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유미리] 가족 시네마

by Casey,Riley 2023. 5. 1.
반응형



  가족 시네마


유미리


         차례

  가족 시네마
  한여름
  그림자 없는 풍경

  지은이:유미리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출생. 고교 중퇴 후 도쿄 키드 브라더스를 거쳐 1988년 극단 
청춘 5월당을 결성하여 극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하였다. 1993년 최연소의 나이에 
희곡 "물고기 축제"로 시기다 구니오 희곡상의 영예를 안았다. "정물화" "Green 
Bench" 등의 희곡 작품과 "가족의 표본" "사어사전" "유미리의 자살" "물가의 요람" 
등의 에세이를 출간했다.
  첫소설집 "풀하우스"로 제24회 이즈미 교카상과 노마문예 신인상을 연달아 
수상했다. 제 113회, 제 114회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으며, 1997년 중편 "가족 시네마"로 재 116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였다. 일본의 20대 순수문학의 기수로 손꼽히며, 가족 및 삶과 죽음을 
테마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가족 시네마

  섬광으로 눈앞이 컴컴해지고 망막에 자잘한 빛 알갱이가 부유하기 시작하자, 큐로 
친 당구공처럼 엔트런스 홀(entrancehall)에서 튀어나온 그림자는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이었다.
  계단에 한쪽 다리를 걸친 채, 순간적으로 이 자리를 빠져 나갈 반사신경이 움직이지 
않는 자신을 원망하였다.
  제일 먼저 달려온 어머니는 허풍스럽게 양팔을 크게 벌리며 안겨들었고. 아버지는 
힘줄이 불거진 양손으로 공중에 떠 있는 내 오른손을 잡고 세게 흔들었다.
  "생일 축하한다!"
  아버지의 고조된 목소리가 신호였는지, 남동생과 여동생이 알토와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하모니로 "해피 버스데이 투 유"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고등학교에서 취주악부, 여동생은 중퇴하기 전까지 미션 스쿨에서 성가대 대원이었다. 
분노와 곤혹감으로 몸을 뒤틀자, 어머니와 사교 댄스를 추고 있는 듯한 꼴이 되고 
말았다.
  현관 양 옆에서 HI 라이트가 20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을 비추고 있다. 
카메라가 불쑥 눈앞에 나타나 천천히 이동한다. 그래픽 디자인 전문학교에 다닐 때 
영화 제작에 참가한 경험도 있고, 회사를 PR하는 영화의 촬영 현장에 함께 한 일도 
있어, 카메라가 스태디 캠을 부착한 아리 3형임을 알 수 있었다. 재빨리 세어 보니, 
촬영 스태프가 여덟 명, 규모는 적지만 아마추어의 개인적인 회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화단 나무에는 마이크를 매단 장대를 들고 있는 남자, 그 발치에는 
나구라 테이프 리코더를 조작하고 있는 녹음 담당이 있다.
  "생일은 다음 달인데."
  힘없이 중얼거리나.
  "영화잖아."
  어머니는 꼬집듯 말하며 내 팔에 젖가슴을 밀어붙였다. 마흔 다섯 살 기념이라며 
수치심 한 조각 보이지 않고 유방을  풍만하게 수술한 어머니. 그 실리콘의 감촉에 
몸을 떨며, 누가 감독인 가타야마일까 싶어 팔짱을 끼고 우뚝 서 있는 남자들을 
둘러보는 순간, 분노가 온몸을 내달려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려고 몸부림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째지는 소리를 내지르자, 모두들 전원이 나간 모터가 속도를 잃듯 동작을 멈추었다.
  "컷."
  느긋한 목소리로 말한 사람은 카메라를 가트하며 움직이기에 조소라고 생각했던 
남자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시선을 돌린 채 내게서 떨어졌다. 남동생은 한눈에 
내 생일 케이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 상자를 양손으로 껴안고 계단에 앉아 있었고, 
여동생은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야시씨 면회입니다"라고 안내에서 구내 전화가 걸려 온 것은 한 달도 더 지난 
일이다. 그날은 아무하고도 약속이 없었던 터라 이상하다 싶어 이름을 묻자. 여동생인 
요코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진지한 의논거리를 들고 나를 찾는 일이 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회사에 찾아오는 것도 처음 일이다. 크레디트 카드로 산 옷값이 연체되어 
돈을 빌리러 온 것인가. 카드론으로 빌렸다면 오만이나 십만 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돈 때문에 온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10년 전, 그녀는 고등학교를 1학년에 중퇴하고 소극단의 오디션을 받아 합격하였다. 
그 무렵 나는 유화를 그만두고 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몇 번이나 어거지로 
티켓을 사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주역을 맡게 되어 눈깜짝할 사이에 
분장실에서 소녀 팬들의 아우성에 둘러싸이는 몸이 되었다. 2년 전 소극단을 그만두고 
프로덕션에 소속되었다.
  성인 비디오에서 두 번 주연을 맡았고, 이따금 CM의 엑스트라 일이 굴어 들어오는 
것을 제외하면 일거리가 없어, 생활비는 길거리에서 화장지를 나누어 주는 
아르바이트로 벌어들이는 모양이다.
  반년 전에는 오디션에서 기적적으로 단막극의 준 주연급으로 발탁되어 애처로울 
정도로 들떠 법석을 떨더니, 방영 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몹시 침울해 했었기 때문에 
여배우의 길을 단념했을 거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여동생은. 그 드라마를 연출한 가타야마라는 디렉터가 영화를 기획하였는데, 
주연으로 결정되었다고 말했다. "대단한데" 하고 일단은 축하했지만, 영화 그 자체가 
의심스러웠고, 그보다 왜 회사까지 찾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석연치가 않았다. 
얘기를 계속하라고 채근하자 그녀는 "시나리오가 문제야, 영화는 시나리오로 
결정나거든, 잡담 삼아 우리 가족 이야기를 했더니 가타야마 자식, 흥분해 가지고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픽션도 아닌, 그 경계를 넘어서는 획기적인 영화를 만들어 
보자는 거야"라고 단수에 지껄여댔다. 그리고는 "알겠어? 그러니까 언니도 출연하게 
됐단 달이야."라면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장단이라도 맞추듯 말하며 발을 
동동거렸다.
  그녀가 한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1분 걸렸다.
  "나더러 영화에 출연하란 말이니?"
  점차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여동생의 눈을 보고 물었다.
  "그 사람들도?"
  "그래 당연한 일이잖아. 아빠랑 엄마하고 오빠한테는 허락 받았어, 그래 봐야 
가족이란 어느 집이나 다 연극이잖아. 그러니까 아무 문제 없어."
  그녀는 어린 시절같이 "키들키들키들" 하고 귀에 익은 웃음 소리를 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별거한 지 20년이다. 어머니는 처자식이 있는 후지키와의 관계를 
아직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가족의 일원으로 영화에 출연한다면, 후지키와 
헤어진 것일까. 설사 촬영은 했다 하더라도 상연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자, 목소리까지 들떠 있는 동생이 가여워졌다.

  3일은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어 흐지부지 되었는가 보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로케 현장의 
얼빠진 구경꾼들처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야구 모자에 오리털 조끼를 입은 가타야마가 "어때"라고 묻자, "괜찮아요, 
이쪽은"이라며 카메라맨이 지시도 기다리지 않고 기재가 놓여 있는 현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탸아먀는 비비꼬인 웃음을 띠며 화단 앞에 쭈그리고 앉아 이어폰으로 
테이프를 듣고 있는 녹음 담당 쪽을 향했다. 녹음 담당은 여전히 테이프를 들으면서 
가타야마를 쳐다보았다. 장대를 들고 서 있는 남자와 라이트 옆에 있는 남자는 
아까부터 말이 없다.
  어머니는 엔트런스 홀에서 콤팩트를 들여다보며 립스틱을 고쳐 바르고, 하늘을 
쏘아보았다가는 입술을 빠끔거렸다. 짙은 재색 소프트 모자에 던힐 양복을 입은 
아버지가 다가왔다.
  "화장했어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축 늘어져 있었다.
  "도란을 좀 발랐지. 너도 화장을 좀 하는 편이 좋겠다. 메이크업 담당이 없으니까 
요코에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어떻겠니?"
  아버지는 별 거리낌없이 말했다. 그리고는 "참 어렵네, 대사라는 거. 하지만 난 뭐 
난생 처음이니까 어쩔 수 없지"라고 중얼거리며 엄숙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길이 닿자 "그럼 나중에 보자"리며 등을 돌렸다.
  앞에 선 어머니의 키가 나와 전혀 차이가 없는 까닭은, 나보다 2센티미터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기 때문이다.
  "괜찮지? 엄마도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야, 어리석은 짓이란 건 알고 있어. 난 
요코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 거야. 너도 해야 돼, 알았지?"
  시야에 이어폰을 빼고 테이프를 돌리고 있는 녹음 담당이 들어온다. 장대를 든 
남자가 나무에서 내려오자 라이트가 꺼졌다.
  "감독님, 이동합니다."
  경례라고 할 듯한 기세로, 주머니가 닥지닥지 달린 사파리 재킷을 입은 조감독이 
말했다. 카타야마의 눈은 나를 비난하듯이 쏘아보고 요코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여동생은 랩이라도 부르는 말투로 "언니 어떻게 된 거야, 그러면 안 돼, 늦었잖아,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구. 참 내"라면서 깡총거렸다. "자, 가자구, 언니 방으로... 아빠랑 
엄마가 기다리다 지쳤어. 늑대가 나타나 할머니가 잡아먹힌단 말이야. 감독!"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동"이라고 조감독이 외치자, 모두들 현관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현관 앞에 세워 두고 엔트런스 홀로 들어가 자동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 "기재는 비상 
계단으로 옮기세요, 절대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이라고 숨죽인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모토미가 하라는 대로 해요"라며 오른손으로 조감독의 팔을 붙잡고는 쉿! 
하고 왼손 집게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웠다. 조감독이 무언의 지시를 내리자 
스태프들은 지칠 대로 지친 빨치산 같은 표정으로 비상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과 가타야마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남동생은 생일 케이크 상자에 달인 
빨간 리본을 턱으로 만지작거리며 층 표시 램프를 쏘아보고 있었다. 7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서자 남동생은 내 얼굴을 보고, "정확해. 한층은, 하나, 둘, 셋, 넷, 
그러니까 2초야. 따라서 7층까지는 스물 넷을 세면 되거든, 누나"라고 말하며 케이크 
상자를 무릎으로 받치고 열림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리려 하지 않았다.
  "아빠가 제일 먼저예요"
  여동생이 애니메이션의 소년역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복도로 내려서면서, 
"아빠는 어느 방인지 모르는데"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방 번호를 말해 주자 모자의 
챙을 손으로 만지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옛날에 아버지는 외출하기 전이면 모자를 몇 개나 상자에서 꺼내 거울 앞에서 써 
보고는, "다들 날더러 앨런 래드를 닮았다고 하는 게 그렇게 닮았나"라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여동생은 "아빠 똑같아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여동생이 "캠프에 갔을 땐가 바위 위에 서 있었던 아빠가 , 정말 우디 머피하고 꼭 
닮았더랬어요"라고 말하자, 숟가락으로 반합을 두드리고 있던 엄마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버지는 영화를 보고는 모자를 사 모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줄곧, 집을 나간 첫 번째 원인은 그 사람이 폭력을 휘두르고 경마에 
미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의 이유를 물으면 "구두쇠였기 때문이지"라고 
내뱉었다. 그런 후 "멍청한 남자랑 결혼하면 자기도 안심하고 남편 못지 않게 
멍청해지는 여자도 있지만, 남편은 물론이고 자기자신까지도 죽을 때까지 용서 못하는 
여자도 있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내가 세 살이 되자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하였고, 머리에는 롤을 감아 주었다. 그러나 자기가 머릿속으로 그린 행복한 가정이 
삽화가 현실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카바레에서 일하기 시작하였고, 
미련 없이 어머니 역을 내던졌다.
  침실문을 열어 가족을 안으로 들여보낸 후. 스태프를 거실로 안내하였다. 
엊그제부터 계속 비가 내려 창문을 꼭꼭 닫아 둔 탓인지, 눅눅한 공기가 생기 없이 
방안에 고여 있었다. 어머니는 내 수입과 집세의 발란스를 따져보는 모양이었다. 
수상쩍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급기야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핥듯이 
실내를 들어보았다. 아버지는 부티크에라도 들어선 듯 벽장에 걸려 있는 옷을 
바라보고, 선반 위에 놓인 검정 고양이 장식물을 하나하나 들어보다가, "이거 
얼마지?"라며 조그만 목조 검정 고양이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나도 모르게 "파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할 뻔했다.
  "비싸겠는데."
  아버지는 집게손가락으로 고양이를 뒤집었다.
  "노르웨이 제, 받은 거예요."
  아까부터 소변이 마려운데 어머니가 서랍장을 열까봐 참고 있다. 밑에서 두 번째 
단에는 남자용 속옷이며 양말이 들어 있다. 목욕탕을 들여다보아도 곤란하다. 
세면대에는 면도기와 칫솔이 두 개 꽂혀 있고, 게다가 빨랫감까지. 나는 손을 씻으러 
가는 척하면서 그런 것들을 세면대 위 캐비닛에 숨겼다.
  거실에서는 라이트 세팅이 끝났는지 가타야마가 조감독에게 테이블의 위치를 
지시하고 있다. 카메라맨은 벽장 안에서 찍을 작정인지, 요코가 청소기니 겨울용 
담요를 끌어내어 침실로 옮기고 있다. 나는 가타야마에게 "이 집은 내 명의로 빌린 
것이 아니라서 제일 윗층에 사는 주인에게 발각되면 곤란하니깐 11시까지는 끝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가타야마는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벌써 9시 7분인데. 뭐 
어떻게든 해치웁시다, 예"라고 신경에 거슬리는 무례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난 출연하지 않아요. 동생은 여배우지만, 나는 다르니까."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협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꽤 노력하기도 하고. 괜찮아요, 난 
다큐멘터리로 자란 몸이니."
  가타야마가 스태프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카메라맨 쪽으로 걸어가기에, "그래도 
난 절대로 안 해요"라고 다짐하려는데 등뒤에서 누군가 팔을 잡았다.
  "시나리오에는 언니의 생일로 설정되어 있으니까 딴 생각마. 더구나 현관 장면하고 
연결이 어색해지잖아. 출연해, 그렇지 않으면 소란을 피우겠어."
  손톱이 두 팔에 파고 들었다. 스태프는 그녀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 듯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녀라면 유리창도 깨부수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내던지고도 
남을 것이다.
  "스탠바이 부탁합니다."
  조감독이 말했다.
  화장실에서 나와 거실로 돌아오자, 남동생이 테이블 위에 케이크 상자를 놓았다. 한 
가족이 모여 살았던 20년 전과 똑같은 배치로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정말 그렇다. 늘 이런 위치였다. 어색하고 답답한 분위기까지 그 시절과 
다름이 없다. 우리들 사이에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확실하게 남아 있는 것은 , 
의식이 서로 닿을 때마다 접촉 불량을 일으켜 웅성거리는 증오와 짜증이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감정의 피막이 찢어져, 우리 형제들에게 접촉하면 
감전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다섯 명 
모두 서로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뚜껑 열까?"
  남동생이 리본에 손을 대었다.
  "그건 내 역할이야."
  아버지다 말하자 동생의 얼굴에 분노가 치밀었다. 아버지를 거역하지 않는 유순한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다. 그 시절 역시 마차가지였으리라.
  왼손에 시나리오를 쥔 가타야마가 마룻바닥에 정좌를 하고 앉아 얼굴을 바싹 
긴장하고 말했다.
  "포인트는 모토미 씨의 생일날 20년 만에 온 가족이 재회한다는 점이니까 처음에는 
흥겨운 분위기로 갑시다. 음, 아니, 역시 시끌벅적한 편이 좋을까, 나는 영화는 
축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 그래요."
  가타야마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조감독이 초를 세팅하였다.
  "부부싸움은 어떻게 되는 거죠?"
  어머니가 콤팩트를 열고 물었다. 현관에서 립스틱을 바르며 입술을 빠끔거릴 때는 
대사를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장면은 나중에 따로 찍을 겁니다."
  가타야마가 딱 잘라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감독이 백 엔짜리 라이터로 초를 
불에 붙이고는, 내 얼굴 앞에서 딱딱이(슬레이터)를 탁 쳤다.
  "축하해, 언니!"
  여동생이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천박한 웃음 소리에 흰자위까지 번들거려가며 
웃고 있다.
  "그만하지 못하겠니, 요코! 감독 컷하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무슨 상스러운 짓이니, 넌 옛날부터 그 모양이었어. 모두들 불쾌하게만 만들고."
  "컷."
  가타야마는 카메라가 아니라 어머니의 말을 끊으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합시다."
  이 사나이는 의외로 유능할지도 모르겠다.
  "축하한다, 모토미도 스물 아홉 살이 되었구나. 슬슬 결혼을 생각해도 좋을 나이지, 
아니 벌써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너희들 어머니가 나랑 맺어진 것은, 스물 한 살 때 
일이었어."
  아버지가 단조로운 말투로 말했다.
  "모토미, 누구 좋아하는 사람 있지? 엄마한테만 가르쳐 주렴."
  어머니는 기묘한 어조로 말하며 귀를 내 얼굴에 닿을락말락 하게 갖다 대었다.
  "누나, 털어놔."
  남동생이 내 턱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오로지 남동생만이 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촬영을 중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터라, 나는 
신음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가 양복 주머니에서 빨간색 조그만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내 탄생석인 
에메랄드 반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카바레에 나가야 할 만큼 생활비는 조금밖에 
주지 않으면서도 가족들에게 항상 터무니없이 값비싼 선물을 하였다. 성인식 때 받은 
것은, 어머니 말에 의하면 백오, 육십만 엔이나 하는 밍크 코트였다. 또, 지금 다니는 
회사에 취직되었다고 알리자, 한 자루에 칠, 팔만 엔이나 하는 몽블랑이니 위터맨이니 
파카니 하는 만년필을 여섯 자루나 보내 주었다.
  "나 같으면 전당포에서 그거하고 똑같은 반지를 절반 가격에 살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는 반지값을 어림잡은 모양이다.
  "끼어 보지, 그래."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여동생이 상자에서 반지를 꺼냈다.
  "됐어."
  떨리는 목소리를 견디는 게 고작이었다.
  "아빠가 애써 선물한 거잖아. 안 그래요. 엄마?"
  "옛날에도 그랬어, 네 언니는 아빠한테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절대로 울지 않았잖아, 
고집불통이야."
  그때 엔트런스 홀에서 차임 벨이 울렸다. 인터폰을 들지 않고 그냥 지나쳐보려고 
몸을 긴장하고 있었더니, 일단 그쳤다가 몇 초 간격을 두고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부엌 싱크대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조감독이 허리를 구부린 채 인터폰 쪽으로 
다가갔다.
  "자네 조감독 처음 하는 거야?"
  카메라맨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녹음 담당도 들으라는 듯 한숨을 토하며 
귀에서 이어폰을 빼 목에 걸었다.
  "전원 끄는 걸 깜박했군요, 죄송합니다."
  조감독이 머리를 숙이자, 가타야마가 조용히 말했다.
  "받아도 좋아요."
  나는 마룻바닥에 맨발을 비비듯 걸어 천천히 벽으로 다가갔다. 인터폰을 드는 
오른손이 가족과 스태프의 눈길로 굳어졌다.
  "있으면서 없는 척해 봐야 소용없지."
  웃음 섞인 이케의 속삭임.
  "지금 자료 가지고 아래로 내려갈게요"라고 말을 하는데, 요코가 옆에서 손을 뻗어 
해제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그녀는 그 손을 입가로 가져가 웃음으로 비틀어진 입술을 
가렸다.
  현관으로 나가려고 뒤죽박죽 쌓인 신발더미를 헤치고 있는데, 이케가 벨로 누르지 
않고 불쑥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늘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사이에 
현관문을 열어 두기 때문이다.
  이케는 문을 열자마자 현관에 우글거리는 신발, 기재, 그리고 목을 들이밀어 촬영 
스태프들을 보고는 낭패감인지 비난인지 모를 눈길로 나를 보았다. 나는 구구 건지도 
모를 신발을 꿰고, 아케의 어깨를 밀며 복도로 나갔다. 7층 다른 집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문에 조그맣게 달라붙은 볼록 렌즈에 한쪽 눈을 대고 우리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지금 영화 촬영하고 있어. 사정이 좀 복잡한데 동생이 주역이라서, 나는 거절했는데 
갑자기 촬영이 시작됐어. 오늘은 그냥 돌아가, 나중에 전화할 테니까."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텔레비전 드라마의 형사처럼 나타나 이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나는 모토미의 애비되는 사람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아버지가 한쪽 눈을 찡긋 조아렸는가 싶더니,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조아렸다.
  이케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려다가 미처 정리가 안 된 채 당황하며 명함을 찾기 
시작했다.
  "모토미 씨와 같은 회사에서 영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케라고 합니다."
  "딸아이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겠군요."
  아버지는 은근한 태도로 가볍게 인사를 하였다.
  명함을 찾지 못한 이케는,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꾸벅거리며,
  "죄송합니다, 오늘 명함을 갖고 있지 않아서."
  "그런데 무슨 용건으로."
  아버지가 틈을 주지 않고 취조를 하기 시작했다.
  이케의 머리가 어깨 위에서 흔들흔들 흔들렸다.
  그는 "아아, 저 약속이 있었지" 하고 내게 동의를 구했지만 영문모를 복수심이 
솟구쳐 내 말은 목구멍에 막혔다.
  아버지는 연기를 하는 듯한 허풍스런 몸짓으로 왼쪽 소매를 걷어 올리고, 로렉스 
손목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아, 그렇지만 내일이라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렇죠 모토미 씨."
  이케가 또 내게 동의를 구하고는, "그럼 내일 회사에서"하면서 두 걸음 뒤로 
물러나는데, 어머니가 복도로 튀어나왔다. 볼록 렌즈로 무슨 일인지 살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어머니는 이케 앞을 가로막고 서서 말했다.
  "당신도 영화 출연해요. 가족만 있으니까 조역이 모자라서, 영 신이 안나. 당신, 
모토미 생일 축하하러 온 거지."
  한걸음 한걸음 뒷걸음질 하던 이케를 어머니는 문 앞까지 되돌려 놓고 말았다. 
이케는 문에 기대는 듯한 꼴로 버티고 섰다.
  "죄송하지만, 그만 돌아가 봐야 됩니다."
  "생일날 밤에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가다니 그런 법이 어딨어요. 당신 모토미 애인 
역에 딱 어울려. 자 들어와요."
  어머니는 이케의 팔을 꽉 잡았다.
  "저는 모토미 씨와 같은 회사에 다니고 영업을 맡고 있습니다. 오늘은 의논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던 겁니다."
  어머니의 침이 튀었는지 소맷부리로 얼굴을 닦으면서 아버지한테 한 말을 
되풀이하였다.
  "재미있잖아. 가족 앞에서 그 의논인지 뭔지를 하자구요. 회사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 히트칠 수도 있고, 사장님도 기뻐할 거라구요, 틀림없이."
  이케는 줄달음쳐 엘리베이터 버튼을 두세 번 누르다 여간해서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복도 끝가지 달려가 비상계단으로 뛰어내려갔다.
  문 앞에 가타야마와 조감독이 아연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다.
  "어머? 뭐야, 카메라가 안 돌아가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원망스러운 듯이 꾸민 목소리를 쥐어짜 내고, 가타야마를 흘겨보면서 
"괜한 고생했네"라며 어깨를 떨구었다.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서도, 어머니는 줄곧 끈적끈적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한가지 물어보겠습니다만, 딸아이와는 3년 만에 만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점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좀 부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간신히 본래 성격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시비조로 말했다.
  "그건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아무튼 찍읍시다."
  가타야마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싸움 장면 말인데, 나 역시 가족을 하루도 잊은 일이 없어요, 라고 소리치는 부분 
있잖아요? 거기서 말이죠, 눈물을 흘리는 편이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뺨을 만지며 말했다.
  "아아, 딱히 상관없습니다."
  가타야마는 주저없이 말했다.
  남동생은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리모콘으로 전원을 끄더니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여동생은 "바보짓이야, 이제 다 틀렸어"라고 중얼거리며 창문 앞을 
왔다갔다 하고 있다. 아버지는 답배갑을 들여다보고,"아아 다 피워버렸군"이라면서 
비틀었다. 조감독이 자기 담배를 내밀자 고개를 저으며 받지 않았다.
  "헤비스모커는 말씀이죠, 상표를 바꾸지 않은 법입니다. 내가 피우는 것은 팔러먼트, 
당신은 마일드세븐."
  아버지는 재떨이에서 비교적 긴 꽁초를 주워 입에 물고는 성냥을 그었다.
  "내가 앉은 자리가 어디였더라. 오른쪽? 왼쪽?"
  매끈하고 팽팽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가타야마가 기억을 더듬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담배 끝을 살짝 왼쪽으로 털었다.
  촬영은 아버지가 반지를 꺼내는 장면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협력하며 연기를 잘해 나갔다. 도저히 20년 동안 별거중인 부부라고는 여겨지지 않은 
만큼 호흡이 잘 맞았다. 요코도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점차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아 
2분에 한번 꼴로 등장하면 충분하다는 식으로 작전을 바꾼 모양이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남동생이 케이크를 잘아 담은 접시를 내어 내 얼굴에 밀어붙이고, 모두들 "와" 
하고 웃는 장면에서 "컷"소리가 들렸다. 조감독이 내민 화장지로 생크림을 닦아내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했다.
  "다음은 싸움 장면이지, 요토미 짱, 술 꺼내 와!"
  '어머니는 언제까지 우리를 어린애들처럼 짱으로 부를 작정인지.'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맥주 말고, 위스키나 정종 있지? 엄마는 다 알아. 꺼내 와. 정종 같으면 안 데워도 
되고, 상온이야."
  싱크대 밑 수납고에서 이케가 사다 둔 정종팩을 꺼내 건네자, 어머니는 잔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시작해요, 엄마."
  "자"하는 가타야마의 목소리에 아버지는 물고 있던 담배를 버리고, 딱딱이 소리를 
기다렸다.
  "오호, 전당포라고, 당신 같은 삼류 인간한테는 비즈나 유리 구슬로 충분한데 
말이야."
  "생활비는 한푼도 주지 않고, 나하고 자식들은 끼니를 때울까 말간데, 자기는 실크 
와이셔츠나 주문하고, 백금에 다이아몬드 넥타이핀이랑 카우스 버튼까지 끼고."
  어머니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컷! 우는 거 좀 일러요."
  가타야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안경을 끼는 편이 좋겠습니까?"
  아버지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금테 안경을 써내, 가타야마에게 보였다.
  "그러세요."
  가타야마는 한숨을 토하고, 크게 들이쉰 숨을 그대로 삼켰다. 아버지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안경 다리를 귀에 걸쳤다가, "갑자기 끼면 이상한가"라고 혼자 
말하고는 다시 벗었다. 가타야마는 턱 근육을 경직시키고 딱딱한 목소리로,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안경 같은 거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자, 갑시다"하며 
조감독에게 신호를 보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겠소? 가족이 함께 살지 않다니 부자연스러워. 그건 
그렇다치고 어쩌다가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되었는지, 난 잘 모르겠군."
  "어쩌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구요? 참 이상한 말도 다 
하는군요. 당신,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죠? 그래요, 그게 문제라구요, 
그게!"
  "그게 문제라니, 제대로 설명을 해 주지 않으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잖니. 모토미, 
가즈키, 요코, 너희들은 아니?"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가 시나리오에 씌어 있는 대사인지 , 아니면 애드 리브인지, 
나는 분간이 안 갔다. 가타야마가 시나리오를 썼다면, 각자 주장을 취재하여 
대사화하였을 것이다. 리얼한 응수로 들리기도 하고 작위적인 점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진부한 대사임에는 틀림없다.
  "그걸 모른다면 끝장이죠."
  어머니는 코를 킁킁거리며 입술을 비틀고 말했다.
  "자식이 세 명이나 되는 여자가 어째서 카바레 같은데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됐죠? 
생활비래야 하루에 고작 오백 엔밖에 주지 않았잖아요. 경마에 부은 돈은 삼천만 
엔이든 사천만 엔이든 아무 문제사지 않겠죠."
  "당신이 지금 모토미 하고 똑같은 나이였을 때, 내가 만마권을 맞춰서, 애들한테 
옷을 사주겠다고 했더니 오십만 엔이나 하는 투피스를 산 건 누구였지?"
  아버지는 빈정거리며 목덜미를 긁었다.
  "딱 한 번뿐이잖아! 인기 있는 말들은 다 제쳐 다고, 겨우 10점짜리에다 걸면서 
재산을 탕진했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어요. 분명히 말해 두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야. 당신이 돈을 걸고 지는 방식을 용납 할 수 없는 거예요. 당신, 쓰즈키 구에 
있는 집하고 땅 전부 팔아서, 천만이든 이천만이든 걸 배짱 있어요?"
  '여기에서 아버지가 격노하여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시나리오겠지.'
  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내가 잘못했고, 사과하지, 당신 말대로야."
  비통한 목소리가 들려 눈을 뜨니, 아버지가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머리가 많이 빠져 핑크빛 속살이 들여다보인다.
  '나이가 들어 마음이 약해진 걸까, 아니면 가족을 학대하는 아버지로 비치고 싶지 
않은 것인가.'
  참혹함과 수치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유치해요, 아빠!"
  여동생이 아버지의 어깨를 흔들었다.
  "웃기지 말아요, 마음에도 없는 사과가 무슨 사과예요. 기가 막혀서! 내가 어떤 
심정으로 집을 나갔는지 알기나 해요. 내가."
  눈물이 뺨에서 턱을 타고 테이블로 떨어지고, 어머니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져 울었다.
  "컷! 어머니, 너무 빨리 울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가타야마가 어머니를 쏘아본다. 방안은 영화 촬영 현장다운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시겠어요, 어머니. 격렬하게 말다툼을 하고, 엉겨 붙어 서로 치고 박고 싸움을 한 
다음에, 하루라도 가족을 잊어 본 말이 없다고 소리친 다음에 우는 겁니다. 아버님도 
용서를 구하는 것은 그 다음이잖습니까?"
  아버지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려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똑바로 가타야마를 응시하고 있다. 가타야마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톡톡 상냥하게 두드렸다.
  "하지만 두 분 다 연기는 일품입니다, 아주 좋아요. 앞으로가 진짜니까, 열심히 해 
주십시오."
  "저 말이지, 지금 찍은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다시 하면 박력이 떨어질 것 
같은데."
  카메라맨이 집게손가락으로 흰색이 섞인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고막이 
까끌거릴 만큼 쉰 목소리였다.
  "우리들은 몇 번이라도 할 거예요."
  어머니가 기침을 삼키듯 말했다.
  "다시 한다면 안경을 끼고 싶은데, 어떨까요?"
  아버지는 넥타이 매무새를 가다듬고, 양복에 실밥을 가시라도 뽑는 것처럼 집어 
털어 내고는 말했다.
  가타야마는 시나리오에 눈길을 떨군 채 혀를 끌끌 하며 말했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고 했잖습니까?"
  "그렇지만, 역시, 지금까지 끼지 않았으니 이상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때가 돼서 안경을 끼는 경우도 있고, 흥분해서 깜박 잊는 경우도 
있습니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신경을 쓰시는군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 가타야마는 카메라맨에게 "조금 더 찍을까?"하고 주문을 
하였다.
  "이상하군, 아무래도 처음부터 끼지 않으면 이상해. 나는 자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화를 봐 왔네. 그 정도는 상식 아닌가. 젊은 시절 "영화의 벗"이란 잡지를 구독한 
일도 있다구."
  아버지는 시비를 걸 상대를 찾아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다. 입안에 시큼한 타액이 
잔뜩 고이고 목덜미가 뜨끈뜨끈해졌는가 싶더니, 알레르기성 습진이 솟아난 것 같은 
기분에 온몸이 근질근질하다.
  "좋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로 하지."
  가타야마가 아버지를 무시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재를 정리하고 있는 스태프를 그냥 놔두고, 침실로 들어가려 하자, 남동생이 내 
어깨를 쳤다.
  "나. 테니스 코치해서 돈 벌어."
  "윔블던 센터 코트에서 시합이 있을 거래."
  요코가 내게 눈짓을 하였다.
  "내년이야."
  남동생은 새하얀 이를 보였다. 갑자기 오한으로 온 방이 부들부들 떨 것 같았다. 내 
가족은 20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붕괴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번에는 희극적으로.
  남동생이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였다.

