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 속의 나오미 >> 은희경
소제목 :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모르겠다.
깊은 밤 어디선가 낯선 소리가 들리면 나는 시계를 본다. 가령 자동차의
급브레이크나 뭔가 깨지는 소리, 누군가의 흐느낌 같은 불길한 소리들 말
이다. 그 소리들은 무슨 끔찍한 생의 종말처럼 들린다. 나는 그 소리를 들
었으므로 경찰이 찾아오면 사건발생 시각에 대한 증언을 해야 될지도 모른
다. 그러니 시각을 정확히 알아두려는 것이다.
그 시각에 나는 거의 언제나 스탠드 라이트만 켜놓고 책상 앞에 앉아 있
다. 방안이 어두워서 벽시계의 바늘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부러
일어나서 전등 스위치를 누를 마음은 없다. 나는 게으른 편이다. 또한 충
실한 증인이 되기 위해서 야광바늘이 있는 벽시계로 바꾸거나 할 만큼 재
미있는 사람도 못된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버린다. 내가 알아두
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실제의 시간이 아니라 시간으로 환산된 종말일는지
도 모른다고.
의학은 따분하지는 않지만 공부하는 게 지겹지 않을 수는 없다. 낯선 소
리가 들리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책에서 눈을 떼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
곤 한다. 그러나 소리는 대개 한 번으로 끝난다. 사방은 다시 조용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럼 그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내 머릿속의 스크린에 여배우가 나와서 권태로운 표정으로 말해준다. 우
리는 지금 '인생'이라는 영화를 찍는 중이에요. 주인공은 마지막에 죽게
돼 있죠. 하지만 종말이 오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녀는 지겨울 만큼 오래
살고 있거든요. 조금 전 비명 말인가요? 하도 지루해서 마지막 장면을 미
리 한 번 찍어본 것뿐이라구요.
나는 이따금 이런 쓸데없는 상상으로 머리를 식히곤 한다.
소리가 그쳤다고 해서 곧바로 다시 책에 집중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쳐
들었던 고개를 숙인 다음 조금 전 읽던 행을 찾는 동안에도 시간은 지체하
지 않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나는 버튼을 누르자마자 죽어버리고 다시 한
번 누르자 당장 살아나 로큰롤을 신나게 불러젖히는 온/오프 라디오는 아
닌 것이다.
나는 담배를 피워문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희미한 스탠드 라이
트의 불빛 아래에서 느릿느릿 매듭이 풀어지는 연기의 하얀 리본을 쳐다보
곤 한다. 연기는 책꽂이를 타고넘어 침대 뒤쪽의 허공으로 사라진다. 연기
를 뒤쫓다보면 방안의 물건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그것들은 내가 가
진 모든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 그러므로 그것이 나에게 중요한 것일까.
다시금 나는 불길함에 대한 터무니없는 상상에 빠진다.
지금 일어나서 현관문을 연다. 복도 가득히 들어차 있던 연기와 불꽃이
맹렬한 기세로 방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지금 담배재를 떨려고 한다. 그 순
간 강진이 일어나 책상다리가 꺾이면서 재떨이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폭격
이 시작되었다. 전투기의 굉음이 요란하다.
나는 저 스탠드 라이트가 비추고 있는 물건 중에서 무엇을 들고 이곳을
도망쳐나가야 할지 잠시 생각해본다.
내 시선은 옷장문에 멈춘다. 옷 따위는 필요없다. 침대, 텔레비전, 냉장
고--나는 무거운 걸 드는 일을 세 살 때부터 싫어했으니 살아 남는다면 아
마 팔십까지도 그럴 것이다. 책꽂이를 본다. 나의 이십대 초반 전부를 바
친 전공서적과 노트들, 어릴 적 앨범, 그녀의 편지. 모두 다 필요없다. 인
생이 달라질 기회가 왔는데 그런 순간에 자신의 진로나 추억 따위에 얽매
이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소제목 : 진은 '헤이, 주드!'로 불러주기를 원했다.
강도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나는 언제나 중요한 것은
모두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해왔다. 자동차키와 지갑, 그것이면 된
다. 천재지변이니 현금지급기는 이미 다 사용중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갑에서 카드를 빼서 버리고 출발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뭔가를 버릴 때
는 되도록 많이 버리는 것이 좋으니까.
언젠가 내 차의 조수석에 앉은 한 여자가 콘솔박스 속에 있는 모든 물건
을 버린 적이 있다. 카세트테이프, 무료 세차권, 동전, 유료도로 사용 영
수증, 볼펜. 심지어 먼지까지 걸레로 닦아버렸다. 그런 다음 그 안을 자신
이 고른 새로운 테이프와 사탕과 방향제로 채워넣었다. 마치 나의 내장을
모조리 들어내고 다시 새 위장과 창자로 채우는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나를 그녀가 나타나기 전의 과거로부터 단절시키려 했다. 그녀의
기대대로 자기 쪽에서 원하지 않을 때까지는 아니었지만, 꽤 오랫동안 나
는 그녀가 나를 제 것으로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애
들과는 약간 달랐다. 하지만 그 정도 다르다고 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
다.
나는 절대적이라는 단어를 적용시킬 만한 일을 아직 알지 못한다.
All or Nothing. 누군가는 이 구절을 화끈한 인생을 살기로 다짐하는 데에
사용하는가 본데 내게는 별로 흥미가 없다.
하지만 다른 여자애들과 약간 달랐던 그녀의 존재처럼,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내게 약간 특별한 것이 몇 가지 있긴 하다. 쉴레 화집과 하드커
버로 된 카프카의 <성>, 그리고 진. 그 정도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문화적 교양이라곤 갖추지 못했다. 여자애들이 갖다놓
은 내 차 안의 음악테이프조차 챙겨 듣지 않으며 전공이 아닌 책은 거의
읽은 게 없다. 전시회 같은 데 가본 적도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던
가 아니면 아는 만큼 들린다고 하던가. 아무튼 그런 말이 맞다고 생각한
다. 쉴레는 내가 가져본 유일한 화집이고 <성>은 내가 읽은 서너 권밖에
안 되는 소설 중 하나이다. 우연히 그것들을 선물받았고, 아는 것이 그뿐
이므로 아는 만큼 좋아하는 것이다. 그 두 가지는 다 생일선물이었다. 진
이 준 것이다.
골고루 많이 갖춘다는 건 좀 거추장스러운 일 아닐까. 나는 같은 종목에
두 개의 물건을 갖는 법이 없으며 종목도 되도록 줄인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첫째, 손톱깎이와 발톱깎이를 따로 갖지 않는다. 둘째, 두 개의
손톱깎이를 가지지 않는다. 그냥 단 한 개의 손톱깎이면 충분하다. 조금
더 상위개념으로 올라가서 연필칼과 면도기와 손톱깎이와 편지칼과 가위를
겸한 칼날 한 개라도 상관없다. 하나뿐이라는 데에 의미를 두고 집착하는
성격이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검소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귀찮은 것이
싫을 따름이다. 그리고 한편 내가 알기로 친구란 누구에게나 필요한 종목
인데, 내게는 그 종목에 해당하는 한 가지 물건이 바로 진이다.
소제목 : 나는 낯설거나 불균형한 여자애에게 관심이
나는 진을 좋아한다. 진은 유쾌한 녀석이다. 아마 내가 지금 당장 적막
을 뚫는 저 불길한 소리를 갱들의 총격전이라고 단정하고는 차 트렁크에
쉴레 화집과 <성>만 싣고 프라하를 향해 출발한다고 하더라도 믿어줄 것이
다. 그가 살고 있는 의대 기숙사 앞에서 클랙션을 눌러대며, 빠뜨린 물건
이 있어서 싣고 가려고 왔는데, 진, 그게 너야! 라고 소리치면 삼층 창을
열고 서 있다가 곧바로 <오브라디 오브라다>를 노래하며 조수석으로 슬라
이딩해 들어올 녀석이다.
고향에 있는 어머니의 전화와 차가운 맥주를 빼고 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비틀즈이다. 자신의 모든 책에 진이라는 이름 대신 주드라고 서명을
한다. 가까운 사람들이 "헤이, 주드!" 하고 불러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통신의 아이디도 주드이다. 주드는 존 레논이 첫아내인 신시아와의 사이에
서 낳은 아들 줄리안의 애칭이다. <헤이 주드>는 아버지인 존 레논이 아닌
폴 매카트니가 만들었다. 폴이 레논의 부부싸움을 말리러 갔다가 어린 줄
리안의 슬픈 눈을 보고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존 레논은 그 노래가 요코
의 등장 이후 비틀즈에서 멀어지고 있는 자신을 향한 폴의 심정을 담고 있
으며 주드는 바로 자신을 가리킨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진은 이런 시시콜콜
한 얘기를 많이 알고 있고 내가 관심없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끈질기게 들
려주곤 한다.
진은 다감한 성격이라 내가 사는 집에 올 때도 언제나 여자애들처럼 초
컬릿이나 캔맥주, 꽃 따위를 들고 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비틀즈의 음악
만은 절대로 선물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라도 있어? 하고 내가 물었더니
글세, 이유 같은 건 생각 안 해봤어, 그냥 그런 거야,라고 대답했다. 하긴
이상한 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점도 없을지 모른다.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약간 다르게 보이는 여자애들한테 관심
이 간다. 낯설다거나 불균형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거나 그런 이상한 여자
애들. 누가 보기에도 멋지고 아무리 봐도 예쁜 여자애가 내게 온다면 굳이
마다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으
나 그렇다고 버릴 이유도 없는 의학도의 길 같은 포장도로 같은 존재일 뿐
이다. 내가 만난 몇 명만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여자애들은
잠시라도 칭찬을 해주지 않으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므로 사실 좀 피곤하
다.
내가 쉴레와 카프카를 좋아하는 이유가 '단지 알고 있기 때문'인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여자애가 하나밖에 없는 마을에 살고 있다
면 물론 그 여자애를 세상의 전부로 알고 좋아하기야 하겠지만, 세상의 모
든 여자애들을 만나본 다음에도 같은 감정으로 좋아하는가 하는 것과는 전
혀 다른 문제이다. 무조건 그렇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쉴레와 카프카를, 마을에 하나뿐인 여자애를 좋아하는 정
도보다는 조금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에게 있어 이상한 존재이
기 때문이다. 나 혼자 생각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말을 '매
혹'이라는 단어로 쓰고 있는 것 같다.
밤이 점점 깊어간다. 내 담배는 다 타버렸다. 재떨이는 스탠드라이트 옆
에 얌전히 놓여 있다. 자동차 오가는 소리는 단조롭고 어느 집에선가 들리
는 아기 칭얼대는 소리와 변기의 물 내려가는 소리는 차라리 고적하다. 이
시간 어디선가 많은 일이 일어나긴 하겠지만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소제목 : 진과 나는 보름 동안 떠나기로 했다.
DRIVE MY CAR (1)
Baby you can drive my car
And maybe I love you
진과 나는 보름 동안 떠나기로 했다. 물론 진의 아이디어였고 장소를 물
색한 것도 진이다. 처음에 나는 내키지 않았다. 장소를 옮긴다고 공부가
더 잘 될 것 같진 않은데? 나는 그냥 하던 대로 하겠어. 진은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번 시험은 장난이 아니야. 의대생 십 프로 정도가 떨어진
다는 거 알잖아. 그리고 거기는 다른 고시원과는 달라. 깨끗이 지은 현대
식 6층 건물에 방마다 샤워시설이 되어 있고 지하식당에서 언제나 커피를
마실 수 있대. 또 산 중턱에 자리잡아서 전망이 아주 좋다는 거야. 언덕
위의 하얀 집처럼.
내가 물었다. 그 집 이름이 그거야? 언덕 위의 하얀 집? 진은 웃으며 대
답했다. 아니. 그 집 이름은 레인 캐슬이야. 진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주
인은 우성 고시원이라고 지었지만 언젠가부터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
에서는 그렇게 불린대. 나도 통신에서 채팅을 하다가 소개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은 몰라. 하지만 원래 그런 뜻으로 지어지진 않은 것 같아. 우성
아파트라거나 우성 빌딩이라거나 그런 거겠지 뭐. 상관없잖아.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다음날 출발했다.
레인 캐슬은 진이 막연히 추측하던 것보다 훨씬 멀었다. 도시를 별로 벗
어나본 적 없는 나에게는 물론이고 동해 끝 어딘가의 고향으로 서너 달에
한 번씩은 꼭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진에게도 지루한 거리였다. 처음에 진
은 끊임없이 노래를 흥얼거렸었다. 노란 잠수함에 친구들이 탔다거니 루시
가 다이어몬드를 갖고 하늘로 갔다거니. 그러나 고속도로를 세 시간쯤 달
리고 나자 축 늘어져 말없이 차창만 보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뒤에도 거대한 산 몇 개를 끼고 국도를 한 시간 가까
이 내려와서야 목적지인 남쪽지방 한 소읍의 팻말이 보였다. 벌써 날씨가
어둑어둑했다. 간이슈퍼 앞에 차를 세우고 자판기에서 뜨거운 캔커피를 빼
마신 뒤 진과 나는 슈퍼주인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고시원요? 그런 데가
있다고 하긴 하던데. 아무튼 조금 더 가서 일주도로가 나오면 그 길을 타
고 쭉 가세요. 한 시간 정도 가면 도(道) 경계가 나오는데 그쪽 어디에 있
다고 들었어요. 진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옆눈으로 서로를 쏘아보
았다.
소제목 : 그곳이 바로 레인 캐슬이었다.
DRIVE MY CAR (2)
비는 일주도로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슈퍼주인이 말한 도 경계는 쉽
게 나타나지 않았다. 와이퍼는 헉헉거렸고 번갈아가며 운전을 하던 진과
나는 이렇게까지 해서 도착한 장소가 기대만큼이 아닐 것만 같은 불안과
후회로 벌써부터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제 보이는 것이라곤 캄캄한 숲
뿐이었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마을이 있는 듯싶었지만 검은
물속에라도 잠겨버렸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차의 헤드라이트만
이 빗속을 뚫고 힘겹게 구불구불한 일주도로를 올라갔으며 마주 오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고갯길을 수없이 접어들고 돌아나오고 하는 동안 우리는
점점 미로 아니면 함정에 빠져든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번에는 아주
끔찍한 각도의 급커브 고갯길이 나왔다.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사고 많은
곳. 운전대를 깊숙이 꺾으며 나는 이곳이 지상의 마지막 지점이 아닌가 하
는 아찔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진과 나는 동시에 눈을 찡그렸다. 모퉁이를 돌아나오
자 갑자기 성채처럼 커다란 건물이 눈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창마다 불
을 환하게 밝힌 그곳이 바로 레인 캐슬이었다. 비와 어둠을 뚫고 솟아오른
레인 캐슬은 한밤에 그 앞을 통과하는 여행자를 위협하는 거인처럼 바로
길가에 버티고 서 있었으며 숨이 멎을 만큼 조용했다.
차가 건물 앞에 서자 1층 창문의 안쪽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비가 내리는 밤 창문을 통해 보는 남자의 얼굴은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저 남자 말야. 꼭 창턱에 올려놓은 잘린 목 같은데, 여기가
언덕 위의 하얀 집 맞아? 내가 속삭이자 진이 대답했다. 밤인 데다 비가
와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야. 그냥 공부하기 좋은 조용한 곳이고 저 사람
도 흔히 보는 사무실 직원인데 뭐.
우리는 6층에 방을 얻었다. 진이 607호이고 내가 그 맞은편인 615호였
다. 진의 말대로 남자는 보통의 사무실 직원처럼 무뚝뚝했다. 그것이 우리
를 조금은 안심시켰다. 그가 우리에게 돈을 받고 줄이 많이 쳐진 서류의
빈 칸을 채워넣는 동안 진과 나는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붙어 있
는 <수련생 주의사항>이라는 안내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1. 건물 밖으로 나가거나 대화를 일절 금지합니다.
2. 잠은 최대한 적게 자야 하며 잠깐 자더라도 불은 항상 켜두어야 합니
다.
3. 수련 중 체험하게 되는 현상은 수련의 과정이니 몸의 변화가 나타나
면 당황하지 말고 더욱 수련에 정진하십시오.
저게 뭐죠? 남자에게 방 열쇠를 건네받으며 진이 <수련생 주의사항>을
가리켰다. 신경 쓸 거 없어요. 남자는 눈을 내리깔고 퉁명스럽게 대꾸했
다. 당신들은 수련생이 아니니까. 진이 다시 물었다. 공부하는 사람들 말
고 수련생이 많은가요? 그러자 남자가 입술 끝을 올리며 음산하게 웃었다.
팔십 명, 많을 때는 2백 명도 있고. 진이 열쇠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내
게 말했다. 올라가자. 그래. 내가 냉큼 대답했다. 무뚝뚝한 남자가 웃으니
나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소제목 : 이미 정해진 어떤 프로그램에 따르도록
DRIVE MY CAR (3)
진과 나는 각자의 무거운 가방을 끌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단추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의 조명은 센서장치가 붙어 있는 데다
형광등이었다. 우리가 한 발 다가서자 마치 여러 곳에서 카메라 스트로보
가 터지듯이 창백한 빛이 몇 번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엄청나게 환
해졌다. 내벽 모두가 거울이었던 것이다. 우리를 바짝 포위한 거울벽이 서
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진과 나는 숫자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다음 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옆눈으로 서로를 쏘아보았다.
이윽고 6층에 도착했으므로 우리는 으스스하고 불쾌한 그 엘리베이터에
서 나올 수가 있었다. 진과 나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또 다시 천장에 붙은 센서등이 작동되어 마치 감시를 하
듯이 내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욕실은 오른쪽이고 방은 그 반대쪽이었다.
나는 방문 손잡이를 잡고 시계바늘로 치면 15분을 지나갈 정도의 동선만큼
만 오른쪽으로 돌려서 가만히 문을 열었다. 방안은 아주 깨끗했고 새 책상
과 옷장이 딸려 있었으며 역시 환하게 불이 켜진 채였다. 아무것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먼저 청바지와 남방셔츠를 벗어 옷장에 걸었다. 그리고 트렁크 팬티 차
림으로 짐을 풀기 시작했다. 티셔츠 몇 벌과 트레이닝 바지를 속옷과 함께
옷장의 서랍에 넣었다. 옷걸이에 걸 만한 옷은 더 없었다. 이곳에 있는 동
안 한두 번 마스터베이션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쉴레의 자화상
에서처럼 검은 외투를 걸치고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짐 정리는 금방 끝났다. 아마 진은 나하고 거의 비슷한 속도로 짐정리를
마쳤을 것이다. 가방 크기는 나의 두 배였지만 무슨 일이든 나보다 두 배
는 빠르니 말이다. 특히 여자애들을 가로챌 때는.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우니 그제서야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진이 준비해온 여러 가지 간식이 떠올랐지만 뱃속에 뭘 채워넣기 위해
몸을 일으킬 마음은 전혀 없었다.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그것은 뭐랄까,
이미 정해진 어떤 프로그램에 따르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저항할 수 없는
잠이었다. 몸이 두터운 요 밑으로 묵직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내 몸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장미무늬 요를 뚫고, 그리고 장판, 시
멘트와 골조와 전기배선과 수도관과 쥐오줌 혹은 쥐, 그 모든 것들을 통과
하여 5층, 4층, 3층---1층---땅속 어딘가의 어둠--아니다--어둠을 뚫고 땅
밑의 다른 빛 속으로---.
나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때로부터 나의 이상한 꿈이 시작되었다.
소제목 : 어쨌든 꿈이란 그런 거잖아.
DRIVE MY CAR (4)
햇빛이 내리쬐는 한낮이다.
나는 걷고 있다.
그녀도 걷는다. 성벽을 따라.
성벽. 어떤 경계라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고 웃는다.
어느틈에 성벽 위에 올라앉아 있다.
등뒤에서 무서운 소리가 난다.
거대한 물체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물체의 중심으로부터 빛이 뚫고나와
화살처럼 내 눈을 쏜다.
나는 비켜 서고 그것은 내 곁을 지나쳐간다.
사라지는 뒷모습, 회전목마를 매단 말이다.
그런데 그림자이다. 어느새 밤이 된 것일까.
이미 그녀는 없다.
나는 눈을 떴다.
그러나 한 장씩 이어붙인 연속사진 같은 그 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온몸이 꽁꽁 묶인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 결박당한 몸 위
를 통증이 조각조각 찢고 쪼개며 뛰어다녔다. 내 몸 안에 뭔가가 들어가서
모든 핏줄과 내장을 그러쥐고 그물처럼 사정없이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 꿈에서 나를 완전히 벗어나게 해준 것은 진의 노크소리였다.
지금까지 계속 잔 거야?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진이 들어서며 물었다.
응. 진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잠을 푹 잔 얼굴은 아닌데? 여자 꿈
을 꾸었어. 몽정? 그건 아니고, 모르는 여자야. 모르는 여자라고? 그런 여
자하고 하는 편이 차라리 나아. 꿈에서 어머니나 누나하고 하고 나면 그날
은 꼭 재수없는 일이 생겨. 그런 날 밤은 아버지하고 하게 될까봐 잠들기
가 겁나더라구.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면서? 맞아. 한 번도 만난 적 없거
든. 그래도 꿈속에서는 다 알아보지. 어쨌든 꿈이란 그런 거잖아.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B1 버튼을 눌렀다.
누구지? 내가 중얼거렸다. 꿈 속의 여자? 응.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알고 지냈던 여자애 중 하나는 아니야. 그런데도 나에게 무척 중요한 여자
인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 전혀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일이 가능할까. 몰라. 어쨌든 이제 한 번은 만난 셈이니 모르는 사이는 아
니잖아. 이름 물어봤어? 아니. 여자애에 대해 생각하려면 이름이 필요해.
그리고 이름이 있어야 불러볼 거 아냐. 또 만나게 되면 꼭 이름을 물어봐.
그래보지. 내가 대답했다.
지하식당의 입구에는 커다란 시계가 있었는데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진에게 물었다. 한 시라니, 오후 한 시란 말이야? 아침 먹는 게 아니
었어? 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비틀즈의 가사로 대답했다. 겟 백.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와줄래? 아침에 가서 깨웠더니 밥은 그만두고 잠이
나 더 자야겠다고 했잖아. 왜 이렇게 헤매. 아직 덜 깼어?
소제목 : 방안도 밀폐된 상자를 연상시켰다.
DRIVE MY CAR (5)
식당에는 간소한 음식이 따뜻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팔십 명이 넘는다는 수련생들은 밥도 먹지 않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방에까지 사람이 없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내가 지적했다. 글쎄?
주방에서 일하는 여자가 공부나 수련에 방해될 만큼 예쁜 처녀 아닐까. 아
니면 고추를 썰 때마다 앞치마 밖으로 젖가슴을 내놓는 한 칠 년 굶은 과
부이거나. 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당 안은 막 물청소를 마친 텅 빈 양계장처럼 환하고 조용했다. 천장에
는 창백한 형광등이 일렬로 엎드려서 내려다보고 바닥에는 빈 식탁만 줄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마다 그 소리가 건너편 벽에 부
딪쳐 크게 울리곤 했다.
소리는 내 관자놀이를 때리는 것 같았다. 나는 두통을 느꼈고 명치 끝이
답답하여 더 이상 뭔가 뱃속에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진이 입 안의 미트
볼을 마저 삼키기를 기다리며 나는 물을 두 잔 마셨다.
복도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련번호를 단 방문이 양 옆으로 죽
늘어서 있는 것은 호텔과 비슷했지만, 좁고 긴 그 복도는 끝이 구부러져서
막다른 곳을 한눈에 볼 수가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창문부터 열었다. 엘리베이터, 복도, 지하식
당, 그런 곳들과 마찬가지로 방안도 밀폐된 상자를 연상시켰다. 이곳에서
응급으로 조처해야 할 일은 환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창밖에는 아
직도 비가 오고 있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전날 밤 우리가 검은 물에 잠겨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개 짖는 마을인 모양이었다. 이끼색의 양철지붕도 있었고 슬레이트 지
붕, 회색 시멘트집, 그리고 흙집, 바라크집, 붉은 벽돌집----전부 합해야
20채도 안 되어 보였다. 기와집은 딱 한 채였다. 그 집의 처마 밑에는 자
전거가 기대어져 있었다. 집 사이의 길은 좁고 구불구불했으며 드문드문
우물과 장독대가 보였다. 뒤쪽으로는 일주도로가 하얀 띠처럼 둥글게 마을
을 감싸안고 있었다. 그 뒤로는 산이었다. 아주 가끔 산 아래쪽에서 자동
차가 나타나 일주도로를 돌아서 산 너머로 사라지곤 했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가 기대어진 기와집 마당을 한참동
안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나는 책상에 붙어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에 한 번씩 일
어나 창가에서 바람을 들이마시거나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 방안에서 변
화를 줄 수 있는 일이란 그것 말고는 없었다. 군대에 갔다 온 사람이라면
이마로 치약 뚜껑을 누른 채 팔굽혀펴기를 한다든지 옷장 손잡이에 두 발
을 집어넣고 물구나무를 선다든지 따위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게다가 구태여 그런 가학적 처방을 내릴 필요도 없었다.
두통이 나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머리 아프게 사는 타입이 아니었다. '머리 아프다'는 물론이고 골
치 아파, 이런 말도 입밖에 낸 적이 없다. 골 때려, 라든가 골로 보내, 혹
은 골탕, 골통, 골칫덩이, 골뱅이, 골 뭐라도 좋다. 그런 말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두통이 왔을까. 다음 순간 나는 그렇게 머리아
픈 문제를 길게 생각하지 않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덜그럭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면서 마을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고 있었다.
소제목 : 거기에서 우리는 한 여자애를 만났다.
DRIVE MY CAR (6)
밤이 되자 두통은 불면으로 이어졌다.
두통과 불면은 대단히 치명적인 합병증이었다. 나는 이불 속에 누워 있
다가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책상에 앉았다. 책상에 앉으면 또 머리가 아파
서 다시 이불 속에 누워야 했다.
그런 나를 비웃듯이 새벽 한 시쯤 머리 위에서 수상한 발소리가 들려오
기 시작했다.
내 방은 이 건물의 맨 위층이었으므로 소리는 옥상에서 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도둑이나 살인 청부업자를 연상시키는 무겁고 긴장된 발소리는 아
니었다. 장난꾸러기들이 술래잡기를 하는 듯이 빠르고 가벼웠다. 쥐인가도
싶었지만 분명 충격완화장치가 장착된 쥐 특유의 고무 발바닥이 돌아다니
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소리는 귀를 기울이면 들리지 않았고 긴장을 풀
만하면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가 그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홈 사이
가 촘촘한 나사드릴처럼 두통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마을에서는 밤새 개 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그 밤은
<13일의 금요일>이나 <헬 나이트>의 주인공이 살인마에게 쫓기던 하룻밤만
큼이나 길었다.
겨우 잠이 든 것은 창밖이 환해지기 시작해서였다. 잉크병이 엎질러졌던
흰 책상보를 성의없이 세탁해놓은 듯한 색깔의 새벽이었다.
아침에 만난 진은 나와 달리 개운한 표정이었다.
잘 잤어? 응. 넌? 못 잤어. 옥상 위에서 나는 발소리 들었어? 아니. 개
짖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방의 불은 어디에서 끄지? 아무리 찾아도 스위
치가 없어. 진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왜 그런 걸 궁금해 하는 거
야? 그건 시청 앞 도로변의 가로등을 어디에서 끄고 켜는지, 그런 거나 마
찬가지 문제잖아.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말야. 공부하러 와서 방
의 불을 왜 끄려고 해? 잊지 마. 이곳은 고시원이고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철저하게 고안된 건물이라구. 진은 '모든 것은 너 자신 속에 있다는 사실
을 납득해야 해'라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새벽 마스터베이션에 대해 얘기
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많이 하거나 피곤한 날일수록 페니스가 더 크게 발
기하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나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
다. 마지막 문장은 분명 비틀즈의 가사일 거야. 그렇겠지? 하는 따위.
식당에는 역시 우리 둘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진과 나는 전날처럼 시
체 안치실 같이 조용한 식당에서 금방 씹은 음식들이 자신의 식도를 통과
해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한 여자애를 만났다.
그녀는 레인 캐슬에 온 이후 처음 마주친 인류였다. 전날 밤에 보았던
얼굴이 공문서처럼 네모난 사무실 남자는 인류라기보다 그가 앉아 있던 책
상과 마찬가지로 사무집기의 하나로 보아야 옳을 것 같았다. 나와 진은 그
녀를 쳐다보았다.
소제목 : 혹시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는 그 여자애
DRIVE MY CAR (7)
여자애는 거울로 된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걸어나왔다.
이마가 하얗고 눈썹뼈 아래로 유난히 깊게 들어간 검은 눈을 멍하니 뜨
고 있었다. 탈색된 듯한 짧은 머리카락은 조금 헝클어졌다. 미술대학 휴게
실에서 흔히 본 적이 있는 에이프런 모양의 길고 폭 좁은 그녀의 원피스는
초록색이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우리에 대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
다. 그녀의 눈은 허공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온 다
음에는 식당 쪽을 향해 똑바로 걸음을 내딛을 뿐이었다. 그녀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쪽에서 황급히 가운데를 터줘야만 했다. 그녀는 진과
나의 사이를 깃털뭉치처럼 스쳐 지나갔다.
진과 나는 동시에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가는 발목과 납작하고
하얀 면운동화. 누군가에게 손목을 잡혀 따라가거나 허방을 딛는 것처럼
무게가 실리지 않은 걸음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희미하게 풀냄새 같은 것이 났다. 그녀의 몸은 이
곳을 막 빠져나갔지만 그녀의 잔영이 아직 뒤따라 나가지 못하고 남아 있
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방의 거울 안에도 초록색이 감돌았다. 나는 거울속
을 쳐다보았다. 엘리베이터의 움직임이었을까. 갑자기 거울 표면에 물살이
일 듯 주름이 잡히면서 물결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그것은 정말 투명한 초
록색 물결이거나 바람에 날리는 얇고 긴 치맛자락 같았다. 그리고 내 얼굴
을 부드럽게 덮어왔다. 어지러웠다. 꿈에서 깨어날 때 겪었던 것과 비슷한
통증이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무거운 머리를 받치려고 손을 이마로 가
져간 것뿐인데 뜻밖에도 손바닥과 이마 모두에 땀이 배어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자리에 누웠다. 도착한 첫날 그랬듯이 눈꺼풀
을 들어올릴 수 없도록 잠이 쏟아졌던 것이다. 아무래도 지구를 점령하려
는 악의 무리들이 체체파리의 영혼을 칩 속에 넣어 내 머리에 집어넣었나
보다 생각하며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 이상한 꿈이 두번째로 찾아
왔다.
그녀는 성벽 근처를 걸었고 나를 향해 웃었다. 회전목마가 지나간 뒤 아
무데서도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름을 물어볼 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전날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 고통스럽게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전날과 같았다. 비는 마을 위를 오락가락하고 나는 한
시간마다 일어나 창밖을 향해 담배연기를 내뿜었으며 그 나머지 시간은 한
손으로 머리를 짓누르며 책을 보려고 노력했고, 그리고 실패했다. 불면의
밤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똑같았다. 그러므로 새벽에 머리 위에서 발소리
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습관처럼 시계를 흘끗 보았을 뿐 놀라지 않았
다. 한바탕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만에 환란을
견디는 약간의 요령을 터득한 나는 전날 밤처럼 머리를 싸안고 뒤척이는
대신 <성>을 뒤적이며 새벽을 맞았다. 어쨌든 쉽지 않은 밤이었다.
이상한 것은 진이었다. 잠이 깊은 편이라고는 해도 어떻게 한 시간이 넘
도록 머리 위를 뛰어다니는데 그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 새벽에 났던 비명소리도 못 들었어? 아니. 못 들었는데. 만약 진짜
그런 소리가 났다면, <수련자 주의사항> 너도 봤지? 수련과정에서 몸의 변
화가 오니 어쩌니. 그런 거겠지.
진이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왜 그렇게 잠을 못 자는 거야? 혹시 엘리베
이터 앞에서 만나는 그 여자애 때문에 그래?
소제목 : 꿈? 꿈에 여자가 나타나는 경험이야 누구나
DRIVE MY CAR (8)
머리를 짚으며 나는 진에게 대꾸했다. 꿈 때문에 그래. 그 꿈을 꾸고 나
면 머리가 더 아픈 것 같아. 너도 그런 경험 있어? 계속 같은 꿈을 꾸는
거.
그제서야 진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꿈? 꿈에 여자가 나타나는 경험이야 누구나 있지. 전에 나는 어떤 여자
가 꿈속에서 전화번호까지 알려주더라. 아무리 꿈이지만 그런 걸 놓칠 내
가 아니잖아. 잠결에 억지로 일어나서 적어놓았거든. 그 종이를 찢어서 갖
고 다니다가 잊어버렸지만. 만약 실제로 만난다면 할말까지 생각해놓았는
데. 아무래도 우린 전생에 못 이룬 사랑을 이루어야만 하는가봐요, 라든
가. 너도 다음에 만나면 이름만 물어보지 말고 아예 전화번호까지 물어봐.
내가 꿈의 내용을 설명하자 진은 대뜸 진단을 내렸다. 너 혹시 <성> 읽
다가 잠든 거 아냐? 그러니까 어디를 헤매고 성벽 같은 게 나타나고 그러
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소설을 읽다 잠든 적이 삼십 번도 넘
는다. 그러나 이곳에 오기 전까지의 나는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성벽처럼
위험한 장소는 근처에도 가지 않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사흘이 지났는데도 나는 레인 캐슬이라는 장소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떤
병균은 환경에 적응하는 성격이 있으며 흔히 내성이라고 말한다. 병균보다
수천 배 지독한 인간이 환경에 잘 적응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레인 캐슬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환경'이라고 부를 수만은 없는
어떤 특별한 점이 있었다. 방안을 벗어나서는 끝을 알 수 없는 복도와 시
체 안치실 같은 식당 외에 갈 수 있는 장소가 전혀 없었으며 있다면 건물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레인 캐슬에는 언제나 비가 왔다. 그것은
건물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언제나 모든 곳에 불이 켜져 깨끗이 청소된 실내를 비추고 있고 정해진
시각이 되면 난방이 가동되었으며 식당의 음식은 늘 따뜻했다. 그뿐이었
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사실 내성이 좀 있는 편이었다. 그것은 인내심과는 다르다. 모험심
과 용기도 없고 게을렀으므로 무언가를 바꾸기 보다는 적응하는 편이 훨씬
성격에 맞았던 것이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적극적인 성격이었다면 다음
날로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는 대신 나는 하루가 지나면 내성이든 내
공이든 뭐든가 하나는 쌓이겠지 하면서 참았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나흘째가 되어서였다.
소제목 : 비를 맞은 초록 원피스에서 한여름 깊은 숲
DRIVE MY CAR (9)
진은 반대했다. 나는 이미 결정된 일이라고 한 번 더 말해주었다. 진이
계속 투덜거렸다. 그럼 이렇게 해. 나는 예정대로 보름을 채울 테니까 마
지막날 날 데리러 오라구.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내 방으로 들어왔
다. 그리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짐을 풀 때와 반대 순서로 쉴레 화집과
<성>을 먼저 가방 안에 집어넣었고 책들을 그 위에 놓은 다음, 세면도구와
옷으로 나머지 빈 공간을 채웠다.
가방을 다 챙긴 다음 담배를 피워물었다.
이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내 예상대로였다. 진의 가방은 내 가방
의 두 배였고, 진이 일을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나의 절반이었다. 그
러므로 진이 가방을 챙겨들고 내 방문을 두드릴 시간이 된 것이다. 거기에
진 스스로의 판단을 내리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계산해 넣을 필요 없었다.
의대에서 우리는 '하품하는 트윈 베베'로 불리곤 했다. 실제로 하품도 잘
했지만 그보다는 하품을 하게 되는 시점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좋은 생각이 있어. 문을 열어주자 진이 벽에 가방을 기대놓으며 입을 뗐
다.
