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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히틀러 평전 [요아힘 C 페스트] 02

by Casey,Riley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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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 평전

요아힘 C. 페스트

    나의 투쟁
  그는 7월초에 쌓여 잇던 책더미를  향한 것과 같은 똑같은 을 가지고 격
렬하게 <나의 투쟁>집필에 달라붙었다.   석 달 반 뒤에는 책의  제 1부를 
완성하였다. 그는  "자신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영혼으로부터  써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밤늦게까지 타자기 소리가 울려나왔고, 그가 좁
은 방에서 친구인 헤스에게 원고를 불러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임 완성된 부분을  대개는 토요일 밤에 소년들처럼  자기를 둘러싸고 앉은 
동지들에게 낭독해 들려주었다."
  이 책은 처음에 '4년 반의 투쟁'을 청산하고 정리하는 의미로 시작되었지
만 점차 자서전, 이데올로기적인  논문, 전략적 행동방침 등의 혼합물로 발
전하게 되었고 동시에  지도자 신화를 완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정치로 
들어서기 이전의 비참하고 어두운 시절은 이 책의 변용시키는 묘사룰 통해
서 축적과 내적인 준비과정이라는 성격을 얻었다. 곤궁과  결핍으로 대담하
게 짜여진 모습과 고립을 통해서였다. 그것이 신의 뜻이기도  한  30년간의 
사막 생활로 바뀐 것이다. 센세이셔널한 배후를 밝힌  체험고백을 기대하였
던 출판업자 막스 아만의 원고가  딱딱하고 지루한 것을 보고 대단히 실망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명예욕은  처음부터 아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는 폭로하려고 했던 게  아니
라 최근에 생겨난  지휘 요구를 위하여 지적인  바탕을 튼튼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그토록 찬양한 대로 정치가와  강령입안자가 천재적으
로 결합한 예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이 대단히 높은  의도에 대하여 열쇠
가 되는 구정이 책 제 1권 한가운데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 들어 있다.
  정치가의 기술은 가능성의 기술이라는 말이 진정 맞는다면 강령입안자야
말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원하면 신들의 마음에 들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다. 인류의 기 긴 세월동안 정치가와  강령입안자와 결합되는 
일은 단  한번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이 내면적일수록  정치가의 
활동에 반대하는 저항도 더 커지고 마련이다.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평범
한 시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요구들을 위해서 일을 해 야 할 뿐 아니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목적들을 위해서도  일을  해야한다. 그래서 
그의 삶은 사람과 미움으로 찢기게 된다. 
  그럴수록 성공은 드물다. 그렇지만 수백 년만에 한 번  어떤 사람에게 성
공이 닥쳐오면 아마도  그의 노년에는 다가오는 명성의  나직한 빛이 그를 
둘러싸게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위대한 사람들은 역사에서는 마라톤  주
자들이다. 당대의 월계관은  죽어가는 영웅을 머리에 겨우 씌워지게 될  것
이다.

    콤플렉스와 왜곡된 사상의 집합체
  이렇게 나직한 빛에 들러싸인 현상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 이 책의 끊임없는 암시내용이다. 죽어가는  영웅의 모습은 
자신이 겪은 실패를 비극적으로 변용 시키려는 노력이다.  히틀러는 비상한 
진지함으로 갈채를 배려하면서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 책으로  그는 학교교
육이 부족하였지만 그리고 미술  아카데미에서 실패하고 남자 하숙집의 치
명적인 과거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시민적인 교양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입증
하려고 하였다. 자기가 생각이 깊고  현재의미 말고도  미래에 대한 구상을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넘은 의도였다.
  큰소리치는  앞모습 뒤에 자신의  지적인 능력에 대한 독자의 의심을 두
려워하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의  염려가 분명하게 웅크리고  있다. 
자신의 언어에 기념비적인 특성을 주기  위해서 그는 자주 명사를 여러 개
나 길게 나열하였다.  많은 명사들은 형용사나 동사에서 만들어 낸  것이어
서 그런 단어들의 무게는 공허하고도 인공적인  효과를 냈다. "민주적인 결
정을 통해   성취된 동의과정에서, 라는 의견을  대표함으로써" 전체적으로 
호흡이 없는 언어이고  자유가 없으며 마치 경련상태에 있는 것  같다. "최
근에 나는 이 새로운 세계의  이론적 문헌에 탐닉하고 그 가능한 효과들을 
분명히 하면서  이 효과들을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생활에서의 실질적인 
현상과 그 효율성의  사건들과 비교해보았다. 점아 나는 내 자신의  확신에 
대한 확고한 기반을 얻었다.  그래서 이 시기 이후로 이 문제에서  나의 내
면의 관점의 변화를 일으킬 입장에 서지 않게 되었다.
 열 추종자들의  교열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수많은 문체사의  탈선은 박학다식한 척하는  저자의 태도에 원인이  있다. 
'우리 민족의 정치적 오염의  쥐새끼들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학교 교육
을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광범위한 대중의  기억으로부터 갉아 먹어버렸고, 
'제국의 깃발을, 전쟁의 품에서'꺼냈다고 혹은 사람들을 '단순히 육체로부터 
타락하도록' 만들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루돌프 올덴은 히틀러 문제의 과도한 가난으로 때때로 놀이가 어떠한 피
해를 입는가를 지적하였다.  예컨대 히틀러는 곤궁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
다.  "조라  죽이는 독뱀의 집게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가람은 그  독니를 
절대로 알지 못한다' 이  몇 마디  말에는 너무나도 많은  오류들이 있어서 
논문 한 편을 써도 제대로 고 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독뱀은 집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인간을 조여 죽일 수 있는 뱀은  독니를 갖고 있지 않
다. 그러나  인간이 그런 뱀에게 목  졸라 죽임을 당하더라도 독니를  알게 
되지는 않는다."
  이 책에는 사고의 과장된 무질서와 동시에 그런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날
카로운 확신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확신들은 깊이  비합리성에서 직접 
튀어나온 것이며 드물지 않게  적절한 형식이나 인상적인 그림들을 보여주
고 잇다. 이 작품을 특징짓는 모순되고 차단된 모습이다. 그의 완고함과 완
강함은 폭풍우 같은 구절들에 대한  억누를 길 없는 취향과 모순된다 언제
나 느낄 수 있는 양식화  의지는 자기통제의 결핍과 모순되고 논리는 둔감
과 모순된다. 단조롭고 광적으로 억누른 자기중심주위만이 모순  없이 드러
난다. 이러한 작  중심주의는 책이 두꺼우면서도 이 책에 사람인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과잘 어울린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읽기가  매우 힘들고 까
다롭지만 그런데로   상당히 정확하게 저자의 초상화를 보여준다. 그는  남
이 자기를 꿰뚫어볼까 하는 근심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를 보여주는 사람이
다.
  자기  책의 이러한 폭로적인  특성을 알아채고 히틀러는 뒷날 이 책과도 
거리를 두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간혹  <나의 투쟁>은 <민족  관찰자>의 
사설들을  형편없는  문체로 엮어놓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창살  속의 
공상'이라고 밀쳐버리기도  하였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내가 제국수상이 
되리라는 사실을 1924년에 미리 알았더라면   이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
라는 점이다."  그는 전략적인 혹은  문체사의 확신들만을 유보하고 싶다고  
암시하였다. "내용상으로는 아무것도 고치고 싶지 않다"
교양 시민적인 과시욕과  오스트리아 관리 스타일의 과장  섞인 질질 끄는 
벌레 같은 복합문 등 책의  외람된 문체는 책에 접근하기를 어렵게 만들었
다. 그 결과  나중에 1천만 부나 찍어서 보급된    이 작품은 다른  수많은 
의무 문헌들의  운명을 이어받아서 읽히지  않고 서가에 꽂히기만  하였다. 
언제나 독같이 암울한 강박관념을  드러내는, 환기되지 않은  그의 모든 콤
플렉스와 감정이 기반하고  있는 의식 바탕도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  히틀
러는 자신의 의식을 바탕을 잘 준비된 연설가로 등장할 경우에만 감출  수 
있었다.
  이상하게 파괴적인  소문이 독자로 하여금  어떤 페이지들, 특히  매독에 
관한 장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전체적으로   수없이 지저
분한 표현들,  뒤틀린 그림들,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문체의 가난뱅이  냄새 등이 독자들에게 역겹게 느껴졌다. 전쟁과  전
후 활동에 몰두해서 란츠베르크에 갇힐 때까지 고작해야 어머니 같은 여자
친구들만 알았던 망가진 젊은 남자의 금지 관념들은 그가 세계상에 부여한 
답답한 흐름에 반영되었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어떤 여자와 연관된 소문
에 빠질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역사, 정치, 자연 혹은 
삶에 대한 모든 관념들은 한때 남자 하숙집에 살았던 사람의  공포와 욕망
을 담고  있다. 언제가지나 계속되는  사촌기의 자극적인 발푸르기의  밤의 
꿈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세계를 짝짓기, 음란 성 도착증, 능욕, 
혈통 오염 등의 그림들로만 본다.
  유대인의 최종  목표는 다른 민족들은  탈민족화하고 뒤죽박죽 사생아로 
만들고, 최고종족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민족의지식인들을  제거해서 민족 
뒤섞기를 지배적인 추세로  만들고 그 자리에 자기  만족을 투입하는 것이
다. 그는 계획적으로 여인들과 소녀들을 망칠 분 아니라  대규모로 다른 사
람들의 혈통이 제한을 뚫고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유대인들이야말
로 라인  강에 검둥이들을 데려오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똑같은  속마음과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사생아 만들기를 강제로 도입해서 증오스런 백인 종
족을 파괴하려는 것이다.  백인의 문화적, 정치적, 수준을  덜어드리고 스스
로 주인의 자리에 오르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멋쟁이  패션 제품을 통
해서 육체의 아름다움이 덜 중요해지지 않았더라면 수십만의  소녀들이 다
리가   휘고 역겨운  유대놈 사생아들에게 유혹된다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들 검둥이 기생충 민족은 계획적으로 우리의  경험 없고 젊
은 금발 소녀들을 욕보이고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서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민족주의 세계관으로 보면 인간이 개와 말과  고양
이의 품종 개량만을 근심하지 말고  인간을 높이는 일을 걱정하는 더 고상
한 시대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국가사회주의의 특성
  분명히 노이로제  증세를 보이는 이  책의 발산물 부자연스러움,  조각난 
무질서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의미를 낮추어 보
는 이유의 일부가 되어왔다.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아도 그럴 
수도 없었으며, 이런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헤르만 라우슈닝은 
썼다. 그리고 더욱 정밀한  배경체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확언하였다. "원래 
히틀러가 바라고 있던 것은 , <나의 투쟁>에 들어 있지 않다"
  상당한 문체상의  광채와 사료적 효과를  가지고서 그는 국가사회주의를 
'허무주의 혁명'이라고 해석하였다. 그의 말로는  히틀러와 히틀러가 주도한 
얻을 만한 어떤 이념이나 대략적인  세계관 없이 효과를 보아가면서  지지
를 얻을 만한  분이기와 경향들을 그때그대 이용했을 뿐이라고 한다.  민족
주의, 반자본주의, 관습숭배, 외교상의  개념들, 그리고 종족 신념이나 반유
대주의 마저 언제나 흔들리는 완전히 원칙 없는 기회주의에 노출되어 있었
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회주의는 아무것도 존중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믿지 
않았고, 가장 화려한 맹세조차도 전혀 가차없이 깨뜨리는 것이다.
  국가사회주의 전략적인 배신 특성은  그야말로 끝이 업으며 모든 이데올
로기는 권력 의지를 감추기 위한 시끄러운 앞면일 뿐이라고  한다. 이 권력
의지는 언제나 오직 자신만을 원하면  모든 성과를 오직 거칠고 야심 만만
한 새로운 모험을 위한  기회와 단계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의미도, 구체적
인 목적도, 만족도 모른 채 말이다.  " 이  운동을 이끌어 가는  힘들은 완
전히 조건도 강령도  없으며 행동만 준비되어 있고, 그 최고의  핵심멤버들
은 본능적이며, 지도부의  정예요원들은 극히 사려 깊고 냉혹하고 매운  교
묘한 자들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자신의 운동에  대해서 항상 제시할  수 
있는 어떤  목적도 가진적이 없으며 지금도  없다." 30us대에 어떤  사람이 
국가사회주의 이면을 보고 조롱조로  '표상 없는 의지의 세계'라고 말한 것
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국가사회주의가 언제나 높은 정도의  적응력을 보였고 히틀러 자신이 강
령과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는 것은 사실이
다. 예를 들면 25개 조항이  낡은 다음에도 근 거기 매달렸다. 전략적 고려
에서 그는 모든 변화는 혼란을  부를 뿐이고 어차피 강령이란 상관없는 것
이라고 고백하였다. 국가사회주의  기본서로 여겨지는 ,중요 전락가 알프레
트 로젠베르크의 대표저서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자신은 '너무 어려워서, 극히 조금밖에 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가  정통이론을 발전시키지  않았고, 무릎만  꿇으면 
정통 사상을  입증한 것을 여겼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직  전략적으로만 
생각하는 성공의지와 지배의지였던  것은 아니다. 권력만을 절대적인  것으
로 이데올로기는 그때그대의 요구에  따라 멋대로 이용하는 종류의 권력의
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국가사회주의는 실질적인 지배와  독트린 두 가지 다였다. 그 두  가지는 
서로 얽히고  뒤섞여 있다. 개별적으로  전해지는 목적의식 없는  권력욕에 
대한 극단저긴 고백들을 살펴보아도 히틀러와 그의 가까운 주변 사람은 언
제나 자기들이 가진  선입견과 억눌린 유토피아의 포로들이었다.  국가사회
주의는  권력을 높여줄 가능성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고서는 이념상의 동기
를 받아들이기 않았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권력의 고백들은  대단히 희미
하고 알아보기 힘든 것이라도 이념적 동기를 빼고는 이해되지 않는다.   
  히틀러는 그의 놀라운 인생행로에서 전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든지 기민한 전략으로 쟁취하였다. 그의 성공에 나타나는  상당히 인상적인 
상황이었다. 성공  자체는 이념화된 공포, 희망  비전들이 복합체와 관계가 
있다. 히틀러 자신이 그의  성공은 강제적인 사유능력과 관계가 있다. 그는 
역사와 정치, 권력의 인간존재에 대한 몇 가지 기본  문제들에 대한 사색에
서 그러한 사유능력을 이용할 줄 알았다

    히틀러 세계상의 일관성
  그러므로 <나의  투쟁>으로 세계관을 표현하고자  한시도가 불충분하고 
문학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비록 단편적이고  무질서한 것
이긴 해도 이 책은 분명히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
하고 있다. 히틀러가 원했던 것이 실제로  그 책 안에  쓰여 있다. 비록 그 
시대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흩어진 부분들
을 정리하고 그 논리적 구조들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마침내 '숨막
힐 정도로 철저하고 일관된  이면의 건물'을 찾아내게 된다. 히틀러는 그것
을 란츠베르크 감옥 이후 몇 년 동안 계속 다듬고 체계화해 나갔지만 전체
적으로 더 이상의 발전을 겪지 않았다.
  초기의 고정관념들은 세부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상승의 세월과 
통치의 세월 동안 계속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지막을 앞에  두고도 그 마비
시키는 힘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허무적인  태도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다윈주의 적인 생존투쟁 이념으로 둘러싸인 공간의지, 반공산주의 , 반유대
주의  등은 그의 세계상의 일관성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최초와 최후의 진
술내용을 결정짓고 있다.
  그것은 물론 새로운 이념이나  새로운 사회적인 행복을 제시하는 세계관
은 아니었다. 그것은 19세기 중엽 이후로 넓게 퍼진, 기묘한 민족주의의 천
박한 학문에  속했던 수많은 이론들을  멋대로 짜맞춘 것이었다.  히틀러의 
'스폰지 기억력'이  지나간 세월의 탐욕스런 독성  빨아들인 것들은 놀라운 
변화를 거쳐서 상당히  새로운 맥락으로 다시 나타났다. 시대의 이념의  페
허에서 일으켜 세운,  어두운 구석들이 없지도 않은 대답하고 두려운  건축
물이었다.
  히틀러의 독창성은 ,  극히 이질적이고 거의 조합이 불가능한 것들을  하
나로   엮어내는 능력이었으며 이데올로기라는  조각이불에 밀도와 구조를  
부여하는 능력이었다. 그의  지성은 사상들을 생산하지는 못했으나  거대한 
힘을 생산해냈다는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은  이념 혼합체를 조여서 
단단하게 마들고 거기에 얼음장같은 맹혹성을 부여하였다.
  휴 트레버 로퍼는 이러한 정신의 차가운 착란세계를  인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정말  위풍당당하게 화강암처럼 단단한 모습으로  그러면서도 
불쌍한 정도로 뒤죽박죽 잔뜩 긁어모아서 썩어가는 쓰레기더미에 둘러싸인 
채 그  어떤 야만인이 입상처럼 거대한  힘과 거친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낡은 당통과 죽은 해충들, 재와 껍질들과 오물, 여러 세기의 지적인 쓰레기
들에 둘러싸인 채"
  어떤 사상도 권력문제를 질문해보는  히틀러의 능력이 특별한 무게를 지
니고 나타난다.  재치 있는 이념으로  인해 오히려 실패해버린  민족운동의 
대표자들과는 반대로 그는 사상 자체를 '단순한 이론 '이라고 해서 중히 여
기지 않았다. 실천적이고 조직능력이 있는 핵심이 그 안에  들어 있을 경우
에나 사상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그가 당 목적에 맞는 관점들에  다른 생
각이라고 부른 것은 모든  이념, 경향들, 심지어는 맹목적 신앙에도 권력에 
걸맞는 ,그러니까 원래 의미에서 정치적 형식을 부여하는 그의 능력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두려움에  사인 시민 계급의 방어이념을 요약하였
다. 그 원래의 관념들을  더 조잡하게 만들고, 공격적이고 목적의식 뚜렷한 
행동이론을 마련한 것이다.  그의 세계관에는 시민시대의 악몽들과  지적인 
유행들이 모드 다 드러나  있다. 1789년 이후로 잠복해서 작용하는 ,러시아
와 독일에서 활성화된 좌익혁명에 대한 거대한 공포가 사회적 공포로 나타
나다.
  종족적, 생물학적, 공포로는  도이치계 오스트리아 사람으로써 외세에 대
한 공포가  있다. 서툴고 몽상적인  도이치사람들이 민족들 간의  경쟁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는 민족적인 염려가 민족주위 적 공
포로 드러나며 자기계급의 위대성의  시대는 끝나고 안전의 느낌이 부서지
는 것을  바라보는 시민계급의  시대공포도 나타난다.  히틀러는 소리였다.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 내부에 어느 것도 뿌리를  내리지 못
하고 있다. 모든 것은 외면적이며 우리를 스쳐지나간다. 우리민족의 생각은 
불안하고 성급해졌다.  삶 전체가 완전히 찢기고 있다"

    종말론적인 다윈주의
  무한한 공간을 탐하고 빙하기에서  움직이고 싶어하는 그의 극단적인 성
향은 이러한 근원적인 공포감을 세계위기의 징후로 확대시켰다.  이러한 위
기 속에서 시대들이  태어나고 몰락해 가고, 인류의 운명은 유희의  대상이 
된다. " 이  세상은 끝에 왔다." 그는  거대한 세계질병의 관념에 사로잡혔
다. 바이러스, 흰개미의  폭식, 인류의 궤양 등에  의한 질병이었다. 나중에 
그가 희르비거의 빙하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지구의 역사
와 인유발전이 강력한 우주적인  파국에 이른다는 주장이 그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몰락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열광하였던
가.
  이런 세계상에 들어 있는 대재앙의 모습에서 그는 자신의 특별한 소명의
식을 이끌어냈다. 역사 앞에서 사명감을 가진 치유하는 특성이었다. 전쟁중 
마지막 시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군사적 필요성에 거역하면서가지도 그
가 유대인 근절 작업을 계속해 나간,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든 일관성 병적
인 고집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일상의 이해관계를   훨씬 
넘어선 거인들을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 우주를 구하기 위해  선택되어
서 악을 '다시 악마에게 돌려보내는' '다른 힘'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에 뿌리
를 박은 것이었다.
  강력한 우주적 싸움이라는 생각은 이  책의 모든 주장과 앞모습을  배하
고 있다. 그러한 주장들일 아무리 부조리하고 공상적인  것일지라도 그것들
은  이 생각의 해석에 형이상적인 진지함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어둡고 장
엄한 연극적 관점으로 이끌어간다.  "우리는 몰락할지도 몰라, 아마도 그러
나 우리는 세계를  함께 끌고 갈 거야 무스피리, 세계방화  말이야" 언젠가 
그는 종말론적 기분에 휩싸였을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의 투쟁>에는 그가 자신의 맹세에 세계를 함께 끌어들이는 우주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구절들이 수없이  만하다. 그는 이렇게 확인하였다. "공산
주의라는 유대식  이론은 우주의 토대로서,  사상적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질서를 종말로 이끌어 갈 것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세계의 
질서원칙을 끌어올리는 이런 무의미한 가설을 우주적인 영역에서 생각하려
는 항거할 길 없는 히틀러의 성향을 보여주고 이사. 그는 '별들' ' 혹성들' '
세계의 기' '수백만 년들'을 극적인 사건 속으로 함께 끌어들이고 '창조' '지
구' '천공'등을 배경으로 이용하였다.
  그것은 분명한 방식으로   모두에 대한 모드의  싸움이라는 원칙 약자에 
대한 강자의  승리라는 원칙을 감추어주고  일종의 종말론적인 다윈주의로 
발전해 나가는 배경이었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지구는 떠도
는 술잔과 같은 것이고 따라서  언제나 가장 강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수만 년 전부터" 그는 영원히 계속되는  치명적인 상
호 갈등에서 일종의 세계 법칙을 찾아냈다고 믿었다.
  자연은 생명체들을  이 지구에  자리잡게 하고서 힘에 의한 자유로운 게
임을 구경한다.  용기와 근면성에서 가장강한  존재가 자연의 총아가  괴어 
존재의 지배권을 얻게 된다.  오직 약하게 태어난  자만이 이런  법칙을 잔
혹하다고 느낀다. 그럼으로써 그는  오직 약하고 제한된 인간이 될 뿐이다. 
이 법칙이 지배하지 않는다면 모든  유기적 생명체의 최고발전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보존의 욕구만이 언제나  마지막에 승리하게 
마련이다. 그러한 욕구에서  보면 이른바 휴매니티란 멍청함,  게으름, 망상
적인 아는 체하기 등의 혼합을 표현한 것으로서 3월 햇빛에 눈처럼 녹아버
리고 마는 것이다. 영원한  싸움을 하면서 인류는 위대해졌다. 영원한 편한 
속에서 인류는 몰락하고 말 것이다.

    단단한 자연법칙
  이러한 '단단한  자연법칙'은 모든 사색의 출발점이며  연관점이 되고 있
다. 그것은  역사란 다름아닌 생존공간을  둔 민족들 간의  생존싸움이라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생존  싸움에 '모든 가능한 수단'이 다 허
용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설득, 간계, 영리함. 인내 .선의,  교활함, 그리고 
잔인성까지도 말이다.
  전쟁과 정치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모순도 존재하지 않으며, '전쟁
이야말로 정치의 최종목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사건의 규범들로 일
치하는 것만을  존중하는 정의 혹은  도덕의 개념들을 특징짓는  생각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공격성을 강조하는  귀족주의적인  지도자 이념과 종족
적인 특질 도태의 이념들에 양분을 주었다. 그는 유럽 전체에서 '형통에 다
른 고기잡이'를  해서 금발에 흰  인종이 '자신의 혈통 근거를  확장'시키는 
것을 돕게 만들고 ,패하지 않는 종족으로 만들려 한다고 했다.
 이렇데 전체적인 전투 철학의  표지에서 보면 복종이 미덕보다 더 중요하
고 헌신의지가 통찰력보다 광신적인  맹목성이 최고의 미덕보다 더 중요하
였다. 결혼은 자기  주장의 결합이고, 집은'생존 싸움을 위한  성'이 되었다. 
동물 세계와 인간사회를 거칠게 유추해서 히틀러는 가차 없는 사람들이 감
성적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찬양하였다. 그의 말로는 원숭이들은  모든 
것은 '아웃사이더  적으로 간주하고  덤벼들어  죽인다. 원숭이에게 타당한 
것은 더 높은 차원에서 인간에게도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언급에 아이러니가 얼마나  적은가 하는 것은 자신의 채식주의를 
보존하기 위해 원숭이의 식사습관을 예로 들면서 원숭이가 올바른 길을 보
여준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한 일이다. 도한 자연을  보면 예컨대 자
전거는 올바른 것이고 비행선은 '완전히  미친 짓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자연법칙을 탐구하고 그것을 다루는 길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
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자연상태의   잔인한 도태원칙보다 '더  나은 생각'을 해 
낼 수가 없다. 자연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다."고양이가 쥐를 먹는다는 것이 
누구 잘못일까?"라고 그는 비웃었다. 이른바 인간의 휴매니티란 '인간의 허
약함에 봉사할 뿐이며  사실은 자기 존재를 가장 잔혹하게 절멸시키는  짓'
이다. 싸움, 굴복, 파괴 등은 변경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한존재는  다른 존
재의 피를 마신다. 하나가  죽어야 다른것의 양분을 얻는다. 휴매니티 같은 
헛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
  타인의 권리 타인의  행복의 요구에 대한 히틀러의 완전한 무관심,  그의 
극단적인 부도덕성은  "신적인 존재법칙에 조건  없이 굴복한다"는 생각에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시대의  데카당스와 약자의식
을 보충해보려는 후기 시민사회 이데올로기의 요소가 드러나  있다. 주저하
지 않는 갊은 찬양하고 가차없고   원시적인 것을 본래의 것으로 여기려는 
경향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히틀러가 자연법칙에 기대어 자신의  개인적인 냉정함
과 감정 없음을 변명하려 했다고 추측된다. 초개인적인  원칙을 들이댐으로
써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싸움,  살인, '피의 희생 '등을 신의 계율을 겸손하
게 실현하는 행동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에게서 나  자신을 지
키는 것은 주님의 일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라고 그는 <나의 투쟁>에 
썼다 . 그리고 거의 20년이 지난 다음전쟁과 유대인  근절의 한가운데서 도
덕적인 만족감을 지닌 채 이렇게 확인하였다. "나는 양심이 깨끗하였다."
  전쟁과 파괴는 위협받는  세계의 정치의 도덕이며 형이상학이었다.  자기
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거대하고 불확실한 거리를 두고 시대들을 눈앞에 떠
올려보면, 그리고 민족들과 문명들의 몰락 이유들을 생각해보면  언제나 본
능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곤 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지배체계
들이 피로, 허약 상태, 파국에 도달하는 것은 자연을  무시한 것, 특히 종족
을  뒤섞은 일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생명체가  종족의 순수성
에 대한  뿌리 깊은 총동을 존중하고  "박새는 박새에게, 참새는 참새에게, 
황새는 황새에게, 들쥐는 들쥐에게 " 가는데  반해서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고 생물학적인 배신을 하려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리하르트 가그너가 죽은 날인1883년 2월 1일에 베네치아에서  쓰
기 시작하였지만 완성은 못했던<인간의 암컷에 대해서>라는 논문에서  다
루었던 주장이었다. 민족들이  성 불능에 빠져 늙어죽는 것은 원래의  질서
를 거부한 데  대한 복수라는 것이다. "피의 혼합과 그를  통해서 생겨나는 
종족 수준 저하야말로  모든 문명들의 죽음의 원인이다. 인간은 전쟁에  패
해서 몰락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순수한 피에만 깃들여 있는 저항력 의 상
실로 몰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좋은 종족이  아닌 것은 폐품
이 되고 만다.

    창조적인 종족핵 이론
  그 뒤에는 창조적인  종족핵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에 따르면  태초
부터 소수의  아리안족 엘리트가, 우둔하고  역사도 없이 스러져간  열등한 
민족들의 대중을  지배해 왔다. 종속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들의 
천재적인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국가들을 건설하고 문명들을  만
들어낼 수 있는 이 빛나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은 "언제나 새로이 불을 만
들어내었고 그 불은  인식이었다. 그것은 말없는 비밀의 밤을 밝혀서  사람
들에게 지상의 다른 생물들의 지배자가 되는  길을 보여주었다." 이 아리안 
종족핵이 종속된 종족과 섞이기 시작하면 문명의 하강과  몰락이 나타났다. 
"지구의 이 지역에서 인간의 문화와 문명이란 아리안족의 존재와 뗄 수 없
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종족의 죽음이나 몰락은 이  지역에서 문
명 없는 시대라는  어두운 베일을 다시 내려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것
이야말로 인류가 새로 직면한 위험이라는 것이다. 고대의  위대한 왕국들의 
몰락과는 달리 이제는 문명의 몰락이  아니라 더 높은 인종 자체의 종말이 
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리안 핵의 파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전되어 있
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서 게르만 혈통은 점차 쇠진을 향해 다가가고 있
다."고 히틀러는  절망해서 말했다. 다가오는  승리를 의식하면서 사방에서 
어둠의 세력들이  몰려들고 있다. "유럽을  생각하면 나는 몸이 떨립니다." 
하고 그는 연설에서 외쳤다.  구대륙은 이제 '피와 슬픔의 바다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비겁한  허풍쟁이들과 자연을 비판하는 자들'이 자연
의 기본적인 법칙을 공격하려 하고있으며, 수많은 위장 아래  몸을 감춘 채 
'종합적인 총공격'의 요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공산주의, 평화주의,  국제연맹, 모든 국제적  운동과 국제기구들, 그리고 
유대-기독교의 사랑도덕 이 도덕의  전세계적인 변형태들이 인간을 설득하
려고 한다. 즉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고 감히 자기 충동의  주인이 되어서 
영원한 평화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 
하늘에 대하여 반항'할 수 없는  법이다. 의심할 수 없는 자연의 의지는 종
족들의 존재와 싸움을 통한 발전을 인정하고 있으며 주인과 노예로 갈라지
는 것과 잔인한 종족유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체계에서  어렵지 않게 고비노의  흔적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종족불평등에 대한 고비노의 이론은 최근의 종족 뒤섞
임에 대해 공포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명의  몰락을 혈통의 혼란
과 연결시켰다. 점차 밀려나는 지배층의 계급적 원한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거의 감추지 못한,  프랑스 귀족의 종족 콤플렉스 '망가진 천민  혈통'에 대
한 거부감 등은 이념상의  자의와 천재적인 모호함으로 동시대 잡문문필가 
패거리에 지속적인 자극을 주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과장적인 유사문헌
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다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웅주의'와 '파
르시팔'에 대한 에세이까지 이르렀다.
  히틀러는 이러한 주장을 한 번 더 종합해서 선전에  쓸모 있도록 만들고, 
시대의 모든 불쾌감, 공포감,  위기현상 등에 설득력 있는 설명체계로 만들
어낸 것이다. 베르사유,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두려움,  자본주의 질서의 압
력, 현대 예술, 밤의 생활과  매독 등이 아주 오래된 싸움의 형식으로 여겨
지게 되었다.  그 싸움에서 저급한  종족이 인간귀족 아리안에게  대항하여 
덤벼들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 뒤에 숨어서  싸움을 조종하는 전술가이
며 권력을 탐하는 최고 원수는  가면을 벗기고 보면 신비로운 영역으로 올
라선 '영원한 유대인'의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유대인, 모든 죄악과 공포의 원흉
  그것은 지옥의 일그러진  도깨비 모습이었다. '지구를 뒤덮은  것'이고 철
천지 원수고 '반대세계의 주인'이며 광란과 심리적 계산으로 이루어진 처치 
곤란한 존재였다. 적을 여럿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원칙에  다라서 히틀러는 
유대인을 가능한 모든 죄악과 거포의 원흉으로 만들어버렸다.  유대인은 문
제 거리고 그  모순이며  명제이고 반명제이고, 말 그대로 '모든 일에 죄가 
있는'존재였다.  증권의 독점지배, 벌세비즘, 휴매니티 이데올로기 소련에서 
3천만 명이 희생된 일 등 모든 것이 다 유대인 책임이었다.
 그 사이에 죽은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히틀러의대화가 란츠베르크에 갇혀 
있는 동안  출간 되었는데 거기서 히틀러는  이사야 19장 2~3절,  출애굽기 
12장 38절  등을 인용하면서 유대교, 기독교,  볼세비즘이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된 것은 휴매니티 사상으로  천민
들을 사주하여 혁명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의 결과였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어렵지 않게 모세가  최초의 볼세비즘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 세계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기
독교를 어느 정도 창안해내었듯이 레닌도 현대의 질서를 끝내기 위해서 공
산주의 이론을 이용하였다. 구약성서의 구절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되풀이
되는 더 가치 있고 창조적인  종족에 대한 유대인의 공격 모델을 보여주었
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유일한  죄인 유대인을 지구상의  원수로 만들어버리는 자신의 
반유대주의에 들어 있는  선전 기술적인 측면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유
대인이 없다면 "우리가 그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동
시에 유대인은 그의 감정의 고정점이었다. 그것은 주관적인  모습으로 보면 
악마적인 선전관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병리적인  망상증이었다. 그가 
미워하고 바라는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투사한 것이었다.
  모든 마키아벨리적인 합리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지배에 대한 유대인
의 갈망이라는 주장에서 심리적인  이 거대한 시대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다는 그의  커가는 확신은 바로 이 '구원의 형식'에 자
리잡은 것이다.
  1924년 7월 말에 란츠베르크에 그를 찾아온 어떤 보헤미아의 국가사회주
의자가 유대인에 대한 그의 입장이 변했는가 불어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
다. "그럼요,  물론이죠. 유대인에 대한  투쟁방식을 바꾸었다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나는 지급까지 너무나 온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요! 책을 써
나가면서 앞으로는 성공적으로 우리  자신을 관찰하기 위해서 가장 날카로
운 투쟁수당으로  써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있어 생존의  문제입니다. 유대인은 세계
의 페스트거든요.'
  사실 이러한 증오의 유례없는  강화와 잔인성은 란츠베르크 시절이 사색
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이미 1923년 5월에  히틀러는 왕관 서커스  장에서 
이렇게 외친 적이 있었다.  "유대인은 종족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아닙니다. 
유대인은 영원하신 신과 똑같은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이 될 수 없습
니다. 유대인은 악마와 같은  똑같은 형상입니다. 유대인은 모든 민족에 대
한 결핵종족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이념조각들과 감정들을 처음으로  눈에 
확 들어오게 정리하면서 그는  세계관이라는 건물을 확실하게 만들어낸 이
론가의 지적인 확신과 자신감을 얻었다.
  그가 유대인의인간으로써의 특성을 의심하고 그 근거로 기생충학 용어를 
끌어다 쓰는  것은 이미 단순한  선동가의 외침이 아니었다.  치명적이고도 
치료를 확신하는  진지함이었다. 자연법칙 자체가  '기생동물' '영원한 거머
리' '민족들의 흡혈귀'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러한 조치는 확고
한 독자적인 도덕을  가진다. 그의 사상체계의 일관성 속에서 말살과  대량
학살은 이러한 도덕의  최고 승리가 되는 것이다. 히틀러는 마지막까지  이
러한 맥락을 인식하고 거기서 결론을 이끌어낸 과격성을 인류에 대한 동적
처럼 주장하였다. 근 나폴레옹처럼 정복자로서의 명성만을 가졌던  것은 아
니었다고 했다. 나폴레옹은  '다만 인간일 뿐 세계적  사건은 아니었던'것이
다.
  1942년 2월말에 이른바 최후의  해결을 결의하였던 반 호수 회의가 있은 
직후에 그는 원탁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유대인이라는  바이러스 발견
은 이 세상에서 일찍이 감행하였던  가장 위대한 혁명의 하나이다 내가 이
끄는  이  싸움은 지난 세기의 파스퇴르와 코흐가  했던 것과 같은 싸움이
다. 얼마나 많은 병들이 유대 바이러스의 탓으로 생겨난 것인가! 우리는 유
대인을 말살해야만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그는 다른 보든 사람보다 더 깊
이 생각하고 더 많이 꿰뚫어보는 사람의 확신을 가지고 자연질서의 창조자
인 자신에게 주어진  세속적인 사명을 깨달았다. 자신의  '거인적인 의무'말
이다.
  그것은 고비노를 본질적으로  교정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종족과  문화가  
죽는 과정을 몰락에 모든 원인이 되는 유대인현상으로 의인화했을 뿐 아니
라 역사에 유토피아를  되돌려주었다. '고비노의 우울하고 숙명적인 염세론
을 공격적인 낙관론으로' 바꾸어버림으로써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 프랑스 귀족과 달리 히틀러는 종족의 몰락이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
라 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대인의 세계음모 전략은 아리안족의 유산인  독
일에서 결정적인 적수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생물
학적인 감염이나 자본주의와  볼세비즘의 협동음모가 여기서처럼 체계적이
고 파괴적으로 이루어진  곳은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사실에서  그는 
자신의 의지를 불러낼 에너지를 이끌어냈다. 독일은 지구의  상속권을 결정
하는 세계의 전쟁터다. 이러한 생각을 보면 그가 도이치  몇 유럽의 전통적
인 반유대주의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유대인 망상증은 국가적인 크기를 가진 다른 비전들보다 그를 더욱더 
광증으로 이끌어갔다는 사실도  볼 수 잇다. "우리 민족과 우리  국가가 피
와 돈에 굶주린 유대인 민족폭군의  희생제물이 된다면 지구 전체가 이 히
드라에 먹히고 말  것이다. 독일이 이 포위에서 벗어난다면 모든  민족들에
게 가장 위험한 위협이 전세계에서 부서진 것으로 간주해도 될 것이다" 그
러면 저 천년왕국이 독일에  나타날 것이다.- 그는 겨우 하나의 도정을  뒤
로하자 벌써 몹시 서두르면서 이  천년 왕국의 시작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나면 깊은 몰락에서  질서가 다시 생겨나고 통일성이 실현될 것이다.  주인
과 노예는 서로 마주서고 현명하게 이끌어 가는 '세계의 핵심민족들' 은 서
로 존중하고 보호하게 될 것이다. 세계질병의 뿌리 이  모든 본능적 불안과 
자연을 거역하는 혼합의 원천이 마침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본능적'이라고 부른  확실성을 그의 길에 마련해준 것은 결코 
완성된 적은 없지만  이토록 굳게 입을 다문 이데올로기였다. 그가  시대의 
은총을 얼마나 인정했든지 세계상태의  해석과 목숨을 건 투쟁의식은 그것
과 완전히  무관하였다. 그러한 투쟁의식은  그의 정책에 확실한  일관성과 
무감동의 특성을 부여하였다. 확정을  꺼리는 태도, 거의 모든 동료들이 한 
목소리로 보고하는 결단에 대한  히틀러의 두려움은 언제나 전략적인 대안
들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는 망설이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뒤로 
미루어놓고 기다리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극히l 초조하고 
확고한 태도로 위대한 최종대립을 서둘러 추진했다. 히틀러  정권의 수많은 
비인간성을 극히 단순하게 무지의 탓으로  돌리는 것보다 더 그를 잘못 본 
것은 없었다. 실제로 그는 일어난  일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어느 
누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의 가까운 추종자  한 사람
이 확인해주었듯이 그는'과격한 국가사회주의자'였다.
  
    이데올로기와 외교정책
  그의 이념적 관념들의  긴장된 복합체는 특별히 외교정책에  반영되었다. 
공상적으로 보이는 목표설정 탓으로 구체적인 정책강령으로 이해되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충실하게  달랐던 본질적이 노선은  이미<나의 
투쟁>안에 드러나  있다. 독일의 패배를  출발점으로 삼고, 혼탁한  종족적 
자질이 회복되는 정도에 영토회복의 정도를  연계시켰다. '혈통의 찢김'이라
고 부르는 것이  도이치 제국에서 '세계지배권을 빼앗아' 갔다고  했다. "도
이치 민족이 역사발전에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던 양떼 같은 통
일성을 얻게 되면 그날로 도이치 제국은 지구의 주인이 될 것이다.'
  국가사회당에서도 널리 퍼져 있던  공간 없는 민족이란 민족주의 전통적 
표어에 대해서 그는 민족 없는 공간이란 표어를  내세웠다. 국가사회주의의 
국내정치 사명은 마스 강과 메멜 강  사이의 텅 빈 공간으로  민족을 보내
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것은  공산주의  인간대중일 분 도이치 
민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눈앞에 떠도는 혁명의  모습은 엘리트 주의적이고 생물학적인 관념
들로 채워진 모습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지배형식과 기관들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새로운  인간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었다. 새로는 인간의  도래는 
수많은 연설과 고시문에서 '진짜황금시대'의 시작이라고 찬양되었다.. "국가
사회주의의 오직 정치운동이라고만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국가사회주의는 종교 이상이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 
창조의 의지다"라고 히틀러는 말했다.
  다라서 새로운 국가의 가장 절박한 과제들 중에는 '더  이상의 사생아 만
들기'를 중단시키고 '결혼을  지속적인 종족 오염의 수준에서  구해내고 '다
시금 '주님과 똑같은  사람들을 생산하고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튀기를  만
들어내지 않도록'한다는 것도 들어 있다. '억압이 이종 교배'를 통해서 줄어
들게 된 순수한  아리안이 다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이상적인 
상태를 히틀러는 생물학적이고 교육적인 지루한 과정의 결과라고 보았다.
  1939년 1월 25일  고위장관들을 대상으로 한 비밀  연설에서 그는 1백년 
이나 걸리는  발전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 마지막에는 다수가  선별의 
의지를 표지를 이용하게  되고, 그 표지들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생존공간의 확보를 거듭 요구하곤 하였다. 생존공간이란 '흘러 넘치
는' 주민을 위해서  위협받는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
었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정복 전략에  출발기지로서 쓸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탐욕스런 상상력을 가진 민족은 오늘의 동맹과 정세에  더 이상 얽
매이지 않도록 해 줄 만한 공간, 일정한 크기의 영토를 필요로 한다. 
  역사상의 위대성을  지리적이 넓이와 결합시키는  이런 생각을 히틀러는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었다. 종말이 다가오기 직전 벙커  속에서 명상하면서 
그는 자신에게  무모한 정복을 강요한  운명을 탄식하였다. 거대한  공간이 
없는 위협에 대처하는   네 가지 가능성 중에서 산아제한, 내부의   식민지
화, 해외의 식민지화 등을 한편으로는 소심한 꿈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품
위 없는 과제'라고 비난하였다.  분명하게 미국을 염두해 두고서 오직 정복
전쟁의 가능성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했다.
  "선의의 대해서 거부된  것은 주먹이 빼앗아야 한다"고 그는 란츠베르크
에서 썼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확장 욕망의 방향을 말하였다.  "유럽에
서 기반과 토양을 가지려고 했을 때 이것은전체적으로 오직 러시아를 희생
시켜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새로운  제국은 다시금 그 
옛날 기사단들의 길로 행진해 나가야 했다."
  이러한 생각 뒤에는  다시 위대한 세계전환의 관념이 나타났다. 그가  알
아낸 바로는 역사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점에 있다는 것이다. 한 번  더 역
사는 강력한 바퀴를  굴렀고 운명과 기회들을 새로 나누어주고 있다.  함대
들로써 먼 나라들을  정복하고 부를 쌓고 전진  기지들을 건설하고 세계를  
지배하던 해군력의 시대는  이제 종말의 국면에 서 있다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기 전 시대의 고전적인 연결통로였던 바다는 이제 현대성의 조건 아
래서 넓은 제국의 지배를 힘들게 만들고 있다.
  거대한 식민지는  시대 착오적인 것이고  몰락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현대의 기술적인 수단들, 가능성, 도로, 활주로, 철도,  등은 끝없는  영역으
로 퍼져나가고 밀집된 거점 체계들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옛 질서는 뒤
집혔다. 미래의 세계왕국은 지상병력이 될 것이라고는 그는 주장하였다. 단
단하고 이음새 없이  조직된 방어력을 갖춘 거대병력 말이다. 시대는  이미 
그리로 향한 길 위에 있으며 과거의 유산은 이미 공표되였다.
  뒷날  히틀러의 외교상의 연속적인  기습은 분명히 그의 본질에 있는 극
단적인 불안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시대에 대항한 ,역사
의 경과에  대항한 절망적인 돌진하였다.  세계를 분할하는 과정의  독일도 
다시 너무 늦게 나타나는 거시 아닐까 하는  근심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
다.  독일의l 새로운 세계시간이 시작될  때 미래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할 
만한 세력들을 검토해  보면 그는 언제나 거듭 러시아에 부딪치곤  하였다.  
종족적, 정치적, 지리적, 역사적 요인들이 한 목소리로  지적하는 것은 동족
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지평을 앞에  두고 히틀러는 외교정책상의 구상들을 발전
시켰다. 그는 수정론자로서  인생항로를 시작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
와 동시에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1914년 국경선을 회복하고 모든 도이치 사
람들을 강력한 대국  안에 하나로 모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생각에서 
이 평화조약의 악의적인 실천자였던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
러내고 프랑스가 이탈리아 및 영국과 뚜렷한 견해차를 보이는 점을 이용하
여 보복의 출발점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규모로  생각하는 히틀러의 
성향은 시선을 곧장 대륙 전체로 향하고, 국경정책에서  공간정책으로 넘어
가고 있다.

    동쪽으로 방향을 돌림
  모든 사색의 출발점은 독일이 '가차없는 권력정책을  앞에 내세울 경우에
만' 군사적, 정치적,  지리적으로 위협받는 중간지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는 것이었다. 빌헬름  시대의 외교정책을 살펴보면  히틀러는 일찍이  독일
이 해상 무역과 식민지를 포기하고 영국과 힘을 합쳐 러시아에 적대하든가 
아니면 해상무역과 식민지를 계속  추구하면서 러시아와 힘을 합쳐 영국에 
적대하든가 하는 두 가지 대안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은 20년대  초에 분명히 두 번째 가능성을 선택하였다.  왜냐하면 
영국은 제국을 '원칙상의'  적대장 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 그는 분명히  친 러시아 정책을 발전시켰다. 쇼이브너 리히터와  로젠베
르크 같은 이민자 그룹의 영향을 받은 가운데  '민족주의적이고' '다시 건강
해진' '유대, 볼세비즘 질곡'에서 벗어난 러시아와 힘을 합쳐서 서방에 맞선
다는 정책이었다.
  나중에 그의 확장주의적 동방정책의  중심점이 되는 슬라브 종족을 열등
감에 대한 확신이나 생존공간 개념이  이때만 해도 아직 아무런 역할도 못
하고 있었다. 1923년  초에야 비로소, 무엇보다도  소비에트 정권이 안정되
는 것을 보면,  동맹관계를 뒤집어서 영국과 힘을 합쳐 러시아에  대적하자
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료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히틀러는  일년 이상 새로
운 구상을 거듭 검토해보고, 발전시키고,  그 결과와 실현  가능성을  따져
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나의 투쟁>의 유명한  4장에서 러시아에 대적하는 
생존공간 투쟁의 생각을 강령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최후의 
벙커 독백의 순간까지 일관되게 히틀러의 외교정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
나 이러한 생각은, 남부  티롤을 양도함으로서 이탈리아의 호의를 사고, 모
근 식민지 요구를  포기함으로써 영구고가 바라던 동맹을  맺는 등 독일이  
동쪽으로 방해받지  않고 진출하려는 전제조건들을  마련하는 가운데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1925년에 쓴 <나의 투쟁> 제 2권에서  이미 히틀러는 전적으로 비논리적
이고 우연하고, 너무 좁고, 군사 지리적인 목적에도 맞지 않는 국경선 회복
을 지향하는  수정주의 개념을 극히  날카롭게 거부하였다. 그것은  나아가 
독일을 이전의 전쟁상대국 모두에  대립시키고 뿔뿔이 흩어진 적들의 동맹
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줄 뿐이라고 했다.
  그는 강조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914년의 국경선 회복을 요
구하는 것은 자신을 범죄자로 드러내는 결과와 정도를 보이는 정치적 무의
미"라고 했다. 그 대신에  대 공간을 획득하는 일은 "신 앞에서, 그리고 우
리 도이치 후세 앞에서  피흘린"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유일한 행동이며 책
임있는 정치가들에게 그  어느 날인가 '민족을  희생하였다는 죄목을  벗겨
줄' 유일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공대함 속을 전쟁을  끌어들이는 것, '동쪽에 있는 옛날 도이치 
공간'에 거대한 대륙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게르만 대이동의 이념은  그때
부터 히틀러 정책의 핵심사상이 되었다. 그 자신이 이 사상에 대해서 '분열
되지 않는 헌신'과  마지막 에너지의 힘'까지도 고백하였고,  의미심장한 정
치적 행동의 '유일한  목적'이러고 찬양하였다. 이러한 결정도  세속의 등급
을 얻었다.
  그럼으로써 우리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전쟁  이전 시대의 외교정책을  의
도적으로 강조하는 바이다.  우리는  6백년 전에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한
다. 우리는 서부와 남부 유럽을 향한 영원한 게르만  이동을 중단하고 눈길
을 동족에  있는 나라로 향한다. 우리는  마침내 전쟁 이전 시대의  식민지 
및 무역정책을 종결짓고 미래의 영토정책으로 넘어가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자신의 사고의 출발점들을  논리적으로 발전시켜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이론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제 3장에게서 얻은 것이냐 하는 
질문은 그대로  놔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러한 구상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준 생존공간 사상은 분명히  루돌프 헤스를 통해서 히틀러의 이념세
계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헤스는 진자  추종자의 긴박감을 자고 가지고  히틀러를 '이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사람에 대한 열렬한 경탄 덕분으로  란츠베르크 시절에 모
든 경쟁자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고, 특히 에밀 모리스의  비서직위를 인정
하지 않았다. 헤스는  1922년 이미 히틀러와 자기 스승인 칼  하우스호퍼의 
개인적인 접촉을  알성하였다. 하우스호퍼는  영국인 핼포드  매카인더경이 
창설한 '지정학'의 결실  풍부한 생각을 제국주의적인 확장철학으로 발전시
킨 인물이었다. 히틀러의  정복개념을 특징짓는 온갖 마키아베리적인  냉담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복개념은 매카인더가 '심장땅'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몽롱한 확신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지정학의 창시자가 약속한 바에  다르면 땅덩어리가 거대한 탓으로 어떤 
공격에서도 거대한 탓으로 어떤 공격에서도 보호되고 상처를 입지 않은 동
유럽과 유럽 족  러시아의 '세계 지배의 보루'였다. "심장땅을  정복한 자각 
세계를 지배한다" 이런 엉터리 학문 형식들에 잇는 마적인 합리주의야말로 
히틀러적 지성의 특수한 구조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지식도 그에게는 
영역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한 영향이 아무리 분명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히틀러의 비상
한 조합능력은 외교정책의 골격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외교정책의 개념은 여러  유럽 강대국 대한 독일의 관계, 프랑스
에 대한 보복의 필요성, 공간과 정복의 열망들d들, 시대변화의 요소와 다양
한 이념적인 고정관념들을 사상적으로  응집된 하나의 체계로 만들어낸 것
이다. 이 개념은  종족사적인 테마로 돌아가서 절정을 이루는데 그로써  하
나의 원이 완성되고 있다.
  운명 자신이 여기서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해주려고 하는 것 같다.  러시
아를 볼세비즘에 넘겨줌으로써 운명은  러시아 민족에게서 지금가지 그 국
가존속을 만들어내고 보장해 주었던 지성을 빼앗았다. 러시아  국제의 구조
는 러시아에 있는 슬라브 민족의 국가 정치적인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게르
만적 요소가 열등한 종족에게서  만들어내는 국가형성 작용에 대한 놀라운 
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부터 러시아는 상부  지도층의 이런 게르
만 핵에 의해서 소모되어  왔다. 이 핵은 오늘날 거의 흔적  없이 말살되고 
근절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잇다. 그 자리에 유대인이 들어섰다. 자신의 힘으
로 유대인의 질곡을  끊어버리는 것이 러시아에는 불가능한 일이듯이 ,  유
대인으로서도 이 강력한 제국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유대인은 조직의  요소가 아니라 해체의  효소다. 동족에 있는  거대왕국은 
붕괴할 시간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유대지배의 종말은 국가로서  러시아의 
종말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이러한 파국의  목격자가 되도록 
선택되었다. 그것은 민족적인 종족이론의정당성을 아주  강력하게 확인해주
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20년대 초에 벌써 뒷날 히틀러가 추구하게 될 외교정책
의 기본구상이 형성되었다. 초기에 영국과의 동맹 노력,  로마와의 축, 프랑
스에 대한 전쟁,  동부의 정복을 위한 말살정책,  그리고 '세계의 심장땅'의 
접수 등이었다. 도덕적인 고려들이  그런 일을 어렵게 하지는 않았다. 전쟁 
위도를 목적으로 포함하지 않는 동맹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그는 <나의 투
쟁>에서 확인하고  잇다. 국경선이란 언제나  사람들에 위해서 만들어지고 
변경되는 것이고 '생각 없는 약자만' 불변하는 것으로  여긴다. 정복자의 힘
이 권리를 입증하는  것이며 '가진 자가 갖는다'  그것이 그의 정치 도덕의 
원칙이었다.
  그가 자신의 악몽들과  역사이론들과 생물학적 곡론들, 그리고, 상황분석
에서 이끌어내 이 강령은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정신이상의 느낌이 들지만 
그 모든 과격성은남부 티롤이나  알사스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온건한 수
정주의측의 개념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공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민족주의 
파트너들과는 달리 히틀러의 독일이 현존하는 권력 및 체계 안에서는 기회
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정상적인 것에 대한 그의 깊은 원한이 그가 근본으로부터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였을 때에 도움이 되었다.  게임을 거부한 자만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바깥을 향하고, 이 체계를 망가뜨리겠다고 공개적으로  협박하던 소련
에 대항함으로써 체계의 힘들이 그의 편이 되었다. 그  힘들은 모르는 사이
에 독일을 "대단히  강력하게 만들어서, 극히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제국의 
정복은 브롬베르크나 쾨니히스휘테를 따로 되찾는 일보다  더 쉬었고' 모스
크바 공격은 슈트라스부르크나 보첸 공격보다 훨씬 전망이 있었다.

    세계적 권력이, 아니면 몰락이냐
  목적이 그렇듯이 히틀러는  위험을 알아보았고 받아들였다. 그는  1933년
에 이전의 계획을 확실하게 실현시키려고 착수하였다. 그에게  있어 선택이
란 언제나 말뜻 그대로 정확하게  세계적 권력이냐 아니면 몰락이냐의  두 
가지 중  하나를 임하였다. 1930년에  에얼랑겐에서 교수와 학생들을  앞에 
두고 행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존재는 확장을 지
향하고 모든  민족은 세계지배를 지향하는 법입니다"  그의 의견으로는 이 
명제는 다른 사정없이 자연법칙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디서나 
강자의 승리와 약자의 절멸 혹은 조건없는 굴복을 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게임에서 모든 것을 아  잃고 몰락을 눈앞에 둔 마지막 시점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때의 추종자들을  깊이 당혹케 하는, 일관된 발언을 알버
트 슈페어에게 하는 것이다.  '도이치 민족이 가장 원시적인 생존을 계속하
기 위해서 필요한 토대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민족은 "약자
로 판명이 났고, 그렇다면 미래는 오직 더 강력한  동방민족의 것이기 때문
이다.' 독일은 전쟁 이상의 것에서 패배하였다. 그는  완전히 희망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애와 사고에 명령을  내리는 판결기관이
었던 자연법칙, '모든 지혜의 잔인한 여왕'에게 굴복하였다.
 
    출감
  거의 일년이 지난 다음인  1924년 말에 벌서 히틀러가 '국비 대학교'라고 
불렀던 수감시기가  끝나게 되었다. 뮌헨  지방재판소 검찰의 요청을  받은 
교도소장 라이볼트는 1924년 9월  15일에 집행유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
게 만드는 보고서를 보냈다. "히틀러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동료죄
수들까지 질서와  기율을 지키는 사람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절제력이 
있고 겸손하며 친절하다. 아무런  요구도 없고, 조용하고 이해심이 있고 진
지하고 전혀 공격적이지 않고 감방생활의 제한들을 따르기 위해 최대한 노
력을 하고 있다. 그는 개인적인 허영심이 없는 사림이며, 감옥의 식사에 만
족하고, 담배나 술을  하지 않으며 동지애를 발휘하여 다른 수감자들  사이
에서 일종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히틀러는 민족주의 운동을 새로이  불
붙이려 하고 있으며 전처럼  폭력적이고 긴급상황에서 정부에 대항하는 수
단을 쓰지는 않고 정부와의 교감을 가지려고 한다."
  이 보고서가 서술하는 모범적인  생활과 전략은 법정이 내세운 6개월 형
량을 채운다음에 가능한 집행유예의 전제조건이었다.  집행유예를 박탈당한 
국가사회당 지도자가 어떻게 해서  이념적으로 부패한 장관의 독단으로 법
절차를 벗어낫는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여러해 동안이나 갖
은 불안과 싸움을 꾸며내고 중앙정부의 무효를 선언하고,  장관들을 체포하
고 사망자를 냈는데도 여전히 자신을 보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검찰측 항의는 처음에 법원의 결정을 중지시키는 효력을  발휘하였다. 그
러나 국가권력은 범법자에 대해서  국가가 허약했던 점을 용서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결과 국가권력은  법적으로 꼭 필요한 것으로  규정되어 
잇는 히틀러의 추방문제도  어설프게 처리하였다. 뮌헨 경찰청의 9월  22일 
중앙 정부 내무부 장관에게  보내 보고서에서 히틀러 추방을 '필수적인' 일
이라고 표현하였고  새로운 바이에른지사 헬트는  추방할 경우 오스트리아 
당국이 히틀러를 받아들일 것인지 알아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일도 없었다. 히틀러 자신이 처신을 바르게  하겠
다는 의사를 가능한  방식으로 알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그레
고어 슈트라서가 지방의회에서 히틀러가  계속 감옥에 있는 것은 바이에른
의 수치고 '돼지데, 개처럼 천한 돼지떼'가 바이에른  주를 통치한다고 말했
을 때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리고 룀의 지하활동도 그의 신경에 거슬렸다.
  상황은 다시금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2월 7일 실시된  의회선거에
서 민족주의 진영은 겨우3퍼센트의 표만을 얻어서 그 이전까지는 31명이었
던 의원이  14명으로 줄어들었다. 극우파의  활동이 이미 절정을  지났다는 
생각도 12월19일의 상급 지방  법원의 집행유예를 반대하는 검찰의 불만을 
물리치고 서둘러서  히틀러의 석방결정을  내렸다. 12월20일  란츠베르크의 
수감자들이 크리스마스 축제를 준비하고 있을  때 뮌헨에서 온 전보 한 통
이 히틀러와 크리벨의 즉시석방을 명령하였다.
  미리 정보를 입수한 몇몇 친구와 추종자들이 자동차를 가지고 와서 감옥 
문 앞에서 히틀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망스러운 숫자였다. 운동은 산산조
각이 나고 추종자들은  흩어지거나 적이 되었다. 뮌헨의 집에는 헤르만  에
서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만 모습을 나타냈다. 위대한 등장도 아니었고, 승
리도 아니었다. 히틀러는 많이 풀죽은 모습으로 불안하고도  긴장된 태도를 
보였다.
  같은 날 저녁에 그는 에른스트 한프슈텡글을 찾아갔다.  집으로 들어서면
서 곧바로 고통스럽게  말했다. "사랑의 죽음을 연주해줘요." 란츠베르크에
서 이미 때때로 종말의 기분이 그를 엄습했다. 어떤  비꼬는 애도기사는 그
가 젊어서 죽었노라고 적었다. "게르만의 신들이 그를 정말 사랑했다"고

     제 2장 위기와 저항
  히틀러가 란츠베르크에서 출감해보니 아닌게 아니라 용기를 꺾는 방향으
로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작년의  흥분은 잠잠해지고 히스테리  발작들은 
사라졌고 흩날리는 먼지와 연기 속에서  평범하고 비낭만적인 일상의 윤곽
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화폐가치가  안정되면서 자리잡은 것이었다. 그것은  우선 
사회적 기반에 대한  신뢰감을 다시 회복하였고, 그 결과 무질서한  혼란을 
만들어내던 군사적 요소들, 극히 부족한 액수로만 유지되던  의용군과 준군
대 조직체계들에게서 물질적  기반을 빼앗아갔다. 공권력은 점차  확고함과 
권위를 되찾았다. 1923년  11월 9일에 선포된 비상사태는 1924년 2월  말레 
해체되었다. 1924년 한 해가 경과하는 동안 슈트레제만  시대의 친선정책이 
최초의 효과를 나타냈다.  그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들보다는  전체
적으로 개선된 독일의 심리적 태도로 설명되었다.
  전쟁기간이 낡은 증오심과 원한이 점차 풀리기 시작하였다.  도즈 안에서 
배상문제의 해결책이 눈에  보이게되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루르  지방에서 
철수를 준비하였고 안전협약과  가입이 거론되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들어
오기 시작한 미국의 차관자본이 수많은 경제문제들을 개선하였다.  거리 모
퉁이마다 빈민 구호소와 사회복지기관  앞에 늘어선 빈민들 모습에 끔찍한 
색깔을 부여하였던 실업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상황의 변화는 선거결과에도 반영되었다. 1924년 5월  선거에서는 과격파
세력은 한 번  더 성공할 수 있었지만 같은  해 12월 선거에서는 분명하게 
패배하였다. 바이에른에서만 민족주의  계열은 거의 70퍼센트의 지지를  잃
었다. 이러한 변화가 순식간에 민주적 중도파의 강화로  나타나지는 않았지
만 독일이 위기와  전복위협과 실망의 세월을 보낸  다음 마침내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갈가리 찢긴 추종세력
  이제 막 등장한 수많은  직업 없는 직업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히틀러도 
모험과 시민적이지 않은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는 불규칙한 존재기간을 끝
내야 할 시점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애송이 시절의  공포였던 '평화와 질서'
에 다시금 직면하게  되었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의 처지는 정말  희망이 
없었다. 연설의  힘으로 법정에서 승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별로 평가받지도 못하고 절반쯤  잊혀진 실패한 정치가의 처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당은  온갖 조직을 금지  당했다. <민족 관찰자>도  마찬가지였다. 
방위군과 대부분의 개인 지지자들도  뒤로 물러섰고 내전놀이가 끝난 다음
에 다시금 일상의  의무와 사업으로 돌아가 버렸다. 1923년을 돌아보며  많
은 사람들은 어깨를 으슥하면서 정신나간 고약한 시대라고  여겼다. 디트리
히 에카르트와 쇼이브너 리히터는  죽었고 괴링은 망명 중이었고 크리벨도 
망명을 떠났다. 가까운 추종자들은 대부분 아직 복역중이거나  아니면 싸움
에서 지고 흩어져버렸다.
  체포되기 직전에 히틀러는 급히 연필로 휘갈겨 쓴 메모를 알프레트 로젠
베르크에게 남겼다. "친애하는 로젠베르크, 이제부터 당신이 운동을 이끌어 
주시오" 관련성이 풍부한  롤프 아이트할트라는 가명으로-철자를 흩었다가 
다시 배열하면 아들프 히틀러라는 이름이 나오다- 로젠베르크는 옛날 추종
자들 중 남은 사람들을 모아서 '큰 도이치  민족공동체'를 만들었다. 돌격대
는 수많은 스포츠단체들 합창단, 사격클럽 등으로 위장된 존속하였다.
  그러나 로젠베르크가 권위가 없고 말수가 많은 탓으로 ns동은 곧 적대적
으로 싸우는 패거리들로  찢어지고 말았다. 루덴도르프는 옛날  국가사회당 
당원과 폰 그레페와 레벤틀로브 백작이 이끄는 '도이치 민족자유당'의 통합
을 주장하였고  슈트라이허는 밤베르크에서 '바이에른 민족단'을  만들었다. 
그 또한 독자적인  요구를 내세웠다. '큰 도이치 민족 공동체'안에  남아 있
던 슈트라이허와에서,  아르투어 딘터 등은 각자  지휘권을 잡으려 하였다.  
딘터는 과도한  피의 망상들을 소설형식으로  썼고, 튀링겐 지방에  근거를 
둔 인물이었다. 그에  반해서 루덴도르프는 폰 그레페,  그레고어 슈트라서, 
이어서 에른스트 룀과 힘을  합쳐서 '국가사회중의  자유당'을 만들어서 모
든 민족주의 집단들의  통합단체로 조직해나가고 있었다. 히틀러가  감옥에 
있는 기간을 이용하여 스스로 민족 운동 내부의 정상을 차지하거나 아니면 
히틀러를 지도적 지위에서 선전꾼의  역할을 끌어내리기 위하여 끝없는 싸
움과 간계들이 펼쳐졌다.
  이토록 실망스런 상황을  보고도 히틀러는 놀라지 않았다.  로젠베르크는 
나중에 고백하기를 히틀러가 자기를  임시지도자로 임명한 사실에 깜짝 놀
랐다고 했다. 그리고 히틀러의 그런 결정은 의도적으로 당이  이와 같이 파
괴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닌가 하고 타당성이 있는 추측을  하였다. 뒷날 자
신의 지휘요구를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드물지 않게 나온  이런 
비난은 히틀러의 요구를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내
려진 운명의 부름까지  양도할 수는 없었다. 구원의 역사는 대리  구원자라
는 것을 알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로젠베르크, 슈트라이허, 에서, 룀, 아마, 슈트라서,  폰 그레페, 폰 레벤틀
로브, 루덴도르프 사이의 싸움질에서 히틀러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 추종자 한 사람이 말했듯이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
려 그는 적대자들을  번갈아 가면서 부추기고 민족주의  진영들 간의 통합 
열의를 방해하였다. 자기가  갇혀 있는 동안 가능하면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고 권력중심이 형성되거나 지휘요구의 근거가 마련도지 않도록 했다.
  같은 이유에서  그는 의회선거에서 참여한  것은 합법적인 권력쟁취라는 
새로운 전략에 합당한  것이었는데도 그것을 비난하였다. 국회의원은  면책
권을 통해서 어느  정도 독자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사회주의 
자유당이 1924년  5월의 제국의회선거에서 총의석  472석 중에서 32석이나 
차지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곧 이어서  보낸'공개서한'에서  그는 당 
지휘권을 포기하였다. 전권을  포기하고 정치적 동기에서 자신을  방문하는 
일을 일절 금지하였다.
  루돌프 헤서는 어느정도 자만의 목소리를 깔고서 감옥에서 쓴 어떤 글에
서 추종자들의 '어리석은'을 말했다. 히틀러는 그의 높은  목소리를 보고 상
당한 보상감을  느꼈다. 란츠베르크에서 나왔을  때는 오직 페허만이  남아 
있었지만 어쨌든  진짜 경쟁자는 없었다.  확고한 반대자들의 전열  대신에 
그는 무능한 파벌들의 초조함을 보였다.
  그는 자시도 가세해서 만들어낸  쇠약증 상태에 빠진 민족운동이 오랫동
안 기다려온 구원자들로서 등장하였다. 히틀러는 이 폐허에서  논란의 여지
가 없는 지휘권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솔직하게 이렇게 고백하였다. 
"전에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당시 난 다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돌아오면서 멀리  뻗어나간 희망만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갈가
리 찢긴  추종자들의 극히 모순되는  요구들에 마주서게 되었다.  빽빽하게 
늘어선 우파 진영에서 모든 파벌들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이 정당에 분명
한 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그의 정치적 장래를 결정할 판이었
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주 뚜렷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다지 의미가 
크지 않아서 다양한 요구들을 한데로  합칠 수 잇는 그런 특성이어야만 했
다. 
  그가 루덴도르프와 함게 민족진영 연합운동을 조직하리라는 수많은 사람
들의 기대는  무산되었다. 그는 모든 것  위에 우뚝 서서 숭배의  높이까지 
올려진 지도자의 모습만이 자기가 생각한  통합의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으
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서둘러서 동맹을 맺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경계선을 긋는 조건 없는 개인적 요구를 발전시키는  일이 더 중
요하였다. 다음주 몇 주 동안 히틀러의 전략적 행동은  이러한 생각에서 나
온 것이었다.

    헬트와의 협상    
  푀너의 충고에 따라서 그는 우선  새로 바이에른 지사가 된 헬트에게 협
상을 요청하였다. 바이에른 민족당 당수인 헬트는 엄격한  카톨릭이고 연방
주의자였다. 히틀러와 그의 동지들은 한때 정열적으로 그와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1925년 1월  4일에 이루어진 이 만남의  흥미진진한 요소를 줄이기 
위해서 히틀러는, 아직도 란츠베르크에 남아 있는 동지들의  석방문제를 교
섭할 의도라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합법화의  일보를 내디딘 것이다. 
민족진영 내부의 비관자들은 그가 이러한 방문으로 '로마와의 평화'를 만들
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사실상  그는 공권력과의 평화를 원하고 있었다. 퓨
덴도르프와 달리 자신은 적들에게  자기가 그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예고할 마음이 없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 시도의 성공은 그의 앞으로의  정치적 운명을 위해서 민족 진영 내부
의 지도자 자리 확보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독재적으로 운영되는 군
사적 정당의 건설과 권력획득의  야심을 위해서 강력한 국가기관의 신뢰를 
회복하고 11월  9일의 교훈을 잊지 않는  것이 극히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즉 정치란 압도와 열광과 공격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이중적 존재여
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이중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는 새로운  역할을 해낼 수 있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적이면서도  동시에 기존질서의 옹호자로 보여야 한
다는 것,  과격하면서도 절제있게 보여야 한다는  것, 질서를 위협하면서도 
질서의 수호자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 정의를 파괴하면서도  그 회복을 위
해 노력한다는 믿음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히틀러가 이러한  전
략의 모순을 이론적으로도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이것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계속 전진해 나갔다.
  냉정한 지사에게 그는 우선  자신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앞으로는 합법적
으로 행동하겠고, 11월 9일의 쿠데타는 오류였다고 맹세하였다. 그 사이 자
신은 국가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자신은 이미  시민적 
애국자로서 힘닿는 대로  거기 공헌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의 
파괴적인 힘에 맞선 싸움에서 정부편에서 노력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주장
하였다. 물론 그런 활동을 위해서 자신의 정당과  <민족 관찰자>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그가 이러한 제안을 민족주의당의  반 카톨릭주의와 어떻게 결합시킬 생
각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히틀러는 그것은 루덴도르프 개인의 망상이라
고 공격하였다.  자신은 그렇지 않아도  이 장군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으며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했다. 전부터 종파적인 싸움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미 시험이 끝난  민족주의 힘들이 서로 힘을 합쳐야 했을 
뿐이었다고 했다.
  헬트는 이러한 능변에 냉담하였다. 그는 히틀러가 마침내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어서 기쁘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주지사인 자신은 어차피 누구에게나  국
가 권위를 주장할 셈이었다. 11월 9일과 같은  사태가 바이에른에게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그는 히틀러의 보호자이기도 하였던 개인적  친
구 귀르트너 박사의 권고를  받아서 마침내 국가사회당과 당기관지의 금지
를 해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히틀러와  회담을 하고 나서 "이  맹수는 
길들여졌다."고 회담의 인상을 요약하였다.
  
    굴복이냐, 제명이냐
  며칠 뒤에 히틀러는  지방의원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마치 당의  상태
가 충분히 고립되지 않았다는 듯이 그는 쓰라린 도전을  하였다. 이제 자신
의 소도구가 되어버린  하마가죽 채찍을 손에 들고서  그는 주의회 건물로 
들어섰다. 민족진영 의원들은 환영의 인사말을 기대하고 거기 모여 있었다. 
긴 서론도 빼고 그는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지도력 결핍과 개념 없음을 
비난하고, 그들이 헬트가  제안한 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다고  격분하
였다.
  깜짝 놀란 일행이  품행바른 사람이 포기할 수  없는 원칙들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적대자에게 도이치 민족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와 더불
어 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법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의원 한  사람이 
히틀러가 이 연합정권과 협조하기로  약속하고 때이른 석방을 얻어낸 모양
이라는 의심을 표시하자 히틀러는 운동을 위해서 자신의 석방은 스물댓 명
의 민족당 소속 의원들이 지키고 있는 원칙들보다 1천 배나 중요하다고 경
멸적으로 답변하였다. 
  실제로 그는 날카롭고도 도전적인  지휘 요구를 통해서 자기에게 복종하
려 들지 않는 사람들을 제명하려고 했던 듯하다. 그는  뒷날 반어적인 경멸
감을 가지고 당이  1923년에 '인플레이션 이익'을 얻었다고  이야기했다. 당
은 너무  빨리 성장하였으며, 그것이야말고  당의 취약성과 위기의  순간에 
저항력이 없는 결정적인  이유였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거기서 결론을  이
끌어냈다. 민족주의 진영 지도자들은 협조하려 하지 않는  히틀러의 태도를 
비난하고 장군홀 앞에서 함께 흘린 피를 들먹였다.
  그러나 그런  신비적인 감상주의보다 1923년의  속박상태에 대한 기억이 
히틀러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였다. 당시에 까다롭거나 고집스러운  수많은 
동지들을 계속 고려해야 했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서 이끌어낸 결론, 즉 협
조체제란 일종의  속박상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바깥쪽, 즉 
공권력을 향해 공손한  자세를 취한 반면 운동  내부에는 끈질기게 복종의 
태도를 고집하였다. 그래서  이런 대립의 결과 24명의 주의회 의원들  중에
서 겨우 6명만이 그의 편에  남고 다수가 다른 당으로 넘어가는 일을 기꺼
이 감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충돌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초조하게  새로운 대립들
을 시작하였고 소규모로 변한 운동의 가장자리에 있는 다른 조각들을 계속 
떼어버렸다. 그는 다른 수많은 민족주의적이고 극우적인 집단과  자신을 구
별한 특성을  강조하곤 하였으며 모든  형태의 협동을 비난하였다.  14명의 
국회의원들 주에서 겨우 4명만이 그의 진영에 남게  되었고, 그들도 만만치 
않게 반발하면서 헤르만 에서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같은 수상쩍고 깨끗
하지 못한 추종자들과  결별하라고 요구하였다. 히틀러는 앞으로 몇 달  동
안의 괴로운 싸움은 깨끗함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당내 단독 지배권이 문
제라는 사실을 이들 반대자들보다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으므로 한 발
짝도 양보하지 않았다.
  
