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허수정
차례
프롤로그 11
인생의 반환점에 서서 19
사진을 고르며 43
문리버 77
오후의 풍경 111
누군가 비를 맞는다 137
그 소리는 나의 이름을, 나의 이름을 거듭 부르다가 그만 목이 쉬었다 163
키르케여, 나의 기도를 들어다오 207
에필로그 225
작가의 말 235
저자 소개
63년생, 부산에서 출생
89년 실천문학 겨울호에 {구사대와 봉투}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주요작품으로는
단편소설 {데 포르마시옹} {세라피네의 노래}등
장편소설 {바늘귀에 갇힌 낙타} {소설 김대중} {필름 르느와르처럼}
{안녕하세요 셔터맨} {바르샤바 게토}외 다수가 있다.
그외 안물평론집 2권을 발표했으며 1편의 시나리오를 작업 중에 있다.
현재, 한국통신 미래텔에 사이버 소설{무사들}을 연재 중이다.
프롤로그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그 해 여름의 무더위가
그녀를 그에게 데려왔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그 해 무더위와 함께
왔다고...
무더위가 막 시작될 때, 그는 그녀를 만나고 있었다.
그의 앞으로 다가온 그녀는 부채질하듯 손을 흔들며, 숨을 두어번이나 헉헉 내쉬었다.
그 모양이 너무 천진난만해 보여 그는 그만 벙시레 웃고 말았다.
그녀는 그의 미소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혹은 처음 보는 자신에게 미소를 짓는 그를
엉큼하게 생각했던지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는 여름이 좋아요? 나는 싫어.!"
약간은 앙칼스러운 말투와 그를 흘기는 눈빛. 그러나 그는 어색해진 게 아니라,
오히려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그녀는 투덜댔다.
"정말 이 아저씨 싱겁다! 빨리 사진이나 뽑아 줘요."
그는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큼큼 헛기침부터 했다. 자꾸 입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느라 이마저 꽉 다물었다. 그리고, 귀여운 말괄량이처럼 톡톡 쏘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경찰관처럼 제복을 입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보기에, 그녀는 제복에 어울리는
얼굴이 아니었다.
제복에는, 제복에 어울리는 얼굴이 따로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눈이 날카롭고
각이 진 얼굴의 여자가 제복을 입고 거리에서 서성거려야만 제복의 권위가 설 수
있는 법이다.
그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경쾌해 보였다. 짖궂게, 그를 쏘아보는
눈빛엔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백사장을 뛰어 다니는 소녀의 발랄함이 담겨 있었다.
더욱이 머리 모양도 단발이었다. 깜찍하게도. 그러므로 그녀는 타이트한 '스트레이트
팬츠'에 티셔츠를 맵시 있게 걸쳐야 어울린다.
그녀는 스트레이트 팬츠를 입지 않는다. 그녀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제복은 규격화와
획일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그녀에게 맞지 않는 것이다.
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부담없는 소극의 주연이 엉뚱한 옷차림으로 눈을 흘기고
있으니, 그도 그 극의 조연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연의 마음으로
가볍게 말했다.
"경찰관은 아니지요, 아가씨?"
"치, 이 제복을 보면 몰라요? 주차 단속원이잖아요."
그녀는 정말이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소극의 주연답게
반응이 과장스러워 그는 또 웃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제복을 보면 누구라도 금방
경찰관인지 단속반인지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세상엔 그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내민 필름 한 통을 받아들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금방 되죠? 잘 뽑아주셔야 돼요!"
그녀가 하는 말에 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종알대는 아이처럼
뭔가를 말하며 손으로 또 부채질하는 시늉을 냈다. 바깥도 그러하겠지만, 이 안도
확실히 더웠다. 다음 여름에는 에어컨을 하나 살까, 하는 생각을 하다 그는 그만
쓸쓸해졌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 보였던지 그녀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다시,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뒤돌아서며, 그럼 잘 부탁해요 아저씨, 하고 말했다. 아까보다는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웠다.
그가 말했다.
"아가씨, 왜 여름을 싫어하지?"
"네?"
가게를 막 나가려다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정말 싱거운 아저씨다! 아저씨, 소금 좀 드셔요! 이렇게 더운데 하루 종일
밖에 서 있어 봐요, 여름을 좋아하게 되나!"
"아가씨가 교통순경인가? 하루 종일 서 있게..."
"비슷하죠, 뭐. 다음 여름에는 에어컨 하나 장만하셔요!"
"그럼, 이번에 장만할까?"
"역시 싱거운 아저씨답게 물정을 모르시는군요. 지금 신청해도 아마 내년에나
나올걸요."
"그런가, 하하하."
그는 이마를 긁적대며 웃었다. 그녀도 배시시 웃고는 사진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자 사진관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그녀가 나가 버린 사진관에는
정적만이 있었다. 그 속에 그가 있었다.
그는 가게 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한동안, 그녀가 열고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 자신도 잘 모를 일이었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 보니 현기증이 났다. 그는 진열대에 두 손을 짚고 머리를
잠깐 흔들었다. 그리고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눈을 뜨고 그는 시선을 딱히 고정시킬 데가 없어 무심코 주위를 한 번 둘러 보았다.
벽에 걸린 가족 사진이 시야에 들어 왔다.
어딘가 지쳐 보이는 그의 아버지는 무릎에 외손자 민호를 앉혀 놓고, 의자에 앉아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양옆으로 그와 그의 동생 정숙이, 정숙이의 남편이 서
있었다. 얼마 전에 찍은 사진이라 그런지 아버지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두텁게 내려와 있었다. 가족은 모두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눈은 젖어 있는 듯했고, 미소는 어색할 뿐이었다.
그는 사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머리가 점점 텅 비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사진 속에서처럼 씩 웃었다.
무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예감 같은 것이 몸 위를 슬금슬금 기어와 텅
빈 머리에 들어앉는 듯했다.
그는 사진관 안에서 무거운 웃음을 지으며, 까닭 모를 설레임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 설레임의 밑바닥에는 이 여름에 대한 절박함도 함께 고여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퍼내어 봐도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벽에 걸린 사진 속의 자신을 응시했다. 사진 속의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희망에 가득찬 청년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체념에 결박당한
슬픔과 애잔함의 눈빛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알고 있었다.
이번 여름을 끝으로 그는 두 번 다시 여름을 또 맞이할 수 없다는 점을. 그의
삶에서 이 여름은 마지막인 것이다. 아버지도 정숙이도 극구 믿으려 하지 않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지막에 대한 예감 같은 것이 있는 법이다. 누구도 앞날에
대해 단언할 순 없지만, 영화의 끝 장면을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한 삶도
있는 것이다.
그 끄트머리에서 그는 슬프도록 설레이고 있었다.
무더위가 막 시작되던, 절박할 만큼 소중한 여름날... 그는 삶의 끝물에서
그녀를 만나고 있었다.
그는 내 친구다. 불알 밑이 근질근질할 때부터 함께 싸다녔던 죽마고우다.
머리통이 굵어진 후에도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20년 이상을 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 날, 나는 유일하게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지극히 담담한 표정으로 이 얘기를
해 주었다.
긴 얘기였다.
그의 얘기를 다 들은 나는 어떤 말을 그에게 해주어야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이지, 나는 어떠한 말도 못한 채, 바보같이 그를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그는
오히려 나를 위로하듯 내 손을 잡으며 조용히 웃기만 했다.
입장이 뒤바뀐 것 같았다.
그가 나 같았고, 내가 그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적어도 그에게 뭔가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친구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무기력할
따름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사랑에 대해 초월해 보였다.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아무나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그 문제에 대해 혼자 고민하고
정리해 왔던 게 분명했다.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위로도 하지
못하면서 눈물마저 보일 수는 없었다.
그가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게 부탁이 있어."
나는 얼굴을 들고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눈앞이 흐릿해져 눈동자에 힘을 주었다.
"내 영정 사진을 찍었어. 네가 가지고 있다가..."
그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인생의 반환점에 서서
1
눈이 부셨다. 그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리고 눈을 떴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방 안에 부유하고 있었다.
그는 이불을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고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아침의 상크름한 공기가 가슴 속을 훑어 내렸다.
더없이 상쾌했다.
그는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창밖의 세계는 생기가 넘쳐 흘렀다. 햇살은 수정처럼
불순물이 없이 빛났으며,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더없이 신선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다. 새로운 하루를 열어가는 사람들답게, 그들의 발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듯, 아침은 모든 게 싱싱해 보여 좋았다.
재잘대는 여학생들, 약간은 바삐 걷는 샐러리맨, 지팡이에 의지하며 느긋하게
산책하는 노인네에 이르기까지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애잔한 눈빛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그는 창턱에 팔꿈치를 대고 양 손바닥을 연꽃처럼 펼쳐 턱을 괴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창밖만 바라보는 건, 요즘 들어 생긴 습관이었다.
언제나 변함없지만, 그러한 풍경은 그를 평안하게 해 주었다. 그는 새삼 느끼고
있었다. 하루를 시작시켜 주는 아침 햇살과 상크름한 공기, 저 멀리 보이는 가로수의
잎사귀까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내일도 이 변함없는 풍경 속의 소품이 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들은
알고 있습니까?
물론 그 자신도 이 경쾌한 풍경화를 장식하는 하나의 소품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지나가다 그를 본다면, 저 사람은 오늘도 창가에 서 있군,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한 번도 창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는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살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다, 라고
생각했다.
2
그가 방에서 나와 주방으로 갔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미 전기밥솥에 쌀을
안치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창가에서 멍하니 있었나 싶어,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전기 밥솥의 스위치를 켜면서 아버지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 세수를 하지
않았는지 눈에는 눈곱이 약간 끼어 있었다. 눈가에 몰린 잔주름과 이마를 덮은 굵은
주름, 잠을 잘 자지 못한 듯 눈도 퀭했다.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할아버지 같이 늙어 보였다. 그는 공연히 죄지은 듯한
기분이 들어 눈길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부터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주방 옆에 있는 식탁의 의자에 앉으면서 아버지가 말했다.
"반찬은 뭘로 할까?"
그는 고개를 들고 싱크대를 보았다. 수도꼭지 아래 금방 씻어놓은 듯한 대파가
있었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김치가 시었는데……. 김치찌개를 또 할까? 참치 남았냐?"
그는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마땅한 찬거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손쉽게 할 수
있는 반찬으로는 김치찌개가 가장 적격이었다. 김치와 대파를 듬성듬성 썰어
끓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제도 아침, 저녁이 김치찌개였다. 입맛이
떨어지기 쉬운 여름에 김치찌개로 이틀이나 때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로한
아버지를 생각하면 더더울 그럴 수 없었다. 냉장고 안을 잠깐 살펴본 그는 콩나물을
꺼냈다. 그리고 냉동실에서 고등어도 꺼냈다. 밑반찬은 정숙이가 며칠 전에 잔뜩
갖다 놓았으므로 콩나물국에 고등어조림만 갖추면 아침상으로는 손색이 없는 셈이었다.
아버지가 담배를 입에 물면서, 싱크대로 다가가는 그에게 말했다.
"놔둬라, 애비가 하마."
"아뇨, 제가 할께요. 아버지는 밥을 안치셨잖아요."
그는 미소를 지은 채 싱크대에서 콩나물을 씻었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담배를
태우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듯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그에게 농담이나 실없는 소리를 건네지 않았다. 뭔가
진지한 얘기를 할 때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그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 언제나 허허, 웃으면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동생 정숙이가 결혼한 직후에는, 그의 아버지는 그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며 허허대기도 했다.
― 이놈아, 여자가 해주는 밥 좀 먹어 보자!
― 아버지도 참, 여태껏 정숙이가 해준 진지 드셨잖아요.
― 시방은 너와 나 둘뿐이잖냐?
― 오붓해서 좋네요, 아버지.
― 이 놈이! 그 흔한 애인 하나 못 그하냐? 유부남도 구한다는디!
― 아버지가 먼저 결혼하시는 게 아무래도 빠를 거 같은데요?
― 뭐? 허허허...
― 하하하...
아버지는 여전히 한숨을 쉬듯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느 갑자기 콧날이
매워지는 것을 느꼈다.
콩나물국이 끓자 그와 아버지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밥을 먹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몇 술 뜨지 못했다. 그저 국만 후루룩
마시곤 상을 물렸다.
설거지를 하려는 그의 등 뒤에 대고 아버지는 머뭇거리면서 겨우 말했다.
"저...정원아..., 오늘 병원 가는 날이지?"
3
정오 무렵이 되자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사진관을 나오며 잠시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고 있었다. 하늘은 무방비였다. 태양을 가려줄
만한 조각구름 하나 없었다. 태양 아래 노출된 채 스쿠터를 타고 가면 무척이나
덥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게 문을 잠그고 스쿠터 위에 올라탔다.
스쿠터를 몰면서 그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시야가 탁트인 푸른 하늘... 구름
한 점없이 태양만이 하늘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심술궂은
열기아래에서 헐떡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를 터였다.
독차자한다는 것은 전횡을 일삼는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속에서는 누군들
바둥대지 않을 수 없을 법이다. 따라서, 아무런 상념이 없는 태양일 망정 구름 한
점 거느리지 않고 유유히 하늘을 떠 다니는 것은 싫었다.
그는 태양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쓰게 웃고 말았다.
사소한 자연의 현상하나에도 그런 식으로 비약시켜 생각하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스쿠터는 털털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거리는 이 시간이면 늘 그랬던 것처럼 한가로웠다.
슈퍼 앞의 파라솔 아래 앉아 부채질하는 노인네의 느긋한 모습, 비닐 봉지를 손에
들고 쉼없이 수다를 떠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눈에 정겨웠다. 도심에서 소외된 곳이라
그런지 여기는 변함없이 사람 냄새가 났다. 그래서 그는 이 거리를 사랑했다.
햇볕은 거리를 쨍쨍 달구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스쿠터는
여전히 털털댔다.
초등학교 정문이 보였다. 아이들이 왁자대며 교문을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여름방학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그는 스쿠터를 멈추고 아이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끼리끼리 어울려 나오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막 시작되는 방학에
대한 기대감만이 웃고 떠드는 녀석들의 표정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구김살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녀석들은 마치 아침 햇살과도 같이 생기있고
신선했다. 그는 계속,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방을 부유하며 자신을 깨웠던 햇살을 그는 생각했다. 새롭다는 거, 처음
시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그는 빙긋이 미소지었다. 아이들이 아침 햇살이라면
자신은 뭘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삶의 출발점에 서있다. 하루를 출발시키는 아침 햇살처럼 말이다. 그도
그런 때가 있었다. 내일이 있다는 걸 당연히 믿으며, 아무런 걱정 없이 까르르 웃던
시절.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정오의 햇살과도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침의 햇살은 사람들을 일신시킬 수 있지만 정오의 햇살은, 그 열기와
무게에 의해 사람들을 지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는 그러한 때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그의 의식에 갑자기 문장 하나가 불을 켰다. 그는 의식에
새겨진 문장을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서른 다섯 살이 되던 봄, 그는 자신이 이미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버렸다는 것
을 확인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풀 사이드}에 나오는 첫구절이다. 얼마 전에
뒤적거렸던 소설인데, 그는 이 구절을 무척 마음에 들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느닷없이 생각났었는지도 몰랐다.
과연 그렇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삶이 70년이라면, 서른 다섯은 인생에
있어서 반환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오가 하루의 반환점인 것처럼 말이다.
몇몇 아이들이 시시덕대며 그의 곁을 스쳐갔다. 그는, 뛰다시피 종종거리는 녀석들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 고개까지 돌렸다. 녀석들은 점점 멀어져 갔다. 동시에 먼 옛날의
자신이 녀석들의 등 뒤로 오버랩되고 있었다.
그도 그러했다. 단짝 철구와 히히대며 이 거리를 지나다녔다. 하잘 것 없는
일에도 깔깔대며, 성내고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내지르곤 했다. 그러면서 컸다.
물론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그런 시간이 많았지만, 한 번도 허무함을 느끼거나
우울해지진 않았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곁에 없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자상했다. 그는 언제나 어른이 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흐뭇이 웃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서 이렇게 반환점까지 왔다. 정오의 햇살이 누구에게나
내리쬐는 것처럼 그도 반환점에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반환점을
돌아, 여태껏 왔던 만큼을 되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철구가 그러는 것처럼, 그도
되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게 삶이다.
그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스쿠터는 여전히 털털털,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갔다.
몇몇 아이들이 스쿠터를 가소롭게 여기는지, 그의 등 뒤에서 휘휘,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이 놈들,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녀석들이, 사진사 아저씨, 하며
언죽 번죽 떠들었다. 그는 허허 웃으며 녀석들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주었다.
그는 차도로 접어 들었다. 버스와 승용차, 택시... 차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대홍수가 난 것처럼 도심은 차들로 넘쳐났다.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종류도
참 많다. 그는 스쿠터를 내려다 버면서 인생의 반환점에 선 자신의 소유물로서는
약간은 부족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비틀 컨버터블'같은
명차를 타고 다닌다고 반환점이 더 멀어지는 건 아닐 것이다.
끊임없이 오가는 소형, 중형, 대형 차들 속에 섞여 그의 스쿠터도 달렸다.
부르릉-붕붕-털털털-
좌우의 오너 드라이버들을 곁눈질하며 그는 생각했다.
그들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멀고 가까운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 종착점은 그들의
앞에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의 차로 자신들의 삶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는 이미 반환점을 돌아선 사람들도 있을 것이도, 반환점을 향하여
달리는 사람들도 있을 터였다. 그러므로 반환점을 돌았다고 슬퍼할 이유도 없고,
반환점을 아직 돌지 않았다고 해서 느긋해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종국에는
마침표를 찍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의 종착점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그곳을 응시했다.
하얀 건물, 종합병원이었다. 그가 몰고 있는 스쿠터는 병원 정문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풀 사이드}를 다시 생각했다. 첫구절처럼 그의
눈을 아주 오랫동안 잡아끌었던 몇구절들이 낙하하듯 의식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그의 인생은 70년인 것이다. 70년을 전력을 다해 헤엄친다고
정해 버린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그는 인생을 그럭저럭 적당히 헤엄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4
그는 담당 의사를 만나고 있었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의사의 말을 들으면서 그는 70년을 살면 살면 아주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70년을 정말 살 수 있다면 그는 인생의 반환점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거짓말이 아닌 것이다.
5
날씨는 여전히 더웠다. 어디선가 매미 우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려왔다.
그는 텅 빈 초등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며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학교는 고즈넉했다. 매미의 울음 소리 말고는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단지 교문 옆의
경비실에 경비원이 의자에 앉아 입을 쫙 벌리고 자고 있을 따름이었다.
맴맴맴-
매미의 소리는 어떻게 들으면 어리광떠는 아이의 흥흥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들으니까, 그렇게 들리는지도 몰랐다. 그는 팔짱을 끼고 매미 울음이
곡선을그리며 들려오는 나무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에 익은 나무들도 있었다. 벤치의 좌측의 나무들 중에 아름드리 나무는 확실히
먼 옛날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았다. 매미를 잡는다고 철구가 끙끙대며
올라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 드는 나무 옆에서 마음을 졸이며 위로 올라간
철구를 응원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철구는 중학샐이 되면서부터 매미를 잡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여학생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다.
그는 가끔 나무 위로 올라갔던 철구의 모습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맴맴맴―
그 때나 지금이나 매미는 울고 있다. 학교도 변함없다. 단지 본관 건물이 몇 차례
증축되었을 따름이다. 아이들도 이전과 다름없이 채워지고 있다.
아마도 철구의 아이도 내년이면 여기에서 뜀박질하며 친구들과 놀 것이다.
과연, 철구는 인생의 반환점에 서 있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얼굴이
달덩이 같고 몸매가 흐벅진 마누라와 귀여운 아이가 늘 곁에 있다. 그 정도라면
반환점에 주저앉아도 그다지 아쉬울 게 없을 듯 싶었다.
그는 텅 빈 운동장에 다시 눈길을 주었다. 텅 빈 운동장, 텅 빈 자신, 공통점이
교차되는 듯 싶었다.
그는 한참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비원은 그의
존재조차 모르는 듯 쿨쿨 자고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6
그가 사진관으로 돌아와서 벽시계를 바라보자, 시간은 벌써 4시였다. 햇볕이
조금은 기운을 잃어야 할 때였다. 그러나 바깥은 정오 무렵과 마찬가지로 뜨거울
따름이었다.
그는 시간이 덧없게 흘러버린 것에 대해 약간은 아쉬웠다. 그다지 많은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텅 빈 운동장에서 괜한 상념에 젖어 시간을 멍하니 보냈지만,
사실은 달리 해야 할 일도 없었다. 물론 사진관이라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 자신이
멍하니 시간을 허비한 사이 몇몇 손님들이 사진을 찾으러 가게에 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급하게 사진을 찾아가야 할 손님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지금까지 필름을 맡긴 손님 중에 그렇게 급하게 찾을
만한 손님은 없을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문득, 당돌한 척하며 말을 톡 쏘던 그녀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오늘쯤 들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현상한 사진들을 챙겨 보았다. 그녀가 맡긴 필름도 깨끗하게 현상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진은 초점이 잘 맞지 않아 보였다.
그는 그녀의 깜찍한 모습을 시야에 떠올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선풍기를
털었다. 선풍기는 무감정하게 덜덜대며 돌아갔다. 그녀가 가게에 들어오면, 이전과
다름없이 덥다며 볼멘 소리를 할 것같았다. 그래서 진작에 에어컨을 사둘 걸,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몇몇 손님들이 가게에 들어왔다. 그는 손님들에게 어서 오세요, 라는 인사를 하면서
그들의 사진을 내주었다. 손님들이 많이 온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현상된 사진들을
찾으러 왔다. 아마도 바캉스 시즌이 끝나면 이런 손님들은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때도 이렇게 사진을 내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했다.
한동안 들락거렸던 손님들이 뜸해졌다. 그는 의자에 앉아 다시 시계를 보았다.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상한 적막감이 갑자기 사진관 안에 몰려왔다. 그는 어깨를 옴씰했다. 알 수
없는 단절감이 칼날처럼 스쳐갔다. 동시에 그는 무서워졌다. 자신이 앉아 있는 곳과
저 바깥이 급작스레 분리되고 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환상일 텐데도 바깥의
일상적인 풍경이 그의 눈앞에서 쏜살같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너무도
리얼했다. 분명히 착시이거나 환상일 텐데...
어느 새 그는 지구에서 벗어나 있었다. 주위에는 행성이 떠돌아 다녔다. 행성의
빛은 희미했다.
그래서 어둠만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기묘한 형상을 한 외계인들이 그에게
날아왔다. 그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웃음소리을 내며 그의 곁을 돌아다녔다.
그는 눈을 자꾸 끔벅댔다. 이것은 틀림없이 환상이라고 의식은 명령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망연했다. 그어다가 시계의 초침 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채칵채칵―
별안간, 그는 신음을 토했다. 머리, 가슴, 배, 아니 신체의 모든 장기가 비비 꼬여
자신의 숨통을 끊으려고 힘을 가하는 듯했다. 그는 눈을 떴다. 외계인들이 사라지기는커녕
자신의 눈앞에서 목을 조르고 있는 듯했다.
그는 얼굴을 심하게 구기며 바지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약봉지를 꺼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물통을 꺼냈다. 물통을
든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시 의자가 있는 곳에 어칠어칠 다가와 앉았다. 그는
잠깐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다음 약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물통을 진열대 위에 놓고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외계인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박테리아와 결탁하여 자신을 위협했던 장기들도 평정을 돠찾고 있었다.
여기는 지구 바깥이 아니었다. 여기는 사진관 안이었다. 그는 고개를 바로 세워
바깥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바깥도 변함없는 일상이 연출되고 있었다.
귀가하는 샐러리맨도 있고, 수다떠는 여고생들도 보였다. 바깥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동시에 이 안에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이다. 외계인 따위가 결코
있을 리 없었다.
채칵채칵―
초침 소리만 들릴 뿐, 여전히 사진관 안은 적연했다. 그는 의자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을 펴 얼굴을 괴었다.
바깥의 풍경은 여전했다. 어쩐지 그 변함없는 풍경에서 자신은 동떨어진 것
같다, 고 그는 느꼈다.
사진관 안이 덩그랗게 느껴졌다. 뭔가 이어지는 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단절되는 것이 아닌, 소외되는 것이 아닌, 현실과 일상에 계속
이어질 수 있는 뭔가가 자신에게 필요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자신은 결코
외계인따위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세계는 바깥에 있었다.
바깥에 나가야만 그는 현실과 이어질 수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괸 채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니, 한가지 생각에
의식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신은 친구 철구처럼 인생의 반환점에 서 있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사람은 70년은 살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지금 서 있는 지점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반환점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어 흐흐흐, 하고
웃었다.
선풍기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덜덜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때, 가게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짖궂게 검지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아저씨, 찜통 날씨에 그만..."
그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한층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그녀는 그와 선풍기를 갈마보며
입을 비죽댔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면서도 하하하, 웃었다. 진열대에 두 손을 짚고
어깨마저 들썩이기도 했다. 그녀가 혀를 찼다.
"참 안됐어요. 아저씨도 아직 노땅은 아닌 것 같은데 벌써부터 쯧쯔쯔..."
"하하하... 아, 경찰관 아가씨, 어서 와요."
그는 말하면서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짐짓 토라진 표정을 짓더니, 싱겁게
웃어대는 그의 표정에 그만 참지 못하고 푸, 하고 웃음을 쏟았다.
"이 아저씨, 정말! 난 주차단속원이라구요! 그렇게 제복 구별도 못해요?"
"하하... 아, 미안, 단속반 아가씨!"
그는 겨우 웃음을 멈추었다. 정말이지 왜 그렇게 웃음이 나왔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아저씨, 내년에는 꼭 에어컨 장만하세요, 알았죠? 노땅도 아닌 아저씨가
벌써부터 맛이 가서야 되겠어요?"
그녀는 눈을 샐쭉 흘기며 말했다. 그는 이번에는 짐짓 정색을 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사진은 다 됬죠?"
그녀는 진열대에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럼요."
그녀는 그가 건네준 사진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는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긁적긁적대면서 열없게 미소지었다.
"어저씨, 이거 번호판이 잘 안 보이잖아요?"
"그래요, 내가 봐도 그렇네."
"예?"
"하지만 그건 찍은 사람 잘못인데."
"아니에요. 셔텨를 얼마나 잘 눌렀는데... 아저씨가 혹시 현상할 때 잘못한
거 아니에요?"
"어허, 하늘이 내려다봅니다. 설마하니 그럴 리가..."
"치!"
그녀가 그를 향해 코를 한 번 실룩였다. 장난꾸러기 소녀가 마음씨 좋은
아지씨에게 응석부리는 모양이라 그는 평안하게 웃었다. 겨우 두 번째 만남인데도,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소녀를 부담없이 만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괜히 그녀에게 장난을 걸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른손을 오무려 입술에 갖다대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진을 자기의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혼잣말로
종알대기도 했다.
"사진 강좌를 받든가 해야지 원..."
"뭐라고요?"
그는 일부러 능청을 떨며 말했다.
"혼잣말이에요!"
"허허, 나한테 사진 강의를 받지 그래요."
"됐다고 봅니다. 아저씨는요, 아무리 봐도 삼류같아요."
"허허, 흙 속의 진주올시다."
그녀를 향해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면서 그는 속으로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겨우 두
번째 만나는 여자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 그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뭔가를 느꼈다. 피붙이에
대한 감정 같은 건 아니었고, 그렇다고 첫눈에 열정이 확 일어나는 그런 마음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서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요컨대 미묘했던 것이었다.
