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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뉴 로맨서 [윌리엄 깁슨]

by Casey,Riley 2023.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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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 로 맨 서
                      N E U R O M A N C E R


                          William Gibson



                                          
                         --------------
                              I 부
                         --------------
우울한 지바市

                                1


  항구의 하늘은 방송 끝난 채널에 고정된 텔리비전의 빛깔로 번뜩이고 있었다.
  "마약이 필요한건 내가 아닌가봐." 채트의 입구 주변에 몰려 있는 군중들 틈바구니를 어깨로 밀어 헤치며 나아가던 케이스는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무래도 이 지독한 마약 결핍증에 걸려버린 건 이 놈의 몸뚱이인 것 같으이." 그것은 스프롤식 발음에다 스프롤식의 익살이었다. 채트는 국적을 버린 전문가들이 드나드는 술집이었다. 그곳은 일 주일 내내 술을 마시고 있어도 일본어 한 마디 듣기 힘든 곳이었다.
  바텐더 노릇을 하고 있는 래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인공 팔은 단조롭게 움찔거리며 쟁반 위의 잔들에 기린 생맥주를 채우고 있었다. 그가 케이스를 발견하고 씩 웃어보이자 동유럽제 강철 소재와 갈색의 충치로 얽혀 있는 그의 이가 드러났다. 케이스는 카운터에서 앉을 자리를 찾아냈다. 그 자리 한 옆에는 로니 존 수하의 창녀 하나가 믿을 수 없으리 만치 검게 태운 피부를 하고 앉아 있었고, 또다른 옆에는 빳빳히 줄 세운 해군 제복의 키 큰 아프리카인이 앉아 있었다. 그 자의 광대뼈 부분에는 부족의 표식인 흉터가 정확히 줄지어 이랑을 이루고 있었다. "웨이지가 아까 부하 둘을 데리고 여기 왔었네." 래츠가 성한 쪽 손으로 생맥주를 카운터 위로 밀어 보내며 말했다. "혹시 자네하고 뭐 해결 볼 일이라도 있는건가, 케이스?"
  케이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른쪽에 있던 여자가 킥킥거리며 팔꿈치로 그를 슬쩍 찔러왔다.
  래츠가 입이 찢어질 듯 씨익 웃음지었다. 그의 추한 몰골은 그야말로 전설로 남을 만한 것이었다. 돈만 있으면 아름다움을 살 수 있는 이 시대에 그처럼 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딘가 모르게 선구자적인 느낌을 자아내었다. 그가 또다른 맥주 조끼에 손을 뻗자 골동품이 다 된 그의 인공팔이 위잉거리는 소음을 냈다. 그것은 러시아제의 군용 인공팔로서, 일곱 가지 기능을 갖춘 강제 피드백 방식의 매니퓰레이터(manipulator)를 지저분한 연분홍색 플래스틱으로 감싸 놓은 것이었다. "케이스 선생, 자네는 지나치게 예술가적인 데가 있어." 래츠는 웃음 소리 대신 그렇게 툴툴거렸다. 그리고는 흰 셔츠 아래로 불룩하니 튀어나온 자신의 올챙이 배를 연분홍색 집게손으로 긁어댔다. "약간 재미있는 데가 있는 예술가란 말이지."
  "물론일세." 그렇게 대꾸하며 케이스는 들고 있던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여기에도 누군가 하나쯤은 재미있는 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자네는 재미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작자니까 말이야."
  창녀의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그쪽도 마찬가지야, 아가씨. 그러니 좀 꺼져주지 않겠어, 응? 존과 내가 막역한 친구 사이란걸 모르나?"
  여자는 케이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거의 입술 하나 달싹이지 않은 채 들릴락 말락하게 침 뱉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결국은 그 자리를 떠버리고 말았다.
  "제기랄," 하고 케이스가 투덜거렸다. "자넨 술집 운영을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겐가? 술 한잔 조용히 마실 수가 없잖나 말일세."
"허이구." 자국난 목재 카운터를 걸레로 훔치며 래츠가 말했다. "존은 자기 벌이의 일부를 내게 나눠주고 있네. 하지만 자네가 여기서 사업을 벌이도록 놔두는 건 자네의 오락적 가치 때문이란 말이야."
  케이스가 맥주잔을 막 집어들려는 찰나, 어쩌다 한 번쯤은 누구나 겪게 되는 그 이상스런 정적의 순간이 찾아왔다. 마치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이 오가던 수많은 대화들이 동시에 끊겨버린 듯이. 문득 방금전 창녀의 킬킬 대는 웃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뭔가 병적 흥분의 색조를 띤 웃음소리였다.
  래츠가 투덜거렸다. "별 일 다 보겠군."
  "뙈놈들이야," 하고 술취한 호주인이 고함치듯 말했다. "그놈의 뙈놈들이 신경 재접합 기술을 발명해낸거라구. 아무 때든 좋으니 중국땅에 가서 신경 수술만 받게 해줘 보라지. 놈들이 제대로 고쳐놓을테니 말야, 이 친구야..."
  "웃기고 있군." 맥주잔을 들여다보며 케이스가 중얼거렸다. 가슴 속 깊이 묻어놓았던 모든 고통들이 돌연 신물처럼 치밀어 올라왔다. "다 얼토당토 않은 헛소리일 뿐."

중국에선 아직 알지도 못하는 신경외과 기술들이 일본에선 이미 낡은 기술이 되어 잊혀져 버린지 오래였다. 지바市의 암거래 병원들은 최첨단 의료기술의 시술 현장이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전혀 새로운 기법들이 낡은 기술들을 무더기로 대체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 조차도 저 멤피스의 호텔에서 그에게 가해진 신경 손상을 고쳐놓을 수는 없었다.
  이곳에 온 지 일년이 지나버린 지금도 그는 사이버 공간(Cyberspace)을 꿈꿨고, 희망은 매일 밤 희미해져가기만 했다. 이 '나이트 시티(Night City)'에서 그가 성취해낸 모든 성공과 모든 결정들, 그리고 그가 감수해낸 모든 위험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꿈 속에서 매트릭스를 보았다. 그 색깔없는 허공을 가로질러 펼쳐지는 논리의 휘황한 격자들을.... 스프롤은 이제 멀리 태평양 건너의 고향에 있는 낯선 거리였으며, 그는 더이상 콘솔 맨(console man)도 사이버 공간의 카우보이도 아니었다. 단지 생존경쟁 속에 버둥대고 있는 평범한 사기꾼에 불과했다. 그러나 매트릭스의 꿈은 펄펄 뛰는 고압전기로 충전된 부두(voodoo)敎 의식처럼 밤마다 그를 찾아왔고, 그는 그것을 갈망하며 잠결에 울부짖곤 했다. 그러다 어둠 속에서 홀로 깨어나보면 그는 어느 취침캡슐 호텔의 자기 캡슐 안에서 온몸을 오그린 채, 두 손엔 침대 매트리스의 탄성 발포 소재를 그러잡고 있었다. 거기에 있지도 않은 콘솔을 잡으려 손을 뻗친 채.

  "어제밤 자네 여자를 봤지." 케이스에게 두 번째 맥주잔을 건네주며 래츠가 말했다.
"내겐 여자가 없네," 하며 그는 잔을 들이켰다.
  "린다 리양 말이야."
  케이스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애인이 아니라구? 아무 관계도 아니다? 오로지 사업 뿐이라 이건가, 예술가 양반? 일에만 전념하기로 했단건가?" 주름진 얼굴피부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바텐더의 작은 갈색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자넨 그 여자하고 있을 때가 더 보기 좋았던 것 같네. 웃기도 더 많이 웃었고. 이런 식으로 너무 멋부리다간 어느날 밤 병원의 장기저장 탱크 속에 이식용 예비 장기 신세가 되어 처박히고 말걸세."
  "내 가슴을 찢어놓는군 그래, 래츠." 그는 맥주를 마저 마시고는 술값을 치루고 나왔다. 그의 좁고 높은 양 어깨가 비에 젖은 카키색의 나일론 스포츠 잠바 밑에서 움츠러들었다. 닌세이(Ninsei) 거리의 군중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면서 그는 자신에게서 나는 켸켸 묵은 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케이스는 스물네 살이었다. 스물두 살에 이미 그는 카우보이였고, 스프롤 최고의 도둑 대열에 들어 있었다. 그는 최고의 실력자들, 즉 바로 이 분야의 전설적 존재들인 맥코이 폴리와 보비 퀸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그는 거의 끝없이 지속되는 아드레날린 충만 상태에서 일을 해치웠었다. 그 흥분은 젊음과 숙달된 기술에서 넘쳐나오는 부산물이었다. 주문형의 사이버 공간 진입데크 속으로 접속해 들어가면 그의 의식은 육신으로부터 이탈하여 매트릭스라는 공감각적 환각 속으로 투사되었다. 그 자신도 도둑이었지만, 그는 보다 부유층의 또다른 도둑들을 위해 일했다. 그를 고용한 자들은 법인 체제의 철통같은 방벽 속으로 침입해 풍성한 데이타의 보고로 들어가는 창문을 여는 데 필요한 진기한 소프트웨어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자신만은 절대로 저지르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전형적인 실수를 그 역시 저지르고 말았다. 자신을 고용했던 자들의 것을 훔쳤던 것이다. 그는 어떤 물건을 빼돌려 암스테르담의 장물아비를 통해 처분하려 했었다. 그 사실이 어떻게 해서 발각났는지는 아직도 확실치가 않았다. 물론 지금에 와선 그깟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당시엔 꼼짝없이 죽게 되는 줄만 알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미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아, 괜찮네' 하고 그들은 말했다. '돈은 자네가 가지게나. 앞으론 그 돈이 필요할걸세.'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그들은 말했다. '이제 다시는 이 계통의 일을 못하도록 손봐드릴 테니 말이야.'  그들은 러시아제의 세균전용 마이코톡신으로 그의 신경계를 손상시켰다.  멤피스의 어느 호텔 침대에 묶인 채, 자신의 재능이 일 미크론씩 타들어가는 속에서, 케이스는 30 시간에 걸친 환각을 경험했다.  그들이 입힌 손상은 사소하고 교묘한 것으로서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육체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사이버 공간의 환희를 위해 살았던 3케이스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로 실락원(失樂園)을 뜻했다. 일류급 카우보이 시절 그가 자주 드나들던 술집의 엘리트들에겐 육체를 은근히 경멸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육체란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그런 케이스가 바로 자신의 육체라는 감옥 속에 갇혀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전재산을 두툼한 뉴 엔 다발로 바꿔버렸다. 그것은 폐쇄 회로와도 같은 전세계 암시장 속을 트로브리앤드 섬 사람들의 패화(貝貨)처럼 끝없이 유통되고 있는 구식 지폐였다. 스프롤에서 현금으로 합법적인 사업거래를 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현금의 사용이 이미 불법화되어 있었다.  일본에는 틀림없이 치료 방법이 있으리라고, 아니 반드시 있다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지바市의 등록된 진료소나 의술의 암거래가 횡행하는 어두운 세계에는 틀림없이 치료법이 있으리라. 장기 이식이나 신경 접합, 미시 생체 공학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지바市는 스프롤의 첨단기술 범죄자들의 하층 문화를 끌어들이는 자석과도 같았다.  지바市에서 두 달 내내 검사와 진찰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그는 
자신의 전재산이 눈녹듯 사라져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암거래 진료소의 의사들 마저도 그의 재능을 절단낸 전문 기술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젓고 말았다.
  이제 그는 항구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카핀(coffin)이라는 싸구려 취침캡슐에서 자야 하는 신세로 전락해있었다. 선거(船渠)를 거대한 무대처럼 밤새 밝혀대는 석영 할로겐등의 조명 밑에 그곳은 자리잡고 있었다. 거기선 텔리비전 화면처럼 빛을 발하는 하늘 때문에 도쿄의 불빛을 볼 수도 없었다. 높이 솟아 있는 후지 전기社의 홀로그램 로고 조차도 볼 수 없었으며, 삭막한 암흑의 광야와도 같은 도쿄 만에는 둥둥 떠다니는 수많은 백색 스티로폼 위로 갈매기들이 선회하고 있었다. 항구 뒷쪽으로는 도시가 펼쳐져 있어 공장 건물의 반구형 지붕들 위로 기업체의 방대한 완전환경 계획도시 입방체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항구와 도시는 오래 된 거리들로 이루어진 좁다란 경계지대를 사이에 두고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공식적 명칭 조차도 없이 나이트 시티라고 불리는 이 지역의 중심부에 닌세이는 있었다. 낮이면 닌세이 거리의 술집들엔 셔터가 내려져 아무런 특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네온사인은 꺼지고 홀로그램도 정지해버린 채 모든 것은 은빛의 중독된 하늘 아래서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채트에서 두 블럭 서쪽에 있는 '자르 드 떼(Jarre de Th )'라는 커피점에서 케이스는 오늘 밤의 첫 알약을 더블 에스프레소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긴다. 그 핑크색의 납작한 팔각형 알약은 존 수하의매춘부에게서 산 강력한 효력의 브라질산 각성제였다.
  자르는 벽마다 온통 거울로 둘러쳐져 있었고, 그 거울벽 하나하나에는 붉은 빛 네온의 테가 둘러져 있었다.
  처음에 주머니는 바닥나버리고 치료법을 찾아낼 희망은 더더우기나 없이 아는 이 하나 없는 지바시에 혼자 남겨졌을 때, 케이스는 일종의 말기 증상적인 자학 상태에 빠져들었었다. 그는 마치 딴 사람과도 같은 냉혹한 열성으로 새 밑천을 긁어들였다. 일년 전만 해도 콧방귀를 뀌고 말았을 푼돈 때문에 첫 달에 벌써 두 사내와 한 여자를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닌세이는 그를 밑바닥까지 고갈시킨 나머지 결국에 가서는 그 거리 자체가 그의 죽음에 대한 열망의 구현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새 품고 있던 은밀한 독약이었다.
  나이트 시티는 무료함에 지친 나머지 엄지 손가락 하나를 빨리감기 버튼에 대고 누른 채로 아예 고정시켜 버린 어느 연구자가 고안해낸 사회 진화론의 정신착란적 실험장과도 같았다. 그누구든 돈 긁어들이기를 그치는 순간 흔적도 없이 나락으로 가라앉게 된다. 반대로 조금이라도 도에 넘는 짓을 저지를 때는 암시장의 미묘한 표면장력을 깨뜨리게 된다. 어느 쪽이든 목숨을 잃고 만다. 결국엔 래츠 같은 터줏대감의 머리속에 희미한 기억 정도로나 남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심장이나 폐, 또는 신장만은 진료소의 장기 보존 탱크 속에 놓여있다가 돈 있는 생면부지의 누군가에게 이식되어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이 바닥에서의 거래는 벌새의 날개짓처럼 잠재 의식 속에서도 멈춤 없이 계속되었다. 게으름과 부주의, 미움을 사거나 복잡한 규약이 요구하는 바를 무시하는 데 대한 응분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자르 드 떼의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던 케이스는 팔각형 알약의 약효로 양 손바닥에 땀방울이 배어나오기 시작하자 돌연 양 팔과 가슴의 털 한올한올이 따끔거려 오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 속에서 케이스는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은 스스로를 상대로 게임을 시작해왔다는 것을. 그것은 태고적부터 이름도 없이 존재해온 게임, 최후의 솔리테르였다. 그는 이제 더이상 무기를 지니고 다니지 않았으며, 기본적인 예방책 조차도 강구하지 않았다. 그는 이 거리에서 가장 재빠르고도 허술하게 거래를 해치웠으며, 고객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손에 넣을 수 있는수완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고객들에게는 자신이 그리고 있는 자멸의 궤적이 역력히 드러나 보이리라는 것을 의식 한켠에선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고객은 점차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도 이젠 시간 문제라는 사실을 한편으로는 즐기고 있는 그였다. 그런데도 린다 리가 생각날 때면 가장 괴로워지는 것도 바로 죽음에 대한 예감에 즐거워하고 있는 자신의 그런 부분이었다.  그가 린다 리를 만난 것은 어느 비오는 밤의 게임 센터에서였다.

< NEURO_01.2 에서 계속...>

----------------[ 지금까지의 등장 인물들 ]----------------------

Henry Dorsett Case: 케이스.
Linda Lee: 린다 리.
Ratz: 래츠.
Lonny Zone's whores: 로니 존 수하의 창녀
McCoy Pauley and Bobby Quine: 맥코이 폴리와 보비 퀸.