    루덴도르프와 결별하다
  그러는 사이 그는 루덴도르프와 결별을 준비하였다. 11월  9일 정오에 히
틀러가 장군홀 앞에서 도망친 일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일이고, 도이치 
장교는 그런 남자 밑에서  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장군의 용서할  수 없는 
발언만이 그런 조치의 이유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남부 독일의 '총사령관'
이, 그 자신의 고집과  두 번째 부인이며 의사인 마틸데 폰  켐니츠의 과도
한 명예욕으로 해서 계속 새로운 분규에 휘말려들면서 당에 부담스러운 존
재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카톨릭 교회와 갈등을 일으켰고, 바이에른의 왕세자와  불필요한 체
면싸움을 일으켰고, 장교단과 사이가 나빠져서 상당수의 옛날  전우들이 그
에게 장교단에서의 추방을  통고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분파  이데올로기의 
준종교적인 우매함  속으로 점점 더  구제불능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수많은 모반의 공포들,  게르만 신들에 대한 믿음, 문명 비관
론 등과 같이 연관되어 있었다.
  히틀러 자신은 초기 시절의  보수반동주의, 란츠 폰 리벤펠스, 툴레 결사
의 정신나간 생각 등의 양상을  보이는 이런 성향과는 오래전에 이미 결별
하였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이러한 민중 낭만주의에  대한 경멸감을 표
현하였다. 사실은  자신의 관념세계도 어느  정도 유치하게 그러한  낭만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질투심도 작용하였다. 군사적으로 엄격
한 민족에게서 예전에 상병이었던 장군을 따라잡기 힘든 측면이 있다는 사
실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징적인 일이지만 어떤 민족진영 그룹이 1925년 초 어떤 편지에서 루덴
도르프를 '영원한 각하, 위대한 지도자'라고 부른 반면 히틀러는 '오늘의 어
두운 상황에 불을 비치는 불의  정신'이러고 불렀다. 히틀러는 1차 세계 전
쟁의 장군이 자신의 수행원인  울리히 그라프를 군대식 명령으로 자신에게
서 빼간 것을  개인적인 모욕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최초의 대담에서  벌써 
그에게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동시에 점차 끓어오르는  적대감으로 북부 
도이치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의 지도자들인  폰 그레페와 폰 레벤틀 로브
와의 대립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히틀러가 옛날의  권력을 되찾을 수는 없다. 그는 재
능있는 선동꾼이기  하지만 정치가는 아니라고 선언했다.  변화된 자신감을 
드러내는 뒷날의 편지에서 히틀러는 폰 그레페에게 이렇게  답변하였다. 자
신은 전에 북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오직 독
일을 위해서일 뿐이며 "하느님께서 나는 도와주시는  한!" 절대로 그레페와 
그 패거리를 위해서 북치는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당을 새로 창설함
  1925년 2월 26일에  처음으로 <민족관찰자>가 다시 발행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실패한 쿠데타 장소였던  시민 양조장에서 국가사회당이 새로운 창
설(재창설이 아니라)을 예고하였다  사설 '새로운 시작'에서, 그리고 동시에 
출간된 당조직을 위한 기본노선  책자에서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지휘권에 
대한 요구를 하였다. 우선  모든 전제조건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에서와 슈
트라이허에 대한 비난을 염두에 두고서 당을 이끌어가는 것은 그 주종자의 
도덕성이나 파벌들간의 갈등과는 별 상관이 없고, 정책을  추진하는 일이라
고 주장하였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그는  '정치적 아이들'
이라고 불렀다. 그의  정력적인 진로에 대한 최초의 반응으로 온  나라에서 
충성 표명이 나왔다.
  
    모두 히틀러에게!
  다음날의 장면은 전략적으로  세심하게 고려되었다. 자신의 호소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히틀러는 두 달이나 연설 활동을 일절  중지했다. 이러한 방
식으로 그의  지지자들의 기대와 라이벌들의  신경질이 극단적으로 높아졌
다. 그는 방문객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외국의 대표단도 거절하였
고, 모든 정치적인  서한은 '읽지 않고 서류바구니에'  던져버린다고 알리게 
했다.
  이날 집회는  저녁 8시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른  오후에 벌서 
'입장료 1마르크'짜리 최초의  참석자들이 나타났다. 6시에 경찰은  홀을 폐
쇄해야 했다. 약 4천 명의  지지자들이 이미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히틀러
가 홀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최초의 과도한 숭배의식으로  변했다. 참석자들
은 탁자 위로 올라가서 환호성을 지르고 돌로 된  1리터, 2리터들이 맥주조
끼를 흔들어대고, 행복에 겨워  서로 얼싸안았다. 막스 아만이 사회를 보았
다. 안톤 드렉슬러가  에서와 슈트라이허를 추출해야 참석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망설이는, 아니면 고집스런  이 모든 당원들을 향해서 히틀러는 두  시간
에 걸쳐서 대단히  효과적인 연설을 행했다. 그는 일반적인 이야기로  시작
해서 아리안족의  문화창조적인 업적들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외교정책을 
언급하면서 평화협정은 파괴되었고, 배상합의는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그렇
지만 유대의 혈통 오염을 통해서 독일이 몰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옛날
의 강박관념으로 돌아가서 그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거리에 나타난 유대
인은 모두가 금발의  도이치 소녀를 팔에 끼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공산주
의는 "몰락할 수도 있고, 그에 대항해서  더 그럴싸하면서도 똑같이 잔인하
게 행동하는 다른 주의를 마주세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루덴도르프를 비판하였다.  그는 어디서나 적대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면서 어떤 것을 적이라고  부르면서 실은 다른 것을  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핵심에 이르렀다.
  
  누군가 와서  내게 조건을 제시하려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친구여, 우선 내가 자네에게 제시하는 조건을 기다려보게.  나는 대중을 얻
기 위해 애쓰지는 않네!' 라고  말입니다. 당원 여러분, 일년이 지나서 여러
분이 직접  판단해보십시오. 내가 올바르게 행동했다면  그야 좋은 일이죠. 
내 행동이 옳지  못했다면 나는 내 직위를 여러분 손에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 나  혼자서 당을 이끌
어가고, 내가 혼자서 책임을 지는 동안에는 다른 누구도  내게 조건을 제시
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운동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분노로 빨개진 얼굴로 그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적대감을 파묻
어버리고, 과거를  잊어버리고, 당내의  싸움을 끝내라고 간청하였다.  그는 
추종하라고 청하지 않았고,  타협을 암시하지도 않았으며, 단순히 복종이냐 
아니면 결별이냐를 요구하였다.  마지막에 환호성이 울러퍼져서, 새로운 국
가사회당에서 자기 혼자 이끌어가는  지도자 정당의 권위적인 노선을 취하
려는 그의 의도를 확인해주었다.
  이러한 환호성의 한가운데로 막스  아만이 끼여들어서 대중을 향해서 소
리쳤다. "싸움은  이제 끝이다. 모두  히틀러에게 향하자!" 그 순간  갑자기 
단상에는 옛날의  적대자들이 나타났다.   슈트라이허, 에서, 페더,  프리크, 
뤼링겐의 기사  딘터, 바이에른 파벌지도자 부트만  등이었다. 이 압도적인 
장면에서 그들은 소리지르면서 의자와 탁자 위로 올라선 수천 명의 사람들
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손을 내밀었다. 슈트라이허는 약간 당황한  태도
로 '신의 사명'에 대해서 말했다. 최근에 지방의회파  앞에서 상병 히틀러에
게 날카롭고도 조롱섞인 반대로  표명하였던 부트만은 자기가 가졌던 온갖 
주저하는 마음이 "지도자가 말씀하시자 내  안에서 녹아 없어졌다."고 선언
하였다.
  루덴도르프의 압도적  모습으로도, 폰 그레페,  슈트라서, 로젠베르크, 룀 
등이 개별적으로나 혹인 연합해서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그는 약간의 조치
로 벌써 성취한 것이다. 이러한 체험이 그의 권위와  자신감을 강하게 만들
어주었다. 부트만의 표현대로  과거에도 있었지만 루덴도르프와 다른  경쟁
자들로 인해서 매우 제한적으로만  그에게 붙여졌던 칭호가 아날부터 논쟁
의 여지 없이 그의 것이 되었다. 즉 '지도자'였다.

    연설 금지령
  헤르만 에서가 표현한 것처럼 민족주의 진영의  경쟁자들이라는 '악당 같
고 저주스런 음모덩이'들과 대결해서 이전보다 더욱  독재적인 당의 지배권
을 확보하자마자 히틀러는  곧바로 두 번째 목표의 실현에 착수하였다.  곧 
국가사회당의 조직을 자신의 전략적  목적에 맞는 유연하고도 강력한 기구
로 만드는 일이었다. 
  폭력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혁명을  달성하려는 결심에 대해서 그는 이미 
란츠베르크에서 비웃는 추종자  한 사람에게 이렇게 확언하였다.  "내가 활
동을 다시  하게 된다면 나는 새로운  정책을 추구해야 할 겁니다.  무기의 
힘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카톨릭과 공산당 의원들이 화를 내겠
지만 우리는 의회에 진출합니다. 투표로 이기려면 총으로  쏘아버리는 것보
다 시간이야 오래 걸리겠지요.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들의  헌법이 우리에게 
승리를 만들어줄 거예요. 합법적 절차는 모두 느린 법이니까요."
  그것은 히틀러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느리고 힘든 일이었다.  그리
고 언제나 다시 후퇴, 저항, 갈등을 맞이하였다. 그  자신이 최초의 힘든 불
운에 대해서 책임질 상황이  닥쳐왔다. 바이에른 정부는, 어떤 것을 적이라 
말하면서 다른 것을 뜻할 수도 있다는 그의 발언을 원래 뜻 그대로 헌법에 
대한 적대감의 표지로  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적이 자기 시체를  넘어가
든지 아니면 자기가  적의 시체를 넘어갈 것이라는  발언에 대해서도 화를 
냈다. 그는 이  말 끝에 계속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 투쟁이 다음번에 
나를 쓰러뜨리면 철십자가 내 시체를 덮는 천으로 쓰이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고백은 그의 충성 확인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을 일깨워서 처음에 
바이에른 당국이, 그리고 이어서 대다수의 주들도 그가  공식적으로 연설하
는 것을  일시 금지하였다. 집행유예와, 언제나  위협적인 추방령과 연관해
서, 전반적인 사정을 배경으로 놓고 보면 그에게 내려진  이 금지령은 일체
의 전망을 없애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노선의 일시적 실패를  의미하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안감이나  분노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년 반  전인 
1923년 여름에만 해도 한 번의 퇴각이 그를 길에서 밀쳐내서 젊은 날의 무
기력과 약점을 다시  불러왔다. 그러나 지금 그는  끄떡도 하지 않고, 연설 
금지라는 개인적인 타격을 입고 가장 중요한 수입원을 잃어버린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이제부터 당 기관지를 위해서  쓰는 사설의 사례
비로 생활비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는 자주 브루크만 집에서 40에서  60명 
정도의 소규모 손님들을 앞에 두고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모든 마취제, 모
든 흥분제가 없어졌으므로 선전과 위장을 위해서 새로운 수단을 써야만 했
다.
  당시의 관찰자들은 모두 히틀러가  감금되어 있는 동안에 변화했다는 사
실을 증언하고 있다. 생기 없는 정신병자 같은 모습에  처음으로 윤곽과 개
성을 마련해준 엄격하고  엄숙한 모습들을 알아본 것이다.  "좁고 창백하고 
병적이고, 자주 거의 텅  빈 듯하던 얼굴이 훨씬 더 강력한  형태로 집중되
었다. 이마부터 턱에  이르는 골격의 강한 구조가 이제 두드러지게  드러났
다. 전에 꿈꾸는 듯이 보였던 요소는 사라지고 이제  분명한 강인함의 모습
이 나타났다."
  이 강인함은 이제 모든 재앙을 통해서 그에게 끈질긴  특성을 주었다. 그
러한 끈질긴 힘으로 그는 30년대 초에 마침내 승리의 행진이 시작되기까지 
정체기간을 잘 견디어냈다. 1925년 여름에 모든 희망의  저점에서 국가사회
당의 지도자 모임에서 그에게 대리인을 내세우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그는 
당 운동은 자신과 함께 일어서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할 것이라는 도전적인 
이유를 들어서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의 가까운 주변을  보면 그의 말이 옳았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지난 
몇 달 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충돌과 분리는  중간급의 아니면 종속적인 
추종자만 그의 곁에 남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측근은 다시 가
축상인, 운전기사, 경호원, 이전의  직업군인 무리로 한정되었다. 그는 당의 
처음 시작  시절부터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감상적이고, 거의  인간적인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  패거리의 대개 좋지 못한 평판이나 그들의  떠들썩
한 조잡함과 유치한  행동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람들
과의 교류는 그가 시민적이고  탐미적인 원래의 출신계층과 얼마나 무관한 
사람이었던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때로 들어오는 항의에 대해서 그는 언젠가 어느 정도 불확실성의 흔적을 
지닌 채, 자기 생각으로도 측근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잘못이 없지 않은' 
인간의 본성 탓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수상이 되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그가 좋아하는 측근이었다. 히틀러가  한때는 비스
마르크의 것이었던 방에서 영화를  즐기거나 아니면 시시한 대화를 위해서 
저고리 단추를 끄르고 무거운 안락의자에서  두 다리를 쭉 내뻗곤 하던 저 
길고 공허한 저녁의 사적인 모임에서는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분위기를 지
배하였다. 배경도, 가족도, 직업도  없이, 성격이나 경력에서도 철저히 단면
만을 지닌 이런  사람들은 한때 남자 하숙집에  살았던 히틀러에게 수많은 
친근한 기억들을 일깨웠다.
  크리스치안 베버, 헤르만에서,  요제프 베르히톨트, 막스 아만  같은 사람
들에게서 다시 보았던  것은 저 빈 시절의 후광이나 냄새였을지도  모른다. 
경탄과 정직한 헌신만이 그들이  제공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가 '오스테리
아 바바리아'나 '노이마이어  카페' 같은 곳에서 장광설의  독백을 시작하면 
그들은 놀란 모습으로  그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그들의 비판 없는  열광에
서 그가 마약처럼 꼭 필요로 하지만 참아야 했던 대중의 열광에 대한 대용
품을 보았다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레고어 슈트라서
  이 마비의 시기에 히틀러가 얻은 빈약한 성공 중에는 무엇보다도 그레고
어 슈트라서를 얻은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패한 11월  쿠데타에 이
르기까지 란츠후트의 약사였고 저지  바이에른 대관구 지도관이었던 이 인
물은 가끔가다만 전면에 등장하곤 하였다.
  그는 원래 '전선 체험'을 통해서 정치에 들어오게  되었다. 히틀러가 없는 
기간을 이용하여 스스로 앞으로 나서려고 애쓰면서  그는 '국가사회주의 자
유운동'의 틀 안에서 특히 북부 독일과 루르 지방에서  어느 정도의 지지세
력을 만들어냈다. 뚱뚱하면서도 상당히 예민한 이 남자는  음식점들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호머를 그리스어 원전으로 읽고, 우울한  바이에른 소도시 
유명인사의 원형처럼 행동하였다.  그는 인상적인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연
설 재능 이외에도 기자인 동생 오토를 공격적인 동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부서지고 냉정하고  신경쇠약증에 걸린 히틀러와은 잘 어울리
기 어려웠다. 히틀러라는  사람과 지저분하고 비굴한 측근이 다 그의  마음
에 들지 않았다. 정치적인 견해에서 두 사람의 의견일치는  여러 가지로 해
석이 흔들리면서 전체적으로는 규정되지 않는 '국가사회주의'라는 개념에만 
한정되었다. 그는  히틀러의 마법과, 추종자를 모아  하나의 이념을 위해서 
동원하는 능력에 감탄하였다. 
  새로운 당 창설을  위한 모임에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1925년 
3월 초에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과  결별한 대가로 북부 독일 전역에 대해
서 상당히 독자적인 국가사회당  지휘권을 제안하자 슈트라서는 자기는 추
종자이지 대등한 동지로서 히틀러에게 합류할 수는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
는 도덕적인 주저와  의심을 여전히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
래를 위한 이념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히틀러 씨에 협조하기로 
하였다."

    에른스트 팀과의 결별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상당한 손실을  불러왔다. 슈트라서가 폭풍  같은 
에너지로 북부 독일에  당조직을 마련하고, 짧은 시간 안에 슐레스비히  홀
슈타인, 폼메른, 저지 잔센 사이에 7개의 새로운 대관구(국가사회당과 히틀
러 통치  시대의 행정구: 역주)를  만들어내는 동안 히틀러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많은 후퇴를 겪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권위와 노선을 지
키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에른스트 룀과 결별하였다.
  뭔헨의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면서도  석방된 전직 대위 룀은 즉시 
의용군과 전투동맹 시절의 옛 전우들을 긁어모아 새로운  모임, 즉 '전우회'
를 만들었다. 상황이  점차 정상화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이 영원한 병사들은 거의 예의 없이 룀의 전략적 능력과 조직능력 아래 
모여들었다.
  란츠베르크에서 이미 히틀러는  이런 활동을 근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
것은 자신의  조기석방, 민족주의 운동  내에서 권력확보와 새로운  전략을 
어느 정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23년 11월의 교훈에 따르면  이제
부터 군대조직과  그들의 무장한 자신감, 음모적인  행태, 병졸놀이 따위와 
결별해야 했다.  히틀러의 의지에 따르면  국가사회당이 필요로 하는  것은 
준군사적으로 조직된, 오직 정치적 지휘, 따라서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당의 
군대였다. 그에  반해서 룀은 방위군을  위한 비밀부대라는 한때의  이상에 
붙박여 있었고, 심지어  돌격대를 당과 완전히 분리시켜서 오직 자신의  전
우회 하부조직으로 만들려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보면 돌격대의 명령권과  기능을 놓고 다투는 오래된 싸움이
었다. 느리고 둔한 룀과 달리  히틀러는 그 사이 원한과 인식을 얻었다. 그
는 로소브와 그 휘하 장교들이  11월 8일과 9일에 배신한 사실을 용서하지 
않았다. 또한 그날 밤의  사건에서, 맹세와 합법성은 장교들 대다수에게 있
어 뛰어넘을 수  없는 도덕적 장벽이라는 사실도 배웠다. 로소브의  배신은 
관례에 어긋나고 명예스럽지 않는  불법적인 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망
적인 시도이기도 했다. 카르, 히틀러, 로소브 자신의 갈팡질팡하는 마음, 상
황이 그러한 불법적  일 속에서 군대를 이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히틀
러는 거기서 결론을 이끌어냈다. 군과는 어떤 형태로도 뒤섞이지 말 것. 바
로 거기에 온갖 불법성의 시작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4월 초반에 갈등이  불거져 나왔다. 룀은 몽상적인 애착으로  히틀러에게 
매달렸다. 그는 정직하고 자발적이고, 자신의 견해와 친구들에 대해서 똑같
이 충성스러웠다. 히틀러는  정치 이력 초창기에 룀에게서 얼마나 많은  도
움을 받았는지 잊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시대가 변했고, 
한때 영향력이 있던 사람이 그 사이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려 들지 않는 고
집스럽고 힘든 친구로 변했다는 사실도 보았다.
  얼마 동안 그는 망설이면서 룀의 고집에 양보를 했다.  그러나 마침내 아
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결별을 결심하였다.  4월 중순에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룀은 한 번 더 국가사회당과 돌격대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
하였다. 자신의 부대는 비정치적인 개인군대로 남아서 당과  일상적인 투쟁
과 무관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언성이 높아졌다.
  히틀러는 특히 룀의 생각이 1923년 여름처럼 아직도 자신을 다른 사람들
의 의도를 위한  포로로 만들고, 또다시 '선전꾼' 으로 격하시키려는  데 자
존심이 상했다. 화가  잔뜩 나서 룀에게 우정을 배신하였다고 비난하지  룀
은 대화를 중단해버렸다. 다음날 그는 서면으로 돌격대  지휘권을 반납하였
고 히틀러는 답변하지 않았다.
  룀은 전우회 지휘권도 내놓고 난 다음 4월 말에 히틀러에게 한 번 더 편
지를 썼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가 함께 보냈던 아름답고 힘든 시간들을 기억하면서 자네에게 그 전우
애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한 자네의 개인적인 우정만은  없애지 말아달라
고 부탁하고 싶네." 그러나  히틀러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
음날 민족주의 신문에 사직서를 넘겨주자 <민족관찰자>는 아무런 주석 없
이 그것을 실었다.

    세력 약화
  히틀러에게 불안정한 전망마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  아니라, 주
로 이유에서 이루어진 루덴도르프와의 결별이 정치적으로 타당한 일이었음
을 알려주는 사건이  이 무렵 발생하였다. 1925년 말에 사회민주당  출신의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죽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권유로  민족주
의 진영은 '시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 유능하지만 완전히  이름 없는 야레
스 박사에 맞서서 루덴도르프를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장군은 겨우 1퍼
센트 남짓한  표를 얻어서 완패하였고,  그것을 히틀러는 잔혹한  만족감이 
없지도 않은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선거가 끝난 지  며칠 만에 그의 곁에 남은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믿을 
만하고 중요한 동지인  푀너 박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러자 그는  정말
로 정치적 경력의  마지막에 이른 것 처럼  보였다. 당은 뮌헨에 겨우  7백 
명의 당원이 있을  뿐이었다. 안톤 드렉스러는 그와 결별하고 자신의  온건
한 성향에 알맞는 정당을 창설하였다. 히틀러의 싸움부대는  그곳을 찾아가 
쑥밭으로 만들고  경쟁정당을 엉망으로 만들곤  하였다. 그와 비슷한  일이 
다른 유사 단체들에도  일어났다. 드물지 않게 히틀러 자신이 하마가죽  채
찍을 손에 들고서 집회에  쳐들어가서 연설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단상에
서 대중을 향하여  미소짓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
는 재선거에 앞서서  그는 지지자들에게 그 사이  입후보한 폰 힌덴부르크 
사령관을 지지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힌덴부르크를 지지한 것은  그 어떤 '장기적인 정치적 고려'에서 나
온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그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표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가  '질서정당'의 
전선으로 합류하였음을 과시적으로  보여주었고, 거의 모든 강력한  기관들
에 대한 열쇠를 장악하였거나 앞으로 장악하게 될  남자, 이 '대리황제'에게 
접근해 갔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지속적인 후퇴가 히틀러의  당내 지위를 약화시켰다. 특히  튀링겐, 작센, 
뷔르템베르크 등지에서 지배권을 얻기 위해 계속 악전고투해야  했던 반면,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북부  독일에서 당의 건설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쉬
지 않고 움직였다.  대개의 밤을 기차나 대합실에서 보냈으며 낮  동안에는 
지지자들을 방문하고, 관구들을 창설하고, 당 임원들을 소집하고 회의를 하
거나 집회에 참석하곤  하였다. 1925년과 1926년에 그는 거의 1백  개의 회
합에서 주연설자로  토론을 맡았다. 반면에  히틀러는 침묵의 판결을  받고 
있었다. 
  슈트라서의 경쟁적인 명예욕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사정이 일시적으로 당
의 무게중심이 북부로  옮겨간 것 같다는 인상을 일깨웠다. 슈트라서의  충
성심 덕분에  히틀러의 지도적 지위는  전체적으로 인정되고 있었지만,  이 
멜로 드라마적이고 소시민적인  보헤미안(히틀러)과 그의 '로마 노선'에  대
한 냉정하고 청교도적인  북 도이치 사람들의 불신이  거듭 드러나곤 하였
다. 그리고 드물지 않게 뮌헨 중앙당에 대한 광범위한  독립의 인정을 전제
로 해서만 새로운 당원들을 얻을 수 있었다.
  지구당 지도자들을 당 지도부가 임명한다는 히틀러의 요구도 북부에서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당원지침서를 간행하는 권리를 사이에  둔 중앙당
과 관구들 사이의 갈등은 오랜 세월을 끌었다. 히틀러는  극도로 예민한 권
력의지를 가지고서 그러한 조직상의 부수적인 문제들이 중앙당이 통제력을 
가지느냐 아니면  무능하냐를 결정하는 문제가  되리라는 사실을 간파하였
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양보하지 않았으면서도 개별적인  관구
들의 독자적 권력을  오랫동안 참아야 했다. 북부 라인란트 관구는  1925년 
말에도 뮌헨 중앙당의 당원지침서를 이용하기를 거부하였다.

    '새로운 유형' 요제프 괴벨스
  엘버펠트에 자리잡은 라인란트  관구의 사무장은 젊은 인텔리였다. 기자, 
작가, 증권 브로커 등이 되어보려는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다음에 그는 마
침내 어떤 도이치 민족주의 정치가의 비서가 되어서  국가사회주의, 이어서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연결되었다.  그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라는  이름이었
다. 그를 슈트라서에게 끌어들인 요인은 무엇보다도 그의  지적 과격주의였
다.
  그는 정열적인 문학작품과 일기장에서  자기 자신에 전율을 느끼면서 이
렇게 확인하였다. "나는 가장 과격한 사람이다.  새로운 유형이다. 혁명가의 
유형이다." 그는 높고도 특이하게 매혹적인 음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시대
에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열정을 함축성과  결합시킨 문체를 가졌다. 그의 
과격주의는 주로 민족주의  이념과 사회주의 혁명이념을 이용하였다.  그의 
새로운 후원자인 슈트라서의 개념들과 주장들을 알팍하고 날카롭게 서술한 
것 같았다. 피가 통하지 않는, 이상스럽게도 추상적인 감정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히틀러와는  달리 감정적인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전후시대의 곤궁과 
비참의 체험에서 낭만적인 특성을 가진 사회주의를 이끌어냈다.
  그것은 국가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계층에 침투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는 기대와 결합된 것이었다. 그는 한동안 요제프 괴벨스를  자기 동생 오토
와 나란히 자신의  정책노선의 지적인 대변자로 보았다. 이 노선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히틀러의 '파시스트적인' 남  도이치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일종의 사회주의적 대안의 표현으로서만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슈트라서 일파와 그들의 생각
  불도이치 국가사회주의들의 특별의식을 처음에  1925년 9월 10일 하겐에
서 창설된 노동결사로 나타났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나란히  괴벨스가 모
습을 드러냈다. 참석자들은 거듭 뮌헨 중앙당에 대한  공격을 하였고, '서부 
블록'이나, '반대공격'이니 '뮌헨의 완고한  보스'니 하는 말을 하면서 당 지
도부가 당  정책 문제에 관심이  적다고 비난하였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민족관찰자>의 '끔찍하게 낮은 수준'을 탄식하였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수많은 비난들 중 어느  것도 히틀러 개인이나 
당수로서의 위치 자체를  향한 것은 없었다. 그의 지위 자체는  약화시키기
는커녕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생각이었다. 그가 아니라 '중앙
의 무질서한 살림'에 대해서,  그리고 에서와 슈트라이허의 '능숙한 허풍'에 
대한 비난이었다. 전체적으로 상황을 잘못 평가한 가운데  슈트라서 일파는 
'파멸적인 뮌헨 노선' '에서의  독재' 올가미에서 히틀러는 해방시키고 자신
의 일에 충실하도록 만들기를 희망하였다.
  이미 초기 시절부터  퍼져 있었고, 모든 증거와 외양에 반대하면서  마지
막까지 남아 있던 이해하기 힘든  관념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된다. 즉 '지
도자'는 불안하고 인간적인데  다만 잘못된 충고자들과, 이기적이거나 악의
적인 요소들에 둘러싸여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작자들이 지도자가 
자신의 정직한 의지를  좇는 것, 재앙의 흐름을 간파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집단의 정책은  괴벨스가 순수 작업하는 반원간 잡지  <국가사회주의 
편지>에 발표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운동의  시야를 현재로 향하도록 
하고, 동경에 가득 찬,  회고적인 중산층 이념의 협소함에서 벗어나려고 하
였다. 뮌헨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는 거의 모든  것이 여기서는 의문으로 바
뀌거나 공공연히  부패로 여겨졌다." 특히  이 잡지는 북부의 다른  사회적 
조건, 그러니까  바이에른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적,  도시적인 사회구조를 
고려해서 반자본주의적 성향을 강조하였다.
  어떤 베를린 당원이 편지에 쓴 것처럼  국가사회주의는 '과격화된 부르주
아'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노동자의 사회주의라는 말에 두려움'을 가져
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정책적 고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다. "우
리는 사회주의자다.  경제적 약자를 착취하고, 부당한  보수를 주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철천지  원수들이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
라도 이러한 체계를 파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괴벨스는 (민족)국가주의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
의 접근공식을 탐색하였고, 동일한 태도와 신념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는 
계급투쟁 이론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붕괴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에 대한 우리의 꿈을  영원히 파묻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전세계의 
원수 유대인이라는 히틀러의 이론에 분명한  의문을 표시하였다. "자본주의 
유대인과 볼셰비키 유대인이  동일한 존재라는 말은 사실이  아닐 듯하다." 
그리고 유대인 문제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대담하게 주장
하였다.
  외교정책도 뮌헨 지도부와 현저히 달랐다. 슈트라서 일파는  시대의 사회
주의적 호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향한 호소로 여기
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국민들을  위한 호소'로 이해하였다. 배신당하고, 치
욕을 겪고, 착취당한 독일이 그 국가들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
은 세계를 억압하는 민족과 억압당한 민족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의 투
쟁>에서 '정치적 헛소리'라고 평가된 바 있는 수정주의적 요구를 하였다.
  외교정책도 뮌헨 지도부와 현저히  달랐다 슈트라서 일파는 시대의 사회
주의적 호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향한 호소로 여기
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국민들을 위한 호소'로 이해하였다  배신당하고, 치
욕을 겪고, 착취당한 독일이 그 국가들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
은 세계를 억압하는 민족과 억압당한 민족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의 투
쟁>에서 '정치적 헛소리'라고 평가된 바 있는 수정주의적 요구를 하였다. 
  히틀러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광범위한 정복계획의 대상으로 여겼고,  로
젠베르크는 러시아를 '유대인 형리 식민지'라고  불렀다면, 괴벨스는 유토비
아를 향한 러시아의 의지를 극히 높이  평가하였다. 슈트라서 자신은 "프랑
스의 군국주의에 대항하여,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윌스트리트의 자
본주의에 대항하여" 모스크바와의 동맹에 찬성하였다.  슈트라서 일파는 정
책 설명에서 대토지  소유를 없애고, 모든 소규모  기업은 조합에 들 것과, 
20명 이상의 노동자를 가진  모든 작업장의 부분적인 사회주의화를 주장하
였다. 민간업체의 경우 노동자에게 10퍼센트를  배당하고, 국가에 30퍼센트, 
지역에 6퍼센트, 소속구역에 5퍼센트를 배당하였다. 그들은 또한 입법의 간
편화, 계급차별 없는 학교, 보수를 부분적으로 현물로 지급하는 것 등의 제
안에 찬성하였다. 보수를 현물로 지급하는 것은 인플레이션  시대에 생겨난 
화폐에 대한 불신을 낭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하노버 당대화
  이러한 기본적 정책노선들은 1925년  11월 25일 하노버에서 열린 당대회
에서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제안하였다. 북부와 서부 도이치  관구들의 중앙
에 대한  저항과, 관구지도자 루스트가 표현해서  박수갈채를 받은 '뮌헨의 
교황'에 대한 저항적인 분위기는 예상한 정도를 넘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1월 말에 다시 하노버에 있는 관구지도자 루스트의 집에서 열린 합의 모든 
쟁점을 기록하자 재빨리 문을 가리키며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자료들이 틀
리지 않는다면 그는 이  모임에서 "소 부르주아 아돌프 히틀러를 국가사회
주의 당에서 쫓아내기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모반적인 어조보다도 실무적인 언급들이 더욱 뚜렷하게 히틀러의 
당내 신망이  그 사이 얼마나  추락하였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슈트라서는 
12월에 자신의 정책입안을 만들었다. 그것은 상당히 멋대로  조합한 옛날의 
25개 조항을  대체하고, 당을 소시민의  이해를 대표한다는 나쁜  평판에서 
구해내기 위한 정책안이었다.  그것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12월 중에  널
리 퍼졌다.
  히틀러가 이러한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서 '분노'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아
무도 패더의 항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이 일로  인해서 모든 표결에서 
그에게 투표권을  거부하였다. 25명의 참석자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바보 
멍청이에 어쩌면  음모꾼'인 퀄른  관구지도자 로버트  라이만이, 괴벨스가 
'화폐가치 인상의 똥'이라고 부른 페더와 더불어 히틀러 편을 들었다.
  그 사이 이  지역 여론에서 열렬하게 논의된 문제, 도이치  영주가문들의 
재산을 국유화하느냐, 아니면  1918년에 압류된 그들의 재산을  돌려주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노동결사는  히틀러는 전략적인 고려에서 영주들과 기
득권 세력을 편들 필요성을 보았다. 그에 반해서 슈트라서  일파는 좌파 정
당들과 마찬가지로 예전 영주들의 재산 박탈에 찬성하였다.
  물론 당 지도부를 공격할 의도는 아니라는 말뿐의 고백을 앞세우기는 하
였다. 그리고  뮌헨 중앙당의  동의도 받지 않고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자>라는 신문을  발간하고,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란츠후트에 있는 자신의 
약국을 저당  잡히고 얻은 돈으로  출판사를 차리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금세 상당한 정도의  콘체른으로 발전하였다. 6주간의 신문으로 그는  일시
로 뮌헨 중앙당의  에어 출판사를 크기면에서 추월했을 뿐 아니라,  콘라트 
하이덴의 평가에 따르면  '정신적인 다양성과 정직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쪽
의 출판물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하노버에 모여든 이들 패거리가 히틀러와 권력시합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는 사실은, 히틀러가 추진하는 합법적 충성전략을 공격적이고  극단까지 이
르는 '파국정책'으로 바꾸자는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요구로 나타났다. 그는 
국가를 해치고 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수단, 곧 쿠데타, 폭탄, 파업, 거리폭
동, 소동 등을 전투적인 권력정보 의지에 어울리는 것으로 여겼다. 바로 뒤
이어 괴벨스는  이 개념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 목적을 위해 배고픔, 
절망, 희생 등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 민족 안에 등대불을 밝혀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적 절망의 위
대한 불을 일으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때까지 히틀러는 이  일파의 활동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다. 그들이  일
시적으로 당내 제2의  정부 형태로 보이는 권력중심을 만들어내고,  그레고
어 슈트라서의 이름이  북 독일에서 그 자신의  이름보다 '더 많은' 명성을 
날려도 그랬다. 괴벨스는 일기장에서  이렇게 환호성을 울렸다. "아무런 뮌
헨을 믿지 않는다. 엘버펠트가 도이치 사회주의의 메카가 되어야 한다." 자
신을 명예회장으로 끌어내리고,  흩어진 민족주의 진영을 더 큰 운동  안에 
포섭해 들이려는  의도에 대해서도 히틀러는  경멸적으로 무시하고, <나의 
투쟁>에서 그들에게 몇 페이지의 조롱을 보냈을 뿐이다.

    히틀러, 산 속의 평화에 파묻히다
  히틀러의 이러한 은둔은  부분적으로 개인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베히슈타인  부부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베르히테스가덴 
근처 오버잘츠베르크(윗소금산)에 있는 함부르크 상인의 별장을 세냈다. 그
것은 1층에 커다란  거실과 베란다가 있고, 2층에는  세 개의 방들이 있는,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집이었다. 방문객들에게는 이 집이 자기 것이  아
니라고 강조하곤 하였다. "다른 '정당거물'들의  고약한 행실을 본받아 보스
로서의 거동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이 과부가 된 이복누이  앙겔라 라우발에게 자기 집의 살림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열일곱  살 난 딸 겔 리가 그녀를  따라 왔다. 그는 이 
예쁘고, 경박스럽고, 조카라고  강조하곤 하던 소녀를 귀여워  하였다. 그것
은 곧 정열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물론 이 관계는 그의 참을성  없음과 낭
만적으로 과장된 여성에  대한 이상, 숙질 사이의 관계라는 스캔들  등으로 
인해서 곧 부담스러운 것으로 변했다가 절망적인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주 드물게  히틀러는 자신의 숙소를  떠났다. 그것도 보통은  조카딸과 
함께 뮌헨의 오페라를 보러 가거나  아니면 때로 시내에 있는 친구들을 방
문하러 갈  때뿐이었다. 친구들이라야 한프슈텡글,  브루크만, 에서, 호프만 
부부 등이었다.
  당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남 독일에서도 그가  당지도자
의 일을 게을리하고, 당의  자금을 개인용도로 이용하며, 예쁜 조카딸과 함
께 시골의 파티만  즐긴다는 비판이 커졌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러한  비난
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1925년 여름에 <나의  투쟁> 제1권이 나왔다. 이 
책이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첫해에 1만 부도 팔리지 않았건만 히틀러
는 연설 욕구가 꽉 막혀 있는데다가 변명이 필요하기도 해서 제2권을 구술
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침착한 태도로 그는 이 산 속 평화에서 북 도이치 지지자들의 당 
정책 논의를 바라보았다.  그의 은둔을 결정을 내리는 일을 두려워하는  그
의 특성에 의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론에 대한  실용주의자의 무관심 탓
이기도 했다. 그는 개념들을 경멸하고 꼭 필요할 경우에는  어떤 용어를 써
서든지 어떤  일이든 막아내곤 하였다.  그는 또한 은밀한  란츠베르크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유희가 되풀이되기를 기대하였던 것 같다.  경쟁자들을 부
위를 높이는 방법 말이다. 슈트라서 파국전략으로 이제는  상황이 심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를 보고 그는 당연히 개인적인 도전의사를 알아보았다. 
그들의 의도는 자신의 집행유예와  아울러 정치적 장래까지 불안하게 만들
었던 룀의 기도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초조하게 기회를 기다렸다. 
적대자들에게 한방 먹이고 자신의 권위를 되찾을 기회였다.
  뒤돌아보면 히틀러의 초조하고도 지배적인 특성이 당의 성공적인 재출발 
뒤에 1923년 11월의 돌진에 못지않게 당을 파괴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성
질은 전략적인 개념들을 분명히 바보로 만들고 말았다.  1925년 8월에 어떤 
지구당은 1월에 138명의 당원이 있었는데 이제는 겨우 30명만 활동하고 있
다고 보고 하였다.  히틀러가 이 시기에 안톤 드렉슬러에게 행한  모욕주기 
작전에서 추종자이며 증인인 어떤 사람이 그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맺음말
에서 국가사회당은 그의 방법을  가지고는 장기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서두
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당신은 아주 슬픈 종말을 맺을 것입니다!"
  히틀러만은 계속되는 자신의 실패의  고리 속에서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의 세계관을 이미 형상화해낸 확고함과 고집은  이런 
위기를 어떤 의기소침의 흔적이나 체념적인 기분 없이  넘기도록 해주었다. 
극단적으로 극적인 상황에 마주섰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둘러싼 운명적
인 사건들에 얼마나 얽매이지 않았던가  하는 것은 이 시기에 그가 스케치
북이나 자그마한  편지함에 고풍스러운 과시용 건축물,  개선문, 멋진 둥근 
지붕 홀 등을 그렸다는 사실이 보여주고 있다. 숭고하게  통제된 여백을 가
진 극장 배경그림은,  깨지지 않는 세계정복 계획들, 세기의 기대,  그 모든 
실패와 당시의 통탄스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 07
    제 3장 싸움을 위해 일어서다
  히틀러가 마주선 상황은  거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란츠베르크에
서 돌아온 다음 그를 둘러쌌고, 그의 도전들과  모욕과 분리책략 등에 대해서 구
원자이며 중재자라는 더 높은  권리를 부여하였던 메시아적인 후광은 일년이 지
나자 사라져버렸다. 당은 그  정도의 부담을 한 번 더 견디어낼  처지에 있지 않
았다. 정치적 전망을  지켜내려면 그는 반대자들을 파괴해서  자기들에게 끌어드
려야 했다. 북 도이치 사람들의 사회주의 성향과  파국 전략을 물리치고 당의 통
일성을 회복하여야  했으며, 에서, 아만 등  뭔헨 친구들과 화해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히틀러의  전략적 능숙함, 지금에 와서는  해독하기 힘든 인간ㅇ르 다루는 
기술, 그의 마법 등이 이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 싸움을 위한  지렛대로 그는 영주 가문에  대한 재산몰수 문제를 이용하였
다. 사회주의  정당들에 의해서 제안된  국민투표는 모든 전선과  정치적 결속을 
막론하고 무처별적인 대립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현재의 파당을 무
너뜨리기에 특별히 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하노버에서도 이  문제는 정열적으로 
토론되었고, 합의는 오직 타협적인 형식으로만 나왔다. 
  노동자 계층뿐 아니라  중산층, 소규모 저축자들과 재산가들 등 원래의  당 지
지계층은 , 영주  가문이 스스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각기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이전의 영주들이 맞서기  위해서 공산주의자
들과 동맹을 맺고, 재산을 몰수해서 혁명의  부당서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다는 생
각도 이들의 민족주의저  감성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연속적인 싸
움질이 계속되었다.

    슈트라서를 굴복시키다
  이틀러느  ㄴ재빨리 결심해서  이러한  상황의 전략적인  이점을  이용하였다. 
1926년 2월 14일자로  그는 밤베르크에 전국적인 당 지도자  대회를 소집하였다. 
이 도시를  선택한 것부터아 이미  세심한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밤베르크는 
그에제 무조건 충성하는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의 아성이었다.
  몇 주 전 크리스마스 축제 때도 히틀러는  이곳 지구당에 나타났다. 그 빡에도 
그는 대개는 별스럽지 않은  지역조직을 가진 북 도이치 관구지도자들이 도착할 
때에 깃발장식과  눈에 띄는 플래카드,  밀집된 대형행사의 안내문  등을 통해서 
강력한 인상을 받도록,  그리고 가능하다면 용기를 조금  잃어버리도록 배려하였
다. 나아가서 그는 임시소집자와 참석자의 명단  조작을 통해서 자신의 지지자들
이 뚜렷한 다수가 되도록 만들었다.(노동 공동체의 모든 관구 지도자들이 초청되
지는 않았다. 루르  관구 지도자 칼 카우프만은 1926년 2월  12일자 편지에서 이 
점을 항의하고 있다.  다른 한편 당 지도부는 남부 독일의  충성스러운 당원들을 
초청하였다.)
  거의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된 연설로 그는 온종일 걸리는  일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영주재산  몰수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가르켜  유대인 은행주와 증권사주의 
재산을 보호하려 했다느  ㄴ이유로 성실하지 못 하다고 말했다. 그는  옛날의 영
주들이 권도 없는  것을 얻어서는 안된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것
을 그들에게서 빼앗아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당은 사유재산과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서 남 도이치  지지자들의 커가는 박수갈채  속에서 조목별로 
들어갔다.
  그러자 묵 도이치 사람들도 한 사람씩  망설이면서 이쪽으로 합류하였다. 슈트
라서 일파의 정택을 검토하고,  거기에 맞서 1920년의 당 정책을 내세웠다. 이것
은 "우리 종교와 세계관의 근본 취지입니다.  그것을 흔드는 것은 우리의 이념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배신 행위가 될 것입니다."
  괴벨스의 일기는 반대자들  사이에서 내심은 혼란이 커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치 얻어맞은 것 같다. 히틀러란  어떤 사람인가? 반동분자인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서투르고 불안하다.  러시아 문제는 완전히 옆으로 치워졌다. 이탈리아와 
영국은 자연의 동지들이란다, 끔찍하군!  우리의 과제는 볼셰비즘을 파괴하는 것
이란다. 볼셰비즘은 유대의  권력이라고! 우리가 러시아를 상속해야 한다고!  1억 
8천만명을!!! 재산문제에  대한 영주들과 정부의  계약이라고... ! 끔찍한  일이다! 
정책은 충분하단다. 그것으로 족하다. 페더는 고개를 끄덕인다. 라이도 끄덕인다. 
슈트라이허도 끄덕인다. 에서도 끄덕인다. 당신을 모임에서 만나니 내 영혼이 괴
롭구나!!! 짧막한 토론.  슈트라이서가 연설하고 있다. 말이 막히고, 더듬고,  떨면
서, 미숙한 돼지들 보다 별로 나을 게 없구나...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마
치 머리에 한방 맞은 것 같다."
  히틀러는 상대방이 의견을 철회하도록  만들지는 못했다. 슈트라서는 반볼셰비
즘은 본능에 어긋난다고  말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혼란정책을  위한 모범이라고 
불렀다, 반볼셰비즘은 민족주의  세력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착취자  이익에 봉
사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패배는 완벽한 것이었다. 오토 슈트라서
는 뒷날 자기들의 굴복을 변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히틀러가 간교하게
도 평일에  이 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래서  당직 이외의 직업을 가진  북 도이치 
관구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괴벨스만 
밤베르크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월 14일은 일요일이었다. 슈트라서 일파는  이름 있느 ㄴ거의 모든 대
표자들이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에서 온 힌리히로제, 폼베
이른 지방에서  온 테오도어 팔렌, 하노버의  루스트, 함부르크의 클란트 등이었
다. 그러나 좌파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옹호하기  위해서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고 
그들은 모두 자기들  중의 연설가인 요제프 괴벨스만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괴
벨스처럼 머리에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괴벨스가 히틀러의  최면술적인 힘에 
의해서, 그의 화려한 등장과, 자동차 행렬,  뮌헨 사람들의 기구와 물질적 경비에 
의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압도되고 있었다면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적어도 그 순
간에는 히틀러의 능숙함과 유혹의 힘에 패배하였다.
  '배신자 콘체른' 에 대한 공격이 절정에 달했을 때 히틀러는 갑자기 보란 듯이 
그에게 오더니 팔로  그의 어깨를 감쌌다. 이러한 행동이 슈트라서  자신을 되돌
려놓지는 못했지만, 거기  모여든 사람들에게는 어떤 효과를 냈고, 슈트라로서로 
하여금 화해적인 반응을  보이도록 강요하였다. 북부와 서부도이치  관구 지도자
들의 노동자 계층은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들의 정책입안은  제대로 토론도 
되지 못했다. 영주들의 재산몰수는 거부되었다. 3주 뒤인 5월 5일에 그레고어 슈
트라는 등사된 서한을  동지들에게 보내서 정책입안서를 돌려보내달라고 긴급히 
요청하였다. "아주 특별한  이유에서"라고 그는 썼다. 자신은 "히틀러  씨를 위해
서 이 문서를 완전히  회수할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슈트라서는 
괴벨스ㄹ 배신에 화가나서 밤메르크 실패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괴벨스
가 히틀러와 뮌헨의 공격을 말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실상 그가 북부 독일에
서 떨어져 나오는 표지였다. 그러나 괴벨스는  밤베르크에서 아직 제대로 완성되
지 못했고, 그가  논쟁중에 일어서서 자신의 오류를 고백하고 자신이  히틀러 진
영으로 넘어갔다고 고백하였다는,  슈트라서가 퍼뜨린 소문은 확실한  것이 못된
다, 그것은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분명한 실패에 대해서 한 사람의  책임자를 찾
아내려는 시도였을  뿐이다, 칼 카우프만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괴벨스 자신은 
밤베르크 이후에도 히틀러가 사회주의를 배신했다고 주장  했다고 한다. 역시 카
우프만에 따르면 그들은  밤베르크의 실패를 괴벨스 탓으로  돌리기는 하였지만, 
한참 동안으니 그르 ㄹ동지라고  여겼지 절대로 배신자로 여기지는 않았다고 한
다.) 
  히틀러의 정력적인  반대는 슈트라서 일파의 좌파  강령보다는 오히려 좌파적 
생각을 향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념의 전조를 이념 
자체보다 더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으며, 언제라도  임의로 사회주의 관념들을 받
아들이거나 아니면  장식적으로 이용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괴벨스가  밤베르크 
당대회 전에 '히틀러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기'를 소망했던 것은 이우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당 운동에 대해서  무의미하고 치명적인 위험이라고 생
각한 것은, 토론하고 , 문제를 일으키는,  지적인 변명의 필요성과 의심의 영향을 
받는 국가사회주의자였다.
  그런 유형의 인물들이 슈트라이서 형제 주변에  모여들고 있었다. 히틀러는 슈
트라서 자신을 통해서 저 분파를 형성하는  유형이 돌아올까 두려워하였다. 그러
한 유형의 파괴적인 힘이 전에도 민족주의  운동을 파멸시켰다. 히틀러는 극단화
시키는 성향에 따라서 곧 모든 이념논쟁을  분파주의와 동일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는 추종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갈 등을  좋아하였고, 때로는 촉진시키기도 하였
지만 정책을 놓고  의견차이를 가지는 것만은 싫어하였다. 그런 일은  그의 생각
으로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외부로 향한 타격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기독교
의 성공비밀 중  하나는 그 교리를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히틀러의 '카톨릭'  기질은 견고하고 변화되지 않는  형식을 고집하는 그의 
신념에 잘 나타나고 있다. 
  몇 주 뒤에  벌써 그는 어떤 기회를 이용해서  낡은 당 강령이 분명한 약점을 
자기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바로 이러한 낡
고 고색창연한 특성들이야말로 그것을 토론의 대상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질문들에 답변하려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마련해주는 것
이라야 한다.  그가 엄격한 일관성을  가지고 지도자와 이념이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지도자, 변화될 수 없는  강령이라는 원칙과 
잘 들어맞는다. "맹목적  믿음은 산을 움직인다."고 히틀러는  말했다. 그의 심복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강령은 두 마디로 요약된다. 즉 '아돌프 히
틀러'다."(여름 위기 동안 히틀러는 벌써 앞으로 6년  동안 강령을 변화시키지 않
을 것을 요구하였고 자신이 당에 재입당하는 것을 그것과 연계시켰다.)

    이념논쟁의 종결
  밤베르크 당대회와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굴욕은 이미 국가사회주의 좌파의 종
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좌파는  시끄럽고, 특히 오토 슈트라서가 쓴 책에서 온
갖 소동을 일으켰지만 앞으로는 오직 방해하는 이론일 뿐 진지한 정치적 대안이 
되지 못했다. '사회주의'는 비정치적인 애국주의 구호로 대체되었다. 정다의 선동
에서 '밀매 자본주의자'의 모습은 점차  물러나고,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나 다른 
정부 대표자 같은 '국가이익을 떨이로 파는  자들'이란 표현이 나타났다. 그와 동
시에 이대회는 국가사회당을  최종적으로  엄격한 지도자당으로  만들었다. 이제
부터는 마지막날까지 어떤이념적인  논점투쟁도 없게 되었다. 오직  자리와 총애
를 얻기 위한 싸움만 남게 된다. "우리 운동의 동화력은  무서울 정도다,"라고 히
틀러는만족스럽게 확인하였다.  동시에 국가사회주의는 자체적인  사회적 구상으
로 공화국 질서에 도전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국가사외주의는 공화국에 맞서 이념이 아니라 투입  준비가 된, 잘 훈련된, '지
도자'의 카리스마를 가진 전투력을 내세웠다.  히틀러의 설명대로 '우리의 높으신 
분들게 그 많은 공포심을 유발한' '일방성이라는 원시적 힘' 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직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이미지였지만 "독은  대립하는 독으로만 깨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남자의 주먹"을 내세웠다. "더  강한 두 개골, 가장  강력한 
결단력, 더 강력한 이상주의가 사태를  결정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자리에
서 그는 이렇게 학인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싸움은 '정신적'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광신주의로 싸우는 것이다."
  국가사회당을 다른 모든 정당과 정치적 투쟁운동과  구분하고, 또한 유연한 공
산당 간부들에 비해서도 분명한 우세를 확보해준 것은 이 정당의 가차없는 도구
적 성격이었다. 공산당 간부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일탈, 회의, 지적 거부의 요소
들이 나타나곤 하였다.  그러나 국가사회당에서는 반대파의 저항  없는 자진해체
와 더불어  광범위한 종속의지가 일깨워진  것 처럼 보인다.  슈트라서의 수많은 
추종자들은 이제 '정당운동을  지도자의 손에 쓰기 좋고,  흠없는 도구로' 만드는 
일을 명예로 삼게 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최고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이제부터 날카로운 승마용 채찍으
로 절대적 명령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결정권조차
도 갖지 못했다. '좋은  국가사회주의자의 원형'은 '지도자를 위해서 언제하도 맞
아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전당대회는 히틀러를 제1의장으로 뽑자는 
확고한 제안을 형식적인  익살극처럼 명랑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실체로 괴링이 
나중에 말한 것처럼 '지도자'의 압도적인 권위  옆에서는 누구도 감히 '그가 올라
설 돌 이상' 이 되지 못했다. 
  히틀러 스스로 자신의 절대적 지휘권을 역사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1926년 당
대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개인숭배를 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합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상 모든 위대한 시대에 언제나 단 한 
사람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법이죠. 어떤 운동이  아니라 오직 사람들만이 역
사에서 거론되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보통 과도한 승리를  좋아하는 성격과는 달리 밤베르크ㄹ 성공을 유
화적인 태도와 결합시켰다. 그러고어 슈트라서가 자동차 사고를 당하자 그는 '엄
청난 꽃다발을  들고서' 환자를 찾아가서 환자의  편지에 따르면 '매우  친절' 한 
태도를 보였다. 슈트라서  일파의 대변인 중 한 사람으로서 뮌헨  당 지도부에서 
가장 나쁜 평판을 가졌던 괴벨스도 히틀러의 직접적인 구애를 받았다. 
  집회가 끝났을 때 히틀러는 압도된 태도로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포옹하
였다. "그는 부끄러울 정도로  우리에게 친절하다."고 괴벨스는 감동해서 적었다. 
동시에 히틀러는 새로 얻은 권위를 확고하게 제도로 굳혀나가기 시작하였다. 
  
    권력확보와 승리축하
  1926년 5월 22일 뮌헨에서 열린 전당대회는 국가사회당에 아주 노골적으로 히
틀러 개인을 위해 마련된 새로운 회직을 선보였다.  그에 따르면 당의 주인은 뮌
헨에 있는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연합이었다. 그 지도부는  동시에 전국지
도부가 된다. 최초의 의장은 연합법에 맞게 선출되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지지기반인  뮌헨 지구당의 수천 명  당원이 당 전체를 위한 
선거 심의기구를 도맡아버렸다. 그로써 당은 와전히 금치산이 되고 말았다. 뮌헨 
지구당원들은 다시 극히  까다롭게 조정된 방식으로만 제1의장에게 설명을 요구
할 권한을 가지므로  의장의 당 지배권은 무제한이고 통제받지 않게  되었다. 다
수결정이라도 그에 대해서는  구속력이 없었다. 권력없는 파벌이  생기는 것마저 
원천보쇄하기 위해서 관구  지도자들도 지구당 대회에서 선출되지 않고 제1의장
이 임명하기로 하였다. 위원회 의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권력안전 체계를 한 번  더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조사 및 조정위원회
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일종의 당 재판소로서 개인이나 혹은 지구당  천제를 국
가사회당에서 제명할  권한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 최초의  의당은 퇴직 
육군준장인 하이네만 이었다. 그는 위원회를 당  내부의 부정과 부도덕에 해항한 
투쟁기구라고 잘못 생각하였다. 그래서 히틀러는 부리기  좋은 발터 부흐 소령으
로 위원장을  바꾸었다. 위원으로는 열성이  있는 울리히 그라프와  젊은 변호사 
한스 프랑크를 임명하였다.
  6주 뒤인 7월 초에 히틀러는 바이마르에서 당대회를 열어서 자신의 승리를 축
하하였다. 이 당대회는 새로운  시대의 발전과 성향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모
든 비판적인, 아니면 히틀러가 경멸적으로 말한 '정신력 풍부한 움직임, 모든 '익
지 않고 불확실한 이념들'은 억압되었고, 처음으로 뒷날의 당대회 운영방식이 드
러났다. '제1의장의 서명을  받은' 신청서들만 허용되었다. 당 정책상의 견해차이
를 드러내고 '말다툼'을  벌이는 정당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잘 용접된  지도부'의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다. 
  개별적인 특별대회 의장들은  히틀러가 '원칙적 노선' 안에  정해놓은 대로 '지
도자 라고 느끼되  표결결과의 집행기관으로 자처하지' 않아야 했다. 원칙적으로 
표결 자체가 금지되고 '끝없는 토론들을  중단해야'했다. 토론해봐야 정치적 문제
들을 '연합대회가 열리는  장소에서 해결할 수도 있으리라'는 오류만을 부채질할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상의 연설시간이  엄격하게 제안되었다. '전체 프로그램
이 한 사람으로 해서 망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가 바이마르 국립극장  집회가 끝난 다음에 가죽혁대와  각반바지, 방풍 
재킷을 입은 모습으로 무개차에서  5천 명의 지지자들의 사열식을 검사할 때 처
음으로 이탈리아 파시스트  방식으로 팔을 쭉 뻗쳐서  인사를 했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는 있는  일이었다. 제복을 입은 돌격대 종대의 모습을  보고 괴벨스는 
환호하면서 제3제국이 다가오고 독일이 깨어나는  모습을 보았지만, 당시 관찰자
들의 판단에 따르면  모든 임의성을 억압한 것이  당에 오히려 무기력한 모습을 
부여하였다. 이념의 빈곤과  의견이 없는 것을 휘황찬란한  의식으로 덮어버리는 
기술은 이때만 해도 뒷날처럼 아직 그토록 절정에 도달하지 못했다. 
  귀빈들 중에는 재향군인회  철모단 지휘자 테오도어 뒤스터베르크와,  곧 이어
서 돌격대로 자리를  옮기는 황제의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도 끼여 있었
다. 그리고 몇  개의 민족주의 단체들도 당의 통일성과 힘에  압도되어서 자기들
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국가 사회당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레고어 슈트
라서의 입에서 나온 '죽은 국가사회주의'라는 공식이 바이마르의 인상이었다.

    돌격대의 역할문제
  돌격대는 아직도 불안과  반동적인 에너지의 마지막 요소로  남았다. 거기서는 
슈트라서 일파의 과격한 구호들이 특별히 오래  메아리를 울리고 있었다. 히틀러
는 륌을 퇴직시키고 난 다음  일년 이상을 기다렸다가 1926년 가을에 퇴직 소령
인 프란츠 페퍼  폰 살로몬을 새로운 돌격대의 최고 지휘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여러 의영군과  암살활동에 연루되었고,  나중에는 베스트팔랜 대관구  지도자를 
지낸 인물이었다. 
  그를 임명하면서 히틀러는 전톨적인  돌격대의 역할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즉 보조적인  군대조직도, 비밀조직이나 지역구의  싸움부대도 아니고, 중앙당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선전 및 대중테러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조직원칙을 발전시
키려고 하였다. 즉  보조적인 군대조직도, 비밀조직이나 지역구의 싸움부대도 아
니고, 중앙당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선전 및  대중테러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조
직원칙을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광신적이고 순수한 전투력
으로 돌격대를 당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그는 바이마르 국립극장에서 '충성서약'
과 신비스런 의식과 함께  새로운 단위부대들에게 자기가 손수 도안한 연대기들
을 넘겨주었다.
  그는 폰 페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 돌격대의 교육은 군사적 관
점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당 목적에  맞도록 이루어져야 합니다." 옛날 군대
식 조직이 강력하기는 하였지만 이념이 없었고  그래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비밀
조직과 암살 서클은, 적이 이름 없는 형태로  머리와 영혼에 작용하고 있으며 적
의 대변인들을 개별적으로 제거해서 적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투쟁은 "작은 복수나  모반 행위의 분위기를 벗어나서 공
산주의와 그 조직체, 그리고 조종자들을 향한  세계관적인 파괴전쟁이 되어야 합
니다... 비밀집회의 형태가 아니라  강력한 대중행진의 형태로 일해야 하며, 단도
와 독, 피스톨이 아니라 거리를 점령함으로써 운동을  위한 길을 활짝 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른바 '돌격대 명령과 원칙적 지침'에서 폰 페러는 돌격대의 
특성과 활동 가능성을 구분하고 엄격한 훈련기술의  대중심리 효과 행진동작, 팔 
등어올리기, 혹은 '하일' 외침 등을 정하고, 대규모 장면의 효과를 조심스럽게 계
산하는 연출자처럼 느꼈다. 드물지 않게 그의  고지서는 심리기술적인 교훈의 성
격을 띠곤 했다.
  "돌격대가 대중 앞에 나서는 유일한 형식은  닫힌 장면이다. 그것은 동시에 가
장 강력한 선전형식들  중 하나다. 내면과 외면이 균형잡히고 잘  훈련된 수많은 
남자들을 보는 것은,  그들의 쉬지 않는 전투의지를 분명하게 보거나  짐작할 수 
있을 경우, 모든 도이치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문서와 연설
과 논리가 한 것보다 더 설득력 있고 감동시키는 언어로 가슴에 속삭이게 될 것
이다. 조용한 침착함과 자명성은  힘의 인상을 강조한다. 행진하는 부대의 힘 말
이다."
  그러나 돌격대를 무기 엇는  선전부대로 바꾸고 흥행적 매력을 부여하려는 시
도는 군대의  특수의식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모든 
대응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의 양순한 도구로 만들
려는 노력은  오직 제한적으로만 성공하였다.  그 이유는 이  직업군인들의 이념 
없는 시골식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했고, 군대기구가 정치기구에  대해서 언제나 
특수한 지위를 차지해온 나라의 전통 때문이기도 했다.
  페퍼의 재교육 구호는 '투쟁운동'으로서의 돌격대가,  말하는 부분에 불과한 정
치기구(PO)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느낌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
다. 돌격대는 정치기구 'PO'를  'P-제로'라고 부르곤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돌
격대는 자신들을 '우리 기구의 왕관'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들은 우리의 돌격대를 
흉내내지 못한다."고 이른바 의회정당에 대한 경멸적인 생각을 품고서  으스댔다. 
물론 의회 정당은 이것을 지속적인 곤란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국가사회
당의 당 군대 조직에서 갱겨난 곤란한 점들로,  열등감에 가득 찬 세계전쟁의 장
교와 군인들에게 다음 세대나  가능한 굴종적이고 허약한 군주적 인간형의 가다
로운 행동 균형을 요구한다는 딜레마였다.
  머지않아 룀처럼 고집센데다  더욱 독자적이고 냉정하며 전임자처럼 감상적으
로 약해지지도 않는 폰 페퍼와 최초의 갈등이 나타난다. 이 '기력 없는 오스트리
아 사람(히틀러)'이 무섭지 않다고 프로이센  추밀고문관의 아들(폰 페퍼)이 말하
였다.
  베를인 돌격대가  특별히 반항적으로  행동하였다. 이곳의 하부조직들은  그들 
특유의 번죄적 성향과 사기꾼 행동으로 특징 지을 수 있는 정팩을 계속 밀고 나
갔다. 관구 지도아 슐랑게  박사도 거기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정티기구의 베를
린 쪽 지도자들과 돌격대 지휘자들 사이의 싸움은 때로는 따귀를 주고받는 수준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소동은 베를린 국가사회당의  의미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곳 지구당은  당원이 채 1천명도 되지  못하는데다가 이제서야 겨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슈트라서  형제가 이른 여름에 이곳에서  신문업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1926년 10월의 상황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달의 당 내부 
사정은 좃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 관구에서는  베를린 조직의 완전한 파괴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날카로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제대로 된 지도자를  가져본 적이 
없나는 점이 이 관구의 비극이다."

    괴벨스, 히틀러에게 매료되다
  같은 달 중에 히틀러는 참을 수 없게 된  이 상황을 끝냈다. 그의 전략적인 섬
세함이 이런 행동에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혼란을 틈타서 베를린 지역의 정당 
조직을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관할에서 빼내고, 그의  자강 유능한 추종자를 매수
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요제트 괴벨스를 수도의  새고운 관구 지도자로 임
명한 것이다. 7월에 이미 이 야심만만한 반대자는 뮌헨과 베르히테그가덴(히틀러
의 별장)으로 초대 받고 자신의 극좌파적인 신념에 대해서  일지강에다가 간결하
게 '천재'라고 묘사하였다. '신적인 운명의  창조적 도구'라고 하면서 마침내 이렇
게 고백하였다. " 나는 그의 앞에서 떨면서 서 있다. 그는 어린아이 같고, 사랑스
럽고, 선량하고, 자비롭다. 고양이처럼 간교하고 영리하고 능숙하며, 사자처럼 포
효하고 거인답다. 한 인간, 한 남자... 그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다룬다. 선량한 친
구이며 스승!"
  이렇게 과도한 생각은  이 약삭빠른 기회주의자가 슈트라서에게서 떨어져나오
면서 느낀 당혹감을  약간 힘들게 감추고 있다. 같은 자리에  슈트라이서에 대해
서 이런 말이 적혀  있다. "그는 마침내 이성을 잃었다. 여전히 마음만은 지니고 
있지만. 나는 때로  그를 매우 사랑한다." 히틀러는 이질감이 재빨리  진행되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는 괴벨스에게  직위를 주면서 특수한  전권을 함께 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고나구 지도가의 위상을 강화할 뿐만 아리나,  슈트라서와 마팔면을 만으러 내도
록 고려된 것이었다. 히틀러는 분명하게 돌격대를  괴벨스 휘하에 들어가도록 만
들었다. 돌격대는 관구 지도자들에 대해서 열성적으로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 보
통이었다.
  슈트라서를 달래기 위해서 혹은  그의 저항 에너지를 마비시키기 위해서 그를 
당의 선전부 책임자로  승진시켰다. 그러면서도 갈 등을 피할 수  없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괴벨스를 슈트라서의 영향권에서  다시 빼냈다. 옛날 친구
들과 동지들은 새로운 관구 지도자가 더러운  배신을 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머지 않아 모든  국가사회주의 좌익파들은 제각기 배신을 하였다. 배신을  안 할 
경우에는 슈트라서 형제처럼 파면당했다가 나중에 도망치거나 아니면 죽게 되었
다.
  괴벨스가 베를린 관구 지도자가 되면서 북 도이치 지역의 이미 흔들리던 좌익 
세력은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슈트라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헤스와 로젠
베르크 같은 뭔헨 당 간부의  저항을 무릎쓰고 자신의 동지를 임명해줄 것을 요
구하였다. 그러나 괴벨스는 히틀러의 비밀스런 의도를 더 잘 알아맞힌 듯했다.
  어쨌든 그는 곧바로 공산당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어제의 동지들을 향한 공개
적인 전투에 나섰다. 그는 싸움을 만들어내고, 슈트라서 형제에 대항항 경쟁지인 
뻔뻔스런 가두잡지 <공격>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유대인 형톨이며 대자
본가에게 매수되었다는 소문까지  펴뜨렸다. 자기는 나중에 괴벨스를  염두에 두
고 탄식하였다.
  냉정하고 뻔뻔스럽고,  꼬치꼬치 캐어묻는 감상적인  입증의 대가로, 괴벨스는 
정치적인 선동의 새로운 시대를 열였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정치선동의 현대
적 가능성을 잘 인신하였도 끝까지 이용하였다. 이름  없는 베를린 당 조직을 여
론에 올리기  위해서 그는 흉측한 곤봉부대를  모아서 확소하게 실내싸움, 소동, 
총싸움질 등을 일으켰다.  1927년 3월의 경찰보고에 따르면 리히터펠데  동부 정
거장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유혈싸움을 벌인 다음에 '그때까지  거기 있던 모든 것
이 폐허로 변했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베를린에서 국가사회당이 금지령을 받았지만 그런 일은 추종
자들에게 순교자 의식과 작당의 느낌을 만들어주었다.  의미 없는 지역이었던 베
를린 당 조직은  어쨌든 두드러지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른바 '빨갱이 베
를린'의 막강한 건선ㅇ르 상당부분 침입해들어가는 데 성공하였다.

    당 조직 확장
  히틀러는 이러한 당의  외부적인 확장 노력과 동시에  당 내부 조직의 꾸준한 
확장을 위해 정성을  들였다. 그는 유일한 지도자의 카리스마적인 모습  아해 폐
쇄적인 중앙집중 명력 구조를 목표로 삼았다. 서열에 따른 심습, 정장의 모든 고
지무들이 지닌  엄격한 명령 및   지시말투, 그리고 점차 더해가는  형태 단일화 
등으로 당의 준군대적  성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한  지휘형태는 전쟁체험의 
특징을 지닌 것이었다.
  괴벨스는 때로 당을 향해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든 당원들에 이르기까지 단추
를 극히 살짝만 눌러도'  복종해야 한다는 과제를 내걸곤 하였다. 당이 직면하고 
있던 제한과 관청의 통제는 이러한 의도들을  오히려 부추겼다. 외부의 적대감에 
대한 의식과, 당기구의 긴장감과, 히틀러의 전체주의적 지휘는 서로 맞물려 결정
적으로 진행되었다. 별  수고도 없이 뮌헨 중앙당은 가장 저급  단계까지 영향력
을 확대하였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 초판에서  고백하였듯이 보잘 것 없는 민
주적 요소를 제거하고 '게르만적 민주주의'를  '무조건적 지도자의 권위의 원칙으
로' 대체하였다. 이제 그는 '오직 싸움의  원천'일 뿐인 '지구당의 너무 많은 당원
집회'들을 경고하였다.
  당 조직 이외에도  잘 훈련되고, 수 많은 담당영역으로 분할된  관료조직이 생
겨났다. 그것은 국가사회당이  쿠데타를 일으킬 정도로 급격하게  상승한 다음에
도 여전히 남아있던 시골 조직의 성격을  마침내 제거하였다. 히틀러가 개인적인 
태도나 업무 스타일에서 무질서한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당원에 대한 3
중 등록체계를 자랑으로 삼았고,  새로운 사무소나 등록 카드, 혹은 분류함을 받
았다고 보고할 때면 몽상적인 어조에 빠져들곤 하였다. 
  예전의 군대상사식 원시 관료체계  대신에 점점 더 새로운 직급과 하부조직을 
가진 광범위한 그물망이  나타났다. 1926년 한 해에만 뮌헨 중앙당의  자리가 세 
배나 늘어났다. 국가 사회당의 당 기구는 곧 사회민주당(SPD)의 전설적인 당 조
직을 능가하기에 이르렀으나, 당원  숫자가 많지 않고, 아주 천천히 늘어나는 것
에 비해서 어울리지  않게 큰 것이었다. 더구나 히틀러는 당을  자그마하고 단단
한, 선전 및 폭력전문가로 이루어진 덩어리로 만들어내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1천만 명으로 이루어진  조직은 어쩔 수 없이 평화로운 적이  되며, 당은 자발적
으로가 아니라 오직 광신주의적  소수파에 의해서만 행동하게 된다고 거듭 강조
하였다.
  국가 사회당은 1923년에 5만  5천명이었다가 1925년 말에는 겨우 절반 수준이 
남았다. 그러던 것이 일년 뒤에는 당원 수가 거의 10만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부
풀어오른 체계는 히틀러에게  무조건적인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한 대중정당으로 
출발하기 위한 광범위한  틀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다른  세력을 후원
하고 분할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세력을 더욱 늘리고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림자 국가를 만들다
  같은 시기에 그림자  국가(Schattenstaat 의원내각제의 '그림자 내각'을 만들면
서 히틀러는 이런 이름을 붙였다)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 일은 정력적으로 추
진되고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나의 투쟁>에서  이미 히틀러는 자신이 계획하는 
국가전복을 위한 전제로서 하나의  운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자체 내
에 이미 미래의 국가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 자신이 국가의 완성
된 몸체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당 내부의 당 내부
의 당직들은 대신할  수 없는 참다운 민족의 이름으로 '바이마르  비국가'(바이마
르 공화국을 낮춰부른 것)의 기구들에 대항하는 경쟁을 선언하고  정당성을 물고
늘어지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림자 국가의 행정기구들은  정부측 행정기구에 맞추어서 생겨났다.  예를 들
면 국가 사회당의 외무부, 법무부, 국방부  등이었다. 다른 부처들은 국가 사회주
의의 우선정책 주제에 맞추어서 만들어졌다. 국민  건강 및 종족부, 선전부, 거주
부, 농업정책부 등이  있었고 부분적으로 대담하게 딜레탕트적인  구상과 입법계
획을 가진 새로운 국가를 준비하였다. 1926년 이후로 국가사회주의 의사연합, 법
수호자 연합, 대학생  연합, 교사 연합, 공무원 연합 등이  당 보조기구들로 생겨
났다. 심지어는 원예와  가금 경제 영역까지도 이런 조직체들 중에  버젓이 자리
를 차지하였다.
  1927년에 여성  돌격대의 결성을 잠깐  고려했다가 취소한 다음  이듬해 '붉은 
갈고리 심자가'(뒷날 나치  여성대)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점점  폭발적으로 늘어
나는 정치화된 여성들을  사로잡고, 동성연애적인 남성 정당  안에서 여성들에세 
실용적인 자선 분야에만  제한된 활동영역을 할당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괴벨스
가 1940년의 비밀  선언서에서 말했던 것과 사정이  꼭 같지는 않았다고 하더라
도, 그러니까 1933년에 국가  사회주의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 조직과 경험과 
정신적, 영적 원칙들을  국가 단위로 옮기기'만 하면  되었고,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하고 모든  것을 생각해둔' '국가 속의  국가'라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고 하더라도, 어쨌든 국가 사외당이 권력에 대한  요구를 다른 어떤 정당보다 더 
효과적이고 도전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전국 지도자와 관구 지도자들은  1933년보다 오래 전부터 벌써 장관의 거동을 
보였다. 돌격대는  공식행사에서 일시적으로  경찰 임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드며 
드물지 않게 히틀러는  국제 회의에서 '야국'(야당이 아니라)  지도자로 향세하였
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 이념이 자주 사용된 정당 상징물에도 적용되었다. 즉 
갈고리 십자가는  점점 더 진정한, 명예로운  독일의 기호로 여겨지고,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가  그림자 국가의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갈색 셔츠,  휘장, 기호와 
당 기념일 등은 국가와는 대립 할 수 밖에 없는 소속감을 만들어냈다.
  그 시절 국가사회주의가  발전시키고, 뒷날 미로와 같은 권력 체계  안에서 만
족을 얻게 되는 그 모든  관료주의적 열광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휘 방식은 강하
게 주관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주관적 요소들은 언제나 실용적
인 규범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위급한 경우에 부닥치면 이런  규범은 임
의에 따르고, 법칙은 기분에 따르게 되었다.
  나아가서 거칠 것 없이 충동에 따르는 '지도자의 뜻'은 가장 높고 논의의 여지 
없는 헌법적 사실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는  하부 지휘관들을 임명하고 해고하였
으며, 후보자의 선거인  명부를 결정하였고, 그들의 수입을  조절하고, 그들의 사
적인 사정가지 통제하였다.  지도자 원칙은 원칙적으로 제한이 없었다. 함부르크 
관구 지도자 알버트 크렙스가 1928년  초에 관구 내에서 갈등을 겪은 뒤 퇴직하
겠다고 선언했을 때  히틀러는 이 청원을 거부하였다. 그러고 나서  장황한 형식
의 서류심문을 거쳐서 지도자의 신뢰만이 권력있는 지위를 허용하거나 빼앗는다
는 사실을 당 전체에 보여주었다. 자기만이 업적을 칭찬하거나 잘못을 질책하고, 
조정하고, 감사하고, 용서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퇴직을 선언하였다.
 점점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히틀러라는 인물은  그러한 수단을 통해서 점점 
더 확정적으로 구조를 결정하였다. 당 기구조차도  그의 전기의 특성들을 반영하
였다. 광범위하고  기형적 단계를 가진 직책들에  대한 과도한 관료주의적 정열, 
직함의 숭배, 아무것도 아닌 권한의 숭배 등은  이미 관리 아들의 유산을 보여주
는 부분이다. 주관적 요소가 지배하는 것 역시  히틀러가 법도 없고 사회적 연결
고리도 없는 방위군이  밑바닥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래된 과대망상적 
성향도 끝없이 과장하는 대규모 질서에 드러나 있다.  가장 하잘 것 없는 기구들
에도 화려한 칭호를 제공한 것을 고등 사기꾼의 과욕에 불과하였다.
  그림자 국가라는 생각과 전국적 규모의 당 관료조직 설비는 미래에 대한 참을
성 없는 기대이며, 현실을 앞당기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지치지 않는 집회활동은 
계속되었으니 1925년 한 해만 해도  히틀러에게 보고된 바에 따르면 약 2천 4백 
회의 시위를 벌였다. 여론은  거기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기 위한  이 모든 분노한 싸움질과  주먹질, 이 모든 소동은  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공화국은 안정되었던  그 몇 해 동안에  국가사회당은 괴벨스 말마따나 적들의 
미움조차도 받지  못했고 히틀러 자신도  성공을 의심하는 듯했다.  그러면 그는 
현실에서 벗어나 숨막히는 전망으로 넘어가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확신을 미
래로 넘겼다. "우리의 이념이 승리를 거두기까지 20년 혹은 1백년이 걸릴지도 모
릅니다. 그러나 민족, 인류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보면 한 인간이란 무엇이겠습니
까?"라고 물었다.
 다른 기분일  때는 자기가 미래의 대규모  전쟁을 지휘하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한 번은 헤크 카페에서 케이크 접시를  앞에 놓고 슈테네스 대위에게 커다
른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면, 슈테네크, 우리가 승리하게 되면 승리의 가로를 만
들자구. 되버리츠에서 브란덴부르크  문에 이르는 길에 60미터 넓이로, 오른쪽과 
원쪽에 트로피와 약탈품을 세워둔 승리의 가로 말이야."

