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책머리에: 우리 안의 일본 왜곡
불과 2년 전, 이 땅에서는 일본문화 개방을 반대하던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던 것을 기억하
는가. 그 때 사람들은 '저질' 일본문화가 수입되게 되면 한국의 '민족정신'이 '훼손'될 것이
라고들 우려했다. 하지만 일본 영화가 100만을 넘는 관객을 모은 적이 있어도 그 일이 우리
의 고유한 '정신'을 훼손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려오지 않는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일본문화 때문에 개방 이후 한국인들의 심성이 난폭해지고 호색적으로 되었다는 분석도 아
직은 없다.
일본의 만화나 영화를 얼마간이라도 접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그들의 폭력과 성 표현이
우리보다 과격하긴 하지만, 그 대부분은(물론 예외도 있다)폭력과 왜곡된 성의 찬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폭력과 성이 어떤 식으로 인간을 훼손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 그
리고 무엇보다도 일본 문화의 소재는 폭력과 성만이 아니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
예를 들면,<사무라이 픽션>은 자신들의 전통에 대한 현대 일본인들의 한 시각을 보여주
었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100년 전의 한국인들과 같을 수 없듯이 현대 일본인들이
과거의 일본인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말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상
상해온 균일한 개념으로서의 '일본'이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반복적이고도 협박적이었던 우려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단
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실은 거의 대부분 '이미지'의 산물이었다.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이
미지가 그런 식의 과장된 우려를 낳은 거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생산자는 몇
몇 지식인, 그들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왜곡을 확인하거나 의심하는 일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확대 재생산해온 언론매체, 그리고 그런 류의 보도들을 역시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 우리 자신이었다. 그 배경에는 물론 해방 이후 50여 년이 지나도록 전혀 변화가
없었던 민족주의적 반일교육이 있다.
물론 정당한 것이라면 반일이건 일본 비판이건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의 반일 담론은 항상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었고, 논리적이기보다는 비약적이었으
며, 심지어는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허상을 둘러싼 비판일 때도 있었다. 우리의 비판이 그들
의 공감과 반성을 이끌어내기보다는 반발로 돌아온 적이 많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문제는 일본을 왜곡하는 일이 실은 우리 자신을 왜곡시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일
본을 왜곡하는 글들은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피해의식을 공고히 하고 왜소한 열등의식을 버
리지 못하도록 하고 과대한 우월감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회복되지 못한 '그들의' 상처를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그 결과는, 우리 자신의 비틀리고 경직된 모습의 재생산이다.
이 책은 그런 문제의식 하에 '일본'을 키워드로 삼아 20세기 말 한국의 '정신분석'을 시
도해본 책이다. 1장에서는 언론과 몇몇 이들이 어떤 식으로 일본을 왜곡하고 있었는지를, 2
장에서는 한일 간의 현안을 둘러싼 담론에는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를, 3장에서는 그런 오해
와 왜곡의 바탕이 된 우리의 일본관을, 4장에서는 이 모든 현상의 바탕에 있는 우리의 민족
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모두가 21세기의 꿈에 부풀어 있는 지금 새삼스럽게 웬 과거 이야기냐고 생각하는가? 하
지만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미래는 오지 않는다. 겉모습을 달리한 과거
의 반복일 뿐. 그리고 그 때 되풀이되는 건 대개의 경우 또 다른 과오와 어리석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과거를 주로 이루고 있지만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위한 책이다.
어쩌면 이 책이 일본을 옹호하는 책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누구도
'옹호'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 책에서는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이 구체적 대상이 되고 있고 그러다 보니 비판의 대상이 우리 자신이
되고 있지만, 여기서 다루어진 일들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볼 수 있는 일이다. 내 관심
사는 그저 타자와의 '공존'의 모색이었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는 일에 있었
다.
나는 이 책이 일본에 대해 뿌리깊은 반감을 갖고 있는 이들, 혹은 어떤 껄끄러움을 떨칠
수 없는 느낌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우선 읽혀지기를 바라고 있다. 또 지금도 변함 없는 반
일교육과 민족주의교육을 받고 있을 학생들, 젊은이들에게도 보내고 싶다. 그들이 이 책을
통해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 지혜로운 눈으로 타자를 바라볼 수 있는 성숙한 한국인들이
되어주기를, 그로써 세기말 한국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 주기를 바라는 마
음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책은 스스로가 비판하는 '민족'적 충정에 넘치는(!)아이러니의
책이 되고 말았다.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던 데는, 정찬용 박사의 도움이 컸다. 완성고의 첫 독자였던 그는 과
분한 찬사로 격려해주었고 태만한 나 대신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애써주었다. 오
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만났는데도 그와 곧바로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
가 낸 책의 저변에 흐르는 메시지에 공감했기 때문이었고, 그건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책'
의 효용성을 새삼 확인하는 기회기도 했다.
또 이 책에서 다룬 몇 가지 문제를 놓고 함께 생각하고 토론했던 99학년도 가을학기의 세
종대 일문과 학생들, 일러스트 게재를 쾌히 승낙해 준 미토메 마유미씨, 일본에서의 한국 담
론에 관한 자료를 제공해준 이토 마사히코씨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글의 취지를 이해하고 선뜻 출판을 제의해주신 사회평론의 윤철호 사장님, 거
친 글들을 꼼꼼하게 살펴주신 정종주 주간님께도 감사 드린다.
'만남'의 기쁨을 맛보게 해준 이 책이 더 많은 만남으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제1장: 노래하는 민족주의
1:'쇠말뚝'-민족정기를 말살하는 '풍수침략'?
20세기 말 한국에서 한국인들의 반일의식을 드높이는 데 가장 기여한 것은 무엇일까. 아
마도 '쇠말뚝'일 것이다. 어쩌면 생소한 단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쇠말뚝'은 최근까지도
신문에 가끔씩 등장하는 단어다(농촌마을 단합시킨 일제 쇠말뚝, 한국일보,2000.5.24). 쇠말뚝
을 둘러싼 담론은 실제로는 '진실'임이 증명되지 못한 채로 누구나가 '진실'로 믿어 의심치
않았고, 급기야는 전 국민적 '운동'을 이끌어내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세기말 한국을 말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사항이다.
'쇠말뚝' 담론이란 요컨대, 일제가 전국 방방곡곡에 한민족의 '정기'를 끊으려고 쇠말뚝을
박았다는 설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풍수침략'이라고 불렀는데, 구 조선총독부 건물 역시 그
러한 '풍수침략'의 한 케이스였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물방송에서 보도하는 대로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진실이었을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85년 2월, 한 산악회가 서울 근교의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서 '일
제가 박았다'는 길이 45센티미터, 직경 2센티미터의 '말뚝'을 발견했고 제거에 성공했다. 대
학교수라는 발견자(서경대 서길수 교수)의 신분도 보증서 역학을 했는지 이 '발견'은 화제
를 모았고, 이후 비슷한 쇠말뚝이 있다는 제보가 잇따르면서 쇠말뚝 전설은 대중화되고 일
반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서길수 교수는 등산이 취미여서 산을 오르내리던
중 이것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마침내는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조직까지 결성해 이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80년대 한국은, '민족'보다는 '민중'문제에 더
관심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이런 움직임에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고, 이 사실이 일
반에게 널리 아려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 90년대에 접어든 이후였다.
1)'명산 정수리'의 쇠말뚝
1992년 8월 15일자 서울신문은 (일제의 풍수침략 잔해 제거... 민족정기 살린다-명산 정산
쇠말뚝 뽑기 10년)이라는 제목으로 '일제가 끊어놓은 우리 명산의 맥을 살리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전국의 산하를 누비며 일제가 우리명산의 정수리에 박아놓은 쇠말뚝을 뽑아내는 작업을
10년째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되찾는 데 앞장서온 '우리를 생각
하는 모임' 회원들.
구 회장 등 이 모임의 회원들은 광복 47주년을 맞아 지난 12일부터 일제의 간교한 '풍수
침략' 의 상흔인 속리산 문장대에 올라 정상에 박힌 쇠말뚝의 제거작업을 벌이고 있다.(중
략)
북한산 등반에 나섰던 회원들이 백운대 정상 여기저기에 박혀 있는 정체불명의 쇠말뚝을
발견하고 이들 쇠말뚝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각종 사료를 수집하고 고증을 구한 끝에 우
리 겨레의 정기를 차단하기 위해 일제가 설치해놓은 쇠말뚝임을 밝혀내게 됐다.(중략)
그 동안 뽑아낸 쇠말뚝 가운데 비교적 잘 보존된 15개는 독립기념관에 기증, 역사교재로
활용하게 했다.(중략)
확인한 자료 등을 살펴보면 풍수침략의 유형도 갖가지여서 산 정수리에 쇠말뚝을 박은 것
말고도 산등성이에 혈을 지나는 구조물을 설치하거나 산봉우리에 쇳물을 녹여 부은 것 등
간교하다 못해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중략) 서길수 교수는 "앞으로 이 사업을 범국민운동
으로 확산시켜 일제 침략의 잔재를 제거해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강조는 인용자, 이하도 같음)
이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리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간교한' 일본이 한국의 '민
족정기를 차단'하기 위해 전국의, 보통 산도 아닌 '명산'의, 그것도 '정수리'에 쇠말뚝을 박
았고, 그것은 우리에게 '몸서리가 쳐질 정도'의 끔찍한 '상흔'을 남겼으며, 그 '잔재'를 제거
하는 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려는 사람들이 있다(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이 몇 개의 단어를 나열하는 것만으로 이미 '정상적' 한국인들을 분노케 하기는 충분하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몹쓸 일본놈들 같으니라구... 아마도 이 정도가 대부분의 사람
들이 보인 반응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잘 읽어보면 묘한 기사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우리 명산'이란 어디인가? 산의 '정수리'란 도대체 어디고, 누가 정한 건가? '풍
수침략'이라는 발상은 풍수사상을 믿어야만 가능한 발상인데, 이 기사를 쓴 기자는 풍수사
상을 믿고 있는 건가? '각종 사료를 수집하고 고증을 구'했다는데 왜 그에 대한 구체적 설
명은 없는가? 무엇보다도, 쇠말뚝을 뽑으면 되살아난다는 '우리 민족의 정기'란 뭔가? '일제
침략의 잔재를 제거해'야만 높아진다니, 이제까지 우리는 잔재 때문에 '민족적 자긍심'이 낮
았나?...
괜한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실제로 풍수설을 믿었
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이들이 말하는 풍수설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이 기사를 썼으리라는
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사실 확인 없이 '사실' 추구야말로 언론이 (그 생명으로
여기는 것 아니었던가?) 문제의 쇠말뚝을 제보자가 말하는 대로 일제의 행위로 단정할 뿐
아니라 '몸서리쳐질 정도의' '간교한' 행위라는 식으로 감정이입까지 해 보이고 있는 것이
다.
앞으로도 말하게 되겠지만, 바로 이런 것이 한국인들의 90년대 식 반일의식을 높이는 데
기여한 언론의 공통적 자세였다. 사건이 일본에 관한 것일 경우, 사실 확인추적을 하지 않는
안일한 자세, 무조건적 성토, 심지어는 국민의 감정을 단순히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새로 비난어조를 '만들어'가는 감정적 기사... 위의 기사는 그 전형적인 것이다.
93년 9월 13일자 조선일보는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들은 국립공원 속리산 문장대 쇠
말뚝 바위틈에 박혀 있는 쇠말뚝이 일제가 우리 국토의 혈을 끊고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
해 설치한 것이라며 11,12일 이틀 동안 이를 제거하는 작업을 벌였다."고 소개하면서 1.8미
터 간격으로 박혀 있는 지름 2.5센티미터의 쇠말뚝 일곱 개를 뽑았고, 그들이 "이 같은 사실
을 하늘에 알리고 원래의 지기를 회복시키기 위한 속리산 민족혼 대제를 봉행할 계획"이라
고 보도하고 있다. 앞에서는 '차단'이라고 표현되던 것이 여기서는 '말살'이 되고 있다. 의
미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차단'보다는 '말살'쪽이 일제가 악랄함을 강조하는데는 물
론 훨씬 더 효과적이다.
다음은 95년 2월 17일자 한국일보.
<민족정기 되찾자-광복 50년, 통일로 미래로>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기 위한 사업과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돔 일부가 8월 15일 철거되며 이에 앞서 3월 1일에는 이 건물의 철거를
알리는 고유제가 치러진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차단하기 위해 우리 국토의 혈맥 곳곳에 막아놓은 쇠말뚝을 뽑아내고
일제에 의해 개악된 지명은 고유지명으로 바꾼다. 정부는 이 같은 민족정기 되찾기운동을
올해 3.1절 기념행사에 포함시켜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기로 했다.(중략)
조선 풍수지리서에 의하면 이 쇠말뚝이 박힌 곳은 갈룡음수형(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세)의 명당으로 연구가들은 "일제가 용의 코 해당 지점에 쇠말뚝을 박아 인재가 나는 것
을 막으려 했다."고 보아왔다.
여기서도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세'와 '명당'과 '용의 코'는 '연구가'들이 말하는
대로 그럴 듯하게 강조된다. 보통 용도 아닌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것을 막았다니, 읽
는 사람들의 분노는 커지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 기사는, 92년 서길수 교수가 희망했던 사항, 즉 '범국민운동'화가 3년 만에
드디어 현실화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김영삼 정부 때의 강력한 슬로건이
었던 '민족정기 되찾기'가 쇠말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일련의 전말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조사한 (필자가 알기로는) 유일한 언론인이었던 <
월간 조선> 김용삼 기자에 따르면, 쇠말뚝 뽑기는 원래 경상북도청이 8.15 기념사업으로 시
작한 것이었고, 도지사와 내무부장관을 통해 대통령에게까지 전해진 것이었다(<월간 조선
>,1995.10).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얼마 후엔 내무부가 '민
족정기 회복운동'의 하나로 지정했고, '쇠말뚝 제거사업'이라 칭해지는, 세상에도 묘한 '운
동'이 정부 주도 하에 시작되게 된다. 물론 신문들은 "민족정기 회복과 민족자존 되찾기 차
원"(조선일보, 1995.7.21)이라는 내무부의 설명을 그대로 전했고, 사람들 역시 대부분 그렇게
이해했다.
이후에도 신문의 논조는 "그들의 간교한 책략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통해 총체적, 상징적
으로 드러났던 것이다."라든가 "조선 민족의 정수리에 쇠못을 박음으로써"라는 말들로 우리
산의 '정수리'에 못을 박은 일본의 '간교'성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또한 일본의 간교성에 대
한 강조는 쇠말뚝에 한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이보다 앞서 1992년 10월 17일자 조선일보는, 문화재 관리국이 창경궁의 일각
에 있는 장서각 철거를 결정했다는 뉴스를 전하면서도 장서각을 "조선의 기맥을 누르기 위
해, 경복궁의 정전인 명정전 옆의 자경전을 부수고 일본 건축양식인 천수각을 본 따 만들어
박물관 서고로서 이용해온" 건물이라고 전한다. 또 창경궁에 가로세로 5센티미터 크기의 쇠
말뚝이 1.5미터 간격으로 박혀 있는데, 이곳은 "궁내에서는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는 곳"이라
며 서울시 문화관계자들은 그것을 일제가 '민족혼과 맥을 끊기 위해 박았던 것으로 추정"했
고, 한국풍수지리개발중앙회 회장은 "일제가 북악산에서 창경궁으로 흐르는 맥을 끊기 위해
길지인 이곳에 쇠말뚝을 박은 것 같다."(중앙일보, 1995.3.25)고 말한다. 풍수관계자들이야 그
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하달 수 있겠지만, 신문도 '문화관계자'도 일본의 흔적들을 별다른 증
거 제시 없이 한국의 '기맥을 누르'는 일본과 연결시키면서 '간교한' 일본의 이미지를 확산
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었던 셈이다.
2)사실과 사실, 진실과 전설
이렇게, 9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정체불명의 쇠말뚝이 정말로 일제가 박은 것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배제된 채로 제거 '운동'은 진행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증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은 채로 일제의 쇠말뚝 이야기는 어느샌가 '사실'의 차원을 가볍게 넘어
누구에게나 자명한 '사실'로 자리잡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앞서의 김용삼 기자의 기사에는 이 '사실'의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야기가 있다.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 회장에 따르면, "처음에 철주를 봤을 때는 무언지 몰
랐고 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미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백운산 산장 할머니의 증언을 얻
었고(필자 주; 열여섯 살 때 일본인이 박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 그래서 이후 3,4회 산에 올
라 철주를 뽑았더니 매스컴이 언급해 화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최초의 쇠말뚝에 대한 증
언은 일본인이 박는 것을 '보았다'는 것일 뿐 '왜' 박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후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은 쇠말뚝 전문가처럼 간주되면서 다른 쇠말뚝에 관
한 제보를 받고 가서 확인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실제로 가보면 최근의 것
이거나 한 경우가 많았다는데, 이런 사실은 웬일인지 세간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물론 그건
이미 나간 기사와 위배되는 내용이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쇠말뚝 뽑기가 어느새 국가적 '
운동'이 되고 공무원들의 '실적'으로까지 간주되는 시점까지 진행되었기 때문이리라. 개중에
는 일제의 쇠말뚝은 아닌 것으로 판정된 것까지도 일제가 박은 것으로 해달라는 부탁을 받
는 사례가 있었다고 김 기자는 전한다. 이런 과정에서 실제 이상으로 그 숫자가 부풀려졌을
가능성은 물론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은폐된 채로 쇠말뚝 전설은 텔레비전(MBC<일제 36년, 또 하나의
역사-일제 풍수침략의 실체 규명>등)이라는, 신문보다 영향력이 더 큰 언론매체의 지원까지
받으며 전 국민적으로 확산, 유포되게 된다.
신문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런 일들이 어느새 전 국민적 '진실'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쇠말뚝은 일제가 우리나라의 인물 탄생과 정기를 끊기 위하여 산과 강의 맥에 말뚝을 박
은 것이니 만큼,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를 모두 뽑아버려야 한다.(강원 황00, 동아일보,
97.1.7) 혹은 다음과 같은 단정.
일본은 한국 침략을 위해 역사, 풍수지리 등을 열심히 연구했다. 침략 후에는 모든 관사를
명당자리에 지었다. 일제는 '상일 하한'의식 등을 심기 위해 실로 교묘한 수법을 썼다. 일제
는 쇠말뚝을 위치표시용으로 위장했을지 모르나 실제 목적은 정기 말살이었음이 분명하다.
(유왕기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 연구위원, 동아일보, 99.6.7)
'우리 문제'를 '연구'한다는 이의 발언이지만, 여기에서 말해지는 건 '연구'의 결과라기보
다는 세간에 이미 유포된 '상식'일 뿐이다. 그러나 설령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왕궁 터라고 하는 명당에 총독부를 짓고 조선의 '명산'을 훼손시켰으니, 일본이야말로 언
제까지고 번성했어야 풍수지리설의 원칙에 맞는 것 아닌가? 일본은 총독부 건설 이후 20년
남짓밖에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땅의 '맥'이나 '지기'가 원래의 주인을 알아
보고 한국인에게만 좋게 작용한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제 와서 새삼
스럽게 제거할 필요도 없지 않았나?
쇠말뚝=민족정기 파괴설은 일제가 조선인의 반항이 두려워 "민족의 지도적 인재가 태어나
지 못하도록 쇠말뚝을 박았다."고도 말하지만, 이런 식의 기맥침략설이 성립되려면 발견자와
추종자가 풍수설을 믿어야 가능하듯이 행위자(일본)역시 그것을 믿는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에서 풍수에 대한 믿음은 일반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풍수 연구가들은 일
본이 한국인들의 풍수신앙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여 사기를 죽이기 위해 한 일이었다고 주장
하지만, 유명한 무라야마 치쥰의 연구서 <조선의 풍수>(민음사,1990)가 쓰여진 것은 1931년
이다. 그런데 백운대에 쇠못이 박힌 것은 1926년으로 밝혀져 있다. 쇠말뚝은 일본이 한국의
풍수신앙을 숙지하기 전에 박힌 것을 공산이 큰 것이다.
설사 일본이 합방 이전부터 한국의 풍수신앙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일본이
박은 쇠말뚝의 목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속단이다. 설령 일본이 어떤 목적
을 갖고 쇠말뚝을 박았다 해도 그것이 한국의 '기맥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곧바로 단정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김용삼 기자의 기사는, 발견된 쇠말뚝 중에는 해방 이후 다른 목적으로 일본인이 아닌 '
한국인'들이 박은 것도 적지 않았음을 추정케 해준다. 그렇다면, 쇠말뚝에 관해 분명히 했어
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누가' 박았는지와 '왜' 박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서길수 교수가 모았다는 풍수침략의 사례를 보면, 쇠말뚝만 풍수침략의 도구로 간주된 것
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풍수침략사](무크, 친일문제연구 창간호, <일제 잔재 19
가지>,가람기획, 1994)에 따르면, 1985년 3월부터 154건의 사례를 수집했는데 그 중 62건이
일본인에 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판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어쨌거나 이 글이 정리해놓고 있는 <풍수침략 조사 현황표>의 내용을 보자.
우선 많이 보이는 것이 '혈을 찔렀다', '혈을 잘랐다'다. 이는 맥 부분을 끊기 위해 산등
성이를 잘랐다는 뜻이라는데, 방법이 다양하다.
예를 들면, '뜸을 떴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산에 구멍을 파고 며칠 간 불을 놓는 일'이
라고 한다. 그밖에도 사발을 엎어서 묻었다거나 '쇳물을 부었다', '목을 끊었다', '쇠꼬챙이',
'길을 냈다', '숯단지', '명태, 명주실을 묻었다', '북어대가리를 묻었다', '북어를 베에 싸서
묻었다', '쇠문고리', '9구멍에 혈을 찔렀다', '쇠몽둥이', '고개 능선 끊었다', '태실을 캐감',
'사리탑 받치는 거북이 발가락을 잘랐다' 등등 참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이 모두에서, '근대'의 얼굴을 하고 한국을 침략한 일본보다는 '전근대'적인 한국
쪽 무속의 냄새가 나지는 않는가? 일제가 일부러 산에 가서 '사발을 엎어서 묻'거나 '북어
대가리를 묻었'다지만, 이런 식의 주술적 냄새가 나는 행위란 통치자, 그러니까 권력을 가진
자보다는, 말하자면 내놓고 당당히 적을 해할 수 있는 자보다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이
남몰래 하는 행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비고'난이다. 여기에는 '한석봉이 공부한 곳'이니 '남이 장군 탄생지
'라는 표현이 보인다. '한석봉'이나 '남이 장군'이라는 고유명은, 물론 그것이 '한국의 위인'
을 해하려는 것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 말일 텐데, 일제는 과연 '한석봉이 공부한
곳'까지 알고 있었을까? 심지어는 땅에서 '피가 나왔다', '피가 3개월이나 흘렀다'(피에 관
한 이야기는 중국인 이여송이 박았다는 곳에 많이 보인다.)느니, '엿 사먹으러 캐러 다녔다',
'산신에게 혼났다'는 등의 말도 보인다. 이쯤 되면 '진실'이라기보다는 '전설'이라 해야 할
판이다.
김용삼 기자가 전하는 마산 무학산의 쇠말뚝 이야기에도, "쇠말뚝을 잘라 엿가위를 만든
엿장수는 가위를 한 번 치자마자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 '전설
'에 불과하다 해야 할 쇠말뚝을 뽑기 위해 KBS는 60만원을 지원했다던가.
그런데 일본뿐 아니라 중국인도 풍수침략을 했다는 말은 우리에겐 익숙지 않은 이야기다.
왜 그럴까. 오래 된 일이기 때문에?
물론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수백 년 전의 임진왜란 때의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
가?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이른바 '사실'이라는 것이 실은 적지 않은 부분이 '선택'되어 유포
되면 그 과정에서 과장('피' 운운하는 것이 그렇다.)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 항상 '선택'되고 각인되어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 존재는 중국보다는 '일본'이
었다는 점을 이 조사표는 보여준다.
3)제국주의의 본질을 놓치는 민족정기 말살론
역사학자 이이화씨도 '민족정기 말살'론에 대해, "근거가 없는 말"이며 "지도나 해도를 작
성"(<이이화의 역사풍속기행>, 역사비평사, 1999)하기 위한 것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일제가 박았다는 쇠말뚝은 방향 펴시거나 길을 내기 위한 것이었거나 철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일본인들이 철도를 놓으면서 혈을 끊었기 때문에 장수
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지금도 있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철길'은 쇠고, 당
시의 한국인들은 땅과 철을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겼다. 철도를 놓는 것
을 '혈'을 끊는 것으로 생각한 것은 당시의 한국인들로서는 당연한 이해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도로'와 '철도'는 분명 근대화의 이름으로 행해진 한국 '침략'의 전형
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인들의 거부감과 공포감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화'에 맞닥뜨리게 된 한국인들의 혼란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 때문에 '풍수침략'에 대한 공포를 조성하고 만 것이 아닐까. 일본이 조선의 '기맥'을 끊
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장수와 지도자가 나지 않는다는 식의 자학과 패배감은, 풍수가들이 주
장하듯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심은'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쪽의 해석이 '조장'한 것이 아니
었을까.
풍수가들은 일본이 풍수설을 믿는 한국인의 심성을 이용해 패배의식을 심어주려 했다면서
그들의 '의도'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신앙'이었다면, 일본은 그것을 야만국의
'미신'으로서 무시했어야, 이른바 '문명'의 이식에 의해 자신들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당시의 일본의 자세에 더 걸맞지 않을까? 그들의 행위를 무조건 '간교한' 의도를 품은
'풍수침략'이었다고 비난하는 일은 실제로 제국주의의 본질을 보는 일과 멀어지는 일이다.
굵은 쇠못 몇 개가 그 '상흔'을 강조하면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당당한 '역사적 사실'
의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하게 된 데는 다름 아닌 이런 경과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그럴 듯한 해설도 붙어 있다.
일제는 무력으로 병합한 후, 식민지 지배를 고수하기 위해 온갖 치졸한 책동까지도 주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제는 영웅적 인물이 명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다고 믿는 민간신앙
에 착안, 계룡산, 북한산 등 전국의 명산의 정상에 보기 흉한 철주를 박아 전통신앙에 입각
한 민족적 희망마저도 말살하려 했다.(오르내림 산악회, 단 인용은 노자키 미쓰히코, <한국
의 풍수사들>,동도원,2000)
'심지어'라는 부사는 쇠말뚝이 일제의 만행 중에서도 특히 악랄한 행위라고 강조하는 말
이다. 그런데, '오르내림 산악회'가 '기증'했다는 그 쇠말뚝에 대한 해설을, 독립기념관은, 그
리고 학계는 '사실'로서 인정했던 것일까? 그것이 그리 간단치 않았다는 것은, 이 쇠말뚝이
96년 5월 일찌감치 전시실에서 옮겨져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한 사학자도 그것을 '사실'로 믿고 있었다. 백운대에서 "내 눈으로 보
았다."고 그는 말했다. 문제는 쇠말뚝이 박혀 있다는 점 자체보다도 누가 어떤 목적으로 박
았는가일 텐데 말이다.
이 모임의 주도자가 "우리가 철주를 뽑아냈기 때문에 한국이 더 한층 발전한 건지도 모르
지요."(노자키 미쓰히코, 앞의 책, 212쪽)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은 풍수설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여준다. 혹여 1997년 말의 한국의 위기도 쇠말뚝을 미처 다 뽑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앞서의 <조선의 풍수>에서 무라야마 치쥰은 "조선 문화의 이면적이고 근본적인 현상 중
하나가 풍수이고 오랫동안 조선 민족신앙의 지위를 지켜왔기 때문에 한반도 어디를 가도 믿
지 않는 다가 없"었다고 쓰고 있다. 독립기념관의 쇠말뚝 '사건'은 그런 상황이 100년 가까
이 지난 현대 한국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임을 웅변하고 있다.
하지만 풍수설을 믿는다면, 수 센티미터 지름의 쇠말뚝보다도 산등성이 자체가 파헤쳐져
끊임없이 아파트로 변하는 상황부터 걱정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중에 '명산'은 없는지, 혹여
민족정기가 서린 '정수리'를 잘라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에 신경 쓰는
건축업체가 있다는 말은 물론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에게 풍수지리설이란 그저 집터와 조상의 묘를 잘 쓰면 자손이 대대로 번성한다는 정
도의 소박한 믿음이었다. 하지만 풍수지리설은 결국 환경론이며 운명 지배론이다. 또 조상
숭배적으로 보이면서 실은 내 몸의 안녕에 더 관심이 많은 사상으로도 보인다. 물론 환경을
좋게 하자는 데야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환경이 실제로 인간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
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옭아매는 이
데올로기로 작용한다면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아파트가 전 국민의 주거
양식으로 정착하면서, 또 토장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확산되면서부터는 풍수설은 실제 우리
생활과는 관계가 거의 없었다. 그렇게 평상시에는 풍수설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지냈던 많
은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그 설을 믿었던 사람들의 말에 따라 일본이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으려 했다는 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결과적으로 그런 풍수설에 근거하여 나라 정책을 결정한 셈이었다(이를 비
판한 사람은<월간 조선>의 김용삼 기자뿐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언론과 우리 모두
가 그에 합세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물론 그렇게 까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일본'
이었기 때문이다.
4)역사 '바로 세우기'와 역사 '새로 만들기'
99년 봄에 이회창 씨 조상 묘에서 쇠말뚝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그때 풍수가들은, 예전부
터 한국에서는 "자손들을 저주하기 위해 조상 묘 훼손이 자행되어왔다."고 설명(조선일보,
99.4.1)했는데, 그 때 그들은 이에 덧붙여 "묘 자리의 반경 50미터 이내에 철탑만 지나가도
집안에 액운이 낀다는 게 풍수지리상의 믿음"이며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한다며
전국의 명산에 쇠말뚝을 박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일제'를 상기시키는 일을 잊지 않았
다.
충무공 집안의 묘소에서 식칼과 쇠막대가 나왔을 때도 경우는 다르지 않다. 신문은 "이씨
문중에 대한 원한이나 집안 내부의 불화로 인한 사건"이고 "힘있는 사람의 기운을 빌려 난
치병을 고치거나 퇴치하기 위해"했을 것이라면서도, "일본 극우세력에 의한 소행이 아니냐
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며 "일제가 조선 병탄 이후 우리 명산명소에 쇠막대를 박
은 '전력' 때문"(조선일보, 99.4.21)이라고 일제의 쇠말뚝을 거론할 뿐 아니라 '전력'이라는
말로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또 거기에 더해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인재가 못 나
오도록 정기를 끊기 위해 명산 대혈에 무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부터 있어
왔다. 일제는 철길을 놓을 때도 평지 대신 일부러 산허리를 끊어 철길을 놓기도 했다."(위의
조선일보)며 그 '의도'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고 새 시대가 시작된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도(그것
은 분명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겠다는 대외적 선언이었는데) 한 쪽에서는 여전히 반
일의식을 조장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장'이라 말하는 건, 물론
터널조차도 '일부러'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행위라도 목적성이 있는 것
으로 해석할 경우 그 행위에 대한 증오의 감정은 더 커지는 법이니까. 그런데 '산허리를 끊'
지 않는 터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아직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 여부 자체가 아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항을 온 나라가 나서서 사실화했다는 점,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세기말 한국에서는, 쇠말뚝의 제거를 위해 활약하는 인물을 그린 소설(<혈맥>)까지 쓰여
지면서 쇠말뚝을 둘러싼 '간교한' 일본의 이미지가 확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해방된 지 50년
이나 지난 시기에 새삼스럽게 대두된 '기맥'이니 '민족정기'니 하는 담론은 우리에게 마치
바로 직전까지 억눌리고 짓밟히기라도 한 것 같은 억압감을 느끼도록 강요했다. 90년대 초
반이란 , 실은 몇 년 전에 올림픽을 치르고 모두가 선진국 진입에 부풀어 있었던, 말하자면
20세기 이후 최고조로 자신감에 부풀어 있었던 시기였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억눌린' '
정기'를 상상하는 일이야말로 분노로 다져진 반일로 연결되는 일이었다.
"그 작은 철심에 들어있는 악랄한 음모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기록문학회, <
부끄러운 문화 답사기>, 실천문학사, 1997,19쪽)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세기말의 한국은 '민족정기'라는 이름의 망령에 씌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이름으로 전
설과 소문을 '사실'화하여 '사실'이라는 '역사 새로 만들기'에 나서고 있었던 셈이다.
2:파괴와 상실의 사이-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1)억압의 이미지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최대 사업은 구 조선총독부 건물 파괴였다.
93년 8월 10일자 조선일보는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 "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도록 지시하면서 고뇌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고 전
한다. '고뇌'한 이유인즉 '치욕의 역사도 역사'니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던 것
과 '돈'문제 때문이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돈'보다 자존심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고뇌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마치 번민하는 임금과도 같은 말은,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독재가 아닌 민주통치임을 국내외에 과시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실은 스스로를 '나
랏님' 정도로 생각했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어쨌거나 국민들 사이에서는 찬성이 반 정도에
불과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강력한 반대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혼자의
'결정'대로 일은 행해졌다. 그리고 그건 20세기 말 한국이 실은 말 그대로의 민주국가는 아
니었음을 드러낸 일이었다.
수천억 원이나 드는 박물관 파괴와 이전작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는 '전적으로 찬성
28.9퍼센트, 찬성하는 편 22.5퍼센트'였다. 국민의 여론은 50퍼센트밖에 찬성이 아니었던 셈
이다. 그것이 의식되었는지 이 신문은 "그러나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다른 조사에서는 총독
부 철거 찬성이 80퍼센트를 넘었다고 말하고 있다."고도 전한다.
물론 50퍼센트인지 80퍼센트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떤 결론이 옳은 결정
인가일 터이다. 문제는 "돈보다는 민족자존심을 중시했"다는 선택을 뒷받침한 것이 실은 풍
수학자들의 '민족정기' 숭상론이었다는 데 있다.
총독부 건물 파괴가 결정되었을 때의 기사를 보자.
지난 1926년 완공된 식민통치의 상징물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는 정부 방침에 대
해 풍수지리학계는 끊겨진 수도 서울의 정기를 67년 만에 있게 됐다며 크게 환영하고 있다.
풍수학자들은 이 건물이 일제가 조선의 맥을 끊기 위해 건립한 대표적 '풍수침략 조형물'이
라고 규정하고 해방과 더불어 진작 철거해야 했다고 말한다. 해방 이후 역사학계에서는 이
건물의 형상을 두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일'자가 가로누운 형상이다", "건물에 원형돔 지붕
을 설치해 조선인의 혼을 잠재우려 했다", "경복궁의 정기를 약화시키기 위해 정남향에서
일부러 몇 도 비뚤어지게 건축했다."는 등 끊임없이 철거의 당위성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풍수학자들은 총독부 건물이 철거돼야 하는 가장 큰 이유를 건물의 외형보다 그 '터'에서
찾는다. 일제가 조선 왕궁의 정궁이요 명당 중의 명당인 경복궁 앞에 식민통치의 본산인 총
독부를 지어 북악에서 종로, 남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맥을 끊어버리려 했다는 것이다.(중
략)
일제는 이 근정전 바로 앞 광화문 홍려문을 헐고 총독부를 지어 민족정기의 근원을 말살
하려 했다는 것. 특히 풍수학자들은 일제가 총독부 건물과 함께 1927년 경복궁 내 과거장
등을 허물고 총독의 관저 (현 청와대)를 지어 "조선의 입을 막고 목을 누르려 했다."고 풀이
한다(경복궁 터에서 총독부 자리는 기구 즉 인체의 '입'에 해당되고 청와대 자리는 구기처,
'목'과 같다고 해석). 따라서 경복궁을 헐고 총독부와 총독관저를 건립함으로써 왕조와 민족
의 숨통을 억압하려 했다는 게 풍수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풍수지리 전문가인 최창조
씨(전 서울대 교수)는 "당시 풍수지리를 신앙과 같이 믿고 있는 한국인의 정서를 파악한 일
제가 서울 중심지에 총독부를 지어 조선인의 사기를 끊으려 했다."며 "뒤늦게나마 경복궁이
복원되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중앙일보, 93.8.10)
우리는 여기서 총독부를 '대표적 풍수침략 조형물'이라고 규정한 이들이 풍수학자들이었
고, 이들이야말로 최종적으로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인들의 정서를 '파괴'쪽으로 몰아가는 결
정적 역할을 한 세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67년 동안 한국의 정기가 '끊겨' 있었다고 강조함으로써 7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
이나 올림픽으로 절정에 달했던 80년대 한국의 약진을 우리로 하여금 잠시 잊게 만든다. 그
만큼 조선의 "입을 막고 목을 누르려 했다."든가 왕조와 민족의 "숨통을 억압하려 했다."는
신체이미지는 강렬하다. 말하자면 일본의 악랄성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풍수학자는 첨탑이 잘린 이후에도 비슷한 표현으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
을 유발시키고 있다.
지난 7일 옛 조선총독부 철거를 위한 첫 단계로 중앙돔 첨탑이 잘렸다. 다음날 중부지방
과 영동지방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오랜 가뭄으로 시달리던 남부지방에도 많
지는 않지만 비가 내렸다. 이것은 물론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풍수를 배우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렇게 생각 되지만은 않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조선총독부의 철거는
요컨대 우리 국토라는 생명체의 틀어 막혔던 익을 열어준 것이 되기 때문에...(생략)
일제는 조선 왕국의 중핵지인 경복궁을 괴멸시키기 위해 우리 민족이 거의 종교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믿고 의지하던 풍수사상을 이용했다. 경복궁 위쪽에는 그들 총독의 관사(구
청와대 본관)를 세워 우리 국토의 목줄을 눌렀고, 남쪽 아래에는 총독부를 세워 입을 틀어
막는 상징적 풍수침략을 감행함으로써 조선인들에게 민족 터전이 영원히 목숨을 잃었음을
알려주려 했던 것이다. 구 청와대 본관은 이미 헐렸다. 그러니 목을 죄고 있던 손아귀에서는
풀려난 셈이지만 아직 호흡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총독부 건물이 계속 입을 막고 있었
던 까닭이다. 이제 그 총독부 건물까지 없어질 것이라는 사람들의 7일 약속에 하늘은 비로
써 화답한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의 일본대사관 터가 바로 그들의 선조가 한 나라의 왕비를 참살하고 그 나라를 빼앗
았으며 수많은 애국지사를 죽여버린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
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그들이 의도 없이 우연히 그런 입지처를 선정했던 것이라 해도 자신들의 범죄현장
을 쉼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대사관 터를 잡았다는 것은
인의 있는 군자의 대도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일본대사관은 또한 그들의 과거 조선 지배의
대표적 상징물인 국립박물관 건물을 역시 쉼 없이 바라보고 있다.(최창조, 중앙일보, 95.8.14)
파괴 후에 비가 온 것도 여기서는 하늘이 감응한 소치로 간주된다. 그뿐인가. 국토를 '생
명체'로 간주하면서, 그 위에 세워진 총독부가 "목줄을 눌렀"거나 "목을 죄고"있었고 "입을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때까지 "호흡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고 민족 터전이 "목숨을
잃었"었다고 하는 신체이미지가 여기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식의 신체이미지
야말로 '국토'라는 땅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직접, 과거가 아닌 바로 어제, 그리고 우리 조상
이 아닌 나 자신이 당한 것과도 같은 상상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국
토를 '생명체'라 가정하고 그 생명체가 당하는 잔혹한 고통을 상상한다면 그 누가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이는 의도한 것이 아닐 것이다. 단지 본인이 풍수 신앙적 해석을 믿었다는 것뿐이라
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고조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대사관 위치까지도 근정전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라고 말해 일본이 그
자리를 의도적으로 선정한 것처럼 왜곡하면서, 곧 이어 "그들이 의도 없이 선정한 것이라
해도 군자의 대도는 아니다."며 대사관을 이전할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의도 없이 선정한"
사람들이 왜 일부 한국인의 풍수설에 따라 이전이라는 엄청난 경제적, 시간적 손실을 감수
해야 한다는 걸까?
교활함의 강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본대사관은 국립박물관 건물을 "쉼 없이 바라
보고 있"고 결국 "대사관 건물이 꼭 몰래 숨어서 범죄 현장을 훔쳐보는 범죄자의 눈길처럼
되어버렸다."고 대사관 건물을 의인화하는 수사법으로 또 다시 독자들의 상상력을 지휘하고
분노를 촉구한다.
