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퇴마록 1-1. 측백산장
- 인물소개
- 이현암 : 30세, 기공법과 기계체조로 단련된 몸과 냉정한
이성의 소유자.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는 강철
같은 신경의 소유자.
- 박신부 : 58세, 엑소시즘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이단
이라고까지 배척을 받는 흰머리의 신부.
- 장준후 : 13세, 부친의 영향으로 모산술, 증산도, 무속 등
각종 방면의 주술에 대해 (이론적으로만) 정통한
소년.
** 이상의 3인은 한 팀을 이루어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면
어디까지라도 따라가서 해결하고야 만다...
--- 퇴마록 1부. 측백산장.
" 9시 뉴스를 알려드리겠읍니다. 그동안 소왕산에서 폭풍으로
인해 연락이 두절되었던 신라 대학교 아마추어 등반대원 7명이
이미 오래전에 폐쇄되어있던 까치봉 정상에 있는 측백산장에서
전원 변사체로 발견 되었읍니다. 사인은 전신을 둔기로 심하게
구타 당한 듯 하며, 반항의 흔적이나 포박당했던 흔적은 없었읍
니다. 경찰은 일단 수법의 잔인함으로 보아 원한에 의한 살인
으로 단정내렸으나 이들이 발견된 측백산장이 위치한
까치봉이 당초 이들이 등반길에 올랐던 옥녀봉과는 근 12km나
떨어져 있으며, 또 심한 폭풍우로 인해 그런 먼 거리의 등정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최초 이들을 목격했던 모모씨의 진술의
신빙성과 혐의를... "
"흥. 밥통들.."
현암은 리모콘을 거칠게 눌러 TV를 꺼버리고 회전의자를 빙글
돌려 앉았다.
"예? 누가요?"
준후가 오락기에서 고개를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누군 누구야, 경찰들, 그리고 무지한 사람들이지.
도대체 자기가 믿을 수 있게 갖은 양념을 해서 보기좋게
올려놓는 것이 아니면 믿지 않는단 말야. 요번 저 등반대가
떼죽음을 당한 것도 그래. 준후야, 너는 어떤 미친 녀석이
7명이나 되는 남자, 아니 5명과 여자 2명이랬지? 그 사람들을
앉은 자리에서 두들겨 패서 죽이는게 가능하다고 보니? "
"아뇨. 그러면 몇명은 도망가려 할테니까 힘들죠."
"하물며 건너편 골짜기로 올라간 사람들을 반대쪽 골짜기까지
끌고 오는 것은 가능하겠어? 사람의 힘으로..."
"뭐 슈퍼맨 정도면 될수도.."
"하하하. 아냐아냐 이건 분명 사람의 짓이라고는 볼 수 없어.
분명 원한령의 짓이야. 그것도 아주 강한...."
"박신부님께 전화 해 볼까요?"
"아니...아마 벌써 가 계실지도...부검 담당하는 분을 이미
찾아가셨을테니까...."
장마비가 이젠 서울로 까지 몰려온 듯, 먹구름 너머로 번개가
날름거리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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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내 아들은 안돼!"
"이놈들아, 죽은 사람을 두 번 죽이겠다는 거냐?"
부검을 반대하는 유가족들을 경찰들이 제지하고 있는 사이를
간신히 헤집고 나온 박신부는 옷에 묻은 물방울을 툭툭 쳐
내며 부검실로 향했다. 부검을 맡은 장박사와는 고교 동창으로
막역한 사이였고, 또 이번에 고인들을 위한 의식을 박신부
자신이 주관하기로 맡고 나섰던 터였다. 이런 좀 이상한 사건
의 희생자의 처리엔 의례이 박신부가 나서는 것이 이젠 거의
불문율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일곱..젊은이 일곱....일곱명 씩이나..'
박신부의 머리에는 또다시 그 소녀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음...안돼.안돼...부질없는 옛 생각따위는...'
소녀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음...안돼...더 이상은...'
소녀의 얼굴이 아련히 멀어져 갔다.
'흑...미라야....미안하다....'
박신부의 눈가는축축히 젖어 들어갔고 이제 소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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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네."
언제나처럼 장박사는 예의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박신부를
대했다. 시체를 덮고있던 흰 천을 들어올리면서도 장박사의
얼굴은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지독하군."
젊은 남자의 얼굴- 얼마전 까지 젊은 남자의 얼굴이었을 그
얼굴은 온통 멍과 긁힌 상처로 가득했다.
"나 개인적으론 곰의 소행이 아닐까 생각하네만.."
장박사가 약간 눈을 치켜뜨며 말을 꺼냈다.
"아냐. 곰이라면 때리는것으로 끝내지 않지. 물어 뜯어서
토막을 냈을거야. 이건...마치 낙석 더미에 깔린 것 같지 않은
가?"
"낙석? 집안에서 말인가?"
"물론 그럴리야 없지만, 예전에 내가 광산 마을에 있을 때,
이와 비슷한 상처를 보았지. 큰 자갈더미가 무너지는데 깔린
사람이었는데, 성한 곳이 없었어...."
박신부는 잠시 시신의 팔주위를 눌러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직접적 사인은 뭘로 추정되나?"
"음..그건 여기, 명치부의 타박상과 오른쪽 눈언저리의 두개
골 함몰...그리고.."
두사람은 한명 한명 시신을 조사해 나갔다. 다섯번째.
"음? 이건 좀 독특하군."
박신부가 가리킨 시신은 앳되 보이는 여자였는데, 몸에 특별한
외상은 많지 않았고, 양쪽 어깨뼈가 몹시 뒤틀려져 있었다.
"글쎄...어깨뼈가 완전히 부스러졌네."
"어디에 매달린 것 같은데?"
"그 정도로는 이렇게 될 수 없지. 누군가, 아니 무엇인가가
강하게 잡아 당겼으면 모를까. 그런 시신은 또 있네."
장박사가 가리킨 다음번 여자의 시신도 거의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박신부는 대강만 보고 다음의 시신으로 눈을
돌렸다.
"이 경우는?"
다음의 시신은 건강해 보이는 남자의 시신이었는데, 머리 뒷
부분을 거대한 망치 같은 걸로 맞은 듯, 두개골이 박살나 있었
고 얼굴은 알아볼만 했다. 그리고 그 외의 외상은 없는듯 했다.
아니...
"음? 손이 왜 이렇지?"
박신부는 그 시신의 손으로 눈을 돌렸다. 손바닥이 그야말로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헤어져 있었다.
"심한 마찰에 의한 걸세. 혹 로프를 맨손으로 잡고 미끄러져
내렸는지 모르지."
"로프를?"
"음. 두꺼운 장갑을 끼지 않고 한 30미터만 로프를 잡고 미끄러
져도 거의 뼈가 보일 지경이 된다네."
"하지만 이들의 휴대품중 로프는 없었던 걸로 아는데?"
"음.그것까지야 내가 어떻게 아나? 아뭏든 그렇게 보이니 말
하는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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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은 비속을 뚫고 과속딱지를 뗄락말락한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준후의 만류도 뿌리치고 측백산장으로 가는 길
이었다.
- 형, 혼자 가지 마세요.. 아무래도 거긴 좀 위험할 것 같아요.
- 준후야, 염려마. 이런일이 어디 한 두번이었니?
절대 나 혼자서 영을 쫓진 않을테니 염려마. 그냥 조사만
하러 가는 거야. 낮에 도착할 건데 뭐...
- 형, 원한령은 낮밤 구별을 안해요. 신부님 오시면 저와 셋이
같이 가요. 혼자선 위험할 수 있다는거 알쟎아요.
- 그때까지 기다릴순 없어. 흔적이 다 지워진다구. 빨리가서
영사라도 해 보면 뭔가 확실한 원인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 좀 더 조사를 해보고 가도 늦지 않아요. 벌써 거기선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구요.
- 알았어.알았다구. 그럼 관 두지. 담배나 사러 갔다 올께.
- 형!!!
'준후야, 미안하다. 허나 난 마음이 급해...'
현암은 속으로 억지로 웃으면서도 얼굴은 더욱 굳어져 감을
느꼈다.
'그 때에도 시간만 좀 더 있었으면...'
'조금만 빨랐어도...'
'현아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현암의 마음속은 3년전의 그 일을 회상하여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 오빠...
- 오빠아...
- 오빠아아아.. 흐응...무서워 오빠아...
끼이이이이익...
현암은 간신히 차를 멈추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왜이러지? 내가...'
길 앞에는 장마비 때문일까? 머리통만한 돌덩어리가 디굴고
있었다. 만약 그걸 밟았다면 미끄러지거나 차가 퉁겨서 절벽
아래로 굴렀을지도 몰랐다.
'음..왜 현아 생각이 자꾸...벌써 다 지난 일인데...'
생각해 보면 벌써 이런 일이 몇번째인지 몰랐다. 잠시 정신
이 아득해 지다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맞은편에서 오는 트럭과
정면충돌 할 뻔 하기도 하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죽은 동생의
모습에 소스라치다 보면 큰 나무 앞에 서 있기도 했다.
'내가 오늘은 왜 이러지? 수없이 이상한 일을 겪었어도 이렇게
놀라거나 한 적은 없었는데...'
'현아의 모습 때문일까..?'
현암이 심령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전 일이었으나 실제로
퇴마행을 시작한 것은 그의 동생 현아의 죽음때문이었다.
3년전...그 저수지...내가 조금만 빨리 알아차렸어도...
'왜 현아가 나타나는 걸까? 왜 나를..?'
현암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현아의 영은 자신이 수호령으로
삼고 있는 터였다. 그런 현아의 영이 그를 사고로 이끌리
없었다. 오히려 그건 무언가의 방해속에 그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는 현몽 비슷한 것이었다.
'음 그래.. 그렇다면.. 어떤 녀석이 나를 자꾸 개죽음하게
하는 걸까..? 설마 그 산장에 있는 녀석이? 그럴리가..
아직 반도 안 왔는데 이렇게 먼 곳까지..?'
현암은 무언가 음산한 기분이 감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음. 누군가의 영이 근처에 있다.'
현암은 심호흡을 몇번 하고 우선 단전 부근에 기를 모았다.
일반적으로 영은 불멸의 존재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물론 인간에 비해 수명도 엄청나게 길고
순수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어 물리력으론 피해를 줄 수도 없
지만, 순수한 사념을 손,발이나 칼 같은 물체에 실어 보내면
분명 영에게도 타격을 입히거나 심지어 소멸시킬수도 있는
것이다. 옛 고승이나 은둔자들은 스스로의 생각만으로도 사념
을 구체화시켜 잡령을 제압했다지만, 아직 현암의 단계는 그런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고 간신히 그의 손가락과 그의 장도인
'월향'을 통해서 오오라(* 주 1 )를 어느정도 응축시킬 수
있었다. '월향'은 우연히 그가 얻게된 이조때의 작은 은장도
인데, 동명의 어느 여인이 소지했던 칼인듯 했고, 아마 그 여인
은 깊은 원을 품고 그 칼로 자결한 듯 그 여인의 한이 서린
귀물이었다. 사실 좀 위험한 물건이기는 했지만, 현암은 비상
시를 대비하여 그 장도를 가지고 다니고는 했다.
갑자기 와이퍼가 멈추더니 차 안의 등도 나가버렸다.
갑자기 창 앞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이상하게 뭉치더니 천천히
어떤 형상으로 변해 갔다.
현암은 조용히 숨을 내쉬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오른손
식지끝에 오오라를 모아갔다.
앞 유리창의 물방울들이 역류하여 빙글빙글섞여 도는 듯
싶더니 갑자기 잘 알아볼수는 없지만 분명 사람의 얼굴의 형상
으로 바뀌어 갔다.
'데드 마스크 (*주2)..특이한 형태로군...'
현암은 이를 악물고 의식을 집중하려 했으나, 그러기도 전에
그의 마음속에 유리창의 얼굴이 말하는 소리가 울려왔다...
' 어서 오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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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후는 일곱번째의 촛불을 켜고 막 주를 외우려하는 참이었다.
평소, 박신부와 현암등은 준후가 주문으로 영을 불러내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특히 현암은 그런 짓을 자꾸 하면
명이 깎이거나 수호령이 떨어지게 된다고 화까지 냈으나, 이번
경우는 아무래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현암이 무엇과 마주치
게 될는지 통 알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영사 (*주3)도 해 보았
지만 무언가 먹장같이 막을 쳐 놓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점도 쳐 보았지만 뱅뱅도는 궤밖에 나오질 않았다. 이런 일은
흔하지 않았다. 근 몇년을 통틀어 2-3번, 아주 위험했던 경우
나 대단히 강한 영과 맞닥뜨리게 되었을때만 점궤가 뱅뱅 돌았
던 것이다. 그래 이번엔 수호령을 불러 상대의 정체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주를외우기 시작하자 촛불 가운데 그린 도형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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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는 계속 기도문을 외우며, 일곱번째 남자의 이마에 두
손가락을 짚고 영사를 시도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 숨을 거둔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의당 생전의 기억이나 임종시의 정경이 약간은 투사될 듯 하
건만 앞의 여섯명의 시신에는 아무런 영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
았다. 마치 죽은지 몇달이상 지난 것처럼...박신부는 아마 그
이유가 날씨 탓으로 시신이 빨리 부패하기 시작했기 때문일거
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느껴지고 있었다. 이미 희미해질대로 희미해져서,
간신히 흐느낌 같은 흔적만이 남아있었지만...
'고통, 지독한 고통이다. 음..슬프기도 하고, 가슴이 메어질
듯한 슬픔과 분노, 그리고 또 고통, 반항...뭐에 대한 반항이
지? 뭐에 대한? ...슬픔...고통...애착심..,그래. 아끼는 것,
가장 소중한..으음???'
박신부는 놀라움에 시신의 이마에서 손가락을 떼어냈다.
'환령(*주4)을 당했구나! 이렇게 지독한...?'
장박사는 의아한 얼굴로 박신부를 돌아 보았으나 박신부는
화급하게 전화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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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후는 막 가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일곱개의 초중 다섯개는
질펀히 녹아 흩어져서 간신히 깜박 거리고 있었고 하나는 아예
불이 꺼진지 오래된듯, 뻣뻣이 굳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만이
거의 천장에까지 닿을 듯 엄청난 불꽃을 뿜어대고 있었다.
바닥의 도형은 마구 일그러져서 금방이라도 지워질듯 했다.
전화벧 소리가 울렸다. 준후의 입에서 긴 한숨과 주문의 끝을
나타내는 '-훔' 소리가 울려 나왔고, 촛불은 사그라들어 보통
크기로 변했다. 바닥에 그려진 도형을 얼풋 손바닥으로 문질러
지우며 준후는 전화를 받았다.
" 준후니? 나다. 현암이 지금 거기 있니?"
"아, 신부님! 큰일 났어요. 현암 형은 아마 혼자 소왕산으로
간 것 같아요."
" 이런,이런 걱정 했었는데... 혼자서 무슨 베짱으로...."
"이번 산장에서 나타난 놈, 예삿것들이 아녜요."
" 음 맞다. 환령능력이 무척 뛰어난 원한령이고...음?
근데 너 뭐라고 했니? 예삿것 '들'이 아니라고?"
"......."
" '들'이라면, 여럿이란 소리냐?"
"예... 적어도 아홉 이상이...."
" 뭐? 이거 현암군이 큰일이로구나. 어서 우리도 그리로 가야
겠다. 그런데 너, 어떻게 알았지? 또 잡귀들을 불렀니?"
"....예.....형이 하도 걱정이 되어서...영사도 안되고..."
"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 뿐이야! 그런짓 자꾸 하면 아무리
너라도 위험하다고 내가 몇번이나 그랬니?"
" 미안해요...인젠..안그럴께요..."
" 아뭏든 내 곧 그리로 가마. 네가 꼭 필요해. 투시력이 있
는건 너뿐이니까..준비 단단히 하고 와라!"
박신부의 전화가 끊겼다. 준후는 혀를 날름하며 이제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촛불쪽을 보며 소리쳤다.
"신부님은 주님주님 하지만 그분은 너무 크고 무서워...
난 네가 더 고마워. 고마웠어요..."
촛불이 웃는듯이 너울거리며 나부끼더니 조용히 꺼져갔다..
*주 1) 오오라 : 일종의 생체 에너지로서 영혼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그림 뒤에 나오는
원광으로 묘사 되는 것으로 보통 사람에게도
어느정도 발산된다고 한다. 주로 푸른색계열
의 푸른 빛을 띈다고 함.
*주 2) 데드 마스크 : 일종의 지박령 형태의 현상으로 죽은자의
얼굴, 모습등이 창문, 유리, 사진등에 붙박혀
시각화 되는 경우를 말한다. 일반 그림과는
달리 표정을 변화시키거나 움직일 수도 있는
입체적 형상이며 실제로도 자주 일어나는 현상
*주 3) 영사 : 죽은자나 시전자 자신의 영혼을 통해 어떤 현상
이나 사실(전생같은)등을 알아내는 행동으로
많은 훈련과 초감각적 자질로 습득되는 일종의
초능력이다.
*주 4) 환령 : 영의 뒤바뀜 현상. 주로 어떤 목적을 가진 영이
피해자의 영을 쫓아내고 그 육체속에 들어앉는
것으로, 서로다른 영이 육체 한 구석에조차도
머물지 못하고 완전히 쫓겨나게 되는 점에서
일반적 빙의현상과 구별됨.
비는 더더욱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퍼 붓는 듯한 빗
줄기 속에서도 현암의 차 유리에 어린, 흐르는 물줄기로 이루
어진 영상은 더더욱 또렷해 갔다.
" 꼭 이리로 올 생각인가? 환영하네...허나 지옥문으로 들어
섰다는 건 알고 있겠지?"
음..흐릿한 울림이었다. 영과의 대화는 의식을 열고 하지 않
으면 스스로의 사념에 왜곡되어 제 멋대로의 뜻으로 되어 버리
기 쉽다는 건 현암이 익히 알고 있던 바였지만, 이 영의 경우
에는 현암의 집중된 의식으로서도 알아듣기가 좀 난해했다.
여럿의 목소리가 동시에 웅웅거리며 울렸기 때문이다.
" 자네에 대해서는 금방 알 수 있었네. 상당한 조예를 쌓았더
군. 아마 웬만한 잡귀들은 얼씬도 못하겠지..."
현암은 품안의 월향으로 손을 뻗었다. 여간해선 쓰지 않던
물건이었으나, 이번엔 예감이 좋지 않았다.
" 그런 장난감은 꺼내지 않기로 하세.. 자네 한 번 시험을 받아
볼텐가? "
갑자기 품으로 들어가던 손이 덜컥 정지했다. 그리고는 되려 품
에서 서서히 나오고 있었다. 현암은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움켜
쥐었다.
' 윽...굉장한 힘이다..물리력을 행사하다니..'
오른 손의 색이 푸르게 변해갔다. 불룩불룩 움직이는 것이 움켜쥔
왼손 손아귀에서 느껴졌다. 그리고는 어마어마한 힘으로 현암의
목줄기를 향해 뻗어갔다.
' 크읔..'
앞좌석이 뒤로 휘청 젖혀졌고 현암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 이대로는 ... 죽고만다..'
현암은 오른손으로 계속 목을 졸리면서 왼손으로 품안의 월향을
찾았다. 그런데 월향에 손이 닿는 순간..
"꺄아아아악...." 월향검이 울었다. 귀신을 벧때 칼이 내뱉는
월향의 소리였다. 문득 그 와중에서도 왼손이 시큼한 것이 느껴지
더니 점점 감각이 없어졌다. 의식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흐려지
는 눈 앞으로 자신의 왼손이 꾸물거리며 품안에서 기어 나오는 것
이 느껴졌다. 푸르게 변한, 불룩거리는 손이...
두 손이 목을 조이자 더더욱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기공도 이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현암의 목이 뒤로 꺾어지면서 백밀러에 현암의
얼굴이 비쳤다. 현암의 얼굴도 푸르게 변해가고 있었고 눈자위 밑이
불룩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문득 현암의 뇌리에 생각이 스쳤다.
'왜 내 손이 닿았을 때 월향이 울었을까? 월향은 영과 접촉했을 때
만 운다. 그러면...내손에 악령이...'
이젠 손만이 아니었다. 솜에 서서히 물이 번지듯 야릇한 무감각이
하반신으로 부터 번져갔다.
'내 몸은 나의 것이다. 이놈들은 환령을 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각각 다른 곳에서 부터 들어올 수 있는 걸까? 그러면..
한놈이 아니다!'
머리속에 생각이 도는 중에도 현암의 목은 사정없이 조여지고
있었고, 무감각은 단전 근처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단전까지
침투가 된다면 지금 그나마 저항하고 있는 기공도 깨져서, 아마
단숨에 목이 부러지거나 끊어질 지도 몰랐다. 시간이 없었다.
현암은 마지막 힘을 끌어 올렸다. 그의 것이었던, 그가 잘 아는,
그가 사랑하는 자신의 몸의 구석구석에 기운을 불어 넣었다.
" --- 갈! ---- "
폭풍과도 같은 기운이 전신의 모공으로부터 뻗어 올랐고, 푸른
기운이 급류에 쓸리듯 휘르르 밀려 나갔다. 몸의 감각이 순간적
으로 되살아났다. 현암은 눈을 부릅뜨고 조각으로 나뉜 푸른
기운의 수를세었다. 넷이었다. 현암은 다시 한모금 숨을 들이
마시며 왼손으로 월향을 꺼내고 오른손에 다시 한 번 기를
모았다. 푸른 기운들이 앞유리창을 뚫고 나가려는 순간 현암은
월향을 그었다.
"꺄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괴괴한 월향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채 검이 닿지도 않은 앞 유리에 금이 쫙 그어졌다. 얼풋 하나의
푸른 덩어리가 파르르 떨며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현암은 재차
대갈하며 기를 있는대로 오른 손에 집중하며 앞유리의 얼굴을
움켜 쥐었다.
앞유리가 산산히 깨어져 퉁겨져 나가면서 현암의 손끝에 푸른
오오라가 번뜩였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재빠른 놈들!'
현암은 양 미간사이에 월향을 세웠다. 멀리 여러개의 푸른 기운
이 서로 엉키며 순간적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고....현암은
그제야 몸의 기운이쭉 빠져 나감을 느꼈다.
월향의 반탄력으로 왼손은 피투성이였고 박살난 앞 창문으로
빗줄기가 넘실거렸다. 앞창을 깬 오른손은 오오라를 뿜고
있었기에 다행히도 멀쩡했다. 다만 얼굴에 유리조각을 몇개
맞은 것 같았다. 뒤에서 트럭 한대가 지나갔다.
현암은 깊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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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후야. 뭐 좀 찾아냈니?"
박신부의 차 뒷좌석에는 오래된 스크랩북들이 가득했다.
보도된 각종 사건들만을 모아 스크랩한 것으로 박신부가 엑소
시즘에 관심을 가지던 10여년 전부터 모아오던 것이었다.
" 아이고 이 많은 것 중 어떻게 그 몇개를 찾아요? 컴퓨터에다
입력이라도 하시지..."
준후는 피곤으로 붉어진 눈매를 비비며 투정부리듯 말했다.
" 주 외우면 금새 찾을 수 있는데...씨이.."
" 너 또 잡귀와 얘기할려고 그래? 안돼! 차라리 그냥 가자."
" 아녜요.아녜요. 알았어요...씨..안불르면 되쟎아요.."
뭔가 불만스러운듯 중얼거리던 준후의 눈에 오래된 스크랩
하나가 보였다. 거기에 있는 작은 기사 하나가...
" 신부님 이것...! "
준후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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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오빠아......
현아는 물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깊은 곳이 아니었다.
겨우 허리밖에 차지 않는 물이란걸 현암은 알고 있었다.
현암의 발걸음은 느렸다. 피곤했다. 엎어져서 쉬고만 싶었다.
발 밑에는 구름같이 희부연 것만 그득했다. 걸음 걸음 솜뭉치를
밟는 것 같았다.
현아는 물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분명 깊은 곳이 아니었다.
겨우 허리밖에 차지 않는...
피곤했다. 그냥 누워 숨을 내 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빠.....
현아는 물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분명 깊지 않은 곳인데 벌써 목까지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오빠...오...
현아의 옆에서 큰 손이 튀어나와 현아의 머리를 움켜 잡았다.
현암은 뛰기 시작했다. 발 밑에서 무언가가 자꾸 그를 잡아
당겼다. 그러나 뛰었다. 오 조금만 기다려줘...조금만...
커다란 손이 현아의 머리를 물 속에 쳐박았다...
그곳은 분명 깊은 곳은 아니었다...그러나..그러나...
현암이 물가에 다다르자 갑자기 물기둥이 치솟고 커다란 웃음
소리가 하늘을 쪼갤 듯 울려 퍼졌다......
"으으음!!"
현암은 소스라쳐 잠에서 깨어났다. 억수로 내리던 비는 조금씩
개어가고 있었고, 지나는 차들의 소리가 붕붕 멀어져 가고 있
었다.
' 또 현아의 꿈을...'
잠결에 눈물을 흘렸던가? 현암의 눈 주위는 축축히 젖어 있었다.
' 그때도 조금만 빨랐던들....'
지나던 차 한대가 앞유리가 박살난 현암의 차를 기웃거리다 그냥
지나쳐 갔다.
' 음...너무 지체했다. 빨리 가야지. 아뭏든 지독했다. 넷이나
한꺼번에 덤비다니..적어도 영이 다섯은 넘는 거렸다? 하나는
내가 없앴으니 적은 최소한 넷...'
뒤에서 누가 빵빵경적을 울려대는 것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준후가 환한 얼굴로 차에서 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혀엉! 괜찮았어요?"
"하, 말도 마라. 이 꼴 좀 봐."
"음 그만하기가 다행일쎄."
박신부가 차에서 내리며 말을 이었다.
" 지독하구먼.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을 이정도 고생시키다니.."
"녀석들이 환령을 하려 했어요. 여러놈이에요. 굉장히 세고...
최소 다섯놈입니다."
"아뇨 형. 아홉이에요."
놀라는 현암에게 준후가 스크랩북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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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오래된 어느 잡지에서 오린 기사였다...
역이나 터미널 부근에서 잠깐 시간때우기용으로 흔히 알려진
싸구려 잡지에 "납량특집"이란 부제를 걸고 나온 그 기사를
현암은 옆에서 왼 손에 붕대를 감아주는 준후를 힐끗힐끗 쳐
다보면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 소왕산의 저주받은 산장...
등반코스가 최근에 개척되기 시작한 소왕산에 아직도 많은
사고로 인해 폐쇄되어 있는 봉우리가 있는데 그것이 까치봉
이다. 이 까치봉은 몇몇 등반가들에게만 알려져 있는 좋은
등반로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일제 시대때 어느 재산가가
그 봉우리 위에 산장을 지은 일도 있다. 그 산장의 이름이
바로 측백산장인데, 그 이름의 유래는 까치봉 봉우리 주변에
는 측백나무가 유달리 많아서라 한다.
산장을 지을때, 거기엔 옛 건물의 자취가 있었다 하는데, 그
산장도 산상에서의 토목 공사가 힘들었던 관계로 그 자리를
그냥 이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산장의 공사 중에도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또 실제로 귀신을 봤다는
인부들이 속출하여 일을 도중에 그만두고 도주하는 사람이 많아
져서, 공사는 대단히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산가는
끝까지 공사를 완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수많은 농지를 팔
아야 할 정도로 돈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완공이 되자
마자 그 주인 마저도 거기에 출몰하는 귀신의 위협을 받아 그냥
떠나 버려서, 그 산장은 그 이후 지금까지 빈 집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런 집이야 많지 않습니까? 뭐 글솜씨도 엉망이고, 읽기가 싫
군요.. 근데 신부님도 이런 싸구려 잡지를 보십니까? 음 표지의
여자가 이뻤나 보죠? 하하하"
"지금 농담 할 때가 아닐세...계속 읽어 보게나. 음, 그 뒤에
보면 동네의 촌로가 전설을 이야기 한 것이 있네. 보게나."
박신부가 웃지도 않고 정색을 하는 바람에 현암은 다시 기사
로 눈을 돌렸다.
.....저희 동네 사람은 모두 이 소왕산에서 약초를 캐는 걸로
업을 삼고 있읍니다. 허나 까치봉 주위론 절대 들어가지 않지요.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님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이조 말쯤에
저 까치봉엔 웬 산적 소굴이 있었답니다.
되어서 자주 민가를 털었다는데, 관군이 토포를 해서 대부분
목을 베었대요. 근데 그 중 두목격인 십여명이 까치봉 꼭대기로
도망간 걸 몰랐다나 봅니다."
김노인의 말에 의하면 그 후로 그 도적들은 다시 관군의
토포가 있을까 두려워 내려오지도 못하고 산에서만 살았는데,
어디서 방사(도사) 하나가 그들의 두목으로 들어앉아서 그들은
나찰신(*주1)을 받드는 사교집단의 성격을 띄게 되었는데,
그들의 두목이 된 도사가 주문을 가르쳐서 아홉명 모두가
신기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흑암
성제, 흑암장군, 흑암천녀 등의 호칭으로 부르면서, 어린 아이를
잡아 생피를 마시고, 손으로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내는 놀이를
하는등 주로 사람고기를 먹고 살았다고 한다...
"음...이건 지독하군."
"아이고, 형. 말하지도 마요. 난 아까 차에서 그 얘기를 보고
막 게웠다구요."
"준후야.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 산적들은 주문같은 걸 함부로
써서 그 힘에 도취됐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할 수 있게 된걸거야..
그러니 너도.."
"말만 나오면 나보고 뭐라 그래...씨...좋은데 쓰면 되쟎아 뭐!"
...결국 그들의 만행을 버티던 마을 사람들이 다 죽을 각오를
하고 그들의 근거지 - 즉 까치봉 꼭대기의 측백산장 - 을 덮쳤
는데, 그들은 이상한 술수로 많은 사람을 해치다가 여섯이
마을사람들에게 맞아 죽었고, 두목과 여자 하나만이 산채로
잡혔으나, 마을사람들은 분노로 그들을 오우분시(*주2)에 걸고
시체마저 태워서 산에 뿌렸다고 한다. 그 두목은 죽으면서도
'너희는 날 죽일 수 없다. 난 다시 나타나 모든 백성을 다 죽
여 씹을 것이다'라고 웃으며 저주 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 비가
으슬으슬 오는 날이나, 밤 깊은 시간에는 까치봉에서 불빛이
보이고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늑대가 떼를 지어 활보하는
등 이상한 일들이 끊이지 않고, 사람들이 이유없이 죽은채로
발견되는 등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이 후, 이 마을은 거의
폐촌이 되었는데, 어느 지나던 고승이 산 곳곳에 돌탑과 부적
을 묻은 뒤로는 그런 일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을 이 마을에 아직도 거주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굳게 믿고 있으며, 절대 까치봉 정상 근처에는 발을 들여 놓지
않는다는....
"음..만약 여기 나와있는 전설이 사실이라면, 그 도사라는
자와 나머지 여덟은 악령이 되었겠군요...죽는 순간까지
죄과를 깨우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을 원망하다니.."
"음..게다가 방사였으니 술법같은 데도 능하고, 주문에도 능통
했을 것이 아닌가? 거기에 금지된 의식들도 행한 것 같고.."
준후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예. 그러나 믿어지지가 않는데요?사람..먹었다는 건..
도사라는 사람이 식인종도 아니었을 거고.."
현암이 무심히 대답했다.
"아냐, 그건 아마 나찰귀 신앙의 일종의 의식이었을거야..
그걸로 사악한 힘을 얻으려 했는지도 모르지..."
박신부도 입을 열었다.
"아마 여기 나온 이야기들은 어느정도 사실인듯 하네...
불행한 일이지만..."
준후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 너무 징그러운 귀신들야...더러워..."
"그러니 우리가 가야하는 거야... 더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근데 그동안 잠잠하다가 왜 이제서야 나오는 거죠?"
현암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알 수 없지. 고승이 탑을 쌓고 부적을 묻었다니, 일종의
결계(*주 2)를 맺은 모양인데, 어쩌다 그게 깨졌겠지."
"이제 가 볼까?"
십자가와 성수반을 챙기면서 박신부가 재촉했다.
"해지기 전까진 도달해야지. 모두가 덤빈것도 아닌데 현암군을
이렇게 애먹인 놈들이야. 특히 환령술이 그 놈들 장기인듯 하니
모두 알아서 준비들 해."
준후가 제일 반가와 했다.
"히히히..그럼 난 부적을 써야지. 뭘 쓸까...."
" 사카라데바남 인드라(*주 3)님을 부르지? 조심해라..."
현암은 붕대로 감긴 왼손을 가볍게 흔들어 품안의 월향검을
꺼냈다. 준후는 사람고기 먹는 귀신이란 소리에 겁을 먹은듯,
제석천부적에다가 브라마데바(*주 4)의 주를 중얼중얼 읊조리는
듯하더니 피식 웃었다.
"신부님 신부님, 이 분들은 천계서도 젤 센 분들이니 염려없을
거에요...우리 가요. 나쁜 놈들 잡으러..."
셋은 서로 웃고있었으나 마음만은 단단히 긴장한 채 벌써부터
측백나무가 듬성듬성 서있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 주1) 나찰은 불교에 나오는 식인귀의 일종으로, 범어로
락샤사(Raksasa)라고 하는데, 지옥에서 사람을 괴롭
히는 임무를 맡으나, 그들끼리도 바다 가운데의 섬에
나라를 이루고 산다고 한다. 특히 나찰 중에서도 여자
나찰의 힘이 강한데, 이들을 나찰녀, 나차녀, 나찰사
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 2) 결계란 원래는 불도 수행을 위해 일정한 지역을 청정한
금역으로 한다는 뜻이나, 잡신이나 악한 힘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금제를 가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주 3) 범어로 Sakradevanam Indra. 제석천,천제석,제석이라고도
하며, 범왕과 더불어 불법을 지키는 신이기도 하다.
십이천의 하나로 서동쪽의 수호신이며 수미산 꼭대기의
도리천에 산다고 한다.
(*주 4) 범어로 Bramadeva. 범천왕,범왕,바라문천이라고도 하며,
바라문교의 교조이자 우주만물을 창조한 사바세계의
수호신으로 제석천과 함께 불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불상의 좌우에 모신 신이 이 제석천과 범왕천임...
전설은 사실인 듯 했다. 마을의 촌로(전에 잡지에 인터뷰한 김
영감은 이미 죽었다지만)들에게 물어 본 결과 그들이 보이는 반
응에는 분명 진실이 있었다. 또 셋중 가장 영사 능력이 강한 준
후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진실과 심한 공포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등정을 시작했다. 측백산장은 대형 살인사건으로 취급되
는 곳이었으나 예상 밖에 경찰은 일찌감치 조사를 마치고 현장을
비워버렸다고 마을에서 반가운 소식을 얻어 들었다. 아마 산정상
에서 사고수습반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서 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응당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계라도 세웠어야 하는
데, 산장에 자꾸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 아무도 거기 있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 산장은 비어있을 것이었다.
올라가는 길에 별다른 일은 없었다. 전설대로 승려가 세웠다는
결계가 있다면 잡신을 많이 부릴 줄 아는 준후가 그걸 느꼈을 터
인데 준후도 아무 힘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간간히 무언가의 힘으로 파괴된-그것도 일반적인 눈으론
보기 어렵지만- 바위나 뿌리채 쓰러진 나무의 자취들이 보였다.
바위들은 벼락을 맞은 듯 부서져 있었으며 거기에는 누군가 새겨
놓은 글자들이 다 파손되어 있었다.
준후가 그 바위를 살피더니 말했다.
"대.....문선.... 음 아마 대성지성문선왕의 주를 새긴 듯 하네
요. 저쪽 바위는 그에 대응되는 관우장비웅호장의 주를 새긴 것
같고요. 그런데 이런건 병마를 쫓는 주인데...아마 각종의 주를
골고루 사방에 새겨 대결계를 세웠던 것 같아요."
"그것보다 내가 염려 되는 것은.."
현암이 침중히 말했다.
"그놈들이 보통의 잡귀와는 다르다는데 있어. 환술을 연마한 방
사의 귀신이니 아마 벼락을 빌어서 결계를 스스로 파괴할 줄 알
았던 것 같아."
"결계에 갇힌 귀신이 어떻게 재주를 부릴 수 있어요? 그건 불가
능해요."
"아마 처음엔 우연히 몇군데의 결계가 파괴되어 그 힘이 약해졌
겠지. 그리고 조금씩 놈이 힘을 쓰게 되어 결국 방술로 나머지
결계들을 다 파괴한 것 같아."
"그럼 이 결계들을 복구해 볼까요? 할 수 있을 듯 한데.."
"아니, 너무 시간이 걸려. 언제 온 산을 다 뒤진단 말야? 그러다
완전히 빠져 나가 버리면 잡기가 퍽 곤란해. 어서 가자..."
둘의 대화에도 박신부는 끼지 않고 묵묵히 기도문만을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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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퍽 낡아보이는 건물...
언뜻보아도 사람이 살지 않은지 수십년이 지난 듯한 모습이 확연
했다. 크기는 웬만한 이층집만큼이나 컸고, 재산가의 별장으로
쓰려던 역사를 말하듯 곳곳에 달렸던 장식들이 추하게 떨어지고
부서져서 되려 을씨년스런 느낌을더해주고 있었다.
"터의 기운이 아주 부자연스러열해요.
아마 저 쪽의 측백나무 숲은 일종의 진식(*주 1)인것 같아요."
"진식 ?"
"예. 무슨진인지 알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하여간 요기가 저 측
백나무들에서 뻗쳐 저 산장으로 몰려 들어가고 있어요."
"저 측백나무들은 백년도 더 된것같은데..."
"우리가 불리할지도 몰라요. 백년이상 숲의 요기를 모아오고, 거
기에 환술과 환령술까지 아는 방사 출신의 상대가 아홉..."
"여덟일거야. 월향으로 한마리 잡았으니... 한 번 투시를 해 봐.
놈들의 근거지가 어디인지.."
준후는 눈을 감고 도교의 명목법(*주 2)의 주를 읊었다.
"지하실인듯 해요. 땅 밑에 기운이 엉켜 있어요...음 수는 잘 알
수가 없네요...은형법(*주 3)을 쓰고 있는 듯..."
"더러운 놈들 같으니...그런 법들은 도교 전래의 비법들인데 그
런걸 사람 해치는데 쓰다니...모조리 환생도 못하게 없애 버리고
말겠어."
"아뭏든 들어가세..."
박신부의 조용한 음성이 그들을 재촉하였다...
산장안은 어두웠고 음침했다. 바닥은 아직도 핏자국과 사람들의
발자국( 조사하던 수사관들의 것들인양)들로 어지러웠다.
준후가 신음성을 냈다.
"음..은형술이 강해요. 분명히 이 안에 다들 숨어 있는데, 어떤
놈이 강한 은형주로 나머지 놈들을 감싸고 있는듯 해요. 더 이상
은 보이지 않아요."
"자네들 잠시 내 뒤에 서게."
박신부가 앞으로 나섰다. 박신부의 주특기는 그 강한 기도력으로
사마를 쫓아내는데 있었고, 위급할 때는 (준후와 현암만 보이는)
연녹색의 오오라가 주변을 환하게 빛날 정도로 그 힘이 강했다.
박신부는 거의 영들에게 공격을 가하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
나 그의 기도력은 일행에게 거의 무적의 방어막을 제공해 주었고
또 박신부의 성수는 기독교 계의 영이 아니더라도 큰 위력을 보
였다.
"준후야. 상대가 나찰신앙을 가졌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신을 불
러서 너를 보호해."
아무리 많은 주술과 부적을 지니고 있어도 역시 어린이에 불과
한 준후를 현암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히. 벌써 나찰을 다스리는 바이스라바나(비사문천 *주 4) 의
힘을 빌고 있어요. 이 방울에..."
준후의 손엔 이미 몇장의 부적과 작은 놋쇠 방울이 들려 있었고,
태연한 듯 웃고는 있었으나 손엔 이미 땀이 축축히 배인 듯 했
다.
박신부가 방의 중앙에 정좌를 하고 앉아 기도문을 음송하기 시
작했다. 박신부의 기도문이 벽 사이로 울려 퍼지자 갑자기 요기
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준비해라. 준후야."
박신부가 성수를 사방에 뿌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성수가 닿은
벽면에서는 흰연기들이 피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또
저기에서 흰연기들이 부우옇게 뭉치기 시작하여 시야가 흐려질
정도가 되기 시작했다. 박신부의 오오라가 장엄하면서도 따뜻하
게 원형으로 퍼져갔고 흰연기들은 다시 그 오오라 막에 의해 사
방으로 밀려져 나갔다.
"역시 대단한 분이셔. 신부님은.."
준후가 중얼거리며 비사문천주를 외우며 방울을 흔들기 시작했
고, 방울소리는 벽에 부딪히며 점점 그 소리가 커져 나가 귀를
멍멍하게 만들어 갔다. 준후가 손에 힘을 넣었다. 소리는 공명에
공명을 거듭하고 다시 주문의 힘을 빌어 조그마한 방울에서 나오
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커져 갔고 박신부의 오오라
와도 조화를 이루어 나가며 확산되어갔다.
"수파 바이스라바나천 옴 마우라카 주 제모디..."
박신부의 기도소리와 준후의 주문이 방울쇠와 함께 증폭되어가자
벽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며 먼지와 거미줄 나부랭이가 천장에서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현암도 월향을 빼들었다. 월향의 끊
이지 않고 계속 울고 있었다. 현암은 기를 칼에 모으며 태극패(*
주 5)를 꺼내 왼손에 들었다.
세명의 전혀 다른 특기인 기공과 기도력, 주술이 합쳐지기까지
셋은 많은 훈련을 함께 해 왔다. 이로써 그 세가지의 합력을 어
느정도 이룰 수 있게 되어 퇴마에 거의 최고의 위력을 발하는 일
종의 진세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셋의 힘을 모으면 개개
인의 힘을 그냥 더한 것의 약 두배 까지의 힘이 나오는 듯 했다.
이제 벽과 천장은 마치 고통입은 짐승마냥 마구 흔들리고 있었
다. 먼지들이 천정에서 줄줄 흘러내리고, 박신부의 성수에 맞아
피어나는 흰연기들이 여기저기서 뭉쳐 휘감겨 사라져 갔다.
갑자기 바닥에 흐트러진 잔돌들이 공중에 떠 오르기 시작했다.
큰 돌들도 움찔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몇개 있는 낡은 의자며
나무토막같은 것들도 덜컹거리며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현암은 그 광경을 보며 기공을 증대시켰다.
'음...시작이군...이건 물건에 백(*주 5)을 감연시켜 물건을 부
리는 건데...별 놈들 아니군...'
갑자기 잔돌들이 우박같이 셋을 향해 쏟아져 갔다. 무서운 속도
였으나 박신부의 오오라를 통과하는 돌은 거의 없었다. 몇개가
간신히 오오라를 비집고 들어왔지만 바로 떨어져 버렸다. 허나
일단 떨어진 돌들도 다시 벌떼처럼
셋에게 달라붙어 갔다.
박신부의 뇌리에 전에 죽은 네명의 남자의 모습이 떠 올랐다. 아
마도 이 방법으로 인해 전신을 돌에 맞아 죽은 것이 틀림없으리
라... 박신부는 분노를 느끼며 마주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보이지 않는 오오라막이 강세를 띄며 넓어져 갔고 잔돌들이 무
더기로 팍!팍! 소리를 내며 부서져먼지로 화해 갔다. 돌들이 무
더기로 부서져 나가자 덜컹거리던 의자들이 날아왔다. 현암이 태
극패를 쥔 왼손의 손등으로 의자 하나를 기공을 실어 갈기자 의
자는 폭죽처럼 터져 나무조각으로 흩어져 갔다. 박신부가 침착하
게 성수를 날아오는 의자와 나무토막에 뿌리자 그것들은 마치 강
한 망치에 맞은 양 뒤로 나가떨어져 벽에 부딪혀 흡사 사람이 쓰
러지는 듯 딩굴었다.
어지럽던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현암은 태극패로 박신부의
오오라를 반사하여 방안을 한바퀴 돌렸다.
" 잡것들아! 그따위 장난질은 우리에겐 안통한다! 어서 모습을
보여랏! "
방에 딩굴던 의자에서 희뿌연 기운이 3가닥 솟아오르고 사방의
벽과 천정에서 각각 하나씩의 기운이 솟아 뭉쳐갔다. 뭉쳐가는
기운은 점차 푸른 빛과 흰 빛을 띄며 세명의 주위를 둘러싸 갔
다.
상대의 모습이 드러나자 준후가 순간적으로 명안부적을 눈에
문질러 상대의 모습을 파악했다.
"오른쪽 둘은 여자고 나머진 남자에요. 음..현암형쪽의 두놈이
아주 세요. 조심...음...여자들은 왜 벗은 모습으로..."
영이 모습을 보일때는 스스로의 의지또는 습관에 의해 그 모습
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일상적 사람들이 볼때는 다
옷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영이 특별히 그에 신경을 쓰지
않아 생전의 모습이 그냥 투사되기때문이다. 영이 스스로의 보이
는 모습에 신경을 쓸 때만 영은 그 모습이 강조된 형태로 눈에
비치게 되는데, 즉 머리잘린 모습에 신경을 쓰면 머리가 잘린 모
습으로 가시화되지만, 그 나머지는 일반 생전의 모습을 띄게 되
는 것이다. 그러나 준후의 눈에 비친 두 여자의 모습은 완전 나
체였고, 네 남자는 그냥 민숭민숭하게 희뿌연 모습이었으며, 둘
은 남색 도복을 입은 듯 했다.
현암은 성질이 급했다. 곧장 월향과 태극패를 받혀들고 몸을 공
중에 띄워 푸른 두개의 기운으로 몸을 날렸고...
박신부는 천천히 희뿌연 네개의 기운을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
했다.
준후는..."아이고 차라리 센 귀신이 낫지, 다 벗은 여자랑 어케
싸워!!! 형이나 신부님은 똑똑히 안보이니 괜찮쟎어...잉잉"....
울 듯 했다.
아무리 퇴마사라도 아이는 역시 아이였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여귀는 어쩔 줄 몰라 뒷걸음치
는 준후쪽으로 부끄럼도 없이 다가 들었다...
* 주 1) 진식 : 주역, 팔괘나 기타 성복서의 원리로 물건을
배치하여 조화를 부리는 방법으로 군사를 부리는
진법같은 것 (삼국지의 팔진도나 팔문금쇄진)으로
여기서는 환술의 일종으로 쓰이며 어떤 힘을 증폭
추가하는 방법으로도 쓰인다.
* 주 2) 명목법 : 도가에서 쓰는 비술의 하나로 원래는 눈을
맑게 하여 밤에도 볼 수 있게하는 법이나 사물
의 근본을 밝혀 보게 하는 기능도 지니는 비법
* 주 3) 은형법 : 스스로의 모습이나 기를 감추어 보이지 않게
하는 도가의 비술. 모습을 감추는 경우 발자국
이 나는 것은 막지 못한다함.
* 주 4) 바이스라바나 : 범어로 Vai'sravana, 비사문,비사문천
이라 하며 다문천,사천왕,십이천,칠복신의 하나
나찰과 야차를 많이 거느리고 염부제주의 북방
을 지키고 재보를 맡아보며, 불법을 지키는
선신. 몸은 누르고 칠보의 갑주를 입으며, 왼손
에 보탑을 들고 오른손에 보봉을 잡은 분노의
형상을 하고 있음. 탁탑천왕으로도 불림.
* 주 5) 태극패 : 도교에서 마물을 쫓고 진실을 보기 위해 사용
하는 일종의 거울이 들은 패. 크기는 약 9촌
이상이며 앞뒷면에 팔괘의 무늬가 있고 중앙에
동으로 된 거울이 있으며 뒷면에는 태극무늬가
있어서 그런 이름을 가짐. 영화에도 많이 나옴
* 주 6) 백 : (음 번호가 잘못된 듯...죄송)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이론에 의하면 "정령은 백이 되고 혼은 신명이
되고, 정은 음이고 신은 양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또 정도전의 저서 "리매집"에 의하면 백은 혼이 나가고
남은 상태의 영적인 것, 즉 죽고 난 육신이나 그 잔해
등의 물질적인 것이라고도 한다. 그 외의 구절들을
종합하면, 백이란 혼 같이 순수 영적인 것도 아니고,
땅에 귀의하는 반 물질적 존재로, 이는 유체와 비슷한
특성을 지니는 물리력을 행사하기 쉬운 영적존재인
정도로만 생각하시길...보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면
메일을 보내세요...
"꺄아아아아악------"
월향이 길게 비명을 지르며 사방을 그어가는 중에도 푸른 두 기
운은 교묘한 움직임으로 검 끝을 피하며 번뜩이는 태극패의 공격
마저도 잘 피해갔다. 피하기만 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백을
이용한 압박이 현암을 향해 뻗쳐 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가위
에 눌리거나 할 때 느껴지는 중압감을 엄청나게 확대한 것과 같
이, 일종의 기가 하나는 쇠뭉치처럼 묵직하게, 하나는 면도(얇아
서 허리나 팔목에 감고 다니는 칼)처럼 예리하게 현암의 구석구
석을 파고 들었다. 이건 거의 무예시합이나 다름 없었다. 현암은
월향귀검과 태극패, 거기에 간간히 기공술까지 섞어가며 대적했
고 또 기공(현암의 기공은 도가의 것으로 태극기공류의 것이었
다.)으로 온 몸을 둘러 무기에서 압도적이었지만 두 푸른 기운의
모습이 분명치 않아 움직임을 파악하기 어려웠고 또 2:1이어서
어려운 싸움이었다.
"이건...보통내기들이 아니군. 지신 중에서 귀장급은 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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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는 온갖 잡동사니가 총알같이 날아드는 중에서도 천천히
기도문을 읊으며 넷을 몰아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박신부가 미리
뿌려 놓은 성수가 벽에 잔뜩 칠해져 있어서 그리로는 투과 할 수
가 없었다. 그들은 발악을 하듯 바닥의 잔돌이니 나무조각따위를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를 박신부를 향해 날리
고 있었으나 박신부의 몸에서 나는 광채와 마주치면 비껴지나가
거나 맞아 떨어지곤 했다.
"죄의 소산인 어둠의 생명들, 사탄의 앞잡이 들아..."
박신부는 여전히 침착하게 엑소시즘(*주 1)에 사용되는 기도문
을 읊으며 십자가를 비추고 성수병을 흩뿌리며 이제 파르르 떨고
있는 네 개의 희뿌연 기운 쪽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아까 성수를
많이 벽에 뿌려 놓은 탓에 퇴로는 막아 놓았으나 이제 성수가 얼
마 남아 있지 않았다. 넷은 십자가를 통해 보이지 않게 번뜩이는
오오라에 완전 위축된 양,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음... 이상하게 사악한 기운이 생각보다 적고...이 정도면 단번
에 여러명을 몰살시킬 수 있는 정도의 힘을 가진 녀석들은 아닌
데...."
박신부의 머리에 다섯정도의 영이 현암을 몰아붙여 하마터면 큰
일이 나게 할 뻔한 기억을 해냈다.
"그때 하나가 죽었다면...나머지는 여덟...이 넷은 허약한 졸개
급이고 현암군과 준후와 싸우는 녀석들이 그 강자인가? 그렇다면
이거 시간을 길게 끌면 안되겠군 그래..."
박신부는 성수병을 움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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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아이고, 이것들아, 아니 누나들...가까이 오지마요.."
준후는 두 여귀의 요상(?)한 전법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아예 그쪽을 쳐다 보기가 민망하여 눈을 돌리고 있으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주문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아니..
'음 그래. 우보법(*주 2)의 구절중 발을 땅에 붙게 만드는 주가
있다.'
준후는 양발을 (좀 급하게) 한번씩 내 딛어 제 2보까지 밟아 정
신을 모으고 여귀들 쪽을 향해 일갈했다. 효과가 있었다.
두 여귀는 정말 발이 땅에 붙어 버린 듯 그자리에서 당황하는
모양이었다.
"음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부적으로 가려주마."
준후는 둔갑부적을 꺼내 부적을 크게확대 한 뒤 가릴것 없이
여러개의 부적을 날렸다. 제압부,소혼부,오뢰부,귀신칙소부에 전
혀 관계 없는 신행부, 해금부 따위의 것들까지 무더기로 날아가
여귀의 온몸에 다닥다닥 달라 붙었다. 부적을 한 두개도 아니고
무더기로 몸에 달자 두 귀신은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자리
에 눌려 뭉개져 갔다. 부적이 귀신의 몸을 빨아들이고(물론 관계
없는 부적들은 그냥 가리개 역할로 붙었지만) 있는 것이었다.
준후는 의기양양 부적에 불을 붙여 모조리 날려버릴 심산으로
우보를 밟아가며 짜부라지고 있는 귀신- 아니 부적 더미로 향해
갔다.
'흥 남녀가 유별한데 창피한 것도 모르고... 내 야마라자(염라대
왕)께 빌어 암여우로 태어나게 빌어주지..'
어쩌고 하는데 난데 없이 팔 두개가 부적더미에서 튀어나와 준후
의 양팔을 잡았다. 모든 힘이 다 모였는지 놀랍게도 직접 물리력
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으악!"
순간적으로 놀란 준후가 기를 흐트러 뜨리자 준후를 보호하던
신의 힘도 흐트러지고 준후의 팔에 사악한 기가 몰리는게 느껴졌
다.
"악! 어째! 환령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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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은 준후의 비명소리를 듣고도 놀라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싸웠던 경험으로 볼 때 준후가 환령술에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았
다. 현암은 침착하게 다시 날아드는 쇠뭉치같은 일격을 어깨의
기공으로 튕겨내며 소리쳤다.
"신부님! 준후를!!!"
순간적으로 면도와 같은 예리한 기운이 두개로 갈라지는듯 허초
를 보이며 현암의 기공을 뚫고 왼쪽 어깨에 상처를 냈다.
"엇! 본국검법! 백년내에로는 이 검법을 익혔던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그러면 현암과 상대하는 둘은 적어도 백여년 이상의 과거에 자신
들이 쓰던 술수를 죽은 후에까지 살려 사용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격을 받았을때 통증은 마찬가지로 느끼나 상
처가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 현암의 어깨에 난 상처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고 분명 그건 물리력의 행사였다.
'그렇다. 이놈들은 칼에 숨어 싸우고 있는 거구나. 칼에 붙어 귀
기로 칼의 모습을 감추고 그걸 조종하고 있다...'
저쪽이 실물의 병기를 이용하는 거라면 아무래도 너무 짧은 월
향은 불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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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는 준후의 비명과 현암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아끼려던
성수를 뿌렸다. 그리고 JNRJ(*주 3)의 부적을 꺼냈다.
" 생겨나지 않은 자, 이름도 없는 자, 하늘나라에 골고루 넘쳐
흐르는 자, 무참히도 꿰어 찔린자의 이름으로 명하니..."
아직 주문을 끝내기도 전인데 네 영은 서서히 사그라져 갔고,
박신부는 언뜻 그들이 기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람을 해
치는 그정도의 악령이라면 이렇게 순순히 사라질 리가 없었는
데... 박신부는 뭔가 의심스러웠으나 일단 준후의 일이 급했다.
박신부는 황급히 준후의 쪽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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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후는 자기의 몸속으로 들어와 혼을 바꿔 버리려는 환령술에
저항하기보다도 자신의 몸속에서 흐트러져 버린 힘들(주문으로
불러낸 힘들)이 갈피를 못잡고 헤매는데 더 고통을 느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이를 악물어 윗입술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되려 준후의 몸에 떠도는 힘들에 환령술이 밀려나가
는 형편이었다.
"이럴...줄...알았으면...이렇게 많은 신을 불러...놓지 않는건
데....읔..."
그때 박신부가 달려와 준후의 팔목을 잡았고, 준후의 손을 쥐고
있던 손 하나는 박신부의 기도력에 밀려 손을 움츠렸다. 박신부
가 준후의 손을 잡는 순간, 준후의 몸에 있던 투사력이 박신부에
게 전파되어와서 박신부의 눈에도 두 여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
했다. 부적들은 그를 주재하는 준후가 콘트롤을 잃자 큰 힘을 발
휘하지 못하고 있어서 여귀들은 둘이서 준후의 한쪽 팔을 잡고
몸을 일으키려는 참이었고, 박신부의 눈에도 그 요망(?)한 모습
이 들어왔다.
"에잇. 더러운! 바빌론의 창녀(*주 4)같은 것들!"
박신부는 준후의 한쪽팔을 잡고 끌었고 두 여귀는 나머지 한 팔
을 끌어서 준후는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아이고, 나죽네!"
박신부는 준후에게 기도력을 퍼 부었다. 순간 준후의 마음이 안
정을 찾게 되었고 이미 여귀의 몸에 붙은 부적은 다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준후는 화가 치미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에잇! 십육나한(*주 5)주닷!"
준후의 손끝에서 오색이 어린 광채가 뻗어나가 두 여귀를 에워
싸자 그때서야 두 여귀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물론 영안이
트인 준후만이 들을 수 있었지만) 두 여귀의 몸이 무지무지한 압
력으로 사방으로 쪼그라들기시작했다. 준후는 이를 갈며 잔인하
게 두 여귀를 완전 소멸시킬 생각을 했다. 당한 걸 생각하면..
준후의 손끝에 노란 번개가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퍼져가기 시작
했다...
"흥! 범천왕 브라흐마데바의 힘으로..."
완전 끝낼 참이었는데...준후의 눈이 두 여귀의 눈과 마주쳤다.
십육나한의 힘을 빈 엄청난 힘으로 온몸이 짓눌려 찌부러지는 고
통에 못이기면서도 그 눈에서 준후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슬픔....
그것은 절대 악으로 물들어 재미로 사람을 해치는 악령은 지닐
수 없는 눈빛이었다.
'아니야, 이것들은 벌써 옛부터 수십명을 죽이고 근래에만 일곱
명의 사람을 죽이고 혼까지 빼버린 악마들이야...속으면 안돼..'
그러나 그 슬픔에 가득한 눈매에는 이미 사악한 기운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고통...그리고...슬픔....애원하는 듯한...
준후의 손에서 번개가 사라져 가고 손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
다. 현암은 아직 세상모르고 싸우고 있었고, 박신부는 돌연한 변
화에 어안이 벙벙하여 있는데, 준후가 바닥에 흩어진 부적중 하
나를 집었다. 영을 가두는 부적이었다.
준후는 십육나한의 힘을 줄이고 두 여귀의 영을 부적에 몰아넣
기 위해 꼼짝 못하는 여귀에게로 다가갔다. 이젠 부끄럽거나 뭣
한 생각도 없었다. 준후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부적을 여귀의
이마에 갖다대었다....놀랍게도, 두 여귀의 표정은 안도하는 듯
했고, (분명 귀신이 울 상황이 아닌데도) 하나의 눈에 눈물이 번
뜩이는 것을 느꼈다.
준후의 눈에도 눈물이 보였다.
'무슨 이유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나쁜 짓들 하지 말아
요...다시는요...'
박신부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준후는 마음이 자비로워... 분명 많은 사람을 구할거야..
많은 영들을 쉬게 할 거고...그래. 영도 역시 인간처럼 가련한
생명인 경우가 많지...."
부적으로 두 여귀의 몸이 빨려 들어가면서, 준후의 귀에 나직한
몇마디의 소리가 스쳐 갔다.
흐믓해 하던 준후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으악! 신부님!!!"
"왜 그러지? 준후?"
흐뭇하게 바라보던 박신부가 놀라서 물었다.
"으...지금 이것들은...진짜가 아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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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은 이제 두 푸른 귀신의 수법을 대강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지난날 산사에서 이름모를 고승에게 무예를 배우지 않았다면 불
가능한 일이었다. 하여간 다른 둘은 이미 제 몫을 다 한듯했으니
어서어서 처리하고 싶었다. 이제 오래 싸워 기력도 쇠해지고 기
공도 운행하기가 답답했다.
"에잇. 가거랏!"
현암이 고승이 일러준 필승의 수, 파사신검을 썼다. 이는 전진
파의 도가에서 내려오던 비전이었다....
자그마한 장도에 불과한 월향이 기를 주입받고 다시 거기에 깃
든 혼과 합쳐져서 검기(*주 6)가 석자를 넘게 뻗어 나갔다. 현암
은 몸을 풍차처럼 돌리며 (원래 신검합일(*주 7)하게 되어있으나
아직 현암의 검술은 그에 비하면 멀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검기
가 허공을 가르고...
쨍! 퍽!
하는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검 한자루와 철추 하나가 두조각이
나면서 형체를 드러내고는 공중에서 부스러져 사라져 갔다. 그리
고 푸른 기운들은 부르르 떠는 듯 하더니 시커먼 물을 흘리고 지
독한 악취를 풍기면서 땅에 쳐박혀 사라져 갔다.
현암은 그자리에 푹 주저 앉았다. 전신의 기운을 죄다 쓴 것 같
았다..... 그냥 눕고만 싶었는데 준후가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방심하면 안돼요! 큰일 났어요!"
아...피곤 듣기 싫었다.
"뭐가? 다 잡았잖아 인제...."
"아녜요. 방금 우리가 잡은 귀신들은 모두 여기서 죽은 그 등산
객들의 영이에요!!"
현암은 눈이 확 떠졌다.
"뭐? 말도 안돼! 나랑 싸운 것들은 백년도 넘은 검법을 쓰던 놈
들이었단 말야!"
이번엔 준후의 얼굴이 놀란 토끼같아졌다.
"아녜요. 제가 직접 들었어요! 그들은 환령술로 부유령이 된 뒤
에 소혼술로 다시 자기들을 죽인 귀신들에게 잡혀 할 수 없이 우
리와 싸운 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약했고!"
"아니라니까! 나랑 싸운 둘은 분명 백년넘게 묵은 최고 악질들이
었어!"
박신부가 끼어들었다.
"그러면 현암군, 자네와 대적한 둘은 그 오래묵은 악령이고 나와
준후와 싸운 여섯은 그 가련한 등산객의 영혼이었단 말이 되는
데? 원래 등산객은 일곱이었고..."
준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이고 난 몰르겠어요"
박신부는 계속했다.
"그럼 현암군 자네가 차에서 죽인 한 영이 한명 남은 등산객의
영이었다 치면... 아직 자네와 싸운 것과 같은, 아니 그 이상의
귀신이 일곱이나 남아 있다는 얘기야."
현암은 머리끝이 쭈삣했다.
"아니 그렇다면..."
준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고 난 인제 기력도 없고 부적도 거진 다 엉망이 됐다구요!"
"내 성수도 떨어졌네. 오늘은 아무래도 안되겠군. 우리 어서 나
가세. 후일을 기약하자구!"
셋은 퇴마행 이후 처음으로 공포감을 느꼈다. 셋이 막 문으로
가려는데 문이 안으로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닫혔고 갑자기
온 방안의 벽과 천정이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셋은 이를 악물며 둥글게 섰다. 피같이 찐득거리는 액체가 벽
이곳 저곳에서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엄청나게 큰 웃음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
영적 전달의 소리가 아니었다. 또렷이 물리력을 구사하는 목소
리였다.
박신부가 눈을 번득거렸다. "엄청난 놈이다..."
다시 웅웅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치면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
렸다.
"이제 가진 재주를 다 썼는가? 피곤할테니 쉬시게..영원히..."
목소리가 너무커서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 이를 악물고 있는
셋의 눈앞에 푸른 기운이 뭉쳐가더니 또렷한 형상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 수는 여섯이었다....
* 주1) 엑소시즘 : 주로 카톨릭에서 행하는 제령의식. 교황청의
서품을 받지 않으면 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며, 그 방식도 비밀이라 함. 원래 카톨릭
은 귀신이나 사탄의 존재 및 그 역사함을
어느정도 인정하므로 이러한 의식도 정식으로
되어있음. 단 엑소시즘은 아무나 행하는 것이
아니며 여기의 박신부도 그 엑소시즘을 허가
받지 않고 무단 사용하여 이단으로 몰리고
성당없는 신부로 떠 돌고 있음.
* 주2) 우보법 : 우보법은 도교의 비술 중 하나로 주로 액막이를
위하여 기묘한 걸음걸이로 걷는 일종의 기원법
으로 여러가지 효능이 있다고 함. 연제지이의
6권에 이 우보법으로 도둑의 발을 땅에 붙이고
비를 내리게 한 일이 기록되어 있으며, 포박자
11권에도 나옴.
* 주3) JNRJ : 라틴어로 Jesus Natarenus Rex Judaeorum 의 약자
유태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뜻의 네 문자로 이루
어진 부적이며 뒤의 내용은 그 풀이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 주4) 바빌론의 창녀 : 원래는 상징의 의미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용에게 권세를 받은 짐승을 탄 음녀.
여기서 박신부는 단순한 저주의 뜻으로 쓴 것
이다.
* 주5) 십육나한 :석가의 명령으로 정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열여섯의 존자. 빈도라발라토사,가락가벌차,가
락가발리토사,소빈타,낙거라,발타라,가리가,벌
사라불다라,수박가,반탁가,나고라,나가서나,인
게라,벌나바사,아시다,주다반탁가 의 열여섯.
* 주6) 검기 : 몸속의 기를 검에 응집시켜 밖으로 뻗어 나오게
한 것. 검을 타고 나오므로 그 기의 형태 또한
예리해져서 거의 절단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함.
* 주7) 신검합일 : 검술의 최고 경지에 이르면 사람이 칼이 되고
칼이 사람이 되는 경지에 이르른다고 함. 이보다
하나 더 높은 단계가 어검술임.(읔 무협지당)
여섯개의 푸른 형체들은 놀랍게도 이제 완연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 중 둘은 총채를 들고 눈에 요기가 어린듯한 고혹적인 여자였
고, 셋은 험상궂은 남자의 모습으로 귀두도와 당파창(삼지창),
낭아곤을 들고 있었으며 중앙의 우두머리인듯한 자는 도관을 쓰
고 한 손에 새빨간 부채를 들고 있었다. 여섯 모두 푸른색의 도
복을 입고 있었는데, 중앙의 옷깃이 섬뜩한 붉은 빛을 띄고 있는
터라 일반 도복과는 달랐다. 여섯의 형체는 또렷하여 산 사람과
구분할수 없을 정도로 확연해 졌고, 목소리들도 분명히 들렸다.
현암이 이를 악물었다.
" 이 악귀들! 재주가 좋구나! 못된 것만 골라 배웠군!"
준후도 외쳤다.
"그 정도의 도력을 가지고도 악행만을 일삼다니, 원시천존(*주
1)도 코를 싸쥐고 돌아가시겠다. 이 호랑말코들아!"
"프하하하하하하------"
다시 한 번 우두머리가 웃어 젖혔고, 나머지 다섯도 따라 웃었
다. 벽이 마구 울고 천장이 금방이라도 내려 앉을 듯, 마구 흔들
리기 시작했다.
박신부는 깊은 숨을 몰아 쉬며 생각에 잠겼다.
'이유를 알아야 한다...그리고 이 놈들의 내력을 알아 내야 한
다. 멋모르고 덤비면 당하기 쉽다. 원인을....'
"이봐 거기 사제님이신가? 염두 굴리는 소리가 예까지 들리네."
한 거한이 이죽거리며 내뱉았고 한 여귀의 간사스러운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알고 싶으면 가르쳐 주지. 우리는 흑암 요녀, 흑암 마녀, 흑암
서장군, 흑암 북장군, 흑암 우장군 이고 저분은 흑암 성제 시다.
이제 곧 흑암천을 창시할 분이시니 냉큼 혼백을 다 바쳐라."
"웃기는 소리! 일개 방사와 산적의 무리들이었던 너희들이 무슨
신이 된다고?"
"흥! 불가 십이천(*주 2)의 하나 밖에 안되는 나찰천의, 그것도
졸개인 나찰을 믿는 너희가 무슨 얼어죽을 성제요 장군이냐? 마
녀, 요녀는 좀 낫군 그래."
현암과 준후의 욕설에 어지간히 성질이 급해 보이는 장한 하나
가 소리를 질렀다.
"그놈의 나찰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난 그것들때문에 혼백이
빨려가서..."
"그만!"
여귀 중 하나가 매섭게 눈을 흘기며 말을 막았다.
"그래서 그 일곱놈을 이용해 소혼술을 해 주지 않았는가!"
"난 아직 다 돌아온게 아니다! 그 남자놈의 혼이 어찌나 끈질기
던지 내힘은 아직도 반분밖에 안된다. 그 놈의 혼을..."
현암의 머리속이 밝아져 왔다.
"그래. 너희들은 처음엔 나찰을 섬겼지. 나찰의 풍속으론 여나찰
이 우두머리가 되게 되어있고 힘도 월등하지. 그래서 너희 조무
라기 남자놈들의 혼백은 모두 저 여귀들에게 빨려들게 되었을 거
야!"
"닥쳐랏!"
현암은 으르렁거리는 거한들의 소리는 아랑곳 없이 말을 이어갔
다.
"병신같은 것들. 그 나찰 의식이 얼마나 지독한지 나는 들어 안
다. 아마 온몸의 정혈을 저 여귀들에게 남김없이 빨아 먹히고 강
시같이 됐었겠지. 아니 몸뚱이도 먹혔는지도 몰르지.그리고는.."
준후도 알겠다는듯 현암의 말을 받아 이어갔다.
"나중에 공력이 좀 높아지니 흑암천을 사칭하는 편이 낫겠다 싶
었겠지? 그리고 보니 전에 치른 나찰 의식을 무효화 하는 술법이
필요했고...그래서 일곱 등산객을 꼬여낸 거지? 마침 여자가 둘,
남자가 다섯, 한 명만 좀 기다리고 참으면 됐을테고.."
현암도 끄덕였다.
"그 한놈이 차에서 내 월향에 맞아 죽은 놈이군. 내 몸을 이용하
려 했던 모양인데, 두꺼비가 거위고기를 먹으려 하는 격이지."
"그래서...너희는...몸이 없으니 몸을 이용한 의식을 할 수 없어
서...그 가련한 사람들의 몸을 환령해서는..."
"흥! 인간이라는 것들! 모두다 마음속엔 악한 생각뿐이다! 우리
의식에 영광스럽게 쓰인 그 놈들의 마음에도 음심이 없었다면 어
찌 이리 일이 쉽게 되었을거냐?"
"닥쳐랏! 그러나 인간은 그를 극복할 수 있는 이성이 있고 믿는
마음과 사랑이 있다! 너희같이 추잡한 것들이나 그런 유혹을 이
기지 못하고 이런 추한 꼴이 되는 것이다!"
준후의 눈에 지나간 영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 손을 잡으세요..."
현암과 박신부는 준후의 양손을 잡았다. 그들의 눈에도 과거의
영상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미 혼을 빼앗긴 여섯 사람은 미쳐 날뛰고 있었다. 두 여자는
요사하게 웃으며 네 남자가 팔을 비틀어 묶어 천장에 매달고 범
하는데도, 팔뼈가 이그러져 퉁기는 데도 미친듯 웃고 있었다. 한
남자-그 사람은 환령술로 이미 몸이 반이상 제압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아, 그 남자는 박신부가 보았다는
일곱번째의 남자인 듯 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목이 터
지라 외치며 나머지 남자들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두명의 여자 중 하나가 그의 연인인듯 했다.
종국엔 돌을들고 손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네명의 남자들을 마
구 내려 쳤으나 네 남자 - 이미 귀신이 된 - 는 신경도 쓰지 않
고 제 볼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남자가 웃으며 (이미 볼일을 마친) 거의 실신해가는
일곱째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눈에서 붉은 빛이 뱀 혓바닥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뾰족한 큰 돌로 그 남자의 뒷통수
를.....
악몽과도 같은 광란이 지나고 아까 현암일행을 습격했던 것 같은
돌비가 쏟아져 내렸다. 네명의 남자 - 아니 인형들은 헤 벌어진
미소를 띈채로 온몸에 돌을 두들겨 맞고 무너져 내려갔다....
"으으으...이 마귀들아!!"
준후는 못볼것을 본 셈이었다. 그 나이에 이미 못볼일을 많이 보
았지만 이렇게 지독한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준후는 태어나서
이만큼 화가 나 본 적이 없었다.
현암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분노의 기가 일렁이
더니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월향을 쥔 오른손에 피가 와락 몰리
며 상처도 없는데 피가 손끝에서 배어나와 흘렀다. 주인의 피맛
을 본 월향이 길게 울었다...
"현아야...너도...이런 고통을 당했었겠지...?..현아야..."
박신부의 뇌리에 악령이 들려 시퍼렇게 얼굴이 일그러져 가던
미라의 모습이 떠 올랐다. 미라는 악령이 들려 비죽하게 이빨이
나와가는 입으로 울면서...이미 굵은 남자의 음성이 간간히 서껴
들리고 있었지만...의사 선생님 날 살려 달라고..살릴 수 없으면
빨리 죽여 달라고 울부 짖었다...박신부가 의사의 길을 버리고
오직 엑소시즘만을 위한 신부가 되게 하였던 그때의 기억...너무
도 무능력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그리고 분노
로 가득했던 그후로부터의 십년....
"더 지체말라! 저놈들은 너무 많이 봤다! 모조리 죽여버렷!"
우두머리 방사의 귀신이 소리를 질렀다. 나머지 다섯의 요귀가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 들었다.
현암의 입에서 장소성이 흐르며 순간 월향의 대답과 함께 검기
가 넉자를 뻗쳤다. 필생의 공력이었다. 준후의 몰아쥔 작은 두손
에서 브라흐마데바의 노란 번개와 인드라의 붉은 번개가 맑은 소
리를 내며 합쳐져 흰 번개를 이루며 눈부신 섬광을 이루어내기
시작했다. 박신부의 오오라막도 장대한 합창처럼 퍼져갔다.
"현암! 준후! 힘을 모으자! 퇴마진이다!"
박신부의 오오라가 준후의 등으로 밀려가고..
현암이 몸을 날렸다...
준후의 일갈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섬광이 양손에서 뻗어나가
월향의 끝에 엉기며...
순간 월향의 검기가 영롱한 흰빛을 띄며 여섯자를 뻗었다...
"타핫...!"
순간 온 방안을 가득 채운 검기가 벽이며 기둥을 가를것없이 가
르고 지나가면서 기둥이 두개 쓰러지고 벽이 터져 나갔다.
다섯의 귀신들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마치 폭죽처럼 그 자리
에서 터져 나가고, 둘은 김빠진 풍선처럼 뒤로 퉁겨나다가 팍!
소리를 내며 먼지처럼 기화 되어 버렸다....
현암은 풀썩 땅에 쓰러졌다. 입으로 왈칵 선혈이 몰려 나왔다.
퇴마합벽은 완벽히 이루어졌지만 그 충격을 받아 넘기기에는 인
간의 몸으론 무리였다. 온 몸의 기혈이 들끓고 눈앞에 노란 동그
라미들이 아른거리며 귀에서 웅웅소리가 울려퍼졌다. 월향이 슬
픈 듯 울고 있었다.....현암은 의식을 잃어갔다....아니, 그래서
는 안되는데..현암은 혀를 깨물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허나 몸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준후도 무리한 힘을 쓴 탓으로 얼굴이 백지장같이 희어져 있었
다. 입이 반쯤 벌어지고 헉헉거리는 호흡이 단내를 풍겼다. 준후
의 무릎이 휘청하는 것을 그래도 제일 형편이 나은 박신부가 감
싸 안았다.
"신부님...조...조심...아직 하나가...하나..."
준후가 정신을 잃었고 박신부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현암이 쓰러져 있었고, 방사의 영이 징그러운 미소를 띈
채 서 있었다...
"흐흐흐...이젠 기력이 없는가? 꽤 능력들이 세던데?"
녀석의 둘레에는 투명한 핏빛 막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풍선처럼 부풀어 갔다.
박신부는 준후를 안은 채 쓰러져 있는 현암에게로 갔다. 놈은 분
명 주술을 쓰고 있는 터인데, 현암이나 준후가 의식을 잃은 상태
에서 그에 대응 할 방법이뭔지 알 수 없었다. 박신부는 이를 악
물고 성경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박신부의 기도력에 의한 오오라막이 떨리기 시작했다. 놈의 핏
빛 기운이 밀어내는 힘은 지독했다. 더우기 사악한 것은 박신부
의 죄의식을 자꾸 들추어 내어 마음의 평정을 잃게 만드는데 있
었다.
- 네가 미라를 죽인거다...넌 그때 아무것도 못했지...낄낄낄..
- 아니다.아냐.
- 네가 네 목숨을 줄 수 있었는가? 있었는가? 있었는가?
박신부는 몸안의 힘이 터져 나가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어느새
잡념이 든 순간 놈의 기운이 박신부의 오오라를밀어내고 등쪽으
로 덮쳐 들고 있었다. 박신부의 이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조금씩
부서져 나갔다. 순간..준후의 가슴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까
의 두 여자의 혼을 가둔 부적...
박신부는 간신히 손을 뻗쳐 부적을 잡아 부적을 반으로 찢었다.
순간, 핏빛 기운이 떨리며 위력이 뚝 떨어졌다...
박신부는 고개를 들었다. 방사의 영은 허둥거리며 뒷걸음질을 치
고 있었고, 그 앞에는 일곱의 흰 영들이 서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바로 일곱째 남자의 영이었고, 한 여자의(이제는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소리를 내지 않았으나 그들이 말하는 것을 박신부는 느낄
수 있었다.
- 너는 우리의 영을 파멸시키고...
- 인륜을, 천륜을 저버리게 했으며...
- 영원히 암흑속에 가두려...
- 만약 저 아이의 자비심과...
- 사랑이 아니었으면...
- 우리는 아마도...
- 우리를 구원해 준 저들에게서 손을 떼라...
- 악행을 멈춰라...
"크핫핫핫핫핫...! 이 미천한 것들이! 수백년 공을 닦아온 내게
감히 ! "
방사의 영은 폭갈하며 사방으로 손을 휘젓자 무서운 기의 바람이
뻗어 나왔고, 흰 영들이 주춤거리며 물러 나는 것이 여겨졌다.
정말로 그 악령의 힘은 대단했다. 희생자의 영들은 간신히 버티
고는 있었으나 금새 밀려 흩어져 버릴 것 같았다.
"신부님...신부님..."
현암이 갸날프게 중얼거렸다.
"음...괜찮은가? 현암군!"
"신부님...놈은...색계를 범한 도사...월향을...월향이라면.."
박신부의 눈에 땅에 떨어진 월향이 보였다.
"월향의 원한과...일곱 영들...신부님의 힘이 합하면...아마..."
박신부는 지체하지 않고 월향을 집어 들었다. 선한 영이긴 하지
만 월향도 원한령이 봉인 된 검이라 박신부의 영력과 약간의 충
돌을 일으켜 작은비명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박신부는 손
이 데는 것도 아랑곳 않고 월향을 들어 방사의 영에게로 던졌다.
"캐애애액---!"
"꺄아아아아----"
방사의 영의 가슴에 꽂힌 월향이 울고 방사의 영도 무서운 비명
을 울렸다. 일곱영들이 박신부의 의도를 안 듯 방사의 영에 달려
들어 덮쳤고...
"캬아악! 나는 포기 할 수 없어! 수백년을 기다렸다---!"
방사의 영은 시커먼 기운을 흩뿌리며 일곱영을 퉁겨내려 했고..
박신부가 마지막 남은 힘을 오오라에 실어 그 일곱영의 뒤를 받
쳤다.
비등비등한 두 힘...허나 박신부의 기력이 떨어져 갔다.
순간 뒤에서 노란 번개가 쏘아져 왔다. 합쳐진 힘은 순간 검은
기운을 압도 했고...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악-----"
길게 끄는 비명과 함께 일곱영은 방사의 영을 덮쳐 땅속 깊숙히
사라져 갔다........
.....
박신부는 뒤를 돌아 보았다.
현암이 준후의 등에 손을 짚고 있었고 준후가 손목을 떨어뜨린채
양팔을 들고 있었다.
"우리도 아직 죽지는 않았다구요 머..."
준후가 웃으며 팔을 뚝 떨어 뜨렸다. 그리고는 현암과 함께 뒤로
벌렁 넘어져 그대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박신부도 체통을 잊고
뒤로 벌렁 들어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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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백산장이 타오르고 있었다. 새벽이슬을 온통 머금은 측백나무
숲도 이젠 더 이상 요기롭게 느껴지진 않았다.
"자네, 그러다 방화죄로 걸리면 어쩌려고?"
박신부가 손을 탁탁털고 있는 현암에게 농담으로 말했다.
"까짓거 몸으로 때우죠 머, 하하하하"
"그나저나 나는 큰 죄를 졌네. 잡신의 징표를 이용해서 사마를
퇴치하다니...대체 누가 이 가련한 신부의 영혼의 죄를 덜 수 있
을런지..."
"신부님도 그럼 몸으로 때우셔야죠 머, 하하하..
그나저나 계속 이런 놈들만 나온다면 전 퇴마사 사양하겠읍니
다. 이번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셋은 누구의 눈에 띄지 않도록 길 없는 곳으로 하산하기 시작했
다. 준후는 뒤를 돌아 보았다. 측백산장은 불길에 싸여 있으나
험악하게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밝고 따뜻하게 보였다. 불길 속
에서 일곱명의 다정해 보이는 얼굴이 보였다. 셋의 뒷모습을 보
며 작별인사를 하는 듯 했다...특히 연인이었던 듯한 남녀의 얼
굴이 준후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극락 왕생 하세요...누나들, 형들..."
"준후야 뭐해? 어서 가자."
준후는 몸을 돌렸다. 시간이 지나면 세상은 이제 이 사건을 미결
사건으로 잊어버릴 것이나 이 세사람과 구원을 받은 영들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었다. 또 인간들과 착한 영들을 위해서도 이 퇴마
행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었다...
(*** 1부 완결 입니다....하하하...재미있으셨는지 모르겠군요.
이번 주제가 좀 황당하게 전개되는 바람에 좀 무협지같아졌는데,
다음 2부 - 어머니의 자장가 - 는 좀 사실적인 면을 강조한, 슬
픈 이야기가 될 예정입니다...많이 성원 해 주세요.....***)
* 주1) 원시천존 : 도교의 최고신으로 영보천존, 도덕천존과 함
께 최상좌(옥황상제 보다 위임)에 앉은 신.
* 주2) 십이천 : 불교에서 인간을 수호하는 열두신. 사방,사유
의 팔천에 상,하의 2천과 일월의 2천을 더함.
제석천,화천,염마천,나찰천,수천,풍천,비사문천
,이사나천,범천,지천,일천,월천의 열 둘.
[퇴마록 7편 누락부 보충]..아이고 죄송.. 08/02 01:44 36 line
거기에 부적을 뜯고 난 후 일곱 영이 출현하는데,
원래 부적에 봉인 된 영은 여자 둘 뿐이었죠.
그리고 해꼬지를 당한 영은 여섯이었고요...
좀 누락 된 것 같은데 거기서 일곱째 남자로 나오는 영이
자기의 애인이었던 여자의 영이 풀려 나자 나머지의 영을 모아
은혜를 갚으려 나타난 겁니다...
그 내용을 말미에 넣으려 했는데 깜박 했군요...
앞으로의 글엔 이런 실수 하지 않을 것을 다짐 드리며...
참고로 문의가 많아 몇가지에만 실제의 예를 드는데,
여기 나오는 도가의 비술들은 주로 '포박자'라는 책에 나온 옛 실화를
참조했고, 불가의 범어들은 시스템의 스펠링의 한계 때문에 하이폰이나
기타 기호들이 빠져 있읍니다. 심령 현상 중 투석의 사례는 우리나라의
도깨비 이야기나 아르헨티나의 심령 투석 사건등에 예가 있으며,
성수나 기도에 의해 집의 벽에 연기가 일거나 피를 토하는 것등은
주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흔하게 일어납니다.(아미티블가 13번지의 흉가등)
월향검의 사례는 귀물이 법기화 되는 예로 역시 중국이나 그쪽 영향권에
있는 나라들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밤이 되면 징징 우는 칼은 그 칼의
완성시 피를 먹였기 때문. 즉 생명을 봉인한다는 의미임) 현암의 차에
맺혔던 데드 마스크의 사례 또한 영국, 미국등에서 자주 관찰되며 실제
그러한 일은 심령사진(고급의) 과 비슷한 경우 입니다.
기타 아주 기초적인 것을 제외한 주문들은 완전한 저의 창작문이며
실제와 같은 자도 하나 없는 것도 밝힙니다.
- 퇴마록 2부 1편... 어머니의 자장가...
1. 악몽..
윤영은 줄다리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어딘지 모를 곳을.. 어두워
서 사방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짙은 회색 같기도 하고, 어쩌면
푸른 남색, 아니면 거의 검정에 가까운 핏빛 띈 붉은 색의 주변..
친근하다는 느낌도 들었으나 음울하고 답답하여 무언지 조바심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었다...
윤영은 그 곳에서 빨리 나가야만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의 힘이 윤영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래서 헉
헉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윤영은 달리고 있었다.
노랫소리...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리 높지 않은 여자의 음성..
윤영은 웬지 힘이 났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깨닫
게 되었다. 기분이 좋아진 윤영은 웬지 콧노래라도 부를 듯이 흥겨
운 기분이 되었다. 발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흐르
는 땀을 손으로 훔쳐냈다...
"이제 갈 길은 얼마 남지 않았을 거야..."
노랫소리는 잔잔히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니, 그건 노래라
기 보다는 기분 좋은 흥얼거림..무언지 알아 들을 수도 없고, 또
알아들을 필요도 없는 따사로운 울림이었다.
갑자기 노래 소리가 뚝 그치며 날카로운 비명소리같은 것이 울려
퍼졌고 주변이 온통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의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저 뒤에서 폭풍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다가오고 있는
건 거대한 해일같은...
발 밑의 줄다리가 요동을 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윤영은 넘어질
뻔 하다가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출렁거리며 요동을 치던 줄다리가 진저리를 치는듯 하더니 허물어
져 내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
마치 말발굽 소리와 같이 윤영의 심장은 펄떡 거렸다. 저만치 앞에
서 갑자기 하얀 빛이 보이고...무언가 밀어내려는 듯한 강한 힘이
윤영의 전신에 달겨들어 그녀를 쥐어짜려는 듯 비틀었다. 무서운
고통이었으나 윤영은 이를 악물고 뛰었고...그녀의 뒤에 놓였던 줄
다리는 줄이 토막나며 마구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심장 소리...쿵쾅거리는 맥박...귀에 울리는 웅웅 소리와...바로
발뒤꿈치까지 무너져 내리는 다리와 또...온 몸을 잡아 누르는 듯
한...그...
윤영은 환한 빛이 비추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발 밑이 허전했다.
그곳은 끝없는 절벽이었다.
윤영은 이번엔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없이...한없이...
무언가 모를 것이 손에 잡혔다. 윤영은 거기에 매달렸다. 무언가가
다리를 잡아당겼다. 버티기 힘들었다...그러나..버텨 내야만 했
다.. 윤영은 이를 악물며 몸을 끌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윤영의 허리는 그 힘을 버텨내지 못했다. 견디지 못하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허리가 탁 떨어져 나가 다
리가 저만치 떨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찢어진 것이 아니라 무언가
에 잘린 듯이 탁 떨어지는 느낌, 아프지도 않았다. 다시 아래를 보
니 자신의 두다리는 멀쩡히 원래대로 붙어 있었다. 윤영은 안도하
며 머리 위, 자기가 움켜잡은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혀를 빼물고 있는 눈을 감은채 허공에 떠있는 윤영
자신의 머리...그 머리의 두 눈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
"아아악!"
윤영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이불마저도 축축해져 있었다.
'또 그꿈... 아아 이젠 너무 싫어!!!'
책상위의 시계가 울었다. 새벽 3시 30분...
어김없이 같은 시간이었다..아니 이젠 30분씩 빨라지고 있었다..
벌써 8년째 윤영은 그 꿈을 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금요일밤이면
언제나... 다만 요즈음은 시간만이 주기적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8년동안 그 꿈은 6시에 윤영을 깨게 만들었다. 그리고 5주 전부터
는....정확히 30분씩 시간이 당겨지고 있었다. 정확히...
" 이젠 더 이상 싫어! 그만! 그만! "
이상하게도 잠을 자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매주 금요일이면 의식이
몽롱해지고 신기하게도 무서운 기억이 잊혀져서 뭣에 홀린듯이 잠
자리에 들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윤영은 그런 자신이 싫었다. 그
리고 무엇보다도 이젠 너무나도 무서웠다...
윤영은 베게에 엎어져 목을 놓아 울어댔다. 이 시간이 당겨지는 것
이 너무나도 기분나빴다. 언제까지 당겨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언
젠가 정해진 시간에 도달하게 되면 상상할수 없을 불길한 일이 일
어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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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은 가벼운 마음으로 약속장소를 향하고 있었다. 뭐 이번일은
별것이 아닐듯한 느낌이었다.
'음. 이름이 양윤영이라 했지? 21살이고...와 죽인다. 지긋지긋한
귀신들 일에서 벗어나 아리따운 젊은 아가씨의 일을 맡게된 너 행
운아여, 앞날에 축복있으라. 혹 이 기회에 노총각 신세를 면하게
될지도...하하하'
현암의 생각으로는 기껏해야 가위눌리는 정도의 일이거나, 잘해봐
야 부유령(浮遊靈) 또는 몽마(夢魔) 몇마리 정도가 장난치는 일일
거라 여겨졌다. 이번 기회에 멋있게 보이면 어쩌면...
'아이고 내가 정신이 나갔나? 천벌받을 생각만 골라서 하네. 이런
일을 사리사욕에 이용하면 천벌을 받는 법인데...에이고 만약 예쁘
면 천벌 까짓거 받지머!'
이런 따위 생각을 하면서 현암은 카페의 문을 열었다. 커피향이
그윽한데에 코렐리가 부르는 '별은 빛나건만'이 나직이 울리고 있
었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현암은 뒤돌아 앉아있는 여자에게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다가갔다.
음...실망은 아니었지만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썩 미인으로 보이
지는 않았다. 아니, 가만보니 퍽 미인이었다. 그러나 안색이 너무
나빴다..그리고 얼굴에 온통 우울한 그림자가 짙게 깔려서 웃는 얼
굴로 마주 대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양윤영씨...?"
"아..예..제가 바로..."
"아 예. 전 이현암이라 합니다.."
현암은 잠시 쭈삣했다. 얼굴 복판에서부터 푸른 기운이 뻗쳐 이마
위로 거슬러 가려는 듯한 기운이 보였다. 곧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
에게서 흔히 보이는 관상의 징표였다...
현암의 뇌리에서 잡념이 싹 지워지고 입가의 웃음이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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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안계셔요. 아버님은 제가 뱃속에 있을때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제가 열세살때 돌아가셨지요. 그후론 내내 할머님과 함께
살았답니다."
"아 예. 형제분은?"
"없어요. 제가 외동딸이죠."
"혹시 돌아가신 분은? 음..그러니 어릴때나 옛날에 돌아가신.."
"제 기억으론 없어요. 음..그리고..어머님은 그런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으셨어요. 저도 전에 한 번 장난으로 난 왜 오빠나 언니가
없냐고 물어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어머님은 너에겐 없단다..라고
하시고는 막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그래서 그 후론 물어볼 수도 없
었어요.....근데 그런건 왜...? "
" 아 아뇨. 별 거 아닙니다. 흠..근데 할머님과는 원래부터 같이
사셨나요?"
윤영은 주저하며 간산히말을 이어갔다. 좀 부끄러운 듯 했다.
"아뇨. 할머님은 어머니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셨어요. 그
래서 원래 분가하고 거의 의절하고 사셨죠. 그러다 아버님이 급병
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저를 낳은 후는 가엾게 여기셨는지 잘
대해 주셨어요."
"자꾸 집안 얘기를 물어서 죄송합니다만, 원래 꿈에 대한 것은 그
사람이 자란 환경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답니다. 그래서 묻는 것
이니 용서하세요."
"예. 괜찮습니다."
"그러면 꿈에 대한 얘기를 해 보시겠읍니까?"
윤영은 가끔씩 몸서리를 쳐가며 그 저주받을꿈에 대한 이야기를
현암에게 해 주었다. 묘사가 상당히 세세해서 현암이 꿈을 직접 꾸
고 있는 것 같았다.
'음. 하긴 8년이면 400번은 같은 꿈을 꾼 셈이니 다 외우고도 남겠
지...'
현암은 가볍게 들어 넘겼다. 현암에겐 사실 꿈 얘기가 별 문제를
갖는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무서운 꿈을 꾼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 무서운 꿈을 꾸게 만드는 요인이 중요한 것이
고, 사람을 죽게 만들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 경우는 누가 봐
도 좀 감을 잡겠지만)
현암은 마지막으로 손금을 보고 생년월일을 대강맞추어 보았다.
'절대 단명할 운은 아닌데...분명 마가 낀 것이 틀림 없군.'
준후가 있었다면 단번에 영사(靈寫)하여 알아보았겠지만 불행히도
준후는 참선하여 공력을 키우려고 어느 산엔가 쳐박혀서 수련 중이
었고, 박신부는 무슨 종교관계 일인가 뭔가로 연락도 되질 않았다.
할수없이 이번일은 현암 혼자 처리해야 했다.
"음. 매번 그 꿈을 꾸는 시간이 틀림없다면 일은 쉽습니다. 제가
말하는 대로 일단 다음주 금요일에 준비를 해 놓으세요. 괜찮으시
다면 그럼 이만.."
"와 주실 수 있으세요? 제발요.."
"음? 금요일에요?"
"예. 밤에요. 인젠 정말 잠들고 싶지 않아요.."
음. 멀쩡한 여자가 밤에 찾아와 달라니...생각하던 현암은 생각을
고쳐 먹었다. 윤영의 눈빛은 너무나 애처로왔다. 사냥군 앞의 산토
끼의 눈 같았다고 할까? 현암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 내가 돕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는다...'
좀 껄끄러웠지만 현암은 입을 열어 답했다.
" 예... 가 보기로 하지요.."
금요일엔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단순한 꿈인지 아니면 귀
신의 장난인지..현암에게 이 일은 단순한 악몽이 아닐거란 확신이
들었다.
[퇴마록 2부] 어머니의 자장가...2편 08/04 23:59 271 line
(* 음 퇴마록을 가명으로 진행하다 보니 혹 이름이 같은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군요. 허나 여기의 일은 모두 허구이고(하이텔
사용자들에게는) 만약 이름이 같은 분이 지금까지 계셨다면
그건 별거 아닌 우연의 일치이니 오해 없으시길......
3부부터는 아예 제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붙여 진행하겠읍
니다. 하하하 유명해지고 싶으신 분들 자원도 받습니다..*)
- 퇴마록 2부 2편........어머니의 자장가....
2. 동몽주(同夢呪)
현암은 이틀동안 준후를 찾아 헤맸다. 설악산 어딘가 수련하러 간
다던 말 한마디가 단서의 전부였다. 사실 좀 황당한 일이었으나 어
쩔 수가 없었다. 준후에게서 동몽주(同夢呪)를 배워야 했다...그것
만이 현재 윤영의 상태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동몽주는 일종의 주술로 잠들어 있는 사람의 꿈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끔 하는 주술이었다. 별로 어려운 주술은 아니었으나 단,
꿈의 내용이 너무 강하거나 잠든 사람이 깨지 않으면 주술의 시전
자도 깨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준후를 가르친 준후의
아버님은 준후에게도 이 주는 잘 앞뒤를 재어본 후에 사용하라고
생전에 당부했던 바가 있는 터였다.
이틀간의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산행끝에 현암은 준후가 수련하고
있는 산비탈의 동굴을 찾아내었다. 거의 잠도 자지 못하고 지칠대
로 지쳐 파김치같이 되어버린 현암을 준후는 자기 수련을 방해한다
고 막 내쫓으려 했다. 결국 사정얘기를 다 하고난 후에야 준후는
삐치지 않은 듯한 얼굴이 되었으나...
"형. 정말 믿어두 되요?"
"뭘?"
"이거 절대 이상한 일에 써먹는거 아니지?"
"무슨 이상한 일?"
"아니 있쟎수 왜, 그 아가씨 미인이라면서? 그러니 현몽한 듯 나
서서..."
"뭐? 현몽이라구? 그럼 그 주를 외우면 상대의 꿈속에 나오게 될
수도 있단거냐?"
"그것도 가능하죠...물론..허나 아무래도 형은 응큼한 것 같아 아
예 이 동몽주는 가르쳐 주기가 뭣한걸?"
"뭐 임마? 날 뭘로 보고 그러는 거야?"
"뭘로 보긴 뭘로 보우? 늑대지."
"뭐야 임마?"
"아이고 이거 아동학대다! 알았어요 알았어! 근데 진짜 조심해야
돼요. 현암형이야 물론 도가 기공이 쬐끔 있으니 괜찮겠지만, 사심
을 갖거나 만약 그쪽의 영이 형이 보고있다는 걸 알아내고 해꼬지
를 하려 하면 형은 당하는 수밖엔 없어요.그래도 할래요?"
"음...내가 돕지 않으면 안돼."
"그럼 이걸 보고 익혀요. 절대 조심하고요..."
준후는 보따리를 뒤적뒤적하더니 현암에게 케케묵은 것같은 자그
마한 책 하나를 던져주었다...제목은 '몽몽결(夢夢訣)'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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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이 그 주를 익히는데는 3일이란 시간이 걸렸다. 허나 실습해
볼 시간이나 여건이 안되었다. 준후는 잠을 자지 않고 계속 중얼중
얼하며 염불 비슷한 것만 읊조리고 있었던 것이다. 잠을 자는 상대
가 주변에 있어야 같은 꿈을 꾸건 뭘하든 할 것 아닌가?
현암은 고속버스에 몸을 맡겨 서울에 도착했다. 기분이 좋았다.
본의 아니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꿈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잠든 사람에게 가볍게 손가락 끝만 대고 조용히 운기의 상태로 들
어간 후 주만 나직히 외우면 되었다. 과연 그사람이 꿈에서 목마를
타고 총싸움을 하며 노는것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나이도 지긋
한 사람이 원..) 이제 준비는 다 된셈이었다. 일이 현암의 생각대
로만 되어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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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이 되었다. 현암은 윤영의 집으로 가서 벧을 눌렀다.
일부러 늦은 시간에 간 것이다. 윤영의 할머님이 조금은 의심스러
운 듯한 눈빛으로 문을 열어 주었고(아마도 귀신 어쩌고를 쫓는 사
람치겅고 현암은 생각했다..), 이미
윤영은 잠들어 있다고 말해 주었다. 현암은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약간 넘어 있었다.
아마도 꿈을 꾸는 시간은 채 10뵀서
윤영이 악몽을 꾸기 시작한다 해도 아직 2시간 반 정도의 시간은
남아있는셈이었다.
현암은 우선 집안의 기운을 살폈으나 별다른 요기나 마기는 없었
다. 집안 곳곳엔 조금은 낡은 듯한, 그러나 예쁜 장식물들이 많이
있었고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여자 둘만이 사는 집이라 퀴
퀴한 현암의 집과는 우선 냄새부터 달랐다. 현암은 싱겁게 웃다가
벽에 붙은 사진에 눈을 돌렸다....
아마 어릴적의 윤영이 어머니와 찍은 사진인듯 했다. 어릴때의 윤
영의 모습은 퍽 깜찍했으나 현암은 문득 그 사진에 나와있는 사람
이 셋이란 생각이 들었다. 잠시 눈을 씻고 보았지만 여전히 찍혀
있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퍽 자상했을 듯한, 그러나 눈가에 무언지
깊은 슬픔을 담고 있는듯한 어머니가 귀여운 딸아이를 안고있는 모
습....그러나 그 아이의 뒤에는 분명히...
현암은 사진을 좀 더 눈에 바짝들이대고 뚫어지게 응시했다. 분명
히 윤영의 모습 뒤에 무언가가 보였다. 푸르스름한 듯한...마치 윤
영의 몸에서 무언가 발산되려고 하는, 아니, 안으로 갈무리하려고
하는 듯한 흔적이...
"윤영이 에미라오. 저 가엾은 것만 남겨두고 혼자 훌쩍 가버렸
지... 에이고 무정한 것..."
눈치 없는 할머니의 말이 사진에서 현암의 시선을 떼어냈다.
"아...예..."
"그나저나 우리 윤영이한테 어떻게 해야 되겠수? 이건 하루 이틀도
아니고...이젠 내가 무서워서 미칠 지경이라오.."
"아.그렇죠...한 번 윤영씨 방을 둘러 보겠읍니다. 일단 잠이 들었
다니 다행이군요."
"아까부터 기다리다가 잠이 든 모양이우. 불쌍한 것 같으니..."
"예...예...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저와 같이 가시되 절대 소리는
내지 마세요. 윤영씨가 잠이 깨면 허사가 되니까요.."
현암은 조심스레 아직도 의아한 듯한 눈빛의 할머니와 함께 윤영
의 방으로 들어갔다. 윤영은 기다리고 있었던 듯, 앉은 채 벽에 기
대어 잠들고 있었다. 호흡은 가지런 했고, 악몽과는 거리가 먼, 편
안한 잠을 취하고 있는듯 했다.
"이그 일주일만에 잠 든 거에요... 통 잠을 못 이루다가.."
"아 예. 조용히...쉿!"
윤영은 쌔근쌔근 잠을 깨지 않았다. 표정이 참 천진했다. 퇴마행
이후 여러 경험을 했지만, 낯모르는 규수의 방에서 잘 자고응 하는 짓이 많
고, 가끔 자신이 유체이탈되어서
가위에 눌리거나 하는 일도 많았지만, 이건 분명 윤영과는 다른 무
언가의 영이었고, 이렇게 주기적으로 침범한다면 무슨 의도가 있음
이 분명하건만, 아무런 의도나 의식이 느껴지지 않으니, 현암은 환
장할 지경이었다..
'음..이거 무슨 곡절이 단단히 있나보군... 일단 윤영씨의 꿈속으
로 들어가야 뭘 알아내도 알아낼 수 있겠군...'
작심한 현암은 손수건을 꺼내 손에 들고 결가부좌를 하고 윤영옆
에 앉았다. 그리고 손짓으로 할머니를 불러 준비한 금줄을 주며 귓
속말로 당부했다.
"이제 전 윤영씨의 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저를 잘 보시
다가 제가 이 손수건을 떨어뜨리면 저도 잠이 든 것이니, 이 금줄
을 조용히 사방 벽에 둘러 주세요."
할머니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는 못하는듯 했지만 하여간 긴
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절대 소리를 내시면 안됩니다. 채 그 문제의 꿈을 꾸기도
전에 윤영씨가 잠을 깨거나 그 귀신이 제가 보고있다는 사실을 알
게 된다면 사실을 알아낼 수 없으니까요...아직은 윤영씨가 그런
꿈을 계속 꾸게되는 이유를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할머니는 겁에 가득 질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할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현암 자신은 윤영과 같이 잠에 빠질테니 금줄을 칠
수 없었고, 그 금줄을 쳐야 귀신이 마음대로 도망치지 못하고 이
방에서 맴돌게 될 것이었다. 그다음 현암이 잠을 깨어서 놈을 퇴치
하면 되는건데...
"절대 겁먹지 마시고, 혹 저나 윤영씨가 잠꼬대를 하거나 몸부림
을 치더라도 깨우시면 안됩니다. 단지 이..."
현암은 월향을 꺼내 자신의 앞에 놓았다.
"...이 장도칼이 소리내어 울면 위험해 진 것이니, 그땐 저를 -
꼭 저만 깨우셔야 합니다. - 깨우세요...."
현암은 당부를 마치고 한손에 손수건을 든 채로 눈을 감고 동몽주
를 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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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의 밝은 빛과 몇번의 어두움...긴 휴식...평안...안온...
윤영의 꿈은 단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현암에게는 아까의 그
기운이 윤영의 꿈으로 점점 퍼져나가는 것도 느껴졌다. 조만간 시
작될 터였다.
돌연 현암의 눈에 윤영이 말했던, 어둡고 붉은 동굴같은 곳의 광
경이 들어왔다. 저 아래에 줄다리가 있고, 그 위에 윤영이 달리고
있는 것도 보였다.
'시작이구나.'
현암은 허공에 몸을 숨긴채, 날아서 윤영의 뒤를 따랐다. 꿈은 본
래 의식의 세계이므로 자기가 상상하는 것이 모두 가능하다. 단 꿈
을 꾸고 있는 사람 자신은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잘 분간을 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마음대로 자기 의도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동몽주의 능력은 타인의 꿈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뿐 아니라 꿈
속에서 평상시의 정신을 그대로 가질 수 있게 한다는데도 있었다.
노랫소리...노랫소리 비슷한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윤영이 말한 것
과 그대로였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고...마치 먼곳, 아니 막
을 겹겹이 친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현암은 그 곡조를 단단
히 머리속에 기억해 두었다.
아래쪽의 윤영은 정말 전에 말했던 그대로 편안함을 느끼는 듯했
다. 윤영이 자리에 멈추어서고...뒤에서 핏빛 해일이 밀려오기 시
작했다. 죽어라고 달리는 윤영의 모습이 너무 안스러워 보여서 부
지불식간에 그리 날아내리려던 현암은 간신히 준후의 말을 상기해
내고 행동을 자제 했다.
줄다리가 거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윤영은 기를 쓰고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떨어져 내렸다.
현암은, 아니 현암의 의식은 날아서 떨어져 내려가는 윤영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윤영이 떨어져 가는 저 아래에 보이는 것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솟구쳐 올라오고있는 또하나의 윤영...또 하나의 윤영의 모습
이었다....현암은 상상치 못했던 광경에 머리털이 쭈빗해 지는 듯
했다.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윤영은 무심코 위로 솟구치던 윤영의 머리
를 잡았다. 위로 올라가던 윤영의 몸이 찢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찢어진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윤영씨가 본 것이 저거였구나. 그래서 자기 몸이 찢어진 걸로 착
각한 거군! 그럼 저게 아까의 그 기운?'
현암은 의식을 조종해 눈부신 흰빛을 발하는 절벽아래로 내려갔
다. 거기에 있는것은...
거대한 검은 손이 떨어진 윤영을 받쳐들고 있었다. 하반신만 떨어
진 것 같았는데 부서진 몸이 거의 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윤영의 얼굴이 분명했고...현암은 치를 떨며 산산히 부서진 윤영의
몸으로 향하려 했는데..위에서 또 하나의 윤영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현암의 의식은 무언가의 힘에 밀려 다시 현암의 몸으로 들
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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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은 잠에서 깨어 할머니를 부둥켜 안고 한 없이 울고 있었다.
현암은 망연했다.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월향은 울지 않았다는 것
이다. 그럼 사악한 기운은 없었다는 것이...?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윤영이가 어떤 처지인지요!"
할머니가 현암을 다그쳐댔다.
"말 해 드리죠. 완전히는 저도 알 수 없읍니다만... 그 꿈의 내용
은 대강 감이 잡힙니다..."
현암은 윗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사간은 정확하게도 3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 퇴마록 2부 3편...어머니의 자장가
3. 부활
윤영은 얼굴을 감싸쥔 채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현암은 그런 윤
영을 그냥 내버려 둔채 윤영의 꿈에 대한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윤영씨의 꿈은...아 그냥 듣기만 하세요...뭔가 중요한 것을 암시
하고 있읍니다. 아마도 윤영씨의 태어나던 때의 상황을 거의 그대
로 보여주는 것 같군요..."
"태어날 때의 상황이요?"
"예..그 어둡고 붉은 동굴은 어머님의 태(胎)를 의미합니다. 또 그
줄다리는 탯줄의 기억이 바뀌어 보이는 것 같군요. 윤영씨가 그 안
에 있을때, 무언지는 모르지만 급히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 버
릴수 없다고 하셨죠?"
"예...맞아요.."
"그건 바로 탄생의 순간을 나타내는 겁니다. 뒤에서 해일같이 밀려
오던 것은 아마 양수일거고, 줄다리가 끊어지는 건 탯줄이 끊어지
는 것을 의미하구요. 밝은 빛이 보였을 때, 고통을 느낀 건 외부
기압에 의해 첫 태어난 신생아(하다못해 알에서 태어나는 새들 조
차도)는 강하게 느끼는 겁니다..."
"음..그런데 왜 그꿈이..? 저는 물론 그런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데요?"
"음..꼭 의식적으로 기억하진 못하더라도 사람의 잠재의식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죠. 그리고 꿈에서는 그 잠재의식이 자
연히 나타나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그러니 어릴때의 일같은 건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
데요? 꿈을 꾼 기억이 없어요.."
"아니요, 많은 꿈을 꾸셨을 겁니다. 허나 그 잠재의식속의 활동이
라던가 하는건 보통 일상의 활동에 비해 너무 자유롭기 때문에 잠
을 깨는 바로 그 순간에 이성(理性)이라는 존재가 그 기억을 못하
게 방해하는 거지요...그런 꿈이 기억나게 되는 것은 그 꿈의 내용
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을만큼 강렬하거나, 뭔가 중요한 내
용을 가지고 있을때에만 가능한 겁니다."
"그러면 제 꿈은 중요한 건가요?"
현암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음...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심각합니다. 그건 윤영씨 혼자만의
꿈이 아니었어요..."
"예? 뭐라구요?"
윤영은 겁에 질려 자지러질 듯 했다.
"놀라시진 마세요...제 말을 일단 들으시고요..자 진정하시고..."
윤영은 다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그 순간 윤영의 눈가에
이상한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현암은 알지못했다.
" 할머님? 윤영씨는 혹시 쌍둥이로 태어났던 것이 아닙니까?"
이번엔 윤영의 할머니가 깜짝 놀랐다.
"뭐요? 아녜요. 전 그런 말 들은 적 없우...그 때 애를 가졌다구
얘기만 들었지, 가 본 적은 없다우. 난 걔네들이 결혼 하는 것 애
초부터 몹시 반대했었으니...거의 의절하고 살았다구요..나중에 얘
애비가 죽은 후에는 가엾고 불쌍해서 같이 지내긴 했지만.."
"정말 아니었나요? 혹시 윤영씨의 쌍동이인 분..이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두거나 해서 모르시는 건 아닌가요?"
"그거야 알 수 없지만...그럴리가 있겠어요?"
"아니, 전 윤영씨의 꿈속에서 또 다른 윤영씨를 보았읍니다. 그건
보통 꿈속에서 몸이 둘이 되거나 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즉 꿈에서
는 꿈꾸는 사람의 생각만 가시화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은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저는 그 꿈속에서 다른 윤영씨의 모습을..그것도
지금 여기의 윤영씨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그런 모습을 봤던 겁
니다. 그건 지금 여기의 윤영씨의 꿈이 아니었어요.."
윤영은 고개를 파묻고 엎드려 버렸다. 할머니는 겁에 질려 눈빛이
멍해졌다. 현암은 이야기를 그만 둘까 생각도 해 보았으나,당장은
충격이 좀 오더라도 할 말은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고쳐 먹었
다.
" 아무래도 윤영씨에겐 다른 쌍동이 형제가 있었을 테고, 무슨 이
유에선지 그 형제는 태어나자마자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분의 영은 그걸 채 알지 못하고 윤영씨의 몸에 들어가 있는 것
이죠. 그래서 어느 주기가 되면 그때의 악몽...(그때 윤영씨의 형
제분은 목숨을 잃었을테니까 그 기억은 악몽밖에 될 수 없겠죠..)
을 되살리는 것이고 거기에 윤영씨도 같이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말려든다면..."
현암의 표정이 심각해 졌다.
"제 생각이 틀릴지도 모르니 오해는 하지 말고 들으세요..
그 다른 하나의 윤영씨는 태어나자마자 목숨을 잃은 사람이죠. 그
런 상태에서 꿈을 꿀만한 기억은 무엇이 있겠읍니까?"
"음..죽음...?"
윤영이 무서운듯 몸을 움츠리며 방 구석으로 갔다. 현암은 신경쓰
지 않고 자기의 추리를 맞추는데 온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예. 주기적으로 강렬한 죽음에의 공포를 그리고 있는 겁니다. 그
리고 점차 그에 접근해 가는 거죠...아마도 그 시간에 도달하게 되
면 윤영씨마저 위험해 질지도 모르죠. 윤영씨의 탄생시간을 알고
계십니까? 할머님?"
"음...그게...그러니까...축시 말...세시라고 얘 어미에게..들었
던..."
무언가 모를 공포에 질려있던 할머님이 갑자기 입을 벌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예? 축시...새벽 세시라면 이미..."
갑자기 뒤에서 윤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잘 말했어, 젊은 친구! 고맙군!"
현암의 뒤통수에 무언가가 부딪혀 와장창 깨져 나갔고, 놀라 뒤로
넘어지는 할머니의 얼굴과....눈꼬리가 치켜져 올라간 윤영의 얼굴
이 빙글빙글 눈앞에서 맴도는 것을 보면서....현암은 의식을 잃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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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현암은 늘어져 내리는 눈꺼풀을 간신히
치켜 들었다. 몸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뭔가에 묶여 있는 듯해서
기공을 돌려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질길까하
여 내려다 보니 바로 자기가 가져온 금줄이었다. 암담한 느낌이었
다. 이 금줄은 많은 주문과 공을 들여 준후가 만든 것으로, 여기는
모든 영적인 힘을 소실 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현암의 기공은 정통
파였지만, 그것마저도 이 금줄은 흡수해 버리는 것이었다.
현암의 뒷통수와 뒷덜미가 축축한 듯 했다. 아마 머리가 찢어진
듯 했다. 할머니는 한대 맞은 건지 아니면 놀라 기절한 건지는 모
르지만 하여간 세상모르고 누워 있었다. 코까지 고는걸로 봐서 기
절이 곧장 잠으로 연결 되었는지도 몰랐다. 어이가 없었다. 현암은
월향이 걱정되었다. 월향도 귀물(鬼物)이라 금줄에 닿으면 좋지 못
할 것이었다.두리번 거리며 살펴보니, 다행히도 월향은 저만치 떨
어진 채 그대로 있었다. 그리로 기어가 볼까 하고 있는데 문이 열
리더니 윤영, 아니 누군가에게 영을 제압당한 것이 틀림없는 윤영
의 몸이 나타났다.
"악랄한 것! 넌 누구냐?"
윤영, 아니 윤영의 얼굴이 씩 미소를 지었다. 요기롭거나 사악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뭔가 장난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 음..난 주영이라고 해.."
"...주영...?"
"음. 윤영이 계집애를 찾는가 본데, 윤영이는 자고 있어...푹 자
게 놔둘거야.."
현암의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윤영씰, 아니 윤영씨의 혼령을 어떻게 했지?"
"음? 아..자고 있다니깐..내가 자고 있던 것 처럼...후후후..
아므든 고마웠어. 나에게 모든걸 깨닫게 해 줘서..그리고 내가
다시 몸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줘서..."
현암은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내가 도왔다고? 내가 뭘했기에?"
윤영, 아니 주영은 기분이 좋은 듯 계속 웃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
도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이처럼 잔인
한 면도 숨어있을 수 있다는 걸 현암은 알았다. 잠자리의 날개를
조금씩 뜯어내고 다리를 하나씩 뽑고 배를 조금씩, 금방 죽지 않을
정도로 갉아내며 즐거워하는 아니...그 잠자리가 윤영씨, 아니 나
라면...
"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어. 그냥 잠만 잤어. 이상하게 난
윤영이의 안에 그대로 있을 수 있었어. 거기서 잤어. 그냥 잤어...
윤영이가 뭘하는진 다 알 수 있었지만...난 그냥 보기만 했어...그
리고 잤어....계속..."
주영의 눈이 멍하니 허공을 쳐다 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다시금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네가 내 꿈까지 가르쳐 줬어. 난 네가 그 얘기를 할 적에
윤영이 등 뒤에 숨어 있었지. 네가 쳐다보는 바람에 나도 깰 수 있
었던 거야..."
현암은 윤영의 꿈속에서 의식을 날려 주영의 모습을 봤던 일을 후
회했다. 주영의 숨어있던 영은 그 때 인기척을 느끼고 오랜동안의
잠에서 깨어난 것이 분명했다.
"네가 우리는 쌍동이였다는 걸 내게 다시 기억나게 해 주었지. 그
래. 윤영이의 몸은 내것도 되는거야. "
"그런걸 어떻게 알았지?"
