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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 단편

by Casey,Riley 2023.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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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편.TXT
1.68MB



                <<<   퇴마록 세계편 - 아라크노이드   >>>
 


  거미의 탄생
 
  네트워크는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BBS와 연결되는 전화선과 모뎀들, 그리고 인
터네트이나 LAN에 연결된 회선들까지도 겉으로 보면 그냥 별것 아니지만, 실상 그
에는 엄청난 속도로 전자와 파동들이 헤매고  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가시화
되지 않은 작은 세계의 안에도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고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어,
엄청난 작동들을 거의 오차 없이 수행해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네트에 접속하는 것이 자신의 3대 주습관(잠, 밥, 그리고 접속)이라고 자처
하는 전산과 대학생인 미쉘은 며칠간 시험에 시달리다가 문득 묘한 아이디어를 얻
었다. 아침에 잠을 깨어 나오는데 문 앞에 서있는 나무에 거미 한 마리가 밤새 줄
을 쳐놓았던 것이다. 거미줄 무늬는 사람의 지문과 같아서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
다고 어디선가 들은 생각도 나고 해서,  미쉘은 그 거미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
다. 거미줄의 모양은 정말  완벽한 균형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날줄과 씨줄이
절묘하게 배합되어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유연함과, 언제라도 제물이 오면
옭아맬 준비가 되어 있는 그 긴장감……. 문득  미쉘은 그 거미줄의  모양을 보다
가 자연스럽게 그 거미줄의 형태가 네트웍을 구성하는 회선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
고 곧이어 어떠한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주 재미있고 기발한
발상의 프로그램이…….
  미쉘은 그날부터 작업에 몰두했다. 아직 시험이 끝나지도  않았고, 제출해야 할
레포트도 여러 개 남아 있었지만 더 재미있는  작업이 있었으므로 다른 데 신경을
쓸 시간이-시험 공부에 쓸 시간 조차도-없었다.  과거에 미쉘은 라이프 게임에 심
취했던 적이 있었다. 어떤 형태의 패턴을  심고 환경을 설정해주면 꿈틀꿈틀 자라
나거나 또는 소멸해버리는, 또는 자기와 같은 형태의 것을 계속 만들어내는 데 성
공하기도 하는 모니터 상의 작은 문양들을 보면서,  마치 창조주가 된 듯한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끼곤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 아이디어를 프로그램에 심는 것이다.
그러나 '거미'와 비슷한 형태의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퍼스널 컴퓨터 레벨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모든 퍼스널  컴퓨터에 이식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넓
디 넓은 네트워크를 배경으로 해야 했다. 네트워크 상에서도 자생할 수 있는 프로
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컴퓨터 시스템 상의 하드웨어에 대한 자세한 이해가  있
어야 했다. 다행히 그 네트워크 노드들의 대부분은 유닉스(UNIX)를 운영체제로 하
고 있었다. 또 퍼스컴들은 숨은  명령어 몇 개로 간단히  유틸리티를 만들면 되는
것이었고. 퍼스컴이라 봐야 기종이 몇 가지나 되겠는가? 미쉘은 한 때 아르바이트
비슷하게 네트워크에서 일 해 본  적도 있었고, 유닉스 체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즉, 미쉘이 만드는 프로그램의 기본골격은 운영체제 상에서 각 주변 기기
밑 외부 장치 상에 거미줄같이 얽혀지는 구조를  스스로 키워나갈 수 있는, 즉 거
미줄처럼 여러 곳을 얽어서 전체 구조를 이루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었다.
 
  미쉘은 그 프로그램의 이름을 '아라크노이드'라 붙였다.  왜냐하면 그 프로그램
은 거미의 생활 양태와 거미줄의 모양을  많이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 프로그램은 우선 각각의  DNA라 할 수 있는  기본 코드를 갖는다.
그 기본코드는 주 시스템 상에서 만들어지는데, 각 주변 기기 및 네트워크상의 여
러 기기들의 특성을 스스로 파악하는 긴 코드를  자동 생성한다. 이 코드는 '엄마
거미'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일단 '유충'격인  DNA격의 기본 코드를 생성한 뒤에
는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소멸한다. 그  다음, 거미줄의 씨줄 격인 네
트워크를 통하여 기본코드는 각  네트워크 상의 하드 디스크  내에 우르르 쏟아져
들어간다. 그리고 각 주변 시스템 상에서  통신을 타고 '엄마거미'로 다시 커가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히 생장해 나가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뭔가 작동
을 하는 것도 있어야 했다. 그러려면 시스템  차원의 제어가 필요하다. 미쉘은 없
는 그림 솜씨를 발휘하여 그림을 몇 개  그렸다. 거미줄과 다소 흉악하게 생긴 거
미 몇 마리의 그림……. 원래는 좀 예쁘게 그릴 생각이었으나 그려놓고 보니 솜씨
가 없어서인지 을씨년스럽고 그로테스크한 그림이 되고 말았다. 하긴 아무 시스템
에나 그림이 뜨려면 그림 자체가 흑백이어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것이
야 아무렴 어떤가?
   프로그램을 작성 할 때는 게임처럼 생각하고 작성했는데,  만들다보니 이건 바
이러스의 형태를 띠게 되어서  약간은 찝찝했다. 만들어놓아도  퍼뜨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적어도 맨 처음에만은 이  프로그램을 장착시킬 네트웍이 있어야 하는
데……. 그러나 순수하게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는  의욕이 미쉘으로 하여금 몇 날
며칠 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미쉘은 밤잠을 잊고 작업에  몰두하다가 가끔씩 쓰러져 잠이 들곤
했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나고…….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면 그 꿈의 내용은 잊혀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을 깬 다음
에는 전날 그를 괴롭히던 '아라크노이드' 코드 상의 난제의 해결점을 찾아내는 것
이었다.
 
  시스템의 네트웍 담당자인 알렉은 친구인 미쉘이 불쑥 나타나 종이  한 장을 휙
내밀자 다소 놀라서 미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쉘의 얼굴은 수척했고 이미 여
러 날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미쉘이 입을 열었다.
   "이걸 돌릴 수 있게 해줘. 시스템의 일부만 이용해서……. 확인해보고 싶어."
   알렉은 종이쪽지를 보았다. 거기에는 급히 갈겨쓴 듯한  필체로 이상한 코드에
대한 기능 설명이 씌어져 있었다. 코드의 제목은 범용 컴퓨터에 올리기 쉽도록 영
어로 되어 있었고 그 이름은 '아라크노이드'였다.
 
  [program'Arachnoid']
  종류 : 바이러스성 코드
  기능 :
  1. 메인 프레임의 시스템 커널 영역에 주 프로그램 '엄마거미' 장착.
  2. '엄마거미'는 시스템의 상태를 파악하여 각각의 '유충' 코드를 스스로 작성.
  3. 네트워크 상에 연결된 모든 주변 시스템에 '유충'코드를 퍼뜨림.
  4. '엄마거미'는 스스로 파괴됨.
  5. 각 '유충'코드는 네트웍의 횡적인 연결을 이용하여 점차 '엄마거미'로 성장.
  6. 다시 반복.
  특징 :
  1. 각 '유충' 코드는 시스템 상의 모든 주변기기  상의 기억장치에 중복하여 데
이터를 저장함. 그리고 각 데이터가 파괴되었을  때에는 다른 곳에 있던 데이터를
찾아서 다시 다른 주변기기나 하드 디스크의 파일 상에 재저장 - 복구함.
  2. 각 데이터의 크기가 커지면 다시 주변기기 별로'유충' 을 만듦. 이는 시스템
의 커널 코드와 오퍼레이팅  시스템의 주기적 관찰로 시스템의  완벽한 통제가 된
이후에야 독립된 '유충'으로 성장됨.
  3. 이 코드의 목적은 소프트웨어가 독립적 유기체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의 테
스트가 됨. 그 결과를 알기 위해  각  '엄마거미'가 자폭하거나 '엄마 거미'에 의
해 유충들 이 파괴될 때 특정한 그림을 내보냄.
  이상. programmer 쟝 쉥 미쉘.
 
  알렉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말했다.
  "이게 뭐야? 이걸 시스템에 올려달라고?"
  "음……. 오류는 없다고 생각해. 그러나 한 번  정말로 이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지 확인해보고 싶어."
  미쉘의 눈은 흐릿했고 많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어딘가 제 정
신이 아닌 듯한, 아니 신이  들린 듯한 모습에 알렉은 알  수 없는 전율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이건 바이러스성 코드잖아? 이런 걸 시스템에 올릴 수는 없어!"
  "그러니 시스템의 일부만 이용하여 해보자는 것 아냐?"
  "그러다 네트워크가 정지되면 어쩔려구! 그럴 수는 없다구!"
  "며칠 후에 네트워크의 정비기간이 있어. 그때에 시험하면 되잖아? 내가 책임지
고 모두 거미를 죽일게."
  "정비라 해도 일부의 정비일 뿐이야. 그러나 이  내용대로면 이미 프로그램들이
네트워크 상의 모뎀들을 타고 퍼질 텐데 어떻게 다 죽인……."
  "아니, 지운단 말야? 아니, 너는 이것 자체가 말이 되는 코드라고 생각하니?"
  "왜 말이 안 된다는 거야?"
  "여기는 결정적 오류가 있어. 물론 다른 것들도 많이 있지만. 일단은 이 뭐야…
…. 아라크노이드? 흠, 이 거미 코드는 맨 처음에 슈퍼유저 레벨에서 커널에 인스
톨 해야 돼. 분명 엄마거미는 휘하의 주변기기들을 지배하는 오퍼레이팅 시스템의
커널 루틴 상에 설치되어야 한다는 거야. 누가 그렇게  하겠어? 자칫 시스템을 말
아먹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 부탁하는 것 아냐?"
  "안 돼. 그리고도 실현 불가능한 부분은 많아.  이대로라면 엄마거미 자체가 엄
청난 데이터를 쌓아야 하는데, 그걸 버텨낼  만한 오퍼레이팅 부분의 용량을 확보
하기 위한 페이징 속도가 빠른 컴퓨터는 거의 없어. 엄마거미가 되기 전에 시스템
이  다운되기 때문에 유충이 엄마거미로 부화하지 못한다구."
  "아니, 그걸 막기 위해서 데이터 분리법을 쓰는 거야."
  "그러면 네트웍 로드가 엄청나게 커질 텐데? 프로토콜의 싱크로가 안 될지도 몰
라!"
  "그것도 다 생각해 뒀어!"
  미쉘은 알렉에게 자기의 코드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
코드 자체는 독창성이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원리가 너무 복잡했고 사용되
는 시스템의 부담이 과중했다. 그리고 이 코드는 맨 처음, '엄마거미'의 상태에서
출발해야만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미쉘은 열을 올리면서 아라크노이드에 대해 설
명을 했지만, 알렉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팠기 때문에 미
쉘의 말을 귀로 대강 흘려버렸다. 그러는  그들의 뒤로 레오라는 오퍼레이터가 들
어섰다.
  "뭔지 좀 끼어도 될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알렉은 미쉘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바이러스성
의 코드임이 분명한 프로그램을, 그것도 시스템  커널 영역에 올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미쉘은 열을 올리면서  이건 단순한 프로그래밍이 아니라 생명
창조라고까지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라고  악까지 써댔으나, 알렉은 이제 미쉘을
완전 미친 놈 취급을 하면서 내몰아버렸다. 완전히 얼이 빠져 있는 미쉘에게 레오
가 다가섰다.
  "알렉을 이해하라구. 이 큰 네트워크에서야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나도 호기심
이 당기는데, 그러면 내 조그만 사설 BBS가 있으니 거기서 테스트해 보자구."
  "정말 그래도 돼?"
  "음. 어차피 좀 있으면 닫아버릴 엉터리 비비야. 그리고 가입자는 내 친구들 뿐
이고……. 그러니 미리 양해를 얻고 시작하면 돼.  그러나 조건이 있어. 그 '엄마
거미' 상에 모니터링 루틴과  어디트 트레일 루틴을 넣어야  해. '유충'의 상태를
보려면 말야……."
  좋은 테스트 여건이었다. 미쉘으로서는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고…
…. 둘은 이미 어두워진 밤거리를 걸어서 레오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 미쉘의 눈
이 불타듯 푸른 빛을 띠어가고 있는 것을 레오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거미의 성장(1)
 
  "에잉! 이게 뭐야?"
  요즘 한참 잘 나가는 모뎀인지  뭔지로 까르르륵 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울리고
있던 준후가 소리를 쳤다. 원래 그들은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지만 여기 프
랑스에 도착하면서 우연히 만나게  된 정혜영이라는 한국 학생을  통해서 그 집에
초대되어서 놀러왔다가 준후가 그 방에 있는  컴퓨터를 만지작거린 것이다. 집 주
인인 혜영은 연희와 함께 대접할 거리를 사러 나갔고…….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
지지 말라고 승희가 준후에게 말했지만 준후는  지루했던지 살금살금 눈치를 보더
니 또 접속을 해본 모양이었다. 물론  준후가 프랑스 쪽의 네트워크의 전화번호를
하나도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준후는 그냥 무심코 아무전화 번호나 때
려 넣거나 원래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번호들을  심심풀이로 한 번씩 넣어본 것에
불과했다. 몇 번 접속은 되었지만 재미없어서  끊기를 반복하던 차에 시스템이 이
상해진 것이다.
  현암과 박신부는 그들이 추적하고 있는 코제트의 행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
고 있었고, 승희는 패션 잡지를 뒤적이다가  준후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전에 동민이라는 아이의 문제[국내편 제1권  '아무도 없는 밤' 참조]를
해결해준 이래, 오락은 싫어해도 통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진 승희였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승희누나, 이거 봐! 징글……."
  준후가 가리키는 모니터의 화면상에 시커먼 거미 몇 마리가 거미줄 위에 웅크리
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별로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지만 굵은 선으로 팍팍 그려
진 그림은 왠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승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고 흉악하구나! 이건 무슨 게임이니?"
  "아녜요. 내가 한 게 아니라구요. 난 그냥 통신 프로그램  비슷한 게 있어서 신
기해서 들어갈려는데 갑자기 이게 나오더니 먹통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망가
뜨린 게 아닌데 어떻게 하지……. 잉잉, 이게 뭐야."
  준후는 순간 당황을 했는지 컴퓨터의  전원 스위치를 꺼버렸고 잠깐  아주 잠깐
동안 승희의 마음속에 하나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목소리라기보다는 마치 그 의
미만이 마치 말로 들리는 것처럼 그 의미만이 마음속에 울려퍼지는 것이었다.
  -파괴를 위한…….
  "음, 이게 뭐지?"
  승희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준후는 어리둥절한 듯 승희를 쳐다보았다. 승희
는 자기가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준후야, 현암군! 방금 소리내지 않았어? '파괴를 위한……'이라고!"
  "아녜요. 누나."
  "조용히 좀 해! 승희! 지금 중요한 이야기 중이야!"
  현암은 눈도 돌리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마음속으로 들려온 목소리였는데……. 그렇다면 영의 목
소리? 그러나 지금 다른 퇴마사들도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게 잡령 따위가 갑자기
뚫고 들어올 여지는 전혀 있을 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어디서
들린 것일까?  가만 보아하니 준후도 전혀 낌새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분명
승희에게만 들리는 것이었다. 마치 사람의 마음이 승희에게만 읽혀지는 것처럼.
  "에구! 이거 또 나오네!"
  막 컴퓨터를 껐다가 켠 준후가  다시 징징 우는 소리를 냈다.  리부팅해서 다시
모뎀을 작동시키기만 하면 거미그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준후가 투덜거리며 다
시 컴퓨터를 끄는데 승희의 마음 속에 다시 목소리가 울려왔다.
  -파괴를 위한…….
  승희가 고함을 질렀다.
  "준후야! 한 번 더! 한 번 더 켰다가 꺼봐!"
  "왜요?"
  "그걸 켰다가 끌 때마다 소리가 들려! 영적인 소리가!"
  "뭐라고요? 어어……."
  "어서!"
  준후가 겁먹은 눈초리로 다시 컴퓨터를 켜고 전원을  껐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
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 되잖아요? 이번엔 나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모뎀을 작동시켜! 거미 그림이 나오게 하고 끄란 말야!"
  현암과 박신부도 둘의 떠드는 소리가 이상하게 생각되었는지  컴퓨터 쪽으로 다
가왔다. 승희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 중  하나를 준후에게 주었고,
준후는 영문도 모른 채  세크메트의 눈을 받아들고 떨리는  손길로 다시 컴퓨터를
켰다. 모뎀 프로그램을 작동시키자 거미그림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전원 스위
치를…….
  -파괴를 위한…….
  준후가 후다닥 컴퓨터에서 물러섰다. 세크메트의 눈을  통하여 승희의 마음속에
들린 목소리를 이번에는 준후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승희의 얼굴에 두려운 기
색이 감돌았다.
  "너……. 너도 들었니? 그. 그 목소리 분명히 들리지!"
   준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컴퓨터에서  영의 목소리가 들
리다니 믿을 수 없었다. 승희가 다시  해보라고 준후에게 고갯짓을 했으나 준후는
이제 컴퓨터에 손을 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승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컴퓨
터를 다시 껐다가 켰다. 그리고 마음의 힘을 모아서 순간적으로 영사를 행할 생각
이었다. 거미그림이 나오고……. 다시 전원을!
  -파괴를 위한…….
  순간적으로 어떤 사람의 눈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승희는
다시 여러 번 컴퓨터를 껐다 켰다 해보았지만  여전히 영사에 의해 나타나는 모습
은 눈 하나뿐이었다. 깊고, 어디인가 번득거리는 듯한, 그리고 붉게 충혈 되어 있
는 눈…….
  "누나, 무서워! 투시를 해도 왜 눈밖에 안 보이는 거지?"
  승희도 무어라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컴퓨터에 영력이 깃들여지다니. 그것도 상
대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보이는 것은 눈 하나뿐…….
  "눈이 보여! 누군가의 눈이…….이게 뭐지?"
  주의깊게 이 광경을 지켜보던 현암이 입을 열었다.
  "제길……. 이젠 별것에까지 다 잡귀가 설치는군!"
 
 
  거미의 성장(2)
 
  넷은 컴퓨터를 가운데에 놓고 논의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발견된 이 이상한 현
상에도 뭔가 영적인 이유가 있을 것임에 분명했고, 그러한 것들은 절대 그냥 넘어
갈 수 없는 것이다. 승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분명히 영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기는 했지만, 절대  일반적인 형태는 아녜
요. 그러니 이 컴퓨터 자체에 혼령이 맺혔거나 한 건 아니라는 말이죠."
  "그건 당연한 일이야."
  현암이 대답했고 박신부도 말했다.
  "나는 구세대라 컴퓨터에 대해서는 잘  모르네만 혼령이 컴퓨터에 맺혔다고 그
컴퓨터를 이상하게 동작하도록 만든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네."
  준후가 반박했다.
  "아녜요. 컴퓨터도 기곈데……. 전기로 동작되는 거니 전기로 힘을 가하면  이상
하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녜요?"
  현암이 웃었다.
  "준후야, 그래. 너는 뇌전을 쓸 수 있지? 그러면 그 뇌전으로 컴퓨터를 오(誤)동
작시킬 수 있니? 해볼래?"
  "에이……. 그러면 부서지고 말죠. 회로들이 얼마나 예민한 건데……."
  "그건 영에게도 마찬가지일거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니 아예 볼 수조차 없을
미세한 전기신호를 물리력을 가해 다룬다는 건  영력으로도 안돼. 네가 봤다는 거
미그림, 그건 분명히 어떤 신종 바이러스가 붙은 걸거야."
  승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돌리다가 전원을 끄면 어째서 영의 소리가 들
리는 거죠? 제가 보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
  "그 바이러스 프로그램에 뭔가가 있어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바이러스는  원래
증식성이죠. 거기에 어떤 자의 영이 맺히고……."
  현암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그 영의 소리는 원래 바이러스의  일부가 섞인 걸까? 그러니까
원래의 바이러스 코드에 영이 붙은 거고 그 바이러스가 복제되어  나갈 때마다 그
영력의 부분들이 거기에 깃들여서……."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어요."
  박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그런 물질이 아닌 정보에 영이 깃들 수  있다니,
그리고 증식이 된다면……."
  준후는 다시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분명 컴퓨터를 잘 알았던 자의 영일 거예요…….  원래 영이 나눠져서 분
체를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이죠. 비쉬누 신이 아바타라를 만드는 것이나, 시바 신
이 자신의 분신을 창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이야기일 거예요."
  승희가 급히 준후의 말을 받았다.
  "그러                                                                          
                                 그런 분신이 아니야. 영이면서도 일부분……. 마치 하나
의 데이터 조각에 불과한……."
  "아이구. 나는 머리가 아파지는구먼. 아멘!"
  박신부는 머리를 싸쥐었고, 현암은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좋아 좋아. 그러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군. 그러니까 그 흉측한 그림이  나타
나게 하는 바이러스의 원래 프로그램에 영이 하나 붙었고, 그러다 보니 그 바이러
스가 증식됨에 따라 점차로 원래의 영의 분체가 나뉘어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말
이로군. 소설이 문단에서 문장으로, 다시  낱말로 분해되는 것처럼 말이야……. 좋
아. 신기한 일이지만 그럴 수 있다고 보자구. 그런데  준후의 컴퓨터에서 나왔다는
메시지가 뭐였다고 했지?"
  "파괴를 위한…….이라는 뜻이었어."
  "파괴를 위한다? 그러면 이거 보통의 일이 아니군.  분명 원한령류가 깃들어 있
는 프로그램이 분명해. 그리고 놈이 프로그램으로 숨어들었다면 뭔가 목적이 있었
을 거야. 아니라면 굳이 컴퓨터 프로그램에 숨어들 이유도 없고, 계속 쪼개지며 분
화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준후와 승희, 박신부도 뭔가 섬뜩한 것을 느꼈다. 원한령이 목적을 가지고  통신
망에 잠입하여 떠돌아다닌다니……. 그것도 바이러스성  코드를 타고 한없이 분화
되어 나간다면…….
  "잘은 모르겠지만……."
  박신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아. 속히 근원을 밝혀서 놈을 잡아내야 해!"
  "하지만 신부님, 우리는 일정도 복잡한데……."
  "아무리 일정이 촉박해도 이런 식으로  이상한일이 벌어지는걸 보고 그냥 지나
칠 수 없지 않겠니?"
  "그건 그래요."
  "그런데 가만히 있어보자……. 남의  컴퓨터를 이렇게 망가뜨려놔서  어떻게 한
다?"
  승희가 눈을 깜박거리며 마치 화난 것 같은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기
더니 입을 열었다.
  "이 집 주인인 혜영이 언니는 컴퓨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원래 프로그
래머였으니까. 아마 그 언니 정도라면 쉽게 고칠 수 있겠죠.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다면 사과는 해야죠. 혜영누나는 연희누나와 같이 나갔죠?"
  준후가 얼굴에 풀이 푹 죽어서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현암이 웃
으며 말했다.
  "기운을 내. 혜영 씨에게야 뭐 그다지 큰 일은 아니잖니. 바이러스 프로그램  정
도면 프로그래머라면 쉽게 해결하겠지.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건지 한번 볼까?
한 번만 다시 보자."
  현암이 말하자 준후가 다시  컴퓨터를 켰다. 그러나 컴퓨터에  전원을 넣자마자
을씨년스러운 거미그림만 화면에 떠오를 뿐, 아무런 작동도 되지 않았다.
  "에이! 벌써 바이러스가 다 퍼진 모양이에요!"
  승희가 깨끗한 도스 디스크를 들고 왔다. 다시 부팅을 하고……. 하드  디스크로
들어간 승희가 헉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준후야! 이거 네가 다 쓴 내용이니?"
  승희가 루트 디렉토리 상에서 dir/w를 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Volume in drive C has LOVELOVE!!!
   Volume Serial Number is 3F5E-63E8
   Directory of C:\
 
  COMMAND.COM   TREEINFO.NCD   CONFIG.SYS    AUTOEXEC.BAT
ARAK3488.DAT
  5 file(s) 244723712 bytes
                    0 bytes free
 
  "저게 뭐야! 아라크3488? 그리고 딴 디렉토리는 다 어디 갔어?  아깐 모뎀 디렉
토리도 있고 많던데."
  다시 승희가 떨리는 손길로 dir을 눌렀다.
 
   Volume in drive C has LOVELOVE!!!
   Volume Serial Number is 3F5E-63E8
   Directory of C:\
 
  COMMAND.COM      0 08-12-93  5:40p
  TREEINFO.NCD     0 11-10-93  3:25p
  CONFIG.SYS       0 01-01-80  6:43p
  AUTOEXEC.BAT     0 12-02-93  3:24p
  ARAK3488 DAT 244723712 12-21-93 18:33p
      5 file(s) 244723712 bytes
                        0 bytes free
 
  "으악! 이럴 수가! 시스템 파일까지 다 잡아먹었네!"
  승희가 한 번 더 dir을 하자 이번에는 예의 그 거미의 무늬만이 나타났다.
  다시 전원을 끄자 이번에는 조금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파괴를 위한 일념에서…….
  다시 플로피로 리부팅을 한 결과는 마찬가지였고, chkdsk를 해보자
 
  Volume Serial Number is 3F5E-63E8
  Errors found, F parameter not specified
  Corrections will not be written to disk
 
    0 lost allocation units found in 0 chains.
    0 bytes disk space would be freed
 
    244801536 bytes total disk space
        77824 bytes in 2 hidden files
            0 bytes in 0 directories
    244801536 bytes in 5 user files
            0 bytes available on disk
 
         4096 bytes in each allocation unit
       59766 total allocation units on disk
       0 available allocation units on disk
 
    655360 total bytes memory
    589344 bytes free
 
  "이건……. 이렇게 지독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영의 두려움보다도 지독한 바이러스의 성질에 일동은  전율했다. 그리고 승희는
막 추가된 한 구절에 대한 생각을 해내고 있는 참이었다.
  -파괴를 위한 일념에서…….
 
 
  거미의 증식
 
  정혜영이라는 유학생은 연희와 함께 먹을 것을 잔뜩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이곳으로 초대를 한 것이지만 막상 일행
중 꼬마가 자신의 컴퓨터를 가지고 장난하다가 엉망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혜영도
약간은 기분 나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신종의 바이러스 때문이
라고 하자 호기심이 돌았는지 박신부 일행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혜영 자
신이 살짝 컴퓨터를 만져보더니 거기에 나타난 그 이상한 증상에  대해 굉장한 호
기심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역시 혜영도 프로그래머로서의  '끼'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있는 듯했다. 혜영은 곧 새로 나타난  바이러스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을 잊은
듯 한동안 컴퓨터 키만 두드리며 땀을 흘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지독하네요! 어떤 사람이 이런 걸 만들었을까?"
  승희가 물었다.
  "왜요?"
  "도대체 복구가 안 되는군요. 부트섹터, FAT, 루트  디렉토리가 다 날아갔어요!
어디서 이런 게 묻어왔죠?"
  "준후야!"
  승희가 부르자 준후가 벌레씹은 얼굴이 되어  쭈뼛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컴퓨터
를 잘 모르는 박신부와 현암은 잠자코 뒷전에 물러서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
의 깊게 듣고 있었다.
  "예, 누나!"
  "너 도대체 아까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된거야!"
  "글쎄요……. 뭐 난 통신 프로그램 같은 게 보여서  거기에 있는 전화번호를 몇
번 그냥 쳐본 것밖에 없어요. 뭐 통신 접속한 것밖에 없는데……."
  승희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혜영에게 물었다.
  "접속만 해도 바이러스가 묻게 할 수 있나요?"
  "아뇨. 그건 어렵겠죠. 일부러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면 모르지만,  BBS 운영 체
제를 그렇게 새로 만든다는 건 좀……."
  "그러면 뭔가 파일을 다운받거나 해야 바이러스가 묻어올 수 있다는 말이군요."
  "아마 그럴 거예요."
  "준후야, 너 혹시 파일을 다운로드 받은 적이 있니?"
  "아뇨. 그냥 접속하자마자 이렇게 되었어요."
  "그래?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원래 바이러스가 안에 들어  있었다는 말인가? 바
이러스 검색 프로그램에도 걸린 것 같지 않던데……."
  혜영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노트북에 있는 바이러스 체
크 프로그램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이 노트북 안에 있는 프로그램도 저 안에 있던  것과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
데 별로 이상한 점은 없는데……. 이상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렇게 된 것일까
……."
  혜영이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준후에게 물었다.
  "준후 맞지? 그래, 준후야. 프로그램 접속을 몇 번이나 해봤지?"
  준후가 머리를 살짝 긁었다.
  "한 네다섯 번 정도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잔뜩 나와서. 다른데 걸어보고 또
걸어보고 여러 번 했었어요. 혹시 한글은 안 나오나 해서요.헤헤……."
  "아, 그랬군. 그런데 거기에 있는 전화번호는 다 정상적인 비비의 번호들인데 어
쩌다가 그런 바이러스가 묻었지?"
  "글쎄요. 아 맞아요.  중간에 전화번호를  손으로 친 적이 있는데. 잘못  쳤는지
이상한 비비에 접속된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뭐 인터네트하고  중간지점 인 것
같던 비비던데."
  "전화번호를 기억해?"
  "글쎄. 기억은 못하지만 맨 끝자리를 하나 잘못 쳤을 거예요. 아, 맞아요. 이걸보
고 치다가 틀렸어요."
  준후는 리스트에 올려진 전화번호  중 하나를 가리켰고  혜영은 그 전화번호를
끝자리가 0으로 끝나는 것부터 해서 하나하나  접속을 시도해보았다. 처음엔 가정
집만 나오거나 부재 신호 따위만 나오다가 여섯 번째 순서가 되었을 때 BBS에 접
속이 되었다. 준후가 말했다.
  "그래요. 아! 여기예요."
  화면에 떠오른 로고에는 이상한 안시(ANSI) 문자를 쓴 그림들과 정신병자의 비
비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장난기의 메시지가 씌어 있었다.
  "이거 원 참. 싸이코들의 BBS?"
  혜영이 노트북의 엔터키를 쳤다. 그러나 화면은 갑자기 먹통이 되었고 한참이나
하드디스크가 빙빙 돌아가는 것 같더니 간신히 초기화면이 떴다.
  "이게 뭐지? 뭔가가 이상한데……."
  혜영은 초기화면에서 몇 군데 가입 신청 메뉴를 돌아다녔으나 그때도  하드디스
크 입출력이 잦아졌으며 무엇보다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후가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맞아요. 아까도 이랬던 것 같아요. 아까는 노드가 안 좋아서 이렇게 된 줄 알았
었는데……. 그런데……."
  혜영이 다시 엔터키를 눌렀을 때 갑자기 화면에 거미 그림이 나타났다.
  "앗! 이게 뭐야."
  혜영이 소리를 치자 승희가 재빨리 노트북을 껐다. 잘 그리지 못한 거미 그림이
었지만 갑자기 나오자 거미가 액정 모니터에서 뛰쳐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
다. 그런데 전원을 끌 때 역시 몇 가닥의 목소리가 승희의 마음속에 들려왔다.
  -비록 곧 놈이 죽겠지만…….
  승희는 긴장된 얼굴로 준후를  돌아보았고 준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 또한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들고 있어서 그 그 의미를 알아들은 것이었다. 그리고 승희
는 재빨리 투시를 해서 방금  눈앞을 스쳐간 다른 영상을  보았다. 이번에 투시로
본 영상은 어떤 자의 창백한 입술이었다.
  "눈과 입술, 그 두 개 가지고는 얼굴  같은 것을 투시하기 어려운데. 좀더 찾아
볼 수 있을 거예요."
  "투시요? 아이고 그게 뭐예요?"
  "음…….나중에 이야기해 줄게요. 좌우간  이 번호로 주소를  알아낼 수 없을까
요?"
  혜영이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듯 하더니 승희에게 말했다.
  "이것은 일반 가정집 전화번호에요. 그러니까 이 BBS는  틀림없이 개인 비비라
할 수 있겠지요. 금방 주소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거미의 공격
 
  한참이나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서 사설 비비가 있는 집의 주소를 알아내자  일
행은 두 대의 차에 나눠서 그 집에 찾아가고 있었다.  혜영은 박신부, 승희와 함께
뒤차에 탔는데 혜영은 차안에서 승희에게 간략하게 사건과 그들의 정체에 대한 이
야기를 듣고는 낯빛이 질려 있었다. 승희가  친절한 혜영에게 거짓말을 하기가 뭣
해서 아예 까놓고 말한 것이다. 좀 얼떨떨한  듯 한동안 창 밖만을 바라보던 혜영
은 그 와중에도 노트북 안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고립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퇴마사가 무엇인지 납득은 안 갔지만 자기가 들은 거미보다는 귀신들과 영들을 상
대로 싸운다는 이들에게서 뭔가 더 무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승희가 피식 웃으
면서 혜영에게 말했다.
  "무서워할 것은 없어요. 저희를 도와주셔야 해요……. 혜영언니가 이 프로그램에
서 자세한 것을 알아내야 될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 좀 도와주세요. 예?"
   그러나 혜영은 귀신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후라 하얗게 질린 채 자신의 컴
퓨터만을 두들기고 있었다. 승희가 덧붙였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번 일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어떤 자에게 원한
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한데 원한을 어떻게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풀었는
지 알 수가 없네요.  아무튼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죠."
  혜영이 나직이 한숨을 쉬는 소리를 듣고 운전하던  박신부도 한숨을 쉬었다. 앞
차에서는 현암과 준후가 연희와 함께 타고 있었다. 준후가 말했다.
  "레오라는 사람의 주소가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현암은 뭔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승희의 말에 의하면 여태까지 들은 그 영의  메시지는 두 가지라고 했어.'놈이
곧 죽겠지만'과 '파괴를 위한…….' 만약 우리의 생각대로 그 바이러스에 깃든 영
이 원한령이라면 말이야. 그 영은 지금 파괴를 하려는 것  같은데. 아마도 곧 죽을
지 모르는 자신의 원수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 것인 것 같아. 어때 내 생각이 맞
는 것 같니?"
  "그럴 수 있겠군요."
  현암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                                                                             
  좀                                                                                  
                                                                  
                                        이 있어. 파괴를 통해서 복수를 한다니…….  그

도 바이러스를 통해 복수를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바이러스로 파괴할
수 있는 건 기껏 컴퓨터의 프로그램이나  데이타일 것 아닐까?  그런데 컴퓨터의
프로그램이나 데이타를 파괴한다고 해서 사람의 목숨을 해치게 할 수  없는 것 아
냐? 물론 그 사람을 망하게 한다거나 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 사람을 직접적
으로 죽이는 일은 할 수 있을까? 뭔가 좀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뭔가 이유가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보러 가는 것 아니에요."
  "하긴 그래.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컴퓨터 BBS가 어떻게 해서 그런 바이
러스에 정복되었는지 알아보는 게 중요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바이러스는 사방
으로 퍼져나가고 있을지 모르잖아. 그나저나, 뒤의 신부님 차는  왜 이리 느리지…
….쩝……."
  현암이 모는 차는 어느덧  레오라는 사람의 독신자  아파트 부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느덧 차는 그 레오가 살고 있는 아파트 부근에 도착하자 연희가 지도책
을 한참이나 뒤적거리고는 여기가 틀림없을 거라고 단정해주었고  잠시 후 도착한
뒤 차에서 내린 혜영도 이곳이 맞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박신부가 안경을 고쳐
쓰고는 말했다.
  "어떻게 하지?……. 일단 누가 올라가 보겠어."
  현암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가봐야죠. 그리고 연희 씨가 통역을 해줘야 할  테니 같이 가주셨으면 좋
겠는데요."
  "나도 같이 가보겠네."
  박신부가 앞으로 나섰다. 준후는 외국인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내키
지 않는 듯 직접 나서지 않았고, 승희는 따라가고 싶었지만 혜영이 무서우니까 같
이 있어달라는 듯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올라가지 못했다.
  "아니 뭐가 무섭다는 거예요."
  "음……. 저 꼬마하고만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어쩌라는 거예요. 무
서워요!"
  "저 꼬마라구요?. 저 꼬마가 얼마나 대단한 애인지……. 아이고!"
  설명하려던 승희는 그냥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다  말고 이야기를 맺었다. 현
암과 박신부 그리고 연희는 우선 우체통의 주소를 확인했다.  레오라는 사설 비비
의 운영자가 사는 곳은 6층쯤 되는 것 같았다.  떠날 때 승희는 혹시나 해서 연희
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을 한 조각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준후가 가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고물아파트라서 일행은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고 그 사이에 나머지 세 명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혜영이 무서움을 잊
으려는 듯 한참 동안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뭔가 조금은 알아냈어요. 이 프로그램 이름은 '아라크노이드'인 것 같군요.  그
리고 하드디스크의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하드디스크를 온통 채
워버리는 특징이 있는 것 같아요."
  "아! 그래요? 그리고요?"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소스 코드를 놓고 몇 달은 봐야 알 수 있을……."
  혜영이 말하는 중에 갑자기 준후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준후는 소리를 질렀다.
  "엎드려욧!"
  승희가 놀라며 거의 반사적으로 혜영의 몸을  덮쳐누르고 준후도 고개를 푹 숙
였다. 옆 창문으로부터 무언가가 날아와 유리를  와장창 깨고는 다시 반대편의 창
문을 깨부수고 나갔다. 소방용 손도끼였다.  혜영은 눌려진 상황에서 찢어질  듯한
고함을 질러댔고, 준후는 재빨리 차의 문을 열고 몸을 굴렸다.
  준후의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눈이 흐려져  있는 미쉘이었고 그의 손
에는 또 하나의 손도끼가 들려 있었다.
 
 
   아래층에서 일장의 활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현암과 박신부는 연희
와 함께 6층의 레오의 집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613호. 일단 불어를 할
줄 아는 연희가 문을 두드리고 벨을 몇 번이나 눌렀으나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안
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군요. 안쪽의 불이 켜져 있는 것 같던데."
  집안에서 밖을 내다보도록 만들어진 작은 렌즈  구멍으로 하얀 형광등 빛이 아
주 약하게나마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 집안에 불이 켜져 있고, 사람이 있
는 것이 분명했는데 벨 소리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조금은 기분이 묘했다. 외출
중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꺼림칙한 기분에 박신부가 문 앞으로 나서서 안쪽을
향해 살짝 투시를 하기 시작했다. 원래  준후나 승희의 투시력에 비하면 박신부의
능력은 훨씬 미약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투시는 할 수 있었다. 한참이나 눈
을 감고서 신경을 집중한 다음에야 박신부는 입을 열었다.
  "이거 분명 이상하긴 하군. 안에 누군가 있는 듯한 기척은 느껴지는데. 어쩌면…
…."
  박신부가 잠시 다시 눈을 감더니 덧붙였다.
  "안에 있는 건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군."
  "죽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BBS 운영자가 왜?"
  "모르겠네. 하여간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있어. 방을 잘못 찾은 것 같지도  않고
……. 하여간 무슨 일인지 모르니 내가 관리실에 가서 키를 빌려와야겠네. 말이 안
통하니 연희양도 같이 가세. 우리가 가서 키를 빌려올 테니까 현암군 자네는 여기
서 잠시 지키고 있게나."
  "예. 그러죠."
  올라오면서 본 계단 중턱에 써 붙여진 벽보에 의하면 관리실은 맨 위층에 위치
해 있었다. 연희와 박신부는 일단 관리실에서  키를 달라고 하기 위해서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고, 현암은 아파트의 복도 문  앞에서 어정거리며 잠시 동안은 기다리
고 서 있었다. 그러나 성질 급한 현암으로선  가만히 기다리고 서 있는 다는 것이
체질상 맞지 않았다. 처음 한 1분 정도는 가만히 기다리고 서 있었으나, 이내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문 안쪽을 기웃거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문 안쪽에 누
군가 죽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서  있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었다. 문을 부술까 하다가  간신히 그 충동을 억누른 현암
은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문에 대고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나 집중해보
았다. 원래 현암의 혈도는 자유로이 유통되지 않아 귀까지 퍼지지 않기 때문에 초
인적인 청력은 가지지 못했지만, 그래도 공력을 표면적으로 귀까지 퍼트려서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소리를 잘 들리게 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현암이 귀를 기울여서
안쪽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 하는데 안에서는 아무 소리가 없었고 오히려 난데없
이 바깥 쪽에서 낯익은 여자의 비명소리가 현암의 귀에 아주 가냘프게 들려왔다.
  '아. 이건 이건 승희의 비명소린데. 그럼 바깥에서 혹시 무슨 일이…….'
  현암은 깜짝 놀라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보니 승희가 있는
아파트 앞 뜰 쪽으로 면한 창문이 하나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로 가야 아래
가 보일 것 같았다.
 
  남자가 막 준후의 멱살을 잡고 위로 치켜올리는 것을 보고 승희는 비명을 질렀
다. 준후는 자신이 워낙 악령들과 주로 싸우다보니 지금 자신들을 공격한 남자 또
한 분명 무슨 악령이 씌었을 것으로 혼자 판단하고 재빨리  남자에게 달려들어 부
적을 던졌으나 부적은 아무런 힘도 발휘 못한 채 남자의 몸에 맞고 떨어져 내렸다.
영과는 관계 없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마치 무슨 동물처럼 몸을 웅
크렸다가 갑자기 전광석화처럼 준후의 멱살을 잡고 무서운  힘으로 위로 치켜올렸
다. 멱살을 잡힌 준후가 허공으로  치켜올려지자 몸을 버둥거려보았으나 사람에게
는 주술을 쓰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하는 준후인지라 어떤 수를 쓰거나 하지는 않
았다. 남자가 무슨 노래가락 같은 것을 흥얼흥얼거리면서 태연하게 허리춤 뒤편에
찔러두었던 듯한 밧줄을 꺼냈다. 혜영은 의외의 광경에 거의 쇼크를 먹고 몸을 움
직이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승희는 비명을 지른 다음 앞뒤 가릴것없이
남자에게 달려들어 준후를 잡고 있는 남자의 오른팔에 매달렸다.
  "놔! 내려 놔.놓으라고!"
  "M re araign e Sans app tit……
   S mpressa de manger son mari……"
  남자의 입에선 계속 흥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어로 하는  소리인지라
승희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어쨌거나 지금 이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분
명했다. 남자는 준후의 목을 움켜잡은 채 켁켁거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준
후의 목에 왼손으로 밧줄을 감으려 했다.  승희는 남자의 오른팔을 잡고 흔들어대
고 있었으나 그 힘조차 이겨낼 수 없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은 기운이 무척 세어
진다던 말이 사실인 듯했다.
  "안돼! 어서 놔! 놓으란 말이야!"
  "Ce aui restaint du mari
   Regarda Sa femme sans voir……."
  다급해진 승희는 남자의 팔에 매달리는 것을 포기하고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
해서 자신의 몸을 날려서 남자의 다리를 걸었다. 옛날에 누군가에게서 서양인들은
상체의 힘이 좋은 대신 하체가 약해서 다리를 걸면 거의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다
는 말을 주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맞았는지 남자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
고 넘어졌다. 목에 밧줄이 걸린  준후가 헉 하면서 남자가  넘어지는데 딸려 목이
졸려지는 것을 승희가 재빨리 밧줄을  잡는 바람에 간신히 심한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강한 힘으로 목을 잡혀  있었던 준후는 반쯤 의식을 잃고 있
었고 승희도 남자가 밧줄을 당기자 중심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승희는 쓰러
지면서 재빨리 남자와 자신과의 사이에 여분으로 있던 밧줄을 뒤로 쭉 끌어들였다.
남자의 손에서 밧줄이 미끄러져서 어느  정도 승희와 준후 사이에 밧줄의  여백이
생기자 남자도 다시 힘을 주어 밧줄을 잡았고 줄은 팽팽해졌다. 남자는 넘어 졌던
몸을 서서히 일으키더니 승희와 준후가 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미소
를 띠우며 다시 그 알 수 없는 노랫가락 같은 것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Le Ventre de m re araign e agit
   Et donna naissance  plusienurs petits
   Les petits d vor rent alors leur m re……."
  그러더니 자리에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몸을 발로 버티고 줄을 끌어 잡아당기
는 것이었다. 실로 엄청난 힘이었다. 승희는 자신이 손을 놓으면 정신을 잃고 쓰러
져 있는 준후의 목이 졸려 질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줄을  잡고 줄다리기를 하듯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승희가 아무리 힘을 주어 버텨도 몸이 조금씩 앞으
로 끌려가는 듯했으며 몸에 더 힘을 주자 손에서 밧줄이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
다. 손바닥이 벗겨지는지 몹시 쓰라렸다.  하필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혜영은 아직도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고만 있었
다.
  "뭐하는 거야! 어서 빨리 도와줘요!"
  승희는 소리를 쳤으나 혜영은 얼빠진 얼굴로  덜덜 떨면서 멍한 눈으로 중얼거
리는 것이었다.
  "거미. 거미래. 거미……."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서 도와줘요! 급해요, 어서!"
  "엄마 거미가 아빠 거미를 잡아먹고 ……."
  지금 혜영 또한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도움을 기대하기는커녕 오히
려 쇼크 상태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 같았다. 놀란 데다가 남자가 흥얼거리는
가락이 너무도 음산해서 승희도 기절하고 싶을  판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
다. 승희는 이를 악물면서 다시 한 번 도움을 청하는  비명을 질렀다. 손에서 밧줄
이 점점 미끄러져 나가며 거친 밧줄이 승희의  손바닥을 찢는 듯했다. 더 이상 힘
을 주기가 어려워졌다. 정말 남자의 힘은  놀라웠고 손에서 밧줄이 많이 빠져나가
서 이제는 승희의 뒤편으로는 밧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준후의 목에 걸린 줄
과 승희의 손에 잡고 있던 사이의 줄이 팽팽해지려 하고 있었다.
  '더 버텨야 해. 버텨야 해. 왜 소리를 지르는데 아무도  나와보지 않는 거지. 다
른 사람들은 뭘 하는 거야. 이런 제기랄…….'
  "Voyant ceci, les restes de leur p re……
   En rires clat rent……
   Le mangeur de toutes mani res……
   Se fera mang son heure……"
  그러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고 있는 남자가 조금 더 큰소리로 흥얼거리며  갑자
기 손에 힘을 더 증가시키자, 승희는 더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벌렁 넘어졌다. 뒤
에 목이 매어져 있던 준후가 무의식중에 헉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승희
는 체면이고 뭐고 할것없이 소리를 질러대며 땅에 엎드린 채로 줄을 잡고 버텼다.
남자는 양 손으로 줄을 잡고 힘껏 잡아당기자 승희는 몸채로  끌려서 남자의 손이
닿을 듯한 곳까지 끌려가기 이르렀다. 그런데 갑자기 위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승희야!"
  현암이었다. 승희는 반가운 목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아
파트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한 손으로 줄을 잡고  한 손으로 뭔가를
뽑아 들었다. 그러나 승희는 현암 쪽을 쳐다보고 있는 중이라 남자가 어떻게 행동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그러나 현암이 6층에서 내려다보니 줄을 잡아당기고 있
는 남자가 한쪽 손으로 줄을  옮겨잡고 뭔가를 꺼내드는 것이  보였다. 들고 있는
것이 네온싸인 불빛에 번쩍하고 반사했다.
  '이런, 급하다!'
  현암은 급히 계단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계단을 내려가도 저 남자
가 도끼를 내려치는 시간보다 빠르지는  못할 것이었고 승희의 머리는 두  토막이
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지금 월향을 날릴 수도 없었다. 이곳의 창은 상당히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현암이 양팔로 몸을 끌어올려야만 겨우 밖을  내다볼 수 있
었기 때문이다. 현암은 더 이상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앞뒤  생각 없이 팔에 힘을
주어 창문 너머로 그대로 몸을 날렸다.
  시간적으로는 몇 초 안될지  모르지만 허공을 날아서  떨어지는 동안은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할 여유를 준다. 일단 현암은  몸을 날려서 왼손이 자유롭게 되자 왼
손의 월향검을 내뻗었다. 일단 승희를 구해주라는 의도로 월향검을 뿌리고나자 땅
바닥이 벼락처럼 금세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로 땅을 짚어볼까?'
  허공에서 자세를 바꾸는  것은 현암으로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6층이라고
하면 높이가 20미터 이상  된다. 아무리 현암이라  할지라도 공력으로 보호되지도
않는 다리로 그 위치에서 떨어져 땅을 밟으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생각나는 방법
은 한가지뿐이었다. 현암은 허공에서 떨어지면서 몸의 중심을 바꿔서 머리가 아래
쪽으로 향하게 한 다음 순간적으로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땅바닥이 덮쳐들
듯 눈앞에 크게 확산된 순간, 현암은 공력으로 가득 찬 오른손을 내밀면서 엉겁결
에 자기 자신이 알고 있었으나 아직 한번도 써보지 않은 태극기공  18자 9결 중에
'나(拿)'자 결을 운용했다.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꺄아아악!"
  여자의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면서 흰 물체가 번뜩하고 날아오자  승희
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암이  6층에서 아래로 뛰어내려 곤두박질치는
것이 보이자 승희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순
간 써늘하게 날아온 월향은 승희의 머리 위를 넘어서 남자에게 덮쳐들었고 승희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줄을  한 손으로 잡고 있는  남자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고, 막 자기 머리를 향해 떨어지려는  도끼의 목이 싹둑 잘려서 도끼 날
이 옆으로 떨어지는 것이  슬로비디오처럼 승희의 눈에  들어왔다. 승희는 다급한
나머지 재빨리 뒤로 몸을 젖혔다. 승희는 놀라 줄을 엉겁결에 놓았으나 남자가 한
손에 잡고 있던 줄을 당기자, 또 다시 준후가 무의식 중에 헉 소리를 내면서 몸이
조금 끌려갔다. 승희는 욕을 하며 다시 밧줄을 잡고 버티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 놈아! 놔! 이 우라질 놈! 죽일 놈! 망할 놈!"
  그러나 승희의 욕설이 남자의 귀에 들어갈 까닭이 없었고 남자는 오히려 더 크
게 노랫가락을 중얼거렸다.
  "Rira bien qui rira le dernier……
   Rira bien qui rira le dernier……"
  그러는 중에 허공에 제비처럼 원을 그리며  돌아온 월향검이 남자와 승희 사이
를 휙 하고 지나가면서 밧줄을 싹둑 잘라버렸다.  승희와 남자는 둘 다 자기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넘어지면서도 남자는  얼굴 표정 하나 변함 없
이 음산한 목소리로 이상한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쾅 하면서 둔중한 소리가 들리자 현암은 골이 지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공
력을 오른손으로 성공적으로 집중시켜 땅바닥을 내리치는 바람에  몸이 직접 땅에
부딪치지는 않았고 큰 타격은 공력으로 보호되는 오른팔이 흡수해 주었지만, 오른
팔을 통해서 전해진 충격 때문에 수련을 많이 쌓은 현암일지라도 아찔하게 만들었
다. 그러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월향검을 날려 놓았다고 해도 월향검은 특정
한 이유 없이 사람을 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 저쪽에 있는 남자가 뭐하
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준후가 벌써 쓰러져 있고 승희도 고전을 하고 있는 것으
로 보아, 어서 그쪽으로 서둘러 가보아야 했다. 현암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보니까 아파트  화단에 오른팔이 거의  어깨까지 깊숙이 박혀
있어서 쉽사리 손이 빠지지 않았다.
  '윽! 산 넘어 산이라니.'
  현암은 급한 김에 공력으로 팔을 단번에 빼려 했지만 공력은 오른팔에만 돌 뿐
이었으니 묻혀있는 오른팔에 공력을 돌린다 해서 어깨까지 깊숙이 들어간 팔이 빠
질 리 없었다. 현암은 하는 수 없이  조금씩 오른손에 힘을 넣어 오른팔을 돌면서
힘없는 왼팔과 다리의 힘으로 몸을 들어올려서 팔을 빼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잘 안 빠지네. 승희야 조금만 참아.'
  현암은 마음속으로 소리를 치면서 계속 힘을 주었다.
 