그러나 그 장소가 '기맥'을 막는 것이었다고 생각한 것은 앞에서의 쇠말뚝처럼 일부의 풍
수가일 뿐이거나 최소한의 한국인이다. 일본인들이 그 위치를 선택한 것은 분명 노골적인
지배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의도를 읽는 것은 과장이고 왜곡일 뿐이다.
2)옆으로 누운 일자, 거꾸로 선 본 자
'대 일본' 설을 기억하는가. 총독부는 위치뿐 아니라 그 구조까지도 비난의 대상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일자형의 총독부 건물은 대자형인 북악산과 본 자형인 서울시청 건물과 아
울러 공중에서 보면 대 일본의 형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 한가운
데 자리를 잡은 것이나 설계 등에서 우리민족사의 기맥을 절단하고 식민통치를 영구화하려
는 일제 측의 치밀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조선일보, 96.6.12)
일자가 가로누운 형상? 첨탑으로 조선인의 정기를 잠재우려 했다? '일부러' 몇도 비뚤어
지게 설치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한 일본인이 항의하고 있기도 하지만, 일자는 옆으로, 본 자는 거꾸
로 선 형상이다(구로다 가쓰히로, <한국인의 역사관>, 분게이슌쥬, 1999,도쿄) '대 일본'자를
만들기 위한 것치고는 우스꽝스러운 형상 아닌가?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하는 그들이 자신들
의 모습을 그런 식으로 어정쩡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말들을 다른 사람도 아닌
'학자'들이 했다는 것이 서글프지만, 그들이 다름 아닌 '학자'의 권위를 내세워 한 말들이기
에 '간교한 일본' 이미지는 오래도록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다.
3)파괴가 말해준 것
결국 총독부 건물은 철거되었고, 대부분의 신문은 파괴를 칭송했다. 조선일보의 홍사중 씨
만은 파괴를 비판했지만(조선일보, 94.2.15) 동아일보는 "우리 겨레의 오욕과 회한의 역사를
말끔히 씻어주는 감동을 안겨주었다."며 "굴절된 역사를 바로잡고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선
린과 동반자로서의 한일관계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 "이런 점에서 일제 식민지 지배의 상
징이었던 옛 총독부 건물을 철거키로 한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의 역사에 기록될 것"(동아일
보 사설, 96.11.15)이라고 대통령의 결정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파괴는 '오욕과 회한의 역사를 말끔히 씻어'냈는가? 그 후 '굴절된 역사'는 '바로
잡'아졌는가? '해로운 선린과 동반자로서의 한일 관계'는 구축되었는가?
식민지로서의 '오욕과 회한의 역사'는 변한 바 없고, '굴절된 역사'가 '바로잡'아질 리도
없었으며, '새로운 선린과 동반자로서의 한일 관계'는 김영삼 대통령이 물러나고서야 그 물
꼬가 트였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다. 다만 박물관으로 용도 변경할 때의 공사비와
이전비 310억원, 건물해체비용 48억원, 임시박물관 증개축비 237억원, 복원사업비 535억원,
박물관 건립비 3천수백억 원 등(<부끄러운 문화 답사기>,91쪽)수천억 원이 실체 없는 '자존
심'의 복구를 위해 날아갔을 뿐이다.
총독부 건물이 "일본인에게는 추억과 자긍심을, 조선인에게는 치욕과 몰지각한 역사의식
만을 안겨주고 있다."(정운현, <서울시내 일제 유산 답사기>, 한울, 1995, 26쪽)는 말은 총독
부 건물을 둘러싼 움직임을 지켜보던 사람들을 찬성 쪽으로 몰고 갈 만한 의견이었다. 하지
만 중앙청과 박물관으로 쓰였던 그 건물을 보며 '자존심'이 짓밟히는 체험을 한 사람이 도
대체 얼마나 있었을까. 일반인들에게는 총독부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좀 멋진 건물 중의
하나였고 '우리의' 박물관이었을 뿐이다. 총독부를 바라보며 언제까지고 '치욕'을 느껴야 한
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리에게 언제까지고 열등감과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을 것을 요구하는
사고다.
물론 '추억과 자긍심'에 기반한 우월 의식을 느끼는 일본인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총
독부 건물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는 보는 사람의 의식수준이 결정할 문제다. 피지배
자였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치욕'의 감정만이 당연한 것이 아닌 것처럼, 조상의 지배 흔적을
보는 일이 무조건 '자긍심'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수치감'으로 연결될 수도 있
으며, 그 때 과거의 흔적은 우리에게보다도 그들에게 더 '산 교육장'이 될 수도 있다. 타자
를 지배한 일이 자긍심으로 연결된다는 생각은 지배를 실은 자랑스러운 일로 여기게 만드는
폭력적인 사고다. 그것은 오히려 아득한 옛날인 수백 년 전의 광개토대왕의 치적에 자긍심
을 느끼고 싶어하는 한국다운 발상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 일본의 의식수준은 전체
적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성숙한 곳에 와 있다. 만약 '자긍심'을 느끼는 일
본인이 있다면, 그들을 경멸하면 될 일이다.
일본의 한 평론가는, 박물관이 경복궁을 가로막듯 세워진 것을 보고는 "이렇게까지 노골
적이었다니..."하며 수치스러워했다. 진정한 역사교육을 위해서라면 첨탑만을 잘라 일반인이
가기도 힘든 독립기념관에 놔둘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놔두었어야 하지 않을
까. 풍수가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조선총독부 건물은 바로 그 위치만으로 우리에게뿐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도 일본의 조선 통치의 가장 결정적이고도 흉물스러운 역사의 '증거품'일 수
있었다.
총독부 건물은 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20세기 동양의 제국주의의 증거기도 하다. 그토록
세계화를 부르짖었으면서도 그것을 인류의 삶의 한 증거로서의 유산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한국에는 없었거나 소수였다는 것을 총독부 건물 파괴는 증명해 보였다. 하긴 당시이 박물
관장조차도 파괴에 찬성했다. 말하자면 박물관장에게도 박물관을 세계 속의 한 유물로 보는
시각은 없었고 한국인들에겐 '복원'되어야 할 '한국의 유물'만이 특별시 된 셈이다. 그건 물
론 '우리 것'이 아닌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는 한국적 사고방식의 소산이다.
그렇다고 한국의 유물들이 그나마 소중히 다루어졌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이사할 박
물관이 세워지기도 전에, 해방 50년을 단지 '기념'하기 위해서, 영원히 안주할 새 집을 마련
해준다면서 몇 년 동안이나 열악한 환경에 있을 것을 강요했을 뿐 아니라 유물 자신의 훼손
마저 요구한 셈이었으니까. 한국 유물이 일본이 만든 건물에 들어가 있는 것은 유물들에 대
해 미안한 일이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미안해해야 했던 건 오히려 이쪽이 아니었
을까.
그런 의미에서, 총독부 건물을 뛰어난 건축이라고 간주한 일부 사람들의 보존 주장은 적
어도 인류적 차원의 시각이 엿보이는 것이었다. 일본의 (부정적)유산이지만 인류의 유산이기
도 하다는 인식. 외국의 경우, 피지배의 흔적이라도 그 발굴에 힘쓰는 것은 종종 보는 일이
다. 우리는 멀쩡한 건물까지 돈 들여가며 파괴하는 판에 그들은 왜 묻혀진 채로 놔두지 않
고 일부로 발굴하는 것일까. 그건 물론 그들의 '역사'의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글자 그대로라면, 일어난 일 모두가 역사다. 말하자면 역사란, 그 토지 위에 살았던 사람
들의 기분에 따라, 없던 일처럼 그 흔적을 지워버려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4)과거의 은폐는 미래의 왜곡이다
도대체 대통령과 그를 추종한 이들이 생각한 '굴절'되고 '잘못된' 역사란 어떤 것이었을
까. 일본에게 지배당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그 총독부 건물을 그냥 놔둔 일이었을까?
'청산'이란 무엇을 청산한다는 것이었을까? 시청이니 서울역 등 일제의 '잔재'는 많은데
총독부만을 파괴한다고 해서 잔재 청산이 되느냐는 질문에, "적군으로 치면 적장만 제거하
면 끝난다."(정운현)는 이도 있었지만, 그가 '끝난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통치당했다
는 사실이었을까? 그것은 과연 '끝'날 수 있고 '끝'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총독부를 때려부수는 일은 그들이 생각한 과거의 '극복'이나 '청산'과
는 실은 관계없는 일이었다. '극복'이란 파괴하고 보지 않는 일이 아니라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청산'했어야 했던 것은 우리 자신의 피해의식이었
다.
한국에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이 아직 있다면, 그것은 일부 풍수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통치의 결과로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당한 기억
이 아직도 새로워서, 언제까지고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배제하지 못한 채로 그들을 대하는
일이다.
생각하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정권의 주체가 바뀔 때마다 그 때까지
의 모든 것을 뿌리째 부정하면서 파괴해온 것이 바로 우리 역사의 모습이기도 했다. 왜 그
랬을까? 그건 물론 어제까지의 '정통'의 흔적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오
늘의 내 모습만이 '정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부정하는 일만이 현재의 자신의 권위
가 정착되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개 새로운 주체의 창출과정으로 정당화되었
지만, 그 결과 우리의 문화유적은 '흔적'만 남은 것이 적지 않다. 오죽하면 어느 사학자가 "
정말로 통일신라니 고려라는 나라가 존재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우리의 유적은 너무
나 빈약하다."고 탄식했을까.
조선은 고려의 흔적을 대부분 없앴고, 그 때문에 우리는 고려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무
신정권이었다거나 불교국가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힘들다. 경복궁을 '복원'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즉 민족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총독부를 파괴한 일도, 그 속에 흐르는 감성은
수 백년 전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의 '문민정부' 역시 그 때까지의 정부와 '다른' 정부임을
'파괴'로 증명하려 했고, 그로써 우리 민족이 유달리도 이전의 역사를 파괴하기 좋아하는 민
족임이 다시 한 번 증명된 셈이다.
그러나 경복궁이 한국의 역사인 것처럼, 경복궁의 일부가 훼손된 사실도 우리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 총독부가 들어섰고 이후 중앙청 시대를 거쳐 박물관이었다고
하는 것 역시 모두 한국의 역사다.
부끄러운 과거의 흔적을 없애는 것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자신을 상상하는 일은 즐거운 일
이다. 그러나 과거의 은폐와 부정이 반드시 새로운 오늘을 약속하는 건 아니다. 개인의 삶이
건 한 나라의 역사 건, 어차피 역사란 항상 그 때까지의 문화 위에 새로운 문화가(정치도
넓은 의미에선 문화의 하나다.)덧칠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설령 타민족의 손에 의한 것
이었다 하더라도 파괴는 그 땅에서 분명히 진행되었던 역사의 증거물의 인멸이다.
최소한 이 역시 그럴 듯하게 말해지던 고문실이 정말 있었는지, 혹은 '대 일본'설은 정말
이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남겨두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파괴 이후에 남는 것은 과장과
오해의 증폭일 뿐이다. '진실'이 알려지기도 전에, 모든 것이 불확실한 정보만이 '진실'화된
채로, 총독부는 파괴된 셈이다.
역사에 접하는 일은 '기억'하는 일이다.
치욕의 역사라고 해서 보려 하지 않거나 잊으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역사가 주는 교훈마
저 잊어버릴 수 있다. 최악의 경우 그 망각은 과거의 재현을 초래할 수도 있다.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도, 체코에서 역사가 날조되고 역사적 기념물들이 파괴되는 것을 보며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국가는 서서히 자기 자신마저도 상실해 가는 것이다."(<사유하
는 존재의 아름다움>, 청년사, 1994)라며 탄식한 바 있다.
과거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현재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90년대 한국은 과거를 부정하려고만 했을 뿐 과거를 직시하거나 현재의 자신을 돌아
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과거를 직시하며 더 나은 오늘과 내일을 만드는 일보다는
단순히 찬란했던(찬란했다고 말해지는)과거의 문화에 연연하며 허황된 자부심을 기르는 일
에 치중했을 뿐이다.
5)진짜 '자존심', 민족정기를 살리는 법
문제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던 우리의 수천억 원이 정말로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는지에 있다. 오히려 위안부와 강제 징용자 같은, 일본 때문에 피해 입은 사람들을 위해
썼다면, 국가가 과거에 국민을 지키지 못한 죄를 보상한다는 의미에서도 가해자에게만 요구
하는 것보다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민족정기'를
위해 수천억 원을 낭비했지만, 시내 한복판의 먼지와 소음이 오히려 정신적, 육체적 '민족건
강'을 훼손시킨 건 아니었을까?
외국인을 의식한 자존심이라면, 편리하고 안전한 지하철,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물, 아름
답고 깨끗한 환경, 청결한 화장실과 서비스 좋은 택시기사를 대량으로 확보하는 편이 백 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들은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질 것이고, 그들이 한
국을 좋아하게 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민족정기'가 고취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
는 그렇게는 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우리는 돈이 없어 외국에서 돈을 꾸어다
썼다.
총독부 건물 파괴는, 김영삼 대통령이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거 지향적이었고 실질적
이득보다는 이념의 만족을 추구했다는 것을 증명해준 일이었다. 말하자면 과거에 연연하다
현재를 망친 셈이었다.
문민정부 시대란 적이 없어진 시대였다. 북한과도 나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도 노사문제
도 사라졌고 독재도 사라진 시대였다. 그러나 자신의 입지를 존속시키기 위해 습관처럼 '대
립' 세력을 적절히 이용하곤 했던 한국의 정치가들은 90년대에는 '반일'을 국민통합의 수단
으로 삼았다. 그것은 한 시대 전의 '반공'과 다를 바 없었다. 대통령의 "(일본의)버르장머리
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은 일본을 '응징'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고, 사람들은 그것
을 '자존심'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일제가 '민족정기의 근원을 말살'하려 했다는 것은 그들이 '동화' 정책을 선택해 '한국'의
존재를 지우려 했으니 만큼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 총독부의 위치를 한 나라의 궁전을 가
로막듯 세운 일에서 한국의 지배자가 더 이상 한국의 왕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것을 보여주
려는 의도를 읽는 일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의도를 풍수설로 포장하는 일은 왜곡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일본의 간교함을
강조하는 일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언제까지고 감성적 '비난'에 얽매이게 하고 이성적 '비판
'의 주체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야말로 한국인들을 과거의 피해의식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언제까지고 일본을 용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피지배의 상징을 언제까지고 '자존심 상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실은 피
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음
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다.
과거의 상처란 결코 '없어' 질 수는 없다. 또 상처는 부정하거나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차
라리 끌어안는 쪽이, 상처받은 이를 훨씬 강인하게 만들고 남의 상처에도 민감하게 만들어
주는 법이다. 안 보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고 보면서도 초연할 수 있는 경지까지 가
는 것만이 진정한 상처의 '극복'이다
쇠말뚝 소동과 총독부 건물 파괴를 뒷받침한 것은, "쇠말뚝을 뽑아내는 것은 우리 마음속
에 내재해 있는 열등의식 뽑는 것과 같다."(<부끄러운 문화 답사기>, 15쪽, 서길수 교수 인
터뷰에서)면서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문화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없는 데 있으며, 그것은
우리 것이 없어서"이며 "문화 개방을 앞두고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문화의 위대성을 깨달아
면역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민족주의였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촉진위원회'
를 결성하고 "이 건물은 반드시 현 정권 임기 내에 철거되어야 한다."고 촉구(중앙일보,
93.8.14)한 것은 '광복회', '한글학회' 등 11개 관련단체 및 학회 대표들이었다는 대목을 보
면,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란 말하자면 반일주의와 민족주의가 만나 이룬 사업이었던 셈이다.
총독부 건물 파괴 후 땅속에 9천여 개의 말뚝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처음에는 쇠말
뚝과 같은 류의 '풍수침략'으로 해석되었고 그것도 뽑아버려야 한다는 논의가 심각하게 제
기되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는 지반을 다지기 위한 말뚝이라는 해석이 받아들여져 그냥 놔
둔 채로 공사가 진행되었다던가.
그뿐인가. 이 역시 일제의 '잔재'임에 틀림없는 서울역사(도쿄에 가면 그와 너무나도 똑같
은 도쿄 역사가 있다.)는 '보존'되어야 할 건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 최근에는 들려온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3: '역사'인가 '소설'인가-이영희의 <노래하는 역사>
1993년은 세기말 한국의 민족주의 융성의 원년이라 할 만한 해였다. 이 해, 구독률 제1위
라는 조선일보는 일요판에 이영희의 <노래하는 역사>를 연재해 일요일 아침마다 한국인들
이 느긋한 마음으로 일본에 대한 우월감을 다지게 하는 데 공헌했고, 일본을 핵폭탄으로 응
징하는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일본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목청 높여 외치는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가 출간되었으니까.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
산 답사기>가 나온 것도, 또 인기를 끌었던 것도 물론 이런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1) "민족의 우수성을 일본 문헌을 통해 입증하는 고독한 작업"
<일본은 없다>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비하면 <노래하는 역사>의 인지도는 다
소 약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연재의 공헌이 얼마만큼 지대한 것이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94년 말 어느 날, 조선일보의 (사람들)난은 이 연재가 끝나고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94.11.24). 그에 따르면 이 출판기념회는 전직 여성 국회
의원 모임인 목연회가 주최, 조선일보의 후원 아래 각계 인사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
렸는데, 축하 인사자로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나섰고, '이기택 민주당 대표, 김윤환, 이
종찬, 장세동, 정해창' 등 당시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다수 참석했다. 출판기념회로는 더할
나위 없는 화려한 이벤트였던 셈이다.
주최측 회장은 인삿말에서 이영희씨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일본 문헌을 통해 입증하는
작업을 고독하게 해왔다."면서 "이 책이야말로 전 국민이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하고 있고,
조선일보 사장은 "이영희씨는 지난 일년 반 동안 조선일보에 <노래하는 역사>를 연재하면
서 2백만 독자로부터 절찬을 받아왔다."면서 "역사학, 언어학, 민속학에서 그 어떤 학자도
시도하지 못한 한일 간의 새 장르에 도전한 선구자"라는 축하의 말을 보내고 있다.
이 모임이 이렇게까지 화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인삿말에 나타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국회의원 출신이라는 저자 자신의 인맥을 잠시 제쳐놓는다면, 바로 '우리 민족의 우
수성'을 '입증'한 작업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모임은 이후
높아져 가는 90년대 한국적 민족주의의 열풍을 상징하는 모임이기도 했다.
이 연재는, 간단히 말하자면 일본의 <만요슈>(주: 8세기경까지의 고대 시가 4천5백여 수
를 모아놓은 전 20권으로 구성된 시가집)가 실은 '한국어'로 해석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일
보의 2백만 독자들이 정말로 '열광'했는지 어떤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지면에는 일요일
아침 신문의 지면으로서는 조금은 지나치다 싶은 야한 삽화가 적지 않게 게재되었고, 그것
도 인기의 이유와 관계가 없지는 않으리라.
어쨌거나 이영희에 따르면, 와카라고 불리는 일본의 고대 시가는 많은 부분이 한국어로
해석 가능하다는 것이었는데, 그 해석의 결과는 와카=남녀의 섹스의 찬가, 음모와 모략의
노래쯤으로 이해해도 될만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성의 노래로서의 해석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음에 틀림없다.
결국, <노래하는 역사>의 연재는 일본어가 실은 모두 한국어라는 자긍심과 함께(물론 그
것은 설사 사실이라 하더라도 자긍심의 확인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들의 존재가 우리
의 존재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의 우월감을 만족시켜주는 일이다.) '호색적인
일본인상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노래하는 역사>는 한국인들로 하
여금 일요일 아침마다, 일본에 대한 우월감과 함께(상스러운?) 그들의 침실을 엿보는 듯한
야릇한 쾌감을 느끼게 해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이 저자의 말처럼 우리 조상님 일 수
있다는 대목은 잠시 잊은 채.
그런데 <노래하는 역사>는 연재 도중 이미 한국 고대어를 연구한 일본인 연구자로부터
거듭 비판받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로부터의 응답은 내가 알기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중
에 일본어 번역판이 나온 후로는 논리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본 쪽 반론이 적지 않았지
만, 일본 쪽에 그런 비판이 있다는 사실 역시 한국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이 일본인 연구자는 후에 저서를 통해 이영희씨가 "고대 한국어에 관해 너무나도 무지"하
다고 지적하며 한국 학계에서도 "이 씨의 주장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고 있지 않다."고 말
한다. 또 이영희의 논거에 대한 자신의 반박과 함께 국어학자 강 길운의 비판도 인용해놓고
있다[노히라 슌스이,<일본인이 쓴 반일 이야기>, 오늘예감] 실제로 언젠가 대면할 기회가
있었던 강 박사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라며 이영희 설을 일축하고 있었다.
고대어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내겐 이들의 주장을 판가름할 능력도 없고, 그 여부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다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일적 담론들 특유의 수사법이 여기서
도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93년 5월 30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우리 옛말로 읊어진 일본의 과거>라는 제
목에 "만엽집 1천년 비사를 캔다/해학-섹스-권력투쟁 기록 가득"이라는 뽑은 글이 붙은 기
사가 눈에 띈다. 이미 읽은 이들은 알겠지만, 이 연재에는 야한 그림에 걸맞는 성적인 어휘
와 내용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 대상이 단순한 일본 문화였다면 '저질'로 한 마디로 일축
되었을 만한 표현들이 여기서는 웬일인지 '해학'으로 칭해진다. 예를 들면 주인공의 배설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것도 여기서는 "지적 유희를 즐기는 고대인의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간주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 노래의 주인공들이 실은 한국인이었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물론 이 책이 증명하고자 한 것- 고대 일본어는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자체에 문제가 있
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얼마든지 연구할 수 있으며
학술적으로 증명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노래하는 역사>가, 주최측이 "우
리 민족의 우수성을 입증"했다고 칭송한 것처럼 일본에 대한 우월감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는 점이다. 저자가 특별히 그렇게 강조한 것도 아닌데도 읽는 이들이 그렇게 해석한 건, 물
론 한국과 일본의 유사성 혹은 동질성을 주장하는 일이 한국에서는 즉각 우월감으로 이어지
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해석에 대해 저자가 반박하지 않았다는 것은 저자 역시 그런 의
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리라.
실은 이영희의 논리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영희는 구체적으로 언어의 유사성을 증
명해 보이려 한 것이지만, 일본어에 한국어가 어원인 듯한 것이 많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는 일이다. 우리가 늘상 자랑스러워했듯 일본의 문화 자체가 한국에서 건너간 것임은 이
미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이야기고, 언어라고 해서 그 예외일 수는 없음은 물론이니까.
2)친일 이데올로기에서 반일 이데올로기로 바뀐 일선동조론
재미있는 것은 이런 주장이 한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과 일본이 유사성
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일제 시대 때 거꾸로 일본 쪽이 적극적으로 주장하던 이야기였다.
이른바 '일선동조론'이 그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일본은 일제 시대 초기에 한국과 일본이 언어가 같다든가 조상이 같다
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사실화하기 위해 교과서까지 동원했다. 그것은 한국을 저항
없이 동화시키기 위해, 즉 한일합방이 정당한 것이라고 주입하기 위해서였다.
일선 동조론이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국과 일본은 같은 조상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
의 민족으로 '동화'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일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시
키기 위해 태어난 논리였다. 일선 동조론은 합방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선보였고 합방이 이
루어진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주장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어 보급의 필연성을 주장하기
위해 나온 이론이었는데, 그 때의 주장이 말하던 것은 "일한 양국어가 동계'라는 점이었다.
언어적으로 "조선은 동생, 일본은 형"이며, 인종도 풍속도 습관도 '동계'라는 주장이 그럴
듯하게 펼쳐졌다. 언어학자 가나자와 쇼자브로는 <일선동조론>(1929)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
는데, 그 속에서 그는 일본의 조상신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도래했다며 양 민족이 같은 조상
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 총독이었던 고이소 구니아키는 조상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
의 동생 수사노미코토의 자손이 오늘의 조선 민족이라고 했다[김광림, <일선동조론>, 후지
제록스 고바야시 세쓰타로 기념기금 1995년도 연구조성논문, 도쿄]. 그런가 하면 일제는 수
사노미코토가 단군이라는, 즉 그가 신라에 강림, 혹은 단군이 일본에 가서 아마테라스오미카
미와 형제의 언약을 나누었다고 하는 설을 한국 역사교과서에 등장시키기도 했다[호사카 유
지, <일제의 동화정책에 이용된 신화>, <일어 일문학 연구> 제 35집, 문학/일본학편, 한국
일어일문학회, 1999.12].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치란 필요하면 신화 건 언어 건 자신의 입지
확보를 위해 이용하는 것이 그 생리라는 사실이다. 이 당시 한국인들이 전쟁에 나가 싸우기
위해서는 '나라'를 위해 몸 바친다는 자기환상이 필요한 만큼, 일본과 한국은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식의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서정주 시인을 비롯해 지금까지도 '
친일파'라는 죄목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이런 논리에 현혹된 것은 아
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는 그들을 '고발'하고 단죄하는 일보다도 그들이 '왜' '친일'을 했
는지를 보기 위한 관심이 더 필요하다. 우리 근대의 한 시점에서 과오를 범하고 만 그들의
심리구조와 상황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기도 하니까.
일본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들의 제국주의와 과오에 대한 논리적 비판은
물론 필요하지만, 단순한 지탄-그들이 '했다'거나 '어떻게'했는가에 치중하는-을 넘어서서,
'왜' 그렇게 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성교육에서의 김활란 박사나 문학에서의 이광
수처럼 각각의 분야에서 근대화를 이룬 공적이 '친일'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우리의 딜레마를 지혜롭게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한편, 당시 한국인들은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동화될 수 없는 필연성으로
서 얼마만큼 '다른' 민족인가를 강조했다. 그 때는 '다름'이 독립의 근거였고, '다르'다는 차
이의 확인이야말로 동화에 대한 저항을 뒷받침해주는 요소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1990년대, 이번에는 그들과 우리가 실은 '같다'고 하는 사실이 우
리의 '우월감'을 보장해주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조선일보사 사장이 말하는 대로 <노래
하는 역사>에 2백만 독자가 열광했다면, 그것은 물론 그들의 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즉
우리가 아니고서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우월감에 의해서다. 그들에게 문화를
전수해주었다는 사실보다도 더, 그것은 '언어' 자체였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더 한국인 아니
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고, 따라서 그들이 우리와 같은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우월감이
커지는 구조다.
이처럼, 똑같은 사실-동조론-도 그 사실을 강조하는 주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에 따라
다르게 이용된다. 합방 때는 '동화'의 근거로서, 친일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던 일선 동조론이
독립 후의 한국에서는 우월감을 보장하는 반일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노래하는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한 집안이면 어떻고 같은 민족이면 어떻다는 것일까. 그것을 말하는 일 자
체야 그것이 순수한 학구적 호기심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그것이 정치적 이데올로기
를 내포한 것일 때는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의미하고 위험한 발상일 뿐이
다.
3) '타자'없는 타자론
그로부터 6년, 새 세기를 맞고도, 그리고 기존의 비판에 굴하는 일없이, <노래하는 역사>
는 다시 연재되기 시작했으니 민족주의의 '노래'는 역시 생명이 강한 듯하다.
이전에도 보였던 설 중에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일본의 천황이 되었다는 '추정'아닌 '단정
'이 있다. 그에 대한 설명을 다시 한 번 하면서 이영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0년. 당시 백제 분국이었던 왜는 국력을 기울여 지원군을 보냄으로
써 조국 부흥을 도모한다. 그러나 세 부족이었다. 지원군이 나당연합군에 참패한 것은...(생
략)
총력전에서 완패한 왜는 패닉 상태였다. 그간 왜 정권 장악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왔던
연개소문으로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조선일보, 2000.5.24)
'왜'라는 표현의 의도에 관해 언급하는 일은 잠시 놔두자. 이전의 연재에서는 "그 무렵 왜
는 백제의 분국이나 다름없었다."는 표현이 보였는데, 여기서는 "분국이었다."고 사뭇 단정적
이다.
물론 분국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다는 건가? 그런 의미라면 중국도 얼마
든지 한국은 중국의 '분국'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중국은 우리나 일본에 대
해 말하지 않는 일을 우리는 자주, 그리고 언제까지나 항상 일본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여기서의 서술을 믿는다면 우리의 연개소문은 "왜 권력 장악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왔던" 침략자라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나 이 기사의 제목은 '큰 사내 연개소문의 야망'
이다. 이런 논리라면, 일본의 제국주의도 '야망'의 실천이라고 그들이 주장한다 해도 할 말
이 없지 않은가? 실제로 제국주의 일본은 당시, '야망'과 '모험'이라는 단어를 통해 사람들
에게 식민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식민지로의 이주를 권장했다.
내용을 조금 더 보자. 내용인즉, 고구려의 장군 연개소문이 일본이 약해지자 일본을 장악
해 40대 왕 덴무 천황이 되었고, 38대 왕 덴치 천황(이도 백제의 왕자로 해석되고 있다.)과
몇 년 동안 두 정권으로 존재했다는 이야기고, 그 두 사람이 한 여자와 관계했다는 이야기
다.
이 날의 삽화는 세 명의 남녀가 관계하는, 웬만한 에로물 이상 가는 수준이어서 놀라울
정도다. 한국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자처하는 조선일보를 볼 청소년들에 대한 영향은 여기서
는 무시되고 있는 듯하다. 아니면 거기서 밝혀지는 사실이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걸까.
앞으로 더 나아가면 다음과 같은 글도 보인다.
<일본서기>야말로 거짓 투성이 책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거짓말한 역사책'이라 할 수 있
다. 구조적으로 거짓말을 일삼고는 있지만, 말단 부분은 놀랄 만큼 구체적이요, 정확한 기록
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역사는 물론 날조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거짓 투성이"니 "구조적
으로 거짓말을 일삼고"있다는 표현은, 한 외국이 소중히 생각하는 그들의 역사서에 대한 표
현으로서는 너무나 난폭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해괴한 기록"이니, "일본서기는 이같이 참으로 충격적인 사실을 간단한
연호로만 슬쩍 표시해놓았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진실을 일러주고 있는 셈이다.
정녕 무서운 역사책이 아닌가."라며, 이 책이 '의도적'인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는 식으로 일
본의 간교성을 강조한다. 그런 끝의 결론은 "<일본서기>를 우리 손으로 연구하자."다.
한국의 엘리트층이 일본으로 넘어갔으리라는 이야기에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호
족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지배계층이 되었다는 설에도 나는 공감하는 바니까.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여기에는 '타자'가 없다. 걱정되는 것은 야한 그림의 자극 이상으
로 클, 청소년들에 미칠 영향이다. 그들이 만들어 갈 우리의 미래 모습이다. 한일 고대사를
'바로잡'기 위해 쓰여졌다는 이 책이 허황된 자부심을 키워주는 일로 미래사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흥분했다는 이들의 "우리 조상들이 일본국에서 벌인 호
방한 행적들을 더 자세히 서술해달라"(조선일보, 2000.6.14, 섹스와 음모는 '호방한' 일인가?)
는 요구에 본격적으로 부응하기 위해선지, <노래하는 역사>는 8회 째부터는 '팩션'이라는
조어를 사용, 그간의 주장이 '사실'에 '근거'한 '허구'임을 인정하고 드디어 본격적인 '소설'
쓰기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노래하는 '역사'는 자진해서 '역사'의 간판을 내린걸까. 하지만 실은 그렇지
도 않다는 것이 다음과 같은 말에서 곧바로 드러난다. 저자는 "우리 고대사와 한일교류사의
참모습 속에 동북아시아의 오늘과 내일 모습도 드러날 것"이라며 "기성의 모든 역사관의 '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누드'로 읽어주"(위와 같음)기를 요청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누구도 몰랐던 '한일 교류사'의 '참모습'이라는 것이 실은 연개소문의 참으로 노
골적인 강간 이야기니, 당혹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고대인의 글자 그대
로의 야사가, 사뭇 대단한 '역사'로 기록되는 현장 앞에서 이제 우리는 '역사' 서술이란 무
엇인가부터 물어야 할 것 같다.
4:일본은 '없'는가?
<노래하는 역사>는 학구적 에세이 스타일로 그 정치성을 은밀히 감추고 있었지만, 이에
가세하듯 쏟아지기 시작한 소설과 체험론 형식의 일본론들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더 이상은
감추지 않았다.
'일본은(배울 것이)없다'고 말하는, 부정적인 일본관을 전면적으로 내놓으면서 일약 베스
트셀러의 대열에 진입, 90년대 전반의 화제의 책이 된 <일본은 없다>가 아마도 그 대표격
이 되겠는데, 이 책에 대해 많은 식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비판하지 않은
것은 구태여 비판할 만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였으리라. 그러나 이 책이 수많은 사람들
에게 열광적으로 읽혔다는 사실은 세기말 한국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는 일이었고, 그런 의
미에서 이 책은 무시하고 지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책을 쓴 동기를 말하면서, 그 때까지의 일본론들이 칭송 일변도였다고 저자 전여옥은 지
적한다. 그러나 실은 일본을 말하는 수식어로서는 '친절', '근면'이라는 단어와 함께 언제고
'저질'과 '교활'도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은 없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책의 등장은, 말
하자면 긍정적 인식에 가려 표면화되지 못했던 부정적 인식이 자신감과 함께 수면 위로 드
러난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분명 제목만으로도 '팔릴'수 있는 책이었다. 게다가
88올림픽을 치르고 90년대에 이른바 문민정부가 등장하면서, 이제는 정치와 경제면에서 우
리 모두가 꿈꾸던 곳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던 93년 말에 이 책이 등장한 것은 시기
적으로도 절묘했다. 이룰 것을 이룬 우리 앞을 가로막는 것은 더 이상 '없'을 것으로 모두가
생각한 시기였으니까.
1)페미니스트의 여성차별
먼저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이 할애되고 있는 일본 여성론을 보자.
일본 여성은 "남편이 말하지 않아도" 의식주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거나, '여성다운 여성'이
되기를 강요받고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에만 해당되는 사항인가?
물론 아니다. 그것은 한국에도, 어쩌면 한국에 '더' 해당되는 사항이며, 나아가 지구상의 대
부분의 여성들이 아직껏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다. 그런데도 이런 일들이 이 책에서는
마치 일본만의 치부인 양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최대의 문제점은 바로 이런 식의
오류가 전체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정년을 맞은 남편과 이혼하는 여성들을 두고 "불쌍한 인간을 거두지 못하고" 떨쳐버리는
이기주의로 간주하는 것도 물론 이런 맥락에서다. 이미 한국에서도 문제시되고 있는 내용이
니(전여옥의 발언은 이혼을 원하는 할머니에게 가해진 남성 재판관의 질책과 닮아 있지 않
은가?) 새삼 이런 발언의 문제점을 지적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저자
가 상상하는 것처럼 '퇴직금'이 아니라 '정년' 자체다. 즉, 둘만의 시간의 시작을 의미하는
정년을 맞아, 그 동안 '일'을 명목으로 밖에서만 살아온 남편과의 사이에 이미 공통의 화제
도 취미도 없음을 발견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친 종속적인 삶을 청산하려 하는 의식의 발로
가 바로 정년이혼인 것이다.
물론 '거두'는 일에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을 터이다. 하지만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남
(자식 혹은 타인)을 의식한 나머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진정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
는 의욕과 용기의 부족에 의한 수동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는 각
자의 가치관이 정할 문제일 뿐, 한국적(남성중심주의적) 도덕관으로 단죄될 문제는 아니다.
일본 여성이 "자기 실속을 철저히 챙긴다."(여기서 강조되는 일본인=이기주의의 도식은,
후에 다시 말하겠지만, 편견과 자의적 해석이 만들어내는 일본 비판의 대표적 케이스다.)고
소리 높여 비난하지만, 그것은 아이들이 다 커서 자립할 때까지 기나긴 생활을 인내 속에서
견뎌온 그들의 아픔과 여성으로서의 불리한 입장에 대한 이해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
다. 말하자면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 일본이 우리보다 좀 빨랐다는 이야
기인데, 실제로 저자가 이런 비난을 한 지 불과 몇 개월 후에 이런 식의 '황혼이혼'이 한국
에도 늘고 있다는 것이(중앙일보 94.5.1<50대 이후 이혼은 늘어만 가는데>)한국에서도 보도
되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결혼을 둘러싼 보편적이 '여성'의 문
제를, 저자는 일본의 특수한 현상으로 생각했을 따름이다.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고 여자가 남자로부터 보석을 받는 일, 남편과 부모 이외의 남자에
게 술을 따르는 일, 서양 남자를 애인으로 삼는 일 등 비판은 이어지지만, 이런 비판들은 어
디까지나 '한국'의, 그리고 '여성'으로서 길들여진 감성이 시키는 비판일 뿐이다. 그리고 바
로 그런 보편적 '한국 여성'의 사고방식은 일본 여성들에게는 정조관념이 없다는 질타로 이
어진다. 그러나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정조' 개념이란 여성을 억압해온 남성적 사고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그뿐인가. 이런 식의 논리야말로 여성차별 담론을 강화시키는
근원에 있는 것이다. 후에 저자가 페미니스트를 표방하고 나선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다른 것은 죄악'?
이런 식으로,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사고와 행동을 무조건 비판하는, '다른 것은 죄악'
식의 논지가 이 책의 전체 기조를 이루고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갈 때 나중에 신기 좋게 돌려놓는 일, 잔돈에 정확한 일등의 문화적 차
이조차도 저자는 '긴장이 풀어진 편안함'을 모르기 때문이라며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
은 질서와 정돈에 '편안함'을 느끼는 타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저자가 상상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비판이다. 굳이 말한다면 그런 식의 정신적 긴장이 때로는 '유비무환'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반대로 저자가(대부분의 한국인이)좋아하는 편안함의 추구야말로 때로는 '무비유
환'을 유발할 수도 있다. 더치페이에 대해 잔돈까지도 정확한 것을 두고도 저자는 비인간적
인 일로 문제시하고 장사꾼 같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장사'라고 하는 상행위에 대한 경멸
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한국적 사고일 뿐이다.
도표와 도면이 곧잘 이용되는 뉴스의 브리핑까지 '지나치게 친절'한 가르침이라며 비아냥
거리고(얼마 안가 한국에서도 모방이 시작되었던가?), 최고급 물건을 찾는 여성들을 '상식을
뛰어넘는 여성'이라고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급 레스토랑을 찾는 사람이 저자와 같은
'기자'일 때는 "역시 기자들이란 까다로운 족속, 그리고 일본의 부를 제법 즐길 줄 아는 부
류"라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모순도 보인다.
구체적인 근거를 제사하지 않은 채 선입견만으로 비판적 언사를 퍼붓고 있는 것도 이 책
의 또 다른 문제점이다. 예를 들면 "일본이란 사회는 모든 것이 돈으로 결정되는 지극히 비
인간적인 사회"(우리는 어떻던가?)라거나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나은 사회"라고 저자는 거
리낌없이 말하는데, 어디가 어떻게 '돈으로 결정'되고 있는지, 또 우리는 어디가 그렇지 않
아서 더 '나은'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지나친 지출을 하지 않기 위해 카드 아닌 현금을 쓰는
것조차도 그들이 유달리 현금, 즉 '돈'을 좋아해서이며, '돈'을 '오카네'라고 말하는 것도 저
자에 따르면 그들이 배금주의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돈에까지 공경의 접두어 '오'를 붙인
결과다. 그러나 일본어의 기호만 알아도 알 수 있듯이, 여기서의 '오'는 단어에 대한 존경심
의 표현이 아니라 말 자체의 품격을 생각한 어법이다. 일본어는 목욕에도 맥주에도 '오'가
따라다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맥주나 목욕도 존경하고 있다는 걸까? 배금주의라면 한국
쪽에 '더'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저자가 <나비부인>의 여성을 두고 일본인은 "사랑을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결국 아무
것이나 사랑이고 희롱 당한 것마저 사랑으로 분류"한다고 말하고, 전통극인 가부키를 중간
에 식사를 끼워 장시간 즐기는 모습까지도 '퍼질러앉아' 즐긴다고 해석하는 악의적 시각도
물론 이런 시각의 연장선에 있다. 문제는 그런 시각이 언제까지고 문화의 '차이'를 '차이'로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이다.
3)일본어에 문제 있다?