-----------------------[ 용어 설명 ]----------------------------

매니퓰레이터: manipulator. 보통 방사성 물질 등의 위험물을 데 많이 사용되는 집게손 모양의 기계 장치.
취침캡슐 호텔: coffin hotel
카핀. 취침캡슐: coffin
탄성 발포 소재: temperfoam
매트릭스: matrix
부두敎: voodoo (미국 남부 및 서인도 제도의 흑인 사이에 행해지는 주술을 사용하는 원시 종교).
마이코톡신: [細菌] mycotoxin.  곰팡이균류가 내는 독성 물질; 세균전에 사용
뉴 엔: New Yen
첨단기술 범죄자들: techno-criminal
선거(船渠): dock. 도크.
후지 전기社: Fuji Electric Company
스프롤: sprawl. 대도시의 교외가 무질서, 무계획적으로 발전하는 현상, 또는 그런 지역.
채트: Chat (Chatsubo의 줄임말).
<기린 생맥주>: draft Kirin. "기린"이란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일본 주류회사의 맥주 상표명이다. cf) draft beer: 생맥주
예술가: artiste. ((F.)) 예능인 ((배우  가수  댄서, 때로는 이발사  요리인 등의 자칭)).
"별일 다 보겠군.": "An angel passed." --- an angel(s') visit. 좀처럼 없는 사물(事物).
도둑: rustler. (美口) 소도둑, 사기꾼; 활동가. 민완가.
스포츠 잠바: windbreaker
잭: jack. 원래의 뜻은 '어떤 회로의 도선을 접속하기 위해 플러그를 꽂을 수 있도록 한 접속 장치'. 소켓과 그 기능이 같다. ( = hub )   여기서는 동사로 사용할 경우 '접속'해 들어가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주문형 사이버 공간 진입데크: custom cyberspace deck
마이코톡신: [細菌] mycotoxin ((곰팡이균류가 내는 독성 물질; 세균전에 사용))
실락원: Fall. 인간[아담과 이브]의 타락(the Fall of Man), 즉 낙원에서의 추방
패화: seashells (貝貨). 고대에 화폐로 쓰던 조개 껍질.
로고: logo ( = logotype). 회사명이나 상품명을 하나의 활자로 고안해 만들어낸 것.
스티로폼: Styrofoam. 발포(發泡) 폴리스티렌; 상표명. 
에스프레소: espresso. 원두 가루에 스팀을 통하여 진하게 만드는 커피의 일종. 
콘솔: console. 컴퓨터 시스템의 일부분으로서 관리자 또는 조작원과 컴퓨터 사이에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치. 즉, 컴퓨터의 동작을 감시하고 관리자 및 조작원의 필요에 따라서 컴퓨터의 동작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
사회 진화론: social Darwinism. 부(富)나 권력을 가진 자는 생물학적으로도 우위에 있다는 사회학적 이론.
각성제: dex. [藥] dextroamphetamine의 약자. 각성제 및 식욕 억제약. (암페타민은 중추 신경을 자극하는 각성제이다.)
빨리감기 버튼: fast-forward button -- " >> "
터줏대감: fixture. (일정한 직업이나 장소에) 오래 붙박이는 (눌어붙는) 사람.
솔리테르: solitaire. 혼자서 하는 카드놀이, 체커. ((美俗))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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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문장중에 자르 드 떼의 불어 표기는          ' 입니다.
                                     Jarre de The


  그가 린다 리를 만난 것은 어느 비오는 밤의 게임 센터에서였다.  푸른 담배 연기로 자욱한 실내를 꿰뚫고 비치던 그 휘황한 유령상들, 그리고 <마법사의 성>, <대유럽 戰車戰> 게임과 뉴욕 스카이라인의 홀로그램들 ... 문득 그때의 린다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그녀의 얼굴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레이저 조명의 소나기 속에 하나의 부호로 바뀌어 있었다. 마법사의 성이 불타오르자 광대뼈는 진홍색 불빛으로 너울거렸으며, 전차전의 포화속에 뮌헨이  함락될 때 이마는 온통 푸른 빛으로 젖어들었다. 치솟은 마천루의 대협곡을 향해 미끄러져나간 커서의 강타로 불꽃이 튀자 그녀의 입술은 강렬한 금빛을 띠었다. 그날 밤 그의 기분은 최고였다. 요코하마에 전달할 웨이지의 케타민 덩어리와 선금으로 받은 돈이 이미 그의 주머니 안에 들어있었다. 그가 닌세이의 포도(鋪道) 위에 떨어져 지글거리는 뜨뜻한 빗줄기를 피해 거기에 들어왔을 때, 어찌 된 셈인지 게임 콘솔 앞에 서있던 수십 명의 플레이어중에서 게임에 정신이 팔려있는 그녀의 얼굴만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 때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표정은 그로부터 몇 시간 뒤에 항구 옆의 취침캡슐에서 그가 보았던 그녀의 잠든 얼굴과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윗입술은 어린얘들이 날아가는 새를 나타내기 위해 그린 선 같은 모양이었다.
  거래 성사로 한껏 기분이 들뜬 채 게임센터를 가로질러 그녀 옆에 가 섰을 때 그는 그녀가 흘긋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그 회색 빛의 두 눈 가장자리는 검은 눈화장이 지워져 번져있었다. 그것은 마치 다가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못 박혀 버린 짐승의 눈처럼 보였다.
  밤을 함께 보낸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는 호버크래프트 출항장에서 표를 끊어 그로선 처음으로 항만을 건너보기까지 했다. 호버크래프트가 하라주꾸를 따라 항해하는 동안 내내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던 비는 그녀의 플래스틱 재킷 위에 떨어져 방울졌다. 도쿄의 어린이들 한 무리가 흰 로우퍼를 신고 소매 없는 밀착외투를 두른 차림으로 유명한 부티크 앞을 우르르 몰려 지나갔고, 마침내 한 밤중이 되었을 때 그녀는 시끄럽게 덜그럭거리는 빠찡꼬장에 그와 함께 서있었다. 그녀의 손은 마치 어린얘처럼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의 생활을 에워싸고 있던 마약과 팽팽한 긴장의 게슈탈트가 언제나 놀란 듯이 보이던 그녀의 두 눈을 반사적인 동물적 욕구의우물로 바꿔놓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 그는 린다의 인격의 파편이 빙산처럼 깨어져 그 쪼개진 파편이 표류해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원초적인 욕구가 굶주린 탐닉의 전기자(電氣子)처럼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다음에 맞을 마약을 찾아다니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그것은 시가(Shiga)에 줄지어 선 노점에서 파란 돌연변이 잉어가 들어있는 수조(水槽)와 대나무 우리 안에 가둔 귀뚜라미들 옆에 놓고 파는 버마재비들을 연상시키는 집중력이었다.
  그는 들고 있는 빈 컵 속에 남겨진 커피 찌꺼기의 검은 고리를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방금 넘긴 각성제 때문에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테이블 윗면의 갈색 합판은 자디잔 긁힌 자국들로 광택을 잃고 있었다. 각성제가 척추를 타고 오르는 가운데 그의 눈에는 표면이 그렇게 되기까지 일어났을 수없이 많은 우연한 충격들이 떠올랐다. 자르 드 떼는 앞 세기의 켸켸묵고 이름없는 스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본의 전통식 플래스틱 장식과 창백한 밀라노식 플래스틱 장식의 부자연스러운 결합물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엷은 막을 뒤집어 쓰고 있는 듯이 보였다. 마치 수많은 고객들의 신경 과민이 거울과 한때는 광택을 발하던 플래스틱들을 부식시켜 모든 표면 하나하나를 다시는 벗겨낼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부옇게 흐려놓은 것처럼.
  "아니! 케이스 아냐...."
  고개를 쳐든 그의 눈이 눈화장한 회색의 두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색 바랜 프랑스풍의 궤도 작업복에 흰색의 새 고무바닥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이봐요,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요?" 그녀는 그의 맞은 편 자리에 양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걸치고 앉았다. 그녀의 푸른 지퍼 복장은 양 소매가 어깨에서부터 찢겨 나가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팔에 첩부제나 바늘 자국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담배 줄까요?"
  그녀는 발목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예헤유안 필터 담배 한 갑을 꺼내 그에게 한 대 내밀었다. 담배를 받아들자 그녀가 붉은 플래스틱 튜브를 내밀어 불을 붙여줬다. "눈이나 제대로 붙인거에요, 케이스? 피곤해보이는데." 그녀의 억양은 스프롤 남부의 애틀란타 방면 출신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밑 피부가 창백하고 건강치 못해 보였지만, 살결은 아직도 매끈하고 탄탄했다. 그녀는 스무 살이었다. 고통 때문인지 그녀의 입가에는 새로운 잔주름이 새겨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은 뒤로 넘겨 프린트 무늬의 실크 밴드로 묶어놓고 있었다. 프린트 무늬는 집적 회로나 시내 지도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약만 잊지 않고 먹으면 괜찮아." 그렇게 대꾸하는 동안에도 손끝에 잡힐 듯한 갈망의 파동이 그를 강타했다. 강렬한 욕망과 외로움이 암페타민의 파장을 타고 한꺼번에 밀려들고 있었다. 그는 항구 옆 취침캡슐의 후덥지근한 어두움 속에서 자신의 허리를 휘감아 힘껏 끌어안던 그녀의 살결 냄새를 떠올렸다.
  다 고기 덩어리일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고기 덩어리가 원하는 것은 그 짓 뿐이라고.
  "웨이지 있잖아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가 말했다. "그치가 당신 면상에 바람구멍을 내주고 싶어 한데요." 그녀가 자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누가 그래? 래츠가? 래츠하고 얘기했었어?"
  "아뇨. 모나에요. 걔 새 물주가 웨이지 똘마니잖아요."
  "그자한테 그 정도로 빚진 일 없어. 빚진건 오히려 그자지. 게다가 어차피 그자는 주머니도 바닥났는걸."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요새 그치한테 빚진 이들이 너무 많아요, 케이스. 당신을 본보기로 삼을지도 모르잖아요. 정말이지 조심하는게 좋겠어요."
"알았어. 당신은 어때, 린다? 어디 잘 데는 있는거야?"
  "잘 데 말이죠."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있잖구요, 케이스." 
테이블 위로 상체를 움추리며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이 온통 진땀으로 덮혀 있었다.
"이거 받어." 하며 그는 자신의 잠바 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50 엔짜리 지폐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밑에서 지폐의 주름을 편 뒤 넷으로 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당신한테 필요한 돈이잖아요. 웨이지한테 갖다주는게 좋지 
않을까요?" 그때 그녀의 회색빛 눈 속에는 그가 읽을 수 없는 뭔가가 나타났다. 그녀의 눈에서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웨이지한테 진 빚은 이 정도론 어림도 없어. 가져. 돈 들어올 껀수가 또 있으니까." 그렇게 거짓말 하며 그는 뉴 엔 지폐가 그녀의 호주머니 지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돈 생기는 대로 웨이지를 빨리 찾아가도록 해요, 케이스."
  "또 봐, 린다." 하며 그는 일어섰다.
  "그래요." 그녀의 두 눈동자 밑으로 흰자위가 보일듯 말듯 드러났다. 불길한 징조였다. "케이스, 몸조심해요."
  한시바삐 자리를 뜨고 싶은 초조함 속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등뒤로 플래스틱 문이 홱하고 닫힐 때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네온의 우리 안에 비친 그녀의 두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닌세이의 금요일 밤.
  그는 야끼도리 노점상과 안마시술소를 지나 '아름다운 
여자(Beautiful Girl)'라는 커피 연쇄점과 천둥 소리 같은 전자 음향을 쏟아내는 게임 센터를 지나갔다. 지나가는 검은 정장의 샐러리맨에게 길을 비켜주다가 그는 사내의 오른 손등에 미쯔비시-제넨테크社 로고가 문신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게 진짜일까? 진짜라면 저자는 이제 큰 일 난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진짜가 아니라면 어리석은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거지. 어느 계급 이상의 미쯔비시-제네테크社 직원들에겐 혈중 돌연변이 유발요인의 수준을 감시하는 첨단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이식되어 있다. 나이트 시티에서 그같은 의료 기구를 지니고 다니다간 강탈당하기 십상이다. 똑바로 암거래 진료소로 직행해서 말이다.
  그 샐러리맨은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닌세이의 군중들은 가이진(외국인)의 무리였다. 항구에서 온 선원들의 무리, 어떠한 여행 안내서에도 실려있지 않은 쾌락을 찾아 긴장 속에 헤매고 있는 외톨이 관광객들, 이식받은 조직과 근육을 자랑하고 다니는 스프롤 출신의 불량배들, 그리고 이런 저런 종류의 사기꾼들... 모두들 떼지어 욕망과 거래의 어지러운 춤을 추며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지바市에서 왜 닌세이 거리를 묵인해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벼라별 억측이 다 나돌았다. 그러나 케이스는 야쿠자가 이 지역을 일종의 역사 공원, 즉 자신들의 비천한 태생을 상기시켜 주는 장소로서 보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견에 귀가 기울었다. 또 한편으로는신흥 기술은 무법 지대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 즉 나이트 시티가 그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술 그 자체를 위해 의도적으로 감시를 풀어놓은 유희장이라는 생각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졌다.  린다 말이 맞는걸까? 불빛을 쳐다보며 그는 생각했다. 정말로 웨이지가 본보기 삼아 자신을 죽이려 들까? 별로 그럴 듯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웨이지는 금지된 생물학적 약제를 주로 취급하는 자였고, 정신이 올바로 박힌 자 치고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없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러나 린다는 웨이지가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케이스가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암거래의 역학에 대해 근본적으로 간파하고 있는 점은, 사고 파는 어느 쪽도 정말로 그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중간 상인이 할 일은 자신을 필요악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케이스가 나이트 시티의 범죄 생태환경 속에서 확보해낸 이 불안스런 위치는 사기로 뜯어낸 것이었고, 배신을 통해 훔쳐낸 매일 밤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제 그 알량한 지위의 방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예감하자 그는 기묘한 도취감이 격렬하게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지난 주에 그는 합성 분비선(分泌腺) 추출물의 운반을 지연시켰었다. 소매로 팔아넘겨 평상시보다 더 큰 이문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그 일로 웨이지의 기분이 상했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웨이지는 그의 주요 공급선이었다. 지바市에 9 년째 발붙이고 있는 그는 나이트 시티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엄격하게 계층화된 범죄 조직과 줄이 닿아있는 몇 안 되는 가이진 거래상중 하나였다. 여러 가지 유전학적 소재와 호르몬들은 은신처와 대리인들로 얽히고 설킨 사닥다리를 따라 닌세이로 조금씩 흘러 들어왔다. 어떻게 재주를 피웠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웨이지는 어떤 물건의 루트를 역추적해내는데 성공했고, 지금은 수십 개 도시에 안정된 연줄을 확보하고 있었다.
케이스는 문득 자신이 어느 점포의 진열창 안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선원들에게 시계나 플릭나이프, 라이터, 포켓용 VTR, 심스팀 데크, 무겁게 만든 만리끼(万力) 체인, 그리고 슈리켄(수리검: `*') 같은 작고 근사한 물건들을 파는 곳이었다. 슈리켄은 항상 그를 매료시켰다. 여덟 끝 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그 강철의 별. 어떤 것은 크롬 도금되어 있었고, 어떤 것은 검은 색이었으며, 물 위에 뜬 기름처럼 표면이 무지개 빛을 내도록 처리된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은 크롬의 별들이었다. 그것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고리 모양의 나일론 낚싯줄로 진홍색 울트라수에드 배경에 붙박혀 있었고, 중앙 부분에는 용이나 음양의 상징이 찍혀있었다. 거리의 네온 불빛이 슈리켄에 비쳐 비틀리는 것을 보며, 케이스는 이것이야 말로 그의 여행길을 인도하는 별들이며, 자신의 운명을 이 싸구려 크롬의 성운(星運)이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줄리." 하고 그는 자신의 별들에 대고 말했다. "줄리 노친네를 만나볼 때가 된 것같군. 그라면 알겠지."