"아저씨, 필름이나 넣어 주세요."
그녀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진열대 위에 놓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무대위의 배우가 된 양 목소리에 가성을 넣어 말했다.
"아, 가, 씨, 필, 름, 넣, 을, 줄, 몰, 라, 요?"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잔뜩 좁히며 역시 배우처럼 말했다.
"그, 래, 요, 아, 저, 씨!"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킬킬댔다. 그러다가 그녀가 팔짱을 끼고 뻗대듯이
말했다.
"치, 잘못하면 멋대가리 없는 아저씨하고 정들겠네."
"이런, 난 벌써 정들었는데..."
"그러셔요? 아저씨 바람둥이 아니에요? 안토니오 반데라스 정도의 얼굴이면
봐줄만하지만, 아저씨는 현철이 오빠처럼 생겨 가지고..."
"허허, 무슨 말씀을. 남들은 내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고 하던데..."
"욱! 점심 때 먹은 설렁탕이 올라오려고 하네!"
"하하하!"
그녀는 정말이지 소극의 주연이 다시 되어 구토하는 연기를 하였다.
그는 그 모습에 또 큰 소리로 웃었다.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까지 가볍게 탁탁
때리기도 했다.
정말이지 이렇게 웃으니 가슴이 탁 트이는 것같았다. 별이 총총거리는 밤바다에서
물살을 발끝으로 느끼며 시원스런 바람을 맞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먼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다.
지원이의 손을 잡고 경포대 모래위에서 바다로 쏟아지는 별빛을 헤아리며 시원한
바람을 맞받았었다. 참으로 가슴까지 상쾌했던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지원이 생각이 들자 그는 깜짝 놀라 침이 절로 삼켜졌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잠시 구겼다.
까닭은 없지만, 적어도 그녀앞에서는 지원이를 생각하서는 안 될 것같았다.
사실, 그녀는 지원이와는 다른 스타일이었다. 성격과 분위기, 몸맵시까지도.
그런데도 지원이 생각이 어어없이 났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큰 소리로 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녀가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아저씨, 이 여름에 감기 걸린 아녜요?"
"설마 그럴 리가..."
"참... 말투 한번 용의 눈물이네요. 설, 마, 하, 니, 그, 럴, 리, 가, 있, 겠,
소, 이, 까!"
"허허."
그녀의 익살에 그는 다시 웃으며 카메리에 필름을 넣었다. 그러면서 필름을 어떻게
카메라에 넣을 줄도 몰라요. 하며 필름 넣는 법을 얘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주의깊게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기야 초등학생도 카메라에 필름 넣을 줄은 알 테니,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과장스레 카메라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의 앞에 바짝 다가와
카메라를 받고는 고개를 숙여 뭔가를 작동했기 때문에 그녀의 머리가 그의 코 밑에
있었다. 진하지는 않지만 향긋한 내가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좋은 샴푸를 사용하나
보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소리없이 뒷걸음쳤다. 그녀가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고개를 들었다.
"하여튼, 아저씨 잘난 척하기는... 아무리 내가 필름을 넣을 줄
모를까봐서요?"
"아가씨, 하나만 가르쳐줄게. 셔텨를 누를 때 숨을 한 번 멈춰봐요. 사람들이
대개 호흡 조절을 못해서 초점이 맞지 않는 거라구."
"그 말 정말이에요?"
그녀가 다시 몸을 그에게로 바투 당겼다. 씩 웃으며 그는 대답했다.
"아무렴, 농담이지."
"참, 나! 이 아저씨, 정말 싱겁다! 다음에 올 때는 소금을 꼭 사가지고 올게요.
소금 좀 왕창 드세요!"
"그러지, 뭐."
두 사람은 정말 오래된 연인처럼 거리낌없이 웃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벽시계를
보고는, 아저씨 다음에 올게요, 하며 뒤돌아섰다. 그도 잘 가요, 하고 말했다.
그는 진열대에 양 팔꿈치를 대고 양손을 펼쳐 턱을 괴고는 가게를 나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한 번 더 넉살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며 점잖게 말했다.
"아가씨, 우리는 예승즉리의 법칙을 지켜 참으로 다행이네. "
"예? 뭔 승 뭔 리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예, 승, 즉, 리! 즉 예의가 지나치면 사이가 오하려 멀어진다는 얘기이지. "
"참, 나! 그럼 우리가 예의가 없어 친해졌다는 얘기예요?"
"그럼요."
"아저씨, 서울대학교 나왔어요? 되게 유식한 척 하네!"
"아저씨는 쩐문대 졸인데."
"치, 요즘 세상에 누가 한자를 쓴담?"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사진돤 문을 열려다 다시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그는
청중을 향해 헤벌쭉이 웃는 개그맨의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까딱 했다.
"뭔 승, 뭔 리라구요?"
"예승즉리."
"예승즉리..., 예의가 지나치면 사이가 멀어진다... 친구한테 써먹어야지.
알았어요, 아저씨 안녕!"
그녀는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더니 왼손을 흔들며 가게를 나갔다.
한동안,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슴 속에 시원한 바람이 정말 불고 있는지
마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진열대를 톡톡 두드리다가 의자에
앉았다.
가게 안은 다시 인적이 끊긴 산사의 고요함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공허함보다는 경쾌함이 그의 마음에 들어앉았다.
가게를 나간 그녀를 그는 또 생각했다.
그녀는 아직 인생의 반환점에 도착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미 지나왔던 저편을
그녀를 통해 뒤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갑자기, 한동안 들리지 않던 초침소리가 따끔하게 귀를 찔렀다.
채칵채칵―
사진을 고르며
7
그가 암실에서 나오자, 때마침 앰뷸런스의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유리창밖을 보았다. 앰뷸런스가 성난
듯이 지나갔다.
그는 침을 삼켰다. 소독차를 따라가듯 동네 꼬마 녀석들이 앰뷸런스가 달려간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곤 바깥으로 천천히 나가보았다.
그리고 앰뷸런스가 지나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는 쏜살같이 어디론가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구급차가 사라진 쪽에 한동안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진관 맞은편 복덕방
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맞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부정한 두 노인이 복덕방 앞에서 담배를 뻑뻑
태우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차가 지나간 쪽에 눈길을 두고 있는 그들의 표정은
상심한 사람의 그것같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양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푹 찔러넣었다. 그리고 사진관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철렁댔던 가슴은 이제 잔잔해졌다. 그는 진열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러
가지 상념이 머리 속에서 오락가락했다. 그러자 머리가 약간 아파왔다. 그는 오른손을
바지 호즈머니에서 빼내 진열대를 짚었다. 잠시 심호흡도 했다. 갑자기 담배
생각이 났다. 이미 끊었지만, 이상하게도 한 개비를 간절히 피우고 싶어졌다.
그는 바지 호주머니에서 왼손을 꼼지락댔다. 담배를 사러 슈퍼에 갈까, 하며
머뭇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슈퍼까지 가야 된다는 게 귀찮았다.
그는 진열대 뒤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양손을 깍지끼고 머리를 좀 뒤로 젖혀
보았다. 머리가 아픈 건 가셔졌다. 그는 그 자세로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에 가슴이 철렁거렸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반사 작용 같은 것이었다.
여전히 자신은 삶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은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것들도 반사작용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의 꼬리를 이어가고 있으니 쓴웃음이 나왔다. 웃고 싶을 때는 웃고,
담배를 태우고 싶을 때는 태워야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의자 팔걸이를 손으로 짚고 일어났다. 바지 호주머니에 지폐가 있었다. 그걸로
담배를 사면 되었다.
가게 앞으로 나온 그가 슈퍼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앰뷸런스의 칼날같이
예리한 사이렌 소리가 귀를 관통시켰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앰뷸런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그는 움찔거렸다. 앰뷸런스가 그의 옆에
정차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친구 철구가 사색이 다된 표정으로 뛰어왔다. 철구의
왼손에는 두툼한 앨범이 들려있었다. 깜짝 놀란 그가 철구와 앰뷸런스를 갈마보았다.
몇몇 사람들이 수근수근대며 모여들고 있었다.
"철구야..."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철구가 왜 앰뷸런스에 타고 있는지 언뜻 생각되지
않았다. 눈이 붉게 충혈된 철구가 그에게 대뜸 앨범부터 건넸다. 그는 엉겁결에
앨범을 받았다.
"왜..."
"정원아...아버지가...니가 영정에 쓸 사진을 골라서 병원에 가지고
와라. 크기는 알지? 병원에서 연락할게."
철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철구를 망연히 바라만 보았다.
철구가 그의 손을 한 번 잡고는 앰뷸런스에 올라타면서 다시 말했다.
"울 아버지 고혈압이 있는 거 알잖아.... 나중에 보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 그를 향해 씨익 웃는 철구의 눈에선
물기가 반짝였다.
철구가 타자, 앰뷸런스는 기다렸다는 듯 급히 떠났다. 우두망찰한 채 서서 그는
철구가 탄, 그리고 철구의 아버지가 누워있을 앰뷸런스를 지켜보았다.
앰뷸런스는 그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사라졌다.
몇몇 사람들도 흩어졌다.
서편 하늘이 붉어지고 있았다. 햇볕을 기운을 시름시름 잃고 햇살은 서쪽 하늘을
장려하게 변색시키는 중이었다. 그는 석양을 등진 채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앨범을 안다시피 들고 사진관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는 담배 사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8
그는 사진첩을 뒤적였다. 사진첩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많았다.
철구의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그와 철구의 어린 시절 사진들도 있었다. 철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찍었던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보고는 콧날마저 찡하기도 했다.
그는 사진첩을 넘기며 아련한 추억 속을 넘나들었다. 그러다 그는 뜻밖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자신과 철구, 정숙이, 지원이가 바다를 뒤로 하고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었다.
이제는 빛바랜 사진이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그것을 내려다 보았다.
그를 포함해서 사진 속의 그들은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또 모두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정숙과 지원은 비키니는 아니었지만 꽃무늬 수영복을 입고 모델처럼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파도가 하얀 물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자신과 철구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렇다면
정숙과 지원은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원은 무척이나 숙성해 보였다.
제법 숙녀키가 났다. 키도 컸지만 몸매도 정숙이와는 달랐다.
그는 석상이 된 듯 그 사진만 내려다 보았다.
지원은 정숙이와 중학교 동창이다. 2학년 때 둘은 같은 반이었고 금방 단짝이
되었다고 했다.
처음 지원이가 집에 놀러 왔을 때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자신은 그
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짜리를 보고 고등학생이 긴장한 것이다.
희미한 추억이 점차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리 없이 그의 머리에 내려와
의식을 사로잡았다.
9
개가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낑낑댈 정도로 더웠던 날, 여름방학도 다음 주였다.
일주일 후면 어김없이 닥쳐올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즐거운 고민을 그 날
정원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뙤약볕아래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지만 정원은
별로 덥지도 않았다. 방학만 되면 철구와 함께 바캉스를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철구는 동해안을 아예 일주하자는 거창한 계획을 세워 놓았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경비가 여간 만만한 게 아니므로 정원은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철구는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경비를 충당하자며 '박정희 대통령'식의 강행을
고집했다. 그러나 방학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눈피는 아니었다.
하려튼 말만 번지르한 녀석이었다. 녀석을 생각하니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러다
마침 버스가 왔다. 주위에 서 있던 녀석들이 바닷물에 뛰어들 듯 버스로 우루루
몰려들었다. 괜히 얼쯤대다가 버스라도 놓칠까봐 정원도 후다닥 뛰었다.
가까스로 버스에 올라탄 정원은 확뿜어져 오는 열기에 숨부터 막혔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버스는 콩나물 시루 같았다. 인근 학교의 학생들을 깡그리 버스에
쑤셔넣은 듯했다.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코를 싸매고 싶을 만큼 땀냄새가 코를
찔러대고 발은 바닥에 대지도 못했다. 게다가 열려진 차창에서 푹푹들어오는 바람을
고물 선풍기처럼 후끈할 따름었다. 완전히 콩나물신세가 된 정원은 땀을 뻘뻘 흘렸다.
어서 집에 가서 등목이나 빨리 해야지, 하는 생각만 굴뚝같았다. 동해안이고
뭐고간에 그건 그 다음에 궁리할 문제였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정원이 집에 들어가자, 마침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사진관에 있을 것이고, 중학생인 정숙이는 어디서 놀고 있는 모양이었다.
잘됐다, 싶어 정원은 마루에 가방을 퓍 ㅈ던져 놓고 교복을 서둘러 벗었다. 그리고
주위를 쓰을 살폈다.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누구도 자기를 주의깊게 엿보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옆집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자기를 엿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으면
안돼는 일이었다.
정원은 러닝 셔츠를 용감하게 벗었다. 러닝 셔츠는 세숫대야에 던저놓은
빨랫감처럼 젖어 있었다. 팬티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고 기왕 벗은 김이다 싶어 정원은 아예 팬티까지도 다 벗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마당의 한가운데에 있는 수돗가로 갔다.
팬티를 일단 빨랫줄애 걸었다. 다시 주위를 살파며 수도꼭지를 틀었다. 콸콸콸,
물이 쏟아졌다. 오, 이 시원함! 하며 정원은 세숫대야에 물을 받고 바가지로 퍼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댜로 들이부었다.
정원은 입을 쩍 벌리며 어깨를 옴찔했다. 그야말로 머리칼이 쭈뼛 서는 듯했다.
피서가 따로 없었다. 동해안이고 뭐고 간에 이대로 방학을 보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나가면 고생이라는데 말이다.
흐흐흐, 웃으며 정원은 몇 번이고 물을 들이붓고 마음껏 해변의 기분을 만끽했다.
그런데 갑자기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덜컥 열렸다. 동시에 엄마야,
하는 외침이 정원의 귀를 관통했다. 하지만 소리치고 싶은 건 정원이었다. 새파란
하늘아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노출되어 있는 건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정원은 거의 반사적이었다. 바가지로 아랫도리를 가리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마루로
뛰었다. 재잘대며 집에 들어온 주인공들은 정숙이와 그 또래 여자애였다.
워낙 기겁은 했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정숙이 옆에 서서 눈을 똥그랗게 뜨는
여자애를 보았다. 눈길이 한 번이라도 더 갈만큼 예쁜 아이였다. 아니, 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제법 숙성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정원은 한 걸음에 마루를 건너뛰고 방으로 그르다시피 들어가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무슨 망신! 게다가 오빠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한 정숙이의
앙칼진 말이 정원의 뒤통수를 할퀴고 있었다.
"오빠! 창피하지도 않아? 마당에서 그냥 하게? 정말 미치겠네!"
말인즉 백번이나 옳다. 다 큰 놈이 마당에서 홀딱 벗고 목욕을 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셈이었다.
낯이 숯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이마엔 식은땀마저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손바닥으로 땀을 닦으며 정원이는 문틈으로 마당의 동정을 살피는데, 여자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니네 오빠, 몇 학년이니? 되게 재밌다."
"골치 아프다니깐."
"근데 이거 니네 오빠 팬티 아니니?"
"어머, 오빠!"
정원의 고개가 절로 내려갔다. 아이구 맙소사! 빨랫줄에 걸어둔 팬티가 그제서야
생각났다. 하지만 이왕 엎질러진 물, 정원은 뒤통수를 긁적대며 마루를 향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정숙아, 빨리...팬티...좀 갖다줘..."
"하여튼 오빤 정말 문제 있다니까!"
정숙이의 볼멘 소리가 들리고, 다시 여자애의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무정하게
귓가로 날아왔다.
10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올 것만 같은 옛일이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을 띄고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어디선가 지원이가 불쑥 나타나 오빠, 하며 자신을 부를 것만
같았다. 의식의 저 깊은 속에서 누군가가 영사기를 돌리고 있는 듯한, 그런 감각이
목을 타고 내려왔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지원이는 시네마스코프에 등장한 배우처럼
시야에 확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옛일 속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있어서
시네마스코프의 배우였다. 추억은 아련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또렷하게,
입체감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고등학생, 대학생, 그러다가 그녀는 다시 중학생이 되기도 했다.
모든 것은 여전했다. 여전히 그녀는 그의 곁에 서서 마치 그 날처럼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빠도 사진 잘 찍으세요? 모델처럼 찍는 거 있죠? 나도 그렇게 한 장만
찍어줄래요?"
스스로 무안해 어쩔 줄 모르던 그 날, 낯 뜨거움도 감수한 채 정숙이가 끓인
라면을 먹기 위해 마루에 나가 소반 앞에 앉았을 때 그녀가 대뜸 건넨 말이었다.
어색해서 고개를 약간 숙였던 그가 그제서야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빨아들일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젓가락질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계속 자신을 환기시켰다. 정신차려 정원아, 얘는 중학교 2학년이야.
그런데 그 중학교 2학년짜리 여자애가 벌떡 일어나더니 왼손을 허리춤에 붙이고
오른손으로는 머리칼을 한 번 쓸어넘기며 오른쪽 발꿈치를 살짝 들어보이는 앙증맞은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어때요, 오빠? 정말 모델같죠?"
그 우스꽝스러움을 보고 정숙이는 소반을 치며 한바탕 까르르 웃어댔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우습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로 모델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자신이 어이없게
느껴졌지만 그는 자신이 사진작가가 된 듯 눈앞의 모델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러자 정숙이가 짖궂게 그에게 한마디 했다.
"어쭈, 오빠는 정말 반한 눈치인데!"
"응? 으응...임마...반하긴..."
움찔하던 그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정색했다. 지원이가 다시 소반앞에 앉으며
말했다. 여전히 생글거렸다.
"정숙이 아빠가 사진 작가라는데...오빠도 사진 잘 찍을 거 아니예요.
그러니 절 한 번 찍어주세요! 모델료는 없음. 단지 오빠하고 친구가 되어줄게요."
"..."
전류에 감전된 듯 손끝에서 등줄기까지 갑자기 찌릿해져 하마터면 그는 젓가락을
놓칠 뻔했다. 그는 젓가락을 꽉 잡고, 라면만 후루룩 먹었다.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있었다. 오빠 친구가 돠어 줄게요,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진 작가라니... 그는 한 번도 아버지를 사진작가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예술가가 아니라, 사진관을 운영하는 것에 불과했다. 정숙이가
아버지를 '뻥튀기'한 게 틀림없었다.
그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라면 가락을 입 안에 넣으면서 정숙이를 곁눈질했다.
정숙이가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띠더니 그를 보면서 얼른 말했다.
"얘가? 우리 오빠가 너하고 나이가 같니?"
젓가락을 들면서 지원이는 입을 비죽댔다.
"얘는... 내 남자 친구들은 다 고등학생이야!"
"어이구, 잘났어 증말!"
아무 대꾸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라면을 먹고 있는 그에게 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
"저하고 친구하는 게 싫으세요, 오빠?"
"아, 아니...그냥..."
그냥 잠자코 라면만 먹으면 정체 모를 속마음을 들킬 것같아 그는 고개를 들고 말을
얼버무렸다.
"어머, 오빠 되게 튕긴다."
지원이 입을 비죽대며 말했다.
"그럼 우리오빠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
정숙이 말했다.
"좋겠다, 눈 높은 오빠를 둬서..."
"그럼!"
중학교 2학년답게 정숙이와 지원이는 시시껄렁한 얘기를 주고 받으며 까르르댔다.
그는 슬쩍 그녀들을 곁눈질하며 묵묵히 라면을 먹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버지가 사진작가였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라고.
지원은 라면을 먹고 정숙이 방으로 갔다. 뭔가 아쉬운 감정같은 게 남았지만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하지만 책속의
낱말들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건넌방의 기척에만 신경이 온통
집중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자신이 황당하게 느껴져 그는 이따금 쓴웃음을 짓곤 했다.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이었다.
정숙이와 지원은 2시간이 넘게 수다를 떨었다. 그 2시간동안 그는 자신의 방에서
멍하니 책만 내려다 보았다.
이윽고, 지원이와 정숙이가 방에서 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그는 바깥에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 책에만 계속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지원이의 목소리는 이명처럼
귓가에서 머물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동시에 지원이의
소리가 명확하게 그의 귀로 날아왔다. 그것은 이명이 아니었다. 그는 멈칫했다.
"오빠, 저 갈게요."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갔다. 지원은 마루 끝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오빠, 저 사진 찍어줄 거죠? 약속해줘요, 네?"
"그, 그러지 뭐."
"고마워요, 오빠! 참, 제 이름은요, 강지원이에요!"
지원은 그를 향해 손을 한번 흔들었다. 그리고 정숙이와 손을 잡고 마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갔다.
그는 마루에 우두커니 서서 사진 찍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11
그는 지원이를 만난 뒤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진에 취미를 붙인
그를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카메라에 대해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그는 경포대에 가서도 사진 찍기에 열중했다. 철구는 그런 그에게 사진학과를
가려고 하느냐며 가끔 올리기도 했다.
그의 사진에는 정숙이와 지원이 제일 많이 찍혀 있었다.
그는 이따금 사진의 매력에 눈을 뜬 자신이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사진학과에
진학을 할까,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12
그는 눈을 떴다. 주위는 고요했다. 새삼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진관 안이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암실, 진열대, 사진기, 그리고 가족사진이 주위에 존재하는 곳이었다.
교복을 입은 자신은 사진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사진관 안에 있는 자신은 서른
다섯 살의 노총각일 따름이었다. 여기는 현실 세계였다, 분명히.
그는 앨범을 덮었다. 앨범에는 현실이 아니라 추억의 세계가 상존해 있었다.
그곳에 빨려들어갈 수는 없었다. 자신은 아직도 현실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의자의 등걸이에 몸을 깊게 젖히고 얼굴을 들어 천장을 보았다. 하지만 추억은
다시 그에게 낙하하고 있었다. 그곳은 은밀하면서도 깊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지원이었다.
한없이 발랄했던 중학교 2학년짜리 지원이가 웃고 있었다. 예뻤다. 그녀는
그 때부터 예뻤다. 정숙이와는 달리 숙성한 티도 보였다.
추억 속에서 지원이는 자주 집에 놀러왔다. 그는 그 때마다 약속대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 때마다 그는 진지했고 지원이도 모델처럼 매력적으로 웃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친해졌다. 하지만 그는 지원을 정숙이처럼 동생으로 여길 수는
없었다. 그저 오빠처럼 허허 웃으며 스스럼없이 굴었지만 가슴 한 쪽 구석은 늘
묘하게 두근거렸다.
철구는 그런 그에게 충고했다.
―임마, 넌 걔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다른 놈에게 뺏기지 말고
꽉 붙잡으라고!
―야, 무슨 소리...걔는 정숙이 친구야.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네 눈빛을 보면 알어.
―말도 안 돼... 아니 마음에 든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직 학생이잖아.
―어이구, 공자 할아버지 말씀하고 있네! 성춘향과 이몽룡도 미성년자였다,
이거야!
그러나 그는 고백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지원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는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지원이도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집에 자주 오지 않았다. 정숙이
말로는 입시 준비를 벌써부터 한다는 것이었다. 그도 입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대학에 들어가면 고백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사진관과 집이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대학
등록금을 아버지는 마련할 수가 없었다.
이사하던 날, 아버지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한동안 담배를 피워댔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아보지는 마루를 몇번이나 쓰다듬으며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사진관도 사진관이지만 집마저 넘어간 것에 너무나 상심이 컸을 터였다. 어머니와
함께 고생하며 장만했던 집이었다. 집 안 구석구석에 어머니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그도 일을 해야만 했다. 몇 년이 지났을 때 아버지는 다시 사진관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입시준비를 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들어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단지 어떤
그리움같은 감정이 대학 앞을 지나갈 때마다 생기곤 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현실과 추억을 계속 넘나들 순 없었다. 이미 그는
인생의 반환점에 와 있었고, 그것이 종착점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이상
공허한 여행을 계속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자, 또 담배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내 담배를 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자 머리가 약간 아픈 것도 같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거리에는 어둠이 성큼 찾아와 있었다.
그는 슈퍼로 가서 담배를 샀다. 오랜만에 사보는 담배였다. 담배를 피면서 그는
가게로 돌아와 다시 앨범을 폈다.
영정에 쓸 철구 아버지의 사진을 고르며 그는 생각했다. 평생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그분이라면 어떤 것을 골랐을까? 그는 많이 망설이다 사진 한 장을 골랐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인자한 표정의 사진이었다.
그는 그것을 확대하기로 마음먹고, 앉은 자리에서 담배를 세 개비나 더 태운 다음
의자에서 일어났다.
13
검정 양복을 입은 그는 벤치에 앉아 화장터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건물의 입구와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대개 풀죽은
표정들이었다.
어떤 이는 현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넋나간 표정을 짓기도 했다. 으깨어진
유리알처럼 투명한 햇살이, 그들의 축 처진 어깨위로 내리비쳤다. 아직은 아침
나절이지만 햇볕은 뜨거웠다. 하지만 현관 옆에 쪼그리고 앉은 사람은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지 않았다. 건물 뒤쪽과 벤치 있는 쪽은 아무들이 울밀하여
햇빛을 피하기에 안성맞춤인데도 굳이 현관 옆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50대후반의 중늙은이처럼 보였다. 낡은 듯한 점퍼를 걸친 그의 얼굴은 거칠었으며,
햇빛 아래 오랫동안 일을 했는지 살갗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눈동자는 초점이 없어
보였다. 그는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그는 이상하게도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멍하니 그를 보고
있노라니 여러 가지 상념이 의식에 넘나들었다. 현관 옆에 불편함도 감수한 채
쪼그리고 있는 중늙이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이 불현듯 겹쳐지기도 했다.
아마 아버지도 머지않아 저 곳에 쭈그리고 앉은 채 담배를 피울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코허리가 갑자기 매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가 저 중늙은이처럼 꾀죄죄한
점퍼를 걸치고 저 곳에 쭈그리고 앉은 채 담배를 피우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눈을 씀벅거리다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날씨는 쾌청하고, 어디선가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밝음과 평화로움이 하얀 건물주위에 머물고 있는 듯 싶었다.
그러나 하얀 건물은 을씨년스러웠고, 현관 바깥과 안은 삶과 죽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얀 건물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인 셈이었다. 누구도 그 앞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현관에서 나왔다. 상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얀 상자를
들고 있었고, 뒤를 따르는 가족들은 서럽게 곡을 했다. 현관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던 중늙은이는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고 한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했다.
중늙은이와 그들은 가족같지는 않았으나 가까운 사람을 잃었다는 공통점때문인지 모두
슬프게 울었다.
그는 상의 윗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천천히
빨아들었다 내뿜었다.
담배 연기는 어지럽게 선은 긋더니 곧 소멸했다.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끼면서 그는
담배 필터를 빨았다. 연기를 들여마시고 내뿜고... 그러면서 담배는 점차 재로
변해갔다. 연기도 끝까지 허공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소멸.
꽁초가 된 담배를 휴지통에 버리고 그는 새 담배를 또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아까와 똑같이 연기를 빨아들이고 내뿜었다. 여전히 어지럼증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삶이란 것도 이렇게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제 몸을 태우고 나면 모든 것은 무가 될 뿐이다. 허망하고 안타깝고 공허하지만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는 없는 것이다.
주루룩.
눈물이 뺨에 떨어지고 있었다. 바보같이, 하고 그는 생각했다.