  "윽, 윽."
  목구멍에 막힌 목소리가 길게 꼬리를 끌다 커다란 울음소리로 바뀌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다 잠에서 깨어났다. 오른손에는 부엌칼 손잡이의 감촉과 살과 뼈의 
저항이, 눈까풀 안으로는 빨간색이 넘치고 있다. 찌른 것은 남자였다. 잘 알고 있는 
남자였던 것 같은 느낌이다. 아버지, 아니면 이케나 가타야마. 남자의 얼굴을 차례차례 
떠올려 보면서 손목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후카미 세이치같은 기분도 드는데, 
사진으로 보았을 뿐이라 얼굴이 어렴풋하게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회사에는 감기에 
걸렸다고 전화를 걸어야겠다, 실제로 미열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래 점 쉬는 편이 
좋겠어'라고 자신에게 맞장구를 치고 가슴 위 이불을 껴안았을 때, 10시에 있는 
회의가 기억났다.
  내가 고안한 장미꽃바달 기획을 놓고 그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다. 미국 
영화에 줄곧 등장하는 , 1미터 정도의 길쭉한 상자에 장미꽃을 담고, 꽃병도 곁들이는 
상품 기획안이다.
  생일이나 입학 축하용으로 문전 배달을 하는 시스템도 포함하여 제안하였고, 꽃병 
디자인은 조각가인 후카미 세이치에게 의뢰하고 싶은 생각이다. 기획부장 오시마는 
그의 작품이 지나치게 전위적이고 돈도 많이 든다며 난색을 보였다. 하지만 반드시 
히트할 것이라고 줄곧 설득하여 간신히 사장 앞에서 브리핑을 할 수 있는 단계까지 
끌고 왔다.
  이 기획안이 통과되면 오늘 당장이라도 후카미에게 일을 의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일어나야지'라고 자신을 채근해 보지만, 근육이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두 번 
몸을 뒤척이다 이불을 걷어차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다 거울을 본 순간, 꿈속에서의 불안감이 되살아났다.
  오늘은 아무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다. 자신의 기획안이 상품화되어 매상을 올리는 
이미지를 그리면서, 희망에 찬 장래의 청사진을 머릿속으로 펼쳐보려 시도는 하지만, 
그런 일로 흥분했던 시절도 입사 2,3년째까지다. 덜그럭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거실에서 누군가 걸어 다니는 듯한 기척이 느껴진다. 이틀 전 
촬영이 있은 이후, 벽장에서 어머니가 튀어나온다 해도 놀라지 않는다. 잠시 숨을 
죽였다, 정신을 차리고 칫솔을 입에 넣었다.

  5분 지각이다, 내 책상에는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4층 회의실을 향했다. 문을 열자 
사장을 제외한 전원이 모여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자리에 앉자, 황록색 일회용 라이터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오시마가 
고개를 끄떡거렸다. 옆 자리에 앉아 내가 제출한 기획서를 훑어보고 있는 야베의 
얼굴에서 애프터 쉐이브 로션의 잔향이 흘러온다.
  "하야시 씨가 도착하기 조금 전에 사장님한테서 30분 늦는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야베는 기획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야베는 늘 성실하고 예의바르다. 그가 
회사 동료들과 우르르 몰려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걸 본 적도 없고, 함께 술을 마시러 
갔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 "로리타 콤플렉스(유아에게만 성적 욕망을 느끼는 
심리)아냐?"라고 험담을 늘어놓고, 그의 은근한 말투를 흉내내며 바보 취급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곡을 찌르는 기획안을 잇달아 내놓은 야베는 사장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일로 남자 사원들의 질투심에 불이 붙었다. 그래서인지 일 때문에 
필요불가결하게 의논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나는 종이컵에 입을 댄 채 커피를 홀짝 마시고, 대각선으로 앉아 있는 이케의 
얼굴을 보고는, 또 홀짝 마셨다. 사장이 들어왔다. 이케는 나를 힐끗 보고는 눈길을 
떨구고 기획서를 넘겼다.
  이 회의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내 여기저기에 전쟁터와 꽃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사장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듭 되풀이해 강조하는 '어떤 전쟁터에도 꽃 한 송이쯤은 
바람에 흔들린다.'는 사훈이나 마찬가지인 말을 테마로 찍은 것들이다. 보스니아에도 
카메라맨을 파견한 다느니 어떤 사진에는 그 나라에 필 턱이 없는 꽃이 찍혀 있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기도 하지만, 아무도 어떤 사진이 그런지 지적하지 못한다.
  "꽃에 평화니 자연보호니 하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장사를 못하는 게 그의 
한계야. 원래가 정치가니 명분이 필요한 거지."
  사장에 대한 이케의 평가는 그랬다. 사장은 이십대에 구의원을 연임하고, 도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는 정치에서 발을 씻고, 처가에서 운영하는 꽃집을 물려받았다. 
지바현의 비행장 근처에 있는 땅 이외에도, 꽃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노는 땅을 싼값에 
빌리고, 인근 농민들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 그 각각의 
농원에서는 대부분 젊은이들이 일한다. 수도권의 도로변이나 공원 등 공공시설에 있는 
화단 점유율 3할을 자랑하고 있다.
  기획부장 대우인 하리카이가 땀이 밴 미간을 위아래로 실룩거리며, 헛수고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 판에 박힌 일을 딱딱한 목소리로 설명하고 있다. 나이를 물어 본 적은 
없지만, 쉰 전후일 것이다. 두텁고 언제나 번들번들 젖어 있는 입술, 입은 타액으로 
그득하고 말을 할 때마다 테이블 위로 침을 튀었다. 10분 정도 떠들다가 아무런 
암시도 없이 하리카이는 얘기를 끝내고, "그럼 하야시 씨부터"라면서 싱긋 표정을 
풀었다. 나는 자료를 껴안고 화이트 보드 앞에 서서, 시선을 사장의 턱언저리에 
정확하게 고정시켰다.
  "이십대에서 삼십대 커이러 우먼을 판매 대상으로 삼고자 합니다. 능력 한도 내에서 
가능한 한 고급품을 지향하려는 젊은 여성들의 취향에 맞추어 원예 붐도 한몫하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서두를 꺼내자, 말이 내 입에서 술술 흘러 나왔다. 테이블 쪽을 한 차례 
훑어보아도, 아무도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사장을 제외한 열 명의 
남자들은 한결같이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다.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의문스러운 점은 
이야기의 내용을 속기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야말로 
속기사를 고용하면 되고 비용이 문제라면 누군가 한 사람이 대표로 적으면 될 것이다. 
게다가 아우트라인은 기획서에 씌어 있다.
  나는 화이트 보드에 상품의 그림을 그리고, 꽃병에 빨간 매직으로 원을 그렸다.
  "꽃병 디자인은 조각가인 후카미 세이치 씨에게 부탁하려 합니다. 작품집을 직접 
보시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군요."
  나는 작품집을 사장 앞에다 놓았다.
  사장은 천천히 작품집을 들추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어떤가 , 오시마 군."
  손수건으로 안경을 닦고 있던 오시마는 당황하여 자세를 바로 가다듬었다.
  "그의 작품은 전위적이라는 면에서 크게 평가받고 있지만, 지나치게 전위적이기도 
하고 너무 추상적이지 않을까요, 저로서는 좀더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이케를 보았다. 나의 기획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벙긋하지 
않을 작정인지, 줄곧 기획서만 읽는 척하고 있다.
  "꽃다발의 단가를 고려해도, 질적으로 상당한 수준이 아니면 히트하지 못할 겁니다. 
고급스런 느낌은 이 상품의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카랑카랑 마른 입안이 마음에 걸려, 도중에 "저-"라고 세 번이나 주춤거리고 
말았다. 나는 턱을 바싹 잡아 당기고, "이상입니다"로 브리핑을 맺었다. 사장의 얼굴을 
향하고는 있지만 입가를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장이 내게 볼펜 끝을 향하고 말했다.
  "좋은데, 나는 아주 유망한 기획이라고 생각해요. 꽃병 디자인료도 예산 범위 내에서 
할당할 수 있죠?"
  "절대 예산액을 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어요."
  기획안은 통과되었다.
  다들 빠져 나간 회의실에서 화이트 보드에 쓴 글자를 지우려니, 등줄기로는 오한이 
스쳐 지나가고 옆구리로는 찌르는 듯한 통증이 내달린다. 얼굴과 등의 털구멍이란 
털구멍에서 비지땀이 솟구친다. 정말 감기에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검정 래브라도 리트리버(뉴질랜드 원산의 사냥개)가 목을 돌리고 나를 보고 있다. 
목걸이는 하고 있는데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강둑길에도 다리를 건너 도로로 나가는 
길에도 사람 그림자 하나 없다. 불안이 명치께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오려 태세를 
갖추고 있다. 개는 좋아하지만, 다리 한가운데 드러누워 있는 개보다는 차라리 죽은 개 
쪽이 그나마 낫다. 잡종이라면 또 몰라도 래브라도 리트리버란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개는 나를 그저 바라만 볼 뿐, 그 표정에서는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다. 
개라면 경계를 하든지, 아니면 무슨 기대라도 하면서 사람을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니 참을 수 없다.
  나는 개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같이 하고, 손으로 개의 머리에서 등을 쓸어 
내렸다. 개는 앞다리를 세우고 앉았지만, 귀찮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뻐하는 눈치도 아니다. 개의 등 너머로 다리 난간 사이를 들여다보니, 물이 흐르지 
않는 강바닥에 소형 불도저, 그 옆에는 노란색 헬멧이 두 개 나뒹굴고 있다. 손바닥을 
내밀자, 개는 오른 다리를 올려놓았을 뿐, 조금도 마을을 허락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혀를 차면서 일어나, 두세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개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길바닥에 납죽하게 앉아 꼼짝하지 
않는 개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루이, 이리와! 루이! 
루이! 이리와, 루이!"라고 소리치며 탁탁 손뼉을 쳤다. 개는 근육을 움직여 허리를 
들어올리려 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 개를 움직이게 하고 싶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데리고 가서 
새 주인이 될 수도 있다.'
  "루이!"
  나는 개에게 다가가 등 양쪽으로 다리를 벌리고 몸통에 팔을 감았다. 개는 버티고 
있는 앞다리에 힘을 준다.
  "루이, 일어나, 이 바보, 일어나라면 일어나야지!"
  온 얼굴에 핏줄이 돋고 어금니를 깨물며 단숨에 안아 올리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등뒤에서 들이받는 듯한 웃음 소리가 나, 놀라 손을 떼었다.
  "훔칠 작정이야?"
  돌아보니, 쭉 뻗은 다리에 청바지를 입고, 초봄인데도 새카맣게 탄 젊은 남자가 
쇠줄을 흔들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좀 힘들걸, 댁한테는."
  남자가 허벅지를 탁탁 치자, 개가 걷기 시작하더니 그 옆에 나란히 섰다.
  "내가 명령을 내릴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단 말씀이야. 훈련중이거든. 내일 
주인이 데리러 올 테지만, 음."
  남자는 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는 목걸이에 쇠줄을 연결하며 말했다.
  "석 달에 조련료는 이십칠만 엔. 싸지?"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암 안 비싸지, 음"이라고 혼자 중얼거리고는 다시 한 번 
허벅지를 탁 치고 걸음을 옮기려다 물었다.
  "루이라니 대체 뭐야?"
  남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옛날에 기르던 개가 없어졌든지, 누가 
훔쳐갔든지, 죽었겠지 틀림없이, 응"이라고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죽었어"라고 말하고픈 유혹을 못이겨 입을 여는데, 남자가 허벅지를 탁 
치더니 걷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기 몇 달 전까지 길렀던 아키타견 루이는, 남동생이 산보를 
넘어져 목줄을 놓는 순간, 지나가던 다섯 살 소녀에게 달려들어 목덜미에 흉터를 남을 
정도로 중상을 입혔다. 소녀의 부모는 치료비와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화해가 성립된 날 밤, 루이는 정원에 드러누워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은 툇마루에 모여 앉아, 부삽으로 구멍을 파고 있는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있었다. 
50킬로그램이 넘는 루이를 묻기 위해서는 허리보다 더 깊이 파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흙범벅이 된 아버지의 런닝 셔츠 등판에는 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지만, 아버지는 
쉬려고도 하지 않고 구멍을 파내려 갔다.
  이튿날 아침, 학교로 가는 길에 요코가 깨금발로 내 귀에 입술을 갖다 대고 "아빠가 
엽총으로 쏴 죽였어"라고 속살거렸다.
  "거짓말, 우리 집에 총이 어딨어?"
  "골프채로 때렸어, 루이 머리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았다고 엄마가 그랬는 걸 뭐."
  동생들은, 키들키들 웃으며 내달렸다.
  아버지는 코스는커녕 공을 치기만 하는 연습장에도 간 적이 없는데, 클럽이 한 세트 
들어 있는 골프백을 항상 현관 신발장에 세워 두었다.
  "거짓말쟁이!"
  여동생의 등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지만, 루이를 죽인 게 분명 아버지일 거라고 
확신하였다. 그날 이후로 며칠동안 아버지가 어떻게 루이를 죽였을까 생각하다가 
독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후카미 세이치가 사는 다쓰미 장은 비스듬한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네거리 모퉁이에 
있었다. 지은 지 20년은 족히 넘었을 목조 아파트 앞에서, 나는 낭패감에 젖어 있었다. 
일반인들에게까지 유명하지는 않아도 미술계에서는 이름이 나 있는 후카미 세이치가 
이런 아파트에 살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주머니 손에 꼭 쥐고있는 종이의 주름을 
펴서 주소를 확인하였다. 역시 이 아파트가 틀림없다.
  사흘 전 만나고 싶다고 전화를 했을 때, 후카미가 빠른 말투로 두 번 불러 준 
주소를 급히 메모하였다. 볼펜을 굴리며 다쓰미 장이란 이름에 당황하다가 울창한 
나무 숲에 둘러싸인 서양식 건물을 상상하며 자신을 납득시켰던 것이다.
  그 개가 아직도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 이마와 목덜미로 식은땀을 흘리며 
2층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사는 집은 201호. 앞쪽으로 난 창, 그리고 제일 구석에 
있는 창문으로 시선은 옮겼을 때, 유리창 너머로 박제가 된 새가 내 쪽을 살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끼자, 한 쌍의 눈이 날갯짓 하듯 사라지고, 
유리창에는 하얀 먹으로 그린 듯한 구름만 비쳐 있었다.
  샌들을 신은 노인이 카당카당카당 기세등등한 소리를 내며, 페인트가 비늘처럼 
벗겨진 철 계단을 내려왔다. 후카미였다.
  내 가슴에 겨우 와 닿는 키, 귀 옆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머리칼은 회색인데 
턱수염은 완전한 백색이고, 꼭 어린 시절 그림 동화책에서 본 난쟁이 같았다. 날카롭고 
동그란 눈이 내 얼굴에 멈추고, 말없는 검문이 끝나자 뒷짐을 지고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문 옆에는 우편함 구멍이 카터로 잘라 내고, 빨간 매직으로 우편함 마크를 그린 
수제 우편함이 있다. 그 아래에는 "대형 우편물"이란 종이 딱지가 붙어 있는 종이 
상자, 그리고 상수도 미터기 바로 아래에는 스티로폼 상자가 놓여 있고, 크고 작은 
돌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다.
  두 집 건너 안쪽 문 앞에서, 검정 고양이가 생선 대가리를 아작거리고 있다. 
고양이는 내 시선을 느끼자 눈꼽투성이 눈을 내 쪽으로 향하고, 우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등털을 곧추세웠다.
  후카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8조 단칸방에는 화장실과 싱크대가 달려 있을 
뿐이다. 뭐라도 밟아 망가뜨릴까 봐, 엉망으로 널려 있는 다다미 위를 살금살금 
걸었다. 방안에는 자른 꽃대궁이 썩었을 때 같은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싱크대 앞에 있는 발판에 서서 접시며 잔을 씻기 시작한 후카미는, "앉지"라고 
말했다.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어디에 앉으면 좋을지 몰라, 무릎까지 오는 투박한 
스웨터를 입어 도롱이 벌레처럼 보이는 후카미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왼쪽 엄지발가락이 심하게 아파서 창문 아래 뒹굴고 있는 나무 상자를 세워 앉았다. 
스타킹 안에서 바깥 쪽으로 불거진 엄지발가락이 움직이며, '집으로 돌아가면 끝이 
뾰족한 펌프스는 몽땅 내다 버려야지' 하고 머릿속으로 과감한 결단을 내렸을 때, 
후카미가 찻잔을 날라왔다.
  틀림없이 그의 작품일 돌로 만든 찻잔 속에는 말차가 거품을 일으키며 일렁이고 
있다. 찻잔은 뜻밖에도 가벼워서, 손바닥에 쏙 들어온다. 쌓인 책더미 위에 앉은 
후카미는, "왜 나한테"라고 말하며 입을 쫑그렸다. 나는 말차를 다 마시고, 억지로 
미소를 띠려다 실패하여 쓸데없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작품 사진이 실려 있는 잡지 
이름을 대었다.
  그 미술 잡지에서 돌로 조각한 접시니 찻잔이니 라는 후카미의 작품을 보았던 
것이다. 도자기와는 다른 둔탁한 광채를 발하는 꽃병을 두 점 바라보면서 유리 
복제품을 제작하면 어떨까 하는 착상에 떠오른 것이다. 돌로 만들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꼭 선생님의 작품을 우리 상품에 사용하고 싶어서요."
  나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후카미는 글자를 잘못 써 구겨 버린 종이처럼 
얼굴을 구깃구깃 구기고는, 벽장 문을 힘차게 열고 그의 작품이 실려 있는 잡지 
스크랩을 꺼냈다.
  "완성도의 낙차가 심해서 말이야, 좋은 것은 아주 좋지만, 형편없는 것도 많아, 아직 
멀었어."
  후카미는 마치 연기로 고리를 만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을 질금질금 뱉어 냈다. 
그리고 한 작품 한 작품 설명을 시작했다. 모가 나기는 하지만 어딘가 친근감이 배어 
있는 목소리가 머리 주변에서 메아리쳤다.
  "아틀리에로 가지."
  후카미는 느닷없이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샌들을 발에 꿰었다. 하지만 
내가 주춤거리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아틀리에 말이야"라며 껍질이 약간 벗겨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1층 방의 문손잡이를 비틀어 당겼다. 잠겨 있지 않다. 바닥재가 마루인 것을 
제외하면, 2층과 똑같은 구조의 방이다. 창문을 열어 곰팡내 나는 공기를 몰아내자 
3월의 바람이 엇갈려 들어왔다. 나무 상자를 다리 삼아 합판을 올려놓았을 뿐인 판 
위에 펼쳐 놓은 일본 종이가 바람에 휘감겨 날아갔다. 후카미는 서둘러 네 귀퉁이에 
돌을 올려 놓았다.
  한 가지 붓으로 그린 그림은, 검정, 보라, 핑크, 황록색의 그라데이션이 아름답고 
컬러풀한 해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검정 물감 말이지, 붓에 물을 흠뻑 묻혀 그리면, 이런 색이 나와, 물감 재료가 
뭐일 것 같애?"
  최면술사 같은 후카미의 눈을 들려다보다 나도 모르게 "꽃인가요"라고 대답했다.
  2층에서 맡았던 썩은 꽃 냄새가 이 방에도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몸의 심지가 
떨리고, 그것이 입가에서 양편으로 퍼져나가, 마침내 그는 "후후후" 하고 목구멍을 
실룩거렸다. 후카미는 연신 웃어대면서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잡고, 다섯 손가락을 
부채처럼 폈다 오므렸다 했다.
  "조각은 이제 신물이 나, 후쿠이에 가면 공방이 있지만 체력이 따라가지 않아. 그림, 
앞으로는 그림이야, 도안만으로도 좋다면 맡기로 하지."
  후카미는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방문한 목적을 매듭짓기 위해, 자세한 의논을 
하자고 말을 꺼냈지만, 무늬라도 생각하고 있는지 후카미는 눈을 감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 아래는 축 늘어져 있고,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만큼 큰 매부리코였다.
  디자인만 가지고 어떻게 제품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역시 오리지널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어.'
  그렇게 마음을 정했을 때, 후카미가 눈을 뜨고 말했다.
  "꽃을 보러 가지."

