명령하여 기병대를
이끌고 카르타고 군을 습격하여 전투 태세를 갖출 시간을 주지 말라고 명한 뒤 전군을 이끌
고 그 뒤를 따랐다. 그는 평지로 내려가 좌우익을 서로 다른 시칠리아 군으로 편성하였다.
그리고는 외인용병을 몇 명씩 배치한 시라쿠사 출신 부대와 제일 강한 용병들을 중앙에 배
치한 뒤 자기가 직접 지휘하였다. 그러고 나서 잠시 기다리며 기병대의 활동을 지켜보았다.
적의 전차들이 기병대 앞을 왔다갔다하면서 카르타고 군과의 교전을 막고 있었다. 뿐만 아
니라 카르타고 군은 대열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자꾸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티몰
레온은 기병들의 공격을 새롭게 하려는 생각으로 무기를 들고 보병들을 향하여 용기와 확신
을 가지고 뒤따르라고 호령하였다. 그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도 커서 도저히 사람의 목소리
같지가 않았다. 투지에 넘쳐 적을 공격하려는 마음에서 저절로 그런 목소리가 나왔는지, 아
니면 신이 합세하여 그런 소리를 지르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카르타고 군 역시 용감무쌍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쇠로 만든 갑옷으로 가슴을 가리고 머
리에는 청동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있었다. 이 밖에도 호신용의 큰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므
로 그리스 군의 창은 별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승패의 여부는 힘보다 기술에 더 많
이 달려 있는 칼로 결판나게 마련이다. 그 순간이 왔다고 느꼈을 때 별안간 산으로부터 무
서운 천둥과 번개가 휘몰아쳐 내렸다. 지금까지 산마루에 걸려 있던 안개구름은 우박과 비
로 돌변하여 싸움터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스 군은 그것을 등에 받았으나 카르타고 군은 얼
굴에 직접 받았다. 더욱이 비가 쏟아져 내리고 천둥번개가 쉴 새 없이 번쩍이는 바람에 눈
을 뜰 수가 없었다. 전쟁의 경험이 없고 이러한 어려운 일을 처음 당하는 병사들은 여러 가
지 면에서 놀라고 당황한데다가 천재지변과 천둥소리, 갑옷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우박소리
때문에 상관들의 명령을 듣지 못했다. 또한 카르타고 군은 갑옷으로 중무장을 했기 때문에
행동하는 데 있어 많은 지장을 받았다. 옷 속으로 물이 스며들어 내의가 젖고 가슴 받이에
물이 고여, 싸울 때 거북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볍게 무장한 그리스 군은
날쌔게 움직이는데, 한 번 쓰러진 카르타고 군은 중량에 눌려 다시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한
편 크리메수스 강도 비가 내려 강수량이 높아졌다. 게다가 카르타고의 대군이 강을 건너고
있던 중이라 물이 빠지지 않았으므로 강은 순식간에 범람하였다. 강가의 평지에는 강에서
내려 뻗은 조그마한 계곡과 도랑이 많이 생겼다. 그리하여 평야는 일정한 수로가 없는 조그
마한 개울과 급류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 속에서 카르타고 군은 계속 넘어지고 뒹굴어 싸
우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폭풍우가 계속 휘몰아치는 중에 그리스 군이 카르타고의 정예군
400명을 섬멸하였다. 그러자 카르타고 군은 모두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평야까지 추격당하여 결국은 칼로 살해되었다. 또한 카르타고 군의 대다
수는 강으로 후퇴하려다가 강속에 있던 병사들 위로 잘못 떨어진 뒤 강물에 휩쓸려 죽고 말
았다. 또한 도망치려고 산으로 기어오르려던 적들은 가볍게 무장한 그리스 군에게 퇴로를
차단 당한 뒤 살해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죽은 1만 명 중에서 적어도 3천 명은 카르타
고 시민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너무도 치명적이고 크나
큰 비애였다. 죽은 사람들은 가문이나 재력, 명성에 있어서 누구에게도지지 않을 만한 사람
들이었다. 그들의 어떠한 기록에도 이렇게 많은 카르타고 출신의 군인들이 전사했다는 내용
은 없다. 늘 인명 피해를 냈다 하더라도 그들의 대부분은 아프리카나 스페인, 누미디아의 용
병들이었다. 그러므로 카르타고가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다른 국민들을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리스 군은 전사한 적의 신분과 재력을 값진 전리품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
면 전리품들 중에는 청동이나 쇠로 만든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였고, 그보다 훨씬 비싸고
좋은 금속이 아주 많았을 뿐만 아니라 금과 은은 오히려 흔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
군의 포로는 막대한 수에 이르렀는데 그리스 병사들은 이들을 몰래 훔쳐다가 노예로 팔기도
하였다. 포로 중의 약 5천 명 가량은 국내로 이송되어 공공 재산이 되었다 또한 전차도 200
대나 빼앗았다.
티몰레온의 막사는 영광스럽고 웅장한 모습이 되었다. 막사 주위에는 온갖 종류의 전리품
과 군의 장식품이 산처럼 쌓였다. 그 중에는 정교한 기술과 미의 극치를 발휘하여 만든 갑
옷의 가슴받이와 1만여 개의 무기도 있었다. 이 전쟁으로부터 거둬들인 전리품은 너무도 많
은 데 비해서 수거에 소요되는 인력은 태부족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전승비를 세운 것은 싸
움이 끝난 지 사흘 후의 일이었다. 티몰레온은 그가 빼앗은 가장 훌륭한 무기와 함께 승리
의 소식을 코린트로 보냈다. 그리스의 모든 도시 중에서 유독 코린트만은 동족을 죽이고 얻
은 무기로 신전을 장식하거나, 동족을 살해하고 빼앗은 제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왜냐
하면 그러한 물건들은 슬프고도 불행한 기억을 되새겨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야
만족을 정복하고 얻은 전리품으로 신전을 장식한 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잘한 일이라며 칭
찬이 자자하였다. 전리품마다 새겨진 내용은 정복자들의 정의와 불굴의 정신을 나타낸 것이
었다. 그리고 코린트 인들과 그들의 장군인 니이 카르타고의 억압으로부터 시칠리아의 그리
스인을 해방시킨 뒤 신에게 감사드리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승리를 거둔 후 티몰레온은 자신의 용병들을 적지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들로 하여금
카르타고의 영토에서 획득할 수 있는 온갖 재산을 약탈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고 나서 티
몰레온은 잔여 부대를 이끌고 시라쿠사로 입성하였다. 그는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야비하
게 도망쳐 버린 1천 명의 용병들에게 일몰 전에 시라쿠사 시를 떠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들은 결국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
어 버렸다. 그들은 결국 브루티아 인들의 손에 피살되었다. 반역죄에 대한 천벌을 받은 셈이
다.
그러나 카타나의 전제자인 마메르쿠스와 히케테스는 티몰레온의 전공의 영광을 질투해서
였는지 아니면 그가 전제자들과 어떠한 평화 협정도 맺지 않으리라는 것을 염려해서였는지
몰라도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해 왔다. 즉 타르타고가 카타나와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에서 완
전히 축출되지 않기를 원한다면, 시칠리아에 새로운 군대와 장군을 보내 달라고 강력히 요
청한 것이다.
그리하여 카르타고의 장군 기스코가 70척의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파견되었다. 그는
많은 그리스 군 용병까지 이끌고 왔는데, 카르타고 군에 그리스 군 용병이 편입되기는 그때
가 처음이었다. 카르타고 군은 그리스 용병들이 모든 인류 중에서 가장 용감한 군인이라고
숭배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그들을 한편으로 티몰레온의 용병을 400명이나 섬멸하는데 이
는 카르타고의 지원을 받아 하였다. 복병 작전으로 레우카디아 인 에우티모스 휘하에 있는
용병 전체를 무찔렀다. 그러나 이 일은 티몰레온의 행운을 드높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왜
냐하면 그들 중에 포함되어 있던 포키스 사람 필로멜로스와 오노마르쿠스가 델포이의 아폴
론 신전에 침입하여 신전을 더럽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저주받은 자들이
었는데, 모든 사람들의 미움과 배척을 받게 되자 부득이하게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각지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이들은 티몰레온에게 발견되어 시칠리아 원정대로
편입되었고 이어서 시칠리아로 오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티몰레온의 지휘 아래 모
든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위험한 전투가 모두 끝난 뒤 그들은 다른 여
러 곳에 있는 티몰레온의 부대를 구원하고 방어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티몰레온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서 전멸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일거에 전멸
당한 것은 아니었다. 전멸 당한 것은 단지 소부대뿐이었으니 마치 복수의 신이 그의 행운에
양보하여 악한 자를 멸할 때 선한 자를 제외한 것만 같다. 이와 같이 티몰레온은 승리하였
을 때와 마찬가지로 패배하였을 때까지도 신들의 가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시라쿠사 인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전제자로부터 모욕과 조롱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메르쿠스는 자신이야말로 시를 짓는 재주가 많다고 자부하였다. 그는 자신이 죽
인 용병들의 무기를 신에게 바칠 때 승리를 뽐내며 다음과 같은 모욕적인 만가조의 시구를
새겨 놓았다.
호박과 황금과 상아를 박아 만든 이 방패들을 우리들은 초라한 방패를 싸워 빼앗았노라.
이와 같은 일이 있은 후 티몰레온은 칼라우리아 지방으로 전진해 가고 있었다. 그 동안
히케테스는 시라쿠사의 국경 지대로 침입하여 상당히 많은 전리품을 얻고, 주민들에게 갖은
피해를 입혔다. 그러고 나서 히케테스는 얼마 안 되는 병력을 가지고 있는 티몰레온을 경멸
하며 칼라우리아로 돌아왔다. 티몰레온은 히케테스를 무사히 지나가게 한 다음, 기병대와 보
병대를 이끌고 그를 추격했다. 이것을 알아차린 히케테스는 다미리아스 강을 건넌 다음 티
몰레온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었다.
다미리아스 강은 흐름이 빨라서 건너기 힘들고, 양쪽 둑이 높고 가팔라서 방위하기에 좋
은 지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티몰레온 군은 장교들 사이에 말다툼이 생겨 싸움이
다소 지연되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모든 장교들이, 아무도 자기보다 먼저 강을 건너 적과
싸울 수 없으며, 자기야말로 선두로 강을 건너 적을 공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
다. 그러므로 강을 건너는 일이 소란하고 무질서한 가운데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티몰레온
은 제비를 뽑아 이 언쟁을 끝내기로 하였다. 그는 장교 각자로부터 반지를 거둔 뒤 외투 속
에 넣어 섞은 다음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전승 기념비가 새겨진 것이었다. 이를 본 젊은
장군들은 일제히 기쁨의 환성을 올렸다. 그리고 나머지 제비를 기다릴 것도 없이 모두들 전
속력으로 강을 건너 적에게 달려들었다. 적은 이처럼 맹렬한 공격을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
다. 그리하여 하나같이 무기를 내던지고 1천 명의 시체를 남긴 채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그 후 머지않아 티몰레온은 레온티네 시까지 진격하여 히케테스 및 그의 아들 에우폴레무
스와 기병 대장 에우티모슬ㄹ 생포했다. 병사들이 이들을 결박하여 티몰레온 앞으로 끌고
온 것이었다. 히케테스 부자는 전제자이며 반역자라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또한 에우모스
는 비범한 용사임에도 불구하고 코린트가 시칠리아에 최초로 군대를 파견했을 때 코린트 인
들을 헐뜯으며 조소한 일이 있었으므로 용서받지 못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코린
트 군의 내습에 관한 소식도 무섭게 여기지 않고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고 한다.
코린트의 아낙네들이 나왔다 한들
즉 코린트 인들은 모두가 두려워할 만큼 크게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고 레온티니 시민에게
연설하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적대 행위보다 비난하는 말을 더 분하게 생각한다. 그
리고 중상보다는 모욕에 더 분개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전시에 적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흔히 있는 일이며 그러한 행위는 적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티몰레온이 시라쿠사로 돌아왔을 때 시민들은 히케테스의 아내들과 딸들과 아들을 끌고
와서 재판을 받게 한 후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것은 그의 일생 중 가장 불쾌한 일로 생각된
다. 왜냐하면 극 간섭만 하였더라면 무고한 부인들이 목숨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티몰레온은 이 일을 전혀 모른 체하였다. 디오니시우스를 몰아낼 디온의 원한을 복수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는 시민들에게 그들을 맡겼던 것만 같다. 왜냐하면 디온의 처 아레테
와 여동생 아리스토마케와 어린 아들을 산채로 바다 속에 던진 사람이 바로 히케테스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디온 전에 자세히 나온다.
이 일이 있은 후 티몰레온은 마메르쿠스와 싸우러 카타나로 진격하였다. 마메르쿠스는 그
를 맞아 아볼루스 강 근처에서 싸웠으나 패배를 당하고 2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다음 도
망쳤다. 사상자의 대부분은 기스코가 원병으로 보내준 포이니키아인 부대 소속의 병사들이
었다. 이 패전 후에 카르타고 군은 휴전을 제의해 왔다. 그리하여 카르타고 군의 주둔지는
리쿠스강 이내의 땅에만 한정할 것, 시라쿠사의 영토에서 살고자 하는 주민은 온 가족과 재
산을 가지고 와서 살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르타고는 전제자들과의 모든 동맹 관계를 끊
을 것 등의 조약을 협정하였다. 이와 같이 카르타고로부터 버림당하고 성공의 길이 막힌 마
메르쿠스는 루카니아 인들을 끌어넣음으로써 티몰레온 및 시라쿠사 시민들과 싸워야겠다는
계획을 세운 뒤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의 군함을 탄 병사들은 마음이 돌아서서 배
를 시라쿠사에 상륙시켰다. 그리고는 카타나를 키에게 인도하였다. 마메르쿠스는 할 수 없이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독재자 히포가 있는 메세네로 도망쳤다. 그러나 곧 티몰레온이 쫓아
와 해륙 양면에서 메세네를 포위하였으므로, 겁에 질린 히포는 배를 타고 몰래 빠져 나오려
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가 도망치는 것을 목격한 시민들은 그를 체포하고 말았다. 그는 학
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다 모인 극장에서 무서운 고문을 당한 끝에 죽고 말았다.