 
   거미의 먹이
 
  관리실에 올라갔던 박신부와 연희는 아래 주차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관리인을  데리고 레오가 살고 있는 방에 여벌  열쇠를
가지고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 관리인은  순순히 키를 주지 않으려 했지
만             검은             사제복             입은            신부가              
심각                                                  
                                                        쥣수는 없었겠지만-계속  이야
기를 하고, 또 연희가-물론 거짓말이지만-다급한 듯한 어조로 뭐라고 이야기를 하
자 군말 없이 키를 찾아들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
  "뭐라고 했길래 저 사람이 순순히 문을 열어주겠다는 거지?"
  박신부가 내려가는 길에 살짝 연희에게 물었다. 연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레오라는 사람은 평소 우울증이 있던  사람인데 지금 집에 있는 것은 분명
하지만 문도 열어주지 않고 연락을 안 받으니  자살한 게 아닐까 하고 겁을 줬죠.
이 아파트는 자살자가 많다는군요."
  박신부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돌았으나 이내 씁쓸한 얼굴로  바뀌었다. 연희도
박신부와 같은 생각인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 레오라는 사람 정말 죽었으면 어떻게 하죠? 무서울 것 같아요. 신
부님 기분도 이상하다면서요."
  "글쎄."
  세 명은 레오의 집 문 앞에 도착했고  박신부와 연희 둘은 관리인의 뒷전에 서
서 관리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연희는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레오라는 사람이 정말로 죽어 있을까봐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
제까지 죽은 사람을 못 본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박신부는 제발 자신의 예감이 틀리기를 바랐지만 관리인이 들어가고 나서
조금 있다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그렇지 않기를 바랐는데."
  박신부와 연희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마루는  어수선하게 오만 잡동사니들
로 어지럽혀져 있었고  관리인은 방문 하나를 열어놓고 그 앞에 서서  연신 "하느
님 맙소사" 하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관리인의 몸에 가려서 두 사람에게는
아직 방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연희가 겁을 먹고 앞으로  나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가면서 관리인의 어깨를 살짝 쳤다.
  "왜 그러시죠?."
  연희가 묻자 관리인이 멍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 사람이 자살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연희가 고개를 내밀어 방안의 광경을 둘러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윽 하는 소리
를 내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관리인을 한쪽으로  잠시 밀쳐내고 방으로 들어간 박
신부의 입에서도 저절로 "아멘" 소리를 중얼거렸다. 방안은 몹시 지저분했고 온갖
책들과 디스켓, 프린터 용지에 먼지까지  가득 뒤덮여서 거의 발을  디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두 대가 켜져 있었는데,  그중 한대의 모니터에는
예의 그 시커먼 거미 그림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온몸이 꽁꽁 묶이
고 머리가 갈라진 수박처럼 완전히 두 조각이 난 채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의자
는 뒤집혀져 있었다. 그러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뇌수가 디스켓이며 책들을
흠뻑 적시고 있어서 아무도 그 안쪽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연희가 욕지
기가 나는 것을 참으려는 듯한 목소리로 관리인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박신부에게
들려주었다.
  "의자에 묶여 있다가 머리를 맞은 것 같다는 군요."
  그러나 박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머리를 맞았다면 왜 몸이
꽁꽁 묶여 있다는 말인가. 몸이 꽁꽁 묶여서 머리를 친 것이 이론적으로 합당하다
고 생각했으나 지금 그것을 문제삼을 계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를 묶은 줄은
……. 박신부는 성호를 그으며 관리인에게 누군가  부르라는 듯이 눈짓을 했고 관
리인은 서둘러서 거실의 전화로 갔다. 경찰을  부르는 듯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
다. 연희는 여전히 시체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고 박신부는 주변을 꼼꼼이 살피다
가 연희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연희가 이런 광경을 오래 보고 있는 게 좋지 않게
생각되기도 했고…….
  "내려가서 혜영 씨를 불러오는 것이 어떨까?"
  연희가 놀란 듯 말했다.
  "혜영 씨에게 이 광경을 보여주려고요?"
  "그러면 경찰이 시체를 치울 때까지 조금 기다릴까? 그러나 저 화면이 떠 있는
컴퓨터에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연희가 시체를 보지 않으려 손으로  눈 밑을 가리며 책상 위를  보았다. 책상의
두 대의 컴퓨터 중 한  대는 데스크탑이었고, 그 옆에 있는  또 한 대의 컴퓨터는
노트북이었다. 데스크탑의 모니터에는 그 을씨년스러운  거미 그림이 떠올라 있었
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데스크탑과 노트북, 두 콤퓨터가 두꺼운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트북은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계속해서 알아보기 어려운 16진수 숫자들이 스크롤되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 거미 바이러스인가 뭔가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던 중이 아니었을
까.'
  연희는 일단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아래층으로 향했다. 혜영을
부른다기보다는 이 끔직한 곳에서 멀어지려는 생각이 연희의  마음속에 더 강했는
지 도 몰랐다. 박신부는 방안을 좀더 꼼꼼이 살펴보다가 마루로 나가 소파에 몸을
묻고 있는 관리인에게 가서 그의  등을 도닥거리며 기도를 하는  시늉을 했다. 그
관리인도 마침 카톨릭 신자였는지 박신부가 기도를 하자 같이 성호를 그으면서 크
게 한숨을 내쉬었다.
 
  승희는 쓰러져 있는 준후를 몸으로  가린 채 음험한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째려보고 있었다. 남자가 인상을 쓴다거나  화를 내거나 난폭한 행동을 했
다면 차라리 덜 무서웠겠지만 그 남자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이상한 자세로 몸을
웅크린 채 히죽거리며 웃고만 있었다. 승희가 소리를 질렀다.
  "현암군. 빨리 와 도와줘!"
  피하고 싶었지만 승희는 무서워서 준후까지 끌고 몸을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
았다. 계속해서 현암을 소리쳐 부르면서 승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준후의 부적이 듣지 않은 것을 보면  악령이 씌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제정
신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정신병자인 것 같은데.'
  남자의 마음속을 한번 읽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눈을 감고 투시할 상황이 아니
었다. 한동안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뒤에선 준후가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승희는
남자에게서 경계의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뒤로 돌려서 준후의 몸을 짚어보았다.
준후는 아직 몸을 일으키진 못하고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승희의 손에 준후의 목에 걸려 있는 밧줄이 잡혔다. 그  밧줄이 가는 목에 걸려
있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 느껴져서 승희는 뒤로 손을 돌린 자세 그대로 준후의 밧
줄을 풀어주려 애썼다. 그러나 볼  수가 없어서 밧줄은 잘 풀리지  않았다. 안달이
난 승희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다 '설마 그 사이에…….' 하는 생각으로 재빨리 몸
을 돌려서 밧줄을 풀어내려고 시선을 남자에게서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을 놓치
지 않고 남자는 승희에게로 휙 하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
던 현암이 소리를 쳤다. 승희가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눈
앞에 남자가 덮쳐오는 모습이 보였다. 승희는 너무 무서워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
았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퍽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덮쳐오던 자세
그대로 옆으로 나자빠져서 땅에서 구르는 것이었다. 승희가 고개를 돌려보니 부들
부들 떨고 있는 혜영의 손에서 깨어진 빈  병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정신을 차
린 혜영이엉겁결에 빈 병으로 승희에게 달려드는 남자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다.
  "고마워."
  승희가 말하자 혜영은 대답 대신 그 자리에 주저 앉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마
음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안간힘을  쓰던 현암은 그제서야 간신히 땅에서  팔을
빼냈다. 그리고 말 없이 승희 쪽으로 다가가 준후를 안아들었고 준후의 목에서 밧
줄을 풀어냈다. 승희도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우는지 어쩌는지 고개를 무릎에 묻
었고 현암은 준후를 다독거렸다. 준후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별 탈
은 없는 듯했고 다만 목이 퉁퉁 부어 있었다. 잠시  일행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
다. 그러다가 승희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고는 울고 있는 혜영에게
다가가서 혜영의 등을 도닥거려 주었다. 현암이 조용히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승희가 대답했다.
  "몰라……. 차 속에 있는데 이 사람이 갑자기 도끼를 던지며 덤벼들었어. 뭐  하
는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정신병자인가봐."
  현암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준후를 내려놓고 남자가 가지고 있던 밧줄을  가지
고와 그 남자를 꽁꽁 묶었다. 승희는 안심이 되는 듯 혜영을 다독거리면서 남자를
향해 이제는 남자의 마음을 투시를 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소리
치며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연희였다.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승희는 현암과 연희에게 자기들이  겪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문제의  그 남자는
그 사이 정신을 차렸는지 묶인 상태에서  몸을 조금씩 움찔거렸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그 이상한 미소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다시 그 흥얼거리는 노
랫소리가 들려오자 승희가 이를 갈면서 벌떡 일어났다.
  "야, 임마 그만 중얼거려! 듣기 싫어 죽겠어!"
  승희가 남자를 발로 차려는 것을 현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살짝 밀어
냈다. 남자가 그 노랫소리를 내자 혜영이 다시 몸을 떨면서 울음을 터뜨렸고, 승희
는 남자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다가  혜영을 다독거리면서 다시 멀리 떨어진  차
속으로 데리고 갔다. 현암은 아무 말 없이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고 옆에서 연
희가 남자의 노래를 듣고 있다가 그 내용을 현암에게 말해주었다.
  "뭔가 좀 이상해요. 이 사람도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요."
  "이 남자가 뭐라고 하는데?"
  "이 남자가 하는 노래는 거미 이야기예요."
  "거미?……."
  "네에. 거미예요. 동요 같군요……."
  연희는 조용히 남자가 흥얼거리는 노래를 통역해서 현암에게 들려주었다.
 
  "M re araign e Sans app tit
   식욕이 없는 엄마거미가
   S mpressa de manger son mari.
   제 남편을 먹어치웠다.
   Ce aui restaint du mari
   남편의 남은 껍질이
   Regarda Sa femme sans voir.
   제 부인을 무심코 바라봤다.
   Le Ventre de m re araign e agit
   엄마 거미의 배가 움찔거리더니
   Et donna naissance  plusienurs petits.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다.
   Les petits d vor rent alors leur m re
   그때에 새끼들이 엄마거미를 잡아먹었고
   Voyant cew, les restes de leur p re
   이것을 보던 아빠거미의 껍질이
   En rires clat rent.
   소리내어 웃어댔다.
   Le mangeur de toutes mani res
   먹는 자는 어쨌거나
   Se fera mang  son heure.
   다음번에는 먹히는 것.
   Rira bien qui rira le dernier.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으로 웃는 자인걸.
   Rira bien qui rira le dernier…….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으로 웃는 자인걸……."
 
  현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들이 쫓고 있는 그 원한령이 깃들여 있는 바이
러스도 바로 거미 아니었던가. 혹시 무슨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연희는 고개를 돌려서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잘라진 손도끼를 보더니 헉 하
는 소리를 냈다.
  "또 왜 그러지?"
  "참. 깜박 잊고 이야기를 안 했는데 레오라는  사람, 그 BBS 운영자는 자기 방
에서 죽어 있었어요."
  "뭐라구? 죽어 있다구?"
  "예. 머리가 두 토막이 나서 비참하게……. 그런데 이 남자가 도끼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왠지……."
  "도대체 어떤 일일까?"
  현암은 남자의 품을 뒤져서 지갑을 꺼냈다. 거기엔 신분증과 운전면허증이 들어
있었다. 연희에게 보여주니 연희는 남자의 이름이  장 쉥 미쉘이고 대학원 전산과
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말해주었다.
  "최근에 등록을 한 것으로 보니 원래 정신병자 같지는 않은데요. 정말 이상하군
요. 더군다나 거미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도끼를 들고 있었던 것  보니 위에 죽어
있는 남자와도 무관한 것 같지가  않아요. 이 미쉘이라는 사람이  레오를 죽인 것
같아요."
  현암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번뜩거리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거미 그림이 나오는 바이러스, 거미 노래를  중얼거리고 있는 도끼를 든 남자.
그리고 도끼에 맞은 채 머리가 두 토막 나서 죽어 있다는 거미 바이러스의 BBS운
영자.'
  연희가 또 한가지 사실을 덧붙여 주었다.
  "위쪽엔 케이블로 서로 연결된  컴퓨터 두 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는 바로
그 거미 그림이 떠올라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하나의 컴퓨터에는 계속 프로그램
이 돌아가고 있었어요. 분명 서로  접속되어 있었는데……. 그건 거미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아요."
  "뭔가가 다 얽혀 있는 것 같아. 이건……."
  현암과 연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저만치에서  경찰
차가 오는 것이 보였다.
  현암은 연희에게 경찰에 사정 이야기를 잘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위층을 향
하여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런 난리가 났는데도 누구 하나 내다보는 사람이 없
다니, 좀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좌우간 뭔가 주변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이
연관성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레오라는 남자가 죽어 있다는  방을 자세히 보
아야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6층으로 레오의 방을 찾아간 현암은 곧 박신부를 만났다. 피차간에 겪은 일들을
간단히 이야기한 다음에 현암은 레오의 방을 구경하길 원했고 박신부는 말없이 현
암에게 열린 방문을 손가락질해서  보여주었다. 마루에 앉아  있던 관리인은 아무
말 없이 창 밖만 보고 있었다. 현암이 그 방으로 들어가자 쓰러져 있는 레오의 시
체와 함께 모니터에 떠올라 있는 거미그림이 눈에 확 들어왔다. 현암은 눈살을 찌
푸리면서 거미 그림을 잠시 쳐다보다가 옆에 아직도 숫자들이 스크롤되고 있는 다
른 컴퓨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컴퓨터는 신기하게도 옆 컴퓨터와  접속이 되고 있는데 바이러스가 들어가
지 않는 것 같군요."
  "음, 그런 것 같네."
  그리고 현암은 다시 쓰러져 있는 레오의 시체를 다시 곰곰이 살펴보았다.
  그것을 보고 박신부가 말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어."
  현암이 반문했다.
  "뭐죠?"
  "저 사람 말이야. 저 사람이 어떻게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현암은 별로 생각지 않은 채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누군가 들어와서 의자에 앉아 있던 저 사람을 꽁꽁 묶고 그 다
음에 도끼로 머리를 내려쳤겠죠. 그래서 쓰러졌고 저런 자세가 되었겠구요."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네. 잘 보게. 저 사람이 쓰러져 있는 자세가 이상하지
않은가?"
  "글쎄요. 별로 이상하다고 보이지는 않는데요."
  "글쎄. 자세히 봐. 저 사람은 의자 뒤쪽으로 엎어진 것이 아니라 의자 앞으로 쓰
러져 있어. 저 사람을 꽁꽁 묶고 도끼로 쳤다면 구태여 그 사람을 의자에 앉혀 놓
고 뒤로 돌려놓고 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거야 뭐 중요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이상한 것은 또 있어. 한번 자세히 보게. 저 남자를 묶은 줄에 피가  튀
어 있나?"
  현암은 속으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미처 현암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머리를 쳐서 머리가 두 토막이 나고 피가 사방으로 튀어 바닥에 가득 고일 정도면
레오를 묶었던 줄에도 피가 튀었어야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레오를 묶은 줄에
는 피가 묻은 자국은 있었지만 피가 튄 흔적은 없었다. 박신부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 참 이상하단 말이야. 저걸 봐서는 저 사람을 도끼로 쳐서 죽인 후 다시
시체를 묶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왜 쳐서 죽인 사람을 다시 줄로 묶으려 했을까.
그것도 칭칭 줄로 묶어서 반쯤 미라를 만들어 놓은 상태로 말이야. 시체가 움직이
거나 도망칠 것도 아닌데……."
  현암의 머리에 뭔가 스쳐지나갔다.
  "죽인 다음에 줄로 묶는 경우가 있지요."
  "어떤 경우인가?"
  "거미는 그렇게 합니다. 저 아래 도끼를 휘둘렀던 남자……. 연희 씨의 말에  따
르면 그 남자는 자신이 거미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요. 거미에 대한 노래를 읊조
리고 있었고."
  "거미에 대한 노래?"
  박신부의 눈이 책상 위에 있는  거미 그림이 떠 있는 모니터로  향했다. 현암이
나직이 박신부에게 말했다.
  "저 위에 있는 컴퓨터. 아무래도 이상해요.  혜영 씨의 컴퓨터도 그랬지만 거미
바이러스의 접촉만 하면 금세 컴퓨터는 거미 바이러스에게  점령되어 버렸잖아요?
그러나 저 옆에 있는 컴퓨터는 안 그렇네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박신부는 방바닥을 다시 한 번 살폈다. 레오라는 남자가 도끼의 일격을 맞아 죽
은지는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방바닥에  흩어져 있는 피는 이제 서서히 굳어
가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박신부도 옛날에  검시관인 장박사를 따라 다니면서
여러 유형의 시체를 보아 왔기 때문에 이 정도로 피가 응고되려면 적어도 두세 시
간은 지나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최소한 두세 시간 동안 저 컴퓨터
는 그 옆의 컴퓨터와 접속이 되고 있었을 텐데도 거미  바이러스가 들어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살인자가 컴퓨터를 켠  것이라고 최소한으로 잡아도 박신부가
방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컴퓨터가 작동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혹시 이 사람이 그 거미  바이러스를 만든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면 저 옆의
컴퓨터는 그 거미 바이러스를 막는 프로그램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고."
  "맞아요. 저 컴퓨터가 대단히 중요하겠는데요. 저걸 슬쩍 가져가서 혜영 씨나 누
구에게 보여주면 안 될까요?. 경찰의 손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다루기가 어려워지
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저 물건을 그냥 집어가자는 말인가?"
  "글쎄요. 좀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경찰은 분명 이를  단순한 살인 사건으로 처
리해 버릴 것이 분명해요. 그러나  저 바이러스에 원한령이 깃들어 있는  이상, 저
프로그램과 컴퓨터들이 경찰의 손에 그냥 넘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지요.
이 일은 틀림없이 그 바이러스가 중점이 된 것이고 그렇다면  그 원한령과도 관계
가 있지요. 경찰은 이런 영적인 일을 해결하지는 못해요."
  "글쎄."
  박신부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현암이 막무가내로 자그마한 노트북
과 옆에 있는 컴퓨터와의 접속선을 모조리 빼버린 후 노트북과  코드를 모두 챙겨
서 옆에 끼었다.
  "아무도        모를         거예요.        도둑질을         하자는        것은      
  아                                   
                                                                        니야.  저  관
리인도 
컴퓨터가 두 대 있다는 것을 보았는데."
  현암은 입술을 깨물었다. 관리인이 정말 컴퓨터가 두  대 있었는지 기억할지 못
할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으나 어쨌든 이  컴퓨터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현암은
잠시 생각하다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났는지 재빨리 노트북 컴퓨터를 끼고 박신
부가 말리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2,3분 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또 다른 노트북 컴퓨터가 들려 있었다.
  "이건 혜영 씨가 가지고 다니던 노트북입니다. 이걸 옆에다 놔두면 그 관리인도
컴퓨터 2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더라도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하겠지요.  혜영
씨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네요. 마루에 있는 관리인은 저
를 보지는 못했어요."
  현암은 노트북 컴퓨터를 내려놓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박신부는  그런 현암을
말리지도 못하고 잠시 서 있다가 손수건을 꺼내들고 지금 내려놓은 혜영의 노트북
컴퓨터에 묻어 있을지 모르는 지문을 깨끗이 닦아냈다.
  "이건 원. 완전히 범죄자가 다 되어가는구만……."
  경찰들이 막 연희와의 이야기를 마친 듯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박신부
는 찝찝한 얼굴로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거미의 목적
 
  경찰의 관점에서 볼 때, 바로 그 다음날 사건은 이제 어느 정도 수습이 되는 듯
했다. 범인은 도끼에서 검출된 혈흔 등으로 볼 때 미쉘임이 분명했고 그는 정신병
자를 위한 특별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박신부와 승희는 증인 겸 범인 체포자 겸
최초 목격자 등등의 명목으로 사방의 경찰에 불려다니는  신세가 되어서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정신을  차린 준후는 다행히 별  다른 쇼크는 먹지
않았는지 다시 쾌활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만 목에 하얀 붕대를 감고 며
칠 동안 다녀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답답하다며 인상을  한번 찌푸린 것뿐
이었다. 연희는 그런 준후가 안쓰러워서  계속 준후와 놀아주었다. 현암은  혜영과
함께 자신이 들고 온 노트북 컴퓨터로 뭔가 작업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혜영은
처음에는 쇼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참을 헤매었지만 현암과 연희가 잘 타이
르고 그 노트북 컴퓨터를 보여주자 오기가 되살아나는 듯 다시 프로그래머의 '끼'
를 발휘해서 그 컴퓨터 안에 들어있는 여러 루틴들을 분석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녁 때가 되어서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현암이 지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소파에 누워 있을 때 방 안에서 혜영이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찾았다! 이제 알았어요!"
  혜영의 목소리를 듣고 현암과 준후와 연희는 혜영에게로  달려갔다. 방 안은 사
방 디스켓이며 종이들로 잔뜩 어지러져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하지만 혜영은
헝크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만면의 미소를 띠고는 싱글벙글이었다.
  "무슨 일이죠? 혜영 씨!"
  "드디어 알아냈어요. 이 노트북 컴퓨터 안에 들어 있던  것은 그 바이러스의 소
스 코드와 그 바이러스를 억제할 수 있는 에디터 루틴, 그리고 바이러스가 퍼져나
가는 것을 감지하는 모니터링  루틴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이것만 있으면
그 바이러스가 어디로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살펴볼 수 있어요. 그러나 단 하나, 컴
퓨터들끼리 네트워크로 연결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컴퓨터간의 교신을 할 수 있
을 때만 모니터링이 되요. 그래서 어느 쪽으로 퍼졌는지 다 알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러면 제가 그것을 바탕으로 거미 바이러스인지 뭔지를 잡는 백
신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죠. 그래서 그 백신 프로그램을 네트워크에 띄우면……."
  "좋아요. 그건 혜영씨 맘대로 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  바이러
스들이 어디어디로 퍼져나갔느냐는 사실입니다. 그걸  알면 그쪽으로 퍼진 바이러
스 루틴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냈던 그 원한령의 메시지를 전부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러면 그 원한령이 무엇을 노리고 있던  것인지 밝혀낼 수 있 것 아
닙니까?"
  혜영이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화국 컴퓨터에 접속하여-혜영도 해
킹 전문가였다.-전화번호로 여러 주소 코드를 알아내  줄줄 출력하는 동안에도 자
신이 알아낸 거미 바이러스의 특징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거미의 설치, 그리고
유충 거미들의 분리와 성장 등등…….
  그러는 사이에 지친 얼굴로 승희가 박신부보다 먼저 돌아왔다.
  "에이, 빌어먹을. 경찰서는 어느 나라든 갈 곳이 못 돼. 도대체 사람을 들볶으니.
원."
  여기저기 컴퓨터가 설치된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든 현암이 막 들어온 승희를 보
고 말했다.
  "승희야. 같이 나가자."
  승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또 나가? 난 몹시 피곤한데……."
  "나가야 해. 바이러스들이 퍼져 있는 곳이 어디인지 대충 알아냈어. 그 바이러스
에 깃들여 있는 원한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승희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런 제기랄. 난 잠도 마음대로 못 자나. 그만 좀 괴롭혀. 그만 좀!"
  승희가 중얼거리는 것도 듣지 않고 현암은 혜영만 남겨 놓은 채 승희를 준후와
연희도 같이 데리고 문을 나섰다. 혜영은 나가는 네 명에게 인사조차 없었다. 아마
도 이번에 그 백신 프로그램인가  뭔가를 만드느라 또 다시 프로그래머의  '끼'를
훨훨 불태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고생을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닌 결과, 약간의 성과가 있었다.  주소지
에 써 있었던 곳들 중 이미 몇 군데에서는 그 거미 바이러스  침투를 알아내고 피
해를 입은 뒤 아예 하드디스크를 포맷하는 조치를 취해 버린  후여서 거기에 깃든
메시지는 자세히 알아낼 수 없었으며, 또 몇 군데에서는 아예 컴퓨터가 있는 곳에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바람에 거미 구경도 할 수 없었지만, 나머지 몇 군데
에서는 컴퓨터에 떠올라 있는 거미 그림과 함께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와 함께 퍼
져나가는 그 원한령의 분화된 메시지를 승희가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메시지
들은 저번보다 더 단편적이어서 '과거…….'라든가 '참을  수…….'라든가 '침투…
….'와 같은 몇몇 단어만이 들렸을 뿐 저번같이  '파괴의 일념'과 같은 문장은 남
아 있지 않았다. 연희가 이것은 그 바이러스가 좀더 분산되어서 사방으로 퍼져 나
간 결과가 아니겠냐고 조심스럽게 말했고, 현암은 어둡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희는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 남자의  얼굴을 조금씩 알아낼 수는 있었지만 아주  극히
일부분을 조각 맞추기 식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었고 그것을  한데 모으기는 힘들
었다. 더욱이 승희가 알아낸 것은 그 남자의 얼굴 중에서도  몇 군데 되지 않았다.
처음에 눈과 창백한 입술을 본 이후로 코의 일부분과 이마의 한쪽 그리고 귀와 한
쪽 뺨 정도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것이 거기에 출력된 주소 리스트를 따라 돌아다
닌 노력의 전부고 그것만으로는 별소득이 없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남자의
얼굴이라든가 약간의 메시지를 알아낸  것은 수확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알아낸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놈이 비록 곧 죽겠지만……. 용서……. 남을 것이다…….  이 지경에. 내가…….
그 사실. 영원히. 프로그램……. 파괴를 위한 일념으로……. 저주. 빠트린.
 
  승희가 토막토막 적었던 것을 정리해서 보여준 메시지들을 보고 현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파악할 수가 없군 그래. 처음에 알아냈던 두 개의 좀 긴
메시지 말고 이번에 알아낸  것들은 단어 하나씩밖에  안되잖아. 더군다나 순서도
정확히                                        알                                        
  수                                                                                  
                          
                                側然 어떻게 놈의 생각을 알아낼 수 있단  말인지…
…."
  그러자 준후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가 말했다.
  "승희누나. 얼굴의 어떤 부분이 보였다고 했지요?"
  "음, 글쎄다. 여기저기 보이긴 했지만 아주  작은 부분들일 뿐이고 얼굴 전체는
생각하기 어려워."
  "승희누나 그림 잘 그려요?"
  "그건 갑자기 왜 묻지?"
  "승희누나 아버님은 화가셨잖아요. 승희누나도 아버님을 닮았으면 그림을 잘 그
릴 수 있을 거고, 조금씩 생각나는 부분을  그려 얼굴을 만든다면 좀더 얼굴의 윤
곽이 확실히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준후의 말은 그러니까 몽타주를  만들어보자는 거였다. 모두들 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라 동의했고 승희는 좀 멋쩍은 듯이 말했다.
  "난 그다지 그림을 잘 못 그리는데. 그렇지만 한번 해보자고."
  승희가 근처 상점에서 노트와 펜을 사들고 왔다.  일행이 카페에 자리잡고 앉아
식사를 하는 동안 승희는 종이에 끄적거리고 있었다. 어느덧 주변이 어두컴컴해질
때가 되어서야 승희는 간신히  그림 하나를 만들어냈고 그때까지  어슬렁거리면서
카페 안에서 잡담을 나누거나 혹은 졸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승희가 그림을 완
성했다고 하자 승희 주위로 몰려들었다.
  "아이고 더 잘 그릴 수 있었는데……."
  "누가 네 그림 실력 보자는 거니?"
  "와!"
  자신은 실력이 별로라고 했지만 상당히 잘 만들어진 그림이었다. 특이하게 보이
는 점은 별로 없었지만 조금 깡마르고 신경질적인 듯한 인상을  주는 남자의 얼굴
이었다. 현암이 물었다.
  "이 인상이 확실한 것 같아?"
  승희가 슬며시-회심에 찬 듯한-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대강 비슷은 한 것 같아. 나 원래 그림 실력 없다고 말했잖아."
  "아니, 그림 실력 문제가 아니고 이 그림을 바탕으로 그 영에 대한 것을 추적해
낼 수 있느냐는 거지."
  현암이 자신의 그림 실력에 대해서는 아무말을  하지 않자 승희는 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한 번 해보긴 해봐야 할 텐데……. 별로 자신은……."
  그러자 준후가 끼여들었다.
  "일단 이 남자의 신원을 알아내기만 한다면 일이 쉬워지는  것 아녜요. 이 그림
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을 찾아보는 방법은 없을까요?"
  "여긴 우리 나라가 아니란다. 준후야."
  준후는 다시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 되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뭔가 단서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연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단서가 되지? 이 얼굴 하나를 알아냈다고 사람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
닐텐데. 더구나 이건 사진도 아니고 그림이잖아."
  "아니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준후가 한번 헛기침을 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승희누나의 투시는 그림만으론 잘 되지 않을지 모르죠. 더군다나 그 사람은 이
미 죽은 사람이니까요. 원한령이 되어 나타난걸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
니까 승희누나는 안되더라도 제가 소혼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승희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이 그림만 보고 소혼을 할 수  있겠니? 내가 그림을 그리긴 제대로 그린
걸까? 호호."
  현암은 눈을 감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준후가 아무런 기색 없이 말했다.
  "그림만 가지고는 좀 힘들겠지요. 하지만 혜영 누나의 컴퓨터에 들어 있는 바이
러스에 어느 정도 원한령의 기운은 남아 있잖아요. 그것과 이 그림을 합하면 어느
정도 소혼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러나 현암이 준후의 말에 못을 박았다.
  "그렇다고 소혼술을 자꾸 써서는 되나. 그런  일은 부작용이 생겨서 안돼.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구."
  현암이 고개를 젓는데도 준후는 계속 매달려 졸랐다.
  "배운 것을 이런 때 써먹지 않으면 언제 써먹어요.  영을 잡아내기 위해선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요. 형! 다른 방법 있어요? 이  그림 한 장하고, 어떤 말인지
도 제대로 모르는 저 메시지만 가지고 뭔가를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암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준후의 말이 맞을지 몰랐다. 준후가 소혼술을  시키
면 영의 정체를 알아내기가 훨씬 쉬울 테니까. 그러나 현암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
다. 현암의 얼굴이 좀 음울해지자 다른 사람들도 입을 닫았다. 일행은 우울한 기분
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현암이 일행과  함께 혜영의 집에 도착해보니 박신부
가 와 있었다. 그러더니 박신부가 종이 몇 장을 현암과 승희와 연희에게 나눠주었
다.
  "거기서 얼마나 닦달을 당했는지 몹시 피곤하군. 그들 말로는 그 학생은 최근까
지는 정상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던데……."
  승희가 말했다.
  "누구 말이죠? 우리를 공격한 미쉘이라는 놈 말이에요?  원……. 그렇다면 갑자
기 미친 건가?"
  "음, 경찰 쪽에서는 그 행동을 정신적인 장애로 판단하는 모양이야. 내가 어렵게
그들을 설득해서 그 사람의 증상에 대해 정신병 의사가 기술한 것을 복사해 왔지.
이걸 연희양이 좀 읽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연희는 박신부가 가지고 온  자료를 읽어주었다. 거기에는 미쉘이  뭔가 거미에
대한 콤플렉스로 심한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스스로 거미
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는 내용 외에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
두 어려운 학술 용어로 쓰여져 있어서 읽어봐야 알 수도 없었고…….
  박신부가 말을 끄집어냈다.
  "그렇다면               그                미쉘이란               남자는              
  거                                                
                                                                들어냈거나,   아니면 
그 거

바이러스를 많이 이용하다가 미쳐 버렸는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말이죠."
  승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미쉘이란 남자를 한번 투시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오히려 더 확
실해질지 모르는데……."
  눈만 깜박거리고 있던 준후가 답답하다는 듯 중간에 끼어들었다.
  "제가 소혼을 해보면 일이 빨라진다니까요."
  "그건 안 된다. 준후야!"
  박신부가 꾸짖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술수를 자꾸 써서 네 명을  갉아먹게 할 순 없어.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하지 않더냐? 승희야, 그럼 그 미쉘이란 남자에 대해 투시를 해보겠니?"
  준후는 자기 의견이 묵살당하자 불만스런 듯이 박신부에게 다시 말을 했다.
  "그렇다면 승희누나가 미쉘이라는 남자를 투시할 때  저도 그 내용을 알 수 있
게 해주세요. 그러면 소혼은 하지  않더라도 그 영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떠돌아다니는지 읽어낼 수 있으니까요.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고 명이 깎이
지도 않아요. 예?"
  "음……."
  박신부는 아무말 없었다. 현암도 생각을 하다가 그  정도는 괜찮을 듯 싶었는지
연희에게 받은 세크메트의 눈을  준후와 승희에게 건네주었다.  승희는 곧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미쉘이란 남자에 대해  투시하기 시작했다. 무척 혼란스런 느낌이
었다. 거미의 그림, 옛날에 창밖에서 보았던 거미줄의 모양,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
램들의 내용들이 아무런 이유도 연관성도  없이 머릿속에 정신없이 스쳐지나갔다.
미쉘의 마음속은 승희로서는 골치가 지끈지끈 아플 정도로 복잡했다. 도대체 제정
신이 아닌 사람의 마음속이라 온갖가지 생각이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
로 떠오르고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다. 간신히  참으면서 계속 투시를 하다보니 뭔
가 한 가지 장면이 눈에 띄었다. 바로  자기가 그렸던 그림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
의 형상이었다. 남자는 몹시 화를 내는 듯한 얼굴로 잠시 나타났다가 아득하니 멀
어져 갔다. 안타까운 마음에 승희는 미쉘에게-들리지 않을 테지만-안달을 부렸다.
  '아니야. 저 남자에 대한 것을 빨리 더 생각하라니까. 아이고! 저런, 한번 더 봤
으면…….'
  승희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미쉘의 마음속을  추적했다. 세크메트의 눈을 통
해 준후의 느낌이 나직하게 전달되어 왔다.
  -누나, 바로 저 남자 같네요. 누나가 그렸던 그림하고 매우 비슷해요.
  잠시 후 미쉘의 마음속에 그 남자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아마 미쉘은 그 남
자의 모습을 꿈에서 본 모양이다. 영이  미쉘의 꿈속으로 들어가 아라크노이드 프
로그램을 만들도록 지시한 듯했다.  둘은 프로그램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전문가인 승희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그 남자가 미쉘을 정
신적으로 심하게 압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준후의 낮은 탄성이 들렸다.
  "아! 저거……. 저 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아요."
  초조하게 기다리던 현암이 급하게 말을 되받았다.
  "그게 뭐지?"
  "잠깐만요. 지금 제가 추적해볼게요. 미쉘의 마음속을 투시하는 것은 그  정도만
해도 괜찮아요. 그 남자의 메시지가 느껴져요. 아이고! 잊기 전에 어서……."
  이번에는 준후가 땀을 한참 뻘뻘 흘리며 뭔가  생각에 잠겼다. 준후는 박신부가
얼른 집어준 종이에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글자를 써내려갔다.
  -놈이 곧 죽을 것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다.
  박신부가 탄성을 올렸다.
  "맞아! 틀림없어! 바로 이 메시지야. 바이러스에 들어 있던 그  원한령의 단편적
인 생각인 것 같아. 오로지  그 생각만 하면서 원한령이  저 바이러스를 미쉘에게
만들게 했고, 지금 준후가 그 기억을 잡아낸 것 같군. 준후야, 계속……."
  준후는 잠시 펜을 놓고 계속 중얼거렸다.
  "나를 이렇게 만……든……. 아니, 이 지경에 빠트린 놈에게."
  준후는 말을 하려다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거
의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준후가 애를 써서 꽤 긴 문
장을 만들어냈다. 현암이 소리내어 그 문장을 읽어내려 갔다.
  "<놈이 곧 죽을 것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다. 나를 이 지경에  빠트린 놈에게,
놈의 완전한 파괴를 위한 일념으로 나는 최후의 저주를 퍼붓는다. 놈을 죽이는 것
은 암이 아니라 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나는 내 프로그
램 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놈보다 훨씬 오래…….> 이게 전부냐, 준후야?"
  준후가 힘들었는지 잠시 숨을 헐떡이다가 말했다.
  "글쎄요. 이게 전부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헛고생한 건 아닌지……."
  "아니야, 분명히 중요한 내용이 있어."
  박신부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준후가 쓴 글을 몇  번 읽어보고 와서 잠시 후 입
을 열었다.
  "여긴 놈이 곧 죽을 것이라 했고 놈을 죽게 하는 것은 암이라고 메시지에 되어
있지 않니? 또 놈보다는 자신이 프로그램 속에 남아 더 오래  사는 것이라는 내용
등등으로 미루어볼 때, 이 원한령이 노리는 상대는 암환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
는군."
  연희가 한숨을 쉬었다.
  "암환자요? 참 지독한 사람이군요. 그 글로 봐서는 얼마 안 있어도 죽을 사람인
것 같은데, 그것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자기 손으로 죽이려 하다니……."
  "사람에겐 누구나 다 그런 심리가 있지. 자기 손으로  직접 끝장을 내지 않으면
시원하지                       않은                        그런                        
심리                                                          
                                                쥣닦고 있던 승희가 말했다.
  "그나저나 이것만 가지고는 별로 소용이 없겠는데요? 암환자와 바이러스. 이 두
가지를 어떤 식으로 연관시킬 수 있죠? 신부님 말씀 대로라면 그 원한령은 바이러
스를 만들어서 암환자를 해치려는 것 같은데……. 컴퓨터 바이러스로 사람을 어떻
게 해친다는 거야. 무슨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컴퓨터가 자기 혼자 걸어다녀서 모
니터로 머리라도 치지 않으면……. 호호호."
  "앗! 잠깐만!"
  현암이 놀란 듯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잠깐만! 바이러스가 들어간다고 해서 컴퓨터가 움직일 수야 없지……. 직
접적으로 바이러스가 암환자를 죽일 수는 없을 거야. 그러나…… 간접적으로 암환
자가 치료를 못 받게 할 수는 있지. 컴퓨터를 망가뜨리고 모든 데이터를 지운다면
말야……."
  "그게 무슨 말이야? 치료를 컴퓨터가 하나? 의사가 하지."
  "아니야. 요즘은 병원에서도 모든 기록을 컴퓨터로 정리해. 만약 그 암환자의 기
록,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투병과정, 투약과정이 적힌 자료들을 전부 컴퓨터에 기록
해 두었다면, 그리고 그 데이터가 모조리 일순간에 날아가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치료과정들이  입력되어
있는 컴퓨터의 기록이 모조리 없어진다면 암환자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할 것
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해질 수밖에.
  연희가 안색이 창백해져서 말했다.
  "그럼, 그 프로그램의 원한령이 바로 이걸 노리고……. 그렇다면 그 병원의 모든
암환자가 전부 타격을 받을 수도……."
  일행은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현암의 추리대로라면 그 원한령은 분명 자신
이 복수할 수 있는-아무 영이나 물리력을  쓸 수는 없으니까-최선의 방법을 찾아
낸 것은 확실했다. 그러면 그에 따라 죄없이 피해를 입을 다른 수십, 아니 수백 명
의 사람들은……. 준후가 슬픈 듯이 말했다.
  "아!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그 사람이 노리는 사람을  우선 찾아야 하
는 거 아니에요?"
  승희가 짜증나는 듯이 말했다.
  "도대체 암환자가 한두 명이라야 말이지. 치료하는 병원도 한두 곳도 아닐 거고.
도대체 이 넒은 프랑스 땅에서 어떻게 그 사람을 찾아내냔 말이야."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박신부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가만 가만. 좀더 생각해 보자.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 현암군이 무슨 생
각이 있는 모양인데……."
  현암은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면 으레 그러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번쩍거리는
눈초리로 입을 꼭 다물고 시선을 한곳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현암의 머리가 급박
하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그런 현암의 모습만 말 없
이 쳐다보고 있었다.
 
 
  거미의 행동
 
  한참을 생각한 끝에 현암은 마침내 입을  열었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사람들
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현암의 얼굴이 밝은  표정인 것으로 보아 뭔가 단서를
잡고 추리해낸 모양이었다.
  "자, 잘 들어봐. 일단 우리가 어떤 어떤 것들을 알고 있는가부터 생각해봐야 해.
우리는 승희의 그림으로 일단 그 남자의  대체적인 얼굴 윤곽은 알아냈어. 그리고
그 사람이 프로그래머였다는 것, 또 어느 암  환자에 대해서 아주 뿌리 깊은 복수
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도. 그리고 내 생각인데 말야, 그  사람이 죽은 지는 그
다지 오래 된 것 같지 않아. 기껏 해야 1년 미만일 것 같아."
  승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이 사람은 원한령이긴 하지만 여태껏 우리가 상대했던 것처럼 그렇게 강한 영
은 아니야. 다만 지능은 훨씬 좋은 것 같아. 그렇기  때문에 미쉘이란 남자의 꿈에
나타나 미쉘에게 프로그램을 만들게 암암리에 압박을 주어서  이 아라크노이드 바
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었겠지. 아마 꿈속에서  그 미쉘이라는 프로그래머에게 그
프로그램에 대해 많이 가르쳐주었을 거야. 내  생각으로는 그 미쉘이란 사람이 프
로그램을 만든 것이 거의 확실한 것 같아. 레오라는 사람은 BBS 운영자였다니 그
미쉘이란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자기의 BBS에 그 프로그램을 올려주는 역할을 했을
거고……. 그리고 정신이 이상해진 미쉘은 레오를 죽이게 되었을  거야. 거미가 먹
이를 구하는 것처럼 말야. 아마  거미의 흉내를 내서 레오를 꽁꽁  묶었을 것이고,
착란을 일으켜서 아무에게나 덤벼든 거겠지. 거미는  본래 닥치는 대로 먹이를 잡
잖아? 그 원한령이 죽은 다음에 암으로 입원한 사람의 거취를 자세히 알아내는 것
은 어려웠을 것 아냐? 원래. 암으로 죽을 정도의 진단이 내려진 환자라면 오랜 기
간 동안 살아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이  원한령의 주인도 기껏해야 1년 정도 전
에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거지."
  박신부가 조용히
                               이해가 되는군. 그러면 그 다음에는?"
  "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또 있어요. 이 원한령은 그 암환자에 대해  조
사를 많이 했거나 잘 알고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 환자가 있는 병원의  구조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바이러스를  만들겠다는 애초의 생
각에서 짐작해 볼 때 그 환자의 진료기록이나 모든 것이 컴퓨터로 보관되고 그 컴
퓨터는 더군다나 네트워크와 맞물려 있는 대용량의 컴퓨터라는 것도 그 사람이 소
상히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거죠.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이러스를 만
들어서 그 네트워크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지금으로 볼 때는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암환자를 바이러스를 이용해서 해
칠 수 있는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요……."
  "그건 일리가 있는 말이군. 좋아. 그러면 ."
  "그 다음은 당연하죠. 이제부터는 발로 뛰어야 합니다. 프랑스 내에 암환자를 수
용하는 병원을 일단 찾아내는 거죠. 그 리스트를 만든 다음 거기에서 대용량의 컴
퓨터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어서 외부의 네트워크와 수시로 연결될 수 있는 병원이
나 센터 기관을 추려 내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그 기관들을 찾아가서 이 그림들
을 보여주는 거죠. 근래에 이곳에서 근무를 하거나 연관이 많았던 사람들 중에 사
망한 사람이 있었는지. 말이죠."
  "그건 또 어떻게 생각해 냈지?"
  "당연하지요. 아무리 프로그래머 라 해도 자기와 전혀 관계없는 병원이 어떤 식
으로 컴퓨터 네트워크와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아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어요?
더군다나 그 시스템이 외부와 연결되어서 침투되어 들어갈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
도 쉬운 일이 아니죠. 그렇다면 그 원한령의  임자가 되는 남자가 애당초에 그 모
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그곳에 근무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
지요. 그렇지 않나요?."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지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그 말에 정말 일리가 있는 것 같군.  좋아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서 알아보도록 하세."
  박신부를 비롯한 일행이 몸을  막 일으키는데 뒤에서  혜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어요."
  "예?. 뭐가 문제지요?"
  "지금 백신 프로그램이  거의 완성되어가고 간간이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잠깐잠깐. 그 모니터링 프로그램이란 게 뭐죠?"
  "그러니까. 그건 지금 퍼져나가고 있는 바이러스의 상황을  자동으로 감시할 수
있게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에요.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를 맨 처음 만든 사람이 어
떤 목적에선지 만들어 놓은 것이죠. 그런데."
  "그런데. 뭐죠?"
  "지금 방금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돌리다가 그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가  교통국
컴퓨터에 들어간 것을 알았어요."
  "교통국 컴퓨터요?. 그렇다면 큰일이에요. 모든 열차 및 전동차의 운행에 타격을
입을 수 있을지 몰라요. 떼제베(TGV)도 물론이고, 자동 제어되는 신호등에까지 영
향을 줄지도……."
  "이거 큰일이군요!"
  "엉뚱한 곳으로 바이러스가 번져나가서 영향을 주는군……."
  연희가 급히 라디오를 틀어 보았다. 라디오에선 긴급 보도로 TGV를 비롯한 모
든 열차 운행이 컴퓨터 고장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고 아나운서가 말하고 있었다.
  '단지 한 사람이 만든 바이러스 때문에 이런 사태가 오다니.'
  연희가 중얼거리는데 혜영이 다시 말했다.
  "한 사람이 만든 바이러스인지는 몰라도 정말 엄청난  프로그램이에요. 저도 이
런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할 줄은  몰랐어요. 이건 일종의 게임과 비슷
한 성격인데."
  "게임요?"
  "네에. 그러니까 일종의 라이프게임과 비슷한 원리이에요. 라이프 게임에서 스스
로를 복제하는 패턴이 있는데 그것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바이러스
는 네트워크 망을 종적인 관계가 아닌 횡적으로 연결해서."
  "잠깐잠깐…….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 주세요."
  승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현암과 박신부는 그런 승희에게 그러지 말라고
눈짓을 했으나 혜영은 순순히 승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원래 시스템들은 종적인 관계로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메인 밑에  서
버가 있고 그 밑에 터미널들이 있는 식이죠. 시스템이 그런 식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일 때는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아래로 바이러스를 퇴치해 가면 큰 문
제없이 퇴치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나 횡적인 관계에선 달라요. 모든 컴퓨
터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져 있고 네트워크 상에서  교신을 하게 되죠. 이 거미
바이러스의 특징은 네트워크 상의 구조를 먼저 파악해서  일종의 자동코드를 생성
해요. 그러니까 네트워크로 되어 있는 컴퓨터들의 상황을 유전자처럼 알아내어 계
속 번져 나가고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거죠."
  "맙소사. 그런 거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네요."
  "생명까지는 안되지만. 자기 복제를 충실히 하는 거죠. 일단 그 유전자 코드  같
은 것이 만들어지면 . 이 바이러스는 놀랍게도  각 시스템에 있는 메모리 속에 자
신들의 유전자를 집어넣고 다른 시스템 여건을 알아내어  새롭게 발전 시켜나가는
거예요. 그러니 보통 방법으론 도저히 잡을 수 없어요.  지워도 자꾸자꾸 생겨나니
까요."
  "메모리가 장치되어 있는 것은 컴퓨터 본체만이 아닌 가요."
  "그렇지 않아요. 컴퓨터 대해서 잘 모르시니까 그런 말씀을 하실지 모르지만 실
질                                                                               
                                들어 있는  것은 컴퓨터만 아니랍니다.  컴퓨터  메인 메
모리도
중요하지만 비디오 카드에도 별도의 메모리가 들어 있고  하다못해 시간을 기록하
는 클럭에도 메모리가 있어요. 프린터에도 수메가씩 메모리가 있고 키보드에도 메
모리가 따로 부착되어 있는 종류도 있어요.  모든 호스트와 주변장치 속에 유전자
코드가 들어갈 수 있고 어느 일부에서라도 거미의 유전자 코드가  들어 있기만 하
다면 그 프로그램은 어디서든지 또 살아나게 돼요."
  "그렇지만 그런 유전자 코드란 것이 금방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사람의
유전자만큼은 안되어도 그 정도 내용을 담고 있으려면 길이가 엄청나게 긴 것일텐
데."
  "아니에요. 이 유전자 코드란 것은 그러니까 시스템의  하드웨어 사양과 자기들
이 침투할 수 있는 경로만을 기록한 거예요. 그러나 그 하드웨어의 종류들은 단순
히 몇 바이트씩의 기호로만 된 것이고,  상세한 데이터는 엄마거미가 모조리 가지
고 있어요. 그러니까 엄마거미 프로그램은 굉장히 그 크기가  커지는 거죠. 이용가
능한 모든 하드웨어들의 자료들이 거기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엄마거미를 죽이면 유전자코드도 소용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아네요. 그 때문에 그 기록들은 삼중 사중으로 중복되어  사방에 분산된 채 퍼
져 있어요.  어느 하나를 파괴한다 해도 다른 곳에서 카피해서 시스템으로 데이터
를 옮기기 때문에 잡기가 정말 어려워요. 이것을 잡는 방법은 단 한가지밖에 없을
것 같은데."
  "어떤 방법이죠?"
  "모든 시스템의 전원을 일시에 차단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난 다음 시스템이 딴
네트워크와 물리지 않도록 독립된 상태에서. 하나하나 잡아나가야 할 텐데."
  "아이고 맙소사.  지금 이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가 퍼져있는  네트워크에 연결
된 컴퓨터들의 수는 몇 만대는 될거예요. 그걸 언제 하나하나씩 잡는단 말이죠?"
  "이거. 하여튼 으쓸하군요. 컴퓨터 안에서 눈에 안보이게 그런 바이러스가  설치
고 있다니.이건 영보다 더 무섭군요. 근데 혜영 씨가 만든다는 그 백신 프로그램은
어떻게 되는 거죠?"
  "지금 수동식 백신 프로그램은 완성된 상태에요.  그렇지만 이것을 작동시킬 여
유조차 없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려구요?"
  "저도 바이러스를 만들어야 겠어요."
  "바이러스를 만든다구요?"
  "백혈구 바이러스 같은 거죠.그러니까 기존의 바이러스에 있는 시스템에도 뚫고
들어가서 다시 그 바이러스를 죽여버리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바이러스 말이
에요. 바이러스를 죽인 다음엔 스스로 분해되고 자폭하게 만들면 그만이죠."
  "그렇지만 그것을 만들면 또 컴퓨터가."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만든 바이러스는  악성 바이러스는 아닐 테니까
염려 없어요. 아. 기술적인 것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그러나 저러나 제가 여러분
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가 궁금한  것이 있다는 뜻이죠. 아까 원한령…….
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묻는 거지만……."
  "뭔데요?"
  "모니터링에서 이상한 게 보였어요.모니터링 프로그램에서는 현재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가 퍼져나가 있는 시스템들의 상태가 대부분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 이상
한 점이 발견되었어요."
  "뭐죠?"
  "각 거미바이러스들은 사방으로 퍼져나가긴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한군데를
향하여 집중적으로 몰려들고 있어요. 이런 현상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그
쪽 네트워크가 특별히 연결이 잦은 것도  아니거든요. 네트워크의 연결이 많지 않
은 곳이라면 상식적으로 그쪽엔 바이러스가 적게 퍼져야 해요. 근데 이건 마치 의
도적인 듯 몰려들고 거의 . 제가 볼 땐 거의 공포스런 일에 가까워요. 프로그램 코
드만으로는 그런 목적성을 가지게 할 수 없어요. 그러나…….제 생각으로 바이러스
가 어떤 의도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은 가요?"
  "저희도 알 수 없지요. 그 바이러스가 어떤 원한관계에 의해서 원한령의 사주를
받고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많지만 그렇다고 그 프로그램  자체가 원한령을 대변한
다고는 볼 수 없어요. 어떻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글쎄요. 전 프로그램에 대해선  알 수 있지만 영
에 대해선 알 수가 없어요. 솔직히 무서워 죽겠구요."
  "그건 이해해요. 저희가 있으니 염려  마시고 짚이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
요."
  혜영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지요. 즉 난수배열 말이에요 ."
  "난수 배열이라구요?"
  "네에.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엔  어떤 경우에나 난수배열이 들어가요.
랜덤넘버 라고 하는 것인데.즉 그것은 선택을 의미하는 거죠."
  "선택이라구요?. 그건 또 뭐죠?"
  "그러니까 주사위를 던지는 일과 마찬가지에요. 예를 들어 제가 거미바이러스라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내가  지금 있는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가 6대가
있다고 해요. 1부터 6까지요. 그렇다면  내가 어느 컴퓨터에 가장 먼저  침입을 할
것인가는 선택을 해야해요. 그러나 창의성  프로그램 자체에는 독자적인 창의성이
없이 때문에 그런 문제에 부닥칠 경우는 난수를 이용하게 하게끔 프로그램을 하지
요.  즉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1번이 나오면 1번 컴퓨터로
가는 것이고 4번이 나오면 4번  컴퓨터로 가는 것이죠. 이것과  비슷한 루틴이 저
바이러스 코드 중에 있는 거 같더군요. 혹시……. 그  난수 배열에그 원한령인지가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가능할                                                                                
                                                        
                                                후가 말했다.
  "저도 얼마 전에 실험을 했어요. 어느 잡지에선가 내용을 보구요.  컴퓨터의 난
수 배열을 사람의 정신력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해보니까 내
가 마음먹은 숫자가 더 난수 배열에서 많이 나오게 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그 바이러스에 깃들어 있다는  원한령이 난수 배열을 계속 조작하여
바이러스를 원하는 방향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결국 그 원한
령은 바이러스를 무기 삼아 자신이 원한을 가지고 있는 시스템을 파괴하러 바이러
스를 몰아가는 것이 틀림없어. 그래.  분명히 그럴 꺼야. 그런데  혜영씨.깜박 잊고
물어보지 않았군요. 그 바이러스가 집중적으로 모여드는 곳이 어디죠?"
  "바로 국립 암 연구센터예요."
  "암연구 센터."
  현암이 소리를 쳤다.
  "틀림없어. 딱 아귀가 맞아떨어지는군! 바로 그곳에  있는 환자들 중에 이 바이
러스에 들어 있는 빌어먹을 원한령에게 원한을 산 사람이 있을 꺼야. 그래서 바이
러스는 원한령의 조정을 받아 그쪽으로 침투를 하는 것이 분명하고.한시가 바쁘군.
혜영씨 어때요. 그 컴퓨터는 지금 바이러스에게 침투 당해 있는 상태인가요?"
  "지금 주변장치 쪽은 거의 장악되어  있어요. 그리고 조금 있으면  거기도 거미
바이러스에 완전히 장악될 거예요. 그러나  신기하게도 거기는 오래 버티는  군요.
누군가 유능한 프로그래머가 방어를 해서 침입을 막고 있나봐요."
  "방어요? 무슨 방어요?"
  "시스템은 해커들이나 바이러스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어떤 수단을 가지기  마
련인데, 그걸 방어한다고 표현하죠."
  "거의 전쟁이네……."
  "그런데 그곳의 위치는 어디죠?"
  "여기서 그다지 먼 곳은 아니지만. 30분에서 40분 정도는 차를 타고 가야해요."
  "삼사십 분이라. 이거 서둘러야 하겠군."
  박신부가 그 큰 체구를 벌떡 일으키며 재빨리 밖으로 나오면서 소리쳤다.
  "다들 같이 가자구.이런 류의 경험은 처음이지만 어쨌든 그대로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혜영이 얼떨떨한 듯 말했다.
  "경찰에 연락을 하는 것이 어떤 가요?"
  승희가 혜영을 쓸쓸한 눈으로 한번 쳐다봤다.
  "경찰에요? 컴퓨터 바이러스이야기만 나와도 경찰은 골치아파 할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원한령이 들어 있다는 소리를 해보세요. 누가 믿어 주겠나."
  혜영이 살짝 중얼거렸다.
  "하긴 저도 전혀 믿어지지 않아요."
  더 긴소리를 할 것 없이  일행은 혜영의 집을 나와서 차에  분승해서 올라탔다.
혜영이 잠시 꾸물거리더니 노트북 컴퓨터 하나를 들고  헐떡거리면서 나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일행은 모두 차에 올라탄 채 그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가 몰려가고 있
다는 국립 암 센터로 차를 몰고 가기 시작했다.
 
