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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서재필, 우장춘

by Casey,Riley 2023.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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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우장춘.


  서재필(1863∼1951)
  독립 운동가이다.  1884년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미국으로 가서 그
나라 국민이 되었다.  1896년 귀국하여  독립 신문 을 발간하고 이상재와 독립 협회를 만들
고 독립문을 세웠다.  1925년 호놀룰루의 범 태평양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였
으며, 해방 뒤 과도정부의 최고 경무관이 되었다.  1948년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1. 소용돌이

  서울 서대문 밖 영천.
  그 곳에 파리의  개선문 을 본뜬  독립문 이 서 있다.  독립문은 어째서 그 곳에 세워졌을
까? 독립문이 세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1947년 11월 23일, 꽤나 쌀쌀한 날씨였다.  하지만 이 날, 독립문 광장에는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모였다.  내빈석에는 서울 시장과 입법 의원 의장 김규식 박사, 그리고 미군정 장
관 딘 소장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은 독립문 건립 50주년 기념식을 올리기 위해 모여 있었
다.
  식이 진행되고, 사회자가 소개했다.
   다음은 송재 서재필 박사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시민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가벼운 감탄의 물결이 일어났다.  서재필 박사야말로 이 독립
문을 세운 장본인이 아닌가.
  송재의 나이는 이 때 여든다섯 살로서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조국의 동포 여러분…….
  그는 영어로 연설을 계속해 나갔다.  통역관이 그 말을 우리말로 전해 주었다.
   50년 전 오늘, 나는 바로 이 곳에다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당시 조선의 독립은 껍데기뿐
인 것으로 참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구적 건축물을 짓고  독립문 이라는
이름을 붙여, 독립이라는 말이 조선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지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쉰 살 먹은 독립문은 36년 동안의 저 비바람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아 자기를 낳아 준 서
재필 박사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독립문의 수난이 곧 이 민족 이 나라의 가시밭길이었고, 송재 서재필의 일생이었다.

  전라도 동복군 가내리(지금의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 있는 성주 이씨 이기대 집에
서 그의 다섯째 딸이 아기를 낳으려 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산모에게 진통이 왔으나 아기는 좀처럼 태어나지 않았다.  친정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용기를 복돋아 주었다.
   첫아이가 아니니까 이번에는 순산할 게다.
  어느덧 날이 밝아 창 밖이 훤해졌다.  이 때, 뒤꼍 참죽나무에서 까치가 울었다.
   까치가 울고 있구나.  이번에도 아들인가 보다.
  그 말처럼 아기는 태어나며 남아답게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었다.  식구는 모두들 기뻐하
며 아기를 목욕시키는 한편, 산모에게 줄 쌀밥과 미역국 끓이기에 바빴다.
  그러자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안채에까지 들려 왔다.  무슨 일인가 하여 여인들은 귀를
기울였다.
   나리 마님, 기뻐하십시오.  서울 가신 서방님께서 과거에 급제하셨답니다.
   호오, 경사가 거듭되었구나.
  이기대는 안에까지 들릴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1863년 10월 2일 태어났다.(일설엔 1864년생.) 아버지는 달성 서씨로 광언이라
했다.  서광언과 부인 이씨 사이에는 재춘, 재필, 재창, 재우의 네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다.
  재필이 태어나던 날, 아버지 서광언이 과거에 급제하여 경사가 겹쳤다 하여 이름을  쌍경
으로 불렀다.
  당시 동복 군수로 서광하라는 사람이 있었다.  서광언과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하루는 서 군수가 서 진사에게 말했다.
   나에게 아들이 없으니 자네의 둘째 아들 쌍경을 내 양자로 주지 않겠나
  그 당시에는 일가 중 자식 없는 집에 양자로 보내는 일이 흔했다.  유교 사상이 뿌리 깊
은 사회에선 양자를 들여서라도 조상의 제사를 끊기지 않는 게 첫째 의무였다.
  이래서 쌍경은 서광하의 양자가 되었다.  서광하는 그 할머니가 조선조 제 21대 영조의
비 정성 왕후였고, 부인이 당시의 세도가 안동 김씨 출신으로, 서재필의 일생도 이 때 결정
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광하는 임기가 차서,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진잠(지금의 충청 남도 대덕구)으로 돌아갔
다.  그리고 다시 은진군 화석(충남 논산시 구자곡면 화석리)으로 옮겼다.
  어느 날, 일곱 살이 된 쌍경은 양아버지한테 불려 갔다.  양아버지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
다.
   오늘부터 네 이름을 집안 돌림자를 써서 재필이라고 하겠다.
   네, 아버님.
  며칠 뒤, 재필은 하인과 함께 서울 외숙댁으로 갔다.  외숙 김성근(1835∼1981)은 글씨를
잘 썼고, 개화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호를 해사라 했고, 862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도승지, 이조 판서, 예조 판서를
역임했다.
  따라서 그의 집에는 문객이 많았고, 재필은 그런 사람들로부터  사서 삼경 을 배웠다.  과
거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다.
  재필은 어느덧 열네 살이 되었다. 해사의 집에는 당시의 재주 많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
었다.  고균 김옥균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재필을 몹시 귀여워했다.  고균도 안동 김씨
로 스물두 살 때 장원 급제하여 이 때는 벼슬이 예문관 부교리였다.  고균은 재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물었다.
   그래, 요즘에도 글읽기를 열심히 하느냐?
   네.
   어디  대학 의 한 구절을 외어 보아라.
   처음부터 할까요?
   그래, 어디 해 보렴.
  고균은 별 관심을 갖지 않고 눈을 감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재필이 그 어려운  대학 을
처음부터 줄줄 외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만 해라. 그러다가는 끝까지 다 외겠구나.
   전 다 욀 수 있어요.   대학 뿐 아니라  논어 도  중용 도…….