일본론자들이 곧잘 빠지는 오류지만, 여기서도 외래어를 표기하는 가타카나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고 일본어의 비합리성이 강조된다. 하지만 가타카나는 외래어를 표기하는 구
실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외래어가 많다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외래어가 들어 있지 않는 순수한 고유어란 존재할 수 없다. 언어란 원래 살아 있는
(변화하는)것이며 자신이 접한 수많은 '타자'의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저자는 외래어를 표기할 고유어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을 두고 일본 국어학자의 직무유기
라지만, 언어란 국가가 '만들어' 확산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텔레비전'이나 '컴
퓨터'를 표현할 고유어를 따로 만들지 않는 것은(묘하게도 이 때는 한국도 그렇다는 것은
잊혀진다.) 거기에 들어가는 노력이 인력과 시간의 낭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실은 국가주의적 발상이라는 걸 저자는 알고 있을까.
그들의 외래어 사용은 중학교까지의 의무교육의 결과에 따른 전 국민의 영어 이해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그들이 영어를 잘하는 민족은 아니지만, 일본어보다 영어 쪽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을 영어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때 그 어휘는 이미 '
외래어'로 인식되지 않는다. '파파', '마마'와 같은 가장 일상적인 어휘부터가 외래어라는 현
상이 증명해주듯, 그들에게는 그런 단어는 이미 '외래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본어'인
것이다. 이 현상은, 그들의 남의 것(타자)에 대한 놀랄 만한 적응과 수용력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러한 성향이야말로 그들의 변화와 발전의 기반을 이룬 것이
었고, 우리와는 현저하게 다른 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근대화를 일본을 통해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과거는, 근대라는 틀이 필요로 한 새로운
언어들에 관해 일본어를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 '철학', '물리학' 등
의 학술용어부터 기술용어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친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자신도 이미 외래어를 사용해온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근대적 사고의 근간이 돼온 언어시스템들을, 이제 와서 모
두(고유어로)뜯어고치는 작업을 해야 할까. 오늘도 한편에서는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지
만, 그건 조선총독부 건물을 파괴하는 일만큼이나 무의미하고도 소모적인 일이다. 그런 곳에
사용할 수 있는 인력과 시간이 있다면 현재와 미래를 위한 일에 투자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
이다.
4)'분노'-일본에 대한 굴절된 피해감정
저자는 공원에서 평화로이 거니는 일본인들을 보면서까지,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는 그들
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현재의 부와 평화는 어디까지나(물론 미
국의 도움과 6.25 등의 호기도 있었지만) 패전 이후의 그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거의 '죄'에 대한 벌을 주고 싶은 나머지 그런 사실은 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백조의 탈을 쓴 흑조"라는 식으로 일본을 바라보는 식의 굴절된 피해의식
의 발로인 것으로 보이지만, 한 나라가 완전한 백조거나 흑조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가 너무나도 단순하고 순진한 발상이다. 그리고 그런 식의 단순한 사고야말로 복합적 존재
로서의 인간(나라)이해를 가로막고 있는 주범이다. 대상의 복합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
흑조'로 치부하는 일은(단순한 흑조일 뿐 흑조가 백조의 '탈'을 쓰고 있다는 말로 일본은
두 번 단죄된다.) 자신의 가치관이 옳은가 하는 재고 없이 타자를 흑조로 판단하고 배척해
왔던 단순함과 경솔함을(우리가 과거에 겪어왔던 그 수많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배척-예를
들면 '빨갱이'라는 단어가 그랬다-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분노'라
는 '감정'은 일본을 제대로 보게 해줄 '이성'까지 방해한 것으로 보인다.
IMF가 시작되었을 무렵 그 원인을 일본에 돌리는 의견이 심심치 않게 들린 적이 있다.
한 국가의 경제적 파탄이라는 것은 경제 자체가 그 구조가 단순하지 않은 것만큼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당시, 원인을 일본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물론 이미 경제구조 자체가 일본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만큼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이미 반성한 것처럼, 그 원인은 금융부실과 정경유착, 과
도한 소비성향 등 국가와 사회의 제반 구조에 있었다. 그런데도 모든 원인을 일본에 돌리는
것이 우리의 의식이다. 한편, 당시 한국을 가장 많이 도와준 나라는 일본이었는데도(선진국
지원 80억 달러 중 일본 30억 달러, 미국 17억 달러. 동아일보, 98.1.8), 그런 사실은 별로 신
문에 보도되지 않는다. 혹은 보도되더라도 아주 작게 보도되어 국민들의 일반인식이 되기는
힘들다(그러한 속에서의 예외적 케이스로, 경향신문,97.12.27, <일, 한국 살리기에 나섰다>가
있다). <일본은 없다>에는 그런 의식의 원형이 있다.
5)정상과 비정상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건, 저자가 눈앞에 놓인 대상을 '정상', '비정상'으로 구분하고
싶어하며 그 때 자신에게 익숙한 것만을 '정상'으로 보려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때 저자
가 한국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는 만큼, 우리와 다른 일본은 당연히 '비정상'으로 매도된
다. 타자의 '차이'를 '차이'로 보려는 노력 없이 일본이라는 타자를 향해 '비정상'이라는 단
언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 양쪽이 겪었던 대형 비행기사고 현장에서 나타난 양국인들의 모
습은 양쪽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국인들은 통곡과 실신과 울부짖음으로 슬픔을 표
현했지만, 일본인들은 눈물을 참으려 애쓰고 있었다. 물론 슬픔에 맞닥뜨려 울부짖고 통곡하
는 한국적 행동을, 참고 억제하는 일본적 행동양식보다 인간적이라고 느낄 수는 있다. 그러
나 그것은 감정표현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어느 쪽을 아름답게 느끼는가는 실은 보는 이가
속한 공동체의 성향, 혹은 개인의 성향이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정상'이란
하나의 공동체가 편안하게 느끼는 생활양식과 사고를 지칭하는 말일뿐이다.
타자를 '비정상적'이라고 단정하는 일은 자신만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와 오만이 빚
어내는 것이다. 자신의 시각을 상대화하지 못하는 데서 오만은 시작된다. 그런데 때로 이른
바 '정상'인들이 , 그들이 규정한 '비정상'인들을 지배하고 배척하고 심지어는 제거하는 폭
력을 행사해온 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기도 했다.
저자의 일본 체험이 "일본여자들, 참 못생겼다."는, 그 나라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말로 시
작된다는 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이 한마디가 나타내주는 저자의 피상적이고 주관적인 시
점이 저자로 하여금 미녀보다는 추녀의 발견에 정력과 시간을 소모하게 만들었고, 2년 여
동안 단 한 명의 미녀도 발견하지 못한 채로 결국 "일본은 없다."고 외치게 만든 셈이니까.
그리고 바로 그 결과가, 일본을 선진국으로 느낀 적이 "한차례도 없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역할을 방기한 뻔뻔스러운 나라", "한심한 나라", "나라가 국민을 조종하고 억압하고 못 살
게 구는 나라"니, 고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없다"는 단정이었다.
배워야 할 것이 없으니 '우리식'으로 하자는 의식의 종착역은 물론 일본을 따라잡자는 의
식일 터이다. 그런데 도대체 극일이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을 경제적인 것을 염두에
둘 것이다. 경제와 기술이 발전해서 일본보다 잘 사는 날, 그 날을 이 책도 꿈꾼다.
그러나 어떤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보다 수치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혹 우위에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 나라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일일까?
한국은 경제적 발전을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한국인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모든 조사에
서는 대부분의 항목에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경제적으로 '잘'사는 일이 아
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마음 편히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이야말로 '잘'사는 일
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라면 단언컨대, 일본이 우리보다는 더 '잘'살고 있다. 물론 그들도 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고 직장인들은 구조조정바람에 떨고 있으며 주택사정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
다. 그러나, 그래도 일요일이면 동네에서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혹은 동네 어른들과 함께 축
구나 야구를 즐기며, 노인들은 노인들대로 가벼운 운동을 담소와 함께 즐긴다. 돈이 없어도
도서관에 가서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보거나 테이프나 비디오 시디를 빌려 정신을 풍요롭
게 할 수도 있다. 여름이면 동네축제에 참가해 하루쯤 들뜬 기분으로 보낼 수 있으며, 겨울
이면 동네 신사에 들러 한 잔의 감주를 얻어 마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과 합격과 건강을
기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회에는 신뢰가 있고, 불신에 따른 스트레스와 갈등이 적다는 바로
그 점이 현대 일본 사회를 결정적으로 '살기 좋은'사회로 만들고 있다. 물론 가끔씩 끔찍한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미국의 테러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을 나
타내고 한국의 모든 사건이 한국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사건이듯, 각기의 나라가 가진 문제
점이 표출된 사건일 뿐이다.
문제점이 있으면 선진국이랄 수 없다면 그 어느 나라가 선진국일 수 있을까. 일본이 '경
제라는 측면을 제외하면 선진국이 아니'라는 말은, 경제적인 풍요가 정치, 문화의 안정과 발
전에 기여하며, 그 안정이야말로 선진국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당연하고도 기초적인 사실
을 모르는 데서 오는 말이다.
그렇다고 일본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나라건 '있'는 부분도 '없'는 부분
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 개인이 그런 것처럼 정상이고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점
만 보면서 일본을 '있다'고 말하는 일 역시 일본은 '없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문제는 유독 못 생긴 곳만을 보면서 그것을 상대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일, 즉 자신의 눈
이 나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또 내 눈에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얼굴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 때문에 어쩌다 바른 부분을 보게 되면 그것은 '위
선'이나 '거짓'쯤으로 간주된다. 하긴 일본에 관한 이런 경향은 저자뿐 아니라 적지 않은 한
국인들이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6)목수가 되고 싶은 아이들
<일본은 없다>에서는 신분이동에 대한 야망이 없는 것도 부정적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건 사회적 시각보다도 자신이 그 일을 좋아하는가 아닌가다(물론 예외는
있다).
일본 아이들이 가장 되고 싶어하는 것은 목수다. 99년에 초등학생과 유치원생들을 대상으
로 한 '장래 되고 싶은 직업' 조사 결과는, 남자아이는 목수, 학자, 음식점 주인, 야구선수,
축구선수, 의사, 경찰관, 우주비행사, 드라이버, 게임 프로그래머, 소방수 등이었고, 여자아이
는 음식점 주인, 간호사, 수의사, 사육담당, 꽃집 주인, 보모, 의사, 가수, 성우, 선생님, 복지
관계 직원 등의 순서였다.
이전에는 야구선수나 축구선수가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96년까지만 해도 4위에 머물었던
목수가 99년, 21세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 화창하고>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다.
고교를 졸업한 한 소녀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성들의 영역인 목수에 도전해 꿈을
이루어낸다는 스토리다(소녀의 외할아버지는 목수의 우두머리였다). 소녀는 타고난 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고전을 거듭하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향해 주위의 몰
이해와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의 길을 갔고, 그런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드라마였다.
일본에서도 일본 아이들의 목수 지향은 이 드라마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있었지
만, 다른 직업 역시 이른바 '잘 나가는' 직업은 아니다. 우리는 이른바 전문직이 아니면 돈
이나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을 선호하지만, 인간 사회는 물론 그런 이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문직'의 꿈 아
닌 '전문'적 의식=직업의식이 필수적이고, 그런 의미에서는 소박해 보이는 이 꿈들이야말로
그들의 저력이 아닐 수 없다. 소방수가 되고 싶어서 되는 아이와 되고 싶은 다른 것이 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소방수가 되는 아이 중 어느 쪽이 더 우수한 소방수가 될 수 있
을까.
여자아이들의 꿈 역시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 소박한 것들이다. 온 사회에 자신의 이익과
편의보다도 상대방에게 배려하는 음식점 주인과 간호원과 보모와 복지관계 직원들이 존재한
다면, 그 사회는 얼마나 편안할까. 여자아이들이 하고 싶은 음식점이란 아이스크림 집, 빵집,
케이크 집 등 훈훈한 느낌의 직업이다. 어릴 때부터 빵집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 경영하는
빵집이란 얼마나 푸근하고 기분 좋으며 맛있는 집일까? 2위는 간호사고, 간호사는 최근 10
년 간 언제나 '베스트5'안에 든 직업이다. 그 동안 가졌을 병원에서의 체험이 아이들에게 긍
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우리는 이미, 꼬마들이 동경할 만한 아름다운
간호사들이 지금의 일본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노인과 실직자 등 약한 입장의 사람들을 돕는 복지관계 직업이 꼬마들의 동경의 대
상이 되고 있는 일본에서 아직 희망을 본다. 이 앙케이트 결과에서 보이는, 평화 지향적이며
약한 사람을 돕는 일을 아름다운 직업으로 생각하며 권력 지향적이기보다는 보통사람이기를
원하는 일본 아이들의 꿈에서 아름답지만은 않은 과거와 현재를 이겨나갈 일본의 저력을 본
다. 물론 앙케이트 결과는 단순히 동화나 드라마의 영향에 의한 이행기적 희망사항일 수도
있지만, 또 그 중에는 돈과 권력에의 길로 방향 전환할 아이들도 적이 않겠지만, 그래도 어
릴 때의 꿈이나마 소박할 수 있는 일본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본다.
무엇보다도 일본인의 72퍼센트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조선일보,95.8.22)한다는 사실은, 이
미 현재의 일본인들 대부분이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며 마음 편안하게 살고 있으며, 그들이
이른바 '애국심'에 의존하지 않아도 자신이 있는 공간을 사랑하는 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국민들 자신이 사랑하는 나라, 그것이야말로 일본이 '없
'지는 않은 나라임을 웅변해주고 있다.
지난 7년 동안 일본의 대외원조예산은 세계에서 가장 많았고, 아시아 경제를 위해서는 다
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8백억 달러를 지원했다[오부치 전 일본 수상의 발언, 조선일
보,99.5.1]. 물론 이런 것조차도 일본에 악감정을 갖는 사람들은 그것은 대외홍보용이라고 말
할 것이다. 그러나 설사 대외홍보용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안 하거나 적게 하는 나라보다 나
은 건 물론이며,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선진국'일 수 있다.
7)일본 성토물과 1990년대의 행복한 만남
일본은 '비인간적'이며 역사적으로 '불결'하며 '국민을 억압'한 나라로 간주한 결과, <일
본은 없다>가 도달하는 곳은 '내 나라, 국민이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가를 알았다.'는 한국
칭송이다. 그런 식의 자화자찬에 90년대 전반의 한국인들은 열광했던 것이다. 그건 물론 때
마침 세간에 나돌던 '민족정기' 혹은 '자존심'이라는 단어의 뒷받침 덕분이었고, 그런 의미
에서도 이 책은 세상과 행복한 만남을 이룬 셈이다.
이제 말하자. 이 책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바로 이런 식의, 타자의 부정이 자신의 긍정으로
이어지는 데 있었다. 거기에서 이루어진 타자 부정은 대부분이 오해와 왜곡이 빚어낸 것이
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식은 나쁘니 '우리식'으로 하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
이었다. 그러나 자부심이란, 상대방을 부정하면서 얻어지는 상대적인 만족감이 아니라 되돌
아본 자신의 모습에 대해 긍정할 수 있으면서 얻어져야 할 그 어떤 것이다.
어쨌거나 일본에 관해 "나라는 부자지만 국민은 가난하다."고 주장한 이 책의 메시지는
확산되었고, 이후 이 이야기는 한국인들 사이에선 여지껏 진실인 양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1만 달러 벌어 3만 달러 소비하는 한국과 4만 달러 벌어 1만 달러 소비하는 일
본을 두고 한 소리였다.
이런 식의 무지와 편견과 분노와 질시가 깔린 감정적 '일본 성토'물들이 일본을 모르는
이들에게 사실처럼 읽혀지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이 한국의 90년대였다. 논리의 모순
이나 왜곡에는 눈감은 채, 사람들은 우리의 국민성을 치켜세우는 국수주의적 발상에 환호했
다. "21세기는 한국의 세기가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는 저자의 말은 한국인의 무의식적
갈망을 표현한 말이었고, 때마침 타오르던 민족주의 열풍에 결정적으로 불을 붙였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자기도취는 발전보다는 퇴보로 몰아갈 뿐이다. 그리고 우리
는 몇 년 후 위기를 겪었다. 나르시시스트에게 미래는 '없'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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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인의 '필독소설'-김진명의 반일 소설들
1)'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침략성
나름대로의 노력 끝에 남을 누를 만큼의 지력과 힘을 갖추게 된 아이와, 바깥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 집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만 있다가 미처 힘을 기르지 못한 아이가 있다고 하
자. 그리고 약한 아이를 힘센 아이가 때리고 지배하면서 갖은 방식으로 괴롭혔다고 하자. 이
때 선악의 구별은 분명하다. 강한 아이가 강하다고 해서 남을 괴롭히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고, 따라서 약한 아이에 대해 동정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약한
아이가 언제까지고 자신이 왜 당했는가에 대한 의식은 결여된 채로 피해의식만 키우면서 강
한 아이를 비난하고, 나아가 가능하면 힘을 길러 강한 아이가 했던 것처럼 그 아이를 괴롭
혀주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일까.
눈치 빠른 독자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무려 4백만 부
나 팔렸다는 베스트셀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이하'무궁화')의 모티프다. '무궁화'
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핵무기를 소유하게 된 한국이 일본에 핵을 투하한다는 식의 가상결말
만으로 한국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줄 수 있는 책이었고, 반일을 무기로 때마침 높아
가던 민족주의 열기에 불을 붙였다는 점에서는 '일본은 없다'에 못지 않은 역할을 한 책이
었다.
'무궁화'는 과거의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갚을 것을 꿈꾸고, 또 그것을 당연시한 책이다.
하지만 '눈에는 눈'식의 이런 결말을 20세기하고도 말엽에 한국인들은 아무런 비판 없이 받
아들였다. 물론 소설상의 설정은 일본의 공격에 대한 반격이라는 구도를 취하고 있지만, 이
는 식민지 시대의 원한이 실린 염원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책은 우리 안의 무의식-침략을 당연시하는 폭력주의/군국주의-을 드러내 보여준 책이었
던 셈이다.
90년대 초반, 한국인들은 김진명식의 사고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광함으로써,
그런 무의식이 실은 저자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실은 한국인들 대다수의 것이었음을 증
명했고, 그런 의미에서 '무궁화' 현상은 20세기 말 한국의 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
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가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힘과 기회만 있으면 같은 류의 '폭력'을 타자에게 가해도 된다는 무의
식적 폭력긍정론에 누구나가 호응한 셈이니까. 그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90년대 한국의 치
부를 드러낸 일이었다.
'무궁화'가 독자들을 향해 발신한 것은 약소국가로서 강대국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핵을
소유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인도나 파키스탄의 핵실험에 대해 전 세계가 항의했듯
이, 그런 사고가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임은 물론이다. 이런 생각을
두고 약소국에게만 핵을 허용하지 않는 강대국의 '음모'쯤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
만,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무기 소유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핵 소
유의 길로 치닫는다면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지구의 평화적 분위기는 곧바로 깨질 것이 분
명하다.
비핵화선언이란 불충분하나마 평화에의 염원을 담고 있는, 글자 그대로 '위험'에 몸을 노
출시키며 행하는 하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김진명의 비핵화선언 비판은 '평화'의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실은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침략이 나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당위다. 그런데도 그것을 잊게 만든 것 무
엇이었을까. 그건 바로(침략의)정당성이다. 그리고 정당성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상대편에 대
한 증오와 함께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기방어 차원일 뿐이라는 합리화가 필요하다. '무궁화
'의 인기는 바로 이 두 가지를 완벽히 갖춘 데 있었다.
2)조작된 분노
하지만 '무궁화'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판한 바 있으니, 여기서는 몇 년 후
인 1998년 초에 나온 책 '하늘이여 땅이여'(이하'하늘')를 보도록 하자. '하늘'은 '무궁
화'만큼 압도적인 베스트셀러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몇 달 동안은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고, IMF 사태를 맞은 직후의 한국의 고달픈 처지를 절묘하게 이용한 광고를 통해 독자
들의 '감성'에 호소해 성공한 케이스였다.
이제 가슴속에 맺혀 있는 분노와 슬픔을 이 소설 하나로 풀어버리십시오.
위기에 처한 한국의 금융시장에, 교활하고 악랄한 수단으로 뛰어든 투자 자본가의 거대한
음모!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최고의 천재들이 벌이는 세계와의 전쟁. 그들의 운명은, 또
한반도와 일본의 21세기 국운은... 지구상의 단 한 사람, 교황에게만 공개된 파티마 제3예언
의 실체. 중앙청 철거도 드러난 지하의 석주. 그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일본의 간교한 음
모.
'가슴속에 맺혀 있는 분노와 슬픔'이란 물론 이 책이 출판된 98년 직전의 충격, 그러니까
1997년 11월 말에 맞게 된 IMF 사태로 야기된 사회정서를 말한다. 아마도 이 문구를 읽으
면 독자들은 마치 우리 모두가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던 듯한 착각에 빠지지 않았을까.
물론,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나름대로 '분노'했을 것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간파
하지 못하고 과소비로 치달았던 자신들에 대해서, 자신을 해고한 조직체에 대해서, 또는 나
라를 망쳐놓은 정치인, 경제인들에 대해서... 그렇게 '분노'해야 할 대상은 다른 누구보다도
한국인들 우리 자신이었는데도, 이 광고(소설)는 그 분노의 방향을 교묘하게 돌려놓고 있다.
우리 자신이 아닌 제3자,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일본으로 그 분노의 화살이 돌려지도록 만들
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사태가 마치 우리를 해하려 하는 그 누군가의 '교활'하고 '악랄'하
며 '간교'한 '음모'에 의한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 문구들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광
고 문안은, 우리의 위기는 실은 "교활하고 악랄한" "투자자본가의 거대한 음모"와 "일본의
간교한 음모"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실제로 사태 직후에 우리의 위기를 일본의 탓 혹은 미국의 탓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적지
않았고, 이 광고는 그런 분위기에 호소한 것이기도 했다. 증권회사를 둘러싼 외국 투자가들
의 '암투'에 관한 상상력에 불을 붙이려 하는 이런 식의 경계의식이야말로 당시 환영받던
것이었으니까. 예를 들면 말레이지아의 마하티르 수상은, 말레이지아에 경제위기가 닥치자,
자신들에겐 문제가 없었는데 서양의 '음모'때문에 잘 나가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외국
음모론을 공공연히 펼치곤 했다. 문제를 외국 탓으로 돌리려 하는 김진명의 의식 역시 '위
기'의 원인에 대해 분석은 없이 피해의식만을 조장했다는 점에서 마하티르와 완전히 닮은꼴
이다. 그런데 마하티르에게 돌아온 것은, 외국기술 유입정책을 취해 발전했는데 이젠 그 외
국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는 야유와, 외국자본의 이탈이었다.
김진명은 실제로 "지금의 위기가 비틀린 역사와 빼앗긴 문화, 서구 자본의 횡포에서 비롯
"(한국경제신문,98.2.12)되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 '하늘'에서도 위기의 원인이 타자에게 있
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들어 근거불충분한 경계의식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여기서
김진명이 말하는 '비틀린 역사'란 다름 아닌 일본과의 과거다. 광고에서 보이는 '석주' 운운
은 바로 그 부분에서 이용되어 쓰여지는 대목이다.
'하늘'은 우리의 '기'를 일본이 합방 초기에 묶어놓았다고 주장하는 풍수학자들의 의견
을 빌려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물론 그건 이미 앞에서 본, 산에 쇠말뚝을 박았다거나
박물관 자리에 석주를 박았다는 이야기들이다. 김진명이 '석주'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어하
는 것은, 현재의 위기를 타자, 그 중에서도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일본의 '음모'임을 강조
하고 싶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민족정기를 둘러싼 허구성 담론들은, 진실처럼 유포되었던 만
큼 몇 년 후 나타난 소설의 리얼리티를 높이는 데 기여한 셈이다.
3)추악한 일본인/멋진 한국인
'하늘'이 일본이 '아마테라스오미카미'라는 조상신을 숭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면서, 경
멸과 조소에 가득한 시선으로 일본이 신화 속의 인물을 실제 역사상의 인물인 것처럼 만들
려 한다고 비난한다. 일본에서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역사상의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
은 사실도 아니지만,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단군이라는 신화적 인물을 굳이 역사 속
의 인물로 강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에서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닐 텐데 말
이다.
이런 식의 잘못된 지식과 편협한 애국심은 김진명의 다른 소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인들이 화투를 한국인에게 퍼뜨려 '타락'시켰고 그것은 '무서운 흉계'였다는
이야기. 이는 쇠말뚝에서처럼 일본과 관여된 부정적인 요소는 모두 일본의 '의도'로 보고 싶
어하는 한국인 전체의 뿌리깊은 피해의식을 대변하는 것이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화투는
현대 일본에서는 보통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었고, 한국에서의 화투판은 일본 문
화의 한국식 전파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김진명의 소설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일본을 실제 일본의
모습인 것처럼 묘사하고 '일본의 야욕'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런 수사법이 부정적 일본상을
유포시킬 수 있음은 물론이다.
당연하게도 그의 소설에는 보통사람으로서의 일본인, 생활인으로서의 일본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존재하는 것은 '영악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이며, 독도문제로 일장기를 몸
에 두르고 자결하는 전근대적인 희한한 일본인들이다. 그것은 '독도 회복의 광풍'으로 표현
되지만, '광풍'이라는 표현을 굳이 쓴다면, 그것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까지 만들
어 전 국민에게 유포시켰던 한국 쪽 분위기의 표현에 더 적합하다. 독도문제에 대한 관심
자체를 보기 힘든 현대 일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한
나라의 '정신'을 지키는 것으로 자부하거나 간주되는 문인들이 앞장서서 독도를 방문하는
적극성을 띠었던 것도 일본이 아니라 한국 쪽이었다.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일본의 '독도 침략'을 가상하는 소설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 소설
들은 구성의 차이는 있지만 독도가 '석유자원'을 내장하는 등 경제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상
상과 '일본'이 테러리스트를 동원해 독도를 '침공'한다는 등 일본이 먼저 침략한다는 설정
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이 소설들의 무의식이 김진명의 소설들과 멀지 않은 것임은 물론이다.
어쨌거나 '하늘'의 일본인들은 대부분이 악인이거나 신뢰할 수 없는 교활한 사람들이고,
야비하고 난폭하다. 한 일본인의 괴괴한 살기는 삼류 검객소설에나 나올 법한 모습인데, 이
는 물론 김진명의 의식에 비추어진 관념적 일본인상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실제 일본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일본인인 것이다. 하긴 유일하게 인간
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일본인이 한 사람 있기는 한데, 그는 알고 보면(아니나 다를까)한국인
의 피가 섞인 인물이다. 그런 일본인들에 반해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미모와 천재성을 겸비
한 인물이거나 쾌활하고 남성다움이 넘치는 인물들이다. 그러고 보면, 김진명의 첫번째 소설
'무궁화'의 주인공 이휘소도 천재적인 인물이었던가.
4)총독부 철거 3년 후의 '정신문화'의 실종
김진명은 "경제위기를 비롯한 민족적 시련은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가 파괴된 데서 비롯"
되었고 "문화의 힘이 약한 민족은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힘이 왜 약해
졌는지에 대한 반성이 이번 소설의 출발"이었는데, 그가 찾아낸 결론은 "고유의 정신문화가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또 "우리의 젊은이들이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를 외면하
고 정신세계를 망각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한 민족의 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어져오고
있으며, 모두가 힘겨워하는 시기에 우리를 격려하고 일으켜 세우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고도 말한다.
그것이 어떤 위기건, 위기라는 것이 종래의 '힘'의 쇠퇴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 힘이 약해졌다."는 김진명의 진단 자체에는 문제가 있을
수 없다. 물론 '약해졌다'는 말은 이전에는 강했다는 전제가 필요하고, '강한 한국' 상이란
실은 적지 않는 부분이 거품이었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그러나 97년 한국의 위기는 '정신문화의 파괴'나 '전통문화'의 외면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 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어디까지나 88올림픽 이후의 한국인들 개인과 사회와 국가
의 구조와 의식에 있었다. 그런데도 김진명은 위기를 '전통'이나 '정신문화'파괴와 연결시킨
다. 우리와 비슷한 양상으로 위기에 처했던 일본이나 태국에서, '정신문화'가 파괴되었기 때
문에 자신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리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만약 일본인
들이 '일본혼'이 부족해서 경제위기에 처했다고 떠들었다면 우리는 그들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국가에 위기가 닥쳤다고 생각될 때 '정신문화'니 '고유문화'의 실종을 부르짖으며 한탄하
는 것은 실은 김진명이나 한국뿐 아니라 '근대 국가'가 형성된 이래 많은 나라에서 행해져
온 일이다. 그것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공동체(국민)의 힘을 결집하려는 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민족주의의 기원이었다. 김진명
의 '하늘'도 그런 움직임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위기 때 태동되는 민족주의에는 항
상 경계의식에 기반한 배타성이 전제되었고, 김진명의 소설이 배타적인 건 바로 그 때문이
다.
김진명은 "잘못의 출발점은 문화의 상실", "고유문화의 맥을 잘리운 겨레에게는 타락한 물
질문화에 대한 노예적 종속뿐"이라면서, 구체적으로 '굿'의 소멸을 들어 "정신세계를 망각"
했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정신'의 강조야말로 항상 민족주의에 붙어 다니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세계'의 다른 말인 '민족정기'를 지킨다는 구실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파괴하
기까지의 과정을 앞에서 보았다. 그건 다름 아닌 '정신'='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해 소음과 공
해와 혼잡도 마다 않고 멀쩡한 건물을 천억이라는 엄청난 돈을 들여 파괴한 일이었다. 그런
데 그로부터 불과 3년도 되지 않아 김진명은 '정신문화'가 실종되었다고 말한다. 김진명이
의미하는 것이 '민족정기'라면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살아 있었는데 말이다. 자신이 '한국인
'임을 의식하는 민족주의적 감성이 강하기로는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나라가 현재의
한국이다. 일본 문화에 빠져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일 10대 청소년들도 반일감정만은 실은
어느 세대에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아니면 죄책감을 느끼고 있거나.
설령 그들에게 '정신세계의 망각'이 있었다 한들 '하늘'이 말하는 것처럼 '굿'이나 '무당
'의 상실이 곧 '정신'의 파괴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외래종교인 기독교 때문에 우리의 굿
이나 전통적 샤머니즘이 '파괴'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굿이 사라진 것은
근대화 이후 '종교'적이고 '풍습'적인 면이 사라진 사회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는 '파괴'당한 것이 아니라 근대화와 함께 '변형'된 것일 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네
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굿이 우리의 일상생활로부터 사라지게 된 것은, 그것의 '효험'에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된 우리의 근대적 의식의 결과일 뿐, 외래종교의 침투 때문은 아니다.
그가 비판하는 기독교가 오늘날 한국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기
독교가 우리나라뿐 아니라 국가를 초월하여 신도들을 얻어 세계 종교화할 수 있었던 이유
는, 그것이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는 하나의
'이념'으로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굿은 분명 우리 문화의 한 모습이지만,
세계적 종교가 가진 '이념'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는 굿과 기독교를 동일선상에
놓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교황청을, 기독교만을 유일한 가치로 생각하고 그것의 전파를 위해 수단방
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처럼 묘사해 기독교가 의도적인 문화 '침범'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왜곡한다.
실은 모든 문화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침략'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김진명
의 발언에는 그런 인식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그의 말에 따른다면 미국의 농구에 열광하고
햄버거를 먹는 일도 우리의 '정신문화'를 잃는 일이다. 말하자면 그것도 '파괴'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김치를 먹고 한국 춤에 열광한다고 해서, 우리가 미국인들이 그들의 '정
신문화'를 잃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국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즐기는 일
일 뿐이다. 설령 김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정
신문화'(실은 이 정신문화 자체도 실체적인 것은 아니지만)를 잃은 것은 아닌 것처럼, 햄버
거를 먹는 일은 물론 '정신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대상이 너무나 범속한 레벨인가? 그렇다면 불교의 좌선을 예로 들어도 좋다. 우리는 서양
인들이 동양의 정신에 심취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의 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태에 대해서는 경계하기 쉽다. 물론 서양의 문명과 문화의 전파란 실제로 제국주
의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고, 그러한 사실에 대한 자각은 필요하다. 그
러나, 외국 것을 단지 외국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해야 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정
신문화'의 풍요가 아니라 빈곤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일본 문화에 대한 대응에서 볼 수 있
는 지나친 경계 의식을 김진명은 남의 것 모두에 대해 발동시키고 있지만, 인류문화에는 엄
밀한 의미에서의 '고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도에 따라 더 '고유'하거나 덜 '고유'할 뿐,
모든 문화는 필연적으로 교류하며 또한 교류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풍요로워지는 법이다.
물론, 김진명이 강조하는 '정신문화'의 파괴가 혹여 수긍할 만한 반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라면 그 자체에 대해 비판할 필요는 없다. 또 그럴 때의 '정신문화'야말로 배타적 애국심이
아닌 진정한 '정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리라. 그러나 김진명의 주장은 그런 방향을 향하고 있
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5)"한국인의 필독소설"
그런데 이렇게 배타적인 소설이 독자들을 어떤 식으로 감동시켰는지를 살펴보자.
"피눈물나는 현실 속에 정신까지 엎드릴 수 없다는 이야기, 가슴이 뭉클했다."
"고단한 하루 하루를 단번에 통쾌함으로 바꾸어버린 소설."
"가슴속의 고통과 눈물, 지금 이 소설 하나가 닦아주고 있다."
"통쾌하다."
"우리 현실에 눈물이 난다."
"기운 나게 하는 소설이다."
"누가 우리의 천기를 끊으려 하는지 알겠다."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하고, 신선한 자극과 깨달음을 준다."
(31세, 교사)
"아버지께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며 읽어보라고 하셨다. 첫 장을 읽고는 그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18세, 고등학생)
"이 책이 나오자마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읽었는데,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위치를 재확인
하는 시간이었다."(19세, 고등학생)
"민족적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20세, 대학생)
"우리나라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자신을 반성한다."(22세, 군인)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19세, 고등학생)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다."(39세, 주부)
"요즘처럼 힘든 시기에 다시 한 번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일깨워 이 난관을 헤쳐나갈 용
기를 주었다."(23세, 대학생)
광고에 게재된 독자의 목소리라는 것을 신뢰한다면, 독자들의 반응이 앞서의 광고가 요구
하던 것과 너무나도 일치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분
노'이며, 보이지 않는 '적'의 확인이며, '한국인'으로서의 자의식이며, 우리는 해낼 수 있다
는 '용기'다. 그들은 김진명이 사주하는 대로 '천기'라는 실체불명의 대상의 상실에 대해 '
가슴속의 고통'과 함께 '눈물'을 닦으며 '우리 문화의 소중함'과 '우리 민족의 우수함'에 도
취한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위치를 재확인'하며 '통쾌함'이라는 카타르시스를 얻
는다.
아마도 바로 이들이, 외국과의 마찰이 있을 때면 화형식과 타국 대사관에 돌을 던지거나
방화하는 일도 마다 않는(우리의 그런 모습들은 외국인의 눈에는 어떤 '정신'의 발현으로
비치는 것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야만행위로 비칠 따름이다.)이들로 크는 것일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언론도 이구동성으로 이 소설을 칭찬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투기자본의 음모와 일본의 민족말살 기도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의 활약상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경향신문)
"'당신은 진정 한국인으로서 살고 있는가'를 날카롭게 묻는 책이다."(조선일보)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모두가 힘겨워하는 오늘 우리를 일으켜 세울 힘의 근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동아일보)
"한국 혼과 민족정기를 주제로 한 박진감 넘치는 소설이다."(중앙일보)
이 역시 광고에 이용된 것이지만, 조작이 없었다고 한다면, 일반 독자들의 감상과 하등 다
를 바 없는 이러한 평가가 대중을 선도한다는 한국 언론의 모습이다. 그들 역시 '음모'와 '
말살 기도'를 확인한 후 실체불명의 '한국 혼'과 '민족정기'에 대한 자각을 새로이 하는데,
상대가 '일본'이라는 점이 그런 의식을 강고히 하는 데 기여했을 것임은 물론이다.
어쨌거나 언론까지 밀어준 덕분에 '하늘이여 땅이여'라고 하는, 제목부터가 다분히 감상
주의적인 이 소설은 "40만 독자의 애간장을 태우며 전국 서점 연속 베스트 1위를 기록"했고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독자의 가슴조차 쥐어뜯는 단 하나의 소설로 떠"올랐다.
하지만, '하늘'은 서양의 과학이 동양의 문화를 파괴했다고 비난하면서 정작 한국의 위
기는 컴퓨터-20세기 말의 서양 과학의 대표적 소산으로 보아야 할-가 서양의 '음모'를 물리
친다는 식의 모순을 드러낸다. 일본과 최종적으로 화해하는 결말은 '무궁화'와 다르지만,
그것은 서양이라고 하는 또 다른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은 것일 뿐 진정한 화
해로 보기 어렵다.
90년대 후반, 일본과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되면서 21세기에는 일본과 동반자가 되어야 한
다는 담론이 도처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한 예를 들자면, 한 정부산하기관이 모집한 한일엑
스포를 위한 캐치프레이즈 응모작품 중에는 한국과 일본이 손잡고 다음 세기의 주역이 되자
는 내용들이 많았다.
일단은 90년대 초의 무조건적 반일주의보다는 진전된 것으로 보아야겠지만, 그 근간에 자
리하고 있는 것이 실은 또 다른 패권주의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미국에 이기는 동양'의 환상은, 동양을 삼키는 서양의 소설만큼이나, 어쩌면 그것이 과거
에 대한 복수의 성격을 띨 소지가 있기 때문에 훨씬 위험하다. "통일을 완수할 건강하고 힘
찬 정신은 문화를 회복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데서 얻어질 것"이라는, 김영삼 대통령 말씀
같은 김진명의 말은 지극히 평화주의적이지만, 그가 말하는 '힘찬 정신'이란 "21세기에는 우
리나라의 '기'가 온 세계에 뻗칠"것이라는 꿈의 표현이다.
'기'를 뻗치고 싶은 의식은 군국주의적 또는 자본주의적 세계패권의 꿈을 꾼다. '무궁화'
에서 우리는 이미 그의 무의식적 침략주의를 확인한 바 있다. 김진명은 "그 옛날 만주 벌판
을 달리던 웅혼한 민족의 기상"을 그리워하지만, 그가 말하는 '웅혼한 민족의 기상'이란 다
른 민족에 대한 '침략'을 수반한 것이었다. 이는 김진명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약소국가에 오
랫동안 고난을 겪은 불행한 민족임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남 몰래 꿈꾸는 한국인 전
체의 무의식이기도 하다. '만주'를 우리가 '잃은' 땅 정도로 생각하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 일본의 '식민지 조선'을 둘러싼 망언을 비판할 자격은 없는
것 아닐까.
김진명은 '피'의 동질성을 중요시한 끝에 북한을 미화하기도 하는데('가즈오의 나라'),
90년대 한국인들은 이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물론 그것은 '피'의 동질성이 한국인에게는 다
른 무엇보다도 우위에 두어져야 할 '가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그런 식의 '동질성' 찾
기야말로 배타적 민족주의의 근원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동질성'의 확인을 위해 김진명은 '기'를 강조한다. "모두가 힘겨워하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보이지 않는 힘-팔만대장경과 북악의 지기와 또 우리에게는 무슨 신
물이 있을까."에서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힘'이 그것이다. 그가 말하는 또 하나의 '신물'이
란 '단군'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어려운 시기'에 대처할 수 있는 것으로서 김진명은 '팔만
대장경'이라거나 '북악의 지기'라거나 '단군'이라고 하는 '과거'의, 혹은 실체불명의 외부적
인 대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대로 그 세 가지를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긍정적 가치를 부여한다
고 하더라도, 다시 말해 그것들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나타내주는 것이고, 우리가 '뿌리
있는' 민족이며 '기'가 넘치는 천혜의 땅에 살고 있는 선택받은 민족임을 증명해주는 것이
라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그것도 잠재적인 '조건'일 뿐이다. 그런 것
들이 20세기 말의, 즉 현재의 한국의 힘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실제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쨌거나 '기=민족정기'의 상징으로서 등장하는 '토우'는 한국을 해하려는 이들을 멸하는
정의의 사도다. 보통 소설이라면 그 황당함이 비판의 가치조차 없어 무시되었을 설정이 호
응을 얻은 것은, '고유의 전통문화'니 '민족의 맥'이니 하는 단어가 한국에서 마패와도 같은
절대적 위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진명이 신화 속의 인물을 역사상의 인물로 만들기에 진력하는 이유는, 그러한
시도가 곧 '역사'의 유구함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가 길다는
사실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문제는 역사의 길이가 아니라, 그 역사가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고 결과적으로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가 아닐까. 21세기 초에도 세
계 최강대국의 자리를 놓지 않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그들의 역사가 짧다는 것은 수치인가?