 
  거미와의 싸움.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원래 짐작보다  훨씬 늦게야 일행은  국립 암 센터로
도착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암센터로  가는 길 중간에 대규모  적인 교통 혼잡이
일어나서 길이 많이 막혔기 때문이다. 전철과  지하철 등 교통국의 통제로 가동되
는 교통수단은 모조리 가동이 중단되었고 사람들은 의외의  사태에 당황하여 사방
에서 몰려나왔다. 이용 가능한 교통 수단이 자동차밖에 남지 않게 되자 거리는 자
동차로 붐벼 넘쳤는데 나중에는 전자제어로 통제를 받는  신호등들이 팍팍 꺼지고
동작이 중단되는 바람에 길거리 또한  완전 아수라장이었다. 사방에서 접촉사고가
일어나서 교통체증을 더욱더 심화시켰고 차 속에서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떼제
베(TGV) 두 대가 달리던 중 콘트롤을 잃고 역에서 충돌해서 바스티유가극장의 임
원진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는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
다. 현암과 박신부는 발만 동동 구르며 난폭운전을 하여 열심히 차들을 비집고 나
갔지만 그래도 시간은 훨씬 더 걸렸다.  완전히 아수라장이 된 길거리를 내다보며
연희는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준후도 밖의 풍경이 몹시 안쓰러워 보이는 듯 한마
디했다.
  "전자적으로 통제하니 평상시엔 편하긴 한데 이럴 때는  문제가 되는군요. 이건
도대체……."
  거의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려서 국립암센터에 도착한 일행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아차 하는 생각을 했다. 암센터의 커다란 정문에는 외부차량을 통제할 수
있도록 자동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문이 한쪽만 열려 있고
한쪽은 닫혀 있는 채 그 앞에서 수위들이 웅성거리며 혹은 문을 움직이려 하고 혹
은 뭔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격렬하게 떠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전자적으로
내부 통제를 받아서 작동하는 문이  내부의 주 컴퓨터가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아
고장나자 그에 따라서 동작을 멈춰버린 것이  분명했다. 뭔가 센터의 기운이 심상
치 않다는 것을 초입부터 느낄 수 있었던 현암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이미 늦은 거 아니야."
  박신부가 차를 세우고 성급히 차문을 열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아직                                                                 
                                                 가보도록 하세."
  일행은 서둘러 차에서 내려 문을 통과하려 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던 수위
들이 길을 막았다. 연희가 이야기해보니 지금은  센터 안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외부인 들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잠시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
이 개 한 마리를 끌고 와서 수위 한 명에게  줄을 넘겨주는 것이 보였다. 그 수위
가 개를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연희가 그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외부 사람의 출입을 통제한다더니 저 개는 어떻게 들어가는 거죠?"
  "저 개는 우리 원장님이 기르시는 개 입니다."
  "아니 그러면 개는 비상사태에라도 센터에 들어갈 수 있는데 사람은 못 들어간
다는 말인가요?"
  연희는 화가 나는 듯 그 수위를 마구  몰아 세웠고 그러는 사이에 박신부와 현
암 그리고 승희, 혜영, 준후  이 다섯 사람은 얼결에 그들을  만류하려는 수위들을
제치고 재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수위들은 더 따라오지 않는 듯했다.
아마도 지금은 문의 동작이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원래 환자가 많이 있는
곳인 만큼 암센터의 출입은 일반 병원처럼 자유로울 수 있었겠으나 지금 비상이란
말을 들어서 수위들이 그들을 통제하려  했던 것 같았으나 불어를 유창하게  하는
연희에게 기가 질린 것도 같았고 아무튼 그래서 수위들이 따라  오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일행은 일단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는 커다란 건물 두개를 보며 망설였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까! 환자를 먼저 찾아봐야  하
나."
  "일단은 전산실로 가야죠."
  혜영이 본관센터 건물이 왼쪽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표지판에서 읽어 내어 가
르쳐 주었다. 연희도 수위와 입씨름을 끝냈는지  재빨리 와서 합류했고 다시 일행
은 와르르 몰려서 본관센터  쪽으로 향했다. 본관센타는  원래 신분증을 제출하고
들어가게 되어 있었으나 지금 의료원 상태가 매우 몹시 불안해서인지 정문의 수위
는 마침 제자리에 없었다. 수위가 없는 대신 여기저기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뛰
어다니고 서로를 소리쳐 부르면서 뭔가 부산하게 움직이고있었다.  안에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거 같았다. 그 광경을 보고 혜영이 중얼거렸다
  "센터 전체가 난리군요. 하긴 이렇게 큰 센터의  컴퓨터가 작동을 멈춰버렸다고
생각하면 그도 그렇죠. 생각만 해도 아찔하군요."
  "어쨌든 일단 가야 할  곳은 전산실입니다. 전산실이  어딘지 물어봐주게. 연희
양."
  박신부가 말하자 연희는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던  흰 가운을 입은 사람에게 전
산실의 위치를 물었고 그 사람은 힐끗 연희에게 한쪽방향을 손짓해  주고 몇 마디
를 한 채 황급히 걸음을 옮겨서 사라져 갔다.
  "전산실은 3층에 있다는 군요. 3층 복도 맨 왼쪽 끝방이라는데."
  "그럼 어서 가봅시다."
  일행은 바쁜 발걸음으로 3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오히려 수위가 있지 않은 정
문과는 달리 3층 전산실로 들어가는  복도는 초입부터 수위들과 내부  경비원들이
길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경비원들은 그들을  향해 뭐라 이야기하며 그들을 밀어
냈다. 마침 연희는 계단을 오르느라 숨이 차는지  뒤에 좀 쳐져 있는 상태여서 박
신부와 승희가 영어로 뭐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경비원들은 영어를 알아듣는 듯
하는데도 프랑스어로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반쯤 얼이 빠진 듯, 정신이 없는 것
처럼 보이던 혜영이 말했다.
  "불어로 이야기 해야 해요. 프랑스 사람 중에는 불어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예
아는 척도 안해버리는 사람이 많아요."
  "지금 사정이 급한데 그런 것도 따진다 말이야?"
  "프랑스인 들은 고집이 강하죠. 잠깐만요."
  혜영이 앞에 나가서 뭐라 말했으나 경비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외부인 출입 통제라는군요. 지금 전산실 안에 문제가 생겨서 들어갈 수 없다는
군요."
  혜영은 경비원들이 앞을 막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면서 쩔쩔대자 현암이
화가 나는 듯 앞으로 나섰다.
  "혜영 씨. 제가 하는 말을 그대로 전해요. 어서요"
  혜영이 고개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현암은 빠른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
다.
  "우리는 프로그래머들이고 바이러스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지금 이곳
에 이상한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번져서 컴퓨터로 통제되는 모든 시스템 기능이 정
지되었죠?. 그렇죠?"
  혜영이 조금 더듬거리면서 현암의 말을 옮겨주자 수위의 눈이 휘둥그래  커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 일을 어떻게 알았냐고 이 사람이 묻고 있어요."
  가만 보니 지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일반  수위나 경비원이 아니라
경비책임자인 듯했다.  조금 나이도 많아 보였고 옷차림도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지만 이 사람이 내부에 돌아가는 실제  상황을 좀 안다
면 분명히 자신의 말이 먹혀들 것이라고 현암은 자신했다.
  "그런 말엔 대답할 것 없어요. 좌우간 우리는 그 바이러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아마 우리만이 시스템을 수리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세요."
  "당신들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느냐는 것만 반복해서 묻고 있어요."
  "에이. 지금 시간이 없는데. 잔소리 말고 비키라고…….  아니 좌우간 꼭 들어가
야 한다고 말해요. 좀 큰소리로 말해요, 더듬거리지 말고.,"
  현암이 말하자 혜영은 거의 악을 쓰듯이 말투를 높여서 그 경비책임자 인 듯한
사람에게 말했고 경비책임자인 듯한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잠시 말이 없는 것
이었다. 암암리에 길을 비켜 준다는 신호 같았다. 현암은  수위들이 제지하는 것을
뿌리치면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위 몇  명이 형식적으로 현암을 제지하려
했지만 현암이 가볍게 수위들의 손에  잡힌 어깨를 한번 슬쩍 움직이자  수위들은
우르르 현암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현암이  전산실 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따라 들어갔고 경비책임자  인 듯한 남자가 체념한 듯  양어깨를
으쓱하고                                                                              
있었                                                                    
                                        모가 큰 전산실  센터 안의 풍경이라 한다면 시
원하고 
조용한 가운데 약
간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컴퓨터 자체의 팬과 기계들이 돌아가는 조용한 소리
만이 나는 곳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센터의 전산실 내부는 그야말
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비상사태 때문에 비번인  사람들까지 모조리 불려오고
외부에서 도움이 될 사람들까지 불러 왔는지. 온갖가지 사람들이 머리가 헝클어진
피곤한 모습으로 소리를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너무나 혼돈스런
상황이어서 일단 전산실 안으로 발을 디딘 일행들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전산실 내부를 둘러보니 주위에 있는 많은 모니터들에서 그 을씨
년스러운 거미그림이 떠올랐다. 프로그래머 인  듯한 한사람이 거미그림이 떠오른
듯한 그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미친 듯 두드리다가 키보드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저쪽 구석에서 방금 또 거미 그림이 떠오른  듯, 모니터 앞에서 한
프로그래머가 분노에 가득찬 듯한 소리를 지르며 디스켓  뭉치를 땅바닥에 내동댕
이 치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사람들은 이 엄청난 바이러스들을 만나서 지금 제정
신이 아닌 듯했다. 그런 중에 어디에 끼어 들어야 하는지를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잠시 전산실 내부의 광경을 보고 있던 박신부가 준후의 옆구리를 찔렀다.
  "준후야 뭔가 느껴지니?. 영기 같은 것은?"
  "아주 미약해요. 바이러스 코드 안에 숨어 있는 영이라 그런지 이건 도대체."
  준후가 부적 한 장을 꺼내더니 거미그림이  떠올라 있는 모니터 앞쪽으로 걸어
갔다. 이상한 옷을 입은 동양인  꼬마가 이상한 종이를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 앞에 있던 프로그래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프로그래머가 얼빠진 듯이 아무말
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준후는 역시 별 소리를 하지 않고 가만히  종이 부적을 모
니터에 대고 손을 얹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느껴져요. 파괴. 그리고 최후의 저주. 오로지 그 일념만 가득 차 있어요."
  "그것밖에 안 들리니?. 준후야.  아무리 영의 마음이 분화  되어나갔다 해도 그
근본이 되는 큰놈이 어딘가 있을 것 아니야. 그놈을 일단 잡아야 해."
  박신부가 말하자 준후는 모니터에 붙인 부적에 손을 댄 채 계속 정신을 집중하
다가 자그맣게 탄성을 냈다.
  "앗. 저……. 컴퓨터 안에 원한령의 기운이 온통 모여 있는  것 같아요. 그 놈을
어서 잡……."
  준후가 말을 이으려는데 그때까지 멍한 얼굴로 준후가 하고 있던 일을 보고 있
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뭔가 욕설 같은 것을 하고 준후를 밀쳐냈다. 준후가 잠시
화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안타까운 얼굴이 되었다.
  "아이고. 이런 . 막 잡으려 했는데. 놈도 내 낌새를 알아차렸을 거예요."
  준후의 날처럼 그 원한령이 자신을 잡으려는  낌새를 챘는지 갑자기 전산실 내
부에 영기가 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승희가 고함을 쳤다.
  "놈이 뭔가 다급한 느낌을 가지는 것 같아요."
  이상한 기운은 박신부와 준후에게도 느껴졌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프로그래머
들은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현암은 일단 가만히 서서 번쩍이는 두 눈을
뜨면서 사방의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하려 나름대로 애쓰고  있었고 혜영은 메인
컴퓨터가 어느 것인지 눈으로 짚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준후가 또
소리를 쳤다.
  "영기가 저쪽으로 몰려가요."
  준후가 손으로 가리키는 쪽의 천장에 있던 형광등들이 껌뻑껌뻑 거리며  일시에
타다닥 나가 버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마치 줄을 이어서 사열을 하듯 형광등이 주
르르 꺼지다가 퇴마사들이 있는 곳의 천장의 형광등은  붉은 색으로 달아오르더니
펑하고 폭발했다. 유리조각이 날리자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몸을 가렸고 준후를 밀
쳐내었던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프로그래머는 전기가 오르는 듯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갑자기  그 프로그래머가 앉아  있던 컴퓨터에서 퍽퍽하고
흰 연기가 나면서 작은 불똥이  튀겼고 갑자기 거미그림이 있던 모니터가  펑하고
브라운관이 터져버렸다. 주변에 있던 프로그래머들이 의외의 일에 놀라 마구 소리
를 치면서 그쪽으로 모여들었고 한 사람은 배전반을 열고 스위치를 조작하려 했다.
그것을 본 연희가 소리쳤다.
  "컴퓨터에 고압전류가 흘러 들어가고 있다고 해요. 이곳은  병원이라 특수 장비
의 동작을 위해 고압선이 많은데 그 고압선이 오동작을 해서 아무렇게 접속된다고
하는군요."
  "놈은 분명히 이곳에 있어. 그리고 우리가 온 것을  알아차리고 뭔가 수작을 부
리고 있는 거야. 이건 단순한 바이러스의 짓이 아니야."
  박신부는 심각한 표정으로 성수  뿌리개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들은
퇴마사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도대체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프로그래
머들은 눈이 휘둥그래 진 채 모니터에 떠 오라 있던 거미그림이나 현재 상황을 잊
고 잠시 자기들끼리 손가락질하며 빠른 목소리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연희가 소
리쳤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냐고 소리치고 있어요."
  몇몇의 프로그래머가 경비원을 부른 것 같았고  또 몇 명의 프로그래머들은 눈
에 핏발이 선 채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준후가 또 막 부적을 꺼내 모니터를 만지
려 하자 덩치가 좋은 프로그래머 한 명이 곱지 않은 얼굴로 준후를  번쩍 들어 아
예 옆구리에 끼었다.
  "놔요. 놔요. 어이구 ."
  "빨리 놔줘요."
  준후가                                                                        버둥
거리차                                                              
                                        나 프로그래머는 고개를  저으면서 나가라는
시늉을 하듯 그들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박신부가 바깥으로 끌려나가려는 준후의
앞에 서서 준후를 안고 있는 프로그래머를 막아서며 고개를 돌려 말했다.
  "지금 저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없어 어떤 방법이 없을까?."
  갑자기 그러는 사이에  저쪽에 있던 모니터가 또 폭발을 했고 배전반을 손보던
프로그래머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언뜻  보니 그 배전반은 흔히  볼 수 있는
수동 배전반이 아니라 프로그래머블 콘트롤러가  부착된 자동 배전반이었다. 그것
들도 컴퓨터와 나름대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지금 멋대로 오동작을  하고 있는 것
이 분명했다. 그리고 또 다시 몇 개의 모니터에 거미 그림이 떠오르자 그 앞에 앉
아 있던 프로그래머들은 다시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이제  센터 내부는 거의
모든 전등이 나가버린 듯했으나 메인 컴퓨터 쪽에만은  아직 전원공급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중에 나이든 남자 하나와  또 젊은 프로그래머 인 듯한 사람이
프로그래머들에게 뭐라 소리를 치자 프로그래머들이 다시 남아  있는 단말기 주변
에 부지런히 달라붙어서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젊은 프로그래머는 자신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던 것을 다가오는 한 사람에게 물려주고 나이든 사람과 함께 앞으
로 나섰다. 와중에도 침착성을 잃지  않았는지 차분한 얼굴이었다. 나이든  사람이
먼저 말을 했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굽니까?. 저는 이곳 시스템 담당자인 제라르라 합니다. 당신
들이 도대체 어떻게 여기 들어왔으며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군요. 도대체."
  뒤에서 연희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들은 당신들을 도우려는 거예요 이곳에 지금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난리가
났죠?.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바이러스는 보통의 방법으로 치료될 수 없
다는 것까지두요."
  혜영이 연희의 말을 덧붙였다.
  "이 바이러스는 횡적 연결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유전자  배열과 같은 기본
코드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들을 잡지 않으며  이 거미바이러스는 절대 치료될 수
없어요."
  갑자기 뒤에 있던 젊은 프로그래머가 믿어지지 않는 듯 앞으로 나섰다.
  "저는 이 네트워트의 담당자인 알렉이라 합니다. 저희 네트워크도 이 거미 바이
러스 때문에 난리가 났지요. 그런데 당신들은 어떻게 거미바이러스에 대해 어떻게
잘 알지요?"
  알렉이 말을 이으려는데 제라르가 알렉이 말을 하는 중에 끼여들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당신들  문제는 아니요. 다짜고짜 이렇게
들어와서 이상한 행동만 하니…….무엇을 하는 것인지  납득이 갈 수 있도록 이야
기를 해봐요. 지금의 우리 일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단 말이오. 데이터들을  지키는
것만도 힘든데."
  혜영이 소리쳤다.
  "데이터! 맞아요! 바로 당신들은 이곳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
지 아직 모르고 있지요?. 그 바이러스는 데이터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 진 거예
요. 원한."
  연희가 재빨리 혜영을 눈짓으로  원한령이라 말하려 하는  것을 제지하고 대신
말을 이었다.
  "그 바이러스는 바로 이곳에 있는  암환자들의 데이터를 파괴하기 위해서 만들
어지고 침투하게 된 거예요."
   알렉이 소리쳤다.
  "암환자들의 데이터라고요? 그건 도대체."
  연희가 주위에 있는 승희에게서 승희가 그렸던 남자의 그림을 받아들고  그것을
앞에 서 있는 늙은 남자에게 보여줬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시나요?  이 사람은 여기 프로그래머가 아니었나요?"
  늙은 사람은 놀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친구는."
  "이 사람을 아시나요?"
  "네에. 여기 근무했던 사람이에요.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이 사람
은 일년 전쯤에 자살한 사람이란 말이요. 그런데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관계가…
…."
  "틀림없군요."
  연희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알렉은 혜영과 말이  통할 것이라고 느꼈는지 (혜영
이 노트 북을 끼고 있어서 프로그래머로  보였나 보다.) 혜영에게 말을 걸고 있었
다.
  "지금 우리는 데이터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어요. 그러나 테이
프 백업 장치가 이미 제일 먼저 마비되었고 그 다음에 메인 하드디스크도 나갔죠.
다행히 아직 메인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번지기 전에 제가 와서 백업용으로 운용하
고 있는 서브시스템의 하드디스크에 그 기능을 옮겨서 지금 그  앞에 임시로 패스
워드를 걸어서 보호하게 했죠. 아마 그것은 풀지 못할 거예요."
  "글쎄요. 그럴까요? 그건 다행한 일이지만 그 데이터는……."
  "물론 이곳의 데이터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제 네트워크
시스템을 가동정지하고 다름 사람에게 맡긴 채 제일 먼저 이곳으로  달려 온 겁니
다. 제 네트워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정되는  연결점이 여기였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일단계 조치는 이미 취한  상태에요. 이제 우리가 하는  것은 메인 시스템을
복구 하려는 것뿐이고 그  데이터들이 백업되어 있는 하드디스크와  서브시스템이
대신 동작하고 있어요. 지금 간신히 서브  시스템에 방어막을 쳐 놓았으니 아무리
거미 바이러스라 해도 우리가 쳐놓은 방어막은 뚫을 수 없을 거예요."
  "서브시스템이 살아난 건 다행이지만, 거미  바이러스는 너무 무서워요. 그러니
메인 컴퓨터의 바이러스를 완전히 잡을 때까지 서브시스템을 외부와 완전 격리 시
키는 게 어때요?"
  혜영이 말하자 알렉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네트워크 중에서도 의료계와 연결되어 있는  곳이에요.
여기서 시스템을 그냥 차단시키면 현재  의료 행위를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요. 수술중인 사람들이 볼 참고자료도 갑자기 떠오르지 않
을 것이고 의료 기구들의 통제도 불가능하고 의사들이 기록을 찾아  볼 수도 없어
요. 이건 사람들의 목숨과 직결된  데이터들이라고요.절대 그럴 수는 없어요. 여기
는 어떤 수가 있더라도 지켜야 해요."
  "그렇지만 이 서브시스템 마저도 파괴되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지 않게 해야죠."
  "저는 이 거미바이러스에 대해 잘 알아요. 이  바이러스는 아라크노이드 바이러
스이고 미쉘이란 사람이 만든 것이며  레오라는 사설 BBS 운영자가 퍼트린  거예
요. 그리고 보통 바이러스가 아니라 어떤 원한이 개입된……."
  혜영의 말을 듣던 알렉이 미쉘과 레오라는 이름이 나오자 갑자기 놀란 듯한 표
정을 지었다.
  "미쉘이요?. 이 바이러스를 미쉘이  만들었다는 것은 당신들이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또 레오는……."
  "잘 들어요. 미쉘은 지금 레오라는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정신병원에 갇혀 있어
요. 바로 이 거미바이러스 때문에 미쳐버린 거예요."
  "미쉘이 레오를 죽였다구요?. 그리고 정신병원 이라구요. 아니 도대체 무슨 소리
에요?"
  "모두 이 거미 때문이에요. 미쉘이란 사람도 백퍼센트 자기가 원해서 거미 바이
러스를 만든 것은 아니에요. 이것은 어떤 원한령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아이고 이걸 뭐라 이야기 해야 하나……."
  "도대체 믿을 수 없군요."
  현암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는  중에도 박신부 준후 승희는  원한령이 데이터를
통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는 듯 모니터들과  망가져있는 기계사이를 누비며
눈을 감고 투시를 행하기도 하고 좌우간 상당히 애를 쓰고 있었고 연희는 땀을 흘
리며 제라르란 사람을 설득하고 있었다. 현암이  혜영의 어깨를 살짝 치면서 말했
다.
  "우리는 미쉘 씨가 직접 만들었던  모니터링 프로그램과 에디터 루틴을 가지고
있어요. 이걸 이용하겠다고 말해봐요. 그게 중요한 거리고 아까  혜영 씨가 말했잖
아요."
  혜영이 정신이 드는 듯 알렉에게 말했다.
  "우리는 미쉘 씨가 말들었던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을 통해
서 엄마 거미가 어떤 경로로 시스템을 통해  침투하려는 지를 알 수 있어요. 그리
고 엄마거미 바이러스의 맨 처음 소스프로그램도 가지고 있으며 저는 거미 바이러
스를 퇴치하는 백신도 대충 만들어 놓은 상태에요. 그러니 어서 메인 컴퓨터에 제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는 포트를 알려 주세요. 분명히 도움이 될 거예요."
  알렉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구요? 모니터링프로그램과 에디터  루틴이라구요? 더구나  이 바이러스의
백신 프로그램도 가지고 있다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습니까?"
  알렉은 흥분한 듯 혜영을  불렀다. 그리고 혜영의 노트북  컴퓨터를 받아들었고
혜영은 재빨리 알렉 옆에 앉았다.
  "어서 빨리. 이 컴퓨터와 노트 북을 접속시켜 주세요."
  혜영의 말에 따라 알렉이 컴퓨터 포트에 선을  꼽자 다시 노트 북에 떠 올라있
던 모니터링 루틴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거미와의 싸움(2)
 
  이미 준후는 세 번, 박신부는 두 번이나 컴퓨터 안에 깃들여 있는 그 영의 자취
를 발견하고 영적인 조치수단을 강구해서 영기를 지워버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애
당초에 영이 바이러스에 깃들어 있어서 그런지 지금 나타나는 현상은 대단히 특이
했다. 한번 영기를 지워나가도 또 다른 곳에서 곧 영기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박신
부가 화도 나고 지치기도 한 듯 노한 목소리로 준후에게 말했다.
  "준후야. 아무래도 이 상태로 가면 끝이 없을 것 같구나. 지금 우리가 쫓고 있는
것은 그 원한령이 아니라 원한령이 만들어낸 원한이 깃든 염체 같은 것 일 뿐이야.
이것은 원한령 자체가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니 원한령을 없애 버려야 될 거야."
  준후가 또 다시 부적하나를 태우며 박신부 말에 고함치듯 대답했다.
  "저두 알아요. 그러나 어디 어떻게 숨어  있는지 느껴지지 않아요. 너무 복잡해
서. 이런 참."
  승희도 눈을 감은 채 계속  그 원한령의 자취를 쫓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자
정말 이곳에 그 원한령의 사념이 집중되고 있는 것처럼 굉장히  많은 메시지와 영
상들이 두서없이 섞여서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해."
  박신부와 준후 그리고 승희가 한쪽에서 애를 쓰고 있는 동안 혜영과 알렉은 노
트북 컴퓨터를 통해서 바이러스를 잡는 백신프로그램을 메인  컴퓨터에 밀어 넣으
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연희와 현암은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
었다.   다만  연희가   혜영과   알렉이  주고받는      대화를  조금씩   작은   목소리
로  중         
                                                                                 
                “ 들려줄 뿐이었다.
  "혜영 씨가 지금 자기가 아까 만들었던 백신프로그램을  옮기고 있는 중이에요.
아직 거미바이러스가 침투하지 않은 옆의 서브 컴퓨터를 통해서 메인 컴퓨터에 있
는 엄마 거미를 잡는 다는군요."
  컴퓨터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는 현암은 망연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자신은 영적인 힘도 별로 없고 주로 싸우는 것을 본업 비슷하게 했던 참이라 지금
상황에 별로 도울 수 있는 일이  생기지 않자 답답하고 성질이 폭발할 것  같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뭔가 자신도 도움 될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웅얼거리면서 현암은 성질을 죽인 채 혜영과 알렉이 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혜영은 노트북 컴퓨터를 열심히 조작하여 몇 번이고 키를 눌렀으나 생각대로 작동
이 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 역력했다.  알렉이 무어라 소리쳤고 연희가 그 내용
을 현암에게 일러주었다.
  "백신이 이상하게 들어가지 않는다는군요.  분명히 들어가지 않을  다른 이유가
없는데 메인 컴퓨터 가 잘 받아들이 않는대요."
  "무슨 소리지?"
  "자꾸 에러가 난다는군요. 전혀 이유가 없는데."
  "이유없이 프로그램이 들어가지 않는다구?"
  현암은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저만치에서 승희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영기, 영기가 매우 짙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준후도 소리를 쳤다.
  "신부님 저쪽. 저쪽으로 도망친 것 같아요.  저쪽에서 지금 놈이 뭔가 안간힘을
쓰고 있어요."
  준후가 가리키는 쪽에는 메인 컴퓨터의 본체가 있었다.  그리고 그리로 가는 길
에는 오만가지 장비가 널려 있어서 덩치 큰 박신부가 금방  뚫고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현암의 머릿속에 희뜩 어떤 생각이 지나쳐 갔다. 지금 저 원한령은 바이러스 코
드의 랜덤 넘버를 조작해서 자신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바이러스 코드의  작동을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들었었다.
  "그럼 저 백신 프로그램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은 원한령의 짓이 아닐까?"
  순간적으로 생각한 현암은 박신부와 준후를 향해 소리쳤다.
  "그 원한령인지 하는 놈을 잡아 버려요. 어서! 놈이 뭔가 방해하고 있어서 프로
그램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아요."
  박신부가 이 이야기를 듣고 성수 뿌리개를 꺼냈다. 그리고 현암에게 소리쳤다.
  "놈이 지금 어디에서 방해를 하고 있다는 거지?"
  "메인 컴퓨터! 바로 이거예요!"
  현암이 손짓으로 자신에게서 약간 떨어진 커다란 컴퓨터 본체를 가르쳤고  그러
자 박신부는 멀리서 기도문구를 외우면서 메인 컴퓨터를 향해 성수를 뿌렸다.  옆
에 있던 몇몇의 프로그래머들은 박신부가 성수를 뿌리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일부는 킥킥거리면서 웃기까지 했지만 박신부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성수 뿌리개
를 흔들어 성수를 메인 컴퓨터에 뿌렸다. 그러자 갑자기 고통을 느끼는 듯한 울음
소리 같은 것이 준후에게 느껴졌다.
  "맞아요! 틀림없어요! 신부님 계속하세요. 그리고 승희누나 날 좀 도와줘요."
  승희는 눈을 감고 준후에게 힘을 몰아보냈다. 준후가  우보법으로 두 발짝 방위
를 밟으면서 양손으로 수인을 맺고 소리를 쳤다.
  "덧없는 원한으로 수많은 사람을 해치려한 나쁜 자! 어서 나와!!"
  준후는 프로그래머들을 의식해서인지 이번에는 뇌전이나  멸겁화 같은 눈에 보
이는 기운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연기를 잔뜩 컴퓨터 쪽으로 불어넣었다.
그러나 컴퓨터는 상당히 큰 기계였고 준후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무지
막지하게 힘을 있는 대로 뽑아서 컴퓨터 쪽으로 밀어 대면  알아서 영이 뛰쳐나오
리라 여겨졌다. 한참 몇 초 동안 어마어마한  영력을 컴퓨터 안에 밀어 넣자 폭발
하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한남자의 영 같은 것이 컴퓨터  안쪽에서 뛰쳐나오는 것
을 준후는 분명히 보았다.
  "이놈."
  준후는 숨이 가빠 하면서도 붉은 종이로 만들어진  흡령부를 허공에 던졌다. 부
적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을 날다가 메인 컴퓨터 위쪽의 공중에서 덜컥 정
지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었지만  흡령부가 원한령의 보이지
않는 몸에 달라붙은 것이었다.  준후의 눈에는 흡령부에  정통으로 맞은 원한령이
뭔가 아우성을 치면서 부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영이 부적으로 빨려
들어가자 종이는 다시 나풀거리며 땅으로 떨어졌고 준후가  그것을 재빨리 나꿔채
어 소매 자락에 넣으며 미소를 머금고 다시 소리를 쳤다.
  "와! 하하! 이제 잡았어요! 다시 해보라고 하세요!"
  현암은 준후의 말하는 것을 듣고 혜영에게 다시 소리쳤다.
  "다시 해봐요. 백신프로그램인지. 뭔지. 작동해봐요."
  "잘 안 된단 말이에요!"
  혜영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현암이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다시 말했다.
  "지금 영을 잡았어요. 준후가 영을 잡았으니 이번엔 방해받지 않을 거예요. 어서
다시 해봐요."
  혜영은 거의 보이지 않는  손놀림으로 노트북의 키를 빠르게  조작했다. 그러자
모니터링 루틴이 뭔가 제대로 되어 가는지 커서가  깜박깜박하면서 노트북 컴퓨터
가                활발히                작동하는               것이                보
였다.                                                                                
                                                                호 하는   소리를 냈고 
혜영

회심의 미소 같은 것을 얼굴에 떠올렸다. 그러나 곧 그녀의 얼굴에는 이를 부득부
득 가는 것 같은 분노의 표정과 좀 잔인(?)해 보이는 미소가  같이 떠올랐다. 초조
하게 혜영은 컴퓨터 엔터키 부분에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다가 마침내 백신 프로그
램이 메인 컴퓨터로 들어가는 것이  성공했는지 커서가 떨어지자 허공에 대고  큰
소리로 소리쳤다.
  "죽어랏! 엄마거미!"
  혜영이 소리를 치며 거의 주먹으로 치듯  노트북 컴퓨터의 엔터키를 쾅하고 누
르자 옆에 있었던 메인 컴퓨터에 떠올라 있던 거미 그림이 휙 하고 꺼져버리는 것
이 들렸다.
  "된 건가?"
  현암과 연희는 초조히 메인 컴퓨터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혜영과 알렉은 핼쑥
한 얼굴로 계속해서 노트북 컴퓨터에 떠올라 있던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보다가 갑
자기 환호성을 질렀다.
  "만세!"
  "어떻게 된 거예요?. 성공했나요?"
  혜영이 거의 눈물을 흘릴 듯이 함박 웃으며 재잘거렸다.
  "네에. 성공했어요! 컴퓨터에 있는 엄마거미는 지금 새로 포맷되고 있는 중이에
요. 메인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장악되면 제일  먼저 백신 프로그램부터 다시 주입
하고……. 그러고 나면 다시 거미바이러스가  침투할 수 없을 것이고…….  하여튼
이제 잘되어 가는 것 같아요."
  혜영은 말하면서 노트북 컴퓨터의 모니터에 떠올라  있는 글자들 중에 한 줄을
가리켰다.
  "엄마거미 삭제됨."
  연희가 그 문구를 현암에게 말해주며 미소를 띄었다.  현암도 기분이 좋아서 준
후와 박신부에게 소리를 쳤다.
  "신부님, 준후야 이제 그 바이러스는 없어졌어. 염려하지 말라구."
  현암의 말을 듣고 박신부와 준후는 부산하게 돌아다니던 움직임을 멈추고  현암
을 쳐다보았다. 준후가 잠시 후 망설이듯 이야기를 했다.
  "어……. 이상한데. 원한령을 잡았으니 나머지 바이러스에 있던 영력도 사라졌어
야 하는데 뭔가 다른 것이 느껴져요."
  현암이 눈을 크게 떴다.
  "응?. 그럴 리가!"
  박신부가 이야기했다.
  "혹시 아직 주변장치 같은 곳에 그 기운이 남아서 그런 건 아닐까?"
  말하고 있는데 준후가 다시 고함쳤다.
  "이상해요. 아까 것보다는 조금 다른 성격이에요 원한령  혼자만의 영력이 아니
라 다른 사람의 마음 같은 것도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 이상해요 미쉘
이라던 남자의 기운. 느낌 같은 것이. 어  이게 도대체 뭐지?. 다시 한번 살펴보세
요."
  준후의 말을 알아듣고 현암이 눈을 크게 뜨고 혜영을 쳐다봤다. 왠지 몸에 소름
이 끼치는 것 같았다. 혜영도 준후의 말을 알아듣고 이상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러나 모니터의 루틴은 분명히 엄마 거미가 죽었다고 나와있었다.
  "이상하군요. 엄마거미는 분명히 죽었어요."
  혜영은 재빨리 몸을 돌려 메인 컴퓨터의 키보드를 몇 번 두들겼다. 그러자 잠시
후 메인 컴퓨터에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프롬프트가 떴다.  혜영은 심심풀이로 몇
자 쳐서 엔터를 눌러 보았다. 정상적으로 입력이 되는 것 같았다.
  "분명히 됐어요.엄마거미 프로그램은 완전히 지워졌는데."
  혜영이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알렉이 무어라  소리치면서 놀란 듯 노트북 컴퓨
터의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연희도 따라서 알렉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거기에는
또 다른 글이 익살스레 깜박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현암이 연희에
게 물었다. 연희가 얼굴이 하얗게 된 채로 이야기했다.
  "원 세상에. 저건."
  "뭔데?"
  "아빠거미. 아빠거미…….아빠거미는 껍질만 있어도 죽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9. 거미의 최후.
 
  "뭐라고? 아빠거미?"
  현암이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 승희가 벌떡 일어났다.
  "연희언니……. 그 노래.미쉘이 중얼거리던 그 노래."
  승희의 말을 듣고 연희도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어제 정신이 나간 미
쉘이 자신들을 공격하면서 계속 흥얼거렸던 그 노래! 엄마거미가 아빠거미를 잡아
먹었지만 아빠거미는 껍질만 남아서 계속 엄마 거미를 쳐다보고 나중에 큰 소리로
웃는다는 그 노래!
  '그렇다면 미쉘이 흥얼거리던 노래가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단 말인가? 만약  그
것이 미쉘이 엄마거미 프로그램을 만들고 또 다른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는 것을
암시하던 노래였다면……. 그렇다면 엄마거미가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모
니터링 루틴이란 게 바로 아빠거미!'
  연희의 몸에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다. 만약 그렇다면…….
  혜영이 알렉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다시  노트북이 있는 곳으로 와서 노트북을
미친 듯 만져보더니 소리를 쳤다.
  "아니 이럴 수가."
  "뭐에요?"
  현암이 혜영을 보고 소리치자 혜영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을 이
었다.
  "모니터링 루틴 자체에도 바이러스가……. 이건 엄마 거미도 아니고……. 도대체
이건 뭐지. 이것도 거미바이러스 일종은 틀림없는데……. 이건……. 이건……."
  혜영이 이를 악물고 떨리는 손으로 다시 컴퓨터를 검색했다.
  "아빠 거미인 것 같아요! 엄마 거미가 완전히 죽을 것을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아!! 이럴 수가. 이 모니터링 프로그램  자체도 일종의 함정이었어요. 엄마 거미를
잡으려면 이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할 것이라고  미쉘은 미리 생각했나봐
요.  그래서 거기다 또 다른 변종의 거미 바이러스를 아예 넣어둔거예요. 이건."
  혜영의 말을 듣고 연희는 미쉘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   Rira    bien   qui    rira   le    dernier.   (최후에     웃는   자가    정말로   
찝v                  
                                                                                    
알렉은 
미친 듯이 제라르와 함께 서브 컴퓨터로 가서 서브 시스템을 점검해 보
기 시작했다. 알렉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메인 컴퓨터 쪽에서 이 서브  시스템으로 미친 듯 접속을 시도하고 있다
고 해요!"
  혜영이 소리쳤다. 혜영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신
음 같은 소리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큰일이에요. 내가 만든 백신은 엄마거미에 대항하는  것뿐이에요. 이 아빠거미.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어요. 아…….도대체 이걸 만든 놈은……."
  혜영은 발작적으로 다시 메인 컴퓨터 쪽의  키보드 쪽으로 가서 마구 키보드를
두들겨 보았으나 그새 아빠거미에게 장악되었는지 메인 컴퓨터는 혜영의 노력에는
아무 동작도 하지 않은 채 멍청히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컴퓨터에 장비 되어 있
던 모든 작은 전구들은 활발히 깜박거리며 메인 컴퓨터 내에서 아빠거미가 안에서
뭔가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조롱하듯이 보여주고 있었다. 현암이 소리쳤다.
  "도대체 어떤 일이에요?"
  "지금 저 서브시스템은 알렉이  걸어놓은 패스워드로 보호되고  있어요. 그런데
패스워드는 6자 짜리에요. 영문자  6개면 3억개의 조합이 가능한데  지금 이 메인
컴퓨터에 들어간 아빠거미 바이러스가 그것을 풀려고 하고 있어요."
  "3억 개요? 그 3억 개의 조합을 풀려면 시간이."
  "아니에요. 얼마 되지 않아요. 아! 도대체 어떻게 하나!. 이  메인 컴퓨터에 부착
되어있는 8개의 패러렐(병렬)포트는 1초에 1메가  바이트의 데이터가 전송이 가능
해요 1초에 1백만 바이트씩 8개의 포트가 모두 지금 저 서브 시스템으로 연결되고
있어요 3억개의 조합이 있다고 해도 1초에 100만개씩 전송할 수  있는 8개의 포트
로 패스워드를 푼다면 5분밖에 걸리지 않아요. 아니, 8개의  포트에 분산해서 보낸
다면 3분! 2분밖에 안 걸릴지도! 이럴 수가. 도대체 시간이."
  "뭔가 방법을 생각해 봐요."
  "그럴 수가 없어요. 이 메인 컴퓨터는 저에 대해선 지금 완전히 고물이에요."
  알렉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서브시스템 쪽의 키보드를
미친 듯 두드리고 있었다. 아마 패스워드의 숫자를 늘려서 방어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2-3분안에 프로그램을 고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혜영이 다시  신음 소리
같은 어투로 . 그러나 높고 빠른 말투로 소리쳤다.
  "엄마 거미라면 주로 모뎀 선과 시리얼 통신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너무 시간이
걸려서 패스워드를 풀어낼 수 없을 거예요. 그러나 이 놈은 아예 패러렐포트를 집
중해서. 아 어떻게 이걸. 얼마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5분도 최대한의 수치
고 일반적으로 따지면……. 아 3분도 채! 이젠 1,2분밖에 안 남았는데. 아 이것을…
…."
  알렉은 무어라 소리를 쳤고  제라르가 다시 달려왔다. 제라르는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몹시 당황한 듯  계속 고함을 치고 있었다. 연희가  다급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현암에게 말했다.
  "제라르 씨도 소리치고 있어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저 데이터들을 지켜야
한다고. 지금 사태가 몹시 급해요. 저 데이터 마저 침입  당한다면 수백 명의 환자
들의 목숨은 …….어떻게 하든지. 저 컴퓨터를 지켜야 한다고."
  "전기를 끊으라고 해요!"
  "전원도 통제가 안 돼요! 주 전원실까지 가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거의 비명에 가까운 혜영의 소리를 듣고 현암은 이를 악물었다. 자기는 뭐가 뭔
지 하나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컴퓨터에 대해선 잘 몰랐으니까…….그렇지만…….
  제라르가 마구 소리를 치면서 땅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연희가 재빨리 현암에
게 들려주었다.
  "선로를 끊어야 한대요! 그쪽으로 패러렐포트 선 하나가 지나가는 모양이에요."
  프로그래머들이 그쪽으로 달려들어서  땅바닥에 철판으로  막혀있는 부분을 떼
기 위해서 마구 달려들고 있었으나  나사를 풀려면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았다.
현암이 입술을 깨물고 월향검을 빼 들고 그곳에 뛰어들었다. 손을 저어 다른 사람
을 밀어 낸 다음 현암은 월향검에 공력을 집중했다. 검기가 칼 끝에서 쭉 뻗어 나
오자 현암은 그대로 월향검을 땅에 그었다.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철판이 갈라
지며 불똥이 튀고 땅에 깊은 칼자국이 생겼다. 그러나 저쪽에서 혜영은 고개를 저
었다.
  "더 깊이 들어가 있어요. 선로가 차단되지 않았어요!"
  현암은 이를 악물고 다시 또 한번 칼을 그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혜영이 소리를
질렀다.
  "하나는 끊어 졌어요. 그러나 아직 일곱 군데나 남아 있어요!"
   제라르는 지금 어떻게 해서 현암이 조그만  칼로 콘크리트 깊이 묻혀 있는 선
로를 끊어 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좌우간 감탄의 소리를 지르며 다른 선로가 어
느 쪽으로 개설되어 있는지 찾고 있는 듯했다.  현암은 두리번거리는 제라르의 얼
굴을 보고는 다시 혜영에게 물었다.
  "혜영 씨. 이쪽으로 선로가 다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요?"
  "아이구. 아닌 거 같아요. 8개 모두가 분산되어서 ."
  시간이 없었다. 8개 선로를 모두 차단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제라르가 그 선로가
지나가는것도 정확할 수 있을지도 문제였다. 제라르는  뭔가 생각을 하려는 듯 머
리를 쥐어뜯다가 기억이 나지 않는지 하늘에 대고 비탄에 가까운 소리를 울부짓듯
이 내뱉었다.
  "저 데이터들은 수백 명의 목숨이 달린 거예요. 무슨  수가 있어도 저 데이터들
을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만."
  "무슨 수가 있어도…….말인가요?"
  현암은 다시 중얼거리며 월향검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현암의 머리
속에 뭔가 하나 잡히는 것이 있었다.
  '급할수록 냉정해라.'
  현암은                                                                              
다시                                                                    
                                         깨물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는 사람

과 그리고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고 있는 각종 기기  들을 살펴보았다. 갑자기
현암의 머리 속에 뭔가 희뜩 하고 스쳐지나갔다.  현암은 어쩔 줄 몰라서 거의 울
음을 터뜨리려 하고 있는 혜영에게 빠른 목소리로 물었다.
  "혜영 씨 빨리 대답해 줘요!"
  "아……. 지금 무슨 방법이."
  "어서 대답해줘요! 급합니다! 지금 이 메인 컴퓨터는 아빠거미에게 완전 장악된
겁니까?"
  "예! 도대체 손을 쓸 수 없어요!"
  "그렇다면 저 중요한  데이터가 백업되어서 보관되어  있다는 그 서브시스템은
메인과는 별개로 작동이 가능한 거죠?"
  "네에. 두개는 거의 완전히 독립된 시스템이죠. 그러나 거기 연결돼 있는 포트들
을 제거할 수 없어요. 이 안쪽으로 깊숙이 땅속으로 선로가 개설되어 있는 것이고
숫자가 8개 . 그걸 한꺼번에 제거한다는 것은……."
  말하는 새 알렉이 고통스러운 비명소리 같은 것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혜영도 비명을 올렸다.
  "아악! 서브시스템의 패스워드가 풀린 것 같아요! 이젠 10초도 채……."
  현암은 다시 눈을 돌려 먹통이 되어버린 메인 컴퓨터의 옆에 있는 본체를 바라
다보았다.
  "이것이 아빠거미가 잡고 있는 메인 컴퓨터입니까?"
  "네에. 맞아요.그렇지만 그것은…….이제 고작 5초!"
  "좋습니다."
  현암이 갑자기 허공에 대고 고함을 쳤다. 공력을  모으느라 집중하는 소리인 것
을 눈치채고 멍청히 혜영의 말에만 기울이고  있던 박신부와 승희, 준후는 현암을
쳐다보았다. 프로그래머들도 자포자기한 듯한  얼굴로 현암을 쳐다보았다.  현암의
몸에서 넘칠 듯한 공력이 피부를 통해 전달될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고 그 힘은 모
조리 현암의 오른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뒤에서 연희가 놀라서 말했다.
  "현암 씨!"
  현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대신  현암은 공력을 가득 넣은  오른손 주먹으로
메인 컴퓨터를 있는 힘을 다해 내려치는  것이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
불똥이 튀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사람들은 현암의  난데없는 행동에 더욱더
놀랜 모양이었고 알렉은 거의 기절할 듯 놀란 모양이었다.  혜영은 의자에 힘없는
듯 의자에 앉아 있다가 옆에서 현암이 메인 컴퓨터를 단 한방에 박살내는 것을 보
고 놀란 나머지 뒤로 나가 떨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메인 컴퓨터는 현암의 혼신의 공력을 다한 주먹. 단 한방에  거의 두 조각이 난
고철덩어리로 되어서 여기저기서 피식피식하는 연기 같은 것만  약간 베어 나오는
고물로 변해 있었다. 현암의 주먹  한방이 거의 사람 만한  크기의 메인 컴퓨터를
그대로 납작하게 눌러 버린 것을 보고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동안이나 멍
하게 있을 뿐이었다. 이 시스템의 담당자라는 제라르가 한순간에 십년은 늙어버린
듯한 얼굴로 비척거리면서 현암에게 다가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 이건 도대체 말도 안. 안."
  현암은 한숨을 한번 내쉬면서 조용히 혜영을 한번 보면서 물었다.
  "이러면 메인 컴퓨터에 있는 아빠 거미 프로그램도 사라졌겠지요?"
  혜영은 멍한 듯 촛점없는 눈으로 현암을  한동안 올려보다 거의 무의식 적으로
초점조차 없는 눈으로 다시 알렉이 뒤로 나빠진 채 쓰러져 있는 모니터 쪽을 다시
주시해 보았다. 그 쪽의 컴퓨터는 아직 활발히 작동하고 있는 듯했다.
  "네에. 서브시스템은 무사. 무사.한데. 그런데. 이건 이…… 컴퓨터는……."
  현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연희가 갑자기  활짝 웃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
다.
  "그렇다면 됐어요. 데이터는 지켰고. 암환자들도 계속……."
  현암은 아무말도 없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연희도  이야기를 멈추고 현암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스템의 담당자라던 제라르는 어지러운지 등을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고 알렉은 조각상처럼 서서  정말 꼼짝도 하지 않고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주변에 몰려서 그들이 하고 있는 행동을 보던 프로그래머들도 모두 다 반
은 울음이 터질듯 하고 반은 정신이 나간 멍한 듯한 표정으로 이미 완전히 찌그러
져 버린 메인 컴퓨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신부가 다가와 현암의 어깨를 살짝
치며 씩 웃었고 저만치에서는 준후가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현
암은 아무 표정 없는 바위 같은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찌그러진 메인 컴퓨터
를 내려다보며 다른 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 끝


              <<<   퇴마록 세계편 - 얼음의 악령   >>>


 오랜동안 해외출장을 다녀왔던 윈필드 기자가 다시 편집국의  데스크에 들
어서자 사무실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잘 다녀왔느냐며 윈필드  기자를 격려
해 주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윈필드 기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출장을 다녀오면 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윈필드기자도 출장을 다녔
던 내용에 관한 원고를 편집장에게 제출하는 것이 상례이고  그것이 아니더
라도 제일 먼저 편집장에게 가서 인사를 하는 것이 상례일  것이다. 윈필드
기자도 이 상례에 따라 사무실 한구석에 따로 칸막이를 막아서 만들어진 켈
리 편집장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겨 들어 갔다. 그러한 윈필드  기자의 얼굴
은 이상하게도 힘이 없고 모습은 퍽이나 초췌해 보였다. 항상  활기에 넘치
고 자신만만해서 어떨때 보면 좀 공상가나 자아도취 비슷한  것에 빠져있을
것같았던 윈필드 기자의 평상시  모습과는 조금 딴판이어서 윈필드  기자가
켈리편집장의 작은 사무실안으로 걸음을 옮겨 들어가고 나자 사람들은 윈필
드 기자가 왜 그럴까하고 수근수근 거리기 시작했다.

  윈필드 기자가 모습을 나타내자 켈리편집장은 점심식사후의  노곤함 때문
인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책상위로 다리를 뻗고 앉아서 졸고 있다가 윈필드
기자가 들어오자 책상에서 발을 내렸다.

"음... 언제 왔나?"

"예, 오늘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이리로 달려 온 겁니다."

윈필드 기자는 조금 힘없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켈리  편집장은 윈필
드기자가 왜 저럴까 하고 눈을 크게뜨고 윈필드 기자의 표정을  살폈다. 기
자가 저렇게 힘없는 표정을 지을때면 뭐랄까 자신이 추적하던  기사의 내용
을 취재하지 못했거나 해서 편집장에게  혼날 각오가 되어 있을  때인 것이
보통이었다. 켈리편집장은 윈필드 기자가 취재해 온다고 여태까지 여러번이
나 약속을 했었던 소위 특종이라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기대를 하고 있었는
데 지금 막상 맥이 빠진것 같은 윈필드 기자의 모습을 보자 몸에서 힘이 빠
지면서 왠지 울화와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으나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왜 그렇게 인상을 구기고 있는 거야? 얼굴 좀 펴게!"

 "예, 알겠습니다..."

 "일단 거기 앉게나... 그래, 이번에 취재한 것은 어떻게 됐나?"

 "취재 말씀입니까? 예... 그게... 바로..."

 "아니 똑똑히 좀 말해 보게! 그렇게 우물거리지 말고! 취재를 못했다 이건
가?"

 "아니오. 그건 아닙니다."

 "음, 그래? 그렇다면  왜 그러지? 자네 이번에는 캐나다에서 일어나고  있
던 이상한 일에 대해서 조사하러 가지 않았었나?"

 켈리편집장은 마치 용의자를 심문하는 형사와 같은 말투로  윈필드 기자에
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영국심령학회의 월터보울씨라는 사람을  제일먼저
찾아가 보겠다고 나선것이 윈필드  기자였다. 당시 영국에서  유령기사들이
대규모로 출몰하여 영국남부의 몇개 마을이 커다란 공황상태에 빠졌다는 소
식이 들렸을 때 윈필드 기자는 그 사건에서 뭔가  수상쩍은것이 느껴진다고
계속 주장하여 그리로 자원하여 간 것이었다. 그러나  맥빠지게도 더이상의
취재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온 것은 윈필드기자가 떠난지 사흘만
의 일이었다. 도대체 그렇게 떠들썩하게 돌아다녔다다는 유령들  자체가 거
의 하루 이틀만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처음에 협조를  약속했던 심령
학회의 월터보울씨가 돌연 무슨일인지 협조를 거절했으며  그후에 영국정부
에서도 암암리에 내용을 알아내려는 모든 시도를 방해하는 것이 느껴진다고
윈필드기자는 보고를 했었고 그렇게 때문에 이 일은 더욱  수상하다고 말하
며 취재기간을 연장해 줄것을 요청했었다. 그러면서 윈필드  기자는 몇가지
의 사건들, 그러니까 당시 영국에서 발생했던 엽기적인  몇가지의 살인사건
과 스톤헨지에서 발견된 폭주족들의  대규모의 죽음, 그리고  영국공항에서
그 폭주족들을 단신 맨손으로 모조리  때려 눕혔다고 하는 그  의문에 싸인
신비한 동양청년 간에 뭔가가 연결되어있는 것같다고 말하면서 특히  그 동
양청년의 일행인듯한 동양인 그룹에 대한 추적을 계속했었다. 그러나 그 정
체를 알수 없는 그 동양인 청년의 신분이나 정체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여러명의 동행과 같이 다니고 있다는 것 밖에는...... 그 동양인 청년을 필
사적으로 추적한 끝에 윈필드기자는 이번에는 독일에서 그 동양인청년의 자
취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지방에서 늑대인간들이 자주 출몰했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윈필드기자가 애써서 그  동양인들의
자취를 애써 ㅉ아서 뒤를 따라잡았을때 쯤이면 의례 그  일대에서는 그때까
지 벌어지고 있던 이상한 사건들이 흐지부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윈필
드 기자는 이것이야말고 수상한 일이라고 생각 하고 있다고  보고서를 보내
왔었다. 이러한 일이야 말로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한 또  다른 초자연력을
지닌 인간의 저항...'같은 주제로 쓰일수 있는 그야말로 '특종'일 것이라고
켈리편집장에게 이야기 했던 것이다. 원래 이 켈리편집장이  주관하고 있는
이 '어메이징(Amazing)'지는 세상에서도 신기하고 이상한 일들을 주로 소개
하는 잡지였으니만큼 그러한 윈필드기자의 이야기를 듣고  켈리편집장은 더
욱더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윈필드 기자는 독일에서  일단
그들의 자취를 놓쳤다가 다시 불가리아로 갔고 불가리아에서는 아무런 단서
도 찾지 못한 체 다시 루마니아로 자리를 옮겼었다. 루마니아에서는   드라
큘라공의 고향답게 여러 흡혈귀의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고 흡혈귀의 짓으로
보이는 믿기어려운만큼 끔직한 사건들이 수십차례에 걸쳐서 발생한 것을 알
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윈필드기자가 그들을 만나려는 노력은 수
포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공항에서 부터 그들의 자취는  어디론가 감쪽같이
없어 졌다가 나중에 루마니아의 어떤 병원에서 그들중 몇명이  입원해 있었
다는 기록만을 찾아낼 수 있었을뿐이었다. 그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낼 수 있
는 것이 없었고 흡혈귀사건이 주로 일어났던 일대에서 가장 의심이 가는 장
소라고 할 수 있는 트렌실바니아의 드라큘라성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지반붕
괴같은 것이 땅속에서 일어났다는 보고같은 것은 있었지만 성자체가 상하거
나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뭔가를 찾아내기가 어렵다고  윈필드기자는 말
을 했었다. 그때부터 켈리 편집장은 조금씩 윈필드기자가 추적하고 있는 것
이 단지 윈필드기자의 공상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윈필드기자가 마음대로 하게끔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나
서 윈필드 기자는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느닷없이 멀리 떨어진 캐나다로 ㅉ
아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윈필드기자가 선수를 친 것이라고 그 편지에
쓰여 있었다. 여태까지 이상한 사건이 벌어지고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되어
있다고 믿어지는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장소에는 그 동양인들이  세계 어
디를 가리지 않고 빠짐없이 나타나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곳에 동양인들보다 먼저가서 윈필드기자가  잠복하고 있
으면 그들도 틀림없이 찾아올 것이 아니냐는 그런 생각에서 였다.  당시 캐
나다에서는 윈딩고에 대한 희한한 전설이 나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윈필
드 기자는 윈딩고가 어떤것이고 그런 어떤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하나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고, 그 후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끝에 다시
이곳으로 털레털레 돌아온 것이다.