  고균은 눈을 크게 떳다.
   그렇다면 판서님께 여쭈어 너를 전강(임금님이 직접 보이는 일종의 과거)에 내보내야겠
다.
  재필은 스무 명 남짓의 아이들과 함께 전강을 치렀고, 거기서 당당히 장원 급제를 했다.
  이 때문에 말을 타고 거리를 다니며 장원 급제했음을 알리는 영광을 누렸다.
  그 무렵 흥성 대원군이 개혁 정치를 실시하다 그를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10년 만에 물러
나자, 고종의 왕비인 명성 황후와 그 일족이 세력을 잡았다.
  이 때 일본 군함이 강화도 앞바다에서  운요호 사건 을 일으켰고, 이것을 빌미로 일본과
 강화도 조약 을 맺게 되었다.  그들은 먼저 경제 침략부터 해 왔다.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
이 개항되고, 수신사로 김기수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김기수는 돌아와서  일동기유 라는 책을 펴냈으며,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
다.
   우리가 오랑캐라고 깔보던 왜적이 이렇듯 발전했단 말인가!
   아무튼 그들은 군함을 몰고 와서 국교를 트자고 위협하지 않았던가! 지금 왜국 상인들은
물밀 듯이 들어와 성냥이며 비누며 남포등 따위를 팔고 있네.
   우리도 빨리 정신차려야겠어.  산업을 일으키고 국방도 튼튼히 해야 하네.  그러자면 먼
저 백성이 깨는 개화부터 해야지.
  재필의 외숙 김성근의 사랑에는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등이 모여 진지하게 이야
기하고 있었다.  소년 서재필은 그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은 한창 뻩어나는 힘을 가지고 계속 우리 나라에 압력을 가했다.  1877년 10
월에는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라는 자가 나타나 일본 공사관 설치와 2개 항구를 더 개항하
라는 요구를 했다.
  하지만 왕비를 비롯한 조정에서는 되도록 개항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우리 나라는
산업도 보잘 것 없었지만 상업도 발달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참에 일본 상인들이 들어온
다면 경제권을 모두 빼앗길 것이 뻔했으므로 개항을 되도록 늦추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버틸 수도 없어 1880년 7월, 원산을 개항시켜 주었다.
  재필이 열다섯 살 때,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청나라 사람 황준헌이 쓴  조선책
략 을 고종 황제께 바쳤다.  이 책의 골자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선 한국이 중국,일본
과 손잡고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왜별기 라는 특별 부대가 만들어졌다.  왜인의 훈련을 받는 군대란 뜻이다.
   여보게, 왜별기의 훈련하는 광경을 보았나? 정말 꼴불견이더군.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발을 맞추는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더군.
  사람들은 일본이 예로부터 우리에게 굽실거리던 나라이고, 최근에는 서양의 오랑캐 사상
을 받아들였다 하여 얕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보수적 생각은 경상도 유생 이만손 등이 올린  만인소 로 나타났다.  만인소는 글자
그대로 만 명이 공동으로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다는 것이지만, 수백 명이 연명한 일종의
진정서였다.
   오랑캐의 것인 사교(천주교)와  조선책략 의 주장은 모두 요사스런 것이니 단호히 처벌하
도록 하시옵소서.
  상소문은 잇따랐다.
  이런 속에서 정부에서는 김윤식을 영선사에 임명하여 인쇄술 같은 새로운 기술을 배울 유
학생 60여 명을 뽑아 청나라로 인솔토록 했다.
  이 무렵, 재필은 김옥균의 집에 자주 놀러 갔고 거기서 박영효와도 친해졌다.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사위)로 귀족이었지만,  중인 에 속하는 역관 오경석, 한의사 유대치
를 통해 청나라에서 발행된 책을 구하여 서양 지식을 받아들였다.
   자네도 이런 책을 읽어야 하네.
  영효는 자기보다 두 살 아래인 재필을 소탈하게 대해 주었다.  그 당시엔 천주교뿐 아니
라 서양의 학문은 모두  사학 으로 여겼다.  재필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 책들을 보았다.
  그 자리에는 서광범도 있었다.  재필과는 친척으로 아저씨뻘이 되었다.
  서광범은 1880년 증광 별시에 급제하여 이 무렵 예문관 시교로 있었다.  이윽고 김옥균이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화창한 봄날이고 하니, 새절(봉원사)로 놀러 가지 않겠나?
  김옥균의 말에 모두들 찬성했다.  그 절은 영은문이 있는 자리에서 서쪽 산  너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김옥균 일행은 새절로 향했다.
  통도사에서 왔다는 스님이 이들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들 오십시오. 그러잖아도 서방님들께 꼭 보여 드릴 게 있지요.
  스님은 일행을 으슥한 뒷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다락에서 손잡이가 달려 있는 상자를
꺼내 놓았다.
   요지경입니다.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상자 위쪽에 구멍이 있고 유리가 박혀 있었다.  재필이 그 곳에 눈을 대자 스님은 손잡이
를 천천히 돌렸다.
   아, 양복 입은 사람이 움직이고 있다.  마차도 있고 통통배도 있구나.
  손잡이를 돌림에 따라 사진이 움직였다.
  스님은 이 무렵의 개화승인 이동인이었다.  그는 또  만국사기 라는 제목이 붙은 일본 책
을 일행에게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서양 여러 나라의 역사가 이름, 지명등의 간단한 설명
과 더불어 소개되고 있었다.
  요지경에는 별로 감탄하지 않던 김옥균도 이 책에는 흥미를 느꼈던 모양인지 스님에게 물
었다.
   스님, 이런 책을 또 가지고 계십니까?
   아뇨, 소승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이 한 권뿐입니다.
   그러면 이런 책을 구할 수는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책뿐 아니라 그림이나 그 밖의 무엇이든지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지요.
   어디서 구합니까?