레인 캐슬을 소개받을 때 만약을 위해 알아둔 건데 말야. 한 시간 정도
거슬러올라가면 콘도가 있대. 그리로 가. 진은 내가 거절하지 않으리란 것
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결정을 따를 순서였기 때문이다. 죽
이 맞는다거나 마음이 통한다는 말이 따지고 보면 거래의 규칙을 잘 지킨
다는 뜻임을 우리들 트윈 베베는 잘 알고 있었다. 어딘데? 담배를 끄며 내
가 물었다. 설천이란 곳이야. 설천? 이번엔 또 눈이군. 맞아. 스키장에 지
어진 콘도래. 이쪽 지방은 지형이 좀 그런가봐. 레인 캐슬에 11월이면 비
가 많이 오는 것처럼 설천은 한겨울에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눈이 온다는
데? 아무튼 요즘은 스키장 개장 전이라 조용할 거야. 출발하자구.
진과 나는 며칠만에 처음으로 땅을 밟아보았다.
빗줄기는 가늘었다. 그것이 얼굴에 닿자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 거창하게 말해도 된다면 그것은 자유를 되찾은 감동 비슷한 것이었
다. 비의 감촉이야말로 내가 인공적으로 조성된 성의 방 하나에 배치된 레
고 인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의 일부라는 실감을 하게 해주었다. 진이
트렁크에 가방을 싣는 동안 나는 운전석에 들어가 시동을 걸었다. 조금이
라도 빨리 레인 캐슬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곳의 기억은 먼지 하나도 갖고
가고 싶지 않았다.
막 엑셀러레이터를 밟으려는데 진이 잠깐만, 이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
렸다. 나는 진 쪽을 쳐다보았다. 진은 등을 약간 구부리고 조수석의 사이
드미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진처럼 등을 구부리고 운전석 옆에 붙
은 사이드미러를 쳐다보았다. 그 속에서 한 여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주차
장은 텅 비었고 우리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우리가 탄 차를
향해 오는 것이었다.
아무 기억도 갖고 가고 싶지 않다니까.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데도 그녀가 올 때까지 출발하지 않고 기다렸다. 분명 그녀는 이곳을 떠나
려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가방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차에
올라타자 비를 맞은 초록 원피스에서 한여름 깊은 숲에서 나는 냄새가 풍
겼다. 어느 쪽으로 가는데요? 진이 묻자 그녀는 무심히 대답했다. 아무데
나요. 저는 돈이 하나도 없어요.
소제목 : 룸미러 속에서 그녀의 이마가 살짝
NORWEGIAN WOOD (1)
And she told me to sit anywhere
So I looked around
And I noticed there wasn't a chair
진이 이름을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창 밖만 쳐다보았다.
----이름 말하기 곤란해요?
조수석에 앉은 진은 업은 아기를 돌아보듯 그녀를 향해 최대한 고개를
꼬고 있었다.
룸미러 속에서 그녀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리곤 약간 고개를 젖
혔다. 곤란하다기보다 생각하기가 귀찮다는 식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스무
살 정도밖에 안 된 것 같았다.
----그냥 서로 얘기할 때 편하자고 물어보는 거예요. 절대 수첩에 적지
도 않고 돌아서자마자 잊어버릴게요. 어차피 머리가 나빠서 만 여섯
시간 뒤에는 뭐든지 잊어버린다구요.
그러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 없어요?
----그게 아녜요. 저는 이름이 많아요.
진은 뭔지 모르면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가장 최근에 불렸던 이름이 뭐예요?
----미리암.
----미리암?
----원래 마리아였는데 수녀원에 마리아가 셋이나 됐거든요. 그래서 담
임 수녀님이 미리암이라고 바꿔 부르게 했어요. 발음은 다르지만 같
은 이름이라고.
----그럼 수녀예요?
----아뇨.
그녀의 대답은 짧고 명료했다. 거기 대해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
임을 눈치채지 못할 진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라면 조금 둔한 사람으로 보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나 진
이 보기에 그녀는 고시원에서 공부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사무실 벽에
붙어 있던 괴상한 수칙을 지켜야 하는 수련생이라고 짐작되었다.
----고시원의 수련생들이 가톨릭계인가요? 다들 그런 수련을 하고 있나
보죠?
----아니에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할 수 없다는 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저도 몰라요. 수녀원에서는 지난 여름에 나왔고, 고시
원에서 저는 그냥 방에 가만히 누워만 있었어요. 수련 같은 건 안
했고요. 가끔 기도는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일어나려고만 하면 머
리가 아파서 금방 도로 누워버렸어요. 그런 두통은 처음이에요.
----두통?
진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머리를 저었다.
----더 묻지 마세요.
----아, 그래요. 이제부터는 내가 떠들어주지요.
소제목 : 겟 백. 겟 백, 투 웨어 유 원스 빌롱드.
NORWEGIAN WOOD (2)
진은 갑자기 쇼 프로그램 사회자처럼 유창하고 높은 억양으로 말했다.
----그러고보니 우리 소개를 안 했군요. 자, 여기 기사양반 이름은 준이
고, 나는 주드라고 해요. 나를 부를 때는 헤이, 주드 라고 불러주면
고맙겠어요.
----헤이, 주드?
그녀는 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 뭐 좀 이상했어요?
----그런 게 아녜요.
그녀의 말소리는 등산을 하는 사람처럼 숨이 차 있었다. 힘겹게 말을 이
었다.
----조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도 그런 식으로 불러달라고 했죠.
농담인가 싶어서 진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 역시 룸미러로 그
녀를 살폈다.
그녀는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차에 탔을 때보다 훨씬 더 딱딱하
고 건조한 표정이었다. 저주에서 풀려나기는 영 틀려버린 소금인형 같았
다. 제아무리 넉살좋은 진이라도 더는 말을 붙여볼 엄두가 나지 않는지 뒷
좌석을 향해 돌렸던 몸을 똑바로 했다. 묵묵히 앞을 쳐다보던 진은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얼마나 남은 거지? 그리고는 얼마 안 가 노래를 흥얼거
리기 시작했다. 겟 백. 겟 백, 투 웨어 유 원스 빌롱드.
갑자기 노래가 뚝 멈춰졌다. 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조조? 비틀즈 노래에 나오는 조조(JoJo) 말인가요?
진은 노래를 부르는 한편으로 자신이 어떤 연상작용에 의해 <겟 백>을
부르고 있는지 생각해보았음에 틀림없다. 그 노래라면 진이 하도 불러서
나도 알고 있었다.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에 있는 마지막 곡이라는 것도 진
이 말해주었다. 대충 이런 가사였다.
조조는 자기가 외톨박이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런 게 오래
못 간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는 아리조나 턱슨의 고향집을 떠나, 찬란한
캘리포니아 잔디를 향해 출발했어요. 돌아와요, 돌아와. 당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이제 그만 돌아오세요.
진의 물음에 그녀는 이번에도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노래를 계속했다. 귀여운
로레타 마틴은 자신이 성숙한 여자로 다 컸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아직도
선마슴아 같았죠. 모두들 이제 곧 자연히 성숙해질 거라고 말했지만 그녀
는 제 힘으로 그렇게 되고 싶었어요---. 분명 조금 전보다 약간 흥이 난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콘도미니엄까지는 그녀와 동행할 분위기인 것 같았다. 그 다음
은 어떻게 할 것인지, 거기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진과 아무 작정도 없
어 보이는 그녀를 나 역시 무심히 한 번 쳐다보았다. 비는 개었지만 하늘
은 잔뜩 흐렸다. 운전하기에 나쁜 날씨는 아니었다. 이따금 물기를 머금은
숲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아주 미세한 초록색 안개 알갱이가 뿜어나오
듯.
소제목 : 첫번째 소원은요. 오늘 밤 재워달라는 거예요.
NORWEGIAN WOOD (3)
철 지난 휴양지에는 그래도 뭔가가 있다. 정열이 소모된 뒤의 평화나 쓸
쓸함, 추억, 쓰레기 같은 것이라도. 그러나 개장을 한 달쯤 앞두고 아직
방치돼 있는 스키장은 초라하고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손질이 되지 않은
텅 빈 슬로프는 민둥산만큼이나 미련스럽게 보였고 문을 닫은 지 오래된
가게들은 창턱마다 지저분하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스키장을 껴안듯이 두
르고 서 있는 늦가을 산만이 그나마 휴양지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스키하우스 앞에 차를 세우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끝에 겨우 지하
에서 문을 연 패스트푸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이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를 사들고 테이블로 왔다.
그녀는 스트로우로 콜라만 조금 마실 뿐 다른 것은 먹지 않았다. 진이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콜라 먹을 때는 기도 안 하네요?
그녀가 약간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제 기도는 듣지도 않으세요.
----바쁜 하느님을 너무 귀찮게 하지 말고 소원 있으면 나한테 말해봐요.
----왜요?
진은 햄버거빵을 벌리고 그 안에서 시든 양상치를 빼내 냅킨 위에 버리
면서 선선히 말했다.
----소원을 들어주려고 그러죠.
----몇 개까지요?
----글쎄?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뭐, 많으면 준하고 나하고 둘이 나눠
서 들어주면 되니까.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콜라를 마
시던 그대로 스트로우를 입에 문 채 얼굴만 돌려 나를 힐끗 올려다본 것이
었다. 그 시선의 각도는 내게 상당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쏘아보는 듯한
순간적인 눈길이나 얇고 붉은 입술도 그랬다. 깊이 생각하고 말고도 없었
다. 그것은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그림 중의 하나로 쉴레의 <왼쪽 다리를
세우고 앉은 여자>와 비슷한 구도였다. 우연의 일치라고까지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그림 속의 여자가 입은 소매 없는 셔츠도 초록색
이었다. 진이 <겟 백>을 흥얼거린 것과 똑같은 연상작용이었을 뿐이다.
그녀의 눈길이 내게 닿았을 때 나는 무슨 이유로인지 그 눈길을 피했다.
그것은 어쩌면 아무런 연상작용도 아니었다.
----첫번째 소원은요. 오늘 밤 재워달라는 거예요.
그녀는 진에게 말하고 있었다.
----들어주죠.
진은 즐거운 표정으로 감자튀김 봉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두번째 소원은 이따 밤에 말할게요.
그 말은 어쩌면 나를 향해 한 말 같았다. 그러나 분명치는 않았다. 얼음
만 남은 빈 컵과 햄버거를 쌌던 기름종이 따위를 쟁반에 쓸어담던 내가 그
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녀의 오른쪽 흰 운동화에 갈색 콜라가 한 방울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소제목 : 그녀의 깊게 패인 눈빛과 얇은 입술이 또렷이
NORWEGIAN WOOD (4)
콘도미니엄의 방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통유리
문이었다. 맞은편 벽 하나가 모두 숲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옆에 붙
은 쪽유리 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가면 바로 앞으로 스키 슬로프가 지나가
고 있었다. 스키철이면 발코니에 나가서 스키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거
나 원한다면 악수를 나눌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다음으로 시선이 멈춘 곳은 두 개의 침대였다. 가족호텔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부부용 더블침대와 자녀용 싱글침대가 놓여 있었다. 긴 소파도 등
받이를 젖히면 침대로 사용할 수 있게 돼 있었으므로 하룻밤 그녀를 재워
주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그녀에게 자장가를 불러준 다음 두 남자
가 돌아앉아서 책과 노트를 뒤적이며 미친 듯이 '족보'를 외워대는 건 좀
곤란할 것 같았다. 공부는 포기해야 했다.
가방을 풀고 나서 진이 말했다. 맥주를 좀 사와야겠어. 그렇지? 그것은
그녀를 차에 태웠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순서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자동차키를 꺼내 진에게 건네주었다. 가게가 다 닫혔던데, 마을까지 내려
가야 할지도 몰라. 같이 갈까? 아니. 진이 고개를 저었다. 여자분을 혼자
둘 수 없잖아. 셋이나 갈 필요도 없고.
그러나 내가 문을 잠그러 따라나갔을 때 진은 나가려다 말고 그녀를 한
번 돌아보더니 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나도 지금까지는 깜빡 잊고 있었
다는 듯이 마주 쏘아봐주었다.
문은 닫히자마자 저절로 잠겼다. 찰칵, 하는 소리의 여음이 잠깐 방안을
떠돌다 사라졌다. 그녀는 초록옷으로 덮인 무릎을 세워서 두 팔로 감싸안
은 채 긴 소파에 기대앉아 있고 나는 그 옆의 일인용 의자에 가 앉았다.
그녀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숲속으로 해가 지기 시작하는 것만
나란히 바라보았다.
붉은 기운이 조금씩 스러지면서 능선은 검은 실루엣으로 변해가고 있었
다.
햇빛의 산란을 받아 겹겹이 살아 움직이던 나무들은 점점 흑백사진처럼
하나의 평면 안에 조용히 갈무리되었다. 가지와 잎의 흔들림도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어두워지려는 순간, 밖에서 놀던 아이처럼 불현듯
바람이 돌아와 나무 사이로 깃들었다. 그리고 어두워졌다. 어둠과 침묵은
주변의 모든 사물을 제거했다. 시간이 지나는 것도 알 수 없었다. 장소와
시간이 모두 사라져버린 어떤 절대 속에 그녀와 나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그녀의 얼굴은 희미한 윤곽으로 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녀의 깊게 패인 눈빛과 얇은 입술이 또렷히 보였다. 어떠한 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마주치더라도 그녀라면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서 만난다면 누구나 상대를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 만져보거나
목소리를 듣지 않고도 알아본다면 그것은 특별한 경우일 것이다. 특별하다
는 것. 그런 것이 있을까. 있을지도 모른다.
소제목 : 두 팔로 다리를 모아 웅크린 채 한참동안
NORWEGIAN WOOD (5)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전등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불은 켜지지 않았다.
진이 카드로 된 메인 키를 빼서 가지고 갔기 때문에 전원이 차단돼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두 무릎을 세워 거기에 턱을 내려놓은 자세로
마치 굳어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그녀는 타락의 도시에 살고 있었다. 도시는 마침내 신의
노여움을 사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천사의 손에 이끌려 저주받은
도시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등뒤에서 천둥 번개가 치고 신전이 파괴된다.
천사가 그녀의 귀에 속삭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봐서는 안 돼.
뒤를 돌아보지 마. 그러나 그녀는 돌아본다. 그녀는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소금인형이 되어버린다. 바람이 휘몰아치는데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왜 돌아보았을까. 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것일까.
보아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보았기에 그녀는 저주를 피할 수 없었다. 인
간이 엿보아서는 안 되는 신(神)들만의 비밀 같은 것. 그것은 운명을 잣는
다는 물레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청바지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냈다. 왜 그녀에게서 소금인형을
떠올리게 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첫인상 때문일 것이다. 아
무것도 보아서는 안 될 것 같은 맹목의 금기가 서려 있던 투명한 망막, 그
리고 손을 잡힌 채 허방을 향해 끌려가는 듯하던 걸음걸이. 어쨌든 뭔가를
상상하게 만드는 첫인상인 것은 틀림없었다.
진이 돌아왔을 때 나는 발코니에 나가 두 대째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이어 방안이 환해졌다. 냉장고가 위잉 소리를 내며 돌
아가기 시작했다. 진이 카드키를 꽂는 작은 박스를 툭툭 치며 말했다. 두
꺼운 종이 같은 걸 꽂아두면 전원이 연결될 텐데 이렇게 컴컴하게 하고 있
었단 말야? 진이 걸음을 옮기는 대로 무거운 비닐봉지 속의 캔맥주들이 바
스락 소리를 냈다. 나는 조도에 적응하느라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아까와 똑같이 무릎을 껴안고는 그 위에 비스듬
히 턱을 올려놓은 채로.
피곤했던 모양이지? 그녀를 눈으로 가리키며 진이 말했다. 비닐봉지 속
에 든 것을 차례로 탁자 위에 꺼내놓는 진의 몸짓은 그녀가 깨기를 바랐으
므로 전혀 조심스럽지 않았다. 맥주와 커피시럽을 입힌 땅콩, 조미오징어
따위가 차려졌다. 그녀가 눈을 떴다. 두 팔로 다리를 모아 웅크린 채 한참
동안 눈만 깜박이고 있는 그녀는 소금인형 같지 않았다. 잣나무 가지 위에
올라앉은 귀여운 날다람쥐 같았다. 진이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있던 초컬
릿을 뺐다. 마치 펜싱을 하는 듯한 동작으로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린 다
음 그것을 코앞에 내밀자 그녀는 진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맥주캔을 칠레 지도 모양으로 길게 늘어놓고 진은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
보았다. 그리고 산티아고쯤 되는 위치에 있는 캔을 집어들어 마개를 땄다.
나도 캔 하나를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맥주는 알맞게 차가웠다. 진이 차
를 급하게 몰아온 게 틀림없었다.
소제목 : 진과 그녀는 그새 침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NORWEGIAN WOOD (6)
진과 나는 꽤 마셨다. 레인 캐슬에서의 긴장이 풀린 탓인지 취기가 빨리
오는 것 같았다. 나는 몇 번인가 발코니로 나가 담배를 피우면서 찬 바람
을 쐬었다.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초컬릿을 조금씩 부러뜨려 입에 넣어가며
진의 너스레를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그러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
상 하지 않았다. 조조가 누구냐고 진이 물었을 때에도 그녀는 같은 마을에
살던 남자애예요, 라고만 대답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면서 왜 수녀원
같은 데를 들어갔어요? 그 남자 때문에 결국 수녀가 못 되고 나온 거예요?
계속해서 묻는데도 잠자코 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좋아요, 마
지막으로 한 가지. 이건 대답해줘야 해요. 중요한 문제니까. 진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그 남자, 지금도 만나요? 그녀는 진의 세워진 손가락
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그다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죽었어요. 진도
곧바로 대꾸했다. 그거 잘 됐군.
진은 취했다. 그리고 나도.
나는 담배 한 개비를 빼들고 어두운 발코니로 나갔다. 취한 탓에 눈앞의
사물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얼굴에 닿는
바람이 차고 축축했다. 나는 한 손으로 바람을 막고서 겨우 불을 붙인 다
음 흔들리는 몸을 발코니의 목책에 기대고 천천히 담배를 피웠다. 연기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도대체---나는 문득 중얼거렸다. 이게 다
뭐지? 뭐가 어쨌다는 거야. 이 모든 것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진도 발코니로 나왔다. 내가 피우던 담배를 가져다가 제 담배에 불을 붙
였다. 진이 담배를 빨아들일 때마다 어둠 속에서 몇 번인가 불꽃이 빨갛게
커졌다. 내가 물었다. 헤이, 주드. 우리 지금 분명히 여기 있는 거야? 사
방은 너무 조용했다.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내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밤
하늘로 날아올랐다. 갑자기 진이 소리쳤다. 그래, 우리 여기 있어! 여기
있다구! 소리는 텅 빈 스키 슬로프를 타고 넘어서 어두운 숲으로 사라졌
다. 진은 <렛 잇 비>를 흥얼거리며 담배를 마저 피웠다.
진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버린 뒤에도 나는 한참동안 발코니에 서
서 바람을 맞았다. 취한 밤이란 것은 여분의 인생이거나 시계로 잴 수 없
는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는 사이 나
는 추위를 느낄 만큼은 정신이 돌아와 있었다.
진과 그녀는 그새 침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잠이 들었다. 탁자 위에는 빈
깡통과 남은 안주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나는 탁자 위를 대충 치우고
나서 욕실에 들어가 양치질과 샤워를 했다. 소파를 침대로 만든 다음 침대
맡의 스탠드 라이트만 남기고 불을 모두 끄고 누웠다. 쉽게 잠이 올 것 같
지는 않았다. 일어나서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내려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소제목 : 그래요, 지금. 저를 좀 태워다주세요.
NORWEGIAN WOOD (7)
누군가 나를 흔들었다. 일어나요. 어서요.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왜 나를 깨우는 것일까. 그녀는 내 귀에 대
고 속삭이듯 말했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나는 일어나 앉았다. 어둡고 조용했다.
----지금 말인가요?
----그래요, 지금. 저를 좀 태워다주세요.
꿈인가? 하고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분명 꿈은 아니었다.
나는 내 손으로 등받이를 빼내 침대로 만들었던 그 소파 위에 앉아 있었으
며 조금 떨어진 저편에는 더블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진의 모습이 희미하
게 눈에 들어왔다. 오래 잔 것 같지는 않았다. 눈두덩이를 가볍게 누르며
내가 물었다.
----어디로?
----아무튼 밖으로요.
나는 여자애들한테 늘 친절하지 않다는 불평을 듣곤 했었다. 하지만 지
금은 조금도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남방셔츠만 하나 더 껴입고 나와서 그
녀와 함께 차에 탔다. 밖은 꽤 추웠다. 시동을 걸고 나는 그녀에게 조금
전과 똑같이 물었다.
----어디로?
----길을 따라서 그냥 내려가요.
----갈 데가 있는 거예요?
----네. 근데 좀 멀어요. 괜찮죠?
----글쎄요. 돌아오기만 하면 상관없겠죠.
----우린 안 돌아와요.
불현듯 나는 대꾸할 말을 잃었다. 차는 이미 가족호텔을 벗어나 스키하
우스를 향해서 미끄러져내려가고 있었다. 정문 앞에 세워진 설천 리조트라
는 아치를 지나쳐갈 때 나는 룸미러를 통해 뒤를 쳐다보았다. 정문에서 가
족호텔까지 길을 따라 죽 가로등이 서 있을 뿐 숲과 하늘은 완강할 만큼
검었다. 그나마 이제부터는 가로등도 없는 좁은 산길이었다. 나는 헤드라
이트를 위로 조절했다. 그리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옆자리에는 그녀가
타고 있었고 갑자기 내 인생에 그 사실만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
다.
20분이나 3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잠깐 세웠으면 좋겠어
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길이 약간 들어가 있는 장소를 찾아서 숲 쪽으로
바짝 붙여 차를 세웠다. 그녀는 앞만 쳐다보고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별을 보는 것 같았다. 검은 하늘에는 물 속에 담갔다가 꺼내놓은 듯한 별
들이 아주 많았다. 나는 국어 교과서의 어떤 글에서인가 별을 헤아린다는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의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별을 올려다보며 마치 동전 세듯이 그것을 세어본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
가. 그러나 지금 누군가가 세어보라고 권한다면 동전보다는 별을 세고 싶
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센다는 것은 오래오래
보고 싶다는 뜻일 텐데 동전이 많은 것도 좋겠지만 이따금은 별이 많은 것
도 좋은 기분일 수 있음을 느꼈다. 그녀가 세고 있는 별이라면 말이다. 내
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는 울었던 모양이었다. 언뜻 쳐다보니 눈에
눈물이 가득차 있었다. 마치 자기가 세었던 별을 몽땅 눈속에 집어넣은 것
처럼 보였다.
소제목 : 좀 안아줄래요? 슬퍼서 그래요
NORWEGIAN WOOD (8)
----울어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고개를 조금 젖혀 등받이에 기댄 채 그녀는 아무말이 없었다. 눈동자 아
래께에 몰려서 작은 물살처럼 그렁대던 눈물이 눈시울의 턱을 범람하여
툭, 아래로 떨어졌다. 별이 지는 것처럼. 나는 입속으로 그것을 세기 시작
했다. 하나, 둘, 셋, 넷----다섯 개의 별을 떨군 뒤 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좀 안아줄래요? 슬퍼서 그래요.
깊은 우물 같은 어둠속에 얼굴을 묻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짧아 그녀의 숙인 뒷목만이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나
는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껴안아주려 했다. 둥글게 불그러진 하얀 목뼈
에 입을 맞추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
인지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저는 슬픔을 잘 견디지 못해요. 사람들은 모두 다 슬픔을 잘 참는
것 같아요. 어떻게 그처럼 슬픔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죠? 슬퍼
도 일을 하고 먹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그러다보면 슬픔이 사라지기도 한
다면서요? 젬마 수녀님은 기도를 하면 슬픔이 사라진다고 말하곤 했지요.
하지만 저는 잘 안 됐어요. 당신은 어떻게 해요? 당신도 슬플 때는 울겠지
요?
----글쎄요. 언제 슬퍼했었는지 별로 기억이 안 나서.
----거짓말이에요. 태어날 때는 울었을 거면서.
----그 역시 기억이 나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슬퍼서 울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저는 기억이 나요. 분명히 슬퍼서 울었어요.
----그랬나?
나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굳이 아니라고 우길 이유도 없었다. 그녀가 다
시 물었다.
----당신은 꿈을 꾸지 않는가보죠?
----왜요?
----기억이 안 나는 일은 모두 꿈속에 다시 한 번 나타나잖아요. 그러니
까 이런 거 말예요. 언젠가 제가 전철을 탔을 때였어요. 막 문이 닫히려는
전동차를 향해 뛰어오는 남자를 보았어요. 어디선가 본 듯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났지요. 전동차는 남자가 타기 직전에 출발해버렸어요. 차가 그 사
람의 앞을 지나칠 때 유리 밖으로 한 번 더 그 사람을 보았지만 정말 생각
이 안 나더라구요. 하루 종일 얼마나 궁금했던지. 그날 밤 막내오빠 꿈을
꾸었지요.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알았어요. 그 남자는 막내오빠하고 비슷
하게 생겼던 거예요. 나 자신은 끝까지 생각 못 해냈는데 꿈이 가르쳐준
거지요.
----오빠 얼굴까지 꿈에서 가르쳐줘야 알아요?
----막내오빠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어요. 제가 어릴 때 군대에서 죽었
거든요.
나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녀에게는 슬퍼할 일이 많았을 것 같았고
거기 대해 내가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할 차례였다.
소제목 : 이것 좀 볼래요?
NORWEGIAN WOOD (9)
나는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모르긴 해도, 슬플 때는 시간을 정해놓고 실컷 슬퍼하는 게 어때요.
무엇 때문에 그처럼 슬퍼했는지 그런 자신이 이해가 안 돼서 어리둥절해질
때까지 말예요.
----어떻게요?
----그러니까, 물병 속의 물처럼 계속 마셔서 없애는 거예요.
----슬픔을요?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자애한테 차였을 때 그렇게 해본 적이 있어요. 어디를 가나 무엇
을 보나 그애가 연상되어 마음이 무겁더라구요. 그래서 아예 적극적으로
그 생각을 하기로 했죠. 그애가 잘 가던 카페, 잘 먹던 스파게티와 아이스
크림 종류, 그애가 쓰던 향수, 그애가 좋아하던 영화배우와 노래들, 잘 쓰
던 말 따위를 줄기차게 떠올렸어요. 그러다보니 얼마 안 가 그것들이 지겨
워지고, 또 얼마 안 가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죠. 수 백 가지의 기억을 하
나씩 잊으려면 힘들 테니 그애에 대한 감정 자체를 잊어버리면 되는 거예
요. 그렇게 되면 그애와 잘 가던 카페에서 만난 새로운 여자애가 그애처럼
똑같이 과일 파나페를 주문해도 더 이상은 그애를 떠올리지 않게 되죠.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부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끝까지 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쉽지 않아요. 당신은 슬픔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틀림없이 누구를 진심으로 좋아해본 적도 없는 사
람이에요, 라고 덧붙였다. 그 말은 내가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지난
여름 마지막으로 같이 잤던 여자애가 침대에서 담배연기와 함께 허공에 뿜
어올린 말이기도 했고 내 책상 서랍 속에 들어 있는 여자애들의 편지 가운
데 그런 구절이 있었던 것도 같다. 누구를 미치도록 좋아하지 않는 것을
결핍이라거나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듣자 나는 웬일인지 가슴이 조금 아팠다.
----이것 좀 볼래요?
그녀가 초록색 치마를 무릎 위로 걷어올렸다.
----여기 허벅지의 흉터가 아주 커요. 불이 났었거든요. 불 속에서 겨우
빠져나오긴 했지만 그때부터 짧은 치마는 입지 못해요. 보여요?
흉터는 잘 보이지 않았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다리가 몹시 가늘다는 사실 정도였다. 그녀는 다리를 한 쪽씩 쳐들
더니 변속기 레버 위를 타고넘어 그것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치마를 팬티가 있을 만한 부분까지 바짝 끌어올리고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보여요?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녀는 실내등을 켜달라고 말했다. 지느러미
대신 두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라고 하더라도 그녀처럼 기를 쓰고 제 다리
를 보여주려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태도는 너무 천연덕스러웠다.
얼굴을 붉히는 쪽이 오히려 민망해질 판이었다.
소제목 : 그녀가 이끄는 대로 내 손은 그녀의 다리 위에
NORWEGIAN WOOD (10)
나는 내 무릎 위에 가로놓여진 그녀의 다리로 시선을 내렸다.
자동차의 희미한 실내등 아래에서 보기에도 다리의 흉터는 몹시 흉칙했
다. 허벅지에서 무릎까지 살갗이 심하게 일그러져 온통 울퉁불퉁하고 번들
거렸다. 갑자기 차갑고 미끄러운 감촉이 내 손목을 휘어감았다.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았던 것이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내 손은 그녀의 다리 위에 올
려졌다. 그녀는 내 손바닥이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어 흉터를 느낄 수 있
도록 몇 번인가 팔목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손이 좀 차가운 데에 비해서
그녀의 다리는 따뜻했다. 생각처럼 그렇게 우툴두툴하지도 않았다.
내 손을 제자리에 갖다놓은 다음 그녀가 물었다.
-----혹시 몸에 흉터 같은 거 없어요?
나는 잠깐 생각을 해보았다. 흉터는 그 사람이 살면서 겪어온 사건의 흔
적이다. 스쳐갔던 상처들이 몸에 새겨져서 그때의 아픔과 시간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다. 흉터들을 다 합해 수식(數式)을 만든다면 그 흉터를 지닌
사람의 인생이 값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그녀의 것처럼 큰 흉터
는 없었다. 하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치열함 없이 그럭저럭 살아왔다고는
해도 나라고 해서 아픔의 시간이란 것을 완전히 면제받았을 리는 없다. 그
런데도 포경수술을 한 자리 말고는 흉터를 전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글쎄요, 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
덕이고는 조조의 이야기를 듣고 싶냐고 물었다. 여전히 자기의 다리를 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였다.
-----같은 마을에 살았다는 남자 말인가요?
-----그래요. 어릴 때 우리는 조조네 고아원 옆의 딸기밭에서 뛰어놀곤
했어요. 그때 깨진 병을 밟아서 조조는 엄지발가락을 다쳤어요. 나중에 알
았지만 인대가 끊어졌던가봐요. 조조는 절름거렸어요. 일찍부터 오토바이
를 탔기 때문에 우리 마을에는 조조가 절름거리는 것을 한 번도 못 본 사
람도 있었지만요. 조조는 흉터가 아주 많았어요.
그녀는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그 다음 말을 할 때는 목소리도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조조의 인대를 베었던 그 깨진 병조각도 말예요. 조조가 밟지 않았
으면 제가 밟았을 거예요. 조조는 늘 제 곁에 있었고 저 대신 다쳤죠.
그녀가 조조를 만난 것은 유치원에서라고 했다. 그녀가 다니는 유치원은
'희망원'이라는 이름의 고아원과 같은 담장 안에 있었다. 유치원 원장수녀
는 희망원의 원장이기도 했다.
유치원에서 그녀는 무용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무용시간은 언제나 원생
들이 풍금소리에 맞춰 둥근 원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날도 그녀
는 허리에 손등을 가볍게 대고 발꿈치를 들고서 마루를 깐 유치원 강당 위
를 사뿐사뿐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창밖을 지나가고 있는 한 남자
애를 보았다.
소제목 :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예요?
NORWEGIAN WOOD (11)
-----그애가 조조였어요.
그 말을 한 다음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두 다리를 내 무릎 위에 올리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몸은 나와 직각방향을 향해 있었다. 그렇게 각기 다른
쪽을 쳐다보고 앉은 채 그녀와 나는 생각없이 어둠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다리는 전혀 무겁지 않았다.
차 안이 약간 답답하게는 느껴졌으므로 나는 차창을 조금 내렸다. 싸늘
하고 축축한 밤공기가 호기심 많은 정령들처럼 얼른 그 틈을 비집고 들어
왔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담배를 갖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쯤 진이 깨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데에도 생각이 미
쳤다.
-----왜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이마를 찡그리죠?
그녀는 어둠을 보지 않고 내 옆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
는 가볍게 웃었다. 내가 이마를 찡그렸다면 담배나 진 때문이겠고 어느 쪽
이라고 해도 그녀에게 굳이 설명해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시 그녀가 물
어왔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예요?
-----생각 안 해봤는데.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저는 화난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뭔지 모르지만 제가 사람들을 화
나게 만드나봐요. 사실 저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뜨개질도 못
하고 자전거도 잘 못 타요. 아이도 돌볼 줄 모르고 책 읽기도, 그리고 기
도까지도요.
그녀는 곧 폐기될 운명의 고장난 전축처럼 한 번 더 되풀이해서 중얼거
렸다.
-----아무것도요, 기도까지도요.
-----좋아하는 게 없어요? 취미 같은 거 말예요.
-----아뇨. 저는 그냥, 혼자 가만히 있는 게 좋아요. 잠 자는 것 하고.
잠을 자면 꿈을 꿀 수 있으니까요.
-----악몽은 꾸지 않나보군.
-----제 꿈속에는 조조가 살아요. 조그만 마을의 기와집에서. 마당에 우
물이 있고 부엌 안에도 수도꼭지가 달린 집이죠. 댓돌 위에는 조조의 신발
이 놓여 있고요. 조조는 신발이 두 켤레예요. 늘 제 곁에 있는데도 조조가
신발을 신지 않은 건 못 보았거든요. 어쩌다 조조가 밖에 나가고 없는 때
도 있긴 해요. 그런 때 나는 신발을 신고 있는 조조의 발만 끊어 가지고
마당으로 우물가로 돌아다니죠. 꿈에서는 그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
지잖아요.
소제목 : 뒤늦게 내가 손을 들어 어깨를 껴안으려
NORWEIGAN WOOD (12)
-----그 사람은 왜 죽었어요?
-----불이 났을 때요. 저는 불 속에서 뛰쳐나오자마자 정신을 잃었어요.
병원에 찾아온 사람들이 조조 소식을 알려줬죠. 눈을 다쳤다고도 하고 멀
리 도망쳤다고도 하더니 나중엔 그랬어요. 죽었다고.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잠자코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다지 슬
픈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가 가야겠어요, 하고 말했다. 캄캄한 숲 근처에 차를 대놓고
얘기를 나누었던 지금까지의 시간이 어쩌면 모두 꿈이었다는 듯 몽롱한 어
조였다.
-----어디로 갈 거예요?
나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윗몸을 쳐들어서 앞으로 숙
이는가 싶더니 미끄러지듯 내 무릎 위로 올라앉았다. 흰 운동화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났고 그녀의 어깨뼈가 내 가슴팍에 닿았다. 내 무릎 위의 그
녀는 신기한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 어린 소녀 같기도 했고,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체념한 병자 같기도 했다. 어쨌든 가
벼웠다는 얘기이다. 나는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싸여서 굳어진 듯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뺨을 내 왼쪽 어깨에 갖다 댔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뒤늦게 내가 손을 들어 어깨를 껴안으려 했을 때는 이미 차문을 열고 나가
고 있었다. 그녀는 숲 앞에 섰다. 헤드라이트의 뿌연 불빛에 비쳐 그녀의
모습은 실패한 흑백사진 같았다. 빛이 들어간 필름으로 찍은.
-----가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특별한 결의도 동요도 없었다. 내가 열려 있는 차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그녀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등뒤에는 검은
숲뿐이었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움직이면 그녀
는 금방이라도 몸을 돌려 끝을 알 수 없는 밤의 숲속으로 달아날 것만 같
았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모습은 점점 윤곽이 희미해져 녹
아내리는 듯했다. 잘 보이지 않아서인지 말소리도 작게 들렸다.
------그냥 가세요. 괜찮아요. 제가 어디에 있든 찾으러 오니까요.