한편 마메르쿠스는 시라쿠사에서 재판을 받되, 티몰레온이 그 재판이 일절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항복하였다. 그는 시라쿠사로 끌려간 뒤 시민들 앞에서 변명하려고 오래 전
부터 준비해 두었던 긴 연설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군중들의 야유 소리와 고함 소
리로 연설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군중들의 태도로 보아 마메르쿠스는 전혀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외투를 벗어버리고 있는 힘을 다해 극장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자리 아래에 있는 돌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메르쿠스는 자살
할 행운을 잃고 붙잡혀서 도둑과 마찬가지의 벌로 처형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티몰레온은 전제주의를 근절시키고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가 처음으로
시칠리아에 왔을 때, 섬은 너무 황폐했기 때문에 이 곳이 고향인 사람들까지 외면할 정도였
다. 하지만 티몰레온의 좋은 시정으로 인하여 섬은 모든 주민들에게 옥토가 되었다. 따라서
외국인들 조차도 시칠리아에서 바다를 건너왔다. 아티크 전쟁 후 카르타고군에게 유린당하
여 황폐해진 두 도시, 아그리겐툼과 겔라에도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그리겐툼은 메겔루스와
페리스투스가 이탈리아 남해안에 있는 엘레아에서 이끌고 온 이민들에 의하여 개발되었고,
겔라는 케오스 섬에서 고르구스가 이끌고 온 이민들에 의하여 개발되었다 이들의 일부는 새
로 온 이민이었고, 일부는 여러 곳에서 또다시 모여든 그 전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이들 주민이 지루한 전쟁을 치른 후 티몰레온은 그들 전부에게 확고하고도 평화스러운 보
금자리를 마련해 주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을 돕는 데 너무나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티몰레온은 시민들로부터 도시를 창건한 사람 못지 않은 존경을 받았다. 나머지 모든 시칠
리아 인들도 그에 못지 않은 존경을 바쳤다. 따라서 티몰레온의 도움 없이 주민의 힘만으로
는 아무리 좋은 평화 안이나 법의 제정 및 토지의 분배나 정치의 개혁도 완성할 수 없었다.
이러한 것들은 마치 위대한 건축가가 건물을 완성한 다음 여러 가지 장식을 하여 아름답게
꾸미듯 티몰레온의 손에 의하여 세밀한 손질이 가해지곤 하였다. 이러한 손질은 신이나 인
간에게 다같이 반가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는 역사상 업적이 두드러지고 명성이 높은 티모테우스, 아게실라우스, 펠로피다스
및 티몰레온이 가장 숭배한 에파미논다스 등 많은 저명인사를 배출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큰 수고와 노력으로 영광을 얻었다. 그 중의 더러는 시민의 비난 대상이 되어 본인 스
스로 후회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티몰레온은 형을 죽인 사건만 제외한다면, 티마이
우스가 말한 것처럼, 소포클레스의 다음과 같은 절규를 그대로 인용하여 평할 수 있다.
오, 신들이여! 어떤 아프로디테나 어떤 신의 은총이 여기서 인간의 솜씨와 일체가 되었을
까요?
안티마쿠스의 시나 디오니시우스의 그림처럼 콜로폰의 예술가들은 생명의 힘과 용기에 가
득 차 있다. 그러나 이들을 니코마코스의 그림이나 호메로스의 시에 비교해 보면 정교하기
는 하나 일부러 꾸민 듯한 점이 보인다. 니코마코스의 그림이나 호메로스의 시는 보편적인
힘과 아름다운 점 외에도 '전의 무봉'이란 말을 생각나게 해주는 특수한 매력을 가지고
있
다.
티몰레온의 승리도 그와 마찬가지다. 에파미논다스나 아게실라우스의 승리가 고역과 노력
의 소산인데 비하면, 그의 승리는 고상하고도 영광스러울 뿐 아니라 아주 쉽고도 자연스럽
게 이루어졌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티몰레온의 승리는 오로지 운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왕성한 실력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공정하고도 편견이
없는 판단이다.
그러나 티몰레온은 자신의 성공을 오로지 행운의 덕택으로 돌리고 있다. 코린트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나 시라쿠사의 시민들에게 한 연설에서 보면 그는 항상 신에게 감사
드렸다. 그리고 신이 시칠리아를 구하기로 결정한 뒤 그것을 실행할 사람으로 자기를 택한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는 자기 집에 신전을 짓고, 오늘의 자기를 만들어 준 신으로 간
주되는 행운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마저 그 신에게 바쳤다. 그 집은
시라쿠사 시민들이 그의 용감한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시민의 이름으로 그에게 바친, 그를
위한 집이었다. 그들은 집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아담한 땅도 그에게 주었다.
그는 시민들이 준 집에서 주로 살았다. 그리고 코린트에서 온 가족들과 함께 사생활을 즐겼
다. 그는 코린트로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그리스의 모든 싸움과 소요 속으로 휘말려 들지 않
았다.
또한 위대한 장군들이 흔히 명예와 권세를 탐낸 나머지 끼여들었다가 결국에는 신세를 망친
원인이 된 국내의 정치파쟁에도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현명하게도 그의 여생을 시칠리아에
서 보내려고 결심했으며, 거기서 자기가 손수 마련한 행복을 즐겼다. 그 행복 중에서 가장
큰 행복은 많은 도시가 번영하고 수천 명의 시민이 그의 덕으로 행복하게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모니데스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종달새의 머리에는 장식털이 돋아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민주국가에서는 그릇된 고발자가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마침내 시라쿠사에
서도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라피스티우스와 데마이네투스라는 두 선동분자가 티몰레온
을 공격하고 나섰던 것이다. 라피스티우스가 티몰레온에게 어느 소송 사건의 불리한 증인으
로 나설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 화를 내 시민들은 그 요구의 부당함을 제기하거나 소
송 절차를 방해했다. 그러나 티몰레온은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자신이 모든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싸워 온 것은 시라쿠사 인들에게 지금과 같이 모든 일을 법에 호소
할 수 있는 권리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데마이네투스는 청중이 가득 찬
자리에서 티몰레온이 장군으로 있을 때 저지른 죄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그가 적과
내통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하였다. 티몰레온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
했다. 즉 자신이 그렇게도 많이 요구한 것을 일일이 허용해 주신 신에게 감사할 따름이며
또한 자신을 오래 살게 하시어 시라쿠사 인들이 언론의 자유를 좀더 누리는 것을 볼 수 있
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신 신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한 것이다.
티몰레온은 당대의 그리스인으로서 누구보다도 가장 위대하고 고상한 일을 하였다. 또한
웅변가들이나 철학자들이 엄숙한 국민 집회에서 열변과 찬사로써 국민들에게 권고하고 자극
하던 설득력에 있어서도 티몰레온이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인들이 시인하는
바다. 그리고 그는 고대 그리스에서 흔히 있었던 동족상잔의 참극을 다행스럽게도 미리 피
했다. 그는 오직 야만인과 전제자만을 무찔러 용기와 행운의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동족의
설움과 눈물을 자아내지 않는 전승 기념비들만을 세웠을 뿐 아니라, 8년도 채 안 되는 동안
에 시칠리아를 탈환한 뒤 주민에게 돌려줌으로써 오랫동안 뿌리깊게 박혀 있던 화근을 근절
시켰다. 티몰레온은 나이를 먹으면서 시력을 잃기 시작하더니 나중에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
다. 그는 이런 벌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고 부상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것
은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오게 되는 자연적인 원인에서 유래한 현상인 듯하다. 즉 어떤 선
천적이며 유전적인 질환이었던 것만 같다. 왜냐하면 그의 친척이나 가족 중에는 그와 마찬
가지로 노년에 점점 시력을 잃게 되어 마침내는 완전히 실명한 사람이 몇 명 있었다는 이야
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역사가 아타니스가 우리들에게 전하는 바에 의하면, 히포와 마메르
쿠스와의 전쟁을 위하여 밀라이의 막사에 있었을 때부터 이미 그의 눈에 흰 반점이 나타났
다고 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가 머지않아 실명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할 수 있었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완전한 시력을 가지고서도 그는 전제자들을 굴복시킬 때까지
싸움을 쉬지 않았다. 그가 시라쿠사로 돌아왔을 때 세상은 이미 평화를 되찾고 있었다. 그는
시민들에게 총사령관직의 사퇴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가 실명이라는 불행을 태연히 참았다고 하는 사실은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못 된
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실명했을 때 시라쿠사 사람들이 그에게 보인 존경과 감사는 우리들
의 칭찬을 사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늘 떼를 지어 티몰레온을 찾아가서 위로했으
며, 자기 나라로 여행은 모든 외국인들을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고생한 은인을 만나 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시민들은 티몰레온이 그토록 많은
전공을 세운 뒤 승리를 안고 금의 환향도 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명예를 모두 마다하고 자
기들 사이에서 여생을 마치기로 한 그의 결정을 큰 기쁨으로 삼았다. 그들이 티몰레온에게
경의를 표하여 법령화시킨 여러 가지 사항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항목은, 외국과 전쟁이 있
을 때에는 반드시 코린트 인을 군사령관으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을 투표로써 통과시킨 일이
다. 그리고 회의의 진행 방법 또한 그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고상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그
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안건은 자기들끼리 처리했지만 좀더 어려운 일이나 중요한 안건에
관해서는 반드시 그의 충고를 받았다. 이러한 일이 있을 경우 그는 들 것 모양의 교자에 실
려 시장을 지나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데 이때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서 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였다. 티몰레온은 시민들의 인사에 답례한 다음 잠시 환호성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안건을 들었다. 그리고는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 안건이 모두의
표결로 가결된 뒤 그의 하인들이 다시 교자를 들고 회의장 한 가운데를 통과하여 돌아올 때
면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의 옆을 따라 밖까지 나왔다. 그러고 나서야 사람들은 다시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 자기들만으로 처리할 수 있는 안건을 다시 토의하기 시작하였다.
티몰레온은 국부에게 어울리는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노년을 편안히 보냈다. 그러나 흐르
는 세월은 막을 길이 없어 마침내 티몰레온은 가벼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라쿠사 시민
들은 장례 날짜를 정하고, 매장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준비하여 국내외의 조객들이 운집
한 가운데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온갖 장식물과 기념물로 장식한 영구는 제비로 뽑
힌 청년들에게 들려, 그가 헐어 버린 디오니시우스 궁전과 성이 서 있던 곳을 지나 장지로
향하였다. 화환을 머리에 얹고 깨끗한 흰옷을 입은 수천 명의 남녀들이 영구 뒤를 따랐다.
그 광경은 국장의 행렬을 연상시킬 만큼 화려한 것이었다. 또한 모두의 말소리나 고인에 대
한 찬사나 축복이 섞인 눈물은 형식이나 정령에 따른 표면의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북받
쳐 오르는 설움과 사랑이 깃 든 애절한 추념임을 분명히 엿볼 수 있었다. 영구가 화장을 위
한 장작더미 위에 내려지다, 가장 목소리가 우렁찬 전령의 하나인 데메트리오스가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시라쿠사의 시민들은 코린트 인 티모데무스의 아들 티몰레온을 200미나이의 국비를 들여
국장을 치르도록 특별 정령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인을 영원히 추념하기 위하
여 음악 경연 대회와 경마 대회와 모든 종류의 운동 경기 대회를 해마다 열어 그 우승자를
표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고인께서는 전제자들을 꺾으시고 야만족들을 정복하시어 황폐한
도시들을 새로운 주민들로 다시 채워 주셨으며, 시칠리아에 사는 그리스인들에게 자신의 법
으로 살 수 있는 특권을 세워 주셨기 때문에 이런 행사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의 무덤은 광장에 만들어졌다. 그 후로 무덤에는 주랑이 둘러 세워졌으며, 청년들을 위
한 운동 경기장이 건립되어 티몰레온테움이라고 명명되었다. 시칠리아 인들은 티몰레온이
남긴 정치의 형식과 규칙을 지키고, 법과 헌법을 준수함으로써 다같이 오래도록 번영을 누
리며 살았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의 집안이 고대 로마의 귀족 가문이었다는 것에는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의
견을 같이하고 있다. 누마왕이 피타고라스의 제자였다고 단언하는 저자들은, 이 집안의 지소
마메르쿠스는 피타고라스의 아들이며, 용모가 우아하고 웅변술에도 뛰어나 아이밀리우스라
불렸다고 말한다. 전공으로 명성을 떨친 이 집안 사람들에게는 행운도 따랐다. 칸나이 전투
에서 전사한 루키우스 파울루스 조차도 지혜와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싸울 필요는 없다고 동료를 설득하던 그는 언제 그런 설득을 했
느냐는 듯이 동료를 따라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료와 함께 도주하지 않고, 위험
속에 혼자 남아서 의연히 진지를 지키다 전사하였다. 이이에게는 아이밀리아라는 이름의 딸
이 있었는데, 그녀가 명장 스키피오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파울루스였다.
로마가 이름난 인물들로 세력을 떨치던 시대에 태어난 그는 장년기에 당시의 뛰어난 청년
들이 명성을 떨치는 수단으로 여겼던 학문을 하지 않고 전혀 다른 길을 택하였다. 그는 웅
변술로 시비곡직을 따지려 하지 않았으며, 대중들에게 아부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도 하
지 않았다. 그런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용기와 정의감과 성실성으로 그보다 훨씬 생
명이 긴 영광을 얻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곧 동년배들을 능가하였다.
