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 물은 물 1
영원한 자유의 길
성철 큰스님
차례
영혼의 세계
가야산의 메아리
자기를 바로 봅시다
마음의 눈을 뜨자
불교의 근본원리
중도의 원리
중생과 부처
현실이 곧 절대다
생명의 참모습
구원받는 길
원수갚는 방법
불공하는 법
해탈의 길
맺음말
영혼의 세계
윤회의 실증을 위하여
지난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논란과 시비가 되면서도 완전히 결론
내리지 못한 문제로 영혼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 종교가는 영혼이 꼭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학자들은 영혼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싸움은 수 천년 동안 계속되어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는가? 대승이나 소승 어느 경론을
막론하고 팔만대장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생사윤회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생전에 지은 바 업에 따라 몸을 바꾸어 가며
윤회한다는 것입니다. 윤회는 우리 불교의 핵심적인 원리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윤회란 것은 확실히 성립되는 것인가? 근래 세계적인 대학자들은
윤회한다는 연혼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윤회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윤회는 부처님께서 교화를 위해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지 실제 윤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윤회가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면 겁이 나서 사람들이 행동을 잘하지 않을까
하여 교육적인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근래 과학이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과학도 자꾸 발달함에 따라 영혼이
있다는 것이, 윤회가 있다는 것이, 또한 인과가 분명하다는 것이 점차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이 열릴 수 있는가? 해탈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런 의문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내려야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로서,
또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나 불교포교를 하는 데에, 그리고 수행하여 성불하는 데에
근본적인 토대가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만 바름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세계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세계적으로
많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빙성이 높고 객관성을 띠고 있는
연구방법으로 전생기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두서너 살 되는 어린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들이 말을 배우게
되면서 전쟁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전생에 어느 곳에 살던 누구인데 이러이러한 생활을 했다."
이러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따라서 조사해 보면 모두 사실과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생의 기억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터키 남부의 '아나다'라는 마을에 '이스마일'이라는
어린애가 있었습니다. 그 집은 정육점을 하는데, 태어난 지 일년 반쯤 되는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우리 집에 가겠다. 이 집에서 그만 갈겠어요."
"이스마일아,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가 네 집이지 네 집이 또 어디에 있어?"
"아니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은 저 건너 동네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어 내 이름도 '이스마일'이 아니고 '아비스스루모스'야. 아비스스루무스라고
부르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제부터 대답도 안 할 테야."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도 말했습니다.
"나는 저 건너 동네 과수원집 주인인데 쉰 살에 죽었어. 처음에 결혼한 여자는
아이를 못 낳아서 이혼하고 새 장가를 갔어. 그리고는 아이 넷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지. 그러다가 과수원에서 일하는 인부들과 싸움을 벌여서 머리를 맞아 죽었어.
마구간에서 그랬지. 그때 비명소리를 듣고 마누라하고 애들 둘이 뛰어나오다가
그들도 맞아 죽었어. 한꺼번에 네 사람이 죽었지. 그후 내가 당신 집에 태어난 거야.
아이들 둘이 지금도 그 집에 있을 텐데 그 애들이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그리고는 자꾸 전생의 자기 집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런 소리 못 하게 하면
웁니다. 그러다가 또 전생 이야기를 합니다. 한번은 크고 좋은 수박을 사왔습니다.
이 어린애가 가더니 제일 큰 조각을 쥐고는 아무도 목 먹게 하는 것입니다.
"내 딸 '구루사리'에게 갖다 줄 테야! 그 애는 수박을 좋아하거든."
그가 전생에 살았다고 하는 곳은 지금 집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지방 사람들이 간혹 이 동네에 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웬
아이스크림 장수를 보더니 뛰어나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알 턱이 있겠습니까?
"나를 몰라? 내가 '아비스스루무스'야. 네가 전에는 우리 과수원의 과일을 갖다
팔고 채소도 팔았는데, 언제부터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지? 내가 또 네 할례도
해주지 않았더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사실과 맞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꾸자꾸 소문이
났습니다.
터키는 회교국으로서 회교 교리상 윤회를 부인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재생을 주장하면 결국 그 고장에서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비스스루무스'가 전생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자꾸 아이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우는 아이를 달래려면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입니다.
확인도 해볼 겸 아이를 과수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함께 가는 사람이 다른 길로
가려면
"아니야, 이쪽 길로 가야 해."
하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앞장서서 과수원으로 조금도 서슴지 않고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과수원에는 마침 이혼한 전생 마누라가 앉아 있다가 웬 어린애와 그 뒤를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쳐다보았습니다. 어린애는 전생
마누라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더니 다리를 안으며 말했습니다.
"너 고생한다."
어린애가 중년의 부인을 보고 '너 고생한다'고 하다니! 부인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놀라지 마라. 나는 너의 전생 남편인 '아비스스루무스'인데 저 건너 동네에서
태어나 지금 이렇게 찾아왔어."
또 아이들을 보더니,
"사귀, 구루사리, 참 보고 싶었다."
하면서 흡사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을 자기가 맞아 죽은
마구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전에는 좋은 갈색 말이 한 필 있었는데 그 말이 안 보이니 어찌 된 일이냐고
묻고, 팔았다고 하니 무척 아까워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던 여러 인부들을
보지 않고도 누구누구하며 한 사람씩 이름을 대면서 나이는 몇 살이고 어느 동네에
산다고 하는데 모두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생의 과수원주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결국 세계적인 화제거리가 되어 '이스마일'이 여섯 살이 되던 1962년,
학자들이 전문적 과학적으로 조사 검토하기 위해 조사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에서도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조사보고서를 보면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전생기억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과수원 주인이 생전에 돈을 빌려 준 것이 있었는데, '아비스스루무스'가 죽어
버리자 그 돈을 갚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일'은 그 돈을 빌려 간 사람을 불렀습니다.
"네가 어느 날 돈 얼마를 빌려 가지 않았느냐? 내가 죽었더라도 내 가족에게
갚아야 할 것이 아니냐? 왜 그 돈을 떼어먹고 여태 갚지 않았어?"
돈 빌려 간 날짜도 틀림없고 액수도 틀림없었습니다. 안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전생 빚을 받아냈습니다.
이것은 죽은 '아비스스루무수'와 돈 빌려 쓴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정확히 말하는데, 이것을 누가 어린애에게 말해 줄
것이며 또 어린애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이스마일'은
'아비스스루무스'의 재생이라는 데에 확정을 짓고 보고서를 냈습니다.
지금 얘기한 '이스마일'의 예와 같은 전생기억의 사례는 학계에 보고된 것만 해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 중에서 한두 가지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몇 해 전 스리랑카에서의 일입니다. 태어난 지 37개월 된 쌍둥이가 자꾸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단이 아이를 전생에 살았다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인근
주민들을 수백 명 모아 놓고, 그 속에 그 아이의 전생의 부모 형제들을 섞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더러 전생의 부모 형제를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 "이 사람은 아버지, 이 사람은 어머니, 이 사람은 누나, 이
사람은 형님..." 하면서 가족을 한 사람 한 사람 다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의 전생기억을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세 살 된 어느 아이가 전생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는 다이빙 선수였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지금도 다이빙할 수 있겠니?"
"그럼요, 할 수 있고 말고요, 전에 많이 했는데요."
이리하여 세 살 된 어린애를 높은 다이빙대 위에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린애가 다이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조금도 서툴지 않게
서슴없이 다이빙을 하는 것입니다. 전생기억이란 이런 식입니다.
또 흔히 천재니, 신동이니, 생이지지니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글을 배운 적이
전혀 없는데도 태어나면서부터 글자를 다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이지지라고
하는데, 나면서부터 다 아는 것입니다. 이 생이지지가 바로 전생기억입니다. 전생에
배운 것이 없어지지 않고 금생에 그대로 넘어온 것입니다. 또 처음 가보는 곳인데도
낯설지가 않고.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친근감이 가는 경우는 전생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생기억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우매하여
전생기억이 캄캄하지만, 조금 희미한 사람도 있고 분명한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전생기억이 분명하여 증거가 될 만한 사람을 전문으로 조사 연구하는 학자와 단체가
있는데, 그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가 미국 버지니아 대학에 있는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입니다. 그는 세계 도처에 연락기구를 조직하여 전생기억을
가진 아이나 어른이 있어 연락해 주면 학자들을 보내 갖가지로 조사 확인하여 사실
여부를 알아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수년간 600여 명의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그 중 대표적인 20여 명에 대한 사례를 뽑아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윤회를 암시하는 20가지 사례(Twenty Suggestive Cases of Reincarnation)"라는
책이 그것입니다. 전생기억에 대한 보고서로는 가장 확신이 있고, 그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운 유명한 책으로, 세계 각국에서 많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 수년이 지난 1975년까지 1,300명이라는 자료에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전생기억 이외에 차시환생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내 몸뚱이가 아주 죽어버려 남의 송장을 의지해서, 즉 몸을 바꾸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입니다. 1916년 2월 26일자 중국 신주일보에 보도된 사실입니다.
중국 산동성에 최천선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무식한 석공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서른 두 살이 되는 해에 그만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서른 두 살이 되는
해에 그만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장사 지낼 준비를 다 마친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관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사람 기척이 났습니다. 부랴부랴 관을 깨고 풀어보니
멀뚱멀뚱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우리 아버지가 살았다."
하며 그 부모, 부인, 자식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식구들을 하나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더니 정신착란이 되어서 집안식구들도 못
알아보고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기운을 차리고 건강도 많이 회복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식구들을 못 알아보고 또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본인도 퍽 답답한 것 같았습니다. 마침 주위에 붓과 벼루가 있는 것을 보더니 종이
위에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글을 아주 잘 씁니다. 유식하다 이 말입니다.
본래는 일자무식이었는데.
그 글 내용을 보니, 이 사람은 중국 사람이 아니고 안남(인도차이나)
사람이었습니다. 그곳에서도 글은 한자를 쓰지만 말은 달랐던 것입니다.
'나는 안남 어느 곳에 사는 유건중이라는 사람인데 병이 들어서 치료하기 위해
땀을 낸다고 어머니가 두터운 이불을 덮어 씌워 땀을 내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여기 이렇게 와 있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자기는 죽어버리고 안남 사람의 혼만 산동으로 온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전생입니다. 전생이란 것은 반드시 몸뚱이가 죽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다시 나는 것만이 아니고, 죽은 육신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데
영혼만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차시환생이라고 합니다. 남의 육체를
빌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자 중국말을
조금씩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러 달 동안을 가르쳐서 중국말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꾸
전생에 살았던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꾸 소문이 났습니다.
나중에는 북경대학에서 데리고 가서 여러 가지로 정신감정을 해보고 치료도 하고
하였습니다만, 정신은 조금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또 그가 말한 안남에 사람을 보내
조회를 해보았습니다. 과연 유건중이란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 확실하고 또
그가 말한 전생의 일이 모두 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최천선이라는 사람이
죽었다 깨어났으나 안남 유건중의 혼이 최천선의 몸을 빌어 환생했다는 것이 완전히
증명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참 희귀한 일이라고 하여 정부에서 이 사람에게 내내
연금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모두 당사자가 전생기억을 갖고 있어서 이야기하는
경우들입니다만, 또 심리학에서 전생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최면술을 사용하여 그 사람의 전생을 알아내는 방법을 연구하였는데, 이것을
'연령역행'이라고 합니다. 최면을 걸어 최면 상태에서 사람의 연령을 자꾸자꾸 후퇴,
역행시키는 것입니다. 즉 스무살 된 사람을 최면을 걸어서 열 살로 만듭니다. 그러면
열 살 먹은 사람이 되어 그때의 행동이나 말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또 네 살이
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 네 살 때의 노래를 하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한 살로
만들어 놓으면 울기만 합니다. 말도 못 하고, 이런 것을 연령역행이라고 하는데,
심리학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의학에서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났는데 도저히 그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연령역행을 시켜서 그 원인을 조사해 봅니다. 그러면
10년이나 20년 전의 옛날에 그 원인 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간첩이
잡혔을 때에도 이용합니다. 본인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부인할 때 최면술을
사용하여 연령역행을 시킵니다. 그러면 이전에 간첩 교육 받던 것을 모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녹음해 두었다가 다시 물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전생 문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연령역행을 하여 한 살로 만들어
둡니다. 그러면 마흔, 쉰 살 되는 사람도 손발을 바둥거리고 빽빽 울면서 어린애
몸짓만 할 뿐입니다. 이번에는
"네가 태어나기 1년 전, 2년 전에는 어디 있었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소 성명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여기 해인사 골짜기에 사는 사람을 연령역행을 시켜서 한 살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태어나기 3년 전을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소 성명이 바뀌어져서
전라도 어느 곳의 누구라든지, 일본 어느 곳 사람이라든지,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과학에서는 전생회귀라고 합니다. 전생으로 돌아간다 이 말입니다. 전생으로
돌아가서 한 생뿐만이 아니고 이생, 삼생... 여러 수십생까지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정신 상태를 세 가지 단계로 나눕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의식 상태입니다. 의식 상태 안에 잠재의식이 있고,
잠재의식 속에 무의식 상태가 있습니다. 이것은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그런
상태입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잠재의식은 어지간히 연구하여 발표하였지만
무의식에 대해서는 별로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 무의식 상태에 대해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영국의 캐논(Sir Alexander Cannon) 박사입니다. 그는 원래
정신과 의사인데 국가에서 주는 가장 최고의 명예인 나이트(Knight) 작위까지 받은
대학자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미국 등 5개국 학술원의 지도교수이기도
합니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전생 조사에 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영혼도 있을 수 없고 윤회도 없다고 철두철미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최면술을 이용한 무의식 상태에서 전생회귀를 시켜 보니
자꾸 전생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연령역행을 하여 열 살, 한 살, 출생 이전으로
역행시키면 전생, 삼생, 십생..., 저 로마시대까지 역행되어 전생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른 사실의 기록과 조사해 보면 모두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1.382명에 대한 전생 자료를 수집하여 "인간의 잠재력(The Power
Within)"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 캐논 보고서에 의하면, 병이 들어서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 않는데
전생회귀를 통해서 조사해 보면 그런 병들이 전생에서 넘어온 것으로, 그 전생의
발병 원인에 의거해서 치료하니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전생요법으로, 거기에 보면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만 보면 겁을 냅니다. 바다를 구경한 적도 없고 큰 강 옆에 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물만 보면 겁을 내는데 아무리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생회귀를 시켜 보니, 그는 전생에 지중해를 내왕하는 큰 상선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상선의 상인들에게 죄를 지어서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닷물
속으로 던져져서 죽었던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그러니 금생에
물만 보면 겁을 내는 것입니다. 이 원인에 의거해서 치료를 하니 병이 나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높은 계단이 무서워 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보니, 그는 중국의 장군인데 높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곳만 보면 겁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캐논 보고서의 사례에 의거해서 학자들이 전생요법을 개발하여 요즈음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1977년 10월 3일자 '타임(Time)'지에 보면 이에 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잡지에서 자신 있게 보고할 때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전생이 있다는 것은 물론이고, 병치료에 있어서도 전생요법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는데도 전생과 윤회에 대한 의심을 갖는다면 불교를 안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전생이 있고 윤회를 한다고 할 때 어떤 법칙에서 윤회를 하는가? 내가
마음대로 원하기만 하면 김씨가 되고 남자가 되고 할 수 있는가? 캐논 보고에
의거해서 살펴보면, 그것은 순전히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법칙에 의한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인과법칙이란 선인선과, 악인악과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착한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제 전생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 사람이 전생에 착한
사람이었는지 알아서 그 사람의 금생의 생활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비교해 보면,
전생에 악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불행한 사람이고, 전생에 착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전생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받는 그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하는 그것이다.
전생에 내가 착한 사람이었나 악한 사람이었나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받는
것, 지금 행복한 사람이냐 불행한 사람이냐를 살펴보면 됩니다. 내생에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 불행하게 살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보면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현대 정신과학에서는 인과를 인도말인 카르마(Kama:업)라고 하여 이제는
세계적인 학술용어가 되었습니다.
인과 문제에 대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미국의 에드케이시(Edgar
Cayce)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전기도 많이 나와 있으며,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를 '기적인'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기적을 행사하느냐? 남의 병을
진찰하는데 주소 성명만 가르쳐 주면 수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병을 모두
진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서 처방을 내고 병을 치료하는 데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무려 3만 명 이상이나 치료를 했습니다. 미국 뉴욕에 앉아서 영국
런던에 있는 귀족들을 진찰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의 로마에 있는 사람도 진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구가 영국 런던에 갔는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케이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서
바로 뉴욕에 전화를 해보면 그의 말이 그대로 맞습니다.
케이시는 병을 진찰하면서 그 원인이 전생에서 넘어오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교도였습니다. 예수교에서는 전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 종교와 반대되는 것이라 하여 병 치료하는 것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학자들이 종교와 학문은 다르다고 그를 설득하여 이것을 학문적으로
끝까지 조사해 보자고 의논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병 치료를 하는 것은 그만두고
전생 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500명의 전생을 조사하였습니다. 그의 사후에도
버지니아 비치(Virginia Beach)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그의 원거리 진찰과
전생투시에 대한 수많은 기록을 연구하고 있으며, 많은 책들이 발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능력의 비밀"과 "윤회의 비밀", 이 두 권은 공산국가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 번역되었습니다.