물기로 젖어 버린 그의 눈앞에 또 한 대의 장의차가 하얀 건물 앞으로
달려오더니 멈췄다. 제복을 입은 안내 요원이 무심한 얼굴로 장의차 앞에 왔고,
가족들은 울면서 차에서 내렸다. 곧 관이 차에서 내려졌다. 한 사람의 삶이
애틋하게 담겨져 있을 관을 가족들은 들것에 실었다.
안내 요원이 맨 앞에 서서 관을 옮겼다. 가족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애달피
울었다. 조문객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가족들의 뒤를 따라갔다.
"요단강가에 섰는데 내 친구 건너가네-
저 건너편에 빛난 곳 내 눈에 확실하다-"
현관 옆에 쭈그리고 있던 중늙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현관문을 손으로 잡고 어깨마저 들썩댔다. 그의 어깨는 무척이나
구부정해 보였다.
그는 여전히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꽁초가 되면 버리고 또 새 담배를 입에 물고,
그러기를 몇차례 되풀이했다. 철구가 휘주근한 모습으로 하얀 건물의 현관에서 나온
것은 그가 벌써 다섯 개비째의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였다.
철구는 입에 담배를 물어 불을 붙이고는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벤치 있는 쪽으로 허정허정 걸어왔다. 상주 노릇이란 게 쉽지는 않은 듯
눈가는 푹 꺼졌고 뺨은 거칠했다.
그는 재빨리 눈가를 훔치고 철구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여기 있었구나, 힘들지?"
그러면서 철구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힘든 거로 친다면 상주만 하겠냐?"
그는 미소를 계속 입가에 띠고 대답했다.
철구는 목을 위 아래로 움직여 보고는 과장스레 어깨도 한 번 젖혔다. 그리고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시간이 예상 밖으로 오래 걸리는데..."
철구가 하얀 건물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아버지의 생애가 그렇게, 쉽게 소멸이 되겠니? 아니, 시신을 태우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야. 누군들 쉽게 산 사람은
없으니까. 게다가 네 아버지는 더욱 삶에 무게가 있으셨지."
"녀석... 갑자기 철학자 같은 얘기는..."
철구는 그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철구의 시선은 따뜻했다.
철구는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한숨 쉬듯 담배 연기를 몇
번 내쉬더니 바닥에 버렸다.
철구는 딱히 어디를 응시하는 것이 아닌, 시선을 아무 데나 고정시킨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언제나 윤척없이 지껄이며 익살을 떨던 철구가 하룻밤 사이에 어른이
된 거 같았다.
그는 꽁초가 다 된 담배를 휴지통에 버리고 다시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왜
이렇게 줄담배를 피우는지 그 자신도 잘 모를 일이었다. 그저 재로 변해가는 담배의
모양을 지켜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이윽고 철구가 그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 친구분들이 영정 사진 보고 웃으시더라구. 아마 옛날 생각이 났나 봐."
"너무 오래 전 사진을 썼나……."
철구가 그의 어깨를 가만히 껴안으며 말했다.
"아냐, 임마. 한창 때 사진이라 아버지도 좋아하셨을 거야. 이번에 말야,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내가 아버지를 닮긴 닮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
우습지?"
"..."
"그런 느낌이 든 건 처음이야. 난 사실 아버지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잖아.
네가 알다시피... 그런데 그 영정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까, 아버지의 희미한 미소
뒤에...뭐랄까, 글쎄 잘 표현하진 못하겠지만 뭔가 가장으로서의 고독같은 게
엿보였어. 끊임없는 바람기로 인해 엄마 속을 무한정 썩이셨지만, 당신에게도 뭔가
삶에 대한 성찰같은게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야. 내가 너무
감상적인가... 그냥 영정 사진 앞에서 내 감정이 그랬어."
그의 어깨를 껴안은 철구의 손길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정 사진... 정말 잘 골랐어. 역시 넌 사진 작가야."
"녀석... 쿨럭쿨럭...쿨럭..."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기침을 심하게 했다.
철구가 걱정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왠 담배를 그렇게 피우니? 담배 끊은 지 오래됬잖아."
"쿨럭쿨럭..."
그는 오른손으로 입을 막고 한동안 기침을 했다. 철구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목부분을
손바닥으로 토닥거렸다.
"너 그러고 보니 안색도 별로 안 좋고...어디 아픈 거 아니냐? 임마 우리
나이도 건강에 마냥 자신할 때가 아냐."
"녀석, 염려 마라. 내가 설마하니 '부르스 리'처럼 요절이야 하겠니?"
기침이 잦아들어 그는 깊게 심호흡부터 했다. 그러더니 담배를 또 입에 물었다.
철구가 혀를 찼다.
"임마, 그만 좀 피워. 폐가 남아나지 않겠다. "
그는 씩 웃었다. 그의 미소가 어쩐지 애틋하게 느껴졌는지 철구가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갑지기 말이다, 철구야."
"응?"
"이렇게 재가 되어가는 담배를 가만히 지켜보는 게 흥미로워졌어. 담배는
소멸되어 가면서 가치를 높이는 게 아닌가 싶어."
"소멸?"
"그래, 소멸."
소멸이라는 말이 풍기는 어감때문이었을까? 철구는 뭔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했다.
"임마, 언제는 담배가 백해무익하니까 금연하자며 펄펄 뛰던 놈이..."
"보들레르 알어?"
"뭔 레르?"
"그가 담배에 대해 이렇게 말했지. 나는 담배를 통해 증발되기도 하고
집중되기도 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철구가 다시 혀를 차면서 말했다.
"뭔 소리야?"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고르면서 나는 오랜만에 담배를 피웠어. 그랬더니 나는
현실에서 소멸되기도 하고 먼 추억속으로 길게 여행을 떠나기도 했지. 담배는 시간을
죽이면서 동시에 시간을 창조해내기도 했던 거야."
그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싶었던지 철구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멀거니 응시했다.
"너, 무슨 작가처럼 얘기한다. 이더 소외감 느껴지네. 하기야 고등학교 때도 니가
책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짜식, 그냥... 여기지기서 읽고 주워들은 대로 풍월 한 번 읊어본 거네."
그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철구가 그를 올려다 보았다.
"담배 예찬은 그만하고, 이제 들어가 보자."
철구가 어깨를 으쓱하며 뒤따라 일어났다.
휴지통에 꽁초가 된 담배를 버리고 그는 앞장섰다. 철구는 그의 뒤를 따르면거 뭔가
생각하고 있었다. 하얀 건물 현관으로 들어갈 때까지 철구는 묵연했다. 그러다 불쑥
말을 뱉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했다.
"정원아."
"응?"
철구는 그의 옆에 나란히 걸으며 말을 이었다.
"너 지원이 소식 아냐?"
"..."
그는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일순간 창백해졌다. 하지만, 이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걔가 결혼한 후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어."
14
햇볕은 사정없이 거리를 펄펄 끓게 만들었다. 이글이글 타는 태양 아래 걷는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은지 행인들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도 모조리
수영장으로 가버렸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볌두리 동네는 그림엽서처럼 정지되어 있는
듯 보였다.
그녀는 사진관 앞에서 서선댔다. 하지만 사진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는
여간 짜증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거리 저 편을 살피기도 했다. 그러면서 가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사진관 맞은 편의 복덕방 입구에는 더위에 지친 누런 개 한 마리가 넉장거리하듯
누워서 그겨를 멀뚱멀뚱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개를 보곤 입을 한 번 비죽댔다.
"정말 여름은 싫어..."
그녀는 중얼거리다 눈을 번쩍 떴다. 더위와 피로에 녹다운 된 듯한 그가 거리
저편에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던 것아다.
그녀는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연인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아저씨, 한참 기다렸잖아요."
그러나 그는 그저 가볍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쩐지 경황이 없는 듯도 싶었다.
또한 안색이 워낙 수척해 보여, 그녀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아래 위로 그를 훑어 보았다.
"아저씨, 어디 갔다 오는 거예요? 이 뙤약볕에 양복을 다 입구..."
"..."
그는 대꾸할 기력이 병로 없는지 아무 소리도 안 하고 가게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미간을 찡등그리면서 그의 옆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30분 넘게 이
뙤약볕 아래에서 기다렸는데, 그의 반응이 시큰둥하니까 공연히 소외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에 눈총을 쏘았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갔다.
그는 진열대 우측에 놓인 소파에 털썩 앉더니,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해 보였다.
신경질이 라면 끓듯 머리 꼭대기까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녀는 꾹 참고
있었다. 아무리 피곤하고 지쳐 있다지만 그래도 30분을 기다린 성의가 있는데, 그가
너무도 자신을 홀대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투정부리듯 말했다.
"아저씨, 30분이나 기다렸다구요!"
"..."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따발총 쏘듯 또 말했다.
"이거 급한 거니까 빨리 찾아오래요! 얼마나 걸려요?"
"..."
여전히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걱정이 되기 사작랬다.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안색이 사실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아저씨, 혹시 아프세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서 부드럽게 말했다. 그가 비로소 눈을 떴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 아프지 않아요. 이따가 오면 안돼요?"
"예? 그, 그러죠. 좀 급하지만 나중에 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한결 풀이 죽어 있었다. 그녀는 진열대 위에 서너 통의 필름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조금도 꼼짝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를 곁눈질하며 그녀는 까닭을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느닷없고
엉뚱한 감정들이 한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그녀에게 퍼부어지고 있었다.
사진관을 나온 그녀는 손바닥을 얼굴에 대고 흔들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한증막처럼
달아오른 거리에 아까처럼 무작정 서 있을 수만은 노릇이었다. 그녀는 이대로 구청에
들어갈까,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진을 현상해야 했다.
그녀는 슈퍼마켓 쪽으로 걸었다. 슈퍼 앞의 파라솔 의자에는 노인네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는 노인네옆의 빈 의자에 앉으려다 왠지 내키지 않아,
천막 아래로 가서 걸름을 멈추었다. 다행히 천막도 불화살을 쏘아대는 태양의
열기를 제법 막아주고 있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으면서, 진작 여기서
기다렸으면 덜 더웠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사진관 쪽으로 시선을 무심코 주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쓴웃음이 나왔다.
사진관은 여기 말고도 있었다. 왜 여기로 굳이 왔을까? 쨍쨍한 햇볕 아래에서
30분이나 기다리는 수고를 왜 했을까?
별안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양손으로 뺨을 비볐다. 가슴 밑바닥에는 영문
모를 감정이 묘하게 일렁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늘 속이라 덜 덥긴 했지만 다리가 저려왔다. 그녀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냥 구청으로 가면 되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라고 생각하면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데 그가 슈퍼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아까보다는 안색이 좋은 듯했다.
옷도 티셔츠로 달아입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자 빙긋 웃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그가 천연덕스레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니 그녀는 괜히 심술이 났다. 당장 딴 곳으로 뛰어가고
싶기도 싶다.
슈퍼에서 나온 그가 아이처럼 아이스 캔디를 쭉쭉 빨아먹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공연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가 쭉쭉 빨아먹던 아이스 캔디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려면서 씩 웃었다. 그녀는
짐짓 투덜댔다.
"제가 아저씨 애인 이에요? 먹던 하드를 먹게?"
"짠, 기대하시라!"
그는 허리 뒤에 있던 왼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의 왼손에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아이스 캔디가 들려 있었다.
"아까, 나 때문에 화났죠? 미안해. 이거 먹어요. 시원하다니깐."
"치... 하드 하나로 얼렁뚱당 넘어갈 생각하지 말아요"
"그러지, 뭐."
그에게서 아이스캔디를 건네받은 그녀는 포장을 벗기고 단숨에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그가 또 웃으며 파라솔 쪽으로 가더니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노인네는 집으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야, 하드 하나만 샀으면 큰일날 뻔했네."
그가 아이스 캔디를 다 먹고는, 테이블 아래에 있는 휴지통에 빈 봉지를 버렸다.
"이리 와 앉아요."
그녀는 그의 옆에 있는 빈 의자에 앉았다.
아까 복덕방 앞에 누워있던 개가 코를 킁킁거리며 슈퍼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스캔디를 다 먹은 그녀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러자 그가 농담처럼 말했다.
"보신탕을 좋아하나 보죠? 저 놈보고 입맛을 다시는 걸 보니."
"예? 아니예요!"
그녀가 정색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미소는 보기 좋았으나,
자꾸 웃으니까 왠지 밉살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한마디했다.
"왜 그렇게 웃어요? 꼭 꼬마 보듯이!"
"꼬마? 설마하니 그럴 리가..."
그는 외국인처럼 두 손을 어깨 높이로 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의 익살에
그녀도 어쩔 수 없이 피식 웃었다.
"꼬마가 아니라, 제 이름은 다림이에요. 알았어요?"
"그래요? 다림이라... 이름도 그렇구 다림 씨는 중학교 2학년짜리 소녀
같아요."
"중학교 2학년짜리라니 참. 하여튼 아저씨는 엉뚱하기 짝이 없군요."
"그렇게 종알댈 때는 '티파니에서 아침을'나오는 오드리 헵번 같기도 하고..."
"티파니에서 아침을? 아, 그 영화는 봤다. 옛날에, 명화 극장에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한 번 쳤다. 하지만, 그의 얘기에 말려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심술기가 또 솟구쳤다. 그래서 그녀는 뾰로퉁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그는 엷은 미소를 띤 채 잠시 먼 허공에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엷은 미소에는 어딘가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가 갑자기 쓸쓸해 보이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드리 헵번같다는 그의 말이 귓가에 머물고 있었다. 사실 심술기를 드러낼 필요가
없는 소리였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를 극장에거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브라운관에서
그녀는 너무도 청순하게 미소를 짓던 기억이 났다. '로마의 휴일'에서 그녀의 짧은
머리는 무척이나 예뻤다. 그녀는, 짧은 머리도 참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귀엽고, 상큼하고, 예쁜 여자. 그게 오드리 헵번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갑작스런 침묵이 그와 자신의 사이에 선을 긋고 있는 것
같았다. 침묵은 더위를 몰고 왔다. 더위는 끈질기게, 강렬하게, 꼼짝할 수 없게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면서 재빨리 말했다.
"더운 건 싫어요!"
그녀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연기한 홀리처럼 재깔거렸다.
그러자 그는 조지 페퍼드가 연기한 폴처럼 느껴졌다.
문리버
15
벽시계가 열 번을 울리자 그는 암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내일 사진을 찾아갈
손님들을 위해 일일이 봉투에 메모를 하고 필름들을 챙겼다. 하루의 일과를 이렇게
마감한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뭔지 모르게 허전해졌다.
그는 새삼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언제나 변한 것은 없었다. 진열대, 소파,
촬영실, 벽에 걸린 손님들 사진, 제법 명암과 구도를 잡고 찍은 흑백사진, 그리고
그의 가족사진. 그것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습관처럼 그는 가족 사진을 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진 속의 그가 슬픈 눈빛을 한 채 사진관 속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사진 속의 그와 사진관 속의 그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윽고 사진관 속의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애잔한 기운이 묻은 그런 미소였다.
그는 형광등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한낮의 뜨거웠던 열기는 어둠과 달과 별들로
인해 증발돠어 있었다. 한낮에 비해 한껏 서늘한 공기가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흐드러진 별빛은 장신구처럼 밤하늘의 여기저기에
무늬를 그린 채 총총히 빛나고, 달은 복성스럽게 하늘의 한쪽에 모양을 드러내어 환한
빛을 거리로 내려보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썩 맑고 밝은 달을 보는
셈이었다. 그런 달을 보고 있으니까 마음마저 아늑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셔터를 내리려다 문득 진열창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는 사진 액자에 눈이
가게 되었다.
달빛은 진열창에도 교교히 비치고 있어, 액자 속의 사진은 우아한 질감의 밀레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정숙이와 지원이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들이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사진관의 촬영실에서,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며 그가 직접 찍었던 사진이었다.
의외로 사진이 잘 나와 아버지가 무척이나 놀라워했고, 그도 마음에 썩 들어 스스로
우쭐거리기도 했던, 그런 사진이었다.
그 후, 가게와 집이 넘어갔을 때도 아버지는 그 사진을 잘 보관했었다. 자신이 못
이룬 사진 작가의 꿈을 아들이 이루어 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아버지는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는 사진관을 새로 낸 후에도 이 사진을 진열창에 세워 놓았다. 그는 가끔 그
사진을 보며 쑥스러워 웃기도 했지만, 먼 옛날의 아련한 기억을 새록새록 재생시키는
그것을 구태여 진열창에서 치워 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요즘 들어서는
모처럼 시선이 고정된 셈이었다.
그는 한참 진열창 속의 지원을 보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추억의 세계에 다시
발을 내딛는 것을 현실로부터 차츰 소멸되어지는 것이다, 라고.
그는 셔터를 내렸다. 진열창 속의 지원이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는 달빛이 흘러 다니는 거리를 뚜벅뚜벅 걸었다. 스쿠터가 사진관 옆에 놓여
있었지만, 왠지 그것을 타고 귀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토록 달빛이 휘영청하고
총총한 별빛아래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밤은 그런 정취를 사람들에게 자주 선사하지는 않았다.
달빛을 받으며 그는 산책하듯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불현 듯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란 영화가 그의 의식을 똑똑 노크했다. 달빛이 평화롭게 거리를 감싸고 있어서인지
오드리 헵번의 노래도 귓가에 이명이 되어 머물기 시작했다.
‘문리버’창가에 앉아 기타를 튕기며 홀리가 애잔하게 불렀던 노래. 폴은
위층에서 글을 쓰다 말고 창가로 가 그녀의 노래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아래층의
그녀와 위층의 그가 서로 마주보며 안녕,하고 말했다.
그는 그 장면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오드리 헵번의 애틋한 표정도 그의 눈동자에 깊게 자리를 잡고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노래도 길게 그의 귓가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흘러간 그 영화를 생각하면서 허밍했다. 그리고 정말로 다림이 오드리 햅번이
연기한 홀리같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서 발랄함의 뒤안에 숨어 있는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달빛이 머리 위에서 자신을 보드럽게 비추고 있기 때문인지 그는
내내 그녀와 오드리 헵번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몇번이나 ‘문리버’를 허밍했다.
손을 꼭 잡고 지나가던 한 쌍의 연인이 슬쩍 그를 곁눈질하며 희미히게 미소를
지었다.
문리버, 달빛에 빛나는 드넓은 강
나 언젠가 빛나는 당신을 건너 가리라
어릴 적 꿈을 주고
가슴에는 상처를 준 당신
그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리
두 방랑자, 세상은 저 멀리 바라다 보이고
보고 싶은 세계는 너무도 많은데
우리는 같은 무지개 끝을 좇아
그 너머 세상을 기다린다네
내 둘도 없는 벗이여
문리버와 나
16
그녀는 청바지의 호주머니에 한 손은 푹 찔러넣고, 다른 손으로는 핸드백을 든 채
밤갈을 허청허청 걸었다. 어디선가 선들선들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면서
스쳐갔다. 그녀는 온천의 열기가 가셔진 밤공기에 괜스레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흥, 이놈의 변덕꾸러기 날씨! 낮에는 쩌죽일 듯이 덥더니……. 그래서 난
여름이 싫어!”
그녀는 곁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말쑥한 정장의 행인 하나가 그녀를
흘깃 훔쳐보더니 씨익 웃고는 지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여름이 싫다 싫어,
하며 걸음을 비틀비틀 옯겼다.
유난히 밝은 달이 그런 그녀의 머리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무심코 들어올리다가 밤하늘에 우아하게 떠 있는 달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거슴츠레한 눈을 씀벅거리면서 달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자니까,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열대야가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인데, 낮에 비해
밤공기가 조금 서늘하다고 엉뚱하게 신경질을 부리다니 자신이 생각해 봐도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게 다 술 탓인가 싶었다. 답답한 제복을 벗어 던지고, 친구들과 어울려
초저녁부터 술잔을 돌렸으니 취할 만도 했다.
그녀는 마치 사내가 된 듯 너털웃음을 쏟으며 달을 감상했다. 당연히 주위를 오가는
행인 몇몇이 또 그녀를 남상남상 흘겨보았다. 야바위꾼처럼 생긴 취객 하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연신 딸꾹질을 하면서, 미친 년이 달밤에 웃고 그러면 그 다음날은
재수없는데, 라고 중얼대며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없이 웃을 뿐이었다.
달은 밤하늘의 무거움을 상쇄시키며 빛을 은연히 대지로 내려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달을 보면서 어릴 적에 읽은 동화를 생각했다.
철부지 공주는 달을 따고 싶어했다. 신하들은 공주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누구도 달을 따올 수 없었다. 단지 시동의 궤변으로 공주가
달을 땄다는 착각을 했을 따름이었다.
동화 생각을 하자 너털웃음이 멈췄다. 달을 따서 품에 안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원없이 바라볼 수만 있으면, 그건 행복할 터였다.
달은 밤하늘에 떠 있어, 더욱 아름다웠다. 이전에도 아름다웠고, 이후에도 이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현란한 아름다움과는 격이 달랐다. 아치를 연출하며 부드럽고 곱게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그것은 소박함과 우아함의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이었다. 그게
달이 지닌 아름다움의 정취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동안 달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술기운이 점차 쫓겨나고 있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크게 굼을 들이쉬었다 내쉬고, 청바지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오른손을 빼 옆으로 한 번 젖혔다.
술 때문에 출렁거렸던 감정의 물결이 이제는 진정이 된 듯도 싶었다. 그녀는 달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달빗이 고요히 내려앉는 밤길을 걸어가면서 그녀는 문득 저 달을 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캔버스에 유화물감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누구도 손대지 않은,
그저 하얀 도화지에 수채화 물감을 풀어, 아니 수채화 물감도 없다면 크레용이라도
손에 쥐고 달을 예쁘게 그리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꿈이었다. 꿈에 불과한 것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초저녁부터 마셔댔던 술 때문에 뒤죽박죽 헝클어졌던 감정이 정리되고 차분해지는
건 좋았다.그런데 마음이 너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니, 가라앉다 못해 저 깊은
심연속으로 떨어져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것 같았다.
갑자기 울고 싶었다, 그녀는.
그녀는 도리질하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시선을 달에서 거두었다.
한여름날의 달도 깊은 가을날의 달처럼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우울해지는 건 밤하늘의 달 때문이다. 다른 이유란 건 있을 수가
없어. 감정이 극에서 극으로 치닫고 있는 건 술과 달빛때문이야, 하고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애썼다.
그녀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빨리 집에 들어가서 발 씻고 자야지ㅡ 하는 생각만
의식에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비디오 대여점 앞을 지나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별안간 그가 복잡한 머리
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비디오 가게의 진열창을 쓰윽 일별했다. 거기에는 오만 가지의 비디오
포스터가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망각의 삶, 디디에, 데블스 오운, F/X 일루션, 할로윈6, 뉴 엠마뉴엘, 옥화단,
팬티에 관한 일곱가지 이야기, 빨간 딱지, 끓는 냄비2, 사모님 열받았네2,
크레이지 댄스...
그녀는 진열창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을 보면서 쿡 웃었다. 희한한 제목들과 팬티만
걸친 여자들의 아슬아슬한 포즈가 접목된 일단의 포스터는 정말이지 코미디였다. 하기는
코미디를 보면서 웃는 건 우울해지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었다.
여기에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있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주 어릴 때
말고는 요즘 그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문리버'도 듣고 싶어졌다.
오그리 헵번과 닮았다는 말을 그는 했다. 정말 그럴까, 하고 그녀는 비디오
대여점의 쇼윈도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녀는 대여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사내는 능글맞게
웃으며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비디오 테이프를 자주 빌려가지도 않았는데
아는 체를 하니, 예의상 가볍게 목례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사내는
기회다 싶었던지, 여전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오시네요. 신프로 많이 나왔어요. 참, '브레이킹 더 웨이브'보셨어요? 그
영화 정말 괜찮아요. 감독이 덴마크 인 라스 폰 트리에라는 사람인데요. 에, 그
사람은요..."
"..."
그녀는 됐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사내는 모처럼 신이
났는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사내는 그 동안 그녀에게 눈독을 들였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녀는 사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언뜻보면 사내는 좀 잘생겨보일 정도로 허여멀쑥한 얼굴이었지만,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쌍꺼풀이 진 눈이지만 눈빛은 탐욕스러워 보였고, 얇은 입술을 뭔가
간사스러움을 담고 있는 듯했다. 한마디로 여자를 꽤나 후리고 다닌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내가 침까지 튀기며 말꼬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요, 어느 잡지사와의 대담에서, 나는 영화 기법에 거의 물신적인 매혹을
느낀다, 고 서슴없이 말한 감독이에요! 그래서 그는요, 관객들에게 늘 새로움과 충격을
선사하고는 했어요. '브레이킹 더 웨이브'전의 작품으로는 '유로파'가 있는데,
평자들은 그 작품을 영화 기법의 백과 사전이다, 라고 극찬까지도 했다구요. 사실
'유로파는 이중인화, 화면합성 같은 초현실작인 기교를 아낌없이 발휘해
형식주의적 관점에서 분명히 진일보한 면이 있기는 하죠. 하지만 저는 내용이 형식을
꿰뚫어야 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로파'보다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더 높이 평가하는 편이죠..."
그녀는 어이가 없어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 마디도 막히는 데가 없이 보통
사람이라면 몇 마디만 고작 말할 시간에, 술이 좌르르 쏟아지듯 퍼붓는 말 때문에
그녀는 초저녁부터 마셔댔던 술이 목울대까지 왈칵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술
기운도 다시 머리 꼭대기에서 빙빙 돌아가고 있는 것도 같았다. 게다가
대여점안에서 테이프를 고르고 있던 예닐곱 정도의 손님들이 모두 그녀와 사내를 쓰윽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제는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데도 사내는 단단히 오해를 한 것 같았다. 자기를 응시하는
게 드디어 호감을 나타내는 신호인 줄 알았는지 사내는 말을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 해박한 지식 앞에서 녹다운 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냐, 그런 인식에
사로잡힌 듯 사내는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그녀를 여전히 뜨겁게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폰 트리에는요, 할리우드의 스펙터클, 즉 말하자면 쥬라기 공원이라든가
터미네이터 식의 SF 위주에 블록버스터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유럽의 감독인
셈이죠. 나는 우리 영화가 그의 작품은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할리우드 식의 투자가 여의치 않은 건 분명하기 때문에 칸에서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영화에서의 시교, 내가 말하는 기교는 돈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녀는 뒤통수가 따가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내가 있는
카운터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사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군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드디어 넘어왔군, 하는 교만이 사내의 교만이 사내의 눈에서 번득였다.
"아가씨, '브레이킹 더 웨이브'보시겠어요? 역시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아가씨는, 아니 성함이 뭐였더라..."
그녀가 카운터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사내는 코먹은 소리를 내머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내에게 상체를 바투 당기며 속삭이듯 말했다.
"성함은 니 뽕이다."
"예에?"
사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차갑게 웃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니 뽕이라니까, 내 이름이."
"뽀, 뽕이요?"
사내의 얼굴이 붉게 변색했다. 카운터쪽을 은밀히 주시하던 예닐곱 정도 되는
손님들 중 몇몇은 킥킥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공연히 테이프들를 한 번 훑어본 다음 또 말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있어?"
"뭔 파니? 지금은 아, 아침이 아닌데요?"
손님들 줄 몇몇은 킥킥대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이름이 니 뽕이라고 말하는
여자의 차가운 미소를 면전에서 대한 사내는 거의 정신이 나간 듯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사내는 킥킥대는 손님들의 눈치를 살피며 도무지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만 멀뚱거렸다.
"물론, 지금은 아침이 아니지. 그러나 '사모님 열받았네2'는 있으면서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없단 말이에요?"