   왜국입니다.  소승은 부산 태생으로 왜말도 좀 알고, 왜국에도 몇 번 갔다 온 적이 있지
요.  왜인들은 서양 사람들고 사귀며 갖가지 제도를 배워다가 문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김옥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이 때부터 새절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리고 이동인에
게 일본의 사정을 들었다.
  1882년 4월과 5월에 각각 미국,영국과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특히 한,미 통상 조약을
맺을 때에는  조선책략 을 썼던 황준헌이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여 우리나라에 보내 주어 참
고로 하게 했다.  통상 조약은 독일과도 맺었고, 인천도 개항되었다.
  왕비와 민씨 일파의 이런 정책을 가장 증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람은 흥선 대원군
이었다.  대원군은 쇄국주의자로 보수파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었다.
  그 무렵, 구식 군대의 신설된 별기군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무위,
장어의 두 군영 군인들이 여러 달 동안 봉급을 받지 못하여 원성이 높아지자 이들을 부추겨
군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민겸호, 이최응 등을 죽였고, 서대문밖에 있던 일본 공사관을 불질러 버렸다.  그
리고 다시 창덕궁으로 몰려가 왕비까지 죽이려 했으나 왕비는 이미 탈출한 뒤였다.  이것이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 이다.




  2.  사대당과 개화당

  임오군란을 일으킨 흥선 대원군은 다시 정권을 잡았다.  군란이 일어나자 고종은 당황하
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충주 장호원으로 탈출한 왕비와 비밀 연락이 되면서, 고종
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고종은 김윤식과 어윤종을 청나라에 보내어 군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청나라의 마
건충, 오장경은 군함 세 척에 군대 4500명을 이끌고 남양(화성군) 마산포에 도착했다.  청나
라 군대는 대원군을 초청한다는 형식으로 부대에 청하여 그대로 납치해 청나라로 보내 버렸
다.
  왕비는 청나라의 힘으로 다시 대궐에 돌아왔다.  이 때부터 그들은  사대당 이라고 불렸다.
  한편, 임오군란으로 도망쳤던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역시 군함 세 척과 군대 300명을 데
리고 와서 배상을 요구했다  이 때 맺어진 것이  제물포 조약 이다  이어 신임 일본 공사로
다케조에가 왔고, 김옥균은 이들과 가까워졌다.  사람들은 김옥균과 그 일파를  개화당 이라
불렀다.
  1882년 8월, 박영효가 수신사로 임명되어 종사관 서광범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이번 기회에 고균(김옥균)도 왜국을 보고 오는 게 어떻겠소?
   좋습니다.  앞으로는 젊은 사람이 이 나라 사직을 짊어져야 하니 민영익도 함께 가자고
해야겠군요.
  1883년 4월에는 미국 공사 푸트가 서울에 부임해 왔다.  그러자 왕비가 다시 교리로 복직
한 김옥균에게 의논하듯 물었다.
   미국 공사가 왔는데, 우리도 보빙 대사를 보내야 하지 않겠소? 누구를 보내면 좋을까
요?
   민영익을 보내도록 하시옵소서.  앞으로는 젊은 사람이 나서서 활약해야 합니다.
  왕비는 김옥균의 이 말에 몹시 기뻐했다.  그래서 김옥균에게 물었다.
   김 교리도 무엇인가 직책을 맡고 싶지 않소?  말하자면 승진을 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마마, 황공하오이다.  소신은 포경사가 되고 싶습니다.
   포경사?
   그러하옵니다.  소신이 왜국에 갔을 때 보았는데, 그 나라는 고래잡이에 열을 올리고 있
었습니다. 왜국이 개국하게 된 것도 처음에는 미국이 고래잡이 배의 땔감이나 물을 얻기 위
해서였다고 합니다.
   호호호, 그런 일이 있었소?
   왜인들은 고래를 잡아 그 고기를 즐겨 먹지만 미국은 고래 기름을 짜서 불도 켜고, 기계
에도 쓴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동해에는 고래가 많고 그것을 잡아 외국에 팔면 나라 수입
도 올릴 게 아니겠습니까?
  당시 부산에 와 있던 일본 관리의 아들이 소년 시절의 추억담을 쓴 기록이 있다.  그것을
읽어 보면, 이 무렵 부산 앞바다까지 명태의 큰 무리가 밀려와 발로 밟힐 정도였다고 한다.
그 뒤 일본은 이런 수산 자원마저 쓸어 갔다.
  김옥균은 왕비의 신임을 얻어, 1883년 2월에 승정원 우부승지, 3월엔 새로 생긴 외무아문
(외무부) 참의로 승진했다.  이어 동남 제도 개척사 겸 포경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무렵, 민영익은 전권 대사가 되어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올리고 이어 한국인으로
는 최초의 세계 일주를 했다.
  어느 날, 김옥균은 왕비에게 아뢰었다.
   마마, 젊은 청년을 외국에 많이 보내어 새로운 문물을 배워 오게 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서재필을 비롯하여 60여 명이 일본 유학을 떠났다.  말이 정부에서 보내는 유학
생이지, 김옥균이 부산에 와 있던 일본 상인에게 2만 5천 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빌려 그들
의 유학 비용으로 대 준 것이었다.
   자네들은 일본에 건너가서 각자 원하는 대로 학문이나 기술을 한 가지씩 배우도록 하
게.
  서재필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다른 18명과 함께 도쿄에 있는
도야마 유년 학교(사관 학교에 입학하기에 앞서 들어가는 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일본
말을 몰라 애를 먹었다.  재필이 친구들에게 말했다.
   좋은 방법이 있네.  지금 이 학교에 대마도 출신으로 기네코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일본말을 배우도록 하세.