에드가 케이시의 전생투시에 의한 전생과 금생의 인과를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낳고 사는 부부간인데도 그 사이가 무척 나쁩니다. 그 전생을
알아보니 서로 원한 맺힌 사이입니다. 내외간에 잘 지내는 사람을 알아보니 전생에
부녀 관계이거나 혹은 모자 관계입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하겠지만 우리들이
몰라서 그렇지 본래 인과란 그렇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입장은 두텁고
눈은 어두워 이해가 가지 않으니 곤란한 것입니다. 숙명통(전생의 일을 훤히 아는
능력)을 하여 전생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서 이런 때에
현대의 과학자들이 연구한 전생과 윤회 및 인과에 대한 좋은 자료를 소개하면
부처님 말씀을 믿고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은 난쟁이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알아보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야망이 많아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면 내생에는
키가 작게 되는 과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남을 올려다 봐야
하고 남에게 내려다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를 한다. 인과가 있다는 것은
현대의 과학적 자료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이
우주의 진리를 다 깨달음은 부처님께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캐논이라든가 케이시라고 하는 과학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3천여 년 전에 모두 말씀하셨는데 현대과학이 이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불교 믿는 사람은 부처님 말씀 중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내 이해가 부족한 줄을 알고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반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며 알고 또 바르게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전생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받는 그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하는 그것이다.
전생에 내가 착한 사람이었나 악한 사람이었나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받는
것, 지금 행복한 사람이냐 불행한 사람이냐를 살펴보면 됩니다. 내생에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 불행하게 살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보면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야산의 메아리
불교의 근본원리로서 '일체 만법이 하나도 멸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영혼만이 죽은 후에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멸하지 않고 그 형태만
바뀌어 갈 뿐, 영원토록 윤회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양초에 불을 뭍이면 양초는 타서 없어집니다. 이것은 양초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가 분산된 것이지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분산된 원소는 인체나 짐승,
나무 등에 모두 흡수되어 자꾸 도는 것입니다. 즉 물질의 원소는 없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영혼이 있어 인과에 의해 윤회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요즘 세상을 보면 도둑질 하고, 살인도 하고.... 온갖 짓을 다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과 법칙을 분명히 알면 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각자수!
자기가 짖고 자기가 받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불교의 근본은 바로 이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하여 지은 바 업에 따라 윤회를 하며 영원토록 상주불변인데
불교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고 묻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중생이란 나쁜 일을 많이 해도 착한 일은 많이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업을 짓고,
윤회를 하고, 고통을 받고.... 그러나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법을 따라서 수도를 하면
결국에는 스스로 깨쳐 생사해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윤회도 인과도
모두 벗어나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스님, 불교에서는 윤회가 있다고 하는데 윤회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왜?"
"죽고 남 후에는 아주 그만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우선
편하게 살겠는데, 내생이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니 겁이 나서...."
"글세, 나도 인과가 없고 내생도 없었으면 좋겠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잘못한
것이 더 많을 것이고, 내생에 낙보다는 고를 더 많이 받을 터이니 인과가 없으면
좋겠어. 그런데 우리가 없었으면 한다고 해서 없어질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해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안 되지. 이미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자연의 법칙, 인과의 법칙에 의하여 윤회하는 것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영원한 자유자재한 성불의 길, 해탈의 길로 가는 방법밖에 없어. 그 길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어?"
또 한번은 여름에 젊은 학생이 절을 4,00배나 하고 백련암에 올라왔습니다. 자리가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고 삼배를 하는데 잘 일어서지도 못했습니다.
"무엇을 묻고 싶어서 왔나?"
"실제로 윤회가 있습니까?"
"있다면 뭘 하게?"
"윤회가 확실히 있다면 대학이고 뭐고 다 버리고 윤회의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합니다."
"윤회의 문제라니?"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윤회가 있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윤회가 없다면 걱정이 없으니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러나 윤회는 확실히 있어. 인과도 분명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딱 결정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아무리 말리더라도 나는 다른 길을 걷지 안겠습니다. 윤회를
벗어나는 길, 해탈의 길을 걷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학생은 승려가 되어 지금도 공부를 열심히 잘 하고 있습니다.
경전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되기는 어려운데 이미 되었고
불법을 듣기는 어려운데 이미 듣나니
이내 몸을 금생에 제도 못하면
어느 생을 기다려서 제도하리오.
우리가 도를 닦아 성불하기 이전에는 영혼이 있어 자꾸 자꾸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무한한 고가 따르는 것입니다.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이것이
소위 생사고라는 것입니다. 이 무한한 고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천당에 갈 필요도 없고, 극락을 갈 필요도 없고, 오직 사람사람마다 누구나 갖고
있는 초능력, 즉 무한한 능력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활용하면 극락이나
천당은 아무 소용도 없고 이 현실에서 무애자재한 대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불교에서는 '영원한 생명, 무한한 능력'을 불성, 법성, 진여라고 표현하는데, 이것
은
누구나 똑같이 평등하게 갖고 있습니다. 이 능력을 계발하면 곧 부처이니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생사해탈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불교의 근본진리, 구경진리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경계는 영겁불망! 영원토록 잊어 버리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보통 일상생활에서 학문을 익힌다든지 기술을 배운다든지 하는 것은
시간이 좀 지나면 희미해져 버리지만, 도를 깨쳐 도를 성취하면 이 깨친 경계는
영원토록 잊어 버리지 않습니다. 금샌, 내생은 물론 여러 억천만생을 내려가더라도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에 따르는 신비하고 자유자재한
신통묘력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곽공보라는 시인이자 대문장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때 이태백의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이태백의 후신이라고 하였는데, 그는
천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곽공보의 불교 스승이 귀종 선 선사라는 임제종의
스님입니다. 한번은 선사께서 곽공보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앞으로 6년 동안을 네 집에 가서 지냈으면 좋겠다."
"이상하다. 스님께서는 연세도 많은데 어째서 우리 집에 와서 6년을 지내시려고
할까?"
그날 밤이었습니다. 안방에서 잠을 자는데, 문득 자기 부인이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아이쿠, 여기는 스님께서 들어오실 곳이 아닙니다."
"자다가 왜 이러시오"
그는 부인을 깨워 물어보았습니다.
"이상합니다. 꿈에 큰스님께서 우리가 자는 이 방에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불을 켜요. 내가 보여줄 게 있어."
그리고서 낮에 온 편지를 부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개벽 절에 가 보니
어젯밤에 스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입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열 달이 지나 부인이 사내 아이를 낳았습니다. 모든 것으로 볼 때 귀종
선 선사가 곽공보의 집에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선로라고
지었습니다. '선 노스님'이라는 뜻입니다. 생후 일년이 지나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을 하면서 누구에게나 '너'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제자
취급입니다. 그리고 법문을 하는데 귀종 선 선사의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 아버지도 큰절을 하고 큰스님 대접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났습니다. 그 당시 유명한 임제종의 백운 단 선사가 이 소문을
듣고 한번 찾아왔습니다. 백운 단 선사를 보고 세 살 된 아이가 "아하, 우리 조케
오네" 하였습니다. 전생의 항렬을 치면 백운 단 선사는 귀종 선 선사의 조카 상좌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사숙님' 하고 어린애에게 절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백운 단 선사 같은 큰스님이 넙적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스님과 헤어진지 몇 해가 되었습니까?"
"한 4년 되지. 이 집에 와서 3년, 이 집에 오기 전에 1년 전에 서운암에서 만나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장소도 틀림없습니다. 백운 단 선사가 보통
이론적인 것이 아닌 아주 깊은 법담을 걸어 보았습니다. 세 살 먹은 아이가 척척
받아넘기는데,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법담은 장황하여 다 이야기
못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전등록" 등의 불교 역사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것이 유명한
귀종 선 선사의 재생입니다. 그 후 약속대로 한 6년이 지나자 식구들을 불러 놀고
말했습니다.
"본시 네 집에 6년 동안 지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난 간다."
그리고는 그대로 죽어버렸습니다. 이것이 격생불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생을
바꾸어 태어나도 전생의 일을 잊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고통의 벗어나서
영원한 구경락을 얻는다.
이것은 "기신론"에 있는 말인데 불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본래 불교에서는 현실의
세계가 불타는 집이요, 괴로움의 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속에서 그냥 고생만
하고 말 것입니까?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 따라 도를 닦아서 무상도를 성취할 것
같으면 일체 고통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절대적인 낙과 영원한 자유를 성취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목표이며, 동시에 부처님께서 출가하시어 생, 노, 병, 사의
일체고를 벗어나서 구경락,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왕궁에서
천하없는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하여도 죽으면 그만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일시적인 행복을 버리고 수도를 하시어 영원한 열반락을
얻었으니 이것이 불교의 해탈입니다.
우리나라 신라시대 때 혜공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신라
원효대사'하면 최고 아닙니까? 그 당시 원효대사의 선생 되는 스님이 바로
혜공스님이십니다. 원효 스님이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혜공스님께 물었습니다. 두
스님이 함께 생활하며 나누신 말씀이 "삼국유사"라든지 다른 여러 기록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혜공스님은 어떤 분인가? 혜공스님은 선덕여왕 때 재상 천진공 집의 종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평생 누구에게 글자 하나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생이지지였습니다. 불교를 모릅니까? 유교를 모릅니까? 무소불통,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화랑 구감공이 사냥을 나가다가 보니 혜공스님이 들판에서 죽어 있는데
몸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습니다.
'혜공스님이 큰 도인인 줄 알았는데 아무 소리도 없이 저렇게 돌아가시다니. 묻어
주는 사람도 없고 화장해 주는 사람도 없이 이렇게 썩어 가고 있는가. 내가
화장이라도 해드려야겠다.'
그리고는 신라 서울인 경주에 돌아와 보니 어느 스님 한 분이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서 노래를 부르며 오는데, 유심히 보니 혜공스님이었습니다. 한 혜공스님은 산에
엎어져 죽어 있고, 한 혜공스님은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혜공스님이 승조(383__414, 중국스님, 구마라습 문하에서 역경사업에
종사)법사가 지은 "조론"을 보고 자기가 지은 것이라고 하며 전생에 자기가
승조법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혜공스님은 한번도 배운 적이 없었어도 모르는 것이 없어 원효 스님이
물어볼 정도였으며, 신통력이 자제하여 신라시대 10대 성인으로 추앙 받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우리 불교 역사에 많이 있습니다. 그 좋은 실례를
달마대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사의 일화 가운데 '총령도중 수휴척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총령 고개로 신발 하나만을 메고 서천으로 가 버렸다는 말입니다.
달마스님이 혜가에게 법을 전하고 돌아가시자 웅이산에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몇 해 후 송운이라는 사신이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총령이라는 고갯마루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 한 분이 신발 한을 메고 고개를 올라오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바로 달마스님이었습니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너희 나라와는 인연이 다하여 본국으로 간다. 그런데 네가 인도로 떠날 때의
임금은 죽었어. 가 보면 새 임금이 계실 테니 안부나 전하게."
과연 돌아와 보니 먼저 임금은 죽고 새 임금이 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도중
달마스님을 만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니, 달마스님 돌아가신 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 총령에서 달마스님을
만나다니?"
"아닙니다. 저 혼자만이 본 것이 아니고 수십 명이 함께 그분을 보았습니다.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달마스님 묘를 파 보자."
무덤을 파 보니 과연 빈 관이었습니다. 관은 비어 있고 신이 한 짝밖에
없었습니다. 달마대사의 '수휴척리'라는 말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해탈이라고 하여 그저 그런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사후에도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신비한 어떤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영원한 생명 속에
든 무한한 능력을 계발하면 귀종 선 선사도 될 수 있고, 혜공스님도 될 수 있고,
달마대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공부만 부지런히 하면 자유자재한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근본 골자는 도를 깨쳐 영겁불망을 성취하면
영원토록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스티븐슨 씨가 조사한
2,000명 이상의 전생기억은 아이들의 장난하는 물거품과 흡사한 것이지만 영겁불망,
이것은 허공이 무너질지라도 조금도 변함없는 대해탈경계입니다.
그러면 그 '영겁불망'이라는 관문은 어떻게 해야 돌파할 수 있는가? 자고로
영겁불망의 생사해탈을 성취하려면 가장 빠른 해탈의 길이 참선입니다.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는 화두가 근본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여 바로 깨치면
영겁불망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겁불망은 죽은 후에나 알 수
있는 것이지 생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숙면일여, 즉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하지 않고 여여불변할 때, 그대부터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숙면일여라고 하여 깊은 잠이 들어서도 여여한 것이라고 하면 혹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옛날의 조사스님 치고 숙면일여한 데에서 깨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식심분별로서 봉사영혼 아닙니까? 봉사영혼이
되어서 업 따라 몸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업대로 떨어져 버립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 자유가 조금도 없고 업
따라 가는 것을 '수업수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경계가 되면 내 마음대로
입니다. 김씨가 되든, 박씨가 되든, 여자가 되든 남자가 되든 마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의왕생' 입니다.
'수의왕생' 이것이 불교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원력에 의해 태어나고
중생은 업력에 의해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수의왕생이 되려면 숙면일여가 된
데에서 자유자제한 그런 경계를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제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부처님 이상 가는 법문을 하고 큰소리를 쳐도 몸 한번
바뀌면 다시 캄캄해져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아무리 크게 깨치고 아무리 큰 도를 성취했다고 해도 그 깨친 경계가
동정에 일여 하느냐, 몽중에 일여 하느냐, 숙면에 일여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실제 깨친 경계가 이러하여야 비로소 바로 깨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정일여도 안
되고 몽중일여도 안 되는 그런 깨우침은 깨친 것도 아니고, 실제 생사에도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참선은 실제로 참선을 해보아야 하고 깨침은 실제로 깨우쳐 봐야
합니다. 생사에 자재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깨침이어야지 생각으로만 깨쳤다고
하는 것은 생사에 아무 이익도 없고 생사에 자유롭지도 못하며, 그것은 깨침이
아니고 불교의 병이요, 외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공부가 실제로 오매일여가 되어 영겁불망이 되도록 죽자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신명을 아끼지 말고 정진하여 부사의 해탈경계를 성취하고 해탈도인이
되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중생을 제도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당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며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중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을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오, 이 세상은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구경락을 얻는다.
불교에서는 현실의 세계를 불타는 집이요, 괴로움의 바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 따라서 도를 닦아 무상대도를 성취하면 일체 고통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절대적인 낙과 영원한 자유를 성취합니다.
마음의 눈을 뜨자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이다'라고 말합니다.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즉심시불이라고도 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는 만큼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봐야 할 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인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 '심'자 한 자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심자 한 자 위에 있어서, 이 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교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 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고 삼세제불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게 되면 부처를 알게 됩니다. 마음이 부처이므로 그래서 삼세제불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초지종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뿐입니까? 마음의 눈만 뜨고 자기가 먼 천지개벽 전부터 벌써 성불했다는 것,
천지개벽 전부터 성불했으니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성불한
그대로임을 알게 됩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결국 자성을 보는데 그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성불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관법을 한다, 주력을 한다, 경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우는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참선입니다.
참선! 견성성불하는 데에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입니다. 참선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신도나 스님네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신부나
수녀도 백련암에 와서 3천배 절하고 화두 배워 갑니다. 나한테서 화두 배우려면
3천배 절 안 하면 안 가르쳐 주니까.
며칠 전에도 예수교를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3천배 절하고 갔습니다. 이
사람들한테 내가 항상 말합니다.
"절을 하는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느님 반대하고 예수 욕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라고 축원하고 절하라."
이렇게 말하면 그들도 참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우리 종교 안 믿는 사람은 모두 다
나쁜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면 그는 점잖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를 욕하고 나를 해치려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을 더 존경하고, 그 사람을 더 돕고,
그 사람을 더 좋은 자리에 앉게 하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교나 다른 종교인들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톨릭 수도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왜관에
있는데, 그 수도원의 독일인 원장이 나한테서 화두를 배운 지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에도 종종 왔는데 화두 공부는 해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와서
화두를 배운다고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네들 천주교에서는 바이블 이외에는 무엇으로써 교리의 의지로 삼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의 '신학대전' 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아퀴나스는 그 책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자기 마음 가운데 큰
변동이 일어나서 그 책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 버렸는데, 처음에는 금덩어리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썩은 지푸라기인 줄 알고 차버린 그 책에 매달리지 말고, 그토록
심경이 변화된 그 마음자리, 그것을 한번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화두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익히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도 화두를 배워서 실제로 참선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마음 닦는 근본 공부인 선을 알아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화두를 말하자면 또 문제가 따릅니다. 화두를 가르쳐 주면서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옆에서 배우라고 해서 배운다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은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고는 뭐라고 뭐라고 아는 체를 합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화두에 대해 또 좋은 법문이 있습니다. 불감 근 선사라는 스님의 법문입니다.
오색 비단 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누구나 빨리 신선의 얼굴을 볼 것이요
신선의 손에 든 부채는 보지 말아라.
생각해 보십시오. 신선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을 가리었습니다.
신선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을 가리는 부채를 봤다고 신선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화두에 있어서는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정전백자수자'니 '삼서근'이니
'조주무자'니 하는 것은 다 손에 든 부채입니다. 부채!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을 본 사람이 아닙니다. 빨간 부채를 보고서 신선을
보았다고 하면 그 말 믿어서 되겠습니까?