< NEURO_01.3 에서 계속...>


----------------[ 지금까지의 등장 인물들 ]----------------------

Linda Lee: 린다 리.
Mona: 모나. 린다 리 및 케이스와 친분이 있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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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이어 다시 보충 설명을 붙인 부분은 (*)표를 붙였습니다.
-----------------------[ 용어 설명 ]----------------------------

* 지바(千葉): Chiba. '치바'라고도 한다. 요코하마와 토오쿄오 
사이에 있는 도쿄만 주변의 도시.
* 취침캡슐 호텔: coffin hotel
* 취침캡슐 (카핀): coffin
     --- "BURNING CHROME" :
         'New Rose Hotel' P.104, P.105 & P.112 ---

   {뉴 로즈 호텔은 나리타 국제공항의 초라한 주변 지역에 위치한 취침캡슐의 선반 구조물(coffin rack)이었다. 그것은 높이 1 미터, 길이 3 미터의 플래스틱 캡슐들을 공항행 간선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콩크리트 부지 위에 남아도는 가드질라(Godzilla: 한때 일본에서 유행했던 怪獸 영화에서 인기를 끌던 용가리류의 괴물)의 이빨들처럼 쌓아놓은 것이었다. 캡슐 하나하나에는 텔리비전 한 대씩이 천정 높이에 붙박혀 있었다. ... }

    {뉴 로즈 호텔의 취침캡슐들은 강철 파이프에 광택 에나멜을 칠한재생 비계(고층 건물을 지을 때 디디고 서기 위해 긴 나무와 널을 걸쳐 놓은 시설) 안에 쌓여 있었다. 그 에나멜 페인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때면 조각조각 일어나 좁은 통로를 따라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떨어져 내렸다. 나는 왼 손으로 취침캡슐의 출입문을 하나 하나 세나간다. 출입문에는 다국어로 열쇠 유실시 과해지는 벌금에 대한 경고문이 전사(轉寫)되어 있다. }

    {이제 어둠이 깔렸다. 뉴 로즈의 취침캡슐 선반들은 페이트 칠한 금속제 기둥 위에 높이 매달린 투광(投光) 조명등 불빛으로 밤새도록 밝혀진다. 이곳의 어떤 것도 원래의 용도대로 쓰이고 있는 것은 없는 듯싶다. 모든 것이 잉여물이요 재생품이다. 이 취침캡슐 조차도. 40 년전, 이 플래스틱 캡슐들은 사업차 여행하는 이들의 편의를 위한 현대적 설비로서 도쿄나 요코하마에 쌓여있었다. 어쩌면 너의 부친도 이런 캡슐에서 잠을 청한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 이 비계 구조물이 아직 새 것이었을 적엔 긴자(銀座: きんざ. 도쿄에 있는 가장 번화한 거리)에 세워지던 어떤 거울벽 고층건물의 뼈대를 둘러싸며 솟아 올랐었고, 온통 건축공사 대원들로 꽉 차있었다. }

* 첨단기술범: techno-criminal
게임센터: arcade
유령상: (ghost). [光學/TV] 고스트. 제 2 영상(= ghost image). 다중상. TV를 수상할 때 화면에 나타나는 다중상.
* 우선성(右旋性) 암페타민: (dex) [藥] dextroamphetamine의 약자.
암페타민: (amphetamine)  [化] 1-phenyl-2-aminopropane C9H13N
          (중추신경 자극하는 각성제, 교감신경 흥분제)
뮌헨: Munich. ((독일 Bavaria의 도시))
커서: (cursor) 단말 장치에서 어떤 문자를 수정하거나 입력시킬 위치를 표시할 때 사용하는 표지 마크. 여기서는 게임기의 그래픽 화면에 나타나는 사격용 조준 커서를 뜻한다.
케타민: ketamine
하라주쿠: (Harajuku: はらずく). 주로 젊은이를 위한 가게들이 많은 도쿄만(東京灣) 근방의 도시.
부티크: (boutique)  여성복 장식품점.
로우퍼: (loafer)  moccasin 비슷한 간편화(靴) --- moccasin이란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뒤축 없는 신, 또는 그와 비슷한 신의 일종을 말한다.
게슈탈트: (gestalt) [心] 형태 (지각의 대상을 형성하는 통일적 구조)
전기자(電氣子): (armature)  발전기, 전동기 따위의 회전자(回轉子)
고무바닥의 운동화: (sneakers) ((美)) (소리가 나지 않는 데서 유래한 이름).
첩부제: (derm = dermadisk) (파스처럼 붙이는) 피부흡수성 의약 디스크. (첩포제 또는 貼付劑: 착 달라붙는 약제). cf. 'derm(a)'는 진피(眞皮 = corium)의 뜻. 
허리의 잘록한 부분: the small of the back
불길한 징조: (Sanpaku) 三白, さんぱく (= 三白眼, sampakugan, さんぱくがん). 삼백안 (눈동자가 위로 치우쳐 좌우 및 아래쪽의 세 부분의 흰자가 드러나 보이는 눈; 흉상(凶相)으로 여김.
야끼도리: (yakitori: やきとり, 燒(き)鳥). 꼬챙이 구이 새고기 (소, 돼지, 닭 따위의 고기나 내장을 대신 쓰기도 함).
계약 연쇄점: (franchisee) 또는 체인점
             franchise: ((美)) (제품의) 독점 판매권; 총판(總販)권미쯔비시-제넨테크: Mitsubishi-Genentech
가이진: (gaijin: がいじん). 外人, 외국인
enclave: ((F.)) 1. 타국 영토로 둘러싸인 지역(영토). 2. 고립된 장소.  3.(타민족 속에 고립된) 이종(異種) 문화권.
이식(移植) 조직: (graft) [醫] 식피편(植皮片), 조직 이식(법), 식피술(植皮術)  (implant)
불량배: (heavy) ((俗)) 악당, 강도.
생물학적 약제: (biological) [藥]  혈청, 백신 등.
도취(감): (euphoria) 1. 행복감.   2. ((俗)) (마약에 의한)  도취(감).
은신처: (front) (위장한) 대기소, 
대리인: (blind) (잠복한 사람의) 대리인; ((美)) (사냥꾼의) 잠복소; 은신처.
플릭나이프: (flic-knives) ((英)) 날이 자동적으로 튀어 나오는 작은 칼.
심스팀 데크: (simstim deck = simulated stimulation deck) 다른 사람이 경험한 오감(五感) 정보를 기록저장했다가 재생하거나 또는 실시간으로 전송받아 착용자에게 입력시켜 완벽한 대리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모의 경험 장치.만리끼: (manriki = まんりき). (만력). 바이스((공작물을 끼워 나사로 죄어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키는 기계)).
슈리켄: (shuriken) 일본의 닌자(忍者)들이 사용하던 보통 5 개 이상의 칼날을 갖는 별 모양의 표창.
크롬: (chrome) [化] 은백색의 단단한 금속 원소. 공기 중에서 녹이 슬지 않아 크롬 도금(鍍金)으로 널리 쓰임. 크로뮴. [원소 주기율 번호 24번: Cr: 51.996]. (윌리엄 깁슨의 사이버펑크 소설 속에서 크롬은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수에드: (suede) 안쪽에 보풀이 있는, 부드럽게 무두질한 양가죽이나 또는 이와 비슷한 천.

줄리우스 딘. 백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그의 신진대사는 매주 한 번씩 엄청난 비용을 들여 혈청 및 호르몬 주사로 주도면밀하게 변형되었다. 그의 주된 노쇠 방지책은 연례 행사처럼 도쿄 순례 여행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곳의 유전자 외과의는 그의 DNA를 재구성해 놓았다. 그것은 지바市에서는 받을 수 없는 수술이었다. 수술을 받고 나면 홍콩으로 날아가 그 해의 옷과 셔츠 일습을 주문하곤 했다. 성적으로 냉담하고 비인간적일 정도의 참을성을 가진 그는 재단사 숭배에 비교적(秘敎的)인 경지까지 몰두하는 데서 주로 희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똑같은 옷을 두 번 다시 입는 것을 케이스는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의상들은 하나같이 전 세기의 의복을 아주 세심하게 재구성한 것들이었으며, 처방제조된 렌즈를 즐겨 사용했다. 섬세한 금테가 둘려 있는 그 렌즈는 분홍빛의 얇은 인조 수정판을 연마하여 만든 것으로서, 빅토리아 왕조풍의 소저택에 걸린 거울들처럼 가장자리가 비스듬하게 면치기 되어 있었다.  그의 사무실들은 닌세이 거리 뒷쪽의 창고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딘은 그 곳을 자신의 주거지로 사용하려 했었는지, 그 일부는 수 년전에 되는 대로 수집해 놓은 유럽식 가구들로 드문드문 장식해놓은 것 같았다. 케이스가 기다리고 있는 방의 한쪽 벽에 기대어져 있는 네오아즈텍 양식의 책장들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둥근 디즈니 스타일의 탁상 램프 한 쌍이 주홍색 래커칠을 한 강철제의 나직한 칸딘스키형 커피 탁자 위에 어색하니 놓여 있었다. 달리의 연체시계(軟體時計)가 책장들 사이로 드러난 벽에 걸려 있었고, 그 뒤틀린 문자반(文字盤)은 맨 콘크리트 바닥을 향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 시계 바늘은 돌아가면서 문자반이 말린 모양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홀로그램이었지만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법은 없었다. 방에는 저장 생강의 톡 쏘는 냄새를 뿜어내는 백색의 유리섬유제 선적(船積) 모듈들이 쌓여 있었다. 
 "권총은 없는 것같군 그래, 자네."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들어오게."
  책장 왼쪽의 거대한 모조 자단(紫檀)목 문짝에 걸려있던 자석식 빗장이 덜컹하며 벗겨졌다. 그 플래스틱 표면에 자기 접착성 대문자로 붙여놓은 `JULIUS DEANE IMPORT EXPORT'라는 글자들은 껍질처럼 일어나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임시변통식으로 꾸며진 딘의 현관 홀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놓여있는 가구들이 지난 세기의 종말을 연상시킨다면, 그 사무실 자체는 지난 세기의 초기에 속해 있는 듯이 보였다.
  진초록빛 유리의 직사각형 차양이 달린 구닥다리 놋쇠 램프. 그 램프가 던지는 빛의 웅덩이 속에서 딘의 완벽한 분홍빛 얼굴이 케이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일종의 울타리 나무로 만들어진 키큰 서랍장이 양 옆에 붙어 있는 페인트칠된 거대한 철제 책상이 이 수입업자를 든든히 에워싸고 있었다. 그 서랍장은 아마도 한때는 일종의 서면 기록 저장에 사용되던 그런 물건일 것이라고 케이스는 생각했다. 책상위에는 카세트와 누렇게 바랜 인쇄 출력물, 그리고 일종의 기계식 타이프라이터 부품들이 여러가지 널려 있었다. 하지만 딘이 그 기계를 재조립해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같았다.
  "자네가 여긴 왠 일인가?" 그렇게 물으며 딘은 파란 색과 흰 색의 바둑판 무늬 포장지에 싼 가는 봉봉을 케이스에게 권했다. "하나 맛보게. `띵띵 짜헤'인데 최상품이지." 케이스는 내미는 생강 사탕을 사양하고는 입을 딱 벌린 목재 회전의자에 앉아 자신의 검은 진 바지의 빛바랜 솔기를 엄지로 더듬어 내려갔다. "줄리, 웨이지가 나를 죽이려한다던데."
"아. 난또 뭐라고. 그런데 그 얘긴 또 어디서 들었나?" 
  "사람들한테."
"사람들이라." 입 안에 든 생강 봉봉을 굴려가며 딘이 말했다. 
"어떤 사람들 말인가? 친구들?"
  케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자기 친구인지 알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지, 안그런가?"
  "웨이지한테 약간 빚진게 있어, 딘. 그 자한테 뭔가 들은 거라도?"
  "최근엔 통 연락해본 적이 없어서." 그는 한숨지으며 말했다. 
  "게다가 정말 안다 해도 나로선 말해줄 입장이 못되지 않겠나. 사정이 사정인 만큼 말일세."
  "사정?"
  "그는 중요한 거래선이네, 케이스."
  "그렇겠지. 그가 나를 죽이려 들고 있나, 줄리?"
  "그런 얘긴 금시초문인데." 딘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둘은 마치 생강 봉봉 가격이라도 흥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봐, 그게 만일 사실무근한 헛소문인게 밝혀지거든 한 일주일쯤 뒤에 다시 찾아오게. 싱가폴에서 들어올 작은 물건이 하나 있는데 자네한테 맡기고 싶네."
  "벤쿨렌街의 난하이 호텔 물건 말이야?"
  "저런, 자네 입 조심해야겠군 그래!" 그러면서 딘은 씩 웃어보였다. 사실 그의 철제 책상에는 고가의 도청방지 장치들이 꽉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또 보세, 줄리. 웨이지한텐 내가 안부 전하지."
  딘은 손가락을 쓱 쳐들더니 완벽하게 매듭 지은 자신의 창백한 실크 타이를 툭툭 털어냈다.

  그 느낌이 엄습해온 것은 케이스가 딘의 사무실에서 채 한 블럭도 안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문득 누군가가 그의 뒤를, 그것도 아주 가까이서 밟고 있음을 그는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훈련된 편집병(偏執病)적 소양을 기른다는 것은 케이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 요령은 자제력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각형 각성제를 잔뜩 넘긴 상태에서 자제력을 유지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치밀어 오르려는 아드레날린의 약효를 억누르며, 자신의 마른 얼굴에 지루함으로 멍청해진 듯한 표정을 띠고서 군중을 따라 휩쓸려 가는 양 굴었다. 불꺼진 진열창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어찌어찌 해서 그 옆에 잠시 멈춰섰다. 수리를 위해 문을 닫은 외과용품점이었다. 두 손을 재킷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진열 유리창 안을 들여다 보니 조각된 모조 비취 주춧대 위에 배양조에서 발육시킨 납작한 마름모꼴의 살점이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살점의 피부색은 존이 거느린 창녀들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거기에는 피하이식된 집적 회로에 연결된 발광 디지탈 표시장치가 문신화되어 있었다. 굳이 수술까지 받을 필요가 뭐람. 진땀이 갈비뼈를 따라 흘러내리는 가운데 그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될 것을.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눈을 치켜떠 그는 진열창에 비치는 행인들을 살펴보았다.
  저기 있군.
  짧은 소매의 카키색 유니폼을 입은 선원들 뒤에 있었다. 흑발, 거울 안경, 검은 복장에 가냘픈 체구...
  문득 그 자가 사라졌다.
  그 순간 케이스는 달음박질 치고 있었다. 고개를 바싹 숙인 채 인파를 헤치면서.

  "총 좀 빌려주겠어, 쉰?"
  보이가 웃어보였다. "두 시간이다." 그들은 해산물회의 날내음이 풍기는 시가의 초밥 가게 뒤에 서 있었다. "당신 다시 와라, 두 시간 뒤."
  "이봐, 난 지금 필요하다구. 당장에 가진건 뭐 없어?"
  쉰은 분말 양고추냉이가 담겨있던 텅 빈 2 리터들이 깡통들 뒤를 뒤적거리더니, 잿빛 플래스틱에 싸인 홀쭉한 패키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테이저 총이다. 한 시간에 20엔. 보증금 30엔이다."
  "빌어먹을. 그따위건 필요없어. 필요한 건 총이라구. 누군가 쏴죽일 수 있는 물건 말이야, 알겠어?"
  웨이터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테이저 총을 양고추냉이 깡통 뒤에 다시 놓았다. "두 시간 기다려라."

  그는 진열된 슈리켄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막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껏 한 번도 그 물건을 던져본 적은 없었다.
  그는 미쓰비시 은행 칩으로 예헤유안 두 갑을 샀다. 그 칩에는 그의 이름이 찰스 드렉 메이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래도 트루먼 스타라는 이름보다는 나았다. 비록 그가 손에 넣었던 칩중에 여권용으로는 그만한 것이 없었지만 말이다.
  단말기 앞의 일본 여자는 마치 딘 노친네의 사무실에서 몇 년간 썩은 양 보였다. 그것도 과학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케이스는 주머니에서 얄팍한 뉴엔 지폐 뭉치를 꺼내 그 여자 앞에 내밀었다. 
"무기를 사고 싶은데."
  여자는 단검이 가득 든 상자 쪽을 손짓해 보였다.
  "아니야." 하고 그가 말했다. "단검은 싫거든."
  여자는 카운터 밑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냈다. 누런 마분지 뚜껑에는 코브라가 목 부분을 우산처럼 활짝 펼친 채 또아리를 틀고 있는 유치한 그림이 찍혀 있었다. 안에는 똑같은 실린더 여덟 개가 화장지에 싸여 있었다. 케이스는 얼룩덜룩한 갈색 손가락이 그 실린더중 하나에서 종이를 벗겨내는 것을 지켜 보았다. 여자는 그가 살펴보도록 물건을 쳐들어 보였다. 한 끝엔 가죽끈, 다른 끝에는 작은 청동제 각뿔이 달려있는 무딘 강철관이었다. 여자는 한 손엔 강철관, 다른 손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에는 각뿔을 꽉 움켜 쥐더니 잡아당겼다. 기름칠 되어 차례로 포개져 있던 팽팽히 감긴 코일 
스프링 분절 세 개가 미끄러져 나와 악물렸다. "코브라죠." 그녀가 말했다.