싸늘하게 웃으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 그게 언제 니온 영화인데요?"
녀석은 여전히 정신나간 듯한 표정으로 말까지 더듬었다.
"니 뽕이 태어나기 전에."
"예에?"
"앞으로는 '티파니에서 아침을'같은 명화를 좀 소장하시죠. 폰 트리에 운운하면서
'사모님 열받았네'는 왜 있는거야!"
"사, 사모님은...그게 저...주인 아저씨가..."
하지만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 소리가 휙 날 정도로 그녀는 뒤돌아
섰다. 그러고는 뚜벅뚜벅 걸어서 대여점을 나갔다.
킥킥대는 손님들의 시선이 그녀의 뒷모습으로 날아갔다.
카운터의 사내는 그야말로 망연자실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바깣에 나온 그녀는 잠깐 숨을 고르곤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밤하늘에는 여전히
달이 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밥맛 떨어지는 녀석에서 한바탕 쏘아붙여 조금은 가슴이 시원해진 것도 같았지만
그녀는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공허함 비슷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달을
보면서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또 그가 생각났다. 그리고 오드리 헵번과 ‘문리버’라는 노래도.
그녀는 걷다가 다른 비디오 대여점이 눈에 띄어 그 곳으로 들어갔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빌리려고 했지만 그 곳에도 그것을 없었다.
그녀는 별 수 없어, 해리슨 포드와 줄리아 오몬드가 주연한 '사브리나'를 빌렸다.
그리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17
좁은 방 안에 화장대와 옷장, 그리고 작은 싱글 침대가 있었다. 싱들 침대
맞은편에는 14인치 TV와 비디오가 있었고 그녀는 침대에 누워 빌려온 테이프를 보고
있었다. 방 한 구석에는 아그리파 석고상과 이젤, 캔버스, 물감이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옷가지들이 정돈되지 못한 채 침대 밑에 널려 있어, 꼭 게으름뱅이
사내가 쓰는 방 같았다.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브라운관에는 해리슨 포드와 줄리아 오몬드가 열연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안방에서 아버지의 쇳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 몇 시인데 여직 안 자고 텔레비 보노? 전기값 니가 다 낼끼가?"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 리모트 컨트롤 스위치를
눌러 TV와 비디오를 껐다. 형광들도 껐다.
어둠이 순식간에 방 안에 밀려왔다.
그녀는 한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무섭도록 밀려온 어둠을, 창문을 통해 넘어온 달빛이 살며시 밀어내고 있었다.
달빛은 그녀의 발에도 곱게 머물었다.
그녀는 소리없이 웃었다. 정말 달빛을 손으로 만지고 품에 안아, 그 유려한 질감을
느끼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고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으로 턱을 괴면서 그녀는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달은 환했다. 정말이지 다행이다 싶었다. 이 골방에 달빛마저 들어오지 않았으면
무척이나 서운했을 터였다.
그녀는 손바닥에 턱을 괸 채, 환한 달처럼 웃으려고 입술을 움직였다. 잘 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있잖아요, 달님. 술먹어서 하는 얘기는 아닌데요...술은 진작에 다 깼거든요...
달님은 내 맘 아시죠? 난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아니, 앞으로 화가가 될 수
있을까요? 난 이제 겨우 스물 한 살인데...정말 그것밖에 안 됐는데..."
그녀는 손바닥에 턱을 괸 채 오랫동안 달은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18
그는 팔짱을 끼고 창가에 서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은 잔잔한 바다같았고
몸은 새처럼 가벼웠다. 모처럼 유지되고 있는 평화라고 생각했다. 머리도 아프지
않았고 바이러스가 신체의 장기들을 괴롭히지도 않았다. 외계인 따위가 나타나서
깔깔깔, 하고 웃지도 않았다.
유연히 밤하늘을 떠 다니는 달의 평화가 고맙게도 자신을 감싸주기 때문에 모든
게 아늑한 듯도 싶었다.
그는 달을 바라보면서 다림을 생각했다. 발랄하고 서분서분하면서도 당돌한 것도
같고, 꾸밈없이 밝은데도 어딘가 깊은 그늘이 져 있는 듯싶은... 보고 싶다는
감정이 가슴 저 밑바닥 끝에서 샘솟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와 함께 '문리버'를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그녀는 박자도 못 맞춰요? 하며 눈을 흘기지도 모른다. 그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웃었다.
달빛이 창가에 선 그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19
모처럼 사지관은 한여름의 백사장처럼 뜨거운 열기가 그득했다. 중학생인 듯한 세
명의 녀석들이 진열대에 사진 한 장을 놓고 자기들끼리 연신 뭐라고 말하며
왁자하게 떠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녀석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 있는 얘가 내가 점찍은 애인데요, 어때요, 이승연 같죠?"
여드름이 더덕더덕 난 녀석이 그를 보며 말했다.
그가 진열대에 놓인 사진을 내려다 보면서 글쎄, 하고 말했다. 이번에는
초등학생 티를 아직도 못벗은 꼬마 같은 녀석이 말을 받았다.
"천만에! 내가 찍은 얘가 제일 캡이다! 아저씨, 여기 있는 얘 말이에요.
기막히게 예쁘죠?"
꼬마는 사진 속의 한 여자애를 가르키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러자 안경을 낀
녀석 하나가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고 말했다.
"야아, 너희들! 아저씨를 헷갈리게 하지 마. 너희들이 찍은 애가 뭐가 예쁘냐?
솔직히 여기 있는 이 애! 내가 찍은 이 애가 이승연처럼 예쁘잖아! 그쵸, 아저씨!"
"웃기지 마, 이 애야!"
"아냐, 이 애라구!"
꼬마과 여드름이 합창하듯 동시에 대꾸했다.
"어허, 이놈들 시끄럽네."
그는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고 진열대 위의 사진을 손에 집어들었다.
"내가 심판이 될 테니까, 가만히 있어 봐. 어디 보자, 누가 제일 예쁘나?”
"아저씨, 보나마나예요. 내가 찍은 애죠."
"야, 네가 찍은 애가 뭐가 예쁘냐? 나라니깐."
"짜식들, 뻥까고 있네. 내가 찍은 애가 왕 예쁘다니깐."
녀석들이 하나같이 자기가 마음에 둔 여자애들이 예쁘다며 찧고 까불었다.
그는 웃음을 참느라,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사진을 보는 척했다.
여중생들이 야유회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삶이 무엇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나이답게 아이들은 모두
생기발랄해 보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사진을 지그시 보게 되었다. 먼 옛날의 그
시절이 눈앞에 아련히 지나갔다. 지원이의 깜찍한 모습이 명멸하기도 했다.
그는 쓰게 웃고 말았다.
쭝덜댔던 여드름, 꼬마, 안경이 사뭇 정색한 채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모습이
너무 진지해 보였으므로, 녀석들은 그가 명쾌한 판결을 내려둘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가 사진을 진열대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녀석들을 하나하나 갈마보았다.
녀석들은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표정으로 그의 판결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너희들..."
"예!"
"이걸 확대하면 좀 흐리게 나올 텐데."
"예에?"
녀석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자 대단히 실망하는 표정으로 투덜댔다.
그래서 으름장 놓듯 그가 다시 말했다.
"이놈들, 솔직히 말해 봐. 너희들이 찍었다는 애들한테 말이라도 걸어봤니?"
"예? 저는요, 그냥 말을 걸려고 했는데요..."
"하여튼 확대나 해주세요..."
"저는 말은 걸어 봤어요. 시간은 몇 시예요, 하면서요..."
녀석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자신 없이 제각각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그는 또
웃었다.
그런데 언제 들어왔는지, 다림이 녀석들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괜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딴청을 피웠다. 그녀는 그가
아주 한심해 보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그가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리더니 무대위의 배우처럼 가성으로 말했다.
"너희들, 정말 예쁜 여자애가 누구인지 말해줄까?"
"예!"
"근데 사진에 없는데."
"어허, 이 놈들! 너희들이 찍은 애보다도 백배 예쁘고, 이승연보다도 천배 예쁜
여자가 있단 말이야."
"에이, 아저씨도 참... 그런 여자가 어딨어요?"
녀석들이 코방귀를 뀌었다.
"왜 없니? 자, 너희들의 뒤를 봐. 어때 이승연보다도 천배 예쁘지?"
그는 가수를 소개하는 개그맨처럼 팔을 쫙 펴며 리드미컬하게 말했다. 녀석들이
뒤를 돌아보더니, 얄망궂고 되바라지게 발을 동동 구르고 손뼉을 치며 애걔, 하고
소리쳤다. 여드름은,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는 왜 하게요? 이승연이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땅을 치겠네, 라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그도 킥킥댔고,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듯 아이들과 그를 갈마보더니 결국 쿡쿡 웃었다.
여드름, 꼬마, 안견이 그녀와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히죽댔다. 그러고는 잘 부탁합니다
아저씨, 하고 말하면서 우루루 몰려나갔다.
녀석들이 나가자, 가게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녀가 진열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녀를 보면서 여전히 빙글거렸다. 그게 능청스럽게 보였던지 그녀가 톡 쏘듯
말했다.
"남자들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왜들 그래요?"
"뭐가요?"
그가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앙칼스레 말했다.
"정말 유치해요. 내가 이승연보다 더 예쁘다니. 애들이 웃고 난리치잖아요. 좀
어른답게 굴어봐요."
"어허, 말에 이거 칼이 있네. 그럼 본인은 이승연보다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나?
다림 씨는 오드리 헵번 닮았잖아. 그러면 이승연보다 예쁜 건 당연하지."
"참 나... 말이라도 못하면 맙지나 않지."
"그럼 내가 미운가 보죠? 설마하니 그럴 리가..."
"설, 마, 하, 니, 그, 럴, 리, 가...하여튼 아저씨는...좀 무게를 잡아야 애들한테도
권위가 선다니까요. 그리고 애들한테 그런 사진 같은 건 확대해 주고 그러지
말아요."
"어때서? 남자가 여자 좋아하는 건 하느님이 인류를 창조한 이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진리라구, 그리고 벌거벗은 여자 사진을 확대해 달라는 것도 아닌데,
뭐."
"정말이지 아저씨는 못말려..."
"못말려? 그건 비디오 제목 같네."
그의 넉살에 그녀는 다시 웃고 말았다. 그가 언죽번죽 떠벌렸지만 과히 밉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뒷짐을 지고 주위를 괜히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사진
액자들을 하나 하나 살피는 그녀의 눈빛에 호기심이 번쩍였다.
가족 사진에 시선이 멈춘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가족이에요?"
"그래요."
"이 분은 아버지 같고, 이 여자분은 여동생이에요?"
"맞아."
"다행이네. 여동생이 아버지와 오빠를 안 닮아서..."
"아버지와 나를 닮았으면, 혹시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아저씨를 닮았으면 시집도 못 갔을지도 몰라요."
"설마하니 그럴 리가."
"여전히 용의 눈물이셔."
그녀는 톡톡 쏘듯 대꾸하면서도 벽에 걸린 사진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응시했다.
마치 전시회장에 온 관객처럼 눈빛이 제법 진지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홀리가 보석을 감상하는 장면처럼 어딘가 잔양의 애틋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서리는 그늘.
그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아저씨, 사진 작가예요?"
"왜요?"
"몇 번 들락거릴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유심히 감상해 보니 정말 예술사진
같아요. 특히 이 강물의 사진 말이에요. 새가 날아가는 것도 역동적이고 구도와
포인트가 아주 잘 맞은 거 같은데요. 또 흑백이라 아주 강렬해요..."
그녀는 비평가가 된 듯 혼자 고개도 끄덕이며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면서 말했다.
그는 소리없이 웃었다.
"칭찬해 주니 고맙네. 그거 재작년에 마음먹고 찍은 건데, 정말 괜찮아요?"
"그래요, 아저씨. 나도 고등학교 땐 미술부였다구요. 그림을 그려서 아는데, 구도가
정말 좋아요."
"그래요? 오호, 화가였구나."
"지금은 화가 아니에요."
"그림 계속 그려요?"
"아뇨, 안 그려요. 아저씨도 알다시피 나는 단속반 일 하잖아요. 그냥 고등학교
때 미술부였다구요. 고등학교 때 미술부였다고 다 화가 됐으면 우리나라엔 화가
아닌 사람이 없겠네요..."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 눈가의 그늘이 뺨으로 내려오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아주 잠깐이지만 표정이 어두워졌다. 눈도 웃지 않았고 입술도 꾹
다물어졌다. 눈동자에는 무엇인가 갈망하는 빛이 반짝였다.
그 변화되었던 펴정을 그는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왔다. 진열대 안쪽의 그와 바깥의 그녀는 우두커니
서서 제각각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이전과 다름없이, 조금은 과장스럽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 인물 사진들도 아저씨가 찍은 거예요?"
"그건 아버지가 찍은 게예요. 지금은 눈이 나빠지셔서 사진을 찍으면 초점이 잘
안 맞아요. 왕년에는 대단하셨는데."
"나랑 비슷하시네요."
"그런가?"
그가 웃었고 그녀도 따라서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에는 여전히 애틋한 그늘이
남아 있었다. 민감하지 못한 사람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것은 희미했지만 그는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어쩌면 자기만이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가 진열대 쪽으로 걸어오더니, 필름 다섯 통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놓았다. 그가
다섯 통의 필름을 한데 모으면서 말했다.
"벌이가 좋네."
"참 나, 아저씨두..."
"오늘은 급한 거 아니죠?"
"그래요, 아저씨!"
그녀가 느닷없이 혀를 날름 내밀곤 뒤돌아서서 깡충깡충 뚜다시피 사진관 밖으로
나갔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볍게 때리며 그는 조용히 웃었다.
20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데도 거리에선 뜨거운 기운이 끈질기게
머물고 있었다.길을 걷는 행인 몇몇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연신 닦기도 했다. 스쿠터를 몰고
가는 정원도 덥기는 마친가지였다. 그는 스쿠터를 천천히 몰면서 큰길로 나왔다.
도로에는 차들이 정체되고 있었다. 몇몇 차들은 더위에 찌증이 난 듯 클랙슨을
빵빵 울리기도 했다.
그는 도로에 조심조심 진입했다. 그런데 도로 건너편에서 낯익은 모습이 눈에 언뜻
보였다. 그는 스쿠터를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였다.
그녀는 갓길에 불법 주차된 차 옆에서, 차 주인인 듯한 대머리 사네와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차 유리에 주차 위반 스티커가 붙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딱지'를 뗀 것 같았고 대머리사내는 그걸 항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하고
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녀의 표정도 찌푸려졌다.
그녀도 대머리에게 뭐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햇볕이 기운을 잃을 무렵인데도 날씨는 더웠다.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덥다며
짜증을 내는, 그런 일기였다. 그런데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머리와
옥신각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멍히니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 몇몇은 대머리와 그녀를 보고 낯을 찡등거렸다. 이게 웬 싸움이냐,
하는 표정으로 서너명의 행인들은 지나가다 말고 그 자리에 서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마의 땀을 연신 닦으면서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는 콧날이 찡해 옴을 느꼈다. 스쿠터를 정차시킨 채 그는 그녀에게 마음으로 성원을
보냈다. 뒤에서 승용차가 클랙슨을 길게 빵빵 울려댔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리곤 시동을 걸었다.
도로에는 차들의 행렬이 여전히 꼬리를 길게 이어가고 있었다.
21
뎅뎅뎅, 하고 벽시계가 일곱 번의 종을 쳤다.
그는 손님에게 현상된 사진을 내주면서 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손님은 돈을
치르고 사진관 밖으로 나갔다.
그가 다시 암실로 들어가려는데, 문이 열리더니 그녀가 생긋 웃으며 들어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녀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입을 비죽댔다.
"웬일로 이렇게 반기시는 거예요, 아저씨?"
"어허, 그럼 내가 언제는 반기지 않았나?"
"여전히 벌이가 좋아요, 나는."
그녀는 진열대에 또 다섯 통의 필름을 놓았다. 그는 필름통을 내려다 보았다.
필름통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아마도 땀인 거 같았다.
그제서야 그녀도 필름통이 물기에 젖어 있는 걸 깨달은 듯, 손수건을 꺼내 닦으려고
했다. 그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그녀는 멋쩍게 웃더니 소파에 털썩 앉았다.
"많이 피곤하지?"
"왜 이러세요, 아저씨? 닭살 돋네. 평소대로 하세요, 평소대로."
얼굴도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었지만 눈 밑엔 눈물 자국이 희미하게 얼룩져 있었다.
"땀이 많이 나서 여름은 정말 싫어요."
"선풍기 그쪽으로 해줄까?"
그는 진열대 우측에서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를 가리켰다. 덜덜거리는
선풍기를 잠깐 곁눈질하고 그녀가 말했다.
"됐어요, 아저씨. 지금은 안 더워요. 대신 좀 쉬었다. 가도 되죠? 다리가 많이
아파서요."
"어쩐지 어감이 이상하네."
"예?"
"쉬었다 간다는 말이 말이야."
"예?"
무슨 뜻인가 싶어서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낯을 붉히며 그를 흘겼다. 그는
킥킥댔다.
"어휴, 아저씨는 하여튼..."
"뭐가?"
"몰라요."
짐짓 토라진 듯 얼굴을 외면하더니 그녀는 기지개를 한 번 켰다. 그러고는 소파에
어깨를 깊게 묻었다. 그는 진열대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을 깍지 끼었다.
"아저씨..."
그녀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왜?"
"저... 아저씨가 사용하는 카메라 있잖아요."
"어떤 거?"
"거, 왜, 사진 작가들이 사용하는 거요. 노란 끈 달리고 사진기 앞은 대포처럼
튀어나왔구... 그런 거는 얼마나 해요?"
"..."
그녀가 시선을 벽 쪽으로 몲기며 말했다. 시선이 닿은 곳은 벽에 걸린 그의 가족
사진이었다. 그도 진열대 왼쪽 벽에 걸려 있는 가족 사진으로 눈길을 옮겼다.
사진 속의 가족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사진 속의 그도 웃고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가족 사진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저녁 안 먹었지? 자장면 시켜줄까?"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고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불쑥 말했다.
"아저씨!"
"왜? 그럼 짬뽕?"
"아저씨는 사자자리죠?"
"글쎄..."
"혹시 생일이 팔월 아니에요? 사자자리가 나랑 잘 맞는다고 대학로 역술인
아저씨가 그랬는데, 아저씨 정말 몇 살이에요?"
그녀가 굉장히 궁금하다는 기색으로 눈길을 옮기더니,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첫
미팅에 나간 중학생처럼 뺨에도 약간의 홍조가 띠워져 있었다.
그는 능글맞게 웃기만 했다. 그녀가 채근했다.
"정말 몇 살인데요?"
"사실은 이십대 후반."
"치... 그럼 삼십대구나. 그것도 후반. 완전히 아저씨네. 캡 실망!"
"어허."
"결혼도 아직 못했죠? 그렇게 능청스러우니까 그렇죠."
"무슨 소리! 아가씨만한 딸이 둘이나 있는데.
"아저씨 옷 입은 거 보면 알아요. 아이는커녕 아마 사귀는 여자도 없을 걸요,
그렇죠?"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깨를 으쓱하며 그가 서당의 훈장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허, 어린 것이 별걸 다 묻는구나."
"또 용의 눈물이다. 아저씨는요, 용의 눈물을 극복해야만 애인도 사귈 수 있다구요. 좀
신세대 감각과 무게를 절묘하게 조화해 보라구요. 그러면 나도 생각을 좀 해볼 텐데..."
"어허, 됐네. 이 사람아."
"하여튼..."
소파에 편안히 앉아 있어 피곤이 갑자기 몰려왔던지 그녀는 하품을 갑자기 했다.
미처 손도 가리지 못하고 하품하는 모양을 바라보던 그가 엷게 웃었다.
그녀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을 몇 번 씀벅대더니 말했다.
"아저씨."
"응."
"나 이제부터요, 십분간만 잘 테니까 말 시키지 마세요."
"그러다가 내가 업어 가면 어떡하려고?"
"염려 마세요. 지가요, 이연걸이를 5초만에 녹다운 시켰걸랑요. 이틀 전에는
17명과 혈전을 벌이기도 했어요."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조잘대듯 말했다. 그리고 상체를 옆으로 눕히더니 왼손을
베개삼아 머리에 갖다 대었다.
"대단하군. 여자 이소룡이네."
"그런데 아저씨, 왜 계속 반말해요? 듣고 있자니까 열받네."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입을 삐죽댔다.
"허허."
"좋아요, 아저씨 그러면... 그 벌로 자장가나 한 번 불러 봐요."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나직해졌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소파에 누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금방, 그녀는 아이처럼 새근새근 잠들었다. 그는 선풍기를 그녀 쪽으로 돌려 놓았다.
그녀는 평화로워 보였으며, 지쳐버린 작은 새가 보금자리에 돌아와서 곤히 잠든
듯한, 그런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잠든 그녀를 바라보았다. 홀리를 지켜보는 폴처럼.
그는 ‘문리버’를 생각했다. 그리고 읊조리듯 조용히 그 노래를 불렀다.
문리버, 달빛에 빛나는 드넓은 강
나 언젠가 빛나는 당신을 건너 가리라
어릴 적 꿈을 주고
가슴에는 상처를 준 당신
그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리
두 방랑자, 세상은 저 멀리 바라다 보이고
보고 싶은 세계는 너무도 많은데
우리는 같은 무지개 끝을 좇아
그 너머 세상을 기다린다네
내 둘도 없는 벗이여
문리버와 나
오후의 풍경
22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방에서 파를 다졌다. 모처럼 가족이 다 모여 그로서도
마냥 흥겨웠다. 식탁 옆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오 전을 부치고 있는 정숙이와
아버지의 표정도 밝았다.
그는 다진 파를 큰 그릇에 넣고 간장을 적당히 부었다. 그런 다음 깨소금, 설탕,
후춧가루, 고추장을 풀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익숙하게 요리하고 있는
그를 정숙이가 잠깐 보더니 한마다 했다.
"오빤, 진작에 주방장으로 나갔으면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
"그러게 말이다."
삼겹살에 양념장을 버무리며 그가 말했다. 전을 한 번 뒤집으며 정숙이가 쿡,
하고 웃었다.
"오빤 못말린다니깐, 맛만 없어봐!"
"임마, 네가 하는 것보다는 훨씬 맛있을걸. 너 시집 간 이후부터 아버지와 나의
별식은 바로 이 삼겹살 볶음이라구."
"아빠, 진짜 맛있어?"
정숙이가 이번에는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도 그럼,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자식들을 번갈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에 눈길이 갔을 땐, 눈동자에 어렸던 애틋한 빛을 감추지는
못했다.
"기다려 봐, 새로운 맛일테니까."
그가 삼겹살을 프라이팬에 옮겨 담으며 큰소리를 치는데,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아버지가 자기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정숙이의 아이 민호가 할아버지, 하며
들어와 아버지에게로 안겼다. 그 뒤로 정숙이의 남편 석희가 인사를 꾸벅하며
들어왔다. 석희는 깔끔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왼손에 들고 있었다. 아마도 양주인
듯했다.
전을 부치다 말고 정숙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하던 일을 멈추고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석희는 함박웃음을 띠며 그에게도 붙임성 좋게 인사를 했다. 그는 석희와 악수를
하며 어깨를 한 번,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는 석희를 마음에 들어했다. 싹싹한 성격에다가 처갓집일도 잘 챙기려는
노력하는 게 보여 믿음직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도 석희는 아들 노릇을 톡톡히
할 터였다.
아버지는 민호를 번쩍 들어서 품에 안더니 껄껄 웃었다.
"으휴, 이 놈 꽤 무겁구나. 이젠 무등도 못 태우겠네."
"할아버지 나는요, 내년에 초등학교 가요."
"허허... 그래, 이 놈 이제 다 컸네."
아버지는 민호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뺨으로 민호의 얼굴을 비비면서 여전히
큰소리로 웃었다. 외손자가 참으로 귀여운 모양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곁눈질하면서 그는
마음 한 구석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친손자를 안겨드렸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형님, 직접 주방에서 음식을 하세요? 이 사람 시키면 될 텐데..."
석희가 그의 옷차림을 보더니 말했다.
"자네 생일이라기에 별미를 한 번 만들어 보고 있네."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렇죠... 이 사람을 시키면 될 텐데..."
석희가 정숙이를 짐짓 흘기며 말했다.
정숙이가 도리질하듯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아무리 말려도 굳이 오라버니께서 하시겠다는데 어떻게 하겠수!"
"자, 여기에 앉게."
아버지가 방석을 내놓으며 거실의 중앙에 앉았다. 민호는 아버지의 무릎에 냉큼
앉았다. 석희가 그 맞은편에 앉으며 사들고 왔던 선물상자를 아버지의 앞에 놓았다.
아버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아, 뭘 이런 걸 사 가지고 오나. "
"아닙니다, 아버님. 약소한데요...이거 양주입니다. 약주 좋아하시니까, 반주
생각나실 때 한잔씩 하십시오."
식탁 옆에 다시 앉은 정숙이가 전을 부치면서 끼여들었다.
"아빠, 하여튼 양 서방은 술이라면 껌벅 죽는다니까요. 365일 동안 술을 안
마시는 날이 아마 이틀도 안 될걸."
"음."
석희는 정숙에게 고개를 약간 돌려 눈짓을 하며서 헛기침을 두어 번했다. 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을 주체못하고 그저 허허 웃을 따름이었다.
정숙이가 잔소리하듯 또 몇 마디를 구시렁댔지만, 그게 꼭 불만스러워서 내뱉는
소리같지는 않았다.
그는 삼겹살을 마저 버무린 다음 거실로 가서 아버지의 옆에 앉았다. 석희는
하나도 대수로울 게 없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푸근한 표정이었고, 민호는
외삼촌, 하며 다가오더니 그의 품에 안겼다.
가족의 단란함이란 이런 것이겠지, 하고 민호의 엉덩이를 두어 번 두드리며 그는
생각했다. 민호는 삼촌 아파, 하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와 가족들은 정겹게 웃으며 저녁상 앞에 마주앉았다. 그리고 얘기와 웃음꽃을
피우며 저녁을 먹었다. 사위가 사온 양주를 반주로 해 아버지는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는 사진 액자를 석희에게 선물했다. 정숙이와 석희가 사진관 촬영실에서
나란히 찍은 사진이었다. 석희는 야, 이거 영화배우가 따로 없네, 하며 대단히
만족스러워했고 그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
일상의 행복.
그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더없이 평화로웠다.
23
저녁상을 물리고 그와 가족들은 안방에서 포도를 먹으며 정담을 나누었다.
석희와 정숙이가 번갈아가며 얘기를 했고 아버지는 이따금 껄껄대며 그들의
얘기를 들었으며, 그는 미소를 띤 채 포도만 먹었다. TV를 보던 민호는 어느 새
아랫목에 배를 깔고 잠들어 있었다.
정담은 계속 이어졌고, 무슨 말끝엔가 정숙이가 이렇게 말했다.
"마당이 있었던 옛날집이 좋았던 것 같애. 옛날엔 마루에서 포도나 수박을
먹다가 씨를 마당으로 뱉곤 했는데... 오빠, 기억나? 내가 국민학교 때 오빠는
중학생이었지. 그 때, 누가 씨를 더 멀리 뱉나, 하고 내기도 했었잖아."