  초등학교 교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문살 사이로 팔을 밀어 넣어 
빗장을 벗겼다.
  건물 옆에 나란한 화분에는 팬지가 심겨져 있다. 노란색 꽃잎과, 진보라색 꽃잎, 
그리고 한가운데는 검정.
  "아, 팬지였나요, 아까 그 물감."
  낮은 소리로 말해 보았지만, 후카미는 아무 대꾸 없이 걸어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뭇거뭇한 구름이 겹겹, 지금 당장이라도 비가 교정으로 내릴 것 같았다.
  그네를 뒤덮듯 가지를 뻗은 벚나무에서 하염없이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 후카미가 
그네에 앉기에 나도 쇠줄을 잡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두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흔들리며 턱을 들어 머리 위를 보니, 엷은 분홍빛이라고만 여겼던 벚꽃 잎이, 하얗고 
넓직한 파라솔처럼 펼쳐져 있다. 빙글빙글 나선을 그리며 날아 떨어지는 꽃잎에서는 
아무 향도 나지 않는다. 후카미는 그네 위에 섰다. 나도 펌프스를 벗어 던지고, 그네 
위에 서서 한껏 굴렀다. 그네는 점차 폭넓게 흔들리고, 바람이 기분좋게 얼굴에 와 
닿는다. 바름을 머금고 치맛자락이 부푼다.
  교정에는 아무도 없는데 어딘가 멀리서 아이들의 환성소린지 비명소린지 모를 
회오리바람 같음 웅성거림이 들린다. 꽃잎이 입안으로 들어가, 삼키려 하자 목구멍 
속에 들러붙었다. 옆 그네에 눈길을 주니 후카미가 없다. 장딴지에서 힘을 빼고 
그네가 멈추기를 기다려 몸을 비틀자, 후카미는 내 바로 뒤에 쭈그리고 앉아, 넋 나간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그네에 앉은 후카미는, 꽃병의 견본을 만들겠노라고 응낙하였다. 그래서 크기, 
무늬, 색상, 마감 시기 등을 의논하고 아파트 앞까지 배웅을 하자, 후카미는 빙그르 
돌아 등을 보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계단을 밟았다가, 난간을 붙잡고 멈춰 섰다. 
그 자세로 201호의 창문을 올려다보니, 깜빡 잊은 개런티 얘기가 생각나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따라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후카미는 힐끗 한 번 쳐다만 보았을 뿐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물" 이라기에 수도꼭지를 틀고 잔에 물을 받아 건네자, 단숨에 
들이키고는 선반에 있던 위스키를 따랐다. "정리를 좀 해도 될까요?"라고 묻자 잔을 
손에 쥔 채 창가 쪽으로 이동하여, 장승처럼 섰다. 방안에는 책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촛대며 나무로 조각한 말, 벚나무 가지, 만년필이 몇 자루, 빈 포도주와 위스키 병, 
멜빵, 아프리카산인지 남미산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가면 같은 것들이 온통 나뒹굴고 
있다. 후카미가 벽을 따라 방을 한 바퀴 돌 즈음에는 그럭저럭 정리가 되어,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벽장을 열고 뚤뚤 말아 처박아 놓은 의류를 밀치자, 회색 정리함이 나타났다. 안에는 
말끔하게 손질된 속옷과 셔츠가 들어 있고, 위에는 풀먹인 하얀 시트가 세 장 쌓여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여자의 손길이 미쳤었다는 증거다. 나는 빨래와 아직 입지 
않은 옷을 분류한 우 스웨터와 바지는 접어 놓고, 코트와 재킷을 옷걸이에 걸었다. 
벽장 아래단을 들여다보니, 털가죽을 깐 고무 보트가 있었다.
  "자겠어."
  후카미는 고무 보트에 누웠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설거지를 하였다. 머릿속으로 사들일 물건의 목록을 
간추리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가 자리를 뜬 지 한 달이나 두 
달쯤일 것이다. 생활에 필요한 것은 거의 갖추어져 있다. 빨래를 들고 세탁 편의점에 
가고 싶었지만, 이용한 적이 없어서 어떻게 작동시키면 되는지 상상이 안 됐다. 벽장을 
들여다보니, 코고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밖으로 나가 역 쪽을 향했다. 현금 카드로 십만 엔을 인출하여, 역 앞 아케이드를 
어슬렁거렸다. 후카미의 아파트에 냉장고가 없었던 것이 생각나, 전자제품 대리점에 
들어가 소형 냉장고를 주문했더니 2, 3일 걸린다고 한다. 주머니에서 주소가 적혀 
있는 종이 쪽지를 꺼내 배달 전표에 기입하고 돈을 지불하였다. 약국에서 칫솔 두 개, 
치약, 샴푸, 비누, 화장수, 화장지를 샀다. 약국을 나서서 속옷, 생수, 그밖에 살 것을 
생각하는 사이에 그만 아케이드를 다 지나 버리고 말았다.
  골목길 모퉁이의 복합상가 빌딩 1충에 펫숍이 있었다. 쇼 윈도를 들려다보니 
유리벽에는 골든 리트리버(영국 원산의 새 사냥개)와 래브라도 리트리버 강아지가 두 
마리씩 들어 있는 우리가 겹쌓여 있다. 입구 쪽으로 돌아가자, 문을 활짝 열어 놓아 
동물원 우리하고 똑같은 냄새를 주변에 흩뿌리고 있다. 가게 앞 철제 벤치에는, 그 
다리 위에 꼼짝 않고 있던 검정 개가 엎드려 있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개한테서 눈을 돌리고, 잰걸음으로 펫숍울 떠났다.

  일품요릿집에서 후카미와 마주앉아 식사를 하면서, 정말 이 남자의 집에서 밤을 
지낼 작정인지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묵어야 할 이유 따위는 하나도 없다.
  아까까지의 얘기에 의하면 세 번 결혼하고 이혼하고, 쉰 한 살에 네 번째 혼인 
관계를 맺어, 15년간 계속되다가 5년 전에 이혼하였다. 땅과 집은 아내에게 주고, 
자기는 지금 살고 있는 다쓰미 장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평생 먹고 살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저금이 눈깜짝할 사이에 바닥이 났어"라며 그는 웃었다. 
  "왜 이혼한 거죠?"
  "뭐가 됐든 깨지잖아."
  "깨지나요?"
  "깨지지, 아무리 단단한 돌이라도, 여지없이 깨져."
  나는 잠자코 맥주를 마시고, 쥐노래미 찜을 젓가락으로 헤쳤다.
  내 조각품을 직접 본 적 없을 테지. 시골 극장 앞에 뒹굴고 있는 내 돌 같은 건, 별 
볼일 없어. 언젠가 깨부수러 가고 싶어. 그래 봐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 그런 짓도 별 볼일 없지. 조각을 버린 나 같은 게 돌보다 처치 곤란이야. 
아내는 성품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영리한 작자였어."
  후카미는 오른손을 테이블에 얹고, 왼손으로 의자 등받이를 꽉 잡더니 몸을 비틀 
듯이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아파트로 돌아가자마자, 사진을 찍는다면서 벽장 고무보트 안쪽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뭘 찍는데요?"라고 묻는 순간 플래시가 번쩍였다. 후카미는 필름을 잡고 
흔들며, 훅 입김을 불고, 손바닥으로 데우고 네게(일반 촬영용 흑백필름의 원판)를 
벗겼다.
  이마는 하얗게 빛나고 양쪽 눈은 짝짝이로 뜨여 있고, 입술을 헤 벌린 볼상사나운 
얼굴이 부각되어 있었다. 나는 사진을 빼앗아 구겨 버렸다.
  "폴라로이드란, 메이커의 상품명인데,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고. 카메라는 
나를 찍으러 온 사진가 것인데 내가 훔쳤어."
  "얼굴이 끔찍하게 찍혔어요."
  "얼굴은 안 찍어. 엉덩이를 찍지. 벗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엉덩이를 찍을 거야."
  어처구니 없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를 든 변태 노인에 불과하다.
  "마지막에 엉덩이가 남았다."
  후카미는 한층 긴장감 도는 소리로 말하고, 내가 여전히 웃고만 있자, 벽장을 열어 
고무 보트에 올라타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벽장 앞에 무릎을 꿇어앉아, "놀라서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를 했다.
  "이제 너한테는 부탁하지 않겠어, 바로 눈앞에 엉덩이가 있는데 찍을 수 없다니 
화가 나, 그만 돌아가지."
  문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가 우울하게 들리고, 얼마간 진실감을 자아냈다. 처음 
만나는 누인 집에서 밤을 지내는 위험천만한 짓을 저지르는 까닭은 연민 때문이 
아니다. 이 노인이 지나고 있는 유희 감각에 이끌린 탓이다.
  "알겠어요, 찍으세요."
  후카미는 힘차게 문을 열고 말했다.
  "엉덩이야."
  처음에는 하반신만 벗고 후카미가 요구하는 대로 포즈를 취했는데, 금방 전라가 
되는 편이 자연스럽고 부끄럽지도 않겠다는 생각에 윗도리도 벗었다.
  "페티시즘인가요?"라고 묻자, "멍청아, 그런 게 아니야"라는 말을 내뱉었다.
  촬영 중에 나눈 대화는 그뿐이었다. 그는 피사체로 여자의 몸을 몇 번이나 
사용했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을만큼 익숙하게 지시를 내렸다.
  촬영을 시작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후카미는 신음소리를 내며 펄쩍 뛰었다.
  "쯧쯧 필름이 다 떨어졌어, 쯧쯧."
  잠시 궁리를 했지만 결국 긴 탄식 후 촬영은 끝났다.
  옷을 껴입을 기분이 들지 않아, 시트로 몸을 휘감았다. 참고 있었던 담배가 무지무지 
피우고 싶어져 가방에서 버지니아 슬림을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사진을 책상 위에 
늘어놓고, 전문 사진가처럼 몇 번이나 자리를 뒤바꾸었다. 곁눈질 해 보니, 엉덩이는 
이상하리만큼 광택을 띠고 둥글고 커다랗게 과장되어 있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세 
장만 남기고 나머지는 고무줄로 묶었다. 벽장 안으로 기어들어간 그가 파일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자, 그 세 장을 스크랩하였다.
  "이름은?"
  "하야시예요."
  "멋진 엉덩이야."

  쾅쾅쾅,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다시 잠속으로 돌아가려고 입을 
쫙 벌려 하품을 하고 몸을 웅크렸을 때 문이 열렸다.
  "목욕탕에 간다."
  베개 위에 턱을 올려놓고 문 쪽을 보니, 그는 세숫대야를 껴안고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져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리고
  "몇 시예요?"
  "네 시가 넘었어."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문 여나요?"
  "오후야."

  구름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다. 그는 아무 거리낌없다는 표정으로, 그 물감으로 
그린 그림으로 개인전을 열지 않겠느냐는 권유가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내일도 
일찍부터 일해야 한다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목욕탕 입구에서 수건을 한 장 받아들고, 남탕과 여탕으로 각기 헤어졌다.
  몸에 걸치고 있던 것을 벗어 로커에 집어 넣고 열쇠를 잠그고는 여탕의 문을 
열었다. 언젠가 사우나에 갔을 때, 샴푸 거품이 튀자 옆에 있던 여자가 투덜거린 적이 
있어, 제일 구석 자리에 의자와 대야를 놓았다.
  수도꼭지를 눌러 대야에 물을 받고, 비누 거품을 내어 얼굴에 바르고, 따뜻한 물로 
거품을 씻은 후 김서린 거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거의 하루를 잠으로 죽였는데도 눈 
아래가 거무스름하다. 피부가 유난히 누르죽죽하게 보인다. 유방은 축 늘어져 있고 
풍만감도 없다. 나는 배꼽 위 두 단으로 겹쳐 있는 하복부의 지방을 꾹 집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쪽에 대각선으로 앉아있는 삼십대 중반의 껍질을 벗긴 
백도 같은 여인의 나체와, 그 여자가 낳았을 여자 아이의 풋풋한 나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비누 거품으로 몸을 가렸다. 여자 아이는 타일 위에 납죽 앉아, 
엄마에게 몸을 맡기고 멍한 표정으로 내 몸을 바라보고 있다. 나와 여자 아이는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는데, 내 모습이 거울 속에 비쳐 그녀 눈에 들어가기까지 전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엄마는 아이에게 일어나라고 채근한다. 
엄마 어깨에 손을 얹고 오른 다리를 들고 있는 아이의 사타구니께를 엄마가 씻고 
있다.
  김으로 뿌연 거울에, 아이의 아직 골반이 돌출하지 않은 둔부와 민듯한 음부가 
동시에 비쳤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상상 속에서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본다. 
모녀 옆에 있는 노파가 머리를 감기 시작하여 뭉클 올라온 뜨거운 김 때문에 거울로는 
소녀의 등밖에 보이지 않는다.
  소녀는 오른손을 거울에 대고 와이퍼처럼 두세 번 원을 그리고, 칫솔을 입에 
넣었는가 싶었는데 금방 칫솔질을 끝내고 샤워를 틀었다.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쭉 
피고 입을 크게 벌려서는, 입에 고인 물을 거울 표면에 뿜었다. 그리고는 일어나, 
욕조의 수도꼭지를 비틀어 물이 펑펑 나오게 한 다음 한참이나 욕조가에 걸터앉아, 
손톱 끝으로 물이 미지근해졌는지를 확인하고 욕조로 들어갔다.
  나는 머리를 적시고, 샴푸로 거품을 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소녀가 뭘하고 있는지 
보이는 듯한 기분이다. 턱까지 물에 담그고, 머리와 몸을 씻고 있는 여자들의 유방과 
음부를 휘휘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머리를 다 감고 고개를 들었다. 소녀의 모습이 
거울에 보이지 않았다. 엄마도 없다. 나간 것이다.
  탈의실에도 모녀의 모습은 없었다. 나는 백 엔짜리 동전을 넣어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거울 너머로 뚱뚱하게 살이 찐 노파가 알몸으로 의자에 앉아 담배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벌써 몇 년 전부터 다쓰미 장에 살면서 매일 오후면 이렇게 
목욕탕에 다녔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머리가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드라이어가 멈췄다. 하지만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후카미가 염려스러워 덜 마른 채 옷을 입었다. 발을 들추고 나오자 카운터 옆에 있는 
핑크색 전화기가 눈에 들어왔지만,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픈 생각은 일지 않았다.
  그는 세숫대야를 껴안고 음료수 자동판매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숱이 적은 
머리칼은 거의 말라 있었지만, 목과 볼에 흰머리가 몇 오라기 붙어 있다.
  그날 밤에도 그는 촬영을 하였다. 마흔 장 정도 찍자, 더 이상 그럴듯한 포즈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스크랩 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장에 불과했다. 
"수영복이었더라면" "밖에서 찍었더라면"이라고 거듭 투덜거렸지만 들리지 않는 
척하고 속옷을 입었다.
  벽장에서 고무 보트를 꺼내, 우리는 나란히 누웠다. 옅은 잠속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빗소리를 들으면 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얼굴을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에서 잠에서 깨어났다. 손바닥으로 가리고 눈을 뜨니, 
벚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린다. 그가 벚나무 가지를 쥐고 고무 보트 옆에 서 있다.
  "정오는 지났을 거 같은데, 아직도 비는 내리고 있을까."
  방 전체가 가라앉아 있는 듯이 보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전자제품 가게에서 냉장고를 배달하러 왔다. 싱크대 옆에 
놓도록 하고, 어제 저녁 목욕탕에서 돌아오는 길에 24시 편의점에서 사 온 생수와 
우롱차 병, 우유들을 넣었다.
  "돌아가겠어요. 개런티는 백만 엔이면 되겠습니까?"
  "제작비는 별도야. 후쿠이에 있는 공방에 가는 여비도 들고. 그리고 오리지널은 
내가 갖고 있도록 하겠어."
  후카미는 지금 막 의뢰차 찾아온 사람과 교섭을 하는 것처럼 딱딱하고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문을 열자 고양이가 울었다. 다가와 복사뼈에 머리를 비비며, 앞길을 가로막는다. 
계단을 내려갈 모양 같아서 먼저 보내 주려 하자, 고양이는 빙글 방향을 돌려, 옆 블럭 
담으로 폴짝 뛰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거실로 들어서자 자동응답기의 빨간 불이 전멸하고 있다. 쓰러진 초, 아버지가 남긴 
담배 꽁초, 먹다 남은 케이크, 테두리에 어머니의 립스틱이 묻어 있는 잔 등이 
테이블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뒤섞인 체취에 숨이 막혀, 가스라고 차 있는 것처럼 
황급히 창문을 열었다. 그날 가족과 영화 스태프가 이 집을 나선 것은 11시가 
가까워서였다. 나는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에 쓰러졌고, 이튿날에도 거실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세탁기 앞에서 입고 있는 옷을 벗어 셔츠, 스타킹, 팬티를 세탁기 앞에서 입고 있는 
옷을 벗어 셔츠, 스타킹, 팬티를 세탁기에 넣고 스위치를 누르자, 곧장 목욕탕으로 
들어가 욕조 하수구를 막고 수도를 틀었다. 거실로 돌아가 등나무 바구니에 접어 
두었던 배스타월에 손을 뻗은 순간, 또 전화기를 보고 말았다. 이전에 사다 둔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고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케의 목소리가 귓밥으로 기어들어온다. 그 남자는 수화기에 입을 바싹 갖다 댄 채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목구멍만으로 말하면, 섹시한 목소리가 된다고 착각하고 있다. 
빨리감기 버튼을 눌러, 이케의 목소리를 청소기 코드처럼 감아 버려도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 자신에 만족하면서, 비로소 느긋하게 해방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시무라입니다,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언제 출근할 건지 급히 연락 좀 해 
주십시오."
  회사에서 온 전화다. 나는 자신이 기획한 상품에 관하여, 그 진행에 책임을 지기만 
하면, 4, 5일 무단 결근을 해도 누구 하나 뭐라 비난하지 못할 위치를 구축해 놓았다.
  들꽃을 책갈피에 끼워 말리는 엄마와 아이들의 여행, 꽃씨가 들어 있는 펜던트, 
글자를 쓰면 향기가 나는 여섯 가지색 볼펜 등 심심풀이 삼아 생각해 낸 기획안이 
히트를 친 덕분이다. 처음에는 반감을 갖고 있었던 사원들도 지금은 계약제 기획 
프로듀서 같은 직책이거니 하고 포기하고 있다.
  몇 번이나 녹음되어 있는 이케의 목소리를 그냥 지나 보내고 나자, 튕겨나간 스프링 
같은 목소리로 어머니가 조잘거렸다.
  "모토미, 모토미 짱! 엄마, 엄마라구! 집에 있으면 전화 받아, 없니? 정말 없는 
거야? 금방 돌아올 거지, 참네 11시도 넘었잖아. 공교롭게도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중이라면 웃기겠구나.
  아무튼 돌아오면 바로 전화해. 목욕하고 나서 하지 뭐, 하고 늑장부리면 안돼. 
하기야 엄마는 몇 시가 되든 잠 안자고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중요한 이야기야. 만약 
전화 안 하면 엄마, 충격이다. 회복하는 데 시간 걸릴 거야. 있잖니. 그때, C형 
간염으로 쓰러졌을 때, 피 토했잖아, 모토미 짱. 너는 엄마한테 수혈도 할 수 없다구. 
A형이니까. 이상하지? 모토미 짱은 엄마 뱃속에서."
  테이프가 끊겼다. 대답은 간단하다. 이 전화기를 산 2년 전에 등록한 이후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단축 다이얼 6번을 누르면 된다. 간결함의 표본을 보여 주도록 
하지. 두 번 벨이 울리고 연결되었다.
  "내일 나리타에 있는 회사의 농원에 갔다가 전화를 한 다음 만나러 가겠습니다."
  한마디 끼어들 여유를 주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욕조에 물이 넘치고 있다. '잠가야지'하고 생각은 하지만 나는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움직이지 않는다. 요 3년 동안 가족이란 족쇄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나는 다시 걸려들고 말았다. 이미 조련이 끝난 래브라도 
리트리버처럼, 어머니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붕괴된 가족의 복제품 아닌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농원까지 시무라가 차를 운전해 주기로 하였다. 그는 작년 면접 시험 때, 회사에 
지원한 동기를 "자연과 인간의 공생을 평생의 테마로 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무라는 지금 달려가고 있는 농원이 수많은 농가를 이농시킨 후 건설한 비행장 
부지의 일부이며, 현지 농민을 고용하는 조건으로 나라로부터 빌린 것임을 모른다.
  그는 젊은이들이 코뮌과 비슷한 조직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에콜로지 활동을 펴고, 
농원을 운영하고 있는 모습에 무척 감동하고 있지만, 만약 기획실에서 농원으로 
발령을 내린다면 그 날로 당장 사표를 던질 것이다. 그런 식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을 몇 명이나 보아왔다. 농원에서 오래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등교 거부아나 
지적장애를 지닌 젊은이들뿐이다. 운동과 노동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농원 사무실 문을 노크하자, 디렉터란 직책을 갖고 있으나 사실상은 농원 관리자인 
하시즈메씨가 맞아 주었다.
  "다케노리, 하야시 씨가 왔어."
  하시즈메가 소리를 지르자, 다케노리 청년은 전속력으로 잔에 담긴 주스를 가져왔다. 
하시즈메와 다케노리는 여러 가지 과일로 향료, 착색료, 방부제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주스를 만들고 있다. 내가 찾아갈 때마다 다른 종류의 주스를 시음하게 하고는, 
과일 이름을 맞추도록 하는 게임을 즐긴다. 다케노리는 나뿐만 아니라, 언제 누가 어떤 
주스를 마셨는지 일일이 기록하는 모양이다.
  "자네는, 저기, 저기에 있는 차를 마시게."
  하시즈메는 시무라에게 턱을 치켜들었다.
  "솔덤(soldum, 일본 원산인 자두의 한 종류)인가요?"
  "아니야. 윌귤!"
  다케노리가 은쟁반을 머리 위로 흔들었다. 몇 번이나 제조법을 물었지만,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하고 키득키득 웃기만 할 뿐 고개를 저었다. 하시즈메는 스태프 전원을 
이름으로 부르며, 이 농원을 패밀리화 하고 있다. 농원주 겸 양호학교 선생처럼 
행동하는 그의 건전함에, 나는 마음 한 구석으로 강한 반발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케로부터, 하시즈메가 나를 기획부장으로 승진시키라고 사장에게 추천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중역임을 알고 놀랐다. 다케노리의 어깨를 껴안고 웃고 있는 
하시즈메에 대한 경계심은, 첫인상으로 마음이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내 편협한 
성격 때문이다. 처음 만나자 마자 "모토미 짱"이라 부른 그에게 증오심마저 품었다. 
그런 것을 눈치 채었는지 하시즈메는 그 다음부터는 나를 성으로 부르게끔 되었다.
  장미꽃 재배를 담당하게 된 미타무라를 소개 받아 서로 명함을 내밀려다가 같은 
회사에 다니면서 명함을 교환하다니 어색하다는 생각에 웃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튼"이라면서 미타무라는 명함을 내밀었다.
  "꽃장사인 주제에 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폐만 끼치고 있습니다. 인사차 
왔어요."
  말하고서는 금방 후회했다. 여기에서는 이런 말투가 환영받지 못한다. 미타무라는 
말없이 기획서를 들추고 있다.
  "문제없지, 요스케."
  하시메즈는 미타무라의 등으로 팔을 돌리고 말했다.
  "좋은 품질의 장미를 재배하는 것, 그뿐 아닌가, 그렇지, 요스케? 하야시 씨한테 
그걸 보여 드리도록 하지, 그러면 하야시 씨도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우리들은 "꽃의 고장"이란 팻말이 걸린 연구실로 향했다. 오른 손목으로 눈길을 
돌리자, 손목시계가 없다. 후카미의 아파트에 깜빡 두고 온 것이다. 고무 보트에 누워, 
내 시계의 희미한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계를 찾으러 간다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일부터 두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시무라에게 물으니 11시 10분이 넘어 있었다. 도쿄까지는 두 시간 정도면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연구실에서, 꽃의 수명을 오래 지속시키는 처리 방법을 다양하게 실험한 성과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이번 기획을 성공시키기 위한 중요한 포인트의 하나로, 하루라도 
오래 장미를 시들지 않게 하는 방법을 고안해 주었으면 한다고 요청해 주었던 것이다.
  "내가 과거에 실험한 테스트에서는, 쿠리잘 RVB가 유효하지만, STS 즉 초산은과 
테옴 유산 나트륨 혼합물로 에틸렌의 발생을 억제할 수도 있으므로, STS로 사전 
처리하는 방법을 실험하는 중입니다."
  미타무라가 설명해 주었지만, 내 귀는 그냥 지나쳐가고 시무라의 수첩에만 남았다. 
장미의 성장 상태를 보기 위하여 미타무라의 안내를 받아 온실로 향했다. 나는 온실 
냄새에는 도통 길들지 않는다. 농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에텔렌 가스를 실은 습기가 
나를 숨막히게 한다. 달큰한 꽃향기도 다른 냄새와 섞이면 가슴을 짓누르는 악취가 
된다. 어젯밤 거실에 꽉 차 있었던 가족과 촬영 스태프의 체취, 후카미의 방에서 나던 
썩은 냄새가 코의 점막에 배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온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뒷켠에 있는 석류 나뭇가지를 손으로 잡고 토하려고 시도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오른손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목구멍 깊숙히 밀어 넣는데, 누군가 등을 
쓸어 내리는 손길이 있어, 뒤를 돌아보았다. 시무라가 뒤로 물러나며, 
"임신인가요?"라고 웃는 얼굴을 하였다. '이 남자의 얼굴에 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유쾌할까' 하고 생각하면서 입안에 고인 침을 석류나무 밑동에 뱉었다.
  돌아가는 길 차 속에서도 시무라는, "괜찮습니까"라며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지만, 
나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푹 숙여 자는 척하고 있자니 
빨강 신호에서 멈춰 설 때마다, "큰일이군"이라고 중얼거린다. 내 상태보다는 차 
안에다 토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남자와 일을 같이 할 수는 
없어, 어떻게 하면 다른 부서로 쫓아 보낼 수 있지' 하고 궁리하다가 그만 정말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시나가와 역에서 내려, 요코스카 선을 타고 가마쿠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6시가 
넘어 있었다.