"전에 분명히 윈딩고와 관련된 어떤일때문에 분명히 자네가  오랜시간 추적
해 온 동양인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감하고 이번에야말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낸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그들을 만나지 못했나?"

"아닙니다. 글쎄요...."

"그런것은 그런데 도데체 그것이 뭐야?"

 윈필드 기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눈빛을 침울하게 흐리면서 편집
장에게 말했다.

" 그들을 만났었습니다."

" 그래? 아니 그런데 어떻게 된거야. 그들이 자네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런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사람들이 아니었단 말인가? "

" 아.. 글쎄요... 그것은..."

" 윈딩고라는 것은 도대체 뭐야? 그것에 대해서도 조사를 못했나? "

" 윈딩고라는 것은 과거의 인디안 때부터 내려오는  캐나다지방의 전설입니
다. 악령내지는 요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켈리편집장도 사실 그 이후에 암암리에 윈딩고에 대해서는 조사를  해 보았
었다. 전설에 의하면 윈딩고는 키가 5미터 이상이나 되는 거인,  그것도 해
골거인이라고 했다. 뼈만 남은 온몸에는 살대신 얼음덩어리가  주렁주렁 매
달려 있고 모든것을 마음대로 얼어 붙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윈
딩고는 특히 인간을 만나기만 하면 그 인간을 자신의 마력으로 꽁꽁 얼어붙
게 만들어서 아삭아삭 깨물어 먹는 다고 했다. 마치 아이스 캔디처럼... 그
러나 윈필드기자는   켈리편집장이 모르고  있던  것까지  이야기해주었다.
 

" 글쎄요. 아뭏든 전설속의 이야기  일테지만... 그런데 이 윈딩고는  그런
마력뿐이 아니라 또다른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에
게 무서운 저주를 내리는 마력인데 이 요괴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반쯤 홀
린 상태가 되어서 까닭도 없이 다른 누군가를 죽이려는 생각을 품는다고 합
니다."

" 다른 누군가를 죽이려는 생각을 품게된다고?"

" 예, 그래서 이 윈딩고가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윈딩고가  범하는 학살과
더불어 사람들끼리 서로를 의심하고 단합하지 못하게 만드는 혼란상태와 살
인극이 연속되고 그러한 혼란을 틈타서 윈딩고는 버젓이 마음대로 돌아다닌
다고 전해지지요..그래서..."

" 음, 그래? 그런데 그 윈딩고가 정말 나타났었단 말인가?"

" 아 글쎄요. 그것은 글쎄 그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그건..."

" 아니 도대체 뭐야? 내게 말을 하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도대체 그토
록 오랫동안이나 출장을 다니고 많은 출장경비를 소모했으면 뭔가 기사거리
가 될만한 것을 가지고 와야지. 아니면 차라리 실패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
를 하던가, 이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도대체 뭘  하자는 거야, 자
네 출장대신 관광만 하고 온것  아니야? 아무리 우리잡지가 믿어지지  않는
일만하는 그런 잡지라도 자네말은 너무나 허황된 데만 있어 원 세상에 키가
5미터나 되는데다 남을 저주하여 죽이고 싶게만드는 마력을  지닌 해골거인
이라고?"

" 아니.. 그 윈딩고는 있었습니다. 분명히 전설 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그래
도..."

 윈필드 기자는 계속 우물쭈물하며 말을 꺼냈다가 돌렸다가  하면서 정신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켈리편집장은 이런 추세로 내버려  두어서는 도무지
얻을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일단 윈필드 기자를 밖에  나가있으라고
내보냈다. 퇴근시간이 될 무렵이면 술을 한잔 마시게 해서 자기가  본 것을
술술 털어놓게 할 예정이었다. 윈필드기자는  본래 술을 잘 마시지  못해서
술을 약간만 마시면 무슨이야기든지 술술해 버리고 마는 그런  특성을 가지
고 있다는 것을 켈리편집장은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켈리편집장은
일단 윈필드기자를 내보냈다가 퇴근 시간이 될 때쯤해서 다시  윈필드 기자
를 불러내어 둘이 자주가던 근처의 바로 걸음을 옮겼다.

  윈필드 기자는 점차 술이 얼큰히 올라오는듯한 혀꼬인 말투로  드디어 켈
리 편집장의 말에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윈딩고요? 예, 윈딩고의 자취를 보았습니다. 그건...."
 
  "어떻던가?"
 
  "모든지 꽁꽁 얼려버리는 것... 그야  말로 참혹했죠. 제일 먼저  죽었던
사람은 조 톰슨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집 안이 온통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집안은 천장만 빼고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사방 벽에 박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마루 쇼파에 앉아 있다가  뭔가에 놀라서 벌떡 일어나려는  듯 했고
눈은 경악으로 크게 부릅떠 있었어요. 그는 막 일어서려는 자세  그대로 꽁
꽁 얼어붙어서 죽어  있었던 겁니다.  눈을 크게 뜬  채로, 얼음에  뒤덮혀
서... 뒤늦게 가보았지만 저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었죠..."
 
  "아니,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캘리 편집장은 점점 호기심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윈필드 기자는 이번에
는 권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술을 한 잔 따라서 쫙 들이켰다가 잔을 탁 하
고 다시 내려놓았다.
 
  "저도 믿어지지 않았죠.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놀라운 이야
기라고요..."
 
  "그런데 왜 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지? 아니,  차근차근 이야
기하세. 일단 조 톰슨 말고 다른 희생자가 있었나?"
 
  "예, 있었지요. 그 이후부터 그 마을에서는 계속 희생자가 나오기 시작했
다더군요. 마을이래 봐야 산맥 북쪽에  있는 인가 한 사 오십  채가 고작인
그런 곳이었죠. 그런데도 계속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조 톰슨과 비슷했지
요. 정육점 주인은 고깃덩어리 대신 역시 두껍게 꽁꽁  얼어붙어 있었지요.
정육점 냉장고가 아무리 좋았다 해도 그렇게 사람을 삽시간에 얼려 버릴 수
는 없었을 겁니다. 또 이름이  뭐더라.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어떤 할머니 하나는 씽크대의 수도꼭지를 틀려고 하는 자세 그대로 꽁꽁 얼
어붙어서 죽었지요. 역시 조 톰슨과 경우가 비슷했습니다. 무서운 일이었지
요. 때는 또 마침 겨울이었고 그런 사건이 벌어진 곳마다 온  집 안이 두꺼
운 얼음으로 뒤덮이고 그 얼음들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에 날씨가 풀
릴 때까지는 그 안에서 정확한  조사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지요.  보안관과
몇 명의 보안관조수들이 조치를 취하려는듯 했습니다만 일주일 사이에 여섯
명이나 연달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루에 한 명 꼴이죠."
 
  "아니 세상에 그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신문들이나  방송은 어떻
게 잠자코 있었지?"
 
  "그곳이 워낙 떨어진 산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마을의 보안관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철저하게 외부에 차단하고 있
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보안관이 외부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지원이 눈길 같
은 것에 막혀서 늦게 당도하는 것으로 알았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
았습니다. 좌우간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 했고 다음번 윈딩고의 희생자는 누
가 될까 하고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요, 바로  그거였어요. 사람들
간의 의심, 그리고 공포. 아, 아, 도대체 이건."
 
  윈필드 기자는 다시 한 번 자기 스스로 술을 따라서 또 한  번 벌컥 들이
켰다. 그러면서 윈필드 기자는 많이 취했을 때 보았던 몸버릇처럼  몸을 좌
우로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
 
  "음, 뭔가 사연이 있기는 있는가 보군.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편집장님, 제가 왜 기사를 쓰지 않았는지 아시겠습니까?"
 
  "음? 아니 그건 알 수 없지. 그러나 그 정도로 희안한  일이라면 우리 적
대지인 포츈지[Fortune]에 그 기사가 나왔더라도 당장 서점에  나가서 사서
읽고싶을 정도인 것 같네. 그런데 왜 자네... 기사를 쓰지 않았지? 그 이유
가 뭐야?"
 
  "하하하하, 글쎄요. 약속, 약속이 있었지요."
 
  "음? 무슨 약속인데."
 
  "동양인들과의 약속."
 
  "아, 동양인들? 그럼 그들을 결국 만나기는 했군!"
 
  윈필드기자는 켈리편집장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
다.
  "한국에서 왔던 그 사람들과의 약속이었지요. 그 친구들은... 하하하, 기
자를 때려 치던지."
 
  "아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자네... 나를 믿고 이야기 해보게."
 
  "하하하, 이야기 할 수 없어요.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그들은 정말... 편
집장님이라도 이야기 할 수 없어요. 그 약속은..."
 
  "음,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약속을 했다니?"
 
  "절대 기사화 하지 않겠다고 말이죠.  저는 사실 사표를 내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고  생각되고 기분이 좋지
가 않아요. 사표, 사표를 내고 싶네요."
 
  "아니, 그건 지금 또 갑자기 무슨 소린가?"
 
  윈필드 기자는 캘리 편집장이 몸을 흔드는 것을 느꼈으나  윈필드 기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또 다시 앞에 놓여 있는 독한 위스키 잔을 잡고 단
번에 들이켰다. 주량에 비해서 너무 많은 술을 마신 윈필드  기자는 갑자기
눈앞이 몽롱해지는 것 같으면서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는 자기가 술을 마시고 있던  테이블이 갑자기 눈앞으로 붕  떠올라 자기의
얼굴을 철퍼덕 하고 달려와서 때리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일이었지만 당시
윈필드 기자는 별로 신기하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자기가 보고 들은 일에
비하면은 그 정도는 신기하다고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윈필드 기자
는 서서히 눈앞이 캄캄해져 가는 것을 느끼며 문득 머리  속으로 자기가 지
난 며칠 동안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이 쓰려고 했던, 찢어버린
기사의 내용이 자신의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 윈딩고의 공포... 윈딩고는 다른 사람을 저주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소문이 마을
을 휩쓸고 다녔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윈딩고의 공포에 떨었다.  그러던
그 사람들의 공포심은 서서히 바뀌어  갔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는 그런 공포.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꼭 윈딩고 때문만이  아니라 자
기를 죽이러 올지도 모르는, 평상시 원한이나 감정이  있었던 사람들까지도
경계하기 시작했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을 힐끔힐끔 피하며 지
나가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 거대한 해골거인의 영상이 밤에 활보한다는 소
문이 돌았고 그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  다음번의
희생자는 의례 그런 말을 꺼낸 사람이었다. 분명 수십명의 목격자가 있었을
것인데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해골거인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
다.
 
  - 윈딩고를 본 사람은 먼저  죽는다...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된다...
                를 보았다는 사실이 그  저주의 마력에 의해 다른  사람을
해칠수도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공포에  질린 다른 사람들이 선수를  쳐서
자신을 죽이려 할 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윈딩고가  무엇보다도 무서웠겟지
만 그만큼이나 무서운 것이 바로 이웃사람들, 아니 다른 모든  사람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누구나 다 혼자가 된 셈이었다...
 
   밤이 되기도 전에 온 집 안에 문은 첩첩히 걸어  닫혔고, 길거리를 얼씬
거리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상점은 하나 둘씩 겁먹고 해도 지기 전에 문을
닫은 채 철시해 갔으며 혹시 식료품 같은 것을 사려는  사람이 상점의 문을
두들겨도 상점 주인은 공포에 떨다가 혹시나 물건을 팔지 않았다가는 또 다
른 사람의 원한을 살까보아 하는 수 없이 힐끔힐끔 거리고  눈치를 보며 물
건을 파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마을의 상태는 정상적인 것 같았다. 그
러나 어디에서 퍼졌는지 모르게 윈딩고의 마력이 마을을 휩쓸고  있다는 소
문이 퍼지고 또한 연달아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희생자들이 나오
자 사람들은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스스로를 자위하다가  결국은
서로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
에 대한 공포에 떨었다. 윈딩고의 마력에서 처자관계나  가족관계 친척관계
라고 해서 벗어날 수 있을리는 없다고 사람들은 은연중  생각하였고 드디어
는 집 안 자체가 풍지박산되었고 사람들은 서로서로가 방에 문을 걸어 잠그
고 철통 같이 자신의 거주 공간을 방어하며 심한 경우는 총을 옆에 놓고 덜
덜 떨면서 잠이 들기까지에 이르렀다. 윈필드 기자가 그 동양인 청년들보다
하루 앞서서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의 상태는 완전히 생지옥이었다. 보안
관은 일종의 계엄령 같은 것을 발표하여 해가 지면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다
니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켰고 그러지 않더라도 마을 사람들은 해가 진 다음
에는 문밖에 얼씬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윈딩고 자체보다도 사람들이 서로
눈덩이처럼 불려나가는 그런 공포와 의심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윈필드 기자는 다시 기사에서 벗어나 기억을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윈필드
기자는 자신이 바로 지옥으로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옥에서도 해야할
일은 있는 것이라고 여겼고  윈필드 기자는 나름대로의 사명감과  정의감을
가지고 그 윈딩고의 비밀을 하나씩 조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노력은 처음에는 수포로 돌아갔다. 도대체 온 집 안에 어떻게 해서 삽
시간에 앉아 있던 사람이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두꺼운 얼음이 뒤덮혀버
릴 정도가 되었는지는 도저히 윈필드 기자의 머리로서는 납득을 할 수가 없
었다. 정말로 초자연적인 마력. 그런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했
고 윈필드 기자는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도 예의  자기가 주목해왔
던 동양인 청년들이 그리로 나타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윈필드 기자
는 미리 월터 보울 씨에게 윈딩고 사건에 대한 짤막한  경위를 서신으로 보
내는 중이었다. 분명히 월터 보울  씨와 그 동양인들과는 유대관계가  있을
것이었고 그렇다면 월터 보울 씨는 그들에게 이 소식을 귀뜸하여 그들을 이
리로 오게끔 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윈필드 기자는 마땅히  정해진
숙소도 없는 상태에서 호텔의 구석방을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서 짐을 풀 수
있었고 처음 조사를 하던 무렵에는 얼음으로 꽁꽁 뒤덮혀 있는 죽은 시체들
을 보고 다만 경악할 따름이었다. 얼음에 뒤덮힌 시체들을 투명한  얼음 저
편에서 아직도 눈을 퀭하게 뜬 채 사건 현장에 그대로 잘  보존 돼 있었다.
물론 그 시체들을 치우려면 집 안에 두껍게 끼여 있는 얼음덩어리들을 모조
리 깨부시기도 해야되겠지만 날씨가 풀려서 얼음들이 녹기전,  그러니까 새
로운 수사대가 도착할 때까지 사건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보안관의 결단
에 따라 그 시체들은 죽은 자세 그대로 집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사람의 집이 졸지에 시체 안치소가 되어버린 격이
었고 그것만 해도 흉흉했는데 예의 윈딩고의 전설이라는 것이  마을을 휩쓸
고 지나가 마을은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적어도 그들, 그 동양인들,
현암과 박신부와 준후와 연희... 그리고 승희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봐, 이봐 일어나."
 
  캘리 편집장이 얼굴에 차가운 물수건을 갖다 대는 바람에  윈필드 기자는
다시 정신이 들었다. 아니, 완전히 정신이 든 것은 아니었고 정신이 들었다
고 생각했을 정도였을까. 윈필드  기자는 눈앞이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방금까지 자기는 그 생지옥같던 마을 생각을 하고 있었고 아직도 그 마을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나 보다. 옆에는 또 다시  켈리 편
집장이 앉아 있었고 자신의 앞에는 이미 반쯤 비어버린 술병이 있었다.
 
  "좀 정신이 드나? 도대체 이야기를  하다가 그냥 잠들어 버리면  어떻해,
집에 태워다 줄까."
 
  "예, 예 감사합니다. 예, 저는 지금 도대체... 제정신이  아니군요... 이
건 뭐..."
 
  "자, 자, 이거 너무 과음했구만."
 
  캘리 편집장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 이 상태에서  말을 시켜보
았자 변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윈필드  기자를 부축하여
술집 밖으로 나와서 자기 차에 태웠다. 윈필드 기자의 차는 여기서 하루 맡
아 달라고 미리 부탁을 한 참이었다. 캘리 편집장은 윈필드  기자를 옆자리
에 태운 다음 차를 몰고 나가기 시작했다. 마침 하늘은 잔뜩 시커멓게 찌푸
려 있다가 캘리 편집장이 차를 몰고 떠남과 동시에 하늘하늘한 눈송이를 뿌
려주기 시작했다. 윈필드 기자는 속이 안 좋은듯 잠시 헉헉  거리며 부자연
스러운 듯이 몸을 뒤척이다가 잠시 눈을 뜨고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이다. 창밖에 하얀 눈, 그리고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고 창밖의 풍경은 어
둠속이었음에도 희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눈, 하얀색. 그래... 바로 그때도...'
 
  다시 윈필드 기자의 눈이 스르르 감기며 윈필드 기자는  과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얀 눈. 눈이 덮힌 설온 저편에서 동양인들은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에
는 참으로 이상한 집단으로 보여서 무슨 이민온 밀입국자들의  떨거지와 비
슷했다. 여자가 둘, 남자가 넷.  한 명은 나이가 많이 들고  덩치고 우람한
남자였고 또 한 명은 머리를 뒤로 묶고 얼굴이 창백한 남자, 또 한 명은 눈
매가 날카롭고 평범해 보이는 남자였고 또 한 명은 조그마하고 아주 귀엽게
생긴 꼬마였다. 그리고 두 명의 여자는 한 명은 키가 크고  긴 머리에 눈이
큰 미인이었고 한 명은 보통 체격에 눈매가 좀 날카롭고 무서운 그러면서도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역시 눈이 확 뜨일만한 미녀였다.  그러한 일
단의 사람들이 막힌 곳으로 보안관이 완전히 막혔다던 산맥  사이의 눈길을
따라서 마을에 들어왔을때 마을  안에서는 자그마한 소동이 일어났다.  즉,
저 사람들이 온 것을 보면 눈길은 완전히 막히지 않는 것이 분명한 이상 이
공포스러운 마을에서 탈출하여 윈딩고가  날뛰는 겨울이 지난 다음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사람들이 마구 마을을  빠져나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안관은 재빨리 그 눈길은 몹시 위험해서 어떤 트랙터나  눈썰매로도 통과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확인되었기 때문에 절대 아무도  마을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당부를 내리는 한편 그 낯설게 들어온 사람들을 오히려 수상하다
고 말하면서 다짜고짜로 호텔에 넣고 그들을 나가지 못하게 하는  한편, 보
안관조수들로 하여금 그들을 보호(?)한다는  말도 안되는 명목으로  그들을
감시하게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동양인들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으
나 마을을 떠나게 해달라고 수차에 걸쳐서 보안관에게 밀려들었고 보안관은
그러한 사람들의 성화를 견디다 못해 경찰서의 전화를 모조리 자동응답으로
바꾸어 놓고 문을 걸어 잠근채 사람들에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마을 사람들
은 동양인들을 만나기 위해 호텔로 시끌거리며 밀려 들었으나 보안관조수들
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문채 그들을 제지햇고,  동양인들도 구태
여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그들은 조용히 호텔
방 안에만 박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투덜거림은 저녁 때가  되어서 가라
앉았고 그래도 무서운 눈길을 헤치고  길을 떠나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눈길 도중에 윈딩고를 만나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더 컸을지도  몰랐다. 좌
우간 윈필드 기자는 보안관의 행동에 의심을 느꼈다. 그리고 호텔  밖을 나
가 보안관 조수들이 순찰을 돌고 있는 가운데 마을에 또  다시 증거를 발견
할 수 없나 하고 무서운  마음을 감추면서 사방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래,
그때도 눈이 왔었고 사방이 희였다. 보안관 조수들은 분위기도 이상했고 낮
에는 밖에 나가 다니지도 않았으며 누구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
랄까,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같지가  않았다. 윈필드 기자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보안관 사무실을 방문했고  몇 번을 옥신각신했으나 그들과의  면회
허락은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윈필드 기자의 생각으로는  그들이야말로
예전부터 자신이 추적해 오던 그 동양인들이 틀림 없을거라는  확신 비슷한
느낌이 들었고 어떻게 하든 그들을 만나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윈필드기자는 다시 한번 잠시 정신이 들어서 차창밖으로  지나가는 눈송이
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지간이 술이 깨어가는거 같았고  켈리편집장의 차
는 윈필드 집 가까이로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 윈필드기자는 아직 결혼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지내고있던 참이였고 한편 그런일  때문에 켈리편집장과는
왕래가 잦았던 것이다. 켈리편집장은 윈필드기자를 윈필드기자 집까지 바래
다주었고  거기서 끝나지않고 윈필드기자를 부축해준다는 명목으로  윈필드
기자를 그와 함께 집안으로 걸음을 옮겨들어갔다.

 "이제 다왔어. 자네... 정신이 드나?"

 켈리편집장이 윈필드기자에게 말을하는 어투가 이상하게도  예전에 윈필드
기자가 했었던 말을 다시 기억이 되살아나게 만들었다.

 그때 역시 날카로운 눈매로 윈필드기자를 쳐다보구있던 그  아직도 생생하
게 기억할 수 있는 동양인 아가씨. 이름을 승희라고하던...

 "자네 이젠 좀 술이 깬 것 같은데... 괜찮은가?"

 " 예, 괜찮습니다. 뭐 별로.."

그때 미스승희도 자신에게 말했었다.

 - 인제 괜찮으신가요? 좀 얼떨떨하시죠?

 그래... 그 때 미스 승희가 살짝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  정신을 잃은 나를
깨웠다.. 보안관조수들에게 얻어맞고 쓰러진 나를 깨우면서...

 "뭐가뭔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왜 저 사람들이 나를.."

 "후훗...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그들도  원해서 그런 건  아니니까
요.."
 
  윈필드 기자는 보안관의 그러한  일련의 조치들이 뭔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몰래 보안관  사무실에 들어가 보려는 시도를  하던
중에 다짜고짜로 보안관 조수들에게 잡혀서 뒤의 공터로 끌려 나왔다. 변명
을 해보려 했지만 그들의 푸른 낯빛과 풀린 것 같고 초점 없는 눈동자는 윈
필드 기자에게 향해지지조차 않았다. 그들은 윈필드 기자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서는 다짜고짜로 뒤통수를 내리쳤고.. 그런데 감금되어있을 그 동양
인들이 어떻게 다시 나와서 자신을  구한 것인지.. 보니 그  여자와 꼬마가
자신의 주변에 있을 뿐, 보안관 조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꼬마는 뭔가 엄숙
한 표정을 짓고 두무더기의 재 같은 것에 대고 기도 비슷한 것을 올리고 있
는 듯 했다. 그 재더미가 무엇인지 그 때는 몰랐다.  그게 무엇인지.. 아무
튼 그렇게도 만나보고 싶어했던 그  동양인들을 (물론 자신이 가장  흥미를
가졌던 사람은 30명의 폭주족을  혼자 날려버렸다던 그 동양인  청년이엇지
만..) 눈 앞에서 만나게 되자  윈필드 기자의 마음 속에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신분을 위장해서 뭔가 알아내려
고 했으나 그런 마음을 먹기가  무섭게 그 여자는 얼굴색이  확 달라지더니
좀 날카로운 쏘는 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기자라는 걸 누가 모를 것 같아요? 공연히 술수 부리려 하지 말아요! 정
말.. 정말 사람들은 다 어쩔 수 없어..."
 
  "자 이걸 마셔보게.."
 
  윈필드 기자는 자신의 앞으로 커피잔이 쓱 내밀어지자 조금  놀라서 몸을
움찔하고는 다시 상상에서 벗어나 실제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눈 앞
에는 켈리 편집장이 친근해 보이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편집장님.."
 
  "음.. 내가 좀 무리하게 술을 권한 것 같아..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예?"
 
  "정말 자네, 나에게도 이야기 해 주지 않을건가?"
 
   켈리 편집장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켈리 편집장은 그리고보니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자신에게 술
을 먹이고, 여기까지 따라와서 아직도 가지 않고 귀와 눈을  곤두세우고 있
는 것이다. 까닭모르게 불쾌했다.
 
  '나를 진짜 생각해 준 것이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따라 온건가..?'
 
   미스 승희의 기분이 이해 될 것 같았다. 미스 승희는 중얼거렸었다...
 
  - 속이려고 하지 마세요. 스스로 마음 속으로 아무 생각이나 해도 된다고
여기지 마세요.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그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흉악한 상
상을 하지 마세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죠? 그러나...
 
  미스 승희는 분명 에스퍼(Esper)였다. 남의 마음을 모조리 거울처럼 읽어
낼 수 있는 놀라운 투시력을 가진.. 덜 된 에스퍼들이  그러는 것처럼 정신
을 집중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는 놀라운 능력자.. 단지  어떤 사람을 떠
올리는 것 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는 그런 초능력자.. 윈
필드 기자는 처음에는 놀랐고, 그 다음으로는 신기했다. 아니, 그보다도 그
여자가 그런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행동 해야 하는 것인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 이 능력! 이 저주 받은, 거지 같은 능력... 이것 때문에 나는.. 나는..
 
   그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호텔방으로 도망치듯이 들어
와서 그 동양인들에 대한 것들을 대강 알아내고 (윈필드 기자는  경악을 금
할 수 없었지만), 또 자신이 조사한 이 마을에 대한, 그리고 윈딩고에 대한
정보들을 교환(?)하듯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는 분위기가 이상하여  술 한
잔을 권하자, 옆의 꼬마 - 이름이 준후라고 했다. - 는 그냥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미스 승희는 선선히  여러잔의 술을 비우고 조금  취하는 것
같았다.
 
   "모두가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 시군요. 그러니까 현암..이라는  분은 기
(포오스(Force)라고 했었지만 나름대로의 설명이 꽤 필요했다.)를 운용하는
달인이고, 박신부님은 오오라와 기도력, 그리고 준후는 부적과  소혼술, 미
스 승희는 에스퍼 시라는 말인가요? 놀라운  팀이군요... 천하무적이시겟습
니다. 부럽군요.."
 
   윈필드 기자는 경탄의 의미로 말 한 것이었는데 미스승희는 그  말을 듣
자 다시 눈꼬리를 치켜 올리는 것이었다.
 
  "좋아요? 하하.. 부럽다고요? 그럴 것 같아요? 좋을 것 같은가요?"
 
   그 다음 술김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하여간에 흘림투로 이야기 하는 말 몇
마디도 윈필드 기자는 들을 수 있었다.
 
  "그 심한 고통들을 겪고 얻게 된 것이 그런 힘인데.. 하하.. 나는 뭐야..
그런 대가를 치르고  힘을 얻은 것도  아니니... 힘을  쓸 때 마다  늙어가
고... 이제 내 젊음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후후..."
 
  윈필드 기자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힘을 쓸 때 마다  미스 승희는 늙
어진단 말인가? 물론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엇으나 그보다는  무서운 일이라
고 해야 했다. 그러나 채 윈필드 기자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미스 승희
가 좀 당황해 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말했다.
 
  "절대 아는 척 하지 말아요.  준후는 영어를 모르고..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절대 그 건 말하지 말아요. 그러면  그들은 무슨 수
를 쓰더라도 나를 떼어 놓고 다닐거에요... 그건 안돼요.. 그건.."
 
  윈필드 기자의 생각을 미스 승희가 선수를 쳐서 읽어 낸  것이 분명했다.
윈필드 기자는 잠시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라면  어떨까?
그런 놀라운 힘과 능력이 생기는 대신 힘을 쓸때마다 조금씩 늙어가게 된다
면... 그런 사실을 알고 난 후에 그런 힘이 자신의 앞에  쥐어지게 될 기회
가 온다면, 자신은 과연 그 힘을  선뜻 손에 쥘 수가 있을까?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또 문제는 있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의 마음 속이  보인다는 것
은 신나고 희한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러나 그런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 속에서 살아갈 수가 있을까? 나와 사귀는 여자가 피곤하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우려는 것이 실은 다른  남자의 전화를 받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면? 자신이 슬플 때 자신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속으로 귀찮다는 생각을 조
금이라도 가진 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시니 존경했던 사람들의  마음 속
에서 허물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미스 승희는 그런 윈필드 기자의 마음속을 역시 환하게  꿰뚫어 보았는지
술잔을 징글징글 돌리며 미소를 띄었다.
 
  "생각이 깊은 분 같군요... 후훗.. 조물주가 사람에게 왜  잊는다는 것을
주었는지 아실 수 있어요?  모르고 지나가도 될  일, 아니 몰라야 하는  것
들.. 그걸 다 알 수 밖에 없게 된다면 그건 저주죠... 흉악한 저주..."
 
  "그렇지만...."
 
  "아.. 알아요.. 그러니 좋은 일에 쓰려고... 하하 이런 일이 아니라면 그
걸 가지고 무슨 짓을 하겠어요? 고고학의 B급 학생이고  그림그리기를 좋아
하던 현승희는 인제 없죠...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내 몸에서는 그 빌어
먹을 힘이 깨어났고 그 후엔 어쩔 수가.. 후후..."
 
   미스 승희는 꽤 오랜만에 술을 마신 듯, 이젠 몹시 취해가는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준후라던 꼬마는 그런  승희를 보고 불안해 하는  눈치였으나 그
놀라운 능력에도 불구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지 눈만 깜박거리고 동상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윈필드 기자는 아무 생각도 더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 앞에 보이는 이 갸날프고  예쁜 아가씨가
그런 힘을 지니고, 더더군다나 그런 힘에 의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은..
 
  "글쎄요.. 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그런  힘을 스스로
통제하도록 해보시면..."
 
  "후후.. 글쎄요... "
 
   미스 승희는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뭔가가 반짝 거리고  있었
다.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이 윈필드 기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나보다도 몇 배나 센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더군다나 제 동료
들.. 그들이 저는 좋아요.. 난 인제 세상에서는 그들 이외에는 아무도 같이
지낼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너무도 추하고... 헛된  망상.. 끔찍한
생각... 이기심... 약삭빠른 계산..  그런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요..
모르면 괜찮겠지만.. 보이는데.. 다 보이는데...."
 
   미스 승희는 막 울음을 터트릴 것 같다가 갑자기 숙연해지며  조금 화난
것처럼 보이는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왔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붉고 길쭉
한 아름다운 보석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가 봐야 겠어요. 현암군이 찾네요.. 젠킨스가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에
요..."
 
  "젠...킨스요?"
 
  "후훗.. 오늘 이야기는 모두 잊어주세요. 약속해 주시겠어요? "
 
  윈필드 기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보면 자신이 알고 잇고 조사햇
던 이 마을에 대한 상황이나 윈딩고의 흔적을 조사 한 것 같은 것도 구태여
자신에게 와서 물어볼 필요는 없는 것 아니었을까? 그냥 투시를  해서 알아
내면 그 뿐인데 이 아가씨는 왜 자신에게 와서 그런  사항을 일일이 질문한
것일까? 그런 생각까지도 읽어낸 듯, 미스 승희는 찡긋 윙크를 했다.
 
   "저도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털어 놓고 싶었어요.. 왜 아시죠? '마이다스
왕의 귀는 당나귀 귀!' 후훗..약속해 주시겠어요?"
 
  윈필드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자 앞에서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 여자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뿐이 아닌지도 몰랐다. 그런  이 사람들의 능력을, 그  고민이나 고통은
미처 헤아리지도  못하고 기사거리로  알리려던 자신  마저도 초라해  보였
다......
 
  "죄송합니다. 편집장님... 정말.. 정말 말할 수가 없어요.."
 
  "흠..!!!!"
 
   켈리 편집장은 드디어 화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
다. 애당초 기사를 쓰겠다고 한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그러나 할  수 없었
다. 약속을 어기고 미스 승희의  그 처연한 얼굴을 팔아먹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마음대로 햇! 난 실망했네! 자넨 날 화나게 만들었어! 알아서 하게!"
 
  "죄송하다는 말씀 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편집장님.."
 
  켈리편집장은 씩씩거리면서 문 밖으로 나가다가 다시 돌아와 벗어 놓앗던
자신의 코트를 휙 소리가 나게 집어서 뒤에 메고는 문을  쾅 닿고 나가버렸
다. 윈필드 기자는 한 번 한숨을 내 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그대
로 내려 놓고 천천히 주방에 가서 몇 년째 사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술병
을 꺼내서 다시 쭉 들이켰다. 오늘만큼은 취하고 싶었다.
 
   윈필드 기자는 승희와 그 꼬마를 따라 나섰다. 준후라고 하던 꼬마가 힐
끔거리며 자신을 쳐다보았지만 미스 승희는 뭐라고 꼬마를 타이르는  것 같
았다. 그들은 이미 인적이 끊어진, 흰 눈과 얼음에 뒤덮인  쓸쓸한 길을 몸
을 숙이고 달려가고 있었다. 마을의 조금 후미진 곳에 이르러서  꼬마와 미
스 승희는 나지막한 관목 숲으로 뛰어 들었고 윈필드 기자도  그 뒤를 따랐
다. 그리고 그곳에는 예의 그 동양인들이 모두 모여있었고... 그런데 그 순
간 믿어지지 않는 것이 윈필드 기자의 눈에 보였다. 정말  전설대로 키가 5
미터는 넘어보일 듯한 거대한 얼음해골의 형상이 저 집쪽에서  나타난 것이
다. 윈필드 기자는 세상에 저런 것이 있을 수 있나 하고  비명을 지르려 했
으나 눈매가 날카로워 보이는 동양인 청년(아마도 현암군..이라던  그 사람
일 것이다)이 씩 미소를 띄면서 입에 손가락을 갖다대었고 그  옆에서 준후
라고 하던 꼬마가 희한한 동작을 하자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몸이 꽉 붙
어 버린 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흐릿한 모습의 해골거인은 느릿
느릿하게 집 뒤쪽에서 꿈틀 거렸고 지금 윈필드 기자는 몸이  굳어 있는 채
라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소릴르 지를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몸을 꼼짝도 하지 못하는 윈필드 기자 앞으로 덩치가 우람한,  사제복을 입
은 나이든 남자가 나서서 조용히 말했다. 분명 이 사람이  박신부일 것이었
다.
 
  "실례를 범해서 죄송하오. 그러나 소리를 칠 것 같아서... 보안관 조수들
이 오면 시끄러워지니까 할  수 없이 실례를  범했소. 윈필드 기자님이  맞
죠?"
 
  윈필드 기자는 대답도 할 수 없었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만 간신히
숨만 쉴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사람은 잠시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윈필드
기자에게 조용히 말했다.
 
  "월터 보울 씨에게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윈필드 기자는 자기가 여태까지 찾아 헤매고 있던 동양인들을  바로 코앞
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에, 당장이라도 그들을 붙잡고 뭔가 조금이라도 알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미스  승희와 준후는 보았더라도 이  사람이
엑소시즘과 기도력의 권위자인 박신부..그리고 저기 눈매가  날카로운 청년
이 바로 미스터 현암.. 저만치서 겁먹은 듯한 큰 눈망울을  빛내고 있는 훤
칠한 여인이 미스 연희.. 그러나 지금 이렇게 몸을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
에서 도대체 어떤 질문을  할 수 있고 무슨  행동을 취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저렇게 거대한 해골거인이 정말로 활보하고 있는 앞에서는.. 윈필
드 기자는 인제 세상은 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절로 마이  갓 하는 한
숨소리가 (낼 수만 있었다면)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그 동양인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준후가 귀엽게
웃어보이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자 사람들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준후를 다
시 한 번 쳐다보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윈필드 기자가 몸을 떨고 있는데 그들은 저쪽에 있는 어느 집쪽으로 조심
스레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윈필드 기자도 따라가고 싶었으나 몸이 풀리
지 않았다. 지금 그들은 상당히  긴장해 있는 상태였다. 뭔가를  발견한 것
같았고. 그들은 아마도 그 집쪽으로 가야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잠시 논쟁
같은 것을 벌이더니 이제 막  그들은 그 집쪽으로 걸음으로  옮겨서 행동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필 윈필드  기자를 마주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듯 그들은 윈필드 기자를 데리고 갈 것이냐 아니면
이 자리에 놓아 둘 것이냐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윈필드
기자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을 이 자리에 그냥 버리고 두고 간다면 순찰을 돌
고 있는 보안관 조수에게 적발당할지도 모르고 더군다나 이렇게  추운 날씨
에 자기를 꼿꼿이 서 있게 만든다면 자신은 얼어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다. 마치 윈딩고의 마력에 의해 얼어버린 다른 사람들처럼.  윈필드 기자가
생각하기로 이 동양인들은 여태까지의 행적으로 볼 때 결코 악한 짓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윈필드 기자는 그다지 떨리지는  않았고
다만 이들에게서 뭔가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만이 초초하게 마음  속에 올라
오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사람들은 수근거리다가 머리를 뒤로 묶은  삼 십
살쯤 되어보이는 건장한 청년이( 이 사람만은 누군지 윈필드 기자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꼬마를 향해 뭐라고 얘기를 했고 꼬마가 뭔가 손가락을 폈다
꼬부렸다 하자 윈필드 기자의 몸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저, 저, 저게 뭡니까? 혹시..저... 저게 바로 윈딩고?"
 
  "아, 조용히 하시오. 이거 참."
 
  윈필드 기자는 무섭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궁금했다. 도대체  저 해골거인
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 동양인들이 태연한 것으로 보아 저  해골거인도 물
리칠 수 있겠지.. 그러니 위험은 없을 거라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윈필드
기자는 간절하게 말했다.
 
  " 저도 같이 가게 해주십시오. 제발요."
 
   제일 나이가 많은 연장자인 듯한 그 나이든 남자가 생각에  잠기다가 고
개를 끄덕였고 윈필드 기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방금 윈딩고의 모습이 나
타났다 사라진 그 집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윈필드의 기자의 온 몸은 후
들후들 떨리고 있었고 아무리 자신 스스로도 이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방금 자신의  눈앞에 나타
난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그 괴물이 있는 곳으로  스스럼 없이 다가가
는 자신에 대해 또 다시 놀라고 있었다. 그가 가는 사이에  미스 승희가 잠
시 킥킥 거리고 웃는 듯 하더니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무서워 할 것 없어요. 저 괴물은 진짜가 아니니까..."
 
  "예?, 그게 무슨 말이죠."
 
  미스 승희는 윈필드 기자를 잠시 멈쳐 세웠고 미스 연희와  준후, 박신부
도 잠시 정지 했다. 현암과 또 다른 청년 둘 만이 놀랍게 빠른 동작으로 어
느새 집 부근까지 다가가더니 집  뒤쪽 눈덮인 나무사이로 보이는,  대기해
놓은 듯한 커다란 차량쪽을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희안하게도 그 차량
은 차가 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집 뒤에 와서 서  있었고 엔진
덮개 부분에 눈이 떨어지자 곧 눈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되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한 동안 시동이 걸려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차는 무슨 압
축 깨스 같은 것을 운반하는 듯한 대형 차량이었는데 그것을  그 청년이 가
리켜 보이고 뭐라고 말하자 박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리로 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그때만 해도 윈필드 기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하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일행이 모조리 그  근처의 관목숲에
몸을 숨기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나
타난 두 명의 사람들. 그들은 보안관의 조수들이었다. 그들은 그 머리 위쪽
에서 움직이는 얼음의 악령, 윈딩고의 영상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기계적
인 뻣뻣한 동작으로 차의 주변을 살피다가 차에서 길다란  호스를 들이대어
그 집 창뒤쪽으로 끌어다 놓은 뒤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보안관
조수들이 나타나자 윈딩고의 모습은 사라져 없어져 버렸다. 잠시 후에 집의
안에서 뭔가 알 수 없는 번쩍 하는 불빛이 일어났고  그러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 두 명의 보안관 조수들은 그 호스를 창문으로 집어넣고 벨브를 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윈필드  기자가 쳐다만 보
고 있는 사이 옆에 있던 현암이 왼팔을 내뻗었다. 그러자 뭔지는  알 수 없
어지만 하여튼 섬뜩하게 밝은 빛을 내는 뭔가가 그의 왼팔에서 쏘아져 나왔
고 그들이 막 작동시키려던 호스는 중간이 갑자기 번쩍하면서 뚝 끊어져 버
리고 거기서 희뿌연 가스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호스는 보안관  조수들이
놀래서 비명을 치는 사이 그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는  호스는 뿜어져
나오는 가스 때문에 미친듯이  꿈틀거리면서 그 기운을 사방으로  쏘아댔고
그 가스에 맞은 것은 뭐든지 갑자기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박신부가 뭐라고 침중하게 중얼거리면서 입술을 깨물더니 몸을 일으켰다.
마구 튀어돌고 있던 호스는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면서 사방으로  뛰어 돌고
있었는데 박신부는 무서움도 없이 모든 걸 꽁꽁 얼어붙게  만들어버리는 그
호스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는 것이었다. 걸음을 옮기면서 그의 몸 주변에는
이상하게 파란 빛 같은 것이 구 모양을 이루면서 둥그렇게  뭉쳐져 갔고 뿜
어져 나오는 그 차가운 깨스는 그 둥근 빛이 마치 무슨 유리막이 되는 것처
럼 그 남자쪽으로 뿜어지다가 그 빛에 부딪쳐서 다시 갈라져서 흩어져 버리
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호스가 공중에 고정된 듯 딱  붙어버렸고 가
스는 다만 하늘을 향해서 똑바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눈
송이들이 마치 꽃잎처럼 휘날려 떨어져갔다. 그것과 때를 같이 하여 현암과
청년, 그리고 준후는 재빨리  몸을 놀려서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반은 얼결에 집안으로 같이 뛰어들려고 하던 윈필드 기자를 미스 연희가 제
지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지금 가면 안 돼요. 도리어 방해가 될 뿐이예요."
 
  "지, 지금 저게 지금 무슨 일이죠.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겁니까. 방금 보
인 윈딩고의 모습은 무엇이죠?"
 
  미스 승희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대답을 해주었다. 미스 연희는 승희의 얼
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차분하게 입을 다물었다.
 
  "윈딩고는 가짜예요. 준후가 다 투시했었어요. 윈딩고는 입체형상으로 허
공 중에 잠깐 보이게 만든 환영에 불과해요. 그것도 주술을 쓴 것이 아니라
삼차원 레이져 영상기를 이용한 거죠. 저 트럭 뒤에 아마 모든  게 실려 있
을 거예요."
 
  "예, 그렇다면 그 얼음으로 뒤덮힌 시체들은요? 윈딩고의 마력..."
 
  "하하하, 그건 단순한 트릭입니다. 물론 주술력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
니지만 그다지 신기한 것은 아니지요. 방금 저 집 안에서 밝게 뭔가가 빛나
는 것을 보셨지요?"
 
  "예, 그건."
 
  "그것만은 주술력으로 일으킨 불꽃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주술력으
로 일으킨 것이니만큼 흔적이 남지 않고 다만 약간의 열기만이 있을 뿐입니
다. 그러나 집 안에서 저런 불덩어리가 흩어졌다면 스프링클러가 가만히 있
겠어요? 아마 스프링클러를 향해 불을 맺히게 했을겁니다."
 
  "아, 그러면 스프링클러에서 계속 물이 뿜어져 나온다면...그리고  그 다
음에 저 차가운 가스를 들이대면."
 
  "예, 저 트럭 안에는 액체헬륨 가스가 들어 있지요. 스프링클러로 삽시간
에 물이 쏟아져 나오는데 절대 온도 0도에 가까운 저 헬륨  가스를 안에 퍼
부어 대면 모든 것은 움직일 사이도 없이 삽시간에 얼어붙어  버리게 돼 버
리지요. 바로 그것이 얼음의 악령, 윈딩고의 저주라는 주술의 정체랍니다."
 
  "아, 아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뭘 노리고."
 
  "블랙써클이죠."
 
  "블랙써클? 그건 또뭡니까?"
 
  "그것까지 자세하게 말씀드릴 시간은 없네요. 다만 저들은 사람들의 공포
심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어요. 삼대승정 중의 하나인 젠킨스."
 
  "예, 그건 또 무슨 말이죠?"
 
  윈필드 기자는 하나도 뭐가 뭔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으나 승희는 말문이
트인 것처럼 혼잣말을 하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젠킨스를 잡아야 해요. 그를 잡아야 블랙써클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
는 삼대승정 중에서 가장 주술력이 약한 사나이로 자신의  주술력을 완성시
키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필요로 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  작은 마
을을 선택해서 이 마을에 내려오고 있던 윈딩고의 전설을  이용하여 사람들
의 공포심을 끌어 모아 자신의 힘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죠."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신의 힘으로 만든다구요? 그건 도대체 무슨 말입니
까?"
 
  "블랙써클의 삼대계명. 증오와 고통과 공포. 삼대승정은 바로  그러한 힘
을 하나씩 나누어 가진 자들이예요. 증오의 총괄승정이었던  코제트는 이미
죽었고 젠킨스는 바로 공포의 승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따로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젠킨스가 블랙써클에 들어간 지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젠킨스는 당연히 가장 힘이 약할 것이고 자신의 힘을 늘리기 위하여
이 작은 마을부터 선택을 한 것이죠. 사람들을 미칠듯한 공포에  빠지게 만
든 다음  공포감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씩   죽여서 자신의 힘으로  흡수하
는..."
 
  "도대체 뭐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윈필드 기자가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집 안에서는  뭔가가 번
쩍번쩍하고 난데없이 여자의 비명소리가 울리는가 하면  총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불빛같은 것이 번쩍거리기도 했다.  때로는 정전기 모양의 번개  불빛
같은 것이 집안에서 빛나기도 했고 그러자 한참이 지나자 집 안으로 뛰어들
어갔던 청년과 아이가 비틀거리는 한 사람의 남자를 굴리듯이  데리고 나오
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보니까 아까 뛰어나갔던 한 명의 청년은 집 안으로
뛰어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근처에서 호스가 끊어지자 놀라  도망치고 있었
던 두 명의 보안관 조수를 어느새  때려 눕혀 놓고 있었고 두  명의 보안관
조수는 땅바닥에 길게 누워있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퍽 하면서 스믈스물 연
기로 화해서 없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윈필드 기자는 그것을 보고  헉 하는
비명을 질렀고 이번에는 눈매가 날카로운 여자가 조용히말했다.
 
  "놀랄 것 없어요. 저들은 주술로 죽은 사람을 일으켜서  만들어낸 일종의
좀비들이랍니다. 이곳의 보안관 조수들  그리고 보안관 모두가  블랙써클의
하수들이었어요. 보안관 조수들은 모두가 죽은 무덤에서 갓  파낸 시체들로
만들어낸 좀비들이었고 보안관은 젠킨스의  조수라고 할 수 있었죠.  아...
이제 젠킨스를 잡았나 보군요."
 
  어느 사이에 탱크 안의 가스는 하늘로 모두 빠져 나갔는지  더 이상 분출
되지 않고 있었고 눈매가 날카로운 여자는 끌려나와 있는 젠킨스 근처로 가
더니 젠킨스가 보이지 않는 곳에  가만히 앉아서 요가를 하는  것과 비슷한
자세로 정신을 집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이든 남자도 호스에서  모두
액체헬륨이 다 빠져나가자 다시 몸에서 빛을 거두고 그리로 다가갔다. 다만
몇마디 말만을 하며 이상하게 그 뒤에 앉아있는 여자의 눈치만       
                                                                 
                                었다. 그 젠킨스라던 남자는 뭔가 발악하는 듯이 
마구 떠들어  댔는데 이
상하게도 그 청년과 박신부라는 나이든 남자, 그리고 아이와 또  다른 청년
은 젠킨스에게 협박하거나 취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젠킨스는
갑자기 몸에서 불덩어리 같은 것을 일으키며 폭탄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
져나갔고 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폭발력에 휩쓸려서 뒤로 주춤거렸다. 다
시 윈필드 기자가 놀라서 폭풍이 지나간 뒤 눈을 떴을  때는 젠킨스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뭔지 알 수 없는 시커먼 원만이 크게  빙글빙글 맴을 돌면서
젠킨스의 찢어진 시체를 그 안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다 몹시 분노한 표정으로 그 원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러다가  그 원은 없어
졌다. 마치 꿈에서나 보였던 것처럼. 아니, 입체영상에서 잠깐 보였던 윈딩
고의 모습처럼....
 
  윈필드 기자는 병에 술이 더 이상 남지 않은 것을 알고는 그냥 몸을 침대
에 눕혔다. 하하... 이상하게 울적하면서도 유쾌한 듯한 기분..  그래.. 자
신은 영문도 모르고 그 마을의 영웅이 되어버렸었다... 그들이 이  모든 것
을 보여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은 애당초부터 자신들의 정체를  밝힐
생각도 없었고, 그러나 마을 사람들을 계속 윈딩고의 공포에 떨게  만들 수
는 없었으니까... 박신부가 말했었다..
 
  - 얼음의 악령.. 그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불신과  의심일지도 모릅
니다. 윈딩고는 가짜였지만, 진짜  윈딩고는 삽시간에 이렇게 마을  전체를
지옥으로 변하게 만든 마을사람들의 마음 속에 원래부터 있었는지도 모르지
요... 어렵고 무섭고 공포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이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돕고 아껴주기는 커녕 모두가  스스로의 공포심안으로만 빠져  들었습니다.
자신이 아끼는 누군가를 염려해주기보다 자신이 죽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로
만 빠져 든 것이죠... 윈딩고의  주술은 그들의 마음속에는 계속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채 눈치채기도 전에,  그들은 아
슬아슬하게 죽음을 모면한 사람 - 이 사람의 이름도 하필 켈리 였다.. 젠장
할..- 을 데리고 나와서 윈딩고의 모든 것은 가짜이고, 모든 것은 보안관의
음모였다고 말해주었다. 그 덜떨어진  켈리라는 작자는 스프링쿨러로  물을
뒤집어써서 흠뻑 젖은 채, 차에 있던 입체영상기와 헬륨통들을 보자 동양인
들이 집안에서 썼던 주술까지도 무슨 새로운 무기를 쓴 것으로  믿는 듯 했
다. 그리고 졸지에 자신은 윈딩고의 비밀을 파헤친 영웅으로 그  마을에 떠
받들어지게 되었고, 채 그것이 그  한국인들이 소리없이 빠져 나가기  위한
술수라는 것을 눈치채기도 전에 그들은 사라져갔다. 아니, 미스  승희의 쪽
지 하나만 남기고... 약속을 지킬 것을 믿는다는... 후훗...
 
  그래서 자신은 약속을 지켰다. 별별  거짓말을 다 동원해서 부술이  빠져
나가자 죽은 채로 발견된 보안관이 마약밀수를 하다가 탄로나자  자살한 것
이라고 했고, 자신이 본대로  윈딩고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일러주는  한편,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분을 온갖 거짓말을 해서 (기자는 원래 거짓말장이라
는 소리를 누가 했던가? 하하) 메꾸어 주었다.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곳에
서 빠져 나왔다. 물론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않았고... 그  한국인들이 왜
그리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는지는 스스로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하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특종'을 내
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벌거벗겨서 사람들에게 내보이려고 했었지... 도대
체 그 놈의 얼음의 악령이라는 것이 무엇이었던지.. 그리고 미스 승희의 미
소가 또 무엇이었기에 자신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인지.. 또 그 놈
의 힘과 능력이란 것은 무엇인지... 두서없는 생각에 빠지며 윈필드 기자는
서서히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기 시작했다. 박신부가 떠나기 전에
잠시 남긴 말이 생각났다..
 
  -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합시다.. 아멘...
 