    최초의 뉘른베르크 당 대회
  그 사이에 중앙당은 약 30개의 지구당(전체 수  대략 2백 개 중에서)이 1927년 
8월 중순으로 예정된 당대회를  위한 벽보를 주문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고 탄식
하였다. 그리고 대중 집회를 조직하는 일이 힘들다는 말도 했다. 아마도 이런 이
유에서 히틀러느  처음므오 당 대회를 오래된  제국도시 뉘른베르크의 낭만적인 
배경 속에서 치르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곳은  근처에 있는 밤베르크와 비슷하
게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곳이었다.
바이마르와는 달리 이번에는 히틀러의 연출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당의 폐쇄성과 
전투준비 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초기 추종자 중 한  사람은 이날을 
계기로 그를 '대중지휘의  마술사'라고 불렀다. 실제로 이  대회에서 뒷날 인기있
는 의식으로 반전하는 최초의 시작을 볼 수  있다. 깃발과 삼각기와 악단을 동원
하고 특수한 행렬을 이루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돌격대와 당 조직부대들이 도
착하였다. 외국에서도 수많은  대표다들이 왔다. 그리고 일년전에 창설된 히틀러 
청년단이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바이마르에서 이미 다채롭게, 그러나 우연
적으로 작용한 단일화는 여기서 거의 완전하게 실현되었다.
  히틀러 자신도 옛날 의용군  물푼에서 넘겨받아서 돌격대로 도입된 갈색 셔츠
를 입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물론 이 셔츠를 추하다고 여겼다. 루이트폴트 숲
에서 거행된 대규모 행사는 12개 연대기들의  화려한 축성식으로 끝났다. 그러고 
나서 히틀러는 시장광장에서 무재차에서 팡을 쭉 뻗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자
기 추종자들의 분열행ㅅ능 바라보았다. 갈색의 환상적  의상을 입은 여자들과 소
녀들은 히트러 앞으로 지나갈 허락을 받지 못했다. 
  당대회는 노조문제를  위한 '헌금반지'를 만들기로 결정하였고,  지적인 계ㅌ에
도 선전을 할 수 있도록 학회를 창설할  것을 요청하였다. 얼마 뒤에 함부르크에
서 히틀러는 처음으로 수천 명의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농부들을 앞에 놓고 연설
하였다. 당의 정체현상으로  인해서 새로운 사회계층에서 지지세력을  구하지 않
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정지의 시기'에 벌어들인 '수입'들
  국가는 그 사이 1923~1924년의 안정화  요인들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 새로
운 배상 협정,  로카르노 조약과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 켈로그  협약, 그리고 처
음으로 도이치 수상 슈트렌제만과  프랑스 수상 브리앙 사이의 개인적인 친분으
로 시작해서 점차 공식적인 분위기로 넘어가게 된 츠랑스과의 상호이해 등이 분
명한 효력을 드러냈다.
  시대는 긴장완화와 국제적인  균형을 지향하고 있었다. 포괄적인  미국의 차관
은 공과국에 적지 않은 부채를 안겼지만 동시에 경제의 합리화와 현대화를 위한 
투자확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1923년에서 1928년 사이의  지표 상승은 거의 모
든 분야에서 다른 모든 유럽 국각들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을 뿐만 아리나 영토가 
줄었는데도  전쟁 전  독일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1928년에 국민  소득은 
1923년의 소득보다 약 12퍼센트나 높았고, 사회적  개선들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
렀으며 실업자 수는 약 4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시대가 국가 사회주의의 과격주의와 반대 경향을  보이는 것은 분명하였다. 히
틀러 자신도 때로는 몇 주 동안이나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채 오버잘츠베르크
(윗소금산)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나  그의 은둔은 그가 마침내 얼마나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간혹가다만 분명하게  계산된 거리
를 두고서 훈계나 위협을 해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1926년 12월 10일에  <나의 투쟁> 제 2권이 나왔다.  그러나 기대하였던 결정
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제 1권은 1925년에 거의 1만부를, 이듬해에는 거
의 7천부를  팔았지만 1927년 전작품의  매상은 5607권으로  줄었고, 1928년에는 
겨우 3015권에 이르렀다.
  어쨌든 그의 수입은 윗소금산에 있는 집의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베히슈
타인 부인은  집의 설비비를 내주었고,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집안은  여러 가지 
침대보나 식탁보 등의  물품과 도자기 등을 보내주어  집안을 장식하게 해 주었
다. 그들은 나중에 바그너 전집과 그의  <로엔그린>의 원본 총보중 한 페이지를 
보내주었다. 그 무렵쯤  해서 히틀러는 2만 마르크를 내고 6인승에  덮개가 없는 
메르세데스 자동차를 한 대  구입하였다. 그 자동자는 그의 기술적, 과시적 욕구
에 잘 들어맞았다.
  전후에 발견된 그의 세금 자료를  보면 이 비용은 신고된 수입액을 훤씬 초과
하는 것입을 재정당국에  숨길 수가 없었다. 세무서에 보낸 편지는  군대 기피자
로 잡히고 난 뒤 린츠  시당국에 보냈던 편지를 생각나게 하는 감상적인 약삭빠
름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기 생활이  빈궁하고 소박하다고 
맹세하였다. "내것이라고 부를만한  부동산이나 금융재산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습
니다. 나의 개인적인 욕구를  꼭 필수적인 것에만 한젓시키고 있습니다. 술도 담
배도 입에 대지 않으며 가장  저렴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약간의 집세를 빼고 
나면 정치적  문필가의 광고비에  속하지 않는 비용이라곤  아예 없다시피 합니
다... 이 자동차도 내게는  이런 목적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자동차는 있어야 일
상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으니까요."
  1926년 9월에  그는 세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밝히면서 은행빚이 많다고 
거듭 말하였다. 몇 년  뒤에도 그는 때때로 이 시절의 계속적인  돈 부족을 회상
하였다. 때로는 사과만  먹고 산 적도 있다고  말했다. 티르쉬 거리에 있는 과부 
라이헤르트의 집에 얻은  셋방은 사실상 거의 돈이 들지 않았다.  자그마하고 옹
색한 가구가 딸린 방이었고, 바닥에는 닳아빠진 니놀륨 장판이 깔려 있었다.
  수입을 늘려보려고 히틀러는 헤르만 에서와 사진기사 하인리히 호프만과 함께 
<화보 관찰자?를  만들었다. 이 사진기사에세 그는  자기 그림에 대한 전매권을 
주었었다. 이 <화보 관찰자>를 위해서 그는  주석의 단조로움과 눈에 띌 정도로 
약화된 문체는 이 식의 주제 빈곤을 보여준다.
  이 기다림, 계획, 정지의  시기 한가운데인 1928년 여름에 그는 살아있는 동안
에는 출간되지  않는 두 번째 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  사이 다듬어진 
외교 개념들을  포괄적으로 묘사한 책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 힘들여서, 그리고 
강력한 호소로써 다양한 힘에  의해서 불안하게 움직여가는 당을 한데로 붙잡고 
합법화 노선에 대한  불만을 물리쳤다. 공화국의 안정을 보고도 그는  자신의 추
종자들처럼 너무 빠른  결론으로 이끌리지 않았다. 모든 약한 것과  부서지기 쉬
운 것을 간파하는 그의 본능은 그의 원한에  참을성을 주었다. 특이한 어조로 그
는 상황의 저항들과  전망 없음을 보고 특별한 성공의 자신감을  잡아냈다. 그는 
자산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우리 운동이 승리한다는 무조건적인, 아니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근거는 바
로 그 점에  있습니다. 우리가 과격파 운동인  한, 여홀니 우리를 조목하는  한 , 
현재의 국가 상황이 우리에게 반대하는 한 우리는 가장 소중한 인적자원을 모아
들이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국가사회당의 뮌헨 지구 크리스마스  측제에서 그는 당의 처지, 박해, 곤궁 등
을 초기 기독교의 처지와 비교항ㅆ다. 그는  자신의 대담한 이미지와 크리스마스
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렇게 비교 확대하였다. 국가 사회주의는 '그리스도의 이
상을 현실로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한 일은 그(히
틀러)가 완성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보다  앞서 진행된 아마추어  연극 <구
원>은 현재를 '곤궁과 노예상태'로 묘사함으로써 그늬 등장을  준바하였다. "성탄
절의 떠오르는 별은 구원자를 가지킨다."고 <민족  관찰자>에서 서술하였다. "막
이 갈라지면서 도이치 민족을  수치와 곤궁에서 구해내는 새로운 구원자를 보여
준다. 바로 우리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다."
  그런 선언은 바깥 세계에서 볼 때는 그를 둘러싼 낯선 후광을 더욱 강화 시키
는 것이었다. 경력의  초기 시절처럼 기묘한 출현에 대한 명성이  그를 따라다녔
다. 그러한 출현은 진진하게 고려된다기보다는 바이에른  정치의 그림 같은 특성
으로 설명되었다. 그의 습관이었고,  점점 확장되 가던 형식도 여러 가지로 의심
스런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면 장군홀로 진행해갈  때 가지고 갔던 깃발을 '피의 깃발'로 존경하도
록 하였다. 모든 군기의 축성식에서 이깃발의  끝을 거드림으로써 신비스런 힘을 
넘겨받는 것이다.  그리고 당원들은 종족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혈통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편지를 주고받을 때 서로  '도이치로 태어난 사람
들이여'라고 호칭하였다. 다른 활동들  역시 줄지 않는 형태로 국가 사회당이 자
신의 의도를 추구하는 진지함과 요구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1926년 말에 당은 
연설가 학교를 열었다.  추종자들에게 기술과 지식과 자료를  전해주기 위해서였
다. 자신들의 주장에  따르면 1932년 말까지 약 6천명의  연설가를 교육하였다고 
한다.

     서커스 천막으로 들어오다
  1927년 이른 봄에 작센 정부와  바이에른 정부는 새로 얻은 근거와 국가 사회
당을 무시하는  마음으로 당의 지도자에 대한  연설금지를 해지하기로 결정하였
다. 히틀러는 기꺼이 그쪽에서  요구한 선언을 하였다. 즉 절대로 법에 어극나는 
목적을 추구하지도 않고, 법에 어극나는 수단을 쓰지도 않겠다는 맹세였다. 새빨
간 벽보들이 그가 3월 9일  20시에 왕관 서커스장에서 다시금 뮌헹 주민들을 향
하여 연설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경찰  보고서는 인상적으로 마치 모범적 
사례처럼 이 행사의 경과를 묘사하고 있다.

  서커스 장은  7시 10분에 벌써 절반이  넘게 들어찼다. 무대에서  아래로 하얀 
동그라미 속에 갈고리 십자가가 들어있는 붉은  깃발이 드리워졌다. 무대는 간부
당원들과 연설자들을  위한 것이다. 특별석들도  갈색 셔츠가 퍼져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당원들을 위한 것인 듯했다.  단상에는 악단이 자리잡았다. 특별한 
장식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흥분하고 기대에 넘쳐  있다. 사람들은 히틀러 이야기, 
그가 한때는 왕관 서커스 장에서 괸장한 성공을  거둔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여
기저기 눈에 띄게 많이 섞여 있는 여자들도  그에게 열광한 듯이 보인다. 사람들
은 옛날 영광의  날들을 서로 이야기 하고 있다... 뜨겁고  달큰한 분위시 속에는 
센세이셔널한 욕구가 떠돌고 있다. 음악음 몇 개의  소리 맑은 둔대 음악을 연주
하고, 그 사이 계속  새로운 패거리들이 몰려들어온다. <민족 관찰자>는 이리저
리 돌아다니고 계속 칭찬을 듣은다. 카운터에서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강령
을 받았다. 입구에서는 종이 한 장 씩을 손에 들려준다. 거기에는 어떤 도전에도 
휩쓸려들지 말 것과 질서를 지키라는 경고가 들어  있다. 작은 깃발들을 팔고 있
다. '환영의 깃발,  각 10페니히'. 그 깃발들은 검정, 하양,  빨강이나 아주 빨간색 
바탕에 각기 갈고리 십자가가 들어 있다. 여자들이 열심히 사고 있다.
  그 사이 줄들이 채워진다. '전과 마찬가지고  해주십쇼!'하는 말이 들린다. 원형
의 공연장도  사람들이 들어차고 있다...  대개는 하류 직업인들로,  노동자, 과격 
노동 계층 대표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좋
은 옷을  입고 있으며 어떤 신사들은  연미복 차림이다. 서커스 장을  거의 가득 
채운 사람들은 어리잡아 7천 정도에 이르고 있다...
  7시 반의 사정이다.  그때 입구에서 '하일' 하는 외침이  들리고 갈색 셔츠들이 
행진해 들어온다, 음악이 울리고 서커스장은 떠나갈 듯한 환호성으로 가득 찬다. 
히틀러가 갈색 레인 코트를 입고  나타나서 심복들에 둘러싸인 채 서커스 장 전
체를 통과해서 단상으로 올라간다. 사람들은 기쁨으로  흥분한 몸짓을 하고 손짓
하고 계속 '하일'을 외치고 있으며, 의자에 올라서서 발릉 굴러댄다, 그러자 극장
처럼 나팔소리. 갑작스러운 조용함,
  구경꾼들의 열광적인 인사를  받으며 갈색 셔츠들이 대오를  이루어 들어온다. 
맨 앞에는 두 줄로  북치는 사람들, 다음은 깃발이다. 사람들은 파시스트 방식으
로 팔을 뻗어 인사한다.  관중은 그들에게 환호를 보낸다. 깃발들이 스쳐 지나가
고, 번쩍이는 연대기들이 지나간다. 화환 속의 갈고리 십자가, 독수리들, 옛 로마
의 군기를 흉내낸  것들이다. 약 2백 명 정도가  분열 행진을 했다. 그들은 둥근 
공연장을 채우고 거기에  자리 잡고 섰다. 군가와 연대기를 든  기수들이 무대를 
채운다. 
  히틀러는 서둘러 무대의 앞쪽으로 나선다. 그는 자유롭게 말한다, 처음에는 느
린 어조로, 나중에는 빠른  속도로 말하고, 과장도니 정열로 말한느 구절들은 못
고리를 낮추어서 서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다, 그는 팔짓과  손짓을 해보이고 
흥분해서 이리 저리  펄쩍펄쩍 뛰면서, 주의 깊게 자신을 바라보는  수천명의 관
객을 쉬지 않고  매혹시키려고 한다. 박수 갈채가 그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그는 
연극적으로 두 손을  번쩍 쳐든다. 연설의 뒷부분에  자주 들당하는 '아닙니다'하
는 말은  연극적인 느낌을 풍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강조된다.  연설 자체는... 
보고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다지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되찾은 연설의 자유가 국가 사회당이 직면한  난제들을 해결새 주지는 않았다. 
그 동안의  연설 금지는 오히려  히틀러에게 유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가 
출연했더라도 어쩌면 집회의 홀들을  가닥 채우지는 못했을 즐거운 무관심의 시
대에 그의 이름이  마모되는 것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는  스스로 연
설 활동을 줄였다.
  1927년에는 공식 연설을  56회 했다. 2년 뒤에는  27회까지 줄여 버렸다. 그는 
이때쯤 해서야 반신적인 은둔상태가 어떠한 이점을 자겨다주는지 분명하게 깨달
은 것으로 보인다.  대중에게 돌아온 순간에 그는 불리한 상황의  압도적인 힘과 
경쟁 관계에 들어선 것이다.  곧 실패가 나타나고 그와 더불어 비판이 뒤따랐다. 
비판은 그의 지휘  방식과 엄격하게 지켜지는 합법화 정택을 향한  것이었다. 히
틀러에게 완전히 복종적이고, 지도자 숭배의 예언자  중 한 사람인 괴벨스조차도 
1927년의 팸플릿  <나치- 사회주의>에서  무조건적인 합법 노선을  비판하였다, 
다수는 얻으려는 노력이 실패 할  경우 당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저항적인 태도로 확언하였다. "무엇이라구?! 그럼 우린 이를 악물고 각오
가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국가에 맞서 행진하고, 독일을 얻기 위한 최후
의 위대한 일격을  감행하고 말의 혁명가는 행동의 혁명가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혁명을 할 것이다.
  히틀러의 개인적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이 이루어졌다. 공로가  있는 동지드을 
얕보는 듯한 태도, 오랜  정당인이 바난한 것처럼 '히틀러 씨를 둘러싼 애창되는 
장벽' 그의 방만한  업무 집행, 혹은 조카딸에 대한 질투심  등에 ㄷ나 것이었다. 
1928년 이른 여름에  에밀 모리스가 겔리 라우발의  방에 있는 것을 히틀러에게 
들켰을 때 히틀러가 너무나 격분해서 드를 위협했기 때문에 그는 창문에서 뛰어
내려서 겨우 자신을 구했다고 한다.
  조사 및 조정 위원회의 의장인 발터 부흐는 자신이 ;노골적인 복종'을 하고 있
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자신의인상을 전달할 필요성을 느꼈다. "히틀러 씨,  당신
은 점차 인간에 대한 경렴에 이르는 것 같군요. 나는 두려운 근심을 느낍니다."

    오류 없음에 대한 요구
  당내의 시끄러운 분위기를 보고 히틀러는 1928년에 계획된 당대회를 취소하고 
그 대신 뮌헨에 지도자 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는  모든 하부 조직에 준비 모임을 
금지하였다. 8월 31일 대회가  열리자 그는 흥분해서 복종과 기율을 칭찬하였다. 
오직 조건 없이 결탁한 엘리트만이 '역사의 소수파'로서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
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당은 많아야 60만에서 80만의  당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이다. "그것은 쓸모 있는 인원입니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단순한 지지자들로
서 당의 목적을 위해서 쓸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작은 그룹의 광신자들이 대
중을 이끌어갑니다. 러시아화 이탈리아를 보세요... 강력한 소수파를 가진 다음에 
비로소 다수를 얻기 위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자기 옆에 
'고문단'을 두라는 제안을 조소로써  물리쳤다. 자기는 조언자가 필요치 않다. 곧 
이어서 그  제안자인 튀링겐 관구  지도자 딘터를 당에서  제명해버렸다. 그보다 
앞선 서신 교환에서  그는 딘터에게 정치가로서 '무오류성을 요구한다'고 확언했
다.
  곧 이어서 이제 널리 쓸이게 된 명령 수령 형식에 따라 조직되지 않은 새로운 
당 대회가 소집되었다.  거기서 스는 토론이 이루어지는 동안 보한  듯이 지루하
다는 얼굴을 하고서 침묵ㅇ르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점차 쓸모 없다는 느
낌과 마비의 느낌이 퍼지게  되어서 결국 대회는 전체적으로 의기소침한 가운데 
끝났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은 나중에, 히틀러가  이 대회의 개최에 동의한 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을 분명히 파괴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고 추측하였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러나 엄격하게 조직된 당의 지도자로서  히틀러는 자신
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용기를 잃어버릴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는 이제 처음으로 당내외적으로 자신의 독자성을  쟁취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부터 때때로 당은 공식적으로 '히틀러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영향력 있는 후원자와  강력한 기구를 통한 특별한  후원이 없어도 당은 자신의 
힘으로 승리까지는 아니라도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연극을 시작해보자구"
  1028년 5월 20일에  새로운 중앙의회(국회) 선거가 있었다. 국가  사회당은 2.6
퍼센트의 표를  얻어서 9위를 차지했다. 그드의  열두 명 의원  중에는 그레고어 
슈트라서, 고트프리트 페더, 괴벨스, 프리크와 그  사이 재산 있ㄴ느 아내와 광범
위한 관계를 얻고서  스웨덴에서 돌아온 헤르만 괴링이 끼어 있었다.  히틀러 자
신은 '국가가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입후보하지 않았다. 
  자신의 곤궁과 당황을 장저으로  묘사해내는 특유의 능력으로 그는 이러한 장
애를 새로우 거리가으로  만들어내는 데 이용하였다. 결멸하는  의회제도를 인정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태도로  시대의 열망, 사럽, 욕망들보다 높은 곳에 서 있
는 독자적인 지도가한느 역할을 만들어낸 것이다.  오랫동한 고심한 끝네 선거에 
참여하기로 한 결정으 당이 의ㄷ들의 특권을 얻는다는 생각에 적잖이 영향을 받
은 것이었다.
  괴벨스는 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  만에 쓴 기사에서 당의 합법화 맹세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발언을  하고 있다. "나는 으회의 성원이  아니다. 나는 IdI이고 
IdF이다. 즉 면책권 소지자고 무임 승차권 소지자다. 우리에게 의회란 무엇인가? 
우리는 의회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선풀된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위탁한 사람들
이 생각하는 대로 의물르 행 할 것이다... IdI는 쓰레기더미를 보고 쓰레기더미라
고 부르고 둘러대면서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사람이다." 이 고백
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이제 당신들은 놀았는가? 그러나 우리가 벌
써 끝에 와  있다고 믿지는 마시라... 당신들은 앞으로도 우리를  많이 놀릴 것이
다. 자 그러니 연극을 시작해 보자구."  
  
    제3의 가치
  이러한 발언의 경멸적인 광채는  그들의 스스로 달아오른 특성을 감추지 않았
다. 국가  사회당은 과장도니 몸짓의 파편정당이었다.  냉정하게 잘 준비를 갖추
고, 간부들을 투입해 좋고서 히틀러는 상황이  새로 과격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상황이 과격해지면 대중정당으로 나서려는 것이다.
  온갖 열의를  다하고, 온갖 조직적인  불안ㅇ르 다 동원했지만  그는 이제까지 
쓸모 있고 광채  없이 움직인느 공화국의 그늘에서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열정
적인 혼란 상태에서 그토록 효과만점이었던 그의 카리스마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부서져가려고 했다. 때때로 민족이  마침내 공화국과의 평화, 볼품 없는 회색 상
황과 평화를 맺을 준비가 된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 모든 만들어낸 현실, 영웅
적, 낭만적 추억을 잃어버리고, 일상적인 역사와  화해를 하려는 듯이 보였다. 의
회선거는 물론 중간 시민계층의 해체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수없이 등장
한 파편정당들의  모습으로 체계의 감추어진  위기를 알리고 있었다.  또한 당의 
투종 세력도 거의 15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다음해 초에도 여전히 본  대학 교수인 사회학자 요제프 슘페터는 "우리 사회 
상황이 아작도 대단히 큰, 어쩌면 더욱 커지는 안정"을 얻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도,  어떤 영역에서도, 어떤 방향으로도  일격, 비약, 혹은  파국은 
있을 법하지 않다."
  히틀러가 상황을 더욱 예리하게 파악하였다. 공화국의  이 짧은 행운의 시기에 
도이치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제3의 가치를 가지
고 있습니다.  즉 전투욕이죠. 그것은 외국  이론과 독트린의 폐허더미에 파묻혀 
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거대하고 강력한  정당은 그 반대를 증명하려
고 노력하고 있지만 갑자기 아주 낯익은 군악대가 와서 연줄르 시작하면 뒤따르
는 사라들은  꿈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행진하는 민족의 동지가  되어서 그들도 
함께 행진 할 것입니다. 오늘날이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에세는 더 나은 이 점을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벌써 행진
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는  행진의 시작ㅇ르 위한 표지만을 기다렸다. 당이  시대를 초
월하여 모든 허구의 허망한  신념의 체계인 자시의 역동성과 희망과 목적의식과 
선택된 지도자의 이미지를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1928년 5월의 선거를 분석하면서 오토 슈트라서는 '국가 사회주의의 구원복음'
이 대중의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특히 프롤레타리아 계층에 
뚫고 들어가는 일에  실패했다고 탄식하였다. 사실상 당의 지지계층은 샐러리맨, 
영세 사업자, 농부들과 낭만적 저항을 생각하는  젊은 층이었다. '아주 낯익은 군
악대'가 깨우는 소리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민감하게 알아듣는 전위대인 젊은 
층이었다. 그러나 겨우 몇 달 뒤에 벌써 장면은 전체적으로 변하게 된다.   

    4부 권력을 향한 투쟁
    제1장 큰 정치판에 뛰어들다
  히틀러는 1929년 여름에 막 안정되고 있던 공화국 체제에 최초의 대규모 공격
을 시작하였다.그리고 순식간에 앞으로 돌격하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동원이 가
능한 구호를 찾고 있었는데  슈트레제만의 외교 정책이 갑자기 공략기점을 제공
한 것이다. 이용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고, 새로 시작된 전쟁 배상금 논쟁
을 이용해서, 그는  국가 사회당을 고림된 파편 정당의 역학에서  해방시키고 큰 
정치판의 중심부로 끌어올리려고 했다. 
  그의 이런 돌격이  ㄱ이어 나타나는 세계 경제 공황과 시각적,  심리적으로 밀
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래서 그는 마치 전주곡처
럼 자신의 수단,  조직, 전략 등을 일단 시험해볼 기회를  가졌다. 전쟁 배상금을 
둘러싼 싸움은 계속되는  지속적 위기의 첫 박자가 되었다. 이어지는  위기는 공
화국을 사로잡았고,  히틀러에게 붙잡혀  풍부한 발상으로 촉진되어서  공화국의 
종말에 이르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1929년 10월 초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죽음이 전환점이 
되었다. 도이치 외무장관은 복잡한 외교개념에 대한  저항에 부딪쳐서 많은 힘을 
소모하였다. 그의 생각은  '배상금 조건 이행 정책'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재로는 베르사유 조약의  점짐적인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것이었다.  죽기 직전
까지 그는 내심의 의혹이 없지는 안ㅎ으나 그래도 새로운 배상금 규정을 수용하
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새로운 규정이란  미국 은행가인 오웬 영이 이끄
는 배상 창구  위원회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그것은 유효한  조건들을 적잖
이 개선하려 했을  뿐 아니라, 슈트레제만의 고집과 외교적 능숙함  덕택으로 연
합국 점령군이 라인란트에서 일찍 척수하는 계획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국내에서 과격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리고 공화국이 강제상
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초기 연부금도 낼 수  없는 상황에
서 거의 60년 동안이나 지불 의무를 짊어진단느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칼 두이스베르크, 아돌프 하르나크,  막스 플랑크, 콘라트 아데나우어, 한스 루
터 등의 인물들이 끼여 있는, 재계, 학계,  정계의 유명 인사 2백여 명의 공개 성
명서에서 큰 우려를 표시하였다. 저쟁이 끝난지 11년이  지난 지금 이 계획은 시
대의 열망이 들어 있는 모든 종족이 한 가족이란느 이념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
렸다. 표면적인 수많은  화해의 몸짓 뒤에서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대립이 계
속 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준 것이다.
  더욱이 1988년까지  계속되는 부채  상환 요구는 이미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231조 전범조항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도이치 민족의  자의식을 심하게 
손상시켰던 바고 그 조항이었다. 과격한 민족주의  단체들은 이 비현실적인 계획
을 보고 "도이치  사람들이 전부 지불하라"는 역효과를 가진 것이라고  주장하였
다. 점차적으로 전쟁 결과 극복하는 과정이어야 하고, 따라서 공화국의 안정에도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 반대로 "바이마르 '체제'에 대한 원칙적  반대세력의 결정 
지점이 된 것이다."

    후겐베르크와 극우파의 결집
  1929년 7월 9일에 극우파는  '영 안에 반대하는 국민청원을 위한 전국 위원회'
아래 하나로  뭉쳤다. 협정에 서명이 이루어진  약 9개월 위까지  캠페인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고,  극좌파에서 공산당까지 가세하였다.  이 캠페인에서 위원회는 
협정의 철회를  추진하였다. 복잡한 종속  양상을 몇 마디  도발적인 슬로건으로 
축약시켜 수없이 되뇌었고, 그러써 날카롭게 전개된  원수 이미지에 증오가 자리
를 잡도록 애썼다.  이런 합의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고, '도이치  민족을 골고다'로 끌고가서 형리가  '비웃으면서 십자가에' 못을 
박는 짓이라고 했다. 동시에 여기서 처음으로  단결하여 뭉친 '범야권 연합'은 전
범조항 삭제,  모든 배상의 종결, 점령  지구에서의 조속한 철수,  도이치 민족의 
'노예화'에 협조한 모든 장관과 정부 대표의 처벌 등을 요구하였다.
  추밀 고문관 알프레드  후겐베르크가 이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는 야심만만하
지만 생각이  좁고 가차없는 63세의  남자였다. 처음에 동부의  거주 담당관으로 
출발해서 크루프 회사의 이사를 역임한 후 수많은 자회사를 거느린 언론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것은  광범위한 종류의 신문들과  출판사, 통신사, UFA 영화회사 
등을 거느린 것이었다.  중공업 분야의 정치적 신임 인물로서 그는  상당한 액수
의 돈을 다루고 있었고 이 모든 수단들을 이용해서 '사회 주의자 공화국'을 멸망
시키고, 노조를 파괴하고 그 자신의 말처럼  아래로부터의 계급 투쟁에 대항하여 
상류층의 계급 투쟁으로  응답하려 애썼다. 자그마하고 둥글둥글한  몸집에 커다
란 코밑수염, 짧게 깎은  머리 모양으로 그는 싸음 잘하는 은퇴한  수위 같은 느
낌을 풍겼다. 그  자신이 바라는 대로 당당하고 원칙적이며 분노한  사람처럼 보
이지는 않았다.
  1928년 가을에 '어두에서 나온 사나이' 후겐베르크는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 지
휘를 맡으면서 과격한  원한의 대변자가 되었다. 일단은 성공한 듯이  보이던 우
파의 공화국 합류는 즉시 패배하였다. 국가  민족당은 방법론으로나 개별적인 당 
강령에 이르기까지 히틀러 정당을 모방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히틀러 당을 시
민적으로 풍자한 것 이상이 되지 못했다.  후겐베르크는 증오스런 공화국에 대적
하는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안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는 동안 그는 어
떤 글에서 3천명의 미국 기업가들에게 최초의 위기 상태에 빠져든 이 나라에 차
관을 주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이 새로운 의자을 맞이하자마자 당원들의  약 절
반정도가 떠나버렸지만, 후겐베르크는 끄떡도 안 하고, 자기는 양 많은 죽보다는 
작아도 단단한 벽돌 덩어리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가 준비한 국민 청원은, 새로운 과격 노선의 첫 번째 절정이었으며, 그는 흩
어진 우파들, 특히  철모단(재향 군인회), 모든 도이치 당원, 지주  연맹, 국가 사
회주의자들을 자기 지휘아래 한데 모아서 공격을  조직하려고 했다. 잃어버린 영
향력을 일부나마 옛날 상류층에 얻으려는 것이었다. 
  우파는 1918년 혁명이 기회를  놓친 덕분에 아직도 영향력, 지위, 물질적 수단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중을 자기 편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천민당 지도자게 
비해 자기가 '더 나은 신사'라는 건방진 태도로 후겐베르크는 히틀러가 선동가적 
재능을 지녔다고 믿었다.  사회적 망상 속에 격리된 보수주의 활동  쪽으로 대중
을 다시 불러들이기에 적합한 재능이었다. 히틀러를  이용하다가 때가 되면 그를 
능가해서 제압해버리면 될 것이라고 후겐베르크는 생각하였다.
  히틀러의 생각도 그보다 덜 음흉하지는 않았다.  하인리히 로제의원은 이 결합 
소식을 들었을  때 근심스럽게 말했다.  "지도자(히틀러)가 후겐베르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기를 바랄 수 밖에요."
  그러나 히틀러는 속을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근느  분명하게 오만불손한 
태돌 등장하였다. 그리고  괴벨스의 표현대로 이 모든  '좀먹은 잿빛 귀족계급'과 
부르조아 반동분자인 후겐베르크에 대한 경멸감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당내 '좌파'가 시술ㄱ게 관찰하는 가운데 그는 상대방이 요구하는 모든 야오를 
철저히 거절하였다. 자기가  어떤 조건 아래서 그들을 도울 것인지  스스로 결정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따로 추진하기를 제안하였으나 마침내  연합활동에 동
의하였다. 물론 그는 선전을 위해서 완전히 독립성과, 준비된 재원 중의 상당 부
분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동지들을  일부러 혼란케 하거나  아니면 기를 
꺾을 셈으로,  자기 휘하의 가장 유명한  자본주의의 적, 그레고어 슈트라이서를 
공동의 재정 위원회에 자기 측 대표로 임명하였다.

    전략가 히틀러
  후겐베르크와의 동맹은  히틀러를 마침내 목적지를 데려다  줄 계속될 전략적 
승리 중에서 첫 번째  승리였다. 상황을 인식하고, 어디에 이익이 있는지 꿰뚫어
보고, 약점을 찾아내고, 순간의 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히틀러의 비상한 능력이
었다. 설득력까지 갖추고 있기에  더욱더 효과적인 이런 전략적 감각은, 연설 능
력, 군부, 산업체, 법, 갈색 부대 테러 등과 함께 그의 성공의 이유가 된다.
  히틀러의 출세 이야기에서 마적인 음모 혹은 완력의 요소를 지적하는 것이 한
동안 유행하였다. 그것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모든 반
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국가 사회당의 당수를 북치는 사람, 도구  등으로만 생각
하고, 히틀러가 정치  영역에서도 능력을 입증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데서 나
온 것이다.
  히틀러는 전략적인 능숙함, 처음의 망설임, 부분적으로 도전적이고 부분적으로 
불만스러운 협상  태도, 그리고 정직함, 명예욕,  정력 등을 가지고  있단느 인상 
등을 통해서, 상대방이 자신의 출세를 앞세어  재정적인 후원을 해주도록 만들었
다. 그들은 물론 정치적으로 그런 후원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의 성공은 자기 
측의 저항을 통해서도 얻어졌다. 당내 저항 세력은  그에게 전혀 양보를 하지 않
았고, 슈트라서의  전투적 출판사가 내는 신문들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굵은 
난을 치고 굵은 활자를 히틀러의 말을 인용  보도하였다. 도이치 민족에 대한 가
장 큰 위험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시민 정당들이라고 했다.
  히틀러의 전략적 승리를  평가하려면, 권력에 굶주린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라
는 보수파의 맹목성도 읽어내야 한다. 이  보수파는 국가사회주의의 힘과 활동성
에 기생하여, 속으로 경멸하기도 하고 경탄하기도  하는 반항아 히틀러와 연합해
서 오래 전에  미리 확증된 역사와의 이별을 늦춰보려고 하였다.  그래도 히틀러
의 성공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4년 반 동안이나  그는 기다리면서 준비를 갖추었다. 칼 뤼거의  잊지 못할 교
훈대로 저 '강력한 기관들',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과 연합하기 위
해서 애써왔다. 마침내 그런 제안이 나왔을 때  그는 지나친 권력욕의 인상을 만
들지 않도록 조심했다.  자신의 권력 장악 개념에 따라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
었지만, 오히려 냉정하고 자신감에 넘친 태도로 반응하고, 자신의 조건들을 내세
웠다.
  여러해 동안이나 눈에  띄지 않고 잠잠한, 아니면 비웃음이나 받은  과격파 정
당의 정상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개인적, 정치적 야심으로 삼아온  사람의 기분
을 짐작할 수  있어야만, 후겐베르크가 제안한 후원 약속이 그에게  얼마나 대단
한 의미르 가진  것인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엉터리 혁명가라는 악명,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라는 악명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영향력 있는 시민 
후원자들에 둘러싸인 채 대중 앞에  나서서 존경 받는 유명 인사들의 평판을 이
용할 가능성을  돌려준 것이다. 그것은 전에도  한 번 가지고 놀아본  적이 있는 
기회였다. 이제 그는 그것을 좀더 신중하게 인식하는 확고함을 보여주었다.

    선전기구의 활용
  동맹체결과 동시에 국가 사회당은 처음으로 압도적인 선전기구를 펼쳐놓을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그 비슷한 것은 독일이 한  번도 존재한 것이 없었다고 히틀
런느 어떤 편지에 썼다. "우리는 다른 어떤  정당도 한 적이 없는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헤집어 엎었습니다. " 그 오랜 기다림의 세월 동안 행동을 갈망하던 추종
자들의 분노가 이런 폭발로 분출된 것 같았다.
  민족주의 연합 파트너 중 누구도 국가 사회당의 거침 없고 날카롭고 선동적인 
재치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주 처으부터 국가 사회당은 영 안은  캠페인의 계기
일 뿐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본적으로 이른바  무능과 배신에 
빠진 채 돈에만 관심을 갖는 '체제'를 소란스럽게 재판한다는 방향으로 선동하였
다. 히틀러는 11월 말 헤르스브루크에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독일 
붕괴에 대한 책임이 있ㄴ느 사람들에게서 웃음이  스러질 시간이 다가옵니다. 두
려운이 그들을 사로  잡을 것입니다. 그들은 재판관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
니다."
  후겐베르크와 다른 보수연합 동지들은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거친 선동에 매혹
당한 채 자기들이  풀어 놓은 강력한 파도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새로 부추기고 
용길르 주곤 하였다. 이미 오래 전에 자기들이  사태를 주도하고 있다는 눈먼 자
신감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는 캠페인이  외면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렵
지 않게 간파하였다. '도이치 민족의 노예화에  반대하는 법안'을 위한 초안은 국
민 청원을  위해 필요한, 유권자 10퍼센트의지지를  겨우 얻었을 뿐이다. 1929년 
12월 22일에  이루어진 국민 투표도  패배로 끝났다. 겨우  14펴센트의 찬성표로 
이번 국민 청원은 법안  통과 필요한 찬성표의 약 1/4 정도를 얻은 것에  불과하
였다. 그것은 일년 전에 의회 선거에 국가  사회당과 국가 민족당이 얻었던 표를 
하진 것보다 거의 5퍼센트나 적은 것이었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쨌든  큰 정치판으로 뛰어드는 마지막 통과 절차
였다. 후겐베르트 기업의  다양한 출판매제를 통한 후원 덕분에 그는  단번에 인
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방향을 잃고 흩어진 우파에  자신이 가장 강력한 에너지
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여론에 '대단히 강력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
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당연하다는 듯이 건방지고 오만한, 아니면 어
리것은 태도로 당을 거부하던 성향이  이제 기대에 가득 찬 희망으로 바뀐 것이 
놀랍다." 고 했다.(언급된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다.)
  캠페인이 시작된 다음인 1929년  8울 3~4일에 그는 뉘른베르크에 전당 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럼으로써 무엇보다도  자신의 보수 진영 파트너들에게  자기 당의 
힘과 파괴력을 보여주려고 했단느 추측이 가능하다. 그것은 전통적인 당 대회가, 
군사적으로 기획되고 연출의 규칙과  심리적 규칙에 따른 대중 집회로 넘어가는 
최초의 과도기 행사였다.
  숫자 정보가 맞는다면 약 20만  추종자의 30개가 넘는 특수 행렬이 독일 저국 
방방곡곡에서 이쪽으로 밀려왔다.  그들의 유니폼, 깃발, 악대등이  여러 날 동안
이나 뉘른베르크 시를 지배하였다. 장엄한 의식으로  축성을 받은 24개의 새로운 
연대기들 다수는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슐렌스비히  홀스타인에서 온 것들이었
다. 거창한 폐막식에서 약  6만 명의 돌격대 대원들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와전 
무장한 채로 세 시간 반 동안이나 행진 음악에 맞추어 히틀러 앞을 통과하는 분
열식을 거행하였다. 몇  개 부대는 이 며칠간의 쾌감에 빠져서  폭력적인 행동을 
하려고까지 했다.
  국가 사회당의  당내 과격파 건의의  배후에도 정부 참여를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금지'해야  한단느 분위기였다. 당을  '정치권력 쪽으로 데려다 줄'행동은 
모두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간결하면서도  독특한 말로 히틀러는 이런 건의를 거
절하였다. 히틀러의  합법화 노선은, 무엇보다도 빠른  속도로 커가는 당 군대의 
자신감에 의해서 거듭  위협받았다. 이미 그해 말에 돌격대 숫자는  방위군 숫자
와 같아졌다.

    재계화의 관게 구축
  후겐베르크와의 동맹은  히틀러에게 재계와의 광범위한  관계를 마련해주었다. 
재계는 여러  해 동안이나 슈트라이만의  외교 정책을 뒷받침해  왔으나, 지금은 
영 안에  정열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프리츠 티센 
같은 몇 명의  예외를 빼면 소규모 기업가들에게서만 물직적 후원을  받았다. 영
주들의 재산 몰수 문제에서 반사회주의적인, 사유  재산 옹호의 태도를 취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풍부한 재원에 접근할 길이 열렸다.
  연설금지 기간에도 그는 특별히 루프 지방을 차례로 여행하면서 수백 명의 대
개는, 회의적인 기업다들을 앞에 놓고 폐쇄적인  집회를 열어서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국가 사회주의는 사유  재산의 정열적인 
옹호자라고 주장하였다. 성공은 귀족의 증거라는 자기  생각에 맞게 그는 대기업
가란 지도하기  위해 태어난 더  높은 종족이라고 찬양하고,  전체적으로 자신은 
'기업주에게 불가능한 어떤 일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일깨웠다.
  그리고 뮌헨 사교계와의 관계도 다시 좋아졌다.  거기서 그는 언제나처럼 대단
히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엘자  브루크만 같은 여자는, 자신의 말에 따르면 히틀
러를 '중공업계의 지도적인 사람들과 연결'시켜주는 것을 '생애의 과제'로 삼았다. 
1929년에 그녀는 늙은 에밀 키르도르프와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일생 동안 위를 
향해서 반대하고 아래를 향해서는 경멸해 온 이 거친 노인에게서 히틀러가 강한 
인상을 받았듯이, 키르도르프 역시 상대방에게 매료  당해서 한동안 그의 소중한 
후운자가 되었다. 그는  히틀러의 생각을 팸플릿으로 쓰게 한 다음  그것을 개인 
비용으로 인쇄해서 산업가들 사이에 돌리기도 했다.  뉘른베르크 당 대회에 그는 
귀빈으로 참석하였고, 그  며칠동안 자신을 가득 채웠던 그 압도의  느낌을 절대
로 잊지 못할  것이라고 나중에 편지로 써보냈다.(키로도르프는  물론 다시 당과 
결별하였다. 당의  정강은 많은 점에서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1934년에 재압 당했다.)
  1929년의 지방 의회 선거에서 처음으로 이 모든 새로운 수단과 후원들은 내세
울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작센과 메클렌부르크 슈베린에서  국가 사회주의자들
은 봄에 이미  거의 5퍼센트의 득표를 하였다. 프로이센 지방  선거 진출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코부르크에서는 시장을 냈고, 투링겐에서는 빌헬름 프리크가 나와
서 국가 사회당 최초의 주 장관이 되었다.  그는 국가 사회주의 기도문을 학교에 
도입하고, 중앙 정부와 갈등을 만들어냄으로써 곧 자기 목소리를 냈다. 전체적으
로 자기 정당의 연합 정부 수립 능력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과시용 무대 장치
  과시적인 기질에 맞게 히틀러는  자신의 성공에 값비싼 배경 장치를 마련하려
고 했다. 그것은 다시  장래의 성공을 예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안당사는 1925
년 이후 셸링 거리에 단순하지만 목적에 맞는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히
틀러는 프리츠 티센과 당원들이 모은 헌금으로 뮌헨의 브리엔 거리에 있는 바를
로브 궁을 사서 그것을 '갈색집'으로 개조하였다.
  건축가 파울 루트비히 트로스트와 함께 그는 뒤늦게 젊은 날의 꿈으로 되돌아
온 듯이 자신을 잊고 내부  설비를 구상하고, 가구며 문, 상감 세공 등을 스케치
ㅏ였다. 커다란 바깥 셰단을  올라가면 곧장 그의 집무실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
에는 한두 개의 무거운 가구들 이외에는 오직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와 무솔
리니의 흉상, 플란더스  지방에서 리스트 연대가 공격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등
만이 있었다.
  옆방의 고문관실에는 말굽 모양의 거대한 책상 주위로 붉은 모로코 가죽이 씌
워진 60개의 안락의자가 놓여있었다. 의자 등받이에는  당의 상징인 독수리가 새
겨져 있었고, 입구 양편에 있는 청동판엔느  1923년 11월 9일의 희생자들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방 안에는 비스마르크와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흉상이 놓여 있었
다. 이 홀은 원래의 목적으로 쓰이지 ㅇ고  다만 히틀러의 연극적 필요로만 쓰였
다. 히틀러는 오래 전부터 고문단을 두라는 모든 제안을 단호하게 물리쳐왔다.
  갈색집 지하에 있는 식당에는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초상화 아래 '지도자 자리'
가 특별히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몇 시간씩 부관들과  경건한 운전기
사들 사이에 앉아서  굉장한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억누를  길 없는 수다 욕구를 
채우곤 하였다.
  그는 이제 개인적인  생활도 당의 자금 형편에 맞추었다. 1929년  이후에는 그
의 서류에서 상당히  불어난 부채의 갑작스런 이자 따위가 사라졌다.  동시에 그
는 윈헨의 상류 시민층 거주지인  왕자섭정 거시 16번지에 방 아홉 개짜리 큼직
한 집으로  들어갔다. 티르시 거리  셋집의 여주인라이헤르트 부인과  아니 빈터 
부인이 살림을 맡았다.
  이복 누이인 라우발 부인은 전처럼 윗소금간 기슭에 있는 바헨펠트 집 살림을 
맡았다. 조카딸인  겔리도 왕자 섭정 거리의  집으로 이사왔다. 그녀는 외삼촌인 
히틀러의 극장에 대한  열정으로 노래 수업과 연극 수업을 받았다.  숙질 관계에 
대한 소문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또한 비시민적인 자유와, 조카에  대한 애착 
속에 숨어 있는 거대하고 운명적인 삶의 연관을 소중하게 여겼다.

    후겐베르크와의 결별
  히틀러는 영 안에 대한  캠페인이 끝난 직후에위험 하지만 효과만점인 행동을 
통해서 새로 얻은 정치적 자신감을 알렸다.  후겐베르크를 둘러싼 보수파 파트너
들과 보란 듯이 관계를 끊은 것이다. 성의  없음, 약점, 국민 청원에 실패에 대한 
책임 등을 들어서  그들을 통해서 전혀 방해 받지  않는 그의 이러 배신 행동은 
그에게 한 번 더 전략적인 도움을 주었다. 갑작스런 방향 전환은 그가 '자본주의 
개새끼 후겐베르크'와 동맹했다고  비난하는(도이치 민족주의자들은 한결같은 우
월감에 잠긴채  히틀러가 당내 좌파와 겪었던  곤란이라는 측면에서 위원회와의 
갈등을 해석하였다. 물론 슈트라서 일파가 이  과저을 자신들의 승리라고 자랑ㅎ
다는 점도 기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레고어 슈
트라서는 위원회 활동을 통해서  이러한 동맹의 종말에 적잖이 기여하였기 때문
이다.) 자기 진영의 불안한 비난을 침묵케 했을 뿐 아니라 공화국에 반대하는 우
익 진영 유일의  힘이라는 명성을 굳혀주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감당해야 할 
패배에 대한 책임을 부인 해버렸다.
  그와 같이 대담한 행동은 수적으로 여전히 열세인 작은 정당에는 거의 어울리
지 않는 것이기에  오히려 더욱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제 한 
번 일깨운 당 운동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라
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공격적인 의도에 알맞게  그는 중앙당을 새롭게 조직하였
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당  기구 제1분과(정치기구)를 맡고, 퇴역 대령 콘스탄틴 
히에를이 당 기구  제2분과(국가사회주의 국가=그림자 국가)를 맡았다. 괴벨스는 
전국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30년 2월 2일자 편지에서 히틀러는 '거의 예언
자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예언하였다. "길어봐야  2년 반이나 3년 안에... 우리 당
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계층으로 진출
  그는 후겐베르크와 결별한 뒤에  거의 중단하지 않고 변함없는 과격성으로 공
화국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주도적으로 계속하였다.  일년 전에 이미  당시 선전 
책임자 하인리히 히믈러의 서명을 받은 당 중앙의 지침서가 이른바 선전 활동의 
실천을 요청했다. 그것은 정치 선전의 새로운 전략을 표현한 것이다.   
  각 관구(지역구 혹은 히틀러 치하의 행정 구역)  조직은 조심스럽게 준비된 기
습적인 작전을  가지고 마지막 마을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갈 것. 
일주일 이내에 당의 모든 연설가는 수백 번의  행사에서 자기 능력의 '최후의 한
계까지' 다 쓸 것. 모든 도시와 지역은 이 기간 동안 히틀러가 손수 선정한 벽보
와 등사지, 삐라 등으로 완전히 넘쳐나도록 만들 것, '선전의 밤'을 조직할 것, 그
런 밤에는 악대의 행진곡에 맞추어 돌격대가 나타날 것. 돌격대가 "그 자리에 참
석하는 것말고 자체적으로 해도 괜찮은 일들은, 스포트 행사, 할인화, 연극 공연, 
노래, 돌격대 연설, 당  영화 상영 등이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1930년 6월  작센 
지방 선거를 앞두고 당은 그런 행사를 1천 3백 번 이상 치렀다.
  이러한 지방 투입은 특정한 사회 계층 안에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 특히 샐러
리 맨과 농부들을 상당수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렇게 강력하게 돌진해 들어
감으로써 당은 조합, 상공업 조합, 직업  조함 등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예를 
들ㅇ면 농톤에서 당은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농부들이 검은 깃발 아래 시위행진
을 벌일 때 처럼 긴급한  상황이 닥치면 '토지 개혁'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구호
로 맞서곤 하였다. 모든 것을 농부들의 잠재적인 반유대주의로 유도하였다. 어떤 
강습 지침서에 씌여진 바에 따르면 이 반유대주의는 '미칠 정도로 부추겨야'한다
고 했다.
  히틀러는 발터 다레라는 외국의 어떤 젊은 도이치 사람을 루돌프 헤스의 소개
로 알게 되었다. 그는 농업 정택에 대한  책을 완성해 1930년 3월 초에 출간하였
다. 이 책은 농부를 '민족의 가장 고귀한 계층'이라고 찬양하면서, 폭넓은 보조금
을 제안 한 것이었다.
  샐러리 맨들을  위해서도 당은 종전, 도시화,  사회적인 구조변화의 압력 드을 
가장 힘들게 겪은 이 계층에 널리 퍼진 일반적인 위기의식을 이용하였다.
  그에 반해 공장  노동자층은 처음부터 당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1929년 초 
샐러리 맨과 농업  노동자들이 당에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이제  '모든 일하는 사
람의 정당'이라는 주장이  타당하게 되었다. 모든 계층이 몰려들면서 전국적으로 
작은 세포들과  후원 지점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의  위대한 출발을 
위한 준비였다.

    검은 금요일
  이러한 성과들은 히틀러에  의해 쉬지 않고 추진된 당의 활동과,  또한 전통적
으로 분열된 우익의 어지럽고  감상적인 생각을 하나로 모아 전략적으로 강화하
는 히틀러의 능력 덕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그 사이 시작된 세계 경제 
공황 덕분이었다. 
  독일의 경제적 발전을  가능케 하고 특히 자치  단체의 경박스런 지출 경제를 
톡진시켰던 외국 차입금은  대부분 단기 차관이었다. 이제  불안해진 채권자들이 
차관을 회수하였다. 세계무역의 급격한 삼소로 인해  수출을 늘려서 이러한 손실
을 메울 전망도 없어졌다. 세계 시장 가격의  하락과 더불어 농업 경제도 위기에 
빠졌고 처음에는 지원금으로 근근이 꾸려나갔지만 지원금이 다시 일반적인 부담
이 되었다. 
  하나의 재앙이 다른 재앙을 불러 말 그대로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주식 가격
의 폭락에 따라 실업자 수가 늘고, 작업  정지, 압류 등이 늘어났다. 신문마다 난
을 나누어서 강제 경매 공고가 나왔다. 정치적 반작용도 없을 수 없었다. 1928년 
선서 이후로 나라는  사회 민주당의 헤르만 뮐러를  수반으로 하는 대연합 정권 
아래서 힘들게 갈등을  겪으며 통치되고 있었다. 세금 수입이 줄어서  이제 엄격
한 절약이 필요해지자 정부내 보수파와 좌파 사이에 누가 위기의 부담을 떠맡아
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심각한 다툼이 벌어졌다. 

    총체적 위기
  아무도 이 시점에선  무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명백해졌다.  독일의 위기
는 총체적이라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었다.  경게적이고 사회적인 동반 위
기 상황은 영국이나  특히 미국에서도 민감한 현상이었다. 다만 이  나라들은 정
치적, 도덕적,  지걱 척도가 무너지고, 모든  원인을 넘어서서 기존  질서에 대한 
신뢰의 위기, 포괄적인 의식의 위기로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 위기가 독일에 가져온  변화는 객관적인 경제적 조건들만으로는 충분히 파
악되지 않는다. 위기는 오히려 심리적인 현상이었다. 영원히 계속되는 곤궁에 지
치고, 전쟁, 패배, 인플레이션  등으로 영적인 저항력은 약해지고, 이성과 명료함
을 계속 호소하는 민주주의의 멋진 말솜씨에 완전히 넌더리가 난 상태에서 사람
들은 이제 감정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들은 처음에는 물론 이 파국의 숙명적이고 꿰뚫어 볼 길 없는 힘 앞에서 비
정치적이고, 체념한  태도로 반응하였다. 개인적인  생존이 지속적인 근심거리였
다. 매일  노동청에 가보기, 식품 가게나  긴급 구호소에 줄서기,  살아남기 위한 
비참하고 하찮은 고통들,  쓸쓸한 주점이나 길모퉁이, 어두운 집구석에서 쓰라린 
생의 감정을 안고 무감각하고 절망적으로 어슬렁거리는 것.
  1930년 9월의  실업자 수는 3백만 한계를  넘어섰다. 일년 뒤에슨  거의 450만 
명이 되었고 1932년  9월에는 5백만이 넘었다. 통계수치는 1932년 초에  이미 임
시 노동자를 빼고도  6백만 명의 실업자 수를 기록하고 난  다음이었다. 두 가구 
중 한 가구가 실업을 당한 꼴이었다.  1500만에서 2천만 명의 사람들이 지원금에 
의지하였다. 미국 기자인  니커보커의 계산에 따르면, 구호 대상자가 지언금으로 
ㄱ어죽기 위해서는 10년 쯤 걸릴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 있기에 충분하
다고 할만큼, 보잘 것 없는 액수였다.
  전체적인 낙담과 무의미의  감정이 모든 것 위에 덮였다. 위기이  동반 현상들 
중에는 유례없는 자살 파동을 꼽을 수 있다.  그 희생자들은 처음에는 주로 파산
한 은행가와  실업가들이었지만 위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많은 중산층과 소시민 
계층 사람들로 번져갔다. 작은 상점의 주인들, 샐러리 맨, 연금 생활자 등이었다. 
그들의 예민한 계층 의식은 빈곤을 단순히  결핍으로만 여기지 않고, ㄱ사회적인 
계급 추락이라는, 훔위 손상  표지로 받아들였다. 때때로 온 가족이 함께 자살하
였다. 
  출생률이 떨어지고 사망률은 증가하면서  20개 대도시의 주민수가 줄어들었다. 
혼란된 그림의 전체 모습과  타락한 자본주의의 그로테스크한 비인간성은 한 시
대의 몰락이라는 자의식을 만드어냈다.  말기적인 분위기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전체적인 세계 상황의 급격한 변화를 바라는  마음과 비합리적 동경이 깨어났다. 
야바위꾼, 점설술사, 예언가, 손금 보는 사람들, 영매들이 판을 쳤다. 기도는 아니
라도 거의  종교적인 감정들을 쳐주는,  그리고 분명하게 은총의  눈길이 끌리는 
곤궁의 시간이었다. 은총의 현상이란 인간의 일만이 아니라 규범, 질서, '정치' 이
상을 약속해주는, 즉 잃어버린 생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을 뜻하였다.

    대중정당으로 출발
  히틀러는 다른 누구보다 본능적으로 이러한 욕구를 파악하였고 사진에게 유리
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모든 의미에서 그의 시간이었다. 지
난 시절에도 종종  나타나곤 하던 게으름의 발작, 개인적인 영역으로의  후퇴 성
향 등의 단번에 극복되었다.  그 동안에는 그의 열정에 적합한 계기가 부족했다. 
도즈 안, 점령군  슈트레제만의 외교 정책 등은  적합한 공격 대상이 목 되었다. 
이러한 사정들과 자기가  불붙이려는 흥분 상태 사이의  불균형을 피할 수 없었
다.
  그러나 마치내 그는 자신의  선동가적인 활동에 극적ㅇ니 배경을 제공하는 파
국의 무대 장치가  세워진 것을 보았다. 그의 선동에서 고정적인  부분들은 파국
의 무대 장치가  세워진 것을 보았다. 그의 선동에서 고정적인  부분들은 메르사
유 조약과 슈트레제만의 외교 정책, 의회 주의, 프랑스 군의 점령, 자본 주의, 공
산 주의, 특히 유대인의  세계 음모 등이었다. 이제서야 이러한 개념 하나하나가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는 현재의 불쾌, 비참과 아주  잘 결합될 수 있게 된 것이
다.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히틀러가  우세한 점은 대중의 개인적인 소망과 절망감
에 정치적 결정의 색채를 주고, 서로 대립적인  기대들을 향해 자신의 의도를 알
리는 능력에  있었다. 다른 정당의 대변자들은  당황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어찌할 바  모른다ㅡ 사실을 인정함으로써그들은 파국을  맞이한 모든 무기력한 
사람들의 연대감에 의지하였다. 
  그와 반대로 히틀러는 낙관적,  공격적으로, 미래에 대해 확신에 찬 모습을 보
여주었고 증오심을 키웠다. "내 생애에 한 번도 이 시절처럼 기분 좋고 내적으로 
만족을 느낀 적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수많은 경계경보를 울리며 그는 계급 
추락의 공포에 사로잡힌  혼란된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우파나 좌파, 자본주의
나 공산주의에 똑같이 짓눌린 느낌을 갖고,  현존질서가 자기들을 원조하기를 그
만두었다고 비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정책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든 것을 거정하였다. 반자본주의적, 반프롤
레타리아적, 혁명적, 복고적인 것이었고, 냉정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동시
에 그 좋았던 옛 시절의 향수 어린  그림들도 불러냈다. 예전의 계층으로 복권하
기를 열망하는 혁명적인  분노라는 모순에 알맞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의도적으
로 모든 전통적인  대립들을 교차시켰다. 히틀러는 '체제'의  바깥 멀리에 과격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현재의 곤궁에  대해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선언하고 동시
에 현존질서에 대한 자신의 판결을 정당화 하였다.
  그의 말을 확증시켜주기라도 하듯 의회기구들의 최초의 적재력 시험에서 실패
하였다. 위기가 아직 정정에 도달하기도 전인 1930년 초에 대연적이 붕괴되었다. 
연정 붕괴는 공화국이 종말 조짐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속으로 타고 있던 의
견 차이가 표면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실업자 보험의 부담 나누기  문제에 대한 
좌우익 정당의 사소한 의견 차이였다.
   사실 헤르만 뮐러 정권은, 거의 모든  정치 진영에서 돌발적으로 드러난 반대
편으로 도망치려는 경향에 부ㄷ쳐 깨진 것이다.  과격파로 넘어간 주민들은 사회
민주당과 도이치 민족당이 이미 보여준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반복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공화국이 가지고  있는 뒷배경이 얼마나허약한가, 그리고  충성으 기초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공화국이 몇  년 아에 상당한 성취르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취의 
색깔은 잿빛이었다. 가장  호경기 때에도 공과국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을 지루하
게 만들었을 뿐이다. 
  히틀러가 비로소 공화국 정치가들이  일상적 쓸모에 지쳐서 알지도 못하고 받
아들이지도 못했던 추진력을 가동하였다.  유토피아와 개인을 넘어서는 목적들을 
향한 충동, 너그러운 마음과 헌신 의지를 향한 욕구, 지도자의 모습을 향한 원초
적인 동경 - 꿰뚫어보기 어려운  현대의 권력 과정들은 지도자의 모습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되기에 - 그리고 현재의 난군에 대한 영웅적인 해석을 향한 열망 
등이었다.
  '제 3의 가치'라는 구호의 공허한 경제적 약속을 훨씬 넘어 방향감각을 상실한 
대중을 국가 사회당의  길로 끌어들였다. 히틀러는 이제 대중 정당에  대한 망설
임을 없앴다. 처음으로 광범위한  당 조직을 위한 유연성이 입증되었다. 당 강령
이라는 쇠사슬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또한  특정한 계급적 제한에서도 자유로운 
상태로 국가  사회당은 극단적으로 대립적인 요소들을  힘들이지 않고 끌어모을 
수 있었다. 국가 사회당으 출신, 나이, 동기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여지
를 가지고  있었고, 당원의 이미지를 특정한  구조가 없으며, 엄격한 계급개념을 
모조리 부인하였다.
  히틀러 당을  단순히 경제적, 사회적  양상 아래서 반동적인  시민과 농부들의 
운동이라고 파악하고, 이러한  추종세력의 물질적 관심에서 그  역동성을 해석하
려고 한다면 히틀러 당의 상승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영세한 공장경영자, 농부, 대기업가, 소비자 등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에 필
요불가결한 사람등이었는데 이들 사이의  다양한 대립이 벌써 계급 운동의 가능
성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때까지 모든  정당이 부딪쳤던 한계이기도 했
다. 계급적 한계는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고, 가장 힘든 경제적, 사회적 비
참의 시기에 모든  계층을 향한 공허한 약속이라는  전략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은 너무 많은  전문자들이 있었기에 아무도 속일 수 없는  문제였다. 물질
적인 소망에 관계하려고 하면  곧장, 임금은 높이고 물가는 낮추고, 배당금은 늘
리고 세금은 줄이고, 연금은 높이고 관세도 높이겠다고 약속하고, 농산물 생산이
라는 측면에서는 생산자들에게는  높은 가격을, 소비자들에게는 낮은  가격을 약
속해야만 대중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의 기술은, 열광적인  호소로 경제적인 모순들을 뛰어넘고, 적들과 분리
시켜서 자신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만 물리  관심을 이용하는 것이었
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이나 편한 생활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것만
을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사회주의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
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 수백만 명이 실업  수당을 받고 입을 것도 없는 처
지라면 우리가 국가주의자다로, '독일, 모든 것 위에 독일'이라고 외칠 권리가 없
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국가사회주의의  엄격한 계급적 특성은 특히 마르크스주
의 역사학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의 우세함,  사람들의 태도가 오직  경제적인 동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조재를  위한 초개인적인 동지를 가지려는 
그들이 욕구에 기댔다. 그리고  계급차를 뛰어넘는 '제3의 가치'를 믿었다. 즉 국
가적인 명예, 위대함, 결탁, 희생의 각오라는 구호들이 가지는 힘을 믿었다. 아무
런 이익도 없는  헌신의 각오를 믿은 것이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게 됩니다. 
우리는 벌써 행진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당의 대한 공감과 당에 몰려드는 세력은 여전히 중간층에 제한되어 있
었다. 그들은 기본적인 정치적 관념을 가졌고, 옛날부터 존재기반에 문제가 많아
지면 복잡하지 않고 냉정한 질서의 안정감 속으로 도망치려는 성향을 보였던 계
층이다. 그들의 소원,  원한, 관심은 현존하는 정당  영역에서 정확하게 대변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공화국 체제가 그들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했다. 굶주림과 
두려움을 통해서 목적 없이  흔들리던 그들은 다시금 '자기들의' 당을 찾게 되었
다. 히틀러와의  만남에서 그들은 엄청난 선동가의  힘에 굴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운명 같은 것에 압도되었다.
  히틀러도 계급 추락의  두려움에 압도된 시민이었고, 수많은  시민적인 야심에 
패배한 사람이었다. 그후 그는 정치에 들어왔고, 그것이 그를 해방시키고 출세시
켰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정치가 그와  같은 마법으로 자기들에게도 작용하기를 
갈망하였다. 그의 운명은 그들 자신의 운명을 신격화 한 것이었다. 
  대중 정당으로의 출발  시기에 국가 사회당을 이끌어가고, 그 기간  동안 당의 
사회적 이미지를 주로 결정한 것은 이  '침몰하는 중간층' 이었다. 경제적 곤궁이 
직접적으로 국가 사회당의 구호들에  대한 호감을 높여주었고 생각하는 것은 물
론 잘못이었다. 히틀러 당은 불황이 가장 깊이  타격을 입힌 대도 시와 산업지역
이 아니라 소도시와  농촌 지역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
로 흠을  입지 않은 질서라는 배경에서  보면, 비참의 침입은 어느  정도 곤궁과 
친숙해 있던 대도시보다 훨씬 더 원천적이고  파괴적으로 지방에 타격을 입혔다. 
여기서 혼란이라는 개념은 공산주의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었다. (립세트는 어떤 
조사에서 국가사회당의  이상적인 투표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중산층의 
자영업 개신교도, 농장이나 작은 마을에 살고, 전에는 대규모 산업체와 노동조합
의 영향에 반대하는 정치적 중간층이나 아니면 지역정당을 지지했던 사람") 
  위기가 진행됨에 따라 국가  사회당은 노동자 계층에서 최초의 성과들을 얻었
다.  기업세포조직(NSBO)을 동원해서  이른바 '기업  공산주의'를  극복하겠다는 
('나치 세포가 없는 일자리는 없다'고 괴벨스가  적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구
상은 전체적으로 실패하였다. 히틀러가 광범위한 국가  사회주의 노동 조합 조직
이라는 생각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의 예는 그에게 하나
의 정당이 어떻게 노동 조합과  동맹을 맺고 세계혁명이라는 이념을 얻을 수 있
으며, 그리고 나서 월급봉투 문제에 사로잡혀서  인류의 해방을 시야에서 놓쳐버
리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 것 같다. 
  어쨌든 사회 혁명적인  노동자당이 '반유대주의 소시민 정당'의 골짜기로 추락
하는 위험을 막으려는 나치 잔류 좌파의 시도를 그는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단 
한명의 노동자를 얻는  것은 열두명의 각하들이나 '높으신' 나으리들이 입당선언
을 하는 것보다 비할 수 없이 소중하다."고 그들 중 한 명은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다시 자신의 생각으로 성과를  얻었다. 계급의식을 내세운 노
동자들에 대해서 국가사회당은  오랫동안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는데, 이
제 실업자 수가  증가하면서 그것이이루어졌다. 실업자의 이상적인  수용 그릇은 
특히 돌격대였다. 함부르크에서는  4500명의 대원 가운데 2600명이  일자리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거의 60퍼센트에 육박하는  수치다. 브레슬라우에서는 심한 
서리가 내렸을 때 중대 하나가 신발이 없어서 시찰을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조용한 내전
  실업자가 일주일에 두  번 나가야 하는 실업  확인소 앞에서 조직적인 신참자 
모집 부대가 당사자들이 근심과 곤궁에 알맞게 만들어진 선전지 <실업자>를 나
뉘주고 거기 늘어서 있는 사람들과 긴 토론을 벌이곤 하였다. 
  자기 영역에서  나치의 도전을 받았다고 생각한  공산주의자들이 반대 활동을 
벌이면서 주먹다짐과  거리 싸움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점차 양측에  더 많은 
사람들이 투입되면서 '조용한  내전' 상황으로 넘어갔다. 이런  내전 상태는 1933
년 1월까지 얼마간 끊이지  않는 피의 흔적을 남기다가 한편이 권력을 잡으면서 
갑자기 끝났다.
  1929년 3월의 디트마이셴에서  이미 괴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이 경
과하는 동안 두 명의 돌격대원인 농부 헤르만 슈미트와 소목수 오토 슈트라이벨
이 죽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때부터 대립은  점차 대도시로 퍼졌다. 대도시의  노동자 구역, 뒷골목 등이 
이 작은 전쟁의 어두운 배경이었다. 전쟁은  구석징 술집이나 지하술짐을 거점으
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돌격대 술집' 이라는  것으로 그것은 어떤 동시대인이 표
현한 것처럼 '전투지대의 방어진지'였다. 특히  대도시에서 돌격대와 공산당 전투
조인 붉은 전선 연맹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지곤  해서, 이따름 거리 전체를 소란
스럽게 만들고 전투와도 같은 소음으로 가득 채우며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곤 했
다. 종종 중무장한 경찰 부대를 대규모로 투입해야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칼 마르크스를 집어삼킨다!'
  베를린은 이제 점점 더 국가 사회주의 권력  장악 전략의 중심지가 되었다. 공
산주의 계열 당들이 옛날부터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전통적인 좌경 도시는 합법화 전략을 위해서 정복해야만 할 보루였던 것만이 아
니다. 국가 사회당은  베를린에 얼마 안 되는 도당을 거느린  괴벨스라는 인물을 
갖고 있었다. 그는 '빨갱이'들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자만하고 있는 자기
들 힘의 중심부인 베를린에서  그들을 쫓아낼 만한 에너지와 뻔뻔스러움을 갖춘 
인물이었다. 
  '아돌푸 히틀러가 칼  마르크스를 집어삼킨다!' 는 것이 그가  싸움을 개시하며
서 내세운 대담한  구호들 중 하나였다. 국가 사회당은 그때까지  시민적인 교외 
지역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싸우면서  지부를 이끌어왔다. 
괴벨스는 이 교외에서 나와  도시 북부와 동부의 비참한 프롤레타리아적인 구역 
한 가운데로 대원들을 몰고가서  거리와 기업들을 장악하고 좌익에 시비를 걸었
다. 
  더블 단추가 달린 가죽 재킷을 입은 창백하고 수척한 그는 그 시절 인물 유형
에서 가장 특징적이 인물의 하나였다. 실망한  대중에게 너무 오랫동안 세계혁명
의 흉내만 보여오 좌파의 ㅜ안감은, 베를린  공산당 지도부가 1928년 8월에 괴벨
스식 경쟁에 대해 반응하면서 유명해진 구호에  잘 드러나 있다. "공장에서 파시
스트을 내몰아라! 어디서 만나든 그들을 패줘라!"는 구호였다.
  히틀러의 예에 따라  괴벨스는 적이 보인 모범을  보고 실천 방안을 발저시켰
다. 구호 합창, 악대 행렬,  대규모 시위, 아파트 문 앞의 소품 판매 행위 따위는 
사회 주의 정당의 선정  방법에서 얻어다가, 히틀러가 발전시킨 '위대한 뮌헨 스
타일'과 합친 것이다. 괴벨스는 당의 촌스러운 면모에다가 새로운 계층이 가져온 
대도회적이고 지적인 특성들을 가미하였다.
  그는 청중의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신력이 풍부하고 뻔뻔스럽고 시니컬 
했다. 공화국의 구호인 "모두 공화국을  보호하라"의 머리 철자들을 모아서 유대 
말처럼 들리는 '샤드레(Schadre)'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의 선전에 쓰인 '
베를린 최고 악당'이란 말을 일종의 명예로운 타이틀처럼 자랑하고 다녔다.
  그리고 <공격>지에서 아주  꼼꼼하게 배열한 자살자 명단 위쪽에다가 아름다
움과 품위의 삶을 약속하였던 1918년 혁명시기의 구호를 이렇게 인용하였다. "아
름다움과 품위로 사는 이런 삶의 행복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
살자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다.
  적에게서 무제한 배울 각오가 되어있고, 권력에  따르는 건방진 태도와 잘난체
하지 않는다는  점은 국가 사회주의자들을 옛날  방식의 보수주의자들과 구별해 
주고, 그들의 노련함에 현대적인 면모를 부여해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당연한 일
이지만 시민적인 신문들보다는 극좌파 신문에 훨씬  더 주목하였다. 그리고 추종
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좌파 출판물에서 가져온  공산당의 훈령을 '주목할 만한 
구절들'에 싣곤 하였다. 공산당의  실천 방안에서 배운 것처럼 그들은 거칠게 등
장해서 상대방이 사기를  잃도록 만들려고 했고, 자기 편이 약할  경우에는 악의 
없는 이상주의의 결과로 돌리곤 하였다. 
  돌격대 지휘자 호르스트 베셀은  어떤 창녀를 놓고 공산주의 경쟁자와 다투다
가 부분적으로 질투심에  찬 상대방의 총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괴벨스는 멀쩡
한 태도로 '커다란 아이 심정을 가진 영웅' '그리스도 사회주의자'였다고 그를 추
켜세웠다. 붕대를 친친  감은 거리 싸움의 부상자들을 들것에 실어서  연단 옆에 
진열해 보여주는  것도 그의 호과  만점 무대 장치에  포함되었다. 디트마르셴의 
유혈사태에 대한  경찰 보고는 사상자의  선전에 효과를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피의 희생자를 내는 것이  히틀러 정당에 얼마나 효과적인 선전수단이었나를 확
인해준다. 그 결가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약 30펴센트 정도의  신규가입자들을 얻
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로 "단순하고  늙은 농부 아낙네들이 갈색 앞치마에 갈고리 십자
가를 그려 붙이고 다녔다. 그러 노파들을 보면  금세 그들이 국가 사회주의 정당
의 목표나  으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독일에서 정직한 모든  사람들은 이용만 당하고, 정부는 무능하고... 오직 
국가사회주의자들만이 자기들을  이런 비참에서 구해줄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