"윤영이는 세상 사람들속에 살면서 많이 잊어 버렸을테지만, 나는
잠만 자고 있었지...그래...윤영이의 머리를 이용해 볼까...그래
난 귀신이었겠지..그래서 그런건 배우지 않아도 다 알아...태어나
면서 우는 법을 알고 숨 쉬는 법을 알듯이..."
현암은 한숨을 내 쉬었다. 어떤 생명이라도 그 생존의 방법은 알
고 있는 법이다. 하물며 영과 같은 순수한 지성체가 그런 것을 못
할리 없었다. 인간도 다 알고는 있다. 저 깊숙한 의식의 뒤에서
는....
"난 이제 살아났어. 정말 지긋지긋했지. 윤영이더러 대신 자라고
해. 절대 깨어나지 못하게 할거야. 난 계속 살거야....가만....근
데 네가 또 윤영일 깨울지도 몰라! 그건 안돼! 난 또 잠들긴 싫
어!"
주영은 갑자기 악을 써댔다. 그리고는 설합에서 과도같은 칼을 꺼
내 들었다.
"이봐! 뭘하려는 거야!"
"너도 이걸로 자르면 죽겠지? 나도 죽었었으니...너도 죽어봐!"
현암은 다급해졌다. 상대는 이제 귀신이 아닌 사람으로 변해 있었
다. 그리고 자기는 금줄에 묶여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였고,
주문을 웅얼거려 봤자 이젠 사람이 거의 되어버린 주영에게 먹혀들
리가 없었다.
주영이 다가왔다. 정말 기막히게도 이런 판국에도 주영은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주영의 칼이 슬며시 현암의 목덜미로 향했다.
"이봐! 그만둬! 아프단말야!"
현암은 바보같은 말을 지껄여 댔다. 상대의 수준은 어린이..갓난
아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효과가 있었다.
"뭐? 정말?"
주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그 칼로 자신의, 아니 윤영
의 하얀 팔을 그어보는 것이었다.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주영잇! 그만뒀! 뭐하는 짓이야!!"
주영이 놀란 표정으로 현암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윤영의, 아
니 자기 팔에서 떨어지는 피를 내려다 보았다.
"아파..."
주영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래. 아파! 맞아! 이제 난 아플수 있는거야! 몸을 찾았어! "
현암은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미쳐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암은 무섭지만 순진해 보이는 주영
이 갑자기 측은하다는생각이 들었다.
주영은 미친 듯 기뻐하더니 다시 침울해 졌다. 그러더니 얼굴에
점점 공포의 기운이 번져갔다. 아픔에서 과거의 그 잊을 수 없는
기억...죽음의 기억이 난 것이다..
"나는 계속 잠만 들어 있었지...계속 그...아..그래. 꿈에서 날
본게 너였지?..그 무서운 꿈만 꾸며 있었지...그냥 꿈만..그리
고...그리고...아니 그냥 꿈만...그런데...뭔가 갖고 싶었지..그
래...나와 같은 애가 있었어....그 몸은 내거 였어...내거...근데
그애가 다 가져갔어...다...맞아...네가 말해줘서...네가 말해서
기억났어...아악!...싫어....허리! 허리가!...아아악!..."
주영은 갑자기 공포에 질려서 몸부림쳤다. 마구 발광을 하는 것이
었다. 현암의 머리에 갑자기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음? 쌍동이... 쌍동이 였던건 확실해...그런데...몸이 자기 거였
다고? 아무리 쌍동이 였더라도...가만!'
현암의 머리속에서 돌파구가 열렸다. 확실했다.
윤영과 주영은 샴쌍동이(*주 1) 였던 것이다....
"그만해. 주영! 그만둬! 진정하라구!"
"다 미워! 다 미워! 날 죽였어! 내 허리를 잘라냈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어! 다 미워! 윤영이도 미워! 엄마도 미워! 다 죽일거
야!...."
현암은 그때의 정경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쌍동이..상반신은 따로 있었으나...하반신은 붙어 있었
다...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했는지 모른다...둘은 똑같다...같이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둘 다 그대로 둘수는 없다...선
택이 이루어진다...메스가 그어지고 수술이 행해지고...하나의 갓
태어난 생명은 반쪽만 남아서...차가운..차가운 메스로...허리..허
리가...
주영은 이제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고 있었다. 현암의 냉정한 가슴
에도무언가 뜨거운 것이 차고 지나갔다.
"나도...나도 살고 싶었단 말야.....나도...."
주영이 울먹이며 꽁꽁 묶여있는 현암의 앞으로 기어왔다. 눈물에
범벅이 된 눈은 고통이 가득해 보였고, 아이처럼 때 묻지 않은 듯
했다. 주영은 순수했다. 비록 지금 윤영의 몸을 빌고 있는 덕에 말
도 하고 행동도 성인 비슷하게 할 수 있었지만..그야말로 갓난아이
와 다를 것이 없었다. 주영이 아기들이 춥거나 무서울때 그러는 것
처럼 현암의 몸으로 파고 들었다.
현암의 눈에도 눈물이 한방울, 긴 자국을 내며 흘렀다.
현암은전에윤영의 꿈속에서 들었던 멜로디를 나직히 휘파람으로
불었다. 주영이 울먹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엄마...."
현암의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틀림없었다. 그건 옛날에
윤영과 주영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들렸던...어머니의 자장가.....
다시 그 소리를 들으며 주영은 잠이 들어가고 있었다.
'잘 자라...잘 자라...'
눈물을 흘리며 계속 휘파람을 부는 현암의 눈앞이 밝아지면서, 누
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현암은 눈을 돌리지 않고서도 그게 누구
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윤영과 주영의 어머니...
그 얼굴은 자비심이 넘치고 있었고, 지금 두 눈은 주영에 대한 애
틋한 심정으로 넘치고 있었다. 둘의 대화가 은은한 중에도 분명히
현암의 마음속에까지 들어왔다...
'주영아...'
'음..엄마..'
'미안했다..주영아...하지만 이 어마는 그때..'
'음..괜찮아요 엄마...난 뭐...흑...'
'이리온...너를 참 오래 찾았단다...이제 나와 가자...'
'응...엄마...'
따사로운 빛속에 주영의 영은 다시 작은 아이가 되어서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현암의 마음속으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주영이를 가련하게 생각한 마음이...'
'저를 여기 올 수 있게 했답니다...'
'이제 저는 주영이를 데리고 갑니다...'
'이제 윤영이를 안심시켜 주세요...'
어느덧 윤영이 일어나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미 윤영도 무슨 일
이 일어났었는지 다 아는듯 했다. 윤영의 눈에도 눈물이 샘솟듯 흐
르고 있었다.
어느새 날이 새려는듯, 창밖이 붐해 오는 듯 했다. 현암과 윤영의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의 전송을 받으며, 주영과 어머니의 영은 조
용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현암은눈을 감으며 염했다.
'평안하시기를...내내 평안하시기를...'
* 주1) 샴쌍동이 : Siamese Twins. 몸이 서로 붙거나 생체 기관을
공유하는 형태로 태어나는 쌍동이.
태국의 Chang과 Eng(1811-1874)의 쌍동이가
태어난 이후 그런 이름을 갖게 됨.
- 퇴마록 3부 ....유혹의 검은 장미...
1. 연속 사고..
199*년 6월 3일, 서울 여의도에 거주하는 박제성군(가명) 사망
(향년 23세, 무직)...사인 : 밝혀지지 않았으나 과다한 빈혈 증세
를 보임...
199*년 6월 4일, 역시 여의도 모 아파트에서 이영록군(가명) 추락
사.(향년 24세, 학생, 주거는 부정)...사인 : 평소 이영록군의 주
변인들의 진술에 의하면 절대 자살은 아니라 함. 사체 검시 결과
강한 빈혈 증세...경찰은 빈혈에 의한 잠시의 실신에 의한 추락사
일 것으로 단정...
199*년 6월 4일, 여의도 모아파트에 거주하는 윤정열씨(가명), 차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 (향년 25세, 웨이터)...사인 : 밝혀지지 않
았으나 과다한 빈혈 증세...
199*년 6월 4일, 오페라 가수 장인석씨(가명),(향년 28세) 여의도
오페라 하우스에서 처녀 출연 무대에서 공연을 마치고 무대 아래로
실족하여 사망....
사인 : 뇌진탕...역시 강한 빈혈에 의한 것으로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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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흡혈귀일까...?"
박신부는 신문을 오려 스크랩북에 끼워 넣으며 중얼거렸다.
"글쎄요...하지만 전설에 의하면 흡혈귀는 밤에만 나오는 것 아닌
가요..? 또 사람이 많은 오페라 공연 같은데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을 텐데..."
준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흡혈귀류의 변종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신술 같은 걸로 접근했는지도 모르고.."
현암이 박신부가 해 놓은 스크랩들을 다시 들썩여보면서 답했다.
"음...변종이라...아뭏든 드라큐라같은 형태는 아닐거야...그런
놈이야 영화에서나 나오는 거고.."
준후가 다시 중얼거리자 현암이 웃었다.
"야! 영화 얘긴 하지도 마라. 세상에 어떤 귀신이 망토 걸치고 백
작흉내를 내고 다니냐? 다 영화니까 그런거지. 원래 드라큐라 이야
기는 루마니아던가, 헝가리던가의 실제 군주 드라큐라 백작을 모델
로 만들어낸 이야기야. 그 사람은 터키의 침략을 막아낸 영웅이었
지만, 워낙 행동이 잔혹해서 민중에겐 공포의 대상이었지. 그걸 어
느 소설가가 인용해서..."
"하지만..."
현암이 빈정거리는 걸 박신부가 중단 시켰다.
"흡혈귀의 전설이 꼭 드라큐라로 한정되는 건 아니지. 어느나라에
나 흡혈귀의 전설이나 실화들은 다 나타나고 있어."
"아, 1920년인가 독일에서 실제로 잡혀 처형된 흡혈귀 사나이 같
은 예요?"
"아니...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준후가 아는체 하는걸 다시 박신부가 말을 막았다.
"원래 피는 생명의 상징이지. 그걸 모태로 하여 생명에너지를 흡
수하려는 악령이나 그걸 모아 나쁜 목적에 쓰려는 주술같은 건 얼
마든지 있어..."
잠시 분위기가 숙연해 졌다. 박신부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 경우도 예외가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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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준후를 앞세워 여의도로 향했다. 준후의 영사 능력으로 한
번 적의 정체를 알아보려 하는 것이다. 적의 정체를 알지 않고서는
섣불리 도전할 수 없었다. 과거 서둘렀다가 쓰라린 결과를 맞은 일
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만큼,(측백산장에서도 현암을 필두로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다 죽을뻔 하지 않았던가!) 우선은 신중한 조사와 준
비가 필요했다.
"제일 먼저 어디로 가는것이 좋을까요?"
"그 박제성이라는 백수의 집으로 가 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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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성의 장례는 이미 다 끝나 있었다. 신문에 기사가 나서인지
별별 어중이떠중이가 다 찾아 온듯, 제성의 형이 아주 돌이질을 치
며 아예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다.
"어쩌죠? 신부님? 신부님이 한 번 시도 해 보세요."
"안돼. 여긴 불교 신자의 집이라서.."
"불교 신자에겐 천주교 신앙이 안 통하나요?"
"아니...하지만 강도처럼 남의 집 문을 밀어내는데 주님의 권능을
써서야 되겠니? 준후야... 아마 이 방인 듯한데..방 밖에서 한 번
투사 해 보렴.."
준후는 창 밖에서 유리창에 손을 대고 주를 외웠다. 그리고 한참
을 있더니 땀을 흘리며 손을 뗐다.
"이미 영은 떠나고 없어요. 근데 귀기로운 느낌이 들지는 않았어
요...아니 꼭 그런 것도 아니고...어쨌든 사람이나 악령이라는 느
낌은 안 들던데요..?"
"음? 정말이니?"
"예..뭔가 좀 요기로운 것도 있긴 하지만...별건 아니었어요..마
치 옛날에 죽어 비틀어진 나무토막 같은...아주 약해요. 별거 아닐
거에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방 풍경은 별로 특이한 점이 없었다. 일본 만
화영화의 포스터가 벽에 크게 붙어 있었고, 비디오 테이프인가가
수북히 쌓여 있는 듯 했다. 화병에 꽂혀 있는 까맣게 시들어 버린
장미가 참 쓸쓸해 보였다. 어쩌면 잎까지 저렇게 까매 졌을까하고
현암은 생각했으나 곧 잊어버렸다. 준후는 산더미같이 쌓인 비디오
테이프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나 박신부가 재촉해서야 발을 옮겼
다.....
"현암형. 우리 돈 벌면 커다란 티비하고 슈퍼 브이티알 사서.."
"됐어! 난 만화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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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록이라는 주거부정 학생이 떨어져 죽은 아파트 광장도 이미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준후는 아무 영기도 느낄 수 없으니 선
착장가서 배나 타자고 졸랐으나 박신부가 준후를 달랬다.
"준후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놓쳐선 안돼...흡혈귀족은 자취를
거의 남기지 않아서 추적하기가 어렵단다..."
"그래요? 신부님 흡혈귀하고 붙어 보신 적 있었어요?"
눈치 없이 끼어드는 현암에게 박신부는 눈을 흘겼다.
"그냥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준후는 다시 영사를 시작했다.좀 삐졌는지 별 것 아닌 것까지 다
싸잡아 중얼거려 대고 있었다.
"...음...병아리 한마리가 애들한테 밟혀 죽은 적이 있네요...아
이고 가엾어라...잔인한 녀석들...읔...죽은게 많네요...모기들이
떼 죽음을 했어요..약을 뿌려서..아이고 그것들도 해충이지만 불쌍
한 것들인데...잔디들도 기운이 없네요...매연하고 산성비 때문인
듯..."
박신부의 얼굴이 찡그려졌고 현암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음...누군가 막 화를 내고 있네요...물론 신부님이야 수행이
깊은 분이시니까 그럴리 없고..음?...그 옆에선 누가 피식피식 비
웃는데요?...미친 사람인 듯...일도 없이 왜 웃는담?...전 그냥 자
세히 말하는 것 뿐예요...음...검은 장미 세송이가 차에 깔렸군
요...어쩜 저렇게 까말까..."
'음? 검은 장미?..아직 새까만 장미는 나온 품종이 없는데..'
현암의 머리에 잠깐 이런 생각이 떠 올랐으나 준후의 장난이겠지
하고 곧 잊어버렸다. 박신부가 막 폭발 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음...더 이상은 다 오래전에 죽은 가련한...어?...어?"
준후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되었다. 박신부와 현암도 이상한 준
후의 행동을 보고 긴장했다.
"준후야..왜 그러지?"
"음..음...부유령들...지박령들...무더기...무더기로...다 약한
것들이지만...으...그 수가....너무...으...이리로 오고 있어요...
으...원한을 품고...저기...저쪽에 뭐가 있죠?"
준후가 채 눈을 뜨지 않고 가르키는 쪽에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
었다. 긴 머리를 늘어 트리고, 일본식 옷을 입고 손에는 무녀들이
들고 다니는 것 같은 종이달린 막대를 들고 있었다. 이상한 차림새
에 아이들이 먼 발치에서 손가락질을 하는 듯 했지만, 그 여자의
주위에는 이상한 찬 기운같은 것이 엉겨있는듯, 감히 다가서는 아
이는 없었다.
"음..강해요..상당히 강한 기운이...그리고 많은 영들이..으으..
무더기...무서워요...너무 많아요..."
준후는 계속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 여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눈썹만을 치켜뜬 채 셋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2. 무녀 홍녀(紅女)의 등장
여인은 준후의 바로 앞에 와서 섰다. 준후는 그때서야 침중한 얼
굴로 눈을 뜨고는 바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이상한 여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호호호호호... 귀여운 아이로군. 재주도 있고.."
여인의 발음에는 어딘지 모를 일본어의 억양이 섞여있는 듯 했으
나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고 있었다.
"누구시죠?"
현암과 박신부는 암암리에 기운을 끌어 모았다. 가까이 있으니 그
녀의 뒤에서 물결치는 듯한 영들의 회오리 같은 기운을 느낄 수 있
었다.
"아, 저 말인가요? 고향을 찾아온 사람이지요...먼 옛날에 떠났던
고향을 찾아온..."
여인의 눈이 잠시 번뜩였다.
"무녀 홍녀라고 합니다. 원래의 성은 권(權)가 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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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의 침묵을 깨고 현암의 품안에서 월향이 길게 울었다. 여인은
잠시 흠칫하는 듯 하더니, 잠시 현암의 품 속을 보는 듯 했다.
"아...신기한 것을 가지고 다니시는군요...역시 이 꼬마뿐 아니라
두분다 보통 분들은 아니시군요..."
"댁의 몸 전체에 이상한 기운이 가득한 듯 하군요."
박신부의 눈이 안경 속에서 형형히 빛났다.
"백귀야행(百鬼夜行)! 불가 밀종(密宗)의 분이시군요."
준후가 결코 반갑다고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여인을 보면서 말했
다. 여인은 잠시 깔깔깔 웃었다.
"정말 깜찍한 꼬마로군! 어린데도 견문도 넓고! "
"백귀..야행? 그렇다면 백귀의 힘을 지닌.."
현암이 중얼거렸다.
"맞아요. 백가지 귀신의 힘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수행을 하신
분이네요..대단하시겠군요..허나 좀 사악한 기가 많아요.."
준후가 여전히 곱지 않은 어조로 나직히 중얼거렸다.
"오호호호호! 예쁘게 봐주려 했더니 건방진데도 있군. 내가 수행
한 건 외문 방도의 술수란 말이냥? 바가야로!"
여인이 한쪽 눈을 치켜 올리며 비웃듯 내뱉었다. 그러나 준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밀종의 본분은 흩어진 사람과 영의 질서에 다시 조화를 찾아 두
세계에 조화로움을 가져오게 하는데 있거늘, 아주머니는 자기 술수
만 믿고 영을 마구 소멸시켜 버리기만 했던것 같군요. 아니면 사로
잡아 백귀로 만들어 달고 다니고.."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이냐? 어차피 오갈데 없고 쓸모없는 잡령,악
령들이다. 내 힘이 커지는 것에 질투가 나는거냐?"
"흥! 밀종, 아니 불가의 근본인 자비심을 잊고 윤회를 거듭해 해
탈 될 수 있는 영을 함부로 다루는 아주머니! 힘이 커지면 커질수
록 선행도 커야 하는 걸 모른단 말예요?"
"바가! 그럼 고통받는 인간들을 자유롭게 해주는게 선행이 아니란
말이냥!"
" 아주머니가 말하는 잡령, 악령들도 거의가 적어도 한때는 사람
이었어요. 그렇게 마구잡이로 영을 파멸시키는게 사람을 마구잡이
로 죽이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예요?"
"칙쇼!"
여인은 정말 화가 난듯, 들고 있던막대기로 준후를 치려는 듯 했
다. 현암은 그 광경을 보고 품안의 월향에 손을 뻗었으나, 여인은
손을 내려치지는 않고 씩씩대며 뒤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여인의 일갈이 들리더니 막대기가 가로등을 치고 지나갔
다. 갑자기 쇠로 세운 가로등이 쓰러져 준후의 바로 발 앞에서 와
장창 깨져 나갔다. 허나 준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흥. 힘이 대단하시네요. 힘자랑 하시려면 스모판에나 나가시는게
어때요?"
" 흥. 재주들이 아까와서 목숨이나 보존케 해주려 힘든 발걸음을
했더니, 오만 잘난척은 다하는군 그래! 내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말
해주는데, 이번 일에선 손을 떼! 재주깨나 있다고 함부로 덤비다간
무주고혼이 될테니...호호호호..."
여인은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그 뒤로 누런 모래바람이 일었고,
겁에 질린 아이들이 와!하며 도망쳐 갔다. 여인의 웃음소리는 메아
리가 되어 한참을 울렸다...
"대단하군..저 여자..수행이 퍽 깊은데..사실 그리 악한 사람은
아닌 듯 한데..?"
박신부가 중얼거렸다. 준후가 말을 이었다.
"좀 미안하네요.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백귀들이
너무 가엾어서요.."
"왜 가엾지?"
"원래 받아주는 곳이 없어 무주구천을 헤매는 것들이 백귀들이지
요. 그런데 저 아주머니는 그 백귀들을 마구 부려서 신통력을 쓰
고...또...자기가 잡은 영들을 해방시키지 않고 죽이거나 다시 백
귀무리에 넣고 있어요. 그 백귀들의 원망과 한숨소리가 너무 컸어
요..."
"뭔가 사연이 있는것이 분명해.."
"예. 사실 나쁜 짓을 할 아줌마는 아닌데...손이 너무 지독해서
내가 너무 심하게 말을 했어요."
"아줌마 아줌마 하지마라 준후야. 누나뻘 밖에 안되는 것 같은
데.."
쓰러진 가로등을 살피던 현암이 끼어들었다.
"예 ? 그래요? 전 미처 그것까진 못보고 얼굴만.."
"화장을 그렇게 해서 그래. 하지만 내 눈은 못속이지..난 여자 보
는데엔 천부적인 눈이 있거든?"
"핏..그래서 애인도 하나 없이...잘하시네요.."
"음 아뭏든..."
현암이 쓰러진 가로등의 잘린 부분을 쓰다듬었다.
"이건 내가기공도 아니고, 그런 막대기에 날이 있는 것도 아닐텐
데... 아뭏든 수법은 뭔지는 모르지만 고명하군그래..."
"아뭏든 하던 일을 포기할 수는 없지. 여기선 알아음 장소로 가 보자구."
박신부가 잘라 말했다. 준후는 아직도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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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차에서 죽었다 쳐도, 차는 손상이 없다면 그대로 서있는
법이다. 현암은 남겨진 영기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준후는
그래도 찾아보겠다고 고집을 부려 다시 준후의 투시력으로 윤정열
씨가 살던 곳 부근의 차들을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음 이 차에요. 여기선 아직 영의 기색이 강하게 남아있어요."
준후가 가리키는 차의 옆유리창에는 루즈인지 뭔지 아뭏든 빨간글
씨가 써져 있었다.
- 목숨이아까우면 내 일을 방해말고 다른 일을 차자봐라 - 紅 -
"음..그 여자가 남긴 걸까요? 신부님?"
"그런 듯 하군..홍자가 써 있쟎아? 근데 말은 잘 해도 아직 받침
쓰는 법에는 서툰것 같군."
현암이 필적을 살피는 동안 준후는 차의 앞유리에 손을 대고 영사
를 행했다.
"음...아...보여요...그 남자...차를 몰고....아...여기에 주차하
려는 생각이었네요...그리고...어?....이건...이건..."
"뭐지 준후야?"
"..황홀한...황홀한 기분...아주 기분좋은...나른함...그리고..."
"흡혈귀다! 틀림없어!"
현암이 외쳤고 박신부가 말을 이었다.
"피를 빨리는 그 의식..그건 생명을 빼앗기게 되면서 아주 강렬한
쾌락의 기분을 느끼게 된다..성행위의 도착적인 형태...음.(준후가
있었군) 준후야. 그리고 뭐지..?"
"...향기...아주 좋은...냄새....향기..."
"향기?"
현암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꽃...꽃은 향기가
난다...
"음...으윽...그리고는...악...그...지독한...고통...지독한.."
제성의 방안에 시들어있던 검은 장미...준후가 우연히 영사해낸
차에 밟힌 장미 송이들...그리고 짙은 향기...
"음...뭔가가 있어요...작은...아니 커져요...검은...검은...으
윽...피빛...피빛으로....윽....고통이...공포가...무서운 공포.."
준후는 소스라치게 놀라 땀에 흠뻑 젖은 얼굴로 영사에서 깨어났
다.
"뭔가가 들어 왔었어요. 이 차 안으로..뭔가가...잘 보이지 않는
데...그건 마치...음..."
"됐다 준후야. 이제 진정해! 진정!"
박신부가 따뜻하게 준후를 감쌌다. 준후는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무언가를 타고...아니 맞는지 잘 모르지만..무언가를 통해...보
이지 않는것이...들어오고...그리고..."
현암이 차안으로 몸을 굽혔다.그리고 뭔가를 찾아냈다.
"잘했다 준후야. 중요한 단서를 찾았어..."
현암의 손에는 말라버린 한 조각의 검은, 칠흙같이 검은 이파리가
들려 있었다.
3. 검은 장미의 비밀..
"음...검은 장미라..."
"신부님, 흑장미라는 건 원래 있는 거 아닌가요?"
준후가 물어왔다.
" 음 원래 흑장미란 말이야 있지. 허나 그건 진한 붉은 빛을 띈
장미를 일컫는거지, 정말로 검은색의 장미가 있는건 아니지..거기
다 잎이 검은 식물들은 더러 있지만, 장미들 중 잎이 검은 건 하나
도 없단다..."
"준후야, 너 이 이파리로 영사를 한 번 행해봐라."
현암이 운전대를 굴리며 준후에게 아까 주웠던검은 이파리를 내
밀었다. 준후는 그것을 조심스레 손바닥에 올려 놓고 양손을 닫은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음...?....어!"
준후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또 무슨일인가 하여 박신부와 현
암은 준후를 향해 눈을 돌렸고 현암은 자칫 난간을 뚫고 나갈뻔 했
다. 현암은 차를 급정거하여 길 가에 세우고 다시 준후를 보았다.
"이건...생명이 없는 거에요..."
"음? 당연하지. 이미 죽은거 아냐?"
"아뇨, 내말은 그게 아니라..."
뭔가 차가운 것이 박신부와 현암의 등골을 치고 지나가는 듯 했다.
"애당초 살아있던 적이 없는...그런 거란 말예요..."
"그러면...천이나 그런 걸로 만들어진 인조물이란 말이냐?"
"아뇨아뇨...분명 세포로 이루어지고 생장도 하지만, 살아있지는
않는....뭔지 모를...."
준후는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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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난 여의도 오페라 하우스에는 다른 일정이 특별히 잡혀
있지도 않았다. 뒤숭숭한 사고가 대강 수습된 다음이라 단원들과
대부분의 직원들은 일찌감치 퇴근하고난 다음이었다.
수위로 근무하고 있는 김호탁씨는 사고로 사람이 죽은 다음날 당
직근무를 서야 한다는 사실이 영 께름찍 했다.
' 이런 염병할... 하필 이런 날 당직일게 뭐야..젠장..'
이제 막 해가 질 참이었으나 조명을 다 꺼버린 오페라 무대는 몹
시 어둡고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리골레토'의 무대장치로 나온 석
고상들의 모양이 김씨의 랜턴 빛을 받아 흉하게 그림자를 드리웠
다.
' 그러나 저러나 참 이상했어...그 장인석이라는 가수...노래 다
잘하고난 다음에 앵콜로 나오면서 쓰러져서 무대 아래로 쳐 박히다
니....덩치가 좋아서 빈혈로는 절대 안보였는데..?'
그러고보니 김씨는 그 가수가 쓰러졌었던 위치에 와 있었다. 얼마
나 가수의 덩치가 컸었던지 나무로 된 바닥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 그러고보니 난 그때 무대 뒤에서 정리를 하고 있었지. 근데 그
때 그 가수가 나올때...옳거니...그때 좀 이상하긴 했어...비틀거
리는 것 같았는데...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김씨는 랜턴으로 여기저기를 비춰보았다.
' 근데 그 예쁜 아가씨가 그 인석인가 하는 가수에게 줬었던 그
까만 장미꽃은 어딜 갔는지? 분명 그 인석이란 가수가 앵콜로 나올
때 들고 나오는 걸 봤는데...청소 할땐 없더란 말야? 누가 신기해
서 집어가 버렸나? 에잉. 내가 가져갈라고 했는데...'
무대 밑 어두운 구석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리며 움직이는 듯 했다.
'음? 뭐지? 쥐인가?'
김씨는 전등을 비추며 무대 아래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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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냄새가..냄새가 났어요!..이 잎에서...!"
"음? 냄새라고?"
연신 운전에 신경을 쓰며 현암이 물었다. 어느덧 시간이 8시를 넘
어서는 듯 했다.
"음...피...피 냄새 같은게..."
"뭐라구?"
박신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준후...너...손..!"
"예?"
엉겁결에 준후는 손에 들고 있는 이파리를 내려다 보았다. 검은
색을 띄고 있던 이파리가 꿈틀거리는 듯 했다. 아니, 움직이는 것
은 아니었으나 그 색이 선명한 붉은 색으로 점점 물들어가기 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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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하우스의 높은 붙박이 창문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
져 나가고, 누우런 모래 먼지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날아 들어왔다.
어느덧 모래바람 사이로 붉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의 그림자가 번득
이며바닥에 몸을 세웠다. 무녀 홍녀였다.
홍녀의 긴그림자가 드리워진 끝에 한사람이 길게 쓰러져 있었다.
조금아까 번을 돌던 김호탁씨였다...그의 얼굴은 웃고 있는듯 했
고, 안색은 파리하다 못해 밀납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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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요망한 것! 사크라데바남 인드라의 이름으로 악은 소멸되
어랏!"
준후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오자 손에서는 노란 불꽃이 바작거
리며 일어나 이미 피빛으로 변한 이파리를 태워갔다.
"잠깐 준후야! 더 알아볼 것이 있어!"
현암이준후를 제지했으나 이파리는 이미 불에 구워지는 오징어처
럼 구부러지며 재로 변해 버린 뒤였다.
"그렇게 서두르면 어떻게 해! 그 놈이 살아난다면 그 이파리의 조
종자를 찾을 수도 있을거 아냐!"
"그럴 필요 없네...현암군..."
박신부의 침중한 목소리가 현암을 제지했다.
"저길 보게..."
박신부가 가리키는 곳... 하늘에서 여러가닥의 붉은 피빛 기운과
검은 기운이 서로 엉키며 어느 한 곳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
다. 그리고 그 기운들이 지향하는 곳에서는 또하나의 누런 기운이
엉키며 회오리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곳이었다....
"서두르자! 뭔가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어!"
현암이 악셀레이터를 질끈 밟았고, 차는 끼이익하는 타이어 소리
를 내며 급히 앞으로 나아갔다.
"으...저 붉은 기운들....피야...모두 피야..."
준후의 중얼거림이 탄식처럼 들려 왔다....
4. 흡혈귀..
홍녀는 일단 백귀의 영으로 주변에 강력한 결계를 쳤다. 막 죽어
쓰러진 남자에게서 무언가 단서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 남자의 영
이 그를 죽게 만든 어떤 힘에게서 협박을 받지 않도록 강력한 결계
를 만드는 것이 우선 선행되어야 한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놈이 내 짐작대로 흡혈마라면...저 남자의 남은 육신도 흡혈마의
지배를 받게 될 지 모른다. 그러니 미리 차단을 해야겠지..난 아마
추어가 아니니까...'
홍녀는 일단 결계를 확인하여 어떤 영들도침투하지 못하도록 만
든 뒤 영사를 행할 작정이었다. 상대가 흡혈마라면, 흡혈마에게 당
한 사람의 육신은 자칫하면 흡혈귀로 변하게 된다.
'백귀의 우두머리, 적적귀! 진을 펴라! 수뢰귀! 불기운을 막아라!
화뢰귀! 물기운을 막아라!'
홍녀는 백귀들을 차례차례 배치하여 팔괘진과 비슷한 진을 쳤다.
누런 기운이 용솟음쳐 올랐다.
'이만하면 됐겠지.'
홍녀는 그제서야 채 몸의 온기가 식지도 않은 남자에게로 손을 뻗
쳤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뒤에서는 누런 기운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지만, 무언가 그 뒤에서 핏빛 기운이 번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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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을 차를 급정거 시켰다. 오페라 하우스의 바로 앞이었다.
이미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든 붉은 기운들은 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빨려들듯 사라져 버린 뒤였다.
"준후! 뭐가 보이냐?"
현암이 외쳤다.
"음...그러니까...음...어라?...백귀의 진...그 무녀예요!"
"우리보다 한 발 앞섰군!"
현암이 분하다는 듯이 외쳤다.
"뭐 그럴것까지야..같이 힘을 합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나?"
박신부는 태연했다.
"아녜요!...백귀의 힘!...미쳐 날뛰고 있어!...그 아줌마가 위험
해요!..백귀가..백귀들이..통제력을 잃고 있는걸로 봐서..아악...
백귀들이 서로 싸워요!.."
준후의 비명 비슷한 울림에 현암은 재빠르게 준후의 앞에 놓인 부
적들 중 안명부(眼明符 : 눈을 밝혀 영을 볼 수 있게 하는 부적)을
집어들고 차를 빠져 나와 몸을 날려 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뛰어들
었다. 박신부가 잠깐 기다리라고 외쳤으나 그럴 시간이 없다는 예
감이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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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현암은 잠시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 주인의 통제력을 잃은 오만가지 귀신들이 그 안에서
맹목적으로 서로 싸우고 있었다. 물론 귀신들의 싸움이었으니 보통
사람들은 볼 수 없을테지만, 현암은 안명부를 가지고 있어서 다 볼
수 있었다. 현암은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옥같은 광경에 치를
떨며 안명부를 가져온 것을 후회했다...
막 소머리를 가진 귀신 하나가 갈퀴같은 손톱으로 난장이 비슷한
형상의 귀신을 조각조각으로 찢고 있었고, 그 난장이 귀신의 대가
리는 따로 날아올라 소머리 귀신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었다. 머
리를 풀어헤친채 피같은 것을 흘리는 여자 머리가 사방에서 휙휙
날아다니고 있었고, 불쑥 불쑥 주둥이 같은 것이 날아올라 그 머리
들을 물어 채 가기도 했다. 거대한 괴물같은 놈이 다른 놈들을 밟
아 짜부러트리기도 했고, 낫인지 뭔가 이상한 걸 든 놈 하나는 미
친 듯 고함을 지르며 사방에 칼질을 하고 다녔다. 귀신의 너덜너덜
한 살점이 사방에 튕겨지고, 고약해 보이는 형형색색의 액체들이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으..이건 지옥보다 심하군...!'
속이 이상해져 오른편으로 눈을 돌리는 현암의 시선에 엎드려 있
는, 아니 쓰러져 있는 무녀 홍녀의 모습이 보였다. 손을 길게 뻗어
뭔가를 잡고 있었는데..그것은 바로 그들이 계속 찾아 헤매던 검은
장미의 모습...그 검은 장미는 꿈틀거리고 있었다. 검은 이파리를
나부끼며, 꽃송이를 입처럼 벌리면서 날름거리며 홍녀의 목덜미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타----앗!"
일갈성을 울리며 현암은 월향을 뽑아 들었다. 홍녀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현암은 백귀들이 아수라처럼 날뛰
고 있는 가운데를 통과해야만 했다. 월향이 길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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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현암군을 도와야해!"
박신부는 준후를 재촉하여 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
나, 준후는 귀를 틀어막고 계속 고개를 흔들며 버텼다. 영력이 뛰
어난 준후는 그 안에서의 지독한 귀신들의 비명이 들리는 것이 분
명했다. 그리고 거기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아악! 너무 지독해! 귀신들이 서로 죽이고 있어요! 미친 듯이!
아악...저걸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아악! 저 비명소리들..!
아아.."
"준후야! 준후얏!"
박신부는 준후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정신차렷! 저 안에 현암군이 있단 말이다!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
면 위험해!"
"아아...저 비명소리들!...귀가...귀가..!"
" 너밖에 할 수 없어! 저 미쳐 날뛰는 백귀를 잠재우고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주문을 기억해 내! "
"으아아아..."
준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려 내렸다. 백귀라면 말이 백(百)이지 실
은 수 없는 영들의 집합체였다. 이건 전쟁이었다. 어린아이가 전쟁
의 쇼크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백귀를 저대로 가엾게 다 서로 죽게 내버려 둘 셈이니? 아니,
그 무녀도..현암군도 죽게 될 지 모른단 말이닷!!!"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준후는 이젠 축 늘어지고 말았다. 박신부
는 침중한 얼굴로 준후를 땅에 내려 놓고는, 성수와 십자가를 꺼냈
다. 그리고 막 홀로 들어서려는 순간...
하나의 그림자가 기괴한 웃음소리같은 것을 내며 박신부의 앞을
막았다. 아까 쓰러져 있던 그 수위...아니 그 수위의 남은 껍질이
었다. 두 눈은 검은 자위는 온데 간데 없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양 송곳니가 어느새 비죽하게 튀어나온 입을 헤 벌리며, 몸에 뼈가
없는 듯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박신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기랄...아멘..'
박신부는 걸음을 멈추고 흐느적대며 다가오는 수위의 모습을 이를
악물고 지켜보며 십자가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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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악!"
월향이 울며 무작정 달려들던 또 하나의 귀신의 목을 날려버렸다.
월향의 귀기에 쏘인 귀신의 머리와 몸뚱아리는 공중에서 풍선에 터
진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앞을 막는 귀신들의 무리는 너무나
많았고...갖은 수를 다 써 보았으나 현암은 귀신무리의 진을 돌파
하지는 못했고...기껏 반 정도 다가섰을 뿐이었다. 아니, 이제 오
히려 현암은 귀신들의 무리 한 가운데에 있는 셈이 되어 버린 판국
이었다.
검은 장미는 날름거리며 홍녀의 어깨에까지 뻗어가고 있었다..
목을 길게 늘이는 뱀처럼...
"안돼----!"
현암은 악을 썼다. 단전으로부터 뭔가가 터져나와 분출되는 듯 했
다. 그래도 현암은 있는 힘껏 악을 썼다...
" 어허-------자!!!! "
현암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전날, 산에서 만난 이인에
게서 파사검법과 함께 배운 사자후(獅子吼)..머리에 별이 오락가락
하는 듯 했다.
다리에 힘이 없다는 생각이 언뜻 들자마자 현암은 그 자리에 푹 주
저 앉았다. 간신히 월향을 놓치지 않고 쓰러져 눕지 않은것이 다행
이었다.
'음..그래도 백귀들은 이제...'
흐뭇한 기분으로 눈을 든 현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백귀들은
확실히 사자후의 기색에 놀라고, 몇몇 허약한 영들은 어디론가 꺼
져 버렸으나, 대다수의 놈들은 그냥 멈칫 해 있었고...오히려 자기
들끼리의 싸움을 멈추더니 현암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으으으! 섣불리 너무 큰 수를 써서 되려 벌집을 건드렸구나!'
현암은 월향을 든 손을 치켜 올리려 했으나 방금 기를 있는대로
쏟아부은 후라 힘을 줄 수가 없었고,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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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는 수위..아니 이미 흡혈마의 부하인 흡혈귀가 되어버린 수
위의 육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흡혈귀도 박신부의 손에서 번쩍이는
십자가의 위력을 아는듯, 흉하게 붉은 눈알을 이상하게 일그리며
뭔가 신음성같은 것을 토해내며 오른 손으로 왼손의 손목을 주무르
고 있었다.
'더러운 영이여...너의 것이 아닌 육신에서 벗어나라!'
박신부가 여유있게 성수를 꺼내려는 순간...
홀안에서 '안돼--'하고 외치는 현암의 비명이 들렸다.
'아차! 현암군이!'
순간적으로 박신부가 방심한 기회를 틈타 놀랍게도 흡혈귀는 자기
의 팔을 뜯어 박신부에게로 던져냈고..박신부는 눈앞이 캄캄해 지
는 것을 느끼면서 얼굴에 뭔가가 강하게 얻어 맞는 듯한 느낌을 받
았다...코에 비릿한 내음이 나고...세상이 휭 도는 것을 느끼면
서..
박신부는 떨어진 팔에 얼굴을 움켜 잡힌 채 와당탕 땅에 틀어 박
혔다.
그 뒤를 이어...
'어허-------자' 하는 현암의 사자후가 울려 퍼지고...
갑자기 준후의 정신이 맑아졌고...백귀들의 소리도 가라 앉았다.
"음?...음?...신부님?"
간신히 고개를 드는 준후의 눈에 박신부의 쓰러진 모습이 들어왔
다. 뭔가에서 떨어져 나간 왼팔이 박신부의 얼굴을 거의 땅에 들어
박힐 정도로 누르고 있었고...팔이 떨어진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흡혈귀가 이죽거리며 박신부에게로 다가들고 있었다....
5. 사투.(死鬪)
" 사크라데바남 인드라의 이름으로 악은..."
준후의 손에서 번갯불이 일어나다가 사그러 들었다.
'이크! 신부님한테까지 번개를 치게 할 수는 없지! 어쩐다?...'
준후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우선 눈앞에 보이는 흡혈귀에게 노란
번갯불을 쏴 붙였다.
"에잇! 더러운 것! 너부터 죽어랏!"
파파팟..소리를 내며 번개가 뻗어나가 흡혈귀의 가슴에 적중했다.
사방에 고약한 냄새가 풍기며...
"캬아아아악"
흡혈귀는 까맣게 타들어 가는 몸을 데굴데굴 굴렸다.
"쳇! 도망치려느냐? 널 아예 바베큐로 만들어주지!"
준후는 제 이, 제 삼의 번개를 계속하여 날렸다. 연속타를 맞은
흡혈귀는 시꺼멓게 타 들어갔으나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와..질기다."
거기다가박신부의 얼굴을 움켜쥔 흡혈귀의 팔은 아직 멀쩡했다.
준후는 일단 박신부에게로 달려가서 흡혈귀의 왼팔을 잡았다. 시퍼
렇게 된 살점이 뭉그러지며 요상한 액체가 악취와 함께 뿜어져 나
왔으나 준후는 있는 힘을 다해 그 팔뚝을 잡아 떼어내려고 했으
나...놈의 힘은 아직도 너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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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들은 현암을 향해 한발,한발 다가들고 있었다. 현암은 열심히
운기를 하여 힘을 모으려 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백귀들의 허옇게
뒤집힌 눈들이 가까와져 왔다.
'에잇..최후의 수단이다!'
현암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월향검을 기합성과 함께 왼 팔뚝에 찔
러 넣었다. 선혈이 튀었다. 현암은 귀검 월향에게 피를 먹이는 것
이었다. 그건 금단의 술수였고, 자칫 월향검 마저도 통제력을 잃으
면 ( 아까의 사자후가 그랬던 것처럼 ) 그야말로 현암의 목숨은 끝
장나는 것이었다...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 귀검 월향이여...나의 염을 받아들여...조금만 애써다오..'
월향의 색이 서서히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러더니 현암의 팔
에서 저절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는 보통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
을만큼 처절한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 허공을 맴돌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백귀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모든 백귀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
러서기 시작했다. 월향은 이제 핏빛으로 빛나는 한줄기의 빛처럼
되었다. 그리고는 허공을 맴돌며 현암의 머리 위로 높이 솟구쳐 올
라갔다. 그리고는 다시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아래로 폭사되어갔
다. 그 소리는 이제껏 현암이 들어보지 못했던 월향의 울음이었다.
'월향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제 한갖 귀물이었던 월향은 현암의 의도를 알고 있는듯, 무서운
기세로 흉폭한 백귀들의 집단으로 쏘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월향검이...죽기를 각오했다...그에 깃든 영이...죽음을..'
현암은 분명히 그 울음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만 팔년을 함
께 퇴마행을 했던 월향검의 울음소리를...현암은 뭔가 마음속에 뜨
거운 것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현암은 입술을 깨물고 월향이 남
겨준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기공을 혈도로 돌리고 있었다.
그 한 모퉁이에서는...
검은 장미의 봉오리가 홍녀의 목줄기에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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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압...!"
흡혈귀의 왼팔이 폭발하는 듯이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박신부가
마음을 가다듬고 손에 들었던 십자가를 팔뚝에 꽂아 넣은 것이다.
준후는 잡아 끌려던 팔목이 어이없이 터져 나가자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벌렁 나가자빠졌다.
" 에잇...이 놈의 요물! 사탄의 앞잡이!"
박신부가 노기를 감추지 못하고 일어서며 얼굴에 붙은 살점 부스
러기들을 털어냈다.
"아! 신부님 무사..."
준후의 기쁜 음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훨훨 타오르는 불덩어리같
은 것이 준후의 머리채를 움켜 쥐었다.
"앗 준후얏!!"
바로 준후에게 번개를 얻어맞고 몸이 반쯤 타 버린 흡혈귀였다.
흡혈귀는 자기 몸뚱이에서 훨훨 타는 불길도 아랑곳 하지 않고 준
후를 잡아 허공에서 몇바퀴 돌리고는 무서운 힘으로 냅다 집어 던
졌다.
"으아아.."
준후의 몸이 가랑잎처럼 날아가 홀의 입구에 그대로 쳐 박혔다.
"으..이 지독한...용서 할 수 없닷!!"
박신부의 몸에서 장엄한 오오라가 뻗어 나오고...삽시간에 이미
불에 타 반은 기력을 상실한 흡혈귀의 몸을 둘러쌌다. 흡혈귀는 견
딜 수 없는 고통에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비틀며 쓰러져
갔다. 성스러운 박신부의 오오라의 힘에 몸뚱이가 마구 접히고 찌
그러져 갔다..
"어둠의 피조물이여! 영원한 지옥으로...!!!"
박신부의 성수가 흡혈귀에게 확 부어졌지만, 놈의 몸에 붙은 불을
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성수는 흡혈귀의 몸뚱이를 아예 서서히
녹이고 있었다.
"캐애애애애야...."
흡혈귀의 움직임이 정지하고 서서히 몸뚱이가 쪼그라져 녹고 한편
으론 불에 타들어갔다... 잠시 후, 박신부의 성난 눈이 노려보는
속에서, 흡혈귀의 몸은 축축한 잿가루로 변해 버렸다...
'가엾은 이여...심판날에 그대의 일은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박신부는 그 육신의 원주인이었을 이를 향해 잠시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는 서둘러 홀 안으로 뛰어들었다...
"준후야...! 현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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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후는 나가떨어지면서도 정신은 잃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깜찍
하게도 날아가면서 홀안의 상황을 낱낱이 파악하려 하고 있었다.
'으아...월향이 최후의 기력을 쓰고 있다...거기 봉인된 영은 젊
은 누나던데...음..현암형을 위해 죽을 각오를...'
역시 잡념같은 생각이 드는 그 순간에 준후는 벽에 와당탕 부딪히
며 잡동사니들 속에 파 묻혀 버렸다.
'으으으...머리 깨진다 깨져...'
준후는 그 쬐그만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빠르게 일어났다. 그리고는 일단 품에 든 부적 뭉치를 꺼내며 홀
안의 분위기를 살폈다.
월향은 미친 듯 날뛰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예의 그 섬뜩한 비
명소리를 지르며 핏빛 기운으로 허공을 가를때면 현암에게 덮쳐들
려던 귀신 하나가 두토막이 되어 디굴었다. 그러나...현암에게로
다가드는 뭇 귀신들은 너무도 많았다....이제 그들은 한데 뭉쳐 알
수 없는 몸짓과 괴성을 지르며 하나의 진을 구축해 갔다..백귀진이
었다...한데 뭉친 백귀의 힘은 무서운 소용돌이로 결계를 그려서
이젠 준후나 누구더라도 그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었다...
월향은 모든 힘을 짜내어 놀랍도록 빠르게 날아다니고 있었으나...
그 수에는 당하지 못하는 듯 했다...현암은 이미 대주천을 돌리는
듯,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이럴때 조금이라도 심마(心
魔)가 들면 곧장 주화입마(駐火入馬)하여 폐인이 되는 것이다...
박신부가 홀안으로 뛰어 들려다가 멍하니 홀안을 바라보고 있는
준후와 미친 듯 날뛰는 월향을 보고는 홀안으로 뛰어들려다가 알
수 없는 힘에 튕겨 발을 멈췄다.
" 저 안은 지금 백귀진으로 결계가 구축되어 있어요! 인제 외부인
은 들어갈 수가 없다구요!"
박신부는 당황한 듯 했다. 들어갈 수 없다면 주술을 쓰는 수 밖에
없는데, 자신은 주술을 모泡월향이 왜 혼자 허공을 날지..?"
일체의 주술과 발을 끊은 박신부에게는 백귀의 흉폭한 모습이 보
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구..! 큰일예요! 큰일! 저백귀들을 한꺼번에 퇴치하려면 부
동명왕(*주 1)의 멸겁화(滅怯火)를 써야 하는데..."
"그럼 빨리 써야지 뭐해? 주술이라도 좋다! 빨리 현암을 구해!"
"그럴 수 없어요! 저 월향까지 태워버리게 된단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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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 홍녀의 안색이 점차 파리해져 갔다. 몸에서 피가 빠져 나가
는 듯...얼굴에는 희미한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그녀의 목에
붙은 검은 장미가 발갛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
준후는 발만 동동 구르며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박신부는 마치 자신의 아기를 지키려는 듯 있는 힘을 다해 허공을
가르고 다니는 칼을 지켜 보았다.
.........월향......
박신부의 눈이 이번에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혼신의 힘을 끌어 모
으고 있는 현암에게로 돌아갔다.
........현암군.......
잠깐이었으나 너무나도 긴 시간처럼 느껴지고 있었다...영원...
...망각....그리고....그리고...그가 할 일은....선택...
"음 난 못해..못해!"
박신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준후는 의외였다. 박신부가 현암
을 구하라고 자기를 다그칠 걸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신부님..?"
준후는 번민하고 있는 박신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박신부가..박
신부 같은 사람이 한갖 귀신때문에...
갑자기 월향검이 허공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서서히 땅에 내려
앉았다. 백귀들은 돌연한 사태에 어리둥절하여 걸음을 멈추어서고
있었다...
월향의 검신이 땅에 가볍게 꽂히고 자루가 살며시 바르르 떨었다.
그건 무언의...웃음...월향은 웃고 있었다...준후와 박신부의 대화
를 알아듣고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준후와 박신
부는 둘 다 월향검의 의도를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준후가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신부님 어떡해요! 어쩌면 좋아요?"
"이런 빌어먹을..."
박신부가 입술을 깨물며 체통도 잊고 외쳐댔다.
"저 백귀란 것들...빌어먹을 어둠의 피조물들이...!"
어둠...? 어둠....?
준후의 머리에 서광이 비쳤다.
"맞다! 백귀야행(百鬼夜行)...! 백귀들은 밤에만 돌아다니는 것
들....! 빛에..! 빛에 약하다..! "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준후는 부적을 찾을 사이도 없이 아미타불
의 십이광(十二光)(*주 2) 중의 마지막인 초일월광(超日月光)의 주
를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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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과도 같은 빛이 터져 나왔다. 차가운 달 빛 보다도 한 없이
시리고.... 작열하는 태양빛보다도 훨씬 더 따가운.... 폭발하는
듯한 백열광이 구석구석을 훑어 갔다.
"아아아아악..."
"캬아아아악..."
백귀들은 비명을 지르며 자취를 감추고...몇몇 귀신들은 빛에 빨
려들 듯 그자리에서 소멸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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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들이 사라져가는 중에 그 시전자인 무녀 홍녀는 그 아우성에
아까 준후가 겪었던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간신히 눈을 떴으나...그 앞에는 일렁이는 듯한 검은 장미가 꿈틀
대며 자신의 목을 물고...
"아아악!"
홍녀는 놀라움에 몸을 일으키며 장미줄기를 뜯어내려 애 썼으나
줄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되려 손이 가시에 긁혀 점점이 피가
번져 나왔다...그 핏방울 마저도 검은 장미의 줄기로 흡수되어 빨
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악!"
재차 비명을 지르는 홍녀의 귓전에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분 좋지 않아..?....조용히...조용히 늪아! 네가 죽었으면
현암형이 무척 슬퍼 했을거야...'
그리고 보니 힘을 너무 써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빙글 세상이 도
는 것을 느끼면서..준후는 태평하게 웃으면서 기절해 버렸다...
'역시...이런 대 주문은 나한텐 무리야...'
박신부는 잠시 현암의 안위를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홍녀의 비
명소리가 들렸다...또 한 번...
시선을 돌린 박신부의 눈에, 다시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홍녀의
창백한 얼굴과...그 앞에 천천히 허공에 맺혀지고 있는 피같이 붉
은 사람의 형체가 들어왔다...피로 뭉쳐진 인간...허공에서 맺혀지
는....
박신부는 외쳤다.
"흡혈마!!!"
*주 1) 부동명왕 : 불교 5대 명왕의 하나로, 대일 여래의 변신임.
일체의 악마,번뇌를 항복시키는 분노의 표정을
짓고 오른손엔 항마의 검을, 왼손에는 오라를
지니고 큰 불꽃위에 앉아 있다고 함.
*주 2) 아미타불의 십이광 :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무량불:
범어로 Amitabha)가 지니는 12가지 빛의 공덕.
무량광,무변광,무애광,무대광,염왕광,청정광,
환희광,지혜광,부단광,난사광,무칭광,초일월광
의 열두가지임...
6. 홍녀의 과거.
흡혈마의 붉은 형체는 점점 또렷한 모양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많은 핏방울들이 서로 엉키며 흐르고
또 솟구쳐 올라가기도 하면서 흡혈마의 모습은 점점 여성과 비슷
한 모습을 갖추어 갔다...
박신부는 일단 홍녀에게로 달려갔다. 홍녀는 힘을 잃어 자칫하면
아까의 수위처럼 흡혈귀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신부는
아예 성수병의 마개를 열고 성수를 한꺼번에 홍녀의 몸에 퍼부으면
서 기도력을 집중했다.
"만물의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악한 피조물은 사라질 지어다!"
흡혈마는 갑작스런 박신부의 행동에 잠시 멈칫하는 듯만 했고, 아
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박신부의 성수를 몸에 맞은 검
은 장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되려 홍녀가 차가운 느낌
을 받고 사라져가는 정신을 잠시 가다듬었을 뿐이다.
박신부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정신을 차린 홍녀가 외쳤다.
"신부! 소용없어! 이 꽃은 마물이 아니야..이건...에에에잇..!"
홍녀가 다시 이성을 찾았다.
"칙쇼! 더러운 것!! 만물을 불사르는 염부염왕의 번뇌화(樊惱火)!"
홍녀가 기합을 발하자 그녀의 몸 전체에서 주황색의 불꽃이 확 일
어났고 박신부가 뿌린 성수가 녹색의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듯 하
며...검은 장미가 줄기를 고통스러운 듯 비틀며 타들어갔다.
흡혈마가 조금 놀란 듯 주춤하며 물러섰다. 이제 흡혈마의 모습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해 져 있었다. 그 얼굴은 요염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홍녀의 몸에서 불길이 사그러 들었다. 그녀의 옷은 군데군데 가시
에 찍겨있기는 했으나 불탄 곳은 없이 말짱했다. 홍녀가 몸을 일으
키자, 타버린 검은 장미의 회색 잔해와 재가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
다...홍녀는 허리에서 예의의 막대를 꺼내 한 번 휘두르고는 양손
으로 막대의 중앙을 잡고 둘로 나눴다. 막대는 양쪽으로 뽑혀나가
며 번쩍 하는 섬광을 보이는 검신을 가진 두개의 짧은 칼로 변했
다.
"발!"
홍녀의 기합에 두개의 칼의 검신에 아까와 같은 주황색의 불길이
번져 칼날 전체에 퍼졌다. 불의 칼이 된 셈이었다. 홍녀는 몸의 피
를 많이 잃어 체력소모가 극심한 듯, 창백한 얼굴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잠시 다리를 휘청하는듯 하던 홍녀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
어 발검(發劍)의 안정된 자세를 취했다.
"구마열화검(驅魔熱火劍)!!!... 저건 밀교의 보물인데..!"
어느새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준후가 소리쳤다.
"흡혈마의 몸은 지금 인간에게서 빼앗은 생혈(生血)의 기운으로
덮여있어서 마물을 퇴치하는 주술이나 성수의 영향을 받지 않아요!
불...불이나 물리력만이 저 피갑옷을 물리칠 수 있어요..!"
준후가 외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준후는 즐겨쓰던 인드
라의 번개대신 부동명왕의 멸겁화 주를 외웠고...준후의 양손에는
이글거리는 흰 불덩어리가 뭉쳐가기 시작했다.
박신부도 얼른 방법을 바꾸었다. 잘 쓰지는 않던 비장의 방법이었
으나, 해박한 준후의 말대로 하려면 박신부로서는 성령의 불을 일
으켜야만 했다. 박신부는 품에서 큰 은십자가를 꺼내 오른 손에 쥐
고 기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고, 성령의 화신이라는 연푸른색의 불
꽃이 이글대며 십자가 전체에 번져갔다...
흡혈마는 당혹한 듯 했다... 홍녀,박신부,준후는 세 방향에서 흡
혈마를 에워싸고 다가들기 시작했다. 흡혈마는 상황이 불리한 것을
깨달은 듯, 갑자기 몸을 날려 달아나려 했다. 준후가 멸겁화의 불
덩이를 혈마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불덩이는 건
너편 벽을 뚫고 벽건너 방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몸을
날린 흡혈마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바깥의 창 쪽을 향하고 있는
데...
" 아까의 빛을 갚아주마! 야압!!!"
바람을 가르면서 월향검이 날아왔다. 정신을 차린 현암이 집어던
진 것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던져진 월향은 흡혈마의 오른쪽 어깨
쭉지를 꿰뚫고 지나가서 벽에 깊숙히 박혔다. 흡혈마의 오른팔이
그대로 떨어져 나가면서 땅에 떨어졌다. 더불어 흡혈마의 몸도 제
대로 중심을 잡지 못한채 땅에 내려 앉아 비틀거리더니, 몸에서 핏
방울이 화살처럼 네명을 향해 쏘아져 갔다.
"조심해!"
현암이 옆 벽에 기대어져 있던 평평한 쇠문짝을 집어 던졌다.
기공이 실린 나무판이 세명의 앞을 가로 막으면서 흡혈마가 쏘아낸
핏방울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쇠판에 부딪혀 사라져 갔다.
"좋아요! 현암형!"
준후가 소리쳤고..
"기회다!"
홍녀의 손에 들린 쌍검에서 불기운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며 허
공을 날아 흡혈마에게 쏘아져 갔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공격이 현
암의 기지로 무산되자 잠시 망연해 있었던 듯한 흡혈마는 몸을 돌
려 피하려 했으나....두개의 불검은 흡혈마의 양쪽 가슴에 그대로
박혀갔고...
준후가 일갈하며 쏘아보낸 불덩이가 작렬하면서 흡혈마의 온 몸을
뒤덮어 버렸다..
" 사악한 것! 죄값을 받아라! "
박신부가 걸음을 옮겨 연푸른 불꽃이 이글거리는 십자가를 고통에
몸부림치는 흡혈마의 이마에 대고 눌렀다. 희뿌연 연기가 나면서
십자가는 그대로 흡혈마의 이마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카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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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끝났다....
넷은 잦아드는 불길속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홍녀와 준후의 주술에 의한 불은 영적인 것이
어서 여자의 몸을 검게 태우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오른팔이 잘려
나가고 가슴에 두자루의 칼을 꽂고 있는 모습은 비참했다. 더더욱
이 이마의 복판에 검게 탄 십자무늬가 깊숙하게 새겨져 있는것이
차라리 눈을 돌리고 싶게 했다.
" 네 죄값을 받은거다...오유끼.... "
갑자기 홍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셋은 모두 약간씩
놀랐고, 현암이 홍녀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었나요?"
"오유끼...바로 내 동생이었읍니다....."
홍녀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계속 넘쳐나는 눈물
을 막을 수는 없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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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려서부터 영기가 강하여, 부모님은 나를 밀교에 입문시켰
읍니다..그 때, 제겐 여동생이 있었지요...바로 오유끼였읍니다...
저는 도를 닦아 밀교 구대 호법의 하나가 되었고, 제 동생은 공부
를 하여 육종학을 전공하였읍니다..."
홍녀가 눈물로 털어놓는 과거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대강 다음과
같았다.
육종학을 연구하던 오유끼는 새까만 장미꽃을 만들어 보겠다는 집
념을 버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온갖 과학적 방법을 다 써 보았지
만, 생각처럼 새까만 장미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외곬수의 집
념을 가졌던 오유끼는 그 검은 장미를 만들기 위하여 주술과 유럽
의 흑마술의 방법까지 동원하게 되었고...
결국은 인간의 피를 이용하여 검은 장미를 키워내는 데에 성공하
게 되었다...그러나 그 검은장미는 생명이 없는, 마물이었다...
"일본에서 몇차례 혈액원이 습격당해 많은 혈액이 탈취당했던 사
건이 있었읍니다...이상한 일이라 밀교의 총단에서는 그 일을 알아
내기 위하여 저를 내려 보냈죠..."
영사에 의해 조사를 계속하던 홍녀는 결국 그 혈액이 마물인 검은
장미를 키우는데에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고, 그 장본인
이 자신의 친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생의 아지트에 들이
닥친 홍녀는 못 볼 광경을 보고 말았다. 어느새 검은 장미가 뿜어
내는 피냄새에 현혹된 오유끼는 흑마술의 금단의 방법을 이용, 흡
혈마를 불러내어 자신의 몸에 빙의시킨 것이었다. 홍녀는 동생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 무진 애를 썼으나, 도리어 흡혈마가 되어버린
오유끼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도주하는데에 그쳤다. 밀교 총
단은 이 사실을 알고 영력이 강한 구대 호법을 모두 풀어 흡혈마를
쫓았으나, 도리어 그 중 세명이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흡혈마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것에 불안을 느끼고 한국으로 자리를 옮겨
많은 사람의 생혈을 빨아 힘을 키우려 한 것이다.
" 저는 상처를 치료하는 중 밀교 비술중 세가지를 깨달았읍니다.
한가지는 아까 오히려 방해만 된 백귀를 부리는 법...또 하나는 아
까 제 동생을 벌줄때에 쓴 구마열화검의 이용법...그리고 하나는
흡혈마를 제압하여 사람의 몸에 가둘 수 있는 금제법...."
"그러면 세번째 방법은 이용하지 못했군요."
준후가 중얼거렸다.
"아니..꼬마야.."
홍녀의 얼굴에 웃음이 비치며 준후를 귀엽다는 듯 내려다 보았다.
"이미 사용하고 있단다...아까부터...."
"예? 왜요? 이제 흡혈마는 죽었는데...?"
홍녀가 쓸쓸히 웃었다.
"아니...흡혈마는....."
셋의 놀란 얼굴이 홍녀를 향했다.
"내 몸안에 있어......."
7. 최후의 승부
준후가 놀라움에 입을 딱 벌렸다. 박신부는 갑자기 기침을 했고
현암은 겉으로는 놀라움을 내색하지 않았으나 눈꼬리를 위로 치떴
다...
홍녀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흡혈마가 어떤 녀석인데 아까 그렇게 쉽게 이길 수 있었다고 생
각했읍니까? 녀석은 세 분의 강한 힘을 보고 이미 아까부터 내 몸
으로 옮겨 와 있었읍니다...단지 아직은 적응을 못하여서 가만 웅
크리고 있는 거지요...몇시간만 지나면...놈이 활동을 시작할 겁니
다....그러니 그전에...저는....."
준후가 말을 채 잇지도 못한채 손을 휘휘 저었다. 안된다는 뜻이
었다.
" 속세의 인연을 끊었다 생각은 했지만...제 동생을 제 손으로 죽
인 몸입니다...무슨 살 생각이 있겠읍니까...."
홍녀는 자결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홍녀의 손에는 어느새 길쭉
한 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가솔린 냄새가 났다.
"안...안돼요! 누나!"
준후가 울부짖었다. 박신부도 소리쳤다.
"스스로의 생명을 희생할 생각인가! 다른 방법을! 다른 방법을!"
현암도 소리쳐서 막으려 하다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
다... 홍녀를 구하려면 흡혈마를 놓치게 되거나 되려 홍녀가 흡혈
귀로 변해 버릴지도 몰랐다. 이미 몸안에 들어가 버린 흡혈마는 그
놈이 스스로 원하지 않는바에야 꺼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현암의 머리에 한가지 생각이 떠 올랐다...
" 안녕히.... 세상 많은 이를 구제 하시는 겁니다..."
현암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자 준후와 박신부의 놀란 입이 더
벌어졌다.. 홍녀도 눈으로 인사를 보내며 쓸쓸히 웃었다. 그리고
병안에 든 가솔린을 머리에서부터 들이 부었다.
"현암군! 자네 제정신인가!!!"
"흡혈마는 제거 되어야 해요! 저렇게 강한 금제로 막고 있는 지금
이 기회입니다! 홍녀님이 막고 있지 않으면 또 도망쳐서 다시 얼마
나 많은 사람을 해치게 될지 몰라요!"
"홍녀누나! 그래도 그럴 순 없어요!"
"그런 방법이 아니어도 될거야! 우리가 돕겠네! 제발 그러지 마!"
준후와 박신부가 외쳐대는 중에도 현암은 외면하고 있었다. 머리
속에는 생각들이 번개같이 스쳐 지나가고...긴장하여 깨물고 있는
윗입술에 피가 배어 나왔다.
홍녀가 나직히 웃으며 말했다...
"안녕히...뒷일을 부탁합니다...."
홍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불꽃이 튀고 삽시간에 불은 홍녀의 전신
으로 와라락 번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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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녀는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는 듯 고요히 법문을 읊으면서 불에
타들어갔다..
"으악! 안돼요 안돼!"
준후가 울음을 터뜨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박신부가 허둥지둥 달려가 구석에 있는 소화기를 집어들고 달려 왔
다. 막 소화기를 작동시키려는 순간 누군가가 소화기를 와락 빼앗
았다. 현암이었다. 박신부의 눈이 분노로 크게 치켜졌다.
"현암잇! 그럴수가 있는가!"
현암은 이를 악물고 한손으로소화기를 들며 한손으로 월향검을
들고는 칼집을 홱 뿌리쳐 던졌다.
"이대로 놔둔다 해도 홍녀님은 흡혈귀로 변하게 돼요! 그럼 우리
손으로 홍녀님을 처치해야 하게 됩니다!"
"무슨 방법이 있을거야! 방법!"
"냉정해져야 해요! 흡혈마는 자유자재로 몸을 옮아 다닙니다! 우
리에게 옮을지도 모른다구요!"
현암은 스스로 지독한 소리를 내뱉고 있는데에 내심 아연하면서도
초조하게 자신의 생각이 맞기를 기다렸다. 방법은 그 것 뿐이었다.
"현암형! 다시 봤어! 세상에 어떻게...어떻게...!"
준후가 악을 써댔고, 박신부는 이제 옷소매를 걷어 붙이고 있었
다. 완력으로라도 현암이 들고 있는 소화기를 빼앗을 참이었다.
"현암 자네...이렇게 비겁하게..."
현암이 놀랄만큼 큰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욧!"
현암의 눈은 이제 서서히 몸이 수그러져가는 홍녀를 초조하게 응시
하고 있었다. 현암의 손이 준후에게 무슨 표시를 했다. 눈물에 젖
어있던 준후는 현암의 손을 살짝 쳐다보았다. 부동명왕의 인장이었
다. 준후의 머리속에 한가닥 광명이 비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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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닷!"
막 체통도 잊고 현암에게 주먹을 한대 날리려던 박신부는 현암이
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홍녀의 몸이 불에 타고 있는 쪽을 쳐다
보았다.
무언가 붉은 기운 한뭉치가 쓰러져가는 홍녀의 몸에서 반쯤 빠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홍녀가 의식을 잃자 홍녀의 금제가 풀리고 흡
혈마가 화염에서 벗어나기위해 홍녀의 몸을 빠져 나오고 있는 것이
었다. 현암이 마지막 승부를 걸고 있던 순간이었다...
"준후얏!!!"
현암이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동시에 준후는 암암리에 끌어올렸
던 부동명왕의 멸겁화를 그 붉은 기운을 향해 날렸고....동시에 현
암의 몸은 성큼 허공을 날면서 소화기를 틀어 홍녀의 몸에 붙은 불
을 끄기 시작했다.....
"캐애애애액!"
준후가 독한 마음으로 쏘아낸 불덩이는 그냥 한 덩어리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긴 호선을 그리며 마치 화염방사기처럼 붉은 기운을
태워갔다. 붉은 기운은 괴이한 소리를 내며 몸부림치고 있었고...
박신부가 정신을 차리고는 기도력을 발출했다. 푸른 오오라가 퍼
져나가 이미 불에 휩싸인 흡혈마를 허공에 옭매기 시작했다.
"잠시만! 잠시만 버텨줘! "
현암은 사력을 다해 소화기의 뚜껑에 기공을 잔뜩 실린 월향검의
일격을 가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소화기의 내용물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터져나와 사방에 튀면서 그 대부분은 홍녀의 몸으로 쏟아
져서 덮여있던 불을 단번에 꺼버렸다. 준후와 박신부는 흰 소화기
의 내용물이 사방으로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정신을 집
중하고 있었다....
막 땅에 내린 현암의 손에서 일갈성과 함께 월향검이 날아 날카롭
게 흡혈마를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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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이고 뭐고 눈에 뵈는것이 없었다. 셋은 시커멓게 그슬린 홍
녀를 차에 싣고 그 자신들도 일부 그슬리고 흰 소화기약을 온통 뒤
집어 쓴채 미친 듯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 속에서 박신부가 미안한듯 중얼댔다.
"미안하네. 현암군...난 그냥 깜박 속았지 뭔가...흡혈마를 끌어내
기 위해 그런 걸 가지고..."
"음 말시키지 마세요...사고 납니다.."
" 음..자네가 그렇게 안했더라면 홍녀도 죽고 흡혈마도 다시 나와
세상에 많은 피해를 주었을거야...아뭏든 이거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디 퇴마사도 해 먹겠나...목숨을 건 연극까지 해야 하니 이거.."
"홍녀님이 무사한지나 살피세요...신부님도 의사 출신이시쟎아요."
준후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끼어들어 말했다.
"수양이 깊은 여자니 이정도로 큰일은 당하지 않을 거야..."
홍녀의 새카만 얼굴에서 휴...하는 숨이 나왔다.
"음...정말...꼭 완쾌 되세요...그리고 절 용서해줘요...착한 누
나...."
준후가 눈물로 시커멓게 범벅이 된 눈가를 허옇게 얼룩진 소매로
훔쳐냈다. 참 눈물이 흔한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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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시 30분발 오오사까행 비행기에 탑승하실 손님들께서는 트랩
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
밀교에서 파견 나온 몇명의 승려들이 홍녀가 앉은 휠체어를 밀고
트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홍녀는 아직 곳곳에 붕대를 감고는 있
었으나 거의 회복된 듯 했다. 현암과 박신부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
었다. 홍녀도 예의 그 나직한 미소로 답했다.
준후가 헐떡거리며 붉은 장미 한다발을 껴안고 뛰어 와서는 홍녀
에게 전해 주었다.
"푸훗! 또 장미? "
홍녀의 얼굴이 미소로 환해졌다.
"그래...역시 붉은 장미가 아름다워...향기도 좋고.."
준후의 얼굴이 씨익 웃었다. 홍녀는 준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
시 미소를(이번엔 싸늘한 감 없는 환한 미소였다.) 보냈다.
"잘있어..착한 동생...사요나라...!"
제트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준후가 정신없이 이미 사라진 비행기의 자취를 쳐다 보는 중에 현
암과 박신부는 천천히 출구 쪽으로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
작했다.
"대단한 여자였네... 처음에는 좀 사악한 걸로 보였는데...한이
많아서 그랬던 듯 해..."
"예...원래 천황족의 은밀한 후손이었다는 군요...그러니 백제의
후예인 셈이지요...원래 여기 옛선조의 고향에 계속 남아있고 싶다
고 했었는데...."
"아뭏든 존경할 만 해...스스로를 희생하여 악령을 퇴치하려 하다
니...."
어느새 준후가 톡 끼어들었다.
"근데 신부님... 전에 현암형과 월향검을 놓고 왜 선택을 못하셨
었죠? 전 당연히 현암형을 구하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음? 음? 흠흠...저런저런...현암군도 있는데...하하하하....
준후야, 그건 말이다...난 그때 월향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단다...스스로를 희생하여 남을 구하
려는 건 정말로 고귀한 정신이 아니겠니?...홍녀님도 그랬고...하
물며 귀신이 봉인된 월향검에게서도 사랑이란 정말로 그 당사자를
고귀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거란다....우리의 지옥같은 싸움 중
에서도 말이야...."
"음..그건 자비심이 아닌가요? 불타의 가르치심에..."
"그만그만! 신부더러 염불을 외우라는 거냐? 하하하"
셋의 허물없는 웃음소리 속에 또 하나의 비행기가 날아 올랐다.
(***** Special Present *****)
퇴마록의 인물들....
퇴마록 1부에 물론 간단한 설명은 나옵니다만...
약간 더 자세한 설명을 붙이는 편이 나을 듯 합니다.
(만약 퇴마록을 책으로 내게 되면 이 등장인물 개개인의 이야기가
각각 독립된 이야기로 한 장씩을 차지하게 될거고, 또 이 인물들이
만나게되는 과정도 포함될 겁니다만, 일단은 간략한 과거사를 덧붙
이는 정도로 설정을 명확히 하기로 합니다...좀 늦었지만...)
- 퇴마사의 자격.
- 개성적인 영적 능력을 지닌 자로 영 및 기타 초자연 현상에
대한 방어와 공격력이 있어야 한다.
- 가족 및 기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간적 요소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 일체의 목표를 초자연적으로 고통받는 인간 및 영들을 구제하
는 데에 둔다.
- 행동은 항상 비밀해야 하며 외부에 물의를 끼치지 않는다.
- 항상 사랑과 자비에 입각하여 행동하여야 한다.
1. 이현암 (李賢巖) : 30세...서울 출생.
1964년생. 성별 남성. 원래는 공대생이었으며 $$대학을
1983년 중퇴. 그때까지는 주로 기계체조와 전통 무술을
취미로 배움. 82년 졸업과 동시에 양친을 교통사고로
잃음. 형제로 여동생 이현아(68년생)양이 있었으나 83
년 물놀이때에 초자연적 현상(물귀신)으로 잃게 된 후
학교를 중퇴하고 산에서 수도. 주로 태극기공을 연마
하였으며 그 도중에 산속 화전마을에 출몰하는 색귀를
제압하고 마을의 성황에 모셔져 있던 귀검 월향을 얻음
수도 중 산에서 정체를 알수없는 이인을 만나 3가지의
무공 (파사신검,사자후,부동심결)을 익힘.
85년 말 하산하여 동생을 잃게한 물귀신과 대결 중
박신부의 도움을 받고 퇴마사의 길로 들어섬.
성격은 원래는 좀 덤벙거리는 편이었으나 수도 이후
대단히 냉정,침착하고 어떤일에도 놀라지 않는 침착성
을 지니게 됨. 주로 기공과 월향검을 이용한 각종 공격
술이 특기로 퇴마사팀의 주공격수 역할을 함. 미혼.
2. 박신부 본명 박윤규(朴潤圭) : 58세...서울 출생.
성별 남성. 1954년 모 의대 과정을 마치고 (주로 군의
관으로 활동) 9년동안 전문의로 활동. 1963년 당시 12
세였던 차미라양의 검진을 맡았으나 차미라양의 병세
가 악령에 들린 것으로 손을 쓸 수 없었다는데에 충격
을 받고 (차미라양은 얼마후 자살함) 의사를 그만두고
신학에 입문, 1975년에 신부 서품을 받음.
그러나 과거의 기억때문인지 엑소시즘에 심취하고 교황
청이나 주교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주 제령의식 및
퇴마의식을 행하여 이단으로 배척받고 성당을 맡지 못
하고 있음. 가족은 없으며 물려받은 재산 및 본인의 재
산을 바탕으로 퇴마사 그룹의 재정적 후원을 함.
그의 궁극적 희망은 말세의 날에 온다는 적그리스도와
대결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려는 것임.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보유한 성직자로서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강한 기도력을 발휘함.
천주교 신앙에 의거하지 않은 모든 다른 신앙 및 주술
등을 본인은 배격하지만 현암,준후등과는 행동을 같이
함. 기도력에 의한 방어력은 퇴마사들 중 제일임.
또 성수와 십자가등을 통한 공격력도 뛰어남.
역시 미혼으로 가족은 없음.
3. 장준후 (張俊厚) 13세...충북 출생.
모 종교집단의 2인자였던 아버지와 무녀였던 어머니를
양친으로 둠. 횡행하는 모 종교집단의 폐해에 거부감을
느낀 부친의 은밀한 교육으로 거의 모든 신비주의에 대
한 훈련 및 영성개발로 유년기를 보냄. 이미 10세때 주
술, 주문, 강신술, 부적술 등에 천재적 재능을 지님.
10세때 일어난 종교집단의 집단 사투때에 양친을 잃고
현암과 박신부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후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퇴마사로의 길을 가게 됨.
아직 나이가 어려 정신력이 약하고 내력이 짧아 종종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나 어찌보면 셋중 가장 강한 파워
를 지님. 주로 불가(원시 불교) 와 힌두교쪽의 신들을
강신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 - 번개,불을 발사할 수
있고 영사,투시도 하며 부적도 능숙히 다룰수 있음.
을 발휘하고 해박한 지식으로 악령의 정체 및 내력을
알아내는 데에도 탁월함. 단, 어린 나이탓에 상황대처
력이 부족하고 마음이 너무 착해서 종종 위기를 맞기도
함. 장래 최고의 퇴마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짐.
4. 현승희 (玄承喜) 23세...경주 출생.
4부에 모습을 처음 보이게 될 여자 퇴마사. 구체적인
이야기는 4부 종료후에 하기로 할 것임.
스스로의 능력을 모르고 있으나 실은 강력한 신이 환생
한 화신(아바타라:Avatara)임....
- 만약 7부까지 이어진다면 그 이후는 퇴마사의 무대가 세계로
넓혀집니다. 세계의 거의 모든 악령들과 대결하게 되는 셈이죠...
물론 7부까지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이 되겠지만요....
그러면 앞으로도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길다는 이유때문에 잘
안읽으시는 분들도 많은 듯 한데, 스토리의 충실을 기하기 위해서
는 어느정도의 분량은 불가결합니다.(쓰기도 힘들지만..하하하)
- 퇴마록 4부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1편.
1. 발견되는 시체들...
"음! 이거 또야?"
박신부가 신문을 내려 놓으며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뭔데요? 또?"
월향검을 닭피에 담가놓고 있던 현암이 중얼거리며 지나가는 투로
대꾸했다. 전번 흡혈마와의 싸움 이후로 월향검이 영 예전같지가
않아 현암은 월향의 귀기를 돋우기 위해 검은 닭의 피를 먹이고 있
는 중이었다.
" 참혹한 시체가 발견되었네...미술관에서..."
"예? 미술관요?"
새로산 게임기로 열심히 오락을 하고있던 준후가 되물었다. 그 사
이 화면의 주인공은 '꽥'하며 주인공 답지 않은 소리를 내며 죽어
버렸다.
"으악! 최고점 내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좀 조용히 못하니? 준후? 저 오락기 괜히 샀어. 시끄러워서 원."
"그러는 현암형도 밤엔 가끔 하쟎아!"
"읔..나야 오락기가 이상이 없는지를 살피려..."
"그만그만.. 여기 기사를 보게."
박신부가 신문을 펼쳤다.
- ... 현웅 화백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모갤러리내에서 신
원을 알 수 없는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발견될 당시 사체는
벽에 있는 그림에 짓뭉개져서 상체가 거의 으깨져 없어진 상태...
"웩! 세상에..."
준후가 비위가 뒤틀린다는 듯 눈을 돌렸다.
- ...사건 당일 밤, 경비원의 진술에 의하면 어느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가 흉기를 들고 갤러리에 침입, 이를 제지 하려던 경비원
을 폭행하여 실신 시킨 후 갤러리에 침입하였다고 한다. 경찰은 갤
러리내에 도난당한 그림이 없으며 그 이후 안쪽의 도어록이 작동하
여 실내가 차단 된 점으로 미루어 발견된 시체가 갤러리에 침입했
던 남자일 것으로 단정하고 수사를 진행...-
"음...미친 놈이구먼...죽을려고 찾아 들어간 듯 한데.."
현암이 중얼거리자 박신부가 말을 받았다.
"그 이유를 알아내야지..."
- ... 경찰은 또 시체를 처리한 방법이 지나치게 잔인하고 또 시
체를 그런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20톤 이상의 힘이 필요
하다는 점등에서 수사의 난해를 표명하고 있...-
"맙소사! 20톤! 웬만한 기중기보다 큰 힘인데..."
"더 볼 것도 없네."
박신부가 중얼거렸다.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냐..."
준후가 겁먹은 눈매로 말했다.
"20톤이 얼마나 되는 건데요....?"
현암이 말했다.
"내 몸무게의 330배야...나같은 사람 330명을 집어 올릴 수 있는
힘이지...더구나 이렇게 벽에 박치기 시키려면..."
현암이 잠시 말을 끊었다.
"집어 올리는게 아니라 대단한 속력으로 집어 던질 정도의 힘이
야..."
"흑...이게 귀신이라면....물리력을 쓰는 정도가 아니라..."
"그래...거의 상상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는거지..."
겁먹은 준후를 보는 박신부의 눈매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둘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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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서둘러 미술관으로 달려 갔으나 이미 개인전은 취소 된 후
였고, 장내는 말끔히 정리 되어있었다. 준후가 영사를 시도했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지박령류의 짓은 아니군요..."
"그러면 대체 어떻게 된거지? 죽은 자의 영도 나타나지 않아?"
"전혀요...마치 깨끗이 먹혀 버린 것 같아요..."
일행은 사건을 목격한 경비원을 만나보려 했으나 그 경비원은 폭
행당한 후유증으로 중태에 빠져 있어서 면회조차 되지 않았고...
개인전을 주재했던 현웅 화백은 사람을 만나기 싫다면서 굳게 잠
긴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일행은 거기서도 발을 돌릴 수 밖에 없었
다... 경찰에게는 가 보았자미친 사람들이나 사기꾼 소리를 들을
게 뻔했으니 가보나 마나였고...
"악마가 잡아갈! 물리적으로도 깨끗하고... 영적으로도 깨끗하다
니...이거 도대체 단서가 없쟎아!!!"
지친 박신부가 푸념을 해댔다. 그 말을 무심히 듣고 있던 현암의
머리에 문득 어떤 사람이 스쳐 갔다.
"약간의 정보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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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은 전에 알던 친구이자 지금은 사건 담당 기자인 안재민을 통
해 문제의 사건현장을 찍은 사진을 입수했다.
"야! 너 악취미구나. 이런 사진을 뭐하러 가지려고 그러냐? 나 이
거 찍고는 사흘동안 아무것도 못먹었다..제기랄.."
안기자는 마치 사진이 무슨 흉물이나 되는것처럼 봉투를 집어 던
졌다.
"근데 너, 신용을 지킨다는 건 아니까 내가 주지만, 절대 유포 시
키면 안된다. 하이고..아뭏든 나도 군대에서 탱크에 깔려 죽은 사
람도 봤지만, 이렇게 끔찍한 몰골은 처음이다...흠흠...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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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이거 정말 끔찍하군...시체가 무서운 힘으로 그림에 눌린
것 같아...이거...머리도 완전히 없어지고...상체도 아예 으깨져
버렸군 그래..."
역시 의사출신이었던 박신부는 그 끔찍한 사진을 보고서도 제법
담담했다.
" 잘린 다음에 눌린 건 아닐까요?"
"아니, 여기 아래를 보게나..이건 분명 얼굴의 일부고...여기 반
쯤 부숴진 뼈는 어깨뼈의 일부임에 분명해...바닥에 오른팔도 반쯤
은 남아 떨어져 있고...분명 뭔가가 엄청난 힘으로 벽에 대고 눌러
댄게 분명해..."
준후는 아예 저만치에서 귀를 막고 있었다. 말소리를 듣지 않기
위함인지 왁왁 소리를 혼자 질러대고 있었다.
"준후야...이 사진으로 투시를 해 보지 않으련?"
"으악 싫어요...잉잉..."
"준후야...이깟 사진을 징그럽다 여기면 되겠니?...불쌍하다는 생
각을 해야지...."
준후가 머뭇거리다가 슬금슬금 다가 왔다.
그리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사진에 손을 대다가..
"으읔!"
현암과 박신부는 놀라서 준후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우웩!!!"
그날 결국 영사가 성공하기까지는 두시간이 걸렸다. 준후의 뱃속
에 든 것이 다 없어져야 했으니까...그러나 사진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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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은 불안한 마음으로 허리춤과 구두 뒷굽에 감춘 칼을 어루만
지고 있었다.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젯밤 전화를 받고
나간 동료 제성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번에
는 자신에게 전화가 왔기 때문에....
그건 여자의 목소리...분명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냐! 헛소리...어떤 놈이 장난 한게 분명해!..."
하윤은 스스로를 위안하려는 듯 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나 아
무래도 찜찜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어째서...어떻게 그 여자의 목소리가....이미 죽은 년인데...'
그 목소리는 무덤덤하게 이야기 했다. 밤에....(시간도 얘기않고
그냥 밤이라고 했다..)...강변으로 나오라고...
나가지 않으려 했다.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칼잡이 제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해가 지고...날이 어두워지
기 시작하자 그 목소리가 계속 귓전에 울리는 듯 했다.
"밤에......강변으로....나와....."
정말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미 내려놓은 수화기에
서.... 하윤은 미친 듯 전화선을 뽑아 던져 버렸다...아니, 거기가
아니다...벽에 걸린 그림에게서...그 눈깔이 이상했다...나를 째려
보고 있는 것 아닐까?...안돼!....하윤은 항시 품고 다니는 칼을
뽑아 그림을 박박 찢어 버렸다...아니..그래도 들린다...들려....
어디지?....어디 숨은 거지?....
"밤에....밤에....강변으로...."
창문이다!....하윤은 마시고 있던 술병을 집어 창문으로 내던졌
다...유리가 박살이 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그 소리가 메아리
처럼 울리는 듯 했다...
"밤에....강변....."
"그만해! 그만!"
하윤은 미친듯 달려 나왔다. 강변으로....
그리고 지금 그는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옛부터 써오던...시퍼렇
게 갈은 칼 두자루를 가지고....
'만나면 발기발기 찢어 버릴테다...나 목동의 빠가살이 송하윤을
우롱하는 건...사람이든 귀신이든간에....'
벌써 기다린지 2시간이 넘었다. 사방은 칠흙같이 캄캄해 지고...
강물소리만이 고요히 들려올 뿐이었다. 개구리 한마리가 울기 시작
했다.
"궷...궷...궷..."
"시끄러! 망할놈의 개구리 새끼..!"
하윤은 신경질적으로 돌을 줏어 소리나는 쪽으로 던졌다. 그래도
개구리는 계속 울고 있었다.
"궷...궷...궷...너...너...그때..."
"잉?"
개구리 소리가 이상하게 변해 가는 것 같이 들렸다. 아니, 그건
착각이었다. 착각일 뿐이었다! 그러나 개구리 울음의 사이사이에,
간간히 섞여 들려오는 그소리는...그 소리는...!
"궷..궷...피...피...그...궷...붉...은..."
"으아아악! 그만! 그만!"
하윤은 귀를 틀어 막았다. 그리고 방향도 알 수 없이 달리기 시작
했다.
"궷...궷...너...기억...궷...그때....궷....그...."
얼마를 달렸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뭏
든 그 망할 개구리 소리에서 벗어나야 했다.
하윤은 정신을 차렸다. 자기의 아지트 앞이었다..아까 자기가빠져
나온 자신의 은신처...술이 필요했다...하윤은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고요했다...아까 자신이 어질러 놓은 그대로...창문도 술
병도 깨져 있었고...
'에잇 참. 아까 술병을 깨먹었었지!'
...찢어 버린 그림조각이 바닥에 널려 있었고...그림은 여전히 벽
에 걸려 있고...선이 뽑힌 전화기가...음...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니?????
하윤은 그림을 쳐다 보았다. 아까의 그림이 아니었다...노래를 부
르고 있는 여자의 그림...그 여자는...그 여자는....
"으아아아아악!"
그림 속의 여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그 소리에는..그 소리
에는...그 여자가 울부짖어대던 그 비명소리가...
"으아악! 캬아악!"
노래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온세상이 그 소리로만 꽉 찬 듯한...
하윤은 귀를 막았다...몸부림 쳤다...
"으아아아!..내가...내가 잘못..아아악!"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귀를 막아야...빌어먹을 귀...하윤은
두자루의 칼을 뽑아 자신의 양쪽귀에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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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봐요!"
현웅 화백의 이번 전람회 팜플렛을 뒤적거리던 준후가 소리쳤다.
"뭐냐?"
"뭔데!"
달려간 현암과 박신부의 눈에 준후가 가리키는 페이지가 들어왔다.
기쁨에 차서 날개짓을 하고 있는 어느 소녀의 모습...
아주 빨리 날고 있는 듯, 긴 머리가 뒤로 나부끼고 있고 별과 무
지개가 쏜살같이 뒤로 멀어져 가는 그림이었다...
" 전시 번호 13...나르는 소녀...?"
현암이 중얼거렸다..
박신부가 외쳤다.
"아까 사진에 나온, 시체가 날아가 부딪힌 그림이..."
현암이 튀어나가 사진을 집어들었다.
"맞아요...13번...그러면 이 남자는 그 그림에 날아가 머리를 들
이받고...."
박신부와 준후의 얼굴이 망연해 졌다.
1. 발견되는 시체들...(2)
"현웅 화백의 작품경향은...크게 2시기로 나누어 진다...제 1기는
주로 동심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주종을 이룬다. 따뜻한 색조와 파
스텔 톤에 가까운, 수채화를 연상하게 하는 맑은 배경과 아울러.
......"
현암이 팜플렛에 실린 현웅화백의 약력을 읽어 내려가는 것을 박
신부와 준후는 열심히 듣고 있었다. 준후는 뭔가 알아내려는 듯,
팜플렛의 13번 그림 - 나르는 소녀 - 을 열심히 주시하고 손가락으
로 문질러 보고 있었으나 사진도 아니고 인쇄된 그림에서 투시가
될 리 없었다.
"....제 1기의 주된 테마는 소녀의 동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꿈꾸는 소녀','게와 노는 소녀'..."
"게요? 현암형? 옆으로 기는 게?"
"그래..그리고 '나르는 소녀','노래하는 소녀','줄넘기하는 소녀'
,'독서하는 소녀','별헤는 소녀'의 일곱점의 '소녀' 연작은 작가의
개인적인 소장품으로 일체 외부에 알려지지 않다가 이번에 처음 공
개되는 것이다..."
"음..."
박신부가 침중하게 뭔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준후는 팜플렛
에 나온 그림들을 하나씩 뒤적여보고 있었고...
"야...그림들 참 이쁘다."
"그 그림들에 정말 무슨 이유가 있는걸까요? 아니면 그냥 우리가
지나치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걸까요?"
현암이 심각한 얼굴로 박신부에게 물었고 박신부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현웅 화백의 2기의 작품들은?"
"이 팜플렛만으론 알 수가 없군요...단지...나오는 얘기는..."
"뭔가?"
"화풍이 극단적으로 어두워지고 침울한 기분을 띄고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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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벧이 울렸다. 식은 땀을 잔뜩 흘리고 있던 사내는 수화기로
손을 가져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그러나 계속 울리는 벧 소
리에 결심을 한 듯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긴장한 사내의 얼굴이
밝게 펴지며 다음 순간 일그러지고는 욕설을 거칠게 내 뱉었다. 잘
못걸린 전화였다. 사내는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 놓고는 수화기 선
을 들고 선을 뽑아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듯 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사내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창문! 창문에 무언가
글씨가 써져 있었다. 그림물감인지 뭔지 붉은 글씨였다.
'해변으로 나와...'
사내는 소스라쳤다. 그리고는 다리를 후들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미친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방은 아파트의 4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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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와 현암, 준후가 새로 발견된 의문의 변사체의 이야기를 안
기자에게 얻어들은 것은 저녁때의 일이었다. 셋은 용약 사건의 현
장으로 출동했다..준후가 뭔가 감을 잡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반갑게도 사망시간이 24시간을 넘지 않았다는게(아직 검시
진도 도착하지 않았지만 뛰어간 안기자의 말로는 피가 완전히 굳지
도 않았다고 했다.) 더 좋았다. 준후가 영사를 꼭 해보겠다고 한
것도 의외였고...
달리는 차안에서 현암이 물었다.
"확실하니? 이번에 발견된 시체가 먼저의 미술관에서의 사건과 관
련이 있다는 게?"
"음...뭐라 할 수는 없지만...그런 느낌이 들어요...고통...고통
이 느껴지는 듯..."
"고통? 음 물론 고통받다가 죽었겠지. 허나 고통받는 느낌은 좀
흔한거 아냐?"
"아뇨..이건...뭐랄까...멀리 퍼지는 고통....멀리 멀리 퍼지는
...그래서 저도 들을 수 있었어요..."
"멀리 퍼지는 고통...?"
현장에 도착한 일행은 그곳에 웅성거리는 형사들에 의해 제지당했
으나 마침 검시관으로 나온 장박사(박신부의 옛친구)덕에 현암은
조수로, 준후는 박신부의 옷속에 숨어서, 박신부는 마지막 기도를
올려 준다는 명목으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제길...별 짓을 다 해 보는군"
현암이 나직히 중얼거리자 박신부가 조용히 하라는 듯 눈을 흘겼
고, 준후가 박신부의 넓은 법의 속에서 킥킥 웃었다. 현암은 법의
자락속을 슬쩍 걷어찼다. 이번엔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한 번 더 되게 걷어차이고는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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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결국 해변으로 나갔다. 해변으로... 석양이 물들어가는 해
변의 경치는 아름다웠다...그 날...그 날에도 이렇게 해가 지고 있
었다....그 해....그 속에서....사내는 강한 자책감을 느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다 지나갔다. 싸움과 악행으로 일관되었던
자신의 스물 여섯의 성상...그리고 노을 빛 아래에서 있었던..그..
사내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앞에 어느 여자가 서 있는듯 했다.
아니 분명 서있었다. 꼼짝않고 서서...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그건....
"으아아악"
사내는 뒤돌아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멀어서 얼굴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그건 분명...분명...그때의 그여자의 옷...피로
물들던 그 여자의 흰옷....
정신 없이 달려 도망치던 남자가 땅바닥에 나디굴었다. 누가 치밀
하게 모래밭에 말뚝을 박고 발목이 걸리도록 줄을 쳐놓은 것이었
다. 거기에 구덩이까지 좀 깊숙하게 파져 있어서 사내는 그야말로
호되게 나가떨어졌다. 사내가 나가 떨어지는 순간 무언지 이상한
힘이 사내의 발목을 한 바퀴 돌리는 듯 했으나 사내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모래에 얼굴을 쳐박은 남자는 서둘러 고개를 들고 얼굴의 모래를
사방에 뿜어댔다. 양 발목이 부러진 듯 했다. 이제서야 통증을 느
낀 사내는 욕설을 하며 눈을 떴다...그런데...그런데...
사내가 넘어진 바로 앞...
누군가가 거기에 하나의 그림을 세워 놓았다..
나무에 반쯤 몸을 기댄채 긴 속눈썹이 떨릴듯, 가볍게 눈을 감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듯한 그 얼굴은.....그때 그가....
"아아악! 용서해 줘! 용서를!"
사내가 울부짖으며 일어서려 했으나 무언가의 충격으로 부러진 발
목으로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사내는 손가락으로 모래를 비집으며
기어서 달아나려 했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꼬챙이가 날아와서는
사내의 오른손을 뚫고 모래에 깊숙히 박혔다.
"끄아악!"
놀라움과 고통에 못이긴 사내는 왼손으로 꼬챙이인지 나무 말뚝인
지를 뽑아낼 생각을 했으나 어느새 날아온 또 하나의 꼬챙이가 사
내의 왼손 마저 꿰뚫어 버렸다...
사내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두 팔과 두 다리의 의식이 마비
되어갔다. 가물거리는 그의 눈앞에 들어오는 것은...유혹하는 듯이
잠들어가는 소녀의 얼굴...그리고....서서히...아주 서서히 밀려오
는 밀물.....
물이 남실거리며 사내의 코 끝을 간지럽혔다...이제 해가 막 진
저녁 무렵...밀물이 들 때였다...서서히...서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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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느껴지니? 준후?"
영사를 행하다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준후에게 현암이 물었다. 박
신부와 장박사는 사체의 동공이 뒤집히고 경련의 정도가 심한 것으
로 보아 자살 직전(누가 봐도 자살이었으나...귀에 자기 손으로 두
자루의 칼을 꽂고 죽었으니...)에 강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
었을 거라 얘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건....이건...."
준후가 약간 몸을 떨며 한쪽의 벽귀퉁이를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
었다.
"뭐지? 준후?"
현암이 초조하다는 듯 물었다. 준후가 입을 열었다.
"노래소리....노래소리에요...여기 뭔가 있었어요...저 벽에.."
"아무것도 건드린 건 없었네. 경찰들이 철저히.."
장박사가 놀라 말을 하려 했으나 박신부가 손을 저었다.
"들려요...많이 희미해졌지만...전 들을 수 있어요...노래...노래...."
준후가 서서히 손가락을 들었다.
"강한...아주 강한 원한....복수...노래...그림이에요.."
"그림이라고?"
현암이 놀란 듯 물었다.
"예감했었어요...그림...노래하는 소녀! 저기에 걸려 있었어요!"
준후의 눈에서 불통이 튀는 듯 했다.
2. 땅벌떼...
셋은 현장을 벗어났다. 준후는 묵묵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
었고, 현암이나 박신부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차로 한참을 달려가는 중에 박신부가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건가? 현암군?"
"그 화가에 대해 조사를 좀 해 봐야겠어요. 준후의 말대로 그림에
뭔가가 있다면.."
준후가 오랫만에 입을 열었다.
"그림에 깃든것...뭔지는 나도 몰라요.."
"음? 뭐라고? 그림에 원한령이 깃든것 아니었니? 나도 약간 영사
를 해 보았는데 원한 비슷한 이미지가 느껴지던데..."
박신부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준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그렇긴 해요...허나 그것보다 더 복잡한게 있어요...그
힘...그 사람들을 죽게 한 그 힘말여요.."
"힘...? 원한령의 한이 깊이 맺히거나 주술을 이용하면 영이 물리
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종종 있쟎아?"
현암이 약간 스피드를 줄여 커브를 돌며 대꾸했다.
"아뇨...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영의 힘이 그렇게까
지 발휘된다면, 주변은 당연히 그 원기(怨氣)로 물들어 있어야 하
는데...거의 아무런 자취가 없다는 것은...."
"그렇다면 그 힘...사람을 날려 벽에 메어 꽃고할 수 있는 그 보
이지 않는 힘은 어디서...?"
"예감이 이상해요...형...아마도 사건이 계속 일어날 것 같아
요..."
생각에 잠겨있던 박신부가 말을 이었다.
"음..그러면 그 화가의 집으로 가는 건 아직은 좀 시기상조인것
같군. 그 힘이 꼭 그림에서 나온 거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좀 이른
것 같아. 준후가 말한 그 미지의 힘에 대해 뭔가 알아낸 후에 가는
것이 더 나을 듯 한데..?"
현암이 차를 돌렸다.
"음...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나저나 안기자, 이녀석은 왜
연락이 없는거야, 희생자들의 신원에 대해 추적해 준다고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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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가는거야?"
담배연기로 뽀얗게 흐려진 방안에 5명 정도 되어보이는 남자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그들의 앞에는 몇장의 사진이 흐트러
진 술병들 사이에 역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들중 한 사람이
갑자기 신음소리를 내며 뛰쳐 나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덩치가 약
간 커보이는 수염을 기른 남자 하나가 뛰쳐 나가려는 사내를 붙잡
았다.
"임마! 죽고 싶냐? 여기 잠자코 뭉쳐 있어야 한단 말야!"
"형님! 나가게 해 주십쇼...더 이상 이렇게 숨어 지내긴 싫습니
다... 도대체 어떤 놈이, 아니 어떤 귀신인지 뭔지가 우릴 해치려
하는 건진 몰라도 내가 가서 죽여 버리겠소!"
"닥쳐! 그렇게 큰소리를 치다가 벌써 셋이나 당했다."
"형님!"
"안된다면 안되는 줄 알앗!"
"형님....."
사내가 무너져 내렸다. 목소리에 울음인지 짐승 울음소리같은 것
이 섞여 울렸다.
"...이대로는...이대로는...견딜 수가 없어요....그 전화벧 소
리...그리고 그 목소리...."
"닥쳐 임마!"
"...미칠 것 같아요...차라리...차라리..."
"야 임마! 너 무슨 생각하는거얏! 야! 털보! 잡아! 저 놈 잡아!"
그러나 사내는 미친듯 괴성을 지르며 수염난 (털보) 남자를 머리
로 들이 받았다. 어이쿠! 하며 털보가 넘어지자 그 사내는 미친 듯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염병할 자식이...이봐! 다들 따라가서 데리고와! 개죽음을
시킬 수는 없쟎아!"
두목인 듯한 남자가 서둘러 나가자 두명의 남자가 그 뒤를 따랐
다. 두목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제기랄...누군 무섭지 않은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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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자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저녁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현암은
급한 성질대로 막 욕을 퍼부으려다가 멈칫했다. 뜻밖의 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 음..잘 들어라..이거 경찰 컴퓨터를 훔쳐서 간신히 알아낸 거니
까....이번에 칼로 귀막고 죽은 놈은 송하윤 이라하는 조직 폭력배
야... 소위 '땅벌떼' 라고 하는 폭력 조직의 일원이지. "
" 땅벌떼? 뭐하는 놈들인데? "
" 가만가만...끝까지 들어! 이놈들은 해결사로 알려져 있고, 밀수
에도 조금 손을 대고 있지만, 경찰 자료에 의하면 아마도... "
"아마도 뭐야?"
" ...아마도 인신매매 혐의를 받고 있는 놈들인걸로 생각돼."
"음? 인신매매단?"
" 음 그거야 현재 혐의를 받는 정도니까 꼭 단정지을 수는 없지
만... 아뭏든 좀 이상한 점도 있어. 경찰은 이 사건들을 비슷한 폭
력배들끼리의 암투로 생각하고 있지만..내가 보기에도 좀 이상한
면이 많아...아...본론으로 돌아가서... 전에 미술관에서 죽은
(웩!) 녀석 있지? 그놈도 대강 신원이 밝혀졌는데...박제성이라고
그 '땅벌떼'파의 칼잡이였던 걸로 추정 된다..."
"음..같은 일파였다고?...뭔가 찜찜하군..."
" 그 뿐만이 아냐. 오늘 또 한놈 발견 됐어. 바닷가에서..."
"뭐? 그새 또 죽었어? 그 땅벌떼의 일원인가? "
"음..그래. 잘도 아는구먼. 이름은 장인석, 별명은 바베큐..."
스피커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준후가 끼어들었다.
"사인이 뭐였대요? 물어봐요!"
"음..그래. 어떻게 죽었지? "
"음...익사야.. 역시 지독하더군. 두 다리가 부러지고 양손이 바
닷가 해변에 못박혔어. 그리고 밀물이 서서히 들어오고는...꼬르륵
한거지 뭐...."
"음? 밀물? 그러면 굉장히 천천히 익사 했을텐데...반항의 흔적
은? "
"전혀 없었어...마치 자는듯이...얼굴이 평온..아니 멍하다고나
할지...?"
박신부가 무릎을 치며 외쳤고 현암과 준후는 모골이 송연해 짐을
느꼈다...
" 꿈꾸는 소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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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달리고 있었다. 미친듯이, 때로는 저주의 욕지거리를 해대
기도 하고, 때로는 단말마의 비명소리같은 것을 지르기도 하며 미
친 듯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목소리...
그의 귓전에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건...그 때의 그여자...그 얼
굴이 유난히 희었던 그 여자의 목소리...
갑자기 사내의 눈앞에 흰옷을 입은 여자...바로 그여자의 모습이
비쳤다. 얼굴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분명 그 여자 였다...
"아아아아아아-----"
사내는 미친 듯 부르짖었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번득이고 있었
고, 극도의 공포와 분노가 겹친 나머지 입에는 거품마저 물고 있었
다.
"덤벼라! 이 계집애! 다시 한 번 죽여 주맛! 나와! 나오란 말이
닷!"
어느덧 눈앞이 탁 틔인 듯 했다. 공터...일이 없는 공사장이었다.
여기저기 널린 콘크리트 파이프들...그리고 다소 익살 맞은 듯 서
있는 포크레인 한대...여기저기 쌓여 있는 모래와 자갈 무더기...
흰 옷을 입었던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와! 어디냐! 어디 숨었어! "
사내는 미친 듯 고함을 질러 댔으나 아무 대꾸도 없었다. 귓전에
울리던 목소리마저 어느새인가 사라져 버린 후였다.
사내는 여기저기를 살벌한 인상으로 두리번 거리고 다니기 시작했
다. 손에는 이미 어느 새인가 자전거 체인이 들려 있었다. 두리번
거리던 사내의 눈에 포크레인의 빈 운전석이 들어왔다. 아니, 비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림 한폭이 운전석 아래에 놓여 있었다. 어
디서 본 듯한 그림....해변에 있는 어느 소녀의 모습을 그린 듯 했
다. 해변....해변....공사장 전체에는 두껍게 모래가 덮여 있었다.
사내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긴장한 채 서서히 포크레인의 운
전석으로 다가갔다. 그림의 모습이 점차 확대 되면서 눈에 들어왔
다... 무언가 조그마한 것과 놀고 있는 듯한 소녀... 얼굴이 흰...
그 소녀의 얼굴은...
"으아아악!"
사내가 들고 있던 체인을 떨어 뜨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림 속의 소녀가 눈을 뜨고 그를 쳐다 보는 것이었다....
그 눈은 눈동자가 없는 붉은색...
웃음소리...웃음소리가 선명히 들려 왔다.
"아아악!"
사내는 허둥거리며 뒤돌아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허둥거리는
중에 어느덧 발목을 삐었다. 사내는 그 자리에서 디굴었다.
뒤쫓아온 두목과 두명의 남자가 모래 더미를 넘어서자 허둥대는
사내의 모습이 먼 발치에 들어 왔다...그 뿐..그들은 입을 벌린 채
꼼짝하지 못했다.
분명 비어있는 포크레인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내는 다리가 제대
로 말을 듣지 않는듯 뛰지도 못하고 뒤돌아 보는 상태로 뒤로 기어
가고 있었다. 포크레인의 조종석은 분명 비어 있었다. 웃음소리..
사내의 공포에 찬 신음과 비명에 섞여 웃음소리가 똑똑히 들려오
고 있었다...그 웃음소리는...
"그 여자...그 여자의..."
두목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잠시 중얼거렸으나 말을 더 잇지 못
했다. 포크레인의 삽이 마치 거대한 집게발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사내는 긴 비명소리와 함께 허리가 두동강 나 버렸다.
그 광경을 먼데서 지켜보고 있던 세사람의 귀에 아직도 그 여자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리고 있었다. 아니, 더더욱 선명해 지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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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의 얼굴이 침중했다...현암이 담배연기를 푸욱 내 뿜으며
푸념 비슷한 말을 내 뱉았다.
" 이건...도대체....죽어 마땅한 놈들만 죽는구먼요. 차라리 그냥
내버려 두는게 어때요? "
"아무리 악인이라도 회개할 기회는 주어야지...그리고 이미 죽은
영이 산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게 할 수는 없어....살아서 지은
죄는 인간들이 해결해야 하는거야...심판은 주님이 하시는 거고.."
현암은 불만스러운 듯 했다.
"에이! 어째 이번일은 처음부터 기분이 좀 안좋더라니.."
"아뭏든 이건 여러분야에서 조사를 해나가야 할 것같아. 현암군은
우선 땅벌떼라는 그 폭력배 집단의 주변을 알아보게.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그들에게 경고를 해주고..."
"뭐요? 아이고, 왜 내가 그런 놈들하고.."
"그럼 늙은 나나 어린애인 준후가 그래야겠나? 자네가 사람하고
싸우는건 제일 잘하쟎아?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음...그건 그렇다치더라도 왜 그런 놈들에게 경고까지 해줘야 하
죠?"
말을 이어가던 현암은 박신부의 눈총이 날카로운 것을 느끼고 말
을 얼버무렸다.
"아뇨, 아뇨... 하긴 그들도 가련한 인생들이니까...하하하...그
렇게 노려보지 마세요...하면 되쟎아요!!!"
"그리고 나는 그 화가를 만나보겠네. 그리고 준후도 나와 함께 가
기는 하되, 그 화가의 집 주변을 살펴보고 여기저기 영사를 해봐."
"예? 들어가서 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요?"
"음..일단은 너를 데리고 들어갈 명분이 없쟎니? 일단은 내가 이
야기를 나눠보고, (나도 약간의 영사는 할 수 있으니) 만약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면 현암군과 같이 셋이 다시 가보기로 하자구."
"예.."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암도 불만이 가득찬 어조로 말했다.
"예에에에......."
"현암군, 아까 안기자에게서 들은 그 땅벌떼..라는 조직의 명단은
갖고 있지? "
"예에에에......."
"일단 그들에게 연락을 취해 보게. 벌써 3명이나 이상한 일로 죽
었으니, 거기서도 아마 자넬 반겨줄지 모르지..우리도 이 계열(영
능력자 계열)에선 이름이 좀 알려져 있는 편이니..."
"예에에에......."
"현암군!!!!"
"읔! 아이고고...."
어쩌고 하고 있는데 전화벧 소리가 울렸다. 마침 곤욕을 치르고
있던 현암이 냉큼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아,예?.....예....예.....맞습니다만...예?...음.
...성함이 혹시...음....신희강씨요...? 예...알겠읍니다...예.."
현암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더니 전화의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 놓
았다.
"누군데 그래요? 형? "
" 놈들 양반되긴 글렀군...땅벌떼의 두목인 신희강이라는 작자
야...아예 까놓고 얘기하는군 그래...나보고 당장 오라는군..."
"흠...그것 마침 다행이로군..."
"방금 한녀석이 또 죽은채로 발견...아니 죽었다나 봐요..그래서
다들 공포에 떨고 있는거죠..."
"또요? 벌써요? 어떻게 죽었대요? "
준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포크레인이...아무도 없는 포크레인이 저절로 달려와서...도망치
는 남자를 쫓아 왔대...그리고는 삽으로....허리가 잘라졌다는
군...."
준후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읔!!!"
"이번엔 먼발치에서 두목을 비롯한 몇명이 그 남자가 죽는걸 목격
했다는군...처음엔 그들도 이 사건들을 다른 폭력집단의 짓으로 생
각했었는데...이 일을 방금 보고는 이 일이 무언가 영적인 힘에 의
해 벌어지는 것인줄을 안거야...목소리가 마구 떨리더군."
박신부가 현암의 말을 잠시 중지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림이 관련 되어 있었나? 이건 좀 연관이 없는
것 같은데...."
"아뇨, 있어요..."
준후가 재빨리 대답하면서 현웅 화백의 화집을 폈다.
"게와 노는 소녀....이거에요..."
게....그림에는 게가 오른쪽의 집게발을 펴고 소녀의 발가락을 장
난삼아 물듯하는 부분이 있었다...게의 앞발...포크레인...
"음...이거 원...."
박신부가 한숨을 내 쉬었다.
" 안심할 수가 없군...어느곳에서, 언제 들이 닥칠지 모르니..."
" 모두들 조심하는 수밖에 없죠."
준후의 말을 현암이 가로 막았다.
" 이건 물리력을 구사해도 보통 정도가 넘어...이건 원...사람도
없는 포크레인이 날을 들고 쫓아 오는데 쇠로 된 기계 덩어리에 부
적이며 주술이 통할 리가 있어? 이건 원 대책이 없쟎아..."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우리가 아니면 누가 밝혀 낼 수 있겠
나?...."
셋은 한동안 침묵했다. 상대가 대체 어떤 힘을 쓰는 것인지, 그 목
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아뭏든 그 상대가 누구인지를 아
는 것이 시급했다..다른 일은 그 후의 것이었고...
박신부가 침묵을 깼다.
"일단 계획대로 현암군 자네는 그 말벌떼인지 땅벌떼인지를 만나
보게나. 나와 준후는 그 화가를 찾아가 보겠네...."
"좋습니다. 신부님, 준후, 욧."
"그래. 현암군 자네도 이번엔 주의하게..."
3. 숨겨진 것들..(1)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소위 '땅벌떼'의 아지트에 들어간 현암은
속이 미식거려왔다.
"제발...제발 우리를 좀 도와주게...사례는 얼마든지 하겠네."
두목인듯한 남자가 현암 자신이 보아도 안스러울 정도로 현암에게
사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되려 주변의 털보 사내나 얼굴빛이
파리한 여자같아 보이는 남자들은 공포에 질린 듯 하면서도 현암
에게 뭔가 티꺼운 듯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례가 문제가 아니오. 우리는 사례를 받은 적이 없오..."
"그럼...그게 무슨 말인가? 우릴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야?"
"야 임마!"
아까부터 얼굴이 꾸겨져 있었던 털보가 손마디를 우둑우둑 꺾으며
다가왔다.
"너 임마 우리 형님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가뜩이나 비위가 상해있던 현암의 성질이 슬슬 꼬이기 시작했다.
"사례를 받은 적이 없어서 그런 적 없다고만 말했을 뿐이오. 내가
뭐 잘못 말한게 있소?"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털보가 어느새 주먹으로 현암의 명치 부근
을 강타했다. '탕-'하고 쇠소리 비슷한 것이 났다. 어느새 현암은
기공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털보의 얼굴이 조금씩 구겨져 갔다.
"이...이 자식이..."
"털보! 뭐하는 짓이냐!"
"아니...저놈이 몸에 철판을 숨겨둔듯...."
현암은 손에 암암리에 기공을 끌어 모았다.
"이봐, 내 과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자네들은 나를 믿지 않으면
살지 못해. 나를 믿고 따르면 그래도 반쯤 살아날 확률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뭐야 임마!"
얼굴빛이 시퍼런 사내가 화를 못이기는 듯, 옆의 병을 집어 깨지
도 않고 현암을 내리쳤으나..현암이 기공이 담긴 손으로 가볍게 막
자 병은 퍽 하면서 깨져 나갔고...현암의 손은 멀쩡했다.
"자..이제 반의 확률이 반의 반으로 줄어들었다..."
벌써 시퍼렇게 부은 손을 움켜잡고 있던 털보가 칼을 꺼내 들었
다. 두목은 처음엔 말리려고 하는 듯 했으나 곧 무슨 생각을 했는
지 어물어물하고 털보를 그대로 놔 두는 것이었다.
현암이 머리를 굴렸다.
'흠... 날 시험해 보자는 수작이겄다! 이 놈들, 정말 밥맛 떨어지
는 족속들이군. 어디 혼 들 좀 나 봐라.. 혼비백산하게 해주지...'
현암은 저번 싸움이후 어지간히 자유롭게 날릴 수 있게 된 월향을
꺼내들었다. 지난번 흡혈마와의 싸움 이후, 월향에겐 어떤 변화가
일어난듯, 현암의 조종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던 것
이다.
"꺄아아아악-"
월향의 귀곡성이 울리자 네명의 남자들은 움찔했다. 그 뒤를 이어
검집에서 월향이 쏘아져 나와 단번에 털보의 칼을 박살내고 내친김
에 털보의 뺨과 얼굴 퍼런 사내의 어깨에도 가볍게 상처를 냈다.
그리고는 나비같이 날아서 검집으로 돌아 들어왔고...
현암이 능청을 떨었다.
"음음..그래. 착하다...하하하...피맛이 어떠냐? 더 줄까?"
이제 네명의 사내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부들부들 떨며, 다만
현암의 처분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특히 털보와 얼굴 퍼런 사내가
좀 더 떠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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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후야, 뭔가 감이 잡히니?"
"아뇨. 아직은요...별로 특별한 건 없는 듯 해요..."
박신부는 준후와 함께 현웅 화백의 높다란 축대 밑을 돌고 있는 중
이었다. 이 집은 정말 컸다. 그리 화려하거나 비싸 보이는 집은 아
니었지만, 일단 크기와 특히 그렇게 높은 축대 위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음..준후야, 그림에도 영이 깃들 수 있니?"
"예..물론이죠...그림만이 아니라 어떤 물건에도 가능해요."
"그러면...그 그림에 깃든 영이 바깥을 살필 수도 있니? "
"음...어느정도는요...투시하고 비슷하게..."
"그렇다면 그렇게 그림과 비슷한 장소와 여건, 시간을 고르고 골
라 일을 저지를 수 있겠니? "
"음...그건...음! 그러면 신부님은...지금 무슨 생각을.."
"맞아...이건 영 혼자의 짓이 아니야...분명 사람이 개입되어있지
않고서는....영이라고 전지전능한게 아니란 건 너도 잘 알쟎니?"