  작년에 이사한 어머니의 집을 방문하기는 처음인데, 그때까지 살았던 네 군데 집에 
비하면 눈에 띠게 수준이 낮았다. 집안의 가구는 모두 눈에 익은 것들뿐이다. 
책꽂이는 대부분 부동산 관련 책으로 차 있었지만, 제일 아랫단 구석에는 내가 
십대였을 무렵 산 화집과 소설류가 꽂혀 있었다. 천장이 낮은 탓인지 어머니의 키마저 
줄어든 느낌이다.
  "미안해, 갑자기 오라고 해서."
  온 얼굴에 주름을 잡고 웃으니 하얀 잇몸이 드러났다.
  "앉아, 이쪽에."
  어머니는 커피잔을 응접 세트의 유리 테이블에 놓고,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아주 좋아 보이는데요."
  어머니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말했다.
  "뭐가 종아 보인다는 거니?"
  "안색이 좋아요, 건강해 보이고."
  "행복해 보인다고, 그렇게 말하면 돼잖아."
  "영화의 대사 같군요."
  나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있잖니, 요코한테 협력해 주려무나. 동생이 성인 비디오 배우라니 너도 싫지 않지? 
나도 그런 영화는 도무지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나한테도 생각이 있어. 잘 
들어봐, 요코랑 그 남자를 결혼시키는 거야."
  "그 남자라니 누구죠?"
  "감독 말이야, 가타야마. 재능도 없고 돈도 없어 보이지만 대학은 나왔으니까 요코도 
남자랑 붙으면 어떻게든 해 나갈 수 있어."
  "중요한 의논이라니, 그거예요?"
  "얘는, 아니야. 아무튼 엄마는 그렇게 할 테니까, 그렇게 않으면 내가 새삼스레 
하야시 씨랑 부부 놀이를 하는 의미가 없잖아."
  어머니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뭐예요?"
  "쓰즈키 구에 있는 집이야."
  어머니는 빈틈없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였다. 입술은 웃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망설이면서 애매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그 집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리는 거야. 뭐하면 팔아도 좋고."
  "아빠 집이잖아요."
  "무슨 말이야, 아빠가 죽으면 우리들 거잖아. 엄마랑 모토미 짱이랑 요코 짱. 그리고 
가즈키 거라구. 하야시씨는 은행이야. 지금은 맡고 있을 뿐이라구. 죽으면 우리가 찾는 
셈이지만, 지금이라고 상관없어."
  "돈을 빌려서 뭐 할 건데요?"
  "계획이 있어."
  부자연스럽게 몸을 비트는가 싶더니, 소파 위에 정좌를 하고 야담가 같은 자세로 
말했다.
  "비즈니스, 장사야. 어머, 자기 돌아왔어?"
  어느 사이에  후지키가 서 있다. 어머니는 표정을 바꿔 후지키의 양복을 벗기고, 
등을 쓰다듬으며 뭐라 조잘조잘대면서 아래층 목욕탕으로 내려갔다.
  "목욕하고 있어, 나 모토미 짱하고 할 얘기가 좀 있으니까. 생선 초밥 시켜 줄까? 
아니면 밖으로 나가서 먹을까? 슬슬 가즈키도 돌아올 거고 어머, 마쓰바나 집 
도시락이 좋겠다구? 어머,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죠, 예예, 알겠어요. 어머 징그러워. 
대머리가 되는 거야, 마프 증모법 사용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식모? 그대로가 
좋잖아, 하지만 도시오 씨, 어쩌면 빡빡 깍은 스킨 헤드도 어울릴지 몰라, 여기 있어요 
타월."
  어머니가 카바레에 근무한 지 2년쯤 지났을 무렵, 손님 중의 한 명이었던 후지키와 
깊은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집을 비운 틈을 타, 꾸려 두었던 
짐을 후지키의 차에 싣고,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요코는 현관 
기둥에 매달려 징징 울면서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고 타이르면서, 차에 올라타 후지키가 마련해 둔 맨션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여동생은 아버지와 둘이 살게 되었다.
  후지키는 처자식이 있어서 평일에는 회사가 끝나면 곧장 우리가 사는 맨션으로 와서 
저녁을 먹고, 어머니와 둘이서 목욕을 하고, 12가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지내지만, 한 달에 한두 번 출장이라고 거짓말을 하고는 아내가 챙겨 준 
여행 가방을 들고 묵으러 온다. 그 반복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어김없이 지켜지고 
있는 모양이다.
  후지키는 용돈 사만 엔을 빼고는 월급을 고스란히 아내에게 갖다 바치기 때문에, 
어머니는 스낵 바나 꼬챙이 구이집 등 물장사를 하여 생활비를 벌었다. 후지키도 
밤에는 바텐더 일을 하거나, 꼬챙이를 뒤집고, 장부를 적기도 한다.
  뜻하지 않게 꼬챙이 구이가 유행을 하여 제법 돈을 벌어들였을 시기에, 
기타카마쿠라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는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3년간 살다가 
팔아치우고, 그 돈으로 다시 집을 짓고 살기를 팔기를 몇 번 거듭하다가 마침내 
어머니는 주택 건설 면허를 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어느 해 정월 새로 지은 집을 방문하자, 문 입구에 "헤세 흥업"이란 간판이 걸려 
있고, 어머니와 후지키는 응접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몇 천만 몇 억 단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하여 작년에 마지막으로 지은 네 번째 집을 전매했을 때, 
어머니와 후지키의 손에 남은 것은, 고작 천만 엔이었다고 한다. 그 돈도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줄어들어 초조한 어머니는 아버지가 2년 전에 쓰즈키 구에 지은 집을 담보로 
하여 장사를 할 작정인 것이다.
  "알겠어, 찻집과 부동산을 겸한 가게를 여는 거야. 찻집에서는 잔돈을 벌고 
부동산으로는 큰돈을 버는 거야. 굉장한 아이디어지? 메뉴판에다는 음료와 물건을 
함께 적어 두는 거야. 친구하고 차나 마실까 하고 들어왔다가, 메뉴를 보았더니, 
아파트랑 맨션, 토지에 관한 정보가 들어오는 거야. 애인 사이 같으면, 동거할까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고, 슬슬 이사나 할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사람 같으면 
결단을 내리고 쉬울 거 아니야? 인간이란 그런 거거든."
  어째서 "헤세 흥업"의 기획회의에 내가 출석해 있는 것일까.
  "하야시 씨를 설득해 봐, 그래서 태도가 영 미적지근하면 권리증을 가져와."
  "범죄잖아요."
  "너 도대체 몇 살이니? 어머, 어떻게 된 거예요? 도시오씨."
  평소 같으면 목욕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을 후지키가 양복 차림으로 우뚝 서 
있다. 처음으로 보는 귀갑테안경. 1년에 두 번은 개 안경을 사는 이 남자는 
안경다리가 헐거운지 폭이 너무 넓은지, 집게손가락으로 열심히 테를 밀어올리고 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간다는 말이야, 내가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재빨리 현관을 가로막고 섰다.
  "비켜요."
  후지키는 어머니보다 다섯 살 아래인데, 아무리 보아도 삼십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두 사람 모르게 살며시 일어나, '가즈키 방이겠지' 하고 문을 열었다. 벽에 
테니스 라켓이 세 개 걸려 있고, 책꽂이에는 만화 단행본이 즐비하게 꽂혀 있다. 침대 
아래 쌓여 있는 잡지를 끌어내자. 역시 생각했던 대로 로리타 콤플렉스를 서재로 한 
만화 잡지와 사진이었다.
  "모토미 짱!"
  후지키의 외침 소리가 날카로워지고, "모토미 짱, 모토미 짱!" 하고 잇달아 악을 
쓰기에 방에서 나오자 석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머니가 후지키의 머리에다 석유를 
끼얹은 것이다.
  어머니는 백 엔짜리 라이터를 후지키 코밑에다 바싹 갖다 대고서,
  "모토미가 있으니 집에 가도 되겠다고 생각한 거지? 내가 찍소리도 안하고 보내 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모토미, 밖으로 안 나가면 화상 입어, 돌아가."
  "가면 안 돼, 모토미 짱!"
  석유 때문에 눈을 뜰 수 없는 후지키가 팔을 퍼덕거리며 다가왔다.
  "모토미, 중학교 때, 이 남자가 너한테 장난질 했었지? 정직하게 말해."
  나는 석유가 스며들어 시커멓게 된 가죽백을 들고 현관으로 걷다가 스치는 길에 
말했다.
  "알고 있었나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대문에 기대어 기다렸다.
  "5분이 지나도 별 일이 없으면 돌아간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손목으로 눈길을 떨구었는데, 시계가 없다. 내 시간은 후카미의 
아파트에서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1초에 둘을 센다고 하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도저히 육백을 손가락으로 꼽을 기분이 일지 않는다. 여섯, 일곱. 어머니는 항상 백 
엔짜리 라이터를 꼭 쥐고 벼랑 끝에서 살고 있지만, 점화하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검정 고양이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윗입술을 들어 올려 좌우로 벌리고는 이를 
보였다. 인간의 웃는 얼굴하고 꼭 닮았다. 소리를 내어 웃지는 않을까 싶어 몸을 
젖히는 바람에 균형을 잃었다.
  난간을 붙잡고, 고양이의 표정을 살피면서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자, 고양이는 몸을 
일으켜 내게 등을 향하고, 거의 땅에 닿을락말락 소리도 내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고개만 돌리고 꼬리를 한 번 흔들고는 철책을 올라탔는가 싶더니, 이웃집 
기와지붕으로 폴짝 뛰었다.
  문을 두드리자 "들어와요"란 소리가 안쪽에서 들린다. 손잡이를 돌린다, 잠겨 있지 
않다, 문을 연다, 어둡다, 커튼이 쳐져 있고 전등도 켜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에 축 
늘어지게 기대어 나를 지그시 올려다보는 노인의 얼굴은 기묘한 광채를 띠며 긴장돼 
있고, 지난번보다 더 하얗게 보인다.
  젊은 남자의 육체에 매력을 느끼기는커녕 닭살이 돋는 것은, 어머니의 탓이라고 할 
마음은 없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와 헤어진 것은 성적 불만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고 있다.
  어머니의 입에서 "하야지 씨는 말이지, 성교 불능자라구"란 야유를 둘은 것인 한 두 
번이 아니다.
  "남자는 돈, 아니면 섹스야, 어느 쪽이든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는 살아갈 수 있는 
법이라구."
  어머니의 입버릇이다.
  셔츠를 벗으려 할 때였다.
  "아래만 벗어도 돼."
  노인은 어느 틈엔가 손에 든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프레임을 들여다보며, 내 
하반신의 움직임을 좇고 있다. 지퍼를 내리고, 청바지와 팬티 고무를 한꺼번에 잡고 
내려, 한쪽 다리씩 들고 벗는다.
  창문을 뒤로 하고 서 있는 지금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의자에 눈길을 두며, 
배후의 기척에 귀를 기울인다. 렌즈를 들여다보며, 내 엉덩이를 쏘아보는 거뭇거뭇 
번뜩이는 동공... 엉덩이께로 쑤시는 듯 찌르는 듯 뜨끈뜨끈한 통증을 느낀다.
  플래시가 터지고, 순간 주위가 밝아지면서 발이 휘청하였다. 노인은 엉덩이를 필름에 
각인하고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카메라에서 필름을 잡아 떼고 흔든다. 왼손으로 
노안경을 꼈다. 노인의 머리는 무슨 소리엔가 넋을 빼고 있는 듯한 꼴로 한동안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절반은 재가 된 종이를 다루듯 사진을 책상 위에 놓고는 
벽장 문을 열고 파일을 꺼내 사진을 그 안에 스크랩하였다.

  아버지는 담배를 입에 물자 핸들을 돌려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내 머리칼을 
도로변의 버드나무 가지처럼 불어 올린다. 차에 탄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 가즈키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바깥 경치만 바라보고 있다. 
어머니와 요코가 타고 있는 로케용 버스는 고속도로에 진입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멀리 뒤쳐져 보이지 않는다.
  어젯밤 어머니는 "스즈키 구의 집 때문이 아니고, 하야시 씨 문제야, 만약 안 오면 
평생 후회할 테니까"라고 협박조로 말을 입에 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로케 따위에 
동행하지 않을 작정이였는데, "요코를 버리기는 너도 마찬가지잖아"라는 어머니의 
한마디에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며 약속 장소와 시간을 메모하였다.
  "가족 여행 장면인데 어디로 하겠습니까?"라고 가타야마가 묻자 어머니는 온천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캠프장을 고집하였다. 온천에는 입욕료를 내고 
들어가면 되니깐, 온천 여관이 있는 캠프장으로 하자는 절충안까지 내놓았다. 
가타야마도 그 편이 그림이 좋겠다고 찬성하여 조감독이 나가노현이 있는 캠프장을 
찾아냈다.
  어머니와 요코는 차멀미를 한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로케용 버스에 올라탔고, 나와 
가즈키는 아버지의 차에 탔는데, 아버지는 뭐라도 찾는 것처럼 앞 유리창 너머 하얀 
하늘을 쳐다만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머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한 
풍선처럼 보였다.
  "어느 쪽이 먼저 도착하는지 경쟁해요."
  남동생이 어린애 같은 제안을 하자 아버지는 간신히 키를 꽂았다.

  아버지는 창문을 닫고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반개 차선을 달리는 차에 타고 있는 
개와 눈이 마주쳤다. 개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루이도 데리고 왔으면 좋았을 걸 그랬구나."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라디오를 껐다.
  "루이는 죽었잖아요."
  남동생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살아 있었다면, 말이야."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자 "무슨 소리야, 자기가 죽인 주재에"하고 가즈키는 
한참이나 아버지의 후두부를 쏘아보다가, 휑하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는 
조금씩 브레이크를 밟으며 좌측 차선으로 파고들어, 인터체인지를 내려갔다.
  내가 보기에, 가즈키는 비정상적으로 어리다. 스물 여덟 살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대학에 적을 두고 있다. 중학교 시절 개교 이래 제일 가는 수재라고 남들이 
추켜세웠고, 본인 역시 운동은 하찮게 여겼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더니 테니스 
동아리에 들어가, 프로가 되겠다는 말을 꺼냈다.
  가즈키는 일주일에 한두 번 학교에 간다면서 라켓을 껴안고 외출하는 이외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집에서 지냈다. 아르바이트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친구도 있는 것 같지 
않고, 전화도 결려 오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 애는 이제 틀렸어. 하지만 궁지에 몰리면 발광을 할지도 모르니까 가만히 
놔두는 거야. 돈은 많이 들지만 개를 한 마리 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지, 
뭐. 걔 아직도 동정이라구. 그렇지만 두고 봐. 쓰즈키의 땅에 4, 5층짜리 맨션을 짓게 
해서, 걔가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이 엄마가 만들 테니까."
  시내로 들어서자 아버지는 24시간 편의점이나 정육점, 채소 가게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차를 세우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양손에 주머니를 들고 달려와 
트렁크에 넣었다. 이렇게 많은 식량과 음료를 다 어떻게 할 작정인지.
  5분 정도 달리자 논밭이 펼쳐지고, 드문드문 서 있는 가옥은 전부 집장사들이 지은 
집인 듯했다. 시골이라든가 전원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위화감이 있었다.
  "가즈키, 뒤를 봐. 그림자도 안 보이지."
  2차선로에는 유별나게 커브길이 많아서, 차멀미를 할 것 같아 창문을 열었다.
  "이제 30분 정도면 도착이야. 아냐 20분 정도."
  아버지는 나무 사이를 스치고 살길을 올라간다. 나뭇가지가 앞유리창을 뒤덮고, 길은 
고통스럽게 급한 커브를 그리며 비틀비틀 굽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나는 아까부터 소변이 마려웠는데 차를 세울 기회를 잡지 못하여 제 
정신이 아니었다.
  옛날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았을 때, 여름 방학이며 반드시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단자와나 이즈로 캠프를 갔었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길에서 헤매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밤이 되고 말았다.
  뒷좌석에는 빈 주스 깡통이 딩굴딩굴 굴러다녔고, 아버지가 핸들을 꺾어 차의 
방향을 바꿀 때마다 깡통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가 아무리 말려도 
아버지는 절대로 되돌아가려 하지 않았고, 모두가 겁을 먹으면 먹을수록 속도를 
올렸다. "아버지는 도망치는 말이다!"라고 외치면, 우리 형제들은 입을 모아, 
"아버지는 도망치는 말이다!"라고 외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길이 막혔다. 아버지가 핸들을 빙빙 돌려 백을 하며 차의 방향을 바꾸었을 때, 내가 
"화장실"하고 몸을 쭉 내밀며 귓가에 속삭이자, 아버지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풀과 관목을 짓밟으며 나무 사이를 헤치고, 약간 움푹한 곳에서 팬티를 내렸다, 오줌 
냄새와 소나무 냄새를 동시에 맡았다.
  액셀을 밟아 속도를 한층 올리고, 아버지는 핸들에 매달려 밤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갔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노래를 부르고, 가끔은 핸들을 두드려가며 리듬을 
맞추기도 한다.
  "하야시 씨 일로 중요한 얘기가 있어."
  어머니의 목소리가 불안감과 함께 되살아났지만, "아버지는 도망치는 말이다"라고 
아버지가 외치기 전에 잠든척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급정거를 하여 눈을 뜨니, 반대편에서 차가 한 대 다가오고 있다. 아버지는 창문을 
열어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며 차를 세웠다.
  "가까운 길로 가려 했는데, 길을 잃어서 말입니다."