------누가 말인가요?
내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도 모르겠다.
------금요일 아침 아홉시에요.
그 말을 던진 뒤 벌써 그녀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미 나
따위는 만난 적도 없다는 듯이 무심한 걸음걸이였다. 검은 밤을 배경으로
그녀의 흰 운동화가 걷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손목을 붙잡혀 허방으로 끌
려가는 듯한 바로 그 걸음이었다.
소제목 : 차는 희미한 그녀의 윤곽을 거칠고 빠르게
NORWEGIAN WOOD (13)
나는 기어를 변속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그녀
가 내려가는 방향을 따라 속도를 높였다. 차는 희미한 그녀의 윤곽을 거칠
고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진이 잠들어 있는 콘도미니엄과 반대방향이라는
사실은 내 머릿속에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저 운전을 했다. 길이
있었고 그 위로 내 차가 달렸다. 그뿐이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얼마가 지났는지 불현듯 운전하기가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
니 앞창이 좀 흐린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흐린 게 아니라
얼룩이 잔뜩 끼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였으며 그 얼룩은 빗방울 자
국이었다.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와이퍼가 지나간 자리만 깨끗이 닦이면서
창에 부채모양의 세상을 드러내보였다. 빗속으로 새벽이 오고 있었다. 그
녀는 밤하늘 아래로 걸어갔고 그리고 별도 떠 있지 않았던가.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어쨌든 꽤 먼 거리를 온 것만은 틀림없었다.
외딴 주유소에 차를 댔을 때는 동쪽 하늘이 온통 낮고 붉은 구름으로 물
들었다.
빨간 모자를 쓴 주유원이 다가왔다. 모자 밑의 얼굴은 주름이 쭈글쭈글
한 늙수그레한 아저씨였다. 담배는 안 팔죠? 내 말투가 좀 간절하게 들렸
는지 주유원은 윗주머니에서 자기의 담배갑을 꺼냈다. 주머니에 담뱃갑을
넣은 채 기름탱크 옆에 서 있는 주유원이란 약간은 이상했다. 한 개비면
돼요. 내가 사양하는데도 그는 담배를 몇 개비 더 꺼내 부득부득 손에 쥐
어주었다. 잠을 못 잔 것 같은데, 담배라도 피워야 안 졸고 가지. 그는 친
절했다. 한동안 우리 동네 우체국 옆의 주유소에서 일했던 소년을 떠올리
게 했다. 그 소년은 어느날 내 차를 따라서 50미터쯤 뛰어왔다. 그애는 고
통스럽게 숨을 헐떡이며 주유구의 마개를 깜빡 잊고 잠그지 않았다고 말했
다. 빨간 모자의 아저씨는 그 소년 이후로 내가 만난 가장 친절한 사람일
것이다.
늙은 주유원이 나에게 말했다. 이제 이 창은 닫는 게 좋겠어요. 아무리
졸려도 그렇지. 비오는 날 창문을 이렇게 열어놓고 달리면 몸이 얼어붙을
텐데. 나는 왼쪽 어깨가 흠뻑 젖어 있다는 걸 그때야 알았다. 움직이려 하
니 굳어진 석고처럼 딱딱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서 왜 여기 있는지 모르
겠다는 듯 운전대 위에 아무렇게나 얹혀 있는 왼손을 만져보았다. 의수처
럼 차고 뻣뻣했다. 나는 오른손만으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건네주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돈을 세던 주유원은 못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차
를 출발시켰다. 서울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진은 꽤 투덜대겠지만 나의
쉴레 화집과 <성>을 내버리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소제목 : 얼핏 들으면 몽환적인 연가 같지만 실은
YOU WON'T SEE ME (1)
We have lost time
That was so hard to find
변한 것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갔을 뿐.
작년에 인턴 과정을 끝냈으므로 나는 수련의가 되었다. 인턴 생활이란
것은 정신없이 바빠 하루가 저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었
다. 결혼한 친구들은 더했다. 그들은 두어 주일에 한 번씩 오직 곯아떨어
지기 위해 아내의 집에 들어갔다.
한 친구는 자신이 잠든 동안 아내가 발에 비닐봉지를 씌워놓곤 한다고
불평했다. 살갗 속까지 배어들어가 어엿한 발의 일부로 자리잡은 발냄새를
아내들은 잘 참지 못했다. 산부인과 전문의를 딴 뒤 공장이 많은 지방도시
에서 개업한 선배가 있었다. 선배는 거리의 여공들을 볼 때마다 언제부턴
가 중절수술비 단위로 머릿수를 세는 버릇이 생겼다고 농담을 했다. 발을
씻으며 친구는 아내에게 그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면 아내들은 깔깔 웃으
며 발냄새와 외로움 따위를 참기로 마음먹는 모양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수련의 생활은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특히 나는 중간 규
모의 안과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처럼 정신없이 휘돌아치지 않
았다. 환자는 많았다. 진료시간 내내 시력검사를 하거나 치료의자에 앉은
환자의 고개를 젖히게 하고 안구를 소독해야 했다. 시약을 넣어주기도 하
고 적외선 치료기 앞에 앉히기도 했다. 저녁에는 연구 과정이 있었고 그밖
의 다른 공부도 소홀히 볼 건 아니었다. 그러나 힘들다기보다는 단조로운
쪽에 가까운 생활이었다.
이따금 진을 만났다. 진은 그의 고향 근처 바닷가 도시의 보건소에 있었
다. 올 봄에 차를 갖게 된 진은 맥주를 마시고 싶을 때는 몇 시간씩 밤길
을 달려 나를 만나러 왔다. 물론 그런 날은 대개 토요일이었다. 별일 없
지? 나는 첫 번째 맥주잔을 부딪칠 때마다 이렇게 입을 떼곤 했다. 그러면
진은 길게 한 모금을 들이킨 다음, 바다의 소녀 줄리아, 새벽의 달빛, 잠
자는 모래, 라고 흥얼대기 일쑤였다. 그 가사에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거 아냐? 라고 하면, 내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의미없는 것, 이라는 노래
로 대답했다. 시시콜콜한 설명 또한 빠뜨리지 않았다. 이 곡은 말야. 얼핏
들으면 몽환적인 연가 같지만 실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거야.
화이트 앨범에 들어 있던 곡이지.
즉, 진은 변함이 없었다.
소제목 : 그녀를 숲에 버려두고 온 그 밤이 실제로
YOU WON'T SEE ME (2)
진 자신은 우리가 변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전에 비해 원만
해지고 간혹 친절하기까지 하다고 비웃곤 했다. 사람 버렸어. 점점 다른
놈들하고 똑같이 되어가니 말야. 하긴 나도 그렇지. 보건소에서 다들 나를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글쎄 의사 선생님이래. 진은 어깨를 과장되게 흔
들며 푸하하 웃어젖혔다. 그게 왜? 생각해봐. 헤이, 주드라고 불러달라는
놈한테 선생님이라니. 그래서, 주드라고 불러달랬어? 아니. 진이 고개를
흔든다. 네, 저는 바로 의사 선생님인데요, 어디가 불편하세요? 하면서 부
드럽게 웃지. 왜? 그거야, 진짜 의사 선생님이니까.
그러나 진의 말처럼 정말 내가 친절해졌다 해도 그것은 진과 같은 이유
는 아니었다. 나는 약간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어른스럽게 굴 만큼 적응력
이 빠르지 못했다. 아주 가끔이지만 나는 잠들기 전에 슬픔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때 나는 한 스포츠 신문의 귀퉁이에 연재되다 만 '알쏭달쏭 생활 잡
학'이란 얼토당토않은 컬럼을 즐겨 읽었다. 어느날은 '그리운 사람에게 내
꿈을 꾸게 하는 방법'이란 황당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일단 잠들기 전 그
사람 생각을 하고 잠이 든 다음에는 베고 자던 베개를 뒤집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다 못해 정말로 알쏭달쏭하기까지 한 이야기였다. 나는 몇 번인가
시도를 해보았다. 잠을 자다가 베개를 뒤집는 것, 그것은 불가능하다 할
만큼 어려웠다.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는 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단 한
번도 그녀의 꿈을 꾸지 못했던 나는 그렇게 해서 그녀로 하여금 내 꿈을
꾸게 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나는 그렇다는 사실마저 얼마 안 가 잊었다. 다만 여자애들을 만나도 전
처럼 별 생각 없이 자게 되진 않았다. 그 대신 여자애들을 집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왔다. 그러면 진은 내가 어쩌다 그렇게 친절해졌는지, 참으로 불
쾌한 일이라고 빈정거렸다.
나는 친절해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슬프게 할까봐 더욱 소심해졌을
뿐이다. 진도 물론 그것을 모르진 않았다. 진은 나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았다. 물어보지 않고 짐작만 할 때도 말이다. 설천에서 돌아와 내 가방
을 전해주러 왔을 때도 그랬다. 진은 설명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서는, 그 참, 내가 손끝 하나 안 건드리고 그냥 잤단 말이지, 라고 가볍게
한마디했을 뿐이다. 진은 수다스럽고 참견과 억측을 좋아했으므로 간단히
말할 때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것을 존중했다.
그리고 진이 돌아간 뒤에 생각하니 우리 사이에 그녀의 존재가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변함없이 살고 있
다. 한밤중에 낯선 소리가 들리면 여전히 시계를 쳐다보지만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절대적이란 말을 어디에 써야 할지도 찾아내지 못했고.
대체 그녀를 숲에 버려두고 온 그 밤이 실제로 있기나 했던가?
소제목 : 그녀는 폭이 좁고 긴 초록색 끈 원피스를
NOWHERE MAN (1)
He's a real nowhere man
Sitting in his nowhere Land
Making all his nowhere plans for nobody
나는 목이 말랐다. 해는 뜨거웠고 하얗게 구부러진 길은 끝이 보이지 않
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걸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 같았다. 너무나
목이 타서 나는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조금 전 지나쳐온 곳에
우물이 있는 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그 우물에서 물을 마셨던 기억이 났
다. 그러나 지금 서 있는 나는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다. 물을 마시기
전의 나이다. 나는 생각했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서 걸어온 걸까.
머리 위의 해가 너무 뜨거워 나는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한동안 꿈을 꾸지 않았으므로 퍽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
은 곧 잊혀졌다. 그 날은 아침부터 환자가 밀려들었다. 복도에서부터 대기
실이고 진료실이고 눈자위가 붉은 환자들로 가득했다. 냉방장치가 잘 되어
있는 현대식 건물이었지만 병원 안은 마치 난민수용소 같았다. 사나운 눈
병이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 안과병원은 대체로 조용하다. 늙은 부모를 모시고 온 자식들이 서
로 다투는 경우나 바닥에 떨어진 과자를 줍는다고 꼬마를 나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좀 앙칼지다 싶을 때도 없진 않지만 그 정도일 뿐이다. 생사결단
이 나거나 응급인 경우는 별로 없다. 환자들은 자판기의 커피를 마시거나
뉴스로 채널이 고정된 케이블 방송을 멍하니 쳐다보며 순서를 기다렸다.
간혹 대기실에 비치된 이 병원의 재단이 최근 설립인가를 받은 의과대학에
관한 홍보책자를 뒤적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무료한 얼굴로 금방 책
자를 덮곤 했다.
진료도 느긋하게 이루어졌다. 이 병원은 의사 개인별 진료실이 따로 없
고 커다란 홀의 벽 쪽으로 여러 개의 책상과 진료대와 세면시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구조였다. 한가운데는 공동의 치료시설이 있었다. 안과병원
특유의 조도가 약간 낮은 불빛 아래 책상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의사들
은 서두르지 않는 듯이 보였다. 환자와 나직하게 얘기를 나눈 다음 렌즈를
통해 상처난 안구를 들여다보았고 다음 환자가 올 때까지 두꺼운 원서를
뒤적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여름 한철 눈병이 유행할 때 진료실의 풍경은 유난히 부산해
보였다. 나는 평소에는 하지 않는 간호사들의 몫까지 움직여야 했다. 오후
진료부터는 피로가 느껴졌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순번대로 이름을 부르
고 네, 라고 대답하는 환자를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데려다가 담당의 앞에
놓인 둥근의자에 앉혔으며 치료대에 눕히고 소독하고 약을 넣고, 수건을
같이 쓰지 말라는 둥 수영장에 가지 말라는 둥 주의사항을 일러준 다음 처
방전에 따라 적외선 치료기와 주사실을 가리켜주었다. 그러다가 나는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여자를 보고 잠깐 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녀는 폭이
좁고 긴 초록색 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소제목 : 이제 암호를 맞췄으므로 문이 열릴 것이고
NOWHERE MAN (2)
그녀의 머리카락은 짧았고 희고 여윈 팔 속으로 푸른 핏줄이 비쳐 보였
다. 환자의 눈 속에 안약을 조준해 넣으며 나는 중년신사 하나가 그녀의
흰 운동화를 밟고 지나가는 것을 흘끔 보았다. 사과하는 신사에게 그녀는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름이 불
려진 것이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한미라 님, 한미라 님---간호사는 분명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모든 환자들과 다를 바 없는 수순의 치료를 마치고 진료실을 나
갔다. 나는 그녀를 뒤따라 나갔다. 그다지 망설인 것도 아니었다. 간호사
에게 잠시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데에 30초 정도가 걸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로비에도 없었고 접수대와 자원봉사 데스크, 공중전화 부스에도 없었다.
나는 로비 가운데에 줄을 맞춰 놓여져 있는 간이의자에 가서 앉았다. 아마
털썩 앉았던 모양이다. 마치 나 자신이 엉덩이를 붙인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다니던 무거운 짐을 의자에 내려놓은 듯한 둔한 소리가 났다. 거기
앉은 사람들은 모두 한 방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들이 보는 것을
한참동안 함께 쳐다보았다. 조금 후에야 그것이 약 타는 순번을 가리키는
숫자판이란 걸 깨달았다. 나는 내가 거기 앉아 있는 이유에 대해 잠깐 생
각해보기로 했다. 뭘 좀 마시고 싶은 것도 같았다. 자판기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나를 쳐다보고 서서. 나와 눈이 마
주치자 그녀의 이마가 살짝 찡그려졌다.
그녀는 내 옆자리에 와서 앉더니 나무라듯 말했다.
-----계속 쳐다보고 있었어요.
어쩐지 나는 웃었다.
-----나라는 걸 알았어요?
-----네.
-----언제? 진료실에서부터?
이번에는 그녀가 웃었다.
-----금요일 아침 아홉시부터요.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그리고 오전이 아닌 오후시각이었다. 물론 상관없
었다. 그녀는 그 말을 기밀지역에 접근하기 전 신원을 확인받는 내부자의
암호처럼 발음했던 것이다. 그로써 그녀의 신원은 확인되었다. 미리암이었
다. 아니 미라인가. 그것 또한 상관없는 일이다. 이제 암호를 맞췄으므로
문이 열릴 것이고 그녀와 나는 함께 그 문을 통과해 들어갈 것이다. 그 안
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특별한 제한구역으로. 중요하다
면 바로 그것이었다.
소제목 : 그녀에게서는 체액이나 지문 따위도 묻어날 것
NOWHERE MAN (3)
-----눈이 아픈가보죠?
내가 그녀의 눈속을 보았다.
-----안질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요. 각막이 많이 긁혔대요. 눈동자 쪽에. 눈앞이 흐려서 제 손
금도 뚜렷히 안 보이거든요.
그녀의 눈은 붉고 약간 뿌옇게 젖어 있었다. 눈꺼풀을 자주 깜박이는 것
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보름 정도는 치료를 받아야 하나봐요.
눈 속에 모래알이 굴러다니면서 여기저기 찌르는 것 같다며 그녀는 또
눈을 깜박거렸다. 그것이 신체의 본능적인 조절작용임을 내가 모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얇은 눈꺼풀이 깜박여질 때마다 나비의 날갯
짓을 연상했다. 번데기의 허물을 벗은 뒤 갈증을 느낀 아름다운 나비가 바
다거북의 눈에 앉아 눈물을 마시는 장면이 그럴 것 같았다.
다음날 그녀는 오전에 치료를 받으러 왔다. 우리는 전날처럼 약이 나오
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 앉아서 함께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그 다음날
도 그녀를 오전에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은 금요일인데 그녀는 오후
에 왔다. 그녀가 생각보다 눈이 빨리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으므로 나는 표
정이 좀 흐려졌다. 가야겠어요, 하며 그녀는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서 무심
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빈 종이컵이 발밑으로 굴
러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주워 내 컵 위에 겹쳐 들고가서 쓰레기통에 버렸
다. 그녀의 컵에는 립스틱 같은 게 묻어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서는 체액이나 지문 따위도 묻어날 것 같지 않았다. 눈물을 빼
고는 그녀의 몸속에 들어 있는 어떤 육체적 실체도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
았다. 식인종이 그녀를 먹는다면 너무 심심하다고 뱉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뚜렷한 것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연기로 변한다 해도 놀랍지 않
을 것 같은 사라짐의 인상뿐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존재로부터 몸을 숨기
려는 작은 도망자 같았다. 그것은 단순한 주거부정자보다 붙잡기 어려운
조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날 퇴근 무렵에는 선배에게 몇 가지 주의를 들어야 했다. 그는 의사의
세계가 철저한 도제사회임을 강조하며 윗사람의 눈밖에 나는 일은 하지 않
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다. 내가 귀담아 듣지 않는 걸 알았던지 선배는 자
리를 자주 비우지 말라는 뜻이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녀는 토요일에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일요일이 되면 나를 만나기 위해 병원 앞으로 나올
것이다.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요일은 몹시 더운 날씨였다. 금방 샤워를 했는데도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나니 벌써 겨드랑이가 축축했다. 손질해둔 새 셔츠가 있어서 다행
이었다. 다림질까지 해야 한다면 누구를 만나기도 전에 그 사람에게 미리
짜증이 나버릴 것 같은 찌는 날씨였다.
소제목 : 시간을 간직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NOWHERE MAN (4)
그녀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서 있었다. 조그만 챙이 있는 흰 모자를
썼을 뿐 언제나처럼 초록색 옷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녀를 태우고 나는
강 쪽으로 차를 몰았다. 휴가를 떠난 사람이 많아서 도로는 한산한 편이었
다. 조정 경기장의 표지판을 지나치자 얼마 안 가 유원지의 팻말이 보였
다. 강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긴 잔디밭이, 반대쪽에는 숲이 펼쳐져 있
었다. 나는 잔디밭 옆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지 않고 반대편으로 돌아 숲
쪽으로 갔다.
건너편의 잔디밭에는 나들이나온 가족들이 무리를 지어 흩어져 있었다.
어른들은 베드민턴을 치고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치고 수박을 쪼개 먹었다.
조금 큰 아이들은 오리 모양의 유람보트를 타기 위해 줄을 서고 작은 아이
들은 공놀이를 했으며 캠코더를 든 부모들이 그 뒤를 따라다녔다. 화장실
이나 아이스크림 파는 노점을 향해 뛰어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연인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달라고 부탁했다.
그 모든 풍경의 앞으로는 강이 가로놓여 물을 흘려보내듯이 거기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조금씩 흘려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유원지에서의 한순
간을 정지시켜서 카메라에 찍어 간직하지만 강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을
간직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어쨌든 강은 사람보다는 유구한 존재이니까
상대하는 시간의 단위도 다르기는 할 것이다.
그녀와 나는 나란히 앉아 오랫동안 강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는 물을 참 무서워했어요.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는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그녀가 말했다.
-----물이 나오는 영화도. 무협영화 같은 것 말예요.
그녀가 말하는 무협영화 속의 주인공에게는 어김없이 스승이나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술을 연마해야 할 과업이 주어진다. 그러려면 먼저 깊
은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산 너머에 또 산이 있고 골짜기 속에 또 골짜기
가 들어 있으며 구름 위에 다시 구름이 겹쳐 있다. 그런 곳을 헤매는 주인
공의 존재는 모래 알갱이 하나처럼 미미하다. 문득 모든 것이 덧없다. 그
러다가 주인공이 마지막에 닿는 곳은 폭포 아래이다. 그녀는 속계와 초월
세계의 경계점인 듯한 그 폭포소리에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뭔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고 오래된 세상이 있는 것 같았
어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 세상 말예요. 빠져나갈 수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고 계속 반복되는 영원한 세상.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 무서웠어요.
-----계속 반복되는 영원한 세상?
-----만약 그런 게 있다면요.
-----지금도 물을 무서워해요? 바로 발밑에 있는데.
-----아뇨. 말했잖아요. 지금은 화난 사람이 제일 무섭다구요.
-----누가 화를 내는데요?
-----모두가요. 조조만 빼고.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을 준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있기도 했
다.
-----당신을 뭐라고 부를지 생각중이에요.
그날 그녀는 나를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사실 부를 일도 없었다. 어쨌
든 그날 그녀와 나는 서로를 만나기 위해 나왔고 그런 한은 계속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둘만 있다거나 가까이 있을 때 서로는 유일한 존재이며 그
사람을 남과 구분지어야 할 필요도 없으므로 이름이란 별로 소용이 없다.
소제목 : 그때 조조의 눈이 이랬어요. 당신처럼요.
NOWHERE MAN (5)
우리는 얘기를 많이 나누지도 않았다. 강을 쳐다보았고 숲길을 조금 걸
었고 그리고 한순간 매미소리가 소나기처럼 쏴아아 숲을 뒤덮을 때 짧게
눈이 마주쳤을 뿐이다.
길 중간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모자를 벗더니 한 손으로 눈을 만졌
다.
-----눈이 아파요.
-----내가 좀 봐도 되겠어요?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의사 선생
님'처럼. 손을 소독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뺨과 눈썹뼈를 위아래로 살짝 밀
어서 눈속을 봐야 했다. 갑자기 그녀가 깔깔 웃었다.
-----조조도 그랬어요. 내 눈을 들여다보는데 조조의 눈이 더 크게 떠져
있었죠.
그녀의 웃음소리는 아이들이 냇물에 퐁당퐁당 빠뜨리는 조약돌 소리처럼
맑았다.
-----비온 다음날 우리는 유치원 마당에서 조그만 유리병 속에 진흙을
담으며 놀았거든요. 다 담은 다음 조조가 이제 흙을 다시 퍼내자고 했어
요. 병 속의 흙은 잘 나오지 않았어요. 작은 막대기를 집어넣고 세게 후벼
파는 바람에 갑자기 흙부스러기 하나가 제 눈속으로 들어가버렸죠. 조조가
눈꺼풀을 벌리고 불어주려 했지만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서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귓가에 조조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눈을 감지 말고 나를 쳐다
봐. 내 눈을 똑바로 봐. 어서. 그래서 겨우 눈을 떴는데 조조의 커다란 눈
동자가 바로 앞에 있는 거예요. 유리구슬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눈이었죠.
따뜻한 숨소리도 들렸고요. 때마침 원장 수녀님이 달려와서 조조는 매를
맞고 밤까지 벌을 서야 했어요. 그때 조조 눈이 이랬어요. 당신처럼요.
그녀와 나는 나무 벤치 위에 앉았다. 그녀가 눈의 통증을 달래는 동안
나는 조조에 대해 생각했다. 왜 조조의 이야기를 들어도 거북한 기분이 들
지 않는지 생각해보는 중이었다. 여자애들이 다른 남자 이야기를 늘어놓는
심리는 뻔하다. 이를테면 이미지 제고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그런 얘기
에는 정해진 패턴이 있다. 옛날에 옛날에 제법 괜찮은 남자가 살고 있었다
는 것, 그런데 그 괜찮은 남자는 바로 자기를 좋아했거나 혹은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대개는 그 남자가 자기에게 상처를 받은 것으로 끝난다. 지금
도 바람결에 들리는 소식에 따르면 여전히 자기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등
의 간지러운 리본포장으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정성과 모양이 어떻든 모든
포장을 다소 과감하게 찢는 버릇이 있는 나에게 그런 얘기는 늘 역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조조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는 기분이었다. 거기에는 알 수 없는
이입의 힘이 있었다. 그녀에 대한 조조의 감정뿐 아니라 그녀와의 추억까
지도 점점 내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당신이 조조예요, 어쩌면 그녀는
이렇게 속삭이는 것도 같았다.
소제목 : 좀 멀리 가고 싶어요. 데려다 줄래요?
NOWHERE MAN (6)
딱 한 번 그녀는 뛰었다. 벤치 위에 모자를 놓고왔던 것이다. 그녀가 뛰
어가는 발소리를 들었을 때 어딘지 익숙한 소리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사라졌다. 두통이 스쳐가는 느낌 같기도 했다. 흰 모자를 쓰고 되돌아온
그녀와 나는 다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지없이 파란 하늘에는 구름이
한두 줄 아무렇게나 그어져 있었다. 아이들이 잘못 차서 빠뜨린 비치볼 하
나가 강 위에 느릿느릿 떠다녔다. 강을 끼고 길게 이어진 하얀 자전거길
위에서 이따금 자전거 바퀴가 은빛으로 빛났다. 그녀의 초록색 옷깃 속으
로 바람이 들어갔다가 치맛단을 가볍게 흔들며 빠져나오곤 했다.
더위가 한풀 꺾일 때쯤 우리는 유원지를 나왔다.
도심으로 향하는 고속화도로 진입로에서 그녀가 말했다.
-----좀 멀리 가고 싶어요. 데려다 줄래요?
나는 어디로?라고 물으려다가 나 자신이 사실은 어디든지!라고 말하고
싶어한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도 그런 내가 약간은 어색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차선을 바꾸자마자 신호가 바뀌었으므로 급히 좌회전을 해야 하
기도 했다. 차는 이내 위성도시를 가리키는 표지판 밑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마을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저수지나 연못을 끼고 있으면 좋겠어요. 뒷산에는 비석이 몇 개 세
워져 있고요. 또 과수원 옆에 조그만 성당이 있는 마을 말예요.
내가 아예 지명을 말하지 그래요, 라고 웃으며 대꾸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꿈에 늘 가는 마을이거든요.
마치 그곳에 가게 되어 기쁘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런 마을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듯싶었다. 그녀가 묘사한
마을은 유니콘과 에이즈 환자가 어울려 뛰논다든지 세계평화가 이루어졌다
든지 하는 환상의 장소도 아니었다. 텔레비전 뉴스의 자료화면 같은 데에
서 이따금 보았던 풍경인 걸로 미루어 국도를 지나다보면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마을일 것이다. 나는 첫번째로 만나는 갈림길에서 무턱대고 샛
길 쪽으로 운전대를 꺾었다. 시골길이 나타났고 조금 더 들어가자 비포장
도로가 되었다. 과수원이 보였으므로 나는 차를 천천히 몰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저수지나 연못 따위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자갈이 많은 비포장도로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언제 소나기가 지나갔
는지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었으며 질척하고 붉은 흙덩이가 바퀴에 감겨드
는 바람에 운전하기도 거북했다. 해는 기울고 있었지만 여전히 볕이 뜨거
웠다. 그녀와 나는 아무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오르막길이 끝나고 내리막
길이 시작되었다. 얼마 안 가 도시로 돌아가는 국도가 나올 거라고 짐작되
었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어야 돌아가는 길이 덜 지루하리라는 생각도 들
었다.
차를 세운 곳은 둔덕 옆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둔덕 아래를 물끄러
미 내려다보았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벌써 구두에 붉은 흙이 무겁게
달라붙었다. 나는 풀밭 위로 올라섰다. 그녀가 문득 둔덕을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는 폐가로 보이는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그녀의 걸
음은 그 빈 집을 향하고 있었다.
소제목 : 너무나 분명했다. 그녀와 나는 이곳에 온 적이
NOWHERE MAN (7)
그녀와 나는 기와집의 마당에 섰다. 집은 넓었지만 멀리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황폐했다. 문이란 문은 다 떨어져나갔고 그나마 붙어 있는 것도
일부러 그런 것처럼 문풍지가 발기발기 찢어져 흉가 같았다. 마루에는 먼
지가 아닌 흙덩이가 수북이 떨어져 있었으며 벽도 검댕과 흙자욱으로 형편
없이 더러웠다. 방구들까지 파헤쳐져 있었다. 처마 밑의 하얀 회벽만이 이
집이 꽤 정갈한 집이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해주었다. 회벽에는 어른의
허리쯤 되는 높이에 검은 줄이 몇 개 그어져 있었다. 뭔가를 기대놓았던
자리 같았다.
우리는 마당 한 구석의 우물로 가보았다. 바닥이 흙으로 메워지고 자갈
과 나뭇가지, 더러운 신발 한짝, 라면봉지 따위로 뒤덮인 마른 우물이었
다. 우물 옆의 볼품없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녀가 물었다.
-----저, 그런 우물 본 적 있어요? 높이가 없고 깊이만 있는 우물.
-----글세, 없는데.
토관을 묻지 않은 우물이라면---나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자갈돌이 깔려 있구요. 그 한가운데의 땅바닥에 물이 넘실거리고
있어요. 나무를 격자모양으로 붙여서 테두리만 대놓은 네모난 우물인데 그
동네 사람들은 쭈그리고 앉아서 바가지로 물을 뜨는 거예요.
그녀는 친구가 사는 가난한 동네에 놀러갔다가 그 우물을 보았다고 했
다.
-----무서워서 도저히 물을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물을 뜨다가 몸이 기
우뚱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거든요. 팔을 길게 뻗어서 바가지 끝만 살짝 들
어올려 간신히 물을 떠서 마셨죠. 아기 업은 아줌마가 함지를 이고 왔어
요. 광목띠를 풀어서 아기를 자갈 위에 내려놓겠죠. 엄마가 푸성귀를 씻는
동안 아기는 넘실대는 우물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기어다니고 있었어요.
친구 말이 그래도 아기들이 우물에 빠진 적은 없대요.
나는 갑자기 갈증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종일 뭔가 마셨다는 기억이 없
었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물 마실래요?
그녀와 나는 자연스럽게 기와집의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무문이 뜯긴 채
발밑에 넘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타고 넘어서 아궁이 쪽으로 갔다.
부엌 안은 어둑신하고 서늘했다. 묵은 먼지로 뒤덮인 부엌 바닥에 우리의
흙발자국이 두 줄로 고르게 찍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망설이
지도 않았다. 솥이 빠져나가 텅 빈 부뚜막을 지나서 녹슨 수도꼭지로 곧바
로 다가갔을 뿐이다. 시렁이 바로 위에 있었지만 머리를 부딪치지도 않았
다. 그녀가 수도꼭지를 돌리자 물이 소리를 내며 쏟아져나왔다.
너무나 분명했다. 그녀와 나는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나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그것은 나 스스로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짓이었다.
소제목 : 아주 조금의 물, 그리고 그녀의 젖은 손바닥
NOWHEREMAN (8)
어쩌면 그 점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반드시 이유 같은 게 있어야만 한다
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녀의 희고 여윈 두 팔이 나란히 물줄기 밑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천천
히 팔을 움직여서 흘러내리는 옷감을 두르듯이 물로 팔을 감쌌다. 그런 다
음 허리를 구부리고 두 손을 그릇처럼 모아 그 안에 물을 받았다. 그녀는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제단에 선 신부가 신의 피가 담긴 성배를 높이 올
리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나는 고개를 조금 숙여 물을 마셨다. 내 입술에
닿은 것은 아주 조금의 물, 그리고 그녀의 젖은 손바닥이었다.
오므려져 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접시처럼 펴지면서 그 안에 내 얼굴이
담겼다. 축축한 손바닥이 얼굴을 감싸왔다. 이마에 닿는 그녀의 팔은 선득
하도록 차가웠다. 내 눈은 저절로 감겼다. 물줄기가 바닥으로 다닥다닥 떨
어지는 소리 속에서 나는 그녀의 따뜻한 숨소리를 들었다. 긴 시간은 아니
었다. 나는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 속에 눈물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왜 울어요 따위의 어리석고 의미없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녀를 혼자 있게 해주고 우물이 있는 곳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워 물었
다. 발밑에 무언지 단단한 게 밟혔다. 땅에 반쯤 묻혀 있는 그것은 얼핏
보기에 병조각 같았지만 도자기의 깨진 조각이었다. 오던 길에 표지판에서
분원(盆園)이란 지명을 보았던 게 기억났다. 도자기를 구웠던 마을인 것이
다. 그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작 이상한 일은 그녀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었다. 너무 오래 있다 싶
어서 부엌으로 되돌아가보니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와집 뒤편으로 돌아서 가보았다. 좁은 길을 따라 집이 몇 채 더
있었는데 그 역시 사람이 살고 있는 집 같지는 않았다. 울타리 높이만큼
풀이 자라나 집안이 잘 들여다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우물로 돌아와서 거
기에 몸을 기대고 그녀를 기다렸다. 여섯 개나 일곱 개 정도의 담배를 피
워 없애는 동안에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진의 생각도 했
다. 진이라면 노래를 흥얼거릴 것이다. 언덕 위의 바보라든가 내가 울고
있는 이유는 하늘이 너무 파랗기 때문이라든가. 자기가 해준 얘기를 내가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면 분명 좋아할 텐데.
조조에 관해서도 생각했다. 조조는 죽었다고.
이미 죽었는데도 존재한다면 아무곳에도 없는 채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
의 이름은 노웨어맨(Nowhereman)이다. 그는 아무곳도 아닌 땅 위에 앉아
아무도 아닌 사람을 위한 아무것도 아닌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진이 말했던
것 같다. 가사 중에 이런 구절도 있어. 혹시 그의 존재가 너와 나의 어떤
일면은 아닐까? 라는 구절 말야. 알아?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그 모든 생각들이 지겨워지면 나는 나의 갈색
구두에 배어 있는 물얼룩을 노려보기도 했다. 물은 얼마 안 가 다 말라 없
어져버렸다. 증발돼버린 물처럼 그녀도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길다랗게
해가 지고 있었다. 진이 알려준 가사 중에 이런 것도 있었다. 그래, 좋았
어. 오늘밤 내 꿈에 나타나줄 거지.
소제목 : 그녀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
THINK FOR YOURSELF (1)
Do what you want to do
And go where you're going to
Think for yourself
월요일에 그녀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주말이
되어서야 나는 그녀가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로비의
간이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일은 나 혼자서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가
매일 병원에 올 때 그런 일은 하루에 한 번뿐이었다. 그러나 만남과 기다
림에 소모되는 시간배당이 다 그렇듯이 그녀가 오지 않는 뒤로 횟수가 두
어 차례 더 늘었다. 선배에게 눈총을 받는 일도 늘어났지만 상관없었다.
그 주말에 진이 올라왔다. 진이 나를 만나러 오는 시간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진과 나는 넘쳐나는 생맥주잔을 번쩍 들어서 알통
을 실룩여가며 건배하지 않았다. 콜라 병만한 외국 맥주를 손에 쥐고 병
목을 살짝 건드리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는 지방자치제가 활성화되어야
바닷가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의학이 얼마나 진보했는지 확인할 수 있으리
라는 말을 했다. 의료보험제도나 대학병원의 운영체계에 문제가 있다고도
했다.
내가 말했다. 거기서 의무기간만 때우겠다더니, 구청장이라도 출마해볼
생각이야? 진에게는 그 정도의 핀잔이 오히려 흰소리를 계속 이어갈 추진
력이 되는 모양이었다. 물론이지. 우선 결혼부터 하고, 라고 그답게 넉살
을 떨었다. 나는 짐짓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럴 줄 알았어. 어떤 여잔
데? 거기 지방신문의 기자야. 사회부겠군. 어떻게 알았어? 비브리오균 환
자가 발생했을 때 취재왔었지? 귀신이네. 진과 나는 슬슬 서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네가 일부러 명함을 바닥에 떨어뜨리니까 여자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브라보! 그리고 대학신문 기자였고 커트머리에 가슴이 납작하고
말이 좀 빠르지 않아? 틀렸어. 진이 짝짝 박수를 쳤다. 그녀는 글래머야.
금발은 아니지만 긴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다구. 모든 털을 다 물들였어.