"음...그러면...그 누군가는...이 현화백이라는 사람이?"
"그야 모르지만...일단 가장 유력한 사람이지...봐라."
박신부는 품에서 몇장의 메모를 꺼내서 안경을 다슴“農내용을 읽어주기 시
徘杉裏
"현웅화백에게는 두명의 딸이 있었지. 현주희, 현승희의 자매였
어. 부인과는 일찍 사별.. 1년전에 장녀 현주희를 사고로 잃고...
지금은 둘째인 현승희와 함께 살고 있지...그는 원래 풍경화를 전
문적으로 그리던 사람이었는데..."
"잠깐요. 큰 딸이었던 현주희는 어떤 사고를 당했죠?"
"교통사고라고들 하던데...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더군...준후 너
도 참 예리하구나. 나도 이점이 미심쩍게 여겨지고 있어..."
"히히히...이런 추리는 원래 현암형 전문인데..."
"하여간 더 보자... 1년전 딸을 잃고 그 이후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소녀' 7부작을 완결하게 돼. 그 기간이 6개월이었지...
그 그림들은 원래 공개되지 않았으나, 몇몇 그의 집을 방문했던 비
평가들에 의해 걸작으로 소문이 퍼져 이번에 할 수 없이 공개하게
된 거였지...바로 우리가 추적하고 있는 그 그림들이야...그 그림
들은 현웅 화백이 그의 딸의 추억(그러니 두 딸 중 누군진 알겠
지?)을 생각하며 그린거라고 한단다...그 이후의 현웅 화백의 작품
세계는 우울하고 침울한 분위기의 그림들이 대부분이다...자...물
론 억측일지도 몰라...하지만 꼬리를 잇고 생각해 본다면 어떤 결
론을 내릴 수 있겠니? "
준후는 그 쬐끄만 손을 턱에 갖다대고 한동안 생각하는 듯 했다.
"음...그러면 그 주희라는 큰 딸의 영이 그림에 나타나서??? 음..
그러면 그 주희라는 누나는 교통사고로 죽은게 아니라...지금 그
폭력배 집단에 의해..?"
박신부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음..준후 너는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걸 알게 돼서......
흠흠....하여간 내 생각도 비슷하단다...준후야...사실 내 둔한 머
리가 이런 결론까지 가게 된 이유가 또 있지..."
"
박신부의 얼굴이 침울해 졌다.
"사실 그 현웅이 하고 나하고는 원래 좀 알던 사이야...."
준후의 조그만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예?"
"그는 사실...."
"뭐죠? 신부님?"
"자신이 지금도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지...흠흠...아
마 알게 된 건지도 몰라...준후야...네가 내 고해성사를 받는구
나....아 이 죄 많은 신부...그는 ...그는...초능력자야...그것도
굉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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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어째??? 다시 한 번 지껄여봤!!!"
현암은 이제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놈들에게서 한마디 한마디
흘러 나오는 그들의 죄악의 기록들은 정말 이세상의 것이라고는...
-아니 현암은 아직까지도 세상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었는지도 모
른다...-할 수 없는 파렴치와 수치와 몰상식과 불륜과 타락과 수치
와.....
"이 개자식들아!!! 그러고도 살길 바래!"
현암이 털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이미 두목을 포함하여 네명 모
두가 자기의 죄들을 털어 놓으며 울분을 참지 못한 현암에게 얻어
맞은지가 이미 두어시간 째였다.. 이미 냉정한 현암의 눈가마저도
축축히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눈알만 번뜩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그 소녀를 잡아다가 어쨌냐고! 이 죽일 ...
으...이 망할 놈들...중학생 또래 밖에 안된 애들을..."
"....그냥 돌아가면서..."
"똑똑히 얘기해! 이 개자식들아!"
현암이 짐승처럼 악을 썼다.
'아 하느님...아니 무슨 신이라도 좋습니다...아니 어떤 존재라도
좋습니다...인간만 아니라면...'
"...그리고는...지방의 술집에...."
' 나는 여태껏 누구를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워 왔읍니까?...이런 인
간을 위해?....이런 세상을 위해?....신이여...아니 대영(大靈)이
여...당신이 진정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책임을 지시오!'
"...형님...혹시 그 할머니의 귀신도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요?
...전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읍니다...발로 옆구리를 한 번 걷어
찼을 뿐인데...재수 없게...숨이 넘어가서...."
' 나는 지금 이 인간들을 구제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겁니까?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인간들을, 이 쓰레기들을 동정해야
하는 겁니까? 내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아
니....내 이 분노도 죄악입니까?....당신이 만드신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까?...이 세상에 들끓고 있는 이런 것들은 모른채, 태연스
레 영들의 그림자를 쫓는게 내 숙명이란 말입니까..?'
"...살려 주세요....형님...아니 스승님...싸부님...무서워요..."
"무서워? 무섭다고? 너희들이 가련한 어린 젊음들을, 삶에 지친
늙은 생명들을 짓밟을 때에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것 같아?
대답햇! 대답 해 보라구!!!!"
현암은 발악적으로 울부짖듯 한 놈의 멱살을 부여잡고 소리를 질
러댔다. 그의 눈에 눈물이 한 없이 흘러 내렸다..
'신이여...그대는 정말 존재 하는 겁니까?...나는...나는...무엇
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대답을..!...대답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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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후가 눈을 껌벅 거렸다.
"신부님...그렇다면...왜 현암형을 떼어 놓으신거죠?"
박신부도 울적한 얼굴을 띄었다.
"그 친구의 성질...너도 잘 알지않니? 이런 증거가 있다면 그 친
구라면 다짜고짜 현화백의 집으로 쳐들어 갔겠지...그리고 닥달을
했을테지...그것도 좋아...그러나, 그러나 말이다...만에 하나 현
화백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아니 그것 역시 나 혼자만의
생각일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하겠니?......"
"음...예....하긴...."
"그리고 현암군은 아직 인생을 제대로 알진 못해.... 한 번 겪어
볼 필요도 있어...."
둘은 잠시 말이 없이 현화백의 집 주위를 거닐었다. 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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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은 울고 있었다. 미친듯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의 주위를
네명의 남자들이 둘러 서 있었다. 그들...추하게 얻어 맞고 멍들어
부푼 얼굴을 한 악한들...그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죄
에 대한 생각이 채 이름도 모르는 한 남자의 눈물앞에 모조리 되살
아 났다. 그들은 지난 세월을 생각하며, 이미 망쳐버린 자신들의
인생을, 뼈아프고 아무도 모르는 자신들의 과거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 오빠아.....
----- 오빠아.....
----- 울지마 오빠.....
'음...현아...현아야....'
----- 오빠아... 울지마....울면.....싫어.....
현암은 고개를 묻은 채 막연히 망상에 잠겼다.
'그래...그래....모두가 불쌍하다....가련하다...나도 가련하고
....이들에게 당한 자들도....이들 역시....도대체 무엇이...무엇
이 있기에....왜 모든 사람들은...그리고 그 영들은.... 이런 속에
서....이 지옥같은 곳에서.....'
----- 오빠....힘을 내...오빠....오빠가 해야 할 일이 많아....
'음...현아...현아야....가지 말아줘....난 외로워....난...나
도...'
----- 오빠....힘을....해야 할 일이....가야할 길이...너무...
' 음...현아야...'
----- 오빠... 힘을... 힘을...
현암은 퉁퉁 부어 벌개진 눈을 들었다. 막 스쳐 간듯한 현아의 환
상... 눈앞에는 네명의 가련한...그렇다...이제 그들은 다만 가련
한 생명일뿐...
" 자..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죽고 싶지 않으면...
아니, 나도 모르겠다...하지만...나도 너희를...비록 너희라도 죽
이고 싶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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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건...???"
준후가 침묵을 깼다. 박신부도 깊은 생각에서 벗어나서 다시 현실
로 돌아왔다.
"뭐지 준후?"
"음...강한...음...그러나 갈무리된...아니아니...선한듯해요..아
니아니...선과 악이 반반...음...이건...이건..."
갑자기 눈앞에서 문이 (그리고 보니 그들은 거닐며 집 대문 앞에
와 있었다.) 열렸다. 그리고 깔끔하고 좀 날카로운, 선이 가는 젊
은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누구시죠? 무슨 용건으로...?"
여자의 얼굴은 매우 예뻤으나 좀 화난듯한 인상(- 아마 천부적인
것이리라) 이 특징적이었다. 침착한 박신부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
듬으며 말을 꺼냈다.
"아...현화백을 만나러 왔읍니다...전 박신부라고 합니다만...아
가씨는?"
"딸이에요...현승희라고 하죠..."
준후는 아무말도 못하고 승희라고 자신을 밝힌 여자의 얼굴만 들
여다보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듯 하군요...아버님은 지금 병중이신데...아뭏든 들
어오세요.."
문을 열고 앞장서는 그녀의 뒤에서 준후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
한채로 박신부의 옆구리를 찔렀다. 박신부가 나직히 물었다.
"왜 그래?"
"으...신부님..저 누나...굉장...굉장..."
"왜?"
"으...저 누나...화신...아바타라(*주1)...애염명왕..라쟈(*주2)
를 봉인한....으...이런데에 있다니...."
준후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주 1 : 아바타라 (Avatara : 화신(化身)) 신이 형상을 바꾸어
인간으로 세상에 나와 중생을 제도하는 것.
*주 2 : 라쟈 (범어로 Raga-raja) 애염명왕(愛染明王)원래는 인도
의 신으로 후에 진언밀교의 신이 됨. 밖으로는
분노의 정을 나타내고 있으나 내심은 애욕을 본
체로 하는 사랑의 신임. 전신이 붉고 눈이 셋,
팔이 여섯으로 머리에 사자관을 쓰고 있다 함.
4.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
어느덧 밖은 어두워져서 밤이 된 듯 했다...
준후는 계속 입을 다물고 묵묵히 현승희라고 자신을 밝힌 여자
만을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박신부는 그
녀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영기나 귀기도 없었고,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것 같지도 않았다. 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현승희는 그냥 계속 재잘거릴 뿐이었
다.
" 아버지는 지금 몸이 안좋으세요...그래도 작업실에만 계속 틀어
박혀셔서 나오지 않으시죠...신부님은...음...박신부님이셨죠? 퍽
오래전에 뵙고는 못뵌것 같네요...절 기억하세요? "
"음..그래요...승희양...그땐 아주 작은 꼬마였지..하하하"
"후후후... 신부님도 그때는 젊으셨었죠... 이젠 흰머리가 다 희
끗희끗 하시네요...하긴 우리 아버지도 그러시지만..."
"음..나이앞에서야 누군들 별 수 있겠나..."
"그런데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오신건 무슨 까닭에서죠? 제가
없었더라면 아버님도 못 만나뵤을 거예요. 저는 어제 왔는데, (방
학을 해서요) 아버님은 요즘엔 전혀 나가시지도 않고, 또 누구와도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잠깐 얼굴을 뵤을 뿐예요...
에고 이거 아버님이 설마 신부님에게 문열어 주었다고 절 혼내시는
건 아니겠죠? 후후후.."
준후는 현승희가 계속 스스럼없이 재잘거리자 고개를 갸웃했다.
자기가 뭔가 잘못본게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말많은
수다장이 여자가 (물론 좀 예쁘긴 하지만) 애염명왕의 아바타라라
니....? 아닌가?
" 승희양..최근 아버님의 전람회에서 이상한 사건이 생겨 전람회
가 중지되었다고 하는데... 그 후에 아버님은..?"
승희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아! 그 지저분한 사건요?...참 어이가 없어요..왜 남의 귀한 그
림앞에서 죽죠? 죽을려면 딴데 가서 죽을 것이지..."
" 아버님은 전람회를 중지하고 어떠신것 같았지? "
"음...그냥...말이 없으셨죠...그림들은 모두 회수하셨다던데...
그림상인들이 제게까지 연락을 해서 막 졸라대서 알게 됐죠...수집
가들이 몹시 탐을 낸다고 팔 수 없냐고요...하지만 그 그림들은 아
버지가 파실리 없죠..."
준후가 눈을 빛냈다.
"음? 왜죠?"
"어머..귀여워라..안녕, 꼬마야..근데 누나보고 인사도 안하니? "
"읔...이런...인사 할께요...근데 왜 그림을 팔 수 없단 거에요?"
박신부도 숨을 죽였다. 승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원래 무감각
한 여자인가 보다.) 태연히 말했으나 그런 그녀의 눈에도 슬쩍 슬
픔 같은 것이 비쳤다.
"음...그 그림들은 제 언니를 모델로 그린거거든요...1년전에 사
고로 죽은....."
박신부의 얼굴이 긴장되어갔다.
"음..그러면 주희를?"
승희의 얼굴이 점점 침울해져갔다. 준후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
는듯 몸을 흠칫했다.
"...예...그때 저는 미국연수 중이었어요...근데 전보가 와서는
...언니 장례식에 참석하라고...그래서 급히 돌아와서 아버지께 물
어보아도 다만 교통 사고라고만..."
준후가 몸을 조금씩 떨어갔다. 그리고 보니 박신부도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강한 영기...그 기운은 바로 눈앞에서 조금
씩 눈가가 붉어져가는 승희에게서 뻗쳐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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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간단하다...우선 너희의 죄를 속죄해야 한다...경찰에
모두 자수해라...안그러면 내가 먼저 없애줄테니..."
현암은 아직도 씩씩거리는 음성으로 일당에게 다그쳤다. 비록 아
까 속죄의 눈물을 흘린 그들이었지만,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것
이기에 협박을 좀 섞는 것이었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희가 지은 죄에 대한 속죄를 해야한다. 너
희가 해친 사람들의 영과 그 가족들에게 속죄를 해야하는데, 우선
너희에게 복수하고자하는 영을 달래는게 우선이다.... 음..이럴때
준후가 있었으면 좋겠으나, 일단 한시가 급하다. 나도 도가의 강신
술(降神術)은 좀알고 있으니 당장 속죄를 할 수 있게 해주마..."
두목인 듯한 녀석이 다시 부들부들 떨었다.
"강...강신술이요? 그러면...귀신들을...."
털보도 얼굴이 하얘졌다.
"그..그러면 귀신들을 직접 불러...읔...우릴 다 죽일거에요..."
"닥쳐! 그러기에 누가 나쁜 짓을 하라고 했나! 너희같은 놈들은
죽어도 싸! 죽음을 내리면 곱게 받아야지! "
"아...아이고...형님! 살려 주세요!"
"아이고....으아..."
놈들의 아우성치는 모습이 다시 한 번 더럽게 보였다.
"그만해! 다 내 손에 죽을래! "
"으..살려 주세요...제발..."
" 내가 최선을 다해 설득해 보겠다. 그러니 솔직하게 죄를 털어
놓고 용서를 구해! 그리고...만에 하나 딴 생각을 품으면..."
꺄아아악! 소리를 내면서 월향이 현암의 조종에 의해 칼집밖으로
나와서 허공에 섰다.
" 이 월향검으로 호법(護法)을 세울거다. 도망가거나 딴 수작을
부리면 당장 너희 목아지가 두동강 날 줄 알아!"
월향검이 놈들의 머리 위를 한 번 휙! 돌고는 현암 앞의 바닥에
탁! 소리를 내며 똑바로 박혔다. 놈들은 그야말로 사시나무처럼 떨
며 이제는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암은 오대존명왕(*주 1)의 부적을 꺼내어 사방에 붙이며 결계를
쳐 나갔다. 이건 도가의 술수가 아니라 불가의 술수였지만, 준후에
게서 빌려온거라 할 수 없었다. 현암은 아직 부적술에는 미숙해서
얼마만한 위력의 결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인지 좀 스스로도 불안했
지만, 어쨌든 없는것 보단 나을 것이었다...
"북방의 금강야차...서방의 대위덕...동방의 강삼세...남방이 군
다리였나?..음...그리고 중앙은 부동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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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는 스스로 언니의 생각에 슬퍼 지는지 울기 시작했고, 미지의
영기는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짙어져갔다. 그러나 준후나 박신부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저항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들을 공중
에 띄우는듯 몽롱하게 하는 것이었다...당황한 박신부가 정신을 차
리고 좀 급하게 말했다.
"승희양! 울지 말게! 아버님을 만나고 싶은데..?"
승희가 문득 눈물을 그치자 강한 영기도 가라앉았다. 준후가 한숨
을 내쉬었다...
"아..이런...용서하세요...제가 아버님을 부를..."
말을 이어나가려던 승희가 갑자기 휘청하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
다. 마치 무언가에 강하게 맞은것 같았다.
"음? 이런!!"
"누나! 정신차려요!"
승희가 쓰러지자 박신부와 준후는 깜짝놀라 승희에게 다가가려 했
으나, 갑자기 승희의 몸에서 영기가 폭포수같이 흘러 나오는 바람
에 주춤했다.
"음...이건!!"
"와..신부님! 어떻게 된건지...대체...아까와는 비교도...안되
는...."
영기는 마치 급류와도 같이 지하실로 향했다. 엄청난 영기가 마치
물이 쏟아지듯 지하실 쪽으로 흐르는, 아니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
다. 나지막한 진동이 집 전체에 퍼져 나갔고 마루며 벽, 천장이 조
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실로 엄청난 기운이었다..준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지하실!! 지하실에 뭔가가 있어요! 뭔가가 영기를...저 누나의
영기를 빨아들이고 있어요!"
"뭐라고? 영기를 빨아들인다구?"
갑자기 벽에 걸려 있던 액자 몇개가 우당탕 하며 떨어져 내렸다.
"음...보통일이 아녜요! 이 엄청난 기운이 스며들고...그걸 이용
한다면...!"
"음...현웅이...그 친구가! 그 친구!"
"예?"
"..내가 말했잖아! 현화백...현웅이는 초능력을 쓸 줄 알아..만
약..만약 그가 이 엄청난 영기를 흡수하여 힘을 사용하는 주술을
부리는 거라면...."
준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갑자기 창문이며 문이 왈칵 열어
젖혀지고 바람이 몰아쳐 들어왔다.
" 만약...그 화가가 이 힘을 이용한다면...우리도 그 화가의 상대
가 못돼요!"
" 현웅....네가...네가 대체 왜...??"
집안의 전등 몇개가 파삭하며 꺼져 버리고 곧이어 전기마저 나가
버렸다. 준후가 놀라며 야명주(夜明呪)를 외워 작은 빛을 허공에
띄웠다. 한동안의 나리가 지나가고 갑자기 영기가 흐르던 것이 멈
추었으나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주술로 밝힌 불이라 별로 환하지
않아 주위의 것들이 괴괴하게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일단 박신부는 쓰러져 있는 승희가 무사한지 살폈다. 그녀는 아직
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영기를 너무 폭사해서인지 심한
허탈 상태 같았다. 박신부는 준후에게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준후
도 조금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너무나 조용했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가끔씩 커텐을 흔
들 뿐...높은 축대 위에 있는 이 집에서는 바깥의 풍경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너무나 조용했다. 둘은 식은땀이 등으로 흘러 내리
는 것을 느꼈다...돌연 소리가 들렸다...여자가 부르는 소리...
"지하실..! 신부님, 지하실!"
"누구의 소리지? 누가..?"
"알것 같아요...저건..."
준후가 입술을 깨물었고 얼굴이 굳어졌다...
"초상화...초상화가 부르는 소리...."
박신부의 얼굴도 결의의 표정으로 굳어졌다.
"지하실로 가보자...준후야...!"
준후가 입술을 다물며 나직히 수호신들을 부르는 주를 읊었고 박
신부도 품안의십자가를 다시 거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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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은 죽은 영들을 초혼(招魂)하기 시작했다. 일단 희생자는 여
럿이 있었으나, 분명히 이들에게서 들은 그 어느 젊고 예뻤던, 유
난히 얼굴이 하얗다던 여자가 바로 현웅화백의 죽은 큰 딸인 주희
였을 것이었고...이제까지 벌어진 일들을 종합할때 복수를 하고 있
는 영은 주희의 영이어야 했다..그러니 그 영을 불러야 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림에 그려진 얼굴로 추측을 해야
했다.
현암은 묵묵히 도가 비전의 초혼주문을 외우며 아련한 그 여자의
영상을 앞에 놓인 신필(神筆)에 모아갔다. 영이 불러내지면 그 영
은 신필이라 불리는 붓(보통은 천장에 줄로 매달아 놓지만 시간이
없었다.)에 깃들어 글씨를 써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준후가
옆에 있거나, 하다못해 부적이라도 하나 빌려왔으면 직접 대화도
할 수 있었겠지만, 기공만 연마하여 영력이 좀 떨어지는 현암으로
서는 이런 방법밖에는 쓸 수 없었다.
네놈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러나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현
암과 신필을 흘깃흘깃 훔쳐 보고 있었고, 가끔가다가 하얀 빛이 서
려있는 월향(월향은 원래 색계를 범한자들을 제일 미워한다)을 두
려운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한참을 비지땀을 흘리며 정신을 모으던 현암이 눈을 번쩍 떴다.
"왔다!"
신필이 가늘게 떨며 서서히 세워졌다.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네 악
당은 신음소리를 냈다. 신필은 잠시 쓰러질 듯 하다가 갑자기 꼿꼿
이 섰고, 성큼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으악! "
털보가 비명을 질렀다. 신필이 솟구쳐서 털보에게로 날아갔기 때
문이었다. 그리고는 털보의 몸에 탁! 소리를 내며 닿자 갑자기 털
보가 온 몸에 힘이 빠진 듯 늘어졌다.
"악! 털보가..! 털보가..!"
현암이 나직하지만 큰, 기공이 담긴 소리로 소리를 질러대는 두목
을 눌렀다.
"조용히해! 죽은게 아냐! 그 여자의 영이 글로 이야기를 다하기
힘들어서 털보의 몸을 빌리는 것 뿐이야! "
털보가 눈을 반쯤 뒤집은 채 입을 열었다. 이건 난데없이 고운 여
자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제 세명의(털보가 정신이 나갔으므로)
악당들은 거의 까무라치려 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시기에 저를 부르셨나요...?"
"현주희...당신은 현주희가 맞지요?"
"....예......"
그래도 개중 뻣뻣한 듯 보이던 얼굴 퍼런 녀석이 뒤로 확 나가자
빠졌다. 까무라친 것이다...현암은 신경도 쓰지 않고 현주희와의
대화에만 열을 올렸다. 한동안 이야기가 이어져 나갔다. 그러나 예
상외로 주희의 영은 몹시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 당신이 살아 생전...이 악한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그리고
살해 당했죠..?"
"......"
"그렇죠?"
"....예...."
현암은 됐다 싶어 주희의 영을 설득하려 하는데, 천만 뜻밖의 소
리가 들렸다.
"...하지만 다 지난 일일 뿐예요...다만, 다만..아버지를..."
"예? 뭐라고요?"
"...아버지를...제 아버지를 구해 주세요..."
" 아버님이요? 현웅 화백 말입니까? "
"...예....아버지는...지금...속고 있...아!.."
갑자기 주희의 목소리가 고통에 찬 비명으로 바뀌었다.
"주희...주희씨!"
"..아악!....안돼!...안돼!..."
털보가 그 자리에서 비명을 올렸다. 그때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던
두명의 사내도 공포에 가득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창밖...바로
창 밖이었다...그곳은 아파트의 4층...창밖에 그림 한장이 붙어 있
었다..껑충껑충 뛰는...소녀...아까의 주희를 그린...
현암이 내뱉었다.
"그림! 줄넘기하는 소녀! 분명 결계를 쳤는데!"
갑자기 창문이 와장창 깨져 나가면서 털보의 몸이 무엇에 끌린 듯
허공으로 뜨기 시작했다. 털보는 찢어지듯 비명을 질렀고...그 한
쪽 다리를 현암이 잡았다.
"뭐해! 다들 잡앗!"
그제서야 두명은 털보의 다리에 매달려서 그의 몸을 끌어 내리려
갖은 애를 썼으나...오히려 안간힘을 쓰는 세명마저도 몸이 허공에
뜨려 하고 있었다. 이건 영력이 아닌 엄청난 물리력이었다. 현암이
만든 불완전한 결계가 힘을 못쓰는 것도 당연했다.
"빌어먹을...태극기공!!!"
현암이 일갈을 발하며 오른손에 기공을 모아 방바닥을 쳤다. 콘크
리트가 펑! 하며 구멍이 뚫리자 현암은 그 안으로 오른손을 찔러
넣어 바닥을 단단히 움켜 쥐었다. 그런데도 끌어 잡아 당기는 그
힘은 너무도 강했다.
"으아아아아아....!"
고통에 못이긴 털보가 비명을 질렀다. 이제는 원래의 목소리였으
나 그 소리는 너무도 고통에 가득찬 것이었다. 현암이 잡고 있는
다리에서 우둑우둑하는 뼈소리가 났다.
'으... 기공으로 더 버틸 수는 있으나...이대로 가다간 이 남자의
다리가 뽑혀 버린다!'
현암은 월향을 부르려 했으나 월향마저도 강한 힘에 눌려 있는듯,
바닥에 꽂힌채 빠져 나오지를 못했다. 아니, 점점 깊이 박혀 들어
가고 있었다..
"아아악!"
현암이 월향을 보고 잠시 정신이 흐트러 진 사이, 피멍이 든 털보
의 다리가 현암의 손에 바지자락만 남긴채 쑥 빠져 나갔다...
"안돼!"
현암의 외침을 뒤로 하면서 털보의 몸은 나머지 두 남자를 뿌리치
면서 창밖으로 튀어 나갔다.
"으아아아아아악!"
털보의 몸은 창에서 꽤 떨어진 곳을 지나던 고압선에까지 튕겨 나
가 줄을 휘청 휘게 하면서 선에 걸렸다.
파지지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작은 번개와 같은 방전이 일어
나고 털보의 몸여기저기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며 경련을 일으키는
몸이 푸드득거리며 줄에 마구 엉켜가고 있었다...줄에 엉켜 흔들리
며 타들어가는 모습...
"줄넘기...줄넘기라..."
현암은 망연히 창 밖을 분노의 눈으로 노려볼 수 밖에는 없었다.
어느덧 여자의 웃음소리가 깔깔깔거리며 울려대다가 사라져 갔다
...현암은 몸을 날려 창 밖을 보았다. 이미 거의 새까맣게 타버린
털보의 몸 너머로 그림이 너울너울 날아가고 있었다.
'주희가...주희가 아니다....주희의 아버지...현웅화백이 속고 있
는 거라고?....그렇다면....'
현암의 눈에 핏발이 섰다. 박신부가 위험했다. 어쩌면 준후까지
도....상대를 모르고 있다면....
"안돼!"
(퇴마록 4부 5편 끝....6편에 계속...)
*주 1 : 오대존명왕(五大尊明王) : 금강야차명왕,대위덕명왕,강삼
세명왕, 군다리(쿤달리니)명왕,부동명왕의 다섯.
5. 초능력의 집안..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둡고 길었다. 집이 크고 축대위에 있으니
만큼 지하실도 클 것으로 예상은 했었으나, 그 크기는 상상외였다. 약간
씩 삐걱거리는 계단을 거의 다 내려서자, 그곳은 아마 현웅화백의 도구실
인 듯, 각종의 그림도구들과 빈 액자들 등이 널려 있었다.
박신부는 계단을 내려가며 준후에게 간단히 현웅 화백의 이야기를 해 주
었다.
"현웅화백은 염동력을 쓸 줄 아는 초능력자였어..내가 그에게 관심을 갖
고 그와 가까워진 것도 사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그의 능력은 꽤 대단
해서, 어느정도 마음먹은 사물들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본인은 그런 것
을 비밀로 하고 남들에게 밝히지 않았었단다.."
"아...예..."
"아마도 현주희의 죽음은 그 땅벌떼라는 폭력 집단의 소행인 것 같아...
그들에 대해 현웅이 복수를 하는 건지...아뭏든 그 딸마저도 저런 엄청난
기운을 잠재하고 있다니...조심해야 한다...아마 그의 염동력에는 부적이
나 주술 같은 건 잘 통하지 않을 거야..."
"예..신부님..근데.."
준후가 다시 귀를 기울이는 듯 했다. 박신부도 다시금 긴장했고..
부르는 소리...정말로 그림에서 울려 나오는 듯 무미건조한 음색의 여자
목소리...초상화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 이미 그 소리는 박신
부도 알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 지고 있었다...
'가치 없는 자들이여....'
"준후야, 침착해라."
약간씩 몸을 떨고 있는 준후를 박신부가 격려 했다.
'너희들을 시험하기 위해 불렀다...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자, 가치없는
자이리라....'
"흥! 시험이라고?"
박신부가 코웃음을 치며 허리를 폈다.
" 너는 현웅이지? 나를 모르는가? 아니 정말 현웅 네가 이 모든 일들을
꾸민 거냐? 목적은 뭐지? "
'호호호호호....'
보이지 않는 초상화의 목소리가 길게 웃었다.
' 나는 현웅의 딸 주희다...호호호호..'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냐?"
이번엔 준후가 소리쳤다.
" 도대체 이유가 뭐지? 복수인가? "
'호호호... 모든 인간들...내 손을 벗어날 수 없다...너희들도..'
" 복수라면 이미 충분하지 않았나? 이미 4명이 죽었다! "
' 호호호...다섯이다...'
어디선가 팔랑거리며 그림 하나가 날아 와서 박신부의 앞에 떨어졌다.
군데 군데 그을고 검게 탄 자국이 있는 그림...그 그림에는 줄넘기 하는
소녀의 모습이 또 하나 구레나룻을 기른 남자를 밟고 있는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줄넘기 하는 소녀! 근데...이 안에 왜 다른 사람의 모습이?"
'호호호호호...그 놈은 이미 죽고 영이 그림에 봉인된거다..'
준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을 그림에 봉인? 그렇다면..."
채 준후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용서 받지 못할 죄악을 저지른 자, 아니 모든 인간들은 죄악에 물들어
있다...모두를 이렇게 해 주겠다!'
채 어쩔 사이도 없이 그림이 갑자기 불타 올랐다. 준후의 귀에는 그 그
림에 봉인 되어 있던 남자의 영이 소멸되며 부르짖는 단말마의 비명이 그
대로 들려왔다. 준후는 어떻게 손을 써 보려 했지만, 주변의 각종 물건들
이 슬그머니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조각도들이 공중
으로 뜨면서 섬뜩한 빛을 발했고, 캔바스의 뾰족한 다리들이 흔들거리며
마치 생물처럼 걸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읔! 신부님! 저 물건들이...저건 영으로 조종되는게 아녜요..뭔가 다른
힘..."
박신부가 입술을 깨물었다.
"염동력(念動力)..싸이코 키네시스...현웅화백의 능력이다..."
"음..그러면 초능력?"
"준후야! 있는 힘을 다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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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은 있는 힘껏 악셀레이터를 밟고 있었다. 그의 옆과 뒤에는 이미 만
사를 포기한 세명의 악한들이 타고 있었다. 현암은 서둘러 현웅화백의 집
으로 가려 했으나, 세명의 악한들은 이제 현암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
다. 어디를 가든 따라오겠다는 것이었다. 현암은 자기 혼자로는 그 정체
모를 악령의 상대가 되지 않는 다는 걸 설명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어차
피 죽을 목숨이라며 한사코 따라 오려는 것이었다. 두목이 말했다.
"형님! 저희가 지은 죄때문에 죽는다면 우리도 할 말 없읍니다. 아까 저
희는 감동했어요...죽을 각오를 했읍니다..허나...허나...상관도 없는 귀
신에게 사냥당하기는 싫습니다...그러느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요...그 귀신을 잡으러 가는 거라면...저희도 한가닥은 할 수 있으니 도
와드리고 싶습니다...인젠 무섭지 않습니다...이왕 죽는 마당에 뭐가 무
섭겠읍니까?..."
현암은 말할 여유도 없이 그냥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현암이 영능력에
있어서는 좀 둔하다고 해도, 아까 털보를 죽게 만든 힘이 단순한 영기가
아닌 엄청난 물리력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주술이 아닌 물리력에는
물리력으로 맞설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힘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죄에 대한 속죄를 조금이나마 시키자..아니 차라리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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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랏! 준후!"
박신부는 오오라를 발출하여 소나기처럼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들어오는
잡동사니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허나, 기도력에 의한 오오라로 단순 물리
력만으로 날아오는 물건들을 완전히 막기는 좀 무리가 있었다. 박신부의
법의자락이 군데군데 찢겨 나가 너덜너덜 해 졌으나, 아직 몸에 상처는
입지 않고 있었다.
준후의 무릎에 기름통 하나가 날아와 부딪혔다. 잠시 비틀거리는 준후의
머리 위를 아트 나이프가 쌕 하며 스쳐 지나갔다. 준후의 주술 방어가 별
효력을 보이지 못하는게 분명했다. 날아오는 물건들에는 하나도 영기가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에잇! 다 타버려랏! 멸겁화!"
준후가 소리를 지르며 불을 사방에 내 뿜었으나..
오히려 잡동사니들에 불이 붙었어도 기세는 여전해서, 되려 위력이 커지
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유화에 쓰는 물감이며 기름들이 공중에서 펑펑 터
지며 불비를 내렸다.
"아이쿠! 이런! 더 심하네!"
사방에서 불덩어리들이 날아들자 준후는 기겁을 했다. 박신부도 어떻게
도울수가 없어서 간간히 소리만 지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생각이 스
쳐 지나갔다.
' 여기서 시험을 받으라고 했지? 그러면 여기는 시험장...일종의 결계로
만든... 그러면 여기서 지체할 필요가 없다. 돌파하면 그만이다.. '
그리고 보니 잡동사니며 물건들이 문을 가로막고 있는 듯 했다.
"준후야! 쓰레기들과 상대할 시간이 없다! 문! 문을 부숴!"
"알았어요!"
불붙은 의자가 날아오는 바람에 급한 나머지 땅에 몸을 굴리며 준후가
답했다. 박신부가 틈을 얻어 준후의 앞을 막아서서 오오라의 기도력을 배
가 시켰다. 잠시나마 잡동사니들이 우르르 튕겨 나갔고 준후는 그 틈을
빌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박신부는 앞을 가리는 것이 없자 옆으로
몸을 피했다.
" 부동명왕의 화신 구리가라(*주 1)의 힘을 빌어... 분노의 불길이 우뢰
를 타고 벋어나간다... 타앗!"
준후의 양손에서 시뻘건 불길같은 것이 머리만하게 뭉쳐서 포탄같이 날
아갔다. 몇몇 의자며 액자들이 마치 문을 가리려는 듯, 앞을 막았으나 단
번에 가루로 변해 날아가 버리고 불덩이는 문에 그대로 작렬하여 문마저
박살내 버렸다. 무슨 이유에선지 평상기의 준후가 발휘하던 힘보다는 훨
씬 위력이 강했으나 그런 것을 따질 계제는 아니었다. 박신부는 황급히
준후를 옆에 끼고 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불붙은 잡동사니들은 따라오
지 않았다...
"잘했다! 준후야! 크르카라의 불꽃이라던게 이거냐?"
"헉헉헉..! 음...이 수는 평소에는 쓸 수 없었던건데..? 어떻게 됐는지
도 모르겠네요 어구구...내가 어떻게 힘이 난 건지.."
주변을 날아다니던 잡동사니며 화구들이 힘이 없어진 듯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다시금 예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리고 보니 준후가 기를 쓰느라 야명주가 지워져서 사방은 칠흙같은 어
둠이었다.
'호호호...제법 재주들이 있군그래..그러면 어디 다음 시험을 받아 봐
라....'
"아이고! 신부님 다음 시험요? 또 관문이 있나봐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속에서 박신부는 귀를 곤두세웠다.
"망할 것... 주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허나 별 수 없지!
돌파다! 놈의 악행을 막아야 해!"
"음..이럴땐 기공을 연마한 현암형이 있어야 하는데..."
준후가 다시 야명주를 외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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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은 어느덧 전에 셋이 와보았다가 헛탕을 치고 돌아갔던, 현웅화백의
집에 도달했다. 눈을 감고 집중을 하니 낯익은 기운 두줄기와 요상한 기
운이 같이 느껴졌다. 준후와 박신부가 이미 무언가와 대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현암은 월향검과 태극패를 꺼내들고 성큼 차에서 물러 나왔다. 세명의
악한들도 제법 용기있게 차에서 내렸으나...
"으악! 저거! 저거!..."
한 녀석이 두려움에 가득찬 목소리로 악을 써댔다.
"뭐지?"
그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곳...거기엔 두장의 그림이 허공에 떠
있었다.
현암이 중얼거렸다.
" 별헤는 소녀....독서하는 소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가? "
현암이 손을 뒤로 저어 세명을 일단 뒤로 물러서게 했다. 셋은 긴장된
걸음걸이로 현암의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다시금 예의 그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약한 것! 넌 주희가 아니지? 감히 남의 영을 사칭하여 인간세상에서
살행을 일삼다니!"
'호호호...다 죽어야 할 놈들이다...헛수고 하지 마라...'
"헛수작마라! 인간 세상과 영계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 네가 무
슨 목적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두 세계의 질서를 깨고 살계를 범하는 것
은 이들이 지은 것보다 더욱 큰 죄이다!!! 이들은 인간세상의 법으로 처
리할 것이다! 네가 할 순 없다!"
'호호호...헛수작....너도 죽고 싶으냐?'
"흥! 재주가 있거든 한 번 부려봐라! 나 이현암! 퇴마행 팔년동안 한 번
도 굴복해 본 적이 없다!"
'...다 똑같은 놈들...다 죄로 가득찬 놈들...다 죽어랏!..'
독서하는 소녀의 그림이 휙하고 공중에서 말리자 갑자기 사방의 쓰레기
통이며 길거리에서 종이조각들이 날려 왔다. 종이조각들은 씽씽 하는 소
리를 내며 무서운 속도로 넷을 향해 덮쳐 들었고...
"윽!"
"악!"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얼굴 퍼런 사내와 두목의 몸 몇 곳에 종이들이
스치고 지나가자 금새 붉은 선혈이 옷에 배어 나왔다.
현암은 이를 갈며 매섭게 날아드는 종이조각들의 예리한 날들을 피하며
월향검의 검집을 쳤다.
"귀검 월향이여! 나가라!"
예의 귀곡성을 으쓸하도록 내 뱉으며 월향검이 폭사되어 나갔다. 이상하
게도 평소보다도 몇 배 강한 위력인 듯 했고, 현암의 기공도 이상하리만
큼 힘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월향이 날아가는 궤적 주위로 종이조각들
이 아예 공중에서 팍! 팍! 부서져 나갔다.
현암은 기공력을 집중하여 태극패에 쏟아부었다. 찬란한 빛이 태극패에
서 발출 되어 월향에 비추어졌다. 이는 그동안 현암이 고심끝에 생각해
낸 것으로 태극패의 빛을 통해 기공을 전달, 멀리 떨어진 월향검에 기공
을 불어넣는 방법이었다. 원래 공력의 소모가 극심한 방법이었는데 이상
하게도 쉽게 되는 것이었다.
"월향이여! 볼 것 없다! 그림을 뚫어 버려랏!"
"꺄아아악!"
월향의 귀곡성이 울려 퍼지며 검은 그대로 독서하는 소녀의 미간에 적중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림은 뚫리지 않고, 그냥 월향에 의해 뒤로 밀려
나고만 있었다. 반탄력이 현암에게까지 전달되어서 태극패를 든 현암의
왼손이 잠시 휘청 했다.
'이런 제길! 엄청나게 강하다! 내 힘도 배가(倍加) 되었는데...빌어먹
을...!'
현암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받치고 기공을 구할까지 늘리기 시작했다. 밀
려가던 그림이 나뭇가지에 부딪히자 가지가 그대로 부러져 나갔고...순간
현암이 쏘아 보내는 기공력이 증가되자 월향의 검기가 그대로 그림을 꿰
뚫고 나갔다.
'캬아아아아...'
그림은 반으로 쭉 찢어져서 허공에 흩날리고 있었다..그림에서 선혈이
솟구쳐서 여기저기 핏방울을 뿌리고 있었다..섬뜩한 광경이었다.
"월향! 그림 한 장이 남았다! 마저 처치해라!"
월향이 의기양양한 듯 방향을 돌리자 별헤는 소녀의 그림이 공중에서 쫙
펴졌다.
쾅!
갑자기 폭음과 함께 뒤에 서 있던 전봇대의 변압기가 불꽃을 튀기며 폭
파되어 버리면서 불덩어리 같은 것들이 아래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아아악!!"
뒤로 물러서 있던 세명 중의 한 남자가 불꽃을 그대로 뒤집어 썼다. 뜨
거운 수은 같은 것에 닿은 남자의 몸은 흰 연기를 풍기며 그대로 타들어
갔다. 나머지 둘에게도 불똥이 튀어 몸을 간신히 피했을 뿐 그 남자를 돕
지는 못했다.
"으아아아...!"
남자의 온 몸으로 불이 번져갔다. 남자는 발버둥을 쳤으나 무언지 모를
화학물질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고 되려 더 위세 당당하게 타 들어 갔고
남자의 움직임이 갑자기 멎었다.
잠시 월향을 조종하는 것도 잊고 망연히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있던 현
암이 노한 소리를 질렀다.
"별헤는..소녀! 이...잔인한..!"
현암이 다시 태극패로 기공을 쏘아 보내려는 순간 별헤는소녀의 그림이
날아들어 현암의 얼굴로 덮쳐 들었다. 순간 그림의 소녀의 눈이 붉은 색
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으악!"
그림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현암의 얼굴에 더가라붙고 단단히 조여
갔다. 숨이 막히는 것은 둘째치고 그 힘이 엄청났다.
"으...큭!"
'호호호...아예 짓눌러버려 주마...'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월향을 부를 수도 없었다. 두 남자가 비명을 지
르며 달려와 그림을 뜯어 내려 했지만 헛수고 였다. 현암은 발버둥치며
그림을 뜯어내려 하다가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 으... 호흡을 못하면 기공도 약해질 뿐이다... 방법은... 그래! 힘을
한번에 모아서...복압을 높이고...사자후(獅子吼)를 펼치는 수 밖에 없
다.. '
흡혈마와의 싸움때는 공력이 모자라 오히려 죽을뻔 했지만, 지금처럼 이
상하게 공력이 늘어난 상태에서는 잘 하면 될 듯도 했다. 아니, 그것말고
는 얼굴에 거머리 처럼 달라붙은 납작한 그림을 떼어내는 방법이 없었
다..
현암은 일어서서 손짓으로 두 남자에게 물러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리고 단전부위의 기해혈로 기공을 모아서 일격에 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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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이것들은!!!"
준후가 밝아진 주변을 보며 질겁을 했다. 그림들...얼핏보아도 수십점은
넘을 듯한 현웅화백의 그림들이 쌓여 있었다. 하나같이 어둡고 침침한...
여러가지 마물들과 요괴, 괴수들을 그린 그림들이었다...
박신부도 숨을 죽였다. 그림들은 너무도 생생했고, 하나같이 요기가 흘
러 넘치고 있었다...
"현웅화백의 후기작품들...공개되지 않았던 것들이다...음...이런 그림
들을 그리다니...그런데 왜 하나같이 요기(妖氣)가...?"
"저 그림들은 살아 있어요! 지옥의 마물들..! 그들의 혼을 불러 내어 봉
인 한 그림들이에욧! 없애야 해요!"
박신부의 뒷골이 써늘해졌다.
"음..저것들이 풀려 나올수도 있단 말이냐?"
"저놈들이 제 이 관문의 상대였던 듯 해요! 허나 아직 봉인이 풀리지 않
았어요! 저 마령(魔靈)들이 일시에 뛰쳐 나오면 예전의 백귀(百鬼)보다도
훨씬 위험해요!"
준후는 말을 마칠 사이도 없이 사방에 멸겁화의 불길을 쏘아대기 시작했
고, 박신부도 재빨리 뒷방에서 테레핀유 통을 찾아내어 그림에 뿌려댔다.
알듯 모를 듯한 아우성들이 울리며 그림들은 불길에 휩싸여 갔다...
준후가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저 놈들의 봉인을 풀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보니 그 목소리도 들리
지 않고.."
"글쎄다..저놈들을 다 풀었으면 아마 우리도 위험했을텐데..."
준후가 잠시 눈을 감고 투시를 행하다가 소리를 질렀다.
"현암형! 현암형이 밖에 왔어요! 혼자 싸우고 있어요!"
"음..현암군이?"
"예! 아마 현암형이 놈을 붙잡아 둬서 우리에게 신경을 못쓴듯해요! 정
말 다행이네요! 신부님! 도우러 가요!"
"아니, 네가 가거라. 나는 여기를 계속 뚫고 나가겠다. 현웅화백을 제지
하는 것이 급해! 주희의 영은 네가 맡아라! "
"음. 안돼요! 신부님 혼자서는! 만일 그림에 깃든 마령들이 더 있으면
..."
"아니야. 주님의 이름 앞에서는 어떤 사마도 날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화백의 물리력은..!"
"어서가! 가서 빨리 돌아오면 되쟎니! 적은 지금 밖에 있단 말야!"
준후가 할 수 없다는 듯 뒤로 돌아 뛰었고 그 뒷모습을 보던 박신부가
중얼거렸다...
"죽어도 나 혼자 죽어야지...하지만 내가 놈의 힘을 다 빼 놓을테니.."
박신부는 다시 기름통을 들고 사방에 뿌려대면서 걸음을 옮겼다.
'다..다 태워 버리는 거다...내 몸까지 타더라도...저주받을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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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1) 구리가라 : 범어로는 Krkara.부동명왕의 변화신의 하나로
용(龍)의 형태를 하고 있는 용왕.
6. 드러나는 정체...
현암의 얼굴을 감쌌던 그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퍽! 하면
서 떨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사자후(獅子吼)의 엄청난 소리가 주변
을 진동시켰다. 떨어져 나간 그림은 무서운 힘으로 밀려가서 현웅화
백의 집 담벼락에 한 치 가량 틀어 박혔고, 두사람은 엄청난 소리에
귀를 막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음? 언제 내 공력이 이렇게 깊어졌지? 전엔 사자후 한 번 하고는
거의 기절 직전이었는데...'
현암은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며 허공에 떠 있던 월향을 불러 손
에 잡았다. 약간 기운이 빠진 듯은 했지만, 별로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더 이상 사람을 해치도록 놔 둘수는 없다! 아무리 악한이어도 인
간의 징벌은 인간의 손이나 신의 섭리에 맡겨 두는것이 섭리! 하물
며 원한이 있는것도 아닌 , 선량한 주희의 영을 사칭하는 네 손에
더 이상은...!"
말을 이어가던 현암은 움찔했다. 벽에 틀어박힌 그림에서 다시금
기운이 뻗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주변의 전봇대의 변
압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서 터지고 불덩이들이 바지직
거리며 날아오고 있었고 가까운 곳에서는 돌이며 유리조각들이 공중
에 떠올라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호호호... 그정도로 내 그림을 어쩔 수는 없다! 이거나 받아라!'
현암은 기공을 끌어올려 피하려 했으나, 뒤에 두명의 악한들이 있
는 것이 생각났다. 그대로 두면 둘이 아까의 남자처럼 당해버릴 것
이었다. 현암은 둘의 앞을 막아섰다.
"에에잇!"
현암은 있는대로 기공을 끌어올려 앞서 날아오는 돌들과 유리조각
들을 그대로 몸으로 받았다. 뒤에서 두명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으아! 형...형님!!!"
펑 하는 소리가 나며 날아오던 돌이며 유리들이 사방으로 튀었으나
몇개의 유리조각은 그대로 현암의 몸으로 비집고 박혀 들었다. 선혈
이 몇방울 흘렀다.
"으...형님...우리 때문에...우리.."
"집어치워! 누가 너희 형이냐?..윽..!"
현암은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기공을 끌어 모았다. 제 이격으로 불
덩이들이 날아오고 있었고...두 남자는 격앙된 얼굴로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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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이제 지하실전체에 번지고 위로 통하는 문 언저리까지도 집어
삼키고 있었다. 박신부는 아차 싶었으나 밑에 있을것이 분명한 현웅
화백을 만나보지 않고서는 갈 수 없었다.. 내친 김에 박신부는 안쪽
으로 계속 발을 옮기고 있는데..
"음? 저건?"
박신부의 눈앞에 또 하나의 그림이 바닥에 기대어있는 것이 보였다.
공개되지 않은 소녀의 그림... 종이접는 소녀...
"음...이게 복수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던 그림이로군...종이접는 소
녀라... 이번엔 사람을 접어 없애려 한건가? 끔찍하군..."
그리고 보니 땅벌떼의 인원은 여덟이었는데 그림이 일곱장뿐이었던
것이 영 이상했었다. 마지막 그림은 여기 숨어있는 것이었다.
박신부는 기름통을 들고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서서히 여덟번째의
그림으로 접근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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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는거얏! 이 바보들!"
현암은 목청껏 외치고 있었다. 두명의 남자는 현암의 뒤에서 뛰어
나와 현암의 앞을 가리고 날아오는 불덩이를 정면으로 맞받은 것이
다. 삽시간에 불이 온 몸에 번지며 그 중 얼굴색이 파랬던 남자가
미소를..분명히 그 얼굴은 웃고 있었다..보내며 뒤로 쓰러지더니 움
직이지 않았다. 두목이었던 희강은 이를 악물고 활활 타오르는 몸을
담벼락에 박혀 있는 그림에게로 날렸다.
"너...너.... 내 부하들을 모두 죽이고... 안돼... 당하지 않는
다... "
그림은 움찔하는 듯 했으나 두목의 불붙은 몸은 그대로 그림 위를
덮쳐 눌렀다.
"아..안돼! 불을 꺼야해..! "
"혀...형님...복수는 내...내 손으로...으..아아악!!!"
말을 이어가려던 두목의 입에서 참혹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그림이
그의 등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두목의 큰 구멍이 뚫린 몸은 그대로
허물어져 내려갔다. 선혈에 물든채 그림은 허공에 떴으나 이미 불은
그림을 태워 들어가고 있었다.
"이...이...천하에 몹쓸..!"
현암은 이를 갈아붙이며 월향을 던지고 태극패에 기공을 담아 눈부
신 빛을 발출했다. 그림의 중간...그런데 그 그림은 아까의 모습이
아니었다...별헤는 소녀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별이 아
닌...두목의 얼굴... 월향은 그대로 그림을 뚫고 지나가버렸고 뒤이
어 태극패의 빛이 그림을 삽시간에 불덩이로 태워 버렸다....
"끝났다..."
중얼거리는 현암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금 아까의 웃음소리
가 들려 왔다..
'호호호호호호호호...'
"음? 아직 남아있었던가?"
'호호호.. 그림 여덟은 내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거기 가둔 여덟의 영을 희생함으로써 나는 풀려 날 수 있게 되었
다.. 고맙다.. 호호호.. 마지막의 영을 해치운 것은 네 술수에 의해
서 였지...!'
"뭐라고? 내가 언제!!"
'호호호.. 마지막 놈의 영은 그림에 봉인되어 있었다.. 네가 깨끗
이 해치워 주더군.. 호호호호호'
"뭐라구! 이런 악랄한!!!"
현암은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아무리 악행을 많이 한 악
인이기는 했어도, 마지막엔 현암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려 했던 자
였는데..
"네 목적은 뭐냐!!"
'호호호... 이제 나를 막을 수는 없을걸?'
갑자기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후였다.
"주희누나! 더 이상 악행을 해선 안돼요!"
부적을 한 웅큼 꺼낸 준후의 뒤에 겁먹은 듯한 여자가 서 있었다.
현승희였다.
"준후야! 저건 주희의 영이 아니야! 악령이 속임수를 쓰는 것 뿐이
라구! 사정 봐줄 것 없어!"
그간의 이야기를 준후에게서 간략히 들은 듯, 승희의 얼굴에 안도
의 표정이 스쳐갔다. 준후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며 현암
에게 부적 한 장을 던져 주었다. 영의 실체를 볼 수 있게 하는 안명
부(眼明符)였다.
"현암형! 틀림 없어요? 주희의 영이 아닌게?"
"틀림 없어! 내가 초혼을 했을때 주희의 영이 나타났었지! 아버지
를 도와 달라고..속고 있다고 했어! 현웅 화백을 도와야 해!"
현승희의 얼굴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예? 아버지가요? 속고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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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는 그림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그림속에 하나의
남자의 영상이 겹쳐서 타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지었다.
"또 죽고 말았군.. 결국 여덟명이 모두 죽은 건가?..가련하게...
음? 그럼 혹시 현암군도??.. 아니지.. 준후도 갔는데 그리 쉽게 당
할리는 없지..."
박신부는 마침내 마지막 문을 열었다. 그 방은 아직 연기나 불길이
미치지 않고 있는 상태여서 다행이었다. 방안에는 머리가 허옇게 센
남자가 앉아 그림의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현웅 화백이었다.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막 잠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듯한 소녀를
그린 그림...잠깨는 소녀 였다. 그 그림의 얼굴을 본 박신부의 얼굴
에 의심스런 기색이 비쳤다.
"현웅이... 나를 기억하는가?"
현웅화백은 눈도 돌리지 않고 붓만을 놀리고 있었다.
"박신부...나를 기억하는가?"
현웅화백의 붓이 잠시 멈칫하는듯 했다.
" 자네는 또 소녀를 그리는건가? 그 그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네... 벌써 여덟이나..."
"다 죽어마땅한 놈들이었어!!!"
현웅화백은 노호성을 지르며 붓을 멈추었다. 그리고 박신부의 눈을
정면으로 째려보는 것이었다. 그 눈에는 시퍼런 기운이 감도는 것이
이미 정상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박신부의 눈도 안경 너머로 무서
운 안광을 쏘아 보내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 이런 식의 복수가 옳다고 보는가...? "
" 안될것은 무언가? 놈들은.. 놈들은 우리 주희를.. 그 착한 애를
납치해서 번갈아...욕을 보이고.. 반항하는 그 애를 다시 칼로 난도
질 해서 죽였어!!! 놈들도 당해야 해!!!"
"그러면..자네가 그 놈들과 다를 건 또 뭐지?"
"나는...나는 절대 그들을 해치진 않았어! 그림을.. 그림을 그렸을
뿐이야..! 주희가...주희가 꿈에서 매일...내게...내게 복수를..."
" 주희의 영이? 자네가 힘을 빌려 주었나? 자네의 그 숨은 능력.."
"안될건 무언가? 내 목숨도 내줄 수 있었어! 무엇이든... 주희를
위안시킬 수 있는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현웅화백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빛났다.
"날 방해하지 말아주게.. 이게 내 최후의 작품.. 그애가 부탁한 마
지막 그림이네..."
박신부의 머리를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 마지막 그림? 그러면.. 주희가 여덟개가 아닌 아홉개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구 했었나? "
"아홉...아홉이면 어떤가! 더 이상.. 더이상 방해하지맛!"
현웅화백이 눈을 부릅뜨자 옆에 서있던 청동 조각상이 갑자기 박신
부에게로 날아와서 박신부의 바로 옆에 육중한 소리를 내며 쳐박혔
다. 박신부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능력이 엄청나졌군... 그런데 주희가 왜 마지막 그림.. 저 잠깨는
소녀를 그려달라 요청 했는지 알고 싶지 않나?"
"몰라! 듣고 싶지도 않아! 더 이상 지껄이면 옛친구라도 가만두지
않겠어! 내 손으로 자넬 해치고 싶진 않아! 제발! "
"주희를 죽게 만든 자들의 수는 모두 여덟명이었네... 이미 복수는
끝났어... 그런데도 이 아홉번째의 그림을 그려야만하는 이유가 무
엇인지 알겠나...?"
현웅화백은 미친 듯 고개를 저었다.
"몰라! 몰라! 알고 싶지 않아! 방해하지 맛! 주희의 소원을.. 난
들어주고 말거야!"
현웅화백의 몸에서 염동력이 뿜어져 나와 그리고 있던 그림과 도구
를 제외한 근처의 사물들이 미친듯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박신부도
있는 힘을 다해 오오라를 일으켜 그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두사람의
기운이 부딪히자 회오리 바람같은 것이 일어나 주변이 닥치는대로
부서져나가기 시작했다.
"현웅이 이 바봇! 주희는 부활을 원하는 거다! 잠깨는 소녀...그
그림을 매개로 하여, 그리고 여덟명의 영혼을 희생시켜서 다시 살아
나려 하는 거야!"
"닥쳐!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초상화를 완성 해야해! 주희가 살아
난다니! 반드시! 반드시! "
" 이 멍청잇! 죽은자의 부활을 위해선 산 사람의 몸이 필요하다구!
네가 그리고 있는 것이 누군지 알아? 주희가 누구의 몸을 원하고 있
는지 알앗! 바로 승희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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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이런! 지하실에 불이!"
준후가 집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소리쳤다. 현암도 놀라 집
쪽을 돌아보는데, 둘 사이에 포위되었던 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집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아앗! 저런! 저 놈이!"
"쫓아라 준후! 놈은 뭔가 일을 꾸미고 있어! 신부님이..그리고 현
웅 화백도!"
"아버지!!!"
셋은 다급히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벌써 검은 연기는 하늘을 찌
를 듯 올라가고 있었고, 이미 전기가 다 나간 마을쪽에서도 수선스
러운 소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7. 불의 결말..(1)
"뭐..? 뭐라구? 승희를..?"
현웅화백은 놀란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잘 잇지 못했다. 미친
듯 날뛰던 염력도 가라앉아 다시 조용해져 갔다.
"그래...자네가 그리는 저 그림.. 다시 한 번 자세히 보게나.. 다
른 그림들과는 달라... 비슷하기는 하나.. 저건 승희야! 주희가 아
냐! "
현웅화백은 자신이 그리던 그림으로 눈을 돌려 뚫어지게 쳐다 보다
가 얼굴이 점점 울듯하게 일그러져 갔다.
"알겠나? 현웅이? 주희가 이젠 누구의 몸으로 되살아나려는 건지
알겠냐구!"
현웅화백은 오열했다.
"으흐흐흐... 난... 난 어쩌지? 둘 다.. 둘 다 나의 딸들..."
갑자기 주희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아빠! 아빠!'
현웅화백의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오오 주희...가련한 내 딸..."
'아빠...절...절 살려 주세요...살려...'
박신부가 벼락같이 외쳤다.
"안돼! 주희! 네 동생이야! 어떻게 네 동생을 죽이고 네가 살아나
려는 거지? "
'아빠...제가...제가...가련하지도 않나요..? 그렇게 참혹하게 목
숨을... 목숨을 잃은...'
"그만뒀! 네가 그랬다고 동생을 희생시킬...윽!"
박신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어느 새 현웅
화백이 무서운 눈으로 박신부를 쏘아보고 있었고, 붓 한자루가 그의
염력으로 날아가 박신부의 어깨에 꽃혀 버린 것이다.
"박신부... 그만두게... 이건 우리 집안의 문제일세.."
박신부는 아픔을 참으며 붓을 뽑아 꾹 쥐었다. 붓은 그대로 으스러
져 버렸다.
"세상의 섭리는 거역해선 안돼! 주님만이..오직 주님만이 사망을
이길 권세를 얻으셨다... 그런...그런 일은...절대.."
다시 미술 나이프 하나가 날아와서 박신부의 다리에 깊은 상처를
내며 지나갔다. 박신부는 신음을 울리며 무릎을 꿇었다.
'신부.. 당신이 나설 때가 아니야... 아빠... 절... 저를...'
현웅화백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쳐 흘렀다.
"오오... 주희야...주희...나를... 차라리 나를..."
'안돼요.. 승희... 승희여야 해요... 그림을...그림만 완성하면..'
"주희야... 네... 네 동생이야... 그건... 그것만은..."
'아빠... 내게 약속하셨잖아요... 약속을... 그림을 모두...'
박신부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현웅화백을 쏘아보며 외쳤다.
"죽은 딸을 위해 산 딸을 죽일 참인가! 주희! 너 그러고도 살아나
고 싶단거냐!"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주희인듯한 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좋아요.. 그러면... 제겐 아버지의 힘만 주세요... 승희의 그림
은..완성시키지 않아도 좋아요...'
현웅화백의 얼굴이 밝아지며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 역시.. 역시 착한...내 딸..."
박신부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지금 제 정신인가! 자네의 힘을 다 준다는건 자네의 죽음을 뜻해!
주희! 이번엔 아버지를 죽이고 힘을 얻겠다는 거냐! 힘을 얻어서 무
엇에 쓰려...으악!"
한쪽 벽이 갑자기 허물어지며 박신부의 몸을 덮었다. 먼지가 뭉게
뭉게 일어나는 가운데 현웅화백은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이제 저 친구는 잠잠할 거야... 이 힘을 달라는 거냐?...오
냐...줄께...다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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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읔! 형! 이건 너무 심해요! 불길이 너무 강해서..."
새카만 연기와 붉게 날름거리는 불길을 쳐다보며 준후가 콜록거렸
다. 현암은 기공으로 호흡을 줄이며 대꾸했다.
"그래도 가야해! 신부님과 현웅화백이 위험해! 그 악령이 무슨 꿍
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몰라!"
승희가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맞잡았다.
"음..제발.. 제발... 우리 아버지를..."
준후의 눈이 밝아졌다. 이상한 기운이 다시금 승희의 몸에서 흘러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음 이건.. 강력한 기운.. 맞아 승희 누나는 역시 애염명왕 라쟈의
아바타라가 분명해!..그러면 이 힘은 분명 증폭력(增幅力)...우리가
평소보다 더 큰 힘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누나의 덕이었군....
이 힘을 내가 빌린다면...'
"승희 누나! 날 도와줘요!"
"음? 어떻게..? 내가 뭘 할 수 있지?"
"아이고 이런.. 음.. 집중하세요... 제게 힘을 준다고 생각하세
요.."
"음? 힘? 내가 어떻게? 무슨?"
"아이고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눈을 감고 기원을 하세요! 간
절하게! 잡념이 들면 안돼요!"
"음 근데 너무...공기가 매워서..!"
현암이 잘 모르지만 준후를 믿고 승희에게 말을 건넸다.
"음..기해...아니 단전에 힘을 주고 가부좌를 트세요! 도가 참선법
이니 아마 집중이 잘 될 거에요."
"예? 단전요? 가부좌는 또 뭐고요?"
"이렇게 하세요! 이렇게! 예! 예! 그리고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뱃속 깊은 곳까지 숨을 들이 마시며..마음을 가라앉히세요..."
간신히 엉거주춤 자세를 잡은 승희는 어쩔 줄 몰라했다. 불길이 밀
려오는 상황에서 왜 이래야 하는지 납득이 안가는 것이 분명했다.
"아이고 잘 안돼요! 어색해요!"
현암이 정색을 띄었다.
"우릴 믿으신다면... 그리고 아버님을 구하고 싶다면... 해야만 합
니다... 반드시...!"
승희의 눈이 잠시 처연히 현암을 올려다 보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
다. 지하실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불길소리에 섞여 들려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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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는 서둘러 무너진 돌더미를 헤치고 나왔다. 다행히 기도력의
오오라로 수호하고 있어서 별 일은 없었으나, 정신 없이 지나간 몇
분사이의 일이 궁금했다. 먼지가 조금 가라앉자 방안의 정경이 들어
왔다...
현웅화백이 의자에 맥없이 걸터 앉아 있었다. 잠깐 사이에 수십살
의 나이를 먹은 듯, 창백한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해지고 쪼글쪼글
해져서 마치 미이라와 같은 형상이 되었고, 손발도 마치 새다리처럼
가늘어져 버리고 만, 서글픈 몰골이 되어 가쁜 숨만 내쉬고 있었다.
"현웅잇! 이 바보! 어째서.. 어째서 희생을..!"
현웅의 입에서 가쁜 신음 비슷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뭐든... 자네.. 자네도... 저
애를 탓하지 말고... 저 애를 저렇게 만든 이 세상을... "
"으흐흐흑..! 이게 주희를 위하는 거냐! 이 멍청아!"
박신부는 현웅의 손목을 잡고 오열을 터뜨렸다. 뭐라고 할 말이 없
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슥슥하고 스치는 듯한...
현웅화백이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아...안돼!.. 주희...주희야!"
박신부는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허공에 뜬 붓... 허공에 뜬 붓
한자루가 승희의 초상화를 마저 완성시켜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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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된다! 역시 애염명왕 라야의 화신이야! "
어느새 승희는 무아경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고 그녀의 몸에서 현암
마저도 숨이 막힐 듯한 엄청난 영기가 쏟아져 나와 준후의 몸으로
향하고 있었다. 현암이 말을 더듬었다.
"이..이..이게...음...그..그러면 이 분이 라야의 아바타라...??"
"예..형...와 정말 굉장해요! 온 몸에 힘이 솟구쳐요! 어떤 주문이
든 다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준후야!불..불을 끄려면 도가의 술수.. 삼매신수(三昧神水)를..!"
"예! 알았어요!"
준후가 주문을 외우자 갑자기 사방에 검은 안개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것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암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다.
'으.. 이 전설상의 술법이 이 세상에서 재현될수있다니...백년 공
력이 필요한 수가... 정말 저 승희라는 여자, 엄청난 잠재력을 가졌
구나...!'
"타핫!"
준후가 일갈성을 발하면서 양손을 앞으로 뻗자, 모여든 검은 구름
이 쏘아져 나가고 사방의 불길이 흰 연기를 뿜으면서 사그러들기 시
작해서 잠시 후 검은 구름이 흩어지자 근처의 불길은 모두 잡혀 있
었다.
"와! 장하다! 준후야!"
"아이고.. 근데...헉헉... 이거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보니 근처의 불은 꺼졌으나 저 안쪽에서 다시 불이 살아나고
있는 듯 했다. 문득 승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슨...헉헉...무슨 일이죠?...아! 불이 꺼졌네!"
"어서 갑시다. 이만큼 불이 잡힌것이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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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주희! 약속이 틀리다! 아버지의 힘을 빼앗아 저꼴로 만들어
놓고 이젠 동생의 몸 마저도 빼앗을테냐?"
'방해하지마..신부...난 무슨일이 있어도 승희의 몸이 필요하니
까....'
"에잇!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
박신부가 두 손을 모으자 이제까지 현웅화백을 생각해서 발휘하지
않았던 오오라가 둥글게 퍼져 나갔다. 이제 그림은 거의 완성된 단
계였다.. 한쪽 눈썹만 그리면...
우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강하게 퍼져나가는 오오라가 초상화가 그
려지는 이젤에 집중되고, 이젤이 바닥에 털썩 넘어지면서 붓이 날아
가 벽에 부딪히고 다시 땅에 굴렀다.
'신부! 죽고 싶은가!'
" 이 사악한 것! 어릴때, 아니 살아 생전의 착한 모습은 다 어딜가
고 이런 악귀가 되었..."
말을 이어가던 박신부의 머리에 무언가가 떠 올랐다. 혹시... 혹
시... 박신부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붓끝을 뒤적이고 있는 영의
기운에 정신을 집중했다. 영사를 행하는 것이었다. 붓이 다시 움직
이려는 순간 박신부의 눈이 떠지며 호랑이가 우는듯한 노호성이 터
져 나왔다.
"너! 너는 주희가 아니지? 이...이... 사악한..!"
박신부가 그때까지 꺼내지 않았었던 성수를 꺼내 들었다. 번쩍이는
은십자가가 다른 손에 쥐어졌다.
'호호호호호...눈치도 무디시군...이제야 알았다니...'
이를 갈아붙이는 박신부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 내렸다.
"이..이런...이...흉악한 마물! 현웅이의 어버이로서의 정마저 이
용해 먹는...이..."
'호호호...눈치 없는 영감탱이...능력만은 쓸 만 하더구먼..'
"닥쳐랏! 현웅이의 복수닷!"
박신부가 움켜쥔 십자가에서 성령의 불이 파랗게 이글거리기 시작
했고... 오오라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는 빛깔이 연녹색에서 새파란
빛으로 변해갔다. 극한의 기도력이었다.
'음? 이런... 대단하구나!'
뭔가 불안함을 느낀 듯한 악령이 염력을 이용해 갑작스레 돌덩어리
들을 박신부에게 날렸으나, 박신부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공중
에서 부서져갔다. 박신부는 눈물을 뿌리며, 평소와 다른 절규에 가
까운 기도를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하늘에 계신 천상의 주이시여----!"
'아아악----'
악령이 찢어질듯한 비명을 질렀다. 거의 저항할 수 없는 듯 했다.
"그대 왕국의 양들을 보살피시어----!"
불길에 달아오른 벽이며 천장에 마구 금이 가면서 잔돌이며 흙먼지
가 마구 쏟아져 내렸다. 바닥마저도 엄청난 힘으로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사악함으로부터 구원하옵시고-----!"
'캬아아악-----'
악령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는데, 갑자기 현웅화백의 몸이 벌떡 일
어섰다. 박신부는 깜짝 놀라 기도를 외던 것을 중단하고 현웅화백에
게 물었다.
"현웅이! 괜찮은가!"
박신부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현웅의 눈은 여전히 힘없이 풀
려 있었던 것이다. 악령이 염력을 이용해서 박신부의 정신을 흐트러
트린 것이 분명했다.
"네...네 놈이 끝까지...!!!"
분노로 얼굴을 돌리는 박신부의 눈에 초상화의 마지막 부분을 그리
는 붓의 모습이 들어왔다.
"안돼----!"
셋이 마지막 문 앞에 도달했을때, 승희가 갑자기 풀썩 자리에 쓰러
졌다. 현암이 놀라서 외쳤다.
"음! 승희씨! 왜..."
준후가 승희의 얼굴을 짚더니 경악에 찬 소리를 냈다.
"으..승희누나의 몸에서...유체가...유체가 빠져나갔어요!.. 무언
가에 의해...으.."
"뭐라구?"
놀란 현암이 문을 쳐다 보았다. 무언가가 느껴졌다..그건..박신부
의 힘과...또...
"신부님이예요! 그리고 그와 무언가가..."
현암은 기공을 손에 모아 단번에 문을 박살내 버렸다. 그 안의 광
경은 차마 믿기 힘든 것이었다...
박신부가 눈물과 땀을 비오듯 흘리며 엄청난 오오라를 뿜어대고 있
었고.. 그 오오라는 허공위의 한 점에 집중되어 뭉클거리며 형상을
갖추어가는 거대한 영을 안간힘을 다해서 붙잡고 있었다...
그 영은 아직 뚜렷한 형체가 보이지는 않았으나...전신이 붉고 여
섯개의 팔과 세개의 번쩍이는 눈이...
현암의 입이 딱 벌어지고 있는데 준후가 외쳤다.
"라쟈..!애염명왕 라쟈의 현신이..! 누군가에 의해 빠져 나가려.."
"준후! 현암!!! 어서 그림! 그림을..! 이 악령은 승희의 몸에 있는
라쟈의 힘을 가지려고 이런 일을..! 어서..!"
박신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준후가 지녔던 부적들을 허공에 휙 흩
뿌리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만부원진(萬府圓軫)!!! 부적들아...라쟈를...라쟈를 진정시켜!"
허공으로 총총이 떠오르는 부적들은 라쟈의 영 주위에 붙어 박신부
의 오오라와 합세 했다. 그러나 잠시가 지나자 애염명왕이라는 엄청
난 힘앞에 둘의 능력이 미치기 힘들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었다.
현암은 그림을 살폈다. 그림 안에는 승희의 얼굴..아니 꿈틀거리며
추한 몰골로 변해가는 악귀의 얼굴이 꿈틀대고 있었다. 염력으로 빗
발같은 잡동사니가 현암의 몸에 집중되어 거의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방해하지마라...이를 위해.... 라쟈의 힘을 차지하기 위해... 극
심한 고통과 번민속에서 여덟영을 제물로 바치고... 필생의 영력을
쏟아 부은 그림을 그리게 하고... 이 계획을... 지금껏 잘 되어 왔
는데... 여기서 포기할 수는... 포기 할 수는... '
"이 망할..! 네놈의 욕심... 지옥에나 떨어져서 채워랏!"
현암이 월향을 뽑아들고 노호성을 질렀다. 검기가 네자를 뻗어 나
왔고, 검기가 허공을 가르자 날아오던 잡동사니들이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어져 갔다.
"받아랏!"
현암의 몸이 그대로 회전하며 검과 일체가 된듯, 그림을 향해 뻗어
나가는 순간, 무언가가 붉은 것이 앞을 가로 막았고.. 현암의 몸은
그대로 튕겨나가 반대편 벽에 부딪힌 뒤 듸굴었다.. 현암은 선혈을
한모금 뿜어내고는 다시 눈을 들었다. 바닥에는 부적이 어지럽게 듸
굴고 있었고..박신부와 준후가 간신히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라..라쟈의 현신이..."
두 퇴마사의 영력을 이겨낸 라쟈의 붉은 몸체가 그림으로 빨려들
어가고 있었고... 정체를 들어낸 사악한 얼굴이 그림 속에서 웃어대
고 있었다..
'호호호호호... 이제 나를 막을 자, 아무도 없다!....호호호..'
"개...개소리 마랏!"
현암이 다시 피를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신부님! 준후! 퇴마진...퇴마진을...!"
"현암..자네...자네 그럴 상태가 아니네..."
"죽어도 좋습니다! 저 놈이 저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다면... 세상
이 위험합니다!"
현암이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손등을 깨물고 기공을 모
았다. 박신부의 몸에서도 오오라가 뻗어 나갔고... 준후의 몸에서도
흰 기운이 솟아 올랐다. 그때, 이미 미이라같이 되어버린 현웅화백
의 몸이 힘겹게 그림뒤로 기어가고 있는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늘이시여... 더러운 이 세상을 위해...힘을 주소서...'
"퇴마아------"
"--------합진!"
셋은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애염명왕같은 거대
한 신을 상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러나... 누군가 무슨 일인가는 해야만 했다...
현암이 몸을 날렸다. 준후의 손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다섯가지
의 오행의 번개같은 것이 솟아 현암의 손끝에 들린 월향의 끝에 맺
히고, 박신부의 오오라가 팽창하며 현암의 뒤를 밀어갔다. 채 다 들
어가지 않은 라쟈의 여섯손이 악령의 조종을 받아 한데 모아져서 빛
살처럼 날아오는 현암의 검끝을 맞받아쳐 갔다....
'감히 신에게 도전을...으..으으으!!!'
그림의 악령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방심한 사이에 현웅화백
의 깡마른 손이 그림의 한귀퉁이를 움켜쥐어 그림이 찢어지고 승희
가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애염명왕 라쟈의 현신은 그림의 주술이
깨어지자 재빨리 승희의 몸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캬아아아아 안돼! 안돼!'
이제 쏘아져오는 퇴마사들의 합력과 악령이 묶여있는 그림 사이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것도 그 엄청난 힘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현암의 눈에 잠시 깡마른 현웅화백의 웃는 얼굴이 보
이는 듯 했다... 현암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할 수 있는한, 검끝을
현웅화백에게서 떨어지게 하려 애썼다....
햇살같은 빛줄기가 사방에 뻗치고 지하실을 가로막았던 벽들이 와
르르 무너지면서 넓은 지하실 전체에 엄청난 충돌파가 퍼져 나갔다.
세 퇴마사의 합력은 그대로 그림에 작열하여 엄청난 불길을 사방에
뿌리며 그대로 지하실의 벽들을 차례로 부수고 최후로 흙과 축대를
부수며너 밖으로 튀어나갔다. 축대의 바깥쪽이 마치 폭탄이 작열하
듯 터져 나가며 현암의 눈앞에는 마지막으로 웃는듯 하던 현웅화백
의 얼굴과... 일그러진 그림속의 악령... 박신부... 준후... 그리고
승희... 머얼리 현아의 얼굴마저도 한데 섞여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이 보였다.... 그리고는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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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대와 언덕아래의 동네 사람들.. 그리고 불구경 나온 사람들에
다가 의문의 변사체를 조사하는 사람들까지... 난데없이 축대 밖으
로 폭발같은 것이 일어나며 한 남자의 몸이 튀어나오자 기겁을 했
고... 그 뒤를 이어 하도 먼지를 뒤집어 써서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신부와 아이, 무언가를 안은 여자 한명이 그 구멍으로 돌무더
기들을 비집고 달려 나오자 와 하고 도망들을 쳐 버렸다... 구멍에
서 달려나온 셋은 밖에 듸굴던 남자를 안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
고... 소방대가 무진 애를 썼으나 터져 나온 불길은 무엇으로도 거
의 꺼지지 않았다... 집은 벽돌 하나 남지 않고서야 다 꺼졌고...
경찰은 현웅화백의 집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사고가 일어나 수
를 알 수 없는 사람과 지나가던 사람(죽은 악한들마저 해결 되었
다.)들 마저 불에 타 숨진 것이라고 보도를 했다...
이후... 그 사고가 있던 날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거나 귀신이
날뛰었다는 소문, 변압기가 차례로 폭발하며 귀신이 날아다녔다는
소문들이 돌았으나 곧 잊혀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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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는 묘소에 얼굴을 묻고 슬프게 울고 있었고, 박신부와 준후,
그리고 아직 기브스며 붕대를 풀지 않아 거의 미이라 같아 보이는
현암은 먼 발치에 우울한 얼굴로 서 있었다.
"현웅화백의 일, 너무 안됐어요... 딸을 잃고 스스로 마저도 악령
에게 모든걸 잃고... 결국 목숨을 걸고 악령을 퇴치하기는 했지만
.."
현암이 중얼거렸다.
"그 악령은 대체 어떤 놈이었을까요?"
준후가 묻자 박신부가 먼 산을 보며 말했다.
"어디에나 있는... 결국은 인간의 욕심에서 다 유래된 것들이지...
어지러운 세상의 창조물이기도 하고..."
현암이 탄식조로 말했다.
"도대체 우린 누굴 위해서 싸우는 거죠...? 어지러운 세상은 마를
만들어내고..우린 또 그 마를 제압하려고 싸우고.."
"난들 알겠나... 하지만 우린 선을 위해 싸우는 거지.. 아니 꼭 선
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준후가 끼어들었다.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음. 그래 맞다... 고통... 그래,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셋의 눈이 서럽게 울고 있는 승희의 뒷모습으로 모아졌다. 이럴때
면 언제나, 누구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지
난날 그들이 받았던 고통의 기억들이 남긴 흉터가 새삼 느껴지는 것
이었다...
저녁노을이 불타듯 곱게 지고 있었다. 셋, 아니 이제 자신의 처지
를 깨닫고 운명적으로 그들에게 합류하게 된 승희까지, 넷은 발걸음
을 옮겨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또 다른 악과 마가 들끓고 있는
세상을 향해서....
- 퇴마록 5부
생명의 나무
1. 사교(蛇敎)...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깨우친 위대한 사령(蛇靈) 브리트라(*주 1)
의 화신이시여....."
음울하게 켜져있는 수백의 촛불들이 가녀린 빛을 하늘거리고 있는
꽤 넓은 회당에서 녹색의 사제복을 입은 젊은 남녀가 동시에 하늘에
두 팔을 벌리고 간구하는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백여명 이상이 되어보이는 사람들이 운집하여 함께 눈을 감고 외치
고 있었다...
"생명 나무(*주 2)의 과실을 취하신 그 지혜(*주 3)로 저희를 굽어
살피사, 저희의 죄를 정화하고 세상을 살아나갈 힘을 주소서!"
백여명의 울부짖음같은 소리가 아우성처럼 들려왔다.
"죄를! 저희의 죄를!"
"힘! 힘을 주소서!"
남자의 사제복에 수놓아진 모나스 히에로 글리피카 (*주 2)와 여자
의 사제복에 수놓아진 뱀의 문양이 마치 살아있는듯 섬뜩한 빛을 반
사했다...
남자가 뒤로 돌아섰다.
"이미 죽어버린 신, 여호와를 섬기는 무지몽매한 크리스챤들이여!
너희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신! 유일신인 대 蛇靈 브리트라를
믿어야 한다!"
여자도 뒤로 돌아섰다.
"헛된 염불만 늘어놓는 불도에 현혹된 중생들이여! 대령(大靈) 중
의 대령! 브리트라를 섬기고 의지하라!"
둘이 함께 외쳤다.
"세상이 지어진 것은 신들의 투쟁의 결과... 이제 오랜 싸움끝에
승리한 유일신인 브리트라를 믿는가?"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자리에 엎드렸다.
"믿고 섬깁니다!"
"믿고 받듭니다!"
둘의 어조는 묘하게 어울려 마치 한 사람의 목소리인 것처럼 합해
져 나갔다. 둘의 눈은 이상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갑자기 무리들의
머리 위 허공에 거대하게 꿈틀거릴듯한 뱀의 영상이 나타났다...
"오!"
"아아아..!"
"브..브리트라 시여..!"
사제복 같은 것을 입은 남자가 굵은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의 영혼을 바쳐라! 너희들의 모든 죄가 용서 되리라!"
여자가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의 육신을 바쳐라! 세상을 흔드는 힘을 갖게 되리라!"
백여명에 이르는 무리들은 저마다 아우성을 치면서 허공위의 영상
에게 팔을 뻗어갔다. 이미 몇명이 탈진하여 그 자리에서 실신해 쓰
러지고, 한 건장한 남자가 미친듯이 웃옷을 찢고 있었다...
광란의 도가니를 바라보며 두명의 사제는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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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머머... 이게 뭐야! 꺅..그만해! 무섭단 말야!!!"
"아이쿠!"
놀란 승희가 엉겁결에 준후를 밀어내자 무방비상태였던 준후가 뒤
로 나가자빠졌다. 동시에 준후가 펼쳤던 강신부(降神符)들이 허공에
서 힘을 잃고 떨어져 내렸다. 현암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외쳤고..
"이봐! 승희! 그런것을 무서워하면 어떻게 해! 준후가 불러내는 신
들은 우리편이라구! 그래서야 어떻게 마물들과 싸운단 말야!"
"아이고! 몰라! 무섭단말야! 웬 귀신!!"
준후가 울상이 되어서 엉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잉잉.. 그럼 누난 어떡하려구 그래? 아무리 잠재력이 커도 그걸
개발해야 할 거아냐? 신부님처럼 수십년 기도력을 쌓는 수련을 할거
야? "
"읔.. 웬 수십년? 쪼그랑 할망구가 되라구?"
"아니, 그러면 현암형처럼 기공이나 외공을 연마할 거야?"
"아이고! 내가 깡패냐? 나같이 우아한 숙녀가 주먹질하는걸 배운단
말... 으윽!"
"뭐? 깡패? 야 말잘했다. 넌 그러면 날라리냐? 그런 미니입고 귀신
과 싸우면 귀신들이 좋아하겠다!"
"뭐? 야! 말다했어?"
준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살짝 문 밖으로 빠져 나갔다. 안에
선 현암과 승희가 계속 말다툼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에이구.. 나도 모르겠다. 도대체 제정신일땐 눈꼽만큼도 영력이
있는것 같지 않으니..."
박신부가 총총히 들어오다가 시무룩해 있는 준후를 발견하고 자리
에 멈추어섰다.
"음? 왜 이리 소란스럽지? 준후야?"
"또 전쟁이죠 뭐. 아이고... 우리 여자는 좀 빼고 활동하는게 어때
요? 이거 허구헌날 싸움이니..."
"하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원래 다 그런거란다... 오히려 난
인제야 좀 사람사는 맛이 나는것 같애..."
"예? 그럼 여태까진 어땠구요?"
"아니아니... 좀 집안이 화기애애해 지는 것 같아서 좋단 말이
지...그나저나 어서 들어와라. 중요한 소식이 있다."
박신부는 법의를 휘날리면서 세계대전(?)이 진행중인 방으로 들어
갔다. 준후가 가만히 들어보니 처음엔 박신부가 둘을 좋게 말리려고
하는것 같더니 좀 있다가는 되려 3파전으로 갈라져서 싸우는 듯 했
다.
"아이고... 화기애애라구?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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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사교요? 뱀을 믿는 종교란 말인가요?"
현암이 (오랜 말싸움에 지쳐 저절로 휴전 중이었다.) 갑자기 관심
을 보이며 물었다.
"맞네. 요즈음 일각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신흥종교지..."
승희가 아는척을 하며 끼어들었다.
"음.. 원래 뱀을 숭배하는 사상은 고대부터 많이 있었지요. 고대
그리스의 테베에서는 성스러운 뱀을 숭배하였던 것이 대표적이고...
또 뱀은 좋은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신과 거의 대등한 악
의 존재, 그러니까 강력한 힘을 지녔다 믿어져서 그런 예가 많이 있
지요. 북게르만 신화의 미드가르드 독사나 고대 베다에 나오는 브리
트라, 그리고..."
현암이 톡 쏘았다.
"아는척 좀 고만해.. 누가 고고학 전공 아니랄까봐..."
승희가 현암을 불만스럽게 쳐다보며 말을 더 이으려 하는데, 박신
부가 말을 꺼내자 입을 닫았다.
"음... 이번의 사교는 주신의 이름을 브리트라라고 부르더군."
준후가 가만히 보다가 끼어들었다.
"그러면 인도쪽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유파인가요? 음...브리트라라
면 내가 좋아하는 인드라님의 적인데...!"
"꼭 그런것만도 아냐. 기독교, 불교, 그리고 특히 바빌론이나 히타
이트, 페니키아에 까지 걸친 고대 신앙체계를 제 멋대로 끼워 맞춘
교리를 가지고 있지."
현암이 눈쌀을 찌푸렸다.
"음...페니키아라면... 가장 잔인한 인간제물(*주 5)을 바치던 악
성 종교가 있던..."
승희가 또 끼었다.
"그래... 몰록(Moloch)신을 섬기던..."
"아뭏든 상당히 강력한 주술적 힘을 부리는 것으로 봐서, 그들의
뒤에는 뭔가 이름모를 사마(邪魔)의 힘이 있는것이 분명해...또 사
라지는 사람들이 많아서 경찰도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나봐.. 그러나
도대체 증거가 보이지 않고, 수사관들마저도 자꾸 없어진다는거야."
"주술을 이용한다면 경찰이 해결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아니죠.."
"역시 우리가 나서야 할 것 같아..."
네명의 눈이 서로를 쳐다보면서 빛났다.
* 주 1) 브리트라(Vritra) : 원래 인도의 베다에 나오는 악마.
거대한 뱀의 형태를 지녔으며, 사악한 술수로 인간을 유혹
하며 신들을 파멸시키려 했다고 함. 인드라(Indra:제석천)
가 그에 유일하게 대결하여 승리했다함.
* 주 2) 생명의 나무 : 성경에 기재된, 여호와가 에덴동산에 만든
선악과 나무 와 같이 있는 나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를 먹고 쫓겨난 뒤, 수호천사들에게 불검으로 둘러싸서
지키게 했다는, 생명의 비밀이 깃든 나무.
* 주 3) 신학자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의 이설에 의하면,
원본 성서(현재 전해지지 않는) 에는 에덴동산의 설화
가 지금의 성서에 나타난 것과 일치 하지 않는다고 한
다. 즉, 신이 인간에게 뱀을 보냈으며, 그 이유는 선악
과가 아닌 생명의 나무의 과실을 먹도록 하기 위함이었
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활한뱀은 의도적으로 그 메시지
를 속여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게 하고 스스로가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었다고 하는 것이 원래의 성서의 내용이
라 한다. ( Frazer, Folklore in the Old Testament,
London, Macmillan & Co. 1919, Vol. I. pp 47-51)
* 주 4) 모니스 히에로글리피카:중세 서양의 유명한 연금술사이자
마법사인 존 디 가 만든 부적의 이름. 우주의 모든
지혜를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서술되었으며 그 형상은
추 또는 뿔달린 악마의 모습과 흡사.
* 주 5) 고대 페니키아에서는 주신 몰록(Moloch)을 섬겼는데, 특히
그 숭배자들은 첫아기를 희생제물로 바쳐야 했으며 그
신은 수없는 인간제물의 피를 즐겼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MOLK(어린이의 희생제의를 뜻하는 단어)라는 단
어의 유래도 몰록의 이름에 기인한다 한다.
2. 이단의 교리(敎理).
박신부가 얄팍한 소책자 한 권을 꺼냈다. 겉표지는 녹색으로 되어
있었으며, 붉은 글씨로 '蛇靈을 믿고 받들라'는 글씨가 씌어있고 기
묘한 뱀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그들의 교리를 간추린 홍보물이네. 한 번 보게나..."
현암이 책을 펼쳤고 승희가 호기심으로 현암의 어깨 뒤에서 기웃거
렸다. 현암이 자꾸 알짱거리는 승희가 귀찮은듯 상을 찌푸리자 준후
가 아예 큰소리로 읽어 달라고 요청했다. 현암은 고개를 끄덕하며
낭랑하게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우리는 세상에 난립하여 갖은 수단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각종 종교의 허울을 벗기고, 진정한 우주의 질서를 나타내는 힘의
근원을 섬겨야 한다. 무릇, 종교라는 것은 인간의 힘이 닿지 않는
범위에 있는,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갖추어 나가는 힘에 귀의하고
그 힘을 따라 세상을 지배하는 진정한 원리에 순응하여 하찮은 인간
으로서의 삶이라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데에 있는 것이다.."
승희가 비웃었다.
"흥! 하찮은 인간으로서의 삶이라고? 처음부터 냄새가 나는군 그
래! 안그래요? 신부님?"
"쉿!"
"피잇~~~"
"...이에 우리는 우선, 현재 세상에 떠돌고 있는 각종 종교들의 허
상및 그 허구성을 알고 그에 속지 않도록, 또는 속고 있더라도 한시
바삐 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 진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
다..."
준후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놀리는듯이 말했다.
"아쭈! 대단하시구먼..!"
현암은 묵묵히 같은 어조로 읽기만 하고 있었으나, 그의 눈매도 찡
그려지기 시작했다.
"...모든 종교의 기원은 옛 바빌론에서 찾을 수 있다.바빌론에서
시작된 범 우주적인 사색과 신의 기원에 관한 의문은 고대의 원시
신앙체계를 정립하는 첫걸음이었으며, 그 사색의 깊이나 추구는 그
이후의 종교들이 따르지 못하는 바 있었다. 바빌론, 아니 메소포타
미아 지방의 종교는 시기적으로는 이집트나 인도의 것과 비슷하나
실제적 내용으로는 이 두 지방의 종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박신부가 중얼거렸다.
"흠... 바빌론... 부적, 주술, 점복이 그만큼 성행된 종교는 아직
까지도 없었지..."
"...인도의 만신전(萬神殿)이나 이집트의 신의 계보, 그리이스의
신들, 북구의 신들은 대체적으로 거의 유사하거나 일대일 대응의 요
소를 지니는데 이는 자연력을 추상적으로 묘사하여 신격화 시켰던
때문이며 또 실제로 자연력들은 응집되어 하나의 개별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관 및
대신관(對神觀)은 비록 그 유래가 오래되었더라도 훨씬 더 현실 적
인 것으로 이후, 인간의 부족한 사고 및 이성으로 윤색되고 변질된
신의 추상적이고 거대한, 무소불능의 형태보다 훨씬 사실에 가깝
다..."
박신부가 침중한 한숨소리를 냈고, 승희도 눈썹을 치켜 올렸다.
"수천년동안 이루어져 온 인간 의식의 정화를 가볍게 묵살해 버리
는군 그래. 역시 이단논리가 분명해... 우선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바가 그렇고..."
현암은 계속 교리를 읽어 나갔다. 이건 거의 종교의 교리서라기보
다는 일종의 주술적인 이론서에 가까왔다. 그러나 제종교에 대한 비
교적 해박한 지식과 말이 안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정연한 이
론적 전개를 나타내고 있으며, 또 각 종교에서 타부시되는 요소들을
적당히 섞어서 이용해 가는 수법으로 볼때, 이 교리를 만든 인물이
그래도 고등교육을 받은 자였음을 암시 해 주었다. 드디어 각 종교
의 비판대목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독교, 천주교등은 유대교의 이론을 비 유대인들이 이용하여
스스로에게 이롭도록 첨삭을 가한 것에 불과하다.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 이후에 세력을 넓힌 기독교는 로마에 의해 공인 된 후 세계종
교라는 모토를 걸었으나, 이는 모두 스스로의 이득만을 꾀한 인간들
의 행위로, 그 이후 전 세계에 수천건에 달하는 분쟁 및 전쟁을 유
발시키고 수억의 사람을 살상하게 하여 세상의 발전을 저해하게 만
든 유해 종교로써...."
박신부도 눈쌀을 찌푸렸다.
"...그 성경이라는 내용도 고대의 것은 거의 바빌론의 세계관을 억
지로 끌어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대홍수의 노아(*주 1)
는 바빌론 설화의 우트나피쉬팀(*주 2)에 불과하며..."
"그 부분은 좀 빼고 넘어가세. 어차피 꼬투리를 잡고 들어가는 것
일 뿐이니... 종교가 논리적으로 완벽한 것이라면 아예 믿을 이유가
없지.."
현암이 더러운 것을 본 양, 책을 휙 집어 던졌다.
" 그래요. 불교, 도교, 유교 등등... 모두 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
고 써 놓았군요. 역시 말도 안되는 논리로요... 가르침의 유래나 기
원에 대한 꼬투리만 잡았지, 내용에 대한 비판은 없으니 원... 그래
도 모을만한 건 용케도 다 갖다 붙였구먼요...이런걸 또 좋다고 하
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죠?"
"그래.. 그리고 놀랍게도 오히려 약간 식자라고 할 수있는 층에서
더 호응을 얻는 모양이야... 그 뒤의 내용을 보면,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는 역시 세상에서 모두 속죄 받을 수 있다고 하고 있어. 즉
육신으로 지은죄는 육신을 바치면 속죄가 되며, 마음으로 지은 죄는
영혼을 바침으로써 속죄가 된다는 거지..."
승희가 눈쌀을 찌푸렸다. 역시 승희는 퇴마사의 대열에 끼인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쉽사리 흥분하는 기색을 보였다.
"육신을? 영혼을 바친다고요? 이거 역시 악마적 냄새가 나는 군
요..."
박신부는 계속 침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또 이 교리에서는 거대한 뱀의 신, 브리트라를 섬기는데,
그의 미화를 위해서 전 세계의 뱀설화 및 기타 모든 걸 다 갖다 붙
이고 있지...아까 승희가 말했던 미드가르드 독사나 테베의 성스러
운 뱀의 이야기도 물론 포함 되어있고, 그 외에도 쿤달리니(*주 3)
나 기타 거의 모든 종교에 가지각색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한가지의 거대한 신, 즉 뱀의 신인 브리트라를
나타낸다고 하고 있네.... 그리고 주장하기를, 세상의 모든 제신들
은 각 종교에서 이름만 다르게 붙였을 뿐, 동일한 구성을 가진 평등
한 신적 체계와 수를 가지는데, 인간의 의식이 발달함에 따라 분열
을 일으켜 신들의 대전쟁이 있었고, 그 승리자가 뱀의 신... 즉 생
명력의 화신이라는 뱀의 신 브리트라라는 거야... 근데 그 브리트라
가 승리한 이유는 생명의 비밀을 깨우쳤기 때문이라는 거지... 즉
성경에 나오는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은 것이 바로 뱀의 영, 브리트
라의 화신이었다는 거지..."
현암이 입을 열었다.
"음? 생명의 나무라? 그러면 브리트라의 정체는 사탄(*주 4) 이거
나 사탄의 화신같은 류가 아닐까요...?"
"글쎄... 꼭 그렇게까지 단정지을 수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
뭏든 이들은 각종의 이적을 행하고 기적을 일으켜 그 교세를 확장시
키고 있다네... 그러면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증거가 그
의 이적이었다면, 더 큰 이적을 보라!고 주장한다는 거야... 아마도
어디선가 금단의 사술을 동원하는 거겠지... 아직 자세히는 모르겠
지만 그들 중 적어도 하나는 오망성(*주 5)을 이용하는 수단도 쓴다
고 하네. 아마 레비의 마술학파(*주 6)의 일종인지도 몰라..."
준후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런건 잘 몰라요... 서양쪽의 사악한 주술을 쓴다니...어디
내가 모시는 분들보다 정말 센가 볼까?"
"우린 싸움을 하려는게 목적이 아냐. 이 종교가 정말 사악한지 여
부부터 조사해 보고, 정말 사악한 힘을 행사한다면 그때가서 싸워도
늦지 않아.."
현암이 나섰다.
"좋습니다.. 하여간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박신부가 미리부터 생각해둔게 있었던 듯, 시원시원히 지시를 했
다.
"일단은 이 사교의 배후에 있는게 누군지, 아니면 무엇인지 알아야
해. 들리는 말에 의하면 두명의 남녀 사제가 이 종교의 의식을 주관
한다고 하는데... 우선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할 거
야..."
나머지 셋이 입을 모았다.
"좋아요."
"그러면 현암군과 승희양이 한 조가 되어 한 사람의 뒤를 캐보기로
하세. 나와 준후가 또 한 팀이 될테니..."
현암이 별 생각없이 답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남,녀 어느쪽을 맡죠? 아마도 남자쪽이
나을 것 같은데요?"
"음? 어째서?"
"음.. 남자 사제를 불러내는데는 일단 미인계를 쓰는 것이...아이
쿠!...미안미안..! 농담이었어!!!"
"하여간에 이번에는 귀신과 직접 맞부닥치지 않을 수도 있어. 상대
하는 것이 사람이 된다면, 함부로 손을 쓰지 말게. 생명은 소중한
거니까... "
승희가 눈을 부라렸다.
"아니! 그러면 만약 그 자들이 허무맹랑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 거
라면 우리가 나서면 안돼는 건가요? 꼭 귀신이 개입되는 데에만 끼
어야 하는 거에요? 세상에 나쁜 일들을 보이는대로 처리할 수도 있
잖아요?"
박신부가 눈을 감으며 손을 들어 승희를 제지했다.
"아니아니... 승희양, 진정해...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 또한 거의
주술적인 거야... 원래 인간세상에 알려지면 좀 곤란한 것들이지...
우리가 쓰는 방법들이 세상에 퍼지게되고, 그게 확산된다면 세상은
아마도 더 아비규환이 될지 몰라... 우리의 힘은 초자연적인 존재들
을 상대하는데에만 써야 하는 거야... 알게 모르게 그런 일들은 세
상에 얼마든지 있는 거라네..."
"하지만...."
승희가 더 따지려는 것을 현암이 막았다.
"자자.. 시간이 없다구. 빨리 나가서 조사를 시작하자. 신부님, 그
남자 사제에 대한 무슨 단서는 없나요?"
"음.. 잊을 뻔 했군. 여자의 출신에 대해선 내가 약간 조사한 바가
있으니 염려 말게. 자네는 그 교단으로 접근하는 것이 나을 듯 하
네...."
"음. 알겠어요... 그 교리서에 써 있는 주소로 가죠. 가서 한 번
가입하는 척 해 볼께요..."
"음... 그러나 조심하게. 물론 자네를 믿네만...승희양을 잘 부탁
하고..."
"흥! 저는 못 믿나요? 내 몸속에 무슨 신이 들어있다며요? 그러면
나도 뭐 염려 없겠죠뭐."
"그런 식으로 단정짓지마. 아직 기 하나 운용할 줄도 모르고서는."
"뭐?"
"자!자! 또 싸우나? 나가서 싸우게나! 준후야, 우리도 나가보자."
둘로 나뉜 팀은 각자의 갈길을 가기 시작했다. 박신부의 가슴에 약
간의 불안함이 들었으나, 현암을 듬직하게 믿는 마음이 곧 그런 예
감을 덮어 버렸다.....
*주 1) 노아 :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대홍수 때에 방주를 만들어
인류 및 생명의 멸종을 막은 선조.
*주 2) 우트나피쉬팀 : (Utnapishtim)고대 수메르의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언급되는 인류의 선조. 노아와 거의
같은 일을 행했으며, 그 댓가로 영생을 얻음.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유대교의 노아
설화나 북구의 대홍수의 설화등은 거의 다 이
바빌론의 설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여기고 있음.
*주 3) 쿤달리니 : 힌두교 또는 불교에서의 쿤달리 명왕의 뜻도
가지고 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베다에 나오는 우주
의 소멸적인, 또는 생명의 힘으로 역시 뱀의 형상을
띈 상징물로도 나타난다.
*주 4) 사탄 (Satan) : 기독교의 악마. 하나님과 대립하는 악을 인
격화 한것. 마천사인 루시퍼(Luciper)와 동일한 개
체인지에는 이설이 많으나, 근대에 들어서 아담과
이브(하와)를 꼬인 것은 사탄이라고 하는 설이 많음
변화가 자유롭고, 특히 유혹이나 감언등의 수단으로
인간을 타락시킴.
*주 5) 오망성 (五芒星,Pentagram) : 이는 서양의 마술사가 거의
필수적으로 사용한다고 하는 별모양의 도구 또는
부적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각각의 뿔은 4대정령
(地,水,火,空)과 이를 지배하는 광(光, Astral)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다.
*주 6) 레비의 마술학 : 엘루이파스 레비가 쓴 책, 특히 "고등
마술의 교의와 의식"에 기인하는, 마술의 원리와
내용을 밝히는 신비주의적 학파(?). 위에 예를 든
저서는 카발라와 도구, 제의법 등을 서술하고 성서
의 마술적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3. 잠입(潛入) -1.
"와! 신난다!"
긴장을 가다듬던 현암은 옆에서 승희가 쫑알대는 소리가 들리자 맥
이 탁 풀어지는 것 같았다.
"뭐가?"
"난 첨 출동하는거 잖아? 와 너무 재밌을거 같아!"
"재미? 아이고 맙소사... 지금 우리가 재미로 가는 것 같아?"
"아아..물론 알지. 위험할 수도 있다는거. 하지만 뭐, 천하 무적인
이현암군이 옆에 있으니 어떻게 잘 되겠지 뭐. 수련할 때 보니까 진
짜 끝내 주더라, 맨손으로 바위도 막 부시고..."
현암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이구 이 푼수...
"이거봐 승희, 너 몇살이야?"
"23살."
"나 몇살인지 알지?"
"응.. 30살."
"근데 여태까지 한번도 존대말 쓰는 걸 못봤어. 내가 대학 1학년때
네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 국민학교 6학년이었어! 6학년! 근데
뭐? 현암군?"
"근데... 그게 뭐?"
"아이고 맙소사..."
승희가 삐진듯, 안그래도 위로 쭉 찢어진 눈썹을 더 위로 치켜올리
며 말했다.
"흥! 그럼 영감탱이라고 불러 드릴깝쇼? 나참... 그깟 일곱살 차이
나는 것 가지고 되게 재네... 젊게 봐주는거 기분 나뻐?"
"아이고 관두자. 내가 잘못했다..."
티각태각하는 사이 어느새 차는 사교의 총단이 있다는 어느 한적한
교외의 야산굽이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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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와 준후는 막 **대학 캠퍼스를 나서고 있었다. 날씨가 몹시
더웠고 둘의 몸에는 땀이 흘르고 있었다. 박신부는 준후를 근처의
조용한 제과점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팥빙수 두개를 주문했다. 한참
말없이 빙수만 먹다가 문득 준후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그 여자가 맞나요? 사진으로 보니 전혀 이상한 기운이 없는
것 같던데요..."
"아니, 틀림 없어. 그 김윤영이라는 여자가 틀림 없다구. 경찰 수
사 기록에 나온 얼굴과 똑 같아..."
"신부님, 또 그 장박사님을 통해서 알아내셨군요?"
"음... 많이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이 학교 출신 이었다는 것과 사
진 정도는 미리 봐 두었지. 어떠냐? 준후?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
니? 사진이나... 아니면 다른 데에서라도.."
"아뇨. 그냥 예쁜 누나던데..."
"그렇다면 그 여자는 분명 독일 유학 때에 뭔가... 사악한 것과 접
하게 되었을거야...."
"맞아요. 졸업후 그 여자, 독일로 유학갔다고 했죠? 그게 3년전.."
"음... 공부를 마치고 학위를 땄을 시간은 아니지. 출입국 관리소
에서 확인 한 건데, 그 여자가 다시 귀국한 건 작년의 일이야. 그러
니 2년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긴걸로 볼 수 밖에 없어... 준후야?"
"예?"
"네가 주술을 수련한 게 몇 년이었지?"
"헤헤헤... 저야 뭐 날 때부터 해 왔죠... 그러니 나이하고 같죠."
"그러면 주술 수법중에 2년 내로 수련할 수 있을 만한게 있니?"
"글쎄요... 아이고... 정파의 술수는 천부적 자질을 타고 났어도
그렇게 쉽게는 안돼요. 불도나 도가의 주술은 쉬운 것도 한 5년 이
상은 걸릴거에요. 음... 무속에 의한 건 천부적 자질이 있으면 당장
에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 두 사제는 주술력으로 많은 사
람의 눈앞에 뱀의 환영을 보일 수 있다고 하며, 또 여러가지 이
적...그러니까 손에서 불을 낸다든가 몸에서 광채를 낸다고 하던
데...?"
준후는 깜짝 놀라는 듯 했다.
"어이쿠! 만약 속임수가 아니라면 그 정도는 대단한 거에요. 신부
님, 제가 어떤 수련을 받았는지 아시죠?"
박신부는 이미 5년전... 준후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해 보았다.
"음... 너야... 태어날 때부터 모든 주술의례를 받고, 7명의 주술
사가 주술력을 심어주고... 또 천부적인 자질에다가..."
"그랬는데도 제가 인제 겨우 몸에서 초일월광(3부 참조)을 낼 수
있을 정도에요... 손에서 불을 내는것도 3년 전 까진 안됐구요.."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러면 역시 사술(邪術)에 의한 것 밖에 없겠지?"
"예. 서양의 것들은 잘 모르지만... 강한 마력을 지닌 물건을 이용
하거나, 강한 영을 빙의시키면 가능할 수도 있죠. 그러나 그런 방법
을 자꾸 이용하면 점점 자신의 영혼을 잠식당하게 되어서 결국은 꼭
두각시처럼 되어버릴 위험이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자유자재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아니, 또 방법이 있기는 하죠..."
"뭐지?"
"천지간에는 정(正)이 있는 반면에 사(邪)도 있고 마(魔)도 있는
법이죠. 그러한 사악한 정기, 아니 사악한 영에서 힘을 얻을 수도
있어요... 근데..."
"근데 뭐지?"
준후의 눈이 커졌다.
"영계는 인과율(因果律)이 지배하는 세계... 뭔가를 얻으면 뭔가를
주어야 해요... 강한 힘을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걸 바쳐야 하
죠... 그러니... 인간의 영혼이나... 생명을 바쳐야..."
"음...역시... 준후야, 그 사교의 교리서에 있던 내용 기억나니?"
"예? 어떤거요?"
"음... 육신으로 지은 죄는 육신을 바치고, 마음으로 지은 죄는 영
혼을 바쳐서 속죄하라는...."
"아? 예... 음... 역시..."
"그래... 틀림없어... 신자들에게 그러한 논리를 심어놓고 신자들
의 몸과 영을 갉아먹는 댓가로 흑암의 권세를 얻으려 하는게 틀림없
어... 그들이 바라는게 뭘까?"
준후가 스푼을 입에 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신부는 문득 또
자신이 준후가 이제 겨우 13살 밖에 안된 아이였다는 걸 잊고 있었
다는 걸 깨달았다.
"음... 몰라요... "
"아, 그래그래. 미안하다... 음... 아뭏든 그들은 일반 사이비 종
교와는 다른 자들인게 틀림 없어... 단지 사리사욕을 위하는게 아
닌... 그들이 노리는게 뭘까...?"
박신부가 정신을 차리고보니 이미 준후가 박신부의 빙수까지 다 먹
어치운 후였다.
"헤헤헤.. 다 녹아버릴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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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냈어. 호호호... 어렵지도 않던데 뭐."
"음 벌써?"
승희가 희색이 만면해서 교단의 접견실에서 나오는 것을 현암이 서
둘러 차에 태웠다. 승희가 쪽지를 내밀었다.
"그 대사제라는 남자의 주소는 여기래."
"흠... 상당히 외딴 동네인것 같은데..? 근데 그렇게 쉽게 알려주
던가? 난 그냥 쫓겨났는데?"
"호호호... 개인적인 친분이 좀 있는 사람이라 그랬거든. 그랬더니
다 알겠다는 듯, 가르쳐 주던데? 아마 그 대 사제라는 남자, 사생활
이 좀 그렇고 그랬던 듯...호호호"
현암은 웬지 좀 찝찝했다.
"음... 하여간 잘했어. 이렇게 쉽게 주소까지 알아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흠... 뭐 또 딴소리 한 거 아냐?"
"딴소리는 뭘... 그냥 사제님한테 부름 받았는데 주소를 잊어버렸
다고 했을 뿐이야.."
"음? 부름 받는다구?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눈치지 뭐... 딱 들어가니까 사무실에 앉아있던 대머리가 그런 생
각을 하던데 뭐. 호호호"
"어떤 생각?"
"음.. 그러니까... 에잉. 그런거 왜 자꾸 알려구하고 그래? 그런가
부다 하지."
"흠.. 근데 어떻게 그 사람의 생각을 알았냐구?"
"음? 글쎄... 어?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현암은 멍해있는 승희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혹시 독심술이 아닐
까? 승희는 원래 초능력이 발달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또 애염명왕
을 봉인하고 있는 몸이니... 혹시 능력이 슬슬 나타나고 있는거 아
닐까?
현암은 시험을 해 보기로 했다.
"승희야, 내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승희가 그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현암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 보
더니 외쳤다.
"음?... 음... 아! 애인 생각하는구나! 맞지? 맞지?"
현암은 어이가 없었다. 무슨 세상에, 있지도 않은 애인이냐? 현암
은 얼마전 깨닫기 시작한 파사신검의 검식 하나를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이구.. 내가 바보다...빨리 가자!"
현암의 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했다.
3. 잠입(潛入)-2.
그 소위 대 사제라는 남자의 집은 정말로 한적한, 인가가 있는 곳
에서도 30분이상 산굽이로 돌아가는 곳에 있었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워 졌고, 사방에는 벌레 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도록 괴괴했
고 눈 앞에 막 떠오르는 달을 배경으로 3층 짜리 큰 건물이 마치 공
룡인양 육중하게 서있었다.
"기분나뻐... 인제 오기는 왔는데, 어쩔려고 그래?"
"음...들어가야지."
"들어가? 그냥?"
"음...숨어 들어가는 게 제일 좋을 거같아."
"음? 숨어 들어간다구? 왜?"
"그럼 벨 누르고 들어갈까? 그래서 뭐라고 하지? 어차피 그런 식으
로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해. 나에게 맡겨 둬."
"흠... 그래도 도둑처럼 담 넘어들어가는건 영..."
"승희 너는 여기서 기다려. 운전 할 줄 알지?"
"음..."
"그러니 여기서 기다리다가 내가 나오면 재빨리 떠날 수 있도록 준
비해 두라구. 아니, 안이 소란스러워지면 그냥 가. 내걱정은 말고."
"진짜 담 넘어서 숨어 들어갈 거야?"
"그렇대두. 뭔가 알아내려면 그게 제일 빨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지."
"가택 침입죄로 걸리는거 아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저들이 정말 사악한 주술을 사용하고 있
는지 확인만 하고 돌아 올 거니까 염려 마. 만약 안심이 안되면 신
부님께 카폰으로 전화하던지..."
현암은 승희를 차에 남겨두고 대 사제라는 자의 집 쪽으로 갔다.
담이 꽤 높았고 담 위에는 가시철망까지 둘러 쳐져 있었다. 역시 뭔
가 수상했다. 인가도 없는 이런 곳에 이렇게까지 높은 담을 지닌 집
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현암은 기공을 모아 몸을 훌쩍 날려서 담장
위에 손을 잡고 일단 담 위로 올라갔다. 아마도 다른 무엇인가가 또
있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래쪽에 시커먼
그림자들이 몇 개 오가고 있었다. 개였다. 그것도 도베르만...
'이거 아차하다간 꽤 시끄러워 지겠구먼!'
현암은 눈을 돌려 마당 한쪽에서 자라고 있는 큰 나무가지를 바라
보았다. 담장에서의 거리가 한 3m 쯤... 그리로 건너뛰어서 가지를
잡고 나무 위로 올라가면 이층의 작은 창문가를 붙들고 창문으로 들
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으라챠!'
현암은 담장위를 달려서 나뭇가지로 몸을 날려서 가지를 잡고는 탄
력을 이용하여 그대로 창문가에 매달렸다. 빨리 들어가지 않으면 개
들이 짖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현암은 오른 팔을 뻗어 창문을
열려 했으나 창문은 잠겨 있었다.
'제기랄... 일이 어째 너무 잘 풀린다 했더니만..'
현암은 기공술 중 흡(吸)자 결을 외워며 오른손바닥을 유리창에 댔
다. 유리가 손에 바싹 붙은 것이 느껴지자 현암이 손을 당기자 나직
한 '퍽' 소리와 함께 유리가 떨어져서 그대로 현암의 손에 매달렸
다. 현암은 몸을 공중에서 돌려 창문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은 조용
했다. 현암이 들어선 방안은 무슨 서재인양, 벽에 갖가지 책들이 빽
빽이 꽂혀 있었고 벽에 큼직한 문양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모나스 히에로글리피카.... 우주의 지혜를 모은다는 부적인데?'
현암은 잠시 방안을 둘러 보았다. 그 외에 이상한 것은 없었다. 단
지.. 음? 책상위에 서류 몇가지가 있었고 해골의 모형이 서류를 누
르고 있었다. 현암은 그 내용이 궁금하여 해골을 치우려는데 그 촉
감이 이상했다.
'이크! 이거 진짜 해골아냐! 으...'
현암은 해골을 카페트가 깔린 방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해골
의 눈구멍에서 붉은 빛이 나오는 듯 하더니 해골이 입을 들썩거렸
다.
"마..마스터(Master)! 마스터!"
"으! 이 요사한..."
현암은 오른손바닥에 기공을 돋구어 지껄이려는 해골을 냅다 갈겼
다. 퍽소리가 나면서 해골은 그대로 박살이 나버리고 잠잠해졌다.
누런 연기가 피어올라왔다.
'음... 이거 정말 사술을 쓰는 놈이 분명하군...원 세상에..'
현암은 조용히 방 밖을 나가서 복도를 거닐었으나 집안은 너무도
조용했다. 어둡고... 조용하고... 사람은 아무도 없는것 같았다. 현
암은 조용히 계단을 한걸음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월향을 차에 두고
와서인지 좀 허전했다. 월향은 여자의 비명소리같은 귀곡성을 내기
때문에 현암은 일부러 놓고 온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 일층의 거실
에서 현암은 책상위에 갈겨쓴 메모 하나를 주웠다.
- 길일을 택하기 위해 - 바빌론의 점복술 이용 -> 샘플 9개 소요-
윤영과 13일에 약속 -> 흑주술 전수 -
'음...바빌론의 점술? 샘플은 또 뭐라는 거야? 아뭏든 흑주술이
라..... 음, 그리고 윤영은 또 누구지? 아뭏든 단서가 될 것 같구
먼. 적어두자...'
얼핏 왼손바닥에 펜을 꺼내 적고 있는데 저쪽 맞은편에 있는 계단
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인듯...그런데 아주 희미
한 불빛이 거기서 비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리라. 현암은 다시금 조심스럽게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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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는 혼자 남게 되자 몹시 불안했다. 카폰으로 박신부에게 몇번
이나 전화를 하려고(이유도 없지만) 해 보았지만 계속 자동응답기가
받을 뿐이었다. 주위는 이제 칠흙같이 어두워졌고.. 그래도 차의 불
을 켤 수는 없었다. 혹시 저 별장같은 집에 있는 사람의 눈에 띌까
봐서였다. 현암이 들어간지도 벌써 30분이 넘게 지났다. 아니, 30분
밖에 안되었지만 승희에게는 한 3년쯤 된 것 같았다. 승희는 다시
한 번 전화를 시도해 보려고 하는데 집 안 쪽에서 난데없는 굉음이
들렸다.
- 드르르륵
"어머낫! 저건 초..총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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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은 비틀거리다가 다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섰다. 뒤돌아 서있던 남자가 뭔가를 꺼내는 순간 재빨리 몸을 날리
기는 했지만, 그 녀석이 권총도 아닌 기관단총을 가지고 있을 거라
고는 미처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오른쪽 아랫배와 왼쪽 가슴 부
위에 총을 맞은 것이 분명했다. 의식이 가물거리기 시작했고, 고통
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하하하핫! 바보같은놈! 넌 도망 못간다! 감히 금지된 의식 장소에
기웃거리다니!"