그가 바라던 직책은 공공건물이나 도로, 공중 위생 등을 관장하는 조영사였는데, 나중에
집정관까지 지낼 12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그 후 그는 점술원의 사제로 선출
되어 새가 나는 것이나 하늘의 변화를 살펴 앞일을 점쳤다. 그는 이 직책에 있으면서 로마
의 고대 관습을 주의 깊게 연구하고, 조상들의 종교를 철저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래에는 유명무실한 명예직으로만 알고 있던 이 직책을 가장 고상한 지위에까지 끌어올려
놓았으며, 어떤 철학자들이 '그것이야말로 신을 섬기는 학문'이라고 정의 내린 까닭을 확인
하였다. 그는 어떤 일을 수행하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한 가지 일에 종사할 때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그것을 그의 유일한 임무로 삼고서 의식 하나라도 빼놓거나 세목이라도 추
가하지 않았고, 같은 서열의 동료들에게 보잘것없는 것같이 생각되는 것도 경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충고하기를, 신은 노여움을 쉬게 풀고 인간의 실수를 늘 기꺼이 용서
해 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그냥 내버려두
면 국가에는 지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나라의 정사를 어지럽힌 사람 치고
국법을 어기지 않은 사람은 없고, 사소한 일에 부주의하는 사람들은 중대한 일도 소홀히
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군사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종교 문제 못지 않게 엄격하여 고대 로마 군의 훈련 방법을
받아들여 준수하였다. 그가 장군이 되었을 당시에는 장군들 사이에서 병사들에게 감언이설
로 아첨함으로써 출세하는 일이 성행하고 있었지만, 그는 출세를 위해 부하들의 비위를 맞
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사제가 의식을 행하는 것과 같은 배려와 정확성을 가지고 병사들
에게 군기를 가르침으로써 군기를 어기거나 불복하는 자들을 엄격히 벌하여 나라의 영예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정쟁에서의 승리는 시민들의 훈련에 따르는 부속물이라고 생각하
였다.
로마가 안티오코스 대왕과 싸울 때 경험이 많은 장군들은 모두 출정하였다. 그때 유럽의
서쪽에서도 전쟁이 일어나서 그들은 스페인으로 출정하였다. 아이밀리우스는 집정관 대우로
그곳에 파견되었다. 다른 집정관 대우들은 6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다녔으나, 그는 12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다녔다. 그러므로 그는 집정관 대우였지만 실제로는 집정관과 똑같은 대
우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야만족과 두 번 싸워서 이겼고, 3만 명을 죽였다. 주로 지형과 강
의 흐름을 이용한 지략으로써 그의 병사들로 하여금 쉽게 승리를 얻게 하였다. 그는 또 250
개나 되는 도시를 정복, 그 곳의 주민들을 항복시키고 충성을 서약하게 하여 그 지방에 평
화를 이룩하였다. 자신은 정쟁으로 한푼의 이득도 얻는 것이 없이 로마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재물에는 욕심이 없는 편이어서 낭비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은 아
낌없이 써 버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내의 재혼 지참금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한때 집정관을 지낸 마소의 딸 파피리아였다. 두 사람은 꽤 오랫동
안 결혼 생활을 하다가 이혼하였는데, 그 사이에서 난 아들들은 저명한 사람들이 되었다. 유
명한 스키피오와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파피리아가 낳은 아들들이다. 왜 이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로마인의 이혼 사유가 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서 들어보기
로 한다. 이혼한 친구를 몹시 비난한 친구들이 그에게 물었다. "자네 부인이 정숙하지 않은
가? 아름답지 않은가? 자식을 잘 낳지 못하였는가?"
이때 이 로마인은 그의 한쪽 신발을 내밀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것 좀 보게. 새것이
아닌가? 또 잘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것이 내 발의 어디를 아프게 하는지 남이
어찌 알 수 있겠나? 어떤 부부는 크고 공공연한 과오가 있어도 이혼은 하지 못하는 수가 있
는 반면에, 성격이 맞지 않는데서 생기는 사소한 일들이 자꾸만 되풀이되다 보면 늘 마음이
상하고 그것이 남모르게 차츰 더 심해져서 부부간에 수습할 수 없는 불화가 생기는 수가 있
기 마련일세."
아이밀리우스는 파파리아와 이혼하고 나서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였다. 두 번째 아내도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은 자기가 키우고 전처가 낳은 두 아들은 로마에서 가장 이름난
가문에 양자로 주었다. 큰아들은 다섯 번이나 집정관을 지낸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양자로
주었고, 둘째 아들은 그의 사촌인 스키피오 아프리카스의 아들의 양자로 주어 스키피오라고
명명되었다.
아이밀리우스의 한 딸은 카토의 아들과 결혼하였고 또 한 딸은 아일리우스 투베로와 결혼
하였는데, 이 청년은 가난을 벗삼아 그것을 참고 너그럽게 산 훌륭한 로마인이었다. 아일리
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16명의 친척들의 생활 밑천이라고는 농장 하나뿐이었고, 집이라고는
조그마한 집 한 채, 아니 오두막집에서 많은 애들과 아내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아이밀리우스의 딸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집정관을 두 번이나 지냈고, 두 번이나 개선
장군의 영예를 누렸으나, 그녀는 남편이 가난한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편
의 청빈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들의 태도는 당시의 l형제들이나 친척들이 길이나 산, 또는
성벽 같은 것을 경계로 삼고 자기들에게 상속된 땅을 나눠 가지지 않으면 상호간에 싸움이
그치지 않았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따라서 역사는 배워서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러한 종류의 조언을 제시해 준다.
아이밀리우스는 집정관으로 선출된 다음 알프스 산기슭에 있는 리구리아 인과 리구스티네
인을 정벌하러 갔다.
그들은 대담하고 호전적이었고, 그 옛날부터 로마와는 인접국이었으므로 전술에도 뛰어났
다. 그들은 알프스 산에까지 이르는 이탈리아의 광범위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투스카
해가 출렁이고 아프리카 쪽으로 향한 알프스 지방에는 갈리아 인들과 이베리아 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바다에 뜻을 두고 있어서 그런 용도로는 안성맞춤인 가
벼운 배를 타고 약탈을 일삼았으며, 그 세력이 지르랄타르까지 미쳤다. 그들은 4만의 병력을
가지고 아이밀리우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이끌고 온 병사는 8천이 넘지 않았으
므로 적과의 비율은 1대 5였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는 적을 무찌르고 도망치는 적을 계속
추격하여 그들이 성벽 안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아이밀리우스는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너그러운 휴전 조건을 제시하였다. 왜냐하면 로마의 정책은 리구리아 인을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전토를 유린하고자 하는 갈리아 인의 빈번한 침략에 대하여 완충 지대를
만들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아이밀리우스를 신임하고 모든 도시와 배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도시는 전혀 손도 대지 않고 성벽만 헐어 버리고 다시 돌려주었으
나, 배는 노를 3개 이상 사용하는 것은 한 척도 남겨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에 그들이
바다나 육지에서 잡아간 많은 수의 포로를 로마인, 외국인 가리지 않고 석방해 주었다. 이것
이 그가 최초로 집정관직에 있을 때 거둔 훌륭한 업적이다.
그 후 그는 또다시 집정관이 되고자 하여 입후보까지 하였으나 결국 낙선되었고, 이로써
집정관이 되고자 하는 모든 생각을 단념하였다. 그 뒤로는 은퇴하여 점쟁이로서의 직책과
자식들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는 과거에 자기 자신이 그랬듯이 자기 자식들도 고대 o로마
의 훈련 방식에 따라 교육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학문도 비상한 열성으로 가르쳤다.
이를 위하여 그들에게 문법, 수사학을 가르쳐 줄 선생을 구했다. 또한 조각과 회화 선생도
구했고, 심지어는 말이나 개의 조련사와 육상경기의 코치 등도 모두 그리스에서 구해 왔다.
그리고 그가 공사에 너무 바쁘지 않을 때에는 아들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이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운동경기 하는 것도 돌봐 주었다. 이렇듯 그는 로마에서 가장 어진 아버지였다.
이때가 바로 로마가 마케도니아의 왕 페르세우스와 전쟁을 할 때였다. 로마의 장군들은
전략과 용기가 부족하여 수치스러운 일만 저지르고 있어 적에게 주는 피해보다도 자기들이
받는 피해가 더 컸으므로 원성이 자자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안티오코스 대왕을 소아시아
에서 축출하여 타우로스 산맥을 넘어 시리아에 감금하여, 1만 5천 탈렌트를 받고 휴전을 허
락하였다. 또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테살리에서 필리포스 왕을 정복했으며, 그리스인들을
마케도니아 왕의 억압에서 해방시켰다. 대담성과 무력에 있어 모든 왕들을 훨씬 능가한 한
니발까지 정복한 로마인들은, 페르세우스가 마치 우열을 가리려는 듯이 전쟁을 선포하고, 패
주한 아버지의 잔여 병사들을 모아 왔다는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필리포그가
패전한 후에 마케도니아 군이 힘과 훈련을 크게 강화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사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처음부터 간단히 다시 한 번 하고자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이 장군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안티고노스가 그 자신과 그
의 후손을 위하여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2대가 데메트리오스, 제3대가 일명 고나타스라고도
한 안티고노스, 4대가 조부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은 데메트리오스였다. 이 왕은 얼마 동안
통치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필리포스라는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마케도니아의
귀족들은, 이 왕자가 성년에 도달하기 전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선왕의 사촌뻘
되는 안티고노스를 불러들여 과부가 된 필리포스의 어머니와 결혼시켰다. 처음에는 그저 정
치도 대신하게 할 겸해서 장군이 칭호를 주었을 뿐이나, 차차 경험이 쌓여 온건하면서도 백
성들에게 유리하게 정치하는 것을 보고서 왕의 칭호를 주었다. 아마 그가 약속은 잘 하였으
나 이행을 잘 하지 않았는지 도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 필리포스였는데, 그는 연소한 나이에 벌써 국민들에게 어
떠한 왕에게도 지지 않을 만한 큰 희망을 걸게 하였다. 또 국민들은 이 왕이야말로 언젠가
는 마케도니아의 옛날의 영광과 위신을 되찾고, 이제 승승장구 온 세계를 군림하고 있는 로
마의 힘을 막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스코투사 근처에서
티투스 플라미니누스와 정정당당히 싸우다가 패하여 그의 결의는 꺾이고 말았다. 그 자신뿐
만 아니라 그의 온갖 로마 군이 하는 대로 맡겨야만 하였으며, 그래도 얼마 안 되는 공물을
바치고서 휴전을 얻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겉으로는 지각이 있고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보다는 편하
기만 하면 희희낙락하는 노예처럼 살며 그의 나라를 정복자들이 하는 대로 내맡겼지만, 내
심으로는 그의 온 마음을 전쟁에다 쏟고 되도록 비밀리에 전쟁 준비에 골몰하였다. 이를 위
하여 그는 대로나 해안선에 있는 도시들의 방비에 힘쓰지 않고 거의 황폐 상태로 방치하여
적이 경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륙 지대 깊숙히 떨어진 도시의 초소와 요새에 무기와 돈
과 병사들을 집결시키고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이 모든 것을 비밀에 붙였다. 무
기 창고에는 3만 명의 병사들이 무장할 수 있는 무기를 비축하였으며, 각지의 곡물 창고와
요새에 8백만 부셀의 양곡과 1만의 용병이 10년간 싸우기에 충분한 돈을 비축해 두었다. 그
러나 그는 이것들을 전쟁에 투입하여 계획이 실효를 거두기 전에 비애와 고뇌로 죽고 말았
다. 왜냐하면 간악한 자의 중상 모략에 빠져 죄 없는 자기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사형에 처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아들 페르세우스가 그의 왕국뿐만 아니라 로마에 대한 아버지의 증오도 이어받
았다. 그러나 용기가 부족하고 사람됨이 간악했으므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는 여러 가지 결점과 병폐 가운데서도 탐욕이 가장 컸다. 그는 적자도 아니라는 소문도
있었다. 즉 그나타이니온이라는 여자가 아이를 낳자, 왕비가 아이를 얻어서 왕의 아들이라고
속여 왕에게 바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데메트리오스를 살해할 음모를 꾸민
주요 원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집안에 합법적인 상속자가 있는 한 자기가 사생아라는
사실이 탄로 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생각이 아주 천하고 기질이 야비함에도 불구하고 임기응변의 재치만 믿고서 로마와 전쟁
을 하게 되어 오랫동안 버티었다. 집정관이 직접 지휘를 맡은 대군이나 함대를 거느린 여러
장군을 격퇴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로잡기도 하였다. 마케도니아를 침범한 최초의 사람이
었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를 기병전에서 패주케 하여 2500명의 전사자와 600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또 그는 오렌스 항구 앞 바다에 닻을 내리고 있는 적의 함대를 급습하
여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20척을 나포한 후 나머지 배를 침몰시키고, 대형군함 4척을 빼앗
았다.
두 번째로 집정관 호스틸리우스가 대군을 이끌고 마케도니아를 침공하여 오자 엘리미아이
에서 맞아 싸워 격퇴하였다. 그리고 모래 테살리아로 침범할 계획을 세워 마침내 공격하자
적은 미리 겁을 먹고 감히 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로마 군에게 경멸을 표
시하려는 듯이, 또한 심심해서 전쟁을 한다는 것을 보이려는 듯이, 그는 원정대를 이끌고 다
르단족을 침범하여, 1만 명을 학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더욱이 그는 다누베
강가에 사는 호전적이며 말을 잘 타는 것으로 유명한 길리아 족에게 은밀히 간청하고, 또
일리리아 족의 겐티우스로 하여금 그 국민을 선동케 하여 자기를 따라 전쟁에 가담하게 하
였다. 이 야만족들은 보수를 받는다는 데 현혹되어 갈리아의 남부 지방을 거쳐 아드리아 해
안을 통해 이탈리아로 내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풍설도 떠돌고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로마인들은 사사로운 정이나 간청에 의하여 자신들의 장군들을 선
발하지 않고, 대전을 능히 처리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진 장군을 골라 사령관으로 임
명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이 바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였는데, 60이 가까운 나
이였으나 나이에 비해 기력이 왕성하였다. 그에게는 또 용감한 아들과 사위, 세력 있는 친척
과 친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 같이 그를 집정관으로 모시겠다는 나라의 부름에 응
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시민들에게 약간 수줍은 태도를 보이며, 그들이 집요한
간청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으로 연일 시민들이 몰
려와서 선거 장소로 나가라고 권유하고 소란까지 피우며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하릴없이 승
낙하고 말았다.