  아버지의 차는 로케 스태프를 한 시간이나 기다리고 하고서야 도착했다.
  "일기 예보에서 비가 내린다고 하니까 서둘러 짐을 내리세요, 여기서부터는 
걷습니다."
  조감독이 양손을 확성기 대신으로 하고는,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트렁크를 열고, 백화점의 쇼핑백을 꺼내 의상에 달린 가격표를 떼고는, 차 뒤에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티롤리언 모자, 두꺼운 양말, 등산화에 피켈까지 갖춘 중장비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요코나 가즈키도 사전 모의라도 한 듯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나와 어머니만 원피스 차림이다. 어머니는 물방울 무늬이고 나는 단색이지만, 같은 
베이지 계통에 길이나 라인이나 똑같았다. 나와 요코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같은 
애"라는 말로 서로를 폄하했었다. 닮았다고 여겨지는 점을 열거하다가, 반드시 엉겨 
붙는 싸움으로 발전하곤 했다.
  "캠프장에 도착하는 장면부터 찍습니다. 어머니는 조수석, 다른 사람은 
뒷좌석입니다."
  가타야마가 말하자, 아버지는 운전석으로 올라타 지정된 장소에 차를 세운 후, 키를 
뽑아 주머니에 넣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웃는 얼굴로 차에서 뛰어내려, 조수석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다.
  "안 돼요, 아버지, 문을 여는 것은 부자연스럽습니다!"
  가타야마가 외치자, 아버지는 가타야마에게 얼굴을 돌리고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없으니까 그대로 하세요, 차에서 내리는 장면부터!"
  딱딱이 소리가 울렸다.
  아버지는 창에서 내리자 마자, "야아, 날씨가 좋은데"라며 몸을 쭉 뻗었다. 
가타야마는 언짢은 얼굴로, "이 장면은 못 써먹겠군"이라고 말을 뱉었다.
  장소를 이동하여, 아버지와 동생 둘이서 텐트를 치고, 나와 어머니는 식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겨우 2시가 좀 넘었을 뿐인데, 사방은 회색으로 가라앉아 있다. 멧새의 
가녀린 우짖음 소리가 들렸다.
  앞가슴이 이상하게 부풀어 있는 조감독이 테이블 위에 채소와 소고기를 늘어놓았다.
  "카레라이스랑 샐러드였죠, 어머니."
  "카레라이스가 아니야. 카레 스튜. 스튜도 되고 카레라이스로도 먹을 수 있어."
  아버지가 차 트렁크를 열고, 비닐 주머니를 양손에 들고 다가왔다.
  "모토미, 싸구려 고기는 사용하지 마라. 과일과 채소는 바구니에 넣어 강에서 씻는 
편이 좋겠다."
  아버지는 내 앞에다 비닐 주머니를 내려놓고 텐트로 돌아갔다. 스테이크용 
차돌박이가 다섯 장, 과일, 채소, 불꽃놀이 세트까지 들어 있다. 나는 과일과 채소를 
바구니에 담아 강가로 내려갔다.
  엎드려 손끝을 담그니 마치 얼음물 같다. 커다란 돌로 과일과 채소가 흘러가지 
않도록 울타리를 만들었다. 토마토, 딸기, 사과, 피망, 감자, 홍당무, 양파, 샐러리, 
양상추, 오이를 띄었다. 감자와 홍당무는 가라앉았다.
  위쪽에서 환성이 일었다.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이 하는 말의 끝자락이 귀에 
들어온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 듯한 기분이 들어 귀를 기울였는데, 강물 소리가 더 
크다.
  여름 방학 캠프로 가는 도중, 아버지는 운전을 하면서 강을 만날 때마다 차를 
세우고, "자 수영해라"라고 호령을 하였다. 우리 형제는 집을 나설 때부터 수영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튜브를 불어 다 부풀기를 기다렸다가 차례차례 
강으로 뛰어들었다. 수영복을 잊고 왔을 때에는 알몸으로 수영했다. 언젠가 현도가에 
있는 강에서 수영을 했을 때에는 지나가던 차가 속도를 낮추고 놀려댔지만, 우리들이 
황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자 그냥 지나쳐 갔다.
  채소와 과일을 다시 바구니에 담아 위로 올라오니, 텐트가 서 있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져 불안스럽다.
  어머니는 돌을 쌓아 만든 부뚜막 앞에 앉아, 뜨거워진 냄비에 샐러드유를 붓고 잘게 
썬 스테이크용 고기를 볶고 있다. 내가 씻어 온 채소를 도마에 올려놓고 자르자, 
요코가 도마를 빼앗아 어머니의 지도를 기다리는 자세를 취하고, "채소"란 소리가 
들리자마자 도마를 뒤집었다.
  "양파가 처음이고, 감자는 뭉개지기 쉬우니까 물을 넣고 난 다음에 넣으면 돼."
  카메라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잊고 엉겁결에 말을 하자, 요코가 도전하듯 
정면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말투까지 엄마를 꼭 닮았지."
  요코는 이렇게 말하며 도마에 들러붙은 양파 조각을 냄비에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카메라가 자기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고는, 1.5리터 병에 든 생수를 냄비에 부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주머니에서 오백 엔짜리 동전과 사탕통을 꺼냈다.
  "다 삶아 질 때까지 사탕이나 물고 기다리지."
  아버지는 오백 엔짜리 동전끝으로 통뚜껑을 비틀어 열려 애쓰다가 "이거 안 
열리던데"라고 중얼거리며 오백 엔짜리 동전과 사탕통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부뚜막 옆에 놓인 바구니를 무릎에 올려 놓고 과일칼로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나무랄 데 없는 솜씨로 사과를 절반으로 잘라 씨방을 깨끗이 도려내고 
육등분으로 잘랐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딸기 꼭지를 따는 작업에 열중이다.
  "날씨가 좀 수상하니까, 좀 덜 익었더라고 참고 먹었으며 좋겠습니다."
  가타야마가 카메라 옆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일어나 종이접시에 밥을 뜨고, 국자로 카레를 떠 
끼얹었다.
  아버지는 심히 의심스럽다는 듯 냄새를 맡고, 숟가락 끝에 살짝 카레를 묻혀 맛을 
보고는 입에 넣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주보고 앉아 있지만,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아버지는 옛날에 비해 천천히 식사를 한다. 함께 살았던 시절, 식사중에는 말을 하는 
것도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얼른얼른 그릇을 비우라고 우리를 
채근하였고. 누군가 먼저 식사를 끝내면 그 그릇과 물잔을 들고 일어나 설거지를 
시작하곤 했다.
  이 사이에 살코기가 끼었는지, 아버지가 이쑤시개 대신 성냥개비로 이를 쑤시자, 
어머니는 20년 전을 재현하는 드라마처럼 노골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이것 참 엉성하군요, 뭐라고 하면 좋을지, 아무튼 캠프엣 온 가족들답게 해 
주세요."
  가타야마가 여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노천욕탕에 들어간다."
  아버지는 접시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가타야마가 엄지손가락으로 GO 사인을 내려, 우리는 아버지 뒤를 좇아갔다.
  숲을 빠져 나가자, 조그만 노천욕탕이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초록색 비닐 자리가 
깔려 있고, 비를 맞아 검게 썩어 있는 나무 선반이 있을 뿐 탈의실은 없다. 온천욕을 
기대하고 있던 어머니는 실망감을 알알이 드러냈다.
  "아니 우리가 뭐 원숭이냐 너구리냐. 이게 온천이라니. 내 참 기가 막혀서."
  어머니가 자갈을 욕탕 안으로 걷어차며 말했다.
  노천욕탕 옆에 "이 보살탕은 당 온천의 사유지입니다. 숙박객 이외에는 입욕할 수 
없습니다. 무단으로 입욕할 경우 담당 직원의 제재가 있을 것이므로 양해 바랍니다"라 
씌어 있는 입간판이 서 있다. 아버지는 그 입간판을 뒤로 돌려 우리에게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려 보이고는, 눈깜짝할 사이에 옷을 벗었다. 물의 온도를 확인하지도 
않고 몸을 담근 아버지는 목구멍 속으로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었다.
  "가즈키, 물이 아주 좋아."
  아버지가 퍼뜩퍼뜩 덜기 시작한 가즈키의 안면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남동생은 
입술을 토끼 코처럼 벌름거리며 마냥 서 있다가 꾹 깨물더니, 무릎을 꿇고 등상화 
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자 요코도 가즈키를 따라 신발을 벗었다.
  "멋진 그림이군."
  가타야마는 양손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사용하여 파인더(finder, 초점을 
맞추기 위해 피사체를 들여다 보는 장치) 모양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가즈키 뒤에 
숨어, 벗은 옷을 나뭇가지에 걸었다. 빛이 흐르고 노천욕탕에 조명이 비쳐졌다.
  "모토미 짱, 들어와."
  어머니는 핑크색 슬립으로 앞을 가리고, 물에 다리를 담그는 동시에 마술사 같은 
손짓으로 슬립을 걷어 바위 위에 놓았다. 뺨과 턱이 유난히 반짝인다. 매일 밤 목욕을 
하기 전에 한 시간이나 콜드크림으로 얼굴과 전신을 마사지해 가며, 필사적으로 
나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실리콘을 주입한 유방은 물에 가려 있지만, 쇄골 바로 
아래부터 부자연스럽게 부풀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이."
  나를 노려보고 있던 가타야마가 소리를 질렀다. 조감독이 아버지의 얼굴 높이에 
딱딱이를 맞추고 나를 응시하고 있다. "스태프의 휴대용 전화로 택시를 부르든지, 
여관에서 전화를 빌리면 된다, 아무튼 이곳을 떠나야지"하고 등을 돌렸을 때, 
스크립터가 타월을 가지고 뛰어왔다. 
  몸을 담그고 있지 못할 정도로 미지근하다. 아버지가 얼굴을 씻고 뿌연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도 그 시선을 좇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떼가 딱히 무슨 특별한 
패턴을 그리는 것도 아니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날아다니고 
있다.
  아버지의 얼굴에 뼈의 윤곽이 사라지고, 부숭부숭하게 살이 쪄 있음을 깨닫는다. 
나이테 같은 주름이 늘어져 있는 목, 콩알만한 반점이 돋아 있는 피부.
  나는 아버지를 외면하고 다시 하늘을 보았다. 까마귀떼가 소용돌이를 그리고, 커다란 
검은 새도 몇 마리 섞여 있다. 설마 박쥐는 아니겠지. 아버지는 하늘을 올려다본 채 
하나, 둘, 셋, 넷을 세었다.
  "가족이 하나가 되기에는 캠프가 최고야, 아, 좋다."
  아버지는 얼굴을 한 번 씻고 모두를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스즈키 구에 있는 집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어떨까? 우리들은 한 가족이야."
  핸디 카메라가 노천욕탕 주의를 천천히 이동하고, 가타야마와 녹음 담당은 카메라에 
비치지 않도록 기다시피하며 움직이고 있다.
  "하야시 씨, 그런 꿈 같은 소리를 진심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엊그제 다케이 씨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다케이 씨는 정말, 어쩌면 자살을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노천욕탕에 몸을 담그고 영화에 출연하는 걸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다케이는 아버지가 근무하고 있는 파친코점 "아사히 궁전"의 사무원으로, 어머니는 
20년 전부터 아버지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그런 소리를 하는 작자가 어딨어! 이건 영화라구. 당신이란 여자는 늘 그 모양이지. 
조잘조잘 쓸데없는 말을 지껄여 모든 것을 망가뜨렸어."
  저도 모르게 일어난 분노에 몸을 떨던 아버지는, 당황하여 물 속으로 허리를 굽혔다.
  "이렇게 된 이상 영화고 뭐고  다 어딨어요. 감독, 이렇게 미지근한 물에 더 이상 
있다가는 감기 걸리겠어, 나 나갈 테니까, 모토미 그 타월 좀 빌려 주겠니. 거기 
말이야, 거기! 꺼요!"
  라이트가 꺼지자 어머니는 밖으로 나갔다. 바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 놓은 아버지가 
발이 미끄러져 탕 안으로 엉덩방아를 찧고, 양손으로 허공을 잡으려 버둥댔다. 하지만 
나도 요코도 가즈키도 손을 내밀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혼자 힘으로 일어나, 내 
얼굴을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쳤다.
  우리 가족과 스태프는 아이스 박스에서 주스와 맥주캔을 꺼내 슉, 슉, 소리를 내며 
뚜껑을 땄다.
  "몸이 따끈따끈하군."
  아버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맥주를 다 마신 가타야마가 오른손으로 캔을 찌그려 뜨리려다 실패하고, 양손으로 
캔을 비틀고 있다.
  "자 그럼, 마지막 장면을 찍도록 합시다."
  아버지는 아직 콜라가 남아 있는 내 캔에다 담뱃재를 떨어뜨렸다. 촬영 준비가 
완료되고 라이트가 켜졌는데도,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는다.
  요코나 가즈키나 아까 한 이야기의 의미를 찾아내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훔쳐 보고 있다. 짐작은 간다. 다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아사히 궁전"의 사장이 아버지를 해고시키고 싶어한다는 얘기는 몇 년 전부터 
들어왔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우리 형제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의 폭력에도, 
어머니의 성적 방종이 초래한 치욕에도, 우리는 그럭저럭 견디어 왔다. 비굴할 정도로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해고 좋다.
  나나 요코나 가즈키 또한 단단히 뿌리내린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을, 
바깥으로 향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타인과 타협하지 못하여, 미워했을 뿐이다. 
부모를 증오하는 죄에 비하면, 값싼 대가라 해야 할 것이다. 드러나 아버지가 
실직했다면, 경제적인 문제보다 파친코 점의 총지배인, 팔십만 엔이란 고액의 월급으로 
간신히 지탱해 왔던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되어, 모든 것에 제대로 적응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좋은 점은 좋지만, 나쁜 점은 서로 반성하고 개선하기로 하고, 다시 한 번 
시작합시다. 당신이 나를 배반하고 집을 나간 일은 없던 일로 하지."
  서투른 배우가 대본대로 암기한 대사를 읽어 내리는 것보다 더 한심하다. 어머니가 
얼굴로 흘러오는 담배 연기를 피하면서 잔나뭇가지로 모닥불을 쑤시고 있다. 그 빛을 
받아 눈, 광대뼈, 아랫턱으로 절박한 감정이 자글자글 타오를 듯이 보인다. 초바늘이 
시각을 셀 때마다 죄어오는 긴장감을 견딜 수 없었는지, 요코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해요, 엄마. 응? 우리 가족 모두 함께 살자구요."
  애원하듯 목소리까지 떨렸다.
  남동생은 콜라를 다 마시고는 가지고 온 테니스 라켓을 허공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모토미 누나가 좋다면 상관없어, 나는. 굉장한 스윙이지?"
  이번에는 가즈키만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카메라는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나는 같이 못 살아."
  그렇게 말하고 침묵했다. 가족이 함께 살면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물더니 점차 거세지는 바람을 
등으로 막고 불을 붙였다.
  "하야시 씨 잘렸어."
  어머니는 잔나뭇가지를 불에 던지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같이 쓰던 의료보험증은 이제 쓸 수 없어. 국민보험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구. 나랑 가즈키는 어제 가마쿠라에서 절차를 밟았으니까, 모토미는 도쿄도 
보험과에 가서 상담해 봐. 회사 보험이 실효된지 14일 이내니까 내일 가도 늦을지 
모르겠다. 가즈키도 아르바이트 해서 돈 벌어. 하야시 씨는 연금도 퇴직금도 없으니까, 
이번 달부터 생활이 곤란해질 거야. 예전처럼 하야시 씨한테 용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가는, 큰 오산이야."
  어머니는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을 만큼 억제된 말투로 말했다. 함께 살았을 
시절에는 항상 술 취한 듯한 어머니의 짱짱한 억양에 휘말려,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는 법이 없었다.
  거미줄보다 더 가는 비가 여기저기서 선을 그었다. 카메라맨을 제외한 전원이, 
흔들리는 모닥불에 눈길을 떨구었다.
  "아빠는 어떻게 할 거예요? 생활비라든지 집 대금."
  요코가 가칠가칠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즈키는 라켓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달리 아무런 방법도 없다니까, 쓰즈키 구의 집은 넘어갈 거고, 하야시 
씨와 요코 짱이 사는 집이 없어진단 말이야. 요코, 너 부양할 수 있어? 아빠를?"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답배 끝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불쑥 자신의 늙음을 인정한 
듯한 웃음을 띠었다.
  "어떻게든 수가 있겠지. 파친코 가게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생길 것이고, 나는 30년 
경력의 베테랑이니까 여기저기서 오라고 야단할 거야. 어디를 가든 고액으로 채용될 
수 있어."
  천천히 말하면서 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그 경력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니까요."
  어머니는 그렇게 말을 뱉었다.
  "요즘 기종은 거의가 디지털식이라서 컴퓨터로 알을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못을 
조정하는 따위의 일은 초보자로 충분하다구요. 시대에 뒤떨어지고, 쓸모없어 해고된 
주제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하야시 씨는 자존심이 세서 
경비원도 택시 운전사도 못해, 달달이 카드론이 얼마야, 지금 파는 것은 불리, 안 
팔려요, 그 주변 땅값이 제일 비쌌을 때에 비하면 절반 이하니까. 게다가 우리 처지를 
눈치채고 마구 깎으려 들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 그 집을 팔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야 
돼."
  "파치프로(파친코 전문 도박사)가 되면 한 달에 이백 엔, 삼백 엔은 손쉽게 벌 수 
있어."
  타고 있는 한 점 불을 입 위로 잡고 있는 아버지의 오른손이 떨리고 갑자기 빗발이 
굵어졌다. 카메라에는 어느 사이엔가 비닐이 씌워 있다.
  "잠꼬대는 그만해요, 하야시 씨. 알아요, 난 전문가라구요. 부동산 전문가.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요. 쓰즈키 구 집의 명의를 내 앞으로 
옮겨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고된 걸 안 카드 회사며 빚쟁이들이 내일이라도 당장 
몰려와 몽땅 털어갈 테니까."
  "안에서 얘기하지."
  아버지는 젖은 앞머리를 끌어올리며 기둥이 비스듬히 기울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가즈키, 좀 거들어라."
  아버지가 빗속으로 튀어나가, 로프를 바싹 잡아당겨 쐐기를 다시 박으려 했지만, 
텐트는 싫다고 버팅기는 듯 뒤뚱뒤뚱 흔들릴 뿐이었다.
  어머니가 냄비를 모닥불에 내던지자 뭉글뭉글 연기가 피어올랐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어머니."
  가타야마가 비명을 질렀다.
  "하야시 씨는 자기 생각밖에 안 해요! 가족에 대한 애정 따윈 벼룩이 똥만큼도 갖고 
있지 않다구요! 그렇다는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번쯤은 내 말에 귀를 기울려 
줄 수도 있잖아! 전문가가 하는 말을 왜 듣지 않는 거야. 하야시 씨가 구제받을 길은 
단 한 가지, 내 명의로 해요!"
  "여관에 묵자."
  아버지는 산길을 뛰어올랐다.
  우리는 로케용 버스에 올라타, 젖은 머리칼과 얼굴을 타월로 닦았다. 촬영 라이트가 
꺼지자 캠프장은 어둠 속에 가라앉고, 산 전체를 뒤흔들 듯 세찬 강물 소리가 들린다.
  한참 지나자 앞 유리창 너머로 아버지의 실루엣이 보였다.
  "빈 방이 없어?"
  온몸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오늘은 그만 돌아갑시다. 마쓰모토 시내에 있는 비즈니스 호텔, 휴대 전화로 예약해 
주겠나? 내일 날이 개면 등산하는 장면을 찍고, 비가 오면 그칠 때까지 촬영을 쉬기로 
하지. 뭐, 호텔에서 뭉개는 수밖에 없지만."
  가타야마가 조감독에게 지시를 내렸다.
  "텐트에서 묵겠어!"
  아버지는 빗속에서 몸을 버둥거리며 기둥을 바로 잡으려 애쓰지만 끝내 바로 
세워지지 않았다.
  "바보자식, 카메라 돌려!"
  정신을 차리고, 가타야마는 카메라맨이 아니라 조감독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라이트 어디 갔어, 라이트!"
  그렇게 외치고 빗속으로 달려나왔다.
  카메라맨도 쓰고 있던 야구모자로 조수를 막무가내로 때리며 소리 질렀다.
  "시트 한 장 더 꺼내! 빨리 필름 갈아끼라고 하잖아! 라이트는 필요 없어, 그보다 
차의 장소를 바꿔!"
  서둘어 기재를 준비하고 있는 조명 담당에게도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의 차에 
올라탄 조명 담당은 헤드 라이트를 텐트 안으로 비추려 차를 움직이고, 로케용 버스의 
운전사는 문이 아버지와 마주할 수 있도록 핸들을 꺾었다. 카메라맨은 로케용 버스 
문에 매달려 핸디 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했다. 난방으로 김이 서린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문지르자,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양손을 꼭 마주 쥐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빗소리에 넋을 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기도하고 있는 듯이도 
보인다.
  어머니는 유리창에서도 그리고 내게서도 얼굴을 돌리고,
  "모토미, 자기 보험증을 갖게 되면, 즉 집에서 빠져 나갔다는 얘기야."
  "화면에 목소리만 겹치는 걸, 뭐라고 하지요?"
  "싱크로(synchronizer, 음성과 화면을 일치시키는 장치)든가, 아닌가."
  녹음 담당은 나구라의 채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비를 맞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겹쳐지기를 기다렸지만, 
어머니는 침묵한 채였다. 요코는 조감독한테 비닐 우산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가더니, 
아버지를 안아 일으켜 데리고 들어왔다. 고개 숙인 아버지는 로케용 버스에 발을 
들여놓고 건네받은 타월로 코를 풀고는 언제까지고 얼굴을 박박 문지르고 있다. 
갑자기 남동생이 어깨 위로 아직도 머리가 완전히 서지 않은 갓난아이처럼 목을 
흐물거리며 요란한 소리로 웃었다.

  발걸음을 늦추고 펫숍 쇼 윈도를 들여다보았다. 성장한 래브라토 리트리버가 가게 
안 의자 위에서 발을 들썩거리고 있다. 뛰어내리라는 지시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전에 
보았던 그 개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개의 개성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주인뿐이다. 코와 입을 가리고 한두 걸음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 남자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위가 쪽 쪼그라들어, 잰걸음으로 가게를 떠나 후카미의 아파트로 
향했다.
  어째서 그의 아파트에 머물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해골 
표본에 마음을 빼앗겨, 방과 후 아무도 없는 과학실에 숨어든 경험에 비교하는 것은 
악취미인지도 모른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워 모아 배배 꼬아서 라이터로 
불을 붙였을 때의 냄새와, 노인의 전신에 얇은 얼음처럼 퍼져 있는 죽음의 냄새가 
유사하다고 말해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와 타협할 수 있다. 현실감 없는 사람이 아니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말을 이케에게 해 봐야 무슨 소린지 몰라 고개만 갸우뚱할 뿐일 것이다.
  '이케와는 헤어진다.'
  단호히 결단을 내리고 다쓰미 장의 계단을 올라갔다. 오늘은 검정 고양이가 없다. 
조심조심 노크를 한다. 그가 문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등줄기를 쭉 뻗었지만 그런 
기척이 없다. 밖에서 다른 사원들과 의논을 하는데, 대충 디자인이 만들어졌으니까 
오늘 중에 가지러 와 달라는 전화를 받은 것이 두 시간 전이니까 없을 리가 없다.
  "목욕탕에 갈 시간도 아니고, 시장을 보러 갔을까."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문은 열리지 않는다. 살금살금 문으로 다가와, 
그 너머에서 꼼짝 않고 선 채 기다리며 안쪽을 살피다가 포기하고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 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조금이라고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망상이 끓어오른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한 번 힘껏 노크를 
하였다.
  "누구지?" 고함 소리에, "하야시인데요"라고 대답하자 문이 삐죽 열리고, 후카미가 
얼굴 반쪽만 내민다. 입안에 뭐가 들었는지 어물어물하는 목소리로,"기다려"라며 문을 
닫았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 듯한 느낌에 문을 귀에 바삭 갖다 대었을 때, 다시 문이 
열리고, A4 사이즈의 누런 봉투를 내밀며, "스케치료 삼십만 엔과 제작비 선불금 
이십만 엔, 은행에 넣었겠지"라고 물었다.
  고대를 끄덕이는 순간 선명한 코발트 블루빛 하이힐이 눈에 들어와, 고열에 시달릴 
때처럼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갔다.
  "시계를 두고 갔어요."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잠시 아무 말없이 있다가, 문을 닫고 몇 분 후에 다시 
돌아와, "없어"라고 말하며 눈썹을 피끗 움직였다.
  "찾겠어요."
  안으로 들어가자, 스물 두셋 정도의 여자가 내 얼굴을 보았다. 쭉 뻗은 긴 목, 하얀 
목덜미, 파랗게 돋은 혈관이 턱 아래에서 고동치고 있다.
  ""꽃의 세계사"에 있는 하야시입니다."
  명함을 내밀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머리를 쓸어올리고, 느긋한 동작으로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냈다.
  "다무라예요. 카메라맨이 길을 잃어, 선생님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중입니다."
  여자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번호를 눌렀다.
  방에 밴 땀 냄새와 여자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창문을 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하다. 방안을 오가며 시계를 찾고 있던 후카미는, 주먹을 쥐고 책상 모퉁이를 
쾅쾅 두드리더니 마침내 큰 소리로 단언하였다.
  "착각한 거야."
  여자는 머리칼을 갈기처럼 흔들며 일어나,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 싱크대에서 잔을 
씻기 시작한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생수밖에 없는데 드릴까요?"
  눈에는 냉담한 빛이 가득하고, 입가는 이 사태를 재미있어 하고 있다. 후카미는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나를 내쫓으려 했다.
  "시계 같은 거 필요 없잖아."
  '눈에는 눈물이 고이지 않으면 좋으련만'이라 생각하면서 이 자리를 모면할 계시를 
잡으려 안달하였다. 손목시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렇다면"이라고 말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이곳에서 지낸 순간 순간이 부글부글 끓어 넘쳐, 나는 벽장 문을 
열었다.
  시계는 고무 보트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잔을 손에 쥐고 다가온 여자의 눈이 빛나고, 턱선이 딱딱해졌다. 나는 시계를 주워 
신발을 신었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조용히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돌고, 바로 또 모퉁이를 돌아야 하는데, 
오른쪽으로 돌아야 하는지 왼쪽으로 돌아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내 
다리는 자신있게 오른쪽 모퉁이를 돌았다.
  어머니가 어느 날 차 안에서 한 말이 여권에 찍힌 도장처럼 떠올랐다.
  "이걸로 너도 혼자가 된 거야, 집을 빠져 나온 거라구."
  문을 밀자 그냥 열렸다. 아무도 없다, 교정도 건물도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지금도 봄방학중이라는 사실이 숨이 답답할 정도로 가슴을 죄었다. 
  교정에 쌓인 벚꽃잎은 비에 더러워져 회색으로 보인다. 벚나무에는 꽃잎이 겨우 몇 
장 달려 있을 뿐이다.
  그네에 앉았다. 발로 지면을 차자, 건물 유리창에 반사된 석양이 내 움직임을 따라 
춤을 추었다. 색채가 번져 뿌예지고 뒤에는 음영만 남았다.
  3월의 끝, 뜨끈뜨끈한 바람이 불어와 교정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뒤꿈치로 흔들리는 
그네를 멈추게 하였다. 그러나 발치에서 모래가 움직이고, 썰물 같은 바람에 떠밀려 갈 
것만 같아, 나는 바람과 타협하기 위해 몸을 흔들었다.
  