현암은 자꾸만 아득해져가는 정신을 붙잡으려 기공을 돋우려 했으
나 기가 잘 모이지 않았다. 울컥 하고 입에서 피가 몰려 나왔다.
'안돼....정신을 잃으면... 정신을... 그 사악한...의식을.. 막아
야...막아야....'
현암의 정신이 어지러워지면서 몸이 털썩 땅에 쓰러지는 것을 느꼈
다. 아직 안간힘을 다해서 정신을 잃지는 않고 있었지만 이미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흠... 아까부터 내 지켜보고 있었지. 지하실 계단에 TV카메라가
있었던 것 몰랐겠지? 하하핫..."
녀석의 손이 현암의 머리털을 움켜쥐고는 위로 치켜 들었다.
"오호라. 너 퇴마사인 현암이로구나. 꽤 공력이 세다던데, 총알은
아직 못막나보군. 흐흐흐.. 우리의 비밀을 훔쳐 보았으니 이제 안녕
이다. 멍청이.."
대사제라고 불리던 그 녀석이 현암의 머리를 쥔채로 주머니에서 철
컥 소리와 함께 칼을 빼들었다.
"안심해라. 단번에 따 줄테니까... 아프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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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는 미칠 것 같았다. 총소리가 들려오고는 이내 별장안은 정적
만이 감돌 뿐이었다. 현암이 달려 나와야 하는데...만약 현암이...
"안돼! 아아아!!!"
승희는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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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다! 승희가 힘을 보내는구나!'
현암의 단전에서부터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솟아 올랐다.
아직 고통은 그대로였으나, 기공이 몸에 다시 퍼져 나가기 시작했
다. 대사제의 칼이 현암의 목에 다가가는 순간, 현암은 눈을 번쩍
뜨며 오른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녀석의 손을 밀어젖히며 몸을 일으
켰다.
"아아악!"
기공이 잔뜩실린 현암의 주먹을 맞은 놈이 현암의 머리털을 움켜
쥔채 나가 떨어졌다. 놈의 칼은 날아가 버렸고, 오른손이 축 늘어진
것이 아마 부러진 것 같았다. 현암의 입에서 다시 선혈이 뿜어져 나
왔다. 순간적으로 무리해서인지, 상처가 더 쑤셔왔다. 놈을 잡아 족
치고 싶었지만 아까 지하실에서 본 ...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
다. 어서 박신부와 준후에게 알리는 것이 더 급했다. 현암은 몸을
날려 밖으로 뛰어 나갔다.
대 사제가 부러진 오른 손과 비틀거리며 뛰어나가는 현암을 보고는
이를 갈아 붙이면서 왼손에 쥐고 있던 현암의 머리카락을 던져 버리
고는 펜타그램을 꺼내 들었다.
"이이이... 망할 놈! 죽어랏! 땅의 정령 코볼트(*주 1)여!"
대사제가 비명같은 고함을 지르고 주문을 외자 정원의 흙이 불쑥거
리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암은 놀랐으나 걸음을 늪출수 없었
다.
'이런! 4대력(*주 2)을 쓰는구나! 어쩐다!'
땅이 뭉클거리며 마치 유사(流沙)처럼 소용돌이치며 흐르기 시작했
다. 아차 하는 사이 발이 땅으로 꺼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현암은
기합을 넣으면서 몸을 솟구쳐 올렸다. 마구 짖으며 달려오던 도베르
만들이 죄없이 휘말려서 마치 짓눌린 벌레 마냥 터져 죽어가기 시작
했다. 현암은 담장에 왼 손으로 매달렸다. 오른손으로는 계속 총상
을 입은 아랫배를 움켜쥔 채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기공
은 아직 몸에 도는데도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으... 허리를... 움직일 수가 없다... 넘을 수가 없어!'
대사제가 다시 악쓰는 소리가 들렸다.
"도망치려고! 그렇겐 안된다! 아리엘! 아리엘이여!"
미친듯한 바람이 어디서부터인지 몰아쳐 왔다. 폭풍처럼 몰아쳐오
는 바람이 마치 망치인양 담에 매달린 현암의 몸을 강타했고, 현암
은 그냥 몸으로 고스란히 그 힘을 받는 수 밖에 없었다. 순간, 현암
의 머리에 한가지 생각이 떠 올랐다. 현암은 오른손에 최후의 힘을
모아 벽을 후려갈겼다. 벽이 부서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무서운
바람의 일격이 몸에 가해져 왔다. 담벼락이 산산히 부서져 나가면서
현암의 몸도 허공을 날아갔다.
대사제가 이를 갈았다.
"이... 약은놈! 바람에 대항하지 않고 되려 이용하다니..!"
바깥에서 여자의 비명소리 같은 것이 들리더니 잠시 후 차 소리가
요란히 났다. 차 문 여닫는 소리, 그리고 다시 차소리가 멀어져 갔
다.
"한 패가 밖에 있었구나... 질긴놈..."
생각같아서는 당장 따라가서 박살을 내고 싶었지만 어차피 중상이
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도 치료 해야했고... 대사제는 아까 던
져버린 현암의 머리칼 뭉치를 다시 주워 들었다. 또 손에는 아직 현
암의 피도 묻어 있었다. 사제의 눈에 야릇한 미소가 소름끼치게 흘
렀다.
"이것만 있으면... 너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
승희는 미친듯이 차를 몰면서, 한손으로는 카폰의 키를 누르기 바
빴다. 자꾸 번호를 잘못 눌러 엉뚱한 데가 나왔다.
"현암씨...아니 현암 오빠! 제발 죽지마! 이런 젠장!"
승희가 빽 소리를 질렀다. 또 잘못 눌렀나보다.
"죽으면 안돼! 약속해! 죽지마! 죽지 말라구!"
"으음..."
이제 만신창이가 된 현암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승희
가 차를 모느라 기공이 다 빠져서, 이젠 현암에게는 말 할 기운조차
도 없었다.
"의...의식... 놈...놈들의..."
"말하지마! 말하지 말고 정신을 차려!"
승희가 아슬아슬하게 맞은 편에서 오는 트럭과 스쳐 지나가며 외쳤
다. 그 눈에 눈물이 마구 흘러 내리고 있었다.
"막...막아야... 의...의식... 저주... 저주받은..."
"말하지마! 바보야! 살아난 다음에 말해도 그만아냥!"
승희가 악을 쓰며 계속 차를 몰아댔다. 현암의 입에서 가쁜 숨이
흘러 나오며 더 이상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주 1) 코볼트(Kobold, Kobolt) : 서양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땅의
정령.
*주 2) 4대력 : 서양 신비주의에서 나오는, 만물을 구성한다고
하는 지,수,화,공의 4가지 요소(element)의 힘.
지 - 코볼트, 수 - 운디네, 화 - 살라만더, 공 -
아리엘 이 각각의 정령들임.
4. 흑마술(黑魔術).
박신부와 준후, 그리고 아직도 울먹이는 승희는 응급실 바깥을 서
성이며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술도 아닌 기관총에 당하
다니... 놈들이 불법으로 되어있는 총기까지 태연하게 사용하는 것
을 보면 역시 보통의 사이비 종교집단은 아니었다. 그러나저러나 일
단 급한대로 병원으로 달려 오기는 했지만, 총상을 입은 환자를 뭐
라고 변명을 해서 둘러대야 하는지 박신부는 막막했다. 괜히 사실대
로 이야기 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거나 만에 하나 경찰이 사
실을 믿어준다고 하더라도 놈들은 잠적해 버리기가 쉬웠다...그러면
그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알아 내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현암군이 뭐라고 말한건 없었나?"
승희가 아직도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아뇨..."
"흠...이상하군. 놈들이 현암군에게 총질까지 해 댄걸 보면, 뭔가
현암군이 중요한 것을 알아낸것이 분명한데... 그리고 승희양, 그
집에서 일어나는 싸움도 목격했나?"
"흑... 보지는 못했어요. 다만 벽이 무너지며 현암오빠가 날려서
땅에 쳐박히고는... 엄청난 바람이.."
"바람? 혹시 4대력을 이용한 건 아닐까?"
준후가 (아직 걱정의 기색을 버리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호기심이
생기는지 끼어 들었다.
"4대력이요?"
"음... 서양쪽의 신비주의에서는 만물이 4가지의 원소로 이루어졌
다고 하지. 지,수,화,공의 4가지 인데, 그 정령들을 소환(Summon)하
는 비술이라는 것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주로 흑마
술(*주 1)의 계열에서 전수되어...."
승희가 듣기 싫다는 듯 외쳤다.
"그런게 무슨 문제에요? 현암오빠, 죽지는 않겠죠? 예?"
준후가 어른 스럽게 승희를 달랬다.
"염려 말아요, 누나. 워낙 건강한 사람이고 공력도 높고... 거기에
치명적인 급소는 다치지 않았다니까 괜찮을거에요..."
승희가 조금 웃는 얼굴을 보이며 준후를 쳐다 보았다. 준후도 억지
로 얼굴을 펴는듯 했다.
"흠..그래... 넌 어린데도 참 어른스럽구나... 내가 너무 방정맞
지? 나이값도 못하고..."
"음..아뇨 뭐. 누나야 워낙 착한 분이라는 거 알아요. 마음이 착하
고 스스럼없으니까 그런거죠 뭐..."
"고마워...."
셋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현암의 안위를 빌고 있는데 갑자기
응급실안에서 현암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아아아악----!!!"
"음? 아니 현암군이!!"
준후가 사방을 살피면서 외쳤다.
"이건! 이건! 사악한 기운이!!! 이게 뭐죠? 신부님?"
박신부와 준후는 냅다 응급실로 뛰어 들었다. 현암의 비명소리는
계속 울려퍼지고 있었고, 다른 환자들이며 그 가족들이 놀란듯이 웅
성대고 있었다. 막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뛰어가는데 현암을 간호하
고 있던 간호원 한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 나가려 했다. 박신부
와 준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것 같았으나 그 간호원을 붙들고
외쳤다.
"무슨 일이요! 저 환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지?"
"저...저 사람의 팔... 갑자기 상처가 터져나오면서.. 몸 여기저기
에서... 없던... 없던 상처들이...."
박신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준후는 몸을 날려 현암이 누워있는,
흰 커튼을 쳐 놓은 곳으로 이미 뛰어들고 있었다. 준후의 놀라는 외
침소리가 들렸다.
"으아! 신부님! 이! 이런!!"
박신부가 달려가서 커튼을 와락 열어 젖히다가 놀라움에 사로잡혀
그자리에 우뚝 멈추어섰다.
현암은 이를 악물고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이미 의식은 없
는 상태 인것 같았으나 오랜 훈련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취해진 방어
자세이리라. 그런데 그의 몸은 무언가에 의해 뚫린듯한 구멍이 대여
섯개나 나 있었고 거기서 선혈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현암
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오른쪽 어깨에 펑하고 구멍이 뚫렸고 피가 튀어갔다. 의사 한 명이
겁에 질린듯 벽에 기대어 있다가 선혈을 뒤집어 썼고 다른 한명의
의사는 필사적으로 현암의 상처를 붕대로 감싸려 하다가 현암의 몸
에 넘치는 반탄력에 뒤로 자빠져가고 있었다.
준후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신부님! 저게! 저게 어쩐 일이에요! 무슨 사술이기에 기공으로 몸
을 굳힌 현암형을 저리 쉽게...!"
박신부의 눈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흑마술!! 틀림없다! 흑마술의 수법이다!"
박신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의사들의 멱살을 잡고 밀어냈다.
"빨리! 빨리 여기서 나가요! 모두!"
준후는 박신부를 놀란 눈으로 지켜 보았다. 만약 저것도 주술의 일
종이라면... 주술의 방어막을 쳐야 하는데 그러다가는 그 와중에 응
급실의 많은 환자며 의료인들이 다치게 될지 모른다. 준후는 머리를
굴려서 모든 사람을 단번에 쫓아내게 할 방법을 찾았다. 아무영이나
호출해서 눈에 보이게 현신 시키면 될 듯 했다.
준후가 급히 나찰천의 주를 외우자 준후의 뒤쪽에서부터 무시무시
한 형체를 지닌 나찰의 허상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박신부도 준후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괴물이다! 귀신이다!"
삽시간에 응급실 안은 아수라장을 이루면서 환자며 그 가족, 의사
를 가릴것 없이 문을 통해 빠져 나가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이루었
다. 그들의 등 뒤에는 준후가 만들어낸 허상이 포효하고 있었고...
현암의 몸에 생기는 상처들이 점차 몸의 중심으로 옮겨지고 있었
다. 박신부는 대강 주위의 사람들이 없어지자 현암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력을 모아갔다. 녹색의 오오라가 현암에게 집중되어
가자 효과가 있는 듯, 현암의 왼쪽 가슴 언저리가 뭔가에 눌리는 것
처럼 움푹 들어가더니 다시 튀어 나왔다. 박신부가 한숨을 쉬었다.
한 번의 공격은 막아냈지만 너무 체력소모가 심했다.
"준후야! 결계를! 가장 강한 결계를 쳐!"
준후가 불러낸 나찰의 모습을 지우며 부적을 꺼내 허공에 날리며
손가락을 깨물었다.
"암흑의 힘을 막아주소서! 오대존 명왕진!"
준후가 외치면서 입에서 선혈을 뿜어 부적에 적시자 금강야차부(金
剛夜叉符)가 북방으로, 강삼세부(降三世符)가 동쪽으로 날고, 다시
준후가 기합을 넣자 대위덕부(大威德符)가 서쪽, 군다리부(軍茶利
符)가 남쪽으로 날았다. 준후가 수인(手印)을 맺고 기합을 발하자
부동명왕부(不動明王符)가 현암의 머리위에 우뚝 서더니 빛을 뿜어
댔다. 찬란한 빛이 네개의 부적에 번져가자 다시 부적들이 찬란한
금색의 빛을 발하면서 중앙의 부동명왕부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회전
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속도가 빨라지며 불바퀴 같은 형상이 되어 현
암의 주위를 계속 돌아갔다. 전에 현암이 건성으로 펼친 진과는 전
혀 딴판의 위력이었다. 준후는 주술을 마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준후의 옷이 삽시간에 땀에 젖어가는 것으로 보아, 엄청나
게 힘을 가한 진인듯 했다.
"승희! 승희야! 준후에게 힘을!!"
박신부가 외치자 정신 나간듯 서있던 승희가 달려와서는 준후의 옆
에 좌정하고 앉았다. 승희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리면서 현암에게서
배운 도가의 토납술을 행해가자 새파랗게 질려있던 준후의 안색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유파가 다른 힘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지로 버티고 있던 박신부가
진이 완전히 펼쳐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역시 땀을 흠뻑 흘리며 진
속에서 걸어 나왔다. 다행히 준후가 부른 신의 힘들도 정순한 것이
어서 박신부의 오오라막을 별로 침범하지 않고 있었다. 박신부가 한
숨을 쉬면서 준후 옆에 정좌하여 무릎을 꿇고는 십자가를 꺼내들고
앉았다. 준후가 주술을 운용하며 틈을 내어 박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님! 흑주술이라니? 어떤 거지요?"
"지극히 사악한 것이다... 아마 인형을 이용한 수법이었을거야. 목
표로 삼은 사람의 몸의 일부를 담아 사악한 의례로 인형을 만들어낸
뒤, 그 인형에게 위해를 가하면 그 원래의 사람이 인형과 같은 곳에
상처를 입게 되지...."
"원 세상에... 옛날 우리나라의 제웅(*주 2)을 쓰는거나 일본에서
초상화를 그려놓고 못을 박는것과 비슷한 거군요.."
"그것보다 훨씬 효과가 빠르지... 거기다가 주술력이 강한 자들이
사용하는거니... 아까 현암군의 몸에 기공을 돌리는데도 구멍이 막
뚫리지 않던?"
"그러면 놈들이 현암형의 인형에 못같은 걸 찌른 건가요?"
"그럴테지... 그리고 지금은 아마 우리의 방어 때문에 못이 들어가
지 않을 거야..."
갑자기 현암의 입에서 신음성같은 것이 다시 새어 나오기 시작했
다. 현암이 앉아있는 침대의 시트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면서 저절로
불이 붙어가기 시작했다.
"음? 신부님!!"
"이런! 놈들이 현암의 인형을 불에 태우려 하나보다! 준후야!"
준후가 다시 승희의 힘을 가득 모아서 삼매신수의 수를 펼쳤다. 검
은 연기같은 구름들이 뭉쳐나가 현암의 주위에 덮이자 흰 물안개같
은 것이 사방을 적시면서 불을 꺼나갔다. 수증기가 자욱한 속에서
준후가 헐떡거렸고, 승희도 무아지경속에서도 무리한 힘이 나간듯,
얼굴빛이 변해 있었다.
"헉헉헉..! 아이구, 더 이상 수를 쓰면 아무리 승희누나의 힘을 빌
리더라도 무리에요! 어쩌죠? 신부님?"
박신부가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금빛이 번쩍이는 부적을 꺼내들었
다.
"음... 아마도 놈들은 이 근방에 있을거야.. 주술로 해를 입히지
못하면 아마 직접 찾아 오겠지...."
"아이고! 현암형이 알아낸 비밀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 질기게 굴
지?"
"알 수 없지... 아뭏든 비밀보다도, 일단 현암을 지켜야만 해! 준
후야, 힘을 비축해 두어라!"
"예.. 신부님..음? 밖에 무언가가 다가와요!"
준후가 외쳤다. 박신부도 영사를 행했다. 역시 무언가 사악한...검
은 기운들이 병원 주변을 에워싸고 다가오는 듯 했다...
"준후야! 놈들이다!"
"수가 많아요! 둘은 엄청 세고...! 나머지들도 무언가 이상한 기운
이...!"
밖에서 놈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터무니 없게도 놈들은 자기
들이 섬기는 사령(蛇靈)의 힘으로 응급실에 나타난 귀신들을 처단하
겠다고 둘러대는 것 같았다. 약빠른 놈들이었다. 박신부는 혀를 차
며 승희의 어깨를 툭치면서 말했다.
"승희야! 뒤로 물러서서 현암군을 보살펴! 그리고 준후를 도와!"
승희의 눈은 겁에 질려 있었으나, 표정은 뭔가 각오한 듯 심각했
다.
"예...? 예....!"
준후가 품에서 금줄을 꺼내어 주위에 확 펼치자 금줄은 꼿꼿이 가
로로 뻗어서 마치 난간처럼 둘의 앞을 막았다.
"이게 어느정도 우릴 보호 해 줄 거에요. 주술을 흡수해 버리는 줄
이니..."
박신부도 기도문을 읊으며 NJRJ의 부적을 앞에 놓고 십자가를 양손
으로 쥐었다. 십자가에서 파아란 성령의 불이 솟으며 부적이 공중으
로 떠 올라 박신부의 앞을 지키듯 허공에 머물렀다.
승희가 뒤로 들어가 현암을 부축하고는 대강 지혈을 시키기 시작했
다. 밖에서는 놈들이 주문인지 무슨 찬가인지 하는 걸 부르면서 접
근해 오고 있었고... 준후와 박신부는 바짝 긴장했다. 그때 승희의
외침이 들려왔다.
"잠깐요! 여기! 현암 오빠의 손에 뭔가가 써 있어요..!"
돌연 밖에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리자 응급실의 창문이며 문들
이 한꺼번에 와장창 부서져 나가며 엄청난 바람의 소용돌이가 밀어
닥쳤다....
*주 1) 흑마술 : 서양의 신비주의에서는 마술을 크게 주가지로
분류하는데, 그것이 백마술과 흑마술이다.
백마술은 주로 연금술이나 의학같은 선한쪽의
마술을 뜻하며, 이에 반해 흑마술은 사악한 수단
을 이용하여 여러가지의 초자연적인 힘을 얻는것
을 목적으로 한다.
*주 2) 제웅 :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것. 원래는 액을 막기 위
하여 대용물의 요도로 만들어진 도구이나 저주를 내
리는 용도로 악용되기도 했음.
(** 으음.. 쓰다보니 이번 편은 완전 무협지가 되어버리는 듯... 하
지만 할 수 없죠... 내용이 그렇게 되는걸 전들 어쩌겠읍니까? 하하
하.. 6부의 주제도 벌써 잡혔는데 아마도 6부는 음산하게 진행될 것을
보장합니다...**)
5. 주술 전쟁.
"준후야! 조심해랏!"
"야앗!"
엄청나게 밀려들어오던 바람이 박신부가 띄워 놓은 부적을 밀어내지
못하고 두줄기로 갈라져 옆으로 비켜가면서 근처에 있던 시트며 탁자
들을 뒤엎어갔다. 준후는 갈라진 한줄기의 바람속으로 줄이 달린 작은
호로병 같은 것을 집어던지더니 다시 끌어서 마개를 막았다. 박신부는
궁금했지만 묻고 뭐하고 할 시간이 없었다. 뒤에 있던 승희는 놀라서
입을 다물고는 현암의 손바닥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글씨들을 읽으려
애를 썼다...
"역시 소문대로 제법 하는 놈들이군 그래..."
대사제가 다른 한사람의 사제복을 입은 남자와 함께 걸어들어왔다.
대사제의 한쪽 손에는 펜타그램이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밀랍으
로 만든 인형이 들려 있었다. 그 인형에는 머리카락이 붙어있었고 군
데군데 피가 묻어서 마치 붉은 칠이 벗겨진 듯이 보였다. 박신부가 인
형을 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이 고약한 것들! 더러운 사술로 사람을 해치려 하다니! 그 인형은
현암군을 해치려 만든거지?"
대사제는 하늘로 고개를 젖히며 웃어젖혔다.
"하하하하하...."
이번엔 준후가 고함을 쳤다.
"더러운 녀석들! 외국에까지 나가서 그런 못된 것들만 배워오다니!
내손에 혼나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 흑마술인지 뭔지 집어치워! 안그
러면...!"
준후가 앉은채로 대사제를 매섭게 째려보면서 한손을 쳐들었다. 뇌신
인드라의 번개가 작은 손끝에서 이글거렸다.
"사람에게 주술은 쓰지 않으려 했지만, 너희는 사람이 아니니 상관없
겠지!"
대사제의 옆에 있던 남자가 화가 난듯, 이빨을 드러내며 준후에게 다
가갔다. 준후가 (마음을 독하게 먹느라) 눈을 딱감고는 번개를 발했
다. 번개는 남자의 발 앞에 떨어져서 바닥을 파면서 불똥을 뿌렸다.
"흐흐흐... 꼬마가 제법하는구나... 너도 우리의 브리트라님께 몸을
바쳐라...."
"어디서 개짖는 소리가 들리냐? 너희 브리트라를 이기신 인드라님의
가호(*주 1)가 있다. 더 가까이 오면 정말 개 불고기로 만들어주마!"
준후가 독설을 쏘아대자 남자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너 이놈... 어리다고 봐주려 했더니만... 당해 봐라!"
남자가 입을 쩍 벌리더니 뭔가 허옇고 끈적거리는 것 같은 덩어리가
밀려 나왔다. 그 덩어리는 꿈틀거리면서 허공에 떠올라 아메바처럼 움
직이기 시작했고 남자는 그자리에 주저앉은채 움직이지 않았다.
"엑토 프라즘!(*주 2) 준후야 조심해라!"
박신부가 그 쪽으로 가려는데 음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사제였
다.
"영감! 영감은 따로 임자가 있어....!"
대사제가 펜타그램을 휘저으며 살라만더(Salamander)(*주 3)의 이름
을 부르자 한가닥의 붉은 불길이 뿜어져 나왔고 박신부가 기도문의 소
리를 높이자 부적이 떠오르며 불길을 도로 튕겨냈다.
준후가 손을 올리자 금줄이 솟아올라서 날아오는 엑토프라즘을 튕겨
냈다. 그러나 엑토프라즘 덩어리는 금줄에 의해 둘로 갈라지더니 두
덩어리가 되어 다시 준후에게 달려 들었다. 준후는 어이쿠하며 바닥을
듸굴어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엑토프라즘이 닿은 바닥이 흰 연기를
내며 녹아내려갔다. 준후가 입술을 깨물며 반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다 태워주맛! 멸겁화!"
준후의 손에서 불길이 솟아 올라 한덩이의 엑토프라즘에 명중했으나
엑토프라즘 덩어리는 잠시 주춤 하는 듯 하더니 다시 날아들어왔다.
박신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사제가 살라만더의 불을 계속 쏘
아내면서 운디네의 안개기운을 모아 박신부의 옆을 쳤기 때문이었다.
박신부는 오오라로 공격을 힘겹게 막아냈지만 역시 타격을 받은 것이
었다. 대사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대력을 모아 날카로운 막대같은
기운을 형성하여 사방에서 정신 없이 박신부의 오오라막을 가격해 갔
다. 박신부의 기도력은 대단히 강했지만 사방에서 어지럽게 사대력을
운용하며 공격하는 대사제의 교란 전술에 조금씩 밀려가고 있었다.
준후가 부적을 꺼내어 허공에 뿌리고는 왼쪽 손가락으로 날카롭게 한
덩이의 엑토플라즘 덩어리를 가리키고 다른 한손을 가슴에 수직으로
세웠다. 부적들이 마치 나르는 새떼처럼 쏘아져 나가 엑토플라즘 덩어
리에 와르르 달라붙었다. 준후가 오른손의 인장을 고쳐 왼손과 교차시
키며 외쳤다.
"멸(滅)!"
순간적으로 부적들이 붉은 빛으로 달아오르다가 갑자기 굉장한 소리
를 내며 폭발했다. 사방으로 엑토플라즘의 조각들이 튀어 날자 다른
하나의 엑토플라즘 덩어리가 쏘아져 날아왔다.
"어이쿠!"
준후가 다시 양손에 급한대로 멸겁화의 기운을 끌어올려 밀고 들어오
는 엑토플라즘의 덩어리를 막았으나 덩어리는 불길을 맞으면서도 계속
밀고 들어왔다. 준후의 발이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승희는 준후가 준 부적을 만지작거리며 (**정정 : 그 부적 덕분에 승
희가 결계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손에 땀을 쥐고 넷의 대결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이건 거의 전쟁이었다. 불, 물, 바람, 번개, 영체 등등
온갖 힘들이 끌려 나와 꽤 넓은 응급실의 내부를 수라장으로 만들며
격돌하고 있었다. 그러나 준후와 박신부쪽이 조금씩 불리해져 가는 듯
이 보였다. 박신부는 사방에서 마구 밀어닥치는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준후가 상대하는 엑토플라즘 덩어리는 하나였지만 역
시 어린아이인 준후의 힘이 딸렸다. 승희가 뭔가를 생각해 내고 소리
를 질렀다. 둘이 고전하는것은 상대하는 적과의 부조화 같았기 때문이
었다.
"둘이서 상대를 바꿔요! 바꿔서 싸우면..!"
그러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준후는 이를 악물고 불기운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엑토플라즘의 덩어리는 아까 흩어져 버린 잔해들까지 조금
씩 흡수해가면서 준후를 결계가 있는 언저리까지 몰아 붙이고 있었
고... 박신부는 오오라를 끌어올려 방어하기에 바쁜데다가 역시 조금
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싸움을 잠시나마 말려야 했다...
승희의 눈에 땅에 떨어져 있는 월향검이 들어왔다. 평상시에는 귀신
붙은 칼이라고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승희는 월향을 집어들고는
눈을 감고 월향에 힘을 집중시켜갔다...
"꺄아아아아아----"
방안을 진동시키는 귀곡성을 내며 월향이 쏘아져 나갔다. 승희의 증
폭력을 받아 힘을 얻은 것이다. 쏘아져 나간 월향은 막바로 엑토플라
즘 덩어리를 꿰 뚫고는 호선을 그리며 대사제에게로 쏘아져갔다..
"읔!"
뜻밖의 기습에 당황한 대사제는 펜타그램을 들어 월향을 막았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불똥이 사방에 튀며 대사제가 뒤로 몇발자국을 물러
났고 월향도 뒤로 흔들리며 튕겨져 나갔다. 몸통을 꿰뚫린 엑토플라즘
도 잠시 주춤거렸고...
"준후야! 위치를 바꾸자! 저런 괴물은 내 전문이다!"
박신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뛰어들었고 준후가 일갈하면서 멸겁화
의 불길에 힘을 주어 엑토플라즘을 멀찍이 밀어내고는 박신부와 교차
하며 몸을 굴렸다. 박신부가 손에 든 은십자가에 푸른 성령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고 엑토플라즘 덩어리는 기이한 소리를 발하며 주춤거
리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박신부는 성큼성큼 그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
했다.
"이봐! 어디 4대력인지 뭔지 한 번 부려보시지!"
준후가 오행(*주 3)의 부적을 꺼내어 손에 들고 불길을 발하자 부적
들은 현란한 빛을 발하며 타들어갔다. 준비가 된 것이다. 대사제는 너
무나 당돌하게 덤벼드는 꼬마를 가소로운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하하핫! 저 늙은 할아범도 내 상대가 안되는데... 너 가서 좀 더 큰
후에 오렴?"
"너같이 수입귀신이나 부리는 놈에겐 나 하나면 족하다! 어디, 그 사
대력이라는 것의 위력좀 볼까? 내가 도가 오행술을 보여주마!"
"닥쳐랏! 어린놈이 배운 것도 없냐? 입만 까져서는!"
"그래! 난 배운거 없다. 학교도 못다녀봤고! 그래서 많이 배웠다는
너같은 놈은 그렇게 잘났냐? 어디서 잡귀들이나 줏어가지고 다니다
니...."
대사제가 이를 갈면서 펜타그램을 고쳐 쥐었다. 준후도 말은 일단 막
했지만, 아까 그 엄청난 파괴력을 본 이후라 긴장하며 인장을 고쳐 맺
었다. 이제 결계까지 운용할 여유가 없었다. 준후는 오대존 명왕의 결
계를 해소시키며 그 힘을 암암리에 다시 전신에 퍼져있는 오행의 기운
에 돌렸다.
박신부가 오오라를 발하여 엑토플라즘 덩어리를 허공에 묶었다. 그
위에는 NJRJ의 부적이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임자를 만난듯, 아까 그
렇게 위세당당하게 날뛰던 엑토플라즘이 거의 꼼짝도 못하고 고통스러
운 듯 꿈틀대고 있었다. 박신부는 성령의 불이 이글거리는 십자가로
엑토플라즘을 찍어눌러갔다...
한편에서는 대사제가 중얼거리던 주문을 끝내자 펜타그램의 다섯개의
뿔들이 각기 다른 빛으로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받아랏! 꼬마! 살라만더(Salamander)의 화염이다!!"
"흥! 수극화(水剋火)(*주 4)!! 삼매신수(三昧神水)!"
펜타그램의 한 뿔로부터 불줄기가 쏟아져 나오자 준후가 소매를 저었
고 준후의 소매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뻗쳐 나가 두 힘이 공중에서
부딪혀 갔다. 불줄기가 주춤하며 밀리는 듯 했다.
"에잇! 땅의 정령 코볼트(Kobold)여!"
대사제가 불줄기를 거두며 발을 구르자 대사제의 발 밑의 땅이 꿈틀
대며 녹아갔고 그 흙의 파도가 준후를 향해 뻗어갔다. 준후도 지지않
고 외쳤다.
"땅이면 토(土)의 기운! 목(木)은 토를 이긴다! 낙지생근술(落地生根
術)!!"
준후가 양손으로 다리를 치자 준후의 발이 땅속으로 한자쯤 파고 들
어갔고 밀려오던 흙의 파도가 부딪힌 듯 멈추어버렸다. 대사제가 충격
을 받은 듯 뒤로 휘청거리더니 이를 갈며 이번에는 두가지의 기운을
한꺼번에 불러냈다.
"물의 정령 운디네(Undine)! 바람의 정령 아리엘(Ariel)이여!"
준후는 토극수(土剋水)의 원리로 주문을 외치면서 흙을 집어 흩뿌리
자 운디네의 물의 기운은 스러졌으나 아리엘의 무서운 바람은 그대로
준후를 덮쳐갔다.
오행의 원리에 바람의 기운은 미처 없었다... 준후는 호리병을 열고
아까 잡아둔 바람의 기운을 맞서서 발출했다. 아까 준후가 던졌던 호
리병은 주술을 담아두는 역할을 하는 법기(法器)로서 준후 부친의 유
물이었다...
박신부는 이제 형편 없이 짜부라져 버린 엑토플라즘의 덩어리에서 십
자가를 빼냈다. 처치한 것이다. 엑토플라즘을 토해낸 남자는 영체가
죽자 온몸이 쭈글쭈글하게 되어서 신음성을 울리며 딩굴었다. 아마도
정신이 나간 폐인이 되었으리라. 그런데 엄청난 돌풍이 옆에서 몰아쳐
왔다. 돌아보니 준후에게 거대한 바람이 덮쳐들고 준후도 그에 맞서고
는 있었지만 역시 가두어둔 주술의 양이라는건 한계가 있어서인지 조
금씩 밀리는것 같았다. 박신부는 다시 기도력을 발하면서 손에 다시
쥐었던 NJRJ의 부적을 집어던졌다. 굉음과 함께 덮쳐오던 아리엘의 기
운이 부적에 부딪혀 산산히 부서지면서 대사제의 펜타그램의 가지 하
나가 부스러져 버렸다.
"으헉! 이...이런!!"
대사제가 당황한 듯 뒤로 주춤대더니, 괴성을 지르며 펜타그램을 내
밀었다. 펜타그램의 한쪽 가지에서부터 흰 기운이 번져가며 눈부신 흰
빛을 발해갔다...
"아스트랄(Astral : 光)이다! 준후야! 눈을 감아!"
대사제가 이를 갈면서 소리를 질렀다.
" 지고무상의 힘이닷! 모두 죽어버렷! "
펜타그램에서 엄청난 흰 빛이 폭사되어 나와 준후를 덮쳤다. 준후는
오행 중 금(金)의 기운을 불러내었다. 불러낸 기운은 박신부의 금빛
부적에 가해지며 둥근 형상으로 준후의 주위를 금빛 거울처럼 에워쌌
다.
"캐애애액!!!"
대사제의 얼굴이 새카맣게 타서 연기를 뿜었다. 준후의 주술과 박신
부의 부적의 힘이 대사제의 아스트랄을 도로 반사해 버린 것이다. 대
사제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최후의 발악을 하려는 듯, 현암의 인형을
쥐고는 목을 비틀려고 했다.
"죽여버린다앗~~~!"
"앗! 그...그건 안돼!"
"아이고 지금은 결계도 없는데!!!"
박신부와 준후가 당황하여 소리를 지르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의
기합소리와 귀곡성이 들려오며 은빛 섬광이 날아들었다.
"안돼-----!"
"꺄아아아아악---!"
승희였다.... 승희가 힘을 모아 던진 월향이 제비처럼 날아와서는 귀
곡성을 울리면서 대사제의 두 손을 그대로 뚫고 지나가 버렸다.
"크아아아아악-----!!!"
대사제의 두 손이 따로따로 허공을 날으며 선혈이 솟구쳐 올랐다. 현
암의 구멍이 숭숭 뚫린 인형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준후가 엎어지면서
잡았고... 대사제는 두 손이 잘린 그대로 비명을 올리며 도망쳐 나갔
다...
"으....다행이다!"
박신부가 털썩 주저 앉았다. 밖에서 사교의 일당이 우하고 대사제를
데리고 달아나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사이렌소리며 사람들이 떠들며
몰려오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사교의 일당들이 몰려나가자 이번엔
경찰이며 소방관같은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듯 했다.
"아이고 쉴틈도 없네요! 신부님!"
"그래! 어서 빨리 여길 떠나자! 괜히 골치아파진다!"
박신부가 헉헉거리며 현암을 들쳐 업고 뒷뜰 쪽으로 난 창을 넘었고
승희가 늘어지려는 준후를 끌고 그 뒤를 따랐다. 다행히 중상임에도
불구하고 현암의 맥은 바로 뛰는 듯했고 호흡도 고른 듯 했다.
*주 1) 인도의 베다 설화(리그 베다)에 의하면, 인드라는 전사로 묘
사되며, 역시 천둥치는 구름의 인격화로 묘사되는 브리트라
와 투쟁하여 승리했던 것으로 나와있다.
*주 2) 엑토 플라즘(Ectoplasm) : 영체(靈體)라고 번역되며 심령이
물질의 형태를 띄어 나타낸 것. 실례들을 보면 보통 우
유빛 색에 꿈틀거리는 부정형의 형태를 지닌 물질로서,
스스로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고 의사표현도 한다고 한
다.
*주 3) 살라만더(Salamander) : 서양의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4대력
중 불을 지배하는 정령. 불길이 이글거리는 도마뱀의 모
습을 취한다고 한다. 참고로 물의 정령 운디네(Undine)는
여자 또는 부정형의 모습을, 땅의 정령 코볼트(Kobold)는
뿔이 돋은 난장이의 모습을, 바람의 정령 아리엘(Ariel)은
날개달린 사람의 형태를 주로 취한다고 알려져 있다.
*주 4) 오행(五行) : 도가(또는 무속)의 기본이 되는, 우주간에 운행
하는 화(火),수(水),목(木),금(金),토(土)의 다섯가지의 원기
(元氣)로 오행상생(五行相生 : 오행의 요소들이 서로를 만들
어냄)과 오행상극(五行相剋 : 오행의 요소들이 서로서로 이기
고 누름)의 이치로 전 우주만물을 지배한다는 원리.
(**불가의 계율(보시,지계,인욕,정지,지관)과는 다른 뜻으로
쓰임.**)
*주 5) 수극화(水剋火) : 전술한 오행의 오행상극의 원리의 한가지.
물의 기운이 불의 기운을 이긴다는 뜻으로 이러한 상극의 원
리는 木剋土,土剋水,水剋火,火剋金,金剋木의 다섯가지로 이루
어진다.
6. 금단의 의식..
박신부와 준후, 그리고 승희(사실 쇼크를 받은 듯 했다. 그녀의 눈에
는 아까의 주술 싸움은 정말로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을테니..)는 현암
을 그들의 아지트로 데리고 왔다. 이 아지트는 넷의 회합장소로서, 준
후와 박신부가 정성을 들여 엄청난 수호력으로 결계를 친 곳이었기에,
주술로부터는 그래도 제일 안전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박신부가
예전의 의사였던 때의 솜씨를 발휘하여 현암에게 다시 응급처치를 해
주었다. 승희는 아무말없이 입을 꼭 다문채 박신부를 도왔고, 준후는
탈진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했다. 현암의 붕대
를 갈고 약을 바른 뒤, 링겔까지 하나 꽂은 뒤에야 박신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것저것 뒷수습을 하며 입을 열었다.
"휴우... 자 인제 됐어. 현암군은 보기에는 애리애리해도 워낙이 단
련을 많이 거친 몸이라 괜찮을 듯해... 음... 근데 승희, 아까 현암의
손에 써있던게 뭐였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데...?"
"음... 그래요... 다 외웠는데... 그러니까... 길일을 택...그리고
안보였고 , 바빌론의 점복술 이용 , 샘플 9개...군데 군데 지워져서
다는 안보였어요...그리고...윤영과 13일에 약속... 그게 제가 읽은
다에요."
박신부의 눈이 커졌다.
"윤영? 윤영이라고? 그건 우리가 추적하던 여사제의 이름과 같군..."
"음... 그런가요? 신부님은 뭣좀 알아내신게 있어요?"
"아니 별로... 그러나 저러나 바빌론이라... 왜 바빌론의 점복술을
쓴다는 걸까?... 승희, 저쪽에 가면 거기대한 내용이 있는 책이 있을
거야. 좀 찾아봐 주겠나?"
"예. 그러죠."
승희는 선선히 서가로 가서 고대 종교의 의례에 대한 책을 들고서 바
빌론(또는 근동 아시아, 즉 히타이트나 앗시리아를 포함한..)의 부분
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바빌로니아의 종교가 오랫동안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천문학 분야
의 발달과 도량형에 상당히 박식한 사제들 덕분이었다......고대와 중
세 초기까지만 해도 바빌로니아 사제들과 지혜를 대적할 상대가 없다
고 생각되었고 특히 바빌로니아의 마귀론은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관으
로 하여금 열광적인 마녀사냥에 빠지도록 했던 근본 원인으로..."
박신부가 현암의 베개를 돋우어주면서 승희의 말을 막았다.
"아 승희, 점술에 대한 것만 읽어주면 충분해. 나도 오늘은 영 피곤
하단 말야.."
승희는 다시 책을 몇 페이지 뒤적뒤적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바빌로니아의 점복술은 아주 발달된 형태였다. 몇몇 사제는 점을 치
는 전문가(*주 1)였고 그들은 꿈을 해석하거나 동물이나 새의 날개짓
또는 물에 떨어진 기름방울의 모양새등을 통해 미래를 예견하였다. 바
빌로니아에서 가장 흔히 쓰이던 점술도구는 희생제의에 사용된 동물의
내장...특히 간...."
박신부가 섬뜩한 것을 느끼며 고개를 홱 돌려서 승희를 쳐다 보았다.
승희도 망연하게 책을 바라보고 있다가 떨리는 어조로 계속 책을 읽어
내려갔다...
" 간...이었다... 간 관찰법(hepatoscopy)라고 불려진 이 기술을 예
술로 까지 발전하여...."
"아니! 간이라니! 그러면 혹시 현암군은...!"
승희가 역겨운듯한 포정을 띄며 읽기를 멈추고 박신부쪽을 쳐다 보았
다.
"혹시... 간... 인간의 간을 이용하는 의례를..."
"샘플...샘플이 아홉개라 했지.. 만약, 만약 그 메시지가 사실이고
우리의 추측이 맞다면 놈들은 뭔가 사악한 의례를 행하기 위해 아홉명
의 사람을 희생시킨다는 뜻이 돼!"
"으으윽! 신부님! 이건 너...너무!"
"막아야 한다! 현암이 그토록 알리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
을거야! 오늘이 며칠이지? 어이쿠! 벌써 12일이야... "
승희가 역시 흥분하여 외쳤다.
"그 윤영이라는 사람과의 약속이 13일이었죠? 아이구! 벌써 밤이니
몇시간 밖에 남지 않았네요!"
"음... 그런데 13일에 약속했다는 것이 단순히 윤영이라는 여자와의
약속인지, 아니면 그 금단의 의식을 치르기로 한 날인지는 아직 구분
하기가 힘들어."
"그렇지만 만약의 경우, 13일이 나쁜 쪽이라면 어쩌죠? 맹목적으로
저들을 믿고 따르는 사람 중 아홉... 아니 다른 선량한 사람일지도 모
르죠... 아뭏든 아홉명이 죽게 될지도 모르쟎아요? 대책을 강구하는
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음...그래. 막아야 하지..."
"어떻게요? 어떻게 막아야 하죠?"
박신부가 잠시 입을 다물고 침중히 생각에 잠겼다. 준후가 그제서야
기지개를 켜며 무아지경에서 벗어났다.
"음. 신부님? 왜 그리 얼굴이 굳어져 계세요? 오늘 이겼잖아요?"
박신부가 뭔가를 각오한 듯, 준후와 승희를 가까이 모았다.
" 이 방법밖에는 없다. 승희, 그 사교의 교단을 알지? "
"예... 대강 기억할 수 있어요. 교단의 사무실과... 그 대사제라는
자의 거처...."
"사무실은 어차피 표면적인 걸거야. 그 대사제의 집... 길을 인도할
수 있겠나?"
"예..."
"좋다. 방법은 하나 뿐이야..."
"뭐죠?"
박신부의 안광이 빛났다.
"그리로 쳐들어가는 거다...."
*주 1) 바빌로니아의 점치는 사제는 바루(Baru)라고 하며, 여기서의
바빌로니아 종교 습관은 세르게이 토카레프의 "세계의 종교"
에서 참조하였음을 밝혀둔다....
(** 6편의 격돌은 아직 클라이막스가 아닙니다...주의깊게 읽으십시
오. 하하하 **)
6. 금단의 의식 - (2)
준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예? 지금 당장 간다구요? 이렇게 지친 상태로요?"
"아니, 지금밖에 시간이 없다."
박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사교의 인물들은 현암에게 무언가 중요한
비밀(아마도 그들의 금단의 의식일 것이다)을 들킨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흑주술을 사용하여 인형을 만들고 또 직접 추격까지 해
온것임에 틀림없고...그렇다면 그 대사제라는 자가 중상을 입은 현재
의 상태에서 그들의 그 금단의 의식(현암이 보았다고 추정되는)을 채
수습할 경황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때에 치고 들어가야
만 그들의 정체나 추구하는 목표, 그리고 그 금단의 의식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게 박신부의 설명이었다. 어차피 피차간에 지
치고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일테고...
"그러면 저도 갈래요!"
승희가 끼려고 했으나 박신부는 침중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남아서 현암군을 지켜 줘야해... 지금 현암군은 의식이
없는 상태이니... 누군가 간호를 해 줘야지..."
"흠....알았어요..."
"그러면 그 대사제라는 자의 집으로 가는 약도를 부탁한다..."
박신부와 준후는 이것저것 영력을 지닌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고 승
희는 약도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 하고보니 아직
스스로의 특별한 힘을 제대로 발휘할 줄 모르는 승희만을 남기기가 좀
뭣해서 승희에게는 월향검을 남겨두고 또 준후가 몇장의 간단한 부적
을 사용할 수 있게 가르쳐 주었다. 또 만약을 위하여 박신부는 성수뿌
리개 하나를 승희에게 남겨 두었다. 가면서 박신부는 한가지 일을 승
희에게 맡겼다.
"나하고 준후가 그 윤영이라는 여자의 조사를 해온 서류봉투가 있을
텐데... 하도 정신이 없다보니 미처 정리도 하지 못했고, 제대로 읽어
보지도 못했구나... 네가 좀 정리를 하고, 가능하다면 책들도 좀 찾아
서 추리를 해 보렴!"
"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혹시 모르니 30분마다 연락주시고요."
"음, 내차에는 카폰이 없는걸! 너무 걱정은 하지마라. 지금이 밤 11
시니까... 새벽 2시까지는 꼭 연락해 줄께!"
"예..."
박신부와 준후는 승희에게 그려 받은 약도를 가지고 무언가 금단의
의식이 행해지고 있을 것으로 믿어지는 대사제의 집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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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는 현암의 몸에 꽃힌 링겔병에서 똑똑 떨어지고 있는 방울들을
처량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현암의 숨소리를 살폈으나 현암은
곤히 잠든듯, 고른 호흡소리만이 들렸다. 승희는 휴- 하고 한숨을 쉬
고는 박신부의 서류봉투를 꺼냈다. 거기는 그 김윤영이라는 여자의 사
진을 복사한 것 몇장과 **여대의 졸업증명서, 그리고 출입국신고서와
기타 몇가지의 서류들이 있었다. 먼저 승희는 사진부터 펼쳐 보았다.
대학 졸업 앨범에서 카피한 듯, 사각모를 쓴 얼굴과 평복차림의 얼굴,
그리고 여러명이 찍은 스냅사진 같은 모습이 있었다. 전혀 이상한 데
가 느껴지지 않는 그런 모습이었다.
"흠... 그럭저럭 괜찮은 듯한 얼굴이군... 근데 옷을 잘 입을 줄 모
르는 군. 호호호호"
승희는 다른 서류를 펼쳤다. 출입국 신고서였다. 독일유학을 갔다온
듯, 여권에 독일의 입국 및 출국 도장이 찍힌 페이지들이 나와 있었
고, 눈이 좀 나쁜 박신부가 붉은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것이 있었다.
"흠... 독일에서 뭘 배워 왔구먼... 기껏 나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
고 무슨 이상한 것이나 배워와서는..."
승희는 그 윤영이라는 여자의 전공을 들쳐 보았다. 그녀의 전공은 고
고학이었고 특히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의 분야를 주로 연구한 듯 했다.
"흠... 수메르? 바빌로니아? 하긴... 사교의 교리에는 그쪽의 내용도
많이 있었지..."
다시 눈을 돌리는데 아까 보았던 여권의 페이지에서 다른 도장이 눈
에들어왔다. 그것은...
"음? 이건 근동지방을 여행했던 비자인듯한데?"
도장은 여러개가 있었다. 되새겨보니 그곳들은 고대 바빌로니아, 수
메르, 우룩등이 있었던 곳을 여행했던 기록들이었다.
"흠... 역시..."
승희는 다시 날짜를 맞춰보기 시작했다. 윤영이 독일로 떠난 것이 3
년전, 그리고 여권에 찍힌 근동지방을 여행한 시기는 대각 2년반 전부
터 1년 반 전에까지 이르고 있었고 인도의 북부지방도 한 번 간 듯했
다. 이것으로 볼때, 그 윤영이라는 여자는 독일로 가고서 6개월 정도
뒤부터 계속 근동을 여행한 것이 되는 것이다.
"흠....무슨 이유에서 였을까? 아뭏든 그렇다면 근동의 고대사나 종
교등을 한 번 뒤져봐야겠군."
승희는 책들이 빽빽히 꽂힌 서가에서 책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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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와 준후는 긴장하면서 별장같아 보이는 외딴 집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박신부가 준후에게 속삭였다.
"준후야, 조심해라. 녀석들은 주술뿐이 아니라 기관총같은 신식 무기
도 가지고 있어!"
"흠... 예. 알겠어요..."
둘은 현암이 뚫고 나왔던 것 같은, 무너진 벽을 발견하고 그리로 쉽
사리 들어갈 수가 있었다. 마당은 폭풍이 몰아친 듯 엉망이었고, 개
몇마리가 반쯤 땅에 파묻힌채 비참하게 죽어있었다. 그러나 집안은 불
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적막할 뿐이었다.
"흠... 안으로 들어가 보자, 준후야."
박신부와 준후는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안도 현암과 대사제의
싸움 탓이었던지 꽤 헝클어져 있는채로 아직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상
태였다...
"음... 신부님, 마기가 꽤 강하게 느껴져요... 좀 질은 낮은 것들이
지만, 악령들이 몇몇 있는 것 같아요..."
"음. 그래..."
둘이 소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철컥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박신부와 준후가 돌아보니 커다란 서양의 기사갑옷 둘이 흡사 로보트
처럼 철컥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흠! 이따위 장난을!"
박신부와 준후는 각각 하나씩의 갑옷과 맞섰다. 박신부의 십자가에
맞은 갑옷의 투구가 벗겨져 나가자, 텅 비어있는 갑옷의 내부가 보였
다. 그러나 남은 갑옷은 팔을 휘둘러댔고, 박신부는 간신히 쇠뭉치의
일격을 피했다.
"준후야! 사람이 아니다! 사정 봐줄것 없어!"
준후가 몸을 날리며 번개 한 방을 쏘아 붙이자 하나의 갑옷이 달아오
르면서 괴로운듯 몸을 비틀어대더니 쾅! 소리를 내며 분해 되어 버렸
다. 박신부도 오오라력을 벗겨진 갑옷의 목부분에 집중하자 갑옷은 뒤
로 우당탕 넘어지면서 역시 분해 되어버렸다.
"흠. 별것도 아닌것들이..."
"집 경비를 시키려면 좀 센 것들을 부려야지! 바보들..."
"흠... 저정도라도 보통 도둑들은 아마 기절할 걸? 계속 찾아보기나
하자. 준후야."
싱겁다는듯이 말을 잇던 박신부가 바닥에서 핏자국을 발견했다. 아마
현암의 핏자국인듯... 핏자국은 지하실로 이어지고 있었고... 그 핏자
국을 따라가려고 둘이 막 걸음을 옮기는 순간,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여러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요란한 마이크 소리가 들
렸다.
"꼼짝마라! 경찰이다! 가택침입 및 상해죄로 체포한다!"
박신부와 준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경찰이라니!!!"
"아이고, 귀신도 아니고 이게 무슨..."
갑자기 박신부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이..이건 함정이다! 놈들은 우리가 올 것을 예측하고는 경찰에 신고
를...! 우리를 묶어 두려고!"
준후도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미 발자국소리들은
마당을 지나서 현관으로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그...그러면 현암형과 승희누나가 위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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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승희는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발굴되었다는 점토판의 이야기를 재미있
게 읽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읽고있던 부분은 길
가메쉬(*주 1)서사시인데 그 중 길가메쉬가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가 영
생을 얻으려 하는 대목이었다. 영생...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뱀의 이야기... 브리트라...
"음.. 혹시 그들이 노리는게 바로 이..."
갑자기 누군가가 부르짖는 듯한 째지는 소리가 옆방에서 들렸다. 승
희는 놀라움에 옆방으로 달려갔다. 혹시 현암이...?
현암은 아니었다... 현암은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는 상태였고...그
소리를 질러 대는 것은 월향이었다... 월향이 공중에 떠서... 계속 귀
곡성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그 의미는...승희에게 분명히 전달되어왔
다.
'월향이... 음! 이건... 이건... 혹시...!'
승희는 현암의 태극패를 꺼내어 준후가 주고간 명경부를 문질러 보았
다... 분명했다... 월향은 경고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었고... 태
극패에는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 주는듯, 수없는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나 있었다... 그 수는 하나 둘이 아니었고... 말할 것도 없이 사
교의 무리들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까 박신부와 준후와 싸
웠던 것 같은 엄청난 주술을 쓸 수 있을 것이었고... 승희는 혼자였고
더군다나 현암을 보호해야만 했다....
승희의 몸이 저절로 떨리기 시작했다...
*주 1) 길가메쉬 서사시 : BC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 우
룩을 다스렸다는 위대한 왕의 일대기를 그린 서사시. 그
작품의 시기는 호머의 시들보다 적어도 1500년이나 앞선
고대의 이야기이며 19세기말 남부 이라크의 구릉에서 점토
판의 형태로 발굴됨. 내용은 위대한 왕이자 영웅, 거인이
었던 길가메쉬의 영웅적 행적과 그의 친구 엔키두와의 우
정,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다가 실패하여 죽음에 이
르는 것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8. 악전고투...
승희는 태극패를 손에 쥔채 우선 달려나가서 대문을 단단히 잠갔다.
그리고 창문으로 가서 이미 닫혀있던 창문들을 최대한 단단히 잠그고
있는데, 옆방에선가 부연 연기 같은 것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놀란
승희는 허겁지겁 옆방으로 가 보았다. 그곳의 열린 창문으로 안개같은
것이 조금씩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안개 안에서 무언가 이상한 기운
이 느껴지는 듯 했다. 승희는 창문을 닫으려 했으나 무언가 알 수 없
는 힘이 창문을 닫지 못하게 꽤 강한 힘으로 저항하는 것이 느껴졌다.
승희는 겁이 났으나 죽을 힘을 다해서 창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이
퇴마사들의 아지트는 각 창문에도 철창이 쳐져 있었고 유리는 두께가
1센티가 넘는 고압축유리여서 꽤 믿음직했다. 창 밖에서 고요한 소리
가 들려오고 있는 것에 승희는 흠칫 귀를 기울였다.
"퍼져 나가라... 용의 입김이여... 그대의 주인 멀린(*주 1)의 주문
이니.."
"멀린이면... 고대 켈트족의 마법사... 놈들, 정말 아는 것도 많구
나!"
승희는 욕설을 퍼부으며 방을 나서려는데 이미 바닥에 자욱이 깔려
있던 안개들이 스르르 한데 모여들기 시작했다. 놀란 승희는 뒤로 후
다닥 물러서다가 벽에 부딪혀 멈추어섰다. 이미 들어온 안개들은 서서
이 뭉쳐가며 인간과 흡사한 모양을 만들어 나갔다. 승희는 비명을 지
르며 엉겁결에 그 형체에다 들고 있던 태극패를 집어던졌다. 막 모아
져가던 형체는 태극패에 맞고는 펑 소리를 내며 부서져 갔고 태극패의
중앙에 새겨져 있던 동경(銅鏡)도 깨어져 나가 버렸다. 승희는 흰 그
림자가 흩어지자 무서움에 떨며 후다닥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승희는 현암이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현암은 아직 죽은듯이 잠들어
있었으나 여기에도 안개가 꽤 밀려 들어와서 바닥을 자욱하게 흐르고
있었다. 승희는 냅다 소리치며 월향을 불렀다.
"어서! 도와줘!"
승희가 암암리에 뿜어내는 영기를 타고 월향이 날아 들어 왔다. 바닥
을 흐르던 안개는 이번에는 뭔지 알 수 없는 형상으로 뭉쳐가다가 날
카로운 귀곡성과 함께 월향검에게 꿰뚫리고 난 후 바닥에 흩어져 버렸
다. 그틈을 타서 승희는 일단 현암의 팔에 꽂혀있던 링겔 바늘을 빼고
현암을 들쳐 업었다. 일단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곳으로 현암을 옮겨
야 했다. 월향은 또 다시 뭉쳐 오르는 안개를 여기 저기 꿰뚫고 있었
고...
'어디로 가야 하지? 그리고 이 안개들은 대체 뭘까?'
방밖으로 나온 승희는 기겁을 했다. 창문을 꼭꼭 닫아 두기는 했지
만, 어느새 안개는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와 마루바닥에 깔린채 흐르
고 있었다. 승희는 발목이 안개에 휘말리자 무언지 알 수 없는 힘이
발목을 잡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으악! 이게 뭐야! 놔! 놔!"
승희는 안간힘을 쓰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마루 저쪽에는 박신부가
주고간 성수 뿌리개가 있었고 준후가 두고간 부적들도 거기에 있었다.
승희는 현암을 업은채 비틀거리며 그쪽으로 달려 가기 시작했다. 그러
나 안개속에서는 마치 진흙탕속에 발이 빠진 듯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었다. 승희는 거의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억누르며 억지
로 억지로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겨갔다. 현암의 몸이 너무도 무겁게
여겨졌지만 현암을 내팽개치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
해 현암과 준후, 박신부가 목숨을 걸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건 절대로
안되는 일이었다. 승희는 이를 악물면서 걸음을 옮겨갔다. 막 성수를
집으려는데...
"캬아아악"
등뒤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승희는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어느새 안개가 한데 모여서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고 그 커다란
덩어리가 덮쳐 오고 있었다.
"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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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는 어쩔 줄을 몰라하는 준후를 데리고 지하실 입구쪽으로 갔
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경찰들은 집안의 동정을 살
피느라 들어오지는 않는것 같았다.
"준후야! 경찰들에게 괜히 추적당하거나 하면 골치 아파진다. 놈들이
여기 어떤 함정을 파 놓았는지 몰라! 아마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증거들을 남겼을테니!! 무슨 술수가 없니?"
"음.. 아! 은신부적이 있어요! 이걸 쓰면 우리 모습이 안보이게 될테
니, 빠져 나갈 수 있어요!"
박신부의 얼굴에 화색이 돌다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듯, 안광을 빛
냈다.
"아니, 아니...준후야, 아직 나가서는 안돼. 몸이 보이지 않을 수 있
다면 더 수색을 해야해."
"예? 음... 왜 그러시죠?"
"놈들은 분명 시간이 없었던 것만은 확실해. 현암군을 추적해 온 이
후 이 집을 치울 여유는 분명히 없었어. 그렇다면 이 지하실에는 분명
그 금단의 의식을 치렀던 흔적이 남아있을거야. 아마도 그 죄를 우리
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겠지! 아뭏든, 지금이 아니면 아마 기회는
없을거야. 네가 은신술도 쓸 줄 안다는 건 아마 놈들이 몰랐을테니...
놈들이 우리의 생각을 앞질렀지만, 우리는 놈들의 생각을 한 번 더 이
용하는 거야!"
"그렇다면 경찰들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아예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
단 입구를 벽처럼 보이게 하죠."
더 이상 말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준후가 은신부적을 꺼내고 벽을
긁어 벽지를 손바닥만하게 뜯어냈다. 부적을 계단 입구에 놓고 주문을
외우자, 벽지 조각이 부적위의 허공에 떠오르더니 입구 전체가 벽지무
늬로 덮여 버렸다. 경찰들이 들어온듯, 소란스러운 발자국소리가 들렸
으나 완전히 시야가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았다.
"음. 놀랍구나."
준후가 땀을 닦으며 답했다.
"이건 환영일 뿐이고 물리적인 저항력은 없어요. 누군가가 손을 짚거
나 몸을 들이밀면 바로 파괴되어 버려요. 그러니 서둘러야 해요."
"음... 현암과 승희에게도 서둘러 가 보아야 하니까.. 내려가자!"
박신부와 준후는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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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앗! 저리갓!"
승희는 간신히 안개 뭉치가 덮쳐오는 것을 피하면서 성수뿌리개를 집
어 들었다. 그리고 성수를 뿌리려 했으나 마개가 잠긴채여서 성수가
나오지를 않았다. 안개 뭉치는 다시 승희 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승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성수마개를 열려 하다가 급한 김에 그냥
성수뿌리개를 안개 더미에 집어 던졌다.
"캬아아악"
성수뿌리개가 깨어지며 성수가 흩어지자 사악한 안개는 녹색의 불꽃
같은 것에 휩싸이며 녹아 버리기 시작했다. 승희는 뒤돌아서 다시 월
향이 있는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고 걸
음을 멈추어 버렸다.
방안에는 어느새 유리가 깨어져 나가서 계속 안개가 밀려들어오고 있
었다. 그 안에서 월향은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안개 뭉치를 꿰뚫고 있
었으나 안개는 조금씩 움찔거릴뿐 별로 개의치 않고 계속 꾸역꾸역 밀
려 들어오고 있었다. 월향의 칼날에 기공이나 주술이 실려있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안개가 굳이 형체를 갖추지 않고 흩어지는 형상인채로
밀려 와서인지, 아뭏든 월향검은 혼자 헛되이 애쓰고 있었다. 승희는
다시 걸음을 돌려 서재 쪽으로 가려다가 준후가 두고간 부적 생각이
났다. 마루에서 부적을 집는데 마루늬 큰 유리문을 통하여 거대한 안
개더미가 해일처럼 몰려 드는 것이 보였다. 승희는 기겁을 한 채로 서
재로 들어갔다. 서재에는 준후의 부적으로 이루어진 결계가 있었기 때
문이었다. 하지만 그 결계는 보통때에는 열려 있었으며, 한가지의 부
적을 붙여야 비로소 진으로 발동될 수 있었다.그 결계를 발동 시키는
방법이...승희는 급한 마음에 그 방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쾅! 하면서 집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개의 파도가 유리문을
쳤으나 채 두꺼운 유리문을 미처 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승희는 급한
김에 현암을 소파위에 내려놓고 박신부의 성물들을 모아다가 문앞에
벌려 놓았다. 그리고는 준후가 두고간 부적들을 마구 뒤적이기 시작했
다.
다시 한 번 집이 와장창 흔들리면서 마루에서 유리가 깨어져 나가는
소리가 요란히 들려왔다. 이젠 시간이 없었다. 승희의 머릿속에 기억
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맞다! 이 부적이다! 문이 남쪽에 있으니... 남해신축융(南海神祝融)
의 부적이라고 했었지!'
막 부적을 문위에 붙이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귀곡성이 애달프게 들려
왔다. 월향이 혼자서 사악한 기운을 채 감당해내기 어려운 모양이었
다. 안개더미는 홍수처럼 방으로 밀려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아이구! 월향을 잊었었네! 이를 어쩐다!'
승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월향을 불렀으나 귀곡성만이 들려올뿐, 월
향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개더미는 몰려오다가 바닥에 늘어 놓은 박신
부의 성물들에 걸린 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가만 귀곡성이 들려오는
방향을 살펴보니까 월향검은 그 거대한 안개더미속에 묻혀 있는 듯 했
다.
'이를 어쩐다! 비록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그 칼에도 혼이 들어있
다는데...!'
지금 진을 발동시키면 현암과 승희는 그럭저럭 더 버틸 수 있겠지만,
월향은 홀로 남아 어떻게 될지 몰랐다. 무서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
다. 승희는 누워있는 현암을 한 번 보고는 바닥에 벌려 놓은 박신부의
성물들중 묵주를 집어들고 한손에는 축융의 부적을 들고 숨을 한 번
몰아쉰 다음 안개더미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치 물속인것처럼 답답하
고 숨을 쉴수가 없었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승희는 안개 속을
허우적 거리며 헤쳐 나가려 했으나 도리어 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승
희의 목덜미를 잡고 그대로 끌어 올려갔다.
'으아악!'
승희는 발버둥을 치면서 손에 들고 있던 묵주를 집어던지자 귓전에
캭! 하는 비명소리가 들리며 승희를 잡고 있던 힘이 풀렸다. 승희는
바닥에 떨어져서 마음속으로 월향을 애타게 불러대며 손을 휘저었다.
손끝에 뭔가 서늘한 것이 잡혔다. 느낌이 틀림없는 월향검이었다. 이
제는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아까와 비슷한 힘이 승희의 다
리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승희는 넘어질 뻔 했으나 간신히 균형을 잡았
다. 사방에서 알 수 없는 힘들이 승희를 잡으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힘들이 여기저기를 잡으려 할때마다 승희는 발버둥을 치며 간신히
뿌리치며 헤매는 바람에 이제는 완전히 방향감각을 잃어서 여기저기
벽에 부딪히고 다녔다. 승희는 머리를 굴렸다.
'음..벽에 붙어서 돌면 금방 갈 수 있을거다!'
승희는 등을 벽에 붙이고 주춤거리면서 걸음을 옮겨갔다. 이제 곧 서
재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윽!'
또다시 그 알 수 없는 힘이 승희의 목을 움켜 쥐었다. 승희는 굉장한
고통을 느끼면서 빠져 나오려 했으나 허사였고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안돼! 안돼! 정신을 잃으면...!'
승희는 월향검을 꼭 쥐고는 힘을 집중해갔다. 월향검이 살아나는 듯,
손안에서 푸득거리며 떨어가기 시작했고...
"꺄아악!"
월향검이 승희의 손을 이끌고 나가면서 승희의 코 앞을 스쳐 지나갔
다. 승희의 목을 누르던 힘이 또 다른 비명소리와 함께 간신히 풀리
고, 승희는 후다닥 서재로 뛰쳐 들어갔다. 눈 앞이 다시 보이기 시작
했다. 이미 안개는 박신부의 성물들 사이를 가는 시내처럼 통과하여
들어가 현암이 누운 소파 밑에 몰리고 있었다. 승희는 서재 안으로 뛰
어들면서 순간적으로 문틀 위에 축융의 부적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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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럴수가!"
"으웁!"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박신부와 준후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준후는
그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는 마구 토하기 시작했다.
보일러며 잡동사니들이 잔뜩 쌓인 지하실 내부의 한쪽 구석에는 수백
개의 촛불이 빛나고 있었고, 중앙에는 넓은 제단같은 단상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커다란 세발 화로와 네구의 시체가 배가 갈라진채 딩굴고 있
었다.
박신부는 분노와 욕지기를 간신히 억누르며 준후를 놔둔채 이를 악물
며 걸음을 옮겨 가지런히 누워 있는 시체들 쪽으로 걸어갔다. 역시 예
상했던 대로 시체들의 벌어진 배 속에는 내장들이 흐트러져 있었고..
간이 없었다. 박신부는 이를 악물고 계속 시체들을 살폈다. 하나는 늙
은 노인이었고, 둘은 젊은 청년, 하나는 젊은 여자였는데 시체들의 이
마에는 검은 색으로 뱀의 낙인과 3에서 6까지의 숫자가 불에 지진듯
박혀져 있었고, 얼굴은 고통의 표정은 없었으나 무엇에 홀린듯, 눈이
하나같이 희게 뒤집혀 있었다.
박신부는 세발 화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는 숯불을 피웠었던
듯한 재만 쌓여 있었고 불에 타버린 양피지 조각같은 것이 부스러져
남아 있었다. 박신부는 그 양피지 조각을 꺼내 보려 했으나 이미 타버
린듯, 힘없이 부스러져 버렸다. 박신부는 무언가 가슴에 치밀어 오르
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준후는 이제 조금 진정이 되는 듯, 눈물
을 흘리며 그냥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박신부가 가볍게 준후를 달래며 준후를 일으켜 안았다. 준후는 흐느
끼기만 할 뿐, 몸을 마구 떨고 있었다.
"시..신부님...난...난....으흑..."
"그래그래... 괜찮다. 준후야... 이런 광경은 사람이 볼 것이 아니
야..."
박신부는 이를 갈면서 다시 지하실 내부를 살폈다. 이런 곳에는 의당
비밀 통로가 있게 마련이었으니... 역시 왼쪽 천장의 어두운 그늘 속
에 작은 뚜껑 같은 것이 보였다. 박신부는 잠시 죽은 자들을 위한 기
도를 올리고는 보일러의 연료탱크를 열었다. 기름이 주르르 흘러나와
서 지하실 바닥을 삽시간에 채워가기 시작했다. 박신부는 상자 몇개를
가져다가 천장에 있는 뚜껑 밑에 쌓고 밀어서 뚜껑을 열었다. 밤공기
가 밀려 들어왔고 그 뚜껑이 있는 곳은 이미 집 밖의 숲인듯, 인기척
이 없었다. 박신부는 지하실을 빠져 나온 뒤, 잠시 생각을 하다가 성
냥불 하나를 켜서 지하실에 던져 넣었다. 박신부가 준후를 안고 숲에
숨겨둔 차에 도달할 때쯤, 그 저주받은 집에는 화광이 충천했고 경찰
들이 소리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박신부는 계속
흐느끼는 준후를 옆자리에 놓고는 시동을 걸었다.
*주 1) 멀린 (Merlin) : 고대 영국의 전설적인 왕인 아아더(Arthur)
를 돕던 마법사. 그의 마법력은 전설적인 것으로, 아아
더가 그의 불충한 부하(일설에 의하면 아아더의 사생아)
모들렌느와 최후의 일전을 할 때에 멀린은 힘을 호수의
정령 비비안에게 봉인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의 안개를
불러내어 수적으로 열세였던 아아더왕을 도왔다고 함.
8. 악전고투..(2)
결계의 방어력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우우우..하는 소리와 함께 강한
힘이 헉헉거리는 승희와 조금씩 의식이 들어가는 듯 신음소리를 내는
현암, 그리고 월향검을 에워싸고 들어가는 듯 했다.
이미 들어와있던 흰 안개들은 진저리를 치는 듯 하면서 힘을 잃고 흩
어져 갔다. 그리고 바깥에 몰려 있는 안개들은 결계의 힘에 밀려 들어
가지 못하게 되자 점점 그 모양이 응결되어가면서 형체를 갖추어 갔
다. 승희는 비로소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면서 현암의 숨소리를 살폈
다. 이제 어느정도 급한 불은 끈 셈이지만, 밖에 사교의 일당들이 얼
마나 몰려 왔을지, 그리고 또 무슨 사악한 수를 꾸밀지 알 수 없어서
그냥 불안하기만 했다. 박신부와 준후가 어서 돌아와야 할텐데...하는
생각을 하며 승희는 현암이라도 좀 빨리 회복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현암에게로 의식을 집중해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승희는 눈을 떴다.
결계는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았고, 현암이 일어나서 월향검을 집어들
고 승희의 옆에 앉아 있었다. 승희는 놀라기도 하고 또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려다가 머뭇거렸다. 현암의 얼굴에 고통의 기색이 완연했기 때
문이었다. 현암은 승희가 눈을 뜬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리며 씩 웃
으려 했으나 얼굴빛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고마워. 승희... 애써 주어서 이제 훨씬 좋아졌어.."
"왜 일어났어! 총을 두방이나 맞고,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사람
이...!"
"음.. 이젠 좀 나아졌어... "
그러나 현암이 애써 태평한 기색을 지으려 했어도 승희의 눈에는 하
나도 나은 것같지가 않았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 그렇게 다치고 하루
만에 나을 수 있단 말인가? 현암은 정신이 들자, 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극도의 정신력을 발휘해서 몸을 일으킨 것이 분명
했다.
"도로 누워! 무리하면 덧나게 돼!"
"만약 누워 있다가 그냥 죽게되면 덧나고 뭐고 없어..."
승희가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자 현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정말 잘했어... 그 안개, 정말 지독한 거였어. 잘은 모르겠지
만 서양에서 얘기하는 정령인 폴터 가이스트의 힘을 빌었던 것 같아.
그걸 막아내다니, 정말 대견해..."
"내가 막았나 뭐... 근데 어제 본 것이 대체 뭐길래 그렇게 저들이
죽을 기를 쓰고 쳐들어오는 거지?"
현암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음... 놈들은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어... 지금 아니면 얘기 못할지
도 모르니, 어디에라도 적어둬. 만약의 경우에도 세상에 알려질 수 있
도록..."
승희는 현암이 그렇게까지 얘기하는 것을 듣자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
꼈다. 놈들은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승희는 주섬주섬 종이
를 꺼내고 펜을 찾아 현암이 말하는 것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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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현암형이 의식을 차린 모양이에요. 감이 잡혀요."
차 안에서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투시를 행하던 준후가 반가운듯
소리쳤다. 박신부도 조금 안도했다.
"흠.. 그래? 더 자세한 것은 모르니?"
"음... 아이고.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직은 둘 다 무사하지
만...음... 더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음... 서두르자!"
박신부가 모처럼만에 과속을 내고 있었다. 박신부가 입을 열었다.
"놈들... 분명 바빌로니아의 점복술을 이용하려 하고 있어... 길일을
택하기 위해... 바빌론의 점복술 이용... 샘플 아홉개 소요... 기억나
지 준후야? 현암군의 손에 적혔던 말들?"
"예..."
"그 샘플이란건 사람의 간이 분명해... 고대 바빌론에서는 점을 칠때
주로 동물의 간을 이용했지. 그러나 아주 중요한 것을 알아내는 일이
라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을거야. 놈들도 그걸 행한거
고... 9개가 필요하다... 아까의 시체들의 이마에는 번호가 있었어.
만약 그게 현암군의 손에 써 있던 샘플의 번호와 일치한다면, 놈들은
이미 6개의 사람의 생간을 구한거야..."
"웁..."
"진정해라, 준후야...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알아
낼 수 있는 것이 무얼까? 길일을 택한다고? 그렇다면 그 길일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비밀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준후도 뭔가 생각해 낸듯 했다.
"잠시만요... 제가 지혜를 관장하시는 묘길상님(*주 1)의 힘을 빌어
볼께요."
"안돼! 그런 방법으로 비밀을 알아내는 건 네 명을 단축시키게 된다!
그런 목적으로 신을 부르는 건 안돼!"
"아... 이분은 잡귀하곤 달라요! 저도 약간의 실마리만 얻으려는 것
뿐이고요! 한시가 급하쟎아요!"
준후는 박신부의 말을 듣지 않고 급히 주를 외웠다. 박신부는 할 수
없이 계속 운전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잠시 후, 준후가 눈을 빛내
며 말했다.
"뱀...뱀은 허물을 벗으며 계속 모습을 바꾼다..."
"음? 뭐라고?"
"그게 다였어요... 아이구, 나도 이게 뭔지 통 모르겠네! 좀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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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은 내가 들어갈 때에 이미 TV 카메라로 나를 감시하고 있어서,
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허나 그 의식의 내용을 보고 뭔가
감을 잡은 것이 있었지... 놈들은 바빌론의 점복술을 위해 산사람을
해부하고 있었다...간을 꺼내는 거였어..."
"어머나! 원 세상에!"
"길일을 택하기 위해 점을 치는 거였지... 그 희생자들은 모두 무슨
주술이나 마약 같은 것에 중독되었던 듯,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얼굴
인듯 했지. 내가 손바닥에 적어 놓은 메모 봤어? 나도 무심코 적은 거
였는데, 그건 매우 중요한 거였어..."
"음.. 봤어. 길일을 택한다...바빌론의 점복술... 샘플 아홉개... 그
샘플이란게 역시 사람의 간... 아까 신부님과 서적을 조사하다가 알게
됐지..."
"음... 그리고 대사제라는 녀석은 흑주술에 정통한 놈이었고..."
"음. 그것도 알아. 아까 병원에 갔을때 신부님과 준후와 한바탕 했
지. 아마 죽었을 거야. 얼굴이 까맣게 타고 두 손이 잘려졌으니..."
"천벌을 받았군... 아뭏든 내가 본 건 더 중요한 게 있었어. 놈들은
나에게 총을 쏘며 서둘러 들고 있던 양피지를 화로에 던져 태웠는
데... 거기에 찍힌 문장을 나는 봤지..."
"어떤 거였지?"
"모두 3개였어... 왼쪽은 모나스 히에로 글리피카의 문장... 오른쪽
은 거대한 뱀을 상징하는 징표, 그리고 가운데는..."
현암은 긴장하는 듯 했다.
"뭐지? 그게?"
"내 지식이 맞다면 말야, 그건... 생명의 나무를 그린 문장이라고 할
까?..."
"생명의 나무?"
"음... 으으... 아니 괜찮아... 음... 생명의 나무... 유대교의 카발
라(*주 2)에 율법의 나무(*주 3)라는 것이 있지... 그건 그 율법의 나
무를 역으로 그린 거야... 그 내용까지는 보지 못했지만... 그 위에
써있던 라틴어...아보르 비타에 크루치픽사에..."
"뭐라고?"
"십자가의 생명나무라는 뜻일거야..."
"흠.. 생명나무? "
"그래... 나도 아직 그 정도 밖에는 잘 모르지만, 신부님이 보시면
아마 놈들이 원하는게 뭔지 알아 내실 수 있을거야..."
현암은 말을 마치고 피곤한 듯한 얼굴로 문쪽을 주시했다. 그 얼굴에
뭔가 각오한 듯한 빛이 비쳤다. 승희는 현암이 말하는 것을 다 적고는
종이를 벽에 걸린 성모의 그림밑에 숨겼다.
현암이 말했다.
"지금 결계가 점점 약해져 가고 있어... 놈들이 또 다른 술수를 부리
고 있는 것 같아..."
승희가 결계가 깨져 간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겁이 왈칵 나기 시작했
다.
"마음을 단단히 가져... 그 어떤 사술도 인간의 의지 앞에선 버텨 내
지 못해..."
다시 안개가 차올라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집이 지진 난 듯이 흔들리
기 시작하더니 금새 조용해 졌다. 허나 현암은 이제 결계가 완전히 무
효화 되었다는 걸 알았다. 현암은 승희에게 나직히 말했다.
"부적이나 성물이 남은 것이 있으면 모두 가지고 나와... 놈이왔
어... 이제 여기 있어봐야 소용없으니..."
"누가 왔다구?"
"녀석들의 우두머리... 틀림 없을 거야... 이 사악한 기운은..."
미처 승희에게까지 말은 못했으나 현암은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말하
고 있었다.
'이 기회에... 내가 죽더라도... 놈들의 우두머리를 없애야 한다...'
현암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한 손에 월향을 들고 엄숙한 걸음걸
이로 서재를 나섰다. 지금 덮여있는 안개는 아까의 이상한 것과는 달
리 보통의 안개인 것 같았다. 승희는 준후의 부적들과 조그만 성모상
하나를 가지고 현암의 뒤를 따랐다.
집안은 고요했다. 현암은 망설임 없이 대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섰
다. 이미 집 밖은 흰 안개로 가득 덮여 있었고, 저 만치에 세사람의
두건을 쓴 사람의 모습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암
은 상처가 말할 수 없이 쑤셔오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 쪽으로 엄숙
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승희도 입술을 악물고 그 뒤를 따랐다...
*주 1) 묘길상 : 문수보살, 범어로 Manjusri. 묘덕이라고도 불리우며
여래의 왼편에서지혜를 맡았다는 보살.
*주 2) 카발라 : 고대 유대교에서 시작된 신비주의의 방식. 주로 기
호와 숫자를 이용하여 만물의 신비를 밝히는 일종의
계산법. 또는 밀경(密經)으로도 불리워지며, 30세가
넘은 경건한 신자만이 보고 연구할 수 있다고 함.
*주 3) 율법의 나무 : 소설 '푸코의 추'를 보신 분은 알 수 있을,
10개로 분리되는 일종의 우주 체계 또는 만물의 구
성을 밝혀 준다는 도형. 나무 형태는 아니지만 그
런 형태를 띄게 만든 것도 있음. 케테르, 호크마,
비나, 헤세드, 게부라, 티페레트, 네자, 호드, 예소
드, 말쿠트 로 구성...
*주 1) 메두사 :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고르곤의 3자매 중 하나.
고르곤은 머리카락이 뱀으로 되어있고, 강철손톱
을 가졌으며, 그 얼굴을 마주보면 돌이 된다는 괴
물임. 원래 불사의 몸이나, 영웅 페르세우스에 의
해 단 한명 불사의 몸이 아니었던 메두사는 죽음을
당했다함. 원래 그리스 신화이나 페르세우스의 출
신이 근동 쪽으로 알려져 있고, 또 그가 동쪽으로
여행하여 이 괴물을 퇴치 한 것으로 미루어, 이 괴
물의 원래 거주지는 근동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여
기에 실음.
9. 악전고투...(3)
앞장서서 가던 현암이 발을 멈췄다. 눈앞에 두사람의 사제복인듯한
긴 후드를 입은 자들이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너는 죽은 줄 알았었는데... 아니, 최소한 중태에 빠져 있는
걸로 알았는데...?"
둘중의 한녀석이 입을 열었다. 바로 그 대사제라던 녀석이었다. 승
희가 놀란 눈으로 비슷한 말을 했다.
"음? 너도 아직 죽지 않았었구나! 두 손도 잘려 나갔었고.. 얼굴도
다 타버렸던 것 같은데...?"
그 대사제라는 놈은 빙글거리며 대꾸했다.
"생명나무의 비밀을 알고 있는 브리트라님의 힘을 빌면 그 정도쯤
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하하!"
승희는 마음 속으로 매우 동요가 되는 것을 느꼈다. 분명 완전 잘
라졌던 두 팔이 멀쩡하고, 스스로의 아스트랄에 적중되어 까맣게 얼
굴이 타버린 자가 그 짧은 시간동안에 저렇게 완전히 나을 수 있다
니! 저 놈들은 정말 생명에 대한 비밀을 알고 그걸 응용하고 있는것
아닐까...? 현암은 움찔하는 듯 보였다. 현암의 머리속이 방망이질
을 하듯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 현암... 네놈도 대단하구나... 퇴마사 중 으뜸의 공
격수라는 말이 헛것은 아니었어... 허나, 네놈은 이제 끝이다. 네놈
은 우리의 금지된 의식을 봐 버렸어... 보아선 안될..."
묵묵히 몸전체에 퍼져오는 고통을 참으면서 기를 돌리고 있던 현암
이 입을 열었다. 고통이 생각외로 극심했다. 주위를 철벽같이 둘러
싸고 있는 안개 때문이었을까? 죽을 각오를 하고 나왔으나, 정말 이
상태로는 싸울 수 없을 것 같았다...그러나 물론 그런 기미를 보일
수는 없었다...
"저주받을 놈들... 인간이, 같은 인간의 생명을 이용하여 알아내야
될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그것도 너희를 추종하던
자들이었지?"
"그들은 기꺼이 죽어갔다. 생명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의식의 영
광스런 제물로..."
"미친 소리! 마약, 아니 환각에 중독된 상태에서 말이냐!"
대사제가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 답변을 하지 못하자 현암이 날카
롭게 추궁했다.
"흠... 틀림없군. 신도들의 육신의 죄를 사해 준다고 육신을 바치
라고 했겠지... 안봤어도 본 듯하다...그 모두가 신의 섭리라 했겠
지? 그리고 환각상태에 빠져 판단능력을 상실한 그들을... 아직 숨
을 쉬는 상태에서 해부하여 샘플... 그 저주받은 길일을 택하는 의
식을 위한 샘플... 간을 꺼낸거지?"
대사제가 으흐흐흐 하며 나직한 웃음소리를 냈다. 옆의 다른 남자
는 아직까지 아무 말도 없었고, 아직 후드를 걷지도 않아서 얼굴마
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승희는 현암이 봤다는 몸서리 쳐지는 광경
을 상상하면서 몸을 떨고 있는데 현암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네놈이 총질을 할 때에 또 다른 중요한 것도 보았다... 아보
르 비타에 크루치픽사에....."
대사제와 가만히 있던 다른 남자까지도 움찔하는 듯 했다. 현암은
됐구나 싶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군... 십자가의 생명나무... 그건 카발라의
율법의 나무를 역으로 새긴 문장이었다... 율법의 나무에는 열개의
장이 있지...그런데 아홉개의 샘플... "
승희는 계속 초조하게 일편 현암의 말을 들으며 한편으로는 두 녀
석의 동태를 살피느라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다. 오늘따라 현암은
퍽 말이 많았다. 평상시의 성격같았으면 벌써 튀어나갔을텐데...?
" 그 인간의 간들은 모두 구했나? 아니면 다른 한개의 간은 미리
구했던 거였나? "
" 넌 너무 많이 아는군...흐흐흐...마지막 하나는 특별한 것이 필
요하다... 강한 능력을 지닌 주술사의 간이 필요한 거야...아마 너
의 것이라면 충분할 것 같군..."
대사제가 음험한 눈을 빛내며 한 발 앞으로 다가서자 현암은 오른
손에 들고 있던 월향을 던졌고, 월향은 대사제의 발 바로 앞에 박혔
다.
현암은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 이상... 더 이상 몸을 움직
일 기운이 없었다. 현암도 초인이나 불사신은 아닌 것이다. 그는 시
간을 끌고 있었다. 승희는 왜 내 마음을 모르는 걸까?
'승희... 너는 잠재력이 있다... 내 마음을 읽어라... 승희... 난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현암은 예전, 차 안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을 기억하고 계속 생각해
왔었다. 그 당시 터무니 없는 것으로 웃어 넘겼지만... 그 때 현암
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맞추어 보라고 했었고, 승희는 연인을 생
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월향을 이용
한 파사신검의 검식이었고... 터무니 없는 것일수도 있었다... 그러
나 현암에게, 이미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현암에게 단 한가지 남은
연인은 어떤 것이었나? 스스로에게 반문한 현암은 그 사실을 생각해
냈었다... 물론 너무나 미약한 단서였지만, 승희가 완전히 잘못 짚
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줄곧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건 일종의 예감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는 이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시 한 번 도박을 걸고 있었다...
"아직 이르다. 너희는 나와 싸워 이기는 것이 끝인줄 아느냐?"
"흐흐흐... 그 신부 늙은이와 어린 꼬마를 말하는 거냐? 놈들은 아
마 지금쯤 살인 혐의로 경찰에 잡혀 있을거다...흐흐흐..."
"흥! 무의미한 함정에 빠트린 걸로는 시간은 끌 수 있을지 몰라도
막을 수는 없을거다. 나는 내가 알아낸 사실들을 모두 기록해서 감
추어두었다. 물론 나를 이길수도 없겠지만, 설혹 내가 죽더라도 그
들이 모든걸 뒤집어 놓을 거다...!"
승희는 신경질적으로 현암을 돌아보았다. 왜 월향까지 던져 버리는
거지? 그리고 현암은 왜 싸우지 않는거지?
그런데 승희가 가까이서 현암의 옆모습을 보니, 태연한 얼굴을 하
고는 있었으나 얼굴 전체에서 엄청난 땀을 흘리고있었다. 그리고 그
손... 두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왼손으로 승희에게 계속 무언의 신
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 현암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야! 이대로 싸워서는
우리에게 승산은 없어! 그렇다면... 현암은 시간을 끌고 있는걸까?
아니면 비밀을 알아내려는 것일까?'
"하하하... 영리한 놈이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기죽을
것 같냐? 너는 계속 입을 나불대서 우리의 비밀을 알아내고 싶은 모
양인데? 이제 더 이상 수작을 부리지 마라..."
대사제는 막 품에서 뭔가를 꺼내며 땅에 박혀 있는 월향검을 넘어
성큼 앞으로 다가설 모양이었다. 놈이 꺼내는 것은 새로운 펜타그램
과 기관단총이었다....
현암은 계속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승희! 승희!...이젠 시간이 없다!'
갑자기 봇물이 밀려들듯, 승희의 마음속에 현암의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승희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 한 걸음을 물
러 났다... 현암은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승희! 승희! 나는 더이상 버티지 못한다! 내가 공격을 개시하는
순간, 안개벽을 네가 들고 있는 축융부적으로 뚫고 나가라! 축융은
불의 신...이 두터운 안개벽도 뚫을 수 있을거다! 나가서 이 모든걸
박신부님께 알려! 듣고 있나? 승희? 알고 있는 거냐? 지금이다...
지금!!!'
공력이 흩어지기 일보직전인 현암이 노렸던 때가 왔다. 대사제가
막 월향검을 넘는 순간, 현암은 양주먹을 합하며 최후로 남아있던
전신의 기력을 모아 월향검에 보냈고.... 힘을 얻은 월향검은 박혀
있던 상태에서 그대로 위로 솟구쳐 올랐다...
"승희!!! 뛰엇!!!"
"으아아아악!!!!!"
위로 솟구쳐 오르는 월향은 귀곡성과 함께 그게 그런 칼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한 대사제의 오른쪽 다리를 꿰 뚫고 몸을 그대로 관
통하여 등을 뚫고 튀어 나갔다. 피가 사방에 튀면서 대사제는 비명
을 지르면서 그대로 그자리에 무너져 갔다... 이것이 유일하게 현암
이 할 수 있었던 최대의 공격이었다...
최후의 힘을 다 써버린 현암의 몸에도 상처들이 다시 탁탁 터져 붕
대 사이로 다시 피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놀란 승희가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현암이 쓰러져 가며 중얼거렸다..
"승희..! 빨리... 빨리 가... 남은 한... 한 놈은..."
"싫어! 난 안가!"
"저... 대사제 이상의 강한 기운... 어... 어서..."
현암의 고개가 푹 꺾어졌다...
"나 혼자선 못가! 이 바봇!!!"
승희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면서 들고 있던 축융의 부적을 다른 한
명에게 집어던졌다... 부적은 날아가면서 승희의 힘을 받아 불덩이
로 변하고 삽시간에 거대한 불공이 되어서 다른 한 명의 사람에게
덮쳐갔다...
"죽어랏!"
승희가 악을 쓰면서 불공은 그대로 다른 한명의 남자를 덮쳐서 거
대한 불보라를 만들어 냈다...
"됐다!"
승희가 의기양양하게 외쳤으나... 불길이 사라지자 다시 그 남자의
모습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타났다... 오른 손을 쫙 펴서 든채
로... 분명 그 축융의 불공을 단지 맨 손바닥으로 막아낸 것에 틀림
없었다.
"으아! 엄청난 놈!!"
승희가 이제 마지막 남은 성모상을 들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데, 그 남자는 후드를 벗어 뒤로 확 젖혔다. 거기에 나타난 것은 분
명 한국인이 아닌... 아랍인같아 보이는 늙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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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저것!!"
정신 없이 차를 몰던 박신부가 준후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거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속에서 잠시 화광이 번쩍
하는 듯 했다. 분명 그들의 아지트가 있는 방향이었다.
"축융! 축융부에요!"
"역시 놈들이 습격해 왔구나! 준후야! 꽉잡아라!"
박신부가 이를 갈며 있는 힘껏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속도계는 160
을 가리키고 있었다...
9. 악전고투...(4)
아랍노인은 땅에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는 대사제의 옆으로 갔다. 대
사제의 상처는 상당히 중상인듯, 쿨럭거리며 숨을 쉴때마다 입에서 피
거품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승희는 공중에 떠 있던 월향을 불러서 손
에 쥐고는 쓰러져 있는 현암의 앞을 막아섰다. 그 아랍노인은 그런 승
희의 행동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묵묵히 대사제의 상처를 살피고 있
었다.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으
며 그 아랍노인에게 외쳤다.
"넌 또 누구냐! 네가 주모자냐?"
아랍노인은 흘낏 승희를 보고는 서툰 한국어로 대답했다.
"나는 바빌론의 바루(Baru:점복술사)... 엔키두라고 한다... 그대도
보아하니 강한 신을 몸에 지닌 자로구나..."
"무서우면 썩 물러가라!"
"우하하하하핫..!"
아랍노인은 하늘을 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샘플이 세개나 되는군! 어느것을 택할까!"
하면서 아랍노인은 알아먹지 못할 무슨 소리를 중얼거렸다. 승희는
쭈삣했다.
'세개? 세개라고? 현암하고 나... 그러면 저 대사제까지? 으윽!'
승희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물러설수 없다고 생각하자
도리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몸에 무슨 열기같은 것이 느껴져 왔다.
아랍노인, 엔키두가 대사제에게서 떨어져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뭔
가 승희에게 말했으나 승희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랍노인도 승
희가 하나도 못알아듣는다는걸 눈치챈듯,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양손
을 마주쥐고 눈을 감은채 무언가 주문같은 것을 외우기 시작했다. 무
슨 샤마시(*주 1) 어쩌고 하는 것 같았다...
승희가 힘을 모아 월향을 내쏘려고 하는데,갑자기 눈부신 광채가 승
희에게 덮쳐드는 것을 느꼈다.
"이...이게 뭐야!"
승희는 얼떨결에 눈을 가렸다. 손에서 월향이 귀곡성을 지르며 날아
가다가 너무나도 밝게 비치는 광채에 그만 힘을 잃고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으...으...그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 뜨거운 열기같은 것이 몸 전
체에 퍼져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열기가 점점 뜨거워져 갔다...
"아악!"
승희는 눈도 뜨지 못한채 어쩔줄을 몰랐다... 이제 열기는 마구 심해
져서 온몸이 데어버릴것 같았다. 아니, 이대로 가면 온몸이 타버릴지
도 몰랐다. 귓전으로 바루(Baru) 엔키두의 주문소리가 음산하게 들려
왔다...
"안돼! 안..."
승희는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젠 몸에 불이
붙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비명조차 지를 힘이 없었고...헌데...
"음?"
승희는 자신이 뭔가 들고 있는 왼손에는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갑자기 눈치챘다. 그건 박신부가 모셔 놓았던 성모상이었다...승희
는 억지로 실눈을 뜨고 왼손에 쥐고있던 작은 성모상을 보았다. 성모
상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승희는 성모상을 치켜올려 자신의 얼굴
을 가렸다. 성모상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승희의 왼손을 적시면서 승
희는 자신을 몰아 붙이던 열기가 조금씩 가셔가는 것을 느꼈다... 승
희는 눈을 떴다. 아직도 주변은 너무 밝고 그 벽같이 둘러친 안개도
그대로 였으나, 승희는 주문을 외우는 바루의 안색이 변한것같이 생각
되었다.... 바루 엔키두는 안되겠다고 생각되었던지 다시 다른 주문을
외우려하고 있었다... 승희는 최후의 힘을 짜냈다.
"야아아아아앗!"
승희가 갑자기 성모상을 내밀고 빛의 장벽을 뚫고 총알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바루는 의외의 사태에 주춤하는 듯 했고... 승희는 짐작
으로 바루가 있는 방향으로 튀어나가 바루의 몸에 성모상을 맞혔다.
- 쾅!
갑자기 성모상에 적중된 바루의 몸에서 설명할 수 없는 폭발이 일어
나고 승희는 그 힘에 뒤로 나가 떨어졌다. 눈앞에 별이 보이며 어디를
어떻게 부딪혔는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승희는 간신히 눈을 떴
다. 바루가 어떻게 되었나 보기 위해서였다...
"아니!"
바루는 아직 그대로 서있었다. 성모상에 적중된 가슴 언저리의 옷이
찢어져 나가고, 시커멓게 탄 것 같은 자국이 보였지만, 그는 아직 그
대로 서있었다. 아니, 얼굴은 도리어 노기에 가득차 있었다. 바루가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 내용이
욕설일 것은 뻔했다. 승희는 자신의 모습을 힘겹게 살펴 보았다. 아까
의 열기 때문이었는지 옷은 검게 그슬려 있었고, 나가 떨어질 때 잘못
되었는지 왼발이 이상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리고 이젠 조금도 몸을
움직일수가 없었고...
바루가 품에서 이상하게 생긴 돌칼을 꺼냈다. 그리고는 음흉한 미소
를 머금고 승희에게 한발한발 다가오고 있었다. 승희는 눈을 감았
다...
'미안해...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어.... 현암... 신부님... 준후...'
--------------------------------------------------------------------
"앞이 안보여요! 신부님! 속도를!"
"그럴 틈이 없어! 승희는 얼마 버티지 못해!"
먹장같이 둘러친 안개 속에서도 박신부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아
니, 아예 나침판 하나만을 목표로 하여 직선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
었다. 갑자기 왼쪽에서 나무같은 것이 순간적으로 보였다가 쏜살같이
뒤로 멀어져 갔다.
"신부님! 거의 다 왔어요! 속도를 줄여요!"
그 나무는 그들의 아지트에서 2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박신부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이이익!
승희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감았던 눈을 떴다. 눈 앞에서는 바루가
돌칼을 높이 들고 서 있었고... 그런데 그 눈은 한껏 부릅뜬채 그의
왼쪽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안개 속에서 두개의 불빛이 번뜩하면서 무언가가 달려 왔
다...
자동차...
채 속력을 줄이지 못한 자동차는 그대로 바루의 몸을 들이 받고는 아
슬아슬하게 승희의 앞을 비껴 지나가 앞쪽의 돌담으로 달려 나갔다.
바로 박신부의 차였다.
아직 채 줄지 않은 속력으로 담을 들이 받는다면.... 승희가 악을 썼
다.
"신부니임----!"
순간적으로 차 양쪽의 문이 열리고 두사람이 뛰어 내렸다. 차는 그대
로 돌담에 부딪혀 굉음을 내며 찌그러져 버렸다. 승희는 안타까왔으나
걸을 수가 없었다. 아니, 걷는것이 아니라 몸조차 일으킬 수 없었
다... 차에서 뛰어내린 두사람 중
먼저 정신을 차린(몸이 가벼워서 충격이 덜했다) 준후가 승희에게 달
려 왔다.
"누나! 괜찮아요? 아이고 이거 너무 고생한 것 같네요!"
"난 괜찮아.. 그보다 현암씨..."
고개를 돌린 준후가 쓰러져 있는 현암에게로 다가갔다. 맥을 짚어 보
더니 준후가 한숨을 쉬었다.
"별일 없어요... 기력이 떨어진 것 뿐... 이제 괜찮아 질거에요..."
승희가 안심한다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으악! 준후야! 저...저...!"
놀란 준후가 뒤를 돌아 보았다. 쓰러져 있는 대사제 옆에 누군가가
서서 돌칼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바로 바루 엔키두였다.
"샘플...!네...네것이라도!"
승희는 그 사악함에 치를 떨며 소리를 질렀다. 놈은 아직도 죽지 않
고 주술사의 간을 꺼내기 위해 자신과 같은 편인 대사제를 해부하려는
것이었다.
준후가 부적을 꺼내려 했으나 어느새 엔키두가 일갈을 발하자 불덩어
리 같은 것이 날아와 준후에게 적중했다.
"으앗!"
준후가 충격으로 데굴데굴 뒤로 구르자 엔키두는 돌칼을 높이 들었
다. 그때 엔키두의 등 뒤에 무언가가 적중했다.
"캬아아악!"
박신부의 성수 뿌리개였다.. 성수 뿌리개가 깨어지면서 흘러 나온 성
수가 사악한 엔키두의 등을 적시면서 푸른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엔키두는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굴려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
다....
승희가 왼발을 질질 끌면서 기어서 준후에게로 갔다.
"준후야, 괜찮아?"
준후는 약간 충격을 입었을 뿐, 다행히도 별 상처는 없는 듯 했다.
"아.. 괜찮아요... 신부님은?"
박신부도 머리를 감싸쥐고 안개 저편에서 걸어 나왔다.
"아이고 머리야... 글쎄 뛰어내리다가 머리를 부딪혀서... 다들 괜찮
으냐?"
"아... 예..."
"오늘은 정말 최악의 날이군 그래... 모두가 다 다치다니..."
준후가 말했다.
"전 안 다쳤어요!"
"음.. 그래그래... 아뭏든 다행이다. 잘 넘어갔어... 승희야... 정말
고생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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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으로 망가진 집안을 대강 정돈한 일행은 우선 현암을 편하게 눕
히고 중상을 입은 대사제를 안으로 옮겼다. 대사제는 정신은 아직 있
었으나 중상으로 인하여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승희의 발목은 박신부가 옛날 솜씨를 발휘하여 다시 맞춰 주었고, 현
암의 붕대와 링겔도 다시 갈아 주었다. 그리고 박신부가 대사제의 상
처를 살피려하자 대사제는 소리를 질러댔다.
"이놈들아! 뭣하려는거야! 으아악!!!"
박신부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진정하게... 치료하려는 것 뿐이니.."
"이...이놈들! 거짓말마! 날 죽이려는 거지! 죽이려면 빨리 죽여랏!
나는 한마디도 불지 않겠어!"
보다못한 승희가 욕을 해댔다.
"저 망할 녀석! 자기편에게 해부당할 걸 구해 줬는데 말 버릇이 그따
위냐!"
"건드리지마라! 차라리 위대한 브리트라의 제물이 되는 것이 낫다!
저리가! 저리!!"
놈은 악을 쓰며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역시 중상을 입은 때문인지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박신부가 표정없는 얼굴로 그자의 가슴부분
의 옷을 찢고 상처를 살피자 대사제는 박신부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건드리지마! 퇘!"
박신부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가 다시 묵묵히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
다.
"저리갓! 더러운 신부놈! 퇘! 퇘!"
놈의 피섞인 침이 박신부의 얼굴로 계속 날아드는데도 박신부는 묵묵
히 상처만을 매만지고 있었다. 보다못한 준후가 소리쳤다.
"야! 저 지독한 놈!"
승희도 뭐라고 욕을 퍼부으려 했으나 박신부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준후와 승희, 그 대사제 까지도 입을 다물었다. 승희는 화가 나는 듯
준후와 함께 휭하니 밖으로 나가버렸고 박신부는 아무 말 없이 그자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고는 역시 말한마디 없이 밖으로 나갔다.
대사제라는 그자도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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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싸움이 지나고 모두들 잠에 골아 떨어졌다. 대사제라는 자만
빼고는... 대사제는 곰곰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며 고개를 미친 듯
젓다가는 또 눈을 번쩍거리기도 하며 계속 번민하는 듯 했다. 그러다
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발목에 감추어 두었던 단검을 꺼냈다. 그리
고 멀찌감치에서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는 현암을 한 번 돌아 보고는
방을 나섰다.
박신부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방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사제는 고통을 참아가면서 발소리를 죽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박신부는 잠들어 있었다. 평온한 얼굴로 드릉드릉 코를 골고 있었다.
대사제는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박신부의 가슴을 겨냥하고는....
그때 대사제의 눈에 박신부가 벗어 놓은 안경이 눈에 들어왔다.. 까
만 뿔테 안경... 벗어 놓은 그 안경의 모습은 대사제에게 너무도 우스
꽝스러웠다... 그의 아버지... 벌써 얼마나 오래전의 일이었던가...그
의 아버지도 시력이 나빴다... 그래서 항상 잠을 깰때면 주변을 더듬
거리면서 안경부터 찾곤 했고 그는 그런 광경을 볼때마다 미련한 아버
지를 마음 속으로 비웃었었다... 그래... 그때는 비웃었었다...
대사제는 다시 한 번 박신부의 평온한, 조금은 미련스럽게 코를 골고
있는 얼굴을 보았다... 만약 박신부가 아까 자신에게 한마디 말이라도
했었다면, 잘난체 하는 설교를 하려 했었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졌던 신념, 그 악착같
고 확고부동하던 집념들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뒤로 돌아섰다.
그의 등 뒤에는 어느새 현암이 서 있었다. 대사제는 놀라 꿈틀했다.
현암은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고는 박신부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는 대사제와 함께 그들이 누워 있었던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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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방으로 가는 것을 알았나?"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현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내가 그 칼을 내리쳤다면... 아니, 그러지 못하리라는걸 알
고 있었나? 응?"
현암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쨌든 환자네... 지금은 그 이상, 이하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위대한 브리트라의 대사제..."
"아니... 고통받고 있는 한사람에 불과해...."
대사제는 뭐라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생각하는 눈치
였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고문하면 뭔가 나올 것 같나?"
현암은 웃어 넘겼다.
"우린 사람과는 싸우지 않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면.... 하물며 사람을 괴롭히지도 않아... 자네는 포로가 아냐... 가
고 싶으면 언제라도 가게... "
"거짓말!"
대사제는 악을 썼다.
"위선자들... 그렇다면 왜 우리와 대적하고 싸웠지? 왜?"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지... 세상의 고통을..."
"나를 풀어주면 또 그 잔인한 의식을 할 거야... 더 많은 사람을 죽
일거고... 그런데도 날 풀어준다고? 거짓말! 무슨 꿍꿍이야!"
현암은 고개를 돌리고는 자리에 누웠다.
"자네는 그러지 못해..."
"뭐?"
"남에게만 해 오던 고통을 이젠 자네 알았으니까... 자네 역시 해부
당할 뻔 했으니까... 그리고 자네는 이미 한 번 마음으로 졌으니까...
신부님을 왜 찌르지 못했지?"
현암은 말을 마치고는 돌아 누우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자두게... 낫고 싶으면... 주술력으로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한
계가 있는거네..."
대사제는 망연히 앉아 밤을 지샜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어느덧 긴 밤이 지나고 창 밖이 붐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주 1: 샤마시 : 고대 바빌로니아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의 이름.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길가메쉬를 돕는 선한신으로
나옴....
10. 비밀...
승희는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는 너무도 고단한 하루였다....
기지개를 켜면서 보니 옆에서 준후가 꼭 걸레빨아 놓은 것 같은 모양
으로 구석에 쳐박혀 아직도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승희는 피식 웃
음이 나오는 것을 느끼며 어제의 싸움은 참 힘들었었지...하고 생각했
다.
'그래...참 힘든 싸움이었다... 바루라는 엔키두...그리고 대사제..'
음? 대사제...? 그리고보니 어제 중상을 입은 그자를 데려와서는...
그자와 같은 지붕 아래 밤을 보내면서...
'으... 그놈이 혹시 무슨 짓을 했으면....'
승희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얼른 일어나 현암과 대사제를 같이 눕
혀 놓았던 방으로 가보니 현암은 이미 일어나있었다... 그리고 그 앞
에는 대사제가 누워 있었다. 아니...그런데 그 자는...
"윽! 현암씨! 이거 어떻게 된거야!"
대사제의 모습은 하룻밤 사이에 믿어지지 않을만큼 변해 있었다. 두
손목은 다시 잘라져서 바닥에 따로 딩굴고 있었고 얼굴도 알아보지 못
할 만큼 검게 타 있었으며 붕대를 감아 응급조치를 했었던 몸도 선혈
이 많이 번져 나와있었다... 그리고 몸 전체가 미이라처럼 바싹 마른
채로 죽어있었다...
현암은 묵묵히 그 시체를 계속 내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 이 사람은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던 흑마술의 주술력을 스스
로 풀어 버린거야... 그러면 곧 죽는다는 걸 알면서..."
"주술력? 어제만 해도 멀쩡해 보이던데..."
"아니, 전에 우리들과 싸울때 입은 상처는 그대로였어. 그걸 그냥 강
한 주술로 막고 있었던 거지... 악인이긴 했지만... 그래도 ..."
승희가 뭔가 눈치를 챈듯 말했다.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어? 같이 얘기 해 봤어?"
현암은 고개를 돌려 승희를 피했다.
"역시 인간의 마음이란.. 아니아니, 몰라도 돼..."
말을 이으며 현암이 옆에 떨어져 있는 종이조각을 집어 잠시 보고는
승희에게 주었다.
"이 친구의 유서야..."
승희는 마구 갈겨써서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가 가득한 종이조각을 받
아들었다. 그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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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이 이 글을 읽을 때쯤 나는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것이
다.. 나는 밤새 고민했다... 내가 옳은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
니, 나는 옳은 판단을 한 적이 없었던것 같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겠
지... 허나 이 방법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 나는 내 몸을 유지시켜
주는 흑주술의 주문을 거두려 한다... 당신들이 옳았다... 인간은 인
간으로 살아야 한다... 영생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내가 죄를
짓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어제 처음 깨달았다... 이제는 벗어날 수가
없다. 나 자신이 나를 용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브리트라여! 내가 위대한 신이요, 진리의 열쇠를 쥐고 있다
고 믿어왔던 그 그림자에 대한 회의가 들고있다. 물론 그렇다고 빌어
먹을 신부의 종교에 귀의한다는 따위는 아니다... 허나 내가 인간이었
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인간을 해치는 것이라면 어떤 신이나 뭐라해
도 좋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달
라졌을까? 나 자신이 놀랍다... 잊고 있었던 옛날 생각이 들어서 였
나? 빌어먹을... 차라리 그대들을 저주한다... 나를 다시 나약한 인간
으로 돌아가게 하다니! 아니,아니... 미안하다...
쓸데 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그대들에게 좋은 것을 알려주겠다.
그대들이 나의 나약함을 불러 일으켜 나를 이지경으로 만든 것처럼,
나도 그대들에게 금단의 비밀을 알려주어 죽음의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하하하... ]
읽다가 승희가 중얼거렸다. 박신부와 준후, 현암도 모두 모여서 승희
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현암이 중얼거렸다.
"제법 유머감각도 있는 친구였군..."
승희는 계속 읽기 시작했다...
[ 그대들이 추리한 것이 반 정도는 맞다... 우리가 섬기는 브리트라
는 고대부터 내려온 위대한 신의 한 면모로서, 브리트라의 형상이 뱀
의 모습을 띄고 있는 이유는 뱀이야말로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근원
적인 생명력에 가깝기 때문이다...]
준후가 신음소리 같은 걸 냈다.
"맞아요... 묘길상(문수보살)님께 점으로 물었을때에도 '뱀은 허물을
벗고 계속 태어난다...'는 대답을 했었어요!"
[ 우리들, 즉 윤영과 나는 성경에 나와 있는 에덴동산의 이야기에 주
목을 했다. 즉 에덴동산에 열린 두가지의 나무.. 선악과와 생명의 나
무에 대한 것인데... 성서에는 뱀이 인간을 꾀어 선악과의 과실을 먹
게 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 결과 우리는 그 내용이 실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박신부가 중얼거렸다.
"신학자 프레이저의 이론이로군..."
[ 즉, 원래 신은 스스로의 모습을 본따 만든 인간에게 영생을 주기
위하여 생명의 나무 과실을 먹게 할 의도였으나, 그 전령 역할을 맡은
뱀이 그를 바꿔치기하여 스스로가 생명의 나무 과실을 취하고 인간에
게는 그대신 선악과를 먹게 한 것이다. 이 내용은 물론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수는 없지만, 거기에 은유로 표시되어 오랜동안 내려온 비밀
이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단정지었다. 그래서 윤영과 나는 일단 독일
을 거쳐 고대 바빌로니아의 유적이 있는 근동으로 향했다...]
승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대사제라는 남자, 김윤영이라는 여자와 원래 잘 알았나봐요."
"음..."
[ 원래 유대교의 경전인 성서가 바빌론의 주술적 관점과 세계창조에
대한 관점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
다. 또 이후 기독교에서는 바빌론의 지식을 이단이나 사악한 것으로
몰아 붙이면서 말살시켰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두려워 한 것도 사실
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빌론에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다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바빌론의 옛유적들을 거의 도굴하다시피 뒤져
나갈 수 있었고 드디어 귀중한 카발라의 단서를 잡아내는데에 성공했
다. 그 성공은 바빌론에서 만난 바루인 엔키두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
능했다... 엔키두는 나이가 400살이 넘었다고 했다...]
"음? 400살?"
[ 그 카발라의 내용은 해석하기에 극도로 힘들었다. 그건 생명의 나
무를 그려놓은 도안 한장일 뿐이었다... 그 생명의 나무란 아까 현암,
네가 짐작했듯이 10개의 계율을 지닌 유대교 카발라의 율법의 나무를
역으로 구성한 것 처럼 보였다. 우리는 거기에 라틴어로 '십자가의 생
명나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를 해석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박신부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아보르 비타에 크루치픽사에(십자가의 생명나무)..."
현암도 잠시 한숨을 쉬더니 한마디하며 액자를 가리켰다.
"저도 그걸 봤읍니다... 저기 적어서 감춰두었지요. 지금은 쓸모 없
게 되었지만..."
준후가 독촉했다.
"계속 읽어 봐요!"
[ 윤영과 엔키두는 그 해석을 위해 소아시아, 히타이트, 페니키아 등
등의 각종 지역을 미친듯 찾아 헤매었고 나는 유럽의 흑마술계와 마술
학파 내에서 단서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구를 해 나갔다. 나는 단
서가 유럽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했고 그들은 근동을 고집했기 때
문이었다... 나는 생 제르망 백작(*주 1)의 이야기에 주목했었기 때문
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지쳐서 다시 모였다. 그때 우리들의 신비주의에 대
한 실력은 이미 대단한 경지에 달했었고, 갖가지 술수를 익힌 후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영생에 대한 비밀은 풀 수 없었다... 그런데 우연
히도 갑자기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그 도안을 뒤집어 불에 비
추었을때, 우리는 역으로 뒤집힌 것이 아니라 좌우가 바뀐 율법의 나
무를 보았고... 거기에서 아나그램(글자 짜맞추기)을 이용하여 우리는
그 생명의 나무의 도안이 실은 매우 복잡한 것으로, 각기 다른 세개
의 유파의 비전을 결합한 것을 알게 되었다...또 그 흐름은 꾸불거리
는 뱀의 모양이었고, 거기서 우리는 거기에 나오는 신의 이름을 베다
에 나오는 악한 (그러나 세상에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는가?)지혜의
신, 브리트라의 이름을 붙였다. 그 신이야말로 성경에 언급된, 생명의
나무의 과실을 취할 지혜를 가진 신이었으니까...
첫째 유파는 역시 바빌로니아의 마르둑(*주 2)신앙에 의한 것으로 생
명의 나무의 창시에 따른 것으로 되어있었다. 창시는 갓 태어났고 모
든 것의 기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는 이를 검토해 보고 여기
에 해당되는 3개의 율법의 희생으로 바빌로니아와 전혀 상관없는 이방
인의 신생아 3명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해석했다. ]
승희가 신음성을 냈다.
"으윽! 신생아라니!"
박신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페니키아의 신앙이었지... 악신 몰록(Moloch)을 섬기는 최고의
제물... 신생아... 그것을 다시 바빌론의 점술과 결합하여 간을 이
용...."
승희가 계속 읽기 시작했다.
[ 두번째 유파는 앗시리아의 전사신 아슈르(*주 3)의 힘으로 이어졌
다. 전사신의 능력은 힘... 우리는 역시 이를 검토하고 이를 위해서는
힘...즉 젊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앗시리아와
전혀 상관 없는 젊은이 3명의 샘플이 필요했다...]
"흠... 바빌로니아는 근동이었고, 앗시리아는 서쪽의 아리안 쪽에 가
까운 족속이지 않았나?"
박신부가 생각하고 있는데 준후가 물었다.
"그런데 왜 이방인을 바쳐야 한다고 한 걸까요?"
"아마 희귀한 것, 또 정복을 상징하는 의미였겠지."
[ 세번째 유파는 기이하게도 기독교의 이단들인 성당기사단(*주 4)과
관련이 있었다... 이부분은 십자가를 고문도구로 여기는 행위에 대한
말(*주 5)이 많이 나왔다.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 우리는 여기서 또
한 성당기사단과 관계가 없는 이방인 중 노인 3명을 제물로 바쳐야 한
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신생아...젊은이...노인... 준후야, 그 대사제의 지하실에서 보았던
시체들, 기억하지? 그게 모두 목적이 있었던 거였어...."
준후가 박신부의 말을 듣고 기억을 되살리자 비위가 뒤집히는 듯 했
다. 승희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 금방 토하기라도 할 듯한 모습이었
다.
[ 마지막, 중앙에 한 자리가 비었다. 이걸 만든 자들은 필경 중세의
악마파나 마술학파의 일원들로, 이렇게 9자리를 채우고 중앙을 완성하
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이 마지막 남은 자리, 율법의 나무
에서는 티페레트(Teferet)의 자리를 채울 희생물이 과연 어떤 것인가
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티페레트가 뜻하는 광휘(光輝)에
힌트를 얻어 강력한 이난, 즉 보통 사람 이상의 힘을 지닌 주술사의
간이 그 자리에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테트라 그라마톤이나 카
발라의 해석으로도 그런 결과가 나왔다...]
박신부가 침중히 말했다.
"음.... 정말 무시무시하군..."