화두는 암호인데 이 암호의 내용을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는가? 잠이 푹 들더라도
일여한 데에서 깨쳐야만 풀 수 있고 그 전에는 못 푼다는 것, 이렇듯 화두를
참구하는 자세가 근본적으로 딱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이것이 견성인 동시에 뜰 앞의 잣나무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란 것은 팔만대장경에 그토록 많고 많지만, 똘똘 뭉치면 마음
'심'자 한 자에 있습니다. 가장 간단합니다. 마음 '심'자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 일체 만법을 다 알 수 있는 것이고, 일체 법을 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란 자성을 본다는 것인데, 견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공부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여 화두를 바로 아는 사람, 마음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냥 "견성하자" "성불하자" 하면 너무 불교 전문적인 것이 되어 일반 민중과는
거리가 멀어 집니다. "마음의 눈을 뜨자" 하면 누구에게나 좀 가깝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또 사실도 그렇고, 그래서 "마음의 눈을 뜨자"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해서 하나라도 좋고 반쪽이라도 좋으니, 실지로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이런 사람이 생겨서 부처님 해면을 바로 잇도록 노력합시다.
오색 비단 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누구나 빨리 신선의 얼굴을 볼 것이요
신선의 손에 든 부채는 보지 말아라.
'뜰 앞의 잣나무'니 '삼서근'이니 '마른 똥 막대기'니 하는 것은 다 손에 든
부채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을 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보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부지런히 공부하여
화두를 바로 아는 사람, 즉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교의 근본 원리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은 항상 나타나는도다.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인데 불교의 골수입니다. 결국 팔만대장경이 그렇게
많고 많지만 한마디로 축소하면 '불생불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생불멸은 불교의 근본원리로서, 부처님이 깨치신 것이 바로 불생불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 만물 전체가 생자필멸입니다. 난 자는
반드시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생자는 필멸인데 어째서 모든 것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하셨는가? 그것은 빨간 거짓말이 아닌가? 당연히 그런 질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는
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이라고 하신 것인지, 이것을
분명히 제시해야 안 되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당연합니다.
이것을 참으로 바로 알려면 도를 확실히 깨쳐서,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이 도리를 바로 알면 그때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누구든지 의심 안 할래야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상주불멸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인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라고 합니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동시에 모든 불교 문제가 다
해결되는데, 이것을 바로 모른다고 하면 불교는 영영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모두 다 산중에 들어와서 눈 감고 앉아 참선을 하든지 도를 닦아
결국에는 깨쳐야지 안 깨치고는 모를 형편이니 이것도 또 문제 아니냐, 그것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설사 도를 깨치기 전에는 불생불멸하는 이 도리를
확연히 알지 못하더라도, 요즘은 과학만능시대이니 이것을 과학적으로 좀 근사하게
풀이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이 과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고로 철학도 종교도 참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는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되어서, 요즘은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어때서 빼앗기게 되었는가?
과학 중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가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데 성공해 버린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아인슈타인(A.
Einstein)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에 등가원리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이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두 가지로 각각 분리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입니다. 서로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모든 자연현상을 에너지는 에너지 보존 법칙, 질량을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설명했는데, 요즘은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 법칙 하나만 가지고 설명을 하며, 또 하나밖에 없습니다.
즉 질량이라는 것은 유형의 물질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이고, 에너지는
무형으로 운동하는 힘입니다.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어떻게 전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상상도 못해 보았던 일입니다.
50여 년 전 아인슈타인이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가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니 미친
사람이니 하였습니다. 그런 이론, 즉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하고.
그래서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닌
만큼, 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원자탄,
수소탄입니다. 질량을 전환시키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시켜 보면
거기에는 박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천하가
다 아는 원자탄d니 것입니다.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핵이 융합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수소를 융합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는 박대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수소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전에는 에너지와 질량을 완전히 분리하여 별개의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만, 과학적으로 실험한 결과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자탄이 되고 수소탄이 된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앤더슨(C. D. Anderson)이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인데, 그는 에너지를
질량으로 또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실험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광범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이탈리아의 학자로서 뭇솔리니에 쫓겨 미국에 가서 산, 세그레(Emilio
Segre)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형태의 각종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질량으로 전화되고, 또 각종 질량이 전체적으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래서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계는 어떻게 되는가? 자연계, 즉 우주법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을 만큼 에너지가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여서, 아무리 전환을 하여도 증감이 없으며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주는 이대로가 불교에서 말하는 상주불멸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가 없었으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거짓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3,000년 전에 진리를 깨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혜안으로 우주 자체를 환히 들여다 본 그런 어른입니다. 그래서 일체 만법 전체가
그대로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런 정신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3,000여 년 동안을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결과, 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둘이 아니고 질량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질량인
동시에 서로 전환하며 증감도 없으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불생불멸의 원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원자물리학이 설사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해서
그런 것이지 부처님이 본시 거짓말할 그런 어른이 아닙니다. 요즘은 그냥
불교원리를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워서 알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내가
한 가지 예로서 불교의 근본원리인 불생불멸의 원리를 상대성 이론, 등가원리로써
입증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것은 허황한 것이 아니고
거짓말이 아니고, 과학적으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흔히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불교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을
들어보자면 너무 높고, 너무 깊고, 너무 넓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는
거짓말 같고 허황하여 꼭 무슨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접근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의 근본원리인 불생불멸, 이것이
상대성이론에서 출발하여 현대 원자물리학에서 과학적으로 완전히 증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불교원리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이처럼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이론을 모두 증명해 준다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불교원리를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또 현대물리학이 불교에
자꾸 접근해 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런 훌륭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더욱 힘써 정진합시다.
중도의 원리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위 게송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반야심경"의 한 구절입니다.
색이란 유형을 말하고 공이란 것은 무형을 말합니다.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유형과 무형이 서로 통하겠습니까?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예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 가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 결국 소립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충돌해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나곤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나타날 때는 색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입니다. 이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 무형에서 유형으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또 요즘 흔히 '4차원 세계'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 4차원
세계라는 것도 상대성 이론에서 전개된 것으로, 이것을 수학으로 완전히 공식화한
사람은 민코프스키(H. Minkopski)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차원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 강연에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를 들어 '오늘,
해인사에서...' 할 때에 '오늘'이라는 시간과 '해인사'라는 공간 속에서 이렇게 법문
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은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일상생활인데, 그런
분리와 대립이 소멸하고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융합하는 세계, 그것이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애법계라는 것은 양변을 떠나서
양변이 서로서로 거리낌없이 통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해 버리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즉 시공 융합의
세계로서 민코프스키의 수학공식이 어느 정도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든지 '불생불멸'이라든지 '무애법계'니
하는 이런 이론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녹아원에서 수행하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서 맨 처음 하신
말씀이 "내가 중도를 바로 깨쳤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중도', 이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이 융합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순이 융합된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보통 보면 선과 악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데, 불교의 중도법에 의하면 선악을
떠납니다. 선악을 떠나면 무엇이 되는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간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서로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선이 즉 악이고,
악이 즉 선으로 모든 것이 서로 통합니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아까 말한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는 식으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도법문이라는 것은 일체 만물, 일체 만법이 서로 서로 융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모순과 대립을 완전히 초월하여 전부 융화해 버리는 것, 즉 대립적인
존재로 보았던 질량과 에너지가 융화되어 한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중도'라 하면 '중도는 중간이다'하는데, 그것은 불교를 꿈에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라 하는 것은, 모순 대립된 양변인 생멸을
초월하여 생멸이 서로 융화하여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이 되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될 때 에너지는 멸하고 질량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생이 즉 별인 것입니다. 질량이 생겼다는 것은 에너지가 멸하였다는
것이고, 에너지가 멸하였다는 것은 질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멸이 완전히
서로 통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종합해 본다면, "불교의 근본은 불생불멸에 있는데
그것이 중도이다. 그런데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관념론인가? 관념론은커녕
실증적으로, 객관적으로 완전히 입증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가 그것을 분명히 입증했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가 참으로 과학적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과학적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중도란 모든 대립을 떠나서 대립이 융화되어 서로 합하는 것인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철학적으로 보면 대립 중에서도 유무가 제일 큰 대립입니다.
'있다' '없다' 하는 것, 중도라고 하는 것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닙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유와 무가 살아난다는
식입니다. 그 말은 3차원의 상대적 유무는 완전히 없어지고 4차원에 가서 서로
통하는 유무가 새로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유무가 서로 합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서로 생멸이 없고 모든 것이
서로서로 융합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워낙 어려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저 멀리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저 하늘의 구름같이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자물리학에서
실제로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인 불생불멸의 원리가 실험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니 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아니고 아니고 우리가 언제든지 손을
잡을 수 잇고 만져 볼 수 있는 그런 원리라는 말입니다. 이런 좋은 법이지만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알아보려는 사람도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흔히 중도를 변증법과 같이 말하는 데, 헤겔(F. Hegel)의 변증법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직접 상통합니다. 즉 보든 것이 상대를 떠나서 융합됩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즉 없는 것, 없는 것이 즉 있는 것, 시가 즉 비, 비가 즉 시가 되어 모든 시비, 모든
투쟁, 모든 상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대립을 떠난다면 싸움할래야 싸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극락이고 천당이고, 절대세계입니다. 그래서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다" 이 말입니다. 보통
피상적으로 볼 때 이 세간이라는 것은 전부가 자꾸 났다가 없어지고, 났다가
없어지고 하는 것이지만 그 실상, 즉 참모습은 상주불멸,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의 원리는 어디서 꾸어 온 것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이 우주
전체 이대로가 본래 불생불멸입니다.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인 것을 확실히 알고
이것을 바로 깨치고 이대로만 알아서 나간다면 천당도 극락도 필요없고,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현실이 절대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사바세계 그대로가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의 세계를 딴 데 가서
찾으려 하지 말고 자기 마음의 눈을 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태양이 온 우주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고 참다운 절대의 세계를 놔두고
'염불하여 극락간다', 예수 믿어 천당 간다' 그런 소리 할 필요가 없습니까? 바로
알고 보면 우리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경계선은 어디 있는가? 눈을 뜨면 불생불멸 절대의 세계이고, 눈을 뜨지
못하면 생멸의 세계, 상대의 세계이어서 캄캄한 밤중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서로 노력해 마음의 눈을 완전히
뜨자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마음의 눈을 뜹시다."
중생과 부처
불교라고 하면 부처님이 근본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부처라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좀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원리원칙을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번뇌망상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고 일체의 망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모든 망상을 떠났으므로 망심이 없는데, 이것을 무심이라고 하고
무념이라고도 합니다. 중생이란 망상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이라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저 미물인 곤충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비롯하여 십지등각까지 모두가
중생입니다. 참다운 무심은 오직 제8아뢰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끓은 구경각, 즉
묘각만이 참다운 무심입니다. 이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그러면 망상 속에서 사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니 망상이 어떤 것인지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통 팔만사천 번뇌망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구분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입니다. 생각이 왔다 갔다,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이것이
의식입니다. 둘째는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을 떠난 아주 미세한 망상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을 제6식이라 하고 무의식을 제8식이라고 하는데, 이
무의식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8지보살도 자기가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아라한도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며, 오직 선불한 분이라야만 근본 미세망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곤충 미물에서 시작해서 십지등각까지 전체가
망상 속에서 사는데, 7지보살까지는 의식 속에서 살고 8지 이상 10지등각까지는
무의식 속에서 삽니다. 의식세계든 무의식세계든 전부 유념인 동시에 모든 것이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제8아뢰야 망상까지 완전히 끓어 버리면 그때가 구경각이며,
묘각이며, 무심입니다.
무심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본래의
마음자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합니다. 거울은 언제든지 항상 맑습니다. 거기에 먼지가
쌓이면 거울의 환한 빛은 사라지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망상은
맑은 거울 위의 먼지와 마찬가지이고, 무심이란 것은 거울 자체와 같습니다. 이 거울
자체를 불성이니 본래 면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망상을 다 버린다는 말은
모든 먼지를 다 닦아 낸다는 말입니다. 거울에 낀 먼지를 닦아 내면 환한 거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맑고 밝은 광명이 나타나서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우리 마음도 이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제8아뢰야식까지 완전히 떨어지면 크나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구름 속의 태양과 같습니다. 구름이 다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고 광명이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모든 망상이 다 덜어지면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시방법계를 비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일체 망상이 모두 떨어지는 것을 '적'이라 하고,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데 이것을 '조'라 합니다. 이것을 적조 혹은 적광이라 하는데, 고요하면서
광명이 비치고 광명이 비치면서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해인사 큰법당을
'대적광전'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무심이라고 해서 저 바위처럼 아무 생각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열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서 동시에 광명이 온 법계를
미추는 적조가 완전히 구비되어야 참다운 열반입니다. 고요함만 있고 비춤이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고 외도입니다. 일체 망상을 떠나서 참으로 견성을 하고 열반을
성취하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는데, 이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해탈이란 결국 "기신론"에서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한 대로 '일체 번뇌망상을 다
벗어나서 구경락인 대지혜 광명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상으로써 성불이 무엇인지 무심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불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본이 성불에 있는만큼 실제로 적조를
내용으로 하는 무심을 실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근본은 누구든지 다 평등합니다.
평등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항상 말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명경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것은 새삼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고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명경은 본래
청정합니다. 본래 먼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동시에 광명이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그러니 광명의 본체는 참다운 무심인 동시에 적조, 적광, 정혜등지이고 불생불멸
그대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참으로 청정하고 적조한 명경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무리 깨끗한 명경이라도 먼지가 앉으면 명경이 제 구실을 못합니다.
그러나 본래 명경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먼지가 앉아 있어서 보든 것을 비추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명경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먼지만 싹 닦아 버리면
본래의 명경 그대로 아닙니까?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명경이 보래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성이 보래 청정한데 어찌해서 중생이
되었나? 먼지가 앉아 명경의 광명을 가려 버려서 그런 것뿐이지 명경이 부숴진 것도
아니고 흠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먼지가 앉아서 명경이 작용을 완전하게 못
한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다운 명경을 구하려면 다시 새로운 명경을
만드는 게 아니고 먼지 낀 거울을 회복시키면 되는 것처럼 본래의 마음만 찾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항상 "자기를 바로 봅시다"하고 말하는데, 먼지를 완전히 닦아 버려서 보래
명경만 드러나면 자기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할 때
마음의 눈이란 것도 결국 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천가지 만가지 다르다고
해도 내용은 일체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은 세속의 사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옛사람들의 책이나 얘기를 들어보면 유교, 불교, 도교
3교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유교라든가
도교 등은 망상을 근본으로 하는 중생세계에서 말하는 것으로 모든 이론, 모든
행동이 망상으로 근본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망상을 떠난 무심을 증득한
것이 우리 불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번지 앉은 명경으로써 말하는 것이고,
불교는 먼지를 싹 닦은 명경에서 하는 소리인데, 먼지 덮인 명경과 먼지 삭 닦아
버린 명경이 어떻게 같습니까? 그런데도 유, 불, 선이 똑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무심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십지등각도 중생의 경계인데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까?
중생의 경계, 그것이 진여자성을 증득한 대무심경계와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유, 불, 선 3교만 말했지만 요즘은 문화가 발달하고 세계의 시야가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온갖 종교가 다 있고 온갖 철학이 다 있는데 그것들과
불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동서고금을 통해서 어떤 종교, 어떤 철학 할 것 없이
불교와 같이 무심을 성취하여 거기서 철학을 구성하고 종교를 구성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없습니다. 이것은 재가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어떤 큰 철학자, 어떤 위대한 종교가, 어떤 훌륭한 과학자라고 해도 그 사람들은
모두가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에서 한 소리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근본인데 부처님이란 무심이란
말입니다. 모든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고 일체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를 부처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심이 근본이니 만큼 불교를 내놓고는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무심을 성취해서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만큼 불교에는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도 따라 올 수 없는, 참으로 특출하고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망상 속에서 하는 것과 망상을 완전히 떠난 것을 비교해 보면서
생각해 봅시다. 다시 명경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명경에 먼지가 앉으면 모든 것을
바로 비추지 못합니다. 먼지를 안 닦고 때가 앉아 있으면 무슨 물건을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물건을 바로 비추려면 먼지를 깨끗이 닦아 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망상 속에서는 모든 사리, 모든 원리,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지리를 바로 알려면 망상을 벗어나서 무심을 증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구경각을 성취하여 무심을 완전히 증득한 부처님 경계
이외에는 전부 다 삿된 지식이요, 삿된 견해입니다. 대신에 모든 번뇌망상을 완전히
떠나서 참다운 무심을 증득한 곳, 즉 먼지를 다 닦아 낸 깨끗한 명경은 무엇이든지
바로 비추고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지정견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은 망상 속에서 성립된 것인만큼 사지사견이지
정지정견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정지정견은 오직 불교 하나뿐입니다.