    독자적 형태의 청년운동
  국가사회당의 가장 특기할 만한 시작은 청년들  사이에 이루어졌다. 다른 정당
과도 달리 국가사회당은 청년세대의 기대와 희망을  이용할 수 있었다. 자연스러
운 일이지만 열여덟에서 서른 살의 세대는  현재의 대량실업사태에 직면해서, 명
예욕과 자기 입증  의지가 공허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위기에서 가장 심한 
상처를 입은 세대였다.
  그들은 과격하고  현실도피적이 되어서 거대한 공격적  잠ㄷ력을 가지고 있었
다. 그들은 주변세계, 양친의 집,   교육자들, 전래의 권위 등을 경멸하였다. 기성
세대는 오래 전에 물 건너간 옛날의 시민적 질서를 절망적으로 되찾으려고만 하
여다. "우리는 배후에 믿을 것이 없다. 그렇다고 부정하기에는 너무 건강하다!"는 
것은 어떤 시에 나오는 말이다. 
  지적인 청년층에서도 같은 분위기였다. 독일은 전쟁에  패했을 뿐 아니라 혁명
에도 패했으니 지금이라도  그것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수의 젊은이
들은, 무기력을 찬양하고, 허약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민주주의의 타협의지라고 
자랑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경멸하였다.  젊은층은 사회주의 국가의  유물론과 
'쾌락주의적인 이상들'을 거부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자기들을 가득 채우는 비극
적인 생의 분이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공화국과 아울러 전통적인 정당 유형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청년 운동
에 의해 일깨워져서 전쟁에서 전설적으로 확인된 '유기적인' 공동체 형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지겹게 옳은 척하는 얼굴을 한 전통적인  정당 당
수의 사진을 보면서 '노인제들의 지배'에 대한  운한이 불붙었다. 이 넓적하고 자
기만족적인 얼굴에는 시민 계층  젊은이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불안, 거대한 '시
대변화'에 대한 의식 등이 도무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상당수의 젊은이들은 공산당에 합류하였따.  그러나 공산당의 계급투쟁적인 편
협함이 많은 사람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다.  다른 ㅈ은이들은 다양하게 모자
이크를 한 민족주의 볼셰비즘 운동에 자기들의 부서진 꿈인 박사학위 시험의 표
현들을 주려고 하였다. 다수의  청년들, 특히 대학을 마친 청년들은 국가 사회주
의에 넘어왔다.
  국가 사회당은 그들이 자연스러운  대안이었다. 국가사회주의 선전의 흔들리는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혁명적인 어조를 들었다. 그들은  기율과 희
생을 구하고 있었다.  나아가 언제나 합법성이 가장자리에서 힘들게 움직이면서, 
가차없는 헌신의지가 합법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을 허용하는 이 운동의 낭
만성에 이끌렸다.  그것은 당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투 공동체로서, 한 남자의 
전부를 요구하였고 부서지는 세계에  맞서 군인다운 새로운 질서를 내세우는 운
동이었다. 
  젊은 대원들이 몰려들면서 국가 사회당은 대중 정당 이전에 독특한 양식의 청
년 운동의 특성을 얻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 관구에서는 1925년에 당원의 2/3
가 서른살 미만이었고,  할레세거는 86퍼센트나 되었고, 나머지 관구에서도 수치
가 비슷하였다. 1931년에 베를린 돌격대 대원이 70퍼센트가 서른 살 미망이었다. 
당 전체로 이 연령층은 거의 40퍼센트에 이르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사회 민주당은 그 절반 정도도  못 미쳤다. 사회 민주당 의원들의 
10퍼센트 정도만 마흔 살 미만이었다면, 국가  사회주의자 정당에서는 거의 60퍼
센트나 되었다.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자극하고 책임을 맡기는  히틀러의 노력은 
정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괴벨스는 스물여덟에, 칼  카우프만은 스물다섯에 관구 지도자가 되었고, 발두
어 폰 사라흐는 스물 여섯에 전국  청년단장으로 임명되었고, 히믈러는 스물여덟
에 친위대(SS) 전국 지휘자로 이명되었다. 이런 젊은  지휘자들의 무조건적인 헌
신과 변함없는 신념의  힘, 그들의 '육체적인 순수한  에너지와 투쟁욕'은 나중에 
그들 중 한명이 회고한대로  "당의 추진력을 오래된 시민 정당들에선 그 비슷한 
것도 내세울 수 없는 힘이었다. "

    브뤼닝 정권
  이 모든 표지들은 아직 당이 대규모의 비약적인 발정을 하기 이전인 1929년에 
이미 당의  구성을 특정지웠다. 그럼에도  당의 사회학적인 이미지는  어느 정도 
의도적인 요구와 숱한 통합구호 아에 흐려진 채 여전히 명확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러한 통합구호들  뒤에 숨어서, 정치 의식화된  노동자층을 얻으려
는 선정이 거의  성화를 보이지 않고, 국가 사회당이 대체로  원래의 지지기반에
만 한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어보려고 했다. 
  처음으로 국가적인 방해 공작이 나타났다. 1930년  6월 5일에 바이에른 주정부
는 단체복을 금지하였고, 일주일 뒤에 프로이센은 갈색 셔츠를 금지하였다. 그래
서 돌격대는 앞으로  흰색 셔츠를 입고 등장해야만 하였다. 다시  2주 뒤에 정부
는 공뭉원들에게 국가 사회당과 독일 공산당(KDP)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정부의 방어 의지는 늘어나는 소송 숫자로  나타났다. 1933년까지 약 4만건의 소
송이 이루어졌고, 14만 년의 징역과 거의 50만 마르크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런  몸짓도 '체제'에 분명히 스며  있는 허약함의 인상을 억누르지는 
못했다. 대연정의 부끄러운 종말 이전에 이미  헌법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형식
상 헌법을 준수하고  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주변으로,  무능한 의원내각제를 
중단하고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취하자는 생각이 흘러들어왔다. 
  대통령이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어디까지 저항을 했든 그는 새로운 정부 형성
에 처음으로 정열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개입하였다. 하인리히  브뤼닝을 수상으
로 선출한 것은  대통령이 장차 정부 업무에도  개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수상은 충성심,  성격의 엄격함, 의무의식 등을 낭
만적인 근엄성과 합친 사람으로, 언제라도 말없이  자기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
다. 
  힌데부르크는 자기  희생의 각오를 주변에  늘 요구해 왔다.  브뤼닝은 업무를 
인계받은 직후에, 실업자 수가  나날이 증가하고, 위기의 공포가 커가고 있던 시
점에, 의회 표결에서 패배를 겪더니 타협의  가능성을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서 
부당하게 서둘러서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내무장관 비르트는 반대파들에게 의회
의 위기가 체제의 위기에 이르지 않도록 승복하라고 하소연 하였으나 소용이 없
었다. 마치 민주주의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넌더리가 난 것 같았다. 새 선거는 
9월로 예정 되었다. 
  약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국가 사회주의 선전은 다시 불붙고 영 안에 반대
하는 싸움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저 날카로운 캠페인의  음조가 되살아났다. 
다시금 당의 선전지휘부가 몰려나와서 시끄럽고 소란스럽게 도시로 지방으로 흩
어져 들어갔다. 잠시도  중단하지 않고 거리 음악회,  스포츠 축제, 자전거 타기, 
소등 신호, 함께 교회 가기 등의 행사를  벌였다. 그들은 이성적일 줄도 알고, 과
격하거나 열광을 보일 줄도 알며, 상대방보다 더욱 민속적일 수도 있었다. 
  '인간 폐물을  쫓아내라! 그들이 낯짝에서  가면을 벗겨내라! 그들의  모가지를 
붙잡아라! 9월 14일에 그들의 기름 낀 배때기를 밟아주자, 그리고 영광의 빗자루
로 쓸어서 그들을 사원으로 쫓아보내자!" 전국 선전  책임자로 임명된 다음 처음
으로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괴벨스는 이렇게 썼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어리석은 열광'을 부정적으로 평가하
였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조차도 그들의 우세한 부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승
리를 확신하고 있었으면서 여전히 역사가 아니라  일상만 있는 것처럼 잿빛으로, 
별 기력 없는 활동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설자 코스를 마친 2,3 천명의 연설가들이 대규모로 투입되었다. 그들은 당의 
이념적 판단들을 원시적으로 배워 익혀서 떠드는 치들이라 거의 새로운 추종 세
력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수 많은 작은 선전꾼들이 때를  지어 몰려나오는 
것은 지치지 않고 활동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었고, 히틀ㄹ의 생각으로는 그것
은 광범위한 최면  효과를 가지는 것이었다. 동시에 실력을 입증한  관구 연설가
와 전국적 수준의  연설가들이 비싼 동을 들여 준비된 행사에  등장하였다. 프로
이센      내무부의 어떤 건의서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1천  명에서 1만 5천 명 
사이의 관중을 동원한 집회들은 대도시에서 매일  일어나는 현상이다. 미리 예정
된 집회 장소가 청중의 수에 맞지 않는 탓으로 하나 혹은 여러개의 동시 집회가 
열리는 경우도 많다. 
  지도자, 스타, 선거운동  조직자 등 모든 것의  정상에 히틀러 자신이 서 있었
다. 그는 바이마르의 대집회로 선거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로는 자동차, 비행
기, 철도를 이용하여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가 나타나는 곳은 어디든지 대중
이 모여들었다. 그가 계획도, 위기와 방어의  이론도 없었다고 해도 그랬다. 그러
나 그는 답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누구  책임인지 만할 수 있었다. 연합군, 부
패한 체제 정치자들,  공산주의자들, 유대인 등이었다. 그는  이러한 곤궁을 끝낼 
전제조건들도 알고 있었다. 의지와 자신감과 권력의 회복이었다.
  감정에 대한 호손느 언제나 제대로 작동하였다. "일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내개 
말하지 마십시오!" 도이치 민족은 일상의 문제로 망했다는 것이다. "일상의 문제
는 위대한 문제대 대한 시각을 흐려놓는 것입니다. " 그는 의회주의 체제 우기이 
이유로, 정당들과 그들의  목적이 지나치게 '일상적인 잡일'에  매달린 것을 들었
다. '사람들이  희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것 이상으로  잡일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주어신 처방을 따라서 당시의 수많은 불행들을  몇 가
지의 파악하기 위운  원인 탁으로 돌렸다. 무시무시한 배후 인물들이  음모를 꾸
미는 어두운 세계  파노라마를 펼쳐 보이면서 이  몇가지 원인들에 폭과 악마적 
후광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는 연설의 재능 못지 않게 장엄한 행사와 결연한 모습으로 효과를 만들어냈
다. 자신의 암시들이 표어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었다. 날카
롭고 지속적인 수많은 개념들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그가 퇴장한 다음에도 오랫
동안 통제되지 않는 의식의 심층부에 남아서 스스로  작용할 것이었다. 몇 주 동
안 그는 비상한  조직의 체험 이외에도 광범위하게  펼쳐진 맹열한 선거 운동에 
대한 심리적 기교를 터득하였다. 2년 위에 그것들이 이용될 것이다. 
  국가사회주의 선동의 에너지와 소란스러움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강령의 빈곤
은 국가사회당을 지속적으로 과소평가받도록  만들었다. 비판적인 동시대 사람들
은 우월감을  느끼며 국가 사회당을  약간 미친 시대의  소란스럽고 부담스러운, 
약간 미친 형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쿠어트 무홀스키는 히들러에  대해서 상당히 
정확하면서도 대단히 잘못된 평가를  하였다. " 그 남자는 전혀 없다. 그는 자기
가 만들어낸 소음일 뿐이다."(칼 폰 오이에츠키는 1930년 9월 선거 직전에 한 기
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 사회주의ㅣ 운동은 시끌벅적한  현재일 뿐 미래는 
아니다.") 
  형식적인 합법화 선언 뒤에 거의 숨김없이 드러나 있는 헌법에 적대적인 국가 
사회당의 특성을 밝혀 보인 내무부 건의서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 대
신 너무 빨리 성장한 정당 내면의 모순,  당 지도층의 지적인 평이함, 조잡함, 명
예욕 등에 자기 파괴적인 폭발물질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만 여겼다. 

    오토 슈트라서와의 결별
  이러한 기대는 1930년 여름에 국가사회당을 한 번 더 지속적으로 뒤흔든 위기
를 통해서  확인된 듯이 보였다. 뒷날의  관찰을 통해 그것은 당의  기강 확립과 
타격력에 도움을 준 숙청활동이었다.  사방의 격앙된 환호를 받으며, 점점 더 마
비시키며 다가오는 떨림  속에서, 되풀이될 수 없는 시회를 포착한  히틀러는 당
내 최후의 비판 세력과  독자적인 반대파를 숙청함으로써 스스로 무장을 갖추었
다. 
  처음에 그는 점차  모순 속으로 빠져들고 있던  당내 좌파에 대립을 강요하며 
계속 뒤로 밀쳐냈다. 국가사회당이 변두리 정당으로 남아있고, 오직 소동을 일으
켜야만  사람들 눈에 띄고, 의회나 정부에서  자기들의 원칙을 실천할 처지에 있
지 않은 동안에는 이념상의 의견 차를 그럭저럭 감출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지방선거의 성과는 계속해서 적절한  자기 해명을 요구하였다. 오
토 슈트라이서와 투쟁 출판사를 중심으로 한 그늬 추종 세력은 언제나 되풀이해
서 히틀러의 합법화 노선에 의문을 제기하고 공격적인 '파국 전략을 찬성하였다. 
그들은 우악스러운 반자본주의를 자랑하였고, 폭넓은 국유화를 연설하였으며, 소
려과의 동맹을  촉구하고, 당 노선을 벗어나서  지방의 파업 활동을 지워하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행동으로 그들은 방금 만들어낸, 당에 많은  이익을 가져
다주는 재계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강령을 확립하려는 과
격한 성향으로 히틀러의 전략인 강령 회피와 모든 계층을 향한 개방성을 어지럽
게 뒤흔들었다. 
  1월에 이미 국가사회당의  지도자는 오토 슈트라이서에게 투쟁 푸류ㅏ사를 내
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앞 뒤  다르게, 온갖 아첨과 협박과 매수를 동시에 시도해 
보이다가 다시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반항적인 동지를 뮌헨 중앙당의 언론 총
책임자 자리에 임명했고, 출판사를 위해서는 약 8만 마르크를 제공하려 했다. 그
는 옛날 군인이며 오래된 국가 사회주의자인 슈트라서를 지원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슈트라서는 자신만이 참된 국가사회주의 이념의 승리자라고 여기고 모
든 제안과  위협으 거부하였다. 원칙적인 문제에  대한 다판이 1930년  5월 21일 
~22일에 당시 히틀러의 베를린  본부였던 링크 거리의 '상수시' 호텔에서 벌어졌
다. 막스 아만,  루돌트 헤스, 오토 슈트라서의 형 그레고어  등이 지켜보는 가운
데 두 적수는 일곱 시간 동안 흥분해서 각자의 주장을 주고받았다. 
  이 대화는 슈트라서의 수기에 기록되어 남았다.  뒷날 원탁에서 말없는 절망이
기도 했던 독학자의 광범위한 태도로 히틀러는 이 대화를 예술에 대한 설교조의 
표현으로 시작하였다. (예술은 혁명적인  단절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예술'로 존
재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한 것은 그리스, 북유럽적인  것뿐이다. 나머
지 모든 것은 오류이다. ) 그리고 나서 개성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종족, 
세계경제, 이탈리아 파시즘을 논하고,  그런 다음에는 처음부터 드러나 있던, '빌
라도 문제'인 사회주의 문제로 넘어갔다. 
  그는 슈트라서가 이념을 지도자보다 높은 자리에 둔다고 비난하였다. "모든 당 
동지에게 이념을 결정할 권리를 주고, 심지어는  지도자가 이른바 이념에 충실한
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할 권리까지도 주려고 한다. 그것은 우리  당에서 아무
런 의미도 없는 가장 나쁜 민주주의다. "라고 그는 흥분해서  외쳤다. "우리 당에
서는 지도자와 이념을 스스로 구현하고 있는 지도자가 명령하는 것을 따라야 한
다. " 그리고 자기는  동지들의 기율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당 조직이 '몇몇 
망상적인 문사들 손에 망가지도록 맡겨 둘'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서열적인 관계 이외의 인간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히틀러의 무능이 이대면에
서처럼 명백하게 드러난  적은 없다. 그는 지적인 반성의 경우에도  그렇듯이 모
든 생각, 모든 반대에 대해서 권력  문제를 마주세웠다. 누가 배치권을 가지는가, 
누가 명령하는 사람이며 누가  명령을 받은 사람인가? 모든 것은 지배자와 하인
의 대립으로 축소되었다. 거칠고  교육받지 못한 대중이 있고, 대중을 자기의 도
구와 조작대상으로  삼는 위대한 인물이  있다. 이 대중의  합법적으로 보호하고 
돌보려는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 그것이 그의 생각에 따르면 사회주의였다.
  그가 시민적 반동세력과의 새로운 관계를 배려하느라 당의 혁면적인 사회주의
를 방해한다고 슈트라서가 비난하자 히틀러는  격분헤서 대답하였다. "나는 사회
주의자요. 예를 들면 재산이  많은 레벤틀로브 백작과는 달라요. 나는 단순한 노
동자로 출발했소. 오늘날에도  내가 운전기사와 다른 음식을  먹는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지만 당신이 사회주의라는 개념으로 이해하ㅡ  것은 다만 극단적인 마르
크스 주의일 뿐이오. 노동자들은  대개 빵과 놀이 밖에는 구하지 않아요. 그들은 
어떤 이상에 대한 이해력이 없어요. 우리는  상당히 많은 노동자들을 얻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소. 우리는 그 어떤 도덕적 연민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자신들이 
더 나은  종족이라는 이유에서 지배  권리를 분명히 확신하고,  광범위한 대중에 
대한 지배거ㅜ을  가차없이 내세우고 확보하는 새로운  주인 계층을 선별하려는 
것이오... 당신의 체계는 실제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탁상공론일 뿐이오."
  그는 자신의 출판사를 향해 말했다. "아만 씨, 당신은 속시 타이피스느가 갑자
기 당신의 말에 끼여드는  일을 참겠습니까? 생산품에 대한 책임을 지는 기업가
가 노동자들에게도 빵을 분배합니다. 우리의 위대한  기업가들은 돈을 긁어 모으
는 것, 잘사는  것 등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책임과 권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죠. 그들은 자기 자신의 쓸모로 해서 정상에 올라선 것이며, 더 높은 종족이 
입증하는 이러한 선별을 근거로 지도할 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흥분된 토론을 마친 다음에 슈트라서가 그에게,  권력을 차지할 경우 생산체계
는 변하지 않는 거냐고 물었을 때 히틀러는 대답하였다. "그야 물론이죠. 당신은 
내가 경제를  방해할 만큼 돌았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국가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경우에만  국가가 개입할 것이오. 그렇다고 재산 몰수나  공동 결
정권이 필요한 것은 아니죠."
  현실적으로는 오직 하나의 체제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로는 책
임을, 아래로는  권위를'이라는 것이 수천년  전부터의 체계였으며,  지금 달라질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주변 상황에 대해서 상당히 극적으로 서술한,  상세한 
묘사. 전체적으로 대화의 진술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는 없다. 바로 뒤이어서 확
인된 비망록이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수많은  발언에 나타난 히틀러의 주장
들은 다른 곳에서도 일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사회주의
  히틀러의 사회주의 개념에서는  인간적인 추진력도, 사회의 새로운  구상에 대
한 필요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자신이 확인한 것처럼 그의 사회주의는 "경제생
활의 기계적인 구조완느 아무런 상관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주의'라는 단
어에 대한 보충 개념으로 개인에 대한  전체의 책임을 뜻한다. 반면에 '국가주의'
는 개인이 전체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국가 사회주의에서 이 두 가지
는 합쳐진다는 것이다. 
  이런 술책은 모든 이해 관계를 도와 정당성을 갖도록 해주고 개념들을 도박의 
칩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렸다. 히틀러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가 우선 성취되었다. 
사회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아래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국가 
사회주의는 권력 전략을 고려해서 좌익의 표지를  내걸었다. 그것은 안으로나 밖
으로나 강력한 국가를 요구하였으며, '익명의  대중' '영원한 미성년자 다수'에 대
한 확고한 지휘를 요구하였다. 
  당  역사의 출발점이  무엇이었든 1930년에  국가 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
(NSDSP)은 히틀러의 생각에 따르면, 인기 있는 단어의 분위기를 이용하기 위해
서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그리고  역동적인 사회적 힘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
당'이기도 했다. 전통, 보수적 가치관이나  기독교에 대한 고백처럼 사회주의적인 
구호들도 조작이 가능한 이데올로기적인 전진기지였다. 
  그것은 위장, 교란 등에 이용되고, 기회에 따라 번갈아 표어를 바꿀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열광하여 입당한 어떤 젊으이는 괴벨스와  이야기 하는 중에 당 지휘
부가 강령의 언칙들을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를 경허하였다. 페더의 농
노제도 중지는 사회주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말을  했다가, 그런 헛소리를 경청하
는 사람은 걔져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오토 슈트라서가 자신의 주장에 들어 있는 불합리성과 개념 조작을 그토록 당
당하게 밝혀낸 것이  히틀러의 마음을 대단히 상하게 만들었다. 아무말  없이 그
는 뮌헨으로 돌아와서,  그런 대립의 경우에 보이는 방식대로 여러  주 동안이나 
전혀 의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슈트라서는 불확실한 상태였다. 그가  "장
관 자린가 아니면 혁명인가?"라는 소책자에서  논쟁의 경과를 묘사하고, 당 지도
자 공동의 이념에 들어있는  사회주의 핵심 부분을 배신하였다고 비난하자 히틀
러는 반격하였다.  노여움이 너무 커서  문체상의 실수까지 보이는  편지를 써서 
그는 베를린 관구 지도자에게 슈트라서와 그의 추종자들을 즉각적으로 제명시키
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여러 달  전부터 나는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핵임있는  지도자로서, 당내 
운동 계역 속으로 불일치, 혼란, 기율 없음 등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주시해 왔
습니다. 사회주의를  위해서 싸우려 한다는 가면을  쓰고서 우리는 유대, 자유주
의, 공산당 적들과 똑같은 정책을 추구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들 그룹이 요구하는 
일은 바로 적들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을 해체시키는 이 요소들
을 가차 없고  예외 없이 당에서 쫓아내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운동의  본질적인 내용을 정했고 만들어놓았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 운동의 근간으로 삼았고,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감옥에서 
고생했던 것이며, 단절에서  그것을 끌어내어 오늘날의 이  높이까지 끌어올렸습
니다. 우리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운동의 바탕에 둔 본질적인 내용에 잘 
맞지 않는 사람은 이 운동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되고, 다시 이곳을 떠나야 합니
다. 국가사회주의 정당은  내가 지도자로 있는 한 뿌리 없는  문사들이나 혼란스
런 살롱 볼셰비스트의 논쟁 클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정치적인 떠돌이의 공론
적인 어리석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계급  개념이 사라지게 될 독일의 
미래를 위해서 싸우는 조직체 입니다. 

  6월 30일에 괴벨스는 베를린 토끼숲 홀에서 관구 당 대회룰 소집하였다. "질서
에 편입되지 않는 자는 쫓겨나야 합니다!"라고 그는 외쳤다. 자신들의 견해를 밝
히려고 참석했던 오토 슈트라서와 그의 추종 세력은 돌격대에 의해서 강제로 홀
에서 쫓겨났다. 슈트라서  그룹은 '진짜배기 스ㅏ린 주의'라고  말하고 당 지도부
에 의한 의도적인  '사회주의자 탄압'이라고 떠들었지만 그들의 세력은 급격하게 
움츠러들었다.
  다음란 벌써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투쟁 출판사  신문의 발행인 자리를 내놓고, 
동생과는 극히 날카로운  형태로 거릴 두었다. 폰 레벤틀로브와 다른  유명한 좌
익 인사들도 이들 반란 그룹을 떠났다. 그러나  대대수는 의심할 바 없이 히틀러
가 그들에게 일깨우고  수많은 불충 행동들을 넘어서 지키도록  만든 '거의 도착
적인 충성심'으로 그런 행도을 하였다. 
  자신에 넘친 괴벨스는 당은  '이러한 태업 기도를 땀처럼 흘려 내보낼 것'이라
고 말했다. 7월  4일에 오토 슈트라서의 신문은 "사회주의자들이여, 국가  사회당
을 떠나자!"는 기사를  냈다. 그러나 거의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에는 사회주의자가 거의 없었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행동은 이론적으로 해석하
려고 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었다. 
  오토 슈트라서는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여, 처음엔느  '혁명적 국가사회주의자'
라고 칭했다가 나중에  '검은 전선'으로 불렀다. 그러나  문필가적인 분파 그룹이
라는 냄세를 아주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투쟁 출판사의 신문을 읽는  것은 히틀
러 당에서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종하하는 주제는 어차피 거의  주목을 받
지 못하던 참이었다. 
  지도부의 친숙한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은, 역사의 호소를 듣은 것처럼 보이는, 
확고하게 세계파국에 대항하는  싸움을 해온 국가사회주의 정당에는 현학적이고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론적인  개념 논쟁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대중을 당의 강령이 아니라 히틀러라는  사람에게 희망과 치유의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 슈트라서의 탈퇴는 국가  사회당 내부에서 사회주의 원칙 논쟁을 끝냈을 
뿐만 아니라 그레고어 슈트라서에게는 엄청난 권력  상실을 의미하였다. 그 뒤로 
그는 집안의 배경도 신문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여선히 당의 전국 조직책
임자 자리에 있으면서 뮌헨에 거주하며 수많은 관계들을 장악하였으나 당원들과 
여론의 눈에서 점차 사라졌다.  반 년 전만 해도 <세계무대>지는 그가 '머지 않
은 장래에 주인인 히틀러를 구석으로'몰아 붙이고  스스로 당권을 장악할 것이라
고 예측했다.  지금 그는 권력을 잃어버리고  그럼으로써 2년 뒤의  패배에 미리 
도장을 찍은 셈이었다. 2년 지나서 그는  최후의 반항적인 몸짓으로 체념을 이겨
냈지만 결국 지치고 망가진 상태로 당에 등을 돌렸다.


=============================== 08
    슈테네스의 반란
  슈트라서 위기의 후유증으로 돌격대의 동부지역 부지휘자인 전직 경위 슈테네
스의 지휘 아래 있던 베를리 돌격대의 반란을  꼽을 수 있다. 당부대인 돌격대의 
불만은 사회주의 논쟁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정치기구(PO)측의 보스화, 
도당화의 표지들과, 힘든 선거운동에 비해 낮은 보수 등과 관계가 있었다.  
  돌격대가 지쳐빠진 상태로  저녁마다 '뼈빠지게' 일하는 동안 정치기구는 사치
스럽게 치장된 궁전을 세웠다는 것이 자주  나오는 비난이었다. 갈색집에 돌격대
를 위해서 대리석과 청동으로 된 기념비가 세어졌다는 반박에 대해서 그건 오히
려 비석처럼 보인다고 대꾸했다. 정치기구에는 "돌격대는 오직 죽기 위해서 존재
한다."는 확신이 퍼져 있다고 어떤 돌격대가 지휘자가 썼다. 
  괴벨스는 슐레지엔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히틀러와 친위대(SS)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반항적인  돌격대가 며칠 뒤에  헤데만 거리에 있는  관구 사무실로 
밀려들어 왔을 때 히믈러의  검은 부대(친위대)와 최초의 유혈사태를 빚었다. 히
틀러가 나타나자  일시적으로 반란이 멎었다는 사실은  히틀러의 권위를 조명해 
주는 부분이다. 
  당연하지만 그는 처음에 슈테네스가 말하기를 피하고 직접 부대원들을 설득하
려고 했다. 무장  친위대를 대동하고 돌격대 지부의 술집들을 하나씩  돌면서 단
위 부대에  하소연하고때로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승리가  눈앞에 다가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혁명의 병사인 그들에게 합당한 임금을 약속하였다. 임시로 그는 
그들에게 법률상의 보호와 더 나은 보스를 약속하였고 그 돈은 당원당 20페니히
씩 돌격대 특별세를 거두어서 중당하였다.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친위대는 자기
들의 표어를 얻었다. "너의 명예는 충성!"
  반란의 종결은 돌격대 최고 지휘자 폰페퍼의  사임을 뜻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저항 했지만 점차 체냠한 태도로 돌격대의 분명한 영향력 감소와 맞물린 정치기
구의 권력 증대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무게 중심 이동의 원인들  중에는 무엇보
다도 히틀러가 자기 주면에  만들어낸 비잔틴 양식, 곧 아침의 선호 때문이었다. 
대중의 환호가 나날이 자기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을 의식하면서 군대식 서열의
식을 가진 돌격대 지히자들보다 그러한 욕구에 더 잘 적응하였다. 
  그 결과 정치기구는 얼마 안 되는 돈을 분배할 때나 대의원 명단을 작성할 때
마다 다른 후견 활동을 입안할 때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갈 등의 배후에는 
엉터리 예술가인 남 도이치  보헤미안 유형과 다른 한편의 엄격한 '프로이센' 유
형사이에 존재한느 완전한  이질감도 작용하였다. 프로이센 유형은  폰 페퍼라는 
인물과 그의 협소한 지휘부 안에 한동안 더  남아 있었다. 돌격대 최고의 지휘자
의 계급상의 우어ㅜ감을  화난 눈초리로 지켜 보면서  히틀런느 때때로 그는 폰 
페퍼(후추)가 아니라 폰 퀘멜(퀘멜 열매)이라는 이름이 더 알맞을 것이라고 말하
곤 하였다.
  자눙에 1938년, 1941년에도  그런 것처럼 군사력고의 갈들이  일어나자마자 히
틀러는 8어ㅜ  말에 페퍼를 해임하고 직접  돌격대 최고 지휘자  자리를 맡았다. 
일상적인 지휘업무를 위해서 그  사이 볼리비아에서 군대교관 노릇을 하고 있던 
에른스트 룀을 불렀다. 히틀러는 그럼으로써  운동을 궁극적으로 지배하였다.. 폰 
페퍼가 발전시킨 돌격대의 특별 권리까지 이제 자기 안에 합치게 된 것이다.
  며칠 뒤에 벌써 히틀러는  모든 돌격대 지휘자에 대해 '무조건적인 충선 맹세'
를 의무화하였고, 이어서 모든 돌격대 대어ㅜ에게도 같은 의무를 부과하였다. 그 
밖에도 신규 가입할 때에 새로운 의무조항이 붙게 되었다 "모든 명령을 지체 없
이 확실하게 실천한다. 나의 지도자들은 불법적인  일을 나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항목이었다. 히틀러가 위기의 경과를  보고
하면서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한 <민족 관찰자> 기사에는 '나'라는 말이  131번이
나 나온다.
  
    지도자와 교황
  히틀러의 절대적 요구가 그 사이 돌격대에서 아무런 반발도 일으키지 않은 것
은 기록할 만한  일이다. 제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당 운동은 마침에  도구적 구
조가 된 것이다.  히틀러는 과거의 모든 갈등에서도 그랬듯이 오히려  이 공격으
로 자신의 위치와 위신을 강화하였다.
  6월에 이미 그는 새로  지은 갈색집의 고문관실에서 몇 명의 선발된 당기자들
을 놓고 카톨릭 교회의 서열과 조직을 날카롭게 강조하면서 총체적인 당 지히ㅜ
방침을 발표하였다. 카톨릭 교회의 모범에 따라  당은 '민중 속에 서 있는... 정치
적 사제들이라는 광범위한  토대' 위에 피라미드적 지휘체계를 쌓아올린다. 그것
은 "단계별로 지역  지도자와 관구 지도자를 거쳐서  고문단, 그리고 최종적으로 
당 지도자 - 교황에 이르기까지 된다."
  한 참석자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관구 지도자와 주교, 장래의  고문관과 추기
경을 비교하기를 서슴지 않았고, 아무 주저없이  종교적인 영역의 권위, 복종, 신
앙 등의 개념을 세속적인 영역에 혼란스럽게  섞여 받아들였다. 아무런 아이러니
도 없이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 자신은  "로마에 있는 교황이 
신앙 문에제 있어서 정신적인 - 아니면  종교적인이라고 해야 할까 - 오류 없음
에 대한 요구를 가진단느  사실에 이의가 없다, 나느 그 문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니까. 그런 만큼 정치는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교황도 앞으로는 나
의 요구에 대해서 이의를 갖지 않기를 바란다.  즉 나는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
을 이끌어감에 있어서 나 자신과 나의 추종자들에게 정치적인 오류 없음의 권한
을 요구하는 것이다. 세상이 교황의 요구에 이미  익숙해져 있듯이 이 요구에 대
해서도 즉시로 아무런 반대 없이 익숙해지기를 바란다."
  이런 발언 자체보다 더 사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당혹감이나 어떤 반발
을 보이는 반응이 일체 없었으며, 히틀러가  현학적인 에너지로 끈질기게 추구하
던 당내 복종 노선의 성과가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전제조건들
이 그  동안 그를 도와주었따. 당  운동은 점점 더 카리스마적이  되고 지휘권과 
신앙의 기율에 근거한 전투 공동체로 여겨지게 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국가사회당은 이익과 당 강령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정당에 
비해 역동적인 자신감을  창출해ㅐ냈다. 동시에 당 운동은  '늙은 전사'들의 출신
과 경험을 토대로 하였다. 그들은 거의  모두 1차 세계전쟁에 참가하였으며 엄격
한 명령체계 속에서  형성괸 체험을 가졌고,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가정에서 이
미 엄격한 사관학교의  윤리관을 가진 교육방침에 따라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히틀러는 권위적인  교육체계에서 이익을 얻었다.  63명의 관구 지도자  주 20명 
이상이 교사 출신이라는 점은 우연 이상의 일이였다.
  1930년 여름 두 번의 당내  위기를 힘들이지 않고 조정하고 나자 국가 사회당
에는 히틀러가 나오지  않은 권한이나 권위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오토 슈트
라서, 슈테네스, 혹은 폰 페퍼가 만들어내는 위험이 아무리 별 것 아니었다고 해
도, 그 이름들은 여전히 절대적인 권력 요구에ㅔ  제한을 가하는 이론적 대안 구
실을 하였다. 이제  남도이치 돌격대 대장 아우구스트 슈나이트 후버는  어떤 진
정서에 이렇게 적었다. 당 운동의 의미와 매력이  점차 커가는 것은 당 간부들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히틀러'라는 모토 덕분이다. 모두가 이  모토 아래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선전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리고  점점 더 의도적으로 종
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뒤섞은 가운데  '지도자'는 모든 반성, 비판이나 당내
의 표결 결과가 전혀 닿을 수 없는  고독한 기념비적 영역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관구 지도자와 갈등을 겪게 된 어떤 추종자 한 명이 그에게 하소연하자 그는 불
쾌한 어조로 이런 답장을 써보냈다. 자신은  당의 '하인'이 아니라 그 창설자이며 
지도자다, 모든 불만은 '나를  당신 가까이에 있는 당의 냄새만 피우는 사람보다 
더 눈이 멀었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이나, '가혹함' '뻔뻔스런  건방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 사회당  기관지는 이제 오직 히틀러의 신격화, 유대인 공
격으로만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고 이 무렵의 어떤  관찰자가 적었다.(당 연설가 
헤르만 프리드리히는 공산당에서  국가사회당으로 옮겨와서 곧바로 여기 언급된 
히틀러와의 대립에 빠져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으로써  히틀러가 추종자에게서 멀어져서 지나치게 거리
르 둔다는 비난이 다시  강하게 일어났다. 슈나이트후버는 '거의 모든 돌격대 대
원'을 사로잡은  소외감을 표현하였다. "돌격대는  지도자와 더불어 그의 영혼을 
얻기 위해 싸웠으나 아직도 그 영혼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돌격대는 그 영혼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지도자를 향한 외침'은 메아리가 없다고 했다.      
  이미 전부터 개별적으로  등장하다가, 이제 괴벨스에 의해서  베를린에 도입된 
인사말이며 전투 명령어인 '하일 히틀러!(하일은 인사말에 쓰이지만 그밖에도 구
원, 안전, 건강, 이익, 행복 등을 뜻한다.)'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우연만이 아니
었다. 그 밖에도 행사 안내 벽보들은  '아돌프 히틀러'라는 연설자를 알리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고, 그  대신 이름 없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  '지도자'라는 말만 등
장하게 되었다. 여행  중에도 그는 호텔 로비나 사무소 같은데서  흥분해서 자신
을 둘러싸는 당원들이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일가ㅗ 천박하게 알리려는 열
광에 넘쳐서 아는 척한느 것을 극도로 꺼렸다.  믿을 만한 당원들만 마지못해 소
개 받았고, 낯선 사람들과 친밀한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싫어했다.
  물론 그는 좌익의  특성을 극복해 버린 다음부터  유리한 특성들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판단에 따라서는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잡담을  나눌 수도 
있고, 소탈한 사람의 거친 태도로 노동자 동지와 이야기를 할 줄도 알고, 금발의 
어린이 얼굴을 향하여 아버지 같은 동지애를 보일 줄도 알았다. "잠잔 뺀 악수와 
눈을 올려뜨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고 당시의 관찰자가 지적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의도적인 허세가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어ㅓ 가까운 측근들
에게 감출  도리가 없었다. 끊임없이 그는  대중성, 감동적인 몸짓,  혹은 위대한 
몸직의 효과를 계산하였다. 아무도 자신의 이미지에  그토록 많은 주목을 기울인 
사람은 없었고  아무도 그처럼 의도적으로 자신을  흥미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단느 강박관념을 가졌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정확하게, 
그 시대에 스타의  유형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장치가와  스타는 같은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민한 건강 때문에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리노 차
츰 술을  즐기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  두 가지 사실을 이용해서  그는 금욕적인 
생활방식에 대한 명성까지  얻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기 역할을  의식한 당시 
도이치 정치의 가장  현대적인 현상이었다. 민주주의적인 대중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그는 후겐베르크는 물론 브뤼닝에 이르는 자기 적수들보다 더 저오
학하게 판단하였다. 그들은 공적인 효과를 장악하지 못했으며, 출신과 과거의 사
정에 뿌리를 두고 사태를 판단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시간 이후로 아무도 히틀러에게 이렇다 할  만한, 입증 가증한 영향력을 행
사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디트리히 에카르트 시절, 그리고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시절은 이제 아득한 옛날 일이었다. "나는 절대 잘못하지 않소! 내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역사적인 것이오."라고 근느 오토ㅗ 슈트라서와 최초의 담판 과정에서 소
리를 질렀다.  그가 '지도자 교황'의 모습으로  자신을 양식화 할수록  그의 학습 
욕구는 떨어졌다. 오직 경탄하는 사람들과 수행원들에게만  둘러싸인 채 그는 점
차 지적으로도 고립의 상태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젊어서 경탄을 보냈던 모범 인물인  칼 뤼거를 보면 그는 인간에 대한 염세적 
판단을 찬양하였따. 이제 그 자신이 적이나 추종자  구분 없이 인간에 대한 경멸
감을 거의 감추지 않았다.  보수적인 기본 본능에 맞게 그는, 인간이란 천성적으
로 약하다고 여겼고, 어떤  편지에서는 '땅 위를 어슬렁거리고 돌아 다니는 것들
'이라고 썼다. 그리고 "대중은 눈이 멀었고 어리석으며,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도 모른다."고 했다.

    선거전
  인간 경멸  못지 않게 그의 인간  소모도 컸다. 수지 안ㄴㅎ고  그는 사람들과 
지위를 경질하였다. 실각시키고, 처벌하거나 승진시켰다.  분명히 거기에 그의 성
공 비결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추종자란 가차없이 취급당하려  하고 지나치게 
승진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에서  배웠다. 그는 선전꾼들을 사
정없이 선거전으로 내모았다.  당 간부와 협력자들은 전통적으로  비정치적인 계
층 출신이었다. 그들은 아직  힘이 남아돌았고 주저하지도 않았다. 그칠 줄 모르
는 선거전에 열광하여 그것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았다.
  그들의 저돌성은 기존의 정당들이 의무적으로 치르는 느슨한 태도의 선거전을 
매우 인상적인 방밥으로 추어ㅜ하였다.  선거전 이틀동안에만도 베를린에서 스붐
네번의 댜규모 국가 사회당 집회가 있었다. 그들의  벽보는 다시 모든 집기와 성
벽들과 정원 울타리들을 장식하여 도시를  새빨간 색깔로 물들였다. 1페히니짜리 
당 기관지는 엄청난 부수로  찍혀 대문 앞이나 기업체에 나너ㅜ주도록 당원들에
게 분배되었다. 
  히틀러 자신도 8월 3일과 9월  13일 사이에 스무 번 이상의 대규모 집회에 주
요 연사로 등장하였다.  추종자들의 선전 열의를 그는 일종의 선별  과정으로 여
겼다. "이제 자석이  거름더미를 스쳐지나간다. 그러고 나면 이 거름더미에  얼마
나 많은 쇠가 있었는지, 자석에는 얼마나 많은 쇠가 붙었는지 보게 될 것이다."
  선건느 1930년 9월 14일에 치러졌다. 히틀러는 50석, 기분이 좋을 때면 60에서 
80석을 내다보았다. 그는 붕괴된 중산층 유권자들, 처음으로 투표소에 나가는 젊
은이들, 그리고 여러해동안이나  기권한 사람들을 주요 지지층으로 보았다. 오랫
동안 기권해온 사람들은  정치적 논리로 보아 그를 지지할 것이  틀림없었다. 물
론 그들이 투표하러 나갈 경우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제2장 합법과 비합법
  1930년 9월 14일은 바이마르 공화국 역사의  전환점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민주적인 정당  정부의 최후를 의미하였으며 전체적으로  국가의 최후의 비명이 
시작도고 있음을  알렸다. 새벽 3시경에 투표  결과가 나오자 모든  것이 갑자기 
바뀌고 말았다. 국가 사회당은  갑자기 권력의 바로 앞 대기실에 이르러 있었다. 
경탄과 비웃음을 함께 받는, 소란스런 아돌프  히틀러는 정치적 장면을 결정하는 
인물들 중 하나가  되었다. 공화국의 운명은 이미 낙인 찍혔고  이제는 추격전만 
남았다고 국가 사회당 기관지는 환호하였다.
  투표자의 18퍼센트 정도가 국가사회당의 호소에 호응하였다 당은 지난번 선거
에서 81만표를 얻었는데,  2년만에  640만 표를 얻게 된  것이다. 12석이 아니라, 
그리고 히틀러가 추측한 것처럼  50석이 아니라, 107석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사
회 민주당에 뒤이어 두 번째 정당으로 붕상하였다.
  정당사엔 이와 같은 비약이 없었다. 시민  정당들 중에서 오직 '카톨릭 중앙당'
만이 제 위치를 지켰다고  주장 할 수 있었다. 그 밖의  정당들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네 개의  온건파 정당들은 겨우 72석만을  차지하였다. 후겐베르크의 '도
이치 국가 민족당'은 정확하게 반으로  줄었다. 지난번 선거에서 14.3 퍼센트였던 
것이 이번엔  7퍼센트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격 정당과 손잡은  것이 자살 
효과 비슷한 효과를 낸 것이다. 겨우 41석을  확보하여 국가 사회당에 대해서 외
견적으로만 패배한 것이 아니고  히틀러의 우익진영 지휘 요구를 확인해준 꼴이 
되었다. 
  사회 민주당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국가 사회당 말고는 공산당만  얼마 안 
되나마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지난번  선거에서 10.6퍼센트 였다가 13.1퍼센
트를 득표한  것이다. 그런데도 공산당들은  역사만 믿고 지겨운  자기 신격화에 
빠져서 선거 결과를 자기들이 승리라고만  해석했다. "9월 선거의 유일한 승리자
는 공산당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선거결과의 역사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였다. 강조점
은 각기 다르지만  정당정치의 깊은 위기,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질서의 
생명력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온 회의의 표현이라고 설명되었다.  그와 맞무려서 
모든 상황의 근본적인 변하에 대한 열망이 점점 더 커졌다. "과격 정당에 의석을 
선물해준 대부분의 투표자들은 전혀  과격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저 과거의 것에 
대한 믿음이 없을 뿐이다. " 1/3  이상이 이 다음에 무엇이 올 것인지 알지도 못
하고 물어보지도  않은 채 현존 질서를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다. 그것은 '분노의 
투표'였다.
  이 자리에서 10년 전 공화국의  탄생을 특징지었고 결국 그것을 주인 없는 나
라로 만들게 도니 강제적 상황을 한 번 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이제 공
화국에 반격을  가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공화국 체제란 국민의  인내를 얻었을 
뿐이며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역사의 공위 기간으로 여겨졌다.  어떤 낭만
적인 비판자가 말했듯이 '강력한 광경이 없는' '열광'과 대담한  파렴치'와 '지속적
인 말'과, '위대한 사람'을 배출하지 못한 과도적인 현상이었다. 
  좌파든 우파든 점점  더 광범위한 계층이 그런  위대한 사람과 더불어 국가가 
다시 제 본분을 찾기를,  그리고 전통적인 모습을 되찾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절
망적인 위기의 분위기 속에서  민주적 정당 정권에 대한 억눌린 의심들, '도이치 
아닌' 정당정치에 대한 겅멸감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고 어떤 반론으로도 이겨낼 
수 없는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히틀러가 수 없이 반복한 주장, 곧 이 국가는 적
들에 대한 공물이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가장  고약한 쇠사슬일 뿐이라는 주장은 
이제 상당한 공명을 얻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외국에서도 비슷한 판단들이  수 없이 나왔다.  특히 영국과 
미국의 신문들은 선거 결과를  평화 협정의 잔혹한 부조리와 승전국의 표리부동
한 태도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석하였다.   오직 프랑스만이 전체적으로 분개하였
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드러난 극우ㅜ 성향이 라인 강 건너편  이웃나라에 대해
서 더 엄격한  정책을 펼쳐나갈 핑곗거리와 정당화를  마련해 주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희망도 가졌다.
  흥분한 외국의 반응에서 처음으로 이후 약 10년 동안이나 히틀러의 정택을 따
라다닌 저 음성들 중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를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여겨 칭찬하면서  그의 침략과 도덕적인 도덕적인  도전들을 감싸주는 목소리였
다.
  <데일리 메일>지에 기고한  글에서 로더미어 경은 이렇게  말했다. 이 남자의 
승리를 위험으로만 보지  말고, 그가 '온갖 이익들'을  제공한다는 사실도 인싱해
야 한다고 말이다. "그는 볼셰비즘에 대한 방어벽을 강화시켜줄 것이다. 유럽 문
명을 향한 소련의 전쟁이 독일 쪽으로 향하는 무서운 위험을 차단할 것이다."
  국가 사회당의 성공은 상당 부분이 젊은이들과 비정치적인 기권자들을 동원한 
덕분이었다. 투표 참가율은 1928년  선거에 비해 450만 명 가량이 늘어서 80.2퍼
센트에 이르렀다. 공산당은 물론 얼마 안 되는  숫자이지만 이 계층의 덕을 입었
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들은 분명하게 민족주의적인 구호들을  동원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어느 정도로  자기들의 승리를 예상 못했던가 하는 것은 
그들이 당사자 수인 107명의 후보를 다  내세우지도 않았고, 처음에 그만한 후보
자를 당내에 준비해두지도  않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물론  도이치 국적을 
갖지 못한 히틀러 자신은 입후보 하지 못했다.

    미래의 물결
  선거 결과는 여러모로  '산사태'라고 묘사되었다. 그 파급은  산사태보다 더 절
망스러운 것이었다. 투표일 밤의 당혹감 속에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쿠데타가 계
획에 대한 조잡한  소문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상당한 금액의 외국  자본을 철수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미 파멸 단계에 있던  자본의 위기를 더욱 부채질 
하였다. 동시에 돌발적인 운동처럼 여론의 관심과  호기심이 새로운 정당에 집중
되었다. 경기를 타는  사람들, 걱정하는 사람들, 예감에  부풀어 오른 기회주의자
들이 변화된 권력 상황에 편승하였다. 
  특히 늘  깨어 있는 언론일들이  서둘러서 미래의 물결에  합세하려고 들었다. 
폭넓은 보도를 통해서  전통적인 나치, 언론의 약점을  보강하여 '미래의 물결'을 
이루었다. 이제 국가 사회당에 속한다는 것은 '현대적'인 일이 되었다. 황제의 아
들 중 하나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아우비)가 이미 봄에 입당하였으며, 히틀
러가 이끄는 곳은 어디든지 누구든지 따룰 수 있다고 말했다.
  영 안의 입안에 참가했고  처음에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 맞서 그것을 
옹호하였던 히얄마르 샤호트까지 입당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연
말인 두 달 동안에만 국가  사회당 당원은 거의 정확하게 10만명이 늘어서 38만 
9천명에 이르렀다. 이익  단체들도 이러한 거ㅜ력 이동과 변화된  성향에 따르려
고 하였다. "거의  자동적으로 국가 사회당에는 운동을  팽창시키고 견고하게 해 
줄 관계자들과 위치들이 늘어났다."
  "이제 거대한 대중이 만세를 부르며 우리에겐 합류한다면 우리는 패배한  것입
니다."라고 히틀러는 2년 전인 1928년 뮌헨의 지도자 대회에서 장담했다.  괴벨스
는 지금도 경멸감에 차서 '9월생들(9월 선거 이후 신참자들)'이라고 말했다. 자신
은 자주 "우수화 감동을  지니고 아직 우리가 나라전체에서 작은 분파만을 이루
고 있던  시절, 수도의 국가사회주의가  열서넛의 추종세력만을 가지고  있던 저 
좋던 시절을 되돌아본다."고 말했다.
  생각없는 대중이 당에  넘쳐 들어와 혁명적인 의지를  망치고 마침내 잊을 수 
없는 1923년의ㅣ, "인플레이션으로 축재하는 꼴'이 나서, 후퇴상황이 발생하면 곧
바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생겼다. "우리는 파산한 
시민 계급의 시체로  부담을 느껴서는 안된다."는 말이 선거  5일만에 나온 어떤 
건의서에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표현한  것처럼 예상과 달리 당은 별로 노력하지
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국가 사회주의 이념의 거대한 항아리로 몰려들어'와서 하
나로 녹아들었다.  당의 적수들이 여전히  진정시키는 표현들을 찾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계속 폭풍처럼 몰려들었다. 승리 직후가  공격에 가장 유리한 시기라는 
심리 원칙에 따라서 히틀러는 9월 14일 직후에 벌써 당에 새로운 성공을 가져다 
줄 행사들을 개시하였다.
  11어ㅜ 30일 브레멘  시으회 선거에서 당은 의회  선거보다 득표수를 거의 두 
배로 높이고  의석의 25퍼센트 이상을  차지하였다. 모든 다른  정당들은 손상을 
입었다. 단치히, 바덴, 메클렌부르크 등의 선거결과도 비슷하였다. 이러한 성공에 
도취해서 히틀러는 때때로  지금 이 순간에도 외부의 도움  없이 정부를 '선거로 
때려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합법화를 비웃음
  10월 13일에 소란스럽게  의회가 시작되었따. 아직도 계속되는  프로이센의 단
체복 금지에 대한 항의로 국가  사회당 소속 의원들은 의회 건물에서 갈색 셔츠
로 갈아입고 큰소리를 내면서 분명한 항의의  몸짓으로 회의실에 등장하였다. 정
열적인 연설에서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뻔뻔스러움과,  부패와 범죄의 체제'에 대
항하여 도전을   선언하였다. 자신의 정당은 최후의 수단으로 내전을  꺼리지 않
으며, 의회는 자기들의  목표를 막지 못한다고 말했다.  국민이 결정하는 것이며, 
국민은 이제 자기들 편에 있다고.
  그 동안 밖에서는 공산당과의 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괴벨스가 조직한, 유대
인 상전과 행인들에 대한  최초의 박해가 이루어졌다 질문을 받은히틀러는 이러
한 폭력은 부랑다, 도둑, 공산당 도발자들이 일으킨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민족 
관찰자>는 덧붙이기를 제 3국에서 유대인 상점의  진열장은 지금 공산당 경찰이 
지키는 것보다 더 안전할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10만 명이 훨씬  넘는 금속 노
동자들이 공산당과 국가 사회당의 후원을 받아서  파업을 했따. 무너지는 질서를 
보여주는 풍경들이었다. 
  히틀러 자신은 한순간도  전략적인 태도로 망설이지 않은 것 같다.  1923년 11
월의 잊지 못할 교훈 중에는 붕괴되고 해체되는 과정의 질서라고 하더라도 거리
의 공격보다 우세하다는 경험이 들어 있었다.  당내의 낭만적인 엉터리 혁명가들
은 탄약 연기 없는 혁명이란  상상도 못하고 9월 14일의 승리 직후에 다시 베를
린 진군과 혁명과 싸움판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맞서서 합법적 개념을  내세웠다. 합법화라고 하지만 물
론 순수하게 전략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뮌헨에서 말했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정당정치를 추구하는 정당이 아닙니
다. 그것은 우리의 전체적인  관점과 모순되는 것이죠. 우리는 다만 억지로 정당
정치를 추구하는  정당일 뿐입니다. 우리를  강요하는 것은 헌법입니다... 우리가 
방금 거둔 승리에서 우리의 싸움을 위한 새로운 무기를 얻은 것에 불과합니다."
  괴링은 조소적인 태도로 사태를 정확하게 알려준느 이런 설명을 하였다. "우리
는 이 국가 현재의 체제와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파괴하려
고 한다. 그러나 합법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우리가 공화국을 수호하는 법을 갖
기 전에 우린 이 국가를 증오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법을 갖게 된 이후로 우
리는 국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우리가 말한느 것이 무슨  뜻인지 누구
나 잘 알고 있다."

  히틀러의 엄격한 합법화 노선은 방위군을 적잖이  염두에 둔 것이었다. 방위군 
때문에 자신의 국가를 전복하련느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뒷날 근느 
회고하였다. 공적인 질서가  무너져내릴수록 군의 권력과 영향력은  더욱 결정적
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쿠데타아ㅗ 새로 결성된 돌격대에 대한  접촉 금지령
은 국과 국가사회당 사이의 관계를 상당히 약화시켰다.
  1929년 3월에 벌써 히틀러는  군부를 향해 히틀러는 군부를 향해 최초의 조심
스런 제안을 했다. 그런 목적으로 행한 연설에서 그는 제크르 장군이 세운 '정치
와 무관한 군인들'이라는  원칙을 비난하고, 장교들에게 있어서 좌파가 승리하고 
난 다음의 미래란 '형리이며 정치적인  인민위원'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리고 국민
의 위대성과 무기에 대한 존경시에 기초한 자신의 의도를 더욱더 거창하게 추켜
세웠다.
  정확한 심리적 계산 덕분에 이  연설은 특히 ㅈ은 장교 그룹에서 효과가 있었
다. 9월 선거가 끝난 지 며칠 만에  라이프치히의 법정에서 세 명의 울름 수비대 
장교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따. 국방부의  명령을 어기고 국가사회당에 합류하고 
군대 내에서 당을  위한 선전 활동을 벌였다는 이유였다. 변호사  한스 프랑크의 
청을 받고 히틀러는 증인으로 출두하였다. 센세이션으로  평가된 이 재판은 그가 
대규모 청중 앞에서  군부에 대한 접근 노력을 계속하고,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효과적으로 밝힐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심문 사흘째인 1930년 9월 25일
에 그는 방금 최초의 승리로 오만해진, 성공한  당수의 자부심을 지닌 채 법정에 
출두하였다.
  질문이 계속되는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확신은 세가지 동기를 가진것임을 밝
혔다. 사방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민족이 외세에  굴복하는 국제화의 위협이 첫 
번째이고, 개성의 가치상실가 민주주의 사상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 두 번째이
며, 도이치 민족이  평화주의 사상으로 위협적으로 오엽되는 것이 세  번째 동기
라고 했다.
  1918년 자신은 광신적인 도이치 정신, 당수의 절대적 권위, 무조건적인 투쟁의
욕을 가진 정당으로  이 불안한 경향들이 맞설 의도로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러
나 자신은 군부에  반대할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군대를 망가뜨리는  자는 민족
의 적이다. 돌격대는  국가를 공격하련느 생각이나 군부와  경쟁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다음 그는 투쟁의 합법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히틀런느 국가사회당은 
폭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대담하게 선언하였다. "두세번만 선거를 거치면 국
가사회주의 운동은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국가주의 
혁명을 할 것입니다."그게 무슨 뜻인가 묻ㅈ 히틀러는 대답하였다.
  
  '국가주의 혁명'이란 순수하게 내부 정치적인  의미로 파악됩니다. 국가 사회주
의자들에게 있어 그것은 노예상태에 빠진 오이치  정신을 높인다는 뜻이죠. 독일
은 평화조약으로 재갈이  물렸습니다. 도이치 입법이란 평화조약을  도이치 민족 
속에 뿌리내리려는  시동 불과합니다.  국가사회주의ㅣ자들은 이 조약을  법으로 
여기지 않고, 강요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인정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전혀 무고한 다음 세대에게 그러한 짐을  떠맡길 수는 없
습니다. 우리는 외교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수지않고 조약을 무시함으로써 그것
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에 맞서 온갖 수단을  다하여 우리 자신을 방어하려면 우
리는 혁명의 길에 서게 됩니다.

  혁명의 개념을  외부세계로 돌리는 이런  대응은 물론 속마음을  감춘 것이다. 
외부를 향한 혁명은 불법적인 수단을 취하는가 하는 의잔의 질문을 받고 히틀러
는 거침없이 확언하였다.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불법적인 수단을 쓰
게 됩니다. "라고. 이른바 내부의 배신자들을 겨냥한 수많은 위협에 대항하여 질
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기 맹세하고  전능하신 신 앞에 섰습니다. 내가 합법적으로  권력에 오
르게 된다면 합법적인  정부 안에서 국가 법정을 열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
의 불행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법에 따라  심판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도 합법적으로 몇 명의 목이 나뒹굴겠지요.

  이어서 방청석에서 박수갈채가  터졌다는 사실은 법정의 분위기를   알려준다. 
국가사회당이 행한, 헌법에  반대되는 활돌들의 풍부한 증거를  제시한 내무부의 
반대증언은 주목받지 못했다.. 이렇다  할 반응도 보이지 않고 법정은 다음과 같
은 히틀러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자신은  권력을 얻기 위해  투쟁한느 동안에만 
헌법에 얽매인다고 여기며, 합법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자신은 헌법을 없애
거나 다른 것으로 대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지배적인 이론에  따르면 합법적인 수단으로 헌법을 제거하는 것
은 엄격한 민주적  헌법의 이상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의  주권은 국민
의 자발적인 주권  포기도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붕괴의  구명이 있었고 
그 구멍을 통해서 히틀러는 방해받지 않고 돌진해 들어가서 모든 반대를 마비시
키고 국가를 정복하고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헌법에 대한 선서 뒤에는 그의 조소적인 성격에 분명히 드러
난 의지만  숨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폭력에 법조문이라는  외투를 입힐 
수 있을때까지만 폭력을  포기하겠다는 명백한 의지였다. 히틀러는  자신의 합법
화 노선에 불안한 이중성을 마련해주려는 분명한  노력을 보였다. 한편으로 자신
은 '합법성의 바닥 우에 단단하게'자리잡고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다른 한편으론
느 추종자들을 향한 사나운 연설에서 은유와 불안한 상징으로 폭력 성향을 드러
냈다. "우리는 적으로 온 것입니다! 늑대가 양의 우리를 침이비하는 것처럼 우리
는 들어갑니다."
  당 지도부의 선언들만  엄격한 의미에서 합법적이었다. 그밖에  베를린 베딩의 
뒤뜰, 알토나와  에센의 밤거리에서는 살인과 패싸움,  법 위반이 지배하고 있었
다. 목격자들을 향해서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지역 단위부대들의 공격'이라고 얼
버무렸다.
  합법화 노선의 순전히 수사적인 성격을 괴벨스는 라이프치히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ㅈ은 장교에게 털어놓았다. 셰링거 소위에게  명랑하게 이렇게 설명했던 것
이다.. "나는 이 맹세(히틀러의)를 천재적인 장기의 한 수라고 생각해, 그 다음엔 
형재들이 우리에  대항해서 무슨 일을 하겠어?  그들은 공격할 기회ㅣ만 기다려 
온 거지, 이제 우리는 엄격하게 합법적이야, 합법 좋아하시네."
  히틀러이 의도의 이런  불확실성, 즉 헌법에 대한 충성의 맹세와  협박을 번갈
아하는 이런 태도야말로 원래 의도가 그랬듯이  여러모로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의 태도는  광범위한 청중에게서 불안감을 완전히  빼앗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런 불안감을 완전히 빼앗지 않으면서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런 불
안감이 수많은 투항자와  변절자들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그러한  태도는 정치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 특히 힌덴부르크와 군부에 대해서는 동맹의  약속을 포
함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아직도 베를린 진군을 기대하고 
있는 추종자들의 환상을  채워주었다. 마치 지도자가 천재성으로  상대반의 눈을 
속이고 있다고 눈을 찡긋거리며 알려주는 듯이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히틀러의  라이프치히 맹세는 적잖은 효과를  거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모든 방향으로 문을 열어놓는다는 히틀러의 전략은 교활하고 
날카로운 계산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성격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본질에 깊
숙이 들어 있는  우유부단함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지나
치게 대담하며 고도의  균형감을 요구하는 일이었고, 그 점에서 그의  모험 욕구
와 잘 어울렸다. 실패할 경우,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성공 전망이 거의 없는 쿠
데타 아니면 정치에서 퇴각하는 길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돌아온 에른스트 룁
  히틀러에 의해서 추구된  전략의 이념, 그리고 그 위험과 어려움을  가장 분명
하게 드러내보인 것은 바로  돌격대였다. 히틀러의 복잡한 개념은, 갈색 셔츠 부
대(돌격대)안에서 법에 대한 형식적인 존경심과  정치적 투쟁의 낭만을 결합시키
는 것을 전제로 하고있었기 때문이다. 무기를  버리기로 약속하면서도 무기의 정
신을 숭상해야만 하였다. 폰 페퍼는 바로 이  모순된 요구에 부딪쳐서 실패한 것
이다.
  1931년 초에 에른스트 룀이 최고 지휘자 직위를 넘겨받고 곧바로 돌격대를 군
대식으로 더욱 강하게  조직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전국을 5개의  주요지역과 18
개의 지역으로  분할하고, 각 연대(국가 사회당의  연대)는 황제시대에서 가져온 
연대번호를 받았다. 비행  돌격대, 해상 돌격대, 개척  돌격대, 위생 돌격대 등의 
특수한 군대단위 체계는 군대와 비슷한 구졸르  더욱 분명하게 해주었다. 동시에 
룀은 알기 어렵게 되어 있는 폰 페퍼의  개별적인 지침을 하나의 '돌격대 근무규
정'으로 요약하도록  했다. 마치 기계적인 강요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계획들은 시민 전쟁군대라는 옛날 이념을 목표로 삼았다. 
  히틀러가 1925년과 달리 이번에 그것을 허용해준 것은 그 사이 자신의 귄위에 
대한 확신이 생격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룀의 생각이 자신의  이중 노선
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폰 페퍼의 사임과  더불어 시작된 돌격대 개혁을 전체적
으로 살펴보면 히틀러식  엉터리 개혁의 모든 특성들을 알아볼 수  있다. 사태를 
명확하게 결정하는 대신 몇 명의 지휘자들이 바뀌었고, 충성 맹세가 이루어지고, 
경쟁적인 기구가 만들어진 것 등이다.
  돌격대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히틀런느 조심스럽게  친위대를  일종의 
대응조직으로 만들었따. 그것은  엘리트 '내부경찰' 조직이었다. 친위대는 1929년
에 280명까지 줄었으나  히틀러는 이것을 점차 룀에게서 독립시켜  나갔다. 그리
고 돌격대 개혁의 결말은  다른 모든 경우와 같았다. 피할 수  없는 갈등을 만들
어내는 성향을 가차없는 피의 기습전으로 해결한 것이다.
  룀의 지휘아래서 비로소  돌격대는 대형 부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지휘부의 비상한 조직능력 덕분에  1932년 말까지 대원이 거의 50만명으로 불어
났다. 돌격대의 집과 돌격대의 음식에 이끌려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갈색 부대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반사회적인  증오심은 부대안에 있는 모험가들의  원한과 합
쳐져서 비상한  공격성을 발전하였다. 룀  자신은 돌격대 지휘부에서  폰 페퍼의 
인맥을 몰아낸 다음 그 자리에 자신의 동성애  친구들을 앉혔다. 악명 높은 수많
은 친구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으므로, 곧 룀이  '개인 군대 속의 개인 군대'를 만
든다는 소문이 퍼졌다.
  점점 커지는 격력한  반대에 대해 히틀러는 유명한 명령으로 맞섰다.  그는 돌
격대 최고 지휘부의 벌받을 만한 행동에 대한  보고를 받고 그것을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극히 날카롭게'물리쳤다. 돌격대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남자들의  모임
이지... 양반집 따님들을 교육한느  도덕 기관이 아니다." 각 개인이 자기  의무를 
이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사생활은  국가 사회주의 세계관의 본질
적인 원칙들이 어긋날 경우에민 관찰 대상이 될 수 있다." 라고 했다.

    정치적 범죄
  이러한 사면장은 돌격대 내부에서  사실상 무법적인 요소들이 판치는 것을 허
락해준 셈이었다. 온갖 합법적인 맹세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군대는 곧 유례없
는 소란과 공포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독재정권이 나타나야 한다는 요
구의 근거로 발전하였다. 경찰의 확인에 따르면  돌격대의 무기창고에서 온갖 종
류의 고전적인 범죄 무기들이 다 들어있었다. 납 곤봉, 손가락 마디에 끼우는 타
격용 반지무기, 고무 호스  등이었다. 그리고 피스톨은 들킬 위험이 있을 경우에 
반지 연맹의 모범에 따라서 '아가씨들'이 무기 소지자라고 자처하고 나섰다.
  돌격대에서 쓰인 속어들도 지하 번죄 세계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뮌헨의 부대
들은 지참하고 다니는 피스톨을 '라이터', 고무 곤봉을 '지우개'라고 불렀다.  베를
린 돌격대는 폭도의  뒤집힌 자존심으로 이 전투  집단의 이른바 혁명 맹세들이 
선전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별명들을 가졌다.  베딩에 있는 돌격대 중
대는 '도둑떼 중대'라는  이름이었고, 중심부의 부대는 '춤조합'이라고 했다.  어떤 
대원은 '맥주통  왕', 다른 대원은 '사격수',  또 다른 사람은 '리볼버  구멍'이라고 
불리는 식이었다. '베를린  돌격대 노래'에는 프롤레타리아식의 망상,  폭력 서양, 
이데올로기 부족 등의 특징들이 나타나 있다. 

  이마엔 노동의 땀방울
  그래도 뱃속은 텅 비었다.
  그래서 돌격대원은
  종족 전쟁 준비가 끝났다.
  유대놈이 피를 흘리면
  그때야 우린 자유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으로만 나타나는  두려운 뒷모습이었다. 앞모습은 행진하
는 종대의 엄격한 절제, 단체복과 명령하는 지도부 등이었고, 그것은 국민에게는 
질서의 상징으로 보였다. 히틀러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독일은 이 혼란의 시
절에 질서를 살망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되찾고자 하였다고.
  깃발과 악대를 뒤따라서  자부심 강하게 행진하는 갈색  대열이 점점 더 자주 
이미 죽어버린 거리에 나타나곤 하였다. 그들의  엄격한 기율은 공산 주의자들의 
비참한 잿빛 행진에 비해서 두드러진 효과를  냈다. 공산주의들은 제대로 조직되
지 못한 모습으로 목관악기  악대의 자극적인 콧소리를 뒤따라 행진하염서 주먹
을 쥐고 "배고파!" 하는  구호를 외쳤다. 극히 가난한 사람들의 곤궁을 보여주기
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느 그림이었다. 그 시절 정치적인  작은 전쟁에
서 얼마나 확고한 희생의 각오를  가졌던가 하는 것은 어떤 서른네 살의 돌격대 
연대 지휘자가 그레고어 슈트라서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다.

  나는 국가사회당을  위해서 일하면서 30번 이상  법정에 섰으며, 신체손상, 저
항, 그 밖에 나치에게는  당연한 법위반의 이유로 전과가 여덟 번이나 있습니다. 
벌금의 일부를 아직도  내야 하고, 게다가 또  다른 소송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밖에도 나는  적어도 스무번이나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뒷머리, 왼쪽 
어캐, 아랫 입술,  오른팔 팔꿈치 위에 칼자국  흉터가 있습니다. 그 밖에  단 한 
푼도 당비를 요구하거나 받아본  적이 없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업에서 번 
나 자신의 돈을 쓰면서  우리 운동을 위해 내 시간을 바쳤습니다.  오늘 나는 경
제적 파탄을 앞에 두고서...

  공화국은 이러한 확고한  의지에 맞설 만한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히틀러 운동이 일단 커진  다음에는 시민전쟁 비슷한 상황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반대수단을 취할 힘도  없었다. 공화국 옹호자들은 반박논리의  힘으로 비합리주
의의 돌진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제도의 교
육적 파급을 믿고  인간적인 사회적 상태로 사태를  뒤집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
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미 낡은  진보사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러한 신념은 소
용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었다. 그러한 신념은 이성과 분별력을 전제로  한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두려움,  공포, 공격성이 뒤섞여서   판치고 
있었다. 히틀러 선전꾼들의 지성이 대단치 않아도, 위기의 두려움에 대한 그들의 
답변이 신통치 않아도,  반유대주의의 암시가 살벌하여도 사람들을  별로 노엽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전문가들의 분명한  반박에도 흔들리
지 않고 계속 상승 하였다. 1931년 초에  수상인 브뤼닝이 동 프로이센과 슬레지
엔의 비참한 지역을 순방할 때에 그는 차갑고  거의 적대적인 응대를 받았다. 대
중 사이에서 '기아  독재자'라는 제목이 붙은 삐라가  그를 맞았고, 휘파람소리가 
나곤 했다.