  네온이 떠는 닌세이 거리 위로 드리워진 하늘은 예의 초라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오늘 밤의 대기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마치 허파를 물어뜯는 듯했고, 거리의 인파중 절반은 공기여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케이스는 코브라총을 편리하게 감출 길이 없을까 궁리하느라 화장실에서 십 분을 보냈다. 그러다 마침내는 코브라의 손잡이를 진 바지의 허리춤에 찔러넣기로 했다. 그러자 강철관 부분이 그의 배 위를 비스듬히 가로 질렀다. 각뿔형의 공이치기 선단부는흉곽(胸廓)과 스포츠 잠바의 안감 사이에 걸쳐졌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그 놈의 물건이 보도에 부딪혀 덜걱거릴 것만 같았지만,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채트는 사실 거래를 위한 술집은 아니었지만, 평일 밤에는 사업상 관련있는 단골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금요일과 토요일은 달랐다. 정규 손님들 대부분은 여전히 찾아왔지만, 그들의 존재는 몰려드는 선원들과 이들을 노리고 모여드는 전문가들 틈새에서 빛을 잃고 말았다. 케이스는 문을 밀고 들어가며 바텐더 래츠를 찾아 보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이 술집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포주 로니 존이 휘하의 매춘부 하나가 젊은 선원을 나꾸러 가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애로운 관심을 머금은 흐릿한 눈길로. 존은 일본인들이 `구름의 무희'라고 부르는 일종의 수면제에 중독되어 있었다. 케이스는 그 자와 눈이 마주치자 바 있는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존은 굼뜬 동작으로 표류하듯 인파를 헤치고 건너왔다. 그의 긴 얼굴은 께느른하니 침착해 보였다.
  "오늘 밤 웨이지 못봤어, 로니?"
  존은 늘 그렇듯이 침착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봐, 틀림없는거야?"
  "남반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해. 두 시간 전이었나."
  "누구 같이 있는놈들 없었어? 그중 하나는 마르고 검은 머리에 검정 재킷 같은걸 입었고 말야?"
  "아니." 존이 마침내 대답했다.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일들을 잔뜩 기억해내느라 애를 쓰고 있다는 듯, 그의 반반한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덩치들이었어. 근육을 이식한 작자들 말야." 존의 두 눈에는 흰자위가 별로 없었고 홍채(虹彩)는 더더우기나 작아져 있었다. 축 내리깔린 눈꺼풀 밑으로 드러난 동공(瞳孔)은 엄청나게 확장되어 있었다. 케이스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떨군 그는 불룩하니 감춰진 `강철 채찍'을 보았다. "코브라로군." 하면서 그는 한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구 작살이라도 낼 셈인가?"
  "또 보세, 로니." 케이스는 술집을 나왔다.

< NEURO_02.1 에서 계속...>


------------------------[ 용어 설명 ]----------------------------

Hosaka: 호사카. 윌리엄 깁슨의 미래 세계에 존재하는 일본 최대의  재벌.
        {... Hosaka, the biggest zaibatsu of all. ...}
                      cf. zaibatsu: ざいばつ (財閥)
         --- BURNING CHROME, New Rose Hotel, P.104 최하단.

Namban: なんばん
원래의 뜻은1. 南蠻; 남쪽 야만인 (옛날 중국에서 인도지나 따위의 남해 지방의 여러 민족을 가리킨 이름.  2.(무로마찌 시대에서에도 시대에 이르기까지) 해외 무역의 대상이 된 동남 아시아(에 식민지를 가진 포르투갈, 스페인)의 일컬음;  그 시대에 건너온 서양문화[기술, 종료].그러나 여기서는 채트처럼 어느 술집의 이름인 듯.
fleche ((F.)) 화살.
     flechette = 작은 화살, 소형 화살을 쏘는 dartgun.
Julius Deane: 줄리우스 딘.
esoteric: 1. 밀교(密敎)  2. 비밀의 의식을 행하는 종교
beveled: 거울이나 유리의 가장자리를 따거나 다듬어 유리면에 대해 경사를 이루게 하는 것.
Salvadore Dali: `연체 시계'로 유명한 설명이 필요 없는 예술가죠.
문자반: 시계, 계기 등에 문자나 기호를 표시해 놓은 반.
clean: [美俗] 권총을 몸에 지니지 않은; 범죄와 관련 없는
rosewood: [植] 자단(紫檀)  ((콩과의 나무; 열대산)), 화류(樺榴)
self-adhesive: 자기(自己) (경화) 접착성의 [접착제]
clockwork: `시계 장치의', 즉 기계식
bonbon: 불어로서, 사탕 속에 과즙(果汁)이나 브랜디, 위스키 등을  넣은 캔디를 말한다.
Ting Ting Djahe: 중국산 과자 상표인 듯.
paranoia: [醫] 체계가 선 망상을 고집하는 정신병으로서, 강박 
          망상과 청각성 환상을 특징으로 한다. 편집광. 파라노이아.
a stack of octagons: 많은 분량의 팔각형 알약 (각성제)
        cf. stack: ((口)) 한 가리(의 분량); 많음 (of)
pedestal: (彫像 따위의) 주춧대, 다리, 대좌(臺座); 주각(柱脚)
vat: 배양조(培養槽). 배양통. 일반적으로 생물의 성장, 발육에 
     필요한 화학 성분을 포함하고 삼투압, 수소 이온의 농도, 온도
     등의 물리적 조건을 조정한 배양액을 채워넣어 미생물을 인공적
     으로 기르거나 조직의 한 부분을 떼내어 기르는 데 사용하는
     통을 뜻한다.
subcutaneous: 피하의.   cf. a subcutaneous injection 피하 주사.
chip: IC 칩. 즉, 집적 회로를 붙인 반도체 조각.
mirrored glasses: 거울 안경. 빛이 일방통행 되어 착용자의 눈은 
                  보이지 않고 경치가 거울처럼 반사되는 안경 또는
                  선글래스.  cf. mirrorshade
sushi: 초밥 또는 김밥.
horseradish: 양고추냉이. 고추냉이란 겨자과의 다년초로서, 시냇가에 
 자생하며 지하경은 비대한 원주형으로 몹시 매운데
             향신료로 씀. 소위 말하는 `와사비.'
Taser: 긴 전선 끝에 화살을 달아서 쏘는 무기; 맞으면 전기 충격으로
       한때 마비됨; 商標名
New Yen: 여기서 언급되는 `엔' 단위는 모두가 `뉴엔(New Yen)'을
         가리킨다.
Charles Derek May: 케이스가 사용하는 미쓰비시 은행 크레디트 칩에 등록된 이름.
Truman Starr: 케이스가 여권용으로 애용하는 크레디트 칩에 등록된 이름.
terminal: 수행될 작업과 관련된 환경에서 데이타를 입출력할 수 있는 장치. 입력을 전송하거나 출력을 수신할 수 있다.
steel tube: 코브라총의 총신에 해당하는 부분인 듯.
striking tip: 코브라총의 격발부, 즉 격발 선단부인 듯.
** 이런 이국적인 총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은 정보 좀 제공해 주십시오.**
iris: [생] 눈알의 각막과 수정체의 사이에 있는 원반상의 얇은 막 
           (빛의 양을 조절하고 영상을 선명하게 함.)
pupil: 홍채의 한복판에 있는 동그란 작은 구멍. 눈동자.
wasted: 마약(알콜)에 취한, 마약 중독의




미행자가 돌아와 있었다. 틀림 없었다. 전신을 파고드는 흥분을 그는 느꼈다. 팔각의 각성제와 아드레날린에 다른 어떤 것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이 따위 상황을 즐기다니, 하고 그는 생각했다. 미친 놈이 따로 없군.
  다소 기괴하긴 하지만 이 상황이 어떤 면에선 매트릭스 속을 질주할 때와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겠지. 마약에 푹 절어든 뒤 뭔가 긴박하면서도 이상스러우리만큼 임의적인 사건에 휘말려 들기만 하면 닌세이 거리를 데이타의 필드로 볼 수도 있었다. 언젠가 매트릭스가 분자결합으로 기능분화 세포들을 구현하는 단백질을 연상시켰듯이. 그때에는 고속으로 표류하며 미끄러져 나가는 힘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다. 완전한 몰입 가운데서도 그 모든 것들로부터 격리된 채, 주위에는 온통 비즈니스의 군무가 난무하고, 정보가 서로 얽혀들며, 데이타는 암시장의 미로 속에서 실체화되고 있던....
  정신 바싹 차려, 케이스. 그는 혼잣말로 말했다. 짜식들에게 한 방 먹이는거야. 이렇게 나오리라곤 꿈도 못 꿀걸. 그는 린다 리를 처음 만났던 게임 센터에서 반 블럭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그가 닌세이 거리를 가로질러 부리나케 뛰어가자 어슬렁거리고 있던선원들 떼거리가 와악 흩어졌다. 그들중 하나가 그의 등뒤에 대고 스페인어로 고함을 질러댔다. 어느결에 그는 입구에 들어서 있었고, 천둥같은 소리가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마치 아음속 항공기들이 그의 명치 속에서 엔진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대유럽 戰車戰> 게임에서 10 메가톤급의 포를 명중시킨 모양이었다. 붉게 번득이는 홀로그램의 불덩이(火球)가 머리 위에서 확 터지면서 시뮬레이트된 공중 폭발음이 귀를 찢는 듯한 백색 잡음(白色 雜音) 속에 게임센터를 뒤덮어 버렸다. 그는 오른 쪽으로 가로질러 칠도 안된 널판지(板紙) 계단들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갔다. 여기에는 언젠가 웨이지와 함께 와본 적이 있었다. 마쭈가라는 자와 금지된 호르몬 유인제를 거래하기 위해서였다. 복도는 기억에 있던 대로였다. 바닥엔 얼룩진 매트가 깔려있었고, 판에 박은 듯 똑같은 문들이 자그마한 간막이 사무실 앞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문중 하나가 열려 있었다. 소매 없는 검정 티셔츠의 일본 여자 하나가 흰색 터미널을 보다 말고 힐끗 쳐다봤다. 그 여자의 머리 뒷쪽으로 그리이스의 여행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에게 해(海)의 푸른 바다 위로 유선형의 표의문자가 철벅이며 물보라치는 그림이었다.  "여기, 경비 좀 잘하지 그래." 케이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복도를 따라 뛰어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끝의 두 문은 닫혀 있었다. 아마도 잠겨있으리라고 생각한 그는 몸을 회전시키며 나일론 러닝슈즈 발굽으로 제일 끝쪽의 청색 래커칠된 조립문을 박찼다. 문이 팍 열리며 쪼개진 문틀에서 싸구려 철물이 떨어져 나갔다. 안은 어두웠고, 그 속에서 단말기 틀의 허연 곡선이 드러나 보였다. 그 방 오른 쪽 문 앞으로 간 그는 투명 플래스틱제 손잡이를 두 손으로 붙든 채 젖 먹던 힘을 다해 안쪽으로 밀쳤다.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그는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가 웨이지와 함께 마쭈가를 만났던 방이었다. 그러나 마쭈가가 표면상 운영하던 회사는 이미 이곳을 비운지 오래였다. 단말기도, 다른 아무 것도 없었다. 게임 센터 뒷골목으로부터 매연으로 더럽혀진 플래스틱 블라인드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 왔다. 벽의 소켓에서 튀어나와 뱀처럼 둘둘 말려있는 광섬유 다발, 버려진 식료품 통의 더미, 날개가 없어진 선풍기의 날개덮개가 보였다.
  창문에는 싸구려 플래스틱제 창유리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그는 어깨를 추석여 재킷을 벗은 뒤 오른 손에 둘둘 감고는 유리창을 힘껏 갈겼다. 쩍 하고 금이 간 유리창은 두 번을 더 갈겨대자 창틀에서 떨어져 나갔다. 나지막하게 들려오던 게임 센터의 혼잡한 소음 위로 파상의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창문이 깨졌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복도 입구의 여자 때문인 것같았다.
  케이스는 돌아서서 재킷을 다시 입은 뒤 코브라의 방아쇠를 한껏 잡아당겼다.
  이 방문은 닫혀 있으므로 미행자 쪽에선 자신이 발길질에 반쯤 떨어져 나간 문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해주길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 용수철 축이 그의 맥박을 증폭시켜 코브라의 청동제 각뿔이 소리없이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곤 단지 파동치는 
경보음과 게임의 요란한 폭발음, 그리고 그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소리 뿐. 공포는 반쯤 뇌리에서 잊혀졌던 친구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각성제가 빚어내는 차갑고 신속한 공포의 메카니즘이 아니라 단순한 동물적 공포였다. 그는 너무도 오랜 동안 끊임없는 불안에 휩싸여 살아온 나머지 진짜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거의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간막이 방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런 장소였다. 그도 여기서 죽게 될지 몰랐다. 그들이 총을 갖고 나타난다면....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왔다. 이어서 남자의 목소리. 뭔가 일본어로 소리치고 있었다. 외침 소리, 공포에 질린 날카로운 비명. 그리고 또다시 부서지는 소리.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서두르지 않고 점점 다가오는.
  케이스가 있는 방의 닫힌 문을 지나간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세 번 뛸 정도 동안 멈춰선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온다. 하나, 둘, 셋. 구두 뒷축이 매트를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각성제 덕분에 일으켰던 허세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는 코브라를 자루 속에 철컥 집어넣고는 창문을 향해 내달았다. 공포로 이성이 마비된 그는 냉정을 잃고 허둥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새에 창문으로 몸을 날려 밖으로 뛰어내렸다. 보도에 착지하는 순간의 충격으로 둔탁한 고통이 그의 정강이를 꿰뚫고 뻗쳐 올라왔다.
  반쯤 열린 서비스 해치에서 쐐기형으로 가늘게 새어나온 빛이 내버려진 광섬유 더미와 고철덩이 콘솔의 섀시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물에 젖은 판지 등널 위로 푹 고꾸라졌다. 그리고는 몸을 굴려 콘솔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날렸다. 칸막이 방의 창문이 희미한 사각의 빛으로 보였다. 건물 뒷 벽이 게임 센터의 굉음을 죽여 아직도 파상적으로 울리고 있는 경보음이 이 자리에선 더욱 크게 들렸다.  창문에 머리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은 복도의 형광등 불빛을 등지고 있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나타났지만 여전히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 두 눈에 은빛 섬광이 번득 가로지르는 것이 보였다. "빌어먹을." 하고 누군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프롤 북부 어투의 여자 목소리였다.
  머리가 사라졌다. 케이스는 콘솔 밑에 엎드린 채 천천히 스물을 센 뒤 일어났다. 강철의 코브라가 아직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해낸 것은 몇 초 뒤의 일이었다. 그는 왼쪽 발목을 조심하면서 절뚝이는 발로 골목을 따라 사라져 버렸다.

                        *  *  *

  쉰의 피스톨은 월터 PPK 남미판 복제품의 베트남제 모조품으로서, 50 년 묵은 물건이었다. 첫 발에 더블 액션이 가능했지만 방아쇠를 당기기가 매우 힘들었다. 약실은 22구경 장총용이었다. 케이스로선 쉰이 팔아먹은 간단한 중국제 홀로우포인트 보다는 납 아지드화물폭약이 좋았지만, 그래도 그 권총과 아홉 발의 탄약은 쓸 만한 것이었다. 초밥 가게에서 시가 거리를 따라 걸어가면서 그는 재킷 주머니 속에 든 권총을 흔들어 보았다. 총자루는 선명한 붉은 색의 플래스틱 주조물로서 용 의장(意匠)이 돋을새김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엄지로 더듬어 보기에 안성마춤인 물건이었다. 그는 코브라총을 닌세이 거리의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는 물도 없이 팔각의 각성제 한 알을 또다시 삼켰다.
  알약이 들어가자 그의 전신 `회로'에 불이 들어왔다. 그 쾌감을 타고 그는 시가에서 닌세이로, 그리고는 다시 바이쭈로 내달았다. 미행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긴히 전화할 데도 있고 처리할 사업도 있었으므로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바이쭈를 따라 항구쪽으로 한 블럭 내려가다 보면 보기 흉한 황색 벽돌로 지은 밋밋한 10층 사무실 건물이 있었다. 지금 그 창문들엔 빛이 없었지만 목을 길게 빼면 지붕에서 희미한 빛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정문 현관 근처의 불꺼진 네온 사인에는표의문자의 다발 밑에 CHEAP HOTEL이라고 되어 있었다. 또다른 이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곳은 항상 칩 호텔이라고 불리워 왔다. 바이쭈 뒷골목을 지나면 나타나는 그곳에는 투명 기둥의 기부(基部)에 승강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 승강기 역시 칩 호텔처럼 뒤늦게 생각나 세워놓은 시설로서, 대나무와 에폭시 수지를 이용해 건물에 붙들어매 놓은 것이었다. 케이스는 그 플래스틱 승강칸에 올라타 열쇠를 꽂았다. 열쇠는 아무런 표식도 되어 있지 않은 뻣뻣한 자기 테이프였다.  케이스는 처음 지바市에 왔을 때부터 이곳에 주 단위로 카핀을 하나 세들고 있었다. 하지만 칩 호텔에서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좀더 싼 곳에서 잤다.
  승강기는 향수와 담배 냄새를 풍겼다. 승강칸의 벽면은 온통 긁혀 있었고 마리화나 담배를 문지른 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승강기가 5층을 지나갈 때 그는 닌세이 거리의 불빛을 보았다. 승강칸이 쉭 소리를 내며 서서히 속도를 늦추기 시작하자 그는 총자루를 손가락으로 투둑툭 두드려댔다. 언제나처럼 승강기는 완전 정지하는 순간 심하게 덜컹거렸지만 그쯤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승강기에서 내려서자 안뜰이 나왔다. 이 호텔에서 로비와 잔디밭을 합친 것같은 역할을 하는 부분이었다.
  녹색의 플래스틱 잔디로 된 네모진 카페트 가운데에 C자형의 콘솔이 있었고 그 앞에 십대의 일본인 하나가 앉아서 교과서를 읽고 있었다. 흰색의 유리섬유 카핀들은 산업용 비계의 뼈대 구조물에 얹혀 있었다. 카핀은 여섯 줄로 층층이 겹쳐져 쌓여 있었고, 한 줄에 열 개씩 놓여 있었다. 케이스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플래스틱 잔디를 가로질러 가까운 사다리 쪽으로 다리를 절며 걸어갔다. 칩 호텔 구내는 싸구려합판 매팅으로 지붕을 얹었으므로 바람이 드세지면 덜그럭거렸고 비라도 올라치면 빗물이 새곤 했다. 그러나 카핀은 열쇠 없이는 제법 열기가 힘들었다.
  확장 쇠그물로 된 좁은 간이 통로가 그의 몸무게로 흔들리는 가운데 그는 몸을 비스듬히 튼 채 세 번째 줄을 따라 92호실 카핀으로 나아갔다. 카핀의 높이는 3 미터였고 타원형의 출입용 해치는 폭 1 미터에 높이 1.5 미터가 조금 못 되었다. 그는 열쇠를 구멍에 밀어넣고는 실내 컴퓨터의 확인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자석 빗장이 믿음직스럽게 덜컹거리더니 삐걱거리는 용수철 소리를 내며 해치가 수직으로 벌어져 열렸다. 그가 안으로 기어들어가자 형광등이 껌뻑거리며 들어왔다. 그는 해치를 잡아당겨 닫고는 제어반을 탁 쳐 수동식 빗장을 작동시켰다.  92호실 카핀에는 표준형 히다찌 포켓 컴퓨터와 흰색의 소형 스티로폼 아이스 박스 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아이스 박스 안에는 금새 증발되버리지 않도록 종이에 잘 싸놓은 10 킬로그램 들이의 드라이 아이스 조각 남은 것 세 개와 실험용 알루미늄 섬유플라스크가 들어 있었다. 마루 바닥겸 침대 노릇을 하는 탄성 발포소재 판에 쭈그리고 앉은 케이스는 쉰의 22구경 권총을 주머니에서 꺼내 아이스 박스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재킷을 벗어던졌다. 카핀에는 실내 준수 사항이 7 개국어로 나열되어 있는 판이 있었는데, 그 맞은 짝에 움푹 들어간 벽면 한 쪽에는 카핀의 단말기가 한데 성형되어 있었다. 케이스는 단말기에서 송수화기를 집어들고는 기억나는대로 홍콩의 전화번호를 눌러댔다. 그는 전화 벨이 다섯 번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끊어버렸다. 히다찌 포켓 컴퓨터 안에 들어있는 3 메가 바이트 분량의 장물 RAM을 살 구매자가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그는 신주꾸의 도쿄市 전화번호를 눌렀다.
  웬 여자가 일본말로 뭐라고 대답했다. 
  "거기 스네이크 맨 있소?"
  "목소리 들으니 정말 반갑구먼." 내선으로 돌려지며 스네이크 맨이 대답해왔다. "자네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네."
  "당신이 오매불망하던 물건을 손에 넣었소." 아이스 박스를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정말 반가운 소식인데. 그런데 현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 말야. 물건부터 줄 수는 없을까?"
  "이런 젠장. 난 지금 돈이 절실히 필요하단...."
  스네이크 맨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런 우라질 놈." 케이스는 뚜-- 소리를 내는 수화기에 대고 욕질을 했다. 그리고는 보잘것 없는 싸구려 권총을 쳐다봤다.
  "도대체가,"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오늘 밤엔 왜 이리 온통 모호한 일 투성인지."
                                *  *  *