결국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행동도 바로 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눈 감은 사람이 어떻게 바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 앉은
명경이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는데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행동이라 하는 것은
오직 참으로 무심을 증해서 적광적조를 증하기 전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물었을 때, 바로 앉고, 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사는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 바로 알고 싶고, 바로 보고
싶고, 바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캄캄해서 눈 감은 봉사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로 살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바른 생활을 하자는 것이 불교인데, 망상 속에서 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무심을 증해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지등각도 봉사입니다. 왜 그런가?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십지등각이 저 해를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해를 보는 것과 같아서,
비단이 아무리 얇아도 해를 못 보는 것은 보통의 중생과 똑같다."
그래서 십지등각이 사람을 지도하는 것도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바로 이끌려면 자기부터 눈을 바로 떠야 하고, 바로 알아
바로 행동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간추려 보면,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모든 망상을 벗어난 것을 부처라 합니다. 모든 망상이 없으니 무심입니다. 그러나 그
무심은 목석과 같은 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울의 먼지를 완전히 닦아 버리면
모든 것을 비추는 것과 같으며, 구름이 완전히 걷혀 해가 드러나면 광명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나지 않는 것을 불멸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이 무심은 어떤 종교, 어쩐 철학에도 없고 오직 불교에만 있습니다. 또
세계적으로 종교도 많고 그 교주들의 안목도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만 모두가
조각조각 한 부분밖에 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불교와 같이 전체적으로 눈을 뜨고 청천백일같이 천지만물을 여실히 다 보고 말해
놓은 것은 실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실제
무심을 증해야 되겠습니다. 밥 이야기 천날 만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직접 밥을 떠 먹어야지요. 그렇다고 해서 없는 무심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본래 무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내가 자꾸 '중생이
본래 부처다'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중생들밖에 없는데 중생이 본래 부처란
거짓말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까 명경의 비유는 좋은 비유가
아닙니까? 먼지가 앉은 중생의 명경이나 먼지가 안 닦인 부처님 명경이나 근본
명경은 똑같습니다. 본시 이 당 속에 큰 금광맥이 있는 것입니다. 광맥이 있는 줄
알면 누구든지 호미라도 들고 달려들 것 아닙니까. 금덩이를 파려고.
우리가 '성불! 성불!'하는 것도 중생이 어떻게 성불하겠느냐 할지 모으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니 본래 면목, 본래의 모습을 복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란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란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노력하면 본래 부처가 그대로 드러날
것이니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하여 우리의 참모습인 무심을 실증합시다.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는도다.
세상에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이라고 하신 것인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현실이 곧 절대이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실제는 내가 죽지 않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
이 구절의 뜻은, 부처님께서 무량이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겁이 다하도록 절대로 멸하지 않고 여기 계시면서 항상 법문을 설한다는
것입니다.
'여기'라 함은 부처님이 계신 곳을 말함이지 인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나타나시는 곳은 전부 여기입니다.
부처님께서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법계에 안 나타나는 곳이 없으시니까
시방법계가 다 여기입니다. 그래서 이 것을 상주불멸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절제로 멸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상주불멸, 미래에도 상주불멸, 현재에도 상주불멸, 이렇게 되면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화장찰해, 무진법계, 극락정토, 뭐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든 간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부처님은 항상 계시면서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석가모니라고 하는 개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삼라만상 일체가 다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항상 무진법문을
설하고 있으며 무량불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산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 안에 계시는 부처님보다 몇백 배
이상 가는 설법을 항상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위가 설법을 한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립니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바위가 항상 무슨 설법을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정설법이라고 합니다.
유정 즉 생물은 으레 움직이고 소리도 내고 하니까 설법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무정물인 돌이나 바위, 흙덩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설법을 하는가 하겠지만,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항상 설법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허공까지도 항상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온 시방세계에 설법 안 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불교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제도하고 누구를 구원한다고
하는 것이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오직 근본요는 본래면목, 본래부터 성불한 면목, 본지풍광, 본래부터가 전체
불국토라는 것, 이것만 바로 알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하나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법이야. 우리가 불국토에 살고, 우리 전체가 모두 부처라 하니 노력할
것이 뭐 있나. 공부도 할 것 없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안 좋은가.'
혹 이렇게도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근본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이고, 본래 해가 떠서 온 천지를 비추고 있지만 눈
감은 사람은 광명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 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맑은 거울에 먼지가 꽉 끼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하고 말갛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다 비춥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먼지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명경에 때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것, 여기에 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부처라는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불국토에 산다' 이것만 믿고 '나는 공부를 안 해도 된다', '눈뜰 필요 없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봉사를 못 면합니다. 영원토록 캄캄 밤중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설사 우리가 눈을
감고 앉아서 광명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광명 속에 산다는 것, 광명 속에 살고
있으니 눈만 뜨면 그만이라는 것, 설사 내가 완전한 부처의 행동을 할 수 없고
불국토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본래 부처라는 것, 본래 불국토에 산다는 것 그런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는 것은 눈을 뜨지 못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전후좌우에 황금이 꽉 차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
눈만 뜨면 황금이 모두 내 물건 내 소유이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입니까?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 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바가 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데, 이 불생불멸의 원리는 자고로
불교의 특권이요, 전용어가 되고 있다고.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원자물리학에서도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리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수승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 원래 그런 원리가 있는데 요즘 과학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불교에 가까이 온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우주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하셨고,
과학은 오늘에 와서야 자연의 불생불멸을 실증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내용은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참모습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똑같이 존경합시다. 만법의 참모습은 둥근 햇빛보다 더
밝고 푸른 허공보다 더 깨끗하여 항상 때묻지 않습니다.
악하다 선하다 함은 겉보기뿐, 그 참모습은 거룩한 부처님과 추호도 다름이
없어서, 일체가 장엄하며 일체가 숭고합니다. 그러므로 친하게 보이는 파리, 개미나
악하게 날뛰는 이리, 호랑이를 부처님과 같이 공경할 때 비로소 생명의 참모습을
알고 참다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광대한 우주를 두루 보아도 부처님 존재 아님이 없으며 부처님 나라
아님이 없어서, 모든 불행은 자취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영원한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도 서로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
집집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부모님입니다. 첫째로 내 집안에 계시는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거리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잘 받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발 밑에 기는 벌레가 부처님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벌레들을 잘 보살피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머리 위에 나는 새가 부처입니다. 날아다니는 생명들을 잘 보호하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넓고 넓은 우주, 한없는 천지의 모든 것이 다 부처님입니다. 수 없이 많은 이 모든
부처님께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이리 가도 부처님, 저리 가도 부처님, 부처님은 아무리 피하려고 하여도 피할 수가
없으니 불공의 대상은 무궁무진하며 미래겁이 다하도록 불공을 하여도 끝이
없습니다.
이렇듯 한량없는 부처님을 모시고 항상 불공을 하며 살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에게 한없는 공양구를 불공하는 것보다 곳곳에 계시는
부처님을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억천만 배의 비교할 수 없는 공덕이 있다고
석가세존은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불보살의 큰 서원이며 불교의 근본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듯 거룩한 법을
가르쳐 주신 석가세존께 깊이 감사하며 불공으로 살아갑시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실제는 내가 죽지 않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이고, 본래 해가 떠서 온 천지를 비추고 있지만 눈
감은 사람은 광명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 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마치 맑은 거울에 먼지가 꽉 끼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받는 길
내가 부처가 된 이후로
지내온 많은 세월은
한량없는 백천만억 이승지로다.
이 구절은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있는 말씀인데 "법화경"의 골자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성불한 뒤로 얼마만한 세월이 경과했느냐' 하면 숫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한없이 많은 세월이 경과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보통으로 봐서 이것은 이해가 잘 안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인도에
출현해서 성불하여 열반하신 지 2천5백여 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부처님 말씀이 자기가 성불한 지가 무량백천만억 아승지 이전이라고 했을까? 어째서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에 있어서 부처님이 2천5백년 전에 출현하여 성불하신 것은 방편이고
실제로는 한량없는 무수한 아승지겁 이전에 벌써 성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불교에 대한 기본 자세, 근본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성불이다', 즉 부처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으레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실제 내용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입니다. 깨쳤다는 것은 본래 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일 뿐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전에는 자기가 늘 중생인 줄로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억천만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 성불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 성불해 있었는데 다시 무슨 성불을 또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성불한다, 성불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중생을 지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부처님이 도를 깨쳤다고 하는 것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한 본래 모습,
그것을 바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 일체 생명,
심지어는 구르는 돌과 서 있는 바위, 유정, 무정 전체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다
성불했다는 그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 합니다. 모를 때는 사바세계지만 알고 보면
이곳은 사바세계가 아니고 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는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바로
깨쳐서 본래 자기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는 것, 이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온 시방법계가 불국토 아닌 곳, 정토 아닌 나라가 없다는 이것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합니다.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어 천당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본래
부처인 줄 확실히 알고 온 시방법계가 본래 불국토이며 정토인 줄 알면 그만이지 또
무슨 남에게서 받아야 할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불교에서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절대로 구원이란 없습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도 따라 올 수 없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실제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불, 부처란 것은 불생불멸을 이르는 말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 아닌 것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사람은
물론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심지어 저 허공까지도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또한 모든
처소 시방법계 전체가 모두 다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즉 정토이며
불국토인 것입니다.
즉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부처이고, 모든 처소가 전부 다 정토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바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내가 언제나 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천하를 비추고 환한
대낮이라도 눈 감은 사람은 광명을 못 봅니다. 앉으나 서나 전체가 캄캄할 뿐
광명을 못 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우주법계 전체가
부처 아닌 존재 없고 전체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습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그러나 이것을 모르고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내가 중생이다', '여기가
사바세계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근본 병이 어디 있느냐 하면 눈을 떴나, 눈을 감았나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광명이고,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암흑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부처이고 전체가 다 불국토이지만,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중생이고 전체가 다 사바세계,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말할 것 없습니다. 누가 눈 감고 컴컴한 암흑세계에 살겠다고 하는 사람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광명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부처님 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정토에 살고 싶은 입니다. 그렇다면 한시 바삐 어떻게든 노력하여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가고 오고 할 것 없습니다. 천당에 가니 극락세계에 가니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소리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더라, 본래 부처라고 말씀하신
입니다.
인간의 근본 존재는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여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무량불사를 하는 그런 큰 존재입니다. 다만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 눈을 뜨지
못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눈을 뜨겠느냐 이것입니다.
"스님도 딱하시네. 내 눈은 멀쩡한데 내가 기둥이라도 들이받았는가? 왜 우리보고
자꾸만 눈 감았다 하시는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껍데기 눈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한밤중에 바늘귀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눈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그런 눈은 안 통합니다. 속의 눈, 마음의 눈, 마음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명경에 낀 때를 벗겨야 합니다. 명경의 때를 다 닦아 내어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해가 대명중천하며 시방세계를 고루 비추고 있는 것이, 맑고 맑은 거울에 고요하게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울의 대를 벗기고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가? 가장
쉬운 방법이며 제일 빠른 방법이 참선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두를 바로 깨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
뜰래야 안 뜰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맙니다. 일초직입여래지, 한번
뛰어 부처 지위에 들어간다고, 한번 훌쩍 뛰면 눈 다 떠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이 참선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도 방법이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그 원인, 마음 눈이 어두워지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을 제거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 진, 치 삼독이라고 합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불국토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눈을 가린 삼독, 삼독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저절로
안 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 삼독 중에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탐욕입니다. 탐욕!
탐내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성내는 마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떠지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나! 남이야 죽든가
말든가 알 턱이 있나, 어떻게든 나만 좀 잘살자 나만! 하는 데에서 모든 욕심이 다
생기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눈은 영영 어두워집니다. 캄캄하게 자꾸만 더 어두워집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마음 눈을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나깨나 나뿐 아닙니까? 그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해서 자나깨나 남의 생각, 남의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기준을 둔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삼독이 녹는 동시에 마음의 눈이 자꾸자꾸 밝아집니다. 그리하여
탐, 진, 치 삼독이 완전히 다 녹아 버리면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리는데 눈이 안 보일 리 있겠습니까? 탐, 진, 치 삼독이 다 녹아 버리는 데에
가서는 눈이 완전히 뜨여서 저 밝은 광명을 환히 볼 수 있고, 과거
무량아승지겁부터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방세계가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방세계가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이득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을!
자기가 굶어 죽더라도 남을 도와주라고 하면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자신부터
한번 굶어 보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70 평생을 산다고 해도, 80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 동안입니다. 가령 100 살을 살면서 지구 땅덩어리의 온 재산을
전부 내 살림살이로 만든다고 해봅시다. 부처님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해서 또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인생 100년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토에서 무애자재한 그런 대생활을 한 그것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티끌 하나도 안 됩니다.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안됩니다. 내용을 보면
10원짜리도 안 됩니다.
그러나 10원짜리도 안 되는 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서 남을 위해서만 살고
어떻게든 남을 위해서만 노력합니다. 그러면 저 무량아승지겁, 억천만겁 전부터
성불해 있는 그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10원짜리
나를 희생하여 여러 억천만원이 넘는 참 나를 되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괜찮은
장사가 아닙니까? 장사를 하려면 큼직한 장사를 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 것은 공연히 10원, 20원 가지고 죽니, 사니 칼부림을 하는 그런 식이 아닙니까?
아주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잡아먹히셨습니다.
몸뚱이까지 잡아먹히셨으니 말할 것도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배고픈 호랑이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욕심, 큰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물거품 같은
몸뚱이를 하나를 턱 버리면 그와 동시에 시방법계 큰 불국토에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크면 임금이 될 것이지만
이것도 가져 봐야 별 것 아닙니다. 서푼어치의 값도 안 되는 줄 알고 왕위도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큰 돈벌이를 한 것 아닙니까?
근대의 순치황제 같은 분은 만주로 나와서 1년 동안 전쟁을 하여 대청제국을
건설한 분입니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나라입니다. 중국 본토 이외에도
남북만주, 내외몽고, 티베트, 인도지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해탈도를 성취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10원짜리 가치도 안 되는 것임을 알고
대청제국을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리고 그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금산사라는 절에
가서 다른 것도 아니고 나무하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는 부목이 되었습니다.
대청제국을 건설한 망고의 대영웅 순치황제 같은 사람이 절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나무해 주고 스님네 방에 불이나 때주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공부를 성취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순치황제가 출가할 때, "나는 본시 걸식하며 수도하는 서방의 수도승이었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로 타락하였는고?" 하고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전차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만승전차의 보위를 헌신짝 같이 차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욕심이 커서 그렇습니다. 대청제국이란 그것은 10원짜리도 못
되고, 참으로 눈을 바로 뜨고 보면 시방법계에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할 터인데
이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나간 이야기를 한 가지 하겠습니다.
6, 25사변 때 서울에서 대학 교수를 하던 문박사라고 하는 이가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스님네는 어째서 개인주의만 합니까?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사회와 국가도 다
버리고 산중에서 참선한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혼자만 좋으려고 하는 그것이
개인주의가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스님네가 개인주의가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사회에 살면서 부모 형제를 돌보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개인주의입니까?"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단신 여태 50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
한번이라도 남을 생각해 본 적 있는지 양심대로 말해 보시오."
"참으로 순수하게 남을 위해 일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네가 부모 형제 버리고 떠난 것은, 작은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을 위해 살기
위란 것이야. 내 부모 내 형제 이것은 작은 가족이야.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손발을 묶는, 처자권속이라고 하는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오직 큰 가족인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야!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당신이야말로 철두철미한 개인주의자 아닌가?"
"스님 해석이 퍽 보편적이십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에 모두 그렇게
씌어 있어. '남을 위해 살아라' 하고. 보살의 육도만행 6바라밀의 처음이 베푸는
것이야.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돕는 것. 그것이 바로 보시야!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이야"
"...."
"그러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편안하게 좋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더
크고 귀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리는 것뿐이야. 그래서 결국에는 무소유가 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 중생을 품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 중생을 품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려면 반드시 탐내는 마음 이것을 버려야 하는데, 탐욕을 버리면 '나만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하는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하지."
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부처님 앞에 갔다 놓고 절하고 복 비는 것이
불공이 아니고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돕는 것이 불공이라고.
부처님께서 '보현행원품'에 아주 간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중생을 잠깐 동안이라도 도와주게 되면 그것이 자기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여러 억천만배 비교할 수 없는 공적이라고.
이것이 결국 마음의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영원한 튼 살림살이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도와주는 것이 부처님에게 갖다 놓은 것보다 비유할 수
없을 만큼 큰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일본 천리교의 교주 되는 사람이 '나카야마 미키'라는 여자분입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도 굉장히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공부를 해서 자기 딴에는 마음의 눈을 떠버렸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자기 살림살이는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큰 살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당신 마누라였는데 오늘부터는 내가 당신 스승이야! 내가
깨쳤어! 내가 하느님이니까 내 말을 들으시오."
"미쳤나? 왜 이러지? 그래 어떻게 하라는 거요?"