역사의 길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6)상상력의 해방, 상상력의 빈곤
90년대, 김진명 이외에도 일본을 공격하는 소설들이 적지 않게 쏟아졌지만 전쟁을 긍정하
는 시각이 문제시된 적은 없다. '대한제국 일본 침략사'라는 책을 쓴 고원정은, 일본이 '까
불어서' 우리가 한 번 혼내준다는 스토리를 생각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소설에서 우리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을 풀고 싶었다. 한때 우리가 놓쳐버린 우리
의 가능성을 가상의 역사 속에서나마 후련하게 펼쳐 보이고 싶었다.('횃불'광고)
'우리가 놓쳐버린 가능성'이란 물론 우리가 일본을 침략, 지배한다는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김진명의 소설과 닮은꼴이다. 그러나, 이 말 속에 숨어 있는 폭력적 침략주의야말
로 바로 우리가 과거 몇 십 년 동안 일본의 전유물로 간주하고 비난해왔던 바로 그것이 아
니던가. 이러한 가상소설을 '상상력의 해방'이라 칭송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던 것도 90년
대였다. 힘을 길러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복수-타국의 침략이라는 건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내는 일일뿐이다.
과거뿐 아니라 미래-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까지 악의적으로 이용하여 선동하려는 움직
임도 있다. 윤선호의 '위험한 동반자'라는 소설의 광고 문고를 보자.
일본, 세계 청소년축구 결승 진출! 이러다 월드컵도 일본이 독식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서서히 드러나는 일본의 월드컵 단독개최 음모...
미국의 팍스아메리카나 정책에 당하기만 하던 일본은 드디어 미국에 대한 역공의 기회를
마련하고 2차대전 후 최악이라는 경제난 탈출을 시도한다. 그들은 일본의 경제회복을 최상
의 가치라 믿고 그를 위해 또 다시 정의로운 사람들을 희생시키려 한다. 그 무서운 음모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저지하려던 정의로운 사람들은 하나 둘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마침내 위험에 빠진 한일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두 나라의 젊은 남녀가 하나로 뭉쳤다. 이
제 그들의 모험과 사랑이 시작된다.
궁극적으로는 양국의 남녀가 협력하여 해결한다는 상황인 것 같지만, 여기에는 김진명의
'무궁화'식의 왜곡된 선동이 있다. 일본이 '미국의 팍스아메리카나 정책에 당하기만'하고
있다는 것은 일본의 '역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겠지만, 일본이 미국에 '당하기만'하고
있다는 이해 자체가 사실과는 다르다. 더구나 그들에게 경제회복은 중요한 과제지만, 그것을
'최상의 가치'로 믿는 것으로 단정하는 일은 '경제적 동물'로서의 일본의 이미지를 강화시
키는 일일뿐이다. 물론 여기서도 일본의 '무서운 음모'는 빠지지 않는다.
90년대 이후, 철주니 혈맥이니를 소재로 등장시킨 반일 소설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올림픽을 치른 이후 눈에 띄게 강해진 한국인의 민족적 자부심이 배타적 공동체주의로 표출
된 첫 번째 현상이었다. '무궁화'는, 한국인들을 실체 없는 '강한 한국' 환상에 젖게 함으
로써, 이미 내부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었던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는 대신 폭력적 가상게
임을 통한 대리만족감에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한국의 90년대는 말하자면 가상의 일본 공격
을 꿈꾸면서 대리만족을 추구한 시기였던 것이다.
만약 일본에서 한국을 침략하는 설정의 소설이 나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소설
속의 야욕을 '실체'화하는 전 국민적인 항의가 있지는 않았을까.
전쟁이란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살인이다. 그들의 과거를 비판하면서 우리는 '사과'
를 요구하지만, 기회만 된다면 같은 일을 하고 싶어한 것이 90년대 한국의 무의식이기도 했
다. 한국의 일본 비판이 아직 설득력 있는 비판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6:서울대 교수들의 일본 '방정식'
일본에 대한 편견과 왜곡은 삼류 소설가나 언론만의 것은 아니다. 쇠말뚝이나 총독부 건
물을 둘러싼 앞서의 이야기에서 학자들 역시 예외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대한민국 최
고의 지성인들로 간주되는 서울대 교수들조차도 일본에 관한 한 편견과 왜곡의 충동으로부
터 자유롭지 않다.
총독부 건물이 파괴된 다음해에 출간된 '교수 10인이 풀어본 한국과 일본 방정식'(삼성
경제연구소, 1996)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일본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서울대 교수 10인
이 최초로 제시하는 학제적 연구성과와 전망"을 제시한다며 "문화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대오각성의 시론이 되"는 것과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입장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이웃들과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고 자"하는 것이 취지라고 머리말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실제로는 일본의 실상을 제대로 전해준 부분보다는 일반인
들의 일본 인식을 그대로 되풀이하거나 좀 더 '논리적'으로 왜곡한 부분이 훨씬 많다는 점
에서 잘 푼 '방정식'이랄 수는 없는 책이 되고 말았다.
1)'생리적'으로 침략성이 있는 나라?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
일본은 외형상으로는 지극히 서구화된 나라로 보이지만 정서적으로는 국수주의 기풍이 강
하고 생리적으로 침략성이 있는 나라이다.(25쪽)
일본이 국수주의가 강하다고 지적하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제 시대 때 이야기라고 토
를 달았어야 했다. 또 일본이 과거에 타국을 '침략'한 것은 사실이지만, '생리적'으로 침략
성이 있다는 말은 일본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침략'적 기질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말이 다. 그런데 '생리적'으로 침략적인 국민이 있다는 건 맞는 말인가?
'침략'이나 전쟁이란, 어떤 경우 건 정치적, 경제적 혹은 종교적 '상황'(실은 그 모든 저변
에 '경제'가 작용한다.)이 야기하는 폭력이다. '침략성'이라는 말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
으로 규정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나쁜' 일본인상을 재생산하고 일본인을 언제까지고 경계하
도록 만드는 말이다.
혹은 다음과 같은 말.
일본인의 국민성과 정서는 종교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일본 종교는
철저하게 국수적이고 배타적이다.(중략) 한국 불교나 기독교는 국수 배타성이 없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35쪽)
국민성과 정서란 '종교'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국민성이란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풍토 등 수많은 요소가 개입하여 보여주는 어떤 상일 뿐이다. 더구나 일본은
'종교적'이지도 않다.
일본 종교는 '철저하게 국수적이고 배타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종교란 기본적으로 '배타적
'
속성을 갖고 있다. 종교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그 교리들이 예
를 들면 여성 차별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비판 없는 무조건적인 숭상을 계속하는 한
종교는 언제까지고 '배타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배타적'인 것은 종교
자체의 문제일 뿐 일본만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국수적이고 배타적'이라는 말을 일본의
특성으로서 강조하고 싶은 나머지 종교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격인데, 이는 맞는 말이 아니다.
일본에 관한 대부분의 글들이 그렇듯이, 그 비판의 귀결점으로서의 한국 미화는 여기서도
빠지지 않는다. 한국은 '국수 배타성'이 없다지만, 현대의 한국 불교며 기독교가 내부갈등을
일으켜 외부에까지 추태를 노출하고 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론 원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런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은가? 한국인의 '국민성'이 종
교를 국수적이고 배타적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일본인들은 최첨단의 전자기구들을 비롯한 경쟁력 높은 상품을 가지고 전 세계 시장을 압
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 종교, 일본혼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은 상품 제조에 있어 혼을
매우 강조하는데, 인간의 혼을 넣기 위해 자동 생산라인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키는 경우도
있다.(36쪽)
일본 상품이 '종교'에 의한 것이라는 것도 터무니없는 발상이지만, '일본혼'을 강조하는
이 글은 그들이 상품을 생산할 때 어떤 그들만의 비의적인 의식을 행하고 있는 듯한 기괴한
인상을 심어놓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혼을 넣기 위해' 생산라인을 축소시키는 일까지 있다
는 말에서 그 효과는 극점에 달한다. 그들이 상품 생산에서까지 뭔가 종교적이고 비의적인
의식을 행한다는 식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일은 그들의 생산품이 실은 건전한 사고와 기술
에 바탕을 둔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그럼으로써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희한하고도 특수한 종족임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의 상품생산방식이 나름대로의 미학과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리고 바로 그런 점이 '세계시장을 압도'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은 그런 긍
정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것은 아니다. 자동생산공정 중 사람의 체크가 필요한 부분은 있겠
지만, 그런 것을 '인간의 혼' 운운하는 일은 일본을 우리와는 '다른' 기괴한 종족이라는 이
미지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우리에게 항상 일본이 '먼 나라'였던 데는 이런 담론
들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일본에는 음식점을 대물림하여 2백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국수 집이나 추어탕 집이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장인정신은 따지고 보면 조선에서 배워간 것이지만, 그들의 절제된 생활과
신분상승이 어려웠던 일반 서민들로부터 발현된 자구책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 이후 출판인쇄의 발달로 교육기회가 넓었으며, 배움이 있으면 과거
를 통해 입신출세가 가능한 사회였다. 반면 일본의 서민들은 우리에 비해 교육의 기회가 적
고, 또 배움이 있더라도 과거와 같은 출세의 사다리가 없었다. 일본에서의 출세수단은 칼 솜
씨이지 학문이 아니었다.(36쪽)
사실 일본인들의 장인정신도 우리나라에서 배워간 것이다. 백제인들이 건너가서 일본 고
대 예술과 기술을 발전시켰고, 왜란 때 잡혀간 수많은 장인들이 도쿠가와 시대의 과학기술
을 발전시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유교 때문에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했
다는 속설은 근거 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갖지 못한 인문적 교양과 전인적 사고
력은 우리가 일본을 능가하는 일류국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라고 보아야 한다.(37쪽)
읽어나갈수록 이런 식의 한국의 칭송이 많아지는 것은 일본에 관한 글이니 당연한 것이라
해야 할까.
일본의 전통적 대물림이 '신분상승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해석되는 것을 곧잘 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상황적 요소일 뿐 전제는 아니다. 한국이 '과거'를 통해 신분상승
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고, 일본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
에 근거한 암묵의 비판이겠지만, 실은 그러한 신분상승이 초래한 폐해도 적지 않다. 사람들
이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라 더 큰 부와 권력이 보장되는 일만 지향할 경우 한 사
회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의 일을 최고의 경
지로 몰아갈 때야말로 그 사회는 건강하면서도 저력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장인
정신'을 칭송할 때는 원래는 '한국'것이었다고 강조하면서(한국은 그 후 어찌되었던가?), 일
본에서 그것이 지속된 것은 "출세의 사다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폄하하는 것이 이 글의
어법이다.
"일본의 출세수단은 칼 솜씨이지 학문이 아니었다."는 말도,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
칼의 문화/붓의 문화' 혹은 '문의 문화/무의 문화'로 한국과 일본을 구별하는 이분법적 사고
에 의한 오류다. 바로 앞에서 '신분상승이 어려웠다'면서 '출세수단은 칼 솜씨"였다면, 서민
들이나 상인들이 갑자기 '칼 솜씨'를 익혀 '출세'했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칼솜씨
'를 익혀 '출세'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단 '사무라이'가 된 연후의 일이다.
왜란 때 잡혀간 장인들이 어떻게 에도 시대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는 건지에 대한 설명
없이 '잘 알려진 사실'로 간주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러면서 돌연 '유교'를 우리한테 '인문
적 교양과 전인적 사고력'을 준 것으로 간주하면서 갑자기 '일본을 능가하는 일류국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라고 칭송하는 것도 문제다. 실은 일본에서도 유교는 융성했다. 다만 그들
은
종교로서가 아니라 학문으로서 받아들였을 뿐이다. 우리가 교양과는 상관없는 야만적 계
층으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사무라이도 그 정신기반은 유교에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오늘날 일본으로부터 배울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면서도 "일본
의 장점은 우리의 역사전통 속에 그 뿌리가 있으므로 우리 조상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말
에 숨은 의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일본의 장점까지도 실은 우리
것이었다고 강조하는 일, 그것은 우월 의식으로 보이지만 실은 열등의식일 뿐이다.
2)농경민족의 평화 사랑, 기마 민족의 웅대한 기상
'한국, 이런 면에서 일본을 앞선다'는 노골적인 제목의 글은, 한국의 국토환경이 중국이
나 일본보다 뛰어나다고 강조하면서 "우리 국토가 얼마나 좋은가를 알게 된다."(169쪽)고 자
랑한다. "지진, 해일이 없고 사계절이 뚜렷... 자연경관이 좋다."면서 "중국인들이 이동 중 일
본으로 가서 못 살고, 한국에 정착하였을 것"이고, 그러므로 "동아시아인 중 제일 지혜로운
사람들이 한반도에 정착했을 것"이며 "현재 한국인들은 이들의 후손"(177쪽)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의 의견은 한국인들은 중국인의 후손이라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는데, 어쨌거나
국토의 아름다움이니 사계절을 강조하는 일이야말로 오래 전부터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고취
시키기 위한 기본수단의 하나였다. 일본에서도 이미 100년도 더 전에 그런 담론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기마 민족은 무엇보다 기동성이 높은 인종이다. 사실 한국인들은 추석이나 설날에는 무려
국민의 2천6백만명이 이동하는 등 고도의 기동성을 보이기도 한다.(177쪽)
한국인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임을 강조할 땐 농경민족으로, 웅대한 기상을 강조하고 싶
을 땐 기마 민족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곤 한다. 어느 쪽이나 민족주의가 시키는 무의식적 발
상이지만, 이 교수는 명절 때의 귀향까지도 기마 민족의 기동성과 연결시킨다. 귀향이라면
한여름과 신정 때 우리처럼 고향을 찾는 습관이 있는 일본인도 기마 민족 이어서일까.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
일본말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은 한글의 우수성을 당장 깨달을 수 있다. 일본사람들은
서울을 '소우르'로, 을지로는 '우루지르'로, 택시는 '타구시'로, 한글은 '한구르'로 , 갈비는 '
가르비'로 표시한다. 김치도 '기므치'로밖에 표시하지 못한다.(181쪽)
이 역시 일본어를 한국어보다 비하하고 싶은 발상이 만들어낸 예전부터의 속설인데, 이와
똑같은 얘기는 한국어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어를 어떤 소리 건 표현할 수 있
는 훌륭한 언어라고 배웠지만, 과연 그럴까. 많은 소리의 표기가 가능하다는 것과 다른 나라
의 특정 발음을 그 글자로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영어 건 일본어 건
한국어로 써놓고 외국인에게 들려줘 보라. 우리가 아무리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해도 그들은
우리의 기대만큼 알아듣고 이해해주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음운체계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생각일 뿐이
다. 일본어는 한국어 발음을 표기하기에 부적절한 언어일 뿐, 그것이 곧 언어의 수준을 나타
내는 것은 아니다. 설령 받침이 없는 것이 다른 나라의 말을 발음하는 데 불리하다 하더라
도 받침(자음)없이 모음자로 끝나는 그들의 언어의 특성은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쉽고 기억
하기 쉽다는 장점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고유명사의 예를 든다면, 현대보다 도요타, 박춘식
보다는 히라노 다카노리를 서양인들은 더 정확히 발음하고 잘 기억한다. 한국 직장인들이
최근 기억하기 어려운 한국이름 대신 영어이름을 하나씩 만들어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그런
면세서 시사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쪽 언어가 더 우월하다는 식의 발상 자체가, 전라도 사투리보다 경상도 사투
리가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를까.
이번엔 '한반도의 경쟁력'이라는 글을 보자. "우리 국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쓰여졌다."는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음과 같은 말들로 점철되어 있다.
한반도는 비단에 수를 놓은 듯이 참으로 풍광이 곱고...
물은 얼마나 좋고 풍족한가... 한국인의 삶에서 물을 빼놓고는 되는 일이 없다.(중략)물을
넣고 끓여 만드는 '찌개'라는 음식도 다른 나라에서 보고들은 적이 없다.
사계절의 변화는 우리네 한국인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철에 따라 색깔과 질감까지 자연의 변화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샌들과
하이힐, 부츠를 제 철에 맞게 갖추어 신어야 대접을 받는다. 한국인들이 옷을 철마다 바꾸어
입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생활이다. 한국인들이 옷매무새에 까다롭고 그 색감과 조화에 뛰
어난 감각을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막 현장에서 일하다가 시베리아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은 한국의 근로자밖에 없다.
한반도는 이처럼 지구상에서 가장 폭넓은 가능성을 지닌 땅이다.
이쯤 되면 당혹감을 넘어 황당해지지 않을 수 없다. '풍광'이 고운 나라가 우리뿐인가? '
물'을 사용한 음식, 곧 국이나 스프류를 먹지 않는 나라가 얼마나 있는가? '사계절'은 우리
만의 것인가? 설혹 사계절이 없더라도 옷을 기온에 따라 바꿔 입지 않는 나라가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특성은 일본에도 해당된다는 데 웃지 못할 아이러니가 있다.
물론 또 한편으로는 한국은 "나라의 수준에 비해 개인의 생활수준이 너무 높다."고 적절
한 지적을 한 학자도 있고, "더 중요한 과제는 일본과 더불어 사는 일이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은 일본에 대한 정상적 인식을 방해하기에 충분하다.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 볼 수 있는
것, 또는 보아야 마땅한 것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보되 왜곡된 시각이나 굴절
된 시각이 인식을 차단하는 경우도 있다."며 '편견이나 좁은 시각'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
고 "우리가 참으로 성숙 하다면 간과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어떤 사실들을 확대
하고 과장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78쪽)고 말하는 신뢰할 만한 학자도 있다.
그러나 '왜곡된 시각'이나 '굴절된 시각'이 '정상적 인식을 방해"하고 우리의 미'성숙'이
일본 인식을 '확대하고 과장하는 경향'을 키우고 있음을 우리는 바로 이 글과 이웃한 글들
에서 볼 수 있으니 서글픈 일이다. 이 역시 90년대라는 시대가 낳은 한계라 해야 할까.
90년대 초반, 서울대는 '학문적 언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일본어를 제2외국어 선택에서 제
외한 적이 있다. 서울대는 교양강좌에서도 일본어를 배제하면서 일본 쪽의 한국에 대한 무
관심을 들곤 했지만, 실은 일찍부터 동경대와 와세다, 게이오 등 일본의 주요 대학들에는 일
찍부터 한국어강좌가 개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총체적인 모습에 눈감고 귀막
으며 지내는 동안 그 한국어를 바탕으로 한 우수한 한국 전문가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언어는 '타자'에게 다가가는 소중하고도 중요한 수단이다. 서울대의 일본어 배척은 그들이
일본이라는 타자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음을 만천하에 대외적으로 공개한 일이었다.
하다 못해 그들은 언어와 문화에 대해 아는 일이 그들이 갈망하는 '극일'을 위한 일본 전문
인력 양성의 첫걸음일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2000년을 맞아 동경대와 협약을 맺으며 서울대는 조금은 변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동경
대보다 앞선 일문과 설치는 '굴욕'(조선일보,2000.6.29)이라고만 생각하는 그들의 '자존심'이
란 실은 자신감을 상실한 자존심일 뿐이다. '민족을 대표하는 국립대'라는 자부심으로 뭉친
서울대가 더 유연해지는 날, 아마도 그 날이야말로 그들과 함께 우리 모두가 일본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날이 아닐까.
7:신용하 교수의 반일 수사법
몇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서울대 교수들의 일본 이해도 실은 이 정도 수준이었다. 말하
자면 일본이라는 타자에 대한 인식수준만을 본다면 지식인이나 일반인들이나 다를 바가 없
었던 셈이다. 그리고 거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런데 일문과를 먼저 설치하는 일을 '굴욕'이라 말한 신용하 교수야말로 경직된 모습의
서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예를 들면 쇠말뚝에 관해서는 "일본은 믿지
않았지만, 좌절감을 심어주기 위해 이러한 정책을 취했다."고 단정했고, 대중문화 개방에도
물론 반대했다. 말하자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유발하는 발언을 통해 한국인의 반일의식
을 높이는 데 기여한 대표적 인물인 셈이다.
1)식민지 지배의 '수탈'과 '근대화'
그가 90년대에 중점적으로 주장한 것은 식민지 수탈론 이었고, 어업협상 및 독도문제와
관련된 여러 발언도 세간의 주목을 모았다.
먼저, 식민지 수탈론 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하자면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국을 수탈
한 것이었을 뿐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적지 않은 반론이 제기된 바 있다. 그 반론들에 덧붙인다면, 신
교수의 논법은 처음부터 일본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근대화에 대해 논하고 있기 때문에 결
과적으로 근대화라고 하는 커다란 문제가 극히 단순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한국인들에게 가해진 '수탈'과 핍박은 존재했을 것이고, 그것은 앞으로
도 충분히 연구, 조사되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한 연구에 따르면, 일
제의 정책은 농민계층에 대해서는 수탈이었지만 지주계층에게는 오히려 시혜적인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일제에 대한 저항도 계급 간에 다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탈만
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계급간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보는 일이 더욱 생산적인 논의
가 아닐까.
어쨌거나 일본의 식민지정책을 무조건 수탈로만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도 일면적 발상이
다.
기차의 예를 보자. 기차는 근대의 커다란 상징이었고,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속도
로 달리던 기차는 당시 사람들에게 '근대'의 경이 그 자체였다. 설령 그 이기를 누릴 수 있
는 것이 조선인의 극히 한정된 계층에 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때 기차는 분명 '근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차는 한편으로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끌었고, 그 결과 한국의 식민지
화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는 기차는 분명 수탈의 수단이었다.
따라서 식민지 지배는 수탈이면서 근대화였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일본의 일부 우익들이 한국을 문명화했다고 주장하는 소리에는 수탈보다는 근대화만
을 보려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시각이 비판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어떤 경우에서
건 식민지화 자체는 긍정될 수 없는 것이니까. 더구나 근대화 자체가 선으로만 볼 수도 없
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문명의 이기의 유입 자체에 대한 부정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논리들은 의식적(이 경우는 대부분 정치적 이유에서), 무의식적으로 '근대화'
의 양 측면을 보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일본측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식민지화란 필연적으로 문명과 수탈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법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
했듯이, '식민지'란 그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근대의 실험실'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
근대화'의 이름으로 행해진 '수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수탈론은 그 자체가 문제로
서 성립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식민지화란 분명 새삼스럽게 말한 필요도 없는 '악'이
다. 중요한 건 그것을 새삼스럽게 되살리며 증오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화가 어떤 식
으로 '문명'의 얼굴을 하고 다가왔으며 그 문명이 내포한 문제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밝히는
일이 아닐까. 그건 현재와 미래의, 또 다른 지배와 착취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탈 식민지주의 국가의 권위주의와 민족주의적인 지적 엘리트 사이의 공범관계는 내셔널
한 문화의 본질주의와 배타성을 강화시키도록 작용하고 있다."[강상중,'오리엔탈리즘을 넘어
서', 이와나미쇼텐, 도쿄,1996]는 지적도 있지만, 신용하 교수의 담론은 그런 한 전형을 보
여주고 있다. 물론 이는 신 교수뿐 아니라 민족주의적 노선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민중 쪽보
다는 국가 쪽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엘리트층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한국의 반일에 맞서 일본에서 90년대에 험한 분위기가 일었던 것에 대해 그는 "자기네들
의 치부가 드러나니까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신 일본패권주의와 한일관계' 김영
사,1993,339쪽)이라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왜'그런가를 들으려 하지 않고 무조
건 상대가 나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만 해석하는 이런 식의 사고야말로 '대화'를 가로막는
것이 아닐 수 없다.
2)일본은 "매우 기뻐서..."식민지 수탈론 보다 잘 알려진 신 교수의 주장은 최근의 어업협
정 때의 담론일 것이다. 그는 이전부터도 독도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는데, 어업
협정 때도 곧바로 이 문제를 독도와 연관지으면서 문제삼았다. 독도문제는 아직 해결이 되
지 않은 상태니 만큼 논의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문제시하고 싶은 것은 어느 쪽 영토인가 자체보다도 독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우리의 전
국민적 분노와 운동이 말하는 한국 민족주의의 지나친 열기 쪽이다. 우리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전국적으로 보급시켰고 한국인이라면 독도문제를 모를 수 없도
록 되어 있었지만, 일본의 경우 외무성 당국자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한 무관심은 독도를 둘러싼 반응뿐 아니라 월드컵축구 유치 때도 마찬가
지였다. 우리나라처럼 전 국민이 하나의 모습으로 흥분하는 열광적 민족주의의 표출은 현대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우리는 곧잘 일제 시대 때 천황 제하의 일본이 전 국민적
규모로 광분했다는 사실을 두고 비판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은 오히려
한국 쪽이다.
그런 식의 전 국민적인 열기가 가능한 것은 물론 한국이 민족주의적 감정이 강하기 때문
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지식인들과 그 의
견을 무비판적으로 전달할 뿐 아니라 때로는 과장과 왜곡까지도 서슴지 않는 언론 때문이기
도 하다.
한 매체에 기고한 신 교수의 주장을 보자.
[독도문제 확실히 하라]
독도는 한국 고유영토이며...
일본은 매우 기뻐서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일본측 제안 EEZ 경계선을 서변으로 하고...
새 어협에서 한국 어민들의 분노가 일단락 되면 일본은 다음 단계에서 독도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다. 그 때 '중간 수역'안에 들어간 우리의 고유영토 독도는 폭풍 속에 휘말릴 것이
며, 이번 새 한일어업협정에서 노린 일본측 의도와 그에 동조한 한국 자문의 본질이 적나라
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국력과 우리 국민 및 정부의 강력한 의지만이 독도를 지킬 수 있게 되었
다...
이번 새 한일 어협은 독도 영유권을 훼손하여 독도를 위험에 빠뜨렸다.(조선일보,99.4.19)
이 글은 내용 자체도 불확실한 것이지만, 여기서 문제시하고 싶은 것은 내용의 설득력을
위해 동원되는 수사법이다.
한국의 잘못된(잘못됐다고 신 교수가 생각하는)결정을 '일본은 매우 기뻐'했다고, 그는 마
치 일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단정한다. 어업협정에서 '노린'이라는 표현
역시 김진명이나 풍수학자들의 수사법에서 이미 본 표현이다. 말하자면 교활하고 간교한 책
략가로서의 일본의 이미지를 증폭시키는 표현인데, 이런 식의 수사법이 그의 글에서도 빠지
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일어업협정이 독도 영유권과 무관하다고 해명하는 외교통상부
에 대해 반론을 펴면서, 거기서도 '굴욕외교의 표본', '일본의 독도 침탈 장기전략', (일본
의)전략에 한국 외교통상부가 말려든 것'(한국경제신문'다산칼럼',98.12.14)이라고, 읽는 사
람들을 자극하는 단정적 표현을 쓰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어업협정문제를 두고 흥분했고
김선길 해양수산장관을 해임시키기까지 했는데, 사람들이 사태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채로
흥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담론들의 영향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때 협정 당사자들, 혹은 전문가들로부터는 적지 않은 이의제기가 있었다는 건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다. 예를 들면, 한 당사자는 한일어업협정은 "독도와 무관"하고 "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인하여 독도와 그 주변 12해리 영해가 영향을 받는 것도 없으며
일본에 내준 바다도 없"으며 "어업협정 체결 여부와 상관없이 독도 주변에는 우리의 EEZ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최승호 외교통상부 조약국장, 한국경제신문,98.12.10)고 강조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도 볼 수 있었다.
신 교수는 협정이 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적용된다는 규정을 보고 이것이 EEZ
을 다루는 협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협정이 적용되는 장소적 범위와 협정이 다루
는 문제, 즉 물적 대상은 별개라는 법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이 협정은 EEZ
이라는 장소적 범위 내에서 일어나는 어업문제를 다루는 협상이다.(정해웅 외교통상부 국제
법규과장, 조선일보,99.4.24)
그는 또 신 교수가 "중간수역의 외곽선을 중간선으로 오인"한 것이고, 이번 협정에서는 "
중간선도, EEZ기점도, EEZ경계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동해에서 양국 간 거리가 좁은 해역
에서는 연안으로부터 3해리 이내의 수역을 각기 연안국의 EEZ으로 간주하여 어업질서를 구
축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중간선도 협정에 나타나지 않는다. EEZ경계 확정을 미결로 두고
체결한 협정에서 EEZ경계 획정의 논리를 찾으려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또 다른 이는 "한일어업협정에 관한 찬반논쟁은 한 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다"며 "사실까지
왜곡하면서 여론을 오도하는 것을 보다 못해 국내의 국제법계 중진 20여 명이 작년 말 7개
항의 의견서를 발표했다."고 말한다. 그도 협정이 "어업에 국한"된 것이고 "독도 영유권 문
제와는 별개"이며 "EEZ경계협정이 아니라 그 수역 내의 어업분야만을 잠정적으로 합의"했
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업에 관한 협정에 독도에 관한 문제는 왜 들고 나왔는지, 그리고 그
것이 독도문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개탄스러
운 일"이라며 "우리의 입장을 노출시키는 논쟁을 무분별하게 벌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
가?"(박춘호 국제해양법 재판소 재판관, 조선일보,99.4.4)고 묻는다.
그러나 신 교수의 수사법은 그의 의도가 바로 이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실제로 국민여론은 해양수산부 장관을 사임시켰으니, 장관은 말하자면 이 '국
민감정 자극'의 여파로 사임한 셈이라 해야 할까. 그가 실제로 일을 잘 했는지 못 했는지를
떠나 이간의 과정은 가히 마녀사냥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관은 그만두면서 중요한 지적을 했다. "한국은 1년 총 어획량 중 5퍼센트도 안
되는 양을 일본 수역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며, 쌍끌이어업의 주 어장은 제주도 서부고, 일본
에서의 어획량은 2퍼센트 미만"('한일어업, 나도 할 말 있다', 조선일보,99.3.25)이라는 것이
다.
여기서 명확해지는 것은 우리 모두가 전 국민의 문제인 것처럼 흥분했던 어업문제가 실은
'어민'들의 문제였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총 어획량 중 '5퍼센트도 안 되는'양, 그리고 '2
퍼센트 미만'의 쌍끌이어업에 관계된 어민들의 경제권을 둘러싼 쟁탈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영화인들을 살리기 위해 영화쿼터제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로 우리는 어
업문제를 놓고 전 국민적으로 흥분했던 셈이다. 90년대 초반에 우르과이 협정을 놓고 맹렬
한 반대운동을('신토불이'라는 말을 유행어로 만들면서)벌였던 것과 마찬가지 구조를 어업
문제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반대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주장한 것은, 한국이 '농업국가'이며 다른 것도 아닌 '
토지'의 생산물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는 가히 '토지'중심주의라 할 만한 것이
었고 민족주의가 자신의 존재근거로 삼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은 모든 분야에서 민족주의는
고개를 드는 법이다. 그래서 영화인들도 만화인 들도 '우리'의 '문화'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모두를 협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농민이며 어민이 되면 '고향'의 이미지에
약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정서는 더욱 강력히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전체의 일이 아니라 한 분야의 일이니 무관심해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업협정문제가 실은 해당 구역의 어민들의 경제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다는 점까지도 '아는'
일이다. 사건의 본질을 우선 이해해야 적절한 대처가 가능할 것 아닌가.
일본은 우리가 IMF에 처했을 때 가장 많이 도와준 나라기도 하다. 물론 그러니까 대신
어민들을 희생시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한 분야의 대립 때문에(그렇다
고는 알지 못한 채로)국가 전체가 대립하는 사태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점이다.
일본 역시 어민들과 관계 있는 지역 사람들이, 즉 선거를 의식한 강경파들이 어민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강경한 주장을 펴고 있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그것은 당사자들이 나서서 시간을 두고 대화를 통해 슬기롭게 해결하면 될 일이
다. 그것을 일본 전체의 문제로 간주하고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대립하는 일은 소모일 뿐
이다.
3)일본 어업협정 담당자의 발언
그런데 이런 문제를 보면서도 과연 무엇이 문제인지 일본 쪽 어민들을 취재한 기자들은
없었던 것 같다. 언론은 우리 쪽 배가 '나포'당한 사실만을 크게 보도할 뿐 '왜' 그런 사태
가 되었는지 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한일 간의 갈등이 과연 무엇 때문인지, 대립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를 밝히고 전달하려는 노력보다는 한국 측 어민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는 보도만을 하고
있었다. 일본측 어민을 취재한 기사가 혹은 어딘가에 있었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들은
연일 '나포'나 '구타'등의 선정적 문고를 강조하는 일로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고조시키고
있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일본이 한국과의 어업협정을 파기한 이후, 텔레비전은 곧잘 일본 연해에서 조
업하는 한국 어선을 일본 어선이 '위협'하고 있다면서 여러 척의 일본 배가 한국 배 한 척
을 에워싼, 한국민 이라면 적의와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을 방영하곤 했다.
그러나, 그 때 일본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기로는 거의 보도된 적이
없다.
어업협정이 타결되었을 때의 한 일본 신문을 보면[일한 어업조건 합의]라는 제목 하에 '
신 어업협정', '대게 저자망 금지', '자원을 관리', '일본은 환영'이라는 부제가 보인다(요미
우리 신문,99.2.6). 그리고 기사의 대부분은 조업방법이나 배 숫자 등, '자원관리'를 둘러싼
협정이 '최대의 현안'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합의를 "한국선에 의한 저자망 등
의 전면 금지를 요청해 온 일본국 어업협동조합연합회가 환영했다."고도 전한다.
그런가 하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일어업협정에 관한 재협상을 제안한 일본의 한
담당자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어업협정을 파기했으니, 한국 배가 우리측에 와서 조업을 한다 해도
할 말은 없지요. 하지만 우리가 하고 싶었던 건, 한국측이 너무나 그물코 크기가 작은 그물
로 조업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고기를 잡아가는 것까지는 할 수 없다 해도,
그런 식으로 고기를 잡으면, 치어들 까지도 모조리 잡혀버려서 조만 간에 바다의 자원이 고
갈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말을 해도 한국은 들은 척도 안 해요. 우
린 무엇보다도 그런 문제 등을 포함해서 의견을 나누고 싶은 겁니다.
이런 내용들은 우리가 실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되고 있었는지를 잘 모르는 채 흥분부터
했다는 것을 새삼 가르쳐 준다.
한국에서의 일본에 관한 보도, 특히 양국이 대립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보도는, 거의가 이
런 식의 은폐와 왜곡으로 점철되어 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의 '감정'
에 호소할 뿐 '이성'적 판단을 가할 여지는 남겨놓지 않는 어조를 언론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는 이제까지 해방 이후 50
년 동안 실제 쏟아야 될 분량 이상의 에너지를 '반일'에 쏟아온 셈이다.
독도문제는 이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지금은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앞두고 양국
다 조심하는 모습이지만, 행사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불거질 수도 있다. 최근엔 정부의 독도
문제에 대한 자세가 비판되고 있지만, 이 역시 무조건적인 성토나 비난보다 그들의 주장도
들어가며 대화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그들의 영토로 주장하는 주 근거는 1905년에 먼저 시마네 현에 귀속시켰다는 사실
이다. 자신들의 영토임을 의심하지 않는 시마네 현 사람들은 시마네 현 면적도 돌도 면적을
넣어 계산한다. 1905년이라면, 우리가 합방되기 5년 전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아직 세상물정
에 어두웠을 때 먼저 눈을 뜬 그들이 독도를 '법적으로' 그들의 것으로 만든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는 '법'의 '공정성'과 '횡포', 윤리와 규범, 지방견제와 국가경제 문제 등 섬
세한 잣대로 재면서 풀어야 할, 쉽지 않은 문제다. 되풀이하지만 그 때 중요한 건, 독도문제
나 어업문제가 동해지역 어민과 시마네 현 어민들의 갈등이 국가 간의 대리전으로 표출된
사안이라는 이해다.
전쟁은 실은 국가와 국가의 전면적인 대립이 아니라 지역분쟁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작은 공동체의 각기의 이익을 둘러싼 분쟁에 그들이 속한 '국가'가 개입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수많은 생명이 실은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 모르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투쟁으로 착각하고 꽃 같은 목숨을 던진다. 그러한 우를 더 이상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이
제 지혜와 사려가 필요하다.
제2장: 침략하는 일본, 이기적인 일본인
1:'저질' 일본문화?
90년대는 이렇듯 정형적인 수사법이 동원되는 반일 담론이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잡은 시
기였다. 90년대 중반, 한 신문이 대학 1학년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식조사 결과, 그들이 한
국 문화의 장점으로 '고유문화'를 꼽고 있고 앞으로 경계해야 할 외래문화로 일본 문화(71
퍼센트)를 지목하고 있다고 전하는 것(조선일보,95.10.14)도 그 결과문의 하나다. 이 때 미국
문화는 2퍼센트에 불과했다. 실제로 꼽는다면 유입된 미국 문화는 일본보다 많을 수 있는데
도 말이다.
이 결과는 물론 우리의 의식이 '일본'을 유독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경계의식은
과거 그들에게 지배당한 체험 때문에 '일본' 문화가 우리를 '길들일'것을 두려워한 결과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그토록 반대가 강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문화개방이 해방 후 50년 이상이나 걸린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
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화적 쇄국이 이 50년 동안 그들과의 교류를 더욱 어렵게
해온 것도 사실이다. 오래도록 우리는 그들을 '직접' 접할 수가 없었고, 좋은 부분이건 나쁜
부분이건 그것은 항상 얼마간의 '이미지'로만 과대 포장되어 우리 앞에 제시되었으니까.
1)'저질' 일본 문화의 '문화 침략'?
일본 문화 개방에 대한 토론이 아직 한창일 때 지배적이었던 것은 '저질문화가 대량으로
유입되어 악영향을 끼칠 것', '국내 문화산업을 뿌리째 흔들 것',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일본 문화를 모방하는 청소년들이 걱정', '올바른 것을 선별 수용하는 수준이 되면...', '우리
에게는 훌륭한 문화가 얼마든지...', '가뜩이나 청소년범죄가 횡행하는 현실에서 만약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한국경제신문,95.1.1)이라는 식의 담론이었다.
여기서도 일본 폄하의식과 경계의식과 '우리 정서'를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배타의식이 보
인다. '우리'라는 말 자체가 실은 이미 배타적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 것이 있으니까 필요 없다는 논리처럼 불행한 시각도 없다. 그것
은 국산품 연필을 애용하자는 문구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연필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실은 아름답고 쓰기 편한 연필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정신적' 만족감을 주는 '문화'가 아
니던가?), 문화에 대한 욕구는 항상 '다른'것을 갈망하는 법이다.
해마다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는 미국 영화를 미국 문화의 '침략'으로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서 일본 영화의 유입은 '침략'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우리가 '일본'에 관한 한 피해의
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피해의식이 오랫동안 우리를 자폐증
어린아이처럼 만들고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 당당히 일본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지금, 그들은 문화 '침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침략'이라는 말을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노'다.
일본은 물론 팔고 싶기도 했겠지만, 우리 아니라도 그들에게는 전 세계에 무한한 시장이
있었다. 그들이 일본 문화 개방을 '요구'했다느니 '침략'을 꾀했다느니 하는 소리는 정도 이
상의 경계의식이 빚어낸 피해의식의 발로였다. 물론 문화교류 차원에서의 요청은 있었을지
모르겠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문을 닫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었으니까.
그러나 설령 일본이 팔고 싶어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두고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우
리 역시 우리 문화를 팔고 싶어하지 않는가? 우리 자신 우리 문화를 타국에 알리고 싶은 욕
구를 갖고 있으면서 일본만을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런데도 일본이 잘하는 장사는 '팔
아먹는 솜씨'(조양욱, '천의 얼굴 일본, 일본, 일본', 청한,1990,218쪽)가 있어서 지만, 우리
상품이 잘 팔리는 건 진취기상이 높아서 쯤으로 해석되는 경우는 아직도 많다. 여기서 '팔
아먹는 솜씨'란 발렌타인 데이의 초콜릿 판매를 비난하는 글에 나오는 말인데,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톡톡히 초콜릿 맛을 본 장사아치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좌로 360도, 우로 360도 돌지
않을 턱이 없다.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아프리카 토인들에게 담요를, 용의 귀를 가진 농아
에게 워크맨을 팔아먹는 솜씨가 녹슬리가 있는가?