< NEURO_02.2 에서 계속...>


------------------------[ 용어 설명 ]----------------------------

field of data: 원래는 레코드 안에서 파일을 기록하는 물리적인 장소, 즉 어떤 목적을 위해 조직적으로 모은 정보의 집단을 의미. 여기서는 매트릭스, 다시 말해 사이버 공간을 의미 한다.
subsonics: 亞音速 航空機 (시속 700-750 마일 이하의)
the pit of the stomach: 명치
white sound: (= white noise) 어떤 주파수 대역 내에 있어서 모든 주파수의 출력이 포함된 잡음으로서, 주파수와 그 성분이 포함되는 비율의 관계가 정규(正規) 분포에 따르기  때문에 가우스 잡음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가시 광선의 백색광이 모든 주파수의 가시 광선을 포함하고 있는 것과 닮았으므로 이와 같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전기 회로의 저항에서 나오는 열 잡음이나 진공관의 산탄 잡음 등이 여기에 속한다.
a flight of stairs: (층계참 사이의) 일련의 계단ideogram: 표의문자(表意文字).  cf. phonogram
nacelle: 덮개
dex: dextroamphetamine의 알약
service hatch: ((英)) (주방에서 식당으로) 요리를 내보내는 창구.
double action: 방아쇠를 당기는 것 만으로 계속 발사되는 기능.
hollowpoints
azide: [化] 아지드화물(化物)
Baiitsu: 바이쭈
Cheap Hotel: 칩 호텔
thumb: ((美俗)) 마리화나 담배
cooler chest: 냉장 밀폐용기
spun aluminum lab flask:
        cf. spun glass - 유리 섬유, 유리 솜, 실 유리, 솜 유리
Can you front?:   cf. front -- ((美口)) 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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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케이스가 채트로 걸어들어간 것은 새벽이 되기 한 시간 전이었다. 두 손을 재킷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한 손에는 권총을, 다른 손에는 알루미늄 플라스크를 움켜쥐고 있었다.
  래츠는 뒷쪽 탁자에 앉아 맥주 피처에서 어팔리네어리스광천수(鑛泉水)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120 킬로나 나가는 그의 물렁한 살덩이가 삐그덕거리는 의자 위에서 벽쪽으로 쏠렸다. 커트라고 불리는 브라질 꼬마 하나가 바에서 대부분 별 말 없이들 앉아 있는 얼마 안되는 취객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래츠가 피처를 들어 물을 마셔대자 플래스틱 팔이 지잉 소리를 냈다. 박박 밀어버린 그의 머리에는 온통 땀이 배어 있었다. "안 좋아 보이는군 그래, 예술가 친구." 물에 젖어 번득이는 엉망으로 망가진 이를 드러내 보이며 그가 말했다.
  "난 잘 지내고 있네." 하면서 케이스는 해골같이 씩 웃어보였다. "아주 잘 말이야." 그는 여전히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 래츠의 맞은 짝 의자에 몸을 푹 파묻었다.
  "그래서 이렇게 술과 각성제로 지은 철갑을 둘러쓰고 이리저리 헤매 다니고 있구만 그래. 그런 걸로 기분 나쁜 감정들을 막아내고 있는게지, 안그런가?"
  "내 일에 참견 좀 말아주게, 래츠. 웨이지 못 봤나?"
  "두려움과 고독을 막아내고 있는게야." 바텐더 래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두려움에 귀기울이게. 그거야말로 자네의 친구인지도 모르니까."
  "오늘 밤 게임 센터에서 있었던 싸움 얘긴 들은 게 없나, 래츠? 누구 다친 사람 없었대?"
  "웬 미친 인간이 경비원 한 명을 절단냈다네." 하며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자라고 하더군."
  "웨이지하고 긴히 얘기할 일이 있네, 래츠, 나는..."
  "아." 래츠의 입술이 가늘어지더니 일직선으로 굳게 다물어졌다. 그는 케이스의 어깨 너머로 입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막 그 기회가 온 것 같네."
  케이스는 문득 진열창에 놓여 있는 슈리켄이 번뜩이는 것을 본 듯했다. 그의 머리 속에서 각성제가 윙윙대며 울어댔다. 손에 움켜쥔 권총은 진땀으로 미끌거렸다.
  "여어, 웨이지 선생." 하면서 래츠는 마치 상대가 악수를 받기라도 할 것처럼 분홍색 매니퓰레이터를 느릿느릿 내밀었다. "정말 반갑소이다. 자주 좀 찾아주시지 않고."
  케이스는 고개를 돌려 웨이지의 얼굴을 쳐다 봤다. 햇볕에 탄 특색 없는 얼굴이었다. 두 눈은 배양조에서 배양해낸 해록색(海錄色)의 니콘제 이식 안구였다. 웨이지는 암회색 실크 양복 차림에 양 손목에는 수수한 백금 팔찌를 차고 있었다. 그의 양 옆에는 똘마니들이 지켜서고 있었는데, 그들은 거의 쌍동이나 다름없는 청년들로서 팔과 어깨에는 이식받은 근육이 불룩하니 튀어나와 있었다.
  "잘 지내고 있나, 케이스?"
  "여러분." 탁자 위의 재로 수북한 재털이를 분홍색의 플래스틱 
집게손으로 집어들면서 래츠가 말했다. "여기선 말썽은 금물이라오." 재털이는 깨지지 않도록 두꺼운 플래스틱으로 만든 것이었고 칭따오 맥주 광고가 인쇄되어 있었다. 래츠는 그것을 거침없이 으깨버렸다. 담배 꽁초와 녹색 플래스틱의 사금파리 파편들이 탁자 위로 와스스 떨어져 내렸다. "알겠소?"
  "이봐, 멋쟁이." 똘마니중 하나가 말했다. "그 물건 나한테 한 번 써보지 그래?"
  "굳이 다리만 쏠 필요는 없어, 커트." 래츠가 스스럼 없는 어투로 말했다. 케이스는 바 건너편을 흘낏 쳐다봤다. 아까의 브라질 소년이 카운터 위에 서서 웨이지 일당 세 명에게 폭동 진압용의 스미스&웨슨 산탄총을 겨누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물건의 총열은 종이처럼 얇은 합금에 일 킬로미터 길이의 유리 섬유를 감아놓은 것이었고, 구경은 주먹 하나가 다 들어갈 만큼 넓었다. 뼈대뿐인 탄창 속에는 굵직한 오렌지 색의 탄약 다섯 발이 장전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음속 샌드백 젤리였다.
  "법률상으로는 치명적인 물건은 아니거든." 래츠가 말했다.
  "이봐, 래츠." 케이스가 말했다. "신세 졌네."
  바텐더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천만에. 자네가 빚진건 아무것도 없어. 이 자들 말이야." 하면서 그는 웨이지와 똘마니들을 무섭게 노려봤다. "이걸 알아둬야 할거야. 짜쓰보에선 어느 누구도 해칠 수 없다는 걸 말야."
  웨이지가 마른 기침을 했다. "도대체 누가 누굴 해친단 얘긴가? 그냥 사업상 얘기를 나누고 싶은 것 뿐인데. 케이스하고 나는 동업자란 말이야."
  케이스는 주머니에서 22구경 권총을 꺼내 웨이지의 가랑이를 겨눴다. "네가 날 처치하려 한다던데." 그러자 래츠가 분홍색 집게손으로 그의 권총을 붙잡았다. 케이스는 권총을 잡은 손에 힘을 뺐다.
  "이봐, 케이스. 도대체 자네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거야,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다니? 내가 자네를 죽이려 하다니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웨이지는 왼쪽에있는 부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너희 둘은 남반에 돌아가 기다리고 있어."
  케이스는 그들이 술집을 가로질러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술집은 이미 커트와 카키색 복장의 선원을 제외하곤 거의 텅 비어 있었다. 그 자는 만취하여 키큰 둥근 의자 밑에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다. 스미스&웨슨의 총열은 두 똘마니를 따라 문까지 좇아가다가 다시 휙 돌아와 웨이지를 겨눴다. 케이스의 권총 탄창이 탁자에 닿아 딸그락거렸다. 래츠는 집게손으로 권총을 집어들고는 약실에서 탄알을 모조리 끄집어내 버렸다.
  "내가 자네를 없앨거라고 누가 그러던가, 케이스?" 웨이지가 물었다.
  린다였지.
  "이봐, 누가 그랬냐구? 누가 자넬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겐가?"  쓰러져 있던 선원이 신음 소리를 내더니 뱃속의 것을 요란하게 토해놓고 말았다.
  "저 자 좀 내쫓아버려." 래츠가 커트에게 소리쳤다. 소년은 이제 카운터 모서리에 걸터ㅉ아 스미스&웨슨을 무릎 위에 걸쳐놓고는 꼬나문 담배에 불을 당기고 있었다.
  케이스는 밤의 무게가 물에 젖은 모래 주머니처럼 묵지룩하니 두 눈 뒤로 내려앉는 것같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플라스크를 꺼내 웨이지에게 건네 주었다. "가진 건 이것 뿐이야. 뇌하수체제(劑)지. 서둘러 넘기면 500 엔은 받을 수 있을걸. 갖고 있던 RAM 안에 돈될 게 좀더 있었지만 지금쯤은 없어졌겠지."
  "자네 괜찮나, 케이스?" 플라스크는 이미 암회색의 옷깃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좋아. 이걸로 자네 빚은 청산된 걸로 하지. 하지만 자네 꼴이 말이 아냐. 망치에라도 두들겨 맞은 것같군. 어디 가서 잠이라도 자두는 게 좋겠어."
  "그러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채트가 케이스의 주위 사방에서 흔들리는 듯 느껴졌다. "그런데 말이지, 내게 50 엔이 있었거든. 그걸 누군가에게 줘버렸지." 그는 킥킥 웃어댔다. 22구경 권총의 탄창과 풀어놓은 탄약통을 집어 한쪽 주머니 속에 집어 넣은 뒤 권총은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쉰을 만나야겠어. 보증금을 돌려 받아야 하거든."
  "집으로 가게." 래츠가 곤혹스러운 듯한 모습으로 삐걱대는 의자 위에서 자세를 바꾸며 말했다. "예술가 친구. 집으로 가라구."  케이스는 술집 안을 가로질러 플래스틱 문을 어깨로 밀치고 나갔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그들의 눈길이 느껴졌다.

  "망할 년." 그는 시가의 위에 드리워진 장미빛 색조에 대고 욕을 뱉었다. 닌세이 거리쪽의 홀로그램들은 유령처럼 사라져가고 있었고, 네온은 대부분이 이미 차갑게 꺼져 있었다. 그는 길거리 자판기에서 뽑은 발포(發泡) 종지에 담긴 진한 블랙 커피를 홀짝이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래, 훨훨 날아가 버려, 린다. 이런 곳은 바닥 인생들한테나 어울리는 곳이니까." 하지만 정말로는 그게 아니었다. 게다가 배신감을 느끼려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마저 잘 되질 않았다. 그녀는 단지 고향으로 돌아갈 표를 원했던 것 뿐이고, 그의 히다찌 포켓 컴퓨터 속의 RAM만 있으면 그걸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장물아비만 제대로 잡으면 말이다. 게다가 그 50엔 건만 해도 그랬다. 돈을 주었을 때 그녀는 거의 사양하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이제 곧 그에게 남은 전 재산을 훔쳐낼 참이었을테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같은 소년이 접수계 데스크에 있었다. 소년은 다른 교과서를 보고 있었다. "이봐, 친구." 케이스는 플래스틱 잔디 건너편에 있는 소년에게 소리쳤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 벌써 알고 있다구. 예쁜 숙녀분이 만나러 와서 그랬겠지, 내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자네한테는 고맙게도 팁까지 몇 푼 주면서 말야. 한 50 엔쯤 되겠지?" 소년이 보던 책을 내려놨다. "여자 말야." 케이스는 엄지로 자신의 이마를 가로질러 선을 그어 보이면서 말했다. "이렇게 실크 밴드를 한." 그가 씩 웃어보이자 소년도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얼간이." 하고 케이스가 말했다.
  간이 통로 위에서 그는 자물쇠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녀가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그만 망가져 버린게라고 그는 생각했다. 풋나기 같으니. 그라면 칩 호텔의 어떠한 문도 열 수 있는 블랙박스를어디서 빌려주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카핀 안으로 기어들어가자 형광등이 들어왔다.  "이봐, 그 해치 아주 천천히 닫아. 그 웨이터한테 빌린 토요일밤의 특별 메뉴는 아직 갖고 있어?"
  그녀는 카핀의 맞은 짝 끝에서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는 양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두 손목을 올려 놓았다. 그녀의 양 손에서 후춧가루통같이 생긴 단침총의 총구가 드러났다.
  "게임 센터에 있던 자가 당신이었나?" 그는 해치를 끌어내렸다. "린다는 어디 있지?"
  "그 빗장 스위치 눌러."
  그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게 당신 여잔가? 린다라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잔 사라졌어. 당신 히다찌를 갖고 말야. 정말이지 불안스러워 보이는 아가씨더군. 이봐, 총은 어떻게 된거야?" 그녀는 거울 안경을 쓰고 있었다. 복장은 검은 색에, 검은 부츠의 뒤축이 탄성 발포 소재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쉰한테 도로 갖다주고 보증금을 돌려받았지. 총알도 샀던 값의 절반으로 되팔았고. 그 돈을 원해?"
  "아니."
  "드라이 아이스라도 좀 줄까? 지금으로선 이게 내가 가진 전부야."
  "오늘 밤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지? 게임 센터에서 왜 그런 짓을 저질렀냐구. 사설경찰 녀석이 쌍절곤을 휘두르면서 쫓아오는 바람에 그만 골로 보내버리고 말았잖아."
  "린다 말로는 당신이 나를 죽일거라더군."
  "린다가 그랬다구? 여기 오기 전까지는 그 여잘 본 적도 없어."
  "당신, 웨이지가 보낸게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케이스는 그녀의 안경이 실은 외과 수술로 살 속에 끼워넣어 안와(眼窩)를 봉해놓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 두 개의 은빛 렌즈는 그녀의 광대뼈 윗쪽의 매끄럽고 창백한 피부에서 
돋아나온 듯이 보였고, 거칠게 자른 검은 머리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단침총을 감아쥔 손가락들은 가냘프고 희었으며, 끝 부분은 붉은 광택을 띄고 있었다. 인공적으로 보이는 손톱들이었다. "당신 큰 실수를 한거 같애, 케이스. 내가 나타나자 마자 나라는 사람을 당신 좋을 대로 생각해버린 거잖아."
  "그래 당신이 원하는건 뭐지, 아가씨?" 그는 해치에 등을 기댄 채 힘없이 주저앉았다.
  "당신이야. 이렇게 살아있는 몸뚱이. 두뇌도 아직 어느 정도 멀쩡하고. 몰리야, 케이스. 내 이름은 몰리라구 해. 난 내 고용주한테 당신을 데려가려는 거야. 그는 그저 당신하고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 뿐이고. 당신을 해치려는 자는 아무도 없다구."
  "다행이군."
  "하지만 나는 가끔 사람들을 해치거든, 케이스. 나라는 여자는 원래가 그렇게 생겨먹은 모양이야." 그녀는 몸에 꼭 끼는 팽팽한 검은 가죽 바지와 빛을 흡수하는 듯한 일종의 무광택 천으로 재단된 턱없이 큰 검은 재킷을 입고 있었다. "이 단침총을 치워도 얌전하게 굴겠지, 케이스? 당신은 무모한 짓을 저지를 타입처럼 보여서 말야."
  "이거봐, 나는 아주 얌전한 놈이야. 한 주먹감이니까 걱정할 거 없다구."
  "그거 잘됐군." 단침총이 검은 재킷 속으로 사라졌다. "나한테 잘못 수작을 떨다간 일생일대의 끔찍한 실수가 될테니까 말야."
  그녀는 손바닥을 위로 하여 두 손을 내밀었다. 하얀 손가락들을 약간 펼치자 들릴듯 말듯한 찰칵 소리와 함께 외과용 메스처럼 양날이 시퍼렇게 선 4 센티 길이의 칼날 열 개가 붉은 손톱 밑에서 미끄러지듯 튀어 나왔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칼날들이 천천히 손톱 속으로 움츠러 들어갔다.