                      (끝)



            <<<   퇴마록 세계편 - 그 맑은 가을 하늘빛   >>>
 
 
  케임브리지 부근에 있는 도자기 박물관은 일반인들에게 그리 잘 알려져 있진 않
다. 그러나 동서양을 통틀어 수십만 종을 헤아리는 엄청난 양의 도자기가 수집되어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만 따지면 세계적으로 손꼽힐 만한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영국에서 발생한 괴이한 일들을 해결하여 영국 여왕까지-물론 비공식적인 일
이었지만-접견한 퇴마사 일행은 영국까지 온 김에 잠시 쉬기로 하고 각각 흩어져서
나름대로 가보고 싶은 곳들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준후가 우연히 도자기 박물관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곳을 방문하고 싶어했지
만, 박신부는 영국 성공회 측과 상의할 일이 있었고 승희는 어디서 멋진  남자라도
발견했는지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현암은 나가 돌아다니기 귀찮다며 이곳  숙소에
서 맘 편히 쉬겠다고 하는 통에 할 수 없이 연희가 준후를 데리고 한나절 동안  그
박물관에 다녀오기로 했다. 물론 한나절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그곳에 전시되어 있
는 수많은 도자기들을 다 둘러볼 수는 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준후는 그곳에  가고
싶어했다. 다들 처음 안 사실이었지만 준후는 도자기나 그릇 같은 것을 특별한  이
유도 없이 그냥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흙이잖아요. 그런 흙으로 이쁜 도자기
를 만든다는 게 정말 신기하거든요."
  좌우간 가장 귀여움 받는 준후가  애타게 조르고 나서니 무뚝뚝한  현암이야 못
들은 체했지만, 마음 약한 연희로서는 준후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같이  박물
관으로 가게 된 것이다. 준후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의 그
헐렁한 흰 한복을 걸치고 연희를 따라 길을 나섰다.
 
  "여기 있는 도자기들, 좀 오래된 것들은 거의 다 영국이나 유럽이 아닌 다른 나
라 것들이구나."
  그곳에 있는 도자기들의 국적은 그야말로 가지각색이었으나 언뜻 보아서는 중국
의 도자기들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근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는  그다지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었으니까. 영국이나 유럽의 도자기들은 그리  오
래된 것들이 없었고, 화려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인 격조는 좀 떨어지는 편이었다.
준후의 간청에 못 이겨 따라나오기는 했지만 특이한 도자기들도 많이 있어서  처음
에는 제법 연희에게도 눈요깃감이 되었다.
  그러나 한참을 둘러보자 연희는 그 크기나 규모에  비해 왜 이 도자기 박물관에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정말  도자
기들이 화려해 보이고 멋져 보이기도 해서 은연중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지만,
계속해서 엄청난 수의 비슷한 도자기들만 보다  보니 차차 진력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준후는 지칠 줄도 모르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도자기가 진열된 장식대  사
이를 다람쥐처럼 뛰어다녔다. 빠르게 걸어다니건만 아직 채 삼분의 일도  보지 않
아서 연희는 서서히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색을 하지 않고 계속  거
의 달음질치다시피 돌아다니는 준후를 열심히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박물관의 조금
외진 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어, 누나! 저기 봐요!"
  준후가 한쪽의 장식장을 가리켰다. 언뜻 보기에도 그곳에 있는 도자기들은 어딘
가 다른 느낌을 주었다. 거의 모두가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연희도 호기심이 생겼다.
  "거의 다 파란 도자기들이네. 고려 청자일까?"
  준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꼴깍 침을 삼켰다. 보통의  칠이나 유약을 먹이는 것만
으로는 청자의 은은한 푸른빛을 제대로 낼 수 없다는 이야기는 연희나 준후도 들은
적이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쪽의 도자기들은 은은한 푸른빛을 맑게 풍기는 것
이 몹시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준후와 연희는 자신들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발놀림
으로 장식장을 향해 다가갔다.
  "와! 이 색깔 봐요. 난 도자기에  대해 별로 아는 건 없지만  정말 색깔이 곱네
요."
  연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이나 국내에서 보던 청자들과는 또 다르게 이곳에
전시된 청자들은 정말 그 색이 고왔다. 가을 하늘의 맑고 푸른빛을 닮았다고나  할
까?
  "어떻게 흙을 구워서 저런 색깔을 냈는지. 너무너무 신기해요."
  준후는 눈을 크게 뜨고 그곳에 진열되어 있는 도자기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훑어
보기 시작했다. 연희도 도자기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지만, 다만  보기만
해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그곳의 도자기들은 색깔은 물론이고  자
태도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다.
  "준후야, 정말이지 너무 아름답지 않니? 그렇지?"
  준후는 홀린 듯 청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거의 음울하고
맑은 날을 찾아보기 힘든 영국에서 고향  하늘과 비슷한 고운 빛의 청자들을 보고
있노라니 향수가 느껴졌다. 연희는 집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가 하고  생각
하니 피식 웃음도 나왔다. 그러나 준후가 갑자기 시무룩하게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잠시 들었던 고향 생각을 떨쳐냈다. 연희는 의아해 했다.
  "왜 그러지, 준후야?"
  "음, 모르긴 몰라도 진짜  청자의 색깔은 이것일  것 같네요. 너무 고와요.  그
쵸?"
  "응, 나 역시 동감이야."
  "그런데 왜 우리 나라에선 이런 색깔의 청자를  하나도 못 봤을까요? 있는데 못
본 걸까요? 아니면 없는 걸까요?"
  연희는 무어라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연희도 이런 고운 빛깔의 청자를 국내에서
본 적은 없었다. 사진으로도……. 국보급 도자기들은 간혹 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
것들도 이렇게 맑은 빛깔이 나지는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청자 만드는 기술도 다 잊혀졌다잖아요. 왜 그랬는지……. "
  연희는 말을 하지 못했고 준후는  좀 시무룩한 채 옆 칸에  있는 청자들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준후의 입에서 의아한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저건 좀……."
  준후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다른 것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온통 잿빛인 청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분명 모양이나 장식 따위를 보면 청자임이 분명한데 우중충한
회색빛만을 띠고 있었을 뿐, 파란 빛깔은 전혀 없었다.
  "희한하네요. 저건 왜 저렇다지?"
  연희도 이상한 생각이 드는 참에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박물관 안내원이 보였
다. 연희는 안내원을 불러 세우고 어째서 저기에 회색빛 자기가 있느냐고  물었다.
안내원은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이 짓다가 금세 미소를 되찾고는 예의 사무적인 목
소리로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변색되지 않았나 생각되네요."
  안내원의 말에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덧칠을 해서 색을 낸 가짜가 아닌 다
음에야 청자가 변색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있을 법한 일이 아니었다.
  "고려 청자는 원래 전체가 푸른빛이 나게 만들어진  것이고 일단 그렇게 만들어
진 도자기의 색이 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요?"
  안내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알 수 없지요. 음! 저도 여기 근무한 지 꽤 오래됐습니다만 그에 관한 건
자세히 모릅니다. 다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저 청자는 원래는 옆에 있는  것들보다
더 아름다운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점점 색이  탁
해지기 시작하더니 저렇게 우중충한 색으로  변해버렸다고 합니다. 기이한 일이지
만, 무슨 이유가 있겠죠. 몇 번 조사도 해보았습니다만, 당최 원인을 알 수 없더군
요."
  안내원은 말을 마치고 가버렸다. 연희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곡절
이 있는 것은 아닐까? 연희가 옆을 보니 준후는 벌써 눈을 감고 그 회색 청자에 신
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영기가 느껴져요. 연희누나."
  준후가 눈을 감은 채 조용한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연희는 준후의 말에 응답
대신 일단 주위를 먼저 둘러보았다. 준후가 하고 있는 행동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행히 박물관 내부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
었다. 경비원 몇몇과 관람객들이 어슬렁거리기는 했으나 이 쪽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연희가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준후는 계속 중
얼거렸다.
  "아주 오래된 영인 것 같은데……. 아주 희미해요. 의사소통이 쉽지 않네요. 이
건……."
  준후가 말을 하다 말고 연희의 손을 슬며시 잡아끌었다. 준후가 연희의 손을 잡
자, 연희에게도 그 회색빛 자기 주위에 이상한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연희는 흠칫 놀라서 무의식 중에 손을 빼려다가 그 이상한 기운이  보여주
는 영상 같은 것에 흥미가 생겼다. 과거에 연희는 그 이름 모를 남자가 허공에  그
려내는 광경을 보고 그것이 일종의 영적인 소통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와
흡사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호기심이 일었다.
  처음에 나타나는 그 영상은 몹시  어수선했다. 뭔가 강한 열기와  불 같은 것이
번득였고 그 와중에 몹시 혼란스러운 사람들 무리가 보였다. 동양 사람도 있고  서
양 사람도 있었다. 연희의 마음속으로 준후의 생각이 전달되어 왔다.
  -연희누나. 저건 저 도자기에 깃든 영의 기억이에요.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군요.
  연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불과 열기, 그리고
뭔가가 타는 모습이었고 그 밖에 소란스러운 싸움터 같은 정경이었다. 우리 나라를
연상시키는 장면도 부분적으로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어딘지 중국과 같은  느낌
을 주었고 간혹 서양인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음울한 회색빛
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준후가 한숨을 쉬면서 눈을 뜨자 연희의 시야에서도 청자 뒤편의 영상이 사라져
갔다.
  "기억이 너무 오래됐고, 또 혼란스럽게 나타나서 알아  볼 수가 없네요. 이상해
요."
  연희도 방금 본 것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준후의 영사로 인해
뭔가 영상이 나타나고, 더구나 파랗게 되어 있어야 할 청자의 모습이 회색빛을  띠
고 있다는 사실은 뭔가 곡절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더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준후가 연희를 돌아보았다.
  "한 번 소혼을 해 볼까요?"
  "그런 것 함부로 하면 안된다고 신부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니? 그러지 마."
  "그러나 궁금한 걸요. 더군다나 저건 고려 청자인데. 우리 나라 거란 말예요."
  준후가 말을 하는데 박물관  내에 안내방송이 울려퍼졌다. 이제  박물관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연희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준후의 손을 잡
아끌었다.
  "준후야, 일단 돌아가기로 하자."
  "싫어요. 궁금하다구요. 저 청자는 참 좋은 거였던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색깔이
우중충하게 되어버렸는지……. 뭔가 영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해요. 알고 싶단
말예요."
  "일단 오늘은 돌아가야 해. 박물관 문을 닫는 데도  남아 있을 수는 없잖아. 오
늘 본 것을 차차 생각해보기로 하고 뭐 잡히는 것이 있으면 내일 다시 오자꾸나."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아쉬움이 남는지 연신 뒤를 쳐다보았다. 둘은 박물관
의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희누나. 연희누나는 역사에 대해서 잘 알죠?"
  "글쎄. 나보다는 승희가 잘 알겠지. 나야 뭐……."
  "그래도 연희누나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고려 때 청자가 만들어진  게 왜 맥이
끊어졌을까요?"
  "그건……."
  연희는 좀 난감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얼버무려서는 먹혀들어갈 것 같지 않았
다.
  "우리 나라는 과거에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이나 뭔가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구
박하는 풍습이 있었단다. 손으로 뭔가 만드는 것을 천하다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차차 사라져간 것 아닐까?"
  준후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던 듯, 조금 입
을 삐죽하게 내밀고 잠시 뭔가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그럼 뭘까요? 더 좋은 것을 어거지로 만들어내라고 구박을 하니까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진저리가 나서 재주를 감춘 나머지 전해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연희가 듣기에도 어쩌면 준후의 말이 정답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
희는 섬뜩함과 대견함 같은 것이 묘하게 뒤섞인 기분을 동시에 느끼면서 눈을 크게
뜨고 준후를 쳐다보았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준후야,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었지?"
  "당연하잖아요. 나도 사실 그런 생각을……."
  준후는 뭔가 이야기하려다 말을  끊었다. 둘은 막 박물관의  정문을 걸어나오는
참이었고 뒤에서 둘이 나가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던 박물관의 경비원이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은 영국의 축축한 날씨답게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듯 잔뜩  찌푸린 회색빛
구름만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연희도 준후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준후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이상하게 되어버
린 화제를 바꾸려고 하는 것 같았다. 참으로 영악스러운 아이였다.
  "연희누나. 아까 그 영상들 봤지요? 그게 뭐였을까요?"
  연희도 아까 보았던 그 이상하게 혼란스러운 광경들을 생각해냈다.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준후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헤헤헤. 한 가지는 알아요. 연희누나도 거기서 불꽃 같은 거 봤지요?"
  "응, 봤어. 그게 뭐였지?"
  "전 알아요. 도자기 굽는 가마의 불꽃일 거예요."
  준후의 말에 연희는 깜짝 놀란 듯 그 자리에 우뚝 서더니 준후를 쳐다보며 말했
다.
  "맞아. 그렇겠구나. 그러고 보니 아까  보인 그 광경들은 그  청자에 맺힌 무슨
영적인 기운이라고 했지?"
  "예."
  "그러면 이번엔 내가 맞춰볼까? 후후후."
  준후에게 자극을 받아서였을까?  연희의 상상력이 갑자기  부풀어오르기 시작했
다. 고려 청자. 고려 청자는 고려인들의  자랑거리였을 것이다. 아까 영상에서 본
중국인의 모습들. 그건 분명 그 귀중한 고려 청자를 수탈해간 중국인들 같았다.
  "중국인들이 우리 나라를 침략했을 때, 아니  고려 때니까 몽고인들이라는 표현
이 맞겠군. 몽고인들도 고려 청자가 보물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테고, 우리가 본 그
회색으로 변한 청자도 그때 휩쓸려서 빼앗긴 걸거야. 그럴 것 같지 않아?"
  "음, 일리가 있어요. 박물관에 소장된 저 청자들은  지금 보기에도 퍽 명품들이
니까요. 그런데 그런 청자들이 어떻게 이렇게나 많이 이곳에 와 있는 거죠?"
  "음……. 아까 본 영상 중 금발머리를 한  서양인들의 모습도 많았어. 그렇다면
……."
  연희는 의화단의 난 때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북경이 유럽, 그것도 영국군을 주
류로 한 연합군에게 무참하게 함락되었던  사실을 생각해냈다. 예로부터 문화재에
대해 남달리 애착이 많았던 영국인들은 중국에서도 대량의 문화재들을 그때 약탈했
던 게 틀림 없었다. 그리고 원나라 때 이미 한 번 약탈당했다가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던 고려 청자들은 다시 한 번 서구 열강에 의해 약탈당했을 것이고, 그런 경로를
통하여 이 머나먼 영국까지 오게 된 것이라 추측되었다.
  연희는 준후에게 자신의 생각을 무심코 이야기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준
후는 연희보다 더 큰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받았다.
  "남들은 저토록 애지중지하는 물건을 우리는  직접 만들었으면서도 만드는 방법
까지 잊어버리게끔 하다니. 이건……."
  연희도 어린 준후에게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양,  이유 없는 부끄러움 같은 것
을 느꼈다. 준후는 비록 정규 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천성이 똑똑했다.  아이다운
단순함과 솔직함이 영악함과 어우러져 연희도 준후에게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준후는 갑자기 곤혹스런 표정을 짓더니만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
기 준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아, 그래. 저건…… 그렇다면……."
  "준후야, 뭐지?"
  "아! 그러면 그 도자기는……. 연희누나 나 잠깐만 다시!"
  준후는 순간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 듯 연희가 되물을 틈도 주지 않고 달음질
쳐서 박물관의 문을 향해 뛰어갔다. 연희가 뛰어가는 준후의 뒤를 놀란 눈으로  쳐
다보았다. 박물관의 유리문 너머로 경비원이 준후에게  손을 휘휘 저어 들어올 수
없다는 시늉을 하는 것이 보였다. 준후는 그대로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쪼르르
옆으로 돌아가 박물관 건물 주변에 무성히 자라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자취를 감추
었다. 연희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게 서 있다가 큰소리로
준후를 불렀다.
  "준후야, 뭐야? 왜 그러는 거야!"
  그러나 준후는 대답이 없었다. 연희는 뭔가 박물관 안에 있는 고려 청자 때문에
준후가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재빨리 박물관 문 쪽으로  달려가
서 유리문을 탕탕 두들겼다.
 
  회색빛 하늘.
  준후는 박물관 밖으로 나오면서 회색빛 하늘을 보다가 바로 뭔가를 생각해낸 것
이다. 미처 연희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할 여유가 없어서 일단 무턱대고 박물관  쪽
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는 했지만, 정문의 경비원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더군
다나 사람들이 막 빠져나간 이후에는 뭔지는 몰라도-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나오는
박물관들이 흔히 그렇듯이-경비 시스템이 작동될 것이고, 그러면 들어가는 것이 거
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준후는 그렇게 서둘렀던 것이다. 준후는 아까 박물관
안에서 보았던 박물관 뒤뜰로 향해 나 있는 작은 창문을 기억해내고 그리로 달려갔
다. 그 창문은 몹시 작아서 어른이 그리로 드나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
만, 준후처럼 작은 아이라면 가능했다. 그리고  그 창문은 열린 채로 있어서 아까
도자기를 관람했을 때 시원한 바람이 거기에서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다.
  '어디쯤일까? 이 쪽이 맞나?'
  준후는 나지막한 관목들이 빽빽히  있는 박물관의 정원을  달리면서 머릿속으로
자신이 생각한 것을 되짚어보았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그 도자기는 틀림없이 지
금 위기에 빠져 있을 터이고, 그 위기 상황은 아까 어렴풋한 그 메시지 속에서  충
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아까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해내지 못하고 그냥  과거
의 회상쯤으로 여겼었다. 아까 본 영상들 중 적어도 한 가지는…….
  '서둘러야 해! 자세히 알아내야 돼!'
  준후는 헐떡거리며 벽을 따라  달리다가 마침내 작은 들창을  발견했다. 그러나
아까 안에서 보았을 때보다 들창의 높이는 더 높아 보였다. 준후는 힘껏 팔을 뻗고
간신히 들창에 매달려서 힘겹게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이미 관람 시간은 지났습니다. 내일 다시 와주시기 바랍니다."
  연희가 아무리 사정을 하고 이야기를  해도 사무적이고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박물관의 경비원들은 몸에 밴 친절한  미소만 얼굴에 내보인 채 한사코 문을
열어주기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준후라는 아이가 갑자기 박물관 안으로 숨어  들어
갔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연희는 하는 수 없이 경비원들과 입씨름하기
를 포기하고 정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갔다. 준후의 뒤를 따라서 정원을
뒤져보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늘빛이 하도 어두워서 해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지
만, 어느덧 저녁 때가 되어서 구름 너머로는  해가 지고 있는지 사방이 점점 소리
없이 어둑어둑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기분도 좋지 않았고 음울한 느낌이 들어
서 연희는 몸을 한 번 움츠렸다.
  '저녁 때의 박물관은 정말 싫어!'
 
  준후는 간신히 작은 창문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다. 애지중지하
며 고국에서부터 입고 온  한복자락이 혹 찢어지지는 않았을까  한번 돌아본 다음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경비원들은 이제 막 문을  닫은 뒤여서 혹시 남아 있는 관
람객이 없는가 둘러보고 있는 듯, 사방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어디론
가 가서 눈에 띄지 않아야 할 텐데…….  준후는 저만치에 놓여 있는 커다랗고 주
둥이가 넓게 벌어진 뚜껑 있는  항아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항아리는 별다른
보호장치도 해놓지 않았고, 또 유리 상자로 덮여진 몇몇 작은 조각들 앞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유리 상자에 든 조각들을 복원한 모조품인 것 같았다.
  준후는 일단 목표가 발견되자 고양이처럼 몸을 날려서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안
에서 조심스럽게 뚜껑을 닫았다.  뚜껑을 닫자 완전한  어두움과 함께 바닷속같이
내부가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준후는 한숨을 쉬면서 희미하게 울려오는 발자
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선거리는 발자국 소리는 아직  많이 나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경비원들도 대기실로 들어갈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성급한 건 아닌가?'
  준후는 아까 본 영상 중에서 갑자기 떠오른 장면을  눈을 감고 곰곰이 기억해내
기 시작했다. 아까 보았던 불타는 영상,  그건 예삿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
니 불길 속에 뭔가가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뜻 보고 지나쳐
서 그 당시에는 별 생각이 나지 않지만, 지나고 나서 나중에 그 영상이 제대로 보
이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밖에 나가서 회색빛 하늘
을 보자 돌연 그 영상이 또렷하게 떠오른  것이었다. 아까 영상에 보인 회색빛 하
늘 아래에서는 서서히 무너져가는 건물의 모습이 보인 듯했다.
  그건 바로 이 박물관의 모습과 흡사했다.
  '이건 분명 경고야. 그 도자기에 깃든 영이 뭔가  참혹한 일을 예언하여 가르쳐
주는 것이 분명해.'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불                                                        
                                                        리던 그림자의   모습은 어딘지 
사람

형체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준후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영력으로 그 영의 생각을 읽어내자 자신의 옛 기억들과 함께 닥쳐올 일을
경고해주려고 박물관의 모습을 보여준 걸거야. 그나저나 이 경비원들은 왜 아직도
돌아다니는 거야? 대충하고 들어가면 안 되나?  그건 그렇고……. 너무 오래 걸리
면 연희누나가 걱정하지 않을까?'
  준후는 초조한 생각에 연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연희는 박물관 주위를 이미 여러 차례 돌다가 한  번 의심스러운 눈초리의 경비
원에게 제지를 당한 뒤에는 이미 문이 굳게  닫힌 정문 밖으로 밀려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냥 길을 잃은 것이라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그렇게 둘러대는 바람에 오
히려 친절한(?) 안내를 받아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간 준후를 그냥 내버려둔 채 문
밖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연희는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지금 돌아가서 일
행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러다가 준후가 다시 나오게 되
거나 만의 하나 오해를 받아 잡히게 된다면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 준후로서는 속
수무책일 것이 분명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그냥 초조할밖에.
  '그래도 기계화 사단 내부에까지 뚫고 들어갈 만큼 재주가 좋은 아이니까 별 일
은 없을 거야……. 그렇지만 아직 어린데…….'
  근처의 공중전화에 들락날락하면서 호텔로 전화를 해보았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
은 없었다. 기다리던 연희는 일단 자신도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최종 결
정을 내렸다. 오히려 준후를 방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
냥 이대로 있는 것보다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조하게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던 연희는 드디어 궁리  끝에 박물관 안으로 들
어갈 방법을 짜냈다.
 
  '이젠 됐다.'
  더 이상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자 준후는 서서히  항아리 속에서 몸을 일으켰
다. 뚜껑을 밀어내다가 자칫 깨뜨릴 뻔했지만  어쨌든 밖으로 나오자 답답한 것이
가셔서 좀 살 것 같았다.
  준후는 몇 번 숨을 몰아쉬다가 아까의 그 회색  청자가 있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어 전진하기 시작했다. 박물관 안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고 주변은 지나
칠 정도로 고요했다. 조그마한 소리만 내도 커다랗게  메아리가 칠 것 같았다. 고
양이처럼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겨가면서 준후는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조금씩 번
져오는 느낌을 받았다.
  '과연 뭔가 있구나. 그러나 일단은 그 청자를 놓고 다시 영사를 행해야…….'
  준후는 소리 없이 몸을 움직여서 그 회색빛 자기가  있는 진열장 앞까지 나아갔
다. 그 자기는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까 낮에 보았을 때보다 자기에서
느껴지는 영기는 더 짙어져 있었다. 준후는 눈을 감고 조용히 영사를 행하기 시작
했다.
 
  "도와주세요! 도와줘요!"
  소리치면서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던 연희는 드디어 경비원  하나가 나타나자 애
처러운 표정을 짓고는 빠른 말투로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국에서 온 관광객인데 깜박 저 안에다가 여권이 든  지갑을 놓고 온 모
양이에요. 내일이면 출국인데 어쩌면 좋아요? 들어가게 해주세요, 예?"
  "아, 아가씨. 사정이 딱하시군요.  그러면 제가 들어가서  찾아보겠으니 대략의
위치를 말씀해주세요."
  연희는 뜨끔했다. 이게 아닌데…….
  "위치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냥 들어가서 보면  생각이 날 것 같은데…
…."
  "관람시간 이후에는 일반인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아이고 그러면 저는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해요.  저더러 어쩌라는 말씀이에요.
예?"
  "그러나 좌우간 규칙상……."
  "잠깐이면 돼요. 정말이에요. 그리고 정 제가 의심스럽다면 저와 같이 동행해서
다니시면 되잖아요. 예?"
  일단 지금의 정황으로 볼 때, 말도 없이 박물관에 뛰어든 준후의 안위가 걱정될
뿐만 아니라 만약 경비원이 준후를 발견하더라도 준후가 가진 재주라면 위기 상황
은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연희는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연희가 눈을
크게 뜨자 경비원은 잠시 뭔가에 홀린 것 같은 얼굴이 되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힘
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도 뭔가 힘이 있기는 있는 거구나. 심연의 눈이라더니 그건가?'
  "너무 사정이 안된 것 같아 한 번 예외를  인정해드리는 겁니다. 그러나 반드시
저와 동행하셔야 합니다."
  경비원은 뒤돌아서면서 혼잣말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 안됐나보군. 그렇다고 울려고 하다니……."
  연희는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경비원의 말을  듣고 '힘이 아니라 불쌍해
보여서 그런 거구나' 하고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경비원의 뒤를 따라 박물관 안
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상상하지도
못한 채…….
 
  밤이 되자 회색 자기는 더욱  더 강렬한 영기를 뿜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좀더
정확하게 영사를 행하려면 청자에 직접  손을 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회색 자기를 비롯한 모든 도자기들의 주변에는 분명  어떤 감시장치가 있을 게 아
닌가. 준후는 장식장의 여기저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장식장의 칸막이마다
무슨 렌즈 같은 것이 자그마하게 여기저기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 장치는 나중
에 설치된 것인 듯 유리장의 안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일단 준후는 그 사실을 확
인하고 조심스럽게 유리장의 문을 열었다. 유리판은 쉽게 열려졌다.
  '영화에서 나오는 무슨 빛을 이용하는 감지장치인가 보다.  그러기에 사람은 영
화도 많이 봐두어야…….'
  준후는 자세히 그 빛이 나오는 경로를 짚어보았다.  그 빛줄기는 물론 도자기가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촘촘하기는 했지만 가느다란  준후의 손목 정도는 충분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여기저기 빈 구석도 많았다. 준후는 소맷자락이 넓은
한복을 접어올리고 신경을 집중하여 회색 자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에 손을
대자 갑자기 준후의 몸에 후끈한 열기 같은 것이 전달되어 왔다.
  "이크!"
  깜짝 놀란 준후가 어깨를 흠칫하자 접어올렸던 한복자락이  아래로 후르르 흘러
내렸다. 준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 비상벨이  울릴 것이고 자신은……. 잉?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비상벨도 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분명 개장 시간이 지났으니 경보장치를 켜놓았을 텐데…….'
  왜 경보장치가 작동하지 않는지  의아하기도 했지만 좌우간  지금의 준후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준후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이번엔 안심하고
손을 뻗었다. 직접 손을 대자 확실한 전달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까처럼 막연
한 공포나 회상이 아니었다. 비명처럼 소리지르는 외침이었다.
  '매일 밤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이 있다구?. 악마 같은 것들이……. 음? 이게 무
슨 소리야? 모두를 지배하려고 하는……. 음? 지금도? 앗! 조심하라구?'
  놀란 준후가 뒤를 채 돌아보기도 전에 뭔가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이 준후의 시
야를 가렸고 준후의 머리에 둔한 충격이 왔다.  준후는 청자를 그 자기를 거의 끌
어안다시피하며 뒤로 넘어졌다. 다시 한 번 옆구리  쪽에 강한 충격이 왔다. 준후
의 희미해지는 의식 속으로 푸른색의 제복 같은  것이 언뜻 보이더니 이내 깜깜해
졌다.
 
  연희는 자신을 안에 들어가게 해 준 경비원과 함께  박물관의 문을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잠시 그  경비원이 누군가를 불렀는데 아무도 대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경비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잠시 대기실로 보이는 방문
을 열고 그곳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아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들 간거야? 근무시간인데 이거 참……."
  경비원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연희는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준후는
분명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게 될 것 같아서  박물관 안으로 숨어들어간 것이 틀림
없었다. 그런데 반드시 제 위치를 지켜야 할  경비원들이 모두 다 어디로 갔단 말
인가? 혹시 준후가 걱정한 그 무슨 일이라는  것이 벌써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
닐까? 아니면 준후가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 경비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은 아
닐까? 아니지. 준후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지도  모르는 주술을 절대로 사람에
게 사용하지는 않는데……. 경비원은 쓰고 있던 모자를 들썩이면서 머리를 긁적거
렸다.
  "좀 이상하군요. 좌우간 아가씨는 어서 지갑을 찾으셔야죠. 저와 함께 갑시다."
  연희는 왠지 모를 불안한 기분에 경비원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자
신이 한 거짓말이 탄로날까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
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여태껏 퇴마사들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보게 된 바에 의
하면, 정말로 엄청나고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태연하게 벌어
지고 있었고 이번에도 준후가 자신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박물관 안으로 숨어든
것을 보면 여기서도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다른 때 같으
면 신부님이나 현암, 승희 등등이 항상 옆에 있어서 그런 대로 괜찮았지만 지금은
준후를 만나기 전까지는 혼자다.
  "어서 가시죠. 급하시다면서요?"
  경비원이 재촉하는 소리를 듣자 연희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박물관의 전시실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악의가 있어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거짓
말을 하게 되자 호랑이 등에 탄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비원이 비춰주는 랜턴 빛을 받으며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는 진열장 사이를 누
비던 연희는 일부러 조금 크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고 평소보다 좀더 큰 목소
리를 내었다. 준후에게 눈치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고려청자들
이 진열되어 있던 곳의 반대편으로 갔다.  자신과 동행한 경비원을 의식해서였다.
그런데 오히려 경비원 쪽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는 듯했다.
  "아, 잠깐만요."
  연희는 뜨끔했다.
  "예? 무슨 일이죠?"
  "위층에서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요?"
  연희는 자신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을 이  경비원이 눈치챈 것이 아닐까
해서 마음이 뜨끔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대답하는 연희의 귀에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웅웅거리는 듯한 소리였는데
연희는 심상치가 않다고 생각했다.
  "일단 알아봐야겠어요. 그런데……."
  경비원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다른 경비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
한 일이었지만 위층에서는 알 수 없는  기묘한 소리까지 들려오니 찜찜할 수밖에.
거기다가 낯선 이국 여자까지 데리고 들어왔으니……. 그러니 혼자서 이상한 소리
가 나는 위층을 올라가 볼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도자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이곳에-지금으로 생각하면 수상쩍게 들어온-외부인을  혼자 남겨두고 간다는
것도 영 마음이 놓이지가 않는 모양이다.  연희는 그런 상대방의 심중을 눈치채고
는 말했다.
  "그러면 저와 같이 올라가 보시죠. 저도 사실 아까 위층에 간 적이 있었으니까,
위층에 지갑을 놓고 왔는지도 몰라요."
  만약 위에서 아직도 나고 있는 그 소리의 주인공이  준후라면 연희가 같이 가야
쓸데없는 오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었다. 연희가 말을 하자 경비원은 의외라는 듯
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별 일은 아닐 겁니다만, 조심하시고 제  뒤쪽에 서세요. 다른 경비원들도
보이지 않고 기묘한 소리까지 들리니 좀  이상하군요. 그러나 아가씨는 제가 믿겠
어요. 그래도 되겠죠?"
  연희는 경비원의 솔직함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경비원도  연희가 미소를 짓
자 한결 안심이 되는 듯 몸을 돌려  앞장을 섰다. 경비원이 돌아서자 연희는 진작
부터 백에서 꺼내 주머니에 숨기고 있던 지갑을  살짝 바닥에 떨구고 경비원의 뒤
를 따랐다.
  계단으로 향하는 곳의 저만치에는 아까의 그 고려청자들이  진열되어 있는 부근
이었다. 연희는 먼 발치에서 진열장 쪽을 슬쩍 보고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
다. 아까 보았던 그 회색 자기의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후의 짓일까? 이런…….'
  연희는 경비원에게 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가능한한 표정을 변하지 않게
하려 애쓰면서 경비원의 뒤만  따라갔다. 계단께에 이르자  그 웅웅거리는 소리는
더더욱 분명하게 들려왔고 경비원도 무서움을 느끼는 듯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허리에 찬 작은 권총을 꺼내들면서 아주 작은 소리로 연희에게 말했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지면 지체 없이 달려나가세요.  그리고 경찰에 알려요. 알
았죠?"
  연희는 일부러 겁먹은 듯한 얼굴을 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오히려 연희는 준후
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자기를 들고 어디론가 숨었거나 달아난 것이 아닌지, 그
리고 그 일이 발각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전번의 공로로 영
국 여왕까지 접견했으니 해결 못할 바는 아니지만, 잘못하면 일이 뒤틀리고 말 것
이었다. 연희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그 작고  닳은 구리 십자가를
꺼내어들고 걸음을 옮겼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굽이를 돌자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쉿쉿거리는 소리
까지 들려왔다. 그건 분명  사람의 소리 같았다. 경비원은  긴장하여 연희에게 그
자리에 있으라고 손짓을 한 뒤 조심스럽게  굽이를 돌아 올라갔다. 연희도 무섭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냥 그 자리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고 기
척도 없는 준후의 안부가 걱정되었다. 연희는 푸른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위로 사
라지자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물관의 아래층은 그래도
경비실이나 외등의 불빛이 들어와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는데 위층은 캄캄했다. 무
서웠다. 그 웅웅거리는 소리와 쉿쉿거리는 소리는 아직껏 어디에서 울리는지 모르
게 들려오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방금 올라간 그 사람은…….'
  계단을 다 올라와서 몇 발자국을 옮기는데 저 앞에 먼저 올라온 그 경비원의 뒷
모습이 보였다. 무섭던 차에 연희는 반가운  생각이 들어서 그 경비원에게 다가가
서 어깨를 살짝 치면서 말을 건넸다.
  "저……."
  고개를 서서히 돌리는 경비원을 보고 연희는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경비
원의 얼굴은 거무틱틱하게 일그러져 다른 사람의 얼굴로 바뀌어져 있었다. 눈에는
붉은 핏발이 서 있었고 입에는 잔인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캬!"
  경비원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면서 연희에게로  팔을 뻗었다. 그 손마
저도 거무티티하게 변해 있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
다. 연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그 경비원의 손을 피했다.
  그 경비원의 행동은 느릿느릿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연희가  몸을 피하자 허공
을 움켜쥐는 데도 그 동작은  느렸다. 연희는 놀란 나머지  평소 익혔던 호신술을
발휘해서 남자의 다리를 걸어버렸다. 마치 나무등걸이나 바위를 걷어찬 듯한 통증
이 연희의 발목에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조금 움찔했을  뿐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어!"
  연희는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이번에는 당수로 경비원의 목  부위를 후려쳤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연희의 일격에 무릎을  꺾기 마련이건만, 그러나 경비원은 모자
가 날아가고 목을 잠시 움츠렸을 뿐, 여전히 잔인한 미소를 띤 채 다시 연희를 향
해 팔을 뻗는 것이었다.
  연희는 질린 나머지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악령의  농간이 분명한데, 분명 무
슨 술수에 의해 저렇게 변해버린 것 같은데,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연희는
주먹을 쥐고 경비원의 명치 부위를 다시 강타해보았지만 역시 바위를 치기라도 한
듯 경비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연희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새하얗게 변해갔다.
  '이건 사람도 아니야! 어쩌다가 순식간에 이 사람이…….'
  심한 절망감으로 연희는 정신 없이 경비원의 명치 부근을 두들겼으나 딱딱한 바
위 같은 느낌만 왔고 손이  저려올 뿐, 상대는 조금도 타격을  받는 것 같지 않았
다. 그러다가 연희는 그만 경비원의 손에 한쪽 손목을 잡혀버렸다.
  "으아악! 이거 놔!"
  연희는 있는 힘을 다해서 발로 걷어차서 경비원의 손을 뿌리치고 아래층으로 뛰
어내려갔다.
  "준후야! 준……."
  준후를 소리쳐 부르려던 연희는 경악에 질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것인지 아까 그 경비원과 똑같이 변해버린 경비원들이 대여
섯 명이나 계단의 아래로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는 똑같이 검은
얼굴에 일그러진 흉칙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모두 느릿느릿하니 마치 원격조종을
받는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연희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려다가 다시 비명을 지르면서  계단 위로 향했다. 그
러나 거기에는 아까의 그 경비원이 여전히 느릿느릿하게 연희를 향해 다가오고 있
었다.
  "저리 가!"
  연희는 다가오는 경비원을 확 밀쳐내려고 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두어 발자국 뒤
로 밀려났다. 연희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재빨리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경비원의 옆
으로 돌았다. 경비원의 동작은 여전히  느릿느릿했다. 다만 천천히, 느릿느릿하면
서도 지칠 줄 모르는 듯 계속 연희에게로 다가서고 있었다. 어느새 계단 아래쪽에
있던 대여섯 명의 경비원들도 계단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계단 위로 올라오는 참이
었다.
  '내려갈 길이 없네. 다른 계단을 찾아봐야겠어.'
  연희는 다른 도자기들이 쭉 진열되어 있는 장식장 사이를 누비고 달려나가 반대
편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대체 이 박물관은  굉장히 넓은 데도 불구하고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계단은 하나뿐인 것 같았다.
  '큰일이군. 내려갈 방법이 없어.'
  연희는 다시 몸을 돌렸다. 저만치에서 일곱 명으로 불어난 경비원들은 하나같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계속 다가오는 중이었다. 차라리  숨 가쁘게 쫓고 쫓기는 상
황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저렇게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이
연희에게는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일곱 명의  경비원들은 마치 무슨 사냥감을 몰
기라도 하듯 박물관의 복도에 나란히 서서 길을 휩쓸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리들 가!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준후야, 준후야!"
  연희는 준후를 소리쳐 부르는  동안에도 경비원들은 느릿느릿한  몸짓으로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연희는 한동안 준후를 부르다가 다시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눈
물이 앞을 가렸다.
 
  -얘야, 얘야…….
  준후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아예 자신
이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  것인지조차 불확실했다. 그런 속에서도 나지막한
소리가 준후의 마음속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얘야, 정신을 차리렴. 어쩌자고 이런 일에 끼어 든 거니?
  준후는 들려오는 소리에 대답을 하려고 애썼으나 아까 얻어맞은 자리가  욱신거
려서 정신도 모아지지 않았고 말을 할  기력도 없었다. 준후의 마음속에 울려오는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곳은 밤만 되면 무서운 곳이란다. 그 열두 명의 짐승 같은 놈들이 …….
  열두 명의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준후는 힘겹게 정신을 집중해서 소리가 나오
는 쪽에 대고 물어보았다.
  '열두 명의 누구라구요? 그리고 아저씨는 저 자기 속에 계시던 분 맞나요?'
  -정신이 들었구나, 아이야. 그런데 어떻게 나하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지? 내가
다시 살아난 듯한 기분이 드는구나. 허허허.
  '그런 건 지금 이야기할 때가 아닌 것 같네요. 그나저나 아까 아저씨가 품고 있
던 생각을 읽어보니 뭔가 위험한 일이 이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요. 방금 말씀하신 그 열두 명과 관계가 있는 건가요?'
  -그렇단다. 이곳에는 많은 도자기들이 있지만 위층에 있는  열두 개의 도자기는
아주 무섭단다. 이곳에 있는 다른  도자기들은 다 평범한 것이지만  내가 있는 그
청자와 위층의 열두 개의 도자기들은 모두 사람의 영이 깃들어 있는 거란다.
  '그럼, 그들도 도자기에 깃든 영들이란 말인가요? 그리고 아저씨는 어쩌다가 승
천하지 않고 그 자기에 혼이 깃들게 된 거죠?'
  -이야기하자면 길단다. 그리고 그 열두  놈들이 깃든 것은 도자기라고 할  수도
없                                                                               
                                갑자기 생각을 전달하고 있는 영이 분노 내지는 끔찍함을 
느끼
는 것 같아서 준
후는 궁금해졌다.
  '도자기가 아니라면 뭐죠? 여기는 도자기류만 모아놓은 곳인데…….'
  -그건 도자기가 아니야. 그릇일 뿐이지. 그  그릇들은 말이다 모두가 거기 깃든
놈들의 두개골로 만들어진 거야.
  '두개골이요? 그럼 사람의 머리로 만든 그릇이란 말인가요?'
 
  연희는 피곤했다. 너무 많이 뛰어다녀서인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고 숨이
몹시 찼으며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벌써 얼마나 오랫동안 지긋지긋하게도 따라오
는 경비원들을 피해 숨바꼭질을 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그들의 동작으로
보면 결코 뛰어다니는 연희를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들은 조금
도 지치거나 서두르는 기색 없이  사냥꾼들이 몰잇감을 몰듯 연희를 몰고  다니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뛰어다니는 동안에야 잡히지야 않겠지만 언제까지나 계속 뛰
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너무나  피곤하여 조금 틈을 내서  쉴라치면 채 몇
번 심호흡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느릿느릿하니 연희에게로 다가서는 것이었다. 도
저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연희는 몇 번이나 준후를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준후마저도 저들에게 당한 것은 아닐까? 아니야. 준후는 그럴 아이가 아니
야. 얼마나 재주가 많은 아이인데. 그러나 비록 지금은 흉악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분명 사람들이었고, 준후는 사람에게는  절대 자신의 술수를 쓰지 않는
다고 했다. 그렇다면 벌써 준후는…….
  "안 돼! 이 나쁜 놈들. 그 아이를 어떻게 한 거야. 그리고  제발 좀 가까이 오지
말란 말야. 저리 가! 가!"
  연희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지칠 줄도 모르고 여전히 다가드는  경비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경비원들은 들은 척도 않고 징그러운 팔을 뻗은 채 연희에
게로 계속 다가서고 있었다. 연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말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지긋지긋했다. 연희는  이를
갈면서 재빨리 경비원 중의 하나에게 달려들었다.  도망만 치던 연희가 도리어 달
려드는데도 그들은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도 없이 여전히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연희를 잡으려 했다. 연희는 재빨리 거의 마지막 남은 기운으로 고개를 숙여 와르
르 덮쳐드는 그들의 손을 피하며 한  경비원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한
놈의 손이 연희의 어깨를 움켜잡는 것이  느껴졌다. 어찌나 세게 잡혔는지 아찔할
정도로 아팠다. 연희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어깨를 잡은 손을
뿌리쳤다. 어깨 부분의 옷이 놈의  손톱에 걸려 찍 하고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희는 급한 김에 몸을 데굴데굴 굴려서 다시 덮쳐드는 그들의 손을 피했다. 정신
없이 한참을 구르다가 몸을 일으켜보니 그들은 저만치 뒤로 떨어진  채 여전히 조
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릿느릿 다가서고 있었다. 연희는 더 이상 몸을 가누기
도 어려웠고 눈앞에서는 별 같은  것이 자꾸만 반짝이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쓰러져선 안 돼. 절대 안 돼. 아, 하지만 너무  힘들어. 차라리 죽는 게……. 아
니, 내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 또 다가온다. 제발 오지 마. 제발! 제발! 제
발!…….'
  연희는 고개를 마구 흔들며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제발 가까이 오지 마! 저리 가! 저리 갓!"
  연희의 목소리가 휑한 박물관 안에서 이리저리 메아리쳤다. 그러나 연희의 절규
는 아랑곳없다는 듯 그들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연희는 마치 상처입은 짐승처럼 가쁜 숨을 내쉬면서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다가오
는 놈들을 째려보았다. 맞다! 내 손에는 권총이 있다. 더 이상 다가오면 나는…….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쏴버리겠어! 저리 갓!'
  연희는 반은 울먹거리고 반은 이를 갈면서 다가오는  경비원들을 향해, 아니 악
령이 조종하는 인형들을 향해 총을 겨눴다. 총구가 자기들을 향하고 있는 것을 아
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계속해서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이곳에  상당히 오랫 동안 있으면서  대강의 일들은 알
수 있게 되었단다. 그들은 나보다도  훨씬 오래 전에 죽어서  그 자신들의 두개골
그릇을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자들이지.  그런데 그들이 자꾸 나를 괴롭힌단
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고요? 그리고 아저씨를 괴롭히다니요? 무슨 말씀이세
요?'
  -그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영이 들어갈 수 있는 다른 그릇을  찾는 거야. 그러나
사람의 영이 깃들어 있는 도자기는 여기서도 내 것 하나뿐이야. 그들은 내가 들어
있는 이 청자를 차지하려고 나를 몰아내려 하고 있어.
  준후는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분명 남 모르는 고충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의 두개골로 도자기를 만들
다니……. 그 악령들도 분명 무슨 사연이 있기는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건 그
렇고 누가 자신을 때려서 기절시켰을까?
  '그런데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누구죠? 악령들의 힘으로 어떻게…….'
  -그들은 밤만 되면 이곳을 지배한단다. 여기에는  열두 명의 경비원이 있지. 바
로 그들을 이용하는 거야.
  준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대충 추려보면 이런 것이었다. 도자
기, 아니 그릇 속에 들은 악령들은 낮에는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가 밤만 되면 이
곳의 경비원들에게 빙의되어서 멋대로 활보하는  것이었다. 회색 자기와 의사소통
을 하려는 준후를 기절시켜 잡아온 것도 악령에 빙의된 경비원의 소행임이 분명했
고…….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아저씨를 괴롭히는 거죠?'
  -처음에는 협박을 하더군. 그리고 지금은 그들도 지독해졌어. 그들이 왜 경비원
의 몸을 비는지 알겠니? 그들은 밤만 되면 경비원들의 몸을 타고  내 청자로 와서
갖은 방법으로 나를 떠나가게 하려 한단다.  깨뜨리겠다고 내던지고 마구 치는 경
우도 있고 불로 지지고 발로 차고 다니기도 하지. 이젠 나도 힘이 빠진단다. 내 모
든 힘을 다해서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이 청자를  지키느라 버텨왔지만, 이제는
너무 힘이 들어…….
  준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청자에 깃들어 있는 영은 아마도 이 청자를 직접
만든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청자에 대해 목숨보다도  강한 애착을 가지
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에 저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청자에 꽉 달라붙
어서 그들이 협박하느라 청자를 부수려는 것을 오로지  정신력으로 막아내고 있었
다. 안 그랬으면 이 청자는 진작에 깨어져버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청자가 서서
히 회색빛으로 변해갔다는 것도 대강 짐작이 갔다. 하도 고생을 하다보니 영의 생
각이 침침하고 어두운 쪽으로, 또 고생스럽다는 면으로만 기울어졌을 것이 분명하
고, 따라서 그 영이 지키고 있는  청자의 색깔까지도 침침한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것이라고 추측했다. 준후는 수없이  고생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만든 청자를
지키고 있는 이 사람의 영에 대해 가슴 뭉클함을 느끼면서 다시 생각을 모으기 시
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건 뭐죠?'
  -나도 확실히는 몰라. 그러나 대강 짐작은 간단다. 그건 바로…….
  '뭐죠?'
  -누군가를 다시 살리려는 것……. 아마 있어서는 안 될 일을  꾸미려는 것 같은
데…….
  채 그 영의 생각이 다 전달되기도 전에 닫혀 있는 것 같던 준후의 귀에 희미하
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총소리였다.
  '어 이건…….'
  준후는 재빨리 정신을 모아 반사적으로 무슨 일인가를 알아내려고 했다. 준후는
승희와는 달리 영이 아닌 사람에 대한 투시는  거의 할 수 없었지만, 그런 준후에
게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방금 청자의 영에게서 들었던 여러 명의 흉측하고 잔
인하게 느껴지는 영들과 뒤섞인  희미하지만 낯익은 작은  영기가 느껴졌다. 그건
바로 염체, 연희가 늘 가지고 다니던 작은  구리 십자가에 깃들어 있던 염체의 영
기였다.
  '앗, 연희누나.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아요. 이런!'
  준후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몸이 결박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자
신과 그 회색 청자는 짐짝처럼 좁은 상자  안에 처박혀져 있었다. 준후는 손을 뻗
어보았다. 꺼칠꺼칠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나무 상자인  것 같았다. 정상
적인 방법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주술을 사용하자니 너무
공간이 좁아서 자신은 괜찮다  하더라도 청자가 상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아저씨, 저 급히 나가봐야 돼요.  청자가 상하지 않도록 힘을 좀  쓰세요. 어서
요!'
  청자에 깃든 영도 준후의 마음을 알았는지 뭔가 힘을 쓰고 있는 듯했다. 준후의
몸에 닿았던 청자가 저절로  화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방법을 어떻게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준후는 급한 마음에  인정사정 볼것없이 인드라
의 뇌전 한 방을 상자 뚜껑이 있음직한  쪽으로 쏘아붙였다. 번쩍 하는 섬광과 폭
음이 충격과 함께 느껴져 왔다.
 
  연희는 그 큰 눈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경비원들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외치
던 중 한 발의 공포탄을 쏘았다. 그러나 그들은 총 같은 것에 전혀 두려움을 느끼
지 않는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연희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권총
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았다. 6연발 리볼버.  들어 있던 여섯 발 중 방금 한  발은
자기가 공포로 쏘았다. 설혹 남은 다섯 발을 다 명중시키더라도 두 명의 경비원들
은 남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아, 이건 도대체……."
  안타까운 생각에 연희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눈앞에는 복도  대신 그림이
걸린 벽이 보였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어느새 막다른 골목에  갇혀버린 것이다. 저
렇게 느릿느릿한 몸짓으로 움직이고 있는 경비원들이라면 지금  비록 넓게 퍼져서
오고 있더라도 그들의 틈 사이로 빠져나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더 이상
몸을 움직일 기력도 용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연희는 입술을 깨물면서 경비원들
의 발 밑을 겨냥하여 한 발을 쏘았다.  총성은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불꽃을 일으
키며 긴 여운으로 울려퍼졌으나 그들은 주춤거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연희 쪽을 향
해 다가서고 있었다.
  분명히 제정신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어
서 더욱 무서웠다. 연희는 울먹거리면서 떨리는  손으로 서서히 총구를 올려서 다
가오는 경비원 한 명의 심장을 겨누다가 다시 머리를 향했다. 검게 일그러진 얼굴
과 붉게 충혈된 눈. 그 경비원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총을 들고 떨면서  서 있는 연희의 뇌리에  온갖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저들은 지금 악령에 덧씌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분명 사람이다. 이
런 상황에서 현암이나 박신부, 준후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죽으면 죽었지, 총
을 쏘지는 않겠지? 비록 상대가 악령이 깃들인 자 할지라도 자신을 구하고자 다른
사람을 겨누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건 문제가 달라. 쏴!'
  연희의 마음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소리쳤다.
  '그들은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갖가지 힘이 있어! 그러나 지금 네
겐 어떤 힘이 있느냔 말야!'
  그 말이 맞다고 생각되었다. 지금의 연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연희는  이
를 악물고 아래로 떨어져내리려는 손을 치켜들어 다가오고  있는 경비원들을 향해
다시 겨냥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큰 목소리가 연희에게 들려왔
다.
  '그래선 안 돼! 너는 그러면 살인자가 돼! 어떤  이유에서도 사람이 죄 없는 다
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러자 먼젓번 목소리가 소리쳤다.
  '너 혼자 죽는 게 억울하지 않아? 쏴! 쏘라구! 밉지 않아?'
  연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다가오는  경비원이 맞지
않도록 허공에다가 대고 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경
비원들은 몇 걸음만 더 걸어오면 곧바로 연희에게로 덮칠 것이고 이제 더 이상 물
러설 곳도, 물러날 수도 없었다. 등 뒤로 단단한 벽의 감촉이 느껴졌다.
  -쏴, 쏘라구! 밉지 않아? 지긋지긋하지 않아? 끝내, 끝내라구!  쏠 수 있는 데까
지 쏘는 거야. 그게 멋지지 않아?
  "그래 좋아.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었다. 더 이상 자기에게 다가오는 자들에게
도 증오감을 느낄 수 없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연희는 서
서히 총을 치켜올렸다.
  "이 수밖엔……."
  연희는 눈을 크게 뜨고  다가오는 경비원들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자신의 한쪽
관자놀이에 총구를 갖다대었다.
 
  '빨리 가야 해.'
  준후는 청자를 옆구리에 낀 채로 마구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들
려오는 것은 위층이었다. 그리고 준후가 뛰어가는  도중에도 몇 번 차례 총소리가
더 들렸다. 한 번 그리고 다시 두 번 연속으로.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릴까? 혹시 경비원들이  연희누나에게 총을 쏘는 것이 아
닐까?'
  준후는 뛰면서도 마음이 타들어갔다. 아까 뇌전을 이용해 상자를 부수고 나오느
라 충격을 받았는지 눈앞이 아른아른거렸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
다. 어쩌다가 연희누나가 저 지경에 빠졌을까? 준후는 달리면서 잠시 연희가 가지
고 다니던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염체에 대한 투시를 해보았다. 갑자기 그 염체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고, 서둘러야 해!"
  준후는 너무 서두른 나머지 계단을 뛰어오르다 주르르 미끄러 떨어졌다. 넘어지
면서 들고 있던 청자를 계단 모서리에 쾅 하고 찧었지만 다행히 청자는 멀쩡했다.
아마 청자에 깃들어 있는 영이 청자를 보호하고 있는 힘을 아직 풀지  않은 것 같
았다. 옷이 좀 찢어져 나가고 무릎이 까졌는지 조금 화끈거렸으나 준후는 다시 벌
떡 몸을 일으켜 계단 위로 줄달음질쳐갔다.
 