물론 판매를 위한 작전을 두고 상술로 싸잡아 비판하는 일은 쉽다. 하지만 그러려면 '소
비' 행위에 관한 조금은 성숙한 고찰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도 해
당되는 사항이 아니던가?
2)일본 영화가 개방되고, 한국 영화가 약진한 1999년
일본 문화 개방 여부를 두고 아직 논란이 일고 있을 때, 한 텔레비전 방송은 여론조사를
뉴스시간에 실시한 후 부정적 결과를 제시하면서 "정부는 이러한 반응을 알아야 할 것"이라
고 비판적 도발을 하기도 했다. 이런 자세 역시 여론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식의 '정의'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여론을 오히려 그런 쪽으로 몰고 가는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의 쇠말뚝에 관한 보도에서 이미 본 바지만, 다른 분야에 관해서도 한국의 텔레비전 뉴
스는 유독 그런 경향이 강한 듯하다.
이 무렵 일본이 과거에 불성실하니 문화개방은 필요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일본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적지 않은 부분이 오해인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들이 정말 '불성실'한지 어떤지도 단정할 수는 없는 문제다. 도 '성실'과 문화
를 맞바꾸자는 사고도 문제가 없지 않다. 또 문화개방은 한국만 '과거를 청산'하는 일이라면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문화개방이란 과거 '청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개방과는 상관없이, 한일 간에는 여전히 '과거'가 존재하고, 그것을 둘러싼 논의는 계
속되고 있다. '개방'이 '과거 청산'의 표시였다면, 가요와 영화 이외의 모든 분야에서 이미 '
개방'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때에 우리는 일본에 대해 '과거 청산'을 했다는 이야긴가? 아니
면 현재 일본 영화가 상영되고 있으니 우리는 과거 '청산'을 한 셈이 되는가? 대중문화 개
방과 '과거 청산'은 실은 관계 지워질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의견 중에서도 개방이 국내 문화산업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하는 보호무역적
사고야말로 모두를 위협하기에 가장 설득력이 컸을 터인데, 다음과 같은 지적은 언론이 전
부가 부정적 역할만 하지는 않았음을 말해준다.
(사회경제적 충격이 문제라면) 문제의 핵심이 그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위선 없이 정시
해야 한다. 문제의 본질은 우리에게 일본인들만큼의 상품화능력과 머리 굴리기 열의와 '노
하우'가 없다는 데 있다고 하는, 이 명백하고도 부인 못할 사실을 결코 '민족문화 보호' 운
운하며 거창하게 얼버무리지 말자는 것이다.(유근일 칼럼, 조선일보,94.2.5)
외국 가수의 노래가 팔린다고 해서 한국 노래가 팔리지 않는 일은 없다. 마이클 잭슨이
엄청나게 팔린다고 해서 조성모의 음반이 안 팔리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일본 영화
가 개방된 다음해인 1999년, 한국 영화가 유례 없이 약진했던 것을 기억하자. 그건 보호무역
적 사고가 보지 못한 것을 보여준 일이었다.
인간이란 자신과 '다른' 것,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도 강하지만, '자기' 것에 대한 집착도
강한 법이다. 뿐만 아니라 주위가 남의 것으로 둘러싸이면(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담론과
함께) 자신의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는 법이다. 다른 문화가 들어온다고 해서 자기 문화
가 도태되는 일은 없다.
외부의 문화충격에 맞서나갈 힘이 없는 문화라면(물론 산업도) 오히려 도태되는 편이 낫
다. 문화의 존재가치는 소수의 문화 생산자가 연명해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나라
의 국민 전체의 지적, 감성적 수준을 높이고 만족시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문
화 소비자를 폭넓게 흡수할 수 있는 저력을 지니지 못한 문화가 국가의 보호 아래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나가는 모습은 문화 생산자들을 위해서나 소비자를 위해서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화'가 관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정확히 말하자면 '관'이 보호하는 문화는 진정한 '문화'의 본질을 벗어
난 것이기도 하다.
단선적인 시각으로 당장의 위기를 두려워하기만 했다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문화를 생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외부로부터의 문화적 충격을 두려
움 없이 받아들이려 한 시점에서 비로소 다음 세대에 꽃필 수 있는 새로운 문화 창조의 가
능성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외래문화가 아무리 고급하다 해도 그 때문에 국내문화가 전멸하는 일이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른바 '일정한 문화시장'을 확보하지 못할 때 사라지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 '민족언어'나 '민족문화'가 아니라, 고품질 문화에 대항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저품질 문화(예를 들면 '표절'로 대표되는, 문화 생산자로서의 최소한의 직업정신조차
갖추지 못한 안이한 문화 생산자)일 뿐이다. 비록 소량일지라도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는 문화를 키워나가는 쪽이 나라 전체로 볼 때는 훨씬 생산적이다.
문화뿐 아니라 한 분야에 대한 무조건적 보호는 단기간의 이익을 보장할지 모르지만 장기
적으로는 힘을 약화시키는 일이다. 예를 들면 기업을 위한 무역규제는 관민유착이 일어나는
원인이기도 하며 결국은 정당한 설비기술투자로가 아니라 정치가들의 호주머니로 돈이 들어
가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는다.
물론 갑작스런 세계화 물결은 폭력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때 그때의 상황이 필연적인,
혹은 납득할 만한 것인지, 아니면 일방적인 폭력인지를 판단하면서 대처하는 일이다. 무조건
적인 개방도 무조건적인 보호도 아닌, 타국인들도 납득할 만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강한 피해의식에 기반을 둔 국수주의와 민족주의 때문에 우리는 이미 충분히 오랜 기간
동안 문화를 차단 당하고 있었다. 문화의 차단이라는, 그야말로 '비문화'적 사고가 우리 사
회에서는 오랫동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90년대 초, 세계가 공유하는 영화와 음악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면서(일본의 영화가 한 해에 세 개씩이나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동시대적으로 볼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 우리는 분명 문화 후진국이었고, 그런 식으로 우리의 문화적
고립은 바깥에서 보면 북한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일본' 문화 따위야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생
각하는 사이에, 말하자면 우리가 눈 가리고 귀 막는 사이에 일본 문화는 세계가 인정하는
보편적 '세계' 문화로 성큼 자라 있었다.
현대의 경제동향은 이미 자기 나라만 상대할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 문화란 정신적 고
양을 가져다주는 것이지만 '상품'으로서 유통된다. 상품으로서의 문화 수출로 이어지는 우리
문화의 도약을 위해서도 문화개방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일본의 문화가 현재와 같은 수준에
도달하게 된 것도 오랜 세월에 걸친 적극적 문화 수용의 결과다.
3)일본이 멀기만 한 나라였던 까닭
우리에게 일본이 멀기만 한 나라였던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갑자기 졸부가 된 경제대
국쯤으로, 혹은 과거에 우리를 괴롭힌 나라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몇 십 년
동안이나 그들을 우리와 똑같이 피가 통하고 살이 통하는 인간으로서 인식할 기회-문화 수
용만이 그 역할을 한다-로 부터 우리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란, 타국에 대한 이해를 돕는 최상의 매체다. 그 중에서도 영화와 음악은, 그 표현이
직접적이고 대중적이라는 의미에서 일반인들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크다. 미국이나 프랑스
에 관한 책 한 권 안 읽고도, 가보지 않고도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그들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나라의 영화와 음악의 공적이기도 했다.
일본 문화가 차단되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과거에 우리를 침략한 나라였다는 사실
에 근거하지만, 오히려 거꾸로, 그러한 관계였다면 더더욱 그들을 아는 노력을 해야 했고,
문화는 그 자료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들을 보고 이해하는 것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
가 되어 주기도 했을 것이다. 일본 문화 수용은, 그들을 알기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 자신
을 알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일본은 일찍부터 한국의 가요와 영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고(대표적인 케이스를
든다면'서편제'와 조용필), 그런 매체들이 일반인들의 한국에 관한 이해와 긍정적 시선을
기르는 데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개방 때 '왜 우리만?'이라는 목소리도 강했지만 실제로 '
일방적'으로 문을 닫고 있었던 것은 오히려 우리 쪽이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니 '쉬리'가 호평리에 상영되었고, 일본에서도 심은하와 한석규의
팬은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심은하나 한석규가 '한국'의 스타라는 것은 그들에게는 큰 의미
가 없다. 팬들은 그냥 자신의 감성에 맞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교류야말로 타자에 대한 맹목적 반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대중문
화 개방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문화적 교류와 인적 교류를 통한 상호간의 이
해는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는 정치적 문제(반일, 혐한 등)의 해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상대방을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좋아하게 되는 길이야
말로 모든 관계의 시작인 것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쉬리'의 성공을 부담 없이 기뻐 할 수
있는 것도 일본 문화를 개방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4)인류 문명은 '이동'과 '교류'의 '잡식성' 문화에서
일본 문화의 수입이 한국의 '고유성'을 훼손시킨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풍요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가 사람들이 '이동'하고 '교류'하는 곳이었다. 다시 말
하면 그들의 문화는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잡식성' 문화였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
하는 것일까. 이는 문화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고유'한 것도 아니고 그 '순수'
성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며, 실은 다양한 형식의 만남과 그 자극에 의해 더욱 풍요로운 문
화를 꽃 피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문화'란, 특히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문화란 결코 폐쇄된 울타리 안에서 홀로 생산될 수
없는 법이다. 설령 소재가 우리 특유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낡은 것이
어서는 우리 문화의 세계화는 요원할 뿐이다. 폐쇄 속에서 유지되는 '우리 문화', 세계로 나
아가지 못하는 그러한 자족적 지속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전 세계에
서 주목받고 있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보라. 거기에서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친 적극적 문
화 수용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후대에 20세기 말의 대일 정책에 관한 평가가 내려지는 날-아마도 이는 한일 양국이 진
정으로 과거를 극복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을 때의 일일 텐데-김대중 대통령의 과감
한 문화개방은 20세기 말의 악화 일로로 치닫던 한일관계를 크게 선회시켜놓은 것으로서 평
가받게 될 것이다.
제도는 의식을 바꾼다. 살아 있는 일본의 '보통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까지 굳어 있
던 대일 이미지가 개선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제까지의 경직된 반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
다면, 그것만으로도 문화 개방의 의미는 크다.
2:일본의 '사죄'는 없었는가?
문화개방을 하지 말아야 의견 중에는, 과거사에 대한 '사죄'도 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구
태여 문호를 개방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기
직전, '한일외교 관련 교수 1백인 정책제안'(교수신문,98.9.14)이라는 것이 청와대에 제출되었
다는 기사 속에 있었던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없는 상태에서 일왕 방한 및 일본 문화 개방
반대'라는 조항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일본이 그 때까지 '반성'도 '사죄'도 하지 않았다는 인식은 아마도 현재까지도 한국인 대
부분의 인식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도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주원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일본의 반성과 사죄'는 단 한번도 '없'었던 걸까.
1)만날 때마다 반성과 사죄가 있었다
실제로는, 90년대 이후만 해도 대통령의 방일 혹은 일본 수상의 방한 등 양국의 수뇌가
만날 때마다 '반성'과 '사죄'는 있었다.
예를 들면, 노태우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는 가이후 수상이 "겸허히 반성하며 솔직히 사죄
를 드리고자"한다고 말했고, 92년에 미야자와 수상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마음으로부터
반성의 뜻과 사과의 기분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93년 호소카와 수상 방한 때도 그는 "우리
가 한 일을 겸허히 반성하며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진사 드리고자"한다고 말했다. 94년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우리 국민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한 깊은 반성 위에
서..."라는 소리를 들었고, 95년에는 무라야마 수상이 '전후 50주년 담화'에서 "역사의 진실
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시 한 번 통렬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
명"한다고 말한 바 있다(조선일보,98.10.10)
이렇게 거듭되었던 '반성'과 '사죄'라는 단어를 보는 한 일본이 '사죄'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정부가 바뀔 때마다 사과를 되풀이해야 했던 것은 각 정부가 그 이전까지의 사과를 인정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까. 앞서의 정권을 부정하는 것으로 일관되었던 우리의 오랜 전통을
참고한다면,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는 일이 새롭게 수립된 새 정부가 자신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일쯤으로 생각되었던 게 아닌지 모르겠다.
매번 '사과'라는 것이 있었는데도 우리에게 그렇다는 인식이 없는 데는 실은 이유가 있다.
90년대 초반, 일본 법무상의 이른바 '망언'이 문제화되면서 격렬한 일본 비판으로 신문이
가득 채워지던 때가 있었다. 사설이나 시사만화는 물론 독자난에 까지 매일이다시피 망언에
대한 비판이 게재되고 있었는데, 그 비판들은 일본 정부가 문제 해결에 나서서 문제의 장본
인을 사임시키고 하타 수상이 대외적인 사과를 한 후에도 사그러 들기는커녕 반대로 그러한
행동조차도 정치적 필요에 의한 '사과'와 '망언'의 되풀이가 아니냐며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일본의 호소카와 수상이 방한했고 그도 사과를 했지만, 일본 국내에서도 그
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비판받은 그의 진솔한 사과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
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발언을 보자.
일본은 분명히 한국에 관한 한 과거를 정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국제법적인 문제는 한일
국교정상화 때 '정리' 됐으며, 민족적인 문제는 몇 차례의 '사과'와 '통석의 념'으로 충분한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같은 '말장난' 뒤에 일본의 뻣뻣한 자세와 한국
에 대한 우월 의식을 느낄 수 있기에 그것을 진정한 회오와 반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이다. 우리가 바랐던 바는 몇 마디 말보다 폴란드의 국립묘지 앞에 무릎꿇은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의 자세 그것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본은 절대로 그런 자세를 취할 사
람들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의 긍정이다. 일본은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도덕적, 정신적,
문화적, 국제적 자질을 인정받지 못했다. 세계의 많은 나라가 일본과의 거래에서 일본의 얕
음, 실물거래적 사고방식에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는
그 부에 걸맞는 진정한 친구나 이웃이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일본과 더 이상 '과거'를 얘기하고 반성을 거론하는 것을 접어둘 필요성
을 느낀다. 그럴 도덕적 인식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일본에 반복해서 '과거문제'를 꺼내
는 것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뿐이다.(김대중 칼럼, 조선일보.93.11.7)
이어서 이 글은 '극일'을 다짐한다. 그리고 "바라건대 이 상처받은 민족적 자긍심에 불을
붙여 우리를 국제화, 세계화의 대류에 합류시키며 우리의 위상과 실력을 탈 일본의 영역으
로 끌어올릴 지도자의 출현은 진정 없는 것일까?"라는 우국의 말로 글을 맺는다.
일본이 경제적인 성공은 했지만 "도덕적, 정신적, 문화적, 국제적 자질을 인정받지 못했
다."는 강변이나 일본이 '얕'고 '실물 거래적'이라는 인식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자. 이런
말들은 이미 '일본은 없다'를 통해 익숙한 것이니까. 그는 일본에게 '진정한 친구나 이웃'
이 없다고 단정하지만, 정말 그런가? 일본을 좋아해서 가서 살고 싶어하는(일본은 한 조사
에 따르면, 세계인이 살고 싶어하는 나라 2위로 꼽히고 있다.) 수많은 세계인들은 일본의 '
친구'도 '이웃'도 아닌 걸까?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할 때 우리의 '진정한 친구'나 '이웃'으로
는 어디를 생각하는 것일까?
그는 모두에게 익숙한 부정적 일본관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식의
선입견 때문에 분명 있었던 '사과'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일본의 사과를 '말장난'으로 단정할 수 있는지, '사과'의 말 뒤에 어떻게 '뻣
뻣한 자세'와 '우월 의식'을 느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사과를 '말'에 그치는 것이었다
고 말하면서 '행동'을 보여야 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그 때까지보다 진
전된 '말'-그들이 우리에게 한 일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사과하는-조차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면, '사과'는 어떤 식으로 해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일까.
그가 바란 것은 서독의 수상처럼 '엎드려 사과'하는 것이었던 듯 한데, 일본의 수상이나
천황이 국립묘지에서 무릎꿇고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보인다면 그런 의심은 사라질까. 그렇
지 않을 것이다. 불신감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번에는 그 행위는 표면적인 '행동'일 뿐이며,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고 비난할 것이다. '불신'은 언제까지고 대상의 진실을 보는 것을
가로막는다.
'사죄'문제는 끝없는 숨바꼭질과도 같은 존재다.
2)'망언'이 터지면 '원상회복'?
그들이 표면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사죄'한 건 사실이다. 그것을 그들의 본심이 아니라거
나 정치적 퍼포먼스로 보는 일은 비생산적일 뿐이다.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비판은 또 다
른 차원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문제다.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들은 언제고 이중적이며 진실을 말하지
않아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뿌리깊은 일본인 상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
지지 않는 한, 그들의 사죄가 어떤 것이든 진정한 화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사과를 사과로 인정하는 일이 보상과 바꿔쳐지는 사태를 두려워하는 담론도 이 시기에 적
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불신과 집요함이 바로 당시 일본에서 일어난 '혐한' 감정의 주
범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측의 사과에 대해 언제까지고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실은
'말'보다는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한국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과거에 있었던 일은 한두 마디의 사과만으로 잊어버리기
에는 너무나 큰 아픔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사과조차도 받아들이지
않는 인색함이 한일관계를 언제까지고 과거에 얽매이도록 만든다. 용서란 받아들이는 일로
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미래지향적 관계를 모색한다고 해서, 일부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과거가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문화개방 때 개방이 과거지사를 '청산'하는 것이라고 오해했던 것처럼, '사과' 역시
그 어떤 보루로 인식되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방문 때 더 이상 과거지사는 논하
지 않을 것으로 약속했고 정중한 사과를 다시 한 번 듣고 왔지만, '사과하지 않는 일본'은
여전히 모두의 공통인식이다.
그 때문에 새로운 사과가 있고 나서도 신문에는 "일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진실된 사과를
한 적이 없고 과거사 왜곡을 심화시킬 뿐이었다.(중략) 일본은 진정한 참회를 해야만 우리의
미래 동반자로 인정될 수 있다. 독일이 2차대전 후 진정한 참회와 배상을 통해 유럽의 한가
족으로 받아들여졌듯이..."라는 의견(조선일보 독자,98.10.10)이 여전히 실린다. 이 거듭되는
반복, 항상 독일을 거론하는 사고의 빈곤...
독일과 유태인의 경우와 우리와 일본의 관계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다르다.
독일이 저지른 일은 인종차별에 근거한 대량학살이었고, 일본이 저지른 일은 식민지화에
따른 차별과 억압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도 물론 비판되어야 하지만,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진
유태인들의 비극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독일이 '참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내용이 워낙 경악할 만한 범죄였기 때문이다. 죄의 경중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그
'진정한 참회'라는 것이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최근
의 신 나치의 움직임을 보더라도 독일에서 '참회'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일본에도 사과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물론 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의 '사과'가
있었다면 그건 '사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신용하 교수와 같은 지식인들까지 나선 '국민여론'의 조성은 끊이지 않는다.
이번 사과는 과거와 비교할 때 전혀 진전된 것이 아니다.(중략) 총리의 사과를 문서에 담
았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의원이 망언 한 마디 하면 원상회복이다. 최소한 의회 결의라도
있었어야 의미가 있다. 정부가 만일 이를 끝으로 과거사문제를 덮는다면 국민여론을 등지는
것이다.(조선일보,98.10.10)
앞으로도 '망언'이 터지면 '원상회복'으로 간주해야 할까. 하지만 설령 일본의 전 국민이
참회했다고 해도 망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어느 나라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있기 마련
이니까.
과거의 일본을 미화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일본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분명 존재한
다. 다시 말해서, 우경화하는 일본도 분명 일본이지만(실은 그들의 국가중심주의적 움직임은
그들만의 것은 아니다.) 그런 움직임을 비판하는 이들도 분명 또 다른 일본의 얼굴이다.
그런데도 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일본에 관한 한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두
개의 얼굴 중 바르지 못한 부분만이 '일본'의 진짜 얼굴인 것으로 믿고 싶어하고, 반대로 올
바른 부분은 소수거나 위선이거나 돌연변이일 것으로 간주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일본은
없다'식의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선입견이, 바르지 못한 쪽의 발언만을 일본 전체의 의견, 혹
은 진짜로 간주하고 싶어하게 하고 또 다른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망언만이 그들의 '본심'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일본의 한 부분일 뿐이고, 우리가 볼 필요
가 있는 것은 일본 '정부'가, 즉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가기구가 그러한 그들을 경질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긴 그것도 대외적 퍼포먼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그런 부분이 없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그런 선택을
하는, 즉 '망언'에 문제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현재의 일본 정부라는 사실이다. 일본이 모두
가 의심하는 것처럼 이상한 길을 진짜로 걷고 있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일 아닌가.
국가란 어떤 의미에서는 보수나 우익을 필요로 하는 시스템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국가시
스템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언제고 우익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의 누구를
상대로 교류해야 하는 것인지 분명해진다. 사과와 용서와 화해로 힘들여 쌓은 신뢰관계를
몇몇 반일 인사와 몇몇 국수주의자들 때문에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젠 망언이나 불충분한 보상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더라도 어느 쪽이 대다수의 의견이며,(그
리고 설령 소수라 하더라도) 그들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밝은 눈과
여유로운 마음이 필요하다.
3)과연 한국의 '사죄'는 있었는가
현재 베트남에는 월남전 때 한국인들에 의해 뿌려진 2세들이 1만 명이 넘게 살아가고 있
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에서 자행한 만행들은 이제까지 은폐되어왔다. 30년
이 지난 최근에야 겨우 일부 언론에서 문제삼기 시작하고 있을 따름이다.('한겨레21'305
호,308호 등).
그런데 이에 관해 한국은 베트남에 사죄한 적이 있는가? 김대중 대통령이 사죄할 때까지
어쩌면 우리는 아무도 베트남에 대한 죄의식은 갖지 않았던 건 아닐까. 일본을 비판할 때는,
우리의 오빠나 아버지도, 그 숫자가 얼마가 되었건, 혹은 고의적이었건 우발적이었건, 베트
남에서 강간하고 민가에 불지르고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도 한 번쯤 떠올릴 필요가 있
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경우는 그 상황도 규모도 시기도 다르지만, 성적, 민족적, 차별과 지
배의식의 그 근본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닮은꼴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일본만
의 특수문제로 돌리기보다 인류 공통의 문제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비판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과오에도 눈을 돌리면서 비판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 때의 비판 대상은 '
일본'이라는 고유명사 이전에 전쟁이거나 남성이거나 국가거나 군대, 혹은 근대 자체가 될
것이다.
일본이 저지른 학살과 세균전과 생체실험에 대해 비판할 때, 사람을 껍질 벗겨 나무에 매
달아놓기도 했다는 우리의 6.25와 4.3사건과 광주사건도 한 번쯤은 떠올려보자. 월남전에서
'자랑스런 대한 남아'가 엄청난 인명을 사살했고 '잔인한 한국군'의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려보자. 물론 우리도 그랬으니 그들도 용서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잔학상을 규탄할 때 동시에 우리 자신의 허물을 직시하는 일은, 그 곳에 존재하는 집단의
광기라는 문제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서의 '인간'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때야말로,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생산적 비판이 가능
해질 수 있다.
3:일본은 남북통일을 바라지 않는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이 한국의 통일을 바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실시되
는 여론조사에서도 그것은 드러나지만, 이는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
통일을 결코 원하지 않으면서 이를 적절히 조정하여 양쪽에서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경제
대국에서 이미 정치군사대국으로 이미 나아간' 일본의 음흉하고 노골적인 대공세 앞에서 긴
급하기만 한 민족통일에 대한 입장을 다시 한 번 다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주강현, '민
족생활풍습과 일제 잔재', '일제 잔재 19가지'.196쪽)
이 글은 일본이 "결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음흉하고 노골
적인 대공세"을 마치 사실처럼 강조하고 있다. 이 역시도 앞에서 본 식의, 일본인=교활한 민
족이라는 이미지를 보강하는 글이다. 당연히 그 귀결도 '민족통일에 대한 입장을 다시 한
번 다짐' 하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일본은 정말 우리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 걸까?
90년대 중반만 해도,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한일 의식구조 조사를 보면 일본은 한국의 통
일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한국 사람이 '그다지'까지 합하면 97퍼센트였다(한국경제
신문,95.1.1). 한국인의 대부분이 그렇게 믿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같은 조사에서 일본인들은 80.8퍼센트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통일이) 필
요하다'고 말한다. 또 일본이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도 77.7퍼센트
다.
실제로는, 일본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독도문제처럼) 무관심하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오히려 2년 전의 북한 미사일 사건 이후 통일을 원하는 일본인은 늘었다. 그래야만 북한의
위협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니 당연한 일이다.
1)일본과 한국의 '국가라는 구심체'
그런데도 일본은 우리의 통일을 원하지 않고 핵무장을 꾀하고 있다며 우리는 그들의 침략
에의 야욕을 의심한다. 무엇이 그렇게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통일 후의 한국이 힘이 막강해져서 일본을 위협할 만한 대국이 될 것이고, 그것을
일본이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통일 이후의 한국이 어떤 모습이 될
지는 통일의 방법과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정책이 결정하겠지만, 우리 모두가 막연히 생각
하는 것처럼 두 나라가 합치면 두 배의 국력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발상이
다. 더구나 북한의 자원과 싼 노동력이 한국의 경제를 뒷받침해줄 것이라는 생각도 북한을
경제발전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무책임하고도 이기적인 발상이다. 또 다른 지역차별의 발생
을 예상케 하는 발상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한국이 강대국이 된다는 환상을 품으면서 일본은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으
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일본을 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21세기를 맞아
표면적으로는 동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그런 의식들
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일 간의 불협화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일본이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하는 법을 제정했을 대, 한 신문이 "이
법안의 최대 의미는, 패전 후 의식적으로 외면해온 '국가'라는 구심체를 일본인에게 던져주
었다는 점"이라고 부정적인 뉘앙스로 쓴 것도 이런 경계의식의 소산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일본 신문들이 스스로에게 한 소리를 옮겨 쓴 것에 불과한 이런 소리는, 실은 한국이 할 수
있는 소리는 아니다. 왜냐 하면, '국가라는 구심체'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것은 실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니까. 다시 말해서 국가를 중심으로 뭉치는 일의 문제점을 한 번도 생각해보
지 않은 채로 '구심점'을 굳건히 하는 데 힘쓰고 있는 나라가, 과거에 그것을 한 번 버렸던
다른 나라가 그것을 되찾겠다고 나섰다 해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한국
에서는 아직껏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구심
점'을 정립하자며 단군상을 건립하려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일본에서 이런 발언이 나오는 건 그들이 이미 '국가'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한
검토를 나름대로 충분히 거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가'를 중심으로 맹목적으로 뭉쳤던
경험이 어떤 쓰라린 결과를 가져다주었는지를 피부로 알고 있는 '일본' 인들이기에 할 수
있는 소리다. 또한 그런 발언은 무엇보다도 '국가'를 중심으로 뭉치려 하는 움직임을 일본인
들 자신이 우려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국가'를 중심으로 뭉치는 일의 주체가 일본일 경우에는, 김진명의 민족주의 소설
에 환호하는 한국 자신의 '국가' 의식은 잊어버린 채로, 그것은 곧바로 군국주의적 국가주의
로 비판된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도 일본이 하면 무조건 단죄되는 묘한 현상이 여
기서도 보이는 것이다.
2)보이지 않는 '야욕'과 보이는 '왜곡'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도 90년대 이후 실제로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움직임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전쟁을 할 수 없었던 법을 할 수 있도록 개정하고 히노마루와'기미
가요'를 부활시킨 것도 사실이다. '국가'니 '국민' 의식이 강조된 것은 그런 맥락에서의 일
이다. 또 그 과정에서 군사적으로 막강한 힘을 갖추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군사력이
란 대개 경제력과 비례하는 법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최대가 아닌가. 경제력 2위인 일
본이 군사력이 두 번째쯤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국가주의화나 군사대국화에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런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되, '왜' 그들이 그러는지, 또 그런 움직임이 일본을 대표하는
움직임인지까지 보려는 복합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90년대 초 걸프 전쟁 이후, 미국은 일본에게 끈질긴 '군사'적 협력을 요청하고 있다. 현재
까지 일본은 헌법 제9조-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즉 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에 근거해 후
방에서의 조력만 해왔지만, 실은 일본은, 법을 핑계로 많은 선진국 군인들이 피를 흘리고 싸
우고 있을 때 자신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이 없는 일만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비판을 외국으
로부터 받기도 했다.
그런 비판을 우리라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한 마디로 일축하기 어려운 문제다.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을 이기적이라고만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런 비난 앞에서 할 수 있는
말도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전쟁이라는 폭력을 긍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또 하나 문제가 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는 전쟁
의 위험성이 팽배한 지역이었고, 만약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일본은 미국을 도와 한
국전에 어떤 형태로든 참가해야 할 입장이었다. 말하자면 유사시에 미국과의 협력을 위해
자위대가 출동할 수 있는 기반을 그들은 만든 셈이다. 실제로 긴급상황 발생 때 한일 군 당
국이 신속히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한일 사이에는 '군 핫라인'이 가동되었다고도 한다
(조선일보,99.5.5). 한국과 일본이 적으로서 대치한다는 발상은 이러한 현실의 움직임을 보지
못한 결과다. 군사대국화문제는, '군대'를 필요로 하는 '국가' 시스템 자체를 넘어서지 않는
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모든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경계와 비난 이전에 상대방이 처해 있는 '입장'까지도 보는 일
이 필요하다. 적어도 그들의 군사대국화를 복합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그것을 곧장 대동아
공영권을 꿈꾸는 처사라고 단정하는 우는 범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아는 일본은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타국을 식민지화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과거
의 오류와 고통을 통해 항상 더 나은 자신의 모습으로 거듭나려 하는 것이 그들이니까. 예
를 들면 지진과 화산의 재앙을 통해 그들이 지진과 화산 연구에서 세계적 수준의 국가가 된
것처럼, 설사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최종적으로는 과거의 오류를 다시 범하지는 않으
리라는 게 일본에 관해 공부해온 내, 아직까지의 이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이 인식되기보다는 아직도 "일본은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주변국에 대한 정복의 야욕을 접지 않고 있다."거나 "일본은 우리의 이웃에 있으면서도 우
리가 생각하는 그런 이웃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섬나라 근성'을 가슴에
품은 채 우리의 감시와 견제가 소홀하게 되면 우리에게 공격해올 수 있는 준비를 항상 철저
히 하고 있는 것이다."(이승영, 김승일 공저, '한국인이 모르는 일본, 일본인이 모르는 한국
', 무한,1999)라는 식으로 일본의 '야욕'을 강조하는 일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문제시되어야 할 것은, 그들의 보이지 않는 '야욕'이 아니라 우리의 보이는 '왜곡' 쪽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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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표상으로서의 일본인
1: 일본인은 창의성이 없다?
실은 90년대 이전부터 우리에겐 일본에 대한 공통적 이미지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일본 대중문화 유입이 한국에 줄 피해를 강조하는 한 신문 4컷 만화에 보이는
기모노와 게타와 뻐드렁니의 일본인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전통이며 특징이지만 결코
긍정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는 없는 것들이 한국에서는 '일본'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잡
고 있다는 한 예다.
현대인이라 해도,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인은 여전히 순사거나 헌병이거나
그나마 최근 들어와 추가된 모습이 야쿠자다. 김진명 소설에서처럼, '보통사람'은 좀처럼 등
장하지 않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도 순사나 헌병이 아닌 일본 사람은 당연히 존재했을 터인
데도, 해방 후 50년, 국교정상화 후 30년 이상이 지났어도 그 상황에 큰 변화는 없다. 그리
고 그것은 물론, 우리 속의 일본상이 가해자, 악인으로서의 일본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악인이 아니더라도 어떤 정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생각해 보라. 현대 한국에 대해 언급하는 외국의 신문잡지가 상투 틀고 짚신 신은 한국인
을 등장시킨다면, 그것을 우리는 자신의 모습으로 수긍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분명 우리의
모습이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조상'의 모습일 뿐 현대 한국을 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는 생활과 행동양식과 사고 모든 면에서 100년이나 200년 전의 우리 조상보다
도 어쩌면 오늘을 함께 사는 이웃나라 사람들과 공통점을 더 많이 지닌다. 말하자면 우리는
'한국' 인이되 그보다도 더 '현대' 인이다.
미국이나 유럽을 표현할 때는 그런 현상이 거의 없다. 우리는 구태여 그들을 그들의 수백
년 전 모습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왜? 그것은 그들의 전통적인 모습보다 현대의 모습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 대한 관심이 근대화를 둘러 싼 것이었고 그들에 대
해 아는 일이 근대화 자체기도 했던 만큼, 그 이전의 모습은 알고 있더라도 이미지의 중심
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일본과 함께 중국도 그들의 고전적인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왜일
까. 그들의 전통적인 모습은 대개가 희화화된 모습이다. 그것은 친근감이기보다는 조소를 내
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시각은 그들의 현대를 우리가 이미지화 할 만큼 알고 있
지 못하다는 증거기도 하다. 당연히 그들의 전통적인 모습은 상대방에 대한 이제까지의 '상
식'에 갇힌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예를 들면 김진명의 소설에 나오는, 한반도 통일에 일본인들이 부정적이라거나, 일본이 기
술이전을 고의적으로 해주지 않음으로써 한국을 후진국으로 만들고 싶어한다거나, 그들이
한국의 산업을 파괴하고 한국 지배에 나설 것이라는 이야기는, 실은 다른 수많은 매체와 일
반인들도 반복하던 이야기다. 혹은 '일본은 없다'가 보여주는, 대중문화 개방에 대해 일본
이 '문화적 주도권'을 쥐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들에겐 그것이 '오랜 숙원사업'이었으며,
일본인에게 (우리 같은) 도덕관이나 윤리관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일본인이란 '순진
무구한 얼굴, 모기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약자를 가장'하는 사람들이며, '칼과 돈
과 힘 앞에 무릎꿇'고 '강자 앞에서는 쉽게 약자로 탈바꿈'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보자.
몰개성적 산업사회에서는 일본인들과 같은 집단주의적 사고가 효율적이지만 앞으로 다가
올 철저한 개성적 사회에서는 한국인들처럼 한 사람 한 사람 우수한 것이 더 낫다.(김진명,
'가즈오의 나라', 프리미엄북스,1995)
일본은 집단적으로는 큰 힘을 발휘하지만 개인의 창의력은 우리보다 뒤진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약점이요, 우리의 강점이다.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력이 빈약한 집단주의는 집단의 지
도자의 철학에 따라 매우 위험한 집단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일본은 지금 그 위험한 방향
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한영우, 법고창신과 동도서기의길, '교수 10인이 풀어본 한국과
일본 방정식'.49쪽)
일본의 고급문화란 것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이렇다 할 것이 없고 대중문화는 범속과 저
속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은, 또 응용기술에 비해 기초과학의 수준이 크게 뒤지는 것은, 분
명히 개인의 창의성을 억압하는 일본의 집단주의 문화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김영명, '일
본의 빈곤', 미래사,1994,33쪽)
일본인은 팀워크를 이루면 훌륭하지만 한 개인을 놓고 보면 한없이 볼품 없다.(유재순, '
일본 여자를 말한다', 창해, 1998,67쪽)
1) 그들의 모방은 재'창조'였다
'집단주의'와 '몰개성', '창의성' 부족과 그에 따른 '모방'은 일본을 말할 때의 정형화된
수식어다. 이것은 이들만의 독창적인 개념이나 판단이 아니라 이전부터의 일본론들이 말해
왔던 이야기의 변형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개인적으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거나 모방만 하고 아이디어를 스스로
만들어낸 적이 없다는 식의 우리에게 익숙한 설은, 과연 맞는 말일까.
도대체 개인이 약한데 어떻게 집단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일까? 기술이건 문화 건
스포츠 건 종합적으로 뛰어난 분야의 저변에는 항상 뛰어난 '개인'이 존재하는 법이다. '집
단'이란 '개인'의 집합이 아니던가? 한국의 일본론은 이미 비판되고 수정되고 있는 낡은 일
본문화론들을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인은 모방을 잘 할 뿐 창조적 능력은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한때 모방했지
만 적어도 모방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다시 되팔 수 있는 물건을 만들었고, 그것
은 주어진 기술을 철저히 흡수, 연구하여 다시 창조한 것이었다. 모방하되 다시 그들 나라에
되팔 수 있는 것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의 모방은 어디까지나 재'창조'
다. 단순한 모방에 그치는 경우는 한국에 더 많지는 않았던가?
실은 모방과 어떤 기술이나 문화의 유입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또 엄밀하게
말하자면, 완전한 제로로부터의 '창조'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말하자면 어떤 상품이건
문화건 완전한 '무'에서 생산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창조는 정도의 차이
는 있어도 모방에서 시작된다. 그림은 사물을 모방하는 데서 시작되고 작가가 '쓸'수 있는
것은 남의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건 창조행위에는 모방이 따르는 법이다.
2: 일본은 '칼의 나라'?
집단주의는 어떤 맹목성과 힘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사무라이의 나라라는
전제가 있다.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이며 한국은 선비의 나라라는, 한일을 문의 문화와 무
의 문화로 양분하는 사고는 우리에겐 극히 익숙한 것이다.
조선에선 붓을 든 선비가 있었는데 일본에는 칼찬 다이묘들이 할거했고 그 밑에 역시 칼
찬 사무라이들이 있었다. 조선의 당쟁에선 그대로 말이 앞섰는데 일본에선 칼이 앞서 있었
다. 조선에선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거나 귀양살이를 갔지만, 일본에선 일족
이 완전히 칼 아래 목숨을 잃었고 마을 전체가 불타 없어지기도 했다.(중략)
우리에겐 그런 대로 토론문화의 실마리가 있었지만 일본에는 그런 실마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중략)
일본의 단결이란 한 마디로 강요된 단결이었다. 섬나라에서 칼찬 다이묘를 따르지 않았다
간 죽음밖에 없는데 어찌하겠는가...(중략) 그들이 죽고 사는 것은 대의를 위한 것이라기보
다
오야붕을 위한 것이었다...(중략) 이와 달리 조선인들은 오야붕을 섬겼던 게 아니라 대의를
섬겼다.(홍세화,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한겨레신문,1999,104-105
쪽)
'붓을 든 선비'와 '칼찬 다이묘'의 대비, '말'과 '칼'의 대비, '토론문화'의 유무, '강요된
단결', '대의' 존중과 '오야붕' 존중이라는 이분법은 전부 한국의 우위를 증명하는 논법의
자료로 쓰여지고 있다.
1) '칼=폭력=성'의 도식
하지만 '다이묘'란 '칼'만 차고 다닌 무식쟁이가 아니었다. 그들의 학문에 대한 정열은 놀
랄 만한 것이었고, 뛰어난 유교적 학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토론문화'가 없었다는 것은
오해다.