  그 사이 의회의  국가사회당 의원들은 '체제'의 파괴자이며 옹호자로서의 이상
적인 역할을 점점  더 잘해내게 되었다. 자기 파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와는 완전히 달리 의회를 마비시킬 힘이 있었다.  큰소리를 지르고 기율 없는 태
도를 보여서 '수다쟁이들의 집'이라는 의회의  명성을 거듭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사태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에  맞서서, 사태를 개선시켜봐야  조건이행 
정책에 도움을 줄 뿐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정부가 국민에게 어떠한 희생을 
요구해도 국가반역 행위라는 이유로 반대한 것이다.
  그와 함께 그들은  의사진행 방해의 기술적인 방법들을 이용하였다. '공산주의
자'가 말을 하려고만 하면  소란, 의회규칙 어기기, 단체 퇴장 등을 행하였다. 의
회규칙 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107명  의원들에 대해서 무려 4백 번의 형벌 요
청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 일파의 관습을 무시한 공격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1931년 2월 의언 면책 특권의 남용 가능성을 제한하는 법이 의결되었을 때 국
가사회당 소속 의원들, 이어서  도이치 국가 민족당, 이어서 공산당 의원들이 차
례로 완전히  의사당을 떠났다. 그들은  신문기사와 추종 세력  확보라는 면에서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길거리와 대중 집회장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괴벨스는 의사당에 남은  사람들을 '앉은뱅이 정당'이라고 비웃고,  4일만에 힘도 
없는 의회가 아니라 5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연설을 할 것이라고 예고
하였다. 물론 튀링겐  주 내무장관 프리크의 도움을 받아서 야당측의  의회 반대 
의회를 바이마르에서 열갰다는  선전 의도는 좌절되었다. 중앙  정부라 주정부에 
대해서 강제 집행권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의회국가 최후의 비명
  국가사회당 소속의원들의 의사당 탈출  결정은 물론 논리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의회를  마비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의회의 위신을 추락시키기 
위하여 온갖 행동을 다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의회는 그와 상관 없이 어차
피 정치적  결정의 장소가 아니었다. 1930년  9월 선거가 있기도  전에 브뤼닝은 
파탄에 이른 의회를 무시하고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있는 대통령의 비상사태 
권한에 의존하여  국가 를 통치하고  있었다. 의회에서 정상적으로  다수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이 막힌 이후로 절반쯤 독재적인 통치 행휘를 계속하기 위해서 그
는 거의 오로지 대통령의 특별 권한을 이용하였다.
  이 사실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망 순간' 이라고 보는 사람은 이러한 권력 이
탈은 거의 모든 정당이 정치적인 책임을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가능
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사태가 권위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비정
치적인 대중'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권위주의 국
가구조'가 나타나기만 하면 우파에서 좌파에 이르는  모든 정당들은 위기의 순간
에 재빨리  체념하고서 대통령이라는 '대리황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만 하였
다. 각 정당들은  대통령 뒤에 숨어서,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인기 
없는 결단들과 자기  당이 직접적으로 연관을 갖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다. 국가
사회단 소속 의원들이 의사당을 떠났을 때 그들은 다른 정당들보다 정책적인 일
관성을 유지한 셈이었다. 그들의 성공 '비밀'은 그것과 상관이 있다.
  이젠느 더 이상 정당 국가도  아니지만 어쨌든 정당 국가에 대한 염증은 정부
가 안팎으로 분명하게 실패를 거듭하면서 더욱  커져만 갔다. 브뤼닝의 광범위하
고, 거의 자학적인  확신으로 계속된 엄격한 긴축 정책은 재정적인  어려움도 판
매위기도 군비축소 문제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는 9월  선거 결과
에 놀라 어떠한 양보에도 반대하면서 히스테리 발작을 보였다. 
  1931년 초에 무역  협정을 맺어서 경제 공황과 함께 시작된,  국가들간의 전반
적인 경제 전쟁을  끝내고 관세장벽을 허물려는 움직임마저  제지당하고 말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자발적으로 양국  경제 정책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 관
세 협정을 맺고  다른 나라들의 가입을 촉구하였을 때, 프랑스는  그것을 베르사
유 조약의 주요조항을 깨려는 시도라고 여기고 당시 외교관 한 사람이 회고록에
도 쓰고 있다시피 "구대륙에서 평화가 다시 위협을 받는다."고 여겼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프랑스  은행들은 곧바로 단기어음들을 제시하였고, 
두 나라를 '엄청난 부도사태'로 몰아갔다. 이러한  사태는 두 나라가 가을로 예정
했던 계획을 수치스런  상황에서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오스트리아는  엄청난 경
제적 양보를 해야만 했다. 
  한편 독일에선느 히틀러와 급진  보수파가 정부의 체통 손상을 노골적으로 촉
하하였다. 이어서 계속된 협조 노력은 모든 사람의 비웃음과 무시를 받았다. 6어
ㅜ 20일에 미국  대통령 후버가 배상금 지급을  일년 동안 연기하자고 제안했을 
때 '전쟁 시작과  같은 분위기'가 프랑스 의회를 지배하였다. 이  계획과 가장 밀
접한 관련을 가진  프랑스는 그에 대한 협상을 질질 끌었다.  독일의 붕괴사슬이 
생각 이상으로 위기를 강화시킬 때까지 그러한 태도는 계속되었다.
  당시 어떤  관찰자는 베를린에서도 전쟁이 터지기  전의 시절이 연상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거리는  그때보다 오히려 더 텅  비어 있고, 도시와 도시의 극도의 
긴장된 분위기를 뒤덮고 있는 침묵이  그때보다 오히려 더 컸던 것이 특별히 기
억난다고 했다. 1931년 말에 히틀러는 엄청난 끝올림을  해서 지나간 한 해 동안 
당내에 50명의 사망자와 4천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발표하였다. 
  현실에서 그렇듯이 이론상으로 점점  눈에 띌 정도로 의회 민주주의의 후퇴가 
이루어졌다. 의회의 자포자기, 위기 관리의 무능,  거리 사건에 대한 정부 권위의 
실추 등은 헌법  개정 논의를 점차 활발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개혁한에는 우익
이나 좌익 과격파의 전체주의적  생각에 대한 염려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경멸
감이 합쳐져 나타났다. 특히 보수진영의  시사평론가들에 의해서 '새로운 국가'나 
법치국가의 독재' 등의 이론으로 만들어져 나온  답답한 생각들은 중도적인 방향
을 제시한 과격한 히틀러라는 대안을 수정해보려고는 의도를 담은 것들이었다.

    쿠어트 폰 슬라이허
  민주주의가 점차 퇴색하는 것을  보고 대통령 주변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권위
적, 반동적인 헌법안들도 같은 의도를 가졌다. 점차 왕조를 재건해서 민주정권과 
전통 및 국민이 복조적 성향을 화해시켜보겠다는 의도를 가진 이러한 생각의 가
장 무게 있는 대표자들은 수상인 브뤼닝, 국방 장관 그뢰너, 그의 정치적 심복이
자 국방부 차관  쿠어트 폰 슐라이허 장군 등이었다.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 대
통령과의 친분 덕분에 정치 무대의 결정적인 배후 인물로 부상한 사람이었다.
  브뤼닝을 수상으로 임명할 때 슐라이허는 이미  두드러진 역할을 했고, 능숙하
고 날카롭고 노회하게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서 이제부터 어떤 수상이나 장관
도 자신의 동의가  없이는 임명되거나 해임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정치적인 특
성의 윤곽을 희미하게  만들고, 섬세하게 짜여진 음모의 그물을 보이지  않게 만
드는 그의 특성은  곧 '군복 입은 실세'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섬세한 본성대
로 조소적이고,  충동적이며,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ㅗ  위험의 낌새를 
알아채면 줄타기 광대의 기질을 드러내곤 하였다.  군대가 자기 친구들과 이욱도 
감시하도록 만들었다.. 경박성,  책임감과 음모를 좋아하는 등 그의  성격은 공화
국 말기증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현상의 하나였다.
  슐라이허의 생각은 히틀러가 동원한 것 같은 공범위한 민중 운동은 국가의 권
력수단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출발하였다. 소란을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잿빛의 대중 앞에 장교단이  마주섰을 때의 충격적인 혁명체험이 국방부의 깨어
있는 지도층에게 군대는 절대로 국민과 대립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슐라이허는 국가사회당의 당수를  심각하게 여기지를 않고, 그를 '몽상가이며 어
리석음의 우상'이라고  비웃었지만 그래도  그는 히틀러에게 엄청나게  몰려드는 
사람들의 동기만은 존중하였다.
  이 운동의 의심스런  측면들, 무법성, 원한, 이념적  광신주의의 결합을-장교들 
중 한 사람이  국가사회당의 '러시아적 특성'이라고 불렀던-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특성들이야말로 그에게  자신의 계획을 서두르라고  자극하였다. 
힌덴부르크가 아직 살아있고 군부가 전체적으로 붕괴현상에서 아직 벗어나 있는 
동안에 그는 히틀러를  '교육시키고, 정치적 책임이라는 사슬에 붙잡아두어야 한
다고 여겼다. 또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제약을 앞두고 히틀러 추종세력을 '방어의
지' 강화에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는 룀과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통해서 조심스럽
게 히틀러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대중무대와 집회의 버릇없는  영웅에 대한 잃어버린 영향력을,  교육적 지도의 
형태로 되찾으려는  비슷한 생각이 마침 알프레드  후겐베르크를 움직이고 있었
다.힌덴부르크 대통령이 1931년 여름에 그에게  히틀러의 '이 열광한 젊은이들'에 
대해서 탄식하면서 국가사회당은 '믿을 만한 국민정당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을 때, 후겐베르크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는 데 이미 공헌한 바가 
있다고 말했다. 그 동안의 모든 실패의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후겐베르크도 히틀
러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태도, 관계, 협상
  이렇게 사방에서  밀려든 접근 시도들은 마침  국가사회당 당수가 감행하려는 
전진 시도와  만나게 되었다. 그때까지 9월  선거의 성공이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시도를 시작하였다. 선거결과는  그를 정치무대에서 
주요배우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지만, 고립이 계속되면서  그는 어느 정도 말
없는 역할만을 맡아왔다.
  어떤 관찰자는 이렇게  적었다. "히틀러는 넉 달을 잃어버렸다.그는 영원을  주
고도 다시 사지 못할  귀중한 시간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보내버린 것이다. 
세상의 어떤 권력도 그에게  9월 15일 패배자들의 떨림과 관리들의 당혹감을 두 
번 다시 마련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때 시간은 도이치 지도자의 편이었다. 합법
적이냐, 불법적이냐, 누가 그런 걸 물었던가? 그러나 이 도이치 지도자는 비겁하
고 허약한 잠옷 입은 존재일 뿐이며, 얼른 살쪄버리는 소시민 폭도일 뿐이다. 운
명이 자신과 월계관을  한 번에 삭여버리는 산  속에 집어넣어도 아주 편안하게 
지내다가 뒤늦게야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이 북 치는 인간은  진영 안에서만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북을 쳤다... .브르투스는 잠들어 있다.
  정치적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하고 순간에 결정되는 감정에 따라 모여
든 추종세력을 이끄는 히틀러는 실제로 다른 누구보다도 높은 정도로 계속 새로
운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야 할 처지에 있었다. 당은 1931년에도  성공의 행진을 
계속하였다. 5월  초에 샤움부르크 리페의 지방의회에서  26.9퍼센트를 차지했고, 
2주 뒤에 있었던  올덴부르크 선거에서는 37.2퍼센트를 차지해서  처음으로 지방
의회에서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러한 성공들은  9월 선거에서 이미 더 큰 차원에서 이루
었던 것을 작은  차원에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것으로 당이  권력에 다
가가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추종자들이  광장에서 혹은  좁은 길들을  통과하여 
'(권력의) 문 앞에 선 히틀러!'라는 구절을 읊어보아도 마치 그런 말은 바로 거기
까지만 간다는 말처럼 들렸다.
  의회를 마비시킨다는 전략에 따라서 의회에서도 어차피 큰 성과를 거들 수 없
는 처지였다. 그래서  점점 불어나는 당원 숫자, 집회 신기록,  혹은 새로운 순교
자에 대해서, 빨리 맥빠지는, 점점 더 긴장된 환호성민 남았다.
  봄이 되자 다시 발터  슈테네스크가 이끄는 베를린 돌격대에서 초조해 하면서 
지속적인 정체에 대한 원망이 밖으로 터져나왔다.  그러나 돌격대 지휘자가 당에
서 공식적으로 이탈해서, 흔들리는 파벨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전에 히틀
러의 지위해체가 먼저 나왔다.  새로운 보증, 새로운 충성의 맹세를 통해서 반란
자들의 불쾌감이 가라앉았다.
  선거전을 통해서 '체제'를  쓰러뜨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히틀러는 광
범위한 활동에서 모든 영향력 있는 세력의 신뢰와 후원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
하였다. 대중들  사이의 성공만으로 정권을  장악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는 
전보다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권력을 대통령과  그의 측근에서 넘겨주는 헌법 
48조는 의회권력과 선거 승리의 의미를 축소시켰다.  유권자 숫자가 아니라 대통
령의 의지가 수상직을 결정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다수를 얻는 것보다 힌덴부르
크의 신임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합법을 가장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히틀러는  여러 차원으로 한꺼번에 발을  내디ㄷ다. 라이프치
히 합법화 맹세는 품행 단정과 동맹의 제안을  포함한 것이었다. 연초에 폰 슬라
이허의 손가락이 그를 가리켰고,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게 국경수비에 동참하는 일
이 허락되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히틀러는  2월 20일자 명령을 통해서 돌격대
에게 거리싸움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카셀의 조직이  명령을 어기고 무기를 마련
하였다는 이유로 조직을 일시적으로 해체시켰다.
  한편, 룀은  4월의 건의서에서 히틀러가  수상직을 차지하면 돌격대는 '어쩌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착한 아돌프는  충성심
이 흘러  넘친다."고 그뢰너는 친구에게  써보냈다. 히틀러는 아무런 골칫거리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돌릭 주교들이 성명서를  통해 국가사회당에 날카롭게 경고해오자 히틀러는 
즉시 신뢰하는 부하인 헤르만  괘링을 로마로 보내 화해를 시도하였다. <데일리 
익스프레스>지를 위한 인터뷰에서 그는 배상을  중지하기 위ㅏ해서 독일 영국간
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통찰력과 성숙한 모습을 보이
면서 결속 요인을 강조하였다.
  공산당 의원인 빌헬름 피에크가, 붉은 군대는  내부의 혁명적인 해방군을 도우
러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자 히틀러는 미국 신문에  대고, 국가사회
당은 밀려오는 세계 볼세비즘에 대한 방벽이라고  설명하였다. 당시의 어떤 서술
은 이런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욕을 훨신 덜 한다. 이제는 유대인을 아침
식사에 올리지" 않으며 "편집광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시민적인 평판을 염려해서  그는 겉모습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다.베를린에 오
면 언제나 머물곤 하던 작고 초라한 '상수시' 호텔을 떠나서 약간 도전적인 의도
가 없지도 않지만 어쨌든 수상관저 건너편 빌헬름 광장에 있는 '황제궁(카이저호
프)' 호텔로 숙소를  바꾸었다. 길들이려는 생각을 가졌던 우익 지도자들은  히틀
러가 마침내 국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고 안심하였다.
  그는 아직 냉담한 태도를 보이던 기업가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광범위한 차
원에서 노력하였다. '황제궁' 호텔에서 사교클럽을 열고, 유력인사들과 잘 통하는 
폰 디르크센 부인이  적절한 때에 나이든 여성친구의 역할을 다시  떠맡았다. 그
는 그녀의 열성  덕을 많이 보았다.베히슈타인 부인도 전처럼 그를  위해서 열심
히 활동을 벌였다.
  다른 관계들은 대가족을 이끌고 있는 괴링과 경제지 기자인 발터 퐁크의 소개
로 이루어졌다. 경제위기에 고생한 소기업가 빌헬름  케플러는 공감을 가진 실업
가들과 당을  연결해주고, '경제인 동호회'를  민들었다. 그것은 나중에 히틀러와 
결합해서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광범위한 산업계 가문과 연결되어 있고,  8월부터 국가사회당의 언론부상을 맡
은 오토 디트리히는  이렇게 말했다. "1931년 여름에 지도자는 뮌헨에서,  저항의 
중심부에 있는 표준적인 경제계  인사들과 그들이 중심이 된 시민적인 중도정당
의 인사들을 설득하기로 갑자기 결정하였다."  그는 광범위한 순회여행에 나서서 
독일 전국을 6인승 벤츠 자동차를 타고  돌면서 친근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중 
몇 개는 아무런 의심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한적한 숲의 초원, 신의 자유
로운 자연 속에서' 이루어  졌다. 키르도르프의 영지에서 그는 30명이 넘는 중공
업 사업가들에게 연설하엿다.
  사회주의적인 목적을 포기한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의회에서 '은행과 증시 
지배자들'의 재산 몰수를 요구하였던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고트프리트 페터에게 
그는 명확하게 제안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였다. 공산당  소속 의원들이 그 제안을 
한 번 더 제출하엿을 때  그는 의원들에게 그 제안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강요하
였다. 경제정책에 대해서 그는  이때부터 아주 애매한 의견 표시를 하였다. 동시
에 고집스러운 고트프리트 페터와  거리를 두고 그가 공개석상에 등장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7월 초에 히틀러는 마침내 베를린에서  후겐베르크와 만났다. 이어서 재향군인 
철모단 지휘자인 젤테와 뒤스터베르크와 협상을 가졌다.  그들은 다시 그와 동맹
을 맺고 싶어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폰  슬라이허와 육군 사령관 하머슈타인 에
크보르트 장군을 함께  만났다. 그리고 브뤼닝, 그뢰너와 만나고, 한  번 더 슬라
이허와 브뤼닝을 만났다. 그러한 대화들은 의도를 탐색하는 일과, 히틀러가 원칙
적으로 반대하는 체제 안으로  그를 이끌어들이려는 목표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뢰너 장군이 말했듯이 히틀러를  '이제 2중 3중으로 합법화의 
기둥에'붙들어 매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이들 적수 중 누구도 히틀러의 단호함과 비타협적인 특성을 제대로 파
악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위장술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그 결과 국
가사회당 당수가 고립에서 벗어나서  대등한 협조자의 지위를 얻게 되었을 뿐이
다. 이러한  만남들은 추종자들을 자극하였고,적들을 혼란스럽게  하였으며, 유권
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가 이러한 변화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 왔는가 
하는 것은 브뤼닝과의 대화를 위해서 베를린으로 오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보여준 반응으로  알 수 있다. 헤스,  로젠베르크, 그의 대리인  바이스가 뮌헨의 
그의 곁에 있을 때 전보가 한 장 날아왔다.  그는 성급하게 펼쳐 보더니 거기 있
는 사람들에게 흥분해서 외쳤다.  "이제 그들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됐어! 그들은 
나를 대화 상대자로 인정했어."
  그가 얼마만큼이나 위장술을 보여줄  능력이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뢰너의 판
단이 알려주고 있다. "히틀러의 의도와  목적은 선하다.그는 다만 열광적이고, 불
타오르고,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호감이 가는 인상에, 겸손하고 점잖은 사람이고, 
열성파 독학자의 겉모습을  보여준다." 지도적 인사들과 친밀한  의견 교환을 할 
때면 그는, 약간 무시하는 듯한 아이러니가  바닥에 깔려 있기는 하지만 '아돌프'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슬라이허의 주선으로 10월 10일로 일정이 잡힌 힌덴부르크 대통령과의 만남은 
실패로 끝났다. 사실상 대통령 궁에서는 결정적인 망설임이 있었다. 대통령의 아
들인 오스카는 히틀러가 대통령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자는 소주를  마시
려고 할걸요."라고 심하게 비꼬았다. 괴링을 대동하고 찾아온 히틀러는  대통령과 
만나고 있는 동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자기  덩의 목적을 떠벌이느라고 나라의 
어려운 처지를 감안해서 정부를 후원하라는 대통령의  권고를 놓치고 말았다. 점
점 늘어가는 폭력행위에 대한  훈계에 대해서 그는 정작 상대방을 만족시키지도 
못하면서 수다스럽게 단언을  하였다. 대통령은 어쨌든 이  '보헤미안 상사'를 체
신부 장관으로 만들 각오는 되어 있지만 수상만큼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소문
이 나중에 측근에서 새어나왔다.

    하르츠부르크 우파 모임
  힌덴부르크 대통령과의 만남에  이어서 히틀러는 하르츠부르크 온천으로 향했
다. 다음날 벌써  민족주의 계역 야당은 강력한 데모를 하면서  결속을 축하하고 
'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공격의 틀을 만들었다.  한 번 더 후겐베르크는 광범위한 
열병식을 위해서 우파가 가지고 있는  거ㅜ력, 돈, 체면 등 모든 것을 긁어 모았
다. 국가 사회당과 도이치  국가 민족당, 경제당, 철모단, 제국 연맹 등의 지도자
들이 모였다. 나아가 수많은  후원자들, 두 명의 호엔촐레른 왕자를 위시한 예전 
왕가의 후손등, 모든 도이치 운도의 의장직을 맡은 법률 고문관 클라스, 폰 뤼트
비츠와 폰 제크트 같은 퇴역 장성들, 그리고  수많은 재계와 산업계의 유면한 이
름들, 그  중엔느 히얄마르 샤흐트, 연합  철강소의 에른스트 푄스겐,  철강 무역 
연합의 루이 라베네, 함부르크의  블롬, 그리고 폰 슈타우스, 렌겐단츠, 소게마이
어 등과 같은 은행가도 끼어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면 공화국의 적은 모
두 다 모인  꼴이었다. 원한과 목표로 하나가 된 불평분자들의  다채로운 모임었
다. 
  히틀러 자신은 극히 입을 조심하였다. 그는  마지못해 겨우 참석하겠다고 동의
를 했다.  아마도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방문한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그의 불쾌감을  높였던 것 같다. 영  안에 반대해서 단결했을 때처럼  그는 다시 
자기 편의 강력한  반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부르주아와의 
결합은 그 자신에게도 역시 불쾌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에  추종자들을 소집하고 프리크를 내세워 
'마구잡이로 뒤섞인시민계층'과의 동맹을 순수하게 전략적인 고려에서 나온 행동
이라고 변명하였다. 무솔린도  국가 주의 연합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권력을 장
악하지 않았던가. 프리크의  말이 끝나다마자 그는 효과적인  기습공격 스타일로 
개인적인 수행원을 거느리고 홀에 나타나서 추종자들이 화려한 의식으로 약속을 
하도록 하였다. '민족주의 통일전선'은 그 동안  온천 요양소에서 그이 등장을 기
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준비과정에서 이미 국가  사회당 당수에게 수많은 양보를 하였던 후겐
베르크에게 이번 모임은 아직은 마지막 굴욕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영향력 있는 
상대방의 민감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도전적으로 야심만만한 동맹개념을 여지
없이 깨뜨려버렸다. 그는  전날 밤에 모인 편집외의에도 빠졌고 그런  일은 쓸데
없는 시간  낭비라고 선언하였다. 집회의  열광적인 절정을 이루어야  할 마지막 
행진에서 돌격대 부대가 행진하고 난 다음 철모단이 다가오자 보란 듯이 무대를 
떠났다. 회식에도 참석하지 않고서, 수천명의 추종자들이 '굶은 상태로 근무'하고 
있는데 자신망 회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알려왔다. "많은 참석자들에게 좋지 않
은 언론  보도를 피하려는 고려에서"  겨우 "공공연한 결렬"을 피했을  뿐이라고 
후겐베르크가 실망해서 탄식하였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하르츠부르크의 불협화음은  전략적인 술책은 아니었다. 불
만이 숭배자를 만들어낸다는 성모의 비결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만남은 이전보
다 더욱  초조하게 권력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후겐베르크의  단결 주장은 
이 축제를 개최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한 지휘요구를  담은 것이었다. 히틀러는 특
유의 일관성으로 협동은  곧 속박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어
쨌든 독일은  앞으로 우스꽝스럽게도 두 명의  '구원자'를 보게 되리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그런 혼란스런 인상을 몰아내기  위해서 그는 하르츠부르크 집회가 끝난지 일
주일 뒤에 브라운슈바이크의  플란츠 들판에서 대규모 시의를  벌이기로 하였다. 
10만 명  이상의 돌격대원들이 특별열차편으로  수송되어 왔다. 여섯  시간 동안 
분열식이 계속된느 동안 거대한  갈고리 십자가 자락을 늘어뜨린 비행기들이 공
중을 빙빙 돌았다.  히틀러는 연대기 축성식이 벌어지는 동안 이것은  권력 장악 
이전 마지막 축성식이 될 것이고, 당은  '권력의 1미터 앞'까지 와 있다고 선언하
였다. 모든 의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공격>지  10월 21일자는 다음과 같이 설
명하였다. "하르츠부르크는 전략적인 부분 목적이었다. 브라운슈바이크는  변함없
는 궁극 목적을  알린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하르츠부르크가  아니라 브라운슈바
이크가 있는 것이다. "

    히틀러와 시민 계급
  하르츠부르크에서 쌀쌀했던 히틀러의  태도에는 시민세계에 대한 그의 반감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이러한 감정을 그는 완전히  통제한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실크 해트, 프록 코트, 빳빳하게 풀 먹인  셔츠 깃 등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으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직함, 훈장, 자만심  등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지배 요구가 
도덕적인 이념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믿고,  기꺼이 자신의 '역사적인 역할'에 대
해서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허약함과 부패에 대해서  정확한 히틀러의 
감각은 이 완강한 의지력 뒤에  깨어지기 쉬운 특성이 숨어 있는 것을 냄새맡았
고, 중사층 태도를 지닌  이 미라 같은 패거리 안에 들어  있는 시대에 뒤떨어진 
요소를 알아챘다. 
  카페를 드나들던 젊은 멋쟁이, 저 빈둥거리는  예술가 지망생 히틀러의 동경은 
바로 이런 시민세계였다. 그는  온갖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의 사회적, 이념
적, 미적  가치관을 비판없이 받아들여서 오랫동안  간직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 사이 파산 상태에 이르러 공시선서를 해버린 세계였다. 
  그 세계의 대표자들과  달리 그는 이 사실을 잊지 않았다.  후겐베르크를 보면
서 그는 저 약고, 거만하며 허약한 폰 카르, 시민적인 유명인사들의 모습을 대표
하는 그 폰 카르를 다시 보는 듯 했다.  그들은 지배권의 요구와 개성을 지닌 사
람들이었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벌써 거의  반사적으로 경멸적인 형용사들이 쏟
아져 나왔다. 특히 '비겁한' '멍청한' '바보 같은' '썩어빠진' 등과 같은 표현들이었
다. "어떤 계층도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른바 시민계층보다 더 멍청한 것은 
없다."고 그는  자주 강조하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오랫동안이나 소리지르는 
선전화 부정확한 태도를 가지고 일부러 이 계층을 당에서 멀리 떼어놓으려는 애
썼다고 했다. 
  <라이프치히 최신 뉴스>의 주필 리하르트 브라이팅이 1931년 5월에 인터뷰를 
하러 방문하자 히틀러는 이런 말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당신은 우리가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시민계층의 대표자군요." 그리고  자신은 죽어가는 시민계급을 구하
라고 뽑힌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시민 계층을 밀어내려고 하는  사람이며 공산
당보다도 그 쪽을  더 끝장내려고 한다고 했다. 긴장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는 
문화시민적인 자신의 출발에 대해서 거리감을 강조하곤 하였다.
  "오늘날 어떤 없는 자가 내게 잔인하게 자기 의견을 표현하면 나는 이 잔인성
이 언젠가는 밖으로  분출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 시민계층 사람이  꿈을 잃
고 돌아다니다가 문화니, 문명,  미적인 세계 만족 따위를 이야기하면 나는 그에
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도이치 민족에게는 끝장난 사람이다!' 넌 베를린 서부에 
속하는 인간이야! 그리로 가서 깜둥이 춤이나 끝까지 껑충거리다가 뒈져버려라!" 
  그는 간혹  자신을 '프롤레타리아'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사회적인 
소속감보다 사회적인 거부감을 표현하고 있다는 인상을 절대로 떨쳐버리지 못했
다. "나는 절대로 시민성을 양상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는 주장하곤 
하였다. 그가 여러  가지로 표현하였던 노동자 계층에 대한 희망,  이 '참된 귀족 
계층'에 대한 감탄성  발언 속에는 노동하는 계층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거부한 다른 계층에 대한 증오심이 나타나고 있다. 
  시민계층에 대한 그의  증오심에는 근친상간적 혼합감정이 뒤섞여  있다. 처음
에는 거부되고 그  다음에는 속임을 당한 시민적  성향을 가진 사람의 실망감이 
언제나 다시 드러나곤  하였다. 그가 측근에 둔, 특별히 좋아한  건달 유형들, 이 
거칠고 원시적인 '운전기사 계층' 인 샤우프, 슈레크, 그라프, 모리스 등은 이러한 
원한을 반영하고 있다. 
  이 원한은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일시적으로 깨뜨려질 수 있는 감
정이었다. 예를 들면 에른스트 한프슈텡글, 알버트 슈페어 등과 같은 사람들이었
다. 단치히의  국제 연맹 위원인  칼 야콥 부르크하르트에게  히틀러는 1939년에 
'처량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겟느 낯선 세계 사람이군요."
  이 낯선  세계로 가는 통로는  없었다. 하르츠부르크 집회가  보여주듯이 오래 
계속되는 전략적인 관계로 만들어낼 수 없었다.  집권당에 대한 공동의 전략적인 
관계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집귄당에 대한 공동의 전략도, 이미 여러 번이나 논
의된 바가 있었지만  그림자 내각을 만들지도 못했고, 눈앞에 닥쳐온  대통령 선
거에 대비해서 후보  단일화로 이루지 못했다. 시민 진영이 갈색  돌격대를 바라
보면서 그토록  열광적으로 생각하였던 공동의 투쟁이라는  생각도 자의식 강한 
히틀러 쪽 사람들의 조롱만 얻었을 뿐이다. 
  후겐베르크는 하르츠부르크에서 국가  사회당, 나머지 우파 진영, 그리고 돈과 
명예를 가진  그룹들 사이의 동맹관계를  만들어내려고 희망했다. 이  모든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여우같이 교활한 활동을 펼치는 자신이야말로 민족주의 진영
의 위대한 조종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를 밀어붙여서 완전히 굴복하
든가 아니면 민족주의  통일전선이라는 이념 자체를 포기하든지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과 시민적인 우익 사이의 '시험 결혼'이 언제나 그랬듯이 이
번의 시도로 실패하였고  하르츠부르크 집회의 시작이라기보다 오히려 종말이었
다. 그것은 후겐베르크에게는  자신이 조종자라는 망상과의 이별을 뜻했고, 우익 
진영이 생각했던, 북치는  사람, 비어홀 선동기, 환쟁이라는  히틀러에 대한 이미
지와의 결별을 뜻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동맹이라는 생각 자체를 버린다는 
뜻은 아니었다. 후겐베르크는  "우리 자신이 '뒤죽 박죽'이라고 느끼지도  않았고, 
보조기관차 노릇을  하고 나서 나중에  짓밟혀버릴 생각도 없었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그의 길은 계속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만 나갔다. 

    독점 자본주의 음모설
  그러므로 자주 거론되는 '하르츠부르크 전선'이라는 말은 역사적 사실이라지보
다는 정치적 전서의 개념에 가깝다. 그것은  제 3제국의 생성배경에 어두운 음모
들이 있다고 보고, 특히 훈장들로 빛나는  가슴, 프록코트, 계급적 태도에 히틀러
가 눈이 멀었다고 여기는 저 음모성을 위한  빛나는 증거라고 여겨지고 있다. 히
틀러는 타당한 일이지만 그들  시민적인 유력인사들을 경명하였다. 하르츠부르크 
전선은 특히  히틀러와 대자본 사이의 음모를  밝혀보이는 부분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물론 국가 사회당의 당수와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기업가 사이에 모종의 연결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당이 이러한 관계에서  물질적인 이익과 체면상승 효과를 
얻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이 이로웠던 것들은  다 부서져 가는 온건파 정당
들에게도 더 일찍부터, 그리고  더 높은 정도로 주어졌던 것들이다. 한편이 표를 
얻은 것이다 다른 편이 표를  잃은 것이나 이러한 재력 있는 후원자 관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히틀러는 기업가들의 소극적 자세를 거듭  불평하였다. 무솔리니는 "싸움이 훨
씬 쉬웠다. 그는 이탈리아 산업계를 자기 편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이치 
산업계는 도이치 민족의 재생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나. 아무 일도 안 한다!"
고 그는 말했다. 
  1932년 4월에도 그는 거의  붕괴된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 자기 당보다 산업계
에서 더  많은 돈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당황하였다. 발터  풍크가 32년 
말에 루르 지방으로 모금 여행을  나섰을 때 그는 단 한 건의 2~3만 마르크짜리 
후원금을 얻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후원금 규모는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곤 하였다. 1930년에서  1933년 1
월 30일까지 약 6백만 마르크를 현실적이라고 보는  사람이라면, 약 1만 개의 지
역 조직, 광범위한  간부직, 거의 50만에 육박하는 개인 군대,  그리고 1932년 한 
해에만 열두 번이나 치러낸 선거전 등을 위해서는 돈이 두 배가 있어도 이런 거
대한 당 조직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 사회당의 일년  예산은 콘라트 하
이덴이 밝힌 것처럼 실제로 이 시기에 6천만  내지 7천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그
러한 거대 조직은 히틀러가 때로 냉소적으로 자신을 도이치의 가장 위대한 경제 
지도자의 한 사람이라고 부르도록 만든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음모설이  진지한 증인들까지  내세우고 있지만, 그래도  대자본가와 
국가사회당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광범위하고 불분명한 개념들에 도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에 반해서 엉터리 학분적  논의에서 히틀러는 극히 진지하게,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본주의적인 '나치 도당'이 '힘들여서  비싼 돈을 주고 산 정
치 후보자'라고 여겨졌다. 그를  자본가들의 '공공관계'를 위한 매니저라고 본 것
이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기업가들 사이에,  그리고 산업 분야별로  뚜렸한 이해의 
차이가 존재하였다.  적잖은 유대인 기업들을  빼더라도 수출업자,  증귄계, 대형 
유통업자, 화학산업, 그리고 크루프, 회시, 보시, 클뢰크너 등과 같은 전통있는 기
업가 가문들은 적어도 1933년  이전까지는 히틀러에 대해서 대개는 경제적인 고
려에서 후원을  보류하였다. 히틀러가  라인 베스트팔렌 대기업계와  접촉하도록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오토 디트리히는 당시의 보고서에서 경제계가 "우리의  가
장 힘든  싸움의 시기에... 히틀러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고 탄식하였다.  1932년 
초에는 '상당한 숫자의 경제계의 저항'을 느낄 수 있었다. 
  뒤셀도르프 산업가 클럽을 앞에  놓고 행한 히틀러의 1932년 1월 26일가 유명
한 연설은 바로  이러한 저항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고나서  당에 주어
진 재정적인 후원금은 아주  긴급한 걱정은 없애주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바라던 
액수에 미치지 못하였다. 
  1932년 말에 샤흐트,  은행가인 폰 슈뢰더와 알버트  푀글러가 힌덴부르크에게 
제출한,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해달라는 진정서는 요구를 받은  기업가 다수가 
서명을 거절하는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다. 샤흐트는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심하기가 그토록 무거운 것을 보니 중공업은 과연 그 이름에 합당하다고 투덜
거렸다. 
  히틀러와 대자본가들 사이의  밀접한 결합설은, 어째서 수백만  유권자들이 산
업계의 수백만마르크보다 훨씬  앞서서 히틀러를 지지하였는가를 설명해주지 못
한다. 히틀러가 뒤셀도르프  연설을 했을 때 그의 정당은 680만  명 이상의 당원
과 추측컨대 1천만 명 이상의 유권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의 세력기반
이었으며, 그들을 사로잡았던 '거대한 반자본주의  열망'을 고집스럽고 완고한 기
업가들의 생각보다 더욱 고려해야 했다. 기업가들을  위해서는 똑똑한 척하는 오
토 슈트라서를 제물로  바쳤을 뿐이다. 오토 슈트라서는 어차피 그의  미움을 사
고 있었는데 이들 기업가들에 맞서 자신의 추종자들이 베를린 금속 노동자 파업
에 참가하도록 만들어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파업이 그래도 공산주의자들의 파
업보다 낫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히틀러 당이 대자본가에게 매수되었다는 주장은, 어째서 이 새로운 종류의, 거
의 무에서 출발한 대중운동이 전통 있고 탁월하게 조직된 도이치 좌파를 힘들이
지 않고 추월할 수 있었던가 하는 질문에 전혀  답을 하지 못한다. 그 주장은 원
래 이 문제에  답변하려고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답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악말르 믿는 일이거나 아니면  정통 공산주의
의 주장일 분이다.  그 어느 쭉이든 좌익측의 합리성 상실의  표현이며 말하자면 
'좌익의 반유대주의' (다렌도르프는  후원의 동기들에 관해서, 기업가들이 지배의 
전망을 가진 모든 정당에 재정적 도움을 주고  음모가 아니라 훨씬 방어적인, 배
후의 안전만을 생각하였다는 합당한 견해를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1919년에 나
온 후고 슈틴네스의  유명한 말에 따르면 '소요에 대항하는  사회적 안전의 보조
금'을 냈다. 할가르텐도  히틀러가 산업기금에서 강력한 지원을 받았지만 그것으
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요약하였다.  산업계까 히틀러를 권좌로 이끌어가지
는 않았지만 그들의 명백한  의지에 반대하여 권좌에 도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를 둘러싼 '호감' 또는 공감을  지적하는 것은, 산업계가 국가 사
회주의와 음모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과는 다른  일이다. 산업계 내부의 상당한 
세력들이 히틀러의 수상직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분명한 관심을  보였다. 그
리고 그를 물질적으로 후원할  마음은 없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선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러한 감정을 어떤  수체적인 경제 정책상의 기대와 
결합시키지 않았으며, 국가  사회당 내부에 있는 사회주의적, 반시민적 분위기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버리지도 않았다. 공감을 느끼는 몇 명의  시업가들은 1932
년 여름에 당내 좌파의  경제적 과격주의에 맞서기 위해서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까지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기업가들은 시민 민주주의와  그 성과 요구,  대중의 권리 
등을 완전히 수긍한 적이  없었다. 공화국은 그들의 국가가 되지 못했다. 히틀러
가 약속한 질서의 회복이란  그들에게는 기업의 자율권, 세금 특혜, 노조 권력의 
종말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산업계의 대표자가 말한 적이 있는 '이 체제에서 구
원'이란 표어는 권위주의적인  질서관을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 히얄마르 샤흐트는 하르츠부르크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1929년 12월에 마지
막 의회정부가 붕괴되기 전에  어떤 연설가는 도이치 산업연합의 회원 모임에서 
청중의 박수를 받으며  독일에는 "10만 정당간부들이 나라 밖으로 추방되기까지
는 경제계의  평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기록은 이어서  터져나온 "브라
보!"하는 외침에 "무솔리니!"하느  소리도 끼여들었다고 되어 있다.  2년 뒤에 독
일 연합은 브뤼닝  정부의 '공동체 선언'에서 최종적으로  경제, 정치적인 요구들
을 하엿다. 그것은 참된 국민적 독재를 위한 격려를 담은 것이었다. 1931년 10월 
6일자 사설에서 기업가들에 가까운 <DZA>는 '독일 정치와  경제의 표준적인 힘
들'이 브뤼닝에게 등을 돌리려한다고 위협하였다.)
  도이치 사회구조의 어느 분야에도  이 기업가 그룹만큼 질기게 권위주의 국가
의 화석이 남아  있는 분야는 없었다. 그들의 기술적인 현대성은  자본주의 이전
의 사회관과 결합되어 있었다. 공동의 목표를  세웠거나 어두운 음모를 꾸며서가 
아니라, 공화국  '체제'를 극복하련느 반민주적인 풍토라는  점에서 대자본가들이 
국가 사회당의 상승에  일부 책입이 있는 것이다. 물론 대자본의  대표자들은 히
틀러에게 속았다. 그들은 히틀러가  펼쳐 보이는 질서의 태도, 완강한 권위 숭배
만을 보았으며, 과거 지향적인  면모들만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역시 지니고 있
던 미래지향적 측면을 보지 못하였다.  

    뒤셀드르프 산업가 클럽 연설
  히틀러는 뒤셀도르크  산업가 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  비상한 공감 능력으로 
기업가들의 권위주의적이고,  권력과 질설르  중시하는 국가관을 파악해서  자기 
편으로 이끌어들였다.  이 연설은 그의  연설 기술을 가장  인상적으로 증언하는 
연설의 하나이다. 검은색 더블  양복을 입고, 세련되고 정확한 동작으로 그는 처
음에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대기업가들을 앞에 두고 자기 정책의 이념적 기
본을 설명하였다. 두 시간  반 동인 계속된 이 연설은 주장, 말투,  강조점 등 모
든 점에서 조심스럽게 청중의 특성에 맞춘 것이었다. 
  처음에 히틀러는 국내 정치 우선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독일의 운명은 
주로 외교관계에 달려 있다는 부뤼닝 수상의  노선에 명백하게 반대하였다. 외교
정책이란 오히려 민족의 "내적인 체질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밖
의 것은 모두 체념일 뿐이며, 국가적인 자포자기  혹은 통치 잘못에 대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국가의 내적인 체질은 민주주의의  평준화 작용을 
통해서 파묻혀버렸다는 것이다. "한 국민의  소수에만 나타나는 유능한 두뇌들이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로 취급된다면,  천재의 능력과 개성 가치에도 
다수결의 원칙에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국민의  지배라고 잘못 말하는 다수
결의 원칙이죠. 이것은  국민의 지배가 아니라 사실상으로 어리석음의 지배이며, 
평범, 무능, 허약함, 불충분함의 지배입니다. 한 민족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 그것을  위해 태어난 개인들의 지배를 받고 인도를  받는 것이야
말로 국민의 지배입니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각각의 영역에 대해서  잘 모르는 
다수의 지배를 받지 않고 말입니다. "
  민주적 평등원칙이란 사소한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중요한  이념이다. 그것
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힘을 뻗쳐서 천천히 민족을 오염시키
게 될 것이다. 그는 이 기업가들을 향해서, 사유 재산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 원
칙과는 합치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민주주의의 논리적, 도덕적 합리화
는, 인간과 그의  업적이 서로 무관한 것이라는 확신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공격의 핵심부분에 도달하였다. 

  경제 영역에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고 정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
하는 것은 미친 소리입니다! 경제적인 삶은 업적,  개성의 가치라는 생각, 그러니
까 실질적으로 개성의 권위에 자리잡고, 정치적으로  개성의 귄위를 부정하고 다
수의 법칙,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경제적인 생각과 정치적인 생
각 사이에 천천히 틈새가 벌어지게 되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경제적인 영역도 
정치적인 영역과 똑같이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정치적인 민주주
의와 비슷한 것이  경제 영역에서는 공산주의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  두 가지 
기본원칙이 모든 영역에서 서로 싸움을 벌이는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국가에는 어떻게 해도  민주화될 수 없는 하나의 조직체, 그러니까  군대가 있
습니다. 민주화되면 군대 자체가  해체될 것입니다... 군대란 아래를 향해서는 절
대적인 권위, 위를  향햐서는 절대적인 책임이라는, 절대적으로 반민주적인 기본
원칙이 유지되어야만 존속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생활이 완전히 - 읍  면 단위
에서 시작해서 의회에 이르기까지 - 민주주의 사고방식에 기초한 국가에서 군대
는 서서히 이질적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구조적 대립을 수많은 다른  예들에 적용하여 보여주고, 민주
적이고 따라서 공산주의적인 생각이 독일에서 두려울 정도로 퍼져나간다고 묘사
하였다. 그는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를 상세히 서술하였다.  그것은 '독일의 몇몇 
거리에서만 미쳐 날뛰는 무리'가 아니라, '아시아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고... 
전세계를 서서히 뒤흔들어  쓰러뜨리려고 하는 세계관'이라고 했다. 그는 계속해
서 이렇게 말하였다. 

  볼셰비즘은 중단되지 않으면 그  옛날의 기독교처럼 전세계를 완전히 변화 시
킬 것입니다... 세계관의 문제이니만큼 30년이나 50년이란 별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이후 3백 년  만에 기독교는 남유럽 전체를 천천히 장악하기 시작하였
습니다. 

  독일에서 공산주의는 특별히 정신적  혼란과 내적인 붕괴로 인해서 다른 어느 
나라보나 널리 퍼져 있다고 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공산주의에서 "자신들의 실
질적인 경제 상황을 세계관으로 보충하는 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
재의 어려움의 원인을 외부의 상황에서 찾고 외적인 수단으로 그것과 싸우려 하
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조치들이나 '스무 번의 비상사태 선포'
를 해도 민족의 파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추락의  원인은 정치적 특
성을 가진 것이므로,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것도 '근본적인  해결책'
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것(해결책)은 경제가  붕괴하는 것은 국가가  붕괴하기 때문이며 그  반대가 
아니라는 인식에 근거 합니다. 번성하는 강력한  국가하는 보호세력 없이 번성하
는 경제는 없으며, 카르타고의 군함이 없이는  카르타고의 경제도 없었다는 사실
을 인식해야 합니다. 

  국가의 권력과 안녕은 내적인  조직, '어떤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공통의 세
계관의 확립' 결과라고 했다.  독일은 오늘날 거대한 내적 분열의 상태에 직면해 
있다. 국민의 절반을  넓은 의미에서 볼셰비스트고, 나머지 절반은 민족주의적이
다. 한편은 사유  재산을 옹호하고 다른 편은 그것을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생각
하고 있으며, 한쪽에서는  국가반역을 범죄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것을 의무라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분열을 통제하고, 독일의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은 
이 운동과 세계관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분은 여기서  가장 탁월한 민족국가주의 감정에  넘치고, 모든 영역, 모든 
분야에서 지도자의 절대적 권위라는  생각에 기초하여 하나의 조직체를 보고 계
십니다. 국제주의적인 사상뿐 아니라 민주적 사상을 극복하고, 명령과 복종을 알
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처음으로 독일  정계에서 업적의 언칙에  따라 만들어진 
수백만의 조직을 만들어낸 유일한  정당입니다. 추종자들이 거침없는 전투의지로 
무장한 조직, 정치적인  적들이 '너희들의 등장은 우리에  대한 도전'이라고 선언
하면 물러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조직체입니다. 물러서지 않고 잔인
하게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키고,  적을 향해 이렇게 맞받아 소리치죠. 우리는 오
늘 싸운다! 우리는 내일도 싸운다!  너희가 오늘 우리의 모임을 보고 도전이라고 
여겨도 우리는 다음 주에 다시 또 다른 모임을 열 것이다... 우리더러 '거리로 나
가면 안 된다'고 하면  우리는 그래도 거리고 나갈 것이다! 우리더러  '그럼 우리
가 너희를 때리겠다!'고 하면 너희가 우리에게서 아무리 많은 희생자를 만드어내
고, 이 젊은  독일에서 마지막 뿌리까지 뽑아버리기로 확고하게 결심했으니까요. 
우리는 싸움을  좋아해서 이 결심을 한  것이 아닙니다. 독일 전국을  미친 듯이 
돌아 다니는 것보다는 더 멋진 삶이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도이치 운명의 전환점 앞에 서 있습니다. 현재의 바전
이 계속된다면 독일은  어느 날인가 어쩔 수  없이 볼셰비즘의 혼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발전을 중단시키려면 우리 민족은 강철 같은  기율의 학교
에 들어가야  합니다... 정당들, 단체들, 통합  체제들, 세계관, 계급의 망상,  계급 
투쟁 따위의 이 모든 덩어리가 뭉쳐서 강철같이 단단한 민족 공동체가 만들어져 
나오는 일에 성공하거나 아니면 독일은 이런 내부 결합에 실패하면서 결국 멸망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게 이런 말을 하지요. '당신은 민족주의 독일의 북 치는 사람일 뿐
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북  치는 사람일 뿐이라면 또 어때요?! 도이
치 민족 안으로 하나의 새로운  신념을 북을 쳐서 알린다면 그것은 현재의 신념
을 천천히 낭비해버리는 것보다 비랗  바 없이 위대한 정치적 행위가 될 것입니
다. (박수 갈채)...  신사 여러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이 거
리를 통해서 행진해가면, 그리고 갑자기 저녁때  소란이 일어나면 시민들은 커튼
을 걷어올리고 밖을 내다보며  말하지요. '또 밤잠을 설치게 생겼군... '하고 말입
니다. 그러나 그것이 희생임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국가사회주의에 소속된 수십
만 명 돌격대와 친위대  대원들이 트럭에 올라타고, 집회를 보호하고, 행진을 해
나가야 한다면, 밤마다 희생하고 아침 여명에 일터와 공장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실업자라서 실업 수당을  타러 간다면 말입니다... 국민 전체가  똑같은 이상주의
를 가지게 된다면, 독일은 세계의 눈앞에 오늘과는  다른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
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박수 갈채)

  수많은 박수 갈채가  터져나와서 '개성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적인 권
력국가과 기업가의 특권에 대한  히틀러의 변호를 일단 중단시키곤 했음에도 불
구하고 행사의  마지막에 프린츠 티센이 선창한  "하일, 히틀러 씨!"라는 외침을 
따라 한 사람은 참석자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연설의 물질적인 
수확은 오래 계속된 고립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었다.  히틀러가 아니라 이제 국
가가 점차 고립에  빠져들어 갔다. 사바에서 적대자들이  무너져내리는 공화국을 
둘러싸 포위해 버렸다.  사회민주당이 주도하는 연합 정부가  통치하던 프로이센 
지역에서, 국민 투표를  통해서 주의회를 해산시키려는 시도에는 철모단, 국가민
족당, 도이치 국가 민족당 등과 공산당까지 힘을 합쳤다. 그 모두를 합쳐봐야 유
귄자의 37퍼센트의 표를 얻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적대자들이 만들어낸 이런 
광범위한 전선은 지속적인 효과를 만들어내었다.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자들와 국가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 그 둘
이 합쳐서 경찰과 벌이는 싸움, 거리의 무질서, 주말의 유혈사태 등은 국가의 권
위가 망가졌다는  징후들이었다. 유대인의  설날에 그라프 헬도르프가  지휘하는 
베를린 돌격대는 심한 소동을 일으켰고, 대학에서는  인기 없는 교수들에게 항거
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당원들에 대한 재판에서  유래 없는 풍경들이 벌어졌다. 
시민 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머리가 떨어져 구를  것이라는 히틀러의 
말은 여전히 국민의 귓속에 울리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유권자들의 공감과 의석
을 얻기 위하여  경쟁을 벌이는 정당들 사이의  유혈사태 이상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퍼져나갔다. 
  히틀러는 얼마 전에 이렇게 말했다. "시민  정당들 사이에는 파괴가 아니라 오
직 선거의 승리가 목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승리
하면 우리가 파괴되리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우리도 다른  것은 기대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승리하면 공산주의는 파괴될 것이다. 그것도 남김없이 
파괴될 것이다. 우리도 관용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최후의 신문이 파괴되고, 최
후의 조직이 없어지고, 최후의 교육 장소가 제거되고, 최후의 공산주의자가 전향
하거나 제거될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중도란 없다."
  거리에서 시작된 일은  내전의 전초전이었다. 그것은 1919년에  중단된 혁명의 
결정전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1933년 초에  '영웅 양조장'에서, 그리고 돌격대의 
강제 수용소에서 끝나게 될 일종의 전초전이었다. 

    복스하임 문서 사건
  이렇게 초긴장 상태의 분위기에서 히틀러를 극단으로 몰아가려는 생각이 적들
을 지배하였다. 1931년 말  국가사회당 의석의 38.5퍼센트를 얻어서 가장 강력한 
당으로 부상했던 헤센 주의  선거가 끝난지 열흘만에 어떤 국가사회당 변절자가 
프랑크푸르트 경찰 국장에게 공산당의  폭동 시도가 있을 경우 헤센 국가사회주
의자들의 행동방침을 적은 문서를 넘겼다. 이것은  히틀러 추종자들의 국가 반역
적인 집회가 열렸던, 보름스 근교에 위치한  영지의 이름을 따서 '복스하임 문서'
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돌격대와  유사 조직을 통해서 권력을  접수하고, '주민의 철저한 기
율'을 위해서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표현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모든 저
항 행위 혹은  불복종 행위에 대해서는 일괄적으로 사형을 확정하고,  특수한 조
건 아래서는 '재판  없이 즉결 처형'을 실시하도록  되어있었다. 사유재산과 이자 
의무는 즉각 보류되고, 주민은  공개 석상에서 식사를 하고, 노동 의무를 이행해
야 한다. 유대인은  물론 의무나 식사에서 제외되었다. (배석판사인 베르너  베스
트 박사는 헤센의 주헌법재판소의  관구 사법부 대표로 선출되엇고 뒤에 제 3제
국 시절 덴마크 점령지구의 총독으로 승진하였다.)
  이 문서의 발각에 대한 히틀러의 반응은 그가 점점 더 의식적으로 적대자들의 
근심과 여론의  두려움을 전략적으로  유리함으로 바꾸었음을 보여준다.  어쨌든 
그는 반 년 전 합법화  노선 위반이 있었을 때와는 달리 이 문서를 작성한 사람
에 대한 일체의  조치를 피하고 단순히 그에 대한 책임만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세부사항에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고  무엇보다도 절반쯤 사회주의 요소들 중 새
로운 노선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신이 항상 원하
던 권력 장악의 이상적인 상황을 표현하고 있었다. 
  공산당이 궐기 시도에 대한 그의 생각도 이  계획안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공
산당의 시도에  위협을 받은 국가  군력은 도와달라고 요청할  것이고, 돌격대는 
공권력과 더불어 계획을 실천할 것이다. 그러므로  합법성의 이름과 겉모습을 갖
추고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하는 생각이었다.  그것을 히틀러가  이미 
1923년 11월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밤에 카르에게서 받아내려고 했으나 소용
이 없었던 바로 그 외침이었다. 
  그는 다른 수많은  정치가들처럼 단순히 권력을 얻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 언
제나 공산당의 치명적인 포위에  맞서서 구원하는 군대를 이끌고 구원자로 나타
나서 지배권을 장악하고  싶어하였다. 이러한 결말부분은 그의  극적이고도 종말
론적인 성햐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성향은 언제나  지구를 둘러싸고 
어둠의 세력과 한판  붙는다는 생각과 맞물린 것이었으며,  바그너의 모티브들이
었다. 즉 백마의 기사 로엔그린, 성배와 위협을 받은 금발 여인의 모습이 막연히 
투영되어 있었다.  나중에 이러한 상황 설정이  나타나지 않고, 공산당의 쿠데타 
기도가 괴벨스의 표현처럼 '불붙지'않게 되자 그는 그런 일을 거의 꾸며내기까지 
하였다. 

    "가련한 체제여!"
  복스하임 문서가 발견되었어도  아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사방에서 나
타나는 성급한 충성의  붕괴에 대해 한줄기 빛을 던져주었을 뿐이다.  이제는 관
료 계층도, 사법 기관도 국가 반역 사건을 공개적으로 추적할 수도 없었으며, 정
계도 어깨를 으쓱하며  체념한 태도로 이 사건을 처리했다. 그릭  최후의 순간에 
그것을 결정적인 행동의 계기로 삼을 기회마저  없애버렸다. 너무나 분명한 증거
자료를 놓고 히틀러를 체포해서  재판하지 못하고 그들은 오히려 협상하려 들었
다. 그것도 그의 위협에 불안을 느껴서 엉뚱한 방향으로 노력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슐라이허, 힌덴부르크 대통령, 영향력  있는 정치가들, 기
업가들, 유력 인사들에 의해서 대화 상대자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다
시 '대통령 각하'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경찰의  혹은 사법기관의 조
치가 국가 사회주의 운동을 이 시점에서 진지하게  위협할 수 있는지, 아니면 오
히려 생각지도 않은 심리적  효과만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게 되어 
버렸다. 
  어쨌든 프로이센의 내무장관  세베링은 1931년 12월에, 히틀러를  황제궁 호텔
의 기자회견장에서 기습 체포하여  프로이센에서 추방한다는 계획을 포기하였다. 
글고 폰 슐라이허는 그 무렵 어떤 기자회견 도중에 국가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적
절한 조치에 대한 요청이 나왔을 때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그럴 만한 힘이 
없어요.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만 제거될 것입니다!"
  히틀러 정당이 소시민  쓰레기이고, 선동적인 허풍꾼이라는 생각이  변하기 시
작하였다. 개별적으로, 그러나 분명한 형태로  마비의 느낌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자연력에 대한  무력감과 어느 정도 닮은  모습이었다. "이것은 '청년  운동'이다. 
이것은 멈출 수 없다."고 영국의 어떤 무관이 독일 장교들의 생각을 요약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지켜보게 될  국가사회당 부상의 역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쇠
약과 소멸의 역사라고 보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저항할 힘이  없었을 뿐 아니
라 히틀러가 연설에서 제시해 보인 것 같은  미래의 비전도 없었다. 공화국이 계
속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가련한 체제여!"라고 괴벨스는 일기장에 냉소적으로 적었다.        

    제3장 권력의 문 앞에서
  히틀러를 부상시킨 것은 선동거적인 기술, 전략적인 능력, 과격한 열광만은 아
니었다. 마치 반이성이  온갖 간계를 동원하여 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활동한 
듯이 보인다. 우연히도  1932년에 집중된 다섯 번의 대규모 선거들이  그가 자기 
고유의 선동영역에서 얼마나 우세한지 실증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봄에는 대통령의 임기가 끝났다. 선거의 위험과  과격화 효과를 피할 생각으로 
브뤼닝은 일찌감치  헌법 개정을 통해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임기를 종신으로 
연잘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획이란 오로지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겨울 
동안 위기는 거의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1932년 2월에 실업자 수는 6
백만을 넘어섰다. 그러나  여기는 정치가의 적응력보다 전문가의  실무적인 고집
을 중요한 원칙으로  브뤼닝은 자신의 노선을 굳게 지켰다. 그는  전쟁 배상금의 
궁극적인 면제, 군축  회담 성공, 독일의 평등권 등을 추구하고  있었다. 봄을 기
다리면서 엄격한 내핍생활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의 엄격함이나 그의 희망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굶주
림과 추위와 비참함의 품위 없는 동반 현상들에  고통 받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
나 희생을 호소하면서 계속되는 비상사태를 미워하였다.  정부가 비상 사태를 없
애려고 노력하지 않고 비상사태를 유지, 관리 한다는 비난이 널리 퍼졌다. 
  브뤼닝의 가차없는 내핍 정책은 국민 경제의  관점에서 보아도 문제가 많았다. 
수상이란 자는 피와 땀과 눈물을 가지고도 있기 있는 정열적인 희생의 노랫가락
을 지어낼 줄 몰랐다. 그저 실무적인 냉정한  태도만을 보였기에 그의 정책은 정
치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사람들의 절망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다는 사실이  더 문제거리였다. 이  비참이 단순히 비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화국에 대한 거부감은 이러한  곤궁의 뜻을 밝힐 줄 모
르고, 자꾸 새로운 희생을 요구하면서 그 의미를  알려줄 줄 모르는 정치적 무능
에 주요한 원인이 있었다.
  브뤼닝의 시간 벌기  정책은 대통령의 지원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
라운 일이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를 연장하려는 의도에 반대하였
다. 그는 이미  84세의 나이였고, 오래 전부터 대통령 직에  넌더리가 나 있었다. 
게다가 임기 연장 계획과 더불어 반드시 나타나게  될 자신에 대한 토론이, 이미 
실망한 우파 친구들의 새로운  공격을 불러일으키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힌
덴무르크는 1918년 11월에 곤경에  처한 황제를 내버려주었다는 생각에 점점 더 
고통을 받았다. 대통령은, 권위ㅣ적인 개혁을 통해서 영국식 모범에 따른 입헌체
제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사회주의  독재위협을 방어하련느 브뤼닝의 생각을 거부
하고 옛날식 군주제의  직접적인 부활을 고집하였다. 힌덴부르크가  마치매 대통
령에 입후보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투표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어야하고, 하
르츠부르크 전선을 폐쇄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임기 
연장이 2년으로 한정되고, 여러  사람이 나서서 설득하고, 특히 91세의 나이에도 
자신을 피곤할 새가 없다고  말했던 빌헬름 1세 황제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
소 그는 망설이면서  동의하였다. 그러나 뒤에서 모든 일을 조종한  사람이 브뤼
닝임을 간파한 대통령은 이 일로 해서 그에  대한 신뢰를 잃고 말았다. 브뤼닝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함으로써 자신이 기대했던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브뤼닝의 장기놀이와 히틀러의 딜레마
  브뤼닝이 여러 정당들과 협상을 벌이는 가운데 히틀러가 어쩔 수 없이 중심인
무로 부상하였다. 어떠한  헌법개정도 그의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이
다. 동시에 이러한  협상들은 그를 극히 위험한 선택의 기로에  세웠다. 그는 '체
제 수호자들'과  공동 전선을 펼체고  이런 방법으로 브뤼닝의  입장을 강화하고 
자신의 과격주의를 부정하든가,  아니면 여러 모로 경건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늙은 대통령, 국민의 구원자이며 대리 황제인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맞서서 선거
전을 치르는 일을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선거전은 당 운동의 성공 신화를 
극히 위태롭게  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서 힌덴부르크에 대한  대립을 노출시킬 
위험이 있었다. 힌덴부르크에게  대립하는 것은 권력에 접근하기  위해서 대통령
의 권한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
하였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브뤼닝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하였지만 룀과 특히 
괴벨스는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괴벨슨느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다. 브뤼닝 씨는 예상할 수 없는  기간 동안 자
신의 지위와  자기 내각을 안정시키려고 한다.  지도자(히틀러)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여러 방향으로 상황이 고려되어야 한다... 권력을 둔 장기게임이 시
작되었다. 어쩌면 한 해가  다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속도, 영리함, 그리고 부
분적으로는 교묘한 방식으로 장기말을 써야하는 한판  승부다. 중요한 점은 우리
가 강자로 남아 있고 절대로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브뤼닝의 장기수를 통해서 운명적인 처지로 끌려들어간 히틀러는 한동안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후겐베르크는 임의의 서투른 거부감으로  제안을 거절하였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망설이고만 있었고, 그가  마침내 내놓은 대답은  의심과 함께 
조심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후겐베르크는 언제나 히틀러의 과격주의  뒤에 숨
어서 끊임없이 상대방을  넘어서려고 애썼다. 히틀러는 과격주의를  도구로 히용
해서 간교한 합리성의  요소와 뒤섞으려는 전략을 쓰고 있었다. 이  두사람의 반
응은 후겐베르크의 지겨운 전략적 판단과 히틀러의 차이점은 뚜렸하게 드러내주
었다. 어쨌든 히틀러는  너무나도 많은 조건들을 붙여서 거절 의사를  밝혔기 때
문에 그것은 협상을  계속해 나가자는 제안처럼 보였다. 그는 대통령과  수상 사
이에 거리감이 생겨난 것을 확실한  본능으로 간파하고 그것을 한 발자국 더 벌
려 놓으려고 애썼다. 요란한 수다를 떨면서 스스로 헌법의 수호자가 자처하였고, 
대통령의 맹세를 수호하려는 듯한  장기적인 전략으로 수상의 계획에 대해서 수
많은 법적인 이의를 내놓곤 하였다.

    출마를 결심하다
  히틀러는 근본적으로는 힌덴부르크에  맞서서 출마하기로 결심을 한 상태였지
만 이 결심을  공표하기까지 몇 주간을 질질 끌었다. 그의  생활철학은 대통령의 
'호의'를 얻는 것이지 그에 맞서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힌텐부
르크 신화에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자신의 부하들보다 더욱 날카
롭게 간파하였다. 
  그러므로 괴벨스와  다른 사람들이 입후보 사실을  공표하라고 그를 졸랐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는 국가 사회당 소속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의 주내무장관 
클라게스의 도움으로  도이치 국적을  취득하라는 제안에는 동의하였다.  그것은 
입후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힌덴무르크는 1918년 11월에  곤경에 처한 
황제를 내버려주었다는 생각에 점점 더 고통을 받았다. 대통령은, 권위ㅣ적인 개
혁을 통해서 영국식 모범에 따른 입헌체제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사회주의 독재위
협을 방어하련느  브뤼닝의 생각을 거부하고 옛날식  군주제의 직접적인 부활을 
고집하였다. 힌덴부르크가 마치매 대통령에 입후보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투표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어야하고,  하르츠부르크 전선을 폐쇄하지 않는다."는  조
건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의 망설임, 결정의 꺼림, 운명적인 상황에서 최
후의 순간에 결정이 저절로 무르잇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성향 등이 이번 경우에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런 성향은 그가  몽유병자의 정확성을 가지고 있
다는 이미지에  대립되는 것이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결정은 이미  오래 전에 
내려져 있었다. 괴벨스의 일기장은  히틀러의 괴로운, 거의 기묘한 변덕을 한 걸
음 한 걸음 보여주고 있다. 

  1932년 1월 9일.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지도자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는 거대
한 수수께끼다. 다만  경탄할 따름이다! 1932년 1월 19일. 지도자와  대통령직 문
제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내가 나누었던 대화들을 보고하였다. 여전히 결정이 내
려지지 않았다. 나는 그 자신이 입후보라하고 열렬히 주장하였다. 진지한 의도에 
보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숫자 계산을 해보았다.  1월 21일. 
이 상황에서는 우리가  후보자를 내세우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힘들
고도 불쾌한 싸움이지만 그래도  이겨내야 한다. 1월 25일. 당은 이제 전투 분위
기로 떨고 있다.  1월 27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위한,  혹은 반대하는 선거구호
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 1
월 29일. 힌덴부르크  위원회가 열리다. 우니른 이제 색깔을  드러내야 한다. 1월 
31일. 지도자의 결정은 수요일에 내려진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월 2일. 
지도자의 입후보 문제가 너무나도 중요해서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낮
에 지도자와  오랫동안 이야기하다. 그는 대통령  선거를 위한 견해를 피력했다. 
스스로 후보직을 수락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우선 상대방이 확정되어야 한다. 
사회민주당이 먼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고  나면 우리의 결정을 공표하기로 
했다. 이것은 유례가 없는 고통의 싸움이다.  그러나 이겨내야 할 싸움이다. 지도
자는 전혀 서두르지  않고 명석한 두뇌도 자신의  장기말을 놓고 있다. 2월 3일. 
관구 지도자들은  대통령 출마 선언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려도 헛일이다. 장기 
놀이판이 벌어져 있다. 어떤  말을 쓸지 미리 말하지는 않는다... 당은 온통 불안 
투성이고, 긴장되어 있지만 그래도  모두들 침묵 속에 기다리고 있다... 지도자는 
여가 시간에 새로운 당사 건물  설계와 수도의 대규모 개축 설계에 몰두하곤 한
다. 그는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전문가
처럼 다루는지 깜짝 놀라게  된다. 밤이면 충실하고 오랜 당원들이 내게로 온다. 
그들은 모두 아직  지도자의 결심을 모르기 때문에 풀죽어 있다.  그들은 지도자
가 너무 오래  기다린다고 걱정한다. 2월 9일.  모든 것이 아직도 불분명한 상태
다. 2월 10일. 바깥은  쨍하니 차가운 겨울 날씨. 맑은 결정들이  맑은 대기 속에 
놓여 있다.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2월  12일. 지도자와 함께 황제궁에서 한 
번 더 숫자들을 계산해보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감행되어야 한다. 결정은 내려졌
다... 지도자는 다시 뮌헨에 있다. 공개 발표는 며칠 연기되다. 2월 13일. 이번 주
에 대통령직에 대한 결심이 나와야 한다. 2월 15일. 이제 우리의 결정을 더 이상 
감출 필요는  없다. 2월 16일. 나는  선거전이 이미 시작된 것처럼  일하고 있다. 
몇 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다.  지도자가 아직도 공식적으로  입후보 선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월 19일. 황제궁 지도자 옆에서.  오랫동안 그와 단둘이 
이야기했다. 결정은 내려졌다.  2월 21일. 영원한 기다림에 거의  녹초가 되고 있
다. 
  다음날 저녁 괴벨스는  베를린 스포츠 궁에 당원대회를 소집하였다.  1월 25일 
그에게 연설금지가  내려진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선거날짜는  그사이 3주 
앞으로 다가와 있었으나 히틀러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이날 낮에 괴벨스는 
'황제궁' 호텔로 갔다.  히틀러에게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연설의 흐름을 알려주
기 위해서였다. 그가 후보  문제를 거론하자 히틀러의 결심을 알려도 좋다는, 거
의 절망적으로  기다려왔던 허락을 받아냈다. "천만다행이다!"라고  쓰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스포츠 궁은 대만원. 서부, 동부, 북부 지역의 당원대회. 처음부터 열광적인 환
영. 내가 한 시간이나 준비의 말을 한  다음 지도자의 입후보를 공식적으로 선언
하자 거의 10분 동안이나  열광의 폭풍이 일어났다. 지도자를 위한 힘찬 선언들. 
사람들은 일어서서 환호하고  외쳤다. 아치형 천장이 무너져내릴 듯했다. 장엄한 
광경.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 움직임이다. 말로 할  수 없는 환희의 열광이 넘쳤
다. 밤늦게 지도자가 전화를 했다. 나는  보고하였다. 그러고나자 그는 우리 집으
로 왔다. 자신의 입후보 선언이 그토록 박수 갈채를 받은 것을 기뻐하였다. 그는 
역시 우리의 지도자다.

  마지막 문장은 괴벨스가 지난  몇주동안 히틀러의 허약함을 보고 너무나 분명
하게 느꼈던  의혹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히틀러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의 하나이듯이 그가 결심을  하고 난 다음에 일에 덤벼든, 
무기력 상태에서 얻어낸 갑작스럽고  격렬한 에너지 또한 그에게 특징적인 것이
었다. 2월 26일에 그는 '황제궁'  호텔의 기념식에서 일주일 동안 브라운슈바이크 
참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럼으로써  도이치 국적을 취득하였다. 다음날 그는 스
포츠궁에서 적수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나는 당신들의 구호를 안다! 당신
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나는 이렇게 외치겠
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무너뜨리겠다'고... 나는 동지들과 함께 할 
수 있으니 어쨌든 행복하다." 그는 개채찍을 휘둘러서 자신을 독일에서 쫓아버리
겠다고 위협한 베를린  시 경찰총장 체진스키의 말을  받았다. "당신은 편안하게 
개채찍으로 내게 협박할  수 있습니다. 이 싸움의 마지막에 채찍이  아직도 당신 
손에 남아있는지 두고봅시다." 동시에 그는  브뤼닝이 자기에게 강요한 힌덴부르
크에 대한 적대감을 피해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위대한 전쟁의 지도자로 도이치 
국민에게 그 이름이 길이 남아야 할' 힌덴부르크  장군께 이렇게 외치는 것이 자
기의무라고 말했다. "어르신, 우리는 어르신을 너무나 존경하기에 우리가  파괴하
려고 하는 자들이 어르신  뒤에 숨는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옆으로 물
러서 보십시오. 그들은 싸움을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싸우고 싶습니다." 괴벨
스는 너무나 행복해서 지도자는 '다시 상황의 꼭대기에' 올라섰다고 적었다.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자들이 그 사이 어느 정도까지 정치적 상황을 장악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그러써 분명해졌다. 힌덴부르크,  공산당 후보 에른스트 텔
만, 시민적인 극우파 후보인 테오도어 뒤스터베르크  등 세명의 후보들이 오래전
부터 이미 선거운동을 벌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싸움은 이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다시금 거칠고 모든  것을 뛰어넘는 
힘을 보여주어다. 돌발적으로 진행되는 행사 활동은  당의 재정 형편이 나아졌다
는 사실을 보여줄 뿐 아니라  선동 지점의 그물망이 점점 더 촘촘하게 짜여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2월에 벌써 괴벨스는  선전부를 베를린으로 이전시키고 선거전
은 '세계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이 될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당의 
엘리트 연설가들이 소집되고,  히틀러 자신이 3우러 1일부터  11일까지 자동차를 
타고 독일을 종횡으로 돌아다니면서약 50만 명을  놓고 연설하였다. 그가 요구하
였던 대로 이  '위대한 스타일의 선동가' 옆에는 '고통 받는  민족의 정열을 채찍
질하는 몰이꾼 부대'가 나란히 섰다. 
  그들의 재치, 현대의 기술적인 매체들을 최초로  종원한 풍부한 아이디어 등이 
모든 경쟁자들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다시 입증하였다. 축음기  음반을 5
만장이나 발송하고, 발성영화를 제작하여  영화관 주인들에게 시작전 프로그램으
로 방영하도록 강요하고, 선거 화보들을 발간하고, 괴벨스가 말한 것처럼 벽보와 
깃발 전쟁을 벌여서 하룻밤 사이 도시나 도시의 일부를 요란한 빨간색으로 도배
하다시피 하였다.  며칠씩이나 종대를  이루어서 화물차량들이 거리를  통과하며 
달렸다. 자동차에는 나부끼는  깃발아애 모자의 턱끈을 내린  돌격대 부대원들이 
서서 노래하거나  아니면 '독일이여 깨어나라!'를 외치곤  하였다. 이토록 요란한 
선전활동은 당 내에 자기 최면술적인 승리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예컨대 당선
축하를 위한  친위대의 술소비를 제한한 히믈러의  명령같은데서 이런 분위기가 
표현되고 있다. 
  상대편에는 이상스럽게도  고독한 브뤼닝의  모습만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에서 요란한 선거 운동을  제한하였다. 사회민주당이 
선거전에 참가하면  그들이 오직 히틀러를 물리치기  위해서 힌덴부르크를 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불쾌감에 
대해서는 힌덴부르크 자신이 응답해 주었다. 그는 딱  한 번 행했던 라디오 방공
연설에서 자기가 '검정-  빨강 연정 (카톨릭 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의  연정)'측 후
보라는 비난을 물리쳐버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모든 전선을 뒤흔들어놓고, 모든 
충성심을 갈라놓은 선거는 힌덴부르크와 히틀러 사이의 싸움이라는 사실이 드러
났다. 선거 전날인  3월 21일에 베를린 <공격>지는 자신감에  넘쳐서 이렇게 말
했다. "내일이면 히틀러가 대통령이 된다."
  