    한여름

  간신히 구색만 갖추고 있는 상점가의 짧은 차양 아래서, 여자는 당장이라도 녹아 
흐를 듯한 아스팔트 길을 내다보고 있다. 길은 빠드득빠드득 이가는 소리라도 낼 듯 
격분해 있다. 여자는 차양 아래를 빠져 나와 삼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자가 올려다본 건물의 1층은 세탁소고, 그 위 3층의 창문은 열려 있다. 베란다에 
널려 있는 빨래가 땀에 푹 젖은 것처럼 보인다. 벌써 3분쯤 지났을 텐데, 여자는 
팔손이나무처럼 손가락을 쫙 벌려 태양을 가리고 서서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다. 
팔뚝을 타고 내려와 뚝뚝 떨어지는 땀이 아스팔트에 검은 얼룩을 만들었다가 금방 
마른다.
  여자는 빠르게 조잘대며 다가오는 주부들을 알아채지 못했다. 24시간 편의점의 
봉투를 든 주부가 뭐라고 속삭이자 다른 한 주부는, 마치 알사탕이라도 핥듯 입을 쑥 
내밀고 키득키득 웃었다. 둘이 2미터 정도 떨어진 곳을 걸으며 동시에 고개만 돌려, 
위에서 아래로 여자를 훑어 내렸을 때, 여자는 비로소 그 시선을 깨달았다.
  여자는 두 사람에게로 몸을 향하고, 똑똑히 보려고 눈을 찡그렸지만, 윤곽이 희미해 
나란히 서 있는 버스 정류장 간판 두 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귀걸이에서 나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두세 번 
격렬하게 흔들었지만, 귀걸이는 없다. 마른 침을 삼키려 목구멍을 꿀꺽 울리고, 공허한 
눈길을 상점가로 돌리다가 세탁소 옆 술가게에 서 있는 자동판매기에 멈추었다. 그때 
은빛 비상계단에 반사된 8월의 햇빛이 여자의 눈을 찔렀다. 여자는 누군가에게 8월의 
비상계단을 올라가라고 협박이라도 받은 것처럼, 눈가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 상가 빌딩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여자는 비상계단을 올라갔다. 꼬리가 구부러진 고양이가 몸을 쭉 펴고 널브러져 
있어, 5층 층계참에서 걸음을 멈췄다. 고양이는 한쪽 귀를 쫑긋거렸을 뿐 눈도 뜨지 
않았다.
  갑자기 멀어진 기름매미 소리를 들으며 인쇄 상태가 나쁜 사진 같은 하늘, 부동산 
광고가 들어붙어 있는 전신주, 빌딩의 좁은 틈 사이로 이어지는 연지색과 짙은 갈색 
지붕, 건널목과 선로.
  여자는 층계참 앞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어디서 한 번 본 듯하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움츠렸다.
  언젠가 본 듯하다고 느낀 것은 이 흔해 빠진 풍경에 대해서가 아니라, 미동도 하지 
않고 정지해 있는 거리에 대해서였다. 여자는 침묵의 투망에 걸린 것처럼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눈 아래 풍경에 공포감마저 느끼고, 난간을 붙잡으며 몸을 비틀었다.
  3층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빨래는 내가 넌 것일까, 아니면 남자인가, 여자는 방에 
있는 남자를 떠올리고 눈썹을 찡그렸다. 돌아가소 있는 에어컨디셔너의 프로펠러 팬이 
보인다.
  남자와 처음 만난 것은 백화점 가구 매장에서였다. 여쭙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라면서 느닷없이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유명 주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나중에서야 계약제 필자임을 알았다.
  제일 꼭대기 층 커피숍에서 두서없는 얘기를 나누다가, 즉 온건파입니다, 라고 
남자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말했다. 마흔 둘이나 셋쯤일거라고 짐작했지만, 3년을 
사귀고 있는 지금도 여자는 남자의 나이를 모른다.
  만난 지 3주일도 채 되지 않아, 남자는 오피스텔을 빌렸고, 여동생과 살고 있던 
여자는 그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그때까지 근무하였던 법률 사무소의 
사무직을 그만두고 남자의 원고를 워드프로세서로 정리하고, 취재처와 교섭하는 
잡일을 거들게 되었다.
  방을 뛰쳐나올 때 남자와 나눈 대화가 되살아났다. 여자는 사흘간 외박을 하고 오늘 
아침에야 돌아오는 길이다. 문을 열자 남자는 요 사흘 동안 한잠도 못 잤다고 
시위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벼르고 있었다. 남자는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앉아 있는 
여자의 시선에서 변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여자는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손톱을 탁탁 퉁기며, 남자가 뿜어대는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싶지 않아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아침까지 마셨다고 치지, 그럼 이틀 밤을 어디서 잔 거야. 사흘이나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고 할 수 없을 테지.
  아까 동생 집이라고 말했잖아, 여자는 긴장과 짜증이 밴 기분을 눅눅한 목소리로 
둘둘 말아 뱉어 냈다. 동생 전화번호 가르쳐 줘. 여자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말이 얼른 
나오지 않는다.
  남자는 무선 전화기를 들이대며 꾸민 듯한 미소를 지었다. 여자가 침묵하고 있자, 
남자는 기침을 한 것인지 웃은 것인지, 입에서 흘러나온 연기를 손으로 휘휘 털어 
내며 여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자의 마음 안에서는 증오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잇다.
  남자는 지난 3년 동안 함정을 파놓고는 나를 궁지로 몰았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남자는 소리 없는 웃음으로 목을 떨며, 그런 눈으로 노려봐야 아무 
의미없어. 전화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질문을 바꾸지, 누구랑 마셨지? 무슨 상관이야. 
남자는 참으려다 실패하고 소리를 꽥 질렀다. 무슨 상관이냐고? 그래, 어차피 
마찬가지 아니야? 당신은 외박한 적 없다고 할 셈이야?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어디서 
잤냐고 추궁했어?
  여자는 남자가 일주일에 두 번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점을 구태여 꼬집지 않았다. 
남자는 주말에만 아내와 두 아들이 기다리는 교외의 집으로 돌아간다. 추궁하지 않는 
것은 관심이 없기 때문이잖아, 나는 당신이 물어주기를 기다렸다구.
  여자는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기우뚱하였다. 방 구석에 있는 여행 가방을 움켜잡고, 
벽장을 열러 선반에 쌓아놓은 셔츠와 속옷을 쑤셔 넣었다. 나가고 싶으며 나가, 하지만 
얘기가 아직 안 끝났어. 남자는 일어나 여자의 팔을 잡고, 남자한테 가는 거지? 
여자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맞았어, 라고 말하며 남자를 되쏘아보았다. 앉아, 
부탁이니까, 앉으라구. 당신이 나가라고 했잖아. 그런 말 한 번도 한 적 없어, 난.
  여자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문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남자는 카메라 셔터보다 더 
재빨리 표정을 분노에서 애원으로 바꾸었다. 짐은 동생을 보내서 가지고 오도록 할 
테니까. 여자는 현관으로 나가 구두를 신었다. 남자는 뒤쫓아가, 가방을 잡고, 나가면 
죽을 구야, 협박이 아니야, 죽을 거야, 라며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남자의 
손에 힘이 빠지기를 냉담하게 기다리다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여자의 귀에는 
전보문과도 비슷한 남자의 신음 소리가 각인되었다.
  "죽을 거야, 헤어지느니, 죽어 주지."
  태양은 하늘 꼭대기에서 비스듬히, 여자의 얼굴과 목을 태우고 있다. 여자 한 명을 
태우기 위해 빛나고 있다.
  풍경은 역시 정지해 있다. 여자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거리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그건 그렇고 나 혼자만 태우기 위해 저 노란 덩어리가 불타고 있는 
것일까,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비상계단에서 보이는 풍경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여자는 서로 합쳐졌다가, 떨어지며 흘러나오는 기억이 말미잘처럼 퍼져가는 것을 
느낀다.
  여자는 계단을 내려가 삼거리의 오른쪽 길을 걸어,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있는 
공원으로 들어가서 나무 그늘에 몸을 숨겼다. 아아, 어쩌면 중학교 건물의 층계참 
창문에서 보였던 풍경과 비슷한지도 모르겠어, 여자의 입가가 살며시 풀렸다.
  여자는 쉬는 시간이면 층계참에 멍하니 서 있다가 수업이 시작되어 불려 들어가기가 
일쑤였고, 같은 학년 학생에게 떠밀려 계단에서 구른 적도 있었다. 방과 후에도 하교를 
알리는 음악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층계참에서 창 밖을 바라보곤 했다.
  바깥 풍경은 여자의 혼을 빼앗았다. 아무것도 없는 거리, 움직이지 않는 거리, 그런 
풍경에 몸을 담그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여자는 중학교 2학년 여름부터 툭하면 학교를 빠졌고, 급기야는 아예 등교조차 하지 
않았다.
  여행 가방에서 꺼낸 티셔츠로 등의 땀을 닦았다. 나는 돌아갈 생각인가, 아니면 
3년이나 동거한 남자와 헤어져 버릴 것인가, 남자는 정말 자살할 작정일까. 마냥 침만 
삼켜 위는 점점 시큼해지고, 허벅지는 아파온지 오래다. 손가락에 힘이 빠지자 가방이 
풀썩 지면으로 떨어졌다.
  여자는 그 위에 앉았다. 지갑에 얼마나 들어 있을까? 이만 엔은 될 것이다. 
은행에는? 지금 확실한 것은 엉덩이 밑에 깔려 있는 가방과 웅성거리는 기억밖에 
없다, 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해거름 같은 꿈속에서 누군가와 얘기를 했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꿈이 분해되어 눈을 뜨는 순간에 
분명 누군가와 얘기를 했다는 의식만 겨우, 파도에 씻긴 모래탑처럼 덩그러니 
남겨진다.
  이 3년간, 남자 이외의 사람과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꿈속의 누군가를 제외하며. 
몇 번이고 거듭 똑같은 꿈을 꾼 듯한 기분이 든다. 대체 누구였을까.
  기억이 열리고, 부풀어 올랐다.
  여자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 어머니는 남편의 바람기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여자는 그 자리에 있었다. 어머니는, 같이 갈래, 아니면 여기 있을래, 
엄마는 어느 쪽이라고 좋아, 네가 선택해도 돼, 라도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어머니의 
얼굴을 빤히 쳐다만 볼뿐 움직이지 않았다.
  남고 싶은 거지, 라며 어머니는 눈길을 돌렸다. 여자는 그 집에 남아 있기도, 외가로 
가는 것도, 혹은 어디 다른 아파트에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도 다 싫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았다.
  부모가 내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이미 먼 옛날에 
버렸다. 움직이지 말 것. 어느 사이엔가 자신을 둘러싼 풍경이 정지한다. 때가 오면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면 된다.
  어머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며, 아버지가 딸의 등뒤로 다가와 어깨에 양손을 
얹는다.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잘 지내,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날 수 
있으니까, 아니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네 엄마라는 사실은 늘 변함이 
없으니까, 전화할게. 힘 내, 알겠지, 그럼.
  어머니가 현관문을 닫는 순간, 여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목을 졸리고 있는 사람처럼 
눈을 크게 치뜨고, 눈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심장을 껴안고, 웃으면서 소파로 쓰러졌다.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가 부르르 화를 내며, 멋대로 해, 라고 내뱉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우당, 쾅, 
쾅, 쾅, 그 발소리도 웃겨, 우당, 쾅, 쾅, 쾅, 여자는 거실에서 한없이 웃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늦은 오후, 젊은 정부가 큼지막한 쇼핑 백을 껴안고 
나타나, 저녁을 준비했다. 아버지는 행복해 보였다. 여자도 행복해지려 조잘거려 
보았다. 아버지와 정부를 웃기고 즐겁게 하기는 간단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이 
여자가 왜 이렇게 음식 솜씨가 엉망이야, 라고 의아해 하기도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정부는 벌써 아침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잘 잤어, 지금 막 
깨우려는 참이었는데, 먹어. 어머니였다면, 먹고 싶지 않아, 란 한 마디로 끝냈을 텐데, 
여자는, 아 맛있네, 라고 명랑한 목소리로 차려진 음식을 깨끗이 비웠다. 어머, 난 
맛없다고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와. 발랄한 목소리와 화려한 목소리가 난무하고, 여자는 
구두끈을 반듯하게 매고 학교로 향했다.
  그날 밤, 정부는 일단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튿날부터 집에 눌어 살게 되었다. 
여자는 정부와 친구처럼 지냈다.
  어느 날 목욕을 끝내고 보니, 빨래 바구니에 핑크빛 팬티가 들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내 건데 줄게, 라고 정부는 턱을 당기고 조롱하듯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 여자가 팬티를 입자, 아주 귀여운데, 정부가 뒤에서 껴안았다. 어머, 찌찌, 내 
것보다 더 큰 것 아니야? 여자는 커다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거짓말, 언니 쪽이 더 
커. 브래지어 사이즈는? 안 해. 정말? 그러면 늘어져, 그럼 이번 일요일에 사러 가자, 
립스틱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내 걸 써도 괜찮지만, 그래도 자기 화장 도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 응, 가자구. 와 신난다, 갈 거야, 내내 갖고 싶었는 걸. 여자는 
잠옷으로 갈아입으면서 홀린 듯 조잘댔다. 둘이 수다에 지쳐 침대에 들어 간 것은 
1시가 지나서였다.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여자의 서랍장 속 알록달록한 란제리는 세 다스나 되었다.
  어느 여름 날, 바겐 세일을 하는 백화점에 갔다. 여자는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정부는 가슴이 깊게 패인, 그래서 네글리제로 착각하기 십상인 엷은 
장미빛 선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페어 룩으로 하자고 정부가 꼬드겼지만, 그것만은 
아무래도 용납할 수 없었다. 언니가 청바지 입으면 되잖아. 어머 얘는 난 청바지 같은 
건 한 벌도 없어, 청바지는 입어 본 적도 없다구, 싫어, 노동복이잖아, 청바진, 난 
노동해 본 적이 없는 걸 뭐. 치, 카바레에서 일하잖아. 맹추, 카바레 노동이 아니야, 
놀이라구 놀이, 뭐 아무튼, 가자.
  허리에서 엉덩이로 흐르는 곡선을 흔들 듯 정부는 걸어갔다. 여자는 불끈 솟구치는 
증오심에 놀라 눈을 꼭 감았다.
  왜 그래, 정부가 돌아보았다. 여자가 길에 우뚝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빨리 와, 정부의 미간에는 짜증이라 주름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참 후 여자는 
엉거주춤 걷기 시작했다.
  부티크에 들어가자, 정부는 가격표를 힐끗 보고서는 빨강이며 노랑 원색의 옷을 
잇달아 여자의 가슴에 대러보면서, 어때, 라고 미소지었다. 어머니와 함께 옷을 살 
때에는 모노 톤 색상 외에는 사지 않았다. 어머니의 센스인지 나의 취향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거의 어머니와 여자는 동시에 같은 옷에 눈길을 멈추고, 서로 고개를 
끄떡이고는 입어 보고, 그리고 결정지었다.
  이거 한번 입어 보지, 라고 정부가 팔에 걸친 것은 하얀 바탕에 핑크빛 물방울 무늬 
원피스였다. 여자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 가격표를 잡아당겨 보고, 오십 퍼센트 
할인이라도 비싸네, 라며 넌지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냄새를 풍길 작정이었는데, 
아버지한테서 돈 받았거든, 이라며 정부는 혀를 낼름 내밀고 옷을 옷걸이에서 벗겨 
냈다. 그리고 이거 입어 볼 거예요, 라고 남자 점원에게 말했다.
  여자는 탈의실에 들어갔지만 옷을 입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 정전기가 흘러 옷을 쥔 
오른손에 찌르르한 느낌이 왔다. 이 옷은 마음에 안 들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용서 못해. 움츠리고 있던 증오의 단편이 가슴 언저리에서 덩어리가 되어, 똑바로 
정부에게로 향했다. 여자는 거울에 비친 기묘하게 비틀어진 자신의 얼굴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쉰을 세고 탈의실 문을 살며시 열자, 정부는 가에 안에 걸린 거울에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 턱을 약간 위로 쳐들어,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입술 껍질을 쥐어 
뜯고 있는 참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틀어 올리고 있어서, 예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땀에 젖은 목덜미가 보였다. 그 목덜미에 폭포 같은 시선을 두고 있는 
남자 점원은 탈의실에서 나온 여자를 본 체도 라지 않았다. 팔에서 스르륵 흘러 
떨어진 원피스를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자, 거울 한 끝으로 여자의 머리가 비치고 
말았다. 정부는 돌아보며, 아이 그냥 입고 나오지 그랬어, 라고 여전히 명랑하게 
말했다. 여자의 침묵을 짓뭉개듯, 꼭 맞으니까 사, 라고 보호자 같은 말투다.
  이거 싸 주세요, 라며 여자의 팔에서 옷을 걷어 내려는 순간, 여자의 고동은 
쿵쿵쿵쿵, 바로 목구멍에서 팔딱거렸다. 찰싹, 손바닥을 내갈기는 소리가 울렸는데, 
무슨 소린지 정부의 비명을 듣기까지 현실감이 없었다. 여자는 긴장한 팔을 오므려 
자신의 가슴을 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위가 벌떡벌떡 튀어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틀비틀 쓰러진 정부가 어디엔가 부딪친 모양이다. 이마 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여자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온 거리가 째지는 소리로 웅웅거리는 것 같았다.

  여자는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무 그늘에서 나와 햇살 속으로 파고들 듯 
걷기 시작했다.
  그 정부는 어떻게 되었던가. 기억을 더듬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상적인 
관계가 일그러졌다는 것, 즉 서로 말을 하지 않게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아버지와 
정부가 입적을 하느니 안 하느니로 옥신각신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이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면.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면 정부는 늘 아무 대꾸도 라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정부가 사라졌다. 그 후로 정부 2호, 3호가 놀러 온 일은 
있지만, 동거를 라는 선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하루나 이틀 자고 간 정부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삼거리를 다 지나 상점가 차양 아래로 들어서서, 자동 판매기에 동전을 넣는다. 
허리를 굽히고 캔 콜라를 꺼내자 그 자리에 푹 쭈그리고 앉아, 벌개진 뺨에 캔을 갖다 
댔다. 뜨뜻미지근해진 콜라를 마시면서 방으로 돌아가 자신이 취할 행동을 상상해 
보았다. 아직 1시도 되지 않았다. 하루가 고스란히 눈앞에 드러누워 있다. 우선 
에어컨디셔너를 끄고 창문을 연다. 시트와 베갯잇을 벗겨내 세탁기에 넣고, 남자가 
무슨 말을 하든 들리지 않도록 텔레비전을 켜 두고, 방안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린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달걀이 있다. 빵도. 먹다 남은 스파게티도 
있을 것이다.
  여자는 몇 년이 지나도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함없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는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 없이 3년 이상을 버티기 힘들었다. 사흘간 
외박을 한 곳은, 술집에서 알게 된, 아니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술집에서 여자의 뒤를 
쫓아온 초로의 남자 방이었다.
  갈아타는 역에서 내려, 등뒤에 들러붙어 따라오는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을 때, 
누군가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술집 구석에 있었던 그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뉴욕 양키스의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검정 티셔츠에 청바지, 빨간 양말에 
스니커 차림이었다.
  전철을 갈아탄 후에도 남자는 손잡이에 매달려 여자를 줄곧 주시하였다. 여자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보내자, 옆자리로 옮겨 와, 내가 당신 뒤를 쫓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죠, 라고 맥없이 중얼거렸다. 오십대 중반 정도일까. 야구 모자 위로 빠져 
나온 흰머리는 듬성듬성 하지만, 뺨과 턱을 덮은 수염은 새하얗다. 아닙니다, 같은 
방향이에요, 당신보다 세 역 전이죠. 야구 모자를 고쳐 쓰고, 지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내가 당신이 내리는 역에서 세 역 더 간다는 것을 알고 있죠, 여자는 의심이 
아니라 호기심에서 물었다. 남자가 솔직히 털어놓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쿡, 쿡, 
목구멍을 떨며, 웃음을 삼키고 말했다. 몇 번이나 당신을 미행했으니까요, 오늘도 
해질녘부터 뒤를 밟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눈치채지 못했죠, 다음 역에서 내려 
한잔 하렵니까. 과연 다음 역에서 세 번째 역이 자기가 내려야 할 역이라고 
생각하면서 여자는 일어나 선반에서 가방을 내렸다.

  술을 마신 뒤, 남자는 자기 집으로 가자고 말했고, 여자는 그 말을 따랐다.
  시큼한 레몬 향이 방안 가득 고여 있었다. 남자는 처음으로 야구 모자를 벗고, 3년 
전에 이혼하여 독신 생활을 하게 된 것과 아파트를 두 채 소유하고 있으며 그 
임대료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는 것, 전철을 타고 여덟 번 왕복하면서 취향에 맞는 
여자의 뒤를 밟는 것이 일과라는 등등을 얘기했다.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두 번째, 방까지 와 준 사람은 첫 번째입니다. 나와 함께 자지 않으렵니까? 
섹스는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침대에 같이 누워 조금 만지게 해 준다면.
  여자는 말없이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여자가 이튿날 낮, 돌아가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전철을 타고 세 번째 역에서 
내려 상점가를 걸어, 상가 빌딩 3층에 있는 문에 열쇠를 꽂는 자신의 모습을 알알이 
떠올리다가 그만 돌아갈 기분이 사그라들고만 것이다. 사흘 동안 머릿속으로 전철이 
몇 대나 통과하였다. 초조함에 가까운 자책감이 희미해지자, 슬금슬금 머리를 쳐드는 
남자를 괴롭히는 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역 빌딩 지하에 있는 생활 협동 
조합에서 시장을 봐 와, 초로의 남자에게 반찬을 만들어 주는 일에 암울한 흥분마저 
느꼈다.
  사흘째 남자는, 미안하지만, 돌아가 주렵니까? 라고 말을 꺼냈다. 역시 나는 여자랑 
같이 살 팔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게다가, 당신이니까 하는 말인데, 여자 뒤를 밟고 
싶고, 뒤를 밟고 있는 편이, 그러니까 음, 발기합니다, 미행 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여자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그 다음에는 뛰기 시작합니다, 나는 막 사정할 것 
같은 상태에서 쫓아가죠, 그런 쾌락을 버릴 수가 없어요, 미안합니다, 당신과 함께 
살고 있는 분에게도 폐를 끼쳤군요, 그 분은 좋은 사람일 겁니다, 아닙니까? 그렇죠?

  여자는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감에 따라 땀이 가시고, 자신의 몸이 개펄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문 앞에 
섰는데도, 무슨 소리, 인기척 하나 없다. 볼록 렌즈를 들려다 본다. 목을 맨 것일까. 
설마, 여자는 저도 모르게 혼자말을 하였다. 무엇보다 이 방에는 끈을 맬 만한 장소가 
없다. 여자는 얼른 천장을 떠올렸다. 그러나 오피스텔에서 자살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벽장 안 쇠파이프에 여자 옷과 함께 걸려 있는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을 때, 불쑥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이 거품처럼 점점 부풀어, 도저히 억제할 수 없어진다. 
웃음을 털어 내려고 몸의 방향을 틀고 한걸음에 두 계단씩 뛰어내렸지만, 웃음은 이미 
미끄러져 나왔다. 여자는 아무 관계없는 목소리로,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말했다. 
오늘은 토요일, 토요일에 죽을 리가 없지, 그 남자가 죽을 리가 없어, 주말에는 자기 
집으로 가는 거리 내가 나가자 바로 자기 집으로 간 거야, 틀림없어,
  밖은, 뜨겁다. 웃음은 여자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려한다. 웃음으로 젖혀진 머리로 
무슨 기억인가 떠올리려해도, 웃음이 여자를 완전히 덮쳐 버리고 말았다. 내리 쪼이는 
한낮의 햇살 아래로 삼거리가 여자 앞에 한없이 뻗어 있다.
  
    그림자 없는 풍경

  그림자가 없다. 운동장에 배추흰나비가 한 마리,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날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째서 저 넓은 운동장을 혼자 날고 있을까, 나비는 떼를 지어 꽃밭을 날아다니는 
법인데. 마유미는 배추흰나비가 떼지어 날아다니는 모습을 떠올리려 눈을 감았다. 
다섯 살 때쯤?
  배추흰나비는 몸부림치듯이 날개를 파닥이고 있다. 작은 돌멩이를 주워 던진다. 
맞을락말락할 정도 가까운 곳을 스쳐 지나갔는데도 배추흰나비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가!"라고 소리치며 또다시 돌멩이를 던지려 할 때였다.
  "마유미, 나비한테 돌 던지면 못 써!"
  등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니."
  어머니였다. 마유미는 꽃밭으로 되돌려 보내려고 그랬다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있잖아요, 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분해서 가슴이 북받친다.
  기구가 내려온다. 마유미는 허리를 들썩이고 교실 창문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수영장에 도색된 파란 페인트와 똑같은 색 하늘에는 구름 한 조각 떠 있지 않았다. 
유에프오(UFO)라는 둥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구는 이런 날에 하늘에 뜨는 법이고, 한 차례 쉬기 위하여 내려오는 장소는 
수업중인 학교 운동장이 가장 적합하다. 쉬는 시간이면 일대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만약 내가 조정사라면 반드시 그렇게 할 텐데, 마유미는 배신당하고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어 양손으로, 쾅, 책상을 내리쳤다.
  "왜 그러니? 너."
  앞자리에 앉은 가오리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못생긴 주제에 무슨 일에든 허풍스럽게 떠들어대는 통에 넌더리가 난다. 마유미는 
양다리를 뻗어 가오리의 의자를 쿡쿡 밀었다.
  "그만해, 숨 막혀, 마 짱. 그만두라니까!"
  마유미는 다리에 힘을 빼고 웃었다. 뭐가 우스운지, 자기가 웃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누군가 어깨를 꾹 잡고 뒤흔드는 듯한 느낌이다.
  누구야, 그만두지 못해, 누구냐니까, 그만해, 라고 소리를 지르기 직전에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조금 더 흔들어댔다면 팽팽해져 터졌을 것이다.

