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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원숭이 [아리마사]

by Casey,Riley 2023.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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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원숭이 (상)

         -아리마사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1. 독원숭이(1)
            2. 독원숭이(2)
            3. 독원숭이(3)
            4. 독원숭이(4)
            5. 독원숭이(5)
            6. 독원숭이(6)
            7. 독원숭이(7)
            8. 독원숭이(8)
            9. 독원숭이(9)
           10. 독원숭이(10)
           11. 독원숭이(11)
           12. 독원숭이(12)
           13. 독원숭이(13)
           14. 독원숭이(14)
           15. 독원숭이(15)
           16. 독원숭이(16)


  1.

  판매책은 감색 점퍼에 노랑 무명바지를
받쳐 입고 있었다. 아폴로 모자 밑으로
귀를 절반쯤 덮은 장발이 텁수룩했다.
  스물서너 살쯤은 됐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판단했다.
  신주쿠역(新宿驛) 니시구치(西口) -
사내는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역사(驛舍) 기둥에 기대어 서서 저녁
러시아워를 맞아 넘쳐나기 시작한 인파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둔탁한 은색
선글라스가 아폴로 모자밑에서 번쩍거렸다.
  사메지마는 7,8 미터쯤 떨어진 또 다른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진바지에
T셔츠, 허리에 스웨터를 두른 차림새로
웅크리고 있었다.
  끼고 있는 선글라스는 쇼(晶)가
카부키쵸(歌舞伎町) 야시장에서 사다 준
것이었다. 렌즈가 동그랗게 생긴
우스꽝스런 선글래스였다. 수트 차림에 그
안경을 끼고 나서자 차이니즈 마피아 킬러
같다고 쇼가 허리를 부여잡고
깔깔거렸었다.
  기둥 옆에 웅크리고 앉은 것은 가능한 한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였다.
  판매책 혼자 거리에 나와 장사를 할
까닭은 없었다. 따로 망보기를 내세워 순찰
경관이나 사메지와 같은 잠복형사들을
경계하는 것이 상례였다.
  망보기가 어디쯤 서 있는지, 사메지마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20미터쯤 떨어진
매점옆에서 스포츠 신문을 펼쳐들고 서있는
수트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녀석은 틈틈이 신문에 박고 있던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두 녀석 모두 새 얼굴이었다.
  폭력단 가운데서도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돈에 눈이 벌개져 있는
홍고카이(本鄕會)가 최근에 와서는
신나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어디서
어떻게 공급받는지는 모르지만 순도 높은
톨루엔 (메틸벤젠.환각제-역주) 과
스리나인 같은 고급품을 팔고 있었다.
  홍고카이를 등에 업은 판매책들이 신주쿠
니시구치에서 순도 높은 톨루엔을 팔고
있다는 소문을 사메지마가 처음 들은 것은
두 달 전이었다.
  좀처럼 구할 수 없는 고순도의 톨루엔은
거래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순도에 한번
맛을 들이면, 플라스틱 조립 장난감
가게에서 손쉽게 살 수 있는 신나는 너무
싱겁다면서 기를 쓰고 덤비게 되는
것이었다.
  판매책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며서도 사메지마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형사 냄새를 말끔히 씻어내느라고
차림새는 물론, 머리모양까지 바꿨다.
  사메지마는 담배가 몹시 피우고 싶었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어 가면서 참았다. 라이터
불꽃이나 담배연기가 별것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가까이엔 재떨이도
없었다. 발 밑에 꽁초가 너절하게 흩어져
있으면 판매책이나 망보기가 아니더라도
일단 수상쩍게 생각할 것이 틀립없었다.
  사메지마는 망보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녀석은 신문을 접어 왼손에 들면서
오른손에 쥐고 있던 드링크제를 마셨다.
  마시고 난 빈병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가는 것일까. 갖고 가서 어디선가 슬쩍한
신나를 담아 한병에 5천엔씩 받고 팔지도
모른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빈병이 단서가 되어 톨루엔 밀매 그룹을
검거한 적이 있었다. 자동판매기 옆에
마련된 빈병통을 뒤져 드링크제 병만
골라가는 소년을 주목한 것이 뜻밖의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열여섯 살의 고교생인 그 소년의 말로는
드링크제 빈병 1백개를 모아 가면 5천엔을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 소년이 말해준
장소에 잠복하고 있던 사메지마는 빈병을
아지트를 덮친 것이었다.
  사내는 술도매상집 둘째 아들이었다.
가게에서 쓰는 소형 트럭엔 드링크제
빈병이 가득 실려 있었다. 아지트엔
술도매상 아들을 꼬드겨 밀매에 손을 대게
한 스무살 난 클럽 호스테스와, 술도매상
아들의 어릴적 친구인 페인트 도매상
아들이 함께 있었다.
  사내 둘은 전과가 없는 아마추어였으나
여자쪽은 전력이 찬란했다. 열세살 나던 해
폭주족에 끼어든 이후, 날치기. 매춘. 공갈
등으로 소년원과 교도소를 부엌보다 더
자주 들락거린 아가씨였다.
  나이는 제일 적었으나 호스테스가 그룹의
리더였다. 처음엔 내용도 모르고
아르바이트 삼아 일을 거든 것 뿐이라고
사내가 모든 것을 털어놓는 바람에 결국
그녀가 주범임이 밝혀졌다.
  그녀는 두 사내 모두를 잠자리에
끌어들일 만큼 앙큼한 데가 있었다.
더군다나 사내들은 어리석게도 그녀가
자기만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에겐 두 사람 이외에 따로
애인이 있었다. 당시 그 애인은 상해죄로
복역중이었다.
  드링크제를 다 마신 망보기는 빈병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사메지마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판매책에 접근하고 있는 손님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음을 깨달은 사메지마는 혀를
차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손님은 히가시구치(東口)로 빠지는 통로
남자였다. 빨간 점퍼 차림에 흰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지저분하게 목덜미를 덮은
머리카락엔 염색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마스크 밑으로 엿보이는 뺨에는
여드름이 덕지덕지 돋아 있었다.
  마스크가 표지라는 걸 깨달은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신나나 톨루엔을 밀거래할 때,
상대방에게 보내는 암묵적인 표지는 입을
중심으로 엮어내는 것이 관례였다. 기침할
때처럼 주먹을 입에 갖다대고 판매책이
있음직한 주변을 어슬렁거리면 어디선가
슬쩍 나타나서 얼마나 필요한가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침 흉내가 너무 많이
알려져 덜미를 잡히는 경우도 부쩍
되었다.
  <니구구치의 고순도(高純度) 톨루엔>의
흰 마스크도 따지고 보면 기침 흉내의
변형이었다.
  머리를 염색한 젊은이는 두 손을 점퍼
포켓에 찔러넣고 상체를 숙인 자세로
걸어왔다.
  판매책은 망보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재빨리 주변을 살펴 본 망보기가
안전하다고 사인을 보내왔다. 넥타이를
슬쩍 만지는 것이 안전신호였다.
  조금 전, 순찰 경관이 지나갔을 때,
망보기는 손으로 머리를 빗어 올렸었다.
그것을 보고 사메지마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이마에
나타났다는 사인으로, 전국 어디서나
통했다. 하지만 경관 눈앞에서 그런 사인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망보기임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관을 보기만 하면 반사적으로
손이 이마쪽으로 올라가는 버릇만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때문에 얼른
머리를 빗어올리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한
것이었다.
  기둥에 기대 서 있던 판매책이 슬쩍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이제 막 자기 앞을
스쳐가려는 젊은이에게 접근해 갔다.
  판매책의 입술이 보일락말락하게
움직였다. 이어서 젊은이가 뭐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잽싸게
지켜보았다.
  판매책은 왼손으로 젊은이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오른손을 내밀어 꼬깃꼬깃
접은 지폐를 잽사게 나꿔채었다. 그와
동시에 어깨를 감싸안은 왼손에 숨겨들고
있던 열쇠를 젊은이에게 넘겨 주는
것이었다. 신주쿠역 일대에 셀수도 없을
만큼 많은 로커 열쇠였다.
  판매책이 젊은이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렸다. 로커 위치를 알려 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판매책이 어깨를 풀어 주자 젊은이는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방금 받은 열쇠로 지정된 코인 로커로
가서 문을 따고, 종이로 싼 고순도
톨루엔이 든 드링크제 병을 꺼내면서
그것으로 거래는 끝나는 것이었다.
  젊은이의 모습이 인파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자, 판매책도 어슬렁어슬렁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망보기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했다.
  사메지마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순간을 지금까지 기다렸던 것이었다.
  신나를 숨겨둔 코인 로커 열쇠와 대금을
맞바꾸는 것이 판매책의 임무였다. 그러나
로커 열쇠를 수십 개씩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열쇠를 수십 개나 갖고 다니다가 만약
덜미라도 잡히게 된다면, 숨겨둔 물건을
몽땅 압수당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범죄를
고스란히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기
  때문에 기껏해야 두세 개만 지니고
있다가 다 팔고 나면 그때 그때 보충하는
것이 상례였다.
  열쇠를 보충해 주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판매책은 덜미를 잡힐 경우, 망보기도 함께
당하는 경우가 많아 망보기에게 열쇠를
맡겨두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판매책은 니시구치에 있는 백화점
지하매장 입구쪽으로 걸어갔다.
  입구 앞에는 금속제 왜건이 여러
대씩이나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통행인을 상대로 과자나 빵을 비롯해서
부엌용품. 액세서리를 값싸게 파는
코너였다. 일명 왜건 세일장이었다.
  판매책은 제일 끝쪽, 목걸이, 브로치
따위를 파는 왜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얼마간 빗어진 40대의 자그마한 남자였다.
  판매책은 왜건 위에 늘어놓은 브로치를
하나 집어들면서 40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40대의 등 뒤, 백화점 쇼윈도 아래쪽에
둥글의자와 휴대용 금고가 놓여 있었다.
판매책과 얘기를 나누던 40대가 몸을 돌려
금고 뚜껑을 열었다.
  녀석이다!
  사메지마는 잽싸게 몸을 날렸다.
망보기가 허둥대면서 손을 번쩍 쳐드는
모습이 곁눈질에 잡혔다.
  판매책은 이쪽을 등진 자세였고, 40대
남자도 금고 속을 들여다보느라고 아무런
낌새도 못차리고 있었다.
  망보기가 혼자만 미친 듯이 손을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사메지마가
판매책을 덮치는 순간을 확인만 하면 그
자리에서 줄행랑쳐 버릴 속셈이었다.
  40대 남자가 금고 뚜껑을 덮으면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사메지마가 이미
판매책 등 뒤에 서 있었다.
  남자 얼굴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메지마는 판매책 오른쪽 어깨를
나꿔챘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서 있어!"
  판매책이 깜짝 놀라면서 사메지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망보기가 이미 줄행랑을 쳐
버린 것을 확인한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사메지마는 두 사람에게 경찰수첩을
내보이면서 말투까지 바꾸었다.
지금 들고 있는 게 뭔지 좀 보여
주실까요?"
  40대 남자는 이미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사메지마가 말할 필요도
없이, 판매책 쪽으로 내민 오른손에는 코인
로커 열쇠 3개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든 당신이 알 것 없잖아?"
  판매책이 침을 꼴깍 삼키며 허세를
부렸다.
  "그래? 아까부터 줄곧 지켜보고 있었어.
네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어!"
  사메지마는 차갑게 내뱉었다.
  "그, 그래서? 내가 뭘 어쨌다는 게야?"
  "이것, 코인 로커 열쇠지? 안에 뭘
넣어놨어?"
신나를 밀매한 사실은 얼마든지 입증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왜건 세일장의 몸집
작은 40대 남자였다.
  "상품을 보관시켜 놨을 뿐이야!"
  40대 남자가 시침을 뗐다.
  "그래? 그렇다면 함께 가서 한번
열어볼까?"
  그 순간, 판매책이 어깨를 움켜잡고 있는
사매지마의 손를 뿌리쳤다. 도망치려고
몸을 날리는 판매책의 다리를 걸어
쓰러뜨리면서 사메지마는 냅다 호통을
쳤다.
  "저항할텐가?"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으면서 통행인들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판매책이 끼고 있던
선글래스가 땅에 떨어지면서 메마른 소리를
  판매책은 통로에 쓰러진 채로 신음소리를
내뱉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수갑 맛 한번 볼래? 채워 줘?"
  "한번만 봐 주십시오."
  "좋아. 얌전히 일어서!"
  판매책을 끌어 일으키면서 사메지마는
40대 사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고엔 뭐가 들었어?"
  사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금고를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사메지마는
한손으로 판매책의 오른 손목을 움켜잡은
채로 40대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직접 열어!"
  40대 사내는 금고 뚜껑을 열었다. 지폐와
동전이 든 작은 서랍상자가 들어 있었다.
  서랍상자를 들어냈다. 사메지마는 사내를
쏘아보았다. 사내는 눈을 내리깔았다.
  서랍상자를 들어낸 밑자리엔 코인 로커
열쇠가 20여 개나 숨겨져 있었다.

  사메지마의 연락을 받고 정복경관 4명이
달려왔다. 곧 이어 신주쿠 역 철도경관
2명도 합세했다.
  40대 사내와 판매책을 가운데 끼고
사메지마를 포함한 7명의 경관이 신주쿠
역으로 갔다.
  철도경관이라면 로커 위치쯤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40대 사내는 체념란 듯 열쇠에
맞는 로커 위치를 숨김없이 불었다.
  사메지마와 정복경관 4명은 로커를
하나하나 차례로 열어 숨겨놓았던 신나를
  숨돌릴 틈도 없이 곧 신나를 병에 담는
공방(工房)을 덮칠 생각이었다. 망보기가
줄행랑을 친 지금, 뜸을 들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일행이 일곱번째 로커 앞에 걸음을
멈추었을 때였다. 히가시구치, 통행인이
가장 많아 이용률이 높은 로커였다.
  그때까지 압수한 드링크제 병은 20개가
휠씬 넘었다. 경관 2명이 쇼핑백에 가득
담아들고 있었다.
  로커 주변은 짐을 든 이용객으로
엄청나게 붐볐다. 아침 출근시간 못잖게
신주쿠 역 러시가 피크를 이루고 있는
시간대였다.
  "다음은 어디야?"
  로커에서 신나를 모두 꺼내는 것을
물었다.
  사내는 아까부터 무겁게 입을 다문 채
필요한 말 이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시름에 짓눌려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판매책은 어떤지 몰라도 40대 사내에겐
전과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어쩌면 홍고카이의 정식
멤버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앞으로
자신이 받을 형이 몇 년이나 될는지,
구미(組)에 미칠 영향과 끼칠 손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 같을 게
분명했다.
  우선 보기에 사내는 열 손가락이
멀쩡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새끼손가락
한마디쯤은 날아가 버릴게 틀립없었다.
밀매에 손을 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구미의 자금원인 중요
사업에 실패한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40대 사내는 저 혼자 생각으로
신나 밀매에 손을 댄 것이라고 버틸 것이
틀림없다. 입이 찢어져도 홍고카이가
지시했다는 사실은 결코 털어놓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설프게 입을 열었다가는 홍고카이
대표를 비롯해서 중요 간부가 줄줄이
교도소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손가락 한두 개 자르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주변 인파 속에서 울려퍼지는 비명소리에
사메지마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북적거리던 이용객들과, 정복경관 출동을
뒤로 물러섰다.
  그 틈을 비집고 거무튀튀한 피부에 키가
훌쭉한 사내가 불쑥 나타났다. 손에는
번쩍이는 물체를 들고 있었다.
  일본인은 아니다 - 사내를 본 순간
사메지마는 그렇게 판단했다.
  사내는 방한복처럼 생긴 감색 점퍼에
포켓이 주렁주렁 달린 작업복 바지 차림.
허옇게 바랜 작업화를 신고 있었다. 그러나
바짓부리는 너무 짧아 갈색 양발을 신은
발목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였다.
  사내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두
눈만은 먹이를 찾아낸 맹수처럼 이글이글
불을 뿜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번쩍이는 물체가
스테인레스 식칼임을 사메지마는 한발 늦게
  경고나 호통을 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거무튀튀한 사내는 자기 모국어인
듯,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이쪽을 등지고 로커 앞에 서 있는 40대
사내에게 부딪쳐 갔다.
  40대 사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바로 옆에 있던 정복이 깜짝 놀라
얼굴을 돌렸다. 40대 사내는 몸을 뒤로
젖히면서 비틀거리다가 정복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한발 늦었지만 사메지마도 후다닥 몸을
날렸다. 전신의 힘을 실은 어깨로
거무튀튀한 사내에게 부딪쳐갔다. 사내는
그 자리에 벌렁 나자빠졌다.
  주변에 둘러선 구경꾼들은 물론, 정복
경관들도 그제서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겨우 깨달은 것 같았다.
  비명이 파도처럼 일었다.
  식칼은 40대 사내 오른쪽 허리에 깊이
박혀 손잡이만 보일 정도였다.
  40대 사내의 처절한 비명이 귀청을
울렸다.
  "살려줘. 나 좀 살려줘!"
  두눈은 눈꼬리가 찢어질 만큼, 입은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큼 있는대로 벌려
외쳐댔다. 뭉클뭉클 쏟아져 나온 피가 발
밑에 흥건히 고이고 있었다.
  "나 좀 살려줘! 이봐요, 경관님. 아파
죽겠어. 어떻게 좀 해줘!"
  40대 사내는 정복경관 옷자락에
매달렸다.
  "꼼짝 마!"
  철도경관이 호통과 함께 몸을 날려,
거무튀튀한 사내를 덮쳤다. 다른 2명도
가세했다. 4명은 한 덩어리가 되어
딩굴었다.
  "구급차!"
  사메지마는 경찰봉을 뽑아들고 몸을
날리려는 건너편의 경관을 향해 호통치듯
말했다.
  그 경관은 경찰봉을 다시 꽂아 넣는
한편으로 허둥지둥 어깨에 차고 있던
휴대용 무전기 마이크를 잡았다.
  "정신차려! 이봐, 내 말 들려?"
  사메지마는 무릎에 힘이 빠져 축 늘어진
40대 사내의 어깨 밑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그때까지 사내 체중을 혼자 버티어 내고
있던 정복 경관이 한숨 돌리면서 선 자세로
두 다리를 번갈아 굽혔다 폈다 했다.
있었으나 비명은 이미 끊게 있었다. 입술만
바들바들 떨고 있었을 뿐이었다.
  얼굴색은 급격히 창백해졌고, 눈동자도
초점이 풀려 있었다.
  등 뒤에서 안고 있는 사메지마의 옷도
금방 피로 흥건히 젖어 버렸다.
  "이봐, 앉혀야 해! 심장을 아래쪽으로
해서 앉혀야 해!"
  사메지마의 외침을 알아들은 듯, 40대
사내는 인형처럼 몸을 꺾으면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머리가 정복경관 다리 사이를
타고 미끄러져 내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도 처량해 보였다.
  "무슨 일이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눈이 둥그래진 판매책이 혼자
  엉켰던 경관이 몸을 떼면서 거무튀튀한
사내를 잡아일으켜 세웠다. 핏기 잃은
녀석의 입술이 쉴새없이 달싹거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메지마는 40대 사내 앞에
무릎을 꺾어 앉았다.
  "이봐, 정신차려! 내 말 들려? 이봐!"
  사내의 눈꺼풀이 처져내렸다. 얼굴색은
이미 흙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죽을 것 같군요"
  사내를 받치고 있던 경관이 창백한
얼굴로 말하면서 흰 장갑낀 손으로 사내의
맥을 짚었다. 장갑도 피로 얼룩져 있었다.
  "쓸데없는 소린 집어치워. 얘기를,
계속해서 말을 시켜!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의식을 잃지 않도록 해야해!"
  뒤를 돌아보려던 사메지마의 어깨가
휘둔 사내나 경관으로부터 한발짝이라도
멀리 떨어지고 싶었던 것이었다.
  사메지마에게 부딪치자마자 판매책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끽끽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마치 고양이
울음소리 같았다.
  "용서해 줘. 살려 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봐요, 한번만 봐줘."
  두손을 가슴을 싸안은 채 거무튀튀한
사내를 바라보며 울면서 중얼거렸다.
  공포 때문에 얼굴이 실룩거렸다.
  경관 3명에게 두 팔과 머리카락을
움켜잡힌 채로 거무튀튀한 사내는 쉴새없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입술 가장자리엔 흰
거품이 말라붙어 있었다. 눈망울과 울대가
불거져 나온게 특히 두드러져 보였다.
사메지마는 심호흡과 함께 몸을 일으켜
사내 앞으로 갔다. 저항할 것 같은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됐어. 수갑 채워!"
  수갑을 채우는 동안에도 사내는 쉴새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죽어가고 있는 40대
사내에게 눈길을 박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사내의 강한 체취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사내가 중얼거리고 있는 것은
기도소리였다.


  2.

  40대 사내는 병원으로 실려가던 중에
출혈과다로 숨을 거두었다. 사메지마가
짐작했던 대로 홍고카이의 중견 멤버였다.
올해 41세, 이름은 사지(佐治)였다.
  칼을 휘둘은 거무튀튀한 사내는
동남아인이었다. 알리라는 이름만 밝혔을
뿐이었다. 일본어는 거의 먹통이었다. 40대
사내를 찌른 까닭을 영어로 묻자, 자기
모국어로 뭔가 떠들어대었다.
  우선 신주쿠 경찰서로 연행했다.
  사메지마는 경찰청에 전화를 걸어 통역을
요청했다. 본청 경무부(警務部) 교양과
통신 센터에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중국어 (북경어.
우르두어 등을 각각 능숙하게 구사하는
전문요원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대학에서 어학을 전공한 뒤 전문직으로
경찰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고, 경찰에
들어온 뒤 따로 공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화를 받은 본청 직원은 알리의 국적을
금방 짐작한 듯, 곧 통역을 파견하겠다고
말했다.
  알리와 판매책은 각각 다른 심문실에
분리해서 수용했다. 원칙대로라면 판매책이
충격에서 헤어날 때까지 심문을 보류해야
마땅하지만, 망보기가 줄행랑쳐 버린
데다가 알리와 신나 밀거래자와의 관계를
캐는 것도 미를 수가 없어서 사메지마는
서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알리의 심문은 통역이 올 때까지 기다릴
심문을 끝내기 전에 통역이 도착하면,
방범과 과장인 모모이(桃井) 경감이 형사과
사람과 함께 알리를 맡기로 했다.
  책상을 가운데 놓고 사메지마는 판매책과
마주 앉았다. 방범과로 갓 옮겨온
마루야마(丸山) 라는 형사가 기록을
맡았다.
  "이름이 뭐야?"
  사메지마가 물었다. 판매책은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은 하나도 지니지 않고
있었다. 죽은 사지는 자동차 면허증과 함께
홍고카이 문장(紋章)이 든 명함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금방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가와사키(川崎)."
  판매책은 넋나간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있었다.
  "가와사키는 성일테구, 이름은?"
  "가와사키 이로치(一郞)."
  "가와사키 출신이라서 가와사키
이치로라고 둘러대는 건 아니겠지? 지문을
조회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어!"
  판매책은 억울한 소리는 그만두라는
얼굴로 사메지마를 흘낏 쳐다보았다.
  "일을 크게 한번 저질렀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너도 서약의 잔을 받았나?
홍고카이로부터 말야."
  판매책은 머리를 흔들었다.
  "좋아. 다시 한번 묻겠어. 이름은?"
  "도다(戶田) 라고 합니다."
  "도다......"
  "도다 하루키(治樹)."
  "하루키, 얼마나 팔았어?"
  "얼마라뇨?"
  "시간. 양. 손님 숫자. "
  "오늘 처음 시작했습니다."
  "웃기고 있군. 이봐, 내가 지나가던 길에
네 녀석을 덮친 줄 아나?"
  "..... 언제부터 잠복했었습니까?"
  "네 생각엔 얼마쯤 된 것 같아?"
  "일주일?"
  "네놈들 장사 솜씨 꽤 치밀하더군.
그런데도 일주일 만에 들통이 나?"
  "2주일?"
  "심문하고 있는 건 나야. 넌 대답만 하면
돼!"
  도다는 입을 봉했다.
  칼에 찔린 사지의 용태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만약 사지도 지금
심문을 당하고 있다면, 이 자리에서
거짓말로 얼렁뚱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지가 모든 것을 털어놓았는데도 자기
혼자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반대로 사지가 입을 꽉봉하고 있거나
이미 숨졌다면, 쓸데없이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사지씨는 괜찮습니까?"
  "별로 좋지 않아."
  "그 녀석은 사지를 죽일 생각이었던 것
같았어."
  "왜요?"
  "글세... 그 녀석, 전에도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입니다."
  도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말을 이었다.
  "그녀석도 경관을 똑똑히 봤을 게야.
정복 경관들이 너와 사지를 둘러싸고 있는
걸 말야. 그런데도 어째서 사지를
찔렀을까? 그 자리에서 붙잡힐 걸 뻔히
알면서 말야."
  "....글쎄요. 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 너와 그놈, 한방에 몰아넣어 주면
생각이 날지 모르겠군. 요즘 유치장이 몹시
붐비거든!"
  "왜 이러십니까! 좀 봐 주십시오."
  "너와 사지가 체포된 걸 알면서도 녀석은
칼을 뽑았어. 왜 그랬는지, 한번 생각해
봐!"
  도다가 고개를 푹 숙인채로 침을 삼겼다.
꼴깍하는 소리가 사메지마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입을 막자는 건 아니었겠죠?"
  "입을 막다니?"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녀석과 한방에 처넣어야 기억이 살아날
모양이로군."
  "끄, 끔찍한 소리, 그만두세요. 그녀석,
우릴 죽이러 온지도 모르는데......"
  "죽이러? 왜?"
  "체포됐으니까요. 어쩌면 조직이 우릴
죽여 입을 막으려고 녀석을 고용한 건지도
모르잖습니까?"
  "흠!"
  "사지씨를 찌른뒤 나까지 해치운다면.
그래요, 도망친 메기씨가 구미(組)에
연락해서 그 녀석을........'"
  도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자로는 어떻게 쓰나?"
  "그것까진 모릅니다."
  "좋아, 홍고카이 명부를 보면 알 수
있겠지."
  도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메기가
조직의 멤버임을 시인한 것이었다.
  "홍고카이는 너희들을 죽여 입을 막아야
할 만큼 신나 밀매에 열을 올리고 있나?"
  도다는 몇 번이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어제는 얼마나 팔았나?"
  "7갭니다."
  "돈? 아니면 물건?"
  "돈으로 일곱입니다."
  70만엔. 1백40병을 팔았다는 뜻이었다.
  "괜찮은 장사로군. 고순도 톨루엔은
  "모릅니다."
  "믿을 수 없군. 판매책이 물건을 어디서
떼어오는지 모르고 있다니.... 말이 돼?"
  "정말입니다. 전 시키는 대로 하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아요!"
  "심부름꾼을 죽이기까지 하나? 사람까지
고용해서 일일이?"
  도다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사메지마도 눈길에 힘을 실어
마주 쏘아보았다. 도다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노름빚 대신에. . ."
  "자세히 얘기해 봐."
  "자세한 건 모릅니다. 공업용 신나를
취급하는 회사 사장이 노름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회장님한테 물건을 갖고
말했어요."
  "회장이라니, 홍고카이 회장?"
  도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고 대답해! 고개만 끄덕여서는
기록을 할 수 없잖아!"
  "네!"
  이상스럽다는 얼굴로 도다는 얼른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고개를 끄덕였어도
아무 말 않던 사메지마가 갑자기 호통을
치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는 담배를 꺼내었다. 한대 피워
물고는 담뱃갑을 도다앞으로 밀었다.
도다도 꾸벅 절을 하면서 한대 빼어물었다.
  잘만 하면 홍고카이 회장까지 엮어넣을
수 있겠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그러나
일이었다. 법정에서 도다의 진술은 모두
엉터리라고 부인해 버릴게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사지가 죽고 없는 지금, 메기라는
망보기가 도망쳤다고는 하지만, 홍고카이는
적어도 회장에 버금갈 간부를 내놓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었다. 노름빚을
물건으로 대신 갚도록 허용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회장이나 회장 측근의 핵심 간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지씨, 어떻게 됐습니까?"
  담배를 피우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것일까, 도다는 다시 한번 물었다.
  "아직 알 수 없어. 그것보다.... 칼을
휘둔 그 외국인, 정말 처음 본 사람이야?"
 "네. 조직에선 못 봤습니다."
  "넌 자주 들른 모양이로군, 사무실에."
  "딱 한번 뿐입니다."
  "식사 대접도 받았어?"
  도다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얼른
대답했다.
  "네."
  "여자는?"
  "그것도 딱 한번. 전문 목욕탕엘 데려다
줬어요."
  "누가?"
  "사지씨와 메기씨......"
  "네 수당은 얼마야?"
  "하나에 다섯."
  "한병 팔면 5백엔이란 말이로군."
  "네."
  "하루에 7만엔, 괜찮은 벌이야. 꽤
  "마작을 좋아하는 바람에. 게다가......"
  "직접 사기도 했단 말이지?"
  엉성하게 변해 버린 치열(齒列)과 말할
때 입에 침이 고이는 것으로 미루어 도다도
틀림없이 신나에 중독되어 있다고
사메지마는 판단하고 있었다.
  도다는 <네> 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나나 톨루엔을 계속하면 잇몸이
위축되어 이뿌리가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입 언저리 근육이 풀어지는 탓에 침을
흘리는 것은 물론, 입냄새가 심해지는 것도
중독 현상의 하나였다.
  "넌 한병에 얼마씩 주고 사나?"
  "4천엔......."
  "짜군. 그건 누가 정했어?"
  "세 사람 중에서 메기가 제일 높았나?"
  사메지마가 보기에는 메기보다 사지쪽이
나이가 더 든 것 같았다.
  "나이는 사지씨가 많았지만, 메기한텐
꼼짝도 못했어요. 언제나 메기씨가 멍청이,
돌대가리라고 호통을 쳤어요."
  "그래서 나이값도 못하고 신나나 팔고
있었군."
  마흔을 넘긴 조직원이 거리에서 신나
밀매에 관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 것은 발빠른 젊은 녀석들이나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지가 직접
나선 것은, 신나 밀매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지씨, 경마에 미쳐 빚이 꽤 많았나
봅니다. 몇 번이나 애걸한 끝에 가까스로
  "빚 때문이었단 말이지?"
  "네."
  야쿠자 사회에서도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은 위험부담이 많은 현장은 기피하는
것이 상례였다. 젊은 사람들은 소모품으로
쓰일 수밖에 없지만,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내게 되면 얘기가 달라지는 법이었다.
  사지의 손가락이 멀쩡했던 것은 그가
남보다 영리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운이
좋았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은
손가락을 자르는 대신 목숨을 잃게 된
것이었다.
  "홍고카이는 외국인도 쓰고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임시 아르바이트들 가운데는?"
  도다는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기는
       役灼杉鳴?입을 열었다.
  "언젠가 메기씨한테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요. 토공(土工) 으로 몇명을 쓴 적이
있다고......."
  "그럼 그 중의 한명인지도 모르겠군.
그런 사람들도 도박에 끌어들이나?"
  "글쎄요. 하지만 외국인들은 도박을 별로
즐기지 않나 봅디다. 본국으로 송금하기에
급급해서......"
  "그렇게 착실한 사람들이 칼을 휘두른
이유는 뭐야?"
  "글쎄요. 엄청난 보수에 눈이
어두워졌는지도 모르죠."
  "너라면, 얼마가 필요해?"
  "네?"
  "얼마를 주면 사람을 찌르겠느냐,
이말이야."
  "전 못합니다, 그런 일은."
  "그래? 돈도 떨어져, 약도 떨어져 죽을
지경인데, 마음껏 약을 빨게 해 준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사메지마는 도다의 윗입술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다는 대답이 없었다.
  "녀석도 그렇게 끌려들었는지 알 수
없잖아?"
  "전 못해요! 돈 받고 사람 찌르는 일, 전
못합니다!"
  사메지마는 도다를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네가 한 일은 사람을 찌른 것보다 더
악독해. 네가 판 신나에 몸이
너덜너덜해져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불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어? 대답해 봐! 신나도
마약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너도 직접
해봤으니까 잘 알고 있을 것 아냐? 사람을
얼마나 끔찍하게 구겨 버리는지 말해 봐!
네가 판 신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시궁창에 빠지게 됐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네놈이 팔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은
무사할 수도 있었어.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반성해 봐! 이 쓰레기 같은 놈!"
  도다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사메지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메기가 도망친 이상, 팔다 남은 고순도
톨루엔을 다른 곳으로 옮겨 숨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도다의 진술 내용을 본청 수사4과에
알려주면, 입이 찢어져서 홍고카이 분쇄에
  도다 심문을 잠시 중단한 채 사메지마는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모모이와 마주쳤다. 모모이는
<시체> 라는 별명을 가진 50대 초반의
경감이었다. 15년 전 자신이 직접 몰던
자동차 사고로 외아들을 잃은 이후, 인생에
대한 모든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경원당하는 사메지마가
그나마 신주쿠 경찰서 방범과에서 일하게
된 것도 모모이가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신주쿠서 다른 부서 책임자들은 한결같이
사메지마를 거부했다. 팀워크를 깨뜨리는
녀석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사메지마의 계급도 신주쿠서 7개과
  푸석푸석한 머리에 백발이 희끗희끗한
모모이는 갈색 양복 차림이었다. 그늘진
얼굴이 때때로 우울하게 보이기도 했으나
대체로 무표정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이 초로의 사나이
가슴 속에 진짜 경관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모모이 과장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또 징계까지 각오하면서 흉악범을
사살함으로써 사메지마의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었다.
  "어때, 그쪽은?"
  모모이도 옆 심문실에서 막 나오는
길임을 사메지마는 깨달았다.
  "불었어?"
  "네. 고순도 톨루엔은 홍고카이 회장이
노름빚 대신 받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모이의 눈꼬리가 보일듯 말듯 치켜
올라갔다.
  "어쩔 생각이야?"
  "수사4과로 넘겨야죠."
  모모이 입가에 쓴 웃음이 번졌다.
  "녀석들이, 몽땅 자기들 실적으로
꾸밀텐데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니시구치
고순도 톨루엔만 근절된다면......"
  "얼마쯤 잠복했었나?"
  "이럭저럭 한 3주일쯤......"
  "수고했어!"
  모모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사메지마도
따라서 끄덕거렸다.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의 포상을 바랄 기분도
  "그쪽은 어떻습니까?"
  "통역은 왔어도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덮밥 한그릇에 넘어갔어."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훌쩍훌쩍 울고 있어. 통역, 좋은
사람이었어. 달래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거든."
  "사정이 꽤 딱한 녀석인 모양이죠?"
  두 사람은 나란히 방법과로 들어갔다.
모모이가 웃도리를 벗어 자기 의자에
걸었다.
  "형제가 돈벌러 일본으로 왔다더군.
토공이었어. 동생이 두 살 아래,
열아홉쯤일 거라 말했어. 제 나이조차
똑똑히 모르는 녀석이었어. 두 사람이 함께
열심히 일해서 버는 족족 본국으로
송금했대. 그러던 중 동생이 신나에
빠졌어. 공사장 밥집에 있던 녀석이 억지로
끌어들였던 모양이야. 결국 완전 중독자가
돼서 일도 할 수 없게 됐어. 아무리
말렸어도 소용이 없었대. 어느날 억지로
끌고 가서 일을 시켰는데, 발판을 헛디뎌
떨어지는 바람에 두 다리가 망가졌어.
한평생을 병원에서 그것도 휠체어로 보내야
될 처지라는구먼...... 동생이 어디서
신나를 구입하는지는 알고 있댔어. 신주쿠
역 로커를 지키고 있으면 신나 병을 숨기러
오는 판매책을 잡을 수 있다고 계산한
거야. 그때 한칼로 죽일 생각이었어.
동생이 그렇게 된 건 모두 자기와 판매책
때문이라면서 울먹었어.'
  사메지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신나든 마약이든 그런 비극은 셀 수 없을
  중독자가 자신의 쾌락에만 젖어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지만, 결국엔 가족에까지
영향을 미쳐 희생자를 내게 마련이었다.
  그만두게 하려다가 끝내는 제 자식을
죽이고 마는 부모, 반대로 살해되는 부모,
착란에 빠진 오빠한테 순결을 빼앗기는
누이동생, 환각상태에서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녀석. 아파트가 전소하는 바람에
아무 관계도 없는 이웃집 모자가 불에 타
숨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져도, 판매책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는 없었다.
  신나류나 마약은 폭력단의 중요
자금원이었다. 떼돈을 물고 오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그 도깨비 방망이는 불특정
다수의 희생을 먹고 사는 요물이기도 했다.
관심을 기울이는 경관은 많지 않았다.
마약이나 각성제의 경우는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될 뿐 아니라 실적
평가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톨루엔이나 신나는 각성제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감 정도라는 인식이 강했다. 때문에
단속도 사복이 아닌 정복경관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인 해독은 마약이나
각성제 못지 않았다.
  또 판매책 꼬리를 밟아 밀매 루트 전모를
파헤쳐 내기까지 엄청난 노력과 끈기가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각성제 밀수 적발은 대부분이 밀고에
따른 것이었다. 돈을 둘러싼 내부
트러블이나, 덤핑에 따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상대방을 곧잘 밀고하는 것이
밀매 루트 수사는 지금보다 휠씬 힘이
들면서도 효율은 떨어져 있을 게 틀림없는
일이었다. 톨루엔. 신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약이나 각성제와 달리 상품 자체는
위법이 아니기 때문에 효과적인 탐색이나
수사가 더욱 힘들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수사요원들도 신나나 톨루엔보다 각성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었다.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체포가 가능한
경우와 그렇지 못한 케이스를 구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메지마의 경우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어린 사람들을
시궁창으로 몰아넣는 댓가로 고급차를 타고
다니면서 호화로운 환락가를 누비는 폭력단
간부들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사메지마가 <신주쿠 상어>로 불리고 있는
것은 현장의 애송이 야쿠자를 엄격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안전하게
뒷전에 물러서서 어슬렁대고 있는 간부
야쿠자들도 용서없이 덮쳐,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게 된 것이었다.



  3.

  홍고카이 수사는 사메지마가 생각했던
대로 본청 수사4과로 넘어갔다.
  사건 인수인계 절차를 모두 끝낸 이틀
뒤, 사메지마는 오쿠보(大久保)
1쵸메(丁目)에 있는 임대 전문 맨션
아파트를 찾았다.
  아침 6시 30분이었다.
  노가다(野方)의 자기 아파트에서 곧장
이리로 온 것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맨션이었다. 이
언저리 맨션 아파트에는 대부분 신주쿠
일대의 물장사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아파트에 따라서는 반수 이상이
한국인이거나 대만인인 경우도 적지
  사메지마는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건물 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대부분 입주자들의 퇴근 시간은
새벽 3시나 4시쯤, 따라서 6시 30분은
한밤중에 해당되었다.
  사메지마는 제일 안쪽 도어로 걸어갔다.
최근에 새로 칠한 크림색 스틸 도어가
지저분한 외벽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세들어 있던 바텐더가 이사를 간 보름
전에, 경찰청과 신주쿠 서가 한달 예정으로
빌린 집이었다.
  사메지마는 노크도 없이 도어를 잡아
열었다. 담배 냄새와 남자 체취가 물씬
풍겨나왔다.
  부엌과 식당이 딸린 전형적인 원룸
아파트였다. 안쪽 방에는 네 사람이
남은 두 사람은 경찰청 보안1과
사람이었다.
  도시락 껍질. 빈 깡통으로 가득 찬
편의점 비닐 주머니가 방문앞에 놓여
있었다.
  그 중 두 사람이 빛이 부신듯 눈을
가늘게 떠 현관 쪽을 돌아보면서
사메지마를 향해 오른손을 올려 보였다.
  네 사람 중 세 사람은 작은 TV를
둘러싸고 앉아 화면에 눈을 박고 있었다.
TV에 연결된 줄이 방을 가로질러 창문 옆,
커튼과 커튼 사이에 설치된 VTR 카메라와
연결되어 있었다.
  한 사람은 카메라로 고정시키는 삼각대
옆에 서 있었다.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는
사메지마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소리나지 않게 도어를 살며시 닫으면서
사메지마도 방으로 들어갔다.
  TV 옆에 앉아있던 사이토(齋藤) 라는
방범과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올해
스물아홉 살, 방범과에서도 젊은 축에 드는
형사였다.
  "신조(新城)가 감기로 앓아 누웠다는군.
해서 대신 내가 왔어."
  사메지마 말에 고개를 끄덕인 사이토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회색 바탕에 붉은
줄이 든 운동복 차림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를 퍼머까지 한 폼이 야쿠자처럼
보였다.
  "니시구치 사건에서 이제 손을
뗐습니까?"
  "그래, 우리로선 끝난 셈이야."
  말하면서 사메지마는 눈길을 아래로
신주쿠 서 형사가 팔짱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가와다의 무릎을 발로 쿡쿡
찔렀다. 그는 후닥닥 눈을 떴다.
  "사메지마 경감님....."
  놀란 목소리였다.
  "신조 대타로 왔어. 돌아가서 쉬어."
  가와다는 올해 서른 다섯 - 사메지마와
비슷한 나이였다. 불쑥 나타난 사메지마를
보고 몹시 놀란 것 같았다.
  "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럼. 어서 가봐."
  가와다는 두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쓱
문질렀다. 하룻밤 사이에 손이 까칠까칠할
정도로 수염이 자라 있었다.
  "고맙습니다."
닦으며 기와다는 자리에 일어섰다.
  사메지마는 다른 두 사람 쪽으로 눈을
돌렸다. 가와다 옆에 앉아있는 형사는 한번
본 적이 있는 본청 보안1과의 요시다(吉田)
라는 경장이었다. 40대의 베테랑이지만,
안경낀 흰 얼굴은 학교 선생님처럼 보였다.
  또 한명, 카메라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사메지마보다 나이가 들어보였다.
정한(精悍) 하게 생긴 거무튀튀한
미남자였다. 얼굴뿐만 아니라 머리카락도
햇볕에 탄 듯 갈색이었다.
  "신주쿠 서 방범과의 사메지맙니다.
교대하러 왔습니다."
  "수고가 많으시군요."
  먼저 대답한 쪽은 요시다였다.
  "잘 부탁해요.난 아라키(荒木) 라고
  거무튀튀한 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곤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사메지마는 웃도리를 벗고 TV 앞에 바싹
붙어앉았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시작된 건 2시부터였어. 그때는
4명이었어. 모두 남자였구. 3시 40분에
남여 한쌍, 5시 24분에 여자둘, 남자
한명."
  요시다가 앞에 있는 노트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사메지마는 TV 화면을 응시했다. 인접해
있는 아파트 이층 복도가 비쳐지고 있었다.
통로를 겸한 복도엔 외벽 대신, 허리 높이
철책이 쳐져 있어 VTR 카메라로 드나드는
사람의 상반신을 똑똑하게 잡을 수가
있었다.
  화면 한복판에 문제의 집 도어가 보였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 나오는 사람은
빼놓지 않고 모두 카메라에 담고 있는
것이었다.
  "마작인가?"
  사메지마가 물었다. 사이토와 가와다는
돌아갈 준비를 서둘고 있었다.
  "그래, 마작인가 봐. 그저께 옆집으로
라면 배달을 갔던 사람이 마작 패 소리를
들었다니까 틀림없을 거야."
  요시다가 대답했다.
  "테이블은 몇개나 되는데?"
  "둘 아니면 셋이겠지. 요즘은 손님이
뜸하니깐......"
  이번엔 아라키가 대답했다.
  상설 도박장 적발에 VTR 카메라를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별다른 효과가
없기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카메라를 설치할 곳 - 도박장을 감시하기에
적당하면서도 출입객이 눈치채지 못할
위치를 확보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이곳, 오쿠보 1쵸메 아파트에 대만인을
상대로 한 상설 도박장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은 본청 보안 1과였다. 협조
요청을 받은 신주쿠 서 방범과가 VTR
감시에 알맞은 이 집을 확보하자, 곧 이어
합동 감시반이 편성된 것이었다.
  방범과 과장 보좌로 신조 경위가 신주쿠
서측 반장을 맡고 있었다. 오늘 아침
교대할 차례였으나 감기로 앓아 눕는
바람에 사메지마가 대신 온 것이었다.
  상설 도박장엔 밤이 이슥한 뒤부터
새벽까지 손님이 몰리는 법 - 따라서
낮시간에는 감시원이 그렇게 많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 먼저 실례합니다."
  사이토와 가와다가 현관으로 내려가면서
말했다.
  "수고 많았습니다."
  "수고했어."
  방안에 남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두 사람은 문 밖으로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든, 아니면 신주쿠 서 숙직실에서
새우잠을 잔 뒤 오후 4시까지는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었다.
  "본청 교대는 언제 오지?"
  사메지마는 벗어놓은 웃도리에서 담배를
꺼내물면서 물었다.
  "여기 있어.'"
아라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라키씨는 원래 아침 당번이었지만
어젯밤 늦게, 일찌감치 이리로 왔어요.
늦게 일찌감치라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설명을 마친 요시다가 열없이 웃어
보였다.
  "불면증이어서 그래. 집에 있어 봤자
그렇구. 술을 한잔 할까 하고 생각해
봤지만,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끝낼 줄
모르는 버릇이라 그것두 곤란하구.
해서..."
  아라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키가
웬지 위험한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는 요시다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물었다.
  "글쎄. 하룻밤에 2백만엔? 그런
정도겠지. 대만도 요즘 경기가 좋지
못하니까..."
  경기가 나쁘다, 죽을 지경이다, 하는
것은 신주쿠에 몰려 있는 대만인들의
입버릇이었다.
  대만인이 신주쿠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였다. 호스테스가
몰려들면서 대만 바. 대만 클럽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신주쿠에만 대만 술집이
2백 군데가 넘을 정도로 붐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만 술집은 규모가
작았다. 마담 한사람 밑에 호스테스 두셋
술이 아니라 호스테스의 매춘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던 대만 술집이 최근 들어 부쩍
줄어들기 시작했다. 도교 도청(都廳)이
신주쿠로 이전해 온 것과 대만 본국이
호경기를 맞고 있는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도청 이전에 따라 고급 살롱이
늘어나자 자연히 코딱지 같은 대만 술집을
찾는 손님이 줄어들었고, 대만의 호경기로
일본보다 본국에서의 벌이가 휠씬 더
실속이 있었다.
  대만이 한물가자, 최근에는 한국 술집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코딱지 같던 대만
술집과 달리, 호스테스도 10명 이상씩
거느린 대형 호화 클럽이었기 때문에 고급
손님들이 즐겨 찾았다.
사람들이야."
  요시다가 말했다.
  "대만에선 마작을 못하니까, 법률로
금지돼 있으니까 이쪽으로 원정올 수밖에."
  아라키가 지겹다는 얼굴로 내뱉듯이
말했다.
  "그래도 최근엔 많이 줄어든 셈이죠."
  사메지마가 응수했다.
  대만인이 도박을 좋아한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대만 술집이 한창 번창하고
있던 때는 비밀 상설 도박장이
신주쿠에만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대만인을 상대로 한 상설 도박장 주인은
대부분 대만 출신의 폭력배였다.
  "그쪽도 폭력배 단속이 요즘은 좀
뜸해졌다더군먼."
  "대만은 84년과 85년 이태 동안
이친(一淸) 운동이라고 해서 폭력배 추방
캠페인을 전개했었지. 그로 인해 발판을
잃은 대만 폭력배들이 바다를 건너
신주쿠로 흘러 들어왔어. 그들 대부분은
대만 호스테스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면서
도박으로 소일했던 게야. 개중에는 제법
한몫 잡은 녀석도 있었지만."
  이친 운동에 대해서는 사메지마도 들은
적이 있었다.
  대만의 폭력배 소탕은 가혹했다.
흉악범들은 살 곳을 찾아 일본으로
홍콩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외국으로 도망친 그들은 거의 모두
호스테스의 기둥서방으로 기본 생계를
해결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뒤에는
호스테스들이 돈푼깨나 있는 대만인 교포를
끌어들이면서부터 규모도 상당히 커져
갔다. 자리값 수수료만으로도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
  돈 생기는 일이라면 오물통의 파리떼처럼
몰려드는 것이 폭력배의 생리 - 대만
깡패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신주쿠에는 대만 깡패가 2백여
명이나 몰려 있었다. 신주쿠 대만 술집에
기생하면서 <경비료>를 뜯어내기도 했다.
  일본 야쿠자들과 소소한 충돌도 적지
않았지만, 경찰이 출동할만한 대형
트러블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신주쿠라는 향락가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 때문이었다.
  특히 카부키쵸에는 폭력단 사무실이
가지고 있는 조직도 20여개나 되었다. 이런
과밀 지역에 외국인 폭력배가 밀고
들어왔는데도 어째서 큰 트러블이 단
한건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서 세력 범위의
<선(線)> 이 없기 때문이었다. 신주쿠의
경우, 경비료를 갖다바치는 폭력단이
가게마다 달랐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하는
세력 범위의 구획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신주쿠의 특징이었다. 때문에 같은 빌딩,
같은 블럭에 세들어 있는 이웃 가게들이
각각 전혀 다른 폭력단에게 경비료를 갖다
바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새로 개업한 집에 대해 <여기는
우리 구역이니까> 하는 논리가 통용되지
어느 한 조직에 경비료를 내고 있으면 다른
조직이 이중으로 손을 벌리지 않는 것이
이곳의 불문률이었다. 만약에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큰 분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경찰이 개입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대만 술집이 대만인 폭력배에게 경비료를
지불하는 것을 일본 야쿠자가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만 술집의 사양화로 경비료
수입과 도박장 손님이 줄어들자 대만인
폭력배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경기가 피크에 이른 최근
수년 동안 새로운 수입원을 확보한 영리한
폭력배도 적지 않았다.
  대만 폭력배들이 신주쿠에 머물고 있을
이루어졌다.
  신세를 졌다 (혹은 베풀었다) 라는 의리
의식은 만국 공통의 주먹 세계
기본률이었다. 일본에서 신세를 진
사람들은 대만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
갚음으로 일본 야쿠자를 초청해서
환대했다. 뿐만 아니라 대만 환락가에 대한
투자를 알선 하기도 했다.
  일본 폭력단이 대북(臺北) 등지의 수많은
고급 살롱니나 레스토랑의 실질적인
오너라는 사실을 사메지마도 알고 있었다.
그 대부분이 신주쿠에 뿌리를 둔
폭력단이었다.
  야쿠자 조직은 대만인을 대표로 앞세워
돈을 대줌으로써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 수입은 <첸소앙(錢莊)>
세탁한 다음 일본으로 들여오는 것이었다.
  또 다른 것으로는 각성제와 총기류가
있었다.
  현재 일본에 나돌고 있는 각성제와
총기류의 상당 부분은 대만 루트를 통해
조달된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본청 보안1과가 이 시점에서
대만인 도박장 적발에 새삼스레 열을
올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물론 밀고나
제보가 들어왔다면, 엄연한 범죄행위이니까
경찰이 출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VTR 카메라까지 동원한 것을 보면
단순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이유로 해서 경찰 고위층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나타났군!"
  요시다의 말에 사메지마는 화면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감시하고 있는 집 도어가 열리면서
호스테스로 보이는 수트 차림의 여자 두
사람과 남자 한 사람이 막 나오고 있었다.
  "아까 들어갔던 녀석들이야."
  아라키가 나즈막하게 말했다.
  두 여자 중 한쪽은 30대 초반, 또 한쪽은
스물 한둘쯤 되어 보였다. 남자는 떡
벌어진 체격에 갈색 더블 수트 차림이었다.
상체에 비해 다리가 짧은 체형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 굵직한 목줄기, 배도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사람의 영상을 클로즈업 시켰다.
  남자가 뒤따라 나오는 여자를 기다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카메라가 있는 쪽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베짱 깨나 두둑한 얼굴이군."
  요시다가 중얼거렸다.
  사메지마도 심상한 얼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네모진 얼굴에 가느다란 두 눈, 게다가
안구는 푹 꺼져 있었다. 고집스럽게 툭
튀어나온 턱 때문에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성깔 깨나 있겠군. 사람도 한둘 쯤은
죽여본 얼굴이야!"
  요시다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사메지마가 보기에도 그랬다. 날카로운
  남자는 여전히 카메라 쪽을 쪽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마치 눈
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결코 범상한 놈이 아니다!
  사메지마는 남자의 얼굴을 머리 속에
똑똑히 새겨넣었다. 물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신주쿠에서 놀고 있는
대만인 폭력배라면 머지 않아 한번은
맞부딪칠 게 틀림없었다.
  남자는 VTR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걸
눈치챈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카메라를 향해 한순간 흰 이빨을 보였다.
마치 사메지마에게 인사하도 하는 것처럼.
  -- 웃은 것일까?
  사메지마가 확인할 겨를도 없이, 흰
옆으로 돌린 것이었다.
  남자는 양쪽으로 선 두 여자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본 적이 있나, 방금 그 남자?"
  사메지마는 요시다를 보고 물었다.
  "처음 본 얼굴이었어. 아라키씨는
어떻습니까?"
  아라키는 카메라에서 손을 떼면서 두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말할
듯이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나 멋없는
한마디가 튀어나왔을 뿐이었다.
  "처음보는 얼굴이야."
  "낯선 얼굴이 제법 뻐기고 다니는데....
관광여행 온 스하이(四海) 의 거물일지도
모르겠군요."
  요시다가 말했다.
있음을 사메지마는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얼굴이 익은 상대라면, 계급차가 크게 나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반말을 쓰는 것이
요시다의 버릇이었다. 사메지마에게도
태연히 반말을 썼다. 요시다는 사메지마의
계급이 경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경어를 쓰지 않고 있는 것은 그가 건방진
탓이 아니라, 소박성과 지금 이곳이
현장이라는 특수 사정 때문이었다. 본청
같은 데서 열리는 수사 회의 석상이라면
물론 깍듯이 경어를 썼다.
  그렇다면 아라키는 보안1과 과장급이나
새로 부임한 사람이라고 봐야 했다. 새로
부임해 왔다 하더라도 계급이 요시다보다
휠씬 위임은 틀림없었다.
  "스하이, 쯔렌(竹連), 뉴부 등 저쪽에서
아마?"
  아라키가 말했다.
  스하이팡(幇). 쯔레팡. 뉴부팡이란 것은
모두 대만의 조직폭력단 이름이었다.
  "어쩌면 수배자인지도 모르겠군요.
국제수사과에도 비디오 테이프를
보낼까요?"
  아라키는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필터가 없는 담배였다.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
  그 말에 요시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라키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요시다, 이제 그만 가봐도 좋아."
  "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녀석들
판 끝나길 기다리자면 한이 없겠군."
  요시다가 웃는 얼굴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사메지마는
요시다의 웃는 얼굴이 어딘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뒷일은 사메지마씨와 내가 맡을 테니깐
그만 가봐."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
  요시다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청 숙직실에서 쉬고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수고했소."
  "수고했어."
  사메지마에 이어 아라키도 눈을 치켜
요시다를 흘낏 흙으며 인사를 했다.
  요시다가 물러가자 사메지마와 아라키,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아라키는 별로 탐탁찮은 눈길로, 아파트
바라보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옆에 놓여 있는 노트를
집어들었다.
  상설 도박장 출입 상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 시간. 사람 수. 특징 등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감시를 시작한 지난 2주일 동안 출입자는
2백여명이나 되었다. 일요일 새벽부터
밤중까지의 시간대에 손님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 중에 단골로 보이는 사람은
줄잡아 20여 명이었다. 반수가 대만 술집
호스테스였다.
  일본인 폭력단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지금 신주쿠에서 어슬렁대는 대만
폭력배라면 별볼일 없는 녀석들이야."
  노트 기록대로라면 현재 상설 도박장이
있는 사람은 판주인을 포함해서 모두
10명이었다. 판주인이 넷, 그 중 한명은
담배. 음식 심부름을 맡아 부지런히
들락거릴 것이고, 또 한명은 회계 담당,
결국 실제 손님을 상대로 하는 판주인은
2명 뿐이라는게 사메지마의 상상이었다.
물론 실제는 다를 수도 있었다.
  "약도 곁들였을까요?"
  사메지마가 물었다.
  각성제는 상설 도박장의 필수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손님이 지쳐 있을 때
피로회복제라고 은근히 권하는 것이었다.
처음 한 두병을 무료로 서비스하다가
손님이 맛을 들이게 되면 비싸게 파는,
가장 고전적인 수법이기도 했다.
때라도 약값으로 잃은 돈을 회수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 각성제에 중독된 손님이
끗발을 올릴 때엔 약 공급을 거절하기가
일쑤였다. 각성제 약효가 떨어져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은 몽땅 잃어 버리게 마련인
것이었다. 밤새도록 딴 돈을 새벽녘에 단
한판에 몽땅 털어넣는 손님도 드물지
않았다.
  끗발이 떨어져 돈을 잃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약을 공급해주는
것이었다. 각성제가 있으면서도 팔지
않았던 게 들통나면 분쟁이 일어나기
때문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든가,
<우리도 급해 죽겠는데 판매책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는 등 온갖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들어가는 것이었다.
  "글쎄. 요즘은 손님들도 꽤
영리해졌으니까......"
  아라키가 대답했다.
  일본인 상설 도박장에서는 <각성제
금지>를 내건 곳이 많았다. 판주인이
취급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손님들이
휴대하거나, 현장에서 주사하는 것조차
꺼렸다.
  손님이 환각 상태에 빠져 난동부리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적발되었을 때,
단순한 상설 도박과 각성제가 곁들인
경우는 처벌 내용에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상설 도박장 적발은 손님들의 밀고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돈을 엄청나게
경찰에 밀고해 오는 것이었다. 판주인이
폭력단일 경우, 밀고자는 생명의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노름빚에 재산을
몽땅 날려 버렸거나, 생명보험에 가입을
강요당할 경우, 이판사판으로 덤빌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밀고가 있었습니까?"
  사메지마는 이곳에 상설 도박장이 있다는
정보를 보안1과가 어디서 입수했는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라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메지마를
바라보면서 보일듯 말듯 턱을 움직였다.
밀고가 있었다는 사인이었다. 그러나
자세한 건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메지마는 입을 다물었다. 짝을 이루어
들었다.
  침묵 속에서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9시 직전, 40대로 보이는 남녀 한쌍이 큰
목소리로 입씨름을 하면서 아파트에서
나왔다. 중국어였다. 마작에서 돈을 잃은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려는 것 같았다.
  얼마나 입씨름이 심했던지, 싸우는
소리가 꽉 닫힌 창문을 뚫고
사메지마에게까지 들려왔다.
  도박장에서 나온 두 사람은 복도에 마주
서서 말다툼을 계속했다.
  폴로 셔츠에 화려한 무늬의 웃도리를
걸친 사내는 키가 작은 대신 뚱뚱했다.
쉴새없이 삿대질까지 해 가면서 툭
튀어나온 입술로 계속 떠들어댔다. 맞선
여자는 핑크색 수트 차림이었다. 몸매는
껴안은 자세로 조금도 지지 않겠다는 듯
역시 삿대질을 해 가면서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얼마나 돈을 잃었길래 저렇게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일까. 여자는 때때로 발을
동동 굴리기도 했다.
  "저렇게 떠들어대다가는 누군가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르겠군."
  아라키가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 순간, 아라키의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도박장 도어가 벌컥 열렸다.
  아리카가 재빨리 VTR 카메라를 조절했다.
  얼굴색이 나쁜,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도어에 기댄 자세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흰 노타이 셔츠에 번쩍번쩍
빛나는 희녹색(灰綠色) 바지 차림이었다.
기름을 발라 얌전하게 빗어넘긴 머리 -
가리마가 선명하게 보였다.
  사내는 복도에 있는 남녀를 향해 뭐라고
날카롭게 외쳤다. 두 사람은 머쓱해진
얼굴로 사내를 돌아보았다.
  사내는 도어놉을 잡은 채 주위를 한바퀴
휘둘러 보았다.
  "안되겠군!"
  아라키가 중얼거리면서 커튼이 이중으로
쳐진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사메지마는 꼼짝도 않고 화면만
주시했다.
  상반신만 내민 사내는 한동안 주변을
계속 살폈다. 이윽고 도어가 닫히면서
사내의 모습도 사라졌다.
  두 남녀도 말없이 복도를 걸어가는 게
보였다.
  아라키가 다시 창곁으로 나서면서
사메지마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금 그 녀석, 알고 있나?"
  "카부키쵸 2쵸메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언저리 심야 레스토랑의
매니저로 있는 사냅니다."
  "자세히도 알고 있군, 과연 <신주쿠
상어>는 다르군!"
  사메지마는 아라키를 응시했다. 아라키의
입가에 번진 미소엔 빈정거림이 실려
있었다.
  아라키는 털썩 주저앉더니 책상다리를
꼬았다.
  "그 때, 왜 경찰을 그만두지 않았어?"
  느닷없이 친숙한 말투로 물으며 아라키는
담배를 꺼내어 한대 피워 물었다.
  "주제넘은 간섭이란 말이지? 하긴 나도
따지고 보면 당신과 같은 낙오자야."
  아라키는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면서
말했다. 사메지마는 아라키를 뚫어질듯
응시했다.
  "대사관에 나가 있었지. 얼마 안 있다
돌아와 보니 경정으로 못이 박히고
말더군."
  "경정님이셨군요."
  사메지마는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보안1과 파견 근무중이야.
원래는 수사 공조(共助) - 지금은
국제수사과 소속이구."
  사메지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라키도 사메지마와 마찬가지로 캐리어
구미(組) 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이에 경정밖에 되지 않았다면, 캐리어의
출세 단계에서 미끌어 떨어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당신, 경감이라고 했나?"
  사메지가 대답할 틈도 없이 아라키는
말을 이었다.
  "당신 얘긴 들었어. 당신이 경감, 내가
경정이라니 모두 웃기는 소리야. 당신이
유능하다는 건 본청에서 모두 인정하고
있어. 허나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을 뿐이야."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라니? 본청 공안에선
아직도 당신을 경계하는 녀석이 수두룩 해.
미야모도(宮本) 의 유서, 당신이 갖고
있지?"
  "유서!"
난 그때 타이에 있었지만 얘긴 들었어."
  "어떤 얘기?"
  "파벌싸움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모든 걸
혼자 책임지고 어떤 녀석이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 죽기 직전에 자기를 몰아
세운 녀석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해서
동기생한테 보냈다는 얘기. 그 동기생도
베짱 두둑한 고집쟁이라서 현경(縣警)
공안3과 주임으로 근무할 때, 그 지방
경사와 한판 붙었다가 일본도(日本刀)에
머리가 깨졌던 사람이란 얘기....."
  사메지마는 쓴 웃음을 지었다.
  "진짜 일본도에 맞았다면, 지금 여기
앉아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또 머리통이
깨졌다는 것도 과장된 얘기구요."
  "허지만 모두 경악한 건 틀림없어.
맞붙는 건 일종의 만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야."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 꽤나 운이 없었던
모양이야. 본청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엎드려 있었으면 경정까지는 쉽게 승진할
수 있었는데도 사사건건 말썽만 피우다가
죽은 사람 편지까지 덥석
받아들이다니...... 그 편지도 잘만
이용했으면 하나의 찬스가 될 수 있었지만
......"
  "찬스?"
  "그렇잖아? 그 편지를 미끼로 흥정을
했으면 컴백쯤은 문제 없을 것 아냐? 그
편지를 자기한테 넘기라고 너도나도
매달리지 않았어? 그러고 보면 그 편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아라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 사람 고집은 알아줘야 해. 끝내는
일선 경찰서로 쫓겨가고 말았어. 그것도
스물다섯살 때 경감 계급 그대로 말야.
해서 모두들 그만두는 줄 았았다는 게야.
허나 일선 서로 쫓겨갔어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지금은 <신주쿠 상어>, 이름만
들어도 신주쿠 일대 야쿠자들이 줄행랑
치는 <신주쿠 상어>가 바로 그 사람이야!"
  "본청이라면 그런 말썽꾼이 아무 탈 없이
버티어 낼 수 있었겠습니까?"
  "말썽꾼이 아니야!"
  말을 마친 아라키는 사메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메지마도 마주 쏘아보았다.
  아라키에겐 캐리어 출신으로 드물게
있었다. 출세를 단념한 일종의
자포자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타고난 성격인지 사메지마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캐리어 제도는 일본 경찰 조직의 모순의
상징이었다. 캐리어에 뽑힌 사람들이
우수한 인재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과 상자 속에는 반드시 썩은
사과가 한두개쯤 들어 있게 마련이었다.
  두뇌가 명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가운데는 근본적으로 경관으로서의 자각이
모자라는 사람이 적지 않게 섞여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아라키도 그런 유형의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자기와 마찬가지로 캐리어의 낙오자라고
             
하더라도 그 이유는 전혀 다를 것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사메지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4

  점장(店長)의 심술을 목격하는 것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처음 본건
나미(奈美)가 출근을 시작한 이틀째인가,
사흘째였다.
  점장은 플로어에 쓰러져 웅크리고 있는
신참 웨이터, 난의 허리춤을 끝이 뾰족한
구둣발로 쿡쿡 찔렀다.
  난은 방글라데시에서 온 젊은이로 사흘
전부터 <장미의 샌> 에서 일하고 있었다.
  첫날, 더듬거리는 일본말로 <난짱이라고
불러달래요> 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바람에
나미를 비롯한 호스테스들이 허리를 잡고
깔깔댔었다.
  하지만 모두들 왜 웃는지 영문을 몰라
  "난짱, <불러달래요> 가 아니라
<불러주세요> 야."
  <장미의 샘> 최고참 호스테스인
가쓰키(香月) 언니가 바로잡아 주었다.
가쓰키는 스물여덟 살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진짜 나이는 마흔한 살,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장미의 샘> 은 카부키쵸 1쵸메에 있는
캬바레 (춤추는 곳이 아니라 호스테스가
오럴 서비스를 해주는 섹스 업소 - 역주)
였다. 세트 요금이 정해져 있지만, 5시.
6시. 7시. 8시 이후 등 입장 시간에 따라
값이 달랐다.
  옛날에도 세트 요금이란 게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이었을 뿐, 솜씨껏
바가지를 씌웠다. 가쓰키를 비롯한
때문에 바가지를 쓴 손님은 큰 불평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속이 까다로워져 세트
이외의 서비스 요금은 손님 양해하에 추가
오더 형식으로 받고 있었다. 추가 오더는
젤리와 포키를 세트로 묶어 5천엔이었다.
그것으로 15분을 더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밖에 물수건 4장이
따라나왔다.
  나미가 이케부쿠로(池袋) 패션 헬스
(호스테스가 손으로 서비스해 주는
섹스업소 - 역주) 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지도 벌써 넉 달이나 되었다. 패션 헬스
때보다 수입은 줄어들었지만, 출근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조근(早勤)일 땐 오후 4시, 그 이외에는
새벽 1시에 문을 닫았다. 패션 헬스의
출근은 아침 11시 30분이었기에 언제나
수면 부족에 쫓겨야 했던 것이었다.
  진짜 섹스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패션
헬스나 <장미의 샘> 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으로 옮긴 첫날, 손님의 그것을
물수건으로 닦아줄 때부터 왝왝 헛구역질을
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한사람 한사람 서비스를 끝낼 적마다
소독약으로 양치질을 했다.
  충치가 생기지 않았나 하고 언제나
신경을 썼다. 임질이나 매독뿐만 아니라
입안에 잡균이 들어와도 충치가 있으면
금방 곪아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았느냐고 묻고 있잖아, 이 새끼야?"
  점장의 날카로운 외침에 나미는 후딱,
  조근일 경우, 4시 30분부터 10분간의
미팅에 참여해야 했다. 접객 태도,
종업원으로서의 매너, 지난달 매출금 등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반성회(反省會) 였다.
  대답하는 소리가 작다는 이유로 점장이
난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점장의 이름은 아키(亞木) - 모두들
싫어했다. 혈색이 창백하고 깡마른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나긋나긋했으나 한번
울컥했다 하면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약에 중독된 거 아냐?'
  가쓰키 다음으로 고참인 안(杏) 이
종알거렸다. 안은 헤어진 애인이 마약에
손을 댄 바람에 한동안 끔찍이도
마음고생을 한 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지, 날 죽여 줘, 하는
거나 다름 없어.
  그런 얘기를 털어놓으면서 안은 쓸쓸하게
웃었다. 안의 허벅지에는 아직도 실낱같은
상처가 무수히 새겨져 있었다.
  그 사내가 면도칼로 그은 자국이었다.
  -- 면도칼로 한꺼번에 몇 군데씩 그으면
병원에서도 꿰맬 수가 없대. 꿰매자면
피부를 당겨붙여야 하잖아? 이곳을
잡아당기면 저곳이 찢어지고. 저곳을
꿰매려면 이곳이 다시 찢어지구... 따갑고
아픈 것은 말도 마라, 얘.
  "꿇어 앉아! 꿇어 앉으란 말야!"
  아키가 어깨를 걷어차자 난은 꿈틀꿈틀
몸을 일으켰다.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했지만 말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키는 집념이 강했다. 종업원에게
기합을 줄 때, 혹시라도 끼어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였든간에 두고두고
따라다니면서 못살게 굴었다.
  "대답해 봐!"
  "네!"
  난은 가냘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을
내리깐 얼굴에는 자기 혐오의 빛이
역력했다.
  "소리가 작아! 몇번 말해야 알아듣나, 이
멍청이야!"
  아키는 난의 뺨을 후려쳤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이었다. 아키는 오른손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무슨 취미인지 큼직한
가짜 보석까지 박힌 반지였다. 그 반지가
난의 앞니를 정통으로 치는 바람에 이빨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할 정도로
울려퍼졌다.
  "네!'
  퉁퉁 부어오른 입술 사이로 울음 섞인
대답소리 - 난의 처절한 부르짖음이
터져나왔다. 검정 바지에 흰 와이셔츠 제복
차림으로 마루로 된 바닥에 꿇어 앉은
자세였다. 마룻바닥에는 맥주와 싸구려
칵테일, 그리고 손님들의 토사물이 찌들어
말라붙어 있었다.
  "이제 됐어!"
  누군가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나미는 보지 않고도 그것이 가쓰키의
목소리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오늘 조근은 가쓰키와 나미 그리고
이쿠(郁) 그렇게 세 사람이었다. 이쿠는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신참인데가다
남의 일에 참견 않는 성질이다 - 지금도
껌을 짝짝 씹으면서 무관심의 눈길을
허공에 던지고 있었다. 조금 전 나미가
비좁은 갱의실 (옷을 바꾸어입는 방) 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강렬한 신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 밖에는 양(楊) 이란 웨이터가 있었을
뿐이었다. 양은 입이 무척 무거워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 한 번도 없었다. 난과
마찬가디로 일본말이 서툰 탓도 있겠지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도
안가는 사람이었다.
  나미는 양을 경계하고 있었다. 딱 한번,
갱의실에서 양이 아키로부터 기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양이 <장미의 샘> 에 들어온 직후, 2주일
전이었다. 갱의실로 들어서려던 나미는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에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눈빛 말야!
  그 날도 아키는 안절부절 못하고
허둥대고 있었다.
  -- 알아들었어? 대답해 봐!
  -- 미안합니다.
  양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양은
키가 훌쭉했을 뿐만 아니라 가슴팍도
두툼한 중국인이었다. 대만 출신인지
본토에서 건너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몸집이 아키의 두 배는 너끈했다.
  -- 왜 여기서 꾸물거렸어? 홀 바닥
청소하라고 내가 시켰었지?
  아키는 양의 두 뺨을 잡아 앞으로
끌어당겼다.
  -- 미안합니다.
  양은 같은 대답만 되풀이했다.
  -- 왜 여기서 꾸물거리고 있었는지
대답해 봐!
  아키가 길길이 뛰었지만 양은 조용하고
얌전했다.
  "대답해 봐, 이새끼!"
  아키는 양의 두 뺨을 잡아 거세게
흔들었다. 양의 푸석푸석한 장발이 따라
흔들렸다. 얼굴엔 고뇌의 표정이 역력했다.
  양이 북경어로 뭔가 중얼거렸다.
  -- 중국말은 소용없어. 일본어로 해,
일본말로!
  그러나 양은 여전히 북경어를
늘어놓았다. 아키는 손바닥으로 양의 뺨을
철썩 올려붙였다.
  바로 그 순간 나미는 아키가 상반신을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7없는, 새하얀
상반신은 보기에도 섬뜩했다.
  -- 배가 아파서 쉬고 있었대요.
  저도 모르게 한마디 거든 나미는 속으로
아차 했다.
  다시 양의 뺨을 후려치려던 아키는 손을
멈추면서 놀란 눈초리를 나미에게 쏟았다.
  -- 뭐라고 했어?
  -- 배가 아파서.....
  나미의 목소리는 금방 자지러질 것
같았다. 마음 속으로는 경솔했던 스스로를
꾸짖고 있었다. 바보, 바보, 바보!
  -- 배가 아파서 쉬고 있었단 말야?
  아키는 양의 얼굴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면서 물었다.
  -- 미안합니다.
  흙빛이 된 얼굴에 진땀이 번지고 있음을
아키는 그제서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키는 나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상냥한 목소리로 <나미짱>
하고 불렀다.
  아키가 자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장미의 샘> 으로 옮긴 첫날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출근 첫날, 아키가 끄는 대로
불고기집으로 따라갔었다. 식사가 끝난 뒤
아키가 호텔로 끌고 들어가려 했을 때는
생리중이라는 핑계를 대고 가까스로 몸을
뺐다. 불고기를 먹을 때부터 아키의 속셈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쉴샘없이 어깨를
감기도 하고, 허벅지를 쓰다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편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단 한번이라도 말을 들어주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몰랐다. 한번 말을
들어 주었다면 줄곧 질질 끌려다녔을 게
분명하지 않는가.
  -- 나미짱, 대단하군. 중국어를 다 할 줄
알다니!
  아키는 이상하게 말꼬리를 길게 빼면서
감탄했다. 나미는 시침을 떼기로 마음을
굳혔다.
  -- 중국어라니? 양씨가 한 말은
일본말이었어요!
  -- 뭐?
  과장하게 얼굴을 찡그리면서 아키는
고개를 돌려 양을 쏟아보았다.
  양은 흘낏 나미를 쳐다보았다. <제발
부탁해!> 라는 간절한 뜻을 담아 나미는
양을 응시했다.
  -- 네!
  -- 거짓말!
  -- 아녜요! 일본말이었어요, 점장님!
  나미가 덮어씌우듯이 말했다.
  -- 그래애? 어째든 좋아, 배가 아프면
약을 사다 먹어, 약말야. 네 녀석들이
아파봤자 누구 하나 돌봐 주지 않아!
  -- 미안합니다.
  -- 가게 앞길 청소, 서둘러야 해!
  아키는 로커에서 세컨드백을 꺼내어
웃통을 벗은 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꿇어 앉았던 양은 몸을 일으켜, 오른쪽
배를 부둥켜 안은 채 나미 앞을 스쳐
지나갔다.
  -- 셰셰(謝謝).
  들릴락말락 할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나미는 못 들은 척했다.