[ 이제 하나 남은 문제는 신성한 제의를 위한 이방인을 구할 장소를
찾는 것 뿐이었다.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성당기사단과 전혀 관련이
없는곳... 그곳은 극동뿐이었다... 그곳은 피도 섞이지 않았을 것이고
이들 신앙과도 전혀 관계가 없었다... 또 무수히 많은 종교가 횡행할
수 있고, 또 그런 것들이 포용될 수 있는 신들의 땅이었고, 우리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왔고, 그 이후의 일들은 그
대들이 더 잘 알리라 믿는다...]
승희가 목소리가 떨리는지 말을 더듬거렸고, 나머지 셋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우리는 우리들의 아기를 첫번째의 제물로 바쳤다... 아아... 윤영
과 엔키두의 제의였고 나는 미처 그걸 막지 못했다... 그 일만 아니었
다면... 그 일이 나를 계속 괴롭히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죽더라도
이 비밀들을 그대들에게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
"으윽!"
"자신의... 자식까지!"
[ 나는 괴로웠지만 말 할 수 없었다... 첫단추를 잘못 끼우면 결국
하나가 모자라게 되는 법... 나는 그 사실을 잊기 위해 수 없는 잔인
한 짓을 벌였다... 마치 그것이 보상이라도 되는 것 처럼... 그러나
이제 제 정신이 든듯 하다... 윤영을 구해다오... 그대들에 대한 마지
막 부탁이다... 어제, 여기 쳐들어 올때만 해도, 나는 한가닥, 윤영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나는 방금 이 글을 쓰면서, 혼자 카발라를 되씹어
보았다... 전혀 다르게... 인간의 관점에서... 그 괘는 분명 영생을
가리키고 있었으나... 인간의 영생이 아니었다...]
"음?"
"아니... 더 읽어봐! 승희! 어서!"
[ 우리는 그걸 몰랐다... 스스로 영생을 얻겠다는 욕심에만 사로잡혀
서... 근본적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걸 몰랐다... 아.. 이젠 힘이 없
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현암에게 직접 말하고 싶지만 손을
움직이는 것도 무리다... 그... 의식...은...]
"뭐라고 썼어? 엉?"
"글자가 희미해서 읽기가 힘들어요! 손에 힘이 빠졌었나봐요... 여기
부터는..."
"이리 줘!"
현암이 종이를 승희에게서 받아서 기력을 눈에 집중해서 색깔조차 전
혀 없는, 펜이 긁은 자국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마 주술이 풀리면서
극도의 고통... 그것보다도 주술로 붙였던 손이 막 다시 떨어지는 순
간에 쓴 모양이었다...
"의...식....은...브리트라....뱀의 환생..."
박신부가 의자의 팔걸이를 으스러지게 움켜쥐며 신음하듯 외쳤다. 준
후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뱀의 환생이라고!"
"...구했는...지...몰라...도....주술사....간..."
"주술사의 간을 구했는지 모르겠지만...하는 뜻이군! 그 다음!"
"의...식...은... 바로....내....내일!!!"
넷은 망연히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고 있었다. 대사제가 죽기 직전
행한 괘가 맞다면, 대악신 브리트라, 아니 거대한 뱀의 화신일지, 악
마일지 모르는 악신이 이땅에서 부활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
고 그 의식의 시간은 바로 내일이었다....
"야단이군! 더 이상 없나?"
"무...무언가 더 쓰려 한 것 같지만.... 없어요..."
준후가 멍하니 말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어디죠?"
넷은 다시 한 번 멍하니 서로의 얼굴만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서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이 서로의 눈에 들어왔다...
*주 1) 생 제르망 백작 : 중세에서 근세에 걸친 유럽 전체의 역사에
까지 언급되는, 불사불노라는 괴인. 100여년의 주기를 두
고 항상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서, 역사적 사실을 예견하고
그를 막으려 헛된 노력을 한다고 함. (프랑스 대혁명때도
마리 앙트와네뜨의 처형을 막으려 애썼다함.)
*주 2) 마르둑(Marduk) : 기원전 2000년 초, 바빌로니아 발흥 시기에
숭배되었던 신. 거의 최초의 유일 신관에 따른 신이며 당시
사제들은 마르둑이 전능한 신이라 하고 다른 다양한 신은
모두가 마르둑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 믿었다. 즉 죽음의
신 네르갈(Nergal)은 전쟁의 마르둑, 일부에서 주신(主神)
으로 여겼던 엔릴(Enril)은 권력의 마르둑 하는 식으로..
*주 3) 아슈르(Ashur) : 앗시리아가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후 기존의
바빌로니아 신관은 그대로 남았으나 새로운 부족신으로 등
장한 것이 바로 이 아슈르였다.
*주 4) 성당기사단 : 십자군 원정 이후 주둔군으로 동방에 남은 기사
단들이 마니교 및 카타르교들의 영향을 받아 철저히 비 기
독교적인 이단으로 화했다 한다. 이들은 악마적인 의례와
주술을 사용하여 공포의 대상이 되었었으나 정치적 필요로
오랜기간 존속, 그 진정한 정체는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소설 '푸코의 추'를 보시면 엄청 자세히 나온다.
*주 5) 원래 마니교(페르시아에서 발생된 배화교로 그 시조가 짜라투
스트라이다. 이는 중국으로 퍼져 명교, 마니교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의 일각에서는 십자가등을 하나님의 고문수단으로 여겨 업신 여겼으며
결혼과 출산의 무의미성을 선전하기도 했다 한다.
11. 초혼(招魂)...
"이걸 어떻게 하지? 그 대사제라는 자,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쳐주
지 않고 그냥 죽어 버리다니..."
박신부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아직 좀 멍한 얼
굴이었다.
"의식장소가 혹시 사교의 총단이 아닐까요?"
승희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데 현암이 부정했다.
"아니, 총단은 도회지에 있고, 또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
아닐 것 같은데?"
"그러나 꽤 큰 건물이던데? 그리고 지하실이나 밀실이 있을 수도
있고..."
박신부가 둘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시간이 없네. 지금 만약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되면, 브리트라가
소생하는걸 막을 길이 없어져. 바로 내일의 일인데..."
"그 유서를 제게 줘요. 제가 투시 해 볼께요."
준후가 나섰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종이를 손에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투시를 행했고 셋은 침을 삼키며 준후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
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준후가 한숨을 쉬며 종이를 내려 놓았다.
승희가 다급하게 물었다.
"어때? 뭐가 보여?"
"아뇨... 이것저것 쓸 데 없는 것만 보이고..."
박신부가 빠른 걸음으로 서재를 향해 가더니 책들을 마구 뒤져보기
시작했다. 바빌론이나 그 주변의 종교습관들을 조사해 보는 모양이
었다. 현암은 자리에 누운 채 유서로 남은 종이조각을 여기저기 뚫
어져라 살피고 있었고 승희는 나름대로 머리를 짜내느라 얼빠진 것
처럼 보였다. 준후는 얼핏 어떤 생각이 들었다.
"현암형?"
"응? 왜?"
"대사제의 혼을 불러 보는게 어떨까요? 아직 채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초혼(招魂) 해 보자구?"
"예... 그렇게 해서 물어보지 않으면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아요."
박신부가 그 말을 듣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꼭 그래야 할까? 그런 걸 자꾸 하면 준후 네게..."
"괜찮을 거에요... 부르기만 하는 건데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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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준비하여 신필을 매달고 초혼에 들어갔으나 이상하게도 역
시 잘 되지 않았다. 신필이 부르르 떨다가도 뭐라는 글자는 쓰지 못
하고 다시 눕고하기를 몇 차례나 반복하고 있었다. 현암은 좀 이상
하다고 느꼈다. 자기가 해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일텐데 그런 술
법에 능한 준후가 왜 이리 힘들어 하는지 몰랐다.
"준후야, 왜 그러지?"
준후가 땀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분명 불러 내기는 했는데, 뭐라고 답을 하지 않아
요. 이건 대체.."
승희가 답답한듯 말했다. 평상시 같았으면 이런 일을 보고 후들후
들 떨 승희였는데, 급하다 보니 이것 저것 가리지 않는듯 했다. 죽
을 고비를 여러차례 넘기다보니 그렇게 되었으리라.
"왜 답을 안하지? 자기가 꼭 이 일을 막아달라고 해 놓고선.."
"뭔가에 금제를 당하는 지도 몰라요. 승희누나! 금줄을 쳐줘요."
승희가 서둘러 준후의 금줄을 풀어서 주변에 쳤다. 박신부도 영 내
켜하지 않았으나 (이런 일이 필요해 질 때마다 박신부는 스스로의
신앙과 행동간의 번민이 심한 듯 했다.) 기도를 읊으며 준후를 도우
려는 듯 했다. 현암도 몸을 일으키더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상하군... 왜 아무 말이 없지?"
갑자기 천장에 달아 놓은 신필이 격렬하게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아볼 수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떠는 것에 불과
했다. 넷은 긴장하며 붓 끝만을 주시하였으나 결국은 신필이 허공에
서 우지직!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는 것만 보게 되었다. 하마트면 붓
조각에 얻어 맞을 뻔 한 박신부가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승희가 멍하니 말했다.
"분노..."
현암이 미간을 찡그리며 승희를 쳐다 보았다. 승희가 농담을 하고
있는 줄 알았으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승희의 얼굴은 심각했고, 뭔
가 놀라운 것을 갑자기 보았을 때 지을법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
다.
"분노... 알아낸 것에 대한... 큰 분노... 복수..."
"뭐지? 무슨 소리야, 승희?"
"복수... 그...그는 지금 몸을 원해요... 피를 보기 위한... 아니,
아니 어쩌면 그건 슬픔... 아니, 그보다는 복수..."
승희는 마치 뭐에 씌인듯이 보였다. 그녀의 입에서는 멍한 목소리
가 흘러 나오고 있었으나 어조는 심각했다. 현암이 몸을 일으켜 승
희에게 다가가려는 것을 박신부가 제지하고 조심스럽게 승희의 옆으
로 다가갔다.
"자기의 손으로 결말을... 아니, 이건,이건!"
승희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으로 박신부의 등 뒤를 가리켰
다. 놀란 박신부와 현암은 그쪽을 쳐다 보았다.
준후가 땀을 흠뻑 흘리면서 고통스러운듯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
안색은 몹시 파리했고... 준후의 얼굴위에 무언가 아롱거리며서 다
른 얼굴이 겹쳐서 희미해졌다가 또렷해졌다가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
다. 바로 대사제의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으아악! 준후야!!"
승희가 공포로 고함을 질러댔고, 현암이 몸을 번쩍 일으켜서 월향
을 불러 손에 쥐었다. 박신부도 십자가를 꺼내어드는데 분노로 안광
이 형형했다.
"신..신부님...혀..현암형.."
"나는 참을 수 없다..몸..몸을..."
준후의 입에서는 서로 다른 두가지의 음성이 마구 섞여서 새어 나
오고 있었다. 준후의 얼굴에 대사제의 얼굴이 번득거리는 속도가 점
점 빨라져갔다.
"대사제! 이 망할 녀석! 무슨 짓이냐!"
현암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혀...형! 이자는 내...내 몸을 통해..."
"그래! 엔키두, 그... 그는 이미...이미...지독한... 용서할 수...
없...없..."
박신부가 기도력을 발출하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
"으..으아..."
준후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나오며 몸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면서 대사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빌려줘! 하루... 하루만! 내 손으로 직접! 직접!"
박신부는 입술을 깨물며 계속 기도력을 발출했고 현암은 옆에서 소
리를 쳐댔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엔키두...그...그자는...빌어먹을! 으으으.."
"말해! 괜히 아이를 괴롭히지 맛! 우리에게 맡겨!"
"으.. 안돼! 이럴수가... 그는...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녀가 뭘 어쨌다는 거얏!"
"주술사의 간... 그걸 얻기 위해..으..으아!"
현암이 준후의,아니 대사제의 멱살을 움켜쥐고 소리를 질렀다.
"똑똑히 들어둬! 무슨 수작을 꾸미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이
아이의 몸에서 떠낫!"
승희가 정신을 차리고 뒤에서 소리쳤다.
"그는, 대사제는 지금 제정신이 아녜요! 분노로 정신이 없어요!"
현암이 다시 소리를 쳤다.
"정신 차리고 우리에게 말해! 어서! 무슨 일이야!"
"그...그...으.... 엔키두가 윤...윤영을...으..."
현암은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엔키두는 채 주술사의 간을 구
하지 못한채 상처를 입고 달아났다. 주술사의 간이 없으면 의식을
치를 수가 없었고... 그렇다면 대사제가 말했었던 윤영이라는 여자
는..? 결국 엔키두는 주술사의 간을 얻기위해 자기편인 윤영을...
"엔키두가 윤영을 죽였나? 엉?"
"으.. 윤영... 그..그녀는 이제 사람이 아...아니라...이미 바..반
은 브리트라의 화신..."
준후의 몸은 박신부의 기도력으로 파르르 떨면서 힘이 빠져 나가는
듯 했다. 박신부의 강한 기도력에서도 준후의 몸을 움켜쥐고 놓지
않다니, 지독한 집념이었다.
"신부님! 잠시 기도력을 멈추어 주세요!"
"안돼! 준후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
"제 말을 들어주세요! 어서요!"
박신부가 마지못해 기도력 발출하던 것을 멈추었다. 현암은 다시
대사제에게 물었다.
"이제 차근차근 말해 보자. 허나 곧 이 아이의 몸에서 물러나야 한
다. 알았나?"
"내손으로... 내손으로 막..막아야..."
현암은 조금 짐작이 갈 듯 했다. 대사제는 죽은 뒤에 엔키두가 의
식을 강행하기 위해 윤영을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이미 그 자신도 한 번 당할 뻔 한 일이 아니었던가?
"그...그놈은 이미 윤영을 반쯤...고통 속에 죽게하기 위해...안
돼...그놈의 힘은...윤영의 힘을 빼앗아..."
"고통? 윤영의 힘? 그게 뭐지?"
"윤... 윤영의 주술은 고통을 받을때 나타난다...그...힘을 조금씩
엔키두가 빼앗아..."
"어쨌거나 빨리 말해! 그 의식이 치러지는 장소는? 엔키두가 숨어
있는곳! 그곳이 어디라는 거야!"
"그...그전에 약속을..."
" 뭐지?"
" 내...내 시체를 그리로... 이건 중요한 일이다...그리고 꼭 그자
를...막..막아줘...자네 손으로...냉정한 머리로..."
" 뭐? 왜 그러는 거야?"
" 하여간 부탁이다...그리...그리로...힘...힘이 없다...설명할 시
간이 없다...약..약속을..."
현암은 어이가 없었다. 왜 자신의 시체를 옮겨 달라고 하는 걸까?
허나 지금은 어쨌든 그에게서 비밀의 장소를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
다.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고 준후의 얼굴에 겹쳐져 있는 대사제의
모습은 미소를 짓는듯 하며 희미해져갔다...
"고...고맙다...너..너를 믿는다...꼭...그 장소는..."
"어디지?"
"옛날 내 별장이 있던곳...기억나겠지?... 그곳의 뒷산....꼭대
기..."
대사제의 영은 준후의 몸에서 떠나 사라져갔다..... 둘의 대화를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박신부와 승희는 늘어진 준후의 몸을 받
아 간호하기 시작했다. 박신부가 손을 놀리며 말했다.
"대사제의 별장이라.. 거긴 다 타버렸을텐데? 그리고 경찰들이 조
사하느라 분주할거고.."
승희가 말했다.
"왜 모든일이 그 장소와 관련되어야 하는지는 가보면 알겠죠... 어
쨌든 그 엔키두라는 자, 정말 악랄하군요."
현암이 침중히 몸을 일으켰다. 박신부는 그런 현암을 보고는 서둘
러 만류했다.
"왜 또 일어나는건가? 자네 그 몸을 해가지고!"
"갈 준비를 해야죠.."
"뭐? 자네 지금 그럴 상태가 아니야! 아무리 기공술이 뛰어나도 철
인은 아니라구! 그 몸으로 또 싸울려고 하는건가?"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그 대사제가 꼭 내손과 냉정한 머리로 엔
키두를 막아달라고 했어요."
" 그건 자네에게만 한 이야기가 아닐거야!"
" 아뇨.. 뭔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저 대사제의 시체도 가
지고 가야해요."
승희가 기겁을 했다.
"으악! 저 시체를 가지고 간다고?"
"그가 다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자의 말을 믿어? 헛소리에 불과할지도 몰라!"
"난 믿어..."
"그런 악당의 말을?"
"아무리 악당이어도 그 자체가 악은 아냐..."
"그러나 자네는 몸이 엉망이야. 싸우게 둘수는 없어!"
"저도 압니다. 직접 나서지는 않겠읍니다. 아니, 그러려해도 못해
요. 몸은 이래도 공력은 많이 회복이 되었으니, 하다못해 월향을 조
종할 수는 있을 겁니다."
준후가 정신이 드는듯, 한숨을 토하는 바람에 대화는 중단 되었다.
박신부는 준후에게 조심해야 한다고 훈계를 하고 어쩌고 하는 속에
서 넷은 결국 사교와 마지막이 될 결전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
다...
12. 부동심결...
오전 중인데도 하늘이 먹장같이 어둡게 구겨지면서 뇌성벽력이 울리
기 시작하더니 굵다란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박신부
는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현암은 앞에 앉아 조용히 운기를 하
고 있었으며 준후와 승희는 뒷자리에 앉았다. 승희는 그 와중에서도
뒷 트렁크에 실린 대사제의 시체가 무척 껄끄럽게 여겨지는듯,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채, 차는 이제 마구 쏟아져 내리는 빗속을 뚫
고 세번째로대사제의 집터로 향하고 있었다. 문득 준후가 승희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아까 말에요.."
"응? 뭐?"
"아까 대사제의 영이 제 몸에 들어왔을때, 그 영의 생각을 읽었었
죠?"
"어떻게 알지? 넌 그때..."
"아...저도 그때까지는 아직 정신이 있었어요. 근데... 누나 그거 혹
시 독심술같은거 아녜요?"
앞자리에서 현암이 눈을 뜨며 숨을 내뱉었다. 아마 운기가 끝날때여
서 준후의 이야기를 무의식중에 들은 것 같았다. 현암도 말을 꺼냈다.
"예전에 대사제의 집에 처음 쳐들어갈때도 그랬고, 우리의 은신처에
서 대사제와 엔키두하고 싸울때에도 그 능력이 나왔었지..."
승희가 좀 부끄러운듯, 얼버무리려 했다.
"몰라...그냥 마음 속에 떠오른 것 뿐이야...뭐 여기 다른 사람들과
비하면 능력이라고 할 것도 없지 뭐..."
"아니, 중요한 거야."
박신부가 기어를 바꾸며 끼어들었다.
"만약 승희가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된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어. 적의 사악한 의도를 간파할 수도 있고, 감춰진 비밀을 알
아낼 수도 있고..."
"하지만 제 맘대로 나타나는게 아녜요. "
"수련하면 될 수 있을거야..."
"오늘이나 무사히 넘긴다면 그러죠.."
좀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사실 사교의 총단에는 400년이나 묵은
엔키두 같은 강한 주술사들이 더 있을지도 몰랐고, 사교의 광신도들이
무더기로 있을 것이 분명했다... 더우기 어려운 사실은, 그들이 모두
악귀나 마물이 아닌 숨쉬는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악인일지라도 인간
을 심판하거나 해칠수는 없었다. 넷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려운 싸
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한참이 더 지난뒤 승희가 입을 열었다.
"경찰을 부르면 어떨까요? 놈들은 살인,시체유기 등 갖가지 죄를..."
현암이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니? 사교도들만이면 모르지만, 브리트라가 깨어나
는 판에 경찰이 힘이나 쓸 수 있을 것같아? 경찰이 그런 악신을 체포
할 수 있겠어? 더구나, 누가 이런 일으 믿기나 하겠니? "
"쳇...결국 우리밖에 없다는 소리인가? 다른 주술가나 고수들도 많을
텐데..."
"물론 여러사람이 있지만, 그들의 도움을 청하기엔 시간이 없어...
그리고 우리가 이런 일을 알고 끼어들게 된건 또 우리의 운명이 그렇
게 지어져 있는거야..."
"현암군은 나만 미워해...쳇!"
"뭐? 현암...으...관두자 관둬. 지금은 농담 할 때가 아냐."
"그런데 저 시체는 왜 가지고 가지? 너무너무너무 싫어...으앙.."
준후가 입을 열었다.
"지금 대사제의 영도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요."
"으악! 뭐라고? 어머어머 어째..."
"그럴것 없어요.. 저하고 이미 몇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마 대사
제는 우리를 돕기 위해 최후의 주술을 쓸 것 같아요."
"최후의 주술?"
"거기 설치 되어있는 봉인이 있다는데, 그건 자신의 흑주술력으로 봉
인 된 것이라, 같은 자신의 흑주술이 아니면 풀지 못한대요. 그래서
대사제는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흑주술을 다시 한 번 써서 자신의 죽
은 몸을 조종해서 봉인을 풀어줄거래요.."
"으... 완전 좀비아냐..."
"모르겠어요. 좀 찝찝한 건 사실이지만... 믿어야지 어쩌겠어요? 대
사제도 마음을 많이 고친 것 같고... 또 그는 정말 윤영의 생각밖에
없거든요.."
현암이 중얼거렸다.
"윤영...윤영이라..."
아무래도 현암은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을 느꼈다. 왜 대사제가 이토록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서 자신들에게 헌신적이 되었는지 납득은 갔지
만, 그래도 뭔가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윤영...윤영이
라... 그렇다면 해석할수도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현암은 잠시 그 생
각을 접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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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어느덧 굽이를 돌아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다. 비는 이제 억수같
이 내리고 있었고, 대낮인데도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박신부는 대사제
의 집, 아니 전에 대사제의 집이 있던 터에 차를 세웠다. 대사제의 집
은 불에 완전히 타서 아예 거의 무너져 있었다. 넷은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차에서 내렸다. 준후가 현암에게 우산을 받쳐주려 했
으나 현암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준후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우산을 차에 집어 넣었다. 박신부가 타버린 집터를 보면서 중얼거렸
다.
"허무하다... 바빌론의 옛성이여... 이렇게 종말이 올것인데..."
준후가 잠시 사방을 살피더니 박신부의 옆구리를 찔렀다.
"신부님?"
"왜그러니? 준후?"
"사교의 일당이 자꾸 여기에 모이는 이유를 알겠어요."
"왜?"
"산세가 그렇게 되어있어요... 돌에 머리를 부딪힌 뱀의 형상이네요.
그래서 약이올라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있는..."
현암이 이미 잔뜩 젖어버린 머리칼을 한 쪽으로 쓸며 물었다.
"준후, 풍수도 볼 줄 아니?"
"헤헤... 전에 약간 배웠죠. "
"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어서 뒷산을 뒤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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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후가 마치 사냥개처럼 영기가 느껴지는 쪽을 쫓아 앞장을 섰다. 박
신부가 법의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대사제의 무겁기만한 시체를
싸서 지고는 그 뒤를 따랐고 그 다음에 벌써 오돌오돌 떨고 있는 승희
가 현암을 반쯤 부축하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현암은 오른손에 월
향을 굳게 쥐고 있었다.
한참을 가고있던 준후가 걸음을 멈췄다. 뭔가가 잡힌 듯 했다.
"저기...아마 저기가 틀림없을 것 같아요."
과연 준후가 가르치는 방향에서 이상한 기운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그다지 강한 기운은 아닌데... 브리트라가 아직 재생하지는 못
한 것 같군요.."
일행은 그 쪽으로 접근해갔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때문에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다가 승희
가 뭔가에 걸려 우당탕 넘어져 버렸다.
"아이고! 이런!"
뭐에 걸렸나하고 보았더니 무슨 긴 전선 같은 것이었다. 박신부가 승
희를 일으켜세우면서 그 선을 보았다.
"이건 전원 케이블인데.. 아마 이 산 어딘가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는
가보군. 아마 이걸 따라가면 녀석들의 은신처가 나올 듯 한데..?"
"그러면 이 기운은 뭐죠?"
박신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다지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기운이라면, 어쩌면 함정인지도 몰라.
엔키두는 우리에게 한 번 호되게 당했고, 어쩌면 우리가 찾아온다는
사실도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르지. 그러니 분명 대비를 해 두었을거
야..."
"그러면 이 기운은 함정이란 말인가요?"
"그거야 알 수 없지만, 늙은 주술사인 엔키두가 이렇게 기운을 노출
시키지는 않을 것 같아. 일단 이 전선을 따라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
군..."
일행은 걸음을 돌려 깔려 있는 전선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까의 영
기가 느껴지는 장소와는 거의 반대인듯 했으나, 한참을 가자 다시 굽
이를 돌아 그 기운이느껴지는 곳의 뒤쪽정도 되는 곳으로 가게 되었
다. 그리고 그곳에는 잘 감춰진 입구가 있었고 그 앞에서 사교도인듯
한 몇명이 보초를 서는듯 초라하게 비를 맞으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넷은 덤불로 얼굴만 내밀고 잠시 정찰을 했다.
현암이 (비록 비까지 맞아 상처가 쑤셔서 컨디션은 제로였지만)웃었
다.
"축복이 있으라! 행운의 발이여! 하하하..."
박신부도 기분이 좋은듯 했다.
"녀석들의 의식장은 산속의 굴이었나보군! 아까 그쪽의 기운은 의식
장 중에서 벽이 얇은 부분으로 새어나오는 거였을거야... 시간을 많이
절약했군. 승희의 행운의 발 덕분에..."
"놀리지 마세요. 긁혀서 피도 나는것 같은데. 아프다구요!"
"하여간에 입구는 발견했고... 어떻게 해야 할까?"
박신부가 전선을 찾아 들고는 미소를 지었다.
"난 이래뵈도 군에 있을때 장교였다구. 혼란시킨 뒤 기습하는게 최고
야. 인명피해를 줄이려면..."
현암은 박신부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월향으로 전선을 가차 없이 잘라
버렸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입구 안에서 뭐라는 소리가 들리면서 보
초를 서고 있던 사람들이 떠들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마 산속
의 굴 같은 의식장에 전기가 나갔으니 아마 아무것도 못할 것으로 보
였다.
"자! 가자!"
말은 박신부가 먼저 했는데 현암이 먼저 튀어 나갔다. 준후는 뒤따라
가면서 현암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정말 철골(鐵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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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에서 희미하게 준후가 발하는 주술만을 받으면서 현암은 다친
몸에도 불구하고 사교도들을 하나씩 쓰러트리며 길을 열고 나갔다. 사
실 그들에겐 주술을 쓰기도 좀 뭣했는데 현암의 주먹이 그 일을 대신
해주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부상때문에 좀 위력이 약하기는 했지만,
기공을 살짝 실은 주먹을 한대만 맞아도 사교도들은 고요하게 쭉쭉 뻗
어버리고 있었다. 정통으로 맞지않고 팔로 막거나 해도 결과는 마찬가
지였다. 현암이 '투'(透)자 결을 운용하고 있어서 주먹을 막아도 기공
력은 그대로 목표를 가격했기 때문이었다. 절룩절룩하면서 벌써 십여
명의 사교도를 무척 여유있게 넘어뜨리는 현암을 보고 승희는 현암이
권투선수 같은 걸 하면 천하무적이 될 것같다는 허망한 생각을 했다.
하여간 별 힘도 쓰지 못하는 사교도 잔당의 쓰러진 몸을 넘어 바위를
파낸 것 같은 좁은 길을 한 100미터가량 꼬불꼬불 전진하자 눈앞에 빛
이 새어나오는 문이 있었다. 안은 아직 조용한 것이, 별 눈치를 채지
는 못한듯 했다.
"자...여기가 의식장인듯 하군...현암군, 준후, 주의해라. 승희도.."
넷은 긴장하며 잠시 각자 부적과 무기 같은 것을 다시 정비했다. 박
신부는 대사제의 시체를 내려놓으며 허리를 폈고, 특별한 싸움기술이
없는 승희는 그냥 안절부절 못해했다. 준후가 부적을 몇장 꺼내 그들
이 들어온 길에 놓고 주문을 외웠다.
"화염진(火焰軫)이에요. 아마 웬만한 사람은 뜨거워서 이쪽으로 올
수 없을테니 안심하세요."
박신부도 승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안에서 치열하게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승희는 여기서 힘
을 발해 우리를 도와다오. 그게 더 좋아...저쪽에서는 들어올 수 없
고, 앞에는 우리가 나갈테니 안심해도 될거야."
승희가 생각해 보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세명의 힘을 증폭해주는
것 뿐이고 그러려면 차분히 앉아 있어야 했다. 괜히 싸움터에 가야 방
해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불안함에도 불구하도)승희는 고
개를 끄덕였다.
"자..그러면 준비 되었나?"
현암과 준후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신부가 눈짓을
하자 승희가 앉아서 힘을 보내기 시작했고 현암은 기를 오른손에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현암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오른손이 어둠속에
서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 쾅!
현암이 발출한 기공에 문짝은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문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셋은 날렵하게 안으로몸을 날려서 세 방향으로 흩어져
서..그리고...
현암이 인상을 찌푸렸다.
"으앗!"
박신부도 신음성을 냈다.
"아니!"
준후가 말을 더듬거렸다.
"으...브...브리트라..."
방안은 꽤 넓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환영같이 반투명한 거대한 뱀의
형상이 불타는 듯한 두 눈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한 삼십평은 될듯한
방을 가득채운,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역시 반투
명한, 검은 후드를 쓴 한 사람의 영상이 있었다. 엔키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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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벌써 환생했는가? 이...이런!"
박신부가 신음성 같은 것을 냈다. 엔키두가 입을 열었다. 서툰 한국
어였지만, 뜻은 알아들을만 했다.
"흐흐흐... 이미 늦었다. 이미 브리트라님은 여기 현신하셨다... 이
제 브리트라님은 이 세상 전체에 퍼져 나가실 것이고, 이 세상을 다스
리시리라... 브리트라님은 형체 없는 지혜... 고민없는 힘으로 보이지
않게 세상에 군림하실 것이니라..."
준후가 성을 내며 인드라의 뇌전을 내 쏘았으나, 번개는 허무하게 브
리트라의 영상을그대로 통과하여 뒤쪽의 벽에 맞아 사라져 버렸고,
박신부가 기도력을 집중시켜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셋은 당황하여 서
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여태껏 많은 악령과 싸워왔지만, 이렇게 거
대한 놈은 처음이었다...
엔키두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대들의 힘으로는 브리트라님을 이길 수 없다. 아니, 건드리지
도 못한다... 그대들이 어떤 수를 써도, 이미 불멸의 힘이된 브리트라
님을..."
현암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전에 승희의 몸에서 나온 애염
명왕과 대적할때에도, 분명 위력은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주술은 통하
기는 했었다. 저렇게 허망하게..
"이건 속임수다!"
"...애숭이...당해 볼텐가?"
거대한 뱀의 형상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뱀의 사발만한
눈이 이글거리며 광채를 내 쏘는 듯 했고, 줄잡아 지름이 사람키가 훨
씬 넘는 거대한 몸뚱이가 미끄러지듯 꿈틀대었다. 셋은 흠칫하여 뒤로
물러섰다. 뱀이 아가리를 벌렸다. 거대한 이빨들이 날카롭게 번쩍이고
있었다.
"현암! 속임수라니? 무슨 말인가?"
박신부가 땀을 흘리며 외쳤다. 현암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이건 환영입니다! 아마... 맞아요! 틀림없어요! 의식은 아직 완성되
지 못했어요! 놈은 시간을 벌려하는 겁니다!"
"시간을 번다구? 그러면..."
"우리가 온 것을 놈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의식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고! 놈은 의식을 마저 진행시키려 환영을 띄운것에 분명합니다!
아니면 주술이 그대로 통과할리가 없어요!"
엔키두가 눈썹을 치켜올렸고, 뱀은 성난듯 또아리를 풀고 쉭쉭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놈은 준비해두었던게 틀림 없어요! 놈의 말은 너무 유창합니다! 어
제까지 엔키두는 우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어요! 미리 원고를 써둔겁
니다! "
뱀이 입을 벌리고 현암을 향해 돌진해 왔다.
"으아! 현암형!"
"현암군!"
박신부와 준후가 소리를 쳤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멍해지는듯..시간
이 정지한 것처럼 현암의 주위의 모든 것이 현암에게 슬로우 모우션으
로 보여가기 시작했다. 뱀의 커다란 입이 자신의 앞에 닥쳐들고 있었
고... 갑자기 마음속에서 하나의 구절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동심결...!(不動心缺)"
- 일체가 무상이고영원은 없는것...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색(色)
도 없고 공(空)도 없는 것... 아무것도 없는 속에 움직이지 않는 하나
의 마음이 있으니 그것이 부동심(不動心)이라... -
오래전 산중에서 이인(異人) 한빈거사에게서 파사신검, 사자후와 함
께 배운 심결, 아직 한번도 사용해 본 일이 없던 무공이 현암의 마음
에 떠오르기 시작했고 현암은 마음이 바다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
으며 눈앞에 번쩍이며 다가오는 거대한 이빨들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
았다.
"현암!!!"
"현암형!!!"
박신부와 준후가 외치는 사이에 뱀의 거대한 아가리는 그대로 현암에
게 덮쳐들었고 그 순간 번쩍하는 광채가 현암의 몸에서 번져 나오는
듯, 아니, 주변이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가 된 것 같은 밝음 속
에서 닥쳐들던 뱀의 모습은 삽시간에 사라져 갔고 아무것도 없는듯,
짧은 동안이지만 영원같은 신비감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아...."
박신부가 감탄같은 소리를 내고 준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물(物)의 힘이 강하여 세상을 휘젓고 뒤엎어도 심(心)을 이기지 못
한다더니..."
어느새 엔키두의 환영도 순간적으로 뻗어나온 광채속에 사라져 버리
고 다만 현암만이 고요한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뱀의 환영이 겹쳐
있던 뒤로 다시 철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 주술로 감
추어져 있었던 듯 했는데, 현암의 부동심결 앞에는 모든 숨겨진 것이
진정한 정체를 드러내는 듯 했다...
현암이 눈을 뜨더니 갑자기 입으로 울컥 피를 토했다.
"아니! 현암군! 괜찮은가!"
박신부와 준후가 달려오려는 것을 현암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너무
나 힘에 겨운듯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 의도는 너무도 분명
했다... 박신부와 준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은 문을
서서히 밀어 젖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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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는 고요히 앉아 최선을 다하여 힘을 발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
느순간, 엄청난 기운이 몸에서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현암이 부동심결을 썼기 때문이라는 것을 승희가
알리 없었다. 갑자기 머리속이 아득해지며 눈앞에서 별 같은 것이 오
락가락하더니 승희는 그대로 땅바닥이 자신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 퍽!
'아이고고...고운 얼굴이 다 망가지네...'
정말 기운이 없어서 몸을 채 일으키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부스
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대사제의 시체가 들은 가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승희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느꼈으나 아직은 몸
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방의 지퍼가 갑자기 후드득 뜯어지면서 벌어지더니 대사제의 검게
탄 얼굴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잘려나간 팔이...
승희는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으나 무서움에 질려 그럴수도 없었다.
욕지기가 날 듯 했다.
'아니..그래도... 으...흉하기는 하지만 우리편이니... 그런데 왜 하
필 이럴때...'
대사제의 시체는 좀 뻣뻣한 동작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은 감
은 채였고, 꼭 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음...봉인을 풀러 가는구나. 그래그래 빨리 가라...어이구..'
그런데 대사제의 시체는 승희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한 발자
국을 내딛는 것이었다.
'어라? 아이고 왜 나한테 오는거야! 저리가! 저리!'
이제 조금 몸에 힘이 도는 듯 했으나 아직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승
희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침착하려 애썼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누가 힘
을 그렇게 한꺼번에 써먹은 것에 대해 욕을 퍼붓고 있었다. 대사제의
시체는 서서히 승희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 자리에 섰다...
'음? 아이고 이게 왜 나한테 와...징그럽게..!'
대사제의 시체가 입을 열고 억양없이 단조로운, 마치 기계같은 목소
리를 냈다...
"네가... 필요하다....윤...영을 살리려...면..."
'뭐..뭐라고?'
"미..안하...다... 허나 의식....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너를 ..희....생..."
'뭐...뭐라고?'
승희는 갑자기 무언가에 머리를 맞은 듯, 눈 앞이 멍해지는 것을 느
꼈다...
13. 엔키두의 죽음...
박신부와 준후는 양쪽에서 꽤 무겁고, 뭔가로 조여진 듯 빡빡한 문
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억지로 열어 젖혔다. 괴괴한 끼이익-! 소리
를 내면서 문은 서서히 열려갔고, 그 안은 어두침침한 가운데 몇몇
촛불같은 것들만이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이 열려가자, 안에서
뭔가 알아들을수 없는 고함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엔키두의 고함
소리인 것이 틀림없었다...
"준후야! 뒤로 물러낫!"
박신부는 고함소리가 들리자마자 거의 본능적으로 준후에게 소리치
면서 몸을 뒤로 날렸다. 준후가 몸을 뒤로 돌리자 문 안쪽에서 뭔가
시뻘건 불덩이 같은 것이 수십가닥씩 몰려서 날아와 문을 비롯한 주
위의 사방에서 작렬했다. 박신부는 재빨리 오오라를 일으켜 방어를
했고, 준후는 몸을 굴려 일단 두가닥의 불덩이를 피한 뒤, 주문을 외
우며 몸을 일으켰다. 문의 안쪽에서는 얼굴빛이 이상하게 보이는,
열명도 더 됨직한 후드를 걸친 자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버티고
있었다. 아마 사교의 사제들이나 그쯤 되는 자들인듯 했다. 그 너머
에는 놀란 얼굴을 한 엔키두의 모습이 보였고 그의 앞에는 한명의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윤영인 것이 분명했다.
"놈들의 수가 많아요! 이까짓 주술, 한놈 한놈 일때야 겁날것 없지
만...!"
준후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엔 강한 바람이 밀어 닥쳤다.
바람은 문사이에서부터 뻗어 나와 박신부의 오오라에 한 번 부딪혀
두갈래로 갈라지면서 박신부의 몸을 몇발자국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
다.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바람이 밀어닥치는데도 문은 오히
려 스스르 닫혀가기 시작해서 좁은 틈만을 남겼고 안쪽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대력이에요! 지금은 아리엘의 기운..."
"시간이 없다. 놈은 계속 의식을 진행하려 하는것이 분명해!"
박신부는 뭔가 결심을 한듯,입을 굳게 다물고는 오오라를 몸주위
에 한껏 펼치면서 그 거센 바람을 뚫고 한발자국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의 안쪽에서는 기합성 같은 것과 고함소리같은
것이 섞여 들리면서 어느덧 바람의 기운이 더욱 거세졌다. 엉겁결에
준후가 뒤로 두발자국을 물러서며 외쳤다.
"신부님! 놈들이 힘을 증가시키고 있어요!"
박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굳게 다문채, 앞으로 한걸음 한걸
음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박신부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가고 있
었고, 머리카락이 꼿꼿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록 일급의 주술
사까지는 안되는 자들이지만, 십여명이나 되는 적들의 주술을 한데
모은 힘에 맞서 필생의 힘을 다하는 것이 분명했다...
"신부님! 무리에요!"
박신부는 계속 앞으로 전진해 나갔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기도
를 읊으면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들을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구
원이시로다 (*주 1)..."
사교 무리의 주술을 통한 발악이 바람을 통해 나타나는 듯, 그래
도 꽤 넓은 지하실의 바닥에 흩어져 있던 물건이며 잡동사니들이 마
구 바람에 휩쓸려 뒤로 날려가기 시작했다. 놈들의 괴상한 고함소리
와 넋을 잃은 듯한 주문 외우는 소리들이 준후의 귀에까지 들려왔
다. 그래도 준후는 어떻게 대처하여 박신부를 도울지 미처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전번에 대사제와 싸울때에도 이 바람의 힘은 미처 어
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아버지의 법기(法器)를 사용했었으나 지
금은 바람의 위력이 너무나 거세서 몸을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아
니, 온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발이 그대로 땅을 긁으면서 뒤로 밀려
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박신부는 계속, 느리지만 조금
씩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계속 성경의 구절을 읊으면서...
갑자기 박신부가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고함을 쳤다.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나이다!!"
반쯤 열려있던 문이 갑자기 폭발하는 것처럼 산산히 부서져서 바람
에 미친듯이 날려갔다. 문의 부서진 조각들이 갑자기 날아오자 준후
는 쓰러져 있던 현암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몸을 날려 현암의 앞으
로 뛰어가려 했으나 바람때문에 잘 되지 않았다. 문의 안쪽에서 막
단검을 손에쥐고 내리치려던 엔키두가 성난 모습으로 박신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언뜻 보였다.
"이... 망할 놈의 바람!!"
박신부가 다시 아주 힘겹게 한발자국을 내딛으면서 다시 고함을
쳤다.
"....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들을 엎으시니
이다...!"
갑자기 안에서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엔키두
의 목소리였다. 사제들이 박신부를 밀어내지 못하자 그도 주술을 합
세한듯, 바람의 힘이 갑자기 배가 되면서 문을 통해 쏟아져 나왔고,
방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순간적으로 공중에 뜨면서 뒷쪽의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현암의 의식을 잃은 몸이 허공에 떠오르며 뒤
로 날아가려는 것을 준후가 잡았다. 어디에서 그런 기운이 나오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뭏든 준후는 이를 악물고 현암의 몸이 날
아가려는 것을 잡고 버티고 있었다. 박신부의 법의는 찢어질 듯 뒤
로 휘날리고 있었다. 박신부는 잠시 주춤하는 것 같더니, 다시 온
힘을 다해서 한 발을
내딛으며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같이 사르나
이다..!"
갑자기 무언가 터져 나가는듯한 굉음이 들리면서 사제의 무리들이
비명소리를 내면서 뒤로 어지럽게 튕겨져 날았다. 사제들의 몸뚱이는
뒤로 튕겨 날아가서 일부는 벽에 부딪혀 늘어지기도 했고, 선반이며
제단같은 곳에 쳐박히기도 했다. 몰아치던 바람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박신부의 오오라만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
나...
그 와중에도 아직 뻣뻣이 서있는 자가 있었다. 400살이나 되었다는,
바빌론의 바루 엔키두였고, 그의 눈은 분노로 가득차서 이글거리는
듯 했다. 박신부는 전력을 다한 다음이라 그런지 다리에서 힘이 풀
리는 것 같았으나, 지지않고 엔키두의 눈을 쏘아 보았다.
폭풍같이 밀어닥치던 바람이 잠잠해지자 준후는 의식을 잃은 현암
을 내려놓고 부적을 한웅큼 꺼내 쥐고는 의식이 행해지려는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현암이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힘겹게 몸을 꿈틀거
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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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의 몸은 아직도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대사제의 시체는 아직
머뭇거리며 행동을 취할지 말지 망설이는 듯 보였다.
"미..미안...그..그러...나...의식...의식은...행...행해...져...
야.."
'이...이놈, 의식을 꼭 막아달라고 했던때는 언제고...이제와서..'
"새...새로운..비밀..비밀을..알게..음...할..할 말이 있...있
으..면...해..해라..."
'입이 떨어져야 말을 하지!'
갑자기 승희의 입이 열리고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승희
는 놀라서 음음하는 소리를 내 보았다. 소리가 났다.
"너...너...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아직도 마음을 고치지 않았던 거
냐?"
"엔..엔키두는 아무도 이길 수...없어...윤영...윤영을 살리려면..."
"바보같은 소리! 아무리 400년이나 묵은 괴물이라해도 신부님이나 현
암, 준후를 이기지는 못해!"
"그...그럴까..."
승희는 순간적으로 대사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번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퇴마사 일행이 엔키두를 이기지 못하더라도
윤영을 살릴 수 있도록... 대사제가 전에 부리던 독기에 비해서 그의
마음은 몹시 약하고 줏대가 없는 듯 했다. 승희는 이젠 눈앞의 시체가
무섭다기보다 초라하다고 여겨졌다.
"흥! 그렇게 그 여자가 걱정되면 네 간을 꺼내주지 그래? 넌 어차피
죽었쟎아?"
"그..그건 안돼...의식을 위해서...죽음을 당해야만...제물로..소용
이.."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왜 의식을 치러야만 한다는 거지? 왜?"
"브..브리트라를.. 없...애기 위해...이미 의식...은 아홉단계...까
지 진행되었을 것이고... 브리트라가 진실로 원한다면...그는 스스로
의 힘으로도 부활 할 수..""
"뭐...뭐라고?"
대사제의 시체가 하는 말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답답해진 승희
는 대사제의 마음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브리트라는 이미 치러진 의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분노하고
있다... 그...그 이유는...!'
승희는 놀람에 눈을 부릅떴다. 대사제의 말에 의하면 의식은 잘못된
것이었고 그의 예측이 맞다면 악의 사신(蛇神) 브리트라는 스스로 쳐
들어오게 될지도 몰랐다...그것을 막으려면...
갑자기 문 저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활짝 열렸
다. 그리고 노도와 같은 바람이 승희와 대사제의 시체에게까지 밀어
닥쳤다. 안에서 뭔가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듯 했다. 대사제의
시체의 몸이 바람으로 인해 잠시 균형을 잃고 주춤거리자, 승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합을 발했다. 이유도 알 수 없었고, 그런 수
련을 하거나 언급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다만 거의 본능적으로 소
리를 지른 것이었다... 자신의 몸 속에 잠들어 있다는 거대한 힘을 향
하여...
승희는 몸안에서 뭔가 폭발같은 힘이 솟구쳐 나오는 느낌을 받았
다.
결박을 끊듯이 그 힘은 승희의 몸을 조이고 있던 구속을 한꺼번에
풀어버리는 듯 했다.
대사제의 시체가 뒤로 나가 자빠지는것을 그냥 두고는 승희는 폭발하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안으로 뛰어들
어갔다...박신부와 일행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대사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의식은 치러져야만 했다...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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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는 아직도 꼼짝하지 않고 엔키두를 쳐다보고 있었다. 엔키두
의 앞에는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는 윤영이 석상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고, 그 앞에는 커다란 수정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수정구
안에는 색색의 빛이 물결치면서 음산한 빛을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준후는 둘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
다. 너무도 팽팽한 긴장이 둘의 눈빛 사이에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아니, 그 눈빛들은 수천년 전부터 내려오는 각자의 신앙에 대한
믿음과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너무도 강렬한 둘의 눈빛
속에서 준후는 두 사람이 눈으로 행하고 있는 말들,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소리들이 마치 옆에서 듣는 것 처럼 또렷이 마음속에 들려오
고 있는 것을 느꼈다...
- 신부, 그대는 왜 진실을 외면하는가?
- 나는 진실을 외면한 적이 없다. 이 세상은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
이 나의 진실이다.
- 이 세상? 이 세상이 그대는 옳다고 보는가? 추악한 인간들, 허황
된 종교, 이기주의... 세상은 다시 씻어져야 한다... 옛날, 우파니샤
스팀의 시대에서 처럼...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브리트라 뿐
이다.
- 허황된 소리! 악마를 불러내어 세상을 맡기려는가? 그런 짓은 결
단코 용납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는다...
- 하나님이라고? 우주의 위대한 힘은 한가지 뿐이다. 너는 그 힘
을 신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 힘은 공정하다... 인간을 특별
히 위해주지 않는다...
- 요망한 소리는 하지마라! 엔키두!
- 인간이 이제껏 해 온일이 무언가? 위대한 자연력에 순응한 일이
무언가? 이 평화롭던 세상을 악함과 고난만이 들끓는 지옥으로 바
꾸어 놓은 것이 누구인가?
- 네 말에 대한 답은 네 스스로 찾아라! 오만한 자신의 이성과 자
만심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사악한 자여! 가련한자...
- 뭐라고? 감히 나에게 가련하다는 소리를 하는가?
- 진실로 가련한자... 그 오랜 기간동안 증오와 악만을 쌓아왔구
나...회개하라...
엔키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부릅뜬 두눈이 황금색의 찬란
한 광채를 발해갔다...
"샤마시의 광채! 신부님! 눈을 감으세요!"
뒤에서 현암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엔키두와 박신부의 대
결을 주시하고 있던 준후는 엉겁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현암이 어느새
기어서 방안으로 들어와있었고 현암의 손에서 월향이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뒤를 보고있던 준후의 뒷머리에 화끈한 것이 느껴지면서 주위
가 황금색의 빛과 열기로 가득찼고, 준후의 손에 들려있던 부적들에
갑자기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승희는 현암이 기어가는 것을 보고 막 방안으로 뛰어들려다가 천둥같
이 덮쳐오는 황금색광채에 튕겨지듯 뒤로 날아가 떨어졌다. 전에 한
번 당한 일이 있던 수법이었으나, 이번 것은 전번에 비해 그 위력이
할바가 아니었다. 승희는 머리카락이 바지직 소리를 내면서 그슬려오
는 것을 느꼈다... 눈 앞이 멍해졌다.
현암이 쏘아 보낸 월향조차 엔키두가 발한 샤마시의 광채를 뚫지 못
하고 있었다. 그대로 공중에 뜬 채 안간힘을 쓰는 듯 보였으나, 허공
에서 정지한 채 꼼짝을 못할 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월향은 현암
의 눈이 빛에 직접 닫느것을 막아 주어서 현암은 희미한 정신에서도
앞을 볼 수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강한 빛을 온몸에 받으며, 박신부는 앞으로 걸음
을 옮기고 있었다. 현암은 박신부가 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는 것인
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엔키두의 힘은 엄청났다. 아무리 박신부라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판인데...박신부의 검은 법의
는 이미 불이 군데군데 붙어 타오르고 있었으나 박신부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다만 무겁게 걸음을 옮길 뿐...
엔키두는 놀란듯 아랍말로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응답이 없
자 이번엔 서툰 한국말로 다시 소리를 질렀다.
"다가오지 마라!"
엔키두의 눈에 박신부의 얼굴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박신부는 눈
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이 과연..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엔키두는
알 수 있었다. 박신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으나, 다른 자들을
그 강한 빛에서 가리기 위해 자신의 몸에 강한 빛을 그대로 맞으며 오
히려 전진하는 것이었다. 박신부가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아까
사방에 나듸굴던 사제들까지도 가려주려 하고 있었다...박신부는 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을 사랑할 뿐이었다....
"으아아아...너...너는 대체..."
엔키두는 소리를 지르면서 마음을 독하게 먹으며 혼신의 힘을 기울였
다. 그에게서 뻗어나오는 빛이 오렌지색을 띄면서 엄청나게 강한 열기
가 느껴졌다. 뒤쪽에서는 승희가 옷에 불이 붙어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고 현암도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언뜻 준후가 삼
매신수의 수를 발해 검은 물기운을 일으켜서 박신부를 보호하려 하는
듯 했으나, 검은 물기운은 채 박신부가 있는 곳까지 가지 못하고 증발
되듯이 사그러져 없어지는 것이었다. 박신부가 휘청이기 시작하는 모
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현암이 소리를 쳤다.
"승희! 준후! 정신차렷! 신부님이 위험해!"
현암의 외침에 준후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부적을 꺼내들었다. 승
희도 옷에 붙은 불을 끄다말고 현암의 외침을 듣자 정신이 번쩍 솟았
다. 지금 작은 불같은 것을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승희가 급히 좌정
을 하자 현암에게 어느정도 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암은 눈을 감
고 월향을 회수 했다. 그리고는 준후에게 소리쳤다.
"준후! 금(金)! 금의 부적을!"
준후가 전에 대사제와 병원에서 싸울 때의 일을 기억해냈다. 현암도
같은 생각을 해낸것이 분명했고... 준후도 채 눈을 다 뜨지 못한 채
오행의 부적중 금의 부적을 손에 잡았다. 이것이 맞나? 잘 알기가 힘
들었다. 너무나도 뜨거웠다...
현암은 눈을 감은 채 힘을 모았다. 이미 전에 대사제의 총을 맞은 이
후 벌써 몇번이나 무리를 했는지 모른다. 아니, 스스로 자신이 움직이
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움직여야만 했다. 아
아...주변의 열기조차 잘 느껴지지 않았다. 몽롱한 정신...자고 싶었
다... 다만 잠을...그러나...그러나...
현암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야아아앗!"
화답하는 듯한 귀곡성을 내면서 현암의 손에서 월향이 날았고 준후의
손에서 금빛기류가 흘러 월향을 향했다. 월향은 쏘아져 나가다가 점점
속도가 둔해지고는...월향이 박신부의 머리위에 정지하는 순간 준후가
쏘아낸 금(金)의 기운이 월향에 엉키면서 삽시간에 박신부의 머리께부
터 시작되는 반원형의 막같은 것을 만들어냈다...그리고 엔키두가 쏘
아보냈던 샤마시의 태양광(太陽光)은 그 기운에 부딪혀서 마치 렌즈처
럼 집중되어져서 다시 엔키두에게로 덮쳐들어갔다...
"으아아악!!!"
그 뜨거운 빛줄기 속에서 한줄기의 섬광이 갑자기 번뜩하는가 싶더니
사방을 메우고 있던 빛줄기가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일행은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면서 주변이 시원해 져옴을 느꼈다. 준후가 눈을 비비며
명경부를 갖다대었다. 박신부는 그때까지도 서 있었는데 법의에 붙은
불이 아직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승희는 절룩거리며 박신부에게로
다가가고 있었고, 현암은 고요히 앉아 있었다.
엔키두는 오른쪽 귀언저리부터 시작해서 우반신이 완전히 타서 없어
져 버린 채 땅바닥에 딩굴고 있었고... 이미 그의 너무 오래 묵은 영
은 육신을 떠나 있었다.
승희와 준후가 박신부의 몸에 붙은 불을 털어서 꺼주고 있는데 박신
부가 입을 열었다...
"가련한 자들이여..."
아직까지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윤영이 꿈틀 하면서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너...너희들은 누구냥! 무슨 짓들을 한거야!"
준후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제정신이 아니었을테니...
윤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더니 박신부
일행을 돌아보고는 앙칼진 소리를 질렀다.
"우리들의 의식을 방해하러 온 자들이 틀림없구나! 엔키두...엔키두
님을 너희들이 저..저렇게...!"
준후가 이제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깔깔 웃어젖혔다. 현암은 아직도
무표정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박신부도 말이 없었다. 말많
던 승희만이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대꾸했다.
"뭐? 이여자가! 죽을 걸 살려 줬더니 뭐가 어째?"
"뭐라구?"
"흥! 네가 찾는 그 400년 묵은 괴물이 널 산채로 해부하려 했다 이말
이야! 그리고도 뭐? 엔키두님?"
윤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뭐라고? 믿을 수 없어!"
박신부가 윤영은 그냥 내버려둔채 승희와 준후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 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돌봐주렴...현암군도.."
승희가 눈을 크게 떴다.
"예? 저 악당들을요? 저놈들땜에 우리가 죽을뻔 했는데도요?"
박신부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승희야!"
준후는 군소리를 하지 않고 여기저기 널부러져서 간혹 아직도 옷에
불이 붙어있는 사제들의 불을 꺼주기 시작했다. 승희는 그 모습을 보
고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몸을 돌려 준후쪽으로 향했다.
"그래그래...."
박신부는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큰 나무가 넘어지듯 뒤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승희와 준후가 다시 달려와서 박신부를 부축했고, 윤
영은 그냥 어안이 벙벙한 채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광경을 쳐다보고
있더니 선채로 눈을 감고 양손의 집게 손가락을 이마에 갖다 대었다.
준후가 힐끗 그녀를 보더니 승희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굉장히 당황하는 것 같아요.. 아니, 지금은 무슨 투시를
행하는 모양인데? 제법 영력이 강한 것 같군요."
투시를 행하던 윤영의 얼굴이 점점 희게 질려갔다. 그러더니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크게 뜬 채로 그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승희가 잠시
그녀의 마음속을 읽었다. 윤영은 자기가 희생제물이 될 뻔 했다는 사
실에 무척 경악하는 것 같았고 또 대사제가 죽었다는 사실에도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승희가 빈정거리는 말을 했다.
"흥! 수많은 사람들을 이용해 먹고, 죽이고 할 때는 눈 하나 깜짝하
지 않았으면서, 자기가 죽을 뻔하고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죽은 것엔
왜 그렇게 놀라시지? 자기 아이까지 팔아 먹었다면서?"
윤영의 눈빛이 갑자기 매서워졌다.
"너...너...지금 뭐라고 했지?...아기? 아기라고?"
승희는 너무나도 살기띈 그녀의 눈과 마주치자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퇴마록 5부 생명의 나무...17편에 계속..)
*주 1) 이하 박신부의 기도는 성경의 출애굽기 15장, 이스라엘 민
족이 이집트 왕에게 쫓기다가 바다가 갈라지고 다시 그 바다가 이
집트 바로왕의 군대를 덮쳐 전멸케 했을 때 불렀다는 찬가의 내용.
모산술법요..?
모산술 이란 것은 중국 본토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주술로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그 유파를 모산파 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 모산파는 원래 도가에서 유래되었는데, 많이 세속화 되었으며
사람의 점복,장의,악신 퇴치등의 주술을 주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정통 도가는 아니고, 좌도 방문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 유래는 오래되어서 3국시대(위,오,촉의 3국시대) 이전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주로 하는 일은 악령을 쫓는 일이 많앗기 때문에
특히 강시 계열의 영화에 많이 등장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메일로....
14. 브리트라...
"내...내 아기... 내 아기를 어쨌지? 어디에 갔지?"
윤영은 눈을 부릅뜨면서 자기의 양손을 살피고는 허공을 우러러 외
쳤다. 그리고 갑자기 성큼성큼 승희의 앞으로 걸어왔다. 준후는 그냥
어안이 벙벙하여 두 여자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고... 승희가 놀라움
에 잠시 뒤로 주춤 하는듯 하더니 다시 마음을 독하게 먹은 듯, 똑바
로 섰다.
"알고싶어?"
승희는 그 째진 눈을 다시 위로 치켜올리면서 윤영에게 외치다시피
말했다. 승희의 마음도 근원을 알 수 없는 노여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물론 자신과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린 아이를, 그것도 갓
태어난 생명을 희생시켰다는 생각이 다시 마음 속에 떠오르면서, 무언
가 뜨거운 것이 마음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듯 했다.
"네가 한 짓을 네가 몰라? 너는 네 아이를... 그 잘난 브리트라에게
바쳤어...! 첫번째의 제물로!"
윤영이 얼굴이 하얗게 되다가 다시 연녹색으로 변해 갔다. 준후는 어
떻게 사람의 얼굴이 저런 색을 띌 수 있을까 하고 허망한 생각을 했
다.
"내...내가...내..."
윤영의 입이 더듬더듬 떨리면서 무언지 알아듣지 못할 소리가 신음성
비슷하게 새어 나왔다. 눈에 띄게 몸을 떨면서, 윤영은 그 자리에 서
서히 허물어지듯 주저 앉았다. 승희는 그러는 그녀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읽어갔다... 그녀는 ....그녀는....
"거..거...거짓말이야....."
갑자기 땅 밑에서부터 우르르르 하고 충격이 전달 되어 왔다. 마치
지진 같았다... 승희의 머리에 갑자기 아까 대사제의 마음 속을 읽었
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큰일이다! 내 정신좀 봐! 브리트라가 부활해요!"
준후가 승희의 고함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박신부도 힘겹게 고
개를 쳐들었고 현암도 운기하다말고 눈을 뜨고는 소리를 쳤다.
"무슨 말이야? 승희"
다시 한 번 지진같은 파동이 엄습해 왔다. 혼자 서있던 승희는 그 자
리에서 비틀거렸다. 그러면서 빠른 말로 말하기 시작했다...
"브리트라는...분노 해 있어요! 의식은 처음부터 잘못되어있어요! 제
물...제물의 선택이...! 그래서 의식이 중단 되어도 브리트라는 스스
로의 힘으로 환생을....!"
박신부가 황급히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쓰면서 물었다.
"제물? 제물이 왜?"
승희는 거의 넋이 나간 듯 했다. 그녀의 말은 점점 빨라져서 이젠 거
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였다.
"제물...그 제물은 생명의 나무 도안을 만든 3개 종파와 상관 없는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되어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우리나라를 택했
고... 허나 우리나라는 바빌론과 관계가 없는 것이 아녜요! 고대...고
대의 기원을 따지자면...그들은 우리와 피로 얽혀 있어요!"
준후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현암의 머리속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
다.
"바빌론...바빌론은 수메르족... 그 수메르가 혹시...환웅, 단군의
열두연방이었다는 수밀이(須密爾)국!!!(*주 1)"
"맞아요! 우리는 그쪽과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깊었던 거
에요! 주술의 의례로 쓰인 아홉명의 희생은 그래서 되려 브리트라의
분노를 일으키게 되었고, 마지막 대 주술사의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브리트라는 분노한 채로 세상에 출현하게 될지도 몰라요!"
박신부가 멍하니 읊었다.
"아멘..."
"그래서 대사제는 오히려 브리트라를 막기 위해서는 의식을 끝까지
진행하여야 한다고 했어요! 분노의 상태가 아닌 브리트라를 현신케 해
서, 마지막으로 모두가 힘을 합하면 일말의 희망이 있다고...그러나
분노한 브리트라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면...그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했어요!!!"
뒤에서 누가 들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바로 주술에 의해 움직이
는 대사제의 시체였다. 아까 엔키두의 바람과 태양광을 몸에 쏘여서,
시체는 이제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볼 수가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
고 몸에서 몇가닥 가는 연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그 시체의 입이 열리
면서 이제 제대로 알아듣기조차 힘든 한가닥 말이 흘러 나왔다.
"유...유..윤..영....무사..무사 했구...나..."
윤영이 놀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고운 얼굴은 이제
는 반가움과 놀라움, 두려움과 슬픔이 뒤섞인 착잡한 형태를 띄어갔
다. 대사제의 엉망진창이 된 몸이 풀썩 무릎을 꿇어갔다.
"그..그래..너...너..만 ...무사..하면..나..나는..."
"안돼!"
윤영이 자지러지듯 외치면서 그 쪽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대사제의 시
체는 한쪽 팔을 들어 제지했다...아니, 그 팔도 부스러져 땅에 떨어져
갔다...
"아니...나...나...너무...추...추해..."
"바보!"
윤영은 뭐라 할 말 조차 잊은 채,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 대사제의
얼굴은 이젠 이목구비를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그의 입가에 희
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는 듯 했다.
"너...너를...위..위해...너에게...영...영생을...주..주기 위해...
이...이 모든...모든...것을...."
"이 바보얏! 나는 너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했어! 이 모든 악행...오
...이 악행을..."
현암, 박신부, 준후 그리고 특히 승희는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잘못된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상대만을 위해주고 상대
에게 최선의 봉사를 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었다는 것
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안겨주는 것... 그러나 그것은 오히
려 스스로의 자만이 아니고 무엇이랴? 허나 그 둘은 그 속에서 얽혀
이 모든 일들을 꾸며 왔던 것이다. 거기에 그릇된 신앙을 가진 엔키두
가 얽히고 또... 아니, 그러나 지금의 대사제에게는 브리트라나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었다...윤영의 안위만이 최고의 가치일
뿐이었다...
"...최...최후의...방...방법은..."
대사제의 시체는 이제 하나 밖에 남지 않은 팔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
면서 입을 열었다. 윤영이 정신을 잃고는 뒤로 넘어져갔다.
"브...브리트라를 진정시켜...형체를 드러나게 하는 방법은..."
대사제의 흉한 시체의 얼굴에서 숯같은 것이 후드득 떨어져 나가며
백골이 드러났다. 현암은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랑? 숭고?
고귀? 그는 그의 행동을 알고 있을까? 그는 지금 그의 행동에서 분명
가치를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윤영에 대한 사랑때문인 것으로 느끼고
있고, 또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까?
"주...주술사...열명의 주술사의 간을...그...그건...저기 쓰러져 있
는 자들...사교의 열두 사제의 것으로...잔인...하다 생각말고...
세...세상을 구하기 위..위해...윤....윤영이..이...있는 세상을..."
현암은 깨달았다. 대사제...그 자신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사랑은
진정 숭고했다...그러나 그것으로는 모자랐다...세상... 아...이 빌어
먹을 세상...이 세상을...사랑할 수 없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대사제의 시체가 땅바닥에 털썩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갔다... 그리고
먼지와 불에 탄 연기를 남기면서 조용한 침묵만을 방안에 가득 채워
갔다....
승희가 충격에 입을 덜덜 떨며 박신부를 돌아보았다. 박신부의 눈에
는 새로 눈물이 솟아나고 있었고...준후의 눈에도 눈물이 샘솟듯 하고
있었다. 승희는 문득 준후가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저리 어린 나
이에 못볼 것을 많이 보는 구나...하고.... 갑자기 엔키두 앞에 놓여
있던 수정구가 승희의 눈에 들어왔다. 수정구의 안은 핏빛의 불길로
가득 차 있었고... 그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영상이 비쳤다. 갑자
기 승희는 몸에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브리트라가 움직여요! 신부님! 현암씨! 서둘러야 해요!"
지금껏 이를 악다문채 눈빛만을 빛내고 있던 현암이 고개를 돌렸다.
"무엇을?"
"브..브리트라의 재생을...막아야 할 것 아녜요?"
박신부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승희는 답답했다. 분명히 이야기를 다 들어 놓고는!!!
"저 사제들...저 사제들의..."
현암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는 것이 보였다.
"너...승희....네가 하겠니? 너는 그럴 수 있어?"
"예?"
박신부가 승희의 어깨를 툭 치면서 뒤로 돌아서면서 한 마디를 했다.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그대로 브리트라와 상대한다..."
"예? 뭐라고요?"
승희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분명 대사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멍해 있는 승희의 귀에 현암의 음성이 들려왔다.
"승희...세상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나? 수십억의 사람을 위해서 저
악인들 따위는 희생해 버리자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냐.... 생명을
숫자로 따질 수있나? 세상의 진리는 간단한 데 있는 거야... 생명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한다는 것은 말이 안돼...."
진리라고? 생명이라고? 현암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고통이 심해
서인지 퍽 걸걸하고 쉰 목소리였으나....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뿐이야... 답이 있을지 모르지만... 승희
야... 생명의 비밀은 영생에 있는 것이 아냐... 생명이 이어진다는 것
을 믿고... 자신의 믿음을 펼치고, 자신의 존재를 진정한 것으로 만드
는 데에 생명의 신비가...생명의 비밀이 있는거야. 생명을 구하기 위
해 생명을 버릴수도 있는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생명을 가진 자 외에
는 할 수 없는 행위인거야...승희...너도 대사제의 모습에서 거룩함을
보았지... 그러나 그 것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줄 알겠니? 윤영에 대한
사랑...그것 뿐일까...?"
박신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박신부의 얼굴에는 이제 아무런 표
정도 없었다. 평상시에 보이던 옅은 미소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현암군....말을 해서 무엇하겠나...힘을 아끼게나..."
승희는 거의 울음이 터질 듯 했다. 승희는 큰 소리로 울부짖듯이 소
리를 쳤다...
"바보들! 모두 바보들이야...!"
준후도 웃고 있었다. 그 어린 아이가... 얼굴에 검댕이 잔뜩 묻은 얼
굴로 준후는 웃음을 띄면서 승희에게 물었다...
"누나...누나는 바보 아니야...?"
승희는 몸이 우르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이... 이런...
땅이 또 다시 울려왔다. 수정구 안의 붉은 빛이 용솟음 치듯이 강해
지면서, 이제는 번쩍거리는 빛이 주위를 후래쉬처럼 물들이고 있었다.
악신 브리트라가 부활하려 하고 있었다... 네명의 사람들은 서로 아
무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제 싸울 힘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있다해도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있었다... 자신들의 믿음을, 자신들의 의지
를...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수정구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흩어져 갔다. 그 파편들이 튀어오르면서
붉은 빛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하나하나 흩어져 나르는 파편들을
슬로우모우션처럼 관찰 하는 자신들을 발견하면서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 한 걸음도...
*주 1) 한단고기(桓檀古記: 桓은 원래 한자음이 '환'이나 우리말로는
하늘 이란 뜻이 담긴 '한'으로 읽는 것이 맞다고 한다.)를 보면, '파
나류산(波奈留山)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동쪽의 땅이다. 파나
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으로 5만리요 동서로 2만여
리니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卑離國), 양운국
(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
(賣句餘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裨國), 수밀이국(須密爾
國)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 북해라 하며 7세에 전하여 역
년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 하는데 어느것이 맞는 말인지 알 수는
없다' 라는 구절이 삼성기전(三聖記全)하편에 나온다. 이 증 수밀이국
과 우루국이 바빌로니아 문명의 모태가 되었던 슈메르(sumer)와 길가
메쉬의 고향인 우룩(Uruk)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바, 이는 아직 서양
학계와 (특히)일본 학계의 반발로 빛을 보지는 못하고 있는 학설로 알
지만 감히 인용한다...
15. 시험...
눈 앞이 조금씩 밝아져 갔다. 이상했다. 분명 자신은 현암과 준후,
승희와...그 윤영이라는 여자와 함께 사교의 지하실에 있었는데...
박신부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주변은 온통 붉은 색으로 충만한, 넓
은 광야와 같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자신 밖에는... 박신부는
지금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아니 자신이 이미 죽은 곳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박신부는 몇 걸음을 옮겨보았다. 지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는
데 발걸음은 의외로 가볍게 옮겨져갔다. 박신부는 들뜬 마음이 되었
다. 마치 자신이 수십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어린이가 된
듯... 박신부는 잠시 한 발로 깡총깡총 뛰어 보았다. 재미있게 여겨졌
다. 이런 장난을 한 것이 벌써 몇년 전이었더라... 아니 그런 것도 아
니고... 하하하... 주위에 누가 있나 보았다. 처음에는 늙은 나이에
주책이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누구라도 있으면 같이... 놀고 싶었다.
그래... 분명히... 같이 놀고 싶었다. 문득 눈 앞에 흰 옷을 입은 한
소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박신부는 반가운 마음이 들며 입이 저절
로 미소를 머금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소녀의 뒤를 따라간다....그
래서...뒷모습만 보이지만...참 예쁜 소녀인 것 같다....막 그 소녀의
어깨를 두드리려는데...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 너....너는...!"
그 소녀는 미라였다... 이미 오래전...박신부가 의사였을때...그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다가 죽어간 아이... 그 소녀의 눈은 흰자위가 없
이 희게 빛나고 있었고, 두줄기의 피가 눈에서 흘러 내리고 있었다.
박신부는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섰다. 갑자기 소녀의 등 뒤에서 세사
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들은...
"혀...현암군! 준후! 그..구리고 너는 승..승희..!"
현암의 얼굴이 반쯤 무언가에 뭉개진 듯 없어져 있었고... 준후의 얼
굴은 하얗다 못해 은색으로 비치고 있었다. 승희의 눈이 더욱 찢어져
올라가 있었고,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꼿꼿이 서 있었다... 그리고 모
두의 눈은 희게 뒤집혀 있었고, 눈에서는 역시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
다...
"너..너희들..어...어째서!"
현암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준후가 합창을 하듯이 음고없는 소리로 말했다.
"우리를...우리 모두를..."
승희의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브리트라의 앞잡이가 되어서... 우리 모두를..."
박신부는 놀라움에 휘청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손을 보았
다. 그 손은 피에 물들어 있었다... 박신부의 눈 앞이 소용돌이 치듯
흔들리기 시작했고, 가슴이 쾅쾅거리며 두방망이질을 쳤다...
네명이 소리를 모아 말했다. 그 소리는 벼락처럼 박신부의 귀를 때렸
다.
"죽였어...!"
"아..아냐! 아냐!"
박신부는 뒤로 넘어지면서 기어서 뒷걸음질을 쳤다. 네명의 원혼들은
이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너도...너도...너도.....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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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현암형!!! 대체 어디에 있어요! 대답해욧!!!"
준후는 달려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일까 하는 생각도 이미 없었다.
단지 하나의 길...미로였을 뿐이었다. 그 미로는 스스로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보이는 지점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는데, 가
다가 보면 굉음과 함께 보이던 길은 막히고 다른 쪽이 열리는 것이었
다. 홧김에 벽을 두드려도 보았지만 벽은 뭘로 만들었는지 꿈쩍도 하
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꿈을 꾸고 있나? 아니, 내가 죽었나?'
준후는 부적들을 꺼내어 자신이 꿈을 꾸는 건지 주술로 확인해 보았
다. 절대 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게 뭐지? 어째서...'
갑자기 준후의 뒤에서 괴성과 아우성소리가 들려왔다. 뭔가하고 돌아
본 준후가 갑자기 오금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수천,수만을 헤아리는 요괴와 귀신, 망령과 마물들이 엉켜서 소리를
치며 준후를 쫓아오고 있었다. 준후는 급한김에 주술로 몇 방을 쏘아
보냈으나 어림도 없었다. 한놈이 쓰러지면 열놈이, 세놈이 쓰러지면
백놈이 쓰러진 놈의 시체를 밟고 달려 오는 것이었다. 아니, 달려오는
것이 아니고 아예 서로 엉킨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서 천장까지 가득
메우며 굴러, 아니 밀려오고 있었다... 준후는 다시 뒤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길이 쾅! 쾅! 소리를 내면서 닫혀갔고, 준후는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달려나가고만 있었다...
쾅! 소리가 발 앞에서 나면서 준후는 벽에 부딪혀 뒤로 나가자빠졌
다. 그러나 아프고 뭐하고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얼른 몸을
일으킨 준후의 주위에 길이 두갈래로 갈라진 것이 보였다...
그 한쪽에서는 박신부가 급한 표정으로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현암이 마구 준후를 불러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없이 많은 악귀들의 무더기는 이제 준후의 바로 뒤까지 몰려오고
있었다. 준후는 자기도 모르게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는 것을 느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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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은 문득 깊은 물속에 목만 내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게 어떻게 된일이지...?'
의아했다. 분명 브리트라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려고 하고 있었는
데... 물은 깊지는 않았으나 넓었다. 끝이 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
은 물이었고, 하늘은 먹장같이 어두웠다... 현암은 물을 헤치면서 앞
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현암의 눈앞에서 뭔가가 떠올랐다...
그건... 현아...물귀신에게 당했었던 자신의 여동생 현아...그 현아의
뒤에서 물귀신들의 머리가 불쑥 불쑥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아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아---! 오빠앗! 구해 줘! 어서!"
"기다려! 잠깐만! 잠깐만 참아 현아야!!!"
현암은 목청껏 대답을 하면서 현아가 있는 쪽으로 헤엄쳐 가려고 했
다. 그러나 발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몸도...누군가가 자신
을 붙들고 놓지 않는 듯 했다... 간신히 뒤를 돌아보니 그건 박신부와
준후였다.
"가서는 안돼! 현아는 이미 브리트라의 혼령이 씌인 몸이야! 자네를
유인해 내기 위하여 그러는 거야!"
"절대 안돼요 형!!! 죽어도 놓을 수 없어!"
"살..살려줘...오빠...오빠..!"
물귀신들은 이제 현아의 뒤로 가까이 다가들고 있었고, 현아는 가련
하게도 허우적거리며 현암에게로 다가오려고 애쓰고 있었으나 무언가
자꾸 밑에서 잡아당기는듯, 자꾸 물속으로 빠져 들었다가 나오기를 반
복하고 있었다. 뒤에서 준후가 불길을 물귀신들에게 내쏘고 있었지만,
놈들은 물속으로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준후의 불길을 피해 현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놔요! 놔줘요! 브리트라의 노예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단 말예요!
놔요! 이손 놨!!!"
현암은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을 쳤으나, 박신부는 완강했다. 그의
깍지 낀 팔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조여져 왔다.
"안돼...자네를 잃을 순 없어..."
현아는 이제 힘이 빠진 듯 구슬픈 신음성과 함께 물로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그 뒤에는 수십마리의 물귀신들이...
"놔! 놔! 놓으란말야!!!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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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에는 네명의 원혼이 눈을 형형히 빛
내며 서 있었다. 박신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피에 물든 두손을 쳐다
보면서 오열했다. 기억이 났다. 그렇다...자신이 그렇게 했었다...자
신의 손에 의해 벽에 쳐박힌 준후...자신의 거꾸로 쥔 십자가에 머리
가 박살이 난 현암... 오오라의 힘에 튕겨 날아간 승희... 내가 왜 그
랬었던가... 아니, 그리고... 자신을 구해달라 작은 손을 휘젓다가,
구해 줄 수 없다면 차라리 죽여달라 호소하던 그 어렸던 미라....그리
고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모습....
"나의 목숨을 너희들의 손에... 아니 주님의 손에 맡기나이다..."
박신부는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듯이 두 손을 감아 쥐었다. 현암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증스러운 자!! 주님이라는 허황된 이름을 읊조리면 살아날 듯 싶
으냐!"
승희가 외쳤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겠다!"
준후의 소리도 들렸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주지!"
미라의 작은 소리가 셋의 소리를 누르고 들려왔다.
"구원은 없다...신부..."
박신부는 눈물을 폭포같이 쏟으면서, 기도만을 하고 있었다. 목이 자
꾸 메어져 올라왔다.
"제 더러운 영을 하나님 손에 붙이나이다... 구원을...아니 유황불에
사룸을... 하실 수 있다면...그러나 전에 예수께 그러했듯이...이 잔
을 거두실 수 없다면 그대로 하소서... 여호와의 뜻대로 하소서..."
알 수 없는 굉음 같은 것이 들리는 가운데 박신부의 눈앞이 하얗게
빛나는 듯 하더니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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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후는 양쪽을 돌아보았다. 박신부는 다급하게 준후에게 손짓을 해
댔다. 그 자애하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고... 현암은 미친듯, 절규
하듯이 준후를 부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지? 어디로 가지?'
악귀들은 이제 준후에게 손이 닿을 듯한 거리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갑자기 준후의 머리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허중유실(虛中有實)...사중유생(死中有生)....비인 속에 실제가 있
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
준후는 돌연 이를 악물고 들끓는 악귀의 무더기를 향해 돌진해 갔다.
악귀들의 아우성소리와 그 느글느글한 살갗과 역겨운 냄새....
갑자기 준후의 눈앞이 노랗게 물들고 아무런 감각도 느낌도 없이, 망
연한 공간속으로 하염없이 떨어져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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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 놔! 이 손을 놓으란 말야! 놔앗---!"
"내 말을 듣게! 현암군! 평소 냉정한 사고를 지녔던 자네가 아닌가!
현아는 이미 죽은 사람이야! 죽은 현아가 어떻게 우리의 눈 앞에 나타
날 수가 있겠나! 정신을 차려! 정신을 차리란 말야!"
"놔! 놔! 저게 죽은 현아이건, 산 현아이건 상관이 없어! 나는...나
는...구해야만 돼...아니 백번, 천번이라도... 구해 내야만 햇-----!"
현암이 기합소리를 내면서 굉장한 힘으로 박신부의 깍지낀 팔을 뿌리
쳐냈다. 무리한 힘을 써서인지, 몸에 있는 상처들이 터지며 피가 분수
같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현암은 신경쓰지 않고 앞으로 몸
을 날렸다. 팔을 놀리기가 힘들어졌다. 다리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 왜 이리도 느린 것일까... 현암이 헤엄쳐가는 주변의
물들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피로 가득한 궤적을 그리
면서 현암은 그러나 조금씩...조금씩 가라앉아가는 현아를 향해 다가
가고 있었다..
'조금만...오오...조금만 더...현아야...현아...'
무언가가 현암의 발을 잡고 아래로 끌어 당겼다. 현암은 온몸의 기운
이 탁 빠져가는 것을 느꼈으나 다시 이를 악물고 무거운 추를 단듯한
가운데 계속 헤엄을 쳐갔다... 현암의 눈에서는 눈물이, 물이 튀어 금
방 사라지면서도 알 수 있을만큼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조금...조금만..더...더...현..현아...'
이번에는 등으로 한마리의 물귀신이 덮쳐들면서 현암의 등을 깨문듯,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저항을 할 수도 없었다. 오로
지, 현아에게... 현아에게 가까이 가는 것... 현암은 이제 얼굴까지
물속에 잠긴채, 다만 손만을 허우적거리며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고 잇
었다...
'아...아...현아야...'
현암이 최후의 힘을 다해 수면을 쳐갔다.... 순간적으로 물 위로 불
쑥 떠오른 현암의 눈에 막 정신을 잃고 물로 잠겨가는 현아의 감은 눈
이 보였다....
'현아...내가..내가 왔다.....현아..'
현암은 최후의 기력을 다하여 현아에게 손을 뻗쳤다.. 단 한 번이라
도 현아의...내가 지켜주지 못했던 현아를...
현암의 손 끝이 현아의 손 끝에 닫는 순간, 갑자기 폭발하는 듯한 푸
른 광채가 눈 앞을 가리며 모든 것이 아득해져 갔다...
16. 생명의 힘...
승희는 간신히 몸을 가다듬으며 서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앞이 아득해 지는 느낌이 들다가 몸속에서 다시 한
번 폭발같은 기운이 몰아쳐 오는 것이었다. 몸안에서 폭풍이 이는 듯
한 격렬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으나, 아직 그녀는 그대로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 앞에 박신
부가 갑자기 무릎을 꿇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현암이 공중에 몸이
떠서 무엇에 묶인 듯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보이고, 준후가 땅에 쓰러
져 누운채 헉헉꺼리며 뛰듯이 발을 움직이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
고... 윤영의 몸이 허공에 뜬채 서서히 위아래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
도 보였다.
'이...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승희는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무엇때문이었는지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나란히 서서 분노한 브리트라와 대적하기 위해...
'그렇다..브리트라!!! 간교한 지혜의 화신인 뱀...브리트라!!'
승희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과 자신과의 대화 같은
것이었다. 승희가 생각을 하기만 하면, 마음속에서 곧 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지금 일행은 시험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악신 브리트라는 폭력을
쓰거나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단순한 수단이 아닌,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들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 아무리 주술사라도 그러한 힘을
막아낼 수는 없었고... 그들은 평소에 가장 무서웠던 일, 그러나 자신
이 가장 믿는 것에 대한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 신념이 꺾
이거나 그릇된 길로 나갈경우에는...
'그..그런데 나는..? 어..어째서 나는...?'
승희는 몸안에서 폭발하듯 돌고 있는 기운을 생각해 냈다...애염명
왕...그러했다. 승희에게 답하고 있는 것은 승희 자신이 아니라 애염
명왕이었던 것이다...
승희의 몸에 잠들어 있다는 애염명왕의 힘이 승희가 브리트라의 시험
에 드는 것을 막아낸것이다... 그러나 몸안에 봉인되어 있는 처지에서
는 아무리 신일지라도 외부에 힘을 직접 행사하지 못해서 승희의 몸은
브리트라와 애염명왕의 힘이 서로 밀고 있는 풍선의 겉처럼 아무런 힘
도 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마..만약...누군가가 시험에 진다면....'
결과는 당연했다.... 시험에 지는 자는 브리트라의 노예가 되어서...
'아..안돼...그...그런일은...'
승희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아니, 마
음속의 애염명왕과 교신하는 것 외에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승희는 애타는 마음으로 세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
물이 흘러내리다가는 주변의 세찬 기운에 휘말려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갑자기 박신부의 몸이 희게 빛나오르면서 눈부신 광채를 발하기 시작
했고, 잇달아 준후의 몸에서는 노란 광채가, 현암에게서는 푸른 광채
가 솟아 오르면서 세사람의 몸이 털썩 땅에 쳐박혔다.
승희의 마음속에 기쁜 감정이 마구 밀려왔다...애염명왕의 목소리였
다..
'그들은 브리트라의 속죄의 시험, 지혜의 시험, 의지의 시험을 각각
통과했다...이겨낸 것이다...스스로의 마음의 시험을...'
승희의 몸도 마비에서 풀렸다. 승희는 달려가서는 셋을 부둥켜 안았
다. 박신부와 현암은 아직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준후가 제일 먼
저 깜짝 놀라듯 눈을 떴다... 그리고 이윽고 현암과 박신부도 정신이
들었다... 셋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듯이 보였다. 승희는 기쁨에 넘쳐
서 외쳤다.
"축하해요! 축하! 세분 모두!! 너무너무 기뻐요!!"
박신부와 현암, 준후는 어이가 없는 듯이 승희를 쳐다 보았다. 되려
승희가 멀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박신부가 말했다.
"아니, 브리트라는 어디있지? 어떻게 된거야?"
현암도 중얼거렸다.
"내가 정신을 잃었었던가?"
승희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시험에 대
해서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고, 그게 더 나았다... 어차피 그
시험의 내용이라는 건..으...
갑자기 준후가 외쳤다.
"저....저것!!!"
일행은 놀라서 옆을 쳐다 보았다. 윤영의 몸이 허공에 뜬 채 서서히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옷 안쪽이 울툭불툭하게 치솟고, 얼굴이며 손
등에 비늘 같은 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허공중에서 괴이한 음성이 울렸다. 그 음성은 각자의 마음속에 들어
오는 듯, 귀에 들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뜻만은 명확하게 각자의 마
음속에 울리고 있었다...
"나, 브리트라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여... 기뻐하지 말라... 그 능
력이 합당하여 나의 시험에 의해 나 브리트라를 받아들이게 된자가 있
으니... 그를 경배하라... 나는 그의 몸속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리
라...."
현암이 고함을 쳤다.
"이...이...그렇게는 되지 않아!"
박신부도 분노에 찬 소리를 질렀다.
"악마여! 썩 그 여인의 몸에서 떠나랏!!!"
준후는 말대신 양손에 각각 번개와 불을 머금고 막 브리트라의 화신
이 되어 가려는 윤영을 향해 쏘려 했으나...멈칫했다.
승희가 외쳤다.
"준후야! 왜 쏘지 않아? 왜?"
준후가 멍하니 대답했다...
"저...저누나... 착한 사람이야...그런데..."
"바보! 이젠 저 여자는 사람이 아냐! 브리트라의 화신일 뿐이라구!"
현암이 갑자기 승희에게 말했다..
"승희... 그러면 너는 라쟈의 화신이지 승희가 아닌가...?"
승희는 멈칫했다. 그렇다...아직 그녀는 하나의 생명이자 인생을 지
닌 인간이었다...
승희가 눈을 감고 자리에 앉으면서 날카롭게 외쳤다.
"어떻게든 해봐요!!! 힘을 다해서...! 여러분을...믿어요..!"
박신부가 으아아아아 하는 고함소리같은 소리를 내면서 십자가를 쳐
들었다. 십자가에서 솟아나오는 성령의 불길이 사방으로 퍼져 가면서
허공에 커다란 십자가를 그려갔다... 현암이 이를 악물고는 두팔을 주
먹을 쥔채 앞으로 뻗었다. 현암의 몸에서 붕대를 뚫고 피가 곳곳에서
분수처럼 솟아갔다. 섬광같은 기류가 박신부의 등에 모이고 십자가가
더욱 커져 갔고...
" 제신(諸神)들이여! 힘을 베푸소서..!"
준후가 찢어질 듯 고함을 외치며 왼손 식지를 깨물면서 오른 손으로
한 무더기의 부적을 확 뿌렸다. 부적들은 허공에 둥글게 구형을 그리
며 무섭게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고 거기에 준후가 식지 끝을 깨물
어 떼어낸 피를 뿜어내자 구형이 갑자기 핏빛으로 변해가며 무서운 속
도로 현암의 등에 부딪혀갔다... 현암이 몸을 움찔하면서 현암의 손
끝에서 뻗어져 나오던 기류의 빛이 주변을 가득채웠고 박신부의 십자
가가 천정에 닿을 듯 불어나기 시작했다. 승희가 혀를 깨물었다... 갑
자기 몸안에서 폭풍우와 같은 기운이 빠져나가서 서로 연결 되어 있는
셋의 기운을 밀어 붙였다...
윤영이 눈을 떴다... 그 눈은 이미 뱀과 같이 가는 눈동자를 가진,
불타는 눈으로 변해 있었다.... 눈앞에 비친 거대한 십자가의 모습에
윤영의 뱀눈이 크게 벌어지면서 다급한 신음성이 입에서 흘러 나오
고...뱀과도 같은 검은 기운이 윤영의 입에서 몰아쳐 나왔다...
박신부의 기도소리와 함께 박신부의 은십자가가 엄청난 크기의 십자
가 모습의 불길을 안은채 뱀으로 변한 윤영에게 날아갔다...
"저 생명을 구원하시어 다만 악과 멀어지게 해 주소서...."
뱀과 같은 기류는 뜻밖에도 박신부가 보낸 성령의 십자가를 그대로
통과하여 넷을 향해 덮쳐갔고... 박신부의 십자가도 그대로 윤영에게
날아들어갔다...
윤영의 입에서 굵은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아아...너...너희들은...이 여자를 해치려 한 것이 아니라....."
박신부는 윤영을 해치려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윤영의 몸을 지배
하고있는 사악한 기운을 없애려 한 것일뿐...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 것이었다....
현암이 몸을 날려 박신부와 준후를 양손으로 밀어내고는 승희를 발로
걷어 찼다... 윤영의 입에서 나온 검은 기류는 아슬아슬하게 현암과
승희를 비껴가서 벽을 뚫고는 사라져 갔고...
윤영...아니 브리트라의 어깨에 박신부의 십자가가 그대로 작열하였
다... 순간 윤영의 몸이 자지러지듯 뒤로 꺾여가면서 처절한 비명이
토해져 나왔다...
"아아아악----!"
박신부가 벽에 머리를 부딪히면서 땅에 떨어져 내려갔다. 그러면서도
박신부는 계속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의식을 잃을 때까지...
"세상에 악이 창궐하지 말게...하..옵시고...가련한...생...생명들
을....."
박신부의 십자가에서 나온 푸른 불길이 점차 윤영의 몸 안으로 들어
가고 있었고, 윤영은 이를 악물고 이글이글타는 듯한 뱀눈을 한채 몸
을 뒤틀고 있었다... 현암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주술을 쓰던 자세 그
대로 땅에 쓰러져 버렸고, 승희도 몸에서 모든 힘을 다 소모한 듯, 기
력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준후 혼자만이 자꾸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잡으려 애쓰며 눈을
뜨고 있었다... 별같은 것이 자꾸 눈 주위로 돌아다니면서 뭔가 축축
한 것이 코에서 흘러 내리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윤영이 이를 갈아 붙이며 기합성을 발하자 섬광같은 것이 그
녀의 온몸에서 튀어 나가면서, 윤여은 다시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입에서도 선혈이 흘러 내리고 있었고... 그녀, 아니 브리트라가 인간
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이....고약한... 하찮은 인간의 몸으로... 생명의 비밀을 아는
신...나 브리트라의 힘에 대적하려 하다니....."
윤영의 몸이 스르르 다가 왔다...그녀의 하반신은 이제 뱀으로 변해
가고 있었고... 몸에서 뻗치는 기운은....준후는 이제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죄...모든 것이 인간의 죄인지도
몰랐다....그리고 그 값은 인간이 치러야 했다....
"으윽!"
갑자기 윤영, 아니 브리트라가 몸을 뒤틀었다... 왜일까? 준후는 이
상하게 여겨졌다...
"으으윽! 아니...이...이것이..."
윤영의 몸이 다시 한 번 뒤틀리면서 중심을 잃고 땅에 풀썩 쓰러졌
다. 준후는 놀라움을 느꼈다... 누군가가 돕는 것일까? 준후는 마지막
힘을 모아 투시를 행했다... 브리트라의 화신이 되어버린 윤영을 향
해....
"으으윽! 으...안돼!!!"
브리트라의 비명과 함께 윤영의 몸에서 사악한 기운이 뿜어져 밀려
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퇴마사들과의 싸움으로 힘이 약해진 브리트
라라도... 대체 누가 또 있기에...
준후는 깨달았다... 겨우 손가락 만할 뿐이었으나... 윤영의 몸속에
는 다른 생명이 숨쉬고 있었다... 아기... 그렇다..아무 힘도 없는,
아직 이목구비가 갖추어지지도 않은 아기일 뿐이었다... 그러한 아기
가 저항하고 있었다...아니, 채 갖추어지지도 않은 의식으로, 다만 본
능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브리트라가 안심하고 들어간 바로 그 몸
속에서....자신이 살아갈 자리를 빼앗은 자에게 대항해서...자신의 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윤영과 대사제의 두번째 아기는....
준후는 눈에 눈물이 핑 도는것을 느꼈다... 브리트라가 생명의 비밀
을 안다고? 그 비밀을 남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고?
준후의 눈에 맺히는 눈물과 어울리지 않게, 준후의 입에서는 맑은 웃
음소리가 번져 나왔다... 웃음소리는 아이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
런 천진함으로 사방을 메워 갔고, 이제 대 악신 브리트라는 그 작고
작은, 어린 생명의 힘에 밀려 윤영의 몸을 떠나고 있었다... 다시 그
차갑고 어두운, 알 수 없는 세계로....
준후의 웃음소리가 계속 울리는 가운데, 윤영의 모습은 서서히 원래
의 형체를 되찾아갔다... 또 하나의 새생명을담은 채...
[[ 6부 - 지박령 전쟁.. ]]
1. 특종을 찾아...(1)
안재민 기자는 오늘도 편집국장에게 된 소리를 듣고 풀이 죽은 채로 앉아 있었다. 도대
체 요즘은 왜 이리 일이 풀리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제보 전화를 받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가 보아도, 이미 다른 사의 기자들은 고도의 기동성 (노트북에 무선전화기와 연결된
모뎀으로 바로 원고를 보내는 친구들도 있었다.) 을 살려서 간략하게 편집까지 마친 원고
를 송부하고 있곤 했다. 더욱이 워낙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을 지닌 안기자인지라 기사를
작성해도 두번세번 내용을 검토하여 마음에 드는 명(?)문장이 빚어지기 전까지는 도저히
원고를 내밀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시간을 생명으로 아는 편집국에서는 안기자를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더구나, 안기자 에게는 도무지 상상력이란게 없었다. 그러다 보
니 사건의 내용이나 전후관계의 서술이 매끄럽지 못했고, 제정신이 아니거나 편협된 증인
의 말만 너무 믿고 조금씩 방향이 빗나간 기사를 내는 중죄도 몇 번 저질렀었다. 오늘도
안기자는 편집국장에게 '보리자루'니 '돌하루방'이라고 욕을 먹은 후였다.
(으... 이거 원 더럽고 치사해서... 때려 치우던지 해야지...)
애꿎은 담배만 빡빡 피워 물고 있는 안기자의 옆으로 스크립터 김자영양이 캑캑거리며
남들으라는듯 기침을 하면서 지나갔다. 그 심보가 고약하게 여겨졌지만, 이판에 뭐라고
했다가는 괜히 혹을 하나 더 붙이는 꼴이 될 것이 틀림 없으므로 안기자는 그 좋아하던
담배를 억울하게 장초인채로 요절을 내버렸다.
(어디 두고보자... 내가 완전한 특종을 하나 때리고 말 테니까...)
편집장이 '안기자는 느리니까 천천히 특집물이나 준비 해 봐...'라고 한 말이 자꾸 머
릿속에서 울려왔다. 특집이라... 납량특집이겠지 뭐... 이번에는 좀 독특한 기획으로 5회
에 걸쳐 납량특집을 한다고 했다. 이미 몇명의 기자들이 뛰고 있었는데... 그러면 나는
뭐 부록으로 따라다니라는 건가? 아니... 아니... 납량특집? 그러면 귀신 아닌가? 흐흐
흐... 그렇다면 그에게는 좋은 친구가 있었다. 안기자가 자신감이 가득한 눈으로 편집장
을 돌아보았다.
[뭐? 야! 너 제정신이냐?]
현암은 전화기에 대고 농담 섞인 (그러나 약간 섬뜩하게 느껴졌다.) 소리를 질렀다. 그
러나 반대쪽에 있을 안기자의 목소리는 아직도 푹 꺼져 있는게, 농담인지 아닌지 잘 구별
할 수가 없었다.
[나, 제정신 아니다... 내가 제정신이면 너한테 이런 부탁하겠니?]
[원 참. 될 부탁을 해야 들어주지!]
[아냐... 넌 가능할거야. 너 원래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았고 또...]
[야! 안재민! 너 왜 그래? 내가 귀신이 많이 나오는 곳을 어떻게 안단 말야?]
현암은 조금 긴장이 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안기자가 자신의 몇 안되는 절친한
친구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밝혀지면 정말 곤란해질 것이
었다.
[아냐. 너 거짓말하지마. 내가 곰곰히 생각해 봤다. 너 그 동안 이상한 사고나 그런 일
이 생기면 꼭 나에게 물어보고 자료도 달라고 하고 그랬지? 그리고 그런 사건들 중 제대
로 해결된 사건은 하나도 없었어. 뭔가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와! 이거 사람잡네! 그래, 그러면 내가 무당이란거냐? 훠이 훠이, 잡귀야 물러가라!]
[너 아무리 아닌척해도 내 눈은 못 속인다. 넌 분명 뭔가 있어. 영계나 귀신 같은 면에
서 아는 것도 많고... 아마 무슨 능력이 있을거야. 틀림없어... 저번 현웅화백의 초상화
사건...]
[아이고 미치겠네. 내가 그런 힘이 있으면 은행이라도 털지, 방구석에서 룸펜이나 하고
있겠냐?]
현암은 애써서 웃어넘기는 듯 말했지만 머리위에 주르륵 식은땀이 흐르는 것도 느꼈다.
그러나 안기자는 집요했다. 고교시절의 별명 '아시아의 큰손'이 말해주듯 그 큰 손아귀에
서 빠져 나가기가 영 힘들 것 같았다.
[야, 그러지 말고 좀 알아봐줘. 네 주위에 그런 거 잘하는 사람 없니? 분명 누군가 있
을거 아냐?]
준후가 오락을 하다말고 말똥거리면서 땀을 흘리고 당황하여 몸을 이리저리 꼬면서 웃
어대는 현암을 쳐다보았다.
(아이고... 그래, 내 눈앞에 있다. 가르쳐 주랴?)
[그 뭐라더라... 투시력인가 가진 사람 없어?]
[난 무식해서 투시력이란게 뭔지도 잘 모른단다. 유식하신 기자님.]
[그럼 영... 영사라던가? 그런거 하는 사람은?]
[영사? 영화관에서 필름 돌리는 사람은 하나 안다마는...]
[야! 너 정말 그렇게 나올래?]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냐? 와 무섭네????]
[알았어! 어디 두고보잣!]
딸깍하고 전화가 끊기는 소리가 나자 현암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기도
모르게 이마에 흘러내린 식은땀을 훔쳤다. 십년감수한 기분이었다. 준후는 그것도 모르는
듯 쫄래쫄래 다가와서는 현암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형? 무서운 전화야? 왜 그렇게 땀을 흘려? 귀신이 전화한거야?]
[차라리 귀신이 낫겠다... 으이구...]
[흥! 어디 두고보자. 배신자! 비겁자! 철면피! 의리가 뭔지도 모르는 놈! 치사하다, 치
사해... 옛 친구의 부탁을 콧방귀로 흘려버려? 제길...]
안기자는 공중전화박스를 나서며 문을 쾅 닫고 싶었지만 (영화에서처럼) 닫을 문이 없
었다. 안기자는 다시 한 번 뜻 모를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정처없이 터미널로 발길을 옮겼
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으니 5일만 기다리라고 편집장 책상까지 한 번 치고 나왔는데...
처음부터 일이 제대로 풀리는 것 같지 않았다. 믿었던 현암을 들쑤셔서 엄청 무서운 납량
특집거리를 특종으로 실어보겠다는 그의 야무진 꿈 (편집장이 딱지 놓을 것에 대비하여
감동적인 연설문까지 미리 준비했었는데...) 은 이제 어떻게 하라고...
터미날 매표소에 실어다 준다는 곳은 많이도 써있었지만 정작 안기자가 갈 곳은 없었
다. 터벅터벅 여기저기 신경질적인 발걸음을 옮겨다니는 안기자를 사람들은 슬금슬금 쳐
다보면서 길을 비켰다. 아마 안기자가 험악하게 생겼다기보다는 등에 멘 카메라와 녹음장
비등이 뭔가 말해주는 것이 있어서 였을 것이다. 한참 돌아다니던 안기자의 눈에 잡지와
신문 등속이 잔뜩 꽂혀있는 진열대가 보였다.
(음... 그래... 때는 바야흐로 한 여름... 아마도 그런 류의 기사들이 많이 나와있겠
지? 재탕이 되더라도... 잘 캐내기만 하면 그럴듯해 질 수 있겠지!)
마음을 굳힌 안기자는 여자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잡지 나부랭이를 한아름이나 사가
지고 대합실에 앉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화를 가라앉히지 못해 씩씩대면서 잡지를 뒤적
거리는 그의 모습은 가끔씩 지나는 사람들의 오해를 사서 눈길을 끌기에 모자람이 없었
다.
[이거다!]
안기자는 사진에서조차 퀴퀴한 냄새가 나는 듯한, 어느 백골 무더기가 나온 페이지에
눈을 고정시켰다.
-...강화도 ###에서 공사중 우연히 발굴된 이 백골무더기는 그 수효가 500이 넘으며,
같이 묻혀있던 병장기류나 갑옷등으로 볼 때, 아마도 고려조때 침범했던 왜구들이 집단으
로 매장된 것이 아닌가 싶다. 또...
(그래, 이거다. 500명이 넘는 왜구들의 죽음. 역시 인과응보는 존재한다... 이거지? 그
놈들이 우리 나라를 침노했다가 산신령 같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몰살했다는 증거가 나오
게 되면...)
안기자의 머릿속에 시나리오가 짜여져 갔다. 어차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적절히 스토리에 맞도록 증거를 수집하면 하나의 멋진 스토리가 나가게 된다... 그리고
... 흐흐흐...
안기자는 그 문제의 잡지만 빼고 나머지 책들을 쓰레기통에 넣고는 강화도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그가 만나게 될 것이 어떤 것들인지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한 채...
2. 특종을 찾아...(2)
시금털털한 느낌을 주는 버스 안에서 안재민 기자는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잡지의 기사
를 읽었다. 강화도라... 잡지의 기사에 의하면, 발굴된 백골들의 옆에는 병장기와 갑옷들
이 많았고, 그 복식으로 보아 왜구들일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 시기는 '고려조때'라고
간략하게 나와있었다. 고려조라. 고려조면 어느 때인지도 써 놓았어야 할 거 아냐? 보아
하니 고증도 하지 않고 그냥 급하게 납량특집 기사로 쓴 모양이었다. 고려조 때에 강화도
라... 강화도는 일본쪽에서 보면 상당히 긴 거리를 여행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
이 단순한 왜구들이었다면 그렇게 먼거리를 돌아 강화도로 쳐들어가기는 쉽지 않았을 것
이다. 그렇다면...?
안기자는 희미하게 나온 흑백사진에 초점을 모아 백골 곁에서 살짝 나온 칼의 모양을
살폈다. 날이 2개면 검(劍)이라 했고, 날이 하나면 도(刀)라 한다. 사진에 나온 칼의 모
양은 끝이 둥그스름하고 가운데가 아닌 한쪽 귀퉁이가 뾰족하게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분
명 일본도였다. 우리 나라는 도 보다는 검을 주로 사용했고 중국은 모양이 크고 투박한
도를 사용했으므로 백골들의 정체가 일본인, 그것도 왜구들이라는 이 잡지의 주장은 옳은
듯 했다. 그러나 고려조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왜구의 침략은 고려 말부터 조선조 초기까지 계속 되어서 임진왜란 때까지 이어지고 있
다는 것은 상식이었고, 고려의 붕괴 원인 중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이 왜구들의 잦은 습
격으로 인한 사회의 피폐였다는 것도 역시 안기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음...
고려조 때, 특히 여-원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하다가 일본인들이 소위 카미카제 (신풍: 神
風) 라 일컫는 태풍으로 인해 괴멸된 일이 있었다. 그 이후 왜구의 침입은 부쩍 증가되었
고, 왜구들은 교동, 강화까지 침노한 적이 있었다는 책의 내용이 기억이 났다. 그것이 아
마 공민왕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잡지사의 기자도 제대로 추리를 한 거군... 허나...)
안기자는 왠지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밑에 나온 구절 때문이었
다.
-...500구가 넘는 백골들은 모두 온전한 상태로 동쪽을 향해 머리를 두고 있었으며 보
존 상태도 아주 좋아서 학계의 연구 대상으로 좋으리라 생각된다...
온전한 상태... 기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들은 모두 온전한 상태라 했다. 옛날 전쟁,
칼과 창과 돌로 부수고 때리는 전쟁에서 모든 유해가 온전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전쟁이나 싸움으로 인해 죽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면 500명이나
되는 난폭한 왜구들, 그것도 먼길을 와서 강화도까지 도착할 정도로 능수능란한 기술을
가진 자들을 뼈에 흠도 내지 않고 몰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은 그들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몰살된 것이라 했지만, 그건 스스로도 믿지 않는 이야기였으니 일
단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러면? 독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음. 분노한 민간인들이 음식
이나 물에 독을 풀어 원수인 왜구들을 몰살시키다. 그것도 괜찮은 추리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정말 그들이 왜 모두 죽어서 한데 묻히게 되었는지, 그것도 동쪽으
로 가지런히 머리를 두고 매장되었는지는 조금 이상했다. 그리고 그렇다면 칼이나 갑옷
같은 귀한 쇠붙이로 된 전리품들을 그냥 같이 묻어 주었을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옛날엔
쇠붙이가 귀한 것이었으니... 그리고 거기다가 가지런히 매장을 한다?
안기자는 상상의 나래를 펴 보았다. 왜구의 일단이 몰려왔다. 주민들은 그들에게 복종
하는 척 하고는 그들을 접대하는 음식에 독을 탄다. 속아 넘어간 왜구들은 모조리 몰살된
다. 그런 그들을 주민들은 가엾게 여겨서 죽은 그대로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해주어 매
장한다... 낭만적인가? 아니, 말이 되지 않는다. 려말 선초에 이르기까지, 왜구들의 약탈
로 입은 우리 나라 백성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그런 그들에게 좋은 감정이 남아있을리 없
었다. 아니, 당시 백성들의 생활의 궁핍상으로 볼 때에도 칼이나 갑옷 같은 고가의 기물
들을 그런 연민의 감정 만으로 부장품화 시켰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공민왕 때는 외환
이 극심하여 나라가 극도로 피폐해 진 시기였다. '인상식'(人相食)... 사람이 굶주림에
못 이겨 서로를 잡아먹고 어린 자식을 차마 잡아먹을 수 없어서 옆집의 자식과 바꾸어 잡
아 먹었다는 기록... 아니, 그건 삼국시대 이야기 던가? 아무튼 곤궁 이라는 적은 시대를
막론하고 동일한 양상을 지닌다. 그런데 그 비싼 칼과 갑옷을 묻어준다? 그리고... 거기
다가 침략자에 대한 연민이라? 공민왕기, 홍건적의 1차 침입으로 서경이 함락되었을 때,
홍건적의 수효는 물경 4만을 헤아렸다고 한다. 명장 이방실(李芳實)의 지휘로 서경이 탈
환된 뒤 쫓겨 돌아가는 그들을 고려군은 끈질기게 추격하여 복수전을 벌였고, 4만의 홍건
적은 모조리 주살 되어 300명도 채 남지 않았었다. 그 정도로 외적에 대한 복수심은 고려
때 강했었다. 안재민 기자는 대학 때 역사 강의를 들으면서도 이런 외적들을 섬멸한 부분
들을 가장 통쾌하게 여겼고, 잘 기억해두고 있곤 했다. 그런데... 몰살된 왜구들을 정성
들여 장사 지내준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들은 전멸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깊은 땅속에 파묻히게 된 것일까?
스스로 스토리를 지어내려던 생각은 이제 까마득히 잊혀져 갔다. 자기도 모르게 뒤쫓게
된 역사의 실마리라고 할 것에 안기자는 스스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비밀이 있을거야. 꼭 납량특집이 아니면 어때?)
스스로 찾아내어 추리를 해낸것이 무척이나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안기자는 고개를 들
어 몇번 움직여 보았다.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였는지 목에서 우둑우둑하는 뼛
소리가 났다. 길이 낡아서 인지 털털거리는 차안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음? 뭔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안기자의 자리로부터 앞으로 두 자리를 건너 앉아 있는 네 사람의 행색이 다소 기이했
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보니 머리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에 하나같이 흰 광목천을 붙
들어 매고 있었고 남자들인 것 같았는데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했다.
[음? 도닦는 사람들인가?]
넷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안기자는 궁금하여 앞으로 가서 자세히 볼까하고
엉덩이를 들다가 왠지 좀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그냥 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뒤를 둘러보는데 뒤에도 눈에 띄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은 여자였다. 버스의 맨 뒤 다섯 자리 중에 가운데에 앉아있어서 몸까지 다 보
였다. 조금 싸늘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꽤 예쁘고 키는 작은 듯 했으나 몸은 호리호리하
여 꼭 소녀 같았다. 그러나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얼굴에 풍기는 인상은 너무도 엄숙하
고 무거운 듯이 보였다. 그 정도면 뭐 이상할 것도 없었으나 안기자의 자칭 예리한 눈에
다시 희한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자고 있는 듯 했으나 고개도 숙이지 않았고, 자세히 보니 등도 기대
지 않고 있었다. 꼿꼿한 자세로 몸을 곧추세우고 있었는데 차가 덜컹거려도 신기하게 상
반신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눈을 돌린 안기자는 앞에 앉은 네명의 머리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뭔가 수상했다. 보통 사람들은 아닌 듯 했다. 더욱이 뒤에 앉은 여자는 뭔가 1미터
는 넘을 직한, 길쭉한 보따리 같은 것을 몸에 기대어 놓고 있었다. 뭐 그렇고 그렇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 안의 내용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그런 모양을 지닌 물건 중 예쁘
게 차린 여자가 가지고 다닐만한 물건은 없는 듯 했다. 지팡이? 말도 안되고... 몽둥이?
엽총? 아니, 총이라면 개머리판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러면...?
안기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물건은 하나밖에 없었다. 안기자는 까닭모를 두려움 같은 것
을 마음속에 안고 그 여자에게 기대어져 있는 보따리 안의 물건의 모양을 찬찬히 뚫어보
기 시작했다...
틀림 없었다. 사각형에 가까운 단면에 5센티, 1센티 밖에 안되는 두께... 1미터가 넘는
긴 길이... 그리고 위에서 25센티쯤 되는 곳에 불쑥 튀어나온 돌기... 그것은 사극이나
무협지에서만 봐오던 장검이 틀림 없었다... 저 가냘프고 호리호리한, 예쁘게 투피스를
입은 여자가 장검을 들고 있다니...
안기자는 떨리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눈 앞에 쭉 앉
아있는 네명의 인물들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안기자는 불현듯 이들도 자기와 같은 목적
지를 향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까닭없이 무서웠다.
차는 이제 굽이를 돌아 안기자의 목적지인 ###에 거의 다 와가고 있었다.
3. 명검과 도인들...(1)
안기자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에서 내린 사람은 모두 7명... 안기자와 네명의
남자, 그리고 뒷자리에 앉아있던 여인과 늙어서 허리가 구부정해진 평범해 보이는 할머니
였다. 내려서 얼굴들을 보니 네명의 남자들은 옷차림은 평이했으나 모두 검은색 웃옷에
검은색 바지, 신발까지도 검은색인데다가 머리에 질끈 멘 광목천만 흰색이었다. 거기에
머리는 거의 어깨까지 흘러내리는게 광목천만 아니라면 무슨 떨거지 락그룹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네 명은 무표정한 얼굴로 뒷자리에 앉아있던 여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여
인도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장검으로 추정되는 보따리를 떡하니 어깨에 둘러멘 채 네 남
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되받아 보고 있었다. 안기자는 차에서 내린 자세 그대로, 4대1
의 눈싸움을 침묵을 지키고 침만 삼키며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은 분명 보통 사람들이 아니야... 세상에...)
네명의 남자들의 눈빛은 형형 하게 빛나는게, 마치 눈에서 불을 뿜는 것 같았고, 여자
는 그다지 크지 않은 키에도 불구하고 꼿꼿이 고개를 세우고 있었는데, 그 눈빛은 마치
무저갱처럼 깊은 느낌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 했다.
안기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안기자가 뒷자리에 앉은 여자보다는 차에서 먼저 내렸지
만, 등에 진 장비 나부랑이들을 살피느라 차 문 근처에서 꾸물거리는 바람에 양측의 대치
상태에 말려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무언지는 몰라도 양측의 인물들이 내뿜는 느낌이 기이
해서 그 사이를 헤치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원 참...
갑자기 옆에 가만히 지팡이를 짚고 서있던 할머니가 흰 보따리를 하나 들고 그들 사이
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기자는 할머니를 말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고... 갑자기 할
머니가 끼여들자 여자가 먼저 뒤로 한걸음 물러났고, 네명의 남자들도 눈빛을 지우면서
뒤로 두세 걸음씩 물러섰다. 그리고 그 할머니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휘적휘적 노인이
면서도 빠른 걸음걸이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길로 나서서 사라져 버렸다.
안기자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명의 남자들은 지금은 여인에게 목례를 하
고 있었고, 여인도 가는 미소를 지으면서 눈으로 답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문득 여인의
등에 얹힌 보따리를 살피다가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청홍 (靑紅)?...]
여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
했다.
[놀랍습니다... 어찌 그런...]
여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고 몸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을 꺼낸 남자는
주춤하며 여자에게 부탁하는 듯한 말을 했다.
[저런... 견식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안기자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청홍? 그게 뭐지? 아마도 저 칼을 가리키는 말인 것 같
은데...
여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어깨에 얹힌 보따리를 한 번 가볍게 흔들었을 뿐... 그
런데 놀라운 것은 방울소리도 아니고, 마치 쇠쟁반위에 쇠구슬 흘러내리는 것 같은 그런
청명한 쇳소리가 길게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네명의 남자는 그 소리를 듣고 넋을 잃은
표정인 듯 했다. 안기자도 어안이 벙벙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저건 분명 칼이 분명한데
이런 소리를 내다니... 희대의 명검이나 명도는 스스로 운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건 칼
이 우는 소리란 말인가?
가만... 안기자의 머리에 옛날에 읽은 소설의 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떠올랐다. 안기자
는 그런 식으로 상상하면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 책은... 누구라도 읽어 본 적
이 있었을... 청홍검... 청홍검이라...
- 피바다가 된 싸움터, 여기저기서 철갑을 입은 기마병들이 간간이 보이는 허약한 반대
쪽 군사들을 도륙하며 우왕좌왕하는 민간인들을 짓밟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거기에 온몸
에 피를 뒤집어 쓴 젊은 장수 하나가 단신,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고 한 쪽에서 화려한 무
장을 한 역시 새파랗게 젊은 장수가 부하 십여 명을 데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피를 뒤집
어 쓴 젊은 장수는 두려움의 기색도 전혀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적을 향해 창을 휘두르며
돌진한다. 무서운 솜씨... 그가 휘두르는 창질 한 번에 적들은 채 대항도 하지 못한 채
쓰러져 버리고, 삽시간에 십여 명의 부하들은 땅에 뒹구는 송장이 되어 버린다.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장수는 너무나 출중한 상대의 무예에 질렸는지 뒤로 말을 돌려 달아나려 하
나 그나마 창을 맞고 쓰러진다. 갑자기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악귀 같은 형상이 되어
있던 장수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지나가며 얼른 말에서 내리고 방금 자신이 처치한 장
수의 등에 메고 있는 장검을 살핀다.
[이런 바보! 이런 좋은 검을 가지고 뽑아보지도 못한 채 죽다니!]
장수는 장검을 떼어낸다. 그 손길은 약탈이 아니다. 마치 연인을 감싸는 듯한 부드러움
으로 젊은 장수는 칼을 집어든다... 아무것에도 감정을 내보이지 않을 듯했던 장수의 얼
굴이 격정과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검자루에 새겨진 금으로 새겨진 글자...
(靑紅)
[청홍검! 청홍검! 아! 이자가 바로 조조의 수신배검장(隨身背劍將) 하후은이었구나!!!
하늘! 이 검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미칠 듯 기뻐하는 그 장수는 바로 당양 장판교 싸움의 영웅, 상산 조자룡이었다. ----
(그러면 저 여자가 가진 칼이 바로 삼국지의 명장, 조자룡이 썼다는 청홍검이란 말인
가!!)
안기자는 뭣에 얻어 맞은 듯 했다. 그 정도의 칼이라면 국보급이 넘는 보물이었다. 아
니, 우리 나라가 아닌 중국에서도... 그런 전설상의 명검을 저 작고 젊은 여자가...