"옛날 가옥 구조야 요즘 찾기 힘들잖아. 근데 21평이 좀 좁긴 좁은 거 같애요. 한
32평 빌라면 딱 좋겠는데. 저희 가족이 오니까 21평이 좁아 보이잖아요. 형님도
장가를 가셔야 될 텐데... 그럴려면 여긴 너무 좁은 거 아닌가요..."
"!"
정숙이의 말을 받아 석희가 무심코 말을 뱉다가, 뜨끔한 기색으로 말끝을
머무적머무적했다. 그리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아주 짧은 순간, 멈칫거렸으나
이내 포도를 먹으며 미소를 띠었다. 그러자 정숙이가 남편을 잠깐 흘겼고, 아버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내렸다.
갑작스럽게 어색한 기운이 가족들 사이를 감돌자 그가 과장의 혐의가 엿보일
정도로 어깨를 으쓱하곤 활발히 말했다.
"그럼, 매제 말이 맞아. 새식구를 맞이하려면 여긴 너무 좁지. 거실이 있다지만
우리 가족만 빙 둘러 앉아도 어깨가 맞닿아지잖아. 아버지, 한 번 집을 알아볼까요?"
"으응... 그러자꾸나 정원아."
아버지와 그의 표정을 갈마보며 정숙이도 거들었다.
"그래, 맞아!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가는 건 나도 대찬성이야."
"..."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무리 과장스럽게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가슴에 깊숙이 자리잡은 절망을 지울 수는 없었다. 절말은 그들이 맞이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이기도 했다.
그것은 숨길 수도 감출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단란한 한때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들 가족은 숨막힐 듯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가 버렸다.
아버지는 담배를 뻑뻑 피웠고 정숙이는 천장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으며,
석희는 고개를 떨구고 뭔가를 골몰히 생각했다.
그는 포도를 계속 먹었다. 포도 껍질을 벗기는 소리와 씨를 뱉는 소리가 침묵 속을
어렵게 뚫고 나갔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정숙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응."
"병원은 꼬박꼬박 가지?"
"그래."
"의사도 그랬잖아. 무슨 병이든 불치란 건 없는 거야. 고치겠다는 마음만 확고하면
분명히 나을 수 있다구!"
아버지도 말문을 열었다.
"정숙이 말이 맞다. 이 애비는 믿는다. 어디든 기적은 있으며...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해낼 수가 있는거야."
"예."
그는 포도를 계속 입안에 밀어넣었다. 우물우물. 그는 웃기 위해 입가도 움직여
보았다. 입 안에 가득 찼던 포도중에 한 알이 입밖으로 툭 떨어졌다.
정숙의 눈시울이 점차 붉어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담배를 뻑뻑 태웠다. 석희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손길을 기다리는 포도 송이가 많이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포도를
먹고 있는 건 그 혼자였다.
24
어줌이 막을 친 방 안에 그는 얇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창문 너머 바깥의
하늘도 억구름이 잔뜩 끼여 있어, 방 안엔 희미한 빛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있었으나 야속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는 밤새 뒤척뒤척거렸다.
머리는 아팠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으나, 그는 결코 신음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잠을 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식구들은 모두 곤하게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25
정원의 스쿠터가 털털거리며 골목 어귀에 들어섰다.
오후의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으나, 다행히 찜통같은 더위를 몰고 오지는
않았다. 게다가 주택의 담장위로 늘어진 나뭇가지들이 골목에 그림자를 길게 만들어
그늘을 지게 했으므로 조금은 서늘하기도 했다.
골목 저편에서 불쑥 나타난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하며 기막힌 솜씨로 어느 집
담벼락을 뛰어넘더니 안으로 사라졌다.
한여름 날인데도, 뜨거운 열기보다는 뭔가 한아한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골목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쿠터를 한층 더 천천히 몰면서 그늘 밑으로 지나갔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그는 무심코 지나가려다 눈을 번쩍 떴다. 여자였다. 아주 낯익은 얼굴.
그녀도 그를 발견하고는 멈칫거렸다.
그도 스쿠터를 정차시켰다.
여자는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낯이 붉어지고 새끼 손가락을 깨물면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그러했다.
여자는 지원이었다.
그가 스쿠터에서 내렸다. 가슴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는 심호흡부터 했다.
아주 먼 옛날... 중학교 2학년짜리 지원은 깜찍했다. 그는 지원을 보면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골목길에서의 뜻하지 않은 해후의 순간에도 그의 가슴은 그 옛날처럼 심하게
뛰었다.
"지원아, 오랜만이다."
그가 그녀 쪽으로 몇 발자국 옮기며 말하자, 그녀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얼굴을 들더니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게. 꽤 됐네."
"그래. 집에 왔니?"
"응."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선을 약간 아래로 내렸다. 그녀는 여전히 웃었지만,
왠지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 꾸미고 있는 듯한 느낌이, 그녀의 초췌한
안색 때문에 확긴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중학생일 때 억지로 웃지 않았다. 언제나 그늘이 없었다. 어둠은 그녀에게
침범할 수 없었고, 밝음만이 그녀의 곁에서 숨쉬는 듯했다.
하지만 이 골목길에서의 그녀는 밝지 않았다. 그녀는 밝게 보이려고 웃었지만,
그것은 억지로 꾸미는 것이었다.
그녀는 행복하지 않다.
왜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전도가 촉망되는 청년과 결혼했다. 서울 법대를 졸업했으며, 사법고시에도
합격한, 그런 청년이었다. 그는 그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뻤다. 그녀도 명문 여대를
졸업했으므로 그 청년의 반려자로 손색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델이
되지는 못했지만 성공한 셈이었다. 그는 포함하여 주변 사람들 모두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커플. 그러므로 그녀는 행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도
그것을 절실히 원했으므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오빠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한동안의 침묵 끝에 그녀는 말했다.
"나야 늘상 그렇지 뭐."
그가 말했다.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도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쓰게
웃었다.
"얼굴이 조금 수척해 보이긴 한데..."
그녀가 이번에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어제 잠을 못자서 그래."
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만지며 말했다.
"나 갈게."
"그래, 잘 가."
그녀는 그의 곁을 스쳐 갔고, 그는 스쿠터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몇 발자국
걸어가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 오빠..."
"응."
그도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저..."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머뭇거렸다.
"왜?"
"저기 있잖아. 아까 사진관을 지나서 왔는데...진열창에 걸려 있는 거...나하고
정숙이가 고등학교 때 찍은 사진 말야."
"응."
"그것 좀 치워 줄래?"
"왜? 보기 싫어?"
"그런 건 아냐. 단지..."
"알았어, 그렇게 할게."
"고마워, 오빠."
"고맙긴..."
그녀는 가볍게 목례하고 뒤돌아서 갔다.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는
고개를 돌리소 시동을 걸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났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일상적인
안부를 주고받아야 되는 게 그들의 현실인 것이다.
털털거리며 스쿠터가 움직였다. 그와 그녀는 서로가 등진 채 골못을 빠져 나갔다.
아까, 어느 집안으로 들어갔던 고양이가 담장 위에 다기 나타나 야옹, 하고
울더니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오후의 햇살이 담장 위로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들을 찬란히 비추고 있었다.
26
골목을 빠져 나온 그는 큰길로 들어섰다. 그는 가볍게 살랑이는 바람을 맞받으며
스쿠터를 몰았다.
아파트 단지 앞길을 달리고 있는데, 종이 뭉치를 든 다림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가슴에 종이 뭉치를 잔뜩 안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걷고 있었다.
그는 경적을 빵빵 울렸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 아저씨!"
그녀가 구세주를 만난 듯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안녕, 다림 씨. 늘 덥다고 하면서 그 무거운 것 들고 어디로 가는 거야?"
그는 스쿠터를 천천히 몰아 그녀 옆으로 가면서 짓궂게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 참, 아저씨! 덥단 말이에요."
"그럼, 덥지."
"지금 어디 가요, 아저씨?"
그녀가 물었다.
"응, 병원... 아 아니 저 가게에 가는데."
"가게요?"
"응."
"아저씨, 설마하니 숙녀가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낑낑대는데 모른 척하고
지나가지는 않겠지요?"
"글쎄."
"아저씨!"
"그래, 뒤에 타."
그가 웃으며 스쿠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종이 뭉치를 받아 스쿠터에 싣고
다시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그녀가 큼큼, 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안 타? 그럼 혼자 간다."
금방이라도 출발하듯이 그가 상체를 약간 굽히자, 그녀가 아저씨 하며 얼른 뒤에
탔다. 그는 빙긋웃었다. 그녀의 뺨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허리 꽉 잡아. 최고의 속력을 낼 테니까."
"치, 스쿠터 가지고 큰소리는..."
그녀는 눈을 흘겼다.
"어, 스쿠터를 무시하네. 어디 한 번 해볼까!"
그는 큰소리쳤다.
스쿠터가 출발했다. 하지만 여전히 털털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그의 허리를 꽉 잡은 채 킥킥댔다.
"하여튼 아저씨 뻥은!"
"구청으로 가는 거지?"
"예, 아저씨!"
그녀를 태운 그의 스쿠터는 아파트 단지를 지나 도로로 접어들었다.
27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를 무심히 바라보며 그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스쿠터가
그의 옆에 세워져 있었다. 아파트 단지는 풍경화처럼 별 미동도 없이 한가로웠다.
오후의 양광이 그곳에 격랑하듯 쏟아져 그의 눈앞에서 폭포처럼 부서졌으나, 벤치
옆에 보초처럼 서 있는 은행나무의 가지가 길게 늘어져서 빛살을 어느 정도
차단했으므로 , 그는 느긋할 수 있었다.
놀이터에는 서너 명의 아이들이 미끄럼틀에서 올았다. 이따금 녀석들의 웃음
소리가 허공을 매끄럽게 돌아 다였다. 아이들에게는 여름이 짜증나고 귀찮은 계절이
아니라, 놀기에 딱 좋은, 그런 계절인 거 같았다.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민호 생각이 났다. 다음 주쯤에 민호를 데리고
야구장에라도 한 번 가야겠다고 그는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삼촌 노릇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놀이터 뒤에 있는 상가 건물에서 그녀가 나왔다. 그녀는 왼손을 허리 뒤로 감추고
오른손으로는 아이스캔디를 빨아먹으며 벤치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일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서 그의 앞으로 왔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먹은 아이스캔디를
그에게 내밀었다.
"아저씨, 구청까지 바래다 준 것에 대한 답례예요."
장난기 어린 눈으로 그녀가 말했다.
"어, 그래. 고마워."
그는 그녀가 내민 아이스캔디를 받아들고 서슴없이 베어먹었다. 그녀가 짐짓
투덜댔다.
"어, 아저씨... 진짜 먹네."
"성의잖아. 먹어야지."
"복수하려고 했는데... 또 당했네. 하여튼 아저씨는...!"
그녀가 그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허리 뒤에 감추었던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왼손에는 '원비디'라는 건강 음료가 있었다. 그녀는 그것도 그에게 내밀었다.
아이스캔디를 후딱 먹은 그가 웬일이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것도 드세요. 지난 번에 보니까 안색이 안 좋았잖아요. 아저씨가 결혼을 아직
못했으니까 챙겨주는 여자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걱정되면 중매를 서주지."
그가 웃으며 원비디를 받았다.
"그런가..."
그녀도 웃었다. 그는 잠깐 음료수 병을 내려다 보곤 말했다.
"피곤할 텐데. 이거 먹지, 그래?"
"나는 20대 초반이라구요, 아저씨."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는데, 반씩 먹자."
"쫀쫀하기는..."
"먼저 먹어."
그가 억지로 그녀의 손에 음료수 병을 쥐어주자, 그녀가 예의 눈을 한 번 흘겼다.
그리고 병 꼭지가 입술에 안 닿게하고는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 다음 그에게 다시
건네 주었다. 그는 벌컥벌컥 마셨다.
그와 그녀는 나란히 앉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까르르대며 놀고 있었다.
"아저씨, 이렇게 오랫동안 사진관을 비워도 괜찮아요?"
"괜찮아."
"아저씨."
"응."
"뭐...전에 사귀었던 여자도 없어요?"
"글쎄."
"시시하다."
복슬복슬한 강아지 한 마리를 가슴에 안은 아가씨가 그들의 앞을 지나갔다. 그는
강아지를 향해 실없이 손을 흔들었다. 강아지는 무료한 눈밫으로 그를 스쳐봤을
뿐이었다.
며칠 전처럼 끽연의 욕구를 그는 별안가 느꼈다. 하지만 호주머니에 담배는
없었다. 그가 말했다.
"난 이 동네에 꽤 오래 살았거든..."
"예?"
"예전에는, 그러니까 이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여기는 아카시아 꽃이
만발했었어. 고등학교 때 여자친구와 이 앞을 산책하면거 아카시아 꽃 향기를
맡았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아카시아 꽃 향기만 맡으며 하늘 높이
떠 있는 아름다운 달을 바라보았어. 나는 그 때 달이 아름답다는 걸 처음 느꼈지."
"우와, 아저씨...제법 숙성했네! 아니, 혹시 여자 꽁무니나 쫓아 다니는 날라리
아니였어요?"
"설마하니 그럴 리가..."
그는 새삼 아파트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지원은 중학교 3학년이었다. 마냥 행복했던 시절.
아카시아 꽃잎이 어지러이 떨어진 꽃길을 밟으며 그들은 밤하늘에 홀로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그 때가 지금도 그의 눈에 선했다.
하지만 아파트가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서고, 육중한 몸을 자랑하기 시작했을 때
세월은 흔적도 없이 파괴되고 말았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 보아도 그 옛날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추억
속에서만 아스라이 떠다닐 뿐이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저씨."
그녀가 그의 옆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왜?"
그는 놀이터에 눈길을 준 채 말했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여전히 생기발랄했다.
오후의 양광 속에서 아이들은 경쾌하기 짝이 없는 수채화의 소품 같았다.
"정말 아무 말도 안 하고 산책만 했어요?"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의심 많은 연인이 된 기색으로 눈을 맞추면서 장난처럼
손톱을 쓱 세웠다. 그 모양에 그가 쿡쿡 웃었다.
"응, 걷기만 했지."
"치, 조숙해서 좋았겠네요."
"왜? 다림 씨는 그런 추억이 없어?"
"아직 연애 한 번 못해봤다구요!"
"좋아하는 남자 없어?"
"다들 시시해요."
그녀가 별안간 시무룩해지는 듯했다.
매미 소리가 벤치 옆의 나무에서 울려왔다. 그는 잠깐 은행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달라질걸."
가볍게 툭 던지는 말이 아니라 차분하고 진지한 말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힘없이
저었다.
"모르죠. 어느 세월에요..."
"..."
그녀는 고개를 속이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뭔가 시시껄렁한 얘기라도
그는 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들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후의 양광 속에 말없이 그들은 벤치에 한참 동안이나 앉아 있었다.
28
그는 그녀와 헤어지고 슈퍼에서 담배를 하나 산 다음, 사진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숙이와 지원이의 사진을 진열창에서 치웠다.
이느 새 서편 하늘은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낙조는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사진관 안을 적셨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한 모금 뿜으면서 유리창 너머의 바깥을 멍하니
응시했다.
언제나 변함 없는 일상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아마 내일도 그러할 터였다.
29
그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정숙이가 세탁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정숙이의 손에는 빨래 뭉치가 한아름 있었다.
그는 얼른 정숙이를 도와 주었다. 그들은 베란다에서 빨래를 함께 널었다.
베란다에서 나오며 정숙이가 말했다.
"늘 이 시간에 가게 문을 닫고 들어오는 거야?"
"아니. 10시에 닫을 때도 있구, 8시에 닫을 때도 있지 뭐. 정해진 건 아냐.
아버지는 안 계셔?"
"친구분하고 볼일이 있으시대."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곤 욕실에 들어가 세수를 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는 욕실에서
나와 식탁의 의자에 앉았다.
정숙이는 김치통을 냉장고에 넣고 있었다. 모르신 몰라도 낮에 김치를 담그고
밑반찬을 만드느라 고생했을 터였다.
"네가 고생이 많다."
"고생은 뭘. 두 분의 홀아비를 둔 업보 아니겠어!"
정숙이가 앞치마를 벗으며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다.
그가 웃었다.
"오빠, 냉장고에 넣어둔 건 열무 김치니까 이틀 후에 꺼내 먹고, 배추 김치는
냉장고 옆에 뒀어. 내일이면 금방 익을 테니까, 그 때 냉장고에 넣어둬. 아 참,
오빠, 저녁은?"
앞치마를 접어서 포개다가 그의 저녁 생각이 났던지, 다시 앞치마를 두르면서
정숙이 말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실, 밥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생각없...아, 아니 먹었어, 아까."
"정말?"
정숙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응."
그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집에서 먹지. 맛있는 거 해 주려고 했는데."
"마음만으로도 고맙다, 임마."
"그럼 오빠, 수박 먹자. 냉장고 속에 몇 시간이고 넣어 두었거든."
"수박 먹고 갈 시간이 되겠어? 양 서방 퇴근했겠는데."
"염려하지 마. 그 사람은 북극에 떨어뜨려도 라면 끓여 먹을 사람이야."
정숙은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 식탁으로 가져와 먹기 좋게 잘랐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 수박 한 쪽을 손에 들고 베어 먹었다.
그도 수박을 손에 들고 한 입 베어먹고는 말했다.
"정숙아."
"응."
"옛날 집은 아니지만, 우리 옛날처럼 해 볼까?"
"뭘?"
느닷없이 그는 수박씨를 주방 쩍으로 내뱉았다. 정숙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보더니 이내 킥킥댔다. 그도 웃으며 말했다.
"우와, 멀리 갔다. 역시 내 실력은 녹슬지 않았군."
"기다려 봐."
정숙이가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수박을 우물우물 먹은 다음, 양볼에 잔뜩 힘을 주더니
그대로 수박씨를 뱉었다. 총알처럼 수박씨들은 주방으로 날아갔다.
이느새 옛날로 돌아간 그들은, 그 때 그랬던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한동안 웃어댔다.
그와 정숙은 그 시절 얘기를 두서 없이 하면서 수박을 먹었다. 회한의 그늘같은 건
그들의 얼굴에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면서 정담을 나누는 사이좋은
오누이의 정감이 집안에 흘러넘쳤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의 추억에는 전선처럼 연결되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지원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아스라한 추억이라 하더라도 그녀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정숙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말했다.
"참...옛날 얘기하다 보니... 오빠, 낮에 지원이 잠깐 만났어."
"..."
그는 수박을 먹다 말고 식탁에 내려놓았다.
"걔만 생각하면 울화통이 도져. 마음도 아프고 화도 나고... 남편이 이젠 구타까지
한대. 의처증에다가 구타까지... 걔 사는게 말이 아냐, 걔가 아무리 이혼을 요구해도
남편이 들어주지 않나봐. 오빠, 모르고 있었지?"
"..."
정숙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그는 불을 붙였다. 정숙이가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오빠, 담배 피워?"
"응."
"안 돼. 몸에 해로워..."
정숙이 말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담배 연기를 천천히 들이쉬었다가 내뿜었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아."
"오빠, 아직도 걔를 못 잊는구나!"
"아냐, 오래 전 이야기일 뿐이야."
"..."
기어코 정숙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그는 정숙의 어깨를 가만히 안았다. 팔에 안긴
정숙의 어깨는 조금씩 떨렸다.
그는 농담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임마, 바보는 너야, 나 요즘 여자 생겼어."
"오빤...정말...바보같이..."
"그래서 시를 외우고 다녀. 김소월, 박인환, 하이네, 바이런……등등. 정말이다,
들어볼래?"
그는 크게 헛기침부터 했다.
"뒷동산에 동백꽃 피는 그리운 내 고향
바람이 불어와 꽃송이 시냇물에 떨어지네
빨래터 순이는 꽃송이 보거든
내 붉은 마음인 줄 알는지."
정숙이 눈가를 홈착홈착 닦더니 말했다.
"참, 나.... 그게 뭐야?"
"시라니깐. 이것 뿐만이 아니고 밀레의 시도 알어. 한 번 들어 볼래?"
"밀레는 화가잖아."
"아, 참... 그렇지! 밀레는 화가지. 그럼 밀턴은 화가야? 시인이야?"
"오빠도 참..."
정숙이가 그의 가슴을 토닥토닥 때리며 웃었다. 아이구 아퍼, 하며 그는 짐짓
엄살을 부리며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난 후 그가 정숙을 가만히 안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고 정숙은 다시 눈물을 소리없이 흘렸다. 그는 정숙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오빠!"
"그래, 그래..."
"오빠, 죽지 마!"
"그래...안 죽어..."
그는 눈가가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마터면 그도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을 씀벅댔다.
누군가 비를 맞는다
30
철구의 아내 향이가 사람좋은 미소를 따고 사진관안으로 들어왔다. 현상된 사진을
정리하다가 그는 함박웃음을 띠고 인사를 했다.
"아, 제수씨 어서 오세요."
"잘 지내세요?"
향이도 인사했다.
"물론이죠."
"사진 좀 뽑아주세요."
"예. 참, 요즘 태권도도장은 좀 어때요?"
"방학이니까 좀 낫죠."
향이는 필름통을 진열대 위에 놓으면서 말했다.
"예. 철구가 노력하는데 더욱 잘 되야죠."
그는 정말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철구가 모처럼 마음잡고 재작년에
문을 연 게 태권도 도장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모이지 않아 파리만 도장 안에
날아다녔다. 변두리 동네이지만 길 어귀에 이미 태권도 도장이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뒤늦게 뛰어들어 회원을 확보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후발주자'의 서러움을 흠씬 느낀 철구는 쉽게 좌절했다. 니미! 때려치운다,
하며 철구가 술만 퍼마셨을 때, 사내처럼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가가호호 방문하여
선전지를 돌리고 학부모를 공략한 사람이 그녀였다.
물불 안 가렸던 그녀의 저돌성으로 인해 태권도 도장은 아이들로 점차 채워져
나갔다. 철구도 겉으로는 여자가 말이야, 하며 투덜댔지만 속으로는 너무나 좋아 향이가
곁에 없을 때는 흐흐흐, 하며 흐물거렸다.
그러고 보면, 철구를 마음잡게 했던 사람은 그녀인 셈이었다.
그는 철구와 향이를 보면 언제나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천생연분이란 저 두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라고.
일상의 행복.
두 사람은 일상의 행복에 젖어 삶의 종착점까지 순탄하게 걸을 것이다, 하고 그는
새삼 생각했다.
그게 부럽기도 했다. 그가 못 누리는 것을 친구라도 누리고 있으니, 달리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이기도 했다.
"참, 지난 번 장례 때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복성스러운 미소는 그녀의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여전히 보기 좋은, 상대방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그런 미소인 것이다.
그녀는 도장 옆에 사진관이 있는데도, 굳이 다리품을 팔면서까지 그의 사진관으로
와서 필름을 맡기는 마음씨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미소가 가능한지도 몰랐다.
"뭘요..."
그는 뒷머리를 긁적대며 말했다.
"그리고 내일 출장 좀 와주실 수 있어요?"
"도장에 행사 있습니까?"
"예."
"당연히 가야죠."
그는 염려하지 말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녀는 내일 뵙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사진관을 나갔다. 그는 정감어린 눈으로 늘 단아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런 아내가 곁이 있다면 삶의 종착점에 와 있어도 크게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거 같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부질없는 생각인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무심히 유리창 너머의 바깥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변함없는 일상이 그의 눈앞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제처럼
거리를 오고 갔다. 아마 내일도 그러할 터였다.
무심히 바깥을 보고 있는데, 머리가 또 아파왔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유리창 너머의 바깥과 달리, 외계인들은 주기적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항복하고 싶을 정도로 그 놈들은 끈질기게 침입해 오고
있었다.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 약봉지를 꺼냈다. 의자에서 일어나, 진열대 안쪽 구석에 있는
소형 냉장고 쪽으로 갔다. 현기증이 핑 돌았다. 그는 눈을 씀벅거리고 유리창 너머의
바깥을 보았다.
유리창 너머의 바깥은 외계인에 의해 공격당한 거리처럼 파괴되고 있었다.
거리가 뒤집어지고 사람들은 거꾸로 섰다. 그리고 거리는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냉장고 문을 열고 물통을 꺼냈다. 그리고 가루약을 입안에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그는 진열대를 오른손으로 짚고 숨을 한동안 몰아쉬었다. 외계인에 의해
피카소의 그림처럼 기하학적 무늬를 연출했던 거리가 서서히 일상의 풍경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일상의 모습이 되어 거리를 오고 갔다. 그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불현 듯 그는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시간이 많지...
시간이...
그런데 일상의 풍경 속에서 누군가가 빠져나와 안으로 들어왔다.
지원이었다.
그녀는, 진열대에 손을 짚고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를 보며 깜짝 놀랬다.
"오빠, 어디 아파?"
"지원이구나. 아냐, 아프긴..."
하지만 지원은 약간은 걱정스런 눈길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전혀 아프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어깨를 으쓱했으며 허허허, 하고 웃었다.
"소파에 앉아, 지원아."
"응."
지원이 소파에 앉자, 그도 진열대를 돌아서 소파 쪽으로 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허청대지 않고, 똑바로 지원의
옆에 앉을 수 있었다.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은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지원은 어색하고 서먹한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진열창 너머의 바깥에
눈길을 주었다. 뭔가 말을 해야될 텐데... 무슨 말을 할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커피 먹을래?"
"아냐. 요즘은 이상하게 커피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자."
"그래..."
그는 중얼거리며 시선을 옮겨 지원의 옆모습을 보았다. 지난 번 우연히 만났을
때보다 더 수척해 보였다. 불면증에 걸린 사람의 초췌한 안색이 지원의 얼굴이었다.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그는 느꼈다.
옛날에 지원은 커피를 좋아했다. 커피를 좋아할 때 지원은 행복해 보였다.
지원이가 행복할 때 커피는 늘 곁에 있었다.
그는 침묵을 입에 물었다. 일산적인 안부라도 묻고 실없는 얘기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말이 입밖으로 나오면 떨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무거운 고요가
그들을 짓눌렀다.
이윽고 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비가 올 거 같애. 하늘에 먹구름만 잔뜩 끼였어."
"그래?"
그가 짧게 말하고는 시선을 유리창 너머의 바깥으로 옮겼다.
사람들은 여전히 오고 갔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의 머리 위로 하늘이 낮게 떠있는
거 같았다.
"정숙이 만났다면서?"
그는 시선을 유리창 너머의 바깥에 고정시킨 채 말했다.
"응."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진열창에서 사진 치웠구나."
지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응."
그는 시선을 유리창에서 진열대 구석에 세워놓은 사진으로 옮겼다. 액자 속에서
지원과 정숙은 웃고 있었다.
지원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새끼손가락 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8월은 어쩐지 좀 아쉬운 거 같애."
"왜?"
지원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8월이 지나면 아이들 방학도 끝나고...여름도 끝나잖아."
"난 8월이 싫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
지원은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듯했다. 그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첫애가 8월에 죽었잖아. 8월은 피 냄새가 나는 거 같애."
"..."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다독거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손을 내밀었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그는 쓰게 웃으며 왜 이리 못났을까, 하고 생각했다.
또,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지원이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오빠."
"응?"
"오빠는 이 동네에서 이십년이 넘게 살았잖아. 지겹지도 않아?"
"글쎄."
"난 지겨워... 다시 여기에 오게 될 줄은 몰랐어."
"..."
후드득후드득―
바깥에 굵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진열창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낯익은 얼굴이 언뜻 눈에 스쳤다.
"왜?"
지원이 물었다.
"아냐."
"비도 오는데 가야겠어."