  아키가 가쓰키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가쓰키씨, 이 녀석 신참인 것은 나두
알아요. 허나 지금 버릇을 잡아놓지 않으면
우리 가게 이미지에 흠이 가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난짱은 아직
일본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잖아?"
  가쓰키는 지겹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 아뇨? 지금은 괴롭겠지만, 뒷날
고마워할 게요, 녀석도."
  "교육, 교육이라지만...."
같았다.
  "그래서, <교육이라지만> 이라니?
뭡니까?"
  아키가 따지고 들자 가쓰키도 마음을
굳힌 듯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들겨 패고 발로 걷어차는게
교육이야? 저렇게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손님 앞에 나섰다간 모두 놀라 도망가기 딱
알맞잖아?"
  "가쓰키 아줌마! 남의 말 하기 전에 자기
처지부터 우선 생각하는 게 좋을 게야.
당신 같은 할머니가 20대로 통할 만큼 홀이
어두컴컴하다는 걸 잊었어? 그런데도 이
녀석 얼굴 부은 걸 걱정해야 해?"
  나이 얘기만 나오면 가쓰키는 언제나
쥐구멍을 찾았다. 아키가 치명적인 약점을
  "난짱이 경찰에 신고하면 어쩌려구?
점장님도 구린 데가 없는 건 아니죠?"
  아키가 홱 돌아섰다. 나미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경찰? 이 녀석들이 경찰에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아? 이 녀석들 비자, 옛날
옛적에 기한이 끝났는데두? 그것도 취업
비자가 아닌 관광 비자야. 때문에 이런
데서 돈 벌고 있는 게 들통나는 걸 제일
두려워하고 있어. 불평할 처지가 못 돼!
일자리를 제공해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야. 우리가 고용해 준 탓에
본국으로 꼬박꼬박 송금도 하고 있어.
말하자면 우리 가게가, 우리 사장님이 이
녀석들의 은인이야. 그런데두 경찰에
신고를 해? 난짱, 안그래?"
  난은 멍청한 얼굴로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전연 알아듣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난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아키가 말한대로 목이 잘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약한 놈 구박 주는 것
아닙니까?"
  나미가 한마디 쏘았다. 마음먹은 말을
쏟아낼 적엔 어미(語尾) 가 언제나
최경어(最敬語) 로 변하는 것이 그녀의
버릇이었다.
  "약한 놈 구박?"
  아키는 싱긋이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표정이 일변했다.
  "뭐라구? 건방진 년!"
  <후!> 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이쿠가 천장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내뿜은
  아키가 얼굴을 바싹 붙여 대들었다.
입냄새에 나미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무리 여자지만, 해야할 말이 있고,
해선 안될 말이 있는 법이야! 내가 언제
약한 놈 구박했어? 말해 봐!"
  나미는 이번에야말로 두 눈을 꼭 감았다.
흠씬 얻어맞을 각오였다.
  "어서 오십쇼!"
  출입구 쪽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양의 목소리였다. 나미는 눈을 떴다.
  "어서 오세요."
  가쓰키가 손님을 맞았다.
  공장 유니폼처럼 보이는 웃도리를 걸친
20대 남자 두 사람이 입구를 들어오다가 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게 보였다. 어쩌면 퉁퉁
모를 일이었다.
  "어머, 싫어요 점장님. 조명 좀 어둡게
해요! 이렇게 밝게 해 두면 나이가 든 것,
금방 들통나잖아!"
  가쓰키가 너스레를 떨었다.
  미팅 때는 언제나 조명을 환하게 밝히는
게 관례였다.
  아키가 콧김을 내쉬자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래도 그는 잽사게
몸을 돌려 손님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점장, 여기
대령했습니다."
  아키는 숨쉴 틈도 없이 엮어내렸다.
  "손님들 운이 참 좋습니다. 오늘 조근
아가씨들은 마음만 좋은 게 아니라 모두
테크닉이 일품입죠. 마음 푹 좋고 즐겨
-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쪽으로...."
  아키는 손뼉을 쳐가면서 손님은
안내했다.
  <장미의 샘> 이라고 염색한 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양이 맥주병이 담긴
트레이를 받쳐들고 나섰다.
  난이 조명 스위치를 조절했다. 눈앞이
안보일 정도로 홀 안이 캄캄해졌다. 손님이
자리잡은 테이블에 <세트>를 내려 놓은
양이 앞을 스쳤을 때, 난은 어둠 속에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어 보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양의 옆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난도 얼른 웃음을 거두면서
외쳐댔다.
  이쿠가 나미 앞을 지나 손님 테이블로
                  
향했다.
  "시시해!"
  이쿠의 나지막한 부르짖음이 나미에게도
들렸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은, 때마침
볼륨을 높인 유선방송의 록 뮤직에
휩쓸리는 바람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5

  약속시간보다 15분이나 늦게
나타났으면서도 쇼(晶)의 기분은 몹시 상해
있었다.
  니시신주쿠(西新宿) 의 어느 빌딩 이층에
있는 다방 - 신주쿠 경찰서와 가까운
거리였으나 서원(署員) 들은 거의 들르지
않는 것이었다. 이용객의 대부분은 신주쿠
일대에 흩어져 있는 디자인 관계나 편집
프로덕션 사람들이었다.
  나이는 제법 들었지만 넥타이를 매지
않는 사람이었다. 안경을 끼고 숄더백을
메고 다니는 것도 줄담배와 함께 이곳
단골들의 특징이었다.
  쇼는 무릎이 나간 진바지와 T셔츠 위에
레코드 회사의 로고가 찍힌 봉투를 들고
있었다.
  사메지마가 읽고 있던 문고판 책을 덮자,
맞은 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
한마디 없이, 사메지마 앞에 놓은 물컵을
집어 단숨에 마신 다음, 얼음까지 와작와작
씹어삼키는 것이었다.
  내달이면 스물셋이 되는 쇼가 어깨까지
치렁치렁하던 머리를 제법 짧게 자른 것은
극히 최근이었다. 데뷔 앨범 재킷 촬영이
끝나면 더울 짧게 잘라 버릴 생각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만난 이래 줄곧 꽂고 다니던
머리장식을 이젠 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눈과 코의 윤곽이 뚜렷한 탓에 머리를 짧게
자르자 작은 얼굴이 소년처럼 보이기도
   그러나 T셔츠 위로 불룩 솟아오는
가슴을 본다면 그녀를 남자라고 착각한 걸
금방 후회하게 마련이었다. 스테이지에 설
때면 언제나 노브라인 쇼의 바스트는
35인치 - 사메지마 말대로 <로케트 유방>
이었다.
  "왜 그렇게 부었어?"
  사메지마는 언제나 들고 다니는
세컨드백에 읽고 있던 책을 쑤셔넣으면서
물었다. 백 속에는 수각과 경찰봉까지 들어
있어 보기보다는 무거웠다.
  오쿠부 1쵸메 상설 도박장 감시를 사이토
등에게 인계한 다음 일단 서에 들렀다가
이리로 온 것이었다.
  "바보 멍청이 같은 녀석! 그런 주제에
디렉터라고 뻐기긴!"
화냈을 때의 쇼의 눈은, 금방이라도
먹이에게 달려들 것 같은 고양이과(科)
맹수처럼 이글거렸다. 그러나 웃을 때는
티없는 소년의 눈처럼 한없이 맑고
깨끗했다. 그러한 순간적인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사메지마의 즐거움이었다.
  가수 데뷔를 눈앞에 둔 쇼는 레코딩과
미팅으로 눈코 뜰새 없이 쫓기고 있었다.
그녀는 <후즈 허니> 라는 록밴드의
보컬이었다.
  사메지마와 쇼가 사귀기 시작한 것은
일년 반 전이었다. 당시의 쇼는 아직
아마추어였다.
  "설교 깨나 들은 모양이로군."
  "마약에 손대고 있는 건 아닌가? 대마초?
코카인은? 술은 많이 마시는 편이냐?
말아라..... 끝도 없었어. 그런 애송이가
일일이 날 간섭하려 들다니, 기가 막혀서.
관두자고 쏘아 주고 왔어!"
  단숨에 줄줄 내뱉은 쇼는 다가온
웨이트레스에게 소다수를 주문했다.
  사메지마는 뱃속 소리로 쿡쿡 웃었다.
  "애송이였어?"
  사메지마의 쿡쿡 웃음소리를 알아들은
듯, 쇼가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았다.
  "애송이도 애송이 나름이야.... 대학에서
얼마나 음악 공부 했는지 모르지만, DC
브랜드 걸친 얼간이야!"
  "록봉기 일대에선 그런 녀석들이 제법
인기가 있잖아? 연예계 유력자라고 말야."
  "말끝마다 <난 말야> 야. <난 말야, 쇼짱
그러는 게 마음에 안들어. 지금이 아주
  쇼는 입을 뾰족 내밀며 흉내까지 냈다.
  "아이스커피 종이컵을 그 녀석 입 안에
쑤셔박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어. 슈(周)
가 눈짓으로 말리지만 않았으면 그걸
그냥...!"
  슈는 <후즈 허니> 의 기타리스트였다.
쇼를 제외한 <후즈 허니> 의 멤버는 모두
4명. 드럼. 기타. 베이스. 키보드로 구성된
심플한 밴드였다.
  멤버는 모두 사메지마를 알기 휠씬
이전부터 쇼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때문에 한 번 성깔이 나면 걷잡을 수 없는
쇼의 성질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가치가 높고 귀중하다는 증거야,
너희들의 음악이....."
거야, 녀석은."
  사메지마는 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직업. 나이에 관계없이 쇼는 제 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에겐 발칵 성깔을 부렸다. 그
이외의 경우는 놀랄만큼 참을성이 강했다.
  "몹시도 배알이 뒤집힌 모양이군, 그럼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그 디렉터 욕을 하고
나서 밥이나 먹으러 가자구."
  쇼는 토라진 눈길로 사메지마를
쏘아보았다. 선수를 빼앗긴 게 몹시도 약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됐어, 이젠."
  "응?"
  "자기한테 화풀이해 봤자야. 경관이라면
좀더 자상하게 청소년의 고민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실망."
  사메지마가 당황스레 입을 막았다.
  쇼는 사메지마를 건너다보면서 생긋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먹도록 해 줘얄 것 아냐!"
  사메지마도 빙긋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열흘 만이었다.
지난번에는 저녁만 먹고 곧장 헤어졌었다.
니시구치 고순도 톨루엔 때문에 사메지마가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니시구치 빌딩에 있는 이태리
식당으로 들어갔다.
  쇼가 올리브와 페파로니 피자를,
사메지마는 안쵸피 피자를 주문했다.
그밖에 바지리코 스파게티와 생맥주도
시켰다.
스파게티도 절반을 들어 눈깜작할 사이에
게눈 감추듯 했다. 그것도 모자라 사메지마
앞에 놓인 피자에까지 손을 뻗쳤다.
  "내일 스케줄은 어때?"
  사메지마가 물었다.
  "잠깐!"
  쇼는 지나가던 웨이터에게 생맥주를 추가
주문한 다음 대답했다.
  "1시부터 또 미팅이 있어."
  "레코딩보다 미팅에 뺏기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군."
  "나도 몰라. 우릴 효율적으로 세일할
방법을 의논하는 거라지만, 우리 의견은
아예 들어볼 생각도 안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레코드 회사를
바꿔보면 어때? 꼭 그 회사라야 하는 법은
없잖아?"
  추가로 시킨 생맥주를 한모금 마신 쇼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래. 하지만 데뷔 때부터
까다롭게 제 주장만 내세우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요즘은 제멋대로인 사람이
너무 많잖아? 남의 말을 들어서 득보는
경우도 있다나 봐."
  "하지만 디렉터라는 사람, 너희들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것 아냐?"
  "별로."
  "별로라니? 무슨 뜻이야?"
  포크로 둘둘 만 스파게티를 한동안
바라보던 쇼가 낼름 입속으로 밀어넣었다.
  "맛있어, 이 집 스파게티."
  "그래. 모두 먹을래?"
  "절반씩이라고 약속했잖아?"
  "별로 신경쓸 일이 아니란 뜻.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괜찮아. 중요한 건 우리 음악이 듣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정확히 전해지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이야. 만약 녀석이 우릴
만만하게 본다면, 그래서 연예계에
발붙이지 못해 안달을 부리는 허접쓰레기와
같이 취급한다 해도, 언젠가는 그게 잘못된
것이란 걸 알게 되겠지 뭐. 그걸 깨달은 뒤
이러쿵저러쿵 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좋은
것 아니겠어?"
  "다른 멤버들이 납득해 줄까?"
  "물론!"
  쇼는 고개를 끄덕였다.
  "슈가 말했어. <멤버 중엔 네가 제일
문제야. 네가 참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문제 없어> 라고 말야."
  "과연 여왕 대접이군!"
  사메지마는 웃으며 말했다.
  "밉살스럽게 굴꺼야?"
  쇼가 생맥주 조끼를 들어 사메지마 잔에
절반을 따랐다.
  "뭐야? 거품뿐이잖아?"
  "그래, 그거나 뒤집어 쓰라구!"

  이태리 식당을 나오면서 쇼가 못을
박았다.
  "레코딩 얘기, 이제 그만해. 카부키쵸로
가요."
  "트러블에 말려들어도 난 몰라."
  "<신주쿠 상어> 의 여자에게 손을 내미는
녀석이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로 몸을 실었다.
  사메지마가 놀리자, 쇼는 입을 꼭 다문
채 무릎으로 사메지마의 엉덩이를
걷어올렸다. 함께 타고 있던 젊은 커플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쇼를 바라보았다.

  카부키쵸는 언제나 만원이었다. 신학기가
시작된 요즘은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그룹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코마 극방 주변에는 그런 젊은이가
여기저기 그룹을 이루어 북적대고 있었다.
외마디 부르짖음, 노래소리, 게임 센터의
전자소음, 때로는 취객의 호통소리가
뒤섞여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다.
  "역시 사람투성이네!"
  머리를 빡빡깎은 덩치 큰 녀석을
중심으로 한 야쿠자 5인조가 도아회관
어깨를 맞대고 세이부신주쿠 (西武新宿) 역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쇼가
말했다.
  "걸어다는 사람 숫자만도 일본
최골거야."
  "세계 최고는 아니구?"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추고, 어깨동무를
하고 다가오는 학생 그룹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술과 땀냄새 속에는 운동장 흙먼지
냄새도 섞여 있었다. 학생 그룹은 교가로
보이는 노래를 목청껏 외쳐댔다.
  "여긴 다른 곳보다 기온이 높을 거야.
안그래?"
  쇼가 팔짝팔짝 뛰듯이 걸어가면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틀림없었다.
  사메지마는 손목시계를 흘낏 보았다.
8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지금부터 습도가
더욱 높아갈 시간이었다.
  "참, 프로덕션 카메라맨도 그랬어. 같은
가두촬영이라도 록봉기는 괜찮은데
신주쿠는 어쩐지 신경이 쓰인다구."
  "어째서? 야쿠자들이 시비걸까 봐서?"
  "그런 게 아냐. 번쩍번쩍 플래시를
터뜨려도, 록봉기라면 모두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데, 신주쿠에선 구경꾼이 좍
몰려든 댔어. 누군가 스타가 나타난게
아닌가 하구......"
  "록봉기 녀석들이 점전다는 뜻이군."
  "응. 그리고 이곳, 신주쿠엔 그런
유명인들이 별로 오질 않잖아? 그러니까
시골뜨기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기두 하구."
  "그럼 너두 조금 유명해지면 오지 않게
되겠군, 신주쿠에는."
  "내가? 천만에!"
  쇼는 한마디로 자르면서 말을 이었다.
  "난 인생도 노래도 여기서 배웠어.
고향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
  사메지마는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말해서 가수로 데뷔하는 쇼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쇼가 싱어로 크게 성공한다면 두
사람 사이엔 메울 수 없는 거리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사메지마가 그런 얘기를
꺼내면, 쇼가 발칵 화를 내면서 앙탈을
부릴 게 틀림없었다.
의구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앞으로 생길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 아무런 기우없이 태연할만큼
젊지 않았다.
  형사와 록싱어가 맺어진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같은 일이었다. 신주쿠였기
때문에 그런 기적이 가능했었다.
  어쩌면 쇼도 그런 사실을 무의식
속에서나마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때문에 더더욱 신주쿠를 떠나기가 싫은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겐 신주쿠밖에 없어, 아는
곳이라곤....."
  쇼가 사메지마에 바싹 붙어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곳 이외의 다른 곳은 알고
  구야쿠쇼도리 (區役所通) 에 있는
자그마한 게이바를 지나 두 사람은 쇼가 한
때 아르바이트로 일한 적이 있는 카부키쵸
2쵸메 스낵으로 들어갔다.
  <전람회의 그림> 이란 이름의 스낵은
홀이 없는 카운터만의 작은 가게였다.
카운터는 물론 벽까지 모두 검정 래커를
칠해,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검정색과 함게 음악도 이 집의 특징이었다.
카운터 끝에 있는 레코드 플레이어 안쪽
로커에는 LP 레코드가 5천장 이상이나 쌓여
있었다. 대부분이 60년대와 70년대에
유행했던 록이었다.
  장발에 길쭉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마스터와 그의 여동생이 함께
꾸려가고 있는 집이었다.
골덴 가(街) 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장발의 마스터가 이 빌딩 소유주의
아들이란 걸 쇼가 말해 주기 전까지는
사메지마도 모르고 있었다.
  사메지마가 오늘 오전, 오쿠보
아파트에서 VTR 카메라에 잡힌 사내를
알아본 것은, 이 빌딩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인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손님들은 마스터를 타쿠씨라고 불렀다.
  빌딩 주인뿐만 아니라 세든 사람의
대부분도 대만인이란 것을 사메지마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쇼에겐 알려 주지 않았다.
  "아니 쇼짱 아냐? 어서오세요,
사메지마씨."
  두 사람이 도어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타쿠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 "어머, 어서오세요."
  레코드 플레이어에 판을 갈아 끼우고
있던 타쿠의 여동생 에미도 함박 웃음을
지었다.
  흰 피부에서 가냘픈 얼굴 윤곽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도 닮은 남매였다. 30대 초반의
타쿠나 스물 일고여덟으로 보이는 에미나
모두 쇼를 무척 귀여워해 주었다.
  "안녕!"
  쇼가 남자처럼 인사하면서 카운터 의자에
걸터 앉았다. 한 복판에는 매스컴 관계자인
것 같은 노타이 차림의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별일 없죠?"
  사메지마도 인사를 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컨트리와 록을 믹스한 것 같은 어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사메지마로서는
처음 듣는 곡이었다.
  "어때?"
  휠체어를 밀어 쇼쪽으로 다가가면서
타쿠가 미소지은 얼굴로 물었다.
  "따분해."
  쇼가 입술까지 뾰족 내밀었다.
  에미가 웃으면서 <후즈 허니> 라고
사인을 한 술병과 미네랄 워터. 얼음통을
두 사람 앞으로 가져왔다. 타쿠는 큰
깡통에서 땅콩을 한줌 집어 작은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휠체어의 타쿠 때문에 카운터 안쪽은
바닥을 한단 높여놓고 있었다.
  "분에 넘치는 소리, 함부로 하는 게
아냐. 곧 프로 가수가 될텐데..."
  "아냐.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다는
게 그런 건지도 몰라."
  타쿠가 조용한 웃음과 함게 끼어들었다.
한복판에 가리마를 타서 헤어밴드로 묶은
장발이 어깨에까지 늘어져 있었다.
  타쿠만큼은 길지 않았지만, 사메지마의
뒷머리도 옷깃을 덮기엔 충분했다. 좀더
길러서 묶어보자고 최근 들어 쇼가 조르고
있었다.
  쇼가 원하는 헤어스타일에 대해
사메지마는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뒷머리를 묶게 되면 남의 눈에
두드러져 잠복이나 미행에 지장을 받을
염려가 많아 내키지 않을 뿐이었다.
  "무대에 서고 싶어 죽겠어. 아마든
프로든 관계없이 말야."
 쇼가 말을 이었다.
  "비좁은 어항에 갇혀 있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하긴 쇼짱도 시대를 잘못 탔어. 70년대
미국이었다면 대단한 록싱어가 됐을
텐데... 그렇잖아요, 사메지마씨?"
  타쿠가 웃으며 말했다.
  "그랬다면 마약과 술에 듬뿍
찌들었겠지."
  사메지마도 유쾌하다는 듯 마장구를
쳤다.
  "어머, 좋잖아요? 잭 다니엘과 함께
죽으면 ...."
  말하던 에미의 눈이 반짝 빛을 뿜었다.
벽에는 재니스 조프린의 등신대 (等身大)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이 와스프 (WASP,
나타나 날 경찰봉으로 후려팰지도 몰라."
  "넌 말야, 일주일이든 열흘이든 목욕
한번 않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프리섹스와 마약에 빠져 흐느적거릴걸."
  "말 다했어?"
  쇼가 팔꿈치로 사메지마의 허리를
내질렀다.
  "난 록싱어라면 다 그런 사람들인 줄
알았어.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진."
  사메지마의 말에 타쿠도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그런 시대였어. 학교 빼먹고
극장으로 숨어들었지. <우드스탁> 보러."
  사메지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쇼는 짐짓
커다랗게 한숨을 내뿜었다.
  "록을 좋아했던 아저씨들은 보통
아저씨들보다 더 힘들어."
  "그런 노래도 있었지.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젊은 가수가 부른......"
  사메지마가 말했다.
  "이것 아냐?"
  쇼가 눈동자를 둥글둥글 굴려보였다.
  "참, 이제 생각났군. 위층 레스토랑
매니저, 밖에서 한번 봤지."
  사메지마가 지나가는 투로 슬적 말을
꺼내었다.
  "어머, 그러세요? 오(吳)씨 말이죠?
요즘은 가게에도 잘 안나오는 모양이에요."
  에미가 대답했다.
  "가게라니, 어느 집?"
  "<스리 캐슬>..... 심야
레스토랑이에요."
  "오래 된 집인가?"
겨우 4년 전인데요 뭐."
  "마스터 아저씨, <탈커스> 가 듣고
싶어요!"
  쇼가 말하자 타쿠가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쇼짱, 록을 좋아한 아저씨는
지긋지긋하지만, 그 아저씨가 좋아한 록은
좋은 모양이지?"
  "어딘가 거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요.
요즘 것은 꽤 하드하긴 하지만 소리가 너무
차가워요. 옛날 것이 촌스럽긴 해도 뜨거운
데가 있어 좋아요."
  "제법 아는 척하는군"
  타쿠가 사메지마와 눈길을 마주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마스터, 부탁이 있어요. 그 곡 처음
말은 말아요. 어떤 녀석 으스대는 꼴 보기
싫으니까요!"
  "어떤 녀석이라니? 나 말인가?"
  사메지마가 으르렁거렸다.
  "그래. 당신 나이 자랑 듣는 것, 이젠
지긋지긋해졌어. 그따위는 재즈 다방에라도
내다 버렸으면 속이 후련하겠어."
  "설교할 생각은 없지만..... 그것도
추억의 하나로 생각하면 아름답잖아?"
  타쿠가 타일렀지만 쇼는 세차게 고개를
내흔들었다.
  "싫어! 끔찍할 정도로 싫어! 이 사람
인생에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의
얘길 듣는 건 죽기보다도 더 싫어!"
  "대단한데, 쇼짱!"
  다른 손님 수발을 들고 있던 에미가
     楮薦만?말을 이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뭐가?"
  "뭐가?"
  사메지마와 타쿠가 동시에 똑같은 말을
반문했다. 에미가 폭소를 터뜨렸다.
  "말하지 말아요, 에미씨!"
  쇼가 외치듯 말했다.
  "어머, 왜?"
  "싫어! 싫단 말얏!"
  에미가 천천히 머리를 내저으면서 웃는
얼굴로 사메지마를 돌아 보았다. 카운터
안쪽이 높았기 때문에 사메지마가 에미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화장을 별로 하지 않은 흰 얼굴에 엷게
칠한 루즈와 목줄기 선이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시원스런 이마와 쭉 찢어진 눈이
  에미가 장애자인 오빠와 동반자로 평생을
보내기로 오래 전부터 마음을 굳혔다는
얘기를 사메지마는 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타쿠는 20대 때 오토바이 사고로 척추를
다치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타쿠는
아마추어 밴드의 드러머였고, 에미는
보컬이었다. 요코하마(橫濱) 친구집으로
놀라간 에미의 귀가가 늦어지자 타쿠가
마중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에미는 친구집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스카웃하려는 프로 밴드 사람들을
만나러 갔던 것이었다. 그것도 단둘이서만.
장소도 요코하마가 아니라 도쿄
  비록 아버지는 대만인이었지만, 남매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전형적인
일본인이었다. 고생 끝에 자수성가한
타쿠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물장사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실제로 이 집,
<전람회의 그림>은 남매가 생계를 지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대신 두 사람의
아버지가 막대한 자산가임을 사메지마는
알고 있었다.
  손님 가운데 에미에 반한 남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오빠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한 에미의 마음을 돌려놓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믿었다.
  "얘기할 생각이야, 에미씨?"
  쇼가 얼마간 토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떠서 쇼를 바라보았다.
  성숙한 여인과 철부지. 대부분의 사람은
성숙한 여인에게 끌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자기만은 철부지 소녀에게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음을 사메지마는 가슴이
저리도록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었다.
  "좋아. 화장실이나 갔다 올래."
  쇼가 스툴에서 미끄러지듯 내려가자
타쿠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웃었다.
  눈으로 쇼의 뒷모습을 쫓던 사메지마가
다시 에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에미도
사마제마를 똑바로 쏘아보면서 카운터에
팔꿈치를 세웠다.
  에미의 눈은 맑고 매력적이었다. 똑바로
쏘아오는 눈길을 맞받으면서 사메지마는
그녀가 자기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쇼짱이 자기가 모르는 사메지마씨의
과거 얘길 듣기 싫어하는 건 말이죠....."
  에미가 입을 열었다. 사메지마는 그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갑자기 화장실 도어가 벌컥 열렸다.
  "안 돼! 아무래도 안 되겠어. 에미씨,
그만둬!"
  에미가 한입 가득 웃음을 머금는 바람에
두 뺨이 불룩해졌다.
  뒤돌아 보자 어린애처럼 얼굴이 빨개진
쇼가 화장실 도어 앞에 암팡지게 버티고 서
있었다.
  "안 되겠군. 관둬야겠어."
  타쿠가 불쑥 내뱉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다른 손님들까지 포함해서 <전람회의
그림>은 폭소에 휩싸였다.
  6.

  <심야 레스토랑> 이라는 업종이 생겨난
것은 상당히 오래 전 일이었다. 신주쿠와
록봉기에 20년 전부터 자리잡고 있는 <사퍼
클럽>과 기본적으로는 다름이 없었다.
  이런 종류의 레스토랑은 비교적 이른
시간 - 자정께면 문을 닫는 긴자(銀座)
술집 호스테스들이 자기들끼리, 때론
단골손님과 함께 밤참이나 2차를 할
목적으로 자주 이용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카라오케가 붐을 이루고 있으나
옛날엔 밴드도 갖추어 놓고 있었다. 적어도
피아노나 기타 반주는 필수적이었다.
  카부키쵸에서 그것도 대만인이 경영하는
<심야 레스토랑>은 조금 취향이 다른
  지난날의 <심야 레스토랑>이 오후 8시나
9시네 문을 열어 새벽 4시, 5시에 닫는
반면, 대만인이 경영하는 곳은 문자 그대로
심야, 자정이나 새벽 1시에 문을 열어 아침
9시에 닫았다.
  그것은 손님을 일부 계층에 국한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보통 술집이
문을 닫은 이후의 대만인 호스테스만을
손님으로 받았다. 호스테스들은 일이 끝난
뒤의 휴식과 식사를 하러 <심야
레스토랑>을 찾았다. 따라서 일본인 고객를
데리고 가는 경우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극히
드물었다.
  <심야 레스토랑>에는 호스테스뿐만
아니라 호스트도 있었다. 술시중도 들고
노래 상대도 해 주었다. 그곳 음식은 물론
조리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대만
요리였다.
  카라오케는 필수적이었다. 레이저
디스크의 카라오케가 쉴새 없이 멜로디를
쏟아내리는 게 상례였다. 거의 전부가 대만
가요곡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사가
화면 상하 두 곳에서 비쳐질 때도 있었다.
대만. 홍콩. 두 곳에서 히트한 곡일 경우,
북경어. 광동어로 각각 가사를 비쳐 주는
것이었다.
  출연 탤런트도, 배경도 모두 대만
일색이었다. 민요와 동요도 있었다.
  유명한 민요가 흘러나오면, 손님과
종업원이 따라불러 때아닌 대합창이 되기도
했다. 그곳에서 일본어를 쓰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전성기엔 수도 없이 많았다. 신주쿠에
몰려든 대만인들이 중국어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교장인 동시에, 고향과 친지의
소식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서로가 격려해
주고 격려받는 곳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봉을 찾느라고 눈이 벌개져
있는 대만 폭력배들이 정보를 교환하거나
은신하기에도 편리한 곳이었다.
  신주쿠 일대의 대만 술집이 어디까지나
일본인을 상대로 이국정취를 파는 곳인 데
반해, 이들 <심야 레스토랑>은 대만인 만을
상대로 향수를 달래 주고 돈을 받는
곳이었다. 그것만으로 경영이 되는 것만
보아도 신주쿠 일대에 대만인이 얼마나
많이 몰려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바텐더와 웨이터 이외의 대만인 남자는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분분이었다. 또 술집은
거의 코딱지만했기 때문에 웨이터나
바텐더도 한두명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심야 레스토랑> 에는 수많은
대만인 남자들이 몰려들었다. 대대로
일본에서 살아온 회교에서부터, 친척을
찾아온 여행자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의
사내들이 몰려들었다.
  손님의 종류나 수준도 가게에 따라
달랐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가게라도
점잖은 사람만 찾는 곳과, 때로는 험상궂은
손님들이 몰려와 한번씩 법석을 떠는 곳이
있듯이, 이러한 <심야레스토랑>도 가게에
따라서 분위기도 달랐다.
  돈을 벌러 일본으로 몰려왔던 대분분의
내리막에 접어들게 되자 <심야 레스토랑>도
시들해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대만 폭력배가 드나드는
집에서는 예외적으로 일본인 단골손님이
적지 않았다. 대분분이 대만 폭력배와
거래를 맺고 있는 일본 야쿠자들 이었다.
  사메지마와 쇼가 <전람회의 그림>을 나선
것은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였다. 한층 위에
있는 <스리 캐슬>이 붐비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심야 레스토랑>
이라면 경관이 손님을 가장해서 탐색하러
들어가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손님이 대만인인 <스리 캐슬>에 일본인이
들어서면 당장 눈에 두드러지고 말 것은
뻔한 일이었다.
모를 일이었다. 만약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들어가야 한다면, 낯익은 대만 술집
호스테스의 힘을 빌어 함께 들어갈 수밖에
딴 방법이 없었다. 그럴 경우, 그
호스테스가 자기 동행이 형사임을 북경어로
모두에게 알려 준다 한들, 이쪽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신분을 밝히고 밀고 들어가서 이것저것
탐문을 한다 해도 일본어를 잘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때문에 사메지마는 <스리 캐슬>을 한번
훑어볼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스리 캐슬> 매니저인 오가 상설 도박장
판주인으로 한다리 끼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 지금 섣불리
들쑤시는 것은 일을 엉망으로 만들 염려가
  감시당하고 있는 걸 눈치라도 챈다면
오는 그 자리에서 도박장을 폐쇄해 버릴
것이 뻔했다. 비록 VTR로 출입객을 촬영해
뒀다 하더라도 현장이 없어지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현장을 덮쳐 현행범으로 체포하지 않는
한, 드나드는 손님의 주소. 성명을
알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운좋게 판주인이 고객명부라도 작성해 놓고
있다면 별문제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현장에 없는 손님은 확인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오쿠보 1쵸메 상설
도박장건에 관여 않고 있었다. 오늘
현장감시에 끼어든 것은 어디까지나 감기로
쓰러진 신조의 대타로서였다.
온다면 협력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어디까지나 본청의 아라키와 방범과
신조가 중심이었다.
  그렇긴 해도 사메지마는 상설 도박장건에
무척 신경이 쓰였다.
  오늘 아침 TV 카메라를 통해 본 남자,
정한하게 생겼던 그 사람 때문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오라는 사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사메지마가 감시에
들어가자마자, 여자 두 사람과 함께
도박장에서 나온 바로 그 사내 때문이었다.
  그 사내를 보통 녀석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사메지마 뿐만이 아니었다. 본청의
베테랑 요시다 형사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아라키도 강한 인상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띠고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봐야 했다.
베테랑 형사들의 그러한 예감이 빗나간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아라키는 국제수사과에 신원
조회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아라키
자신이 국제수사과에서 파견나왔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사메지마는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요시다가 물러간 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그때까지 입을 닫고 있던 아라키가
여러가지 얘기를 걸어왔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주로 사메지마의
과거에 초점을 맞춘 얘기들이었다.
  아라키가 그 사나이 - 두 여인과 함께
상설 도박장에서 나온 그 사람에 대해 뭔가
사메지마의 감촉을 흩뜨리기 위해서,
관심을 돌려놓기 위해서 일부러 과거
얘기를 시시콜콜 꺼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라키가 국제수사과에서
보안 1과에 파견근무중이라는 얘기도
부자연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리고 사메지마가 제일 처음 느꼈던
의문 - 본청 보안 1과가 대만인 상대의
상설 도박장 적발에 지니칠 정도로 열심인
것도 새삼 마음에 걸렸다.
  이 모든 것이 그 사나이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사메지마는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라키가 불면증을 핑계삼아 일찌감치
감시에 합류한 것도 그 사나이의 움직임을
  "택시 잡기 힘들어 죽겠어!"
  쇼가 쫑알거렸다.
  카부키쵸 후린(風林) 회관 앞이었다.
심야 할증을 알리는 녹색 램프를 켠
예약차가 줄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큰길로 나가볼까?"
  야스쿠니도리 (靖國通) 로 나가려고
사메지마는 구야쿠쇼도리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아무리 카부키쵸라 하지만 학생
그룹이나 데이트 쌍은 찾아볼 수 없는
시간대였다.
  종종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는 기모노나
양장차림의 호스테스, 단정하게 넥타이를
맨 회사원, 캐주얼 차림의 험상궂은
사내들만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우리 집으로 갈 거야?"
  쇼는 시모기카와(下北澤) 임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다. 사메지마의 아파트는
나카노구(中野區) 노가다(野方) 였다. 역시
혼자 살고 있었다.
  쇼의 아파트에 들르는 날이면 사메지마는
언제나 거기서 묵었다. 사메지마 아파트일
경우엔 쇼가 자고 가는 날이 많았다.
횟수를 비교해보면 사메지마가
시모기타자와로 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어.'"
  대답하던 사메지마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쇼도 따라서며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메지마의 눈길은 구야쿠쇼도리
건너편에 있는 빌딩 입구에 못박혀 있었다.
빌딩이었다. 도어를 밀치며 어떤 사내가 막
밖으로 나오는 길이었다.
  번쩍번쩍 광택을 뿜는 실버그레이 수트
차림이었다. 떡 벌어진 체격에 짧은 다리,
굵은 목줄기가 낯이 설지 않았다.
  사내는 벨트를 잡아 바지를 추슬러
올리면서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짧게 깎은 머리, 움푹 패어 들어간 안구,
툭 튀어나온 턱, 모두가 사메지마의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그 사내였다.
  사메지마가 지금까지 속으로 혼자 정체를
더듬고 있던 그 사내가 대만 요리집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 사내는 혼자였다.
  주변을 찬찬히 살핀 다음, 야스쿠니도리
  "뭐야, 왜 그래?"
  쇼가 속삭이듯 물었다. 사메지마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것이었다.
  "잠시 연극 좀 할까?"
  사메지마는 쇼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데이트중인 것으로 위장하자는 뜻임을
쇼도 금방 알아차렸다. 겉으로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면서도 어깨를 감싸안고
있는 사메지마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포개어
쌌다.
  사메지마는 쇼를 껴안은 채
구야쿠쇼도리를 걸었다. 두 사람이 길을
건너고 있을 때, 방금 그 사내가 나온 대만
요리집의 도어가 열리면서 또 다른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보라색 더블 수트를 입은 젊은이였다.
얼굴이었다.
  젊은 사내는 손을 돌려 도어를 닫으면서
허둥대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젊은 사내의 눈길을 등 뒤로 느낀
사메지마는 걸음 속도를 늦추었다.
  젊은 사내의 쏘는 듯한 눈초리가,
구야쿠쇼도리 인도를 따라 멀어져 가는
실버그레이 수트 등에 꽂히는 것을
사메지마는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젊은 사내가 뭐라고 중얼거린 듯 입술이
움직였다. 이어서 왼손으로 웃도리
앞자락을 누른 자세로 뒤따르기 시작했다.
눈길은 여전히 실버그레이 수트 사나이를
노려본 채로였다.
  사매지마는 턱 언저리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것은 일종의 예감이 적중하고
  쇼를 남겨두고 혼자 행동하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걸 설명하기에
앞서 두 남자의 뒤를 쫓는 것이 더 급했다.
  선두에 선, 오쿠보에서 봤던 건장한
남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기억을 더듬듯
주변을 휘둘어 보았다.
  그곳은 골덴 가와 이어지는 골목
입구였다. 골목에 들어선 왼쪽 빠칭코 집이
있었지만, 이미 문을 닫은지 오래였다.
  남자는 틀림없다는 태도로 왼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젊은 사내가 뒤를 따랐다. 사메지마도
쇼를 껴안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도청(都廳) 이전에 따른 신축 붐으로
골덴 가에 빽빽이 들어서 있던 작은 술집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폐업을 한
제외하고는 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앞선 사내는 골덴 가. 주오리(中央通).
하나조노 산반가 (花園三番街)의 술집
골목을 지나갔다.
  골목이 끝나는 곳은 하나조노 신사(神社)
였고 조금 못 미쳐 파출소가 있었다.
  골덴 가 오른쪽 골목에 접어들자, 젊은
사내는 서둘어 거리를 좁혀 갔다. 두
사람의 간격이 10미터쯤으로 줄어들었다.
  쇼는 말없이 따라왔다. 사메지마의
속셈을 완전히 읽은 것 같았다.
  앞장 선 두 사내는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특히 젊은 사내는 마음이 들떠
있는지, 턱을 앞으로 당긴 채 앞서 가는
실버그레이 수트의 사내 등줄기에 눈길을
박은 채였다.
미끄러져 들어갔다.
  사메지마는 쇼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세컨드백 지퍼를
잡았다.
  바로 그 순간, 젊은 사내 왼쪽에 있는
술집 도어가 벌컥 열렸다. 넥타이를 맨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자 2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비틀거리며 나왔다.
  "어머, 괜찮아요?"
  배웅나온 덧옷차림의 중년 여인이
걱정스레 소리를 높였다.
  젊은이가 품에 넣었던 손을 슬쩍 빼내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게 보였다.
  "괜찮아, 괜찮구말구, 장모님."
  "정말...? 잠깐, 다음에 올땐 돈 꼭 갖구
와야 해!"
 "네에. 알았어요, 윽!"
  비틀대던 취객 한사람이 쇼를 보고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자, 어서 가자구."
  또 한사람이 멈추어 선 취객을
끌어당겼다.
  "제법 반반하군. 어느 집 여자야?"
  "정신차려! 이 바보야......
죄송합니다."
  쇼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동행을
야단치는 한편으로 사메지마에게 머리를
꾸벅하면서 사과했다.
  젊은 사내가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취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배웅나왔던 여인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합판으로 된 문을 닫았다.
하나조노 신사의 사잇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오른쪽은 파출소였다.
  젊은 사내는 초조해진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메지마는 취객 두 사람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쇼에게 속삭였다.
  "이 술집에서 기다려줘."
  쇼는 대답 대신 사메지마를 쳐다보았다.
여자가 배웅나왔을 때 홀낏 들여다본 가게
안엔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다. 골덴 가에
있는 술집은 어느 집이나 입구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수상한 술집이 아님은
방금 나온 취객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쇼는 한순간 뽀로통 입을 내밀긴 했으나
고개를 까딱했다.
  "데리러 오는 거지? 안 왔다간 알지?"
"염려 마."
  사메지마가 떠나려 하자, 쇼가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구 조심해. 그 젊은 녀석 뭐가
무기를 가진 것 같았어."
  쇼도 눈치를 챈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그녀의 날카로운 관찰력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알았어. 염려하지 마. 위험하다 싶으면
경찰을 부를 테니까......"
  "바보!"
  한마디 쏘아붙이면서 쇼는 몸을 돌려
술집 도어를 밀치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덧옷차림 중년 여인의 외침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왔다.
  사메지마는 술집 간판으로 눈을 돌려
이라고 쓰여 있었다.
  골목을 빠져 나가자, 젊은 사내가 정면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조노 신사의 모퉁이에 있는
계단이었다.
  계단을 오르면 바로 신사 경내와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신사 사무소의 불이
꺼진데다가 나무가 많아 주변은 무척
어두웠다.
  카부키쵸에서 신주쿠 5쵸메로 빠지는
지름길이긴 했으나 날치기와 치한이 들끓어
밤이면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요즘은 신나
톨루엔을 흡입하는 젊은이들의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사메지마도 계단을 올라갔다.
  후미진 곳에 이르면 앞서 가던 젊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사메지마는 세컨드백 지퍼를 열었다.
파출소에 들러 응원을 부탁할 것도
생각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백 속에서 특수 경찰봉을 꺼내었다.
금속제인 2단 특수 경찰봉은 한번 휘둘기만
하면 길이가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만약 젊은 사내가 지니고 있는 무기가
총기라면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사메지마는 총을 휴대하지 않았다.
  하나조노 신사의 경내로 들어섰다.
  신사의 안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날카로운 외침이 어둠을 찢었다.
  사메지마는 달리기 시작했다.
  신사 정면에 젊은 사내가 우뚝 버티어 서
있었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물체가 어둠
속에서도 번쩍번쩍 빛을 반사했다.
단도였다.
  조금 앞쪽에 실버그레이 수트의 남자가
서 있었다.
  외침소리에 막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놀라움이나 공포의 빛은
전혀 없었다. 다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
  젊은 사내가 뭐라고 다시 외쳤다.
중국어였다. 이어서 가슴 앞에 단도를
모아들고 똑바로 사내에게 부딪쳐 갔다.
  -- 늦었구나!
  그런 생각이 사메지마의 머리를 스쳤다.
그래도 사메지마는 버럭 호통을 쳤다.
  "이봐!"
  젊은 사내와 실버그레이 남자와의 거리는
젊은 남자의 모습에는 죽음을 각오한
필살의 기백이 서려 있었다. 속도도
엄청났다. 몸을 뺀다는 건 불가능했다.
칼끝은 똑바로 실버그레이의 남자 가슴팍을
겨누고 있었다.
  "..........."
  실버그레이의 남자 입에서 야수와 같은
부르짖음이 터졌다. 그 순간 왼팔을 꺾어
높이 쳐들면서 몸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칼날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임기응변의 대응이었다. 단도는 왼팔
상박부(上膊部)에 꽂혔다. 절대절명의
순간, 가까스로 가슴을 보호한 것이었다.
  젊은 사내는 머리를 숙인 맞은 자세로
실버그레이의 남자 가슴을 파고들었다.
  칼에 찔린 남자가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달려가면서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남자는 뒤틀었던 몸을 바로잡으면서
오른손 수도(手刀) 로 젊은 사내의 얼굴을
쳤다. 전신의 체중을 실은 일격이었다.
둔탁한 타격음을 사메지마도 들을 수
있었다.
  젊은 사내의 몸이 뒤로 젖혀지면서 남자
팔에 박혔던 단도도 뽑혔다. 젊은 사내는
오른손으로 단도 자루를 꼭 쥐고 있었다.
  젊은 사내는 엉덩방아를 찧듯이 지면에
풀썩 주저앉았다. 뭉개져 버린 코에서
뭉클뭉클 피가 솟아나왔다.
  "야압!"
  남자는 기합소리와 함께 숨을 내뿜었다.
성한 팔로 칼에 찔린 팔을 받쳐안으면서
주저앉아 있는 젊은이의 턱을 오른발로
체중을 버티면서도 자그마한 흔들림도
없었다.
  걷어채인 젊은이는 두 팔을 벌려 만세
부르는 자세로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엉덩방아를 찧고 앉았던 하반신이 공중에
붕 뜰 정도의 강렬한 발길질이었다.
  남자는 슬쩍 한걸음 물러서면서 자세를
낮추었다. 그러나 나자빠진 젊은 사내는
꼼짝도 안했다.
  남자는 몸을 반쯤 돌렸다.
  "잠깐!"
  사메지마가 소리를 높였다. 남자의
움직임이 자기를 공격하려는 예비동작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카라데 (空手) 인지 권법(拳法) 인지 알
수 는 없었지만 단도에 찔린 이후의 움직임
없었다.
  남자는 몸에 바싹 붙여올렸던 오른쪽
발을 풀었다.
  그러나 체중은 여전히 왼발에 모아놓은
채로였다. 사메지마의 움직임에 따라
언제든 오른발을 날릴 수 있는 자세였다.
  남자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찢어진 왼쪽 소매가 피에
흥건히 젖고 있었지만 고통의 빛은 전혀
없었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초리였다.
  사메지마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쓰러진 젊은 사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젊은 사내는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
의식을 잃고 있었다. 꽉 잡고 있던 단도도
              悶렛?떨어져 있었다.
  다시 남자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남자의
시선이 사매지마가 들고 있는 경찰봉에
못박혀 있었다.
  사메지마는 왼손 바닥으로 눌러 경찰봉을
접었다.
  "경관, 부르지마!"
  남자가 불쑥 내뱉었다.
  "난 관계없어. 저 사람 나 찔렀어."
  "알고 있어요. 이 사내가 당신을
미행했어요."
  남자는 눈을 껌벅거렸다.
  사메지마는 무릎을 꺾어 젊은 사내의
맥을 짚어 보았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나, 관계 없어. 갈테야. 나쁜 것은 이
사람."
  "왜 당신을 덮쳤죠?"
 "몰라. 도둑놈?"
  "당신을 찌르기 전에, 이 사람이 뭐라고
말했었죠? 당신을 알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 기억 없어.
나 피해자야."
  "물론 그렇죠. 당신 상처가 심한 것
같은데....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어요."
  "괜찮아. 조금 따금거릴 뿐...... 곧
나아."
  "그래요? 찰과상같이 보이지 않는데?"
  "당신, 누구야?"
  남자는 빈틈이 없었다.
  "이거 실례했군요. 나는 신주쿠 서 경관,
사메지마라고 합니다."
  "경관?"
    ?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찰수첩을
내보였다.
  남자의 굳었던 얼굴이 얼마간 풀리는 것
같았다. 체중도 양다리로 옮겨졌다.
  "당신, 줄곧 여기 있었습니까?"
  "아뇨. 저 젊은이 거동이 수상쩍어 뒤를
따라 이곳까지 온 겁니다. 실례지만 어느
나라분이죠?"
  "대만."
  "여권이나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게
있습니까?"
  남자의 입 언저리에 웃음이 번졌다.
  "신분증?"
  "네."
  남자는 품속에서 검정 가죽 케이스를
꺼내어 내밀었다.
  "그럼, 실례"
 사메지마는 받아 열어 보았다.
  새 모양으로 된 금빛 배지가 한쪽으로
꽂혀 있었고 일련번호가 찍혀 있었다.
  또 다른 칸에는 남자의 상반신 사진이
붙은 ID 카드가 꽂혀 있었다.
  <대북시정부 경찰국 형경대대
(臺北市政府 警察局 刑警大隊)>
  문자를 확인한 사메지마는 새삼스런
눈길로 남자를 건너다 보았다. 사내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정2대 분대장 곽영민 (偵二隊 分隊長
郭榮民)>
  사메지마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남자는 대북에서 온 형사였다.


  7.

  양(楊)의 김새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나미가 깨달은 것은 폐점을 앞둔 11시
30분께였다.
  오늘밤은 손님이 별로 많지 않었다.
월말이나 주말을 제외하면 언제나 그랬다.
  나미가 출구까지 손님을 배웅하고 막
돌아선 순간이었다. 네팀 째의 손님을
떠나보내며, 오늘밤은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폐점 직전에 뛰어드는 손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술이 엉망이 되어 그것이
제대로 발기되지 않아 애를 먹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양은 계산대 안쪽 어둠 속에 앉아
둥글의자는 아키의 지정석이었다. 오늘밤
아키는 뭔가 초조한 듯 고함을 질러가며 홀
안을 어정대다가 조금 전부터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양은 깊은 시름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을 푹 숙인 채 손바닥을 위로 해서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닫히는 도어를 향해 머리를 숙인 나미는
계산대 안쪽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1미터
사방의 좁디좁은 공간, 미니 스탠드가
희미한 빛을 밝히게 되어 있었다. 그 미니
스탠드도 지금은 꺼져 있었다.
  "몹시 피곤한가 보죠?"
  나미가 말을 걸었다.
  저녁 때, 양이 때맞추어 큰소리로 손님을
맞았을 게 틀림없었다. 양이 외쳐대지
않았다면 손님들을 놓쳐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양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방심상태였던
듯,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나미는 양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양도 말없이 마주 바라보았다.
  그늘진 얼굴이라고 나미는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자 깨끗하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콧날이 조금 휘어져 있었지만
시원한 이마와 튀어난 광대뼈가 퍽
인상적이었다. 언제나 안개에 덮인 것 같은
무표정한 눈은 속마음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기름기 없는 푸석푸석한 머리를 제외하면
그러고 보니 손발도 무척 컸다.
  "괜찮아."
  양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면서 홀
안을 휘둘러 보았다.
  이쿠가 다른 아가씨 두 사람과 함께 손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이쿠는 알몸에 걸친
네글리제 앞자락을 열어젖힌 채 손님 무릎
위에서 코에 걸린 소리를 읊어대고 있었다.
  객석은 영화관처럼 한쪽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아가씨들은 손님과 마주
보고 앉기 때문에 얼굴은 출입구 쪽을
행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쿠가 고양이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손님의 오른손과 이쿠의
오른손이 엉키면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이쿠가 흘낏 나미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감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차가운
눈이었다. 이어서 이쿠는 손님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손님은 두 팔을 축
늘어뜨리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그 안쪽 좌석은 어두운 조명과 담배연기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미는 양에게 눈을 돌렸다.
  "어디 아파요?"
  양은 고개를 내저었다.
  "약 사다 줘?"
  "괜찮아."
  나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발길을
옮겼다.
  "본토에서 왔나?"
  나미는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북경어였다.
  손님 무릎 사이에서 이쿠의 머리가
손님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었다.
  나미는 몸을 돌려 빠르면서도 나지막하게
말했다.
  "열세 살 때. 여기서 북경어 쓰면 안
돼!"
  양은 말없이 나미를 바라보았다. 보일듯
말듯 턱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미는 얼른 계산대 앞을 떠났다. 출입구
도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아키가
들어서고 있었다.
   나미는 처음 나리타(成田) 공항에
내렸던 날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름 - 사람들이 걸치고 있는 종이처럼
얇은 옷을 보고 깜짝 놀랐던 생각이 지금도
  나미가 태어난 곳은 흑룡강성 (黑龍江省)
이었다. 아버지는 교사, 어머니는 방적공장
직공이었다.
  어머니가 일본인이었음을 안 것은 열한
살 때였다. 패전과 함께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걸 나미의 조부모가 거두어
길렀던 것이었다.
  어느 땐가 양친이 밤늦게까지 뭔가
심각하게 의논한 적이 있었다. 나미는 무슨
얘긴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석달 뒤
일본으로 가게 되었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양친의 말에 나미는 적이
당황했다.
  어머니가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일본으로 가면 예쁜 옷도 입을 수 있고,
친구도 새로 사귈 수 있구....."
  나미는 흑룡강성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싫었다.
  그러나 몇날 며칠이고 밤마다 이어지는
양친의 의논을 듣게 되면서, 나미도 결국
일본으로 갈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얘기가 나왔을 때, 아버지는 반대한
것 같았다. 그러나 끝내는 어미니에게
설득당하고 말았다. 나미네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강했다. 때문에 어머니 뜻대로
일본 이주가 결정되었다는 얘기를 듣고도
나미는 놀라지 않았다.
  나미와 일곱 살 아래 동생을 가까이 사는
삼촌집에 맡기고 양친이 먼저 일본으로
건너갔다.
  반년 뒤엔 나미가, 다시 그 반년 뒤엔
  양친이 자리잡은 곳은 치바 (千葉) 시
교외 - 현영 (縣營) 주택이었다. 나미는
일본에 도착한 얼마 뒤 가까운 중학교에
편입학했다.
  그 무렵 나미에겐 가장 쓰라린 시기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미는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기본적인 것은 일본에 와서
배웠지만 그런 몇 마디만 가지고
동급생들에게 끼어든다는 것은 어림없는
얘기였다.
  어머니는 근처 식품 공장에, 아버지는
버스와 전동차를 갈아타고 한시간씩이나
걸리는 제재소엘 다녔다.
  나미는 외톨이였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이 오기 전까지는 TV 만이 - 무슨
친구였다.
  그 무렵 나미는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게
제일 고통스러웠다. 호기심인지 친절인지
알 수 없었지만, 처음엔 동급생들이 곧잘
얘기를 걸어왔다. 선생님들도 <잘 돌봐
주라> 고 말했다. 그러나 얘기를 걸어오면
뭔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도 없는데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돌림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렇잖아도 동급생 가운데는
나미를 싫어하는 아이도 적지 않았다.
  다이 친나(戴淸娜) 라는 나미의 중국
이름은 동생이 도착한 직후 타구치
기요미(田口淸美) 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었다.
  나미는 동생의 도착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동생만 오면, 낮에 중국어로
마음껏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동생을 돌봐야
했던 나미는, 그 지긋지긋했던 기억은 간
데 없고, 동생이 그리워 못 견딜
지경이었다.
  TV가 마음에 든 것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뭐라고 떠들어대든, 나미가 단
한마디의 대답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동생이 도착했을 때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수업이 끝나면 줄달음질쳐 와서
돌보아 주었다.
  동생 이름은 다쓰오(龍夫) 로 정해졌다.
  타구치 기요미. 타구치 다쓰오 - 그러나
없었다. 동생과 단둘이만 있을 땐 언제나
중국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나미의 즐겁고 평화로운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나미가 학교에 가고 나면 동생은 단지
안의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러는
동안 일본말도 놀랄만큼 익숙해졌다.
학교에 들어갈 무렵엔 완전한 일본 아이로
변해 있었다.
  나미는 또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동생이 국민학교에 입학한 얼마 뒤,
제재소에 다니던 아버지가 사고로 크게
다쳤다. 수입이 줄어든 데다가 치료비까지
겹쳐 나미네 생활은 몹시 곤궁해졌다.
아버지는 집에 죽치고 있었지만 나미가
말을 걸어도 대답 한마디 하지 않았다.
  몇 푼 되지 않지만, 달마다 지급되는
보상금은 아버지의 빠칭코과 술값으로
날아갔다.
  부부싸움도 끊이지 않았다.
  그 무렵 나미는 중국으로 돌아가는 꿈을
곧잘 꾸었다.
  꿈속에서 흑룡강성 친구들과 즐겁게
놀았다. 마음껏 중국말로 얘길 나룰 수
있었고 때로는 고함을 지르며 깔깔거리기도
했다.
  언뜻 잠에서 깨면, 언제나 양친의
싸움소리가 귓전을 쳐울렸다. 어머니의
날카로운 고함에 맞서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언제나 술에 젖어 탁하게 들렸다.
  나미는 두 귀를 꼭 막으며 다시 한번
꿈속으로 되돌아 가자고 스스로 달래는
것이었다.
  그런 밤이 날마다 계속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근처 철도
건널목에서 일생을 끝냈다. 전동차에 치인
것이었다.
  사고였는지 자살이었는지 분명치 않았다.
나미는 처음으로 어머니를 증오했다.
  졸업식을 앞두고 집을 뛰쳐 나오고
말았다.
  그 무렵 가까스로 사귀게 된 남자친구
아파트로 밀고 들어갔다. 남자친구는
고교를 중퇴한 뒤 주유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폭주족이긴 했으나 나미에겐
언제나 상냥했다.
  나미는 폭주족 패거리로부터 본격적으로
일본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남자친구가 그
대해 주었다.
  가출한 지 2년째 되던 봄, 나미는 첫
중절수술을 경험했다. 그 충격으로 밖으로
나돌아 나다니다 나이를 올려 스낵바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단골 손님인 스물두살의 세일즈맨을
사귀게 되었다. 그 세일즈맨은 나미에게
프로포즈했다.
  그런 사실을 안 남자 친구는 폭주족
패거리를 동원해서 그 세일즈맨을 흠씬
두들겨 팼다. 전치 3개월의 중상이었다.
  남자친구와 폭주족이 체포된 것을 계기로
나미도 치바에서 도쿄로 옮겼다. 폭주
소녀의 두목이었던 선배를 찾았다. 선배는
신주쿠 카바레에서 일하고 있었다.
동거하는 남자도 있었다. 나미는 눈총을
  한달을 버티던 끝에 나미는 독립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열아홉살 때였다.
  시부야(澁谷)의 패션 헬스에 나가기
시작했다. 6개월 이상 근무하는 것을
조건으로 헬스 주인이 아파트 보증금을
빌려 주었다. 헬스 점장 (店長) 은
보증인을 자청하고 나섰다.
  거기서 여덟 달 일한 뒤, 이케부쿠로
헬스로 옮겼다. 젊은 아가씨가
필요하다면서 제시한 조건이 마음에 들어
스카웃에 응한 것이었다.
  이케부쿠로에서 일년 반을 근무한 뒤
지금의 <장미의 샘> 으로 옮겨왔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조금은 깨끗한 아파트로
옮기면서 패션 헬스 생활을 청산한
것이었다.
의 원룸 아파트였다.
  이케부쿠로 헬스에 있을 때 세 사람과
사귀었다. 첫번째 남자는 역시
폭주족이었다. 사고로 한쪽 다리에 복합
골절을 당해 시골로 내려가는 바람에
헤어졌다. 두번째 사귄 남자는 신주쿠의
디스코 보이였다.
  나미는 디스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중국에도 디스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셜 댄스가 더 유행했다. 삼촌집에 있을
때, 여덟 살 위의 언니가 소셜 댄스를
가르쳐 주었다. 지르박. 탱고. 왈츠 등을
배웠다. 어쩌면 스텝을 모두 잊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디스코보다 휠씬
재미가 있었다.
  디스코 보이의 목적이 돈을 우려내는
두 달도 채 안 되어 헤어졌다.
  한동안 혼자 지내다가 단골손님 한
사람과 친해졌다.
  스물네 살의 회사원이었다. 용돈을
우려내지는 않았지만, 몹시 가난한
사람이었다. 외식은 물론, 술을 마시러
가서도 돈은 언제나 나미가 냈다.
  결혼한 남자였다. 세살 위의 부인은
임신중이었다. 사귄 지 반년 뒤 아기가
태어나자 그 남자는 발길을 끊고 말았다.
  별로 슬프지는 않았다.
  이제부터 혼자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일본어에는 불편이 없었다. 만화 정도는
막힘 없이 마음대로 읽을 수 있었다.
  열세살 때 중국에서 왔다는 얘기는
사귄 폭주족에겐 털어놓았지만, 그 뒤로는
일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상대방이 신기스럽다는
듯 이것저것 물어오는 게 싫었다. 더욱이
자기를 중국인 취급하면서 얕잡아 볼 때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가 진짜 어느 나라 사람인지 나미
자신도 몰랐다.
  한평생을 도쿄에서 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일본에서 살아야 한다면 치바가
아닌 시골이 좋을 것 같았다. 치바에는
두번 다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목돈을 쥐게 된다면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큰 집을 지어
어릴 적 친구와 함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머리속에 떠올려 보았다.
  나미는 얼마 안 있으면 스물두 살이
되었다. 그러나 공상 속에서 깔깔거리며
함께 뛰어 노는 친구들은 모두 열둘이나
열세살 - 헤어질 때의 나이 그대로였다.