  또 한 번의 총소리가 박물관 내부를 울렸다.
  방금 관자놀이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긴 연희의  손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위로 치우쳐서 총알이 천장으로 날아간 것이다. 연희가 깜짝 놀라 감았던 눈을 떴
다. 자신의 손을 보니 거기엔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구리 십자가 속에 들어 있던
푸른 염체가 맺혀 있었다. 경비원들도 눈앞에  푸른 불빛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그
것에서 영적인 기운을 느껴서인지 놀란 듯 흠칫거리며 바로 연희의 두어 발자국쯤
앞에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그러면 날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야? 막지 말아줘!"
  연희는 눈물을 흘리며 염체에게 호소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염체는 연희의 손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원래 그 염체는 그리 큰 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색깔
이 파란색에서 연녹색, 그리고 다시 밝은  하늘색 비슷하게 변해가는 것으로 보아
연희를 제지하려고 무척이나 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멈칫하던 눈앞의 경비원들이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손
들이 자신을 향해 뻗쳐오는 것을 보면서 연희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아 힘을 합
하여 끌어내렸다. 물론 죽기는 싫었다.  무서웠다. 그러나 저들에게 잡히는 것보다
는 죽는 것이 낫다고, 더욱이 저들을 향해  총을 쏘는 것보다는 자신에 대해 쏘는
것이 깨끗하고 빨리 끝내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안녕, 모두들……. 준후야, 너만은 무사하길…….'
  연희가 안간힘을 다해서 한 발  남은 총알을 쏘기 위해  총구를 자신의 이마로
끌어내리는 찰나, 뒤에서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비켜!"
  고함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연희에게 몰아닥치는  것이 느껴졌다.
연희는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분명  지금 들려온 것은 준후의 목
소리가 분명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준후야!"
  반가운 마음에 연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나 강한 바람이 확 하고 밀어닥
치는 바람에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준후가 불러일으킨 바람 같았다.
  연희의 앞에서 막 달려들 기회만 노리던  경비원들은 뒤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
오자 그 기세에 밀려서 오히려 연희 쪽으로 우르르 덮쳐들었다. 그들은 넘어질 듯
하더니 그 중 두 명이 순간적으로 연희의  팔을 잡았다. 양쪽에서 팔을 잡힌 연희
는 그만 총을 떨어뜨려 버렸고, 푸른 염체는 허공을 미친 듯이 날면서 경비원들에
게 달라붙으려 했으나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양쪽에서 강한
힘으로 팔을 쭉 잡아당기자 연희는 두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그만 정신을 잃
고 말았다.
  "이놈들아, 연희누나를 놔줘!"
  준후는 옆구리에 청자를 낀 채로 한쪽 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계속 소리를 질러
댔다.
  준후가 불러낸 바람의 기운이 경비원들에게 몰아치고 있었고 그들은 바람에  밀
려 뒤로 주춤거리긴 했지만 아직 넘어지지 않고 있었다. 경비원들의 수는 모두 일
곱 명. 준후의 눈에 다섯 명이 준후 앞에 버티고 서서 역시 느릿느릿하게 몸을 뒤
로 돌리고 있는 것과 그 틈 사이로 나머지 두 명이 연희의 양팔을 잡고 번쩍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뭐하는 거얏! 어서 놔주지 못햇!"
  준후가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자 무의식 중에  양쪽 손에서 지지직 하면서 뇌전
의 기운이 맺혀지기 시작했다. 순간,  준후는 옆구리에서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무의식중에 뇌전의 기운을 일으키자 청자에도  뇌전의 기운이 들어갔는지, 청자가
움직이려는 것 같은 감이 느껴졌다. 준후의 마음속으로 청자 안에 깃들어 있는 영
의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네가 쓰는 힘이 무엇이지? 참으로 이상하구나. 내가 청자를 움직일 수 있
을 것 같구나. 신기해!
  그 영도 놀라서 말하는 것이었겠지만, 지금 준후에게는  그런 것이 들릴 게재가
아니었다. 준후는  바람의 기운을 더욱 더 세차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자
며 옷 같은 것을 어지러이 휘날리면서도 느릿느릿하게 이번엔 준후를 향해서 걸어
오기 시작했다. 뒤쪽에 있는 놈들이 기절한 연희를 질질 끌면서 걸음을 옮기기 시
작했다. 준후는 바람의 기운이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자 바람의 기운을 거두었다.
한쪽 편에서 인드라의 하얀 번개가 바지직하면서 커다랗게 뭉쳐갔다. 준후가 청자
를 안은 채로 번개를 쏘려고 한쪽 손을 뒤로 힘껏 내미는 그 순간, 마치 굳어버린
듯 꼼짝을 하지 못했다. 저들이 사람이란 생각이 스쳐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사람에게 주술을 써서는 안 되는데……. 특히 이런 번개  같은 것을 맞으면 영
혼이 제압당해 있는 상태에서는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몰라. 어떻게 하지?'
  준후의 눈에 저쪽 모퉁이로 질질 끌려가는 연희의 모습이 보였다. 다섯 명이 준
후를 상대하게 해놓고 그 사이에 두 명이 연희를 끌고 가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준후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다섯 명의 검게 일그러진 얼
굴의 경비원들은 준후를 향해서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준후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 다섯 명은  상대할 만했지만 연희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에게 주술을 마구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런, 이런! 어떻게 하지? 무슨 방법이……."
  준후는 옆구리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청자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연희를
끌고 가는 두 명의 경비원에게로 눈을 돌렸다. 준후는 청자에 깃들여 있는 영에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아저씨, 한번만 도와줘요! 청자를 움직일 수 있을 거 같다고 했죠?'

  준후는 영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야압"  하는 기합소리를 내면서 청자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재빨리 양손으로 수인을 겹쳐  맺으며 인드라의 뇌전의 기운을 있
는 대로 청자에다 밀어넣었다. 허공에  떠오른 청자는 하얀 번개  기운을 받자 그
기운을 담은 채 살아 있는 듯 매우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연희를  끌고 가던 경
비원 중 하나에게로 덮쳐 들어갔다. 그것을 보고 준후는 재빨리 뒤로 돌면서 몸을
작게 오그린 다음, 있는 힘을 다하여 오행의  기운 중 바람의 기운을 땅바닥을 향
해서 내뿜었다. 그런 다음 준후의 몸이 마치  로케트처럼 연희를 끌고 가던 또 한
명의 경비원을 향하여 날아가기 시작했다. 주술을  사람에게 쓰지 않고 연희를 재
빨리 구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몇 명의 경비원 중 맨 앞에  선 놈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우선 빙빙 돌면서살아
                                                                  그리며 날
아간 청자가 그들 중 하나의 얼굴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뇌전의 기운을 담은 데다
가 영이 단단하게 수호하고 있는 청자에 정통으로 얼굴에 맞은  놈은 한쪽 구석으
로 퍽 소리를 내며 처박히더니  벽에 뒤통수를 찧고는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지는
것이었다.
  연희의 팔을 잡고 있던 또 한 명의 경비원은 의외의 사태에 놀란 듯, 고개를 서
서히 돌리다가 자기에게로 마치 탄환처럼 날아오고 있는 준후의 웅크린 몸을 보자
더욱 더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준후는  막 자신의 몸이 경비원의 몸에 부딪치
려는 순간 몸을 뒤집어서 두 무릎과 두 팔꿈치를 한쪽으로  향하게 하여 경비원의
배를 그대로 강타했다. 비록  영에게 씌어서 조종되고  있는 몸이었지만 경비원의
입에서 헉 하는 소리가 새어나오면서 벽과 준후의  몸 사이에 낀 채, 마치 영화의
정지 화면처럼 한참 동안이나 망연하게 있다가 역시 벽을 통해서 주르르 미끄러지
더니 곤두박질쳤다.
  준후는 충격 때문에 비틀거렸다.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진 않았
지만 다시 힘 있게 발로 방위를 밟으면서 나머지 다섯  명의 경비원들을 노려보았
다. 한쪽 구석에서는 뇌전의 기운이 빠져나간 청자가 데구르  구르고 있었고, 쓰러
져 있는 연희의 입에서는  가벼운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준후는 일단 연희부터
부축해서 일으켰다. 연희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준후는 키  큰 연희를 부축했다.
그렇지만 워낙 키가 큰 연희인지라 준후가 부축을 해도 무릎은  그대로 땅에 닿은
채였다. 그 상태로는 끌고 갈  수가 없었다. 다섯 명의 경비원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보고 준후는 안 되겠다 싶어서 연희를 다시 내려놓고 그들 앞을 막고 섰다.
  "가까이 오지 마!"
  준후는 씩씩거리면서 상대를 위협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좋아. 네 놈들이 아무리 영에 빙의됐다  하더라도 이쯤 되면 사정 봐줄  수 없
지."
  원래는 저들이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아보고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
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준후는 품속에서 부적을 한 움큼 꺼냈다. 제압부였다.
  부적을 붙이면 적어도 저들은 그 경비원들의 몸 속에 갇혀서 부적이 기능을 다
할 때까지 한동안 꼼짝도 못할 것이었다. 준후는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세 장의
부적을 허공에 날렸다. 다가오던 놈들은 허공에서  불이 저절로 붙은 부적이 날아
오자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피하려 했으나 부적들이 훨씬 빨랐다.  한 명은 이마에,
두 명은 가슴팍에 불붙은 부적이 명중했고 그러자 그들은 마치  석고상처럼 그 자
리에서 굳은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하하하. 맛이 어떠냐."
  준후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다시 양손에 부적을 하나씩 꺼내들고 서서히  나머
지 두 명의 경비원을 째려보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 둘은 멈칫멈칫하면
서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었다.
  "남의 몸을 빌려서 악한 짓을 하는 나쁜 놈들. 어디 맛 좀……."
  그러나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준후는 갑자기  등 뒤쪽에서 여러 개의 억센 손이
자신을 잡아채려는 것을 느꼈다. 미처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준후는 아까 청자에
깃든 영이 한 말이 생각났다.
  -저들의 수는 열두 명, 이 박물관의 열두 명의 경비원의  몸을 이용하고 있지…
….
  그러나 이 위층에서 연희를 잡아가던 경비원의 수는  일곱, 그렇다면 준후가 미
처 신경 쓰지 않은 사이에 나머지 다섯이  올라온 것이었을까. 왜 그 생각을 미처
…….
  준후는 발버둥치려 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뒤통수에 무엇인가 둔탁한 충
격이 왔다. 준후는 아찔함을 느끼면서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하필이면 아까 맞
은 곳과 같은 곳에 타격이 온 것이다.
  '이러면 머리가 나빠질 텐데…….'
  준후는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멋쩍게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에 휩쓸린 것
도 그렇고 그 와중에서도 하룻밤 사이에 두 번이나 머리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어
버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준후가 연희의 나직한 목소리를  듣고 간신히 눈을 뜬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뒤인 것 같았다.
  "준후야, 준후야. 정신이 드니. 준후야, 일어나."
  준후는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더니 간신히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맘과 달리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온몸이 상자를 묶는
끈 같은 것으로 거의 미라처럼 우악스럽게 묶여져 있었다. 옆에 있는 연희도 마찬
가지였다. 둘은 그 상태로서는 어떤 힘도 쓰기 어려웠다. 일단 준후는 수인을 맺어
야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데 그럴 수도 없고 또 주변에  흉흉한 눈빛을 번득이는
검은 얼굴의 경비원들이 둘러 서 있어서 어떻게 해보기가 어려웠다.
  "준후야, 여기는 3층이야. 저기 저것들은 뭐지? "
  연희가 속삭이는 소리에 준후가 머리를  돌려보니 그쪽에는 우두머리격인 듯한
경비원 한 명이 서서 아까의 그 청자를 앞에 두고 있었고, 그 뒤에는 유리장 속으
로 이상하게 생긴 번쩍거리는 황금색 그릇들이 보였다. 모두 열두 개였다.
  '저것들이 바로 두개골로 만들었다는 그릇이라는 거구나. '
  준후는 연희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저 그릇들은 도대체 뭐래요?"
  연희가 잠시 눈을 약간 찌푸리며 간신히  보일듯 말듯한 진열장 앞의 글자들을
읽어주었다.
  "스키타이족의 황금 채색 그릇이라는군. 스키타이족이라면  퍽 오래된 족속이고
이미 사멸된 종족들인데……."
  준후가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보통 그릇이 아니에요. 두개골로 만들어진 그릇이에요."
  연희는 그릇 속에 사람 해골이 들었다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순간 좌우에 서
있던 경비원들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는 듯 위협적으로  손을 저었다. 연희와
준후는 일단 입을 다물고 그들이 무슨 짓을 할 것인가 잠시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
다. 맨 앞의 우두머리쯤 되는  녀석은 청자를 앞에 두고 매우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청자를 발로 차기도 하고 번쩍 들어 땅에 내치기도 했으나 청자는 공처럼
통통 튀고 데구르 구르며 놈의 폭행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는
준후의 마음에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아까 저 청자에 깃들어 있던 아저씨가 이야기해준 대로 놈들은 아저씨에게 그
청자에서 떠나라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스키타이족이라. 그중에서도 그릇
을 이용하여 누구의 영을 부르려는 것을 보니 분명히 무슨  고대의 주술사임이 틀
림없는 놈이군!'
  준후는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투시를 행하기 시작했다. 저 앞쪽에서
지금 발광하듯이 청자를 괴롭히고 있는  녀석은 지금 흥분 상태라 준후의  투시에
쉽게 포착되었다.
  그들은 스키타이족의 이단자들이었다. 이상한 주술을 행하고  사악한 힘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으며,  시체를 태우고 아기를 죽이는 등
못된 짓을 밥 먹듯 한 놈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열세  명으로, 가장 우두머리가 마
법사였고 나머지 열두 명은  그의 부하들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같은 족속들에게
미움을 받고 끌려나오게 되었다. 스키타이족은 원래가  잔악한 족속이었다. 그들은
적장을 잡거나 싸움에서 승리하면 적의 머리의 두개골을 벗겨내어 술을 따라 마시
는 관습이 있었다. 스키타이족의 족장은 저들이  자기 동족에게 저지른 잔악한 짓
에 대한 보복으로 마법사를 말발굽으로  밟아 전신을 으깨서 죽이고 나머지  열두
명의 추종자들은 목을 자른 뒤 시체를  들개와 새떼의 밥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고
는 열두 명의 두개골을 벗겨내어 잔을  만들어 금박을 입힌 후 다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고의 의미로 삼기 위해 마을에 놓아두었던 것이다.
  '저들은 원래 그런 자들이었구나. 가만……! 그 우두머리 마법사는 말발굽에 밟
혀서 완전히 으깨어져 형태가  없어졌을 테고……. 그러니까  뭔가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매체가 될 만한 그릇 같은  것을 세상에 남기지 못했던 것이로군. 나머지
열두 명의 영혼들은 자신의 두개골로 만들어진 그릇 속에 숨어  있다가 이곳 박물
관에 진열된 후 다시 그들의 두목을 불러내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일 테고…….
그나저나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다니……. 정말 지독한 놈들이로군.'
  준후는 대강의 사정을 짐작하게 되자 이번엔  청자에 깃들어져 있는 영과 부두
목쯤 되는 듯한 놈과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대화는 협박을 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서로 상대방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전개되어 혼란스러웠지만 언어가 아닌 심정으로 전달되는 것이었기에 알아들을 수
는 있었다.
  -어서 거기에서 꺼져! 우리의 마법사님을 부르기 위해선 네 놈의 그릇이 필요하
다. 그러나 네가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그릇마저도 때려  부숴버리겠다. 그러니 어
서 떠나라.
  -절대 그럴 순 없다. 내가 청자를 구운 것은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서였지, 너
희처럼 사악한 목적을 쓰기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다. 너 따위 놈들에게 빼앗기려
고 내 몸을 태우면서까지 이  자기를 구운 줄 아느냐? 어림없다.  절대로 떠날 수
없어. 내가 만든 자기는 절대 그런 목적에 쓸 수 없다.
  준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청자가 저 영의 몸을 태워서 구워진 것이라고?
  -그렇다면 부숴버리겠다!
  -절대로 부술 수 없을 거야. 안 돼! 그것만은 안 된다!
  -이래도냐?
  괴이한 함성을 외치면서 경비원의 몸을 빌린  악령은 청자를 높이 들어서 땅에
있는 힘껏 내던졌다. 퉁 하면서 청자가 땅에서 한 번 튀기고 높이 떠올라 다시 소
리를 내자 청자를 지키고 있는 영이 대신 아픔을 받아내는 것 같은 느낌이 준후에
게 강하게 전달되었다.
  '저런 식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회색 도자기의 영이 당한 고초를 생각하니 준후는 비감한 마음이 들어 몸둘 바
를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뛰쳐나가서  부적과 술수로 그들을 모조리 제압
해버리고 싶었지만 이렇게 온몸이 꽁꽁 묶여 있는 상태에선 그게 쉽지 않았다. 수
인을 맺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손이 쫙 펴진 채로 온몸이 꽁꽁 묶여져 있었기 때문
에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입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것도 힘
을 발휘하려면 발로 방위를 밟고서야 가능했다. 그밖에 특별히 쓸 만한 주술은 당
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대책을 강구하느라  한참 동안이나 준후가 끙끙거리고 있
는데 부두목 놈이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씩씩거리면서 땅바닥에  놓인 청자를 한번
바라보더니 준후와 연희 쪽을 향하여 야릇한  눈빛을 보냈다. 그놈이 외치는 소리
가 준후에게 느껴졌다.
  -네 놈이 말을 듣지 않으면 저 둘을 하나씩 없애버리겠다. 대충 보니 네 놈하고
같은 곳에서 온 모양이니 어떻게  보면 네 놈의 후손일지  모르지. 그러니 저들을
죽이기 전에 그 그릇에서 없어져라.
  -그런 짓을 해선 안 돼!
  -닥쳐! 그러면 없어져 버리면 될 것 아니야. 그  까짓 그릇 하나가 뭐가 대단하
다고 그러는 거냐.
  놈은 성큼성큼 걸어서 꽁꽁 묶여 있는 준후와 연희 앞으로 다가왔고, 다른 경비
원 중 한 명이 달려가서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다가가 청자를 번쩍 치켜들었다. 준
후와 연희는 놀라서 몸을 주춤하고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몸에 꽁꽁 묶여 있는 끈
은 전혀 풀리지 않았고, 뒤쪽에서 지키고 있던 놈들이 우악스런 손으로 끈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꼭 붙들고 있었다. 부두목  놈은 잔인한 눈빛을 번쩍거리면서 둘
을 쳐다보았다. 누굴 먼저 희생물로  삼을까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놈의  시선이
연희와 준후를 번갈아가면서 보는 것을 느끼고 준후가 몸을 움찔거려서 앞으로 기
어나갔다. 연희는 어린 준후가 자기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것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안 돼! 준후야."
  "헤헤헤. 연희누나. 누나는 여자잖아요."
  "좌우간 안 돼."
  연희가 안간힘을 다해 몸을 굴려서 어깨로 준후를 휙 하고 밀쳐냈다. 그리고 놈
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연희가 눈을 크게 뜨고 놈을 올려다보자 놈은 잠시 찔끔했
는지 뒷걸음질을 치려다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부하들은 연희의 몸에 묶여 있
는 줄을 잡고 연희의 몸을 무슨 짐짝처럼 번쩍 허공에 치켜들었다. 준후는 안간힘
을 다해 저항하려 했지만 몸이 꽁꽁  묶여 있는 데다가 세 명이나 되는  경비원이
준후를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땅바닥에 눌러버려서 소리를 지르는 것밖에는 별다
른 수를 쓸 수가 없었다.
  "연희누나! 연희누나!"
  "준후야. 힘내!"
  연희는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린 채 끌려가면서도 준후에게 소리쳤다. 놈은 박물
관 어디선가 모서리가 날카로운 철제 앵글을 주워와서는  연희를 위협적으로 겨누
었다. 곧 온 힘을 쏟아 내려치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준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 손만, 손만 풀릴 수 있다면…….'
  연희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살기 어린 앵글을  바라보았다. 맞기만 하면 머리가
박살날 것 같았다. 이렇게 묶여 있는 여자를 무지막지하게 후려갈기려 하다니…….
정말 잔인 무도하고 흉폭했던 짓을 태연스럽게 자행했던 놈들이 분명했다. 그때였
다. 갑자기 청자에서 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청자의  회색빛이 차츰 희미
해지더니 푸른빛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청자의  영이 자신이 그 청자에서 빠
져나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부두목 놈은 막 연희를 앵글로 내리치려다 그 광경
을 보고 동작을 멈춘 채 흡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저래선 안 되는데…….'
  연희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놓여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색이 변해가는 청자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안절부절 못했다.
  '꽁꽁 묶여 있어서 그러나? 준후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네. 풀려날 수 있
는 방법이 없을까? 혹시…….'
  그 순간, 초조해 하는 연희의 마음을 읽었는지 연희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는 십
자가에서 뭔가 강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십자가에 깃들어 있던 염체가 연희의 생
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뛰쳐나오려 하고 있었다.
  '맞아! 네가 있었지! 그래, 어서 준후의 손을 풀어줘. 손만이라도. 어서!'
  염체가 십자가에서 빠져나가 휙 하고 허공을 가로질렀다. 자신을 잡으려는 경비
원들의 손을 이리저리 빠져나가서  준후가 묶여 있는  손 뒷부분으로 날아들었다.
준후는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그래! 어서 조금만! 손만 풀리면 돼! 손만!'
  경비원 중 몇 명이 푸른 염체가 준후의  손에 달라붙어 밧줄을 풀려고 하는 것
을 눈치챈 듯, 느리면서도 서두르는 듯한  동작으로 준후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
다. 준후는 급한 김에 몸을 데구르르 굴렸다. 염체는 몸을  굴리고 있는 준후의 손
목에 달라붙어 끈을 계속 갉아냈다. 이번에는  다른 경비원들이 다가와 발로 준후
를 짓밟으려 했지만 준후는 재빨리 놈들의 발길질을 피했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동안 준후의 양손이  조금 자유로워졌다. 준후는  마음속으로 푸른 염체에게
감사를 표했다.
  "됐다!"
  준후가 허리힘을 이용해서 용수철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순간  준후의 눈에
푸른 염체가 이번에는 연희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두목의 영이 씌워진 경
비원은 앵글 막대를 들고 푸른빛으로 변해가고 있는 청자를 바라보면서 분노의 표
정을 짓고 있었다. 놈의 입에선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이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고 연희는 그 틈을 이용해 그 자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
고 몸을 꿈틀댔다. 푸른 염체는 그런 연희를  위해 마치 경계를 하듯 허공을 빙빙
돌고 있었다. 준후는 일단 손을 놀릴 수 있을 만큼 자유롭긴 했으나 몸에 묶인 끈
이 다 풀린 게 아니었다. 한 가닥의 줄로 전체를 다 묶은  것이 아니고, 조금 묶고
다른 끈으로 조금 묶어 놓았는지, 매듭이 수십 개는 되는  것 같았다. 끈을 완전히
풀지 않은 상태에서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준후는 뒤돌아서서 부두
목을 향해 뇌전을 쏘려 했지만 뒤로 돌아선 상태에서는 표적을  향해 정확한 겨냥
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두어 명의 경비원이 다시 준후를 향해 다가오고 있
었다. 준후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서 놈들의 공격을 피했다.  저편에서는 더 많
은 수의 경비원들이 연희 쪽을 향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자. 그렇게 되면 적어도 수인을 맺을 수  있을
테니까……. '
  준후는 이런 생각이 들자 재빨리 양손으로 수인을 맺고 발로 껑충 뛰면서 땅을
쾅 하고 굴렀다.
  "땅을 지배하는 지령(地靈)이여. 물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파도를 치게 하라."
  준후가 발을 구른 데서부터 단단한 대리석 바닥이 마치 물결치듯 큰 파도와 같
은 울림을 사방으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바닥이 출렁거리자 경비원들이 우르르 나
자빠졌다. 비록 3층의 바닥이라도 주문이 제대로 통하는 것을 보고 준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파도 쳐라! 파도 쳐!"
  준후는 있는 힘을 다해서 다시 두번 세번 발을 굴렀다.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다시 바닥이 출렁하면서 넓게 파장이 전달되자 바닥에  나자빠진 경비원들이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균형을 잃고 데굴데굴 굴렀다. 청자도 저만치 굴러가고 있었고
연희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누운 채 몸을 굴렸다.  힘이 부쳤는지 준후의
얼굴엔 비오듯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연희에게
다가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준후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도가의 5행 기운 중 금(金)의 기운을 손에 집중시키면  손이 칼같이 되는 술수
가 있었지…….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준후가 기운을 모아서 깡충깡충 뛰면서 손에 기운을  넣어 수형도(手型刀)의 술
수를 쓰자, 손에 싸늘하고 번쩍거리는 기운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고, 그 상태에서
손을 한번 휘두르자 몸을 묶고 있던 끈들이 마치 칼에 베인 것처럼 와스스스 풀어
져 내려갔다.
  "됐다!"
  준후는 연희의 곁으로 다가왔다. 준후는 다시 한 번 수형도의 기운을 발해서 몸
에 남아 있던 끈을 모조리  끊고 연희의 몸을 묶었던  끈도 끊어냈다. 신기하게도
끈이나 옷은 수형도의 영향을 받아서 끊어지거나 찢어졌지만  사람의 몸에는 수형
도의 기운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이 방법도 좋은 방법이구나. 앞으로 자주 써먹어야지.'
  "준후야, 고맙다!"
  자유로워진 연희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목에 걸린 구리 십자가를 꺼내들었고  허
공에 경계하듯 빙빙 돌고 있던 염체가 십자가로 다시 돌아왔다. 저쪽 땅바닥에 넘
어져 있던 경비원들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서 가요. 일단 피해야 해요. 아, 참! 저 청자……. "
  청자는 한쪽 구석의 모퉁이로 굴러가서 처박혀 있었다.
  '저 청자를 어떻게든 다시 가지고 가야 할 텐데.'
  저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청자를 주우러 갔다간 다시 포위될 우려가 있었다. 준
후가 어쩔까 망설이면서 연희를  쳐다보자, 연희는 입술을  깨물더니 청자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준후도 그  뒤를 따랐다. 아무리 사정이  급하다고 해도, 실제로
청자가 살아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해도, 악한  일에 쓰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
다. 연희가 청자를 집어들었고 준후가 그 앞을 막아서는 동안, 경비원들은 다시 일
어나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며 연희와 준후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주욱 둘러서서 주
위를 에워쌌다. 그 숫자를 세어보니 아홉뿐이었다. 아까 준후가  제압부를 써서 몸
을 굳혀 버린 세 명은 경비원들은 아직도 그대로 있는 모양이었다.
  "좋다. 이 나쁜 놈들아! 어디 두고 보자."
  다시 제압부를 꺼내려고 품을 뒤지던 준후는 깜짝 놀랐다. 아까 정신을 잃은 사
이 흘려서 잊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놈들이  모두 빼앗아갔는지 준후의 품 안에는
부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이런! 이러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데…….'
  준후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연희가 걱정스레 준후에게 물었다
  "준후야, 왜 그래? 어서 부적을 날려."
  "연희누나, 좀 두고 봐요."
  일단 부적이 없는 상태에서 저 영들을 떼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맨손의 준후가 쓸 수 있는 것은 공격적인 주술밖에 없는데  사람에게 주술을 쓴다
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일이 아니었다. 준후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골몰하
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경비원  녀석들도 준후가 꽤 무섭다는 것을 알
고 있는지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로 팽팽히  대치한 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부두목 놈의 입에서 이상한 노랫가락 같은 것
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른 놈들도 그 노랫가락에 맞추어
서 음을 내는 것이었다. 준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연희가 의아해서 재빨리 준후
에게 물었다.
  "준후야. 왜 그러니? 저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글쎄요.                                   확실치                                     
않지                                                           
                                                        ㈀별「뵀불러내는  것  같아요. 
혹시 
저들
이 영을 불러보려는 것이 아닌지……. 자기네들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으니까. 우
두머리 격인 마법사를……."
  준후가 채 말을 끝내기 전에 연희와 준후를 둘러싸고 있던 아홉 명에게서 이상
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한군데로 모이더니  마치 자석에 쇳조각이 붙듯이 바
싹 몸을 밀착시켰다. 이상한 기운이 사방으로  팽팽히 번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준
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나타나셨군…….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한번 보자."
  아홉 명의 입이 한꺼번에 열리면서 마치  한 사람이 이야기하듯 동시에 뒤섞인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짐승 울음  소리 같기도 하고 뭔가  고함을 치는 것도
같은 이상한 소리였는데 신기하게도 그 소리를 통해서 저쪽에 영이 이야기하는 내
용이 준후의 마음속으로 전달되어 들어왔다.
  -너희들은 뭔데 방해하는 거냐. 쓸데없는 일에 끼지 말고 어서 사라져라!
  준후는 염력을 담아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헛소리 말아라. 너희야말로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모르지만  지옥에 좋은 자리가
있으니 그리로나 가라. 너희들은 윤회도 필요 없고  환생도 안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건방진 녀석! 네 놈이 무엇을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아는 거야 없지. 그러나 네 놈들이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이 나쁜 놈들아…….'
  -나쁜 짓? 나쁜 짓이라고? 으흐흐하하하…….
  그 마법사의 영은 큰소리로 웃어제끼더니 잠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살고 싶은 것도 나쁜 짓이냐? 물론 네 놈의 눈으로  봤을 때 과거 내가 한 일
이 조금 잔혹할 수야 있겠지. 그러나 영원히  살고 싶다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꿈
아니더냐. 나는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뿐이다. 억
울하게도 막 그 방법을 시행하기 직전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지만……. 그래서 때
가 오기만을 바라며 수천 년을 기다려 왔다. 수천 년을……. 아니, 얼마나 오래 기
다려 왔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때 내 몸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았다면……. 내
이 방황하는 넋을 담을 수 있는 형체를 지닌 물건만 얻을 수 있었다면…….
  마법사의 영은 잠시 회상에 잠기는 듯했다.
  -내 부하들은 그래도 머리라도 있어서 그릇으로라도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제까
지 남아 있을 수 있었지……. 그러나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는지 아는가. 그렇게 오
랫동안 세상을 헤매고 저 그릇들이  옮겨지는 곳으로 따라다녀 보았어도 내  넋을
담아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저기 보이는 저  파란 도자기, 저것만 빼놓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놈이 딱 잡고서 저걸 놓아주지 않는  거야. 그래, 부탁이다.
더 이상 너희들이 말하는 그 소위 악행이라는  것은 하지 않겠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니 제발 내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게만 해줘.
  사람의 몸을 얻기 전인 중간 단계가 될 저 도자기만 있으면 난 다시 살아날 수
있어. 좋다면 너희들에게도 알려주지. 너희들도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을
…….
  "닥쳐라!"
  준후가 소리쳤다.
  "영원히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으냐? 그리고  너 같은 놈은 영원히 살아도 소용
이 없다."
  -무슨 소리지?
  "영원히 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냐?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몸을 빼앗아 영원히 살아서 무얼 어쩌겠다는 거냐! 너 같은 놈에게는 역시 지옥의
불구덩이가 가장 맞는 자리다. "
  -쬐그만 놈이 주둥이만 까졌구나. 그으래? 그러면  죽어봐라! 내 다시 살아나지
못해도 네 놈들, 나를 방해하는 놈들은 아예 씨를 말리겠다. 일단 저 계집년부터…
…. 흐흐흐…….
  준후는 연희를 돌아보았다. 만일 저 자가 연희의 몸 속으로라도 들어가서 저 경
비원들처럼 연희를 지배하게 된다면…….
  "그것만은 안 돼!"

  준후는 하늘에 대고 길다란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준후의 손가락이 허공에 글
씨 같은 것을 그리는 듯 재빨리 움직였다.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놀
림이었다. 열 번, 스무 번, 아니 셀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
자 허공에 어렴풋한 글씨 같은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희는 준후가 무엇을 하
고 있는지 몰라서 당황스런  표정으로 준후를 쳐다보고  있었다. 준후는 순식간에
온몸에 땀이 젖은 채 모든 힘을 다 쏟아서 허공 중에 글씨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연희의 눈에도 그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글씨인지 도형인지 대충
모양이 보일 정도로 뚜렷하게 되자 준후가 헉 하면서 가쁜 숨을 내쉬고 한쪽 무릎
을 비틀하다가 연희의 팔을 잡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 준후가 말했다.
  "연희누나 저기에 손을 짚어요. 어서 글씨를!"
  연희는 영문도 모르고 준후가 이야기한 허공에 떠 있는 글씨에 손을 짚었다. 그
러자 화끈한 감촉이 느껴지면서 연희의  손에 준후가 허공에 그렸던 글씨  모양이
번쩍하더니 새겨진 듯 빛나다가 사라져갔다. 준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떠듬떠
듬 말을 이었다.
  "연희누나. 옛날에 봤어요. 연희누나도 꽤 몸 동작이 빠르죠? 이제 저들에게  당
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허공에 그린 것은  부적 천 장의 공력을 한꺼번에 쏟아낸
거예요. 이걸로 저들을 풀어줘요. 어서요……. 나는 지금 당장 움직이기가 힘들 것
같으니 어서……."
  연희와 준후가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에 한데  뭉쳐진 아홉 명의 경비원들은 서
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마법사의  영이 아홉 명의 영들을 한 곳에
모으고 다시 경비원의 육체적인 힘을  하나로 뭉친 듯 그  기세는 엄청났다. 아홉
명의 동작은 한데 바싹 붙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마법사의 영이 모두를 통솔하
고 있어서인지 한결 같았다. 아홉 명이 동시에 오른팔을 내뻗었다. 그들이 팔을 내
뻗자 휙 하는 바람소리가 들리면서 기분 나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준후는 기
운이 몹시 빠진 듯 몸이  휘청거리면서 한쪽으로 몸을 굴렸다.  아마 뛰어갈 힘이
없어서이리라. 준후가 빠르게 말했다.
  "연희누나. 어서요.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믿어요! 전……  누나를 믿어요.
자신을……."
  연희는 엉겁결에 몸을 피하면서 청자를 구석에 내려놓고는 평소에 익혀왔던  호
신술의 동작으로 맨 왼쪽에 있는 경비원 한  명의 팔을 왈칵 잡았다. 그러자 팔을
잡힌 그 경비원은 으악 하는 비명 소리를 지르면서 데구르르  구르다가 그대로 기
절해버렸다. 나머지 여덟 명의 경비원들이 놀란 듯 고개를 서서히 연희 쪽으로 돌
렸다.
  평소에 반은 미용을 위해, 반은 유사시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호신술을 익혀왔
는데 이 정도 몸을 움직였다고 숨이  차다니……. 연희는 숨을 헐떡거리며 의아해
하고 있었다. 준후가 자신에게 심어준 부적의  힘으로 경비원들의 몸에서 나쁜 영
들을 떼어낼 수 있었지만 그것도  역시 힘의 소모를 크게  요하는 것이 분명했다.
저쪽에서 준후도 수인을 맺어가며 한쪽 끝에 있던 또 하나의  경비원을 뒤로 넘어
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준후는 얼굴이 백짓장같이 하얗게 된 것으로 보아 더 이상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그 기운을 무한정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양쪽에서 한 명씩의 경비원이  땅에 나자빠지자 나머지  일곱 명의 경비원들은
당황한 듯 서로 일렬로 서 있던 배치를  바꾸어서 둥글게 등을 맞대고 섰다. 그러
더니 둥글게 선 상태에서 서로 간격을  넓히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일
곱 명이 동시에 캬아악 하는 소리를 지르자 그들의 손톱이  갑자기 호랑이 발톱처
럼 길게 늘어나는 것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십오 센티미터는 족
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그들이 입을 벌릴 때마다 썩은 피비린내가 풍겨나왔다.
  그들의 동작은 아직도 느릿느릿했다. 둥글게 선 경비원들 중 두 명의 손톱이 연
희를 향해서 뻗어오는 것을 가볍게 피하면서 그 중 한 명의 팔목을 꽉 잡았다. 그
러자 다시 연희의 몸에서 기운이 쭉 빠지는 듯하더니 그 놈도 악  하는 비명을 내
지르며 땅바닥에 그대로 뒹굴며 넘어졌다. 그러나 연희도 갑자기 머리가 아찔해지
며 머리가 빙 돌았다. 연희는 이를 악물면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리가 후
들거렸다.
  '죽기 아니면 살기.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이를 악다물고 있는 연희의 눈에 준후가  비실거리더니 갑자기 한바퀴 맴을 돌
며 픽 하고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너무 큰 주술을 여러 번 써서 완전
히 탈진해버린 것 같았다.  연희는 여기저기서 휙휙  뻗쳐오는 경비원들의 손톱을
피해 준후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서 준후를 부축해 일으켰다.
  "준후야. 정신차려. 왜 그러니!"
  준후의 얼굴은 그야말로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준후는 애써 입가에 희
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무 힘을 써서 그래요. 조금 있으면 나을 거……. 연희누나 조금만 버텨줘요."
  "알았어. 염려 말아. 준후야."
  "내 삼 년의 명이 그 부적 속에 다 들어 있어요. 그러니……."
  연희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목이 메어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준후는 혼자 싸워도 될 것이었는데 자기의 안위를 염려해서 삼  년의 수명을 희생
하면서까지 부적을 만들어내서 자기에게 준 것이란 말인가.
  그러는 중에 또 하나의  경비원의 손톱이 연희와  준후에게로 다가섰고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다가오는 놈의 손목을  잡아서 아예 한쪽으로
엎어쳐버렸다. 이번에는 힘을 좀 과하게 쓴 듯 연희도 서  있을 수 없었다. 연희는
눈앞이 빙빙 도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경비원은 다섯이나 남아 있는데…….'
  그러나 다시 일어서기는커녕 고개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다. 이대로
있다간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연희는 계속 자기에게 다짐을 했으나 아무리  다짐을 해도 도대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신을 모으면 거짓말처럼 다시 힘이 난다던데……. 난 역시 영화 속의 주인공
은 아닌가봐'
  다섯 명의 경비원들이 슬슬 자기와 준후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연희
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 연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정신을 잃은 준후
를 감싸안아 앞을 가리는 것밖에는……. 연희는 최후의 힘을 다해 다가오는 한 놈
의 손톱을 피해 길게 야앗 하는 기합 소리를 지르며 놈의 팔을 잡았다. 놈을 쓰러
뜨리고 난 연희는 이제  고개마저도 가누기 어려워서  벽에 휘청하며 기대앉았다.
그러나 나머지 네 명의 여덟 개의 손,  마흔 개의 길고 날카로운 손톱은 느릿느릿
하게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빨리 다가와서 끝장을 보는 것이
나을 텐데…….
  "준후야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너까지……."
  연희가 체념한 듯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연희의 목에 걸려 있던 구
리 십자가에서 푸른 염체가 휙 하고 튀어나왔다.
  '아, 그래봐야 저 놈들한테 염체의 힘 정도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텐데…….'
  연희는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염
체는 난데없이 바로 옆 구석에 연희가 내려놓았던 청자를 향해 다가가더니 청자를
밀어 연희가 있는 쪽으로 굴려오는 것이었다. 얼마쯤 청자를 밀고 온 푸른 염체가
이번에는 준후가 그려준 부적의 힘이 맺혀 있는 연희의 손을 잡고 청자 쪽으로 끌
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체도 너무 많은  힘을 써서 지쳤는지 그 색깔이 무척
흐릿해진 것 같았다.
  '응? 이 청자에 손을 짚으라고?'
  연희는 거의 자포자기한 듯한 심정으로 염체가  하라는 대로 옆에 있던 청자에
손을 갖다댔다. 연희가 손을 대자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뭔가가 연희의
손을 빠져 나와 청자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실제로 몸이 데이거나 타는 것은 아
니었지만 그 느껴지는 열기는  벌겋게 달은 숯덩어리와  같았다. 빠져나온 열기가
힘으로 바뀌기라도 한 듯 청자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으로 붕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다가오던 경비원의 한쪽 뺨을 퍽  소리를 내며 강타했다. 연희는 그제서
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청자의 영이 준후의 부적의 힘을 대신 받아서 …….  그래서 저렇게 혼자 움직
이고 있는 거야.'
  계속해서 청자는 빙빙 돌며 열기를 뿜으면서  두 명의 경비원을 쓰러뜨리고 있
었다. 그러나 경비원들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두 놈이 그 무시무시한 손
톱을 뻗쳐 청자를 손톱만으로 움켜잡았다. 청자가  몇 번 빠져 나오려 움찔거렸지
만 잘 되지 않았다. 만일 청자의 기운이 소진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박살이 나버
릴 수도 있었다. 연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타까운 심정에 손만 부르르 떨
고 있는데 준후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연희누나. 내 손을, 손을……. 수인을 맺어줘요."
  "뭐라구 준후야?"
  "저 청자에 깃든 아저씨는 나하고는 영이  잘 맞는…… 내가 수인을 맺고 힘을
조금만 더 보내주면 이길 수 있……."
  준후는 어설픈 동작으로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하는 수  없이 연희는 준후의 손
을 움켜잡고 수인을 맺어주었다. 그러나 준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려 움찔거렸다.
  "아니, 그거 왼손 둘째 손가락…… 좀더 위……."
  연희는 준후가 말하는 대로 수인을 다시 맺어주었다. 그 사이 두 명의 경비원은
청자를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길다란 막대기와 앵글로 청자를  마구 내려치고 있었
다. 청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타격을 한번 입을 때마다 조금씩 회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어서 저쪽을 향, 향……."
  다급한 준후의 말에 연희도 있는 힘을 다해서 준후의 손을 청자가 있는 쪽으로
향하게 했다. 연희의 몸에서도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듯했다.  준후는 자신의 기운
에가 연희의 기운까지 한데 모으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준후의 손가락 끝에서 빠
른 속도로 길다란 불줄기가 뻗어나가 땅바닥에 구르고 있는 청자를 향했다.
  불줄기를 받은 청자는 갑자기 붉은 빛을 사방으로 내뿜으며 허공으로  솟아올랐
다. 준후의 눈에 솟아오르는 청자 속에서 불길에 둘러싸인 사람 형상을 한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 그건 틀림없이 청자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몸을 태웠던 그 도공
의 그림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청자에서 솟아나오는 불길은 마치 도자
기 가마의 뜨거운 불길과 흡사했다. 청자에 깃든 영은 준후에게서 받은 힘을 그런
식으로 발산하는 것 같았다. 남아 있던 두  명의 경비원 중 부두목급의 영이 씌인
경비원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져서 바닥을 구르다가 이내 잠잠해졌
다. 이제 마법사와 한 명의 경비원만이 남았다. 그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마지막 남은 경비원의 입에서 분노에 찬 듯한 고함
소리가 터져나오더니 솟아오르는 불길에도 불구하고 허공에 떠  있는 청자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손을 뻗은 채 걸어오는 게 아닌가.
  연희는 준후가 막 정신을 차리려  하자 그리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준후는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기운조차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있는 힘을 다하여
저 청자에 기운을 불어넣었는데 저 마법사란 놈은 생각보다 강한지 그 기운으로도
꺾이지 않았다. 놈의 영을 아예 가두어 버릴 수만 있다면……. 준후의 뇌리에 붉은
색 종이에 그려진 흡령부(吸靈符)가 떠올랐다.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에 헛것이 보
인 것일지도…….
  "부적, 부적만 있으면 그 붉은 부적만 있었으면……."
  "준후야, 정신 차려!"
  "그것만 저놈에게 붙인다면…… 저놈도…… 별 힘을…… 쓰지 못할……."
  준후는 더 이상 중얼거리지 못하고 식식 입으로  새는 소리만 몇 번 내다가 그
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연희도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가 꼼작도 할 수 없는 지
경이라 그 광경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청자는 여전히 사방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강렬한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 마법사인 듯한 영이 씌
운 경비원도 질세라 입에서 계속 커다란 고함을 지르며 손톱을  곤두세운 채 힘겹
게 청자를 향해 조금씩 접근해가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어떻게 해주…….'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연희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띄었다.
쓰러져 있는 경비원 중 한 명의 주머니 속에서 낯익은  누런 종이조각의 끄트머리
가 보였기 때문이다.
  '저건 분명 준후가 가지고 다니던 부적 같은데…….'
  아마 놈들이 준후를 기절시키고 나서 그  부적을 빼앗아 엉겁결에 집어넣은 것
같았다.
  연희는 있는 힘을 다해 기어갔다. 얼마 안 되는 거리가  마치 수 킬로미터는 되
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놈의 주머니에 손이 닿았다. 마지막 안간힘을 써 부적 뭉치
를 끄집어냈다. 마치 손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부르르 떨고 있었다. 과연 준후의
말대로 그 중에는 누런 종이가 아닌 붉은 종이로 씌어져 있는 부적 하나가 보였다.
  연희는 그 부적을 손에 쥐고 청자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경비원, 아니 마법사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리로 간다면……. 그래서 준후의 말대로 부적을  놈의 등에 붙인다면…
….'
  연희는 다시 기다시피하여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경비원, 아니 마법사는 막  청
자를 손톱으로 거머쥐려 하고 있었다. 순간, 놈은 연희가  자신을 향해 비틀거리면
서 기어오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준후의 술수가 어떤 것인지 놈이 제대로
알 수야 없었겠지만 뭔가 있다는 것은 느낀  듯했다. 놈은 안간힘을 다해 몸을 돌
리려 했지만 청자에서 거센 불길이 강력하게 뻗어나오자 손이 떼이지 않는 듯했다.
만일 놈이 손을 뗀다면 그 붉은 빛에 금방 휩쓸려버릴 것 같았다. 놈은 이를 갈더
니 갑자기 또 다른 노랫가락 비슷한 고함소리를  질렀다. 놈의 등 뒤에 다다른 연
희는 놈의 노랫소리가 들리자 흠칫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순간 놈과 연희의 시
선이 마주쳤다. 연희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놈은 이제  경비원의 모습이 아
니었다. 무슨 방법을 어떻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놈은 커다랗게 팅팅 불은 것 같
은 징그러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옷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몸은 온통
시퍼렇게 엄청난 크기로 불은 혹이 뒤덮여  있었고, 여기저기 물집과 더러운 상처
가 온통 뒤덮인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더군다나 그 상처 자국에서는 끊임
없이 시퍼렇고 누런 진물과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쭈글쭈글하게 주름
잡힌 시퍼렇고 거무튀튀한 몸뚱이를 보자  연희는 거기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무섭다기보다는 구역질이 났다.
  -연희누나,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믿어요! 스스로를…….
  '그래 난 할 수 있어! 준후의 말이 틀릴 리  없어. 이 부적을 놈에 붙이기만 하
면…….'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목소리가 연희의 마음속에서 울렸다.
  -징그럽지 않아? 저런 도자기쯤이야 어찌 되건 무슨 상관이 있어. 어찌 저런 더
러운 것에 손을 댄다 말이야. 피해! 피하라구.
  갈피를 잡지 못하는 연희의 마음속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저건 환상이야, 환상이라구. 스스로를 믿으라고 했잖아. 용기를 내! 용기를!'
  연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부적을 치켜들면서 허리를 폈다. 순간, 놈은  연
희의 행동이 뭔가 수상쩍다고 눈치챘는지 캬악  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놈의
시퍼런 등짝이 마구 갈라지고 혹들이 터지면서 이번에는 그 등에서  기분 나쁜 시
퍼런 색을 띤 징그런 벌레들이 수백 마리나 와그르르 머리를  내밀며 꿈틀대는 것
이었다. 정말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연희는 욱 소리를 냈고 저
절로 욕지기가 나오며 간신히 일으킨 허리가 꺾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저건 난 못해! 난 못해!  비록 환영이라 해도 저렇게 징그럽고  웅클거리는
것에 손을 댄다는 것은…….'
  연희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저쪽에 쓰러져 있는  준후의 모습이 눈에 들
어왔다. 그리고 마법사의 손톱이 이제 막 청자를 움켜쥐고 청자를 바스러뜨리려는
모습도 보였다. 청자에서 뿜어져나오는 붉은 빛은  이제 눈에 띌 정도로 옅어져가
고 있었다. 또 놈의 등판에서 꿈틀대며 기어나오고 있는 그 많은 벌레들…….
  "아아아아!"
  연희는 눈을 질끈 감고 길게 비명을 지르면서 놈의 등에 부적을 갖다댔다. 처음
에는 뭉클하면서 따끔따금한 감촉이 손에 전해오는 것 같더니만 곧 이어서 아무것
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단지 평평한 사람의 등짝이라는  느낌만 들었을 뿐…….
갑자기 땡그랑 하면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  연희는 번쩍 눈을 떴다. 땅바닥에는
회색빛으로 변한 청자가 구르고 있었고, 연희  자신은 마치 석고상처럼 꼼짝도 하
지 않고 서 있는 경비원의 등에 손을 짚고 있었다.
 
  "준후야, 준후야. 정신차려!"
  연희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준후는 간신히 눈을  떴다. 연희의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 준후의 눈에 들어왔다. 준후가 겨우 입을 열었다.
                                                                                 
                                청자는? 그리고…… 경비원들은?"
  "응, 걱정마. 다 잘 됐어. 경비원들은 모두 힘을 잃고 석고상처럼 굳어 있어.  그
리고 청자도 깨지지 않았고 안전해. 염려하지 않아도 돼."
  준후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주변을 한번 훑어보았다. 여덟 명의 경비원들이
땅에 뒹굴고 있었고 마법사의 영이 씌어 있던 경비원은 등에 붉은 부적을 붙인 채
뻣뻣하게 석고상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회색빛 청자가 마치 앉아 있듯
이 놓여 있었다.
  "연희누나, 난 연희누나를 믿었어요. 어떻게 저 붉은 부적을 찾았는지는  모르지
만 잘했어요. 고마워요."
  "고맙기는 내가 뭘……."
  준후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청자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정신을 잃고 있
던 사이에 지쳤던 몸도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된 것 같았다. 준후의 뒤를 따라온
연희가 준후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준후는 청자에 손을 대고  청자 안에 깃들여
있는 영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내가 뭘……. 그나저나 나도 내가 죽어서 이런 일을 겪게 될지는 정말 몰랐다.
이제 저 악령들이 다 사라졌으니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아도 되겠지?
  '네, 그럼요. 물론이죠.'
  준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말을 받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골똘이 생각하는
듯 하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저씨.'
  -왜 그러니 꼬마야?
  '이제 그 청자에서 떠나 승천을 하시는  것이 어때요? 아무리 아저씨의 마음이
간절하다고 해도 정해진  하늘의 법도에 따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떠세
요?'
  -글쎄다…….
  '아저씨가 이 청자에 대해 애착심이  많다는 것은 알아요. 아저씨는  이 청자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태우셨죠?'
  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몸을 태우면서까지 도자기를 만
든 사람의 심정이 어떨 거라는  건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었지만, 준후는 그래도
천륜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더 이상 이 청자가 남에게 이용당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게  믿으
시고 아저씨는 아저씨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세요."
  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수백 년의 세월을 거슬러올라가는 듯한 깊은 침
묵이 흘렀다. 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지……. 나는 말이다.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는 보통  도공이었단다.
그러나 나는 …….
  청자에 깃든 영은 회상에 잠긴 듯했다. 준후는 청자에 손을 댄 채 눈을 감고 있
었다. 준후의 마음속에 흰 옷을 입은 도공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비춰졌
다.
  -나는 언젠가 하늘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지. 아주 맑은 가을날이었단다. 저
파란 하늘을 내가 만든 자기 속에 옮겨보았으면……. 그때부터 나는 모든 것을 잊
은 채 어떻게 하면 저렇게 맑은 가을 하늘빛이 나는 자기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
을 하게 되었지. 그리고 그런 자기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지. 그러나 잘 되지 않았
단다. 그러기를 수십 차례, 아니 수백……. 심한 갈등과 번민이 뒤따랐음은 물론이
고……. 그러다 마지막으로 이 청자를 만들 때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는
데…….
  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때에 영이  겪었던 기억이 준후의 마음
속에 영상처럼 되살아났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 앞에서 도공은 밤을 새고  먹고 마시는 것도 잊은 채 초조
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청자를 굽는 과정은 몹시도  어렵고 까다롭다. 조금이라
도 불을 잘못 다루어서 온도가 맞지 않으면 그 안에  넣어두었던 도자기들은 가차
없이 깨어져서 터져나가는 것이었다.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가마 안에서 들려왔
다. 가마 안에 넣어두었던 초벌  도자기들은 일곱 개. 계속해서 펑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작이 바싹 말라서 불기운이 너무 센 게 틀림 없었다. 도공은 불기운을
잡을 방법이 없을까 하여 엉겁결에 가마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화끈한 열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나 차곡차곡 쌓여 있던 나뭇단을 헐 수는  없었다. 쌓아놓은 나뭇단
이 무너져버리면 도자기도……. 그러나 불기운은 어떻게든 낮추어야 했다. 가마 문
을 연 도공은 잠시 주저했다.  그의 마음속에 푸르고 맑은 가을  하늘이 떠오른다.
그러나 또 다시 연속적으로 도자기들이 펑펑 터지는 소리를 듣자  자신의 몸이 으
깨지기라도 한 듯 온몸에 전율이 인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도공은 가마의 문을 닫
고는 불길을 향해 몸을 부딪쳐갔다. 하나 남은 청자를 끌어안고서…….
 