입후보자가 된 그의 태도는 집정관 되기를 간청하는 태도가 아니라, 전쟁에 나가 동포들
에게 승리와 명예를 가져다주려는 태도였다. 시민들은 모두 대단한 기대와 기쁨으로 그를
맞아들이고 만장일치로 그를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하였다. 두 집정관이 제비뽑기를 항 임지
를 결정하던 종전의 관례를 무시하고, 즉시 그에게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에 사령관직을 맡긴
다는 정령을 내렸다. 그가 페르세우스와의 전쟁에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많은 시민들의 호
위를 받으며 집에 와 보니, 그의 어린 딸 테르티아가 울고 있었다. 그가 안아 주면서 왜 우
냐고 묻자, 어린 딸은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며 말했다. "아버지, 페르시우스가
죽었어요." 페르시우스란 어린 딸이 기르고 있던 개의 이름이었다. 그러자 아이밀리우스는
대답하였다. "얘야, 그건 행운이다. 일이 잘될 징조다." 이 이야기는 웅변가 키케로가 그의
점술에 관한 저서에 수록해 둔 이야기이다.
집정관에 선출된 사람은, 연단에 올라가 자기를 뽑아 준 시민들에게 치하하는 연설을 하
는 것이 관례였다. 아이밀리우스는 군중들 앞에 나와 처음 집정관에 나설 때에는 명예가 갖
고 싶어서 자기가 간청한 것이었으나, 두 번째인 지금은 시민들이 장군을 필요로 한 것이었
으므로 구태여 치하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즉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전
과
를 올릴 수 있다고 당신들이 판단한다면 기꺼이 이 자리를 내놓고 싶다. 그러나 만일 당신
들이 나를 믿는다면, 나의 직책을 시기하거나 시시비비를 논하거나 나의 행동을 비판하지
말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조력을 아끼지 마라, 왜냐하면 당신들이 임명한 사령관을
일일이 지휘하고자 한다면 이 원정대로 하여금 먼저 원정대가 초래한 것보다 더 큰 웃음거
리를 자초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연설을 들은 군중은 크게 감동되어 그를 우러러보았으며 그가 성공하리라고 기대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아첨하지 않고,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가진 사람을
사령관으로 결정한 것을 기뻐하였다. 로마 시민들의 모두 그러했으므로, 그들은 세계를 다스
리고 정복하고, 이성과 보다 더 차원이 높은 덕에 굴복하고 봉사하였던 것이다.
전지로 출정한 아이밀리우스가 신속하고도 안전하게 그의 막사에 도착한 것은 행운이었
다. 그러나 그의 대담무쌍한 성격, 신속 과감한 작전과 친구들의 신속한 작전 지원, 극단의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타당한 충고라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침착성과 건전한 전략에 의하
여 승리를 거두었음을 볼 때, 그의 영광스러운 공훈은 다른 장군의 경우와는 달리 행운만으
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하기야 페르세우스의 탐욕이 아이밀리우스에게는 행운이었
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페르세우스의 탐욕이 마케도니아 군의 전승 의욕을 완전히 파괴한
것이 사실이다. 페르세우스의 요청으로 바스테르나이로부터 1만 명의 기병과, 기병이 패전할
경우를 대비하여 그 자리를 메울 수 있는 동수의 보병이 뒤를 따라왔다. 모두가 직업군인이
어서, 경작 기술이나 항해술도 모르고, 짐승을 길러서 생계를 꾸려 갈 줄도 전혀 몰랐다. 다
만 그들의 유일한 직업이며 단 하나의 기술과 장사는 그들에게 저항하는 모든 적과 싸워서
무찌르는 일이었다.
이들이 마이디카 지방으로 와서 왕의 군대와 함께 진을 치고 있었는데, 체구가 크고 놀랄
만큼 훈련이 잘 되어 적에 대하여 자신만만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마케도니아 군에게 로마
군은 자신들을 당해 낼 길이 없을 것이며, 외모와 동작만 보아도 겁에 질려 무서운 생각이
들것이라는 새로운 용기를 주었다. 이렇듯 페르세우스가 그의 부하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큰 기대를 주어 사기를 올렸을 때, 각 부장에게 금화로 1천 스타테르씩의 보수를 주어야 한
다는 요구가 나오자, 그는 그 금액이 너무 많다며 화를 내고 거절하여 그들의 원조를 잃은
결과를 자초하고 말았다. 그 모습은 마치 그가 로마 군의 적이 아니라, 함께 싸울 사람들에
게 전비를 일일이 정확하게 설명해야만 할 어떤 경리 담당자와 같았다.
그러나 적은, 그가 해야 할 일을 일일이 가르쳐 주는 가정교사 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충
분한 물자 외에도 당장 소집하여 쓸 수 있는 10만 대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막대한 수
의 적을 상대로 하여 싸워야 하고, 자신도 막대한 수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전쟁인데, 마
치 시주하려는 사람처럼 주머니를 봉하고 남의 일인 양 그것에 돈을 내는 것조차 두려워하
며 지출을 꺼려했던 것이다. 만일 그가 리디아 인이나 페르키아 인의 후손이라면 몰라도 적
어도 알렉산드로스나 필립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한 왕들은 돈으로 나라를 살수는 있어도, 나라로 돈을 얻을 수는 없다는 신조로 세계를
정복한 영걸들이었다. 그리스의 도시들을 점령한 것은 필립이 아니라 그의 돈이었다는 격언
까지 생겼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도 인도를 정복하려고 원정군을 이끌고 갈 때에, 그의 부
하들이 페르시아에서 얻은 전리품을 운반하느라 그 중량에 눌려 허덕이는 것을 보고서 우선
자신의 마차부터 불살라 버리고 장병들도 그렇게 하라고 설득하여 가벼운 몸이 되어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전쟁터로 나갔다. 그러나 돈이 많은 페르세우스는 그 돈은 아끼다가 결국 자
기 자신은 물론이고 처자와 왕국을 보존하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부하들과 함께 돈 많은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갔으나, 그 많은 부를 아끼다가 결국은 로마에 바치고 만 셈이 되
었다.
그는 갈리아 족을 속여서 쫓아 버렸을 뿐 아니라, 전쟁에서 자기를 도우면 300탈렌트를
주겠다는 기대를 걸게 하여 일리리아 왕 겐티우스를 전쟁에 가담시킨 다음, 겐티우스의 사
신들 앞에서 그 돈을 계산하여 봉인하게 하였다. 이로써 겐티우스는 자기가 요구한 액수를
얻었다고 생각하여 사악하고도 수치스러운 짓을 저질렀다. 즉, 로마에서 자기에게로 파견되
어 온 사절단을 체포하여 감금하였던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이제는 돈을 이 불운한 왕으로
부터 빼앗았다. 그 후 그는 겐티우스가 로마에서 파견된 루키우스 아니키우스에 의하여 그
들의 보금자리에서 몰려나듯이 그의 왕국에서 붙잡혀 가는 것을 모른 체 방관하였다.
이런 페르세우스를 상대로 하여 싸우게 된 아이밀리우스는 인간으로서는 정말로 경멸하였
지만, 그의 전쟁 준비와 군대의 힘이 막강한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기병 4천
과 방형진으로 편성된 완전히 무장을 갖춘 4만 정도의 창병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세우스는 어느 쪽에서도 접근할 수 없는 올림푸스 산기슭에다 자리를 잡고 바닷가를 따
라 사면에 목책과 나무로 된 보루를 쌓아 방비를 견고히 하고, 지연작전만 쓰면 자연 아이
밀리우스가 지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안심하고 있었다.
아이밀리우스가 온갖 대책을 강구하고 온갖 공격 방법을 구상하고 있는 동안, 그의 병사
들은 훈련 부족의 탓으로 공격이 지연된 것을 분해하면서 장군이 할 일까지 참견하여 별의
별 작전을 다 제시하였다. 아이밀리우스는 이들을 엄격하게 질책하였고 자신이 할 일에까지
관여하지 말라고 명령하고는 무기나 잘 준비하고 있다가 일단 명령이 떨어지면 로마 군답게
용감히 싸우라고 단단히 당부하였다. 더 나아가 밤에 보초를 서는 병사들에게는 창을 가지
지 말고 보초를 서라고 명령하였다. 적의 공격에 대비할 무기가 없으므로 잠을 자지 않고
경계를 더 엄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병사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물의 부족이었다. 왜냐하면 바닷가에 있는 샘 하나에서 더러
운 물이 조금씩 흘러 나왔는데, 그것도 한 방울씩 한 방울씩 겨우 떨어질 정도였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는 올림푸스 산기슭에 나무가 무성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나무들
이 많이 우거져 있으니 그 밑에는 반드시 샘의 줄기가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산기슭
을 따라 많은 구멍과 우물을 파게 하였더니 산이 압력에 의하여 맑은 물이 곧 펑펑 솟아 나
왔다.
샘이 흐르는 곳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물이 고여 있는 저수지가 있고, 그 저수지가 노출
될 때에는 물이 나와 흐른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이와 반대로 어떤 사람들
은 말하기를, 그때 샘이 형성되어 주변의 물질이 액화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며, 이러
한 변화는 축축한 기체가 서로 바짝 눌려서 액체로 변할 대 그 농도가 냉기에 의하여 생긴
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여자의 유방이 젖이 가득 들어 있는 그릇과 같지 않고 그 속에 있
는 양분이 젖으로 변화되어 나오는 것처럼, 샘이 가득 찬 냉한 땅도 그 속에 지하수를 숨기
고 있거나 깊은 물줄기가 되어 솟아 나오는 물의 저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압력에 의하여
지하에 있는 수분과 공기가 물로 변화한다. 이렇듯 땅을 파면 그 압력에 의하여 그 곳에서
는 물이 나온다. 그리고 여자의 유방을 빨면 젖이 나오듯이 기체가 냉각되어 액체가 되면
더 많은 물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땅을 파지 않고 그대로 두면 아무 물도 나올 수가 없다.
이것은 수분이 생길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논쟁을 야기 시킨다. 즉 똑같은 이치로 살아 있는 짐승에게 피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영혼이나 육체가 액체나 흐르는 물질로 변화하기 때문에
상처에 의하여 피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이 반론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광
맥을 찾아서 땅을 파는 사람들이 흔히 깊은 땅 속에서 강을 만나는 경우 때문이다. 땅에 갑
자기 상처를 낸 것이 원인이라면 물은 조금씩 조금씩 점차로 고일 것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바위를 판 곳에서 많은 양의 물이 일시에 터져 나오는 수가 종종 있다. 그러다가 갑자
기 뚝 그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그치기로 한다.
아이밀리우스는 며칠 동안을 조용히 지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양군이 가까이 대치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조용히 있기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아는 모든 것을 조사해 보고
깊이 생각해 본 결과, 아직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통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폴로 신전과 페트라 옆을 지나 페르하이비아를 거쳐서 오르는 통로였다. 그러므로
이 통로가 가파르고 오르기 힘든 곳이었지만, 무방비인 채로 있는 장소라는 것에 더 용기를
얻어 이것을 군사 회의에 상정하였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자 스키피오, 일명 나시카가 맨 먼저 나서서 적을 포위하기 위하여 파견될 병사들의 지휘
를 자기가 맡겠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 아이밀리우스의 큰아들인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아직
나이는 어렸지만 열심히 자기가 맡겠다고 나섰다. 아이밀리우스는 아주 기뻐하며 필요한 만
큼의 병력을 주었다.
폴리비오스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니었고, 나시카가 원정대의 기록과
함께 어느 왕에게 보낸 짧은 편지에 의하면 로마인이 아닌 이탈리아인 3천명과 그의 좌익은
5천 명의 병력이었다고 한다. 이 병력 외에 120명의 기병과 하루팔루스가 보낸 트라키아 군
과 크레타 군의 혼성 부대인 보병 200명을 이끌고 바다 쪽을 향하여 행군하기 시작하여 헤
라클레스 신전 근처에다 진을 치고 마치 배를 타고 떠나 적의 배후를 포위하려는 듯이 행동
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날이 어두워지자, 그는 장교들에게 자기의
참뜻을 말하고 바다를 등지고 반대 방향으로 밤새도록 행군하여 아폴로 신전 아래까지 와서
병사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였다. 이 곳에서 올림푸스 산까지의 높이는 그것을 측량한 사
람의 경구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 높이가 약 2천 미터나 되었다.
올림푸스 산의 정상까지는 아폴로 신전이 있는 곳부터 수직으로 꼬박 2천여 미터.
그곳에 도착한 사람은 에우멜루스의 아들 크세나고라스.
안녕히 계십시오. 오, 아폴로 신이시여.
그대의 순례자에게 은총을 내리소서.
기하 학자들은 산이 높이나 강의 깊이가 2천 미터가 넘을 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크세나
고라스는 억측으로 산의 높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측량 기구를 사용하여 실제로 측정한 것
이 확실하다.
나시카는 여기서 그 날 밤을 보냈다. 행군 도중 도망간 한 크레타 병사가 페르세우스에게
로마군이 그를 포위하려는 계획을 일러주었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 군이 미동도 않고 있는
것을 보고서 페르세우스는 이러한 계획이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이밀리
우스는 이 소식에 놀랐지만 전군에게 출동 명령을 내리지 않고, 다만 1만의 용병과 2천의
마케도니아 군을 밀로스에게 주어 곧 출동하여 고개를 모두 차단하라고 명령하였다. 역사가
폴리비오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적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로마 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고 한다. 나시카가 직접 말하는 바에 의하면, 정상에서 격전이 벌어져 그 자신도 트라키아
병사를 투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결국 적은 격퇴되었다. 밀로스는 무기를 잡을 사이도
없이 속옷만 걸치고 수치스럽게 도망쳤다.