멍하니 있는 안기자를 놔두고, 여인은 조용히 등에 걸쳤던 보따리를 내려 손에 살며시
들더니 걸음을 옮겨 멀어져 갔다. 네명의 남자들은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말이 없더니 다
시 두런두런 떠들기 시작했다.
안기자는 손에 들고 있던 잡지책을 뒤적이는 듯 하면서, 그들의 대화를 귀를 잔뜩 곤두
세우고 엿듣기 시작했다.
[근호형, 그 칼이 진짜 청홍검일까요?]
[틀림 없을 듯 싶어. 그 검이 우는 소리를 들었지 않니?]
[그러면 저 여자도 우리처럼 그 왜구들의 무덤을 조사하러 온 것일까요?]
[그럴 거야. 이거 생각보다 큰 일인 듯 하군. 저런 신병(神兵)을 모습을 드러내어 가지
고 올 정도라면,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진다 생각한 듯 한데...]
[경민 형은 뭐 짚이는 게 없수?]
[글쎄... 누가 흑막을 쳐 놓은 듯 해서 영 투시가 안돼. 모종의 음모가 있는 것이 분명
해...]
[그런데 윤섭이, 아까 그 여자의 내력도 대단하던데... 우리 넷이 비록 오성(五成)의
기공력만 썼지만 그걸 눈 깜짝 않고 버틴 것을 보면...]
[누가 아니래, 아무튼 우리 현현파 (玄玄派)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모일 것 같군.]
[태현이, 경민이! 그만! 누가 들을라!]
네 명이 떠들던 말을 멈추고 걸음을 바삐 놀려 사라져 버린 뒤에도 안기자는 후들거리
는 다리를 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청홍검... 기공력... 현현파... 투시...
그런 것들, 그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로 세상에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들이 모
여들고 있다니... 그리고 왜구의 무덤이라고 했다. 그들의 목적지도 분명히 그곳이었다.
안기자는 마음을 다잡아먹고 용기를 냈다. 이번일은 정말 보통의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데...
(그렇지. 현암이 놈에게도 이 일을 어렴풋이 눈치채게 해 주어야지. 그래서 그 놈이 오
는지 안 오는지 두고보면 그놈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놈인지, 아니면 징그럽게 내숭을
떨었던 건지 알 수 있으렸다! 흐흐흐...)
안기자는 DDD전화 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4. 명검과 도인들...(2)
신호는 가는데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 안기자는 정말 짜증이 났다. 벌써 30분 이상 현
암의 연락처에 전화를 걸어대고 있었으나 도대체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었다.
[제기랄, 관둬라. 관둬. 네가 도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 내 인생은 안 달라진다!]
홧김에 전화를 끊은 안기자가 고개를 돌리자 서울에서 출발한 듯한 버스가 다시 먼지를
뿜으면서 멈추는 모습이 보였고 안기자의 몸이 다시 움찔했다. 아마 안기자가 타고 온 버
스의 다음차인듯 했다. 그러나 안기자가 움찔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그 버스에서
천천히 내리는 몇사람. 그들의 행색 또한 아까 보았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제일 먼저 내린 사람은 머리와 수염을 그야말로 치렁치렁하게 흐트러 뜨린 두 남자였
다. 그야말로 때가 쪼졸히 낀 회색 옷 (원래는 흰색이었던 듯 했다.) 을 걸치고 역시 얼
룩덜룩한 회색의 작은 쌕을 메고 있는 두사람, 보통때 같았으면 그냥 너저분한 거지나 그
런 류로 치부하고 넘어갔겠지만 막상 기이한 사람들을 본 후의 안기자에게는 그 사람들도
범상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 다음에 내리는 사람은 머리를 빤질빤질하게 윤까지 낸 듯, 완벽한 대머리를 가진 거
대한 체구의 남자였다. 키가 2미터는 될 듯 싶었고, 그 큰 키가 작아 보일 정도로 어깨가
딱 벌어진 사람이었다. 얼굴 또한 험상궂기가 이를데 없었고, 이마에 한일자로 주름이 쫙
가 있는 것이 (그런 것을 갈메기라고 하던가?) 좀 더 그 사람의 얼굴을 공포 영화의 주인
공처럼 만들고 있었다.
(원 세상에... 이거 아무래도 내가 못 올 곳을 온 모양이다...)
그 다음에 내리는 사람은 생김새는 그다지 특이한 것이 없었으나 뭔가 등에 이상한 것
을 짊어지고 있었다. 무슨 막대기 같은 것을 잔뜩 담은 화살통 비슷하게 생긴 것을 지고
있었는데,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차에서 내리면서 어깨를 한 번 떨치자, 등의 화
살통 같은 것에 꽂혀있던 막대기들이 일제히 부채 모양으로 활짝 펼쳐지는 것이었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수염 기른 두 남자와 대머리 (아니 갈메기) 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그러나 안기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들 저러는 걸까?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차는 문을 열어 놓은 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얼핏 보니 안에 누군가가 내려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운전사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맨 뒤에서부터 나오는 듯 했다. 물
론 차안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음? 아이고! 저게 누구야??? 차에서 막
내린 그 사람은 바로 스크립터 김자영양이 아닌가? 여긴 어떻게 알고???
[이봐요! 김자영씨!]
[와! 안기자님! 이런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차에서 또 뭉기적거리면서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사진부 기자인 손민구기자가 장비들을
잔뜩 둘러메고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여! 손기자! 손기자도 왔어요?]
김자영 기자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어리둥절해 있는 안기자에게 말을 붙였다. 맨날 내
담배연기에 도망만 다니더니만, 그래도 객지에서 만나니 반가운가보다.
[안기자님! 우린 ###의 고분을 취재하러 왔어요.]
[예? 아이고 거기는 어떻게 알고?]
[예? 글쎄요. 편집장님이 무슨 잡지인가 보시고, 전화를 받고 하시더니 가라고 하던데
요?]
(음... 도움이 안되는 편집장... 내가 사력을 다해 취재하려 했던 내용을 어떻게 냄새
맡고... 도대체 그러면 난 뭘 하라는 거야?)
벌레를 씹은 듯한 얼굴이 되어 가는 안기자에게 씩씩거리면서 막 다가온 손기자가 끼어
들었다. 차는 이미 먼지를 일으키면서 떠나갔고.
[안기자! 안기자는 왜 여기 있지? 납량특집 취재 간 거 아니었어?]
안기자의 속이 뒤집혔다.
[그래서 여기 와 있는거 아냐?]
[음? 우리는 역사 기행 취재땜에 온건데... 내일이면 정진욱기자도 올텐데...]
[뭐? 역사기행? 아이고야... 그럼 난 뭐여?]
자영이 다시 끼었다.
[예? 왜요? 안기자님?]
[여기 ### 고분얘기, 난 납량특집으로 다뤄야 한단 말예요!]
[그건 우리가 역사물로 다뤄야 하는데?]
[아 관둬요! 나참... 난 포기 안할거요.]
[이런 내용은 역사물에 맞는 거라구요!]
[아니라구요! 납량물적인 내용이 될 게 틀림 없어요!]
안기자와 김자영 스크립터가 한참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손기자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둘은 말싸움을 멈추고 손기자의 시선이 가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입이 딱 벌
어졌다.
얼굴에 갈메기가 있는 거한이 손에 든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어 맞추고 있었다. 뭔가 했
더니 그건 엄청나게 큰 철봉이었고, 몇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하나로 맞추니까 큰 철
봉이 되는 것이었다. 무게도 엄청나게 무거울 것 같았고... 그 사람이 철봉을 땅에 쾅!
짚자 요란한 소리가 울리면서 땅에 철봉이 손가락 하나 깊이는 들어간 듯 싶었다.
그 앞에는 등에 이상한 것을 진 남자가 가벼운 웃음을 띈 채 서 있었고, 두명의 수염
기른 남자는 멀찍이 서서 그 광경을 관망하고 있었다.
[저... 저 사람 뭐하는 거에요? 약 팔려는 건가?]
김자영 스크립터가 눈을 깜박거리며 그 광경을 지켜 보았고, 이미 그보다 더한 것을 본
안기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김자영 스크립터에게 대답했다.
[저게 뭘 하는 건지 아시오? 서로 재주를 겨루는 겁니다.]
[재주요? 무슨 재주요?]
[가만 보고 있어요. 저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란 말예요.]
이상한 막대를 진 사람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대머리가 화가 난 듯, 철봉을 잡은 손
에 힘을 주자 철봉이 조금씩 땅 속으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믿어지지 않는 힘이었
다. 그래도 그 이상한 것을 진 남자는 미소만을 띄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한마디 했
다.
[뱀을 잡으러 왔으면 뱀굴로 가야지, 어째서 호랑이와 겨루려고 하나?]
김자영 스크립터가 다시 소근 거렸다.
[저 사람들, 무슨 도사 들이에요?]
[글쎄요. 나도 잘은 몰라요. 허나 분명 저들은 목적이 있어서 모여드는 게 틀림 없어
요.]
[목적이요?]
[예. 아마 그 고분과 관계가 있을 겁니다.]
[그 고분요? 그러면 왜구 500구가 발굴되었다는 그...]
대머리가 얼굴이 붉어지면서 다시 철봉을 빼내어 등에 지었다. 그러면서 다시 한마디
했다.
[고다이고 천황의 검은 손 대지 마라.]
등에 이상한 것을 진 남자는 여전히 냉소를 띄며 답했다.
[지금 그따위 칼이 문제일 것 같은가? 목숨이 아까우면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야...]
빈정거리는 말을 듣자 대머리는 화가 난 듯, 철봉을 빙빙 돌렸다. 바람소리가 울리면서
그 무거운 철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자, 그때까지 가만 구경하고 있던 두
명의 수염 기른 남자 중 하나가 소리를 쳤다.
[무엇하는 거요? 싸울 상대는 조금 있으면 지겹도록 생길 터인데!]
대머리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봉을 순식간에 멈추었다. 그리고는 봉
을 어깨에 얹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쿵쿵 거리면서 걸어갔다. 안기자 일행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 소리를 쳤던 수염 기른 남자가 등에 이상한 것을
진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걸며 인사 같은 것을 하는 듯 했다.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돌려 안기자 일행을 쳐다 보았다. 막 오금이 저린 안기자가 뒷걸음질을 치려는
데 김자영 스크립터가 툭 튀어 나갔다.
[안녕하세요? 성함이?]
수염 기른 남자가 의아한 눈 (결코 곱지 않은 눈매였다) 으로 돌아보는데도 김자영 스
크립터는 그녀의 최강무기인 미소를 흘리면서 이상한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이름을
묻는 것이었다. 남자는 여전히 얼굴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답했다.
[붉은 깃발... 주기(朱旗)선생, 속명은 박상준이라 합니다.]
[깃발요? 그러면 등에 매고 계신게 혹시 깃발인가요?]
수염난 남자가 퉁명하게 말했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허나 만지지 마십시오. 부정탑니다.]
[뭐요? 부정요?]
자영의 눈꼬리가 치켜졌다. 지독한 남여평등주의자인 자영에게 그런 말은... 갑자기
주기선생이라 자신을 밝힌 남자가 소매에서 노란색의 작은 깃발을 꺼내어 한 번 휘두르며
말했다.
[아아, 원래 그런 것이니 노하지 마세요. 음 방송국에 계시는 분이군요.]
[음? 어떻게 아셨죠?]
[하하하하...]
주기선생은 갑자기 호탕하게 웃으며 휙하고 걸어나갔다. 걷는다고는 하지만 그 걸음걸
이가 기묘했고, 너무나 삽시간에 멀어져서 사라지는 바람에 자영은 채 말을 붙이지도 못
했다. 그냥 주기선생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있던 수염난 남자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흠... 힐기보법(詰旗步法)... 오늘 견식을 넓히는 구먼.]
김자영 스크립터가 힐기보법이 뭐냐고 채 묻기도 전에 두명의 수염난 남자도 붕붕거릴
정도의 빠른 걸음걸이로 사라져갔다. 거의 자동차정도의 속도였다. 얼이 빠져서 멍하니
서있는 자영에게 안기자가 다가갔다.
[알겠소? 보통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오...]
[저... 저게... 대체...]
말을 더듬는 사람은 오히려 손기자였다. 안기자는 (속으로는 자기도 놀랐지만) 태연한
듯이 말을 이어갔다. 안기자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을 (약간의 과장을 덧붙여서) 두 사
람에게 들려주었다. 이 고분에는 분명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면이 있으며, 초자
연적이고 불가사의한 일, 나아가서는 숨겨진 역사의 비밀이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두사람은 통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세상에는 과학 같은 것으로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답니다. 저들도 그렇고, 또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 고분에도 뭔가 엄청난 비밀이 있을거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하
나 제안을 하겠어요.]
[뭐죠?]
[나는 급히 오느라 소형카메라하고 녹음기밖에 장비를 가져오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쪽
은 손기자도 있고, 장비도 많으니 우리 어찌되었든 간에 공동으로 취재를 하도록 합시다.
그 결과가 역사적인 것이 되든, 납량특집 쪽으로 가든지 말예요.]
[하지만...]
[방금 눈으로 본 듯이, 저런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뭔가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런 판에 혼자서 다니는 것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치는게 나
을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그런 일이 요즘에 일어난다는 것은 믿을 수가...]
[믿을 수 없는 일일수록 특종이 되는 것 아닙니까? 한번 캐보자구요!]
김자영 스크립터도, 손민구 기자도 점차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공동 취재에 동의하게 되었다.
[자. 그러면 잠시만요, 우선 이 일을 알려주고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
[누군 데요?]
[내 친구죠. 사기꾼인지, 숨은 도사인지는 아직 모르지만요...]
안기자는 최후의 시도라는 생각으로 다시 전화기로 걸음을 옮겼다. 막상 큰소리는 쳤지
만, 내심 불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현암이 설혹 엉터리나 돌팔이더라도 자신의
옛 친구인 것만은 틀림 없었고, 적어도 자기보다는 이런 상황에 잘 대처할 것이라는 생각
이었다...
신호가 가더니 딸깍하고 누군가가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안기자는 자기도 모르게
반가움으로 입이 벌어지는 것을 느꼈다...
5. 명검과 도인들...(3)
다행히도 전화를 받은 사람은 현암이었다. 안기자는 길게 수다를 떨려고 했으나, 현암
은 별 대답없이 다만 가능하면 빨리 그리로 가겠다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로 갈때까지는 섣불리 그 고분으로 갈 생각은 말라고 짤막하게 덧붙였다.
[왜? 그 고분에 뭐가 있다는 거지? 너는 무언가 아는게 있는거지? 그렇지?]
안기자가 추궁했으나 현암은 무거운 목소리로 한마디 할 뿐이었다.
[하여간 10시까지는 정류장에 그대로 있어. 내가 갈 테니... 농담이 아니다. 위험해...
그것도 몹시...]
전화가 딸깍 끊기는 소리가 났다. 안기자는 현암의 목소리에서 뭔가 섬뜩한 느낌을 받
았다. 위험하다고? 농담이 아니라고? 몰려드는 이상한 사람들... 그리고 또...
안기자의 머리속에 아까 대머리가 말했던 '고다이고 천황의 검' 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자신은 잘 아는 바가 없었지만... 안기
자는 김자영에게 다가갔다.
[김자영씨, 고다이고 천황이 누구인지 혹시 아세요?]
자영이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면서 기억을 되살리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자세히는 몰라요. 다만... 전에 '태평기'라는 일본 역사서를 본 적이 있는데, 비운의
천황이었던 것 같군요. 젊어 천황에 즉위한 후 막부와 대립하여 천황의 정통을 세우려 했
다가 실패하고 여러번 유배를 당하다가 후에 마사시게(正成)라는 명장을 얻어 가마쿠라
막부를 섬멸하여 건무의 신정 (그것을 정변이라는 사람도 있대요) 을 하여 이상적 정치를
할려고 했다나요. 그러나 2년만에 호죠와 같은 편이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에
게 망하여 원한 속에 죽었지요. 그것이 일본 남조의 멸망인데...]
손기자가 히죽 웃었다.
[자세히도 아시네요.]
[죽을 때의 모습이 '태평기'에 나오는데 그 부분이 인상깊어요. 거의 괴멸된 남조를 끌
고 요시노산에 갇혀서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에 법화경을 쥐고 숨을 거두면서 남긴 말
이 '비록 내 뼈는 남산의 이끼에 묻힐지언정 그 영혼만은 언제까지나 북조의 하늘을 노려
볼 것이다!' 였다더군요... 의지의 인물이었죠.]
안기자가 잠시 자영의 말을 중단시키고 말했다.
[잠깐... 칼... 칼이라 했습니까?]
[예... 태평기의 그 부분은 제게 인상 깊었던 부분이라 아마 틀리지 않고 기억한 내용
일거에요.]
고다이고 천황의 검... 고다이고 천황은 김자영 스크립터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평생
에 걸친 이루지 못한 꿈과 의지를 남은 채 억울하다고 하면서 죽은 인물이었을 것이 확실
하다.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놓지 않고 있던 검... 혹시 아까 대머리의 도인 (인지 뭔지
는 모르지만) 이 말한 검이 혹시 그 태평기에 나왔다는 칼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많았다. 그런 칼이 어째서 멀고먼 우리 나라의 강화도에 묻혀있을 이
유가 무엇이며, 아까의 그 대머리나 주기선생이라고 자신을 밝힌 이상한 사람들은 어떻
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정말로 그들은 무엇이든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 해도 그 주기선생의 말에는 다른 뜻이 있었다. 그 대머리는 분명 고다이고 천황의
검을 찾아서 온 것이다. 그러나 주기선생은 그에게 '지금 그따위 칼이 문제가 아니다. 목
숨이 아까우면 돌아가라' 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안기자는 자영과 손기자를 끌고 다시 읍내로 향했다. 뭔가 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
다. 현암이 자신이 올 때까지는 고분으로 가지 말라고 한 말이 걸려서이기도 했고, 그 고
분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자료를 찾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작은 서점에도 일본 역사에 대한 책은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어느 책에나 고다이
고 천황의 이야기는 나와 있었다.
김자영 스크립터의 기억력은 정확했다. 그녀가 이야기한 것은 거의 그대로였고 그녀가
묘사한 고다이고 천황의 임종 모습도 그대로였다. 그 날짜는 1339년 8월 16일...
안기자는 몇장을 더 넘겨 보았다. 남조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만했던 마사시게의 아들
구스노키 마사쓰라(楠木正行)이 시죠나와테에서 일족과 더불어 전멸한 것, 그리고 북조의
대장 모로나오가 고다이고 천황이 머물었던 요시노산에 불을 질러 모든 것을 태우고 전멸
시킨 일이 일어난 것이 1348년... 마사시게의 셋째 아들이었던 마사노리가 남조를 배신하
고 북조에 귀순한 것이 1369년... 결국 남조가 멸망한 것이 1392년... 그러나 북조도 융
성한 것은 아니었다. 1362년 북조의 관위 수여식을 거행할 때에 관위를 기재할 종이가 없
어서 식을 연기할 정도의 푸대접을 받고 있었으니까. 결국 천황이라는 것은 무사들의 명
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할 것 같은 말이 나왔다. 천황의 신기(神器)라고 하는 3가지의 유물에 대한
것이 그것이었다. 책에는 1392년 남북조의 통합 때에 천황의 신기를 북조에 전하였다고
했으나, 앞의 장에는 고다이고 천황때에 이미 정이 대장군 다카우지에게 신기를 양도한
것으로 되어 있었고 그 신기는 위조품이라는 설이 있었다. 또 그 때의 신기는 이미 당시
무로마치 막부를 건설했던 요시미쓰의 명에 의해 북조로 운반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
다. 그렇다면 혹시...? 처음에 가짜 신기를 전달하였다면 그 후에도 가짜 신기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었다. 또 그 얼마 뒤 이세의 국사인 미쓰마사가 후남조를 세울 때에 신기를
훔쳐냈다는 기록도 있었다. 신기... 결국 고다이고 천황의 이후 천황의 신기는 진짜가 아
닐 수도 있었다.
안기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여기까지의 내용을 김자영 스크립터에게 들려주자 김자영 스
크립터도 침중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 비약이 심하지 않은 가요? 한낱 왜구들이 그런 것까지...]
손기자가 끼여들어 물었다.
[그런데 그 세가지의 신기라는 것은 무엇무엇이지?]
일행은 다시 책들을 뒤져나갔다. 맨 앞부분에 그 이야기가 나왔다. 삼종의 신기는 아마
데라스오미카미의 몸을 상징하는 거울, 영혼의 정수를 담았다는 구슬목걸이(曲玉), 그리
고 12대 게이코 천황때 최고의 무장이었다는 다케루(日本武尊)의 목숨을 구했다는 초치검
(草치[艸 + 雉; 글자가 없네요]劍)...
[물론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안기자가 입을 열어 손기자에게 답했다.
[고다이고 천황이 천황의 신기를 쥔 채 다카우지에게 내주지 않았다고 가정을 하세. 그
러면 천황이 임종시에 쥐고 죽을만한 칼은? 바로 천황의 신기 중의 하나인 초치검이 아니
었을까? 더군다나 고다이고 천황은 천황의 세력을 확립하고자 가장 노력했던 천황이었으
니...]
김자영 스크립터가 다시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며 안기자를 들여다 보았다.
[그렇다면 아까 말한 고다이고 천황의 검이라는 것이 실은 삼종의 신기 가운데 하나라
던 초치검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물론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죠. 그러나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천황의 삼종
의 신기는 천황의 즉위에 없어서는 안되는 물건이라고 해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 강화
도에서 그 신기 중의 하나를 발견했다고 가정해 봐요. 1360년 이후 모든 일본의 천황들은
사이비 신기를 가지고 즉위식을 한 거라구요! 하하하!]
[하지만 아까 그 대머리 도사의 말 한마디만을 듣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무 비약이
심하잖아요?]
[심하면 어떻습니까? 만약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역사적 발견을 하는 셈예요.
그리고 실패해도 납량특집감 정도는 될 수 있을걸요?]
김자영 스크립터는 너무 터무니 없는것 같이 들리는 안기자의 말이 옳은 것 같지 않다
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덧 조금씩 흥분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손기자도 얼굴에 잔
뜩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추리에 골몰하고 있었고...
[아무튼 조사 해 볼 필요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흘린 말 한마디만
가지고 그런 추리까지 하는 건 너무 무모한 것 같군요...]
손기자의 차분한 말로 결국 일행은 잠정적으로 행동을 정하게 되었다. 안기자는 자신의
위대한(?) 추리를 너무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 조금은 불만이었지만 또 가만 생각해보니
너무 과장된 추리인 것도 같았다. 아니 그러다 보니 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아
이고...
어느덧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다보니 시간이 다 되어갔다. 안기자를 선두에 세우고 세명
은 현암과 만나기로 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벌써 사방은 캄캄해지고 김자영 스크립
터는 아까 본 이상한 사람들과 이상한 일들이 자꾸 생각 나는 것을 느끼면서 문득문득 무
서운 생각이 드는 것을 느꼈다.
텅 빈 길이었다. 차도 벌써 끊어진 듯, 길에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고 다만 풀벌레며
개구리 우는 소리들만이 들려왔다. 안기자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저만치에 서있는 일
단의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섯 사람... 아니 아주 작은 꼬마도 하나 있는 것 같
았다. 모두 여섯 명의 그림자가 묵묵히 서 있었다.
[이현암!!!!]
[안재민! 너 왔구나! 별일은 없니?]
한사람이 손을 흔들며 반겼다. 안기자는 걸음을 재촉하며 일행을 끌고 그리로 다가갔
다. 덩치가 큰 신부, 흰 한복을 입은 작은 꼬마, 좀 야한 옷을 입은 여자와 어느 팍삭 늙
은 듯한 노인, 그리고 그 옆에 바싹 붙은 온화한 표정의 여자와 또 한 명, 낯익은 모습이
드러나 보였다. 현암이었다. 안기자는 반가움에 걸음을 옮기면서도 도대체 어울리는 것
같지 않는 또 다른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에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6. 명검과 도인들...(4)
[인사들 나누자구. 자, 이 분은 알고 있었겠지? 박신부 님이고, 여기는 준후... 그리고
이 쪽은 승희...]
현암은 안기자에게 한사람씩 소개를 해 주기 시작했다. 뒤따라 김자영 스크립터와 손민
구 기자가 달려오자 현암은 그들에게도 인사를 나누게 주선해 주었다. 현암이 옆에 서있
는 팍삭 늙은 것 같은 노인을 소개하며 말했다.
[그리고 이쪽은 최철기 옹이라는 분이십니다.]
노인은 카랑카랑하고 다소 쉰 듯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나, 경주 사는 철기라고 하네. 박수 무당이지.]
안기자와 자영의 눈이 다시 한번 휘둥그레 졌다.
(인젠 무당까지...)
현암은 아는 듯 모르는 듯, 다시 온화한 얼굴의 여인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쪽은 송화암의 지연 보살 님이십니다.]
박수 최철기옹이 좀 높은 쇳소리 비슷한 소리를 냈다.
[나하고 우연히 같이 오게 되었지! 하하하]
손민구기자가 끼어 들어 합장을 했다.
[아! 지연 보살님. 여기에는 또 어쩐 일로..]
현암이 웃는 얼굴이 되었고, 안기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손기자가 원래 불교 신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음? 손기자, 지연 보살님과 원래 알던 사이야?]
[전에 한 번 은혜를 입은 적이 있지. 지연 보살님은 참 신통하신 능력이 있다네. 보살
님이 독경 해 주면 상처가 싹 나아버린다고.]
김자영 스크립터가 안기자에게 조그만 소리로 물어왔다.
[음? 그러면 안수나 심령치료 같은 거에요?]
[음. 그런 것 같군. 그런데 손기자가 저렇게 나올 정도라면...]
손기자는 계속 고마웠다며 지연 보살에게 합장을 하고 있었고, 지연 보살은 몹시 수줍
음을 타는 듯, 얼굴이 빨개져서 쩔쩔매고 있더니 박수 철기의 등 뒤로 가서 숨었다. 숨어
봐야 박수 철기의 키는 150도 채 안되어 보일 정도였기에 숨으나마나 였지만...
[아, 보살님. 전에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부러진 다리가 감쪽같이 낫는
일을 겪은 뒤 너무 고마워서 몇번이나 송화암으로 찾아 갔었읍니다만 그때마다 만나 주시
지 않으셔서...]
[잉? 다리가 부러졌었다고?]
안기자가 눈을 크게 떴다. 보통의 안수나 심령치료라는 것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내상이나 종양 같은 속병을 치료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안기자도 그런 것은 믿
지 않았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저 지연 보살이라는 여자는 그 정도를 넘어서는 것 같았
다. 부러진 다리가 감쪽같이 나았다니? 다리가 부러지면 최소 입원 8주에 가료 12주다.
그런데...
[그만 하셔요... 여기 훨씬 더 도력이 높은 분들만 계시는데... 에구구...]
안기자가 현암을 향해 눈을 흘겼다. 현암은 모른척하고 옆을 보고 있었지만,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음... 분명 저 놀라운 능력을 가진 여자가 자기보다도 도력이 높다
고 한 사람중에 현암도 끼어있을 것이 분명한데 여태껏 내숭을 떨고 있었어? 막 안기자가
뭐라고 하려는데 꼬마아이가 툭 튀어 나왔다.
[아이고 보살님, 저희는 구경온 거에요. 그런데 도력이 뭐에요?]
안기자가 가만 보니 참 똘망똘망하게 생긴 꼬마였다. 눈이 좀 작았지만 눈자위가 새까
맣게 눈을 채우고 있어서 참 귀여워 보였다. 음... 저런 꼬마가 무엇을 알겠나? 그리고
보니 성당에 가있어야 할 신부가 현암과 같이 나타난 것도 이상했고 거기다 저 날라리 같
은 여자라...
(음, 그냥 놀러온 건가? 아무래도 꼴들을 보니 무슨 신통한 힘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
데... 그런데 너무 부자연스러운 일행인데...?)
[자자. 아무튼 목적지가 다 같으니 일단 떠납시다. 마침 나하고 현암군이 차가 있으니
그걸 타고 가면 좀 편할겁니다. 이야기는 가면서 더 나누기로 하고요.]
박신부가 조금 이상해진 분위기를 깨며 일행을 갈라 놓았다. 일행은 9명이었으니 차 두
대에 분승이 가능했다. 안기자는 애써서 현암과 같은 차를 타려 했으나 현암이 지연 보살
을 자신의 차에 타라고 하자 손기자가 따라갔고, 김자영 스크립터가 따라가고 거기에 준
후라고 하던 꼬마까지 쪼르르 잽싸게 끼어들어서 인원이 차버렸다. 안기자는 내심 고약한
놈, 망할 놈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덩치 큰 신부의 차로 갔다. 철기 옹(翁)이 뒷자리로 쑥
들어가더니 승희라던 여자가 옆에 타려고 하자 소리를 질렀다.
[에잇! 새파란 것이 어딜 와! 부정타!]
승희라고 하던 좀 야한 여자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면서 막 뭐라는 말이 나올 것
같은 순간에 (그 여자, 되게 성질이 급한가부다) 박신부가 앞자리에 타라고 타이르는 것
같은 소리를 했고 승희는 별로 곱지 않은 얼굴로 앞자리에 탔다. 안기자는 자신이 참 자
리에 대한 한 지지리도 재수없다는 생각을 했다. 하필 해소병자같은 저런 사람의 옆에...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앞에서 승희가 킥킥 웃고 있었다. 왜 갑자기 화를 내다가 웃는
것일까? (안기자는 승희가 안기자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으니까) 철기
옹은 박신부의 차 안이 몹시 불편한 듯, 앓는 소리 같은 것을 냈다.
[차안에 억수로 많이 붙이고 발라 놓았구먼. 이래서야 원... 흘흘...]
도대체 무엇을 붙여 놓았다는 건지 안기자에게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철기 옹은
차안을 방어하기 위해 박신부가 숨겨 놓은 성물들과 차에 뿌려 놓은 성수의 기운을 느끼
고는 괜히 심통을 부리는 것이었다. 박수무당인 철기옹에게 박신부의 기운은 맞지 않는
것이 분명 했으니까...
차가 출발했다. 안기자는 목적지가 ###고분이냐고 물었고 박신부는 그렇다고 대답 해
주었다. 뒷자리의 철기 옹은 잠시 눈을 감고 있더니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현암은 막
속력을 내어 달리는데, 박신부는 느긋하게 운전하고 있었다. 안기자는 좀 불만스러웠지만
뭐라 하기가 좀 껄끄러워서 잠자코 있기로 했다.
불쑥 철기 옹이 한마디 내뱉었다.
[아깝구먼! 아까워!]
안기자가 물었다.
[뭐가요?]
[아... 저 계집애 말여. 몸안에 엄청 큰 힘이 있는데 십분의 일도 써먹을 줄을 모르는
구먼. 하긴... 차라리 그게 나을거여. 아마 영영 힘을 다 쓰지는 못할걸세. 신이 이세상
에 유배 온 거니까.]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데 앞자리의 승희라던 여자는 '계집애' 소리를 듣고
또 다시 성질이 살아난 듯, 위로 쭉 째진 눈으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철기 옹
은 못 본 척 눈을 감고는 계속 중얼거려 댔다.
[좋은 일 해! 사람들을 많이 구해야 혀! 하늘은 공정한 거여! 좋은 신이 유배 왔으면
악신도 유배 왔을 테니깐... 어딘가에...]
승희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신부에게 낮은 소리로 뭐라고 뭐라고 혼자 중얼대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지? 미쳤나?)
안기자는 박신부와 승희의 대화법을 알 리 없었다. 박신부는 굳이 기자라는 위험한(?)
사람을 태우고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마음 속으로 생각만 하면 그걸 승희가 읽
고는 간단히 박신부에게 대답만 해주면 그뿐이었으니까. 참으로 완벽한 도청방지체제(?)
가 아닌가?
한참 침묵이 흘렀다. 안기자는 넌지시 철기 옹에게 아까 본 이상한 사람들의 정체를
물어볼 생각을 했다. 어차피 비슷비슷한 사람들이라면 서로 알고 있을 듯도 해서였다.
[노인장...?]
[왜?]
[혹시... 주기선생 박상준이라고 아십니까?]
[아 그 새파란 놈이 무슨 선생이여? 입만 깐 놈이지.]
[그럼 아시는군요?]
[음 조금 재주는 있는 놈이라고 들었어. 등에 12깃발을 꽂고 다니며 12지신을 부린다고
큰소리치는 놈이라지? 왜? 그 놈도 왔나?]
[예. 봤지요. 대머리에 이마에 갈메기가 있는 거한하고...]
[아! 갈메기? 그러면 그놈은 차력파의 병수라는 놈이여! 힘만 센 멧돼지 같은 놈이지!]
[아하! 그리고 수염하고 머리를 잔뜩 기른 두명의 흰, 아니 회색옷을 입은...]
[그것 가지고야 알 수 있나? 오의(汚衣)파 인 듯 한데, 그 이상은 몰러!]
[그러면 혹시 현현파라는...]
[음? 거기도 왔어? 죽지 못해 안달들이 났군. 필경 현현파 두 늙은이겠군.]
[예? 아... 네명의 청년이 왔던데요?]
[음? 그럼 그 늙은이들은 뒈졌나? 그 제자들인게로구먼.]
[그리고... 청홍검을 멘 여자...]
갑자기 가만히 앉아 중얼거리고 있던 철기 옹이 눈을 번쩍 뜨면서 몸을 일으켰다.
[뭐? 청홍검????]
[아니 왜 그러십니까?]
안기자가 잠시 어리둥절해서 보니 승희도 눈을 치켜 뜨고 뒤를 돌아보고 있었고, 박신
부도 당혹한 얼굴로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런 이런... 초치검하고 겨뤄 볼 생각이구먼! 누가, 누가 청홍검을 메고 왔다고?]
[초치검이요? 그러면 일본 천황의 3종 신기의 하나라는 그...]
[아 누가 메고 왔냐니깐! 어떤 여자였어!!!]
철기 옹은 안기자의 귀가 멍멍해 질 정도의 큰 소리를 바로 안기자의 귀에 대고 질렀
다. 안기자는 기겁을 하는 바람에 눈에 눈물까지 조금 나왔다.
[아... 체구가 작고, 좀 예쁜... 젊은 여자...]
[뭐? 도지(桃枝)무당이 아니고?]
[예? 도지가 또 누구죠?]
철기 옹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청홍검은 분명 도지 무당이 가지고 있다던데... 그걸 빌려
줄 리가 없는데...]
[도지 무당이 누군 데요?]
[아 알 것 없어!!!! 그러면 자네, 그 여자 혹시 일행이 없던가?]
[예? 없는 것 같던데요?]
[아니, 그 여자 주변에 허리가 구부러지고 나처럼 폭삭 삭은 할망구가 없었어?]
[아... 할머님이 한 분 같이 내리기는 했었죠... 그러나...]
[이런 이런! 그 할망구까지도 왔구먼! 에구구...]
철기옹은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의자에 깊이 묻었다. 안기자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
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박수 철기옹, 지연보살, 주기선생, 차력파, 오의파,
현현파, 청홍검에 도지 무당이라... 도대체 결코 쉽사리 찾아 볼 수 없는 이런 신기한 사
람들이 왜 하나같이 그 ###고분으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정말 자신이 추리한대로
초치검이라는 일본 천황의 신기가 그곳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은 그런 사실을 또 어
떻게 안 것인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머리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순간, 현암이 운전하던 앞차에서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7. 밀법진...(1)
현암은 말없이 운전대만 굴리고 있었고, 손민구 기자는 계속 앞자리에 앉은 지연보살에
게만 떠들어대고 있었다. 김자영 스크립터는 계속 눈을 깜박 거리면서 지연보살에게서 무
슨 말이 나오나만 바라보고 있었으나 지연보살은 계속 수줍은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었다.
준후는 뭐라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 했으나, 현암에게서 미리 다짐을 받은 듯 계속
입을 열려다가 현암의 눈치를 살피고는 도로 입을 다물곤 했다.
현암의 운전은 성격 탓인지 약간 거칠은 편이었다. 어느새 박신부가 느긋하게 모는 뒷
차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쳐지게 되었는데...
[서요!!]
준후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차가 우뚝 멈춰 섰다.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몸이
왈칵 앞으로 쏠려서 한동안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그마한 체격으로 가운데 끼
어 들었던 준후는 거의 앞창문으로 뚫고 나갈 지경이었으나, 현암이 손으로 막는 바람에
간신히 정지 할 수 있었다. 손기자가 시트에 부딪힌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뭡니까?]
현암은 그 와중에도 고요히 앉은 채 앞만을 보고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준후가 흥분
된 얼굴로 입을 먼저 열었다.
[밀법진!! 누가 여기 이런 것을...]
현암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준후야? 깨고 지나갈 수 있을까?]
[해 봐야죠...]
손민구 기자와 김자영 스크립터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진이 어떻
고 깨고 지나간다고? 보기보다는 와일드한 면이 잇는 김자영 스크립터가 먼저 입을 열었
다.
[밀법진요? 그게 뭔데요? 아무 것도 없잖아요?]
지연보살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얼굴에 놀란 표정은 없었지만, 안색이 다소 질려 있었
다.
[보이지는 않지만... 큰 힘이 이 근방을 뒤덮고 있어요...]
손민구 기자도 끼었다.
[아니, 차로 지나가면 될 거 아녜요? 왜 갑자기 세우는 거죠?]
현암이 차에서 내리라는 손짓을 했으나 손기자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현암을 쳐
다 볼 뿐이었다. 현암이 좀 시무룩한 안색으로 말했다.
[차는 더 이상 갈 수 없어요. 아예 땅에 달라 붙은 거니까.]
[예? 달라 붙어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준후의 말에 따라야 해요. 못 믿겠으면 여기서 돌아가는 건 괜찮
아요.]
김자영 스크립터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런 아이가 무슨...
손기자는 미심쩍은 듯 손을 뻗어 차의 키를 돌려 보았다. 시동이 걸렸다.
[아니, 차가 왜 못 간다는 거죠? 엔진이 돌잖아요?]
[엔진이 돌면 뭐해요? 바퀴가 붙었는데!]
[무슨 농담하는 겁니까? 내가 해 볼까요?]
[엔진 망가져요!]
현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손기자는 현암의 자리에 옮겨 타고 클러치를 힘있게 떼었다.
순간 잘도 돌아가던 엔진이 그냥 뭔가에 걸린 듯 죽어버리고 말았다. 정말 바퀴가 뭔가에
끼어 돌지 않는 듯 싶었다. 손기자는 머쓱해지기도 하고, 좀 놀라기도 했다.
[아이고... 이거... 정말 뭐가 끼었나 보네요!]
[에이! 하지 말래니까 왜 그래요? 인제 정비소 갈 돈도 없구먼...]
[예?]
[아녜요. 하여간, 이제 돌아가요. 잘못하면 큰일 납니다.]
김자영 스크립터가 차에서 내렸다. 뭔가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준후가 자영에게 말했다.
[누나! 정말 돌아가는게 좋아요. 잘못하면 큰일 난다구요. 이건 정신을 흐트러트리는
정도의 보통 진법이 아녜요. 그러니까...]
[잠깐, 잠깐! 진법? 그러면 삼국지에 나오는 팔진도 같은거 말이니?]
[그 정도가 아녜요! 이건 밀교의 금강계구회만다라를 응용한 진 같은데...]
[잠깐만! 밀교? 만다라?]
[아이구. 설명할 시간 없어요. 빨리 돌아가세요!]
[난 못가! 난 취재하러 왔단 말야! 도대체 앞에 뭐가 있다구?]
김자영 스크립터가 막 발을 내디디려는데, 현암이 갑자기 손을 들어 막았다. 그 인상이
대단히 살벌(?)해서 자영은 순간적으로 발을 멈추었다.
[잠시... 움직이지 말아요!]
현암이 손을 뻗어 옆에 있던 나무가지를 하나 꺾어 자영의 앞에 던졌다. 나뭇가지는 갑
자기 와삭하는 소리를 내면서 허공에서 부서져 없어져 버렸다. 자영은 놀라서 말했다.
[아니? 도대체 뭐죠? 마술인가요?]
[그 나뭇가지 꼴이 되기 싫으면 돌아가시오.]
[못 간 대두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손기자가 살며시 호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어 던졌다. 볼펜 역시
와작 소리를 내면서 부서져 버렸다. 손기자가 앓는 것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아이고... 귀... 귀신인가보다!]
[귀신이 아니라 귀신을 막으러 온 사람들이 친 진일겁니다.]
지연보살이 역시 조용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손기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
다.
[난... 난 믿을 수 없어. 세상에 이런 것이 어찌...]
준후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두분은 위험해요...]
[준후, 지연보살님, 어서 가십시다!]
현암은 냉냉하게 말했고, 준후는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고는 사방을 살폈다. 자영과
손기자도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주변에 이상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현암형! 수인을 맺어요. 금강구회만다라... 첫번째는 항삼세삼매야회(降三世三昧耶會)
예요.]
[지연보살님, 임(臨)자 부동근본인(不動根本印)입니다.]
[예. 약간 알아요.]
[진을 파괴 할 수도 있지만... 뭔가 이유가 있어서 쳐 놓은 것 같아요. 그러니 안에
들어가서 이 진을 쳐놓은 사람을 만나볼때까지는 파괴해선 안될 것 같아요. 그러니 그냥
통과 합시다.]
현암은 말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면서 다시 한마디했다.
[어서 돌아가거나 여기서 기다려요.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어요.]
김자영 스크립터는 화가 난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도 알 수 없고,
자기들 끼리만 가다니... 손민구 기자는 되려 주춤 거리며 물러서려 했지만...
[나도 갈꺼라구요!]
발을 내딛는 자영의 몸에 갑자기 무언가 억누르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으악!!!]
자영은 기겁을 하며 발을 도로 빼냈다. 그러자 고통은 없어졌다. 그러나 눈 앞을 보니
세사람이 이상한 손모양을 하고 앞선 꼬마는 뭔가를 중얼거리며 길 옆으로 괜히 꼬불꼬불
나가고 있었다. 자영은 다급한 김에 다시 발을 뻗었으나 다시 고통이 밀려왔다.
[으악!!! 아이고고!!!]
하도 아파서 눈물까지 글썽 났다. 그럴수록 오기는 더 생겼고...
(아예 확 뛰어들어 버려? 에고 그랬다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바보 같은 손기자는 그냥 눈만 데굴데굴 굴릴 뿐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고 발목에서 무릎까지는 벌써 부어오르고 있었다. 정말 무슨 도깨비 장난
같았다...
[으앙~~~~!!!]
현암은 고개를 돌렸다. 김자영 스크립터가 주저앉아서 마구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
기자는 영문도 모르고 그저 안절부절하고 있었고... 준후도 뒤를 돌아 보았고, 지연보살
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준후가 눈짓을 했다. 아마 시끄러우니 그냥 지나가게 해주어
도 될 것 아닌가 하는 눈짓인지... 하여간 현암은 여자가 저렇게 우는 건 질색이었다. 현
암이 찡그린 얼굴로 돌아오자 자영은 곁눈질로 현암을 훔쳐보면서 더 큰소리를 냈다.
[아 그만해요!!! 원 세상에 다 큰 어른이...]
[으아아아앙~~~~!!!]
가까이서 보니 분명 거짓 울음이 분명한데 이거 원... 현암은 여자가 귀신보다 더 무섭
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자 주 : 우와아아아아악~ 돌 날아온다!!!)
[아니, 왜 그러는 겁니까? 돌아가시라고 하지 않았어요? 떼쓰는 겁니까?]
[우리는 엉엉~~~ 취재를 해야 엉엉~~ 한단 말예요!!! 엉엉~~]
[이런 걸 취재해서 뭐하려구요? 사람들이 믿지도 않을 거고, 또...]
손기자도 이제야 눈치를 챘는지 앞으로 나섰다.
[그건 저희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기사에 쓰지는 않겠어요. 다만 고분의
역사적 자료를 찾으려는 것 뿐입니다.]
[고분요? 그게 어떤 건지나 아시고 하는 말이에요?]
자영의 눈이 반짝 했다. 그러면 저 현암이라는 사람은 그 고분에 대해 뭔가 알고 있나
보다!!!!
[으아아아아아앙~~~~~!!!!!!!!!!]
[아이고! 고만 해요!!!]
결국 현암은 떫은 감 씹은 얼굴이 되어서 준후에게로 돌아왔다. 간신히 타이르고 어르
고 협박까지 해서 두 기자를 떼어 놓고 오는데는 성공했지만 뭔가 예감이 이상하기도 했
다. 특히 그 여기자인지 스크립터인지가 나중에 씹어먹을 듯한 눈초리로 째려보는 것도
섬뜩했고... 현암은 다시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고 걸음을 옮겼다. 진속에서 망상을 갖는
것은 위험했다...
일행은 준후의 인도로 항삼세삼매야회, 항삼세갈마회, 이취회, 일인회, 사인회, 공양
회, 이세회등의 일곱 단계를 임,병,투,자,개,진,열의 수인을 바꾸어 맺으면서 무난히 통
과했다.
준후가 잠시 쉬면서 설명을 했다. 퍽 숲속으로 많이 들어간 다음이었다.
[이 진은 금강계구회만다라를 진으로 옮긴 것으로 아홉 개의 진으로 되어 있어요. 여기
까지는 경고용인지, 그다지 강한 방어는 아녜요. 사람이 모르고 들어와도 죽을 정도는 아
닌 것 같아요. 다만 겁을 줄 정도...]
지연보살이 말을 이었다.
[진을 친 사람이 마음 씀씀이가 깊군요. 그러나 만다라 대로라면 삼매야회와 근본성신
회의 두 단계가 남아있지 않은 가요?]
[잘 아시네요... 그 두단계가 문제에요. 대강보니까, 그 두진은 퍽 통과가 어려울 것
같아요... 아주 강한 힘이 있어서요. 그리고 여기까지의 일곱 단계도 마지막 두단계를 잘
못 건드리면 변해버릴 수가 있어요.]
현암이 물었다.
[진이 변한다고?]
[예...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진법으로 볼 때 사문(死門)은 아녜요. 경문(警門)에 해당
되죠. 그러나 이 진은 지금 잠들어 있는 듯 하네요. 잘못 건드리면 생문(生門)이 닫히고
모든 입구가 빙빙 돌게 되어서 길이 모두 사문으로만 통하게 바뀔 수 있는 위험한 것이
돼요...]
[흠...]
[그리고 또 이상한게 있는데, 이건 우리 나라의 술법이 아녜요.]
[음? 그러면?]
[일본 밀교의 술법이에요...]
[일본? 그러면 진언종??]
준후가 막 뭐라 말을 하려는데, 뒤에서 여자와 남자의 비명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현
암은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이고! 그 기자들이다! 에이! 왜 졸졸 따라와! 위험하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죠?]
[일단은 구해 줘야지!]
[수인은 기억하죠? 전 이 진을 좀 더 살필께요!]
[그래! 염려마!]
지연보살도 현암을 따라가려고 몸을 돌렸다. 아마 상처라도 입었으면 도움을 주기 위해
가려는 듯 했다. 현암은 다시 수인을 고쳐 맺으면서 뒤로 걸음을 옮겨갔다. 지연보살이
그 뒤를 따랐고 준후는 그냥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현암이 숲속으로 사라지자 준후는 사방을 꼼꼼히 살피며 앞에 쳐진 보이지 않는 힘의
장막을 거둘 방법을 생각하는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는 준후의 등뒤에 누군가의 그림자
가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8. 밀법진...(2)
현암은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수인을 고쳐 맺으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김자영 스크립터가 내는 것이 분명한 비명소리가 계속 조금씩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 비명 소리는 이제는 흐느낌 소리 같은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손기자의 탄식 같은
소리도 섞여서 들려오곤 했다. 분명히 현암의 말을 듣지 않고 억지로 현암일행의 뒤를 제
멋대로 따르다가 진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이 틀림 없었다. 뒤쪽에서 따라오는 지
연보살도 뭐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걸음을 퍽 서둘러 옮기는 듯 했다.
마침내 현암은 자영과 손기자를 발견했다. 보니까 두사람은 아직 멀리 가지도 못하고
겨우 이단계인 항삼세갈마회(降三世[羊+ 曷]磨會)의 초입의 위치에 있었다. 자영의 몸은
허공에 떠 올라서 발을 움직여도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게 되어 있었고, 손기자는
빤히 코 앞에 자영이 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이 허우적 거리며 겨우 반경 1미
터쯤 되는 원호속을 맴을 그리며 눈먼 쥐 처럼 돌고 있었다. 진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이상한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영은 계속 뱅뱅 도는 손기자에게 욕까지 해대
다가 현암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반가움에 찬 소리를 질렀다. 온 몸이 풀에 긁히고 여
기저기 옷까지 너덜너덜해져 있는 것을 보면, 그나마 약하게 쳐 놓은 초임의 진세를 억지
로 비집고 들어오느라 꽤나 고생한 듯 했다.
[여기! 아이고 여기에요! 도와 줘요!]
[자! 수인을 맺어요! 병(兵)!]
현암이 수인을 설명해 주자 자영은 금새 알아듣고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자영의 몸이
털썩 땅에 내려 앉았고, 헤메고 다니던 손기자도 자영이 붙잡고 인장법을 일러주었다. 손
기자도 비로소 눈이 트인 듯, 땀에 온통 범벅이 된 얼굴을 흔들어 대었다.
[어휴~. 죽는줄 알았어요... 원 세상이 눈 앞이 뿌옇게 꽉 막히고...]
현암은 여전히 냉냉하게 말했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요? 그러니 돌아가요. 너무 위험하다구요.]
자영이 금세 살아난 듯, 다시 대들었다.
[아니, 또 돌아가라구요? 그럴 순 없어요! 우리도 갈래요! 이제는 취재보다도, 오기가
생겨서라도 그놈의 무덤인지 뭔지 내 손으로 뒤져봐야 겠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아직 정신 못 차렸어요? 이건 초입의 경고일 뿐이라구요!
더 안쪽으로 가면 점점 더 힘이 강해지고, 그런 곳을 그냥 통과하려다가는...]
[어떻게 된다는 거죠?]
[즉시 사망예요!]
자영은 겁도 없이 곧바로 대꾸했다.
[여기서 그냥 나간다 해도 난 안달이 나서 죽을 거에요. 기왕 죽을 거면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죽을래요!]
[아니, 그런 억지를...]
[현암씨라고 했나요? 당신이야말로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나를 놓고 오라가라 하는 거죠?
내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뭐! 그러니 송장 치우고 싶지 않으면 빨리 여기를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구요!]
[뭐... 뭐요? 송장 치운다고요?]
자영의 눈이 또 다시 곱지 않게 되었다. 자영이 현암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길을 갈켜 줄래요, 아니면 걍 주글래요?]
이건 억지도 보통 억지가 아닌데다가 찡그리고 있는 자영의 눈에 장난기까지 있는 것
같아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던 현암이 막 입을 열려는데 뒤쪽에서 껄껄껄 하는 밭은 웃음소리
가 울려왔다. 언뜻 보니까 박수 철기 노인이 박신부와 승희, 안기자를 끌고 수인을 맺은
채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 철기 옹이 수인을 맺는 법을 가르쳐 준 모양이었다.
[여보게나, 젊은 친구! 웬만하면 데리고 가세 그려! 그 안에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것도 있지 않은가?]
[아... 철기 옹이시군요.]
자영은 박수무당 철기 옹이 자기를 도와주는 듯한 소리를 하자 반가워서 그쪽으로 다가
가려고 했으나 철기옹은 그 낌새를 알고서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예끼! 가까이 오지마! 부정 타! 흠... 요즘 젊은 것들은 왜 저리 법도가 없지?]
자영은 흠칫했으나 까놓고 대들려고 하던 승희보다는 자영쪽이 산전수전을 더 겪은 베
테랑인 듯, 그 자리에서 꾸벅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경거망동을 했습니다.]
승희는 삽시간에 요사(?)를 떠는 자영이 좀 못마땅한 듯이 보였으나 안기자와 박신부는
그냥 웃고 있을 따름이었고, 철기 옹은 다시 껄껄 웃으며 말없이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
다. 지연 보살이 그 뒤를 따랐고 자영을 툭치면서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안기자가 다
시 만난 현암에게 다가왔다.
[이봐, 현암. 이거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이런 진법이라는게 정말 세상에 있다니, 그리
고 자네가 고수 중의 하나였다니 말야... 하하하]
[그런 소리말라구. 내가 무슨 고수야, 고수는. 에잇. 자네들 같은 사람들은 여기 오면
안되는 거였는데... 아무튼 입 꼭 다물고 있어.]
[그런데 저 노인이 말했던 것은 뭐야?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 말야...]
[흠... 차차 알게 될거야. 너무 서두르지 마.]
[아니, 난 궁금해 죽겠다구. 차차 알게 될 거라면 말해줘도 좋잖아? 분명 여기 모이는
사람들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다만 그것이 초치검과 고대의 신물에 얽혀 있는 것이라는
사실 외에는...]
[초치검과 고대의 신물? 아니 그러면 일본 천황의 3종 신기중에 하나라는 초치검 말고
도 다른 고대의 신물이 있다는 건가?]
[추정일 뿐이지만... 아마도 그럴 것 같아. 500구가 넘는 왜구들의 시체... 그건 아마
도...]
[아마도 뭐지?]
[원정대 였을거야. 우리 나라에 숨겨져 있다는 고대의 신물을 찾는...]
막 현암이 더 말을 이으려는데 갑자기 행렬이 멈추어 섰다. 뭔가 해서 보니 현암이 아
까 통과할 때는 없었던 불기둥이 오솔길 위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불기둥은 화
끈한 열기를 뿜고 있었으나 주변의 것들을 태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음? 아니 저건 또 뭐야?]
[진법이 변했어! 누가 진을 건드린 것 같아.]
앞쪽에서 철기 옹의 화난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에잇! 어떤 놈이 수작을 부리는 거냐?]
철기 옹은 등에 메고 있던 말굽자 모양의 나무막대 같은 것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막
대를 당겨 줄을 걸자 그 막대는 활이 되었다. 그전에 시위를 푼 활을 본 적이 없던 안기
자는 미처 그게 뭔지 잘 몰랐지만, 그 말굽모양의 나무막대 같은 것은 시위를 끌러 놓은
국궁(國弓)이었던 것이다. 철기 옹은 수인을 풀고 움직이는데도 일단 활을 잡자 주위의
진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 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읊으면서 철기옹이 활을 쥐
자, 조그마한 영감 같았던 철기 옹의 몸이 쫙 펴지면서 기운이 넘치는 것 같은 모습이 되
었다. 철기 옹이 빈 활을 힘있게 당겨서 줄을 연속으로 탁탁 두번 튕기자 눈 앞의 불기둥
이 퍼석하고 흩어져 사라졌고, 갑자기 저쪽에서 조그마한 노란 깃발이 날아오다가 무언가
에 부딪힌 듯, 땅에 툭 떨어졌다. 안기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저건 분명 빈 활인데... 그리고 저 깃발은...]
[영력에 의해서 활을 쏘는 걸세. 옛날 조선 태조 이성계나 명장들이 썼던 술수지. 그런
데 저 작은 깃발은...]
철기 옹이 소리를 질렀다.
[썩 모습을 드러내라!]
저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 한 남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주기선생 상준 이었
다. 다시 사방에서는 불기둥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이상한 회오리 바람이 몰아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이 사방을 채워서, 자영과 손기자는 말도 제대로 이을 수
없었다.
[철기 어르신, 그간 별래무양 하였소이까?]
[흠... 네놈이 알 일이 아니다!]
[그런데 철기 어르신은 어떤 일로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까?]
[네놈이야말로 여긴 뭣하러 왔느냐? 초치검을 얻기 위해서냐?]
[저같은 놈이 무슨 복이 있어서 그런 귀한 것을 가질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냥 구경온
거죠.]
[이놈, 구경을 온다는 놈이 12깃발을 다 메고 왔어?]
철기 옹과 주기선생이 싸움하는 것처럼 떠들어 대는데 안기자가 뒤에서 현암을 쿡 찌르
고 간신히 현암에게 말을 했다. 이제는 하늘마저 어두워져 가는 듯 했다.
[저 주기선생이라는 사람, 도력이 높은 것 같던데?]
[음. 12지신술을 쓴다더군. 그런데 좀 사파에 가까워. 사리사욕을 챙기는 듯 하고...]
주기선생은 뭐라 말을 하다가 갑자기 등에서 깃발 하나를 빼내어 휘둘렀다. 펄럭 하고
깃발이 펴지자 주사를 먹인데 천에 마치 부적처럼 이상한 글자가 금색으로 그려진 것이
보였다.
[시간이 없구먼요. 이 진은 왜놈들이 쳐 놓은 게 분명합니다. 이미 진형이 바뀌고 있어
요.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와 진을 부수고 있군요."
[진을 부순다고?]
[예. 현현파, 오의파, 청홍검을 든 여자 모두가 사방에서 진으로 들어오고 있어서 진세
가 곧 발동 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만나게 되었으니 힘을 합치는 것이 어떨까
요?]
[에잇. 너 같은 녀석은 소용없다! 그냥 구경이나 해라!]
철기 옹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자그마한 아이가 뛰어 나왔다. 준후
였다. 이제 숲속은 미친 광풍이 휘몰아치고, 금새라도 귀신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분
위기가 되었다. 번뜩이는 불기둥들이 사방에 일어나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 기이한 속에서
아이가 뛰쳐 나오자 안기자와 자영, 손기자는 흠칫했다.
[아이고 현암형!!!! 저기에! 저기!]
현암이 소리를 쳤다.
[뭐니? 준후?]
[사람들이 진을 깨고... 진을 친 사람들과 싸우고 있어!]
[음? 누군데?]
[우리가 아는 사람도 있다구!]
[누가? 그 진을 친 사람?]
[그래! 홍녀 누나가 있어!]
그때까지 말이 없던 박신부도 갑자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홍녀가 여기에 어떻게 알
고 왔단 말인가?
갑자기 주변에 몰아치는 바람이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위세가 세졌고 검은 기류
같은 것과 불덩이 같은 것들이 날아 다니고 있었다. 진이 본격적으로 발동 된 것 같았다.
박신부는 조용히 자영과 손기자, 안기자를 자기 뒤에 서도록 손짓하고 기도력을 발했다.
오오라가 둥글게 퍼져 나가면서 바람과 다른 힘들을 밀어내어 더 이상 압박을 받지 않게
해 주는 것이었다. 안기자와 자영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박신부는 신경도 쓰지 않고,
현암과 승희에게 눈짓을 했다. 이제는 진을 깨버리자는 신호인 듯 했다.
주기선생은 깃발을 휘저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고, 철기 옹은 그냥 허리를 쭉 편 채
지연 보살을 등 뒤에 숨기고 당당히 서있었다. 입으로는 무슨 염을 하는 듯 했다.
나뭇가지와 잔돌들이 미친 듯 이는 바람에 떠올라 비처럼 날아왔고 하늘마저 이제는 완
전히 캄캄해져 있었다. 어서 진을 통과하거나, 아니면 파괴해 버려야 했다. 현암은 입을
꾹 다문 채 기공력을 모으면서 아까 돌아섰었던 여덟 번째의 삼매야회의 진문으로 걸음을
옮겨갔고 승희와 주기선생이 그 뒤를 따랐다...
9. 밀법진...(3)
강풍은 점점 심하게 일어서 주변에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고 있었고, 공기중에는 점
점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뭉쳐가기 시작했다. 현암은 기공으로 몸을 닦은 자신으로서도 버
티기가 조금씩 힘들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진은 본격적으로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 분
명했고, 이 속에서 이대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진을 파괴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암은 호신부를 쥐고 뒤를 따라온 준후에게 물었다.
[어디를 어떻게 해야하지?]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 목소리마저 잘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왼쪽!! 저쪽에 보이는 소나무요! 그게 삼매야회의 핵의 자리예요!]
현암도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눈앞의 검은 기운이 짙어지면서 바람소리가 요란
하게 귀를 막는 듯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삼매야회는 재(在)의 무드라로 나타나요. 자연력을 지배하는 힘이죠! 대일 여래의 자
제력을 나타내는 중심의 자리! 그걸 씌운게 저 소나무에요!]
[어떻게 하느냐구!!]
[꺾어요!]
마치 진은 살아 움직이는 듯, 현암이 월향을 꺼내자 갑자기 먹장과 같은 구름더미같은
것이 밀려서 현암을 덮쳐왔다. 준후가 뒤에서 황급히 부적 두장을 꺼내어 허공에 띄우자
공중에서 부적이 확하고 타오르면서 검은 구름의 위세가 좀 주는 듯 했다. 현암은 월향을
쥔 오른손에 기공력을 집중했다. 검기가 길게 뻗어 나왔다.
[오! 검기!]
옆에 서있던 주기선생이 신음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 현암은 말없이 입을 다문 채 월향
을 날렸다. 꺄아아악- 하는 귀곡성과 함께 월향은 앞을 가리는 구름더미를 뚫고 준후가
가리킨 소나무에 박혀들었으나 나무가 꺾어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진의 힘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뒤에서 도움을 주려는 듯 철기 옹이 잇달아 활시위를 튀기는 소리
가 들리자 소나무의 굵은 가지들이 툭툭 부러져 나갔다. 현암은 태극패를 꺼내어 기공을
월향에 비추었고, 준후도 승희의 힘을 끌어서 인드라의 뇌전을 발했다.
준후의 손에서 뻗어나간 두갈래의 번개와 태극패에 비추어진 현암의 기공력이 월향에
집중되자 월향이 꽂혀있던 소나무가 갑자기 화약에 터지는 것처럼 펑! 소리를 내면서 산
산이 부서져 나갔다. 소나무가지가 사방으로 후둑후둑 떨어지면서 미친 바람과 검은 안개
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잦아 들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보고만 있던 주기선생이 경망하게 박
수를 짝짝 쳤다.
[대단하시오... 대단... 귀물을 부려서 저 굵은 나무를 꺾다니... 과연 유명한 퇴마사
는 명불 허전이로군...]
현암은 그 소리가 좀 고깝게 들렸으나 접어두기로 하고 뒤를 돌아 보았다. 안기자와 그
일행이 무사한가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박신부가 비로소 기도력을 거두고 있었고 셋은
얼이 빠진 듯, 와들와들 떨고만 있었다. 다친곳은 없는 듯 했다. 자영이 김빠지는 소리를
했다.
[저... 저... 사람들... 귀신인가봐...]
현암은 씁쓸하게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주기선생이 먼저
나섰다.
[9번째 근본 성신회는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좀 쉬시지요?]
뒤에서 철기 옹이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벌써 성신회는 안에서부터 붕괴 되었다. 진이 다 뭉개진 것을 몰러? 뻔뻔
한 녀석 같으니...]
주기선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몰랐습니다. 철기 어르신, 왜 저를 그렇게 몰아 붙이시는 겁니까?]
[아, 없는 재주를 자랑할려는 네 속이 하도 빤해서 그랴!]
[아니, 이거...]
주기선생이 씩씩거리며 철기 옹에게 가려는데 준후가 잡았다.
[아저씨, 싸우지 말아요... 예?]
주기선생은 말똥말똥 자신을 쳐다보는 준후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고는 갑자기 껄껄
웃으면서 진문이 쳐져있던 나무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안기자가 중얼거렸다.
[힐기보법! 저 사람을 올림픽 마라톤에 내보내면...]
현암이 안기자를 잠시 째려보자 안기자는 입을 닫았다. 현암은 말없이 일행에게 손짓을
했고 사람들은 진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문의 출구는 숲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막 숲에서 나오자 사방이 한 4-500미터는 될듯
한 붉은 색의 황무지가 운동장처럼 펼쳐져 있는 가운데 십수명의 사람과 세명의 사람들이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십수명의 사람들은 안기자가 보았던 현현파의 검은 옷을
입은 네명, 병수라고 하던 차력사, 오의파의 두사람, 청홍검을 넣은 것이 분명한 보따리
를 등에 메고 있는 가냘픈 여자와 그 뒤에 서있는 평범한 노파, 네명의 체구가 큰 화상과
작은 소사미가 한 명, 이렇게 해서 열네명이었다. 그 반대편에는 남색의 일본식 승려복을
입은 한 거한과 빼빼마른 노승, 그리고 낯익은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전에 만났
었던 홍녀였다...
지금 청홍검을 멘 여자와 일본 승려복을 입은 거한이 앞에 나서서 서로 눈싸움을 하는
듯 했다. 그들도 많은 사람들이 진문속에서 우르르 달려나오자 눈길을 돌렸다. 주기선생
은 분명 앞에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그 자리에는 없었다.
준후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홍녀누나~~~!!]
먼발치에서 준후를 알아본 홍녀가 잠시 웃는 얼굴을 짓다가 다시 그 특유의 매서운 얼
굴로 되돌아 갔다. 전후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 무슨 이유인가로 해서 두쪽이
대립하고 있는 듯 했다. 철기 옹이 앞으로 나서며 카랑카랑한 소리를 질렀다.
[어이! 도야지 할멈!!! 안 죽고 살아 있었구먼 그려!]
청홍검의 여인 뒤에 있던 노파가 움찔하면서 화난 얼굴로 철기 옹쪽을 노려 보았다.
[저 쭈그렁바가지 영감은 아직도 안 뒈지고 깨적깨적 걸어다니누먼! 얘! 얘! 현정아!
저 영감부터 빨리 베어버려라!]
현정이라고 불리운 검을 멘 여인은 갑자기 난데없는 노파의 말에 어리둥절하여 있었다.
철기 옹은 깔깔깔 웃으면서 걸음을 옮겨서 노파에게 다가갔다.
[에쿠쿠... 도지무당, 도야지라고 혀서 화났나부지? 깔깔...]
노파는 웃지도 않고 얼굴을 돌려 버렸다. 오히려 예기치 못했던 사태에 당혹한 얼굴을
한 것은 두사람의 일본 승려와 홍녀인 듯 했다. 박신부가 우렁찬 목소리로 홍녀에게 인사
를 했다.
[홍녀님! 안녕하셨소? 여기는 또 어쩐 일로?]
홍녀도 거의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얼굴은 풀지 않고 있었다.
[아! 신부님도 무양하신지요? 현암상도? 준후상도?]
현현파의 네사람은 뭔가 쑤근 거리기 시작했고, 갈메기가 있는 대머리 도인 병수도 나
타난 사람들이 그들과 맞서고 있던 일본인들과 아는 척을 하자 이마의 갈메기를 더 진하
게 찌푸렸다. 승려들과 오의파의 두사람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박신부는 그들은 일단 접
어 두기로 하고 말을 이어갔다. 안기자는 자영과 손기자에게 자신의 앞을 가리도록 하고
모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주머니속에 넣어 두었던 소형 카메라로 찍어댔다. 대놓고 사진
을 찍다가는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때문에서 였다.
[같이 오신 분들 소개를 해 주시지요.]
홍녀가 뒤의 두사람에게 일어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덩치 큰 승려가 먼저 퉁명
스럽게 한마디 했다.
[도오운!(道雲)]
그러자 뒤쪽의 빼빼 마른 노승도 합장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스기노방...(杉坊)]
홍녀가 덧붙였다.
[두분은 한국어를 하지 못합니다.]
보통 일본인이 그러하듯 조선어라고 하지 않고 한국어라고 홍녀가 말한 것은 일행에게
홍녀가 사려 깊다는 인상과 함께 다소의 친화감을 준 듯 했다. 청홍검을 메고 있던 현정
이라던 여자가 검보퉁이를 어깨에서 내려 손에 옮겨 쥐면서 말했다.
[아시는 분이 있나 보군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우리의 길을 막지
요?]
10. 드러나는 윤곽...(1)
홍녀는 좀 당황한 듯한 표정이 되어서 현정의 말을 맞받았다.
[아니, 길을 막다뇨.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저 앞의 저 커다란 진은 누가 펼쳐 놓은 것이죠? ]
[아무튼 저희가 펼친 것은 아닙니다. 저희도 여기 도착한 지는 얼마되지 않았어요.]
[분명 일본계의 수법이던데요?]
[아니오. 저 정도의 진을 치려면 며칠은 준비해야 한다는 것, 알만하신 분들이니 굳이
설명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허나 우리가 여기 도착한 지는 두어 시간 밖에 되지 않았어
요. 그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인상을 좀 찡그리고 있던 오의파의 두 사람 중 수염을 좀 더 길게 기른 남자가 나섰다.
[나는 오의파의 제자인 고상렬이오. 내가 좀 끼겠소만, 홍녀 님의 말씀은 꼭 여러분들
이 여기에 일찍 도착하였기 때문에 진을 치지 않았다는 변명을 하는 것으로 들리는군요.
홍녀 님은 도착한 것이 두시간 전이라는 것만 강조하시고 진을 치지 않았다는 맹세는 하
지 않으시는 듯 하군요... 제가 너무 넘겨 짚는 것인가요?]
얼굴이며 차림새가 흉악했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상렬이라는 오의파 제자의 지적은 논리
적이었고 정확한 듯 했다. 상렬은 계속 말을 이었다.
[꼭 여러분이 진을 쳤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불제자인 듯 한데, 두
시간 전에 이곳에 도착 했다는 말이 거짓인 것 같지는 않군요. 그러나 두시간 전에 이곳
에 도착해서, 이곳에 설치 되어 있던 진을 다만 발동시킨 것이라면...]
현현파의 맏이인 근호가 끼었다.
[이곳에 설치 되었던 진이라고요? 그러면...]
오의파의 다른 제자인 성곤이 대신 답했다.
[우리 오의파는 원래 산천을 떠돌기를 중시합니다. 전에 이곳에 와 본적이 있죠. 물론
그때는 이 밑에 그런 고분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만, 이
곳에 놓여진 돌이나 고목들이 일종의 진세를 형성하여 자라고 있다는 것은 알고 퍽 의아
해 했었답니다.]
대머리의 거한인 차력사 병수가 어느새 꺼내 든 철봉을 땅에 쿵 놓으면서 소리를 쳤다.
[보나마나야! 고다이고 천황의 검을 도로 찾아갈려고 왜놈들이 술수를 부린 것이지! 그
러나 그 검은 내가 점찍었어! 아무도 손대지 말라구!]
홍녀의 안색이 붉어졌다. 좀 창피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는 모양이었다.
[고다이고 천황의 검이라니? 저는 잘 모르겠군요!]
여검사 현정이 벌컥 소리를 쳤다.
[발뺌은 하지 마시지! 초치검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면, 밀교의 술사들이 어째서 이 시
골까지 왔단 말이지?]
안기자가 흥분된 듯, 곁에 있던 현암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현암과 박신부를 비롯한
퇴마사들과 지연보살은 아직 그들의 언쟁에 끼여들고 있지 않았다.
[이봐, 자꾸 초치검이니 고다이고 천황의 검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대관절 어떻
게 되어 가는 거야? 일러달라구!]
김자영 스크립터도 옆에 있던 준후라는 꼬마를 잡고 물어 보았다.
[정말... 저 사람들이 모두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준후가 머쓱한 듯 답했다.
[음... 뭐... 저 사람들은 다 투시를 하거나 자기가 모시는 신에게서 들은 거죠. 저도
신을 불러 보았는데, 매우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 가서 힘을 합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 밖에는...]
현암도 입을 열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고다이고 천황의 검이라거나 초치검이라는 이야기는 모두 일본
천황의 신기를 말하는 거네. 천황의 3종 신기의 하나인 천총운검을 말하는 것이지...]
[역시! 내 추측이 맞았군!]
[그러나 아직 속단하기는 일러! 그 검이 과연 진짜 인지도 알 수 없고, 하물며 이곳에
묻혔던 500구 왜구 시체의 내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준후나 승희, 철기
노인까지도 신술이나 투시로는 이곳의 내력을 알지 못했으니...]
[무슨 말이야? 신통력이 있는데도 알 수 없단 말야?]
[무언가 먹장을 쳐 놓은 듯, 방해하고 있어. 그건 엄청난 힘이었지... 여기 모인 사람
들의 꿍꿍이들은 다 달라. 어떤 이는 천총운검을 뺏으려고, 어떤 이는 호기심으로, 어떤
이는 자기가 모시는 신이 시켜서 온 것이고 우리 같은 경우는...]
[자네 일행은 왜 왔지?]
[불안해서 온 거야... 뭔가 고대로부터의 흉악한 음모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 준후
와 승희가 그렇게 말했어...]
준후? 승희? 그리고 보니 승희라 하는 여자는 가만히 서서 눈을 감은 채 양손의 집게손
가락을 옆머리에 대고 지그시 누른 채 무슨 생각인지 깊게 하고 있었다. 승희가 일종의
레이더로서 여기 모인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어 무언가 알아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기
자가 알 수는 없었지만... 준후는 치근거리는 김자영 스크립터에게 반쯤 홀려가고 있는
듯 했다. 준후는 그들 일행, 어쩌면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천총운검의 자취를
알게 되었는지를 김자영 스크립터에게 털어 놓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 잡지에 실린 기사의 내용을 보거나 어떻게든 얻어 들
은 것이 분명해요. 그런 이상한 내용을 보고 투시를 행해 본 거겠죠. 그러나 투시로는 아
무것도 나오지 않았을 거에요. 저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더 호기심이 생
기죠. 뭔가 방해하여 투시나 영사가 안되게 한다면, 거기에는 뭔가 중요한 물건이 있거나
강한 영이 수호하고 있는 것일테니까요...]
안기자도 준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제 저쪽의 일본인 그룹 (이라봐야 말
이 통하는 것은 홍녀 뿐이었지만) 과 오의파, 현현파, 차력사 병수와 검사 현정이 한바탕
설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이쪽의 이야기가 더 중요했다. 도지 무당과 철기 옹도 나름대로
무슨 이야기인지 (아마 두 사람 사이에는 퍽 오래된 로맨스가 있었던 눈치였다) 핏대를
세워가면서 떠들고 있었고 (그들의 로맨스란 그런 식인가 보다) 네명의 우리 나라 승려와
소사미는 그냥 뒷켠에 서서 번잡한 일에 말려들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든 알고 싶어지는 법이죠.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써요. 요행히, 그
기사에는 대강의 시대가 나오죠. 그리고 역사책을 조금만 조사하면 고려조 말기에 강화도
에 왜구가 꽤 큰 규모로 쳐들어온 일은 1363년 경부터 1375년 경까지가 주종을 이루었다
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그 때 당시의 다른 것들, 예를 들면 당시 그 근처에서 나온 유
물이나 하다못해 나무, 큰돌, 산신 등에 의하면 약간의 단서는 얻을 수 있어요. 나는 모
르지만... 산법(算法)으로 풀 수도 있고...]
[정말?]
[아주 약간요. 그 결과로 아주 강력한 외부의 힘이 들어 와 있다는 것을 알았죠. 다른
이들도 그랬을 거에요. 그 다음은 사람들의 재주에 달린 셈이죠. 그 강력한 외부의 힘이
무엇인가... 그 내용으로 투시를 행하여 '천총운검'의 글자가 새겨진 칼의 형상을 본 사
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모시는 신명을 불러내어 이 고분에 숨겨진게 바로 천총운검,
즉 초치검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도 있을 거에요. 또는 고다이고 천황의 검이 있다는
이야기로 들은 사람도 있을거구요...]
[그랬구나... 나는 단순히 역사책을 읽은 추리에 의해서 그런 가설을 냈었는데... 역시
무언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택한거로군...]
안기자의 또랑또랑한 준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렸고, 손기자는 열심히 수첩에 메모
를 하고 있었으며 김자영 스크립터는 준후를 귀엽다는 듯 쳐다 보고 있었다. 안기자가 다
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 묻혀 있다는 고다이고 천황의 검, 아니 초치검, 천총운검은 과연 진짜일
까? 투시력으로 그걸 알아낼 수는 없니?]
[그건 안돼요. 여기의 알 수 없는 힘이 방해하는 것도 그렇고, 투시는 이중으로 할 수
는 없어요. 그러니까 투시로 그런 검이 여기 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그 검에 대한
내력은 직접 그 검을 본 후에만 할 수 있다는 거에요...]
[흠...]
저쪽에서는 이제 말들이 한층 험악해지고 있었고, 홍녀는 결국 자신들이 초치검을 찾아
왔다는 사실을 인정한 듯 했다. 그러나 홍녀는 계속 자기 나라의 유물을 도로 가져가야만
하며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다고 하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 특히 차력사 병수와 여검사
현정이 코웃음을 치며 펄펄 뛰고 있었다. 현정이 먼저 싸늘하게 말했다.
[흥! 땅에 묻혀 있는 물건이야 그 땅 임자의 것이지. 즉 우리 나라 땅에서 캐낸 것은
우리 것이라는 말이야!]
차력사 병수도 펄펄 뛰었다.
[너희들은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 걸 수없이 집어가지 않았나? 이 병수 님께서 그깟 칼
하나 가지겠다는데 그게 영 떫다 이거지?]
홍녀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일본승려 도운이 앞으로 나섰다. 아마 말을 알아듣지
는 못했지만, 분위기를 보고 특히 차력사 병수를 글자 그대로 떫게 생각한 것이 틀림 없
었다. 도운이 홍녀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홍녀는 영 탐탁하게 생각되지 않는 듯, 스기
노방이라고 하는 늙은 승려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비웃는 듯한 미소만 빙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홍녀는 한숨을 쉬면서 말을 꺼냈다.
[여러분, 여기 공도님이 제안을 하셨습니다.]
[무슨 제안?]
[여러분 들 중 많은 분들은 그 고다이고 천황의 검을 찾으러 오신 겁니다. 그게 정말
초치검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초
치검은 하나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물러선다 해도, 그러면 그 검은 누가 가질 것입니
까?]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정말 그 검을
가지고 갈 사람은 한 명, 또는 한 문파로 정해져야 하는 것이니까...
오의파의 상렬이 소리쳤다.
[우리는 그 검에 욕심을 내지는 않소! 우리는 이곳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서 알아보려고
온 것 뿐이오!]
[그러시다니 다행이로군요. 그러나 다른 분들도 모두 그 검을 탐내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차력사 병수는 그냥 씩씩 거리며 있었고, 여검사인 현정도 입을 꼭 다물고 홍녀를 쏘아
보고 있었다. 현현파의 네사람도 검에 욕심이 있는 것 같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체
구의 승려들도 가만 서 있다가 언쟁에 끼어 들었다. 그 중 우두머리인 듯한 승려가 합장
을 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백제암의 지극, 증장, 다문, 광목의 네 중이며, 저는 그 중의 다문이라 합니
다. 저기 소사미는 승현이라 하지요. 숨김없이 말씀 드리자면, 저희는 그 검을 찾아오라
는 어느 분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지극, 증장, 다문, 광목은 원래 불교의 4대 천왕이었으며, 그 이름을 딴 것으로 보아
이 네사람도 범상한 사람은 아닐 듯 했다. 승려 다문은 그 부탁을 한 사람이 누구라는 말
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몸짓이나 표정 만으로 보아도 그의 결의는 분명한 듯 했다.
도지 무당과 싸움 비슷한 언쟁을 하고 있던 철기옹이 소리를 쳤다.
[병신들 육갑하고 있구먼! 지금 어떤 큰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판인데 도대체 뭣들 하
는 짓인지...]
그러나 현현파, 병수, 4천왕, 현정, 일본 승려등의 14명은 철기 옹의 말을 못들은 척
했다. 홍녀가 계속 이야기 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약속을 하는 겁니다. 도력을 겨루어서 가장 뛰어난 능력
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그 검을 갖도록 약속하는 겁니다...]
차력사 병수가 갈메기를 찌푸리면서 소리쳤다.
[그러면 시합을 하자는 거요? 방법은 어떻게?]
[일 대 일로 도력을 재어 보는 겁니다. 방법은 아무것이나 좋구요...]
현정이 소리쳤다.
[밀릴 것 같으니 일 대 일로 하자구? 호호호호... 간사한 방법이로군! 그러나 어디 어
떻게 되는지 한 번 보라구! 나는 그깟 초치검을 얻으러 온 것이 아냐! 다만 이 청홍검으
로 그깟 잘난 칼을 박살내주려고 온 것이지!]
현정이 말을 마치면서 어깨를 흔들자 검을 싸고 있던 천이 흘러내리고 찬란한 검집이
드러났다. 현정이 청홍검을 휙 내려서 오른 손에 들자 검집에서 뽑히지도 않은 검이 저르
르 하고 울었다. 현현파의 사람들이 쭈삣거렸고, 차력사 병수의 입이 벌어졌으며 일본인
들은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안기자는 바야흐로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도력대결이라니! 요즘 세상
에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 안기자는 김자영 스크립터와 손기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의 눈빛도 떨리고 있었다.
현암과 박신부는 무슨 생각인지를 묵묵히 하면서 서로 작은 말로 속삭이고 있었다. 막
투시를 마친 승희와 준후도 그들에게로 갔다. 승희가 현암에게 속삭였다.
[이봐, 현암씨! 저들 대부분은 그 검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어! 물론 오의파나 철기
옹 같은 사람들은 욕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저 일본인들 중 홍녀라는 여자와
공도 라는 남자는 다만 그 칼을 찾아오라는 사명을 받고 있는 듯 한데, 스기노방이라는
저 노승은 더 꿍꿍이가 있는 듯 해...]
[뭐? 꿍꿍이라고? 그게 뭔데?]
[나도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다만...]
[다만 뭐지?]
[여기의 그 이상한 기운과 비슷한 기운으로 마음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아... 저 스기노
방이라는 노승...]
박신부가 눈썹을 꿈틀 했다.
[음? 이곳의 기운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누나가 마음을 읽을 수 없다면 정말 고수네!]
박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현암군, 아무래도 우리도 그냥 있어서는 안될 듯 해. 저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싸움을
벌이게 될지도 몰라. 검을 놓고 싸우지 않게 할 무슨 방법이 없을까?]
현암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승희가 눈을 반짝 거리며 말했다.
[아예 현암씨가 모두 눌러버리면 어떨까? 그래서 찍 소리 못하게 만들어 놓고 검 따위
는 생각하지 말고 모두 힘을 합쳐서 검보다도 더 중요한 고분의 비밀을 캐보면 어떠냐고
하는 거야. 저 사람들, 아마 눌리고 난 다음에는 아뭇소리 못할 거 아냐!...]
[음? 눌러 버린다구?]
[그냥 말로 해서는 죽어도 안들을 거야. 그러니 일단 시합을 벌여서 찍 소리 못하게 눌
러 놓은 다음에 타이르면 다 들을 거 아냐?]
[근데 왜 꼭 내가...]
[우리들 중 사람과 대적해서 무술을 쓴다면 제일 센 건 현암씨 아냐? 신부님의 기도나
준후의 부적을 사람들에게 쓸 수는 없잖아?]
좀 황당한 소리였지만 박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우리 생각이 맞다면, 이 고분에 숨겨져 있는 비밀은 그 초치검 정도가 아닐 거
야. 그보다 훨씬 크고 무서운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해... 그러니 일단 여기 모인 사람들
을 어떻게든 수습해야지...]
[그러니 아예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눌러 버리라구! 내가 힘을 보내주면 현암씨의 상대
는 없을 거야!]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현암은 망설였다. 굳이 이런 쇼를 벌려야 되는 건
가? 사실 좀 우스운 일이었지만 마땅한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고, 사실 그들이 의심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빨리 여기 있는 사람들의 분쟁을 수습해야 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온 승려들 (홍녀같이 잘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도 어떻게 치워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
았고... 그들은 지금 그 칼의 향방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아직 확실히 감이 잡힌
것은 아니지만, 고분에서 나온 500여구의 시체들이 더욱 문제 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었
다. 그 시체들의 내력이 만약 퇴마사들이 생각하는 대로의 것 들이라면...
현암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일본인들과
여러 술사들 사이에는 이제 막 언쟁이 지나가고 바야흐로 실력대결이 벌어지려는 순간이
었다.
11. 드러나는 윤곽...(2)
도운이 등에서 갑자기 여러 개의 무거운 철추가 달린 쇠줄을 꺼냈다. 도운의 큰 덩치에
걸맞게 철추들은 무거운 것인 듯 했고 쇠줄 또한 검은 빛으로 어두운 윤기를 발하는 것이
그것 또한 어느 정도 내력이 있는 물건 인 듯 했다. 도운이 뭐라 일본어로 소리를 쳤고
홍녀가 그를 번역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도운 님은 여러분을 해치거나 상처를 입는 방법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힘이나
도력을 겨루자고 하는 것이지요.]
[흥! 힘이라고? 감히 나 병수님 앞에서 힘을 논한단 말인가?]
차력사 병수가 예의 철봉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백제암에서 왔다는 승려들 중 가장 덩
치가 좋은 증장도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아미타불... 빈승 증장, 도력은 얕지만 무식하게 힘쓰는 것이라면 약간 합니다...]
증장의 얼굴은 꼭 노지심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도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
게 높은 톤의 곱상한 목소리였다. 뒤에서 일본 노승 스기노방이 뭐라 홍녀에게 지시하자,
홍녀가 다시 이를 한국어로 바꾸어서 말했다.
[우리의 수효는 셋입니다. 그러니 세 분야로 나누어서 겨루자고 스기노방 스님이 제안
하시는군요. 그러니 일단 한국 측에서 먼저 각 분야의 대표자 세명을 뽑아서 우리와 겨루
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요행히 이기면 초치검을 원래의 곳으로 가져가고, 저
희가 지면 그 쪽의 세 분께 검을 맡기기로 하지요.]
병수가 툴툴 거렸다.
[우리끼리 먼저 겨룬다고?]
[어차피 초치검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여러분들도 나름대로의 합의가 있어야 하
지 않겠습니까?]
현현파의 맏이인 근호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 방법은 공정하지 못해! 물론 당신들의 실력이 우리보다 위라고는 믿지 않지
만, 우리들끼리 겨루는데에도 내력이 많이 소모될 것 아닌가? 당신들은 그 동안에도 아무
힘도 쓰지 않고 최후의 지친 사람과 상대해서 쉽게 이기려는 계략이구먼!]
홍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스기노방이 계속 눈짓을 보내서 할 수 없이 말하는 듯 했다.
[여러분들끼리의 합의는 어쨌든 필요한 것입니다. 저희는 저희의 국가적 사명을 띄고
왔으니 일국의 대표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저희는 여러분에게 꼭 힘을 써서 싸우라는 말
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든 대표자를 뽑아 주시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여
러분들끼리 상의하셔서 선출 해 주시면 그만 아닙니까?]
간사한 방법이었다. 지금 상황으로 볼 때, 물론 초치검에 관심을 가진 사람도 있고 그
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초치검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보검 획득을 눈 앞에 두고 쉽게
물러서서 양보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알아서 대표자를 뽑으라는 말
을 뭐라고 반박하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병수, 현현파, 4천왕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
고 있었다. 여검사 현정은 말 없이 일본인들을 노려만 보고 있었고...
[정말 치사하군 그래!]
갑자기 철기 옹이 나섰다. 사람들이 그 쪽을 보자, 철기 옹과 현암이 서 있는 것이 보
였다. 도지 무당과 오의파의 두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홀연히 없어져 있었고, 박신부 일행
과 기자단은 저만치 뒤에서 관망만 하고 있었다. 철기 옹이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 말했
다.
[왜놈들... 잊어 버리려고 해도 계속 밥맛 없는 짓만 하는구먼. 난 저 스기노방이란 자
를 알아. 저 자는 나를 모르겠지만...]
스기노방의 눈빛이 약간 떨리는 듯 했으나 곧 평정을 찾았다. 철기 옹은 크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좋다! 좋아! 내 이 나이가 되어서 네놈의 과거를 들쳐 내지는 않겠다. 아무튼 네놈들
수법이 치사하다만 그러고도 네놈들이 진다면 얼굴에 똥칠을 하는 거겠지? 다만 스기노방
이라는 네놈은 원래 강신술에 능하니까 어디 박수인 나하고 붙어 보자! 그리고 여기 현암
군하고 저 얼굴 허연 계집하고 검법으로 겨뤄 봐라! 그러면 나머지 힘쓰는 놈은 어찌 되
었든 2대 1로 우리가 이길 것이니!]
스기노방은 갑자기 깔깔깔 하고 웃어 젖혔다. 그리고 다시 홍녀에게 뭐라고 했다. 홍녀
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기노방 님은 이 두 분이 두 분야의 대표자라 하시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
정할 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계십니다.]
철기 옹이 웃어 젖혔다.
[하하하... 원래 여기 병수하고 백제암의 중들은 모두 외공을 익힌 아이들이니 저 도운
이라는 놈과 붙어야 할거고, 저 스기노방이란 땡초는 분명 강신술이나 소혼술로 겨루자고
할 테니 지금 이 자리에는 나밖에 없지. 도지하고 오의파 애들은 이런 일엔 안 끼겠다고
했고 현현파 네놈들이야 내 친구의 제자 뻘 밖에 안되니 쑥 빠져 있거라! 그리고 여기 홍
녀는 보아하니 밀교의 보검을 갖고 있는 듯 하니, 당연히 검을 쓰는 사람일텐데 그렇다면
현암밖에 적수가 없지!]
홍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자신은 전에 현암 일행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원받고 흡혈마
를 잡는 임무를 완수한 빚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암은 그 일은 이미 염두에도 두지 않
고 있었지만, 홍녀의 마음 속에 그 때의 기억이 자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 빠른 철
기 옹이 알아낸 것이었다. 그것은 아까 승희가 읽어낸 것을 넌지시 물어 보아서 알아낸
결과였고, 승희가 읽어낸 홍녀의 마음이 사실 그대로라면 홍녀는 보기와는 달리 마음이
약해서 현암과 싸우지는 못할 것이란 계산이었다.
홍녀는 손에 든, 꼭 막대기처럼 감추어진 구마열화검(驅魔烈火劍)을 한 번 보았고, 현
암이 지니고 다니는 귀검인 월향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저는 현암 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패배를 시인 합니다.]
난데없는 홍녀의 말에 도운은 물론 스기노방의 눈마저도 크게 벌어졌다. 홍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뒤로 돌아갔다. 스기노방은 낮은 목소리로 홍녀에게 빠르게 떠들어댔다.
질책하는 듯 했으나 홍녀는 침울한 얼굴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현암은 퍽 마음이 무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실력으로 말하자면, 홍녀에게 제 아무리 구마 열화검이 있다 하
더라도 자신에게는 그 동안 갈고 닦아 자유자재로 공중에서 부릴 수 있는 월향검이 있어
서 결코 뒤떨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여겼었다. 그리고 한 번 겨뤄 보겠다는 단순한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홍녀가 기권을 해 버리다니... 모여있던 일행들도 현암과 홍녀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들의 눈 빛은 마치 무언가 알았다는 듯한 것처럼 현암의 눈에 비
쳤다. 철기옹의 계략은 스기노방의 술수를 이용하여 그를 엎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현
암은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원 세상에!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구요! 홍녀님! 우리 정당하게 실력을 겨뤄
봅시다! 홍녀님도 임무가 있지 않습니까?]
홍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절대 현암상의 상대가 못돼요. 여러분 중 그 누가 전설로 내려오는 어검술(禦劍
術)의 능력을 가졌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어검술이라면 거의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아니 무협지에서
조차 주인공 밖에 쓰지 못할 정도로 말로만 내려오는 술수였다. 그런 술수를...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아니, 어검술이라뇨,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다만 칼을 조종 할 수 있는
것 뿐이죠... 그건...]
[이 현암씨!]
갑자기 또랑또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검사 현정이었다.
[저는 스승님인, 그리고 이 청홍검을 물려주신 도지 님의 전인이기도 합니다만, 아미파
의 검법을 좀 배운 바도 있습니다. 물론 철기 어르신이 내세우신 분이니만큼 제가 구태여
나서지는 않겠습니다만, 갑자기 현암씨와 한 번 대련을 해 보고 싶어지는 군요!]
느닷없는 말이었다. 이건 도대체 여자가 당돌하게도...
[지금 중요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판국에...]
[저로서는 이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어검능력을 지닌 분을 이 기회가 아니면 어떻
게 만나보겠습니까?]
현정이 정말 기쁘다는 얼굴로 청홍검을 스르르 뽑아 들었다. 현암은 당혹해 했고 철기
옹도 갑자기 사태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놀라는 듯 했다. 철기옹이 소리쳤다.
[이봐! 이봐! 여자가 그렇게 설치는 것이 아냐! 좀 기다려! 일단 이 일본애들과 일이
마무리가 된 다음에 시간은 많이 있단 말야!]
검사 현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자신의 옆으로 칼을 그었다. 현정의 옆에 있
던 차돌로 된 큰 바위하나가 마치 두부처럼 두 조각이 나버리자 현정은 다시 칼을 넣었
다.
[기다리죠... 다만 청홍검은 뽑힌 후 그냥 꽂혀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례한
것이니 죄송합니다.]
현현파의 태현과 윤섭이 그 돌을 만져 보았다. 그들은 돌의 잘라진 면이 마치 종이장처
럼 매끈매끈 한 것을 보고는 탄성을 발했다. 철기옹은 되었다 싶어서 일단 병수와 증장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튼 지금 일 대 영 일세! 그리고 자네들은 나와 스기노방이 대적한 뒤에 저 도운인
가 하는 아이와 겨루도록 하게. 힘을 아껴야 돼! 일단 내가 이기면 이 대 영이니 승부는
끝난 것이고, 내가 지더라도 그 때 싸워도 늦지 않으이!]
철기 옹은 말을 마치자 마자 등에 다시 졌던 활을 내려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 주문을
외우며 묘한 몸짓을 했다. 스기노방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철기 옹은 그런 스기노방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주문을 외웠다. 철기 옹의 굽은 허리가 쭉 펴지고, 노쇠한 몸에 활
기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어깨가 점점 벌어지고, 키까지 쑥쑥 늘어나고
있었다. 혼을 불러서 스스로의 몸에 씌운 것이 분명 했는데, 혼도 보통의 혼이 아니라 아
마 유명한 장군의 혼 쯤 되는 듯 했다. 철기 옹의 목소리가 변했고 걸걸하고 우렁찬 목소
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왜놈들... 이건 김덕령 장군의 현신이다... 어디, 재주를 한 번 피워 보아라!]
철기옹의 눈에서 마치 호랑이의 눈처럼 환한 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스기노방은 움
찔 했으나 지지 않고 마주 주문을 외웠다. 스기노방의 몸도 말라 비틀어진 형상에서 마치
고무풍선처럼 늘어나기 시작했고 얼굴이 검은 색으로 물들면서 험상 궂은 형상이 되어갔
다.
뒤에서 보고 있던 백제암의 승려 다문과 현현파의 우두머리 격인 근호가 동시에 다급성
을 냈다.
[마하칼라!]
박신부와 준후는 팔짱을 끼고 관망하면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고, 승희는 이번에는 철기
옹을 돕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안기자와 김자영 스크립터는 눈 앞에서 벌어지
고 있는 믿기 힘든일에 주목하고 있었는데, 손기자가 문득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안기자...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초치검 말야... 그게 왜 여기에 있을까?]
[난들 그걸 어떻게 알어?]
[내 문득 생각 난 것인데... 여기에 초치검을 들고 올 하등의 이유가 없는거쟎아? 뭔가
초치검을 들고 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거 같애. 그리고 그걸 알아내면 이 고분의 수
수께끼도 풀릴 것 같은데 말야...]
[왜 초치검을 들고 왔냐구? 그건...]
갑자기 안기자의 머리에 무언가의 생각이 떠 올랐다. 초치검... 그건 강력한 힘을 지녔
다는 천황의 상징이었다. 혹시... 혹시... 그 초치검으로가 아니면 상대 할 수 없는 무언
가가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주술력을 지닌 초치검이 아니면 깰 수 없는 것... 그러
니까 일종의 봉인 이라고 할 수도 있고... 가만... 봉인을 깬다고? 이게 무슨 생각일까?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어하는 판에 갑자기 승희가 눈을 번쩍 뜨면서 소리쳤다.
[알았다!]
박신부가 놀라면서 승희에게 물었다.
[뭐지? 승희야? 철기 옹을 도와야쟎아?]
승희는 얼떨떨 한 듯 했다.
[여기 안기자의 생각이 맞아요... 난 문득 안기자의 생각이 들어오고... 저 스기노방이
라는 중의 생각이 문득... 마치 싸움을 앞두고 잠깐 생각이 풀려 나온 듯한 그 말... 맞
아... 맞아...]
[뭔데? 승희누나?]
[초치검이 여기 있는 건 우연이 아냐! 그건... 그건 더 중요한 뭔가를 얻기 위해... 봉
인을 풀기 위한 거였어!]
[초치검보다 더 중요한 거라구? 아니 그러면...]
[단군... 단군의 유물이야... 맞아... 저들이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바로...]
아무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말들이 승희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자 일동은 아연한 느낌
이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서 이렇게 된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 편 저 아래 둔덕에서는 김덕령의 혼을 업은 철기 옹과 마하칼라의 힘을 빌은 스기노
방이 막 격돌하려 하고 있었다...
12. 혼 전(混戰)...(1)
[저들이 노리는 것은 초치검 정도가 아냐! 특히 스기노방... 그 자가 노리는 것은 바로
단군의 유물...]
승희가 더듬거리면서 말을 잇자 박신부가 다그치듯 말했다.
[단군? 난데없이 어째서 단군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 승희야, 틀림 없니? 확실해?]
준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더니 자기도 눈을 감고 중얼중얼 뭐라 주문을 외우기 시
작했다. 그 와중에도 철기옹과 스기노방은 서로 몸이 닿지 않고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격
돌하고 있었다. 김덕령의 혼을 업고 힘을 빌린 철기옹이 어깨에 걸려있던 활을 내려 계속
빈 활을 퉁겨내자 스기노방도 검은 흑단나무로 만들어진 듯한 카트반가와 흡사한 봉을 뒤
에서 뽑아 양손에 들고는 보이지 않는 기운을 쳐나갔다. 보이지 않는 기운과 나무로 된
봉이 충돌을 하는데도 쨍!쨍! 하면서 불꽃이 튀기고 있었으며 철기옹의 주위로는 누른 기
운이, 스기노방의 주위로는 검은 기운이 몰려 서로 엉기기 시작했다. 주변에 서있는 인물
들은 둘의 굉장한 격돌을 관전하느라 한 눈을 팔 수 없었다. 다만 먼 곳에 있는 안기자와
손기자, 김자영 스크립터 등은 옆에서 승희가 말한 것에 놀라서 이쪽저쪽을 번갈아 쳐다
보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승희가 말을 이어 나갔다.
[틀림없어요. 스기노방... 저 자의 마음이 잠시 열렸었어요. 단군... 단군의 유물을 찾
아야 한다고... 초치검이 아녜요. 초치검도 중요하지만 그건 단군의 유물을 얻기 위한 수
단에 불과 했을 뿐...]
놀란 안기자가 엉겁결에 소리를 높였다.
[초치검이 수단에 불과하다고? 그건 천황의 3대 신기인데?]
박신부는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승희의 말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으나 초치검
같은 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다는, 그것도 생각지도 못했던 단군의 유물이 그들이 진정
으로 노리는 것이라는 말에는 아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손기자가 되려 단정 짓듯이 말했
다.
[그럴 수도 있어!]
[뭐라구요? 손기자님?]
[김자영씨, 생각해 봐요. 칠지도의 훼손을 말에요.]
칠지도는 일본의 국가적 유물로 알려져 있어서 거의 신성시 되는 국보중의 국보였다.
그러나 그 칼에 씌인 문귀를 일인들은 교묘하게 수정하여 그 칼이 하사 받은 것이 아니라
공물로 바친 것인 양 꾸미고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 또 그 칠지도가 임나일본부설을 입증
하는 증거로 사용된다는 생각이 김자영 스크립터의 뇌리를 스쳤다. 그래. 그들은 그러고
도 남는다. 선천적으로 이유없이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자영이었
다. 요즘 봇물처럼 유행하는 일본식 패션이라거나 노래, 왜색 분위기들을 누구보다 싫어
하는 것이 자영이었다. 막 그런 말을 듣자, 자영의 몸에서는 까닭없이 후끈 열기가 솟아
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갑자기 준후가 눈을 번쩍 떴다.
[어라라... 이 누나... 이 누나는 나랏자손...!!]
준후는 놀란 듯이 자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영과 안기자, 손기자도 무슨 일인가 하여
준후를 돌아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막 요란한 외침이 들려왔다.
철기옹과 스기노방의 힘은 서로 비슷비슷했다. 어차피 신력(神力)을 빌어 쓰는 것은 신
자체의 힘과는 별 관련이 없으며 그 시전자의 능력 여하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철기옹은 계속 공세를 취할 수 있었고, 스기노방은 방어에 급급했다. 철기옹은
마구 활을 쏘아대면서 그의 비장의 무기인 화살을 꺼냈다.
[이놈! 삼천 부적을 모아 만든 화살이다! 네놈의 술수도 이젠 끝이다!]
마하칼라의 힘을 빌고 있던 스기노방은 갑자기 그의 카트반가의 사람머리 형상의 뚜껑
인지를 잡아 떼자 거기서 흑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그 연기는 스기노방의 기류를
타고 막 화살을 메기고 있던 철기옹에게로 날아갔다. 막 화살을 메기고 있던 철기옹은 갑
자기 밀어닥친 연기를 맡자 활줄을 툭 끊으면서 뒤로 휘청거리며 물러서기 시작한 것이
다.
[여전히 간사하구나! 이 놈!]
철기옹이 분노의 고함을 치고 있었다. 현암이 소리를 치면서 철기옹에게로 날듯이 달려
가서 철기옹을 부축했다.
[비겁하오! 스기노방! 독을 사용하다니!]
스기노방은 갑자기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는 신의 기운을 풀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병수와 현현파, 사천왕도 그 쪽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도운이
길을 막았다. 성질이 어지간히 급해 보이는 병수가 철봉을 들어 도운을 겁주듯 빙빙 돌렸
으나 도운은 철추를 다짜고짜로 병수에게 던졌다. 병수가 철봉으로 철추를 막자 철추가
철봉에 감겼다. 둘은 서로 자신의 무기를 끌어 잡아 당기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서 사천
왕은 스기노방에게로 달려갔다. 갑자기 그 앞을 또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홍녀였다.
[여러분! 여러분! 싸우지 마십시다! 이건...]
[닥쳐랏! 치사한 작자들! 정당한 무예의 대결에서 독을 사용하다니!]
광목화상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데 홍녀는 어쩔지 망설이다가 뒤에서 스기노방이 소
리를 치자 눈을 감고 손을 앞으로 모아 막대기를 둘로 나눴다. 맑은 소리와 함께 막대기
가 둘로 나누어지고 쌍검인 구마열화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암이 소리쳤다. 현암은 철
기옹을 부축하고 있어서 미처 몸을 뺄 수가 없었다.
[홍녀님! 싸울 셈이요?]
홍녀는 대답대신 날카로운 기합성을 넣으면서 혼자 사천왕을 향해 뛰어 들었다. 사천왕
의 승려들은 여자가 덤벼오자 퍽 당황하는 것 같았으며, 더군다나 그녀의 손에 영기를
뿜어대는 칼이 들려있자 좀 당황하는 듯 했다. 그들은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
었다. 사천왕은 홍녀에게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일종의 진법 같은 술수를 발휘하여 홍녀의
주위를 에워싸는데 갑자기 그리로 현정이 뛰어들었다.
[이봐! 무기없는 화상들 말고 나는 어때?]
현정이 소리치면서 청홍검을 꺼내자 스르릉 하고 사람의 가슴을 베듯이 울리는 검의 울
음소리가 들려왔다. 사천왕은 뒤로 물러섰고 홍녀는 이를 악물면서 기합성을 넣었다.
[발(發)!]
홍녀가 기합성을 발하자 구마열화검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 올랐다.
현암은 목을 높여 소리치고 있었다.
[여러분! 싸움은 안됩니다! 싸우지 마세요!]
그러나 이미 현현파의 네 사람은 스기노방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스기노방은 순간적으
로 신력을 끌어들여서 다시 마하칼라의 형태로 변해갔고 이번에는 그도 긴장한 듯, 카트
반가의 봉을 허공에 던지고는 칼트리 도 (티벳의 칼. 고기를(인육) 써는 용도로 쓰인다)
와 방울을 꺼냈다. 스기노방의 뒤에서 거대한 검은 기운이 일어나면서 허공에 던져진 카
트반가가 마치 스기노방이 직접 휘두르는 것처럼 붕붕 소리를 내며 돌았다. 현현파의 우
두머리인 근호가 소리쳤다.
[마하칼라의 사비술(四臂術)이다! 사합술(四合術)을!]
윤섭이 기합을 넣자 그 위에 근호가 뛰어오르고 윤섭이 근호의 양 다리를 잡았다. 양
옆에서 태현과 경민이 윤섭의 옆구리에 팔을 끼우자 근호는 길게 소리를 치면서 양 손을
가슴 앞으로 교차시키고 후다다닥 돌렸다. 태현과 경민도 각각 자유로운 왼손과 오른손을
휘두르면서 마치 네 명이 하나의 거인을 이룬 듯 스기노방을 향해 덮쳐갔다.
현암은 계속 그만들 두라고 소리를 쳤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힘이나 주술은 사람과
사람이 맞붙어서 싸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힘자랑을 하기 위하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병수가 철봉을 도운에게 빼앗겼다. 도운이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병수에게 덮쳐 가는
데 사천왕이 그 앞을 막았다. 도운이 철추를 휘둘렀으나 사천왕 중의 지국화상과 증장화
상이 각각 철추를 붙들었다. 도운은 철추를 한 손에 몰아 쥐면서 갑자기 허리춤에서 뭔가
를 꺼냈다. 광목화상이 소리쳤다.
[슈리켄(표창)이다! 저자도 화상인데 그런 지독한 것을...!]
도운은 들은 척도 않고 놀라운 속도로 슈리켄을 무더기로 뿌렸다. 다섯은 재빨리 몸을
피했으나 병수의 옆구리에 슈리켄 두방이 박혔고 채 철추를 잡고 있어서 몸을 피하지 못
한 지국화상과 증장화상도 한 방씩의 슈리켄을 맞았다. 광목화상과 다문화상은 재빨리 몸
을 피했으나 곧 몸의 자세를 가다듬고는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이... 이 고약한 놈!]
현정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청홍검을 날렵하게 놀려대면서 홍녀를 밀어 붙이고
있었다. 홍녀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구마열화검을 휘두르며 불꽃을 뿌려대고 있었으나 마
치 달빛처럼 싸늘하게 흰 빛을 번득이는 청홍검에 감히 칼을 맞 부딪힐 엄두를 내지 않고
있었다. 현정의 검법은 그야말로 물샐 틈 하나 없었다. 정말 여인들만 배워서 천년을 내
려왔다는 아미파의 비전을 터득한 듯 싶었다. 마치 현정은 대련을 하고 있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인정사정없이 홍녀를 몰아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지연보살이 달려와서는 현암에게서 철기옹을 넘겨 받았다. 철기옹이 숨이 막히는지 기
침을 했다. 지독한 독인 듯 싶었다. 현암이 소리쳤다.
[괜찮으십니까? 어르신!]
철기옹은 찡그리던 얼굴을 애써 가다듬더니 불쑥 딱딱하게 내뱉았다.
[그저 그렇지 뭐!]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철기옹은 신음소리를 울려대기 시작했다. 지연보살이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으로 철기옹의 얼굴을 손으로 덮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는 것을 보면서 현암은
입을 굳게 다물면서 몸을 일으켰다.
현현파의 네 도인들은 마하칼라의 힘을 업은 스기노방의 무기들에 맞서서 혈전을 치르
고 있었다. 스기노방은 오른손의 칼트리도와 방울을 미친 듯 흔들면서 사합진(四合陣)의
양쪽인 태현과 경민과 대적하고 있었고 근호는 허공 중에 떠서 날 뛰는 카트반가를 맨손
으로 막아내면서 싸우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스기노방이 입을 벌리며 훅하고 녹색
의 연기를 뿜어냈다. 가운데를 받치던 윤섭이 비명을 올리자 사합진은 재빨리 뒤로 물러
섰다. 가운데의 윤섭이 중독된 듯 했기 때문이었다. 윤섭의 무등을 타고 있던 근호가 노
호성을 지르면서 단봉 두개를 빼들고 그대로 몸을 날리자 양쪽의 태현과 경민도 삼재검을
빼들고는 스기노방에게 덮쳐갔다.
[죽일놈의 늙은이!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박신부와 준후는 미친 듯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쪽으로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이건 무
슨 수를 써서라도 막지 않으면 자칫 여러 명이 죽거나 다칠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박신부
는 도운에게, 준후는 스기노방 쪽으로 달려갔다. 사천왕을 따라왔던 승현소사미도 준후쪽
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현암은 막 홍녀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검사 현정의 청홍검 앞에
마치 금새라도 홍녀의 목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현암이 월향을 꺼내자 길게 끄
는 귀곡성이 울려 나왔다.
지연보살은 땀을 줄줄 흘리며 철기옹의 몸에서 독을 빼어내고 있었다. 지연보살의 손이
검게 물들어가고 의식을 잃고 있던 철기옹의 몸에서 신음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승희는 말없이 가부좌를 틀고 현암과 박신부, 준후를 돕기 위해 힘을 보내려 심호흡을 하
고 있었고, 자영은 철기옹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안기자와 손기자도 그 뒤를 따르고 있
었다.
(이런 걸 찍어야 하는데... 에구구... 그래도 아무리 특종이라도 사람의 목숨이 더 중
하다!)
안기자 일행이 마구 달려 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오의파의 두 사람이 튀어 나
오더니 길을 막았다.
[못 간다! 흐흐흐...]
안기자 일행은 놀라움에 우뚝 멈추어 섰다. 저 사람들이 왜 그러는 걸까? 보기와는 달
리 점잖았던 사람들인 것 같았는데...
김자영 스크립터가 비명을 질렀다. 안기자와 손기자도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의
눈은 희게 뒤집혀 있었고, 입에는 흉악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초치검을 찾으러 온자... 아무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
셋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저 두사람은 뭔가에 씌인 것이
분명했다. 도력이 높은 사람들인 것 같았는데 저렇게 되다니... 이제 장내의 모든 사람들
은 저마다 혼전을 벌이고 있거나 상처를 입고 있었고 세 기자를 도와줄 만한 사람은 없었
다. 그 속에서 오의파의 두사람, 아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씌인 두 사람은 히죽
히죽 웃으면서 세 명의 기자에게 다가들었다.
13. 혼 전(混戰)...(2)
[인술(忍術)이다! 저자는 화상의 탈을 쓴 살인자로구나!]
도운이 철추를 집어던지고 꺼내 든 슈리켄에 맞은 지국화상이 소리쳤다. 증장화상은
이미 독이 몸에 깊이 번진 듯,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광목화상이 두 화상과 차력사인
병수를 돌보는 동안 다문화상이 분노에 겨운 눈을 불태우며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너... 헛되이 화상의 흉내를 내며 부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 내 혼을 내주마!]
다문화상이 기합을 넣으며 휙휙 허공에 손질을 하면서 기를 모으자, 가사 속의 몸이 풍
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다문화상은 기합을 넣으면서 가사를 단숨에 벗어 뒤로 집어 던지
자 온 몸에 강철같이 꿈틀거리는 근육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놀라운 외공력이었다. 도
운은 이를 악물며 몸을 회전시켜 다시 세개의 슈리켄을 내던졌으나, 다문화상이 기합을
발하면서 한 손으로 세개의 슈리켄을 휘어잡았다. 도운이 흠칫하는 사이, 다문화상이 기
합을 넣자, 손 안에 든 슈리켄은 종잇장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내 승려의 몸으로 인명을 해칠 수는 없지만, 네 놈도 이런 꼴로는 만들어 줄 수 있
지!]
도운은 그 광경을 보고 무언가 결심을 하는 것 같았다.
홍녀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구마열화검을 휘둘러서 청홍검을 맞받아 쳤다.
챙- 하면서 청명한 소리가 울리고 구마열화검의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검사 현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 칼을 휘둘러갔다. 구마열화검도 보물축에 끼이는 칼이라 청홍검
의 일격에도 어느 정도 견디어 내는 듯 했으나, 한 번 부딪히고 난 후 이미 칼에서 뿜어
져 나오는 불길이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현정이 청홍검을 잠시 거두어 자세를 취한
그대로 소리를 쳤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만 자비심은 있다. 목숨은 빼앗지 않을 것이되 계속 반항하면 팔
하나만 가져갈 것이고 항복한다면 그 칼만 접수해 주겠다. 어떠냐?]
홍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분명 검술의 조예로는 홍녀가 아미파의 정수를 이어받았
다는 현정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밀교의
보물인 구마열화검을 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홍녀는 입술을 깨물며 주문을 외웠다.
홍녀의 뒤에서 길다란 모래먼지 같은 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달려오던 현암이 소리를
질렀다.
[물러나요! 백귀야행진(百鬼夜行陣)이오!]
현암의 말을 들은 현정이 문득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누런 기운이 이미 현정을 에워싸
기 시작했다. 현암은 월향검을 뽑아 들었다.
현현파의 우두머리격인 근호는 스기노방에게 미친 듯 단봉을 휘두르며 악을 쓰고 있었
다.
[더러운 늙은이! 어서 해독제를 내 놓아랏!]
태현과 경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줄로 조종하는 단검인 삼재검을 무서운 기세로 날려
서 스기노방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스기노방은 방어에만 주력하고 있을
뿐, 오히려 뒤로 물러서고 있는 듯 보였다. 달려가던 준후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
다. 마하칼라의 힘을 업을 정도의 스기노방이 공격도 하지 않고 저렇게 물러서는 것이 이
해가 가지 않았다. 현현파의 세명의 공격도 예삿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공격은 주술의
힘을 빈 것이 아니었다. 몇가지의 주술이면 쉽게 세 명을 제압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데 오히려 물러서고 있다니? 갑자기 누군가가 준후의 앞을 막아섰다. 준후와 비슷한 또래
로 보이는 동자승인 소사미 승현이었다.
[가지마! 저... 저 자는...]
승현사미는 숨이 차는지 헐떡거리면서 준후의 앞을 막아섰다. 준후는 놀라서 재빨리 걸
음을 멈추었다. 승현사미가 소리쳤다.
[나는 힘은 없지만, 저 자가 무얼 하는지는 알아! 저 자는 여기 잠든 오백의 혼령들을
깨우고 있어!]
준후는 놀란 눈으로 스기노방이 물러서고 있는 발자취들을 짚어 보았다. 분명 방위에
맞춘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뚜렷한 발자국이 깊게 새겨지는 것으로 보아서, 걸음을 옮기
는 발에 힘을 가해서 지기(地氣)를 일시적으로나마 파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준후가
놀라서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악!]
스크립터 자영의 비명소리였다. 놀란 준후가 뒤를 돌아보니 오의파의 두사람이 세 명의
기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손기자는 대들다가 이미 한 방 얻어 맞았는지 안
기자가 그의 팔을 잡고 있었고, 자영은 계속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영안(靈眼)이 트여
있는 준후의 눈에 오의파의 두 사람의 몸에 씌인 사무라이 복색의 무사들의 영이 같이 투
사되어 보였다. 이미 스기노방의 주술이 효과를 발휘하는 듯, 영들이 깨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물러서고 있는 뒤편에는 아무 잡념도 갖지 않고 오로지 힘을 보내
는 데에만 집중하고 앉아있는 승희의 모습도 보였다. 저런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다면...
[아이고! 이를 어째!]
준후가 어쩔 줄을 모르고 좌우를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붉
은 깃발 두 개가 날아와서 스기노방의 뒷편에 꽂혔다. 주기선생 상준이 나타난 것이 분명
했다. 날아와 꽂힌 붉은 깃발들 중 하나에서는 꿈틀대는 불기둥이, 하나에서는 울부짖는
듯 한 맹수의 형상이 어리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이 늙은이야! 네가 왜놈들 중 제일 센 놈이냐?]
웃음소리를 울리면서 주기선생 상준이 힐기보법으로 날듯이 숲속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손에는 해묵은 검 한자루가 들려있었다.
스기노방이 눈을 부릅떴고 스기노방에게 미친 듯 달려들던 근호도 놀란 신음성을 냈다.
스기노방이 무어라 노한 소리를 지르며 뒤에 꽂혔던 붉은 기 중 불기둥이 솟는 기 하나를
밟아버리자 불기둥은 마치 터져 죽어 가는 것처럼 사그라져 없어져 버렸다. 그 광경을 보
고 이번에는 상준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일그러졌다.