"우리 살림살이를 전부 다 팝시다. 이것 다 해봐야 얼마나 되나요? 모두 다
남에게 나누어 줍시다. 그러면 결국에는 참으로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큰 돈벌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재산을 다 팔아서 모두 남에게 줘 버렸습니다. 이제 내외는 빈손이
되었습니다. 밥은 얻어 먹으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남에게 좋은
것, 남 돕는 것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몸으로 일본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돈벌이를 크게 한 것입니다. 우선 조그만 살림살이를 나눠 주고서는.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도 큰 살림살이를 한번 해봐야겠다' 이렇게
작정하고 집도 팔고 밭도 팔고 다 팔 사람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 재산 온통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나누어
준다면! 그렇게만 되면 내가 목탁 가지고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예불하며 모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설사 그렇게 까지 극단적으로는 못 하더라도 우리의 생활방침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이것이 참으로 나를 위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해 욕심부리는
것은 결국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자꾸 노력하면, 참으로 남을 돕는 생활을 할 것 같으면 결국에는
마음의 눈을 떠서 청천백일을 환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것을 많이 할 것 없이 한가지라도 남을 돕는 생활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작년 겨울에 불공에 대한 법문을 했더니 신문기자들이 정리해서 '불공 대상은
법당에 앉아 있는 부처님이 아니고 일체 중생'이라고 해서 한창 시끄러웠던
모양입니다. 보통 사회 사람들이 볼 때는 참 좋은데 스님네들이 볼 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불공한다고 부처님께 갖다 놓고 절하지 말고 자꾸 '남 돕자 남 돕자' 해 놓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으라고? 하면서 한때 소동이 났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내가 설사 천번 만번 시궁창에 처박힌다고 할지라도 자꾸
말할 참이야. 남을 돕는 것,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참으로 불공이라고."
우리 불교가 앞으로 나른 길에 서려면 승려나 신도 모두 생활방향이 남을 돕는
데로 완전히 돌려져야 합니다.
승려가 예전처럼 산중에 앉아서 됫쌀이나 돈푼이나 가지고 와서 불공해 달라고
하면 그걸 놓고 뚝딱거리면서 복 주라고 빌고 하는 그런 생활을 그대로
계속하다가는 불교는 앞으로 영원히 없어지고 맙니다.
절에 다니는 신도도 또한 그렇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자식 머리만 아파도
쌀되나 가지고 절에 와서 "아이고 부처님, 우리 자식 얼른 낮게 해주십시오"하는
이런 식의 사고 방식으로는 참된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승려도 신도도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 발전이 없습니다. 산중에 갇혀서 결국에는
아주 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불교 승단에는 승려 전문대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을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들은 논을 팔아서라도 자식 공부시키려고
합니다. 자식 공부시키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승려를 자꾸 교육시켜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지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나중에는 법당의 기왓장을 벗겨 팔아서라도
'승려들을 교육시키자' 하는 것이 내 근본 생각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종단적인
차원에서 꼭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생명이 억천만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는데 왜
지금은 캄캄 밤중에서 갈팡질팡하는가?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눈을 뜨는 방법은?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깨치든지 아니면
남을 돕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떡장사를 하든, 술장사를 하든, 고기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지 화두를
배워서 마음속으로 화두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화두를 하고
남을 돕는 일을 꾸준히 하면 어느 날엔 가는 마음 눈이 번갯불같이 번쩍 뜨여서
그때에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다는 그 말씀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참으로 인간 세상과
천상의 스승이 되어서 무량대불사를 미래겁이 다하도록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춤뿐이겠습니까? 큰 잔치가 절어질 텐데, 그렇게 되도록 우리 함께 노력합시다.
원수 갚는 방법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
이것은 "원각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중생이 성불 못하고 대도를 성취 못하는 것은 마음속에 수많은 번뇌, 팔만 사천
가지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많은 번뇌 가운데서 무엇이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증애심,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가의 3조 승찬대사는 그가 지은 "신심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증애심만 떨어지면
통연히 명백하도다.
이 증애심이 실제로 완전히 떨어지려면 대오해서 대무심경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무심삼매에 들어가기 정에는 경계에 따라서 계속 증애심이 발동하므로 이 병이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대도를 목표로 하므로 부처님 말씀을 생활과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을 부모와 같이 섬겨라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입니다.
'나쁜 사람을 용서하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또 모르지만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라 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나 하실 수 있는 말이지 다른 사람은 감히
이런 말조차 못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불교에서는 '용서'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다고
잘못한 사람과 싸우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 그러니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란 큰 모욕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의 불성은 똑같다"고 주장합니다. 성불해서 연화대 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죄를 많이 지어 무간지옥에 있는 중생이나 자성자리,
실상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나쁜 사람이라도 겉을 보고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한층 더 나아가서 세속말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고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부처님 같이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실례로
들어도 그와 같습니다. 부처님을 평생 따라 다니며 애를 먹이고 해치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제바닷타' 입니다.
보통 보면 제바닷타가 무간지옥에 떨어졌느니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느니 하는데
그것은 모두 방편입니다. 중생을 경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제바닷타가 부처님에게는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부처님은 어떻게 원수를 갚았는가?
성불, 성불로써 갚았습니다.
죄와 복이 온 시방법계를
비춤을 깊이 통달했다.
착한 일 한 것이 시방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혹시 이해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악한 짓을 한 무간지옥의 중생이 큰 광명을 놓아서 온 시방법계를 비춘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선한 것을 부처라 하고 가장 악한 것을
마귀라 하여 이 둘은 하늘과 땅 사이 입니다만, 사실 알고 보면 마귀와 부처는 몸은
하나인데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다 해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고, 아무리 성불했다 하여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더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부처는 한몸뚱이이면서도 이름만 다를 뿐
동체이명입니다. 비유하자면 겉에 입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제바닷타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지만 그 근본 자성, 본모습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중에 제비닷타가 성불하여 크게 불사를 하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했습니다. 제비닷카가 성불한다고 "법화경"에서 수기하였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정신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 행동, 공부하는 근본 지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불교에 들어오는 첫째 지침은 "모든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같이 섬겨라"입니다. 우리 불교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물론 소나 돼지나 짐승까지도 근본 자성은 성불하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부처님과 같이 존경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 믿는 우리는 상대방이 떨어진 옷을 입었는지 좋은 옷을 입었는지
그것은 보지 말고 '사람'만 보자는 말입니다.
이런 옛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에 큰 잔치가 있어서 전국에 큰스님네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 한 분이 검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잔치에 초청되었습니다. 본시의 생활
그대로 앍은 옷에 떨어진 신을 신고 대궐문을 지나려니 문지기가 못 들러가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좋은 옷을 빌려 입고 다시 갔더니 문지기가 굽신굽신하면서 얼른
윗자리로 모셨지요. 다른 스님네들은 잘 차려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이
스님은 자꾸 옷에 들이붓고 있습니다.
"스님, 왜 이러시오. 왜 음식을 자꾸 옷에다 붓습니까?"
"아니야, 이것은 나에게 주는 게 아니야. 옷 보고 주는 것이지!"
그리고는 전부 옷에다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비유입니까? 허름한 옷을 입고
올 때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더니 좋은 옷 입고 오니 이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겉만 보고 사는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법문하시면서 큰 짐을 지워 주시네. 그건 부처님이나 하실 수 있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나.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당장 주먹이 날아드는데 어쩌란 말인가"
하고 항의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나간 실례 몇 가지 들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옛날에 현풍 곽씨 집안의 한 사람이 장가를 들었는데, 그 부인의 행실이 단정치
못했습니다. 시부모 앞에서도 함부로 행동하고, 의복도 바로 입지 않고, 언행이 전혀
공손치 않아, 타이르고 몽둥이로 때리기까지 하고 별 수단을 다 해봐도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양반집에서 부인을 내쫓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이 "맹자"를 펴놓고 읽다가 이런 구절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한 것 없이 착하다.
악한 이고 착한 이고 간에 누구든지 그 본성은 다 착하여
모두가 요순과 똑같다.
여기에 이르러 그 사람은 다시금 깨닫고 생각했습니다.
'본래 요순같이 어진 사람인데 내가 잘못 알았구나. 앞으로 우리 마누라를 참으로
존경하리라.' 하고 마음 먹었습니다.
예전에 양반집에서는 아침 일찍 사당에 가서 자기 조상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음날 아침 도포를 입고, 갓 쓰고 사당에 가서 절을 한 후에는 제일 먼저
자기 부인에게 넙죽 절을 했습니다. 부인이 자기 남편을 보니 미친 것 같았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를 보고 욕하고 때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정색으로 정장을
하고 절을 하니 말입니다.
"당신이 참으로 거룩합니다"하면서 남편이 또 절을 합니다.
막 쫓아내는데도 한사코 따라다니며 절을 하고는
"사람이란 본시 모두 착한 것이오. 당신도 본래 착한 사람인데 내가 잘못 보고
욕하고 때렸으니 앞으로는 당신의 착한 성품만 보고 존경하겠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를 한 달 두 달이 지나다 보니 부인도 자기의 본래 성품이 돌아와서
"왜 자꾸 이러십니까?"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요, 순임금과 똑같소. 그런 당신을 보고 내가 어찌 절을 안 할 수
있겠소?"하며 여전한 남편의 기색에 부인도 맞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나더러 요, 순이라고 하는데 진짜 요순은 바로 당신입니다."
하면서 서로가 요, 순이라고 존경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했듯이,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
내가 6.25사변 후 통영 안정사 토굴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진주에 신도들 30여 명이 와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한
신도가 30년 동안 자기 영감하고 말을 안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라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금방 알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이름을 들먹이지 않겠습니다. 내가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불교 믿는 부처님 제자라고 하면서 딴 사람도 아니고 아들 딸 낳고 함께 사는
영감하고 30년이나 말을 안 하고 산다니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 딸 몇 놓고 난 후에 남편이 작은 마누라를 얻어 나가고 자기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라는 겁니다. 살림이고 뭣이고 싹 쓸어가 버리고, 남은 자식들 데리고 먹고 살며
공부시키려니 그 공생이 말로 다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평생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분이 복받쳐서 말도 하기 싫다는 거였습니다. 다 듣고 난
다음에 내가 물었습니다.
"나에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까?"
"예, 하겠습니다."
"그러면 법당에 올라가서 부처님께 3,00배 절을 하되 '스님께서 시키는 대로 꼭
하겠습니다'하는 원을 세우고 절을 하시오."
그랬더니 밤을 새워서 3,00배 절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남편이 작은 부인을 얻어서 나를 이렇게 만들고 괄시를 했다
하는 원한이 맺혀서 30년 동안 말도 안하고 원수같이 지냈는데,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영감도 본래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착한 사람이니까 오늘 돌아가는
길로 당신 집으로 가지 말고, 가게에 가서 술하고 좋은 안주 사가지고 작은 부인
집으로 찾아 가십시오. 부엌에 가서 손수 상을 차려서 영감님께 올리고 큰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길 '영감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스님의 말씀이
영감님이 참으로 부처님 같다고 했는데, 내가 그것을 모르고 이제껏 말도 안 하고
지냈습니다. 그 허물이 너무나 큽니다만 아무쪼록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당신이
참으로 부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 내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영감이 보니 마누라가 미쳤단
말입니다. 아무리 얘기를 하려고 해도 막무가내이던 사람이 술 받고 안주 만들어
와서 절을 하며 잘못했다고 비니 하도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당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토굴에서 공부하시는 스님께 가서 영감 이야기를 하고 법문을 들었는데,
영감같이 착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영감님이 부처님과 똑같은 어른이라고
하십디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영감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영감이
"아 불교가 그런 것인가."
하고는 금나 발심을 했습니다. 그후로는 철저한 불교신도가 되어서, 부인이
새벽으로 기도하러 갈 때는 꼭꼭 같이 다니고, 나중에는 진주에서 신도회 회장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은 상대방을 보되, 겉모습만 보지 말고 본래 성품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보살계'서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넓게 비치는 진로업혹문이 모두 보현보살의 진법계다"
진로업혹문이란 중생의 나쁜 짓을 총망라한 말인데, 아무리 중생이 나쁜 짓을
한다 할지라도 겉보기만 그럴 뿐 실제는 진부 보현보살의 진법계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상대를 부모와 같이 부처님과 같이
섬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와 같은 사상을 잘 알아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예전 인도에서 조석으로 예불시간에 반드시 지송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지르제타'라는 스님이 지은 150찬불송이 그것입니다.
의정법사의 "남해기귀전"에도 보면, 의정법사가 인도에 갔을 때 전국 각 사찰에서
150찬불송을 조석으로 외우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베푼 은혜 천지보다 깊어
그걸 배반하고 깊은 원수 맺는다.
부처님은 그 원수를
가장 큰 은혜로 본다.
어떤 상대를 부모보다, 부처님보다 더 섬기고 받들고 하는데, 그는 나를 가장 큰
원수로 삼고 자꾸 해롭게 합니다. 이럴 때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그만큼
상대를 더 섬긴다는 말입니다.
원수는 부처님을 해롭게 해도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상대는 부처님 허물만 보는데
부처님은 그를 은혜로 갚는다.
존어원전친!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근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잘해 주는데 상대방은 나에게 잘해 주는 것은 하나도 없이 다 내버리고
자꾸 나를 해롭게만 합니다. 그런데도 섬기기만 하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상대를 받들고 섬긴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고 불교의 근본입니다.
전에도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교 믿는 사람 몇이 삼천배를 하러 온
적이 있습니다.
"절을 할 때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제일 반대하고, 예수님 제일 욕하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도록 기원하면서 절하시오."
이렇게 말했더니 참 좋다고 하면서 절 삼천배를 다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부처님 제일 욕하고, 스님네 제일 공격하는 그 사람이 극락세계에서 제일
먼저 가도록 축원하고 절합시다."
이제는 우리 불자들에게도 이런 소리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는 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게 되면 일체 번뇌망상과 중생의
병은 다 없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의 모든 병이 다 없어지면, 그것이 부처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을 목표로 하고 사느니 만큼 부처님 말씀을 표준 삼아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그때 자기 감정에 치우쳐 살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의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교에서는 치고 들어오는데 자꾸 절만 하고 있으면 불교는 어떻게 되나?
상대가 한 번 소리지르면 우리는 열 번 소리질러야 겁이 나서 도망갈 텐데, 가만히
있다가는 불교는 씨도 안 남겠다. 자! 일어나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럴수록 자꾸 절하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원하는, 그런 사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전하고,
그런 사상으로 일상생활을 실천해 보십시오. 불교는 바닷물 밀 듯 온 천하를 덮을
것입니다. 그것이 생활화되면 모든 사람이 감동하고 감복하여 '불교가 그런
것인가!'하여 불교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게 고리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애는 어느 곳에 있는가? 저쪽에서 소리지른다고 이쪽에서 같이
소리지르면 안 됩니다. 저쪽에서 주먹 내민다고 이쪽에서도 같이 주먹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불지른다고 같이 불을 지르면 함께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쪽에서 아무리 큰 불을 가져오더라도 이쪽에서 자꾸 물을 들이붓는다면 어찌 그
물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은 물을 못 이길 것입니다. 나중의 성불은
그만두고 전술, 이기는 전술로 말하더라도 불에는 물로써 막아야지 불로
달려들어서는 안됩니다.
근본은 바로 모든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법문의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천노유를 부처님으로 섬긴다.
지극한 죄인을 가장 존중하며
깊은 원한 있는 이를 깊이 애호하라.
모든 일체 만법의 참 모습은 때가 없이 항상 청정합니다. 유정, 무정 할 것 없이
전체가 본래 성불입니다. 옷은 아무리 덜어졌어도 사람은 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늙은이나 어린이나 전부다 부처님같이 섬기고, 극히 중한 죄를
지은 죄인까지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동시에 나를 가장 해롭게 하는 사람을
부모와 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자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근본 지침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행동해야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법당에 들어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은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는 여기에 있느니 만큼 우리 서로 노력합시다.
실상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하니
귀천노유를 부처님으로 섬긴다.
지극한 죄인을 가장 존중하며
깊은 원한 있는 이를 깊이 애호하라.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자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근본 지침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행동해야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법당에 들어가
앉을 자격이 있습니다. 유정, 무정 일체가 본래 부처님입니다.
불공하는 법
요즈음 학생들에게 불공하라고 자주 이야기하며 권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혹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용돈을 타쓰고 있는데 어떻게 불공을 할
수 있는가"하고. 그것도 당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불공은 꼭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은 모두 불공입니다. 예를 들어
버스 속에서 노인이나 어린이에게 혹은 병든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
그것도 불공입니다. 또 정신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혹은 어떤 사람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는 것, 그것도 불공입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적선을 비는 눈먼 사람에게 10원짜리 한 닢 주는 것, 그것도
불공입니다.
이처럼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남을 도와주는 것은 모두
불공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몸, 마음, 물질 이 세 가지로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꽉 찼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불공거리, 불공 대상입니다.
단지 우리가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 할 뿐입니다. 이렇게 불공해야
결국에는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수련회 때 삼천배를 한 뒤 백련암에
올라와서 화두 배워 달라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자, 모두 화두 배우기 전에
불공하는 방법 배워 불공부터 시작한 후 화두 배우자." 이렇게 말하면 처음에는
모두 눈이 둥그렇게 됩니다. 우린 돈도 없는데 부처님 앞에 돈 놓고 절하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그런데 나중에 알맹이를 듣고 보면 그것이 아니고 남 도와주는
것이 참 불공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끝에 가서 "모두 불공합시다" 하면 "예"
하고 대답하는데, 진정으로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히 주의를
시킵니다. 그것은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자랑하는 것을 나쁜 일입니다.