지원이 일어섰다. 그도 뒤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우산이 하나 있는데 쓰고 갈래?"
"아냐. 아직은 많이 안 오니까 뛰어가면 돼."
지원이 웃었다. 그리고 출입문까지 천천히 걸어가더니 뒤돌아섰다. 그녀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잠깐 망설이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빠, 몸조심하고 잘있어."
"그래, 너도."
지원이 엷게 웃으며 사진관을 나갔다. 그는 문밖까지 나와서 그녀가 뛰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비가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도 어깨에도 툭툭 떨어졌다. 그는
손바닥을 쫙 펴서 빗방울을 받았다. 손바닥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는 가게로 다시 들어갔다.
31
굵은 빗방울이 거리를 순식간에 회색빛으로 물들이면서 쏟아졌다. 여름의 열기는 금방
식혀졌다. 사람들은 뛰어가거나, 건물 속으로 빗줄기를 피해 들어갔다. 거침없이 내리
퍼붓는 빗발로 인해 거리는 황량하게 변해갔다.
슈퍼의 천막 안에서 다림은 비를 피하고 있었다. 비스듬히 쳐놓은 천막은 햇살을
가려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빗줄기를 막아주는 구실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천막 안에는 그녀 외에 난감한 표정의 행인들이 몇몇 더 있었다. 한
중늙은이가 감격에 찬 사람의 표정으로 장탄식조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허허... 참으로 장하게 오시는 비님이여, 허허..."
그녀는 사진관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비는 좀체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그녀는 슈퍼 안으로 얼른 들어갔다.
3
'단조롭고 개성이 없는 인내심 많은 비'란 어떤 비일까,하고 그는 유리창 너머의
바깥을 보면서 생각했다. 단조롭고 개성이 없는 비는, 게다가 인내심 많은 비라는
게 있을 수가 있을까. 모든 비에는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는 것이다, 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장대비, 여우비, 보슬비, 이슬비, 가랑비, 는개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단조롭고 개성이 없는 비는 찾을 수가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떤 비라고 확실히 단정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어느 단편에서
이런 구절을 썼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벌써 사흘째나 계속 내리고 있다. 단조롭고
개성이 없는 인내심 많은 비였다.'
하루키는 확실히 대단한 작가였다.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단조롭고 개성이 없는
비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인내심 많은 비. 그것은 혹시 장마를 얘기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장마 때
내리는 비라도 어제와 오늘이 다를 터인데... 사고의 폭이다. 작가의 사고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그는 유리창 너머의 바깥을 보면서 그렇게 엉뚱한 생각를 하고 있었다. 거침없이
내리퍼붓는 비를 보고 있자니까 별의별 상념이 다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씁쓰레하게 웃고 말았다.
씁쓰레한 미소를 따게 되면 입 안도 쓴 맛이 감돈다. 쓰다. 지원이 다녀감으로써
미소도 입맛도, 그리고 사고의 폭도 씁쓸하게 되는 것이다.
사진관 문이 열렸다. 그는 고개를 들고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다림이 멋쩍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저씨.”
장대비에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맞았는지 그녀의 머리와 옷은 후줄근히 젖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코끝에서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비를 많이 맞았네."
그는 인사대신 말했다.
"예. 하늘에 구멍이 뚫린 모양이에요. 양동이로 퍼붓는 거 같다니까요."
그러고는 그녀는 왼손에 쥐어져 있는 비닐봉지를 그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진열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커피포트에 물을 따르고 플러그를
벽 아래에 있는 콘센트에 꽂았다. 그리고 진열대에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그녀가 왼손으로 아이스크림 통 밑바닥을 잡고 마구 퍼먹고 있다가 그를
곁눈질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공연히 심통난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기도 했다.
"아저씨!"
"응."
"내가 게걸스럽게 먹고 있다고 생각하죠?"
"응."
"아저씨, 외아들이죠?"
"어떻게 알았어?"
"먹는 거 보면 알아요. 형제가 많은 집에서는 좋아하지 않는 거라도 일단 먹는
게 있으면 전쟁이 벌어지거든요. 우리 집은 특히 더 그래요. "
"..."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려고 그야말로 전쟁이 벌어지죠. 아이스크림에 선을 그어
놓고, 이거는 내 거다, 하며 허겁지겁 먹었다구요. 그래도 오빠들의 속도가 훨씬 빨라
내 것을 뺏겼죠, 언제나 그랬어요. 그래서 요즘은 숙달된 조교처럼 먹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어요, 자장면을 몊 분에 먹는지 모르죠? 일분도 안 걸린다구요."
"..."
"이제 안 먹을래요."
"왜?"
"아저씨가 날 보는 게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를 쳐다보듯하잖아요."
"아닌데, 난 치타로 생각했는데."
"아저씨!"
"아, 미안 미안. 농담이었어."
"하여튼..."
그는 웃었고 그녀는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정말 화난 것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이스크림 통을 탁자에 놓고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손을 깍지 끼어 쭉
펴기도 했다.
커피포트의 물이 끓기 시작했다. 그는 냉장고를 열어 맥심커피와 프림통을 꺼냈다.
그리고 커피잔에다가 커피를 탔다.
"커피 먹을래?"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커피까지야..."
그녀는 말을 얼버무렸다.
"이열치열이라며? 여름이니까, 뜨거운 커피 먹자고."
"좋아요. 그 대신 전 블랙이에요."
"어쭈!"
그가 말하며, 쟁반에 커피잔을 받치고 소파 쪽으로 들고 왔다. 탁자에 커피잔을
놓으니까,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표정은 귀여운 여학생에게 꿀밤을 놓고 싶은
선생님의 그것 같았다.
그녀가 커피잔을 두 손으로 들더니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따뜻하다."
"춥긴 추웠지?"
그가 커피잔을 입가로 가져 가면서 말했다.
"몰라요, 아저씨."
유리창 너머의 바깥은 비가 지치지도 않고 아까와 똑같은 굵기와 기세로 쏟아지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가방을
우산삼아 무림의 무사처럼 뛰기도 했다. 걷지 않고 빨리 뛰면 비는 그만큼 덜 맞을
터였다. 그러므로 비가 올 때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누구나 무림의 무사처럼
뜀박질이 빨라야 할 것이다.
지원은 무림의 무사가 아니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비를 흠낀 맞고
힘없이 걸음을 옮겼을지도 몰랐다.
그는 유리창 너머의 바깥을 보면서 지원이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커피를 마셨다.
그녀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아저씨."
"응?"
그는 그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진열대 구석에 세워져 있는 가진 액자를
주시하면서 말했다.
"진열창에 있는 저 사진을 왜 저기에 뒀어요?"
"응...그냥..."
"거짓말."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여동생 곁에 있는 저 여자 말이에요?"
"응."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함께 걸었던 여자죠?"
"글쎄."
"척 보면 안다구요. 저 여자는 아저씨 말고 딴 남자랑 결혼했죠? 그런데 어느 날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아저씨한테 다시 나타났죠? 사진관 안, 바로 여기에서 두
분은 다시 만났죠? 그리고 애절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가슴아픈 얘기를 나누셨죠?
난 척...보면...안다구요!"
발랄했던 그녀가 이상하게도 생기를 잃어가는 듯했다. 목소리에도 점점 힘이
빠졌다. 그는 그녀의 영문 모를 변화를 지켜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유리창 너머의 바깥은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여자의 직감이죠, 뭐."
"비가 오니까 감상적이 되나 보네."
"아저씨는 비가 오는 날, 그런 상상을 안 해요?"
"비가 오는 날은 올드팝을 듣고 시를 읽지."
그러고는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래, 옛날에는 그러했다.
아련한 추럭의 한 길목에서, 비가 내리는 날 카페에서 올드팝을 들으며 커피를
마신 적이 있었다. 앞에는 지원이가 있었다.
지원이는 방긋 웃으며 시를 낭송해 주었다. '로제티'의 시였던가? 그가 방위로
입대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그 때 그녀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시를 낭송하는 그녀의
모습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떤 착시 현상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눈이 부셨다.
그는 그 때부터 시를 읽기 시작했다.
"정말요? 어쭈 아저씨! 눈도 감고 있네. 정말 그리운 시절이 생각나나 보네.
그러면 카세트 놀리면 뭐해요? 테이프 하나 틀어 봐요."
"그럴까..."
그는 눈을 뜨고 말했다.. 소파에서 일어난 그는 진열대 쪽으로 걸어가, 진열대
옆에 놓여 있는 카세트의 스위치를 눌렀다.
"테이프를 꽂지도 않아요?"
"응. 안에 있어. 가끔 듣는 노래라 늘 안에 있지."
"어떤 노래인데 그래요?"
"올드팝. 포 더 굳 타임이라구."
감미로운 선율이 사진관안에 흘렀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닥까닥하며
노래를 들엇다. 그는 진열대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노래를 음미하듯
귀를 세우고 들었다.
생각해 보면 오랜만에 듣는 노래였다. 근래에는 사진관에 카세트를 틀어놓은 적이
없었다.
유리창 너머의 바깥엔 빗줄기가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 그리고 선율이 흘렀다. 빗소리와 노래가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어 그들의
귀에 곱다시 안겼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도 몇 번 들어본 노래네, 뭐. 아저씨!"
"응?"
"비와 음악, 여기에다 시까지 있으면 좋겠다. 외우고 있는 시 있어요?"
"그럼 내가 다림 씨 같을까 봐."
"그럼 해 봐요."
그녀는 종알대듯 말했다. 손바닥에 턱을 괴면서 그는 유리창 너머의 바깥을
바라보아싿.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스카프를 두른 여자가 우산을 들고 사진관
앞을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누군가 비를 맞는다
오도 가도 못하는 벌판 술래가 되어
비에 묻힌 세상 등 뒤에서
금방이라도 그대 나설 것만 같아, 아니
가서는 아니 올 것만 같아
사무쳐 온다, 노오란 슬픔
정처 없는 벌판 그대 울 적에
벌건 강물의 소리 비를 적시고
아득아득한 세상 홀로 선
팽나무 한 그루
젖은 어깨 들먹이는구나
터져 나오는 속울음
발 끝에 묻고
저기 사람의 마을처럼
칙칙거리며 뒤안 돌아 오르는 연기
들꽃들 고개 숙여 눈시울 붉히면
뜨겁게 사무쳐 오는 그리움
해거름 술래가 되어
우리들 사랑은 너무 춥구나
누군가 비를 맞는다
우리들 그리움도 비에 젖을 때
뜨거운 입김으로 돌아올
눈부신 햇발을 감고
누군가 비에 젖고 있다, 그렇게
우리들 추억에는
어느새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박수를 갑자기 쳤다. 그는 눈을 뜨고 멋쩍게
웃었다.
"아저씨, 이제 보니 제법이네. 비오는 날 올드팝을 들을 자격이 있네."
"부끄러운데 이거..."
"그거 처음 듣는 시인데...누구 시예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작품인데, 난 유명한 사람보다는 무명
시인의 시가 좋아."
"나도 그래요. 그거 아저씨와 나의 공통점이네."
"다림 씨도 시를 좋아해?"
"고등학교 때 미술부라고 했잖아요. 그림을 그리려면 시를 알아여 한다구요. 감성과
리듬이 뒷받침되어야만 좋은 그림도 나온다구요."
"그래?"
어느 새 그녀도 진지해 있었다. 짓궂게 종알대던 모습은 간대 없고 그녀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도 어느 시인의 시를 읊조려 볼까요? 나는 짧은 시예요. 아저씨처럼 긴 시는
못 외워요. 아이큐가 75거든요."
그녀는 헛기침부터 했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는 문득 한 가지를 깨닫고
있었다.
사랑, 그것이었다.
비처럼, 음악처럼, 시처럼 그것은 그의 가슴을 적셨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그 숲에
내 발자국도 미치지 못한 그 숲에
눈이 내려 쌓인다.
바람이 잔잎을 흩어놓는다."
"심오한데... 나도 다림 씨를 다시 봐야겠어."
"쬐금 부끄러운데..."
그녀는 뺨을 두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앞으로 비가 오는 날만 다림씨를 만나야겠어. 그래야 시를 들을 수 있을 거
아냐."
"아저씨!"
"놀리는 거 아냐."
"참, 필름 맡기러 왔는데..."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왓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필름통을 꺼내
건네주었다.
"아저씨하고 너무 노닥거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 이거 빨리 뽑아 주세요!
20분 안에 되죠?"
"그러면 저 큰길 쪽에 ‘17분 완성’으로 가지?"
"거기는 싫어요. 주인이 꼭 ‘전두환’아저씨처럼 생겼어요."
"전두환 아저씨가 어때서?"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잠시 킥킥댔다. 그녀가 소파에 다시 앉으며 말했다.
"아저씨 그리구요, 나 구청까지 가는대 바래다 주어야 돼요. 우산을 안
가져왔잖아요. 설마하니 비 오는데 여자 혼자 비 맞고 가게 하지는 않겠죠?"
"비 맞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데."
"아저씨는 비 맞고 다녔어요?"
"가끔은."
"요즘은 안 돼요. 산성비라서 맞으면 대머리가 된다구요."
"그렇게 영악하면서 시를 읊네..."
또그녀는 짐짓 투덜대는 기색을 보였다. 그는 웃으며 필름통을 챙겨 작업할 준비를
했다.
유리창 너머의 바깥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산을 쓴 채
거리를 지나다녔다.
사진관 안은 올드팝이 은은하게 흘렀고, 그녀는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들을 한번 ㅁ바라보며, 살아 있다는 것은,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다,
라고 생각했다.
33
먼 옛날, 그는 혼자서 비를 맞고 거리를 허청허청 돌아다녔던 때가 있었다.
방위 복무할 때였다. 그는 지원의 생일날에 용기를 내 전화를 하여, 일요일에
만나자, 선물할 게 있어, 라고 말했다.
그녀는 쾌히 그러자고 했다.
일요일, 그날은 비가 아침부터 소리없이 내렸다. 우산을 쓰고 그는 약속장소인 신촌의
어느 카페를 찾아갔다. 손에는 생일선물인 시집이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우산을 접고 그는 시집을 소중하게 가슴에 안은 채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올드팝이
감미롭게 흘러 다니는 실내를 그는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금방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아직 안 왔는가 싶어 실내의 중앙에 놓여 있는 테이블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렸다. 계속 출입구를 바라보면서, 조명이 어두웠으므로 혹시나 자기를
못 찾을까봐 그는 내심 걱정하면서 눈에 불을 켰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언제나 나이에 비해 깜찍했던
목소리나 웃음,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면의 사각지대인 구석진 자리에서 그녀는 앉아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앉아 있었다. 그녀와 그남자는 웃고 있었다. 어두운
조명까지도 빛나게 할, 그런 환한 웃음이었다.
그는 망연히 그녀와 그남자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집도 테이블에
놓아둔 채, 우산도 손에 들지 않았다. 비틀비틀거리며 그는 카페를 나갔다.
소리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는 아주 오랫동안 걸어다녔다.
그 소리는 나의 이름을, 나의 이름을 거듭 부르다가 그만 목이 쉬었다.
34
그는 아이들 사이를 누비면서 카메리 셔터를 눌러댔다.
철구의 구령에 맞춰 아이들의 기합 소리도 우렁차게 도장 안을 휘몰아쳤다.
"옆차기!"
"으샤―"
셔터 누르는 것을 잠깐 멈추고 그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품세에 열중하는 아이들의
열기로 말미암아 도장 안에 설치된 에어컨이 별로 맥을 못 추는 것 같았다. 조금
덥다고 느낀 그는 아이들의 대열에서 벅어나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아이들의 표정은
예술영화 보듯 하나 하나 살폈다. 녀석들은 대부분 진지한 얼굴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아주 그럴 듯하게 태권도의 여러 동작들을 실수 없이 해내고 있었다.
아이들의 앞에서 철구 역시 아주 그럴 듯하게 손과 다리을 뻗으며 스승으로서의 격을
갖추고 있었다.
스승와 제자들의 무술 시범.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아이들의 뒤에서 역시 진지하세 참관하고 있는 학부모들을
잠깐 보았다.
감탄과 감격의 표정으로 학부모들은 이따금 탄성을 내지르며 자식의 동잣에
대견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걸로 보아 지금 이 이벤트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셈이었다.
다른 태권도 도장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학부모 참관 수업을 계획한 것은
철구의 아내 향이의 아이디어였다. 6개월마다 학부모들을 초청하여 자식의 기량을
확인시킴으로써 도장에 대한 신뢰를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상품을 건 품세
경연대회까지 곁들여 아이들을 분발시켰으므로 여러모로 이 행사가 가지는 의미는 컸다.
향이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학부모들 옆에서 철구와 아이들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향이를 슬쩍 바라보면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그리고 카메라
셔터를 다시 눌렀다.
아이들의 표정과 동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아두는 것이 그가 철구와
향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응원인 셈이었다.
그는 셔터를 누르며 열심히 도장 안을 누비고 다녔다. 땀이 툭툭 떨어지고 거친
숭이 절로 나왔으나 꾹 참았다.
그리하여 오전에 시작된 행사는 오후가 되자 끝났다.
철구는 카메라를 챙기는 그에게 저녁에 술을 한잔 하자고 말했다. 철구는 몹시
지쳐 보였으나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철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35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그는 스쿠터를 몰면서 사진관으로 향했다. 햇볕은
8월답게 쨍쨍했다. 하지만, 제법 삽상한 바람이 코끝으로 달겨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그도 지쳐 있었던 것이다. 지친 몸이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햇살로 인해 더위까지 먹어 버리면 그야말로 녹다운이 될 터였다. 바람이라도
불어주니 그는 조금이라도 견딜만 했다.
그의 스쿠터가 사진관에 거의 도달하고 있는데, 뒤에서 경적이 빵빵 울렸다. 그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면서 스쿠터를 멈췄다. 예쁘장한 티코 한 대가 미끄러지듯
그의 옆으로 와서 정차했다.
운전을 하고 있는 낲선 여자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낯선 여자 옆에는
그녀가 타고 있었다. 그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 사진관 아저씨 맞죠?"
낯선 여자는 그녀와 동년배처럼 보였으나 제법 요염한 태가 넘쳐 흘렀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스쿠터 보니까 다림이가 늘 얘기했던 아저씨같더라구요. 저희도 지금
사진관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여기서 만나뵙게 되다니... 잘 됐네요."
"아,예."
"이거요."
낯선 여자는 그에게 필름 2통을 건넸다. 그는 필름통을 받아 바지 호즈머니에
넣었다. 낯선 여자가 눈을 찡긋했다. 낯선 여자도 그녀처럼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낯선
여자는 그녀와는 달리 제복이 어울려 보였다.
"저는 효정이라고 해요."
"아, 예. 저는 정원이라고 합니다."
"예, 정원 씨. 다림이가 정원 씨 얘기를 많이 하던데요."
낯선 여자는 그녀와는 달리 그를 정원 씨라고 불렀다. 그는 웃었다.
밫선 여자가 그녀를 깨우려고 어깨를 잡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놔두세요. 많이 피곤한가 봐요?"
"예. 우리 일이란 게 그렇죠, 뭐."
꾸벅이는 그녀는 땀을 한 방울 흘렸다.
그녀는 습관처럼 여름이 싫다고 말했다.
애틋한 마음이 든 그는 일없니 고개만 끄덕거렸다. 낯선 여자가 말했다.
"정원 씨를 봤는데도 안 깨웠으니..., 전 다림이에게 혼나겠는데요."
낯선 여자는 입을 활짝 벌리고 웃었다. 치아가 가지런했으며 눈처럼 하얗게
보였다. 낯선 여자는 시동을 걸면서 또 말했다.
"정원 씨, 다림이가 정원 씨를 대단히 좋아해요. 그렇게 느꼈어요, 여자의 육감은
십중팔구 맞는다는 거 아시죠?"
"..."
낯선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그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낯선 여자가 모는 티코가
앞으로 먼저 나갔다.
그는 스쿠터에 오도카니 앉아서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티코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조수석에 앉아 졸고 있던 그녀가 언제 깼는지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들었다. 그는 가슴이
뭉클햐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두 손을 어깨 위로 높이 들어, 티코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일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36
해거름이 되자 기온은 한결 떨어졌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열대야가 사람들을
정신 못차리게 기승을 부리더니만, 이젠 힘이 달리는지 슬금슬금 물러갈 시미를 보였다.
철구와 함께 일식집에 들어가면서 그는 새삼, 여름도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시간은 거짓을 몰랐다. 시간이 흐르면 계절은 바뀌는 법이었다. 시간의
등에는 언제나 새로운 계절이 대기하고 있다가 자기 차례다 싶으면 쟁큼 올라타는
것이다. 아무도 이같은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가는 것이다. 누구나 죽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부활을 꿈꾸는
것이다. 여름이 죽고 가을이 오는 것처럼.
느닷없는 상념이 그렇게 머리 속을 화전하자 그는 씩 웃었다. 하기는 느닷없는
상념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상념들은 이미 그의 일부처럼 의식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리고 걸핏하면 머리 속을 돌아다녔다.
그와 철구는 방안에 자리잡았다.
모처럼 술자리를 마련한 철구는 제법 호기를 부렸다. 너무 비까지 않야, 하며 그가
말려도 철구는 해낙낙할 뿐이었다.
아가씨가 회를 비롯람 음식들을 부니런히 날라 상 위에 차려 놓았다.
그와 철구는 술잔을 부딪치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옛 추억을 얘기했다.
시시껄렁한 육담도 주고받으며 껄껄댔고, 사소한 일상의 얘기에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보통의 남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와 철구도 그렇게 친구간의 정담을 나누었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중에 그는 문득 콧등이 시큰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철구와 자신이 똑같이 인생의 반환점에 섰는데, 철구는 아직도 종착점이 길게
남았고 자신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한 번도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자신했다. 그러나 술기운 탓이었을까.
모든 게 허망하고 아쉬웠다.
초연하고자 아무리 노겻해도 가끔은 허물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우, 인생의 반환점에 서 있는 나이는 모든 걸 달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구나 늙고 죽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굼을 쉬고 말았다. 그리고 거푸 잔을 비웠다. 갑자기 정색한
그에게 뭔가를 느꼈는지 철구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갑자기 왜 그래?"
"철구야."
"응?"
"넌 신을 원망해본 적 있니?"
"신을?"
"그래."
"사람인데...가끔은 그러지. 누구나 다 마찬가지 아냐?"
"그럴까?"
철구는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정말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냐?"
"무슨 일은...아냐. 나에겐 아무 일도 없어. 단지 너와이렇게 술을 마시고 부담없이
얘길르 나누니까 너무 좋아서 그래. 이런 시간을 영원히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진시황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야."
그는 철구가 따라준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녀석, 술도 많이 늘었네."
"나도 너처럼 살고 싶어. 향이 씨 같이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또
아이도 낳고..."
"그게 뭐 어렵다고 그래?"
"그럴까?"
"빨리 결혼해, 짜샤!"
"..."
그는 철구의 잔에 술을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철철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그러면서
쿡쿡 웃었다.
"너 향이 씨한테 잘해줘."
"짜샤, 나만큼 마누라한테 잘해주는 사람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철구야."
"응?"
"어떤 사람이 있어. 그는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어."
철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누군가를 아주 열렬히 사랑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가 부르다가 목이 쉴 정도로
열렬히 사랑해서...정말 결혼을 하고 싶어했지. 그래서 그녀를 닮은 아이도 그는 낳고
싶어했지. 그런데, 그런데 그는 그럴 수 없었어. 왜냐하면 신이 그에게 그러지
말라는 거야, 그는 처음엔 저항했지. 그러나 곧,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았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잖아. 그중에 그같은 영ㄱ할을 할 사람도 있어야 된다는
게 신의 뜻이었고, 그는 그것을 깨달았던 거야, 알겠니? 철구야. 세상에는 그와 같은
사람도 있어."
"도대체 무슨 얘기야?"
"재미없니? 내 얘기가."
"너 지원이 때문에 마음 상했니?"
"갑자기 지원이 얘기는... 아냐."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내려다 보았다. 잔에는 술이 담겨져 있었다. 근느
잔을 들었다. 잔 안의 술이 찰랑댔다.
지원이 때문에 마음이 상했냐교 철구는 물었다. 물론 그렇다. 마음이 편한 건
아니다. 하지만 지원이는 원했던 일을 했다. 앞으로도 원하는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녀 생각이 났다. 그녀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므로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그녀의 눈에는 가끔 애잔한 물기가 서렸다. 발랄함 뒤에 감춰져 있는
애잔함을 들여다 보는 건 슬픈 일이었다.
근느 웃으며 술을 계속 마셨고, 철구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7
그와 철구가 일식집을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이슥해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꽤
오랜 시간을 마셨던 셈이었다.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그가 조금 휘청거렸다. 철구가 그를 부축했다.
"짜샤, 괜찮냐?"
"그럼, 괜찮지!"
그는 큰소리를 치며 철구의 부축을 사양했다.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그는 제식 룬련하는 군인처럼 팔을 죽죽 내뻗으며 걸었다.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그를 곁눈질하며 웃었다.
"봐, 임마 괜찮지? 안 취했다니까."
"그래, 그래……, 너 안 취했어."
철구가 그의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자신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미 자신은 취했고 사고의
흐름이 뒤죽박죽이 도리 정도로 의식마저 헝클어져 있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잘 정돈시키고 싶었다.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삶을 정리하고 싶었다. 실제로
그렇게 해 왔다고 그는 스스로 자부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헝클어졌다. 자신도 철구처럼 살고 싶다고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철구처럼 자신도 인생의 반환점에 서 있는 것이다. 종착점은
아직도 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긴에게느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웃는
것뿐이었다.
그가 말했다.
"철구야, 한 잔 더 해야지?"
"너 괜찮겠어?"
철구가 상당히 걱정스런 눈길로 말했다.
"철구야, 너 고등학교 때 뭐라고 했냐? 기억 안 나냐? 이 뻥쟁아, 네가 먼저
그렇게 하자고 큰소리 쳤잖냐!"
"쨔사!"
그는 철구를 짐짓 노려보다시피 바라보며 웃었다. 결국 철구도 킥킥 웃었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잠자돈 개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술 먹구 죽자!"
그러자 골목 어귀 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컹컹 들려왔다.
그와 철구는 초등학생 마냥 어깨동무를 한 채 거리를 쏘다니며 노래를불렀다.
포장마차에 들러 술을 또 퍼마시기도 했다.
귿르은 결국 곤드레만드레가 되었다.
38
그가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엉뚱하게도 파출소였다. 대통령의 사진돠
태극기가 벽의 중앙에 걸려 있었고, 제복을 입은 사내가 책상앞에 앉아 뭔가를 쓰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철구가 새우처럼 웅크린 채 의자에 누워 코를 드르릉 골며 자고
있었다. 뭔가를 쓰던 제복의 사내가 그를 흘긋 쳐다보았다. 사내의 표정은 기분 나쁠
정도로 으스스했다.
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포장마차에서 나와 고성 방가와 노상 방뇨를 하다가 순경을 만나 한바탕 싸운
기억이 났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는 철구를 깨우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코까지 고는 그를 깨운다는 게 미안스러웠다.
그는 목을 한 번 움직였다. 목과 어깨가 욱신거리는 걸로 보아 자신도 한참을 잤던
모양이었다.
제복의 사내는 계속 뭔가를 쓰고 있었다. 다른 순경은 순찰을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파출소 안은 의외로 적요했다.