홍녀가 불러낸 백귀야행의 기운은 막 대결하려던 다문화상과 도운까지도 에워싸 버렸
다. 도운은 여유 있게 웃음을 지었고 다문화상은 이상한 분위기에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백제암의 사천왕들은 외공 수련에 주안점을 두고 수련을 해왔기 때문에 주술에 대한 것은
그리 잘 알고 있지 못한 듯 했다. 백귀의 기운 중 한 놈의 기운이 뻗쳐 막 다문화상의 뒤
를 덮치려다가 부르르 떨며 튕겨져 나갔다. 박신부가 뛰어들면서 오오라를 발한 때문이었
다. 박신부가 기합소리같은 기도성을 올리자 오오라가 둥글게 뻗어나가면서 쓰러져 있던
세사람과 광목화상까지를 에워쌌다.
문득 독기운으로 신음하던 병수가 고통도 잊은 듯 놀란 함성을 질렀다.
[초치검!!!]
정신없이 뒤엉켜 싸우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울려 퍼진 병수의 목소리에 뒤
를 돌아보았다. 주기선생 상준의 손에 들려있는 낡은 칼... 그 검집에는 분명 <천총운검>
의 네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
14. 혼 전(混戰)...(3)
명검은 과연 명검이었다. 청홍검에 어린 선명하고 맑은 기운이 휘둘러지자 백귀들은 감
히 다가오지도 못하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현정은 원래 특별한 영력을 지닌 사람은 아
니었지만, 주위를 둘러싼 기운이 어딘지 흉악하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검을 휘둘러
몸주위에 마치 칼로 이루어진 듯한 방어막을 치자, 마치 현정의 몸 주위에 수백 개의 칼
이 흔들리고 있는 듯 했다. 아미파의 호신 검술이었다. 현정은 몹시 화가 나있었다. 저
홍녀라는 일본 여자는 정당한 무술이 아닌 사악한 술수를 사용하여 사람을 해치려는 것
같이 여겨졌다. 사실 홍녀는 사람들을 해칠 목적으로 백귀진을 친 것이 아니라 싸움이 벌
어지는 사이에 백귀들을 몰아 넣음으로써 싸움을 중단시킬 목적을 가진 것이었으나 현정
이 그것까지 구분할 수는 없는 것이었고... 현정은 싸늘한 눈매를 한 채 몸 주위에 계속
무서운 속도로 검을 휘둘러대면서 홍녀에게로 서두르지는 않았으나 신속하게 걸음을 옮겨
갔다.
한쪽에서는 박신부가 있는 힘을 다해 오오라를 발해서 백귀들을 물러서게 만들고 있었
고 그 사이 광목화상은 부상당한 두 동료 화상들을 부축하며 뒷쪽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다문화상은 막 도운에게로 다가서고 있었다. 가진 재주가 바닥이 났고 이제 무기도 가지
지 않은 도운은 다문화상에게 몇 수 공격을 해 보았으나 다문화상이 엄청난 힘으로 도운
의 손목을 잡자 힘조차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비명조차도 지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너 이놈... 오늘 제대로 걸린 줄 알아라...]
손목을 잡힌 도운의 팔에서 우둑우둑하며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도운의 눈
이 고통에 희게 뒤집혀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 사이, 도운은 아직 자유로운 한 손을
재빨리 품에 넣어서 마지막 남았던 슈리켄 하나를 집어 다문화상의 배를 찔렀다.
[으윽!! 이... 이놈이!!!]
다문화상이 노호성을 지르며 도운의 팔을 잡은 채 거대한 덩치의 도운을 패대기 쳐 버
렸다. 자신의 팔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느끼면서 도운은 의식을 잃어버리는 듯 했다.
다문화상은 슈리켄에 찔린 배를 만져 보았다. 벌써 검은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독이 그
사이 침투한 모양이었다. 다문화상은 분을 참지 못하고 발을 들어 도운의 목을 밟으려 하
다가 멈칫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살인을 할 수는 없었고 또 그것보다는 일단 해독하는
것이 중요했다.
[요즘 세상에도 독을 가지고 다니는 놈들이 있다니!]
다문화상은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독은 여러 종류가 있다. 닿기만 하면 즉사하
는 독도 많이 있는데 이렇게 효과가 느린 독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분명 살해의 목적보다
는 협박이나 무력화에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협박을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독이
라면 당연히 해독약도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다문화상은 거칠게 도운의 품을 뒤졌다. 벌
써 독기운이 도는지 몸이 저릿저릿하고 힘이 빠지고 있었다. 도운의 품에서 다문화상은
작은 봉지 하나를 찾아냈다.
[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문화상이 찾아낸 봉지 안에는 서로 다른 크기와 형상, 색깔을 지
닌 약이 이삼십 가지나 있었다.
[아니! 이중에서 어떻게 해약을 찾지?]
준후는 품에서 부적 두 장을 꺼내어 막 기자단 일행에게 다가가는 오의파의 두 사람을
향해 던졌다. 부적들은 날아가면서 허공에서 저절로 불이 붙었고 막 두 사람의 등에 붙으
려 했는데...
[어딜!]
눈이 뒤집힌 오의파의 두 남자는 재빨리 몸을 뒤로 돌리면서 언제 부터 들고 있었는지
하여간 손에 든 일본도를 휘둘러서 부적을 허공에서 잘라 버렸다. 준후는 놀랐다. 놈들은
두 사람의 몸을 빌어 살아 생전 익혔던 무예까지도 응용하고 있는 참이었다. 준후는 다시
부적을 던졌다. 그러면서 안기자와 김자영 스크립터, 손민구 기자에게 얼른 피하라는 눈
짓을 보내면서 계속 부적을 날렸다. 어지럽게 날아가는 부적을 막아내느라 오의파의 두
사람, 아니 두 명의 사무라이는 경황이 없는 듯 했다. 안기자는 비틀거리는 손기자를 부
축하고 자영의 손을 잡아 끌면서 지연 보살이 있는 곳까지 단숨에 달려 갔다. 지연 보살
은 손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철기옹의
숨소리는 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막 안기자 일행이 지연보살에게 당도 할 때쯤, 지연보
살이 이를 악물며 땅에 손을 댔다. 손에서 검은 액체 같은 것이 뿜어져 나가며 주위의 풀
들이 순식간에 말라죽어 버렸다. 안기자는 망연한 중에도 땀을 흘리고 있는 지연 보살의
모습을 감췄던 소형 카메라에 담았다. 준후는 기자들이 피해 가는 것을 보고서는 부적을
던지던 것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현현파의 세 사람은 스기노방을 주기선생에게 맡기고 중독당한 윤섭을 데리고 물러서려
하고 있었다. 상준이 들고 있는 초치검이 탐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것 때문에 중
독당한 동료를 버려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제 거기까지 기어왔는지 차력
사 병수가 얼굴이 새파랗게 된 채 철봉을 쥐고 헐떡거리고 있었다.
[초... 초치검... 그걸... 저걸 얻어야 해...]
[이봐요! 정신 차리시오! 일단 당신은 치료를 받아야 해요!]
[초... 초치검!!... 으흐... 얻어야 해! 저걸 얻지 못하면...!]
[왜 그리 욕심을 내는 거요?]
[고다이고 천황의 검... 난 저걸 얻지 못하면 죽어!]
현현파의 사람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는데 뒤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기선생 상준은 다시 여유를 갖고 스기노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준은 한 손
에 초치검을 들고 한 손으로 등에서 붉은 깃발을 세개나 꺼냈다. 스기노방은 노한 얼굴로
막 아까 상준이 던졌던 두 깃발 중 다시 하나의 깃발을 뽑아서 꺾어 버리고 있었다. 상준
이 소리쳤다.
[너도 꽤 대단하구나! 12지신 중 축(丑)신과 사(蛇)신의 힘을 그리 쉽게 이겨내다니!
그러나 이것도 배겨 내는지 보자! 신(申)! 유(酉)! 술(戌)!]
상준이 세 개의 깃발을 펄럭이며 한꺼번에 허공에 던지자 깃발들에서 회색의 기류들이
뿜어져 나와 스기노방에게로 덮쳐 들었다. 스기노방은 금강저와 카트반가를 휘두르며 다
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하하하! 물러서는거냐?]
막 상준이 웃고 있는데 소사미 승현이 고함을 쳤다.
[뒤를! 뒤로 물러서게 하면 안돼요! 절대로! 저 자는 지금...!]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스기노방의 방울이 승현 소사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때마침 뒤로 후퇴하던 광목화상이 그 광경을 보고는 몸을 날렸다.
[소사미! 물러서!]
광목화상의 배에 주술이 실린 방울이 명중하자 퍽 소리와 함께 날아들던 광목화상의 몸
은 공중에서 밀려 방향을 바꿔서 뒤에 질린 듯 서있던 승현소사미와 엉켜서 우당탕 나 뒹
굴었다. 잔인한 일이었다. 뒤로 물러서려던 현현파의 세 사람도 다시 이를 갈면서 고함을
지르면서 앞으로 달려 나왔고, 주기선생 상준은 다시 세 개의 깃발을 꺼내어 던졌다.
[오(午)! 미(未)! 해(亥)!]
12지신 중의 3가지의 힘이 다시 스기노방에게로 덮쳐갔다. 문득 현현파의 근호가 소리
를 쳤다.
[주기선생! 왜 약한 신들만 부르는 거요? 더 강한 신들을 불러 일거에 끝내 버리시오!]
사실 지금까지 주기선생 상준이 불러낸 힘은 12지신 중 소, 뱀, 원숭이, 닭, 개, 말,
양, 돼지의 여덟 가지 힘이었다. 신력이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 테고 뭔가 나름대로의 이
유도 있을 것이라 생각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상준이 불러낸 동물들이 상징하는 힘은
실제의 전투적인 힘보다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통례였다. 왜 호랑이나 용 같은 가
장 무서운 힘을 지녔음직한 12지신의 힘은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경민이 근호의 말을 이
었다.
[당신의 십이지신 술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자(子),인(寅),진(辰)의 술법이 아니오? 왜
힘을 남겨두려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군요!]
상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상준이 많은 수의 힘을 불러냈음에도 그 힘들이
약해서인지 스기노방을 어쩌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현파의 세 사람은 다소 의아
한 감을 느끼면서도 다시 상준을 도와 스기노방을 상대하기 위해 뛰어 들었다. 막 독이
몸에 퍼진 병수가 철봉에 기대며 다시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승현 사미가 정신을 차리
고는 신음을 올리는 광목화상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광목화상은 워낙 외공으로 강철같이
단련된 몸이어서 그런지 배에 구멍이 뚫리지는 않았으나 워낙 타격이 심했던지 신음성만
울리고 있었다.
홍녀는 정신없이 백귀진을 가다듬으려 애쓰고 있었다. 홍녀의 백귀진은 전번 흡혈마와
의 싸움 때에 한 번 질서를 잃고 준후의 초일월광에 밀려 많은 수의 영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위력이 예전만 못했고, 또 홍녀가 사람들을 해칠 목적으로 편 것이 아니라서 박신
부의 오오라력과 현정이 휘두르는 청홍검의 위세에 형편없이 찌그러져가고 있었다. 사실
홍녀는 현정을 물러서게 할 목적으로 백귀진을 편 것이었는데, 막상 보검을 지닌 현정에
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참이었다. 현정이 검막을 치면서 거의 홍녀에게 접근
했을 때,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작은 검이 제비처럼 현정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현
정은 흠칫했다.
[어검술! 정말로...!]
[사람을 해치지 마시오!]
현암이 소리를 치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현정은 힐끗 그 쪽을 쳐다보더니 망설임 없이
칼을 내리 그었다.
[아아악!!]
홍녀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쓰러졌다. 어깨에 깊은 상처가 나서 금새 어깨가 붉게 물
들고 있었고 삽시간에 주술이 흩어지자 백귀의 기운도 약해져 가고 있었다. 청홍검의 정
순한 기운앞에 주술의 방어가 전혀 먹혀 들지 않는 것을 미처 모르고 홍녀는 주술로 방어
하려 했던 것이다. 홍녀는 그 와중에도 구마열화검을 놓치지는 않았으나, 상처의 고통이
몹시 심한 듯 몸을 몹시 떨고 있었다. 현정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서려는데, 두
번째로 작은 칼이 날아들었다. 현정은 그 칼이 자기를 해치려 하는 것이 아닌지 알고 있
었던 듯,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뻣뻣이 서서 월향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현정의
표정없는 눈이 현암을 향했다. 현암은 막 달려와서 홍녀의 앞을 막아섰고, 오른 손을 뻗
자 월향검이 날아와 현암의 손에 잡혔다.
[사람을 해치지는 말라는 말이오!]
[죽이지는 않아요. 다만 혼을 내 주려는 것이죠.]
[이 정도면 되지 않소? 이제 그만 두시오.]
[아니, 저 칼, 내가 가져야 겠어요. 전리품으로요.]
현암은 힐끗 홍녀가 아직도 쥐고 있는 구마열화검을 보았다. 밀교의 보물인 그 검을 홍
녀가 죽으면 죽었지 내놓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저건 남의 물건이오. 왜 가지려 하는 거요?]
[덕이 있는 자가 가지면 되는 것이지, 무슨 주인이 어쩌고가 있는 겁니까? 내가 세상에
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바로 명검입니다!]
현암은 현정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 보았다. 오랜 수련을 거쳐야 나올 수 있는 무표
정... 아무 욕심이 없는 듯 했으나,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유별난 기호에 맞는
물건을 보면 더욱 탐을 낸다는 사실을 현암은 짐작하고 있었다. 초치검... 거기다가 구
마열화검... 혹시 월향검까지 갖고 싶어하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자 현암은 좀 으쓸해 지
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돌려보니 지금 칼 하나를 갖고 아웅다웅할 때가 아니었다. 주
기선생 상준과 현현파의 사람들이 스기노방과 붙고 있는데, 스기노방은 밀리는 것 처럼
보였지만 그건 무슨 술수 같은 느낌을 현암도 받고 있었다. 때마침 백귀들을 밀어낸 박신
부가 다가오자 현암은 홍녀를 맡긴다는 눈짓을 했다. 그리고 현정에게 고함을 질렀다.
[지금 이 여자는 무력합니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사정이 급해요! 우리 그러지 말고 일
단은 저 미친 왜놈 노인네를 혼내 주러 갑시다!]
[내가 말하고 싶은 바에요.]
현정은 말을 하면서 재빨리 한 쌍의 구마열화검 중 한 자루를 의식을 잃어 가는 홍녀의
손에서 빼앗았다. 현암은 어이가 없었으나 현정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깜찍하게 소리
를 쳤다.
[어서 갑시다! 시간이 없어요!]
현암은 얼결에 홍녀를 좀 도와주려 했으나 현정에게 되려 말려 든 꼴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정말 그깟 검 하나로 다툴 때가 아니었다. 현암은 하여간 고개를 끄덕이면서
현정과 함께 스기노방의 쪽으로 달려갔다.
지연보살이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철기 옹을 치료하느라 너무 기운을 많이 쓴
것 같았는데 어디로 가는 것인지 자영은 의아하게 여겼다.
[어딜 가세요?]
[저... 저기 다친 사람이 많아요... 가야죠...]
손기자가 얼핏 보니 지연보살의 손은 검은 색에서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으나 팔목
은 아직도 검게 변한 채였다. 독이 채 빠지지 않은 것 같았는데...
[지연보살님! 당신 독이...!]
지연보살은 힘들어하는 얼굴에서 다시 희미한 웃음을 띄고 슬며시 손기자의 어깨를 짚
었다. 놀랍게도 즉각적으로 손기자가 사무라이의 귀신이 씌인 오의파에게 얻어 맞았던 곳
의 아픔이 금새 가셨다.
[아니... 저까지... 저는 별로...]
[아녜요. 아픈 사람은 다 고쳐줘야죠...]
힘겹게 이야기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지연보살을 자영이 얼른 부축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부상자들에게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손기자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안기자에게 말했다.
[우리는 뭐지? 우리도 뭔가 도와야 할 것 아냐? 아니, 세상에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
는 건가? 이런 제길...]
안기자는 눈을 빛내다가 입을 열었다.
[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뿐이야! 아까 말한 이야기... 단군의 유물이라는 이
야기가 있었지? 그 수수께끼를 풀어야 해! 자! 저들이 목숨걸고 싸우는데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저 늙은 왜놈이 생각했었다는 단군의 유물에 왜놈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
는지 밝혀내는 거야!]
[지... 지금 상황에서...]
[어차피 우리는 힘으로는 도움을 못 줘!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전부라구!]
안기자는 배낭에서 어제 급히 샀던 일본사의 책을 꺼내어 펼쳤다. 손기자도 힐끔힐끔
사방을 돌아보면서 들었던 것들을 한 데 짜 맞추려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승희가 눈을 떴다. 뭔가 기운이 이상했다. 이상한 기운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고 승
희의 마음 속의 애염명왕이 뭔가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듯 했다.
(이... 이건!)
승희의 주변에 수십, 아니 수백이 넘을 듯한 기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놀란 승희는
그들의 마음을 투시하려 했다. 마음...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읽고 승희는 자지라
질 듯 놀랐다. 그리고 또 다른 자... 또 다른 자... 아니 수백에 이르는 자들의 마음에
있는 소리들을 읽자 그것이 마치 합창처럼 승희의 귀로 밀려 들었다.
- 모두 해치운다!
- 모두 해치운다!
-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라! 나가라! 아마데라스의 후손들이여!
그들은 지박령들이었다. 오백이 넘게 매장되어있던, 그리고 오백 년이 넘게 무슨 이유
에서 인지 이 곳에서 잠들어있던 시체들의 영혼은 어디로 승천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모
두가 지박령이 되어 있었고, 지금 그들은 소리 높이 적의를 불태우며 이리로 다가오고 있
었다. 스기노방에 의해 지기가 깨지고 봉인이 풀린 것이 분명했다. 승희는 미친 듯 고함
을 쳐서 일행을 불렀다.
15. 혼 전(混戰)...(4)
주기선생 상준의 12지신력이 스기노방을 공격하고 거기에 현현파의 두 사람이 멀리서
삼재검으로 공격을 하고 있는 판에서도 스기노방은 그 공격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승희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마침내 스기노방은 원하던 것이 이제야 이루어졌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폈다. 스기노방은 그 사이 지기를 깨뜨려서 오백의 지박령을 깨우
는 데 반 이상의 힘을 할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봉인이 깨졌다는 것을 알자, 스기노
방은 이제까지의 수세에서 벗어나 다시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경민과 태현이
날린 삼재검을 스기노방이 맨 손으로 잡아냈다. 그리고 스기노방이 이상한 주문을 흘리면
서 손에 힘을 주자 삼재검에 연결되어있던 쇠줄들이 실오라기처럼 툭툭 끊어져버렸고 경
민과 태현도 알지 못할 힘으로 타격을 입은 듯,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현현파의
우두머리 근호가 노호성을 지르면서 단봉을 휘두르며 몸을 날리자 주기선생 상준의 12지
신의 기운 중 세 가닥이 함께 스기노방에게로 덮쳐갔다. 스기노방의 머리위에서 혼자 춤
추던 카트반가가 근호에 맞서 날아가고 스기노방은 금강저를 휘둘러 세 가닥의 기운을 차
단했다. 그 때, 현정이 소리를 지르면서 스기노방에게로 달려가다가 몸을 날렸다. 현정은
일단 들고 있던 구마 열화검을 스기노방에게 날카롭게 던진 후, 청홍검을 높이 치켜들며
뛰어오르고 있었다. 스기노방은 서둘러서 몸을 틀어서 구마열화검을 피했으나, 워낙 많은
사람들이 공격해서인지 미처 현정의 청홍검까지 방어할 겨를이 없는듯 했다. 현정의 청홍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옆으로 그어지려는데...
[죽이지 마시오!]
갑자기 현정의 옆구리로 두 가닥의 기운이 날아들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에서
기습을 당한 현정은 급히 허공에서 몸을 틀며 청홍검으로 두 가닥의 기운을 막아냈으나
몸은 그대로 스기노방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스기노방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손
을 쫙 펴자 현정의 몸은 날아가다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져서 뒤로 날아갔다. 현정은
내려서며 간신히 중심을 잡았으나 다시 무릎이 풀썩 꺾이는 것을 느끼고 청홍검을 땅에
꽂고 몸을 기댔다.
[누... 누가 대체...!]
주기선생 상준이 음울한 얼굴로 현정을 살펴 보고 있었다. 현정의 얼굴은 아직도 무표
정 했지만 그 속에서 은은히 분노의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현정이 입을 열자 입가에
가는 선혈이 흘렀다. 타격이 큰 것 같았다.
[다... 당신 어... 어째서?]
[미안하오. 다만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막으려 했을 뿐인데...!]
상준이 떠들고 있는데 찢어질 듯한 귀곡성을 지르면서 월향이 날아들었다. 미처 뛰어오
기 전에 현암이 월향을 날린 것이다. 월향검이 날아들자 그 비명성에 스기노방의 안색이
변했고 주기선생 상준도 눈을 크게 떴다. 월향검은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훨씬 커다란 소
리를 지르고 있었다. 현암은 문득 월향검이 이상하게 분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비처럼 날아든 월향검은 근호를 허공에서 몰아 붙이고 있는 카트반가에게 쏘아져 들
어갔다. 챙! 하면서 불꽃이 파파팍 튀자 근호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어느새 카트반가는
두동강이 되어서 땅에 떨어져 버렸고 월향은 다시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어 스기노방에게
로 덮쳐 들어가고 있었다. 근호의 입에서 놀라움에 겨운 더듬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어... 어... 어검술!!!]
다문화상은 독한 마음을 먹었다. 이삼십 여종이나 되는 약들 중에는 해독약이 분명히
있을 것 같았지만 다른 것들은 효과가 없거나 심지어는 독약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것
이다. 다문화상은 자기가 찔렸던 독 묻은 슈리켄을 집어 들어 정신을 잃어가려는 도운의
팔에 살짝 그었다. 그리고는 도운의 뺨을 때리며 도운이 정신이 들게 하느라 애썼다. 도
운이 자기가 중독된 것을 알고나면 분명 해독약을 고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쪽으로 비
틀거리는 지연보살을 안은 자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치셨군요! 어서... 어서 상처를...!]
다문화상이 돌아보니 저만치에서 승현사미가 광목화상을 잡고 울고 잇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병수가 거대한 몸집을 기댄 채 쓰러져 있는 것도...
[아미타불... 저는 됐습니다. 나름대로 해독할 수 있으니 저 사람부터 구해 주십시오.]
다문화상이 무심코 손가락으로 광목화상을 가리키며 지연보살을 힐끗 보았다. 오히려
치료 받아야 할 사람은 지연보살인 것 같았는데...
[보... 보살님, 보살님이야말로...!]
지연보살은 땀을 흘리면서도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광목
화상 쪽으로 가려고 했다. 자영은 다문화상이 멍하니 손에 든 푸른 빛 나는 슈리켄과 약
봉지를 보고는 순간적인 센스로 다문화상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를 알아차리고는 소
리를 쳤다.
[보살님! 해독을 더 이상 하시면 안돼요! 맞아요! 이 사람을 구해 주세요!]
자영은 도운을 가리켰다. 도운을 치료하여 먼저 정신이 들게 하면 해독약을 고를 수 있
을 것 아닌가? 그러나 다문화상이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을 보살님이 치료하면 이 자의 독기운마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 자가
해독약을 골라줄 리가 없지요.]
자영은 다문화상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옳은 말이었다. 오히려 이 자가 정신을 차리면
독이 퍼져가는 다문화상을 이길 수도 있을 테니 다시 독을 가할 수도 없을지 모르고...
자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홍녀가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멀지 않은 곳에서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영은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측은하게 보였다. 일본인들 중에서는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적이었는데...
[보살님! 저 여자를 구해주세요! 그러면 아마 저 여자는 약을 쓸 줄 알지도 몰라요!]
묘책이었다. 다문화상이 알았다는 듯, 으음하는 소리를 내면서 한 손으로 지연보살을
부축해 올리고 한 손으로는 정신을 잃은 도운의 거구를 집어들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
다. 정말 엄청난 힘이었다. 자영은 혀를 내두르면서 다문화상의 뒤를 따랐다.
준후는 협박하듯 칼을 휘두르며 점차 다가오는 오의파의 두 사람, 아니 사무라이의 혼
령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 아무리 칼을 휘두른다고 해도 멸겁화 한 방만 적중시키면 이
길 수 있겠지만 그런 수를 썼다가는 오의파의 사람이 상할 것이 두려웠다. 준후는 과거
해동밀교가 망할 때에 자기를 길러준 사람이자 악의 화신이었던 서교주에게 뇌전을 사용
한 이래, 사람에게 주술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도저히 사람에게 주술을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부적은 던져 보았자 놈들의 검술에 당해버리니 소용없었고,
승희가 고함을 지른 것으로 보아 그 쪽으로도 빨리 가 보아야 했다.
(흥! 혼(魂)은 귀(鬼)로 대적한다.)
준후가 주문을 읊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잘 쓰지 않던 술수였으나 지금은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두 개의 흰 기운이 엉기기 시작해서 형체를 갖추어 갔
다. 과거 밀교의 제 사 호법이었던 무녀 을련에게서 배운 리매술이었다. 다가오던 사무라
이들이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두 개의 흰기운은 뚜렷한 형체를 갖추지는 않았으나 커다란 사람의 형체가 되었다.
[흥! 저 놈들을 선량한 사람의 몸에서 빼버려랏!]
준후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리자 두 리매는 고함소리 같은 것을 지르면서 덤벼
들었다. 사무라이들은 놀란 듯, 칼을 휘둘러 댔으나 물질적인 칼은 리매의 몸을 그냥 통
과해 버렸다. 그러면서도 리매의 몸은 물리력을 발하는 듯, 오의파 사람의 몸을 꽉 잡고
는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엄청난 힘이었다. 이를 보는 준후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
다.
(非人,非鬼요 非幽,非明이라더니 정말 힘들이 좋구나! 귀신에게도, 사람에게도 힘을 미
칠 수 있다니, 내 왜 진작 저 놈들을 쓰지 않았지? 앞으로는 자주 이용해 먹어야 겠다!)
두 리매는 마치 옷을 벗겨내는 것처럼 오의파의 몸에서 두 사무라이의 영을 끌어내버렸
다. 사무라이의 영들은 반항했으나 원래 그다지 영력이 있는 놈들이 아니어서 인지 구름
덩어리 같은 리매에게는 변변히 힘조차 써보지 못하고 땅에 패대기 쳐졌다.
[좋다! 헤헤헤! 못된 왜놈들! 아예 묵사발을 만들어 줘라! 그리고 따라와!]
준후는 기분 좋게 리매들이 사무라이의 영을 그야말로 묵사발로 두들겨 패는 것을 힐끗
보면서 승희의 쪽으로 달려갔다. 좋은 장난감을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안기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을 뒤적였다. 손기자는 이 판에 책을 넘기고 있는 안기
자가 불만스러웠으나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 갑자기 안기자
가 덜컥 책을 내려 놓았다.
[그래... 그거다... 만약 그렇다면...]
[무슨 말이야? 안기자!]
[단... 단군의 유물... 그... 그건... 남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망해 가는 남조의
권위...]
[남조의 권위? 고다이고 천황의 남조 말야?]
[그래. 고다이고 천황. 그는 남조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 단군의 신
물을...]
[그게 무슨 말이야? 일본 남조의 정통성하고 단군의 유물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안기자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잘들어! 이건 아직 정설로 인정된 학설은 아냐. 어디까지나 가설이지... 그러나 나는
전에 들은 적이 있어! 일본인들, 왜구들, 남조, 초치검! 그래! 내 생각대로라면 모든 것
이 해석돼! 이 모든 일들이...!]
손기자는 갑자기 무섭게 빛나는 안기자의 눈을 보면서 몸을 흠칫했다. 갑자기 누워있던
철기옹의 눈이 힘겨운 듯 열려지면서 입에서 가는 신음성이 나왔다. 안기자와 손기자는
말을 나누다 말고 철기옹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후다닥 철기옹의 몸을 일으켜 앉혔다.
철기옹이 컥컥 하며 몸을 가다듬더니 갑자기 소리를 쳤다.
[아아... 이런..! 놈들이! 놈들이 온다! 내 활! 활을!]
[어르신! 고정하세요! 우리가 거의 이겨갑니다! 일본인들은 거의 쓰러져 버렸어요!]
[아니야! 아니야!]
철기옹의 고집으로 단단하게 얽힌 듯한 얼굴에는 결의 같은 것과 함께 놀랍게도 공포
같은 것까지 어려있었다.
[활을! 활을! 놈들이 와!... 단군님! 정말로! 정말로 놈들이!]
안기자가 멍하게 철기옹을 부축해 일으키는데 손기자는 아까 땅에 떨어졌던 줄 끊어진
활과 이상하게 생긴 화살을 주워오고 있었다.
이제 백귀의 기운을 모두 몰아낸 박신부는 승희의 비명소리를 듣고 그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준후도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승희는 몸을 덜덜 떨면서 머리의 양쪽에 손가락
을 짚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승희야!]
[왜 그래요? 승희 누나?]
박신부와 준후가 온 것을 알고 승희는 눈을 떴다. 승희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
었다.
[지박령! 지박령들예요!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그들... 그들이!]
박신부와 준후도 놀라서 나름대로 눈을 감고 영사를 했다. 엄청나게 많은 영의 기운
들... 하나같이 엄청난 결의와 표독한 심정을 가진 지박령들! 수를 헤아릴 수 조차 없는
영들이 그들이 있는 사방을 에워싸고 빽빽이 몰려오고 있었다. 준후가 입을 딱 벌렸고,
박신부도 안색이 변했다.
[삼... 삼백명은 되겠구나!]
[아녜요! 사백, 아니 오백!!]
승희가 외쳤다.
[오백명이에요! 군대에요! 지박령의 군대! 그들 중에는 지휘자도 있고 장수들까지 아직
도 있어요! 그들의 목소리까지 들려요!]
박신부의 얼굴이 망연해졌다.
[오백... 그러면 그 고분의 시체들이 모두 다 지박령이 되었다고? 모두가?]
준후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오... 오백... 군대처럼 진을 갖추어서 오고 있어요! 완전히 포위 됐어요!]
박신부가 몸을 돌려 보았다. 이쪽의 주술사들도 많았으나 대부분 일본인들과의 싸움에
서 상처를 입고 의식을 잃고 있었고, 성한 것은 그들 넷과 주기선생, 현현파의 근호와 승
현사미의 일곱 뿐이었다. 그리고 무력한 세명의 기자들...
[오십대 일... 아니 칠십대 일의 싸움...!]
[신부님 어떻게 하면 좋죠? 예?]
준후는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고, 승희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박신부는 침착하
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이건 전쟁이었다. 그것도 일방적인...
[준후야! 현암군을 도와! 저 스기노방이란 늙은이가 더 이상 발악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승희는 지연 보살을 도와 다친 사람들이 빨리 회복되도록 해야한다! 한 사
람이라도 더!]
[신부님은요?]
박신부의 입가에 결의의 표정이 스쳐갔다.
[일단 내가 막아보겠다...]
준후가 외쳤다.
[신부님 혼자서요! 안돼요! 제가 진을 치면 잠시 더 버틸 수 있을 거에요! 저랑 같이
가요!]
승희도 오백이나 되는 원혼들의 앞에 단신으로 나가려는 박신부가 무모하다고 여겨졌
다. 마침 정신을 잃었던 오의파의 두 사람이 깨어나고 있었다. 준후가 다시 리매들을 부
르면서 말도 없이 앞으로 쪼르르 뛰어 나갔다.
[아니 준후야!]
[신부님 어서 가세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고! 저도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볼께요!]
박신부가 잠시 승희를 쳐다 보았다. 철없고 멋만 내고 버릇 없던 승희가 이제는 어엿한
한 몫을 하는구나 하는 감정이 스쳐갔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정신을 차린 오의파의
두 사람도 무슨 영사 같은 걸로 상황을 눈치 챘는지 박신부의 뒤를 따라왔다. 박신부는
힘있게 승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준후가 가는 쪽으로 달려 나갔다. 구회 만다라
진이 파괴되어 활짝 열려있는, 영들의 예상 침공로를 향해서 였다.
16. 혼 전(混戰)...(5)
현정은 가쁜 숨을 내쉬면서 청홍검으로 땅을 짚어 몸을 일으키는데에 성공 했다. 입가
에는 아직도 선혈이 흐르고 있었고, 그 짧은 새 어떻게 타격을 입었는지는 주술을 모르는
현정으로서는 알 수 없었으나 하여간 몸을 잘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현정은 입술을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현암이 먼거리에서 조종하는 월향검이 끈질긴 스기노방과 대결하고
있었다. 거기에 원조하는 식으로 주기선생 상준의 십이지신의 기운이 허공을 난무하고 있
었다. 현현파의 근호는 그 어지러운 싸움 중에 미처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자꾸 쓰
러져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정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청홍검이 밑에 있는 돌멩이에 쑤욱 박혀 들어가고 있어서
몸이 자꾸 아래로 쳐졌기 때문이었다. 현정은 다시 울컥하고 선혈을 한 모금 뱉아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나는 저 자를 죽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분명했는데... 누구라도 보면 알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얏! 현정잇! 힘을 냇!]
현정이 왼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저... 저 자... 주기선생... 저 자도 내가 살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왜...
왜 나를 공격하여 다치게 유도 한 것일까... 초치검을 얻어 놓고서도... 저 자의 속셈은
뭐길래... 아니!]
갑자기 현정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뭔가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현정은 힘껏 몸
을 일으켰다. 다급한 생각이 들자 알 수 없는 힘이 몸에서 솟아나는 것 같았다. 현정은
멀찌감치에서 태극패를 꺼내 들고 월향을 조종하고 있는 현암을 향해 비틀거리면서 발걸
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현정의 생각이 옳다면 이건 정말 급한 문제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으로는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강하고 믿을 만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현암이기
때문이었다.
현암은 자꾸 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월향검은 마치 분노한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스
기노방을 덮치려 하고 있었으나, 주기선생 상준과는 영 박자가 맞지 않았다. 주기선생이
불러낸 기운들은 그리 강한 것 같지도 않으면서 너무 그 수가 많아서 자꾸 월향의 진로를
막거나 스기노방을 헛되이 밀어 붙여서 월향이 빗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저 자는 도대체 뭐야? 잘난 척만 하고는! 뭔가 일이 급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아닌가!)
현암이 옆을 힐끗 보았으나 상준은 열심히 스기노방을 공격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
다. 현암은 잠시 월향을 스기노방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승희가 달
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현암이 다시 월향을 조종하여 스기노방을 공격하면서 승희에게
외쳤다.
[승희야! 힘을! 여기를 빨리 정리해 버리자!!]
승희는 현암의 목소리를 듣고 멈칫 하면서 자리에 섰다. 현암은 고전하는 것 같았다.
승희는 일단 현암이 먼저 싸움을 끝내는 편이 급하다고 생각하고 선 자세 그대로 눈을 감
고 정신을 모았다. 현암의 몸으로 엄청난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좋다! 승희!]
현암은 기를 한 모금 들이키면서 기운을 모았다. 스기노방의 주술도 꽤 강한 편이었으
나 이제 카트반가와 방울을 놓쳐서 금강저 하나만 가지고 늙은 몸으로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 정도의 스기노방이라면 한 방으로 보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 받아보아라! 이 왜놈 늙은이!!!]
현암이 소리를 지르고는 충만한 힘으로 사자후의 장소성을 허공에 뿜었다.
어흥- 하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 메아리치면서 마른 나뭇잎들이 우스스 떨어져 내리고
멍멍한 울림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주위를 가득 채웠다. 음파에 실린 강한 기운이 퍼지
자 스기노방과 주기선생 상준도 순간적으로 놀라 몸을 움츠렸고 상준이 불러낸 십이지신
의 기운마저도 스기노방에게 달려들던 것을 멈추고 허공에서 부르르 떨었다.
[이때닷! 나가라 월향!]
현암이 소리를 치며 오른 손에 들고 있던 태극패를 앞으로 쫙 뻗어내자 허공 높이 솟구
쳐 있던 월향검이 귀곡성을 울리면서 스기노방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 꽂혀갔다. 엄청난
기세였다. 스기노방은 돌연히 보인 현암의 엄청난 위력에 미처 어떻게 행동을 취하지도
못하고 다만 금강저를 머리 위로 밀어 올릴 뿐이었다. 현암은 독한 마음을 먹으려다가 자
비심을 베풀기로 순간적으로 마음 먹고는 태극패를 약간 옆으로 비틀었다. 막 내려 꽂히
던 월향이 미미하게 진로를 틀어 스기노방의 금강저마저 박살내고는 그대로 스기노방의
오른쪽 어깨에 적중되어 버렸다. 만약 현암이 진로를 바꾸지 않았으면 스기노방은 정수리
부터 두동강이가 났을 것이었다. 월향은 스기노방의 오른쪽 어깨에 뼈까지 보일 것 같은
상처만 내고 다시 제비처럼 날아 스스로 날에 묻은 피를 허공에 뿌려 털고는 현암의 손으
로 돌아왔다. 스기노방은 멍하니 박살이 난 금강저 자루를 잡은 자세 그대로 굳은 듯 서
있다가 월향이 다시 날아 현암의 손에 되돌아간 이후에야 어깨의 상처를 보고 얼굴이 하
얗게 질렸다. 그리고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울렸다. 주기선생 상준 마저도 현암의 신기
에 가까운 엄청난 위력을 보고는 멍하니 모든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현암은 묵묵히 월향
검을 왼팔목에 매어 놓은 검집에 부드럽게 꽂았다. 뒤에서 승희가 깔깔 거리며 소리를 질
렀다.
[우와! 빅토리 현암군!]
현암은 승희를 보고 얼굴을 한 번 찌푸려 보이고는 조용히 스기노방에게로 걸어갔다.
승희는 현암의 눈초리가 우울한 것 같이 보이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스기노방은 헐떡이
며 어깨의 상처를 움켜 쥐고 있다가 현암이 다가오자 공포의 눈길로 뒷걸음질을 치려 했
다. 현암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스기노방의 어깨를 잡았다. 스기노방은 모든 힘을 쏟아
야 고통을 간신히 멈출 수 있는 듯,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헐떡이며 현암의 얼굴을 겁먹
은 듯 쳐다 보았다. 현암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자신의 웃옷을 부욱 찢어내어 스기
노방의 어깨를 처매어 주었다. 스기노방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현암이 입을 열었다.
[주술을 써서 미안하오. 그러나 그러지 않고서는 당신의 수법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아
서...]
말을 잇던 현암은 스기노방이 한국어를 못 알아 듣는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스기노방의 어깨를 대강 싸매고 나서 스기노방에게 손을 내밀었다. 스
기노방이 망연히 현암의 얼굴을 쳐다보자 현암은 근처에 쓰러져 있는 윤섭을 눈으로 가리
켜 보였다. 해독약을 달라는 것이었다.
스기노방의 얼굴이 울음을 쏟을 것 처럼 일그러져 갔다. 그런데 갑자기...
[피해욧!!!]
현정의 급박한 목소리였다. 현암은 놀라서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기계체조의 수법을
사용해서 몸을 뒤로 날렸다. 한 가닥의 활활 타오르는 불기운이 뒤에서 날아와 현암을 아
슬아슬하게 비껴가서 스기노방의 가슴에 적중해 버렸다. 현암이 스기노방을 끌어 당겼으
나 약간 늦었다. 스기노방은 엄청난 기운을 맞자 몸을 공중으로 띄우면서 한참을 날아가
뒤에 서있는 소나무에 부딪혀 떨어졌고 그의 승복에는 불이 번져갔다.
[누구냥!]
현암이 눈을 부릅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현정이 약간 뒤에서 땅에 나뒹굴고 있었고 좀
떨어진 곳에서 이를 악물고 있는 주기선생 상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상준은 어느
새 등에서 새로이 커다란 붉은 기를 꺼내들고 있었고 그 깃발에는 금색의 글자로 '辰'자
가 있었다. 십이지신 들 중 아껴 두었던 용신의 깃발이었다.
철기옹은 손기자에게서 활과 화살을 넘겨 받자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활줄이 끊
어진 것을 보자 혀를 차면서 활을 굽혀 활줄을 묶었다. 손기자가 말했다.
[어르신! 줄 끊어진 활로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활을 쏘지 못할텐요!]
[아녀... 아녀! 한 번은 쏠 수 있어! 적어도 한 번은!]
철기옹은 지연보살의 치료로 독은 제거된 듯 했으나 아직은 몸을 가누기가 무척 힘든
것 같았다. 철기옹은 이상하게 생긴 화살을 들어 보이며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화살! 삼천 장의 부적으로 만든 이 화살은 일단 시위에 메기기만 하면 어디 까지건
따라가서 맞추고야 마는 것이네... 한 번... 한 번이라도 왜놈들을... 그 놈들을...]
안기자가 눈을 빛내면서 외쳤다.
[철기 어르신! 알고 계신 것을 말 해 주십시오! 저들의 목적은 무엇이고, 도대체 이 곳
에 감춰진 비밀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건... 그건 하늘의 비밀... 단군의 비밀...]
[여기에 숨겨져 있는 보물은 초치검 말고 또 있는 거죠? 초치검보다도 더욱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유물...! 그것이 바로 단군의 유물 아닙니까!]
철기옹은 헐떡이는 숨결을 뿜으며 망연히 안기자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안기자의 얼굴
은 긴장으로 온통 굳어 있었으나, 그 눈에는 결의가 불타고 있었다.
[맞... 맞네... 내가... 내가 바로 그 신물을 지키는... 이미 수백 대나 내려온 나랏자
손의...]
손기자가 전에도 나랏자손이라는 말을 들은 것을 기억해 냈다. 아까 준후라는 꼬마가
김자영 스크립터를 보고 나랏자손이라 하지 않았는가?
[나랏자손이 뭡니까? 어르신!]
[나랏자손이란... 단군의 피가 내려오는 정통의 자손을 말하네. 우리 고유의 무가(巫
家)에서는 이 태생을 제일로 친다네. 신과 가장 가까운 적통 이라 하여...]
안기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철기 어르신! 저 일본인 중들의 목적은 그 단군의 유물을 빼앗으려는 거죠?]
철기옹은 슬픈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기자는 몹시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단군의 유물! 남조의 흥망! 초치검! 초치검은 봉인을 풀려고 가지고 온게야! 봉인
을... 철기 어르신! 여기 감춰져 있는 단군의 유물에는 엄청난 봉인이 되어있지요? 그리
고 그것을 풀려면 초치검 같은 신물이 필요하구요?]
철기옹은 그 와중에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초치검? 그 따위로 봉인을 푼다구? 절대로 안돼... 하하하핫... 놈들이 왜 초치검을
가져왔는지 아나?]
[초치검을 왜구들이 가져왔던 이유는요? 뭐죠?]
[봉인... 그래. 그 봉인은 순수한 나랏님의 기운을 쐬어야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놈들
이 그렇게 떠 받들고 자랑하던 초치검은... 하하하...]
철기옹은 하늘에 대고 커다란 웃음소리를 뿌렸다. 안기자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
다. 그는 놓아 두었던 일본 역사서를 잡고 다시 페이지를 뒤지기 시작했다. 초치검...천
총운검... 찾았다!!!
[게이코 천황의 세째 아들인 다케루(日本武尊)가 이즈모(出雲)를 평정한 이후 많은 공
을 세워서 본국인 야마토로 개선 하였으나 쉴 사이도 없이 이번에는 동쪽을 평정하기 위
하여 그의 아내와 동반하여 출정하다. 그는 도중에 이세신궁(伊勢神宮)에 들러 백모인 왜
희(倭姬)를 방문하였다. 왜희는 그를 무척 반기며 위로의 말을 보내고는 소중히 간직한
천총운검(天叢雲劍)과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며...]
[이세신궁! 이세신궁! 저 이(伊)와 권세 세(勢)!!! 이것이 무슨 뜻이겠나? 손기자!!!]
[다른 세력... 그러니 그건... 아니 그렇지만 그건 허무맹랑한 <고서기>와 <일본서기>
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이 아닌가!]
[그러나 천총운검, 아니 초치검은 지금 우리의 눈 앞에 있어! 손기자... 이세신궁, 다
른 세력의 신을 섬기는 궁전! 당시 상황을 사실이라 가정을 하세! 다케루는 동쪽을 향하
여 진군했고, 출정 도중에 왜희를 방문하러 이세신궁에 들렀다 했네! 그러면 이세신궁이
있던 곳은 어디이겠는가! 동쪽! 바로 우리 나라의 땅이었어!!! 그리고 증거는 또 있네!
그의 백모가 어째서 왜희라는 이름으로 불렸겠는가? 왜희(倭姬)... 바로 왜국(倭國)에서
건너온 여자라는 이름이 아닌가! 이세신궁이 일본에 있는 것이라면 그의 백모가 어째서
왜인여자라고 상징되는 이름으로 불렸겠는가? 모르겠나? 다케루건 진무 천황이건... 그건
그들 고서기의 영웅들은 모두가 이 땅에서 건너간 민족이었다는 뜻이 돼! 초치검도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거일 가능성이 많단 말이야!]
[그... 그건...]
[보게! 다케루는 왜희를 만나 칼을 받은 후에 더 동쪽으로 가서 사가미국(相模國)을 친
것으로 되어있네! 상모국... 그런 이름은 모르지만 혹시 사마르칸트나 그쪽이 아니었을
까?]
[안기자! 흥분하지 말게! 비약은 금물이야! 좋아. 그러나 지금 그것이 중요한 때인가?]
[중요하지! 중요해! 지금 모든 것은 그 한가지에 귀착 되고 있는거야! 바로 단군의 유
물! 자. 내 말을 더 들어보게! 고다이고 천황은 남조의 권위를 세우려 삼 종의 신기를 가
지고 수없이 전투를 치뤘네. 그러나 결국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궁색하게 몰려서 죽
음을 맞았지. 그에게 천황의 정통성을 부여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초치검,
아마테라스의 거울, 영혼의 목걸이, 이 세가지 신기로도 실리주의자인 다카우지는 눈 하
나 깜짝하지 않고 고다이고 천황을 몰아 붙였네. 그 상황에서, 물리적인 병사나 세력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고다이고 천황이 한 생각이 어떤 것이었을 것 같은가! 음?]
갑자기 철기옹은 묵묵히 몸을 일으켜 활을 들고는 뚜벅뚜벅 걸어 나갔고 안기자는 놀라
서 입을 다물었다. 손기자도 철기옹을 쳐다보았고 철기옹의 몸에는 다시 신이 내렸는지
지친듯한 기운은 보이지 않고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 주위를 돌고 있었다. 철기옹은 뚜벅
뚜벅 박신부와 준후가 달려나간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17. 혼 전(混戰)...(6)
지연보살은 홍녀의 어깨위에 손을 얹고 정신을 모으고 있었다. 다문화상은 이제 막 몸
에 독기운이 번져서 정신이 흐릿해 져가는 것 같이 보였고, 별다른 힘이 없는 김자영 스
크립터는 다만 눈만을 빛내면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문화상이 힘이 겨웠
던지 붙잡고 있던 도운의 몸에서 힘을 빼자 도운의 몸뚱이가 털썩하고 넘어져서 흙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다문화상은 떨리는 손으로 약봉지를 쥐더니 그 약봉지를 김자영 스크립터
의 손에 넘겨 주었다.
[왜... 왜 그러시죠?]
다문화상의 얼굴은 이제 하얗게 질려 있었고 얼굴 전체에는 고통의 표정이 짙게 번져가
고 있었으나 그 와중에도 다문화상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려 애쓰고 있었다.
[하... 하하... 석가세존이 부르시는 것 같군요... 이생에서 죄업이 너무 컸다고... 하
하...]
[정신 차리세요! 지연 보살님께...!]
다문화상이 힘겹게 손을 들어 자영을 저지했다. 그러면서도 다문화상의 큰 덩치는 서서
히 주저 앉아가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일단 살리던 사람부터 구해야죠... 그리고 약을 찾.,. 찾으면 제..
동료... 들부터... 그리고 여기 이... 자도...]
[이 악인을 뭐하러 구해줄려구요?]
[악인이라도... 저는 버틸 만 합니다... 그...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으...
세... 요]
[말을 하지 마세요!]
[아니... 이건 중요한 일... 저... 저희 백제암에서 사대천왕을 다 파견했는데... 이렇
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줄은... 저희의 힘은 약해요... 그러니 아... 아가씨에게...부
탁...]
[나요? 내가 무슨 힘이 있다구요!]
[아... 아니... 아가씨는 나... 나랏자손... 승현... 승현 소사미가... 말했었어요...]
[나랏자손이 뭔데요! 대체!]
다문화상은 가쁜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이를 악물고 눈을 번쩍 떴다. 최후의 힘을 모
아 독기운에 저항하려는 모양이었다.
[자... 잘 들어요... 만약 우리가 전부 당하게 되면... 나랏님의 신물을... 신물을 대
신 전달해 주세요...]
[신물이라뇨? 초치검 말인가요?]
[아... 아녜요... 그... 그건 단순히 겉에 드러난 것일 뿐... 단군... 단군님의...]
[단군님이요?]
[여기... 강화도... 마니산은 온 세상의 영기가 모이는 산... 여기 이 부근에 숨겨져
있는 단군 적의 비기가 있어요... 그건... 상고에서부터 내려오는 것... 몽고의 침략 때
에 이리로 옮겨진...]
몽고의 침략이라고? 그랬다. 고려조 때에 침략해온 몽고는 전 국토를 유린하기에 이르
렀으나, 고려왕조는 강화도에 웅거하여 30년이나 항쟁하였었다. 단군 때부터 내려오는 신
물이라니! 만약 그런 것이 정말 남아 있었고, 고려조 때까지 전해져 왔다면 몽고의 항쟁
기에 강화도로 왕이 피신하였을 때 빼놓았을 리가 없다고 자영은 여겼다. 그런데 왜 그것
을?
자영은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고려조는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세계역사상 몽고의 침입
에 맞서서 그리 오래 저항한 나라는 없었다. 중국은 물론이고 서쪽에서는 다뉴브 강가에
서 수십만에 달하는 서양의 기사군이 괴멸되었고, 그 사나운 바이킹 족이 밀려서 노르웨
이로 쫒겨났다. 그 와중에서, 그 와중에서도 자그만치 30년간을 강화도라는 작은 섬에 웅
거하여 항쟁한 나라... 그러나 고려도 결국은 무릎을 꿇었다. 왕은 원 황실의 부마가 되
고, 수많은 다루가치 (원의 파견관리) 가 전국에 배치되었다. 만약 그런 실정을 내다보았
다면... 강화도에 감춘 단군의 비기를 그냥 놓아 두었던 것이 아닐까? 자영은 그건 사실
이 아닐 거라 고개를 저었다. 아까 안기자가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다문화상이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일본인들은 그 신물을 노리고 있는겁니다. 단순히 초치검을 되찾자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왜 노리는 거죠? 왜?]
[여기 모인 사람들의 반은 초치검을 욕심 내어, 그리고 나머지 반은 단군의 신물을 지
키러 온 겁니다. 당신... 당신은 승현사미가 말한 것이 틀리지만 않는다면 나랏자손이 분
명해요... 당신... 당신만이...]
[무슨 소리에요!]
[단군의 신물을 얻을 수 있는건 당신 뿐... 절대, 절대 남의 말을 듣지 말아요... 절
대... 아아... 힘이 되어야 하는데... 아... 약, 해독약을... 찾으면... 어서 제 동료인
지국을... 지국화상을...]
더 이상 버틸 기운이 없는듯, 다문화상은 스르르 쓰러져 버렸다. 이제 독이 다 퍼졌는
지, 다문화상의 얼굴은 흙색으로 변해 있었다. 자영은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나랏자손? 내가? 아니... 아냐, 아닐 거야... 내가 어떻게... 단군의 신물? 그리고 나
만이 그걸 얻을 수 있다고? 아냐... 아냐...)
지연보살이 그야말로 억수같이 땀을 쏟으며 몸을 떠는 가운데, 홍녀의 청홍검에 맞은
어깨가 기적처럼 서서히 아물어들고 있었다. 자영은 다문화상의 말에 충격을 받아 아직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참이었다.
갑자기 자영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가만! 이게 무슨 소리지?)
- 가누나... 가누나...
늙은 여자의 목소리... 자영은 망연히 주변을 둘러 보았으나 늙은 여자는 하나도... 아
니, 한 사람 있었다. 아까 도지라고 철기옹이 말했던 그 늙은 무당...
- 나랏님권세를 잡으사 하늘힘을 모아 모아 납시시니 훠어이, 물렀거라 잡것들아! 물렀
거라 잡것들아!
굿거리 비슷하기도 하고 사설 비슷하기도 한 소리... 어디서 들리는 지도 모르는 그 갸
날픈 소리는 계속 자영의 귀에 울려오고 있었다. 자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암은 부릅뜬 눈으로 상준을 쳐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오른손에 들려 아래로 숙여진
월향에서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검기가 세 자나 뻗어나서 갑자기 아래쪽의 땅에 펑 하면
서 구멍이 뚫렸다. 상준도 인상을 쓰면서 초치검을 허리에 꽂고 다시 하나의 붉은 기를
펴 들었다. 호랑이(寅)의 깃발이었다. 현암은 나직하지만 울림이 있는 소리로 상준에게
물었다.
[너... 왜 그런 짓을 했지?]
상준은 대답대신 하하하하 하고 하늘을 보고 웃었다. 막 쓰러질락 말락하던 현정이 대
신 소리를 질렀다.
[저 자! 저 자는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실력자들이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서... 그래서 모든 신물들을 다 차지하려고...!]
상준이 고함을 쳤다.
[닥쳐랏! 무슨 헛소리냐!]
[저자가 들고 잇는 초치검은 가짜에요! 일본인들과 우리들, 아니 일본인들이 있는지는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초치검을 내놓아서 서로 싸우게 만들려는 심산이었을 거에
요!]
현암은 잠시 흥분을 감추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상준은 일행과 같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따로 가서 혼자 초치검을 얻을 수는 없었을까? 간단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
다. 그러나 초치검이 그렇게 쉽게 발견될 성질의 것이라면 나머지 사람들은 왜 여기에 모
여있었겠는가? 그리고 보니 자신도 정신없이 여기로 온 것이지만, 원래 고분이 발견된 곳
은 이 구회만다라진이 설치되어있는 곳과는 좀 다른 곳이었다. 현암의 일행은 다만 강한
영기를 느끼고 여기로 온 것이었고, 500구의 왜구 시체가 발견된 고분은 만다라진의 입구
쪽에 있었던 것이다. 초치검은 500구의 왜구 시체들 속에 묻혀있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
과 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초치검은 여기, 우리가 있는 땅 밑에 있을 거에요! 이 만다라진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생각해 봐요! 이 만다라진은 일본의 술수로 편 진이에요! 그리고 금방 칠 수 있을 만
큼 쉬운 것이 아니구요! 왜구들이 펴 놓았다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흐트러진 것을, 일본
화상들이 다시 보강한 겁니다! 그러면 일본인들이 무엇을 지키기 위해 만다라 진을 폈다
고 생각되나요? 바로 초치검이에요! 저 주기선생이 들고 있는 것은 모조품이에요!]
[왜 모조품을?]
[하하하하하...!]
주기선생 상준이 하늘을 보고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상기된 얼굴로 현암과 현정
을 쏘아보며 소리를 쳤다.
[이 초치검...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는 전에 아주 힘겹게 초치검을 얻었었지. 그러나
가짜였어... 가짜...! 그리고 나는 너희들의 신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나는 다만 진짜
초치검을 얻기 위해 너희들이 서로 싸워 쓰러지도록 하려 한거다! 청홍검은 좀 가치가 있
겠지만...]
[못된놈!!!]
[욕하지 말게. 그러나 나는 아무도 죽일 의도는 없어! 다만 여러 사람들이 힘을 써서
나를 방해하면 안되니까 그냥 눕혀 놓은 것이지!]
[왜 다른 사람의 신물에 욕심을 내는 거지? 그 이유는?]
[하하하.... 이거나 받고 며칠 병원에서 쉬게!]
깃발이 날아갔다. 현암은 슬쩍 몸을 날려 피하자 현암이 서 있던 자리에 불덩이가 솟구
치고 누런 기운이 바위처럼 땅에 깊숙한 자국을 내며 박혔다.
(상당한 녀석이군!)
현암은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마음 속으로는 경게를 늦추지 않고 있었
다. 아까의 한 방은 준후에게 얻었던 피화부 덕에 쉽게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에게 월향을 다시 날리고 싶지는 않은데...)
상준은 정말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자신의 가장 강한 공격중의 하나인 진의
공격을 맨 손으로 넘겨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준은 공격을 하면
서 힐기보법을 폈다. 상준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로는 절대 듣지 않을 모양이군!)
현암은 승희를 돌아보았다. 승희는 다시 현암이 싸움을 시작하자, 현암에게 힘을 아낌
없이 퍼부어주고 있었다. 현암의 손에서 월향이 떠나자 월향은 무서운 귀곡성을 지르면서
상준의 뒤를 따르더니 대번에 상준이 들었던 깃발하나가 갈갈이 찢어져 버렸다.
[잠깐!!!]
상준이 소리를 쳤다. 현암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아는 것을 어서 다 말하게! ]
상준이 머뭇거리는 가운데 현정은 맥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가
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근호는 쓰러진 스기노방의 품을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해약
은 없었고 스기노방은 뭐라고 뜻 모를 소리만 신음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승현사미는 막 광목화상을 붙들고 울다가 고개를 들었다. 광목화상은 심한 타격을 입어
서 인지 가쁜 숨만 간신히 내쉬고 있었으나 잠시 몸을 움직여 승현사미의 귀에 뭐라고 작
은 소리를 중얼거린 다음 고개를 떨구고 의식을 잃어갔다. 승현사미가 돌연 고개를 들더
니 목에서 염주를 끌렀다. 그리고 염주를 끊고는 염주알을 하나 땅에 던졌다. 또 하나...
또 하나...
[저기다!]
승현사미는 맨손으로 미친 듯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바로 세 번째 염주알이 굴러가
다 멈추어진 자리였다. 손가락으로는 땅이 잘 파지지 않자 승현사미는 광목화상의 허리에
있던 조그마한 야삽을 꺼내더니 그것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어디서 솟아나는지 무서운
속도로 땅을 파헤쳐서 어느덧 두 자 가량의 구멍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같은 때, 홍녀는 막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런데 홍녀는 눈을 뜨자마자 겁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자영이 홍녀가 눈을 뜬 것을 보고는 홍녀에게 다가갔다.
[홍녀님! 어서! 어서 해약을 골라주세요!]
[아니... 아니... 안돼! 이건! 이건!]
[뭐요? 어서 사람들을 구하게 이 중에 해약이 어떤 건지...]
홍녀는 자영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소리를 쳤다.
[스기노방상!!!!! 안돼!!!!]
지연보살이 다시 눈을 뜨고 막 몸을 일으키려는 홍녀를 붙잡았다.
[왜 그러는 거에요? 왜?]
홍녀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스... 스기노방... 죽은 자의 몸을 깨우는 주문을... 그건... 그건...]
[으아악!]
승현사미는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구멍 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
다. 막 구멍 속에서 백골이 다 된 손 하나가 튀어나와 승현사미의 손목을 잡았다. 승현사
미가 찢어질 듯 함을 치자 책을 뒤지던 안기자와 손기자가 놀라서 그 쪽으로 달려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발 밑의 땅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으앗! 이게 뭐야!]
막 상준의 말을 들으려하던 현암도, 현정, 근호, 상준도, 그리고 지연보살이나 자영,
승희까지도 승현사미의 비명 소리를 듣고 모두 시선을 그리로 모았다. 땅이 마구 흔들리
면서 갈라지고 있었다. 손기자와 안기자는 막 이쪽으로 달려오려다가 겁을 먹고는 다시
뒤로 물러서고 있었고, 승현사미는 계속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이윽고 땅이 갈라지면서 미이라처럼 백골이 드러난 손들이 하나씩 땅을 헤집으며 나타
나기 시작했다.
자영도 비명을 질렀고, 근호는 입을 덜덜 떨고 있었다. 주기선생 상준마저도 입을 벌린
채 신음소리 같은 것을 냈다.
[저... 저게 뭐야...!!]
갑자기 승현사미의 몸이 뒤로 휙 나가 떨어졌고 승현사미가 팠던 구멍에서 미이라 같이
썩은 얼굴이 이상한 천 조각을 두른 채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십여
개의 시체들이 서서히 땅 속에서부터 기어 나오고 있었다. 어떤 자는 녹슨 칼을 아직까지
들고 있었고, 낫처럼 생긴 이상한 무기를 들고 있는 자도 있었다.
현암마저도 다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현암은 물러서지 않고, 일단 현정의 앞을
막아선 다음 승희를 불렀다. 승희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얼굴로 현암에게 다가왔다. 현
암은 침착 하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승희를 뒤로 돌리고는 일어서고 있는 시체들을 주시
했다. 안기자와 손기자는 자영과 홍녀, 지연 보살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문득 주기선
생 상준이 소리를 쳤다.
[초치검!!! 저것이야말로 진짜 초치검이다!!!]
승현사미가 팠던 구멍에서 머리를 내민 시체의 한 쪽 팔에 정성스럽게 기대어져 있는
검... 바로 초치검이었다...
18. 지박령 전쟁...(1)
박신부와 준후는 막 영들이 몰려오는, 그들이 들어왔던 구회 만다라의 진의 입구쪽을
지나 바깥쪽으로 달음질치고 있었다. 박신부의 뒤로는 오의파의 두 사람이 따라 달려오고
있었고, 준후의 뒤에는 두 마리의 리매가 쿵쿵 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박신부가 달리면
서 말했다.
[준후야! 뒤의 저것들은 뭐지?]
[제가 불러낸 리매들이에요! 우리 편이니 염려하지 마세요!]
일행은 어느덧 구회 만다라진이 애당초 처져 있던 초입에까지 달려 나왔다. 아직 영들
의 기운은 그곳까지는 다다르고 있지 않았다. 마치 군대가 서서히 진격하는 듯, 아직은
좀 떨어진 곳에서 점차 진열을 갖추어 다가오고 있는 듯 했다. 뒤쪽에서 달려오던 오의파
의 두사람이 박신부를 소리쳐 불렀다.
[신부님! 신부님!]
[왜 부르십니까?]
오의파의 맏이인듯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신부님! 놈들을 막으려면 보통의 영력으로는 안됩니다!]
[그건 무슨 말이지요?]
[저희도 어느 정도의 능력은 있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러나...]
준후가 끼었다.
[그리고 보니 아까 묻고 싶었어요. 아까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 사무라이의 영들에게
빙의가 되었었죠? 칼까지 들고...]
오의파의 둘은 멋적은 듯 미소를 씨익 지었다. 좀 쑥스러운 듯도 했으나 그 와중에도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그들... 그들의 고분에 갔었습니다. 도지 님과 함께...]
[예? 그러면 도지 님은 어디 계시죠?]
[아마 혼자서 굿을 벌이고 계실 겁니다. 아직도 무사하시다면요... 도력이 보통이 아니
신 분이니...]
[아멘... 혼자서... 그런데 당신들은 어째서?]
[녀석들은 보통의 지박령이 아닙니다. 몸, 몸을 갖추고 일어났었어요! 틀림없습니다]
박신부와 준후는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 보았다. 뒤에서 리매 두 마리가 으아아아
~~ 하는 고함소리를 질렀다.
[몸? 몸을 갖추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들은 군대입니다. 그것도 이상한 주술로 보호되고 있는 군대였던 것이 틀림없어요.
놈들 중의 두 명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힘으로 밀어내고는...]
오의파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고분을 조사하러 갔을 때에 영적인 방어를 펼
쳐 몸에 부적을 몇 개나 달고 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지 무당은 그곳에 도착하자 그
들의 힘을 줄이느라고 혼자서 굿을 벌여 무아지경에 빠져 버렸고, 두 사람의 오의파는 고
분들 사이에서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초치검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갑자기 그들의 뒤에
서 물리력에 의한 강타를 당하고 몸에 지닌 부적을 뜯긴 후 기억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저는 그 와중에도 잠시의 일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일본어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
죠. 저는 원래 대학에서 일본사를 공부했었기 때문에 약간 알아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들은 척후를 나가서 대술사(大術士)인 묘운(明雲)이 깨어났는지 보라 했지요.]
[대술사? 명운?]
박신부는 오의파의 한 명을 다시 새로운 눈길로 보았다. 비록 외모는 누덕누덕 기운 누
더기를 입고 있었지만, 대학에서 일본사를 전공했던 인텔리 였던 모양이었다. 박신부의
그같은 마음을 그 사람도 어떤 능력으로 알았는지, 슬며시 웃으며 대답을 했다.
[저희 오의파는 원래 거지와 각설이들에서 비롯된 유파입니다. 때문에 남의 마음을 알
아내는 것과 잡귀를 물리치는 것에 강하죠.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다릅니다. 지박령들...
그러나 절대 보통 잡귀가 아니에요!]
[아까 몸을 갖춘 군대라는 말을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놈들은 물리력을 쓸 수 있다는 겁니다. 묘운이 깨어났나 보라는 그 이후에 제가 어렴
풋이 들은 말이 있는데, 묘운이 일어나야 우리들이 다 일어난다고...]
박신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묘운이 일어나야 일어난다고? 그렇다
면 묘운이라는 자가 어떤 주술로 지박령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묘운이
라는 자가 부리는 주술이 어떤 것이기에 그들이 모두 물리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말인가?
하나 둘도 아니고 오백이나 되는 지박령들이...
준후가 부적들을 무더기로 꺼내며 소리쳤다.
[신부님! 이 만다라진을 다시 응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새로 진을 칠 여가가 없
으니...]
박신부는 준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준후는 리매들을 시켜 아까 현암이 꺾어놓은
나무의 자리에 부러진 나무를 다시 세우게 했다. 리매들은 단순하여 준후의 말에 고분고
분 잘 따르는 것 같았고 힘도 엄청 난 듯 했다. 준후와 리매들이 한참 작업을 하는 사이
에 박신부는 다시 오의파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저는 그 초치검의 이야기가 제일 궁금합니다. 도대체 왜 초치검이 여기에 묻혀
있게 되었는지 말이죠. 그 초치검의 이야기에 대해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일본사를 전
공하셨다면...]
[아... 그렇죠.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기는 쉬운일은 아닙니다... 우선, 일본에 내려왔
던 초치검이라는 것은 분명 가짜입니다.]
[예? 과연... 그러면 고다이고 천황이 북조에게 내어준 삼종의 신기가 모두 모조였던
것이 확실하군요.]
[아니요. 그 이전에 이미...]
오의파의 그 사람의 눈빛은 진지했다.
[고다이고 천황 이전,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될 때, 그러니 1180년대가 되겠죠. 그때 다
이라 씨의 마지막 후계자 니이노마나(二位尼)가 싸움에 져서 8살 짜리 아이이던 안토쿠
천황을 안고 물에 뛰어 들어 자결했을 때, 삼종의 신기는 모두 가라앉았고, 거울과 목걸
이는 건졌으나 초치검은 끝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예? 그렇다면 그 초치검이란 것은...]
[여기 나타난 초치검이 과연 가짜인지, 아니면 그 때 이후 물에서 건져낸 진짜 초치검
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도대체 이야기가 얼마나 복잡하게 돌아가는지 박신부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박신부와
퇴마사 일행은 안기자의 전화를 받고 서울을 떠나기 이전에 분명 강한 영기를 투시해 냈
고, 그 기운은 초치검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었다. 그런데 그 초치검이라는 것
이 아예 가짜일수가 있다니? 도대체 무슨 곡절이 그렇게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인지 박신
부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오의파의 사람은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이라씨는 미나모토씨와의 대결에서 분명 패했습니다. 간몬해협(關門海峽)의 동쪽인
단노우라(壇浦)에서 500척의 군선 으로 미나모토씨의 요시쓰네의 700척 대군과 결전을 치
렀던 일이 사서에 분명히...]
갑자기 준후의 외침이 들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 안전지대에서 적들과 대항해야 해요!]
준후의 외침에 세 사람은 준후가 있는 곳으로 뛰어 들었다. 셋이 뛰어 들자, 준후는 허
공에 부적들을 던졌고, 자욱한 안개 같은 것이 그들의 앞을 막았다.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어요! 녀석들이 오고 있는 것 같은데...]
준후는 리매에게 손짓을 했고, 두 마리의 리매는 안개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오의파
의 두 사람은 땅바닥을 긁어 이상한 도형을 그리더니 각자 남과 북쪽을 향해 좌정하고 앉
았다. 박신부도 성수 뿌리개와 부적을 꺼내어 들었으나 박신부의 머릿속에서는 계속 초치
검의 이야기가 맴돌고 있었다.
안기자의 전화를 받고 준후가 영사를 행했다. 그 결과는 초치검이라는, 일본 천황의 신
물이 거기 있다는 내용이었고, 안기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 나라 각지에 숨어 지내던 주술
사들이 대거 그 초치검을 얻기 위해 그리로 몰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은 어떤 투시로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흑막을 친 듯, 아니면 어떤 주술의 탓인지 보
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펼쳐진 구회 만다라 진... 이건 일본의 수법이었다.
진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파괴되어 일본의 승려들이 와서 손을 보아 위력을 갖게 된
것은 분명했지만 하여간 이 진이 여기 펼쳐져 있었기에 일본 승려들이 진을 편 것도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500구의 시체가 발견된 고분은 이 진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런! 거기에 뭔가 비밀이 있었겠구나! 너무 정신이 없다보니 그냥 영기만 느끼고 진
안으로 뛰어 들었었어!)
500구의 시체가 있는 고분이 아닌, 다른 곳에 진이 쳐져 있었다면, 그 진 속에는 뭔가
그 정도로 중요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초치검!)
그리고 오의파의 사람이 빙의 될 때 들었다는 말들... 묘운이 깨어났나 척후를 보내라
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묘운이 깨어나야 그들이 몸을 갖고 깨어난다고... 그렇다면 묘운
이라는 자가 있는 곳은 분명 그 진의 안쪽, 그리고 초치검이 있는 곳도...
(낭패다! 저 진의 안쪽이 어쩌면 더 위험한 곳일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초치검... 오의파 사람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다이라씨와 미나모토씨의 싸
움으로 삼종의 신기가 가라앉았고, 끝내 초치검을 건지지 못했다면 과연 여기 있는 초치
검은 정말 초치검일까? 어떤 자는 그 검을 고다이고 천황의 검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모
든 것이 먹장을 친 듯 불확실하게 투시될 정도로 강한 주술이 둘러싸고 있는 판에, 유독
초치검의 모습만 투시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속임수... 아아 이럴 수가... 그렇다면 초치검이 여기 있다는 것이 속임수였다는 말인
가? 아니, 승희의 투시에 의하면 단군의 유물의 봉인을 풀려고 가지고 온 것이 초치검이
라고 하던데... 아니었다는 말인가? 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일까?)
박신부가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노호성이 들렸다.
[훠어이! 왜놈들은 물러가라! 나랏님의 땅이다!!!]
철기 옹이었다. 때를 같이 하여 준후가 쳐 놓은 안개 장벽의 너머로 기괴한 외침소리와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놈들... 놈들이... 와요! 그런데 리매들은... 어째서...?]
그리고 보니 척후 격으로 준후가 보냈던 리매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오의
파의 두 명은 긴장된 얼굴로 뭔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주변에 싸늘한 냉기가 돌며 뭔
가 뒤에서부터 스스스 소리를 내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박신부는 일단 철기 옹을 불러 세
웠다. 철기 옹은 줄이 끊어진 활과 이상하게 생긴 화살 하나를 들고 있었다.
[어르신! 어르신은 뭔가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아는 것이 있냐고?... 알지... 나는 많은 것을 안 다네!]
[저는 도대체 이 일들이 왜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도대체 초치검은 진짜입니
까?]
철기 옹은 긴장된 얼굴로 박신부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움직이려 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말 할 수 없네!!!]
[그러면, 이 일들, 단군의 유물은 정말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자네, 그 일을 어떻게 알았나?]
[지금 사태는 급합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아까의 일본 승려들 정도가 아녜요. 오
백이 넘는 지박령의 무리가 몸을 가진 채 일어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
까?]
철기 옹이 이를 악물었다.
[몸을 가지고... 몸을 가지고... 그건 그 스기노방 놈의 주술이야! 시체를 깨어나게 하
는 주술! 놈은 이미 그 주술을 폈네!]
박신부는 경악의 눈으로 철기 옹을 쳐다 보았다. 시체를 깨어나게 하다니! 그렇다면 지
금 오백의 지박령들은 단순히 영기만이 아니라 백골이 된 몸으로 일어나서 그들에게 다가
오고 있다는 말인가?
갑자기 준후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쳤다.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리매! 물러낫! 아아! 물러서!!!]
갑자기 안개 속에서 고함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쇳소리가 들리며 미친 듯한 고함소리
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고... 갑자기 안개를 뚫고 한 마리의
리매가 미친듯한 고함을 지르며 걸레꼴이 되어서 뛰어 나왔다. 귀신도 물질도 아닌 리매
가 거의 반쯤은 난도질을 당해 버린 것이다. 준후가 비명을 지르자, 오의파의 두 사람이
기합을 넣었다. 아까부터 들리던 스스스... 소리가 더 커져서 박신부가 돌아보자, 사방에
서 수 백을 헤아리는 뱀들이 몰려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윽! 이건 또 뭐야!]
철기옹이 소리쳤다.
[오의파의 뱀을 부리는 술수네! 아아... 그러나 그걸로 되겠는가!]
뱀들은 빠른 속도로 기어서 안개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저 편에서는 병장기 부
딪히는 소리와 고함소리, 그리고 비명소리와 쿵쾅 거리는 발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박
신부는 이를 악물었다.
[준후야! 안개를 거둬! 우리에게 되려 불리할 뿐이다!]
다친 리매는 준후의 앞에서 신음하는 듯 하다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준후는 눈물을 글
썽이면서 박신부를 돌아보다가 멍하니 주문을 외웠다. 안개가 걷혀가기 시작했다.
[으앗!]
[헉!]
[이럴 수가!!!]
안개 너머로 서서히 저 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모두는 기겁을 했다. 군대... 그
것은 완연히 군대였다. 수백을 헤아리는 군대는 질서정연한 사각형의 방진을 이룬 채로
녹슨 병장기를 들고 저벅저벅 전진해 오고 있었고, 선두의 창병들은 달려드는 뱀들을 찔
러 몰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백골이었다. 백골이 된 몸에 누더기와 녹슨
갑옷조각과 투구를 얹은, 죽은 자들의 군단이었다. 갑자기 안개가 걷히자, 중간에 선 역
시 해골인 말을 탄 장수가 뼈 뿐인 손을 치켜 들자 대열은 정지했다.
박신부와 오의파, 준후와 철기 옹까지도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몸을 덜
덜 떨고 있었다. 준후가 더듬거렸다.
[지... 지옥이야... 이런 일이 어찌...]
철기 옹이 소리를 질렀다.
[왜놈들! 죽어서까지 우리 땅을 침노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는 놈들!]
해골 장수의 신호에 따라 대열이 정비되자, 갑자기 방패를 든 앞 줄의 해골 병사들 뒤
에서 썩어빠진 활을 든 궁수들이 우르르 나와 제 2열에 섰다. 오의파의 두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어어어! 활! 놈들이 활을!]
[아니, 700년이나 썩은 활이 당겨진단 말인가!!]
그러나 해골의 궁수들은 시위를 메기고 썩어빠진 화살을 일제히 발사하는 것이었다. 박
신부는 순간적으로 기도력을 발휘하여 오오라막을 펼쳤다. 오오라막은 순식간에 일행 모
두의 주위를 감쌌다.
[모두 조심해욧!]
화살은 거짓이 아니었다. 50여발에 이른 화살이 박신부의 오오라막에 충돌하여 우다다
다다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나갔고, 애써 화살을 막아내던 박신부는 한 발 한 발의 화살이
오오라에 적중될 때마다 조금씩 몸을 흠칫거리며 뒤로 밀려갔다. 50여발의 화살을 다 막
아내면서 박신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3미터 이상 땅에 자국을 남기며 밀려
나갔다.
[신부님!]
준후가 소리를 치는데 마지막 화살까지 받아낸 박신부가 몸을 떨더니 왈칵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모두... 모두 도망쳐! 저... 저건 영력과 물리력이 둘 다 깃든...]
준후가 씩씩 거리면서 해골의 부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해골 궁수들은 제 이의 화살
을 시위에 메기고 있었다. 준후는 앙칼진 소리를 지르며 양 손을 미친 듯 휘둘렀다.
[야아아아아앗---!!!]
준후의 왼손에서는 인드라의 뇌전이, 오른 손에서는 부동명왕의 멸겁화가 물줄기 처럼
뻗어 나갔다. 앞 쪽의 궁수 하나가 뇌전을 맞고 마치 항아리가 깨지는 것처럼 폭파 되어
버렸고, 두 명의 궁수는 몸이 불덩어리가 되어 땅에 뒹굴며 고약한 냄새를 왈칵 뿜어냈
다. 다시 준후가 불과 번개를 내 쏘는데 뒷쪽에 있는 해골 장수가 손을 쳐 들었다. 와르
르 하면서 이번에는 널찍한 방패를 든 해골 병사들이 몰려 나와 앞을 막았다. 준후가 내
쏜 불길은 방패에 맞고 해골 병사들을 뒤로 몇 걸음 밀려나게 했으나 그 뿐이었다. 준후
는 울듯한 표정이 되었다.
[이...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다시 방패를 든 병사들이 고개를 숙이자 그 사이사이로 궁수들이 시위를 메긴 활을 내
쏘았다. 오의파와 준후, 박신부와 철기옹마저도 벌떼같이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비명을
올렸다.
19. 지박령 전쟁...(2)
막 땅에서 솟구쳐 올라온 백골들은 한 데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 중앙에는 먼지가 가득
끼인 초치검을 안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놈들의 얼굴은 만신창이로 썩어 해골에 흙먼지
만이 가득 끼어 있는 상태였으나, 그 퀭하니 뚫린 눈구멍 속에서 무언가 불타오르는 적의
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현암은 이제 막 모험을 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주기선생 상준의 속셈이 어떤 것인지
불분명하기는 했지만, 지금 십여 구에 이르는 썩은 백골들이 땅에서 일어나는 판에 사람
들끼리 싸울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현암과 상준, 근호를 제외하고서
실질적으로 이 괴물들과 맞붙어 싸울 수 있을만한 사람은 없었다. 지연보살은 치유 능력
만을 가진 사람이었고, 승희도 변변한 힘은 쓰지 못했다. 승현 사미도 너무 어렸고, 그
이외의 사람들은 독에 중독되거나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판이었다.
현암은 침착 하려고 애쓰면서 상준을 쳐다 보았다. 상준의 눈매도 떨리는 듯 했다. 현
암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주기선생! 우리끼리의 싸움은 좀 뒤로 미루자. 일단 저것들부터 물리쳐야 할 것 같아.
찬성하나?]
[너... 너는...]
[지금은 일단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너와 나를 포함해서... 남자로서의 약속
이다. 어떤가?]
상준은 뭐라 잘 말을 잇지 못하는 듯 하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좋다. 나도 살고 봐야지. 초치검의 보상금이 아무리...]
상준은 말을 하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현암은 날카로운 눈으로 상준을 잠시 보았으
나 상준에게 더 묻지는 않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준을 다그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
다. 다만 한마디, 위협을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싫어한다. 그러나 배반자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무슨 말
인지 알겠나?]
현암의 날카로운 눈 빛을 받자 상준은 되려 화난 듯이 소리를 쳤다.
[남아일언이 중천금이다! 잔소리 말고 어떻게 저 괴물들과 상대해야 할지나 생각해봐!]
현암은 스기노방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고 있는 근호를 불렀다. 그리고 승희에게 말했
다.
[우리가 잠시는 버틸 수 있겠지만, 모두가 사느냐 죽느냐는 너에게 달렸어. 너의 힘을
모아서 지연보살님에게 실어드려라. 사람들을 일단 모두 낫게 해야해! 최선을 다해서! 알
았지?]
[현암군! 저... 해골바가지들... 그냥 박살을 내면...]
현암이 입술을 물었다.
[붙어 봐야 아는 거야. 그러나... 보통이 아닌 녀석일 것 같아. 그러니 나에게 힘을 넣
어 줄 생각은 말고 사람들을 빨리 깨우는데 최선을 다해! 알았지!]
승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연보살에게로 달려갔다. 현암은 근호에게 눈짓을 했고 근
호도 겁먹은 듯 하기는 했지만 용기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 개의 단봉을 꺼냈다. 상준
도 찢어진 기 하나를 던져 버리고 남아있던 용신의 기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아직 등에
는 한 개의 기가 남아있었다.
이제 백골들은 둥근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썩은 장검을 든 두 마리의 해골이 칼을 땅
에 내려치자 녹이 와스스 부서지며 칼이 흰 색을 드러냈다. 긴 낫같이 생긴 구겸창 같은
무기를 든 두 마리도 마찬가지의 행동을 취했다. 현암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곧 덤벼들 것
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선수다! 공격!]
현암이 소리를 치며 월향을 날리자 주기선생도 깃발을 휘둘러 불길을 뿜어냈다. 근호는
단봉을 이상한 수법으로 던져냈다. 월향검이 귀곡성을 울리면서 날아가고, 단봉 두 개가
공중을 윙윙거리며 돌면서 날아가는 뒤를 주기선생의 불길이 따랐다.
승희는 지나가는 길에 땅에 뒹굴고 있던 승현사미를 안고 지연보살에게로 달음질 쳤다.
그곳에서는 홍녀가 자영의 다그침에 못 이겨 약을 고르고 있었다. 갑자기 홍녀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몰라요!]
[아니, 해약을 모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 예요?]
[도운 상이 쓴 게 무슨 약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저는 약학에 능통하지 못하다구요!
정말이에요! 이 약들 중 몇몇은 알지만!]
자영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소리쳤다.
[정말이에요? 그러면... 그러면...]
지연보살이 홍녀에게 끼여들어 물었다.
[그러면 홍녀님이 아시는 약은? 그러니 해약이 아닌 것을 일단 골라내어 보세요.]
홍녀는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하면서 몇몇의 약들을 쓸어내었다. 그러자 색깔이 각각 다
른 다섯 가지의 약이 남았다. 약들은 각각 여섯 개씩이 있었다. 다가온 안기자와 손기자
도 망연한 눈으로 그 약들을 바라보았다. 지연보살이 입을 열었다.
[홍녀님... 홍녀님은 일본 사람이지요?]
홍녀는 겁먹은 듯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역시 사람이지요?]
이번에는 홍녀가 망연히 지연보살을 쳐다 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망연히 지연보살의 땀
에 젖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연보살은 아직도 고통을 느끼는 것 같았으나, 그 표정은
온화했다.
[그러면 귀신보다는 사람을 도와주세요... 지금 싸우는 사람들을...]
홍녀의 눈이 지연보살의 눈과 마주쳤다. 지연보살의 좀 우둔한 것도 같은 얼굴... 그러
나 그 눈만은 바다같이 깊었다. 홍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자루만 남은 구마열
화검을 손에 쥐고 몸을 일으켰다.
자영은 지연보살을 쳐다보았다. 지연보살은 다섯 가지의 약을 놓고 뭔가 생각하고 있었
다. 문득 손기자가 눈을 돌리니, 지연보살의 손에 도운의 슈리켄이 들려 있는 것이 보였
다. 손기자는 순간적으로 사태를 짐작해 내었다.
[보살님! 그러면 보살님은... 독을 직접 실험해서 약을 알아내려고...]
지연보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막 재빨리 슈리켄으로 상처를 내려는데 손기자가
와락 지연보살의 손목을 잡았다.
[안됩니다! 안돼요!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지연보살은 고개를 저었다. 손기자는 소리를 쳤다.
[괜찮습니다! 약은 겨우 다섯 가지에요! 네 번 실험 하면 분명 진짜 약이 무언지 알 수
있다구요! 그 다음에 제게 해약을 한 알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지연보살이 한 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 다섯 가지의 약 중에 또 독약이 있으면 어쩔 셈이죠?]
[그... 그것은...]
[그러니 제가 해야 해요. 저는 해독을 시킬 수 있을 겁니다.]
[아닙니다! 해독을 시킬 수 있다면 저를 해독시켜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아...]
자영과 안기자, 승희와 승현사미는 다만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
다. 지연보살이 달래듯, 그러나 빠른 속도로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남을 해독하는 것보다 제 몸을 해독하기가 훨씬 쉬워요. 그러니...]
[아녜요!]
승희가 외쳤다.
[자기가 중독된 상태에서 어찌 자기 몸을 스스로 치료하기가 쉽겠어요? 지연보살님은
아까 한 번의 해독에도 많은 힘을 쓰셨어요! 그러니 해독할 자신이 없으신 거죠? 그래서
스스로를 희생할 생각을...]
일동의 얼굴이 하얗게 상기 되었다. 승희의 말을 듣고 보니 지연보살은 해독에 자신이
없는 것이 분명했고 스스로를 희생하려는 것이었다. 손기자가 와락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
기 재빠르게 지연보살이 들고 있던 슈리켄에 손을 찔렀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미처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손기자는 씨익 웃으며 알약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안기자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뭐... 뭐하는 거야? 엉? 미쳤어!!]
손기자는 알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 독기운이 퍼지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내가 미쳤다면 좋아. 미친놈이 먼저 가야지... 하하]
손기자가 알약을 삼켰다. 지연보살을 포함한 모두는 긴장된 얼굴로 손기자를 쳐다보았
다. 얼마 지나지 않은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여겨졌다. 갑자기 손기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더니 코에서 두줄기의 피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자영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손기자!!!]
손기자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짓는 듯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금방 이
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안기자가 소리를 쳤다.
[바보! 이 멍청잇!!!!]
귀곡성을 울리며 날아간 월향검을 한 해골이 구겸창을 휘둘러 막으려 했다. 그러나 월
향검은 제비처럼 진로를 바꾸어 옆으로 돌면서 해골의 목을 따버렸다. 근호의 단봉도 한
개는 칼로 차단당했으나 도리어 단봉은 떨어지지 않고 빙빙 돌면서 다시 근호의 손으로
돌아왔고, 하나는 한 놈의 앙상한 팔뚝에 맞아 팔을 부셔버렸다. 이어 주기선생의 불길이
휘몰아치자 또 다른 하나의 백골이 불에 휩싸여 버렸다.
근호가 소리쳤다.
[하하하! 놈들아! 맛이 어떠냐!]
근호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며 단봉을 다시 잡고 앞으로 몇 걸음을 나아갔다. 현암이
불안함을 느끼고 제지하려 했으나 조금 늦었다.
[반자이(만세)-----!]
몸이 불로 뒤덮인 백골이 마치 총알같이 앞으로 달려나와 근호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근
호는 놀라서 물러서려 했으나 놈의 뼈만 남은 팔이 근호의 허리를 감자 근호의 몸에도 삽
시간에 불이 옮겨 붙었다.
[아니! 저런!]
현암이 당황하여 월향검을 재차 날렸다. 날아간 월향검은 근호를 안은 백골의 대가리를
날려버렸으나 그래도 놈은 근호를 놓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근호는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넘어뜨려 백골을 안은 채 데굴데굴 굴렀다. 불에 타고 있
던 백골은 바닥에 넘어지면서 그대로 바스라져 없어졌으나 근호의 옷은 너덜너덜하게 되
었고, 심한 화상을 입은 듯 했다. 현암이 잠시 넋 나간 듯 그 참혹한 모습을 보고 있는데
상준이 소리를 지르며 불길을 내쏘았다.
[정신 차렷!]
현암이 다시 월향검을 잡으며 몸을 돌리자 막 틈을 노려 뛰어나오던, 근호의 단봉에 맞
아 외팔이 된 해골이 상준의 일격에 불덩이가 되어 쓰러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뒤쪽에 있
던 여섯 놈의 백골들은 끼어들려하지 않고 한데 모여 이상한 자세들을 취하고 있었다. 그
중앙에 있는 놈은 초치검을 검집째 높이 쳐들었다.
막 월향이 다시 한 놈의 백골을 꿰뚫자 주기선생의 불길이 놈을 태워버렸다. 그리고 현
암과 상준이 막 달려 나가려는데, 갑자기 음산한 바람이 사방에서 일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게!]
상준이 놀라 고함을 치는데 갑자기 여섯 명의 백골이 모여 서 있는 곳에 시커먼 안개
같은 것이 우르르르 모여들고 있었다. 현암마저도 방어자세를 취하며 주춤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현암상!!! 조심해요!! 그건!!!]
홍녀였다. 막 현암이 태극패를 꺼내려는데 백골들에 모였던 안개가 거대한 짐승의 모양
을 이루더니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포효하며 현암과 상준에게로 덮쳐 들었다.
20. 지박령 전쟁...(3)
막 쓰러져 가는 손기자를 자영이 부축해 안았고 안기자는 눈을 붉혔다. 지연보살은 이
제 막 입술을 깨물면서 슈리켄에 손을 찌르려 하는 참이었는데 승희가 슈리켄을 빼앗아버
렸다. 승현사미가 소리 쳤다.
[잠깐! 잠깐!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잠깐만!]
지연보살과 승희가 승현사미를 쳐다보았다. 승현사미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알약들을 가
리켰다.
[저...저는 의학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약에 대한 건 좀 알아요. 약은 쓴 것 아닌
가요?]
너무 허무맹랑한 말이었다. 일동은 모두 멍하니 승현사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승현사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입에 쓴 약은 누구나 싫어하는 법, 누가 입에 쓴 약을 먹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뱉어낼 거에요. 그러니...]
승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맞아! 그러니 독약은 쓴 맛을 지니고 있지 않을지도 몰라. 누구에게 복용시키려면 약
이 잘 넘어가야 할 테지.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상한 맛이 느껴지지 않게 했을 거
야. 그러나 만약 입에 쓰게 느껴지는 약이 있다면... 그것은 뭔가 이로운 필요가 있어서
가지고 다니는 것일지도... 보살님! 약들을 더 추려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승희는 재빨리 약들을 집어 들어 혀에 대 보았다. 두 가지는 단 맛이 났다. 승희는 약
이 혀에 닿기가 무섭게 퉤하고 침을 뱉어 버렸다.
[이 두 가지는 단 맛이에요! 의심스러우니 일단 제껴 놓고...]
다른 한 가지의 약은 좀 의아한 맛이었고 한 가지의 맛은 정말 속이 뒤틀려 버릴 것처
럼 쓴 맛이었다. 승현사미가 저절로 찌푸려지는 승희의 얼굴을 보고는 무릎을 쳤다.
[와! 저거다!]
[잠깐!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그러니...]
[아녜요! 저렇게 쓴 맛을 지닌 약, 만약 독약이라면 누가 뱉어내지 않고 삼킬 수 있겠
어요!]
승현사미는 종알거리면서 승희가 쓰다고 했던 색깔의 약 한 알을 집어 쓰러져 있던 다
문화상의 입에 밀어 넣었다.
[아앗!!]
[앗!]
새카맣게 날아오는 화살들을 보고 거의 체념했던 박신부와 준후, 오의파와 철기옹의 앞
을 무언가 희뿌연 것이 가로 막았다. 날아오던 화살들은 그 희뿌연 것에 맞아 반 이상은
양 옆으로 흩어지고 반 정도는 그 희뿌연 것에 후두둑 박혔다.
[리매야!]
그것은 준후가 불러 내었던 리매였다. 아까 여기까지 도망 왔다가 중상을 입었는지 사
라져 버린 리매가 아니고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다른 리매인 듯 했다. 리매는 하늘을 향
해 어헝~ 하면서 고함을 치며 몸을 돌렸다. 리매는 한쪽 팔이 뭔가에 의해 잘려져 있었
고, 몸이 많이 상한 듯, 기가 흩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수십 개의 화살을 몸
에 맞고도 리매는 아직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준후가 소리를 쳤다.
[어서들 피해야 해요! 리매가 어서 달아나라고 하고 있어요! 어서요!]
오의파의 두 사람이 후다닥 박신부를 부축해서 세웠다. 그러나 박신부는 정신을 차리려
는 듯 고개를 흔들면서 두 사람을 밀어내고 있었다. 철기옹이 갑자기 하늘을 향해 엄청나
게 큰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와하하하하하하하...]
사방이 찌렁찌렁 울리는 듯한, 그야말로 엄청난 소리였다. 앞에 도열했던 해골궁수들의
몸이 마구 떨리는 듯 했고, 방패를 든 놈들도 그 웃음의 기운에 압도 된 듯, 방패로 도열
된 진이 흔들리고 있었다. 갑자기 때를 같이하여, 저만치 먼 곳에서 부터 늙은 여인의 목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불쌍한 망제들아 천고에 맺혔느냐 만고에 맺혔느냐. 천고에 맺혔으면 천고에 풀 것
이고 만고에 맺혔으면 만고에 풀 것인데...]
철기옹이 웃음을 잠시 멈추고 웃음을 지었다. 그의 입에서 반가운 느낌의 말이 터져 나
왔다.
[도지 그 할망구다! 이제 좀 대적해 볼 수 있을게야!]
그러면서 철기옹은 땅에 떨어져 있던 덩굴을 하나 주워 올렸다.
준후는 일단 리매에게 염을 발했다. 그리고 허공에 손가락으로 이상한 도형을 그리니
갑자기 리매가 힘을 얻은 듯, 어깨를 쫙 폈다. 그러자 리매의 몸에 박혔던 화살들이 우르
르 빠져 나가서 땅에 떨어지며 먼지가 되어서 바스라져 없어져 갔다. 준후가 손뼉을 쳤
다.
[와! 된다! 된다! 리매를 살릴 수 있구나! 리매야! 저 못된 것들을 물리쳐 버려라!]
리매가 포효하면서 앞으로 내달릴 차비를 했다. 아마 아까 없어진 것이 암놈이고 이 놈
은 숫놈인듯, 이 리매는 덩치도 컸고 힘도 더 센 듯 했다. 준후는 뒤에서 리매를 지원하
여 번개를 몇 방 내 쏘려는데 박신부가 소리를 쳤다.
[준후야! 잠깐!]
[왜요?]
[네가 쏘는 번개는 방패에 막혀서 별 효과가 없어! 너 리매의 무등을 타고 나가서 싸워
보아라! 나도 여기 오의파 친구들과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준후는 박신부의 말을 듣고 리매를 손짓해 불러서 무등을 탔다. 그러는 중에 계속 철기
옹은 광소를 터뜨리고, 도지의 망자를 내보내는 가락도 점점 다가오자 모두 죽은 망자들
인 해골 병사들은 점점 우왕좌왕하고 있는 참이었다. 준후가 엄청난 덩치의 리매의 무등
을 타자 말을 탄 것보다 더 높이 위로 솟았고, 방패 너머에 웅크려서 우왕좌왕하는 병사
들의 모습이 아주 똑똑히 보였다. 오의파의 두 사람은 뭘 하려는 건지 주변에서 끝이 뾰
족한 풀잎들을 모으고 있었고, 철기옹은 계속 광소를 터뜨리면서 덩굴 가닥으로 일단 끊
어진 활 시위를 잇고 있었다. 오의파의 한 사람이 풀 잎을 한 움큼 들고 허공에 던지자,
다른 한 사람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의 땅에서 나고 자란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닌 게 없는법! 우리 땅을 범하는 너희
왜놈들, 산천 초목에까지 깃든 이 땅의 정기가 어떤 것인지 한 번 보아라!]
오의파의 다른 사람이 품에서 부채를 좍 소리가 나게 꺼내어 부치자, 풀잎들이 허공에
날아오르더니 다시 화살처럼 해골 병사들을 향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박신부는 눈을
크게 떴다.
(오! 저런! 풀잎을 화살처럼 사용하다니!)
해골 병사들의 일각에 풀잎 화살들이 쏟아지자 혼란이 일어났다. 물론 풀잎이 화살 만
큼 강한 위력을 내지는 못했으나, 아무튼 해골 병사들의 몸에 풀잎들은 군데군데에 박혀
들어갔고, 놈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것 같았다. 방패를 든 병사들과 궁수들의 몇몇이
몸에 풀잎을 여러개 박은 채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땅에 뒹굴자 진의 한 귀퉁이가 와해
되기 시작했다. 준후가 마치 말을 탄 장수가 된 듯한 기분에 소리를 쳤다.
[나가자!]
리매가 길게 울면서 앞으로 달려나가자 그 기세에 땅이 쿵쿵 울리는 듯 했다. 그 무등
을 탄 준후가 신이 나서 사방에 제석천의 뇌전과 멸겁화의 불길을 마구 뿌려대자 높은 곳
에서 아래로 내리 떨어지는 불꽃이며 번개를 맞은 해골 병사들의 몸은 불길에 휩싸이거나
그대로 가루가 돼 버리기도 했다. 박신부가 오의파 사람들에게 외쳤다.
[풀잎의 위력이 약하네! 내 성수를 뿌려보자구!]
박신부가 허공에 솟구쳐 올라가는 풀잎들에 뿌리개를 휘둘러서 성수를 튕겨내자 풀잎들
은 이슬처럼 성수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성수를 머금은 풀잎들이 다시 해골
병사들에게 내려 꽂히자, 아까 처럼 그냥 타격만 주는 게 아니라 숫제 놈들의 몸이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좋다! 잘한다!]
철기옹도 소리를 치면서 덩굴로 만든 급조한 활이나마 튕겨대기 시작했다. 제 일격을
맞자 진의 일각에 버텨 두었던 방패 하나가 산산이 조각 나 버리고 그 사이로 제 이, 제
삼의 활을 튕기자 한 놈씩의 해골 병사들이 박살이 나 버리고 있었다. 준후를 태운 리매
도 막 풀잎의 소나기와 철기옹의 지원 사격을 받으면서 막 무너져 가는 진의 일각에 도달
했다. 몇몇의 해골 병사들은 흉폭한 리매의 기세에 질려 도망가려다가 준후의 불을 맞고
부서져 가면서 쓰러져 갔다. 리매의 몸에 다시 몇 개의 화살이 꽂혔으나, 리매는 그런
것 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앞에 서있던 해골 병사 한 놈의 팔뚝을 잡아 번쩍 들더니
그 놈을 그대로 허공에 휘둘러 대면서 돌진 해 나갔다. 해골 병사 한 놈을 통째로 휘두르
는 통에 몇 몇 병사들이 그 놈과 부딪혀 와지끈 하면서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고, 어느덧
재수없게 리매의 손에 잡혔던 병사는 팔목 하나만 남기고 콩가루가 되어 버렸다. 흉폭하
게 날뛰는 리매의 주변에는 이제 너저분한 뼈다귀들만 널렸을 뿐, 나머지 해골 병사들은
뒤로 도망쳐가기 시작했다.
[하하핫! 어딜 도망가느냐!]
준후가 소리치면서 아낌없이 불을 내 쏘는데, 갑자기 긴 창 한자루가 날아 들어서 그대
로 리매의 아랫배에 박혔다. 날뛰던 리매의 몸이 휘청 했다.
[어엇!]
리매가 쓰러지자 준후의 몸도 땅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게 되었다. 아랫배에 정통으로
긴 창을 맞은 리매는 고함을 지르면서 서서히 사라져갔고, 박신부와 오의파의 두 사람은
또다시 갑작스레 찾아든 상황의 변화에 잠시 하던 일을 멈추었다.
다각다각...
다그닥 다그닥...
해골의 말을 탄 해골 장수였다. 뒤에 십여 기의 해골 기병을 거느린 해골 장수가 서서
히 등에서 엄청나게 긴 장검을 빼들고 있었다. 그리고 막 돌격할 채비를 하는 듯 했다.
철기옹이 뒤에서 소리를 쳤다.
[저 놈이 두목일거야! 모두들 조심하게!]
홍녀가 던진 구마열화검은 시커먼 짐승 모양의 형체의 몸을 뚫고 지나갔고, 그 놈은 잠
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월향을 날렸다. 월향은 귀곡성을 내
면서 짐승 모양의 형체의 양 미간을 향해 날아 들어 미간 부위를 꿰뚫어 버렸다.
[캬아아아악!!!]
짐승의 형체는 서서히 몸을 떨면서 사라져 갔다. 막 달려오는 홍녀를 보고 현암이 고맙
다는 눈짓을 했다. 상준은 알기 힘든 눈빛으로 현암의 손으로 돌아온 월향검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암은 이번에 올 때에는 왼손 손목에 검집을 묶어서 언제든지 오른 손으로 검을
쉽게 뺄 수 있게 했고, 또 던졌던 월향을 다시 받을 때에도 왼손 손목만 내밀면 바로 월
향이 날아 자기 집(?)으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러니 퍽 편리했고, 남들
이 보기에도 멋져서 이중의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홍녀는 현암을 향해 다시 외쳤
다.
[조심해요! 저 건 밀교의 술수에요!]
홍녀가 말을 잇는 동안 이제 초치검을 손에 든 자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고, 나
머지 다섯의 해골들은 뒤에 도열하여 뭔가를 염원하듯 음산한 독경소리 같은 것을 내고
있었다.
상준은 잠시 몸을 흠칫하면서 몸에 불이 붙었던 현현파의 근호에게 힐기보법을 이용하
여 달려갔다. 근호는 몸을 잘 움직이지 못했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는 듯이 보였
다. 상준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자네는 나와 대적했었지만, 자네 정도는 내 상대가 되지 않으니 도와주겠네.]
근호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대꾸는 하지 않았다. 상준은 현암에게 소리치고는 근호를 부
축하여 힐기보법으로 승희가 있는 쪽으로 달려 나갔다.
[잠시만 이 자리를 부탁하네!]
현암은 돌아보지도 않고 앞으로 나서고 있는 자만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놈의 손에 들
려있는 초치검... 현암이 다시 월향검을 빼들고 이번에는 기공력을 주입하자 파란 검기가
월향에 맺혀갔다. 갑자기 그 자가 검을 자신의 앞에 세우자, 주변에 미친 바람이 불면서
나뭇잎이며 잡동사니 들이 마구 휘날렸다. 그러더니 놈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둘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셋... 넷 으로 늘어났다. 홍녀가 다시 구마열화검을 주워들고 소리쳤다.
[저... 저건 밀교의 수법 중에서도 가장 고단계라고 하는 방법들... 저 자는 틀림없이
보통의 고수가 아닌... 아아... 대 선사님!!]
현암은 잠시 홍녀의 얼굴을 보았다. 홍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오!]
[아아... 저... 저건... 난... 묘운(明雲)... 묘운 대선사...]
[묘운 대선사라니? 저 해골의 이름이오?]
홍녀는 갑자기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의 빛을 얼굴에 띄면서 악을 썼다.
[아아아... 현암상, 어서, 어서 물러서세요! 어서욧!]
[물러서다니! 그럴 수 없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현암이 중얼대는데 이제 여덟 개의 분신(分身)으로 갈라진 놈의 모습이 현암의 팔방을
에워싸고 달려 들었다. 현암은 막 파사신검 중의 한 검초를 써서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
면서 공격에 대응할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홍녀에게 외쳤다.
[홍녀님! 나 혼자 충분하니 홍녀님부터 어서 피하...]
갑자기 현암은 옆구리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현암은 간신히 몸을 수습하여 중심을
잡았다. 왼손을 대보니 옆구리에서 선혈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얼굴을 돌리는 현암의 눈
에 얼굴이 그야말로 새하얗게 질려서 피에 젖은 구마열화검을 들고 있는 홍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홍녀의 얼굴은 현암보다도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현암은 고통보다도 놀라움
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니... 홍녀님... 왜...???]
[혀... 현암상... 나... 나는...]
미처 말을 잇지 못하는 홍녀의 뒤, 그리고 현암의 사면팔방으로 묘운의 분신들이 몸을
날려 공격해 들어왔다...
21. 지박령 전쟁...(4)
[와! 성공이다!]
승현사미가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는 중에 다문화상은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
다. 승희와 지연보살, 그리고 자영은 너무 기쁜 나머지 박수를 치면서 재빨리 해독약을
가지고 지국, 증장 화상과 손기자에게 약을 복용시켰다. 승현사미는 남은 두 알의 약 중
한 알을 가지고 쓰러져 있는 병수에게로 달려가면서 지연보살에게 외쳤다.
[보살님! 광목스님을 구해주세요! 저 일본 노승에게 맞아...]
[알았다... 동자야...]
자영은 나머지 한 알의 해독약을 들고 도운의 시커멓게 변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승희가 말했다.
[복용시키세요...]
[이 악당에게요? 저쪽에는 또 중독 당한 우리편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저쪽의 중독된 사람들은 스기노방의 독에 의해 중독된 거에요. 일단 악인이어도 이대
로 죽게 할 수는 없어요...]
[...]
[너무 많이 듣고,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이겠지만... 그래도 사람의 목숨은 소중한
거에요...]
승희는 말없이 자영을 쳐다 보았다. 자영은 머뭇거리다가 한 숨을 쉬고는 마지막 한 알
의 해독약을 도운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 때, 현암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승희가 돌
아보니, 주기선생은 몸이 시커멓게 탄 근호를 안고 이쪽으로 달려오다가 막 뒤를 돌아보
고 있었고, 현암은 비틀거리면서 서 있는데 백골의 분신들이 막 팔방에서 현암에게 덮쳐
들고 있었다.
(앗! 현암군이 다쳤나? 저런!!!)
승희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고 정신을 모았다. 현암의 위기상황을 보고 그냥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승희가 현암에게 힘을 보내자, 부상을 당해 주춤거리던 현암은 다시
순간적으로 자세를 가다 듬고 오른손에 힘을 가하여 월향검을 돌리며 떨쳐 내었다. 월향
은 귀곡성을 울리면서 무서운 속도로 파르르륵 회전하면서 현암의 몸 주위에 바싹 붙어
한 바퀴를 돌면서 해골들의 공격을 차단했다.
챙챙챙...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면서 묘운의 분신들이 가하던 공격이 월향검에 의해 차
단당해졌으나 미처 현암의 배후로 덮치던 하나의 분신에까지 미처 도달하지는 못했다. 순
간, 퍽! 하면서 불기운이 솟으며 미처 현암이 막아내지 못했던 한 분신의 공격마저도 불
기운에 의해 차단당했다. 바로 홍녀였다.
현암은 다시 월향검을 손에 쥐고는 홍녀를 돌아보았다. 홍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는 듯, 아니 극도의 번민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현암상... 나... 나는...]
현암은 홍녀의 사정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분신을 홍녀는 묘운 대선
사라고 중얼거렸었다. 그렇다면 홍녀의 입장에서 묘운은 까마득한 사조(師祖)이었을 것이
고 묘운의 영은 강압적으로 홍녀에게 현암을 없애라는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 분명했고,
홍녀는 엉겁결에 현암에게 상처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행동을 했던 자신을
후회하는 듯이 보였다.
[말할 필요 없소... 나는 괜찮으니 물러서요...]
괜찮기는 커녕 현암은 통증이 너무 심해 금방 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그의
특유의 근성을 발휘하여 이를 악물고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홍녀의 눈이 피를
분수같이 뿜는 현암의 옆구리를 향했고, 홍녀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공격을 차단당한 묘운의 분신들은 다시 현암과 홍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섰다. 포악한
기세가 더 흉흉해졌고, 여덟 분신들의 입에서 호통소리가 터져 나왔다. 홍녀는 그야말로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 호통소리에 대항하여 다시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현암은 이 상태대로는 얼마 버티기가 어렵다고 느껴졌다.
(묘운 대선사의 분신들... 저것들은 분명 허상이다. 허상... 그렇다면...)
갑자기 홍녀가 비명을 울리면서 구마열화검을 떨어뜨렸다. 묘운이 뭔가 술수를 부려서
금제를 발동시키려 하는 것 같았다. 홍녀를 무력화 시킨 후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 같았
다. 홍녀는 묘운과 같은 밀교의 수법을 익힌 인물이었고, 묘운은 대선사라고 칭해졌으니
만큼 홍녀에게 무슨 수를 부릴 수 있을 만도 했다.
현암은 도박을 하기로 했다. 일단 저렇게 많은 수의 분신들과 상대한다는 것은 부상을
당한 몸으로는 무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고, 일단 홍녀마저도 위험해 지는 것이 분명했
다. 속전속결!
(부동심결!!!)
현암은 월향검을 하늘로 떨쳐내고는 양손을 마주 쥐고 단전에 힘을 넣었다...
일단 철기옹이 달려나가면서 해골의 장수가 던진 창을 주웠고, 박신부는 쓰러진 준후를
안아 들었다. 해골 장수는 무서운 기세로 짓쳐 들어오고 있었다. 뒤에서 오의파의 두 사
람이 다시 풀잎의 화살을 날렸으나 장수의 갑옷을 뚫지 못하고 모두 튕겨져 나갔다. 철기
옹이 다시 몸에 신을 강신 시켰는지 창을 공중에 크게 휘둘렀다. 박신부는 준후를 안은
채 오오라력을 발동하여 철기옹의 앞을 방어 했다.
[야아아앗!!!]
막 철기옹의 창이 휘둘러지자 해골의 장수는 장검으로 창을 받아 넘겼다. 이 합, 삼
합... 철기옹과 해골 장수가 맞붙어 싸우는 중에도 박신부는 계속 오오라력을 발하여 철
기옹의 방패가 되어주고 있었다.
박신부의 품에서 준후가 말했다.
[신부님... 저 자는... 지금 자신의 성명을 밝히고 있어요.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아들
마사토키(正時)라고... 누군지 아세요?]
[글쎄다. 음... 가만... 저 장수가 지금 일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냐?]
[그냥 뜻으로만 전달되고 있어요. 들을 수 있어요...]
[그러면 저 장수에게 일단 싸움을 중지해 달라고 전해 줄 수 있니? 잠시... 그러니까
잠시 휴전을 하자고 말야...]
준후는 눈을 몇 번 깜박거리더니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 듯 했다. 그러자 뒤
에서 말을 돌려 재차 공격하려던 해골장수가 주춤하면서 말을 멈추었다. 철기옹도 대강
준후와 해골 장수 마사토키 사이의 말을 알아 들었는지 창을 곧추 세웠다. 준후가 다시
중얼거렸다.
[모두 길을 비키기만 하면, 죽이지는 않겠대요. 자기들은 급히 묘운 대선사와 만나야
한대요.]
[묘운 대선사? 그리고 길을 비켜 달라고?]
[자기들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군요. 수백년 동안 기다려 왔대요!]
박신부는 긴장했다. 드디어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낼 때가 된 것 같았다.
[왜 그들은 여기에 있었지? 어째서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준후가 다시 정신을 집중하다가 놀라움에 입을 벌렸다. 준후의 음성이 떨리는 듯, 잘
말을 하지 못했다. 무슨 광경을 투시하여 본 듯 했다. 박신부는 자신도 그 광경을 보기
위하여 준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해골 장수는 울분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700년이나 지난 날의 일들... 해골
장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과거들이 준후를 통해서 박신부에게까지 생생하게 전달되어 왔
다.
- 오백의 병사들은 아직 그대로 도열하여 서 있었다. 많은 어려움을 거치고, 고려의 해
안 수군과 벌써 몇 번이나 싸워 잡힐 뻔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까지 일단 도
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들은 힘을 아끼기 위해 왜구들을 계속 그들 대신 싸우게 시켰
고, 이제 자신들이 같이 왔던 왜구들은 지난 전투 때에 전멸해 버렸다. 남은 것은 자신의
오백 군사와 묘운 대선사와 그를 수행하는 승려 십 여명... 묘운 대선사는 일단 그 물건
의 자취를 탐색하기 시작했고, 이제 대강 어느 곳에 그 물건이 묻혀 있는지 알아내고 있
었다. 그러나 고려의 대군이 닥쳐오고 있었다. 몇 천명일까... 이제 우리에게는 식량도
남아 있지 않았고, 화살도 거의 다 떨어졌다. 병사들의 사기는 높지만, 오랜 항해로 쌓인
피로가 아직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물건? 어떤 물건이란 말인가? 초치검인가?)
- 묘운 대선사는 우리의 안위보다는 일단 그 물건을 지키기 위해 사방에 진을 폈고, 우
리에게 죽는 순간까지 진을 지키라 말하고 그 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가 죽어도
다시 빛을 보게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러면 지금 저 진 안에는 묘운이라는 자가 또 있다는 말인가?)
- 우리는 마지막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남조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지금 덧없이
전멸해 버리면, 이제 거의 손에 들어온 물건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고려인들은 아직
자신들의 땅에 그 물건이 묻혀 있는 것도 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그들에게 이
물건의 소재를 공연히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싸우면 몇몇은 사로잡힐지도 모르
고, 그러면 비밀이 누설된다. 그럴 수 없다. 후일을 기약한다... 묘운 대선사의 법력을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저들은...)
무서운 광경이었다. 오백명에 이르는 군사들은 차례대로 도열하여 벼랑 밑에 앉아 칼을
꺼내어 할복 자살을 하는 것이었다. 장검을 거머쥐고 배에 칼을 찔러 넣고 그대로 쓰러지
는 자도 있었고, 독한 자는 배를 긋고 다시 칼을 위로 말아 올리는 자도 있었다. 그 누구
도 뒤에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목을 쳐주지 않았다. 아마도 고통을 깊게하여 원령을 남게
하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신음성을 울리며 쓰러진 자는 뒤에 차곡차곡 눕혀 놓고 다시
다음 열이 들어가서 배를 가른다. 몇몇은 도망치려 하나 장수들은 그런 자를 그대로 창에
꿰어 다시 시체더미에 밀어 넣는다.
(세... 세상에... 그러면 여기 묻힌 오백명의 집단은 모두 할복자살을 한 거란 말인가?
그... 그 물건을 지키려...?)
장수들은 최후로 자신들의 말을 죽여 다시 시체 더미에 눕힌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대
로 시체더미로 들어가 눕는다. 그리고 줄을 당기자, 미리 설치해 놓았던 듯, 머리 위의
벼랑이 허물어지면서 흙더미가 그들의 위를 덮는다... 아무도 그들이 왔었는지, 어디로
꺼져 버렸는지 눈치채지 못하리라... 고려인들에게 그 물건의 소재를 가르쳐 줄 수는 없
다. 그 물건은 그대로... 남조... 남조의 정통성과 권위를... 먼 훗날이 오더라도... 나
구스노키 마사토키의 손으로...
(도대체 그 물건이 무엇이기에!!)
박신부는 눈을 떴다. 준후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고, 오의파의 두 사람은 멍하니 서
있었다. 철기옹... 그랬다. 철기옹은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
다. 해골장수는 묵묵히 서있었다.
그가 내뱉는 소리가 말이 아닌 마음의 울림으로 모두에게 전달되어 왔다.
--- 이제 길을 비켜라! 길을 비키면 해치지 않는다. 나 구스노키 마사토키의 명예를 걸
고 약속한다...
오의파의 상렬이 눈을 크게 뜨면서 소리를 질렀다.
[구... 구스노키 마사토키! 그... 그러면 마사시게의 아들! 1348년에 북조의 군대에 밀
려서 남조의 사령관인 형 마사쓰라와 함께 불타는 행궁 안에서 자살했다고 알려진...]
--- 형과 나는 서로 자해하려 했으나, 형이 나를 만류했다. 나에게는 마지막 임무를 남
기고... 나도 같이 죽은 것처럼 보이게 했을 뿐이다. 이 일을... 그 물건들을 되찾아 남
조의 영광을 이룩할 때까지... 나는 죽을 수 없다... 죽을 수도 없다... 나는 형의 앞에
서 맹세를 했다... 맹세...
수백년에 걸친 해골 장수 마사토키의 집념... 그리고 물건... 그건 초치검이었을까? 아
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박신부는 천천히 준후를 내려 놓고 철기옹에게로 발걸음을 옮
겼다. 철기옹은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박신부의 얼굴도 역시 비장하였다.