몸으로써, 마음으로써, 물질로써 좋은 불공을 해놓고 입으로 자랑하면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불공을 자랑하기 위해, 자기 선전하기 위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푼이나 기부해 주고 신문에 크게 선전해 달라고 하며 또 그 재미로 돈 쓰는
사람도 많은가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할 재료 장만하는
것이지! 아까운 돈으로 남 도와주고 몸으로 남 도와주고 마음으로 남 도와주고서, 왜
입으로 모두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까? 참으로 불공이란 남을 아무리 많이
도와주었다고 해도 절대로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말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근본 생각은 '남모르게 도와주라'에 있는 것입니다. '남모르게 남을 도울 것!'
예수님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기막힌
소리 아닙니까! 자기 왼손으로 남을 도우면서 오른손도 모르게 도와주라고 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 학생들에게 이 말이 좋게
들리는가 봅니다. 편지 자주 옵니다. "스님 말씀하신 남모르게 남 돕자는 그 말씀을
평생 지키고 노력하겠습니다." 하고.
이제 예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미국의 보이스라는 사람이 영국의 런던에 가서 어느 집을 찾는데 안개가 심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이곳저곳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열두어 살 되는
소년이 나타나 물었습니다.
"선생님, 누굴 찾으십니까?"
"어느 집을 찾는데 못 찾고 있다."
"저는 이 동네에 사는데 혹시 제가 아는지 주소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신사가 주소를 보여주니
"이 집은 마침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하며 안내해 주었습니다.
어린이가 인도하여 안내해 준 집에 도착하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하도 고마워서 사례금을 주었더니 그 소년은 사양하고 결코 받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선생님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소년단원 회원인데 우리 회원은 하루
한 가지씩 남을 도와주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었느니,
오히려 제가 감사드리겠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신사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에 와 보니 어린이도 남을 돕는 정신이 가득하군. 돈도 받지 않고,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남을 도우면서 오히려 일과를 할 수 있게 되어 고맙다고 하니
이런 정신을 배워야겠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에서도 소년단을 시작하였습니다. 온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이 정신이 뻗어나가 우리나라에도 보이스카웃, 소년단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 소년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찾지 못하고, 소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이름 모를 소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그 마을에는 큰 들소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에 이렇게 새겼습니다.
-날마다 곡 착한 일을 함으로써 소년단이라는 것을 미국에 알려 준 이름 모를
소년에게 이 동상을 바치노라.-
남의 종교와 비교, 비판할 것은 아니지만, 예수교와 불교를 비교해 봅시다.
진리적으로 볼 때 예수교와 불교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도 개인적으로 볼 때 예수교에서 보면 불교가
아무것도 아니고, 불교 측에서 보면 예수교가 별 것 아닐 것입니다.
서양의 유명한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도 "예수교와 불교가 서로 싸운다 하면
예수교가 불교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극단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보면 그러하지만 실천면에서 보면 거꾸로 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참으로 종교인다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불교인은
예수교인을 못 따라갑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인데, 참으로
자비심으로 승려 노릇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남 돕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자비'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승려가 봉사정신이 가장 약할 것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진실로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갈멜 수도원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원 초하룻날 모여서 무슨
제비를 뽑는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양로원, 고아원, 교도소 등 어려움을 겪는
각계각층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양로원' 제비를 뽑으면 1년 365일을
자나깨나 양로원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고아원'에 해당되면 내내
고아원만을, '교도소'면 교도소 사람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기도로써만 이루어지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 안 합니다. 조금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의 근본 정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인입니다.
그들은 양계와 과자를 만들어 내다 팔아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자기들 노력으로 처리하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서만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어찌 하는가?
불교에서는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데, 소승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승은 남만 위해 사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은 대승이지 소승이 아닙니다. 원리는 이러한데 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쪽 사람들은 내 밥 먹고 남만 위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교를 본받아서가 아니라, 불교는 '자비'가 근본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기준을 남을 돕는 데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중도 다 알겠지만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은 불공을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의 대상은 절 밖에 있습니다. 불공의 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다 불공의 대상입니다. 이것이 불공의 방향입니다.
내가 생각할 대는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목탁 치고 부처님 앞에서 신도들 명과
복을 빌어 주는 이것이 불공이 아닙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만이 참 불공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실천할 때, 그대 비로소 우리 불교에도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내가 전부터 자주 불공 이야기를 해 오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이것이 참으로 불공이요, 이것을 행해야만
참으로 내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디 자서전을 보면, 그는 영국에 유학 가서 예수교를 배웠는데 예수교에서는
사람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그후 불교에서는 진리에 눈떴는데 일체 생명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남의 종교를 말하는 것은
안되었지만, 비유하자면 예수교가 접시물이라면 불교는 바다와 같다 하였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사람만이 상대가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그 상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만이 상대가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그 상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미물이고 할 것 없이 일체 중생이 모두 다 불공의 대상입니다.
일체 중생을 돕는 것이 불공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고 또 궁행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내가 배가 고픈데 자꾸 남의 입에만 밥 떠넣으라니, 나는
굶으라는 말인가?"
인과법칙이란 불교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근본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선인선과, 악인악과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과보가 오는 것입니다.
병이 났다든지 생활이 가난하여 어렵다든지 하는 것이 악한 과보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악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기억에는 없지만
세세생생을 내려오는 것입니다.
선인선과, 이번에는 착한 일을 자꾸 행합니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남을 자꾸 돕고 남을 위해 자구 기도하면, 결국에는 그 선과가 자기에게로 모두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기도가 되는 되며, 남을
해치면 결국 나를 해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면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또다시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남을 내가 도우니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법칙에 의해 그 행복이 내게로 전부 다 오는 것입니다.
생물 생태학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해치면 자기가 먼저 손해를
보게 되고, 농사를 짓는 이치도 그와 같다 하겠습니다. 곡식을 돌보지 않으면
자기부터 배고플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배고파 굶어 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같이 불공을 잘
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한가지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공할 줄 모르고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 문앞에 서서 보니 지옥 속에서 고 받는 중생들 모습이
하도 고통스럽게 보여서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그 모습을 보면 '아이고, 무서워라. 나도 저 속에 들어가면 저렇게 될 텐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이런 생각이 들 텐데 이 사람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는 많은 사람의 고를 잠깐 동안이라도 나 혼자 대신 받고 저
사람들을 쉬게 해줄 수 없을까?, 편하게 해줄 수 없을까?' 하는 착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을 하고 보니 지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 천상에 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입니다. 착한 생각을 내면 자기부터 먼저 천상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으로 기도를 해야 됩니다. 어느
정도 인격이 있는 사람이면 '내 복만을 위해, 내 배만을 위해' 기도는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내게 항상 다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배 절을
하라고!'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그런 생활을 매일 아침마다 20분 동안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108배 기도하는 정성이 없으면 아무리
불공한다고 해도 매일 108배 하는 사람과는 많이 다릅니다. 나도 새벽으로 꼭
108배를 합니다. 그 목적이 어디 있는가? 시작할 때 조건이 나를 위해 절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저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나길 구함이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이제 발심하여 108배를 하는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를 위해 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중생들과 보리도에 회향합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했는데
기도한 공덕이 많습니다.. 이것이 모두 일체 중생에게 가버려라 이것입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원합노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위없는 진법계에 희양하오며'
예불 참회한 이 공덕이 모두 남에게로 다 가라는 말입니다. 그래도 혹 남은 것, 빠진
것이 있어서 나한테로 올까봐 온갖 것이 무상진법계로, 온 법계로 돌아가고
나한테는 하나도 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저 인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중국을 거쳐 신라, 고려에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중국도 중공적화 이전에는 총림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절에서 다 '참회'해
온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법계에 회향하고 모두 남에게 다 가버려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의 근본 자세이고, 사명이며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요즘은 사회에서도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 스님들은 산중에 살면서
이런 활동에는 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오직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따르는 불공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석으로 부처님께 예불하면서 곡 한가지 축원을 합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축원문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세 번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해보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좋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절을 한 번 하든 두 번 하든 일체 중생을 위해 절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기도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돕는 사람, 일체 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앞머리에서 말한 부처님을 팔아서 사는 '도적놈' 속에는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서로 힘써 불공을 잘 해서 도적놈 속에 안 들도록 노력합시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을 위해 절하는 사람,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부처님을
팔아서 사는 '도적놈'에 안 들어갑니다. 우리 서로서로 힘써 남을 위한 불공을
합시다.
해탈의 길
1. 한 물건
한 물건이 있으니 천지가 생기기 정에도 항상 있었고, 천지가 다 없어진 후에도
항상 있다. 천지가 천번 생기고 만번 부서져도 이 물건은 털끝만치도 변동 없이
항상 있다.
크기로 말하면 가없는 허공의 몇억만 배가 되어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그래서 이
물건의 크기를 큰 바다에 비유하면, 시방의 넓고 넓은 허공은 바다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물거품과 같다.
또 일월보다 몇억만 배나 더 밝은 광명으로써 항상 시방세계를 비추고 있다.
밝음과 어두움을 벗어난 이 절대적인 광명은 항상 우주 만물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이 물건은 모든 명상과 분별을 떠난 절대적인 것이다. 절대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지만 부득이해서 절대라는 것이다.
한 물건이란 이름도 지을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한 물건이란 이름을 붙일
때 벌써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일시에 나타나서 억천만겁이 다하도록 설명하려
해도, 이 물건을 털끝만치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가 깨쳐서 쓸 따름이요, 남에게 설명도 못하고 전할 수도 없다.
이 물건을 깨친 사람은 부처라 하여, 생사고를 영원히 벗어나서 미래가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것이다.
이 물건을 깨치지 못한 중생들은 항상 생사바다를 헤매어 사생육도에 윤회하면서,
억천만겁토록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중생이라도 다 이 물건을 가지고 있다. 깨진 부처나 깨치지 못한
조그마한 벌레까지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 다른 것은, 이 물건을 깨쳤느냐 못
깨쳤느냐에 있다.
석가와 달마도 이 물건은 눈을 들고 보지도 못하고, 입을 열어 설명하지도 못했다.
이 물건을 보려고 하면 석가도 눈이 멀고 달마도 눈이 먼다. 또 이 물건을
설명하려고 하면 부처와 조사가 다 벙어리가 되는 것이다. 오직 깨쳐서
자유자재하게 쓸 따름이다.
그러므로 고인이 말씀하기를, "대장경은 모두 고름 닦아 버린 헌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말하노니, "팔만대장경으로써 사람을 살리려는 것은 비상으로써 사람을
살리려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경전 가운데도 소승과 대승이 있으니, 대승경에서는 말하기를 "설사 비상을
사람에게 먹일지언정 소승경법으로써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승경 역시 비상인 줄 왜 몰랐을까? 알면서도 부득이한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크게 정신차려야 한다.
오직 이 한 물건만 믿는 것을 바른 심신이라 한다. 석가도 쓸데없고 달마도
쓸데없다. 팔만장경이란 다 무슨 잔소리인가? 오로지 이 물건만 믿고 이것 깨치는
공부만 할 따름이요, 그 외에는 전부 외도며 마구니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염불해서 죽어 극락세계에 가서 말할 수 없는 쾌락을 받는데,
나는 이 한 물건 찾는 공부를 하다가 잘못되어 지옥에 떨어져 억천만겁토록 무한한
고통을 받더라도, 조금도 후회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오직 이 공부를 성취하고야 만다!' 이러한 결심이 아니면
도저히 이 공부는 성취하지 못한다.
고인이 말씀하기를,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한번 깜작이지 않는 사람이라야
공부를 성취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말하노니, "청상과부가 외동아들이 벼락을
맞아 죽어도 눈썹 하나 까딱 이지 않을 만한 무서운 생각이 아니면 절대로 이
공부할 생각을 말아라"고 하겠다.
천근을 들려면 천근 들 힘이 필요하고, 만근을 들려면 만근들 힘이 필요하다.
열근도 못 들 힘을 가지고 천근 만근을 들라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면
미친 사람일 것이다. 힘이 부족하면 하루바삐 힘을 길러야 한다.
자기를 낳아 길러준 가장 은혜 깊은 부모가 굶어서 길바닥에 엎어져 죽더라도 눈
한번 거들떠보지 않는 무서운 마음, 이것이 고인의 결심이다.
제왕이 스승으로 모시려 하여도 복을 베면 베었지 절대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고인의 지조이다.
사해의 부귀는 풀잎 끝의 이슬 방울이요, 만승의 천자는 진흙 위의 똥덩이라는
이런 생각, 이런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야 꿈결 같은 세상 영화를 벗어나 영원불멸한
행복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털끝만한 이해로써 칼부림이 나는, 소위 지금의
공부인과는 하늘과 땅인 것이다.
다 떨어진 누더기로써 거품 같은 이 몸을 가리고 심산 토굴에서 감자나 심어 먹고
사는, 최저의 생활로써 최대의 노력을 하여야 한다.
오직 대도를 성취하기 위하여 자나깨나 죽을 힘 다해서 공부해야 한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키지 않으면 대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한다.
사람 몸 얻기도 어렵고, 불법 만나기도 어렵다. 모든 불보살은 중생들이 항상 죄
짓는 것을 보고 잠시도 눈물 마를 때가 없다고 한다.
중생이란 알고도 죄 짓고 모르고도 죄 짓는다. 항상 말할 수 없이 많이 지은
죄보로써 사생육도를 돌아다니며,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 몸
얻기란 사막에서 풀잎 얻는 것과 같다. 설사 사람 몸 얻게 된다 하더라도 워낙
죄업이 지중해서 불법 만나기란 더 어렵고 어렵다. 과거에 수많은 부처님이
출현하시어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건만 아직껏 생사고를 면치 못한 것을 보면,
불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것이다.
이렇게 얻기 어려운 사람 몸을 얻어 더 한층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으니,
생명을 떼어놓고 공부를 하여 속히 이 한 물건을 깨쳐야 한다.
사람의 생명은 허망해서 믿을 수 없나니, 어른도 죽고, 아이도 죽고, 병든 사람도
죽고, 멀쩡한 사람도 죽는다. 어느 때 어떻게 죽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생명이니 어지 공부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리오?
이 물건을 깨치기 전에 만약 죽게 된다면, 또 짐승이 될는지, 새가 될는지, 지옥에
떨어질는지, 어느 때 다시 사람 몸 받아서 불법을 만나게 될는지, 불법을 만나도
최상 최고의 길인 이 이 한 물건 찾는 공부를 하게 될는지, 참으로 발 뻗고 통곡할
일이다.
이다지도 얻기 어려운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에 공부하여
이 몸을 건지리오?
제일도 노력, 제이 제삼도 노력, 노력 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노력한 그만큼 성공하는 법이니, 노력하고 노력할지어다.
2. 상주불멸
부처님께서 도를 깨치고 처음으로 외치시되 "기이하고 기이하다. 모든 중생이 다,
항상 있어 없어지지 않는 불성을 가지고 있구나! 그것을 모르고 헛되이 헤매며
한없이, 고생만 하니, 참으로 안타깝다"고 하셨다.
이 말씀이 허망한 우리 인산에게 영원불멸의 생명체가 있음을 선언한 첫소식이다.
그리하여 암흑 속에 잠겼던 모든 생명이 영원한 구제의 길을 얻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으랴! 억만겁이 다하도록 예배드리며 공양을 올리고
찬탄하자.
영원히 빛나는 이 생명체도, 도를 닦아 그 광명을 발하기 전에는 항상 어둠에
가려서 전후가 캄캄하다. 그리하여 몸을 바꾸게 되면 전생 일은 아주 잊어 버리고
말아서, 참다운 생명이 연속하여 없어지지 않는 줄은 모른다.
도를 깨치면 봉사가 눈뜬 때와 같아서 영원히 어둡지 않아, 천번 만번 몸을
바꾸어도 항상 밝다. 눈뜨기 전에는 몸 바꿀 때 아주 죽는 줄 알았지만 눈뜬 후는
항상 맑으므로, 몸 바꾸는 것이 산 사람 옷 바꿔 입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눈뜨기 전에는 항상 업에 끄달려 고만 받고 조금도 자유가 없지만, 눈을 뜨면
대자유와 대지혜로써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실생활에서 보면, 아무리 총명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도 도를
깨치기 전에는, 잠이 깊이 들었을 때는 정신이 캄캄하여 죽은 사람같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조를 깨친 사람은 항상 밝기 때문에 아무리 잠을 자도 캄캄하고
어두운 일이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참으로 도를 깨쳤나를 시험하려면 잠을 자 보면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천하없이 크게 깨친 것 같고 모든 불법 다 안 안 것
같아도, 잠잘 때 캄캄하면 참으로 깨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큰 도인들이
여기에 대해서 가장 주의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명과 암을 초월한 절대적인
광명이니, 곧 사물의 법성이며, 불성 자체이다.
상주불멸하는 법성을 깨치고 보면, 그 힘은 상상할 수도 없이 커서 비단 세속의
학자들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재가 말하는 법성은 깨치고
보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일시에 나타나서
천만년이 다하도록 그 법성을 설명하려 하여도 털끝 하나만큼도 설명하지 못할 만큼
신기하다. 시방허공이 넓지마는 법성의 넓이에 비교하면 법성은 대해 같고
시방허공은 바다 가운데 조그마한 거품과 같다. 허공이 억천만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지만 법성의 생명에 비교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하다.'고 하시니,
이것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설명이다. 이렇듯 거룩한 법을 닦게 되는 우리의
행복을 어디다 비유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인은 이 법문 한마디 들으려고 전신을 불살랐으니, 이 몸을 천만 번
불살라 부처님께 올려도 그 은혜는 천만 분의 일도 갚지 못할 것이다. 오직
부지런히 공부하여 어서 빨리 도를 깨칠 때, 비로소 부처님과 도인스님들의 은혜를
일시에 갚는 대이니, 힘쓰고 힘써라!