  "먼저 실례합니다."
  갱의실에서 미니로 갈아입은 이쿠가
말했다. 손님을 맞을 때와는 달리 짙은
화장이었다. 지금부터 어딘가 몸을
풀러가는 게 분명했다.
  두 아가씨에게 인사를 한 다음 나미는
갱의실을 나섰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아키가 느닷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니 깜짝이야!"
나미는 비명을 질렀다.
  아키는 징그럽게 웃었다. 제복 대신
감색의, 그러나 싸구려 수트 차림이었다.
  "나미짱"
  "네."
  한껏 차가운 소리로 대답하면서도 나미는
두려움으로 가슴이 콩콩거렸다.
  "아까 내가 좀 지나쳤지?"
  아키는 징그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살이라고는 한점도 없이 깡마른
얼굴 - 웃을 적엔 주름살투성이가 되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미안했어. 사과할께."
  금속성처럼 울리는,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서툰 배우가
대사를 읽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기분 풀라구."
  아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미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맞잡았다. 눅진눅진
젖은 손이었다.
  "한잔 하러 가자구."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나미의 눈 속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미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내가 잘 아는 집이야. 분위기도 제법
괜찮구. 조용한 게 마치 일류 호텔 바 같은
느낌이야."
  호텔이란 한마디에 나미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 쳤다.
  "미안하군요. 그처럼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되는데....."
  "신경을 쓰고 있는 게 아냐. 그냥 한잔
하고 싶은 것뿐이야. 같이 가는 거지?"
  아키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
  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절당한 뒤에
표변할 아키가 무서웠다.
  "나미짱, 집이 싱오쿠보랬지? 한잔 한 뒤
집까지 바래다 줄께."
  나미는 전신이 막대기처럼 굳어짐을
느꼈다.
  -- 싫어. 싫어. 싫어. 이런 녀석과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아!
  나미는 눈길을 돌렸다.
  난이 바닥에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양이
안쪽에서 두 손에 쓰레기 뭉치를 들고
나왔다.
  "저어, 약속이 있어요."
  "누구와?"
  "친구들이에요."
-- 그런 것까지 네 녀석에게 일일이
말해야 하나?
  여자라고 대답하면 합석하자고 할 게
틀림없었다.
  "남자친구예요."
  "흥!"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난과 양은 묵묵히 제 할일만 했다.
나미는 아키의 눈길을 피해 두 사람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양과 마시러 가는 건가?"
  아키가 불숙 내뱉었다. 나미가 그쪽으로
얼굴을 돌린 걸 보고 넘겨짚은 것 같았다.
  "네?"
  "양과 한잔 하러 가느냐고 물었어."
  빈 맥주병이 든 상자를 들고 가던 양이
걸음을 멈추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자 2개를 들었지만 전혀 힘들어 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아, 아니에요...."
  아키는 홱 몸을 돌렸다.
  "양!"
  "네에."
  "나미짱과 한잔 하러 가나?"
  양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키를
바라보았다.
  "한잔 하러 가느냐구 묻고 있잖아!"
  나미 쪽에 눈길을 돌렸다. 뭔가
탐색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닙니다."
  나미도 허둥대며 부인했다.
  "아녜요. 양씨가 아녜요."
  "그래?"
  아키는 몸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
  "양, 넌 좀 남아 있어."
  "네에."
  양은 보일듯 말듯 나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미는 불안했다. 어쩌면 양이 자신의
정체를 아키에게 불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키가 더욱 끈적끈적 달라붙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다른 곳으로 일자리를 옮겨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봐도 좋아. 수고했어."
  아키가 나미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묘하게도 표정이 밝게 바뀌어
있었다.
  나미는 더욱 불안해졌다.
  아키가 딱지맞은 분풀이로 양을 못살게
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새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경찰에 귀띔하는 것은 양이나 난을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일 - 그렇게 때문에
아키는 기세가 등등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왜? 약속이 있다면서?"
  아키가 멈칫거리고 있는 나미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그럼, 먼저 갈께요."
  나미는 까딱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출구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고했어."
  "수고했어요."
  "수고했습니다."
  아키에 이어 양과 난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몸을 굽혀 반쯤 내린 셔터
내뿜었다.
  빠른 걸음으로 카부키쵸를 누벼
야스쿠니도리를 건넜다. 스튜디오 아르타
앞까지 온 그녀는 갑자기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 관계 없어. 나완 관계 없는 일이야.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양의 일이 점점
더 걱정되었다. 신주쿠 역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속을 태워도 소용없는
일임은 알고 있었다. 지금 돌아간다 해도,
아키가 양을 흠씬 두들겨 패고 있는 현장을
지켜본다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발걸음 속도가 처졌다. 자루처럼 생긴
숄더백을 저도 모르게 가슴에 꼭 껴안았다.
무사했을 것이 아닌가. 오늘 저녁 나절,
양은 자신을 도와 주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자기는 양을 끔찍한 액운 속으로 몰아넣고
말다니.
  지금까지 나미는 양에게 특별한 기분을
느낀 적이 한번도 없었다. 갱의실에서
있었던 <통역사건> 이후, 오히려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던 것이 오늘은 달랐다.
  그때, 배가 아프다는 그의 핑계를 통역해
준 은혜를 양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미를 도와 준 것이었다.
  말 없고 어두운 사람, 그러나 결코
악인은 아니었다.
  나쁜 쪽은 오히려 나미 자신이었다.
  격렬한 감정의 회오리가 가슴 속 갚은
데서 소용돌이쳐 오름을 느꼈다. 나미는
숨이 막혀 입을 크게 벌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대로
전동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미는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종종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만약 양이 두들겨 맞고 있다면, 몸을
던져서라도 말려 주고 싶었다.



  8.

  하나조노 신사는 신주쿠 경찰서가 아니라
요쓰야 (四谷) 서 관할 구역이었다.
  사메지마는 골덴 가 옆 파출소 순경을
불러 구급차를 수배토록 했다. 젊은이는
앰뷸러스에, 곽영민은 패트롤카에 태워
병원으로 옮겼다.
  파출소 순경에게 사건 전말을 알린
사메지마는 자신이 목격자라는 것, 모든
잘못은 어디까지나 젊은이에게 있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다.
  덧붙여서 이 사건을 자기에게 맡겨 줄 수
없겠느냐고 넌지시 부탁했다.
  상해 사건이기는 하지만 피의자는
실신상태, 또 피해자도 피의자도 모두
외국인이었다. 담당 순경이 오히려
고마워했다.
  "경감님 뜻대로 하십시오."
  대충 마무리를 짓고 사메지마는 쇼가
기다리고 있는 <인동> 으로 갔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쇼가 문 소리가 나자
튕기듯이 고개를 돌렸다.
  "끝났어."
  사메지마가 대답했다.
  "어떻게 됐어?"
  "대단한 건 아니었어. 허나 지금 서로
돌아가야 돼."
  쇼는 생긋 웃었다. 조금은 쓸쓸하게 뵈는
웃음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미안."
  사메지마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주인 여자에게 돈을
치렀다. 맥주 한병 - 1천2백엔이었다.
  쇼의 어깨를 감싸안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 번에 두 배로 갚을께. 오늘 데이트
깬 빚."
  쇼가 눈을 치떠 사매지마를 쳐다보았다.
  "거짓말쟁이!"
  그러면서 두 팔로 사메지마의 목을
끌어안았다.
  "안기고 싶었어, 오늘밤."
  속삭임이 끝나자 사메지마의 귀를 힘껏
깨물었다.
  "아얏!"
  "엄살은! 전화해!"
  쇼는 자나가던 빈 택시를 보자 손을
흔들며 달려갔다.
  "내일 걸께!"
  "정말이야. 전화 않음, 록봉기로 옮겨갈
거야!"
  사메지마는 싱긋 웃음을 보냈다. 택시
문이 닫히며 쇼는 사라졌다.
  사메지마는 다시 파출소로 갔다. 길고 긴
하루였다. 아침 6시에 시작된 하루가 새벽
4시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파출소에서 젊은이와 곽이 실려간 병원을
확인했다. 신주쿠 경찰서 관내
구급병원이었다. 파출소 순경 2명과 함께
갔다고 했다.
  사메지마는 병원으로 갔다. 사메지마가
도착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응급처치가 끝난
뒤였다.
  젊은 사내는 코뼈와 턱이 깨어진데다가
뇌진탕까지 겹쳐 있었다. 곽의 왼팔 상박부
상처는 전치 1개월의 중상이었다.
  근육이 무척 강했던 탓에 뼈는 다치지
않았다고 의사는 감탄했다.
  "엄청난 근육, 믿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근육이었어요. 강철이나 다름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째든 찔린 순간
칼끝이 튕겨나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돕니다."
  젊은 사내는 진통제와 마취제를 맞고
잠들어 있었다.
  웃도리 주머니에 지갑과 여권이 들어
있었다.
  대만 국적의 허환 (許煥), 스물세
살이었다. 관광 비자로 반년전에 일본으로
와서 체재 기간을 한번 연장했음도
확인했다.
곽영민과 허환의 신원을 조회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응급처치가 끝난 곽이 퇴원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적어도 일주일은 입원해야
한다는 것이 의사의 주장이었다.
  "내가 만나보죠."
  사메지마가 나섰다.
  두 사람 모두 1인실에 들어 있었다. 병실
밖에는 경관이 지키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노크와 함께 곽영민이 수용된
입원실 도어를 열었다. 베드에 앉아 있던
곽이 이쪽으로 눈을 돌렸다.
  와이셔츠 왼쪽 소매를 잘라내고 붕대로
감은 팔을 삼각건 (三角巾) 으로 목에 걸고
있었다.
  곽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동요나
  이 사내가 진짜 경관이라면 수많은 경험,
난장판을 헤쳐 나온 베테랑임에 틀림없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통증은 좀 어때요?"
  곽은 머리부터 내저었다.
  "괜찮아요. 호텔로 돌아가고 싶어요."
  "어느 호텔입니까?"
  "<산코 호텔>, 신주쿠 5쵸메."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지도리 (明治通) 쪽에 있는 비지니스
호텔이었다. 곽이 하나조노 신사를
가로지르려 했던 것은 호텔로 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 어떻게 됐습니까?"
  "턱과 코뼈가 부러졌더군요. 과잉방어가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과 - 잉 - 방 - 어?"
  사메지마는 수첩을 꺼내어 한자로 써
보였다. 그제서야 곽은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하자면 내가 너무 셌다는 뜻이군."
  "그런 뜻이죠."
  사메지마는 철의자를 당겨 앉으면서
말해다.
  "지금, 마취제를 맞고 잠들어 있습니다.
내일 아침이라도 통역을 데리고 와서
심문할 생각입니다"
  "당신이 담당합니까?"
  "네."
  다시 한번 사메지마는 자기 소개를 했다.
  "신주쿠 서 방범과 사메지마
경감입니다."
  "경 - 감?"
  "인스펙터....."
  곽은 턱의 긴장을 푸는 것 같았다.
젊었을 때는 여드름이 무척 심했던 것
같았다. 거쿠튀튀한 얼굴 여기저기엔
아직도 여드름 구멍이 숭숭했다.
  "알고 보니 당신, 꽤 높은 사람이군.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너무 젊어서......"
  "곧 서른일곱 살이 됩니다."
  "난 서른여덟 살."
  "신분증, 다시 한번 보여 줄 수
없습니까?"
  곽은 침대 옆 옷걸리에 걸려 있는
웃도리를 가리켰다. 찢어진 왼쪽 소매에는
피얼룩이 번져 있었다.
  "미안하지만, 직접 꺼내 보세요."
  사메지마는 일어서서 웃도리 오른쪽
  "속엔 명함도 들어 있을 겝니다."
  사메지마는 머리를 숙여 보이면서 한장
꺼낸 다음, 자기 명함을 한장 꽂아 넣었다.
  "여기 적힌 정2대 (偵二隊) 란 무슨
뜻입니까?"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폭력단
전담반입니다."
  "그러면 대북 경찰의 폭력단 담당?"
  "그렇습니다. 분대장 계급은 당신보다
하나 아랩니다."
  경위란 뜻이었다. 아마도 바닥에서부터
한걸음 한걸음 올라 온 게 분명했다.
  "일본에 온 목적은 관광입니까?"
  곽영민은 애매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혼자서?"
  "네."
  "언제 입국했습니까?"
  "나흘 전."
  "언제까지 머물 예정입니까?"
  "앞으로 열흘."
  "2주간이군요. 휴가가 꽤 길군요.
부럽습니다."
  곽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쿄 이외에 다른 곳으로 갈 예정은
없나요? 가령 교토 (京都) 라든가....."
  "글쎄요."
  "일본어가 능숙하신군요."
  곽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대만, 한때 일본 식민지였죠. 나이 든
사람이라면 모두 일본어를 잘합니다. 역대
일본 임금 이름도 곧잘 외우죠. 우리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일본말을 배웠어요.
지금은 대부분 까먹어 버렸지만..."
  "겸손의 말씀. 일본어 실력이 아주
훌률합니다.... 대만에선 주로 어떤 말을
사용합니까?"
  "북경어. 나이든 사람은 대만어도
씁니다. 원래는 복건성 (福建省)
말이지만."
  "대만 주소는 어떻게 됩니까?"
  "지금 심문하고 있는 겁니까?"
  "일단 조회해 봐야 하니까요. 여기,
주소를 써 주실까요?"
  사메지마는 수첩을 내밀었다.
  곽은 한순간 망설이는 것 같더니 수첩을
받아 주소를 적었다. 대북 시내였다.
  주소를 써달라고 했던 것은 곽영민이
진짜 대북 형사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수첩을 돌려받은 사매지마는 곽에게 다음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허환의 이름과 여권
넘버를 적어둔 페이지였다.
  "당신을 덮친 녀석입니다. 이름, 기억
나세요?"
  곽은 슬쩍 보는 시늉만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허형제 (許兄弟) 는 류망입니다."
  "류망?"
  곽은 수첩에 <流氓>이라고 써 보였다.
  "무슨 뜻입니까?"
  "야쿠자. 공갈꾼. 건달..... 돈이
필요하면 은행이나 보석상도 서슴없이
덮치죠."
  "갱이란 뜻이군요. 허환은
  곽은 입술을 깨물면서 허공으로 눈길을
던졌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당신, 대만 폭력단에 대해 좀 알고
있습니까?"
  "쯔렌팡. 스하이팡이라면 듣고 있죠."
  "쯔렌. 스하이는 상당히 큰 조직이죠.
그러나 그 이외에도 작은 그룹이 엄청
많아요. 신디케이트엔 가입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죠. 무기도 대량
소유하고 있구요. 피스톨. 카빈.
서브머신건......"
  "어디서 어떻게 구입하나요, 그런
무기를...."
  "대륙에서 흘러 들어오죠. 한번에 몇백
자루, 몇천 자루씩. <블랙스타> <레드스타>
  "제조번호. 일련번호가 연이어진 총을,
공장도 (工場渡) 로 밀수해 온단
뜻입니까?"
  "네."
  곽은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대륙엔 돈 벌기에 눈이 벌개진 군인이
많아요. 어쩌면 정부 자체가 움직이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사메지마로서는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블랙스타> <레드스타>가 중국 정부의
관급 (官給) 권총인 흑성 (黑星). 적성
(赤星)을 가리키는 것임을 사메지마도 알고
있었다. 토카레프. 마키로프와 같은 소련제
자동권총을 중국측이 라이센스 생산한
것이었다. 클립 부분에 별 마크가 들어
  일본에도 대량 밀수가 시도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상당한 물량이 폭력단
중심으로 거래되고 있다는 얘기도 있어
경찰청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대만으로 흘러드는 중국제 권총이
연번호 (連番號) 라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1백 자루, 2백 자루라면 몰라도
천 단위라고 한다면, 제조공장에서 직접
밀수 루트에 공급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군부의 요인의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대륙 정부는 대만 치안이 불안해지는 걸
즐거워하고 있어요."
  대만 치안을 교란시키기 위한 파괴
공작의 일환으로 무기를 밀수출하고 있다는
중국 정부일지도 모른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전혀 황당무계한
견해도 아니었다. 미국이나 소련도 내전
상태의 제3세계에 대해 오랫동안 무기와
군사 관련 기술을 공급해 주지 않았는가.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 사태도 따지고
보면 무기 공급의 연장선에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었다.
  중남미나 중동 사태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것은 이미 한 나라 형법으로는 다스릴
수 없는 거대한 범죄행위이기도 했다.
  경찰청 수사4과가, 소속 경관 만으로
특정 국가를 상대로 범죄행위를 단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황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허환은 소규모 갱 그룹의
일원인가요?"
  "네. 허브러더스는 원래 모두 5명.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둘째와 막내 뿐입니다.
둘째는 교도소, 막내가 바로 허환. 허환은
너무 어려서 체포를 면했던 겁니다."
  "다른 3명은?"
  "한명은 동료 손에, 두 사람은 경찰대와
총격전 끝에...."
  모두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었다.
  "허환이 어린애였던 탓에 체포되지도,
살해되지도 않았다는 뜻인가요?"
  곽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환은, 저희 형 둘을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들을 찾아 끝까지 추격한 것은
나였지만 실제 총을 쏜 사람은......."
  곽은 <보안경찰 특근중대
(保安警察特勤中隊)> 라고 써 보였다.
  "허환은 두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네. 허환은 총격전 직후 행방불명이
됐죠. 그동안 일본에 와 있었더군요.
오늘밤, 나를 보자 깜짝 놀라더군요.
형님의 원수 -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죠"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던가요, 칼을
겨누면서?"
   "네. 난 허환의 얼굴을 잊고 있었어요.
총격전이 있었던 것은 4년 전, 당시 허환은
열아홉 살, 지금은 스물세 살. 그 나이의
사나이 얼굴, 빨리 변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저쪽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거죠?"
  곽은 굳어진 얼굴로 사메지마를
쏘아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미행당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나요?"
  "도중에 눈치챘죠."
  "두렵지 않았나요?"
  곽은 말은 않고 사메지마를 쏘아보면서
고개만 내저었다.
  사메지마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당신 반격, 정말
놀랍더군요. 권법의 일종입니까?"
  곽의 입 언저리에 보일듯 말듯 미소가
번지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보통사람으로선 상상도 못할
할 수 있는..... 대만 형사는 모두 무술의
달인들입니까?"
  "모두 군에서 배우죠. 대만은 의무병
제도이니까 경관은 물론 범죄자들도 모두
배우죠."
  그러나 아무리 군에서 가르친다고 해도
곽영민이 보였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메지마는 곽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사메지마는 수첩을 덮으며 말을 이었다.
  "당분간은 <산코 호텔>에 머물
생각입니까?"
  곽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여기서 지내세요.
우기고 있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붕대 갈아매고
소독하는 것쯤, 호텔에서 혼자 충분히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꿰맨 건 어떻게 하죠?"
  "실 뽑는건 대만으로 돌아간 뒤에....."
  "어쨌든 오늘 하루만이라도 병원에서
묵도록 하세요."
  곽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걱정을 끼쳐 미안하군요."
  "그렇게 해 주세요. 그리고 호텔을 옮길
적엔 나한테 알려 주시구. 내일 다시
오죠."
  사메지마가 일어서자, 곽영민도 침대에서
내려와 고개를 숙였다. 답례를 한 다음,
                  =사메지마는 병실에서 나왔다.


  9.

  야스쿠니도리를 건너던 나미의 눈에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른 채 웅크리고
걸어오는 난의 모습이 띄었다.
  널찍한 황단보도 저쪽 가장자리를 나미와
반대방향 - 역쪽으로 가고 있었다. 난은
나미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가냘픈 몸매를 푹 숙여 눈을 내리깐 채
묵묵히 걸어갔다. 난이 퇴근한 지금,
가게엔 양과 아키 두 사람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아키의 화풀이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미는 가슴이 아팠다.
  꿇어 앉은 양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쿡쿡 찌르거나 발로 걷어차는 아키의
떠올랐다.
  양의 일본말이 서툰 것을 꼬투리 잡아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면서
그때마다 발로 걷어찰 게 틀림없었다.
  반대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인파에
끝없이 떠밀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들 자기가 <장미의 샘> 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훼방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나미는 왼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 헤어진 회사원이 준 선물이었다.
비싼 건 아니었지만,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시계를 백 속에 넣었다.
  아키에겐 시계를 잊고 간 게 생각나서
되돌아 왔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아키에게 한잔 하러가자고 아양을 떨어야
할 것인가? 아키가 잠자리까지 원하고 있는
걸 빤히 알면서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든, 무슨 핑계를 대든, 양을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 그래, 그게 좋겠어. 잘 아는 대만
술집이 있다면서 함께 가자고 양을 끌고
나오는 거야. 아키가 뭐라든 일단 오늘밤만
무사히 넘겨놓고 보는 거야! 하지만 아키도
함께 가겠다고 나선다면?
  나미의 걸음걸이 속도가 축 쳐졌다. 빨리
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키의 의심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가슴이 무거웠다.
  아키가 충성을 맹세한 폭력단원이라는
조직원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야쿠자들과 사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각성제를 맞고 있다면 야쿠자로부터
공급받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오늘 저녁만
하더라도 안절부절 못하다가 도중에 슬쩍
사라지지 않았는가. 약기운이 떨어져
견디다 못해 구하러 간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발걸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마약중독자가 식칼을 휘둘러 사람을
상하게 한 얘기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케부쿠로에서 일하고 있을 때, 낯익은
카바레 종업원이 얼굴이 파래져서 날뛰는
것을 직접 본 적도 있었다. 수많은 경관이
  점장 말로는 그 종업원이 각성제
중독자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스러웠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쳐대던 처절한 모습, 거의 벌거벗은
채 닫치는 대로 집어던지며 날뛰던 모습.
눈꼬리가 축 쳐져 있는 바람에, 처음엔
길에서 자주 만나던 종업원이란 걸
알아보지 못했었다.
  아키가 만약 그런 식으로 날뛰고
있다면.... (장미의 샘> 으로 갈 마음이 싹
가셔졌다.
  나미는 걸음을 멈추었다.
  카부키쵸 입구였다. 많은 사람들이 역
쪽을 향해 반대편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왜 그래. 아가씨?"
풍기면서 얼굴을 붙여왔다.
  "바람맞은 모양이로군."
  나미는 얼굴을 돌렸다. 남자의 오른팔이
어깨를 감아왔다. 나미는 세차게 뿌리쳤다.
  "이 손 치워! 멍청이 새끼!"
  나미의 날카로운 소리에 남자는 깜짝
놀라며 물러섰다.
  "겁나게 놀고 있군. 모처럼 인심 한번
쓰려 했더니...."
  나미는 못들은 척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내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뭔가를 혼자 중얼대고 있었다.
  나미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심호흡을
했다.
  어쨌든 가봐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미쳐 날뛰고 있다면 경관을 부를
생각이었다. 양에겐 안됐지만, 그래도
살해당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또 양이 불법취업자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 난 역시 중국 사람인가 봐.
  나미는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양에게
이처럼 신경이 쓰이는 것은 그가
중국인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북경어를
쓰는 중국인.....
  만약 지금 가게에 남아 있는 사람이 양이
아니라 난이었다면 -- 두려움을 무릅쓰고
이처럼 <장미의 샘> 으로 되돌아 가고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미는 카레라이스 전문식당이 있는
끝이 바로 <장미의 샘> 이었다.
  -- 무섭지 않아. 무서울 것 하나 없어.
처음 일본에 와서, 중학교에 입학해서 한반
아이들이 말을 걸어올 때 느꼈던 두려움에
비하면, 이 따위는 아무 것도 아냐!
  <장미의 샘> 입구의 셔터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반쯤 내려진 그대로였다.
  <장미의 샘> 주변 일대에는 엿보기집
(조그만 구멍을 통해 모델 아가씨 나체나
섹스 제스처를 구경하는 집). 패션 헬스.
소프랜드 (한때 터키탕으로 불리던 매춘집.
터키 정부의 항의를 받자, 비누거품을
사용한다 해서 소프랜드로 개명) 등이 몰려
있었다. 모두 영업이 끝난 시간이어서
골목은 어두컴컴했다.
  나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면서 셔터
  두들겨 패는 소리, 비명, 호통소리가
울려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심하게
두들겨 맞은 양이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는 셔터 틈으로 몸을 굽혀 안으로
들어섰다. 플로어는 불이 꺼져 캄캄했다.
  술과 담배연기가 뒤섞여 찌든 냄새가
물씬 거리는 가운데 한가닥 빛줄기가
보였다. 갱의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빛이
있었다.
  나미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 돌아가 버린 것일까. 나미는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카운터엔 아키의
세컨드백이 그대로 있었다. 아직 돌아가진
않은 것이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나미는 나직하게 불러보았다. 아무
소리가 없자, 소리를 조금 높였다.
  "아무도 안 계세요?"
  갱의실 도어가 천천히 열렸다. 역광 속에
키가 훌쭉한 남자 모습이 나타났다. 말은
없었다.
  "양씨!"
  나미는 안도의 안숨과 함께 부르짖었다.
양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소매긴 흰 폴로 셔츠에 진바지로 갈아입고
있었다. 오른손엔 물수건을 들고 있었다.
  나미는 다가섰다.
  "점장은?"
  양은 말 한마디 없이 나미를 응시했다.
얼굴 어디를 봐도 두들겨 맞은 흔적은
없었다.
  "안에 있어?"
  나미가 다그쳐 묻자, 양의 턱이 보일듯
말듯 움직였다.
  "점장니임...."
  나미는 스스로가 들어도 코에 걸린 것
같은 목소리로 부르면서 양의 어깨 너머로
갱의실을 살폈다.
  갱의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아키의
모습이 보였다. 상반신을 로커에 기대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자세였다. 얼굴을 반쯤
숙여 무릎 쪽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것
같았다.
  "점장님."
  다시 한번 부르면서 나미는 아키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비스듬히 숙여진 고개, 무엇보다도 턱을
가슴팍에 처박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전신의 피가 한순간 몽땅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미는 고개를 홱 돌렸다.
  양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죽은 거야?"
  저도 모르게 나미는 북경어로 물었다.
  양의 턱이 다시 한번 보일듯 말듯
움직였다.
  "당신이 죽였어?"
  역시 북경어였다.
  "그래!"
  양도 북경어로 나지막하게 대답하면서
  "도망쳐요!"
  나미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이 사람, 폭력단 멤버예요. 이 근처에
패거리가 득시글 득시글 해요. 눈치채기
전에 빨리 도망쳐야 되요!"
  양의 눈이 번쩍하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지
나미는 알 수 없었다. 난처해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재미있어 하는 것 같이도
보였다.
  "어쨌든 빨리 나가요, 여기서!"
  오금이 저렸다.
  양이 참다 못해 아키를 내동댕이친 게
틀림없었다. 운나쁘게도 급소를 부딪친
아키는 그만 숨이 끊기고 만 것이었다.
  "너도 함께?"
  "그렇잖으면......"
  나미는 양을 쏘아보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말없고 얌전하던
양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 이 사람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구나.
누구나 짐작 못한, 엄청 강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두려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양도 나미의 속마음을 읽은 것 같았다.
  "잠깐만 기다려 줘."
  양은 나미가 보는 앞에서 물수건으로
갱의실과 홀, 그리고 계산대 이곳 저곳을
훔쳤다. 자신이 손을 댔음직한 곳은
구석구석 깨끗이 닦았다.
  처음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해
있던 나미도 마침내 양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래도 소용없어. 만진 곳이 어디 한두
군데라야 말이지."
  "천만에. 내가 만진 곳은 전부 기억하고
있어. 청소할 적마다 그날그날 깨끗이
닦았어."
  기가 막혔다. 날마다 자기가 만진 곳을
일일이 깨끗이 닦아내고 있었다니.......
  양은 바로 눈앞에 시체가 나둥그러져
있는데도 태연한 얼굴로 자기 할일만
계속했다.
  "자, 이제 끝났어!"
  양은 물수건을 로커에서 꺼낸 큼직한
쇼핑백에 던져넣었다. 쇼핑백 안에는 양의
제복이 들어 있었다.
  "이제 가도 돼!"
태연한 말투였다.
  사람을 죽여놓고 이처럼 태연하다면
상대방이 기가 질리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양이 너무나도 침착했기 때문에 나미는
공포감보다는 오히려 망설임이 앞섰다.
  아키가 죽은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 숨이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양도 그걸 알고 있으면서 자기를 놀려
주느라고 저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까닭이 없었다.
  양과 아키가 눈을 맞춰 자기를 놀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미는 다시 한번 아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었지만,
아키 한쪽 코에선 피가 한줄기 흘러
말라붙어 있었다. 얼굴색도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 틀림없이 죽은 것이었다.
  멍청하게 서 있는 나미를 남겨놓고 양이
먼저 성큼성큼 출구쪽으로 걸어갔다.
  "왜 그래?"
  양이 돌아보면서 채근하듯 말했다.
나미는 머리를 내저었다. 이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양이 카운터 위에 놓여
있던 아키의 세컨드백을 집어들어 쇼핑백에
담고 있는 게 보였다.
  이어서 양은 셔터 틈 사이로 바깥을
살폈다.
  "서둘러!"
  양이 짧게 소리쳤다.
  나미는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넣었다.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양이 팔을
붙잡았다.
  "뛰지 마! 보통 때처럼 태연히 걸어!"
  말을 마친 양이 물수건 쥔 손으로 셔터를
잡아당겨 바닥까지 내렸다. 발끝으로 셔터
끝을 밟아 고정시킨 다음, 나미 팔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나미는 겁에 질린 채 양이 끄는 대로
따라 걸었다.
  팔을 움겨잡은 양의 손아귀엔 별로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도망칠 마음이 있었다면
간단히 뿌리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미는 그럴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겁에 질린 것은 사람이 죽어
있다는 상황 때문이었지, 죽인 양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아키에게는 안됐지만, 그의 죽음에 가슴
아파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잘
됐다는, 그래서 속이 후련한 느낌이 더
강했다.
  역으로 가는 큰길로 나와서야 양은
나미의 팔을 놓아 주었다. 두 사람은
인파에 묻혀 나란히 걸었다.
  "어쩌죠, 지금부터.....?"
  나미가 물었지만 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수할 생각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날마다 지문을
닦아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는 곳이 어디야?"
  양이 물었다.
  "싱오쿠보. 신주쿠 역에서 한 정거장."
  "그래?"
  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면 지금까지 양이 어느
누구와도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양의 출신지와 주소는 물론, 나이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장미의 샘> 에서 양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키 뿐일 것이라고 나미는
생각했다.
  양은 <장미의 샘> 셔터에 내다붙인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든 게 분명했다.
아키라면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받아들일
사람이었다.
  양과 난에게 월급을 지불하는 것도 -
아마도 두 사람은 아직 한푼도 받지 못했을
터이지만 - 아키였다. 월급이 얼마로
결정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속보다 휠씬
낮춰 지불할 생각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불평을 늘어놓으면 불법취업자로
몰아세워 입을 막아 버릴 생각으로 있었을
것이다.
  야스쿠니도리 횡단보도에서 두 사람은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갈 곳, 마땅찮죠?"
  나미가 물었다. 양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양은 똑바로 길 건너편을 쏘아보고
있었다. 나미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룻밤 정도라면......"
  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미를
바라보았다.
  "날 도와줄 생각인가?"
  "싫어요?"
  신호가 바뀌었다.
  몰렸던 사람들이 무너지듯 횡단보도로
내려섰다. 사람 물결에 밀리듯이 양과
나미도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양은 말없이 성큼성큼 걸었다.
  쫓아가느라고 종종걸음을 치면서 나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뭘 도와 주면 되죠?"
  양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뒤따라
오다가 부딪칠 뻔한 나미가 당황해서
버티느라고 비틀거렸다.
  휘청대는 나미의 팔을 양이 붙잡았다.
아까보다 휠씬 힘이 실려 있었다.
  "니네 집으로 가자!"
  양이 결심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10.

  이튿날 출근하자마자 사메지마는
하나조노 신사 사건을 모모이 과장에게
보고했다. 오전 시간은 대부분 그 일로
보냈다.
  곽영민이 정말 대만 경관인지, 본청
국제수사과에 확인 요청을 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곽이 상해사건의 피해자인
동시에, 또다른 사건의 피의자라는
사실이었다.
  곽이 내사중인 오쿠보 1쵸메 상설
도박장에 드나들고 있는 것은 사메지마가
바로 목격자였다.
  만약 곽이 틀림없는 경관이라면, 무슨
있느냐 하는게 문제의 초점이었다.
  현 단계에서는 곽영민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쪽에서 내사하고 있는 게
탄로나기 때문이었다.
  내사는 본청 보안1과와 신주쿠 방범과가
공동으로 맡아 하고 있었다. 신주쿠
서에서는 과장보좌인 신조를 비롯해서
4명이 참가하고 있었다. 그런 판국에
사메지마가 어설픈 짓을 했다가는 모든 게
헛수고로 끝나고 마는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모모이 과장과 그 문제도
의논해 보고 싶었다. 경우에 따라서 본청
보안 1과가 모모이에게 쓸데없는 짓
그만두라고 호통을 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환이 상설 도박장 판주인과 손은 잡고
있는건 아닐까?"
데스크 워크를 맡은 과원이 몇몇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 오쿠보 1쵸메 감시반
멤버는 한 사람도 안 보였다. 사메지마와
모모이의 대화에 끼어들 사람도 없었다.
  어떤 경우든 단독행동을 하는 사메지마의
입장은 경관 연속 살해사건 (<소돔의 성자>
참조) 이후에는 변함이 없었다.
  "감시반 기록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겝니다."
  "신조나 가와다에게 한번 얼굴을
확인시켜 보는 게 좋을거야. 만약 허환이
관련되어 있다면, 상해 사건 원인이 도박
트러블일 가능성도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곽영민은 내게 거짓말을 한 게
되는군요."
  모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임은 분명합니다. 그것고 대단한
베테랑의...."
  "깨끗한 사람 같던가?"
  "글쎄요. 수사에 도움이 된다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으로 뵙디다."
  곽영민이 폭력단 담당이란 사실이 그의
결벽성을 판단하는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일반적으로 폭력단 담당 형사는
자신이 원하든 않든간에 폭력배들과 관계가
깊어지게 마련이었다.
  관할 구역 안에 있는 폭력단 사무소를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한번은
방문하게 되는 것이었다. 또 주요 간부의
이름, 얼굴 모습, 신체적인 특징도 파악해
둬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서로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고 마는
  정보 수집을 위해 조직원들과도 자주
만나야 했다. 처음엔 차 정도로 끝내다가
다음 단계는 식사, 그 다음은 함께
술잔까지 기울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 모든 비용을 야쿠자가 부담하면서
몰릴 위험도 있었다. 때문에 형사는 자기가
먹고 마신 것은 자기가 부담하는 게
상례였다. 그러나 커피값 정도라면 몰라도,
폭력단 간부급이 이용하는 레스토랑이나
술집쯤 되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한정된 정보 수집비로는 어림도 없었다.
때문에 형사들은 자기 월급에서 쪼개어
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경관의 월급은 결코 많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돈 많은 사람이 1만
엔어치 술을 샀다 해도, 돈 없는 사람이
일이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은 대등한
사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관과 야쿠자 사이는 그렇지
못했다. 어제 술대접을 받은 경관이 오늘
영장을 들고 체포하러 가야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금전관계 만이 아니었다.
  폭력단원으로부터 범죄와 연관된 정보를
얻는다 해도 그것을 확인하러 현장으로
출동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 시점에서 모두를 현행법으로
체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범죄행위를 시인(是認) 하는 자리에서 또
다른 범죄행위가 진행되는 경우도 더러는
있었다.
  가령 각성제 밀매를 내사중인 수사관이
이루어질 예정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수사관이 손님을 가장해서 잠입한다.
그러나 그 마작집에서는 허가 사항을
무시하고 도박이 진행중이었다. 손님을
가장한 수사관도 어쩔수 없이 도박에
참가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함정수사라는 비난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일본 경찰은 이러한
방법을 기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약 단속반은 예외였다.
사법권을 갖고 있는 것은 일반 경관과
마찬가지이지만 수사방법엔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마약단속국이 법무성이 아니라 후생성
(厚生省, 보사부에 해당) 관할이기 때문에
그러한 차이가 생긴지도 몰랐다.
드나드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모모이는 그 까닭이 궁금했다.
  일본에 머물고 있는 동안 곽영민에겐
수사권이 없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설령 곽이 일본으로 도망친 대만 범죄자를
쫓고 있다 하더라도, 범인의 소재파악이나
신병확보는 일본 경찰이 할 일이었다.
  곽이 할 수 있는 일이란 ICPO
(국제형사경찰기구. 인터폴) 를 통해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하는 것 뿐이었다.
  따라서 비밀도박장 출입을 추궁하게
되었을 때, 수사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만일 도박에 참여했다면
도박 피의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곽이 심심풀이로 드나들었을지도
모르겠군."
  모모이가 말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관광여행 중에
낯익은 대만 폭력배를 만나, 재미있는 곳을
안내받은지도 모르죠."
  "자네가 봤을 때, 호스테스를 동행했다고
했었지?"
  "네. 동행한 두 여인 모두 대만인
같더군요."
  "어젯밤은 혼자였나?"
  "혼자였습니다."
  모모이는 보일듯 말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제쯤 덮칠 생각입니까?"
  사메지마가 물었다.
  "글쎄, 아직은 시기가 아닌 것 같아.
허나 이번 상해사건으로 본청에서도 계획을
앞당길지도 모르겠어."
좋겠군요."
  모모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박장건은 본청이 앞장선 사건이야.
이쪽에서 도와달라고 부탁한게 아니니까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오늘 한번 더 곽을 만나볼 예정으로
했지만, 오쿠보 건은 모른 척할
생각입니다."
  모모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곽이 누군가를 추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아니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죠. 제가 받은
인상으론 한번 노린 상대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타입이더군요."
  "누군가처럼 말인가?"
지었다.
  "그 이상인 것 같더군요. 거치적거리는
녀석은 서슴없이 없애버릴 사람입니다."
  "그런 사내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쫓는
피의자가 이 신주쿠에 숨어 있다면 우리도
골치깨나 썩여야겠군."
  사메지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경우에 따라선 곽을 일단 체포할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진
않아. 어쨌든 그도 우리와 같" 경관이니까
말야.'
  "동감입니다. 오늘 만나 좀더
깊이........."
  사메지마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모모이
책상 위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모모이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네, 방범괍니다. ....네. .....네, 여기
있습니다."
  모모이는 사메지마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자네 전화야. 국제수사과야."
  사메지마는 전화를 받았다.
  "사메지맙니다."
  "어제는 수고 많았어."
  귀에 익은, 조금은 체념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아라키요. 당신이 문의한 건으로
이렇게....."
  "언제 복귀했나요, <국제>로?"
  사메지마는 놀랐다는 투로 되물었다.
  "복귀한건 아냐. 다만...."
  아라키는 일단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있어. 어제 그 건으로 말야."
  "좋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죠?"
  "당신을 이곳으로 오랄 수도 없구,
그렇다고 내가 거기로 가는 것도 싫구....
어디 적당한 곳에서 차나 한잔 하는 게
어때?"
  사메지마는 손목시계를 흘낏 보았다.
오후 1시 20분이었다.
  우선 곽영민부터 만나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라키를 먼저 만났을
경우, 그가 곽영민과의 접촉을 못하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사메지마의 망설임을 아라키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또 만날 생각이지, 문제의 그 대만인?"
  "네."
  "그전에 나를 만나 줬음 좋겠어."
  빈틈없는 사내라고 사메지마는 속으로
감탄했다.
  "알겠습니다."
  "곧장 나올 수 있을까?"
  "네."
  "그럼 2시 조금 지나서 그 언저리 호텔
커피숍 어떨까? 가능하면 그쪽 서원들의
발걸음이 없는 곳" 좋겠는데.....'
  사메지마는 니시시주쿠에 있는 호텔
이름을 알려 주었다.
  "알았어. 지금 떠날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사메지마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모모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아라키 경정, 잘 아세요?"
  모모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들었어."
  "스스로를 낙오자라고 부르던데요."
  모모이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느릿느릿한 말투로 뒤를 이었다.
  "소문은 들었어. 허나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야.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할 게
못 돼."
  모모이는 한동안 사메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한마디 붙였다.
  "꽤나 날카로운 사람 같더군."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모이의
말에 아라키를 조심하라는 충고의 뜻이
담겨 있음을 개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라키가 약속한 호텔 커피숍에 나타난
것은 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멋쟁이 차림이었다.
  사메지마 건너편에 풀썩 몸을 걸치면서
아이스커피를 시킨 다음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말할 때마다
입술 사이에 낀 담배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두 사람 모두 신원을 확인했어.
곽영민은 대북 경창국 소속 형사였어.
허환은 열세 살때부터 경찰신세를 진
망나니구."
  "허브러더스라는 갱단 멤버였다면서요?"
  "다섯 형제의 막내야. 일제 검거 때
총격전이 벌어진 바람에 둘은 사살됐어.
둘째는 종신형으로 복역중이야. 맏형은
동료 손에 찔려 죽었어. 체포 당시 허환은
미성년이었구, 범행에 큰 관련도 없었던
탓에 실형은 면했어. 풀려난 직후
숨어들었던 것 같아."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곽영민의
말했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일본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오. 아마 <심야 레스토랑> 호스트로
잔돈 푼이나 벌어 쓰고 있었겠지."
  "오쿠보 1쵸메와는 관련이 없나요?"
  "오늘 아침, 요시다가 확인해 봤어. 본
적이 없는 얼굴이라더군."
  "그렇습니까?"
  "심문은 당신이 맡았나?"
  "통역이 필요합니다."
  사메지마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환이 설령 일본말에 불편이 없다
하더라도, 시침을 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
  "상해 사건이니까요. 보기에 따라선
살인미수일 수도 있구요."
  아라키는 말없이 담배연기를 훅
내뿜었다.
  "오쿠보건과 연관이 있다면, 그쪽을 끝낼
때까지 기다릴 수는 있겠습니다만...."
  아라키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모두 대만인이긴 하지만,
허환이 칼을 휘둔 것은 일본 국내에서
일어난 상해사건이었다. 일본 법에 따라
허환을 재판에 회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곽에 대해 과잉방어 책임을
물을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곽에 대해 궁금한 게 없나?"
  아라키가 불쑥 내뱉듯이 말했다.
  "많죠."
어쩡쩡하게 끝내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하다구먼. 고문 혐의로 몇 번인가
피소될 뻔했다는 얘기도 있어."
  사메지마는 아라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국제수사과의 공식적인 조회에 대만측이
그런 것까지 알려왔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계급은 경위. 고집불통이 아니었다면
휠씬 출세한 사람이야."
  "저쪽에서 그런 것까지 알려왔나요?"
  아라키는 고개를 내저으며 싱긋 웃음을
흘렸다.
  "지금 얘긴 저쪽 형경대대 (刑警大隊)
총대장, 이쪽으로 말하면 총경이
개인적으로 알려 준 게야. 그 총경, 곽영민
  "꽤 친한 사인가 보죠?"
  아리키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알고 지내는 정도야. 대만 폭력배
문제로 오가기도 했어. 이쪽에서 검거한
녀석을 인수하러 하네다 (羽田) 로
날아오기도 했으니까. 그런 인연으로 해서
곽.허 두 사람에 대한 자료도 빨리 보내 준
게야."
  "내사중인 비밀도박장에 드나들고 있다는
것도 저쪽에 알려줬나요?"
  "아니. 허나 저쪽에서 은근히 묻더군.
곽이 일본 야쿠자와 어울리지 않느냐구
말야. 곽은 대만에 진출한 일본 야쿠자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 깡그리 몰아내겠다고
벼르고 있는 모양이야."
  "재미있는 사람이로군요."
당신을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괜찮습니다. 우리 과장님도
그러더군요."
  "당신네 과장, 된 사람이야. 그런 일만
없었다면 본청에서 불러들였을 게야. 참,
당신 목숨을 구해 준 적도 있다지?"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모모이는 피의자를 사살했다. 모모이는
물론, 사메지마로서도 평생의 짐으로 남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건 이후, 모모이는
그 일에 대해 지금까지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곽이 정말 일본으로 놀러온 줄로
생각하나?"
  "글쎄요."
  사메지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 있나요?"
  사메지마의 말에 아라키는 요하게도
빠져나간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누군가를 추적하고 있다면 중대한
월권행위야. 어쩌면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경정님은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아라키는 대답 대신 아이스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서로가 허실허실로 속마음을
더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키는 아이스커피 글래스에 눈길을
박은 채 입을 열었다. 글래스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줄줄 흘러내려 종이받침으로 스며
들었다.
  "가령, 예를 들어 곽이 중요 용의자를
쫓고 있다고 치자구. 원칙대로 하면 그
일본 경찰에게 맡겨야 마땅해. 대만 경찰은
ICPO를 통해 수배만 하면 되는 거야. 허나
곽은 절대로 그 녀석을 일본 경찰에 맡길
생각이 없었어. 왜냐하면 그 녀석이
일본에선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야.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경찰은 자국 내 범죄만으로도 눈코 뜰
사이가 없어. 외국 범죄자 검거에 전담
수사반을 편성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뜻이야. 만약 곽이 쫓고 있는 용의자가
교묘한 지능범이라면 일본 경찰이
검거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어.
해서 곽은 월권행위임을 알면서도 휴가를
얻어 일본으로 쫓아온 게야"
  "지금 말씀하신 가설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 것 같군요."
말했다.
  "어떤 조건?"
  "첫째, 곽이 무슨 까닭으로 그
용의자에게 그렇게 집착하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폭력단 전담의 베테랑 형사라면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텐데도 2주일씩이나 휴가를 얻어
외국으로까지 쫓아왔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휴가 때 만이라도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게 형사들 마음
아닙니까? 휴가를 얻은 폭력 전담반
형사라면 폭력배와는 얼굴도 맞대기
싫어하는 게 보통 아닙니까? 그리고 또
하나, 그 용의자가 일본에 있다는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대만 폭력배는 일본 뿐만
않습니까?"
  "대만 폭력단에 대해 조사를 해 봤나?"
  "조금은."
  모모이에게 보고하기 전에 사메지마는
먼저 신주쿠 도서관으로 갔었다. 덕분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그 결과 사메지마는 대만 폭력단이 세계
최대의 조직 폭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차이니즈 마피아로 불리는 중국인
범죄조직은 남북 아메리카는 물론 유럽으로
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대만. 홍콩. 타이
등지와도 깊은 유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차이니즈 마피아 조직의 핵심은 마약
네트워크였다. 지역별 인적 교류도
빈번했다. 위험을 느끼면 금방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 특히 미주 대륙과
피하는데 장기 중의 장기였다.
  대만 폭력배 뿐만 아니라 중국인
범죄조직의 횡적인 유대는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사불란한 단일 조직으로 결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점은 대만 폭력배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이 여러 조직에 가입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일본 야쿠자의 경우, 한
사람이 두 군데 조직에 가입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직관리
면에서 본다면 일본 폭력단이 휠씬
철저했다.
  대만에서는 조직내의 하극상 갈등도 자주
일어났다.
  "당신 말대로야. 보통 형사라면 일부러
일본까지 원정오진 않았을 게야."
  "곽이 수사 때문에 일본으로 왔다는
확증을 가지고 계신 것 같군요."
  아라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한걸음 더 다가섰다.
  "저보구 어쩌라는 겁니까, 경정님?"
  아라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당신보구 이래라저래라 말할
입장이 아니잖아?"
  사메지마도 웃으면서 담베에 불을 붙여
물었다.
  "비공식적으로 경정님에게 알려왔군요,
곽의 방일 목적에 대해서......"
  "그런 셈이야. 아까 얘기했던 대북
경찰국 형경 총대장이 알려왔어. 협력을
요청한다는 얘기는 안했어. 아니, 못했다는
게 옳을 게야."
  "그래. 만약 내가 눈앞의 출세만
생각했다면 즉각 웃분에게 보고했을 게야.
그랬으면 곽의 일본에서의 활동에도 제동이
걸렸을 게구....."
  "그렇게 하진 않았군요."
  "그래."
  "왜요?"
  "마약과 권총 루트 때문이었어. 곽이
쫓고 있는 건 대만 폭력배의 거물이야.
녀석이 법석을 떨면 일본 야쿠자가 끼어들
건 분명해. 지금 일본에 있는 대만
폭력배는 옛말과 달리 먹고 살기에 급급한
녀석들이 아니야. 일본 야쿠자가 대만에
진출하면서 교환 학생 흉내를 내고 있는
셈이야. 간부 후보생을 서로 교환해서
교육하고 있거든. 무슨 일이 터졌을 땐
두둑하다고 들었어. 일본 젊은 녀석들은
맡은 임무와 검거됐을 때 받을 형기 (刑期)
를 계산해 가면서 눈치껏 몸을 사리는 데
반해, 대만 녀석들은 명령에 철저히
복종한다는 게야."
  "곽이 쫓고 있는 녀석도 일본 조직폭력에
가입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흥정을 하고 있거나........"
  "어떤 형식으로든 일본 야쿠자의 보호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로군요."
  아라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아. 마약과
권총을 거래해 온 일본 조직에 몸을
의탁하고 있겠지. 곽이 그걸 알고 혼자
일본으로 쳐들어온 게야."
  "하지만 영장도 없이 뭘 어떻게 손을
씁니까? 설마 납치해서 대만으로 끌고 갈
생각은 아니겠죠?"
  "거기까진 나도 잘 몰라."
  "곽이 쫓고 있는 게 어떤 녀석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아라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녀석에 대해선 대만 총대장도 좀처럼
입을 떼려 하지 않았어. 내게 말해 주면
일본 경찰이 선수를 칠까 봐, 그래서 곽이
겉돌아 버리는 걸 염려하는것 같았어.
협력한다는 약속이 없으면 얘기해 줄 수
없다는 게야. 곽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관광여행을 가장하겠다는 것이었어."
  "그랬었군요."
  대만 경찰은 가능하면 일본 경찰이 곽을
지원해 주길 바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판단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곽의 표적에 대해선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나도 귀가 솔깃했어. 막말로 해서, 곽이
설치고 다니면 일본과 대만 밀수 루트가
드러날 게 뻔하잖아? 그걸 두들겨 부술 수
있다면 나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당신한테 이런 얘길 하는 건 당신도
같은 낙오자이기 때문이야. 잠깐, 당신에게
컴백 야심이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사메지마가 입을 뗄 틈도 주지 않고
아라키는 말했다.
  사메지마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아라키는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데가
있었다. 범죄자 검거를 출세의 수단으로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숨기려 하지도
  "결국 협조 약속은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응, 하지 않았어. 내가 비록 낙오자이긴
하지만, 사나이답지 않다는 얘기까지 듣고
싶지 않았거든. 거짓 약속으로 남의
발목이나 잡는 간교한 관료 흉내는 내고
싶지 않았어."
  아라키는 얼굴까지 찡그리면서 말했다.
실제로 그런 인간도 적지 않았다. 아라키도
출세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타입이긴
했으나, 그래도 사나이다움을 지키려는
점에서 그런 인간과는 구별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곽이 쫓고 있는 게 어떤 녀석인지 결국
모르신다는 말씀이군요."
지경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왜 곽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나요?"
  "얘기해 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때문이야. 또 녀석의 목적이랄까, 일본에
온 진짜 이유를 우리가 알고 있는 걸 눈치
채면 자취를 감출 염려도 있거든.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 것 아냐?
해서 모른 척하고 있는 게야."
  "만약 곽이 쫓고 있는 녀석이 일본
조직폭력과 관계가 없다면 어쩔
생각입니까?"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만에
하나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결국 난 닭
쫓던 개처럼 지붕만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모른 척하고 있을
수밖에. 지금까지의 얘기, 공식적으론 존재
하지 않는 것이나까 말야."
  "만약 들통이 나면?"
  "웃사람에게?"
  사메지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라키는
한마디로 잘랐다.
  "관계 없어. 이미 난 바닥에 떨어진
신세이니까!"
  사메지마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본청 보안 1과를 동원한 건
경정님이었죠? 곽을 옭아넣고 싶어서....
직접 그곳으로 출장근무까지 하고
있는거죠?"
  "웃분을 설득하는 데 꽤나 고생했어.
진짜 이유는 덮어두고 말야."
였습니까?"
  "입국한 직후, 입국관리국에 있는 아는
사람에게 미리 부탁해 뒀었지. 덕분에
호텔까지 손쉽게 알아낼 수 있었어. 허나
내가 직접 미행할 순 없는 것 아냐? 또
현장요원이 모두 당신 같지 않아. 아니
멍청이들이지. 자신이 없었어. 그런
멍청이들이 대만 제일의 민완인 곽을
들키지 않고 미행 감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곽이 무기를 휴대하고 있는 건 아니죠?"
  신경이 쓰인 사메지마가 불쑥 물었다.
만약 무기를 휴대하고 왔다거나, 여기서
은밀히 입수했다면 귀찮아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르겠어. 빈손일 가능성이 높아. 관광
테니까 말야."
  사메지마는 길게 숨을 내뿜었다.
  "결국 저보구 곽을 감시해 달라는
뜻이로군요. 이번 상해사건은 덮어
버리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런 뜻이야."
  아라키는 사메지마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에겐 큰 도움이 안 되는 일임은
알고 있어. 헌데도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
건, 당신은 이해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야. 또 하나, 곽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될 폭력단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신주쿠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녀석들일
게야. 마약과 권총으로 단물을
빨아먹는...."
  "날 뻔뻔스런 놈이라고 생각하나?"
  아라키가 나지막하게, 그러나 물어 뜯을
듯이 물었다.
  "타이에서 근무할 때,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사메지마의 말에 아라키는 놀랐다는 듯
얼굴이 굳어졌다. 눈을 가늘게 떠서
사메지마를 쏘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비자였어. 일본으로 여자를 송출하는
업자에게 비자 편의를 봐 줬어. 변명할
생각은 없지만 폭력단은 아니었어. 상대는
현지에서 사귄 술집 마담이었어. 일본 가서
돈을 벌어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약해졌지. 물론 사례도
꼬박꼬박 받았지만....."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빈부의 격차가 극단적으로 심한 나라야.
내가 주재 근무할 때만 해도 거지왕초가
시골로 돌아다니며 어린 아이들을
사들였어. 눈을 찢고 팔다리를 잘라
불구자로 만들어 거리에 내세우는 거야.
육신이 멀쩡한 아이들보다 벌이가 좋았기
때문이야."
  아라키는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거지왕초를
패죽이고 싶은 마음이었어. 허나 그들도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게야.
어쩌면 부모가 내다 버린 아이들을 그렇게
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구. 나도 그런
이이들을 방콕 거리에서 많이 왔거든."
  "잘 알겠습니다."
  "모든 게 경정님 생각대로 될지 어떨지
자신할 순 없지만, 일단 맡아보죠. 곽이
신주쿠에서 대만 폭력배를 샅샅이 뒤져
고문만 하지 않는다면 그냥 지켜보기만
하죠."
  "고마워!"
  "하지만 곽이 내 속셈을 눈치챈다면 모든
게 허사가 되고 맙니다.'"
  "글쎄.... 만약 곽이 당신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접근해 올지도 모를 일이야."
  "그렇게 되면 양쪽을 저울질
해야겠군요."
  "내가 필요로 하는 건 일본 조직폭력의
밀수 루트야. 일이 커지기 전에 곽은 젖혀
버려야해. 적당한 선물을 줘서 말야."
  "오쿠보 1쵸메 도박장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그까짓 건 아무래도 좋아. 곽영민 건이
마무리된 뒤에 덮쳐도 괜찮아."
  사메지마는 싱긋 웃었다.
  "경정님도 도박을 좋아하는군요,
그렇죠?"
  아라키는 담배를 붙여 물면서 대답했다.
  "수사란 것도 도박과 다를 게 하나도
없잖아? 안 그래? 법원이 판주인이
돼서......"
  아라키는 진지한 얼굴로 한마디
덧붙였다.
  "신세, 잊지 않겠어!"


  11.