  대마도(쓰시마)는 우리 나라와 예로부터 관련이 깊은 곳이다.  조선조 시대에는 우리 나라
에 조공을 바쳤고, 우리 나라와 물물 교환을 하지 않고선 살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왜인 가
운데에는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재필 등은 가네코에게 일어를 배우며 군사 교육을 받았다.
  재필은 박영효의 문객이었던 이규환과도 친했다.  또 강원도 사람으로 임씨라는 성을 가
진 사람이 있었는데, 힘이 장사였다.  그는 언젠가 일본인 학생과 언쟁을 벌이다가 일본인
학생을 번쩍 들어서 집어던져 버린 일도 있었다.  그 후로 일본인 학생은 조선 유학생들을
겁내어 얼씬도 하지 못했다.
  재필은 1년 남짓 공부하고, 1884년 4월에 도야마 유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한편, 박영효는 이보다 앞서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뒤 한성부 판윤(서울 시장)으로 있으
면서 갖가지 계획을 세우려고 힘썼다.
   지금 종각부터 동대문까지 가가(추녀 밑에 임시로 만든 가건물, 이것이 곧 가게의 시작
임)가 무질서하게 난립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가를 철거하여 도로를 넓혀야 합니다.
  박영효의 건의에 고종 임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가가의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받
은 수구파 대신들이 이를 반대했다.
  박영효는 이밖에 백성들이 흰 옷 대신 무색 옷을 입도록 장려했고, 유길준을 시켜 신문
발행을 계획게 했다.
  그러나 박영효가 광주 유수로 좌천되자 이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뒤 유길준은 민
영익의 수행원이 되어 미국에 가게 되었고, 그 곳에 계속 머물러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
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한성 판윤이 된 김윤식의 주선으로 1883년 10월  한성 순보 가 발행되었
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이다.
  1884년 초에는,  청,불 전쟁 이 있었다.  프랑스는 이 전쟁의 대가로 인도차이나(베트남,크
메르,라오스)를 식민지로 차지했다.  전쟁이 나자, 청나라는 조선에 와 있던 병력을 일부 철
수시켜  전선으로 보냈다.
  김옥균은 국내 정세가 미묘하게 돌아가자, 적극적으로 개화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청나라가 병력을 대부분 철수시킨 이 때야말로 사대당을 쓰러뜨릴 기회요!
  김옥균은 개화를 하여 나라를 빨리 발전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
에도 건너가차관 교섭을 했고, 그 돈으로 신식 군대 창설과 나라의 재정을 튼튼히 하려는
계획을 가졌다.  그러나 차관 교섭은 실패하였다.  김옥균은 다시 일본 공사 다케조에와 자
주 만나며 밀담을 나누었다.  다케조에는 김옥균의 말에 귀가 솔깃 했지만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재필은 이런 때 일본에서 귀국했다.  고종은 귀국한 유학생들을 불러 물었다.
   자네들은 왜국에 가서 무엇을 배워 가지고 왔는가?
  재필이 일동을 대표하여 아뢰었다.
   저희들은 신식 군사 교육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들의 재주를 좀 보이게.
   황공하옵니다.
  일행은 1개 분대가 되어 행군, 체조, 총검술을 차례로 보였다.  임금은 몹시 기뻐하며 연
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아홉 사람이 하나처럼 움직이는구나.  신기한 일이다.
  그 자리에는 왕비를 비롯하여 대신들도 나와 관람하고 있었다.  고종은 또 말했다.
   자네들의 소원이 있다면 말해 보라.
  역시 재필이 일동을 대표하여 건의했다.
   지금 왜국은 법국(프랑스)의 군대 조련을 받다가 덕국(독일)의 병제를 바꾸고 있습니다.
서양 병제에는 장군 아래 장교가 있고, 이들이 중간에서 분대,소대,중대,대대를 지휘하고 있
습니다.  그러니 우리 나라도 중간 간부인 장교를 길러 내는 사관 학교를 하루 빨리 세우심
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고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관 학교를 빨리 만들어 자네들이 보여 준 재주를 우리 군사에게도 가르쳐 주어야 하겠
다.
  이 말에 서재필 일행은 감격해하며 임금에게 절하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 무렵, 나라 안의 정치는 남별궁(지금의 조선 호텔자리)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 군대의
대장인 위안 스카이(원세개)가 휘어잡고 조선의 내정에 일일이 간섭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안 스카이가 사관 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서재필의 건의를 반대하고, 수구파 대
신들이 이에 찬성하여 일이 클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민영익의 생각은 김옥균과 크게 달랐
던 것이었다.
  김옥균은 전보다 더 자주 일본 공사를 만나 국제 정세를 설명했다.
   당신은  조선책략 을 읽어 보셨소? 아라사는 청나라와 우리 조선뿐 아니라 일본에도 위협
이 될 것이오.
  그런데 일본은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태도를 선뜻 결정하지 않았다.  1884년 10월 31일, 김
옥균은 비장한 결의를 가지고 따지기 위해 일본 공사관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 날, 다케조에는 평소의 우물쭈물거리던 태도와는 달리 분명한 말을 해 주었다.
   지금까지 내가 적극 지원해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제 본국 정부의 뜻
이 결정되었으니 아무 염려 마시고 일을 진행하십시오.
  김옥균은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는 곧 박영효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박영효와 김옥균은 서로 손을 맞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혁명을
성공시키자고 맹세했다.
   대감께서는 내일 청수장(일본 공사관)을 한 번 더 찾아가시어 일본 정부의 속셈을 알아
보시오.  나는 이 밤으로 금석(홍영식)을 찾아가 거사를 의논하겠습니다.
  홍영식 집에는 마침 서광범도 와 있었다.  김옥균은 다케조에와 만난 일이며, 박영효와 서
로 죽음으로써 맹세했다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너무나 기뻐서 무릎을 치며 외
쳤다.
   마침내 나라 위해 죽을 만한 때가 찾아 왔구려!