내가 확실히 장담할 수 있지.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트윈베베의 농담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확실히 이제는 예전과 달리 아무 쓸모없는 말로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워졌
다는 느낌이었다. 진이 나를 흘끗 보았다. 탁자 위로 깊게 몸을 구부리더
니 뒷거래에 능한 마약단속반 형사처럼 은근히 말했다. 털어놔봐. 뭘? 묻
는 내 목소리는 덤덤했다. 술병을 쥐고 만지작거리던 진은 병에 붙은 은색
라벨을 무심히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 있지? 나는 진을 조금쯤 노려봐
주려고 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모든 게 시들했다.
소제목 : 여자 얘기 하나 해줄까.
THINK FOR YOURSELF (2)
진이 말했다. 여자 얘기 하나 해줄까. 나는 피스타치오 껍질을 잘못 깨
무는 바람에 시큰해진 이를 위아래로 부딪쳐 소리를 내며 시큰둥하게 대답
했다. 좋지. 사실은 문제가 좀 있어. 문제? 여자가 고집이 세. 그게 어때
서? 고집 세다는 것이 무슨 뜻인 줄 모르진 않겠지? 모르겠는데? 그건 내
가 밀라노식 스파게티를 먹고 싶다고 하는데도 볼로냐식 스파게티를 주문
한다는 뜻이야, 알아? 몰라. 볼로냐엔 야채가 많이 나니까 음식에 야채를
듬뿍 넣는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긴 해. 바로 그거야. 그 여자는 나한테
맞추지 않고 제 방식을 고집하거든. 휴가를 갈 때도 나는 낚시, 그 여자는
스키, 이런 식으로 나눠 가야 할지도 몰라. 스키 폴(pole)로 눈 속에 파묻
힌 물고기를 찍어 바구니에 담아가면서 스키를 탈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
지 못하는 한 말야. 그리고 아이들도 각각 나눠서 데리고 가야 하니까 반
드시 짝수로 낳아야겠고. 뭐야? 비로소 나는 진을 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무슨 얘기 하는 거야, 여자가 진짜로 있다는 거야? 진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그 여자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진의 표정은 그답지 않게
심각했다.
그 여자한테 진심이야? 내 물음에 진은 쉽게 대답했다. 물론이야. 그럼
뭘 모른다는 거야. 뭘 알아야 하는 거지? 진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상대
에 대해 모르는데 어떻게 특별한 감정으로 좋아할 수 있겠어. 잘 모르는
상태에서도 같이 잘 수야 있지. 그러나 사랑이라는 건 지속적인 느낌이고
또 낯선 타인끼리 시험삼아 주고받기에는 너무 큰 거래라구.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는 사랑은 없다는 얘기로군. 내가 중얼거렸다. 누
군가가 어디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자기의 전부가 되는 사랑도 있을지 모르
지.
누군가의 존재 자체만 사랑하는 것? 서로 아무런 법적 사회적 교분도 맺
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실제 자기가 살아가는 삶과는 아무 상관없이? 진
은 콧방귀라도 뀔 기세였다. 그런데도 그 감정을 지속하고 싶은 열정이 생
겨난단 말야? 그렇게 정신만 갖고 장난치는 고급인간이 정신병자 빼고 또
있어? 진은 내가 달라졌다는 말도 했다. 그런 순정적인 말을 한 입의 소유
자가 정말 나인지 공증이라도 받아두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진은 이 세상을 끌어가는 것은 상식과 계약이라는 따위의
전혀 설득력 없는 일반론을 폈다. 아무래도 그 여자를 책임져야 하거나 책
임지기 싫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달라진 걸로 따지자면 진도 만만
치 않았다. 여자애들이 당황하든 말든 그 앞에서 마스터베이션에 대해 떠
들어대던 진이 아니었다.
우리는 맥주를 많이 마셨다. 간간이 그녀의 얘기도 했을 것이다. 곧 취
해버렸기 때문에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소제목 : 진이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 중에 장담할 수
THINK FOR YOURSELF (3)
갈증 때문에 나는 다음날 새벽시간에 깨었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따라 마신 다음 식탁에 앉았다. 불현듯 '정신차려'란 말이 머리를 스
쳐갔다. 전날 밤에 들었던 말이었다. 그밖에도 진의 말들이 하나 둘 두서
없이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하나씩 주워다 바둑을 복기하듯 천천히 짜맞
춰보았다.
진은 그런 말도 했다. 딸기밭이 있는 마을의 고아원이라구? 제기랄. 내
가 아는 존이라는 놈도 그 비슷한 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그걸 노래
로 만들었지. 그놈은 죽은 놈이야. 목소리가 몽롱하고 죽여줬는데 말야.
금요일 아침 아홉시? 그것도 그놈이 다 노래했지. 진은 꼬부라진 혀로 노
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수요일 아침 다섯시. 동틀 무렵 집을 나간 그녀.
금요일 아침 아홉시. 그녀는 멀리 와 있네. 자동차 회사 사람과 만날 약속
을 기다리며. 그녀의 안에서 오랫동안 금지되어왔던 것을 찾기 위하여.
bye, bye.
진은 노래 속의 소녀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꺼덕꺼덕 손까지 흔들었
다. 여자에 대한 매너라면 지지 않겠다는 듯이 나도 한쪽 팔을 번쩍 들었
다가 내려놓았다. 취해 있었다.
진의 모습이 뿌옇고 시야가 흔들렸다. 나는 맥주병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들이킨 다음 거기에 뜨거운 이마를 댔다. 병은 차갑고 축축했다. 내가 중
얼거렸다. 이것도 꿈 아닐까? 뭐? 지금 우리말야. 술 마시는 꿈을 꾸고 있
는 거 아니냐구. 아니. 진은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차려. 꿈은 그냥 꿈인
거야. 꿈 속의 여자는 꿈 밖으로 나오지 않아. 알아? 그 여자는 그냥 나처
럼 비틀즈에 약간 머리가 돈 이상한 여자일 뿐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조조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진짜 있을 것 같애? 진은 말을 끊고 화장실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자리로 다시 돌아온 뒤 진의 추측은 계속되었다. 그 여자는 망상 환자
야. 분명히 정신병력이 있을 거라구. 누가 알아? 우리가 인턴시절을 보낸
그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었을지. 거기에서 아마 라디오를 열심히 들었을
거야. 내가 고3 때였는데 말야. 여름방학 내내 에프엠에서 비틀즈 특집을
했었거든. 속이 답답하고 엿같은 시절이니 그 음악에 안 빠질 수 있어? 그
여자도 아마 그런 걸 거야. 감옥이나 병실에서 듣는 음악이 어떤 심리작용
을 일으키는지 그런 거 우리가 딸딸 외워보지 않은 것도 아니잖아. 그 여
자가 바로 그거라구. 내가 장담하지.
진이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 중에 장담할 수 있는 건 우리가 그 순간 술
마시는 꿈을 꾸고 있지는 않다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실제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진이 또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났었다. 단속적으로 이어지던 기
억이 거기에서 완전히 끊어졌다.
일요일은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오후에야 침대에서 일어나 레토르트
카레 한 봉지로 배를 채우고 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내뿜으며 이제부터 뭘
할까를 생각했다. 전에는 늘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을 해왔고 아니면 전공
서적을 뒤적였다. 허전함 따위는 별로 느낀 적이 없다. 넌 변했어. 진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소제목 : 나는 전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THINK FOR YOURSELF (4)
쉴레 화집을 꺼내본 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책꽂이로 가보았
다. 표지에는 여전히 <왼쪽 다리를 세우고 앉은 여자>가 나를 보고 있었
다. 눈빛이 언제나처럼 도발적이었다. 그러나 울기 직전 같기도 했다. 사
나우면서도 겁에 질려 있었으며, 내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것도 같았고 나를
간절히 원하는 것도 같았다. 둘 다일지도 모른다. 적의가 없는 갈망이란
건 없을 것이다.
나는 화집을 몇 장 넘겼다. 해설에 따르면 쉴레는 한 개의 물건에 집착
했다. 그것은 그가 28세로 죽기까지 평생을 지니고 있던 거울이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보다도 많이 그렸다.
뺨을 잡아당기는 자화상, 길쭉한 배를 드러낸 자화상, 가슴에 깡마르고 붉
은 손을 얹고 있는 자화상, 오른쪽 팔꿈치를 들어올린 붉은 셔츠의 자화
상, 수음하는 자화상, 윗니 한 개를 드러내고 있는 자화상, 죄수 자화상,
성 세바스찬이 되어 온 몸에 화살을 맞는 자화상.
그 중에서 나는 <이중 자화상>(Double Self-Portrait)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두 남자가 반쪽짜리 몸으로 나뉘어 담긴 그림이다. 알몸의 남자는
팔이 뭉뚝하게 잘려 있고 음부도 검은 골처럼 도려져 있다. 또 하나의 남
자는 길고 검은 외투로 감싸여 몸이 보이지 않는다. 그 남자는 두 눈에 눈
동자가 없다. 알몸의 남자도 한 눈은 감기고 한 눈은 반만 뜨고 있다. 그
들의 눈은 단지 거울 속의 자신만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까
지 포함해서 바라보는 겹의 눈이다. 제목은 <예언자>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했다. 서로 소통할 필요 없이 누군가 나를 그런 식으로
들여다보고 나의 내면 속에 들어와 간섭하기 시작했다면---그것은 다른 누
구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런 생각을 진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 여자가 마치 너 자신 같다는 느
낌? 정신차려. 너한테는 지금 동일시 증상이 있어. 몸 속에 병원체가 들어
왔는데 그것을 이물질로 판별하지 못하고 자기라고 생각한다면 면역은 끝
장이야. 면역결핍 말야, 알아? 진에게는 취기가 오르면 말끝에 '알아?'를
자주 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레트로바이러스 말이군. 내가 대꾸하자 진은
곧바로 받았다. 그래. 그게 바로 에이즈 환자잖아. 면역결핍은 이질적인
것을 자신이라고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야. 알아? 그러나 나
는 알지 못했다.
내가 알기로 나는 함부로 써서 없애버려도 좋을 만큼 열정의 양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열정이 시작됐다면 한 가지 이유뿐이다. 특별한 일이 일
어난 것이다. 특별한 일을 진이 들먹이는 정도의 초급 과학에다 끼워맞춰
해석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다시 월요일이 왔다. 나는 그녀를 기다리지 않았다. 로비에 나가 자판기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다. 대신 나는 원무과의 한 아가씨에게 커피를 뽑아
주었다. 점심도 사주었다. 그 아가씨는 내 부탁이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글쎄요, 이름만 갖고는 바로 찾을 수 없을 텐데요. 차트는 생년월일로 정
리가 돼 있거든요. 그러나 나는 그녀가 내 부탁을 들어주리라는 걸 알았
다.
오래 걸리지도 않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퇴근시각 무렵에 그 아가씨가
나를 부르러 왔다. 나는 외래환자 한미라의 차트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고 생일은 십일월이었다. 의료보험 대상자는 아니었고 또 주
소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전화번호는 있었다. 내 눈길이 잠시 그 위에 머물
렀는데 평생 그 숫자를 잊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전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소제목 : 그 전화로 내가 알게 된 것은 두 가지였다.
THE WORD (1)
Say the word, love
Say the word, love
Say the word, love
남자는 오후 네시쯤 왔다. 극성스럽게 번져가던 안질이 한풀 수그러들어
환자는 많지 않았다. 나는 내 몫의 차트를 외래에서 가장 무뚝뚝한 간호사
에게 맡겼다. 누가 찾아왔는데요? 간호사는 그 말만을 하고는 짐짓 관심없
다는 듯 대답도 듣기 전에 차트를 가져갔다.
단 한 번 통화를 했을 뿐이지만 나는 남자를 금방 알아봤다. 지하식당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이기도 했다. 밖에는 비가 오는 모양이었다. 남자의 회
색 남방셔츠의 어깻죽지가 검게 젖었고 의자 옆에는 물을 뚝뚝 흘리는 비
닐우산이 기대어져 있었다.
두드러진 광대뼈 때문에 남자는 눈이 움푹 들어가 보였다. 눈빛이 감춰
져서 명쾌한 인상이 아니었다. 어깨는 벌어졌지만 등이 약간 굽었고 가죽
점퍼를 입으면 어울릴 것 같았다. 실제로 겨울이 되면 가죽점퍼를 입는다
고 봐야 할 것이다. 제 손으로 짐승의 몸에서 가죽을 벗겨내 마구 두들겨
패서 부드럽게 만들어 척 걸칠 것만 같은, 어딘지 그런 거친 공정(工程)의
냄새가 나는 남자였다. 그녀처럼 슬퍼 보이는 존재에게도 화를 낼 만한 사
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자마자 나는 아무것도 할말이 없다는 말을 꺼냈다.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은 그가 먼저였다. 내가 전화를 걸어 그녀를 찾았을 때 그는 다짜고짜
나를 만나야겠다며 말을 가로챘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
지 물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는 대답이었다. 남자는 그녀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나 역시 그녀를 찾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납득하지
못했다. 내가 그녀를 감금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큰소리를 쳤다. 아마
그런 식으로 해서 번번히 그녀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 듯했다.
그 전화로 내가 알게 된 것은 두 가지였다. 전화번호는 그녀의 것이 아
니었다. 그리고 전화번호의 주인인 남자는 끊임없이 그녀를 찾아내서 어딘
가로 데려다놓는 모양이었다. 수녀원이나 고시원 같은 곳에. 어쩌면 안과
병원에도 남자가 데려다주었을지 모른다. 나는 남자를 결코 호의적이라고
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자는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조금 뒤에야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는데 뜻밖에도 음울한 눈빛이었다. 그
녀를 빨리 찾아야 한다고 말할 때의 표정은 고통스럽게도 보였다. 인상이
거칠어 보인 것은 단지 조급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더
니 자신에게 있어 그녀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라고 말했다. 아기들이 우
물에 빠진 적은 없대요. 그녀의 말이 생각났으므로 나는 약간 긴장이 풀렸
다.
소제목 : 조조가 돌아왔다고, 더 이상 찾아다닐 필요
THE WORDS (2)
남자의 입에서 또 하나의 '원'자가 붙은 '애란원'이라는 장소가 나왔을
때 나는 꽃집 같은 걸 연상했다. 가톨릭 단체에서 운영하는 미혼모의 집이
죠. 남자가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거기에서도 사라졌다. 자신이 다소 과격
해진 것은 그때 이후라고 남자는 고백했다. 그녀가 또다시 몸을 파는 일이
생길까봐 되도록 폐쇄된 장소에 그녀를 데려다놓아야 했다는 것이다. 이유
야 어찌 됐든 그것은 명백한 유형(流刑)이었다.
왜 함께 살지 않는 거죠? 모처럼 내가 입을 열었다. 치료를 받아야 하니
까요. 남자가 무겁게 말했다. 그애 혼자 너무 큰 일을 겪었어요. 우리 모
두 그애에게 빚이 있어요. 남자가 말하는 우리란 그녀의 가족이었다. 남자
가 비로소 자신을 그녀의 오빠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이제
는 부모가 죽었기 때문에 다른 가족은 없다면서 남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자랄 때 우리는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어요. 언제나 내가 그애 곁에 있
었죠. 남매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 말은 군대에서 죽게 돼 있는 그녀의 막내오빠 따위는 처음부터 태어
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오랫동안 치
료를 받아왔고 그러느라고 수녀원 같은 데는 들어갈 시간도 없었다는 것이
다. 무슨 병인데요? 내가 물었다. 어린애라고 말했잖아요. 그애는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전혀 안 자랐어요. 나는 더 묻고 싶지 않았다. 한밤중의 숲이
나 기와집에 갔던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고시원에서 내가 꾸었던 성벽
의 꿈에 대해 말할 일은 더구나 없었다. 남자는 내게서 신통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므로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찾아야 했다. 그 일이 꽤 시급했던
지 남자는 금방 일어났다.
일어서며 남자가 물었다. 혹시 그애하고 우물에 안 갔었어요? 나는 남자
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아닌가보군. 그럼 그애가 우물 얘기를 하지
않던가요? 글쎄요. 내 대답에 남자는 별 의심 없이 자기의 발끝을 보며 고
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는 꿈으로 그애를 찾지요. 며칠 전부터 꿈에 우물
이 보여요. 바닥이 메워진 우물인데 그애가 그 우물 밑에 웅크려 있었어
요. 남자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도 의자를 탁자 안에 집어넣고 남
자를 따라 걸었다. 한 발 앞서 걷는 남자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절름발이였다.
몇 발짝 걷다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우산을 놓고 간 것이었다. 우
산을 집어들자 거기에서 흘러내린 물로 남자의 팔뚝이 젖었다. 남자가 말
했다. 혹시 그애를 나보다 먼저 찾게 되거든 이렇게 말해요. 그때 식당문
이 열리고 비를 맞은 아가씨 둘이 호들갑스럽게 걸어들어왔으므로 남자의
다음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뭐라고 말입니까? 그러자 남자
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마치 중얼거리듯 천천히 내뱉었다. 조조가 돌아왔다
고, 더 이상 찾아다닐 필요 없다고 말이오. 아가씨들 중의 하나가 내게 알
은척을 해왔다. 나는 그 여자가 누군지 기억을 더듬어볼 여유가 없었다.
그럼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죠? 내 목소리는 조금 떨려나왔을지도 모른
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우뚝 선 채로 나를 너무나 빤히 쳐다
보았기 때문에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소제목 : 그러나 깨어보면 모든 것은 조각일 뿐이었다.
THE WORD (3)
남자는 오른손에 우산을 들고 절뚝거리며 사라졌다. 비오는 날 오른손잡
이는 대개 왼쪽으로 우산대를 기울이므로 오른쪽 어깨가 젖는다. 오른손에
무거운 걸 들면 왼쪽 어깨가 기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남자는 왼쪽 어
깨가 검게 젖어 있었다. 어쨌거나 이상한 남자였다.
하긴 이상하다거나 이상하지 않다는 것은 다수의 기준일 따름이다. 일찍
이 스스로를 사회적 동물로 규정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다수의 생각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다보면 삶이
거기에 너무 깊이 의존되어 그 생각을 바꾸면 손해가 되는 상황에 이른다.
이제는 빠져나가는 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 그들은 자신이 왜 사는지까
지도 남이 정해준 대로 대답한다.
인생이 그런 복제일 뿐이라면 구태여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인간이 태어
날 이유도 없는 일이다. 나 자신까지 태어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누군가
태어나서 어떤 인생을 살아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그건 봉제공장의 곰인
형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쉬운 문제이다. 포장상자에 넣어지며 곰인형들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많기 때문에 누구나 곰인
형은 우리처럼 생겨야 한다고 알고 있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일반적
인 것이 꼭 절대적이란 법은 없으니까, 라고.
나는 그런 식으로 남자의 출몰에서의 이상한 점을 납득했다. 특별한 경
우를 인정하면 받아들이지 못할 일은 사실 그다지 없었다.
그런데도 남자가 꾸었다는 꿈에 대한 생각만은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
다. 왜 하필 그때 도자기 조각을 밟았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표지판의 글
씨를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고 필요없는 것을 별로 기억해두지 않는 무심한
나는 그 장소를 다시는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분
원이라는 지명이 분명히 새겨져 있었다. 삽질에 자신이 없다면 인부를 사
서라도 메워진 우물을 파헤쳐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
았다. 나는 꿈을 기다렸다.
매일 밤 꿈을 꾸었다. 재채기처럼 꿈 중에도 전염되는 종류가 있는 모양
이었다. 남자가 꾸었던 것과 같은 꿈을 꾼 적도 있었다. 어느날 꿈에서는
그녀가 등뒤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그녀가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싶어 그
녀 쪽으로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침대 헤드에 머리를 부딪쳐
잠이 깨어버렸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날은 밝았고 다시 잠들기란 쉬
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잤다.
꿈은 꿈이라기보다 나의 다른 삶이었다. 그 삶 속에 그녀가 있었다. 나
는 제 시간에 퇴근하는 성실한 가장처럼 이 삶에서 그 삶으로 들어갔다.
이따금 그녀가 없는 꿈도 있었다. 그녀도 때로 외출한다는 사실을 이해 못
할 나는 아니었다.
꿈 속의 인생은 이곳의 인생과 너무나 비슷했다.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의
또 다른 버전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인생을 해석하는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꿈에서는 발목을 잠시 끊어서 갖고 돌아다닐 수 있고 누이나 어머
니와도 화간했다. 사람은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했다. 꿈은 이곳 인
생을 변형시킨 부속 세계가 아니었다. 다른 세계였다. 꿈에서는 거리라는
것도 성립이 되지 않았고 사건이 시간순으로 일어나지도 않았다. 꿈 속에
또 꿈이 있고 다시 그 속에 꿈이 있었다. 죽음도 끝이 될 수는 없었다. 나
는 현실에서 살아가듯 꿈 속에서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깨어보면 모든 것은 조각일 뿐이었다. 그녀는 내 꿈과 현실을 뒤
섞어놓았다. 그녀가 왜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 나를 만나러 왔는지 나는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소제목 :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안 돌아갈 수 있어요.
MICHELLE (1)
Michelle, ma belle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That's all I want to say
-----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우물 밑에 있는 꿈을 꿨다는 사람을 만났어요.
-----저도 만났어요.
-----그 사람이 나보다 먼저 당신을 찾아냈군요?
-----늘 곁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왜 당신을 데려가지 않았죠?
그녀는 치마를 걷어올렸다. 흉터로 온통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진 하얀 허
벅지가 드러났다. 그 위에 굵은 갯지렁이가 달라붙은 듯한 붉은 줄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채찍 자죽도 같았고 우산대로 맞은 자리로 보이기도 했다.
나는 급히 가방 속에서 포타딘을 꺼내 발랐다. 그녀가 댓돌 위에 앉아 있
었으므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무릎을 꿇은 채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약솜
을 조심조심 누르는 나는 의학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저를 찾았어요?
-----전화했었어요. 그 사람 집이었고. 당신은 거기 없었죠.
그녀는 허리를 굽혀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입술을 내 귓
불에 대고 속삭였다.
-----우린 안 돌아가요. 그렇죠?
-----전에도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모든 것은 반복되잖아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세상 얘긴가요?
-----그래요. 끝없이 되풀이되기 때문에 끝나지 않아요. 아무것도 바뀔
수 없죠. 하지만 우리는 달라요.
나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물처럼 검고 깊은 그녀의 눈속으
로 내 몸이 빨려들 것만 같았다. 내가 중얼거렸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가 웃음을 지었다. 짧은 머리카락은 불꽃처럼 아름다웠고 초록 옷에
서는 향기가 뿜어나왔다. 바람이 불어와 우리의 발밑을 휘감고 돌았다. 그
녀의 목소리는 먼데서 들리는 소리처럼 아득하고도 부드러웠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안 돌아갈 수 있어요.
소제목 : 그녀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안았다.
MICHELLE (2)
댓돌 위에는 그녀가 벗어놓은 하얀 운동화가 놓여 있었다. 나는 운동화
를 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서 두 손으로 그녀의 발을 잡았다. 그녀의 발
은 작고 차가웠다. 맨발이 분명한데 얼음구두라도 신고 있는 것 같았다.
발등을 여러 번 쓰다듬어준 다음 운동화를 신겼다. 뒤꿈치까지 집어넣은
뒤 두 발을 댓돌 위에 내려놓자 그녀는 전지를 갈아끼운 자동인형처럼 발
딱 일어났다.
-----자, 이제 가요.
내 말에 그녀가 물었다.
-----어디로?
-----오다가 저수지를 봤어요. 뒷산에 비석도 있었고. 보고 싶어 했잖아
요.
그녀는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처마 밑으로 가서 벽에 기
대놓았던 자전거를 마당 한가운데로 끌고 나왔다. 뒷자리의 앉음쇠에 녹이
슬어 있었다. 티셔츠를 벗어서 모포처럼 접어 거기에 깔았다.
그녀는 자전거 핸들 옆에 붙은 조그만 거울을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이것 봐요.
그녀가 잡아끄는 대로 나는 허리를 굽혀 그녀와 함께 거울을 보았다. 거
울 속에는 그녀와 나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 나는 내 얼굴이 두 개
들어 있는 줄로 알았다. 그녀와 나의 얼굴은 거의 같아 보였다.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얼굴이 내 것인지 가려내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거울 속의 그녀를 쳐다보자 거울 속에서 그녀도 내
게 마주 시선을 보내왔다. 다음 순간 우리는 거울에서 눈을 떼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녀를 안아 자전거 뒷자리에 태웠다. 나는 핸들을 잡았고 그녀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내 귓가에서 따뜻하게 퍼졌다. 페달을 밟으며 나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녀가 팔만 떼어서 내 허리에 둘러놓고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 불안은 저수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바람
이 불어 그녀의 짧은 머리가 이마 위에서 나폴댔다.
저수지는 고요했다. 그녀와 나는 저수지를 끼고 걷기 시작했다.
단 하나뿐인 새 것처럼 선명하고 맑은 날씨였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들
은 구름의 그림자가 내려앉아 초록이 아닌 검은 숲처럼 보였다. 햇빛이 아
물아물 비쳐들어 골짜기만이 연초록으로 빛났다. 어쩌면 햇빛이 골짜기를
내리비추는 게 아니라 골짜기 안에서 빛이 뿜어져나오는 것도 같았다. 다
른 세상이 숨어 있기라도 하듯이 신비로운 색깔이었다. 그녀는 이따금 걸
음을 멈추고 골짜기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소제목 : 갑자기 내 목을 꼭 끌어 안았다.
MICHELLE (3)
수문 근처를 걸을 때는 떨어지는 물소리가 제법 드세게 들렸다. 갑자기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 발짝도 나가려 하지 않았다. 자전거
는 제방 아래에 세워져 있었으므로 나는 거기까지 그녀를 업고 내려왔다.
도중에 운동화 한 짝이 벗겨졌지만 그녀는 그것을 줍지 않고 다시 한 짝을
꺼내 신었다.
뺨을 내 등에 꼭 붙이고 있는 그녀는 지게 위에 앉은 나비만큼이나 가벼
웠다.
-----물소리가 무서웠어요?
-----아뇨. 저는 슬퍼졌던 거예요.
-----왜요?
-----행복하니까요. 시간은 흘러가게 되어 있고. 행복한 순간에는 그 행
복이 곧 끝난다는 것 때문에 슬퍼져요.
-----행복은 반복되지 않는가요?
-----끝나니까 다시 시작되고 또 반복될 수 있는 거겠죠. 그게 다시 온다
는 걸 알지만, 그래도 슬퍼요. 기다리는 건 너무 슬픈 일이거든요.
산에 올라가면서 그녀는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나는 시계꽃 두 개로 시
계를 만들어서 그녀의 팔목에 매주었다. 그녀는 푸르스름할 정도로 하얀
팔을 길게 뻗어서 모양을 보며 기뻐했다. 초록 진딧물이 잔뜩 붙어 있었지
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석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자그마한 실개천을 건너야 했다. 가늘고 짧
은 통나무 하나가 거기 걸쳐져 썩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놓고 말했
다.
-----내가 먼저 건너갈 테니 기다려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바위틈에 하켄을 박듯이 눈빛을 내 눈 속
에 깊이 꽂은 채로.
나는 한쪽 발을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둥근 통나무는 내 무게가 실린
쪽으로 약간 몸을 비틀었다. 내 몸도 앞뒤로 휘청했다. 그녀는 낮게 소리
를 질렀고 나는 그녀도 나처럼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리 중
간쯤에서 두 발을 벌려 단단히 버텨 선 나는 그녀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그녀는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나 팔을 잡지 않고 갑자기 내 목을 꼭 끌어
안았다. 우리는 균형을 잃어 함께 개천으로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신발과 다리를 적셨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초록색 치맛단이
검게 젖었다. 그녀는 젖은 운동화를 양손에 벗어 들었고 치마도 말아쥐었
다. 그녀가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걸음이 절룩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조조가 돌아왔다는 거, 들었어요?
-----알아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대꾸였다. 나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조조는
어디에도 없는 노웨어맨(nowhereman)이었고 너나 내 속에 노웨어맨의 모습
이 들어 있지 않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노래에 따르자면.
소제목 : 내 무플 위에 가만히 얼굴을 내려놓았다.
MICHELLE (4)
무덤은 모두 다섯 개였다. 맨 위에 두 개, 그 아래로 다시 나란히 두
개, 그리고 발치에는 아직 떼를 입히지 않아 붉은 흙이 드러난 조그만 무
덤이 하나 있었다. 죽은 지 며칠 안 된 사람의 무덤인 모양이었다. 그 무
덤 앞에만 비석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그런 것처럼 붉은
흙무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맨 위에 있는 큰 무덤 쪽으로 올라가더니
차가운 비석을 만졌다. 손가락으로 비문 위의 글씨를 따라 그려보기도 했
다. 그러고는 무덤 위에 가만히 올라앉았는데 눈에 눈물이 있었다.
나도 그녀의 곁에 앉았다. 무덤 위는 생각보다 아늑했다.
그녀가 내 무릎 위에 가만히 얼굴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쓰
다듬었고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옆으로 얼굴을 돌린
채 그녀는 붉은 무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방심한 눈물 한
줄이 주루룩 내려와 그녀의 턱에 한참이나 매달려 있었다. 조용했다. 숲에
서 바람이 한 줌씩 나왔다가 들어갈 뿐이었다. 바람이 나오면서 나뭇가지
를 사그락 들추는 것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잠이
들었다. 젖은 속눈썹을 가지런히 내려뜨린 채로.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꺼풀을 가만히 벌렸다. 잠든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깊은 밤 구름 속의 달 같았다.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
다보았다. 눈 속에 모래가 많이 들어 있었으므로 입김을 한 번 불어주기도
했다. 그녀는 깨어나지 않고 대신 빙긋 웃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눈
에서 나온 모래를 허공에 흩어놓았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불현듯 클로로
포름이라도 맡은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깜빡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꿈을 꾸었어요.
그녀가 눈을 뜨고 말했다.
-----꿈속에서 우리는 함께 도망을 쳤어요. 기와집이 있는 마을에 살았
죠. 마당에 우물이 있고 부엌 안에도 수도꼭지가 있는 집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꾼 적이 있는 꿈이었다.
-----어느날 당신이 죽었어요.
-----그건 내가 아직 안 꾼 꿈 같은데.
-----우리가 앉은 이 무덤 안에 당신이 누워 있었어요.
-----내가 내 무덤 위에 앉아 있는 거로군. 죽은 나는 잘 있던가요?
-----아뇨. 무덤 안으로 물이 들어와서 당신 몸은 썩지 못했어요.
-----퉁퉁 불었겠는데.
-----곧 물길이 이곳으로 지나갈 예정인데 그때 당신 몸도 쓸려서 떠내려
갈 거래요.
-----내가 왜 죽었는데요?
-----저 때문에요.
-----당신 때문에?
-----제가 죽었으니까요. 당신은 사랑을 잃고는 살아갈 수 없었죠.
내가 웃는 걸 보고 그녀도 따라 웃었다.
소제목 : 저를 몸 속으로 안아주세요.
MICHELLE (5)
그녀를 일으켜서 품에 안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저를 몸 속으로 안아주세요.
나는 그녀의 긴 치마를 젖히고는 그 안의 한 겹 옷을 벗겼다. 그리고 그
녀의 몸 속으로 깊이 들어가 하나뿐인 팔을 내저었다. 그녀의 두 손바닥이
내 팔을 감싸더니 기도하듯이 꼭 당겨서 끌어안았다. 그녀의 젖은 손바닥
에 영혼을 감싸인 채 내 육체는 고통을 느꼈다. 그것은 시간이나 대기권
따위를 찢고 지나가는 듯한 속도의 고통이었으며 그 마찰의 저항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려는 순간 캄캄한 암흑과 고요의 결락에 부닥쳐 돌연 추락하
는데, 어쩌면 그곳이 세계의 끝인 모양이었다.
세계의 끝은 갈릴레이 이전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낭떠러지였다.
그녀와 나는 바다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내 왼팔을 베고 그녀는 하늘을 쳐다
보았다. 아니었다. 그녀가 쳐다본 것은 하늘이 아니라 허공이었다. 조금
뒤 그녀는 두 팔을 뻗더니 허공에 대고 엄지를 이리저리 놀리기 시작했다.
수화를 하는 것도 같고 어찌 보면 뜨개질 같기도 했다.
-----뭐해요?
-----바람개비를 접어요. 당신 주려고요.
그녀는 꽤 열심이었다. 종이의 귀를 맞춰서 대각선으로 접기를 여러 번
했다. 허공을 접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허공을 한 지점에 모으더니
엄지와 중지로 꾹 눌러 잡았다. 다른 한 손으로 핀 꽂는 시늉을 하고는 아
래쪽에서 막대를 길게 뽑았다. 그리고 후 하고 불었다. 막대를 입에 물어
보기도 했다. 그녀가 접은 바람개비는 노란색과 초록색이었다. 그녀는 다
시 보라색을 접기 시작했다.
나는 목이 탔다. 담배 생각도 간절했지만 담배는 티셔츠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자전거를 세워둔 곳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다시 개 짖는 소
리가 났는데 그 소리는 어쩐지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조금씩 조금씩 심
장박동이 급해졌고 이마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분명하진 않지만 그것은
쫓기는 자가 느끼는 공포의 초기단계가 아닌가 싶었다. 무엇에게 쫓긴단
말인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모르더라도 나의 신체가 감지하고 있
다면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럼 나는 그녀가 사라질까 불안해서 뒤
돌아보았던 게 아니었던가?
나는 점점 참을 수 없게 되어갔다. 그녀가 바람개비를 다 접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 팔 위에 놓여 있던 그녀의 얼굴을 바
닥에 내려놓았다.
------어디 가요?
몸을 일으키는 나를 그녀가 올려다보았다.
------자전거 있는 곳에.
------그래요.
그녀는 천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누운 채로 계속해서 허공에 대고 바람
개비를 접었다. 손이 위로 들렸다가 내려지는가 하면 허공에서 엇갈렸다가
풀어졌다. 그녀의 긴 치마깃이 젖혀져서 밋밋하고 가는 다리가 드러나 있
었다. 번들번들한 흉터가 덮여서 마치 의족을 비닐로 싸놓은 것 같았다.
바느질이 신통치 않아 간신히 몸통에 붙어 있는 봉제인형의 다리 같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걷지 못하리라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소제목 : 나는 바지를 꿰입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MICHELLE (6)
계속 허공에 바람개비를 접으며 그녀가 말했다.
------저를 못 찾겠으면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요.
------그러죠.
나는 바지를 꿰입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한 발짝 옮기려는데 등 뒤에
서 그녀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제 이름은 나오미예요.
------알아요.
나는 몹시 서둘렀다. 그녀에게서 떠나기 위해. 그녀의 머리맡 쪽에서 뭔
가가 발에 차인 것 같았지만 그것을 내려다볼 틈도 없었다. 그대로 산 아
래쪽을 향해 마구 뛰어내려갔다. 거의 다 내려왔을 때는 땀이 얼굴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전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전거를 찾아 헤맸다. 풀밭을 헤치고 숲
속에도 들어가보았고 마을로 통하는 길로 뛰어가보기도 했다. 마을 뒤쪽으
로 가니 거기에 과수원이 있었다. 그러나 자전거는 보이지 않았다. 내 구
두에는 흙이 두텁게 달라붙었다. 몸은 땀과 긁힌 자국으로 뒤범벅이 되었
고 불이라도 삼킨 듯이 목이 말랐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정신없
이 뛰었다.
그렇게 뛰면서 어느 풀숲에선가 흰 운동화 한 짝을 보았다. 내 등에 업
혔을 때 그녀의 발에서 벗겨진 것이었다. 그제서야 조금 전 그녀의 머리맡
에 놓여 있다가 내 발에 차인 것이 운동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것
을 아주 멀리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차버렸었다. 한 발짝이라도 더 뛰었
다가는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말 거라고 느껴질 때는 어느새 기와집까지 와
있었다.