  곽은 병원을 나와 호텔로 돌아가 있었다.
사메지마는 <산코 호텔> 프론트에서 곽의
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사메지맙니다. 지금 로비에 와
있습니다만...."
  곽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올라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비즈니스 호텔 중에는 숙박객 이외의
사람이 방에 드나드는 걸 꺼리는 곳이 적지
않았지만 <산코 호텔>은 달랐다.
사메지마가 보기엔 주로 외국 비즈니스맨,
그 중에도 아시아계 손님이 많은 것
같았다.
  곽이 머물고 있는 방은 5층에 있는
싱글이었다.
  사메지마는 자동판매기에서 캔 2개를
뽑아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노크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도어가
열렸다. 곽은 호텔 목욕 가운을 입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좁은 방이었다.
싱글베드와 자그마한 라이팅 데스크로 방이
가득 찼다. 베드 옆, 양복 몇벌이 걸려
있는 클로지트 밑에는 삼손나이트 트렁크가
놓여 있었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 저녁 나절의
러시아워 소음이 밀려들고 있었다. 방은
비좁았으나 전망은 나쁘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들고 온 캔커피를 라이팅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어서 오십시오."
 사메지마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상처는 어떻습니까?"
  곽은 베드에 걸터 앉았다. 침대 위엔
약봉지가 놓여 있었다.
  "붕대를 갈아매고 있었군요."
  "괜찮습니다."
  사메지마는 재떨이로 눈을 돌렸다.
깨끗했다.
  "담배 피울테면 피우세요. 내게 너무
신경쓸 필요 없습니다."
  얼른 눈치를 챈 곽이 말했다.
  "담배, 안 피우시나요?"
  "어쩌다 피울 때도 있습니다."
  "피우시겠소?"
  사메지마는 담배를 꺼내었다.
  "고맙소."
 곽이 한대 뽑았다. 사메지마도
빼어물면서 라이터를 켜서 내밀었다.
  한동안 사메지마의 눈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곽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 신원, 조사해 보았소?"
  "네, 허환도 함께. 당신 말이
틀림없더군요."
  "재빠르시군요."
  "허환은 아직 심문할 만큼 회복되지
않았더군요. 턱이 깨어져 있으니까
당분간은 무리라고 봐요."
  "날 검거할 생각이오?"
  "아뇨."
  "지금 당장 대만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데두?"
  "당분간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잖았소."
 곽은 콧구멍으로 담배연기를 뿜어내었다.
  "허나 그런 몸으로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겠군요."
  "괜찮아요. 난 아무렇지도 않소."
  "이곳 저곳 좀 둘러봤소?"
  "조금은. 신주쿠, 제일 재미 있었소."
  곽은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대만에도 있죠, 신주쿠 같은 곳?"
  "만화."
  "만화?"
  곽이 몸짓하는 걸 보고 사메지마는
라이팅 데스크 위의 메모지와 볼펜을 집어
주었다.
  <만화(萬華)>
  "흠! 만 송이 꽃이로군. 이름만 봐도
미인들이 득실대는 곳 같군요."
  "법죄자도 득실대고 있소."
  "신주쿠와 비슷합니까?"
  "조금은. 전혀 닮지 않은 면도 있소.
그러나 폭력배는 많아요."
  "일본 야쿠자도?"
  "거리에선 한 사람도 볼 수 없소. 그들은
호텔. 레스토랑. 나이트 클럽 갈 때도
자동차를 타니까."
  "정기적으로 대만을 방문하는 야쿠자도
있소?"
  "물론. 대만에 출자한 사람 많아요. 최근
대만 암흑 사회도 기업체를 많이 거느리고
있소. 그런 업체의 고문. 사장, 모두 BMW
타고 다니죠."
  "기업화가 늘어나고 있다구요?"
  "큰 조직은 모두 그래요. 톱은
비지니스맨, 일이 터졌을 때 웃통 벗고
검거되는 건 송사리 뿐이죠."
  "어디든 마찬가지로군요."
  "일본도?"
  "톱클래스 간부들은 멋이나 부리며
거들먹거리죠. 좀처럼 꼬리를 잡을 수
없어요. 변호사를 고용해서 어떻게 하면
걸리지 않나 연구하기 때문이죠."
  곽은 머리를 끄덕였다.
  "현명한 방법이군요. 대만 폭력배도 일본
야쿠자한테 많이들 배우게 되겠군요."
  "그러나 언젠가는 꼬리가 잡히겠죠. 나나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엔 어려울지
모르지만, 언제가는 반드시....."
  "당신, 그걸 굳게 믿고 있군요."
  "물론! 비합법적으로 돈을 벌거나,
사람들을 협박해서 남보다 잘 살아보려는
그런 녀석들이 거들먹거리게 놔 둘 수는
없소!"
  곽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 훌륭한 경관이오!"
  "글쎄요. 훌퓽한 경관은 따로 있다고
봅니다만."
  "어떤 사람?"
  곽이 물었다.
  "애국심이랄까.... 정권 수호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경찰 제도의 가장 큰
목적은 정치 권력을 정적에게 넘겨주지
않는 데 있는 것 아니오? 도둑놈보다
반정부주의자 단속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
훌륭한 경관이겠죠."
  "당신은 그러지 않단 말이군요."
  "난 이 나라에 혁명이 일어나리라고는
보지 않소. 아무리 반정부주의자가
없어요. 그럴 정도로 국민 지지를 받는
그룹도 없어요. 물론 테러 행위가 없는 건
아니오. 허나 대부분이 자기 선전을
위해서, 자기 존재를 과시하기 위한 것일
뿐, 지지자를 늘이기 위한 건 아니라고
봐요."
  "다른 나라가 파괴 공작을 시도해 오면
어떻게 되죠? 내가 보기엔 일본 사람 너무
안일해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금방 잊어
버려요. 자기들이 저질렀던 일도, 당한
일도....."
  "그게 일본인 성격인 건 사실이오.
당신이 지적한 것과 같이 일본인 만으로는
쿠테타가 어려워요. 외부의 도움이 있다면
성공할 수도 있겠죠. 허나 그런 경우도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지탱하지 못해요. 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만약 어떤
나라가 일본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그때는
경찰 아니라 군대가 나서는 게 마땅합니다"
  "일본과 대만, 엄청나게 다르군요."
  "아시아 선진국 중에서 일본만이
특수한지도 모릅니다. 정치적 긴장이
없어요. 대만에는 대륙 문제가, 한국에는
남북 문제가 있지만, 일본은 군사적 긴장이
없어요."
  "행복한 나라죠."
  "어떤 의미에선 그렇죠. 나이든 사람
가운데는 평화에 길들여진 현재의 일본을
걱정하는 사람도 많아요.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손 한번 못 쓰고 무너질
것이라구...."
  "그런 건 대만도 마찬가지요. 대만인
이주해 온 사람들은 지금도 중국 정부는
하나 뿐이라고, 자기들만이 정통 중국
정부라고 주장하고 있소. 대륙 정부는
가짜라는 거죠. 허나 젊은이는 달라요.
중국이 둘이라도 좋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별개의 나라다, 하고 말이오.
허나 대만 정부는 그런 주장을 용납
안해요. 우리를 앞세워 단속하고 있소."
  "난 당신 임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내가 체포하고 싶은 건 갱. 프로
킬러. 강도들이오. 만약 그런 녀석들에게
무기를 대 주는 외국인이 있다면 함께 싹
쓸어 버리고 싶소. 때문에 당신처럼
외국인과 폭력단을 구분할 순 없소."
  "당신 같은 경관, 일본에 많습니까?"
  "글쎄요. 별로 없을 게요. 이런 미묘한
문제엔 모두 몸을 사리니까요."
  "웃사람 눈이 두려워서?"
  곽의 얼굴엔 빈정거림이 번졌다.
  "그런 점도 있겠죠."
  "당신, 왜 경관이 됐나요?"
  사메지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당신은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뭐랄까,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내겐 어울리지 않는다, 꾸려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 거죠. 대학을 나와 회사에 취직해서
정년까지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회사원
아니었소. 또 경관도 온갖 규칙에 얽매어
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구.... 허나
내가 하는 일이 어떤 형태로 사회에
공헌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게
큰 매력이더군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경관이 됐다고나
할까요.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느냐
아니냐가 내겐 유일한 기준입니다. 물론
거대한 조직이니까 항상 순조로운 건
아니지만....."
  "경관, 좋아합니까?"
  "망설여질 때도 있지만 좋아해요. 물론
밉살스런 녀석도 적지 않지만."
  "어떤 사람이?"
  "덮어놓고 으스대는 경관. 입만 열면
국가 이익이 어떻구 저떻구 떠들어 대는
결심했죠.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 기구나
조직이 아니잖소? 경관은 일반 사람에겐
없는 힘을 갖고 있소.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지키기 위한 힘이지, 법률을 지키기
위한 건 아니라고 봐요. 나쁜 짓을 했다가
경관에게 용서를 비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죄송합니다> <한번만 봐
주십시오> 라고 비는 사람에겐 경관은
재판관인 동시에 법률이 제복을 입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는 존잽니다. 허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오. 법을 어긴
것과 경관에게 용서를 비는 것은 별개
문젭니다. 법률이 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때문에 경찰은 펜스나 울타리 같은
존재여야 마땅하다고 봐요. 그 펜스를
넘으면 자기 자신과 타인이 상처를 입게
이상 앞으로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경찰은
그걸 깨닫게 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허나 이 세상엔 펜스 바깥에서
태연히 살아가려는 녀석들도 있어요. 펜스
바깥으로 나가면 지름길이 있다는 것쯤은
모두 알지만, 대부분은 뛰어 넘으려 하지
않아요. 헌데도 당연한 것처럼 지름길로
접어 들면서, 말리는 사람들을 협박하는
녀석들을 그냥 못 본 척한다면 <뭐야?
우리만 바보 아냐> 하고 반발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죠. 그런 불평등을
용납해선 안되는 법이오. 세상에는 온갖
불평등. 불공평이 활개치고 있지만, 그런
불평등만은 모른 척할 수 없어요!"
  사메지마는 곽에게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할 자신이 없으면서도 열변을 토했다.
같은 경관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혼자 몸으로 외국까지
쫓아다니면서 자신의 짐과 싸우는
곽영민이야말로 자기를 이해해 줄 것
같기도 했다.
  곽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손을
내밀었다.
  "담배 한대 더 얻을까요?"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내밀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다른 경관에게 털어놓은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같은 일본인 경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곽은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사메지마를
똑바로 쏘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일본에
  "네, 알고 있어요."
  사메지마는 조용히 곽을 마주
쏘아보았다.
  "경관이 되기 전에 군대에 있었소.
육군이었소. 몸이 건장한 데다 수영을
잘했기 때문에 특수부대 훈련을 받은 뒤
금문도(金門島) 수비대에 배치되었죠."
  곽은 금문도. 마조도 (馬祖島) 라고 써
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두 섬 모두 대만 영토이지만 대륙 포대
사정거리 안에 들어 있었소. 대륙이 공격해
온다면 제일 먼저 노릴 것이 바로 이 두
섬이오. 때문에 수비대 훈련은 지독했소.
바다에 잠수해서 적과 싸우는 부대였소.
<수귀자> 라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칠
정도였습니다."
  곽은 <水鬼仔> 라고 써 보였다.
  "<수귀자>는 엘리트. 프로그맨 부대.
사격은 물론 격투기에도 발군이었소. 어제
당신이 본 건 태권도, 한국 무술이었소.
<수귀자>는 태권도의 달인들입니다. 한국
사범을 초청해서 필살기법만 배우고 있소.
<수귀자>는 전우애가 깊어 단결심이
강해요. 전우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진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사메지마는 말없이 곽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스물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셨소. 아버지는 대북, 나는 금문도....
그래가지고는 간병을 해드릴 수가 없었죠.
해서 상사에게 호소해서 군대에서 경찰로
옮긴 겁니다. <수귀자> 동료들과 헤어지는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형사
발령을 받았소. <이친운동(一淸運動)> 이
시작되었소. 소혹(掃黑) 이라고 해서 대만
사회에서 갱 폭력단을 일소한다는 대대적인
캠페인이었습니다. 검거 선풍이 불자
폭력배들은 국외로 - 홍콩. 일본.
볼리비아로 탈출했소. 어느 정도
조용해졌나 싶었으나 그 뒤, 1987년
본토와의 교류가 허용되자마자 블랙스타.
레드스타 따위의 총기류 밀수가 본격화되고
말았어요. 권총을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다시 폭력단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습니다. 배짱이 커져서 너도나도
갱으로 변신했구.... 대형 폭력단은
<이친운동> 때 혼이 난 바람에 모두
말았지만 소형 그룹은 갱단으로 재편성돼
은행강도. 보석강도. 유괴에 손대기
시작했어요. 허나 허브러더스 사건을
계기로 대형 폭력단도 갱과 관계를 끊어
버렸소. 위험한 일은 밑바닥 프로에게
맡기기 시작한 겁니다."
  "프로?"
  곽은 사메지마를 바라보면서 메모지를
잡아당겨 글자로써 보였다.
  "처음엔 홍콩 영화가 사용한 말이오."
  <직업흉수(職業兇手)>
  "킬러, 히트맨이란 뜻입니다. 졸때기
폭력배들은 모두 자신이 <직업흉수> 라고
뻐기고 다녔죠. 멍청이들처럼!"
  "그럼 그런 프로가 실제로는 없었나요?"
  "극히 드물죠. 좀체로 사람들 앞에
그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은
쯔렌이나 스하이 같은 대형 폭력단 뿐이오.
보스가 직접 은밀히 접촉해서 표적을 알려
주는 식으로 일을 하죠. 보통 때는 일반
시민과 다름없어요. 택시기사. 노점상
따위로 경찰 눈을 속이는 거죠. 폭력배
냄새는 절대로 풍기지 않아요. 영리한
녀석들이죠."
  "일은 어떤 식으로 하나요, 그런
녀석들은?"
  "폭력단이 어떤 회사와 손을 잡고 싶으면
먼저 보스가 그 회사 최고 경영자층과 만나
얘길 나누죠. 주로 대형 은행. 부동산
개발회사 같은 곳이오. <내가 고문을
맡겠습니다. 무슨 트러블이든 모두 해결해
드리죠>.... 간단히 말하면 그런 식이죠.
하면, 보스가 <직업흉수> 에게 전화를 거는
겁니다. 일주일? 한달? 반년?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몰라요. <직업흉수>는
사장의 모든 것을 조사하죠. 사는
곳에서부터 일상생활 패턴에 이르기까지.
단골 레스토랑. 나이트 클럽. 골프장은
물론, 운전기사. 보디가드의 신원까지
파악하는 겁니다. 조사가 끝나면 어느날
폭탄이나 권총, 때로는 라이플이 불을 뿜는
것이죠. <직업흉수>가 잡히지 않는 한,
폭력단 보스는 안전한 겁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몇몇 <직업흉수>가 꼬리를
잡히는 바람에 폭력단 보스도 체포됐죠. 단
한사람, 아무리 해도 꼬리를 잡을 수가
없는 <직업흉수>가 있어요. 총기류.
강한 걸로 봐서 군 출신이 틀림없어요.
<차기> 라고 해서 발길질 한번에 너끈히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어제 당신이 본 내
기술은 <비틀러 차기> 였소. 그
<직업흉수>는 차기로 상대방 골통을 쪼개는
사람이오. 나무를 타는 원숭이처럼
몸놀림도 날렵합니다. 자기가 죽인 사람
곁에는 반드시 나무로 깎은 원숭이를
놔두는 버릇이 있죠. 일본에서는
<상엔(三猿)> 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는
<상엔>...." (일본어의 원숭이 발음과
".... 하지 않다' 는 뜻의 運語의 발음이
모두 같은 "자루' 인 데서 연유한 것임.
"상엔' 은 두 눈. 두 귀. 입을 막고 있는
세 마리의 원숭이상을 뜻함 - 역주)
  "일본 문화, 대만에 많이 남아 있어요.
<상엔>은 물론, 코끼리에게 붙잡혀 눈. 귀.
입을 막고 있는 원숭이 장식물도 있어요.
<상엔>은 일종의 경고 메시지인 셈이죠.
자기가 하는 일을 봐서도 안 되고,
들어서도 안 되고, 또 떠들고 다녀도 안
된다는 경고. 재주 많은 녀석, 제가 직접
깎아 만든 것을 시체 옆에 놔두고 사라지는
겁니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새로 붙였어요. <두유앙>
이라고.'
  "나는 줄곧 <독원숭이>를 쫓고 있습니다.
그가 조직으로부터 추방당했다는 소문도
듣고 있구요" 그래서 <스와밍>, 일본말로는
뭐라고 하는지 잘 모릅니다만... 내 손에
체포된 걸 인연으로 해서 때때로 정보를
  "끄나풀을 말하는군요."
  "네. 형사는 모두 자기 <스와밍>을
거느리고 있죠. 난 <스와밍> 에게
독원숭이를 조사시켰소. 그를 배신한
사람은 예웨이(葉威) 라고 하는 스하이팡
보스 중의 한사람입니다. 예웨이는
독원숭이를 앞세워 조직의 장애물을 제거해
온 사람입니다. 독원숭이가 잡히지 않는 한
그도 안전했죠. 헌데 작년, 예웨이 자신이
갱 그룹에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소."
  일본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강도. 유괴를 다반사로 하는 갱 그룹이
조직폭력단 간부를 납치해서 몸값을
우려내는 일이 대만에서는 흔히 발생했다.
  폭력단 간부라 해도 설마 하고 방심하고
있다가는 언제 유괴 당할지 모르는
있는 틈을 노려 권총. 서브머신건.
산탄총으로 무장한 그룹이 덮쳐 눈깜작할
사이에 자동차로 어딘가에 감금해 버리는
것이었다.
  덮칠 때 복면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체가
탄로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보스의 가족이
몸값을 지불하면 한적한 시골 어느 구석에
내동댕이치듯 석방하는 것이 그들의
패턴이었다.
  보스는 자기가 유괴당했던 사실을 떠들고
다닐 수 없는 일. 조직폭력단 간부가
납치당해 몸값을 지불하고 나서야
풀려났다고 한다면 한갓 웃음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하들에게도 체면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예웨이를 유괴한 것은 파이인토앙
파이인웬 (白銀文) 에서 딴 것이다.
  예웨이는 대북 애인집에서 유괴당했다.
  파이인토앙은 그를 납치하면서 애인과
보디가드 셋을 사살했다. 사흘 뒤 가족이
몸값 5천만원(元)을 지불함으로써 예웨이는
석방되었다.
  풀려난 예웨이는 굴욕을 씻기 위해서, 또
소문이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독원숭이를 불렀다.
  예웨이 유괴범이 파이인토앙임을 알아낸
독원숭이는 은밀히, 그러나 재빠르게
행동을 개시했다.
  파인토앙 멤버 한명이 살해되자 예웨이는
미국으로 피신했다. 경찰의 눈과
파이이토앙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독원숭이는 파이인토앙 멤버를 한사람
  위험을 느낀 멤버들은 때로는
흩어지기도, 때로는 뭉치기도 하면서
대응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상대방이
너무도 영리하고 강했기 때문이었다.
  "한달에 5명이나 죽어갔습니다. 한명은
사살됐고, 한명은 맞아 죽었어요. 나머지
셋은 함께 있던 아파트가 폭발하는
바람에......"
  파이인토앙은 자신들을 노리는 게
독원숭이임을 알아내기는 했으나 손쓸
방법이 없었다. 본명과 사는 곳을 비롯해
독원숭이의 실체를 아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리더인 파이인웬은 마지막까지
살려뒀다가 죽이되 두 눈알을 뽑아
자기에게 가져오라는 것이 예웨이가 내린
  멤버가 모두 살해되고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을 때, 파이인웬이 이판사판으로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대만을 탈출한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머물고 있는 예웨이를
재차 덮친 것이었다.
  미국이라고 안심하고 있던 예웨이는
파이인웬의 승부에 깨끗이 무릎을 꿇었다.
독원숭이에게 내린 말살지령을
철회하겠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이인웬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독원숭이가 죽인 사람 가운데는
파이인웬의 동생이 둘이나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이인웬은 예웨이의 목숨을 살려 준
대가로 독원숭이의 본명을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럼 독원숭이는 살해되었소?"
  사메자마의 물음에 곽영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예웨이가 파이인웬과 남은 또
한 사람을 살려주라고 하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듯 독원숭이는 그 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소."
  대만으로 돌아온 파이인웬이 집으로
덮쳐갔을 땐 여인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을
뿐, 독원숭이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파이인웬은 그녀를 참살했다. 마약을
강제로 주사하고 번갈아 가며 몇 번이고
폭행한 뒤 사살해 버린 것이었다.
  그 여인은 독원숭이의 애인이라고 했다.
함께 산 것은 아니었다. 운나쁘게도
독원숭이가 집을 비운 사이, 우편물도
것이라고 했다.
  "일이 그렇게 되자 파이인웬이
살아남는다는 건 절망적이었소. 이리저리
도망다녔지만 헛수고였소. 마침내 석 달
뒤, 만화(萬華) 서화가(西華街) 에서 총을
맞은 피살체로 발견되었소."
  "예웨이는 어떻게 됐나요?"
  "더 이상 미국에 머물 수 없게 되었죠.
그를 숨겨 주고 있던 차이니즈 마피아와
베트남 마피아 사이에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오. 그렇다고 대만으로 돌아올 수도
없는 처지였죠. 독원숭이가 노리고 있을 게
뻔한 일이니까요. 해서 결국 일본으로
숨어든 겝니다."
  "그를 숨겨 줄 사람이 일본에도 있다는
뜻이군요."
란 사람, 알고 있습니까?"
  사메지마를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청이 지면 감시하고 있는 광역폭력단
산하의 이시와구미의 구미쵸(組長)였다.
무투파(武鬪波) 중의 하나였다.
  "이시와는 대북에서 다방. 빠칭코.
비디오숍 따위를 경영하고 있죠. 표면상
대표자로 내세운 대만인들은 모두 예웨이의
친척입니다. 일본 영화. TV. 비디오
해적판을 대량으로 취급하는 비디오숍이
중요 자금줄입니다. 일본으로 오기로
작정한 뒤 나도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
일본어를 복습했죠."
  곽은 일본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멜로드라마와 수사 드라마의 제목을 몇 개
대기도 했다.
언제였나요?"
  "한달 전. 아마 볼리비아 여권을
사용했을 겁니다. 무척 두려워하고 있을 게
틀림없어요. 독원숭이가 한번 노렸다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독원숭이의 본명은 알아냈나요?"
  곽은 머리를 저었다.
  "대북 아파트도 가명으로 빌렸더군요.
허나 짐작 가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사메지마는 곽을 쏘아보았다.
  곽은 일어서서 오른손으로 옷장에서
삼손나이트 가방을 꺼내어 열었다.
  뚜껑 안쪽 칸에서 캐비닛판 흑백사진
한장을 꺼내어 사메지마 앞으로 내밀었다.
소해정(掃海艇) 처럼 보이는 고속 보트에
타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이프와
수중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모두
6명이었다. 그 옆엔 M16을 든 수병이 서
있었다. 웨트 마스크 밑으로 드러난 얼굴과
눈부실 만큼 강한 햇살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사진이었다.
  왼쪽 두번째 사람이 곽영민이었다.
  곽은 자기 왼쪽의 키 큰 사내를
가리켰다. 메모지에 한자를 써 보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유진생(劉鎭生) 이라고 나와
동갑나깁니다. <수귀자>에 함께 입대한
동기생이기도 하구요. 내가 경찰로 옮긴
3년 뒤, 사고를 낸 바람에 그도 제대를
했소. 말이 없고 평소에는 온순한
강했소. <내려차기> 한번에 발뒤꿈치로
정수리를 깨뜨리고 말아요!"
  사메지마는 사진이 뚫어질 듯이 유진생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카메라를 향해 뭔가
수줍어 하듯, 눈을 내리깔고 있는
얼굴이었다. 옆에 있는 곽과 비교하면 휠씬
젊어 보였다.
  "어째서 독원숭이가 유진생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슨 근거라도?"
  "유진생네 집은 무척 가난했습니다.
누이동생이 병으로 일찍 죽었어요. 병원은
커녕 약국에도 한번 못 가보고 앓기만
하다가 죽었다는군요. 유는 그 누이동생을
못 잊어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유가 제대한 뒤 소식이
끊겼죠. 궁금해서 그의 고향집을
모시고 살고 있더군요. 유진생이
시골집으로 전화를 했을 때 동생이 집안
사정을 알려 줬다고 했어요. 그 이후 매월
꽤 많은 돈이 정기적으로 송금되어 왔다고
했어요. 보낸 사람 주소도 밝히지 않은 채
말입니다. 또 하나, 예웨이는 육군 장성을
많이 알고 있었소. 물론 <수귀자>가 육군
최정예 부대임도 알고 있었구. <수귀자>
대원이 휴가를 나오면 자기가 경영하는
레스토랑. 호텔로 초대하기도 했죠.
제대자에겐 자기와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그러나 적극적으로 접근해 갔죠.
예웨이가 그런 것은 내가 <수귀자>를 떠난
뒤, 87년부터 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래 전부터 유가
독원숭이라고 의심하고 있었군요."
것입니다. 유는 손재주가 비상했소. 기지에
있을 때, 시간만 나면 나이프로 나무를
깎아 온갖 것을 다 만들어 보였어요.
도르래를 만들어 날리기도 했었소. 허나
<상엔>을 깎는 걸 본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유가 독원숭이인지 아닌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제일 가까웠던 사이였소. 경찰에 포위돼서
사살당하게 내버려 둘 수 없어요! 반드시
내 손으로 정체를 밝히고 싶어요. 허나
대만에선 그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유진생은 변신의 명수인 동시에 몇날
며칠이고 조용히 엎드려 상대방을 기다리는
끈기까지 갖추고 있어요. 그의 인내력은
<수귀자> 들도 알아 줬으니까요. 그런
유진생이 지금 일본에 있다고 나는
자기를 배신한, 그로 인해 애인까지
처참하게 죽게 만든 예웨이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사메지마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만약 곽의 얘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신주쿠는 엄청난 폭탄을 가슴에 안고 있는
셈이었다. 독원숭이라고 불리는
청부살인자가 자기를 배신한 대만 마피아
간부를 죽이려고, 일본 폭력단까지
끌어들여 한바탕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독원숭이가 일본에 와 있다는 확실한
증거라도 있나요?"
  곽은 머리를 내저었다.
  "없습니다. 독원숭이는 움직일 때
눈곱만한 흔적도 남기지 않아요. 때문에
대만폭력배가 잘 드나드는 곳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독원숭이에 대해, 예웨이에 대해
뭔가 실마리가 잡힐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그러나 아직은 빈손이오.
영리하기 짝이 없는 독원숭이는 대만인이
몰리는 곳엔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어쩌면
아직 일본에 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구요."
  "이시와구미는 어떻습디까?"
  "알아봤죠. 대만 술집에 자주 드나드는
녀석은 많아요. 허나 예웨이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어딘가 몸을 숨긴 채
꿈쩍도 않는 게 분명합니다"
  이시와구미는 신주쿠 서 관내 두 곳에
사무소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 한곳은
본부, 또 한곳은 숙사(宿舍) 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예웨이가 그 두 곳 중
생각했다.
  "나는 당신을 훌륭한 경관이라고
믿습니다. 독원숭이 얘기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사메지마는 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 독원숭이가 이시와구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라도 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른 조직의 공격이라고 오해한
젊은 조직원이 엉뚱한 곳에 분풀이를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게 되면 곽영민이나 아라키도 헛물을
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신주쿠 일대는
계엄상태나 다름없게 되고, 독원숭이도
지하로 숨어들거나, 꼬리를 잡히게 되고 말
게 분명했다.
  따라서 사메지마 혼자 가슴 속에 접어둘
일이 아니었다. 이시와구미와 독원숭이의
싸움에 일반 시민이 휘말려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가지 알고 싶은 게 있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사메지마는 진지하게 물었다.
  "뭡니까?"
  "독원숭이가 아무 관계없는 일반시민을
죽인 적도 있습니까? 폭탄을 사용했다던지,
혹은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시민을 상하게
한 적도 있나요"
  "없습니다. 한번도. 독원숭이는 우수한
프로, 진짜 <직업흉수> - 자기가 노린
사람만 죽였어요."
  "이번은 어떨 것 같습니까? 이시와구미
멤버나 이시와 다케조도 죽이리라고
봅니까?"
  곽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마에는 땀이
번져나고 있었다.
  "....글쎄요. 가령, 예웨이가 일본인
보디가드를 거느리고 있다면 죽일지도
모릅니다."
  "예웨이의 은신처를 알아내려고
이시와구미 사람을 고문할 가능성은
없나요?"
  "아주 어려은 질문이로군요. 만약
독원숭이가 유진생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는
일본어를 하나도 할 줄 몰라요. 예웨이의
은신처를 묻고 싶어도 물어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통역이 필요하겠군요."
  "네. 하지만 누가 해 줍니까?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신주쿠에 있는
실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사메지마는 곽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차 잘못하면 엄청난 사건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높습니다. 당신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나로서는 우선
이 나라에서 폭력배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최악의 상황부터 막는게 더 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때문에 독원숭이가 누군가를
죽이거나 상하게 한 순간부터는 더 이상
협력해 드릴 수 없습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희생자가 나오면 모든 것을 상사에게
보고할 수 밖에 없소. 이시와구미 감시를
강화하고 조여 붙여서 이시와 다케조가
예웨이를 데리고 경찰에 출두하도록 유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있던 곽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당신 입장이라
해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게요. 여긴 당신
나라 아니오?"
  "그래요. 허나 당신은 나를 믿고
독원숭이 얘기를 털어놓았소. 당신 신뢰에
보답을 해 드리죠. 당신은 그저께 밤,
오쿠보란 곳에 있는 마작 도박장을
찾아갔죠?"
  곽은 사메지마를 쏘아보았다. 입술
언저리에 보일듯 말듯 웃음이 번졌다.
  "역시 경찰이 감시하고 있었군요.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메지마는 천천히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때 나도 그 방에서 당신을
지켜보았소.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걸 첫눈에
깨달았소."
  "그럼 어젯밤은?"
  "우연이었소. 당신과 마주친 김에,
미행해서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였나요?"
  "구야쿠쇼도리, 당신이 대만 식당에서
나온 순간부터."
  곽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 식당으로 가기 전, 대만 술집도 한곳
들렀죠. 이시와구미 사람들의
단골집이었소. 그러나 어젯밤엔 오지
않더군요."
  사메지마는 속으로 곽의 정보수집 능력에
감탄했다. 아무리 대만에서 예비지식을
며칠되지 않은 그가 이시와구미와 대만
마피아의 접점을 찾아냈다는 것은 놀라온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메지마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바깥은
이미 컴컴했다.
  "이제 서로 돌아가야겠군요. 당신을 찌른
허환 건은 아까 얘기한 것처럼 시간이 꽤
걸릴 겝니다. 당신도 한동안은 자유롭게
행동해도 괜찮아요."
  곽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만약 뭔가 알게 되면 연락해 드리죠."
  "네."
  "오늘밤에도 카부키쵸로 나가볼
생각입니까?"
  사메지마의 물음에 곽영민은 눈에서 불을
                        
뿜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유진생을 찾아낼 때까지 몇
번이고!"



  12.

  나미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오늘은
나미가 늦게 출근하는 날이었다. 양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출근하라고
몇번이고 타일렀다.
  어젯밤은 눈 한번 붙이지 못했었다.
  양은 여기가 좋다면서 담요 한장만
뒤집어 쓰고 나미의 원룸 아파트
마룻바닥에서 잤다.
  집에 도착한 나미는 몇 번이고 다잡아
물었다.
  "뭘 도와 주면 좋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예요?"
  그러나 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양이 입을
  "날이 새면 떠날 생각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연락하지. 여기, 집으로
하든 가게로 전화를 걸께."
  "가게엔 못 나갈 것 같아요."
  "안 돼! 내일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출근해야 해. 그러잖으면 경찰이 너부터
의심하게 된단 말야."
  "그럼 당신은 어쩔 생각이에요?"
  "난 더 이상 가게엔 나갈 수 없어.
점장과 단둘이 남았던 걸 난이 알고 있어.
경찰이 의심할 게 분명해. 날이 밝으면
짐을 가지러 갈 생각이야. 여기가 안전할
것 같으면 돌아올 작정이야. 물론 네가
좋다고 허락해야 하지만...."
  나미는 입 안이 바싹 마른 것처럼
까칠까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양이
무섭다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둘이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좋아요. 만약 경관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죠?"
  "이리루?"
  나미는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양은 무표정한 얼굴로 집안을 휘둘러
보았다. 여자 혼자 살고 있는 걸 숨기기
위해 속옷 빤 것을 집안에 널어둔 게
보였다.
  "저걸 베란다에 널어둬, 경관이
찾아왔다는 신호로."
  나미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오쿠보도리
북쪽, 일방통행로 오른쪽에 있었다. 일층은
편의점이었다. 나미는 4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베란다는 편의점 입구, 일방통행

  "경관이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죠?"
  "처음 퇴근한 그 시간에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해. 가게로 되돌아왔던 건
말할 필요 없어.'
  양은 일단 말을 끊고 나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되돌아 왔었지?"
  나미는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양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남자가 아니었음을
안 지금, 새삼스레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벽녘, 설핏 잠들었던 나미는
마룻바닥에 누웠던 양이 일어나는 기척에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나미를 내려다보며 양이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 한마디만 남기고 양은 떠났다.
  혼자 남은 나미는 출근시간이 가까워
오자 더욱 불안해졌다.
  -- 아키의 시체가 발견되었을까?
  TV 뉴스 시간에 맞춰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지금까지 뉴스 따위는 한번도 보지
않았던 나미였다.
  그러나 신주쿠 카바레에서 사내 시체가
발견 되었다는 뉴스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일찍 출근하는 사람이 바로
아키와 난, 그리고 양이었다. 그것도
3시30분이나 4시가 되어서야 나왔다.
  그렇게 생각하던 나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제나 아키는 출근 전에 전날
매출 내역을 본사 사장에게 보고하러 갔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외에 고리대금업도 하고 있었다.
야스이가 시체를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세번 밖에 보지 않았지만, 야스이는
첫눈에도 야쿠자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키와는 달리 호스테스들에겐 아주
신사적이었다.
  아키가 매출 보고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으면 야스이가 직접 가게로
찾아갔을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난이 시체
발견자가 되는 것일까.
  난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이
출동하면 불법취업이 탄로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4시30분이 되어서야 나미는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 일도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 이미 경찰이 와 있는 게 아닐까.
심문받는 게 힘들고 무섭지 않을까? TV
드라마처럼 한사람씩 경찰서 심문실로
데리고 가서 시시콜콜 따지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어젯밤 일을 끝까지
숨길 자신이 없었다. 비록 말은 않는다
하더라도 얼굴색이 금방 변해 버릴 것만
같았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
싱오쿠보 역으로 갔다.
  전동차 안에서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승객이 모두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싱오쿠보에서 신주쿠까지 한 정거장이
오늘처럼 길게 느껴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때, 정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언제나
사람으로 북적대는 계단을 나미는 난간
손잡이에 의지해서 가까스로 내려갔다.
  출찰구로 나오기 전에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굴색이 어떤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파랗게 질려 있다면 어떻게
할까?
  오늘은 평소보다 짙은 색깔의
파운데이션을 발랐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다. 생기가 별로 없는 어둡고 길쭉한
얼굴. 머리카락이 많이 상한 탓에 목 뒤로
모아 묶은 것까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얼굴 가운데 마음에 드는 곳은 희고 고른
이빨 뿐이었다. 눈은 작고 눈꺼풀도
두꺼웠다. 평범한 코에 얇은 입술.
웃으면 조금 나아보이긴 했다. 아키란
사내, 이 얼굴이 뭐 잘났다고 추근댄
것일까.
  얼굴 표정이 평소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출찰구를 나온 나미는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왔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지하통로를 이용하든가 지상도로를
이용하든다 했다.
  오늘은 지상도로를 걷고 싶었다.
지하가에서 계단을 올라 카부키쵸 입구로
나왔을 때, 만약 경관이 즐비하게 깔려
있다면, 그걸 보고 깜짝 놀라는 자신을
누군가가 수상하게 여길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신주쿠도리 아르타 스튜디오 앞은
심장이 점점 더 크게 두근거리는 걸
느끼면서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 내가 죽인 게 아니잖아! 내가 죽인 게
아니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똑바로 길을 건너 야스쿠니도리로
나왔다. 그곳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패트롤카도 경관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마른 침을 삼켜가면서
야스쿠니도리를 건넜다. 얼굴이 가면을 쓴
것처럼 딱딱하게 느껴졌다.
  손목시계를 흘낏 보았다.
  4시 56분이었다.
  카부키쵸로 들어섰다. 어쩐지 다른
날보다 사람이 적은 것처럼 보였다. 그
센터에도 손님이 별로 없었다.
  무슨 까닭일까.
  왼쪽으로 카레라이스 전문식당이 보였다.
젊은이가 달려가고 있었다. 한사람, 또
한사람, 나미가 가야 할 모퉁이를 돌아
달려갔다.
  핸드백을 든 손에 힘을 주면서 나미도
모퉁이를 돌았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사람이, 엄청난 사람이 몰려 있었다. 그
틈을 비집고 플래시가 번쩍번쩍 터졌다.
패트롤카도 여러 대 눈에 띄었다. 경광등이
번쩍번쩍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경관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 이대로 돌아가 버릴까.
  그러나 마음과 달리 나미의 발걸음은
몰려 있는 인파를 헤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13.

  신주쿠 경찰서에 살인사건 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는 것을 사메지마가 안 것은 그
이튿날이었다.
  홍고카이의 사지가 신주쿠 역 구내 코인
로커 앞에서 칼에 짤려 죽은 사건에 대한
사메지마의 책임을 묻는 사문회가 열린
날이었다. 신주쿠 서장과 모모이 과장 입회
아래 본청에서 파견된 관계관이 심문을
맡았다.
  경관 눈앞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증거품인 신나,
압수방법, 피의자 보호, 주변 대응 등에
소홀한 점이 없었나를 집중적으로 따졌다.
  현장에 있던 경관 가운데 사메지마가
  사메지마는 모든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분명히 했다. 또 당시 상황으로 보아
사지를 찌른 범인의 행동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음을 들어 주변 경비를 맡았던
제복경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사메지마에게 한가지 다행스러웠던 일은,
언론이 그 사건을 크게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같은 날, 우연히고 칸사이(關西)
고속도로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했던
탓에 그 사건은 뒤로 밀려 버린 것이었다.
또 살해된 피의자가 신나 밀매에 관여한
폭력단원이었다는 점에서 언론의 논조는
오히려 범인에게 동정적이었다.
  만약 신문이 크게 취급하면서 압수 현장
사메지마에 대한 처분도 한결 무거워졌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다. 별다른 인사조치 없이 수습될 것
같았다. 하기는 사메지마를 이동시키려
해도 서내에서는 받아들일 부서도 없었다.
  경찰층 고위층이 이번 일을 빌미로
사메지마를 파면으로까지 몰고 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만약 그런
움직임이 있다면 철처히, 끝까지 맞서 싸울
각오였다. 그러나 현단계에서는 벌집을
쑤시고 나올 간부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사메지마의 판단이었다.
  이번 사건을 빌미로 사메지마가
파면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주간지가 법석을
떨 일이었다.
경관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메지마를
경찰조직에서 은밀히 배제시키려 온갖
노력을 계속할 것이 틀림없었다.
  사메지마가 수사관으로서 우수하면
우수할수록 그들이 노리는 그런 기회는
늘어날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위축될 사메지마도 아니었다. 오히려
형사로서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투지를 불태웠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표출할 권리가 있다고 사메지마는 믿고
있었다. 사메지마의 경우, 살아 있는
증거는 바로 쇼와 사랑을 나누는 것,
그리고 경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는 현재의 사메지마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이었다. 그 두
가지를 잃는다는 것은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사문회는 오전중에 끝났다.
  사메지마는 점심을 먹으러 구내식당으로
갔다.
  식당에서 누군가와 동석하거나 합석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상대는 모모이 과장이거나,
감식계의 야부이었다.
  오늘은 야부가 사메지마보다 조금 늦게
식당으로 들어왔다.
  야부는 큼직한 얼굴에 대머리까지 벗어져
먹는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탄도(彈道) 검사에는 따를 사람이
없었다. 본청 감식과를 비롯하여 과학수사
연구소 등에서 스카웃 제의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한마디로 거절해 오고
있었다.
  서내에서도 모모이와 함께 별종 딱지가
붙어 있었다. 본인은 그런 일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일개 감식계 직원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웃도리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들어선
야부는 사메지마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가왔다.
  "한동안, 못 봤군. 별일 없었나?"
  야부는 사메지마 건너편에 풀석
  "그렇지도 않아."
  사메지마는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야부가 식사를 가지러 갈 생각도 않고
있자, 사메지마는 자기가 먹던 정식을
젓가락으로 가리키며 일깨워 주었다.
  "오늘은 정식이 먹을만해."
  "그래? 그럼......"
  야부는 잡담 제하고 사메지마 앞에 놓인
정식 트레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처음엔 한두 입 맛이나 보려는가 보다고
바라보고 있던 사메지마는, 자기가 몇 조작
떼어먹은 민스 카틀렛까지 야부가 몽땅
먹어치우자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음, 맛이 괜찮은데....."
  야부는 눈깜작할 사이에, 사메지마가
3분의 1쯤 먹던 정식을 몽땅 먹어지웠다.
  사메지마는 일어서서 다시 정식 한상을
트레이에 받쳐 들고 왔다. 야부가 마침
밥공기를 내려놓는 참이었다. 밥공기는
깨끗이 비어 있었다.
  야부는 입 안 가득히 퍼넣은 밥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만큼은 더 못 먹어."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릴 하고 있어?"
  사메지마는 기가 막혔다.
  "이건 내 점심이야. 내 밥, 모두
뺏어먹었잖아?"
  "그랬나?"
  야부는 미안해 하는 기색 하나 없이 새로
갖다놓은 밥상에서 유채(油寀) 절임
한조각을 집어 와삭와삭 씹어삼켰다.
  이어서 사메지마 찻잔으로 손을 뻗쳤다.
  "이봐."
  "응?"
  야부는 새로 밥을 먹기 시작하는
사메지마를 건너다보면서 물었다.
  "새로 수사본부가 설치됐다면서?"
  "그래. 허나 이번 사건엔 당신 할일이
없을 것 같아."
  사메지마는 대답했다. 사용된 흉기가
총이 아니란 것을 넌지시 알려 주었다.
  "응. 어제도 말했지만 사인은 두개골
함몰이야. 두개골을 둔기로 위에서 내리친
것 같았어. 정수리가 쪼개지면서 뼈 조각이
뇌를 짓이겨 버린 거야. 그것도 한방이야.
범인은 키가 크고 팔도 긴 녀석인가 봐.
뭔지는 모르지만 둔기로 위에서 후려친 것
같았어. 피살자가 서 있는 상태였다면
  "피살자는 뭣하는 녀석이었어?"
  사메지마는 화제를 바꿀 생각으로
물었다.
  "카바레 점장이야. 마약 상습자였구.
어깨 밑에 주사 자국이 있었어. 시체가
발견된 건 어제 저녁나절, 카바레 경영자가
경찰에 신고했어. 야스이 흥업(興業)
이라고 들어본 적 있나?"
  "카부키쵸 1쵸메의?"
  "그래, 거기 사장이야. 야쿠자 맞지, 그
녀석도?"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놓았다. 야스이는 이시와구미와 같은
레벨의 폭력단 멤버였다.
  "피해자도 조직폭력단 멤버인가?"
  "아니. 입적은 안했어."
  "거기서 일하던 웨이터야. 어디론가 숨어
버렸어."
  "유류품(遺留品)은?"
  "없어. 지문도 없구."
  "지문도 없다구? 거기서 일한
녀석이었다면서?"
  "깨끗이 닦아 버린 것 같았어. 물론 다른
종업원과 손님들 지문은 여기저기 덕지덕지
남아 있었어. 허나 그 웨이터가 사용한
로커. 트레이. 재떨이 등 지문이 남겼을
만한 곳은 깡그리 깨끗이 닦아 버렸더군."
  "허나 손님 지문인지, 그 녀석 것인지
지금 단계에선 판별할 수 없잖아?"
  "이봐, 내 감식경력이 몇 년인데 그런
소릴 하누? 범인은 도망치기 전에 깨끗이
닦았어. 녀석의 지문은 하나도 없었어!"
  사메지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가?"
  "만약 자기 지문이 걱정스러웠다면 가게
구석구석을 모두 깨끗이 닦아 버렸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도 자기가 손댄
곳만 훔쳤어. 범인이 처음 들어간 집이라면
혹시 몰라도 거긴 자기 직장 아니야?"
  "2주일간 일했다더군."
  "2주일씩이나 있었다면, 어디를 만졌고
어디는 안 만졌는지 구별한다는 건
불가능해."
  "그건 그래."
  "수사본부선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지문을 깨끗이 닦아 버린 걸로 봐서
전과자 소행으로 보고 있어."
  "이름과 주소는?"
쥐어짜 봤지만, 이력서도 제대로 받아둔 게
없나봐. 피살된 녀석이 직접 면접해서
채용했다는 게야."
  "사진도 없어?"
  "응. 지금은 몽타지를 만든다 어쩐다
법석을 떨고 있어. 어쩐지 외국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외국인?"
  "그 카바레엔 또 한녀석,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법취업자가 있었어. 그런 사람만
골라서 채용하고 있는 모양이야.
일본인보다 휠씬 싸게 먹히잖아?"
  "그럼 그 녀석의 국적은 판명됐나?"
  "동양계란 건 알아냈어. 양이란 이름으로
행세하고 있었다는 것두......"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부는 말을 이어갔다.
  "그날 매출금도 몽땅 털렸어. 절도혐의로
경찰을 들락거린 중국계를 훑고 있어,
지금. 종업원에게 사진을 보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카바레 이름은 뭐야?"
  "<장미의 샘>, 풍속영업법
(楓俗營業法)이 공포되기 전까지는 캐치
전문이었어."
  캐치 전문은 문자 그대로 호객꾼과
호스테스가 길거리로 나가서 억지로 손님을
끌러다가 바가지를 씌우는 업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쨌든 간판을 바꿔달고 신장개업을
해야 할 처지로군, 그 카바레도."
  사메지마가 턱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그렇겠지. 호색꾼 사내들이야 배설만 할
수 있다면 옥호(屋號) 따위 상관 않을
테니까 말야."
  야부도 고개를 주억거려 가며 동의했다.

  오후, 사메지마는 아라키의 전화를
받았다. 다시 만나자는 얘기였다.
  지난번과 같은 호텔 커피숍에 마주 앉은
사메지마는 곽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털어놓았다.
  아라키는 표정이 험상궂어졌다.
  "청부살인자라구?"
  "이시와구미 녀석들이 살해라도 된다면
큰일입니다. 전쟁으로 번지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내야 합니다."
  "정말 일본에 있다는 게야? 진짜 그처럼
솜씨도 좋구?"
입국했답니다. 확인해 볼 수 있나요?"
  "그것만으로 무리야. 입국관리국에선
볼리비아계 중국인과 볼리비아인을
구별하지 않아. 볼리비아, 콜롬비아와 함께
요주의 나라이긴 하지만 입국자를 함부로
뒤질 순 없어. 혹시 뭔가를 숨겨
들여오려고 했다면 몰라도."
  "그랬을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한번 조사해 봐 주세요."
  "알았어."
  아라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메지마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야?"
  "한동안은 지켜보기만 할 생각입니다.
곽은 곽대로 열심입니다. 그 녀석에게 대한
곽의 마음가짐은 특별합니다."
  "물론이죠, 무술이니까요. 기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독원숭이가 정말 곽영민보다
한수 위라면 그 위력은 엄청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허환은 곽의 손바닥 일격에
코뼈가, 발길질 한번에 턱이 부서졌어요.
단 두 발,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눈깜짝
할 사이에. 그것보다 한수 높다면 아무리
신주쿠 언저리에서 한다 하는 녀석들이라도
한주먹거리도 못돼요."
  "이시와가 감싸고 있다면, 당연히
무장까지 했을테지?"
  "그렇겠죠. 허나 독원숭이도 멍청이가
아니니까 정면으로 맞붙어 갈지 어떨지는
알 수 없죠."
  "그 녀석도 무장을 하고 있을까?"
  "글쎄요. 들은 얘기지만, 대만 폭력배의
  "굉장해?"
  "자동소총은 물론, 수류탄까지 갖추고
있답니다."
  아라키는 입술을 캐물었다.
  "만약 여기서도 그 정도로 무장을 갖추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어쩌면 이시와구미는 제명당할지도
모릅니다."
  "과장이 너무 심하군. 아무리 솜씨가
뛰어나다지만 겨우 한사람이야. 한사람
힘으로 어떻게....."
  "곽영민 얘기대로라면, 절대로 얕봐서는
안됩니다. 독원숭이는 지금 예웨인의
은신처 찾기에 혈안이 돼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찾아내야 합니다."
  "서툰짓 했다간 예웨이가 더욱 깊게 숨어
건덕지를 찾기가 더욱 어려워져."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봅니다.
이시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여
예웨이를 내놓게 하든가, 이시와를 은밀히
감시하면서 일이 터질 때까지
기다리든가......"
  "몰아붙이는건 간단하지 않아. 기동대를
동원해서 이시와 구미쵸 집은 물론,
사무소까지 포위해야만 효과가 있어.
그렇게 해서 예웨이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우리가 심문해야 할 만한 용의점은 하나도
없어."
  "그렇죠. 만약 그렇게 되면 독원숭이도
예웨이가 풀려나길 기다리겠죠."
  아리키는 한숨을 내뿜으면서 천장으로
눈길을 던졌다.
  "수사 4과의 지원 없이는 힘든 일입니다.
예웨이의 은신처를 알아낸다는 게 간단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목숨이 위태롭다
하더라도 예웨이가 요새 같은 곳에 갇혀
지낼 수도 없는 것 아니겠어? 며칠에
한번씩은 술집이나 레스토랑으로 바람 쐬러
나다니리라고 봐."
  "물론이죠. 방안에 죽치고만 있을
야쿠자는 없을 테니까 외출이야 자주
하겠죠."
  "독원숭이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단 말이지?"
  "독원숭이가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독원숭이를 먼저 잡아 버리면,
이시와 대만 루트를 밝히는 것도
힘들테구...."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 수밖에 없군요, 지금은."



  14.

  <장미의 샘>은 한동안 문을 닫게 되었다.
점장이 피살된 데다가, 웨이터 2명도
그만둔 탓에 어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찰 조사가 일단 끝나자 나미를 비롯한
호스테스는 야스이 흥업사무소로 갔다.
  아키의 시체를 발견, 경찰에 신고까지 한
야스이였지만, 별로 동요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야쿠자라서 그런 일에
익숙해 있는 탓에 그런지도 모른다고
나미는 생각했다.
  "당분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어요.
생활이 어려운 사람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도 괜찮아요. 그런 사람에겐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날짜로 계산해서 월급을
지불할 생각이오. 희망자는 손을
들어봐요."
  모여 있던 호스테스 전원이 손드는 것을
보고 나미도 손을 들었다.
  "알았어요."
  야스이는 짧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서 있는 야스이의
운전기사가 으르렁거렸다. 첫눈에 봐도
졸때기 야쿠자가 분명했다.
  "망할년들! 지금까지 돌봐 준 은혜도
모르구....."
  "그만둬!"
  야스이가 말리면서 반지낀 손으로 젊은
사내, 운전기사 어깨를 눌렀다. 아키가
끼고 있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였다.
  "월급, 언제쯤 받을 수 있나요?"
  젊은 사내가 가쓰키를 놀려보다가 침을
뱉었다. 가쓰키는 못 본 척했다.
  "내주 말쯤. 늦어도 그 다음 주
초에......"
  모여 있던 호스테스들이 <우--> 하고
소리를 질렀다.
  "만약 기다리는 게 싫다면 포기해도
괜찮아. 우리도 지금 한푼이 아쉬워. 아키
빈소에 부조도 해야 하는데 매출금은 몽당
도둑맞았지, 당분간 장사도 못하게
됐지...."
  "너희들, 설마 양이 어디 있는지 알고도
모른 척 시침 떼는 건 아니지?"
  젊은 사내가 으르렁거렸다.
  경찰 뿐만 아니라, 이들까지도 양이
범인임을 훤히 알고 있는 것에 나미는 섬뜩
놀랐다.
  "말해 봐!"
  젊은 사내는 한사람 한사람 뚫어질 듯이
노려보았다.
  돌연 이쿠가 끼어들었다.
  "나미짱이 친하게 지냈어요."
  나미는 숨이 막혔지만 못 들은 척했다.
야스이가 나미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아가씨가 나미 맞지?"
  "너, 알고 있어?"
  젊은 사내가 씨근덕거리며 나미를
몰아세웠다.
  "가만 있어, 넌."
  야스이가 말리면서 나미 얼굴에 시선을
박았다.
  "아가씨, 알고 있어? 알고 있음 말해 봐.
  "저, 몰라요."
  대답하면서 나미는 이쿠를 노려보았다.
이쿠는 태연한 얼굴로 껌을 짝짝 씹었을
뿐이었다.
  "정말 몰라? 무서워할 것 없어.
아가씨에겐 폐가 되지 않게 할 테니까 알고
있으면 말해 봐."
  "정말 모릅니다."
  야스이는 한참 동안 나미 얼굴을
쏘아보다가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웃도리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한장
꺼내어 나미 손에 쥐어 주었다.
  "양이 들고 간 가방엔 내가 아키에게
빌려 준 중요한 명함이 들어 있어. 그것
만이라도 돌려받았으면 좋겠어. 아가씨한테
손해될 일은 없을 테니까, 만약 양으로부터
연락이 있으면 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활
걸어 줘. 내가 없더라도 삐삐나 무선전화로
금방 연락이 닿을 게야."
  나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잘 부탁해. 알았지?"
  야스이는 나미의 어께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럼 여러분, 오늘 수고 많았어요."
  야스이가 말하자 호스테스들도 발길을
돌렸다.
  나미는 이쿠의 뒷모습을 쏘아보면서
계단을 내려왔다.
  도중에 가쓰키가 이쿠를 쏘아 주었다.
  "무슨 마음으로 그런 쓸데없는 소릴
했어? 나미짱을 못살게 해서 득보는 거라도
있어?"
  "맞아요. 사과해요!"
  안이 거들었다.
  "별로 사과할 마음 없어요."
  이쿠가 뾰로통해진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버릇이 그래?"
  안의 표정이 홱 바뀌어졌다.
  "그만 두세요. 전 괜찮아요."
  나미가 안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다니, 그것도 말이라고 해? 화를
내야 할 땐 화도 나고, 따질게 있음
따지기도 해야 해. 이쿠, 이년 한번 뜨거운
꼴을 당해야 정신을 차릴 게야."
  안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분통을
터뜨렸다.
  이쿠는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이
어깨를 흔들면서 앞장 서서 걸어갔다.
  "나미짱, 협박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눈길을 나미 쪽으로 던지며 말을 이었다.
  "난 말야, 중국인이라면 딱 질색이야."
  "누구 말야? 누가 중국인이야?"
  안이 다그쳐 물었다.
  "얘, 얘가 중국년이야!"
  이쿠는 턱으로 나미를 가리켰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나미짱은......"
  "중학교 때, 중국 잔류 고아가 우리반에
편입해 왔어. 보기만 해도 속이 메슥거리는
년이었어. 얘도 그년과 꼭 같아!"
  이쿠는 숨을 한번 쉬지 않고 내뱉었다.
  "말투랑 이상한 사투리랑 똑같아, 기분
나쁘게두......"
  나미는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스스로도 얼굴이 굳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양, 그 녀석과 이 년이 중국어로
떠들어대는 걸 내가 직접 봤어!"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야?"
  가쓰키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었다.
  "나미짱이 어디서 왔든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런 걸 떠들고 다니는 게
창피하지도 않아?"
  "어머, 훌륭하시군요."
  이쿠가 새들새들 웃으며 빈정거렸다.
이어서 씹고 있던 껌을 나미 발 밑으로
훅하고 내뱉었다.
  "멍청한 년!"
  나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한마디
내뱉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미짱!"
  가쓰키가 걱정스레 불렀다.
     "괜찮아요!"
  나미는 저도 모르게 외치듯 말했다.
  가쓰키가 숨을 들이마셨다. 나미는
가쓰키와 안쪽으로 돌아 서서 머리를
숙였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몸조심
하세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인 다음, 나미는 달리기 시작했다.



  15.

  그날 밤 레코딩을 끝낸 쇼가 사메지마
아파트로 찾아왔다. 사메지마가 집에
들어온 것은 오후 8시께 -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전화 벨이 울렸다.
  "밥, 먹었어?"
  쇼의 목소리였다.
  "저녁이라면 먹었어. 밤참이라면
아직이구."
  사메지마는 웃으면 대답했다.
  "배가 고파 죽기 직전에 있는, 병아리 록
스타에게 은혜 베풀 생각 없어?"
  "그 병아리 록 스타가 무전취식으로
장래를 망칠 위기에 있다면 한번쯤 생각해
볼 수도 있지."
테니까!"
  사메지마와 쇼는 칸나나 (環七, 環狀
7호선 도로) 변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쇼는 무척 시장해 있었다. 햄버거와
스파게티를 주문해서 사메지마가 맥주를
마시는 동안 번개같이 먹어치운 다음,
냉수도 두 컵이나 거푸 들이켰다.
  "아, 이제 살았다. 눈에 보이는 것두
있구......"
  두 뺨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록 스타로 성공했다 해서 스테이크는
어느 집이 맛있구, 스시(초밥) 는 어디라야
된다는 둥 건방만 떨었단 봐라. 오늘
여기서 걸신 들린 듯이 먹어치운 얘기,
온통 떠들고 다닐 테니까....."
형사따위 거들떠 보지도 않아. 포르셰로
마중해 줄 재벌 도령님이 줄을 서서 기다릴
텐데, 그럴 시간이 있겠어?"
  쇼가 생글거리며 받아쳤다.
  "그도 그렇군."
  "하지만 여왕이 못 되면 끼니나 겨우
이어가는 공무원한테 매달려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사메지마는 테이블 너머로 주먹을
뻗어쳤다. 쇼가 슬쩍 피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려구?"
  "가난한 형사 집에. 정신없이 먹었더니
졸음이 와. 어제. 그제 이틀동안 별로 못
잤어."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쇼는 잡담
제하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정말 잠만 잘 거야?"
  "응!"
  목소리엔 생기가 실려 있었다. 머리까지
뒤집어쓴 담요가 바스락거리나 싶더니,
진바지. 양말. 요트 파카가 침대 밑으로
흘러내렸다.
  베개를 고쳐 벤 쇼가 오른팔을 사메지마
쪽으로 뻗쳤다.
  사메지마는 방바닥에 있던 쿠션에 기대어
TV을 켰다.
  "소린 죽여!"
  사메지마는 혀를 차면서 볼륨을 줄였다.
쇼는 만족스럽다는 듯 웅얼거리면서
사메지마의 두 팔을 오른손으로
어루만졌다. 사메지마 쪽으로 얼굴을 돌려
누웠지만 두 눈은 감은 채로였다.
  10분도 안 되어 조용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정말 잠이 들어 버린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할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스탠드를 켠 다음, 천장 조명을
껐다.
  2시간 동안 TV를 보면서 기다렸지만 쇼가
눈을 뜰 것 같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쇼의 오른손을 담요 밑으로
살짝 밀어넣고는 욕실로 가서 샤워를
틀었다.
  사메지마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실로
들어섰을 때, 쇼가 한 쪽 눈을 뜨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깨끗이 씻었다고 해서 누가 안겨
줄 것 같아?"
  "공짜로 밥먹고 잠자고 그냥 튈
생각이야?"
  "형사 월급, 모두 우리 세금아냐?"
  사메지마는 하나 남은 베개를 들어
느닷없이 쇼의 얼굴을 덮어눌렀다.
  웃음과 비명이 뒤섞여 쿡쿡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디서 살인이나 폭행사건이라도 터진
건가? 제법 귀에 익은 소린데...."
  사메지마는 베개를 누른 손에 힘을
주면서 이죽거렸다.
  발버둥치던 쇼가 가까스로 베개 밑에서
빠져나왔다.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할딱거렸다.
  "고, 고소할테야! 경관이 폭행했다구
말얏!"
  "그럼 본관에게 증거를 보여 주실까?
범인이 어떤 식으로 당신한테 폭행을
  걸치고 있던 탱크톱 자락 사이로 쇼의
젖무덤이 출렁거렸다.
  "범인은 여길 이렇게 했었나?"
  "관, 관둬!"
  "그리곤 여기도 이렇게?"
  "손 치우지 못해?"
  "마지막으로 이 부분을 이렇게 했겠지?"
  사메지마는 쇼가 걸치고 있던 탱크톱과
팬티를 벗겼다.
  왼손으로 쇼의 머리를 받쳐 안으면서
오른손을 허벅지로 가져갔다.
  "겨우 이것 뿐이야?"
  자기를 억눌러 안느라고 거칠어진 숨결을
다듬고 있는 사메지마를 쳐다보며 쇼가
말했다. 두 눈이 반짝반짝 빛을 뿜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했어, 범인이...?"
  이번엔 사메지마가 되물었다.
  "키스했어, 그 녀석이. 억지로
짓누르면서."
  쇼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억지로?"
  "그래. 뻔뻔스럽게 혀까지 밀어넣으면서
말야."
  사메지마는 쇼의 입술을 덮쳤다. 안고
있던 팔도 풀었다.
  키스를 끝내고 다시 물었다.
  "그 다음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멍! 멍! 하고
짖었어."
  "그뿐이야?"
  "그뿐이었어"
  "거짓말하면 그냥 두지 못해!"
  "호호호."
  쇼는 스탠드 조명을 껐다.



  16.

  이튿날, 나미는 하루 종일 집안에서만
지냈다. 일층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다.
  뉴스 시간마다 TV를 지켜보았다. 오후
7시. 9시. 10시. 11시 30분.
  그 사건에 관한 소식은 하나도 없었다.
양이 붙잡혔는지 어떤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편의점에서 여성용 구인지(求人誌) 도
사왔다. <장미의샘> 이 문을 닫은 이상,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펼쳐볼 기분이 아니었다.
  12시 30분, 전화 벨이 울렸다.
  나미는 흠짓 놀라면서 수화기를 들었다.
오늘 처음 울린 전화벨 소리였다.
  ".....여보세요."
  "혼자 있나?"
  북경어였다.
  "혼자예요."
  "지금 그쪽으로 갔으면 하는데?"
  "좋아요."
  전화를 끊은 지 5분도 안되어 인터폰이
울렸다.
  나미는 발딱 일어서서 도어를 열었다.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에 고급스런 회색 양복차림, 안경을 낀
사람이었다.
  찬찬히 살펴보자 양이었다. 양은 금속제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말없이 안으로 들어선 양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집안을 휘둘러 보았다. 나미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멋져요. 돈 많은 사람처럼 보여요."
  양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서류가방을
침대 밑에 밀어넣은 다음 걸터앉았다.
  "경찰은 어땠어?"
  "날 별로 의심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나미는 양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망설이듯
말꼬리를 흐렸다.
  "....않았지만 이라니?"
  "경찰은 당신을 찾고 있어요."
  양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구 사장님두."
  "사장?"
  나미는 야스이로부터 받은 명함을
내보였다.
  나미는 야스이 흥업 사무소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들려 주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온 뒤 이쿠가 했던 말은 숨기기로 마음
먹었다.
  나미는 묘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여전히 양이 두렵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양의 또 다른 일면을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기까지 했다.
  "...이 사내가 전화 걸어달라고 했었나?"
  "네."
  "전활 걸면 너와 만나 줄 것 같았어?"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나자면 만나 줄
거예요."
  나미는 생각하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차츰차츰 새로운 불안감이 일었다. 양이
무슨 생각으로 야스이와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지 궁금했다.
  양은 어딘가 텅빈 것 같은 눈으로 나미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난 지금 어떤 사람을 찾고 있어. 그
사람은 이시와라는 일본인과 함께 있어.
이시와에 대해 자세한 걸 알고 싶어."
  나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시와라는
이름은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었다.
  "이시와는 폭력단 두목이야.
이시와구미라는 폭력단의....."
  "몰라요, 그런 것."
  "이 사내도 폭력단 맞지? 이시와에 대해
알고 있을 게 틀림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양은 침대 밑에서 서류가방을 꺼내어
열었다. 나미가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재빠른 손놀림으로 비닐백을 꺼내었다.
  세컨드백을 열었다.
  지갑. 영수증. 명함 따위가 들어 있었다.
펜케이스처럼 보이는 가죽제품도 눈이
띄었다.
  양은 가죽 케이스를 열었다. 1회용
피하주사기와 납작하고 작은 종이처럼 생긴
것이었다.
  "그 사내는 이걸 되돌려 받고 싶은
게야!"
  나미는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각성제임에 틀림없었다.
  "이게 경찰 눈에 띄면 여러 가지로
골치가 아파지거든. 그게 두려운 게야."
  나미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양은
종이 포장을 하나 꺼내어 찢더니 안에 든
것을 손바닥에 쏟았다.
보였다.
  양은 손바닥을 높이 쳐들어 가루를
형광등에 비쳐보다가는 혀끝으로 맛을
보았다. 나미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대만제가 틀림없어!"
  양은 티슈 페이퍼로 혀끝을 닦으면서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맛 없어요?"
  "써. 무척이나."
  "당신도 맞아요, 이걸...?"
  양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걸 즐기는 건 바보 멍청이들이야!"
  양은 벌떡 일어서서 각성제를 모두 부엌
수도에 흘려보냈다. 손도 깨끗이 씻었다.
  나미가 냉장고에서 캔 콜라를 꺼내 주자
양은 머리를 끄덕이며 받아마셨다.
  "전화해, 이 사내에게."
  "왜요?"
  "내가 어딨는지 알려 준다고 해."
  나미는 눈이 둥그래져서 양을
쳐다보았다.
  "사람 눈이 많잖은 곳에서 만나고 싶다고
해."
  "어디에요, 그런 곳이?"
  양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입을
열었다.
  "어디든. 사람 눈이 없는 곳. 신주쿠
교엔 (新宿御苑) 이 좋겠군."
  "밤엔 닫아요."
  "알고 있어."
  "가본 적 있으세요?"
  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들어가면 <타이와가쿠(臺灣閣> 란
건물이 있어. 거기서 만나자고 해."
  "전화는 언제쯤?"
  "내일 새벽. 문 열기 전에."
  "그렇게 일찍? 안 올 거예요."
  "꼭와. 가죽 케이스 얘기도 해!"
  "몇시쯤?"
  "새벽 5시."
  "사무소에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
시간엔."
  양은 명함을 내밀었다.
  "염려 마. 틀림없이 누군가와 연락이
닿을 테니까."
  무슨 근거로 양이 저처럼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지 나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하기로 마음 굳혔다.
  "알았어요."
  나미가 대답하자, 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려구요?"
  "돌아가야겠어."
  "벌써? 묵을 만한 데, 있긴 있어요?"
  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양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나미가 쳐다보자,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세요."
  "나미씨 집이지?"
  남자 목소리였다.
  "네."
  "난 어제 만났던 야스이야."
  나미는 양에게 눈길을 돌렸다. 메마르고
갈라진 것 같은 목소리였다.
  "네."
  "지금 혼자 있소?"
  "....네."
  "잠시 들렀으면 하는데 괜찮을까?"
  "어머, 지금 막 자려는 참이었는데...."
  "잠시면 돼요. 한두마디 얘기만 나눌
거니까, 금방 끝낼 수 있어."
  "곤란합니다."
  "그럼, 지금 곧 갈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전화가 끊겼다.
  나미는 양을 쳐다보았다.
  "큰일났어요. 사장님이 곧 이리로
온댔어요!"
  "불을 꺼!"
  양의 말에 나미는 튕기듯 일어서서
형광등 스위치를 껐다.
  양은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창에는
레이스 커튼이 쳐져 있었다. 커튼을 젖히고
  "어쩌려구요?"
  "조용히 해!"
  양은 허리를 낮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양쪽 집 창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양쪽 모두 물장사 여인이 살고
있는 집 - 이 시간엔 텅비어 있었다.
  양은 다시 안으로 들어와서 창을 닫았다.
  "뭐가 보여요?"
  "야스이 졸개 녀석들이 이 집을 감시하고
있어. 널 의심하고 있는 거야!"
  "어쩌죠?"
  "걱정할 것 없어. 야스이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아직 모르고 있어. 남자 한 사람이
이 건물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고
확인하러 오는 게야."
  "하지만...."
녀석, 공갈을 치거든 경찰에 신고한다고
대들어. 나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면서
말야!"
  양은 현관에 벗어둔 구두와 서류가방을
집어들더니 다시 베라다로 나갔다.
  한동안 아래를 살피다가 잽싸게 몸을
날려 베란다 방책 위에 올라서더니
눈깐짝할 사이에 옆집 베란다로 내려갔다.
폭이 10센티미터도 채 안되는 방책 위를
가볍게 타고 걷는 것을 보고 나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창문 잠그구, 불을 켜고 있어."
  베란다 칸막이 저쪽에서 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미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두근거리는
보고 있을 때 인터폰이 울렸다.
  -- 이처럼 빨리1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야스이가
일층에서 전화를 건 게 분명했다. 아파트가
감시당하고 있다는 양의 말이 틀림없었다.
  다시 한번 인터폰이 울렸다.
  나미는 현관으로 나갔다. 체인 록이 걸려
있는 도어를 빼꼼 열었다.
  야스이가 두 사내를 데리고 서 있었다.
크림색 양복에 체크 무늬 셔츠, 도수가 든
선글래스를 끼고 있었다.
  "네!"
  "미안하군, 불쑥 찾아와서.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어서...."
  말투는 비록 정중했으나, 위압스런
표정은 험상궂기 짝이 없었다.
  "우선 문부터 좀 열어요. 이렇게 바깥에
서 가지고서야...."
  "이웃 사람 보기에도 꼴사납구."
  야스이 뒤에 서 잇던 두 사내가 날카롭게
복도를 구석구석 살폈다.
  "허지만,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서....."
  "알아요. 금방 일어설 테니까..... 차
대접은 바라지도 않아. 이 아이들은
바깥에서 기다리게 할 테니까."
  "정말이세요?"
  "정말이구말구. 약속하지. 거짓말이거든
경찰에 신고해도 안말려요."
  나미는 일단 도어를 닫아 체인을 풀었다.
약속한 대로 야스이 혼자 안으로 들어왔다.
  "미안하군."
  현관과 신발장을 슬쩍 훑던 야스이가
선 채로 손을 돌려 도어를 닫기는 했으나,
언제든 복도의 두 녀석이 밀치고 들어올 수
있도록 조금 틈새를 남겨두는 것이었다.
  "남자 애들은 엉터리들만 골라 채용한 것
같더니 아가씨들은 그렇지도 않았어.
관리도 빈틈없구. 나미씨 주소도 본사에
파일되어 있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야스이는 구두를
벗었다.
  "잠시, 괜찮지? 집이 깨끗하군. 이
정도면 세가 얼마쯤일까?"
  두리번거리던 야스이는 화장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화장실 좀 써도 괜찮지"
  유니트 배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손만 씻은 듯 금방 나왔다.
  웃도리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손을
닦았다.
  야스이는 커튼을 열고 베란다를 살핀
다음, 방 한복판에 책상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빼어물었다. 나미도 어쩔 수 없이
침대에 걸터 앉았다. 두 손은 무릎 위에
모았다.
  "담배 한대만 피우고 금방 일어설께.
재떨이.... 이 콜라 깡통이면 충분해."
  라이터 뚜껑 여는 소리가 이상스럽게도
크게 울렸다.
  야스이는 연기를 내뿜으면서 말을
이었다.
  "무슨 연락온 것 없었나?"
  나미는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얼굴을 쳐들었다.
  "그 녀석, 양이라는 도망친 웨이터
말야."
  나미는 고개만 내저었다. 자신 등 뒤, 몇
미터 되지 않는 곳에 벽을 사이에 두고
양이 숨어 있었다. 등줄기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
  야스이는 피우던 담배를 콜라 깡통
구멍에 쑤셔 넣었다. 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중국 출신이지?"
  나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다른 아가씨 얘기로는 중국 잔류
고아라더군."
  "어머니가 그랬어요."
  "그럼 아가씬 여기서 태어났나?"
  "열세살 때 일본으로 왔어요."
  "중국어도 잘하겠군."
  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이란 녀석, 일본어를 거의
못했다면서?"
  "전 잘 몰라요."
  "통역해 준적 없나, 아키나 누구한테?"
  나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양과는 별로 얘기한 적이 없나?"
  "네."
  "고개를 이쪽으로 돌려. 얼굴 좀 잘
보이게."
  나미는 고개를 돌렸다.
  "정말 미인이군. 혹시 양이 아가씨한테
반한 건 아냐?"
  "아닙니다."
  "얘기해 본 적도 없다면서 아닌 걸
어떻게 알아?"
  "그런건 느낌으로 알 수 있죠."
없나?"
  "네, 없어요."
  "아키한테는 친구집에 얹혀 지낸다고
했다는데 들은 적이 없다?"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야스이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말야, 남자 한 사람이 이
아파트로 들어왔어. 허나 지금 불이 켜진
집은 둘밖에 없어. 그 남자는 불이 켜진 두
집 가운데 어느 한집으로 들어간 게
틀림없어. 여기 이 집 아니면 또 한집...."
  "어떻게 그렇게도 자세히 아세요?"
  "내 부하 녀석이 밑에서 지키고 있어.
어제부터 줄곧 아가씨네 집을 감시하고
있다, 이 말씀이야."
  "우리에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그처럼 귀찮은 짓, 좋아서 하고 있는 건
아냐. 아가씨가 싫어하는 그 마음 잘 알아.
그러니까 깨끗이 물러가게 알고 있는 것
모두 얘기해 줘."
  나미는 심호흡을 했다.
  "얘기해 드릴 것, 아무 것도 없어요."
  "내 보기엔 그렇지 않아. 믿을 수 없어!
정말 전화 한통도 없었어?"
  "없었어요."
  "그래?"
  야스이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콜라
깡통에 쑤셔박았다.
  "마음대로 한번 버티어 봐. 허나 우릴
손쉽게 물러설 사람을 알았다간 큰 코다쳐!
오늘 안 되면 내일... 매일이라도 찾아올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마음대로. 허나 나쁜 짓한 게 없으니까
겁날 것 하나도 없어. 경찰이 오히려 우릴
고맙게 생각할 게야. 자기들이 할일,
대신해 주고 있으니까 말야!"
  "거짓말 마세요!"
  "뭐가 거짓말이라는 게야? 잘 들어. 양은
살인범이야. 그런 흉악범의 뒤를 쫓는 건
선량한 시민의 의무야!"
  나미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야스이가 말한 대로 분명한 살인범이었다.
그러나 두려운 쪽은 양이 아니라
야스이였다. 또 야스이는 선량한 시민이
아니었다.
  야스이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떠들고
있을 때보다 휠씬 더 두렵게 느껴졌다.
꼭 알려 줘. 그게 몇시든 상관없어. 명함
갖고 있지? 그 번호로 전화해. 누군가가
틀림없이 있을 테니까 잊지 말도록!'"
  나미는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조금전에 양이 말했던 대로였다.
  야스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구두를 신은 뒤 나미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이건 화장실 빌려 쓴 값이야."
  1만엔 짜리 한장을 나미 앞으로
내밀었다.
  "필요없어요."
  "그러지 말구 받아둬. 단돈 1만엔으로 뭘
어떻게 해 보자는 건 아니야. 당신 월급두
될 수 있는 한 빨리 지불하도록 하지."
  야스이는 도어를 밀어 열었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두 녀석이 허둥대며 담배를 밟아
끄면서 머리를 숙였다.
  "가자!"
  야스이는 퉁명스레 내뱉으며 나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럼...."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뒤를 부하 두
녀석이 잰걸음으로 쫓아갔다.
  나미는 문을 닫아 잠갔다. 긴장이 일시에
풀려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릴 것 같았다.
가까스로 도어 체인을 걸고 집안을 휘둘러
보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양이 방안에
있었다.
  "깜짝 놀랐어요."
않음을 보고 다시 한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배를 싸안고 침대에 걸터앉은 모습이 무척
괴로워 보였다.
  "왜 그래요?"
  양은 말없이 머리만 내저었다. 얼굴색이
창백했다.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던 양이
침대 위의 서류가방을 끌어당겨 캡슐과
빨간 알약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괜찮아. 약을 먹었으니까......"
  "배가 아파요?"
  "맹장염이야. 만성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 언제가는 잘라내야겠지만."
  나미는 아키와 양이 갱의실에서
옥신각신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도 양은
배가 아파 약을 먹고 잠시 쉬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병원엘 가야...."
  그러나 나미는 끝가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 소용없는 얘기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보험증이 없는 양이 병원을
찾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그렇잖구. 30분만 지나면 깨끗이
가셔져."
  "거기 누우세요.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밖으로 나갈 수 없잖아요?"
  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눕자,
나미는 발치에 앉았다. 양은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어서 상반신을 일으켜
웃도리를 벗으려 하자, 나미가 거들어
주었다.
  양은 서류가방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이마에선 진땀이 배어나왔다.
  보다 못해 나미가 부엌으로 가서 수건을
물에 적셔 이마에 얹어 주었다.
  양은 꼼짝도 안했다.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새벽에 전화하는 것, 잊으면 안 돼!"
  "도대체 어쩔 생각으로 그러세요?"
  "해야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하지만 그 사람들, 당신을 그냥 두진
않을 거예요."
  "붙잡히지 않아. 그들은 날 잡을 수
없어!"
  양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나미!"
  새삼스레 부르는 소리에 나미는 양을
바라보았다.
  "내일이 지나거든 내 일은 잊어 줘."
  "나미는 가게에서 부르는 이름이에요.
본명은.... 친나, 다이친나 (戴淸娜)."
  "친나, 고향은 어디지?"
  "흑룡강성. 당신은?"
  "대만. 대만에 대해 좀 아나?"
  나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얘기해 줘요."
  "따뜻한 곳이야. 도쿄보다 휠씬 따뜻해."
  "사람들도 많아요?"
  "대북이나 고웅(高雄)은 많지. 내가
태어난 곳은 중동부 시골, 바다 가까운
곳이야. 날마다 자맥질로 고기를 잡았지.
어릴 적부터 수영을 잘했어. 헤엄칠 줄
알아?"
  "못해요, 전혀. 얼굴을 물 속에
집어넣지도 못해요. 자주 개울에서 어울려
  "그렇게 쉬운걸 못 배웠어? 난 말야.
지금도 물 속에서 3분 이상 견딜 수 있어."
  "고기잡이로 먹고 살았나요?"
  "아니, 고기잡이는 어릴 적 얘기야. 배가
고파서 그거라도 구워 먹을까 하고..."
  "난 댄스, 춤을 무척 잘 추었어요."
  "댄스?"
  "언니가 가르쳐 줬어요.
사촌언니가....."
  나미는 일어섰다.
  "지르바. 탱고. 왈츠...."
  좁은 방안에서 스텝을 밟아 보였다.
  "일본으로 온 뒤엔 출 기회가 없어
스텝을 깡그리 잊어 버린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어요."
  양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번졌다.
  "좋죠? 디스코보다 휠씬 좋아요. 일본
사람들 댄스하는 것 별로 못 봤어요."
  "대만에서도 댄스, 모두 좋아해."
  "출 줄 아세요?"
  양은 조금 당황스러워하다가 입을
열었다.
  "옛날, 군에 있을 때 놀러가서 좀
춰봤어. 휴가를 얻어도 갈 곳이 별로
없었거든."
  "군대에도 있었어요?"
  "응. 대만에선 누구나 다 갔다 와야 해."
  양은 옛날 얘기를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미는 화제를 바꾸었다.
  "술, 즐기세요?"
  "조금밖에 못 마셔."
  "여행은? 어디어디 가봤어요?"
 "미국도 가봤어요?"
  "응."
  여행 얘기에도 양은 별로 끌려들지
않았다.
  "가족은? 결혼은 했어요?"
  "아니."
  양은 멋없이 대답했다.
  "여자 싫어하세요? 그렇진 않겠죠? 여자
싫어하는 남자,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양도 머리를 끄덕였다.
  "싫어하진 않아."
  "일본 여자, 어떻게 생각하세요?"
  양은 보일 듯 말 듯 머리를 가로
흔들면서 눈을 감았다.
  "졸음이 와요? 한숨 주무시겠어요?"
  "네가 그렇게 조잘대고 있는데 어떻게
잠이 드누?"
  "어머, 미안해요. 조용히 입다물고
있을께요."
  "넌 잠 안 와?"
  "지금은."
  "나 때문에?"
  "그런 건 아녜요."
  나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나 같은 여잔 싫죠?"
  "어째서?"
  "그렇담......."
  나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뭐야? 말해 봐."
  양이 감았던 눈을 뜨면서 채근하듯
말했다.
  "옆에 눕고 싶어요. 당신 곁에."
  양은 말없이 나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미는 옷을 입은 채로 곁에 누웠다.
천장 조명을 끄고 스탠드를 켰다. 나미는
천장에 그려진 스탠드의 둥근 그림자에
눈길을 박았다.
  "통증, 가라앉았나요?"
  한참 만에 나미가 물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약만 먹을 수
있다면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
  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은 몸을 반듯이 해서 눈을 감았다.
  나미는 살며시 손을 뻗쳐 양의 배를 쓸어
주었다. 깜짝 놀란 듯 양이 몸을
움찔했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단단하고 탄력 있는 근육이었다. 마치
로프를 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양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차츰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갔다. 그래도
양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미는 조용히 어루만지면서 양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양이 눈을 떴다.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가만히, 움직이지 말아요!"
  나미는 속삭이면서 양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누가 몸을 흔드는 바람에 나미는 눈을
떴다. 벌써 양복까지 갖춰 입은 양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오전 4시였다.
  나미는 깜짝 놀랐다.
  "전화, 5시랬죠?"
  어느새 저도 모르게 잠이 푹 든
것이었다. 아직도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 그러나 여기선 걸 수 없어."
  나미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어디서 걸죠?"
  "어디든 상관 없어. 여기서 떨어진
곳이라면."
  양은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따로따로 나가는 게 좋겠어. 내가 먼저
나갈 테니까 10분쯤 있다가 나와. 아무
데나 네 마음대로 가서 5시가 되거든
전화를 걸어. 공중전화가 좋을거야. 이렇게
말해. 내가 전화로, <갈 곳이 없어. 돈을
좀 빌려 줘야겠어. 신주쿠 교엔에서
노숙하고 있으니까 빨리 와 줘> 라고
하더라고 말야."
  "<갈 곳이 없어. 돈 좀 빌려 줘야겠어.
신주쿠 교엔에서 노숙하고 있으니깐 빨리와
줘.>"
 나미가 되풀이하자 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숙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교엔은 닫혀 있잖아요, 지금 이
시간엔?"
  "담을 타넘으면 어디서든 들어 올 수
있어. 센다가야 쪽이라면 휠씬 쉽지. 내가
그렇게 말하더라고만 전해. 안쪽 못(池)
옆, 타이완가쿠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야."
  "타이완가쿠? 하지만 경찰을 끌고 가면
어쩌죠?"
  "그 녀석들이 경찰을?"
  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녀석들은 날
붙잡아 어딘론가로 끌고 갈 생각으로 있을
게야."
  나미는 덜컥 겁이 났다.
  "뭘 하든 네 마음대로야. 단, 이곳으로
돌아와서는 절대로 안 돼!"
  "싫어요! 나도 교엔에 함께 가겠어요!"
  "위험해!"
  "하지만 당신 혼자로서는 그들과 얘기할
수 없잖아요? 당신 일본어 실력으로는
무리예요."
  양은 말없이 나미를 쏘아보았다.
  "전화를 걸고 나면, 나도 당신과 한패로
몰리게 된다는 것 모르세요?"
  양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부탁이에요. 나도 데리고 가 주세요.
무섭지 않아요, 조금도."
  양의 눈이 초점을 잃으며 조금은
멍해지는 것 같았다.
  "따라오면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끔찍한 꼴을 보게 돼. 참아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광경을!"
  "괜찮아요. 아무리 끔찍하고 처참해도
견디어 낼 수 있어요."
  "내가 무섭지도 않아?"
  "무섭지 않아요, 조금도. 당신과
헤어지는 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두렵지만."
  나미의 말투는 단호했다.
  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함께 가자구. 그러나 스커트
차림으로는 안 돼."
  "진바지라면 괜찮아요?"
  "그래."
  "감시자는 어쩌죠?"
  "걱정할 것 없어. 포기하고 돌아간 것
같아."
  나미는 서둘러 진바지와 트레이닝 셔츠로
갈아입었다.
  "2,3일은 떠돌아 다닐 각오로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나미는 소핑백에 속옷과 원피스 한벌을
쑤셔담았다.
  "준비됐어요."
  "그럼...."
  현관으로 나가던 나미는 앞장 선 양의
팔을 잡아당겼다. 양이 고개를 돌려
쏘아보았다.
  "날 버리고 혼자 가면 안 돼요, 절대로!"
  나미는 양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알았어."
  양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밖은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맑은
날씨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역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지나가던 택시를
잡았다.
  "샌다가야!"
  나미가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양은 이미 몇 번이고 온 적이 있었던 듯
신주쿠 교엔 주변지리에 밝았다. 택시가
센다가야 5쵸메로 접어들자마자 팔꿈치로
나미를 쿡쿡 찔렀다.
  "여기 세워 주세요."
  두 사람은 택시에서 내렸다. 요금은
나미가 지불했다.
  양은 지금 달려온 메이지도리(明治通)
에서 왼쪽으로 꺾인 길로 들어섰다. 나미는
서둘러 뒤를 따랐다.
  주택가와 상점가가 뒤섞여 있는
채로였다. 개를 데리고 산보나온 노인
몇몇을 제외하면 통행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양이 길옆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가리켰다. 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양도 부스 안으로
들어왔다.
  야스이 명함을 꺼내어 든 다음, 전화
카드를 밀어넣고 번호를 눌렀다. 벨이 서너
번 울리자 상대방이 나왔다.
  "네, 야스이 흥업입니다."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야스이 사장님 부탁합니다."
  "누구시죠?"
  "나미라고 전해 주세요."
  "급한 일이에요. 양씨가 나한테 전활
걸어왔어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수화기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다가 다른
사람이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아직 잠이 덜 깬 다른 남자 목소리였다.
  "야스이 사장님께 좀 전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말씀하세요."
  "양씨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갈 곳이
없어. 돈 좀 빌려 줘야겠어. 신주쿠
교엔에서 노숙하고 있으니까 타이완가쿠
있는 곳으로 빨리 와 줘> 라고 말했어요."
  "잠깐. 신주쿠 교엔 타이완가쿠라고
했나? 당신은 지금 어디있어?"
  나미는 서슴없이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대로 기다려 줘. 전화 끊지 말구."
  다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미는 손으로 수화기를 막고 양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양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공중전화 레버를 눌렀다. 신호음과 함께
전화카드가 빠져나왔다.
  "걱정할 것 없어. 녀석들, 틀림없이 와!"
  의아해 하는 나미에게 달래듯 설명하면서
양이 먼저 전화 부스에서 나왔다. 나미도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북동쪽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얼마 안 가 정면으로 높직한 철책이
보였다. 검정색 철창살 끝은 뾰족했다.
건물이 다닥다닥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철책을 따라 조금 가자, 움푹 꺼진 것처럼
민가가 몇 채 몰려 있는 곳이 나왔다. 모두
낡은 집, 게다가 무슨 까닭인지 빈집처럼
보였다.
  양은 빈집 뒤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철책 대신 콘크리트 담이 나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낡은 담이었다.
  주위는 컴컴하고 조용했다.
  양이 서류가방을 내밀자 나미는 아무 말
없이 받아들었다.
  짙은 풀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양이 담장 꼭대기에 손을 얹더니 순간,
가볍게 올라갔다. 말타듯이 걸터 앉은
양에게 나미가 서류가방과 자신의 쇼핑백을
건네 주었다.
나미는 두 손을 위로 뻗쳤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호통을 치며 덮쳐올 것 같아
가슴이 콩콩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양이 나미의 두 손을 잡아 가볍게 담장
위로 당겨올렸다. 나미가 걸터 앉아 균형을
잡기를 기다려 양은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양이 밑에서 두 손을 벌렸다. 나미는
다리부터 안쪽으로 내려 미끄러지듯 몸을
던졌다. 양이 허리를 잡아 받아 주었다.
  착지와 동시에 나미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크고 작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곳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갈길이 뻗어 있는 게 보였다.
  신주쿠 교엔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첫번째는 작년 봄의 벗꽃 구경 - 사귀던
  양이 앞장 서서 성큼성큼 걸아갔다. 숲이
우거지고 조용한 탓일까, 교엔 안은 날새는
게 다른 곳보다 더딘 것 같았다. 새떼가
푸드득 머리 위로 날아오르기도 했다. 자갈
밟히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아직 어둠에 젖은 공기가 무척 쌀쌀했다.
  이처럼 너른 교엔 안을 두리번거려
방향을 살피지도 않으면서 망설임 하나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양이
이상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종종걸음으로 쫓아가자 앞쪽에 못이
나타났다. 길쭉하게 생긴 못이었다.
중간중간 잘록하게 휘어진 곳이 많았다.
깊은 것 같지는 않았다.
  못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다다르자 양이
왼쪽을 가리켰다. 짙은 숲속에 목조건물이
뾰족했다.
  "저게 타이완가쿠야."
  짧게 한마디 한 양은 다시 휘적휘적
걸어갔다.
  반대쪽, 멀찌감치서 바라보자
타이완가쿠가 서 있는 곳도 연못가였다.
  나미는 한참동안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지난번 왔을 땐 있는지 조차도
몰랐던 건물이었다.
  짙은 녹색 수면에 거꾸로 비친 건물
그림자가 무척 신비하게 느껴졌다.
  못 주변은 깨끗하게 손질된
잔디밭이었다. 잔디 사이를 누비듯이
보도가 뻗어 있었다. 맞은 편 숲 위로
나시구치 고층 빌딩들이 보였다.
  잔디밭 언저리는 일본정원인 것 같았다.
타이엔가쿠의 신비로운 모습이 나미는 휠씬
더 마음에 들었다.
  타이완가쿠에 넋을 빼겼던 나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양은 나무 사이를 빠져
이미 저만큼 가고 있었다. 동트는 새벽빛을
가로막기라도 하듯이 숲이 이곳 저곳에서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것도 보였다.
  혼자였다면 길을 못 찾아 허둥댔을 게
틀림없었다. 거대한 미로나 다름없었다.
숲이 많아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렇긴 해도 나미는 지금 자기들이
신주쿠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안 가서 갑자기 눈앞이 툭 트이면서
콘크리트 둑으로 둘러싸인 못이 나타났다.
흐릿한 수면엔 창포잎이 우거져 있었다.
보였다.
  양은 그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나미도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못가엔
널찍널찍한 돌이 깔려 있었다. 여기저기
깨어졌거나 아예 들어낸 곳도 있었다. 계단
중앙에는 못 쪽으로 미끄럼틀이 붙어
있었다.
  그제서야 나미는 못이 아니라 풀장임을
가까스로 깨달았다. 건물과의 사이에는
수도꼭지가 나란히 달린 음료수대가, 휠씬
왼쪽에는 공중변소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네모난 콘크리트 기둥도
보였다. 왼쪽 구석엔 창이 달린 방이
있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건물 바로 앞에는 테이블로 쓰고 있는
것일까, 직경 50 센티미터, 높이 1미터쯤
잡초가 무성했다.
  양은 통나무 쪽으로 다가가서 그 중
하나를 옆으로 밀쳐냈다. 양이 힘겨워하는
걸로 봐서 무게가 상당한 것 같았다.
  통나무를 밀쳐낸 양은 땅바닥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나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호기심에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
  양이 파낸 흙구덩이에서 검정 물체가
보였다. 검정 비닐로 덧싼 뭉치는 적어도
한아름은 되어 보였다. 비닐을 벗기자
배낭이 나왔다.
  배낭을 옆에 꺼내놓고 양이 입고 있던
양복을 벗었다.
  팬티 한장만 남기고 홀랑 벗은 양은 배낭
  제일 먼저 꺼낸 것은 로프 타래였다.
이어서 종이로 싼 길이 4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가느다란 물체를 꺼내었다.
마지막으로 잠수복처럼 보이는 옷과
고무바닥을 댄 부추를 꺼내었다.
  양은 잽싸게 부츠를 신더니 잠수복을
입었다. 웃도리에 달린 후드를 쓰고 끈으로
졸라매었다.
  나미는 양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벗어놓은
양복을 서류가방 위에 개어놓았다.
  도대체 양의 속셈이 뭔지 점점 더 알
수가 없었다. 무슨 까닭으로 이런 곳에
옷과 짐을 숨겨놓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의 움직임은 잽싸면서도 빈틈 하나
없었다. 옷을 갈아입은 양은 가늘고 길쭉한
양은 나이프를 오른쪽 허벅지에 묶어
매었다.
  일단 준비를 마친 듯 양은 시계를
보았다. 나미도 따라서 자기 손목시계로
눈길을 쏟았다.
  5시 7분 전이었다.
  양은 배낭을 다시 구덩이에 묻은 다음
통나무를 그 위에 옮겨다 놓았다.
  "이쪽으로 와."
  양이 말했다.
  나미가 따라가자 풀장 옆에 오두막 같은
집이 두채 있었다. 지금은 쓰지 않는
펌프실이었다. 그 중 하나는 잡초가 길로
자라 지붕을 덮고 있었다. 푹 꺼진 곳에
집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어! 어떤 엄청난 일이 벌어지든
올 테니까 마음 푹 놓고 있어!"
  <있어!> 를 세번씩이나 강조하고 있는
양의 모습이 TV 시대극에 나오는 닌자
(忍者, 전란시대 일본 武家의 간첩. 무술.
변신술에 능하다) 처럼 보였다. 그러나
북경어를 쓰는 닌자였다.
  나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양은
한동안 나미를 쏘아보다가 몸을 홱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양의 모습이 나무사이로 사라지자 나미는
서류가방을 옆으로 눕혀 걸터 앉았다.
핸드백과 양이 벗어놓은 양복과 셔츠를
무릎위에 싸안았다. 몸을 웅크려 바닥을
살폈다. 여기저기 수도 없이 많은 벌레집이
보였다.
  불안했다.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불안이
아니라 양의 운명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 자리에 앉은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멀리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얘기 소리였다. 점점
가까워졌다.
  나미는 핸드백과 양의 양복을 가슴에 꼭
껴안으면서 눈을 감았다.
  풀냄새에 머리가 어찔어찔해졌다.