설사 그런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정치가 '칼'만으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
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사고방식이다. 일본의 근세, 즉 본격적 무사정권 시대는 실은 전국통
일이 이뤄지고 유례 없는 국내적 평화가 유지된 시대였다. 싸울 일이 없어 사무라이 중 실
업자가 속출하기도 했던 시대였다. 그들에게 지적 자산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일
뿐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은 칼의 나라다. 일본 중세 전국시대에는 약 280개의 봉건국가들이
있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싸움, 칼싸움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늘 죽음이 일상
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김경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바다,204
쪽)
일본의 성 개방 문화는 기후와 칼 때문에 빚어진 것들이다. 더운 지역이기 때문에 노출이
많고, 그 끈적거리는 일본의 여름을 지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주 씻어야 한다. 그러다 보
니 성적인 유혹과 접촉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206쪽)
또 다른 하나는 앞의 폭력문화 부분에서 살펴본 것처럼 칼의 문화가 빚은 성폭행들 때문
이다. 수시로 유린되는 여성들 역시 나름의 합리화가 필요했으며, 그 합리화가 조금 느슨한
정조관념으로 바뀐 것뿐이다. 조선의 여인들처럼 자살을 하지 않을 바엔 마음 편한 편이 나
을 것은 뻔한 이치다. 일본인 특유의 현실타협심리들은 모두 이렇듯 조금은 슬픈 역사를 지
니고 있다. 무조건 욕만 할건 아니다.(207쪽)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유교적 사고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음을 가르쳐주었던 김경일
교수도 '일본=칼의 나라'라고 하는 정형적 일본관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물론
이 글은 일본을 "무조건 욕만 할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니 일본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글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성 개방 경향이 '기후와 칼' 때문이라는 해석이 너무나도 단
선적인 이해임은 초등학생이라도 알 만한 일이다. 그의 논리에 따른다면 일본의 성 개방 풍
조는 여름에 한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걸까. 하긴 한국은 '추워서' 일본과는 다르다고도
하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본이 한국에 비해 '성의 홍수'로 뒤덮인 나라로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성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일을 금기시하지 않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일 뿐이다. '칼의 문
화'와 '성폭행'의 연결은 아마도 '칼'이 '폭력'을 연상시켰기 때문이겠지만, 여성들은 그의
말처럼 '수시로 유린'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성을 팔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합리화'
가 필요할 리도 없다. 물론 이것은 시대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자살하지 않
을 바에야...'라는 말은 여성들이 강간이라는 폭력에 대항하지 못해 자살했던 일을 미화시키
는, 결과적으로 여성 억압으로 이어지는 위험한 발상이다. 성 의식에 관한 한,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유교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칼'과 '폭력'과 '성'은 그들만
의 전유물이 아니다.
또한 이 글 역시, (일본의) "저열한 성문화 때문에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며, "일본인들
의
성 의식을 초월할 수 있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우리만의(강조는 필자) 성문화를 우리 청소
년
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일본의 저질 성문화를 극복하는 유일한 대안"(207쪽) 이라고 강조하
면
서 '저질' 일본에 대비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한국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는데서, 우리는
일본에 관한 우리의 담론들의 공통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어느 쪽도 이미
지일 뿐 '실체'는 아닌데도, 일본을 비판하는 글은 거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긍정과 미화
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노골적으로 비판적인 글보다도 이처럼 호의적으로 보이면서 실은
자신의 편견을 의식하지 못한 글들이, 그 편견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편견의 재생
산에 더 기여할 수 있다.
'사무라이들의 폭력적 성문화'(207쪽) 라는 말은, 사무라이=성=폭력이라는 간단히 연결로
우리의 편견을 심화시키고 있지만, 일본에는 이토 진사이를 비롯한 뛰어난 유학자 및 사상
가가 있었고, 그들은 무사들의 브레인으로서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또 사무라이의 최
고봉에도 막부의 장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쇄국정책을 완화시켜 네덜란드를 통해 18
세기 전반에 이미 서양학을 받아들인 장본인이다. 일본이 19세기 중반에 남보다 빨리 근대
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부를 쓰러뜨리고 새 정부를 세
워 근대화에 앞장선 것도 다름 아닌 사쓰마와 조슈번의 '칼찬 사무라이' 들이었다. 그뿐인
가. 무엇보다도 그들은 조선 통신사를 정중히 대접할 만큼은 '문화'에 대한 지적 욕구가 컸
다.
2) 선비는 사무라이보다 훌륭한가
우리는 스스로를 '문의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이것은 조선 시대의 선비 계층만이 우
리 머릿속에 강하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불과
5백여 년 지속된 전체 역사 중의 한 시대일 뿐이다.
원나라가 침략해왔을 무렵 고려는 80여 년 간의 무신정권 시기였다. 그리고 조선은 고려
시대의 무신정권의 체험에 근거해 이러한 전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문관을 우위에
놓고 무관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했다. 때문에 군대의 중요한 포스트까지 문관이 차지했다.
문관을 통해 출세하려는 의식은 그런 맥락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 데 지나지 않는 것이
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무관이 되려는 사람은 적었고, 방위가 필요할 때는 언제나 중국에
의지해야 했다. 당연히 군대는 약화되었고, 1592년에 3주일만에 수도가 함락된 것은 그 때문
이었다. 1637년에 청나라에 한 달만에 제압 당한 것과 19세기 말 일본에 병합 당한 것도 그
런 '무'의 취약함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이순형, '일한병합', 후지제록스
고바야시 후시타로 기념기금 1998년도 연구조성논문, 도쿄) .
그런 부분을 도외시하고 우리는 '문'의 나라였다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
방식이 '문'을 우위에 두는 것으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이순신 장군은 무관이 아니던가? 을지문덕은 어떤가? 최
영 장군은? 그들을 우리는 선비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하는가? 그들은 지적 능력이 부족했
을까?
현대의 스포츠선수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신체적 능력은 실은 정신의 능력과 무관하지 않
다. 더 나아간다면,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정신과 신체를 나누어 생각하는 일 자체가
근대 이후의 사고방식이다. 우리에겐 '선비'라는, 일상에서 정치까지 '현실'에는 관심을 두
지 않고 '학문'만 하고 있어도 어느 날 출세가 가능한 직업계층이 있었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는 '무'라는 '기술'을 경시하지 않는 가치관이
존재했을 뿐이다.
무관을 경시하는 발상처럼 일면적인 이해에 머문다면, 우리의 선비 역시 얼마든지 부정적
으로 말해질 수 있다. 처자식이 굶어죽거나 말거나 언젠가 출세할 날을 꿈꾸며 글만 읽고
있었던(과거는 창의성을 보기보다는 얼마나 잘 외우고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에 중점이 주어
졌다던가.) 독서인에 불과하다고 누가 선비를 매도한다면, 우리는 수긍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여기서 사무라이가 선비보다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우리의 시각이, 정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사고와 시스
템을 무조건적으로 존중하도록 길들여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사무라이가 경멸되는 다른 한 쪽에서는 대표적인 사무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
('대망') 가 "우리에게 역경을 극복하는 방법과 기회를 기다리는 인재의 종요로움을 일깨워
주는 '인간 치세의 경략서'"(조선일보,1998.10.10 광고) 로 권장, 소개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의 모습이다. 아이러니 아닌가.
3: 일본에는 기술'만' 있다?
'무의 문화'로 단정지으며 경시하는 사고의 연장선에 일본에 '기술'은 있지만 문화는 없
다고 생각하는 사고가 있다. 일본의 현대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많이 달라졌지만, 한때 일본인은 경제적 동물일 뿐 문화를 갖고 있지 않다는 말까지 그럴
듯하게 퍼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품이니 첨단 테크놀로지니 과학을 '문화'와는 동떨어진 별개의 것으
로 생각한다. 하지만 상품에 그것을 만드는 이의 철학과 가치관이 들어가 있다면 '상품'이라
고 해서 문화가 아니라는 법은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일본 제품들의 섬세함은,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이
경제적 '동물'로서의 근성을 발휘해 소비자의 요구를 '약삭빠르게' 혹은 '상인혼'으로 읽어
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상품 생산이라는 행위를 '경제'=이익행위 관념으로만
하지 않고(물론 최종적으로는 이어지지만) , 소비자의 입장을 생각하는 '배려'라는 '문화적'
관념을 바탕에 두고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고분에서 나온 밥그릇과 주전자는 조상들의 '문화'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현대
의 기계로 만들어진 밥그릇과 주전자는 문화와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다.
300년 전의 장인은 기계 생산이 아닌 수공 생산을 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상품은 어디까지나 '상품'이며, 경제행위의 결과로만 치부되고, 우리는
그 가치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우리에게도 '상품' 혼의 필요성이 강조되면
서 상품 제조가 '마인드'가 필요한 작업임이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이 역시 '기술'을 천시했던 우리의 의식-손으로 하는 작업, 신체의 경시-의
소산이다.
1) 기술이전의 벽을 넘는 방법
그런 한편에서 일본은 기술이전에 인색하다며 비판하는 것도 우리의 또 다른 모순된 모습
이다. 언젠가 한 학생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전 무역학이 전공이라서 강의 시간에 그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저희 교
수님이 이야기하시기를,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하나는, 일본 회사에서 일하다가 기업비밀
을 알게 된 다음에 그만두고 한국 회사에 취직하는 거구요, 또 하나는 유학 가서 교수한테
잘 보였다가 나중에 그 교수를 통해서 기업비밀을 빼오는 길밖에 없대요. 일본 사람들은 제
자한테는 잘 가르쳐 준다나요.
스파이 행위와 은사를 이용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교수'가 제시했다는데, 그 어느 쪽도 경
쟁에서의 정정당당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이야
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지고 있다는 것은 일본을 따라잡는 소망이 너무 큰 나머지 그런
의식이 내포하는 부도덕성에 둔감해졌다는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일본이 기술이전을 자발적으로 안 해준다고 하는 인식인데, 과연 그
럴까. 한국은 그에 대해 늘 불만을 표시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치 않다.
주한 일본 경제인들의 한국 비판을 보자.
"기술개발에는 관심조차 없다."
"신용도 없고 경영 충고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국인은 신뢰=돈이라는 것을 모른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근본적으로 기술경쟁력이 없어서 비롯되었다."
"금융개혁만 이야기하고 기술개발은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
"사회질서, 문화 등 모든 것이 OECD에 가입한 나라라고 믿을 수 없다."
(조선일보,98.3.6)
가혹하게 들리는 비판이지만, 이런 것들이야말로 실은 기술이전이 잘 안 되는 이유였다.
그런데도 우리한테는 일반적으로 일본=기술이기주의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설령 일본이 이기주의에서 기술이전을 꺼린다고 해도,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
이다. 기술이전에 일본이 인색하다고 하는 한국의 비판은, 마치 시험 당일 날 공부를 안 해
온 아이가 실력 있는 아이한테 답을 보여달라고 하다가 거절당하고서 하는 비판 같은 것 아
닐까. 남의 노력의 결과물을 손쉽게 손에 넣으려 하는 자신의 의식의 문제점은 보지 않고,
보여주지 않는 아이의 태도를 이기주의로만 비난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물론 그들의 현재의 눈부신 성과가 패전 이후의 미국의 도움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혹은 6.25를 통한 특수경기에 적지 않은 요인이 있다는 지적도 귀 기울일 만하다.
하지만 그들의 오늘날의 번영은 그보다도 훨씬 많은 부분이, 그들 자신의 수십 년에 걸친
꾸준한 연구와 노력의 성과라고 보아야 옳다. 주지 않는 데 대한 비난보다, 우리와 마찬가지
로 일본에 대해 기술이전을 원하는 여타의 다른 나라보다도 우리가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지, 또 우리 자신은 다른 나라에 우리의 기술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부터 생각할 필요가
있다.
4: 일본인은 잔혹하다?
사무라이의 나라의 칼 쓰는 '기술'은 '잔혹한' 일본인상으로 쉽게 연결된다. 실제로 한 조
사에 따르면(정대균, '한국인에게 일본은 무엇인가', 강,2000) , 한국인들이 품고 있는 일본
인에 대한 이미지 중 가장 많은 것은 '간사/야비하다'고 그 다음이 '잔인/무섭다'(27쪽) 다.
이 책이 정리해놓은 한국인의 일본인 이미지를 보자.
일본인은 간사하고, 잔인, 잔악, 야비하며, 이기적이고, 나쁜 놈들이며, 독한 면이 있고, 경
제동물이며, 교활하고, 이중적이며, 실리적이고, 경계할 필요가 있지만, 근면하고, 친절하며,
단결력이 강하고, 성실 검소하며, 질서를 잘 지키고, 예절바르고, 생활력이 강하다.(36쪽)
1) 일본인은 다른 민족보다 더 잔인한가
그런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잔인'하다는 설은 맞는가?
우리는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드라마 혹은 현대 범죄드라마 등에서 피가 난무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고, 눈을 가리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표현을 역겹게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일본인'만'의 잔혹성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잔혹성-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
겠지만 폭력 행사에 필수적인-이란 인간이 어떤 순간에 범하는 폭력의 한 표현이다. 그들은
다만 그 '폭력'의 표현을 좀더 직접적으로, 직설적으로 하는 것일 뿐이다.
근대 일본이 저지른 범죄 중 남경대학살은 분명 나치에 버금가는 잔혹성을 보여준 사건이
었지만, 그런 식을 잔혹성이 우리에게는 없었을까? 그들의 폭력은 해방 후부터 제주 4.3사건
을 거쳐 6.25이후까지 이데올로기 대립 과정에서 일어났던 우리 자신의 수많은 끔찍한 일보
다 '더' 잔혹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광주사건 때의 잔혹성은 어떤가? 그들은 일부이거나
특수한 상황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잔혹 행위란 대부분이 일부
에 의해, 특수한 상황에서 저질러지는 법이다.
유태인에 대한 독일은 어떤가? 인디언에 대한 미국은 어떤가? 죄 없는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산 채로 불태워 죽였던 중세 유럽은 어떤가?
다시 말하지만, 잔혹성이란 '인간'이 어떤 상황 하에서 드러내고 마는 어떤 충동적 감성이
며, 그 표현에 금기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들의 잔혹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사슴의 피를 받아먹는 일은 잔혹하지 않은가? 살아 있는 곰의 가슴을 열고 웅
담즙을 착취하는 일은 잔혹하지 않은가? 그것들은 어쩌면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 즉 인간이
광기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용납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일상 속에
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 잔혹하다고도 할 수 있다. 단순히 보신을 위해 다른 종의 생명
을 빼앗는 것은 잔혹할 뿐 아니라 추하지 않은가?
인간은 누구나 한 시대와 어떤 환경 안에서 잔혹할 수 있다. 일본인'만'을 잔인한 민족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범죄를 그들만이 저지른 '특수한' 일로 생각하는 사고 때문이며,
우리 자신의 체험을 망각하고 있거나 면죄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사람을 죽여 장기를 먹는 사건이 최근에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예전
에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것을 두고 '일본은 없다'는 일본에만 있을 수 있는 사건으로 비난
하고 있었지만, 그건 일본 내에서도 '특수'한 사례였다. 그런데도 일본 쪽 사건이 더 기억되
는 건 우리가 그러한 사건을 크게 사회문제시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학생이 초등
학생을 살해한 사건을 둘러싸고 전 일본이 들끓었지만, 한국에서 초등학생이 유치원생을 살
해했을 때 한국 사회는 그 사건을 별로 문제삼지 않았다. 장기를 먹은 사건이 일본에서는
소설의 소재로 쓰여지며 '인간'을 탐구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지만, 한국에서 그런 문제
에 관심을 쏟은 소설가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어느 쪽이 '더' 잔혹한가가 아니다. 잔혹성 자체는 보편적이며, 공간과 시간에 따
라 달리 표현되는 것이고, 그 공간과 시간의 바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더' 잔혹하
게 느껴지는 법이다. 민족성이 잔혹성을 결정하는 건 아니다.
2) '왕따'는 일본에서 '수입' 되었는가
'칼의 나라 일본', '잔혹한 일본인' 상은 곧바로 '일본 문화=폭력'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조장하기도 했다. 한때 학원폭력이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 그것을 쉽게 일본 만화 탓으로 돌
리는 단순하고도 순진한 분석가들이 전문가에서 일반인까지 적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본' 것을 모방하는 존재라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이야기다. 인간은 태어난 직후부터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을 모방하
고 익히면서 서서히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니까.
그러나, 인간이 부정적인 매체에 접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 행위를 따라할 것이라는 생각
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어떤 현황을 받아들이는가 거부하는가는 어디까지나 주체의 가
치관에 달려 있다. 바른 가치관이 심어져 있다면, 어린이라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나아가 비판할 수도 있다. 만약 어떤 폭력을 보고 모방할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 때는 이미
그럴 만한 폭력에 대한 욕구를 키워왔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말하자면 이미
그러한 폭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폭력적인 대중매체가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사건'의
원인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법이다. 단순사고는 언제까지고 문제의 원인을 보지 못하
도록 만들 것이며, 결국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게 만들 것이다.
학원폭력문제는 그런 의미에서 어디까지나 우리의 '상황'이 빚어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그런 점에서, 입시위주 교육-이것까지 일본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
나 해방된 지 이미55년이다. 50년 이상 비판 없이 모방해놓고, 문제점이 드러났다고 해서 그
것을 제공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과 전반적인 '현대병'이 학원폭력을 발
생시키는 황폐한 심성의 원인이다. 그런 면에서 결과적으로 일본 사회와 비슷하다면 비슷하
지만, 그것은 '수입'일 수는 없다. 구태여 '수입'이라 한다면 현대병의 수입이며 근대화에서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닮고 만 우리의 필연적이며 특수한 현상일 뿐이다.
최근 이근안이 자수했을 때도, 이근안이 사용한 고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전부 '일제에
게서 배운 것'이라는 말이 어김없이 나왔다. 마치 일제가 가르치지 않았다면 한국에는 그러
한 고문이 없었을 거라는 것처럼, 하지만 한국에도 방법은 다를지언정 갖가지 끔찍한 고문
은 있었다.
이렇게, 나쁜 사항은 '일본' 탓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것이 여전히 우리의 의식이다. 그 이
전과 그 이후의 모습에는 눈감은 채로.
인기리에 방송되던 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왕따' 당하는 아이를 소재로 다루면서 등장
인물 중 한 여성은 이렇게 말하며 분개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여간 일본 거라면 뭐든지 수
입한다니까. 왜 그런 것까지 수입할까?"
이 말은 드라마작가 자신의 의식이기도 하고 대중의 무의식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다. 그
것이 얼마만큼 모두를 사로잡고 있는가는 열린 사고를 가진 지식인들까지 비슷한 소리를 하
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의 왕따가 한국과 비슷한 입시경쟁체제를 갖고 있는 일본에서 수입된 것은 이상한 일
이 아니다.(홍세화, 앞의 책)
하지만 '이지메'란 자신과 '다른' 사람(경제력, 외모, 능력 등에 있어 우월하거나 반대로
열등한) 을 배척하는 인간의 본능적 심리현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일일뿐이다. 그 구체적
양태와 심각성에는 시대와 공간에 따라 차이가 있을지언정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현
상이다. 학교에서의 이지메만 하더라도 그렇다. 미국이나 유럽에는 이지메가 없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다만 양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 90년대 초 학원폭력문제가 대두되었을 무렵 처음에 '이지메'라는 말이 쓰였던
것은, 그것이 일본 것이어서가 아니라 한국어에 그 현상을 표현할 적당한 단어가 없었기 때
문이다. 얼마 안 가 '집단 괴롭힘'이라는 말이 쓰이더니 어느 사이에 '왕따'가 일반화되었는
데, 이 경과는 이미 잊혀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처음에 '이지메'라는 말을 썼던 것이 그
현상 자체가 일본에서 '수입'된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리라. 하지만 수입된 것은 그 내
용이 아니라 개념을 표현할 '명사'였다. 그 배경에는 명사에 강한 일본어의 특성이 있다.
3) '독한' 일본인의 '타자에 대한 거리감각'
타자에게 '잔혹한' 일본의 이미지는 스스로에게도 '독한' 일본인으로도 쉽게 연결된다. 물
론 독하다는 말은 과거의 탄압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더 일본인들이
감정표현을 잘 안 하는 일을 두고 말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가족과 친지의 죽음
-인간사에서 가장 슬픈 일 중의 하나인-에 맞닥뜨려 취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텔레비전에
비치는 한국인은 곧잘 통곡하고 심한 경우 실신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릴지언정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려 노력하거나 아예 눈물을 비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통곡이란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였으며 산 자
에 대한 외교적 수단이기도 했다. 슬픔을 가능한 한 격렬하게 나타내는 것이 한국의 의식으
로서의 미덕이었고, 여성들의 실신은 그 전통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 반대였다. 그들은 타인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생각했고, 눈물을 억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일상을 지배하는 큰
차이 중의 하나인데, 일본인이 이른바 '속마음'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이 연장선상의 일이
다.
한국과 일본은 타자에 대한 거리감각이 기본적으로 다르다. 한국인은 거리를 두지 않는
것에 익숙하고 일본인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을 편해한다. 거기에는 단지 '차이'가 존
재할 뿐이다. 한국적 행동양식-풀고 헤치는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어진 우리 자
신의 감수성에 바탕을 둔 판단이 우리 자신을 긍정적으로 판단하도록 만들고 있을 뿐이다.
어느 쪽을 더 '쾌적'하게 느끼는가는 개인, 혹은 그 개인이 속한 집단, 공동체의 취향에 의
해 정해진다. 어느 한 쪽에 절대적 우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의 직설적 발로는 '인간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고(그것을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
도 실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교육받은 결과지만) 미성숙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반대로,
나
타내지 않는 것은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자기제어가 가능한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
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억제하는 쪽을 누가 '인간적'이라고 한다고 해서, 뭐라
고 반격할 수도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자체가 아니다. 어떤 평가든 거기에는 평가하는 사람의
개인적 자질과 그가 속한 공동체적 사고가 필연적으로 관여하기 마련이라는 사고가 필요하
다.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5: 이중적인 일본인, 교활한 일본인?
'독한' 일본인의 이미지는 그 정적인 모습과 함께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중성을 가진 일본인과도 연결된다. 또 잔혹한 일본인상과 대치되는, 벚꽃을 사랑하고 차를
즐기며 부드럽게 미소하는 일본인상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중적'인 일본인상으로 연결
된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속마음'을 따로 갖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정
말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도 이런저런 이유로 (그건 공적 관계일 수도 있고 사적 관계일
수도 있으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서일 수도 있고 의식적 거짓에서일 수도 있다.)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경우는 누구에게나 어떤 집단에게나 있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일본인이 유독 표적이 되는 것은 그들에게 그 경향이 강하기 때문일지는 모르겠
다. 굳이 말한다면, 한국인이 비교적 속내를 잘 보이는 경향이 강한 데 반해 일본인들은 속
을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해두는 정도가 정확할 텐데, 그것은 앞에서 말한
거리감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혹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공공성의식의 차이에서
오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일본인의 이중성 이미지가 '교활' 혹은 '간교'한 이미지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앞
에서 본 것처럼(정대균, 앞의 책) 한국에서의 일본인의 대표적 이미지는 '식민지 지배/2차
대전'과 함께 '간사/야비'였다.
1) 100년 전엔 한국인, 중국인이 '교활'했다?
그런데 100년 전의 일본 서적들을 보면,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에 대한 표현으로 다름 아닌
'교활'이라는 표현이 자주 눈에 뜨인다. 재미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간사'나 '교활'은 어
떤 한 민족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이민족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이미지로 생각할 수 있겠다.
인간은 어떤 때 상대방을 '간교'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상대방이 자신의 이
익을 위해 타자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에 말해지는 단어다. 말하자면 이 쪽의 상상력을 넘
어설 정도로 머리를 굴려 나쁜 일을 획책할 경우에 그 형용사는 쓰여진다. 앞서의 조선총독
부나 쇠말뚝을 둘러싸고 '간교'의 단어가 많이 쓰여진 것도 그 한 예다.
하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있을 때, 즉 막연한 경계와 피해의식이 그런 단어를 떠올리도록
하는 경우도 많다. 말하자면 상대방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되는 경우 사람들은 상
대를 '간교'하다거나 '교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949년의 일본인의 한국인 이미지 조사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것도 '교활'이었다(정
대균, '일본인은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강,1999) . 당시 한국인은 해방감에서 얼
마간의 폭력을 행사했고 그 때문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존재로 경계되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교활'이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아 조사는 한국인을 두고 '군중심리'가 강하다거나 '집단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
여주고 있다. 또 '단결력이 있다'고도 말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이 형용사들은 모두 우리가
일본인에 대해 즐겨 쓰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이 결과는 양국 국민이 실제로 그런가 아닌가
를 나타냈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이 대부분 어떤 상황 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미지란, 대부분이 이런 구조를 거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은, 그렇게 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리 주입된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교육일 수도 있고 언론 매체를 통해 얻은 것일 수도 있다.
다음 글은 우리의 왜곡된 일본 인식의 대표격이라 할 만한 글이다.
(한국이) 생명에 대한 추구, 삶의 문제 등을 상당히 도외시하고 있어요. 그것은 내가 요
즘
가만히 보면 일본서 들어온 풍조예요. 그런데 상당히 기성인들 속에도 일본 문화를 찬양하
는 경향도 있고, 일본 문학이 우리보다 앞서가 있는 것처럼 착각들을 하고 있어요.
4-3 일본을 바로 알자고 말하는 박경리
일본의 전통, 문학이라는 게 그 역사의 시작이 하나의 칼로 시작했고, 간단히 이야기하자
면 우리 연표를 보면요, 우리는 마디가 굉장히 길어요. 그런데 일본은 많이 짜개져요. 그게
뭐이냐? 끊임없는 전쟁에서 모든 말하자면 변혁이지요. 새로운 강자가 나오면 또 뺏고, 그러
니 일본은 전통적으로 칼을 숭상하는 나라였어요. 이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살았어요. 힘 앞
에서는 수동적으로 살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그 본질이 능동
적인 것이거든요. 이런 거(앞서 말한 일본인의 수동성) 는 전부 수동적이지마는 우리가 손가
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다 생명 가진 능동성 때문에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한 마디로 일
본 국민들은 수동적으로 살아온 민족이에요. 왜냐 하면 집단을 하나로 만들려면 국민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일본을 단결이 잘 된다고 부러워하거든요. 단결이 뭡
니까? 수동적이어야만 단결을 할 수 있어요. 개성을 죽이고 시키는 대로하는 거, 이것을 단
결을 잘 한다 해 가지고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일본을 칭찬하는 거예요. 단결을 잘하는 것
은 수동적인 것이고 수동적이라는 것은 창조적인 능력이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디서 본
을 가져오면 갈고 닦고 기능은 되지만 창조적인 능력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창조적인 능력이 있고 일본에는 기능적인 능력이 있어요. 그런데 그 기능적인 능력이 자본
주의가 들어오면서 이게 맞아떨어진 거지요. 기능 가지고 하는 게 자본주의 아니에요? 왜냐
하면 자꾸 복제품을 만들어 파는 거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을 찬양하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오히려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문학은 어떤 형태로 나
타나냐? 이건 도피주의, 허무주의로 나가거든요. 그래서 일본 문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거
의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 그러니까 생활과 예술이 유리되어 있는 상태지요. 그런데 이것
이 일본에서 들어와 가지고 난 요즘 작품 잘 안 읽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라든지, 아쿠타
가와 그 사람도 공언화 했잖아요. 자기는 예술을 위해서 살겠다고, 그러나 예술을 위해서 산
다면 인생에 최후가 없어요. 흔히 일본에 얼마나 많은 문인들이 자살을 했습니까? 다 그런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인제 탐미주의의 아류가 되거나 질이 떨어지면 에로티시즘이
되는 거예요. 또 칼로 갖다 매일 싸우기 때문에 밤낮 피를 연상하게 되고 그게 그로테스크
예요. 그로테스크하고 에로티시즘이 일본의 탐미주의예요. 그런데 그로테스크나 에로티시즘
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뭐 우리가 알다시피 위대한 사상가나 철학가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 종교도 형식만 갖추고 있지 진정한 종교가 없어요.(중략) 이런 식으로
일
본의 종교라는 것이 갈팡질팡 아무 것도 완전히 없는 거예요. 완전히 없는 거예요.
여기에는, 나쁜 것은 일본에서 온 것이고, 일본은 칼의 문화기 때문에 나쁜 문화이며, 강
자가 나오면 권력이 교체되었던 역사가 일본을 수동적으로 만들었으며, 그 수동적 자세가
집단성을 유지했고, 모방은 잘 하지만 창조적인 능력이 없다(한국엔 있다) 는, 한국인들의
일
반적 일본관의 총체적인 모습이 있다. 어쩌면 오늘의 한국인들의 일본관은 이대작가의 영향
을 받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쁜 것은 일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나 일본을 '칼의 문화'로 해석하는 일의 문제점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으리라. 일본인=수동적이라는 생각 역시 한국적인 정형적 일본관
이다. 권력 앞에 굴복하는 것을 '수동적'이라 표현한다면, 이것은 한국은 물론 어느 나라에
대해서나 말할 수 있는 일이다. 수동적이고 얌전해 보이는 것이 일본의 일반적인 이미지지
만, 일본도 농민들의 반란 같은 것은 적지 않았고, 이른바 '하극상'으로 불리는 쿠데타도 적
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수동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일본인은 일반적으로 단결력이 있다는 긍정적인 해석조차도 여기서는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해석되며, 창조적이 아니라는 말로 일본인은 모방'만' 한다는 많이 듣
던 말이 되풀이되고 있다. 기능적 능력과 자본주의를 연결시켜 말하는 일은 기술에'만' 능한
일본, 경제적 동물 일본을 연상시키도록 만드는 부분이다.
이 모든 것과 함께, "칼로 매일 싸우고..."나 "위대한 철학가가 없다."는 말도 왜곡과 편견
일 뿐이다.
또 종교 역시 부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은 일본에
는 '진정한' 것,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데 있는 듯하다.
2) '섬나라'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가 '섬나라'라고 우습게 보고 싶어했던 일본의 지형적 입지는,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
면 실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미완성'의 입지를 자각함으로써 자신들이 '받아들이는' 입
장임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새로운' 것에 대해 탐욕스러우리 만큼의 호기심을
갖게 만든 입지기도 했다. 말하자면 아이덴티티 부재의 상태를 고수함으로써 '순수'니 '고유
'에 집착하지 않는, 이른바 '잡식문화'에만 가능한 저력을 길러준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재래 종교에 유교와 불교를 사이좋게 접목시키고 마는=종교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사람들한
테는 배척되어야 할 '불순'성이겠지만-일본의 유연성은 바로 이러한 그들의 특성에서 비롯
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그 특성을 살려 유불선을 합친 종교를 만들었다. 그나마 생활을 '지배'하는
종교는 아니다. 그들에게 종교란 어디까지나 일상생활의 뒤편에 숨어 있다가 필요할 때 나
타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종교라는 것을 절대시하지는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는 종교보다 생활이 더 중요했던 셈인데, 그들이 결혼식은 신도식으로,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한다고 해서 비웃을 일은 아니다. 왜냐 하면 그들에게 있어 '식'이란 어디까지나 의식일 뿐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잡식'이기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결혼식은 서구식으로 하
면서 식이 끝나자마자 폐백이라는, 남성 우위를 만천하에 공고하는 전통의식이 시작되지 않
는가?
인간은 의식을 위해 뭔가의 형식을 필요로 한다. 일본인의 경우 그러한 형식을 여러 종교
로부터 빌어 왔을 뿐이다. 그것은 '종교'를 우습게 보는 것이라고 분개하는가? 당신이 그렇
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종교의 '내부'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문명개화에 성공한 것도 이 특질을 적극적으로 발휘했기 때문이다. 서구의 생활양
식과 사고방식을, 다르다고 해서 이단시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일축하는 대신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키며 배우려 했고 끝내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1500년대에 이미 총을 만들어낸
것도 다름 아닌 그런 그들의 특성이 가능케 한 일이다.
여기서 비판되는 탐미주의 문학은 다니자키 준이치로나 미시마 유키오와 같은 몇몇 탐미
적 작가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서양에서 가장 일찍 받아들여지고 평가
된 작품들은 바로 그런 작품들이었다. 물론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반영된 평가였지
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정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들의 문학이 혹은 그 어떤 것이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사고방식과 우리가
여러 가지 자기 규제 하에서 드러내지 않는 부분을 그들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말들 역시 박경리의 시각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일본의 실용주의적 적응능력은 근대화를 이룩한 정신적 토대가 되기도 했지만, 이는 곧
일본의 정신적 빈곤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외형적으로는 세계 최고수준의 경
제대국이 된 지금도 그 대외적 행동이나 문화수준에서는 대국이나 선진국의 그것에 크게 미
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원칙과 이념, 철학이 외국 문물의 수용과 근대화과정에서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김영명, '일본의 빈곤',53쪽)
자기도취에 빠진 일본인들의 대세계관은 이처럼 독선적이고 편협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부터 넓은 시각을 갖지 못하고, 다른 국민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알지 못
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에서 당연히 생겨나는 그들의 큰 한계이다.(신평, '일본땅 일본바람',
세대,1990,253쪽)
물론 일본에도 문제는 있다. 그러나 일본인은 '원래부터' 편협하다는 생각은 그것을 그들
의 태어날 때부터의 '특성'으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편견을 조장한다.
여기에는 한 민족을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지으려 하는 본질주의가 있다. 그것은 민족을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균일한 집단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민족구성원들의 역사적, 계층
적, 성적 차이를 무시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한 대상을 표현하는 단어에 대한 열망은 어
쩔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경우엔 우리는 그것을 의심하
고 거부할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에 관한 담론에 대해서도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6: 일본관의 원형, '국화와 칼'
실은 이러한 일본관의 원형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국화
와 칼'은 일본론의 고전격이 되고 있는 책이지만, '미를 사랑하고 아름다운 국화 만들기에
온 힘을 기울이는' 아름다운 심성의 일본과 '칼을 숭배하고 사무라이에게 최고의 존경을 바
치는' 잔인한 일본이라는 식으로, 두 얼굴을 가진 일본으로 규정한 것이 바로 베네딕트였다.
베네딕트는 유교적 가족주의가 일본의 의식을 결정하고 '온'이 일상생활을 지배하며 일본
인들은 '자기 분수에 맞는 위치'에 있으려 하며 '수치감'이 행동을 규정한다고 했다. 이 분
석은 주종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집단주의와 계층사회로서의 일본상을 굳혔지만, 실은 집단이
아닌 개체로서의 존재방식도 강했고 절대적 수동성의 이미지에 반하는 서민층의 봉기도 적
지 않았다는 식의 반론이 최근에는 강세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베네딕트는 일본에 체재한 적이 없었고 그의 연구자료는 미국에 거주
하던 일본인이거나 문헌이었다.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뛰어난 분석을 보여주었지만,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에 언어 해석에서 오류를 범하는 한계를 드러내고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분석대상은 근대 이전의 일본이 중심이었고, 현대라 해도 1944년까지의 일본이었다. 그
런 한계를 보지 못하고서는 기존의 판에 박힌 일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국이 그녀에게 연구를 시킨 것은 전쟁이 끝나고 일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해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일본을 야만국으로 보고 있던 시기였고, 그런 우
월감과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일본인을 세상에 흔치 않은 희한한 종족으로 특수화시킨 부
분이 없지 않다.
한 대상에 대해 한 마디로 말하는 일은 대상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를 무시하는 일이
기도 하다. 물론 규정은 때에 따라 필요하지만, '차이'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런
데도 그 차이가 무시된 결과 ,서양 사회에도 있는 계층사회가 일본에'만' 있는 것으로 규정
되거나 동양 공통인 유교적 관념을 일본만의 가치관인 것처럼 '국화와 칼'은 서술하고 있
다. 그 결과, 이중적인 일본인상은 평화 속에서도 언제 칼을 빼들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확산
시켰고, '이해할 수 없는 위험한 민족'의 이미지를 유포시켰다.
이렇게 타자에 대한 분석은 분석자가 속한 시간과 공간과 자질에 의한 한계를 보이는 법
이다.
최근의 베스트셀러인 '먼 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이원복) 도 기본적으로는 베네딕트적 시
각을 답습하고 있다. 일본은 칼의 문화라거나 사무라이에 대한 이해나 창의성에 관한 설명
이 그렇다. 혹은 이기주의나 '이지메'에 관한 해석, 폐쇄성, 일본어를 퍼뜨리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시각도 기존의 경계성 발언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일본어의 확산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일본어는 이제 세계 사용자수 3위에 달한 언
어다. 언어란 어떤 의미에서 경제 자체기도 해서 강대국의 언어가 항상 세계 속에서 중심이
되는 건 그 때문이다. 개인이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 나라를 알고자 하는 욕구
와 같은 소수의 동기를 제외한다면 그 언어를 배우는 것이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고 최종
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최근의 영어 열기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무지와 편견으로 점철된 여타의 일본론과 비교한다면, 이 책은 편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보이는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류들이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일본에 관한 한 편견의 배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라 해야 할까.
7: 일본 문학 이야기(1) -'설국'에서 오에 겐자브로까지
1) 경제의 선진성은 문화의 선진성으로 이어진다
박경리는 일본 문학을 폄하하지만, 일본 문학은 이제 한국에서도 확실한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문학 이전부터 인기 있던 만화는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 걸까. 어떤 사람들은
일본이 만화로 문화 '침략'을 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침략'이라는 것이 수용
자의 의지를 무시한 폭력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압도적 숫자의 소비자들의 (읽고 싶은)
욕
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화는 수입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침략'이
라고 부르는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존재하지 않는 일본의 '의도' 만들어내기에 가담하
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읽고 싶은 걸까. '일본' 것이라서? 물론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재미
'와 '감동'(이는 대중문화가 소비되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을 추구한다. 언젠가부터 청소년
들
의 화제에 오른 대상이 '일본'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일 따름이다.
서구의 문화가, 그것이 '서구'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필연성-예를 들면 선
진국의 것이라는, 그래서 더 높은 수준의 문화에 접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지적 욕구를 충족
시켜주는-을 갖고 우리와 만나게 되는 것처럼, 한때의 음성적 일본 문화의 유입 역시 '일본
'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진'국이거나 유입조건이 좋은 '이웃'의 것으로서 이루어지고 있
었다. 일본의 만화는 일찍부터 미국으로 아시아로 수출되고 있었고, 한국의 만화 수입 역시
그러한 흐름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었다.
경제의 선진성은 필연적으로 문화의 선진성으로 이어진다. 일본이 '경제'대국이지만 '문화
'대국은 아니라고 생각하려는 경향은 경제와 문화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오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경제를 뒷받침하는 고도의 기술 역시, 넒은 의미에서는 그 민족
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갈고 닦은 '문화'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과거에 일본의 '선진'국이었던 것처럼, 오늘의 일본이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가고 있음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그들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후진국이 어느새
훌쩍 앞서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불편해한다. 하지만 그들이 과거에 우리가 문화를 전
해준 후진국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쩌면 식민지가 되었을 때 이미 잊어야 했는지도 모
른다.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21세기를 코앞에 둔 오늘이고, 오늘 우
리가 그들에게 뒤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이야말로 더 이상 뒤지지 않는 길로 이어
진다. 그 명백한 사실을 보지 않고 90년대의 대부분을 '우리식'으로 하면 된다는 식의 자기
만족에 빠져 일본에 대한 편견과 왜곡에 열광했지만, 이대로라면 우리는 '일본'에 뒤질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서도 뒤쳐지고 말 것이다.
2) 오에 겐자브로의 '상상력'
일본 문화가 경계의 눈초리를 받는 동안에도 '문학'은 별 문제 없이 유입되었던 분야였다.
그러나 한 시대 전에 교실에서 학생들 사이에서 돌려가며 읽혔던 '빙점'이나 노벨상을 받
았다고 해서 유명해진 '설국', 심지어는 임신한 부인들이 태교 목적으로 읽는다는 묘한 수
용형태를 보였던 '대망'을 제외하면, 80년대 말까지의 일반 독자들의 일본 문학에 대한 관
심과 지식은 거의 전무에 가까운 것이었다. 문단에서도 일본 문학은 경시되는 경향이 있었
고, 우리의 눈은 오로지 서구 문학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2,30년.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그 동안 훌쩍 성숙해진 일본 문학, 그리고 그에 따른 일본 문학의 세계화 현상이
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그들은 오늘날 영어로, 이태리어로, 불어로 활발히
번역되면서(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의 자발적 번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쌓여 가는 무역흑자에 일조하기에 이른 것
일까.
90년대로 들어선 이후 우리에게는 현대 일본 작가의 작품들이 적지 않게 소개되었다. 지
속적인 베스트셀러로 자리잡고 스테디셀러의 대열에도 끼게 된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시해,
노벨상 수상이라는 화려한 타이틀과 함께 갑작스럽게 알려진 오에 겐자브로, 신세대 작가로
알려진 요시모토 바나나,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면서 우리에게도 유명해진 교포작가 유미
리 등, 대가에서 신인급까지 활발히 소개된 덕에, 우리에겐 불충분하나마 현대 일본 문학의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자료가 주어져 있다. 여기에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와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아사다 지로까지 넣는다면, 우리에게 이미 일본 문학은 생소한 것
이 아니다.
우선 먼저 명실공히 현대 일본 문학의 거장으로 우뚝 선 오에 겐자브로에 대해 생각해보
자.