자전거는 그 집 회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나는 자전거에 올라 탔다. 웬
일인지 그녀가 있는 무덤 쪽으로는 가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
무것도 알 수 없었고 알려고 할 틈도 없었다. 나를 몰아치는 급박한 두려
움, 그것은 종말에 대한 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무덤과 반대쪽으로
마구 페달을 밟았다. 무서운 속도였다. 뒷자리에 있던 티셔츠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내 얼굴을 거칠게 덮어씌웠다. 눈을 감은 채 나는 더욱 빠르
게 페달을 밟았다. 티셔츠는 바닥으로 날아가 떨어졌고 자전거의 바퀴가
그것을 밟고 지나갔다.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소금기
둥이 되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달릴 뿐이었다. 그녀의 이름, 나오미.
나는 그녀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사
랑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내 눈물은 너무나 뜨거웠고 또 마를 줄 모
르고 흘러내렸다. 그럴수록 페달을 밟는 발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
다. 속도 때문에 내 눈물은 아래로 떨어지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졌다. 자
전거도 땅 위를 달리기에는 너무 빨라 허공으로 떠올랐다. 내 몸은 바람개
비 같았다. 비가 쏟아져 나를 땅으로 다시 떨어뜨렸다. 굵은 빗줄기는 빽
빽한 물의 숲처럼 나를 가로막았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멈
추지 않았다. 속도의 띠 위를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나
는 보았다. 눈앞에 검은 성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을. 그것은 어느 꿈에선
가 본 듯한 거대한 성벽이었다. 자전거는 그대로 성벽을 향해 무서운 속도
로 달려들었고 갑자기 비가 멈추었다.
몸통이 깨지는 고통 속에서 나는 자전거에서 빠져나간 은빛 바퀴가 선명
한 푸른 허공으로 천천히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소제목 : 진이라면 그 꿈을 단순한 몽정이라고
WHAT GOES ON (1)
You didn't even think of me
As someone with a name
Did you mean to break my heart and watch me die
Tell my why
진이라면 그 꿈을 단순한 몽정이라고 할 것이다. 아무리 봐준다고 해도
'스토리를 갖춘 몽정' '제법 필연성이 있는 몽정' 이상은 아니다. 실제로
도 그 꿈을 꿀 때마다 내 트렁크 팬티는 축축해져 있었다. 그러나 런닝셔
츠는 팬티보다 더 많이 젖었다. 꿈꾼다는 말에는 보통 달콤하다거나 멋지
다는 뜻이 들어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거리가 멀었다. 잠을 자면서 저절로
정액을 흘리는 정도의 한가하고 간지러운 일은 분명 아니었다. 오히려 헬
스 클럽에 가서 강도 높은 운동을 한 시간쯤 하는 것 이상으로 체력소모가
많은 일이었다. 나는 사력을 다해 꿈을 꾸었던 것이다.
두어 주일 사이에 내 몸무게는 5킬로그램이 줄었다. 넌 면역결핍하고 비
슷한 증상이야, 라던 진의 말이 떠올랐다. 더구나 내게는 에이즈 환자에게
는 없는 다른 증세까지 있었다. 극단적인 감정의 분열이 찾아들곤 했다.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어쩌면 그것은 약물에 의한 환각과 비슷하리라는 생
각이 들었다.
진은 대마초를 피운 적이 있었다. 그의 고향에서 고기를 잡거나 농사를
짓는 친구들이 진을 낚시도구와 함께 배에 태우고 섬으로 갔다. 무릎까지
오는 긴 고무장화를 신고 섬 깊숙이 들어간 진은 그 장소에 있을 성싶지
않은 작은 들판을 만났다. 그 들판 옆에 누워 진은 환상을 경험했다. 초록
색 풀들이 바람에 움직일 때마다 그 끝에서 햇빛이 수천 방향으로 부서졌
다. 어릴 때 어머니가 뜰에 양귀비를 심었어. 양귀비 꽃이 못 생겼다고 하
면 믿을 수 있겠어? 정말이야. 꽃은 전혀 예쁘지 않았어. 그런데도 어머니
는 꽃을 보기 위해 양귀비를 심었지. 어느날 흰 셔츠에 감색 바지를 입은
공무원이 와서 어머니를 협박했어. 어머니는 잡혀가진 않았어. 그 대가로
공무원에게 뭘 줬는지 나는 알지만. 가끔 자기 전에 생각이 나곤 했어. 양
귀비 꽃대를 따던 어머니의 손. 그 손에 묻었던 진득한 액체. 들판에 누워
있자니 그런 장면이 하나씩 스쳐가더라구.
존 레논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판에서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 아주 나른
하고 몽환적인 목소리로 노래하는 거야. 난 너를 취하게 만들고 싶어. 그
러면 랭카셔 블랙번에 있는 4천 개의 구멍을 모두 셀 수 있어. 앨버트홀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구멍이 필요한가도----. 하지만 노래 제목처럼
그런 건 <인생의 어떤 하루>일 뿐이지. 그 날을 뺀 대부분의 인생은 시간
속에 그냥 휩쓸려가는 거야. 그 말을 하는 진의 표정은 쓸쓸하기보다 담담
했다. 진에게는 소년시절 부모 속을 어지간히 썩이는 바람에 일찌감치 철
이 들어버린 지루한 사내 같은 모습이 가끔 있었다.
소제목 : 진에게 비틀즈는 환각이었고 쓰레기 봉투 같은
WHAT GOES ON (2)
진에게 비틀즈는 환각이었고 쓰레기 봉투 같은 것이었다.
환각을 하나 마련해두고 있으면 쓸모없는 외로움이나 질문 따위는 쓰레
기처럼 그곳으로 빨려들어가서 폐기된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현실 속에 그
럭저럭 건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게 인생인 모양이었다. 그런 방법을 취미
생활이라고 부르든 변화나 일탈이라고 하든 나는 관심없었다. 요리를 많이
하는 부엌에서는 쓰레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복잡한 요리를 하지 않는
덕분인지 어쨌든 내 삶에는 찌꺼기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쓰레기 봉투도
환각이라는 마취도 굳이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혼자 있을 때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긴 하다. 그런 때
나는 케이블 방송 중에 바둑 채널을 켜놓곤 한다. 바둑은 전혀 알지 못한
다. 다른 모든 채널이 보는 이의 환심을 사거나 뭔가 가르치기 위해 목청
을 높이고 말을 빨리하는 데 반해 바둑 채널은 나직나직하고 말도 급하지
않아 좋아할 뿐이다. 화면이 단조로운 것도 마음에 든다. 그나마도 자리를
잡고 앉아서 쳐다보는 것은 아니다. 전공서적을 뒤지거나 손톱을 깎다가
이따금 고개를 한 번씩 돌려 화면을 보고 소리를 들을 뿐이다. 어쨌든 그
정도면 혼자는 아닌 셈이었다.
이따금 축구시합을 볼 때도 있다. 게임이란 재미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선수의 국적에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운동 잘하는 청년의 아
름다운 율동, 그리고 공의 향방에 따른 힘의 흐름을 볼 따름이다. 아주 어
쩌다 책을 읽어도 나는, 이걸 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 라고 생각한다. 이 멋진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라고 크게 깨치
는 일은 별로 없다. <개 기르는 법>을 보든 <장자>를 보든 마찬가지이다.
한때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원리나 진실이란 것
은 몇 가지뿐인데 그것의 수없이 많은 사소한 변형을 습득해내는 것이 어
리석게 여겨졌다. 그러나 책 읽는 데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내 생각보다
훨씬 많았고 훌륭한 사람 가운데에도 적지 않았다. 내가 틀린 건지도 모른
다고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세상에는 내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만큼 원
리나 진실이 많은 건 아닐까.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제한된 삶 속에서 인
간이란 죽을 때까지 전체를 다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텐데, 하나
를 전체로 알고 사는 편이 여러 개를 알고 난 뒤 나머지에 대한 갈급 때문
에 조급해 하며 살아가는 쪽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더 나쁜 경우로는 일
부라는 점에서 결국 하나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여러 개를 알았다고 해서
전체를 알고 있는 듯이 뽐내는 경우이다. 어쨌든 지금은 몇 권의 책을 두
고두고 읽는 것과 수없이 많은 책을 읽어대는 사람의 방법 사이에 큰 차이
를 느끼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사는 동안 나를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고 배척하는 사람도
없었다.
소제목 : 꿈 속에서 나는 늘 그녀를 버렸다.
WHAT GOES ON (3)
그 방식에서 불편을 느낀 일도 별로 없었다.
성실하고 평범한 나에게도 부당한 일은 가끔 일어났다. 내게도 여러 가
지 소속이 있었고 그것의 억압이 나만 비껴갈 리도 만무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지 않은 데에 억울함을 느끼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
다. 어떤 것이 행복인지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고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
수시로 점검하는 체크 리스트도 또 센서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시위나
파업으로 교통체증이 날 때는 사이드 블레이크를 올린 다음 라디오를 틀었
고 간혹 멋진 여자가 지나가면 쳐다보았다. 나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있었
지만 아프게 하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나는 무엇에 이끌리듯 어떤 풀밭에 앉았었다. 그리고 일어나보니 옷 전
체에 도깨비바늘이 붙어 있었다. 그 바늘은 살갗을 파고들어 나를 아프게
했다. 그 첫번째 바늘이 그리움이었다.
꿈 속에서 나는 늘 그녀를 버렸다. 꿈에서 깨어나면 온몸이 젖어 있었고
두려움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려움의 베일을 제치면 그
속에서 훨씬 더 강렬한 감정이 가시나무처럼 아프고 드세게 솟아올랐다.
그녀가 그리웠던 것이다. 내가 필사적으로 눈을 뜨지 않는 것은 꿈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꿈을 꾸면 또다시 그녀를 배신하리라는 걸 알면서
도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어떤 저주의 사이클 속으로 빨려들어가버린 모
양이었다.
나는 마치 잃어버렸던 통각을 되찾은 사람 같았다. 예민해지고 자주 우
울했다.
병원에서도 나답지 않았다.
다섯 살 아이의 시력이 마이너스 5.5 디옵터인데도 안경을 씌우지 않겠
다고 고집하는 젊은 어머니가 있었다. 여자애인데 외모가 중요하죠. 당장
라식수술을 시키겠어요. 그 어머니에게 내가 말했다. 그럼 이 쌍꺼풀 수술
은 첫돌 때쯤 시키신 겁니까. 시력이 나빠지기 전의 관심이 더 중요한 거
죠. 다섯 살 아이는 내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 거의 감다시피 눈을 한껏 찡
그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참견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므로 내 이마도
그리고 그 어머니의 이마도 찡그려졌다.
시력을 거의 잃어가는 한 백내장 환자는 한 층 위에 있는 정밀검사실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네 번이나 물어보았다. 해진 청바지를 입은 젊은 남자
가 진료실로 들어와서 짜증을 내며 떠밀 듯이 노인을 데려갔다. 그에게 넉
넉한 수술비가 있었다면 짜증을 내지 않았을 것이므로 나도 기분이 나빴
다. 나는 퇴근 후까지도 그 남자의 어두운 얼굴을 잊지 못했다. 그 사실이
또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아픈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지 내
가 이제 그들의 고통에 그다지 무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자주 기분이
나빴고 쉽게 지쳤다. 뭔가 답답하여 병원 밖으로 나가버리는 일도 자주 있
었고 그런가 하면 환각과도 같은 통증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선배가 나를 더욱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대해서
도 나는 더 이상 상관없는 존재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랫사람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들려는 것은 관리를 손쉽게 하려는 장악의 일종이었고 파벌의
준비였다. 나는 그가 가진 권력적 속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사람
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자 오히려 그때부터 나는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나의 관심은 어이없게도 여러 가지 마찰로 나타났다. 어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문제까지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 모든 것을 견딜
이유가 내게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9월이 되면서
나는 병원을 그만두었다.
소제목 : 내게도 변화 자체는 그리 큰 일이 아니었다.
WHAT GOES ON (4)
변화란 생각처럼 사람을 크게 달라지게 만들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변화를 맞이하기 전의 불안이나 기대가 삶의 선택에 변수를 제공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내게도 변화 자체는 그리 큰 일이 아니었다. 나는 우울하지도 불안하지
도 않았다. 그렇다고 후련하거나 편안해졌다는 뜻도 아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의 잘잘못을 헤아리는 무의미한 계산으로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듯
이 지금의 삶에 대해 더 낫다 못하다는 식의 부질없는 방향 설정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런 점이 달라졌구나 하는 의식조차 별로 없었다. 나는 처음
부터 그렇게 살아왔다는 듯이 무심히 시간을 보냈다.
언제나 혼자였고 조용했다.
어느날은 커튼을 뜯어 세탁소에 맡겼다. 세탁소 옆의 레코드 가게에서
비틀즈의 씨디를 몇 장 샀고 그러고보니 플레이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것을 사러 세 블록 떨어진 큰 상가로 나갔다.
오디오 기기점은 2층에 있었다. 플레이어를 고르는 일은 간단했다. 최상
의 선택을 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럴 만한 사전지식도 없는 나를 주인은 친
절히 대해주었다. 나 역시 물건을 잘 샀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 마지막까지
다짐을 두는 따위로 주인을 괴롭히는 절차 없이 돈을 치렀다.
내가 그려준 약도를 쳐다보며 주인이 말했다. 아파트가 아니라 단독블럭
이네요? 29블럭이면---피자집과 포토 샵이 있는 건물이라---아, 알 것 같
아요. 빨간 차양이 있는 피자집 말이죠? 거기 이층이요? 배달직원이 돌아
오는 대로 바로 보내드릴게요.
상가를 나오다가 나는 모퉁이 가게에서 햄스터를 두 마리 샀다.
그놈들은 철망으로 엮은 집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
이 발을 멈추었다. 연두색 철망집 안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왼쪽에는
붉은 플라스틱 쳇바퀴와 먹이통이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흰색 철
망 사다리를 올라가면 그 위에 다락방처럼 얹힌 것이 집이었다. 하늘색 지
붕의 하얀 집은 국립공원 같은 데에 자연보호라는 글씨를 새긴 채 나무에
매달아놓은 새집보다 몇 배나 작았다.
그 집의 동그랗게 뚫린 구멍 안에 몸을 겹치고 잠든 햄스터 두 마리가
보였다. 그것들의 귓속은 너무나 작은 흰 조개껍질 같았다. 몸통은 검은
털이 섞인 회색 스웨터를 뜨고 난 뒤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은 실뭉치 비
슷했다. 그러니까 소독된 흰 덩어리에 불과한 느낌으로 흰쥐를 다룰 때의
무뚝한 기분과는 좀 달랐다.
애완동물 가게 주인은 사십대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내가 그에게 물었
다. 이것들은 늘 이렇게 잠만 자나요? 남자가 대답했다. 낮에는요. 야행성
이니까요. 남자가 철망집을 툭툭 건드리자 햄스터들이 눈을 떴다. 작고 검
고 반짝거리는 눈이었다. 검은 드레스의 목과 소매에 수없이 붙은 조그만
검은 구슬장식 중의 하나가 떨어져나와 물컵 속에 빠진다. 그것을 건져내
서 박는다면 그런 눈이 될 것 같았다.
먹이는 뭘 먹나요? 내가 남자를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을 때 남자는 마치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내가 햄스터를 사리라는 것을
이미 눈치챈 모양이었다. 남자는 조금 전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봉투에 든 배합먹이를 먹죠. 수분을 섭취하게 상추 같은 걸 넣어주고
요. 목욕이나 가끔 시켜주면 되고 키우기는 제일 쉬워요. 주인을 알아봅니
까? 내 물음에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런다는 사람도 있지만 저것들이 주
인을 알아보긴 뭘 알아보겠어요. 강아지나 고양이하고 달라서 자기 맘 내
킬 때만 한 번씩 가서 쳐다보면 되고 귀찮게 하거나 신경 쓰이는 일이 없
으니까 기특해서 하는 말이겠죠.
소제목 : 어느날인가 나는 집안이 너무 조용하다는
WHAT GOES ON (5)
철망집을 들고 가게문을 나서는 내게 남자가 말했다. 그래도 산 짐승인
데 사람 손을 안 탈 수야 있나요. 좀 귀여워해주세요. 집을 오래 비우게
되면 맡아주니까 갖고 오시고요.
남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햄스터는 내버려두는 대로 소리 없이 자랐
다. 나는 여전히 혼자이고 조용하게 지낼 수 있었다. 바깥이 어두워져 실
내가 더욱 조용하다 싶은 저녁 무렵 불현듯 덜컥거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
보면 그놈들이 잠에서 깨어 쳇바퀴를 돌리기 시작하는 거였다. 시각은 언
제나 여덟시 삼십분에서 아홉시 사이였다.
마음 내킬 때만 한 번씩 쳐다봐주면 된다는 말 역시 맞는 말이었다. 대
부분은 잊고 있다가 이따금 생각이 나서 먹이를 주어도 햄스터는 투덜대는
법이 없었다. 그놈들은 편식을 했다. 먹이통에 배합먹이를 쏟아놓았더니
해바라기 씨앗만 골라 먹었다. 해바라기 씨앗을 철망 안으로 들이밀면 어
느 틈에 달려와 반쯤 선 채 두 발을 오므리고 받아먹었다. 철망 사이로 목
을 빼고 있는 햄스터에게 해바라기 씨앗만 쉬지 않고 계속 주어본 적이 있
었다. 그놈들은 끊임없이 받아 먹었다. 알고 보니 볼 안쪽에 집어넣어두었
다가 나중에 먹는 것이었다.
그놈들이 좋아하는 것은 좁은 틈새였다. 바닥에 깔린 톱밥을 헤치고 그
속에 들어가 있는가 하면 쳇바퀴 밑의 좁은 틈에 마치 깔린 듯이 눌려 있
기를 좋아했다. 사다리 오르내리기, 지붕에 올라가기도 좋아하고 종이 사
각거리는 소리도 좋아했다.
언젠가 현관 쪽에서 톱질을 하는 듯한 규칙적인 바스락 소리가 나서 가
보니 문틈으로 누군가가 광고 전단을 집어넣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
로 꼬고 반쯤 넣어진 광고 전단을 읽어보았다. 통돼지 구이집의 개업인사
광고였다. 문틈으로 <온가족이 통돼지의 맛을 즐기는데 단돈>까지 나왔을
때 나는 그 전단을 문 안에서 주욱 잡아당겨주었다. <단돈> 뒤에 이어지는
<1만 5천원>이라는 문구가 느낌표 세 개와 함께 달려나왔다. 바깥에 있던
사람은 약간 놀랐는지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꽤 급했다.
나는 뻣뻣한 코팅이 입혀진 그 광고지를 세로로 길게 접어 햄스터의 집
에 넣었다. 그놈들은 종이 귀퉁이를 찢기도 하고 종이배라도 탄 듯이 접힌
골을 따라서 왔다갔다하기도 했다. 또 그것을 담요처럼 덮어쓰고 밑에 들
어가 있기도 했는데 그대로 고개만 내밀고 잠이 들어버릴 때도 많았다.
철망 문이 열리지 않도록 끈으로 묶어놓은 적이 있었다. 피자를 포장했
던 초록색 헝겊 끈이었다. 그놈들은 끈에서 실을 한 올씩 뽑아다가 집안의
바닥에 깔았다. 거기에는 잘게 찢은 종이도 잔뜩 덮여 있었다. 한 놈이 없
어졌나 싶어 찾아보면 태극 무늬처럼 서로 꼬리를 물고 하나로 뭉쳐져 자
고 있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쳇바퀴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기도 했고 두
놈이 위아래에서 마주보며 발을 구르는 경우도 있었다. 귀찮아서 먹이를
주지 않으면 조그만해졌다가 부쩍부쩍 먹고 나면 몸집이 커졌다.
어느날인가 나는 집안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여
덟시 반에서 아홉시 사이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날이 이틀은 된 것 같
았다. 철망집으로 가보았다. 밤인데도 그놈들은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소제목 : 인생이 몹시 복잡해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WHAT GOES ON (6)
나는 애완동물 가게에 햄스터를 데려갔다. 가게 남자는 이틀 뒤에 찾으
러 오라고 말했다. 나오면서 힐끗 보니 햄스터들은 늘어져 눈을 뜨지 못했
다. 나는 그 가게 안에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모든 애완동물에게 어쩐지
짜증이 났다.
그날 저녁은 너무 조용했다. 그것은 내가 필요로 하는 데에서 약간 더한
조용함이었다.
바둑방송을 켰는데도 그것만으로는 그 조용함이 해소되지 않았다. 돌아
누워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천장등에서는 농담(濃淡)차가 전혀 나지 않는
균일한 빛이 새어나와 네모 반듯한 방안을 채웠다. 욕실 세면대의 수도꼭
지는 꼭 잠겨 있었고 책장의 책은 나란했으며 한 번도 위치가 바뀐 적 없
는 냉장고, 침대, 옷장 따위의 가구들은 아무런 할말이 없어 보였다. 바닥
에는 아무것도 흐트러져 있지 않았고 벽에 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파리
나 바퀴벌레조차도.
그제서야 나는 씨디 플레이어가 아직까지 배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다음날 나는 친절했던 오디오 기기점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주일이
라고요? 아이고, 벌써 그렇게 됐나요. 이거 죄송합니다. 전화번호를 안 주
셔서 연락을 못했는데, 사실은 손님이 주문하신 그 물건이 창고에 없어서
본사로 가지러 갔거든요. 어떻게 한 이틀만 더 기다려주시겠어요?
그 다음날에는 상가에 가서 햄스터를 데려왔다. 그러나 이제 해바라기씨
를 한 개씩 받아먹게 한다든지 종이를 넣어준다든지 하는 일은 하지 않았
다. 원래 있던 자리에 철망집을 갖다놓은 뒤 당분간 와보지 않아도 될 만
큼 먹이통에 먹이를 수북히 쏟아주었다. 그 정도 이상은 관심을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예 가게 남자에게 햄스터를 돌려주고 오지 않은 것이 약간
후회되었다.
사흘 후 나는 다시 오디오 기기점에 전화를 걸었다. 주인은 내가 고른
상품이 구 모델이라서 구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씨디가 걸리기
만 한다면 어떤 상품이나 상관없다고 대답했더니 그렇다면 이번에는 가격
이 문제라는 거였다. 상가에 다시 나갈 일이 없는데요. 내 말에 주인은,
그럼 하는 수 없네요. 디스플레이 해놓았던 물건이라도 보내드릴게요, 하
고 선심쓰듯 말하더니, 어디 안 나가실 거죠? 라고 물었다. 주인은 이런
질문도 했다.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놓고 사세요? 자주 옮겨 다니는 직업인
가보죠? 남에게 관심이 없는만큼 나는 사람 보는 눈도 대체로 정확하지 않
은 편이긴 하지만 어쨌든 처음 짐작처럼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후 늦게 커튼을 찾으러 세탁소에 갔다와보니 현관 문틈에 뭔가가 끼워
져 있었다. 나는 포장박스를 조금 찢은 듯한 누런 종이쪽을 읽었다. 오디
오집에서 왔다 감.
다시 전화를 한 것은 사나흘쯤이 지난 뒤였다. 주인은 내가 집을 비운
데에 짜증을 냈다. 지금 바로 플레이어를 배달시킬 테니 집에 붙어 있어달
라고 사납게 사정했다. 나는 피자집의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고 있
었다. 부스를 나오니 피자 냄새가 났고 마침 점심 때였다. 주문 데스크로
다가간 나는 미디움 사이즈의 체다 치즈 피자 한 개를 포장해 달라고 말했
다. 포장상자의 초록끈을 잡고 계단을 올라와보니 며칠 전과 똑같은 메모
가 끼워져 있었다. 오디오집에서 왔다 감.
나는 피자의 맛을 망치고 말았다. 인생이 몹시 복잡해져버린 느낌이 들
었다.
소제목 : 세상에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WHAT GOES ON (7)
그러고 또 이틀인가가 지나 나는 상가로 나갔다.
오디오 기기점은 여러 개의 보자기 같은 것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맞은
편은 안경점이었다. 안경점 입구에 안경사 자격증을 내건 젊은 주인은 친
절했다. 오디오 기기점 주인의 첫인상과 비슷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나올 때가 됐거든요. 이쪽에 의자 있는데 하나 드릴까요.
나는 그가 권하는 대로 오디오 기기점이 보이는 방향으로 의자를 돌려놓
고 앉았다.
젊은 안경점 주인의 지시에 따라 한 남자가 콘택트 렌즈를 끼어보고 있
었다. 남자는 번번이 실패했다. 렌즈를 처음 끼세요? 주인이 물었다. 아
뇨. 몇 년 전에도 끼어본 적 있는데 포기했었죠. 렌즈가 잘 안 맞아요. 안
과에 가봤는데 저는 눈물이 좀 부족하다나봐요. 안구 건조증인가 보군요.
글세요. 그렇다는 것 같아요. 가끔 눈이 좀 부시고 아파요. 아무튼 면접만
아니라면 그냥 안경을 끼는 게 속 편한데. 요즘 누가 안경 쓴다고 점수 깎
아요? 안경을 쓰면 오히려 세련되고 깔끔해 보이는데. 주인의 말에 남자가
겸연쩍은 듯 말했다. 여자친구도 권하고요. 사실은 그것 때문이죠 뭐. 근
데 안구 건조증이란 건 못 고치나요? 남자가 좀 창피한 일이지만 저는 잘
우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왜 눈이 그렇게 건조하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눈
에는 지방층이 있어요. 지방층을 만드는 샘에 문제가 생기거나 눈물을 공
급하는 통로가 막히면 그런 증상이 오죠. 잘 우는 것하고는 관계가 없어
요. 그렇게 되는 거군. 남자는 드디어 렌즈를 눈에 붙이는 데 성공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우두커니 들었다.
오디오 기기점 주인은 오지 않았다. 남자가 콘택트 렌즈를 끼고 간 뒤에
도 한참이 지났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나올 텐데. 안경점
주인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나는 조금 있다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는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그리고는 상가 1층을 이리저리 구경하기
시작했다.
특히 열쇠집에 오래 머물렀다. 지금의 열쇠통을 뜯어내고 비밀번호를 눌
러 문을 여는 도어록을 달기로 마음먹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부
터 작정이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집을 새 열쇠로 잠그고 싶어졌을
뿐이다. 나는 약도를 그려 주인에게 주었다. 전화번호는요? 주인이 물었
다. 전화는 없어요. 약도뿐예요. 언제 올 거죠? 주인은 한 시간 뒤에 오겠
다는 것을 나는 세 시간 뒤로 미루었다.
나는 2층으로 다시 올라가지 않고 상가를 나왔다. 상가를 나와 집 반대
쪽으로 걸어갔다. 큰 길이 티(T)자로 갈라지는 곳에 공원 팻말이 보였다.
호수를 끼고 있는 아주 넓은 공원이었다. 사람이 북적이지는 않았지만 아
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벤치에 앉은 어린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붙잡았고
나이든 남녀는 대개 남자 혼자 캔맥주를 마셨다.
세상에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꽤 있었다. 내가 미처 생
각해보지 않았을 뿐이다.
소제목 : 나는 한 번도 혼자라는 사실을 불행해
WHAT GOES ON (8)
늦은 오후가 되자 아이들이 공원으로 몰려나왔다. 아이들은 롤러 블레이
드를 신고 있거나 스케이드 보드를 갖고 왔다.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도 많
았다. 공을 갖고 온 아이들은 가꾸어진 잔디밭 안에 들어가 공을 찼다. 멀
리 '잔디보호' 완장을 찬 관리인이 보이면 아이들은 얼른 스포츠쌕 속에
공을 집어넣고는 자전거만 타는 척했다. 어떤 아이는 휘파람을 불기도 했
다.
나는 휘파람 부는 아이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관리인이 멀어지자 그 아
이는 자전거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제 키의 두 배가 넘는 청동 조형물
아래에 자전거를 세웠다. 두 개의 길다란 기둥 끝에 바람개비가 달려 있는
조형물은 그 장소에 서 있는 것이 퍽 어색해 보였다. 바람이 불어도 움직
이지 않는 청동 바람개비 옆에서 작은 풍향계만이 빙글빙글 돌았다. 계속
휘파람을 불면서 아이는 조그만 돌을 집어 풍향계를 맞췄다. 돌은 청동 조
형물에 부딪쳐 쩔그렁, 소리를 내고는 퉁겨나갔다. 거기 기대져 있던 아이
의 자전거가 별 이유 없이 픽 쓰러졌다.
공원에는 자전거 빌려주는 곳이 두 군데나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이 타게
되어 있는 자전거는 사마귀처럼 몸통이 길었다. 그리고 노란색이었다. 노
란 자전거들이 나무 사이로 나타났다 멀어졌다 하는 모습은 바쁠 것이 없
었다. 젊은 부부가 탄 자전거도 보였는데 그 뒤로는 아들인 듯한 두 발 자
전거 소년이 위협하듯 바짝 붙어서 따라다니고 있었다.
나는 해가 질 때까지 자전거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현관키의 비밀번호를 궁리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 머릿속에 있는 네 자리의 숫자 조합은 꽤 많았다. 생년월일, 진의 전
화번호,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한 해에 하나씩 지녔던 일련번호, 외래
환자 한미라의 연락처, 자동차 번호-----. 가장 강력하게 기억을 보장하는
네 자리 숫자는 현금카드의 비밀번호였다. 그것은 어떤 날짜를 가리키는
숫자인데 좋든 싫든 나라는 사람의 삶을 지금과 같은 것이 되도록 결정지
어준 날짜인 것이다. 돈과도 관련이 있는 날짜였다. 그래서 나는 현금카드
의 비밀번호를 그 번호로 정했었다.
내 생일날은 분명 아니지만 그 날은 내게 생일의 의미도 없지 않다. 그
날은 나 혼자 살아난 날이었다. 모든 가족들은 사고 현장에서 한꺼번에 죽
었다. 다섯 살난 내가 살아난 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천행이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액운이라고 했다. 하늘이 죄없는 어린애를 살려준 거라
고도 했지만 나를 가리켜 가족을 잡아먹는 악마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는 동정하는가 하면 고아로서의 인생행로가 너
무 뻔하다며 죽는 게 나을 뻔했다고 냉대하기도 했다.
그들의 생각 중 어떤 것이 타당한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
처럼 나 역시 살아 있으니 그 동안은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뿐이다. 그리
고 어찌 됐든 죽은 가족의 존재가 내 통장 속의 돈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로만 본다면 나는 운이 나쁜 편은 아니다.
그녀도 알 것이다. 나는 한 번도 혼자라는 사실을 불행해 해본 적이 없
다. 내가 혼자라는 것조차 몰랐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제목 : 이제부터 뭘 할 거야?
GIRL (1)
Is there anybody going to listen to my story
All about the girl who came to stay
Ah, girl, girl, girl
이제부터 뭘 할 거야? 진이 물었다.
나는 읽고 있던 <성>을 덮으며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글세. 프라하에나
가볼까. 카프카 생가에라도 가보게? 진은 약간 빈정댔다. 그러나 3주 후에
나는 정말 프라하에 가 있었다.
떠나기 전날 진을 다시 만났다. 술을 마실 시간은 없었다. 진에게 다른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은 뭔가를 상의하고 부탁하기 위해 우리가 졸
업한 대학의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진은 나를 걱정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언제 돌아올 거야? 가봐서. 돌아오면 또 뭘 할 건데?
그때 돼봐야 알겠지. 제기랄! 진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낮게 내뱉었
다.
나는 찻잔을 들어서 남아 있던 커피를 마셨다.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익숙한 것이 내게서 떨어져나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샴 쌍둥이의 분리수술을 하는 시간 같았다.
진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아직은 수술 도중이라서 우리 몸이 완전히 분
리되지 않고 조금이나마 붙어 있을 테니 말이다.
진이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악몽에서 못 헤어나는 거야? 나는
약간 웃었다. 아직도 그 여자가 꿈 속으로 너를 불렀다고 생각해? 아니
참, 너를 만나러 꿈을 뚫고 나왔다고 했던가. 나는 또 한 번 웃으려 했지
만 이번에는 잘 되지 않았다.
진이 늘어놓았다. 꿈이라면 나도 수없이 꾸어봤어. 열두어살 때 우연히
해몽 책을 본 뒤부터 그놈의 악몽에 꽤나 시달렸지. 좋은 옷을 입는 꿈은
불길한 일이 생길 징조이다. 꿈에 신발을 잃어버리면 재산을 잃는다. 음식
을 먹으면 병에 걸린다. 이빨이 빠지는 꿈은 또 뭐라더라 아무튼 그런 건
그래도 나아. 나를 향해 달려오는 기차는 죽음을 뜻한다. 이 구절을 본 뒤
부터는 기차 꿈을 꿀까봐 눈을 부릅뜨고 잠을 안 잤지. 그러다가 깜빡 잠
이 들면 그런 때 꿈은 늘 기차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꿈이었어. 얼마나 꿈
이 무서웠으면 책이라고는 읽기 싫어하는 내가 그 두꺼운 프로이트의 <꿈
의 해석>을 끝 페이지까지 독파했겠어. 그 책에서 알게 된 것은 두 가지뿐
이야. 인간은 미래에 대해 늘 불안감을 갖고 있다는 것과 퀴즈를 좋아한다
는 것. 꿈은 그냥 꿈이야. 꾸고 나서 잊어버리는 거라구.
진과 나는 레인 캐슬에 함께 갔었다. 그런데 진은 자신이 이름을 궁금해
하고 초컬릿을 건네주었던 여자가 마치 나 혼자서 몰래 만나고 온 존재라
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 기억마저 환각 속에 해소시켜 쓰레기봉투 속에
던져버렸다는 말일까.
소제목 : 천상의 루시. 그래, 찾아낸 거야?
GIRL (2)
진이 계속 말했다. 어떤 소설에서 악마의 향기로 여자를 현혹시켜 죽이
는 사생아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 자기 자신은 무색무취의 인간이기 때
문에 그런 향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거지. 그 소설 보니까 눈에 안 보이는
냄새도 열심히 노력하면 유리병 속에 담기더라구. 공부 못하는 놈들 말이
맞아. 노력해서 안 되는 건 공부뿐인가봐. 어쨌든 냄새가 그러니 꿈도 그
러지 말란 법은 없지. 아무리 허상이지만 자꾸 꾸다보면 꿈에도 실체가 생
겨날지 몰라. 꿈에 본 영상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는 일이 있겠지. 영매
라든가 전생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이 최면상태이든 뭐든 그런 희귀한 실체
와 접촉한 것일 테고.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그런 것으로 반도체
를 개발하고 놀이동산을 설계하고 외환시장을 조절하고 암을 퇴치하는 건
아니잖아.
인생이 기차여행이라면 그것 역시 차창밖을 스쳐가는 수많은 풍경 가운
데 하나라구. 조금 매혹적인 풍경이라고 해서 역도 아닌 곳에 굳이 기차를
세워달라고 할 필요 있어? 그냥 지나쳐가면 아무 상관 없는 걸 갖고.
나는 찻잔을 들었지만 커피는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이상한 일이란 게 뭔지 생각해봤어? 내가 물었다.
아니. 진이 곧바로 대답했다. 이상한 일은 그냥 이상하게 내버려둬.
나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고마워.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던 진이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나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
다. 우리는 약간 어색해져 있었다. 고마워 따위의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진과 나는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스키 폴로 낚시를 하는 여자랑은 요즘 어때? 내가 침묵을 깼다. 응. 잘
돼가. 진이 짐짓 부드럽게 대답했다. 진 역시 제 쪽에서 막 침묵을 깨려
했던 게 틀림없다. 어떻게 됐는데? 내가 취미를 바꾸었거든. 그 여자처럼
스키를 타기로 한 거야? 아니. 낚시와 스키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장소를
취미삼아 함께 찾아보기로 했어. 아마 그 일로 평생을 탕진해야 할 것 같
아. 그랬군. 허락하겠대? 너 없는 사이에 해치우려고 약혼날짜 잡았지. 진
은, 보름 남았어, 라고 덧붙였다.