     독원숭이 (상)

         -아리마사 장편추리소설

=================================
    독원숭이 (하)

         -아리마사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1. 독원숭이(17)
            2. 독원숭이(18)
            3. 독원숭이(19)
            4. 독원숭이(20)
            5. 독원숭이(21)
            6. 독원숭이(22)
            7. 독원숭이(23)
            8. 독원숭이(24)
            9. 독원숭이(25)
           10. 독원숭이(26)
           11. 독원숭이(27)
           12. 독원숭이(28)
           13. 독원숭이(29)
           14. 독원숭이(30)
           15. 독원숭이(31)
           16. 독원숭이(32)
           17. 독원숭이(33)
           18. 독원숭이(34)
           19. 독원숭이(35)
           20. 독원숭이(36)

  17.

  신주쿠 서에 <카부키쵸 카바레 점장
피살사건> 수사본부가 설치된 지도 사흘이
지났다. 그러나 비교적 손쉬우리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다른 사건 때문에 감식계로 야부를
찾아간 김에 사메지마는 어째서 수사가
답보하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수사본부는 차츰 초조해 하고 있어.
별것 아니라고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피의자인 중국인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으니...."
  중국인이란 말이 마음에 걸려 사메지마는
귀를 기울였다.
  "그래, 중국인이었어. 지문을 깨끗이
닦고 사라진 녀석. 호스테스를 집중 추궁해
보았으나, 전과자 카드엔 그런 녀석이
없었다는군. 주소도 엉터리구 사진도
없었어. 일본어가 반벙어리인 셈치고는
시간이 너무 걸려. 같은 패거리들이 깊숙이
숨겨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 녀석이 범인이란 건 틀림없나?"
  "글쎄. 피살자가 각성제 중독자이니까
그쪽으로도 훑고 있는 모양이야. 헌데 묘한
일이 생겼어."
  "묘한 일?"
  "시체 발견인자인 동시에 신고자...
당신도 알고 있는 야스이란 녀석이
행방불명이 됐어. 피살자의 고용주이기도
한데."
  "일찌감치 튀어 버린 건가?"
  사메지마의 물음에 야부는 고개를
  "아니, 그런 건 아냐. 어제 새벽에 젊은
녀석 셋을 데리고 나간 뒤로 연락이
끊겼다는 게야."
  "무슨 말이야. 도대체?"
  "수사본부에서 몽타지를 만들려고,
호스테스랑 야스이를 만나러 갔었지.
그랬더니 사장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서
야스이 흥업 녀석들이 허둥대고 있더란
게야. 어쩌면 야스이란 녀석, 보기보다
구린 짓을 많이 하고 있는지도 몰라."
  "예상 못했던 사태란 말이지?"
  "그래. 얘기로는 어제 새벽 누군가가
사무소로 전화를 걸어 야스이를 불러냈던
모양이야. 집에서 자고 있던 야스이가
연락을 받자마자, 사무소에 있던 두 녀석과
운전기사를 데리고 뛰쳐나갔다는 게야.'
  "4시에서 5시 사이."
  그런 시간에 야쿠자가 출동했다면
어디선가 일이 터졌거나, 아니면 조직
본부의 호출을 받았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봐야 했다. 새벽 4,5 시라면 일반적으로
사람의 활동력과 이해력이 가장 낮은
시간대였다.
  때문에 야쿠자들은 그런 시간대를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집으로 쳐들어가서 빚을
조르거나 토지양도서에 서명을 받아내거나
하는 것이었다.
  야스이가 소속된 폭력단 본부를 다른
조직이 습격한 낌새는 없었다. 때문에
야스이가 불려나간 것은 그들이 노리고
있던 인물이 움직이기 시작한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았다.
있었다. 행방을 감춘 고액 채무자를 쫓고
있던 젊은 부하들이 황급히 지원을
요청했다면 새벽에 뛰쳐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제 새벽이었단 말이지?"
  사메지마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로선 비상이 걸린 셈이야. 만
하루가 지났는데도 사장과 연락이 되지
않고 있으니 ....."
  "시침 떼느라고 그러는 게 아닐까?"
  "시침 뗄 이유가 뭐 있어? 야스이가
점장을 죽였다면 또 모를까.... 범행 현장
상황으로 봐서 야스이 짓은 아니었어."
  "머리통이 깨졌다고 했지?"
  "흉기는 원형의 둔기.... 돌이거나
금속제 재떨이 같은 것."
  "흉기는 찾아냈나?"
  야부는 고개를 저었다.
  "현장에는 없었어."
  "그 흉기 말인데... 인체(人體) 로는 볼
수 없나?"
  "인체? 맨주먹 말인가?"
  사메지마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발일 수도 있잖아."
  야부는 그러나 어림없는 얘기는
그만두라는 얼굴이었다.
  "설마 맨주먹에 머리통까지 깨어질라구?
허긴 카라데(空手) 시범을 보면 벽돌이나
돌을 깨는 녀석이 있긴 있으니까 전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없겠지. 허나 그런
달인이라면 구태여 머리통까지 께뜨릴
이유가 없잖아? 다른 급소를 치는 방법이
  "보통은 그렇지."
  사메지마도 수긍했다.
  "발을 쓴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쓰러질 때 걷어차는 정도가 일반적이야."
  야부는 사메지마를 건너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허나 피살자는 치명상인 두개골 파열
이외엔 다른 상처가 하나도 없었어. 다시
말하면 처음부터 피살자가 앉아 있었거나
누워 있는 걸 걷어찬 게 아니라면...."
  "피살자 키는 얼마였지?"
  사메지마가 물었다.
  "1미터 70센티미터. 큰키는 아니지만, 서
있었다면 정수리를 내려차기가 절대로 쉽지
않아. 현장엔 의자 같은 발돋음할 잡기가
하나도 없었어."
  "흉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단언은 할 수 없지만,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정면이야."
  앞에 서 있는 1미터 70세티미터 사내의
머리통을 깨뜨리자면, 야구 배트같이
길쭉한 흉기로 후려지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럴 경우 흉기는 위쪽에서 비스듬히
내리꽂히게 마련이었다.
  곽영민이 말한 태권도의 <내려차기>가
어떤 것인지 사메지마는 실제로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다만 발뒤꿈치를
사용한다는 것만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발뒤꿈치라고는 볼 수 없나?"
  "뭐라구?"
  "발뒤꿈치루, 무슨 수로 어떻게 해서
정수리를 깨뜨리누?"
  "그건 나도 잘 몰라. 허나 흉기 형상으로
봐선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면 범인은
발레리나나 댄서처럼 다리를 높이 쳐들 수
있는 녀석이야."
  야부 얼굴엔 개구쟁이 웃음이 번졌다.
  "수사본부에 귀띔 줘야겠군. 범인이
발레리나일지도 모른다구 말야."
  사메지마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날 밤, 사메지마는 요란한 전화 벨
소리에 잠이 깨었다. 눈을 비비면서
머리맡의 시계를 보았다.
  새벽 1시 30분이었다. 1시가 지나서
스탠드 불을 껐으니까 잠이 들자마자
전화벨이 울린 셈이었다.
  "여보세요...."
  "사메지마씨 계십니까?"
  귀에 선 억양, 곽영민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린 사메지마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납니다. 곽영민씨?"
  "네. 주무시고 계셨나요?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죠?"
  "재미있는 곳을 안내하고 싶어서... 지금
신주쿠에 나와 있습니다. 오실 수 있나요?"
  사메지마는 전싱에 긴장을 느끼면서
물었다.
  "그럼요! 찾아낸 모양이로군요,
독원숭이를."
  사메지마는 전신에 긴장을 느끼면서
물었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곽이 설명한 곳은 카부키쵸 1쵸메
구야쿠쇼도리 쪽이었다.
  "지금 난 그 근처 공중전화에서......"
  "바로 나가죠. 이 시간이라면 15분 밖에
안 걸릴 겝니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사메지마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사메지마의 아파트는 환상 7호선 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이 시간이라면
싱오메가이도 (新靑梅街道) 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빈택시가 많았다. 만약 택시가
없다면 사메지마는 직접 운전해 갈
생각이었다.
  바지와 셔츠를 주섬주섬 챙겨입은
차고 그 위에 웃도리를 덮어 입었다.
  만약 독원숭이와 맞부닥치기라도 한다면
특수 경찰봉 하나로는 뒤가 켕기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권총을 가지러
경찰서에 들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2시가 조금 지나서 사메지마는
구야쿠쇼도리 입구에서 택시를 내렸다. 이
시간에도 정체가 심한 구야쿠쇼도리 안으로
들어가기를 꺼려 했기 때문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안쪽으로 들어가자,
가드레일 위에 걸터앉아 기다리고 있는
곽이 보였다. 감색 양복 밑으로 목에 매단
왼팔이 보였다.
  "오래 기다렸죠?"
  사메지마가 다가서자 곽도 일어섰다.
  "수첩 갖고 왔겠죠?"
  "수첩? 경찰수첩 말인가?"
  "네."
  "항상 휴대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메지마가 말끝을 흐리자 곽은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심해도 되겠군요. 수첩, 필요할지도
몰라요."
  "왜요?"
  "곧 아시게 될 겝니다."
  말을 마친 곽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카부키쵸 2쵸메 쪽으로 가다가 후리(風林)
회관 앞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메르세데스 벤츠가 3대 주차해 있었다.
주위엔 7,8 명의 야쿠자가 옹기종기 모여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면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야쿠자들은 다가오는 곽에게로 일제히
사메지마를 알아보고는 얼른 태도를
바꿨다.
  "수고하십니다."
  이시와구미의 풋나기였다. 그 한마디를
신호로 모였던 야쿠자들의 얼굴에 일시에
긴장이 스쳤다.
  사메지마는 그들을 무시하면서도 전신이
긴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 정도의
풋나기들이 동원된 것을 보면
구미쵸(組長)인 이시와를 비롯하여 주요
간부들이 부근 술집으로 충출동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곽과 사메지마는 야쿠자 앞을 지나
첫번째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두 사람 모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곽이 말하면서 벤츠가 주차해 있는 빌딩
뒤쪽으로 돌았다.
  "3층에 몰려 있을 겝니다."
  곽의 말에 사메지마는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아리산<阿里山)> 이란 네온이 보였다.
심야 레스토랑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들어갑시다."
  곽을 따라 사메지마도 물수건 바구니가
쌓여 있는 비상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뒷문에는 망보는 녀석이 한명도 없었다.
  <아리산> 도어에는 <회원제> 라는
플레이트가 붙어 있었다.
  "뭐라고 하거든 한잔만 하고 돌아간다고
말하세요."
  곽이 속삭이듯 말하면서 도어를 밀었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국요리 냄새도 코를
찔렀다. 노래에 맞춘 손뼉 박자 소리까지
어울려 홀 안은 꽤나 시끌벅적했다.
  곽이 도어를 밀치고 들어서려는 순간,
안쪽에서 흰 실크 셔츠를 입은 사내가
튕기듯 달려왔다. 사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곽 입에서 중국어가 쏟아져 나왔다.
  사내가 뭐라고 대거리를 하면서 안쪽으로
도어를 밀어붙였다. 입장을 거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곽은 계속해서 빠른 말투의 중국어로
사내를 몰아세웠다.
  사내의 어깨너머로 홀 안이 보였다.
중앙통로를 중심으로 홀은 양쪽으로 갈려
있었다. 통로 바로 옆에 놓인 대형 TV를
중심으로 부스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안쪽이 주방인 것 같았다.
  왼쪽 부스엔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다.
오른쪽은 사내 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곽이 사메지마를 돌아보며 중국어로
뭐라고 떠들어대자, 사내의 얼굴색이
단번에 변해 버리고 말았다.
  "신주쿠 서에서 나오셨나요?"
  사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찰수첩을
내보였다.
  "오늘은 예약 손님 뿐입니다. 일반
손님은 한 사람도 못 받습니다."
  사내가 말하자, 곽이 다시 뭐라고
중국어로 몰아세웠다.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곽이 뭐라고 몰아세웠는지 한마디도
들어가려는 것이란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사내는 도어에서 손을 떼면서
한쪽으로 비켜섰다. 가게로 들어서는
곽에게 사내는 뭔가 애원조로 당부했다.
  시비나 분쟁을 일으키지 말아달라고
거듭거듭 부탁하는 것 같았다.
  곽은 쌀쌀하게 한마디로 눙치면서 사내
오른쪽 어깨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메지마도 뒤를 따랐다.
  오른쪽 부스에 15,6 명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앉아 있었다. 중앙 테이블에 여자
둘과 남자 넷, 그 왼쪽 테이블에 4명,
오른쪽 테이블에 2명이 앉아 았었다. 좌우
테이블에는 따로 여자가 한명씩 끼어
있었다.
떨어진 곳에 한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중앙 테이블에 앉아 있는 4명 가운데
3명은 사메지마도 아는 얼굴이었다.
  이시와 다케조와 이시와구미 간부인
다카가와(高河)와 하다(羽太) 였다.
이시와는 실버그레이 수트에 짙은
선글래스를 끼고 있었다. 짧게 깎아올린
머리에 체구는 뚱뚱했다. 나이는 50대
전반.
  다카가와는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미남형이었다. 얼굴 윤곽이 뾰족하게 생긴
탓에 눈초리가 더욱 날카롭게 보였다.
홀쭉한 키, 오렌지그린의 더블수트
차림이었다.
  다카가와 옆에 앉아 있는 하다는
자국이 숭숭 남아 있었다. 검정 수트에
받쳐 맨 넥타이 무늬가 화려했다.
  이시와와 다카가와 사이에 깡마른 은발이
앉아 있었다. 얼굴색이 거무스름한 것으로
보아 속병이라도 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맞은편에 아가씨 둘이 앉아
시중을 들고 있었다.
  곽은 성큼성큼 반대편 빈 부스로 풀썩
자리를 잡았다. 대형 TV에 가려 손님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TV에는
분수가 시원스레 솟고 있는 공원을
배경으로 젊은 남녀 한쌍이 산책하고 있는
영상이 비쳐지고 있었다. 화면 아래쪽엔
한자로 노래가사가 흐르고 있었다.
  흰 셔츠의 사내가 두 사람 옆으로 와서
허리를 낮추면서 필사적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싸움, 안됩니다."
  "걱정 마!"
  사메지마가 대답하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받았다.
  "술을 뭘루 하시겠습니까?"
  말하는 태도로 보아 걱정 말라는
사메지마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사메지마는 곽을 홀낏 건너다보면서
맥주를 시켰다. 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곽은 주문을 받고 물러서려는
사내 팔을 잽싸게 나꿔챘다.
  "우리 두 사람 여기 있는 것, 비밀이야!
알았지?"
  사내의 눈엔 짙은 공포가 서렸다.
  노래가 끝나자, 건너편 부스에서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스포트라이트
너머로 곽과 사메지마가 앉아 있는 부스를
노려보았다.
  홀 안 공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주방 입구에 있던 또 다른
2명도 사메지마 쪽을 노려보며 허리를
낮추었다. 밝은색 수트를 입은 젊은
녀석들이었다.
  "지배인! 지배인 어디 갔어?"
  통로 건너편 부스에서 탁한 음성이
울렸다. 하다 목소리였다.
  "네에, 여깅습니다."
  실크 셔츠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오늘은 우리가 예약했다는 것 잊었나?
돌려 보내!"
  일어선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4인조는
다카가와. 하다의 보디가드들이었다.
  가게안은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실크
셔츠 사내는 사메지마와 곽을 내려다보면서
눈만 껌벅거렸다. 속이 타는지 입술까지
핥았다.
  "돌려보내! 말 안 들으면 우리가 듣게 해
줄 수도 있어!"
  바로 그때, 카라오케의 다음 곡 도입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른쪽 테이블의
남자 2명과 호스테스들이 박자에 맞춰
손벽을 쳤다.
  이시와 옆에 앉은 은발 남자에게로
마이크가 넘어갔다. 은발이 노래를
시작하려는 순간, 하다가 서 있는 네
녀석에게 턱짓을 했다.
  네 녀석은 어깨를 흔들면서 통로를
  은발 남자가 노래를 시작했다. 메마른 것
같은 낮은 소리 - 중국 노래였다.
  통로를 가로지른 네 녀석이 사메지마
테이블로 다가왔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곽영민 덕분에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곽이 천천히 일어서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예웨이"
  노래가 뚝 그쳤다.
  오른쪽 테이블의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은발 사내를 감사듯 둘러섰다.
  4인조도 몸을 날려 곽을 덮칠 기세였다.
  "관두지 못해!"
  사메지마가 고개를 들면서 나직하게,
그러나 힘이 실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홱 몸을 돌리던 한 녀석이 사메지마를
알아보고 훅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4인조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시와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예웨이였다. 오늘밤 그들이 <아리산> 에서
한잔 한다는 정보를 곽이 정확하게 알아낸
것이었다.
  이시와구미의 최고간부 3명과 누군가가
목숨을 노리고 있는 예웨이를 엄호하고
있는 이들 보디가드들이 맨주먹으로
외출했을 까닭이 없었다.
  사메지마를 본 순간, 얼어붙고 만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몸수색이라도 당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무기불법소지로 체포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뭐야, 이새끼!"
  하다가 호통을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스포트라이트가 눈에 부신 듯,
한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라이트 꺼!"
  카라오케와 스포트라이트가 동시에
꺼졌다.
  "..........."
  곽이 중국어로 뭔가 몰아세우면서 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강한 어조였다.
  예웨이도 보디가드를 밀어젖히면서
일어섰다. 팽팽하게 긴장된 얼굴이었다.
  4인조가 슬금슬금 곽영민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다가 꾸짖듯이 4인조를
노려보았다.
  "움직이지 마. 내 말 들어. 빈 몸들
아니지?"
  사메지마가 나지막하게 명령하듯 말했다.
대형 TV에 가려 하다는 아직도 사메지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뭘 꾸물거려?"
  하다가 호통을 터뜨렸다.
  곽은 하다를 무시한 채 예웨이의 테이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테이블엔 이시와. 하다. 다카가와도
함께였다.
  곽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곽이
대만 경관이란 걸 알 까닭이 없는 하다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메지마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다가 덤벼들면, 가만히 당하고 있을
곽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난장판이 될지도
몰랐다.
  곽을 노려보던 하다가 사메지마 쪽으로
  "아니, 당신....."
  하다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곽은 중앙 테이블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른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두
대만인이 곽을 알아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곽은 천천히 하다와 이시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른 걱정 안해도 좋아요, 얘기만 나눌
생각이니까. 대만의 거물 두목
예웨이씨와."
  "뭐야. 네놈은?"
  이시와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더없이
불쾌하다는 얼굴 표정이었다.
  곽은 머리를 숙였다. 비아냥거림이
뚜렷한 동작이었다.
  "난 대만 경관, 저쪽은 일본 경관."
가리켰다.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예웨이 보디가드가 벌떡 일어섰다. 둘 중
젊은 쪽이었다.
  곽이 고개를 홱 돌려 노려보면서 뭐라고
나직하게 내뱉었다.
  예웨이가 젊은 녀석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당신 무례하군. 나, 지금 일본 친구와
함께 있어."
  예웨이가 일본어로 더듬거리자 곽은
머리를 끄덕였다.
  "일본어 오케이? 나와 당신, 공통의
친구가 있어. 벌써 만났어? 아직 못
만났겠지? 만났다면 당신 이 자리에 없어!"
  예웨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듣기만 했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어. 독원숭이,
그렇게 말한 건 당신이었지?"
  "돌아가 줘!"
  이시와가 쮜어짜듯이 내뱉었다. 그는
사메지마를 줄곧 노려 보고 있었다.
  "곧 돌아갈 생각이야."
  사메지마가 응수했다.
  "당신, 신주쿠 서 소속이지?"
  이시와가 다시 물었다.
  "그래. 이 얼굴 기억해 주는 게 좋을
게야. 내가 바로 방범과 사메지마야."
  "그냥 한잔 마시면서 즐기고만 있는데 왜
끼어들어 못살게 굴지? 이유를 말해 봐요,
사메지마씨!"
  "못살게 굴 생각은 없었어. 이 사람이
옛날 친구를 만나야겠다기에 따라왔을
뿐이야."
  "그게 바로 우릴 못살게 굴고 있는
게야!'"
  "그래?"
  사메지마는 중앙통로의 놋쇠 장식 난간을
타넘어 이시와구미 4인조에게로 다가갔다.
  "진짜 못살게 굴자면, 이 형님들을
검문해서 발가벗겨야 하는 것 아냐? 몸속에
뭘 숨겨가지고 왔는지 한번 뒤져볼까?"
  "이 새끼가!"
  하다가 으르렁거렸다.
  "참아, 하다씨!"
  다카가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다카가와는 분명히 긴장해 있었다.
무투파(武鬪派) 를 표방하고 있는
이시구미에서는 드물게 보는 인텔리
야쿠자였다. 지금은 행방불명이 된
사메지마는 머리에 떠올랐다.
  곽이 입을 열었다. 일본어였다.
  "예웨이, 난 <산코 호텔>에 묵고 있어.
여기서 가까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와. 독원숭이 손에서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야. 당신, 모든 것 자백하면
도와 줄 수 있어, 기꺼이."
  "무슨 소릴 지껄이는거야, 이 녀석이?"
  이시와가 사메지마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메지마는 마주 쏘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글쎄, 두 사람만 통하는 얘기겠지."
  "날 얕잡아 봤다간 큰코 다쳐! 까부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구!"
  이시와가 으르렁거렸다. 조직폭력단
두목답게 박력이 있었다.
  사메지마는 이시와 얼굴을 노려보았다.
만 것이었다.
  "이시와구미 구미쵸, 내 별명 들어본 적
있어? 난 결코 누굴 얕보거나 하진 않아!
물고 늘어질 뿐이야!"
  이시와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얼굴도
파랗게 질렸다. 옆에 있던 다카가와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벌떡
일어서면서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젠 됐지! 돌아가 줘, 사메지마 선생!"
  다카가와는 이시와가 더는 참지 못하고
사메지마에게 몸을 던져 대들까봐 겁이 난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곽영민 쪽으로 눈을 돌렸다.
곽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손을 뻗쳐
앞에 놓인 요리를 덥석 움켜쥐었다. 야채와
고기를 섞어 볶은 것이었다. 요리를 입안에
웃도리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러면서도
예웨이 얼굴에 박힌 눈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맛있군. 굉장한 요리야!"
  곽이 빈정거렸다. 예웨이는 몸을 뒤로
젖혔을 뿐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또 보자구."
  예웨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곽은 천천히 도어 쪽으로 걸아갔다.
사메지마도 뒤를 따랐다. 등엔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사메지마가 손을 돌려 도어를 닫는 순간,
홀 안에서 유리 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나왔다. 누군가가 테이블을 뒤집어
버린 것이었다.
내려왔다.
  바깥으로 나와 혼잡한 거리로 들어서면서
사메지마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앞서 걷고 있던 곽이 돌아보면서 빙긋
웃었다.
  "몹시 긴장했던 모양이군요."
  "터무니없는 짓이었죠. 만용을 더
부렸다간 정말 살아나오지 못했을 거요."
  "대만이었다면 예웨이도 날 그냥 두진
않았을 겁니다. 허나 여기는 일본. 더구나
예웨이는 대만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신세....."
  "왜 못 돌아간다는 거요?"
  "독원숭이!"
  "틀림없이 죽일 거라고 보는군요."
  "틀림없어요. 독원숭이는 절대 놓치지
말겁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곽이 독원숭이에게 완전히 반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군요...
<내려차기>란 어떤 것입니까?"
  곽은 이상스럽다는 듯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내려차기는 왜 묻는 겁니가?"
  "관내에서 남자 한 사람이 살해됐어요.
나흘 전에. 머리통이 깨져서...."
  곽의 눈이 번쩍 불을 뿜었다.
  "어떤 식으로?"
  사메지마는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담당한 사건이 아니라 잘 몰라요.
허나 둔기로 - 둔기가 무슨 말인지
  "돌같이 생긴 것. 날카롭지 않은 걸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요. 둔기에 맞아 머리통이
깨졌답니다. 그것도 정면에서...."
  "그 시체, 보여 줄 수 없나요?"
  "미안하지만, 현 단계에선 어렵습니다."
  "그렇습니까...? 내려차기는 정면에서
상대방을 이렇게......."
  곽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왼팔을
가슴으로 당기고 무릎이 가슴에 닿을
정도로 날카롭게 쳐들어 정강이가 이마에
스칠 정도로 쭉 뻗어 차올렸다. 이어서
비스듬한 각도로 발뒤꿈치를 내리찍었다.
  발끝이 사메지마 이마보다 휠씬 높이
올라갔다.
  지나가던 취객 몇몇이 깜짝 놀라
  "이게 <내려차기> 입니다. 일본에서는
뒤꿈치로 <정수리 찍기> 라고 하더군요.
머리통이나 쇄골 깨뜨리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사메지마는 기가 질렸다. 엄청난 그리고
끔찍한 발길질이었다. 키큰 사람이 그렇게
차 온다면 피할 틈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옳았다. 머리를 감싼다 해도 어깨가
부서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파괴력은 어느 정돕니까? 일격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나요?"
  곽은 물끄러미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 수련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단
일격에 사람을 죽이는 건 간단치가 않아요.
허나 독원숭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모두 돌로 쳐 죽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찍듯이
쳐내렸다고 말예요."
  곽은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들어
찍어내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허나 아니었어요. 독원숭이가 뒤꿈치로
정수리를 찍어 깨뜨렸던 겁니다. 굉장한
기술이죠. 직접 당하고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를 정도이니까요."
  곽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만약 나흘 전 그 살인사건의 범인이
독원숭이라면, 앞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죽어갈 게요. 예웨이가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어쩌면 독원숭이도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예웨이를 죽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각오로
                            ^있을 겝니다."
  사메지마는 전신에 소름이 돋고 있음을
깨달았다.


  18.

  산구바시(參宮橋) 의 아파트는 나미가
살고 있던 오쿠보 아파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벽돌색 외벽과
유리 도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자동
잠금장치가 나미를 놀라게 했다.
  각 세대와 연결된 현관 입구의 집합
인터폰으로 연락해서 내부에서 열게
하든가, 열쇠가 없다면 현관 자동 도어
안으로 들어간다는건 불가능했다.
  오후 9시, 나미와 양은 아파트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미는 원피스, 양은
수트 차림이었다.
  두 사람은 조금 전까지 시바(芝)에 있는
비지니스 호텔에 들어 있었다.
줄곧 그 비지니스 호텔에 박혀 있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나미를 알고 있었다. 어제 아침, 오쿠보
아파트를 나설 때 양이 했던 말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했다.
  --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끔찍한
꼴을 보게 돼. 참아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광경을!
  그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어제 나미는 몇 번이나 구역질을 했다.
교엔에서 일어났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이 숲속으로 들어간 직후, 사람들이
웅성거며 나미가 숨어 있는 펌프실을
지나갔다.
  그리고 몇 분 뒤.
처절한 부르짖음이 귀청을 찢을듯이
울려왔다. 단 한번이었다. 그러나 그
외마디 부르짖음은 길게길게 울려퍼졌다.
그리고는 물밑처럼 조용해졌다.
  30분이 지나자, 나미는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양이 살해된 게 틀림없다고 행각했다.
도망쳐야 한다고 입술을 꼭 깨물면서
펌프실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양이 불숙
나타났다.
  양은 축 늘어진 사람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처음엔 누군지, 나미는 알아보지
못했다.
  코가 문드러지고 얼굴이 으깨어진
야스이였다. 두 팔은 팔꿈치 부분에서
이상한 각도로 비틀어져 있었고, 입에는
넣을 때 부러진 것일까, 앞니도 몽땅 빠져
있었다. 대신 침이 뒤섞인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 내렸다.
  양은 짐짝이라도 되는 것처럼, 야스이를
땅바닥에 털썩 던지듯 내려놓았다.
  야스이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눈물로 얼룩진 두눈엔 공포와 애원의 빛이
뒤섞여 있었다.
  나미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땅바닥에 내동이 쳐진 야스이가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두 팔이
부러진 탓에 체중을 버티어 몸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날개가 찢긴
벌레가 꼼지락거리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양은 전혀 표정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대신 이 녀석에게 몇가지 물어봐 줘.
대답하면 살려 주고, 거짓말을 하거나
대답하지 않으면 죽인다구 해. 그것도
천천히 고통스런 방법으로...."
  나미는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야스이와 눈길이 마주쳤다.
살려달라는 애원의 빛이 서린 눈길이었다.
  나미는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질문에 대답하면 살려 준댔어요.
그렇잖으면 죽게 됩니다. 사장님은."
  야스이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움직였다.
양이 어깨를 잡아 상반신을 일으켜 주었다.
거친 손길에 야스이 입에서는 다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입에 박은 돌은 뽑아 주지. 고함을
  나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통역했다.
  야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이
손가락을 집어넣어 입에 박힌 돌을
뽑아냈다. 이빨 부러진 부분에 돌이 스치자
야스이는 두 눈을 꽉 감으면서 터지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죽, 죽이지 말라구, 살려달라구 이
녀석한테 말해 줘. 뭐든 시키는대로
하겠다구...."
  둑이 터진 것처럼 말을 쏟아내는 야스이
입을 양이 손을 덮어 막았다 .야스이는
조용해졌다.
  손을 떼면서 양이 입을 열었다.
  "예웨이라는 중국인을 아는가 물어봐.
대만에서 온 65세의 남자. 이시와구미
두목의 친구야."
  야스이 눈에 경악이 서리면서 양과
나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얼굴은 땀과
피. 침으로 얼룩져 있었다.
  "예웨이라는 대만 사람 혹시 모르세요?
이시와구미 구미쵸 친구로 나이가 많은
사람입니다."
  "모, 몰라. 정말이야. 이시와는.... 같은
계열이지만 그 대만인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몰라. 거짓말이 아냐. 정말이야. 이 녀석은
내 부하 셋을 죽였어. 눈깜짝할 사이에.
부탁이야,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 줘. 알고
있는 것 죄다 털어놓을 테니까...."
  나미는 야스이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양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실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이시와구미 두목이 어디 살고
있는지 물어봐."
  "요쓰야(四谷) 근처에 있는 아파트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시와구미 사무소는 어디 있어?"
  "신주쿠. 본부는 숙사, 두 곳이야. 이
수첩에 주소가 적혀 있어."
  부러진 오른팔을 웃도리 안주머니로
가져가려던 야스이 입에서 다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미가 통역해 주자 양이 대신 수첩을
꺼내었다.
  "이시와구미 다른 간부 사는 곳은 알고
있나?"
  "알고 있어. 알고 있구말구. 다카가와
주소를 알고 있어. 이시와의 넘버 스리야.
지금 산구바시 애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
  야스이는 시키는대로 했다. 다카가와의
애인을 몇 번인가 바라다 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신주쿠 호스테스 출신이었다.
  "다카가와는 매일 그 아파트로 가나?"
  "별다른 일이 없으면 틀림없이.... 잘
모르지만 그럴거야. 아침마다 젊은 녀석이
아파트로 마중을 갈 정도이니까...."
  양은 표정없는 얼굴로 야스이를
바라보다가 나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 녀석 말, 정말로 들려?"
  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라고 봐요. 살려고 발버둥치는 걸
봐두 거짓말은 아닐거예요."
  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야스이 입에서
뽑아낸 돌을 다시 주워 들었다.
  야스이는 눈이 휘둥그래져 금방이라도
소리치는 것보다 양의 손이 더 빨랐다.
돌멩이가 목구멍을 틀어박고 말았다.
야스이 목에 힘줄이 불거져 올랐다. 그러나
대신 킥킥거리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을
뿐이었다.
  양은 야스이 몸을 가볍게 쳐들어 다시
어깨에 매었다. 야스이의 두 발이 격렬하게
허공을 걷어찼다. 어린애가 발버둥을 치는
모습 그대로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한마디 남긴 양은 야스이를 멘 채 다시
숲 쪽으로 내려갔다.
  야스이는 히! 히! 하는 소리를 내면서
계속 발버둥을 쳤다.돌에 막힌 목구멍
사리로 터지는 숨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한 소리 - 날카롭기는 했으나 결코
  히! 히! 소리도 마침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미는 풀섶에 주저 앉아 심하게
구토질을 했다.
  야스이가 어떻게 될지, 더이상 생각지
않기로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그러나 믿지 못할 만큼 끔찍한 악몽을 꾼
것 같은 기분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우거진 숲속, 문 열기 전의 조용한 공원
안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 스크린에
비쳐지고 있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양은 한참 만에 돌아왔다.
  검정 잠수복을 벗어 손에 든 모습 - 팬티
한장 뿐이었다. 전신이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끝났어!"
  나미는 말없이 양을 쳐다보았다. 양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신주쿠 고층
빌딩들이 아침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었다.
  "아마 오늘쯤 비가 올거야. 못 수위가
높아지면, 한동안 발견되지 않을 게야."
  "못에 빠뜨렸어요?"
  "하수도 맨홀 뚜껑을 추로 썼어. 로프로
묶은 네 놈에게 철판을 안겨 가라앉게
했어"
  나미는 다시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이제 헤어져야겠군. 어디든 마음대로
가도 좋아. 허나 경찰에 가는 것만은 삼가
줬으면 좋겠어."
  나미가 개어놓은 셔츠와 양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양이 말했다.
  나미는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당신과 함께 가겠어요."
  "무섭지 않아? 두렵지 않아?"
  "두려워요. 하지만 헤어지는 게 더
무서워요!"
  "그 녀석은 죽었어. 너와 나를 연관지어
생각할 사람은 이제 한 사람도 없어!"
  그래도 나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있어요!"
  그러나 양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미는 양이 넥타이 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출근 준비를 서두는 회사원처럼 익숙한,
그리고 침착한 모습이었다.
  "데리고 가 주는 거죠?"
내려다보았다. 왜 함께 가자느냐는 물음이
깃든 눈길임을 나미는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도 안했다. 양도 마찬가지였다.
  양은 잠수복을 들고 통나무 있는 쪽으로
갔다. 통나무를 밀어 내고 배낭을 꺼내어
잠수복을 쑤셔넣었다. 발목에 매달았던
나이프를 풀어 서류가방 위에 놓았다.
  배낭 주둥이를 동여맨 다음 비닐
주머니로 싸서 흙구덩이에 묻었다. 그위에
통나무도 옮겨다 놓았다.
  나이프를 서류가방에 집어넣으면서 나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제 가보자구!"

  나미는 집합 인터폰의 802호 버튼을
눌렀다.

숭숭 뚫린 스텐레스 판에서 응답소리가
흘러나왔다.
  "네에...."
  여자 목소리였다.
  "<클럽 아디리> 종업원이에요.
다카가와씨가 부탁한 걸 배달하러 왔어요."
  나미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러세요?"
  여자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게 엘리베이터 홀로
들어가는 현관 자동 도어가 열렸다.
  양은 손수건으로 꺼내어 802호 버튼을
슬쩍 닦았다. 이어서 나미를 자동 도어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온 잠시 뒤,
도어는 슬금슬금 저절로 닫혔다. 양은
눌렀다. 일층에 멈춰 있던 에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얼른 올라탔다.
  8층에 이르러 나미가 먼저 내렸다. 양이
서류가방을 나미에게 내밀었다. 나미는
그것을 받아들면서 복도로 나갔다.
  양은 주머니에서 고무장갑을 꺼내어
꼈다.
  나미가 802호 도어 앞에 걸음을 멈추자,
양은 도어놉 반대쪽 벽에 몸을 찰싹
붙였다. 그쪽 벽은 도어에 달린 방범
렌즈의 사각지대였다. 나미는 인터폰을
눌렀다.
  "네."
  대답과 함께 방범렌즈 안쪽에 인기척이
났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도어가 열렸다. 그
도어놉을 힘껏 잡아당겼다.
  검정 원피스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도어 안쪽 놉에 매달린 채
끌려나왔다. 양은 오른손을 슬쩍 뻗치며,
눈이 둥그래져 영문을 몰라 하는 여인의
입을 막아 양쪽 뺨을 조였다. 소리를 못
지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양쪽 뺨이 찰싹
다라붙을 정도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양은 여인을 집안으로 밀어넣었다.
여인은 양이 미는 대로 뒷걸음질쳤다.
  양은 여자 얼굴을 죈 채 신발도 벗지
않고 카페트가 깔린 실내로 올라갔다.
나미도 뒤따라 들어와서 도어를 잠갔다.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양은 여자를 밀면서 거실로 들어가
재빠르게 좌우를 살폈다.
샤프트에 연결된 매직핸드처럼 동시에
움직였다.
  수도고속도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거실에는 검정 가죽응접 세트와 대형 TV가
놓여 있었다. 대리석 응접 테이블엔 작은
맥주병과 글래스가, TV엔 자막이 붙은
외국영화가 비쳐지고 있었다.
  맥주병 옆 재떨이에는 루즈가 묻은 살렘
라이트 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여자 혼자였다.
  양이 여자 턱을 당겨 올리자, 하얀
목줄기가 드러났다.
  양이 왼손을 수평으로 폈다. 손가락
두번째 마디를 굽혀 갈퀴를 만들었다.
  "제발!"
  나미가 짧게 부르짖었다.
  양이 나미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왼손 갈퀴가 아래로 처지면서 여인의
명치를 찔렀다. 동물 울음소리가 터지면서
여인의 무릎이 꺾였다.
  양은 여인을 바닥에 눕혔다. 기절한 건
아니었지만 고통과 겁에 질려 비명은 커녕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양이 나미에게 머리짓을
했다. 나미는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얼른
내밀었다.
  서류가방에서 꺼낸 로프와 포장용
테이프로 여인의 두 팔과 다리를 묶고 눈과
입을 봉했다.
  거실 안쪽엔 따로 방이 둘 있었다.
한쪽엔 킹사이즈 침대가, 다른 한쪽엔
들어안아 침대에 눕힌 다음 담요를
덮어씌웠다.
  나미는 양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소파에
몸을 묻었다.
  TV에선 영어 대화와 각종 효과음이
흘러나왔다. TV 위엔 비디오 테이프
케이스가 얹혀 있었다.
  양은 거실로 돌아와서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나미는 저도 모르게 무릎 위에
모은 두 주먹에 힘을 넣었다.
  양은 벽에 붙어 있는 사이드 보드로
다가갔다. 무선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버튼을 눌러 자동응답으로 바꾸었다.
녹음된 여자 목소리에 이어 삐 - 하는
신호음이 울렸다.
  이어서 양은 사이드 보드를 뒤지기

  양이 서류가방에서 약을 꺼내어 먹는
것을 나미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캡슐과
알약 숫자가 지난번보다 많았다. 통증이
엄습할 때면 양의 얼굴은 금방 흙빛으로
변했다.
  어제 낮에도 한번 양의 통증이
발작했지만, 약을 먹는 대신 얼음찜질로
버티어 냈다.
  약이 얼마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제처럼 안전한 곳에 있을 땐, 가능한
약을 먹지 않고 참는다고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성이 생겨, 한번 먹을
적마다 양이 늘려야하기 때문에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진통제가 아니라
주기적으로 복용하지 않으면 복막염으로
번질 위험도 높았다. 그 항생제도 몇
알밖에 남지 않았다.
  전화 벨이 두 번 울렸다. 자동응답
테이프가 돌아가자 아무말 없이 끊겼다.
  사이드 보드에서 찾아낸 서류를 나미는
양에게 읽어 주었다. 그 중에는 나미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권리증도 몇 개 들어
있었지만, 양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정을 지나자 나미는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어젯밤 잠을 설쳤기
때문이었다.
  침대에 들자마자 양이 감겨왔지만 나미는
조금도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양은
두말 않고 물러났다. 그러나 날샐 무렵,
  그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한 것이었다.
  양은 거절하지 않았다.
  끝난 뒤, 양은 다시 잠에 곯아
떨어졌지만, 나미는 점점 눈이
말똘말똥해졌다.
  양도 수잠을 자고 있는 것쯤은 나미도
알고 있었다. 틈틈이 양을 바라볼 적마다
그도 눈을 떠서 말없이 천장과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그처럼 하느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양의 속마음을 아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산구바시 아파트로 오기에 앞서 작전을
짜면서 단호하게 자르던 양의 말이
생각났다.
  -- 이게 너와 함께하는 마지막 일이야.
다카가와한테서 예웨이 있는 곳을
알아내면, 그때부터는 나 혼자 할 수 있어.
  나미는 그때 처음으로 예웨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 그 사람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
결사적으로 찾고 있어요?
  양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미를 바라보면서
짧게 대답했다.
  -- 날 배신했어.
  -- 그 사람 죽이면 모든 게 끝나나요?
  양은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대만으로 돌아가세요?
  -- 올 때 이용했던 루트가 아직
무사하다면.
  -- 어떤 루트예요?
  -- 얘기하자면 길어. 알아듣지두 못할
돌아왔어. 배멀미도 지독했어. 차라리
발바닥을 불로 지지는 게 낫지.....
  -- 비행기로 온 게 아니었군요.
  양은 애매한 웃음을 지었을 뿐, 더
이상은 얘기하지 않았다.
  새벽 3시가 지나자 세 번째 전화가
걸려왔다. 벨 소리에 나미는 잠이 깨었다.
응답 테이프가 돌아가자 전화는 끊겼다.
  20분 뒤, 이번엔 현관 입구와 연결된
인터폰이 삐 - 하고 울렸다.
  양이 말없이 자동 동어 잠금장치를 푸는
스위치를 눌렀다. 인터폰에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아파트 현관과 거실은 복도로 이어져
있었다. 그 중간은 욕실과 화장실이었다.
  나미는 일어서서 복도 쪽으로 향했다.
등을 찰싹 붙였다. 부엌에서 찾아낸
앞치마를 머리에 뒤집어쓰면서 오른손은
어느새 칼을 뽑아들고 있었다.
  나미는 현관으로 내려가서서 감시렌즈를
통해 바깥을 살펴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로프 마찰음과 함게 올라오다가 8층에서
멎는 게 보였다.
  발자국 소리에 이어 짙은 녹색 더블수트
차림의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느슨하게
풀린 넥타이에, 두손을 포켓에 찌른 사내의
눈초리가 칼날퍼럼 번뜩거렸다. 머리는
올백이었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한쪽 손을 뽑아
인터폰을 눌렀다.
  나미는 두 번 크게 숨을 내쉰 다음 현관
도어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도어를 열자 사내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야?"
  술냄개가 풍겼다. 눈밑이 불그스레했다.
  "유카리씨 친구예요. 유카리씨, 몸이
불편하다면서 절 불렀어요."
  "뭐라구?"
  사내는 혀를 차면서 도어를 닫고
난폭하게 구두를 벗었다.
  "그래서 전활 안 받았나? 멍청하게
앓기는 왜 앓아......"
  나미가 내놓은 슬리퍼를 신는 둥 마는 둥
안으로 들어갔다. 나미는 사내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도어를 잠갔다.
  "이봐, 유카리!"
  사내가 거실로 들어서면서 침실로 눈을
돌리는 순간, 양이 잽싸게 움직였다.
깊숙이 박혀 있었다.
  사내의 눈이 둥그래졌다. 놀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일까. 휙하는 바람소리가
입 안에서 새어나왔다.
  사내가 양의 오른팔을 붙잡은 것과
동시에 양의 왼손이 사내 얼굴을 조였다.
  "소리치면 배를 확 찢어버릴 테다!"
  사내의 턱이 덜썩덜썩 움직였다. 양은
사내 하복부를 찌른 나이프를 잡은 채 몸을
밀쳐 소파에 앉혔다.
  사내가 털썩 소파에 몸을 묻자, 양은
무릎을 맞대듯이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사내는 하복부에 꽂힌 나이프에 눈길을 준
채로였다.
  눈을 껌벅거렸다. 통증은 별로 없는 것
같이 보였다. 나이프가 15센티쯤 뱃속으로
  양과 마주 앉은지 얼마 안 되어 사내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눈꼬리에
눈물이 고이면서 숨을 쉴 적마다 콧물을
훌쩍이는 것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양의 오른팔을 잡고 있던 사내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양이 나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내의 셔츠와 바지가 붉게 물들면서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이기 시작했다.
  "단 한번밖에 기회가 없어요. 지금
상태라면 응급처지를 받으면 목숨을 건질
수 있어요. 그러나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거나 고함을 지르면 배를 짓이겨 버릴
거예요!"
  사내는 양이 손으로 죄고 있는 턱을
움직였다.
사내는 헉헉거리며, 마치 결승 테이프를
끊은 육상선수처럼 짧고 얕은 숨을
헐떡거렸다. 오열처럼 들리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사이에 섞이기도 했다.
  "예웨이, 어디 있죠?"
  나미가 물었다.
  사내는 번쩍 고개를 들어 나미를
바라보았다.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양이
잽싸게 왼손으로 사내 얼굴을 덮으면서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넣었다.
  양의 손바닥 밑에서 사내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사내는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양이
얼굴을 덮었던 왼손을 풀었다.
  "보, 보스 아파트에 있어. 요, 요쓰야
와카바쵸 (若葉町).... 보디가드도 함께
있어. 두, 두 채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나미가 숨도 쉬지 않고 통역했다.
  "아파트 이름과 호수는?"
  양이 묻자 나미가 사내에게 통역해
주었다.
  "와카바 그랜드 하임, 1021호와
1022호....."
  "보디가드는 몇 명이야?"
  "예웨이 회장이 데리고 있는 둘과,
우리쪽 둘......"
  "총도 갖고 있나?"
  "가, 갖고 있어....."
  말을 마친 사내는 애원하듯 나미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나미는 자기도 빈혈을 일으킨 것처럼
눈앞이 어찔어찔했다. 목 뒷줄기가
서늘해지는가 싶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 그
                    燒美??주저앉고 말았다.
  멀리서 사내 목소리가 울려왔다.
  "이, 이 사내가 바로? 이 녀석이 바로 그
녀석이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미는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사내는 양에게로 눈길을 돌리면서
물었다.
  "당, 당신이 독원숭이?"
  "독 - 원 - 숭 - 이?"
  양이 되물었다.
  "그래. 조금 전에 대만에서 온 형사를
만났어. 당신을 쫓고 있다고 했어.
곽이라는....."
  "곽?"
  나미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살려 줘. 제발 나 좀 살려 줘."
  사내는 부르짖듯이 애원했다. 눈을
깜박거릴 적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불카했던 얼굴이 지금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살려 줘, 독원숭이님...."
  "독원숭이가 아냐! <두유앙> 이야!"
  양은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발음했다.
이어서 사내 배에 박혔던 나이프를 슬쩍
뽑아냈다.
  사내가 숨을 들이마시면서 두 손으로
배를 감싸안았다.
  양은 사내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다시
한번 천천히 말했다.
  "두 - 유 - 앙."
  "두, 두유앙...."
  사내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복창하듯이
                    +되받았다.


  19.

  아파트 입구엔 요요기(代代木) 경찰서
정복순경이 서 있었다. 사메지마는 모모이
과장과 함께 패트롤카에서 내려 아파트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로 8층까지 올라갔다.
  아직도 현장검증이 진행중인 듯,
플래시가 번쩍번쩍 터지는 게 보였다.
도어는 열려 있었다.
  사메지마와 모모이는 포켓에서 장갑을
꺼내어 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경찰청 수사 1과
하시우치(橋內) 반장과 요요기 서
형사과장인 호리의 모습이 보였다.
거실에서 한창 아라키와 얘기를 나누고
  瓚獵?참이었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호리가
사메지마와 모모이를 알아보고 뜻밖이란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오, 신주쿠 서 분들이?"
  하이우치도 입을 닫으며 사메지마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내가 와달라고 연락했어. 피의자가
신주쿠 서 관내에 사는 외국인이 분명한 것
같아서 말야."
  아라키가 눙치듯 설명했다.
  "피해자는 이시와 간부죠?"
  모모이가 묻자, 아라키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호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네. 다카가와 마쓰아키 (高河光明),
서른아홉 살입니다."
  "사인은?"
전이구, 배도 칼에 찔렸습니다. 그냥
뒀더라도 다량실혈로 숨졌을
치명상입니다."
  "배를 찌른 한참 뒤에 목을 잘랐단
말이지?"
  "세력다툼 전쟁이라기보다는 원한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범인은 남녀
2인좁니다."
  모모이 물음에 넙죽넙죽 대답하는 호리를
하시우치가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속상해 할 것 없어. 범인에 대한 정보를
처음 제공해 준 사람이 바로 사메지마
경감이야."
  아라키가 옆에서 달래듯 말했다.
  사메지마는 아라키 쪽으로 눈을 돌렸다.
호리와 하시우치는 어안이 벙벙한 듯 서로
  아라키가 사메지마와 모모이를 거실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수사요원과
감식과원이 거실 한복판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방해하는 사람이 없게 되자 아라키는
모모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얘기 들었어?"
  "오는 차 안에서 대충 들었습니다. 대만
프로가 움직이고 있다는...."
  모모이가 나직한 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함께 올 줄은 몰랐어."
  "이 현장만은 한번 꼭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과장님까지 이 사건에 끌고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사메지마의 말에 아라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을 감았다. 엄청 낙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라키는 다시 눈을 떴다.
  "피살자를 만나 적이 있나?"
  "어제 만났습니다. 곽과 함께 카부키쵸
심야 레스토랑에서."
  사메지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라키는 얼굴을 굳히며 날카롭게
반문했다.
  "뭐라구?"
  사메지마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 차
안에서 모모이에게 들려줬던 어젯밤 일을
다시 한번 얘기했다.
  "그럼 다카가와는 바로 그 직후,
이곳으로 왔다가 살해된 거로군."
  "범인들이 앞질러 와 있었다는
뜻입니까?"
  사메지마가 물었다.
주인인 이지마(飯島) 유카리를 찾아왔어.
유카리가 전에 근무했던 술집 이름을
대고서 말야. 다카가와가 보낸 선물을
배달하러 왔다기에 들어오라고 했다는
게야. 허나 도어가 열리자마자 느닷없이
사내가 덮쳐와서 유카리를 꽁꽁 묶어
침대에 던져 버리더라는군. 수트 차림의 키
큰 남자란 것 외엔 유카리는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했어. 여자가 외국어 -
중국어 아니면 한국어로 사내에게 말을
거는 것을 딱 한번 들었을 뿐이라는 게야.
줄곧 침대에 내동댕이쳐 있었는데 오늘
아침, 다카가와를 맞으러 온 풋나기들이
구해 줬다는군. 다카가와는 거실에서....
조금 전에 들었던 것처럼 배와 목이 찔려
죽어 있었어. 그리고...."
가리켰다. <D> 자가 쓰인 플래스틱 판이
놓여 있었다.
  "이봐, 호리. <D> 위치의 증거품을....."
  호리가 내키지 않는 태도로 증거품을
모아 담아둔 상자에서 비닐 주머니 한개를
꺼내어 들고 왔다.
  "이것 말입니까?"
  투명 비닐 주머니에 담긴 것이 똑똑하게
보였다. 나무를 깎아 만든 자그마한
<상엔>이 들어 있었다. 두 눈을 막은
원숭이, 두 귀를 막은 원숭이, 입을 막은
원숭이가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아라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날카로운
눈길을 사메지마 쪽으로 돌렸다. 호리는
어정어정 하시우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사메지마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자기
의견부터 말했다.
  "지금 곧 곽에게 연락해서 이걸 보여
줘야겠군요."
  "안 돼. 그랬다간 당신과 나 모두
망태기를 뒤집어쓰게 돼.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내부 밀고로 밀고 가야 해!"
  "범인 다카가와를 고문한 게
틀림없습니다. 금방이라도 또 다른
살인사건 신고가 날아들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메지마의 말투는 거칠고 단호했다.
  "알고 있어. 수사 4과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어. 지금쯤 이시와 본부
감시에 들어갔을 게야."
  "그 정도로 끝날 것 같습니까? 설마
예웨이가 이시와 본부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목소리가 너무 커! 이쪽으로 와."
  아라키는 당황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복도로 끌고 나갔다.
  복도에는 감식원이 지문과 발자국을
채취하고 있었다.
  "여긴 이제 끝났지?"
  아라키는 감식원을 쫓아 버린 다음
담배를 꺼내었다.
  "어쨌든 다카가와가 살해된 걸 이시와
쪽에도 알려 줬어. 지금쯤 예웨이가
공항으로 줄행랑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야."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본청이 이 사건을 내게 맡기도록 손을
쓸 생각이야. 수사 1과. 4과도 어떻게
옥신각신한다는 정보를 당신이 입수해서
뒤쫓던 중에 대만 프로가 출동한 것까지
알게 되었다 - 이런 식으로 밀고 갈
생각이야."
  "독원숭이는 어떻게 합니까?"
  "그 녀석은 당신이 맡아 줘야겠어. 우선
수사 1과는 원한, 수사 4과는 조직간의
분쟁선을 중심으로 뛰게 할 작정이야. 지금
예웨이가 살해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아. 범인은 여자와 함께야. 그 여인이
통역을 겸하고 있을 테니까 유력한 단서가
될거야."
  "이시와 쪽에서 발설한다면?"
  "그렇게 되면 일은 오히려 손쉬워져.
국제수사과에서 예웨이 신병을 인수해서,
이시와의 거래관계를 샅샅이 조사할 수
발설할 이유가 없어."
  "글쎄요."
  모모이가 헛기침을 하면서 끼어들었다.
  아라키가 쏘아보았지만 모모이는 말을
이어갔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이시와는 이번
사건에 대해선 시침을 떼겠죠. 허나 범인에
대해서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아라키 얼굴에는 망설임과 당황스러움이
동시에 번졌다. 모모이는 계속했다.
  "이시와 두목은 무투파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데리고 있는 간부가
살해됐는데도 모른 척하고 있진 않을
겁니다."
  "이시와는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습관까지 자세히 알고 있어요. 경찰이
엉뚱한 곳을 더듬고 있는 틈을 타서 이곳
저곳에서 롤러 작전을 펼지도 모릅니다."
  "허나 범인은 일류 프로야. 그렇게
간단히 이시와 손에 잡힐 것 같은가?"
  "그게 바로 문젭니다. 혈기왕성한 젊은
야쿠자가 대만에서 온 프로 킬러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설친다 칩시다. 신주쿠에
대만인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줄 아세요?
더군다나 이시와 야쿠자들 중에 대만인과
본토에서 온 중국인을 구별할 줄 아는
녀석이 있을 것 같습니까?"
  아라키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모모이는 말을 이어갔다.
  "분명히 말해서, 이시와 야쿠자가 몇 명
죽든, 대만 폭력단 보스가 살해되든 말든
이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중국인과
대만인이 단지 중국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이시와 졸때기들에게 봉변
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목숨까지 잃게 되는
건 두고 볼 수 없어요!'
  "...알겠어. 이시와가 함부로 못 날뛰게
단단히 압력을 넣지."
  "경정님이 직접 말입니까?"
  모모이가 다짐하듯이 물었다.
  아라키는 꼴깍 침을 삼키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직접."
  그제서야 사메지마도 입을 열었다.
  "그럼 이시와 쪽은 경정님께
맡기겠습니다. 전 곽과 함께 독원숭이를
쫓겠습니다. 이시와에겐 하다라는
주의해 주십시오. 잠시라도 마음을 놔선
절대로 안 됩니다."
  "하다라고 했나? 알겠어."
  아라키가 길게 들이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메지마는 모모이에게로 눈을 돌렸다.
모모이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라키
경정님, 한가지 충고해 드릴 게 있습니다."
  "뭐야?"
  "수사 1과가 설령 원한관계를 훑는다
하더라도 이시와 본부를 감시할 땐
경정님은 몰론 부하들도 반드시 방탄복과
권총을 갖추도록 하십시오. 지금부터가
최악의 사태라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독원숭이가 이시와 본부를 덮치기라도
한단 뜻인가?"
  "다카가와 한테서 짜낸 정보로 지금
예웨이를 헤치웠다면 별문제겠지만....
실패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라키는 당혹스런 얼굴로 말을 받았다.
  "여차하면 기동대도 출동시킬 수 있어."
  "중요한 건 예웨이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아니라 사람의 목숨입니다."
  사메지마는 차갑게 내뱉으면서 모모이과
함께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메지마는 패트롤카에 몸을 실으면서
운전경관에서 <산코 호텔>로 가자고
명령했다.
  "독원숭이가 예웨이 숨은 곳을
  모모이가 달리는 창밖으로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나른한 목소리였다.
  "아마, 틀림없을 겝니다."
  "그렇다면 예웨이만 죽이고 나면 모든 게
조용해지겠군."
  "이시와 쪽이 잠자코 있다면 그렇겠죠."
  "곽영민이란 사람은?"
  "예웨이가 살해된다 해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겠죠. 곽의 머리속엔 독원숭이 밖에
없는 것같이 보였어요."
  "그건 그것대로 성가시게 되겠군."
  모모이는 곽과 독원숭이에 관한
사메지마의 보고가 늦어진 데 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또 일시적이긴
했지만 사메지마가 아라키에게 정보를
제공한 데 대해서도 모른 척해 주었다.
수밖에 없었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 그 점을 사과하자
모모이는 뜻밖에도 따뜻하게 받아 주었다.
  "당신이 곽에게서 느낀 우정이 더 컸던
탓이겠지. 아라키 경정에게 협력하려는
마음보다...."
  사실 그랬다.
  곽에 대해서 묘한 우정을 느꼈기 때문에
사메지마는 아라키의 손발이 되는 걸
마다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모모이가
거기까지 이해해 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사메지마였다.
  패롤트카가 신주쿠 산코쵸(三光町)로
접어들 때까지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산코 호텔>이 멀찌감치 보이자
  "과장님에겐 노상 폐만 끼치고 있군요."
  페롤트카가 멈춤과 동시에 모모이가
대답했다.
  "언제든 하고 싶은대로 해. 내가
과장으로 있는 신주쿠 서 방범과에 당신이
재직하는 동안은."
  "고맙습니다."
  사메지마가 도어를 열면서 머리를
숙였다.
  모모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끝나거든 나한테 들러. 다카가와의
동생뻘인 야스이가 실종한 걸로 미루어
보아 카바레 점장 피살사건과도 무관한 것
같지 않아. 자료를 모아둘 테니까... 또
당신이 자신이 아라키 경정에게 충고했던
것처럼 권총을 휴대하는 게 좋겠어."
 사메지마가 거수경례를 붙이자
패롤트카는 휭하니 달려갔다.