그가 장애아, 핵 등을 소재로 인류의 멸망이라고 하는 절박한 위기감 속에서 '구원'으로서
의 문학을 지향한 작가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다. 그는 '상상력'이라는 어휘
를 곧잘 쓰는데,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창조적 공상력과는 거리가 있는 단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능력이 그가 말하는 '상상력'인데, 이 말은
간단하면서도 실천은 간단치 않은(크게는 인류가 이제까지 자행해온 그 수많은 전쟁, 작게
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많은 갈등을 빚어내는 육체적, 정신적, 언어적 폭력들이 바로 그 '
상상력'의 부족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 어휘야말로, 오에 문학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 중의 하나다.
그가 시종일관 추구해온 것은 인간에 있어서의 '폭력'의 문제다. 예를 들면 1967년의 작품
인 '만연 원년의 풋볼'은 근대 일본이 낳은 가장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라 단언할 수 있는
데, 그건 거기에 인류의 불행으로 이어지는 '폭력'에 대한 깊은 사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타자 배척-이물감 제거에의 끝없는 지향-이 시작되는 장소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은 우선 자신 속의 폭력으로 향한다. 나아가 그 눈은 자신이 속했던
작은 시골마을이라는 공동체를 들여다보는 일로 향하게 되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일본이라
고 하는 공동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비판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
을 들여다보는 일 그 자체다. 이것이 오에가 이루어놓은 일이다.
3) 일본 작가들이 '타자'와 '폭력'에 맞서는 방식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이 젊은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우리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
상이지만, 하루키의 문학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문학을 '상실'이라는 어휘에 의
거해 읽는 데는 문제점이 없지 않고, 그가 '태엽 감는 새'에서 처음 시도한 '타자'를 향한
적극적인 손 내밀기와 '역사' 들여다보기는 꼭 성공한 시도였다고 만은 말할 수 없다. 그러
나 '상실의 시대'라는 감상적 작품으로 알려진 그가 늦게나마 그런 시도에 나섰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을 그러한 시도에 나서게 한 것은, '양심'이라기보다는 '지성'이다. 오늘날의 세계적
사상가들의 양상은 달리 하면서도 공통적으로 천착하는 문제가 인종차별과 종교분쟁 등이
야기하는 폭력이라는 점, 나아가 어떻게 하면 이질적인 것을 배척하는 인간의 본능-정확히
말하자면 본능뿐 아니라, 동질성을 강조하는 교육의 결과기도 하지만-을 넘어서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가(예를 들면 데리다는 그 방법의 하나로 '호혜' 개념을 제시한다.) 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것은 분명하다.
물론, '타자'와 '폭력'이라는 문제제기라 '역사'면에서의 접근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
니다. 신세대 작가처럼 알려졌지만 이미 중진 작가라 해야 할 야마다 에이미의 경우, '풍장
의 교실'에서 교실폭력의 문제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유발케 하
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며 그러한 '폭력'에 맞서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작가가 제시
한 방법에 대해 '인내'라든가 '사랑'이라는 도덕적 대답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기존의 가치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찾아낸 그 선택은, 최상의 것은 아닐
지라도 주인공 소녀가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택할 수 있었던, 글자 그대로 '현실적
인' 선택이다. 동시에, 흑인이 자주 등장하는 야마다 소설의 또 다른 주요 테마가 인종차별
문제라는 것은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차이'에 대해 '차별'을 행사하는 인간의 본능, 그
근원을 깊숙이 들여다보려 하는 야마다의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오엔 겐자브로의 작업과 전
혀 달라 보이면서도 맞닿아 있다.
유미리의 소설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붕괴 직전에 있거나 붕괴 이후의 가족을 주로 다
루고 있었다. 그녀의 소설은 '가족'을 하나의 제도로 인식할 뿐이며, 그에 따른, '혈연'에 대
한 냉정한 거리 두기라는 자세를 취한다. 가족을 다룰 경우 가족의 붕괴를 애석해하는 것이
중심이었던 우리 문학이 '혈연' 환상에 기대고 있는 것이라는 점, 따라서 '제도'로서의 가족
-현재와 같은 개념의 가족이 정착된 것은 고작해야 100년이 되지 않았고, '가족' 개념은 의
식적, 무의식적으로 타자 배척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의식의 정착되기 전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소설과 유미리의 소설이 서 있는 곳이 한 동안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마다 마사히코의 건조한 소설들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역시 자신 속에 존재하는 '공
동체' 환상을 일찌감치 떨쳐버린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일본'인으로서의 '
주체'성이란 실소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이 아닌 어딘가, 도시가 아닌 '교외', 중심부
가 아닌 주변부에 남기를 그는 희망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떠 있기를 희구하는
곳은 어딘가에 '속하'지 않아도 되는 '중간지대'다. 그건 그가, 단순한 주변부에의 동경이
또 하나의 중심부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경우는 얼핏 보기에는 이들과 좀 달라 보인다. 예를 들어 '가족' 개념
만을 두고 본다면, 그녀는 유미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장소에 서 있다. '가족'은 그녀에게
는 거리 두기 곧 상대화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여전히 위안 받는 장소다. 그러나 좀 더 들여
다보면 그 '가족'은 꼭 '혈연'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같은 공간에 살면서 바깥
에서의 상처를 위무해 줄 수 있는 상대, 바나나에게 '가족'의 성립요건은 그것만으로 충분하
다. 그뿐 아니라, 동성연애자라든가 성전환자 등 아직 사회 속에서 용인되지 못하고 있는 존
재도 그녀의 소설 속에서는 이질적 존재가 아니다. 모든 존재를, 자신과 같거나 비슷하기 때
문이 아니라, 다른 채로, 혹은 다르기 때문에 끌어안는 그녀의 소설은, 인류의 비전을 제시
하는 또 하나의 작은 유토피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시도의 성공 여부는 놔두고라도 평
가할 만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은 좁은 의미의 '소설'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얻을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그녀의 가치관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가 우선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일본'의 한 작가가, 현대가 아닌 고대의, '일본'이 아닌 '로
마' 이야기를 써서 호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번역된 히라노 게이치로도 마찬가
지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세계를 대상으로 해 관심사항을 심도 있게 흡수, 소화해내고 충분히 사유해 자신의 것으
로 재창조해내는 일본 자체의 특성이 문학에서도 발휘되고 있는 셈인데, 그 바탕에 예를 들
면 일본 고전문학은 물론 근대 초기의 문학까지도 패러디화되는 강도 높은 흡수력이 있음은
물론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심도 있는 천착-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전통'의 계승
이 아닐까-이 그 대상을 넓히게 되면, 세계 공통의 자산까지도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게 된
다. 그런 과정을 거쳐 '모방'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 재창조가 일본에서는 눈에 띄게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소재를 넓히는 것은 소재의 진부함과 상투
성을 탈피하는 탈출구가 될 수 있다. 그를 위해서는 물론 유연한 사고와 폭넓은 지적 호기
심이 필요한데, 시오노 나나미가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을 가지
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화가 세계로 수출되고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
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 '사해문서'[주: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 사해 근처 동굴에서 발견된 양피지 문
서. 2000년 전의 히브리어로 쓰여진 그 내용은 기존의 성서의 권위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어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음.]등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다.
4) '설국'의 30년 후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작가까지 포함한다면, '폭력'과 '차별'에 대한 관심, 중심화 현상의
지양, '문학', '모국어', '민족' 등 우리가 자명시 해왔고 또 여전히 하고 있는 개념에 대한
거리 두기, 폭넓은 지적 호기심 등이, 현대 일본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공
통요소다. 우리 문학이 90년대에 개인의 내면과 '죽음'을 다루고 있을 때 그들은 공동체의
문제와 죽음을 건너뛴 '삶'을 모색하고 있었다. 단절이니 고립이니 하는 자폐적 문학을 벗어
나 '관계'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자기미화를 벗어나 자기비판을 시도하고 있었다.
대책 없는 냉소와 감상적 고독과 자기비판 없는 억압의식, 메마른 공허감 등등은 더 이상
그들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일상의 무의미'를 거론하며 자신을 껍질 속에 가두는 문학이 아
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그것들이 주류가 될 수 없는 것이 현대 일본 문단의 상
황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모두 현대 일본 문학이 종래의 감성적 '문학' 속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
타자'를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한 데서 일어난 현상이다. 자기 투영적인 타자가 아니라 살
아 있는 '타자'를. 그리고 그건 그들이, '타자'에게 열리지 않는 '자기' 이야기가, 나르시시
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따라서 비생산적이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세계는 여전히 인종차별과 종교분쟁이 끊이지 않고, 지구 어디에선가 난민은 생기고 있으
며,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공존을 위한 지혜일
것이다. 현대 일본 문학은 '타자'를 만나는 길을 각기의 방법에 따라 모색하고 있으며, 그들
의 세계 진출이 순조로운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오에의 문학이 노벨상 수상을 통해 세계문학으로서 자리잡게 된 사실은 이를 증명하는 좋
은 케이스였다. 오에보다 앞서 노벨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은, 최종적으로 총
괄하자면 '설국'이 보여주고 있듯이 '일본의 미'를 추구한 문학이었다. 그러나 오에의 문학
은 '일본의 미'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오에에게 상이 주어졌다는 것은, 불과 30년이
채 안 되는 동안에 세계의 문학관이 변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30년 전, 온천마을의 게이샤(기생) 를 중심으로 서술되었던 일본적 아름다움
의 표현을,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평가했던 노벨상 위원회가, 이제는
(30년 동안의 지적 수준의 고양에 따른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라 해야겠지만) 달라졌다
는 말도 되겠다. 가와바타와 같은 자국중심주의적인(바꿔 말하면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문학이 아닌, 비록 무대는 일본의 산 속 작은 마을일지언정 세계인이 '내 이야기'로 공감할
수 있는 인간 근원의 문제를 다룬 문학을 지금 세계는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8: 일본 문학 이야기(2) -문학의 세계화에 대하여
1) 왜? 우리 문학이 일본에 어디가 뒤지는데?
1994년 가을, 일본의 오에 겐자브로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사람들은 일본이 '로비
'를 잘해서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건 물론 언론의 은근한 부추김과 그렇게 생
각하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욕구가 만나 빚은 분위기였는데, 그러한 분위기 뒤에 "왜 우리
는?" 이라는 물음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왜? 우리 문학이 일본에 어디가 뒤지는데? 이렇게
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문학이 있는데 우리가 못 탈 이유가 뭐지?...
아마도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당시, 언론들은 오에가
일본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임에 안도하며 호의적으로 보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노
벨상 심사위원들이 이미 대부분 노인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노벨상의 권위를 깎아 내리는 것
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 안심하라, 한국인들이여. 이번 수상은 일본의 경제력에 주어진 것이
지, 그들의 문학이 우리보다 특별히 훌륭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신문들은 이런 메시지를
알게 모르게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오에의 수상은 결코 그런 맥락으로 생각될 수 없는 일이었다. 설
령 오에 개인의 문학성이 수상에는 불충분한 것이었다고 누가 주장한다 치더라도, 이 수상
은 오에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일본 문학 전체의 수준이 세계로부터 인정받았음을 나타내주
는 것이었다. 일본 작가들은 1968년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수상하기 전부터 이미 미시마
유키오, 이오우에 야스시, 아베 코보 등이 해마다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는 일본 내의 기대가 컸던 것으로 보이는 아베 코보나 이오우에 야스시가 운 나쁘게도 세상
을 떠나버린 다음, 얼마쯤은 그들의 몫이라고도 할 수 있을 상이 '오에 겐자브로'라고 하는
한 개인에게 주어졌다고 간주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일 것이다. 말하자면 1990년대 초반의
그들의 일본 문학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알던 것보다 훨씬 깊고 폭넓은 것이었고, 그런 의
미에서도, 오에 자신이 겸허하게 말했듯이 그 해의 상이 '일본 문학' 전체에 주어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이는 것이다. 일찍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함께 후보로 거론되었던 미시마
유키오가 가와카타 대신 노벨상을 수상했더라면 미시마의 자살이라는 저 희극적이고도 비극
적인 마지막 순간은 없었으리라는 설이 회자되고 있다는 것도 이미 3,40년 전부터 일본 문
학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적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2) 아베 코보의 충격
미시마 유키오나 다니자키 쥰이치로는 가와바타와 함께 비교적 일찍부터 해외에 소개되어
높은 평가와 인기를 누렸던 행복한 작가였다. 다니자키의 경우는 인간에 있어서의 '성'의 문
제를 철저히 추구한 작품이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깊이 다룬 것으로 평가받았고, 미시마 역
시 일찍부터 희곡집 등이 번역, 상연되는 등 그 센세이셔널한 죽음과 함께 해외에서 가장
유명해진 일본 작가기도 했다. 이들은 분명 '그로테스크'나 '에로티시즘'의 요소를 갖고 있
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부정적 평가로 이어져야 할 것은 아니다.
가와바타, 미시마, 다니자키 등은, 해외에 소개되어 일정 수준의 평가를 획득한 제1세대라
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주로 '일본'이라는 주체를 강조한 '일본'적인 작품으로 어필했다고
한다면, 이후의 세대, 제2세대는 이들과는 반대로 '일본'과는 별로 관계없는 주제로, 말하자
면 어떤 보편성을 추구하는 자세로 외국 독자들에게 다가갔다.
예를 들면, 한 프랑스인의 술회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아베 코보의 충격은 그의 작품들이
너무나도 '일본'의 이미지와 동떨어진 것이었다는 사실-벚꽃도 농염한 에로티시즘도 없고,
애매한 미의식 대신 명석한 논리가 존재하며, 황폐한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자신
과 타자의 탐구라는 테마-에 의한 것이었다. 그 아베 코보에 열광한 한 서양인 독자에 의해
아베 코보는 번역되었고,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후 해외에 소개되고 평
가받았을 뿐 아니라 일정한 독자층을 획득하게 된 작품들은 대개가 어떤 보편성을 내포하는
작품들이었다.
오에 겐자브로의 작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소개되었고, 그의 대표작 '만연 원년의 풋볼'
은 작품 발표 4년 후인 1971년에 번역되었다. 말하자면 거의 동시대적인 관심과 소개가 서
양에서는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현재의 평가는 그러한 축적이 쌓인 끝의 평가였던
것이다.
차별받는 계층의 고통에서 야기되는 성과 육체의 폭력에 깊이 천착한 나카가미 겐지도 영
어권과 불어권에서 높은 평가를 얻고 있으며, 다자이 오사무의 딸이기도 한 쓰시마 유코도
이미 20여 년 전에 서구에 소개되어 소설이 드라마화 되기도 했는데, 자명한 것으로 여겨져
온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높이 평가받고 있다. '겐지 이야기'와 같은 고전의 전
통을 이어받는 섬세한 여성문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지적 훈련을 쌓은 이
에게만 가능한 현대적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쓰시마 유코가 평가받게 된 이유기도 하
다. 현재 세계 각지에서 이들 1,2세대의 문학에 관한 국제 심포지움이 심심치 않게 열리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연구의 대상으로서, 말하자면 인류의 자산의 하나로서 자리잡게 되었
음을 말한다.
그들에 이어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이후에 소개된 제3세대의 특징은, 그들에 관한 홈페
이지가 외국인 팬에 의해 제작,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평론가들의 평가
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열광적인 독자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언뜻
젊은이들의 세련된 일상을 그리고 있는 것 같으면서 인간의 깊은 곳을-'우물'로 상징되는-
들여다보려 하는 진지함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경우는 온갖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하
는 따뜻함으로 읽는 이에게 어떤 위안을 주는 것이 인기의 이유라 할 수 있겠다. 또 시마다
마사히코와 같은 작가는 아이덴티티의 파괴 욕구 혹은 존재의 근거 없음에 관한 인식이 루
트를 부정하는 일본인의 새로운 모습으로서 공감을 얻었다. 그 결과 외국어로 번역되어 독
자를 확보하게 되면서 20세기 말 현재의 일본 문학은 가벼운 오락으로서의 지적 엔터테인먼
트의 역할까지-즉 생활 속에 자리잡는다고 하는 세계화-해내기에 이른 것이다.
3) 한국 문학이 세계화에서 뒤지고 있다면
그들이 왜, 어떤 점을 평가받고 있는지는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고, 한 나라의 문학이 해외에 소개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번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앞서의 일본 문학들이 소개된 과정을 보면, 대부분 일본으로 유학했던 유학생들이 기여한
바가 컸음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계기로 자국에서 일본에 관한 공부를 하게 되었던
학생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그러다가 한 작품과 만나, 그 작품에 대한 열광이 그를 '번
역'이라고 하는 지난하고도 힘든 과정에 발을 들여놓고 나아가 연구하도록 하며, 자신의 나
라로 돌아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반인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이야기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한사람에 의해 번역과 작품 평가와 독자
확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고, 앞서 '로비'설을 부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인데, 여기
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현재까지의 일본 문학 소개가 대부분 번역자의 자의에 의해 이루
어졌다고 하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의욕을 갖게 된 이들에 대한 후원 시스템이 일찍부터
잘 구축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일 뿐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
소한 계기로 시작된 한 나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그 나라의 문학을 소개하는 열정으로까
지 발전해 수많은 번역자와 연구가들을 산출해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관심이, 패전 직후였다면 동양의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라는 부정적인 모습, 그 이
후라면 경이로운 경제발전의 나라라는 긍정적인 모습 중 어느 쪽 인가로부터 야기된 사람들
이 많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개중에는 한 일본인과의 만남, 짧은
일본 여행과 같은 사소한 계기 역시 적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계기가 어떤 것이든 일본
을 더 잘 알고자 한 그들에게 일본이라는 존재가 더욱 큰 매력을 가진 존재로 다가왔으리라
는 점은 분명하다. 그들의 관심과 열정을 지속시킨 것은 바로 이점이었을 것이고, 이점이야
말로 중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관심을 끌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고 그 관심을 지속적
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 이것이 현대 일본 문학의 세계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문학이 일본 문학보다 세계화에서 뒤지고 있다면, 그 이유는 이미 분명하다. 우선은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의 애정을 유발하는 조건이 부족했던 데서 오는 번역 인력의
부족이다. 나라로서의 매력을 지닐 것,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그것은 제도적인 번역가의
'양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물론 작품 자체의 문제도 있다.
우리는 한국의 토속적 정신이 잘 녹아나 있는 작품을 훌륭한 것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
고, 박경리의 '토지'가 높이 평가되는 것도 그와 같은 가치관과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이
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우리 것이 세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에의 '만연 원년의 풋볼'의 경우, 그 배경은 일본의 산골이지만, 거기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은 그 '토지'의 미화가 아니라 공동체성에 대한 비판이고 '타자'에 대한 열린 시각이다.
한때 신문에 났던 '토지'의 광고는, 프랑스인 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 한국인들을 사랑하
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는 말을 전하고 있었는데, 그런 식의 말에 기뻐할 일은 아니다. 그
건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이 반영된 말에 지나지 않으니까.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은 그들이 '한국인들을 사랑'해주는 일이 아니라, 말하자면 인류학적
인 관심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 이야기'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즉
특수성을 그리지만 인류 공통의 문제로 심화된 문제의식을 느끼도록 해주는 점을 그 작품이
갖고 있는가를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며, 바로 그러한 작품만을 우리는 세계 속의 공동자산
으로 내보일 수 있다. 예컨대 아프리카 문학이나 남미 문학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아프리카 사람이나 남미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보편적이고도 근원적인 문
제, 시대와 공간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 있는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한 작가의 작품이 지속적으로 읽히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이 우리가 '문학'을
찾는 이유, 위안, 구원, 즐거움 등등을 충족시키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한국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인간' 문제로서의 공통적인 어떤 발견이 있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한국을 알
기 위한' 작품은 문학으로서보다는 사회학적, 인류학적 자료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고,
그것으로써는 지속적인 독자층이 형성되기가 쉽지 않다. 오에의 작품이 인류의 보편적 테마
에 다가간 이야기였음을 참고로 한다면, 우리가 어떤 문학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는 분명하
다.
지금 우리가 좋은 작품으로 생각하는 작품이 다른 나라의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가? 우리의 '가치'는 그들에게도 '가치'일 수 있는가? 우리의 '감동'은 그들에게도 '감동'일
수 있는가? 우리 문학의 세계화를 향한 출발은 그것을 묻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문
학 역시 '유통'되는 '상품'인 이상, 현재 세계 속에서 '팔리'는 상품이 어떤 것인지를 인식
하는 일은 중요하다. 물론, 우리에게 그런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누가 그들을 밝
은 눈으로 평가하고 '읽는' 일로 밀어줄 것 인가다. 세계화의 여부는 거기에 달려 있다.
제4장: 한국 민족주의와 반일
1: '진출'인가 '침략'인가-확장주의적 민족주의
1) '진출'인가 '침략'인가
99년 7월 21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광활한 평야를 배경으로 한 전면광고를 보자. 거기에
는 {광개토대왕님, 야후는 '다음'이 꺾겠습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
다.
우리의 국토가 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신 분, 천육백년전에 이미 세계화
를 몸소 실천하신 분. '다음'은 야후를 실력으로 꺾고 대왕님의 자랑스런 후손이 되겠습니
다.
'다음'뒤에는 250만 대군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네티즌 중 약 절반은 이미 '다음' 회원이
며...
이 광고에는 '우리의 국토가 대륙이라는 사실'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이 보인다. 김진명식
의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발상과 다를 바 없는데, '대륙'에 대한 동경과 환상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는 이미 앞에서 본 대로다. 여기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천육백년 전에 이미 세계화
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정벌이라는 이름의 침략을 '세계화'라고 생
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일본이 설령 교과서에 침략을 침략이라 하지 않
고 '진출'이라 적었다 해도 그것을 은폐나 미화라고 비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교과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인다면, 실은 80년대 초반의 교과서 왜곡이란 꼭 우리가
상상하는 것 같은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도 한일 간의 관계에 언제고 따르는 오해는 없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일본의 교과서가 '왜곡' 일색만이 아니며 "가해의 역사가 기록"(이준호,
'후지산과 대장성', 경운,1997,201-3쪽) 되어 있다는 사실, 혹은 일본 교과서 중에도 (아시아
를) '왜 침략했으며 상대국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가를 정리해보자.'는 과제가 수록되는
등
사실의 직시와 반성의식이 나타난 교과서도 존재한다는 지적(지명관, '벚꽃은 오래 피지 않
는다', 동아일보사, 1993,248쪽) 이 이미 있지만, 그러한 사실은 여전히 우리의 일반 상식은
아니다.
교과서를 문제삼는다면, 오히려 기존의 교과서보다도 90년대 중반 이후의 민족주의에 입
각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 운동이 일어나면서 쓰여지고 있는, 과거를 합리화하는 자화자찬식
교과서 쪽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때는, 그런 식의 자화자찬 내지는 왜곡이 우리
와는 무관한 일은 아니라는 자각도 필요하다.
다시 광고로 돌아가자면, 물론 '야후를 실력으로 꺾는 일'이야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250만 대군'에의 칭송에는 군국주의의 무의식적 긍정이 있다. '다음'이 사업을 잘 하는 것
이야 좋은 일이겠지만, 이런 식의 민족주의적 성향이야말로 배타성과 반목으로 이어지는 것
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개봉된 '철도원'은 자신의 일(공적인 부분) 을 가족(사적인 부분) 보다 중요시했
던 지난 시대의 한 슬픈 이야기다. 근대는 개인이 국가나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당연
시하는 이데올로기가 확산되던 시대였고, 폐쇄 운명에 처한 지방 간선철도의 역장 역시 그
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철도원'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
는 것은 쉽다. 한 신문은 '철도원'과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결부시키고
있었는데, 국가주의를 곧 군국주의와 동일시하는 문제점은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아주 빗
나간 분석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경우 그런 일들이 실은 우리 자신 역시 그런 분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거나 혹은 독자들로 하여금 잊도록 만드는 교묘한 수사법
이 쓰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이미 충분히 본 것처럼.
민족주의는 타국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할 때 혹은 국가의 힘을 길러야 할 때,
구심점을 만들어준다는 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족주의가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관대하지 않다. 말하자면 나는 힘을 기르는 것이 당연시되면서 남의
힘이 커지는 것은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 것을 해외에 파는 것은 권장되지만
남의 것은 못 들어오게 하는 식이다. 더구나 그렇다는 사실에조차 눈감게 만드는 것이 민족
주의다.
때로 부당한 상황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주지만, 민족주의는 궁극적으로는 자국의 이익
을 보호한다는, 모두가 수긍할 만한 이념 아래 실은 '보호' 차원을 벗어나 '증대'시키는 일
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침략자로서의 광개토대왕을 보기보다는 정복자로서의 모습만 보며
열광하도록 만드는 것도 바로 이런 민족주의적 심성이다.
2) 우루과이라운드 반대가 '보호'한 것
90년대 초 불붙었던 우루과이라운드에 대한 반대도 민족주의 열풍을 되살린 것 중의 하나
다. 쌀 개방 반대란 농민들을 보호하자는 발상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농본국가'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심정적인 동의를 얻기 쉬운 것이었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현대와 같은 글
로벌 시대에 농민이나 어민'만'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고에는 설득력이 없다. 과거와 달리 농
민이나 어민보다도 훨씬 열악한 생활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도시노동자도 우리 앞에는
있다.
어업이나 농업은 '토지'와 관련된 것이고 그런 만큼 지켜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국가주의의 본질을 잘 말해주는 사고방식이다. 공동체란 당연히 자신들이 존
재할 영토를 필요로 하고, 그 영토의 필요성은 대개 '예전부터' 그 곳에 있었다고 하는 의식
을 기반으로 강조된다. 말하자면 '토지'(바다도 물론 영토다.) 와 관련된 담론이야말로 국민
을 민감하게 만들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독도에
관한 열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는 제 땅에서 나온 것이 몸에 좋다는 '신토불이'를 외치면서 캐나다
의 곰이며 녹용을 먹고 있으니 모순 아닌가? 한국의 꽃이며 야채가 수출되는 일은 자랑스럽
게 보도되면서, 중국산 나물은 농약 투성이인 것으로 보도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불매운동
이 벌어지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우리 야채는 농약 세례에서 자유로울까?
또 한편에서, 기계가 만드는 상품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 그리고 양주니 보석이니
골프채니 하는 고급 상품일수록 그 관대함은 커진다. 그 뒤켠에서 죽어갈 수도 있는 기계산
업이 우리의 관심권에 들어오는 일은 없다. '보호'를 말한다면 어민과 농민뿐 아니라 산업노
동자도 그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것을 팔고 싶다면 당연히 외부의 것에 무조건 배타적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해
외의 우리 민족이 그 곳에서 따뜻하게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우리 역시 외국인에 대해 가슴
을 열어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우리는 외국에서 인정을 받은 음악가니 스포츠선수를 자랑
스러워한다. 하지만 그들이 바깥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타자로서의 그들을 한국인 이
전의 개인, 혹은 지구민의 한 사람으로서 따뜻하게 맞아주고 키워준 그 나라의 토양이 있었
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일 교포에 대한 차별을 그 실상은 잘 알지 못하는 채로 목청 높여 비난하지만,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법률도 뚜껑을 열어보면 별다를 것 없을 뿐 아니라 더 못한
경우도 부지기수다. 오히려 정신적인 배척과 차별은 더하다고도 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 사
람들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도 그렇지만 해외교포인 조선족이나 고려인들에게까지 원성을 사
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배척의식이 실은 일본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을 함부로 대하게 만드는 것은 민족주의의 바탕을 이루는 순혈주의와 우리보다 경제
가 못한 계층을 무시하는 배금주의다. 순혈주의는 단일민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세계로
고아를 수출하고 있는 우리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앞장서서 각 나라의 순혈성을 해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혼혈의 가능성을 앞장서서 높이고 있으면서 우리만은 순혈주의를 고
수하겠다는 것은 모순 아닌가?
세계는 하나가 되고 있고 그런 속에서 지금 활약하고 있는 인물 중엔 혼혈인이 많다. 혹
은 적어도 다른 땅에 던져져 자라난 경우가 많다. 그들의 성공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신의 '피'에 구애할 수 없었던 만큼 타인의 '피'에 상관하지 않는 공간적 조건이 그들에
게 부여되어 있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다른'것을 포용하는 능력이야말로, '
다른'이들이 섞여 살 수 밖에 없는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능력이다.
3) 배타성의 기원
민족주의뿐 아니라 공동체를 단위로 하는 모든 '주의'는 원천적으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
다. 공동체주의, 가족주의 등의 '주의'들은 필연적으로 그 바깥에 있는 이들과 안을 구별지
음으로써 가능한 개념이고, 구별하는 순간이 이미 '배척'의 순간이다. 구별과 '배척' 없고서
는 자기존립 자체가 위험해지니까.
어떤 단위의 '민족' 개념이 정해지는 순간, 그 공동체가 정한 요소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민족'으로서 인정받지 못할 수밖에 없다. 배타성은 자신의 존립을 위협할 그들의
'침범'에 대한 경계의식에서 생겨난다.
한국이 배타적이라는 자각은 IMF 이전에는 별로 없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남에게도
넉넉한 마음을 쓸 줄 아는 정 많은 민족으로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우리의 오랜 미덕으로
여겨져 온 '정'이란, 실은 모르는 이한테는 거의 발동되지 않는 폐쇄적 공동체 내부의 것일
뿐이다. 실제로 현대 한국 사회는 지연과 혈연과 학연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누군가와의 '관계'틀이 모든 방면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가? 당연히
그러한 사회적 요구로서의 관계틀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는 혹독하리 만큼의 배타성이 발휘
된다.
모르는 사람이나 대상을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성향은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줄리아 크리
스테바도 말했듯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한국적 배타성의 수준은 급기야는 아시아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살기 힘든 나라로 꼽을 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왜 우리는 아는 사람에게는 온갖 정성을 다해 마음을 표시하면서 모르는 이에게는 무관심
할 뿐 아니라 적대적이기까지 한가? 왜 배타의식을 조장하는 삼류 민족주의 소설이 지치는
일도 없이 되풀이 쓰여지며 그에 열광하는 독자는 끊이지 않는가?
4) 상처는 내면화하고 대상화할 수 있을 때 치유된다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경계의식을 조장한다. 그래야만 국가=민족이 존속될 수 있기 때문
이다.
우리의 경계의식이 특히 강하게 발동되는 대상은 물론 일본이다. 그것은 일반인들뿐 아니
라 지식인층에서도 예외가 없다. 예를 들면, 한일 문학 심포지움에서 한 한국 평론가는, 심
포지움 개최에 대해 (일본 문인들에게) "상대 국민문학에 영향을 끼치고자 한다든지 심지
어
는 상대국의 번역문학 출판시장에 자신을 홍보하고자 한다든지 하는,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
운 의도들도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이는 구조
적으로 IMF 이후 한동안 그럴 듯하게 유포되었던 외국자본 음모설과 멀지 않다.
그런데 우리의 그런 배타성은 근대화(일단 그것을 긍정적 가치로 간주한다고 할 때) 로의
길을 가로막기도 한 주범이기도 하다. 두말 할 필요도 없지만, 서구라고 하는 타자에 대한
배척이야말로 한국과 중국으로 하여금 근대화에 눈감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의 태
도는 현대의 한자 배척에서 볼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정책에서 압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강렬한 주체
의식과 동일성 환상이다. 그것은 근대국가의 반열에 끼기 위한 조건이기도 했지만 여지껏
그것에 구애하는 나머지 이제 우리는 다른 나라로부터 '배타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기 위한 일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온 것이 아닐까. 물론 그것은 근대 이후 '국가'체계 갖추기에 뛰어들었던 나라라면 모두
가 한 번씩은 겪었던 일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것은 어른=근대국가가 되기 위한 통과
의례 같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국가를 지나 '탈 근대'를 말하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난 20세기 말까지도 한국은 민족주의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을(일본을) 언제까지고 침략자로 간주하는 사고는 지나친 경계의식의 소산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의 배타성의 기원, 곧 뿌리깊은 경계의식은 잦은 외세의 침략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의식 속에 가장 깊게 각인되어 있는 일본이 그 주 대상인 것은 당연
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기원'을 볼 수 있는 지점에까지 와 있으니, 말하자면 냉정한 자기분
석도 가능한 시점에 와 있으니, 이제 그만 해묵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나서도 되지 않을
까. 그럼으로써 일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어렵게 만들어왔던 기억과 경험들로부터 자유로워
져도 되지 않을까.
상처란, 내면화하고 대상화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자신의 상처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분
석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그 치유가 가능해지는 법이다. 상처의 원인을 알면서도 언제까지
고 그 일에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들이대지 않고는 타자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유아적 수준의 나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일본에 대해 언제까지고 피해자로서의 우리를 강조하는 일은 '유아'로 머무르겠다고 말하
는 일이기도 하다. 이젠 그만 성숙해지고 싶지 않은가? 그들의 과거에 대해 분노하고 거부
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로서의 고뇌까지도 이해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가?
'선진국'이란 어쩌면 경제적, 정치적 지표보다도 국민의식의 성숙도가 정해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그토록 지향하는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도, 그런 의식은 필요하다.
2: 문학과 민족주의
1) '아웃사이더' 문학과 '모국어'를 지탱하는 문인
독도문제로 한창 떠들썩했을 때 문인들이 독도를 방문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
었다. 일반적으로 문학은 한 민족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니, 민족 간의 갈
등이 표출되고 있었던 독도에 문인들이 일부러 방문한 것은 당연한 일쯤으로 받아들여졌을
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일반적으로 제도에 저항하는 아웃사이더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은 모국
어의 아름다움에 종사한다는 의식으로 본다면 그 어느 예술보다도 '국가'와 가까운 존재다.
국어 교과서는 문인들의 글이 주축이 되고, 우리는 그들의 언어를 매개로 '민족'을 배우고 '
국민'화된다. 문학이 문학이라는 것만으로 절대적 가치가 부여되었던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문학이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언어'를 지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대립구도 속
에서 문인들이 독도를 방문한 것은, 그 자신들은 의식하지 않았겠지만 이런 구조 때문이다.
'열려'있는 것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문인들이 곧잘 배타적 성향을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모국어'라든가 그를 통해 '민족정신'을 지키는 주역이 자신들이라고 하는 의식
(무의식) 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러니칼한 일이지만 누구보다도 '민족'을 지켜야 할
문인들이 '친일'에 나서고 앞장서서 '일본어'로 쓰기 시작한 데도 이런 배경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문학과 정치의 필연적 관계를 몸소 증명해 보인 셈이다.
2) 김지하의 '민족정신' 회복운동
얼마 전에 시인 김지하가 민족정신을 강도 높게 부르짖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학교에 설치된 단군상의 목이 잘린 사건에 자극을 받은 듯이 보이는 그는, 느닷없이 그 사
실을 두고 "한국에 닥친 IMF가 경제적 위기뿐 아니라 '정신적 공황'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상고사'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할 것을 촉구했다. 단군상의 훼손이 "민족 해체
의 조짐이 농후"하게 나타난 현상이라면서 "생명체에는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
다. 그가 말하는 '구심점'이란 '제정신'과 '탁월한 문화'(조선일보,99.7.12) 라던가. 그런데 구
심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만을 뺀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말도 대중소설가 김진명
의 논리와 비슷하지 않은가?
김지하가 '민족정신회복 시민운동연합'의 대표라는 것을 보면 그가 명실상부한 이 시대의
민족주의의 대표자 중의 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이런 인물이 일본에 있었다면 명백히 '우경
화'니 '국수주의자'로 낙인찍힐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도 그를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
다.
"위기의 시대에 우리의 줏대를 세우고 그 토대 위에 우리의 비전을 끌어오기 위해서 상고
사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시급하다."고 김지하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줏대'는 바로 '민족
정신'일 터인데, 도대체 그가 말하는 민족정신이란 무엇일까.
먼저 그가 말하는 민족정신 '회복'운동이 어떤 것인지 보자.
그는 운동의 일환으로 '왜곡된 상고사 즉시 중지를 위한 시민공청회'를 열고 정부에 항의,
요구사항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천절을 국민대축제로 선포하고 시행
단기연호 회복
해외동포의 상고사 중심 민족교육 개혁
교육부 내 상고사 바로 세우기 특위 설치
문화관광부가 상고사 바로잡기 문화행사 개최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근대 바로 세우기였다. 그것을 위해 정권은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들여 쇠말뚝을 뽑고 총독부 건물을 파괴했다. 그런데 김지하는 '상고사'를 '
바로 세우'자고 말한다. 그 구체적 방법으로 '단군'을 숭상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민
족정신'이라는 것이 회복된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그런데 김진명 역시 관심을 보이던 단군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가 배운 바로는 그는 한국을 연 개조신이다. 그리고 그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우리는
모두 같은 '피'로 연결되는 한 자손이라는 것이 우리가 배운 중심 골자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물론 단일민족사상이다. 그리고 단일민족사상이 강조되는 이유는
물론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고, '민족'이 강조되는 이유는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
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김지하가 말하는 대로 단군을 강조하는 것은 '구심점'을 만들기 위한
것인 것이다.
그러나 '구심점'이란 무엇일까. 지금 현대 세계 사상의 조류는 이 '구심점'을 강조하는 일
의 폐해, 즉 '중심'사상이 만들어온 폐해를 들여다보는 중이다. '중심'주의는 주변부를 소외
시키고 배척하고 급기야는 제거에 나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눈감게 했던 것이 바
로 '뿌리'사상이며 단일민족 환상이며 공동체중심주의였다고 하는 것이 현대 사상의 중요한
결론이다. 그런 이 시기에 김지하가 새삼스럽게 '뿌리'를 강조하는 것은 '한국의' 독자적 사
상 만들어내기에 전념한 나머지 바깥의 사상에 관심이 없었거나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천황'이라는 구심점이 있어야만 나라가 지속된다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사고를 갖고 있
거나 한 것일 터이다. 미시마가 구심점의 회복을 외치며 자살한 지 30년, 세기말 한국은 세
계적 조류를 되돌려놓으려 하는 시대착오적인 담론이 횡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본을 답
습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3) '고유'는 있는가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고유'한 단일민족사상이란 과연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단일민족사상이란 어떤 것인가. 태초에 한 인간이 있었다. 그 인간이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았다. 한 지역에서 바깥으로부터의 다른='불순'한 피가 들어오지 않은
채로 수백 수천 년 이런 일이 계속되었다고 상상하면서 사람들은 '순수'를 상상하고 그에
따른 '고유' 환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태초'의 인간이 '순수'하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을까? 그를 하느님이 손
수 빚어(이것이 바로 단군신화지만) 지상에 떨어뜨려 놓았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그의 순수
란 증명되기 힘들다. 한 사람의 시원의 인간을 상상한다는 것도 무리지만(그들은 이미 그룹,
즉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을 테니까, 그들이 모두 한핏줄이라는 증거는 없다.) ,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몇 천 년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인간의 피가 그 '순수'를 지켜낼 수 있을까?
우리가 곧잘 말하듯이 한국은 수없이 외부로부터의 침탈을 받았다. 전쟁이란 필연적으로
그 나라의 여성을 강간(혹은 사랑이 있었을 수도) 한다는 방법으로, 정복자로서의 증명을 자
신과 상대방 남자들에게 과시한다[하세가와 히로코, {의식으로서의 성폭력}, '내셔널 히스토
리를 넘어서', 도쿄대학 출판부,1998]. 중국계와의 혼혈은 왕족 수준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졌
으며 두 번에 걸친 대대적 일본인의 침략이 한국인의 '순수'한 피를 지켜주었을 거라고 상
상하는 것도 무리다.
더구나 신화에 의하면 우리는 곰의 자손이 아닌가? 처음부터 '인간'으로서의 순수조차도
깨진 상태다. '단군은 우리 조상인가'의 저자도 이미 지적했지만, 단군의 실재인물 여부를
떠나 현재 한국에 사는 우리가 '단군'이라는 한 인물을 조상으로 하는 단일민족일 수 없음
은 분명한 일이다. 한국의 지배계층이 일본을 이루었다는 발상이 가능하다면 중국의 지배계
층이 한국 토착민을 정복하고 국가를 이루었다는 사고도 가능하다. 단일민족임이 주장되는
한편에서 중국인이 시조였다는 족보들이 당당히 존재하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아마도 그 족
보는 중국과 관계 있다는 사실이 가문의 영광이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일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민족이 강조되는 것은 그것을 믿는 일이 '구심점' 만들기로 연결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글자 그대로 '순수'한 '고유'란 존재할 수 없다.
이를테면, 서기가 아닌 단기로 달력을 돌리자는 것을 기독교의 관습이 정한 달력에 전 세
계가 따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겠지만, 서양 중심의 문명을 거부하기에는 이미 서양은 너
무나도 깊숙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자리잡은 것을 언제까지고 '
남'의 것으로 생각하고 거부하려는 사고방식 자체가 민족주의가 시키는 바인 것이다.