  이어 홍영식은 침착히 말했다.
   우리는 오늘날과 같이 나라가 위급할 때 귀한 목숨을 던져 나라 정치의 개혁을 하려는
것이니, 이 뜻은 하느님도 알아 주실 것이고, 시운 또한 우리를 도울 것이오.  어서 거사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취하세!
  긴장된 며칠이 흘렀다.
  김옥균은 서재필 등 몇몇 청년을 시켜 정보를 수집게하고는 바둑 잘 두는 사람을 데리고
일본 공사관을 또 찾아갔다.   일본 정부가 워낙 변덕이 심하고 다케조에 또한 우유 부단한
성격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7일 밤이었다.
  김옥균은 한쪽에서 바둑을 두게 하고, 한쪽에서 다케조에와 밀담하여 다짐을 받았다.
   걱정 마시오.  꼭 도와 드리겠소.
   그렇다면 안심하고 거사를 서두르겠소.
  그런 뒤 집에 돌아오자 서재필이 기다리고 있다가 불길한 보고를 했다.
   아무래도 우리 낌새를 알아차린 모양입니다.  위안 스카이는 며칠 전부터 신도 벗지 않
고 잠을 잔답니다.
  민영익도 매일처럼 그와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럭저럭 11월 30일이 되었다.
  이 때, 재필은 물론 개화당 사람들은 김옥균의 집에 모여 거사의 마지막 세부적인 계획을
결정했다.
   12월 4일, 금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총국의 피로연이 있는데, 한성의 외국 사신은 물론
수구파의 대신들도 참석할 것이오.  그 때 거사하기로 하겠소.
  이 무렵, 지토세 호라는 일본 배가 인천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김옥균은 이 배가 도
착하기 전에 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거사 날, 안동 별궁에 불을 지르도록 합시다.  그러면 놀라 뛰어나오는 수구파 대신을 해
치우기 쉽지 않겠습니까?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김옥균도 곧 찬성했다.  안동 별궁은 우정총국 이웃에 있고, 또 동지 서광범의 집이 근처
에 있어 방화하는 데 여러 가지로 편리했기 때문이다.  재필은 이 때 다른 동지 마흔세 명
과 더불어 금호문(창덕궁의 서쪽 문)근처에 잠복하고 있다가 변란을 알고 입궐하려는 반대
파 대신이 있으면 이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우정국은 우편물을 처리하는 관청으로, 1884년 3월 27일 임금의 특명으로 서둘러 창설되
었다.  책임자는 홍영식으로 모든 준비를 다 갖추어, 12월 4일 안동(안국동)에 건물을 마련
하고 피로연을 열기로 하였다.
  홍영식은 각국 공사를 비롯하여 정부 고관에게 빠짐없이 초대장을 보냈다.
  날이 어두워지자 손님이 오기 시작했다.  미국 공사 푸트, 영국 영사 애스턴, 청나라 영사
진수당, 일본 공사 대신 시아무라 서기관이 왔다.  그리고 독일 사람으로 외교 고문이던 묄
렌도르프도 참석했다.
  사대당 거물로선 전영사 한규직, 우영사 민영익, 좌영사 이조연 등이 와 있었다.  이들은
모두 군사를 지휘하는 중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또 개화당에선 홍영식, 박영효, 김
옥균, 서광범이 참석했고, 그밖에 김홍집, 윤치호, 민병석 등의 얼굴도 보였다.
  홍영식은 침착한 태도로 연회석의 이야기를 이끌었고, 다른 사람들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
누었다.  김옥균만은 자주 창 밖을 기웃거리며 무엇인가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 때, 누군가 창 밖에서 김옥균을 불렀다.  김옥균은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는데, 다시 그
이 하인이 와서 불러 냈다.  김옥균은 이렇듯 들락날락하며 긴장된 태도를 보였고, 얼굴도
창백했다.
  그것은 계획대로 일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안동 별궁 방화는 윤경순, 이규환 두 사람
이 맡았는데, 별궁의 뒷문이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어 열고 들어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가까스로 들어가 폭발물을 붙였는데, 서투른 기술로 제조한 것이라 그것이 터져 이들은 심
한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불이 나기는 했으나 몰려든 군사들에 의해 곧 진화되고 말았다.
   아, 계획이 틀어졌구나!
  연락 담당 윤혁로의 보고를 받은 김옥균은 입술이 새파래지다 못해 꺼멓게 탔다.  별궁
방화야말로 거사의 성공을 좌우하는 열쇠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대궐에 화재가 발생하면 책임을 가진 대관이 달려와 불을 끄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을 게을리했다가는 극형을 받았다.  따라서 별궁에 불이 났다 하면 민영익을 비롯한 네
명의 영장들이 맨 먼저 달려올 것이 아닌가.  그 때 한꺼번에 없앨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순간적인 판단력이 빨랐다.
   별궁에 불을 지를 수 없다면, 근처 인가라도 불질러 연기가 오르게 하여라.
  그리고서 김옥균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는데 이런 그를 보며 민영익과 묄렌도르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때,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불이야!
  동시에 우정국 창문에 불빛이 벌겋게 비쳤다.
   뭐, 불이라고?
   별궁은 아닌 것 같군.  그러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
  민영익은 벌떡 일어나 창 밖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민 대감, 별궁도 아닌데 뭘 걱정하시오?
   아버님 댁이 저 방향에 있으니 살피고 오겠소.
  연회는 여전히 웃음과 담소 속에서 계속되었다.  그런데 나갔던 민영익이  아이고 귀야!
하며 비틀거리면서 들어왔다.
  민영익의 얼굴에서 어깨에 걸쳐 피가 흘러내렸고 귀가 하나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곧이어 여자들의 비명과 아우성으로 연회장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뿔뿔
이 흩어졌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세 사람은 창덕궁 쪽으로 달려갔다.  금호문 앞에 이르자 신복모
의 지휘 아래 마흔세명의 자객이 네 군데로 갈라져 매복하고 있었다.