  -단 하나 남은 도자기는 성공적이었지. 그 대가로 내 몸은  타 없어져서 유골조
차도 남지 않게 되었고……. 나중에  사람들이 이 청자를 보고  감탄을 하는 것을
이 안에서 들을 수 있었어. 이 청자는 내 무덤이나 다름 없단다. 이 청자는 임금님
의 진상품으로까지 바쳐지기도 했지. 그러나 그 후에는…….
  준후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의 영상은  아까 청자를 처음 보았
을 때 그 청자에 깃든 영의 기억을 읽어낸 바 있어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충분
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공이  청자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 잠시 후 청자에 깃든 영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래. 물론 이러고 있어선 안 되겠지?
  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도공 아저씨. 지금 저 청자의 빛이 어떤지 아세요? 청자의 빛은 아저씨가 생각
한 것과는 달리 지금은 파란빛이 아니랍니다.'
  -어, 뭐라구? 그건 무슨 소리지?
  '지금 아저씨의 우울한 마음이 청자를 감싸고 있어서 저 청자는 우울한 회색을
띠고 있어요. 우리 고향의 하늘이 아닌 이 낮선 땅의 하늘과 같이…….'
  청자에 대고 있던 준후의 손에 떨리는 듯한 감촉이 전해왔다.
  -이 자기의 빛이 정말 파란색이 아니니?  아! 하기야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렀
지. 그 사이 견디기 힘든 일도 수없이 많았고……. 내가 나오면 이 자기의 빛이 다
시 파란색으로 변할 수 있을까? 그 맑은 가을 하늘빛으로 되돌아 올 수 있을까?
  '예, 틀림없어요.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영은 또 다시 깊은 상념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을 잊다가 잠시 후 짙은 탄식조로
말을 이었다.
  -하늘을 다시 보고 싶구나. 이곳처럼 우중충한 하늘이 아닌 그 푸르던 하늘을…
…. 그러나…….
  '다시 보세요. 아저씨가 만든 청자 속에 그 하늘빛이 있어요. 나와서 보세요. 그
러면 보일 거예요.'
  -그래. 그렇다면 더 주저할 필요가 없지. 얘야, 너는 재주가  많은 것 같던데 힘
을 좀 빌려주지 않겠니?
  '그럴게요.'
  준후가 다시 청자를 한 손으로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입으로 나
지막이 주문을 외우자 도공의 영은 서서히 청자에게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연희
는 비록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는 귀로 들을 수는 없었지만 청자의 회
색빛이 마치 물에서 씻겨나가 벗겨지듯이 점점 파란빛을 띠어가는 것을 보고 얼굴
에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도공의 영이 완전히 빠져나온 듯 청자는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떨
어져내릴 것 같은 맑은 가을 하늘의 푸른빛으로 바뀌어갔다. 이제 도공의 영은 완
전히 청자에게서 빠져나와 허공에 머물고 있었다.
  -그랬구나. 얘야, 저 고운 빛을 한번 보거라. 내가 평생을  바쳐 만들려 했던 빛
이 바로 저것이란다. 곱지 않니?
  '예. 너무 고와요.'
  -그래, 저게 바로 내가 살던 하늘의 빛…….
  준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은 한동안 흐뭇한 듯이 말이 없었다. 영이 다시 준
후에게 물었다.
  -그런데 꼬마야 내가 죽은 이후로 세월이 많이 흘렀지?
  '예, 많이 흘렀죠.'
  -지금도 청자를 굽는 사람은 많겠지? 나보다도 훨씬 곱게.
  준후는 우울해졌다. 그 도공이 죽은 지는 적어도 육칠백 년은 지났다. 그러나 그
동안 이어져 내려오기는커녕 고려 왕조가 멸망할 때쯤엔 청자를 굽는 방법은 거의
잊혀졌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준후의 마음을 어느새  눈치챘는지 도공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랬구나……. 말 안 해도 알겠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이런 아름다운
것이 왜 잊혀져야 하는지. 왜 사람들은  말로만 이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
  도공의 탄식의 말이 끊겼다. 이제  도공의 영은 해묵은 승천을 하려는  듯 점점
그 기운이 약해져가고 있었다. 준후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있다
가 도공의 영이 거의 사라지려 할 때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기억하세요. 가을 하늘빛을요…….'
  -알았다. 어쨌거나 시원하구나. 나는 다시 태어나서도 청자를 구울 거란다. 꼬마
야, 고맙다 고마워…….
  도공의 영이 서서히 사라져가는지 청자는 완연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우아한  자
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준후와  연희는 한동안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
다가 청자를 들고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마법사의 영이 깃들어 있었던
경비원의 몸에서 흡령부를 떼어 오는 일도 잊지 않았다.
 
  새벽녘이나 되어서야 들어온 준후와 연희를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다른 사
람들이 물어보았지만 둘은 그냥 얼버무렸다. 준후가 자신의 3년 동안의 명을 소모
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현암이나 박신부가 불같이 화를 낼  것이 분명했기 때
문에 그 말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준후가 연희에게 사정사정했다. 다행히도 승희는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들어왔는지 아니면 피곤했는지 일찌감치  자고 있었기 때문
에 투시당할 염려는 없었다.
  무사히 호텔에 돌아온 다음날, 연희는 벨을 누르는 소리에 문을 열었다.  연희가
문을 열자 그 앞에는 어제 박물관에서 만났던 경비원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연희
도 좀 흠칫했다. 설마 저 사람이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긴장
했다. 준후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몸이 풀리도록 해놓고 박물관을 떠났
었는데……. 그러나 연희는 그런 생각을 떨쳐내고 미소로 그 경비원을 맞이했다.
  "하루 만에 또 뵙는군요. 무슨 일이시죠?"
  "어제 잘 들어가셨습니까? 지갑은……."
  "예. 찾아보다가 그냥……."
  연희는 자기가 작은 지갑을 떨구고 왔다가  준후와 함께 그냥 박물관을 빠져나
온 것을 기억해내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가 경비원에게 말했다.
  "예, 저랑 같이 찾아보셨지만 찾지 못했었잖아요. 기억나지 않으세요?"
  "아, 예. 어제 일 말이죠. 그거 참 이상하더군요. 박물관에 근무하는 동료들은 평
소 성실한 사람들인데 어째 우리가 한데 몰려가서 잠이 들었는지. 그리고 나는 또
왜 그랬는지. 그건 좀……. 아니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 경비원은 혼잣말로 중얼중얼거리더니 얼버무렸다. 그러다가 그제서야 찾아온
용건이 생각났는지 불쑥 지갑을 꺼내서 연희에게 내밀었다.
  "오늘 아침에 찾았어요. 아래층 전시물 사이에 끼어 있더군요. 그나저나 오늘 출
국을 못하셔서 어쩌죠?"
  "예, 괜찮아요. 다행히 연기됐어요. 지금이라도 찾았으니 정말 다행이군요.  정말
고마워요."
  연희가 미소를 짓자 경비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뭘요."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현암이 누가  연희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나 보려
고 연희의 뒤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그러자 경비원은 현암이 연희와 동행인
이라는 생각이 들었던지 얼굴을 붉히면서 서둘러 돌아서는 것이었다.
  "아, 예 예. 이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죄송하다니요. 이렇게 찾아서 돌려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아, 예. 뭘요."
  자기 혼자 무슨 상상을 했는지 경비원은  서둘러 발길을 옮겼고 그런 경비원의
뒷모습을 연희는 미소로 바라보았다. 현암은 영문을 모른 채 잠시 그런 연희의 얼
굴을 쳐다보다가 무심한 표정으로 걸음을 안으로 옮겼고, 그 옆에 언제 왔는지 준
후가 눈을 반짝거리며 웃는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희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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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반란...
 
  니제르강이 크게 고비를 이루며 흐르는 아프리카의 한 나라인  말리의 대
통령인 훔바타에게 급한 소식이 전달 되어서 그의 비서관이 채 노크도 하지
않고 대통령의 집무실로 뛰어든 것은 11월 중순의 어느 맑은  날이었다. 대
통령은 막 책상 앞에 놓여진 서류들을 들추어 보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기
지개를 켜다가 비서관을 보고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큰일입니다. 반란입니다."
 
  "음, 뭐라고?"
 
   비서관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말하기가 좀 난처한 듯  주저하는 목
소리로 말을하자 대통령은 눈을 크게 떴다.
 
  " 반란? 아니 도대체 누가 반란을 일으켰단 말인가?"
 
  "도.. 도곤족들입니다."
 
  "도곤족들이...? 뭐라고?"
 
   대통령은 놀랍다기보다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도곤족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잖아. 그렇다면 도대체 목적이  뭐야? 공산
쿠데타도 아닐테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혀 합리적인 목적을 갖추고 있는 것 같지가 않습
니다. 일설에 의하면 백인들의 문명을 반대하는 그런 구호를 내세우고 있다
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문명을 반대하는 구호를 내세운다?  도곤족들이 갑
자기 무슨 자연보호론자들이 된 것인가."
 
  "글쎄요. 그런 것은 알 수 없습니다만 좌우간 그 기세가  대단합니다. 지
나가면서 걸리는 것이라면 모조리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들의 수가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아 그리 넓은 범위로 퍼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음, 기세라니? 도곤족들이 무장을 다 갖추고 있나?"
 
  "아닙니다. 무장은 전혀 갖추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뭐야? 경비대를 파견해서 진압해야지, 어서!"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것이..."
 
  "뭐가 어떻게 됐다는 말인가?"
 
  "벌써 두 차례 걸쳐서 중대 규모의 지방 경비대가 전멸됐습니다."
 
  이태껏 침착한 기색을 유지해왓던 훔바타 대통령이 비로소 놀라는 눈치를
보였다.
 
  "음! 뭐라고? 도곤족들이 언제 그런  막강한 화력을 소요하게 됐단  말인
가? 어떤 딴나라의 정부가 개입한 흔적은 없는가?"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아직 전혀 무장을 갖추지 않고 기껏해
야 창이나 활같은 무기만 들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니 그런데도 뭐야? 그런데도  우리 경비대가 그들을 당해내지  못했단
말인가. 그들은 수도 얼마 되지 않는다면서?"
 
  "그들은 이상한 무기인지 뭔지 하여간 이상한 술수를 씁니다.  그래서 모
두 전멸되어버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대통령은 책상을 내려치고는 책상 위의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이 멍청한
비서관은 갈아버려야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하나도 대통령으
로서는 하나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도곤족이라면 필경 홈보리 산맥에  그
대부분이 살고 있는 가난한  농민들로서 예전에 소련이 붕괴되기  전이라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같은 것에  영향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종족이었다. 그러나 지금 구소련이 와해되어 버리고 공산 이데올
로기가 거의 쓸모없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자명해진 이때 난데없이 쿠데타라
니. 그것도 반문명적인 쿠데타? 그리고 무장조차 하나도 갖추지  않는 그런
농민집단이 중대규모의 경비대를 두 차례에 걸쳐서 전멸시켰다고?  그건 도
대체 무슨 말인가?
 
  대통령은 다소 노기섞인 목소리로 국방장관을 호출했고  국방장관도 마침
대기 중이었던 듯, 즉각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훔바타  대통령으로서는 더
욱 더 울화통이 치미는 것이 국방장관조차도 몹시 놀란 듯한 어조로 더듬거
릴 뿐이었다.
 
  "대, 대, 대통령 각하! 3차로 파견한 경비대도 전멸됐습니다. 이번에는 2
개 중대 규모로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진격을 했는데도 그 알  수 없는 이상
한 힘에 의해서..."
 
  "도대체 무슨 소린가? 좀 자세하게 얘기를 해 ㅂ!"
 
  "모르겠습니다. 전방의 통신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이  이상한 불빛과
안개를 뿜었다고 하고... 그리고는 통신기에서 비명 소리 같은 것만이 들리
고는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고 합니다. 전멸을.."
 
  "그렇다면 뭘 하고 있는 건가? 항공기 순찰을 해. 헬리콥타를  띄우란 말
이야."
 
  "헬리콥타 세 대가 이유 없이 추락해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도대체 어떻
게 된 것인지 저로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무기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이상한 힘이 그들에게..."
 
  "바보같은 소리 집어 치ㅇ!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국방장관까지도 그런 소
리를 하는 건가? 아무튼 책임지고 당장 진압해버려. 경비대가  아니라 정식
훈련을 받은 정규군들을 파견하란 말이야, 알겠나?"
 
  대통령은 국방장관의 더듬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전화기에 대
고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전화통을 던져 버렸다. 그리고 보니  옆에서 비서
관은 창백한 안색으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대통령 각하,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지는 저도 모릅니다만 이건  심각한
사태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도대체가 무슨 도대체야. 집어 치워."
 
  대통령은 크게 소리를 질렀으나 대통령의 마음 속에도 뭔가  불안한 느낌
이 전달되어 오고 있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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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또 전멸이라니. 군대를 파견한지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됐다고. 출동한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전멸을 한단  말이야. 이게 도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린가?"
 
  "글쎄요. 그건 저로서도."
 
  이제 대통령 앞에는 국방장관과  비서관은 물론이고 내무장관과 그  외에
각계 관료들까지 모두 서서 대통령의 고함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도대체 원인이 뭔지도 알 수가 없단 말인가. 그들이 무슨 화학무기나 생
물학 무기를 쓰는 것은 아니야?"
 
  "그런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도곤족의 군대, 아니 군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도곤족의 무리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우리
병사들의 시체만이 있을 뿐이고 어떤 화학무기나 특별한 화력을  지닌 무기
를 사용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뭐야! 항공기로 공습을 하든지 아니면 포격을 해서  그들을 모
조리 없애 버리면 될 것 아니야."
 
  "그러나 그들의 행적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숲  속으로 숨어서
소규모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아직 그들의 숫자가 몇 명인지도 정확히 파
악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금속성  무기나 장비같은 것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레이다나 기타 어떤 수단으로서도 그들이 어디 있는지 잡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야."
 
  대통령은 다시 책상을 쳤다. 도대체 대통령으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는 일
이었다. 장비도 하나도 없고  무기도 없어서 레이다에도 걸리지  않는다니.
그러면서도 그들은 채 얼마 되지도 않아 파견된 정규군들을  모조리 전멸시
킬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도대체 그들이 어떤 수단을 쓰기에  그토록 강한
능력을 보일 수가 있단 말인가. 한참을 대통령이 씩씩 거리며  끝나지 않을
지루한 장광설을 막 늘어놓을 찰나 문화성장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도곤족들은 원래 알 수 없는 지식을 소유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혹시 그들이 어떤, 그러니까 우리들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그런 초과학이라
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주술같은 것을 사용하여 그러는 것이 아닐까요."
 
  "음, 초과학? 주술이라구?"
 
  "아마도 주술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겠습니다.  초과학적이라고 한다면은
이렇게까지 흔적이 없이 밀고 나갈 수는 없겠지요. 더군다나 그들은 문명과
그다지 밀접하지 않게 살고 있는 족속들이니까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주술을 써서 군대를 전멸시키다니. 그건 도대
체 말이 되지가 않아요."
 
  국방장관이 소리를 치자 문화성장관은 다시 조용히 말을 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도대체  어떤 무기
나 방법을 써서 정규군을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전멸시킬 수가 있
죠. 아무리 그래도 지금 시대가 어느땐데."
 
  "하지만 그것 밖에는 해답이 없지 않습니까."
 
  잠시 회의 석상은 조용한 침묵만이 썰렁하게 흘러  지나갔다. 아프리카의
종족들은 거의 어떤 종족이나 주술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  주술사들의 능력
은 종족마다 다르긴 했지만 항상 대단했으며 거의 어느 종족에서나 추장 바
로 다음가는 위치에 주술사가 있고는 했다. 주술사에게 잘못 보이면 엄청난
저주를 받아서 힘을 잃게 되거나  죽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주술사의 힘에
의해서 다른 부족을 멸망시키거나 무서운 괴물을 퇴치했다는 옛날 이야기같
은 것들은 대통령이나 각료들로서도 아프리카인 이상 잘 알고 있었다. 그러
나 그런 것은 단순히 전설이라고만 생각되었을 뿐이었는데.  아프리카가 백
이들에 의해서 개척이 되고 그들의 종교가 아프리카 안에서도 확산되면서부
터도 또 그들의 종래의 부족집단의 생활태도를 버리고 개화되어  촌락과 도
시와 국가를 이루고 살게 되면서부터 그러한 주술사와 같은  존재들은 서서
히 그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고 이제는 몇몇 개화되지  않는 원시
종족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존재들은 기억 속에서 묻혀져 가는 옛 이야기 꺼
리에서나 등장할법한 그런 것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들의 마음 속에 주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남아 있었다. 아직 그들도 나
이가 많아서 어렸을 적에 받은 그러한 영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해서가 아
닐까 하고 대통령은 생각해 보았으나 또 어떻게 생각하면 그러한 방법 말고
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사태가  나라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황당한 추론을 믿어도 된단 말인가?"
 
  대통령이 신임성같은 소리를 중얼거렸을 때 문화성장관은 다시 한  번 자
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아무리 믿어지지 않은 일일지라도 일단  조사해 보아서 나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음..."
 
  대통령의 한숨 소리 비슷한 것이  방안의 침묵을 깨고 밖으로  울려 퍼졌
다.

 
  2. 동방에서 온 사람들..
 
  도곤족의 반란에 의해서 세  번이나 정부군이 전멸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훔바타 대통령으로서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서 문화성 장관의 말대로 급히
주술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는 반면 또한 다른 쪽으로는 멜바싸 대령의 지휘
하에 기계화부대 일개 대대를  집결하여 그리로 파견시키도록 명령을  내렸
다. 그러나 멜바싸 대령에게는 지뢰와 같은 방어물만을 도곤족이 공격해 올
것으로 오는 진로에 잔득 설치하여  도곤족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 후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만을 내렸을 뿐 더  이상의 진격이나
진압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멜바싸 대령의 병력마저도 다른 병력들처럼 금
방 전멸해버린다면 더 이상 어떤 방법을 강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
한 와중에서도 문화성 장관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많은  비서관들을 동
원하여 연락을 하고 있었다. 그 내용이란 다름 아닌 주술적인  대응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이고  그러다가 아프리카의 또 다른 종족인 티티키족의
한 촌로 주술사를 찾아 내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촌로 주술사는 문
화성 장관의 제의에 처음에는 순수히 응해서 관조로까지 와서  투시를 행했
는데도 불구하고 투시해서 도대체 무엇을 보았는지 경악한 듯 입을 딱 벌리
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말도 없이 그 자리에서 빠져  나가려 하는 것
이었다. 문화성 장관은 도대체 그 주술사가 왜 그러는지 궁금하여  그 주술
사에게 왜 아무말도 없이 가는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 주술사의 대답은
간단할 뿐이었다.
 
  "너무, 너무 크고 무서운 고통,  고통의 힘. 그러니 동방에서,  동방에서
온 사람들을 찾으시오. 그들만이 저항할 수 있을..."
 
  주술사는 알아듣기 힘든 중얼거림을 몇 마디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물러
나갔고 문화성 장관은 그 주술사를 다시 불러보려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문
밖을 나가자마자 그 사람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찾
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물론 문화성 장관이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누구
라는 것을 당장에 알 수 있을 리는 없었지만 그  시간에도 퇴마사들은 이미
말리로 들어와서 도곤족들의 이상한 반란의 풍문을 전해 듣고  이미 그리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다.
 
  3. 고통의 승정...
 
  지금 퇴마사들이 쫓고 있는 것은 블랙써클의 삼대승정 중  마지막 승정이
라고 할 수 있는 고통의 승정인 히루바바였다. 세 명의 승정  중 한 사람은
증오의 승정이었던 코제트였고 코제트를 추적하는 중에 퇴마사들은 또 다른
두 명의 승정이 한 명은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이며 또 한 명은 미국에 있는
젠킨스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추적 끝에 캐나다로 옮겨서 공포의 힘
을 끌어 모으려고 하던 젠킨스를 잡았고 그 젠킨스의 마음을 투시해 내어서
히루바바의 이름과 히루바바가 도곤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역사
학 책 같은 것을 뒤적거린 승희의 노력으로 도곤족들은  말리의 남부지방에
주로 살고 있으며 홈보리 산맥에  동굴 속에서 아직도 대부분  철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도곤족이 살고 있는 나라인  말리를 향하여
비행기를 옮겨 탄 것이다.
 
  좌우간 꽤 오랜시간 비행기를 몇번이나 갈아타고 그 중  몇번인가는 금방
이라도 떨어져서 전원이 몰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자아내게
만드는 털털거리는 고물 비행기를 타고 한참이나 여행을 한 끝에 말리 지방
에 도달한 퇴마사 일행은 일단 내리자마자 도곤족의 기미를  살폈고 도곤족
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나라들을 뒤져보다가                          
                                                                 
                상한 반란 사건
이 일어났다던 소문(정부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공공연하게 유포시키지는 않
았으나 이미 민간에 루머로는 많은 소문이 퍼져 나가 있었서 국민들은 공포
에 떨고 있었다)을 들었으며 또한 승희의 투시력을 이용하여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문화성 장관이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이미 퇴마사 일행은 멜바
싸 대령이 이끄는 부대의 선을  넘어 가려다가 지금 야전  최고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멜바싸 대령에게 면담을 신청하여 막 멜바싸  대령을 만나고 있
는 참이었다.
 
  "당신들은 누구고 어디에서 왔소?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이오. 여기는 민간인이나  외국의 관광객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닐텐
데."
 
  멜바싸 대령은 처음부터 위압적인 태도로 말을 꺼냈다. 그러한 그들의 앞
에 나선 것은 덩치가 크고 얼굴이 창백하며 머리를 뒤로  묶고 있는 삼십살
정도의 건장한 남자였다. 그 남자, 그러니까 백호는 아무말 없이 대령의 앞
에 나아가 뭔가 카드인지 신분증인지를 하나 꺼내서 보여 주고  또 몇 장의
서류같은 것을 품 안에서 꺼내서 보여 주었다. 연희가 뭔가 번역할 말이 있
으면 해 준다고 옆에서 말 했으나 백호는 다만 눈을 찡긋 하며 아무말도 하
지 말라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 멜바싸 대령도 또한 아무말 없이 그 서류
들을 자세히 뒤적거려 보고 어디론가 전화를 해보는 것 같더니 잠시 놀란듯
한 눈으로 백호를 가만 올려다 보았다.그러자 백호가 조용히 말했다.
 
  "여러분들은 잠시 나가 계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군요.  제가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퇴마사들은 좀 불만스러웠으나 분명히 모종의 정치적 또는 외교적인 문제
가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백호가 그들을 피해 있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
기 때문에 그들은 옆방으로 따로 옮겨 갔다. 물론 백호의  진정한 신분이나
지금 백호와 멜바싸 대령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같은  것을 승희가
마음 속으로 투시해 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으나 승희는  그런 짓을 해
서까지 백호가 굳이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을 알아내고 싶어하지는 않아 했
고 다른 퇴마사들도 암암리에 승희가 그러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다만 그들은 거기서 이번에 히루바바의 힘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
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대체  히루바바가 어떤 힘을 사용했기에  잘
무장된 군대를 채 무전응답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전멸시킬 수 있는 것인지
도 궁금했다. 박신부가 잠시동안 이어졌던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아마도 내 생각이 틀림 없다면, 저들은 분명 몹시 파괴적이고 악랄한 주
술적인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어. 중장비까지 갖춘  군대를 단
숨에 자취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켰다는 것은 일상적인 수단이 아니야. 그러
나 도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했기에 그럴수 있는지는 감이 잡히질 않아.."
 
  현암이 고개를 끄덕였고 준후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준후야.. 혹시 저주의 주술 중에  이렇게 여러명의 사람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그런 술수가 있니?"
 
  "헤헤... 저주라는 것도 뚜렷한 대상이 있어야 할 수 있죠.  누군지 알지
도 못하는 병사들을, 그것도  단숨에 해치울 수  있는 술수 같은 건.  글쎄
요...헤헤"
 
  현암은 잠시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 보았다. 자신은  도혜스님이 물려준
수십년의 내력과 한빈거사에게서 배운 고대의 갖가지 무예들을 익히고 있었
다. 그렇기 때문에 블랙써클과 같은 사악한 집단의 사람들과 싸워서도 항상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만약 정규군들을 공격한다면  몇 명
이나 상대할 수가 있을까? 아니, 제 아무리 현암이 공력을 최대한으로 돌리
더라도 장갑차 한 대나마 상대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런 장비들을 갖춘 중
대 규모의 인원을 단숨에 해치울 수가 있을까?
 
  "젠킨스의 말로는 히루바바의 힘이 가장 세다고 했었어요, 삼대승정 중에
서. 물론 제일 간사하고 일을 많이 벌리며 사악한 지혜를 가진 것은 코제트
였지만 실제로 능력면으로 따지면 세 승정 중에 히루바바를 앞설 사람이 아
무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제가 언뜻 읽어 냈었어요."
 
  이미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여러 번 얘기를 나눈 적이  있지만 승희가 다
시 한 번 히루바바의 고통의 힘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 히루바바의 고통의 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젠킨스도 채
알지 못하고 있었어요. 역시 블랙써클의 일하는 방식 그대로죠.  각자 모든
사람이 알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
 
  "그런데 또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어."
 
  이번에는 박신부가 말했다.
 
  "보통 주술사들이 일을 할 적에는 가능한 한 은밀하고 자신들이  앞에 나
서지 않도록 일을 하게 마련인데 이번에 이 히루바바라는 자는 거의 공공연
하게 반란을 일으킨 것인 것 같아.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 아무리
주술적인 능력이 있다고 하고 지금 몇몇 부대들을 어떤  방법인지 모르지만
전멸시킨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야. 그렇지만 절대로 지방 경비대도 아닌
정규군과 주술력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을 텐데 어째서 그들은  무모하게
이런 일을 하려는 것일까. 도곤족은 평상시에 매우 선량하게  살아온, 농민
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종족이라던데."
 
  "그거야 알 수 없죠. 하지만 여태까지 본 바에 의하면 코제트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증오하게 만들려고 애를 썼었고 젠킨스는 공포감을 퍼뜨리려
고 윈딩고를 불러내기까지 했었어요. 그렇다면 히루바바는 사람들에게 고통
을 주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 같고 그러기 위해서 전쟁이나 내란 같은 것을
또 다시 일으키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보면 지난번에 세크메트  사건
때도 그와 비슷한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음, 물론 그 사람은 이집트의 주술사였지만..."
 
  박신부는 조용히 앉아서 뭔가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블랙써클이 노리던 목표들을 잘 생각 해 봐.. 맨 처음  우리가 상대했던
그 호웅간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지. 그리고 그는 블랙써
클을 벗어나 도망치려고 했었고.. 그리고 두 번째로 만났던  그 젊은이는..
"
 
   박신부는 말을 잇다가 연희의  눈치를 살피고는 입을 다물었다.  연희는
예의 그 남자의 이야기가 언급되자 비록 표정은 변하지  않았더라도 얼굴에
수심기 어린 그림자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러고보면 연희가 퇴마사
일행과 같이 이 험한 여행을 해  온것도 따지고 보면 그 남자에  대한 생각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박신부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현암이  그 눈치를 챈 듯  재빨리 말했
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블랙써클과 맞닥뜨리게 된 것은 세크메트  건 때였다
고 보는 것이 맞을겁니다. 그때의 이집트 주술사는 한국에 전화(戰火)를 불
러 일으키려 했었죠. 그리고 영국에서는 전멸한 켈트족들의  영들을 이용하
여 영국을 수라장으로 만들려고 했었고... 카프너는 덜 떨어진 사람들을 이
용하여 늑대인간들을 만들었지만 그건  아마도 블랙 써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를 상대하기 위했던 거였을 거구요... 그리고 코제트
는 루마니아에서 장애자들의 심리를 이용하고 흡혈귀의  전설을 이용했었지
요... 항상 그들은 억눌리고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어요. 이
번의 도곤족들도 분명 그러한 음모가 있을 겁니다. "
 
  "그러니까 도곤족들의 반란이 바로 블랙써클의 부추김을 받아서 일어났다
는 건가?"
 
  "그렇게밖에 볼 수가 없잖아요.."
 
  승희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도곤족들은 멸망당한 민족도 아니고, 특별히 박해를 당했다는 기
록도 없어요. 그런 종족이 이런 난리를 일으킨 것은 어쩌면  정치적인 이유
같은 것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히루바바는 분명 도곤족의  주술사고, 실질적으로 저  반란에도
분명히 개입되어 있을 것이 분명해. 승희야, 뭔가 히루바바에  대한 투시는
해 낼 수 없니?"
 
  "전혀 안돼요.. 후훗..."
 
  "흠..."
 
   일행이 별 성과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백호가  다시 방으
로 들어섰다.
 
  "정찰대와 같이 가보기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멜바싸  대령도 동행하겠
다고 하더군요."
 
  "그거야 뭐 상관 없습니다만... 정찰대와 함께 간다면 특별히  행동의 제
약을 받을 것 같지는 않으니.."
 
  "글쎄요."
 
  백호가 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었다.
 
  "탱크를 타고 가야 하니 여러분 들께는 좀 걸리적거릴지도  모릅니다. 그
러나 외국의 사절을 보호해야만 한다고 대령이 고집을 부려서..하하..."
 
  "음?"
 
  현암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좀 인상을  썼지만 준후만은
신이 나는 듯 했다.
 
  "하하 탱크요? 히힛..신난다.."
 
  그러나 현암은 고개를 갸웃했다.
 
  "외국사절이라고요? 우리가 언제.."
 
  현암이 말을 이으려는데 백호가 눈을 찡긋했다. 현암은 자신이 승희와 같
은 투시력이 있다면 백호가 도대체 또 무슨 술수를 부려서 기세등등한 다른
나라의 야전사령관을 녹여 놓았는지  궁금했으나 백호가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을 말하라고 다그칠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신부는 다른 생각을 했
다.
 
  "원 참.. 탱크속에서 투시나 기도력을 발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군요.."
 
  "그러나 그것만은 꼭 지켜주어야 한다고 멜바싸 대령이 고집을 부려서요.
워낙이 깐깐하고 고지식한 성품이라 영..."
 
  승희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튼  승희는 여자가 탱크 같은  것을
탄다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그나저나 요란한 탱크 같은 것을 타고 간다면 도곤족들을 만날  수 있을
까요? 시끄러워서 모두 피해버리는 것은 아닐지.."
 
  "글쎄요. 정 그렇게 되면 그 때가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더라도,  일단 포
위망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그렇다고  저번처럼 뚫
고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남의 나라, 말도 통
하지 않고, 거기다가 정글과 초원, 사막지대인데..."
 
  백호가 한 번 어울리지 않게 윙크를 해 보였다.
 
 
  3. 고통의 주술...
 
   퇴마사들은 덜덜거리는 소련제 탱크(안이 무척 갑갑했다.) 2대에 나누어
타고 또 다른 2대의 탱크와 병력을 실은 4대의 장갑차에 둘러싸여서 황무지
처럼 보이는 산들 사이로 헤치고 나가고 있었다. 탱크 안은 에어킨디셔너가
가동되고는 있는 듯 했지만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빛에 달아올라  탱크의 내
부는 찜통 같았고 퇴마사들은 땀을 주룩주룩 흘렸지만 정작  멜바싸 대령이
나 다른 승무원들은 훈련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원래 더운지방에서  살던 사
람들이라서 그런지 별반 더운 기색을 보이지 않고 마냥 느긋했다.
 
  "아이고.. 너무 더워요. 뚜껑 열고 바깥에 좀 나가 있으면  안되나요? 이
건 뭐.."
 
  땀을 너무 흘려서 화장기가 지워져 가는 승희가 반 필사적으로 얼굴에 콤
팩트를 두들기면서 투덜거렸으나 백호는 멜바싸 대령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
고는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승희는 백호와 박신부와 함께 탱크 한 대에 타
고 있었고 현암과 준후, 그리고 연희는 다른 탱크에 타고  있었다. 그냥 나
누어 타라고 해서 엉겁결에 탔지만 하필이면 덩치 큰 사람들과 같은 탱크를
탄 승희는 안그래도 좁아터진 탱크 속이 더더욱 갑갑하게 느껴져서 참기 어
려운 모양이었다. 계속 승희가 졸라대자 마침 박신부도 덥던 참이라 백호에
게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백호씨. 아직 한참 더 가야 합니까?"
 
  "예? 아.. 글쎄요 그런 모양입니다."
 
  "그러면 아직 위험지대도 아닐텐데 뚜껑을 열고 좀 밖에 나가  있어도 크
게 뭣할건 없지 않겠습니까? 너무 더워서..허허..."
 
  백호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멜바싸 대
령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한참 설득을 당하고 난 다음 멜바싸  대령은 이제
거의 민망할 정도로 땀을 흘리고 있는 승희를 한 번  측은한 듯이 쳐다보더
니 고개를 끄덕였고 승희는 어떻게 여는지도 잘 모르는 탱크의 해치를 어떻
게어떻게 금새 열고는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햐.... 시원하다~~"
 
   조금 덜컹거리는 탱크 위였고 날씨는 아직도 더웠지만 답답하던 탱크 속
에서 나가니 정말 살 것 같았다. 승희가 바깥으로 나가자 멜바싸 대령이 명
령을 내린 듯, 다른 두 대의 탱크와 두 대의 장갑차가 승희가 타고 있는 탱
크를 앞질러서 나아갔다. 최악의 경우에도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것
인지도 몰랐다. 승희는 일단 숨을  돌리고는 탱크의 바깥으로 아예  나가서
그 위에 올라 탄 뒤, 박신부와 백호도 바람을 좀 쐬라고 밖으로 불렀다. 그
러고보니 저쪽 편 탱크에서는 벌써 현암과 준후가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한
가하게 탱크의 포신과 포탑에 걸터  앉아 있었고 연희도 반쯤  탱크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멜바싸 대령은 아직 적응이  덜 되었을
지 모르니 일사병을 조심하라고 하면서 헬멧 세 개를 밖으로 건네주면서 꼭
쓰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승희는 머리 모양이  망가질까봐서인지 헬
멧을 가지고 장난만 하고 쓰지 않았다. 오히려 탱크 위에 있는 기관총 위에
팔을 척 얹더니 저쪽을 향해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현암군! 아 어때? 폼나?"
 
  현암이 저 쪽에서 한숨을 쉬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것과 준후가 까르
르 웃는 것이 보였다.
 
   잠시동안 시원한 것 같더                                       
                                                                        쇠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밖으로 나갈데도 없으니 그냥 버티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보니  아까는
탱크가 신나게 달리는 것 같더니 지금은 속도가 퍽 줄어들어 있었고 탱크의
엔진소리도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도곤족들과  대치하고 있는
부근까지 도달한 것 같았다. 그러자  백호가 승희와 박신부를 보고  손짓을
했다.
 
  "이젠 위험할지 모르니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음냐..."
 
  박신부는 선선히 다시 탱크 안으로 들어갔으나 승희는 불만스러운  듯 투
덜거렸다.
 
  "또 푹푹찌는 그 안으로 들어가라구요? 맙소사.. 싫어요. 밖에 있어서 위
험한 것 보다 안에 들어가서 쪄죽을 위험성이 더 많을 것 같아요."
 
  이번엔 멜바싸 대령이 안에서 승희를 불렀다.
 
  "그래도 들어오셔야 해요. 이미 3번에 걸쳐서 정부군들이  전멸했고 아직
그 원인도 알아내지 못했을 정도로  적들은 기이한 수단을 가지고  있어요.
조심하는게 제일이죠."
 
  "치~~ 그렇게 정부군들이 전멸할 정도로 도곤족들이 세다면  이깟 쇠뭉치
속에 들어가 있어도 안전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지난번 전멸된 정부군들은
탱크를 아무도 안타고 갔었나요?"
 
  멜바싸 대령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리면서도 강경하게 승희에게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을 했고 승희는 영 떫은 듯한 표정으로 다
시 탱크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는 중에 맞은 편 탱크위에 있던 현암과 준후
도 승무원들의 제지로 다시 탱크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그러나  현암은 무
전기로 백호에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도곤족들이 무슨 꿍꿍이를 부리는지 알아내기에는 바깥에 있는  편이 좋
을 겁니다. 저희 몸은 저희로서도 지킬 수 있고, 저희로서도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 염려 마세요. 그리고 준후가  뭔가 희한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니
멜바싸 대령과 부하들은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우리만 나아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군요."
 
  승무원들과 현암, 준후 사이에는 영 말이 통하지 않아서 현암은 무전기를
통해서 백호에게 의견을 전한 것 같았다. 백호도 현암의 말을  옳다고 여겼
다. 애당초에 무기나 통상전력으로 그들을 상대하려고 자신이  특수 신분임
을 밝히면서까지 이 정찰대를 끌고 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부근 지역까
지 안내를 부탁한 것 뿐인데도 이 고지식한 대령은(하긴 사정을  모르는 사
람이니 그럴 법도 하지만) 이 탱크가 절대적인 보호를 해주는  것으로 믿는
지 도대체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멜바싸 대령과  이야기를 나
누었으나 멜바싸 대령의 고집은 완강했다.
 
  "적들은 어쩌면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화학무기를 이용하는  것인지도 모
릅니다. 그러니.."
 
  "화생방 무기를 썼으면 분명 흔적이 남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종류의 독개스 같은 것을 개발했을
지도.."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이건  분명 초자연적인 어떤 힘에  의해 벌어진
일입니다."
 
  "좌우간 여러분들의 신변을 위험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최선의 조
치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고요. 그러니 이 안전한 탱크 속에서.."
 
  갑자기 박신부가 말을 꺼냈다.
 
  "사람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이런 쇠뭉치 기계가 아닙니다. 믿음과 용기
만이 사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도 점점 앞에 뭔가  수상한 것
이 있다는 느낌이 오는군요. 이만 부대를 정지시키십시오."
 
  "부대를 정지시킨다면... 이만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오. 대령님과 부하들은 몹시 위험하니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말고
이 곳 쯤에서 대기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하핫..."
 
  멜바싸 대령이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면서 박신부와 승희를 곱지 않은 눈길
로 쳐다보았다. 이런 늙은 신부나 연약한 여자와 같은 사람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인지.. 더군다나 무기도 없고 무슨
특수한 장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멜바싸 대령은 이 사람들이
혹시 미친사람이거나 사기꾼 들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있는데 백호가 다시 무전기로 뭐라 옆 탱크와 중얼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더
니 소리 쳤다.
 
  "뭔가가 느껴진답니다! 어서 부대를 정지시키세요!"
 
  멜바싸 대령은 옆의 레이더를 한 번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탱크 내부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
되어 있고 화생방 대비장치까지 가동하고 있으니.."
 
  "좌우간 어서 세우세요!"
 
  승희도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번쩍 눈을 뜨며 소리쳤다.
 
  "앞에 수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숨어 있어요! 그들이.."
 
  "뭐라구요?"
 
  멜바싸 대령은 그래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투시경을 통해 밖을 보았으
나 눈 앞은 글자그대로 황량한 초원일뿐.. 어디에 수백명이나  되는 사람들
이 숨어있을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도대체.."
 
  멜바싸 대령은 미심쩍었지만 그래도 탱크를 세웠다. 그리고는  선두의 두
대의 장갑차와 탱크에 연락을 해서 먼저 산개하여 앞을 수색해 보라는 명령
을 내렸다. 멜바싸 대령이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는 아프리카 말을  모르는
일행으로서는 알 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승희가 멜바싸 대령의 마음을
읽은 듯 다시 소리쳤다.
 
  "그들을 앞으로 보내면 안돼요! 위험..."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도대체?"
 
  "앞에는 뭔가... 아직 발휘되지는 않았지만 뭔가가..."
 
  다시 무전기 쪽에서 준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지르는 지 무전기
를 직접 귀에 대고 있지 않은 박신부와 승희에게까지 준후의 목소리는 똑똑
히 들렸다.
 
  - 사람들을 돌아오라고 해요! 아이고 위험! 위험해욧!
 
  박신부가 급하게 투시경에 눈을 갖다 대었다. 지금 병사들은 막 장갑차에
서 내려서 두 대의 탱크의 뒤에 조심스럽게 몸을 숨긴채  천천히 앞으로 나
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멜바싸 대령님! 저들을 속히 뒤로 물러나라고 하십시오! 위험합니다!"
 
  "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앞에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
요! 당신들의 말은 믿을 수가 없소! 자꾸 뭐가 있다고  해서 저렇게 수색을
내보낸 건데.."
 
  "좌우간 당장 돌아오도록 하세요! 저건.."
 
  승희가 또 다시 소리를 쳤다.
 
  "앞에서 적의가... 이유없는 적의!! 공격할거에요! 어서!"
 
  백호도 소리쳤다.
 
  "어서 물러나라고 명령을 내려요!"
 
  그러나 멜바싸 대령도 핏대를 올렸다.
 
  "도대체 무슨 수작들이요! 여기 지휘관은 나요! 그러니.."
 
  무전기에서 다시 다급하게 준후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 그들이 공격!! 소리! 소리에요!! 신부님 기도력으로!!
 
   준후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탱크 안에 이상한  울림이 전
달되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사람의 중얼거림과 같은 소리였는데  그다지 큰
소리로 전달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탱크 안까지 그 소리는 파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갑자기 무전 통신이 탁  끊어져
버렸고 탱크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몸에서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 같앗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라 온 몸에서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박신부
는 순간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힘을 다해서 몸에서 기도력을 끌어 올
렸다.
 
  준후가 소리..라는 말을 하고 이상한 울림이 전달 되어오자 현암은 더 이
상 지체하지 않고 승무원들이 뭐라 하건 상관하지 않고 왈칵 탱크의 해치을
열어젖히면서 준후의 몸을 위로 밀어올렸다. 준후는 현암이  밀어내는 힘에
의해서 왈칵 몸을 위로 솟구치면서  포탑위에 주저 앉으며 소매  안에 있던
부적들을 있는대로 허공에 뿌리고는 수인을 맺었다. 현암도 곧 공력을 운기
하면서 해치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연희는 좀 예민한 편이었는지 고통스러
운 듯 귀를 막았다.
 
  "아아 이럴 수가..!"
 
  주변에서는 난데없는 모래바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도 작은  관목과
덤불들이 미친듯이 흔들리고 있었고.. 그러나 정작 현암을 놀라게  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느 새 단순한 벌판만이 펼쳐져 있었고 아무것도 없었던
눈 앞의 초원지대에는 수백명의 가면을 쓴 토인들이 서 있었다.  아마도 모
래흙으로 몸을 약간 파묻고 땅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기습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총을  쏘거나 창을 던지거나 화살을  쏘지도
않았다. 다만 한결같은 꼭 같은  몸짓으로 몸을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길게
우~~ 하는 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들의  중앙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 되어 보이는 화려한 가면을 쓴 키 큰 남자 하나가 막
그들의 앞에서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힘을 쓰지 못하고  있던 병사들을
향해 뭐라고 소리를 치더니 갑자기 들고 있던 창 같은  것으로 자신의 가슴
팍을 부욱 그으며 한대의 탱크와 그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을 향해 길게 숨을
내뿜듯 높은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순간 고통에 겨워 신음하고  있던 병
사들의 몸둥이가 갑자기 후두둑 소리를 내며 부풀어 오르고  그들은 산채로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것이었다.  현암이 타고 있던 탱크의  안까지
울림이 전달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탱크 속에 있던 사람들도 분명 마찬가지
가 되었을 것이다.
 
  '고통의 주술!! 이건 음파..음파를 이용한...!!'
 
  반대쪽에 서 있던 병사 중 몇 명이 그 끔찍한 모습을 보면서 비명을 질러
댔고 몇몇은 안간힘을 쓰면서 잘  움직여지지 않는 팔로 총을  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중앙에 서 있던 키 큰  남자가 그 쪽
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가슴팍을 그으면서 숨을 내뿜듯이 소리를 치자 안간
힘을 쓰던 병사들의 최후의 비명소리가 그 무시무시한 울림사이로 갸날프게
들려왔다.
 
  '소리.. 소리를 이용하여... 공명(共鳴)을 일으키는 술수..  아.. 그러나
세상에 이건..!!'
 
  현암은 저들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정규군들을 자취도 없이 해치워버렸
는지 이제 짐작이 갔다. 일단  수백명의 훈련된 목소리로 주술력을  실어서
사람들을 마비 시킨다. 그리고는 중앙의 남자 - 분명 그  남자가 고통의 승
정인 히루바바인것이 틀림 없었다.- 가 또 다른 주술력을 실은 음파를 엉키
게 하면 두 두 음파가 엉키면서 공명을 발생 시키고  거기에 말려든 사람은
마치 전자레인지 속에서 빵 봉지가  터져 나가듯 폭발해 버리는  것이었다.
비슷한 음파의 술수인 사자후를 사용할 줄 아는 현암으로서는 이해가 갈 것
같았다. 물론 한사람이 내는 음파 만으로 이렇게 넓은 범위에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저들은 수백명이었고 그 사람들이 내는 음에 히루바
바 자신은 목표를 노리고 공명을 일으키는 작은 소리만 방아쇠를 당기듯 쏘
면 그 부근의 모든 사람은 전멸해 버리는 것이다.
 
  탱크들의 약간 뒤 쪽에 서 있던 장갑차 한 대가  도망치려는 듯 엔진소리
를 내면서 채 방향을 돌릴 새도 없이 뒤로 후진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그 남
자는 다시 자신의 가슴팍을 그으면서 그 장갑차 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소
리를 질렀다. 그러자 후진하던 장갑차가  펄쩍 뛰듯이 확 방향을  꺾으면서
다른 한대의 장갑차를 와장창 들이 받았고 들이 받힌  장갑차는 뒤집어지면
서 안에 있던 탄약이 폭발한 듯 굉음을 울리면서 폭발하여  불길을 내 뿜었
다.
 
  현암은 더 이상 참고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암이 몸을 날리려
고 하자 뒤에서 준후가 거의 결사적으로 현암을 잡았다.
 
  "안돼요! 현암형도 저 소리에 들어가면 버틸 수 없어요!"
 
  "아..저..저런..그렇지만..!!"
 
  이제 도곤족들은 계속 울림을 내면서 서서히 진열을 그대로 둔 채 다가오
고 있었다. 다행히                                                
                                                                  사방으로 
돌면서 이 탱크를  보호하고
있어서 별로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았고  옆 쪽을 보니 박신부가  타고 있던
탱크는 전체에 걸쳐서 희미한 연녹색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박신부가 늦
지 않게 기도력을 발휘하여 그 쪽의 또 다른 탱크를 보호한 것이 틀림 없었
다. 현암은 눈 앞에서 병사들이 처참하게 터져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양주
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히루바바의  얼굴이 의아하다는 듯이 탱크  위에
올라탄 채 고통의 음파 속에서도 멀쩡하게 있는 현암과 준후를 향하자 현암
은 길게 사자후의 고함소리를 질렀다.
 
   도곤족들이 내고 있던 음파 속에 현암의 사자후가 어헝~  하면서 밀어닥
치자 음파로 인한 주변의 모래먼지들이 더욱 거세어지면서 도곤족들  중 몇
몇이 몸을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히루바바는 다시 이번엔  현암이
타고 있는 탱크 쪽을 향하여 높게 소리를 질렀다.
 
  "얍!!"
 
   준후는 얼굴빛이 하얗게 질리면서 막 히루바바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양
손의 수인을 재빠르게 교차시켰고 그러자 탱크의 주변에 구(球)모양으로 돌
고 있던 부적들에 저절로 불이 붙으면서 탱크전체가 우르르  흔들리기 시작
했다. 탱크의 안에서는 승무원들이 무전기를 들고 법석을 떨고 있었으나 무
전통신은 보다 강한 음파들에 눌려서 이미 두절되어 있었다. 준후가  쳐 놓
은 만부원진(萬符圓陣)은 다행히도 주술력이 담긴 음파를 안에까지 뚫고 들
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현암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박신부가
기도력으로 수호하고 있는 옆의 탱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탱크는 갑자
기 도곤족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질주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
 
   그런데 현암의 눈에 갑자기 뒤 쪽에 남아있던 두 대의 장갑차가 눈에 들
어왔다. 두 대의 장갑차는 아직도 시동은 걸려 있었으나 마치  안에 아무도
없는 듯 그대로 서 있었다.  분명 그 안의 병사들은 지금  이유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고 그러면... 현암은 아래 쪽을 보았으나 무전기는 이미
불통인 것이 확실했다.
 
  "준후야! 나를 보호해 다오! 저 쪽 탱크까지 가야겠다!"

 
  4. 대치...
 
  "내 부하들!! 저 놈들이!! 저 놈들이!!"
 
   멜바싸 대령은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사실 멜바싸 대령과 옥신각신
하기는 했었어도 많은 병사들이 죽은 것이 사실 멜바싸  대령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준후나 승희의 말대로  병력을 정지 시켰더라도 지금 준후
와 박신부가 각각 수호하고 있는 두  대의 탱크 외에는 아마 보호  받을 수
없었을 테니까.. 박신부는 지금 전력을 다하여 기도력을 펼쳐내어 탱크의 안
에 탄 여러명들을 보호하느라고 무아지경에 들어가 있었고 승희는  그런 박
신부를 돕기 위해 힘을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눈 앞에서 자신의 부하들
이 채 손도 놀려보지 못하고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멜바싸 대
령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멜바싸 대령은 넋이 나간듯이 멍하니 앉아
있는 운전병과 포병을 밀어내고 직접 탱크를 몰아 도곤족들이  있는 곳으로
밀어 붙이고 있었다. 백호는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 잠시 얼빠
진 듯 투시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탱크가 전진하기 시작하자 소리
를 쳤다.
 
  "뭐하는 거요!"
 
  "저 놈들!! 모두.. 모두 죽여버린다!!"
 
  멜바싸 대령이 악을 쓰면서 탱크의 조종간을 잡아 당기는데  바깥에서 히
루바바가 이 탱크를 향해서 소리를  지르는 듯 하자 탱크는  갑자기 우르릉
하면서 거칠게 떨었다.
 
  "으윽.."
 
   박신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듯한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승희의 힘을
받아서 안간힘을 다해 다행히 고통의 음파를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박신부로
서도 직접 히루바바의 음파를 받자 좀 버티기가 힘에 겨운 것 같았다. 백호
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어쩌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지도 몰랐다. 지
금 제대로 무장도 갖춘 것 같지 않은 도곤족들은 이  빌어먹을 음파 밖에는
별 힘이 없을 것이엇고 이 음파에서만 박신부와 준후에  의해 보호받는다면
지금 두 대의 탱크만 가지고도 싹  쓸어버릴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과연 멜바싸 대령의 그런 행동에  퇴마사들이 동의할지가 의문이었다. 아니
나 다를까, 박신부가 탱크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뜨더니 멜바싸
대령을 쳐다 보았다. 멜바싸 대령은 히루바바의 음파에 의해 탱크가 흔들리
자 조종간을 놓고는 이번에는 탱크의 포좌 조종간을 잡았다.
 
  "뭘하려는 겁니까?"
 
   박신부가 소리를 쳤고 멜바싸 대령이 이를 갈듯이 외쳤다.
 
  "저 놈들을 그냥 둘 수 없소! 유산탄 3방이면 놈들도 끝이오!"
 
  승무원 중 포수가 좁은 공간안에서 몸을 틀어 포탑의 옆  부분에 주욱 늘
어서 있는 포탄 하나를 집어 포 안에 집어 넣으려는 것을 박신부가 막았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저들이 어째서 그러는 지를 알아야..!"
 
  "앉아서 당하라는 말이오!"
 
  멜바싸 대령이 고함을 치며 억지로 포탄을 장전했고 탱크의 포탑이 윙 소
리를 내며 옆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박신부는 뭐라고  말을 하려 했으나
기도력을 발하고 있는 중이어서 과격한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고 백호는 입
술을 깨물고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탱크의 해치를 뭔가가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윽! 이건 뭐야!"
 
   백호가 놀라서 탱크 포탑 위측의 투시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다행히도
탱크의 밖에서 해치가 열리지 않자 탱크의 해치를 주먹으로  탕탕 두들기고
있던 것은 현암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현암은 백호가 해치를 열어주며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멜바싸 대
령에게 (마치 멜바싸 대령이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 처럼) 소리를
쳤다.
 
  "포를 쏴서는 안됩니다! 히루바바는..."
 
  백호가 재빨리 현암의 말을 멜바싸 대령에게 옮겨주자 멜바싸  대령도 그
음파 속을 헤집으면서 현암이  이쪽 탱크로 건너온것이 희한하게  여겨지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현암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해치  바깥쪽을 향하여 목을
내밀었다.
 
  "우리가 공격한다면 히루바바는 뒤쪽의 두 대의 장갑차를 공격할 겁니다!
멈춰요!"
 
  멜바싸 대령이 백호의 통역을 듣고는 눈을  크게 떴다. 멜바싸 대령은 다
시 전방의 투시경을 들여다보았고 과연 히루바바가 노기등등한 기세로 금방
이라도 뒤쪽의 장갑차들을 향해 숨을 내뿜으며 소리를 지를 듯한 자세를 취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현암이 다시 말했다.
 
  "조금이라도 탱크를 더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그럼 히루바바는 무차별로
뒤쪽의 보호받지 못하는 장갑차들을 공격할 것이고 그러면 거기  타고 있는
병사들은 전멸합니다!"
 
  "그.. 그렇지만.."
 
  멜바싸 대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백호도 알 수 있었다. 포를 쏘아
포탄이 날아가 터지기까지는 채 0.5초도 걸리지 않는다. 멜바싸 대령은 선수
를 칠까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틀림 없었다. 백호도 특전부대 출
신 답게 이미 머리 속에서 그 확률을 계산해보고 있었다. 불행한 것은 아직
탱크의 포구는 히루바바를 향해 회전하지 않은 상태였고 지금은  포를 쏘아
보아야 몇몇 도곤족들 정도만 해치울 수 있을 뿐, 히루바바를 다치게 할 수
는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재장전하고  포구를 더 돌려서 히루바바에게 직격
탄을 쏘는데 필요한 시간은 대략 3초. 그러나 그 시간이면 히루바바는 충분
히 그 고통의 음파 라는 것을 내쏘아 장갑차에 타고 있는 인원들을 몰살 시
킬 수 있을 것이었다. 백호는 초조하게 멜바싸 대령의  눈치를 살폈다. 멜바
싸 대령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포를 발사한다면.. 아니, 군인의 사고방식으
로는 2대의 장갑차에 타고 있는 부하들을 희생해서라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는 히루바바를 아예 없애버리는 편이 현명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백호는 멜바싸 대령에게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지휘관이고, 적을 무찌를 의무도 있지만 부하들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도 있소. 그렇지 않은가요?"
 