  사메지마는 <산코 호텔>로 들어갔다.
로비 소파에 앉아 영자신문과 일본신문을
동시에 펼쳐 읽고 있던 곽이 알아보고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웬일로, 이 시간에?"
  "어제 만났던 이시와 간부 한 사람이
살해됐습니다.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누군가가 잠복해 있다가 덮친
모양입니다. 현장에서 <상엔> 조각이
발견됐어요."
  곽은 눈을 깜박거렸지만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독원숭이!"
  나직하게 부르짖으면 곽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휠씬 전에 시작됐는지도 모르죠.
함께 움직여 주시겠소? 당신이 말한
유(劉)라는 전우의 사진도 필요하군요."
  곽은 머리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엘리베이터로 방으로 올라갔던 곽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사진은 안주머니에 들어 있습니다."
  사메지마는 우선 야스이 흥업으로 갔다.
곽은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전화당번으로 보이는 청년 두 사람이
사무소를 지키고 있었다. 야스이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고 했다.
  "사건 뒤 자취를 감춘 양이란 웨이터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나?"
  두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미의 샘> 에서 일했던 호스테스
주소록 좀 보여 줘."
  "사장님이 가져갔습니다."
  폭주족 출신으로 보이는 스물 안팎의
청년이 대답했다.
  "그걸 가지고 간 뒤 행방불명이 됐단
말이지?"
  "네."
  청년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야스이도 호스테스를 훑고 있었나? 양의
소재를 알려구?"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죽은 아키는 각성제 상습복용자였어.
야스이가 공급해 준 게 틀림없지?"
  청년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서렸다.
그러나 야스이 소식은 정말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벤츱니다."
  "색깔과 넘버는?"
  "흰색.... 넘버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침 떼지 마. 자동차 심부름, 너희들
몫 아냐? 그런데도 넘버를 모른다구?"
  청년은 눈길을 내리깔았다.
  "네리마(練馬) 33, 네65XX입니다"
  사메지마는 수첩에 적었다.
  "야스이, 연락 있으면 나하테 꼭 알려!"
  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계열인 이시와구미 간부가 살해된
건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메지마는 밖으로 나와, 곽에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다음
함께 신주쿠 서로 걸어갔다.
  신주쿠 서 현관을 들어설 때 곽의 얼굴엔
웃음이 번졌다. 나라는 달라도 경찰서
분위기엔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다고 느낀
건지도 몰랐다.
  "서류를 갖고 오겠소.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곽에게 입구의 소파를 권한 사메지마는
방범과로 향했다. 곽은 신기하다는 듯
미소띤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테니...."
  모모이는 벌써 수사기록을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미의 샘> 호스테스
주소도 들어 있었다. 참고인 조사때 일일이
적어둔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모모이에게 고맙다면서
머리를 숙였다.
  과장석에 죽치고 앉은 모모이는 평소와
눈으로 신문을 훑으면서 두어번 머리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서류를 들고 권총 보관고로 향했다.
경감용 모델인 뉴넌브 38 구경 홀스터 째로
허리에 찼다.
  다시 방범과로 돌아온 사메지마는
야스이의 자동차 번호를 적은 쪽지를
모모이에게 내밀었다.
  "이 차를 수배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쩌면 견인되어 왔는지도 모릅니다."
  "부탁합니다."
  이어서 사메지마는 위장 패트롤카를
배차받기 위해 담당과로 갔다. 다행히
빈차가 있었다. 해치백 타입 한대를 마음
놓고 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차를 뽑아 현관 앞에 세운 뒤 곽을
맞으러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기다렸죠?"
  곽은 그렇잖다고 머리를 흔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하군요. 생각보다 사람들도
적구요."
  "검거되어 오는 사람들 말인가요?"
  사메지마는 웃음을 터뜨렸다.
  신주쿠 서 투어를 즐기자면 주말 심야가
제일 좋죠. 보초경관한테 내쫓기지만
않느다면....."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그건 뭡니까?"
  "서외 반출이 금지된 서륩니다."
  곽은 눈썹을 치켜올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서류를 펼쳐 <장미의 샘>
  대부분이 오쿠보. 고엔지(高圓寺).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 나카노(中野)
일대였다.
  사메지마는 오쿠보 쪽으로 자동차를
몰면서 <장미의샘> 점장 피살사건 개요를
들려 주었다.
  피살자가 각성제 중독자라는 것,
경영주였던 야쿠자가 실종되었다는 것, 그
야쿠자가 오늘 아침 시체로 발견된
다카가와의 동생뻘이라는 것도 덧붙였다.
  곽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때문에 점장 살해용의자인 양이란
웨이터가 독원숭일 기능성이 아주 높다고
봅니다. 한가지 알 수 없는 것은, 양이
만약 독원숭이라면 무슨 까닭으로 카바레
웨이터로 취직을 했나 하는 점입니다.
대만인 사회를 파고들어야 했을 텐데, 양은
그러지 않았단 말이오!"
  "예웨이 때문이겠죠."
  곽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나와 독원숭이는 사정이 다릅니다. 내
경우엔 설령 예웨이가 먼저 눈치를 챈다
해도 거리낄 게 아무것도 없어요. 허나
독원숭이가 만약 어설프게 대만인 사회에
파고 들었다면 예웨이가 금방 눈치를 채
도망쳤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독원숭이로서는 어렵게 밀입국한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니겠소?"
  "밀입국으로 봅니까?"
  "물론이죠. 여권은 갖고 있겠지만
보나마나 위조한 것일 게요. 독원숭이는
예웨이가 일본 폭력단에게 의탁하고 있는
비행기를 탈 순 없는 일 아니겠요?"
  "총을 소지하고 있다는 뜻이군요."
  "총 정도라면 일본에서도 구할 수
있습니다."
  곽은 앞유리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조용히 말했다.
  "다른 도구라면, 어떤 것들입니까?"
  "글쎄요. 허나 <수귀자> 에 있을 땐 별별
훈련을 다 받았습니다. 살인은 물론
거물이나 자동차. 비행기 등 교통기관
파괴술에 이르기까지."
  사메지마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곽영민이 걱정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아라키가 지원을 요청해야 할 곳은
기동대가 아니라 자위대라야 걸맞을 것
같았다.
  "배를 이용했을테죠. 어선으로 위장한
소형 선박... 대만. 중국 본토. 일본을
잇는 밀수 루트가 있습니다. 각성제와
권총을 실어나르죠. 그 중엔 일본인도 적지
않아요. 해서 순시선의 눈을 피해 멀리
돌아 숨어드는 수법을 씁니다. 날씨가 나빠
물결이 거친 때를 노리면....."
  "돈이 꽤 많이 들텐데...."
  "독원숭이에겐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번에 몇백만원(元),
몇천만원씩 벌거든요. 그걸 일본 엔화로
바꾸는 것쯤 식은죽 먹기죠. 일본이든
대만이든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나라 아닙니까?"
  일본 해안 어딘가에 상륙한 뒤 자동차를
대절해서 도쿄로 들어온 것일까 하고
  "독원숭이는 대북에서 살해된 그
여인에게 홀딱 반했던 모양이죠?"
  "글쎄요. 독원숭이가 유진생이라면,
여자에 대해서는 아주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죠. 돈으로 여자를 산 적이 거의
없을 겝니다. 마약이나 각성제도 전혀
관심이 없었구. 때문에 자기 애인에게
강제로 마약을 주사하고 폭행까지 한 뒤에
죽였다면 절대로 잊지 않을 겝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장 패트롤카는 오쿠보 2쵸메로
접어들고 있었다. 다구치 기요미(田口淸美)
라는 <장미의 샘> 호스테스의 주소가 그
근처였다.
  조금 달리자 일방통행로가 보였다. 그
건물이 바로 목적한 임대 전문 아파트였다.
4층으로 올라갔다. 문패는 커녕 호수
표지도 없었다.
  인터폰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한참 기다렸다가 몇 번이고 다시
눌러봤지만 역시 감감소식이었다.
  양쪽 옆집을 둘러보았다. 왼쪽 집엔
아무도 없었고, 오른쪽 집엔 사람이
있었다.
  진 바지에 특이한 헤어스타일의
열일고여덟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도어를
반쯤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사메지마는
속으로 쇼를 연상했다.
  "옆집? 몰라요. 인사 나눈 적 한번도
없어요. 요즘 집에 안들어오는 것 같아요."
  사메지마는 고맙다고 인사한 다음, 집세
물어보았다. 호수별로 주인이 따로 있어
각자가 제멋대로 징수하고 있는지, 아니면
임대 전문의 부동산 회사가 일괄 징수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아파트는 햐쿠닌쵸(百人町)에 있는
부동산 회사 소유였다. 따라서 집세도 모두
그 회사 앞으로 송금한다는 대답이었다.
  사메지마는 다시 고맙다고 인사를 남기고
계단을 내려왔다.
  차에 오르자 곽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너무 부드럽군요. 일본 경관은
모두 그런가요?"
  "나쁜 짓을 하지 않은 일반 시민에겐
정중해야 하는 것 아니오?"
  "하지만 지금 그 아가씨, 머리에
염색까지 했더군요. 어쩌면 각성제에도
사는 주제 치고는 옷도 무척 화려하구...
수상하다는 느낌 안 들었나요?"
  사메지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곽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아니
대부분의 일본 형사들도 머리를 염색한
젊은 아가씨를 보면 곽과 똑같은 생각을
가질 게 틀림없었다.
  사메지마도 옛날엔 그랬다. 그러나
그것이 엄청난 편견과 착각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쇼 덕분이었다.
  머리를 물들였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다른 복장을 하고 깅다고 해서 모두가
범죄자일 수는 없었다. 쇼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하고 기초적인 논리였지만,
경찰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사메지마는
쇼를 통해서 당연하고 기초적인 진리를
  만약 곽이 쇼를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도 지금의 쇼가 아니라 사메지마가
처음 만났던 때의 쇼를.
  이번엔 다카다노바바 쪽으로 차를
몰았다. 일반적인 탐문 수사라면, 전화로
당사자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뒤
찾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독원숭이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는 여인이
어쩌면 <장미의 샘> 호스테스일지도
모른다는 절박감 때문에 직접 이곳 저곳을
부딪쳐 볼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다카다노바바에 살고 있는 호스테스
이름은 키타노 마스미(北野眞澄) 였다.
  메이지도리, 도쓰카 경찰서 건너편 길로
접어들었다. 다카다노바바 2쵸메, 거기에도
아까와 비슷한 원룸 아파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오쿠보 아파트와 달리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6층에서 내려 가다렸지만 응답이 없었다.
  사메지마는 등 뒤에 서 있는 곽을
돌아보며 고개를 흔들어 보이다가 다시
한번 벨을 눌렀다.
  "네에."
  귀찮아 죽겠다는 목소리에 이어 도어가
빼꼼 열렸다. 체인 록은 그냥 둔 채였다.
헝클어지듯 덥수룩한 머리의 젊은 여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노브라에 탱크톱. 반바지
차림이었다.
  "누구시죠?"
  "신주쿠 서에서 왔습니다."
  사메지마는 경찰수첩을 내보였다.
  "또예요?"
  여자는 혀를 찼다.
  "금방이면 끝납니다. 한두가지 확인만
하면...."
  "잠깐만요."
  도어가 거칠게 닫혔다. 체인 록을 푸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한참이나 기다리던
사메지마가 다시 벨을 눌러볼까말까고
망설이면서 도어에 귀를 바싹 갖다붙였다.
  병 부딪치는 소리가 땡그랑땡그랑 하고
들렸다. 집안을 서둘러 치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메지마는 건물 반대편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머리를 굴려 보았다. 만약
지금 독원숭이가 집안에 있었다면, 형사가
찾아 왔다는 얘기 듣고 베란다로 나가,
옆집으로 도망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쩔까고 망설이고 있는 순간 도어가
다시 벌컥 열렸다.
  "들어오세요."
  만사가 귀찮다는 나른한 목소리였다.
사메지마는 안으로 들어서면서 재빠르게
현관 홀을 살펴보았다. 펌프스 (댄스 구두)
와 샌들 사이에 남자 운동화가 한켤레 섞여
있었다.
  여자는 껌을 짝짝 씹으면서 오른 손으로
탱크톱 속으로 밀어넣어 가슴을 만지작
거렸다.
  "손님이 있나?"
  사메지마는 눈짓으로 운동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친구예요. 누가 와 있던 무슨
상관이에요?"
  "하긴 그렇군."
  대답하면서 사메지만 여자 치열(齒列) 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신나에 중독된
이빨이었다.
  "키타노 마스미 맞지?"
  "네."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았겠지만....
그 뒤 양이란 웨이터로부터 연락온 것
없나?"
  "없어요. 모르는 사이나 마찬가진데
연락은 무슨 썩어자빠질 연락."
  "하지만 얼굴은 알고 있잖아?"
  "그래요."
  "이 사진 좀 봐 주겠어?"
  옆에 섰던 곽이 웃도리 안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어 사메지마에게 주었다.
  "여기 왼쪽 끝에 있는 사람인데...."
  "모르겠어요."
  껌을 짝짝 씹으면서 흥미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눈만 홀낏했을 뿐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찬찬히 봐!"
  "모르겠어요. 이젠 됐죠?"
  사메지마는 입을 다물었다.
  여인은 금방이라도 도어를 닫아 버릴 듯
한 손으로 놉을 잡고, 사메지마를 못마땅한
듯이 올려다보았다. 한쪽 발을 달달 떠는게
몹시 초조한 것 같기도 했다.
  "신나에 중독되면 눈도 나빠지나?"
  사메지마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다. 여인의 눈이 금방
동그래졌다.
  "무슨 말이죠?"
  "너 지금 신나 들이마셨지? 아직도
냄새가 고약해!"
사메지마가 한걸음 빨랐다. 왼손으로
도어를 밀치면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대낮부터 신나나 즐기구, 팔자 한번
늘어졌군. 신나가 싫증나면, 그 다음은
뭐야? 각성제? 마약? 말해 봐!"
  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창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메지마는 여인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여인이 허둥대며 고함을
질렀다.
  "잠깐, 왜 이러세요?"
  침대 하나만 달랑 놓인 방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상반신은 벌거벗은 채
진바지를 꿰어찬 젊은 사내가 베란다에
우뚝 서 있었다. 빨갛게 염색한 머리,
앞가슴엔 금목걸이가 늘어져 있었다.
  여인의 부르짖음을 등 뒤로 들으면서
사메지마도 베란다로 뛰쳐나갔다.
  사내가 베란다 난간에 한쪽 발을
올려놓는 순간이었다. 사메지마가 돌진해
오는 것을 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떨어지면 죽어!"
  사메지마는 짧게 경고했다.
  사내는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다가는
사메지마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햇볕에 그을은 피부 - 그러나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서퍼가 부럽긴
했으나 바다로 나갈 용기가 없어 시내
자외선 살롱에서 태운 게 분명했다.
탈색제로 머리를 빨갛게 한 것도 겉멋
때문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베란다에 걸쳐올렸던 발을
  "왜 그래? 함부로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여자 목소리 못잖은 고음이었다.
  사메지마는 방안을 휘둘러 보았다.
서둘러 치워 버린 듯 드링크제 병이나
청량음료수 깡통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것 놔요! 왜 붙잡고 야단이에요!"
  여자의 고함소리에 사메지마는 고개를
돌렸다. 곽이 한손으로 여자의 팔을
움켜잡고 현관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곽은 여인을 침대에 내동댕이 친 뒤,
검정 비닐 쓰레기 주머니가 놓여 있는
부엌으로 갔다.
  주둥이 매듭을 풀어 바닥에 쏟았다. 갈색
드링크제 병 몇 개가 굴러나왔다. 쓰레기에
묻어 있는 액체에선 강한 휘발성 냄새가
풍겼다.
  "고소하겠어요. 가만 있을 것 같아요?
불법수색이라고 고소하겠어요!"
  여자가 곽을 노려보면서 앙칼지게
외쳤다.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잘난 척
으스대지 마, 아가씨!"
  사메지마가 호통을 쳤다.
  "고소할 테면 해 봐! 그전에 신주쿠 서로
끌고 가서 어디 한번 샅샅이 뒤져 볼가?
신나 말고 또 뭐가 튀어나올지 한번 해
봐?"
  사이드 보드 위에는 담배 마는 기구가
얹혀 있었다.
  "뭐야, 이건. 말해 봐!"
  사메지마는 사내를 쏘아보았다. 이런
걸 알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눈을 내리깔았다.
  "신나에 대마초. 이것뿐 아니지?
크랙이나 코카인 따위는 어디다 숨겨놨어?"
  "몰라요. 난 놀러온 사람, 집주인한테
물어보세요!"
  사내가 어린애처럼 입을 뽀족 내밀자,
여인이 독기 서린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럼 도망은 왜?"
  사내는 말없이 침만 꼴깍 삼켰다.
  사메지마는 여자쪽으로 돌아섰다. 여인도
한풀 꺾인 듯 손톱만 깨물고 있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데가 어디야?"
  "꼭 알아야 해요?"
  여인은 치뜬 눈으로 사메지마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알아야겠어."
  "신주쿠 <샤룸>."
  "뭐라구?"
  "<샤룸>, 카부키쵸 2쵸메."
  "카바레야?"
  "클럽이에요."
  "출세했군. 누구 소개로?"
  여인은 코끔을 쳐들면서 얼굴을 돌렸다.
  "대답해!"
  "야스이 사장님."
  "그래? 언제 만났어, 야스이는?"
  "사건 이튿날과 그 다음날."
  "마지막으로 만난 게 몇 시쯤이었어?"
  "오후. 4시쯤이었을 거예요."
  실종 12시간 전쯤이었다.
  "무슨 까닭으로 야스이가 널 그처럼
친절하게 보살펴 줬누?"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양에 대해서 뭘 알려준 탓 아니야?"
  여인은 심호흡을 했다. 다시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사메지마를 쳐다보았다.
  "경찰서로 연행해 갈 생각이죠?"
  "너 하기 나름이야."
  "눈감아 줄 수도 있단 말예요?
정말이세요?"
  "양에 대해서 얘기해 봐. 야스이에게
귀띔해 준 그대로 말야."
  "양이 죽은 점장 백까지 갖고 갔어요. 그
안에 야스이 사장님이 아키 점장에게 빌려
준, 아주 귀한 게 들어 있댔어요.
그래서....."
  "그래서?"
  "먼저 약속해 주세요. 눈감아
준다구....."
 "오늘은 그냥 물러가겠지만, 언젠가 다시
찾아오겠어. 그때도 저런 게 굴러 있다면
용서 없어!"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미와의 관계를 귀띔해 줬어요."
  "나미?"
  "<장미의 샘> 호스테스였어요. 본명은
타구치라고 하는. 그애, 중국어를 아주
잘해요. 잔류고아란 얘기도 있어요. 그래서
양과 붙어먹게 됐나 봐요."
  사메지마는 다시 한번 사진을 내밀었다.
  "어때?"
  여인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씹어뱉듯이 말했다.
  "이 새끼 틀림없어요!"


  20.

  태어나서 65년, 후회 따위 한번도 해 본
것이 없었던 사내가, 평생 처음으로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번 시작하고
보니 후회란 건 연쇄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젊은 파이인웬에게 독원숭이의 주소를
가르쳐 준 것부터가 잘못 판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자기는 그
자리에서 각성제에 찌든 파이인웬에게
살해되었을 것이 분명했고, 또 파이인웬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 독원숭이를 죽였다면,
이렇게 도쿄까지 도망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었다.
  그는 독원숭이에게 파이인토앙(白銀團)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시점에서 그 일은
툭툭 털어 버리고 잊어 버렸어야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버려 두더라도 언젠가는
경찰과 맞붙어 결국은 개죽음을 당할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개죽음을 면한 어느 누군가가
자기를 유괴해서 몸값을 뜯어냈다는 소문을
퍼뜨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자기가, 이 예웨이가
부들부들 떨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는 것까지 뻥튀겨서 떠들고
다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서 깊은 천지회(天地會)의 전통을
물려받은 스하이팡(四海幇)의 대간부로서
수많은 일류기업의 고문으로 있는 자기가,
이 예웨이가 눈까지 가려져 얼굴도 못 보는
소문을 어떻게 참고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복에서
이화(梨華)를 만나러 아파트로 갔을 때,
보디가드를 몇 안 데리고 갔던 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설마, 이 예웨이를 유괴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어리석고
무모한 짓을 할 류망 그룹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파이인토앙
따위, 그때까지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파이인웬은 그렇게 예쁘고 나긋나긋한
이화와 15년간이나 예웨이를 모셔온
운전기사 후(侯)를 죽였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는 일본으로 도망쳐 온
와 있는 것이었다.
  이 우스꽝스런 소동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다.
  독원숭이가 우수한 프로임엔 틀림없지만,
애인을 살해당한 탓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이라면 이 예웨이에게 정면으로
대들지 못할 것이 아닌가.
  독원숭이는 삶을 포기했다 - 예웨이는 꽤
오래 전부터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살할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자기 목숨에 대해 관심이나 흥미를 가지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인 탓에, 자기 생명조차 하찮게 여기게
된 것이지도 몰랐다.
  파이인토앙 처치 명령을 내리면서
예웨이는 독원숭이의 건강이 좋지 못함을
팽개쳐 두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병이었다.
  그러나 독원숭이는 수술할 시간까지
아까워하면서 일에만 매달렸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곪아든 맹장을 뱃속에 안고 있을
게 분명했다.
  녀석은 이 예웨이를 해치우기 전엔
수술받을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독원숭이가 한번 벗고 나서면 어느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는 것을 예웨이는 잘
알고 있었다.
  독원숭이가 죽든가, 표적 상대가 죽어야
비로소 끝이 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독원숭이 실적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설령 몇 주일, 몇
달이 걸린다 하더라도 독원숭이는 끝까지
성공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독원숭이는 불치의
병이었다. 해치워야할 상대의 이름만
귀띔해 두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목숨을 빼앗아 버렸다.
  그 불치의 병 - 독원숭이가 지금은 이
예웨이에게 달라 붙어 있는 것이었다.
  예웨이는 속으로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후회와는 달리 공포라면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맛보아 온 것이었다. 그때마다 용하게
고비를 넘길 수가 있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다시 대만으로
돌아가서 지난날의 권력과 영화를 되찾을
자신이 있었다. 미국으로, 일본으로
도망다닌 것도 따지고 보면 살아남기
  대만에 살아남기 위해서 아닌가.
  대만에 남아 있는 부하들에겐 한시라도
빨리 독원숭이를 찾아내어 없애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때문에 1천만원(元)의
상금까지 내건 예웨이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불안이 완전히 가셔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 곽영민이 불쑥 나타났을 때
예웨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곽영민은
독원숭이를 쫓고 있는 대북 경찰국
형사였다. 빨간 주머니 (赤袋; 뇌물이란
뜻) 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 멍청이이기도
했다.
  어젯밤 곽이 보여 주었던 무례한 행동이
예웨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만에
돌아가기만 하면 그 따위 형사 나부랑이는
일이었다. 이 예웨이의 터럭하나 다치게 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려줄 자신이 있었다.
  독원숭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자기라고 믿고 있었다 일본으로 도망쳐
오면서도 어쩌면 독원숭이가 쫓아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시와에게
신원이 확실치 않은 대만인은 조심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시와는 그러마고 약속했다. 신주쿠에서
예웨이 이름을 입에 올리는 대만 녀석이
있으면 그 즉시 붙잡아 뒤를 캐보겠다고
다짐해 주었다.
  그런 녀석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곽의 출현이 예웨이에게는 불길한
징조였다. 독원숭이가 일본에 숨어 들어와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현실이라면, 현재의
이시와 경비 태세는 너무도 허술한
것이었다.
  은신처를 완벽하게 숨기는 것만이
독원숭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자기와 이시와의
관계가 탄로난 지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예웨이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시와구미 사람을 하나하나 끈기있게
훑는다면 이런 은신처를 알아내는 것쯤은
식은죽 먹기가 아닌가.
  일본 야쿠자가 머리도 영리하고 조직력이
탄탄한 건 사실이지만, 전투력엔 문제가
있었다. 아니 전투 자체를 너무 안일하게
  조직이 튼튼하다고 자부한 나머지, 이
세상엔 자기들에게 기어오를 상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일개인이 그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독원숭이가 얼마 두려운 존재인가를 아는
일본 야쿠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녀석이
얼마나 냉철하고 능률적으로, 또 끈기있게
표적에 접근해 가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몇달이든, 아니
몇년이든 참고 기다리는 것도.
  설령 몇년씩 걸린다 하더라도 독원숭이를
해치웠다는 연락이 오기 전엔 결코
대만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 예웨이의
속셈이었다.
  결국 자기가 죽든 독원숭이가 죽든 둘 중
것이었다.
  독원숭이가 대만에서 살해되기를
예웨이는 마음 속으로 빌어 왔다.
독원숭이가 일본에 와 있다면, 예웨이가
알고 있는 일본 야쿠자의 힘으로는 절대
죽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시와의 핵심 측근인 하다는 독원숭이를
완전히 얕보고 있었다. 자기를 겁쟁이라고
뒷전에서 비웃고 있다는 것도 예웨이는
알고 있었다.
  단 한놈인데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가 -
하다 얼굴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한번 독원숭이의 맛을 보게 되면 하다도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예웨이는 스스로를 달랬다.
독원숭이 맛을 보고도 운좋게 살아남을 수
졸라맬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한시라도 빨리 그렇게 되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독원숭이가 덮쳐오더라도 자기만 무사할
수 있다면 - 이시와 사람 몇몇이 목숨을
잃는다면 이시와도 어금니를 깨물고 덤빌
게 아닌가.
  독원숭이가 정말로 일본에 와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누군가를 죽여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예웨이는 생각했다. 단 자기
자신은 독원숭이가 죽여 보여야 할
누군가에 절대로 끼이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기분을 내자고 했던 어젯밤
외출은, 곽영민의 출현으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곽과 함께 온 일본 형사는 너무
  기분이 울적한 탓일까, 오늘 예웨이는
하루 종일 침대에서 딩굴었다.
  데리고 온 아가씨는 그렇게 밉지는
않았으나,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아 새벽녘에
그냥 돌려보내고 말았다. 어젯밤 2차로
들른 집에서 일하던 열아홉 살짜리 일본인
호스테스였다. 대만 아가씨에겐 절대로
손을 벌리지 않았다. 은신처인 이 아파트를
누군가에게 떠들고 다닐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예웨이가 은신하고 있는 이 아파트는
이시와가 애인에게 사준 집이었다. 어젯밤
데리고 온 열아홉 살 아가씨도 이시와의
애인이 경영하는 클럽 호스테스였다.
  이시와 자택도 이 아파트 근처였다.
걸어다닐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지만,
묵었다.
  나란히 붙은 3LDK (방 셋. 거실. 식당.
부엌) 두채를 하나로 터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현관과 베란다는 따로따로 나
있어서 외견은 아직도 완전히 두채로
보였다 양쪽 안쪽 방엔 벽장으로 위장된
문을 달아 서로 오갈 수 있게 했다.
  경찰이나 대립조직이 습격해 올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지금 예웨이가 들어 있는
3LDK는 언제나 비어 있었다. 누군가가
습격해 오면 벽장으로 위장된 문을 통해
슬쩍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이시와의
계산이었다.
  창에도 특수유리를 끼워 바깥에선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제일 안쪽
방이 침실 - 지금 예웨이가 쉬고 있는
  앞쪽에 있는 두 방에는 대만에서 따라온
예웨이의 보디가드, 황(黃)과 이(李)가
지키고있었다. 황은 백학권(白鶴拳)의
사범, 이는 사격의 달인이라고 했다.
예웨이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는 충직한 부하였다.
  옆집 3LDK에서는 이시와와 애인이 오붓한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이시와가 이 집으로
올 때면 보디가드를 둘밖에 거느리지
않았다. 두 보디가드는 현관 통로 쪽에
있는 방에서 자고 있었다. 침실과 현관
사이에는 따로 중문이 있었다. 침실의
교성이 보디가드에게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11시.
  노크 소리와 함께 보디가드인 이가
  "이시가와가 얘기가 있다면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옆집과 통하는 이쪽 벽장
도어를 열어 달랍니다."
  예웨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열어 줘. 차 준비도 하구. 열쇠는 네가
갖고 있나?"
  "네."
  위장 도어가 설치된 곳은 이가 들어 있는
방이었다.
  예웨이는 침대에서 내려와 잠옷 위에
가운을 걸쳤다. 약간 오슬오슬한 게 식욕도
없었다. 뜨거운 차 한잔이 필요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세수를 한 뒤
거실로 들어섰다. 이시와가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문신을 그대로 드러낸
보디가드가 버티고 서 있었다.
  뭔가 몹시도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잘 잤습니까?"
  예웨이는 인사를 하면서 건너편에
앉았다. 전전(戰前) 세대인 예웨이는
일본어에 전혀 불편이 없었다.
  이가 뜨거운 차를 담은 포트를 받쳐들고
들어왔다. 러닝셔츠 바람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이시와가 마련해 준 45구경 군용
콜트였다.
  "차 한잔 하시겠소?"
  예웨이는 웃는 얼굴로 이가 따라 준
찻잔을 들어올렸다.
  이시와는 고개를 내저었다.
  "예선생, 아주 나쁜 소식이오. 당신도
알고 있는 내 부하 다카가와 - 어제 함께
  예웨이는 말없이 이시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범인은 중국어가 능숙한 남녀 2인조.
나이프로 다카가와 목을 잘랐소!"
  예웨이는 들고 있는 찻잔으로 눈길을
깔았다. 갑자기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것같이 느껴졌다.
  "다카가와는 숨이 끊기기 전에 심한
고문을 당한 것 같소. 이곳을 불었는지도
알 수 없소. 경찰도 시끄러워질 게구.
유감이지만,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게
됐소."
  "그럼 어디죠?"
  이시와가 담배를 꺼내어 물자, 뒤에
버티고 있던 보디가드가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붙여 주었다.
서쪽 지방으로 가든 당신이 결정할 문제요.
조금 있으면 하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올게요. 공항이든 역이든 당신이 정한
곳까지 호송해 줄 게요."
  예웨이는 이시와가 한 말을 보디가드인
이와 황에게 통역해 주었다.
  "이 새끼가 두령님에게 등을 돌린
셈이군요."
  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듯이 말했다.
  "그런 것 같군. 경찰이 두려운
모양이지?"
  예웨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엔
황이 물었다.
  "원숭이가, 다카가와 시체 옆에 원숭이가
놓여 있었답디까? 어쩌면 전혀 관계 없는
녀석의 손에 살해된 건지도
  예웨이는 이시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카가와 피살현장에서 원숭이 조각이
발견됐소?"
  "그런 게 있었다고 했소. 시체는 우리
아이들이 발견했소."
  예웨이는 보디가드에게 통역해 주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와씨 생각엔 내가 어디로 가는 게
좋겠소? 오사카? 교토? 아니면 대만으로
돌아가야 하오?"
  "대만이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우리
아이들에겐 조심하라고 일러두긴 했지만,
경찰이 몹시 시끄럽게 굴 게요. 어제 불쑥
나타났던 신주쿠 서 그 녀석도 당신이 말한
독원숭이 얘길 알고 있는 것 같았소."
  예웨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함께 있는 여자는 도대체 누구요?"
  "그 녀석 여자 아니겠소? 대만인이겠죠."
  예웨이는 고개를 저었다.
  "녀석의 애인은 죽었소."
  "그렇다면 모르겠소!"
  이시와는 소파에 등을 기대면서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건방진 녀석! 죽여 버립시다, 기회를
봐서."
  이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참아!"
  예웨이가 말리면서 이시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여자를 포함해서, 이시와씨는
독원숭이를 어쩔 생각이오?"
  "하다란 녀석, 꽤나 열을 받은 모양이오.
지금 성질을 부렸다간 형사 녀석들 좋은
일만 시키게 될테니까 말이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그럼 여자부터 찾아내 주시오.
독원숭이는 일본어를 할 줄 몰라요. 여자가
통역을 맡았을 게요. 다카가와씨를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여자가 도와줬기 때문일
게요."
  "....그렇겠군. 다카가와는 새로 들여
앉힌 애인집에서 당했소. 마누라와 갈라선
지 아직 한달도 채 안됐을 게요."
  이시와는 생각에 잠겨드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누군지 나도 한번 생각해
보겠소."
  예웨이는 황과 이를 돌아보며 말을
  "떠날 준비를 해!"
  두 사람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예웨이도 옷을 갈아입으려고 침실로
들어갔다. 양복차림으로 거실에 나오자
이시와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하다가 막 도착했다고 밑에서 전화
연락이 왔소. 주변을 잘 살펴보라고 했소.
아직은 경찰도 이곳까지 손을 뻗치지 않은
모양이오. 밑에서 별 이상이 없다고 하면
내려가도록 하시오. 난 여기서
작별해야겠소. 오늘 아침엔 당신과 만나지
않은 걸로 해 두겠소."
  예웨이는 끊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시와씨, 폐가 많았소. 이 은혜, 잊지
않겠소. 언젠가, 이번 일이 끝나면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소."
  이시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 도움이 못돼서 미안하군요. 어쨌든
기차나 비행기를 탈때까지는 하다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지켜 줄 게요."
  예웨이와 이시와는 악수를 나누었다.
이시와의 오른손엔 왼손과 마찬가지로
새끼손가락 첫마디가 없었다.
  이시와는 보디가드에게 턱짓을 했다.
  "아래까지 모셔다 드려."
  "네."
  이시와의 보디가드가 한발 앞서 현관으로
내려갔다. 황과 이를 앞세운 예웨이가 뒤를
따랐다. 이시와는 남은 보디가드와 함께
거실에 서 있었다.
  앞장선 이시와의 보디가드가 투시경을
  예웨이는 긴장된 눈길로 복도를 살폈다.
  30센티미터쯤 열리던 도어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이시와 보디가드가 도어
아래쪽을 살폈다. 사방 20센티미터 크기의
종이상자가 도어 밑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
걸려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보디가드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종이상자를 열었다.
  펑! 하는 폭발음과 황색 섬광이 번쩍
보디가드의 두 손목과 얼굴이 허공으로
날았다. 보디가드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습격이닷!"
  예웨이를 가로막으며 이가 부르짓었다.
  예웨이는 잽싸게 돌아섰다. 눈이
둥그래져서 보디가드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도망쳐! 이봐, 이시와. 도망치라구!"
  예웨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멍청하게
서 있는 또다른 보디가드를 밀어젖히면서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자, 이시와가 아직도 그
자리에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이시와씨! 원숭이, 독원숭이가
쳐들어왔어!"
  피로 얼룩진 현관 도어를 닫으려고 황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시체에 걸려
제대로 되지 않았다. 권총을 뽑아들고 있던
이가 도와 주려고 한발 내디뎠을 때, 도어
틈으로 뭔가가 날아 들어왔다.
  예웨이는 이시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의 섬광과 귀창이
찢어질 것 같은 폭음이 집안을 휘몰아
눈을 감고 괴로워하는 황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예웨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이시와를 잡아끌었다.
  도어가 활짝 열리면서 시커먼 그림자가
집안으로 몸을 날려 들어왔다. 예웨이가
이시와를 끌면서 거실 문 앞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붉은 색. 푸른 색. 보라색
빛이 동시에 번쩍했다.
  이가 발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발마의 경련에 불과한 발포였다.
  검정 스웨터에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사내가 냉철하게 살육을 시작한 것이었다.
예웨이도 잘 알고 있는 독원숭이가
애용하는 우지 서브머신건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재봉틀처럼 빠른 속도로 황과
몸통에 구멍을 뚫어갔다.
  좁은 현관 복도에는 순식간에 피보라가
자욱했다.
  예웨이는 잡고 있던 이시와 팔을 놓고
거실 도어를 닫았다. 현관 쪽 소음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이시와의 얼굴로 눈을 돌렸다. 공포에
질려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거실 도어를 뚫고 총알이 날아 들어왔다.
  이시와가 비명을 질렀다. 어깨에 총알이
박히는 충격에 청각이 회복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다투듯이 거실을 가로질렀다.
말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벽장으로 위장된 도어 쪽으로
갔다.
  이가 쓰고 있던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들어왔다. 두 사람은 구르듯이 바닥을
기어갔다.
  "도, 도대체 무,무슨 일이야?"
  이시와가 손을 뻗쳐 도어를 잠갔다.
예웨이가 한걸음 앞서 벽장에 닿았다. 위장
도어를 열어놓고 이시와를 기다렸다.
  이시와는 곰처럼 엉금엉금 기어왔다.
  위장 도어를 닫아 잠근 뒤, 안쪽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부둥켜 안은 채 이시와
애인 아파트로 몸을 굴렀다
  "닫아! 닫아 걸어! 그 문 꼭 닫아 걸어!"
  이시와는 미친 듯이 중얼거리면서 위장
도어를 닫아 걸었다.
  스틸로 만든 튼튼하기 짝이 없는
도어였다. 양쪽의 위장 도어는 벽 중간
부분에 겹쳐 닫히게 설계되어 있었다.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시와는 거친 숨을 내뿜으면서 수화기를
집어들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상대방이 나오자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개새끼! 뭘 하고 있어? 위에 있어. 위로
쳐들어왔단 말야! 빨리 올라와!
우물쭈물하다간 내가 살아남지 못해!"
  전화를 끊은 이시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위장 도어를 노려 보았다.
  한참 있다가 훅하고 숨을 들이키며
애인을 돌아보았다.
  "현관 잠겨 있지?"
  "네. 경찰도 부를까요?"
  "안 돼! 아직은 안 돼!"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저기, 저 방이 더 안전하겠어!"
  예웨이는 이시와를 따라 거실로
옮겨갔다. 수많은 사람이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복도 쪽에서 들려왔다.
  "하다가 왔어! 이제야 하다가 쫓아왔어!"
  이시와는 중얼거리면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벽장 위장 도어를 두들기는 금속성이
울렸다. 예웨이는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독원숭이가 위장 도어를 발견한
것이었다.
  "도망칩시다."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드는 이시와에게
부르짖으며 예웨이는 현관으로 향했다.
  이시와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욕의
  이시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애인과 함께
현관 쪽으로 나왔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것같이 느껴졌다. 스틸로 된 위장
도어가 날아가면서 흰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벽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이번엔 독원숭이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쪽 어깨에서 반대편 허리쪽으로
비스듬히 회색 숄더백을 메고 있었다.
손에는 눈깜짝할 사이에 보디가드 셋을
해치운 서브머신건을 들고 있었다.
  이제 끝났다. 이대로 죽어야 하는가 -
예웨이가 체념한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이 새끼가!"
우르르 거실로 몰려 들어왔다. 모두 권총을
뽑아들고 있었다. 예웨이가 이시와에게
밀수출한 블랙스타 - 중국제 권총이었다.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좁은 아파트
안은 하다 일당이 쏜 탄막에 뒤덮이고
말았다.
  독원숭이는 예웨이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유리창을
박살내면서 베란다로 뛰쳐나갔다.
  난간에 손을 댔다 싶자, 어느새 옆집
베란다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별명 그댈로
원숭이 같은 솜씨였다.
  "뒤쫓아! 저놈 잡아!"
  이시와가 부르짖었다.
  그러나 하다를 비롯한 일당이 베란다로
몰려갔을 때, 독원숭이는 흔적조차 없었다.

  21.

  모모이로부터 무선 지시를 받은
사메지마는 곽과 함께 와카바쵸 아파트로
달려갔다. 요스야 서와 경찰청 수사 1과.
4과로 구성된 합동수사반이 출동해 있었다.
  아파트 로비에는 아라키 모습도 보였다.
헤어진 지 아직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염려했던 사태가 터지고 만
것이었다.
  아라키는 검증중인 현장에 곽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세 사람은 패롤트카와
감식차가 몰려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섭섭하겐 생각 마시오. 지금 당신이
끼어들면, 수사요원 머리만 혼란스러워질
게요."
  초면에 인사가 끝나자 아라키가 곽에게
불쑥 내뱉었다. 곽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라키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당신이 정보를 제공해 준 데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될 줄은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오."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은 것
아닙니까? 피해상황은 어느 정돕니까?
예웨이도 살해됐나요?"
  사메지마가 물었다.
  "아니. 사망 넷에 중상이 한명이지만
예웨이는 안보였어. 사망자 가운데 둘은
예웨이의 보디가드로 보이는
대만인이었어."
  "예웨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저었다.
  "모르겠어. 이시와의 젊은 두목 하다와
함께 도망친 것 같아. 이시와는 어깨에
총을 맞아 입원했구."
  "어떤 식으로 습격해 왔는지 듣고
싶군요."
  곽이 말하자 아라키는 망설였다. 그러나
사메지마가 날카롭게 쏘아보자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목숨이 붙어 현장에 남아 있던 사람은
이시와 뿐이었어. 때문에 확실한 건 아직
몰라. 예웨이와 이시와가 10층의
1022호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도어를 열자
종이상자가 놓여 있는 게 눈이 띄더라는
게야. 이시와 감식과 말로는 <음향 섬광
수류탄> 으로 보이는 폭발물이 실내에
폭발음으로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게 하는
것인가 봐. 그게 터진 직후 범인이 실내로
뛰어들면서 기관총을 난사했어. 예웨이
보디가드 2명과 이시와 부하 한사람이
벌집이 되고 말았어. 옆집인 1021호와
연결된 철제 위장 도어 덕분에 예웨이와
이시와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어. 위장
도어를 발견한 범인은 또다른 폭발물 -
감식과는 플래스틱 폭탄으로 보고 있는데 -
로 단번에 날려 버렸어. 1021호로 도망쳐
왔던 예웨이. 이시와 두 사람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진 순간, 하다를 비롯한 이시와
부하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가까스로 살아난
게야. 범인은 베란다로 도망쳤어. 믿을 수
있겠어? 몸을 던져 유리를 박살내고 밖으로
뛰쳐나간 그놈은 난간 위를 달려서
옆집으로 가서 외벽에 붙은 물받이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는 게야! 시대극에 나오는
닌자 뺨치는 놈이야!"
  "범인이 사용한 경기관총은 어떤
종류였습니까?"
  곽이 물었다.
  "그것도 아직 몰라. 현장에 떨어진 탄피
가운데 가장 많았던 것은 9밀리미터 구경
권탄총이었어."
  "우집니다. 독원숭이는 파이인토앙
멤버를 죽일 때도 우지 서브머신건을
사용했어요. 우지에도 9밀리미터 권탄총을
씁니다."
  곽은 사메지마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아라키는 한숨을 내쉬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흰 폴로 셔츠 위에 방탄복을
껴입은 데다가 허리엔 권총까지 차고
  "이시와 상처는 어느 정돕니까?"
  "치명적인 것은 아닌가 봐. 녀석은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예웨이와 하다를
도망시켰어. 예웨이를 우리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던 게야. 하다는 예웨이
경호역으로 따라붙였을 게구."
  "습격한 사내, 범인도 다쳤나요?"
  "물받이에 피가 묻어 있었어. 이시와
부하 총에 맞은 건지, 유리 파편에 찢어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시와 부하는 체포했나요?'"
  "몇 명은. 총포법 위반 현행범으로
체포했어. 이시와는 병실에 경비를
세워달라고 매달리더군."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더였다.
  하다가 자취를 감춘 게 마음에 걸렸다.
하다가 지금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는 이시와구미가
독원숭이를 해치우려고 다시 피보라를
일으킬 게 틀림없었다.
  "하다를 수배했습니까?"
  아라키는 숨을 갚게 들이마시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녀석은 피의자가 아냐. 다음 회의에서
이시와를 족치자고 수사 4과를 설득해 볼
생각이야. 수사 4과는 지금 허둥대고 있어.
이시와가 다른 조직과 한판 붙을 것이라는
정보가 전혀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사메지마는 곽을 바라보았다.
  "이 다음은 어떻게 나올 것 같은가?
독원숭이 그 녀석 말이오."
  곽은 엄숙한 얼굴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독원숭이가 취할 길은 두 가지
있습니다. 지하로 숨어 들어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 예웨이가 나타나지 않고는 못
배기게 이시와를 계속해서 덮치는 것. 이
두가지 길밖에 없다고 봅니다."
  "녀석이 이래놓고도 전쟁을 포기
않는다는 뜻이오?"
  아라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곽은
고개를 번쩍 쳐들며 대답했다.
  "독원숭이, 한번 노린 표적은 절대로
놓치지 않아요. 반드시 죽이고야 맙니다. "
  "기가 막히는군."
  아라키가 신음처럼 중얼걸렸다.
사메지마가 끼어들면서 입을 열었다.
  "독원숭이와 함께 있는 여인을
알아냈습니다. 다구치 기요미라고,
여잡니다."
  "뭐라구?"
  아라키는 허를 찔린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여자가 어째서?"
  "독원숭이는 양이라는 가명으로 그
카바레에서 며칠간 일을 했어요.
독원숭이가 일본에서 저지른 첫 살인의
희생자는 바로 그 카바레 점장입니다."
  사메지마는 <장미의 샘> 점장 피살사건
개요를 간단히 들려 주었다. 또 다카가와의
동생뻘인 같은 계열 폭력단 간부 야스이가
행방불명되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독원숭이는 아키 - 야스이 - 다카가와를
통해 이 아파트를 찾아낸 게 틀림없습니다.
야스이도 어딘가에서 살해됐다고 봐야
주십시오. 일본 말을 못하는 독원숭이가
기요미를 통역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어디서 중국어를?"
  "잔류고아 2세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라키는 입술을 께물었다.
  "뭐라구?"
  "기요미가 독원숭이와 함께 행동하고
있는 게 자발적인 것인지, 협박으로
강제당한 것이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습격한 게 독원숭이
단독행동이었다면 기요미는 지금 혼자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기요미만 확보하면
독원숭이 행동을 봉쇄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또...."
  사메지마는 곽에게로 눈을 돌렸다. 곽은
말없이 사진을 꺼내었다.
확인했습니다."
  사진을 받아든 아라키의 말씨가 갑자기
정중해졌다.
  "빌려갈 수 있습니까?"
  "좋으실 대로,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뭡니까?"
  "만약 독원숭이를 - 본명은 유진생이라고
합니다만 - 코너로 몰아넣었을 때, 그를
설득하자면 중국어가 가능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걸 내게 맡겨 줄 수
없을까요? 나는 유진생을 잘 알고 있어요.
지금 일본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곽의 표정은 진지했다. 한동안 쏘아보던
아라키는 사진으로 눈길을 내리깔았다.
  "알았습니다.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22.

  "알았어. 너희들, 형사들이 뭐라 하든
어른 옆을 한시라도 떠나면 안 돼.
알겠지?"
  하다는 휴대전화 스위치를 끈 뒤 옆에 서
있는 젊은 사내에게 넘겼다.
  예웨이는 창문을 통해 이륙하는 비행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네다(羽田) 공항 바로
옆에 있는 호텔 특실이었다.
  하다는 예웨이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쪽 방에 두 사람, 이쪽에
한사람 보디가드가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하다의 부하였다. 예웨이가
데리고 온 두 사람은 아파트에서 모두 죽은
것이었다.
갖다놓은 중국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다는 아직 분을 못 삭여 씩씩거렸다.
단짝이었던 다카가와는 살해되었고, 보스인
이시와가 부상당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예웨이는 씩씩거리는 하다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하다가 모든 것이 예웨이 때문이라고
생각을 굳히면 이 자리에서 당장
살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비록 총상은
입었지만 이시와가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이시와까지 그 자리에서 살해됐다면
하다는 틀림없이 자기를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시와가 목숨을 건진 것은 예웨이가
거실로 끌고 간 덕분이었다. 그것은
수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일이었다.
  "구미쵸가 메세지를 보내왔습니다.
예웨이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꼭 전하라고
했습니다. 예웨이씨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면서....."
  하다는 분통이 터진다는 듯 이빨 사이로
한마디 한마디 밀어내듯이 말했다.
  "천만에.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오.
이시와씨의 젊은 부하를 둘이나 잃게 한
것, 죄송스럽고 면목이 없군요."
  "셋입니다. 다카가와는 잊었나요?"
  하다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와는 성격이 정반대였지만 좋은
녀석이었습니다. 다카가와는 함께 수업을
쌓아온 사이입니다. 그래서....."
마찬가집니다."
  "구미쵸는 예웨이씨를 대만까지
호송하라고 했습니다. 예웨이씨에게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이라면서."
  하다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아 불끈
쥐었다. 힘을 가할수록 두 주먹이 바들바들
떠는 것을 예웨이는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예웨이가 입으로는 하다를 위로하고
있지만, 부하 몇이 죽은건 아프지도
가엾지도 않았다. 보충할 수 있는 인력은
어디까지나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었다.
  "경찰도 꽤 법석이겠군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문제에 국한시켜 보면 이시와구미는
피해자이니까요."
상체를 내밀어 하다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하다씨, 난 내일 비행기로 대만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소. 허나 그만두기로
마음을 바꿨소. 당신, 복수할 생각 없소?
설마 다카가와씨나 젊은 부하의 원수를
갚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물론 갚아야 하구말구요. 허나 지금은
경찰이 저렇게 법석을 떨고 있으니...."
  "신주쿠에선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있겠지요?"
  "네. 우리 아이들 모두 독원숭이 찾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경찰보다 먼저
찾아내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반드시
박살을 낼겝니다."
  "경찰 감시도 엄청나겠군요."
  "우리 본부를 기동대가 둘러싸고
있답니다. 형사들도 나와 당신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구. 허나 숙사 쪽엔 아직
경찰 손이 뻗치지 않았어요. 사람을 동원할
수 있을 겝니다."
  "숙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따로 젊은
이이들을 합숙시키고 있는 곳이 있어요.
이불밖에 없는 썰렁한 곳이죠. 아까
전화로는 사복 서너명이 지키고 있을
뿐이라고 합디다. 본부 앞을 얼씬거리는
사람은 일일이 체크하고 있다지만...."
  "그럼 숙사쪽 사람을 동원해 주시오.
독원숭이를 잡을 방법이 있소. 아직 경찰도
모르고 있는 히든 카드가 있소."
  하다가 미간을 찡그리며 예웨이를
  "그런 방법, 정말로 있습니까?"
  예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곰곰이 생각해 봤소. 만약 독원숭이가
일본에 있다면 잡아낼 방법이 없을까 하고
말이오. 있었어요, 딱 한가지. 허나
독원숭이가 일본에 와 있는지 어떤지를
몰라서 이시와씨에겐 말하지 않았소.
쓸데없이 젊은 사람 고생만 시킬까 봐서
말이오."
  "뭡니까, 그 방법이란게?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하다는 투지가 깃든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얘기하지요. 허나 그전에 당신이
찾아내야 할 사람있소."
  "누굽니까, 그게?"
  "독원숭이는 혼자가 아니오. 일본어를 할
따라다닌다고 봐야 해요. 이시와도 말했죠?
다카가와를 죽인 범인은 남녀 2인조라고
말이오. 여자는 틀림없이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숙한 독원숭이의 가이드일
게요."
  "가이드?"
  "한번 생각해 보시오. 독원숭이가 어떻게
해서 다카가와 아파트를 알아냈을까? 함께
있는 여인이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아는
사람 가운데 다카가와 아파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가 둘 중의 하나
아니겠습니까?"
  하다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 - 독원숭이와 함께
있는 그 여자는 <아디리> 에서 왔다고
유카리에게 말했다는 게 생각나는군요.
실제로 <아디리> 에서 호스테스로 일한
적도 있구요."
  "어디서 그런 걸 알아냈을까요?"
  "<아디리>의 호스테스한테 들었을 수도
있겠죠."
  "그럴지도 모르죠. 아니면 다카가와씨를
고문했던 것처럼, 다카가와씨를 알고 있는
누군가를 고문했던지...."
  "우리 아이는 아닐 겝니다. 살해당한
아이가 더 없었어요."
  "독원숭이, 신주쿠를 잘 알고 있어요.
이시와구미가 신주쿠를 본거지로 하고
있다는 것도. 당신네 조직원 이외에
다카가와씨 아파트를 알고 있는 사람,
없나요? 신주쿠 야쿠자 가운데서....."
  하다는 휴대전화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예웨이는 손을 들어 말렸다.
  "서둘 것 없어요. 중요한 건 약국.
약국을 감시하도록 해요!"
  "약국?"
  "독원숭이, 병을 앓고 있어요. 만성
맹장염이자만 상태가 아주 나빠요. 어쩌면
함께 있는 여자가 약을 사러 올지도
모르오."
  "하지만 약국이 어디 한둘이라야 감실
하죠. 적어도 몇백 개는 족히 될텐데요."
  "독원숭이, 병원엘 갈 수 없어요.
항생자가 필요한테 의사처방을 손에 넣을
길이 없다.... 이럴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겟소?"
  "처방전이 없어도 항생제를 팔아 주는
약국을 찾아내자는 뜻이군요."
  "그래요. 그런 약국도 몇백 개나
되나요?"
  "아니오. 아무리 신주쿠라지만, 그런
약국은 몇 집 없을 겝니다."
  "그럼 그런 약국을 감시하도록 해요.
만약 만성맹장염 치료제를 사러 오는
여인이 있다면 독원숭이의 가이드가
틀림없을 거요. 그 여자만 잡고 보면
독원숭이 숨은 곳 찾기는 식은 죽 먹기가
될 게요."
  "그래요! 그렇군요."
  하다는 나지막하게 부르짖었다.


  23.

  담뱃갑을 꺼내어 열었다. 빈 갑이었다.
묵직한 도어 안쪽에서 여인의 비명과
총성이 뒤섞여 울려왔다.
  통로 소파엔 다른 사람이라곤 한사람도
없었다.
  나미는 일어나 통로를 걸어갔다. 매점은
입구 왼쪽 모퉁이에 있었다. 조금 전에
나미는 거기서 커피를 샀었다.
  코마 극장 근처에 있는 영화관이었다.
  B급 액션 영화 두편을 동시상영하는 좁은
객석에는 관객이 20여명 밖에 없었다. 졸고
있거나 옆에 앉은 여인을 집적거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제대로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담배를 사러 왔지만 매점은 닫혀 있었다.
나미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7시
40분이었다.
  최종회 상영이 시작된 것은 20분
전이었다.
  약속한 영화관을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동시에 두려움도 엄습해 왔다.
  그러나 잘못 알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이 영화관을 지정한 것은 바로 양이
아닌가. 손님이 적으니까 편리할
것이라고까지 말한 양이었다. 이 근처엔
영화관이 적지 않지만, B급 영화를 두 편
동시상영하는 곳은 여기 뿐이었다.
  -- 오늘로 모든 게 끝나!
  양은 그렇게 말했었다.
살아남고 싶다면 경찰을 찾아가는 게 좋아.
하지만 오늘은 안 돼! 다카가와가 말한
곽이라는 대만 형사를 찾아가 내 얘길
털어놓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단, 넌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모든 걸 나한테 덮어씌워야
살아남을 수 있어. 잊으면 안 돼! 또
경찰에 자수하기 전엔 절대로 아파트로
돌아가지 마. 알았지?
  -- 싫어요! 기다리겠어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끝나거든 돌아와 주세요!
  나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양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미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기 기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뭣 때문에 양과
알 수가 없었다.
  양은 지금까지 사귀어 온 모든 남자와
전혀 다른 타입이란 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양과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경찰은 양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일까.
양을 주목하고 있다면 자기도 무사하지
못할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자기도 체포당하는 것일까. 두 번씩이나
살인을 도와 준 나미였다. 양이 사형을
받는다면 자기 또한 사형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양은 만날 장소로 두 곳을 지정했다. 이
영화관으로 오지 못하게 될 경우, 신주쿠
교엔에서 만나자고 했다.
  처음 양이 지정한 장소는 신주쿠
  -- 거긴 싫어요. 다른 곳으로 해요.
  아직도 못 밑에 시체가 잠겨 있을 것을
생각한 나미가 반대했다. 그러자 양은
두말없이 이 영화관을 지정했다.
  -- 제일 앞줄 왼쪽 끝자리에 앉아 있도록
해. 너무 늦어 가지 못하게 되면 교엔
타이와가쿠에서 만나!
  -- 언제?
  -- 내일 아침 9시에서 10시 사이. 그때도
못 가게 되면 다음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기다려.
  양은 자기가 살해될 수도 있다는 건 전혀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았다.
  영화관으로 들어와 상영중인 작품이
액션물이란 걸 안 나미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총을 쏘아대고 칼을 휘두르는 신을
공포감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꾸벅꾸벅 조는 동안, 치한 녀석이 나미의
가슴과 허벅지를 더듬었다. 그때마다
나미는 핸드백으로 치한의 머리와 얼굴을
사정없이 두들겨 주었다.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딴 자리로 갔다가
양과 길이 어긋나게 될 게 더욱 두려웠다.
치한을 두들겨 주면서 나미는 눈물을
흘렸다.
  치한은 바퀴벌레처럼 슬금슬금 도망쳤다.
  양은 지금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총을 맞았거나 칼에 찔려 어느
구석에 처박혀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비록 토막질이지만 양도 어느 정도의
일본어는 가능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충분히 가능하지 않는가.
  만약 걸을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라면 벌써 왔어야 할 사람이었다.
  걷지 못할 정도로, 입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루종일 극장 안에서 이렇게 어정대고
있는 동안 양은 벌써 병원으로 실려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미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떨쳐
버리려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양은 헤어지면서 현금 30만엔을 나미에게
주었다.
  -- 아파트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이
돈으로 호텔에서 묵도록 해.
  -- 돈이라면 나도 얼마간 갖고 있어요.
떨어지면 빌려쓸 수도 있구요.
좋다고 할 때까진, 가족과도 만나선 안돼!
  그때만은 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 알았어요.
  -- 널 위해서야. 다카가와 패거리들은 날
찾느라고 야단일 게야. 어쩌면 네 뒤도
쫓고 있을지 몰라.
  날이 새기 직전 산구바시 아파트를 나온
두 사람은 철야로 영업하는 패밀리
레스토랑까지 걸어갔다. 아파트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다.
  두 사람은 거기서 헤어졌다.
  벌써 12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양이 무사히 돌아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나미에겐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너무도
많은 일이 한꺼번에 터지는 바람에, 지금은
양이 시키는대로 따라 움직이는 것 이외에
  어쨌든 마지막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영화관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최종회 영화가 끝나도 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신문을 사볼
생각이었다. 신문에 별다른 기사가 없다면
어딘가 호텔로 가서 TV 뉴스를 볼
작정이었다. TV 뉴스에는 뭔가가, 양에
대한 뭔가가 나올지도 몰랐다.

  10시 조금 못 되어 나미는 영화관을
나왔다. 들어갈 땐 훤했던 신주쿠도 어느새
밤이 깊어져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인파로 붐볐다.
나미는 어깨를 웅크리고 걸어가다가 코마
극장 옆 철야 영업 스탠드에서 신문을
샀다.
시작했다. 다방 간판이 보였다. 제일
구석자리로 가서 신문을 펼쳐들었다.
석간신문이었다.
  <한낮 주택가에서 공포의 총격전>
  사회면을 펼친 수간, 주먹만한 컷과
제목이 이마를 쳤다.
  <폭력단 구미쵸 애인집 경기관총. 폭탄에
피습>
  나미는 숨을 들이키면서 빨아삼킬 듯이
소제목을 눈으로 쫓았다. 주문을 받으러
웨이트레스가 다가온 것도 모르고 신문을
읽었다.
  몇 번 되풀이해서 읽고 나서야 범인이
도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양은 살아 있어! 살해당하지 않았단
말야!
토라진 얼굴로 서 있는 웨이트레스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사살자 명단에 예웨이가 끼어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았다.
  없었다. 대만 여권을 소지한 이와 황이란
이름은 있었으나 예웨이는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이시와구미 구미쵸를 찾아왔다가
개죽음을 당한 것 같다고 기사에 쓰여
있었다.
  예웨이란 이름은 이와 황 둘 중 어느
한사람의 가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이가 달랐다. 신문에 난
대로라면 두 사람 모두 30대였다. 양은
분명히 예웨이가 노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양은 영화관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나미는 커피잔을 들었다. 손가락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쨌든 양은 살아 있었다.
  영화관에 오지 않은 것은 아직 예웨이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미는 훅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안 온
것이 아니라 못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 안 돼!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 안 돼!
  그러나 순간순간 머리 속을 헤집는 온갖
상념을 씻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양의
모습이 떠올랐다. 침대에 주저앉아 한쪽
손으로 오른쪽 하복부를 지그시 누르면서
고통을 참아내던 모습.....
복막염이 되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쯤은 나미도 알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화장실에서 졸도한
학생이 있었다. 맹장염 복통을 생리통으로
착각한 나머지 만 하루 동안 방치한 탓에
복막염이 병발된 것이었다. 서너 시간만
늦었더라면 죽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그럴
듯하게 번지기도 했다.
  약도 얼마 남지 않았다.
  화농방지와 진통제였다. 모두 대만을
떠나올 때 준비했던 약이었다. 부상당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약이 없으면 양은 꼼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양이 가지고 있는 것은 많아야 앞으로
2회분 뿐이었다. 통증 발작은 하루
한번꼴로 되풀이되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양은 이번 일을 끝낼 때까지, 어떻게든
약으로 버틸 생각이라고 말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발작이 일어났는데, 먹을
약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헤어질 때,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양이
약을 먹는 것을 나미는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 많이 아파요?
  -- 아니, 지금은 괜찮아.
  옆에서 보기에도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앞서,
결정적인 순간에 발작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예방책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약은 겨우 1회분. 오늘
  -- 약이 떨어졌어, 약이 떨어졌어!
  그 약이 굉장히 독한 것이란 건 나미도
알고 있었다. 같은 진통제라도 두통이나
생리통에 먹는 것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아무 약국에서나 손쉽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은 일본에 온 뒤로 약을 보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약을 마련하는 일이 급했다. 그렇지
않으면 양의 목적달성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의사 처방전이 없으면 그처럼 독한 약은
살 수 없는 일, 양이 아니라 나미가
나선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일 아침 신주쿠 교엔으로 갈 적엔 어떤
  나미는 시계를 보았다.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약국은 꽤 늦게까지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나미는 머리를 짜보았지만 허사였다.
  -- 어쩐담! 어떻게 해야 좋지?
  나미는 불현듯 가쓰키 생각이 났다. 얼마
전, 큰아이가 천식기로 고생하고 있다면서
걱정한 적이 있었다.
  천식약은 약국에서 함부로 팔지 않았다.
약이 떨어지면 병원에 가서 받아와야 했다.
그러나 가쓰키는 애기를 데리고 병원 다닐
시간이 마땅치 않았다. 급할 때는 약국에서
사다먹였다고 했다.
  -- 의사 처방전이 없음 살 수 없는
약이지만, 그 집에 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어.
공중전화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나미는 벌떡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도어가 열리면서 열대여섯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년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전활 걸어보자구. 아이스커피
주문해줘."
  한 녀석이 나미를 앞질러 수화기를
들었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더니
카운터에 한쪽 팔을 올려놓고 떠들기
시작했다.
  "나야. 뭐? 역시 있었군. 그래. 꽤
시끄러운 녀석이야.... 그래? 그래,
그래....."
  나미는 그 자리에 서서 입술을 깨물었다.
소년은 나미를 흘낏 쳐다보면서 말을
  "응? 아무 것도 아냐. 그 때문이야,
들통나는 게 오히려 낫다고 한 것도...."
  나미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전화를 걸고 있는 소년을 다시
한번 쏘아보았다. 엉덩이를 불쑥 내밀고
카운터에 엎드려 한쪽 발을 쉴새없이 달달
흔들었다. 담배를 꺼내어 물더니
웨이트레스를 보고 소리쳤다.
  "재떨이 좀 갖고 와!"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공중전화라면
바깥에도 있었다. 나미는 계산서를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과 약속을 깨뜨려도 되는 것일까. 역
쪽으로 걸어가면서 나미는 몇 번이고 같은
생각을 되풀이해 보았다.
  약국 이름과 위치만 묻고 전화를 끊으면?
처음부터 없었다.
  공중전화를 발견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2대는 사용중이었고 또 한대는
고장이었다.
  역 가까이까지 가서야 겨우 빈
공중전화를 찾을 수 있었다. 느슨히 풀린
넥타이 웃도리를 어깨에 걸친 남자도 전화
부스로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미는
종종걸음으로 앞질러 달려갔다.
  사내의 혀차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핸드백에서 수첩을 꺼내었다. 만약
가쓰키가 다른 집으로 일을 나가고 있다면
이 시간엔 연락이 닿지 않는다.
  전화 카드를 꽂아넣고 가쓰키의 아파트
번호를 눌렀다.
  -- 있어 줘요. 가쓰키 언니, 집에 있어
줘요!"
  네번째 신호음이 울리자 상대방이
나왔다.
  "여보세요?"
  몹시 성가셔 하는 나이 든 여자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가쓰키 언니? 저 나미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미짱! 지금 어디서 걸고 있지?"
  "바깥이에요."
  "나미짱! 지금 말야....."
  다급해 하는 목소리 - 나미는 모든 것을
일순간에 깨달을 수 있었다. 경찰은 역시
자기를 뒤쫓고 있는 것이었다.
  "가쓰키 언니, 부탁이에요. 약국 가르쳐
주세요."
  가쓰키는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숨이 넘어갈 듯이 다그쳐 물었다.
  "어디 다쳤어, 나미짱!"
  "아니에요. 친구가 앓고 있어요. 의사
처방전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약국을 찾고
있어요."
  "나미짱, 그래도 괜찮겠어?"
  "뭐가 말예요?"
  "뭐가라니?"
  가쓰키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았다.
  쾅하고 전화 부스 도어를 발길로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빨리 끝내!"
  밖에 서 있는 사내가 으르렁거렸다.
  나미는 고개를 돌려 쏘아보았다.
  "빨리 끝내!"
  성난 얼굴로 사내가 다시 으르렁거렸다.
생각하면서 나미는 수화기를 고쳐잡았다.
  "부탁이에요. 급해요. 꼬마 약 사온
약국, 가르쳐 주세요."
  "가르쳐 주는 건 어렵잖지만.... 나미짱,
지금 당장 경찰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때를 놓치면 나미짱도 헤어나지 못할 거야.
새끼들, 우리 같은 사람 언제나 눈에
가시로 생각하니까 알아서 해."
  "가겠어요. 가구말구요."
  이번에는 등 뒤에서 퍽 소리가 울렸다.
사내가 손바닥으로 도어를 두들기는
소리였다.
  "그 약국은 말야. 가게 - <장미의 샘>
에서 똑바로 가다가 막다른 골목 왼쪽에
있어. 젊은 약사와 늙은 대머리 두 사람이
교대로 보고 있어. 대머리라야 돼!"
 "고마워요."
  "나미짱, 뭣하면 내가 함께 따라가 줄
수도 있어. 혼자 경찰에 가는 게 내키지
않는다면 말야."
  나미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가쓰키 언니는 정말 착한
사람이라고 속으로 감탄했다.
  "괜찮아요. 나쁜 짓 한 것 하나도 없는데
겁날 것 없어요. 또 전화할께요."
  "나미짱"
  나미는 전화를 끊고 돌아섰다. 사내가
한쪽 손을 포켓에 찌른 채 우뚝 버티고
있었다.
  "빌어먹을! 무슨 전화가 그렇게 길어? 너
혼자 대절했냐?"
  부스에서 나오는 나미를 물고 늘어졌다.
  "입 닥쳐!"
            