한편 나사카는 아무런 위험도 없이 적을 추격하여 전군을 평지에까지 이끌고 내려왔다.
페르세우스는 밀려오는 적을 보자 겁에 질려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였다. 그는 피드나 앞에
서 일전을 불사하거나, 아니면 그의 군대를 각 도시로 분산시켜 놓고 로마 군이 추격해 오
기를 기다렸다가 로마 군에게 큰 손실을 입혀서 격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페르세우
스는 병력에 있어 적보다 자기 쪽이 더 우세하고, 특히 왕이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같이할
때에 병사들은 자기들의 처자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라고 충고하는
친구들의 말을 듣고 또다시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을 치고 손수 싸울 준비를 갖
추고 지형을 조사하고는, 로마 군이 접근해 오자마자 일격에 격퇴할 전략이라도 세우고 있
는 듯이 명령을 내렸다. 이 곳의 지형은 장병을 네모꼴로 배치하여 진형에 알맞은 들판일
뿐 아니라, 여러 개의 조그마한 산들이 연결되어 있어 경장 부대나 척후병의 퇴각, 전진에도
적절하였다. 그리고 이 들판의 한가운데로 아이밀리우스손과 레우쿠스, 두 강이 흐르고 있었
는데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때는 여름의 하반기였으므로 로마 군에게는 다소 불리할 것 같
았다.
아이밀리우스가 나시카와 합류하여 전투대형을 갖추고 적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그러나 적
의 진형과 그 수를 알게 되었을 때, 아이밀리우스는 깜짝 놀라 더 이상의 진군을 멈췄다. 그
러자 빨리 싸우고 싶어하는 젊은 부장들은 그의 옆으로 말을 몰고 와서 지체 말고 어서 공
격하자고 그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그 중에서도 요전번 올림푸스 산의 승리로 의기충천한
나시카는 더욱 심하였다. 그들에게 아이밀리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내가 그대들
의 나이라면 그렇게 하겠소. 그러나 승리를 많이 해 온 나의 경험은 어쩌다가 사람들이 패
배를 당하게 되는지 그 실책을 가르쳐 주었소. 진형을 갖추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적
과 긴 행군으로 지친 아군 병사들을 싸우게 하는 법이 아니오."
그러고 나서 그는 선봉 부대와 적에게 보이는 부대는 마치 공격을 가하려는 듯이 보이게
하고, 후방에 있는 부대에게는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부대 전체의 동태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교란시킨 후에 그는 모두 진지 내로 조용히 불러들
였다.
밤이 되어 저녁 식사가 끝나고 모두가 잠자리에 들어 휴식을 취하려고 하자, 갑자기 중천
에 떠 있던 보름달이 차츰 그 빛깔을 잃어 컴컴해지고 여러 가지 색을 띠는가 싶더니 마침
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로마 군은 그들의 풍속에 따라 놋그릇을 두드리고 모닥불과 횃불을
올리며 달빛이 다시 돌아와 달라고 기원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마케도니아 군은 공포와 절
망에 쌓여 이 월식은 자기들의 왕을 불행으로 몰아 넣을 징조라는 소문을 영내에 퍼뜨렸다.
아이밀리우스는 이러한 일에 경험이 없지 않고, 또 월식의 외관상의 불규칙성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으므로 일정한 때가 되면 달이 지구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벗어나
면 다시 일광을 받아 빛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앙심이 두텁고 제물
을 신에게 바치는 엄격한 종교 숭배자이며 점술을 믿는 사람이었으므로, 달이 다시 밝은 빛
을 발산하기 시작하자 어린 암소 11마리로 제사를 드렸다. 먼동이 틀 때, 그는 황소 20마리
로 헤라클레스 신에게 제사를 드렸으나 아무런 효험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21마리 째를
바쳤을 때 징조가 나타났는데 전쟁에 패배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스 신에게
황소 100마리로 고사를 지내고 엄숙한 운동제를 개최하겠다는 것을 맹세하고, 각 부장들에
게 전투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아침에 그는 병사들의 얼굴에 햇빛이 비치어 눈이 부셔서
전투에 지장이 있을 것을 생각하여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자기 막사에
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며, 적들의 진지를 펴고 있는 들판 쪽을 바라보았다.
일설에 의하면, 저녁 녘에 아이밀리우스가 전략을 써서 적을 유인하여 싸움을 걸어오게
하였다고 한다. 즉 그는 일부러 말의 고삐를 풀어 도망치게 한 다음, 병사 몇 명으로 하여금
이를 쫓게 하여 적을 유인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가 지휘하는 어
떤 트라키아 군이 마초를 운반해 오던 로마 군의 짐 나르는 말들을 습격해서, 그것을 격퇴
하려고 리구리아 군 700명이나가 싸운 것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엔 쌍방의 주력 부대가 출
동,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밀리우스는, 눈앞의 풍파를 보고 다가올 큰 폭풍우를 예측하는 수로 안내인처럼, 적군
의 동태와 동요로부터 격전이 있을 것을 간파하고 장군의 막사에서 나와 부대를 순시하며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이때 나시카가 말을 몰아 척후병에게로 달려가 보니, 적은 이제 막 총
공격을 하려는 기세였다. 그가 말하기를, 트라키아 군이 앞장을 서서 전진해 오는데 보기에
도 소름이 끼칠 정도의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큰 체구에다 검은 옷을 입고 번쩍거
리는 방패를 들었으며, 두 다리에는 갑옷을 정강이 받이를 붙이고, 오른쪽 어깨 위로는 무겁
게 쇠를 입힌 곧은 창을 휘두르며 전진해 오고 있었다.
이 트라키아 군 뒤로는 갖가지 모습으로 무장한 용병들과 파이오니아 군의 혼성 부대가
따랐다. 그 뒤로는 제 3사단의 발군의 용사들인 한창 나이의 마케도니아 군이 금빛 찬란한
자줏빛 옷을 입고 따랐다. 또 그 뒤로는 이들이 대열을 갖추어 감에 따라 바로 진지에서 나
온 청동 방패 부대라고 불리는 방형진의 창병 부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온 들판은
강철과 청동으로 번쩍였고, 병사들의 함성으로 천지가 진동했다. 적이 이러한 순서로 어찌나
대담하고도 빨리 전진해 오던지 맨 먼저 피살된 적병은 로마 군의 진지에서 불과 2퍼얼롱
전방에 쓰러져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어 아이밀리우스가 격전지로 나가 보니, 마케도니아 군의 선봉 부대가 그들
의 창끝을 로마 군의 방패에다 들이대고 있었으므로 칼을 들고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또 마케도니아 군의 다음 부대가 어깨에 메었던 둥근 방패를 내려 자기들 앞에 일렬로 세우
고, 갑자기 단창을 적의 방패에다 들이박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방패벽이 발휘하는 큰 힘
과 빈틈없이 무기를 들고 있는 선봉 부대의 그 무시무시한 모양을 목격하였을 때 그는 간담
이 서늘해졌다. 그는 일찍이 이러한 광경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는
이때의 광경과 공포감을 두고두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이러한 광경을 못 본 체
하고서, 투구도 갑옷도 입지 않고 씩씩하고 쾌활한 모습으로 말을 타고 각 부대를 돌며 격
려하였다.
이와 반대로 폴리비오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마케도니아 왕은 비
겁하게도 헤라클레스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핑계로 피드나 시로 후퇴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은 비겁한 자들의 변변치 않은 제물을 받거나 당치도 않은 기도를 들어줄 리 없었다. 왜
냐하면 활을 쏠 줄 모르는 자는 상을 탈 수 없고, 전쟁을 피한 자는 승리를 거둘 수 없으며,
수고하지 않은 자는 성공할 수 없고, 약한 자는 번영할 수 없는 것이 하늘의 뜻이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스 신은 아이밀리우스의 탄원을 들어주었다. 그는 한 손에는 칼을 쥐
고 승리를 빌었으며, 신의 도움을 간청하며 싸웠다.
당시에 살았고, 그 당시 자기도 살고 있었고, 이 전투에도 참가했었다고 하며 페르세우스
의 전기를 상당히 길게 집필한 바 있는 포시도니우스라는 사람은 이를 부인했다. 왕이 전쟁
터를 떠난 것은 무섭다거나 제사를 드린다는 핑계에서가 아니라, 싸움이 있던 바로 하루 전
에 말이 그의 넓적다리를 걷어차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구들의 물러서라는 권
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 한 필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여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싸움터로 나
갔다. 사방에서 빗발처럼 쏟아지는 화살 중에서 쇠로 만든 화살 하나가 그의 왼쪽 옆구리에
깊이 박히는 바람에 나중에까지 오래도록 검은 상처를 남겼다고 한다. 이것이 포시도니우스
가 페르세우스를 변호한 말이다.
로마 군은 방형진을 돌파할 수가 없었으므로 펠리그니아 군의 지휘관인 살리우스는 자신
의 부대의 기를 빼앗아 적의 진영 속으로 던졌다. 이탈리아의 모든 나라에서 군기를 버린다
는 것은 가장 큰 불명예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본 펠리그니아 군은 곧 맹렬한
기세로 몰려들었다. 군기를 되찾으려는 싸움이 시작되고 무서운 살육전이 벌어졌다. 그들은
칼로 적의 창을 산산조각 내거나, 방패로 적을 밀며 두 손으로 그것을 빼앗으려고 애를 썼
다.
한편 마케도니아 군은 두 손으로 긴 창을 붙잡고, 달려드는 적을 갑옷과 함께 찔렀다. 어
떠한 갑옷도 그들의 창을 당해내지는 못하였다. 펠리그니아 병사들과 마루키니아 병사들은,
마치 미친 짐승처럼 분해서 펄펄 뛰며 죽기를 무릅쓰고 적에게 달려들었으나 땅바닥에 내동
댕이쳐지고 말았다. 아군의 전위 부대가 전멸되자 그 뒤를 따르던 부대는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패주한 것은 아니고, 올로크루스 산 쪽으로 퇴각했을 뿐이었다.
역사가 포시도니우스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아이밀리우스는 그의 부하 중 몇 명이 도망칠
준비를 하고, 그 나머지는 뚫고 들어갈 가망이 전혀 없는 방형진, 어느 방향의 공격에도 대
응할 수 있도록 창끝을 바깥쪽으로 향하고 빽빽이 늘어서 있어서 접근할 수 없는 일종의 방
책,의 창병들과 싸우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옷을 찢으며 분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대가 고르지 않고 전선이 넓게 뻗어 있었기 때문에, 적의 방형진은 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도처에 틈이 생겼다. 그리고 아이밀리우스는, 대군의 경우엔 으레 그런 일
이 있듯이, 어느 곳에선 세게 몰아붙이고 또 어느 곳에선 후퇴하는 공격자의 전략의 차이에
따라 마케도니아 군의 방형진에 아주 많은 틈이 생긴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아이밀리우스
는 곧 군의 대형을 소형으로 나누어 적의 전선에 생긴 틈을 공격하되, 한 지휘자로 하여금
모두들 도맡아 공격하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지휘자가 그것을 부분부분 나누어 따로따로
공격하게 하였다. 아이밀리우스는 이 명령을 각 부장에게 내렸고, 또 각 부장들은 병사들에
게 명령을 내렸다. 먼저 몇몇 부장이 병사를 이끌고 적진으로 들어가 적의 대열을 교란시키
자, 몇몇의 부장들은 대열이 단절된 쪽을 공격하고 또 몇몇의 부장들은 배후를 공격하여 적
을 지리멸렬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일체가 되어 치밀하게 공동작전을 펴니 방형진은 허물어졌다. 로마 군이 마케도니
아 군과 1대 1이나 조그만 분대를 지어 싸우게 되자, 마케도니아 군이 가진 칼은 로마 군이
가진 튼튼하고 긴 방패에는 상대도 되지 못했으며, 마케도니아 군의 가볍고 조그마한 원형
방패는 갑옷을 뚫고 몸에까지 박히는 로마 군의 칼의 위력을 막아 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마케도니아 군은 도망쳤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카토의 아들이며 아이밀리우스의 사위인 마르쿠스가 용감무쌍하
게 싸우다가 칼을 떨어뜨렸다. 세심한 배려 속에 교육과 훈련을 받고 자란 명문가의 아들이
었으며, 명예를 절대적인 것을 알고 그것을 존중하는 가정에서 자란 청년이었으므로, 이런
귀중한 물건을 적에게 빼앗기고 산다는 것은 일평생 큰마음의 부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
다. 급히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친구나 동료에게 자기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고 협력을 구하
였다. 이렇게 하여 상당히 많은 수의 용감한 병사들이 모였고, 그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따라
전진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적에게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하여 적을 격퇴한 후, 이제는 거의
폐허가 된 그곳을 점령하고 칼을 찾기 시작하여, 마침내 시체와 무기 더미 속에서 그것을
찾아 냈다. 그들은 승리의 환성을 지르며 전보다도 더 열심히 아직까지 남아서 버티고 있
는 적을 공격하였다.
결국 마케도니아 군은 자기들의 진지를 지키며 끝까지 용감하게 싸운 3천 명의 정예부대
가 전멸 당했고, 달아나던 자들도 무수히 살해되었다. 들판과 산기슭은 온통 시체로 덮였고,
싸움이 끝난 다음 날 로마 군이 건넌 레우쿠스 강물은 그때까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적의
전사자 수는 2만 5천명 이상이라고 하고, 로마 군의 전사자 수는 포시도니우스에 의하면
100명, 나시카에 의하면 80명이었다.