  멜바싸 대령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맞은 편에 있는 히루바
바와 도곤족들도 긴장한 것 같았다. 여태껏 무적의 기세를 발휘했던 음파를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는 그들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고  더군다나 그런
방어의 주술을 쓰는 사람들이 막강한 화력을 지닌 탱크에 타고서 탱크 자체
를 방어할 줄은 그들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곤족들은 계속 예의 그
우..하는 울림을 내고 있었고 슬슬 산개해서 반원형으로 좀  넓게 퍼져 나갔
으나(아마 만의 하나 포탄이 터지더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
이다.)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고 있었고 히루바바 자신도 금방이라도
음파를 발할 기세로 위협하듯이 조금 자리를 옮겨 탱크포가 지금 향하는 곳
과 다른 각도로 옮겨가서 서 있었을  뿐이었다. 멜바싸 대령의 탱크와 준후
가 보호하고 있는 또 한 대의 탱크도 역시 도곤족들측과 마찬가지로 팽팽하
게 대치하고 있었고 뒤쪽의 병력수송 장갑차들은 안에서 병사들이  모두 기
절해 버린 듯, 시동만 꺼지지 않은 채 계속 서 있을 뿐이었다. 탱크 위에 서
있던 현암은 일단 멜바싸 대령이 포를 발사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양측 모두 어쩔 수가 없는, 일종의 교착상태에 들어간 셈이
었다. 멜바싸 대령이 포를 쏘면 히루바바는 분명  뒤 쪽에 있는 두 대의 장
갑차를 공격할 것이고 그 안에 타고 있는 이십여명의 병사들은 또다시 참혹
하게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히루바바의 음파를 박신부와 준후가 각각
방어할 수 있기 때문에 히루바바가 지금 먼저 장갑차에 타고 있는 병사들을
해치운다면 (물론 박신부나 준후등등은 아무리 히루바바라 할지라도 그렇게
학살하는 것에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고 더군다나 다른 도곤족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질색을 하겠지만) 멜바싸 대령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히루바바를
비롯한 도곤 족들을 탱크의 포와  기관총으로 가루로 만들어버릴 것이었다.
아무리 박신부나 준후가 말린다하더라도 히루바바와 도곤족들을  위해 이쪽
의 사람들을 죽도록 스스로 방어를 풀지는 않을 것이라고 멜바싸 대령은 생
각할테니까... 그러나 또 지금 당장 히루바바를 해칠수도 없는 일이, 세 명의
승정 중 마지막 남은 히루바바가 죽어버리면 블랙써클의 남은  마스터와 총
수에 대해서는 알아낼 길이 막막해지는 것이었다.
 
  '원 참.. 무슨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지?'
 
  그러나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다고 현암은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이렇
게 대치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시간을 끈다면 멜바싸 대령과
의 통신이 두절된 것을  알고 구원부대가 증파되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음파를 만들어내고 있는 도곤족들도 인간인 이상 긴시간 이렇게  음파를 만
들어 낼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보다 먼저 박신부의 기도력이 떨
어지거나 준후의 부적들이 효력을 다할지도 모른다. 현암은 다시 좌우의 탱
크를 살펴 보았다. 아직까지는 준후의  부적들도 건재하게 살아있는 불덩이
들 처럼 탱크의 주위를 돌고 있었고 현암이 올라타고 있는 탱크는 전체에서
박신부가 뿜어내는 오오라가 스며들어서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현암은 지
금 히루바바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대주술사이기도 하고
블랙써클의 승정이기도 하지만  도곤족들의 리더이기도 한만큼  히루바바도
지금 이순간 막연히 저러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현암은 자신이 지금 히루바바의 입장에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기려 하는데 아래에서 멜바싸 대령이 영어로 현암에게  직접 말했
다.
 
  "당신, 이 음파 속을 헤치고 옆 탱크로  갈 수 있소? 무전이 되질 않으니
당신이 내 명령을 전해준다면 두 대의 탱크로 동시에 저들의 리더를 겨냥하
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현암은 고개를 저었고 백호도 고개를 끄덕하면서 멜바싸  대령에게 말했
다.
 
  "탱크의 포탑을 조금이라도 돌린다면 저들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리
고 무전도 되지 않는데 눈치로 두 대의 탱크가 박자를  맞추어 같이 동작한
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아요."
 
  백호가 말을 더 이으려 하는데 저쪽에서 히루바바가 뭔가 고함을 치는 것
이 들렸왔다. 거의 현암의 사자후만큼이나  큰 목소리였는지 음파들을 뚫고
그 목소리는 현암과 탱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전달  되어오는 것이었
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호는 멜바싸 대령을 쳐다보앗으나 멜바싸 대령도 고개를 저었다.
 
  "저건 상가 어입니다... 도곤족들의  말이죠. 불행히도 저도 상가  어는 할
줄 모릅니다."
 
  "승무원들 중에는 혹시..?"
 
  "없어요. 몇 명 그쪽 출신이 있었는데 다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히루바바는 재촉하듯이 다시 고함을 쳤다. 멜바싸 대령은 이를 갈았다.
 
  "저놈이 저렇게 소리지르는 사이 저 놈을 날려버리면 어떨까요?"
 
  그러나 백호는 고개를 저으며 멜바싸 대령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포탑을 아무리 빨리 돌리더라도 사람이 말하는 속도보다 빠를 것 같습니
까?"
 
  현암은 히루바바가 뭔가 고함을 치는 것을 듣고는 반대편 쪽 탱크를 바라
보았다. 반대편 쪽 탱크의 해치를 열고 막 연희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현
암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연희가 히루바바의  아프리카 말까지도 번역해
줄 수 있었단 말인가?
 
  "연희씨! 저 자가 뭐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어요?"
 
  "현암씨!"
 
  연희는 준후의 부적 속에서 보호를 받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꽤나 고통
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린 채로 소리쳤다.
 
  "잘은 몰라요.. 비행기 안에서 잠깐  몇 개의 단어를 본 것  뿐인데.. 지금
저 자는 상가 어로 이야기 하고 있어요!"
 
  현암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보니 긴 비행기 여행동안 연희는 내
내 뭔가 자그마한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알고보니  도곤족들이
주로 쓰는 언어인 상가어를 공부하는 것이었나보다. 그러나 단 10여시간, 길
게 잡아 20 시간 정도만에 아무리 다소 미개한 언어라고는  하나 하나의 언
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익혔다는 것이 현암으로써는  믿어지지가 않
았다. 그러나 연희는 그런 현암의 생각을  알 리가 없었고 다만 히루바바의
이야기 중 알아들을 수 있었던 몇 마디만을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탱크를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저 뒤쪽의 병사들을  모두 죽이겠대요.
정확한 건 아니지만 좌우간 그 뜻만은.."
 
  "병사들을 해치면 히루바바 자신도 각오하라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긴말은 아직 제가 만들기엔 힘들어요... 그냥 병사들을 죽이면 이
쪽도 쏜다고 하죠.."
 
  연희가 힘을 다해서 가냘픈 듯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히루바바는 경계
의 자세를 늦추지 않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협상을 하자는 것 같아요...  피차 지금 싸우게 되면  둘 다 죽으니 협상
을..."
 
  "협상을요?"
 
  현암이 눈썹을 찌푸려 올리면서 탱크 안에 있는 멜바싸 대령을 쳐다 보았
다. 연희의 이야기를 현암이 백호에게, 그리고 백호가 다시 멜바싸 대령에게
히루바바의 제안을 전했다. 멜바싸 대령도 당장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어
서 난감해 하던 차에 히루바바가 어떤 제안을 하는지 듣고 싶어지는 모양이
었다.
 
  "아.. 자세하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 대표  한 사람
을... 음?.. 어?"
 
  "왜 그러세요 연희씨?"
 
  "백인이나 흑인과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대요... 바로 우리들과 이야기 하
고 싶다는군요.."
 
  "예?"
 
  "틀림 없어요. 아.. 히루바바는 우리들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어요. 우리
들 중의 하나와 이야기 하재요.. 어서..."
 
 
  5. 협상...
 
   현암은 그 말을 듣자마자 연희에게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주세요."
 
   연희가 고개를 끄덕하더니 힘을 다                              
                                                                 
        소리를 질렀고 히루
바바는 잠시 잠잠해졌다. 그러나 도곤족들이  내는 이상한 울림만은 여전히
협박하듯 주변을 가득메우고 있었다. 현암은  탱크 안의 박신부와 백호에게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백호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목소리가 탱크 내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듯,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해치 위로 내밀고 말했다.
 
  "혼자 가셔도 되겠습니까? 저 자가 무슨 꿍꿍이를 부릴지 모르는데요..."
 
  "그러나 가야죠. 이런 상태로 계속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저 자를 해치워버린다면.."
 
  "그러면 안됩니다. 물론..."
 
   악인이라도 목숨은 중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현암은 입을 다물었다.
너무 여러번 한 말이었고,  백호도 그런 것을  모를만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런 말을 새삼스럽게 한다는 것은 어딘지 좀 백호를 우습게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 올라
서 현암은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는 꼭 히루바바를 잡아 죽이기 위해 온 것은 아닙니다. 지금 코제트
와 젠킨스에게서도 블랙써클 자체에 대한 정보는 듣지 못했어요. 만약 히루
바바에게서 그런 것들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런 것은 승희씨의 투시를 통해서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블랙써클의 주술사들은  모두 마음을 굳히는  술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빈틈을 보이지 않으면  승희의 능력으로도 그런 비밀들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좌우간 그러면 저  자와 내가 이야기 하는 동
안 승희도 방심하지 말고  투시를 시도해 보라고  전해주세요. 지금 우리가
저 자가 히루바바인 것을  아는 것처럼, 히루바바도  우리들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블랙써클의 인물들은 바보들이 아니에요. "
 
  "음.. 그런데 현암씨, 저 자와 의사소통이 가능할까요?"
 
  현암은 잠시 고개를 돌려서 연희의 얼굴을 살폈다. 연희는 지금 히루바바
가 다시 무슨 이야기를 하지 않나하고  저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연
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도곤족들의 음파에 퍽 약한 것 같았다. 준
후의 만부원진 속에서도 저 정도의 고통을 느낀다면 그곳을  벗어나 히루바
바에게 가까이 간다면 큰 충격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곳에서 상
가어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은 연희 뿐이었는데.. 현암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 올랐다.
 
  "세크메트의 눈! 그걸 이용하면 될겁니다! 세크메트의 눈 한 쪽을  히루바
바에게 준다면..."
 
  "예? 그러나 그건 대단히 귀한 것 아닙니까? 만약 그 자가 돌려주질 않으
면 어쩌려구요?"
 
  "어차피 한 쪽만 주는 것입니다. 히루바바도 한 쪽의 세크메트의 눈만 가
지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지요. 그리고 지금은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
게 문제가 아닙니다. 백호씨, 승희에게  세크메트의 눈 하나를 달라고  해서
제게 주세요."
 
  "그러나 혼자서는 좀 위험.."
 
  "다른 방법이 없어요. 저는 기공력과 사자후, 그리고 준후가 준 부적의 세
가지를 다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음파 속에서도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
습니다. 그러나 신부님과 준후는 탱크를 떠나서는 안돼요.  탱크에서 보호가
풀리면 히루바바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그러면 저라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저 음파  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고통 때문에
아무 힘도 쓰지 못할 겁니다. 저는 만용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저
밖에는 지금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백호가 현암을 믿는 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리더니  잠시 탱크 안으
로 들어가더니 안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백호와 박
신부와 승희에게 말을 하는 것이리라. 잠시 후 백호가 다시 해치 밖으로 고
개를 내밀며 현암에게 세크메트의 눈을 전해 주었다.
 
  "신부님과 승희씨가 조심하시랍니다."
 
  현암은 씩 웃고는 연희에게서 세크메트의 눈을 달라해서 연희가 던져주는
또 하나의 세크메트의 눈을 받았다. 그리고  연희와 여전히 불안한 듯한 표
정을 띄고 있는 준후를 향해서도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씨.. 제가 그리로 간다고 전해주세요.."
 
  6. 일대일의 결투...
 
   현암은 차분한 걸음걸이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가면을 쓰고 있
는 도곤족들, 그리고 그 중앙에  있는 히루바바를 향해 나아갔다.  박신부나
준후가 탈진하지 않을까 마음 속으로는 걱정하고 있었으나 지금  조급한 행
동을 취해 보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현암이  가까이 다가오자 도곤족들은
서서히 현암의 주위를 둘러쌌고 놀랍게도 그중의 세 사람은  바주카포를 현
암을 향해 들이대는 것이었다. 도곤족들은  그리고보니 세 번이나 정부군들
을 전멸시켰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들이라고  무기를 좀 노획하지 않았으
리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아마도 히루바바가  현암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탱크의 포들이 자신들을 공격할까봐 취한 조치였을 것이다. 이 바주카포 들
은 정식명칭을 로우(LOW)라 부르는 것으로  경화기에 속하는 것이라 영화
에서와는 달리 그것으로 중장갑을 지닌 탱크를 부술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
포가 겨누어지고 있는데도 만약 이들이 더 강한 화기를 지니고 있었다면 탱
크들까지 파괴 되었을지 모른다는 안도의  한숨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나서
는 현암은 잠시 그쪽을 쳐다보았으나 더 이상 포에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
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바주카포를 쏘면 근방에 잇던 사람들이 모두
날아갈테니 그들이 함부로 그것을 쏘지는  않을 것이었다. 히루바바는 뭐라
고 현암에게 조용히 말했다. 도곤족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히루바
바는 자신의 화려한 가면을 벗었고 그러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히루바바
는 40대나 50대 정도로 보이는 건장하고 우락부락한 것 처럼 보이는 남자였
다. 그의 가슴에서는 방금 고통의 주술을  쓰면서 스스로 낸 상처가 있었고
그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히루바바의 온몸에
는 그것말고도 마치 조각가가 일부러 장식을 한 것처럼 크고 작은 흉터들이
빽빽하게 덮여 있었다. 현암은 히루바바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세
크메트의 눈을 히루바바에게 전해주려고 했으나 그러자 현암을 둘러싸고 있
던 도곤족들이 움찔하면서 협박하듯이 현암에게 바주카포를  들이대는 것이
었다.
 
  '이런 젠장.. 그러면 어쩌라는 거야..'
 
  이번에는 히루바바측에서 현암을 한 번 가르켜 보이고는 다시  자신을 가
리켜 보였다. 그리고는 등 뒤에 메고 있는 자루까지도 은빛이 도는 세 자루
의 창을 한 번 가리켜 보였다.
 
  '무슨 뜻이지?'
 
  현암은 히루바바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 알 수 없어서 어깨를  한 번 으
쓱해 보였다. 히루바바는 다시 몇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할 뿐이었다. 현암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세크메트의 눈을 내밀었으나 히루바바는  고개를 저
었다. 그리고는 다시 왼손으로 현암을, 오른손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이고 창
을 가리켜 보인 후 이번에는 두  손으로 서로 엉켜 싸우는 것  같은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양손을 펴서 끝났다는  듯한 시늉을 한 뒤 세크메
트의 눈을 가리켰다. 현암은 속으로  아하 싶었다. 지금 히루바바가  말하는
것은 현암과 자신이 싸우자는 뜻임이 분명했다. 지금 양쪽이 이러지도 저러
지도 못하는 대치 상태에  있으니 둘이 승부를  가리자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보니 히루바바도 세크메트의 눈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만약 세
크메트의 눈을 히루바바가 받게 되면 히루바바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현암
이 알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마찬가지로 현암이 아는 것도 히루
바바가 모두 알게 되고.. 지금은  서로가 적이니만큼 그렇게 서로간에  있어
위험할 수 있는 정보의 교환은 싸움이 끝난 뒤, 그러니 승부가 정해진 다음
에 하자는 뜻임을 현암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암은 지금 이런 판국에 일대
일의 결투로 승부를 내자는 히루바바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으나 또 어찌 생
각하면 그것이 히루바바로서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만약 히루
바바가 승리한다면 히루바바는 현암을  죽이지 않고 무력화시킨 뒤  현암을
인질로 삼아 이 위기를 수습하려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히루바바가 패한
다면 어차피 도곤족들도 사람들에게 고통은 줄 수 있을지언정  사람을 해칠
수는 없을 것이니... 어쩌면 가장 빠르게 상황을  종결할 수 있는 제안인 것
같았다. 그런데 현암에게 한가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히루바바가 현암을
인질로 잡을 생각을 했다면 왜 지금 그러지는 않는 것일까? 지금 무기를 든
부하들을 시켜서 현암을 인질로 잡으려고 (물론 현암이 호락호락 잡힐 사람
은 아니었지만) 하지 않는 것일까? 현암은 그것이  궁금했으나 좌우간 히루
바바를 선뜻 믿을 수는 없었다. 히루바바는 다시 현암을 아무 표정 없는 눈
으로 바라보더니 주변의 도곤족들을 가리켜 보이고 양 손을 가슴에 얹었다.
 
  '자신의 부족들을 사랑한다는 표시인가?'
 
  현암은 그 제스츄어가 일견 우습게 보였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블랙
써클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 해서 모두가 사악하고 간사한 술수만을 부
린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편견일지 몰랐다. 현암은 과거, 자신과 비슷하게 일
대일로 싸웠었던 그 이름모를 남자를 생각했다. 그 남자는 블랙써클에 굳이
속한 것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좌우간 그들과 연관이 있었고 그러면
서도 사악하거나 비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보니 히루바바가 자신의 부하들
을 진정으로 아낀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희생을 치르면서 현암을  잡으려 하
지 않은 것도 설명할 수가  있었다. 히루바바는 과연 악인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방금 너무도 참혹한 방법으로 병사들을 학살 한  것을 본다
면...
 
  현암은 조용히 히루바바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히루바바의 눈은 오랜 수
련을 거친 것 처럼 아무런 표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현암에게는 그
눈의 깊숙한 안쪽에 슬픔 같은 것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현암
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길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판단
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었다.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히루바바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하더니 현암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현암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마주 절을 해
주었다. 아마도 무슨 관습이나 의례인 것  같았는데 그런 현암의 생각이 옳
았던 듯, 도곤족들은 계속 우~ 하는 울림을 내면서 히루바바와 현암의 주변
에 넓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하긴  울림을 계속내지 않으면 뒤쪽의 장갑
차들이 달아나 버리거나 무전통신이 다시 가능해 질테니 그것을 풀 수는 없
을 것이엇고 그러므로 박신부나  준후도 자신을 도울  수는 없을 것이었다.
현암은 히루바바를 가리키고 히루바바의 등에 있는 창을 가리켜 보인 후 다
시 자신과 자신의 손목에 있는 월향검을 한 번 가리켜 보였다. 무기를 써서
싸우겠느냐는 표시였다. 그러자  히루바바는 고개를 끄덕하면서  등에 있던
세자루의 창 중 두 자루를  꺼내 하나씩 손에 드는  것이었다. 현암도 일단
긴장하면서 천천히 월향검을 빼어 들어 다시 월향을 왼 손으로 옮기고 오른
손에 공력을 모았다. 현암의 왼팔은 이제는  거의 나은 상태여서 그나마 다
행이었다.
 
  '히루바바는 도대체 어떤 술수를 쓸까? 혹시 속임수 같은 것을 쓰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현암으로서도 일단은 히루바바가 약속을 지킬  것으로 믿었으니
도전에 응한 것이고 그렇다면  조심은 할지언정 히루바바가 치졸한  수법을
쓸지 모른다는 의심은 하지 않기로 했다. 히루바바는 양 손에 두 개의 창을
들고 조심스럽게 현암과 간격을 유지하며 도곤족들로 둘러싸인 원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히루바바의 손에 들려있는  창이 범상한 것
같지가 않았다. 영기를 그다지 잘 느끼지는 못하는 현암이었지만 그 창에서
는 매우 강한 기운이 뻗쳐나오고 있었다.  보통 아프리카 토인들의 창은 자
루가 나무로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저 창은 희한하게  자루부터가
은색 빛을 띄고 있었고 모양도 일반적인 창의 모양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
다. 그리고 양 손에 들고 있는 두 개의 창의 길이는 서로 달랐다.
 
  '방심하지 말자..'
 
  현암은 승희가 탱크 속에서 힘을 폭포수처럼 보내오는 것을 느꼈다. 현암
은 암암리에 지난번에 새로 익힌 탄자결의 수법에 따라 공력을  모아 손 끝
에 기공탄을 맺히게 해 가고 있었다. 현암이 들고 있던 월향검도 긴장한 듯,
저절로 스스로의 검기를 맺어가고 있어서 벌써 월향검에는 두자  가까이 되
는 검기가 일어나고 있었고 히루바바도 그 써늘한 기운을 느끼는지 잠시 안
색이 굳어졌다. 둘은 그런  상태에서 서로를 노려보면서  팽팽히 대치 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잠시 동안이었을지도 몰랐지만  무한히 긴 시간인 것 처
럼 생각되었다...
 
  히루바바 측에서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히루바바는 짧은 창으로 자신의
가슴을 또 한번 부욱 그었다. 이번에는 아까 탱크를 공격할 때보다도 더 깊
은 상처를 내는 듯 했다.
 
  '고통의 주술...'
 
  히루바바 자신도 고통을 느껴야만 힘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현암
은 잠시 생각했으나 히루바바는 곧 손에 들고 있던 긴 창을 알아들을 수 없
는 주문과 함께 던졌다.  그러나 히루바바는 이상하게도  현암을 향해 창을
던진 것이 아니고 똑바로 하늘을 향해  창을 던지는 것이었다. 현암은 주춤
하다가 영문을 몰라서 다시 히루바바가 가장 긴 창을 꺼내  손에 드는 것만
을 바라보고 잇엇다. 그런데 현암의 귓속으로 준후가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현암형 조심!! 그건 절대 빗나가지 않는.. 주술의.."
 
  '빗나가지 않는다고?'
 
  준후가 갑자기 소리를 치자  현암도 내심 뜨끔해지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몇 걸음 옮겼다. 그러자 하늘로 던졌던 창은 (분명 저 멀리 날아갈 각
도였는데도) 언제 궤도를 바꾸었는지 막 몸을 비키는  현암의 눈 앞에 번쩍
하면서 땅에 내려 꽂히는 것이었다. 현암은  기겁을 해서 다시 자세를 바로
잡으며 창을 쳐다보았으나 창은 어느새 땅 속으로 깊숙히 파고 들었는지 모
습이 사라져 버렸다.
 
  '땅에 박혀버린 것일까? 아니! 빗나가지 않는다면 그건..!'
 
  현암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면서 몸을 뒤로 날렸다. 현암이 땅에서 발
을 떼자마자 현암의 발 밑에서는 팍 하는 소리를 내며 창이 똑바로 위로 뚫
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현암은 기게체조의 동작을 응용하여 뒤로 두어번 재
주를 넘으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덤벼오는  창 끝을 피했다. 그러나 창은
다시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허공에서  궤도를 바꾸어서 다시 현암을  향해
날아드는 것이었다. 현암은 뒤로 날렷던 몸의  중심을 다시 바로 잡으며 왼
손을 내밀었고 월향검이 째지는 듯한 귀곡성을 뿜으며 쏘아져 나갔다.
 
  히루바바는 현암의 손목에서도 자신이 던진 빗나가지 않는 창과  같은 검
이 저절로 쏘아져 나가는 것을 보고 한 번 인상을 쓰더니 등에서 길다란 창
을 빼들고 다시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그 사이 다시 현암을 노리고 날아
들던 창과 월향검은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혔다.
 
  "꺄아아악!!"
 
  월향의 귀곡성이 보통때보다도 훨씬 고통스러운 듯  사방에 울려퍼지면서
히루바바의 창은 세로로 쫙  쪼개지며 허공중에서 갑자기 퍽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히루바바는 그 모습을 보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얼굴에 놀라
는 기색을 보이며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었다. 현암은 그 모습을 보
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나 그것도 잠깐, 월향검은 잠시 허공중에서 비틀하
다가는 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그만 땅에 털썩 떨어져 내렸다.
 
  "어엇! 월향!"
 
   현암은 가슴이 철렁하면서 월향검을 향해 날듯 몸을 날렸다. 히루바바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주문을 외우면서 현암에게로 긴 창을 던졌다. 현
암은 월향검이 땅에 고통스러운 듯 떨어져 내린 것을 보고는  거의 제 정신
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막 땅에  떨어져서 조금씩 꿈틀대는 월향검을 집어들
려고 하는데 히루바바의 창이 날아들자 현암은 분노로 눈에서  불똥이 튀기
는 것 같았다. 현암의 손 끝에  순간적으로 모든 공력이 모여들면서 둥그런
기공력의 덩어리가 오른손 세번째 손가락 끝에 ㅁ혀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
다.
 
  "탄!!"
 
   현암은 자신에게 막 덮쳐들려고 하는 히루바바의 두번째 창을 향하여 아
까부터 모아두었던 탄자결의 기공탄을 손가락으로 튕겨내면서  왼손을 재빨
리 월향검쪽으로 뻗었다.
 
  콰쾅!!
 
  허공중에 마치 폭탄이 폭발한 것 같은,  열기 없는 휘황한 빛이 작열하면
서 히루바바의 두번째 창은 마치 그 빛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중에
서 흩어져서 사라져 갔다. 저쪽에서는 히루바바가 뒤로 넘어지고 있었다. 아
마도 이런 빗나가지 않는 창 같은 것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히루바바 자신의
영도 이 창과 영적인 연관이 맺고 있을 것이었고 그런  창이 두번씩이나 부
서져 버린 이상 히루바바 자신도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현암은 공력
을 한꺼번에 몰아서 내 쏘는 바람에 좀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았으나 그래
도 기공탄의 위력이 만족스러웠고 월향검의 안위가 걱정되기도 해서 왼손으
로 재빨리 월향검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허억!!!"
 
  월향검을 잡은 왼 손에서부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격렬한 아픔이 전달되
어오는 것이었다.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도...하마트면  월향검을 떨어뜨릴
뻔 한 현암은 으윽.. 하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월향검을 떨어뜨리지 않게 손
목을 돌렸다.
 
  "고통의 주술!"
 
  뒤쪽에서 준후가 현암이 휘청하는  것을 보고 다시  소리를 쳤다. 현암은
머릿속으로 퍼뜩 생각이 떠올랐다.
 
  '히루바바가 쓰는 것은 고통의 주술.. 그렇다면 그 창은 단순히 찌르는 것
만이 아니라 건드린 상대에게까지도 고통을 전달하는 구나!'
 
  그러고 보면 히루바바의 빗나가지 않는 창을 정통으로 온몸으로  받아 쪼
개어버린 월향검은 그 격렬한 고통을 그대로 전달받은 것이  분명햇고 그래
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하물며 현암이 그냥 손으로
잡았는데도 이럴 정도의 고통이 전해져 온다면...
 
  "아.. 미안하다.. 미안.."
 
   현암은 간신히 웅.. 하는 소리만 내면서 꿈틀거리고 있는  월향검을 더욱
꼭 쥐었다. 잠깐이라도 놀라서 이런 월향검을 떨어뜨리려고 했던 자신이 부
끄럽게 생각되어서 현암은 더욱 격렬한 고통이 전해옴에도 불구하고 월향검
을 더욱 더 손에 꼭 쥐었다.
 
  '차라리 내가.. 내게 아픔을...'
 
  현암이 이를 악물고 온 몸에 퍼져가는 고통을 참아내는 사이에 뒤로 넘어
졌던 히루바바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히루바바의 가슴에 방금 히루바바 자
신이 내었던 상처들에서 갑자기 피가 뿜어져 나왔다. 히루바바도 격심한 고
통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히루바바에게는 아직도 한자루의
창이 더 남아있었다.
 
  "현암형! 지지 말아요!"
 
  "현암씨! 힘내세요!"
 
   저만치 뒤에서 준후와 연희의 응원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와서 현암은 거
의 졸도할 듯한 고통 속에서도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그것이 히루바
바를 분노하게 한 것일까? 히루바바의  표정 없던 얼굴에도 고통의  기색이
짙게 배어나와 있었다. 히루바바는 하늘을 향해  분노에 가득찬 것 같은 고
함을 터트리면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가장  짧은 창으로 그야말로 인정사
정없이 자신의 가슴팍을 그어대었다.  현암도 이를 악물면서  날이 서 있는
월향검을 쥔 왼손에 힘을 주었고  현암의 손이 월향검의 날에  베어서 피가
후두둑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제 현암에게는 마지막 남은 세번째의 빗나
가지 않는 창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승희가 계속 공력을 보내고 있기는 했
지만 아직 다시 '탄'자 결을 사용할 만큼 기공력이 모인 것은 아니었고 더더
군다나 고통받고 있는 월향검을  다시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현암은 월향이 고통받는 것에 더욱더 마음이 아팠고 지금 이 순간만은 히루
바바도, 블랙써클도, 팽팽히 대치하고 있는 양측의 향방 같은 것에도 관심이
씌여지지가 않았다.
 
  '아프지 말아.. 아프면.. 나에게.. 내가 다 감당 할께..'
 
  현암의 눈 앞에 히루바바가 세번째의 창을 던지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모
우션처럼 들어왔다. 현암은 온 몸에 퍼지고  있는 극심한 고통에 거의 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월향검을 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암
은 가능한한 최고의 기공력을 끌어모아 오른손에 집중하고 눈  앞을 날아오
는 창의 날카롭게 번쩍이는 끝을 향하여 천천히 원을 그리듯 뻗어냈다.
 
  '빗나가지 않는..창이라면... 그대로 맞받아주겠다...'
 
  창의 끝이 날카롭게 번득이면서 막 현암의 손바닥을 꿰뚫으려는 순간, 현
암은 고함을 치면서 오른 손바닥에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힘을 모아서 '발'
자 결로 창을 내밀었다. 미친듯이 솟구쳐서 현암에게로 날아들던 창은 현암
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에 잠시 주춤했지만 그래도  뒤로 밀려나지
는 않고 마치 화난 독사처럼 계속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마치 창이 허공중
에 그냥 떠서 정지해 있는  듯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자 히루바바는
손가락을 벌려서 자신의 가슴에 깊게 난 상처를 쥐어 뜯었다.
 
  "크아아아악!!"
 
  히루바바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울려퍼지자 창은 조금씩 더  힘을 어더
기세를 올리며 현암의 손바닥으로 파고 들어왔다. 뒤에서 승희가 전력을 다
해 힘을 보내주고 있었으나, 지금 온 몸에 고통을 극심하게 느끼고 있는 현
암으로서는 그 힘을 제대로 다 운용하여 창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창은 서
서히 현암의 손바닥 앞에까지 접근해 들어왔고 창이 가까이  다가오자 현암
의 오른손에서도 고통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이런...'
 
  현암은 이대로는 더 버티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히루바
바는 현암이 버티어내는 것을 보고는 다시 목에 걸고 있던  짐승의 이빨 같
은 것으로 만든 목걸이를 잡더니  그렇지 않아도 심한 자신의  상처를 다시
한 번 헤집는 것이었다. 아마도 히루바바의  고통의 주술이란 것은 일단 자
신의 몸에 고통을 가한 후 그것을 몇 배로 불려서  적에게 돌려보내는 것인
지도 몰랏다. 그러나 그런 술수는..
 
  '둘이 다 죽자는 말인가?'
 
  현암의 오른팔이 점차 뻐근해지기 시작했고 히루바바의 창은 이제 현암의
손바닥으로 파고들 듯이 다가들고 있었다.  현암은 다시 기합성을 외치면서
손을 꺾었고 현암이 힘을 거두자 창은 다시 무서운 힘으로 현암에게 닥쳐들
었다. 현암은 재빨리 기공력의 운용을 바꾸면서  창이 막 현암의 가슴을 꿰
뚫으려는 순간 창의 자루를 잡았다.
 
  "허억..."
 
  현암이 직접 창의 손잡이를 잡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현암의 오
른팔로부터 전신으로 마치 전기가 퍼져 나가듯  퍼져 나갔다. 현암은 눈 앞
이 캄캄해지면서 온 몸에서 분수와 같이 식은땀이 솟아나오는 것을 느꼈다.
전신의 감각도 모조리 사라지고 하늘은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그러나 현암
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왼손에 잡혀있는 월향검이 떨리는
듯한 느낌만은 놓쳐버릴 수 없었다. 현암의 왼손에서는 베인 상처에서 마치
샘물처럼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월향검이 같이 고통을 느끼고 신음하
는 듯 검신(劍身)을 떠는 그 느낌도 그대로...
 
  '져서는 안돼.. 져서는..'
 
  현암은 자꾸만 힘이 풀리려고 하는 오른팔을 자신의 부옇게  흐려진 시각
한구석으로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고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현암은 왼손에 잡혀있는 월향검에게  중얼거렸다. 아
니 중얼거린다고 생각했다..
 
  '참을 수 있어.. 그렇지? 난.. 난 참을 수..'
 
  현암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자신의 심장으로 파고들려고  하는 히
루바바의 창을 움켜쥔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히루바바의 고통..
그러나 자신은 어떤 일들을 겪어왔던가... 히루바바의 고통은 아무리 극심하
다 해도 육신의 고통일 뿐이었다.  현암은 지금껏 최선을 다해왔었다. 아니,
스스로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그건 물리적인 힘이나 자신의 내력 으로서
만 이기고 거쳐 온 길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기억들.. 그리고 추억들... 같
이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과 동료들..
  현암의 몸에서 무리하게 운용되던 기공력이 퍽하고서 제 길을  잃고 몸의
반대쪽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현암의 입에서  큭 하는 소리와 함께 뭔
가 붉은 것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죽을 수 있다면
차라리 편하겠지만 죽어서는 안되었다. 절대 안되었다.
 
  '난.. 난 불가능한 순간에도  항상 이겨와야만 했고..  이겨 왔었어.. 그래..
또.. 또 이겨 낼 수 있어.. 이길 수 있어.. 이겨야만 하니까...'
 
  히루바바도 전력의 힘을 창 끝에 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히루바바
도 힘을 더 끌어모으기 위해서  그랬는지 이제 히루바바의 온  몸은 자신이
낸 상처들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히루바바도 숨을 헐떡이며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이 보였다. 히루바바도 이기기 위해서는 게속 자신의 몸에 고통을
가하고 힘을 쓸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가엾은 자... 서로 고통받고.. 그래서 이기면... 그러면 뭘하지..'
 
  현암의 몸 안에 영문도 모르고 승희가 계속 부어넣어 주는 힘들이 소용돌
이치면서 떠돌고 있었고 현암의 부들부들 떨리는 온 몸의  구석구석은 불룩
불룩 튀어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히루바바는 급기야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쥐어 뜯었고 히루바바의 손가락 사이로는 핏줄기
가 솟아 올랐다. 보고 싶지  않았으나 현암은 눈을 감을  수도 없었고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현암은 언뜻, 히루바바가, 그리고  끝까지 이기려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기려고 힘을 쫓던 블랙써클의 모든 사람들이  가엾다는 생
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 이런것이.. 그래.. 맹목적인 미움..  미움이 미움을 낳고.. 증오가 증오
를.. 고통이 고통을...'
 
  이제 현암의 눈 앞에 있는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눈 앞에는
희뿌연 얇은 베일들이 한꺼풀씩  내려가 앞을 가려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 앞에서 온몸에 피를 흘려가며 최후의 수단까지 쓰고 있는 히루바바의 모
습은 흐려지지 않고 현암의 눈에 똑똑이  들어왔다. 현암은 불현듯 모든 것
을 정리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더 버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히루바바는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계속해서 맞서는 고
통, 그리고 증오, 미움... 현암의 몸 안에서 미친듯  소용돌이 치는 기공력들,
그리고 자신의 극심한 고통을 잊으려는 듯, 현암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번에는 구태여 외울 구결도 생각나지 않았다.  현암은 순간 자신의 바로 앞
에 있는 창의 존재도 잊었다. 그리고 피를 흘리는  히루바바도, 왼손에 잡혀
있던 월향검마저도 잊었다...
 
  '부동심결..'
 
  순간 현암의 몸에서 엄청나게 밝은 광채가 뻗어나와서 사방을  너무 밝아
서 오히려 캄캄한, 그런 빛안으로 가두어버렸다.
 
 
  7. 그들은 모두를 미워하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현암은 조용히 눈을 떴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
는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도 잠시동안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왼손에
잡혀잇는 월향검이 우웅.. 하고 우는 것을 느끼고 현암은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 그랬었지..'
 
  현암은 자신의 앞에 길쭉한 것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까의 번쩍
거리던 은색빛을 잃고 시커멓게 되어버린  히루바바의 창이었다. 현암은 고
개를 천천히 들어서 히루바바를 쳐다 보았다.  현암의 몸에 더 이상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도곤족들의 고통의 음파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저
만치로 도곤족들이 슬프고 지친듯한 걸음걸이로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는 것
이 보였다. 탱크가 뒤에서 공격하든지 말든지 상관을 하지 않는 듯, 그냥 그
들은 모두 어깨를 늘어뜨리고 하염없는 듯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개중
에는 울고 있는 자도 있었다.
 
  '내가 이겼구나... 그리고 그들은 약속을 지켜서 모든  걸 포기하고 물러가
고 있어...'
 
  몸은 아직도 잘 움직여지지  않았고 눈을 뜨자  평정이 깨져서인듯, 숨이
몹시 찼다. 현암은 천천히 왼손에 쥐고 있던 월향검을 오른손으로 옮겨들고
가볍게 월향을 왼쪽 손목의 검집에 꽂았다.  그리고 다시 앞쪽을 쳐다 보았
다...
 
  히루바바는 쓰러졌었는지 온통 피와 흙투성이가 되어있었으나  중상을 입
은 사람답지 않게 어느새 몸을 일으켰는지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현
암은 히루바바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현암은 조용히 그러한 히
루바바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가지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  하나를 히
루바바에게 쥐어주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도곤족들은 이미 멀어져 가
고 있었고, 현암의 다른 일행들도 저만치에  떨어진 탱크 위에서 이쪽을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승희를 통해서라도 모든  정황은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었다. 오히려 이럴때 끼어들지 않고 현암을 믿고 침묵을 지켜주는
것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현암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다른 하나의 세크메
트의 눈을 통해서 히루바바에게 마음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 히루바바 당신은 졌다... 그리고 당신이 결과에  승복하는 것 같아 나도
후련하게 생각한다...
 
  히루바바는 과연 도곤족의 대 주술사답게 세크메트의 눈으로 무엇을 하는
지 한 눈에 알아차리는 것 같았다. 히루바바가 태연한 듯, 그러나 힘겨운 듯
이 고개를 끄덕해 보였고 곧이어 히루바바의 생각이 현암의 마음 속으로 곧
장 전달되어 왔다.
 
  - 너는 고통에 지지 않았다.. 너는 고통을 이겨낼 줄 알았고.. 그러니 네가
이길 수 밖에 없다.
 
  - 당신은 좋은 사람인것 같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
 
  잠시 히루바바가 움찔하는 것 같았다.
 
  - 나도 당신은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나 그들은 모두를 미워하라
했다... 모두를 미워하라고..
 
  - 누가? 블랙써클이?
 
  히루바바는 고개를 끄덕했다. 현암은 슬픈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 아무도 미워할 필요는 없다... 내가 당신을 이긴 것은 내가 당신을 니워
하지 않아서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결국은 내가 졌을 것이다.
 
  -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모두를.. 백인들과 그리고 모두를.. 미
워했다. 미워할 수 박에 없었다..
 
  현암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당신은 공명정대하고 깨끗한 사람인듯 한데 어쩌다 블랙써클 같은 곳에
몸을 맡기게 되었지? 당신도 다른 자들처럼 소위 그 힘이라는 것을 얻기 위
했기 때문인가?
 
  - 내가 힘을 필요로 한 것은 나의 민족들에게 고통을 없애주기  위함이었
다. 그래서 나는 힘을 필요로 한 것이지  그 고통을 이용하여 나의 힘을 증
가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나 자신은 고통의 힘을 이용했지만.. 그건 나 하
나로 족했다...
 
  - 그건 무슨 말이지? 민족을 위해서라고? 그러나 당신은 민족을 전쟁으로
몰아가려고 하지 않았나?
 
  히루바바는 마치 더 이상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이 조용히  눈을 감고
앉은 채 생각을 전달해 왔는데  그 생각들은 나직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었
다.
 
  - 한 번의 싸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지배하고 평화롭
게 살고 있던 부족을 국가라는 개념으로 억지로 억압하고 군대를 만들어 우
리를 억눌렀다. 그들은 얼굴은 나와 같이 검지만 속은 백인들과 마찬가지인
종족들이었다. 증오스러운 백인들.. 그래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러
기 위해서 나는 힘을 필요로 한 것이다. 내가 블랙써클에 가입하게 된 것도
사실은 그런 목적에서였다....
 
  - 당신은 왜 백인들을 그토록 증오하는가?
 
  - 백인들 자체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백인들이 하는 짓, 백인들이 만들
어낸 것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 왜 그런가?
 
  - 우리는 평화롭게 살고  있던 민족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백인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지. 처음에 백인들은 사람들의 눈을 부시
게 하는 번쩍거리는 장난감 같은 것으로 우리를 유혹했고 곧 이어서 생활의
편리한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우리들을 현혹했다. 그리고 조금 뒤에는 종교
를, 그리고 술을, 그리고 군대와 무기를, 법률이란 것과 문명이란 것을 가지
고 왔지.. 그러나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 그러나 당신들의 생활은 그것 때문에 편리해지지 않았는가?
 
  - 하하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 다른 법이다.  백인들은 그
것들이 정말로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면에서 백인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단 말인가?
 
  -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
신은 문                                                          
                                                求째메
 
  - 문명? 하하, 그대는  지금 백인들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나 땅을
달리는 자동차를 말하는 것인가? 인간이 왜 하늘을 날아야 하고  땅을 빠른
속력으로 지나야 하지? 걸어도 항상 목적지에는  도달할 수가 있다. 오히려
걸어서 가는 것이 빠를지 모르지. 백인들이  말했던 소위 그 자동차라는 것
을 사거나 만들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그냥 걸어서  다니는 것보다
수십배나 큰 노력을 들이고 아니면 수백배나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이곳
에서 저곳으로 가는 데 빨리 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거리를 빨리 감으로써
얻어지는 시간보다 그 자동차를 사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간이 훨씬  더 길
다. 내 말이 틀렸나?
 
  - 음...
 
  - 우리는 행복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
는가? 소위 그 문명이라는 것이 들어온  이후, 사람들은 조급해졌고 욕심꾸
러기가 되었다. 우리는 돈이라는 것을 몰랐고  그런 것을 만들고자 하는 필
요도 없었다. 그러나 백인들이  그런 사악한 지혜를  가르쳐 주었고 그러한
지혜는 언뜻 보기에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도구였을 뿐이다. 우리는 단지 사냥하고 농사를 지어서 먹을
것을 얻기만 하면 행복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쓸데 없는 것들 때문에 서로
경쟁을 하고 그런 쓸데 없는 것들을 사기 위해서 온갖가지  흉악한 짓들 까
지도 서슴치 않게 되었다. 백인들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 나의 생각은 다르다. 모든 것은 선택에  의한 것이고 사람이 그것을 어
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러한 것은 좋은 것이  될 수도,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글쎄, 나는 네가 하는 말이 위선처럼 들린다. 너는 네가 살고 배워온 것
들에 대해 타성에 박혀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히루바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
체 무엇을 바라는가?
 
  - 다만 과거로, 과거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랬다. 백인들의 모든 자취를 없
애버리고 다시 마을과 도시를 평평한 평야로 만들고 우리들이  자유롭게 사
냥을 하고 맨발로 디딜 수 있는 땅으로 만들기를 바랬다. 백인들은 이런 것
이야말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기름진 평야와  짐승들이 뛰어놀
던 땅을 모조리 딱딱한 돌로 뒤덮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편
안하고 나지막한 집을 거대하고 차가운 돌덩어리같은 것으로 바꾸어 버렸고
항상 편안하게 걸어다니고 마음대로 치장을 할 수 있었던  우리의 차림까지
도 바꿔버렸다. 그러나 백인들의 가장 큰 죄는 그들이 돈을 만들어 낸 일이
다. 우리는 농사를 지어서 충분히 모든 사람이 먹고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TV를 사기 위해서, 아니면 자동차를 사기 위
해서, 더군다나 전혀 쓸모도 없는 화려한  가구나 장식품 같은 것을 들여놓
기 위해서 스스로의 양심들을 팔아먹고 있다. 그런 것이 일상사처럼 행해지
고 아무것도 모르고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남보다
더 나아져야 되겠다는 생각, 그리고 더  남을 짓밟고서라도 자기가 조금 더
나아지겠다는 욕심에만 휘말려갔다. 내가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낫게 보일
수만 있게 해준다면 다른 데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그런  물건 하나를 갖고
싶어서 남은 꼭 필요한 것까지도 모조리 긁어서 빼앗고  자신의 손가락이나
목에 번적 거리는 보석을 걸고 싶어서 남의 입에 들어갈 메마른 빵 한 덩어
리까지도 모조리 빼앗아 버리게 되었다. 백인들은 약속했었다.  그들의 문명
이란 것을 받아들이면 풍요가 온다고. 그러나 과연 우리들은 예전보다 풍요
롭게 살고 있는가? 흉년이 한 번 들면 도대체 몇 명씩이나 죽어가는지 아는
가? 너는 지나가면서 이 비옥했던 땅이 어떻게 바뀌었고 그럼으로  해서 사
람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볼 수  없었는가? 말라 비틀어지고 굶어서  쓰러진
송장 무더기들을 보지 못했나? 그것이 과연 백인들이 우리에게 약속했던 풍
요란 말인가? 그것이 그들이 문명이라는 것이 우리들에게 가져다 준 혜택이
라는 것인가? 천만에, 블랙써클, 블랙써클을 너희는 악하다고 말  할지 모르
지만 내가 보기에는 블랙써클보다도 백인들의 문명이 더욱 더 악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백인들의 문명을 처치하기 위해서 블랙써클을 이용하려  한 것
이고 지금도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히루바바는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가 다시 온화한 태도로 현암에게 생각을
전달해 보냈다.
 
  - 당신은 내 적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종족은 적이라 할지라도 미워하지
는 않는다. 내가 잔혹한 주술로 적의 군대들을 해치웠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전사이고 나의 싸움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다른 것이다. 우리
는 싸웠지만 당신은 당당히 이겼기에 떳떳하고 후회 없이 싸웠기에 나 또한
자랑스럽다. 좌우간 당신은 훌륭하게 싸웠고 나의 모든 힘보다 강했다. 그래
서 나를 이겨낼 수가 있었고 나는 당신에게 찬탄을 보내며 당신을 치하하는
바이다. 당신의 손에 의해서 나는 졌고 조금 있으면  죽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훌륭한 적이었고 나는 당신과  같은 강한 상대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는 그 사실을 명예롭게 생각한다....
 
  - 히루바바 당신도 훌륭했다..
 
  - 고맙다. 당신은 문명의 물을 먹었지만 그 문명을 그다지 싫어하지는 않
는 것 같군.
 
  - 그건 사실이다. 히루바바 당신의 생각이 틀리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이 속한 종족, 그리고 당신이 볼 수 있었던 땅, 당신
이 생각할 수 있었던 크기의 세상 안에서만  당신은 옳은 것이다. 이 온 세
상으로 생각을 돌려보고 모든 민족들과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 볼  때 이 문
명은 필요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은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
고 나도 그것은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좌우간  나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거를 뒤엎거나  부정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과거에
의해서 현재가 생겨난 것이고 이 현재에 속해 있는 나는  현재에 대한 책임
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문명을 비판했지만
그 문명이 없다면 지금 수십억에 달하는 세상 사람들은 채 반 아니, 십분의
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고민없이 살던 과거를 이야기
했지만 세상에 이곳처럼 풍요하고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사람들이  살 수 있
는 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사람들이 힘들여 애쓰고 문명이나 국가의
힘으로 모여서 힘과 기술을 합치지 않으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정도로 사람
들은 많아져 버렸다. 물론 그러지 않았다면 좋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
다 더 큰 문제는 이미  사람이 이렇게 늘어나버렸다는 것이고  그 사람들은
모두 살아야 한다. 당신은 당신 종족에 대해서 말을 했고 모든 백인들을 그
것 때문에 미워한다고 말했다. 분명히 동정은 간다. 그러나 백인들도 백인들
스스로의 종족을 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그렇지만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라 그런 사악한 술수로 우리들을 물들
여서 그렇게 만든 것에는 도저히 찬성을 표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
었다. 모두를 미워하라고.. 우리가 아닌 다른 모두를 미워하라고.. 그리고 나
는 그것만이 우리가 살아남는 길이라 여겼다.. 그래서..
 
  - 그들도 우리다...
 
  히루바바는 잠시 착잡한 생각에 잠기고 있었고 현암은 조용히 히루바바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잠시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히루바바에게 천
천히 생각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 당신들 종족도 물론  이지만 나도 백인은 아니다.  나의 종족도 어쩌면
백인들에 의해 당신들 도곤족들과 같은  길을 걸어왔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만...
 
  현암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말했다.
 
  - 이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에  나나 당신이 과거에 백인의 힘
을 받아 들여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는 힘을 지녔었다
고 한다면 지금의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세상
은 그렇지 않게 흘러갔고 그렇지 않은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그러한 세상을
위해서 애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한 세상이나마 말이다. 물
론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히루바바, 너는 만약 다른 종족이
너의 종족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모조리 죽이고  모든 것을 다
시 시작하게 해준다고 한다면 그 일을 기꺼히 따르고 너의  모든 종족을 희
생시키겠는가?
 
  - 모두가 모두에게 적이 될 수 밖에 없도록 세상이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
다. 그렇다면 모두를 미워할 수 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현암은 다시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현암은  더 이상 마음속으로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현암은 박신부의 얼굴을 떠  올렸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속에만 묻어두고 있었던 현아의 얼굴도 떠 올랐다.. 뒤를 이어서 현암이
지금껏 겪어온 모든 일들이 주마등같이 현암의 마음속에 숨김없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히루바바에게도 그대로 전달 되어갔다.  현암은 잠시 가만히 있다
가 조용히 히루바바에게 물었다.
 
  - 당신은 정말로 모두를, 정말 모두를 미워할 수가 있었던가? 히루바바...?
 
  - 아, 아
 
  히루바바는 탄식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생각이 아닌 현암의  느낌, 그리고
과거의 기억에서 히루바바가 무엇을 느꼈는지는 현암도 알 수 없었다. 히루
바바는 아직도 마음을 열고 있지는 않았다.
 
  -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었다는 말인가. 나는 모르겠다. 내가 정말  잘못했
던 것이란 말인가...
 
  히루바바는 계속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현암은 그런  히루바바륵 가만히
보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 잘못이었다. 너도 잘못이었고 블랙써클도 잘못이다.
 
  - 정말 잘못인가?
 
  -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블랙써클을 상대하려는 것이다. 블랙써클은 사악
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피해를
입었다... 블랙써클 자체의 사람들까지도...
 
  현암은 조용히 블랙써클과의 싸움들을 돌이켜보고는 다시  생각을 이어갔
다.
 
  - 물론 그곳에는 악인들도 많이 있었지만 선량하게 이끌어져 갈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져 갔다. 영혼까지
도... 다른 모든 악행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이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당신
도... 영혼은 구혼받지 못할 것이다.
 
  - 나 하나의 영혼으로 부족이 구원받기를 바랬는데.. 후후 모든게  잘못이
었나보군...
 
  히루바바는 잠시 착잡한 생각에 잠기는 모양이었다.
 
  -  그러면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나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현암은 차분하게 말햇다. 할 수만 있다면 이 큰 덩치의 거인을 구하고 싶
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늦은 일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바를 해
야만 했다..
 
  - 우리들에게 가르쳐다오. 블랙써클의 모든 비밀을...
 
  히루바바는 조용히 생각 에잠겼다. 현암은 그런 히루바바를 내버려두었고
히루바바는 너무 많은 상처를 입고 고통을 받아 이제 몸에서 생명력이 거의
다 빠져나간 듯, 얼마 더 숨을 이어가지 못할 것 같았으나 그래도 의연하게
앉아 있는 자세를 흐트려뜨리지는 않았다.  히루바바는 천천히 호흡을 이어
가려고 애쓰고 있는 듯 했으나 그 호흡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헐떡거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히루바바가 결단을 내렸다.
 
  - 내가 알고 있는 한 한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 블랙써클의 총수와 마스
터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에  대해서 아는 데까지
기억을 되살려 보겠다...
 
  히루바바의 모든 기억들이 쏟아지듯 현암의 마음 속으로 들어왔고 현암은
아무 저항이나 판단을 하지 않고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행여나 현암이 기억
못하는 것이 있어도 분명 뒤에서 승희가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을테니... 그
리고 히루바바의 기억이 어느 순간엔가 끊어진 것을 느꼈을 때 현암이 눈을
떠보자 히루바바는 앉은 채로 숨을 거두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의연한 자세
만은 죽은 다음에도 몸을 쓰러뜨리게 하지 않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또 그
블랙써클이 나타나서 히루바바의  몸을 흡수해 버리겠지...  그 광경만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잘가라, 히루바바. 편안히...."
 
  현암은 몸을 돌려서 박신부와 준후 그리고 백호가 기다리는  곳으로 천천
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히루바바는 마지막 순간에 모두를 미워하지 않고 죽을 수 있었을까?'
 
   현암은 자신의 말재주가 짧은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은 스스로 정말 자
신이 옳다고 생각하던 바를 말한 것일까에 대해서 잠시 고민했다. 그러면서
현암은 발걸음을 옮겨서 박신부와 준후와 승희와 연희 그리고  백호가 기다
리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고 있었다.  현암의 왼손목에서 월향이
조용히 울었고 아프리카의 붉은 노을이 피빛 낙조를 지으며  저쪽 평원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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