  금호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김옥균은 수문장을 불러 문을 열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거듭 외치자, 군졸 중에서 김옥균을 따르는 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서재필도 김봉균, 이석이 등과 함께 이들을 호위하듯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달빛은 사람
이며 건물과 뜰을 환하게 은빛으로 비추었다.  가끔 도중에서 순라군을 만났으나 감히 누구
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이 때, 이미 일본 군졸과 개화파 동지 40여 명은 금호문 밖을 철통같이 지키고 다른 사람
의 대궐 출입을 금했다.
  김옥균 등은 숙장문을 지나 협양문 안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김봉균과 이석이에게 인정
전에 설치한 폭탄을 30분 뒤에 폭발시키라고 지시했다.
  고종은 이 때 침전에서 자고 있었다.  김옥균이 환관을 시켜 왕을 깨우게 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세 사람은 침전까지 들어가 우정국에서 변고가 생겼다고 알린 뒤
이렇게 덧붙였다.
   만일 변란이 이 곳까지 몰려들게 되면, 전하의 신변이 위태롭사옵니다.  빨리 다른 곳으
로 옮기셔야 합니다.
  고종은 불안으로 몸을 떨고 있었지만 왕비는 차가운 눈초리로 김옥균을 노려보며 날카롭
게 물었다.
   그대들이 지금 여쭙는 변란이란 청나라에서 일으킨 것이오, 아니면 왜국에서 일으킨 것
이오?
  김옥균은 말문이 막혔다.  그 때, 궁궐이 무너지는 듯한 폭음이 들렸다.
  개화당의 계획대로 고종과 왕비는 경우궁(옛날 휘문 중학 자리)로 옮겨졌고, 일본군이 경
비했다.  그리고 사대당의 대신들 윤태준,한규직,이조연은 경우궁까지 왔다가 그 곳에서 피
살되었다.  이어 개화당은 민영목,민태호,조영하 등을 차례로 죽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왕비, 궁녀들은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보고 벌벌 떨었다.
  이튿날 12월 5일, 날이 밝자 새 정부가 발표되었다.  영의정 이재원, 우의정 홍영식, 전후
영사 겸 좌포장 박영효, 좌우 영사 겸 외무 독판 우포장 서광범, 그리고 호조 참판 김옥균,
서재필은 병조 참판 겸 정령관이었다.
  즉 김옥균이 재정의 실권을 쥐는 호조 참판이 되고, 박영효와 서광범은 병권을 잡았으며,
서재필은 그 행동 대장인 셈이었다.
  아침 8시, 병사 30명씩을 각국 공사관에 보내어 그들을 호위해 주고 안심시켰다.
  맨 먼저 미국 공사 푸트가 찾아왔는데 임금 옆에 김옥균이 앉아 있음을 보고 만족한 듯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다음에 온 영국 공사는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표정으로 임금의 안
부만 묻고 곧 물러갔다.
  공사들이 다녀가자 왕비는 김옥균을 불러 말했다.
   이 곳은 춥고 비좁으니 빨리 창덕궁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오.
   마마, 잠시의 불편은 참으셔야 합니다.
  김옥균의 생각으로는 청나라 군사가 몰려올 경우, 경복궁이 방어하기 편리하다고 여겨 반
대했던 것이다.
  김옥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고종은 다케조에 공사와 단둘이 있게 되자 또 부탁했
다.
   공사는 우리를 창덕궁에 돌아가도록 해 주시오.
  다케조에는 별 생각 없이 이를 승낙했다.  김옥균이 이를 뒤늦게 알고 홍영식과 함께 다
케조에를 만나 따졌다.
   수비를 하는 데는 창덕궁이나 이 곳이나 별 차이가 없소.  게다가 왕 전하께서 이미 환
궁하신다고 발표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 아니오.
  그리하여 임금과 왕비는 그 날 오후 여섯 시쯤 대궐로 돌아갔다.
  12월 5일의 밤은 별인 없이 지나갔다.  이튿날, 개화당은 80여 개에 이르는 개혁 정책을
방문에 써서 문 안 곳곳에 붙였다.
  1)대원군은 곧 환국하시도록 한다.
  2) 청나라에 하던 조공을 폐지한다.
  3) 문벌을 없애고, 백성의 평등과 자유권을 제정하며 인재를 등용한다.
  4) 간신배로 나라에 해독을 끼친 자는 엄벌한다.
  5) 순사 제도를 만들어 도적을 방지한다.
  6) 좌,우,전,후의 4영을 하나로 합치고, 정예를 따로 뽑아 근위대를 만든다.
  이런 방이 나붙자 백성들은 모두 기뻐했다.
  개화당은 5일 밤이 무사히 넘어가자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이 무렵, 왕비는 밀서를 써서
음식 그릇 밑에 숨겨밖에 내보내어 청나라에 구원을 청하고 있었다.
  위안 스카이는 밀서를 전달받자 경기 관찰사를 지낸 심상훈을 고종에게 보냈다.  12월 6
일 아침의 일로, 개화당의 내각과 왕의 진심을 알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먼저 박영효가 반대했다.
   이런 때 간신을 상감께 만나도록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오.  곧 쫓아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김옥균은 듣지 않았다.
   심상훈은 나와 둘도 없는 친구이니, 별일 없을 것이오.
  하지만 이것은 김옥균이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심상훈은 고종의 참뜻을 알고 만족해하
며 곧 물러갔다.  뭐니 뭐니 해도 왜국의 힘을 빌린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12월 6일 10시쯤 다케조에의 방문을 받고, 영의정 이재원과 좌의정 홍영식은 깜짝 놀랐다.