전투의 규모가 큰 데 비하여 이 싸움은 아주 빨리 승부가 났다. 전투가 시작된 것은 오후
3시였는데 4시도 못 되어 적이 패주했으니 말이다. 그 후 로마 군은 패주하는 적을 따라 13
마일 가량 갔다가 어두워지자 진지로 돌아왔다.
모든 귀환 장병들은 횃불을 들고 마중 나온 병사들의 환영을 받으며 막사로 돌아와, 불을
켜고 사철나무와 월계수 화환으로 막사를 장식하였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는 큰 슬픔에 잠겨 있었다. 아버지를 따르던 두 아들 중 작은아들이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밀리우스가 가장 귀여워하는 아들이었고, 아이밀리우스는 그
가 형들보다 용기와 기질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밀리우스는 그는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지만, 대담하고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경험 부족으로 멀리 떨어진 적중에서 싸
우다가 죽었으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슬픔과 두려움이 전군에게 알려졌다. 이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저녁 식사를 그만두고 막사와 참호 속에서 나와, 횃불을 들고 작은아들을 찾
느라고 처음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 사이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진영에는 슬픔이 가득 찼
고 들판에는 스키피오를 찾는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진동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천성적으로 지휘자로
서 또는 조언자로서의 자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늦은 밤 찾기를 거의
단념하다시피 하고 있을 때, 그는 적의 추격을 그만두고 2,3명의 동료와 함께 돌아왔다. 그
는 온몸에 적의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마치 잘 훈련된 개처럼 억제
할 수 없는 최초의 승리의 기쁨에 홀려 정신없이 적을 추격하여 얻은 결과였다. 이 소년이
바로 나중에 카르타고와 누만티아를 정복하고 그 당시 로마에서 가장 명성과 권세를 떨친
스키피오다. 이렇듯 운명의 여신은 이러한 아이밀리우스의 대성공에 대한 그녀의 불만과 시
기를 다른 날로 미루고 지금은 그의 승리를 비난도 하지 않고 그대로 그로 하여금 즐기게
한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그의 기병대를 이끌고 피드나로부터 펠라로 도망쳤다. 그것이 그때까지 그
가 가진 병력의 전부였다. 그러나 나중에 보병 부대가 뒤따라와 기병들을 검둥이와 배신자
들이라고 비난하면서 말에서 끌어내려 때리기 시작했다. 이 소동에 겁이 난 페르세우스는
큰길을 벗어나서는 남에게 자기 정체가 알려질까 봐 그의 자줏빛 옷을 벗어 놓고, 왕관은
벗어서 손에 들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걷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왕과 동행한 자들은 신발 끈이 풀어졌다고 그것을 맨다는 핑계로 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말
에게 물을 먹여야겠다 거나 자신이 물을 마셔야겠다고 핑계를 대며 뒤에 처져 하나 둘씩 그
의 곁은 떠나갔다. 그들은 적을 무서워한 만큼이나 페르세우스의 잔인한 행위가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패전에 마음이 뒤죽박죽이 된 왕은 그 패배의 원인을 다른 모든 부하들에게 씌
움으로써 울분을 풀고자 하였다.
그는 밤에 펠라에 도착했다. 그때 그의 재무관인 에우크투스와 에우다이우스가 와서 때가
적절하지 않음을 생각하지 않고, 왕에게 솔직하게 경고와 조언을 했다. 이에 격노한 왕은 두
사람을 다 단도로 찔러 죽였다. 이 일이 있은 후 모두가 무서워서 도망쳐 버렸으며, 남은 사
람이라고는 크레타 인 에반데르, 아이톨리아 인 아르케데무스, 보이오티아인 네온 세 사람뿐
이었다. 일반 병사들로는 크레타 출신의 병사들만이 몇 따랐는데, 그것도 왕을 위해서가 아
니라 벌 떼가 꿀을 탐내듯이 왕의 돈을 탐내서였다. 왕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 중
에서 잔, 사발, 금은 접시 등 50탈렌트에 해당되는 것을 크레타 인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암피폴리스를 지나 갈레프소스까지 오게 되어 그의 공포가 좀 감소되면서부터 그
의 고질인 탐욕이 되살아났다. 친구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기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잔이었던 것을 실수로 크레타 병사 누구에게 주었는데 그것을 돌려 달라, 그러면 그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본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크레타 인들을 속이려는
술책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를 믿고 잔을 돌려준 사람은 그만 속고
말았다. 그는 그 돈을 지불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활하게 그의 친구들로부터 30탈렌트 이
상의 돈을 사취하였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 배를 타고 사로트라케의 쌍둥이 신 카스토르와
폴룩스를 모신 신전으로 가서 보호를 구하였다.
마케도니아 인들은 무서운 국민이라고 세상에 널리 아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대들보가 무너졌듯이 그들 모두가 함께 무너져 아이밀리우스에게 굴복하고 전체 국가의 왕
으로 그를 받들었다. 이것으로 보아, 아이밀리우스가 한 모든 일이 다 운이 좋아서 된 것이
라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암피폴리스에서 일어났던 전조 역시 인간의 조작이라고 보기는 어
렵다. 그가 거기서 제사를 지내고 성례를 시작했을 때, 별안간 번개가 제단 위에 떨어지며
제단의 목재에 불이 붙어 제물로 바쳤던 것을 태워버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가 승리를 했다는 소문이 벌써 퍼지고 있었다는 점이
다. 페르세우스가 피드나에서 패배를 당했을 때, 로마 시민들은 경마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밀리우스가 큰 전투에서 페르세우스를 무찔렀고, 마케도니아 국민이 그에게 무릎을 꿇
었다는 소문이 별안간 경기장 입구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전 시민 사이로 퍼지게 되었다. 그
날 하루종일 모든 시민은 환호를 지르며 기뻐했다. 그러나 나중에 조사해 보니 그것은 뜬소
문으로 판명되었다. 시민들 각자가 제 마음대로 꾸며 낸 것이었으므로, 당분간은 일고의 가
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며칠이 지나 확실한 정보를 알게 되었을 대, 시민들은 먼저
들은 소문이 기적과 같은 사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탈리아의 사그라 강가에서 있었던 싸움의 소식도 그 날로 펠로폰네소스로 전달되고, 메
데스 군과 미칼레에서 있었던 싸움의 소식도 그 날로 플라타이아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로
마 군이 타르퀸스 군과 라틴 군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며칠이 지났을 때, 로마에 키가 크고
잘생긴 두 명의 청년이 나타나서 전지로부터 소식을 가지고 왔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쌍둥
이 카스토르와 폴룩스라고 생각되었다. 이들이 땀에 흠뻑 젖은 말들을 공회당 안에 있는
분수 가에서 쉬게 하고 있을 대, 두 사람에게 말을 건 최초의 사람은 승리의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대 두 젊은이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가
만히 그의 턱수염을 쓰다듬어 주었더니, 당장에 수염이 누런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사람들은 두 젊은이의 말을 믿게 되었고, 그 후부터 그 사람은 '구리 수염'이라는 뜻
의 '아헤노바르부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시대에 일어난 다음고 같은 사건을 보면, 위의 이야기가 아주 믿지 못할 일도 아닐 성
싶다. 안토니우스가 도미티안에게 반란을 일으켜 게르마니 지방에 큰 전쟁이 일어나 갑자기
로마가 당황하고 그것이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아무도 모를 때, 사람들의 입에서 저절로 아
군이 승리했다는 소문이 새어나와 안토니우스는 살해되고, 그의 군은 전멸되어 한 사람도
도망을 치지 못했다는 소문이 로마 시 전체에 퍼졌다. 의심할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 때
문에 많은 고관들까지도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을 추적했으나 헛수고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조사해 보았
으나 광막한 군중의 바다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게다가 믿을 만한 확실한 근거도 없자 로
마 시에서는 단시일 내에 그 일이 망각되었다. 그러나 도미티안이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러
나갈 때 도중에서 그에게 승리를 전하는 전령과 편지를 받았다. 그가 승리한 날짜는 로마에
그 소문이 퍼진 날짜와 같았다. 두 곳 사이의 거리가 2천 5백 마일 이상이나 되었지만, 이
사실을 당시의 사람 치고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밀리우스와 공동으로 사령관직을 맡고 있던 크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그의 함대를 이
끌고 사모트라케 섬에 닻을 내렸다. 신을 존경하는 뜻에서 신전에 있는 페르세우스를 해치
려고 하지 않고 다만 바다를 건너 도망치지 못하도록 경계만을 엄중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조그마한 배의 주인인 크레타 사람 오로안데스를 은밀히 설득하여, 자신과 자
신의 보물을 반출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연 크레타 사람답게 행동하여 우선 보물
은 싣고, 페르세우스에게 밤에 처자와 가장 필요한 시종들을 케레스 신전 옆의 항구로 데리
고 오라고 하고는 저녁이 되자마자 사람은 남겨 둔 채 그냥 떠나 버렸다.
벽에 있는 좁은 창문을 통해 처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은 페르세우스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이런 어려운 일과 도망치는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그들이었
으니 말이다. 그들이 해안을 헤매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먼 바다고 배를 몰고 가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 그는 땅이 꺼져라 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이제 곧 먼동이 틀 때였기
때문에 또다시 성벽 쪽으로 돌아왔다. 그는 로마 군인들에게 들키고 말았지만 붙잡히기 전
에 처자와 함께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전에는 그의 총애자였던 이온에게 그의 아이들을
맡겼었는데 이온은 이제는 반역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이들을 억류하고 있는 자들에
게 와서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시카를 크게 믿어 그를 찾았으나 거기에 있지 않
았으므로, 달리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는 자신의 불행을 탄식하며 옥타비우스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탐욕보다도 더 천한 죄악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그
것은 목숨에 대한 집념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운명의 여신도 비참한 자들에게서는 빼앗
아 가지 않는 유일한 것인 연민마저 잃고 만 것이다. 그의 요청에 의하여 그는 아이밀리우
스의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는 신의 분노와 그의 악운으로 인해서 멸망한 왕
을 예우하는 뜻에서 각료들을 거느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머금고 그를 맞았다. 이때
페르세우스는,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꼴을 하고서, 그의 발 앞에 몸을 내던지고, 그의
두 발목을 부둥켜안고서 남자답지 못한 모습으로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 모습은 아이
밀리우스로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슬픔을 띤 화난
얼굴로 말하였다. "여보시오, 불행한 양반, 그러게 재난을 당할 만한 짓을 하여 운명을 비난
할 길도 없게 하시는 거요? 지난날의 그 권세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지 않소?
그리고 또 그대는 로마의 적수답지 못한 비겁한 사람임을 보임으로써 이 사람의 승리의 가
치를 값싼 것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오? 아무리 불운에 시달려도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적
일망정 크게 존경하는 법이오. 그러나 제 아무리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로마인은 비겁
한 자를 경멸하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밀리우스는 페르세우스를 땅에서 일으켜 그
의 한 손을 잡고 투베로에게 인도하였다. 그리고 아들과 사위들과 젊은 장군들과 함께 막사
로 돌아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운명과 세상사에 관하여 이야기하
기 시작하였다. "자기가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 우
쭐대거나, 어떤 도시나 왕국을 정복했다고 해서 기고만장하거나, 이러한 운명의 변화 속에서
모든 전사들이 인간의 운명이란 나약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세상에 영속하는 것은 없
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는 것을 경시하는 것은 타당할까? 우리 무력한 인간들이 언제쯤이
면 자기 자신을 나공불락의 존재라고 믿을 수 있을까? 남을 정복하고 나면 운명이란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법일세. 그리고 사물의 법칙을 아주 경시하
고, 만물이 얼마나 빨리 변천하며 각자의 운명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가장
기쁠 때에도 슬퍼지기 마련이라네. 권력의 정상에 도달하고 가장 위대한 왕국을 지배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가 한 시간도 못 되는 사이에 유린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또
이제까지 무수히 많은 군의 호위를 받고 있던 왕이 그의 정복자의 손에서 목숨을 잇기 위하
여 나날의 양식을 얻어먹고 있는 것을 볼 때, 지금 우리가 얻은 이 권력이 영원히 계속되리
라고 그대들은 믿을 수 있는가? 아닐세, 젊은이들 그런 헛된 자존심이나 이겼다고 해서 쓸
데없이 교만한 태도를 보이지 말게. 겸손한 태도로 앞으로 올 것에 늘 대비하게. 지금 하늘
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고 있는지 그것에 대비하고 있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이밀리우스가 똑같은 내용의 연설을 되풀이하자 젊은 장군들은 교
만한 태도가 적당히 꺾이고, 자만심과 오만한 마음이 없어져서 아이밀리우스의 앞을 물러났
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자 아이밀리우스는 군대를 각 병사로 보내서 쉬게 하고, 자신은 그리스로 가
명예를 누리고 은혜를 베푸는 가운데 잠시 동안 휴양을 취했다. 그는 각지를 다니며 시민의
슬픔을 덜어 주고, 그들의 정부를 개조하고, 페르세우스의 창고에 들어 있는 곡식과 기름 따
위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저장량이 너무 많아서 원하는 사람마다 다 나누어준 뒤에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델포이에서는 백색 대리석의 큰 사각기둥을 발견
했는데, 그것은 페르세우스의 황금상을 세울 주춧대로 쓸 계획이었다고 한다. 아이밀리우스
는 정복된 자는 정복한 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페르세우스 대신
자기의 조각상을 세우라고 하였다. 올림피아에서는 피디아스가 호메로스의 유피테르 신의
초상을 조각하였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로마에서 10명의 호민관이 오자, 마케도니아 인들에게 그들의 도시와 나라를 돌려주고 마
음대로 살 것을 허용하였으며, 마케도니아의 법에 따라 과거에 그들이 왕에게 바쳤던 세금
의 절반밖에 안 되는 100탈렌트의 세금을 로마인들에게 바치게 하였다. 그 다음 각종 연극
과 운동회를 개최하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큰 연회와 잔치를 열었다. 그 모든 비용을
왕의 보물 중에서 넉넉하게 지출하였다. 손님들을 잔치 자리에 앉히는 데 있어서도 그 계급
과 공에 따라 각자가 받아야 할 대접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또 오
락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 사소한 일가지 질서 있게 하는 데 그리스인들도 모두
놀랐다. 아이밀리우스는 자신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서 모든 손님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
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무한히 기뻤다. 그리고 그의 열성에 감탄한 듯한 사람들에게 말하
기를 잔치를 차리는 것이나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나 똑같은 정신으로 하여야 하며, 다만 전
쟁에서는 적군에게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보여야 하고, 잔치에서는 손님을 기쁘게 하는 것
만이 다를 뿐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다른 덕목에 못지 않은 너그러운 마음씨와 큰
아량을 높이 찬양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왕궁에서 꺼낸 많은 금은 보화를 보지도 않고서, 재
정관을 시켜 그것을 고스란히 국고에 넣게 하였기 때문이다. 학문을 좋아하는 자기 아들들
에게 왕의 장서를 가지라고 허용했을 뿐이었다. 수훈을 표창하여 포상할 때에도 그의 사위
아일리우스 투베로에게는 무게가 겨우 5파운드밖에 안 나가는 은잔을 하나 주었을 뿐이었
다. 투베로가 바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조그마한 농장에서 열 여섯이나 되는 친척들이 함
께 살았다는 그 사람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것이 전공에 이하여 아일리우스 가로 들어
오게 된 최초의 은잔이었으며, 그 전까지만 해도 이 집안에서는 일체의 금은 잡기는 쓴 예
가 없었다고 한다.