< NEURO_03.1 에서 계속...>



--------------------------[ 용어 설명 ]-------------------------

어팔리네어리스: Apollonaris. 독일산의 광천 음료의 일종.
철갑: bombshelter. 직역하자면 원래는 `방공호'.
니콘: Nikon. 잘 알다시피 유명한 일본의 광학제품 회사이다.
             깁슨의 근미래에서 니콘사는 이미 생체 광학 제품에도
             손대고 있는 듯하다.
칭따오 맥주: Tsingtao beer.
아음속 샌드백 젤리: subsonic sandbag jellies.
                   (참고로 jelly bomb는 젤리 모양의 가솔린
                    소이탄을 말한다.)
법률상으로는 치명적인 물건은 아니거든.: Technically nonlethal.
                      (nonlethal: 전투력만 상실시키는, 안전한)
* 짜쓰보: Chat(채트)는 짜쓰보(Chatsubo / 茶つぼ)의 줄임말. 원래는
          차를 넣어 두는 단지나 그릇이란 뜻. 여기서는 `술집'이라
          는 뜻으로 전용(轉用)하여 쓰고 있는 듯.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다니?: you wig or something?
                             `wig'이란 터무니없는 사람을 뜻한다.
뇌하수체제: pituitary
발포 종지: foam thimble.
           오늘날의 커피 자판기의 종이 컵과 유사하게 발포 소재로
           만든 일회용 컵의 일종인 듯.
토요일 밤의 특별 메뉴: Saturday night special.
                       쉰에게서 빌린 `총'을 뜻함.
단침총: flechette pistol.
        `flechette'이란 원래 제 1차 대전 때 공중에서 투하된
        강철제 화살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오래 전에 미국에서 군용으로 개발되었던, 초당
        수십 내지 수백 개의 작은 바늘들을 발사하는 무기의
        소형판인 듯하다.
안와: socket (= eye socket). 안구가 들어있는 눈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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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카핀에서만 일 년을 살아온 그에게 지바 힐튼 호텔의 25층 룸은 엄청나게 거대해 보였다. 가로 십 미터, 세로 팔 미터 넓이의 그 방은 스위트룸을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흰색의 브라운 커피메이커가 좁은 발코니 쪽으로 열린 미닫이 유리창틀 옆의 낮은 탁자 위에서 김을 내뿜고 있었다.
"커피 좀 마셔 둬. 꼴을 보니 그게 좋겠어." 그녀는 입고 있던 검은 재킷을 벗었다. 단침총이 겨드랑이에 찬 검정색 나일론 어깨총집에 매달려 있었다. 양 어깨에는 평범한 철제 지퍼가 달린 소매없는 회색 풀오버를 입고 있었다. 방탄복인가 보군. 선명한 빨간 색 머그잔에 커피를 쏟아부으며 케이스는 생각했다. 자신의 팔다리가 마치 나무처럼 뻣뻣하게 느껴졌다.
  "케이스." 하는 소리에 고개를 쳐든 그는 처음으로 그 사내를 보았다. "내 이름은 아미티지일세." 허리께까지 벌어진 사내의 검은 겉옷 속으로 털 없는 근육질의 딱 벌어진 가슴과 납작하고 단단한 복부가 드러나 보였다. 파란 두 눈은 어찌나 창백해 보이는지 표백제를 연상시켰다. "태양이 떠올랐네, 케이스. 자네에겐 오늘이 행운의 날일세."
  케이스는 갑자기 팔을 옆으로 휙 내둘렀다. 그러나 사내는 뿌려진 뜨거운 커피를 손쉽게 피해버렸다. 갈색 얼룩이 모조 라이스페이퍼를 바른 벽을 따라 흘러내렸다. 사내의 왼쪽 귓불에 모가 난 금귀거리가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특수 부대 출신이군. 사내가 미소 지었다.
  "커피 마셔, 케이스." 몰리가 말했다. "당신한텐 아무 일도 없을거야. 하지만 아미티지씨 얘기를 다 듣기 전엔 아무 데도 못 가." 
그녀는 비단 방석 위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단침총을 보지도 않은 채 분해검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거울눈 한 쌍은 케이스가 탁자로 가 컵을 다시 채우는 모습을 따라다니며 지켜보고 있었다. 
  "자넨 너무 젊어서 전쟁 기억은 없겠지, 케이스?" 아미티지는 커다란 손을 들어 짧게 자른 자신의 갈색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묵직한 금팔찌가 손목에서  번쩍거렸다. "레닌그라드, 키에프, 
시베리아. 자네 같은 부류는 우리가 시베리아에서 발명해낸거라네, 케이스."
  "무슨 소리요?"
  "스크리밍 피스트 말일세, 케이스. 들어본 이름일걸."
  "일종의 군사 작전 아니었소? 러시아의 무슨 연계체(連繫體)인가 하는 곳을 바이러스 프로그램으로 된통 한 방 먹이려 했다던데. 그래, 들어본 적 있어. 살아 돌아온 자는 아무도 없다더군."
  그는 돌연 긴장감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아미티지는 창가로 걸어가 도쿄 만을 내려다 보았다. "그렇지 않아. 헬싱키까지 간신히 빠져나온 부대가 하나 있었다네, 케이스."
  케이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자네는 콘솔 카우보이야. 자네들이 산업 은행에 침투하는 데 쓰는 프로그램들의 원형은 스크리밍 피스트를 위해 개발된 거였지. 키렌스크 컴퓨터 연계체를 습격하기 위해서 말야. 기본적인 구성 단위는 나이트윙 초경비행기 한대와 조종사 한 명, 매트릭스 데크 하나, 데크 기수(騎手) 한 명이었지. 우리는 모울이라는 바이러스를 침투시키고 있었어. 모울 시리즈는 본격적인 침투 프로그램의 제 1 세대였네."
  "아이스브레이커 말이로군." 빨간 머그잔을 입에 갖다 대며 케이스가 말했다.
  "아이스란 I.C.E., 즉 침입 대응 전자 방어장치의 축약어지."
  "선생, 문제는 이제 나는 기수(騎手)가 아니라는 점이요. 그러니 난 그만 가보는게 ...."
  "난 그 자리에 있었네, 케이스. 그들이 자네 같은 부류를 만들어냈을 때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단 말일세."
  "여보쇼, 당신에겐 나같은 족속들을주무를 힘이 있소. 이렇게 돈 많이 드는 '면도칼 여인'을 고용해서 나같은 놈을 여기까지 끌어올 정도로 부자니까. 그것 뿐이지. 나는 이제 두번 다신 데크를 두드릴 수 없는 처지요. 당신이든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말이요." 그는 
창문으로 건너가 아래를 내려다 봤다. "이제 내가 사는 곳은 바로 저 아래요."
  "우리 프로파일에 따르면 자네는 저 거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죽음을 당하고 싶어 안달이라더군."
  "프로파일이라니?"
  "자네에 대한 상세한 모델을 구축했지. 자네의 가명들 하나하나에 대한 정보를 사들여 모종의 군용 소프트웨어로 좍 분석해봤네. 자네는 자멸적인 성격이더군, 케이스. 이 모델의 예측에 따르면 자네는 저 바깥 세상에서 한 달 밖에 못 살아. 게다가 우리의 의료 예측 결과에 의하면 자네는 일 년 안에 새로운 췌장(膵臟)이 필요하게 돼."
  "'우리'라니." 그는 사내의 빛바랜 파란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 누구 말이오?"
  "우리가 자네의 신경계에 가해진 손상을 고쳐놓을 수 있다면 어떤가, 케이스?" 케이스에게는 돌연 아미티지가 커다란 쇠덩어리로 깎아낸 물건처럼 보였다. 미동도 없이 엄청난 무게를 지닌 조상(彫像)처럼. 그는 이제 깨달았다. 이것은 꿈이고, 이제 곧 깨어나고 말리라는 것을. 아미티지는 두번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케이스의 꿈들은 언제나 그처럼 정지된 장면에서 끝났었고, 이제 이 꿈 역시 다 끝나버린 것이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케이스?"
케이스는 도쿄 만을 내려다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풍이 대단하군 그래."
  아미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내거는 조건은 뭐요?"
  "자네가 익히 알고 있는 조건과 별로 다를게 없네, 케이스."
  "이 사람 잠 좀 자게 해줘요,아미티지." 몰리가 방석 위에 앉은 채 말했다. 단침총의 부품들이 비단 방석 위에 마치 값비싼 퍼즐 조각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 사람은 지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에요."
  "조건을." 하고 케이스가 말했다. "지금 대시오. 지금 당장."
  그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름도 없는 그 병원은 예약비가 높았으며, 단정한 소정원으로 분리되어 있는 호화판 병동(病棟)의 군집이었다. 케이스는 지바市에 온 첫 달, 병원들을 전전하는 가운데 이 곳에 왔던 기억이 있었다.
  "겁이 나있군,케이스. 정말로 겁이 나있는거야." 일요일 오후. 그는 일종의 안뜰 같은 곳에 몰리와 함께 서있었다. 흰 옥석과 푸른 대나무 수목, 매끄러운 파형으로 일궈놓은 검은 자갈길. 거대한 금속제 게처럼 생긴 정원사 로보트가 대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성공할거야, 케이스. 아미티지가 갖고 있는 물건이 어떤 건지 당신은 상상도 안 갈걸. 예를 들어 저 신경외과 전문의들이 당신을 고쳐놓는 대가로 그 양반한테 뭘 받게 될건지 알아? 바로 당신의 치료 방법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야. 덕분에 저 자들은 경쟁 병원보다 3년을 앞서게 되는거라구. 그게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나가는건지 상상이나 가?" 그녀는 가죽 진 바지의 혁대고리에 양 엄지 손가락을 걸고는 버찌처럼 빨간 카우보이 부츠의 래커칠한 뒷굽치로 서서 뒤로 몸을 흔들었다. 폭 좁은 그녀의 부츠 앞 부리는 반짝이는 멕시코산 은으로 덮혀 있었다. 공허한 수은과도 같은 그녀의 양쪽 눈 렌즈가 곤충같은 냉정함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은 거리의 사무라이지." 그가 말했다. "그 자 밑에서 일한지는 얼마나 됐지?"
  "두어 달쯤."
  "그 전엔?"
  "다른 자 밑에 있었지. 먹고 사는 일이 다 그렇잖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스운 일이야, 케이스"
  "우습다니, 뭐가?"
  "마치 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던 느낌이거든. 아미티지가 갖고 있는 프로파일 때문인가. 당신이 어떻게 생겨먹은 남자인지 난 알고 있어."
  "이봐, 아가씨가 나에 대해 뭘 안다구 그래."
  "당신은 괜찮은 남자야, 케이스. 당신은 뭐랄까,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야."
  "그 자는 어때? 그 자도 괜찮은 자인가, 몰리?" 로보트 게가 구불구불한 자갈길을 따라 더듬거리며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천 년은 묵어 보이는 청동빛 등딱지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츠 일 미터 전방까지 다가온 놈은 빛을 한 줄기 내쏘더니 그렇게 수집한 데이타를 분석하느라 잠시동안 꼼짝 않고 얼어붙어 있었다.
  "내가 항상 최우선시하는건 말야, 케이스, 바로 귀중한 내 목숨이지." 게는 그녀를 피해가기 위해 경로를 바꿨다. 그러나 그녀는 가볍게, 그러나 정확하게 놈을 걷어차 버렸다. 은제의 부츠 앞부리가 그 등딱지에 부딪혀 쨍 소리를 내며 울렸다. 놈은 등을 아래로 깔고 뒤집어졌지만 이내 청동빛 다리들을 휘적여 자세를 바로잡았다.
  케이스는 옥석 가운데 하나에 앉아 파형으로 대칭을 이룬 자갈길을 신발끝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 담배가 있는지 뒤지기 시작했다. "당신 셔츠 속을 봐." 그녀가 말했다.
  "물어본 질문에나 좀 대답해주지 않겠어?" 그가 담배갑에서 구겨진 예헤유안 담배 한 가치를 꺼내들자 그녀는 독일제 강철로 된 납작한 판 모양의 물건을 꺼내 불을 붙여줬다. 수술대에나 어울려 보임직한 물건이었다.
  "글쎄, 내 생각으론 그 자는 뭔가를 손에 넣은게 분명해. 지금은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지만 전에는 한 푼도 없던 자야. 게다가 주머니가 갈수록 불어나고 있거든." 케이스는 그녀의 입가가 어딘지 모르게 긴장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어쩌면... 어쩌면 뭔가가 그 자를 손에 넣고 있는 건지도...." 말끝을 흐리며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슨 뜻이지?"
  "나도 잘은 모르겠어. 내가 아는 거라곤 우리가 실제로는 누구를 위해서, 아니면 어떤 존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건지 모른다는 것뿐."
  그는 두 개의 거울 안경을 쳐다봤다. 토요일 아침에 힐튼 호텔을 나온 그는 칩 호텔로 되돌아가 열 시간 동안 내처 잠잤었다. 그리고는 항구의 경비 구역을 따라 한참을 아무 목적도 없이 걸었었다. 철조망 울타리 너머로 갈매기들이 원을 그리며 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만일 몰리가 그를 미행하고 있었다면 정말로 감쪽같이 해냈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나이트 시티에 가지 않았고, 카핀에서 아미티지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는 이 조용한 정원에서 일요일 오후를 맞아, 체조 선수의 육체와 마술사의 칼손을 지닌 이 여자와 함께 있었다.
  "그만 안으로 들어와 주시겠습니까, 선생님? 마취 전문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문의는 절을 하고 돌아서더니 케이스가 따라오는지 기다리지도 않고 병동으로 다시 들어갔다.

  차가운 강철 내음. 얼음 덩어리가 그의 등뼈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그 어둠 속에서 한없이 왜소해진 느낌으로, 두 손은 점점 싸늘해져가고, 환영 속의 그의 몸뚱이는 텔리비전 하늘의 회랑을 따라 사라져가고 있었다.
  목소리들.
  이어서 검은 불길이 가지 뻗은 그의 신경 지류(支流)로 꿰뚫고 밀려 들어왔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끔찍한 격통....

  가만 있어. 움직이지 말고.
  그리고 래츠가 거기에 있었다. 린다 리와 웨이지, 그리고 로니 존도. 네온의 숲의 수많은 얼굴들, 선원들과 사기꾼들, 그리고 창녀들. 그곳에 은빛으로 중독된 하늘은 철조망과 두개골의 감옥 저 너머에 드리워져 있었다. 
  빌어먹을, 움직이지 말라니까.
  하늘이 쉭쉭대는 잡음에서 매트릭스의 무색이 되어 사라져 가는 곳, 거기에서 그는 언뜻 슈리켄을 보았다. 그의 별들을.
  "가만 있어, 케이스! 정맥을 찾아내야 한단 말야!"
  그녀는 그의 가슴에 걸터 앉아 한 손에는 파란 플래스틱제의 일회용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가만 누워 있지 않으면 네 빌어먹을 목을 따버리고 말겠어. 네 몸 속은아직 엔돌핀 억제제(抑制劑)로 꽉 차 있단 말야."