   우리 일본군은 오랫동안 대궐에 주둔할 수 없으니 공사관으로 돌아가야 하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오?  김 참판의 의견을 들을때까지 기다려 주시오.
  곧 김옥균이 달려와 항의했다.
   지금 우리 당의 자립과 자위가 간신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고 게시지
않소?  게다가 각 영의 병기를 좀 보시오!  대부분 녹이 슬고 총알이 나가지 않아 이제 겨
우 수리를 하는 판인데, 당신이 그런것도 모른 체 대궐에서 철수한다는 것은 너무도 경솔한
짓이오.
  다케조에는 김옥균에게 설득되어 철수를 보류했다.
  그 문제가 겨우 해결되어 안심하고 있는데, 전령이 달려와 급한 일을 알렸다.
   청나라 장교가 상감마마를 뵙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단연코 거절할 일이지, 물으나마나다.
  그 청나라 장교는 청나라 군이 보내는 글만 남기고 돌아갔다.
  그런데 또 얼마 있다가 위안 스카이가 병력 600명을 300명씩 2조로 나누어 입궐하여서는
대궐을 경비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고종이 심상훈을 통해 이미 승낙했던 일이었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도전이다! 위안 스카이가 만일 혼자 와서 상감마마를 뵙겠다면 막을
수 없지만, 병력을 이끌고 온다면 우리는 무력으로써 막을 것이다.
  그러고 얼마 뒤, 다케조에 공사에게 전하는 편지를 가져왔다.  다케조에가 그 편지를 펴서
막 읽으려는데 별안간 대포 소리가 요란하게 나며 포탄이 날아왔다.
  이어 총 소리가 북동쪽으로 나며 총알이 쏟아졌다.
  왕과 왕비, 세자 등은 몇몇 무감의 호위를 받아 동대문 밖의북묘(청신동 관왕묘)로 피난을
가겠다는 어명을 내렸다.  김옥균과 일본 공사는 이것을 막을 수 없어 갈팡질팡했다.
  청나라 군사 800명이 함성을 지르며 선인문으로 들어왔는데, 한 조는 관물헌 정면 솔밭으
로 들어왔고, 다른 한 조는 낙선재 남쪽을 돌아 공격해 왔다.
   적은 관물헌을 포위할 계획이로구나.
  정령관 서재필은 결사적으로 이들과 맞서 싸울 것을 결심했다.
   최후까지 싸우자! 우리의 자주 독립과 개혁을 위해 무도한 청나라 군사를 섬멸하자!
  처음엔 선인물을 향해 들어오는 군사를 향해 기왓장을 던지며 총알을 아꼈다.  그러다가
총을 쏘자 많은 청나라 병사들이 쓰러졌다.
  그들의 무기 역시 구식일 뿐 아니라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잘 조준도 하지 못했
다.
  하지만 서재필 쪽은 겨우 150명이고, 일본군이 15명있을 뿐이었다.  이런 소병력으로 청군
1500명을 대항할 수는 없었다.  어느덧 도망치는 자가 많았고, 반대로 청나라 병력에 편드는
자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총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고, 개화당은 결정적으로 불리해졌
다.  김옥균이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 군사로 상감을 호위하고 인천으로 갔다가 일이 여의치 않으면 일본까지라도 가서
재기할 기회를 찾아야 하오.
  그러나 다케조에는 반대했다.
   지금 청나라 군사뿐 아니라 조선 병사들까지 우리 일본군에 대항해 호고 있소.  이러다
가 국왕의 몸에 무슨 위험이라도 닥친다면 우리의 책임이 중대해질 것이 아니오.
  다케조에는 개화당 대신들을 데리고 일본 공사관으로 피하였다.  이로써 개화당의  삼일
천하 는 막을 내리고야 말았다.
  김옥균,서재필 등의 개화당이 개혁을 앞세워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루려고 했다가 3일 만에
실패한 이 정변을  갑신정변 이라고 한다.
  당시 북묘엔 청나라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고종과 왕비는 북묘로 향했고, 홍영식은 끝
까지 임금을 모시다가 피살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 공사를 따라 인천으로 갔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
에 일본 배 지토세호를 타고 망명의 길을 떠났다.  뜻을 같이한 동지 43명 가운데 9명만이
그 배에 있었다.  나머지 동지들은 참살 혹은 처형을 당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을 다섯 역적, 즉 오적으로 점찍었다.
그 죄는 본인뿐 아니라 부모, 형제, 자식들에게까지 미쳤다.
  서재필의 가족은 이 때 거의 모두 죽고 말았다.
  아버지, 어머니, 형 재춘은 음독 자살했고, 동생 재창은 종로에서 형졸의 칼에 맞아 죽고,
부인 김씨도 시부모를 따라 자살하여 두 살 먹은 어린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
다고 한다.


    3. 망명 생활

  김옥균 일행 9명의 망명자는 배 밑 창고에 숨어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이 배에 탄
것도 지토세 호의 선장이 호의를 베푼 덕분이었고, 다케조에 공사는 오히려 이들을 귀찮게
여기는 눈치였다.
  12월 11일에야 지토세 호는 인천을 떠났다.  이틀 뒤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상륙한 뒤에야
그들은 비로소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었다.
   들려 오느니 조국의 암담한 소식뿐입니다.  차라리 미국에 건너가 견문도 넓히며 다시
재기할 날을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세 사람은 그런 의견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여비가 문제요.  일본에서 하루하루 보내는 데 필요한 돈도 없는 형편에…….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다.  박영효와 서광범은 글씨를 써서 일본인에게 팔았고,
서재필은 요코하마에 와 있던 미국 선교사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며 쉬운 영어도 몇 마디 배
웠다.  석 달 뒤, 90원의 돈이 모아져 세 사람은 미국의 작은 배인 차이나 호를 타고 미국을
향해 출발했다.