그는 아무런 미동도 하진 않은 채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철구의 코고는
소리와 사내의 글 쓰는 소라가 그의 귀에 메아리처럼 들려 왔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바늘로 머리를 콕콕 찌르는 듯 해싿.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눈앞이 빙빙 돌아갔다.
철구가 빙빙 돌더니 공중으로 떴고, 사내는 책상에 거꾸로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회오리처럼 벽도 소용돌이쳤다.
그는 오른손으로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약봉지는 없었다. 신음이 입밖으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신음을 삼키고 또 삼켰다.
누군가가 의자 밑에서 불을 지피는 것 같았다. 이제는 몸까지 뜨거워졌다. 신체의
장기들이 뒤틀리고 숨통이 끊어질 듯 숨이 막혔다. 결국 그는 거친 숨을 내뿜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제는, 틀림없이 외계인들이 나타날 차례였다. 놈들은 깔깔깔 웃으며 자신을
괴롭힐 터였다.
아아, 두렵다! 아아, 두렵다!
그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두렵다는 생각을 몇번이나 했다.
누군가가, 모든 걸이 뒤집어지고 휙휙 돌아가는 파출소 안에 들어왔다. 틀림없이
외계인일 터였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파괴되는 파출소안이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그는 감히 눈을
뜨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과 귀를 가린 채 외계인들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외계인들의 걸걸한 소리는 사정없이 그의 귀를 뚫고 나갔다. 신음이
자꾸만 입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했다.
외계인 하나가 그를 향해서 소리쳤다.
"술 먹고 운전한 것도 죄냐? 넘길려면 넘겨 새꺄! 내가 누군데!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무서운 게 있으면 술을 먹지도 않았어. 씨부랄 놈들아!"
또 다른 외계인이 말을 받았다. 굉장히 험악한 어조였다.
"아저씨, 조용히 하세요! 시시비비는 서에서 따지자니깐."
"그러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아!"
"이 아저씨가 진짜!"
그는 여전히 어깨를 떨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외계인들은 몇차례나 더
뭐라고 뇌까렸다. 그러더니 외계인 하나가 음모에 가득 찬 엄평스러운 목소리로, 마치
그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읊조리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소름이 쭉 돋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순경 아저씨,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 동네
민정당 조직책이야. 뭐 이런 거 밝히기는 싫었지만..."
다른 외계인이 여전히 험악한 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가만히 앉아 계세요! 정말 웃기는 아저씨네!"
"아니, 그러니까...민정당 조직책이라니까."
"진짜 웃기는 아저씨네! 그래서 어쩌란 말요! 이 아저씨가 민정당 없어진 지가
언젠데..."
"아니, 그러니까...민정당이라니까..."
"조용히 좀 못해요!"
"아니, 순경 아저씨 민정당..."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을 외계인들의 위렵에 굴복해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더러운 소리들이 귓가에 폭죽 터지듯 쾅쾅 울리는 것을 계속 들을 수는
없었다.
그는 고개르 번쩍 들고 눈을 떴다. 그리고 소리쳤다.
"이 씨발놈들아! 이 씨발놈들아! 내가 왜 조용히 해! 왜 조용히 하냐구!"
그러자 파출소 안이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숨을 몰아쉰 그는 아연해졌다. 어디로
증발해 버렸는지 외계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취객과 경찰관 둘이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잠에서 깼는지 철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일어서더니 그의 어깨를 잡았다.
"왜 그래? 정원아!"
그는 취객과 경찰관들을 노려보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는 오열하면서 소리쳤다.
"씨발놈들, 씨발놈들!"
"정원아, 정원아! 왜 그래?"
철구가 그를 껴안았다. 마침내 그는 철구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엉엉 울고 말았다.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울음이었다.
철구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그는 한참이나 울었다.
39
그는 아침부터 멍하니 의자에만 앉아 있었다. 손님들이 오면 펴시래 놓은 사진을
주고, 필름을 맡기면 묵연히 받아둘 따름이었다.
머리가 텅 빈 것 같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꾸 착시 현상만 눈앞에 펼쳐졌다.
나무 하나 보이지 않는 황령한 벌판에 자신이 서 있는 것이었다. 모을 그저
오들오들 떨면서 씉이 없는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고독함과 무서움이
무서리처럼 자꾸 몸에 내렸다.
누군가가 있었으면 했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그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사진관에 있었다. 진열대 뒤의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진열창을 똑똑 두드렸다.
그는 눈을 씀벅댔다. 그리고 진열창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였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유리창 너머의 바깥에서 손과 입으로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다.
아. 저. 씨. 뭐. 하. 세. 요.
그는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입가의 근육이 생각만큼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도
입으로만 말했다.
가. 만. 히. 있. 어.
나. 들. 어. 가. 도. 되. 요.
응.
커. 피. 한. 잔. 주. 실. 거. 죠.
응.
그녀가 사진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조금 휘청거렸다. 그녀가 깜짝
놀라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굉장히 창백해요."
"아프긴... 하나도 안 아퍼. 소파에 앉어. 커피 맛있게 끓여 줄게."
조금은 걱종되는 눈길로 그녀는 그를 살펴보면서 소파에 앉았다. 그는 커피포트에 물을
따르고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았다.
그녀는 계속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커피를 끓였다.
커피를 쓿이는 동안 그들은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쟁반에 커피 두 잔을 받치고 소파 쪽으로 갔다. 소파 앞의 소형
탁자에 커피잔을 놓았다. 그녀가 말했다.
"정말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설마하니 그럴 리가..."
그녀는 핸드백을 열더니, '원비디'를 꺼냈다. 그리고 그에게 건넸다.
"아저씨, 선물이에요. 이거 드시고 제발 건강하세요. 아저씨는 가끔 안색이 안
좋더라. 아저씨가 애인이 없으니까, 내가 이렇게 챙기게 되잖아요."
"내가 빨리 애인을 만들어야겠는데... 그래야 다림 씨가 피곤하지 않지."
"애인이 무슨 물건이에요? 만들게."
"고마워. 근데 어떡하지. 난 줄 게 없는데."
그녀는 커피잔을 손에 쥐고 입가로 가져가면서 말했다.
"커피 끓였잖아요."
"그래도... 아, 사진 찍어 줄게. 아주 예쁘게. 커피 마시고 촬영실에 가서 앉어.
모델처럼 찍어 줄게. 예쁠 거야."
"에이...괜찮아요. 나 돈 없어요."
"괜찮아. 내가 돈 있어."
40
그녀는 촬영실의 의자에 앉았다.
사진기를 조절하며 그는 말했다.
"얼굴을 조금 더 왼쪽으로...그렇지. 조금 더 턱을 내리고..."
그년느 그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그느 이마의 땀을 닦고는, 구도를 잡았다. 그의
안색이 계속 창백해 보여 그녀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저씨...너무 힘들어 보인다. 사진 안 찍어도 괜찮은데...
"괜찮아."
"좋아요, 아저씨 그러면 내일이 일요일이니까 영화 보여드릴게요. 여기서
기다리세요."
"알었어. 웃어! 그래야 더 예쁘지!"
그녀는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그느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펑.
41
그녀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을 때는 밤 9시가 넘은 후였다.
아버지가 안방 문을 열고 나와, 욕실에 들어가려는 그녀를 불렀다.
"내일 선 본다. 그리 알고 준비하거라!"
"싫어요, 전 내일 약속이 있어요."
"뭐라꼬 이 놈의 가시나가! 내일 선보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애비가
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나? 잔말 말고 준비하거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안방에 도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욕실 문을 거칠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세면대에 두 손을 짚고
미간을 찡등그린 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키르케여, 나의 기도를 들어다오
42
일요일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그는 오전 10시경에 사진관에 와서 그녀를 기다렸다. 시간을 분명하게 정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정오경이나 오후 1시정도에 그녀가 오지 않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커피를 끓여서 마셨다. 카세트를 틀어 올드팝도 들었다.
지난번에 비가 왔을 때의 정경이 눈에 잔영처럼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 때, 그녀는 짧은 시를 읇조렸다. 표정도 한없이 진지했다.
그는 그 때를 생각하며 조용히 웃었다.
생각해 보면, 데이트는 처음인 셈이다. 그리고 시를 낭송했을 때처럼 비가 오는
것이다. 첫 데이트치고는 무드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수줍게
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소파에 편안히 앉아 커피의 맛과 향을 음미했다.
유리창 너머의 바깥은 비가 내렸고, 지난번처럼 하루종일 내릴 모양이었다.
하지만비의 굵기가 지난번보다는 가늘었다. 콸콸콸 쏟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리없이, 끈질기게 떨어지는, 뭔가 분위기가 좋은 그런 비였다.
굴곡이 없고 차분하게 내리는 빗속에서는 외출도 그렇게 귀찮은 일은 아지다.
바짓가랑이가 조금으 ㄴ젖는다고 하더라도 참을 수 있다. 왜냐하면 조용하게 떨어지는
비에는 애틋한 정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가 내리는 유리창 너머의 바깥을 바라보며 어떤 영화가 이런 빗속에서의
장면을 찍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애수, 티파니에서 아침을, 스트리트 오브 화이어...
그는 생각나는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그녀를 기다렸다.
정오가 됐는데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1시가 넘어가기 시작했는데도 그녀는 사진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필름을 맡기러
온 두어 명의 손님만 들락날락 했을 뿐이었다.
그는 이따금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1시 30분이 되자, 일단의 손님들이 사진관안으로 우루루 몰려들었다. 그들은 우산을
탁탁 접으며 가족사진을 찍으려 하는데요, 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는 그들을
촬영실로 안내했다.
젊은 여자에거 안긴 아기에서부터 초등학생, 중학생, 중년의 부부와 젊은 부부.
그리고 어깨도 구부정하고 꽤 늙어보이는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은 모두 모인 거
같았다. 그는 벽에 걸린 자신의 가족사진을 잠깐 바라보며 엷게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좁은 사진관 안이 그들 가족으로 안해 북적댔지만 그는 어수선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사는 기운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우리도 이렇게 가족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도 그는 했다.
그들 가족은 할머니를 중심으로 해서 병풍처럼 빙 둘러섰다. 모처럼 마음먹고 온 듯
중년부부는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조절하면서 웃으세요, 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키득댔고, 중년부부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고, 젊은 부부는 활짝 웃었다.
할머니는 긴장이 되었는지 좀체 미소를 짓지 못했다. 그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조금만 웃으세요!"
할머니도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거라도 놓칠 수 없어 그는 셔터를 눌렀다.
가족사진 촬영이 끝나자, 중년부부는 할머니에게 독사진을 권유했다. 할머니는 약간
망설였지만 혼자 카메라 앞에 앉았다. 여전히 할머니는 잘 웃지 못했다.
그는 몇번이나 할머니에게 웃으라고 말했다.
43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레스토랑에 있었다. 맞은편에는, 역시 부모와 함깨 앉아
있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기생오라비처럼 옷을 입었고 얼굴도 허여멀쑥했다.
부모들으 커피를 마시며 꽤나 진지하게 얘기했고, 사내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느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사내가 비디오 대여점의 점원처럼
재수없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44
비는 여전히,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다기 커피를 마셨다. 사진을 찍느라 떠들었던 가족들이 모두
돌아간 뒤라 사잔관안은 더욱 고즈넉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도 그는 문득 싸늘한 냉기를 느꼈다. 그러나 굳이
난로를 틀고 싶지는 않았다.
카세트에 꽂혀 있는 올드팝 테이프도 다 감아져 있는데도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정말이지.
45
그녀는 기생 오라비처럼 생긴 사내와 단둘이 레스토랑에 있었다. 부모들은 모두
돌아간 모양이었다.
사내는 열심히 떠들었고, 그녀는 손바닥에 턱을 괸 채 지루한 표정을 얼굴에 띠고
있었다.
감미로운 팝의 선율이 실내에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마저 귀에 거슬렸다.
46
벽시계는 6시를 알렸다. 유리창 너머의 바깥은 여전히 비가 내렸다.
그는 사진관 안에 혼자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는 벽시계를 한동안
바라보다, 소파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아프고 몸에서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가서 눕고 싶었다.
열쇠를 챙기고 사진관 문을 나서려할 때였다. 낮에 왔던 할머니가 약간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니, 할머니..."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더없이 인자하게 생긴 할머니라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웬일이세요? 사진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으응...젊은이, 사진을 찾으러 온 것은 아니야."
할머니가 일없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
"예?"
"저기 부탁이 있어서 왔는데..."
"부탁이라니요?"
"아까 찍은 독사진이 마음에 걸려서..."
"다시 찍으시려고요?"
"그래요. 내 나이가 여든이유. 이제 저 세상에 갈 준비를 해여 하는데, 아까
사진은 영..."
"!"
그는 멀거니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독사진은 내 영정 사진으로 쓸 생각이라우. 그래서 다시 찍을까 해요. 젊은이를
번거롭게 해서 참으로 미안해요."
"이리 오세요ㅡ 할머니. 다시 찍어 드릴께요."
마음이 뭉클해진 그는 혼잣말처럼 영정 사진이라, 하고 되뇌였다. 할머니가 그의
안내를 받아 촬영실로 갔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섰고, 할머니는 촬영실의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곱게 나와야지. 냐가 저 세상에 간 다음에 애들이 그 사진으로 날 기억할
텐데..."
할머니는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할머니, 좀 웃으셔야 사진이 곱게 나온답니다."
"그래요, 웃어야 되는데...잘 안 되는군."
"..."
"먼저 간 사람들 사진을 보면 왜 그렇게 다들 인상을 쓰고 있는지... 나는 그
사진들을 보면서 늘 작심했다우. 나는 절대로 인상을 쓰지 말아야지..."
"할머니, 영정에 쓸 사진이라고 생각하시니까 좀 슬프시죠?"
"이제 나도 가는 구나... 뭐 이런 생각이라우. 내 어머니도 갔고 이제야 나도
가는 건데 뭐..."
그는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머니는 아주 쓸쓸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낮에 와는 달리 입가에 어리는 미소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47
다시 독사진을 찍은 할머니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몇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진관을 나갔다.
그는 소파에 앉아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마지막 사진을 곱게 찍겠다는 할머니에
대해 생각했다.
할머니는 나름대로 자신의 삶에 대한 정리가 끝난 거 같았다. 그래서
할머니에게는 어떠한 미련이나 집착 따위는 없을 듯싶었다.
자신도 그러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불현 듯 '마이 라이프' 는 영화가 생각났다. 6개월 전쯤에 비디오 대여점에
갔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빌려 봤던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아니 충격만이 아니라 삼각파도와 같은 감동도
세차게 몰아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시한부 인셍을 사는 한 사내가 앞으로 태어날 2세를 위헤 자신의 모든 것을
기록한 비디오 테이프를 남긴다는 내용은, 그에게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었다.
할머니도 영화 속의 그와 다를 게 없었다. 자식들의 기억 속에 곱게 남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어쩌면 사람이란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유한한
것이며, 때문에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삶을 정리하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들의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으로 남아 있게
하는 것이다.
그는 유리창 너머의 바깥을 바라보며 소파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8시쯤 되어서 그는 사진관을 나왔다. 여전히 비는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스쿠터를 타지 않고 우산을 쓴 채 집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사진관에 헐레벌떡 뛰어온 것은 그가 떠난 지 10분이 지났을 때였다.
굳게 닫힌 사진관 앞에서, 한동안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48
그가 집의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가 안방에서 나왔다. 아버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밥은 먹였냐?"
"지금 먹을게요."
그러자 아버지가 주방으로 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자식의 저녁을 직접 챙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얼른 말렸다.
"제가 챙겨 먹을게요. 아버진 들어가서 쉬세요."
"한 그릇 다 먹어야 된다."
"예, 아버지."
아버지는 그의 안색을 슬며시 살피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밥통에서 밥을 푸고,
국을 데우고,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 식탁에 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버지는
뭔가 해야 할 말이 있었던지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고
안방으로 도로 들어갔다.
그는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아버지에게는 한 그릇을 다 먹겠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입 안도 칼칼하여 국만 수저로 떠 먹었다. 밥은 몇 술
떠먹지도 못하고 그는 상을 치웠다. 그리고 자러 가려다 안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버지는 TV앞에 앉아 비디오 예약 녹화를 하기 위해 긴문을 보며 텔레비전과
비디오의 리모트 컨트롤 스위치를 이리저리 눌러대고 있었다.
"뭐 하세요?"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더니 멋쩍게 웃었다.
"명화극장을 예약녹화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구나."
"무슨 영화인데요?"
"'지상에서 영원으로'인데... 니 에미와 연애 시절에 본 영화다."
"제가 해드릴게요."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리모트 컨트롤을 작동시켜 예약 녹화를 했다. 그런 다음,
예약 녹화하는 방법을 하나 하나 설명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유심히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그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말했다.
"아버지...왜요?"
"아, 아니...저...
"아버지..."
"요즘 약은 꼬박꼬박 먹니? 요즘 들어 네 안색이 너무 안 좋구나..."
"괜찮아요."
"얘야..."
"주무세요, 아버지...전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을 나왔다. 다시 주방으로 가서, 바지 호주머니에 있는
약봉지를 꺼내, 가루약을 입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건넌방으로 들어간 그는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일정한 굵기와 일정한 템포로, 소리없이 비는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그는 아랫목에 누웠다. 얼마나시간이 흘렀을까?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게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미 잠이 들었는지 집 안은 호젓했다.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만 귀에 들렸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는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고는,
죽음을 맞이할 때였다.
분명히, 그렇게 느꼈다. 몸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육신은 이미 지치고 지쳐
버려, 그것을 새로운 안식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이 라이프'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마이클 키튼이 연기한 '존스'가 한의사를 찾아갔을 때 한의사가 한 말이었다.
그는 그 장면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백번 옳은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죽음 뒤는 아무도 모른다. 때문에,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는 자기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갑자기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는 시선을 옮겨 창문을 보았다. 번쩍, 하는 섬광이
터졌다. 그리고, 뒤이어 요란한 굉음이 귀를 때리고 지나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천둥, 번개가 바깥을 급습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요란하게
퍼붓는 빅를 바라보았다. 바깥은 암흑이 지배했고, 외계인의 공격처럼 번개와 천둥은
사정없이 거리를 강타했다
몸이 오슬오슬 떨리고 있었다. 그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고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베개를 들고 그는 안방으로 건너갔다.
형광들이 꺼져 있어, 아버지는 어둠 속에 묻혀 있었지만, 아버지의 고른 숨소리가
귀에 정겹게 들려왔다.
그는 아버지 곁에 누웠다. 별안간 그녀가 생각났다. 보고 싶었다. 아주 많이.
빗소리는 여전히 들렸다. 이따금 천둥 소리도 무섭게 들려왔다.
그는 쉽게 잠을 자지 못했다.
49
비온 뒤라 그런지, 더욱 눈부시게 맑은 태양빛이 거리를 유리조각처럼 덮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갓 닦은 유리창처럼 투명했다.
거리도 신선하게 보일 만큼 깨끗했다. 간밤 내내 쏟아졌던 비가 거리의 모든
때를 말끔히 씻어 놓은 모양이었다.
찬란한 햇살은 사진관의 진열창을 통해 안으로 스며들어와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는 멍하니 유리창 너머의 바깥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런 다음,
그는 암실에 들어가 일을 했다. 할머니의 독사진, 가족사진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했다.
정오쯤 되었을 때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사진관으로 들어왔다. 진열대에서 뭔가를
쓰고 있던 그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선생님 눈치를 살피는 철부지 소녀처럼 눈을 끔뻑대며 아저씨, 하고
콧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녀는 모처럼 화장을 한 얼굴이었다.
"어서 와, 다림 씨."
그는 너그러운 선생님처럼 말했다.
"어제 내가 안 와서 삐졌죠?"
"알긴 아는군."
"그럼 지금 영화 보러 가요!"
그녀는 진열대 쪽으로 바짝 다가와, 조르듯 말했다.
"지금?"
"예! 뭐 어때요?"
"하지만, 다림 씨도 일해야 되잖아."
"까짓거... 아저씨하고 영화보는 게 지금 내가 원하는 일이에요. 아저씨는 원하지
않으세요? 어제 내가 바람 맞혔으니까, 영화도 내가 보여드릴게요. 무슨 영화가 보고
싶은데요? 빨리 말해 봐요."
"허허허."
그는 이마를 가볍게 때리며 웃고 말았다. 그녀는 진열대에 팔꿈치를 대고 얼굴을
그에게로 바투 당기며 칭얼대듯 또 말했다.
"어떤 영화가 보고 싶어요?"
"참 나... 좋아. 난 오우삼 감독의 '페이스 오프'"
"에이, 그거는 액션 영화잖아요? 그런 거 말고 좀 마음을 울리는, 아니면 야한
영화라도..."
"하하하."
그는 큰소리로 웃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성화에 못익겨, 사진관 문을 잠그고 거리를 나왔다. 그들은 택시를
잡아 타고 종로로 향했다.
그들은 '마르셸의 여름'을 보았다.
영화를 보고 그들은 극장 근처의 호프집으로 가서 맥주를 마셨다. 이것저것 얘기도
했다. 무슨 말 씉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다림 씨, 오늘이 생일이야? 화장도 했는데... 화장한 모습은 처음 보는데."
"보기 싫어요, 아저씨? 아니 정원 씨."
그녀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뭐? 정원 씨라고? 하하하! 보기 좋아."
"참, 아저씨도..."
"여자랑 이렇게 술 마시는 게 오랜만이다. 게다가 아직도 대낮이잖아..."
"그러니까 아저씬, 나한테 고마운 줄 알라구요."
"그래서 내가 선물을 할게."
"뭘요?"
"지난번에 찍은 다림 씨 사진., 정말 모델처럼 예쁘게 뽑아서 액자에 넣어
줄게. 벽에 걸어서 두고두고 보라구."
"정말요? 그러면 아저씨."
"응?"
"12월에 선물해줘요."
"12월에?"
"예. 사실은 12월 24일이 내 생일이거든요. 그 때 카드와 함께 액자를 선물해
줘요. 사실은 남자 친구가 없어서 한 번도 남자에게서 카드를 받지 못했어요."
"저런..., 우리 다림 씨가 인기가 없는 줄은 몰랐네."
"인기가 없는 게 아니구, 내가 눈이 높아서 그렇죠!"
그녀는 종알대듯 말했다.
"그럼, 그럼. 우리 다림 씨가 얼마나 예쁜데."
그는 어르듯 말했다.
"어쩐지 듣고 보니, 어감이 이상하네요."
"뭐가?"
"우리 다림씨라니... 내가 뭐 아저씨 애인이에요?"
"어? 아닌가? 난 여태껏 그렇게 생각했는데..."
"누가 나이 많은 노총각한테 시집가겠어요?"
"시집이 싫으면 결혼하지 뭐."
"참, 아저씨두!"
"하하하하! 다림 씨, 그럼 오늘을 일단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생각하자고. 다림 씨
생일이 이브니까, 오늘이 그 날이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놀자. 밖에 나가 캐럴송도
사구 말이야."
"하여튼, 아저씨 엉뚱한 건 알아줘야 돼. 그 대신 12월에도 꼭 선물하고 카드도
보내주셔야 돼요."
"그러지 뭐."
그들은 한동안 웃고는, 호프집을 나왔다.
"어디로 가요, 아저씨?"
"8월의 크리스마스답게 롯데월드!"
"에이, 시시해. 크리스마스와 전혀 연관성이 없군요."
그들은 정말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가 된 듯 함박웃음을 띠며,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종로 거리를 뛰었다. 행인들 몇몇이 그들을 보며 웃었다.
그들은 레코드 가게에 가서 지난 해에 발매되었던 캐럴송 CD를 샀다. 레코드
가게의 여자 점원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잠실로 갔다. 롯데월드에서 어린 연인인 양 손을 꼭 잡고 여러
가지 놀이기구도 탔다.
그들은 내내 즐거웠다.
50
밤이 이슥해졌을 때 그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확실히 밤기온은
서늘했다. 여름이 이제는 거의 다 갔구나, 하고 근느 생각했다. 아쉽고 짧았던 여름.
그는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고운 빛의 달무리가 하늘을 은은하게 흘렀다. 눈부신 찬연함과는 다른 우아함이었다.
언제 봐도 밤하늘의 달은 사람을 그윽하게 만든다.
그 아래 거리도 평안하게 잠든 거 같았다.
그들은 낮과는 달리 조금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수줍음을 타는 꼬마 아가씨처럼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는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우리 손잡고 가자."
"아저씨두...참... 여긴 내가 사는 동네란 말이에요. 소문 나면 어쩔려구 그래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웃었다.
그들은 손을 잡고 졸목길을 걸었다. 그들의 발길을 달이 밝혀 주었다.
"이제 여름이 거의 다 간 거 같애."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잘 됐죠, 뭐. 난 여름이 싫었거든요."
"그렇게 더웠어?"
"아시잖아요. 나 더위 많이 타는 거... 땀도 엄청 흘렸는데..."
"그러면 텔레비전에서 하는 납량특집 귀신 영화를 보지. 더위가 싹 달아날
텐데..."
"시시해요. 난 무서움을 안 타거든요."
그녀는 입술을 비죽대곤 말했다.
"그래? 그럼 이 얘기 들어봐. 내 친구 중에 철구라고 있는데, 녀석이 직접 겪은
얘기야."
"진짜 겪은 귀신 이야기란 말이에요?"
"무서움을 안 탄다며?"
"그럼요! 얘기해 봐요."
"녀석이 군대에 복무하고 있을 때 였어. 그 날도 여름이었대. 깊은 밤에 녀석이
경비초소에서 동료와 둘이서 근무를 섰대. 그런데, 한참 경비를 서고 있을 때 어디서
방귀 냄새가 나더래."
"방귀요? 그래서요?"
"그래서 녀석이 같이 보초를 서던 동료에게 너 방귀 뀌었지? 하며 물어 보았대.
그랬더니 전우가 펄쩍 뛰더래. 네가 뀌어놓고 왜 나한테 뒤집어 씌우냐, 뭐
이런식으로 동료가 화를 냈던 거지. 그런 동료의 낌새를 보니 정말 방귀를 뀐 거
같지 않더래. 아니, 방귀를 꼈어도 그렇게 오래 남아서 코를 자극시키는 게
이상하더래.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초소가 몇 년전에 보초 서던 군인이 자살한
곳이래."
"자살이요?"
"그래."
그녀가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그가 빙긋 웃었다.
"무서워?"
"무섭다기 보다는... 그런데 귀신의 냄새가 왜 방귀 냄새같다는 거예요?"
"글세."
"아이, 아저씨는 왜 이상한 얘기를 해서 으스스하게 만들어요?"
"이제 보니, 무서움을 잘 타는 구나."
"몰라요."
그녀는 도리질하듯 고개를 흔들더니, 그를 행해 짐짓 눈까지 흘겼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는 잠깐 멈칫거리는 듯했다. 달빛이 그녀의 머리
위에 곱게 내려와 머물고 있었다. 장말 아름답다고 그는 생각했다.
손을 꼭 잡은 그들은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바람이 한 차례 시원하게 불어왔다.
"아저씨,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저 집이에요."
그녀는 막다른 골목집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집이 넓고 하면... 들어와서 커피 한 잔 하고 가면 좋을 텐데..."
그녀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괜찮아."
그는 그녀의 손을 풀며 말했다.
"근데,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 아저씨가 지난번에 봤던 호정이라는 친구...
기억나시죠? 나, 그 친구 집에서 살기로 했어요."
"집은 좁은데 형제는 많고...또 아버지가... 하여튼 그렇게 됐어요. 참, 잊을
뻔했네. 나 로테이션 돼요. 이번에는 은평구청 쪽으로 가요."