이렇듯 모든 질서를 잡아 놓은 다음 그리스인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마케도니아 인들에
게 모처럼 로마로부터 얻은 자유에 유의하여 법을 준수함으로써 그것을 지키고 모두가 다
화목하게 살도록 노력하라고 열심히 타이르고는 에피루스로 떠났다. 페르세우스와 싸운 아
이밀리우스에게 그 나라의 여러 도시를 약탈하도록 허용하는 명령이 원로원에서 왔기 때문
이었다. 불시에 여러 도시에 기습 공격을 가하리라고 결심한 그는, 각 시의 교인들로 구성된
대표 10명씩을 불러 약속한 날까지 각 가정이나 신전에 있는 모든 금과 은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 명령을 전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군대를 주어 금품을 받으러 온 것처
럼 가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날짜가 되자 각지에 간 군대가 갑자기 약탈을 시작하
여, 삽시간에 15만 명의 사람을 노예로 잡고, 70개의 도시를 약탈하였다. 그러한 엄청난 파
괴와 철저한 약탈에도 불구하고 한 병사가 얻은 것은 겨우 11드라크마도 되지 못하였다. 따
라서 사람들은 각 특정인에게 돌아가는 몫이 적은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오직 몸서리를 쳤
을 뿐이었다.
아이밀리우스는 이러한 만행, 그의 부드럽고도 온화한 기질에는 완전히 역행되는 행위, 을
한 수에 오르쿠스로 가서 군을 이끌고 이탈리아고 건너갔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이 쓰던 16
줄로 앉아서 노를 젓고, 정복된 군의 온갖 무기와 승리의 관과 자색과 주홍색의 천으로 장
식되어 있는 갤리선을 타고 로마를 향하여 티베르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배가 천천히 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으므로 로마 시민들은 그를 환영하기 위하여 강가에 운집해 앞으로 있
을 그의 개선식에 큰 기대를 걸며 미리 즐겼다. 그러나 페르세우스의 보물을 탐냈던 군인들
은, 자기들이 기대한 만큼의 보수를 받지 못하여 내심으로는 아이밀리우스에게 노하고 있었
으므로, 공공연히 엄격하고도 독재적인 사령관이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밀리우스의 정적이었던 세르비우스 갈바는 그의 밑에서 군단 사령관을 지낸 사람이었
지만, 병사들의 이런 심리를 이해하여 개선식 같은 것은 거행할 필요가 없다고 대담하게 공
언하고는 병사들 사이에 여러 가지 중상 모략을 퍼뜨려 그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뿐
만 아니라 그는 평민 중에서 선출된 호민관들에게 오늘은 4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고발
하기엔 시간이 충분치 않으니 내일까지 연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호민관들이 이야
기할 것이 있으면 어서 해보라고 그에게 명령하자, 그는 온갖 종류의 비난을 가득 섞은 연
설을 시작하여 나머지 시간을 전부 소비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호민관들은 갈바에게로 모
여 음모를 꾸미고는, 호민관들이 다음 날 집회를 열기로 지정한 의사당을 아침 일찍부터 포
위하였다.
날이 밝아 오자 표결에 들어갔다. 처음 부족부터 표결에 착수하였는데 개선식을 거행할
것을 반대하였다. 이 소식이 시민들 사이로 퍼지고 원로원에까지 이르렀다. 시민들은 아이밀
리우스에게 이런 수치스러운 대우를 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정말로 슬픈 일이라고 개탄하였
으나, 말뿐이고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원로원의 지도적 의원들은 흥분하여 이러한 행동이야
말로 야비한 행동이라고 펄쩍 뛰면서, 병사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아이밀리우스의 개선식 거
행을 방해할 것이고, 머지않아 무정부상태가 될 것이라 생각하여 이들의 만행을 억제할 것
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이들은 군중을 헤치고 의사당으로 올라가서, 시민에게 할 말이
있으니 그것이 끝날 때까지 표결을 잠시 멈춰 달라고 호민관들에게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모든 것이 다 중지되고 장내가 조용해지자, 집정관 대우를 받고 있고, 단 한 번 싸움에서 그
에게 도전해 온 23명의 적을 무찌른 일이 있는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가 일어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장군께서 이러한 철없는 오합지졸을 군대랍시고 이끌고도 위대하
신 전공을 세우실 수 있었음을 보고,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금 본인의 가슴에는 우리의 장
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얼마나 위대한 사령관이었나가 분명해 졌습니다. 그리고 과거
에 일리리아 인과 리구리아 인을 정복한 것을 영광으로 알던 바로 그 시민들이 이제 마케도
니아 왕을 생포해 오고,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의 모든 영광을 로마의 군사력으로 탈취해
온 그 위대한 모습을 어찌하여 보려고도 하지 않는지 본인은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시내로
우연히 흘러 들어온 승리에 관한 사소한 뜬소문만 듣고도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이 소문
이 사실인가를 어서 알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린 여러분이 장군께서 정말로 승리를 거두시
고 돌아오신 지금, 장군의 영광이 너무 커서 보기에도 두려워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적을
아끼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것인지, 신들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도 드리지 않고, 여
러분 자신이 느껴야 할 기쁨도 느끼려고 하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닙
니까? 여러분이 개선 장군을 시기해서, 혹은 불쌍히 여겨서 개선식을 그만두는 것이라면 이
둘 중에서 후자의 경우가 훨씬 낫습니다. 여러분의 원한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전쟁
에 나간 일도 없이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반들반들하고 윤나는 피부에 상처라고는 하나
도 없는 자가, 우리들 앞에서 함부로 건방지게 장군의 직책과 의무를 정의하려 하고 있습니
다. 이렇게 많은 상처를 받으며 싸운 사람만이 장군의 용기와 비겁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
습니다."
그는 옷을 벗어제쳐 가슴에 있는 무수히 많은 상처 자리를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이리저
리 몸을 돌려서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될 곳도 여러 군데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는 갈바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 상처 때문에 나를 조롱하고 있군요.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영광으로 여기
고 있습니다. 동포를 위해 밤낮으로 싸움터에서 말을 달리다 얻은 상처니까요. 이제 어서 가
서 표결이나 해 보시오. 나도 뒤따라가서 야비한 자와 감사를 모르는 자와 자기들의 장군을
저버리는 선동자들의 아부와 선동에 속아넘어가는 자가 누구인지 지켜보겠소."
이 연설을 듣고 병사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으므로, 모든 부족은 이 투표에 참
가하여 아이밀리우스를 위하여 개선식을 거행해도 좋다는 정령을 포고하고는 다음과 같이
식을 거행하였다고 한다.
시민들은 포룸, 경마용 건물인 서쿠스라고 부르는 원형의 대 운동장, 개선식 광경을 가장
잘 구경할 수 있는 시내의 다른 여러 곳에다 관람대를 세웠다. 구경꾼들은 모두 흰 옷을 입
었다. 모든 신전이 개방되었으며 화환으로 장식하고 향을 피웠다. 많은 관리들이 나오 교통
정리에 힘썼으며 큰길로 모여들거나 큰길을 달려서 가로지르려는 것을 막았다. 개선식은 사
흘 동안 계속되었다.
첫 날은 250대의 전차에 실린, 적에게서 빼앗은 동상, 조각, 그림, 어머 어마한 초상 등을
보이는 데도 하루가 모자랄 정도였다. 둘째 날에는 마케도니아 군의 놋쇠와 강철 두 종류의
갑옷 중 가장 훌륭하고 값진 것만 수레에 싣고 행진하였다. 그것들은 모두 새로 닦여서 반
짝반짝 윤이 났다. 그것들은 아무렇게나 쌓여진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아주 공
을 들여 쌓여진 것이었다. 즉 방패 위에 투구를, 정강이에 대는 갑옷 위에 가슴에 대는 갑옷
을, 크레타의 방패, 트라키아의 방패와 화살 통은 마구와 함께 쌓고 시퍼런 칼들을 그 위에
놓았으며, 또 그 위에는 방형진의 창병들이 쓰던 긴 창을 높이 세웠다. 수레가 흔들리며 갈
때 그 덜컹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하고 무서웠던지 정복된 적의 전리품이라고 할지라도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갑옷이 가득 실린 이들 수레 뒤에는 3천 명의 병사들이
따랐는데, 3탈렌트씩의 은화를 담은 750개의 그릇을 네 사람이 하나씩 들고 걸어왔다. 다른
병사들은 은잔과 손잡이가 없는 술잔과 찻잔 등을 들고 보라는 듯이 그 뒤를 따랐는데, 그
크기뿐만 아니라 정교한 양각 세공의 수법 또한 기가 막힐 정도였다.
셋째 날 아침에는 행렬이나 엄숙한 입장식 같은 때에 흔히 불어 대는 공격 나팔 소리가
앞장을 섰다. 그 뒤로는 곱게 단을 댄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저고리를 입은 청년들이 제물
로 바칠 120마리의 살진 황소를 뿔에 금칠을 하고 머리에는 리본과 화환으로 장식을 하여
끌고 오고, 소년들이 제주를 담은 금은 동이를 들고 뒤따랐다. 이 뒤로는 은화를 담은 그릇
과 마찬가지로, 그릇마다 3탈렌트씩의 금화가 담긴 그릇이 따랐으며, 그 수는 77개였다. 그
뒤로는 아이밀리우스가 신에게 바치기 위하여 만들게 한 10탈렌트어치의 금으로 만들고 많
은 보석을 박은 큰 술잔을 든 사람들이 따랐다. 이 뒤로 페르세우스의 전차가 따랐는데, 거
기에는 그의 갑옷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그가 쓰던 왕관이 얹혀 있었다. 좀 간격을 두고
포로가 된 왕자와 왕녀가 따랐고, 이들과 함께 그들의 시종들과 장인들과 가정교사들의 긴
행렬이 따랐는데, 모두 눈물을 흘리며 군중 쪽으로 손을 뻗어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고 아이
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 아이들은 왕자 둘과 공주 하나였는데 이들은 자기들의 불
행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들의 처지를 모르고 있는 그것 자체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애달프게 하였다. 그러므로 구경꾼들은 페르세우스에 대해서는 별로 관
심도 두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그 어린것들이 불쌍하여 파마 그들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
고, 그 대다수는 눈물을 참지 못하였으며 아이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들과 시종들이 지나간 다음 페르세우스가 왔는데, 그는 검은 옷에 그 나라 사람들이
신을 목이 긴 신을 신고 있었고, 자기가 겪은 불행이 어찌나 컸던지 넋은 읽고 이성을 잃은
듯 한 모습이었다. 그 뒤로 패왕의 측근자들과 가족들이 따랐는데, 그 표정들이 모두 슬픔으
로 가득 찼고 눈물 어린 눈으로 왕만을 계속 지켜보아, 그들이 슬퍼하는 것은 왕의 불행뿐
이고 자기들의 처지 대해서는 아랑곳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구경꾼들은 알 수 있었다.
이보다 먼저 페르세우스는 아이밀리우스에게 사람을 보내 간청하기를, 이 화려한 행렬에 끼
여 개선식에 참석하는 것만은 제발 좀 면제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는 페르
세우스가, 그럴 만한 근거는 충분히 있겠지만 너무나도 비겁하게 자기 목숨만을 아끼는 것
을 경멸하고 있던 터라, 그것에 관해서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
라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치욕은 죽어야만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졸장부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는 무슨 희망을 가지고 사내답지 못하게 전리품의 한 부분이 되어
그 행렬에 끼여 있었는지 모른다.