3. 위법망구
*혜가대사
달마가 처음으로 법을 전하려고 중국에 가서 소림사 토굴 속에 들어가 9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그때 신광이란 중이 있었는데, 학식이 뛰어나
천하에 당할 사람이 없었다. 학문으로써는 대도를 알 수 없는 줄을 알고 달마를
찾아가서 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돌아보지도 않았다. 섣달 한창 추운
계절인데, 하루는 뜰 밑에 서서 밤을 지새니 마침 눈이 와서 허리까지 묻혔다.
그래도 신광은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섰으니 달마가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돌아보며 "이 법은 참으로 무서운 결심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니, 너 같은 보잘것없는 심신으로 무얼 하겠느냐?"고 꾸짖으며 "썩
물러가라" 하였다. 신광은 그 말을 듣자 칼을 들어 팔을 끊어 달마대사에게 바치고
도를 구하는 결심을 표시했다. 달마대사는 그제서야 머물기를 승낙하고 법을
가르치니, 신광은 나중에 법을 전한 유명한 2조 혜가대사이시다.
*왕화상
혜통스님은 신라 사람이다. 그 당시 선무외화상이 인도로부터 중국에 들어와 법을
편다는 말을 들은 혜통스님은 수륙만리를 멀지 않게 생각하고 신라에서 중국으로
선무외화상을 찾아갔다.
가서 제자로 받아 줄 것을 아무리 간청하여도 거절당하였다. 그렇게 3년 동안이나
온갖 노력을 다하여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시동 거절당하였다.
하루는 큰 쇠화로에다 숯불을 가득 담아 그것을 이고 무외스님의 방 앞에 가서 서
있었다. 화로가 달아서 머리가 익어 터지니 소리가 크게 났다. 무외스님이 놀라서
나와 보고 급히 화로를 내려놓고 "왜 이러느냐?"고 물으니, 혜통이 대답하기를,
"제가 법을 배우러 천리만리를 멀다 않고 왔습니다. 만약 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신다면 몸이 불에 타서 재가 되어 날아 갔으면 갔지, 죽은 송장으로 절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무외스님은 그 기개를 인정하여 터진 곳을 손으로
만져 합치고 법을 가르쳐 주기로 승낙하였다. 그리하여 크게 성공해서 신라로
돌아와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그후 머리가 나은 곳에 큰 흉터가 졌는데 왕자
모양이 되어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왕화상이라고 불렀다.
*포모시자
포모시자 초현 통선사는 당나라 때 사람이다. 젊었을 때 육관대사 벼슬을 하다가
홀연히 지상의 허망을 깨달아 벼슬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그 당시 나무 위에
새집처럼 집을 짓고 사는 이가 있었으니, 유명한 조과선사이다. 찾아가 '법을
배우겠다'하니 스님은 절대로 듣지 않았다. 그래도 가지 않고 모든 시봉을 하며
날마다 법 가르쳐 주지만을 지성으로 빌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법을 가르쳐 줄까
기다리다가, 세월이 흘러 16년이나 되어도 한말도 일러주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그때는 하도 기가 막혀서 그만 가려고 하니 조과스님이 물었다.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다른 곳으로 불법을 배우러 갑니다."
"불법 같으면 나에게 조금은 있다."
하며 포모를 들고 확 부니, 그것을 보고 초현은 확철히 깨쳤다. 그리고 오랫동안
시봉하다가 나중에 출세해서 큰 도인이 되었으니, 그를 세상에서는 포모시자라
불렀다.
*자명선사
자명선사는 임제종의 대표적인 조인이다. 분양화살 밑에서 지내면서 추운
겨울에도 밤낮으로 정진하며, 밤이 되어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다리를 찌르며
탄식하기를, "고인은 도를 위하여 먹지도 아니하고 자지도 않았거늘, 나는 또한 어떤
놈이기에 게으르고 방종하여 살아서는 때에 보탬이 없고 죽어서는 후세 이름 없으니
너는 무엇하는 놈이냐?" 하였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공부하니, 후에 크게 깨쳐
분양선사의 도풍을 크게 떨쳤다.
*불등선사
불등선사는 불감스님 밑에서 지낼 대 하도 공부가 되지 않아서. 크게 분심을 내어
'만약 내가 금생에 철저히 깨치지 못하면 맹세코 자리에 눕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49일간을 기둥에 기대어 서기만 하고 조금도 앉지도 않고 꼭 서서 공부를 하여
마침내 크게 깨쳤다.
*도안선사
도안선사는 중국 진나라 때 사람이니, 천고에 드문 천재였으나 도를 깨치려고
홀로 20년간 방에 들어앉아서 죽을 힘을 다하여 공부한 끝에 마침내 깨쳤다.
*이암선사
이암 권 선사는 공부할 적에, 해가 지면 눈물을 흘리며 "오늘도 또 이렇게 헛되이
보냈구나!" 하며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리하여 누구와도 절대로 말을 건네지
않고 지내며 정진하였다.
4. 수도팔계
억천만겁토록 생사고해를 헤매다가, 어려운 일 가운데도 어려운 사람 몸을 받고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꼬.'
철석 같은 의지, 서릿발 같은 결심으로 혼자서 만 사람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듯,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마침내 물러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야만 한다. 오직
영원한 해탈, 즉 '성불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한다'는 굳은 경의로써 정진하면 결정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1) 절속
세속은 윤회의 길이오, 출가는 해탈의 길이니, 해탈을 위하여 세속을 단연히 끊어
버려야 한다.
부모의 깊은 은혜는 출가수도로써 보답한다. 만약 부모의 은혜에 끌리게 되면
이는 부모를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이니, 부모의 길 위의 행인과 같이 대하여야 한다.
황벽 희운선사가 수천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황벽산에 주석하였다. 그대 노모가
의지할 곳이 없어서 아들을 찾아갔다. 희운선사가 그 말을 듣고는 대중들에게
명령을 내려 물 한 모금도 주지 못하게 하였다. 노모는 하도 기가 막혀 아무 말
못하고 돌아가다가, 대의강가에 가서 배가 고파 엎어져 죽었다. 그리고 그날 밤
희운선사에게 현몽하여 "내가 너에게서 물 한 모금이라도 얻어 먹었던들, 다생으로
내려오던 모자의 정을 끊지 못해서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쫓겨나올 때 모자의 깊은 애정이 다 끊어져서 그 공덕으로 죽어 천상으로 가게
되니, 너의 은혜는 말 할 수 없다"고 하며 절하고 갔다 한다.
부처님은 사해군왕의 높은 지위도 헌신짝같이 벗어던져 버렸으니, 이는 수도인의
만세모범이다.
그러므로 한때의 환몽인 부모 처자와 부귀영화 등 일체를 희생하여 전연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수도에만 전력하여야 한다.
또 수도에는 인정이 원수다. 인정이 두터우면 애욕이 아니더라도 그 인정에
끄달리어 공부를 못하게 된다. 아무리 동성끼리라도 서로 인정이 많으면 공부에는
원수인 줄 알아야 한다. 서로 돕고 서로 생각하는 것은 좋은 것 같지만 이것이
생사윤회의 출발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서로 싸운 사람같이 지내라"고 고인도
말씀하였다.
일체 선인악업을 다 버리고, 영원의 자유와 더불어 독행독보 해야 한다. 일반에
있어서 일대 낙오자가 되어 참으로 고독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무상대도는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니 일반인과는 삼팔선을 그어 놓고 살아야 한다. 삼팔선을 터놓고
일반인과 더불어 타협할 때 벌서 엄벙덤벙 허송세월 하다가 아주 죽어 버리는 때를
보내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2) 금욕
욕심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색욕이다. 색욕 때문에 나라도 방치고 집안도
방치고 자기도 망친다. 이 색욕 때문에 나라를 다 망쳐도 뉘우칠 줄 모르는 것이
중생이다.
그러므로 수도하는 데도 이것이 제일 방해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것이 하나뿐이기 다행이지, 만약 식욕 같은 것이 둘만 되었던들 천하에
수도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색욕이란 무서운 것이니, 이 색욕에 끄달리게 되면 수도는 그만두고라도
지옥도 피할래야 피할 수 없으니, 도를 성취하고 실패하는 것은 색욕을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데 달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 무서운 색욕을 근본적으로
끊으려면 도를 성취하기 전에는 안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도를 성취하기 전에는 네 마음도 믿지 말라"고 하셨다.
만약 '색욕을 끊지 않아도 수도하는 데 관계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자기가 색욕에 끄달리어 남까지 지옥으로 끌고 갈 큰 악마인 줄 깊이 알고 그 말에
절대 속지 않아야 한다.
영가스님 같은 큰 도인도 항상 색욕을 경계하라 말씀하였다.
"차라리 독사에게 물려 죽을지언정 색은 가까이하지 말아라. 독사에게 물리면 한
번 죽고 말지마는 색에 끄달리면 세세생생 천만겁토록 애욕의 쇠사슬에 얽매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니 피하고 또 멀리하라."
이 얼마나 지당한 말씀인가?
만약 이것을 끊지 못하면 항상 애욕만 머리에 가득 차서 도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하여 무한한 고의 세계가 벌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다.
"색욕을 끊지 못하고 도를 닦으려 한다는 것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이다."
예로부터 참으로 수도하는 사람이 자기의 생명은 버릴지언정 색은 범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니,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서로서로 멀리하여야 한다. 만약
가까이 하면 결국은 서로 죽고 마는 것이니, 서로서로 범과 같이 무서워하고
독사같이 피하여야 한다.
어떠한 인격자라도 이성을 믿지 말고 친근하지 말지니, 성과를 증득하기 전에는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성들의 호의는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지 사절하여야 한다.
오직 영원한 자유를 위하여 일시적인 쾌락을 끊지 못하면, 이는 인간이 아니요,
금수보다도 못한 것이다.
생사윤회의 근본은 애욕에 있으니 애욕을 끊지 않으면 해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녀가 서로서로 멀리하는 것이 성도하는 근본이니, 절대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3) 천대
천하에 가장 용맹스러운 사람은 남에게 질 줄 아는 사람이다. 무슨 일이든지
남에게 지고 밟히고 하는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다.
천대받고 모욕받는 즐거움이여,
나를 무한한 행복의 길로 이끄는 도다.
남에게 대접받을 때가 나 망하는 때이다. 나를 칭찬하고 숭배하고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나의 수도를 제일 방해하는 마구니이며 도적이다.
중상과 모략 등의 온갖 수단으로 나를 괴롭히고 헐뜯고 욕하고 해치고 괄시하는
사람보다 더 큰 은인은 없으니, 뼈를 갈아 가루를 만들어 그 은혜를 갚으려 해도 다
갚기 어렵거늘 하물며 원한을 품는단 말인가?
나의 공부를 방해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해 주고 참는 힘을 북돋아 주어 도를
일취월장케 해주니,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을까?
칭찬과 숭배는 나를 타락의 구렁으로 떨어뜨리나니 어찌 무서워하지 않으며,
천대와 모욕처럼 나를 굳세게 하고 채찍질 하는 것이 없으니 이 어찌 은혜가
아니랴.
그러므로 속담에도 말하지 않았는가.
'미운 자식 밥 많이 주고, 고운 자식 배 많이 때린다'
참으로 금옥 같은 말이다.
항상 남이 나를 해치고 욕할수록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나는 그 사람을 더욱더
존경하며 도와야 한다.
한산과 습득스님이 천태산 국청사에 있으면서, 거짓 미친 행동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모욕과 천대를 받고 있었다.
그 주위 지사가 성인인 줄 알고 의복과 음식을 올리며 절하니 한산과 습득스님이
크게 놀라 외쳤다.
"이 도적놈들아, 이 도적놈들아!"
그리고는 도망쳐 달아나서는 다시 세상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옹스님은 남에게 대접받지 않고 미움과 괄시 받기 위해서 일부러
도적질을 다 하였다.
이것이 공부인의 진실방편이다.
최잔고목!
부러지고 이지러진 마른 나무 막대기를 말함이다.
이렇게 쓸데없는 막대기는 나무꾼도 돌아보지 않는다. 땔나무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땔 물건도 못 되는 나무 막대기는 천지간에 어디 한 곳 쓸 곳이 없는
아주 못 쓰는 물건이니, 이러한 물건이 되지 않으면 공부인이 되지 못한다.
결국 저 잘난 싸움마당에서 춤추는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아서, 공부 길은 영영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세상에서 아무 쓸 곳이 없는 대낙오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영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 머리고,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버림받는 사람, 어느 곳에서나
멸시당하는 사람, 살아 나가는 길이란 공부 길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불법 가운데도 버림받은 사람, 쓸데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영원한 자유를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천태 지자대사 같은 천고의 고승도 죽을 때
탄식하였다.
"내가 만일 대중을 거느리지 않았던들 육근청정의 성위에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어른 노릇하느라고 오품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지자대사 같은 분도 이렇게 말씀하였거늘, 하물며 그 외 사람들이랴.
(4) 하심
좋고 영광스러운 것은 항상 남에게 미루고, 남부끄럽고 욕되는 것은 남모르게
내가 뒤집어쓰는 것이 수도인의 행동이다.
육조대사가 말씀하셨다.
"항상 자기의 허물만 보고 남의 시비, 선악은 보지 못한다."
이 말씀이야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눈이다.
내 옳음이 추호라도 있을 때에는 내 허물이 태산보다 크다. 나의 옳음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라야 조금 철이 난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든지 온통 내 허물만 보이고, 남의 허물은 볼래야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나 옳고 너 그른 싸움'이니, 나 그르고 너 옳은 줄만 알면 싸움이
영원히 그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깊이 깨달아 '나 옳고 너 그름'을 버리고 항상
나의 허물, 나의 잘못만 보아야 한다.
법연선사가 말씀하셨다.
"20년 동안 죽을 힘을 다해서 공부하니, 이제 겨우 내 부끄러운 줄 알았다."
'나 잘났다'고 천지를 모르고 어깨춤을 추며 어리석음에서 조금 정신을 차린
말씀이다.
뉴튼은 천고의 큰 물리학자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훌륭하다'고 많이
존경하였으나 뉴튼 자신은 그것을 이해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데, 왜 자기를
대학자로 취급하는지 의심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말하였다.
"우주의 진리는 대해같이 넓고 깊다. 그러나 나는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이나 줍고
노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여, 진리의 바다에는 발 한번 적셔 보지 못했다."
이 말도 자기의 어리석음을 조금 짐작하는 말이다.
서양의 제일가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항상 크게 외쳤다.
"나는 단지 한가지만 안다. 그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볼 때, 세상 사람들은 참으로 저 못난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요, 다 저 잘나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임제종의 중흥조인 법연성사의 말씀을 잊지 말자. 누가 법문을 물으면 항상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천하의 어리석은 사람이여,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떠드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상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위대한 인물은, 오로지 모든 사람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잘나지 못함을 지각하는만큼 그 사람의 인격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잘나지 못함을 철저히 깨달아 일체를 부처님과 같이 섬기게 되면, 일체가
나를 부처님과 같이 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낮고 낮은 곳이 자연히
바다가 되나니, 이것은 일부러 남에게 존경을 받으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남에게 존경을 받을 생각이 있으면, 남이 존경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내 몸을 낮추고 또 낮추어 밑 없는 곳까지 내려가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더라."
공자가 노자를 보러 가니, 노자가 말하였다.
"그대를 보니 살과 뼈는 다 썩고 오직 입만 살았구나! 큰 부자는 재산을 깊이
감추어 없는 것같이 하고 어진 사람은 얼굴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하나니, 그대의 교만한 행동과 도도한 생각을 버려라. 무엇을 알기에 그렇게
잘난 척하는가?"
공자가 듣고 크게 탄복하여, 노자를 '용과 같다'고 하였다. 노자가 또 공자에게
말하였다.
"내 부탁하노니 누구든지 총명한 사람이 그 몸을 망치는 것은 다 남의 허물을 잘
말하기 때문이니, 부디부디 조심해서 남의 나쁜 것과 그른 것을 입밖에 내지
말아라."
이 두 분은 지상에서 큰 성인이라 존경하는 바이다. 서로 처음 만났을 적에 이런
말로써 경계하니, 누구든지 일생 동안 지켜도 남을 말들이다.
하심의 덕목을 몇 가지 적어 본다.
*도가 높을수록 마음은 더욱 낮추어야 하니,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며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긴다.
*어린이나 걸인이나 어떠한 악인이라도 차별하지 말고 극히 존경한다.
*낮은 자리에 앉고 서며 끝에서 수행하여 남보다 앞서지 않는다.
*음식을 먹을 때나 물건을 나눌 때 좋은 것은 남에게 미루고 나쁜 것만 가진다.
*언제든지 고되고 천한 일은 자기가 한다.