"언제?"
"9월 초순이에요."
"그래..."
그의 표정이 쓸쓸해 보였는지 그녀가 사내처럼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짓기만 했다.
"내가 가니까 외로워서 그래요? 근데 가더라도, 어차피 서울 하늘 아래인데요
뭐. 은평구청으로 가더라도 사진 뽑으로 아저씨 가게로 올 거예요."
"그래."
"진짜예요! 못믿는구나. 두고 봐요. 그럼, 아저씨, 나 가요!"
"그래, 잘 가."
여전히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도 그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고는, 집으로 아이처럼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말했다.
"아저씨. 있잖아요, 12월에 액자와 카드를 선물할 때 시도 한 편 헌정해야
돼요. 아저씨가 좋아하는 시로요. 알았죠? 그리고 이 캐럴송 고마워요. 참, 한 가지
깜박한 게 있다. 아저씨, 건강에도 신경 좀 써요. 오늘도 별로 안색이 안 좋아요."
"그래."
그녀는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석상처럼 서서
그녀가 쪼르르 달려간 쪽만 바라보았다.
골목은 쓸쓸할 정도로 조용했고, 그 말고는 아무도 서성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51
그는 사진관 안으로 들어가 형광등을 켰다. 그리고 새삼스레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언제나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 촬영실에 갔다. 촬영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도 맸다.
그는 카메라를 자동으로 조절했으며, 그런 다음 촬영실의 의자에 앉았다.
그는 웃으면서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웃어요, 정원 씨."
카메라의 플래시가 펑 터졌다.
사진을 찍고, 그는 친구인 철구에게 전화를 했다.
얼마 후, 그는 사진관을 나와 문을 잠그고 철구의 태권도 도장으로 갔다.
52
그 뒤, 오랫동안 사진관 문은 열리지 않았다. 굳게 닫힌 셔터 위에는 '출장중'
이라는 팻말만 걸려 있었다.
그녀는 9월에도 10월에도 사진관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발길을 돌리곤
했다.
나 죽었을 때, 사랑하는 이여.
53
"비 한 번 엄청나게 오네요. 비가 오니까, 시바스리갈 한잔하고 싶어지는데요.
다림 씨, 시바스리갈 한잔 하실래요?"
기생 오라비처럼 생긴 사내가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창밖에 시선을
걸어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자 사내는 머쓱해진 모양이었다. 입맛을 두어 번
다시더니, 그녀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와 시를 읊조렸던 그 날처럼 빗줄기는 굵으면서도 줄기차게 거리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자꾸 생각났다.
언제나 허허 웃고, 능청을 떨고, 그러면서도 그는 맑은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낭송해 주었던 시는 너무 좋았다.
누군가 비를 맞는다... 그가 낭송하면 어떤 시라도 아름다울 것 같았다. 그가
들려주었던 올드팝도 다시 듣고 싶었다.
그러나 사진관의 문은 닫혀있었다. 몇 번을 들러 보아도 '출장중'이란 팻말만 걸려
있었다. 그가 촐장을 간다는 소리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시잔관에는 '출장중'이란
팻말만 무정하게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는 출장을 갔을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출장을 갔기에 이렇게까지 돌아오지 않을까? 소련일까? 영국일까? 그것도
아니면 달나라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창밖은 비가 쏟아지고있었다.
그녀는 깍지 낀 두 손에 턱을 받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페에는 자유분방한 재즈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겠다는 듯, 흐느적대기도 하고
때로는 감미롭게 흘러다녔다.
지즈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녀는 올드팝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생 오라비처럼 생긴 사네는 식어빠진 커피를 홀짝댔다.
웨이트리스가 실내는 돌아다니며 손님들이 원할 경우, 커피를 서비스로 따라 주고
있었다. 웨이트리스는 창가의 테으블로 와서 그녀의 빈잔에도 커피를 따라 주었다.
그녀는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생긋 웃는 웨이트리스의 얼굴이 예쁘게 느껴졌다.
기생 오라비는, 어떤 말을 해야 그녀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라는 표정을 얼굴에
따고 그녀의 가색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뭔가 자신있는 게 생각이 난
듯 음험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제즈를 마음껏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은 거 같습니다. 다림 씨도 제즈를
좋아하십니까? 사실을 제가 여기에 자주 오는 이유는 재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
지금 흐르는 이 곡은 '러스 브라운'의 'Ain't Nobody's Bizness If I Do'이로군요.
역시 이 카페의 주인은 심미안이 있어요. 러스 브라운은요, 한 마디로 말하면 순수
흑인의 창법과 정열과 힘이 넘치는 보컬을 바탕으로 해서 재즈 애호가들의 정신을
쏙 빼놓지요. 어때요? 지금 들어보기니까, 음량이 대단하다는 거 느낄 수 있으시죠?
게다가 팝적인 요소가 있으니까 그녀는 대중으로부터 사랑까지 받게 되었죠. 달리
말하면 러스 브라운은 퓨전 재즈의 리더라고 할 수 있죠. 그럼 퓨전 재즈란 뭐냐?
단적으로 말해, '퓨전 재즈'는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아티스트들의..."
기생 오라비의 입에서 말들이 썰매타듯 줄줄 미끄러져 나왔다. 그 말들은 그녀의
귀에까지 미끄러녀 들어와 넘어졌다. 그녀는 창밖의 비를 바라보고 있다가, 어이가
없어 쓰게 웃었다.
카페에 앉아 있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녀는 쓰게 웃으면서
기생 오라비를 잠깐 흘겨 보았다.
그녀의 웃음을 제멋대로 해석한 기생 오라비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쉬지 않고
말했다. 이때가 기화다 싶었던 모양이었다.
기생 오라비와 다시 마주앉아 있게 된 것을 순전히 아버지의 전횡 때문이었다.
그녀는 처음 선을 본 날,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 기생 오라비와 저녁 7시까지는
함께 있어 주었다. 사진관에서 우두커니 기다릴 그를 생각하면 속이 탔지만,
아버지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하는 자리였으니 만큼 그녀로서는 나름대로 애를 쓴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집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남자가 아음에 들지 않는다고 분명한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속사포같은 아버지의 성화를 그녀는
이길 수가 없었다.
"니 주제를 생각해야지! 그런 자기를 또 마련할 수 있을 거 같냐? 애비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
아버지의 쇳소리가 갑자기 기생 오라비의 '청산유수'에 뒤섞이더니 그녀의 귀로
물결쳤다.
창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올드팝이든 재즈이든 함께 듣고 싶고 얘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그였다. 기생
오라비가 아니었다.
기생 오라비는 비디오 대여점의 점원처럼 머슬머슬한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런 부류는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강요에 못이겨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자기 자신도
결코 현명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녀는 정말이지 자기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래서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퓨전재즈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정신이 쏙 나갈 정도로
열광하는 것은 정통 재즈죠. 즉, 제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아트 테이텀'이에요.
그야말로 제즈계에서는 신화적인 인물이죠. 간단히 말하면, 그는 정통에다가
모더니즘을 겸비했다고나 할까요! 그는 천재였어요. 태어날 때부터 실명에 가까운
장애를 지녔지만, 피아노가 그의 장애를 극복해 주었으며, 열살 때부터 지방악단과
조인트 세션을 할 정도였으며 뉴욕과 시카고, 헐리우드 등지를 돌아다니며..."
기생 오라비는 열정적으로 떠들었다.
여전히, 그녀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낭송했던 시를
하나하나 머리에 떠올여 보았다.
누군ㄱ는 비를 맞는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창밖의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쓰고
거리를 지나다녔다. 어느 누구도 비를 맞고 거리를 쏘다니지 않았다.
....
누군가 비를 맞는다
우리들 그리움도 비에 젖을 때
뜨거운 입김으로 돌아올
눈부신 햇발을 감고
누군가 비에 젖고 있다, 그렇게
우리들 추억에는
54
비가 쏟아지는 거리에는, 거기에 걸맞는 기온이 흐느적댔다. 싸늘했다. 여름은
확실히 저 멀리 떠나 버렸고, 가을이 온 것이었다. 그리고 겨울이 기어올 텨였다.
여름이 끝나가는 걸 그는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폭염이 퍼붓는 대낮의 거리에
스쿠터를 털털 몰면서도 늘 니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의 뒤안에는 영문 모를 우수가 엎드려 있었다.
무엇인가를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눈빛.
그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생각하며서 빗속을 거었다. 머리 위를 우산이 가려주었지만, 빗줄기는
사정없이 그녀의 어깨와 바잣가랑이를 적시고 있었다.
밤은 어느 새 그녀의 얼굴 앞에 머물기 시작했다. 여전히, 싸늘한 냉기는 그녀의
목덜미와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그녀를 오슬오슬 떨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깨를 웅크린
채 빗속을 걸으며, 그를 생각하고 그리워했다.
불이 꺼진 사진관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것은 손으로는 감히 열지 못하게끔
굳게 닫혀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출장중'이란 팻말이 비를 맞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어딘가로 출장을 가서 길을
잃어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서른 다섯이나 먹은 아저씨가 바보같이...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거리의 양 옆에서 빗물이 고여들어 어딘가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빗물은 흘러 한강으로 가고, 다시 또 흘러 저 넓은 바다로 갈
터였다. 그러므로 빗물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는 것이다.
어깨를 꼭 껴안은 연인 한 쌍이 함께 우산을 쓴 채 그녀 앞을 지나가싿.
그녀는 1시간이나 사진관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
것처럼.
55
그녀는 호정의 원룸에 들어갔다. 마침 커피를 끓이고 있던 효정은 그녀에게도
커피를 내놓았다. 그녀는 욕실에 들어가 대충 씻고 옷을 갈아 입었다. 그런 다음,
룸의 아랫목에 앉아 커피잔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따뜻해서 좋다."
하고 그녀가 말했다.
"길거리만 돌아다녔니? 왜 이리 비를 맞았어?"
효정은 대단히 궁금한 기색이었다.
"그냥..."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미소를 지었다. 원룸의 창문
밖에 보기좋게 서 있는 나무가 원없이 비를 맞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통해 나무를
보며 그를 또 생각했다.
효정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늘은 데이트가 어땠어? 너 이번이면 세 번 만나는 거니?"
"..."
"왜? 그렇게 싫어?"
"응."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참...알 수가 없네. 집안도 괜찮고, 또 하는 일도 광고 회사의 대리라며? 그
정도면 킹카 아냐? 얘, 그런 조건의 남자가 날이면 날마다 나오는 거 아니다."
"..."
"너, 사진관의 정원 씨 때문에 그렇지?"
"..."
"정말 정원 씨를 사랑하는 거니?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잖니? 조건으로
비한다면야 오늘 만난 사람이..."
효정이 말하다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난 사랑해 본 적이 없잖아."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또 마신 다음 말을 이었다.
효정은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 아저씨를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사랑일까? 하고 나는 스스로 고민도 많이
했어. 정말 이런 마음이 사랑일까...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어..."
"..."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해. 오늘 만난 그 사람과 카페에서 재즈를 들었는데... 그
사람과 함께 앉아 그것을 들으려니까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어. 나는 그저
창문 너머의 바깥을 보며 사진관 아저씨만 생각했어. 사진관 아저씨와는 오래
전의 팝을 들어도 감미로웠고 커피를 마셔도 너무 맛있었어.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아도
그 시간이 헛되지 않고... 그저 부담없고 재미있고 그리고 약간은 가슴이 설레기도
했어. 아저씨가 오드리 헵번 얘기를 하는 바람에, 여러 군데의 비디오 대여점을
찾아다니기도 했었어. 결국 '티파니에서 아침을'봤어, '문리버'는 이제 허밍도 할 수
있다구."
"..."
그녀는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들어 다시 창문 너머의 바깥을 보았다. 창문 너머의
바깥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루종일 내리는 비의 냄새가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와 코를 스쳐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그에게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아저씨, 비에도 냄새가 있는 거 같아요.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하겠지.
―몰랐어? 당연히 비에도 냄새가 있지. 귀신에도 냄새가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자기만의 독특한 냄새가 있는 법이야. 누구도 이 법칙을 외면할
수가 없다구.
―야, 역시 아저씨는 나하고 통하는 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 우리 다림 씨의 냄새는 뭘까? 난 이렇게 생각해. 다림 씨는
그림을 그릴 때 다림 씨만의 냄새를 완성할 수가 있는 거야.
―정말 그럴까요?
―그럼. 다림 씨는 화가야. 시의 아름다움도 아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곱다시 안기고 있었다.. 그는 달나라로 출장을
간 것이 아니라, 그녀의 곁에 이렇게 있는 것이다.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눈동자가 아린 듯하고 가슴엔 멍울이 서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효정은 상당히 걱정되는 눈길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얘, 너 괜찮니?"
"그, 그럼 괜찮지 않구."
"우는 거 아니지?"
"얘는... 창문 옆에 붙여져 있는 영화 포스터를 바라보다가 눈이 부셔서 그래..."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효정이 고개를 돌려 창문 옆에 붙여져 있는 영화 포스터를
새삼 보았다.
'기타노 다케시'감독의 '하나비' 원문 포스터는 벽에 무심히 걸려있을 뿐이었다.
단지, 푸른 색조의 강렬함 속에 기타노 다케시가 바지 호주머니에 양손을 푹
찔러넣고 고독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원 씨가 저기 푸스터 속의 기타노 다케시 감독 닮은 것도 같다..."
효정이 말했다.
"얘는... 아저씨가 저렇게 못생겼니?"
그녀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참... 자기 눈에 안경이라더니..."
"그래, 얘. 내 눈에 안경이다."
"커피 더 마실래?"
"응."
효정이 그녀의 잔에 원두커피를 더 따라주었다. 그녀는 커피잔의 따뜻함을 느끼며
마셨다. 효정이 말했다.
"어때, 맛있지? 향도 좋구? 나하고 마셔도 괜찮지?"
"얘는..."
"그나저나, 정원 씨는 도대체 어디로 출장 간 거니? 왜 이렇게 네속을 태우는
거니? 사진관 문 닫은 지가 한 달이 훨씬 넘었잖아. 너, 은평구청으로 간다고 얘기도
했다며...너무 무심한 거 아니니?”
"이상해...사진관 문을 그렇게 오래 닫아도 되는 건지..."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혹시 몸이 아파서..."
"얘는!"
"아냐, 얘. 지난번 내가 볼 때 정원 씨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였어. 아픈 거
아닐까? 내가 알아봐줘?"
효정이 말했다.
"아냐, 됐어. 뭔가 사정이 있을 거야. 이제 곧 열겠지. 뭐"
"참...걱정이다. 네 아빠는 광고 회사 대리한테 시집보내기 위해 혈안이라며...
이럴 때 곁에 있어줘야 되는데..."
"괜찮아. 세 번이나 만나줬잖아. 덕분에 너하고 함께 지낼 수 있는 허락도
받았는걸 뭐. 성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 자, 자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거라구!"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어쭈!"
효정은 짓궂게 입술을 비죽댔다. 그녀와 효정은 서로 마주보며 소리내어 읏었다.
어니새 빗줄기는 가늘어졌다. 언뜻 보면 가랑비로 착각을 할 수도 있었다. 저
멀리서 차의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와 효정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그러면서 그녀는 창문 옆에 걸려 있는
'하나비'포스터를 보았다.
고독과 우수를 씹으며 걸어가는 기타노 다케시의 분위기가 어쩌면 그와 닮은 것도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음에 만나면 말해줘야지. 기타노 다케시가 아저씨를
제법 닮은 거 같은데, 라고.
그는 하하하. 하며 소리내어 웃을까? 아니면 나는 나야, 하며 어깨를 으쓱할까?
"불끌까?"
효정이 말했다.
"응. 비 오는 밤, 불꺼진 방에서 내가 귀신 이야기 해줄게."
"얘는!"
"너 귀신 봤어?"
"아니."
"귀신을 본 사람은 많아도 냄새를 맡은 사람은 별로 없을걸."
"냄새?"
"그렇다니깐. 아저씨가 얘기해 줬는데..."
56
그가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엔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어디인지 언뜻 실감이 나지
않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얀 병실.
자신은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구나...,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의 곁에는 정숙이가 있었다. 넋 나간 듯 망연한 표정으로 보호자 간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가 깨어나자, 정숙은 수심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지어냈다. 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은 어때? 아퍼?"
"아니."
"오빠, 마음을 굳게 먹어야 돼."
"아버지는? 많이 우시지?"
"..."
정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어깨까지 들썩대며
오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머리가 어지럽다. 이제 외계인은 자신을 데리고 갈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정숙이가, 철구가... 그리고 그녀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오빠."
정숙이가 그를 지그시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응."
"무슨 생각해?"
"그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
"친하게 지내는 아가씨가 있다며? 철구 오빠가 그러던데..."
"..."
그는 눈을 감을 채 조용히 미소지었다.
"연락해서 오라고 할까?"
"아니, 괜찮아."
그는 눈을 뜨고 정숙이를 보았다. 정숙이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정숙이의
손을 잡았다. 작고 가녀린 동생의 손은 그의 손 안에서 떨렸다.
"오빠..."
"민호를 야구장에도 한 번 데려가 보지 못한게 마음에 걸려...."
"오빠..."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정숙은 눈을 씀벅대고 간이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도 웃었다. 철구와 향이가 한 아름의 꽃을 들고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고 다가왔다.
정숙은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들도 정숙에게 목례했다.
"정원아... 좀 괜찮니? 어서 일어나야 술도 한잔 하지!"
철구가 간이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정원 씨... 빨리 쾌차하셔야지요."
언제나 단아한 향이가 말했다.
"예. 제수 씨... 도장은 어때요?"
"아이들이 더 많이 늘었어요."
향이와 정숙이는 꽃을 꽃병에 꽂고 잠깐 의례적인 안부를 주고받은 후, 철구와 그를
바라보고는 병실에서 나갔다.
병실에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철구는 한숨을 소리없이
내쉬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정원아, 다림 씨 말야."
"그래..."
"내가 연락해서 오리고 할게."
"아니, 그러지 마."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녀에게 나는 어디 멀리 출장을 간 것으로 하고 싶어. 대신 8월에 썼던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녀에게 주고 싶어. 다림이는 아직 남자에게 카드를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대. 바보같이..."
"..."
"그녀는 웃을 거야. 나는 걔의 웃는 모습이 참 좋아. 철구야..."
"응..."
"오래 생각했어. 난 걔를 사랑하고 있었어. 시간이 많지 않았는데, 나는
바보같이 긴 시간이 걸리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거야."
"..."
"철구야, 나는 지금 모든 게 다 평안해..."
"으응..."
철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하얀 병실 안에는 창문을 통해 넘어오는 햇살이 부유하고 있었다.
에필로그
그는, 찬바람이 거리를 쏘다니고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에 죽었다. 아주
평안한 얼굴로 죽었다고, 아니 죽음을 맞이했다고 그의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고개만 무겁게 끄덕거렸다.
그가 나에게 맡긴 영정 사진을 그의 영전에 놓으며, 나는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웃음은 바라보는 사람까지도 편안하게 만들 만한, 그런 미소였다.
사진관의 벽에 걸려 있는 슬픈 미소와는 달랐다.
나는 그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그의 미소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가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내 손을 잡고 술 한잔을 더 하자고 말할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12월 24일, 나는 은평구청 앞으로 가서 그녀를 기다렸다. 나의 옆구리에는 포장된
사진액자가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선물인 것이다. 나는 안타깝게도
그의 대역인 셈이었다. 그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금세 눈이라도 펑펑 쏟아질 것 같았다.
그래, 눈이라도 펑펑 쏟아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거리는 퇴근 무렵이어서 그런지 인파로 넘쳐났다. 연인들과 샐러리맨,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선 젊은 주부들... 사람들은 모두 크리스마스 전야가 즐거운
모양이었다. 모두들 들뜨고 흐뭇한 표정이었다.
내 표정도 그들처럼 보였으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5시가 조금 넘자, 그녀가
구청을 나서는 게 내 눈에 띄었다. 사실상, 그녀를 처음 만나는 것인데도, 웬일인지
하나도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 사진을 계속 지켜본 때문일 터였다.
거리로 나서는 그녀에게 나는 다가갔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림 씨죠?"
"..."
"저는 철구라고 합니다. 시간을 좀 내주시겠습니까?"
"..."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눈에 하얀 물기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저는 정원이 친구입니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만 보았다.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전해줄 선물이
있는 것이다.
"근처 커피숍이라도 가시죠..."
나는 눈으로 그녀의 양해를 구하고, 앞장섰다. 조금 망설이더니 그녀는 뒤를
따라왔다. 거리는 사람들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사람들의 숲을 헤치고,
분위기 좋아보이는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커피 전문점에도 사람들은 많았다. 우리는
겨우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우리는 원두 커피를 시켰다. 커피가 나올 동안, 나는
무슨 말부터 해야할까, 하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녀는 고개를 액간 떨구고 묵연히 앉아 있었다.
커피 전문점에는 캐럴송이 흘러나왔다. 상당히 경쾌하고 흥겨운 멜로디였으나, 내
마음은 전혀 경쾌하지 않았다.
전문점 아가씨가 커피를 날라 왔다.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커피의 맛과
향을 음미하듯 천천히 마셨다.
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입을 열었다.
"정원이한테 다림 씨 얘기를 들었습니다. 진작에 찾아왔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정원이는 죽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악성 종양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
"..."
"정원이가 죽었다는 거 혹시 알고 있었습니까?"
"네."
그녀는 처음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투명한 눈물이
그득했다. 억지로 웃으려는 듯,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웃지
못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사진관에 몇 번 갔었어요. 늘 출장중이라는 팻말만 걸려 있더군요. 그래서
사진관 옆의 수퍼에 가서 물어 보았죠. 수퍼 아주머니가 말씀해 주시더군요."
"..."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깊게 연기를 들이쉬었다가 내뿜었다.
"정원이가 오늘 다림 씨한테 꼭 선물해 달라고 말하더군요. 받으세요."
"..."
그녀는 그것들을 받아들고 포장을 풀었다. 액자 속의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무엇이 생각났을까? 그녀느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눈물이 그녀의 뺨에서
흘러내려 사진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바보같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녀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카드를 개봉했다.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 산타클로스가 선물보따리를 들고 길을
떠나는 모습.
그녀는 카두에 적힌 그의 글을 읽었다.
나는 담배를 뻑뻑 피웠다.
그녀는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가를 몇 번이나 닦았다.
안녕, 다림 씨.
이거 어째 쑥스럽기 그지없네. 웃음부터 나와. 아마도 다림 씨에게 처음으로 쓰는
편지라 그런 가봐.
하지만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이 글을 쓸까 해, 물론 두서가 없을 거야. 그래도
이해해줘. 아저씨가 원래 그렇지, 뭐.
나는 하늘 나라에 있어.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은 여기에 있지만, 아마도
다림 씨가 이 글을 읽을 때에는 십중팔구 내가 하늘 나라에 있다는 얘기야, 어째
복잡한가? 아니지, 우리 다림 씨가 이 정도도 이해 못 한 대서야 어찌 화가라고 할
수 있겠어.
참, 화가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나는 다림 씨가 그림을 계속 그렸으면
좋겠어. 원하는 일은 하면 되는 거야.
물론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알지마, 우리 다림 씨라면 못할 것도 없지 뭐. 가끔은
고흐라든가 로트랙을 생각하면서 용기를 가져.
긴은 다림 씨에게 화가로서의 재능을 조신 거야. 그것을 거부하면 안 되지.
정말이다. 내가 신의 곁에 있어서 알아.
그래... 난 짧게 세상에 존재했지만, 신은 나에게도 나름대로의 행복을 주셨어.
다림 씨를 내게 보내서, 함께 영화도 보고, 맥주도 마시고, 놀이기구도 타고...
짧았지만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선사하신 거잖아.
정말 고마웠어.
늘 잘 지내기를 바래. 참, 잊을 뻔했는데, 나 다림 씨 좋아한 거 모르지? 지
난번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구.
그럼, 안뇽!
― 팔월에,
정원이 아저씨가.
추신:시도 한 수 적어보냈어. 낭송해 봐. 아주 분위기있는 시야, 시 내용이 너무
슬퍼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크리스티너 조지너 로제티'라는 사람의 시인데,
이름이 어째 발음하기가 힘들지? 하지만 시는 너무 좋아.
제목이 '나 죽었을 때 사랑하는 이여'인데... 울지 말고! 괜히 이 시를 헌정하나?
...
나 죽었을 때, 사랑하는 이여.
나 죽었을 때, 사랑하는 이여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세요
머리맡에는 장미도
그늘 지우는 사이프러스도 심지 마세요
몸을 덮은 푸른 풀이
소나기와 이슬에 젖게 두세요
그리고 원한다면 기억해 주세요
아니, 잊으셔도 돼요
나는 그늘을 보지 못할 거예요
비가 와도 느끼지 못하고
나이팅게일이 괴로운 듯
울어대어도 들을 수 없을 거예요
저 떠오르지도 지지도 않는
어스름 박명에 누워 꿈을 꾸면서
당신을 회상할지도 몰라요
아니, 잊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카드를 덮고,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울었다. 눈물이 카드와 사진에 툭툭
떨어졌다.
나는 담배를 두 개비나 더 피우고,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눈물 닦으세요, 다림 씨."
그녀는 손수건을 받아들고 눈물을 닦았다.
나는 커피잔을 들어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셨다.
커피 전문점 안에는 캐럴송이 여전히 흘렀다. 여전히 경쾌하고 흥겨움 멜로디였다.
사람들도 북적댔다. 아마 몇몇 손님들은 자못 궁금한 시선으로 그녀와 나를 훔쳐보고
있을 터였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들고 손수건을 나에게 주었다. 나느 손수건을 받아 들고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저... 하나 물어볼게요."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저씨의 스쿠터는 지금 누가 타고 다니나요?"
"아버님이 탑니다. 사진관도 다시 열어서 아버님이 운영하시죠."
"예... 스쿠터가 여전히 털털대면서 가나요?"
"그렇죠. 여전히 털털대면서..."
그녀가 웃었다. 내 앞에서는 처음으로 웃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포장지로 액자를 다시 싸고, 카드는 핸드백에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그만 가요."
"예."
우리는 커피 전문점을 나왔다.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넘쳐났다. 도로도 차들로
빽빽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신명나고 흐뭇한 표정으로 거리를 쏘다니는 듯 했다.
하늘은 아까와 다름없이 함박눈을 쏟아낼 기세였다. 눈이 왔으면 좋겠다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녀와 나는 잠시 거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말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예. 안녕히 가세요."
그녀가 뒤돌아섰다. 그리고 거리 저쪽으로, 액자를 옆구리에 낀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금방 무엇이 생각났다. 나는
급히 소리쳤다.
"다림 씨!"
"예?"
그녀가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렸다.
나는 멋쩍게 씩 웃고 말았다. 그리고 말했다.
"다림 씨 셍일... 축하해요."
"고맙습니다."
그녀느 다시 목례를 하고 인파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모습은 곧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려 나의 사애에거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오랫동안 거리에 서서 그녀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눈송이가 하나 둘 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얀, 너무도 순백해보이는 눈송이들이 거리로 떨어지고 있었다. 거리를 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탄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나는 두 손을 허공에 대고 떨어지는 눈송이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아내가
생각이 났다. 무드 있는 레스토랑에서 적포도주라도 마셨으면 싶었다. 그리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이 긴 얘기를 아내에게 하고 싶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면서 공중전화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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