그런 사고라면 우리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와 문명의 자산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의복, 서양 음악, 서양 미술, 학문, 온갖 제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현재의 우리를 지탱해주고 있는 것의 많은 부분이 서양 것이거나 일본 것이다. 일본은
천황 중심의 연호가 세계화의 움직임에 반하는 것이라고 내부비판이 있는 이 시기에, 우리
는 새로이 고유력을 공존시키는 데 따른 번거로움을 감수하자는 것일까?
그런 번거로움을 모르는 바 아닐 터인데도 단군력으로 돌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5000년 역
사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대체 역사가 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길이만으로 권위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우리뿐이다. 진정한 권위는 길이가 아니라
내용이 만들어내는 법이다. 말하자면 그 주체가 창출하는 가치가 결정하는 법이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되었나가 아니라 그것이 '현재'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에 따라 권위는 부여되는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권위란 통용되지 않거나 일부에서 통용될 뿐이다.
4) '단군'이란 누구인가
물론 '단군'이라는 인물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군신화가 역사이기보다 '신화'일 수
밖에 없음은 무엇보다도 그 내용이 1500년 통치를 강조하고 1908세의 수명을 강조하기 때문
이다. 한 인간에게 보통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요소가 가미되는 순간이야말로 한 인물이 글
자 그대로 '신화'화되는 순간이다. '신화'는 '신화'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과장이라는
수식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대상의 신화화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상 '신화'의 경우 그 범상한 인간을 뛰어넘은 초월성은 다름 아닌 후예의 존재의 필연성
과 가치, 곧 선민성을 증명한다.
단군신화는 일연이 고려 때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10세기경 몽고가 고려를 침
공했을 무렵 쓰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외부의 위협이 있거나 새로운 왕조(통치자) 가 들어섰
을 경우 인간이 우선 필요로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정당성이다. 말하자면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통한 '구심점' 만들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정당성을 위해 수많은 도구가 이용된다. 그 중의 하나가 신화 창조다. 일본의 신화집
'고지키'도 새로운 왕조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물론 그 때는 그
것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이 '만들어진'것이라는 사실을 어느샌가 잊는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
인하는 일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면서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물론 이런 일 자체가 나쁘다거나 좋다고 말할 일이 아니다. 다만 인간은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위기를 맞으면 크게는 국가가, 작게는 무수한 지역공동체와 가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에 관한 신화를 만들어낸다. 단군신화도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
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 자신의 중심을 파괴하고 해체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만
들어 국가로서의 힘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이유를 모
르는 채로 우리를 옭아매었던 경직된 '중심'사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 어떤 식으로 존
재하는 것이 모두를 편안하고 자유롭게 하면서 타자를 적대시하지 않고도 공동체를 꾸려나
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민족(혹은 종교 등 다른 공동체) 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모
든 전쟁과 살상의 무의미함을 가르쳐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세계가 민족분쟁과
종교분쟁을 넘어서 평화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초등학교마다 커다란 단군상을 세워놓는 일로 한국의 '정신'이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일도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지만, 또 그렇다고 이미 세워진 단군상을 목을 자르는 식으로 훼
손시키는 일도 황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단군은 현재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직동에 있는 단군
사당은 조잡하고 쓸쓸하다. 그러나 그것이 신화가 되었건 역사가 되었건 이데올로기적인 것
이 아니라면, 가끔씩 바라보고 마음의 위안을 받는 인물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물론 좋
은 일이다. 문제는 그런 것은 인위적으로 강요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다.
'단군'을 기반으로 한 '민족정신'의 회복이란, 다시 말하지만 시대착오적이다. 구태여 단
군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지나칠 정도로 민족주의적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어떤 '정감'의 회복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한 강요되지 않은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다. 민족주의와 애국심은 무성한데 진정한 어떤 교감, 모두를 서로
좋아하게 만들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군이나 '민족'을 강조한다
고 해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3: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1) 민족의식의 기원과 '고유한 정체성'
'민족'의식이란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개는 근대가 시작되면서 근대 '국가'의 필요성이
생김에 따라 구심점으로서의 '민족'의식이 신문 등의 매체를 통해 유포된다(베네딕트 앤더
슨, '상상의 공동체', 리브로포토, 도쿄,1987) . 그 때까지 사람들은 '국가'의 개념이나 '민족
'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사는 공동체의 경계인지
를 알지 못했고, 군주의 존재도 실상은 희박한 것이었다.
근대 체제로 개편되면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를 넘보는 일이 생겼고, 혹은 그에 대항해 지키는 일도 필요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한 한 커다란 힘을 가진 공동체인 게 바람직했다.
타국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필요해지는 것은 물론 군대다. '국가'의 이름으로 장정들을 동
원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위해 '죽을'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과거에 그것은 군주에 대한
충성이었지만 새로운 근대국가는 그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것이 곧 자신의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피를
나눈 '민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민족' 개념이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민족' 개념이 성립되려면 순수와 고유에 대한 집착과 환
상이 필요해진다. 근대국가들이, 혹은 현재 근대국가로 받돋움 하려는 수많은 작은 공동체들
이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민족주의 비판에 대해 '열린' 민족주의가 말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열린 민족주의란 근원
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민족'을 실체화하는 일 자체가 타자와 나 자신을 '구별'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그러한 '차이'의 발견은 필연적으로 차별과 배타성을 낳게 하는 것이기 때문
이다. 민족의식은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다른 한편에서 민족주의
는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한다.
문화를 개방하면 '일본화'된다고 우려했던 사고에는 지켜져야 할 어떤 '고유'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져야 할 것으로 상상하는 우리의 '고
유'한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순수한 의미에서의 '고유'란 민족 수준이라면 아직 민족 간의 혼혈이나 교류가 이루어지
지 않은 태초의 시점, 개인 수준이라면 태어나서 아직 주위의 '문화'를 흡수하지 못했을 당
시에나 가능했을 어떤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태어나자마자 먹는 분유는 우리 것인가?
우리가 듣고 본 모든 것은 우리 것이기보다는 서양 음률이었고 서양적 풍경이 많지 않았는
가? 그림책과 비디오 중 우리 것은 얼마나 있었을까.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많이 보았던 디즈니 만화는 우리 안에 미국식 감성을 심어놓았을
까? 일본 만화는 우리 속에 '일본적' 정체성을 형성시켰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외국 문물에 노출되어 외국 것을 흡수한다는 의미에서는 우리는 태
어나면서부터 '정체성'이 훼손된 상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교육을 통해 '한국적'
사고방식과 입맛이 더 편안한 한 개체로 길들여지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미국인도 일본인
도 아닌 어디까지나 '한국적'인 '한국인'일 뿐이다. 동시에 미국인과도 일본인과도 공유할
수 있는 동시대적 공간을 마음속에 갖고 있기도 하다.
모든 지구인들은 외국 문화를 즐기지만, 잊지 않을 만큼은 그러한 문화에 대한 경계심을
키울 것을 교육받는다. 하지만 정체성이란 반드시 그 순수성이 지켜지는 것도 아니며 따라
서 경계의식 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 있다.
2)'민족'이면서 '개인'으로 존재하는 일
그렇다고 '민족'을 잊거나 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이 아니기만
하다면, 민족은(민족주의가 아니라) 이 지구상에 '다른' 것을 존재하게 하여 그 다름을 즐길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하다. 지구가 즐거울 수 있는 건 나와 다른 수많은 인종과 민족이 존재
하기 때문이 아닌가? 다른 문화, 다른 음식, 다른 풍경은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유혹하고,
다른 세상에 접하는 일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볼 수도 있다.
민족이라는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각자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을 때, 그것
은 의식하지 않아도 '한국 정신'=모두가 그렇게도 원하는 '민족정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나타
날 수 있다. '민족'이 필요하다면 각자가 '즐길'수 있는 것으로서, 나아가 권리보다 의무의 주
체로서 '민족'이면 될 것이다. 김치와 불고기를 즐기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으로 특별
시하지 않고 한국 땅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되 이 역시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을 일이다.
우리 문화를 사랑하더라도 이 역시 타국 문화보다 '우수'하다는 비교확인을 하고 싶은 욕망
을 버릴 일이다. '우월성'의 확인은 필연적으로 그 주체를 특별시하는 욕망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그것은 최종적으로 다른 종족을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하는 비극을 낳기도 한다.
'민족'이면서 '개인'으로 존재하는 일은 민족을 버리거나 의식하지 않는 일이 아니라 한국
인이되 이제까지의 '한국인'적 감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방식이다. 그로써 우리는
정치적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필요'할 때 민족일 수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실은 '한국'인이라는 민족의 개체기에 앞서 '학생'이고 어떤 '직업인'이
고 '주부'고 '아빠'가 아닌가? 말하자면 민족적 아이덴티티만이 우리를 구성하는 아이덴티티
는 아니라는 얘기다. 민족 아이덴티티가 강조되는 것은 항상 국가가 그것을 필요로 할 때다.
우리는 지역감정이라는 우리 내부의 타자문제를 이미 갖고 있다. 그것도 말하자면 '다름'
을 참지 못하는 인간의 본능이 야기한 것이지만, 다름을 참지 못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연령의 수준을 나타내는 일이다. 어린아이가 모르는 사람을 거부하는 것처럼.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서, 한국인의 기질은 일본인에게는 버겁고 일본인의 기질은 한국인
에게는 이해되기 어렵다. 인간관계에서 거리를 두지 않는 한국인의 성질이 일본인에게는 버
겁고, 거리를 두는 일본인의 성질이 한국인에게는 냉정한 인물로 비쳐진다. 말하자면 한일
간에는 성격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야 할까. 부부였다면 성격 차이로 이혼할 가능성이 많은
부부다.
하지만 깔끔한 사람을 인간미가 없다고 완전 부정하거나 털털한 사람을 칠칠치 못하다고
완전 부정하는 일은 어리석지 않은가? 결별보다는 융화 쪽이, 최소한의 거기에는 존중과 우
호의 감정이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지 않은가?
3) 애국심이란 무엇인가
한국에 대해 추상적인 애국심을 품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애정'을 가진 사람
들은 드물다. 한 조사는 이 나라의 청소년 중 70퍼센트가 이민을 희망한다는 충격적 사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애국심'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설령 우리의 애국심이 추상적인 민
족주의 구호에 호응하는 '애국심'이라 할지라도.
애국심이란 어떻게 교육되는 것일까. 그것은 '자랑스런' 역사와 '아름다운' 국토를 인식시
키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국가의 '국민'은 그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 의식적 혹은 무
의식적으로 (대부분은 무의식적이지만) '국가'를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을 부여받고 배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계절의 아름다움이니 지구 어디보다도 빼어난 풍광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적지 않은 과장과 무리한 '발견'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말이다. 앞
서의 서울대 교수가 국토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은 그 한 예다.
말하자면 국토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사계
절이 없어도 사막은 사막대로, 초원은 초원대로, 북극은 북극대로 아름답지 않은가.
우리는 민족주의적 교육을 거쳐 비로소 '국민'으로 거듭난다. 실은 별다른 의식 없이 태어
난 각기의 존재를 '민족중흥이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으로 생각하도록 교
육 받는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그것이 보수, 국수로 흐른다는
의미라면 한국이야말로 해방 이후 내내 '우경'의 길을 걸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학교에서는 '국가'를 존중할 것을 배우고 '국민'으로 길들여진다. 이제는 바뀌었지만 '국
민학교'란 바로 그것을 위한 곳이기도 했다. 일제가 패전 후 국민학교를 '소학교'로 고친 것
은, 바로 그러한 '국민'으로 길들여져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만 기억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50여 년의 교육의 결과 이제 일본인들은 국가의식도 민족의식도 우리의 생각
밖으로 희박하다.
우리는 몇 년 전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국민'화 교육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의미에
서는 '국민학교'란 오히려 우리 쪽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교육받은 국민으로서
의 자각은 '국민정서'라는 말을 신격화하고 '국민정서'라는 말은 가치관과 정서의 획일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국민정서는 무조건적인 애국심을 강요한다.
4: 역사란 무엇인가
1) 미화되는 '역사'
90년대 초반부터 중반의 대표적 구호였던 '역사 바로 세우기'에서 의미하는 역사란 민족
정기가 발현된 '역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완벽한 존재일 수 없듯이 그 인간이 만들
어내는 '역사' 역시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것이다. 실제로 20세기의 역사 운운할 때엔 그 세
계사가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것이기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면서도, 우리 자신의 역사
도 그럴 수 있음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건 자신의 역사(과거) 를 '사랑'할 것이 우리에겐 대
전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며,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긍지를 가질 만한 '아름다운' 역사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에서 미화의 유혹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역사'란 한 민족에게 있어 긍정적인 사실만이 '역사'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나라나 다소간 미화된 스토리가 '역사'로서 이야기되는 법이다.
일본에서 이른바 교과서 '왜곡'이 이루어지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부정하
고 싶은 역사, 아름답지 못한 역사를 우리 조상이 이랬다고는 차마 가르치지 못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다. 90년대 이후 이른바 양심적 지식인들의 반성을 '자학사관'으로 일축하며
'국민의 역사'라는 '아름다운 역사' 책을 내놓은 것도 말하자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역사를 가르치고 싶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살상했다는 사실에 조금이라도 '긍
지'를 갖게 하기 위해서는 하다 못해 그것이 이웃나라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우리 자신이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나라 재건에 힘쓰고 있을 때 그들은 국
가와 정치에 무관심한 수십 년을 지내왔고, 그 결과 일본인들이 국가와 민족에 무관심해진
것을 우려한 보수적 우국 충정파의 아저씨들이 나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들뿐인가? 그들이 자신의 조상들이 나쁜 짓을 했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해 '침략'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문제가 있어서 침략을 당했다고는
공적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해방 후 50년이 지나도록 일본의 지배에 대해 '왜' 그런 일
을 당했는가를 돌아보기보다는 그저 '어떻게' 당했는가만 강조돼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잘못된 역사를 고치고 싶다는 것이야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왜 '잘못' 되었던가를
직시하는 일이 아니라, 침략 당한 역사의 흔적을 남겨놓은 것이, 그래서 그 기억을 하루빨리
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한 것이 20세기 말 한국의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하루빨리 잊자, 하루빨리 잊고(우리는 그런 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아름답고 훌륭한 역사만을 기억하자...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란 그런 것이었다. '자존심'
과 민족'정기'라는 말이 그토록 외쳐졌던 것은 그 때문이다.
2) 기자조선의 역사, 일본 천황가의 역사
역사의 '왜곡'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항상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역사 서술 자체
가 인간이 살아온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허구'의 요소가 없을 수 없고, 누가 언제
쓰는가에 따라 허구의 내용은 달라진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역사란 왕의 역사, 통치자의 역사였다. 중국의 경우 왕은 처음엔
혈통으로서 그 정당성을 부여받았지만, 어느샌가 혈통 바깥의 인물이 무력으로 왕이 되는
일이 생기자 혈통 이외의 '왕'의 근거가 필요해졌다. 그 때 '혈통'을 대신한 것은 '덕'이었
다. 말하자면 누구보다도 지력이 뛰어난 현인이 왕이 된 것으로 간주토록 한 것이었다. 현인
이란 우주의 질서를 파악하는 존재였다. 한 무제 때, 공자의 혜안이야말로 한 왕조의 정통성
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이후 공자의 성인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행설이
란, 국가의 흥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후에 '만들어'내 당시의 왕을 합리화시킨 것이기도 하
다.[가지야마 고이치 편, '세계의 역사', 주오코론신샤, 도쿄,1991]. 말하자면 중국의 역사서
란 당대의 왕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일본의 역사서에도 그런 요소는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기자조선과 위만의 역사는 아마도 중국과의 일체감이 필요했을 때 서
술되었고 문제없이 받아들여진 것일지도 모른다. 또 이들의 존재는 한반도가 실은 식민지였
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식민지사관'이라고 펄쩍 뛸
이들도 있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백제 후예가 일본의 천황가
가 되었다는 말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런 생각을 부정하고 싶어지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들의 후예가 아닌 순수한 한국 민족
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자존심이지만, 우리는 어쩌면 침략자의 후예일 수도 있지 않은가? 설
사 피침략자의 후손이라 해도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역사를 배우는 일은 다만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과거를 '보'는 일이어야 한다. 중요한 건
'자존심'보다 우리가 속한 이 영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려는 지적 호기심 쪽이다.
자존심이 중요하다면 과거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만든 오늘과 미래에 바탕해 만족시키고 싶
지 않은가?
3)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 교육
우리가 반일의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역사에서 어두운 부분은
가려진 채 일본의 만행만이 강조되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학생 때라면 국민학교에서부
터 이어진 반일 교과서와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졸업 후에는 독립기념관의 소름끼치는 고
문장면과 이보다 더 리얼한 무수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해방 후 50년 동안의 한국의 교육방침은 원수를 갚으라는 원한 섞인 것이었고, 그런 의미
에서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교육이었다. 우리의 선생님들은 '사실'을 적개심을 키우는
방향으로 강조했을 뿐, 왜 그러한 '사실'이 자행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할 시간과 계기는 거의
주지 않았다. 우리가 오랜 세월 문화를 전달해준 일본이 왜 어느 날 이웃을 '동생'으로 취급
하며 지배하려 했는지, 왜 인도를 침략한 영국과 달리 '말'까지도 빼앗으려 했는지, 반면에
우리는 왜 그런 식으로 지배받아야 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만드는 교육은 이루어지
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해방 후 50년이 지나도록 우리의 역사의식은 피해의식으로만 점철된
미성숙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일본에 관해 어떤 피해가 있었는가를 알되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인간의 보편적 문제로
서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개별적 나라의 문제로 특수화시켜 천인
공노할 극악한 일본과 양순한 한국의 이미지만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문제
로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 지배와 차별의 구조, 민족주의 문제 등과 연결시키면서
그 속에서 한일의 특수성을 보는 교육이 필요하다.
한편 일본에 대해 관대하게 '잊'거나 '용서'하자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해결이 되
는 것은 아니다. 과거지사를 그냥 묻어버리고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와 사고와
행동이 '왜'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는가를 묻는 성숙한 교육이 필요하다.
그 점은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지배와 침략을 가르치되 우월감에도 자괴감에도
거리감을 두면서 자신의 조상들을 대상화하는 일이 물론 그들에게도 필요하다. 그러한 교육
에 의해 자신들을 돌아보는 체험을 한 차세대들은 필요 이상의 피해의식과 자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고, 슬기로운 눈으로 자신과 상대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특수성과 우수성만을 강조하는 일은 언제까지고 서로를 '이겨야' 하는 경쟁상대로만 보도록
만든다.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길게 본다면 우리의 20세기는 그 이전과 달리 일본 쪽으로부
터 많은 것을 받아들인 시기다. 고대 문화나 언어가 어떻게 건너갔는가에 대한 연구는 언어
와 문화와 기술 등 모든 방면에서 연구가 활발하지만, 근대 이후 어떤 식으로 일본의 '기술'
이(우리가 강조하는 도자기 기술이나 인쇄기술 역시 기술이며 문화다.) 받아들여졌고 소화
되
었는가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이상 할 것은 없다.
문화란 줄 수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줄 수 있었던 것을 우월감이 아닌 기쁨으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을 열등감이 아닌 감사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 그 주체는 서로
바뀔 수도 있음을 조금은 무책임하게 인정한다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나올 수 있다. 진정한
자존심이란 사실을 열등감 없이 인정하는 데서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교과서를 다시 쓸 필요가 있다. 타자에 대한 서술 양식도 바꾸고 자신의
신화화도 정도 껏 해둘 일이다. 조상의 훌륭함을 매개로 혹은 타자에 대한 적개심을 매개로
자국에 대한 긍지와 사랑을 갖도록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자신이 어떤가
를 생각하는 일로 애국심을 키울 일이다. 각기의 지난날에 긍지를 갖되 자기미화와 자화자
찬에 빠지지 않을 일이다. 우리는 집안 자랑을 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 범위가 민족이 되면 그 자랑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건 이상하지 않은가?
5: 전통이란 무엇인가
1) 민족의식과 한글 사용
역사교육에서 강조되는 것은 항상 '전통'의 존중이다.
한때 한자를 병행 사용하겠다는 정부 방침을 둘러싸고 논란이 인 적이 있다. 한글을 '지
키'자는 각 관련단체들의 항의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부 언론까지 나서서-이 때 역시 한 텔
레비전 방송은 일본 대중문화 개방 때처럼 즉각 전화조사를 행하더니 국민은 반대한다고 전
했다-정부에 대해 '재고'할 것을 촉구했다. 그건 자신들의 의견(방송사 사장일까? 아니면 앵
커나 프로듀서?) 이 국민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으로 착각한 오만이 아니었을까. 설사 그것
이
순수한 '국민의 의견'이었다 해도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국민'이라
는 이름의 공동체는 집단의 그늘에 숨어 과오를 저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어쨌거나, 거리에 나서서 한자 병행을 반대하는 할아버지들의 보습을 보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하긴 원래는 남자들과 권력계급에 비해 지성이 부족한(?) 아녀자들과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한글 보존을 위해 할아버지들과 남성들이 나서고 있는 20세기 말 한국의 모
습을 세종대왕께서 보셨다면 의아해 하시면서도 즐거워하셨을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한자가
남성들만이 사용하는 '권력'의 상징이었는데, 이제 한자 대신 '한글'이 민족주의적인 발상을
등에 업고 자신만이 살아남아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은 배격해도 좋다고 주장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조선 시대, 그것도 4대 임금님이라고 하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한글은 만들어졌지만, 실제
로 조선 시대에 그것이 보급되지는 않았다. 한글은 '여성'의 문자였고, 힘없는 계층의 문자
였다. 남성권력계급들은 여전히 한자를 사용했고, 한자라고 하는 어려운 것을 알기는 지력이
부족한(부족하다고 간주되었던)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그러던 한글이 본격적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아니 그 이전에 본격적으로 쓰여져야
한다고 의식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다
름 아닌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유'나 '전통'의 관념이 높아지는 것은 그것이 손상될 것 같은 위기
의식, 타자의 침략/지배/침범이 발생할 때다. 근대 이후의 한글 사용 의식도 말하자면 그 일
환이었다. 일제에 대항해 나라의 문화를 지키기 위한 의식의 발로였던 셈이다. 동시에 한글
보급운동이 일어난 것은 문맹의 숫자를 줄인다는 신문들의 '부수 늘리기 작전'의 성격도 없
지 않았다.(강준만,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인물과 사상사, 1998,95-96쪽)
해방 이후의 한글 사용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순히 그런 필요성이 주장되었다
기보다는 이런저런 이유로 민족의식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던 시기의 주장이었다.
2) 선택되어야 할 '전통'
'한글세대'라는 말은 자부심 섞인 뉘앙스로 말해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글'을 우리
가 갖고 있다는 것 자체보다도 혹은 '전통'보다도, 어제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
게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 하는 일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야말로
중요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전통'을 말한다면, 한글보다 먼저 쓰였고 조선에서도 압도적
다수에 의해 쓰였던 '한자'야말로 그 때 중심적이었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전통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한글'만'을 사용할 것을 고집하는 것은 '전통' 보존이니 민족유산을 주장
하는 사고방식에 오히려 배치되는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과거의 유산을 배우기 위해서도
한자가 필요하다고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한글은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이 우리 '고유'의 것이고 '전통'이기
때문에 써야 한다는 주장만으로는 설득력이 없다. 한글을 써야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쾌적
하게 느끼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필요하다. 실제로 한글만의 문장은 읽기 쉽다는 장점이 있
다. 하지만 영어에 관한 노력이 세계와의 소통을 위한 것이라면, 한자를 쓰는 일은 아시아와
의 소통을 우선 가능하게 해준다. 일본에 이어 중국이 관광객들이 많아지고 있는 지금, 그것
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아니면 한국에 왔으니 한국어를 알아야 한다는 식의
경직되고 배려 없는 주장으로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배척하고 마는 걸까?
영어에 대한 논쟁이 결론이 나 있는 만큼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한글'만' 써야
우리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용하는
가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일 테니까.
한국어를 모두 한글로 바꾸자는 주장이 일부 있지만-그들은 한국어가 순수한 우리말이라
고 착각하고 있다-이런 사고방식의 문제점도 '전통'에 대한 사고 자체에 있다. 과거의 것을
무조건 현대로 되살려 놓는 일만이 '전통'의 계승에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이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3) '전통'이 만들어지기까지
하나의 사고가 힘을 얻으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그것은 물론 순수하게 공감을 얻어
서 전파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그 시기의 권력집단의 필요에 의해 선택되고 지켜
지는 과정에서 하나의 진리로 간주된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습속으로 굳어지게 되고 그
한 시대가 지나면 '전통'이라는 말로 정착되게 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이란 실은 어떤 한 시대, 한 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한 생활양식이
며 사고방식일 뿐이다. 그것이 후대에 이런저런 이유로(대개는 민족주의 등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목적으로) 무조건의 숭배와 존중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지만 '전통'이란 그 시대의 생활양식일 뿐이며, 일반인들의 것이 아닌 경우엔 권
력계층의 가치관일 경우가 많다. 이른바 유교 전통 역시 마찬가지다. 유교는 말하자면 그 가
치관이 자신들의 권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남성 지배층에 의해 그 '가치'
가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전통'이라는 말은 그 가치 여부가 음미되기도 전에 근원적인 가치로서 인정된
다. 그것이 하나의 생활양식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사랑할 자유도 거부할 자유도 있어야 할
텐데, 실제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강요된다. 서양에서도 볼 수 있었던 여성차별 이상의 '
칠거지악'이라는 엄청난 족쇄까지도 한 치의 의심 없이 유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져
온 것이 불과 100년 전 일이다. 그리고 현대 한국 여성들은 아직도 이 족쇄에서 자유롭지
않다.
물론 과거의 것이라도 우리를 아름답고 지혜롭게 해주는 것이라면, 또 현대의 우리에게도
쾌적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면 지키고 즐겨야 마땅하다. 의식적으로 지키려 하지 않아도 그
내용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자연히 이어지는 법이다. 그것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
랑'하는 마음들에 의해, 그리고 그 때의 전통을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우리를 또 다른 질곡에 빠뜨리는 가치관과 습관까지도 동시
에 '전통'이라는 이름만으로 존중된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전통의식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그들의 '전통'으로 생각하는 영구 왕실의 고전적 의식이나 타탄체
크무늬의 스커트, 백파이프 등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된 인공적
인 것이었다[에릭 홉스봄. 테렌스 레인저, '창작된 전통', 기노쿠니야 쇼텐, 도쿄,1992]. 그
런 '전통'의식은 대부분의 경우 '민족'의식과 함께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민족주의가 강화되
어야 될 필요가 있을 때 '전통'은 강조되는 것이다. '민족'이 만들어지고 유지되기 위해 '전
통'은 필요했던 셈이다. 그것은 전통이 '자기 이미지'(자신들의 구체적 모습을 상상하는 일)
구축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고, 그것이야말로 구심점을 만들어 국가라는 공동체의 존속을
가능케 해주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전통에는 끊임없이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다.
'문화'와 전통은 우리 자신이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은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지
는 것이며, 타자에 의해 '발견'되고 이름 붙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 초기에 일본인 야나
기 무네요시가 '조선'을 보며 명명한 '곡선미/애상미'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본 모습을 우
리는 오랫동안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생각해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런 자신의 모습에
반발한 이들은 반대로 강하고 진취적인 한국상을 내놓았다.
그러나, 곡선의 가녀린 모습이 허구라면, 강하고 진취적인 모습도 실은 허구다. 인간은 필
요에 따라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일 따름이다.
4) 이 100년, 10년 사이에 우리가 만든 문화
전통은 문화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지켜진 문화를 전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100년 동안, 또는 10년 사이에 어떤 '문화'를 만들어냈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끝마무리가 거칠거나 쓰면 금방 부서지는 얼마 전까지의 우리 상품
은 분명 그 당시 우리의 '문화' 수준이었다. 우리는 골동품의 정교한 장식과 쓰기 편하도록
한 조상의 지혜를 '문화'로 자리 매김 하지 않는가.
300년 전의 문화만 '문화'인 것은 아니다. 90년대의 우리가 만들어낸 상품 중 소비자가 쓰
기 편하고 아름다운 물건이 생산되었다면 그것은 새로운, 또는 1990년대의 한국 문화로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혹여 베끼기만 존재했다면 그 자리에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타국인들이 주목하지 않는 상품은 후대에 우리의 문화로 기록될 수 있을까? 한 상품이 주
목받아 유행하기만 하면 유사품이 쏟아져 나와 원래의 상품에까지 식상하도록 만들어버리고
마는 문화는 문화일 수 있을까?
일본 유치원 졸업식에서 졸업하는 아이들이 후배 아이들에게 사뭇 엄숙하게 넘겨준 것 가
운데 유치원에서 기르는 닭과 토끼 돌보는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대자보 만한 종이
가 있었다. 다음 세대를 위해 그 때까지의 '지혜'를 전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치 계승으로
서의 '전통'의 이름에 걸맞는 것이 아닐까?
5) '자존심'과 '보신탕'
한국적 민족주의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자존심'이다.
그 때의 자존심이란 기가 죽지 않는 일이거나 다른 나라를 '이기'는 일쯤이다. 동시에 우
리의 부정이나 비판에 연결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자존심이 표출되는 상대는 '일본'이었다. 이겨야 할 분야는 과거의
전통이거나 문화유산이거나 축구시합이거나 했다.
그런데, 자존심이란 도대체 어디서 찾아지는 것일까. 개인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자아의식이며, 무시당할 수 없다는 기개이며, 글자 그대로 자신을 존중하고 나아가 존경할
수 있는 기분이다. 한국 영화의 자존심이니 한국 음악의 자존심이 지켜졌다 거니 하는 말이
곧잘 사용되지만, 자존심에 관해 말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계시민으로서의 올바른
가치관과 행동양식이 아닐까.
예를 들어, 남이 싫다는 것을 강요로만 간주하고 보신탕을 먹는 일이 자존심을 살리는 일
은 아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전통'의 개념이 실은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
전통'이라 해서 무조건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관습을 '전통'의 이름으로 무조건 지키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은 아니다. 그런 일을
'정체성'을 지키는 일로 착각하는 일은 실은 우리 자신의 부정적 '정체성'을 확산시키는 일
일뿐이다. 보신탕을 먹더라도 최소한 '전통'의 이름으로 먹을 일은 아니다.
이제는 화장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없어진 듯하지만, 조선시대 이전에는 화장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가 오랜 전통으로 생각해왔던 토장이 뿌리를 내린 것은 실은 조선 시대 이후의
풍습인 것이다. 조선 시대의 풍습이 '전통'으로 기억된 것은 물론 그것이 최근의 일이고 그
것이 바뀌기 전 일이 잊혀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런 식으로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아는 일이다.
6: '과거'로서의 일본
이웃나라란 자고로 사이가 나쁜 법이다. 이 말은 크리스테바가 한 이야기지만, 그녀의 말
을 빌리지 않고도 우리는 그 말을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를 보는 것만으로 납득할 수 있다.
이웃관계란 사사건건이 부딪치고 이해관계가 얽히기 마련이니 그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어업문제나 영토문제에서 아직 문제가 남아 있는 것도 그렇지만, 우리가 식민지가 된 것은
우리가 다름 아닌 그들의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이웃'을 침략한 일본은 말하자면 인류의
전형적인 과오를 저지른 셈이다.
100년 전. 그 시대는 먼저 눈을 뜬 나라가 자국의, 정확히는 각 '개인'들의 부를 꿈꾸며
제국주의로 내달린 시대였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이었다면 안 그랬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우리는 선한 민족이니 그랬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걸었던
길에 대한 비판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잘 아는 일본인은, 한 조사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그건 거꾸로
말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우리에게 일본 그 자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침
략 당한 과거의 피해의식이, 일본='침략자'의 등식이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가장 강렬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불과 100년 전의 한일합방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
시일까. 그건 우리에게 무려 400년 전의 역사가 항상 어제의 일처럼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
다. 말하자면 세종로 한복판에 이순신 장군이 서 있어 항상 그 일을 기억시켜주듯이 상대방
에게는 까마득한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을 일을 한국인은 오늘도 '현재'로서 기억하고 있다
는 얘기다. 오늘 무슨 일이 생기면 오늘의 일을 오늘의 일로서 바라보기보다 먼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가 현재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1) 차이를 수용하는 열린 마음을 통한 공존
어쩌다가 가해자가 된 그들을 우리보다 '불행'하다고 보는 시각을 가져보면 어떨까. 그러
면 조금은 여유로워 질 것이다. 피해자로의 경험도 분명 상처지만, 가해자의 경험도 상처임
에 틀림없다. 자신의 과거를 상처로 인식해야 하는 그들-물론 영광으로 인식하는 어리석은
이들도 많지만-의 고충을 이해해보면 어떨까.
노벨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브로가 한국에서 강연을 했을 때 한 청중이 힐난조로 물었다.
"당신이 원폭 피해에 대해서 쓰는 일은 일본이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일이 아닌가? 일본이
원폭 투하를 당한 것은 당연한 일 아니었나?" 오에는 조용히 대답했다. "글쎄요... 그런데 한
국인 피폭자들도 그렇게 말할까요?"
원폭 투하에 관해 일본이 말하는 것은, 최소한 오에의 경우 단순히 '피해'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굳이 피해자라 한다면 그것은 국가에 의해 희생당했다고 하는 한 개인으
로서의 피해자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전쟁은 물론 국가에 의한 것이었다. 전쟁을 일으킬 때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정부는 없다.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국가가 주체가 되어 수행하는 법이다. 그 때 국민
은 대부분 수동적으로 그 전쟁 수행에 따르는 고통을 감수하기 마련이다. 전쟁에서 승리했
을 때 실제로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한 줌의 자긍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승리가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열광하기 마련이다.
일본 근대의 과오는 국가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국민들이 이에 대해 열광한 것도 사실이
다. 그에 대한 비판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국민들의 '피해'에 대한 동
정이 필요 없는 걸까? 오히려 국민의 열광과 환멸=피해를 함께 냉철히 봄으로써 '국민'이라
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일의 우를 깨달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국가공동체의 문제점을 서로
말하는 일은 생산적인 논의로 이어질 수 있다.
또 여기에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에는 떨어지지 않은 원폭이 왜 일본에서만 시험되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말하자면 인종차별문제를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런 문제까지도 우리는 '함
께'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일본에 문제가 있다면 비판하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하면서 비판할 필요가 있다. 혹은 절대로 한국에선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없다면,
그 대신 한국에'만' 일어나는 엄청난 양의 부끄러운 일들을 떠올릴 일이다. 타국의 불행을
보면서 가위표를 긋고 우월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왜'를 물을 정도의 여유가 필요하다.
어느 나라나 아픈 부분이 있게 마련 아닌가. 그렇다면 비슷한 병은 함께 고치고 다른 병은
타산지석으로 삼는 지혜를 갖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인간은, 자신과의 '차이'를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동질성
의 확인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반면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본능적
인 두려움과 혐오를 느낀다. '다르다'는 데 대한 호의는, 상대가 자신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
을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만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그것은 사회 속에서도 학교 속에
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우리의 경우 무엇보다도 지역 간 갈등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모
든 공동체의 성립에 기반이 되는, 그래서 정말은 친목과 평화의 기반이 되어야 할 이 죄 없
는 본능이, 때로는 타자를 배제하고 파괴하는 잔혹한 폭력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와 다른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닌가. 공존을 위해 필요한 건
차이의 배제가 아니라 차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다.
2) '강대국' 일본이 아닌 '이웃' 일본과
해방 후 55년. 이제 정복당했던 기간 36년보다도 훨씬 많은 세월이 흘렀다. 55년이라면 인
간으로 치면 우리의 해방 후 세월은 중년으로 접어들고도 한참 지났을 나이다.
이제는 그만 중년의 성숙함으로 '상처'를 잊고 싶지 않은가. 상처에 거리를 두고, 피해의
식에 기반한 혹은 정설화 되어 있는 일본관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바라보고 싶지
않은가. 굴욕적인 피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된 이후 어쩌면 100년 동안이나 아파해 온 것일
지 모를 우리 자신을, 이제는 낫게 하고 싶지 않은가. 상처를 딛고 넘어서는 그 날, 아마도
우리에겐 진정한 '독립'이 가능해질 것이다.
일본과의 바람직한 관계 구축이라는 명제는, 그들이 강대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으
로 이웃이라는 한일 간의 숙명을 현명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하나의 당위성이다. 무엇보다도,
이웃 간은 사이가 나쁘기 마련이었던 역사의 어리석음을 21세기에까지 되풀이하지 않기 위
해서도 그건 필요하다.
21세기, 이제야말로 인접국가로서의 숙명을 슬기롭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가.
에필로그
어떡하다 남들보다 일찍 유학을 갔다. 지금이야 초등학교 때라도 유학을 가지만, 한국에서
대학은 마치고 가는 게 정상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나는 한 동안 고독했지만, 곧 몇몇
아름다운 친구들을 다른 민족 속에서 찾을 수 있었고, 우리는 민족이니 국가니를 크게 의식
하는 일없이 함께 젊은 날을 보냈다.
어느 날, 사무라이의 후손이어야 할 그 애들이 "전쟁이 나면 난 도망갈 거야. 사람을 어떻
게 죽여?"라고들 당연하다는 듯 말했고, 그 날은 내가 '배운' 일본과 내 앞에 '있는' 일본이
다르다는 걸 결정적으로 확인한 날이었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무렵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는데, 운 좋게도 굴지의 통역회사에 등록
되어 한일 간의 꽤 중요한 회합들을 현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건 유학생 신분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경험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는데, 동시에 책이며 매스컴을
통해 그 동안 축적된 상식들이 무너지는 순간들이기도 했다.
귀국 후, 나는 내가 알게 된 일본을 전하는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친일파'
로 보이는 두려움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 나뿐만이 아니다. 일본에 대해 호의적으
로 말하는 이들은 항상 이렇게 덧붙이곤 하니까. '그렇다고 한국이 일본보다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운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경계의 눈빛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물론 나 역
시 그런 시선으로부터 줄곧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감히 말하고 싶다.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일본인들을 '친한파'라 칭하는 의미에서
라면, 나는 '친일파'라고. 그리고 최고조로 보이는 지금의 한일관계가 한 두 마디의 '망언'
으로 깨지지 않는 탄탄한 관계로 이어지려면, 맹목적인 반일파나 반한파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을 필요할 때 가차없이 가할 수 있는 친일파와 친한파가 더 많이 필
요하다고. 해방 후 50년 이상이 지났으니 이젠 구 친일파아닌 신 친일파쯤이 있어도 좋지
않은가?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낀다던 한 학생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책 앞부분의 '비판'에 관해서는 쓰면서도 즐거운 기분이 아니었다. 누구나가 알 수 있
는 일을 구태여 써야 하는가 하는 도로감 때문에. 실은 누군가가 쓰겠지 하며 오랫동안 게
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상식 있는 이들이라면 그 문제점을 알 만한 왜곡된 담
론들이 어느샌가 많은 이들에게 진실처럼 회자되고 있었고,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분위기는 많이 변했고,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한일 양국은 대단히 우호
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많이 남아 있고, 꼬인 일들을 현명하게 풀어나갈 수 있
는 성숙함을 기대하면서 나는 이 책을 썼다.
이 책에 쓴 내 사고의 기본틀을 만들어준 이는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일본인 비평가다. 나
는 그에게서 '타자'와 '교통'과 '윤리'에 대해 배웠다. 그의 사유에서 배웠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얕고 난삽한 글들이지만, 그것은 내 능력 부족과 함께 이 책이 근본적으로 누구에
게나 읽힐 수 있는 책을 지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게 사제관계로 시사한 적은 없어도,
그는 언제나 내 스승이었다. '사이'에 서는 일의 치열한 아름다움을 그에게서 본 이후로 나
는 '사이'에 서는 고독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본문에 쓴 이야기 중 경복궁
을 가로막은 조선총독부의 거대한 모습을 보고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침략적 행위를) 했
다니..."하며 잠시 말을 잊었던 비평가란 바로 그였다. 이 책에서 시도된 '정신분석'이란 물
론 프로이트에게서 빌린 것이지만, 더 가깝게는 '일본 정신분석'이라는 그의 글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책을 그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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