  의식을 차린 그는 어둠 속에서 그녀가 옆에 길게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
  목이 나뭇가지로 만든 양 뻣뻣했다. 척추 한가운데서 꾸준히 맥박치고 있는 고통이 느껴졌다. 환영이 나타났다간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한데 섞여 어른거리는 스프롤의 고층 건물과 허름한 빨랫집의 둥근 지붕들, 다리나 육교 밑의 그늘 속에서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어렴풋한 사람들의 모습들....
  "케이스? 오늘은 수요일이야, 케이스." 그녀가 몸을 굴려 누워있는 그의 몸 위로 팔을 뻗었다. 젖가슴 한 쪽이 그의 상박(上膊)부를 스쳤다. 물병의 밀봉용 은박지를 찢어내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자아." 그녀가 그의 손에 병을 쥐어 주었다. "난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어, 케이스. 내 안경 속엔 마이크로채널 화상 증폭장치가 내장되어 있거든."
  "등이 아파 죽겠어."
  "그들이 거기로 당신 체액을 갈았거든. 혈액도 바꿨어. 혈액까지 바꾼건 계약상 췌장까지 새 것으로 갈아넣었기 때문이고. 게다가 당신의 간에는 어떤 새로운 세포가 이식됐어. 신경 계통의 물건인가 본데, 잘은 모르겠어. 주사를 꽤나 놨지.본격적인 수술로 들어가서는 한 군데도 절개할 필요가 없었대." 그녀는 케이스의 옆에 다시 자리 잡았다. "지금은 2:43:12 AM이야, 케이스. 내 시신경에는 정보판독 칩이 내장되어 있거든."
  그는 일어나 앉아 병 속의 물을 마시려 하다가 속이 메슥거려 기침을 했다. 그 바람에 미적지근한 물이 튀어 그의 가슴과 넓적다리를 적셨다.
  "데크 좀 두드려 봐야겠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옷을 찾아 더듬거리고 있었다. "성공했는지 알아야...."
  그녀가 웃었다. 작지만 강한 두 손이 그의 상박부를 움켜쥐었다. "안됐지만, 잘난 양반, 여드레는 더 기다려야 돼. 지금 접속해 들어갔다간 신경계가 뭉그러져서 널부러져 버리고 말거야. 이건 의사의 지시야. 게다가 그들은 수술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하루 이틀 있다가 검사해본다더군." 그는 다시 드러누웠다.
  "여기는 어디지?"
  "집이야. 칩 호텔."
  "아미티지는?"
  "힐튼에. 원주민들한테 구슬이나 팔고 있든가 뭐 그러고 있겠지. 이봐, 우린 곧 여길 떠나게 될거야. 암스테르담, 파리를 거쳐서 다시 스프롤로 돌아가는거지." 그녀가 그의 어깨를 만졌다. "엎드려봐. 내 마사지 실력은 수준급이야."
그는 두 팔을 앞으로 쭉 편 채 배를 깔고 누웠다. 양 손의 손가락 끝이 카핀의 벽에 닿았다. 그녀는 그의 허리에 올라타 탄성 발포 소재 매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가죽 바지가 케이스의 피부에 서늘하게 와 닿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당신은 왜 힐튼으로 돌아가지 않았지?"
그녀는 대답 대신 한 쪽 팔을 뒤로 뻗어 그의 넓적다리 사이로 넣고는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음낭(陰囊)을 어루만지듯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잠시동안 그대로 어둠 속에서 몸을 흔들고 있었다. 등을 곧추 세워 그를 타고 앉아 다른 한 손은 그의 목 위에 댄 채로.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가죽 바지가 나직하게 삐득거렸다. 몸을 추석이던 케이스는 탄성 발포 매트를 짓누르고 있는 자신의 물건이 딱딱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쿡쿡 쑤셔왔지만 목의 뻣뻣하던 느낌은 가시는 것 같았다. 그는 한 팔꿈치를 짚고 상반신을 일으켜 몸을 뒤집었다. 탄성 발포 매트를 등에 지고 다시 풀썩 드러누우며 그녀를 끌어당겨 젖가슴을 핥았다. 딱딱해진 작은 젖꼭지가 침에 젖어 그의 뺨 위를 미끄러져 지나갔다. 그는 그녀의 가죽 바지에 달린 지퍼를 찾아내자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럴 것 없어."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난 어둠 속에서도 보이니까." 바지를 벗겨내는 소리. 그녀는 케이스 옆으로 비집고 들어오더니 벗은 바지를 발로 차냈다. 그녀가 다리 하나를 그의 몸 위에 걸쳐오자 그는 그녀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생각지 않게손끝에 전해져 오는 이식 렌즈의 딱딱함. "손대지 마." 그녀가 말했다. "지문 묻잖아."
   또다시 그를 타고 앉은 그녀는 그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하체에 감았다. 케이스의 엄지는 그녀의 둔부(臀部)가 갈라진 부분을 따라, 다른 손가락들은 음순(陰脣) 위에 펼쳐져 놓였다. 그녀가 하체를 낮추기 시작하자 또다시 환영들이 고동치듯 눈앞을 스쳐갔다. 얼굴들, 다가왔다가는 멀어져가는 네온의 파편들. 그녀의 음순이 그의 남자를 감싸안으며 미끄러져 내려오자 그의 등이 발작적으로 활처럼 휘어졌다. 그녀는 그렇게 그를 타고 앉아 몸 속에 삽입시킨 채 쉬지 않고 상하 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함께 절정에 이르고 말았다. 그의 오르가즘은 영원의 공간 속에서 푸른 불꽃으로 불붙어 너울거렸다. 매트릭스와도 같은 광막함. 떠오른 얼굴들은 그 속에서 갈갈이 찢겨 폭풍의 회랑을 따라 휩쓸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허벅지 깊은 곳이 그의 허리를 강하게 조여들며 젖어들고 있었다.


< NEURO_03.2 에서 계속...>


-----------------------[ 용어 설명 ]-----------------------------

스위트 : suite. 붙은 방. 호텔 따위에서 침실 외에 거실, 응접실
         따위가 붙어 있는 것.
브라운 커피메이커: Braun coffeemaker. '브라운'은 독일의 유명한
                   가전회사 상표명. 커피 끓이는 기구.
풀오버: pullover. 머리로부터 입는 스웨터 따위.
라이스페이퍼: ricepaper. 얇은 고급 종이. 벽지의 일종인 듯.
특수 부대: Special forces. 유격전 등의 특수 부대.
방석: futon. ふとん(布團). 1) 이부자리; 이불; 요.
                           2) 부들 방석 ((좌선(座禪) 따위에 씀)).
                              cf. 부들: 명주실, 무명실을 꼬아
                                  현악기의 현을 연결하는 데에
                                  쓰는 줄.
거울눈 한 쌍: twin mirrors.
              몰리의 두 눈에 이식되어 있는 거울 안경.
키에프: Kiev. 흑해 북방,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도시.
스크리밍 피스트: Screaming Fist.
                '절규의 주먹'이라... 일종의 작전 암호명인듯.
군사 작전: run. ((syn.)) operate
                [軍] (폭격 목표에의) 직선 비행, 접근.
                (접근 비행이나 돌파 비행?)
키렌스크 컴퓨터 연계체(連繫體): Kirensk computer nexus.
나이트윙 초경비행기: Nightwing microlight.
                    '밤의 날개'라는 이름으로 보아 스텔쓰형의
                     초경량 비행기인 듯.
데크 기수(騎手): jockey. 케이스와 같은 콘솔 카우보이,
                 즉 사이버 공간의 해커를 뜻한다.
헬싱키: Helsinki. 러시아 서북방, 유럽 발트해 북방에 위치한
        핀란드의 수도. 항구 도시이며 산업 도시이다.
모울: Mole. '두더쥐'라는 암호명의 침투 바이러스.
아이스브레이커: Icebreakers.
                직역하면 '길을 트는 사람이나 물건, 또는 실마리'
                이지만, 여기서는 해커가 시스템 침투를 위해
                사용하는 전문 바이러스를 가리킨다.
    '전자 방벽 파쇄 전문 소프트웨어' 쯤으로 의역하면
                좋을 듯.
아이스: ICE (Intrusion Countermeasures Electronics).
        해커(hacker 또는 cracker)에 의한 시스템 침투를 막기 위한
        전자적 대응장치. '침입 방어용 전자 방벽' 쯤으로 의역하면 좋을 듯.
프로파일: profile. 인물 단평을 나타내는 분석 데이타.
췌장(膵臟): pancreas. 이자.
            위 및 간장 부근 복막 밖에 있는 길이 약 15 cm의
            암황색 기관으로서, 하루에 약 500 내지 800 cc의 췌액을  분비함.
"허풍이 대단하군 그래.": I'd say you were full of shit.
                       : shit --> 허풍. 실없는 소리.
"자네가 익히 알고 있는 조건과 별로 다를게 없네, 케이스.":
     Not very different than what you're used to, Case. :
     케이스의 사이버 공간 진입 능력, 즉 정상적인 중추 신경을
     볼모로 잡아 그의 배신을 막겠다는 암시인 듯.
철조망 울타리: chainlink (fence).
               철사를 파도 모양으로 엮은 울타리.
일회용 주사기: Syrette. 시레트.
               1 회분의 주사액이 들어 있어 쓰고 버리는 응급용
               주사기. 商標名.
빨랫집: Fuller. 축융업자(縮絨業者); 마전쟁이.
정보판독: readout. (기억 장치 또는 기억 소자로부터의) 정보 판독.
"... 원주민들한테 구슬이나 팔고 있든가 뭐 그러고 있겠지. ...":
                   selling beads to the natives or something.:
          아미티지가 일본의 지하 병동에 첨단 의료 기술 따위를
          파는 것을 뜻하는 듯.
허리: the small of his back. 허리의 잘록한 부분.
폭풍: hurricane. 풍속 73 내지 150 마일의 태풍. 허리케인.
회랑: corridor. 복도.  cf. [지정학] 회랑 지대.
허벅지 깊은 곳: inner thighs.
                허벅지 --> 허벅다리의 안쪽 살 깊은 곳.
                허벅다리 --> 넓적다리의 위쪽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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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닌세이에는 주중이라 한결 줄어든 인파의 물결이 춤추며 지나가고 있었다. 게임 센터와 파찡꼬장에서는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케이스가 채트 안을 휙 둘러보니 존이 덥고 맥주 냄새 풍기는 어슴프레한 실내에서 휘하의 창녀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래츠는 바텐더 일을 보고 있었다.
  "웨이지 봤나, 래츠?"
  "아니, 오늘 밤엔." 래츠는 몰리 쪽으로 눈썹을 치켜올려 보였다.
  "보거든 갚을 돈이 생겼다고 말해주게."
  "운이 트이기 시작한겐가, 아티스트 양반?"
  "아직은 모르겠네."

  "글쎄, 이 사람을 좀 만나봐야만 한다니까." 그녀의 거울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케이스가 말했다. "마무리 지을 일이 있단 말야."
  "아미티지가 좋아하겠어, 당신한테서 눈 떼는걸?" 그녀는 딘의 연체 시계 밑에서 두 손을 양 허리에 떡 버틴 채 서있었다.
  "당신이 있으면 저 자는 나하고 얘기하려 들지도 않을거라구. 난 딘 같은 자는 상관 안해. 제 앞가림쯤은 할 줄 아는 자니까. 하지만 내가 갑자기 지바시에서 사라져 버리면 신세 망치게 될 친구들이 있단 말야. 내 친구들, 알겠어?"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싱가폴에도 친구가 있고 신주쿠하고 아사쿠자에는 도쿄 거래선들이 있어. 그들이 신세를 망치게 된다구, 알아듣겠어?" 그는 몰리의 검은 재킷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5 분. 5 분이면 돼. 당신 시계로 말야, 음?"
  "내 임무상 그렇게는 안돼."
  "당신 임무가 뭐든 상관없어. 그렇게 지시대로만 고지곧대로 따르느라 막역한 친구들 목숨을 날리게 할 수는 없다구."
  "흥, 막역한 친구 좋아하시네. 저 밀수꾼한테 우리에 대해 알아보려고 들어가려는걸 모를 줄 알아?" 그녀는 먼지로 뒤덮인 칸딘스키 커피 탁자 위에 부츠 발을 턱 올려놓았다.
  "아,케이스, 멋진 친구, 거기 있는 자네 동행인은 분명 무기를 소지한 것 같군 그래. 머리 속엔 반도체 칩까지 적지않게 이식되어 있고 말씀이야. 똑바로 말해보게, 도대체 무슨 일로 찾아왔나?" 딘의 희미한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잠깐만, 줄리. 어떻게든 나 혼자 들어가겠어."
  "물론이지, 이 친구. 그렇잖으면 어림도 없어."
  "좋아," 하고 그녀가 말했다. "가봐. 하지만 5 분만이야. 더 기다리게 했다간 쳐들어가서 네 막역한 친구라는 자의 숨통을 아주 끊어놓고 말겠어. 그리고 기왕이면 그 사이에 한 번 잘 궁리해봐."
  "뭘 말야?"
  "내가 널 봐주는 이유." 그녀는 뒤돌아서 백색의 저장생강 모듈 더미를 지나 걸어나갔다.
  "요샌 이상한 친구를 데리고 다니나, 케이스?" 줄리가 물었다.
  "줄리, 그 여자는 나갔어. 좀 들어가게 해주지 않겠어? 부탁이야, 줄리."
빗장이 움직였다. "천천히 움직이게, 케이스," 목소리가 말했다.
  "장치들을 작동시키지 그래, 줄리, 책상 속에 들어있는 장치들을 몽땅 말야." 회전 의자에 앉으면서 케이스가 말했다.
  "그야 항상 켜져 있다네." 딘은 부속이 앙상하니 드러난 자신의 낡은 기계식 타자기 뒤에서 총을 꺼내들어 케이스를 조심스레 겨누며 온화하게 말했다. 그것은 매그넘 회전식 연발권총의 총열을 뿌리까지 잘라낸 벨리건으로서, 방아쇠울 앞쪽은 잘라내버리고 총자루는 낡은 마스킹 테이프같은 것으로 감아놓은 물건이었다. 케이스는 그 물건이 딘의 잘 다듬질된 핑크빛 손에는 퍽이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만사불여튼튼 아닌가, 이해해 주겠지? 개인적 감정은 없네. 그럼 이젠 용건이 뭔지 말해보게."
  "역사 수업을 좀 받고 싶어, 줄리. 거기다가 어떤 자에 대한 정보도."
  "이봐, 도대체 무슨 일인가?" 딘은 캔디 사탕같은 줄이 쳐진 면 셔츠를 입고 있었고, 목깃은 도자기처럼 희고 빳빳했다.
  "나 떠날거야, 줄리. 가버린다구. 하지만 그전에 부탁 하나 들어주지 않겠어, 응?"
  "누구에 대한 정보 말인가, 친구?"
  "아미티지라는 외국인인데 힐튼의 스위트 룸에 묶고 있어."
  딘은 권총을 내려놓았다. "가만히 앉아있게, 케이스." 그는 소형 단말기에 대고 뭔가를 두드렸다. "자네나 내 네트워크나 모르긴 매일반인 것같군, 케이스. 이 신사분께선 야쿠자와 일시적인 사전협의가 되어 있는 모양이야. 네온 국화 대원들은 자기 편을 나같은 자들로부터 숨기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 달리 알아볼 길은 없네. 그럼 이젠 역사 쪽으로 들어가볼까. 역사라고 그랬지?" 그는 다시 권총을 집어들었지만 케이스를 똑바로 겨누지는 않았다. "어떤 종류의 역사 말인가?"
  "전쟁. 전쟁에 나간 적 있어, 줄리?"
  "전쟁? 그따위 것 알게 뭐 있나? 3 주만에 끝났지."
  "스크리밍 피스트."
  "유명한 사건이었지. 요샌 역사 수업도 안 받나? 그건 말야, 전후에 일어난 피로 얼룩진 엄청난 정치적 풋볼 시합이었지. 그 일로 모조리 지옥에 휩쓸려 들어갔다가 나왔네. 자네쪽 고관도 말일세, 케이스, 
자네의 스프롤 지역 고관이, 그러니까 그게 어디였더라, 맥린이었나? 벙커에 수없이 떠돌던 그... 엄청난 추문들이라니. 어떤 신기술을 시험하려고 애국심으로 들끓는 젊은이들을 꽤나 죽여버렸지. 그들은 러시아의 방어망에 대해 알고 있었어.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말야. EMP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거야, 자기펄스 병기 말일세. 그러면서도 그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보낸거지, 단지 어떻게 되나 보기 위해서 말야." 딘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러시아놈들의 사격놀이 표적으로 던져준게야."
  "그중에 살아나온 자는?"
  "제기랄." 하고 딘이 말했다. "정말이지 피비린내 나는 해였어.... 하지만 몇 명 살아나온 자는 있었던 것같애. 유격팀중 하나였는데 소련군 무장 헬리콥터를 탈취했지. 헬리콥터 말일세. 그걸 핀란드까지 몰고 간거야. 물론 입국 코드는 없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핀란드 방어군과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졌지. 특수 부대식으로." 딘은 코를 킁킁대며 말했다. "말도 못하게 끔찍했네."
  케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장 생강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난 말야, 전쟁을 리스본에서 치뤘지." 권총을 내려놓으며 딘이 
말했다. "멋진 곳이었어, 리스본은."
  "군에 복무했었어, 줄리?"
  "천만에. 하지만 활약은 좀 했었지." 딘은 예의 그 핑크빛 미소를 지어보였다. "전쟁이란 사업성이 아주 그만이거든."
  "고마워, 줄리. 신세 졌어."
  "천만에, 케이스. 잘 가게."
                                 *  *  *