내가 축하해, 라고 하자 진은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웃었다. 진심 같은
데? 맞아. 나는 자신있게 대꾸했다. 진심이 아닐 이유가 전혀 없었다. 비
록 분리수술을 해서 더 이상 트윈베베는 아니라 해도 진은 내게 하나뿐인
친구였다. 헤이 주드! 내가 장난스럽게 불러보았다. 그 노래 제목이 뭐더
라? 갑자기 회전문 앞에 서 있는 만화경의 눈을 가진 소녀---.
진이 말해주었다. 천상의 루시.
그래, 찾아낸 거야? 내가 물었다. 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런 소녀는 존재하지 않아. 그 소녀를 찾은 게 아니라 그 소녀의 노래를 들
어줄 만한 여자를 하나 고른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환상이란 실현되
는 게 아니라 가슴에 품는 거라구. 상대의 가슴속에 있는 환상을 알아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나보던데? 어쨌든 여자라는 존재가 대충 그 정도지 뭐.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이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소제목 : 우리가 왜 가깝게 지냈는지 생각해봤어.
GIRL (3)
진과 나는 되도록 유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마지막 고백이 될지도
모른다며 진은 자기 곁을 스쳐지나간 여자애들의 신체적 특징에 대한 미련
을 털어놓았다. 약혼식장에 가기 전에 꼭 한 번은 만나볼 필요가 있다며
너댓 개의 이름을 꼽기도 했다. 진은 그런 말을 짐짓 진지하게 했다. 경박
한 얘기일수록 진지하게 하는 것은 진의 버릇이었다. 이상주의자이기 때문
에 냉소적일 수 있는 것처럼.
내가 그렇다고 말하자 진은 눈썹을 으쓱했다. 그래? 존 레넌이 죽었을
때 카터 대통령도 그에게 비슷한 말을 했지. 존은 38구경에서 다섯 발이
쏟아져나와 죽었거든. 누가 쐈는데? 여섯 시간 전에 찾아와서 <이중 환상
곡> 앨범에 사인을 받아갔던 놈이야. 자기를 존과 동일시했지. 우상을 쏜
거야. 쏘고 나서는 코트를 개켜서 옆에 놓고 조용히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던데. 그럴 수도 있지 뭐.
진과 나는 찻집 앞에서 헤어졌다. 진은 짧은 순간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
했다. 살인범이 말야. 같은 죄를 짓고 들어온 놈과 단 둘이 감방에 갇히면
어떤 짓을 할까? 퀴즈야? 내가 물었다. 응, 맞춰도 상은 없어. 둘이 새로
운 살인을 모의할 것 같은데? 내 대답을 듣고 진은 웃었다. 성공할까? 서
로 배신하겠지, 그놈이 어떤 놈들인데. 맞아. 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다. 우리가 왜 가깝게 지냈는지 생각해봤어. 그럼 잘 갔다 와.
그날 밤 또 꿈을 꾸었다. 운전을 하고 있는 나는 아마 술에 취한 것 같
았다. 밤이었고 길은 몹시 구부러져 있었다. 커브길에서 꺾어 나가는데 갑
자기 커다란 건물이 나타났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밑을 아무리 더듬거려보아도 발에 닿는 것이 없었다. 차는 계속
앞으로 나갔다. 건물에 부딪칠 것만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죽음을 받
아들이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차가 굴렀다. 눈을 뜬 나는 이런 경우
를 당한 영화 주인공이 하듯이 팔을 쳐들어 움직여보았다. 팔은 별 이상
없이 움직여졌다. 아직 안 죽었나? 하고 중얼거리는 순간 나는 얼굴 살갗
이 일시에 쭉 잡아당겨지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란 걸
알았던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다른 세상일 뿐이었다. 진땀을 흘
리며 나는 내게 말했다. 나는 죽었어. 다른 세상으로 들어온 거야.
그리고 꿈이 깼다. 음주운전 예방 캠페인에 써먹어도 될 것 같은 꿈이었
다.
나는 몇 시간 후면 비행기를 탈 것이고 당분간은 운전을 하지 않을 것이
다. 그러나 어쨌든 께름직한 꿈이었다.
소제목 : 비행기 안에서 나는 또 한 번 그 꿈을
GIRL (4)
비행기 안에서 나는 또 한 번 그 꿈을 꾸었다.
역시 브레이크가 발에 닿지 않았다. 나는 헛발질을 하면서 죽음을 향해
달려갔다. 차체가 깨져버린 뒤까지도 차바퀴는 계속 돌았다. 바람을 가르
는 바퀴소리마저 귀에 들리는 듯했다.
나를 깨운 것은 스튜어디스가 끄는 카트의 바퀴소리였다. 식사 하시겠어
요? 스튜어디스가 물었다. 나는 양 손가락으로 눈가를 몇 번 누르면서 고
개를 끄덕였다. 생선으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고기로? 아무거나. 그러나
다음 순간 마음을 바꿔 고기를 선택했다. 이코노믹 클래스의 기내식이란
게 다 그저그렇지만 그래도 딱딱하고 퍼석퍼석한 냉동생선을 씹기보다는
다진 고기 편이 나았다. 나는 대충 음식을 우겨넣기 시작했다.
내 자리는 통로 쪽이었다. 오른쪽 옆자리와 창가자리에는 젊은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여행사 직원인 듯한 남자가 와서 출입국 신고서 쓰는 요령을
가르쳐주고 가는 걸 보니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는 단체 관광객인 모양이었
다. 내 옆좌석의 여자는 보름달처럼 얼굴이 둥글었고 승려들이 겨울에 쓰
는 회색 털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창가에 앉은 뚱뚱한 여자는 굵은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밥을 먹는 동안 싫어도 그들의 대화를 엿듣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름달
같은 여자가 말했다. 여행사에서 정한 코스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나로
드니 화랑 같은 데는 빠져 있고. 안경 낀 여자가 대답했다. 난 외국여행이
처음이라 그런 건 몰라. 아무튼 이걸 보고 잠을 못 잤어. 안경 낀 여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기내식을 간이 테이블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던 노란 표지의 책을 펼쳐서 넘기기 시작했다. 검은 글씨
로 큼지막하게 '동유럽 편'이라고 쓰인 그 여행 안내서를 보름달 같은 여
자도 손에 포크를 쥔 채 함께 들여다보았다.
얀 후스 동상? 응. 타락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다가 화형당했잖아. 여
기 읽어봐. 그의 유언도 새겨져 있어.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지키며,
모두에게 진리를 전하라. 검은 안경의 여자가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어주자
보름달 같은 여자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리 흥미있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스튜어디스가 와서 식사를 마친 기내식 쟁반을 걷어갈 때였다. 쟁반을
건네주던 그녀는 잘못해서 포크를 내 테이블 위에 떨어뜨렸다. 죄송합니
다. 그녀가 포크를 집어 다시 자기 쟁반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
를 얼핏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약간 이상했다. 분명 나를 보고 있었지
만 초점이 맞지 않았다.
안경 낀 여자는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지 모든 것을 신기해 하고 있었다.
구름밖에 보이지 않는 창밖을 보며 감탄을 거듭했다. 그러다가는 갑갑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이 창문 좀 열고 볼 수 없을까, 라고 친구에게 진지
한 낯빛으로 물어보기도 했다.
소제목 : 안경 낀 여자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GIRL (5)
안경 낀 여자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이 건전하고 지루했다.
스튜어디스가 마실 것을 실은 카트를 밀고 왔다. 그들이 커피를 마시는
동안은 아무 얘기도 들려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약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그들이 내게 불편을 끼친 것은 없었다. 안경 낀 여자 쪽이 수다스럽긴
했다. 그러나 겨우 몇 시간 같은 공간에 있을 뿐인 별 상관없는 여자에게
말이 많다고 불평할 필요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여자는 목소리를 낮
춰서 얘기했고 화장실에 갈 때도 진심이 느껴지는 겸손한 말투로, 죄송합
니다. 잠깐 일어나주셨으면, 하고 말했다. 입가에 웃음만 띠고 있을 뿐 노
골적으로 자기 나라의 단체 여행객들을 깔보는 한국 스튜어디스보다 오히
려 더 수준높은 훈련을 받은 게 아닌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들의
존재는 내게 얼마간 불편을 주었다. 방해가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더 이상은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비행기가 착륙했다. 금연 사인에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
다. 내가 가방을 어깨에 메자 안경 낀 여자가 상냥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아, 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가방은 가벼
웠다. 그 속에는 관광 안내 책자나 탐험지도처럼 <성>이 들어 있을 뿐이었
다. 여자가 다시 내게 무언가 말을 걸었지만 이미 통로로 한 발짝 나가 있
던 나는 줄을 따라 비행기 안을 빠져나왔다. 조금 걷다 생각하니 여자는
짐을 좀 들어달라고 말했던 듯도 싶었다.
호텔을 구하는 일은 쉽게 해결되었다. 프라하역까지 택시를 타고 나오니
걸어서 10분 정도면 닿는 곳에 호텔이 여러 곳 있었다.
그날 밤은 일찍 침대에 누웠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수없이 뒤척대
다가 일어나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가 흩어지는 것을 쳐다보며 나
는 내 방에서 하듯이 방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텔레비전. 그러나 바둑방
송이 있을 리 없었다. 눈과 귀를 긴장시키는 이국의 방송은 전혀 보고 싶
지 않았다. 전화. 내 소식을 궁금해 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없는 것 같았다. 욕실 문에도 시선이 갔지만 샤워는 이미 마친 뒤였다. 속
옷 몇 벌밖에 들어 있지 않은 옷장을 열고 속옷들을 꺼내 이것저것 갈아
입어볼 수도 없었으며 스탠드라이트를 켰다껐다하기도, 소파에 앉았다일어
났다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호텔 마크가 찍힌 비누와 수건과 재떨이와
성냥과 메모지와 펜 따위를 쓸어보아 가방에 집어넣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전화기 옆에 놓인 관광 안내 소책자와 지도를 집어서 뒤적였지만 몇 줄 읽
어보다 그만두었다.
소제목 :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었다.
GIRL (6)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었다.
선 채로 프라하 시가의 밤을 꽤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던 것 같다.
달이 있는 밤이었다. 좁은 길은 어둡고 조용했다. 멀리 불이 켜진 건물
들과 차들이 드문드문 내려다보였다.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대고 나는 기
도하는 사람처럼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내 귓불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었다. 우린 돌아가지 않아요, 그렇
죠?
그리고 그녀는 말했었다. 죽음도 끝은 아니에요. 모든 것은 반복되죠.
인간이란 존재는 시간의 형틀 위에 앉아 있으니까요. 시간이라는 저주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사랑을 이룬 사람들뿐이에요. 그들은 돌아가
지 않아요.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그들은 어디로 가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데도 가지 않아요. 왜요? 왜냐하면 이미 소멸했으니까요.
나는 다시 침대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깨끗이 세탁된 침대 시트와 베개
에서는 희미하게 꽃냄새가 났다. 베개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이국의 호텔
에서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내가 왜 프라하에 왔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왜 현관의 키를 바꿔 달고 공원에서 자전거를 구경하
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햄스터들은 결국 죽었고 오디오 가
게에서는 내가 떠나오던 날 아침까지도 물건을 배달해주지 않았다. 밤마다
나는 <성>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드는 순간, 내일 아침 눈을
뜨면 그곳이 프라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굳이 프라하에 온
이유를 말하자면 그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 오래 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 나는 문득 눈을 떴다.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내가 이 호텔의 508호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찾는 전화는 분명 아니었으므로 나는 전화를 받
지 않았다. 전화벨이 그렇게 끈덕지게 울리지 않았다면 눈을 뜨지도 않았
을 것이다. 나는 눈을 떴다. 전화벨이 뚝 그쳤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둠. 그리고 물 속 같은 침묵뿐이었다.
침대에 엎드린 채 내 시선은 멍하니 창쪽을 향하고 있었다. 커튼을 내리
지 않아 창으로 달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캄캄한 하늘은 지금이 한밤중임
을 깨닫게 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캄캄한 하늘에 커다란 은색 백조
가 떠 있었다. 백조의 머리 위에서 아름다운 왕관이 빛났고 달이 천천히
그 왕관 뒤를 지나가고 있었다. 꿈인가보군.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꿈 속까지 전화벨 소리가 따라왔다. 이번에도 쉽게 그칠 성싶지 않게 끈
질겼다. 눈을 꾹 감은 채 견뎌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일어나 전화를 받
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떴다. 그러나 내가 전화를 받을 필요가 없었
다. 내 발치에서 자고 있던 누군가가 일어나 전화를 받는 것이 보였다. 긴
드레스 같은 잠옷을 입은 여자였다.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리고 통화를 했
다. 목소리는 너무 나직해서 들리지 않았는데 꽤 긴 통화였다.
누굴까. 나는 그녀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잠이 별똥별처럼 눈꺼
풀 위로 쏟아져내렸다.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릴까봐 나
는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그 꿈 역시 다
른 안타까운 꿈들이 그렇듯이 그녀가 전화기를 내려놓고 일어서는 순간 깨
어졌다.
소제목 : 나는 그날 멀리 나가지 않았다.
GIRL (7)
호텔 1층에서 나는 시리얼과 우유, 초컬릿 과자, 요구르트 한 개로 아침
을 먹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유리문이 있는 창가자리였다. 거기에서 나는 어젯
밤 보았던 백조를 보았다. 그것은 백화점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 옥상에
설치된 홍보용 대형 네온이었다. 아침에 보는 백조는 첫날밤을 보내고 난
뒷날의 신부처럼 평범했다. 불이 꺼진 왕관은 유치했고 날아가고 있는 듯
보이던 아름다운 날개도 전구의 띠일 따름이었다. 한밤중에 잘못 걸려온
전화가 왔다는 것 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요구르트의 뚜껑을 벗겨냈다.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며 빈 접시를 치우고 커피잔에 뜨거운 커피를 부
어주는 체코 아가씨는 얼굴이 예뻤다. 영어를 쓰는 한 관광객 할머니가 아
가씨에게 뭔가 말하고 있었다. 두 번이나 왔다구요. 잠을 완전히 설쳤어.
아가씨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 호텔 문은 밖에서 열쇠로 잠그면 안에서
는 열 수가 없게 돼 있거든요. 어젯밤 어떤 방에서 그런 일이 있었나봐요.
한 방에 투숙했던 일행이 열쇠로 잠그고 나가서 밤새 돌아오지 않았대요.
방안에 갇힌 사람은 나가지도 못하고 프론트를 찾느라 아무 방 번호나 계
속 눌러댔던 거예요.
체코 아가씨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전화를 받은 방이 세 방이나 된다고
말했다. 내가 알기로 그런 방은 셋이 아니라 넷이었다. 별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날 멀리 나가지 않았다. 호텔에서 가까운 구시가를 어슬렁거렸
다. 도시는 새롭게 뜯어 고쳐지는 중이었다. 여기저기 세워진 거대한 타워
크레인이 중세를 간직한 고도(古都)라는 평판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상관
없었다. 역사나 지리에 대해서도 그렇고 음악이라든지 문학, 종교, 그 어
느것에도 나는 관심이 없었다.
사진 찍는 것, 물건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거리의 관광객들은 꽤
바빠 보였지만 나는 그다지 할 일이 없었다. 먹는 것이라고 해서 특별히
관심이 있을 리 만무였다. 그래도 나는 두어 번 조그만 카페에 들어가 커
피를 주문했다. 값싼 캐비어에 흑맥주를 들이키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북적이는 책방에서 엽서와 달력을 고른다든지 어깨 너머로 씨디를 구경하
는 것보다는 나았다.
광장에는 다섯 사람의 밴드가 모여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그 어설픈 연주가 들어 있는 음악 테이프를 팔았다. 버버리 상표의
바바리코트를 똑같이 입은 점잖은 부부가 그것을 샀다. 체코 민속음악은
서정적이에요, 안 그래요? 그럼. 스메타나의 고장이잖아. 레닌필 듣다가
체코필 연주 들어봐. 얼마나 부드럽고 서정적인데. 이런 식의 말들을 주고
받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 곁을 지나쳐갔다.
치렁치렁한 옷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남자의 동상 쪽으로 가보았다. 아
마 비행기 안에서 만난 안경 낀 여자가 그것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체코
종교 개혁가의 동상인 모양이었다. 그 아래 벤치에는 많은 사람들이 쉬어
가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서로 엉킨 부랑자 같은 남자 하나는 개혁가의
발치에 있는 계단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것을 스케치북에 데생하며 서 있
는 남자도 차림새로는 부랑자와 다른 점이 없었다.
소제목 : 나는 두 여자가 나를 발견하기 전에
GIRL (8)
정시가 되자 사람들이 시 청사의 시계탑에 모여들었다. 시계 위에 난 작
은 창문이 열리고 인형이 된 예수의 열두 제자가 나타나 인사를 했다.
광장 한쪽에 늘어선 집시들의 노점에는 조잡한 귀걸이와 마녀인형, 칼
따위를 팔았다. 그것들을 건성으로 구경하며 어슬렁거리는 내 귀에 갑자기
한국말이 들려왔다. 저것이 고딕 양식의 틴 교회고요, 저기 보이는 게 로
코코 양식의 킨스키 궁전입니다. 나스타샤 킨스키가 아닙니다.
가이드를 빙 둘러싸고 열심히 설명을 듣는 무리는 한눈에 보기에도 한국
단체 관광객이었다. 그 중에는 낯이 익은 여자 둘도 끼어 있었다. 검은 안
경테의 여자는 검은 바지에 검은 가죽점퍼 차림이었다. 얼굴이 보름달 같
던 그녀의 친구는 이제 보니 키가 아주 컸다. 납작한 천 운동화를 신었는
데도 거기 있는 어떤 남자보다 큰 것 같았다. 청바지에 스웨터를 입고 소
매 없는 파카를 걸친 그녀는 해변에서나 볼 수 있는 챙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굴과 달리 그녀의 몸은 아주 가늘었다.
프라하는 중세가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왠 줄 아시는 분? 가이드가
물었다. 관광객들은 대답하지 않고 서로를 쭈볏거리며 쳐다보았다. 가이드
는 그것이 더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모르시겠어요? 힌트. 세계대전하고
관계가 있습니다. 이래도요? 아, 쉬운 건데 모르시는군요. 1938년 나치가
공격하자마자 프라하는 바로 항복을 해버렸지요. 바르샤바 같은 데는 끝까
지 저항을 해서 도시가 몽땅 부서졌지만 프라하는 그 반대라는 겁니다.
나는 두 여자가 나를 발견하기 전에 그 자리를 벗어났다.
청년 둘이 내게로 다가왔다. 빨간 색과 금색의 궁정식 귀족의상에 반바
지, 흰 타이즈를 신었으며 회색 가발을 검은 끈으로 뒤로 묶고 있었다. 그
들은 전단을 내밀었다. 모짜르트 음악회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이
모짜르트 주간이라서 입장료가 할인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헐렁한 바지에 허름한 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전단을 가지고 왔다. 그 전단 역시 초대장이었는데 속눈썹과 젖가슴이 과
장되게 그려진 여자 얼굴 옆에 '깜짝 놀랄 멋진 쇼'라고 적어놓았다. 틀림
없이 만족할 것이라는 글귀를 번개가 치는 듯한 테두리 안에 넣어 강조했
고 숙녀도 환영이라는 말까지 들어 있었다. 나는 귀찮아하며 그것들을 쓰
레기통까지 가지고 가서 버렸다.
나는 프라하성에는 가지 않았다. 구시가로 가는 길에 카프카의 얼굴이
내걸린 기념관을 보았지 만 거기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것이 아니었
다.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
러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치 단체관람을 하러 간 영화관 속에서 퀴퀴한
시멘트 냄새와 땀냄새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영화관을 가
득 채우며 바글대는 인간들이 모두 나와 똑같은 교복을 입은 동급생들뿐이
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 것 같던 기분 말이다. 어쩐지 답답해지
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도 쉬게 하고 이곳에 왜 왔는지도 생각해보기 위해
동상 아래 잠든 남자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남자는 눈을 뜨고 나를 흘끗
보더니 불쾌하다는 듯 돌아누웠다.
조금 길게 생각해봤지만 나는 왜 내가 여기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내일 당장 떠나지 않을 이유 또한 알아내지 못했다.
소제목 :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GIRL (9)
호텔로 돌아와서 나는 비행기 시각을 알아보았다. 불현듯 한 가지 사실
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이내 프라하를 떠났을 것이다. 그 한 가지 사실이
란 <왼쪽 다리를 세우고 앉은 여자>의 행방과 관련된 것이었다. 쉴레의 초
록옷 소녀, 왼쪽 다리를 세우고 앉은 그녀는 프라하에 있었다. 나로드니
화랑이었다. 나는 그 그림 옆에 적혀 있던 갤러리라는 영문 글씨체까지 기
억할 수 있었다.
그날 밤은 잘못 걸려온 전화 따위는 없었다. 꽤 깊이 잤다. 한밤중에 한
번 눈을 뜨기는 했다. 창 쪽을 보니 또 밤하늘에 왕관을 쓴 백조가 날아와
있었다. 나는 안심하고 다시 잠들었다. 왜 안심했는지 생각해보고 싶었지
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꿈에 그녀가 왔던 것이다.
-----조조가 돌아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알고 있어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사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가슴만 터질 듯이 아팠다.
-----아주 먼 곳까지 갔었대요. 금방 돌아올 수가 없었나봐요.
-----당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인가요.
-----조조는 다 알아요. 뭐든지요. 그리고 제 다리를 갖고 왔어요. 저는
이제 걸을 수 있어요.
-----그럼 나하고 같이 가요.
-----어디로?
나는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러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 입
술은 말더듬이가 첫 발음을 할 때처럼 심하게 떨렸다. 나는 기를 쓰고 입
술을 움직였다. 뱃속에서 올라오던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는 숨을 쉬지 못
했다. 누군가 내 심장을 꺼내서 풍선 불 듯이 천천히 불고 있는 것 같았
다. 풍선은 점점 팽창했다. 숨이 막혀갔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말해야
한다. 어디로? 그녀는 물었다. 나는 대답해야 한다----. 드디어 풍선이 터
질 때와 비슷한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내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져나왔
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꿈이 깬 것뿐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누군가 필요해----그것도 진이 잘 부르는 노래 속에 포함돼 있다. 도와
줘. 누군가 필요해. 도와줘. 그렇다고 아무라도 좋다는 건 아냐. 도와줘.
내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네가 알잖아. 땅 위에 다시 발을 딛을 수 있게
도와줘.
나는 꽃냄새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시 엎드려 있었는데 어쩌면
조금 울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나로드니 화랑 같은 곳에는 절대 가지 않
겠다고 마음먹었다. 돌아가서 진의 약혼식에 참석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
다. 그녀는 조조의 세계에 속해 있다. 내게 그녀는 없다.
소제목 : 저는 사람의 인연에 큰 의미를 두거든요.
I'M LOOKING THROUGH YOU (1)
I'm looking through you, where did you go
I thought I knew you, what did I know
전날처럼 나는 식당의 창가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밖을 보며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요구르트를 생각없이 떠 먹었다. 누군가 등뒤에서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돌아보니 얼굴이 둥글고 키가 큰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앉아도 돼요?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다. 스님들 털모자가 운동모로 바뀌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오
늘 일정이 어떻게 돼요? 내 대답도 듣기 전에 앞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으
며 그녀가 밑도끝도없이 물었다. 나는 그녀가 어떻게 해서 이 호텔에 불쑥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또한 궁금하지도 않았다. 단체 여행객들이 이
곳으로 호텔을 옮겼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녀에게 다른 볼일이 있어 왔다
하더라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애매하게 글쎄요, 라고 한 뒤
다시 창밖으로 얼굴을 돌리려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저하고 같이 가요.
마치 창밖으로 향하려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아 자기 쪽으로 돌려
세우는 듯한 급한 말씨였다. 친근하기도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이 여자와 가까워지기라도 했나. 내 목소리는 좀 퉁명스러웠다.
-----난 관광하러 온 게 아녜요.
-----그런 거 같았어요.
그녀가 말을 받았다.
-----구경도 안 하고 사진도 안 찍고. 어제 보니까 프라하 성에도 안 올
라가더라구요.
-----어제?
-----구시가 광장하고 골든 레인에서요.
나 혼자만 그녀들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호텔에 오게 된 경위도 스스로 설명했다.
-----저는 단체 여행객이 아녜요. 같이 온 친구 때문에 웬만하면 그 팀에
합류하려고 했죠. 하루 지내보니 역시 단체는 갑갑해요. 그래서 혼자 떨어
져나온 거예요.
그런 다음 그녀는 맑은 소리로 웃었다.
-----사실은요. 당신을 찾으려고 프라하 시내 호텔의 전화번호를 다 뒤졌
어요. 혼자 묵고 있는 한국 남자는 생각보다 찾기 쉽던데요. 여섯 번째 전
화에서 이 호텔이 걸렸으니 운도 좋았구요.
나는 그녀가 왜 나를 찾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속을 안다는 듯 그
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사람의 인연에 큰 의미를 두거든요.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았
으니 당신 옆방에 묵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소제목 : 제 눈을 보는 건가요?
I'M LOOKING THROUGH YOU (2)
말을 마친 그녀는 '안 그래요?'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손가락 끝으
로 탁자를 톡톡 쳤다. 몹시 가늘고 긴 손가락이었다. 손가락만이 아니라
그녀의 몸 전체가 마르고 길었다. 수수깡을 이어붙인 듯한 몸통 위에 보름
달처럼 얹힌 통통한 얼굴이 몹시 부자연스러웠다.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일
부러 메주콩처럼 물에 담가 불려놓은 것 같기도 했다. 윤곽이 뚜렷하지 않
다보니 돌에 부조된 마애불의 얼굴처럼 초탈해 보이는 점도 있었다.
그보다도 더 기묘한 것은 그녀의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똑바로
나를 향해 있는데도 허공을 쳐다보는 듯했다. 두 눈의 초점이 맞춰지지 않
는 것이다. 분명 양쪽 눈의 시력차가 크게 나는 눈이었다. 각막이 화산처
럼 부옇게 솟아올라 있는 것이 왼쪽 눈은 원추각막 같아 보였다.
-----제 눈을 보는 건가요?
이번에도 그녀는 내 마음속을 정확히 짚었다.
-----왼쪽 눈은 시력이 나오지 않아요. 빛과 어둠을 구별할 뿐이죠. 뭔가
가 눈앞에서 움직여도 희미하게밖에 못 느껴요. 하지만 괜찮아요. 오른쪽
눈이 정상이니까요. 거리감각이 없어 실을 꿰거나 당구공 맞추는 건 잘 못
하지만 볼링이나 농구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어쨌든 오늘 저하고 같이 가
는 거죠?
-----어디를 가는데요?
어쩐지 나는 대꾸를 하고 말았다.
-----프라하성에요.
그녀의 대답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거침없게 나왔다.
-----당신은 프라하성을 찾아온 거 아닌가요? 비행기에서 내릴 때 당신
가방 안에 카프카의 <성>이 있는 걸 언뜻 봤어요. 그 책 저도 조금 읽어본
적 있어요. 성 밖을 헤매기만 하고 끝내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이야기
죠? 당신도 그 주인공처럼 프라하성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건가요?
나는 피식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거래요. 그런데 그
보다 더 나쁜 일이 뭔지 아세요?
-----글쎄요.
-----바로 원하는 걸 얻는 일이요.
내가 눈을 몇 번 깜박이자 그녀는 오스카 와일드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
고 말해주었다.
-----원하는 걸 얻으면 누구나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게 되죠. 원하고
있을 때까지만 그것이 중요한 거구요. 누구를 애타게 만나고 싶다고 해요.
막상 만나면 열망은 사라져버리잖아요. 차라리 만나고 싶어할 때의 열망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하지만 그런 건 다 평범한 얘기예요.
소제목 : 특별한 것이 있다고 믿어요?
I'M LOOKING THROUGH YOU (3)
그녀의 묘한 눈빛이 허공 어딘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 채로 중
얼거리듯이 내게 물었다.
-----특별한 것이 있다고 믿어요?
-----어딘가 있겠죠.
-----그래요. 지금 만나고 있는데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사라지지 않는
특별한 존재가 분명 있을 거예요. 혹시 일기를 쓴 적 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매일 일기를 써요. 제 일기에는 비밀이 아주 많이 적혀 있어
요. 이런 것도 써 있죠.
그녀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의 표정은 조그만 웅덩이에 미꾸라
지를 숨긴 어린애 같기도 했고 유리구슬 속에 온 세상을 집어넣고 들여다
보며 점을 치는 늙은 짚시 같기도 했다.
-----특별한 것은 존재한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큰 비밀이다, 이렇
게요. 처음 봤을 때 당신도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저절로 알아지는 그런 게 있잖아요. 그래
서 당신이 출입국 서류를 쓸 때 제 수첩에 당신 이름을 적어놓았죠. 당신
이름은 준이에요. 그렇죠?
그녀가 내 눈앞으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인사하죠. 제 이름은 미나예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실크 손수건처럼 부드럽게 차가
웠다.
-----미나?
-----예명이에요. 모델이거든요.
그러고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처럼 키가 크고 깡마
른 여자가 좁은 평균대 위를 걷는 듯한 걸음걸이로 어깨를 우쭐대며 무대
에 나타났다 들어가는 패션쇼 장면을 바둑방송의 채널을 돌리다 몇 번쯤
본 기억이 났다. 그렇다 해도 보름달 같은 얼굴만은 도무지 모델이라고 여
겨지지가 않았다. 문득 검은 뿔테 안경에 검은 옷을 입고 있던 몸집 큰 그
녀의 친구가 떠올랐다. 이런 식이라면 주방 유니폼 외에는 어떤 옷도 어울
릴 것 같지 않은 그 여자도 모델일는지 모른다.
내 생각을 다 안다는 듯이 그녀가 말해주었다.
-----그애는 아녜요.
-----네?
-----그애는 텍스타일 디자이너라구요.
-----신학 대학에 다니거나 전도사의 부인이 아니었어요?
내가 처음으로 농담을 하자 그녀는 또 한번 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애는 곤충도감을 수집해요. 온갖 벌레의 생김새에서 옷감의 색깔,
무늬에 대한 착상을 얻는대요. 거미를 제일 좋아하고, 애벌레나 나비의 보
호색도 연구해요. 퇴근하면 집에서 벌레만 들여다보고 있죠. 아니면 액션
비디오를 보거나.
그녀는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작은 비명을 질렀다.
소제목 :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I'M LOOKING THROUGH YOU (4)
그녀는 뺨을 맞은 사람처럼 반사적으로 얼굴을 얼른 옆으로 돌렸고 몸을
움츠렸다.
그녀 못지 않게 놀란 사람은 커피 주전자를 들고 있던 여급이었다. 그
예쁜 체코 아가씨는 무엇엔가 한눈을 팔다가 팔뒤꿈치를 그녀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 부딪쳤던 것이다. 그 바람에 여급이 들고 있던 커피 주전자의 주
둥이가 기울어져 그녀의 모자 위로 커피가 쏟아졌다. 다행히 많이 쏟아진
것은 아니었다. 호들갑스럽게 사과를 하는 여급에게 그녀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여급이 주방 쪽으로 사라진 뒤 그녀가 내게 말했다.
-----커피 냄새를 맡으니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등받이에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그녀의 발에는
흰 운동화가 신겨져 있었다. 운동화에도 커피가 튀어 얼룩이 몇 방울 눈에
들어왔다. 오래 전 나는 콜라가 튄 흰 운동화를 본 적이 있었다. 내가 그
녀를 똑바로 쳐다보자 각막이 고르지 않게 솟아오른 그녀의 왼쪽 눈이 나
를 마주 쳐다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이 차려져 있는 긴 테이블 앞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커피 주전자가 있던 자리는 빈 쟁반뿐이었다.
홍차를 마실까 생각하는 사이 예쁜 여급이 새 커피로 채워진 커피 주전자
를 가지고 왔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커피 주전자 앞에 재빨리 줄을 만들었
다. 나도 맨 끝에 섰다. 차례를 오자 나는 쟁반에 커피잔을 두 개 놓은 다
음 뜨거운 커피를 따랐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앉았던 의자는 통로 쪽으로 부주의하게 끌어당겨져 있었다. 마치
무엇에 쫓겨 급히 떠난 모양 같았다. 나는 내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천천
히 커피를 마셨다. 커피맛은 좋은 편이었다. 이제부터 뭘 할지 정해진 덕
분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건지도 모른다.
방으로 돌아온 뒤 약 30분쯤 전화를 기다렸다. 그녀는 전화하지 않았다.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저하고 같이 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고 그녀가 틀림없이 자기의 말을 지키리라 여겨졌던 것이다. 왜 그
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절로 알아지는 그런 거 있잖아요. 그녀의 말이
맞을 것 같았다.
남방셔츠를 하나 더 겹쳐 입고 재킷을 걸친 다음 나는 호텔을 나왔다.
전날처럼 구시가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골든레인을 걸어올라갈 때는
바닥에 깔린 돌의 모양을 쳐다보기도 하고 작은 상점들도 구경했다. 모자
가게 앞에서 제일 오래 머물렀다. 랍비의 모자도 있고 북구 사람들이 자주
쓰는 털모자, 사냥 모자, 운두가 높은 검은색 귀족 모자도 있었다. 여러
개의 고깔을 색색으로 이어붙여 끝에 방울을 단 장난스러운 모자를 나는
한참 쳐다보았다. 그녀가 쓴다면 원뿔형의 검은색 마녀 모자와 고깔모자
중 어느 것이 더 나을까 견주어보기도 했다.
광장을 가로질러 카를 다리 앞에 이르렀을 때는 두 시간쯤이 지나 있었
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소제목 : 그녀가 내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물었다.
I'M LOOKING THROUGH YOU (5)
그녀는 청바지에 짧은 부츠 차림이었다. 크림색의 헐렁한 스웨터 안에
목까지 올라오는 푸른색 폴라티를 입고 있었고 하얀색 캡을 썼다. 미리 약
속시간과 장소를 정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다
가왔다.
날씨는 맑았고 시월 하늘은 깨끗했다. 우리의 머리 위로 바람이 가볍게
스쳐갔다.
블타바는 아름다운 강이었다. 강 옆으로는 나무들 사이로 붉은 지붕과
흰 벽, 그리고 창이 많은 집들이 보였다. 강 위에는 여기저기 흰색 보트가
매어져 있었다. 유람선의 나무갑판 위에는 흰 의자들이 나란히 쌓여 간이
카페가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다리 입구에 섰다. 건너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레인캐슬의 복도
처럼 구부러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리 중간이 불룩 솟아오르게 설계된
모양이었다. 다리 양쪽에는 성인들의 동상이 죽 늘어서서 먼지와 새똥을
뒤집어쓴 채 관광객들을 굽어보았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석상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석상을 흉내내서 팔을
쳐들어보기도 했다. 그러고는 다리 쪽으로 가서 난간에 몸을 기댔으므로
나도 그렇게 했다.
강을 끼고 펼쳐진 중세의 시가지를 나는 이렇다할 감흥 없이 내려다보았
다. 나 자신이 그 풍경 안에 들어와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엄청나게
크고 생생한 그림엽서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후에라도 나는 여행을
자주 하게 되진 않을 것이다.
두 팔을 난간 밖으로 뻗고 있던 그녀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물었
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죠?
나도 그녀를 쳐다보았다. 독심술이라도 배운 거냐고 물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묻기로 마음먹는다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들
을 굳이 정상적인 개념으로 해득하기 위해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그냥 이
상하다고 생각해버리는 편이 훨씬 간단하고 또 합당한 일이었다. 관심없는
일에 철저히 무식한 사람의 변명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는 여행을 좋아해요. 특히 미술관과 화랑을 많이 다녔죠. 인물화,
석상 같은 걸 주로 봐요. 아름다운 육체들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포즈를 보면 넋을 잃어요. 그래서 모델이 됐는지도 모르겠
어요. 그림이나 동상에서 마음에 드는 포즈를 발견하면 그게 머릿속에 들
어와 박혀요. 도록을 사다놓고 몇 시간이고 거울 앞에서 연습을 하곤 했거
든요. 처음에는 성모 마리아나 여신들의 포즈를 좋아했죠. 화살통을 등에
멘 다이아나 여신이 사냥개를 향해 오른팔을 드는 모습, 비스듬히 선 채로
한쪽 다리를 타올로 감싼 목욕하는 비너스. 그런데 그림을 많이 보게 되니
까 생각이 차츰 바뀌더라구요.