  그림자가 없다. 한여름의 햇살이 기름을 부은 것처럼 운동장 한가득 넘치고 있는데, 
수돗가와 나무들, 철봉 등에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운동장에 뒹굴고 있는 
슬리퍼가 지금이라도 둥둥 떠오를 것처럼 보인다.
  교장 선생님에게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 줄 거다, 어서 빨리 친구들을 사귀고 학급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하여라"라는 말을 듣고, 리나는 담임인 다나카와 함께 6학년 2반 
교실로 향하는 참이었다. 다른 건물로 건너가는 복도에서 운동장으로 눈길을 돌리니, 
눈이 너무 부셔 현기증이 일 듯하였다. 리나는 지금처럼 그림자가 없는 풍경을 언젠가 
바라본 적이 있지 않았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였다.
  "야스다, 무슨 일이야?"
  다나카가 걸음을 멈추고 리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화를 내려는 것인지, 빈혈을 
일으킨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을 하는 것인지, 리나는 알 수 없었다. 스스로도, 자기가 
지금 쓰러질 것 같은지 어쩐지 확실하지 않다. "아무 일고 아니예요"라고 말하려는 
데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마유미는 출석부를 껴안은 다나카의 뒤를 따라 교실로 들어온 여자 애를 보는 순간, 
금방 전학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단발 머리에 귀밑 머리칼만 살짝 땋아 내리고, 그 
끝을 하얀 레이스 리본으로 묶었다. 기구가 내려오는 대신에 전학생이 온 것이다. 
허망하게 끝날 뻔했던 오늘 하루에 신나는 변화를 가져다 줄 징후인지도 모른다.
  "전원 기립."
  호령이 떨어져 일어나자, 칠판 앞에 선 전학생이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4학년 때, 전학생이 오자마자 한바탕 우스갯소리를 하여 끝까지 
무시하겠노라고 화를 낸 적이 있는데, 겁먹은 토끼처럼 교단 앞에 서 있는 그녀가 
마유미에게 바람직스럽게 여겨졌다. 그녀라면 팀에 끼워 줘도 좋을지 모르겠다.
  다나카는 양손을 앞으로 꼭 쥐고 학생들을 휘 돌아보며 말했다.
  "자, 모두들 잘 들어요, 오늘 오타구의 오야마 초등학교에서 전학생이 왔습니다."
  분필을 뒤고 칠판에 그녀의 이름을 썼다.
  "야스다 리나"
  마유미는 리나라는 이름의 만화 주인공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급하게 기억을 
더듬었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자 기억했나. 우리 2반의 새로운 친구니까, 모르는 것이 있으면, 친절하게 가르쳐 
주도록, 알겠나."
  마유미가 "선생님 제 옆자리에 앉혀도 좋은데요"라고 손을 들고 말하려 한 그때,
  "그럼 우선 제일 뒷자리, 저기에 앉아요."
  다나카는 늘어진 목소리로 말하고는 다시 양손을 마주 쥐었다. 마유미는, '옆자리의 
준이치가 오늘도 결석을 하였고, 이 자리에 앉혀 주면 친절하게 가르쳐 줄 텐데' 라고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리나는 무표정하게 복도 쪽 제일 끝줄에 앉았다. 그 앞자리의 히나코가 재빨리 말을 
걸고 있다. 마유미는 누구에게든 환심을 사려고 아양을 떠는 히나코를 꼬집어 주고 
싶었다. 갑자기 얼음을 삼켰을 때처럼 아파진 가슴을 쓸어 내리자, 가오리가 말했다.
  "귀엽지, 응."
  동의를 구하며 눈짓을 하는데 마유미는 전학생이 귀여운지 어쩐지 분간이 안 갔다. 
1교시째 사회 수업 도중에 몇 번이나 훔쳐 보았지만, 요시카와 히나노나 도모사카 
리에처럼 귀엽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리나의 얼굴은 갸름하고, 눈초리는 째져 있고 입술은 조그맣고, 코는 너무 높다. 
그리고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피부가 하얗다. 노트 한구석에 초상화를 그려 보았지만, 
끔찍한 얼굴이 되고 말아 지우개로 지웠다.
  2교시째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마유미는 남자 아이들의 태도가 여느 때 같지 
않음을 눈치챘다. 리나에게 말을 걸고 싶고, 눈에 띄고 싶어한다, 아무튼 환심을 
사려고 안달이었다. 그렇게 전학생이 신기한가, 마유미는 눈썹을 찡그렸다. 훗카이도나 
오키나와에서 전학생이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미국 사람이라면 더욱 좋다, 영어도 
가르쳐 달라고 할 수 있고, 집에 놀러 오도록 하면 어머니도 기뻐할 것이다. 미국 
사람이랑 손을 잡고 걸어다닌다면 누구든 놀랄 것이다. 다들 뒤돌아보면서 "어머, 쟤, 
미국 사람이랑 친구야. 영어 할 줄 아나봐. 외국 사람이랑 친구가 되다니 
대단한데"라고 속삭일 것이다. 나는 리나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오리나 
도모에는 같이 놀기만 할 뿐 진정한 친구라고는 할 수 없다.
  리나는 입술을 깨물 듯 꼭 다물고 교과서를 들추고 있다.
  자연 수업이 시작되었다. 몹시 나른하다. 이제 리나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리나가 
입을 꼭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인기를 끌기 위한 작전이 아닐까. 나라면 
어떻게 할까, 훨씬 더 적극적으로 모두에게 말을 걸 것이다. 특히, 반을 통솔하는 나 
같은 아이에게 "친구가 돼 줄래"라고 부탁할 것이다. 운동장을 보니 구름 그림자가 
북쪽에서 천천히 다가와 모래 놀이터를 덮었다.
  "앗, 유에프오."
  마유미는 낮은 소리를 질렀지만, 가오리가 "어, 어디"라고 관심을 보일 때까지 
연필로 쿡쿡 쑤실 정도의 일도 아니고, 아무튼 나른하다, 따분하다. 창문에서 
뛰어내리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부터 계속된 불안과 짜증이 
입에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어젯밤은 최악이었다. 마유미는 지우개를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손톱으로 
자근자근 뜯어내기 시작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욱신욱신 관자노리 근처에서 고동치고 
있다. "마유미는 어떻게 한단 말이예요! 마유미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어머니는 몇 
번이나 내 이름을 무단으로 사용했는지 모른다. 어째서 두 사람이 헤어지지 못하는지 
마유미는 알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두 사람이 점점 추악해지는 것이다. 두 
사람의 얼굴을 애써 부지 않으려 한 지 한 달이다.
  그토록 좋아했던 아버지가 온몸에 이가 득실거리는 불결하고 추잡한 할방구로 
보인다. 2미터 이상 떨어져있지 않으면 이가 옮는다. 마유미는 어젯밤 목욕탕 앞에서 
아버지와 스쳤을 때, 엉덩이에 아버지의 손이 닿자, 정말 가려워서 견딜 수 없었던 
일을 생각하고, 엉덩이를 의자에 비벼댔다.
  그건 그렇고, 준이치가 O-157이란 소문은 사실일까. 오늘 아침에도 수업이 
시작되기 전, 가오리랑 몇 명이서 준이치가 등교를 하게 되면 자리를 바꿔 달라고 
다나카에게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의논을 했다. 그런데, 준이치의 뒷자리에 앉아 있는 
지나미가 "그렇지만 만약 O-157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라고 반문하였다. 
결론은 내가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마유미는 입술을 핥으며 궁리를 하였다. "절대로 O-157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어요?"라고 해야 하는 건가.
  다음 쉬는 시간에 리나에게 슬쩍 말을 걸어 보자. 그러면 마음이 좀 풀릴지도 
모르지. 그리고 성격을 알면 반 아이들 모두에게 가르쳐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이상하다, 그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야 한다.
  마유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도루에게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떡이고 있는 리나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가슴이 콱 막혀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떻게 된 거지? 조금 전의 리나와는 전혀 다른 귀여운 얼굴이다. 미인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서둘러 얼굴을 칠판 쪽으로 돌렸지만 쿵쿵거리는 가슴이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끓어오르는 불쾌함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리나가 터무니없이 혐오스러운 것, 
자신을 불끈하게 하는 성가신 일을 갖고 온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리나에게 신경을 
쓰는 것도, 남자 아이들이 안절부절 못하는 것도 그녀가 단순히 전학생이기 때문이 
아니다, 눈에 띄기 때문이다! 모델 일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지? 저만큼 예쁘니까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저렇게 잘난 척하고 있는 것이다. 마유미는, 다나카가 
신난다는 듯 손을 비벼댄 것도 리나가 예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가끔 자기에게 그러는 것처럼 아무 일도 아닌 척 리나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더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하여 기절할 것만 같았다.
  마유미는 창가 제일 앞줄에서부터 천천히 교실을 돌아보다, 썰물이 되어 울퉁불퉁한 
개펄이 드러났을 때처럼 질린 표정이 되었다. 이제 반년이면 졸업을 할 텐데 뭣하러 
전학을 온 거지. 틀림없이 천방지축일 거야. 지난번 학교에서 나쁜 짓을 저질러 어쩔 
수 없이 전학하게 된 걸 거야.
  3교시가 끝나 쉬는 시간이 되자, 마유미는 리나의 자리로 갔다.
  "어디 사는데?"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며 미소만 지을 뿐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 리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마유미는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가능하면 그녀가 자기한테만은 
마음을 열러 주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되면 2반 아이들 모두에게 
신임이 두터워 득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만약 모델이라면 친구가 되는 편이 좋다는 
것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리나는 힐끗 마유미를 보았을 뿐 고개를 숙였다. 그 얼굴이 미소를 띠고 있는 듯이 
보여, 마유미는 가슴 한구석을 고스란히 도려낸 듯한 기분에 침착함을 잃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응, 어디에 사느냐니까?"
  마유미는 열을 셀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생각했다.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대답하지 않을 작정인가, 열.
  "얘들아! 전학 온 이 애 말이지, 우리들이랑은 말하고 싶지 않대, 왜 그렇다고 
생각하니?"
  자기 목소리가 윙윙 울려 귀를 막고 싶었다.
  "우리들이 바보라서 그렇대, 자기는 머리도 아주 좋고 미인이라서 얘기하고 싶지 
않대!"
  "전학을 와서 그런 거 아니야?"
  다쓰야가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전학 오면 다 말 안하는 거니"
  "알게 뭐야, 난 관계없는 일이니까."
  다쓰야는 우물거리다가 교실에서 나갔다.
  "전학을 오면 당연히 자기가 먼저 적극적으로 말해야 되잖아, 더구나 이게 다 뭐야, 
리본 같은 거 단 사람 2반에 있어? 귀여운 척 하는 게 아니야, 저질! 떼, 지금 당장!"
  마유미에게는 일부러 천천히 리본을 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리나의 손가락은 
얼어서 움직여지지 않는 것처럼 딱딱하다.
  "그렇게 싫으면, 내가 떼 주지."
  마유미는 리본의 매듭을 머리칼째 휙 잡아당겼다. 풀리지 않는 리본에 짜증이 나서 
더욱 힘을 주자, 손바닥 안에서 머리카락이 뽑히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리본은 
여간해서 풀리지 않는다.
  "빨랑 떼!"
  마유미가 거칠게 손을 떼자, 리나는 다시 리본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두 사람에게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길게 느껴진다.
  "이사왔지? 어디에 사는지 말해."
  "...몰라."
  마유미는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금방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계집애는 정말 
바보인지도 모른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모르다니 그런 멍청이가 어디 있어,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집에는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어쩐지 상대를 하는 것조차 어리석게 
느껴졌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우리 반 애들 모두가 보고 있다, 질 수야 
없지'라고 마유미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
  "그럼 넌 홈리스란 말이니?"
  내심 세련된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두들 기대했던 것만큼 웃지는 않았다.
  "전화는 있겠지?"
  리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말을 하면 고개만 갸우뚱하는 리나에게 마유미는 
소름이 끼쳤다. 시원시원하지 않는 점, 동작이 느릿느릿한 점, 마유미는 그 점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계집애한테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그럼 너네 집을 지도로 그려 봐."
  마유미는 리나의 책상 위에 있는 노트를 펼치고 필통에서 연필을 꺼냈다. 아직 
번지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지도 정도는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리나는 연필을 곡 쥔 채 노트를 쏘아보았다. 사흘 전에 이사온 아파트에서 학교로 
오는 길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노트에 반듯하게 그릴 자신도 
없다. 노트는커녕 운동장에다 그리라고 해도 분명 삐져 나올 것이다. 지도는 못 
그리지만, 걸어서 집에 돌아갈 수는 있다. 그 때문에 어제 엄마와 둘이서 집에서 
학교까지 오는 길을 왕복하였다.
  하교 시간이 한참 지났기 때문에 교문은 닫혀 있었다. 엄마는 교정을 힐금힐금 
들여다보며 "좋은 학교 같은데, 엄마는 그런 느낌이 드는 걸"이라고 김빠진 사이다의 
거품처럼 맥없이 중얼거렸다. "어때, 제대로 올 수 있겠지? 내일은 엄마가 따라오긴 
할 테지만." 학교에 가는 것만이라면 간단하다. 이 사람은, "제대로"의 내용이 
문제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리나는 생각했다.
  아무튼 그려 보자고 리나가 손가락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지도도 못 그려, 그럼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야!"
  얻어맞았는가 싶을 정도로, 마유미의 목소리가 귀에 쨍--하고 울렸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오히려 안심한 것은 마유미 쪽이었다. 리나의 
손에서 연필을 빼앗아 노트에 힘껏 내리찍자, 연필이 둔한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마유미를 화나게 하면 안 되는디유, 죽일 수도 있어유."
  고이치가 말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는 커서 요시모토 프로덕션에 들어가 
코미디언이 되겠다고 허풍을 떨며, 늘 이상야릇한 사투리를 쓴다.
  "자살을 한다면, 유서에 내 이름을 쓰지는 말아유, 정말이어유."
  점심 시간이 되었다.
  히나코가 "라켓 베이스 하자, 다쓰야, 할꺼지?"라며 아직 급식의 뒷정리도 끝나지 
않았는데 야단을 떨고 있다.
  "경찰 놀이 하자."
  다쓰야는 교실을 뛰어나갔다.
  마유미는 히나코의 팔을 붙잡고, 리나를 곁눈질하면서 복도로 나갔다.
  점심 시간에는 전원 운동장에 나가 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리나를 교실에서 
데리고 나올 것인가. 마유미는 평소 같으면 제일 먼저 신발장으로 갔을 텐데, 히나코와 
팔을 끼고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히나코는, 가오리나 도모에랑 사이가 좋은 마유미가 
어째서 자기 팔을 잡고 팔짱까지 끼었는지 수상쩍었다. 리나에게 같이 놀자고 말을 
걸려는 참에, 마유미가 복도로 끌고 나간 것이다. 만약 마유미 팀에 끼워만 준다면 그 
편이 낫다. 전학생과 사이가 좋아져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르니까. 히나코는 재빨리 
계산하였다.
  "라켓 베이스 할래?"
  "하고 싶지 않아. 히나코는 하고 싶니?"
  "아니 별로. 뭐 하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마유미는 신발을 바꿔 신고 복도 쪽을 살폈지만, 리나의 
모습을 없었다. 회선탑(기둥 머리에서 늘어뜨린 몇 가닥의 쇠줄 끝에 매달려 돌게 
만든 놀이 기구)쪽으로 걸어가자니, 가오리와 도모에, 지나미가 뒤쫓아 왔다. 이 세 
명은 어느 사이엔가 쉬는 시간이든 방과 후이든 마유미에게 딱 달라붙어 행동하게 
되었다. 2반 학생들의 절반이 경찰 놀이를 시작했다. 다쓰야와 고이치가 가위바위보를 
하여 도둑과 경찰을 가르고 있다.
  "경찰 놀이 하자, 응"이라면서 손을 흔들고 있는 고이치를 무시하고 마유미가 
회선탑에 매달리자, 나머지 네 명도 서둘러 쇠줄을 꼭 잡았다. 가오리가 돌리려고 땅을 
찼는데, 마유미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세워, 고개를 돌리고 리나를 찾았다.
  "걔 말이야, 야스다 리나란 애, 어떻게 하지? 끼워 줄까?"
  마유미가 별일 아니라는 듯 그렇게 묻자, 순간 네 명은 비밀스런 담합으로 리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순간에 입회해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유미의 질문이, 같은 
반으로 인정을 하느냐 마느냐를 뜻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자신들이 같은 팀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중요한 의식이기도 하다.
  모두 쇠줄을 놓자, 다섯 명이 만든 원 안으로 긴장이 잉태되고,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바닷물이 빠지듯 멀어졌다. 마유미는 이 긴장감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물어도 대답할 수는 없다. 전철을 타고 가다가, 앞에 앉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의 남자애가 지그시 쳐다볼 때의 쾌감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진다. 천천히 밀려오는 희열감에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네 
명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피려 마유미는 그들에게로 얼굴을 향했다.
  "가오리,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모르겠어."
  가오리는 정말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그렇게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따돌림을 
받지는 않을까 싶어 초조했다.
  "음, 아직 어떤 애인지도 모르고, 만약 이상한 애라면 같이 놀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얘기하며 마유미의 안색을 읽으려 했지만, 마유미는 꼼짝 않고 가오리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유미는 지나미를 보았다.
  "잘 모르겠는데. 그렇지만, 왜 전학을 왔을까? 지금은 2학기니까 졸업할 때까지 
그냥 있으면 될 텐데."
  지나미가 말하자, 가오리와 도모에는 리나가 왜 전학을 왔을까, 그 이유에 대한 
화제에 달려들었다. 마유미는 얘기가 빗나가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역시 리나가 
전학을 온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책을 손에 들고 체육관 
쪽으로 걸어가는 리나의 모습이 마유미의 시야에 들어왔다.
  가슴 선에 레이스가 달린 하얀 원피스,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갈색으로 보인다. 설마 
염색을 한 것은 아니겠지. "저것 좀 봐"라고 리나를 가리키며 마유미는 걷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몸의 윤곽과 팬티가 또렷이 햇빛에 비쳐 보인다.
  "잠깐, 얘들아, 봐, 저기."
  마유미는 턱을 치켜들었다.
  "우와, 팬티가 고스란히!"
  코에 돋은 땀을 손등으로 닦고 도모에가 째지는 소리를 질렀다.
  "초 섹시!"
  가오리가 눈을 치켜떴다.
  마유미가 "야스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리나는 누가 불렀나 하고 운동장을 휘 
돌아보고 있다. 마유미는, 경찰 놀이를 하고 있는 고이치와 반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잠깐, 이리 와 봐!"
  "무슨 일이어유, 뭐하고 있는데유?"
  여섯, 일곱 명이 달려오고 고이치가 말했다. 마유미는 다시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야, 스, 다!"
  그리고는 말했다.
  "저것 좀 봐."
  고이치의 귀에다 속삭였을 때는, 이미 경찰 놀이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비치는군유, 속속들이 다 보이는구먼유."
  모두들 "와"하고 웃어대자, 리나는 간신히 자기가 2반 아이들의 시선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에게로 가서 놀이에 가담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마유미가 앞장서자 전원이 리나를 에워쌌다.
  "다 비쳐 보여."
  가오리가 한껏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팬티 다 비쳐 보여."
  모두들 입을 모아 소리를 질렀다.
  리나는 당황하여 치마에 눈길을 떨구었지만, 비쳐 보인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린 듯 하여 고개를 숙인 채 귀를 기울였다. 타닥,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튕겼다.
  '지금이라도 밀물이 밀려들어와 나는 익사하고 말 것이다.'
  리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리 반에서는 팬티 보이게 하면 안 된다구."
  누군가가 말했다.
  "벌칙 게임 하자!"
  "뭘 하지?"
  "팬티 벗기기!"
  "벗겨라! 벗겨라!"
  모두들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딱 한번, 6학년 반 편성이 있은 직후에 벗겨라 콜이 발생한 일이 있다. 벗겨지기 
직전까지 갔던 것은 도모에였다. 그러나 그녀가 울음을 터뜨려 모두들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치마를 잡은 손을 움추렸다.
  마유미는 그 도모에가 제일 큰 소리로 콜을 하며, "벗겨랏, 패앤티!" 하고 장단까지 
맞추는 모습을 보고는, 손뼉치기를 그만두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표정하게 우뚝 서 있을 뿐인 리나에게 바보 취급을 당한 듯한 기분이 
들어, 원피스를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손바닥이 아파올 때까지 
손뼉을 쳐댔다. 벗겨라 콜을 당하면서 그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이해할 수 없다.
  작년 봄방학에 가족끼리 온천에 갔었다. 방으로 요리사가 들어와 눈앞에서 산 
왕새우를 직접 요리하던 때의 일이 기억났다. 몸통이 잘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몸부림치는 왕새우의 대가리가 무서워 마유미는 울부짖었다. 
아버지가 웃자 덩달아 요리사까지 웃어서, 마유미는 왕새우 껍질에 담긴 성게알을 
요리사의 얼굴에 던졌다. 요리사는 어머니가 건네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따님한테는 너무 잔인했군요, 가끔은 재미있어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만, 따님은 
마음씨가 아주 고운 모양입니다"라고 말했다. 두 살 위 오빠는 "겁쟁이일 
뿐이에요"라며 웃었다.
  모두들 손뼉치기에는 싫증이 났는지, 누가 먼저 치마에 손을 댈 것인가 견제하고 
있다.
  "마, 윳, 밋!"
  고이치가 선창을 하자, 아이들은 목소리를 합하여 콜을 시작하였다.
  "마, 윳, 밋! 마, 윳, 밋!"
  마유미는 리나와 함께 피고석에 세워진 것처럼 점점 원의 안쪽으로 밀렸다. 
마유미는 팬티를 벗길 마음은 없었다. 순간적으로 3학년 때 옷을 입은 채 수영장에 
빠져 이틀간 학교를 결석할 정도로 창피했던 일이 생각났다.
  "수영장,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라고 하자!"
  마유미가 외쳤다.
  "선생님한테 들키면 어떻게 하려구."
  다쓰야가 입을 뾰족 내밀었다.
  "그러면 다쓰야다 벗겨."
  마유미가 그렇게 말을 되받자, 다쓰야는 당황하여 다른 아이의 등으로 얼굴을 
숨겼다.
  '자식, 어쩌면 리나의 팬티가 벗겨지는 걸 보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변태.'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마유미는 달큰한 목소리로 리나의 귀에다 속삭였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편이 좋겠지?"
  마유미는 리나의 손을 잡고 수영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도 모두 졸졸 
뒤를 따라왔다. 수영은 금지되어 있지만, 수영장에는 1년 내내 방화용수로 물이 
채워져 있다. 수영장을 개장하는 6월 첫 주에 한 번 물을 뽑고, 학생들이 청소를 하면 
깨끗한 물을 새로 채운다.
  나뭇잎에 섞여 핑크색 필통이 떠 있다.
  "뛰어들어."
  마유미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자, 리나는 마유미의 얼굴에 시선을 남긴 채 
등쪽부터 쓰러지듯 수영장으로 빠졌다.
  온몸에 물방울을 덮어쓴 마유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리나는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허우적거리지도 도움을 청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모두들 입을 꼭 다물고 
수영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점심 시간이 다 끝났음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고이치가 
무릎을 꿇고 팔을 뻗어 리나의 손을 잡았다. 몇 명이 협력하여 끌어올리자, 마유미와 
리나만 남기고 나머지 모두들 교실을 향하여 뛰기 시작했다. 우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게 된 사정을 다나카가 묻는다면 뭐라 대답하면 좋을 것인가. 마유미는 혀를 찼다.
  "난 그냥, 뛰어들 거냐고 물었을 뿐이야. 네가 멋대로 뛰어 든 거니까. 미끄러졌니?"
  리나는 잠자코, 물방울만 똑똑 떨어뜨리고 있다.
  복도를 걸어 교실 앞까지 왔을 때였다.
  "이 봐, 야스다."
  다나카가 불러세웠다.
  "어떻게 된 거야?"
  언짢은 목소리였다.
  "수영장에서...."
  마유미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어떻게 말할까 궁리를 하였지만, 그럴싸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영장에서 어떻게 됐다는 거야? 너희들 무슨 짓을 한 거지?"
  다나카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발을 헛디딘 거야?
  마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다나카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종아 그럼, 우선은 양호실로 가자. 미즈노는 교실로 돌아가."
  다나카는 리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양호실로 향했다.
  '양호실에서 다나카가 리나의 원피스를 벗기고 옷을 갈아 입힐 것인가, 그것은 안 될 
일이다'라고 마유미는 생각했다. 모두들 보러 가자고 꼬드기고 싶었지만, 만약 들키면 
수영장에 뛰어들게 한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이 들통날지도 모른다. 팬티를 벗기고 
있는 다나카의 손길에 몸을 맡긴 리나의 모습을 상상하자, 마유미는 입안이 카랑카랑 
마르는 느낌이었다. 고소하기도 하고, 얼토당토않은 부정이다 싶은 기분도 들고, 
눈앞에서 소중한 것이 도난 당하는데도 뒷짐을 지고 있는 듯한 초조함 때문에 "아, 
짜증나"라고 외치고 싶었다. 다나카는 양호실에서 리나를 발가벗기고 있다!
  교실은 조용했다.
  "선생님은 지금 양호실에서 전학 온 학생에게 옷을 갈아 입히고 있습니다."
  억양이 없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는데, 그 말의 의미를 다들 눈치채지 못했는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마유미는 실망하여 "발가벗기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여야 한 마나 
망설였지만, 입을 다물고 경멸에 찬 눈길로 모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끝냈다. 교내 
어딘가에서 햇볕을 쪼임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리나의 하얀 원피스가 떠올랐다.
  리나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교실로 돌아왔다. 마유미는 짧은 바지 아래로 쭉 뻗은 
리나의 하얀 다리를 보고,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모두의 눈이 그녀의 하얀 다리로 
모아지고 있는 듯한 기분에 불안과 통증이 아랫배 언저리에서 부글거렸다. 주목받고 
있는 것은 그녀다.
  다나카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이 교실을 휘 둘러 보았다.
  "수영장에는 접근하지 않도록, 알았나, 그럼 교과서 68쪽."
  수업이 시작됐다. 왠지 기분이 안 좋다. 반 아이들 모두의 동정어린 눈길이 
리나에게 몰려 있고, 다들 해변으로 올라갔는데, 나 혼자만 바다 한가운데 남아 있다고 
마유미는 생각하였다. 
  '손해를 본 것은 나뿐이야! 이런 기분을 지금가지 수없이 맛보았어. 오빠만 항상 
득을 보고, 아무리 오빠한테 혼이 나도 엄마는 나를 두둔해 주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유미의 눈에서는 분을 못 이긴 눈물이 배어 나왔다. 마유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 약한 
탓에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오빠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얻어맞아도 보복이 
두려워 부모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말 못하는 것이다. 그저 울 수밖에 없다. 절대로 
결점이나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언질을 주고 다짐을 해 왔건만, 
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한 것일까. 자기가 겁쟁이가 되고 만 듯하여 마유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유 지겨워!"
  마유미는 벌떡 일어나 교실을 뛰쳐나갔다.
  "야, 왜 그래, 미즈노."
  아연실색한 다나카가 복도로 따라나왔다.
  "양호실에 가는 거예요, 안 되나요? 아프다구요."
  마유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오후의 마지막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마유미는 이미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쉬는 
시간에 가오리와 도모에 등 친구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찾아와 주었기에, 마음이 확 
풀려 기쁜 나머지, "아무 일 없어, 이것 봐"라며 침대에서 뛰어내렸을 정도다. 
"괜찮아"라고 웃으며 깡총거리다 교실로 뛰어가는 마유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오리와 도모에는 복도에 멍청하게 서서 얼굴을 마주보았다.
  교실로 돌아오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떠올랐던, 경찰 놀이와 라켓 베이스를 
마무리짓고 있는 리나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분 좋은 충족감이 밀려와, 
아까까지 마유미를 괴롭히던 불안의 그림자는 말끔히 걷히고 없었다. 친구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녀들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그러나 수업 시간이 다 끝나가자 불안과 희열이 서로 어긋나며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여름 방학 때부터 하루에 몇 번이나 기분이 들쭉날쭉하였다. 마유미는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꼭 껴안아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 누군가를 상상해 보았다. 
머리에 떠오른 엄마를 금방 지워 버리고 다나카, 가오리, 이치, 지나미, 다쓰야.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떠올리는 사이에 우스꽝스러워져,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마유미는 손바닥으로 입을 눌렀다.
  마유미는 리나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5교시째 쉬는 시간에 팀을 불러모아 놓고, 
준이치 문제만 거론하기로 하였다.
  "만약 말이지, O-157이 아니라고 하면, 다나카한테 증명하라고 하자."
  마유미는 웃었다.
  "어떻게?"
  히나코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변 검사!"
  도모에가 갑자기 얼빠진 것처럼 소리지르자 마유미와 그 일행은 서로 어깨를 치며 
웃어댔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옛날에는 성냥갑에 똥을 담아서 대변 검사를 했었대."
  지나미가 말했다.
  "거짓말, 어떻게 성냥갑에 넣는단 말이야? 바깥으로 삐져 나올 텐데."
  가오리가 웃느라 몸을 뒤로 젖혔다.
  "와, 웃긴다. 웃겨."
  도모에가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책상을 탕탕탕 두드렸다.
  "하지만 말이야, 누가 다나카한테 증명하라고 말하지?"
  웃음을 거둔 히나코가 묻자, 마유미는 순한 기분이 나빠졌다.
  '히나코 계집애 팀에 끼워 주지 말 것을, 이렇게 신나는데 쓸데없는 말을 하다니, 
눈치가 없어.;
  마유미는 정말 꼬집어 주고 싶었다.
  "히나코가 말해. 응."
  마유미가 동의를 구했지만, 가오리는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자기가 당하겠다는 
생각에 바싹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O-157은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래? 만약 O-157이 맞다면, 우리도 
같은 급식을 먹었으니깐 감염되었을 것 아니야."
  히나코가 당황해서 급하게 말했다.
  "급식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잖아, 멍청이."
  이것으로 히나코의 역할은 결정되었다. 매점에 물건을 사러 가는 것은 늘 가오리의 
역할이었지만, '히나코로 바꾸지 뭐' 그렇게 마음먹었다.
  "아 참, 노트가 없네. 히나코, 매점에 다녀와 줄래?"
  마유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가방에서 동전 지갑을 꺼내 백 엔짜리 두 개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히나코는 순간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코로 킁 숨을 쉬고는, 
동전을 집으려 하였다. 동전이 마유미 손가락 사이로 떨어져, 책상 아래로 굴렀다. 
무릎을 구부리고 주우려 하는 히나코에게 가오리가 "멍청하긴"이라고 빈정거리며 
키들키들 웃었다. 업신여김을 당하고 죽어라 쫓아다녀야 하는 심부름꾼 노릇에서 
해방된 것이다. 가오리와 눈길이 마주치자 마유미는, "어때? 히나코를 팀에 끼워 준 
의미를 이제 알겠지"라는 눈짓을 하였다. 교실을 나서려는 히나코의 등에다 대고 
가오리는,
  "잔돈, 잊지 말고 잘 받아 와."
  온 교실에 울려 퍼지도록 목소리를 끼얹었다.
  "준이치가 성냥갑에 똥을 담아 온다면, 정말 웃음거리겠지."
  마유미가 말했다. 그러나 더 이상 웃음이 솟지 않는다. 모두들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거면 됐지."
  히나코가 책상 위에 노트와 동전을 놓았을 때, 마유미는 그녀의 눈에 분노와 굴욕과 
포기가 뒤섞인 적의가 깃들어 있음을 간파하였다. "이거 말고"라고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순간적으로 이 이상 괴롭히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고마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히나코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휴, 팀을 이끌어 가는 것도 정말 힘든 일이야."
  수업이 다 끝난 후, 다나카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손을 탁탁치며 말했다.
  "야스다, 정리는 다 끝났나, 좋아, 앞으로 와, 앞자리가 좋겠지, 모두들 잘 들어, 
가와카미부터 한 자리씩 뒤로 물러난다. 제일 뒷자리 마쓰무라는 아까 야스다가 
앉았던 자리고 옮긴다, 알았나, 시작!"
  어째서 일부러 일거리를 만드는 걸까, 게다가 다나카는 유난스레 들떠 있다. 애써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기분이 거슬린 이유는 앞자리로 옮긴 탓에 항상 눈에 
들어오는 리나와 다나카를 동시에 노려보았다. 다나카가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줄곧 
리나를 생각하고 있었다면, 편을 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다나카가 내 눈을 
피하고 있는 것 같다. 용납할 수 없다. 마유미는 무언가가 강력한 힘으로 얼굴을 팍팍 
잡아당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안면신경통으로, 얼굴이 뒤틀릴지도 
모른다.
  자리 이동이 끝나자 다나카는 간단한 전달 사항을 알리고, "오늘 방과 우 자유 
놀이는 4시 30분까지다"라고 마무리를 짓고 반장의 기립 호령을 기다렸다.
  골똘히 생각에 잡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라지 않는 마유미를 친구들이 
에워쌌다.
  "무슨 일이야? 또 어디 아프니?"
  "저질."
  마유미는 한곳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가, 불쑥 턱을 치켜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전학 온 애, 체육관 뒤로 불러 와. 아직 집에 가지 않았겠지, 지금 뛰어서 
쫓아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잠깐 와 봐, 할 얘기가 있어."
  히나코는 실내화를 벗고 구두로 갈아 신고 있는 리나에게 말했다. 리나는, "집에 
가래"라고 입속으로 우물거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현관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오리가 손짓을 하였다. 리나는 둘 사이에 껴서 체육관 쪽으로 
걸어갔다. 곁눈으로 보니 태양은 운동장을 자글자글 태우고 있고, 아이들은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서 팔딱거리듯 놀고 있다. 리나에게는 설탕에 꼬여든 개미처럼 보였다.
  오늘 아침의 운동장처럼 그림자가 없는 풍경을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 내려 
하는데, 히나코가 등을 툭 밀어서 휘청거렸다. 경련하는 감각이 사고력을 빼앗아, 전혀 
공포심이 일지 않는다. 리나는 오늘 아침 교문을 들어설 때부터 이렇게 되리란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체육관 뒷뜰로 통하는 복도를 돌 때, 리나가 다리를 휘청하자, 
히나코가 다시 등을 거세게 밀었다. 앞으로 푹 고꾸라진 리나가 고개를 들자, 마유미와 
도모에, 지나미 세 명이 체육관 벽에 기대 있었다.
  "우리들 팀에 끼여들고 싶걸랑, 똑똑하게 말해, 알았어? 왜 전학 온 거지, 전학 온 
이유를 가르쳐 줄래?"
  마유미가 허리를 굽히고 아래에서 쏘아보듯 말했다. 리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약간 갸웃했다.
  "말해, 어째서야."
  마유미는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리나는 이유를 설명할 마음이 없었다. 문득 채소밭쪽을 보니 2학년 밭에는 나팔꽃, 
6학년 밭에는 가지 한 그루에 대여섯 개의 오이처럼 빼빼 마른 열매가 달려 있다.
  마유미는 얼굴을 상기시키며 물었다.
  "왜 입 다물고 있는 거야. 이유 정도는 있을 것 아니야. 아버지가 전근을 했다든다."
  그렇게 말을 했지만, 아버지의 전근 때문이라면 지방에서 왔어야지 싶은 생각에 
주춤했다.
  "아니면 이 근처에 새로 집을 지었다든다."
  2학년 때와 4학년 때 전학 온 학생이 그랬던 것을 기억해 냈다.
  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파트로 이사를 했는데...."
  그러니까 왜 이사를 했느냐고 묻고 있잖아,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니!"
  리나의 등 뒤에서 도모에가 소리를 질렀다.
  "싫어져서...."
  "그러니까, 그, 러, 니, 까, 왜 싫어졌느냔 말이야. 왜 전학 온 거냐구? 전번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마유미에게서 풍기는 땀내 섞은 파우더 냄새가 리나의 코를 간지럽혔다. 이유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 말해 봐야 돌려보내 주지도 않을 것이고. 리나는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글쎄...."
  "저 말이지, 너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문제 일으킨 거 아니니? 돈을 훔쳤다든가, 
남자애랑 키스하는데 선생님한테 들켰다든가."
  도모에의 목소리를 경련하듯 고조되었다.
  "키스? 아, 징그러워, 혀를 감았지. 이 계집애 마녀 같은 여자 아니야? 여러분, 
야스다 리나는 남자를 쓰러뜨리고 키스를 했답니다."
  히나코가 양손을 메가폰 삼아 소리를 내질렀다.
  "변태!"라고 외치며 지나미가 리나의 치마를 휙 걷어 올렸다.
  마유미는 울음을 터뜨리려고도 하지 않고 똑바로 앞을 향하고 있는 리나에 대한, 
긁혀서 생긴 빨간 선 같은 증오심이, 점차 쾌감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이면 엄습해 오는 모래에 파묻힌 듯한 외로움과, 이대로 사늘하게 식어 
죽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깊은 공포심과 정반대로 밀려오는 쾌감에 허벅지와 둔부가 
들썩여졌다. 리나의 몸에서 열을 빼앗고 있는 듯한 기분에 끓어오르는 희열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반에서는, 키스 금지야, 절대로 안 돼, 그러니까 너 전학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건 우리들만이 아니고 우리 반 전체의 의견이니까, 알겠어? 남자애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약속해. 이 학교로 전학 오지 않는다고."
  마유미는 넘실거리는 힘을 느끼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집에 돌아가면 너희 엄마 아빠한테 분명하게 말해, 알았어?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에는 안 간다고. 그리고, 우리들이 그랬다고 절대로 말하면 안 돼. 안 그래? 너 
학교에 오고 싶지 않지. 5학년에도 그런 애가 있거든. 등교 거부아 말이야. 아무튼 
다른 학교로 전학가. 왜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는 거야. 잠자코 있지 말고 
대답해."
  리나는 코 앞에서 윽박지르는 마유미의 눈을 보고 무슨 말을 하든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눈을 몇 번이나 보았다. 어떤 학교로 전학을 가든, 분명 모두 
똑같은 얼굴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자기만 다른 얼굴인지 리나는 알 수 없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생각은 하지만, 생각과 실제로 
학교에 가지 않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정하기만 하면 의외로 간단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리나는 생각해 보았다. '절대로 밥을 먹지 않는다, 그렇다 밥을 먹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먹고 싶지 않으니까 먹지 않는다.'
  리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한다. 학교에는 가지 말아야 한다. 
머릿속으로 주문처럼 되풀이 하자 온몸의 힘이 빠지고, 모든 고통이 잔잔히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리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거리고 걷기 시작했다. 
  어처구니 없는 결말에 다섯 명 모두 어째야 좋을지 몰라, 멀어져 가는 리나의 등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대로 하염없이 어디까지 걷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없어질 
것만 같은 발걸음이었다.
  "일러바치면 어떻게 하지?"
  지나미의 멍한 목소리에 마유미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나머지 네 명도 그 뒤를 
쫓았다.
  머릿속으로 "배신"이란 단어가 맴돌아, 마유미는 리나의 어깨를 잡고 마구 
뒤흔들었다. 배신자는 용서 못해, 나를 얼마나 괴롭혀야 속이 시원할 것인가.
  "선생님한테 이르러 가는 거지! 뭐라고 말해 봐! 왜 배신하는 거야!"
  어깨를 뒤흔들면서 마유미는 리나를 체육관 벽 쪽으로 밀었다. 리나는 표정을 
지우고 있다.
  "무슨 일이어유?"
  고이치가 다쓰야와 축구공을 주고받으며 다가왔다.
  "이 계집애, 선생님한테 일러바친대."
  가오리가 말했다.
  "무슨 일 때문에유?"
  가오리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마유미가 리나의 어깨를 벽에 밀어붙여, 
머리가 앞뒤로 요동쳤다, 다쓰야가 "싸움하면 안 돼"라면서 축구공을 힘껏 걷어 차차 
공이 힘차게 튕겨 나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리나의 머리를 벽에다 세게 부딪쳤다. 
리나는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의 함성이 갑자기 멀어지고, 고이치가 리나 옆으로 
달려왔다. 리나의 양다리는 힘없이 쭉 뻗어 있고, 머리에서 피가 머리칼을 타고 
목덜미로 흘러 떨어졌다.
  "큰일났구만유!"
  고이치가 비명을 질렀다.
  "어머, 어떻게 해."
  도모에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병원! 선생님! 선생님을 부르는 수밖에 없어. 난, 관계없으니까!"
  다쓰야가 교무실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마유미가 어깨로 숨을 헐떡이며, 하얀 
원피스 깃으로 빨갛게 스며 퍼지는 피를 바라보고 있다. '역시 오늘은 재수가 없어, 
소해만 봤잖아'라고 마유미는 생각했다. 도마뱀....