    힌덴부르크의 승리

  그토록 고조된 기대에 대해서 결과는 상당히  충격적인 한방이었다. 그것은 상
당히 인상적인 힌덴부르크의  승리였다. 그는 49.6 퍼센트를 얻어서  30.1 퍼센트
를 얻은  히틀러를 기대 이상으로  따돌렸다. 오토 슈트라서는  승리감에 넘쳐서 
거리에다가 벽보를 붙이도록  했다.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역할을 맡
은 히틀러의 모습을  그린 벽보였다. 그림 아래에는  '대규모 군대는 파괴되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안녕하시다'고 적혀 있었다.  뒤스터 베르크는 6.8퍼센트를 얻었
다. 그이 이러한 페배는 민족주의 진영내  경쟁에서 히틀러에게 유리하게 판정된 
부분이었다. 텔만은 13.2 퍼센트의 표를 얻었다.  수많은 곳에서 국가 사회주의자
들은 갈고리 십자가 기를 절반 내려서 조기 형식으로 게양하였다.
  그러나 힌덴부르크도 헌법에 명시된  대로 절대 다수표를 얻지 못했으므로 재
선거를 해야만 했다. 히틀러가 이 상황에 대처한 모습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당 
내에서는 두려운 좌절감이 퍼졌고  개인에 따라서는 분명히 전망이 없는 2차 선
거를 포기하려는 생각까지 나돌고 있는 판에 히틀런는 전혀 감정의 동요를 보이
지 않고 선거 당일인 3월  13일 저녁에 벌써 당, 돌격대. 친위대, 히틀러 청년대, 
나치 운전기사대 등에게 더욱더 힘찬  새로운 활동을 호소하였다. "1차 선거전은 
끝났습니다. 2차 선거전이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2차전도 제가 직접 지휘하겠습
니다."고 알렸다. 괴벨스가 찬가에서 찬양한 대로 당은 '단 한나의 관현악적인 공
격정신'으로 다시  정비되었다. 그러나 가까운 수행원  한 사람이 늦은 밤시간에 
어두운 집에서 그를 만나보니 그는 침울한  사색에 빠져 있었다. "분수에 넘치게 
돈을 걸었다가 판을 잃은, 실망하고 용기를 잃은 도박꾼 같은 모습"이었다.   

    독일 하늘의 히틀러!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민족 관찰자>에서 용기를 잃은 추종자들을 격려하였
다. "독일이 아직 겪어보지  못한 분노와 가차없는 태도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우리 싸움의 이유는  우리에 맞선 모든 것에 대한  증오다. 이제 용서는 없다. " 
며칠 뒤에  거의 50명의 저명인사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고 나섰다. 귀족들, 장군
들, 함부르크 명문가들,  교수들이었다. 선거날짜는 4월 10일로  잡혔다. 증오, 원
한, 내전 구호들로  무장한 좌우익 과격파의 선동을 억누를 속셈으로  정부는 부
활절이 다가온다는 명목으로  '당쟁 중지령'을 내렸다. 그것은  선거전을 대략 일
주일로 제한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구석으로 몰리면 언제나  그랬듯이 히틀러는 
바로 이러한 제약을 자신의 가장 효과적인  선전술로 바꾸어버렸다. 연설의 재능
을 가능하면  널리 이용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 앞에 직접  나서기 위해서 
그는 자신과 가까운 측근인  슈레크, 샤우프, 브뤼크너, 한프슈텡글, 오토 디트리
히, 하인리히 호프만 등을 위해서 비행기 한 대를 전세냈다.  
 4월 3일에 그는 처음으로 저 유명한  독일 비행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서 참모부에서 조직된  집회를 서너 개씩을 매일 돌았다. 도함  21개 대도시
에 기획된 ㅈㅂ회들이어ㅆ.  그리고 당 선전분느 이 비행 계획을  전설로 만들었
다. 이 비행기 여행은 풍ㅂ나 아이디어, 대담한 현대성, 공격욕,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섬뜩한  인상을 만들어냈다. '독일  하늘의 히틀러!' 가 표어였다.  그 
이중적인 의미는 수맣은 기대와 수많은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자
신ㅇ르 둘러싼 환호성을 보면서 어느 정도 자아도취 상태에서 자기는 신의 도구
이며, 독일이르 해방시키기 위해서 뽑힌 사람이라고 말했다. 예측했던 대로 힌덴
부르크는 선거에서 53퍼센트,  2천만 표를 얻어서 힘들이지 않고  절대 다수표를 
확보하였다. 히늘러도 지난번보다 훨씬  더 많은 표를 얻었다. 1350만 표를 얻어
서 36.7퍼센트를 얻은  것이다. 뒤르터베르크는 아예 입후보하지  않았고, 텔만은 
10포센트 남짓의 표를 얻었을 뿐이었다. 
  같은 날 아직 피로와열기와  승리감에 도취된 분위기에서 히틀러는 14일 뒤로 
다가온 프로이센,  안할트,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함부르크 등지의 지방 의회 
선거전에 돌입하였다. 그것은 다시 주민의 4/5가 참가하는 거의 전국적인 규모의 
선거전이였다. "우리는 한 순간도 수지 않고 곧바로  결정한다."고 괴벨스는 적었
다. 히틀러는 또다시 독일 비행에 나섰다. 8일동안 스물다섯 개 도시에서 연설하
였다. 그의 측근은  한 개인이 만난 사람들  수로는 '세계기록'이라고 허풍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히틀러 개인의 모습은 쉬지 않는 
활동성 뒤로 사라져버렸다. 마치 "우리의 삶  전체가 성공과 권력을 향한 몰이사
냥이다."라는 활동원칙이 앞에 나서서 일을 하고 잇는 것 같았다.
  그럼으고써 이미 알기 어려ㅇ던 이 사람의 개성이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사라
져 없어지고, 전기 기록을 할 수 없게 만든다. 히틀러의 주면은 히틀러라는 현상
에 색깔, 독자성,  인간적 광채 등을 부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헛일이었다. 거의 
어떤 효과든지 다  말들어낼 수 있는 선전술조차도  이 문제에 부딪치면 한계를 
드러냈다. 괴벨스나 오토  디트리히의 일기와 체험담은 그 예를 웅변해  주고 있
다. 어린아이들의 친구, 길 잃은 비행기  속의 정확한 항해사, '절대로 안전한' 거
ㅜ총 사격수,  '빨갱이 무리' 한가운데 정신성  풍부한 두뇌 등의  일화들을 널리 
퍼드려보아도 그것은  삶에 대한 친밀성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감만을 만들어냈
다. 다만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소도구들만 어느 정도 개인적인  윤곽을 마련
해주었다. 레인 코트,  펠트 모자, 가죽 두건,  채찍, 짤막한 콧수염, 이마 옆으로 
쓸어넘긴 머리 등이어싸.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런 소도구
들조차 그의  개성을 오히려 없애버렸다.  괴벨스는 이 시기에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당원들을 사로잡았던, 모듬 개인적 윤곽을  지워버리는 분주함을 이렇게 묘
사하였다. 

  다시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서서, 걸으면서, 차 타고 가면서, 비행기 타고 가
면서도 계속 일이다. 가장  중요한 토론들은 계단이나 집 현관이나 문가에서, 그
리고 정거장으로  가는 차 속에서 이루어진다.  거의 생각할 겨를이  없다. 철도, 
자동차, 비행기로  독일 전국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시작하기 반 시간 전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ㅌ게 어떤 도시에 도착해서, 연단으로 올라가서 연설을 한다... 
연설이 끝나면 마치 옷을  다 입은 채로 뜨거운 온천에서 빠져  나온 꼴이다. 그
래도 다시 자동차에 올라서 두 시간을 달린다...

  성공을 위하여 줄곧 달리기만 하던 이 마지막 2년 반 동안 겨우 몇 번의 상황
만이 히틀러를 비개성적인  모습에서 빠져나오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의 개인적
인 성격에 대한 한 순간의 조명이었다.

    겔리 라우발의 죽음
  독일을 종횡으로 달리는 몰이 사냥중이던 1931년 9월 초에 뉘른베르크를 뒤로 
하고 함부르크 여행하는  중 그는 조카인 겔리  라우발이 왕자섭정 거리에 있는 
집에서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고에  따르면 그는 완전히  놀라서 깊은 
충격을 받고 즉시  방향을 바꾸어 돌아갔다. 모든 증언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그의 생애의 어ㄸ너 사건도 이 사건만큼 그에게  깊은 충격으르 준 것은 없었더, 
여러 주 동안이나 그는 신경발작 상태에 빨져  있었고, 몇 번이나 정치를 그만두
겠다고 결심하였다. 극히 풀죽은 상태로 생명을 끊겠다고  암시를 한 것도 한 번 
이상이었다. 
  그의 불행한 생애의 순간들을 따라 다니는 바닥  없이 추락하는, 모든 것을 내
던져버리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다시 그의 존재의 과도한  긴장상태를 보여주었
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그대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영원히  애쓰는 사람의 
과도ㅇ 긴장이엇다. 그에게서  나온느 에너지는 강인한 인간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이로제에 걸린 인간의 동작인 것이다. 
  위대함은 감정이 없다는 그의 생각에 잘 맞는 일이지만 그는 사람들을 피해서 
여러 날 동안이나  테게른 호숫가에 있는 집에 틀어박혔다. 가까운  측근의 말에 
따르면 나중에도 조카 이야기를 시작하기만하면 그는 이따금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불문율에 따르면 아무도  그녀의 기억을 불러내서는 안 되었다. 죽음의 예
식을 사랑하는 열정적인 기질에 따라서 그는 그녀에 대한 추억돠 과도한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산장에  있는 그녀의 방은 그녀가 남겨두고 떠난  그대로 보
존되었다. 한편  그녀가 쓰러진 채로 발견도니  바닥에는 그녀의 흉상이 놓였다. 
히틀러는 해마다 기일이  되면 이곳으로 찾아와 몇  시간씩 묵상에 잠기곤 하였
다.(조카의 이름을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에 대한 지적은 슈페어가 전해준 
것이다.) 
  히틀러의 인간관계의  빈곤과 감정의 냉정함에 대해서  특별한 배격을 이루는 
과장된 찬양의 요소가  조카의 죽음에 대한 그의  반응을 독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것은 그의  연국적 욕구와 자기 연민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닌 것 같다. 
이 사건은 그의 개인적인 삶의 열소가 되는 사건들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 같
다. 이 사건은 이미 상당히 복잡했던 그의  여성 관계를 항구적인 것으로 고정시
키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현존하는 증언들을 믿을 수 있다면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그에게 여자들은 오
직 보충적이거나 부수적인  역할만하였더. 남자 하숙집니아 뮌헨  맥주집에서 우
연히 어울린 사람들, 방공호, 군대 막사,  유니폼과 남자들 사이의 동료애로 특징
지어지는 정당 활동 등이 그의 세계였다. 이  세계를 보충하는 영역은 비록 혐오
스러운 것이긴 했지만  사창가였다. 그의 힘들고 뻣뻣한 기질로 해서  그나마 몹
시 어렵게 가지는 파렴치하고 일시적인 관계들  뿐이었다. 젊은이들의 우상인 슈
테파니에 대한 애착에서 여자들에 대한 그의 관계의  편협한 특성을 볼 수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여성  혐오자'로 여겨졌다. (여자들 사이에서 전혀 인기가 
없지도 않았던 멘트도 자주 히트럴의 비난을 샀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언제나 수많은  사회적 관계들 속에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그
의 주변에 있었건만 그의 전기에는 무서울 정도로 사람의 모습이 비어있고 개인
적인 관계들이 ㅇ벗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특별히 두려워하였기에, 측근의 표
현에 따르면  그는 언제나 '어떤 여자와의  소문에 휩싸이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게리 라우발의 모습과 더불어  처음으로 이러한 콤플렉스가 좀 느슨해지는 듯 
했다. 그녀는 '알프  삼촌'에 대해서 몽상적이고 처음에는  분명히 아직 어린애다
운 애착을  보엿다. 친척관계라는 사실을  통해서 양식화되지 못한  행동에 대한 
두려움, 정치가다운 자세를 포기할까 하는 두려움, 자신을 폭로하는 행동에 대한 
두려움 등이 어느 정도  줄었던 것 같다. 그래도 겔리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문
제 많은 의식수준에서  나온 것이었다. 열여섯 살 소녀를 집에  받아들였들 때의 
아버지 같은 애착, 그러고  난 다음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 노릇을  하기 전에 애
인으로 삼았지만 여기에는 근친관계의  요소가 남아있었다. 히틀러의 인생행로를 
스쳐간 수많은 여성들, 최초의 운전기사의 동생인  예니 하우크에서 헬레나 한프
슈텡글, 유니티  미트포드를 거쳐서, 그가 오스트리아식으로  '나의 공주님' '나의 
작은 백작 아가씨' '얌전이'  '바람둥이' 라고 친근하게 불렀던 여자들, 그리고  에
바 브라운에 이르기까지 그모든 관계에서 겔리 라우발과의 관계 만큼 중요한 것
은 없었다. 그년느 그의 유일한, 그리고 이런 말이 어울리지 않기는 하지만 어쨌
든 위대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금지의 느낌들, 트리스탄의  분위기, 비극적인 감
상으로 가득찬 관계였다. 
  더욱 특이한 것은 그가  언제나 능숙하게 사용한 심리적인 직감에도 불구하고 
아직 균형감각 없고 충동적인 젊은 아가씨의 분제적인 상황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 증엉네 따르면 이  자살은 삼촌과의 관계가 참을 수 
없게 도니데서  벗어나련느 절망적인 탈줄  행동이었던 듯 하다.  어떤 사람들은 
변태적인 히틀러가 어느 정도 뒤틀린 태도로 부추긴 끝에 소녀가 자살한 것이라
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일부는 둘  사이에 성적인 접촉 자체를 의문시하
기도 한다. 장화 신은  인물 히틀러에 대한 조카의 무분별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히틀러가 조카와 함께 있으면서 정치적인 의무를 멀리 한다는  뷔르템베르크 관
구 지도자 문더의 불평이 그의  해임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삼촌의 명성
을 즐렸고, 그의 스타 의식을 나누어 가졌을 것이라는 것만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이나 함께 몽상하고,  오페라를 즐기고, 시골 소풍, 카페를 
돌아 다니는 즐거움 등을 함께  맛보던 이 관계는 점차 숨막히는 관계로 변화되
어 갔다. 히틀러의  어두운 측면들, 곧 그의 질투심, 끊임없이  나오는 지나친 요
구들, 예컨대  별 재능 없고 야심도  없는 어린 조카를 유명한  음악 선생들에게 
보내서 그녀를 바그너 오페라의 여주인고으로 만들려고  하는 식의 요구들, 그리
고 끊임없는 간섭  등은 그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가능성을  제한하였다. 히틀
러의 주변에서 나온 말에 따르면 함부르크로 떠나기 직전에 격렬한 싸움이 있었
다고 한다. 소녀가 얼마 동안 빈에 가겠다고 말한 데서 시작된 싸움이었다. 모든 
증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뒤엉키고 전혀 출구가 없어 보인느 상황이 
마침내 그녀를 자살로 몰아간 것이었다. 정치적  상대 진영에서 나와서 일시적으
로 떠돈 소문들은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그들은  소녀가 히틀러의 아이를 임신
해서 거ㅜ총 자살을  했다고 비방하였다. 혹은 히틀러 자신이 살해의  책임이 있
다, 게리  라우발이 ㅣ삼촌에게 역사적  사명을 못하도록 말려서  친위대가 비밀 
처형해버렸다는 등의  소문이었더. 히틀러는 때로  이 '끔찍한  더러움'이 자신을 
파괴하였다고 탄식하고, 이 몇 주 동안 이런  소문을 퍼뜨린 적들을 절대로 용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두운 태도로  말했다.(겔리가 어떤 린츠 출신 유대인 미술
선생의 아이를 임신했던 사건을 보고하고 있다.  한프슈텡글은 겔리의 시체가 코
뼈가 부서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고도  말하고 있으나 그에 대한 증거자룐느 거
론하지 않았다. 이  질문에 대해서 한프슈탱글은 필자에게 이 사건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잇었다고 설명했다.)

    치정살인 같은 연설
  그는 정신을 되찾자 곧바로  함부르크로 가서 수천명이 환호하는 가운데 자극
적인 연설을 했다 이런 연설이 진행될 때면 청중은 집단적인 황홀경에 빠져들었
다. 제약에서 벗어난 순간, 위대한 기쁨의  순간을 갈망하였다. 그러한 순간은 군
중의 날카로운 외침으로 드러나곤 하였다. 전체적인  맥락이 너무나 분명해서 그 
흐름을 놓칠 수  없을 정도다. 히틀러 연설의 승리는 공허하게  끝나는 성행위를 
대체한다고 해석 할 수 있다. 더욱 깊은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히틀러는 곧
잘 대중을 '계집'에 비유하곤 하였다. <나의 투쟁>의 해당 페이지를 잠깐 들여다
보기만 해도  인간관계가 결핍된 이  고독한 청중을 굽어보면서,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 분명해진다. 
  <나의 투쟁>에는 대중의  표상이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철저히 에로틱한 열정
이 아주 특이한  문체상의 자유를 만들어내고 있다.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 말투
로 그는 대중을 자신의 '유일한 신부'라고  부른다. 연설을 통새서 느끼는 저항할 
길 없는 사정의 욕구는 똑같은 기분을 느끼는 대중을 찾아냄으로써 적잖은 자극
을 받았다. 지속적인 곤궁에 지쳐서 몇  가지 기본적인 욕구들만으로 움츠러들어 
있던 대중은 이제 그의 연설을 듣고  '충동적인'반응을 해오는 것이다. 당시의 실
황녹음은 이러한 행사들이 가진 독특한 성적 교접의 특성을 분명하게 들려준다.
  시작 부분의 숨이  멎을 듯한 정적, 그러다가 대중의 짧막하고  날카로운 외침
들, 흥분의 고조,  최초의 해방의 외침, 그러다가  마침내 어지러운 소란, 새로운 
흥분,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연설의  오르가슴을 느끼며 내지르는 황홀경의 
신음소리.
  르네 시켈레 같은 시인은 때로 히틀러의 연설이 '치정 살인 같다'고 말하곤 했
다. 그리고 수많은 다른 관찰자들도 이  행사들의 날카롭고 감각적으로 달아오른 
분위기를 발푸르기스 밤과 마녀들의  무도장 같은 용어를 써써 표현하려고 하였
다.



================================== 09
    선동꾼 의식
  물론 연설가 히틀러의 성공 이유를 충동적이고 성적인 대용 효과를 노린 황홀
경만으로 설명하려는 사람은  실망하게 마련이다. 그의 특징인  도취상태와 합리
성이 여기서도  뒤섞여 이ㅆ. 무대 조명을  받으며 몸짓을 하고,  창백한 모습에, 
거칠고도 낭랑한 음성으로, 미난, 외침, 증오의  수다를 터뜨리는 그의 언제나 자
기 감정을  냉정하게 통제하는 사람이었고,  그 모든 경솔함  가운데서도 자신의 
본능에 일정한 방법을  부여한느 것을 방해받이 않앗다. 그것은 그의  모든 행동 
방식을 특징짓는 이중성이었다. 그 이중성이야말로 그의 성격의 기본사항이었다. 
이런 점에서 연설  기술은 합법화 전략과 같은  것이며, 뒷날 권력 쟁취의 방법, 
혹은 외교상의 조작술과  같은 것이다. 그가 세웠던 정거ㅜ 자체도  이러한 모습
을 띤 것이었고, 바로 그렇기에 '이중 국가'라고 정의되었던 것이다. 
  계획적으로 훈련된 심리적인 제압기술의  합리성, 광범위하게 확대된 기술살의 
도구들, 이런 것이 이  시기의 성공을 초기의 성공과 구분해주는 점들이다. 히틀
러의 성공은 언제나 그가  극단적인 한계까지 밀고나간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정상으로만 과격해진 것이  아니라 계산을 하는데 있어서
도 더욱 과격해졌다. 
  1920년 8월의 어떤 연설에서 이미 그는, 명료한 인식의 근거에서 '본능적인 것
을 일깨우고 채찍질하고 선동하는  것'(브라이팅레게 히틀러는 1931년 초에 이렇
게 말했다. "정신적인 싸움은 신념으로만이  아니라 이성으로도 이루어지는 법이
다. 대중에게  우리는 신념의 감정을  향해 호소해야 하지만  우리 지도부에서는 
신념을 논할 자리가 업삳. 모든 것은 냉정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을 자신의 의
무로 삼았다. 그 뒤에는  이미 그 자신의 대중적 성공의 비밀에  대한 개념이 숨
어있었다. 그러나  곧 세계 경제 공황이라는  비할 바 없이 예민한  조건 아래서 
이러한 통찰력은 그의 선동  스타일에 냉정하게 계삭해서 적용된느 방법을 만들
어내었다. 그것은 그가  모든 선전의 목적이라고 부른  심리적 '항복'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괴벨스에 따르면 선거전을 계획하면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항
목을 '가장  세부넉인 데 이르기까지 조직'하고  아무것도 우연에 내맡기지 않았
다. 노선, 투입되는 행진, 집회의 크기,  청중의 정확한 혼합 상태, 긴장을 고조시
키기 이ㅜ해서 깃발 펼치기, 행진곡 리듬, 열광적으로 외친느 하일 외침 소리 등
을 연출함녀서 연사의 등장을  언제나 일부러 늦추다가 갑자기 타오르는 조명을 
받은 연사가 목말라 애태우며 현기증을  느낄 준비가 된 대중 앞으로 나서는 것
이다. 
  어젠가 당의 초기 시절에 히틀러는 오전에  집회를 계호기하였다. 홀에 사람이 
가득 찼는데도 불구하고 이 청중들과 "매우 불행하게 전혀 어떤 결합도, 작은 접
촉도"이루지 못했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 행사는  모두 저녁 시간으로 잡았다. 
독일 비행의 기간에도 그는 가능한 한 이  원칙을 지켰다. 그렇지 않아도 밀집된 
행사를 저녁 시간으로 모으는 일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들어냈다. 그
래서 슈트랄준트에 갔을 때처럼 때때로 그는 늦게 도착해서 새벽 두시 반뎡에야 
겨우 모습을 나타낸  경우도 있었다. 4만 명의 청중은 거의  일곱 시간을 기다렸
다. 그가 연설을 끝내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시간처럼 공간에 대해서도 그
는 특별한 의미를  두었다. <ㅎ파르시팔> 공연이 이루어지는  동안 어두운 바이
로이트 축제  극장의 '신비스런 마법'이나  '카톨릭 교회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그러나 신비스런 어둠'은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방해'하려  하는 선전꾼의 의도
를 한결 쉽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사고의 차단
  그는 간혹 자신의 인식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러나 진실로 그런 모든 행사는 두 개의  대립하는 힘의 싸움을 표혀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그의 생각에 따름면 모든 싸움에 어울리는 것이지만  선동꾼에게는 
모든 제압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혀옹되어 있다. '사고의 차단' '최면상태'  '광
신적 헌신에 의한 수용상태'를  만들어내야 한다. 공간, 시간, 행진곡, 조명,  대중 
집회 등이 심리기술적인  투쟁의 수단이다. 히틀러는 해설하듯이  이렇게 설명하
엿다. 한 개인이  "스스로 작은 존재라고 느끼던  일터나 대기업에서 빠져나와서 
처음으로 대규모 행사장에 들어서서 자기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수천 명의 사람
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보면, 무엇인가를 갈구하면서  이 최면 상태, 열광상태의 
강력한 효과 속으로 다른 3,4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휩쓸려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성공, 수천명의 공감이 이  새로운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그에게 말해주면, 그리
고 청므으로 이제까지  믿어온 것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는 벌써 우리가 
대중 최면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의 마법과 같은 영향에 굴복한  것이다. 의지
력과 동경, 그리고 다른  수천 명의 힘이 각각의 개인 속에  누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의심하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이런 집회장에  들어온 사람은 내면의 확신을 
가진 상태로 집회장을 떠나게 된다. 근느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이다. "
  그는 '모든 인간적 약점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자신의 발상법과 선동의 원칙들
에 '수학적' 성공의  확실성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두 번째  독일 비행을 하
는 동안 괴를리츠에서 연설을 하고 나서 조명을 받은 비행기가 밤하늘에서 수천 
명의 머리 위를 선회하는 비행이 만들어낸 효과를 발견한 다음부터는 언제나 이 
방법을 다시 사용하곤 하였다. 헌신과 지도자에  대한 동격의 분위기를 만들어내
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그는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당 운동을  우해서 피의 증인들과 순교자를 베풀어주신 전능
자의 은총을  찬양하였다. 1차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다음에 그는  당 기관지를 
향해 "지루하고, 천편일률적이고,  자율적이자 못하고, 미지근하고 정열이  없다."
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돌격대원들의 죽음에서 무엇을  만들어냈는가 질
문했다. 어떤 참석자가 그의  말을 기억한 것에 따르면, 자시들은 죽은 동지들을 
"북치고 피리 불며 파묻었다.  그런데 어째서 깨진 두 개골, 칼로 ㅉ긴 피투성이 
셔츠 등을 당 기관지의 진열창에 내놓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는가? 어째서 
이 신문들은  그 멍청한 정치적 헛소리를  떠드는 대신, 죽은 사람들의  관 옆에 
몰려든 민중을 선동하고,  살인자와 그 조종자들에 대하여  반항하도록 부추기지 
않았던가? 장갑 순양함 포템킨의 선원들은 나쁜 음식물에 대한 반감으로 혁명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우리는 동지들의 죽음을  가지고 국민적 해방  전쟁을 만들 
수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모든 생각들, 그의 모든 심리적인  정열은 언제나 다시 대중 집회
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것은 "작고 가여운 인간에게 작은 벌레가 거대한 용의 한 
부분이 된 것 간은  자부심에 찬 신념을 만들어낸다. 그 용의  빛나는 숨결 아래
서 증오스런 시민세계는 불꽃  속으로 날아가버릴 것"이라고 했다.(이 발언은 물
론 히틀러의 수많은 전략적  인식들이 그렇듯이 마르크스주의 적을 향산 것이었
다. 그러나 이것은 말솜씨였을  뿐이다.) 전략적이고 제의적인, 언젠나 똑같은 질
서를 행사진행의  바탕에 깔았다. 점점  더 효과적으로 자신의  출현을 드높이기 
위해서 그  질서를 이용하였다. 깃발, 행진곡의  박자. 기대에 찬  외침이 대중을 
점점 더 자극적인 불안으로 몰아넣는 동안 그  자신의 극도로 예민한 상태로, 쉬
지 않고 광천수를 마시면서  호텔 방안이나, 당 사무소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짧
은 간격으로 홀  분위기를 보고받았다. 이따금 그는 마지막 지시를  내리거나 악
센트를 담은  전달문으 ㄹ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드물지 않게  대중의 초조감이 
가라앉고 인위적으로 드높인 발작적인 분위기가 마비되려고 할 때쯤에야 일어서
곤 하였다. 

    자기최면
  그는 긴장을 높이는  긴 과정을 생각하고, 완전히 뒤에서 부터  연단에 등장하
곤 하였다. '바덴바일 행진곡'을  독자적인, 오직 자신만을 위한 입장음악으로 삼
았다. 그 음악이  멀리서 그의 입장을 알리며 울리면 속삭임이  가라앉고 사람들
은 팔을 쳐들고  허공을 향하여 외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증  의미를 이용
하여 행복한 존재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다. '그'가 나타나 것이다. 당시의 수많은 
영상들은 그가 발을 구러며  흐느끼는 사람들의 울타리 사이로 조명등을 받으면
서 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괴벨스가 적은대로 "살아있는  사람들로 이루어
진... 개선의  길을 통과하여" 등장하는 모습니다.  앞에는 드물지 않게  여자들이 
있고, 그 자신은 고독하고, 폐쇄되고, 영적  유린을 향한 욕망으로 도취된 모습니
다. 그는 자기 개인만  쓰는 도입연설아나 인사말을 거부하였다. 그는 연단에 서
서 한순간 기계쩍으로  손을 흔들면서 넋나간 모습으로, 쉬지 않고  눈길을 움직
이면서 대중의 회침 속에서 나타난 힘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고 밀려 올라가려고 
한다. 
  자주 몇 분  동안의 참을 수 없을 정도까지  집중을 위한 정적이 계속되고 난 
다음 최초의 말이 둔하게 쓰다듬듯이 정적  속으로 퍼져나간다. 시작부분은 단조
롭고 진부하고, 대개는  초기 시절의 전설들에 관한  것이다. "내가 1918년 이름 
없는 병사였을 때... "이런 시작은 그가  후각을 곤두세우고 스스로 조율할 수 있
도록 도와준다.  그러다가 누군가 내지르는 외침이  그에게 영감을 준다. 하나의 
답변, 날카로운 언급이  나오면 열렬히 기다리던 최초의  박수갈채가 터져나오고 
그것은 상호접촉을 마련해 준다. 
  그는 격양되어 도취상태에  빠저들고, 어떤 관찰자가 언급한  것처럼 "약 15분 
쯤 지나면 옛날의 어ㅜ시적인 비유를  이용해서 표현 할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난
다. 즉 정령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거칠고 폭발적인 움직임과 함께 쇳
소리로 변한 음성이 가차없이 절정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그는 말들은 마구잡이
로 토해낸다. 귀신을 부르듯 열광에 사로잡혀서  두주먹을 얼굴 위로 치켜올리고 
눈을 감고 대체 성행위의 흥분 상태에 완전히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그의 연설은 조심스럽게 준비된 것이고, 언제나  앞에 놓여있는 메모를 철저하
게 지키는 편이지만  근본적으로 대중과의 긴밀한 의사소통  속에서 이루어졌다. 
일시적으로 그의 추종자 노릇을 했던  어떤 사람의 눈에는 마치 그가 청중의 감
각을 호흡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런 비상한 민감성을 그의 주
변에 확실한 여성적 후광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민감성은 청중과의 밀교적인 결
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청중은 성서의 의미로 '그를 보고  자신을 아는' 것
이다. 그가 대중의  가장 비밀스런 움직임을 함께 나누고 그들의  혼란스런 상태
를 모범적인 방식으로 자기 안에 지니지 않았더라면, 심리적인 예민함도, 집회를 
연출하는 합리성도  그에게 그토록 엄청난  마법의 힘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중은 그의 연단  앞에서 만나 자신을 축하하고 자신을 숭배하였다.  그것은 병
적인 만남이엇고, 도취된  억압의 축제에서 개인적 위기의식과  집단적 위기의식
의 한판 만남이었다. 
  그러므로 히틀러는 어떤 집회에서나  그 집회가 듣고 싶어하는 것만을 말하였
으며, 진짜 내용은 극히 표피적으로만 건드렸다는, 언제나 되풀이된느 주장이 정
확한 것이다. 근느 기회주ㅇ거인 대중적 말재주꾼이  아니라  제압, 공포, 증오란
느 수많은 감정들을  위한 입이엇다. 근느 그러한 감정들을 하나로  통합해서 정
치적 동력으로 바꾸었다. 
  미국인 기자 니커보커는 뮌헨의 대중집회가 끝난 다음 이렇게 표현하였다. "히
틀러는 혼란스럼게 이야기했다.  그는 거대한 집회에서 설교한느 전도사였다. 도
이치 정계의 빌리  선데이(미국의 야구 선수, 복음 설교가)다. 그가  개종시킨 사
람들은 그와 함께 가고 그와 함께 웃고 그와  함께 느꼈다. 그들은 그와 함께 프
랑스 사람들을 비웃었다.  그와 함께 공화국에 야유를 보냇다. "그러한  결합에서 
그는 "자신의 노이로제를 일반적  진리로체험하고, 집단 노이로제를 자신의 강박
관념에 대한 공명의 근거로 삼았다. "그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토록 자신의 성
과에 매달렸다. 연설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박수 갈채가 필요하였다. 
홀 안에  한 줄기 반대의 분위기만  있어도 방해 받았다. 처음부터  그가 어디에 
등장하든지 항상 데리고 다녔던 돌격대는 질서를 유지한느 역할만을 한 것이 아
니라 모든 반대와 저항의 느낌을 숨죽이게 만들고 협박을 통해서 환호성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히틀러는 불친절한 청중을  만나면 곧바로 연설의 실마
리를 잃어버리고, 연설을 중단하고 즉석에서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는 보고가 여
러개나 된다. 
  그는 극히 전통적인 의미에서 대중의 환호성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환호성
은 그를 일깨우고, 그를  긴장상태로 잡아두고, 계속 앞으로 나가게 했기 때문이
다. 그는 이런 소란의 한가운데서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역사가 칼 알렉산더 폰 뭘러는 자신의 교욱과정에 참가했던 히틀러의 초기 연
설을 보고, 그가 청중들에게  흥분을 전달하고, 청중의 흥분이 그에게 다시 목소
리를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앗다. 물론 그는 탁월한 전략가이고, 유능한 권력 조직
자이며, 정확한 심리학자엿다. 온갖  단절, 빈자리, 열등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엇
지만 당시늬 비상한 공공  현상의 하나였다. 그를 온갖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저 
이겨내기 어려운 천재성을 그는 대중과의 결함에서  얻었다. 평범한 것을 강력한 
예언적인 구상으로 끌어올리고, 자신을 지도자로 변화시켰다. 일상적인 상태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것은 그에게 언제나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기본상태
는 무감동이고, '오스트리아식의' 피로감에  물든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 모든 
게으름, 칼튼 찻집의 '즐거운  과부'와 초콜릿 케이크, 혹은 끝도 없는 건축 이야
기 등으로 만족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둘러싼 대중의  시끌벅적한 혼동이
야말로 그에게  저 영원한 의지의  행동을 위한 충동력을  부여하였다. 의지력은 
그에게 행동의 기쁨,  지속성, 확고한 공격성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 시끌벅적한 
혼란 상태는 그가 쉬지 않고 필요로 하는 마약이었다. 
  1931년 10월 초에 처음으로 브뤼닝과 비공식적으로 만났을 때 그는 수상의 자
세한 설명이 끝난  다음에 한 시간동안이나 말을  계속했는데 말하는 동안 점점 
더 격렬해지고 거침  없는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미리 돌격대에게  일정한 간격
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창 밑으로 행진해 가라고  명령을 해놓고 그들의 소리에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므뤼닝의  마음을 혼란시키고 자신의 마음
을 충전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대중의 추종동기
  히틀러를 효과적인 선동가  이상으로 만드로, 예를 들면 요점을 잘  찍어서 사
람들을 휩쓸어가는 괴벨스에 비해서  확실하게 우위를 확보해준 것은 바로 대중
과의 이런 깊은 결합이었다. 선거 유세를  위해서 비행기를 이용하겠다는 발상은 
이러한 배경에 놓고 보아야만  그 재치를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등장하는 곳
마다 메시아적인 빛을 던졌따. 히틀러는 여러 시간이나 끈질기게 기다린, 부글부
글 끓어오르고 있는 대중  위에 구원자처럼 내려와서 그들을 둔감과 절망감에서 
끌어내어, 그 자신이 표현한 대로 '앞으로 밀어주는 히스테리'로 데려갔다. 
  괴벨스느 이런 집회를 '우리의 정치적  작업의 예배의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어떤 함부르크의ㅣ여고사느 1932년  4월에 12만명이 모인 선거유세장을 찾은 다
음에 히틀러가 "도움을  주는 사람, 구원자의 모습으로, 지나치게 커진  곤궁에서 
해방시키는 사람"으로  등장했을 때의, '사람을 사로잡는  경건성'을 서술하고 있
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동생인 엘리자베트  푀르스터 니체는 히틀러가 바
이마르를 방문한 다음  그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사람이
라는 인상'을 받앗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게  하고, 그의 승리의 상승을 가능케 했던  것은 이념
적 요소들이 아니라  이런 형이상학적인 특징들이었다. 히틀러의  대중적인 성공
은 무엇보다도 종교심리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신념이라기보다는 오히
려 영적 상태로 보였다. 
  히틀러는 분명히 전통적인 사고와  반응방식의 확장된 체계와 결합할 줄도 알
고 있었다. 즉  권위에 대한 도이치의 애착, 비현실적인 사고  형성의 경향과, 깊
은 복종의 필요성, 정치에  대한 독특한 무관심 등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일반적
인 접속 지점의  바로 뒤에서 벌써 일체감은 대개 끝나게  마련이었다. 히틀러의 
증오와 구호에 공명한  것은 무시무시한 도이치의 반유대주의ㅣ가  아니었다. 그
는 다만 눈에  보이는 적이라는 공격대상을 다시 붙잡은 것뿐이다.  그가 모아들
인 것은 아주 독특한 도이치 사람들의 전투정신이 아니라 오랫동안 무시되어 온 
자기 존경, 민족적 자존의 감정이었다. 대중은 그가 제약없ㄴ느 제국주의적 욕구
를 우크라이나  평원의 모습들로 유혹하였기  때문에 그를 따른  것이 아니였다. 
역사에 다시 동참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그를 따랐다. <나의 투쟁>이 엄청난 
부수로 발행되엇지만  실제로 그것을 읽은 극소수의  독자층은 히트럴의 구체적 
강령에 나타나는, 이념에 대한 지속적인 무관심을 지적하곤 하였다. 
  사람들이 종종 회고하듯이 국가사회당의 상승과 권력 획득은 제국주의와 반유
대주의라는 목적을 내걸고 도이치 사람들이 세계에  대항한 음모가 아니었다. 대
중 동어ㅜ 시적의 히틀러의 연설을 특이할  정도로 구체적인 의도표명이 적었다. 
그리고 그의  이념적인 고정 지점인 반유대주의와  생존공간에 대해서도 이상할 
정도로 소홀히 취급된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공허하고 일반적인 주제, 세계
관과 무관한 은유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잡히는 목표라는 점에서 그의 
연설들은 <나의 투쟁>의  공개적인 태도에 훨씬 못미치는  것이엇다. 히틀러 자
신이 2차 세계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위기 한가운데
서, 자신이  여러해동안이나 무해정책을 펼쳤다고  고백하였다. 상황이 자신에게 
평화의지라는 가면을 쓰도록 강요하였다고 밝혔다. (1938년 10월 10일자 국내 언
론계의 주간들에게 행한 히틀러의  연설. 골드 만은 때때로, 1930년 선거들을 위
한 히틀러의 선언은  빽빽하게 인쇄된 13쪽에 국가  사회주의 관점에서 본 온갖 
적들과 배신자들을 차례로 나열하고 있지만 단 한마디로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이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곤 하였다.)
  위대한 연설가의 자의식을 가지고  그는 점점 더 내용과 구체적인 개념성으로
부터 자유롭게 되고  형식에 치중하였다. 지속적인 성공은  국가사회주의가 얼마
나 카리스마적인 운동이고, 얼마나 이념적이지 않은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강령이 아니라  지도자를 바라보는 운동이었다. 지도자를  통해서 비로
소 불명확한 이념 혼합이 윤곽과 맥락을 얻었다.  그는 이념이 둔하고 혼합된 상
태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이 따르는 것은 음조이고, 최면
을 거는 음성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남아잇는  동경과 주도적인 꿈들을 분명하
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에게 환호성을  올린 사람들 다수는 그의  연단 앞에서 
자기들의 피로와 자기들의  공포를 잊으려고 했다. 민스크나  키에브를 생각하지 
않앗고, 분명히  아우슈비츠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다수는 무엇보다도 상황이 
달라지기를 바랐다. 정치적인  고백은 현존하는 것의 맹목적인  거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구호와 표어들
  좌우익의 모든 경쟁자들보다 허ㅜ씬 날카롭게 히틀러는 이러한 부정의 심리에 
들어 있는 가능성들을 인식하였다. 그의 선동가적인 전략은 중상과 전망, 현실에 
대한 증오스런  트집잡기, 그리고 강력한 미래의  약속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강한 국가  찬양, 국민 추켜올리기, 민족의  재탄생요구, 정치적인 행동의 
자유 등이었다. 특별히  그는 도이치 통일의 필요선을  역설하엿고, 국민의 '자기
해체'를 탄식하였다. 계급투쟁을 '열등한 자들의 종교'라고 부르고, 구각 사회주의 
운동을 '국민의 가교'라고  불렀다. 그리고 도이치 사람들이  언젠가 다시 세계의 
'문화 비료'가 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일깨웠다. 
  자기 흥분과 대중 동원의 수단이 되는 그의 본래 주제는 현실의 평가절하하였
다. '독일의 폐허',  국민의 비참, 공산주의의 위험,  '정당국가의 반자연적인 음탕
함' '소규모 저축자의 비극', 배고픔,  실업, 자살 등이었다. 일부러 일반적인 형식
을 취한 비참의 서술은 그의대중적인 성공의 가장 큰 공통 분모를 마련해주었던 
것만이 아니다. 히틀러는 또한 정확한 의도표명이  정당의 내적인 분열을 일으키
며, 목표를  불확실하게 해야만 정당  운동의 추진력이 오히려  커진단느 사실을 
인식하였다. 대중,  그리고 최종적으로 권력은 현실의  가장 과격한 부인을 가장 
불명확한 미래의 약속과  결부시키는 사람들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특이하고도 수없이 변화해온 상과  대립상, 저주와 유토피아를 결합시켰
다. "우리 민족이 서른  개 당으로 찢어져 있다면, 그리고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면 그것이 도이치일까요? 이  모든 슬픈 정치갇르에게 나는 아ㄹ게 말하고 싶군
요. '독일은 단  하나의 정당이 되어야 한다, 영웅적인 위대한  민족의 정당이 되
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동시에 현존하는 것에 대한  엄격하고 선동적인 구호는 단순화의 기회를 그에
게 주었다. 그는 이러한 단순화가 바로 자신의  성공의 이유이며 나아가 자기 원
치ㅣ의 확실한 확인이라고  보았다. "모든 선전은 민속적으로 되어야 하며,  선전
의 정신적 수준은 가장 능력이 제한된  사람의 숭요능력에 맞추어야 한다."는 원
칙이었다.
  1932년 3월의  연설에서 나온 한 구절이  하나의 예를 보여준다.  이 연설에서 
그는 이 정권이  13년이나 유지되었으면서 오직 '파국의 결과들'만을 민들어냈다
고 비난하였다. 

  혁명의 시절에 시작하여  질곡과 노예의 시절까지, 조약들과  비상사태의 시대
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실수에 실수, 붕괴에 붕괴, 비참에 비참이 쌓이는 것을 보
았으며, 낙담과 무기력,  희망 없음이 파국의 이정표였습니다...  농부들의 상태는 
오늘날 바닥까지 떨어졌고  생업으 붕괴되고 수백만이 저축한  돈을 잃어버렸고, 
이전에 위대하였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
이라면, 이 불행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과 정당들입니다. 그들으 오늘
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되풀이되고 변조된, 너무나도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러한 고발
형식들, 저항을 부채질하는 구호들, 조국, 명예, 위대함, 권력, 복수 등 애매한  처
방들을 가지고 그는  대중의 힘을 한데 모았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고발하면서 
만들어내는 혼돈을 감정의 흥분이 지속적을 부추기도록  신경을 썼다. 그리고 현
존하는 사정을 파괴하는  모든 것을 다 이용하였다. 현존하는 체제에서  모든 역
동성이 발전해 나와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
무도 변화에 대한 점점 더 커지는 욕구를 그보다 더 믿음직하고, 확고하고, 대중
적으로 요약해낸  사람은 없었다. 1932년  초에 베를린을 방문하고  나서 헤럴드 
니콜슨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절망해서ㅓ  '대안처럼 보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정도'라고 일기에 적었다. 
  사회적인 추진력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히틀런의 불확실한 선동은,  모든 사회
적인 갈등을 넘어서  대립들을 말로 덮어싸야 할 처지로 그를  몰고갔다. 베를린
의 프리드리히 숲에서 자정에  행해진 히틀러의 연설에 대해서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거기에는 모든  사회 하ㅌ민들이 모였다. 그들은 지도자의 연설에  완전
히 감동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주 잘 나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중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어마이스터라는 교수는 그를 '도이치 예술가
들의 후보자'로  추천하였고, '인간을 사로잡는  그의 연설기술의 심정의 소리'를 
찬양하였다. 
  지방 연합 지도자들과  국경 지방의 귀족 지도자들  앞에서 히틀러가 두 시간 
동안 위기, 이익, 사회적  갈등 등을 다룬 연설을 하고 났을  때 어떤 지주는 '모
두의 이름으로'토론을 하지 말자고 제안하였다. "방금 들은 것을 머리 속에서 신
성하게 만들어야 할 시간에  다른 것으로 방해 받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했
다. 히틀러는 자신의 연설을 충심으로 받아들여  줄 것을 요구하면서 회의론자들
과는 "세계를 정복할  수 없으며, 하늘 나라도, 한  국가도 기습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댔다. 
   그의 표어들, 정충적인 철학  나부랭이, 날카롭게 기초를 만든 감정들을 긁어
보아 놓으면 누구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거기서 찾아낼 수  있었다. 두려워하
는 시민층은 질서와 사회적 세력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혁면적인 젊은 세대는 
새롭고 낭만적인 사회의 수강을,  도덕을 잊은 노동자 계층은 안전과 빵을, 십만 
군대는 경려과 화려한  제복의 전망을 얻었다. 지식인들은 이성 경시과  생의 우
상화라는 유행하는 분위기에 대한 대담하고 생생한  답변을 얻었다. 이러한 다양
성은 사방을 향한 거짓말보다는 오히려 비정치적인 기본음조를 잡아내는 능력에 
기초한 것이다. 나폴레옹처럼 그는 누구라도 자신의 그물 속으로 들어오면, 자기
가 권력을 장악하는 날 그 어떤 희망이라도  자신의 그물 속으로 들어오면, 자기
가 권력을 장악하는 날 그  어떤 희망이라도 걸지 않을 계층은 없다고 말 할 수 
있었다. 
  1932년은 의심의 여지 없이 히틀러가 연설가로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시기였
다.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에 따르면 그보다 이전 시기에  개별적인 집회에서는 
더욱 풍부하고, 믿음이 가는 연설을 했으며,  뒷날 수상시절, 완전히 제의적인 대
중집회에서 거의 측량할  수도 없이 수많은 대중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러나 구
원의 열망, 자신의 카리스마적인  전향력에 대한 의식, 하나의 ㅣ목적을 향한 극
단적인 긴장,  고통스런 비참의 배경을  앞에 놓고 자신이  선택받았단느 믿음이 
그토록 '연금술적인' 결합 상태에 이른 것은  없었다. 히틀러에게 이 시기는 깊은 
인상을 새겨넣는 원초적 체험의 시기였다. 그것은  언제나 되풀이해서 그의 결정
에 영향을 미쳤다. '영웅 서사시' '싸워서 극복해낸 지옥',  혹은 '거인들간의 싸움'
이라고 찬양되는 '투쟁시기'의 신화 속에 이러한 감정이 살아남았다.(히틀러가 전
쟁중에도 특히 두 번째 국면에서 후퇴를 앞에 놓고 이 투쟁 시절에서 어느 정도
의정보와 자신간을 얻었던가 하는 것은 뚜렸하게 나타나고 잇다.) 
  집회의 결말부분은 조심스럽게  계산된 시작부분의 제의 의식과  잘 어울렸다. 
악단은 소란과 환호성  사이로 독일 노래나 당 찬가 하나를  연주하였다. 그것은 
종결과 동감의 인상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히틀러가 전신을 땀으로  흠뻑 적신 
채 아직도 마비되고 긴장돤 모습으로 그 장소를 떠나서 기다린느 자동차에 올라
탈 때까지 모여든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역할도  하였다. 그는 대중이 모려들거나 
돌격대나 친위대가 넓은  종대를 이루어 횃불 행진을  하는 동안 운전기사 옆에 
서서 인사하고, 기계적으로 미소짓곤 하였다. 그는 피곤하고 힘이 빠지고 탈진한 
채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위대한 대중연설을 한 다음 집회의  과도한 분위기를 
마무리 짓는 어지러운  감정 탐닉에 빠진 상태였다. 이러한 순간에  그가 조용하
게 초점 없는 눈길로 멍하니  앞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어떤 관찰자에게 
부관인 브뤼크너가 길을  막아서면서 "그분을 놔두십쇼. 완전히 지쳤어요!" 하고 
말했다. 관구  지도자 한 사람은 이런  연설이 있은 다음날 아침에  호텔 방안에 
그가 '고독하게, 등을 구부린 채 피곤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둥근 탁자에 웅크리
고 앉아서 천천히 야채 수프를 떠먹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선거결과
  히틀러는 자기가 불러 일으킨 선동효과만으로 권력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프
로이센의 주의회 선거에서  국가 사회당은 36.3 퍼센트의 표를  얻어서 지금까지
의 사회 민주당과  온건파 정당 연합정권을 물리쳤다. 그러나 절대  다수를 얻지
는 못했다. 그것은 석달 뒤인 7월 31일 의회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은 230
석을 얻어서 지금ㄲ의  의석수를 두 배 이상으로  늘렸고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히틀러가 확장 가능성의  한계에 부딪쳤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중도파와 우파 시민 정당들에  큰 손실을 
주었거나 부분적으로  흡수해 버렸지만 그래도 중신으로의  진출은 아직도 막혀 
있었다. 
  엄청난 선거 비용, 끊임없는  대중 집회, 행진, 벽보와 삐라 부착, 당 연설가들
은 지쳐빠지도록 투입하고, 히틀러 자신도 세 번째 독일 비행에 올라ㅆ. 그는 보
름 만에 50개 도시에서 연설하였다. 이모든  일들은 프로이센 지방의회 선거에서 
당에 1퍼센트의 득표  증가를 가져다주었을 뿐이었다. 이미 당시에  괴벨스는 이 
결과에 대해서 이런 주석을 붙였다.. "이제 ㅁ무슨 일인가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
는 짧은 시일 내에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선거에서 이겨
서 죽을 것이다. "(그밖에 7월 선거가 끝난 다음 의회내 국가사회당 소속 의어ㅜ
들의 구성도 흥미롭다. 230명의  의원들 중에는 노동자와 봉급 생활자들이 55명, 
농부 50명, 상업, 기술,  산업계 대표자 43명, 당직자 29명, 공무원 20명, 교사  12
명, 전직 장교 9명 등이었다. )
  이러한 기대에 대해서 곧 최초의 연결점들이  나타났다. 순수한 긴급사태 체제
로 넘어가면서 특히 재선 이후로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몇 명의 개인들에게 자신
의 직책을 맡기다시피 했다. 그리고 점점 더  뚜렸하고 멋대로 자신이 바라는 것
이 곧 국가의 복지라고 여겼다. 몇 명의  무책임한 조언자들에 의해서 그러한 생
각이 뒷받침되었다. 그들 중에는  그이 아들 오스카도 있었다. 당시의 인기 있는 
유행어에 따르면 '헌법에  안 나오는 인분'이었다. 특히  비서관인 마이스너와 슐
라이허 장군, 젊은 보수파  의ㅣ어ㅜ 게레케 박사, 혹은 힌덴부르크의 이웃 영지
의 주인인  폰 올덴부르크 야누샤우 등이었다.  그는 황제시대부터 '반동적 촌뜨
기'역을 해왔고, 예를 들면 언제라도 한 명의 소위와 열며의 병사로 의회를 해산
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단느 따위의 주장으로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던 인물이었
다. 그 밖에 몇 명의 동 프로이센 귀족들, 뒷날엔느 프란츠 폰 파펜도 그중에 들
었다. 
  다음 몇 달은 그들의 배후 작용 시기였다.  그들의 동기와 이익을 결정하는 것
은 언제나 분명하지  않았다. 강력하고 도전적인 덩어리처러머  히틀러는 정치무
대에 갑작스럽게 등장하였다.  그들의 의도는 그를 자기들에게 합류시키고, 좌익
에 대한 위협  수단으로 이용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구식 독일이  망상적인 오
만에 사로잡혀서, 역사에 잃어버린 역할을 되찾으려고 애쓴 최후의 시도였다. 

    여러 가지 음모
  그들의 최초의 희생자는 아이러티컬하게도  브뤼닝이었다. 수상은 대통령의 후
원을 믿고서, 저 '강력한 인물' 중 몇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다. 그의 적인 히틀러
는 바로 그들의  호의를 받아서 그토록 지속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정부는 
여러 모로 나타나는 산업계의  요구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에 산업
계는 점점 더  심하게 정부에 등을 돌려ㅆ. 이제는 힌덴부르크와  계급상의 동지
인 지주들도 정부에 등을  돌렸다. 그들은 특히, 어려움에 빠진 영지의 수익성에 
따라서 물질적 지원  여부를 결정하고, 희망없을 정도로 빚을 많이  진 영지들은 
실업들 완화시키기 이위한 대규모  신도시 건설에 이용하려고 하는 브뤼닝의 의
도에 분개하였다. 곧장  이익집당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어서, 수상이 볼셰
비즘 사상을 품고  있다는 빈나까지 나왔다. 늙고 판단력이 흐렴진  대통령에 대
한 여러 가지 압력들을 개별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브뤼닝과 결별하
려는 대통령의 결심에 일조한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이 재선과정에서 자신을 엉뚱한 진영과 대립하도록 만든 인물이라고 믿고 
있었다. 주변의 속삭임까지  가세하니 자기가 빠져들었던 깊은  개인적인 갈등을 
용서하려 들지 않았다.  브뤼닝은 군부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슐라이허의 신임
을 잃어버리자 곧 정치적인 종말을 맞았다. 
  이 사건은, 정부의 활발한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통치활동 내부의 감추어
진 대립이 밖으로 드러나고, 그와 함께 공화국  최후의 비명에 도니 돌격대와 친
위대의 금지령으로  대두되었다. 복스하임 문서가  발견되면서 국가사회주의자들
이 폭력적인 국가전복도 고려하고 있다는 새로운 근거가 노출된 셈이었다. 
  당 군대는 점점  더 초조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행동을 하였다.  히틀러는 이중
성을 가진 합법화 전략을 따르면서 때때로 걱정하는 듯한 태도로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갈색 셔츠  부대를 잡아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하였다. 루덴
도르프는 흥분해서 간혹 독일을 '돌격대  점령지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차 대
통령 선거 이틀 전에 괴벨스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돌격대와 친위대 지휘
부와다음 며칠 동안의 행동  방식에 대해서 논의했다. 어디나 불안 뿐이다. 쿠데
타라느 말이 유령처럼 떠돈다. "
  선거일에 룀은 돌격대 부대에 경계령을 내리고,  베를린을 갈색 셔츠로 포위해
버렸다. 프로이센 경찰은  몇 개의 돌격대 조직 중심들을 뒤지다가  중요한 문서
를 찾아냇다.  그것은 대규모의 반역  행위는 아니지만 히틀러의  당선이 확실한 
경우를 위한 세부적인 경계조치와 행동 조치들을  지시한 것이었으며, 구데타 암
호 '할머니가 죽었다'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폴란드가 침공해올 경우에 
국토 방위 참가를 거부하라는  명령이 동부지역 돌격대에 내려진 사실도 밝혀졌
다. 특히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칠만한 발견이었다. 몇 개 지방 정부
의 성급한 재촉에 따라  제안된 돌격대와 친위대의 금지령은 만장일치로 결정되
었으며, 이 결정은  오랫동안 품고 있었으면서 언제나 미루어 온  생각들을 종결
짓게 만들었다. 
  그러나 금지령이 내려지기 며칠  전에 몇가지 사건이 극적인 전환점을 마련하
였다. 금지령에 찬성하고  자신이 그것을 만들어냈다고 자랑하던 슐라이허가 '하
룻밤 새' 모든 생각을  뒤집고, 금지령이 내려지지 않도록 쉴새없이 반대 활동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반대 활동에는 곧 힌덴부르크 대통령까지 연루되었다. 슐라
이허는 대통령에게  금지령으로 이미 실망한 우익측  추종자들에게 더욱 인기를 
잃게 되리라고  암시했던 것이다. 슐라이허의 반대  행동은, 돌격대와 함께 예를 
들면 철모단과 공화국에  충성스런 국기단 같은 모든 군대 조직을  해체하고, 대
규모의 민방위군과  군 스포츠 연합을 만들어서  공화국 방위군의 하부조직으로 
삼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아가서 이런 행동은 과
격한 금지는 싫고 더욱 섬세하게  일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음모꾼 같은 
성격과 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히틀러에게 돌격댈르  탈군대화 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요구들을 하였는데,  그러한 요구들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어서 
돌격대가 그것을 거부하면 히틀러가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될 만한 것들이었다. 
  어느 정도 주저하면서, 그리고 돌격대와  친위대에 근무한느 자신의 '옛전우들'
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면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금지령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4
월 14일에 경찰이 대대적인  활동을 한느 가운데 히틀러의 개인군대는 해체되고 
사령본부, 막사들, 학교, 병기창고 등이 점령되엇따. 그것은 1932년 11월 이후 국
가사회당에 대하여 국가공권력이  내린 가장 강력한 조치였다.  개별적인 인물들
이 아니라 개인 군대의 존재 자체가 금지령의 동기라는 당국의 설명은 오래간만
에 다시 국가의 자기 주장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조직된 권력을 유지한느 것
은 오직 국가만이  가지는 권한이다. 개인이 그러한 권력을 조직하고  국가가 이
것을 용인하면 그것은  이미 평화와 질서를 위ㅣ태롭게 한다...  권력국가에서 군
사력은 국가 헌법에 맞는 조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적인 군대  조직은 본질적으로 합법적인  조직이 될 
수가 없다... 해체 조치는 국가 유지 자체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
  룀은 처음으로 자신의 40만  군대의 공격성과 힘에 의지해서 실력행사를 햅보
이려고 결심했던 듯하다. 그러나  히틀러는 합법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곧 이
어서 그는 돌격대를  정치 기구 안에 흡수하였고,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에 손상
을 입히지 않았다. 파시즘 운동은 국가의 최초의  저항을 받으면 벌써 힙없이 싸
움터를 비운다는 사실이  다시 입증되었다. 1920년에 이탈리아에서  카브리엘 디
눈치오가 대포 단  한 방 쏘아서 퓨메시를  소탕하였던 것처럼 히틀러도 합법화 
전략에 따라서 금지 조치에 가장 엄밀하게 복종하였다.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총 한 방은 총 한 방 이상이 될  것이고, 금지령은 제한된 방어조치와는 다른 것
이었다. 그것은 보수파  지배와 혁명적인 민족 운동의  결합체인 '파시즘 정국'의 
무력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슐라이허나 그의 측근에서, 정부 내에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는 정보를 히틀러
에게 보내왔기 때문에 그는 아심하고 기꺼이  굴복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어서 
근느 자신의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는 아주 여유 있게 행동하였다. 히틀러 운동
을 제압한 조치가 내려진 그날 저녁에도 괴벨스는 황제궁 호텔에서 히틀러와 나
누었던 대화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거ㅜ력을 떠맡게 도리 경우의 인
사문제를 논의하였다. 마치 우리가  이미 정부 내에 있는 것처럼, 내 생각으로는 
어떤 운동이 성공의 반대편에서 이토록 자신만만해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브뤼닝의 몰락
  벌써 이튿날로 힌덴부르크가 그뢰너 국방장관에게 특별히 냉랭한 글을 써보낸 
것은 대규모 음모의  신호였다. 이 음모는 법률지들의 열렬한 캠페인과  함께 이
루어졌는데, 이러한 캠페인에  민족주의 진영의 유력인사들이 한  목소리로 합류
하였다. 황태자는 국방 장관이 "돌격대와 친위대에 소속되어 가치있는 교육을 받
고 잇는 놀라운 인적자원을 파괴하려는"일을 돕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
다.. 슐라이허는 자신을 언제나 '양자'처럼 대우해준 직속장관에게 사퇴를 권고하
였다. 그리고 악성  비방을 퍼뜨리거나 어쟀든 적어도 이런 비방을  반박하지 않
았다. 그뢰너 장관은 병들어  있으며 평화주의자다, 혹은 두 번째 결혼에서 아이
가 지나치게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군대가 악성 루머에 빠제게 되었다는 따위의 
비방들이었다. 대통력에게 슐라이허는,  이 아이는 방위군 안에서 핀란드 달리기 
선수의 이름을 따서 (아이가 너무 빨리  나와서) '누르미'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설명하였다. (에센부르크는 '제국  지도부의 기능'은 이 시점까지는 브뤼닝,  그뢰
너, 슐라어허, 힌덴부르크 사이의 인간적인 이해에 상당히 기초하고 잇었음을 지
적하였다. 독신상태가 상호의존의  정도를 강화시켰다." 그뢰너가 재혼하면서  이 
관계가 깨졌다. "그뢰너와  슐라이허는 이제 서로 만나는 일이 드물어졌고,  생각
을 교환하는 정도와 따라서 신뢰 관계가  차츰 멀어졌다. " 마찬가지로 힌덴부르
크에 대해서도 눈에  띄게 멀어졌다. 너무 일찍 태어난 아리고  인해서 그뢰너에 
대한 온갖  비난은 새로운 힘을  얻었다. 힌덴부르크와 그의  친구들에게 있어서 
공화국과 민주주의의 도덕적인  규범도 포함해서 몰락의 징조였다.  이토록 부도
덕한 시대정신에 그뢰너까지 굴목한 셈이었다.  1931년 7월에 슐라이허도 결혼했
다. 그것도 자기 때문에  이혼하게 도니 장군의 부인과 결혼하였다. 이것도 힌덴
부르크의 엄격한 도덕심을 손상시켰다.)
  동시에 슐라이허는 국가사회당  지도부에 자신은 개인적으로 돌격대 금지령에 
전혀 찬성하지  않는다고 알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국가  사회당을 권력에 
참여시켜서 그  번개를 뺏을 생각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말처럼  영향력 있는 
전문가들의 내각으로 그들을 '포위하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개인 군대까지 거느
린 호민관에게 이런 마법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솔리니가 보여주
기도 했으련만 그렇게 생각하였다. 
  4월 말에 그는  히틀러와 최초의 협상을 하였다. "대화는  상당히 잘 진행되었
다."고 괴벨스는 적었다.  곧 이어서 마이스너가 오스카 폰 헨덴부르크까지  합세
한 두 번째 만남이 있었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모든 것이 잘돼 간다... 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  그리고 브뤼닝 자신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주는 행복
한 느낌."
  드러나지 않도록 안에서 붕괴시키는 작업을  약 한 달쯤 한 뒤에 사태는 결정
되었다. 5월 10일에 그뢰너는 의회에서 우파의  분노한 공격에 맞서 돌격대 금지
령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연설 재주도 없는 그가 '국가  속의 국가'이고, '국가에 
맞선 국가'인 국가사회당에 반대한는  항의를 시작했지만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일
으킨 분노의 소동에  밀려 시작부분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였다. 어찌할  바 모르
고 혼란에 빠진,  이미 지쳐버린 장관과 더불어 그가 시작하였던  군사령관인 하
머슈타인 장군이 그에게 항명하면서  그는 방위군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퇴임해야 한다고 알였다.  그뢰너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호소하려  했으나 아
무 소용도 없다 이틀 뒤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이들 도안의  계획에 의하면 어차피  그것은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외투를 
잡아당겼으니 당연히 그 외투를 입고 있던  공작도 딸려나올 형편이였다. 5월 12
일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거의 2주  일정으로 노이데크로 출발하였다. 브뤼닝이 
면담을 요청하자 대통령은  못마땅하게 여기며 거절하였다. 대통령은  이때 분명
히 자신의 계급동지들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흔들리는  수상의 지
위를 맹공격하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였든 그것은 대지주들과  늙은 장교들의 
완고한 태도로 정직성과 원칙에 대한 고려 없이 나온 이유들이었다.
  힌덴부르크가 5월 말에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수상과 결별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브뤼닝은 외교상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5월 30일 그가 
대통령을 만나러 가기 직전에도 군비축소 문제에서 결정적인 전기를 약속해주는 
정보가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음모로 가득 찬 보고서는 마지막  순간에 그
가 대통령에게 그  사실을 보고할 기회를 막아버렸다. 일년 전만  해도 힌덴브르
크는 브뤼닝이  자신의 마지막 수상이다.  자신은 그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모욕적일 정도로 짧은 겨우 몇 분  간 면담한 상태
에서 해임되었다. 힌덴부르크는  소카게락 전투일을 기념하는 수병의  행진을 참
관하려고 하였다. 전쟁기념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군대행사가  공화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색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군축협상에서 좋은 방향으로 변화한단느 
정보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는 브뤼닝이 그것을 지나치
게 평가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프란츠 폰 파펜
  브뤼닝의 후임으로 슬라이허  장군은 대통령에게 정치경력이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 있던 어떤  남자의 이름을 들먹였다. 프란츠 폰 파펜은  오래된 베스트팔
렌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봉건적인 기병연대에서 근무하였고,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에 대사관 무관으로서 음모사건에 연루된 탓으로 미국에서 추방되
었을 때에 처음으로  어느 정도 일반에 알려지게 된 인물이었다.  그는 유럽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솔하게도 자신의 비밀 활동에 대한 중요한 서류를 영국 관리에
게 넘겨주고 말았다. 자르의 중요한 산업계 인사의  딸과 결혼을 해서 그는 상당
한 정도의 부와  중요한 산업계 인사들과 접촉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카톨릭 
귀족으로서 고위 성직자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예전에 총사령부  장교였던 까닭
으로 방위군에도 다양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수많은  이익 집
단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슐라이허의 관심을 끌였던 것인지
도 모른다. 파펜은 거의 기묘한 방식으로 고풍스러웠다. 황고함, 오만함, 불평 많
은 건방진 태도 등으로  인해서 시사만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등장 인물
로 그려졌고, 당시 사람들은 그 그림이 그의 특성을 잘 그려낸 것이라고 느꼈다. 
그는 경박하고, 너무 서두른다고 알려졌으며 아무도  그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
았다. "일이 성공하면 그는 대단히 만족한다. 그러나 실패하면 전혀 반성하지 않
는다. "
  그러나 바로  이런 사치스럽고  용감하고  태평스러운 태도야말로 슐라이허의 
눈에 파펜이 특별한 적임자로  보이도록 만든 이유였다. 그러한 그의 특성은, 점
차 구체적으로 고려되고  있던, '온건한' 독재체제 아래서  의회 제도를 소멸시키
려는 계획을 밀고 나가기에  알맞은 특성으로 보였다. 경험 없고, 겉모양만 생각
하는 파펜은 수상직 자체와  그것을 가져다주는 대표기능 만으로 허영심을 만족
시킬 것이고 그 밖의 점에서는 쓰기 편한 도구가 되어주리라는 생각도 작용하였
다. 바로 이런 생각은 명예를 탐하면서도  공식석상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슐라
이혀의 기질에 잘  맞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파펜은 두뇌가 아니라고  깜짝 놀라
서 그를 말렸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는 두뇌일 필요도 없어, 모자 노
릇만 하면 되니까."
  파펜이 그런 광범위한 관계망 덕분으로 사회민주당보다 보수적인 모든 정당들
의 연합정부를 구성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의회주의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고 슐라이허가 믿었다면  그는 곧 실망하였다. 새로운 수상은 정치적  기반이 전
혀 없었다.  브뤼닝을 배신한 일에  격분하여 카톨릭 중앙당은  과격한 반대파로 
변했고, 후겐베르크도 자신의 야망이 한 번 더  무시되었기 때문에 몹시 화를 냈
다. 공식적으로 적대적인 거부감에  부딪치자 새 수상인 파펜도 화가 났다. 그는 
수상직에 취임하자마자 브뤼닝이 마련했던 성공을 자기  것으로 감고, 로잔 회담
에서 배상금 문제를 종결지었는데도 기대했던 효과는  전혀 없었다. 사실상 그의 
내각은 민주적인 것도 아니었고, 각 분야별로  합법적인 조직으로 여겨지지도 않
았다. 그것은 대통령의  애국적 호소를 거절할 수 없었던 가문  출신의 남자들로
만 이루어진 것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일곱 명의 귀족, 두명의  합병기업 회장, 뮌헨 시절 히틀러의 보호자였던 프란
츠 귀르트너, 그리고 장군  한 명 등으로 구성된 내각이었다. 여기에는 중산층이
나 노동자층의 대표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은 이 늙은 지도층이 얼마나 현
실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당시 '귀족 내각'이라고 불렸으
며 순전히 힌덴부르크의 권위와 방위군의 힘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장부가 극단적으로  인기를 얻지 못하자 히틀러도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슐라이허와의 협상에서 그는 새로운 선거를 공고하고, 돌격대에 대한 금
지조치를 해제하고, 국가  사회당에 완전한 활동의 자유를 줄 경우  정부를 승인
하겠다고 약속했다. 
  브뤼닝이 해임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5월 30일 오후에 그는 파펜의 지명
에 동의하는가 하는 대통령의 질문을 받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새 수상이 7워 4
일에 으회해산으로 그의 불운한 조치들을 시작하고,  곧 이어서 돌격대 금지령의 
해제를 생각하고 있을 때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벌써 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
였다. "우리는 시민적인  과도내각에서 가능한 한 빨리  물러나야 한다. 그 모든 
것은 예민한 감각의 문제다." 라고 괴벨스는 적었다. 며칠이 지나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시민적인 똘마니들 근처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공격>
지를 타고서 파펜 내각을 향하여 새로운 공격에 나서야겠다."
  돌격대 금지령이 기대했던 것처럼 곧바로 풀리지 않자 그는 어느 날 저녁 "금
지령에도 불구하고 항의하기 위해서 완전히 제복을 갖춘 40~50명의 돌격대 지휘
자들을 거느리고 포츠담 광장의 커다란 카페에  나타났다. 우리는 경찰이 우리를 
체포하기만을 원했다... 우리는  자정쯤 아주 천천히 포츠담 광장을  지나 포츠담 
거리를 걸어갔다. 그러나 어떤  자식도 움직이지 않았다. 순찰 대장은 몹시 당황
해서 우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
  이틀 뒤인6월 16일에  금지령은 마침내 해제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의 망설임
은 오히려 '다가오는 새로운  세력 앞에서 국가 권력이 무릎을 꿇었다'는 인상만 
만들어냈다. 마지막 순간에 나온 그런 친절의  대가로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나중
에 정부에 참여한다는 동의를  얻어내려는 파펜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시도
는, 슐라이허가 미리 손을 썼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이미 너무 늦었다. 뿐만 아니
라 그것은 히틀러의 광범위하게  뻗은 궝력욕의 범위와 과격성에 대해서는 거의 
그로테스크할 정도의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파펜은, 굽히지 않고 냉정하게 
온갖 반대 요구들로 공박해 오는 상대방에게서 의회선거가 끝난 다음에 만날 약
속을 얻어낸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네 갑자기 거리에서 내전 비슷한 대립 상황이 다시 벌어지더니 진짜 
절정에 도달하였다.  금지령이 해제되고  7월 20일까지 5주동안  프로이센에서만 
거의 5백 건의 충돌에 사망 99명, 부산자가 1125명이나 되었다. 7월 10일은 전국
에서 17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수많은 장소에서 방위군이 본격적인 싸움에 개입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른스트 텔만이 돌격대  금지령 해제는 공식적인 살인 권
유였다고 말한 것은  옳았다. 물론 그는 자기 편인 공산당  투쟁조직이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는지 소극적인 활동을 벌이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7월 17일에 함부르크 알토나에서 그해 여름에  가장 심각한 혈전이 벌어 졌다. 
약 7천명의 국가 사회당 항의 시위대가 공산당 노동자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보
고 공산주의자들은  지붕과 창문을 통해  불 공격으로 응답하였다.  그것은 다시 
과격한 대응을 불러일으켜 서둘러 바리케이트를 넘어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사
망자 17명과  수많은 중상자들을 냈다. 1932년  7월의 그 투쟁에서  목숨을 잃은 
68명 가운데 30명이 공산주의자였고, 38명이 국가사회주의자였다. 괴벨스는 이렇
게 적었다. "서로 두들겨패고 총을 쏘고 있다. 이 정권의 마지막 구경거리."