-----어떻게요.
-----그림 속의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여인의 모습을 연출
했던 모델의 모습을 보게 된 거예요. 모델이 슬픈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
아요? 모델은 절대로 자신을 통해 만들어낸 그 아름다운 존재에 도달할 수
없잖아요. 모나리자의 모델이 정말로 성모 마리아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
예요. 모델에게만큼은 위대한 작품의 아름다움과 존재의 완성이 허상일 뿐
이죠.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고부터 그림 속의 여인들이 더 아름답고 슬프
게 느껴졌어요. 불균형하고 뭉개지고 짓밟힌 여인의 모습일수록 더 아름다
운 것 같았구요.
소제목 : 문 페이스(Moon Face)라면,
I'M LOOKING THROUGH YOU (6)
그녀는 불현듯 웃음을 지었다.
-----제 얼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글쎄요.
-----그 병에 걸리면 달처럼 점점 이렇게 얼굴이 차올라요. 달의 보이지
않는 검은 부분, 그것이 제 생명의 시간인 셈이에요.
문 페이스(Moon Face)라면, 그녀가 말하는 병이란 루프스를 가리키는 모
양이었다. 루프스는 면역체계의 이상증세였다. 어떤 병균에라도 감염되면
생명은 보장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폭발물이나 값비싼 크리스탈 그릇이 그
렇듯이 자신의 몸을 되도록 옮기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소독된 방에서만
살 수는 없다 해도 외출이나 무리한 활동은 절대 금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물론 가서는 안 된다. 설령 영혼을 구원해주는
교회라고 해도 말이다. 꼭 가야만 한다면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데 아마 자
기 결혼식에 가는 날까지 그래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밀폐된 비행기를 탔고 한 해에 전세계 온갖 사람이 1억
명이나 모여드는 도시를 버젓이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었다.
나는 무슨 말인가 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왼쪽
시선은 허공에 버려두고 오른쪽 눈만으로 나를 쏘듯이 쳐다보며 그녀는 천
천히 모자를 벗었다.
그녀의 머리는 민둥머리였다. 내과병동에서 흔히 보았던 약물치료에 지
친 말기 환자의 머리였던 것이다.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신선한 대기를 들이마시듯 두 팔을 벌
리고 가슴을 내밀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한쪽 손에 들린 흰 모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크림색 스웨터 차림에 두
팔을 벌리고 선 그녀의 포즈. 그것은 조금 전 그녀가 흉내내던 성인의 석
상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하늘과 강물 모두 푸르고도 맑았다.
나는 갑자기 난간을 붙잡았다.
강물에 대고 토하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죽을 찢는 듯한 두통뿐이었다. 초록색 옷자락 같은 강물을
한참동안 쳐다본 후에야 겨우 머리를 쳐들 수 있었다. 저만치에서 노점을
구경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카를 다리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다리 양쪽으로 길게 펼쳐진 노점에는 머리핀과 브로치, 수채풍경화 따위
를 팔았다. 엽서나 집시 퍼즐 따위 조잡한 물건들이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어떤 청년의 노점 앞이었다. 청년은
길고 검은 외투자락을 가볍게 흩날리며 다리 난간 쪽에 서서 피리를 불고
있었다. 몰락한 귀족처럼 아름답고 우수가 있는 청년의 흰 이마 위로 마침
머리카락이 몇 가닥 흘러내려와 있기도 했다. 반쯤 눈을 감고 두 손으로
피리를 잡고 부는 청년 앞으로 모여 있던 사람들은 청년이 피리연주를 마
치자 박수를 치고 피리를 사기 시작했다. 그녀도 목걸이처럼 기다란 줄이
달린 그 피리를 사려는 것 같았다.
그때 가죽점퍼를 입은 외국 남자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인상이 거칠어 보이는 남자였다. 남자와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았
다. 서로 아는 사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고개를 저
었고 남자는 떠났다.
소제목 : 당신 눈 속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아요.
I'M LOOKING THROUGH YOU (7)
나는 다시 강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등뒤에서 새소리 비슷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그녀가 피리를 입에 물
고 있었다. 청년처럼 곡을 연주하지는 못했지만 제법 듣기 좋은 맑은 소리
를 냈다. 그녀는 줄을 자기 목에 건 채로 피리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
바람에 우리의 이마는 서로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녀에게서는 꽃냄새가
났다. 눈동자 속은 놀랄 만큼 투명했다.
피리는 성냥갑만한 하얀 도자기로 만들어져 있었다. 표면에는 세라믹 플
륫이라고 새겨졌고 유약을 덧칠하지 않은 분청이었는데 마름모꼴 모양에
구멍이 세 개 뚫려 있었다.
-----여기를 입에 대고 부는 거래요.
그녀가 주둥이 부분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립스틱도 침 묻은 자죽도 없었다. 그녀는 목에 걸고 있던 줄을 벗더니 피
리를 내게 주었다.
-----선물이에요.
기억이 맞다면 내가 받은 첫번째 선물은 열아홉 살 때 여자애한테 받은
털장갑이었다. 베이지색에 붉은 가로줄이 세 개 정도 그어진 장갑이었다.
한두 번 그 장갑을 끼었던 것 같다. 물론 소중히 하지는 않았다. 곧 잃어
버린 걸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그 겨울이 지나고 얼음이 녹아내리던 어떤
봄날 내가 살던 낡은 집의 처마 아래로 쥐가 떨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
다. 직접적으로는 중력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구멍이 뚫린 천장을 들
여다보게 되었고 눈도 뜨지 못한 반투명하고 빨간 새끼쥐들이 꼬물거리고
있는 걸 보았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겹쳐 있는 그 빨간 새끼쥐들이 깔고
누워 있는 것은 여자애가 선물한 장갑 한 짝이었다. 어미쥐가 물어간 모양
이었다.
그 뒤로 나는 선물 같은 걸 주면 받기는 하지만 달가워하지 않는다. 반
가워한 선물이 있다면 단 하나, 내가 끝까지 그 거취에 관심을 갖고 관리
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진의 선물뿐이다. 그리고 그럭저럭 나는 선물을
한 번도 준 적이 없는 채로 남에게 선물을 주지 않기로 결심해버렸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잃어버려도 상관없어요. 간직해달라고 주는 게 아녜요.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어떻게 알죠?
-----글쎄요.
-----혹시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거 아녜요?
정말로 나는 점점 그런 의혹을 강하게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처
음 보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 '누군가'이다. 내 말에 그녀는 가볍게 웃었
다.
-----아뇨. 당신한테서 어떤 표정을 읽었을 뿐이에요. 죽을 정도로 심하
게 앓고 나면 사람은 신통력이 생기나봐요. 아픈 사람을 쉽게 알아보죠.
-----나는 어디가 아프죠?
-----눈.
-----눈?
-----당신 눈 속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아요.
소제목 : 나는 침대로 들어갔고 그리고 잠이 들었다.
I'M LOOKING THROUGH YOU (8)
그녀가 다시 말했다.
-----누구를 진정으로 좋아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 말예요. 그런 삶은 끔
찍할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나쁜 마법에 걸린 건지도 모르죠. 사랑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고 그 사실을 의식하며 살아갈 수 없다면요, 잠에서 깨
어나고 다음날을 맞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죠?
눈이 떠지니까 잠에서 깰 뿐이다. 인간은 시간이란 말 위에 올라타 있
다. 말이 가면 말 위에 탄 인간이 나아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내려버리
지 않는 한 말이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데에야 인간은 살아가지 않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새로운 날이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인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그녀가 말했다.
-----어릴 때 저는 우주선이 나오는 만화영화를 무서워했어요. 수많은 은
하계가 등장하는데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존재가 두려웠던 거죠. 우주
미아 얘기가 특히 무서웠어요.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같은 궤도를 되풀이
해서 맴돌아야 한다는 얘기 말예요. 그리고 창고에 엄청나게 많이 쌓여 있
는 쌀가마니 얘기도 무서워했죠. 쥐가 와서 한 톨 물어가고 또 한 톨 물어
가고 또 한 톨, 한 톨, 한 톨----한참 듣다 보면 끝나지 않고 반복되는 이
야기라는 걸 깨닫게 되고 순간 소름이 쫙 끼치는 거예요. 인간이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는 카를 다리를 다 건너갔다.
약간 외진 계단길로 접어들었다. 올라가기는 힘이 들었지만 오래된 집과
카페를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 길에는 사람이 적어 좋았다. 계단은 축
축했고 끝없이 이어졌다.
장난감 박물관이라고 쓰인 작은 집 근처에서였다. 계단에서 한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다리 위에서 그녀와 얘기를 나누던 남자였다. 남자가 그
녀 앞에 와서 멈춰 섰고 그녀는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할 얘기가
있어 보였으므로 나는 걸음을 빨리 해서 먼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니 그들은 싸우는 듯했다. 나는 길이 굽어지는 모퉁이에 서서
기다렸다. 돌벽에 기대 담배 한 대를 피웠다. 그리고 다시 보았을 때 그들
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프라하성에 도착하여 다시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성당의 높은 첨탑 앞에 섰다. 아치형 문이
있었고 어느 성당이나 그렇듯이 문마다 성서 이야기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성당 안은 몹시 어두웠다. 외기는 차단되고 신의 형상을 한 스테
인드 글라스를 통과한 빛의 굴절만이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그림과 조각
과 십자가를 구경했다. 기도를 하기도 했다. 제단 아래에는 무덤이 있었
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도 허리를 깊이 구부리고 성호를 그었다. 그 사
람들 틈에 그녀가 끼어 성호를 긋는 게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그
녀가 아니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흥미없는 성당을 그만 빠져나왔다.
길은 다시 광장으로 이어졌다.
구시가 쪽으로 걸어내려오는데 전날 만났던 허름한 셔츠의 아저씨가 또
전단을 나눠주었다. 속눈썹과 젖가슴을 강조한 여자의 그림이 있는 '환상
적이고 멋진 쇼'에의 초대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리고 호텔로 돌아갔다. 공항에 전화를 해보았다. 직항노선이 없었으므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잡기가 꽤 복잡했다. 어쨌든 비행기는 이틀 후에나 탈
수 있는 모양이었다. 샤워까지 하고 나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이었다.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침대로 들어갔고 그리고 잠이 들었다.
소제목 : 어디에서나 흔히 보는 도시의 밤이었다.
IN MY LIFE (1)
There are places I remember
All my life though some have changed
All these places have their moments
With lovers and friends I still can recall
눈을 떠보니 그 사이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
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탁자와 옷장, 전화기 따
위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혀 식
욕이 일지 않았으므로 서둘러 움직일 이유는 없었다. 나는 처마 밑에서 빗
줄기를 쳐다보는 사람처럼 꼼짝않고 어둠 속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렇
게 반 시간 정도가 흐른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먼저 의자 위에 걸쳐놓았던 바지를 입었다.
재킷은 옷장 안에 걸어놓았었다. 재킷을 꺼내다가 불현듯 나는 그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허름한 셔츠의 남자가 나눠주었던 전단이 손에
잡혔다. 주소가 적혀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나는 신발을 신었다.
밤공기가 꽤 차가웠다.
어디에서나 흔히 보는 도시의 밤이었다.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전단을 꺼내 보여주자 택시 운전사는 자세히 보
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사가 나를 내려놓은 곳은 어둡고 좁은 길
모퉁이였다.
네온이 켜 있는 조그만 간판이 보였다. 그 앞에 남자 둘이 서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남자의 얼굴을 금방 알아보았다. 전단을 나눠주던 남자였
다. 불룩한 배와 얼굴 모두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훨씬 나이들어 보였고 조
금은 교활하거나 수상쩍은 분위기도 풍겨나왔다.
쇼를 하는 극장은 지하에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
다. 계단이 끝나자 좁은 복도가 나왔다. 손님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벽에 붙은 긴의자에 앉아 맥주병을 하나
씩 든 남자들에게서는 땀냄새에 섞인 심한 노린내가 났다. 그들의 표정은
장난스럽기도 하면서 진지하기도 했다. 거칠고 호방한 한편 은밀히 두려워
하고 있기도 했다. 어쨌든 기대를 억누르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복도를 등지고 그들 옆에 앉았다. 갑자기 그들의 말소리가 뚝 끊어
졌다. 나 때문은 아니었다. 모두들 내 등뒤를 흘끔거리는 눈치였다. 돌아
보니 한 여자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아주 키가 컸다. 굽높은 검은색 통굽 구두를 신고 허벅지까지 올
라오는 검은 스타킹을 신었는데 어둠 속에서 언뜻 보기에는 다리가 없이
걸어오는 것 같았다. 윗도리는 입지 않았다. 앞부분을 끈으로 묶게 돼 있
는 검은 레이스 블래지어 속으로 젖꼭지가 비쳐보였다. 아랫도리 역시 끈
으로 묶는 검은 레이스 팬티 위에 반투명한 천을 걸쳤을 뿐이었다.
여자의 다리는 너무나 길어서 불균형하고 기괴하게 보였다. 허리까지 내
려와 찰랑거리는 금발은 가발처럼 뻣뻣했으며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었
다.
소제목 : 그들은 더 자극적인 걸 원했다.
IN MY LIFE (2)
여자는 복도 중간에 멈춰 서더니 갑자기 벽 안으로 사라졌다.
그곳에 문이 있다는 걸 몰랐던 남자들은 거의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그제서야 할일이 생각난 듯이 손에 들고 있던 맥주병을 기울였
다. 여자는 분장실 같은 데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차임이 울렸다. 시작시간이었다. 남자들과 나는 귀퉁
이가 해어져 허옇게 속이 드러나 보이는 무거운 검은색 인조가죽 문을 열
고 들어갔다. 극장 안은 어둡고 연기로 자욱했다. 믿을 수 없게도 그 안에
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입구 가까운 쪽에 아무 자리나 가 앉았다. 시골 극장 같은 낡
은 무대에 희미한 불이 켜져 있었다. 커튼이 움찔거리며 천천히 올라갔다.
무대는 초라했다. 한가운데에 나무의자가 하나 놓여 있을 뿐 아무런 무
대장치도 없었다. 전반적으로 어두웠고 조명이라고는 나무의자를 비추는
백열등 하나뿐이었다.
환타지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무대 뒤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목소리는 낮고 음울했다. 쇼가 아니라 인민재판에나 어울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느린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촌스럽고 단조로운 음악
이었다. 그렇다고 섹소폰 소리처럼 나른하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 밤의 요정을 소개합니다. 자, 나오세요, 미쉘! 사회자는 울 듯이
갈라지는 소리로 출연자를 소개했다. 조금 전 대기실에서 보았던 검은 스
타킹의 여자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가면의 눈은 치켜 올라가고 뺨에는 번
개 모양의 줄이 쳐졌으며 이마에 호랑이의 눈 같은 보석이 번쩍였다.
여자는 음악에 맞춰 몸을 비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자신의 젖가슴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몸을 뒤로 젖히고 다리를 한 짝씩 들어올리기도 했다.
음악이 조금 빨라지면서 여자의 춤도 조금씩 격렬해져갔다. 높이 쳐든 다
리를 브이자로 한껏 벌리고는 그 가운데에 손을 집어넣었다. 머리카락을
흔들며 빙빙 돌리거나 한쪽 다리를 의자에 올리는가 하면 의자 옆에 엎드
려 몸을 뒤챘다. 객석에서는 야유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욱 자극적인 걸 원했다.
갑자기 여자가 춤동작을 멈추고 객석을 쳐다보았다. 백열등 조명이 다가
가서 여자의 가면을 가까이 비췄다. 여자는 무대를 내려오더니 야유를 했
던 한 남자 앞에 가서 섰다.
키가 너무 큰 데다 검은 속옷과 스타킹으로 감싸인 여자의 모습은 공포
심을 줄 정도로 기괴했다. 남자는 여자를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여자
는 공격적으로 한 발 다가서더니 남자의 얼굴 가까이에 가슴을 밀어붙였
다. 객석은 긴장되었다.
그제서야 사회자의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멋진 신사분. 오늘 밤
미쉘은 당신을 선택했군요. 어서 미쉘의 옷을 벗겨주세요. 어서요! 그제서
야 남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가 한껏 내민 가슴을 더듬더듬 만져서
브래지어의 끈을 풀어주었다. 관객들이 박수를 쳤다. 앞가슴이 풀어헤쳐져
젖가슴을 드러낸 채 여자는 다시 무대로 올라갔다.
여자는 블래지어를 벗어 던졌고 이내 알몸이 되었다. 무대 반대편에서
남자가 하나 나타났다. 콧수염 때문인지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보통 체구
의 남자였다. 사회주의 국가 관청의 고지식하고 소박한 하급 관리 같은 차
림의 남자는 이런 무대에 서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정상적으로 보였다.
소제목 : 여자가 다가가 남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IN MY LIFE (3)
여자가 다가가 남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팬티까지 벗겨졌을 때 남
자는 만세를 부르듯이 양팔을 위로 쳐들었다. 옷을 다 벗고 난 뒤의 남자
는 옷을 입고 있을 때보다 더 고지식하게 보였다. 남자의 몸 가운데에 솟
아 있는 페니스 역시 남자 자신처럼 대본의 순서를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
의욕도 없는 것 같았다.
둘은 기계적으로 몸을 밀착하고 함께 춤추기 시작했다. 여자가 무릎을
꿇고 페니스를 입에 넣었다. 얼마 안 가 남자는 여자의 몸 위에서 여자와
결합한 채 꽤 빠른 동작으로 춤을 추었다. 그러나 국민체조처럼 뻣뻣한 그
동작은 권태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잘 보셨습니까.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행복해질 차례
입니다. 사회자는 다음 순서를 소개했다. 자, 용기 있는 분, 무대로 올라
와주십시오. 오늘밤이 행복해집니다.
옆자리가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 나와 같이 대
기실에 있던 땀냄새가 많이 나는 남자 중의 하나가 동료들의 소란스러운
독려를 받으며 무대로 뛰어올라갔다. 가면의 여자가 새로운 남자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조금 전처럼 남자의 옷을 벗겨서 던지기 시작했다. 남
자의 점퍼, 벨트, 청바지, 양말 두 짝---웬일인지 여자는 거기에서 동작을
멈췄다.
불빛이 남자를 가까이 비췄다. 남자는 요란한 날염 티셔츠와 팬티바람으
로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린 채 우뚝 서 있었다. 팬티 속의 페니스가 뻗쳐
있는 것이 음영으로 뚜렷이 나타났다. 팡파레 같은 음악이 크게 울렸다.
둥둥 하는 북소리 속에서 여자가 남자의 팬티를 단숨에 끌어내렸다. 남자
의 페니스는 제막식에서 베일을 벗은 걸작 조각품처럼 쏟아지는 빛을 받으
며 객석을 향해 위용을 드러냈다.
그때 돌발상황을 알리려는 듯 무대 뒤에서 귀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음악이 터져나왔다. 조명이 재빨리 무대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여자가 하
나 더 나타났다. 여자는 첫번째 여자가 나타날 때와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검은 속옷에 검은 스타킹, 그리고 로봇처럼 키가 키고 가면을 쓰
고 있는 것도 똑같았다. 다시 한 번 무대가 흔들리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가 들렸다. 또 여자가 나타났다. 역시 검은 옷, 검은 스타킹, 그리고 가
면. 그리고 다시 날카로운 소리가 나면서 세번째 여자의 등장.
그들은 놀랄 만큼 체격이 비슷해서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
웠다. 온 도시를 다 뒤졌다 해도 그렇게 똑같은 체격의 배우를 네 사람이
나 구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폭력이라도 써서 끌고온 건지도 모른다.
세 검은 마녀는 아직까지 페니스를 드러낸 채 무대 중앙에 서 있는 남자
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두 여자가 양쪽에서 팔을 붙들었고 나머지 한 여
자는 어깨를 잡았다. 북소리가 섞인 수상한 음악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세 여자는 남자를 무대 위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춤을 췄으며 첫 번째
여자는 남자의 페니스를 입에 넣기 위해 역시 춤을 추며 그들을 쫓아다녔
다.
밤 그림자 같은 여자들의 위협적인 모습에 비해 남자는 왜소하기 그지없
었다. 마침내 여자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경악한 남자를 무대 뒤로
끌고 퇴장했다.
소제목 : 남자의 본능이 조롱당했음을 호소하는
IN MY LIFE (4)
쇼는 끝났다. 다들 불평을 늘어놓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오며 나는 무대를 한 번 쳐다보았다. 남자의 옷이 바닥에 아무렇
게나 던져져 있었다. 그러나 양말만은 의자 위로 날아갔는지 두 짝이 기묘
하게 의자 등에 걸쳐져 있었다. 그것은 남자가 두고 간 발 같았다. 남자의
본능이 조롱당했음을 호소하는 증거 같기도 했다. 어쩐지 이 모든 것이 비
밀경찰의 취조같이만 여겨지는 쇼였다.
나는 쇼가 시작하기 전처럼 긴의자에 앉아 사람들이 다 나가기를 기다렸
다. 복도가 조용해졌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스타킹의 여자가
다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첫 번째 여자인지 두 번째 여자
인지 아니면 세 번째 여자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여자는 아직도 가면을
쓰고 있었다.
웬일인지 여자는 내 앞에 잠깐 멈춰 섰다. 나는 가면 속의 눈을 쳐다보
았다. 가면 뒤에서 여자의 눈도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자의 눈은 초
점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숨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나는 순간 가면을
향해 팔을 뻗었다. 가면이 조금 들쳐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여자는
내 손을 뿌리치고 반사적으로 가면을 붙잡으며 낯선 이국어로 욕을 내뱉었
다. 그 입술은 얇고 붉었다.
나는 밤거리로 나왔다. 극장에서 쏟아져나온 사람들은 아직도 거리에 있
었다. 모두 어딘가 한 방향으로 걷는 것 같았다. 나도 그들을 뒤따라갔다.
재킷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서늘한 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소
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극장 안에서 듣던 음악과는 딴판이었다. 유혹적이
고 앙칼지고 단조로운 음률이 반복되었다. 사람들의 걸음은 약간 빨라졌
다. 그러자 마치 스피커를 손바닥으로 막고 있다가 떼어낸 듯이 갑자기 음
악소리가 커졌다.
광장이 나타났고 거기에는 밤에만 개장되는 듯한 놀이시설이 펼쳐져 있
었다. 나는 입구에 멍하니 섰다. 앞서 걷던 사람들이 어느 틈에 여러 가지
놀이기구를 향해 순식간에 흩어져버린 것인지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없이 많은 불빛을 매달고 돌아가는 회전목마가 있을 뿐이었다. 발길을
끌어당겼던 앙칼지면서도 유장한 음악도 바로 거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
다.
나는 회전목마에 한 발 가까이 갔다. 회전목마는 아주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붉은 말과 흰 말, 금색과 은색의 안장, 별 모양으로 반짝이는 박
차, 아름다운 갈기와 커다란 검은 눈. 화려한 모양의 말들은 올라갔다 내
려갔다 하면서 원을 그렸다. 기둥과 벽에 촘촘하게 박혀 있는 꼬마전구는
순번에 의해 꺼졌다켜졌다 반복하며 나를 시간의 명멸 속으로 빠뜨렸다.
원주의 벽에는 쪽거울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것들은 수십 대의 삼
면경을 병풍처럼 둘러쳐놓은 듯이 벽에 붙어서 불빛과 말의 현란한 움직임
을 반사시켰다.
소제목 : 그녀를 태운 붉은 말의 쳐든 다리를
IN MY LIFE (5)
회전목마는 텅 비어 혼자 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 바퀴 돌 때마다 말에 올라탄 사람의 모습이 하나둘 나타나기
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소리없이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세 바퀴
쯤 돌았을 때 나는 맨 구석의 붉은 말에 올라 탄 여자를 보았다. 나는 그
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림자가 져서 뚜렷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원주를 따라 돌아가고 있는 거울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찾으
려 했다. 그녀의 몸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때마다 거울 속에 그녀의 얼
굴이 비쳤다사라졌다 했다. 거울은 그녀의 얼굴을 포착해내지 못하고 있었
다.
나는 그녀를 태운 붉은 말의 쳐든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말의 배에
서 뻗어나온 쇠기둥이 둥근 너트 속으로 들어갔다나왔다 하고 있었다. 말
은 갈기를 날리며 뛰었다. 그 동안 쇠기둥이 규칙적으로 너트 속을 들락거
렸다. 너트는 쇠기둥을 붙잡았다가 놓아주곤 했다. 쇠기둥은 피스톤이 실
린더 속을 왕복하듯 끊임없이 너트를 짓찧었다. 나는 온몸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의 붉은 말은 뒤편으로 돌아가 보이지 않았다. 나
는 회전목마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붉은 말을 따라가야만 했다. 거기에
그녀가 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회전목마보다도 어쩌면 바람보다도 빨리
뛰었다. 그러나 궤도를 이탈할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파멸
의 속도에 이르기 전에 나는 쓰러져버렸다. 나와 함께 돌던 회전목마는 갑
자기 속도를 높였다. 맹렬한 기세였다. 이윽고 추진력을 획득한 그것은 밤
하늘로 날아갔다. 바람개비처럼.
바닥에 쓰러진 채 나는 날아가는 회전목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유원지를 나왔다. 택시가 지나갔다. 택시 운전사
에게 호텔 이름을 말하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운전사가 깨
웠을 때는 호텔 정문 앞이었다. 어떻게 방으로 들어와 침대로 들어갔는지
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진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거기는 지금 몇 시야? 진이 물
었다. 밤. 그래? 여긴 아침인데, 재미 좋아? 응. 미쉘이라는 여자를 봤어.
키가 아주 큰 여자야. 그거 괜찮네. 프랑스 여자쯤 돼? 아니. 너무 졸음이
쏟아져 나는 통화를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눈을 감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우리는 왜 친했지? 그거야 트윈베베니까. 또 살
인범이고? 무슨 잠꼬대야? 우리가 새로운 살인을 모의하는 놈들이라고 말
했잖아. 아, 그거? 진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별 뜻 아냐. 몰랐어? 그냥 노
래 가사라구.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댄 등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져내리는 것
을 느꼈다. 그리고 말야. 내가 죽는 꿈을 꾸었어. 자동차 사고로. 진은 즉
시 대꾸했다. 자기가 죽는 꿈을 꾸면 오래 산다고 해몽 책에 나와 있지.
----그런 게 아냐. 내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진짜 죽은 거라구
----차가 멈추지 않아
----근데 죽은 다음에도 나는 계속 나야
----끝나지 않는다는 거야.
----이봐, 지겹지 않아?
전화기가 손에서 미끄러지는 것 같았고 나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소제목 : 그녀는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WAIT (1)
Wait till I come back to your side
We'll forget the tears we've cried
빨리요, 빨리. 여자는 서둘렀다. 땀 때문에 도수 높은 검은테 안경이 자
꾸 흘러내렸다. 여자는 안경테를 올릴 여유조차 없는지 그것을 콧망울에
걸친 채 걸음만 재촉했다. 내가 의사란 건 어떻게 알았죠? 그애가 말해서
요. 당신을 불러달랬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또 내가 의사라는 걸 어떻게 알았다는 걸
까.
여자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다쳐서 여자
의 호텔방에 누워 있다는 것뿐이었다. 여자의 말대로 위급한 상황이라면
전직 안과 레지던트일 뿐인 내가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 낯
선 나라의 의료체계며 시설이 어떤지 모르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앰뷸런스
를 부를 수 있다면 그 편이 나았다.
여자가 호텔로 나를 데리러 왔을 때 그 의견을 말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
었다. 그러나 여자는 막무가내였고 생긴 그대로 고집이 셌다. 무슨 전화가
밤새 통화중이더라구요. 직접 올 수밖에 없었어요. 여자는 자신의 손으로
내 침대 옆에 대롱거리고 있는 송수화기를 제자리에 올려놓으며 그렇게 내
뱉었다. 아마 그것 때문에 더 흥분해 있는 듯했다.
호텔로 가는 택시 안에서 여자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럴 수가 있어요?
안 그래도 걔는 심각한 환자란 말예요. 그것이 마치 내 잘못이라는 말투였
다. 여행을 와서도 안 되는데 그런 일까지 당하다니. 호텔을 옮긴다고 할
때 말렸어야 했어요. 내가 끝까지 데리고 있어야 하는 건데. 말을 끊고 여
자는 나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걔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당신이 의사일 거라고 그랬어요. 병원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는 느낌이란 게 있다면서. 하긴 내 눈에도 불친절하고 거만
해서 의사같이 보이긴 하더라구요. 여자는 분명 근거없이 감정적으로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것은 환자 가족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순
간 나 역시 진짜 의사처럼 반응하는 것을 알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스스로 그녀를 몹시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만큼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모자는 쓰고 있지 않았다. 얼굴
은 더욱 부었으며 팔 다리에도 긁힌 자국 투성이였다. 이마 가운데는 살갗
이 조금 찢어져 있었다. 반지 같은 것으로 맞았거나 아니면 인도 여자들처
럼 이마에 보석을 넣었던 자리 같았다.
검은 안경의 여자가 탁자 위에 있는 조그만 상자를 가리켰다. 우리 가이
드한테 비상약은 얻어다놨는데, 저걸로 될까요. 나는 그것으로 소독 따위
의 간단한 처치를 했다. 그녀는 깨어 있었지만 이마를 찡그릴 뿐 눈은 뜨
지 않았다. 소독약으로 닦고보니 상처는 깊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것도 아닌 면역기능이 없는 루프스 환자였다.
내가 말했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여자는 안경을 벗어
안경알에 얼룩진 눈물을 옷소매로 닦으며 대답했다. 가이드가 오면 비행기
시각을 알아봐달라고 해야겠어요.
비행기는 내일쯤 있을 거예요. 나도 그 비행기를 탈 건데 같이 예약을
해보죠. 여자는 처음으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고맙다고 말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소제목 : 당신 방으로요.
WAIT (2)
전화 벨소리는 도발적이고 불길하게 방안 공기를 흔들었다. 게다가 여자
가 받자마자 끊어져버렸다. 여자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놈일 거예요.
쟤를 저 지경으로 만든 자식 말예요. 그제서야 나는 그녀가 왜 폭력을 당
했는지 묻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여자도 자세한 것은 몰랐다. 프론트의 전화를 받고 급히 내려가보니 호
텔 앞에 자동차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낯선 외국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리고 뒷자리에는 그녀가 녹아내린 아이스바처럼 내던져져 있었던 것이
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인도 위에 부려놓고 남자는 차에
올라타더니 사라져버렸다.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얻어
맞았다는 것만은 확연했다.
프라하 같은 데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 보나마나 깡패겠죠. 여
행안내서에는 치안은 걱정할 것 없다고 돼 있지만 사람 사는 데에 나쁜 놈
이 왜 없겠어요? 여자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이번
에도 받는 즉시 끊어졌다. 뭘 원하는 걸까요? 전화기를 손에 든 채 여자가
외쳤다. 히스테릭한 여자의 대사를 들으니 여자가 폭력영화를 즐긴다는 그
녀의 말이 기억났다.
여자는 한동안 입술을 깨물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그녀가 불현듯 눈을 떴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
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저를 데려
가주세요.
그러고는 내가 묻기도 전에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방으로요.
나는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 속에 깃든 갈망,
그리고 어떤 모호한 적개심은 언젠가 내게 슬픔에 대해 말해주었던 초록옷
소녀의 눈과 똑같았다. 그러니까 색색의 종이조각이 모이고 흩어지며 만들
어내는 신비한 만화경의 눈이었다. 안과의로서 보자면 원추각막이라는 병
증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내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눈은 아름다웠다. 등뒤에서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허리를 굽혀 눈물이 고인 그녀의 눈시울에 입술을 댔을지도
모른다.
얘한테 아무짓도 안 하는 거죠?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미처 무슨 뜻인지 생각해볼 틈도 주지 않고 여자는 계속 공격적으로 쏘
아붙였다. 데려가는 건 좋은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알았죠?
그러더니 다음 순간 말소리가 갑자기 눅어지며 정반대의 말을 늘어놓았
다. 하긴 뭐, 그래도 괜찮아요, 얘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하는 것이었다.
노파처럼 의심과 호기심이 다같이 많은 여자였다. 여자는 이런 말도 했다.
같이 자는 건 괜찮다구요. 문제는 그 다음이에요. 당신은 여자하고 잔 뒤
얼마나 오랫동안 같이 있죠? 그게 제일 중요해요. 얘를 슬프게 하면 안 돼
요.
여자는 내게 매우 엉뚱한 맹세를 요구했다. 같이 잔 다음 적어도 다섯
시간은 그녀의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약속해주지 않
으면 그녀를 데려가는 데 동의하지 않겠다는 여자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나
는 멍청히 쳐다보았다. 요 몇 달 사이에 내 앞에 나타나는 여자들은 모두
가 이상한 사람들뿐이다. 세상의 여자들이 다 이처럼 이상하다면 내가 열
여섯살 때의 첫 데이트 이후 만나온 보통의 여자들은 생명이 없는 조화(造
花)나 모조품이었단 말인가.
소제목 : 한 시간 뒤에 그녀는 내 방 침대에
WAIT (3)
한 시간 뒤에 그녀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의사로서의 주의 관찰 의무도 아니었
고 여자와의 약속 때문은 더욱 아니었다. 욕실에서 수건을 가져다가 얼음
몇 개를 싸서 이마에 얹어주자 그녀는 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다. 그녀는 온종일 잠을 잤다.
공항에 전화를 걸었다. 비행기는 다음날 오후에 있었다. 그녀가 잠깐 눈
을 떴을 때 나는 예약한 비행편의 출발시각을 알려주었다. 들었는지 못 들
었는지 그녀는 한 눈을 허공 쪽에 다른 한 눈을 내 얼굴로 향한 채 한참동
안 멍하니 있었다.
그녀가 윗몸을 일으키려 했으므로 나는 그녀의 등 뒤로 팔을 넣어서 안
아 일으켜주었다. 그녀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더니 무릎을 세워 그것을
두 팔로 껴안았다. 전날 보았던 그대로 그녀는 푸른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셔츠는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그러나 침대 시트 밖으로 조금 비어져나
온 그녀의 발은 대리석 석상의 발처럼 희고 정갈했다.
-----당신 꿈을 꾸었어요.
-----내 꿈을요?
-----파티가 있었어요. 모두 가면을 썼구요. 그렇지만 저는 당신을 금방
알아봤어요. 당신이 제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어요. 어떤 비밀 같은 것
말예요. 그리고 도망치자고 말했죠.
-----어디로?
-----꿈을 꾸는 중에 그것이 꿈이란 걸 알 때가 있잖아요. 바로 그랬나봐
요. 당신은 꿈 밖이나 뭐 그런 아주 먼 곳으로 가자고 했어요. 하지만 약
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지요. 저는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어요. 그림자가 가면을 벗기려고 제 얼굴로 팔을 뻗
을 때 너무 놀라 잠이 깼던 거예요.
그녀의 민머리 속에 땀이 송글송글 돋아 있었다.
-----그 그림자 말예요.
둥근 얼굴을 자신의 무릎 위에 기운없이 올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죽음이었을까요?
순간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연한 것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두 손으로 뺨을 감싸쥐면서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죽음이 두려운 건 아녜요. 죽음도 삶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형틀이니까요. 다만 모든 게 영원히 반복되고 끝나지 않는
다는 것이 두려워요. 밤에 바닷가를 거닐었던 가난한 소년 이야기 알아요?