드디어... 드디어 박신부는 이 일의 전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22. 초치검의 정체...(1)
햇살과도 같으나 뜨겁지 않고, 달빛과도 같으나 시리지 않은 황금색의 휘황한 빛이 사
방을 가득 메웠다. 이제 막 독에서 풀려나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던 백제암의 네 승려들과
차력사 병수... 그리고 김자영 스크립터와 안기자, 승현사미와 지연보살, 주기선생 상준
과 의식을 잃어가던 근호, 그리고 현정과 승희와 홍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현암
의 몸에서 눈부시게 뻗어 나오는 광채에 채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러나 그 광채는 사람의
눈을 쏘는 광채가 아니었다. 어둠을 밝혀주는 빛의 성질만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뭔가
은은하고 차분한 심정을 갖게 하는... 그러면서도 뭔가 묵직하고 향기가 도는 것 같은 그
러한 광채... 불가와 도가에서 양쪽 다 추구하는 그러한 무(無)의 경지를 일깨워 주는,
그러나 결코 공허하지만은 않은 그런 빛이 잠깐, 아주 잠깐동안 사방을 감쌌다... 바로
한빈거사의 최고의 술수였던 '부동심결' 이 만들어낸 빛이었다.
대선사 묘운의 분신들은 삽시간에 빛에 휩쓸리듯 사라져 버렸고, 빛이 지나간 후에는
뒤쪽에 기이한 진을 펴고 있던 다섯 명의 백골들도 모두 땅에 흩어져 버린 채였다. 단지
묘운 대선사만이 갑자기 좀 더 삭아버린 듯한 모습을 한 채 검을 안고 뒷걸음질 치고 있
었다. 갑자기 초치검을 안고 있던 묘운의 오른 팔이 가루로 변하면서 초치검은 땅에 떨어
져 내렸다.
아직 사람들이 갑자기 사방을 가득 메운 엄청난 빛의 소용돌이의 잔상 속에서 눈을 채
뜨지 못하고 있는데, 현암은 조용히 한 발을 앞으로 옮겼다. 묘운 대선사의 몰골은 이미
백골이 된데에다가 다시 강한 빛을 쏘이자 마치 재로 만들어진 것같이 금방 이라도 부스
러질 것 처럼 보였다.
[으... 으으으으... 캬아아악!]
묘운의 백골은 채 초치검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갑자기 사방에서 돌풍을 일으키면
서 진이 펼쳐져 있는 바깥쪽의 출구로 한 줄기의 검은 구름같이 되어서 휘몰아쳐 없어져
버렸다.
얼마나 되었을까? 시간적으로는 그다지 긴 것 같지 않았지만 마치 영원과도 같은 사이
가 지나자 사람들은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탈진한 승희가 갑자기 무슨
헝겊인형처럼 비틀대기 시작했다.
[후... 후후훗... 후후후... 양... 양심도 없어... 혼... 혼자만 이렇게... 남의 힘까
지 다 쓰고는... 후후후...]
승희는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면서 웃는 얼굴을 한 채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그
리고 현암의 고개가 푹 떨구어졌으나 몸은 한 발을 앞으로 내민 자세 그대로였다. 가장
먼저 눈을 뜬 상준이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땅에 떨어져 있는 초치검에 가서 멎
었다.
[초치검!!!]
상준은 아직 충격으로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근호를 재빨리 땅에 눕혀 놓고 서서히 걸
음을 옮겼다. 아직 뻣뻣이 서있는 현암이 조금은 두려운 듯, 조용히 발을 옮기다가 점차
가속하여 힐기보법으로 냅다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저것! 저것만 얻으면!!!]
막 초치검에 달려 들려던 상준의 앞에 갑자기 굉음과 함께 거대한 물체가 날아왔다. 상
준은 하마터면 그 물체에 얻어 맞을 뻔 했으나 재빨리 몸을 돌려 땅에 발을 끌며 옆으로
멈추어 서서 피할 수 있었다. 그 물건은 바로 차력사 병수의 철봉이었다. 저만치에서는
차력사 병수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손대지 마라!! 손대지 마라!! 그건 고다이고 천황의 검!! 나는 그것이 꼭 필요하다!]
주기선생 상준은 뒤를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나도 필요하다!]
상준은 여유 있게 다시 초치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초치검을 막 집으려 손을
뻗는데...
[이크!!! 이건!]
갑자기 상준의 코 앞으로 화끈하는 불기둥이 솟아 오르는 바람에 상준은 기겁을 하고
뒤로 조금 물러섰으나 검은 계속 상준의 목줄기 앞을 따라왔다. 어느새 홍녀가 구마열화
검을 빼들고 서 있었다.
[물러서십시요... 이건 임자가 따로 있는 물건입니다...]
상준은 힐끗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홍녀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이글이글 타오르는 구
마열화검을 들고 서 있었으나 그 기세는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의 현
암은... 현암의 쪽을 다소 켕기는 눈매로 살피던 상준의 눈이 다시 여유를 되찾아 갔다.
[흥... 저 친구... 꽤 재주가 괜찮은 것 같더니만 너무 무리했는지 그대로 죽어 버렸군
그래...]
홍녀는 상준의 말에 흠칫하면서 뒤를 돌아 보았다. 현암은 눈을 부릅뜬 채 얼굴이 딱딱
하게 굳은 채로 서 있었고 홍녀에게서 칼을 맞은 옆구리에서는 계속 피가 주륵주륵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 선 채로...
[아앗!]
홍녀는 방심한 사이에 무언가 화끈한 것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불덩이였다. 홍녀는
불덩이를 정면으로 맞으면서 뒤로 밀려나가 현암의 발치에 나가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허
를 찌른 주기선생 상준의 용(辰)의 깃발의 힘이었다.
[하하하... 방심하면 되나? 저 친구는 아직 죽지는 않았을 테니 염려 말고 푹 쉬어
라... 일본 계집! 그리고 현암인가? 이제 싸움이 끝났으니 내가 칼을 가져도 아까 한 약
속에 위배는 되지 않...]
[이놈!!! 너야말로 방심하면 되냐!!!]
이죽거리던 상준의 등 뒤로 차력사 병수가 무서운 힘으로 그대로 몸을 날려 부딪혀 갔
다. 자신의 꾀가 성공한 것에 겨워 있던 상준은 미처 달려오고 있던 병수를 잠시 생각하
지 못했던 것이다. 병수의 거구가 그대로 어깨로 상준의 등판을 밀고 들어오자 상준은 비
명을 지르면서 넘어졌고, 병수는 얼핏 보아 200킬로는 될 것 같은 거구가 달려들던 힘 그
대로 상준을 땅에 쳐 박으며 그 위를 내리 찍었다. 어디선가 우지직 하는 뼈 부러지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병수의 밑에 깔린 상준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부러지지 않은 왼팔을 허공에 휘둘러댔다.
그러자 병수가 깔아 뭉갠 상준의 등 뒤에서 요란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상준이 마지막으
로 등에 메고 있었던 깃발이었다.
[아아악!!]
이번에는 병수의 몸이 폭발 같은 기운으로 뒤로 날아갔다. 상준의 몸도 재차 가해진 압
력을 이기지 못해 땅 속으로 한 치쯤 파고 들어갔고, 잠시 후에는 병수의 거구가 땅을
쿵! 울리면서 떨어져 내렸다.
김자영 스크립터는 아까 승희가 썼던 방법대로 손기자에게 애매한 맛의 알약을 막 복용
시켜서 손기자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던 참이었고, 안기자는 자신이 뭘 하
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포켓 안에 있던 비밀 사진기의 셔터를 연신 누르고 있었다. 백제
암의 사천왕들 중 세 명은 이미 조금씩 독기운이 가셔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이고 있
던 참이었고, 한 쪽에서는 지연보살이 막 광목화상을 치료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현현파의
네 명은 모두 아직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도 섬광 같은 빛이 쓸고 지나간 후
돌연히 일어난 정세의 변화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고, 초치검은 여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다. 승희도 현암도 정신을 잃고 있었고, 홍녀와 상준, 병수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
고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친 듯이 초치검을 향해 달려 나가는 두 명이 있었다.
바로 승현 사미와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모르는 스기노방이었다.
김자영 스크립터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스기노방과 승현사미... 둘은 조금 다른 방
향으로부터 초치검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는 김자영 스크
립터나 누가 달려나가도 둘보다 빨리 갈 수는 없었다. 자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큰 소
리로 외쳐댔다.
[아기 중아!!! 빨리!!! 빨리!!! 칼... 그 칼을...!!!]
승현사미와 스기노방은 거의 비슷하게 초치검을 향하여 달려들고 있었고, 두 사람과 초
치검과의 거리는 채 삼십미터 정도도 남지 않았다...
23. 초치검의 정체...(2)
승현사미는 죽을 힘을 다하여 달려나갔다. 저만치에서 시커멓게 타고 찢어진 흉한 가사
자락을 휘말면서 비틀거리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달려드는 스기노방이 있었고... 그 사이
에는 초치검... 초치검이...
스기노방이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달려오는 자세 그대로 손가락을 튕겨 냈다. 염
주알을 내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뛰면서는 잘 조준이 안되는지 쏘아낸 염주알들은 달려
오는 승현사미의 주변에 마치 총알같이 흙먼지를 풍기면서 박혀 나갔다. 이제 거리는 얼
마 남지 않았고, 승현사미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승현사미의 작은 고사리 손에 낡은 초
치검의 검집이 잡혔다.
(잡았다!)
그러나 고개를 위로 든 승현사미의 눈에는 분노하여 악귀같이 일그러진 스기노방의 얼
굴이 보였다. 승현사미는 채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초치검을 뒤로 돌리고 기어서 조금
씩 뒤로 물러났다. 공포에 질려서 채 무슨 행동을 취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스기노방
의 악문 입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조오센징 꼬마... 어서 그걸 내 놓아라...]
승현사미는 그 와중에도 스기노방이 한국말을 하자 깜짝 놀랐다. 스기노방은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 했었는데... 그러면 저 자는 모두를 속이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보니 아
까 홍녀와 여러 한국인들이 이야기 할 때 그가 홍녀가 번역하여 스기노방에게 대화 내용
을 들려주기 전부터 스기노방은 흥분하고 소리를 지르고 했었다. 그런데 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실을 숨기고...
[칙쇼!! 어서 내 놔! 너 같은 어린 것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스기노방의 전신에서 검은 회오리 같은 것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하칼라의 힘을
다시 부르고 있는 것이리라. 승현사미는 총명하기는 했으나 그런 힘에 대항할 능력은 없
었다. 스기노방이 검은 기운이 무럭무럭 일어나는 손을 내밀었으나 승현사미는 입술을 깨
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작은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이... 바가야롯!!!]
스기노방이 큰 소리를 지르며 막 손을 들어올리는 중에 승현사미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
으켜서 오히려 스기노방의 쪽으로 달려 들었다. 승현사미가 뒤로 달아날 것으로 생각한
스기노방의 손은 그대로 허공을 짚었고, 승현사미는 몸을 날려서 스기노방의 가랑이 사이
로 들어가 있는 힘을 다 해 허리를 폈다.
[으어어!]
순간적으로 방심한 스기노방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네 활개를 펴며 땅에 넘어져 버렸
다. 승현사미는 와~~ 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대로 다람쥐 같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달
려왔고 막 정신을 차리고 있던 백제암의 다문, 증장의 두 승려들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달
려 나갔다. 지국화상도 달려 나가려 했으나 김자영 스크립터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걸음
을 멈추었다.
[잠깐! 잠깐만요!]
[왜 그러십니까?]
[아까... 아까 다문화상님이 지국화상님에게 물어보라고 하던 말이 있었어요!]
[예?]
[나랏님의 신물... 그게 뭐죠? 그건 단군의 신물이라 했어요. 그리고 나만이 그 신물을
얻을 수 있다고... 아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에요?]
지국화상의 눈도 놀라움과 당혹감이 넘쳐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막 숨을 돌리고 있던 손
기자와 안기자도 자영에게 편을 드는 듯, 지국화상을 타는 듯한 눈초리로 쳐다 보았다.
지국화상은 눈을 돌려 주변을 보았다. 저편에서는 두 명의 백제암 승려가 다시 스기노방
을 맞아 싸우고 있었고, 승현사미는 막 정신을 차린 광목화상을 불러 지연보살을 업게 하
여 현암과 홍녀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당장 급한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
다. 지국화상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렸다.
[다문... 다문이 그런 소리를... 아아. 그 친구는 우리가 다 죽을 것으로 생각했나 보
군... 입도 싸지...]
[무슨 내용인지 어서 이야기 해요!]
자영은 머리를 굴렸다.
[다문화상인가 승현 사미인가가 이야기 했어요! 나는 나랏자손이고... 그리고 나만이
단군의 신물을 얻을 수 있다고. 나만이 얻을 수 있다고요. 알겠어요? 나만이! 내게 말해
주지 않으면, 나도 협조하지 않을 거에요! 알겠어요?]
안기자도 입을 열었다.
[단군의 신물... 그건 초치검 정도보다도 훨씬 중요한 거에요. 우리들에게는요. 그러나
일본인들은 초치검이 더 중요하겠죠. 그런데 일본인들, 아니 저 스기노방이라는 자가 단
군의 신물을 욕심내는 까닭이 무엇이죠?]
[그... 그건... 저도 다는 모릅니다. 저희는 어느 높은 분의 청탁을 받고 온 거에요.
단군의 신물을 캐내어 찾아 달라는...]
손기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높은 분?]
자영이 다시 눈을 빛냈다.
[그런데 왜 초치검을 그렇게 노렸죠? 초치검을 갖기 위한 아까의 싸움 때에 당신들은
결코 물러서려 하지 않았어요. 단군의 신물을 찾으면 그만인데 왜 초치검까지 그렇게 가
지려 애쓴 거에요?]
지국화상이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단군의 봉인... 그것을 여는 열쇠 중의 하나가 바로 초치검입니다. 그래서 일본인들도
그걸 찾는 것이고, 이전의 왜구들도 그 초치검을 가지고 여기까지 온 것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초치검이 단군의 신물을 얻는 열쇠가 된 것이죠? 어째서...]
[그것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그들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정통성을 얻기 위
해...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국익에 이용하기 위해서...]
안기자의 머릿속이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단군의 신물을 얻으러! 그 열쇠
로 쓰기 위해 초치검을 가지고 여기까지 온 것이라니!!
안기자의 머리에는 비로소 많은 것이 정리되어 가는 듯 했다.
[알았다... 드디어... 드디어 알았어!!!]
손기자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안기자를 쳐다 보았다. 안기자는 무섭게 빠른 말투로 마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잔뜩 엉켜있던 실타래가 드디어 풀려 가는 듯 했다.
[왜구들... 그들은 보통 도둑떼로 여겨져 왔어. 그러나 일개 오합지졸인 도적의 무리들
이 왜 남의 나라의 수도에까지 공격해 들어간 것일까? 도둑이라면 그들의 목적은 약탈이
야! 대강 해안 일대만 약탈하고, 뭣하면 그 근방으로 더 진출하는 정도는 있을 수 있겠
지. 그러나 어떻게 바다를 건너온 도둑들이 그리 집요하게 타국의 중심부로 나아가려 했
을까? 바이킹들의 전례를 보아도, 그들이 굳이 굳건히 방어되고 있는 내륙 깊은 곳의 수
도를 공략한 일은 별로 없어. 왜 유독 왜구들만이 그랬을까? 그것도 중국은 그러지 않았
어. 해안만 약탈하는 정도였지. 어째서 우리 나라만 그렇게 집요하게 공격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그들 중 일부분은 단순한 도둑이 아니라 정치적인 증거를 남기지 않고 일종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대였던 데에 있었던 거야! 그렇다면 무엇을 찾는 전쟁이었을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정통성... 바로 그 정통성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신물을 찾는게 그들
의 목적이었던 거였어! 그리고 그 신물이란 것이 바로 단군이 남긴 유물...]
손기자와 자영은 둘 다 숨이 막히는 듯 했다. 안기자의 말은... 그렇다면... 지국화상
이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바로 천부인(天符印) 입니다...]
[철기 어르신. 말씀해 주십시오. 저들이 찾으러 온 것은 바로 단군의 신물이 아닙니
까?]
철기옹은 들고 있던 창을 땅에 거꾸로 꽂았다.
[...]
[그렇지요? 저들은 그것을 찾으러 온 것이지요? 초치검... 그건 무슨 필요가 있어서 가
지고 온 것일테구요.]
[초치검... 아마도 그건 단군의 봉인을 푸는 열쇠에 불과할 것이네!]
[열쇠라구요? 봉인을 풀려는 열쇠? 어째서 초치검이...]
[단군의 봉인은 지금 겹겹이 쳐져 있네! 그러니 아무도 그걸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지!]
[겹겹이 쳐져 있다구요?]
[원래 단군님이 설치하신 봉인! 그리고 고대에 신라의 화랑군이 설치한 봉인! 그리고
왜구들이 침노하면서 설치한 봉인! 적어도 세가지가 있을 것이네! 앞의 두 개는 내가 원
래 알고 있던 바이고, 그 이후 고려때에 왜구들이 침노하면서 막은 봉인이 있었지. 여기
에 펼쳐진 만다라의 진형이 누구에 의해 쳐진 것인지 알겠지?]
[그러면... 저 안에 묻혀 있다는 묘운 이라는 대선사가 원래의 진을...]
[그래! 그들은 이 단군의 신물을 얻으려고 침노했으나, 그때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밀려났지. 그때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수법으로 이곳을 봉해버린 게야! 자기들이
다음에라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지!]
[그렇다면 그 신물은 무엇이고...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은... 뭐, 뭐냥!]
막 박신부에게 무슨 말인지 하려고 하던 철기옹이 놀라서 소리를 쳤다. 저 뒤쪽의 숲
건너편,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부터 엄청난 빛이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강
한 빛은 박신부와 준후들이 있는 이곳에까지 섬광처럼 비쳐 들고 있었다.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현암형!!! 부동심결 이에요!!!]
박신부도 크게 놀랐다.
[부동심결... 현암군이 마지막 수단으로 쓰는 방법이 아니냐!]
준후가 발을 굴렀다.
[아이고! 저 안에 있다는 묘운인지 뭔지 하는 녀석과 싸움이 붙었나 봐요!!]
빛이 터져 나오자 뒤쪽에 조용히 도열해 있던 해골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멀리
서부터 온 빛이지만, 해골 병사들은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리고 아우성을 쳤으며 마사토
키가 인솔하던 해골의 기병대들도 뒤로 몇걸음을 물러섰다. 철기옹은 긴장된 얼굴로 삼천
부적을 이어 만들었다는 화살을 들어 활에 메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때, 갑자기 검
은 구름 같은 것이 휙 하면서 안쪽에서부터 튀어 나왔다. 그 진로의 바로 앞에 철기옹이
있었다.
[요사한 것!]
철기옹만이 아니라 박신부와 준후, 오의파의 두 사람들까지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
림자에 놀라 당황했다. 철기옹은 무의식적으로 부적으로 만든 화살을 활에 걸고 튕겨 냈
다.
쌔애애애---액!!
화살은 활에 튕겨지자 무서운 기세로 날아가 짓쳐 들어오던 검은 덩어리에 적중되었다.
순간 엄청난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검은 덩어리는 불덩어리로 짓쳐 타올라갔고 불덩이로
화한 검은 덩어리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철기옹에게로 덮쳐 갔다.
[위험해요!!!]
박신부는 기도력을 일으키면서 그대로 철기옹에게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약간 늦었다.
닥쳐오던 불덩이는 철기옹의 왼쪽팔에 걸리면서 그 손에 들려있던 활과 다시 충돌하여 마
치 폭탄과 같이 작렬해 버렸다. 준후와 오의파의 두 사람도 뒤로 나동그라졌고, 선두에
섰던 해골병사들이 폭발력에 밀려 우르르 뒤로 넘어졌다. 마사토키가 탄 해골 말도 후다
닥 뒤로 밀려 나갔다.
준후는 넘어졌지만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신부님!!!]
저편구석에 박신부와 철기옹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제 서서히 가루가
되어 가는 하나의 백골이 있었고... 백골의 목에는 우연히도 철기옹의 활이 얽혀 불에 타
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해골 장수 마사토키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묘운--------!!!!]
준후는 급히 박신부에게로 달려 들었다. 박신부는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이 없는듯 했다.
그러나... 철기옹의 왼팔은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어깨 바로 밑에서부터 잘려져 나가
없어져 있었다.
[으악!! 으아아... 도와줘요!!]
오의파의 두 사람이 준후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 나왔다. 그런데 상렬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겁에 질린 눈으로 해골들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마... 마사토키... 그... 그가...]
마사토키의 유골은 계속 소리를 질러대면서 해골 병사들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다. 해골
병사들도 갑자기 퀭한 눈구멍을 번득거리면서 녹슨 무기들을 고쳐 잡기 시작했다. 그 기
세가 흉흉하기는 조금전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상렬의 입에서 두려움 섞인 목소리가 흘
러 나왔다. 순간적으로 영사를 통해 그들의 심리를 읽어낸것이다.
[대... 대선사 묘... 묘운의 영이 소멸... 되어서 저... 저들은 이제... 승천도 하지
못하... 게... 그... 그 분노가...]
[아저씨 뭐해요? 도와줘요!]
준후는 오의파의 한 명의 도움을 받아 막 철기옹과 박신부를 부축해 업으려는 중이었
다. 박신부는 정신을 조금 차린 듯, 준후와 오의파 한 사람에게 기대고 있었고, 철기옹은
오의파 사람의 등에 업혀져 있었다.
[도망쳐! 어서! 어서!]
[예? 왜...]
[저들... 저들은 이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거야! 어서! 어서 여럿이 있는 곳으로
피해!!!]
상렬은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미친 듯 달려와서 박신부를 빼앗듯이 들쳐 업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준후는 채 영사를 해 볼 겨를도 없이 오의파의 나머지 사람과 함께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갑자기 등 뒤에서 함성소리가 들렸다.
[으앗!!!]
이제 해골 병사들은 물밀듯 밀려들고 있었다. 700년을 기다려 온 끝에 비로소 주술로
잠을 깨었는데, 묘운의 영이 소멸되어버린 지금 그들을 다시 안식의 길로 보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이제 그 복수를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진세도 규율도
더 이상 없었다. 미친듯한 함성을 지르면서 500여를 헤아리는 해골의 군대는 미친 듯 달
아나는 다섯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홍녀는 조금씩 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아까 주기선생 상준에게서 받은 타격
이 꽤 커서 아직 몸이 자유롭게 움직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대강 일어설 수는 있을 것 같
았다. 홍녀는 무심코 현암의 다리를 잡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손아귀에서 화끈
한 열기가 밀려드는 것을 느끼고는 잡았던 손을 놓고 몸을 후다닥 일으켰다.
현암은 아직 살아있었다. 그러나 뻣뻣하게 몸을 굳힌 채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
는 것이었다. 부동심결로 너무 무리한 힘을 쓴 나머지 그의 몸 안에서는 나머지의 기혈들
이 들끓고 내력이 통제를 잃고 마구 휘몰아치고 있었다. 자칫하면 다시 주화입마가 될지
도 몰랐다.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홍녀의 옆으로 승현사미와 광목화상이 지연보살을 업
고 다가왔다. 이제 지연보살은 너무 그녀의 능력을 많이 발휘하여 거의 탈진 지경에 있었
다. 보아하니 광목화상은 지연보살을 만류하는데, 지연보살이 자꾸 현암부터 치료해야 한
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어서... 급해요... 현암선생을 먼저... 빨리...]
[이제 거의 다 수습되었습니다. 왜 그리 서두르시는 겁니까?]
지연보살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아까 홍녀가 자신의 사조라 할 수 있는 묘운의 압박
을 받아 현암에게 상처를 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홍녀는 아직도 자신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하기도 싫었다. 다만...
[아녜요... 더 큰 일이... 더 큰 일... 계시... 계시가 있었어요...]
승현사미는 갑자기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고 홍녀를 빤히 쳐다 보았다. 홍녀는 일단 지
연보살을 부축하여 땅에 내렸고 광목화상은 스기노방과 동료들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다
시 달려나갔다. 지연보살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홍녀에게 말했다.
[단군님... 단군님의 계시... 이... 이곳은 성스러운 장소... 단군님의 뜻을 이 분께
맡기면... 어기지 않고 그대로 잘 할 거에요...]
[단군님의 뜻이라고요? 이 분에게?]
[어떻게 될지는 저도 잘 몰라요... 다만... 이 분에게 전해 주세요... 스스로의 의지대
로 하라고...]
지연보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서서 현암의 등에 양 손을 댔다.
순간 두 사람은 모두 몸을 움찔하면서 갑자기 땀을 비오듯 흘려댔다. 안절부절하고 있는
홍녀를 향하여 승현사미가 입을 열었다.
[아... 아줌마는... 아줌마가 어떻게...]
홍녀는 눈을 돌렸다. 승현사미는 더듬거리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아줌마도 나랏... 나랏자손... 어떻게... 아줌마는 일본인인데...]
홍녀의 뇌리에 무언가가 치고 지나간 듯 했다. 나랏자손? 자신이...
[뭐라고? 내가? 내가 나랏자손이라고?]
[틀림 없어요... 어떻게...]
홍녀는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들어왔었다. 자신의 성이 권(權)가 였다는... 그래서 예전
에 흡혈마가 되어버린 자신의 동생인 오유끼... 배다른 동생이었던 오유끼를 쫓아 여기에
왔을 때에도 그렇게 아늑한 기분이 들었던 것일까? 그러나 먼 조상때부터 자신의 일족은
일본에 살았었다는데... 어떻게? 어떻게 자신이...
갑자기 현암의 몸에서 엄청난 힘의 기류가 터져 나와서 지연보살과 현암의 몸의 주위에
소용돌이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지연보살은 무섭게 몸을 떨었고 코와 귀에서 피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홍녀와 승현사미는 발을 동동 구르고 그 광경을 볼 뿐이었다. 그
러다가 홍녀는 승현사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는 것을 알았다. 그건 바로... 초치검!!!
막 홍녀가 뭐라 말을 하려 하는데, 엄청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숲 속에서 오의파의
두 사람이 철기옹과 박신부를 부축하여 뛰어 들어오고 그 뒤에 준후가 달려 들어오고 있
었다. 오의파의 두 사람은 안기자가 있는 쪽으로 갔고 준후는 홍녀의 쪽으로 달려왔다.
[모두 조심해요! 왜구의 영들! 지박령의 군대가!!!]
절룩거리면서 누군가가 힘겹게 준후의 뒤로 다가와 준후의 어깨를 잡았다. 누군가 했더
니 바로 상처를 입었던 여검사 현정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도 청홍검이 들려있었다.
[너! 우리 의모(義母)님을 못 보았니? 왜 그 분은?]
그리고 보니 아까 도지 무당의 굿소리는 들렸었는데, 도지 무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준후가 망연히 뒤를 돌아보는데 갑자기 귓전에서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 아이야... 아이야... 나는 이미 저 놈들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이미 오의파의 두 사
람이 귀신이 들릴 때에 말이다... 그러나 내 혼백은 죽지 않아서 저들을 막으려고 계속
굿을 했으나 힘이 모자라는 구나...
준후의 귀에만 들려오는 소리였다. 준후는 일단 도지 무당이 죽었다는 사실에 너무 불
쌍하고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으나 일단 급한 일은 따로 있었다. 이렇게 죽어서까지 현신
하여 혼백이 떠나지 않고 뭔가를 알려주려 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중대한 알릴 일이 있다
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준후는 마음속으로 답했다.
-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죠?
- 현정이의 청홍검... 그건 전장에서 수 없는 적을 베인 무적의 상징이란다... 그것으
로 진을 치면 저들을 일단 막을 수 있단다... 그리고... 단군님의 힘을 깨워서... 나랏자
손...
- 예? 나랏자손요?
- 나랏자손 3명의 힘을 모아서... 아아... 이승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구나... 힘을
모아서...
- 잠시만요! 어떻게...??
- 나랏자손들... 그리고 초치검... 그리고 가장 강한 자의 의지를... 아아... 허무하
다... 허무하도다...
도지무당의 한 섞인 푸념소리가 마치 저승으로 빨려 들어가듯 멀어져 가는 것을 준후는
느꼈다. 도지무당이 이미 죽었다니... 그리고 아까 도지무당의 굿거리가 다만 소리로만
울려오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은 물밀듯 밀려드는 지박령들을
막아야 했다.
[누나! 그 칼! 청홍검을...!]
준후가 말하자 현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현정은 무술에는 능했지만 영력이 없어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없어요! 도지 님의 유지에요! 그 칼을 저 진문의 초입에 꽂아요!]
그러나 현정은 준후의 말에 답하기는 커녕 오히려 도지무당이 죽었다는 소리에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준후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서요! 에구구!]
막 진문을 통해 해골의 병사 몇몇이 뛰어 들었다. 준후는 냅다 뇌전을 일으켜서 두어
놈을 갈겼다. 그러나 놈들은 아까와는 달리 한이 더욱 사무쳐서 인지 잘 쓰러지지 않고
준후의 뇌전을 버텨내고 있었다.
[어서! 어서 칼을 꽂아욧!!! 다 죽을지도 모른단 말에요!!!]
누군가가 와락 현정에게 뛰어 들어 청홍검을 빼앗았다. 현정은 충격을 받아 아무 생각
이 없는 멍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칼을 빼앗자 무의식적으로 저항하려 했으나 칼은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그 장본인은 바로 홍녀였다.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홍녀누나! 뭘 하려는 거에욧!!]
홍녀는 청홍검을 들고 잠시 준후를 쳐다 보았다. 준후는 홍녀가 만에 하나 왜구들의 편
을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자 너무나도 당황했다. 홍녀가 청홍검을 들고는 말했다.
[이걸로 진문을 막으면 정말 저들이 못 들어오게 되는 걸까? 나도 아까 그 분의 이야기
를 들었단다.]
[그... 그래요... 어서...]
갑자기 홍녀의 귓전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백제암의 승려들과 싸우고 있던 스기노
방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대선사였던 묘운의 잔영과 같은 소리도 울려왔다. 아까 현암을
공격하게 만들었던 묘운의 독한 목소리... 일본의 영광을 위해... 과거의 역사를 묻어두
기 위해... 모두를 죽이라 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이유는 묻지 말라
고... 권위에 굴복하라고...
- 그 칼을 던져버려! 아니 꺾어버렷! 지금이 기회야!
홍녀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된 듯, 마구 헝클어지고 있었다. 홍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앞에... 금방 이라도 울 것 같은 준후의 얼굴이 보였다. 귀여운 아이... 과거에 자신
을 구해 주었던...
[염려 마라...]
홍녀는 있는 힘을 다해 진문쪽을 향해 청홍검을 던졌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외치고 있
었다.
[나는... 나는 사람이야!]
홍녀가 던진 청홍검은 눈부신 궤적을 그리면서 진문의 바로 앞에 꽂혔다. 홍녀는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일본인이건, 한국인이건... 그건 문제가 안돼! 나를 이제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더
이상은 괴롭히지 맛!!!]
홍녀가 양 손에 수인을 맺고 청홍검을 향해 힘을 가하자 힘을 받은 청홍검의 주위로 무
서운 열기가 퍼져 나가며 진문을 뚫고 들어온 몇몇의 해골들을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홍
녀의 주특기인 번뇌화(煩惱火)였다.
[캐캐묵은 역사의 망령들! 남조가 뭐고 과거의 영광은 무엇이란 말야! 다 사라져! 다
사라져 버렷! 더 이상 산 사람들을 해치지 마!!!]
준후는 야아~ 하는 기쁨의 함성을 지르면서 부적들을 모두 꺼내어 허공에 날리고는 그
자리에 눈을 감고 앉았다. 부적들은 마치 새들처럼 떼를 지어 허공을 나르며 하나씩 불이
붙은 채 뱅글뱅글 맴을 돌면서 청홍검의 주위로 맺혀져 들어갔다. 폭풍우 같은 기운들이
수없이 많은 피를 뿌렸던 무적의 신검인 청홍검의 몸을 타고 다시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
면서 달려들던 해골병사들을 그대로 가루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마사토키의 해골말이 크
게 울부짖으며 진저리를 쳤고 마사토키의 유골은 쳐들어오던 해골 병사들을 정지시키고
뒤로 약간 물러서기 시작했다...
[바... 바가야롯!!!]
한 쪽에서 백제암의 승려들과 대적하던 스기노방은 그 광경을 보고 노한 함성을 터뜨렸
으나 홍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휘청하면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준후는 행여 진문이 다시
돌파 당할까봐 계속 진문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현정은 망연히 홍녀를 쳐다보다
가 다시 현암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현암의 옆구리에서 흐르던 피는 멎어 있는 듯
했고, 얼굴에도 조금씩 화색이 돌고 있었다. 지연보살은 눈이며 귀에서 피를 계속 흘리면
서도 현암에게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현암의 손이 조금씩 떨리며 움직이기 시작했
다...
박신부는 이제 정신을 완전히 차리고 안기자와 빠른 목소리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박
신부가 알아낸 것... 그것은 철기옹에게서 들었던 단군의 신물에 대한 것이었다. 자영이
입을 열었다.
[구스노키 마사토키... 그는 남조의 대들보인 마사시게의 아들이었습니다. 마사시게의
아들 마사쓰라(正行)의 동생이었죠... 역사에는 북조의 물밀듯 밀려오는 군대를 이기지
못하고 형인 마사쓰라와 시죠나와테에서 결전을 벌이다가 둘이 같이 자결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박신부가 계속 말을 이었다.
[마사토키는 임무가 있었던 거였어! 고다이고 천황의 마지막 유지... 그건 고다이고 천
황 자신이 명령한 것이고, 마사토키의 형인 마사쓰라가 다시 그에게 맡긴 일이었어. 그
일을 위해 마사토키는 죽음을 가장하여 이 땅으로 온거야! 왜구를 빙자한 정규군 오백을
인솔하여... 그의 목적은 바로 하나!]
지국화상이 조용히 말했다.
[천부인...]
이번에는 안기자가 흥분하여 입을 열었다.
[그래요! 일본의 남조는 힘은 미약했지만 일본 천황 삼종의 신기를 가졌다는, 정통성의
면에서 북조를 이겨 내려고 많은 애를 썼죠. 물론 당시 북조의 일인자인 아시카가 다카우
지는 그런 삼종의 신기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어요! 그런 다카우지를 승복시키기 위
해서, 고다이고 천황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신물을 필요로 했던 겁니다! 그게 바로 단군
의 천부인이었어요!]
의식을 회복한 손기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일본인들과 단군의 천부인이 무슨 관계란 말이야?]
[아냐! 일본인의 시조는 바로 이 땅에 있었던 한민족이었고, 그들의 시조들은 모두가
한민족의 후예였어! 아마도 그 시절까지만 해도, 그들은 그들의 정통이 한반도에 있었다
는 사실을 암암리에 수긍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그 신물을 내세우면 스스로가 방
계가 아닌, 정통성의 대를 잇는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방계?]
[맞아! 일본을 처음 개척한 것은 삼국의 유민들이었다고 하는 설이 있어. 원래 일본의
토착민은 아이누 족이야. 그러나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아이누 족들과는 전혀
다른 피의 사람들이야. 언제? 어떻게 다른 민족이 일본을 점령했겠나? 아메리카에서 태평
양을 건너서? 해군을 주로 육성한 적이 없는 중국 대륙에서? 아냐! 바로 이 땅의 후예들
이야! 그들은 이 반도 땅에 살던 사람들의 후예 였어. 그래... 식민지 백성! 삼국의 식
민지의 후예들이었단 말야!]
[그... 그러나...]
[식민지 사관... 그건 우리가 그들에게 세뇌 당한 것이지만.. 그들 자체 뇌리에 박혀있
는 바이기도 해! 맞아! 지금의 증거로는 부인 할 수 없어! 그들은 우리의 방계였고, 백제
가 망한 뒤 정통성을 찾기 위해 스스로 그 징표인 신물을 찾으려 그리도 많이 침략해 온
거야! 남조 부흥을 꿈꾸던, 그러나 쇠망해가던 고다이고 천황이 마지막 기대를 건 것도
바로 이런 면이었어! 고대로부터의 정통을 잇는 징표를 보인다면, 행여 모두가 복속하지
않을까 하는...!!!]
박신부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사토키는 반드시 수행 해야할 과업이 있다고 했네... 물론 아무도 장담할 수도 없지
만... 지금 안기자의 추측이 맞을지도...]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건 매우 중요한 사건이야. 그러나... 그러나 증거가 없잖
아? 나는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귀신이니 영이니 주술이니 하는 것은 전혀 믿지 않았
어. 이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만... 그러나 그런 영들의 이야기를 증거로 내세울 수는
없지 않나?]
여전히 신중한 손기자가 말했다. 아직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안기자는 눈을 빛내며 소리를 쳤다.
[초치검! 초치검이 있잖아! 거기에 뭔가 비밀이 있을 거야!]
일동은 모두 눈을 돌려 초치검의 행방을 다시 확인했다. 초치검은 이제 먼 발치에 있
는, 현암의 곁으로 가고 있는 승현사미의 손에 들려 있었다.
24. 홍녀가 남긴 말...(1)
현암은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아까 부상을 입은 몸으로 부동심결을 시
전 했던 까닭이었는지 그만 정신이 멍멍해져 버렸던 것 같았다. 꿈... 그리고 그 속에서
오락가락하던 세계... 찰나에 불과 했을지도 모르고 몇 시간이 경과했을지도 몰랐다. 그
러나 그 속에서 비치던 눈부신 빛... 빛의 나라... 그리고 거기에 있던 그 분...
현암은 눈을 떴다. 갑자기 눈 앞에 닥치듯 밀려오는 주위의 풍경에 오히려 조금 놀라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누구지? 그리고 왜 여기에 있지? 여기는...)
고개를 돌린 현암의 눈 끝에 땅에 털썩 쓰러지는 지연보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땅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는 주기 선생 상준... 그리고 조금 먼 곳의 차력사 병수와 여검
사 현정, 홍녀와 땅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준후...
(맞다. 그랬었지... 지금은... 음? 그런데 지연보살님은 왜?)
현암은 채 지연보살이 마지막 기운을 발휘하여 자신을 치료해 준 사실을 모르는 채 땅
에 쓰러진 지연보살을 부축해 일으켰다. 지연보살은 완전히 탈진해 버린 듯, 숨을 몰아쉬
면서 드문드문 입을 열었다.
[혀... 현암선생... 정... 정신을 차렸으니 다... 다행...]
[왜 그러십니까? 왜 이런 모습으로...]
[아... 모... 모든게 잘 될거에요... 내 명이 길어 할 말을 다하고 가는군요...]
[가다뇨? 그런 말 마세요! 무슨 말씀을...]
[아녜요... 아까도 홍녀님에게 말해 두었지만... 스스로의 의지를... 스스로의 믿음...
그것이... 바로... 단군님의 뜻...]
지연보살의 눈이 서서히 감겨지려 했다. 현암의 몸에 돌던 기운을 간신히 바로잡기에
지연보살의 능력이 모자랐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사람들을 치료했기 때문에 탈진이
정도를 지나친 것일까? 아무튼 지연보살은 서서히 숨을 거두려 하고 있는 듯 했다. 죽음
의 기운이 그녀의 순박한 얼굴을 덮어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세요!!! 정신을!]
[아... 모든 사람들... 고통... 고통이 없게... 아직 고쳐주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요... 그들도... 잊지 마시고...]
스스로의 죽음에 즈음해서도 남의 작은 고통을 말하다니... 현암은 지연보살에게 거의
소리를 질러댔다.
[눈을 떠요! 눈을! 어서! 어서--엇!]
[아... 아무도 죽지 않게... 아무도 고통 당하지 않게...]
지연보살의 눈이 굳게 닫히면서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현암은 알 수 없는 말들에
충격을 받고 다만 멍하니 입을 벌리고 초점 없는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아니 형...]
현암은 다정한 듯 귓전을 울리는 소리에 망연히 헤매던 망상의 세계로부터 벗어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승현 사미가 있었고, 그 뒤에 탈진하여 비틀거리는 홍녀가 서 있었다.
준후는 진문에 힘을 강화시켜 해골병사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느라 온 힘을 다하고 있었
고, 현정은 쓰러진 주기선생 상준과 병수를 끌고 편히 눕히고 있었다. 자기를 해친 자일
지라도 보살펴주는 현정의 (보기와는 다른) 세심한 마음씨가 느껴졌다. 이제 장내는 대강
수습이 되어서 죽은 지연보살과 실종된 도지 무당을 제외하고는 생명을 곧 잃을 것 같은
사람은 없었고, 현현파의 윤섭은 중독 된 채였으나 도운의 몸에서 나온 약으로 어떻게 어
떻게 중독에서는 벗어난 듯 했다. 현현파의 네 명은 기자들에 의해 모두 가지런히 먼 발
치에 눕혀져 있었고, 도운도 곁에 쓰러져 있었다.
[현암형... 이걸 받으세요...]
현암은 다시 정신을 차려 고개를 돌렸다. 눈 앞에 캐캐묵고 낡은 길쭉한 물건이 작은
고사리 손에 들려 있었다. 바로 <천총운검>의 네자가 검집에 박혀있는... 초치검이었다.
현암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승현사미의 환히 웃는 얼굴과, 그 뒤에 이유없이 긴장
한 홍녀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이걸 내게?]
[예... 형이 제일 결단을 잘 내리실 거 같아요... 그냥 느낌으로...]
승현사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녀가 그에 대해 설명을 했다.
[현암상은, 아니 현암 님은 아까 검을 얻기로 내정 되었던 분이에요. 약속을 지키는 겁
니다... 다만...]
현암은 승현사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고, 아울러 홍녀의 마음도 고맙게 여겨졌다.
스기노방이었다면 그랬을까? 당장에 힘없는 승현사미에게서 초치검을 빼앗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저는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제게 잠시 검을 견식 하게 해 주시겠습니까?]
이상한 말이었다. 현암은 무심코 승현사미에게서 검을 받아 홍녀에게 내밀었다. 홍녀는
검을 받자 뒤로 돌아서 검집에서 검을 빼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나직한 탄성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오!]
현암은 영문을 알 수 없어 했고 승현사미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마구
저 편에서부터 달려오는, 마치 그림자같이 시커먼 그림자가 있었다. 스기노방이었다.
[칙쇼!!!!]
미처 뭐라 할 사이도 없었다. 스기노방은 어느새 백제암의 네 승려들을 뿌리치고 미친
듯 달려 나온 것이었다. 스기노방의 손에서 검은 기류가 튀었다.
[아아악!!!]
스기노방의 손에서 떨쳐 나온 기류는 그대로 홍녀의 옆구리에 적중했고 홍녀는 비명을
울리면서 초치검을 떨어뜨리면서 쓰러졌다. 스기노방은 날듯이 덤벼들면서 초치검을 나꾸
어 채려 했다.
[어딜!!!]
현암은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왼손으로 초치검을 나꾸어 채며 오른손으로 월향을 꺼내
어 던졌다. 모든 것이 순간에 일어났다. 쏘아져 나간 월향검은 스기노방의 오른편 반신을
꿰뚫으며 지나갔고, 스기노방은 그 와중에도 초치검의 검집을 잡았다. 그러나 현암의 왼
손은 초치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으아아악!!!]
스기노방이 비명을 지르면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초치검의 검집만이
손에 들려 있었고, 현암의 손에는 초치검이 뽑혀진 채 들려 있었다.
현암은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다시 망연해 져서 초치검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이것이... 그토록 모두가 찾던 칼이었던가...?]
녹이 잔뜩 슨 칼... 이것이 무슨 신물이고, 신검이란 말인가! 순간적으로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영력도, 초자연적인 능력도 느껴지지 않는 칼... 이것이 과연 무
엇이기에 일본에서부터 사람들을 파견하고, 여기서도 많은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무엇
때문이었단 말인가!!!
스기노방은 몸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뭔가를 떨어뜨렸다. 바로 붉은 색의 조그마한 깃
발... 막 현정의 간호를 받고 몸을 일으키던 상준과 병수가 둘 다 기급성을 냈다.
[어!!!]
[저... 저자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병수와 상준은 고함을 쳤다.
[고다이고 천황의 검을 찾지 못하면 내 중독을 고쳐주지 않겠다던 놈이 바로 너였구
나!!]
[초치검에 5억원의 상금을 걸었던 것이...!!]
말을 내뱉고 상준과 병수는 서로를 쳐다 보았다. 그렇다면 그 둘은 서로 같은 자의 농
간에 의해 서로 초치검을 탈취하려고...
다시 월향검에 적중되어 땅에 쓰러진 스기노방은 이제 다시 힘을 쓰지 못할 것 같았다.
상준이 병수에게 말했다.
[자네... 자네도 그 붉은 깃발을 보고 놀랐었어. 자네 아까 초치검을 얻지 못하면 목숨
이 위험하다고 했었지? 그러면 저자가 무슨 수작을 부렸던 거였나?]
병수가 씩씩 거리며 대꾸했다.
[그래... 나는 며칠 전에 나도 모르는 사이 독에 중독 되었어. 분명 중독은 되었는데,
병원에서도 무슨 독인지조차 모르는 거야... 그리고 누군가가 붉은 문양을 그린 편지를
보내어 고다이고 천황의 검을 해독약과 바꾸자고 하더군... 그게 저 자 일 줄은 정말...]
[나에게는 5억원의 현상을 걸었지...]
상준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그다지 좋은 사람은 못돼. 어떤 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하
고야 말지. 그러나... 나에게 청탁을 한 자가 왜놈이었을 줄은...]
상준이 말을 멈추고 스기노방에게로 다가갔다. 스기노방의 눈빛은 떨리고 있었다.
[너, 한국어를 잘 할 텐데? 왜 감추고 있었지? 내게 목소리를 들려주면 발각날까 보아
서 였나?]
[그것만이 아닐세!]
뒤에서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현사미의 부축을 받고 걸어오는 철기옹이었다. 철
기옹은 팔이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은 터라 금방 이라도 까무라 칠 듯이 보였으나, 목소리
만은 그 고집답게 아직도 칼칼했다.
[이 놈... 나는 이 놈을 잘알지. 이자는 과거 일제시대에 이 땅의 맥을 끊으려 그렇게
동분서주 했던 바로 장본인이여!]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제시대에 이 땅의 맥을 끊는다고 산천의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 기를 쇠잔시키려 했던 일이 자주 있었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자가
그 장본인 중의 하나였다니...
[이 놈도 주술사였지... 이 놈은 옛날에 자기 재주를 자랑하다가 나의 박수 형님에게서
한 번 호되게 당한 일이 있었어! 그리고는 우리 백성들에 대해 겁을 먹고 그런 짓들을 자
행한 거야! 내 옛일이어서 웬만하면 발설하지 않으려 했지만...]
갑자기 스기노방의 입에서 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말은 한국말이어서 모두가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한 거다. 너희는 너희 나라를 아끼듯이, 나도 우리
일본국을 위하는 거다!]
병수가 코웃음을 쳤다.
[흥! 나라를 위한다고? 그래! 너희 같은 족속은 그렇게 간악한 방법이 아니면 나라를
위하거나 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냐?]
[나에게 뭐라 욕을 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광목화상이 소리쳤다.
[약하니까 간사한 수단을 부리는 것이지! 그리고 우리를 두려워 하니까 어떻게든 분열
시키고 약점을 들추어 내려는 것이지... 그러나 그래도 그건 옳은 짓은 아니다!]
스기노방은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홍녀와 현암이 있는 곳을 돌아보고 있었다.
현암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칼이 무엇이기에? 현암이 막연히 초치검
을 다시 들여다 보려고 하는데... 홍녀가 현암을 불렀다.
[현암상... 그 칼을 보면 안됩니다... 제발...]
[무슨 소리요?]
[어서... 다른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나랏자손의 힘을 모으세요...]
현암의 눈이 크게 벌어지면서 초치검을 놓았다. 막 그 때에 엄청난 굉음이 울리면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던 준후가 뒤로 와당탕 넘어졌다. 해골의 병사들이 진을 다시 부수
고 있는 듯 했다. 놀란 박신부와 기자 일행이 냅다 달려오기 시작했고, 상준과 병수는 쓰
러진 스기노방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쇠구슬이 구르는 것 같기도 하고, 철판이 떠는 것도
같은 소리였다. 준후가 쓰러진 쪽으로 달려가던 박신부와 기자들, 그리고 오의파의 사람
들은 귀를 막았다. 검사 현정이 소리를 질렀다.
[청홍검! 청홍검이 채 버티지 못하고 있어! 이건 검이 지르는 소리야!]
진문의 초입에 꽂혀 있던 청홍검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해골의 병
사들이 무슨 수를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계속 강력한 힘으로 진을 밀어 붙이고
있었다. 박신부가 달려나가면서 소리를 쳤다.
[사악한 죽은 자들!!]
박신부가 달려들면서 오오라의 기도력을 검에 집중하자 진 바깥 쪽에서 엄청난 고통의
비명들이 들려왔다. 원래 방어나 사악한 죽은 자에 대한 영력의 발휘는 박신부가 퇴마사
들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다시 박신부가 눈을 감고 청홍검 앞에 앉아 기도를 하며 힘을
발하자 오오라가 둥글게 퍼져 나가면서 주변을 환하게 만들었다. 바깥쪽의 해골병사들이
아우성을 치는 듯 했지만, 잠시 동안은 박신부의 힘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다시 일으킨 준후는 그곳을 박신부에게 맡기고 급하게 홍녀의 곁으로 뛰어 나갔다.
[혀... 현암상...]
현암은 눈을 부릅뜨고 홍녀를 내려다 보았다.
[현암상... 제발... 제발... 제 부탁을 들어줘요. 이 초치검을 보지 말아요... 제발...
그 보다는 더 중요한 일이...]
[홍... 홍녀님... 무엇이 그리도 중요한가요?]
막 뛰어들어온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홍녀 누나? 괜찮아요?]
[나... 괜찮아... 그러나... 저... 저건...]
홍녀가 박신부가 버티고 있는 진문을 가리켰다. 진문은 이제 다시 잘 버텨 내는 듯 했
으나, 박신부의 몸은 미미하게 떨고 있는 것이, 퍽 힘든 것 같았다. 홍녀가 다시 입을 열
었다.
[수백 명의 원혼들... 저들의 수가 너무 많아요... 도저히 우리의 힘만으로는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준후가 외쳤다.
[맞아! 도지 님의 말... 내가 들었어요. 나랏자손 3명의 힘을 모아야 한다고...]
도지 무당이 죽어서까지 준후에게 전해 준 말이라면 믿어 볼만 할 것 같았다. 아니, 그
방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저 수많은 지박령들을 상대로 싸울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 씩의
싸움이라면 여기의 어떤 사람도 지박령 하나 둘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저들
은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 붙일 수 있었고, 그것도 군대 조직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
었다. 개개인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앞에서는 밀릴 것이 뻔했다. 현암은 입술을 깨물
었다. 지금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의지대로하라는 것이
지금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하여간 무언가 해야만 했다. 기자들 일행이 뛰어왔
다. 짧은 시간 사이에 믿지 못할 일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서 인지 인제 그들은 무슨 일을
보아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 3명이 누구누구지?]
[저 자영누나 하고... 승현사미, 그리고 철기옹이 있는데... 여기 홍녀님도 나랏자손이
지만...]
[그러면 어서 사미하고 어르신을 불러와라! 철기 어르신은 중상을 입으셨으니 괜찮은가
살피고...]
[제가 다녀오죠. 어차피 도움이 안되니까...]
손기자가 철기 옹을 부르러 뛰어 갔다. 자영이 말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어요...]
안기자는 현암의 손에 들린 초치검을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홍녀가 휘청이며 몸을 일으켰다. 스기노방에게서 받은 타격이 꽤 큰 것 같았는데... 그
러나 지금 시간이 없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현암은 준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단군의 유물이 어디에 있지? 그건 어떻게...?]
[제가 뭔가 느껴지는게 있어요...]
준후가 조용히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바로 묘운의 백골이 땅을 뚫고 나온 구멍이
었다.
[묘운인가 하는 자가 기어 나오면서, 아마도 그가 쳐 놓았던 봉인이 깨진 것 같아요.
이제 뭔가가 느껴져요...]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에 들린 초치검을 무심코 치켜 올리려는데, 안기자
가 말없이 현암의 어깨를 탁 치며 초치검을 가리켰다.
[음? 이건?]
갑자기 현암의 눈에 초치검의 칼에 새겨진 문양이 들어왔다. 뭔가 글씨 같은데... 한문
이면서도 이상한 도안 같은 무늬들과 한글 비슷한 것도 섞여 있었다. 현암은 그 무늬를
알아볼 수 없었다.
준후가 현암을 돌아보고 뭔가 말을 하려다가 초치검의 검신에 새겨진 문자를 보았다.
[어? 저건 가림토!! 그게 왜 여기 새겨져 있지?]
[준후야! 너 그 글자를 읽을 줄 아니?]
[예... 밀교에서 배웠어요. 단군 때부터의 글자라고...]
[읽어 봐!]
홍녀가 갑자기 소리를 쳤다. 그리고 눈물을 터뜨리고 있었다.
[아... 안돼요... 안...]
[왜 그러는 겁니까? 홍녀님?]
[현암형...]
준후가 어쩔 줄 몰라하면서 현암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현암도 망설이고 있었다. 홍녀
가 왜 그 문구를 보지 말라고 하는 걸까... 홍녀가 주르륵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떨구
었다. 그녀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 어차피 알게 될 것이라면... 보세요... 그... 그러나... 그 글을 본 다음 내...
내말을...]
준후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가림토와 고한문 비슷한 글자들을 읽었다. 그 동안 현
암과 기자 일행은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지? 내용은 알겠는데... 의미를 모르겠어요...]
[준후야, 무슨 내용이지?]
[마립간이 닭우... 닭우가 맞을 거에요. 닭우라는 장수에게 귀한 칼을 신물로 전달하니
오랑캐들을 평정하는데 도움이 되라는...]
[닭우?]
아무 내용도 아닐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현암의 머리에서 무언가가 벼락처럼
와서 부딪히는 듯 했다.
[마립간? 틀림 없이 마립간이냐?]
[예...]
[마립간! 그건 신라의 왕을 호칭하는 말이었어! 그러면... 그러면...!]
안기자가 갑자기 소리를 쳤다.
[마립... 간 이라구? 그 문구대로라면 애당초 초치검을 내려준 것은 바로 신라의 왕이
었단 말인가? 일본서기에서는 초치검의 기원을... 이세신궁에서 왜희라는 여자가 일본무
존인 다케루에게 전해...]
자영도 무릎을 쳤다.
[다... 다케루! 닭우! 그렇다면 일본 무존이라는 다케루가 바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일본 전역을 평정했다는 일본 고대의 영웅 다케루가
신라 마립간의 휘하의 일개 장수에 불과 했다는 말인가? 토벌군의 선봉장에 불과한... 그
렇다면...
25. 홍녀가 남긴 말...(2)
박신부는 전신에서 비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놈들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점
점 진문을 막기가 어려워 지고 있었다. 아마도 마사토키의 집념에 의한 것이리라. 박신부
는 계속 기도문을 외우며 힘을 발출하고 있었지만, 이대로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박신부는 문득 아까 마사토키와의 영적 대화를 기억해 냈다. 다시 그의 영과 이야기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 잠시... 잠시 이야기를 하자!
마사토키의 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영사를 통해 희미하게 분노의 느낌만이 전달 되어
왔다.
- 마사토키! 그대의 집념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미 남조는 망했다. 이제와서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 닥쳐라! 남조의 정신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 초치검... 그리고 그 신물... 나는 우리의 민족들이 다시 정신적인 중심을 갖기를 원
한다... 그것이 남조의 정신이다.
- 정신적인 중심이라고?
- 우리의 중심은 천황이다! 간악한 자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북조 놈들은 명
목상의 천황을 내세우면서도 천황을 일개 수단으로만 여겨왔다. 나는 안다. 내가 여기서
수백년을 묻혀 지냈어도 알고 있다. 위대한 고다이고 천황이 승하 하신 후, 천황들이 어
떤 생활을 했는지 아는가? 노리개! 권력의 노리개일 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싫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신권(神權)은 다시 세워져야 한다! 그것을 믿기에 나와 나의 부하들은 모
든 것을 그에 바쳤던 거다!
- 신권... 신권이라...
박신부는 눈을 감았다.
- 마사토키! 천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신의 자손이며, 일본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 그래... 천황은 신의 자손이다. 그러나, 그러나 당신이나 나,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신의 자손이다... 그 후예들이다.
- 헛소리!!!!
갑자기 진문으로 밀어 닥치는 기운이 엄청나게 강해지면서 생생한 분노의 기운이 닥쳐
왔다. 박신부의 몸은 급작스러운 기운에 조금 뒤로 밀려 났고, 뒤에서 오의파의 두 사람
이 박신부를 받쳤다. 박신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 마음 속으로 외쳤다.
- 믿는바... 스스로 믿는 바가 허물어지면 누구나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마사토키...
진실은 받아 들여야 한다. 천황이 왜 일본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겠는가? 그것을 당신들은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신의 후손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할까? 당신이 그
렇게 알도록 길들여져 왔고, 그것 밖에는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내 말 듣고 있는가? 마
사토키?
- 닥쳐라! 그러는 너는... 너는 너의 신을 섬기지 않는가? 그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겠
는가?
- 천황은 인간이다. 어느 인간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그것은 천황 스스로도 이미
인정한 바 있다. 왜 그러한 천황을 계속 신격화 하려 드는 것인가? 그것은 왜곡이 아닌
가? 고대의 신물을 강탈하여 얻었다고 정말로 정통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는가? 신물을
강탈하고, 그것을 날조함으로 얻는 정통성이라면 그 언제까지 왜곡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그대도 초치검에 씌어져 있는 문구는 알고 있었겠지?
- 그만해라! 그만!!
- 그 때문에 그대들은 진정한 초치검을 분실했다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모조품을 만
들어서 이리저리 혼란하게 만들었지. 천황 삼종의 신기 중에서도 유독 초치검만이 분실과
재발견의 일들을 여러번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른 두 가지의 신물들보다 훨씬 큰 물
건이었는데도 찾지 못했다는 것... 그렇다. 정통성과 실리 두 가지를 다 추구하기 위해서
는 그 방법 뿐이었을 테니까... 대대로 물려 내려온 천황의 보물이면서, 자칫 그 진정한
정체가 공개되면 일본 전체를 한국의 발 아래 엎드리게 할 수도 있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
르니까... 나는 아직 초치검에 쓰여진 문구를 보지는 못했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초치
검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이지? 너는 아는가?
- 나... 나도 모른다! 몰라! 그 입을 닥쳐랏!!!
갑자기 진문 밖에서부터 회오리 바람 같은 것이 몰아치면서 진문을 막고 있는 박신부를
다시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게 만들었다. 문득 박신부가 발하는 오오라 너머로 진 밖에서
아우성치던 해골 병사들이 마사토키를 향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오의파의 상렬이 기급
성을 냈다.
[저...! 저들! 한데 뭉치고 있다! 오백의 영을 하나로...!]
오의파의 두 사람과 현정, 박신부마저도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마사토키가 내지
르는 알 수 없는 일어 구령이 하늘 어딘가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듯,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려 왔다. 그러면서 해골의 병사들은 하나하나 부스러지면서 땅에 쓰러지고 그 영은 마
사토키의 영에 흡수되어 가는 듯 했다. 그러면서 마사토키의 영은 엄청나게 그 힘이 강해
져 가는 것이었다.
상렬은 마사토키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상렬이 신음하듯이 소리쳤다.
[저 자... 마사토키가 부하의 혼에게 명령해서 하나로 뭉치게...!]
박신부는 이를 갈았다.
마사토키의 해골의 몸 주위에는 이제 형언하기조차 힘든 기운들이 안개처럼 막장을 쳐
가고 있었고, 그의 해골 말 조차도 부스러져 없어져 가고 있었다. 마사토키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요란한 소리가 울리면서 땅이 흔들렸다. 오백의 영을 흡수한 마사토키의
엄청난 기운이 다가오자 박신부는 뒤로 주르륵 밀려 났으나 이를 악물고 오오라를 북돋아
마사토키의 무시무시하게 커져버린 힘을 막아내고 있었다.
(죽어도! 죽어도 네 뜻대로 하게 놓아 두지는 않는다!)
쓰러졌던 승희가 다시 의식을 찾기 시작했다. 몸도 조금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
고... 승희는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 보았다. 난장판 이었다. 곳곳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
었고, 그들을 간호하는 사람들이 쓰러진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진문앞에는 박신부가
기도력을 계속 발하여 진문을 막고 있었고, 오의파의 두 사람과 현정이 박신부의 뒤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저 밖에 있는 것들은... 아... 왜구들의 지박령들... 큰일이다! 저들이 뭉쳐서...)
승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아직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
듯 했고, 투시도 잘 되지 않았다.
(준후는? 그리고 현암씨는? 스기노방과 홍녀는?)
철기옹이 승현 사미와 손기자와 함께 현암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일단의 사
람들이 모여서... 문득 먼발치에서 스기노방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피를 흘리고 있는 모
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기선생 상준이 막 비틀거리면서 스기노방이 잡아채었던 초치검의
검집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었다. 갑자기 스기노방의 생각이 승희의 머리 속에 떠 올랐다.
- 초치검의 비밀은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된다! 모두... 모두 저 세상으로...
[미... 미쳤어! 저 자...! 모두 같이 죽으려고...!!]
승희가 놀라면서 후다닥 몸을 일으켜 그 쪽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이미 조금 늦었다. 승
희가 몸을 옮기려고 하는 사이 이미 스기노방의 몸에서 갑자기 먹장과 같은 기운이 한꺼
번에 밀려 나와 마치 폭탄 처럼 작렬해 버렸다. 스기노방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천왕
들과 병수, 상준등은 놀라서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려고 했으나 폭탄처럼 급작하게 발출
하는 기운에 타격을 받고 뒤로 나가 떨어져 버렸다. 상준이 빼앗으려던 초치검의 검집은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산산이 바스러져 없어져 버렸다.
[으아! 저... 저자가!]
스기노방의 몸은 마치 고무풍선이 짜그라들듯이 급격하게 쪼글쪼글하게 되어갔다. 몰려
나오고 있는 검은 기운은 바로 스기노방의 혼(魂)과 백(魄)인 듯 했다. 승희는 스기노방
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최후의 영력까지 모아 모두를 영원히 잠
재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현암과 준후등의 일행은 아직 먼 발치에 있었고, 박신부와
다른 사람들은 진문의 입구를 수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스기노방의 기습적인 공격은 자
신의 생명을 바친 것이니 만큼 엄청났다. 영력을 별로 갖추지 못한 백제암의 사천왕들과
병수는 이미 부상당했던 터라 기력이 쇠잔해져서 큰 타격을 입은 듯 했고, 주기선생 상준
은 금방 다시 몸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아까 병수와의 다툼에서 받은 타격으로 힘을 쓰기
어려울 것 같았다. 허공중에서 스기노방의 목소리가 울렸다.
- 나 혼자 가지는 않겠다! 일본국의 영예를 위하여 너희 모두를 데리고 가겠다!
스기노방의 영이 얽힌 기운은 마치 돌개바람처럼 소용돌이 치면서 퍼져 나가 그대로 진
문으로 향했다. 박신부의 뒤에 있던 상렬이 기운을 눈치챘다.
[물러서랏!]
상렬은 주문을 읊으며 스기노방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튀어나가고 있던 스기노방의
회오리는 그대로 상렬이 막 불러 일으킨 기운과 충돌해 버렸다.
[으아앗!]
상렬의 몸은 그대로 뒤로 튕겨져 날았고 오의파의 다른 사람이 상렬의 몸을 받으려 했
으나 그 마저도 뒤로 밀려나 버렸다. 스기노방은 이제 최후의 영력을 동원하여서 그들의
몸을 그대로 밀어 붙여 진문을 파괴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거대화된 마사토키의 영의 힘
으로... 모두를 해치우기 위해... 그들이 밀려 나는 곳은 청홍검의 검신이 힘을 뻗치고
있는 중앙을 향해서 였다. 박신부는 비명을 울렸다.
[안돼!]
지금 박신부가 발하고 있는 힘은 거의 괴물화 되어버린 마사토키의 힘을 간신히 막아내
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발산되는 힘의 중앙에 저 두 사람이 부딪힌다면... 박신부
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마사토키의 저 거대한 힘을 막지 못하면 모두 죽을지도 모른
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두 사람은 그냥 죽게 된다... 박신부는 탄식을 발하면서 힘을 거
두었다.
[아아... 야훼여... 어찌... 어찌 우리를...]
박신부가 뻗쳐내는 힘이 순식간에 풀리자 오의파의 두 사람은 그대로 진문에 꽂혀 있던
청홍검을 쓰러뜨리면서 땅에 넘어졌다. 박신부가 입술을 깨물며 다시 중얼거렸다.
[그러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나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모두! 모두 죽여야 한다! 입막음을 위해! 대 일본국을 위해...!
스기노방의 영력이 흩어지면서 허공중에 여운을 남겼다.
진문 밖에서 오백명의 영을 업은 마사토키의 해골은 갑자기 진문이 열리자 약간 주춤하
는 듯 했으나 다시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의파의 두 사람은 넘어졌지만 황급히 일어나 몸을 피했고, 갑자기 여검사 현정이 날
듯이 달려들어 청홍검을 다시 손에 쥐었다. 마사토키는 이제 육중하게 땅을 뒤흔드는 굉
음과 함께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박신부는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는 십자가를 꺼내 들었
다...
[주여... 힘을...]
뒤에서 정신을 차린 주기선생 상준과 차력사 병수가 승희와 함께 달려 왔다. 백제암의
사천왕들은 스기노방에 가까이 있었고, 또 외공 이외의 영력은 그다지 크지 않아서 였는
지 허무하게 다시 정신을 잃고 있었다.
승희는 재빠르게 현암의 마음속을 읽어내고 정세를 판단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현암씨! 어서! 어서 단군의 신물을! 여기는 우리가 어떻게든 해 볼께!]
현암은 지금 너무도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고 망연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진문이 깨어
지고 정세는 급박하게 변해 있었다. 언뜻, 준후가 진문 쪽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아앗! 놈들이 다시 퍼져 나오고 있어요!]
준후의 눈에는 보였다. 오백의 지박령들은 마사토키를 중심으로 진문을 뚫기 위해 한
데 모였다가 이제 다시 분산된 것이다. 이제는 해골의 육신을 빌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었다. 마사토키는 아직 해골의 육신이나마 그대로 가지고 가
운데에 서 있었고, 박신부는 승희의 힘을 받아 오오라를 증폭시키고 있었고, 상준은 병
수, 현정과 함께 대치했고, 오의파의 상렬과 다른 한 사람도 나름대로의 주술을 펴고 있
었다.
[형! 어서 가요! 나도 막아 볼 테니... 그러나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준후, 너도 같이 가자! 가림토 한글을 알아볼 수 있는건 너 뿐이잖아!]
현암은 진문 쪽도 염려 되었지만, 준후는 아무튼 꼭 필요할 것 같았다.
자영이 두려움에 가득찬 눈매로 입을 열었다. 자영의 눈에는 지박령들이 보이지는 않았
지만, 진문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분위기는 쉽게 알 수 있었
다.
[단군의 신물을 얻는다고... 일이 해결 될까요?]
현암은 도지무당과 지연보살의 말을 떠올렸다. 아니, 지금은 그것 이외의 방법이 없었
다.
[그 수 밖에 없습니다.]
철기옹이 비틀거리며 막 도착했다. 철기옹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 나왔다.
[나랏님의 신물을 감히 캐내야만 하다니... 그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데...]
[왜죠?]
[단군님의 천부인을 지키는 것이 내 소임일세. 벌써 수십 대를 이어온 일이야. 그러
나... 그러나...]
철기옹은 이제 정신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진문 쪽을 훑어 보았다.
[왜놈들에게 빼앗기는 것보다는 낫겠지!]
철기옹의 인도로 일행은 묘운이 뚫고 나온 구멍으로 향했다. 아마도 바위를 들추고 나
온 듯, 깊은 구멍 밑에 퀭하니 빈 공동이 있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이 밑에 석실이 있고, 거기에 봉인이 있다네. 봉인을 잘못 건드리
면, 천부인은 절대 찾을 수 없다네...]
[어째서?]
[스스로 자리를 옮겨 버리고 큰 벌을 내리기 때문이지... 천부인은 영이 깃들어 있는
신물중의 신물이야! 그래서 사람들 누구도 이 봉인을 감히 깨려 한 적이 없지. 잘 지켜왔
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잘못 건드리면 그야말로 큰 해를 입어. 군신(軍神) 치우(蚩尤)의
힘으로 보호되고 있다고들 하네!]
일행은 좁은 구멍을 통해 석실로 내려갔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석실... 안기자가 라이터로 불을 밝혔다.
26. 홍녀가 남긴 말...(3)
[여기가 천부인이 있는 장소란 말인가...?]
석실은 퍽 어두웠고 사방에는 석벽이 있었다. 너무나 오래되어서 그 석벽들은 거의 자
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아악! 이게 뭐야!]
자영이 비명을 질렀다. 발 밑에는 수십 구에 달하는 거의 삭아버린 백골들이 굴러다니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골들은 어떤 것은 그야말로 오래 묵어서 거의 건드리면 먼지로
부스러질 듯 한 것들도 있었고, 그렇게까지 오래되지 않은 듯 보이는 것도 있었다.
[무... 무서워!]
자영이 질겁을 하자 철기옹이 내뱉었다.
[이게 무서워? 저 밖에는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흉악한 백골들이 우글대는데, 이깟 아
무것도 아닌 백골들이야 뭐 어때서 그려?]
현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나도 모르네. 나도 여기 들어온 것은 처음이니까...!]
홍녀는 승현사미의 손을 잡고 입을 다문 채 우울한 눈매로 서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아
무 말이 없었다. 안기자가 손이 뜨거워졌는지 라이터 불을 끄자 준후가 야명주를 외워 방
안을 그런 대로 환하게 밝혔다.
지금은 머뭇거리거나 망설일 때가 아니었으니 어쨌든 서둘러야 했다. 현암은 날카로운
눈매로 석실 안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보니 벽에는 어떤 벽화 같은 것도 있었던 듯 했는
데 워낙 낡아서 하나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삭아 있었다. 찬찬히 살피던 현암의 눈에
어떤 문구가 들어왔다. 그 문구는 그다지 오래 된 것 같지 않았고 대강은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현암은 준후를 불렀다.
박신부는 십자가를 눈가에 끌어 올렸다. 성령의 힘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지박령들을
보기 위해서 였다. 십자가에서 푸른 영적인 불길이 이글이글 일어나 박신부의 눈을 쏘았
다. 박신부는 화끈한 고통 비슷함을 느꼈으나 지금은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눈을 뜨자
지박령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청난 숫자였다. 아까 싸움을 통해서 적잖은 놈들을 소멸
시켰을텐데도 그 숫자는 엄청 났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마사토키의 주변을 떠돌면서 바싹
밀착하고 있었다.
[죽은 자 들이여... 그대들의 갈 길로 가라!]
박신부가 서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리력이 없는 영혼들은 수가 비록 많았지만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과연 박신부가 푸른 불길이 이글거리는 십자가를 내밀고 다가오자,
지박령들이 수런거리는 듯 했다.
오의파의 두 사람은 박신부의 뒤에서 같이 지박령들을 노려보면서 긴장하고 있었으나
영적인 투시력이 없는 현정과 병수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승희는 상준과 가까
이에 있었다. 승희가 순간적으로 마사토키의 마음을 읽어내고 소리를 쳤다.
[조심해요! 저들은 몇 패로 갈라져서 신물의 무덤으로 가려하고 있어요!]
상준은 몇 번이나 타격을 입은 뒤라 헐떡이고 있었으나 승희의 고함소리를 듣자 등에서
마지막 깃발을 꺼내어 휘둘렀다.
[더러운 귀신놈들! 십이지신의 최고의 술수닷!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긴다! 십이신장의
맏이인 자(字)신이여!]
상준이 깃발을 휘두르자 갑자기 사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면서 조그마한 아지
랭이 같은 기운들이 새까맣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쥐... 그 이름답게 쥐떼를 방불케하는
술수였다.
막 박신부의 앞에 있던 마사토키의 유골의 뒤에서 수십 마리의 지박령들이 열개의 집단
을 이루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고, 각각의 지박령들의 집단은 모두를 향해 달려 들었다.
[조심햇!]
박신부는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력을 펼쳤다. 오오라가 둥글게 퍼져 나가자 달려들던 녀
석들 중 몇몇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병수와 현정은 서로 등을 마주 대고 섰다. 병수는 무작정 철봉을 빙빙 돌리면서 소리를
쳤다.
[우라질! 뭐가 보여야 싸우지!]
[보이지 않기는 나도 마찬가지에요!]
현정은 휘청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현정은 사실 몸을 움직이기가 아직 어려운 상태였
다.
[눈을 감아요! 눈을!]
[무슨 소리요!]
[어차피 보이지 않는 적들! 마음으로 보아야 싸울 수 있어요!]
현정은 날카롭게 외치고는 눈을 감고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청홍... 청홍이여! 무적의 상징이여!]
현정은 조용히 서있었다. 그녀의 손 끝에 들린 청홍검이 달빛에 희게 빛나고 있었다.
병수는 고개를 젓다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는 듯 다시 눈을 서둘러
뜨고는 봉을 돌리는 속도를 높여갔다. 갑자기 병수의 봉에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이 부딪혀
서 쨍하며 불꽃을 튀겼다.
[놈들이다!]
현정은 갑자기 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리 그었다.
[횡소천군 직췌만마(橫掃千軍 直悴萬馬)!!]
갑자기 현정의 눈 앞에서 다시 쨍하는 소리를 내면서 무언가가 허공중에 떨림을 일으키
면서 사라져 갔고 부러진 낡은 칼이 땅에 툭 떨어졌다. 현정은 미소를 지었으나 좌우 측
에서 동시에 어떤 기운이 닥쳐 오는 것을 느꼈다.
[헛!]
현정은 순간적으로 오른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다시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뭔가가 잘라
져 나갔으나 현정의 왼쪽 어깨를 뭔가가 시큰하게 긋고 지나갔다.
[으악!]
병수도 마찬가지였다. 있는 힘을 다해 철봉을 돌려서 대강 방어를 해나가고 있었으나
온 전신을 방어하기는 어려웠다. 놈들은 순간적으로 사방에서 칼질을 해대는 것 같았다.
재빨리 몸을 번득여서 피하려 애썼으나 병수의 온 몸에는 삽시간에 상처가 늘어갔다.
현정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정은 이를 악물고 느껴지는 기운들을 어김없이 일
검에 하나씩 그어가고 있었으나, 그 때마다 두어 놈이 몸에 상처를 내는 것에는 견디기
어려웠다.
오의파의 두 사람은 부적도 사용할 줄 아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승승장구였다. 한 사
람이 허공에 부적을 휘두르면 갑자기 허공에 불덩어리가 타오르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이
다른 부적으로 그 불덩어리를 짓눌러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열 번 정도
사용하자 부적은 금방 떨어져 버렸다. 두 사람은 허공 중에 손가락으로 부적모습을 그리
면서 대항하려 했으나 그런 임시 방편은 위력이 반도 되지 않았다.
주기선생 상준이 불러낸 기운이 휩쓸어서 몰아닥쳐 왔다. 그러나 그 앞을 막아선 일단
도 있었다. 두 기운들은 어지럽게 엉켜서 돌아가고 있었다. 자의 기운은 막강한 위력을
지녔지만 그 위력은 수가 많다는데에 있었다. 그러나 적들도 다수여서 쉽게 승부를 내지
는 못할 것 같았고, 그 외에도 지박령의 소대들은 여럿이 있었다. 상준은 눈을 번득이며
하나남은 용의 깃발을 들고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오십 마리는 넘는 놈들
이 그래도 상준의 주술을 조금은 두려워 하는 듯, 감히 다가서지는 못하고 주위를 에워싸
고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승희는 느꼈다. 그러나 그 상태는 언제 깨질지 몰랐고, 놈들이
무더기로 덤비면 상준도 대적이 안되며 승희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박신부는 갑자기 강한 타격이 다시 오는 것을 느꼈다. 박신부에게는 마사토키가 직접
덤벼들고 있었다. 대부분의 지박령들은 사방으로 풀었으나 한 백여명 정도의 힘은 다시
마사토키에게로 엉켜든 모양이었다.
[으윽!]
마사토키가 휘두르는 백골의 팔의 힘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그 앙상한 팔목이 박신부가
뿜는 오오라 막을 후려 갈기자 박신부는 와당탕 뒤로 밀려나서 땅에 넘어져 버렸다.
[저... 괴... 괴물...!]
성스러운 오오라에 닿은 마사토키의 팔은 조금씩 녹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사토
키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었다.
- 모두 물러서라! 다 죽으리라! 혼마저도 소멸시켜버리겠다!
- 너희야 말로 이승과 저승, 두 세계의 질서를 어기는 만행을 그만두어라!
- 나는... 내 임무가 있다! 내가 승천을 못하더라도... 그 일만은!!!
마사토키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박신부의 오오라막을 후려갈겼다. 박신부는 기도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고, 마사토키의 팔은 오오라에 밀려 마치 바나나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
럼 거의 부스러져 없어졌으나 마치 막대기처럼 가늘어진 백골의 손가락 하나는 오오라를
뚫고 들어와 박신부의 옆구리에 박혔다.
[으헉!]
박신부는 화끈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다시 이를 악물고 기도를 계속 했다. 남아있던 마
사토키의 손가락 뼈는 흩어져서 없어져 버렸지만 박신부의 상처는 그대로 였다. 이번에는
마사토키가 하나 뿐인 팔로 땅에서 커다란 돌을 집어 들었다. 박신부는 이를 악물고 마사
토키를 노려볼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현암군! 어서! 어서!)
[여기에는 신령하고 밝으신 단군님이 어지심을 베풀기 위해 남기신 신령한 물건이 있는
곳이니 마땅히 예를 차릴 것이요... 그 어지심과 넓으심에 감복하여야 하리라... 사람되
지 못한자 단군님이 남기심을 뵈올 자격이 없는 자니 예를 갖추지 못한 자, 공을 세우지
못한 자, 마음을 갖추지 못한 자, 어여삐 여김이 없는 자는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는
높고도 높으신 남기심을 지킴이로써 갖추어 남긴 것이니 명심하리라...]
준후는 떠듬거리면서 글자들을 읽어나갔다. 현암과 일행들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
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철기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킴이... 단군님의 유물을 지키는 지킴이이지... 나의 먼 선조님이시네... 아마 신라
때에 새겨 놓으신 걸게야.]
[신라때요?]
[그래... 내 집안에 전해지는 바로는 삼국은 모두 단군님의 이 유물을 얻으려 애썼었
네. 그걸 얻는데 성공한 것이 바로 신라였으나... 뒤에 삼국을 일통한 후 다른 신앙을 지
나치게 신봉하는데에 분노한 선조님께서 단군의 유물을 캐어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안치
하고 대대로 후손들을 지킴이로 삼으셨지...]
이번에는 안기자가 눈을 빛냈다.
[신라... 그래요... 그래...]
손기자가 물었다.
[왜 그런가? 뭔가 짚이는 것이 있어?]
[신라가 진흥왕 때에 북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그 이후로 신라의 왕관에는 출(出)자 형
태가 새겨지기 시작했지. 그것의 의미는 바로 신라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물의 쟁탈전
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어... 신라의 무덤은 석실로 되어있는 고
구려의 무덤과도, 단순한 토총인 백제의 무덤과도 달라.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쓴 구조야. 흙, 자갈, 모래, 석회, 돌... 신라의 고분들을 만든 사람들은
왜 그렇게 도굴을 겁냈을까? 대개 삼국의 생활양식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
져 있어. 아마 왕실의 보물이나 그런 것이라고 해도 삼국이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왜 유독 신라는 얼마나 중요한 보물을 가지고 있었기에 도굴당하는 것을 그
리도 싫어했던 것일까? 도대체 도굴 당하면 안되는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바로 고대로부터의 상징인 천부인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거야...]
현암은 기자들이 말하는 데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철기옹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나도 모르네! 나는 이곳을 지키는 사람일 뿐, 여기를 여는 것은 말할 수 없네. 그리고
나는 여기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될 것 같으이... 내가 직접 이 문을 여는 것은 내 조상님
의 뜻을 어기는 것 일테니...]
자영이 소리쳤다.
[안돼요!]
[또 왜 그러느냐? 계집애야?]
[지금 사태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아시잖아요?]
[중요?... 껄껄... 그래... 너희에게는 중요하지... 그러나 여기에 모신 단군님의 유지
만큼 중요할까? 이것 때문에 옛날에는 수십 번의 전쟁이 났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
을 바쳤지... 그런데도 중요할까?]
[그러나...]
[자네들 모두 잘 듣게. 내가 만약 아까 도지 할망구가 죽어서 한 말을 듣지 못했다면,
그리고 지금 저 왜놈들이 이곳을 더럽힐지 모르는 상황만 아니더라면, 내가 절대 이곳을
가르쳐주지 않았을 거네. 그러나 그 늙은 할망구가 자네들에게 맡겨두면 결국은 단군님의
뜻대로 이루어질거라고 뒈지고 난 다음에도 나에게 지껄여대는 바람에 내가 이곳을 가르
쳐 준 걸세. 자네 여기에 잇는 백골들이 다 무엇인지 아는가? 모두가 왜놈들과 욕심을 부
리는 악당들의 백골이네!]
[그렇다면... 여기에도 위험이 있는 것 아닌가요?]
철기옹이 씁슬히 웃으면서 백골 하나를 밟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 나랏자손! 3명 이상의 나랏자손이 같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곳은 발을 들여놓자
마자 이런 꼴이 되게 되어있네! 우리 선조님의 작품이지! 그 분의 도력이 얼마나 높은지
아는가? 그 분은...]
현암이 침중히 입을 열었다.
[저는 단군님의 유물을 꼭 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까 여러 선배 분들이
돌아가신 후에까지 여기에만이 길이 있다 했기에 들어온 것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
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겁니다.]
[하하핫! 초개같은 목숨들... 그리도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자네의, 아니 밖에 있는 자들의 목숨이 그리도 아까운가?]
현암의 얼굴은 어두워졌으나, 눈은 몹시도 빛나고 있었다.
[아깝습니다... 모든 목숨은 아깝습니다. 너무도... 너무도 아까운 것입니다... 이미
두 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더 죽어야 하겠습니까?]
[세상에는 그렇게도 많은 목숨들이 죽기만 기다리고 있네. 발길에 채이는 것이 사람이
고 서로들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것이 사람이네. 그런데도 그렇게 아까운 것인가?]
[단군님도 한 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철기옹은 갑자기 화를 내듯 얼굴이 붉어지면서 뭐라 소리를 지를 듯 보였으나 스스로
평정을 찾으려 몹시 애쓰는 것 같았다. 현암은 그 동안 눈 하나 깜짝 않고 철기옹의 얼굴
을 쳐다보고 있었다. 철기옹은 뭐라 다시 말을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현암이 다시 나직
하게 말을 이었다.
[어르신의 심정 이해가 됩니다. 저희가 해 보겠습니다. 연이 있다면 성공하는 것이고,
아니라면 여기의 백골들 같이 되겠죠.]
[나를 약올려서 길을 알려는 게냐?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아닙니다. 어르신이 이곳을 알려주신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제부터는 인연에 맡기겠습니다.]
[잘못 들어서면 죽네.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
[단군님의 뜻을 믿습니다.]
철기옹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땅에 앉았다. 준후가 갑자기 소리쳤다.
[할아버지! 안돼요!]
[왜 그러냐? 준후야?]
[할... 할아버지... 저분은 이제 몸에 불렀던 신을 거두려... 그러면 돌아가시는데!!!]
그리고 보니 중상을 입은 철기옹이 여태껏 그리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철기옹이 강신
술을 써서 힘을 늘렸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철기옹은 삽시간에 다시 몸이 오그라들
며 평범한 노인처럼 되었다. 철기옹의 입에서 말이 흘러 나왔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었
다.
[내 명은 다 했네... 나는 자손도 없으니... 더 이상 지킴이도 될 수 없네... 자네...
자네 뜻대로 하게... 원래 나는 저기의 관문을 건드려서 천부인을 풀어주어 스스로 옮겨
가게 하려 했으나... 자네의 말을 듣고... 그리고 도지 늙은이의 말을 듣고 자네에게 일
을 주기로 하네... 자네는 착한 사람인 것 같으이... 나는 성질이 못돼먹어서 평생을 후
회했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후회할 짓을 하는구먼...]
철기옹이 가리키는 곳은 그리고 보니 문고리처럼 생긴 작은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철
기옹은 말을 하는 것을 후회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곳을 가르쳐 준 것을 후회하는 것인
지,아니면 관문을 건드리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인지 아무튼 현암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저건 꼭 당기는 것처럼 생겼으나 당기면 죽게 되네. 밀어야 하네... 그리고 저 손잡이
를 힘주어 뽑아내면 이 석실은 무너지고 천부인은 다른 곳으로 스스로 옮겨가게 된다
네...]
철기옹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철기옹은 손짓으로 현암을 불렀다. 현암은
귀를 철기옹에게 댔다.
[자... 자네에게... 처... 천부인은... 말... 말을 할 줄 아는 유물일세... 천부인에
가까이 가면... 질문을 할걸세... 현... 현명하게나... 그리고 자네의 그 착한 성품을 잊
지 않... 않으면...]
철기옹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현암은 의아해서 고개를 돌렸다. 철기옹은 앉은 채로
이미 숨져 있었다...
현암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일동은 숙연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암은 조
용히 떨리는 손으로 철기옹의 눈을 감겼다. 철기옹의 눈은 그 성깔만큼이나 잘 감겨지지
않았다... 현암은 갑자기 손잡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후는 뒤에서 숨을 거둔 철기옹
을 보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준후의 입에서는 스스로에게 묻는 듯한
혼잣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를 갖추지 못한 자, 공을 세우지 못한 자, 마음을 갖추지 못한 자, 어여삐 여김이
없는 자는 들어가지 못하리라... 들어가지 못하리라...]
준후는 지금 이 무덤에 설치된 관문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었
다. 공을 세운다... 는 초치검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신라의 장수 닭우가 정말 초치
검으로 일본을 평정한 것이라면, 이 관문 역시 신라때에 만들어진 것이고, 초치검이 열쇠
라는 말이 많았던 만큼 초치검은 공을 상징하는 열쇠일 것이었다. 그러나 나머지의 세가
지는 모두 수수께끼였다. 예와 공과 어여삐 여김이라는 것은 모두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
까? 현암이 조용히 손잡이를 밀고 재빨리 뒤로 물러서자 석실의 한 귀퉁이가 서서히 올라
가기 시작했다. 그 건너편에는 오래되었으나 아직 그다지 낡지 않은 휘장이 쳐져 있는 것
이 보였다. 의아했다.
휘장에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조그마한 사람
의 모습들이 몸을 쭉 뻗어 엎드려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자
세였는데... 하여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긴장했던 일행은 망연히 문이 올라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은 무척이나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고 뒤편의 휘장의 모습도 점차 똑똑히 들어
왔다. 세명의 작은 사람이 아직 상체밖에 보이지 않은 커다란 사람의 주위에 떠 있었다.
칼과 거울과 방울을 들고...
준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풍백... 운사... 우사... 단군... 단군님의 화상이구나...]
사람들은 초조히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질급한 안기자는 그냥 허리를 굽히
며 들어가려 했으나 현암이 잠시 그를 제지했다. 예감이 이상해서였다. 이상하게도 홍녀
와 자영, 승현사미는 그들의 옛 조상의 그림이어서 그런지 친근감을 지니고 그림을 바라
보고 있었다. 서서히 그림속의 사람의 수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준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예... 예를 갖춘다... 단군님은 고대의 제황... 제왕에게 드리는 예를 갖추려면...)
준후는 반사적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의 돌벽들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준후가 몸
을 날리면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모두! 모두 엎드려욧! 얼굴도 들지 말고! 단군님의 얼굴을 보면 안돼욧!]
준후의 소리를 듣고 자영이 제일 먼저 엎드렸고 홍녀가 승현사미를 눌러 엎드리게 하면
서 몸을 그대로 쓰러뜨렸다. 그러나 손기자와 안기자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사방의 벽에
갑자기 수없이 많은 구멍들이 열렸다. 현암이 두 명의 기자들 쪽으로 몸을 날림과 동시에
사방의 벽에서는 땅에서 한 자 정도의 높이에 이르기까지 빽빽하게 짧은 화살들이 쏘아져
나왔다.
27. 홍녀가 남긴 말...(4)
[으윽!]
박신부는 마사토키가 집어던진 바위덩이가 오오라 막에 부딪히자 몸에 큰 충격을 받고
뒤로 주르륵 밀려 났다. 비록 간신히 바위를 튕겨내기는 했지만, 놈의 힘은 너무도 강했
다. 적어도 백여 명의 힘을 합친 정도의 힘이었으니... 박신부의 눈 앞이 아찔해지면서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언뜻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오의
파의 두 사람과 병수, 현정도 몸에 많은 상처를 입고 뒤로 밀리고 있었다. 박신부는 입술
을 깨물면서 현암 일행이 들어간 구멍 쪽으로 몸을 돌려 뛰었다.
[모두들! 이쪽으로! 이 무덤을 지켜야 해! 여기로 모여!]
박신부의 고함소리를 듣자 현정을 비롯한 네 사람은 간신히 몸을 떨쳐서 박신부 쪽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포위되어 있던 상준과 승희는 그럴 수 없었다. 승희가 상준에게 힘을
보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의 힘을 늘려주면 우리도 일단은 빠져 나갈 수 있겠지!)
승희는 눈을 감고 상준에게 힘을 집중했다. 그러나...
[으악! 뭐... 뭐하는 거야! 아악!]
도리어 상준은 고통에 가득찬 비명을 지르면서 들고 있던 깃발을 떨어뜨려 버렸다. 승
희와 상준은 영의 파장이 맞지 않아 승희가 보내는 힘이 되려 상준의 힘과 충돌해버린 것
이 분명했다. 승희는 깜짝 놀라서 힘을 보내던 것을 멈추었으나 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
던 지박령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승희와 상준은 갑자기 온 몸에 무수한 타격을 입고 땅에 뒹굴었다. 그러더니 두 사람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지박령들이 그들 둘을 포로로 잡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몸은 허
공에 들린 채 마사토키에게로 서서히 운반되어져 갔다. 상준이 정신을 잃자, 그나마 한
편에서 지박령의 많은 수를 붙잡아 두고 있던 쥐의 기운마저도 사그러져서 그쪽의 지박령
들마저도 다가오고 있었다. 박신부는 이를 갈았다.
[이... 이런! 하느님...!!!]
[괘...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현암은 퉁명스럽게 안기자의 말에 대답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안기자를 내리 누
르느라 현암의 몸은 바닥에 딱 붙어 피하지 못하는 바람에, 등에 화살이 여러 개 스치고
지나가서 옷이 찢어지고, 붉은 핏줄기가 마치 채찍에 맞은 듯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안
기자가 몸을 떨면서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현암은 그냥 무표정하게 뒤로 돌아서 버렸다.
단군의 휘장은 이제 언제 위로 말려 올라갔는지 사라지고 건너편에는 다시 하나의 작은
석실이 있었다. 준후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이 쭈뼛거리며 다음 방에 들어가자 준
후가 이미 벽에 씌어진 문구를 읽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천부인은 여러 단군님들의 덕과 힘과 영험을 모은 물건이라... 그 힘을 얻으면 수
월히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리라... 그러나 이미 여러 번, 마음이 올바르지 못한 자들
이 천부인을 얻고 그 힘을 써도, 천부인의 너그러움은 누구에게나 덕을 베푸시었다...]
안기자가 다시 중얼거렸다.
[혹시... 신라가 가장 열세이면서도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이 천부인의 힘을 얻
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손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비약은 하지 말자구. 아무리 영험한 것이라도 물건 하나가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둘이 다시 중얼거리는 중에도 준후는 계속 읽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물건의 지킴이로써, 그릇된 일에 인이 사용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나는
한님 만큼 마음이 넓지 못하다. 그래서 관문을 설치한 것, 여기 두번째의 관문이 있다.
그대들이 여기에 왔다는 것은 나랏자손 3명과 함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대들
이 천부인의 힘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생사나 국운이 걸린 중대한 일 때문이라는 것일
터, 그대들의 성의를 보아야 한다...]
[어서 더 읽어 봐!]
[신라의 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이 방의 열쇠가 되는 천총운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것
을 왜(倭)를 정벌하는데 보냈다고 하니 그 검을 지녀야 하리라...]
안기자가 무릎을 쳤다.
[그래서! 그래서 천총운검이 일본으로 갔구나! 신라의 마립간은 천총운검을 빼앗았지
만, 그것이 혹시나 되 빼앗겨 백제가 천부인의 힘을 사용하면 어쩔까 염려했을 거야! 천
부인이 있는 이곳은 당시 백제의 땅이었으니! 그러나 그 천총운검을 가져간 장수 닭우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 일본에 그냥 남아 일본의 영웅이 되었고, 천총운검은 초치검으로 바
뀌어서 그곳의 신물이 되었으니...]
준후는 계속 읽어갔다.
[...이 방의 문을 여는 방법은... 나랏자손 한 명이 천총운검으로 스스로 피를 바치는
것이다...]
일행의 얼굴이 휘둥그레 졌다. 글귀를 읽던 준후마저도 얼굴이 하얘졌다. 현암이 소리
쳤다.
[준후야! 제대로 해석한 거야? 잘못 읽은 것 아냐?]
준후는 다시 글귀로 눈을 돌려 빠른 속도로 뭔가 중얼거리면서 읽었다.
[나... 나랏자손 한 명이 천총운검으로 자발적으로 목숨을 바쳐야...]
사람들은 저마다 얼굴이 해쓱해 진 채,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나랏자손의
목숨이라고? 자영... 그리고 승현 사미, 그리고 홍녀... 현암이 소리를 질렀다.
[그건 안돼! 안돼! 준후야! 더 읽을 필요 없다. 어서 나가자!]
안기자가 중얼거렸다.
[그...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현암의 얼굴이 험악해 졌다.
[우리는 사람을 살리려 여기 온 것이지, 죽이려고 온 것이 아냐! 사람을 제물로 바치라
고? 말도 안돼!]
홍녀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다 죽습니다.]
현암이 거칠게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싸우자구! 싸워서 이기면 될 거 아냐! 자! 어서 나갓! 다 나가!]
승현사미가 조용히 앞으로 나왔다.
[저... 저...]
[이 쪼그만 놈이 무슨 어른 행세를 하려는 거냥! 어서 썩 비켜!]
현암은 그야말로 험악하게 소리를 지르자 승현사미는 움찔해서 뒤로 물러섰다. 자영 스
크립터는 그 큰 눈을 토끼같이 뜬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안기자와 손기자, 준
후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현암은 거의 제 정신이 아닌 듯 했다.
[자꾸 쳐다보지 맛! 벽... 그래! 이 놈의 벽! 다 부수고 가면 될 거 아냐!]
현암은 기공을 끌어올리면서 한 쪽의 벽을 냅다 후려쳤다. 그러나 돌벽은 쇳소리를 내
면서 현암의 공격을 우습게 튕겨냈다. 두 번... 세 번...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홍녀가
앞으로 나섰다.
[그만... 소용 없어요... 결단을...]
[결단? 결단이라고? 하하하하...!]
현암은 미친 듯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눈물 비슷한 것이 번뜩이고 있었다.
[현암상... 저... 저라도... 어차피 모두 죽을 바에야...]
[모두 죽는다구? 결단? 결단이라구? 좋아! 아주 좋아! 하하하핫...!]
갑자기 현암의 얼굴이 바뀌면서 초치검을 꺼내 들었다. 일행은 긴장했다. 현암의 얼굴
이 파르르 떨면서 초치검에 기공이 주입되는 듯, 푸른 검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준후가
소리 질렀다.
[혀... 형! 뭐하는 거에요!]
[목숨을 바치라... 목숨을 바치라... 우리가 그냥 가더라도... 나중에라도... 이 칼이
남아 있다면... 어떤 놈인가는...]
기공을 받은 초치검의 낡은 검신에서 녹이 우르르 떨어져 나가면서 처음 원래의 모습을
보이며 검기가 두 자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암은 계속 기를 써서 공력을 늘리고
있었다.
[나랏자손의 피를 바쳐... 서라도... 힘을 얻... 얻으려 하겠... 지?... 그... 그건...
안... 안돼!]
갑자기 힘을 과하게 받은 초치검에 금이 쫙 퍼져 나나기 시작했다. 안기자가 눈이 커졌
다.
[뭐... 뭐하는 거야! 그... 그건 중요한 물건이라구!]
원래 현암은 영력이 깃든 월향을 통해서만이 네 자의 검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으나,
지금 극도로 흥분한 현암은 평범한 초치검을 통해서도 세 자가 넘는 검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피...피를 보게 놔 둘 수는 없..없..!!! 야아아아압!!!!"
현암의 고함소리가 좁은 석실 안에서 멍멍하게 울리면서 검기를 이겨내지 못한 초치검
은 폭발하면서 굉음을 울리면서 가루로 변해 버렸다...
일행은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어안이 벙벙해서 거의 쇳가루로 변해버린 초치검의 아주
작은 조각이 사방으로 튀는데에도 피하지도 않고 있었다. 현암의 손에는 칼의 손잡이 만
이 남아 있었으나 현암은 그것마저도 기공력으로 뭉개버리고 있었다. 현암의 얼굴에는 맑
은 미소가 비치고 있었다.
[이제... 이제 아무도 피를 보지 않아도 될거야... 힘... 힘이 무슨 소용이야...]
안기자가 비로소 정신이 든 듯, 소리를 질렀다.
[자네! 그게 무슨 짓인가! 그건 역사의 유물이야!]
[그러나 피를 부르는 물건일세...]
[꼭 피를 보지 않더라도! 그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엄청난 용기를 심어 줄 수 있는
물건이란 말야! 역사적인 증거로...!]
[그러나 한 사람이 죽을지 모르지... 힘을 얻으려는 누군가에 의해!]
[그런... 짓은 안하면... 그리고 모든 민족에게...]
현암이 안기자의 멱살을 움켜 쥐었다. 그 눈은 불타는 듯 했다.
[잘들어! 모든 민족을 위해 한 사람이 목숨을 바친다면 그건 영웅적인 것일 수도 있어!
그러나 모든 민족이 그 핑계로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건 추악한 일이야! 왜 모든 민족이
조금씩 손해 보면서 한 사람을 살려서는 안되지? 많은 사람에게 그건 약간의 기분 문제이
지만, 당하는 한 사람에게는 목숨이 전부야! 네가, 너의 가족이 여기 제물이 된다고 생각
을 해 봐!]
안기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현암은 안기자의 멱살을 놓았다.
[자... 이제 나가자. 다 죽으러...]
허탈하게 웃으면서 현암은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생각했다. 자기가 무리한
공력을 썼다는 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현암은 정신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등의 상
처도 말할 수 없이 쑤시고 있었다. 현암은 석실이 왜 갑자기 빙글빙글 돌까 생각하면서
의식을 잃어 갔다. 흙바닥이 미친 듯 얼굴로 덮쳐 드는 것을 보면서...
- 모두 길을 비켜라! 그러지 않으면 이 둘을 갈갈이 찢어 버리겠다!
박신부와 오의파, 현정과 병수는 구멍을 둥글게 에워싸고 몸을 떨고 있었다. 마사토키
의 해골은 양 손에 정신을 잃은 승희와 상준을 들고 있었고, 주변에는 수없는 지박령들이
웅웅거리며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박신부가 외쳤다.
[둘을 풀어주어라!]
- 길을 비켜라!
박신부는 한 숨을 쉬었다.
[모두 비키세...]
현정이 소리쳤다.
[안돼요! 저들에게 단군의 신물을 내어주면...!]
[길을 내주게... 단군의 신물이 아무리 중요해도... 목숨만은 못한 걸세...]
[무슨 소리에요!]
[어서 비키라구!]
[못 비켜요!]
박신부는 고개를 저으면서 오오라를 갑자기 밀어냈다. 현정은 급작스럽게 쏘아낸 오오
라에 주르륵 밀려 저만치까지 뒷걸음질 쳤다. 오의파의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를 옮겼고,
병수는 철봉을 쥔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박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길을 막지 않겠네. 그러나 안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는 기다려 주게...]
- 안돼! 놈들이 먼저 천부인을 얻으면...! 나는...!
박신부가 눈을 부릅떴다.
[뭐? 그렇다면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해치겠다는 건가! 마사토키! 그건 안된다!]
- 그러면 여기 둘은 죽어도 좋은가?
상준의 몸이 허공에서 네 활개를 펴듯 펼쳐졌고 심한 힘으로 당겨지는 듯 했다. 정신을
잃고 있던 상준이 비명을 질렀다.
[그... 그만해! 그만!]
갑자기 병수가 미친 것처럼 야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면서 마사토키의 백골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현정도 몸을 날렸고...
병수의 몸이 마사토키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현정이 날듯이 마사토키의 목을 향해
청홍검을 휘둘렀지만...
[으악!]
[아악!]
마사토키가 한 번 손짓을 하자 병수의 팔이 우두둑 소리를 내면서 갑자기 길게 늘어나
버렸고, 현정은 허공에서 뭔가에 부딪혀서 뒤로 떨어져 뒹굴었다. 오의파의 둘이 주문을
외우려 했으나, 그들마저도 갑자기 폭풍처럼 밀어 닥친 기운에 우르르 넘어져 버렸다. 박
신부가 오오라를 뿜어 보호하려 했으나, 사방에 놈들이 가로막고 있는지 오오라가 뭔가에
막힌 듯이 퍼져 나가지 않았다.
[이... 이놈들!!!]
박신부는 노한 호통을 지르면서 양 팔을 움츠렸다가 벼락같이 폈다.
박신부의 오오라를 압박하고 있던 지박령들이 무더기로 튕겨져 날아가면서 오오라가 좌
악 퍼져 나갔다.
[마사토키! 멈춰!!!]
박신부가 막 마사토키를 향해 달려 나가려는데... 뭔가가 박신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엇!]
그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현현파의 네 사람... 그리고 백제암의 사천왕들... 도
운까지도... 모두 몸을 일으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홉 명의 눈은 모두 풀린 상
태였고, 이상한 기운을 몸에서 발하고 있었다.
[마... 마사토키! 이 지독한! 부상자들을 빙의 시키다니!]
이제는 박신부 혼자였다... 오백 대 일...
- 어서 물러서라! 도저히 너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나는 혼자여도...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
- 물러서라!!!
박신부는 물러서기는 커녕 구멍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여... 함께 헤 주소서...)
마사토키의 목소리가 그 와중에도 마음속에 느껴졌다.
- 죽여랏!!!
28. 홍녀가 남긴 말...(5)
준후는 조용히 현암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모두 나가요... 이젠...]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이제 초치검이 가루가 되어 없어진 이상, 더 이상 관문을
돌파할 수는 없었으니... 묵묵히 일행이 몸을 돌리는데 갑자기 자영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저... 저기!]
놀란 준후는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홍녀가 벽 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몸은 부르르 떨리고... 호... 혹시...
준후는 눈을 부릅뜨고 홍녀에게 다가갔다. 달음질쳐서 가고 싶었지만 몸은 슬로우모우
션 처럼 밖에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악! 누나!]
홍녀의 손에는 구마 열화검이 들려 있었고... 그 검은 이미 홍녀의 배를 깊이 긋고 있
었다. 홍녀의 피는 이미 바닥을 잔뜩 적시고 있었고... 홍녀의 얼굴은 고통에 희게 질려
있었으나 입은 간구하는 듯한 조용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준후는 홍녀가 마음으로 기
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천부인이시여... 모르고 있었으나... 저도 그대의 후손이라 합니다... 검은 이미 없
어졌으나... 마지막으로 기원을 들어주소서... 힘을 베풀어서... 힘을... 모두를 살리기
위한...
[누나! 뭣하는 짓이얏! 그만! 그만!!!!]
준후는 악을 쓰고 있었다. 준후에게로 홍녀의 목소리가 전달되어 왔다.
- 나는... 나는 일본 사람인 줄로 알고 있었어... 죄를 많이 지었지... 현암 상에게 미
안하다고 전해 줘... 아까... 내가 칼질을 한 것... 그러나 현암 상은 내게 왜 그랬느냐
고 묻지도 않았지...
[그만! 그만둬요! 제발!]
준후가 외치는 사이에도, 홍녀의 메시지는 폭포처럼 준후의 마음속에 흘러 들어왔다.
홍녀가 마지막 남기는 말일 것이었다.
-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이 있었어... 나는 일본인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해... 진실이
바로 앞에 있는데... 그러나 그들은 진실을 받아 들일만큼 속이 넓지 못해... 그렇게 살
아왔으니... 그들은 가엾은 족속이야... 나라는 부강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그렇지 못
해... 아니아니... 그만... 그러나... 그들은 착해... 일본이 죄를 많이 지은 것, 그러나
일본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야... 나는 아까 초치검을 그냥 빼앗아 없애려 했었어... 사실
은 그래서 여기로 들어온 거였어... 일본인을 위한다는 좁은 생각으로... 그러나 현암상
이... 그 분의 마음 씀씀이가 더 넓어서... 전해 줘... 꼭... 언젠가는 모든 것이 밝혀질
터이니... 언젠가는... 현암상은 현명했던거야... 지금 천부인의 목소리가 들려... 너도
들려...? 지킴이의 관문은 그냥 있지만... 천부인은 내 소리를 들었어... 그리고 말을 걸
고 있어... 들려?... 들려?
홍녀의 몸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준후는 울먹거리면서 그냥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갑자기 석실 전체가 우르릉 거리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난 것처럼 천
정부터 바닥까지가 흔들려서 일행은 모두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 앉고 무릎
을 꿇었다. 어디선가 장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 매무새를 다듬고 꿇어라...
홍녀가 마주보고 있던 석실의 벽이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거기서 언뜻 보인 것
은 밝은 광채... 아무도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그 광채는 그대로 눈을 태울듯
이 비쳐 들어왔고...
- 나는 한님의 목소리고, 한님의 밝음이며, 한님의 마음이로다...
자영과 승현사미만이 눈을 조금씩 뜰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광채가 어떤 물건인지
는 볼 수 없었다.
- 그대들은 지킴이의 시험을 모두 이겨냈구나... 그대들은 이제 한님의 뜻대로 다 이룬
것이다...
자영은 놀랐다. 그러면 천총운검을 부순 것, 홍녀가 그 다음에 무모하다는 것을 알면서
도 자결한 것이 모두 다 계획되어 있던 일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한님의 뜻을 이루었다는
것은...
준후에게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 나는 이곳의 관문을 처음 만든 지킴이이다... 이 곳의 관문은 내가 설치한 것이 아니
며, 천부인에 욕심을 내고 힘을 얻은 자들이 그때마다 관문을 늘려나간 것이었다. 그 관
문들은 바로 천부인이 세상에 나가는 것을 막고 힘을 가두어 자기들만이 이용하려 한 사
악한 것들이었지. 나는 내 힘을 다해 그 관문들을 없애려 했으나, 천총운검을 찾을 수 없
었고, 또 나랏자손 한 명의 희생이 필요 했다네... 나랏자손은 관문을 없애기 위해... 그
리고 검은 천부인을 옭아매는 열쇠로 만들어진 것이었어...
준후는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았다. 천부인이 이 땅에 묻혀있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었
다. 천부인은 한님의 목소리, 한님의 밝음, 한님의 마음으로, 하나의 물건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힘을 자기의 것으로만 하려는 자들이 천부인을 봉인 한 것이고, 지킴
이는 그 봉인을 다시 봉인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킴이의 봉인은 봉인을 깨기 위한 역
봉인이었고, 그 원래의 봉인을 깨기 위한 열쇠가 초치검과 나랏자손의 희생이었던 것이
다. 지킴이의 글은 그 봉인을 해소시키기 위한 방법을 원래의 뜻을 감춘 채 적은 것이었
을 것이고...
- 현명하구나... 어린아이야... 너희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잘해 주었어... 원래 천
총운검으로 나랏자손이 해를 입으면, 검은 그냥 부서지게 되어있었지... 그러나 내 생각
보다도, 너희의 착한 마음이 더 좋은 해결을 본 것이야... 이제 천부인은 세상에 나갈 것
이다... 널리, 모든 사람을 위해주고, 모든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줄 것이야...
한님의 뜻은 하나의 나라나 작은 일들에 편협하게 씌어지기에는 너무 큰 것이지... 모든
이들에게, 비록 적이나 모르는 자들에게도 널리널리 미쳐 고루고루 넘치게 퍼질 것이리
라...
갑자기 광채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졌다. 그리고 갑자기 천둥과 같은 울림이 느
껴지더니 광채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준후의 마음에 다시 지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 이제 천부인은 갈 곳으로 가셨다... 너희에게는 문제가 있었지? 그건 내가 도와주
마... 그리고 나도 쉬러 가련다... 몇 천년만인가... 하하하...
갑자기 엄청난 폭풍 같은 바람이 소용돌이 치며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일행이 땅에 엎드
려 있는 곳에는 바람이 용케 피해가는 것이었다.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 치우의 바람이 사방을 잠재우리라...
준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치우의 삭풍...!!!]
갑자기 박신부의 뒤의 구멍에서 엄청난 바람의 소용돌이가 왈칵 밀려 나왔다. 박신부는
피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앉은 채 앞으로 넘어져 흙에 반 쯤 묻혀 버렸다. 폭풍과 같은
바람은 마치 속에 날카로운 발톱을 수없이 감춘 듯, 거칠 것이 없이 쓸고 나갔다. 나무에
닿으면 나무가 갈아져 없어져 버렸고, 돌에 닿으면 돌이 드드득 갈리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사람의 몸만은 다치지 않는 것이었다.
- 으아악!
- 아악!
- 어억!
수백을 헤아리던 지박령 들은 그 엄청난 삭풍에 밀려 삽시간에 휘몰아쳐져 정신 없이
흩어져 뱅글뱅글 돌았다. 빙의 되었던 사람들의 몸과 승희, 상준 등의 사람들의 몸도 마
치 가랑잎처럼 날아갔고, 땅에 흩어져 있던 백골들 마저도 갉아져서 가루가 되어가고 있
었다. 그러나 마사토키의 백골은 몸이 조금씩 닳아져 없어져 가는 중에도 버티면서 앞으
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아아아... 신물! 신물! 나... 나... 나는!
마사토키의 백골이 안간힘을 다하여 구멍의 앞으로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이미 박신부
가 몸을 서서히 일으키고 있었다.
- 마사토키... 인제 너의 임무는 끝났다. 실패로... 이건 바로 천부인의 힘이다...
- 아... 아냐! 나는... 나는 죽어도!
- 너는 이미 죽었다... 편히 쉬어라...
박신부는 놀란 듯 크게 아가리를 벌리는 마사토키의 백골을 향해 십자가를 갖다 대었
다. 지박령들이 흩어져 버린 마사토키는 크게 힘을 쓰지 못했다. 큰 비명성을 울리면서,
마사토키의 백골에 집요하게 달라 붙어 있던 그의 영은 서서히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사토키의 백골은 그대로 가루로 변해 바람에 흩어져 갔다...
마사토키의 백골이 흩어지자, 박신부는 한 숨을 내쉬면서 몸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박
신부의 몸도 바람에 밀려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박신부는 꼼짝도 하기 싫었
다... 아무래도 좋았다. 쉬고 싶을 뿐이었고...
현암은 정신을 차리고 홍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준후는 울먹이면서, 홍녀가 남긴 말들
과 그 간의 일들을 이야기해 준 참이었다. 아무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홍녀는
이미 숨을 거두었으나, 그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홍녀는 숨이 지기 전에 천부인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일까? 모든 것을 깨달은 듯... 홍녀의 얼굴은 평온했다. 정말
평온했다...
일행은 굴 밖으로 나왔다. 현암은 마지막으로 나가기 전에 관문의 손잡이를 뽑아 버렸
고, 현암이 구멍에서 나가자 다시 땅이 흔들리면서 흙더미가 구멍을 메워버렸다.
박신부가 현암에게 물었다.
[천부인은? 찾았나? 어디에 있지?]
준후가 손가락을 들었다. 마침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곱게... 황금색과 붉은 색을
같이 영롱하게 발하면서... 준후의 얼굴이 환하게 미소로 빛났다.
[저기... 저기에 있어요...]
박신부는 흙먼지 낀 안경을 치켜 준후가 가리키는 아침해를 쳐다 보았다. 현암도, 승희
도, 기자들과 정신이 든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올라오는 아침해의 빛은 세상을 그야말로 고루 밝혀 줄 듯, 환하게 빛나 온누리
를 물들여 가고 있었다. 박신부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잘되었어! 모든 것이 잘 되었어!]
이제 사람들은 각자 갈길로 흩어져 갔다. 아무 것도 얻은 것은 없었으나, 준후의 설명
을 듣고 난 모두의 마음은 흡족한 듯 했다. 상준과 병수는 그 동안 사리사욕을 위해 능력
을 써 온 일들을 뉘우치고 남을 위해 살도록 애쓰겠다고 약속하고 떠났고, 현정은 도지무
당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 와중에도 언젠가 현암과 꼭 대련하자는 말을 남기고 청홍검을
멘 채 떠났다. 현현파는 철기옹의 시신을, 백제암의 승려들은 지연보살의 시신을 각각 수
습했다. 고인의 믿던 바에 맞게 장례를 치뤄주려는 것이었다. 일본승 도운에게는 오의파
의 상렬이 설명을 해주었고 도운은 말 없이 떠났다. 홍녀의 시신을 가져가려 했으나, 준
후가 홍녀는 이 땅에 묻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홍녀는 퇴마사들이 장례를 치뤄주기로
했다. 이제는 기자단들만이 남았다. 안기자에게 현암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이제... 이리 줘...]
[뭘 말이야?]
[자네가 계속 비밀카메라로 우리들의 모습을 사진 찍었다는 것, 알고 있어. 필름을
줘.]
[그... 그건...]
[이런 일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어.]
[그...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은 밝혀져야 할 것이 아냐! 일본과의 관계... 그리고...]
[증거는 하나도 없어.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거고...]
[그러나...]
현암은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참 맑은 날이었고 해는 여전히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구름이 낀다고 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금방 다시 나타나는 법이지... 진실도
마찬가지야. 억지로 밝히려 할 필요가 없어...]
현암은 어느새 안기자의 비밀카메라를 재빨리 꺼내들고 있었다. 그리고 주저없이 필름
을 빼내어 확! 펴 버렸다.
[이... 이봐!!!]
안기자가 뭐라 말을 하려 했으나 이미 현암은 다시 빈 카메라를 돌려주고 뒤로 돌아섰
다.
[재민이. 이제까지 봤던 것은 다 잊도록 노력해. 나도 예전 그대로니까... 하하하...]
현암은 껄껄 웃으며 차로 발을 옮겼다. 왜구들이 쳤던 만다라의 진은 치우의 삭풍에 쓸
려 완전히 없어진 듯, 사방은 그야말로 고요하기만 했다. 김자영 스크립터와 손기자는 멀
어져가는 현암과 퇴마사들의 차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었다. 자영이 외쳤다.
[담에 술 한 잔 사요!]
차에서 승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린 술 끊었어요!]
안기자는 중얼거리며 볼멘 소리를 냈다.
[손 좀 그만 흔들어요! 제기랄! 자기만 잘난 척 하구!]
자영이 해맑게 웃었다.
[왜요? 특종을 놓쳐서 아쉬워요? 호호호...]
[놓쳐요? 아직 안 놓쳤어요! 바보 같은 놈! 자기만 잘난척 하구!]
안기자가 품에서 필름을 한 통 꺼냈다. 자영과 손기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까 카메라 필름을 갈았다구요! 이게 진짜인데... 괜히 생필름을 버려놓구...]
안기자는 필름을 들고 조용히 뭔가를 생각했다. 자영과 손기자는 둘 다 뭐라 말을 못하
고 조그만 필름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기자가 다시 중얼거렸다.
[망할 놈! 필름은 여기 있단 말이다! 모두 다 찍었어! 이걸... 이걸 밝혀서는 안된다
구? 안된다구??? 난 기자란 말이다! 필름을 버릴 수 없어! 없어! 버릴 수는 없다구!!!]
자영과 손기자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안기자는 갑자기 벼랑으로 달려가서 있는 힘을 다
해 필름을 냅다 집어 던졌다. 필름은 참 용하게도 멀리 날아가 바다에 빠져 버렸다. 안기
자가 다시 볼멘 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며 돌아와서 말했다.
[실수로 필름을 떨어뜨렸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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