    위로부터의 쿠데타
  돌격대를 인전한 것이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자의식을 강화시켰다는 사실을 깨
닫지 못하고 파펜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으뜸패를 내놓아서  거의 고립되어버린 
정부의 위신을 강화하고,  히틀러와 그 추종세력에게 화해적인  태돌르 보이려는 
희망에서 파펜은 7워 20일에  프로이센 주정부의 주도적인 인사 세명을 수상 집
무실로 부르더니 갑자기 비상권한으로 주지사 브라운과 이 자리에 함께 있던 주 
내무장관 세베링을 해임한다고 밝혔다.  비상계엄 사령관으로서 자신이 주지사의 
임무를 떠맡겠다고 선언하였다. 세베링이  강제력에 굴복해서만 자신의 집무실을 
비워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그날  저녁에 일방적으로 경찰력을 행사하
겠다는, 수많은 비판을 받은 '협정'이 이루어졌다. 미리 준비된 두 번째의 비상사
태법에 힘입어 파펜은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일언에 군사적 비상 사태령을 내
리고 이렇게 해서 정치적 권한을 장악하였다.  저녁에 내무장관 집무실에 나타난 
세 명의 졍찰 간부의 요청을  받고 세베링은 자신은 오직 강제력에 굴복하여 자
기 자리를 내놓은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 곳을 떠나 옆에 있는 자기 집으로 갔
다. 오후에 이미 그 비슷한 방법으로 아무런  저ㅇ도 받지 않고 두려움의 대상이
었던 프로이센 경찰 지휘관들이 제압되었다. 베를린  시경찰 총장 체진스키와 부
총장인 바이스, 경감  하이만베르크 등이 잠깐 체포되어서  경찰청사의 마당으로 
끌려나갔을 때 전하는  바로는, 몇 명의 경찰관들이 총장에게 국기단  구호로 작
별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유!'하고 외쳤는데, 그토록  오랫동안 허약하였
고, 열의도 없었고, 이제는 체념상태에서 포기되는 바이마르의 자유에 대한 작별
인사로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이덴은 그밖에도 1932년 7월 20일에 사
회민주당의 경찰사회주의가 끝났다고  올바르게 지적하였다. "쓸데없인 인용되던 
아무런 의미도 없는 힘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이 정부는 여러해동안이나 경찰의 
칼날을 갈고 호통을 쳤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것을  사용해야 할 순간이 되자 이 
아름다운 것을 감히 쓰지도 못했다. ")
  물론 광범위한 저항이  고려되었다. 어떤 관찰자에 따르면  체진스키와 하이만
스베르크 내무부 국장인 클라우제너와 힘을 합쳐서  세베링에게 '보든 수단을 동
원한 전투 실시'를 고집하였으며, 특히 '베를린 경찰의 체포, 그리고 대통령의 무
력화 선언'을 요구하였으나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고 한다. 
  저항은 효력도 없는 언론상의  항의와 국사범 재판소를 소집하는 것으로 그치
고 말았다. 이 때  프로이센 정부는  훈련받은 경찰병력 9만  명, 국기단, 공화주
의 정당들, 노동조합들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밖에도 온갖  중요한 직
책을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내전에 대한 염려, 현재의 실업상황에서 총파업의 
효력에 대한 의심,  그밖에 수많은 비슷한 고려들이 저항 계획을  가로막고 말았
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적들의 수동적인 체념의 눈길만을 받으면서 
파펜은 '공화국의 가장 강력한 방법'의 권한을 장악하였다.
  프로이센 정치가들의 동기에 대해서는 무게와 존경을 금할 수 없으며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면 그들의 결정이 합리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 앞에서 보면 그들의 합리성은 별 것  아니다. 항의 시위조차 생각하지 못했
다.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세베링과 신경쇠약에 걸리고 도덕적으로  파괴된 그의 
동지들은, 명예심과  하직함으로써 지난 13년  도안의 미숙과 태만을  잊게 만들 
뿐 아니라, 새로워진  민주적 자의식을 위한 추진력을 얻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
해보지 않았다. 1932년 7월 20일, 절대로 얕잡아 볼 수 없는 이날의 의미는 심리
적인 결과들로 나타난다.  그것은 공화국 수호자들의 저항이 얼마나 별  것 아닌
가를 보여주어서 한편의 용기를  빼앗고 다른 편에게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초조감만 키워놓았다.  이제는 세 개의 날카롭
게 대립하는 진영이  권력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첫째로는 파펜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으적, 군위주의적인 세력으로,  의회에서는 유권자의 10퍼센트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군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둘째로는 이
미 역할이 끝나버린  민주주의 세력, 그들은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여론의 지원
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적대하는, 국가 사회주의와 공산당이라
는 전체주의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합쳐서  53퍼센트라는 부정적 다수를 장악하
고 있었다. 이 두세력이  그렇듯이 모든 진영은 서로 차단되고 마비되어 있었다. 
1932년 여름과 가을 내내 계속  새로운 전략적 수단을 써서 상대 진영을 부수려
는 시도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파펜도 7월 20일의  행동을 이런 관점에서 
보았다. 아무런 요구도 받지 않았는데 그는 브뤼닝에게, 자신은 히트러를 권좌에 
오르게 할 계획이 없고, 다만 그를 속이려 할 뿐이라고 알려주었다.)
  8월 5일에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영주산(퓌르스텐베르크)에서 슐라
이허를 만났다. 여기서 처음으로 그는  전권을 요구하였다. 자신에게는 수상직을, 
그 밖에 내무,  법무, 농업, 항공 장관직과, 새로마든 선전부  장관직, 그리고 7월 
20일의 비상사태법에  근거해서 프로이센  주지사 및 내무장관직도  요구하였다. 
그리고 포고령을 통해서 통치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한을 가진 가진 전권위임법
을 요구하였다. 괴벨스의 표현대로는 '권력을 차지하면 우리는 그것을 다시는 내
놓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이레서 우리 시체를 끌어내지 않는 한 말이다. "
  권력을 넘겨받기 직전에 와 있다는 확신을 가진 채 히틀러는 슐라이허와 헤어
졌다. 헤어질 때  그는 명랑한 기분으로 영주산 집에서의 만남을  기념하여 기념
비를 세우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자시의 요구에 무게를  싣기 위하
여, 그리고 벌써 직장을 떠나서 승리의 날에  축하와 방종과 약속받은 직위를 준
비하려고 소동을  피우는 돌격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히틀러는  단위부대들이 
베를린을 둘러싸고 행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들은 점점 더 촘촘한  원을 이
루며 도시를 둘러쌌다. 
  1932년 시민 양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가 마지막 순간에 피스톨을 빼들려
는 것 같았다. 전국  방방곡고에서, 그러나 특히 슐레지엔과 동 프로이센에서 유
혈충돌이 더 많아졌다. 8월 9일에 나온 정치 테러 금지령은 "정치적인 싸움의 열
정에 사로잡혀  분노와 증오로 상대방을 공격하여  죽이려 하는" 자에게 사형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밤에 상부 슐레지엔에  있는 포템파라는 마을에서 정
복을 입은 다섯명의 돌격대원이 어떤 공산당 노동자의 집에 침입해서 그를 침대
에서 끌어내다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문자 그대로 발로 밟아서 죽였다. 
  
    대통령의 거부
  이러한 과정들이 어디까지 국가사회당의 권력에 대한 기대를 방해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슐라이허 스스로 이미  길들인다는 생각을 
포기했던 것 같다.  어쨌든 히틀러를 우파 연합의 수상으로 임명해서  책임감 안
에 묶어두고 이런 방법으로 그의 인기를 줄여보겠다는 그의 계획은 우선 대통령
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대통령은 그 사이에 파펜의 민첩함과  뻔뻔스런 매
력에 반해서 아버지  같은 애착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런 파펜을  보헤미아의 광
신자이며 엉터리 메시아인  히틀러와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밖에도 
대통령이 좋아하는 대리황제 노릇을 문제로 삼고 있었다. 
  8월 13일에 국가 사회당  지도부와 확대 회담을 열었을 때 슐라이허는 파펜과 
힘을 합쳐서 히틀러의  전권 요구를 거절하고 그  대신 부수상 자격으로 현재의 
내각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하였다. 불같이 화가나서, 그리고 전부냐 무야 하는 기
분에 사로잡혀서 히틀러는 그따위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파펜이 어느 정도 
'서로 신뢰하고 성과가 있는 협조'의 시기가 지나면 히틀러에게 유리하도록 수상
직을 포기하ㅇ다는 너그러운 제안을  덧붙였는데도 고집스럽게 거절하였다. 그의 
연극적 상상력이,  먼지 속에 빠진  마비된 세계에 지배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보여주겠다는 상상을 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자동차로 베를린으로 오는 도중에 그는 킴  호숫가의 어떤 음식점에서 '커다란 
계란 케이크를 먹으면서'  자신의 지휘자들을 향해서 이미  공산주의자들에게 감
행할 살육의 모습을  그려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금 갑자기  자기가 기만당했다고 
여겨진 그의 삶에서 후퇴가 있을  때마다 실망에 이어 거대한 절망의 몸짓이 뒤
따랐다. 같은 날  오후에 힌덴부르크의 부름을 받았을 때도 그는  부름에 응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던 것 같다. 대통령궁측에서 아직  아ㅁ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분
명한 확인을 해주어서야 그에게 한번 더 희망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힌덴부르
크는 히틀러가 현재의 정부를  지지할 마음이 있는가 물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였
다. 히틀러는 물론 없다고  대답했다. 늙은 대통령이 개인들에게 자기 의사를 관
철할 때 잘 쓰곤 하던 애국심에 대한  호소도 히틀러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래
서 경고와, '얼음장 같은 작별'만 남았다. 돌아가는 길에 히틀러는 흥분해서 대통
령의 몰락을 예언하였다. (이 대담의 진행에 대한 견해들은 적잔힝  다르다. 힌덴
부ㄱ르크가 안  좋은 분위기레서 히들러를 세워둔채로  맞아들여서 짧은 대화를 
했고 이 과정에서 히틀러에게  과격주의가 드러나자 히트럴가 권력을 장악할 경
우 자기가 쏘아버리겠다는 위협을 해서 도로 ㅉ타버렸단느 견해가 널리 퍼져 있
다. 그러나 파펜이 자신의  회고록 224쪽에서 밝힌 의견은 다르다. 그는 이 만남
이 정확한 상황을 강조하면서 이별의  순간에만 "얼음장 같았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마이스너는 같은 날에 대한 비망록에서,  힌덴부르크가 돌겨ㄱ가 방종한 행
도을 할 경우에는 날카로운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하기는 했지만 그런 다음에
는 친절하게 담화를 끝냇다고 한다. "우리 두 사람은 오래된 전우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나중에도 우리의 길이 서로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지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전우로 손을 내밀겠소.")
  곧이어 서둘러 발표된 성명서를  보고 히틀러는 자기가 또다시 당했다고 느끼
면서 분노는 더욱 커졌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의 요구를 "아주 분명하게 거절하
였다. 정부원력을 일방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국가 사회주의운동에  정부 권력 
전체를 넘겨주는 것은 양심상으로나  의무상으로 조국에 책임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성명서에 씌여  있었다. 또한 히틀러가 이전의 약속에 따라서  대
통령의 신임에 의해 만들어진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공식적
인 유감이 표현되어 있었다. 관공서 용어로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약속위반
에 대한  비난이었고 과거의 인물들인, 자이서,  증오스런 폰카르 등을 기억나게 
하는 암시였다. 물론 몇 달 뒤에는 이런 생각들은 잊혀지고 말 것들이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지체없이  더욱 격렬한 반대를 계속하였고,  파펜에게 항
구적인 선불정책이 얼마나 생각없고  허망한 것이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8월 22일에 정치적 테러 금지령에 근거해서 포템파의 살인자들이 사형선고를 받
게 되자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하다시피 한  법정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정복 
차림으로 나타난  슐레지엔의 돌격대 지휘자 에드문트  하이네스는 법정에 대고 
요란하게 보복하겟다고 위협했다.  히틀러는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전보를 보
냈다. 그것은 '끔찍한 사형판결을 받은  동지들'에게 자시의 '무제한의 신의'를 보
장하고 빠른 해방을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2년 전부터 조심스럽게 지켜온 시민적 태도라는 가면을 과격한 태도로 벗어던
지고, 예전의 험악한 시절에 하던 대로 살인자들과 연대감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과격함은 그의 분노의 정도를 부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추종자들의 흥
분에 대한 고려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돌격대가 다시금 깊이 실망
하고 있었다. 돌격대는 이제 전국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전투조직으로서 난폭하
고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빌헬름 거리의 연미복 입은 부르주아들을 경멸하였
다. 돌격대측에서는 히틀러가 어떻게 계속되는 굴욕을  아무렇지 않게 참고 있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충성스런 전사들을 마침내 길거리로  내보내어 피
의 축제를 벌이도록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돌격대는 그런 축제를 
벌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히틀러도  이제는 돌격대를 전보다 더욱  위협적인 방식으로 이용하였
다. 열흘 동안이나 거의  쉬지 않고 캠페인을 벌인 끝에 9월  2일에 파펜이 양보
해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위신까지 손상시켰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
을 종신형으로 감형해  달라고 대통령 특사를 신청하였다. 그들은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종신형  감방에서 풀려났다. 9월  4일자 히틀러의 연설에도  속은 사람의 
분노와 노여움의 소리가 여전히 들어있다. 

  나는 나으리들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그들은 자리 몇  개를 내주고 
우리 입을  틀어막아 버리려는 거지요. 이  낡아빠진 마차로는 오래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죠, 여러분, 나는 흥정하고  팔고 에누리해주려고 당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당은 아무 양이나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라고  만든 사자가죽이 아
닙니다. 당은 당입니다. 그뿐입니다!... 나를  장관 자리 몇 개로 꼬실 수 있을 거
라고 절말 믿으셨나요? 나는 정말 당신들을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내게 있어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무관한 일인지 나으리들은 전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사랑
하는 하느님께서 그러기를 바라셨더라면 우린 한 알짜리 안경을 가지고 이 세상
으로 왔겠지요. 가당치 않은 소리! 저들은 높은 자리들이 자기들 것이 아니기 때
문에 그것을 차고 앉아 있는 겁니다. 

  힌덴부르크와 파펜에 의해서 굴욕으로 거절당한 사건에 대한 히틀러의 분노는 
아주 강한 것이었기에 처음에  그는 합법화 노선을 포기하고 유혈봉기를 통해서 
권력을 차지할까  하는 유혹까지도 느꼈던  것 같다. 그  스캔들은 정치적으로만 
그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그의 시민적인 소속  욕구에도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
다. 전보다 더 자주 위협적인 문구가 집회장에 울려퍼졌다. "청산의 시간이 다가
옵니다!" 그는 파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카톨릭 중앙당과  협상을 시작했
다. 그 과정에서 한  번은 실망한 좌파의 도움을 받아서 의회의  결정과 국민 투
표를 거쳐서 힌덴부르크를 하야시키자는 모험적인 제안이  나온 적도 있었다. 그
리고 지난 몇 주 동안에  복수욕에 불타서 그는 자신과 측근에게 혁명적인 방식
으로 요직들을 점유하는  상황들을 힘으로 쓰러뜨리는 장면을  상상하였다. 어쨌
든 그가 몇 년 전부터  힘들여서 추구해 온 합법적인 길은 냉정하고 조심스러우
며 그의 본질의 의존 본능적인 측면에만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서 그
의 공격성, 지나치게 긴장된  상상력과, 피를 흘리지 않고는 역사적 위대성을 생
각할 수 없다는 발상법은 앞의 면모와 반대되는 것이다.  

    잔인성에 대한 명상
  국가 사회당 소속인 단치히  시장 헤르만 라우슈닝이 이때쯤 윗소금산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러한 내면의 모순이 그를 뒤흔들고  있었다. 라우슈닝
은 강력한  민중대표의 이러한 소시민적인  삶의 방식에 깜짝  놀랐다. 창가에는 
면직물 커튼, 이른바 농부들의 가구, 매달린  새장에는 지저귀는 새, 그리고 연로
한 부인들과의 교제등이 모두 놀라운 일이었다.  히틀러는 파펜에 대해서 격렬한 
인신공격을 하고, 민족주의적인 시민계급을 '독일의 진짜 적'이라고 불렀다. 포템
파 판결에 대한 항의는 상당히 교육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하였다. "우리는 잔인해
야 합니다. 잔인성을 위한 양심을 회복해야 합ㄴ.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우리 민
족에게서 상냥함과 감상적인  편협성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이 '평온함'과 초저
녁 술좌석의 즐거움 말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감정들을 위한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려면 민족을 강요해서 위대하게 만들
어야 합니다. "
  그는 그렇게 역사적인 도전의  전망 속에 빠져들어가 자신을 잃어버리고 스스
로를 비스마르크에 견주다가 갑자기  단치히와 독일 사이에는 국가간 범죄자 인
도 조약이  있는가 물었다. 라우슈닝이 그  질문을 제대로 친절하게 설명하였다.
(괴벨스의 일기자에는  8월 25일자로 자우슈닝에게  한 히틀러의 질문을  설명해 
주는 기록을 하고 있다.  "지도자가 구류 상태라는 소문이 돌고 잇다. 하지만 그
건 어린애 장난이다. ") 
  그러고 나서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다시 자신감을 보였다. 파펜의 경박함, 단
순성, 양보의 각고, 모든  민족주의 요소들과 대통령이 노령에 대해서 느끼는 주
저하는 듯한 불안감, 이  모든 것이 그의 지구력을 강화시켜주었고, 그에게 안도
감을 주어서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포템파의 살인자들을 '동지'라고  부른 지 며
칠 지나지 않아 히틀러에게 권력이 돌아오리라는  확신을 표현하고, 서둘러서 경
제 계획에 매달리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그리고 이런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나
의 일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더라도 - 그리고 내가 성채 안에 갇혀 있는 경우
라도 - 나는 당신의 충실한 조력자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미국 통신사인  언합통신의 대표가 이 무렵  히틀러에게 무솔리니의 경우처럼 
베를린으로 행진할 생각인가 물어보았을 때 히틀러는 이중적인 의미로 대답하였
다. "무엇하러 베를린으로 행진해 갑니까? 난 이미  거기 있는데요!"(앞에서 말한 
힌덴부르크의 노력에 대한 히틀러의  조롱섞인 지적은 1932년 9월 4일자 연설에
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맥락이다. "오늘 나를 대통령 각하와 대립
시킨다면 나는 웃을  것입니다. 그 싸움을 나는 대통령 각하보다  훨씬 오랬동안 
견딜 수 있거든요.")

    제4장 드디어 수상관저로   
  고전 드라마의 법칙에 따라서  1932년 가을부터 근거 있는 의망을 일ㄲ우면서 
위기를 극복할 듯한 전환점이 사건진행에 나타났다.  마치 연출자의 상상혁이 작
동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근본적으로 국가사회주의의 상승을  도와주었던 전제
조건들이 한 번 더 혼란에 빠졌다. 아이러니의  한 순간 게임은 모든 국면ㄹ에서 
뒤집어지는 듯이 보였고, 히틀러의 과장된 권력 기대를 폭로하는 듯이 보였다가, 
장면은 급격히 무너져내렸다. 
  8월 13일 이후로 파펜은 히틀러의 뜻을 더 이상 받아주지 않겠다고 분명히 결
심하였다. 그의 설명이  그다지 맏을 만하지 않아서 그런 결심의  상세한 동기들
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대도 이렇게 뒤늦은  ㄲ달음에 도달한 계기는, 괴벨스가 
나증에 '겉보기 너그러움'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한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이중적인 
기만노선이었다.
  성공의 강요에 떠밀리던 당이 순간적으로 직면한  불안정한 상황은 , 지소적인 
거부의 전략  속에 어떠한 기회들이  들어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정부의 
권위기반이 약해서 수상은  하는 수 없이 포템파 재판을 흐지부지  만들었다. 그
러나 신경질적으로 된 히틀러가 살인자들에게 보낸 위로 전보는 그 자신의 속셈
을 폭로하고 말았다. 곧 이어서 그는 한 번 더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파펜이 9월 12일에 소집한 의회에서 그는 얼결에 자신에게 전략적으로 불리하
기만 한 의회해산안을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  라펜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욕구가 
다른 생각을 앞서버렸다. 하원의장으로 선출된 헤르만  괴링의 도움으로 그는 수
상에게 도이치  정당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42대 512)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파펜은 보복으로 의회가 개원하기도 전에 만든 의회해산 명령을 적은 유명한 붉
은 지도를 의회에 내보이는  데 성공하였따. 의회 운영을 망치고 체면으; 손상을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방금 개원한 새 의회는 약 한시간  가량의 회의를 
한 당음에 벌써 해산되었따. 새로운 선거날ㄹ짜는 11월 6일로 확정되었다.
  모든 증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히틀러는 원래 이러한 급변을 피해보려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이해에 어긋나는  것이기 ㄸ문이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 모두 깜짝 놀라  것 같다. 아무도 우리가 이런 결정을 할 요긱를 가졌
다고는 다. 우리는 다만 기쁠 따름이다.
  그러나 병적인 전투욕구는 곧 사라져버리고 여러 해 전에 없어졌던 풀죽은 상
태에 빠졌다. 당은 변덕스런 유권자들 덕택에 눈부신 상승을 누렸다. 유권자들은 
패하지 ㅇ낳는다는 인상에서 그에게 승리를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을 히틀러 자신
이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8월  13일의 패배, 다시 대립을  ㅗ돌아선 것, 
포템파 사건, 힌덴부르크 대통령과의  갈등, 이 모든 것이 그를 선출해야 한다는 
믿음과, 그가 비할  바 없는 역할을 한다는 믿음을 손상시켰다는  사실을 분명하
게 느꼈다.  성공의 분위기가 한 번  뒤집히ㅁ 당의 내적인 법칙으로  보아 당의 
매력도 사라져버릴 것이고 바닥 없이 추락하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파펜의 
무력화 전략이 성공한  것도 히틀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난 일년  동안 값비
싼 선거전들을 치르고 난 지금 당은 거의  힘의 한계에 도달하였다. 자금도 바닥
이 났다. 히틀러의  충신은 점점 더 의기소침한  태도로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적들도 우리가 이번 전투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힘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계
산하고 있다."
  4주 뒤에 그는  추종자들 사이에서 돈과 인력을 놓고 불화를  빚고 있다.고 말
한다. "조직은 수많은  선거전을 통해서 대단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너
무나 오랫동안 방공하 속에 엎드려 있는 중대처럼 과로하고 있다."
  근심어린 어조로 그는 자신의 낙관론을 펼친다. "우리의 기회는 나날이 좋아지
고 있다. 전망이 상당히  나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과 몇 주  전의 위안 없던 
전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다."
  히틀러만은 적절한 결심을 한  다음이면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에 넘쳐서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따. 10월 전반부에  그는 네 번ㅉ 독일 비행 
길에 올랐고,  점점 더 커지는 상승의  필요성에 맞게 연설의 숫자와  비행 거리 
기록을 갱신하였다.  바로 얼마 전에 자신을  방문해서 중무장낳ㄴ '군신의 아들
들'에 불러싸인 채, 호전적인  자동차 행렬을 이루어 포츠담의 전국 청년단 대회
까지 따라갔던 쿠어트  뤼데케에게 자시느이 생각을 들려주었다.  희망과 현실이 
뒤얽힌 상태에서 자신이 수상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도 힘의  한계에 도달한 듯 보였다. 자동차가 달리는  동안 수행원은 
미국에 대한  보고를 해서 그가 잠들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미국은  그에게 칼 
마이의 기억들로 가득 채워진 곳이었다. 그가  장담한 바에 따르면 위네토우, '늙
은 그림자  손'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강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는이 
감기려고 할 ㄸ마다 깜짝 놀라면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계속, 계속하라구, 
난 잠들면 안돼!"
  7만 명의 히틀러 청년단이 벌이는 인상적인 선전 쇼가 끝나고 이틀 뒤에 뤼데
케가 이틀러와 작별했을  ㄸ 히틀러는 완전히 지쳐 보였다. 기차의  좌석 구석에
서 겨우 힘 없는 작별인사를 할 힘밖에는 없었다.
  선거전의 흥분, 권력의 약속, 연극적인 등장,  숭배와 ㅈ비단착란 등이 그를 붙
잡고 있었따. 사흘 뒤 뮌헨의 지도자 대회에서 그는 괴벨스의 말대로 '형식상 대
단히 위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주  광범위한 전망을 ㅗ우리 투쟁의 발
전과 현상태에 동화와  같은 윤곽'을 부여하였다. "그는  사실상 우리 모두 위에 
있는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절망적인 분위기에 빠질 ㄸ마다 당을  깨워 일읕킨
다."
  그들이 직면하고 있던 어려움은  점점 더 커졌으며 그들의 정ㅊ거인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자금 붑족이  분명하게 마비시키는 
기능ㅇ르 하였다. 파펜과 그의 '방동내각'과  대립전선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국가민족당  계열의 자본가 그룹과 적대적인 입장에 빠졌고,  그들의 기
부금은 당연히 전보다 더  적어졌다. "돈을 만들기가 극히 어렵다. '재산과  교영'
을 갖춘 어리신들은 모두 정부 편을 들고 있다. "
  선거전도 '귀족도당' '시민적 불량배' '타락한 귀족 클럽 정권'에  반대하는 방향
을 이루어졌다. 당의 선전지침도  입에서 입으로 '파펜과 그의 내각에 대한 직접
적인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구호들을 전파하는  것이었다.(시민정당들이 
이 도전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미  말한 선전지시에서 분노의  어조로 인용된, 
오이치 민족진영의 선전책자의  예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  선전책자에서는 국가
사회당은 마르크스주의 찌꺼기로  묘사되어 있거나 아니면 괴벨스는  '남자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욕을 얻고 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그의 일파는  나중에는 실망하고 말 것이지만 어ㅉ든 한 
번 더 위대한 희망의 시기를 맛보았다. '반동을 거부하자!'는 것이 히틀러가 내놓
은 공식적인 선거구호였다.  그것은 정부의 기업가 위주 경제 정책에  대한 열렬
한 공격, 도이치 민족주의 집회들을 강제해산시키기, 철모단 지도자들에 대한 조
직화된 기습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국가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여전히 강령이  없었고 학문 이전의,  주문을 읊는 
듯한 비유로만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 "매수되지 않는 도이치 
직업관료인 프로이센  장교의 업적주의 원칙이고,  성벽이며, 시청, 주교좌 교회, 
자유 제국도시의 구빈원이며, 그 모드든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또한 "노동자 계
층에서 노동자주의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직한 모호성이
야말로 그것을 민중적인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정직한 노동을 위한 정직한  살림'이라는 말이 야간 학습에서 배운 치유의 믿
음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경제체제의 분배기구가 자연
의 수확품을 제대로 분배하는 법을 모른다면 이 체제는 잘못된 것이고 변화되어
야 마땅하다." 이런 구호는, 모든 것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기본감정에 잘 들어맞
았다.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어떤 연설에서  '반자본주의적 동경'이라는 말을 했는
데 그것은 곧 표어가 되어서 당시 시대 분위기를 광봉무이하고도 이론적인 개념
으로 잡아냐는 가장 이닉있는 표현이 되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그레고어 슈
트라서가 그러한  표현을 찾아낸 것이다.  이 표현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위대한 시대 전환기 시대의 증거가 되었다.(이 구절의 전체 맥락은  다음과 같다. 
"국가 사회주의 운동의 상승은 노동과 자연스러운 생활의 재건의 권리를  거부하
는 구각에  대한 국민의 저항인  것이다. 오늘날 경제체제의  분배기구는 자연의 
풍부하 생산물을 제대로  나누어줄 줄 모른다. 이 체제는 잘못된  것이고 국민을 
위해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발전에서 본질적인 것은 우리  민족을 일관하는 
거대한 반자본주의적인 동경이다.  이러한 동경은 오늘날 의식, 무의식적으로 우
리 민족의  95퍼센트를 사로잡았다. 이  반자본주의적인 동경은... 우리가 거대한 
변화 앞에 서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극복과 경제에서  새로운 생
각을 일깨우고 국가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일걔워야 할 시간이다. " 국가 사회당 
내부에서 슈트라서의 정치적 영향력이 근본적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과대 평
가되어 온 것은 상당 부분 이러한 표현이 만들어낸 작용이다.)

    베를린 교통파업
  선거 며칠전 분명하게 지치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던 선거전이 막바
지에 이르렀을  때, 그 동안 당이  좌익 구호를 외쳐온 것이  진지한 의도였음을 
보여줄 기회가 찾아왔다.
  11월 초에 베를린  운수업체들의 파업이 발생했다. 그것은  노동조합의 투표결
과에 반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주동한 파업이었다. 그리고 기대와  달리 국가사회
주의자들이 이 파업에  곧바로 합류하였다. 돌격대와 붉은 전선은  공동으로 5일 
동안이나 대중교통 수단을 길거리에 세우고 철도의  구간들은 막았다. 파업 감시 
초소들을 세우고 일하려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ㅡ,  긴급을 ㅗ조직된 보조 교통
의 운행을 힘으로 방해하였다. 
  행동 통일은 언제나 좌익 과격파와 우익과격파의 운명적인 공통점이라고 평가
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 순간에 국가사화당에는 다른  선택의 여
지가 없었다. 시민적인 유권자들 사이에 두려움이  커져서 재정적인 후원이 거의 
전면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언론 
전체가 우리에게 욕을 퍼부어댄다. 이것이야말로 볼세비즘이란다. 그렇지만 우리
에게는ㄴ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도로공사 노동자들의 가장  원시적인 생존권이 
달려 있는 이 파업에서 우리가  빠졌다면 노동자 계층에 굳힌 우리의 확고한 지
위가 흔들렸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거 이전에 반동에 대항한  우리의 노선이 
정말로 내면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알릴 기
회를 가졌다."
  그리고 며칠 뒤 11월  5일자. "최후의 돌진이다. 패배에 맞서기 ndl한  당의 절
망적 몸부림... 마지막 순간에 1만  마르크를 구할 수 있었다. 그 돈은 토요일 오
후 선전비로 3들어가게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다. 이제 운명의 
결정만 남았다."

    11월 6일 선거 패배
  운명은 1930년 이후 처음으로 구각사회당원들의 권력요구에 불리한 판정을 내
렸다. 2백만 표를 잃고 의석 34석을 잃었다. 사회민주당도 의석 몇 개를 더 잃어
버렸다. 다만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 11석,  공산주의자들이 14석을 더 얻었다. 전
체적으로 보아서 여러 해 전부터 진행된 시미적 중도정당들의 붕괴가 머증ㄴ 것
으로 여겨지는 결과였다.
  국가사회당의 후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것이 전국적으로 고루 일어난 현상
으로 지역적인 패배가 아니라 전체적인 패배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
난번 선거에서 가장  강력하고 믿을 많나 지원을 보여주었고, 원래  대도시 소시
민 정당의  이미지를 벼화시켜주었던,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저지  작센, 포메른 
같은 농ㅇ업지역에서도 국가사회당은 상당한 표를  잃었다. 지도자들은 "이 벌어
진 틈을 다시  메우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싸우겠노라."고  야속하였지만 다음 몇 
주 동안 이루어진 지방선거에서도 침체가 계속되었다.  당의 승리의 행진은 끝난 
것으로 보였다. 당이 아직도 대단한 약속을 할  수는 있었지만 이제 신화는 아니
었다. 당이 평범한  대정당으로 남느냐 아니면 신화로 남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
되었다.
 
    파펜의 독자노선
  선거 결과에 만족한 살마은 누구보다 파페니었다.  위대한 개인적 승리를 의식
하는 태도로 그는 히틀러에게 묵은 싸움을 그만두고 모든 민족주의 세력의 결속
을 시도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수상의 자신만만한 어조를 통해 오직 자신이 허약하다는 사실만 더욱 
뚜렷하게 의식하게 된  히틀러는 며칠 동안이고 베를린에서  멀리 떨어진 채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선거가 끝난 저녁에 그는 정부와의 협상에  대한 생각
을 일찌감치 떨구어버리라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룹는 공개되어 있고,  일부는 
은폐된 적들이 쓰러지기까지 가열찬 싸움을 계속할 것"을 선포하였다. 적들의 반
동적인 정책은 나라를 볼셰비즘의 팔에 밀어 넣는 것이라고 했다.
  파펜이 공식적인 서한을 보내왔을 때야  비로소 그는 며칠 더 잘 계산된 망설
ㄴ임을 보이고 나서  거부하는 답변을 보녔다. 이번에도 이룰 수  없는 조건들을 
여러 개나 붙인 거부였다.  수상은 다른 정당들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할 경우 날
카로운 거부의사로 받아들였다. 
  이제 정부는 거의 전국적인  불쾌감을 얻으면서 마지막 남은 대안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의회를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해서 위험할 뿐 아니라  비용이 많이 
드는 정치적인 유예기간을 한 번  더 만들거느 아니면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대
로 공식적으로 헌법에  손을 대고, 대통령과 군부의 힘을 빌어서  처음에 국가사
회당, 공산당, 그리고 가능하면ㅇ 다른  정당들도 금지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리고 
나서 의회의 우파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릭도 새로운 선거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를 일종의 초법적인  권위로 만들어서 그가 소집한 옛 지도층
의 대표자들 한가운데 안정시킨다는 구상이었다.
  분명하게 실패한 민주적, 의회주의적인 '열등한  사람들의 지배'가 있은 다음에 
파펜의 주변에서 구상된 새로운 국가는 '우수한 사람들의 지배'를 허용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국가사회자의시그이 야만스런  독재체제를 바로잡게 될 것이라고 생
각하였다. 파펜이 10월  12일자 연설에서 몇 가지 부분을 드러내보인  이러한 해
결책의 세부사항은 아직 불분명하고 단순한 입장표명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래
도 전체적으로  보면 사고 유희의  단계를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힌덴부르크의 
이웃이며 친지인 늘긍ㄴ  올덴부르크 야누샤우는 반동ㅈ거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자기와 자기 친구들은 짧은 시간  안에 "도이치 민족에게 헌법을 낙
인으로 새겨주어서 민족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파펜이 "놀이공처럼 정치적, 사회적 힘들에 의해서 이리저리 던져지지 않고 그 
모든 힘들 위에 굳건히 서 있는 " 강력한 국가권력을 만들겠다는 의도를 알리자 
그는 갑자기 슐라이허측으로부터 생각지도 않는 저항을  받게 되었다. 장군은 파
펜이 광범위한 민족주의 연합을 펼쳐서  히틀러 당을 통제하는 데 쓸모 있는 유
순하고 민첩한 도구라고 여겼기 ㄸ문에 그를  기용하였다. 그런데 파펜은 도구가 
되기는커녕 히틀러와 성과 없는  개인적인 투쟁상태에 빠졌을 뿐 아니라 힌덴부
르크 대통령의 변함없는  신회를 바탕으로, 여론에 등장하기를  꺼리는 장군에게 
쓸모있게 여겨졌던 유순한 특성마저 잃어버렸다.
  슐라이허는 때로 방문객을 향해 이렇게 비웃곤  하였다. "자 이제 무슨 마릉ㄹ 
하시겠소, 우리 귀여운 프란츠(파펜)가 자신을 발견했단 말씀이야."
  파펜과 달리 그는 1932년의  위기에 몰린 산업국가의 문제점을 기사의 관점에
서 보지  않았으며 국가가 무조건  강해야만 한다고 속접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수상의 모험적인  개혁안이 그를 화나게 했으며, 그는 그런  안을 위해서 
바우이군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이러한 계획은  구대를 국가사회당 및 공산당과 
내전 비슷한 대치 상황에 빠뜨릴 것이기  ㄸ문이다. 국가사회당과 공산당은 거의 
1천8백만의 지지자를 등에 업고  어쨌든 백만 단위를 헤아리는 군사적 추종세력
을 갖춘 집단이었다. 슐라이허가 결정적으로 전향하게 된 거승ㄴ, 그사이 변화된 
권력상황에서 국가사회당을 길들이고  서서히 마멸시킬 확실한 기회를 보았다고 
여겼기 ㄸ무닝다.
  그러한 생각을  품은 채 그는  파펜에게 형식적으로 물러서서,  당 지도자들과 
'우파 연합 내각'에 대한  협상을 대통령 자신에게 맡ㅋ기라는 제안을 하기도 하
였다. 파펜은 11월  17일에 이 제안을 따르면서 속으로는 대화가  실패로 돌아가
고 자신이 다시  기용되기를 바랐다. 이틀 뒤에 히틀러는 서둘러  소집된 사람들
의 환호를 받으면서  황제궁 호텔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대통령궁으로 차를 
달렸다. 그러나 이 대화도, 이어진 두 번ㅉ 회합도 성과 없이 끝났다. 
  히틀러는 고집스럽게 특수한  전권을 가진 대통령식 내각을  요구하였다. 그에 
반해서 파펜의  조종을 받은 힌덴부르크는  이런 전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라가 계속해서  비상사태법에 따라 통치되어야 한다면  파펜을 해임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히틀러를 의회의 다수파  정당 정권의 수상으로 임명
할 수는 있다고 했다.(대통령의 트구건을 누가 가질 것이가 하는 문제를 놓고 줄
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다. 히틀러는 대통령의 특권을  지닌 수상직을 요구하고 있
는 데 반해  대통령은 그것을 양보하려고 하지않는다).  국가사회상 당수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기 ㄸ문에 힌덴부르크으 ㅣ국무비서관인 마이스너
는 11월 24일자 편지로 글에게 통보하였다. 

  매우 존경하는 히틀러씨,  대통령께서는 당신이 대통령식 내각의  지휘권을 인
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거듭해서 
배타적 특권을  강조해 왔고, 대통령  개인에 대해서나 그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정치적, 경제적 조치들에  대해서 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정당의 당수에
게 대통령의 전권을 넘겨주는 일이  도이치 국민 앞에서 책임질 수는 없다고 생
각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이ㅡ는 대통령식  내각이 결국
은 일당독재로  넘어가서, 도이치 alwrh에  존재하고 있는 대립들을  극단적으로 
날카롭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맹세와 자신의 양심을 걸고 그런 일을 초래한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괴벨스가 '걸작'이라고 불렀던,  다음에 언급되는 히틀러의 글은 히틀러의  전략, 
엉터리 요설, 심리학 등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예리한 비난이었다. "혁명은 다시  닫힌 문 엎에 서  있다."고 
괴벨스는 분노한 어조로 적었다. 이번에는 패배가  언론에 알려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대통령에게 보내는)상세한 편지에서 그는  상당히 예리한 감각으로 
힌덴부르크가 내세운 조건들의  내적인 모순을 분석하고, 1월 30일  경정되는 해
결 방안의 기본적인  윤곽을 처음으로 그려 보였다. 통치방식을 헌법  48조에 따
라, 합헌적으로 가결된  전권위입법으로 대체하자는 히틀러의 제안이  특히 대통
령궁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정ㅊ거인 거래에  희말려드는 일에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해방시켜주
고, 견디기 힘든 책임을 면제시켜줄 수 있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의 무게는 앞으
로의 발전 과정에서  지나치게 평가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마이스너의 편지에서 
그토록 분명하게 거부의사를 밝힌  대통령을 ㅗ하여금 이남자의 권력 요구에 결
국 항복하도록 만드는  데 상당히 기여한 것이었다. 얼만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
이 고작 체신부 장관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던 그 남자였다.
  
    슐라이허의 저항과 수상취임
  파펜은 물론 모든 협상이  결렬된 다음에 자신이 다시 수상직으로 복귀되리라
고 믿었지만 실망하고 말았다. 그 사이에  슐라이허가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통해
서 국가사회당과 접촉을 하면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을 자기가 이끄는 내각에 참여
시킬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교활한 계획은, 이 너그러운 
제안이 히틀러의 부하들 사이에  상당한 폭발력을 지닌 갈 등을 만들어내리라는 
생각을 바탕으로한 것이다. 슈트라서는 최근 당의  패배를 보고 거듭 양보전략을 
주장하는 데 반해서 특히  괴벨스와 괴링이 고집스럽게 모든 '얼치기 해법'에 반
대하면서 분산되지 않는 전권을 요구하고 있었기 ㄸ문이다.
  슐라이허가 정타ㅁㄹ 계속하는 동안  그는 12월 1일 저녁에 파펜과 함께 대통
령구응로 부름을 받았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서 입장ㅍ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바독 파펜은 자기가 생각하는ㄴ 대로 국가전복  형식의 헌법개정안을 밝혔다. 이
럭승ㄴ 이미 여러 달 동안이나 공개적으로 거론한 다음 거의 형식적으로 대통령
의 승인을 요청한 것에  불과하였는데 슐라이허가 갑자기 극적인 반대의견을 펼
쳤다. 그는 파펜의 의견의 의견을 불필요하고도  위험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전
의 위험을  그려 보였다. 그리고 국가사회당에서  슈트라서 계보를 빼나고, 철모
단, 노조, 사회민주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요세력들을 모아서 자신이 지휘하는, 
당파를 초월한 내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힌덴부라크는 이
유도 제대로 캐보지  않고 고집스럽게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자신의  계회은 대
통령에게 맹세를 깨는  위험을 피하엑 해줄 것이라는 슐라이허의 지적도,  이 늙
은 대통령이 총애하는 파펜 수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헌법 문제를 초월할 정
도의 애착을 흔들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슐라이허는 패배할 사람이 아니었다. 대담이  끝난 직후 파펜이 장제력
을 통한 헌법개정을 위해서  방위군을 투입할 준비가 되었는지 물어보자 슐라이
허는 솔직하게 거부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도 그리고  다음날 내각회의에서도 
국방부의 연구결과를 지적하였다.  즉 사흘 동안의 전쟁놀이의  결과를 요약하고 
베를린 교통파업에서도 드러났던  국가사회당과 공산당의 힘에 맞서 효과적으로 
대응할 만한 힘이 군대에 없다고 단언하였다.  더욱이 총파업과 더불어 동부국경
에서 폴안드가 침입해오는 경우를ㄹ 예상해보면 말할 것도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거의 스러져가는 소수파의 지원을 받는 수상과 그의 지나치
게 대담한  복구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당파를 초월한 방위군을  투입하는 일에 
대한 의혹을 드러냈다.  슐라이허의 설명이 내각구서우언들에게 미친  강력한 인
상을 보자 파페능ㄴ 자신이 속ㅎ고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지체없이 대통령을 방문해서  새로운 상황을 보고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 순간 
그는 슐라이허의 해임을 요구하고  새로운 국방장관과 자신의 계획을 계속 추진
할 결심을 했던 듯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힌덴부르크가 그를 말려ㅆ. 이어서 나
온 눈물난는 장면을 파펜 자신이 상당히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거의 고통스럽게 울리는 음서응로 ... 그는  나를 향했다. '지금 내가 의견을 바
꾼다면, 친애하는  파펜 , 당신은 나를  악당이라고 여기겠지요,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에  내전에 대한 책임까지  떠맡기에는 이미 너무  늙었어. 그러니 
하느님의 이름으로 폰 슐라이허  씨가 자기 행운을 시험해보라고 놔두는 수밖에 
없소'
  이 거구의 강한 남자가 작별하기  위해 내게 손을 내밀 ㄸ 두 줄기 굵은 눈물
이 그의 뺨 위로 흘러내혔다. 우리는 협동기간이 끝난 것이다. 영적인 교감의 정
도는 ... 몇 시간 뒤에  장군께서 이별 기념으로 내게 주신 그림 아래에 적인 '나
는 동지를 가졌네!'라는 헌사를 보면 구외자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ㄹ은. 대통령의 마음을 재빨리 얻고,  또한 '정치적 위기에 사려 깊은 
가교를 놓을 마지막 기회르 걸고  승부를 가릴 수 있는 파펜에게 있어서 사임이
었을 뿐 이별을 나니었다.  생각지도 않돈 추락에 대해서 그가 느낀 모욕가ㅁㄴ, 
슐라이허가 이제는 배후의 은신처에서  앞으로 나와서 아무런 보호물도 없이 강
렬한 조명을 바덱  된데 반해, 자시능ㄴ 대통령 곁에 남아서  슐라이허가 해오던 
조언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을 보고 상당히 완화되었다.
  파펜이 공직에서 사임한 다음에도 국가와 재산을 장악한 사람의 자부부심을가
지고 대통령궁과 마당  하나 사이를 둔 수상관저에 계속 살았다는  사실은, 힌젠
부르크 대통령과의  '영적인 교감'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마이스너와 오스카 
폰 힌덴부르카까지 가세하면  그것은 일종으 ㅣ집안 공동체였다.  그들은 노회한 
슐라이허 장군의 여러 가지  노력드을 차갑고 불쾌한 눈길로 주시하면서 방해하
고 마침내 비싼 대가르 치르고 실패하도록 만든 사람들이었다.

    국가사회당의 위기
  시국은 슐라이허가 의도한 대로 아주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히틀러가 직
면한 위기느 거의  절정에 도달하였고, 그것은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퇴각보다 
무거운 것이었다. 추종세력의  초조감과, 희망은 실망으로 바뀌어서 모든 여역에
서 터져나오고, 당은 빚은 압사당할 지경이었다. 이제까지는 돈 있는 기부자들의 
기부금이 없어진 것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채권자들이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
다. 당 기관지들을 인쇄하는  인쇄업자, 제복 재단사들, 옷감 공급업자들, 사무소
의 임대인들,tkansg은 어음 소지자들이었다.
  히틀러는 뒷날 야비한 논리로 이렇게 고백하였다.  당시 자신은 수많은 채무증
서에 서명하면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승리하면 지불하기가 쉬울것이요, 
패배하면 지불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기 ㄸ문이라고 했다.
  거리 모퉁이마다  돌격대원들이 빈둥거리면서  행인들에게 도장찍힌 모금함을 
내밀었다. "마치 전쟁 지휘자가 연금 대신 동냥질 허가증을 내주기라도"한 것 같
았다. "나쁜 나치를 좀 도와주시죠!"라고 그들은 냉소적으로 소리치고 하였다.
 콘라트 하이덴은 얼마나 많은 절망한 돌격대 하위장교들이 적대적인 정당과 신
문사로 달려가서, 비밀을 폭로하고 대신 현찰을 받아려고 했는지 알려주고 있다. 
당이 승승장구할 ㄸ는  큰소리로 불안하게 몰려들었던 오만가지 기회주의자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불안해 하면서 새로운 냄새를 맡기 시작한  것도 붕괴의 
조짐이었다. 그ㄸ까지만 해도 히틀러의  아성이었던 튀링겐 지압ㅇ의회 선거에서 
국가사회당은 가장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12월 6일 괴벨스는  일기장에 이렇
게 적었다. "상황은 거의 파국적이다. 튀링겐에서 우리는 7월 31일 이후 거의  40
퍼센트으 lthstlf을 입었다.  "나중에 그는 이 시기에 당 운동이  이대로 무너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에 휩싸였다고 공공연히 고백하였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사무실 마다 탈퇴서가 수북이 쌓였다.
  히틀러의 노선에 대해서도 분명한 회의가 나타나ㅆ.  그는 여전히 굽히지 않고 
절반의 권력을 거부하였다. 그렇다고 전권을 얻을 능력도 없었다. 슐라이허의 수
상취임은 승리냐 아니면 몰락이냐 하는  그의 최종적인 요구를 한 번 더 거절한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모든 패베, 실망, 위기를  넘어서까지 과격한 양자택일에 
집착하는 것은 분명히 경탄스런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잇 어떤 
해설가처럼 히틀러의 고집이 이제 어리석음으로 변했다고 물어볼 만하지 않겠는
가?"
  슈트라서, 프리크, 페더 등이 이끄는 일부 추종세력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여겼다. 당에 많은 이점을  가져다 주
었던 경제 위기는 아직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고, 실업자 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 부분을 포함해서 1932년 10월 ㅂ러써 875만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 바야흐
로 아ㅍㄹ 내다볼 수 없는  과격ㄱ한 효과를 불러올 혹독한 겨울에 진입하는 중
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전문가들의 판단에 따르면 처음으로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지표
들이 전환점을 가리켜  보였다. 외교정책상으로도 그토록 오랫동안  질질 끌어오
던 협상이 진척되고 있었다.  히틀러으 ㅣ표어인 전부냐, 무냐 하는 것은 퓨트라
서 일파가 정확하게  인식하였듯이 합법화 전략에 모순되는  것이었다. 슐라이허
가 다시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준비할지도 모른다는 구체적인 두려움
들은 사라졌다. 당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새로운  선거를 감당할 힘이 없었
다.
  슈트라서가 어떤 추종세력을  지배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당수의 명령
을 어기면서 까지  무엇보다 정치기구 책임자인 그를  따를 준비가 어느 정도나 
되어 있었는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다.(63명의 국가사회당 의원들을 추종세력으
로 꼽고 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1백 명의 추종세력을 말한다. 히틀러 자신과 
특히 괴벨스는 국가사회당의 언론  기구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슈트라서 일
파의 활동을 전혀 언론에 발표하지 않았따.  과격노선의 대표자로서 괴벨스는 언
제나 전부냐, 무냐 노선을  지지하였다.) 여러 가지 견해들 중 하나는  이런 추측
을 하고 있다. 히틀러가 처음에는 고지ㅂㄹ  굽히고 슈트라서의 입각에 동의하려
고 했을 것이다.  그런 방법은 적어도 그 자신의 절대권력의  요구를 지켜주면서 
당을 권력 주변에 둘 수 있기 ㄸ무닝다.  그러다가 괴링과 괴벨스가 히틀러를 원
래의 노선으로 되돌려놓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  다른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
는 자신의  ㅗ선을 '냉정하고 분명하게'유지하였다고 한다.  슐라이허가 자시느이 
'반자본주의적 동경의 내각'(슐라이허  최초의 경제정치적인 조치들은 파펜의  반
동적인 조치들을 부분적으로  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조치들은  이러한 특성
화를 부적합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다.)구성을 위한 협상에서 슈트라서에게 
부수상과 노동부 장관 자리를 제안하였고, 그 대가로  당을 둘로 가르는 일에 동
의를 받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슈트라서가 히틀러를 속이려는 생각을 하기나 했는지,  아니면 그는 다만 자의
식 강한 당내  2인자의 권리의식에서 혀뵤ㅏ을 시작했을 뿐인지  명확하지 않다. 
예컨대 슐라이허에게 자신을 비행부 장관으로 임명하라고 요구했다는 괴링과 결
국 같은 행동을  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비밀 담합설,  약속에 대한 암시들, 
여러 가지 주장등이 혼합된 가운데 믿을  만한 기록문서가 전해지지않고 있으며,
(이런 배경에 대한 지식은 디트리히의 짤막한 언급에 근거하고 있다.) 단순히 뒤
죽박죽 음모, 여러 가지  모함들, 협의 ,분노한 경쟁 등만이 입증ㄱ되고 있다. 이
것이야 말로  이념적으로 동원력이 있고,  지도자 이념과 충성  원칙에 입각하고 
있으며 언제나 실무적인 고려가  아니라 오직 개인적인 고려에서만 결정을 내렸
던 당의  어두운 얼굴이었다. 히틀러를  둘러싼 당 지휘부는  마지막까지 격분한 
채 서로 싸우는  췬위병 무리로 남아 이었다. 그들은 어느ㄸ인가는  모두가 모두
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될 판이었다.
 
    당이 무너지는 날이면...
  튀링겐에서 손실이 큰 선거가 있고 난 다음 12우러 5일 황제궁 호텔에서 열린 
지도3자 대회에서 격렬한 대립상황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슈트라서는 공공연
히 프리크에 의해서  곤경으로 몰렸고, 모든 것을 유린하는 히틀러의  연설의 힘
에 밀려서 고립상태에 빠져들었다.  이틀 뒤에 그는 같은 자리에서 한  번 더 수
많은 비난의 폭포를  겪고 음험함, 배신, 충성 남용 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아마
도 히틀러의 비난과,, 자신의  변명에 대한 회의 참석자들의 반응응ㄹ 보고 슈트
라서는 자시느이 노력이 전혀 전ㅁ\망이  없다는 사실을 ㄲ달ㅇ랐던 것 같다. 어
ㅉ든 그는 시끄러운 소동이 벌어진 동안에 자시느이 물건들을 챙겨서 말도 인사
도 없이  슬며시 방을 떠났다. 호텔  방에 도착해서 그는 히틀러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지난  여러 해 동안의 그들의 관계를 요역하ㅓ고, 구제불능으로 
괴벨스와 괴링의 영향을  받은 당의 선동적인 과격화정책을  비난하고, 히틀러의 
일관성 없음을 비난하고,  그가 결국 '폭력행위와 ㄷ이치의  폐허 더미로' 이끌어 
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고  나서 체념과 혐오가ㅁㄹ  느끼면서 모든 
당직에서 사퇴를 선언하였다.
  이 사직서는 당을  정망적인 침체상태로 몰아넣었다. 특히  편지에 슈트라서의 
앞날의 의도가 전혀  밝혀져 있지 않아서 더욱 심했다. 슈트라서의  가장 가까운 
추종세력인 에리히 코흐, 쿠베, 카우프만, 레벤 틀로브 백작, 페더 , 프리크,  슈퇴
어 같은 사람들만  어떤 표지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라, 히틀러도  잔득 신경ㅇ이 
날카로워져서 공식적인 토의에서  의견차이를 조정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퓨
트라서를 찾을 수 없게  되자 불안은 점점 커졌다. 괴벨스는 이렇게 적었다. "저
녁에 지도잦는  우리집으로 왔다. 분위기가 제대로  잡히지를 않았다. 우리 모두 
의기소침해쏙, 당전체가  분열되고 그 동안 해온  모든 일이 허사가 될  위험 쭬 
때문에 그랬다. 우리는 결정적인 시련 앞에 서 있다. " 나중에 자신의 호텔 방에
서 히틀러는 갑자기 침묵을 깨고 소리쳤다.  "당이 무너지는 날이면 나는 3분 안
에 권총으로 끝을 내고 말겠어"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찾았던 두려운 슈트라서, 한순간 당의 운명을  자기 손
에 쥔 것으로 보인 슈트라서는  그날 오후를 친구와 함꼐 맥주를 마시면서 보냈
다. 체념한 사람의 편안한 심정으로 그는 여러  해 동안이나 억눌렸던 울분을 토
하고 욕하고 한숨 ntl고  들이켰다. 그러다가 지친 모습으로 저녁 기창에 올라타 
자신을 녹초로 만든  히틀러 곁을 떠나 휴가길에 올랐다. 자신의  추종세력은 아
무런 방책도 없이  남겨놓았다. 이러한 체념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여러  해 동안
이나 무조건적인 추종이  가져온 해약의 작용으로 보앙 할 것이다.  그레고어 슈
틀서는 너무나 오랫동안 충성을 다해왔기에  이제 독자적으로 설 수 없게 된 것
이다.
  슈트라서의 퇴직이 채 알려지기도 전인 다음날 벌써 히틀러는 당내 그의 계파
를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번개처럼, 빠르게,  독특하고 격렬한  확고함으로 그는 
명령과 호소를 하였다.  돌격대 위기의 해법 모형에 알맞게 그는  슈트라서가 맡
고 있던 정치기구를 스스로 떠마고 벌써 여러해 전 하노버에서 맹목적인 충성을 
입증하였던 로버트 라이를 참모로 임명하였다. 갱니  ㅂ지서인 루돌프 헤스를 제 
3자의 권력욕에 맞서기 위한 경쟁기관인  정치부 중앙 상무처자응로 승진시켰다. 
나아가서 농업과 국민교육 담당영역들이 각기 독립되어 다레와 괴벨스에게 맡겨
졌다.
  이어서 히틀러는 간부들과 당소속 의원들을 의회의장인 헤르만 괴링의 관저로 
ㅅ빕해서 감동적인 충성서약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어서 자기가  언제나 슈트라
서에게 신의를  다하였는데, 그는 언제나 자기를  향한 신의를 깨뜨렸으며, 당을 
파멸의 가장자리로 이끌어 넣었다고 하였다. 승리  직전에도 이런 표현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정말로 흐느끼면서 머리를  책상에 부딪쳐서 절망의 연기를ㄹ 
했는지 분명하게 확인되지는  않지만 괴벨스는 "그토록 강력한 개인적인 고미능
로 해서  보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여러해 전부터  당에서 흔들리지 
않고 싸우고 일해 온 오랜 동지들은 분노와  고통과 수치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늘저녁은 운동의단합을 위해 아주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히틀러는 슈트라서 추종자들 중 단 한 사람도 이러한 열정적인 압도의 자염ㄴ
에서 빼놓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공공연하게 굴종의 행동을 요구하였
다. "모두들 그에게 손을 내밀고 약속하였다. 무슨 일이든지 닥칠테면 닥쳐라, 그
와 더불어 계속  싸워나갈 것이며, 목수ㅁㄹ 걸어야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위대
한 일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슈트라서는  이제 완전히 고립되었다. 죽은 
사람이다."

    상대방의 무기력 
  그와 더불어 히틀러는 한 번 더 생애의  커다란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리고 붕
괴와 해체를 오히려 추종 강화의 계기로 만드는 놀라운 재능ㅇ르 한 ㅂ전 더 입
증하였다. 그에게  싸움도 타협도 강요하지  않은 슈트라서가 물론  그의 성공을 
쉽게 만들어주었고, 편리하게도  지난 몇 달 동안의 실패에 대한  속죄양 노릇을 
해주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적대자들이 싸울 주응ㄹ 모르고  감정을 억누르면서 
체념하고, jRO를 으쓱하며 직무에만  골몰하였다는 시실 또한 히틀러 상승에 나
타나는 동반현상의 하나였다. 힌덴부르크ㄹ  바음이 돌아서자마자 브뤼닝이 그랬
고,. 7월 20일에는  세베링이나 체진스키도그렇게 빨리 체ㅕ하였다.  이제는 슈트
라서와 그의 도당  그리고 후겐베르크와 다른 사람들 차례였다. 그들  모두 그의 
분노 앞에서  막대기를 내던지고 가버렸다.  히틀러와 달리 그들은  권력을 향한 
정열이 없었다. 한 번의  위기는 그들에게 패배나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그에 반
해서 그에게 있어 위기는 싸움을 위한 기회이며 새로운 확실성을 향한 출발점이 
되고 하였다. "속지 맙시다."하면서 그는 시민적인 적수의  유형을 날카로운 경멸
감으로 묘사해냐ㅐㅆ. "그들은 우리에게 저항하려 하지 않습니다. 저쪽에서  하는 
모든 말 속에 우리와 타협하자는 외침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열망하
고 권려ㅛ을  차지하고 기쁨을 느끼는  남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만 말하지요, 그들은 조용한 가운데 꽃을 보살피고, 습관이된 시간에 낚시
하러 가고 그밖에는 경건한 관찰을  하며서 삶을 보낼 수만 있으면 대단히 행ㅂ
족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1932년 12월 위기는  바로 이러한 오만불손한 이미지를  확인해준 것이었으며, 
전재으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패배와 붕괴에서 일어서서 승리자의 ㅎㄹ신을 가질 
필요가 있ㅇ르 ㄸ마다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한  예로 인용되고 하였다. 히틀러는 
과거를 돌어보며 이렇게 사람드르이 용기를 북돋우곤 하였다. 당시 자신은 "전혀 
다른 낭떠러지들 사이를 지나가야 했으며 존재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양자택
일에 바닥친 것도 여러 번이었다."는 것이다. 
  슈트라서 사건과 더불어 국가사회당의 정치적위기가 극복된 것은 전혀 아니었
다. 괴벨스가 쓴  일기자응ㄴ 다음 몇 중동안에도 계속해서 낙담의  표현들로 가
득 차 있었으며, '수만흥ㄴ 싸움질과 불화'를  기록하고 있다. 당 지도부, 특히 히
틀러, 괴벨스, 괴링, 라이 등은 당원들의  사기와 신뢰감을 회복하기 위해 주말이
면 관구들을 방문하였다. 대규모 선거전의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히틀러는 하루 
네 번까지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연설을 하고  하였다. 재정적인 결핍은 끝이 없
었다. 베를린 관구에서는 당 직원들의 봉급을 줄였고, 국가사회당 소속 프로이센 
지방의회 의원들은 의회 심부름꾼들에게 크리스마스 팁도 주지 못했다. 
  12월 23일에는 괴벨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무시무시한 고독이 어두운 절망
처럼 나를 덮친다!"
  해가 바뀔 부렴 <프랑크푸르트 신문>은 '국가사회당의 마법에서 풀려나는  것'
을 축하하였다. 반면  영국 좌파의 지도적 지식인인 해럴드 래스키는  이렇게 확
인하였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생명이 위험하다고  묘사하던 시간은  지났다... 
우연이 사태를 바꿔놓지만 않는다면  늙은 히틀러가 바이에른의 시골 구석에 처
박혀서 저녁이면  맥주집에서 친구들에게 자기가 한때는  도이치 제국을 뒤엎을 
뻔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생을  마감하는 일도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
다. "그에 대한 답변이라기도 한 것처럼 괴벨스는 불쾌한 몸짓으로 이렇게 썼다. 
"1932년은 영원한 악운의 실타래였다. 그것을 조각내 부수어야 한다... 모든  절망
과 희망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파펜의 음모
  그 순간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가운데  갑작스럽게 변화가 나타났다. 슐라이
허가 아무리 영리하게 수상직무를  시작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벌써 모든 파벌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빠졌다.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그는 
스스로 '사회주의적 장군'이라고  소개하였지만 노동자들을 향한 그의 고백은 사
회민주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기업가들은  그런 고백에 대해서 괘
씸하게 여겼다. 농부들은  노동자를 선호한 것에 대해서 분노하였고, 대지주들은 
예고한 계획경제의 이념들, 노동조합을  향한 접근 시도, 혹은 의회 상태의 회복
을 위한 노력 등 이 모든 것은 정직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오직 불
신과 저항만이 돌아왔다. 
  슐라이허가 표명한 낙관론은 수많은 적대자들이 자기에 대항하여 하나로 뭉칠 
처지에 있지  않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가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함께 
벌였던 음모는 일찌감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사건은 사기를 잃고  빚에 쪼들
리고 있던 국가사회당의 응집력에 무거운 손상을  입혔다. 히틀러의 도움 없이는 
반정부 전선이 아무런  폭발력도 갖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손상을  입은 히틀
러는 아직 동맹을 맺을 상대로 여겨지지 않았다.
  슐라이허의 이 모든 생각들을  꿰뚫어보고 국가 사회당에 예기치도 ㅇ은 기회
를 마련해중 사람은 다름아닌 프란츠 폰  파펜이었다. 슐라이허의 경쟁 상대자들
이 마침내 히틀러를 '공동 대표'로 점찍은 것이다. 
  슐라이허 장군이 수상이 된  지 2주만에 벌써 파펜은 퀄튼의 은행가인 쿠어트 
폰 슈뢰더에게 국가사회당 당수와 만나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다. 이 접촉은 
그레고어 슈트라이서와의 결별과 맞물려있다.  그것은 산업계의 후원자들이 슈트
라서 사건을 당 내에서  혁명적이고 반자본즈의 분위기가 극복된 것은 아니라도 
어쨌든 그 수뇌가 제거되었다는 사실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11월 의회 선거가 강화시켜준  공산당의 목소리가 나날이 커진다는 사실도 히
틀러에 대한  기업가들의 망설임을  없애는데 기여하였다. 더욱이  국가사회당의 
선전은 이런 구호를  담도 있었다. 당이 내일이라도 무너지면 모래  독일에는 벌
써 1천만 명의 공산당이 더 생긴다는  것이다. 슈뢰더는 퀄튼 신사클럽의 대표로
서 라인 중공업계에  상당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전에도  히틀러를 위
해서 활동적으로 일을  벌인 적이 있었고, 1932년 11월 히얄마르  샤흐트가 히틀
러의 권력 요구와  관련된 청원서를 낼때도 거기 서명했다. 당시  파펜은 날카로
운 어조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부했지만 지금 슈뢰더가 1월 4일에 
히틀러와 약속이 되었다고 알리자 즐겁게 수락하였다. 
 
    퀄른 회담
  엄격한 비밀조치 아래서 이루어진 대화는 1932년 8월 13일의 굴욕을 문제시하
는 히틀러의 분노와  비난에 찬 독백으로 시작되었다. 얼마동안 시간이  지난 뒤
에야 겨우 파펜은  대통령이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모두 
슬라이허의 책임이라고 돌리면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과 히틀러 사이에  일종의 양두제 성격으로 도이치 국가민족당과 국
가사회당의 연합을 제안하였다.  슈레더가 뉘른베르크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 히
틀러는 다시 '긴  연설'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수상으로  임명될 경우 혼자서만 
정부의 수반이 되겠다는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파펜의 부하들
은 많은 변화의 정책을 함께 마련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경우 장관 자격으로 자신
의 내각에  들어올 수가 있다고 했다.  그가 암시한 변화들  중에는, 사회민주당, 
공산당, 유대인들을 독일의 지도적  위치에서 쫏아내겠다는 내용과 공공생활에서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히틀러는 
슐레이허가 의회를 해산  할 권한이 없다는 것, 따라서 국가사회당은  선거를 다
시 치를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아주 소중한 정보를 얻었다.
  이 만남을 가리켜 '제3국의 탄생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히 타당한 일이
다.(여기 제시된 회동의 표현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파펜  자
신은 여기에 대해서  정열적으로 반대입장이었다. 그의 변명서인  회고록에 들어
있는 묘사들도 물론 상당 부분 독자의 신뢰를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회
동에 우연적이고 부수적인  의미만을 부여하려고 노력하였다. 거듭  그는 순수하
게 정보의 목적을  가진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슈뢰더의  확언만 여
기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히틀러는 그보다  몇 주 전에 파펜과 협상하기
를 거절했다. 파펜이 나중에 장담한  말, 곧 어떤 제안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사
실이라고 해도, 히틀러가 파펜의 말을 사실은  힌덴부르크의 말로 들었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여전히 결정적인 것이다. 파펜은 자신이  슐라이허의 이해
와지원을 얻기 위해서  이 회동을 가졌다고 믿게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양두체
제의 계획도 히틀러와 자신이 아닌, 히틀러와  슈라이허의 관계된 것이었다고 하
낟. 이 회동을  둘러쌌던 두려운 비밀주의는 이 만남의 부조리한  성격을 보여주
는 것이다.)
33. 특별히 산업체의  돈으로 획득한 영지는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서  형식상 힌
덴부르크가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  선물되었다.  1932년 7월 20일  사태로 인해 
힌덴부르크는 상당히 걱정하였다. 브뤼닝은 이렇게 쓰고 있다. "슐라이허가  수상
직에서 물러나기 4일 전 저녁에 병원에 있는 나를 방문한 에르빈 플랑크는 힌덴
부르크가 고발당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정부ㄱ 직면하게 된 곤란점들을 설명하
였따.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는데 히틀러가  동의한 까
닭이라고 확인해주었다." 이 순간부터 1월 30일에 이르기까지 인과적인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1월 30일은 퀀른에서 이 순간  처음으로 윤곽이 
잡힌 연합의 표지를  지니고 탄생하였다. 이 만남은 히틀러의 야심을  지원해 온 
기업가들에게 새로운 빛을  주었다. 대화가 끝날 무렵 파멸에 가까운  다의 재정
상태에 대한  이야기와 빚을 청산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이 논의되었는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회담 자체가  이미 당의 지불 능력을 회복
시켰고 재무 자체는 하찮은 것으로 되돌려버렸다.  1월 2일만 해도 국가사회당의 
세무 고문관이 베를린 재무부에, 당이 독립성을  포기할 경우에만 세금을 지불할 
처지에 있다고 보고했다.  이제 괴벨스는 당이 '다시  호황기에' 들어섰다고 적었
다. 흔히 주장되는  대로 그것이 재정 상태를  '갑작스럽게 개선'시키지는 않더라
도 어쨌든 "조직의 나쁜 재정상태를 걱정할 마음은 전혀 없다. 이번에 일이 제대
로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퀼른 회담이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자신감과 승리의 기대를 회복시켜준 만큼 슐
라이허와 그의 정부에는 결정적인 일격이 되었다.  다가오는 위험을 의식하고 수
상은 돌아가면서 언론에  정보를 주고, 이어서 힌덴부르크에게 청원하였다. 대통
령이 앞으로는 파펜을 자기가있는 자리에서만 만나 달라는 청에 대해서 그는 엉
뚱한 대답을 들었다. 처음으로 자기 위치가 약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힌덴부
르크 대통령은 국가기관이나 올바른 직무수행의 원칙들을 자신의 '젊은 친구' 파
펜보다 우선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 그는 대담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아주 훌
륭한 이야기꾼이었다.
  이번 만남에서 파펜이 이미  대통령을 자기 편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
다. 그는 사실과  다르게 히틀러가 마침내 양보하고 정부 권력을  혼자서 차지하
겠다는 요구를 철회  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파펜이 제멋대로 한  것을 나
무라기는커녕 대통령은 "이런  설명(슬라이허의)이 맞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 말하고, 히틀러와  사적으로 친밀한 접촉을 유지하라고 부탁하였다. 마지막으
로 그는  자신의 국무비서인 마이스너에게 파펜의  의무에 대해서 슬라이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대통령 자신이 자기 수상에  반대하는 음모
에 말려들어간 것이다.

  모든 정치의 끝
  이미 형성중이던 파펜-히틀러  공동전선은 곧 이어서 효과적으로  강화되었다. 
슬라이허가 점점 약해지는  자신감을 가지고 슈트라서, 노동조합, 정당들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는 동안  1월 11일에 지주연맹 대표가 대통령궁을 방문해서 정부
가 보호무역 정책을  취하지 않는다고 심한 불만을 토했다. 이러한  불만의 뒤에
는 브뤼닝 수상이  만들었고 최근 재개된 신도시  계획에 대한 지주들의 근심이 
숨어 있었다. 또한 그  동안 수많은 지주들에게 부당한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착
취 행위를 통해서 인기 없은 공화국에 근본적인 고민을 만들어준 동부 보조금ㅁ
에 대한 의회의 검토에 대한 근심이 숨어  있었다. 각료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대
통령은 대지주들의 이익 대변다 노릇을 하였다.  슐라이허가 금세 구속력이 있는 
수긍을 해주지 않자, 목격자의 보고에 따르면 노이데크의 지주(힌덴부르크)는 주
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면서 최후 선언을 하였다. "폰 슐라이허 수상, 당신에게 청
원하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퇴역장교이니 청원이란 부드러운  형식이라는 사
실을 아실테지. 오늘  밤이라도 내각을 소집해서 법을 제정하고 내일  서명할 문
서를 내게 보내달라는 말이오."
  슐라이허는 처음에 대통령의 압력에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러
나 몇  시간 뒤에 지주연합의 선동적인  결정을 알게 되자, 도전을  받아 들이고 
갑자기 협상을 결렬시켜버렸다.  그러고나서 이틀 뒤 그가  반동적인 후겐게르크
에게 경제장관직을 거절하고 자신의 사회정책적인 그의 반대편에 섰다. 
  사회민주당은 이 '장군'에게 처음부터 일체의  지원을 거절하였고, 노조 지도자 
라이파르트가 슐라이허와  협상하는 것도  방해하였다. 히틀러의 판단에  따르면 
사회민주당은 스스로의 이념적 상투어와 어설픈 사상으로 장식된 평이한 생각들
에 걸려 넘어졌다. 반대편의 보수적인  유명인사들이 '역사적 권능'이라는 특별의
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회민주당은 역사철학적 기반을 가진  자기만족에 빠져
서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진보에만 매달렸다. 그들은  히틀러가 해방된 질서의 최
종적인 실현에 앞선 짧은 우회로라고 여겼다. 
  슐라이허는 분명히 수많은 간계들과 정부기구에 어울리지 않는 음모들을 꾸며
서 자신의  신용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것만으론느 그를 히틀러보다  더 믿지 
못할 충분한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장군을 몰락하도록 내
버려둔 냉담성에는, 전통의 표상에 전혀 맞지  않았던 이국가에 반대한느 전통의 
어떤 신중성이 드러나  있다. 어쨌든 이 모든 신중성, 불쾌감,  반대를 통해서 슐
라이허가, 권력의 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히틀러에 대항하여 그나마 마지
막 남겨진 대안이란느 인식이 붕괴되고 말았다. 대연정이  붕괴된 뒤 몇 해 동안 
사회민주당은 거의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이제 사회민주당이  한 번 더 벌떡 일
어섰지만 그럼으로써 얼마 남지 않은 공화국의 마지막 생존 기회마저 없앴을 뿐
이다. 

  약아빠진 수상은  기대보다 빠르게 출구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올바른 자기  생각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휘안 정책은 기업ㄷ가들을, 신도시 정책은  지주들을, 그의 츨신은 사회민주당을, 
슈트라서를 잡으려는 생각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헌법 개정
은 실현 불가증하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의회를  가진 정부도, 의회 없는 정부도, 
혹은 폭력 투입도 실현 불가능하게 되었다. 정치  자체가 그와 더불어 종말에 이
른듯했다. 새로운 내각을 위한  교섭을 아직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
각 조직 문제는 반쯤 가려진 상태에서 열렬히 이루어지는 활동의 대상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협상  위치를 강화하고 국가사회당의 권력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1월 15일로 예정된 리페 지역 지방의회 선거를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아부
었다. 비용이 가장 많이  투입된 선거전에서 그는 한 번 더  유명한 당 연설가들
을 전부 오인하우겐 남작의  성에 소집해서 저년마다 그들을 물림듯이 투입하였
다. 첫날 괴벨스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까지 합해서 세 번 연설하였다. "  히틀
러 자신도 며칠  사이에 열여덟번의 집회 연설을 하였다. 여러  번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혹은 냉담한  경멸감에 부딪쳐본 확고한 심리적 눈길을 가지고  그는 이 
선거가 가진 기회의 의미를 파악하였다. 처음부터  선거결과가 권럭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결정적인 시련  과정이라는 생각으로 선거전을 펼쳤다.  실제로 여론은 
이런 관팡 방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약  10만 명 유권자들의 투표인 이 작은 
지역선거가 마치 '6800만 인구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시느이 판결인 것처럼 모
두 기다렸다. 
  이렇게 엄청난 투입에 알맞게 히틀러는 1월 15일에 전 해 7월 선거 이후 최초
의 승리를 기록할 수  있었다. 당은 39.5 퍼센트의 표를 얻어서 전해에 리페에서 
얻었던 득표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을 포함한  계열정당들은 
모두 합쳐서 히틀러  당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그러나  국가사회당의 엄연한 
승리였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론은, 이 결과를 비할 바 없는 노력의 결실로 보지 
않고, 또한  탈진해서 대규모 선거전을  펼칠 능력이 없는  국가사회당에게 작은 
선거라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는 상황의 이점을 고려하지  않고서, 이것을 
히틀러 정당이 패하지 않는다는 영광을 되찾은 것이라고 여겼다. 
  히틀러가 1월 18일 최근  자기에게 합류한 주류상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에 베
를린 달렘에 있는 집에서 프란트  폰 파펜을 만났을 때 높아진 자신감으로 수상
직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일 것이라는 
파펜의 대답으로 회담은 결렬 위기에 빠졌다. 
  며칠 뒤에 번거로운 비밀유지 조치 아래서 대통령 아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담
이 다시 진행되었다.  히틀러와 그 수행원들은 어둠 속에서 마당을  통해서 리벤
트로프의 집으로 들어가고,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국무비서  마이스너는 처음
에 보란 듯이  오페라에 참석하였다가 휴식 시간이  끝난 직후에 로열석을 떠났
다. 파펜은 리벤트로프의 자동차로 호송되엇다. 
  모든 참석자가 다 모이자마자 히틀러는 대통령  아들을 옆방으노 불러냈다. 마
이스너의 참석을 고집하였던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는 그로써 고립되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두시간에  걸친 둘만의 대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
는지 전혀 확실하지  않다. 자신의 전략적인 방법에 알맞게 히틀러는  아마도 적
절한 위협과 매수를 뒤섞어서 대통령 아들은 자기 편으로 붙잡으려고 애썼을 것
이다. 그중에 아마도  국가사회당측에서 이미 되풀이해서 확언했던  것으로 프로
이센에 대한  정부측의 쿠대타 행동의 책임을  물어 힌덴부르크를 고발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힌덴부르크일가가 노이테크 영지를 양도하면
서 나온 탈세 소문을 국가사회당이 밝혀 낼것이라고 오스카게에 암시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특별히  산업체의 돈으로 획득한 영지는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서 형식상 힌덴부르크가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   선물되었다. 1932년 7월 20
일 사태로  인해 힌덴부르크는 상당히 걱정하였다.  브뤼닝은 이렇게 쓰고 있다. 
"슐라이허가 수상직에서 물러나기 4일 전 저녁에 병원에 있는 나를 방문한 에르
빈 플랑크는  힌덴부르크가 고발당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정부ㄱ 직면하게 된 
곤란점들을 설명하였따.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는데 히
틀러가 동의한 까닭이라고 확인해주었다.") 나아가 히틀러의 최면적인 힘도 기회
주의적인 대통령 아들에게  분명히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리벤트로프의 
집으로 들어설 때는 히틀러에  대해 주저하던 오스카가 돌아오는 길에서 마으스
너에게, 이제  다른 가능성은 없다, 히틀러가  수상이 되어야 한다,  게다자 파펜 
자신도 부수상직에 동의를 하지 않았든냐고 말했다. 
  슐라이허는 이때쯤 해서냐  비로소 상황의 전체적인 위험성을  간파한 듯하다. 
1월 23일에 그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국가사회당을 분열시키고 의회의 비중
에 따라 내각을  조직하려는 자신의 의도는 실패하였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어서 대통령에게  의회를 해산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사회당과 
공산당의 금지령을 선포할 전권을 청하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2월 2일의 대립
을 상기시켰다. 그 당시 파펜이 비슷한  해결책을 제안했지만 슐라이허의 반대에 
부딪혀서 좌절되었다. 상황은 변했다는 수상의 암시를  늙은 대통령은 들으려 하
지 않았다. 그리고 마이스너와 의논한 다음 슐라이허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예상대로 대통령 주변 세력은 지체없이 슐라이허의  의도를 여론에 흘렸다. 사
방에서 격렬한 항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짐짓  화난 태도로 
국가 쿠데타 계획 '슐라이허 최고'를  비난하였다. 공산당원들도 당연한 일이지만 
화를 냈다. 수상은 민주적 중도당에서도 나머지 위신을 잃고 말았다. 
  한 목소리로 나오는 이런 반응이  힌덴 부르크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리 없었
고, 그래서 히틀러 내각의  계획에 더욱 마음이 쏠리게 되엇다. 1월 27일에 괴링
이 대통령궁으로 마이스너를 ㅌ아와서 '존경하는 사령관 각하께'히틀러는 슐라이
허와는 대대로 법을 깨뜨림으로써  대통령의 양심을 부담스럽게 하지 않고 엄격
하게 헌법을 준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포위작전
  그 사이 파펜은 끈질기게 계획을 더욱 앞으로  밀고 나갔다. 이 시점에서 그의 
계획은 장래의  내각조직에 도이치  국가민족당을 참여시키고, 대통령과  가까운 
철모단 지도자를 참여시켜서 이 계획을 대통령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데 집중되
었다. 도이스터베르크는 이른바 히틀러 내각의  '절박한 필요성'에 대해서 결정적
으로 반대하였지만 젤테와 후겐베르크는 파펜의 계획에  동이하였다. 지난 몇 해 
동안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후겐베르크는  "어떤 일도 일어날 리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및 바위군 최고 통수권자 자리에  남
고 파펜이 부수상이  되고 후겐베르크 자신은 경제 분야를, 젤테는  노동부를 맡
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히틀러를 포위하자는 겁니다."