 나미는 있는대로 악을 썼다.
  "주정뱅이 새끼, 썩 비키지 못해?"
  사네는 눈이 둥글래졌다. 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돌아보고
킬킬거렸다.
  나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횡단보도를
달리듯 가로질렀다.


                     
  24.

  예웨이는 신주쿠로 돌아왔다. 차광
스크린을 이중으로 바른 메스세데스 벤츠
뒷자석에 몸을 묻고 있었다.
  벤츠는 한곳에 머무는 법 없이
카부키쵸를 중심으로 신주쿠 거리거리를
이리저리 계속 돌았다.
  옆자리엔 하다가 역시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휴대전화로
여기저기 바쁘게 연락하고 있었다.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에 있는 카폰은 수신
전용으로 비워 놓고 있었다.
  일본 야쿠자의 기동력은 놀라운 데가
있다고 예웨이는 속으로 감탄했다. 특히
조직의 횡적 유대를 통한 정보수집력은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후부터 지금까지, 못둑이 터진 것처럼
하다 앞으로 각종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첫번째 정보는 보스인 이시와의 용태와
경찰 동향에 관한 것이었다. 경찰이 어떤
식으로 이시와구미를 감시하고 있는지
하다는 이미 전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형사들이 예웨이와 하다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다는 벤츠 운전사에게 이시와 본부와
숙사 근처엔 절대로 접근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두번째 정보는 예웨이가 귀띔에 준
독원숭이 가이드에 대한 것이었다.
이시와가 입원한 병원을 지키고 있는
다카가와 운전 기사로부터 다카가와 주변
젊은 패거리를 동원해서 일일이 전화를
걸게 했다. 다카가와와 의형제를 맺은
야스이란 사내가 며칠째 행방불명인 것을
알아냈다.
  하다는 야스이의 차상급 보스와 차하급
부하를 긴급수배했다. 야스이는 다카가와의
알선으로 각성제 밀매에 손대고 있었음도
알게 되었다. 야스이가 취급한 각성제는
알고 보면 예웨이 조직이 밀수출한
것이었다.
  야스이 흥업 사람을 통해 <장미의 샘>
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얘기도 들었다.
살해된 점장 아키는 그날 야스이에게 떼를
써서 각성제를 얻어갔다고 했다. 아키는
적어도 수회분의 각성제를 소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야스이가 시체를
들어 있는 아키의 백이 보이지 않았다.
  야스이는 당황했다 각성제 봉지에는
지문도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키 살해범으로 우선 지목된 것은
<장미의 샘> 에서 일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는 외국인 웨이터였다. 야스이는 경찰을
앞질러 아키의 백만 회수하려고 서둘다가
행방불명이 된 것이었다.
  경찰은 아직 눈치 못챈 정보이지만,
야스이는 그 외국인 웨이터와 친하게
지냈다는 <장미의 샘> 호스테스 연락을
받고 뛰쳐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야스이
흥업은 그 호스테스 찾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하다는 그런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호스테스의 주소부터 확인하도록 명령을
  나미란 호스테스의 주소는 밤이 되서야
알게 되었다. 이시와구미 2명이 싱오쿠보의
나미 아파트로 달려갔다.
  경찰이 한창 가택수색중이었다.
  하다로부터 경과를 들은 예웨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용하십니다. 과연 이시와구미는
다르군요. 독원숭이의 가이드가 누구인지
밝혀졌으니까 한결 쉬워졌군요."
  예웨이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하다는 조금 머쓱해지려는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만약 예웨이가 귀띔해
주지 않았다면 사태를 여기까지 파악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생각이 앞질러 가렸기
때문이었다.
  -- 창피한 걸 알기는 아는군. 멍청이
것밖에 안 들어 있지? 거드름이나 피울 줄
알았지,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있어? 넌 피에 굶주린 이리에 불과해.
  예웨이는 속으로 하다를 비웃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정중했다.
  "경찰이 우릴 한발 리드하고 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가 경찰을 앞지를 차례요."
  "어떻게?"
  "우선 나미란 여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필요해요. 다카가와씨 애인이 그 여자를
알아볼 테지만, 지금 경찰이 보호하고
있소."
  "잠깐 기다려 보십시오."
  하다는 분주하게 이곳 저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예웨이가 요구한 사람을 금방
찾아냈다.
 전화를 끊으면서 하다가 운전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카부키쵸 2쵸메 <샤룸> 이란 클럽으로
가자. 야스이 부하에게 얘길 건네놨어!"


                             
  25.

  나미가 달려갔을 때, 약국은 이미 절반
쯤 셔터를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가쓰키가
말했던 나이든 대머리가 흰 가운 차림으로
셔터를 조작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아저씨."
  나미가 숨이 턱을 차서 약국으로
뛰어들자, 대머리는 돋보기 너머로 놀란
눈길을 쏟았다. 흰 가운은 여기저기 얼룩이
져 지저분하게 보였다. 한손에는 셔터를
내릴 때 쓰는 길다란 쇠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어, 어서 오슈."
  "저어....."
  나미는 약국안을 둘러보았다. 문 밖에
쌓아놓고 파는 티슈 페이퍼. 토일렛 페이퍼
상자를 안에 들여놓은 탓에 발디딜 틈도
마땅찮을 만큼 비좁았다. 종이냄새.
약냄새. 합성세제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대머리는 몸을 옆으로 해서 상품을
쌓아둔 사이를 비비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슨 약을 드릴까요?"
  나이에 비해서 말투가 매끄럽기 짝이
없었다.
  돋보기 렌즈 탓일까, 눈이 엄청나게 커
보였다.
  "저어.... 내일 여행을 떠나는 친구가
있어요. 운나쁘게도 만성맹장염을 앓고
있는데......"
  나미는 생각해 두었던 거짓말을
둘러댔다.
  "병원엔 갔었나?"
  "아뇨. 약만 먹고 있어요. 옛날엔 모두들
그렇게 했나 봐요."
  "약으로 가라앉혀 봤자 임시변통밖에 안
될텐데...."
  나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내버려 두면 큰 욕 볼 게야.
잘라내야지."
  "돌아와서 수술할 생각인가 봐요. 이번
여행은 늦출 수가 없대요. 내일 출발이니까
병원에 갈 시간도 없구요."
  "하긴 그렇군. 병원엘 가면 당장
수술하자고 덤빌 게 뻔하지."
  "어떻게 안 될까요?"
  대머리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몹시 아프대? 아가씨가 그런 건
아니지?"
  "네. 물론 제가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진통제와 항생제가
필요하겠군.'
  "부탁드립니다. 아저씨."
  "잠깐 기다려. 처방전이 없으면
곤란하지만...."
  대머리는 유리 칸막이가 된 안쪽 코너로
들어갔다.
  나미도 안도의 숨을 푹 내쉬었다. 양에게
약을 갖다 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약을
보고 얼마나 기뻐할까를 생각하자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양이 내일은 틀림없이 신주쿠
교엔에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기다리는 동안 한번 약국 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침 콘돔 세일중이었다.
천장에는 정력제 광고 전단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조제실> 이라고 유리 칸막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대머리가 허리를 굽혀
전화기 옆에 놓은 메모를 보면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통화는 짧았다.
  대머리를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약장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약을 짓기
시작했다.
  나미는 불안해졌다.
  필요한 약이 다 팔려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면 --.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머리는 꽤 오랫동안 여기저기 서랍을
열았다 닫았다 했다.
  마침내 필요한 약을 찾아낸 것일까, 나미
쪽을 보면서 싱긋이 웃어 보였다. 손
움직임도 빨라졌다.
나왔다.
  "사흘분이면 충분하겠지?"
  "저어... 괜찮으시다면 좀더....."
  "닷새분?"
  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머리는 다시 조제실로 들어갔다 나미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어떻게 됐든 약을
닷새치나 구하게 된 게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조제실에서 나온 대머리는 약봉지를 열어
나미에게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빨간 알약은 한번에 두 알씩, 흰 캡슐은
한개씩, 통증이 심하면 2개를 먹어야
하지만, 그때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는 게
현명할 것이라고 했다.
  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꺼내었다.
  대머리가 말한 약값이 결코 싸지
않았으나 나미는 두말 않고 지불했다.
  이쪽 약점을 잡아 바가지를 씌운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비싼 약인지 나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조심해서 가요."
  대머리는 잔돈을 거슬러 주면서 나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쪽이 불안을
느낄만큼 강렬한 눈초리였다.
  나미는 약봉지와 함께 지갑을 핸드백
깊숙이 넣었다.
  약국을 나왔다.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좋을지 좌우를
살펴보았다. 오늘밤은 호텔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양쪽 모두 야쿠자처럼 보이는 사내들이
마음먹었다. 이 언저리에 양아치들이
득시글거린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미의 샘> 앞을 지나가는 게 싫어서
반대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굳게 닫힌
<장미의 샘> 셔터에는 각종 비라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특별히 정해 둔 곳은 없었다. 그러나
카부키쵸 2쵸메에서 쇼쿠안도리 (職安通)
사이는 호텔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
지역이었다.
  대부분이 러브호텔이었으나 여자라면
혼자라도 받아 줄지 몰랐다.
  신주쿠에서 훌쩍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택시
잡기도 쉽지 않았고, 그렇다고 사람이
않았다. 두렵기까지 했다. 가쓰키로부터
경찰이 자기를 쫓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달리듯이
걸었다. 누군가가 뒤를 따라오는 것 같기도
했으나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당장 아무 호텔이나 들어가서 잠그고
조용히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TV
뉴스도 보고 싶었다.
  수조(水槽)나 양동이에 살아 있는 생선을
손님이 직접 고르게 해서, 원하는 대로
요리해 주는 것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활어(活魚) 요리점 옆으로 꺾어 들어갔다.
  정면을 유리로 장식해서 요리점이라기
보다는 디스코텍으로 착각하기 딱 알맞은
건물이었다. 벌써 영업이 끝났는지
  "잠깐, 아가씨 나 좀 봐요!"
  나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걸헌팅
나온 건달이겠거니 생각했다.
  "게이코씨!"
  고개를 돌려보았다.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감색 수트에 반짝반짝 닦은
검정구두... 조금 전 약국 옆에 버티고 서
있던 야쿠자였다.
  나미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사내 어깨 너머로 메르세데스 벤츠가
멈추어 있는 게 보였다. 차창 유리가
슬금슬금 내려갔다. 새하얀 여자 얼굴이
보였지만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실례! 사람을 잘못봤어."
  사내가 벌쭉거렸다.
  벤츠를 본 순간 나미는 심장이 금방 멎을
  그러나 사람을 잘못 봤다는 사내의 말에
안심이 되면서 전신의 힘이 쭉 빠졌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호텔
밀집지역이었다. 어느 집으로 들어갈까
잠시 망설였다. 주위는 컴컴했다.
  느닷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등 뒤에서
덮쳐왔다. 두 팔은 등 뒤로 돌려졌고 입도
막혔다. 누군가는 머리카락을 움켜잡아
당겼다.
  "소리치면 죽을 줄 알아!"
  나직하고 싸늘한 목소리가 바로 귀
뒤에서 들여왔다. 어디서 다가왔는지, 바로
뒤에 멈춰 있는 자동차로 질질 끌려갔다.
  구두가 벗겨지고 핸드백이 바닥에
쏟아졌다.
  머리가 세차게 자동차에 부딪치는 바람에
  "됐어, 가자!"
  누군가가 소리쳤다.
  나미는 뒷좌석에 엎어지듯이 실렸다.
  뭐가 어떻게 됐는지, 자기를 덮친
사람들이 누군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녀석들은 나미의 눈과 입을 포장용
테이프로 잽싸게 봉해 버렸다.
  "됐어! 차바닥에 밀어넣어!"
  누군가가 뒷좌석의 나미를 굴리듯이
바닥으로 밀어냈다. 차바닥 철판에 가슴이
부딪치는 바람에 나미는 숨이 콱 막혔다.
머리도 깨어질 듯이 아팠다. 포장용
테이프로 봉한 두 눈에서 눈물이
번져나왔다.
  "전화 이리 줘."
  "뭘, 꾸물거리고 있어? 빨리 줘."
                                   
 "번호, 알고 계십니까?"
  "감색 벤츠 말이지?"
  "네."
  "알고 있어. 바보소리 그만하구 입
닥쳐!"
  "죄송합니다."
  버튼 누르는 소리에 이어 신호음이
들렸다. 한참 있다가 첫번째 남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붙잡았습니다. 네, 염려 마십시오.
아직은 별일 없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네, 본부장님은?... 네, 곧
찾아뵙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찰칵하고
들렸다.
  "이봐, 조심해서 몰아. 알고 있지?"
            
 "네."
  "본부장님한테로 가시는 길입니까?"
  "그래. 이 여자 데리고 오랬어."
  누군가가 킬킬 웃는 소리도 들렸다.
  "웃을 때가 아냐! 멍청이 같은 놈."
  호통소리에 차 안은 잠잠해졌다.



  26.

  예웨이가 탄 벤츠가 하수도 옆 골목길을
달리고 있을 때 카폰이 울렸다.
  신주쿠 중심과도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었다.
  수화기를 집어든 하다는, 혹시 경찰이
눈치 챈 건 아니냐고 먼저 다짐을 놓았다.
  "그 운송회사로 끌고 와!"
  짧게 명령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하다는 예웨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찾아냈습니다."
  "틀림없습니까?"
  "카바레에서 함께 일한 애가 얼굴을
확인했습니다. 틀림없어요."
  예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확인해 준 여자 말이죠?
가게에서 일단 데리고 나왔기 때문에 두
사람을 붙여놨습니다. 새벽 2시, 영업이
끝날 때까지 함께 있으라고 했습니다. 돈도
달라는 대로 집어 줬구요. 앙큼한 년! 얼굴
한번 확인해 주는데 50만엔이나 달라고
하다니!"
  하다는 아직도 약이 오른다는 듯이 혀를
찼다.
  "지금부터 어디로 갑니까?"
  "다 왔어요. 여기서부터는
기타신주쿠(北新宿) - 일단 우리 지역으로
돼 있습니다. 도산한 운송회사 건물을 하나
잡아둔 게 있었요. 개울 바로 옆입니다.
반지하로 된 방도 딸려 있구요. 은밀한
곳이죠. 팔아 버리려다가 필요할 때가 많을
차가 들어갈 수 있으니까 시체를
실어내기엔 안성맞춤이죠."
  "이게 그 개울이요?"
  하수도로 생각하고 있던 예웨이가
어이없이 없다는 듯 물었다.
  "네. 간다가와(神田川) 라는 강입니다.
지금은 별것 아니게 보이지만, 여름
장마철이면 물살이 꽤 위험합니다."
  강이란 말에 예웨이는 젊은 시절이
생각났다. 운하 옆 창고를 아지트로
사용했었다. 창이 하나밖에 없는
건물이었다. 그것도 도로보다 낮은
호안(護岸) 부분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직
스하이팡이 결성되기 휠씬 전의 일이었다.
  예웨이는 몇몇 친구와 함께 그 창고를
빌어, 대륙에서 쫓겨온 국민당 정부의 바닥
뒤였다.
  국민당 정부는 정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토박이 (대만인). 인텔리. 대학교수는 물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신봉자도 철저하게
배제시켰다. 국민당 정부의 비밀경찰이
명단을 넘겨주면 그들을 납치, 고문하는
것이 예웨이의 일이었다.
  예웨이가 납치, 고문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대만 태생이었다. 교육 수준이
높아 일본 식민지 시대부터 독립운동을
주도한 의사. 정치가, 학자들이었다.
  장개석 일당이 대만으로 쫓겨오자 이들
지식인들은 국민당 정권을 거부하고
나섰다.
  한사람을 만 48시간 동안 집중고문한
적도 있었다. 대만 독립 운동가 이름을
  고문에 못 이겨 입을 연 사람도 있었고,
끝까지 비밀을 지킨 사람도 있었다. 어느
쪽이 됐건, 고문이 끝나면 예웨이가 직접
머리를 쏘아죽였다. 시체는 마대(麻袋)에
담아 창밖 운하로 집어던졌다.
  시체는 물결따라 멀리 흘러갔다.
단슈호(淡水河) 까지 흘러간 경우도
있었다.
  당시 국민당 정부군의 대부분은 굶고
자란 가난한 농가의 둘째나 새째들이었다.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들이었다.
  대만에 오기 전까지 전기나 수도를
한번도 구경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패거리의 눈엔 대만이 풍요한
천국이었다.
  비록 식민지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장개석 일당을 거부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웨이도 대만 태생이었다. 그러나 광복
후 극에 달한 혼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외성인 (外省人,
전후 대륙에서 이주해 온 중국인) 으로
위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만의 그러한 상황이 당시 일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벤츠는 말뚝에 쇠사슬을 감아 입구를
막은 공지 앞에서 멎었다. 주위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바닥이 콘크리트로 된
주차장이었다.
  주자창 한귀퉁이에 3층 건물이 보였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으나 벤츠
헤드라이트만으로도 충분히 살펴볼 수
통로가 보였다.
  조수석의 사내가 차에서 내려 쇠사슬을
풀었다. 벤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
저곳 콘크리트가 갈라진 틈을 비집고
잡초가 길로 자라 있었다.
  조수석에 탔던 사내가 건물 쪽으로
달려갔다. 콘크리트 경사면으로 내려가
지하실 통로에 내려진 셔터를 밀어올렸다.
  벤츠는 지하실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쓰다 버린 책상과 의자. 전화기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스폰지가 삐죽
불거져 나온 소파에, 금이 쭉쭉 갈라진
유리 테이블이 스산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벤츠 헤드라이트가 꺼지기 전에 사내가
켰다. 천장에 붙박혀 있는 전등 3개에 불이
들어왔다 .콘크리트 바닥 여기저기에
오일로 보이는 시커먼 얼룩이 져 있었다.
  사내가 도어를 열어 주기를 기다려
예웨이는 벤츠에서 내렸다. 하다도
휴대전화를 들고 뒤를 따랐다.
  "다니(谷)가 들어오거든 셔터를 내려. 이
안에서도 괜찮지?"
  하다는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좋아, 네가 갖고 있어. 그리고 의자
하나 갖고 와. 여자를 앉히게...."
  "네."
  운전사와 사내는 재빠르고 절도 있게
움직였다. 예웨이는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하다가 라이터를 켜서 내밀었다.
  "여자는 독원숭이를 처치할 때까지
살려두는 게 좋을 게요. 일이 꼬이면 따로
이용할 수 있게 말이오."
  예웨이가 조금은 들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옛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절
고문기구로 오일 버너를 자주 사용했었다.
때로는 나이프로 발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잘라내기도 했다.
  "잘 알겠습니다."
  "방음 잘 되어 있나요? 비명을 질러도
밖으로 안 새어나가나요?"
  "셔터만 내리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뒤쪽은 강이 흐르고.... 보기보단
안전합니다."
           
 헤드라이트 빛줄기가 비쳐왔다. 흰색
벤츠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자를 내린 다음, 다니가 타고 온 차,
위로 올려보내. 보초도 세우고."
  하다가 지시했다.
  "네."
  흰색 벤츠가 경사로 따라 지하실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사내 넷이 타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 얼굴이 온통 포장용 테이프
투성인 여인을 끌어 내렸다.
  "그 의자에 앉혀요."
  예웨이가 말했다. 테이프투성이라서
얼굴생김새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여자를 동글의자에 앉힌 뒤 사내들이
주위를 둘러샀다.
  운전사 혼자 흰 벤츠를 후진시켜
빠져나가자 다른 사내가 얼른 셔터를
내렸다.
  예웨이는 지하실에 남아 있는 멤버를
한사람 한사람 살펴보았다. 하다를
비롯해서 모두 여섯 사람이었다. 자기와
같은 차를 타고 있었던 하다 부하 2명,
여자를 납치해 온 다니란 사내와 그 부하가
2명, 그렇게 6명이었다.
  하다가 이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예웨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테이프를 뜯어내!"
  하다가 명령했다. 테이프를 깨끗이
뜯어냈지만 여인은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였다.
  길쭉하게 생긴 흰 얼굴이었다. 특징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생김새였다. 여기저기
꼭 감은 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한 녀석이 히죽거리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오른손을 번쩍 들어 내리칠
기세였다 예웨이가 재빠르게 손을 흔들어
말렸다. 어느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만 지하실 가득히
울려퍼졌다.
  예웨이는 담배를 피우면서 울고 있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여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늘지긴 했으나 비할데 없이 아름다운
눈동자 - 예웨이는 속으로 감탄했다.
여인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선 사내들을
한사람 한사람씩 살피다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여인의 눈길이 예웨이 얼굴에 딱
멈추었다.
     "겁낼 것 없어!"
  예웨이는 북경어로 말했다.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을 뿐이었다.
  "우린 널 돕고 싶어. 네가 알고 있는
녀석은 끔찍한 살인마야!"
  역시 북경어였다.
  "그 녀석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여자는 입을 다문 채 머리만 살래살래
내저었다.
  -- 역시 북경어를 할 줄 아는군.
  예웨이는 자기 짐작이 틀림없음을
확인했다.
  "너도 중국인인가?"
  "...일, 일본 사람입니다...."
  겁에 질린 떨리는 목소리였다.
  "절 돌려보내 주세요. 가게 해 주세요."
            
 "암, 돌려보내 주구말구. 지금부턴
일본어로 얘기하자구."
  예웨이는 뒷부분부터는 일본말로
바꾸었다. 여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넌 어째서 중국어를 그렇게 잘하나?"
  "중국에서 자랐어요"
  "몇살까지?"
  "열세살때 일본으로 왔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중국사람?"
  "아버지만. 엄마는 중국에서 자란
일본인이었구요."
  "그랬었군."
  예웨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패전 무렵, 중국엔 수많은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중국을 저희 나라,
  패전과 동시에 모택동 군에게 쫓기게
되자 급한 나머지 젖먹이를 버리고 도망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여인의 어머니도
그렇게 버림받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럼 북경어가 아주 능숙하겠군.
독원숭이와도 북경어로 얘길 했나?"
  "독원숭이라뇨?"
  "글자 그대로 독원숭이야. 무섭고도
끔찍한 살인마.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수십명도 더 될 거야."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너도 직접 눈으로 봤을 게야.
다카가와씨 살해될 때 함께 있었지?"
  여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생각만큼 쉽지 않겠다고 예웨이는
생각했다. 이런 타입의 여인이 보기와는
경험해 온 예웨이였다.
  "그렇다고 너한테 화를 낼 생각은 없어.
나쁜 놈은, 모든 책임을 져야 할 놈은
그녀석이야. 그놈, 지금 어디 있어?"
  "모릅니다!"
  여인은 눈을 내리깐 채, 넋나간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침 떼지 마! 너, 약사러 갔던 것도 다
알고 있어. 독원숭이가 먹을 약 말야!"
  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엔 핏기가
삭 가셨다.
  "난 폭력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순순히 털어놔. 정직하게 말만 하면, 곱게
보내 줄 수도 있어."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나(淸娜)."
  "일본인이면서 이름은 친나야?"
  여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 순간,
눈에는 외고집이 번뜩였다.
  설마! 하고 예웨이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 여자가 독원숭이에게 반해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고집스레
번뜩이는 눈빛엔 사랑하는 남자를
감싸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예웨이는 목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순순히 털어놓지 않으면, 널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넘겨 주겠어. 꽤 괴로울 걸.
여자로선 견딜 수 없는 꼴을 당할 테니까
말야."
  그러나 여인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감싸려고 제 몸을 내던진다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 자, 말해 봐. 그녀석 지금
어디 있어?"
  여인은 금방 귀머거리라도 된 것처럼
예웨이를 무시했다. 인형처럼 얼굴에도
표정 하나 없었다.
  예웨이는 속이 부글부글 끊어올랐다.
하다를 돌아보며 눈짓을 했다.
  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여자 쪽으로
다가가서 잡담을 제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입술이 찢어지고 코에선 피가 터졌다.
여인은 아픔을 못 참고 신음했지만 여전히
입을 꼭 봉한 채로 였다.
  "이년, 뜨거운 맛 톡톡히 보여주지.
지옥이 따로 없다는 것, 곧 알게 될 게야!"
  피투성이가 된 여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하다가 으르렁 거렸다. 여인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다는 여인이 앉아 있는 동글의자를
냅다 걷어찼다. 의자와 함께 여인은 바닥에
나둥그러졌다.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얼굴이 콘크리트 바닥에 세차게 부딪치는
바람에 숨이 막힌 듯, 비명이 중간에서
끊게 버렸다.
  "옷을 벗겨!"
  하다가 부하에게 명령했다.


  27.

  사메지마와 곽은 차 안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신주쿠 5쵸메에 있는 구급병원
주차장은 병실을 감시하기엔 아주 좋았다.
  자정이 거의 다 된 시각 - 틈틈이
휘몰아치는 강풍에 차체가 흔들거렸다.
  두 사람은 본관 3층, 특실병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시와 다케조가 입원해
있는 곳이었다.
  이시와는 입원 직후, 수사 1과의 간단한
심문에만 응했을 뿐 일절 입을 다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면회도 거절하고 있었다.
  병실은, 물론 병원 주변에도 경관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시와구미 야쿠자들도
득시글거렸다. 개중에는 의사의 제지를
있었다. 야쿠자들은 여기저기에서, 경찰.
병원 사람들과 옥신각신,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다는 병원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자취를 감춘 예웨이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자동차는
사메지마가 몰고 나온 위장 패트롤카였다.
  차에 딸린 무선통신기에서는 저녁
나절부터 폭행사건. 패싸움 신고와 그에
따른 출동지시들이 쉴새없이 흘러나왔다.
  오후 5시쯤, 니시신주쿠 7쵸메에서
공중전화를 걸고 있던 중국 유학생이
야쿠자로 뵈는 패거리한테 몰매를 맞아
얼굴에 중상을 입은 사건이 터졌다. 조금
뒤엔 니시신주쿠 호텔 중국인 여자 쿡이
그룹에 걸려 들어 봉변을 당했다.
  밤이 깊어지자 신주쿠 카부키쵸 주변에서
비슷한 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피해자들이
대부분 중국인. 한국인 등 아시아계
외국인이었다.
  무선기에서 다시 신호가 울렸다.
  -- 경찰청으로부터 패트롤카에게. 신주쿠
관내에서 상해사건 발생. 니시신주쿠
7쵸메, 다이코 파크 빌딩 가까이 있는 사람
연락 바람.
  -- 신주쿠 7, 세이부 신주쿠역 앞에
있음.
  -- 경찰청, 알았다. 다른 사람은 없나?
  -- 경찰청 310, 현장 부근에 있음.
  -- 경찰청, 알았다. 신주쿠 7, 경찰청
310, 현장으로 출동하라. 현장은
빌딩. 뒤편 종업원 전용 주차장에 피투성이
남자가 쓰러져 있다고 사쿠라이라는 파크
빌딩 종업원이 신고. 즉각 출동, 상황
보고바람.
  -- 신주쿠 7, 알았다.
  -- 경찰청 310, 현장으로 출동중.
  -- 경찰청, 알았다. 피해자 발견 직후
야쿠자로 보이는 남자 수명 카부키쵸로
도주하는 것 목격했다고 함. 경찰청 310.
신주쿠 7은 현장 도착 즉시, 범죄성 유무
최우선 보고 바람. 신주쿠 서 나와라.
  -- 여기는 신주쿠 서, 말하라
  -- 본건 신고 접수번호 1288. 지령 23시
53분, 담당은 기우치. 전담 간부 및
대기차량 파견 바람.
  -- 신주쿠, 알았다. 담당은 하마다,
PS에서 이미 출동했음.
  -- 경찰청, 알았다. 신주쿠 관내
사안(事案) 윤곽 판명될 때까지 통화
통제하겠음. 각국 그렇게 아십시오.
  사메지마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면서 차의 시동을 걸었다.
  "사냥이 시작된 것 같군."
  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하다나 예웨이,
어쩌며 그 두 사람을 노리고 독원숭이가
나타나지 않나 하고 지키고 있었다.
  "돌아가죠, 이젠"
  곽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메지마는 야스쿠니도리 쪽으로 차를
몰았다. 방금 상해사건 신고가 들어온
니시신주쿠에는 이시와구미 본부 사무소가
가보기로 했다.
  이시와구미 본부 위치는 니시신주쿠
7쵸메였다. 기동대 장갑버스가 주차해
있었고, 주변도로엔 간이 검문소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방탄복에 헬멧. 발패로
완전무장한 기동대원들이 경계하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차를 멈추고, 곽과 함께
삼엄한 경비태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계가 이처럼 삼엄한데도 독원숭이가
습격해 올까요?"
  이시와구미 본부 건물은 창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곽은 머리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예웨이가 저 안에 있다면....."
  "저 안엔 없겠죠. 하다 모습이 안 뵈는
게 바로 그 증거죠."
카부키쵸 쪽으로 달렸다.
  병원으로 가기 전, 사메지마와 곽은
<장미의 샘> 호스테스를 전부 찾아 만났다.
그러는 동안 경찰은 다구치 기요미
아파트를 수색한 끝에 그녀 사진을 입수,
유진생과 함께 긴급 수배령을 내렸다.
  <장미의 샘> 호스테스들은 야스이
흥업에서 헤어진 이후 다구치 기요미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걷기로 하죠."
  사메지마는 세이부신주쿠 역 근처에 차를
세웠다. 거리를 싸돌아 다니다 보면
독원숭이와 마주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카부키쵸가 너무
혼잡스러워 차를 몰고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독원숭이가 상처를 입었다지만, 곽의
말처럼 꼬리를 감출 생각이 없다면
당장이라도 이시와구미와 예웨이를 공격해
올지 모를 일이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카부키쵸로 걸어
들어갔다.
  몇 발자국 내딛기도 전에 거리 전체가
팽팽하게 긴장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신주쿠엔 이런 날이 일년에 몇 번쯤은
있었다. 야쿠자나 경찰처럼 자주 들르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보통
때와 다른 냄새가 풍기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물 밑에서 뭔가 끔찍한
이변이 꿈틀거리면, 그 진동이 이 일대
  호객꾼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오가는
야쿠자들의 걸음걸이가 놀라울 만큼
빨랐다. 평소라면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있을
포르노숍도 일찍 문을 닫았다.
  거리 전체가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가 바늘로 콕 찌르기만 해도 금방
폭발해 버릴 만큼 긴박한 공기였다.
  다른 지역에선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신주쿠 키부키쵸 특유의 분위기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물밑의 긴장이
이처럼 직접적으로 도시 전체 공기에
영향을 미치는 곳은 신주쿠 카부키쵸
뿐이었다.
  이 구석 저 구석 박혀 있던 야쿠자들은
경관이나 형사들을 보기만 해도 몸부터
사렸다. 평소 때라면 머리를 꾸벅하면서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길을 비켜갔다.
  그렇다고 줄행랑을 치거나 숨어 버리는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 터질 때를
대비해서 야쿠자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신주쿠를 본거지로 하는 모든 폭력단이
무엇가에 대비해서 안테나를 총동원하고
있었다.
  곽은 한손으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오늘밤엔 야쿠자가 득시글득시글
하는군요. 평소 때도 많았지만, 오늘은
더더욱 많군요."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었다.
  보통 때는 4,5명 단위로 이동하던
야쿠자들이 오늘밤엔 2인 1조가 눈에
두드러질 만큼 많았다. 휴대전화까지
갖추고 있었다.
  "사냥개인 셈이죠. 모두 눈에 불을 켜서
쫓고 있어요. 우리가 노리는 바로 그
사람을 찾아......"
  "이 녀석들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설령
독원숭이를 발견했다 해도 그 자리에서
살해되고 말겝니다."
  곽이 나지막하게 씹어뱉듯이 말했다.
  후린 회관 커피숍에서 야쿠자 7,8명이
떼를 지어 몰려 나오더니 세팀으로 나뉘어
어딘로가 흩어졌다.
  "이상하군."
앞을 지나가는 2인조 중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녀석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봐!'"
  어깨를 잡힌 야쿠자는 고개를 홱 돌려
사메지마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허를 찔린 듯 입을 딱 벌렸다.
  야스이 흥업에서 본 젊은 녀석이었다.
  "뜻밖에도 열심이군, 오늘밤은."
  사메지마는 사내 손목에 매달려 있는
휴대전화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야스이로부터 무슨 연락 있었어, 그
뒤로....?"
  사내는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없습니다. 왜 이러시죠?"
  "<왜 이러시죠>가 아냐! 이렇게 설치고
  "별로.... 설치고 있다곤 생각지
않습니다."
  "이시와가 응원요청을 해 왔나?"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럼 왜 총동원이 돼서 이 야단이야?
눈에 불을 켜서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야?"
  "형사님, 눈감아 주십시오."
  옆에 서 있던 녀석이 끼어들었다.
  "입 닥치고 있어!"
  사메지마가 호통을 치면서 노려보자,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얘기해 봐. 누구 명령이야?"
  "모릅니다."
  "너네와 이시와구미는 같은 계열이지?"
  사내는 눈을 내리깔았다. 더 이상 입을
여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허지만 내가 잘못한 게 뭔지나 한번
들어봅시다."
  사내는 고개를 쳐들면서 말했다.
  사메지마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움켜잡고 있던 사내 어깨를 풀어 줄 수밖에
없었다. 철저한 함구령이 내려진 야쿠자
입을 열게 할 방법이 당장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도 좋습니까?"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혀를 두어 번 차면서 돌아섰다.
2인조의 뒤를 눈으로 쫓는 사메지마를
보면서 곽이 입을 열었다.
  "뭐가 그리 이상합니까?"
  "저 녀석들, 이시와 부하가 아닙니다.
야스이 사람들이죠."
소속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카가와나 이시와 습격범을 찾는 데
야스이 쪽 사람들이 총동원된 것은 이해가
힘든 일이었다.
  "녀석들도 야스이가 당했다는 걸 눈치 챈
모양입니다. 이시와쪽에서 슬쩍 흘려 준 게
틀림없어요."
  "이시와 쪽에서?"
  사메지마는 손목시계를 슬쩍 보면서
대답했다.
  "카바레 점장 살해, 다카가와 살해,
이시와 애인의 아파트 습격.... 이 셋이
연관된 사건이란 건 아직 엄중하게 보안을
유지하고 있어요. 언론도 눈치 못 채고
있구요. 더군다나 야스이 실종이 이들
사건과 연관된 것이란 건 경찰도 아직
눈지채고 있지만...... 경관이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면, 이시와구미 쪽일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다면 야스이 부하들이
총동원될 까닭이 없잖습니까?"
  "이시와구미가 왜?"
  "누군가가 다카가와와 야스이를 연관시켜
본 것이겠죠. 다같이 독원숭이에게 당한
것이라고 추리 했겠죠."
  사메지마는 의미있는 눈길로 곽을
바라보았다. 곽은 짧게 부르짖었다.
  "예웨이!"
  "그렇다고 봐요, 난. 하다와 예웨이는
어딘가로 숨어 버렸지만 결코 연락까지
끊은 건 아닐 게요. 예웨이가 이시와구미를
앞세워 독원숭이에게 반격을 노리고
있을지고 몰라요."
  "그렇다면...."
  사메지마는 부근 빌딩에 걸린 간판을
눈으로 쫓았다.
  "왜 그러세요?"
  "이시와 녀석들, 다구치 기요미 존재도
알아냈을 겝니다. 야스이 조직으로 흘린
정보가 이시와구미로 피드백될 때,
야스이가 특정 호스테스와 양 -
독원숭이와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전해졌을 것 아니오?"
  아파트에서 압수한 다구치 기요미의
사진을 본 다카가와 애인 - 유카리가
이전에 근무했던 클럽 이름을 대고
찾아왔던 여인이 바로 다구치 기요미였다.
  그러나 경찰이 다구치 기요미의 이름이나
범인과의 관계까지 유카리에게 가르쳐 줬을
당장 이시와구미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이시와구미는 다구치 기요미를 찾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낮에 만났던 그
여자 얘기, 야스이와의 관계로 보아 이시와
쪽도 알고 있을 갭니다."
  "그 여자라니요?"
  "톨루엔 (각성제. 신나의 원료) 에 취해
있던 키타노 마스미."
  "그렇군요. 다구치 기요미를 찾아내자면
그 여자가 꼭 있어야 겠죠."
  "이시와와 접촉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군요!"
  사메지마는 단안을 내리듯이 잘라말했다.
  마스미는 야스이 소개로 카부키쵸 2쵸메
<샤룸> 이란 클럽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었다. 시간이 꽤 늦었지만 술집마다
영업시간이 다르니까, 어쩌면 아직 문이
열려 있을지도 몰랐다.
  한동안 헤맨 끝에 허름한 빌딩에 나붙은
<샤롬> 이란 간판을 찾아냈다.
  6층에 있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사메지마는
<샤룸>이 아직 영업중임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묵직한 도어 틈으로
카라오케 듀엣이 흘러나왔다.
  사메지마는 도어를 당겨 열었다.
  "어서 오십쇼!"
  도어 바로 안쪽에 서 있던 검정 양복의
사내가 사메지마와 곽을 돌아보며 목청을
높였다.
이어진 좁은 통로 안쪽에 L자형 홀이
보였다. L코너 부분에 카라오케용
스테이지와 대형 TV가 자리잡고 있었다.
  부스는 6할쯤 차 있었다. 모두 열서넛쯤
되어 보이는 손님들이 호스테스를 한사람씩
끼고 있었다.
  "잠깐!"
  사메지마는 검정 양복 사내를 밖으로
불러냈다. 경찰 수첩을 보일 필요도
없었다. 사내는 사메지마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왜 이러십니까? 우린 레스토랑으로
영업신고를 했어요. 거짓말 아닙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여기에 본명이
키타노 마스미라는 호스테스 있지?
들어온지 며칠 안 되는......"
 "키타노?"
  사내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야스이 흥업 소개로 온 여자야."
  "아! 야스이씨 소개로 말이죠? 네,
있습니다. 이쿠라는 아이예요."
  사메지마는 눈으로 도어를 가리켰다.
  "지금 안에 있어?"
  "네. 조금 전에 잠깐 나갔다 왔지만,
지금은 안에 있습니다."
  말하던 사내 얼굴에 낭패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갔다 왔어?"
  "아, 아닙니다. 뭔가.... 조금.....
급하게 살 게 있어나 봅니다."
  더듬거리며 둘러댔다.
  "사실을 얘기해 주면 고맙겠어."
  "사, 사실입니다. 정말 뭘 사러 갔다
왔습니다."
  사메지마는 차갑게 사내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사내는 체념한 듯 눈길을
내리깔았다.
  "손님을 따라 나갔었습니다. 거절할 수
없는 손님..... 아시겠죠?"
  "어떤 손님인데?"
  "이쯤에서 눈감아 주십쇼.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 아시겠잖습니까?'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손님, 아직도 있나?"
  "아닙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있어?"
  사내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메지마는 사내를 밀치며 도어를
잡았다.
  "걱정할 것 없어. 가게에서 법석을 떨진
않을 테니까...... 어느 부스에 앉아
있지?"
  "안쪽에서 두번째."
  "여기서 기다리세요."
  사메지마는 곽을 돌아보고 말한 다음
안으로 들어가서 사내가 가르쳐 준 부스를
넘겨다 보았다.
  핑크색 미니스커트의 키타노 마스미가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앉아 손박자를 치고
있었다. 테이블엔 브랜디가 병째 놓여
있었다.
  두 남자 손님은 스테이지 반대쪽으로
보고 앉아 있었다. 지겨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한사람은 사메지마도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이시와구미 녀석이었다.
      ? 사메지마는 세 사람이 눈치채지 않도록
살며시 물러났다.
  도어를 열고 곽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시와구미 녀석들이오!"
  이번엔 검정 양복 사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저 세 사람, 잠깐 불러낼 수 없을까?"
  "한번만 봐 주십시오."
  사내는 겁이 질린 얼굴로 애원했다.
  "난처하게 됐군. 영업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순 없구.... 안에서 일을 벌였다간
당신네 피해가 클 것 같구."
  사내도 답답하다 듯 눈만 내리깔고
있었다.
  "부탁해. 어쩔 도리가 없어, 그 방법
밖에는."
                             
 사메지마는 사내를 쏘아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밖으로 나올 때까지 내 얘긴 않는게
좋아. 단지 어떤 손님이 찾아왔다고만
말해."
  "네."
  사내는 퉁명스레 대답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도어가 닫히자 카라오케 음악이 한결
조용해졌다. 사메지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정면과 좌우가
모두 술집이었다. 왼쪽이 바로 <샤룸>
이었다. 한복판과 오른쪽 집은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곽은 사메지마로부터 몇 걸음 떨어져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좀 요란스러워질지도 모르겠소."
  사메지마가 나직이 일러 주자, 곽은
머리를 끄덕이며 히죽 웃음을 흘렸다.
  도어가 열렸다. 다시 음악이
요란스러웠다.
  야쿠자 둘이 밖으로 나왔다. 앞장 선
녀석은 사메지마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두 사람 모두 30대 중반, 앞장 선 녀석은
수트, 뒤쪽은 캐주얼 차림이었다.
  키타노 마스마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캐주얼 차림의 녀석은 사메지마도 낯이
익었다.
  사메지마를 알아본 캐주얼 사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형사!"
  마스미가 짧게 부르짖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내 어깨를 사메지마가
나꿔챘다.
  "이것 놔! 뭣하는 짓이야?"
  사내가 뿌리쳤다.
  "놓치지 마!"
  사메지마는 소리치면서 사내를 곽 쪽으로
밀어보내면서 마스미의 팔을 나꿔챘다.
  "어머머! 왜 이래요?"
  캐주얼이 마스미를 가로막으며
사메지마를 덮쳤다. 사메지마는 손을 바꿔
사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 새끼 미쳤어?"
  등 뒤에서 덮치려는 수트 차림의 사내를
곽이 나꿔채고 있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넌 또 뭐야?"
  곽은 입을 꽉 다문 채 사내 머리로
터져나왔다.
  사메지마도 점퍼 사내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이 새끼가!"
  사내 오른손이 잽싸게 점퍼 안으로
들어갔다. 사메지마는 왼손으로 사내
오른손목을 잡는 동시에 무릎으로 샅을
세차게 걷어올렸다. 점퍼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사메지마는 곽을 돌아다보았다. 곽은
오른손 만으로 수트 차림 사내를 요리하고
있었다. 사내는 오른손을 돌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비수를 잡았다. 그 순간 곽의
다리가 번개처럼 움직이면서 사내는 바닥에
나둥그러졌다. 반쯤 뽑힌 비수도 저만큼
나가떨어졌다.
꽥하는 소리와 함께 축 늘어지고 말았다.
  사메지마도 다시 점퍼 사내로 눈을
돌리며 잡고 있던 오른손 목을 힘껏
나꿔챘다. 시커먼 권총자루가 나타났다.
잽싸게 뺏어 들어 사내 얼굴에 바싹
갖다대었다.
  "뭐야, 이게. 말해 봐!"
  사내 대신 곽이 짧게 대답했다.
  "블랙스타."
  "훌륭한 것 갖고 있군. 어디다 쓰려구
이런 걸 숨기고 다니나?"
  점퍼 사내는 얼굴을 돌렸다.
  "내가 알 게 뭐야? 빨리 끌고 가기나 해
보시지."
  "제법 큰소리는 칠 줄 아는군."
  사메지마는 또 한번 무릎으로 사내 샅을
주저 앉았다. 머리를 움켜잡은 사메지마는
사내 얼굴로 방아를 찧었다. 사내는 눈을
꼭 감은 채 입만 벌룩 거렸다.
  "네가 말 못한다면 저쪽 친구가 얘기해
주겠지, 그렇지?"
  곽은 넥타이를 잡아당겨 수트 차림
사내를 일으켜 세웠다. 사내가 곽의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곽의 오른쪽 팔꿈치가
턱을 내리쳤다. 사내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번져나왔다.
  사메지마는 멍하니 서 있는 마스미에게
눈을 돌렸다.
  "네가 한 걸 말해 봐. 이 친구들이 뭘
시켰지?"
  눈이 동그래진 마스미는 세차게 고개를
                         훑永榕駭?
  "몰라요. 아무 것도 안했어요. 전
관계없어요!"
  "시침 떼지 마!"
  사메지마가 호통을 쳤다. 마스미는
얼굴이 파랗게 질였다.
  "이 녀석들, 중간보스가 피살된 바람에
열을 받았어. 계집 끼구 술이나 마실
처지가 아냐, 지금은."
  사메지마는 점퍼 사내 머리를
잡아일으켰다. 사내는 눈을 떠서 마스미를
째렸다.
  "난 모르는 일이야..... 입 다물고 있어.
까불면 죽을 줄 알앗!"
  마스미는 뒷걸음질쳤다.
  "제법 기세가 등등하군. 아직 맛을 덜
봤나?"
사내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곽이 체중을 실어 수트 사내 오른발목,
아킬레스건 부분을 밟아 뭉개고 있었다.
동시에 한손으로는 멱살을 잡아 사내
상체를 들어올렸다.
  "어, 어쩌려고 그러세요?"
  마스미가 겁에 질린 얼굴로 부르짖었다.
  "아, 아얏, 아얏, 아파죽겠어......"
  "자, 잠깐 그, 그만두세요......."
  마스미가 애원하듯이 매달렸다. 수트
사내는 연신 쥐어짜듯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곽은 얼굴 표정 하나 바꿈없이 고문을
계속했다. 수트 사내는 눈을 있는대로 뜨고
안간힘을 썼다. 전신에서 기름땀이
  곽이 슬쩍 발과 손을 풀었다. 사내는
발목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서 떼굴떼굴
굴렀다. 옆에서 지켜보던 점퍼 사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 이게 무, 무슨 짓들이야?"
  점퍼 사내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곽이 천천히 다가가자, 사메지마는
점퍼 사내를 넘겨 주었다.
  곽은 오른손으로 사내를 일으켜 세운 뒤,
한참 동안 눈 속을 빤히 쏘아보았다.
  "얘기, 해줄 수 있지?"
  사메지마는 수트 사내 두 손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다.
  점퍼 사내는 곽의 차가운 시선을 더는
이겨내지 못하고 얼굴을 돌렸다.
  "빨리 끌고 가기나 해!"
  곽은 잽싸게 사내 목을 끌어당기면서
이마로 얼굴을 들이받았다. 비명이 터졌다.
사내 두 콧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아직 말할 생각 없나?"
  곽은 차갑게 내뱉었다.
  "넌 도대체 뭐하는 녀석이야? 너도
형사야?"
  점퍼 사내가 울부짖었다.
  곽은 사내 오른손을 비틀어 높이 쳐들어
올렸다.
  사내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곽의
손가락이 갈퀴처럼 손목을 파고들었다.
  사메지마는 마스미에게 다가갔다.
마스미는 넋이 빠진 듯, 멍한 눈으로 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들, 뭘 부탁했지?"
  마스미를 고개를 가로저었다.
    ? "말할 수 없어요."
  "말해!"
  "말하면 난 죽어요!"
  사메지마는 점퍼 사내를 고문하고 있는
곽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음은 네 차례야."
  "싫어욧! 난 싫어욧!"
  "그럼 말해. 녀석들은 널 죽일 수 없어.
생각해 봐, 죽이겠다는 건 헛소리야. 겁
주려고 한 소리야."
  마스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용서해 주세요.... 이번만 눈감아
주세요."
  "제법 예쁘게 놀고 있네. 무슨 부탁을
받았어? 말해 봐!"
  "....화, 확인해 준 것밖에 없어요. 저게
나미라고 가르쳐 줬을 뿐이에요!"
주저앉았다.
  "어째서, 왜 날 못살게 구세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따라다니면서 못살게 구세요?"
  마스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디서?"
  "저쪽 호텔가에서였어요. 차 안에 앉아,
저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기만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
  "몰라요. 정말이에요."
  마스미는 몸을 웅크렸다.
  "혼자였나, 나미는?"
  마스미는 대답하지않았다.
  "혼자였나, 묻고 있잖아!"
  "혼자였어요."
  사메지마는 곽한테 손목이 비틀려
신음하고 있는 점퍼 사내를 돌아보았다.
               "납치해 갔나?"
  곽이 손에 힘을 가했다.
  "그래, 맞았어. 우리가 끌고 갔어."
  점퍼 사내는 외마디 비명을 섞어가며
대답했다.
  술집 도어가 열렸다. 조금 전의 검정
양복 사내가 휴대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전화 벨이 계속 울렸다.
  "전화가......"
  검정 양복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두
사내를 보고 기가 질려 버린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녀석들 전화야?"
  사메지마가 물었다.
  "네, 네. 그렇습니다."
  사메지마는 전화를 받아 점퍼 사내
얼굴에 갖다대었다.
                                      
 "받아봐!"
  점퍼 사내는 얼굴을 돌려 버렸다. 곽이
힘을 주었다.
  "아, 알 - 았 - 어......"
  신음소리를 냈다.
  사메지마는 전화를 점퍼 사내 왼쪽 귀에
갖다대면서 응답버튼을 눌렀다.
  ".....네. .....아니, 오쿠보야....."
  점퍼 사내는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뭐라구? 언제, 언제야? 알았어,
알았다니까....."
  점퍼 사내는 눈을 들어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사메지마는 수화기를 뗐다.
뚜뚜 하는 소리가 울렸다.
  "뭐래?"
  사메지마의 물음에 점퍼 사내는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까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우리 숙사가 습격당했어.
3명이나 살해됐다는 게야. 경찰이 지키고
있는데도 말야....."
  점퍼 사내는 사메지마를 노려보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당신들은 뭣하는 사람들이야?
왜 못 잡아? 그깟 새끼 하나도 못 잡구,
그래도 경찰이야?"
  사메지마는 곽 쪽으로 눈을 돌렸다. 곽도
긴장한 얼굴로 마주 바라보았다.
  "납치한 여자, 어디로 끌고 갔어?"
  사메지마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28.

  사내들이 주고받는 얘기가 나미에겐 아주
먼 곳의 일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눈물도
어느새 말라붙었고, 이제는 고통도 그렇게
심하게 느껴지지않았다.
  마치 무슨 의식 같았다.
  사내들은 한사람씩 차례대로 나미를
범했다. 욕망을 채우고 난 뒤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미를 두들겨 패고 발로
걷어찼다. 한놈도 빠지지 않고 모두 그렇게
했다.
  몇 사람이 몸 위로 올라오든 한사람이
올라오든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다만
끝없이 계속되는 것만이 달랐다.
  딱 한사람이 의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만인은 의자에 앉아 사내들이 나미를
범하면서 두들겨 패고 발길질하는 모습을
꼼짝도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사내들이 달라붙어 씨근씨근 거친 숨을
내뿜으면서 성급하게 방아를 찧는 동안,
나미는 지하실 이 구석 저 구석을 멍한
눈길로 던졌다. 몇 번이고 대만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대만 노인을 오랫동안 노려볼
수는 없었다. 올라탄 사내들이 나미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체위를 바꿀 적마다
머리가 인형처럼 대롱대롱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한없이 계속될 것 같은 의식은 돌연 끝이
났다.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 - 대만
노인을 제외한 전원이 일단 한차례씩
  마지막 녀석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대만 노인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노인도
잠자코 의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미는 부서진 인형처럼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자신의 얼굴과 하체가 피에 젖어
있다는 것쯤 나미도 알고 있었다. 그것
뿐이었다 피가 흐른다고 해서 새삼
호들갑을 떨거나 겁에 질릴 필요는 없었다.
  몸과 마음을 잇는 실줄이 끊겨 버린
것이었다.
  "이제 끝났소?"
  노인이 말했다. 옆에 섰던 사내가 무슨
물건을 노인하테 내밀었다. 그것도
단도임을 나미는 금방 알아차렸다.
  노인은 단도를 뽑아들고 나미 옆에
  "말하고 싶을 때까지 말하지 않아도
좋아."
  노인은 북경어로 말하면서 나미의 왼쪽
장딴지를 슬쩍 잡아올렸다.
  "지금부터 발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잘라내겠어."
  왼발이 콘크리트 바닥에 닿았다.
발바닥을 타고 싸늘한 기운이 전신에
전해졌다. 다음 순간 새끼발가락에 뜨거운
전류가 흘렀다.
  나미는 비명을 질렀다.
  아득히 멀어졌던 고통이 파도처럼 되돌아
왔다. 동시에 허공으로 흩어졌다고만
생각했던 마음이 몸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목이 막혀 더 이상 비명도 지를 수 없게
되자 나미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다리를 붙잡아 눌렀다. 눈도 감지 못하게
눈꺼풀까지 아래위에서 잡아 당겨
버티었다.
  대만 노인이 잘라낸 피투성이
새끼발가락을 나미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어서 양쪽 유방 사이에 올려놓았다. 대만
노인은 진지한 얼굴로 나미를 응시했다.
  멀리서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이
자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야쿠자 한사람이 달려가 전화를
받았지만, 대만 노인은 꼼짝도 않고 나미를
응시했다.
  "....예선생!"
  전화를 든 야쿠자가 대만 노인 뒤로
다가왔다. 노인은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나미는 흐느끼면서도 노인과 야쿠자를
지켜보았다. 전화를 들고 있는 것은
나미에게 첫 주먹질을 한 녀석이었다. 그
짓도 제일 먼저 한 녀석이었다.
  노인은 몸을 일으켰다. 오른손에는
나미의 피로 얼룩진 단도를 들고 있었다.
  "누구요?"
  "그놈입니다."
  야쿠자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누구라구?"
  노인은 기가 막힌 것 같기도 하고,
초조해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스스로 독원숭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휴대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을까요?"
  야쿠자는 목소리를 죽여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공포가 깃든 탓일까,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투였다.
  나미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29.

  예웨이는 등 위에서 칼을 맞은
기분이었다.
  -- 왜, 일이 어떻게 됐길래 독원숭이가
이리루 전화를?
  예웨이는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피범벅이
된 하체가 천박스러웠다. 그런면서도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않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예웨이는 단도를 왼손으로
옮겨 잡으면서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나, 예웨이야!"
  북경어로 말했다.
  "배신자 반드시 죽인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예웨이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번져나왔다. 틀림없이
대화를 나눈 상대였다. 그때마다 예웨이는
살인지령을 내렸었다.
  휴대전화임에도 불구하고 독원숭이가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두렵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있는 곳을 독원숭이가
이미 훤히 알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넌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어."
  예웨이는 천천히 말했다.
  "천만에. 파이인웬은 살려달라며 무릎을
꿇었어. 물론 녀석은 죽었지. 허지만
너에겐 애걸할 시간조차 줄 수 없어!"
  독원숭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예웨이에겐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고통을 억누를 때 나타나는 독특한 고음이
섞여 있음을 금방 깨달았다.
     ? "만나보자구. 만나서 우리 오해를
풀어보자구."
  독원숭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좋지. 오늘밤, 네가 한숨 자고 눈을
떴을 때, 내가 머리맡에 서 있는 걸 볼 수
있을거야!"
  "그런 뜻이 아니야. 네 친구도 널 만나고
싶어하고 있어."
  "친구?"
  "친나라는 여자야."
  독원숭이의 침묵이 예웨이에겐
즐거움이었다.
  -- 그렇지.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이제 깨달았겠지!
  "....그런 여자, 난몰라!"
  "그래?"
  예웨이는 전화를 여자 입에 갖다대었다.
                 ? "문안을 드려봐."
  여인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 전화기와
예웨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눈꼬리에선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예웨이는
여인의 얼굴을 단도로 누르면서 지그시
힘을 주었다. 피가 뿜어나왔다.
  "양......."
  여인은 울먹이면서 불렀다.
  예웨이는 만족하다는 듯 전화기를
들었다.
  "기분이 어때?"
  "....모르는 사람이야!"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독원숭이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좋아. 헌데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아냈지?"
  예웨이는 일부러 화제를 바꾸었다.
한사람씩 배를 갈라서 말야. 뭐라고
외쳐대며 비명을 질렀지만, 난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한 녀석이 종이에
적어주더군 그게 바로 이 전화번호였어.
다음에 만날 땐 얘기할 시간이 없을 테니까
지금 알려 주는 거야."
  "그렇다면 이 여인과 얘기할 시간도
없겠군. 모두 함께 만나 오해를 풀어
잘못을 고쳐 줄 생각이었는데......"
  예웨이는 말을 마치며 이번엔 여인의 입
안으로 비수를 찔러 넣었다.
  "친나, 독원숭이는 널 만나고 싶지
않댔어. 너 따윈 알지도 못한다는 게야."
  독원숭이가 들으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전화기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 입에서 비수를 뽑을 때 이미 찢어졌던
입술이 더욱 크게 찢어졌다.
  여자는 흐느껴 울었다.
  "안 만나도 괜찮은가, 친나. 그랬었군.
그처럼 매정한 사내라면 잊어버리는 게
좋단 말이지?"
  예웨이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독원숭이의 침묵은 암흑과도 같았다.
예웨이는 독원숭이가 암흑 속에서 자신의
숨통을 서서히 죄고 있음을 느꼈다.
  "그럼 친나, 너한테 주사를 놔 주지."
  예웨이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말했다.
  암흑이 찢어졌다.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울려나왔다.
  "신 - 주 - 쿠 - 교 - 엔. 타 - 이 - 완
- 가 - 쿠로 와! 여자를 데리고."
 전화가 끊겼다.


  30.

  이시와구미 숙사는 본부 사무소와는
상당히 떨어진 니시신주쿠 4쵸메, 신주쿠
공원과 가까운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현장 가까이 가자 이곳 저곳에 몰려서
있는 구경꾼들과 출동한 소방차가 비좁은
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사메지마와 곽은 현장 못 미친 곳에서
차를 세웠다.
  소방차가 출동했다는 사실은 범행에
폭발물이 사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구경꾼 사이를 헤쳐,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경관 앞을
빠져나갔다. 순경이 곽을 제지했다.
  "괜찮아. 이 사람, 내가 데리고 왔어."
열어주었다.
  숙사가 들어 있는 아파트 입구에서는
아라키가 소방대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라키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엔
까치집이, 얼굴엔 멍이 파랗게 들어
있었다. 응급처치라도 받은 것일까, 찢어져
너덜너덜한 오른소매 사이로 팔꿈치에 감긴
붕대가 보였다.
  길바닥에 까려 있는 호스를 타넘어
사메지마와 곽이 다가가자 아라키가 고개를
돌렸다. 눈빛을 본 순간, 사메지마는
아라키가 어떤 변을 당했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일년 전, 권총밀조범을 단독으로
추적하고 있던 사메지마는 오히려 범인에게
공포를 맛본 적이 있었다 (<소돔의 성자>
참조). 그 직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과
똑같이 지금 아라키의 눈에선 표정없는
둔탁한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때 사메지마가 히스테리 증상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쇼 덕분이었다. 쇼는
사메지마를 닦달해서 정신을 차리게 해
주었다. 앙칼지게 대든 쇼의 분노가
사메지마를 휩싸고 있던 공포감을 비록
완전히 씻어 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현실로 돌아오게는 해 주었다.
  아라키에게도 그렇게 해 줄 사람이 있는
것이까.
  사메지마와 아라키는 한순간이긴 했으나
불꽃이 튈 정도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녀석이 덮쳤어.'
  "내가 너무 만만하게 봤어. 수사 4과와
상의한 끝에 이곳은 일부러 경비를
허술하게 했어. 녀석이 만약 덮치려 한다면
이 곳 밖에 없다 - 그렇게 유도할
생각이었어. 때문에 본부에는 기동대까지
동원했으나 이 언저리엔 사복만 배치했던
게야."
  이쪽이 한마디도 묻지 않았는데,
아라키는 폭포처럼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녀석은 언제 어떻게 건물 안으로
들어왔는지 짐작도 안 가. 이곳은 평범한
아파트로 입구가 하나밖에 없어. 반대편은
어떤 회사 사택이 들어 있어. 양쪽 건물
벽과 벽 사이는 30 센티미터도 채 안되니까
그 틈으로 사람이 드나들었다곤 생각할
수가 없어. 이시와구미 숙사는 4층 끝에
둘과 새우잠을 자고 있던 한명, 그렇게 셋
뿐이었어. 셋 모두 배가 찔려 죽었어. 아마
마지막에 찔린 녀석이었을 거야. 비명을
질렀어. 아니 지르게 만들었을 거야.
분명히. 난 차 안에서 수사 4과 친구들과
입구를 감시하고 있었어. 비명소리에 놀라
달려 올라갔어. 도어를 열려는 순간,
폭음과 함께 박살이 났어. 수사 4과 경위
한명이 즉사, 한명은 중상이야. 녀석이
도어에 폭탄을 세트한 게야. 여는 순간
폭발되도록 말야."
  "녀석은?"
  "쓰러져 있는 우릴 타넘고 유유히
사라졌어. 난 권총을 차고 있었지만
뽑는다는 건 생각도 못했어. 알겠어?
검정옷에 후드를 푹 눌러쓴 녀석이 우뚝

아니다. 어느 나라의 고   
버티고 서서 날 내려다 보았어. 내 상처가
별게 아니니까 확인 사살을 할까말까
망설이는 것 같았어..... 만약, 만에
하나라도 내가 이시와 야쿠자처럼
보였다면... 녀석은 날 죽였을 게야. 난
꼼짝도 할 수가 없었어.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어. 녀석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눈을 감은 것 뿐이었어.
내가 눈을 감자 녀석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
  아라키가 핏기 없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거야, 저것.... 나무로 깎은 원숭이를
내 손에 쥐어 주었어. 그리고는 사라졌어.
녀석은, 그놈은 보통이 아냐!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범죄자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어!"
  옆에 서 있던 곽이 조심스레 한마디
물었다.
  "....경관도 죽였습니까?"
  갑자기 10년도 더 늙어 버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보일 듯 말 듯 머리를
흔들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이빨
사이로 말어내듯이 말했다.
  "독원숭이!"
  아라키가 무심결에 오른손을
움직이려다가 신음소리를 흘리면서 왼손을
힘겹게 웃도리 안쪽 왼 포켓으로 가져갔다.
  "당신한테 빌렸던 사진......"
  배 위에서 찍은 곽의 사진이었다.
  "복사를 했으니까 돌려 드리려구 갖고
다녔소."
  곽은 사진을 받아들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라키는 앓는 숨을 들이마시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최악의 상황이야. 녀석은
이판사판으로 폭주(暴走)를 하고 있어.
예웨이를 죽일 때까지, 예웨이의 은신처를
찾아낼 때까지 닥치는대로 살인을 계속할
게 분명해. 녀석을 저지하자면, 앞으로 몇
사람이나 목숨을 잃게 될지......'"
  "염려할 것 없어요."
  곽이 조용히 말했다. 아라키는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왜? 어째서 염려할 일이 아니라는
거요?"
  "독원숭이, 예웨이에게 점점 가까이
접근하고 있어요. 얼마 뒤엔 아니
금방이라도 맞부딪치게 될 겝니다."
  "시간이 없어요. 그 사내가 말한 다구치
기요미가 끌려간 곳으로 빨리 가야
합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라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다구치 기요미가
이시와구미에게 끌려가서 감금되어 있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아라키는 꼴깍 침을 삼켰다.
  "그래? 허나 시간이 꽤 걸린 게야.
본청과 신주쿠 서는 오늘밤 이시와구미
본부 경비와 특별검문에 병력을
총동원했어. 거기다가 다른 사건도
연발하고 있는 형편이니까 여유가 조금도
없어.... 날이 샌 뒤엔 어떨지
몰라도......"
  사실이었다. <샤룸>의 두 녀석을 불법
무기소지와 공무집행 방해 현행범으로
연행해 가도록 카부키쵸 파출소에 연락하자
보낼 사람이 없다면서 30분쯤 기다리라고
했었다.
  하루 종일 크고 작은 사건이 꼬리를 문
데다가 총동원 태세까지 겹쳐 너나할 것
없이 심리적인 여유가 없었다. 적어도
오늘밤에는 명령 계통을 비롯해서 각
부문의 정상적인 기능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사메지마는 할 수 없이 야쿠자 두 녀석을
직접 데려다 주었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아라키는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봐, 설마 혼자 갈 생각은 아니겠지?
테니까... 단독행동은 삼가는 게 좋겠어!"
  "시간이 없습니다. 다구치 기요미의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서야......."
  "혼자가 아닙니다!"
  곽이 조용히, 그러나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라키는 기가 막히다는 듯 곽을
응시했다.
  ".....안돼! 절대로 안돼! 월권행위야!
무슨 일이 생기면 국제적으로......"
  사메지마는 아라키는 응시했다.
  "실례합니다."
  두 사람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서 있는 곳까지 오자 곽이 입을
열었다.
  "데리고 가 주시는 거죠, 그렇죠?"
 곽이 도어를 열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신이 정보제공자 아니오? 당신이
안내해 주지 않았으면 나는 현장까지 갈 수
없었소 - 이건 내가 쓸 보고서의 한
구절이오."
  곽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 등 뒤는 내가 맡갰소."
  두 사람은 자동차에 올라탔다.


  31.