소제목 : 그 도시가 언젠가는 구원을 받을 거라고
WAIT (4)
어쩌다보니 소년은 낯선 밤바다를 거닐고 있다. 모래밭에서 무언가가 반
짝거린다. 소년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줍는다. 은화였다. 은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소년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한참을 걷다가 소년은 걸음을 멈춘
다. 번화한 시장이 바닷가에 솟아나 있는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긴 천막시장이었다. 불빛은 휘황하고 상인들은 모두 화려한 옷에 많은 장
신구를 걸치고 있다. 아주 부유한 바닷가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물건
을 사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소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상인들
은 저마다 소년의 소매를 붙잡고 눈앞에 물건을 들이밀며 사달라고 아우성
이다. 뒤따라오면서까지 간곡히 사정을 한다.
슬픈 눈을 가진 옷감장수 하나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도
시는 저주를 받아 하루 아침에 사라졌어요. 천 년에 단 한 번씩만 되살아
나지요. 그때 지나가던 낯선 사람이 물건을 사줘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답
니다. 동전 한 닢을 내도 좋아요. 제발 물건을 사주세요. 그러나 소년은
자신이 동전 한 닢조차 갖지 못한 가난한 소년임을 잘 안다. 천 년에 한
번 지나가는 단 하나의 행인이 가난한 자신이라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옷감장수는 포기하지 않는다. 당신은 살 수 있어요. 부탁이에요. 옷감을
사주세요. 저는 가난해서 돈이 없다니까요. 그러나 옷감장수는 이리저리
피하는 소년을 따라다니며 자신의 눈물로 얼룩진 화려한 비단 필목을 바짝
들이밀 뿐이다. 옷감장수가 너무나 끈질겼기 때문에 소년은 당황하기 시작
한다. 당황함은 점점 두려움으로 바뀐다. 어떤 종류의 난폭한 두려움에 사
로잡힌 소년은 중얼거리고야 만다. 이놈의 도시, 영원히 사라져버려라. 그
순간 거짓말처럼 화려한 도시는 사라져버린다. 불빛도 상인들도 옷감장수
의 눈물도 없다. 검은 모래밭과 파도소리뿐이다. 그때서야 소년은 자신의
주머니 안에 있는 은화를 떠올린다. 소년은 주머니를 뒤진다. 은화는 소년
의 손 안에서 차갑고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녀가 물었다.
-----그 도시가 언젠가는 구원을 받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려울 것 같은데요.
나는 별 생각 없이 대꾸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소년에게도 도시를 구할 마음은 있었어요. 운명이 방해한 거죠. 두
려움과 배신의 운명 같은 거요. 하지만 언젠가는 사랑을 품은 사람이 도시
를 구해낼 거예요. 배신도 두려움도 없는 사랑 말예요. 당신은 그런 사랑
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내려고 생각을 집중해본 일 따위는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조금 찌푸렸다. 당장 그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해서였다.
많은 사람은 사랑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
은 불가능하다.
소제목 : 그것은 부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 욕망의
WAIT (5)
그것은 부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 욕망의 원리이다.
어떤 사람이 1킬로그램의 금을 가짐으로써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것
은 가능하다. 그러나 1킬로그램의 금을 얻은 사람은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10킬로그램을 더 가지면 부자일 것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원하는 금의 양은 한계가 없이 계속 늘어난다. 그러므로 그가 부자
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랑을 믿지 않는 한 사랑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단계에서는 1킬로그
램 정도의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1킬로그램을 얻은 다음
의 갈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특별하고 영원한 사
랑을 원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 사랑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랑이 있
다고 믿는 순간 사랑은 사라진다. 사랑을 원하는 순간부터 사랑은 불가능
해진다. 그것이 바로 모순이라고 이름지어진 사랑의 운명이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녀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어 그
녀를 바라보자마자 이상하게도 몸 속의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가 세례를 받을 때의 느낌
이 그럴는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몇 달 동안 사막을 헤매다가 돌아온 사람
이 막 샤워기 아래에서 첫물을 맞은 느낌 같기도 했다. 몸안이 투명해지는
기분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는 침대에 도로 눕더니 또 잠이 들었다. 얼굴은 너무나 창백했고 입
술에 핏기라고는 없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맡을 지켰다. 한두 시간쯤 후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 물을 마시고는 자기 방의 옷장에 걸린 잠옷을 갖다달
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방에 들러 소매 없는 흰 드레스 같은 잠옷도 갖
다 주었다. 그런 다음 혼자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길었던 하루
가 저물고 있었다. 저녁식사인 모양이었다.
방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창밖에 검은 밤이 드리워졌다. 달도 돌아와 있
었다. 달은 만월이었다. 어두운 방안으로 달빛이 비쳐들었다. 그녀는 침대
맡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전등 스위치를 누르려 하자 그녀가, 켜지 말아
요, 라고 말했다.
-----해가 지는 걸 봤어요. 그걸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도 생
각해봤구요.
-----눕는 게 좋겠어요.
-----이대로 당신하고 오랫동안 얘기하고 싶어요.
그녀는 띄엄띄엄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시간이 다 흘러가버리기 전에. 제 귀
에는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요. 당신은 저와는 다른 시간 위에 올라
타서 제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어요.
내가 침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그녀는, 오지 마세요,라고 낮
게 말했다.
-----제가 맨처음 간 박물관에서 보았던 게 뭔지 알아요?
그녀는 두 팔을 높이 쳐들어 활짝 벌렸다.
-----날개예요.
그녀가 이국의 박물관에서 처음 본 날개는 기원전 사모스레이스 섬의 언
덕에 서 있던 여인상의 날개였다. 활짝 펼쳐진 날개 아래로 부드러운 옷깃
이 겹겹이 흘러내려 있었다.
그녀는 특히 에로스 상에 매혹되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상자 위에 앉아
장미에게서 나비의 날개를 떼어내고 있는 에로스는 너무 아름다웠다. 발뒤
꿈치는 조심스럽게 들리고 표정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등에는 깃
털이 많이 새겨진 날개가 돋아 있었다.
소제목 :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WAIT (6)
에로스의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는 프시케 상 앞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췄
다.
날개를 단 에로스는 나비처럼 프시케에게로 내려앉아 있다. 한쪽 팔로
프시케의 젖가슴을 감싸안고 다른 한 손으로 프시케의 머리를 안았다. 아
름다운 프시케는 누워서 에로스를 올려다본다. 프시케의 알몸을 덮은 얇은
베일이 프시케의 다리 위에서 미끄러지는 중이다. 프시케가 두 팔을 위로
뻗어 에로스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날아오르려는 것처
럼 가볍고 탄력이 흐른다. 환희의 포즈이다.
그녀는 프시케에 대해 긴 얘기를 했다.
그리고 침대 아래로 내려서며 말했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소매 없는 흰 새틴 잠옷이 여신의 옷처럼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으며 흘러내렸다. 그녀는 왼손으로 사이드 테이블을 짚
고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그러더니 발레리나처럼 오른팔을 들어 왼쪽 겨드
랑이에 대고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채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국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방안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달이 너무 가
까이 있었으므로 그것은 달빛처럼 느껴졌다. 달빛이 그녀의 흰 옷깃을 타
고 흘러내렸다. 꿈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짧은 순간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
채 하얗게 탈색돼버리는 듯한 환각 같은 것이 왔다.
이내 그녀는 지친 듯이 침대에 기댔다.
내가 부축해 주는 대로 그녀는 얌전히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공
연을 마친 무용수처럼 조금 숨을 헐떡거렸다.
-----봤어요? 그게 <버림받은 프시케> 상이에요. 에로스를 다시 얻기 위
해 세상 끝까지 헤매며 무서운 시험을 치르고 있는 거죠. 마지막에는 제우
스가 주는 신(神)의 잔을 마시고 불사의 사랑을 얻게 돼요. 프시케란 말은
영혼이라는 뜻이래요. 나비라는 뜻으로도 쓰인다는 건 제 친구가 말해주었
어요. 걔는 나비를 곤충으로만 생각해요. 그애에게 제가 부탁했었어요. 만
약 제가 관에 들어간다면 <버림받은 프시케> 포즈로 넣어달라고 말이죠.
그애는 화장할 거라고 대답했고요. 생각해보니 저도 그 편이 나을 것 같았
어요.
더 이상 말을 이어가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르 닫
혔다. 나는 담배를 피우려고 일어났다.
그때 그녀가 불현듯 눈을 떴다. 창밖을 쳐다보고는 빙긋 웃는 것이었다.
몸을 돌려 창밖을 보니 백화점 옥상의 백조 네온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여전히 흰 날개에 붉은 색 왕관을 쓴 백조였다. 백조는 밤하늘에 수호천사
처럼 홀로 떠 있었다. 웃음을 머금은 그대로 그녀는 잠이 들었다. 나는 진
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냥 방을 나왔다. 술집은 호텔 옆의 골목 안에
있었다.
작은 술집이었다. 남자 둘이 어깨를 맞대고 앉아 나직한 목소리를 얘기
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석자리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남녀
가 취한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기도 했다. 나는 바에 앉아 흑맥주를 주문
했다.
길고 날렵한 유리잔에 담긴 흑맥주를 나는 단숨에 마셨다. 두번째 잔을
주문하자 눈가가 유난히 거무스레한 여주인은 컬컬한 목소리로 뭔지 모를
농담을 던졌다. 붉은 드레스 가득히 터질 듯이 살이 비어져나왔다. 내 눈
은 맥주를 가지러 가는 여주인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붉은 드레스의 스팽
글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게 마치 인공연못 안에서 사료로 살을 찌운 비
단잉어의 비늘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여주인에게도 흑맥주 한 잔을 권했다. 여주인은 걸쭉하게 웃더니 내게
거무스레한 시선을 꽂은 채 조금 전의 나처럼 단숨에
소제목 : 깨어보니 더러운 침대 위였고
WAIT (7)
내가 여주인에게 물었다.
회전목마가 있는 놀이공원을 알아요? 여주인은 담배연기를 뿜으며 껄껄
웃을 뿐이었다. 쇼를 하는 지하극장에서 가까운데, 모르겠어요? 여주인이
견딜 수 없다는 듯 꺼이꺼이 어깨를 들먹이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나는 의사예요. 당신은 간이 나쁘고 천식도 있어
요. 여주인과 나는 질세라 술을 마셔대며 계속 한쪽은 웃고 한쪽은 소리쳤
다.
웃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여주인은 새로 술을 가져왔다. 너는 비
만에다 냄새도 심하고 못 생겼어. 영어를 못 알아들으면 독어로 말해줄까.
그래도 여주인은 탁한 소리로 웃어제쳤다. 나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갑자
기 여주인이 웃음을 뚝 그치고, 조용히 못해, 이 새끼야! 할 것만 같았다.
사실은 그런 걸 간절히 원했는지도 모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그리
고 혼란스러웠다.
아무래도 내가 품고 있는 사랑에는 두려움과 모순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내 마음은 바닷가 소년만큼이나 가난했다.
나는 사랑을 원하면서도 두려워한다. 그러나 혼자가 되면 다시 그 사랑
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 모순이 인간의 사랑이 가진 숙명이다. 불가능한
사랑?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고 제한적이란 걸 알면서 어떻게 영원
한 사랑을 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 꿈, 그 모순을 어떻게 뚫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 결국 나는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히 반복되는 시간의 서클
속으로 들어가야만 할 운명이다. 그런 다음 어리석게도 거기서 다시 사랑
의 구원을,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더러운 침대 위였고 옆에는 비늘을 홀랑
벗겨낸 살찐 잉어가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었다. 자켓 안에 든 여권과 지
갑을 확인한 뒤 나는 그대로 공항으로 갔다.
출발시각은 많이 남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기다리기도 하고 혹은 기다
리지 않기도 했다. 그녀는 공항에 나타나지 않았다. 탑승구 안으로 들어갈
때 내 눈은 조금 젖었다. 하긴 모든 것이 내 짐작대로였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묵은 호텔
의 키는 밖에서 잠그면 안에서 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내 방에도
전화가 잘못 걸려왔던 것이고 프라하 호텔의 예쁜 여급은 늙은 부인에게
그 일을 사과해야 했다. 혹시 어젯밤 그녀가 그런 전화를 걸어야 했던 것
은 아닐까. 그녀는 스스로는 열 수 없는 문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긴 했을까. 지금도 내 침대에
누워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눈을 감았다.
어김없이 꿈이 찾아왔다. 정신없이 블레이크 페달을 찾았지만 발밑에 닿
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발은 허공을 더듬거리다가 몸통에서 떨어져
나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나는 중얼거렸다. 이건 꿈이야. 진짜 죽는 것은
아니라구. 그러나 지금까지는 꿈이었다고 해도 이번만은 꿈이 아닐지도 모
른다. 두려움에 떨며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떴다. 비행기 창밖을 내다보았
다. 내가 앉은 좌석에서는 비행기의 동체로 창이 가려져서 밖이 내다보이
지 않았다.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다시 보니 창을 가리고 있는 것은 은색
날개였다.
기내 스크린 안에서는 젊은 남녀가 다리 난간에 기대서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등받이에 등을 대고 다시 눈을 감았지만 또 잠들고 싶진 않았다. 음악이
라도 들어볼까 싶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것은 처음 해보는 일이
었다. 생각처럼 귓구멍이 간지럽거나 거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나갔다. 무슨 노래인지 모르기 때문에 몇 곡이 흘러갔는지도 모른
다. 음악을 듣는다는 의식도 없이 단지 바깥과 차단된 나 혼자의 시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평화롭고 자연스러웠다.
그 평화는 아는 노래가 나오는 순간 깨어졌다. 진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알 턱이 없었을 비틀즈의 노래였다.
우린 우리 모두의 사이에 자리잡은 공간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죠.
환상의 벽 뒤에 자기 자신을 숨기는 사람들은 절대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해요.
너무 늦어버리는 거죠.
죽고 난 뒤에는 말예요.
기어코 나는 다시 잠들고 말았다.
소제목 : 똑같은 죽음이 내 경우는 꿈 속으로
IF I NEEDED SOMEONE (1)
Carve your number on my wall
And maybe you will get a call from me
진이 죽었다.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돌아온 다음날 나는 오전 내내 잠을 잤고 간간이 악몽을 꾸었다. 눈을
뜨자 곧바로 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 안에는 생수 한 통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대충 몸을 씻고 아래층 피자집으로 내려갔
다.
피자를 먹는 내내 나는 공중전화 부스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뭔가 할
일이 있었는데. 겨우 생각해낸 것이 씨디 플레이어였다. 나는 부스 안에
들어가서 오디오 기기점에 전화를 걸었다. 주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
했다. 나도 빨리 매듭을 짓고 싶어요. 근데 대체 사람이 언제 집에 있는지
알아야 배달을 하죠. 하도 퉁명스러웠으므로 나는 현관키의 비밀번호를 가
르쳐주었다. 물건을 받는 날 새로운 비밀번호로 바꾸면 그만이다. 전화부
스를 나오려다가 말고 나는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바닷가 도시의 보건소
번호를 눌렀다. 보건소 직원이 말해주기를 진은 죽었다는 것이었다.
진은 내가 비행기 안에서 자고 있을 때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브레이크
파열이라고 했다. 똑같은 죽음이 내 경우는 꿈 속으로, 그리고 진은 현실
속으로 찾아든 것이다. 남이 꾸어주는 태몽처럼 내가 진의 죽음을 꿈으로
꾸어준 것일까. 아니다. 진이 내 꿈을 대신 때우기 위해 죽은 것인지도 모
른다.
오늘이 발인인데, 모르셨어요? 직원의 목소리는 미덥지 않다는 식이었
다.
장지가 어디죠? 나 역시 뜨악하게 물었다.
장지에 늦게야 나타난 내게 의대 동기 몇이 다가왔다. 즉사였어. 유언
같은 걸 남길 틈도 없었다나봐. 동기들은 모두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메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차갑게 말했다. 너희들 트윈베베는 정말 알 수
없는 놈들이야. 한 놈은 약혼식 이틀 전날 술집에서 만난 여자를 태우고
가다 저수지에 빠지질 않나, 한 놈은 무단사퇴에다 행방불명. 대체, 어디
로 사라졌던 거야? 동기들은 내게 연락이 되지 않아 애를 먹은 모양이었
다. 죽은 놈이야 아무 말 안 했지만 약혼녀라는 여자가 어찌나 찾아달라고
당부를 하는지 말야. 저기 있다. 너한테 꼭 연락을 해달라고 하던 여자.
그 말을 듣기하도 한 듯이 여자가 우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진의 말은 다 사실이었다. 여자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고 글래머였다.
고집이 센지 어쩐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슬픔 때문에 여자의 노란
머리는 초라하고 황폐해 보였다. 검은 옷 속에 든 젊은 육신은 비탄을 가
누는 데 힘이 들어서 다른 의미의 탄력은 다 잃은 듯했다. 나를 쳐다보고
는 있었지만 눈빛 역시 촛불이 꺼진 직후의 흰 연기처럼 꼬리만 길 뿐 섬
광이 없었다.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진은 언제나 당신 얘기뿐이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여자가 마치 대답을 기다리듯 내 곁에 가만히 서 있었으므로 나는 별 뜻
도 없이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나를 비난하던 동기 쪽으로
가서 검은 넥타이 무리에 합류했다.
소제목 : 그때 나는 <If I needed someone>을 듣고
IF I NEEDED SOMEONE (2)
진을 묻고 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재킷을 벗어 옷장 안에 걸어놓고 잠시
방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 뭘 하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동안 뭘 하고 살았는지 생각해보려다가 그만두
었다.
진이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했다. 아니면 무심해지거나.
나는 중얼거렸다. 진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안다. 그걸 믿는가. 믿
는다. 내 눈으로 보았으니까. 그렇다면 간단하고 명백하다. 진은 죽었다.
-----죽었다니까. 이제 그는 없어. 왜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사실'인
데?
나는 삶이 '사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삶에는 모호
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나는 건조하고 명백한 '사실'
속에서만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처럼 불완전하고 애매한 존재
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담배를 세 대나 피
운 것도 몰랐으며, 언제부터인가 방안에 노래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깨닫
지 못했다.
당신 존재의 저편을 보고 나면 당신도 찾게 될 겁니다
마음의 평화가 거기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죠
그리고 우리 모두가 결국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삶은 계속 흘러갑니다
당신의 안에서 그리고 당신의 밖에서
그것은 비행기 안에서 들었던 노래였다. 진이 죽어갈 즈음 나는 그 노래
를 들었다. within you without you. 그제서야 일어나서 방안을 둘러보았
다. 노래는 책상 옆에 놓인 씨디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플레이
어 위에는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갈색 종이쪽이 놓여 있다. 나는 그 종이
를 읽었다. <오디오집에서 왔다 감. 네시로 시간 예약을 맞춰놓았음.> 오
디오 기기점 주인은 내게 단 하나뿐인 씨디를 찾아내서 플레이어에 걸었던
모양이었다.
정확히 열흘 동안 나는 공원에도 나가지 않고 피자만 먹으면서 비틀즈를
들었다.
여보세요. 어느날 진의 약혼녀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견디기가 너무
힘이 들어요. 만나서 진의 얘기를 좀 들려주지 않을래요? 그때 나는 <If I
needed someone>을 듣고 있던 참이었다. 당신의 전화번호를 내 벽에 새겨
놓아 주세요, 내가 전화를 할 거예요. 그 노래 가사에서처럼 진은 그녀의
집 벽에 전화번호를 새겼었다. 그런데 그 번호는 자신의 것이 아닌 내 전
화번호였던 것이다.
다음달에 나는 변두리 병원에 다시 일자리를 얻었다. 일자리를 얻은 지
석 달 후에는 결혼했다.
소제목 : 아내는 늘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다.
RUN FOR YOUR LIFE (1)
Hide your head in the sand, little girl
Catch you with another man
That's the end'a little girl
Na, na, na
Na, na, na
아내는 늘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다. 내 머리카락 색깔은 너무 검거든요.
미련스럽게 보여서 싫어요.
또 한 가지 아내가 신경 쓰는 것은 체중을 유지하는 일이다. 아내 말로
는 규칙적인 식습관이 중요하다고 한다. 안 먹다가 한꺼번에 먹어봐요. 그
러면 몸이 저 스스로 알아서 열량을 꼭 필요한 대사에만 조금 사용하고 모
조리 저장을 해두는 거예요. 기초대사량도 훨씬 적어져요. 언제 음식이 들
어올지 모른다 싶어서 아예 안 쓰고 비축하는 셈이죠. 삶에 대한 본능이란
그런 거잖아요.
책을 많이 읽는 아내에게는 시시콜콜한 이야깃거리가 많다. 아무 관심도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나는 듣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내용을 잘 듣지 않는
데도 아내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정도는 짐작으로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아내를 화나게 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 것도 삶에 대한
본능에 속할까.
우리는 결혼 후 한동안은 내가 혼자 살던 29블럭에서 조금 떨어진 고층
아파트에 살았다. 새로 집을 지어 이사한 것은 작년 일이다. 이곳 역시 29
블럭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어느 휴일엔가 아내와 함께 신도시 가운데에 있는 작은 산에 올라갔었
다. 거기에서는 이국적 분위기를 주는 빌라촌과 주택가가 한눈에 내려다보
였다. 저기가 양지마을이에요. 아내가 설명했다. 햇빛이 잘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래요. 집들이 정말 그림같이 예쁘죠? 아내는 그 마을에 하얀
이층집을 짓고 싶다고 했다. 털이 긴 흰 강아지도 한 마리 키우고요, 라며
노란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 또 어느 휴일엔가, 아니 이번에는 휴가였던 것 같다. 아내와 나
는 국도를 따라 남쪽 지방을 여행하고 있었다. 운전을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따라 가곤 하는 나는 잠깐 사이 엉뚱한 곳을 헤매게 되었다. 커
브가 많은 숲길이 계속되었다. 어딘가 눈에 익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특별
한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아내가 기시감이란 말로 간단히 정리해버린 일
종의 잔상(殘像)에 지나지 않았다.
길 모퉁이에서 갑자기 커다란 건물이 나타나서야 나는 그곳이 우성 고시
원이란 걸 알았다.
소제목 : 내 섹스도 그런 식인 셈이었다.
RUN FOR YOUR LIFE (2)
커브가 급한 탓인지 고시원 앞에는 '사고 많은 곳'이라는 팻말이 있었
다. 아무래도 이 길이 아닌 것 같아요. 돌려나가는 게 좋겠어요. 아내가
말했다. 나는 고시원 주차장을 이용해 차를 돌렸다. 얼마 안 가 마을이 나
타났는데 마을 입구의 바윗돌 위에는 양지마을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마을
은 내가 십 여년 전에 본 것보다 훨씬 황폐해 보였다. 나는 양지마을이라
는 이름이 전국에 몇 백 개쯤 될까 생각하면서 일주도로를 빠져나왔다.
신도시 양지마을에 자리잡은 하얀 이층집 말고도 아내와 나에게는 많은
것이 있다.
다섯 살난 아들에서부터 호두목 식탁이나 통신판매로 산 실내 운동기구
따위의 꼭 가질 필요는 없는 자질구레한 물건들까지. 그리고 그런 것을 별
망설임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약간의 저축, 규칙적인 동반외출, 기념일마다
선물을 주고받는 습관, 상대에 대한 안정된 관심과 존중, 결혼이라는 생활
----생활.
나의 출퇴근 시간은 거의 규칙적이다. 레지던트 시절을 보냈던 그 안과
병원에서 다시 일하게 된 지도 4년이 되어간다. 그곳까지는 승용차로 30분
정도 걸린다. 내 근무태도에 대해 잔소리를 하곤 하던 선배는 과장이 되었
다.
이따금 그와 골프를 친다. 그에 비하면 내 실력은 많이 처지는 편이라
필드에서도 병원에서처럼 그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몸에 힘을 빼. 모든
운동이 다 그런 거라구. 중요한 것은 적당히 힘을 빼는 일이야. 인생도 그
렇잖아. 혼자만 뻣뻣한 놈 치고 장타 날리는 놈 못 봤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입을 가리고 웃는 젊은 캐디가 있었는데 언제부터
인지 입을 가리지 않고 웃게 되었다. 대신 그의 곁에 바짝 붙어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의 자동차에 함께 타고 가는 일도 있었다. 내가
그의 가방을 차 트렁크에 싣어주자 시동을 걸던 그가 내게 말했다. 네 차
로 뒤따라 올래? 거기 가면 괜찮은 애들 많아. 같이 마시다가 본게임 때
찢어지면 되지 뭐.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결혼한 이후로 아내 말고 다른 여자와 같이 잔 적이 없었다. 아내와의
잠자리는 대체로 무난했다. 아무렇지도 않고 나쁠 것도 없는 섹스였다. 그
것은 아내 아닌 누구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굳이 아내 이외의 여자를 취
할 이유도 없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신문 기자였던 아내는 지역신문의 모
니터로서 가끔 기사를 쓴다. 그러나 그다지 흥미있어 하는 것 같지는 않
다. 전부터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조금쯤은 일정한 습관을 해소시켜줄 필
요가 있는 것뿐이다. 내 섹스도 그런 식인 셈이었다.
소제목 : 아내 역시 나를 진으로 생각하는 순간이
RUN FOR YOUR LIFE (3)
아내와 나는 자주 호수공원에 간다. 아들애를 데리고 갈 때도 있다. 그
애가 자전거를 타는 동안 우리는 청동 조형물 아래의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본다. 호수를 바라볼 때는 아내도 그다지 말이 없다. 아내는 물냄새를
깊이 들이킨다. 바닷가 도시에서 자란 아내는 물을 좋아한다. 자신이 그리
워하는 바다내음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물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내는 호수공원을 마음에 들어한다.
물을 보면 어릴 때 생각이 나요. 하루종일 모래밭에서 놀다가는 한 번씩
바다로 정신없이 달려가서 엄마 품에 안기듯이 풍덩 몸을 던지곤 했어요.
계집애가 팬티도 입지 않고 알몸으로요. 한 여덟살 때까지 그랬던가? 그렇
게 말하면서 아내는 아주 나이든 여자처럼 아련히 웃는다. 호수 저 너머에
있는 먼 강물처럼. 아내는 좋은 여자이다.
호수와 강이 가까워서인지 도시는 밤이 되면 곧잘 안개로 덮인다. 늦은
밤 무심히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가 검은 창 바깥의 자욱한 안개에 깜짝
놀랄 때도 있다. 발코니로 나가보면 세상은 온통 안개 천지이다. 안개는
골목에서도 나오고 땅에서도 공중에서도, 가로등 불빛에서도 뿜어져나온
다. 밤의 대기 속에 가득찬 안개는 두터워졌다가 얇아지기를 반복한다.
뿌옇게 감싸인 아파트 숲과 밤거리가 어찌 보면 저주와 재앙의 도시 같
은가 하면 한편 신비한 신생(新生)의 의식이 치러지는 신전 같기도 하다.
깊은 밤 아내와 나는 발코니 난간에 기대 선 채 안개가 자욱한 밤 도시
를 바라보며 진의 얘기를 하기도 한다. 대개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 아
내는 이런 말을 했다. 진과 나는 각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극
복하기 위해 상상 속의 쌍둥이가 된 거라고. 우리 둘 다 어린 나이에 아버
지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보았던 건 사실이다. 내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 아
내는 이렇게 말했다. 혼자 살아 남았다는 게 잘못은 아니죠. 보상금과 유
산에 대해서도 그래요. 어쨌든 부당한 재물은 아니잖아요.
비틀즈를 들을 때에도 아내와 나는 진의 얘기를 한다.
아내는 비틀즈를 아주 좋아한다. 아주 오래 전 내 차의 콘솔박스 안에
있던 모든 물건을 버림으로써 자신이 나타나기 전의 내 과거와 나를 결별
시키려던 여자애가 있었다. 아내도 그 여자애처럼 결혼 전 내가 쓰던 물건
을 다 버리기를 원했지만 오디오 기기와 씨디만은 용서했다. 내가 갖고 있
던 씨디를 되풀이 듣다가 아내는 비틀즈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내는 진에
게서 비틀즈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고 했다.
내가 진에게 들었던 그대로 노래 가사나 뒷얘기들을 옮겨주면 아내는 재
미있어 했다. 진은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스키와 낚시를 같이 하는
장소를 물색하려 했었다. 그처럼 진에게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
었다. 비틀즈 얘기라면 진이 나보다 삼십 배는 잘했고 훨씬 쉽게 아내의
고집을 꺾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넉 장의 앨범 중 아내는 <러버 소울>
을 가장 좋아했다. 그것을 함께 들으며 이따금 나는 아내가 진인 것처럼
여겨진다. 아내 역시 나를 진으로 생각하는 순간이 분명 있을 것이다.
소제목 : 나비와 껍질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RUN FOR YOUR LIFE (4)
나는 이제 꿈을 잘 꾸지 않는다. 꿈을 자주 꾸는 것은 어린 아들애이다.
그애는 제 방에서 자다가 깨어 우리 부부의 방문을 두드린다. 엄마, 무
서운 꿈을 꾸었어. 도망치다가 높은 데서 떨어졌어. 아내가 아이를 안아주
며 말한다. 괜찮아. 엄마가 가서 오르골을 틀어줄게. 그걸 들으면서 자면
천사 꿈을 꿀 거야. 아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제 방으로 데려다준다. 문밖
을 나가며 나누는 말이 내 귀에 들려온다. 엄마, 어른들은 무서운 꿈을 안
꿔? 엄마도 어릴 때는 무서운 꿈을 꾸었어. 아이가 묻는다. 아빠도? 아내
가 대답한다. 그럼. 너도 곧 어른이 되면 무서운 꿈을 안 꾸게 돼. 다 크
느라고 그런 거야.
아내도 알 것이다. 꿈을 꾸지 않게 되면 떨어질 곳도 날아오를 곳도 없
어진다. 누군가는 위에서 걷고 또 누군가는 아래에서 걷겠지만 어쨌든 반
복되는 시간의 평지를 걷는다는 점은 다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걷다 보면
죽음과 만난다.
밖에서 놀던 아이가 잠자리채를 손에 든 채 뛰어들어온 적이 있다. 온몸
이 땀으로 젖은 그애는 내게 오른손을 쑥 내민다. 아빠, 이게 뭐야? 나무
에 많이 붙어 있었어. 아이가 제 손바닥을 펴서 보여주는 것은 곤충의 빈
껍질이다. 그 안에는 한때 애벌레의 연한 연두빛 몸통이 들어 있었을 것이
다. 지금은 딱딱하게 마른 회색 껍질뿐이고 안은 텅 비어 있다. 곤충이 일
정 기간 사용한 뒤 벗어놓은 허물. 허물을 빠져나간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
어디쯤 날고 있을까.
나는 속이 텅 빈 회색 껍질을 한참동안 본다. 생명이 떠나간 뒤에도 껍
질은 남는다. 껍질에게도 육신이 있어 어쨌든 존재하긴 하는 것이다.
나라는 껍질에서 빠져나간 내 생명. 그것 역시 어딘가에 나비처럼 아름
다운 날개를 펴고 죽어버린 껍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제 시간을 누리고 있
을 것이다. 내 생, 그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잃어버렸을 뿐이다. 내 꿈은 나를 빠져나가
어딘가에서 제 나름의 날갯짓으로 살아간다. 그 어딘가에서 내 생명은 나
비로서 계속되고 나는 여기에서 껍질로 존재한다. 나비와 껍질이 다시 만
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움도 잊었다.
소제목 : 에필로그, 아홉번째 꿈
에필로그, 아홉번째 꿈
이렇게 두터운 안개는 본 적이 없다.
신도시가 가까워질수록 길 가득히 안개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시계는 새
벽 1시 9분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이 시각에 운전을 하는 일이 많지 않
다. 거기에 안개까지 덮이니 아주 낯선 곳을 달리고 있는 기분이다. 진입
로에 들어설 때쯤에는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더듬더듬 나아가다보면
자동차의 꼬리에서 내뿜는 두 개의 비상등을 하나둘씩 만나게 되는데 그
빛마저 흰 비단 베일에 비쳐보이는 것처럼 아득하게 깜박거린다.
갑자기 허공에 붉은색 달무리가 나타난다. 나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는
다. 신호등조차 보이지 않는 안개인 것이다. 아마 내 모습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세상 누구도 지금은 나를 볼 수가 없다. 운전대에 두 팔을 얹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혼자라는 생각을 해본다.
안개는 익숙한 장소를 전혀 다른 곳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언제나
가는 길밖에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운전대를 잡은 내
손에는 약간 힘이 들어간다.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어가려다가 나는 지형이 조금 낯설다는 느
낌을 받는다. 육교를 지나자마자 첫번째 길에서 꺾었어야 했다. 지금 내가
들어선 곳을 둘러보니 두 블록쯤은 더 지나쳐온 것 같다. 기다시피해서 차
를 유턴해 돌아나와 보니 그 역시 낯선 길이다. 이곳은 바둑판형이 아니라
방사형 길이라서 한 번 잘못 들면 헤매게 마련이다. 아무래도 그렇게 된
모양이다.
길을 찾는 동안 시간이 꽤 흐른 것 같다. 안개는 점점 깊어진다. 쉴새없
이 피어오르는 안개 뒤의 거무스레한 고층아파트 건물들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간간이 보이던 자동차의 비상등마저 없다. 바닷속 같은 뿌
연 막막함뿐이다.
어딘지 잘 알 수 없는 사거리의 신호등 앞에서 나는 차를 세운다. 신호
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는 아주 짧은 시간. 이상하게
도 그 순간 잠이 밀려든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햇빛이 내리쬐는 한낮이다. 그녀와 나는 걷고 있다. 그녀가 이따금 나를
돌아보고 웃는다. 그때 갑자기 등뒤에서 거대한 물체가 나를 향해 달려온
다. 물체의 중심으로부터 빛이 뚫고나와 화살처럼 내 눈을 쏜다. 사라지는
뒷모습, 회전목마를 매단 말의 그림자. 그 사이 그녀는 사라지고 없다. 나
는 두리번거린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뭐라고
불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내 이름이다.
꿈이 깨는 것과 동시에 나는 불현듯 눈을 뜬다. 신호등은 바뀌지 않고
아직도 붉은색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밤과 안개뿐이다. 나는 안개를 물끄
러미 바라본다.
그 속에서 자전거 하나가 나타난다.
자전거는 건너편 차선을 타고서 내 차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다.
짧은 머리에 긴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타고 있다. 그녀는 내 차 옆을 스쳐
지나간다. 내게 눈길을 두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나는 안개 속에
얼핏 드러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깊이 들어가 있었고 입
술은 얇았다. 흰 운동화로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이 몹시 서툴러보였다.
내게는 신호등이나 중앙선 따위는 쳐다볼 틈이 없다. 가속페달을 깊이
누른 채 급하게 운전대를 꺾어 그녀를 뒤따라간다.
그러나 자전거는 안개 속으로 빨려들 듯이 미끄러져들어간다. 내가 안개
를 뚫고 다가갔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없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또 그
녀를 잃은 것인가.
그때 안개 속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조.
소리는 귓불을 간지럽히듯 아주 가까웠고 나직했다. 조조. 그것이 내 이
름이란 걸 나는 깨닫는다.나는 미친 듯이 가속페달을 밟는다. 안개 속으로
질주해 들어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볼 필요도 없었다. 오직 그녀뿐
이다. 그녀를 절대 놓칠 수 없다.
그녀는 나를 꿈으로 불렀다. 그녀는 시간의 굴레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꿈속에서 도망쳐나왔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
는 그녀를 사랑한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그때였다. 눈물을 머금은
내 눈속으로 망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불빛이 화살처럼 내리꽂힌다. 그것
은 나를 향해 달려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아니면 구원이라는 찰라의
섬광일 것이다. 몸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나는 그녀의 자전거 바퀴가 안
개 속에 떠오르는 것을 본다.
그리고 아홉번째 꿈의 노래를 듣는다.
아주 오래 전---나는 거리를 걸어내려오고 있었지. 더운 열기 사이로 나
무들은 속삭이고. 그때였어. 비가 쏟아져내리듯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
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오, 거기 펼쳐져 있는 두 영혼의 낯선 춤!
꿈 속의 일이었을까.
단지 꿈이었을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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