    힌덴부르크의 흔들림
  힌덴부르크는 지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어쩌다 사태를 제대로 바라볼 능력이 
생기곤 하였다. 그는 물론 이 시점에도 여전히  히틀러를 부수상으로 한 파펜 내
각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육군 사령관 하머슈타인 장국니 1월  26일에 정치적인 
움직임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을 때 힌덴부르크는 "극히 예민하게 정치적인  영향
을 일체 거부하였지만 아마도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인 듯 오스트리아 상병을 
국방 장관이나 수상으로  임명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말했다."("정확하게 말하
자면 1933년 1월 26일  오전 11시 30분 한 명의 증으니 앞에서"라고 하머슈타인
은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다음 날 파펜이  나타나서 대통령에게 파펜 내각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하였다. 힌덴부르크는 이제  히틀러의 임명에 반대하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다음날 하루 동안에  어떤 사정이 전기를 마련했는지  세부적으로 알 수가 없
다. 측근 세력의 강력한  노력이나 국가사회당의 위협, 대지주와 우파 그룹의 개
입이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그  누구에게도 슐라이허란느 
이름이 대안으로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도 한몫  하였다. 응석받이 재주꾼 파펜
이 새로운 정부에는 우파 대표들이 빠짐없이 참석할 것이라고 약속한 것도 대통
령에게 작용하였다. 피로에 지친 힌덴부르크가  '노동조합 간부들의 지배'라고 여
겼던 상태에 끝을  내고 우파 방식으로 통치하자는  것이 슐라이허 이전 브뤼닝 
수상을 해임할 때 가장 결정적인 동기의 하나였다.  힌덴부르크가 한 번 더 자문
을 구한 정당은 당수들도  슐라이허에게 반대하고 파펜을 다시 수상으로 임명하
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합당한 안정감을 가진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해서 자기들이 그토롱 오랫동안 공들인 마모과정을 노출시킬 시간이 되었다
는 의견이었다. 즉 공화국은 이제 끝났다는 것이다. 
  1월 28일에 슐라이허는  판을 장악하려는 최후의 시도로 힌덴부르크에게 의회 
해산권을 요청하고 안 되면 해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정오경에 그는 대통령 궁
으로 갔다. 그가 이 시점에서도 거의 준비가  끝난 히틀러 내각에 대해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그가 영향력을 상실하였는지 분명하게 보
여주는 부분이다. 정반대로  그는 마지막까지 힌덴부르크가 자기 편이라고 믿고, 
언제라도 자기에게 해산권을 주겠다는 이전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여겼다. 그
랬기 때문에 대통령이 다시금  요청을 거절하자 그는 개인적으로 모욕을 받았다
고 느끼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 각하, 각하계서 저
의 직무수행 능력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실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4주 전만 해도 그 반대의 말씀을  서면으로 해주셨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각하꼐
서 임명한 수상의  등뒤에서 다른 사람하고 협정을  맺으실 권리를 인정할 수는 
없군요. 이것은 약속 위반입니다.         
  대통령이 가지는 한  발을 이미 무덤에 내려놓고  있으며 이런 결정을 언젠가 
하늘예서 후회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슐리이허는 화가 나서 냉정한 태
도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약속  위반을 하신 다음에도 각하께서 하
늘나라로 가실지 저로서는  확실치가 않군요."(힌덴부르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
다. "조국을 위해 당신이 애써준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오, 장군. 이제는 신의 도
움으로 토끼가 어떻게 계속 달리는지 두고 봅시다.")
  슐라이허가 물러난 직후에 파펜이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마이스너와 함께 대
통령에게 히틀로를  수상으로 임명하자고  졸랐다.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힌덴부르크는 결정의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하엿다. 관례와는 달리  그는 히틀러 
자신이 새로운 정부 내각을 조직하도록 청하지  않고, 파펜을 "의회의 여러 정당
들과의 협상을 통해서 정치적 위치를 분명하게 하고 현재의 가능성을 확정하가."
는 명령을 수행할 '대리인'으로 임명하였다. 

    마지막 난제들
  그날 오후 재빨리  파펜은 장관직 두 개의  후겐베르크의 참여 약속을 받아냈
다. 그런 다음 국가회당의 당수를 찾았다. 광범위한 사전협상에서 이미 히틀러측
은 수상직 이외에 내무장관직과 괴링을 위해서 새로 만들어낸 시민 비행부 장관
직을 받기로 합의하였다.  히틀러는 그밖에도 프로이센 총독직과  프로이센 내무
장관직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프로이센 경찰 통수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밖데오 선걸르 다시 치를 것을 요구하였다. 
  다시금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되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의 다른 조건들에 대
해서 듣더기 다시  나쁜 예감에 사로잡힌 듯했다. 그러다 물로  ㄴ이중적인 의미
였지만 ' 이것이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라는 히틀러의 약속을 듣고 겨우 진정하
였다. 그리고  마친네 그는 준비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였다. 파펜이 
프로이센 총독직을 차지한 것만 빼면 히틀러의  요구는 모두 관철되었다. 결정은 
내려졌다. 
  1월 29일 슐라이허가  하머슈타인과 함께 포츠담 위수병에게 경계령을 내리고 
대통령을 체포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방위군을  장악하려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 결정은 더욱 속도가 붙었다. 늙은 대통령을 '납으로 봉인된 가죽 자동
차'에 태워서 노이데크로 데려가야 한다고 오스카  힌덴부르크의 부인은 며칠 동
안이나 화가 나서 떠들었다. 수상 광장에 있는  괴벨스의 집에서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대담한 선동가의 반응을 보였다. 그는  즉각적으로 베를린 돌격대에 경
계령을 내렸을 뿐  아니라 기대하고 있는 권력에 미리 도취하여,  빌헬름 거리를 
점령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여섯 군데 경찰대대에 대기 명령을 내렸다.
  이 소문을 낸 사람이 누군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누가 그 소문으
로 이익을 얻었는지는 아주 분명했다. 파펜은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는 데 이 위
협적인 군사 쿠데타의  유령을 이용하였다. 1월 30일 새벽에  블롬베르크 장군을 
제네바로 소환하여 다른  내각 구성원에 앞서서 국방장관에  임명하였다. 이것은 
분명이 슐라이허가 마지막으로 절망적인 주도권을 잡지 못하도록 기선을 제압하
기 위해서였다. 슐라이허는 이제 자기 쪽에서 히틀러와 결탁하려고 하엿다. 히틀
러가 내놓은,  선거를 다시 하자는  조건에 강하게 반대하였던  후겐베르크도 이 
같은 위협으로 압력을 받았다. 
  파펜은 확인되지  않은 쿠데타 소식이 히틀러에게  들어가는 것ㅇ르 막으려는 
의도에서 1월 30일  아침 7시에 벌써 그를 이쪽으로  불러서 '격양된 흥분상태에
서' 그가 내세운 선거라는 조건을 바꾸려고 했다. "11시까지 새로운 정부가 구성
되지 않으면 방위군이(쿠데타를 위해) 행진할 것이오!"하고  그는 소리쳤다. 그러
나 후겐베르크는 파펜봐  더 날카롭게 히틀러의 속셈을  꿰뚫어보았다. 히틀러는 
무한한 국가재원을 투입해서 새로운 선거를 치름으로써 11월 6일의 선거 결과를 
만회할 기회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반대 의사를 
고집하였다. 
  파펜이 10시 10분 전에 계획된  내각의 구성원들을 데리고 눈이 얇게 쌓인 정
원을 지나 대통령 궁의 마이스너의 집무실에서 장엄한 태도로 새 수상 히틀러에
게 인사했을 때 다시  모든 것이 한 번 더 위태로워지는  듯했다. 히틀러가 감사
의 말을 하면서 "이제 도이치 민족이 보통 선거를 통해서 이미 만들어진 내각구
성을 확인해 주어쟈 할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후겐베르크의 완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대단히 격렬한 대입에서 히트러는 상대방에게 한  발 다
가서서 새로운 선거가 내각의 인적 구성을  바꾸지는 않으리라고 '화려한 약속의 
말'을 하였다. 자기는 "현재  이 자리에 계신 누구와도 작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파펜이 근심스럽게 뒤를 밀었다. "고문관님(후겐베르크), 어려움 속에서  이
루어진 합의를 위태롭게 할 생각입니까? 당신은 도이치 남자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히틀러가 포위해서 제어한다는 거대한 결의는 이로써 첫 시련에서 이미 그 약
점은 노출했다. 단순히 수적으로만 살펴보면 히틀러를  소수파로 만드는 데 성공
하였다. 국가 사회당원 세명이 여덟명의 보수파 장관들에 마수저는 것이며, 국가
의 결정ㅈ거인  열쇠가 되는 지위들은 모두  사회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단단하게 
결속된 동지들 손 안에 들어있었다. 다만  그를 포위한 사람들이 파펜, 노이라트, 
젤테, 슈베린 크로지크만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방어를 위한 가치의식도 에너지
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래되어  내려오는 특권을 지키는 것밖에는 
별 다른 관심도  없었다. 히틀러가 수적으로 불리한 합의를 기꺼이  수락한 것은 
그가 가진 자신감뿐 아니라 이들 보수파에 대한 상당한 경멸감을 보여주는 것이
다.
  방의 창가에서 이들 동맹자들은 힘을 합쳐서 저항하는 후겐베르크를 공격하였
다. 옆방에서는 대통령이  국무비서를 불러서 이렇게 지체되는  까닭이 무엇인지 
초조하게 물었다. 마이스너는  '손에 시계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여러분 대통령에 대한  선서가 11시에 정해져 잇습니다. 지금 11시  15분입니다, 
대통령 각하를 더 이상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 사령관 대통령의 전설적
인 이름은 공화국 최후의  생사 순간에, 보수파 친구들의 공격도, 히틀러의 기습
하는 기술도, 파펜의 맹세도  하지 못했던 일을 갑자기 이루어냇다. 솔직한 자부
심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 타당하게  후겐베르크는 자신을 가리켜 '고집불통'이라
고 불렀다. 작년 8월에만  해도 근느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자신은 '히틀러에게
서 계약에 대한 충실성'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무슨 일을 하는 것
인지 잘 알면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약속 시간에  대해서 깊은 존경심을 보였
다. 몇 분 뒤에 내각은 선서를 하였다.



================================== 10
    신과 함께 앞으로!
  파펜은 정말로 자신이 정치적인 걸작품을 만들어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는 
슐라이허레게 복수를 했고,  히틀러 길들이기 작전을 실현하였다  예상치도 않았
던 수상직 역임 이후로  부조리하게 피어난 명예욕도 내각에 복귀함으로써 만족
시켰다. 그리고 히틀러에게 국가를 양도하지 않고 책임 속으로 끌어들였다. 국가
사회당의 당순느 대통령 내각의  수상이 아니고 의회 다수파 수상직을 수락하였
기 때문이다.  그는 힌덴부르크의 특별한 신임도  얻지 못했다.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기,  프란츠 폰 파펜의 것이다.  히틀러가 대통력과 만나는 자리마다 
동참한다는 유보조항을 넣은 것도 협상의 성과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부수상이며, 프로이센의  주인이었다. 내각에서 나치당원은 
고작해야 내부장관직을 차지했을  뿐이다. 지방 경찰은 내무장관에  속하지 않앗
다. 그리고 다른 장관직이래야  괴링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일 뿐, 실질
적인 권한은 갖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괴링은  플이센 내무 장관직도 겸임하겠지
만 파펜은 자신이 완강하게  그의 길을 막을 것이다. 내각에서 외무, 재무, 경제, 
노동, 농업부는 보수파의 손에 있었고, 방위군에 대해서는 정처럼 대통령이 통수
권자였다. 어쨌든 저 치명적인 히틀러 씨를  기업가와 대지주의 요구에 봉사하도
록 만들고, 권위적인 새 국가를 위한 파펜  자신의 계획에 봉사하도록 만들 것은 
날카롭고도 절묘한 배합이라고 생각했다. 
  수상직에서 실패한 파펜은, 위기에 처한 현대의  산업국가가 지나간 시대의 대
표자들에 의해서  통치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던 것 같다. 약간  수상쩍은 이 
대중 조련사(히틀러)와  더불어 민중 없는  지도층이라는 오래된 문제가  극복될 
것도 같았다. 파펜은 경고하는 사람들에게 정치  흥행사같은 말투로 자신감에 차
서 대꾸했다. "잘못 생각하고 계시군요, 우리가 그를 참여시킨 겁니다. "
  히틀러는 무론 처음부터  이런 의도를 잘 간파하고 있었다. 새로운  선거의 요
구는 바로 그에  대한 전략적 대응책이엇다. 선거에 승리하면 그는  모든 약속을 
깨고 파펜이 만들어낸 틀을  부수고 자기에게 마련해준 꼭두각시 수상직을 극복
해버릴 속셈이엇다. 힌덴부르크가 "여러분, 이제 신과 함께 앞으로 나갑시다!" 하
는 말로 작별을 고하기도 전에 벌써 이 '민족주의농축 내각'은 서로 엇가리는 속
셈들을 감춘 체제가 되었다. 
  빌헬름 거리는 괴벨스가 소집한 말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의심, 희망, 
행운, 낙담 사이에서 이리저리 찢기면서' 맞은편 황제궁 호텔에서도 히틀러의 추
종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른스트 룀은 쌍안경을 들고서  신경질적으로 수상
관저 입구를  관측하였다. 맨 먼저  괴링이 나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식을 외쳤고, 곧 이어서 히틀러의 자동차가 입구를 떠났다. 그ㅌ 선 채로 대중
의 환호성을 맞았다.  몇 분 뒤에 추종자들에 둘러싸여서 황제궁에  들어섰을 때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고 어떤  목격자가 전한다. 하느님이  자기를 도우시는 
한 자기는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이미 여러 번이나 선언했다. 
  1월 30일 오후에 그는 최초의 조치로 이러한  의도를 한 번 더 확인하였다. 지
체 없이 이어진 각료회의에서 그는 이제 아무런 소용도 없어진 후겐베르크의 반
대를 무릎쓰고 의회  해산과 새로운 선거를 결정하였다. 파펜 자신이  교묘한 심
리전략으로 반대하는 후겐베르크를 대통령이 싫어하는 '당리당략' 이라고 밀어붙
여서 그의 의혹을 물리쳤다. 이어서 힌덴부르크가 이 결정에 서명하였다. 

    횃불행진
  그날 저녁  국가사회당원들은 어마어마한  횃불 행진을 하였다.  정부청사들이 
자리잡고 잇는 지역의  시위행위가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길에는  구경꾼들이 흥
분하고 소란스럽게 때를  이루어 몰려들었다. "베를린은 오늘  밤 완전히 사육제 
기분에 빠져 있다. " 그 사이로 중요한 일을 한다는 기쁨에 사로잡힌 공무요원들
이 질서를 잡았다. 저녁 7시부터 자정이 넘도록  제복을 입은 2만 5천 명의 히틀
러 추종자들이 철모단과 함께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서 수상관저 곁을 지나 행
진해 갔다. 얼굴들과 집의 담벼락에 불안한  그림자를 던지는 정열적인 횃불부대
였다. 불이 켜진  창문 한 곳에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가볍게  오락가락하는 히
틀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옆에는 괴링, 괴벨스, 헤스가 있었다. 창문 몇 개 떨
어진 곳에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근심스럽게, 행진해 가는  집단을 바라보면서 
막대기로 악단의 음악에 장단을 맞추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책임자들의 항의를 
무릎쓰고 괴벨스는 이 시위 장면을 라디오로  중계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히틀러
가 불쾌한 태도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오직 뮌헨 방송국만  끝까지 거부하였다. 
자정이 지나서야 마지막  중대가 정부청사 지구를 지나쳐  행진해갔다. 괴벨스가 
힌덴부르크와 히틀러를  향하여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과  작별을 고하는 가운데 
'도취의 비틀거림... 이 위대한 기적의 밤이 끝났다.'

    승리냐, 음모냐?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권력장악은 '기적'과 '동화'라고 찬양되엇다. 마법의 영역에
서 가져온 단어들이 정부의 선전 전문가들에 의해서 이 사건에 초자연적인 축복
의 후광을 부여하는 데 이용되었다. 히틀러 자신이 1월 30일에 어떤 추종자에게, 
"항구를 눈앞에 바라보면서 음모에 짓눌리고, 재정적 곤궁에 시달리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우르르 몰려 다니는 1천 2백만 명의 무게에 짓눌려서 좌초하련느 것처
럼 보일 때" 오직 신의 섭리를 통해서 구원되었다고 말햇다. 그러한 형식들은 사
건에 분명히 어떤 급전의  요소, 믿을 수 없는 요소를 덧붙일  때 특별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당이  파열돠려는 위기에서  갑자기 
대통령 방 쪽으로 발기길을  바꾼 것,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보잘것없는 출발, 무
기력과 추락에서 갑작스렵게  권력의 정상에 선다는 급전이었다. 사실상 '거기서
는 뒤틀리기는 했지만 동화의 요소들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괴벨스가 도입한 기적이라는 생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해석
애 몇 가지 특징을 부여하였다. 그것은 히틀러를 악마로 여기고, 그의 성공을 어
떤 모르는 힘이  배후에서 작용한 탓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복수욕에  불타는 기
사 폰 파펜의  음모에 역사전환의 거대한 무게를  실어주려는 등의 모든 해석의 
시도에 쓸모가 있다. 이런  해석은 다양한 변이형태로, 권력 장악이 역사적 우연
이었다는 생각을 포함한다. 
  분명히 히틀러의 길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가능
성들은 우연, 경박,  불행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스스로의 길
을 착각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역사적이고 일부는 정치적인 특성을  가진 강
력한 성향들이 사태를  1월 30일까지 몰아갔다. 저항하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아
마 그것이야말로 진까 기적이었을 것이다. 
  브뤼닝이 해임된  이후부터 공화국과 히틀러 사이에는  오직 정신이 흐릿해진 
노인의 흔들리는 의지력과  슐라이허의 음모, 픈란츠 폰 파펜의 눈먼  단순성 밖
에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바라본 사람이라면 배후의 음모, 이익 집단의 개입, 
독재적인 권모술수 등에는 오직 부찾거인 의미만을  부여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공화국이 붕괴했다는 상황에만 영향을 주었을  뿐이지, 붕괴 자체를 가져
온 것은 아니었다. 
  1932년 여름 이후로 그가 권력에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고 해도, 그 거
리는 너무 멀어 권력은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었따. 그의 상대방들이 
그에게 그 모든  것, 즉 정당과 으회의  배제, 계속된 선거전, 헌법  남용의 습관 
등을 가져다주었다.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저항하려고 일어서기만 하면 언제나 
다른 사람이 나서서 그 행위를 가로막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의심의 여지 없이 마지막까지 상대바의 힘이 그의 힘보다 원
등하엿다. 그러나 그 힘들이 서로 싸우면서 그들은 서로를 상쇄시켰다. 국가사회
주가 모두의 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는 어렵지 않았다. 시민, 공산주의자와 마
르크스주의자, 유대인,  공화국주의자들의 적이었다. 그러나 눈멀고  허약한 상태
에서 자기들 모두가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 참여하엿던 사람들의 자기  변호는 아직도 여전히 히틀러의 수상 임명은 
국가사회당이 가장 강력항 정당으로 부상한 결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핑곌
르 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회 민주당이 공화국 전기간 동안 1933년 1
월 30일 직전 몇 달 동안은 빼면 똑같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내각의 다수
파조차 차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은 헌법의 정신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지만, 히틀러가 철저히 헌법
의 공공연한 적대자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을  역시 놓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국가사회주의잗르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온갖 저항
에 부딪쳤을 것이다. 사실상 히틀러의 보수파 조력자들은, 자기들의 의도가 비천
하기만 하지만 효과적으로  히틀러의 내면에도 간직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너무 늦게서야 그가 자기들과  자기들이 보호하려고 애쓴느 세계에 대해서 텔만
과는 다른 방법이지만 그 못지 않게 과격한 방법으로 대립되는 인물이라는 사실
을 깨달았다. 
  어떤 이름 없는 바이에른의  수사과 공무원이 1921년 여름에 국가사회당의 집
회를 방문한 다음에 보고하였다. 히틀러는 "제2의 붉은 군대  지휘자일 뿐이다. " 
이 공무원이 1933년의부패한 유명인사들보다 히틀러의 본질을 더욱 날카롭게 파
악하였다. 
  그토록 많은, 유리하게 작용한 힘들과 상황들을 보면서  이 몇 주 동안 히틀러
의 남다른 공ㅈ이란  대체 무엇일까 물어보게 된다. 사실상 1930년  1월 30일 직
전에 그의 독특한 능력이 이렇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공적이란 수동적인 
천성이었다. 극히 초조한  상황에서도 그는 기다리고 완고한  추종세력을 제어하
고 붕괴의 와중에서도  침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대통령의 옆방
에서도 위대한 도박꾼의 냉정함으로 모든 위험에 맞서서 자신의 판세를 지킬 줄 
알았다.
  영 안에 반대하는 국민청원 이후  몇 년을 돌아보면 그가 소동과 선전의 국면
을 지나면서 정치가로서 얼마나  성장했는지 볼 수 있다. 지난 몇  주 동안의 경
험은 다시금 그의  도박사 기질을 강화시켰다. 이 시기에는 그는  자기가 포기하
고 난 다음엔 언제나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자신의 생애에서 놀라운 일이라고 말
했다. 
  
    수상직에서 하는 독백
  그날 방, 환호성이 가라앉고,  음악과 행진의 발걸음 소리가 멎었을 때 히틀러
는 이른 새벽까지 수상의  접견실 옆에 있는 작은 방에 머물렀다.  그 자리제 참
석한 사람 중 한 명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깊은 감동 상태에서 그는 끝없이 장
황한 독백에 빠져들었다. 그는 오전에 있었떤 선서식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자신
의 성공들을 기억하였다. '빨갱이' 적들이 말을 잃었음을 지적하고, 그 다음 자신
의 선전 원천으로  넘어갓다. 이번 선거처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  선거전은 없
엇다고 확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
신의 활약은 지구의  지배권을 놓고 백인, 즉 아리안족의 결정전을  벌이는 것이
다. 아리안 이외의  종족, 유색인종, 몽골인종은 볼셰비즘의  지배 아래 이끌려가
려고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이날부터 '세계사게서 가장 위대한 게르만 종족 
혁명'이 시작된다.  종말론적인 전망들이 건축의  전망들과 뒤섞였다.  자신은 맨 
먼저 수상관저를 개축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수상관저는 '담배곽'일 뿐
이다. 아침  무렵에야 그는 뒤쪽으로 난  작은 물을 지나 건물을  떠나서 호텔로 
건너갔다.
  이날의 마비시키는 경험들,  그이 만족감과 보상 체험 등은 아직도  목적이 아
니었다. 그것은 목적으로 이르는 도중의 한 단계일 뿐이었다. 이날 밤의 긴 연설
에 나오는 선언이 아무리 불확실하게 울리는 것일지라도 그의 의도는 이제 전보
다 더욱 확실한 전망으로  다가오는 전망으로 다가오는 혁명을 지향하는 것이었
다. 진짜 혁명가처럼 그는  자기와 함께 역사의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특징적인 일이지만 그는  이러한 생각에 부정적인 색채를 입혔다. 이  시기에 그
는 벌써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바로  독일의 마지막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다."

    중간 관찰 : 도이치의 파국인가, 도이치의 계승인가?

  히틀러가 수상직을 넘겨받으면서 행산 횃불행진, 대중행진, 박수갈채를 동반한 
극적인 기념식은 사건의 헌법적인 의미에는 도무지  맞이 않은 것이었다. 1933년 
1월 30일 사건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정부  내각 개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론은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한 사건을 이전의 내각 개편과 비교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연합내각인 도이치 국가 민족당이 "실패한 오스트리아 화
가를 제어하겠다."는 화려한 의도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처
음부터 권력 전체를  장악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전략적인 
목적의식, 그리고 계획적인 연출에 의해서 진행된  열광의 압력파도는 새로운 ㅅ
가의 궤적을 만들어냈다.  그 궤적은 짧은 시간 안에 보수파를  붙들어 쫓아내게 
된다.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축하하며, 함께 통치하려는  파펜과 그의 동지들은 
온갖 시도는 숨을 헐떡이며 따라 뛰려  애쓴다는 인상만을 만들어냈다. 내각에서
의 수적인 우세,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 경제, 군대, 관리의 통제력 등을 확보하
고도 경쟁을 계속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못했다. 
  비밀 암호에 따르기라도 한  듯이 1월 30일과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사
회주의 진영으로  넘어갓다. 혁명기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얻릉 수 있으며, 
배신, 계산, 두려움이 시대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한 번 더 확인되었다. 
그러나 성격도 없는 아첨 패거리만 대중의 정치적 전환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고 
드물지 않게 자발적인 으지가  나서서 모든 선입견, 이념, 사회적 한계를 부수고 
새로운 물결에 동참하였다 "우리 모두가 기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라고 고트
프리트 벤이 옛날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소란그럽게 진행되는 출발의 분위기
에 휩쓸려 들어갔던 저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강력한 전통적 정당들과 연맹들이 이러한 돌진의 와중에 무너져내려서 강제해
산과 금지령이  나오기도 전에 지도자 없는  도당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공화국, 
내면의 붕괴, 무기력 같은 과거는 끝났다. 새로운 것을 향한 격렬한 고백의 물결
에 끼지 않은  사람들은 빠르게 줄어들어 소수파가 되면서 점차  고립되었다. 그
들은 수십만  명이 동참한, 불켜진 대성당  아래의 대중 맹세,  지도자의 인사말, 
밤의 불놀이, 합창 등  새로운 공동체 의식의 압도적인 시위에서 제외되엇다. 최
초의 테러 표지들도 환호성을  줄어들게 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환호성을 동반하
였다. 대중의 의식은 테러를, 오랫동안 기다려 온 터져나오는 에너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커져가는  소음이 돌격대 참모진의 '영웅술집'에서  터져나도는 외
침들보다 더 컸던 것이다.
  
    역사 기록자들의 고민
  이렇게 열광적인 동반 상황이 히틀러의 권력장악에 불안정한 성격을 부여하였
다. 이런 열광은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역사적인 사고로, 음모나 어두운 배신으
로 표현하는 모든 주장에서 힘을 빼앗았다. 이  시기의 사건을 해석하다 보면 언
제나 되풀이해서, 국가사회주의가 도이치 민족처럼 정신적, 영적 모험을 겪은 오
랜 문화 민족에게서  어떻게 그토록 빠르게 힘도  들이지 않고 권력을 차지하고 
다수를 정복하였는가, 그리고  열광과 믿음과 헌신의 히스테릭한  상태로 이끌어
갈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민족들 중에 고급귀족'으로 여겨진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안정성들이 어떻게  그토록 분명하게 마비될 수 
있었단 말인가. 당시의  어떤 관찰자는 히틀러가 취임하기 이전에 이미  어떤 피
할 수 없는 결과들이 나타날 것인지  서술하였다. "독재, 의회 폐지, 모든 정신적 
자유의 억압, 인플레이션, 테러, 내전 등이 나타날 것이다. 반대파를 간단하게 없
앨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총파업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국기당과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히트러가  방위군을 장악하고 무기를 사
용한다고 해도, 수백만의 확고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수백만의 확고한 사람들은 없었고, 피의 공격도 없었다. 히틀러는 도둑
처럼 밤에 몰래 온  것도 아니었다. 다른 어떤 정치가도 그런  적이 없을 정도로 
요란하게 그는 모든 우회로와 전략적 조작을 통해서 자신이 민족을 어디로 이끌
어가려는지 분명하게 밝혔다. 곧 독재, 반유대주의, 생존공간의 정복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도이치 성향이라는 이론
  권력 장악의 쾌감은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수많은 관찰자들에게 독일이 이 몇 
주 동안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갔다는 인상을 일깨웠다. 공화국 헌법과  게임 규
칙들이 아직 타당한 것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독특한 방식으로 극복되고 버
려져서 낯선  것처럼 여겨졌다. 한  민족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이성과 진보라는 
유렵 전통을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나타나는 이 그림이 수십년
이 지나도록 이 사건에 대한 이해의 열쇠로 여겨졌다. 
  30년대에 이미 국가사회주의의 성공을 도이치 심성에 뿌리내린 어떤 특이성으
로 설명하려는 최초의 해석들이 나타나고 있다.  고집스러운 자부심을 지닌채 문
명과 교화에 대한 거리감을 선택된 문화민족의 '세계 불쾌감'이라고 이념화 시키
는 도이치 특성, 즉 결점으로만 가득 찬  해도하기 힘든 도이치 본질과 연관시키
려는 해석들이다.  비스마르크, 프리드리히 대왕을  거슬러 루터,  아니면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9세기에 토이부르크 숲에서 라틴  사람이 도
이치 땅에 침입하는 것을  막아냈던 게르만 영주 아르마니우스까지 포함하는 조
상들을 예로 들면서, 히틀러 이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도이치 역사에 잠재해 있
던 히틀러주의의 전통을 구성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프랑스의 게르
만 학자 에드몽  베르메유의 저서에 효과적으로 나타나고 잇다. 그것은  또한 한
동안 앵글로색슨계의 해석 방향을 특징지었다. 
  월리엄 쉬러의 책에서도 독일의  이미지에 몇 가지 특성을 부여하였는데 그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메유는 이렇게 썼다. "역사의 여러 단계에서 도
이치 사람들은  내면의 혼란과 허약함에서  아니면 반대로 제압되지  않고, 지지 
않는 힘의 표상에서 나온 절망적인 확신을 가지고서 자신들이 신의 사명을 완수
해야 하며 독일은 섭리에 의해 선택받았다고 믿었다. 
  로마 제국 찬탈, 한자 동맹, 종교개혁, 도이치 신비주의, 프로이센의 부상, 낭만
주의 등에는 전체적으로 이러한 사명 욕구가 은폐된 형태로 드러나 있다고 하였
다. 이러한 사명은 비스마르크의 '피와 강철의 정책', 황제제국의 세계권력의지와 
더불어 점점 더 공개적인 권력정책의 방향을 취하는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자면 도이치 역사에  '죄없는 현상'이란  없다. 목가에서도 
복종, 군국주의,  팽창의지 등을 읽을 수  있으며, 무한성을 향한  도이치의 동경 
또한 현실에서는 권력수단이 부족하지에 유령에 세계에서 지배권 행사를 하려는 
시도라고 한다. 그 모든 것은 마지막에 히틀러에게 집중된다. 그는 당시 어떤 유
명한 책의  제목처럼 '도이치 파국'(수없이  덧붙인 관찰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를 
수백년 역사의 소실점을 두려는 시도들은 국가사회주의 해석과 비슷해질 위험에
서 벗어나지  못한다. 국가사회주의해석은 스스로  한자동맹 신비주의, 프로이센 
정신, 낭만주의를  찬탈하고 제3제국을 도이치 역사의  자기실현이라고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시도, 곧 구가사회주의와  전체주의를, 전통과뿌리깊
은 질서를 거부하는  민주 시대의 위기현상으로 보고, 그 사회적  반항심과 경제
적 허약함을 묘사하고,  이것을 도이치의 특성이  아니라 현대의  특성이라고 정
의하려고 한느 시도  역시 문제가 많다. 그것을 19세기의 수많은  염세적 예언들
이 말한 대로  전체주의 국가의 부정적 유토피아가 실현된 것으로  여겨ㅆ. 도이
치 쪽이세 나온,  이런 해석의 풀발점을 가진 묘사에서 히틀러는  이따금 지나치
게 낯선  현상으로 서술된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치우친 모든  해석의 시도들은 
현상의 특성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 마르크스주의  해석모델의 경우에 그것이 가
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자신들의 원칙에 얽매이고, 한때는 굴복한 동지들에 대한 
경건한 심정에  얽매여서 이쪽 대표자들은  잘 알려진 자본에서  가장 반동적인, 
국수주의적, 제국주의적인 요소들이 공개적인 테러의 독재"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 사상을 마지막까지 추적해보면, 히틀러, 괴벨스, 슈트라이허가 
아니라 후겐베르크, 크루프, 테센  등을 국가사회주의의 핵심 인물로 볼 수 밖에 
없게 된다.)이 아니라 도이치의 계승이라는 것이다. 

    시대이론
  물론 국가사회주의에는 분명하게 도이치  특성들이 있었다. 그러나 베르메이유
나 쉬리가 말한 것과는  다른, 더 복잡한 종류의 것들이었다. 악의 계통나무라는 
말이나, 개별적인 설명은 이  사건의 본질은 정당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또
한 그것의 기원을 오직 현상에서만 추적하는 것도  맞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 
속에는 검은 구름 속에 번개가  숨어 있듯이 파국적인 성향에 분명히 숨어 있는 
것이다. 수많은 단순한 태도들,  혹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문제시되지 않은 태도
를, 미덕과 가치  개념들조차 국가사회주의의 성공을 도와주었다. 전체주의적 권
력체계는 한 민족의  퇴화된 혹은 범죄적인 성향들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 리
차드 3새를 악당이라고 규정해  버릴 수없듯이 한 민족을 악당이라고 규정할 수
는 없다는 것이 시대이론이다. 
  수많은 나라에 독일의 그것과 견줄만한 역사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들이 존재
하였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차이가 겨우 파시즘  지배를 막아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민주적 경향들과  실질적, 효과적으로 결합되지 못했던 뒤처진 국가의
식은 도이치의 특성만은 아니었다.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의 대립, 
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대립 역시 도이치의  특성만은 아니었다. 또한 독
일의 복수욕, 전투 이데올로기, 혹은 거대 권력의 꿈 등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
다 더욱 강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히틀러의 사고를 그토록 결정적으로 규정했떤 반유대주의도 도이치의 특수 현
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많은  나라들보다 도이치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약했다. 어쨌든  국가사회주의는 종족 감정으로 대중과 열광을 얻은  것은 아
니었다. 히틀러가 그 사실을 얼마나 잘 의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가 권력
장악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것을 숨기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에 잘 드러나고 있다.
(루마니아의 파시스트 지도자인 쿠드레아누는  20년대 초에 독일에 머물면서, 이
나라에는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반유대주의가 없다고 불평하였다.)  
  이 이기에 이탈리아, 터키,  폴란드,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등지에서 파시즘 혹
은 파시즘 아류  정권이 탄생하였다. 국가사회주의에서 분명한  도이치 특성이었
던 것은 이런  여러 나라들에 나타난 체제들과  비교해볼 경우에만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파시즘의 가장 과격한, 가장 절대적인 출현 방식이었다. 

    국가주의적 요소들
  지적인 영역과  실천적인 영역에 출현한 이러한  원칙적 과격함은 본질적으로 
히틀러가 국가사회주의에 덧붙인 부분이었다.  사상을 날카롭게 현실에 대립시키
고, 현실에  맞서 사상에 힘을 부여하는  그의 방식으로 보면 그는  분명 도이치 
사람이었다. 지역정치가로 실패하고 티어쉬 거리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시절에 
그는 죽은 다음 명성을 위해 개선문과 둥근  지붕 홀을 구상하였다. 수상이 되어
서는 인간의 나이로 생각하지 않고  온갖 비웃음을 무릎쓰고 천 년 단위로 생각
하였다. 베르사유 조약과 독일의 무기력을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게르만 민족 이동의  결과들을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게르만 민
족 이동의 결과들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무솔리니의 명예욕이 역사적인 위대성
을 회복하자는 목적을  가졌고, 모라는 구제도와 '여신  프랑스의 영광'을 회복하
려고 하였고, 그  밖의 다른 파시스트들도 미화된 것이긴 하지만  과거의 상태에
서 유혹을 받았다. 
  히틀러는 머리에서 만들어낸,  현실의 담보가 없는, 구조적인 목적을 실현시키
려고 생각하였다.  즉 종족적인 자기 주장  의지로 대서양에서 우랄, 나르빅에서 
수에즈에 이르는 세계왕국을  쟁취한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그에 반대
한다고? 그 나라들을 때려눕힐 것이다. 민족들이  자기 의지에 맞서 이주한다고?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시킬 것이다. 종족들이 자기  구상에 맞지 않는다고? 현
실이 자기의 생각에 맞게 될 때까지 그들을 선별하고, 더 훌륭하게 배양하고, 말
살할 것이다. 
  그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였다. 그의 발언에는 언제나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무모함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광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무
시무시하고도 냉혹한 선입견 없음으로 모두에게 마주서 있다. "고 그는 선언하였
다. 극단적인 과격성게서만 그는 본질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사
회주의는 그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히틀러가 자신의 극단적인 과격주의를 위해 언제나 순종적인 하수인들을 찾아
냈다는 사실도 국가사회주의를 다른나라의 파시즘 운동과 구별하게 해주는 분명
한 민족적인 특성의  하나다. 이 정권의 인상을 분명하게 특징짓는  집중된 냉혹
함과 성실성의 인상을  어떤 인간적인 정부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  정권의 두
려운 모습은  주로 살인자와 고문관들이 계획적으로  실시한 잔인성에서 생겨난
다. 그리고 이  정권을 이해하는 인기 있는 이해방식은 이렇게  분명하게 범죄적
인 요소들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렇나  요소들이 문학 
아니면 연예물의 서술에  등장하고 있다. 국가사회주의는 주먹에  채찍을 움켜쥔 
모습으로 의인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정권은 스스로를 그런식으로 유형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이 정권
은 특히 초기에  이러한 현상을 철저히 이용하기는 했으나, 그렇게  범죄적인 본
능을 풀어놓아서는 지속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가사회주
의의 본질을 구성하는  과격성은 감정을 동원하는 것이나, 책임 없는  충동 만족
의 약속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그것은 범죄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도착된 도덕
적 에너지의 문제였다.
  국가사회주의는 방향성이 없기는 하지만 강력한 도덕적 동경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호소하였다. 특히 친위대를 통해서 이러한  유형을 끌어들이고 엘리트 방식
으로 조직하려고  하였다. 이 공동체에게 끊임없이  요청되고, 밤의 제전의 횃불 
아래서 낭만적으로 강조되었던  '내적인 가치'의 요구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생각
에 따르면 다음의 덕목들을 포함하였다. 충성, 정직, 복종, 강건, 단정, 빈곤, 용감 
등이었다. 물론 모든  불필요한 관계체계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정권의 목적만을 
지향하는 방향을 강조되었다.
  이와 같은 도덕적 명령  아래서 그들 중 한 명이 썼던  것처럼 '차갑고 돌같은 
태도'를 지니고, '인간적인  감정을 갖기를 중단' 하였던 무감정의 하수인  유형이 
양성되었다. 이 유형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
하게 대하는  것을 정당화하였고, 말  그대로 시체를 넘어가는  능력을 요구하는 
가운데 자신의 자아를 죽였다. 이것은 제3자가  보기에는 범죄적 감정보다 더 과
격하게 보이는, 확고하고  기계적인 일관성이었다. 이러한 일관성의 즐거운 잔혹
성에는 아무리 약한 것이라도  여전히 압도적인 사회적, 지적, 혹은 인간적 원한
이 드러나 있다. 

    현실감 상실
  도덕적 요구는  특별한 사명의식으로  보충되고 확대되었다. 묵시록적인  대립 
상황 속에 있다는 느낌, '더 높은  법칙'을 따른다는 느낌, 이념의 사도라는 느낌, 
그밖에도 무엇이 되었든  형이상학적인 확신의 그림과 구호들이었다.  이러한 형
이상학적인 확신이야말로 무자비함에 특별한  성스러움을 부여하였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사명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민족의 적'이라고 
청했다.(히틀러는 1938년  2월 20일자 연설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  임무를 
방해하는 사람은 그가  볼셰비스트든 민주주의자든 혁명적 테러리스트든 반동적 
공상가든 상관없이 민족의 적입니다."  특별  사명을 받았다는 이런 사상은 형이
상학적인  요구를 바탕에  깔고서 한스  프랑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937년 2월 10일자 일기에 이런 기록을 하고 있다. "나는 독일에 대한 신앙을 고
백한다. 독일에 봉사하는 것은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어떤 고백도, 어떤 신앙
도,, 오늘날 그리스도가 온다면  도이치 사람일 것이라는 이 신념처럼 강한 것은 
없다. 우리는 진길로악을  없애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이름
으로 유대인과 볼셰비즘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하느님, 우리를 보호하소서!") 
끊임없이 더 깊은 깨달음과 더 높은 사명을 불러대는 이러한 엄숙주의에는 도이
치의 전통적인 정치에 대한  무관심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민족의 현실에 
대한 혼란스러운 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이념은 현실에서  형태를 얻고 사람들이 체험하고,  사상은 현실 속에서 절망, 
공포, 미움, 놀라움 등으로 바꾸는 법인데  그런 현실이 존재하지 않았다. 강령이 
있고, 히틀러가 말한  바에 따르면 강령의 실현에서 오직 긍정적  활동과 부정적 
활동이 있을  뿐이었다. 그 시대의  주역들에 대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이후로 
널리 알려지게  된 유머능력의 결핍은  바로 이러한 현실감  상실의 표현이엇다. 
그것이야말로 국가사회주의에 나타난 분명하게  특징적인 도이치 요소였다. 그리
고 몇가지는 이러한 특성에서 여러 가지 연결통로가 멀리 도이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놓쳐버린 혁명
  역설적인 한 주장에 따르면 근대 도이치 역사의  가장 결실 풍부한 사건은 '일
어나지 않은  혁면'이었다. 혁명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 나라의 각시대의 정치적 
특성에 대한 소극적  태도와 완고한 목가상태를 마련해주었다.  혁명능력이 없다
는 것은 특별히  복종적인 특성의 표현이라고 여겨졌으며,  선량하고 전투적이지 
않고 몽상적인 도이치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자의식이 강한 이웃의 조롱을 받았
다. 사실상 모든 혁명에 대한 깊은 의구심은, 역사적 체험이 거의 철저히 위기감
으로만 체워진  한 민족의 반동일  뿐이었다. 지리상 유럽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관계로 이 나라는 아주 일찍부터 봉쇄 콤플렉스와 방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나라 전체가 황무지로 변했던 30년 전쟁(1618~1648년 
유럽전체의 종교전쟁, 독일  영토에서 대부분의 전투가 이루어졌고, 전쟁이 끝났
을 때 독일은  완전히 황폐한 상태였다.)의 절대로  치유되지 않는 잔혹체험에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30년 전쟁의 가장  확실한 유산은, 완전히 남의 손에 떨어지는  악몽같은 느낌
과, 모든 혼란상태에 대한 깊은 공포심이었다. 그런 혼란상태는 여러세대에 걸쳐
서 자기  나라 영주들과 외국의  영주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착취되었다. 시민의 
첫 번째 의무로 여겨지는 평화는  또한 당국에 대한 시민의 첫 번째 요구이기도 
하였다. 공포와 곤궁을  나라에서 멀리 해달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에
서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파악되었던 계몽주의 독일에선느 영주 계급
에 의해서 보호되고, 개별적으로 찬양받을 정도였다. 과거의 두려움이 너무 깊었
던 것이다. 
  도이치의 의식에 그토록 깊이  뿌리박은 질서, 기율, 자신에 대한 엄격성에 등
의 범주들,  국가를 논란의 여지가 없는  심급이며 '악을 멈추게  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 지도자에 대한  신앙 등은 그토록 잊을 수 없는  역사의 경험에 기원을 
두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보호 욕구를 잊을 수 없다는  역사의 경험에 기
원을 두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보호욕구를 히틀러는 효과적으로 파악하며 
약간의 소질만으로 벌써 자신의 지배욕에 쓸모있게  만들었다. 복종에 대한 요구
를 이념으로 만든  지도자 숭배 사상으로, 혹은 혼란상태에 대한  뿌리깊은 방어 
본능을 눈에 보이게 만든 기하학적인 군대 행진을 통해서였다. 
  독일에 혁명이 없었따는  관점은 오직 절반의 진실이다. 이 민족의  왕의 머리
를 자른 적도 없고 승리에  찬 시민봉기도 알지 못하였지만 세계를 혁명으로 동
원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른바  혁명의 시대
에 도이치 민족은  가장 도전적인 인식들, 가장 날카로운 혁명의  구호들을 만들
어냈다. 그리고 피히테의 고양된 말이 따르면  사고의 바윗덩어리를 마구 쏟아내
서 이 사고의  바윗덩어리들로 미래 시대의 집을 지었다. 그러나  독일의 지적인 
과격성은 자신의 집을 짓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도이치 정신에 위대성과 능숙
함을 부여해주었다. 그러나 현실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실용적인 능력의 결핍
에 불과하다. 실용적인 대토에서  비로소 사고와 삶은 서로 화해하고, 이성은 이
성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은 도이치 정신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 도이
치 정신은 말뜻  그대로 반사회적었고 우익 쪽에도  좌익 쪽에도 서지 않았으며 
주고 삶에  대해서 대립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절대적이고 집중되어  있고, '난 
달라질 수 없어' 하는 태도이며, '지적인 낭떠리지를 향한'거의  묵시록적인 '성향'
이었다. 
  세계의 뇌우가 내리칠 때에  심연의 가장자리에 인간의 진부한 현실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시간들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삶이 내게 무슨 상관이랴, 신
이 나를 도와주실 텐데.
  사색의 영역을 정치의 영역에서  이렇게 분리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대체행
동이라는 성격을 가졌다.  이념의 과격성은 의지의 무기력을 감추려는 것이엇다. 
사색이 현존하는 것에  대항하는 힘이 되었다는 헤겔의  말은 승리에 찬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위로의 뜻을 품고 있다. 삶의  곤궁을 지닌 시골풍 도이치 소국들
의(19세기 초까지 독일에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두 개의 대국과 상당히 독
립적인 수많은 소공국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백 년 묵은 딜레마는, 사상이 아
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거시적인  영역으로 상승하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정신력이 부족한, 혹은 프랑스를 모방하는 영주들을  통해서 사상이 오랫동안 무
시되어 왔다는 사정도 역시 사상이 거시적 영역으로 도주하는 일을 도왔다. 
  19세기 초의 가장 조잡한  글에서 1920년대의 정치적 잡문들에 이르기까지 이
러한 글들이 아무리 종속적이고,  읽히다 맑, 위축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정신
의 특이한 기본동작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외적인 것에 흔들리지 않고 맞서는, 
이상적인 내면의 왕국  건설 종사하려는, '시대를 시대  자신에게 떠맡기는' 정신
이었다. 정신은  판단의 과격성에 드러나는 복수의지를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정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믿은 현실에 대한 섬세한 복수욕이었다.  이제 현
실이 정신에 걸려서 멸망할 차례였다. 
  19세기 동안 정치적 해방  노력 과정에서 시민의식이 체험한 수많은 실망들을 
통해서 현실의 소외  과정이 더욱 강화하였다. 그 흔적들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볼 수 있다. 정치  사상의 허구적 특성에서, 빙켈만에서 바그너에 이르는 신화화 
이데올로기에서, 그리고 비현실적인 도이치 교양개념에서 볼 수 있다. 교양 개념
은 예술과 숭고에  의한 정신의 왕국만을 자신의 요소로 삼았다.  정치적인 것은 
교양의 바깥으로 밀렸다. 그것은 민족문화의 일부가 아니었다. 
  이러한 경향들이 집중된 사회적  유형의 인물은 도이치 본질을 극히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그러한 인물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사회적인  특권을 누려
왔다. 오래된  초상화에 그려진, 세상과 거리가  먼, 사유에 잠긴  남자들이 그런 
유형이다. 그들의 교수와 같은 얼굴은 이상적인  엄격함과 원칙에 대한 충실성을 
사유의 강조와 결합하엿고, 그들의 우직성을 내면에 심연도 포함하고 있다. 그들
은 거대한 크기로 사유하였고, 체계들을 파괴하고 새로 세우리도 하였으며, 그들
의 눈길은 먼 곳에서 온 것이었다. 동시에  분명한 사생활의 요소인 친밀성과 협
소한 가정적 분위기가 그들을 감싸고 있다. 파울 드 라가드네가 말한 것처럼 '책
들과 꿈들'이 그들의 요소였다. 그들의 창의력은 실질적인 현실의 결핍에 대하여 
풍부한 보상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자의식은 정신적인 지거업에서 온 것으며, 문
화에서, 그리고 자신이 문화에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즐거움을 만들어냈다. 

    비정치적인 정치의 욕구
  현실에 대한 경멸에 맞게 정치에 대해서도  점점 두드러진 경멸감이 나타낫다. 
정치는 가장 끈질기고  엄격한 의미에서의 현실이었다. 정치란 비천한 요소이고, 
20년대의 유명한 책  제목처럼 '열등한 자들의 지배'였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
기까지 독일의 정치 사상은, 도적적으로나 지적으로  비천한 현실보다는 어느 정
도 우월한 음조를  지녀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배후에는, 이상적인 '비
정치적 정치'를  향한 욕구가 작용하였다. 이러한  욕구는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정치적 무기력에서 나온 것이다. 고립상태에 빠진 극소수를 제외하면, 독일의 여
론은 정치에 대해서 무관한,  드물지 않게 당혹한 태도를 보였다. 여전히 정치를 
고달픈 관심사고, 자기설득이며,  널리 퍼진 견해에 따르면,  자기 소외엿던 것이
다. 도이치 세계는 개인적인  개념들, 목적들, 미덕들을 지향하였다. 어떤 사회적
인 약속도 개인적 세계의 파토스와 견줄 수 없었다. 그것은 가족의 행복, 자연에 
대한 감동, 학식있는  인식을 향한 조용한 열의였고 전망이 가능한  만족의 영역
이었다. 도이치 사람들은 숲의 신비가 아니라  '시장판의 소음'을 꿈의 자유가 아
니라 헌법의 권리를 얻으려고 그러한 영역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정치에 반대하는 정서
  이러한 감정도  과격화되었다. "정치적  인간은 역겹다."고 리하르트  바그너는 
프란츠 리스트에게  썼다. 그리고 그의  숭배자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바그너가 자기 민족의  어떤 표현이었다면, 어쨌든 그가 도이치 였다면,  최고의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도이치 사람, 도이치 시민이었다면, 정치에 대한 미움이라
는 측면에서 그렇다."
  반정치적인 정서는  권력에 대한 도덕의  옹호, 사회적인 것에  대한 인간성의 
옹호, 정치에 대한 정신의 옹호라고 양식화되었다. 언제나 새롭고 깊은 논쟁적인 
사유과정에서, 시민적인 자기 반성의 중요한 주제들은  이러한 대립 쌍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러한 정서의 최고봉은 상당히 복잡한 고백으로 가득찬, 1918년에 출
간된 토마스 만의 <비정치적 인간의  관찰>이었다. 그것은 계몽적이고 서유럽적
인 '정치 테러리즘'에 대항하여 문화적인 자부심에 넘친 도이치 시민성을 옹호한 
것이다. 이미  제목에서 현실과 등을 돌린  낭만적인 목적의식, 비정치적 정치에 
대한 전통적 동경이 드러나고 있다. 

    예술을 통한 구원
  점차 광범위하고 미로 같은 논문들에서도 읽을 수  잇는 정치에 대한 미적, 지
적 원한은, 19세기  중엽부터 특이한 작용을 해온 구원의 표상에서  극단적인 표
현을 얻었다. 즉,  예술을 통한 구원이라는 사상이었다. 민족의  모든 이루어지지 
않은 꿈, 모든 실망한 동경들이 이 사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처음에 정치와 
문학의 밀접한 상호침투에  대한 낭만주의의 요구로 나타났다.  쇼펜하우어는 삶
의 투쟁에 비극적으로 휘말리는  일에서 특히 음악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생각으
로 여기에 주관적인  색채를 부여하였다. 그러다가 리하르트  바그너에서 그것은 
"'정치의 종말'과 인간성의  시작이라는 문화적인 꿈"이라는 형태로 극장을  통해
서 절정에 도달하엿다. 정치는  대형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고, 국가는 예술 작품
이 되고, 예술가가 정치가를 대신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예술은 신비고, 그 사
원은 바이로이트이며, 성사는 값진 한 사발의 아리안 피였다. 그 피는 쓰러진 암
포르타스에게 치유를 선물하고, 클링조르 안에  구현되어 나타난 유대주의, 정치, 
성애의 대립되는 힘을 상상의 성의 폐허 아래 묶어두었다. 
  세기말에는 랑벤이 렘브란트의 이름을 혁신 욕구의 상징으로 이용해서 바그너
의 성공에 거의 뒤지지 않는 성공을 거두었다.  예술이 광증에 이른 세계에 단순
성, 자연성, 직관성을 되돌려주고, 상업과 기술을 제거하고, 계급들을 완하시키고, 
민족을 합치고, 평화로워진  세계 속으로 잃어버린 통일성을  되찾아와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예술은  위대한 정복자였다. 맨  마지막에는 모든  정치를 제거하고, 
정치를 도취, 권력, 카리스마, 천재성 등으로 되바꾸어 놓는 작업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일관성 있는  태도로 동경하는 새시대를 지배하는  일을 은총 입은 천재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위대한 예술적 영웅'  '카이사르 같은 예술가의 개성'의 몫이
었다. 
  도이치 사람들의  도피 행동은 이러한  동기들이 나타났다.  제1차 세계전쟁과 
전후 시대를 통해서  전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정치에 마주서게 되었을  때, 그들
은 전보다 더욱 격렬하게 이러한 도피행동으로  반응하였다. 전통적인 도피 통로
는 그들을 미적인  혹은 신비적인 대체 영역으로 데려갔다. 정치에  대한 거부감
은 '더러운'혁명에 반대하는 정서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바이마르 시대의 지평선
을 어둡게 물들인 수많은  음모설에도 나타났다. 예를 들면 후광의 배반설, 붉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황금(자본주의) 인터내셔널의 이중 위협설, 반유대주의, 
혹은 널리 펴져ㅣ던  프리메이슨과 예수회에 대한 공포 콤플렉스 등,  간단히 말
하면 현실에서 물러나서 배신,  고독, 기만당한 위대함 등 낭만적인 범주들로 가
득찬 공상적인 가상의 세계 속으로 물러나려는 온갖 징후들로 나타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사고로  전쟁체험의 이데올로기들, '젊은 민족들'  '총체적 
동원령' 혹은 '야만 독재 군주제' 등과  같은 비정치적인 이미지들과 범주들의 지
배를 받앗다. 이른바  보수파 혁명의 민족주의 유토피아적인  발상들과 표어들의 
홍수엿다. 그러한 표어들은  피히테의 말을 뒤집어서 세계에  비합리주의의 제복
을 입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정치  현실의 쉽ㅈ 않은 균형에 대비해서 
부조건적인 구호들을 내걸고, 장엄한 신화의 모습 안에 일상을 내세ㅇ다. 그러한 
것들은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으나, 혼란스러운 낭만적인  대안 
노릇을 해서 공화국의 지적인  기아 상태에 적지 않게 공헌하였다. 더욱이 '정치
에 대한 혐오감'은  증오스런 현실을 보면서 전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불타오
르게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옹호자들은  부패하고 희망없는 체제의 옹호자들처럼 여겨
졌고, 자신들의 열정과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불쾌감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
을 메울 길이  없었다. 그에 반해서 우익측의 공격자들은 상상력에  넘치고 구상
력 풍부하게 신화, 몽상, 섬세한 쓴맛 나는 소재들을 이용해서 공화국에 대한 이
미지를 만들어냈다. '체제'를 향한  가장 경멸적인 비난들 중에는, 공화국 체제가 
국민의 소비와 소시민적 쾌락이라는 '작은 행복'에 길들인다는 것도 있엇따. 
  그에 반해서 모험,  비극, 몰락 등이 시대의 매혹적인 용어들이었다.  칼 폰 오
시에츠키는 지식인들 사이에 수많은, '이기적이지  않은 파국의 연인들, 세계정치
의 불운의 미식가들'을 보았다. 반면 어떤  프랑스의 관찰자는 30년대 초에, 독일
은 '너무 많은  정열과 과격주의로 위기를' 맞고 잇는 것이  아닌가 무었다. 사실
상 '지적 낭떠러지를 향한  성향'은 독일의 위기가 전체적으로 출구 없는 절망적
인 특성을 가진 데 대해서 부분 책임이  있다. 그러한 특성은 현실로부터의 도주
의 필요성을 대중 현상으로  만들고, 알지 못하는 것 속으로 낭만적, 영웅적으로 
도약하려는 이념을 극히 친숙한 생각으로 만들었다.

  히틀러 현상은 이러한  이념적 배경에서 보아야 한다. 그는 이러한  태도와 콤
플렉스의 저질스런 생산품과 같다. 신화적 사고와  합리적 사고가 사회적으로 소
외된 지성의 극단적인  과격성 안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그의 연설에는  거의 알
려진 모든 반정치적 감정의 수사법들이 등장하고 있다. 당에 대한 증오, '체제'의 
타협적 특성에 대한 증오,  '위대성'의 결핍에 대한 증오 등이 나타난다. 그는 언
제나 정치를 운명의  이웃개념으로 보았다. 스스로는 무능하여  강한 남자, 예술, 
혹은 '섭리'라고 표현되는 더 높은 힘을 통하여 해방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여
겼다. 권력 장악 과정에 행한 중요한 연설들  중의 하나인 3월 21일 포츠담 연설
에서 그는  정치적인 무능, 예술을 통한  대체의 꿈과 구원 등의  맥락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도이치 사람은 내면적으로  허물어지고, 정신으 통일되지 못하고, 의지는 갈라
지고, 행위는 무기력해서 자신의  삶을 주장할 힘을 잃고 있습니다. 그는 별에서
의 권리를 꿈꾸면서  지상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결국  언제나 내면으로 
향한 길만이 도이치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가수,  시인, 사상가로서 도이
치 민족은 다른 사림들이 살았던 세상만을  꿈꾸다가, 곤궁과 비참이 비인간적으
로 강타해 오면 그제애 비로소  높은 상승, 새로운 왕국, 새로운 삶을 향한 동경
이예술에서 솟아나오곤 했지요.

  예술가의 꿈에서 벗어난 이후로  그는 자신이 이러한 구원자 현살이라고 생각
하였다. 예를  들어 정신적 전통의  맥락애서 보면 그는  자기가 비스마르크보다 
랑베렌의 '위대한  예술가 주인공'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그의 이런  여러 가지 
발언들로 미루어보아 비스마르크에  대해서는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위대
한 인간의 미적인 현상이라는 측면헤서 경탄하였다. 
  히틀러 자신에게 있어서도 정치는 위대함으로 데려가는 수단이고 화려한 대체
역할로서, 불충분한 예술적  재능을 보충해 주는 비할 바 없는  기회를 의미하였
다. 그는 정치가로서의  모든 요소를 배워 익혔고 그것을 임시  역할로 받아들였
다. 순간적인 영감이라는 측면에서는 철저히  신화적, 미적, 비현실적으로 생각하
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어떤 사람이 관찰한 대로 그는 예술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측근에 말에 따르면 '휴머니티' 같은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초기의 연설
이나 후기에 총통사령부의 원탁대화  같은 임의발언의 기록들은 그 사실을 증언
하고 있다. 아마도 그를 가리켜 1923년 체임벌린이 10월이 편지에서 '정치가와는 
정반대 유형'이라고 말한 것  이상의 칭찬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체임벌린은 당
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정치의 이상이란 아마도 정치를 갖지 않는 것인가를 봅
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치는 솔직하게 알려지고 세상에 보여야 하겠지요."  이
런 의미에서 히틀러는 정말로  정치를 갖지 않았다. 다만 거대하고, 암시적인 세
계이념과 운명 이념을 가졌다. 그는 광적인 집념으로  그 이념의 실현을 자기 삶
의 목표로 삼았다.

   정치의 미학화
  발터 벤야민은  파시즘을 가리켜 '정치의  미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도이치 
민족의 정치에 대한 관념은  전부터 이미 언제나 미학적인 것이었으므로 파시즘
은 도이치 사람들을  특별히 격렬한 힘으로 사로잡을 수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
국이 도이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정치를 오직 정치로만 알았다는 사실이 바
이마르 공화국 실패 원인의 일부엿따. 히틀러가  비로소 당당한 연막술로 연극적
인 장면들을 통해,  도취와 우상화 소동을 통해 동식적인 사건들을  친근하 ㄴ모
습으로 보여주었다. 그 적절한 상징으로 조명을 받은 것이 대성당들이었다. 대성
당들이 마법과 빛으로 이루어진 벽들이 어둡고 위협적인 바깥 세상을 차단할 것
이다. 도이치 사람들은 히틀러의 공간 열망,  그의 반유대주의, 그에게 붙어 잇는 
저속하고 잔인한 특성들에 공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 다시금 거대
한 운명의 소리를  주고, 정치를 다시 전율과 뒤섞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박수갈
채를 보내고 그의 추종 세력이 되었다. 
  히틀러가 예술과 정치에 대한 생각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고, 정권을 예술과 
정치의 최종적인 화해라고  찬양한 것은 비정치적인 '아름다움의 국가'라는 이데
올로기와 잘 맞았다. 그는 자신을 페리클레스의  후예라고 여기고 그에 견줄만한 
것을 발전시켰다.  알버트 슈페어가 전한  바에 따르면 그는  고속도로를 자신의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극히 진지한  의도로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
히 히믈러도, 루돌프  헤스도 '비음악적인 인간들'이기에 자신의  후예가 될 자격
이 없다, 반면에 슈페어는 히틀러의 관념 세계에서는 '음악적  인간'이고, '예술가'
고, '천재' 이기에 앞으로  높이 출세할 것이고, 자신의 총통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전쟁 초기에  예술가들을 풀어주었지만 
학자들, 기술자들은 아니었따.  새로운 무기를 선보이는 자리에서도 그는 미적인 
형태를 자세히  뜯어보았으며, 대포 총신의  '우아함'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예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는 음악적인 인간만이  야전 사령관 노릇을 제대
로 할 수 있다고 말하곤  하였다.(학자와 기술자의 석방은 슈페어의 노력에 의해
서 1942년에야 이루어졌다. 슈페어가 사석에서 알려준  바에 따르면 히틀러는 지
역 방위군  사령부에 예술가들의 군대 서류를  요청해서 없애버림으로써 그들이 
석방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승리를 거든  다음에 정복자로서 파리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박물관 방문객 자격으로 그 땅을 밟았다.  일찍부터 나중에는 점점 더 초
조하게 되어버린 그의 사적인  복고적 노스탤지어도 이런 특성에서 나온 것이었
다. "나는 내  의지에 반하여 정치가가 되었다."고  그는 말하곤 하였다. "정치는 
내게 오직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내가 지금처럼 활동하지  않으면 힘들어
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다! 정계에서 물러나서 이 모든  근심, 걱
정, 분노 따위를 뒤로 하게 되면 그것은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될 것
이다... 전쟁은 왔다가 스러져간다. 남는 것은 오직 문화의 작업들 뿐이다."
  한스 프랑크는 그러한 느낌들을 시대적 경향이라고 여겼다. 즉 "국가, 전쟁, 정
치 등과 결부된 모든 것을  쫓아버리고 문화적 활동이라는 높은 이상을 맨 앞에 
세운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국가사회주의 지도부의  상당수
가 행렬에 끼여들지  못한, 혹은 실패한 절반 예술가라는 사실이  무의미한 것만
은 아니다. 히틀러 이외에 디트리히 에카르트도 그런 사람이었고, 괴벨스는 소설
가가 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로젠베르크는 건축가로 시작하였고, 시라흐와 한스 
프랑크는 작가, 풍크는  음악가 노릇을 흉내냈다. 슈페어도 비정ㅊ거인 고립의지
라는 측면에서 이렇나 부류에 속하였고, 미화시키는 격문을 써서, 공허하고도 가
열차게 국가사회주의의 상승을 촉진하였던 저 지식인 유형들도 마찬가지였다. 

    낭만적 세계태도

  사회적으로 소외된 지식인들의  일그러진 현실개념은 히틀러의 이념세계를 본
질적으로 특징지엇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대화중에 '더  높은 지대'로 올라가곤 
하는 그의 경향을 증언하였다.  그러한 지대에서 그를 다시 '현실의 바탕으로 끌
어내려야 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윗소금산이나, 산장 위쪽 해발 2천  미터 높이의 목바위에 세운 독수
리 둥지에서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였다. 공기가  희박한 이곳 산들의 운명적인 
모습을 앞에 놓고 그는 자신의 계획들을 곰곰히  생각했으며, 그 자신이 가끔 말
했듯이 모든 중요한 결정을 이곳에서 내렸다고 한다. 
  우랄 산맥까지 이르는 거대 왕국의 상상,  거대 공간과 세계분할의 지정학적인 
과대사상, 민족들과 종족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포함하는 유전학적인 비전들, 초
인들의 꿈들, 혈통이 순수성과 성스러운 잔에 대한 환상들, 대륙 전체에 걸친 활
석 레일 체계, 군사 시설,  방어 마을 체계 등은 그 자체로 보아서 전혀 '도이치'
가 아니고  가깝거나 먼 원천들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여기서  도이치적인 것이 
있다면 그가 단편 조작들을 이어맞춘 지적이고  거친 일관성뿐이었다. 어떠한 결
론에 부딪쳐도 물러서지 않는 엄숙주의도 도이치적인 것이었다. 
  히틀러의 확고함은 기형적인  성격의 전제조건들과 분명히 관계가  있었다. 그
의 과격성에도 밑바닥의 과격성과 대담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의 확고함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이 나라의 지적 전통에  속하는 저 반정치적,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그는 종족 투쟁적인, 혹은 확장적인 목
표 설정들로 도이치  역사의 연속선에 선 것이 아니었다. 이론적  확신에 가득차
서 현실을 거대한 높이에서  나온 범주적인 원칙들을 종속시킨 지식인의 한사람
으로서 그는 도이치 역사의 연속선에 서는 것이다.

    실현된 허구들
  그를 비슷한 유형들과  구분지었던 것은 정치적인 능력이었다.  그는 실질적으
로 권력을 이해하였던  예외적 지식인들이었다. 민족적 저술의  문학적 쓰레기더
미에 이르기까지 선구자들의 텍스트에서  그가 주장한느 것보다 더 과격한 주장
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현재의 공포에 대해서도, 현실 부정을 미화시
키는 데에 대해서도 더욱  격렬한 증언들이 있다. 예를 들면 마리네티는 '파렴치
한 현실'에서 벗어나  구원받기를 바라고, 1920년의 어떤  성명서에서는 '모든 권
력을 예술가에게' 양도하라고 요구하였다. 지배권은  '널리 퍼져있는 천재 프롤레
타리아들'에게 합당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성명서들은 지식인
들이 무기력을 향해 그럴싸하게  애교를 부리면서 스스로를 우쭐대는 것에 지나
지 않았따. 마리네티는  '복수하는 바다'를 향해서 현실에  반대하는 주문을 말하
였다. 히틀러가 여기서도  예외엿던 것은 자신의 지적 허구를 말뜻  그대로 받아
들이고, 수백년  묵은 흥분된 사상의  표현들을 그 형태  그대로 집어삼켰다는데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전례가 없는 인물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이 독재자 페이시스
트라토스의 출현에  놀란 것처럼 도이치 사람들도  식탁에 앉아있다가 히틀러의 
출현에 놀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세계가 그랬듯이  도이치 사람들도 
충분히 경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지적인 비축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
도로 자신의 의도를 언제나 노골적으로 표현하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 
속의 현실과 사회적 현실을 전통적으로 분리해 왔기에 말은 별것이 아니라는 생
각이 오래 전부터 일깨워져 있었다. 그의 말처럼  사람들이 하찮게 여긴 말도 없
었다. 그것만이 히틀러에 대한 거대한 오판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
대의 오판이기도했다. 의회의 사회민주당  의원대표인 루돌프 브라이차이트는 결
국 바이마르 근교의  너도밤나무숲 수용소에서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히틀러
가 수상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그가 몰락하게 되었다고 기뻐서 
손뼉을 쳤다. 다른  사람들은 히틀러를 언제라도 표로 눌러버릴 수가  있을 것이
며 그가 절대로 헌법  개정에 필요한 정족수 2/3의 다수표를 얻을 수 없을  것이
라고 계산하였다. 역시  사회민주당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율리우스  레버는 온 
세상이 그랬듯이 마침애  '이 운동의 정신적인 토대를  알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도이치 시민 계급 대중에게 있어서 양심업슨 모험가의 손에  떨어졌다는 생각은 
'대단히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수많은  사회민주당원들은 히틀
러가 성급하기 파펜  및 힌덴부르크와 대립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기들이 제 
3자로서 미소지으며  무대에 등장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렇게 되면 
1918년과는  달리 청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프로이센의 전임 국무비서  아베그
가 그라프 케슬러와의 대화에서 위협하였다.)

    위험
  히틀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 같다. 다만  바라보는 거
리에 따라 시각의 날카롭기가 달랐을 뿐이다.  기다리던 외국의 제재조치들은 없
었다. 오히려 상당수의 외국 수도들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맹목, 제어의 희망, 허
약 등이 복합된 가운데 다가오는 몇 년을 위한 협정과 조약들을 맺을 채비를 하
엿다. 그러나 이렇게  매혹된 가운데서도 불안한 예감들이 개별적으로 나타났다. 
파리에 있던 어떤 도이치 사람은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 "마치 이웃 나라에서 화
산이라도 폭발한 듯한 감정"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폭발은 언제라도 자신들
의 들판과 도시를 페허로 만들 수 있으므로 두려운 마음으로 그 화산의 가장 작
은 움직임도 주시하고 있다.  거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맞이하는 자연 현상이다. 
독일은 오늘날 다시... 위대한 국제 스타가 되었다. 공포, 이해할 수 없음, 역겨운 
경탄 등이 뒤섞인 모습으로 신문마다, 극장마다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심술궂은 기쁨도 들어있다.  거대하고 비극적이고 무시무시하고 위험한 
모험의 인물이다."
  이 나라가 모험을 시작할 때  내건 이념들 중 어느 것 하나도 이 나라만의 것
은 없었다. 비인간적인  진지함이 도이치적인 것이다. 그러한 진지함으로 독일은 
상상 속의  존재에서 밖으로 나왔다. 위의  말한 경향과 감정들은 그  사이 모든 
것 위에  견딜 수 없게 뒤덮인  긴장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것은 수백년 
동안 형성된 혁명적  사상과 고정적 사회적 상황 사이의 긴장이었다.  이러한 경
향과 감정들은 그의 등장에 유례없는 무게와 때늦은 반동의 극단적인 특성을 부
여하였다. 도이치의 천둥이  마침애 목표를 이룬 것이다. 과거지향적인 유토피아
의 표지 속에서 현실을 부인하려는 절망적 시도는 이 천둥이 울려퍼지면서 붕괴
되었다. 
  그러나 과격하게 이상화된 관념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현실 거부는 억누르기가 
어렵다. 현실  거부는 자발적인 상상력과 관계가  있고, 사유의 위허성과 관계가 
있다. 그 정치적 문제성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도이치 정신은 과거의 유산을 
주로 현실 거부의 태도에서 얻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도이치의 
모든 길이 아무런 재치도 없이 언제나 아우슈비츠로만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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