  "폭력 사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이 점은 분명히 해둡시다, 다나카 선생."
  교장은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고 원만하게 대처하자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어려 있다.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없었다고, 그렇게 분명하게 보고를 해 주니 다행이군요. 그렇지만 다나카 선생, 
이번 야스다 리나 양의 상처가 학내 폭력이 아니라고 단언 할 수 있습니까? 폭력이 
있었나요?"
  다나카에게는 교장의 목소리가 유난히 느슨하게 들릴 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이상하게 커다할게 보여 눈을 쉴 새 없이 깜박거렸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폭력이 아닙니다."
  그 이외의 대답은 있을 수 없다.
  "생각합니다, 로는 좀 부족하군요. 하지만 다나카 선생이 그렇게 단언을 하시니, 
폭력이 아니겠죠, 아무튼, 아이들을 진정시켜 집으로 돌아가세 한 다음, 야스다 양은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야스다 양의 어머니를 어떻게는 설득해서 
시끄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난 다나카 선생한테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겠습니다. 좌우지간, 폭력은 아닙니다. 다나카 선생이 
그렇게 분명하게 말해 주어서 안심이군요."
  다나카 교장의 지시로 1반의 담임인 스기야마에게 리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도록 
부탁한 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을 교실로 모이게 하였다. 골치 
아픈 사건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억누르지 못하여, 다나카는 무릎을 
바들바들 떨었다.
  야스다는 역시 문제아였던 것이다. 교무 주임은 이전 학교에서 폭력 사건이 있어 
전학을 왔다는 설명을 하며, 1반의 스기야마 선생보다는 베테랑인 다나카 선생이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니 잘 부탁드린다고 추켜세웠다. 그때, '폭력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이들을 지도하는 것은 별로 나쁘지 않겠지'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저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거절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나카가 흔쾌히 수락한 우 교무 주임이 
농담삼아, "야스다 양의 어머니가 말입니다. 이전 학교에서는 교장의 권유를 순순히 
받아들려 전학에 동의했지만, 만약 새로운 학교에서도 폭력 사건이 생기면 그때는 
그냥 참고만 있지만 않겠다고 하면서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아무쪼록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그것 참, 폭력 사건 때문에 자살한 아이가 생겨 텔레비전에 
끌려나가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으니까, 나 역시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며 
머리를 숙인 일이었다. 그 후 인사를 하러 온 리나의 어머니는 "잘 부탁합니다"란 
한마디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 교장이 알려 준, 야스다의 어머니가 
귀화한 재일 한국인이란 사실도 다나카의 불안감을 부채질하였다. 폭력에다 차별가지 
더해지면 설사 상해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매스컴이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다나카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오늘 야스다가 입은 상처는 폭력이 아니다. 알았나. 선생님이 병원으로 가기 전에 
야스다와 얘기를 나누었다. 야스다는 체육관 뒤에서 발이 미끄러져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우리 2반에서 폭력이 있었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선생님은 폭력을 아주 싫어한다. 늘 강조하지만 모두들 사이좋게 지내도록."
  느닷없이 목이 메이고, 눈물이 글썽 고인 자신에게 어이없어 하며 감미로운 감상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교사로서의 환희를 오랜만에 만끽한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선생님이 울고 있다, 가오리는 놀라 주위에 있는 아이들과 얼굴을 마주 보았다. 몇 
명이 덩달아 울기 시작하여, 가오리도 서둘러 눈물을 짜내려 했다. 하지만, 여느 때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대수롭지 않은 장면에서도 금방 울고 마는데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려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은 선생이 
수치스러워서이다. 비참한 어른을 보는 일이 이렇게 유쾌하다니, 그것도 선생이. 
가오리는 다나카의 얼굴을 보고 있는 사이에 웃고 싶어지고 말았다.
  "야스다는 사고였다. 하지만 만약, 2반에서 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둘 것이다. 선생님은 선생이기를 포기할 것이다. 이 말만은 분명하게 해 두겠다." 
  다나카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상반신만 틀어 칠판을 향하고는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그리고는 다시 얼굴을 돌리고 미소지었다.
  "선생님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내일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텔레비전 리포터가 몰려오면, 무시하든지 선생님한테 물어 보라고 말해 주었으면 한다. 
알겠나, 그건 사고였다. 사고라고 생각하는 학생, 손을 들어 봐."
  '울고 짜고 야단들이군.'
  고이치는 확실하지 않은 분노를 억누르며 눈을 치켜 뜨고 상황을 살폈다. 뭐야 모두 
손을 들고 있잖아. 체육관 뒤에 있던 아이들의 얼굴을 조금씩 어긋난 각도로 보았다. 
손이 점점 올라가고, '쳇, 뭐야 다 들었잖아'라고 생각했을 때 고이치는 손을 높이 
쳐들었다.
  "좋아, 손 내려! 선생님은, 사고는 안 됐지만 한편으로 기쁘기도 하다. 과연 우리 
2반이다, 선생님은 감탄했어, 돌아가도 좋다. 하지만 한 가지 약속을 하자. 교실을 
나서면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어버리도록,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않도록, 
알았나, 기립!"
  가오리는 복도를 걸으면서 리포터가 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했다.
  "만약 그 전학생이 죽으면, 틀림없이 올 것이다. 유서도 없이 죽다니 불쌍하다. 
리포터가 물으면 거짓말 하지 말고 정직하게 대답해야지, 마유미가 나쁘다. 얼굴은 
나오지 않게 가려 달라고 하고, 목소리도 바꿔 달라고 하면 누군지 모른다. 엄마한테 
말하면, 방송국에 연락하는 방법을 분명 알고 있을 거야."
  가오리는 자기 얼굴 한가득 웃음이 번지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뒷좌석에 누워 병원을 향하고 있는 리나의 의식은 아코디언처럼 좍 펴졌다 
오므라들었다 하였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림자가 없는 운동장 풍경은, 다섯 살 때 어머니와 단둘이서 여행하던 중 센다이 
역에서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는 말만 남기고 어딘가 사라진 우 한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찾다가 미아가 되었을 때의 풍경이랑 똑 같았다. 
어째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나를 혼자 내버려두었는지, 왜 그 여행에 아버지는 
동행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모른다. 리나는 정말 알고 싶은 일은 누구에게 물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아무도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모른다. 리나의 의식은 오므라들었다.

  마유미는 리나의 원피스를 적시고 잇는 빨간 얼룩이 장미꽃으로 보이지 않아 
실망하고 있다. 포도... 나뭇잎... 박쥐... 붕어... 저녁놀이 비친 구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보이지만, 이거다,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머니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도록"이라고 말하며 다나카가 도서관으로 데려다 놓은 지 벌서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기분이 아주 나쁘다. 누가 뭐라 묻든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입을 열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엄마가 
알아줄지 걱정이었다. '그 전학생도 입을 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을까? 
아무래도 좋다. 영원히 무시하면 그만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잠이 밀려온다.
  도서실 창문으로 보이는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능목, 그네, 정글짐이 긴 
그림자를 한없이 늘어뜨리고 있다.
  
    옮긴이의 말
    페티시즘의 가족

  우선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가족 시네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직업을 살펴보자. 
모토미(나)는 꽃 상품 기획자이고 요코(여동생)는 배우, 남동생은 대학생이기는 하지만 
테니스를 주로 한다. 모토미는 꽃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두 동생은 자신의 육체를 
직접적으로 남의 눈앞에 드러내는 일을 한다. 이 형제의 부모는 이미 20년 전에 별거 
상태로 들어 가서 아버지는 파친코 지배인으로 어머니는 술집에서 일하며 정부와 
동거하고 있다. 이런 가족이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를 촬영한다고, 2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여 카메라 앞에 놓여진다.
  정해진 각본도 없이 한 가족의 상호관계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의도의 영화가 
될 터이지만 그러나 카메라를 의식하여 개개인의 행동에 약간의 작위성이 생겨난다. 
아마 이 약간의 작위성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가족의 실체일 것이다. 그 옛날의 
가족은 집이라는 공간 속에 함께 살아가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개인과 우주의 
교감을 가능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였다. 그러나 "가족 시네마"의 가족은 
붕괴된 지 20년 만에 고작 카메라의 피사체가 되기 위해 한 곳에 모여 있을 뿐이다. 
그것은 카메라 또는 어떤 시선 앞에 등장하는 하나의 피사체에 지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일상 생활이나 사회 생활도 보여지는 존재로서 표현되고 있다. 
모토미는 꽃다발 상품에 관한 자신의 기획안이 회의에서 통과되자 후카미라는 노년의 
조각가를 비즈니스 차원에서 만나지만 그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엉덩이를 카메라 앞에 
들이댄다. 이때 모토미는 엉덩이만 드러내기가 뭣해서 전라가 되는데, 이것은 자신을 
물상화시키고 싶지 않다는 욕구의 표현이다. 자신의 전 존재를 드러내고 그 상태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늙은 남자와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보는 자"인 
후카미는 엉덩이만을 필요로 했다. 다시 말해 카메라의 렌즈와 같은 시선으로 한 
여자의 엉덩이를 기억하고, 거기서 미적인 가치를 발견하려 한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양쪽이 카메라의 렌즈와 대상(피사체)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상호 
반성적이므로 렌즈와 대상의 역할이 항상 바뀔 수 있고, 을 한쪽이 양자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
  이런 구도는 "그림자 없는 풍경"에서 묘사되는 교내 폭력 사건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가해자인 마유미와 피해자인 리나(일본으로 귀화한 재일한국인)는 동시에 붕괴된 
가족 사회의 피해자이다. 가족이라는 기본적인 사회단위의 뒤틀림이 학교라는 사회의 
뒤틀림, 폭력성, 물상화로 이해되는 것이다.
  "한여름"은 이런 가족의 모습과 관련된 남녀의 일탈적인 사랑을 묘사한 작품이다. 
남자는 주말만 되면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평일에는 가족을 떠나 여자와 동거 생활을 
한다. 이 작품에서 하나의 에피소드 등장하는 전철에서 만난 한 초로의 남자의 기이한 
고백과 여자의 반응도 시사적이다. 여자와 자면서도 섹스를 하지 않고 가볍게 
만지기만 하고 그렇게 이틀이 지마나 미련 없이 헤어진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미행하면서 그 여자를 보는 것이 더 즐겁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여자가 그 남자의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것이고, 또 주말이면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남자와 함께 3년이나 함께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때, 남자에게 있어 어느 
쪽이 진짜 가족이고 어느 쪽이 가짜 가족일까? 아니면 둔다 진짜이거나 가짜인가? 
여자에게 그 남자와 한 방에서 생활하는 것은 가족적인 것일까?
  "가족 시네마"의 어머니(여자)는 아버지(남자)를 돈과 섹스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 
아버지는 가족의 생활에 거의 보탬이 되지 않은 무질서한 생활을 하면서도 딸에게 
회사 취직 선물로 몽불랑과 파카 같은 고급 브랜드 제품을 준다. 이 또한 가족의 
사랑을 브랜드라는 제품으로 물상화하는 행위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화해롭고 
정통적인 의미의 가족 관계와는 머 곳에 있고, 딸과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내에서 가족애라는 드라마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땀과 숨의 냄새와 때론 
조화롭고 때론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인간적인 드라마를 고급 브랜드로 대체하고 있다.
  "그림자 없는 풍경"에서 폭력의 대상이 되는 전학 온 학생 리나 소극적인 반응과 
어눌함. 그것을 충동적으로 폭력의 제물로 삼아 버리는 마유미와 그 친구들의 시선. 
그것은 완전한 대극적인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인간적인 드라마를 상실하고 화해로운 
차원의 가치를 잃어버린 이 시대의 가족의 모습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시점에서 보면 
가해자는 마유미고 리나는 피해자라는 단순한 등식의 의미를 잃는다. 그녀들은 동전의 
양면적인 존재인 것이다.
  유미리는 카메라 렌즈와 피사체의 관계,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시선을 
교차시키면서 이 시대의 가족을 냉철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족 관계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듯하다. 그것은 파친코 지배인 
30년이란 경력이 디지털한 시대를 맞아 무의미해져 버린,  아버지의 오갈 곳 없는 
현실과 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함께 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아버지의 
환상이 부정되는 장면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집이란 공간이 과연 그 옛날처럼 가족이란 소우주를 회복시켜 줄 수 있을까? 
가즈키처럼 정상적인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거부하는 현대 젊은이들이 그런 공간으로 
회귀하기를 원할까? 그녀의 작중 인물들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한여름"의 여자는 터져 나오는 허탈한 웃음에 오도가도 못하고 삼거리 앞에 서서, 
뜨거운 땡볕 아래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 과연 그 삼거리는 어디로 뻗어있고, 또 
하나하나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며, 그 끝은 어디일까?
  유미리는 그 물음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