  간다가와(神田川) 에 바싹 붙어 있는 그
건물은 옆으로 넙적하게 퍼진 3층이었다.
건물은 물론 주변도 캄캄했다. 그러나
콘크리트를 깐 주차장에 흰색 자동차
한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오우치 운송(大內運送)> 이라는 낡은
간판이 달려 있었다. <샤룸> 에서 체포한
야쿠자가 말했던 대로였다.
  사메지마는 일단 건물 앞을 지나서 조금
떨어진 곳이 자동차를 세웠다. 두 사람은
소리나지 않게 조심조심 내렸다.
  습기찬 공기가 얼굴을 덮어왔다.
간다가와에서 풍기는 텁텁한 냄새를 맡는
순간, 사메지마는 온몸이 긴장되고 있음을
  다구치 기요미가 이곳에 감금되어
있다면, 하다와 예웨이도 함께 있을 게
틀림없었다. 어젯밤의 심야 레스토랑과는
달리 오늘은 중범죄가 진행중인
현장이었다. 게다가 독원숭이의 습격에
대비해서 하다를 비롯한 이시와구미
야쿠자들은 무장을 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잠시 살펴보고
올 테니까....."
  사메지마가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주변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얽힌
주택가였다.
  사메지마는 철조망 있는 곳으로 다가서서
안으로 들여다보았다. 건물 일층 부분을
가로막듯이 주차해 있는 흰색 승용차는
메르세데스 벤츠였다.
드나들 수 없게 쇠사슬이 쳐져 있었다.
  사메지마는 철조망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벤츠에 사람이 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타고 있다면,
쇠사슬을 타넘고 들어갔다간 금방 들통이
나게 마련이었다.
  철조망 옆 주택 담장에 몸을 숨긴
사메지마는 한참동안 벤츠를 지켜보았다.
  주변 주택가에도 불 켜진 집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새벽 3시가 가까워진 시각
- 깨어있기엔 너무 늦었고, 일어나기엔
엄청 이른 시간대였다.
  사메지마는 심호흡을 했다.
  벤츠에 누군가가 타고 있다면, 망을 보기
위한 게 틀림없는 일 - 이쪽이 서툴게
움직였다가는 하다 일당에게 저항할 준비나
  사메지마는 손을 내려 허리에 찬 권총을
가만히 잡았다.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벤츠 안에서 순간적으로 희미한 불빛이
비쳐나왔다. 한 사람이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운전석은 건물 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향해
있었다.
  사메지마는 곽이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곽이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벤츠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느새 숨어들었는지
곽은 벤츠 뒷편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떻게 무슨 수로 거기까지 갔을까고
생각하다가 사메지마는 속으로 깜짝
감탄했다. 간다와 바닥이나 둑을 타고 간
생태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사메지마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사메지마가 자기를 응시하고 있다는 걸
곽도 깨달은 듯 몸짓으로 사인을 보내왔다.
벤츠에 타고 있는 녀석이 사메지마 쪽으로
주의를 집중하도록 움직여 달라는
메시지였다.
  사메지마는 손을 흔들어 알았다는 대답을
보내고는 담벼락 그늘에서 불쑥 몸을
드러냈다. 차 안의 빨간 담뱃불이
움직였다.
  사메지마는 벤츠 쪽은 못 본 척하면서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쇠사슬을 타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벤츠 문이 열렸다.
  사내가 한쪽 발을 내디디며 소리쳤다.
  그러나 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곽이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싶은 순간,
사내는 이미 콘크리트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다. 곽은 사내 머리를 나꿔채 콘크리트
바닥에 두어 번 방아를 찧었다. 사메지마가
다가갔을 때, 사내는 이미 실신한
상태였다.
  사메지마는 사내 손에 수갑을 채우고
넥타이를 풀어 재갈을 먹이면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숨어들었죠?"
  곽의 바짓가랑이 물에 젖어 색깔까지
변해 있었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내가 <수귀자> 출신이란 걸 잊은 건
아니겠죠?"
  곽이 사내 몸을 뒤졌다. 블랙스타 권총을
차고 있었다. 곽이 뽑아들면서 사메지마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나중에 돌려 드리죠. 괜찮겠죠?"
  사메지마는 순간적으로 결단을 내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곽은 익숙한 솜씨로 제1탄을 약실에
장진시켰다.
  실신한 사내를 엎어 굴리면서 두 사람은
벤츠 뒤로 돌아갔다.
  벤츠가 가로막고 있던 것은 건물 일층
부분이 아니라 지하실로 이어진 경사로
입구였다. 경사로 아래엔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사메지마는 구두를 벗었다. 맨발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 셔터에 귀를 대었다.
  희미하게 사람 소리가 들렸다. 셔터 밑
틈으로 불빛도 새어 나왔다.
지하실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경사로
하나 뿐인 것 같았다.
  "저 안에 있어요. 다른 데 입구가 또
있나 한번 찾아봅시다."
  곽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층으로
다가갔다. 일층 외벽 아랫 부분은 셔터,
윗부분은 불투명 유리창이었다. 보통
유리였다.
  사메지마는 웃도리를 벗어 유리창 섀시
잠금고리 부분을 덮어 씌운 다음 권총
손잡이로 힘껏 내리쳤다. 박살난
유리조각이 실내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소리가 별로
요란하지 않았다. 지하실까지는 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쪽 소리가 지하실까지 들린다면, 그쪽
그처럼 허술한 곳으로 사람을 납치해
감금했을 까닭이 없었다.
  권총을 홀스터에 꽂은 사메지마는 유리가
깨어진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어 창문
잠금창지를 풀었다.
  사메지마는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콘크리트 바닥의 실내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썰렁했다.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라이터를 켜서 안을 살펴보았다. 한쪽
구석에 용도를 알 수 없는 나무판이 쌓여
있었다. 받침대 같기도 했고 보통
패널같이도 보였다.
  곽도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내부를
정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일층은 복도를 한쪽으로 놓고 세 칸으로
계단이었다.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중간에서 방향을
틀게 되어 있었다. 방향을 트는 공간에는
로커가 쌓여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목을 일부러 막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사메지마는 난간에 기대어 살펴보았다.
계단 끝부분 오른쪽에 철망을 씌운
유리창이 보였다. 스틸 도어였다. 도어
유리창은 불빛을 받아 훤했다.
  도어엔 자동 록의 놉이 달려 있었다.
  사메지마와 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곽이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내가 밖으로 나가 경사로 셔터를 두들겨
녀석들 주의를 끌겠소. 그 틈을 노려
당신은 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시오."
없소. 내가 그쪽을 맡겠소."
  사메지마가 반론을 제가하자 곽은 싱긋
웃음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쪽이 더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소. 허나 난 왼팔을 쓸 수 없는 몸, 저기
쌓여 있는 로커를 타넘으면서 내려갈 수가
없소."
  사메지마는 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았습니다!"
  "먼저 당신이 밑으로 내려가시오. 도어
앞에서 천천히 백까지 센 다음 작전
개시요!"
  사메지마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난간에
손을 걸쳐 상체를 끌어 올렸다. 난간에
먼지가 쌓여 미끄럽기 짝이 없었다. 우선
먼지부터 털어냈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로커를 타넘자면 자칫 요란한 소리가 날
염려가 있었다. 난간에서 직접
뛰어내리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메지마는 다시 난간에 손을 걸쳐 몸을
끌어올렸다. 경사진 콘크리트 난간은
먼지를 쓸어 냈어도 미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팔로 난간을 끌어안다시피 해서
왼발부터 아래로 내렸다. 발끝과 바닥
사이엔 상당한 거리가 남아 있었다.
오른발도 밑으로 내렸다. 허리를 낮추면서
난간을 안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가벼운
충격이 발끝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사메지마는 지하실 스틸도어에 바싹
붙어서서 곽을 올려다보았다. 곽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리켰다.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사메지마는 입 속으로 천천히 하나 둘 -
세기 시작했다.
  곽이 몸을 돌려 위로 올라갔다.
  사메지마는 계단에 걸터앉아 권총을
뽑아들었다. 먼지와 땀에 젖어 있는
탓일까, 싸늘한 총신이 손아귀에 찰삭
달라붙었다.
  몸을 일으켜 살며시 도어놉을
살펴보았다.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 자동 록이었다. 이쪽에서 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50 까지 세었다.
  무늬 유리에 철망까지 씌어 있어 도어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瀏??그림자로 봐서 도어 안쪽에
큰짐들이 쌓여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80을 세었다.
  사메지마는 몸을 낮추어 귀를 도어에
바싹 갖다붙였다.
  -- 얼마나 걸릴까?
  사내 목소리가 들렸다.
  -- 10분 정도면 충분하겠지.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 그건?
  -- 녀석을 해치우게 되면 묻어 버려야 할
것 아냐?
  대화가 끊겼다.
  -- 뭐야?
  -- 다카오 녀석이겠지.
  -- 망보기가 지겨워진 김에 저도 저년을
한번 품어보자, 이건가?
들려왔다.
  - 다카오 녀석 같지는 않는데?
  -- 멍청이 같은 소리! 교엔이야,
교엔으로 가야해. 셔터를 올려봐.
  사메지마는 왼손의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은 다음 도어놉을 잡았다.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덜컹덜컹 울려왔다.
  도어 록을 풀어 잡아당겼다. 덜컹 소리가
울렸을 뿐 열리지 않았다.
  탕! 하는 총소리가 울렸다.
  사메지마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도어가 안에서 잠긴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힌껏 잡아당겼다. 이번엔 열렸다.
  두번째 총성이 귀청을 찢었다. 이어서
비명이 터졌다.
  총구를 위로 해서 낮춘 자세로
  눈앞에 콘크리트 공간이 펼쳐 있었다.
오른쪽으로 50 센티미터 쯤 들어올린
셔터가 보였다.
  셔터 바로 옆에 사내가 한명, 무릎을
싸안은 채 딩굴고 있었다. 안쪽, 가구를
쌓아둔 곳에 또 다른 사내가 몸을 숨겨
부들부들 떨면서 안쪽으로 계속 기어
들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앞쪽으로 있는 장의자에는 사람이 허옇게
알몸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경찰이닷! 손들고 나왓!"
  사메지마는 가구 틈에 숨어 있는
사내쪽으로 총을 겨누면서 외쳤다. 사내가
발포했다.
  사메지마는 바닥에 엎드리면서 천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곽은 보이지
  사내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패닉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첫발을 셔터 쪽으로
쐈으나 이번엔 사메지마를 겨누고 있었다.
  "경찰이닷! 못 들었나?"
  사메지마는 호통을 쳤다. 그러나 사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두번째 방아쇠를 당길까말까
망설였다. 사내와 자기 사이에 놓여 있는
장의자엔 여자가 피투성이가 된 알몸으로
늘어져 있었다. 지금의 사메지마 자세로
방아쇠를 당긴다면, 여자가 맞을 위험성이
너무 높았다.
  사내가 난사하기 시작했다.
  사메지마는 죽음을 각오했다. 총성은 벽.
가구. 천장에 이중 삼중으로 에코되어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다.
  사메지마와 사내 사이로 뛰어든 곽은
무릎을 세운 자세로 두 발을 거푸 쏘았다.
  사내는 빙그르르 몸을 돌리다가 책상에
부딕치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메지마는 한동안 꼼짝도 못했다. 총에
맞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이처럼 몇
발씩이나 총알이 쏟아진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내가 곽의 총에 쓰러질
때까지 적어도 네 발이나 다섯 발은 쏘았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그러나 사메지마에게 명중된 것은 한발도
없었다.
  마른침을 몇 번씩이나 삼키고 나서야
사메지마는 몸을 일으켰다. 곽은 무릎을
세운 자세로 그대로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덕분에 살았군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곽이 오른쪽
무릎을 꺾으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권총을
쥔 오른손으로 가까스로 상체를 버티었다.
  "곽영민씨!"
  곽은 대답이 없었다. 오른쪽 가슴에서
피가 번져나왔다.
  "정신차려요! 구급차를 부르겠어요!"
  곽은 권총을 떨어뜨리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사메지마는 맞잡아 주었다.
  곽의 입술이 움직였다. 숨이 새고 있는
것 같았다.
  "도 독 - 워 원......"
  "정신차려요! 곽영민, 정신차려!"
  곽은 혀를 내밀어 입술에 침을 발랐다.
  "자 잡아줘요! 꼭!"
  말을 마친 곽은 사메지마를 뿌리치며
사메지마는 곽이 쓰러지지 않게 어깨를
받쳐 주었다.
  신음소리가 들렸다. 곽에게 무릎을 맞은
야쿠자였다.
  곽이 가슴에 품고 있던 사진을 꺼내었다.
곽의 얼굴에서 급속하게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사진을 사메지마 앞으로
내밀었다가는 다시 자기 가슴에 갖다댔다.
  "정신차려! 내 말 들려?"
  곽의 눈길이 사메지마를 더듬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사메지마 목을 감아 믿기지
않을 만큼 세차게 끌어당겼다.
  "독 - 원 - 숭 - 이... 잡을 사람,
당신뿐....."
  사메지마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뿐...."
  곽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약속해
달라는 뜻이 분명했다.
  "알았소."
  곽의 목줄기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외마디 고함이 터졌다. 한이 서린 처절한
부르짖음이었다. 곽은 후 - 하고 조용히
숨을 내뿜었다.
  "곽영민씨!"
  등 뒤에서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곽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지상 주차해 있는 벤츠 카폰으로
사메지마는 경찰과 구급차를 불렀다.
  다시 지하실로 내려왔다. 곽은 벽에
기대어 놓은 자세 그대로였다. 고개가 푹
꺾여져 있었다.
  사메지마는 콧잔등이 시큰거려 더 이상
여인이 쓰러져 있는 장의자 쪽으로
다가갔다.
  여인은 알몸이었다. 왼발과 얼굴 상처가
끔찍스러웠다. 여러 사람에게 윤간당한
흔적도 뚜렸했다. 살아 있었으나 넋나간
얼굴엔 표정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사메지마는 부드럽게 여인을 일으켜 앉힌
다음 웃도리를 벗어 걸쳐 주었다.
  "신주쿠 서 경관이오. 다구치
기요미씨죠?"
  여인은 멍한 눈으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다구치씨 맞죠?"
  사메지마는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여인은
엄청난 쇼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
  여자 입술이 움직였다.
  "다이 - 친 - 나(戴淸娜). 내 이름은
다이 친나...."
  사메지마는 여인을 응시했다. 여인의
시선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이 친나예요."
  여인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사메지마는 곽이 준 사진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여인의 눈이 움직였다. 사진 속의
유진생을 뚫어질 듯이 쏘아보았다.
  "이 사람, 지금 어디 있소?"
  사메지마가 물었다.
  "타이완가쿠!"
  여인이 대답을 했다.
  여인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완가쿠는 어디있소?"
  대답이 없었다.
  구급차와 패트롤카 사이렌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사메지마는 계속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여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타이완가쿠> 이외엔 더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구급차와 패롤트카가 오우치 운송
주자창에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들것을 든 구급대원과 함께 정복경관
2명이 셔터 안을 들여다 보았다. 경관
한명이 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이건...!"
  사메지마가 얼굴을 돌려 신분을 밝히자,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이 여자를 유괴 납치한 현행범을
체포했어!"
  구급대원이 달려가서 곽과 쓰러져 있는
야쿠자의 용태를 살폈다.
  "사망자는 2명, 이 여성이 피해자, 저기
저 시체의 무릎을 맞은 녀석이 범인이야.
주차장에도 수갑을 채워 둔 녀석이 한명
있을 게야."
  "이 사망자는 누굽니까?"
  경관이 곽을 가리키며 물었다.
  사메지마는 두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제보자야. 나를 돕다가 총에 맞았어."
  먼저 타구치 기요미를 들것에 실어
구급차로 옮겼다.
옮기려 하자 사메지마가 저지했다.
  "하다와 예웨이는 어디 있지?"
  사내는 계속 비명만 질렀다.
  "어디야? 말해 봐!"
  사메지마가 사내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구급대원이 사메지마를 말렸다.
사메지마는 구급대원을 노려 보았다. 기가
질린 듯 구급대원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미안. 금방 끝내겠어."
  사메지마는 다시 사내 쪽으로 돌아섰다.
  "어디야?"
  "내가 알 게 뭐야?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줘! 아파. 아파서 죽을 지경이야."
  사메지마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야쿠자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사메지마는 안전장치를 풀면서 사내의
  "왜, 왜 이래? 무슨 짓하려구......"
  "경감님!"
  옆에 서 있던 경관 2명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어디야?"
  "이러지 마! 그 총 집어치워!"
  사메지마는 입을 꽉 다문 채 사내를
지그시 쏘아보았다. 야쿠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권총과 사메지마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알았어. 마, 말하면 되잖아?"
  야쿠자는 울먹이면서 부르짖었다.
  "그 여자가 말한대로야. 타이완가쿠는
신주쿠 교엔에 있어. 본부장님이 그놈 목을
따려고 타이완가쿠로 달려갔어.
비상동원령도 내렸어. 지금쯤 그 녀석을
      활Ⅰ「?찢어서....."
  "언제쯤이었어?"
  "한 40분쯤 됐을거야. 녀석이 전화를
걸어왔어. 이리루."
  사메지마는 경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정복 2명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들었지? 이시와구미 피습사건
수사본부에 연락해!"
  "넷."
  사메지마는 권총에 안전장치를 걸어
홀스터에 꽂으면서 밖으로 달려나갔다.
  "경감님!"
  경관 한명이 황급하게 불렀다.
  "현장은, 이 현장은....."
  "더 급한 일이 있어!"
  사메지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32.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이렇게 될 줄은.....
  예웨이는 메르세데스 벤츠 뒷좌석에 몸을
묻고 생각에 잠겨 들었다. 좌우 양쪽엔
하다 부하가 한사람씩 찰삭 달라붙어 앉아
있었다. 벤츠가 멈춰있는 곳은 도쿄
도청사(都廳舍) 앞이었다.
  독원숭이와의 전화 통화 내용을 전한
예웨이는 하다가 부하들과 여인을 데리고
곧바로 신주쿠 교엔으로 달려갈 줄로만
알았다. 자기는 그 지하실에 남아서
독원숭이를 해치웠다는 승전 소식을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독원숭이가 전화를 끊은 직후,
긴급 연락이 왔다. 독원숭이의 전화가
거짓이 아님이 확인된 것이었다.
  긴급 연락을 받은 하다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 자리에서 이시와구미 전
야쿠자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경찰이 본부를 둘러싸고 있다구? 그럼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 잘 들어. 떼지어
몰려나오면 눈치챌 테니까 한두 사람씩
뿔뿌리 흩어져 나와. 그러면 안전할거야.
전화당번 한둘만 남겨놓고 총집합이야!
회전등은 물론 권총도 있는대로 몽땅 갖고
와. 집에 엎드려 있는 녀석, 이리저리 정볼
수집하러 나선 녀석, 모두 불러모아!
삐삐로 즉시 연락해. 전쟁이야, 지금부터!
알았나?"
  하다는 예웨이를 돌아보았다.
겁니다."
  예웨이가 염려한 대로 하다 머리 속에는
복수심밖에 없었다. 다카가와를 죽이고
보스를 다치게 한 데 이어 숙사까지 습격한
독원숭이에 대한 복수 -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고 판단한 하다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끝장을 낼 생각이었다.
  예웨이는 솟구쳐 오르는 불안을
억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여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 따위 년, 나중에 적당히 처리할 수
있어요. 끌고 가는 건 남의 눈에
두드러지기 쉽구,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오. 녀석을 해치운 다음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아요."
  "몇 사람쯤 데리고 갈 생각이오?"
했어요."
  20명, 단 20명.
  예웨이는 불안했다.
  그러나 독원숭이는 환자, 게다가
여자까지 이쪽에 납치당한, 약점이 크다면
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오늘
독원숭이를 처치하지 못하면 또다시
끌려다녀야 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웠다. 대만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겁에 질려 하루하루를 벌벌 떨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예웨이의 침묵에 하다는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함께 가는 거죠?"
  싫다면 당장 죽이려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게 예웨이
있었다.
  예웨이는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가야죠. 이런 늙은이도 혹시
쓰일지 모르잖소?"
  이시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예웨이를
앞장 세우는 일은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예웨이가 현장에 나섰다가 만에 하나
일본 경찰에 체포라도 된다면 이시와구미가
관리하고 있는 대만 루트 - 권총. 각성제
밀수 루트는 당장 궤멸당할 게 뻔한
일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각 계열조직에 물품 공급이 중단되는
것은 물론, 광역폭력단에서의 이시와구미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헤아려 판단해야 할
이시와는 입원중이고, 참모격인 다카가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남은
사람은 하다 한사람 뿐 - 이시와구미의
전권을 쥐고 있었다.

  예웨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다 지시로 공격부대는 니신주쿠 도쿄
도청사 앞에 집결해 있었다. 경찰눈을
피하기 위해 자동차 한대에 네 사람씩만
타고 있었다. 때문에 동원된 자동차만 해도
7,8대나 되었다.
  미래도시처럼 우뚝 솟아 있는 도쿄
도청사의 시커먼 몸뚱이 군데군데에 붉은
광점(光點)이 점멸하고 있었다. 예웨이
눈에는 불길하게 느껴질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 도청사 주변으로 이시와구미
공격부대를 실을 승용차가 속속
몰려들었다.
  동원된 사내들은 하나같이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번쩍번쩍 뿜어내는
눈빛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농담 따위는
엄두도 못낼 분위기였다.
  하다는 자동차 한대 한대를 직접
찾아다니며 무장 유무를 확인하면서,
독원숭이를 덮칠 때의 주의사항도 재삼
환기시켰다.
  하다가 비록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이성을 잃고 있긴 했으나 전투수순을
무시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옆으로
지켜보고 있던 예웨이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평소 때는 택시들이 몰려 있는
말았다.
  이윽고 하다가 벤츠 조수석에 올라탔다.
도어를 세차게 당기면서 운전석에 앉은
젊은 사내에게 짧게 명령했다.
  "출발!"
  벤츠가 출발하자 집결해 있던 이시와구미
자동차들이 전투기 편대처럼 질서정연하게
뒤를 따랐다.
  "교엔을 잘 아는 친구한테 들었습니다만
타이완가쿠는 교엔 한복판, 못 옆에 있다고
합니다. 꽤 널찍한 곳이라서 분산해서
커버하기로 했어요. 그럴 경우 우리편끼리
충돌할 염려도 있고 해서 5인1조씩 네
팀으로 갈랐습니다. 녀석은 혼자니까,
오히려 기동력은 우리보다 앞선다고 봐야
합니다."
  "혼자죠. 언제나 그 녀석은
혼자였습니다."
  예웨이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를
쓰면서 말했다.
  하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차에 타고 있는 아이들을 먼저
교엔으로 들여보낼 생각입니다. 이 시간엔
닫혀 있을 테니까 담을 타넘을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아이들이 먼저
들어가서 발판을 준비해 둘 겝니다. 문이
닫힌 건 따지고 보면 오히려 잘 된건지도
몰라요. 안은 굉장히 너른 곳이니까."
  "우리는?"
  "아이들이 모두 들어간 뒤 담을 너머
타이완가쿠로 갈 생각이오. 여자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게 금방 탄로나겠지만, 신경쓸
테니까. 우리 숙사를 습격했을 때, 녀석은
기관총을 사용하지 않았다는군요. 탄환이
떨어진 게 틀림없을 겝니다."
  예웨이는 머리를 내저었다. 하다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바로 했다.
  카폰이 울렸다. 잽싸게 받아 몇 마디
얘기를 나눈 하다가 전화를 끊으면서 짧게
명령을 내렸다.
  "센다가야 쪽으로 돌아. 그쪽이 넘어가기
손쉬운 모양이야."
  예웨이는 담배를 꺼내었다. 입에
물었지만 양쪽 옆에 앉은 하다 부하는 불을
붙여 줄 생각이 전혀 얹는 것같이 보였다.
두 녀석 모두 자기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예웨이는 판단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이시와구미간의 돈독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부하들을 선동했다고
따끔하게 못을 박을 작정이었다.
  10분도 채 안 되어 하다가 명령한 장소에
도착했다.
  앞쪽에 자동차 한대가 2미터쯤 되는
철책에 바싹 붙어 서 있는 게 보였다.
  "됐어!"
  하다는 차가 채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앞에 서 있는 자동차 쪽으로
가서 타고 있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한쪽은 교엔 철책,
반대편엔 자그마한 빌딩과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뒤따라 온 차들이 한대 한대 차례로
예웨이가 타고 있는 벤츠를 앞질러, 먼저
섰다.
  하다는 먼저 와 있던 자동차 지붕에 손을
짚고 서서 몰려오는 자동차를 지켜보고
있었다.
  철책 안쪽은 잡목숲이었다. 철책사이로
잎이 무성한 가지가 늘어져 있기도 했다.
굵은 나무는 키가 7,8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어둠에 덮인 철책 안을 바라보고 있던
예웨이는 어느덧 공포감에 말려들고
있었다. 입안도 바싹 말랐다.
  먼저 와 있던 차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
한사람은 어깨에 조립식 사다리를 메고
있었고, 또 한사람은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철책을 따라 걸어갔다.
  두 사람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열어놓은 채 올라탄 그는 카폰 수화기에
손을 얹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벨이 울렸다. 하다가
얼른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어떻게 됐어?"
  "알았어."
  단 두마디 만으로 하다는 전화를 끊었다
차에서 내려 일렬종대로 주차해 있는
공격부대에게 사인을 보냈다.
  차 안에 타고 있던 사내들이 앞을
다투듯이 쏟아져 나왔다.
  전투복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하다의 사인에 따라 입을 꽉 다문 채 조금
전 두 사람이 사라진 쪽으로 줄지어
걸어갔다. 하다는 다시 벤츠에 올랐다.
  "출발! 10분 동안 이 언저리를 적당히
  벤츠는 줄지어 가는 사내들을 앞질러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전투부대는
철책을 따라 걷다가 적당한 지점을 찾아
안으로 뛰어 넘어갈 작정인 것 같았다.
  예웨이는 딱 한번 신주쿠 교엔에 온 적이
있었다. 4년전, 관광을 겸해 도쿄를 찾았을
때였다. 대만인 가이드를 앞세워
타이완가쿠도 구경했다.
  타이완가쿠는 1928년, 예웨이가 두 살
나던 해 당시의 일본왕 결혼 축하선물로
대만 국민이 지어 증정한 건물이었다. 대만
삼목(衫木)으로 지은 이 건물을 처음 봤을
때, 이처럼 교색창연한 대만 건물이 어떻게
도쿄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지 깜짝
놀랐던 일이 생각났다.
  그날은 평일이기도 해서 사람들이 별로
공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허영이며 낭비라고 가이드가 비아냥거리던
것도 생각났다.
  -- 여긴 도쿄에서도 일급지예요. 공원을
헐어 버리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토지를 보다 유효하게 이용할 방법이 수도
없이 많을텐데...... 일본 사람들은 이상한
데가 많아요. 보세요, 사람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녜요? 기껏해야 일년에
한번, 벚꽃철에만 붐빌 뿐입니다.
  요소요소에 못을 파고 일본정원과
서양정원을 배치한 50헥타르가 넘는 광대한
공원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민망할
정도였다.
  -- 게다가 저녁만 되면 문을 닫아
버립니다. 열어놓아도 사람들이 오지
남녀조차 드나들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범죄가 그렇게 많다는 뉴욕 센트럴 파크도
24시간 열어 놓는다는데....
  가이드는 머리까지 설레설레 내저었다.
일본에 뿌리박고 살면서도 일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가이드는
예웨이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때문에 미국
가서 사는 게 꿈이라고까지 떠벌리기도
했다.
  카폰이 울렸다. 하다가 잽싸게 받았다.
  "나야. ....알았어. 곧 가지. 사다리는
그냥 뒷겠지? 좋아. 거기서 대기하고
있어!"
  전화를 끊었다.
  자동차는 원위치로 방향을 꺾었다.
  "아까 아이들이 철책을 넘어간 그곳에
  폐옥처럼 낡은 집이 옹기종기 몰려 있는
곳이었다. 옆으로 돌아 들어가자 철책이
안쪽으로 푹 꺼져 있었다.
  차가 멎자 하다가 운전사를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넌 이 근처를 천천히 돌고 있어. 경찰이
눈에 거슬리지 않게 조심해서 말야. 내가
전활 하면 즉각 달려와야 해!"
  "알겠습니다."
  하다는 뒷좌석으로 눈길을 돌렸다.
  "갑시다!"
  예웨이는 하다 부하 사이에 끼어 차에서
내렸다. 움푹 꺼진 철책을 따라 한줄로
서서 걸어갔다.
  철책이 끝나고 콘크리트 담이 나타났다.
사다리가 걸려 있었다. 안쪽에는 몇 사람이
  하다 부하 한사람이 먼저 올라가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다니(谷)가 뒤를
이었다.
  "이번엔 예웨이 선생 차례요!"
  하다가 말했다.
  담 밖에 남은 사람은 둘뿐이었다.
예웨이는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난 늙은이. 하다씨, 당신이 먼저
올라가도록 하세요."
  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빨리. 서둘러 주세요."
  예웨이를 응시하면서 재촉했다. 오른손이
허리춤으로 올라갔다. 예웨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다리에 발을
올렸다.
  "너희들, 예웨이 선생 조심해서 모셔.
  하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알았습니다."
  담장 높이는 철책과 비슷했다. 예웨이는
비스듬히 걸쳐 있는 사다리를 타고 담장
위로 올라갔다. 뾰족뾰족한 철책과 달리
틈이 벌어진 콘크리트 담 위에는 폭이
2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막대기가
가로걸려 있었다. 예웨이는 두 손을 짚고
가까스로 막대기 위까지 올라갔다.
  밑에 서 있던 이시와구미 야쿠자들이
미끄러져 내리는 예웨이의 발을 손으로
받쳐 받아 주었다.
  담장 안쪽에는 오솔길이 뻗어 있었다.
위쪽으로는 잎과 가지가 무성하게 담장을
덮을 정도였으나 나무 둥치와 담은 3,4
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엔 잡초가
  오솔길 위에는 낙엽이 제법 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다가 담 위로 올라오더니
사다리를 들어 안쪽으로 옮겨놓았다.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됐어?"
  하다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서
물었다.
  "명령하신 대로 팀을 갈라 이 앞쪽으로
대기중입니다."
  "이 앞쪽은 어떻게 돼 있어?"
  "담장을 따라 조금만 가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길로 숲을 빠져
나가면 큰 길이 나옵니다."
  한 녀석이 숲 건너편으로 눈길을 던졌다.
시커먼 나무 그림자 사이사이로 불빛이
언뜻언뜻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 위 나뭇잎이
아직도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캄캄했다.
  "좋아, 발 밑을 비춰, 최선두와 최후미를
맡은 녀석은 권총을 뽑아들도록. 허나
엎어지거나 해서 오발되지 않도록 조심해!"
  예웨이를 한복판에 세우고 8명이
일렬종대로 출발했다. 조금전 그 사내가
설명했던 대로 담장을 따라 얼마 안 가서
왼쪽으로 폭 2미터쯤 되어 보이는 흙길이
보였다. 흙길이 끝나자 자갈이 깔린 정식
원내(苑內) 통로가 뻗어 있었다.
  통로는 흙길보다 휠씬 널찍했다. 숲
사이를 누비듯이 좌우로 이어져 있었다.
공격부대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모였나?"
  하다는 회중전등을 하나만 켜도록 지시한
다음, 점호를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우렁찬
  "좋아. 타이완가쿠는 어느 쪽이야?"
  젊은 사내 한명이 앞으로 나와서
설명했다. 그가 바로 하다가 말한 신주쿠
교엔을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전투복에 부츠를 신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거기서 왼쪽 길을 따라
몇 걸음 안 가면 왼쪽으로 큰 건물이
보입니다. 그게 바로 타이완 가쿱니다."
  "왼쪽으로는 돌아갈 수 없나?"
  "갈 수 있습니다만, 상당히 돌게 됩니다.
국화 재배장을 한바퀴 돌아나와야....."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센다가야 쪽 출입구가 나옵니다. 거긴
꽤 널찍하니까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타이완가쿠로 갈 수 있나?"
들어오면 못이 나옵니다. 못가 길을 따라
왼쪽으로 꺾어 들어오면 정면에
타이완가쿠가 보입니다."
  "자세히도 알고 있군.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나?"
  "이 녀석, 이 근처에서 살고 있습니다.
꼬마 때부터 여기서 살다시피 했답니다."
  옆에서 끼어들면서 다니가 대신
대답했다.
  "그래? 계집들과 말타기라도 했나?"
  두세 명이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팽팽하던 긴장감도 따라서 어느 정도
풀렸다.
  "자, 나는 첫번째 코스로 간다. 너와
쿠보(久保) 팀은 왼쪽 길로 가. 그쪽 길은
제법 복잡할 테니까 네가 따라가야
  조금 전에 길을 설명 했던 전투복 차림이
<네> 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오기시(大岸)와 후루쿠보(古窪) 팀은
센다가야 출입구에서 못을 따라
접근하도록. 우리 4명이 중앙, 한쪽이
10명씩, 너희들은 좌우를 맡는다. 우리
4명은 지름길이니까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접근하겠어. 잘 들어! 녀석은 혼자다.
상당히 영리하고 재빠른 놈이란 걸 잊지
말도록. 만약 우리 편 이외에 엉뚱한 놈이
눈에 띄면 망설일 것 없어. 그 자리에서
없애 버려! 그게 아무 관계 없는 부랑자라
하더라도 신경쓸 것 없어. 그것도 제놈의
팔자야."
  "경찰은 괜찮을까요?"
  누군가가 물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치워! 만에 하나
붙잡힌다 하더라도, 이 많은 사람이 각각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판별해 낼 방법이
없어. 25년형을 언도받아 봤자, 25명으로
나누면 한사람이 일년씩이야. 이런 판국에
경찰이 무섭다고 뒷걸음질 쳐 봐. 무투파
이시와는 남의 웃음거리 밖에 안 돼!
알아들었나?"
  "넷!"
  기세찬 대답이 울려퍼졌다.
  "좋아! 권총 뽑아들고 각자 출발!"
  하다는 나지막하게, 그러나 힘이 실린
목소리로 호령했다.


  33.

  지금부터 하려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사메지마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신주쿠 교엔에는 지금 독원숭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시와구미의 무장 전투
집단까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가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었다.
  곽영민은 사메지마의 목숨을 구하려다가
대신 죽어갔다. 곽이 자신의 몸으로 총알을
막아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 지하실에
피투성이가 되어 딩굴고 있는 것은
사메지마 자신이었다.
  그 곽영민이 사메지마에게 요구한 것은
  독원숭이는 반드시 사메지마가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곽이 무슨 이유로
사메지마에게, 사메지마에게만 그걸 요구한
걸까.
  사메지마는 그 좁은 호텔방에서 곽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 유진생은 내가 군에 있을 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요. 만약 독원숭이를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요. 유진생이 특근 중대에 포위되어
사살당하게 내버려 둘 순 없소.
  곽은 독원숭이와 1대 1로 대결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살하든 생포하든 간에
1대 1로 맞부닥치고 싶었기 때문에
월권행위임을 알고도 휴가를 얻어 이
신주쿠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때문에 곽은 그 일본 경관이 자기를
대신해서 목적을 달성해 주기를 바랐고, 또
요구한 것이었다.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곽영민 자신에게 부여되어 있던
경관으로서의 책임을 그가 대신 수행해
주기를 원한 것이었다.
  그러한 곽의 바람을 저버리는 것은
경관으로서의 자부심을 내팽개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아니, 한 인간으로서도 남은 인생은 곽에
대한 회한과 가책 속에 보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설령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경관이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라고 곽에게
분명히 말했다. 곽은 같은 경관으로서 비록
국적은 달랐지만 사메지마를 이해했다.
이해했기 때문에 자기가 못다 이룬 사명을
사메지마에게 위탁한 것이 아닌가.
  곽영민 역시 경관으로서의 직무만이
아니라 경관인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싸웠고,
도전한 것이었다. 곽은 법이나 국가를
위해서 싸워 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요구한 경관상(警官像)을
위해 싸운 것이었다.
  사메지마가 <경관 곽영민>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곽이
동료였다면 공사간에 사이좋게
지냈으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로서의 경관>에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다.
  때문에 사메지마는 곽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곽의 외로운 싸움을 지지했다. 곽
역시 사메지마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독원숭이 손에 일본 경관이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를 듣고 낭패스러워하던 곽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메지마는 가야 했다.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경관만이 곽의 싸움을 물려받아
대신 싸워 줄 수 있었다.
  곽이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가 죽었다
하더라도 사메지마는 곽의 싸움을 대신
하기 위해 가야 했다.

신주쿠 육교(陸橋)를 지나면서 위장
패트롤카 사이렌을 끄고 적색등만
점멸되도록 했다.
  기타신주쿠 현장에 있는 병력을 신주쿠
교엔으로 출동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하더라도 병력소집. 장비점검. 현장 지휘자
선정 등에 적어도 30분 이상은 걸리게
마련이었다.
  신주쿠 교엔엔 틀림없이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일상적인 충돌과는
사정이 달랐다.
  경찰 병력 출동을 기다리고 있다가는
그러지 않아도 한걸음이 아니라 두 걸음
세걸음이나 늦어 버린 지금, 모든 것이
끝나 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사메지마는 신주쿠 고교 운동자 옆을
거기서부터는 신주쿠 4쵸메가 아니라
나이토쵸(內藤町) 였다. 신주쿠 고교와
교엔은 맞붙어 있었다.
  교엔 담벼락을 따라 차를 몰았다. 신주쿠
교엔에는 정문. 오기도몽(大木戶門).
신주쿠몽. 센다가야몽 등 4개 있었다.
  그 중에 다이쿄쵸(大京町) 쪽으로 나
있는 정문은 칸오카이 (觀櫻會, 매년
4월중순, 日王 주최로 열리는 벚꽃 감상회
- 역주) 등 공식행사 때 이외에는 항상
닫혀 있었다.
  이 시간엔 다른 문도 모두 닫혀 있었다.
신주쿠 고교 쪽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입구는
신주쿠몽이었다.
  신주쿠 교엔은 됴쿄 도내에 있는 다른
공원과는 달리 환경청 직할의
명이나 되어 야간 당직도 있었으나
행정개혁에 따라 직원수가 반으로 주는
바람에 야간당직은 폐지되었다. 때문에
광대한 시설이 야간엔 무인상태로 변했다.
개원은 아침 9시, 폐원은 오후 4시 30분.
요스야 서 관할이지만 벚꽃 시즌 이외는
야간 패트롤도 하지 않았다.
  신주쿠몽이 보이자 사메지마는 핸들을
꺾어 문 앞에 바싹 붙여 자동차를 세웠다.
  타이완가쿠가 교엔 어디쯤 있는지
사메지마는 알지 못했다. 대시보드에서
플래시를 꺼내들고 차에서 내렸다. 적색
점멸들은 켜둔 채로였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 20분. 동트기까지는 한시간도
채 안 남아 있었다.
매달렸다. 굵직한 돌기둥에 붙은
철책문이었다. 높이는 약 2미터.
  문 위로 올라가서 걸터앉은 채 어둠 속에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숲쪽으로 시선으로
던지며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독원숭이와
이시와구미가 벌써 맞부닺쳤는지, 아니면
아직도 탐색만 계속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충돌했다면, 이렇게 조용한
걸로 봐서 어느 한쪽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메지마는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오른쪽에 실팍한 돌집이 보였다. 규모는
작았으나 제법 품격이 있었다. 매표소였다.
  사메지마는 플래시를 끈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옆에 경내 안내판이 서
  신주쿠 교엔은 사메지마가 서 있는
위치에서 보면 가로 널찍한 장방형이었다.
오른쪽 전방이 일본 정원 왼쪽이
서양정원이었다. 동서 1킬로미터, 남북 7백
미터에 둘레가 3킬로미터나 되는 광대한
면적이었다. 타이완가쿠는 교엔 한복판,
동서로 뻗은 길쭉한 못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정원과 숲을 지나 5백미터쯤
안쪽으로 들어간 곳이었다.
  사메지마는 안내판 지도를 머리 속에
새겨 넣은 다음 플래시를 껐다.
  홀스터에서 권총을 뽑아 탄환이 몇 발
남았는지 확인해 보았다. 장탄된 다섯발
가운데 지하실에서 한발 쐈기 때문에 네
발이 남아 있었다. 예비탄창은 준비하지
못했었다.
                            
 사메지마는 심호흡을 했다. 이제
독원숭이가 웅크리고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하는 것 이외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깊숙이 들이마신 숨을 길게 내뿜는 순간,
숲 저쪽에서 총성이 어둠을 찢었다.



  34.

  전투복 차림의 젊은 야쿠자가 이끄는
10명이 왼쪽으로 출발했다. 국화 재배장을
우회해서 타이완가쿠로 접근할 팀이었다.
이어서 하다가 또 다른 팀 10명을
출발시켰다. 이들은 센다가야몽 쪽으로
갔다가 못을 따라 거슬러 올라오게 되어
있었다.
  하다는 두번째 팀 10명이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다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이제 우리 차례야. 출발!"
  다니와 또 한녀석이 권총을 뽑아들었다.
두 사람 모두 두 자루씩 갖고 있었다.
받아들었다.
  예웨이는 유저(遊底) 를 당겨보았다.
권총을 잡아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보디가드가 항상 붙어다녔기
때문에 직접 총을 휴대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모처럼 잡아보는 탓일까, 권총이 꽤
묵직하게 느껴졌다. 젊었을 때는 제법
솜씨를 자랑했었지만, 이 나이에 제대로 쏠
수 있는지 어떨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자신이 직접 총을 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랬다. 살아 있는
독원숭이와 더 이상 부닥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자기 눈에 띌 때는 시체가 되어
있기를 바랬다. 시체와 다름없는 상태라면
살아 있어도 무방했다.
걸어갔다. 자갈 밟히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려퍼졌다.
  예웨이는 전신에서 땀이 번지고 있음을
느꼈다. 손바닥이 특히 더 심했다.
플래시를 꺼 버렸기 때문에 밤하늘 반사광
만으로 길을 더듬어야 했다.
  다시 바람이 휘몰아쳤다. 좌우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솨- 하고 귓전을 울렸다.
  네 사람은 입을 꽉 다문 채 묵묵히
걸어갔다.
  예웨이는 권총을 고쳐잡으면서 끊임없이
앞과 좌우를 살폈다.
  다니를 선두로 하다, 예웨이가 뒤를
따랐다. 또 한 녀석이 후미를 맡았다.
  예웨이는 소름이 돋고 있음을 느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후미를 맡은 사내도
불안한 눈초리로 끊임없이 뒤를 살피고
있었다.
  "그 녀석, 멍청하게도 타이완가쿠에서
죽치고 앉아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다니가 소리를 죽여 물었다.
  "글쎄."
  대답하는 하다의 목소리도 메말라 있음을
예웨이는 알아차렸다. 하다 역시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세 녀석이 느끼고 있는
공포감을 한데 합친다 하더라도 자기가
느끼고 있는 공포에는 휠씬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예웨이는 생각했다.
  독원숭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예웨이 자기 뿐이었다.
접어들었다. 거기서 타이완가쿠까지는
1백50미터도 채 안되는 거리였다.
  바로 그때, 오른쪽에서 총성이 울려왔다.
전자동 연속 사격음이었다. 총성이
생각했던 것만큼 요란하지는 않았다.
어딘가 먼곳에서 울리는 폭죽 터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오기시 쪽입니다."
  그러나 하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번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 울부짖듯 터뜨리고 있는
비명이었다.
  조금 전의 연속사격에 이어 이번엔 단발
총성이 들려왔다. 생각난 듯 한발, 또
한발, 모두 두 발이었다.
  "야압!"
  검은 그림자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람처럼 가로질러 가는 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네 사람이 줄지어 서 있는 좌우
숲이었다. 방금 총성이 울려진 것은 오른쪽
숲 저쪽, 못 있는 곳이었다. 그쪽에서
바람처럼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네 사람
전방 1백미터 지점을 가로 질러 왼쪽
숲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타이완가쿠
방향이었다.
  예웨이는 반사적으로 권총을 들어 숲을
향해 세 발을 연속해서 쏘았다. 다니와
후미의 사내도 잇따라 총을 쏘았다.
  "방금 그게 녀석이야?"
  하다가 물었다.
  예웨이가 대답하려고 막 입을 열려 했을
때, 오른쪽에서 또 다른 그림지가
나타났다. 두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안고
비틀비틀 이쪽으로 다가왔다.
  "보, 본부장님....."
  하다 일행을 보자, 신음 섞인 소리를
내뱉으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꺾었다.
  "후루쿠봅니다."
  다니가 하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사람은 쓰러져 있는 후루쿠보에게
달려갔다.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숨결도 금방 끊어질 것 같았다.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숨결도 금방
끊어질 것 같았다.
  "후루쿠보!"
  하다가 옆에 웅크리고 앉자, 후루쿠보가
엄마를 만난 아기처럼 매달려 왔다.
     ? "어떻게 됐어?"
  "빌어먹을... 개새끼가...."
  후루쿠보는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이었다.
  "비겁하게도... 비겁한 놈... 못 속에
숨어 있다가......"
  쿡하는 소리와 함께 후루쿠보는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이었다.
  하다는 잽싸게 몸을 뺐다.
  "이봐, 정신차렷!"
  다니가 잡아 흔들었다. 후루쿠보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앞으로 푹
고꾸라지면서 얼굴을 자갈에 처박았다.
눈을 멀거니 뜨고 있었으나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이봐! 후루쿠보! 내 말 들려?"
  하다가 벌떡 이러서면서 외쳤다.
함께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예웨이는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황색 섬광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얏?"
  다니가 놀라서 외쳤다.
  폭발은 타이완가쿠 쪽에서였다.
  "빌어먹을!"
  하다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
  "가자!"
  하다가 달려갔다. 다니와 또 한 녀석도
뒤를 따랐다. 예웨이는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감을 느끼면서 하다가 뛰어간 쪽으로
어정어정 쫓아갔다.
  오른쪽에 못이 보였다.
  못 옆으로 난 길바닥에는 거인이 비틀어
내버린 인형처럼 이시와구미 야쿠자들이
  예웨이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센다가야몽 쪽으로 갔던 사람들이었다. 못
옆길로 접어든 순간, 물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독원숭이가 벌떡 일어서서
서브머신건을 난사한게 틀림없었다.
독원숭이 입장에서 보면 줄세워 놓은
표적을 맞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예웨이는 흩어져 있는 시체에서 시선을
돌려 왼쪽으로 살펴보았다.
  나무 사이로 뻗은 오솔길 저쪽에
타이완가쿠의 흰 벽이 보였다.
  유리문 옆엔 좌우 하나씩 둥근 창이 나
있었다.
  뛰어가던 하다와 다니와 우뚝 멈추더니
플래시를 켜서 발 밑을 살피고 있었다.
  "하다씨이 - ."
큰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세 사람은
꼼짝하지 않았다. 예웨이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타이완가쿠 왼쪽, 나무숲 사이로
오솔길이 뻗어 있는 게 보였다. 뒤꼍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타이완가쿠를 뒤꼍에서 보면 금방이라도
못으로 미끄러져 내릴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못에서 타이완가쿠 이쪽으로
나오는 오솔길을 따라 타다 남은 불꽃이
아직도 여기저기 타닥타닥 튀고 있었다.
짙은 폭약냄새와 함께 주변 일대엔 흰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히 번지고 있었다.
  가냘픈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
사람 형체가 나딩굴고 있었다. 이곳에
쓰러져 있는 인형은 거인이 그냥 내팽개친
모습이었다.
  주인을 잃은 손발과 몸퉁이 피투성이가
된 채 여기저기 흩어져 딩굴었다.
  다니가 주저 앉아 웩웩 토하고 있었다.
  예웨이는 눈을 감았다.
  독원숭이는 뒤쪽에서 타이와가쿠로
접근하는 이 오솔길에 폭탄을 장치해
두었던 것이다.
  다시 눈을 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주인 잃은 팔다리에 반짝거리는 물체가
무수하게 박혀 있었다. 길바닥에도 흩어져
있었다. 예웨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반짝이는 물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못이었다. 몇백 개, 아니 몇천 개도 넘을
만큼 언청난 양의 가는 못이 시체에 박히고
길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파편처럼 사방으로 튀어나가게 한
것이었다. 신관(信管)에 연결한 와이어를
길에 가로질러 둔 것이었다. 선두에 선
사람 발길에 와이어가 걸려 뇌관을 때린 몇
초 뒤에 폭약이 터지도록 지발성(遲發性)
신관을 사용한 게 틀림없었다. 폭발과 함께
엄청난 양의 못이 우박처럼, 소나기처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덮쳐 버린
것이었다. 지금 들리고 있는 가냘픈 신음은
가까스로 숨이 붙어 있는 몇몇 사람의
마지막 단말마에 지나지 않았다.
  하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꾸르륵
소리와 함께 뱃속에 들어 있던 음식물을
분수처럼 뿜어냈다.
  끔찍한, 기막힌 일이었다.
떼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예웨이는 전신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도, 도망칩시다.....하, 하다씨!"
  하다는 토하느라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번쩍 치켜들었다.
  "안 돼! 녀석을 해치워야 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녀석을 죽여 없애야 해!"
  쥐어짜는 목소리로 울부짖듯이 외쳤다.
  "어디 숨어 있어? 이리 나와! 여자가
죽는 걸 보고만 있을테야?"
  하다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기다렸다.
  가냘픈 신음소리는 가위 눌린 사람의
단발마로 바뀌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한둘은 더 되는 것
같았으나, 몸을 일으켜 가세하려는 사람은
  "독원숭이!"
  예웨이도 북경어로 외쳐 불렀다.
  "친나는 우리가 데리고 있다. 썩
나타나지 못해?"
  네 사람은 자연스레 등을 맞대고 섰다.
하다와 예웨이의 외침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세찬 바람이 나뭇가지에 걸려 윙윙거렸다.
  신음소리가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네
사람 귀에 들리는 것은 바람소리와
울음소리뿐이었다.
  "빌어먹을! 더는 못 참겠어!"
  비명 같은 부르짖음이 터졌다. 예웨이와
다니 사이에 끼어 섰던 야쿠자가
타이완가쿠 주변 나무숲을 향해 권총을
난사했다.
  "개놈의 새끼, 칵 뒈져 버려라!"
탄환이라도 떨어진 것일까, 총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숲속은 조용해졌다.
  그러나 정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이 새끼이!"
  쥐어짜는 듯한 외침이 길게 꼬리를
이었다. 하다와 다니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예웨이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했다.
  "아앗 - !"
  두 사람이 숲속으로 뛰어든 잠시 뒤
처절한 비명이 울려나왔다. 뱃속 저 깊은
데서, 창자를 쥐어짜는 것 같은
비명이었다.
  예웨이는 두 손으로 권총을 받쳐들고
숲속을 겨누었다.
  사각사각 숲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반동력과 함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에 이어 사람이
나둥그러지는 것 같은, 쿵하는 소리가
울렸나왔다.
  예웨이는 팔을 쭉 뻗쳐 권총을 겨눈
자세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둥그스름하게 솟은 풀더미 사이로
검정구두가 보였다. 한짝은 똑바로 위를
향했고, 또 한짝은 옆으로 비틀어져
있었다.
  총신으로 나뭇가지를 들어올리며 우거진
풀더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다였다.
  피를 뿜는 목줄기를 두 손으로 막으면서
하다가 꿈틀대고 있었다. 흡사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경악과 공포로 휘둥그래진 두 눈을
쉴새없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예웨이는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풀이 우거진 안쪽에 다니와 또 다른
야쿠자가 겹쳐 쌓은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배가 일자로 찢어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예웨이는 홱 몸을 돌렸다.



  35.

  폭음이 울려온 조금 뒤 총성이
계속되다가 잠잠해졌다. 권총을 뽑아든
사메지마는 다실(茶室)을 지나 일본정원을
빠져나왔다. 깨끗하게 손질된 잔디밭과
둥글게 다듬어 심은 정원수 사이로
자갈길이 구불구불 끊기듯이 이어져
있었다.
  숲을 빠져나와 일본정원으로 들어섰을
때, 멀리 못가에 우뚝 솟은 건물이 보였다.
시커먼 숲을 등지고 솟은 그 건물은
유현(幽玄)한 분위기조차 느끼게 했다.
  쭉쭉 뻗은 기둥이 노가쿠도 (能樂堂,
노가쿠는 8세기 사루가쿠(猿樂)에서 발전한
일본 전통 가무극 - 역주) 처럼 보이는
있었다. 건물은 언뜻 보기에 이층으로
되어있는 것 같았으나 벽은 없었다. 지붕은
선이 날렵한 기와 지붕이었다. 못가에 우뚝
자리잡고 있는 것이나 건물 형태가 교토의
긴가쿠지(金閣寺)를 연상시켰다. 바로 찾고
있던 타이완가쿠였다.
  사메지마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얼마 가지 않아 타이완가쿠 건너편
못둑에 다다랐다. 길은 못을 따라 좌우로
갈라져 있었다. 오른쪽 길은 못을 가로질러
건너가는 지름길이었고, 왼쪽길은 못
가장자리를 빙 돌아 타이완가쿠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사메지마는 왼쪽 길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오른쪽 지름길로 못을 건너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타이완가쿠 주위는 신주쿠 교엔에서도
특히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키가 10미터도
더 됨직한 나무들이 담장처럼 겹겹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사메지마는 조심스레 걸어갔다.
  왼쪽 길쭉한 못이 보였다. 못은 생각보다
컸다. 폭이 넓은 것은 대안까지 50미터쯤
되어 보였다.
  못둑에 다다라 건너편을 주시했다.
여기저기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언뜻
보아도 못둑과 나무 사이에 나딩구는
사람이 7,8명은 되어 보였다.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춘 채 숨을 죽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때때로
소리뿐이었다. 바람에 못물이 일렁거렸지만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오른쪽
타이완가쿠 입구가 나타날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속으로 가늠했다.
  사메지마는 다시 조심조심 걸어갔다.
오른쪽 갈림길 저쪽에 이번엔 웅크리고
있는 사람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시커먼
그림자는 마치 이마를 땅에 박고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메지마는 총구를 겨눈 채 한걸음씩
한걸음씩 다가갔다.
  두어 걸음 거리에 이르러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봐!"
  이쪽으로 등을 돌린 자세로 웅크린
천천히 사내 앞쪽으로 갔다.
  사내는 앉은 자세로 얼굴 한쪽을 지면에
박듯이 고꾸라져 있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 멀겋게 열린 눈동자..... 두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고 있었다.
  맥을 짚어볼 것도 없었다.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사메지마는 심호흡과 함께 권총으로
고쳐잡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갈림길로
들어섰다.
  죄우에 우거진 나무 사이로 흰 건물이
보였다. 벽에는 원형창이 한줄로 나란히 나
있었다.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주변
일대에는 피비린대가 코를 찔렀다.
살폈다. 못을 건너갈 경우, 나무숲 길이
그쪽 방향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언저리에도 뭔가 번쩍거리는 물체를
뒤집어쓴 채 주인 잃은 팔다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나뭇가지와 건물 담장에도
잘려나간 팔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소매자락이 너덜너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울컥 치솟아오르는 구토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일찌기 보지 못한
대량살육의 끔찍한 현장이었다. 못가에
자빠져 있는 사람까지 합치면 시체는 거의
20구에 달했다.
  사메지마는 오른쪽으로 눈을 돌렸다.
  마른 풀과 대나무로 엮어 짠 문이 건물
안쪽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 안쪽으로
유리가 박살난 채 열려 있었다.
  타이완가쿠는 못 비탈에 받침대를 세워
지은 건물이었다. 때문에 이쪽에서는
단층으로 보이지만, 못 저쪽에서는
받침대까지 모두 볼 수 있어 이층으로
착각하기 쉬웠다.
  사메지마는 쓰러진 대나무 문을 타넘어
들어갔다. 문기둥 높이는 1미터도 채 안
되어 보였다. 열려 있는 유리 도어를 지나
건물 안으로 훌쩍 들어갔다.
  고건물 특유의 마른 나무 냄새가 풍겼다.
내부는 캄캄했다. 못쪽으로 나 있는 부분
이외에는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타이완가쿠는 흰 벽과 굵은 삼목 기둥을
짜맞춘 건물이었다.
  귀을 기울였지만 안쪽에선 아무 소리도
  사메지마는 심호흡을 했다. 안으로
이어진 계단을 한단 올라갔다. 유리 파편이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파삭하고 주변을
울렸다.
  그 순간 건물 내부에서 총성이 터졌다.
도어 유리가 박살이 났다. 탄환이
아슬아슬하게도 바로 사메지마 옆으로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흰벽 뒤로 몸을 날려 숨었다.
두번째 총알은 삼목 마룻귀틀에 박혔다.
나무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메지마는 벽에 등을 찰싹 붙인 채 두
다리를 모았다.
  안쪽에서 뭐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북경어였다. 세번째 탄환은 유리
도어를 관통했다.
총구를 아래로 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발
밑이 한순간 휜해질 만큼 불꽃이 번지며
탄환은 땅에 박혔다.
  "경찰이닷! 저항하지 말고 손들고
나와라!"
  사메지마는 목청껏 외쳤다.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곧 이어 반응이
있었다.
  "경찰? 틀림없이 경찰인가?"
  서툰 일본말이었다.
  "그렇다! 나는 신주쿠 서의
사메지마이다!"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블랙스타 권총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안에 있던 사람이
내던진 것이었다. 탄창은 꽂혀 있지
않았다. 있는대로 몽땅 발사한 모양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권총은 유리조각을
튕겨내면서 사메지마 발 빛으로 미끄러져
왔다.
  "쏘지 마! 난 빈손이야!"
  사메지마는 권총을 겨눈 채 벽그늘에서
뛰어나왔다.
  누군가가 두 손을 번쩍 들고 건물 안에
서 있었다. 사메지마는 플래시를 꺼내어
얼굴을 비쳐 보았다.
  사내는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 은발이 반짝거렸다. 예웨이였다.
검정 더블수트 차림이었다.
  "예웨이로군."
  사메지마는 열려 있는 유리문을 통해
거물 안으로 들어갔다.
  "네, 예웨이올시다."
  예웨이 목소리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濚ソ퓐?
꾸며졌던 실내장식도 어느새 평범한 가정의
거실로 변
그러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번지고
있었다.
  하다는 어떻게 됐나 - 사메지마가 물으려
입을 열려는 순간, 건물 안을 비치고 있는
플래시 불빛 속에 또 다른 사람 그림자가
바람처럼 가로질러 갔다. 그 그림자는
예웨이 등 뒤 바깥복도 난간 저쪽에서 불쑥
나타난 것이었다.
  그림자는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건물
안으로 돌진해 왔다. 예웨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사메지마를 보면서 더듬더듬 말을
잇고 있었다.
  "이, 이제 안심. 나, 나는 살았어...."
  예웨이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사메지마가 경고의 고함을 지를 틈도 없이
한줄기 빛이 예웨이 목줄기를 번뜻 그었다.
  예웨이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 순간
칼을 맞고 죽은 홍고카이 야쿠자, 사지가
생각이 났다.
  피가 뿜어나왔다. 예웨이는 손으로
목줄기를 잡으며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검정옷에 후드를 푹 눌러쓴 사내 얼굴이
플래시 불빛 속에 떠올랐다. 석탄재처럼
빛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눈을 가진 남자였다. 눈두덩이 푹 꺼진
초췌한 얼굴엔 수염이 텁수룩 했다.
어디선가 물을 흠벅 뒤집어쓴 듯, 전신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양날의 나이프가 번뜩였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예웨이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꺾고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이어서 사내를 쳐다보더니
가냘픈 비명을 질렀다. 마치 사내 앞에
  사내 입에서 기합에 찬 고함이
터져나왔다. 두 손을 허리로 끌어당기는가
싶자 부츠를 신은 오른발이 허공을
치솟았다. 자기가 자기 턱을 차려는 것
같은 자세였다. 허공으로 치솟은 발이
정점에서 멈칫하더니 바람을 가르며
발뒤축이 예웨이 이마에 내리꽂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예웨이 목이 어깨
사이에 파묻히고 말았다. 가냘프게
이어지던 비명소리도 칼로 잘라낸 듯 뚝
끊겼다.
  예웨이 몸통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천천히 뒤로 나둥그러졌다.
  멀겋게 초점을 잃은 예웨이의 두 눈이 발
밑에서 사메지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생명의 빛은 이미 꺼져 있었다.
바라보았다. 예웨이를 응시하고 있던
사내도 사메지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내가 X자 멜방에 서브머신건과 회색
숄더백을 달아 메고 있었다. 발목엔 칼집이
묶여 있었다.
  사메지마는 플래시로 사내 얼굴을
비쳤다. 생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사내는 쓰러져 있는 예웨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왼발이 번쩍하는 순간,
사메지마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몸이 공중으로 붕 뜨고 있음을
느꼈다. 닫혀 있는 쪽의 유리 도어에 등이
부딪쳤다. 통증을 느낄 여유도 없이 유리
파편을 뒤집어 쓰면서 건물 밖으로
나둥그러졌다.
  권총과 플래시도 어디론가 날아가고
문짝 위에 떨어졌다. 마른 풀과 대나무로
엮어 만든 문이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격통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갈비뼈를 칼로
저미는 것 같은 격통이었다.
  사내가 쓰러진 유리 도어를 부츠 발로
저벅저벅 밟으며 밖으로 나왔다.
석탄재처럼 어두운 눈길로 사메지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얼굴 이곳 저곳을
훑던 눈길이 사메지마 눈 속에 박혀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네 활개를 큰 대자로 던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또 한걸음 사메지마 쪽으로
다가섰다. 고개를 뒤로 젖혀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판별하려고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사메지마에게도 들렸다.
  몇십 대가 넘을 것 같은 패롤트카. 장갑
버스가 몰려오면서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였다. 동도 트기 전의 새벽 공기를
찢고 메아리치는 사이렌 소리가 신주쿠
교엔을 덮어오고 있었다.
  사내는 다시 사메지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유 - 진 - 생이지?"
  사메지마는 메말라 버린 입속을 침으로
적시며 쥐어짜듯이 물었다.
  사내 눈길이 움찔했다. 다음 순간
사메지마를 쏘듯이 응시했다. 사메지마는
마른 혓바닥을 적셔가며 가까스로 말을
  "너를 - 체포 - 한다!"
  사내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왼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사내의 체중이 왼발에 걸리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언제든 오른발을 날릴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뜻밖의 변화가 일어났다.
사내가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비틀거린
것이었다. 왼손으로 하복부를 강하게
죄듯이 싸안았다.
  사메지마는 사내 몸이 이상이 생긴 걸
대뜸 알아차렸다.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내는 비틀거리면서 왼손으로 뻗쳐 옆에
있는 기둥을 잡았다. 눈을 크게 떴다.
나이프를 내던진 다음 메고 있던
  사메지마는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격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켜 머리부터
사내에게 부딪쳐 갔다.
  기둥을 잡고 있던 사내 손이 미끄러져
내리면서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사내는 머리를 입구 계단에 정면으로
부딪쳐 나둥그러지면서도 오른팔꿈치로
사메지마 어깨를 내리쳤다. 왼쪽 어깨가
빠개지는 것 같았다. 사메지마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사내가 두번째 타격을 날리려는 것을 본
사메지마는 오른주먹을 뻗쳤다. 펀치는
사내 턱에 정통으로 꽂혔다. 사내는 몸을
틀어 사메지마의 두번째 펀치를 피했다.
그러나 몸 움직임이 둔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 바람처럼 번개처럼 발길을 날릴
  사내는 몇 바퀴 몸을 굴린 다음
일어서려고 무릎을 세웠다. 사메지마는
사내 어깨에 걸린 서브머신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사메지마가 멜빵째로 서브머신건을
나꿔채 끌어당기는 바람에 사내는 다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사내는 오른쪽 어깨를
휘둘렀다. 멜빵이 벗겨졌다. 사메지마는
서브머신건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러나 사내도 가만 있지 않았다. 오른쪽
다리가 땅에 깔리듯 크게 바람을 가르면서
사메지마 발목을 쓸어왔다. 사메지마는
서브머신건을 든 채로 뒤로 한바퀴
빙그르르 돌면서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사내는 다시 비틀비틀 일어섰다.
왼손으로 기둥을 잡으면서 오른쪽 다리를
꿈틀대고 있는 사메지마를 노렸다. 아니,
사메지마가 들고 있는 서브머신건을 멀리
걷어차 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서브머신건 방아쇠에 걸린 사메지마
오른손 검지가 움직였다.
  엄청난 반동과 함께 총알은 타이완가쿠
천장을 뚫었다. 용마루를 관통하면서 기와
부셔지는 소리도 들렸다.
  "움직이지마!"
  사메지마는 땅바닥에 벌렁 자빠진 자세로
총구를 사내 가슴에 겨누면서 외쳤다.
사내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사메지마는 총을 고쳐잡으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격통 때문에 두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저항은 그만둬. 그만두는 게 좋아!"
한이 서린 눈길이었다. 이윽고 왼쪽 다리가
꺾이면서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반대로 사메지마는 안간힘을 쓰면서
일어섰다. 왼손으로 바지 뒷주머니를
더듬어 사진을 꺼내어 사내 앞으로 던졌다.
  웅크린 자세로 고통과 싸우고 있던
사내는 앞에 떨어진 사진엔 눈길 한번
던지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사내
족권에 채여 건물 밖으로 나둥그러질 때
놓쳐버린 플래시를 찾았다.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플래시를 찾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하늘이 파랄만큼 밝아
있었다. 플래시를 비추지 않더라도 사진을
보기에 충분할 만큼 밝았다.
  사메지마는 고함을 질렀다.
  사내가 고개를 들면서 느릿느릿 오른팔을
뻗쳐 사진을 집어 들었다.
  "곽이야! 곽영민, 네 전우!"
  사메지마는 계속 고함을 쳤다.
  곽영민이란 이름을 외쳐댈 때 코끝이
시큰하면서 울음이 복받쳐 오름을 느꼈다.
  사내는 뚫어질 듯 사진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사메지마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곽....."
  "그는 죽었어! 히즈 데드!"
  사메지마의 짧은 부르짖음이 끝남과
동시에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허나 그는 친나를 구해 냈어. 그녀는
살아 있어 - 밧 히 세이브드 친나. 쉬즈
얼라이브!"
  "친나......"
  사내는 시선을 들어올리면서 쥐어짜는
소리로 부르짖었다.
  "쉬즈 인 호스피틀!"
  사내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 아 두유앙?"
  사메지마가 물었다. 엘리트 부대 출신인
만큼 간단한 영어는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았다.
  사내는 사메지마를 쏘아보면서, 힘겹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웃어 보인 것이었다.
  "아 유 허트, 오어 시크? - 부상당한
건가, 아니면 병인가?"
  사메지마의 물음에 흙빛으로 변한 입술이
움직였다. 알아듣기 힘들 만큼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병이야. 병이 날 죽이고 있어. 사람은 어느
누구도 날 죽일 수 없어."
  말을 마친 사내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얼굴을 푹 숙였다.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사이렌 소리가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왔다.
패트롤카는 오기도몽과 정문을 통해 직접
교엔 안으로 달려 들어온 것이었다.
  사메지마 역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패트롤카가 자갈을 튕기면서 타이엔가쿠
바로 앞까지 달려올 때까지 사메지마는
독원숭이에게 총을 겨눈 채 꼼작도 않고 서
있었다.

  독원숭이 유진생은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구급차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해부 결과
했으나, 사인은 맹장염 악화에 따른
복막염으로 밝혀졌다.
  신주쿠 교엔에서 살해된 이시와구미
야쿠자는 모두 22명이었다. 그 중에는
수뇌급 간부 하다도 들어 있었다.
폭발후유증으로 생존자 한명은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교엔 중앙부에 있는 나카노 이케(中池)
물 속에서 야스이를 포함한 야스이 흥업
사원 4명의 사체를 찾아냈다. 나이프로
목이 찢긴 시체에는 맨홀 쇠뚜껑이 매달려
있었다. 그 무게로 시체가 물 속에
가라앉은 것이었다.
  독원숭이 - 유진생의 손에 죽거나 다친
사람은 모두 43명이나 되었다. 도쿄 경찰청
수사 1과가 집계한 피해상황은 다음과
  사망 36명, 부상 7명.
  사망자 가운데 3명은 대만 국적.
  이 가운데 경관 피해는 사망 한명, 부상
4명.
  이시와구미 구미쵸인 이시와 다케조는
퇴원하자마자 은퇴를 결심, 이시와구미에게
해산령을 내렸다.
  대만 신문은 대북시정부 형경대대 정2대
(刑警大隊偵二隊) 분대장 곽영민이 휴가
여행중 일본에서 사고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그 뒤 일본 경찰정 국제수사과의
공식적인 상황설명과 사고 당시 행동을
같이했던 일본 경관의 증언에 따라
곽영민의 사고사는 순직으로 인정되었다.
그에 따라 곽영민은 조장(組長) 으로 2계급
   b특진이 추서되었다. 대만 경찰의 조장은
경정에 해당되는 계급이었다.


  36.

  나미는 병원 로비로 나왔다. 한밤중에
혼자 있고 싶을 때, 로비 이상 좋은 곳은
없었다.
  사메지마라고 하는 신주쿠 서 형사가
다녀간 직후였다. 사메지마가 병원으로
나미를 찾은 것은 오늘이 두번째였다.
  첫번째는 피해자 진술과 상황설명을
들으러 온 공무였고, 오늘은 사적인
문병이라고 했다.
  사메지마가 찾아온 것은 양에 대한
얘기를 들려 주기 위해서였다. 양은 끝까지
나미를 걱정하더라고 말했다. 그리고 양의
본명이 유진생이란 것도 가르쳐 주었다.
  꽃을 사들고 온 사메지마는 돌아갈 무렵
  -- 아가씨가 굳이 잊고 싶다면 보지 않고
버려도 좋아. 만약 잊을 수 없다면, 잊고
싶지 않다면.....
  사메지마는 그렇게 말했다. 자기 자신도
복사한 것을 한장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결코 잊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메지마가 돌아간 뒤, 나미는 봉투를
열어보았다.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군함으로 보이는 작은 배 위에서 잠수복
차림의 남자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양의 젊고 앳된 얼굴도
있었다.
  나미 눈에는 사진속의 양이 자기보다
휠씬 어리게 보였다.
불빛 밑에서 나미는 몇 번이고 사진을
꺼내어 보았다.
  병실로 돌아가려고 봉투에 집어넣은
다음, 지팡이를 짚고 발걸음을
옮기려다가는 몇 번이고 다시 그 자리에
서서 꺼내어 보았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일생동안 어떤 끔찍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더 이상 눈물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양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니 흐르지
않았다.
  그대신 여행을 하고 싶었다.
  재판이 끝나, 언젠가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된다면 - 사메지마는 나미가 극형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꼭 한번 대만엘
다녀올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양이
자맥질하면서 고기를 잡았었다는 대만의 그
바다를 가보고 싶었다.
  환자가 없어진 걸 알고 찾아나온 담당
간호사의 주의를 듣고서야 나미는 로비를
뒤로 했다.
  병실로 돌아온 나미는 침대에 누워서
대만 바다를, 남국 섬의 바다를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새까맣게 그을은 아이들이 새파란 바다에
자맥질해 들어가 고기를 잡는 모습....
사진에서 본 젊은 날의 양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나미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끝>


    독원숭이 (하)

         -아리마사 장편추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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