< NEURO_03.3에서 계속 >

==========================[ 용어 설명 ]==========================
멋진 친구: sport. (口)    운동가; 사냥꾼  노름꾼, 도박꾼   멋진 남자
벨리건: bellygun. (상대방의 복부에 들이대고 발사하는) 총신이 짧은 권총.
연발 권총: revolver. (회전식의) 
고관: brass. (一般的) 고관, 높은 사람, 고급 장교
벙커: bunker. [軍] 지하 엄폐호.
자기펄스 병기: EMP (Electro-Magnetic Pulse) weapon
러시아놈: Ivan.    보통 러시아 남자의 이름. 이반.
                   Ivan Ivanovi(t)ch: 전형적인 러시아(군)인.
사격놀이 표적: turkey shoot. 움직이는 표적을 쏘는 라이플 사격회
                             (칠면조가 상품);
              ((美俗)) 손쉬운 것, 전투기에 의한 적기의 유효 공격.
무장 헬리콥터: gun ship. ((美))
특수 부대: Special Forces. (유격전 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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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ef history of
HELSINKI, Finland

  Located at the southern tip of the Finnish peninsula, Helsinki 
is the capital of Finland and the administrtive center of Uusimaa 
province. It is also the leading seaport and industrial city of 
Finland.
  The old center of the city ismade up of government buildings, 
the main building of Helsinki University, and the Great Church, 
all of which surround Senate Square. The buildings were all 
designed by architect C.L. Engel and date back to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Examples of modern Finnish architecture are 
Taivallahti Church, the City Theater, and Finlandia concert 
hall  the last designed by the noted architect Alvar Aalto. 
Helsinki is also home to an opera and ballet company, symphony 
orchestras, and Helsinki University, the largest university in 
Scandinavia. Helsinki Stadium was built for the 1952 Olympic 
Games.
  Helsinki is surrounded by the natural harbors of the Gulf of 
Finland. The harbors and excellent railway and road connections 
to the nation's interior enable Helsinki to handle more than half 
of Finland's imports. Helsinki's main industries include food and 
metal processing, printing, textiles and clothing.
  Helsinki was founded in 1550 by King Gustav Vasa of Sweden to 
compete with Tallinn, a port on the other side of the gulf used 
to trade with Russian merchants. The city's growth was hindered 
by a plague in 1710 and devastating fires in 1713 and 1808. In 
1809 Finland was ceded to Russia, and in 1812 the capital was 
moved from Turku to Helsinki. The city was completely 
reconstructed at this time. Finland gained independence from 
Russia in 1917 after a brief but violent civil war in Helsinki. 
Population (1987 estimate), 486,111.

  --- Excerpted from Compton Encyclopedia CD-ROM Version ---
=================================================================
    *  *  *
  훗날 그 때를 돌이킬 때마다 그는 스스로 되뇌이곤 했다. 새미 검투장에 갔던 그 날 저녁은 처음부터 감이 좋지 않았다고. 몰리를 따라 그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온통 발에 밟혀 널려있는 입장권 쪼가리와 스티로폼 컵 사이를 지척대며 걸어가면서 그는 느꼈었다. 린다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케이스가 딘을 만나본 후에 그들은 남반으로 가서 아미티지가 준 뉴 엔 지폐 뭉치로 웨이지에게 진 빚을 갚았다. 웨이지는 좋아했지만 그의 부하들은 별로 그렇지 못했고, 몰리는 케이스 옆에 서서마치 좋아서 미칠 듯해 보이는 야생짐승의 격렬함으로 씨익 웃음짓고 있었다. 그들중 누군가가 덤벼들어 주기만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돈을 갚은 뒤 케이스는 한 잔 하기 위해 그녀를 채트로 다시 데리고 왔다.
  "시간낭비야, 카우보이씨." 케이스가 재킷 호주머니에서 팔각형 알약을 꺼내들자 몰리가 말했다.
  "어째서? 하나 하겠어?" 그는 알약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새로 이식해준 이자 때문이야, 케이스. 게다가 당신 간에 심어놓은 플러그들도 있고. 아미티지가 그따위 마약은 우회시키도록 만들어 놨거든." 그녀는 버건디색 손톱 하나로 팔각형 알약들을 톡톡 두드려댔다. "당신은 생화학적으로 암페타민이나 코카인으로는 기분 낼 수가 없게 된거야."
  "빌어먹을!" 그는 팔각형 알약을 들여다 보다가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삼켜봐. 열댓 개 삼켜보라니까. 아무렇지도 않을테니."
  그는 시키는대로 해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맥주 세 잔을 비우고 난 뒤, 그녀는 래츠에게 검투 시합에 대해 묻고 있었다.
  "새미 검투장에서 하지." 래츠가 말했다.
  "난 빼줘." 케이스가 말했다. "거기선 서로 목을 딴다던데..."
  그러나 한 시간 뒤, 그녀는 흰 티셔츠에 헐렁한 럭비 반바지 차림의 깡마른 태국인으로부터 표를 두 장 끊고 있었다.
새미 검투장은 항만의 창고 뒤에 자리한 공기팽창형 돔으로서, 팽팽하게 펼친 회색 직물을 가는 강철 케이블망으로 강화시킨 구조물이었다. 양 끝에 문이 있는 복도는 돔을 지탱하는 압력차를 유지해주는 조잡한 기밀실(氣密室)이었다. 합판제 천정에는 형광 고리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나사못으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 대부분이 고장나 있었다. 공기는 축축하고 땀냄새, 콘크리트 냄새로 차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원형 투기장과 관중들, 긴장감 도는 정적, 돔 아래에 우뚝 솟은 빛의 꼭두각시들은 그로선 전혀 예기치 못했던 광경이었다. 층층이 경사를 이루며 솟아오른 콘크리트가 일종의 중앙무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것은 복잡하게 얽혀 번뜩이고 있는 영사 장치들이 빙 둘러가며 에워싼 융기식 원형 무대였다. 불빛이라곤 원형무대 위에서 껌뻑거리며 형태를 바꾸는 홀로그램 밖에 없었고, 그것은 그 아래 있는 두 사내의 몸놀림을 그대로 재현해주고 있었다. 계단식 관람석에서 피어오른 담배연기의 층들이 떠돌다가는 송풍기가 돔을 지탱하기 위해 일으키는 기류에 부딪혀 휩쓸려들고 있었다. 소리죽여 돌아가는 송풍기 소리와 검투사들의 증폭된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두 사내가 무대 위로 원을 그리며 돌자 몰리의 렌즈눈 위로 반사된 색상들이 오일처럼 미끄러져 지나갔다. 홀로그램들은 열 배 크기로 증폭되어 있었다. 열 배의 배율에서 그들이 쥐고 있는 단검은 일 미터에 조금 못 미치는 길이였다. 단검을 쥔 검투사들의 파지법(把持法)은 손가락을 틀어쥐고 엄지는 칼날과 일직선상에 놓인 양이 검술가들의 파지법과 같다는 것을 케이스는 기억해냈다. 단검들은 저절로 움직이는 듯이 보였다. 두 사내가 검투시합의 개막을 기다리는 가운데 그것은 자신들의 안무가 그려내는 호와 길을 따라 긴박성이 결여된 종교의식처럼 점과 점의 교차 속에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위로 쳐든 몰리의 얼굴은 평온하고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서 먹을 거나 좀 사올게." 케이스가 말했다. 그녀는 검무에 정신을 빼앗긴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스는 이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걸어갔다. 너무 어둡고 너무 조용했다.
  관중들은 그가 보기에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진정한 밤의 도시의 군중들이 아니라 완전 환경 계획 도시로부터 내려온 기술자들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 검투기장이 모 기업의 휴양오락 위원회로부터 인가 받은 곳임을 뜻할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 재벌기업을 위해 평생토록 일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지 그는 잠시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회사에서 제공되는 주택, 사가(社歌), 회사장(會社葬)...
 돔을 한 바퀴 다 돌다시피 하고서야 비로소 그는 매점을 찾아냈다. 그는 야끼도리 꼬치와 밀랍판지로 포장된 큰 맥주 두 병을 사들었다. 홀로그램을 흘낏 올려다보니 한 사내의 가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것이 보였다. 진한 갈색 소스가 꼬치에서 그의 손 마디 위로 뚝뚝 흘러내렸다.
  이제 7일만 있으면 접속해 들어갈 수 있다. 지금이라도 두 눈을 감으면 매트릭스가 보일 것만 같았다.
  홀로그램의 검무가 휘젓고 지나가자 그림자들이 꿈틀대며 비틀렸다.  문득 그의 양 어깨가 두려움으로 움추러 들기 시작했다. 식은 땀이 그의 갈비뼈를 타고 방울져 흘러내렸다. 수술이 실패했다면... 그는 아직도 여기에 고기덩어리인 채로 남아있고, 단검들의 원무에 눈길을 고정한 채 기다리고 있는 몰리도, 티켓과 새로운 패스포트, 그리고 돈을 가지고 힐튼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미티지도 없다면... 이 모든 것이 꿈이요 일말의 가치도 없는 환각에 불과하다면... 뜨거운 눈물이 그의 시야를 흐려 왔다.
< NEURO_03.4에서 계속 >

==========================[ 용어 설명 ]==========================

네온 국화단 대원들: sons of the neon chrysanthemum.
국화는 일본의 이미지를 상징하고, 네온은 사이버펑크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윌리엄 깁슨의 다른 소설들에도 등장하고 있는 네온 
국화단이란 케이스가 살아가는 근미래의 다국적 실세중 하나인 
야쿠자의 한 분파인 것같다.

  cf.  son: (학교 등의) 일원, 자제; 당원; 계승자; (특정 직업의) 종사자.

버건디: burgundy. 암청색이 감도는 적색, 암홍색 (reddish-pupple color).

공기팽창형 돔: inflated dome.

기밀실: air lock. [토목 공학] 에어 로크. 공기 잠함(潛函)과 같은 압축 공기
          속에서 작업할 때 출입구에 설치하여 외부 기압과 작업
          기압을 조정해주는 기밀실.

완전 환경 계획 도시: arcology ( ARchitectural eCOLOGY )

  경정맥(頸靜脈)에서 솟구쳐나온 피가 홀로그램광(光)의 붉은 핏방울이 되어 흩뿌려졌다. 관중들의 환호성,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자들, 계속되는 환호성... 껌뻑이며 꺼져가는 홀로그램 속에 한 사내의 모습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목을 찌르는 강산성 구토물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왔다. 
케이스는 두 눈을 감고 심호흡한 뒤 눈을 떴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급한 걸음으로 막 그의 앞을 지나쳐 가던 린다 리. 공포에 질려 있는 그녀의 잿빛 눈동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일전의 그 프랑스풍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는 사라져 버렸다. 어둠 속으로.  완전 무의식적인 반사 동작으로 그는 맥주와 야끼도리를 팽개치고 그녀를 쫓아 달려갔다. 그때 자신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았다.
  머리카락처럼 가는 붉은 빛줄기 하나가 나타나 눈에 잔상을 남겼다. 그것은 케이스의 얇은 신발창 밑의 콘크리트를 태워버렸다.
  그녀의 흰색 스니커즈 운동화가 언뜻 눈에 스쳤다. 벽이 커브를 이루는 곳 가까운 쪽이었다. 또다시 레이저빔의 유령상이 그의 망막 위를 가로질러 찍혔다. 그것은 달려가는 그의 시야에서 위아래로 춤췄다.
  누군가가 그의 발을 걸었다. 앞으로 푹 고꾸라지는 그의 양 손바닥을 콘크리트 바닥이 강타했다.
그는 몸을 굴리며 발을 찼지만 상대를 맞히지는 못했다. 성게 가시 같은 헤어스타일의 깡마른 금발 소년이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무지개빛 후광이 그의 머리 뒤를 비추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한 사내가 단검을 높이 쳐든 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몸을 돌리고 있었다. 소년이 미소를 지으며 소매에서 뭔가를 꺼냈다. 면도날이었다. 세 번째 명멸한 레이저빔이 그 칼날에 붉은 빛을 새기며 그들을 지나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케이스는 그 면도날이 수맥 탐지자의 막대기처럼 그의 목을 향해 내려 꽂히는 것을 보았다.  소년의 얼굴이 벌떼처럼 우웅대며 일어난 미세한 폭발의 구름 속에 뭉게져 버렸다. 초당 20발을 연사하는 몰리의 단침총! 소년은 경련을 일으키며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케이스의 다리 위로 쓰러졌다.  케이스는 매점쪽을 향해 어둠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레이저빔의 루비빛 바늘이 당장이라도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아래를 내려다 봤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린다를 발견했다. 그녀는 콘크리트 기둥 밑둥에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었다. 불에 익은 고기 냄새. 관중들은 승자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외쳐대고 있었다. 맥주가게 주인은 시커먼 걸레로 맥주통 꼭지를 닦아내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스니커즈 운동화 한 짝이 벗겨져 그녀의 머리 곁에 뒹굴고 있었다.  벽을 따라 걷자. 콘크리트벽의 커브를 따라서. 두 손은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계속 걷는거다. 이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얼굴들을 지나서. 모든 눈길들은 링 위로 투사된 승자의 홀로그램 이미지로 쏠려있었다. 면상에 칼자국이 난 유럽인의 얼굴이 휘황한 시합의 불빛 속에서 춤추는 모습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그의 입술은 금속 파이프의 짤막한 대를 물고 있었다. 코를 쏘는 대마초 냄새. 케이스는 계속 걸어갔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케이스." 몰리의 거울 눈이 짙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당신 괜찮아?"
그녀 등뒤의 어둠 속에서 뭔가가 힘없이 울며 그르륵거렸다.
  케이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싸움은 끝났어, 케이스. 이젠 돌아가야지."
  그는 몰리 옆을 지나 다시 어둠 속으로걸어가려 했다. 뭔가가 죽어가고 있는 그 어둠 속으로. 그녀가 그의 가슴을 손으로 막았다. "당신의 막역한 친구의 친구들이야. 당신 여자를 대신 죽인거지. 이 바닥 친구들과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니었나 보지? 이봐, 우린 당신 프로파일을 조사할 때 그 늙어빠진 개자식에 대한 프로파일도 일부 손에 넣었었어. 그 자식은 돈 몇 푼에 누구든지 없애려 드는 놈이야. 저 쪽에 있는 놈이 그러는데 저 여자가 당신 RAM을 장물아비한테 넘기려는걸 찾아냈다더군. 여자를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편이 더 싸게 먹히지. 비용이 좀 절약되거든.... 레이저건을 든 놈을 족쳐서 다 불게 만들었지. 우리가 마침 여기에 있었던건 우연의 일치였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거든." 그리고는 굳게 다무는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한 일자를 그리고 있었다.
  케이스는 두뇌 활동이 정지해버린 느낌이었다. "누구지," 하고 그가 물었다. "저 자들을 보낸게 누구야?"
몰리는 피로 얼룩진 저장 생강 주머니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녀의 두 손이 피로 끈적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희미한 신음소리를 내며 죽었다.  암거래 병원에서 수술후 검진을 마친 뒤, 몰리는 케이스를 공항으로 데려갔다. 아미티지가 호버크래프트를 전세내어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스가 마지막으로 본 지바市의 모습은 완전환경 계획도시의 검은 형상들이었다. 그러나 그 검은 바닷물과 수없이 떠다니는 쓰레기 더미들은 연무 속으로 곧 사라지고 말았다.

==========================[ 용어 설명 ]==========================

경정맥: jugular (= jugular vein). 인후, 목, 경부(頸部)
 
수맥 탐지자의 막대기: dowser's wand.수맥이나 광맥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점(占) 막대기.

대: stem. ((美俗)) 아편 파이프.

대마초: hashish (= hasheesh). 인도 대마초로 만든 마취제.

호버크래프트: hovercraft. 고압 공기를 아래쪽으로 분사하여 기체를
              지상이나 수상에 띄워서 나는 탈것.

형상들: angles. 어쩌면 arcologies의 외관에 대한 묘사라기 보다는,
        그 구조물을 이루고 있는 문자 그대로의 angle iron, 즉
        거멀장, 앵글 철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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