페르세우스 뒤에는 400개나 되는 금관이 따랐다. 이것들은 각 도시에서 대표를 파견하여
전승을 기념하는 뜻으로 아이밀리우스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아이밀리우스가 화
려하게 장식한 전차에 앉아 나타났다. 이러한 위용을 갖추지 않더라도 원래부터가 풍채가
늠름한 사람이었는데, 황금으로 장식한 자줏빛 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월계수 가지를 들고
있었다. 모든 병사들도 똑같은 모양으로 각자 손에 월계수 가지를 들고 질서정연하게 대열
을 지어 장군의 뒤를 따랐다. 몇몇은 통례적인 관례에 따라 농담을 섞어 가며 민요를 부르
는가 하면, 또 몇몇은 자기들의 장군을 찬양하는 개선가를 우렁차게 불렀다. 정말로 모든 사
람이 장군을 존경하고 찬양하였으며, 아무도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완벽한 행복을 다소 조절하여, 아무도 재난을 완전히 모면하며 살수는 없다는 인생사를 맛
보게 하는 것은 신의 영역인가 싶다. 우리가 호메로스를 읽으면 알 수 있듯이, 운명의 여신
이 행복과 불행을 똑같이 나누어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축복을 받은 사람
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아이밀리우스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그 중 스키피오와 파비우스는 임 이야기한 것처
럼 다른 집의 양자로 들어갔고, 후처의 몸에서 낳은 다른 두 아들은 아직도 어려서 자신의
집에서 기르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명은 아버지가 개선하여 돌아오기 닷새 전에 14살의 나
이로 세상을 떠났고, 다른 한 명은 개선한 지 사흘 후에 1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
므로 로마인이라면 그의 불행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행복과 기쁨과 재물로 가득 찬 이
집안으로 갑자기 뛰어들어 승리와 개선의 노래에 눈물과 비애를 섞어 놓은 운명의 잔인함에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는 용기란 적을 무찌르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불행의 충
격을 몰아 내는 데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자기에게는 불행보다는 행운이 더 크고, 또
자기 한 개인의 설움은 나라의 영과에 비교할 것이 못될 만큼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에게서 위엄을 앗아가거나 승리의 위신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였다. 이
미 이야기하였듯이 큰아들의 장례를 끝마치자 그의 둘째 아들이 죽었으므로, 그는 시민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연설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설움을 슬퍼하는 당신들이라고 하였다.
"나는 아직껏 한 번도 인간사에 관해서는 어느 것도 두려워한 적이 없고, 다만 신들 중에
서 운명의 여신만을 성실치 못하고 변덕스럽다고 여겨 늘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여신이 이번 전쟁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언
젠가는 어떠한 화와 사태의 역류가 오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하루 사이에 이
오니아 해를 건너서 브룬디시움으로부터 코르키라에 도착하였고, 닷새만에 델포이에서 제사
를 드리고, 또 닷새만에 마케도니아로 진주하여 군의 관례에 따라 제사를 지내고 곧 전투가
시작하여 보름만에 승리로 이끌어 명예로운 종전을 이룩했습니다.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
고는 있었지만 운명의 여신의 질투가 아직도 남아 있고, 어떠한 위협도 전혀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내가 두려워한 것은 이 운명의 여신의 변덕이었습니다. 나는 승리를 거둔 나의
병사들과 막대한 양의 전리품과 포로로 잡은 왕을 배에 싣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정말로 무사히 여러분에게로 돌아와 나라가 기쁨과 축하와 재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
았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큰 은혜를 베풀면 반드시 무슨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
고 있었으므로 나는 아직도 안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라에는 재난은 일어나지 않겠다고
마음을 놓자, 내 집안에 이런 괴변이 생겨서 이 기쁜 행사를 치르는 동안에 나의 성을 이어
받을 자식 둘을 잇따라 잃었습니다. 이제 나의 가장 큰 걱정거리가 사라지고 나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 얼마 동안은 운명의 여신이 우리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왜냐하면 내 성공에 대한 운명의 여신의 질투도 없어
졌고, 또 운명 앞에서는 정복자도 개선식에서 끌려간 포로와 다를 것이 없다는 이치대로, 정
복자인 나도 정복당한 페르세우스 못지 않은 슬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정복된 페르세우스는 아직도 자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를 정복한 아이밀리우스는
자식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밀리우스가 참으로 진지하게 진심에서 시민에게 토로한 관대하고도 도량이 넓
은 연설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페르세우스의 신세를 아주 측은히 여겨 될 수
있는 한 그에게 친절하게 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보통 감옥으
로부터 좀더 깨끗하고 친절한 곳으로 옮겨 주는 것뿐이었다. 여기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페
르세우스는 식음을 전폐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그의 죽음은 아주 이
상하고 특이한 성질의 것이었다고 한다. 즉, 그를 감시하고 있던 병사들이 어떤 이유에서인
지 그에게 원한을 품고 미워하였는데, 그를 괴롭힐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자 그를 자지 못
하게 하여, 자려고만 하면 고통을 주어 그가 계속 눈을 뜨고 있도록 해서 결국은 완전히 지
쳐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의 두 아들도 그가 죽은 후 곧 죽었다. 셋째 아들은 알렉산드로스
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세공과 조각에 능하였고 로마 말도 완벽하게 하고 쓸 줄도 알았으므
로 관청이 서기가 되어 일하였다고 한다.
아이밀리우스의 마케도니아 정복이 국민에게 가장 큰 혜택을 준 것은,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지고 와서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1차전 때의 집정관들인 히르티우스와 판사의 시대까
지 국민들이 세금을 전혀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각
별히 받고 있으면서도 늘 귀족들과 한편이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었다.. 그는 대중의 비위
를 맞추려고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고 늘 모든 정치적인 일에 있어 귀족들에게 밀착되
어 있어, 나중에 이러한 이유로 인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아피우스의 공격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었으며, 감찰관 후보로 입후보했을 때 스키피오
는 귀족의 원로원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에게 아피우스 일파도 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
었다. 후자는 그 자신의 이해관계가 컸지만 국민의 사랑을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아피우스
는, 시키피오가 천한 계급의 사람들과 노예의 신분에 있다가 새로 자유를 얻게 되었지만 토
론에는 아주 익숙한 자들에게 둘러싸여 광장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서, 이러한 오합지졸들
을 모아 그들이 원하는 어떠한 안건이든지 간에 통과시킬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큰 소리
로 이렇게 외쳤다. "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통곡하시오. 당신이 무덤 속에 있을 때 그
위에서는 무슨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안다며, 즉 당신의 아들이 거리의 선동자인 자기
아버지 아이밀리우스와 리키니우스 필로니쿠스의 도움으로 감찰관이 되려고 하고 있다는 것
을 안다면."
그러나 스키피오는 늘 국민들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왔기 때문에 국민들의 호의를 얻고 있
었다. 그의 아버지인 아이밀리우스는 아직도 귀족들 편에 있었지만 국민들의 총애도 대단하
였다. 그의 태도는 국민의 인기를 얻으려는 데 온 신경을 쓰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하여 온갖
술책을 다 쓰는 사람 못지 않았다. 국민은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어 입후보자들 중에서
도 그야말로 감찰관이 될 인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감찰관은 가장 신성하고 권위가 있는 직
책으로서 다른 여러 가지 일에서뿐만 아닐, 사생활도 엄격하게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
되어 있었다. 감찰관은 원로원 의원을 제명하고 그 자리에 가장 알맞다고 판단되는 다른 사
람을 앉히고, 또 생활이 방종한 청년들로부터 그들의 말을 몰수함으로써 벌을 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뿐 아니라 그들은 시민 각자의 재산을 평가할 수도 있었고, 인구
의 수도 산정할 수 있었다. 아이밀리우스가 산정한 그때의 총 인구는 34만 7452명이었다. 그
가 최초로 원로원 의원에 임명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였는데, 그는 그 직책을
이미 4번이나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와 그의 동료인 마르키우스 필리포스는 기사들의 처리
에 있어서도 똑같이 완화책을 썼다.
이렇듯 허다한 중책에 시달리다가 그는 마침내 병석에 눕게 되었다. 처음에는 위독한 것
같더니 잠시 후에는 위험성이 없어졌지만, 고치기 어려운 노환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래
서 의사들의 충고에 따라서 이탈리아 남부의 벨리아로 가 바닷가에서 오랫동안 고요한 생활
을 즐겼다. 그러는 동안 로마 시민들은 그가 돌아오기를 갈망하였다. 가끔 공중이 모이는 곳
에서 공공연히 그를 만나 보고 싶다는 의사들을 표명하였다. 그러므로 중대한 제사에 참석
해야 할 날이 다가오자 그는 건강이 상당히 회복된 것으로 생각하고 로마로 돌아왔다. 그리
고 다른 사제들과 그의 귀환을 축하하는 시민들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다음 날 그는 자기
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신들에게 또다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끝마치고 집에 돌아와 식
사를 하려고 앉았을 때,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완전히 의식을 잃고 사흘 후에 숨을 거두
었다. 인생의 행복에 필요한 것을 무엇 하나 탐낸 일이 없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식도 고인의 유덕을 기리는 장례식다웠다. 금이니 상아니, 그밖에 이런 장례식에서 으
레 볼 수 있는 허식과 사치의 호화판 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 동포들뿐만 아니라 적들까지
도 선의와 명예와 사랑을 다한 정성어린 장례식이었다. 마침 로마에 와 있어, 이 엄숙한 장
례식에 참석하게 된 많은 스페인 사람들과 리구리아 사람들, 마케도니아 사람들 중 젊고 튼
튼한 사람들은 영구를 메고, 나이 먹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지켜 준 은인이라고 말하
며 그 뒤를 따랐다. 왜냐하면 그가 정복시에 그들에게 친절하고 인자하게 대하였을 뿐 아니
라, 일생 동안 마치 자기 가족이나 친척이나 되는 듯이 그들이 모든 구차한 일들을 돌봐 주
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유산은 겨우 37만 드라크마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공동 법정 상속인
인 그의 두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작은아들 스키피오는 부자인 아프리카누스의 양자
로 갔기 때문에 자기 몫의 유산을 그의 형에게 주었다. 이상이 아이밀리우스의 생애와 삶의
모습 전부이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로스와 티몰레온의 비교
이 두 위인의 생애에 관해 비교해 볼 때 차이가 눈에 띄지 않을 것을 확실하다. 두 사람
다 강적과 싸웠다. 즉 한 사람은 마케도니아와 싸웠고 또 한 사람은 카르타고와 싸웠다. 두
경우에 있어 성과도 놀랄 만하다. 한 사람은 안티고노스의 왕통을 제 7대에서 무찔렀고, 또
한 사람은 전제자들로부터 시칠리아를 해방시켜 시칠리아 시민들에게 그 전에 누리던 자유
를 되찾아 주었다. 아이밀리우스로 말하자면 페르세우스의 막강한 군대와 전에 여러 번 로
마 군을 무찌른 경험이 있는 강병들로 편성된 적과 싸웠으나, 티몰레온의 경우는 디오니시
우스가 절망 상태에 있었고 그 힘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을 때였다. 그러나 티몰레온을
두둔하여 말하자면 아이밀리우스의 병사들처럼 훈련이 잘 되고 전쟁 경험이 많고 복종할 줄
아는 군대가 아니라, 소득에만 관심이 있고 전투 기술도 없으며 통제할 수 없는 오합지졸을
이끌고도 전제왕을 여럿 무찔렀고, 사방에서 모집한 무수히 많은 군대를 가진 강력한 카르
타고 군을 무찔렀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투에 투입된 전략이 같지 않을 때, 소수의
병력으로 적을 무찌른 장군에게 최대의 존경이 가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두 장군은 그들이 관여하는 모든 일에서 부패를 모르는 성실함으로 행동함으로써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는 어렸을 때부터 나라의 법과 관습에 따라 공사를 공정
하게 처리하는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티몰레온은 그의 노력에 의하
여 이룬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당시의 모든 로마인들은 어느 정도 질서를 잘
지키고 권위에 순종하고 국법과 동포들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디온을 제외한
시칠리아에 주둔한 그리스의 사령관들은 놀랍게도 뇌물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리고 디온이 스스로 시칠리아에 스파르타 왕국을 세울 꿈을 꾸고 있었다고 질투를 토로한
사람도 많았다.
역사가 티마이우스에 의하면, 길리포스조차도 군사령관을 지낼 때 받은 많은 뇌물 때문에
명성을 잃고 창피스럽게도 시라쿠사 인들에 의해 고국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무수히 많은 역사가들이 스파르타의 장군 파락스와 아테네의 장군 칼리푸스가 시칠리아의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으로 범한 비행과 배신행위를 전하고 있다. 그러면 감히 이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던 그들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던가? 전자는 디
오니시우스가 시라쿠사에서 추방될 때 그를 따라온 자였고, 후자는 디온 휘하의 고용 보병
장교로서 디온을 따라 시칠리아로 온 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니은 시라쿠사 인들의 요
청에 의하여 군사령관으로 파견되었으니 권력을 잡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들
스스로가 제공한 군사령관이라는 확고한 칭호를 갖게 되었으나, 시칠리아를 그 압제자들로
부터 해방시키자 기꺼이 그 자리에서 떠났다.
우리들이 아이밀리우스를 숭배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즉 그는 자기 돈을 남에
게 관대하게 나누어주면서도 마케도니아와 같은 부유한 나라를 정복하였을 때 단 한 푼도
손대지 않고 자기 수중에 넣지도 않았다. 이 말은 티몰레온이 시라쿠사 인들이 선물로 준
시골집과 아름다운 땅을 받은 것을 비난하자는 뜻은 아니다. 그것을 받았다고 해서 별로 수
치스러울 것도 없다. 물론 받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나,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의당 받아
도 좋은 것을 거절하는 것이니 거의 인간 이상의 덕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튼튼하고 건강한 몸은 극단적인 추위에도 더위에도 잘 견디듯이, 가장 고결한 마음은 세
도가 높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으며, 운이 나쁘다고 해서 의기소침하지도 않는다. 이렇듯 아
이밀리우스의 덕은 그의 용모나 행동에 흘러 넘쳤고, 그가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을 때
보여 주었듯이, 그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었을 때에도 그에 못지 않은 위엄과 의지력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티몰레온은 진정으로 영웅적인 행동을 발휘하여 그의 형을 의롭게 살
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가책으로 슬픔에 잠겨 20년 동안이나 어떠한 공적 장소에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나라의 어떤 일에도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떠한 야비한 행동
도 사갈처럼 알고 그것을 삼가야 한다. 그러나 세평이라면 그저 무엇이나 다 두려워하여 수
수방관하는 태도는 온순하고도 너그러운 태도이긴 하지만 영웅적인 태도라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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