(5) 정진
보든 육도만행은 그 목적이 생사해탈, 즉 성불에 있으니, 성불의 바른 길인 참선에
정진하지 않으면 이는 고행외도에 불과하다.
정진은 일상과 몽중과 숙면에 일여가 되어야 조금 상응함이 있으니, 잠시라도
화두에 간단이 있으면 안 된다.
정진은 필사의 노력이 필수조건이니, 등한, 방일하면 미래겁이 다하여도 대도를
성취하지 못하나니, 다음의 조항을 엄수하여야 한다.
*네 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벙어리같이 지내며 잡담하지 않는다.
*문맹같이 일체 문자를 보지 않는다.
*포식, 간식을 하지 않는다.
*적당한 노동을 한다.
(6) 고행
병 가운데 제일 큰 병은 게으름병이다. 모든 죄악과 타락과 실패는 게으름에서
온다. 게으름은 편하려는 것을 의미하니, 그것은 죄악의 근본이다.
결국은 없어지고마는 이 살덩어리 하나 편하게 해주려고 온갖 죄악을 다 짓는
것이다.
노력 없는 성공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대성공자는 대노력가 아님이 없다. 그리고 이 육체를 이겨내는 그
정도만큼 성공이 커지는 것이다.
발명왕 에디슨이 항상 말하였다.
"나의 발명은 모두 노력에 있다. 나는 날마다 20시간 노력하며 연구했다. 그렇게
30년간 계속하였으나 한번도 괴로운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의 정법이 두타제일인 가섭존자에게로 오지 않았는가?
총림을 창설해서 만고에 규범을 세운 백장스님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편히만 지내려는 생각, 이러한 썩은 생각으로써는
절대로 대도는 성취하지 못한다.
땀 흘리면서 먹고 살아야 한다. 남의 밥 먹고 내 일 하려는 썩은 정신으로써는
만사불성이다.
예로부터 차라리 뜨거운 쇠로 몸을 감을지언정 신심 있는 신도의 의복은 받지
말며, 뜨거운 쇳물을 마실지언정 신심 있는 신도의 음식을 얻어먹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결심 없이는 대도를 성취하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잊지 말고 잊지
말자.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만고 철칙을!
오직 영원한 대자유를 위해, 모든 고로를 참으로 이겨내야 한다.
(7) 예참
일체 중생의 죄과는 곧 자기의 죄과이니, 일체 중생을 위하여 매일 백팔참회를
여섯 번 하되 평생토록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행한다.
그리고 건강과 기타 수도에 지장이 생길 깨에는 모두 자기 업과이니, 1일 3천배를
일주일 이상씩 특별 기도를 한다.
또 자기의 과오만 항상 번성하여 고쳐 나가고, 다른 사람의 시비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8) 이타
수도의 목적은 이타에 있다. 이타심이 없으면 이는 소승의 조이니, 심리적,
물질적으로 항상 남에게 봉사한다.
자기 수도를 위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남에게 봉사하되, 추호의 보수도 받아서는
안 된다.
노인이나 어린아이, 환자나 빈궁한 사람을 보거든 특별히 도와야 한다.
부처님의 아들 리훌라는 10대 제자 가운데서도 가장 밀행제일이라 한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일이라도 귀신도 모르게 한다.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다. 한푼 어치
착한 일에 만냥 어치 악을 범하면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만 손해볼 뿐이다.
예수도 말씀하지 않았는가.
"오른손으로 남에게 물건을 주면서 왼손도 모르게 하라."
세교도 그렇거늘, 하물며 우리 부처님 제자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지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천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행, 실행 없는 헛소리는 천번 만번 해도 소용이 없다.
아는 것이 천하를 덮더라도 실천이 없는 사람은 한 털끝의 가치도 없는 쓸데없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고인은 말하였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나니, 말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또 말했다.
"옳은 말 천 마디 하는 것이 아무 말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니 오직 실행만 있을 뿐 말은 없어야 한다.
5. 참선궁행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설사 억천만겁 동안 나의 깊고 묘한 법문을 다 외운다 하더라도 단 하룻동안
도를 닦아 마음을 밝힘만 못하느니라."
또 말씀하셨다.
"나는 아난과 멀고 먼 전생부터 함께 도에 들어왔다. 아난은 항상 글을 좋아하여
글을 배우는 데만 힘썼기 때문에 여태껏 성불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와 반대로
참선에만 힘써 도를 닦았기 때문에 벌써 성불하였다."
노자도 말씀하셨다.
"배움의 길은 날마다 더하고, 도의 길은 날마다 덜어 간다. 덜고 또 덜어 아주 덜
것이 없는 곳에 이르면 참다운 자유를 얻는다"
옛 도인이 말씀하셨다.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명경과 같이 밝다. 망상의 티끌이 쌓이고 그 밝음을 잃고
캄캄 어두워서 생사의 고를 받게 된다. 모든 망상의 먼지를 다 털어 버리면 본래
깨끗한 밝음이 드러나 영원히 어두움을 벗어나 대자유의 길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학문을 힘쓰는 것은 명경에 먼지를 자꾸 더하는 것이어서 생사고를 더 깊게
한다. 오직 참선하여야 먼지를 털게 되어 나중에는 생사고를 벗어나게 된다."
또 말씀하셨다.
"학문으로써 얻은 지혜는 한정이 있어서 배운 그 범위 밖은 모른다. 그러나
참선하여 마음을 깨치면 그 지혜는 한이 없어, 그 지혜의 빛은 햇빛과 같고,
학문으로 얻은 지혜의 빛은 반딧불과 같아서 도저히 비유도 안 된다."
육조대사는 나무 장수로서 글자는 한자도 몰랐다. 그러나 도를 깨친 까닭에 그
법문은 부처님과 다름없고, 천하없이 학문이 많은 사람도 절대로 따를 수 없었다.
천태스님이 도를 수행하다 크게 깨치니, 그 스승인 남악이 칭찬하며 말했다.
"대장경을 다 외우는 아무리 큰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너의 한없는 법문은
당하지 못할 것이다."
과연 그래서 천고에 큰 도인이 되었다.
역선사는 고봉선사의 법제자이다.
출가해서 "심경"을 배우는데, 3일간에 한 자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 스승이 대단히 슬퍼하니, 누가 보고 "이 사람은 전생부터 참선하던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여 참선을 시키니, 과연 남보다 뛰어나게 잘하였다. 그리하여 크게
깨쳐 그 당시 유명한 고봉선사의 제자가 되어 크게 법을 폈다. 99세에 입적하시어
화장을 하니, 연기는 조금도 나지 않고 사리가 무수히 쏟아져서 사람들을 더 한층
놀라게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방세계에 가득 찬 음식, 의복, 금은보화로써 시방세계의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천만년 예배를 드리면 그 공덕이 클 것이나. 그러나 이 많은 공덕도 고 받는 중생을
잠깐 도와준 공덕에 비하면 천만 분의 일, 억만 분의 일도 못된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다.
부처님 제자로서 자기 생활을 위하여 부처님의 본의를 어기고 부처님 앞에만
'공양 올려라'한다면, 이는 불문의 대역이니 절대로 용서치 못할 것이다.
중생을 돕는 법공양을 버리면, 광대무변한 부처님의 대자비는 어느 곳에서
찾겠는가? 탄식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큰 법공양도 화두만 참구하는 자성공양에 비교하면, 또 억만 분의
일도 못 된다. 참으로 자성공양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백천제불이 칭찬은 감히
꿈에도 못하고 3천리 밖으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영명선사가 말씀하였다.
"널리 세상에 참선을 권하노니, 설사 듣고 믿지 않더라도 성불의 종자는 심었고,
공부를 하다가 성취를 못 하여도 인간과 천상의 복은 훨씬 지나간다."
이러한 말씀들은 내 말이 아니라 시방제불과 조사들이 함께 말씀하신 것이다.
악은 물론 버리지만, 선도 생각하면 안 된다. 선, 악이 모두 생사법이어서 세간의
윤회법이지, 출세간의 절대법은 아니다. 선, 악을 버려서 생각지 말고 오직 화두
하나만 의심하는 것이 참다운 수도인이다.
그러므로 고조사가 말씀하였다.
"대자비심으로써 육도만행, 곧 남을 돕는 큰 불사를 지어 공부를 성취하려는
사람은 송장을 타고 큰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과 같나니라."
주조 스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총림에 와 있으면 10년, 20년 말하지 않고 공부하여라. 그래도 너희를
벙어리라 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공부하여도 성취 못하거든 노승의 머리를 베어
가라."
과연 그렇다. 공부하는 사람은 입을 열어 말만 하게 되면 공부가 끊기는 때이니,
이런 식으로 공부해서 천만년 하여도 소용없다. 오직 항상 계속해서 간단이 없어야
한다.
일본의 도원선사는 일본에 처음으로 선을 전한 사람이다. 중국의 송나라에서
공부를 성취하고 환국하여 처음으로 외쳤다.
"일본은 불법이 들어온 지 벌써 8백년이 되어 각종 각파가 전국에 크게
흥행하지만 불법은 전연 없다. 고려는 조금 불법을 들었고, 중국은 불법이 있다."
이 무슨 말인가?
팔만대장경으로써 온 우주를 장엄하여도 그 가운데 자성을 깨친 도인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송장의 당장에 불과 했던 것이다. 모든 법의 생명이 자성을 깨치는 데
달렸기 때문이다.
자성을 밝히는 선문에서 볼 때에는 염불도 마구니이며, 일체 경전을 다 외워도
외도이며, 대자비심으로써 일체 중생을 도와 큰 불사를 하여도 지옥귀신이다. 모두
다 생사법이지 생사를 벗어나는 길은 되지 못하니, 필경 송장 단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자성을 밝히는 길만이 살 길이다.
그러므로 앙상스님이 말씀하였다.
"'열반경' 40권이 모두 마설이니라."
"열반경"은 최상승경인데, 이것을 마설이라고 하면 일체 경이 전부 마설이 아닐 수
없다. 오직 자성만 믿고 닦아야 한다.
동산 스님이 말씀하였다.
"부처와 조사 보기를 원수와 같이 하여야만이 바야흐로 공부하게 된다."
또 고조사가 말씀하셨다.
"비로자나의 머리 위에 있는 사람이 되어라. 아니, 누구나 다 비로자나부처님의
머리 위에 앉아 있지 않은 사람이 없나니라."
또 말씀하셨다.
"장부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운이 있나니, 어찌 부처의 가는 길을 가리오.
올빼미는 다 크면 그 어미를 잡아먹나니, 공부인도 필경은 이와 같아야 한다."
곧 부처와 조사를 다 잡아먹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때가 부처님의 은혜를 갚게
되는 때이다.
그러므로 적수단도로 살불살조라 한다. 이것이 대낙오자의 일상생활이며
대우치인의 수단 방법이다.
6. 인과악연
만사가 인과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어, 무슨 경과든지 그 원인에
정비례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은 우주의 원칙이다.
콩 심은 데 팥 나는 법 없고 팥 심은 데 콩 나는 법 없나니, 나의 모든 결과는
모두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를 맺는다.
가지씨를 뿌려 놓고 인삼을 캐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미친 사람일
것이다. 인삼을 캐려면 반드시 인삼씨를 심어야 한다.
불법도 그와 마찬가지로, 천만사가 다 인과법을 떠나서는 없다. 세상의 허망한
영화에 끄달리지 않고 오로지 불멸의 길을 닦는 사람만이 영원에 들어갈 수 있다.
허망한 세상 길을 밟으려면 영생을 바라는 사람은 물거품 위에 마천루를 지으려는
사람과 같으니 불쌍하기 짝이 없다.
이것이 생사윤회하는 근본 원칙이니, 대도를 닦아서 불멸을 얻으려는 사람은 모든
행동을 이 원칙에 비추어, 일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영원을 위해서 악인과는 맺지
않아야 한다.
모든 일이 다 내 인과 아님이 없나니, 추호라도 남을 원망하게 되면 이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며 이같이 못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모두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인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만약 원망한다면 명경을 들여다보고 울면서, 명경 속의 사람보고는 웃지
않는다고 성내는 사람이다. 또 몸을 구부리고 서서 그림자 보고 바로 서지 않았다고
욕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어리석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천만사가 전생이건 금생이건 다 내 인과인 줄 깊이 믿어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가 더욱더 노력하여야 할 것이니, 이래야 인과를 믿는 수도인이라 이름할
것이다.
털끝만큼이라도 남을 해치면 반드시 내가 그 해를 받는다. 만약 금생이 아니면
내생, 언제든지 받고야 만다. 그러므로 나를 위하여 남을 해침은 곧 나를 해침이고,
남을 위하여 나를 해침은 참으로 나를 살리는 길이다.
부처님께서 전생에 누더기를 깁다가 모르고 바늘로써 누더기 속에 들어 있는 이
한 마리를 찔러 죽였다. 이 인과로써 성불하여서도 등창이 나서 오랫동안
고생하셨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정업은 면하기 어려우니, 자기가 지은 죄업은 꼭
재앙을 받고 만다.
인과의 법칙은 털끝만치도 어김이 없다. 그러나 출가한 불자로서 수도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해태굴에 빠져서 시주물만 헛되이 소비하는 무리는 하루에 천 명을 때려
죽여도 인과가 없다 하였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오직 부지런히 정진해야 할 것이다. 비극 가운데서도 비극은 스님이 가사 입은
몸으로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게으름만 부리다가, 죽어도 악도에 빠져 사람
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지금 불자로서 사람 몸을 잃지 않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 걱정하고 걱정할
일이다.
7. 이계위사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최후로 부촉하셨다.
"내가 설사 없더라도 계를 스승으로 삼아 잘 지키면 내가 살아 있는 것과 같으니,
부디부디 슬퍼하지 말고 오직 계로써 스승을 삼아 열심히 공부하라. 너희가 계를
지키지 못하면 내가 천년 만년 살아 있더라도 소용이 없나니라."
지당한 말씀이다. 계는 물을 담는 그릇과 같다. 그릇이 깨어지면 물을 담을 수
없고, 그릇이 더러우면 물이 깨끗하지 못한다. 흙그릇에 물을 담으면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흙물이 되고 말며, 똥그릇에 물을 담으면 똥물이 되고 만다. 그러니 계를
잘 지키지 못하면 문둥이 같은 더러운 사람의 몸도 얻지 못하고 악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니 어찌 계를 파하고 깨끗한 법신을 바라리오. 차라리 생명을 버릴지언정
계를 파하지 않으려는 것이 이 때문이다.
자장율사는 신라 귀족의 아들로서 사람됨이 하도 훌륭하여, 국왕이 속인으로
환속케 하여 대신으로 삼으려고 자주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간청하여도
오지 않으니 왕이 크게 노하여 사신에게 칼을 주며 '몰을 베어 오라'고 하였다.
사신이 가서 전후사를 자장스님께 알리니, 스님은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차라리 하룻동안이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계를 파하고서 백년 동안
살기를 원치 않노라."
사신이 이 말을 듣고 차마 죽일 수 없어 왕에게 돌아가 사실대로 아뢰니, 왕도
노기를 거두고 더욱 스님을 존경하였다.
고인이 말씀하셨다.
"알고서도 되를 지으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지나니라."
수도인은 더욱 명심하고 명심해야 할 것이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퇴옹당 성철선사의 '오도송'--
맺음말
진흙 속에 깊이 묻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아볼 수 없는 옥, 참으로 무한한
가치와 영원한 생명을 가진 보배이다.
진흙을 떠나 지상으로 나올 때 벌써 그 옥은 끼진 물건이며, 따라서 두푼 어치
가치도 없다. 천 사람 만 사람이 밟고 다녀도 옥인 줄 모를 그때, 햇빛보다 더 밝고
가을보다 더 맑았다.
사람의 손에 들어와 말할 수 없는 귀여움 받는 말, 욕심이 첩첩이 쌓이고 악심에
거듭거듭 묶이어 똥보다 더럽고 창부보다 더 천하게 되니, 참으로 통곡하고 통곡할
노릇이다.
오직 진흙 속에 깊이깊이 묻혀 영원토록 짓밟히기를 바라는, 이것이 수도인의
참다운 풍치이다.
넓고 넓은 천지, 끝없이 흐르는 세월!
그동안 천만번 몸을 바꾸어 사생육도를 헤매며 돌아다녔으니, 큰 바닷물보다 많은
어머니의 젖을 먹었고 태산보다 높은 뼈를 뿌렸다.
내 뼈 묻히지 않은 곳 어디 있으며, 내 피 흘리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부모형제 되지 않았던 중생 어디 있으며, 처자권속 괴지 않았던 중생 어디 있으랴.
애욕이 불타고 이양에 굶주리며, 지치고 시달리어 잠깐도 편할 때가 없다.
하루 일만 생각해도 가슴이 찢어지고 창자가 끊어지나니, 천생만생의 기나긴
인연을 생각하면 한숨이 바람이 되고 눈물이 바다 되어도 오히려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앞으로 또 닥쳐올 일! 미래겁이 다할 것이 아닌가!
이런 줄 알면서도 뼈가 아리고 살이 떨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목석보다
더한 물건이다.
수도인은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고, 바늘로 입을 끌어매고서, 오로지 일체 만사를
다 버리고 영원불멸하는 자성을 밝힐 따름이다.
책,영화,리뷰,
산은 산 물은 물 [성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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