  요코하마를 떠난 지 약 2주일 뒤에 서재필 일행은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
다.  샌프란시스코는 기후가 따뜻하고 공기가 맑았다.
   죽어도 함께, 살아도 함께!
  세 사람은 굳게 약속했지만, 각자 살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서광범은 요코하마에서 알게 된 미국인 언더우드의 소개를 받아 뉴욕으로 떠났다.
  박영효는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배삯을 빌려 일본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게 된 서재필은 말할 수 없이 쓸쓸했고, 영어를 몰라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
니었다.  그래서 영어 사전 한 권을 구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면서 처음엔 가구점의 광고
지 돌리는 일을 하였다.
  광고지 500장을 집집마다 돌려 주고 2달러씩 받았다.  그 2달러를 벌기 위해 서재필은 매
일 3, 40리씩 걸어야만 했다.
  그는 광고지를 돌리는 틈틈이 농장에 가서 포도도 따주고 끼니를 얻어먹었다.  또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밤에는 기독교 청년회가 운영하는 야간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반
드시 교회에 나갔다.
  처음엔 영어를 배우는 게 목적이었지만, 차츰 신앙심이 생겼다.
   바르고 깨끗한 길이 여기 있구나.  나도 믿음과 사랑의 복음을 세상에 전해 주신 그리스
도의 뒤를 따라야겠다!
  신앙심은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서재필은 교회에 다니다가 로버트라는 실업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서재필을 동정하여
도와 주려고 힘썼다.
  어느 날, 서재필은 로버트의 집에 갔다가 로버트의 친구인 홀넨백을 소개받았다.
  홀넨백은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큰 광산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재필에게
여러 가지로 묻더니 친절하게 말했다.
   나 있는 데로 오게.  내 고향에는 내가 경영하는 중학교도 있고, 내가 이사로 있는 대학
도 있으니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겠네.
  서재필은 1885년 9월, 샌프란시코를 떠나 홀넨백의 고향 펜실베이니아 주의 웩스바레라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홀넨백이 경영하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서재필은 이 학교 교장 스코트의 집에서 정원을 돌봐주며 열심히 공부했다.
  스토트 부부는 서재필을 친아들처럼 돌봐 주었다.  영어 실력이 늘어감에 따라 서재필의
학업 성적은 눈부시게 달라졌다.
   정말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구나.
  중학교에 입학한 지 3년이 채 안 된 1889년에 서재필은 벌써 라파예트 대학 입학 시험을
치러 당당히 합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 입학의 기쁨도 잠깐이었다.  어느 날, 홀넨백은 서재필을 불러 한 가지 제안
을 했다.  그것은 서재필이 선교사가 되어야 학비를 대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네가 라파예트 대학 4년을 마친 뒤, 신학을 3년 동안 더 배우기를 바라네.  그러
면 7년 동안 매년 1천 달러씩 학비를 대 주겠네.  그 대신 공부를 마치거든 반드시 선교사
가 되어 자네의 고국으로 돌아가 선교 사업에 종사해야만 하네.
  서재필은 망설였다.  결정을 내리기가 아주 곤란했다.  남이 모처럼 청하는 호의를 나쁘게
이용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실행할 수 없는 약속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말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만, 나는 당신 뜻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첫째, 나는 우리 나라에서
역적이라는 죄인의 누명을 쓰고 있기 때문에 본국에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습니
다.  둘째로, 저는 선교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선교사가 되어 남에게 얼
마나 많은 감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홀넨백은 더 이상 도와 줄 수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하였다.
  홀넨백과 헤어진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을 찾아가 화학 교수로 있는 하트에게 모든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하트 교수는 친절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지 말게.  그렇다면 내 집의 일을 조금씩 거들어 주면서 공부를 계속하게.
  마침내 서재필은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시련은 또 닥쳤다.  서재필이 교수의 집에 간지 2년째 되던 1891년에 하트 교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서재필은 할 수 없이 대학을 중퇴하고, 필라델피아로 갔다.  필라델피아는 큰 도시로, 펜
실베이니아 대학도 있어서 고학하는 데는 역시 대도시가 낫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서재필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란 청소부 정도였다.  청소
부 일로 겨우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대학 공부를 할 수 없어 그는 다시 워싱턴으로 갔다.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취직 자리를 부탁해 보기 위해서였다.  대통령 비서를 찾아간 서재
필은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허헛, 우리 나라 대통령은 당신 같은 사람의 직업을 찾아 주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비서 핸들리는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취직을 할 수 있습니까?
   직업을 구하려면 인사 행정 처장을 찾아가 보시오!
  서재필은 곧 인사 행정 처장인 브라이언트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브라이언트 차장은 친
절히 서재필을 맞아 주면서 말했다.
   직업을 구하려면 우선 자격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이리하여 서재필은 수학, 역사, 지리 시험을 치렀고, 합격이 되었다.  그러자 행정 처장은
말했다.
   자격 시험에 합격은 되었더라도 취직은 각 주의 취직 배당률에 따라 하는 것이오.  펜실
베이니아 주의 배당은 벌써 자리가 찼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소.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
소.
  사실 이 말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서재필은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형편이 못 되
었다.  그는 자신이 일할 만한 자리가 없나 하고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았다.
  절망에 빠져 있던 서재필에게 기쁜 소식이 들렸다.  군의 총감부에게 동양 글을 번역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문이었다.
  서재필은 장원 급제를 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거뜬히 시험에 합격하여 주급 125달러를
받는 군의 총감부 도서관 번역사가 되었다.
   자, 이만하면 다시 공부를 할 수도 있다.
  서재필은 본디 법률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군의 총감부의 빌링스 대령의 권고로 의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다.
  서재필은 군의 총감부에 근무하면서 워싱턴 대학 의과에서 세균학을 전공하였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의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세월은 빨랐다.
  1895년, 어느덧 4년이 흘러 서재필은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도서관을 그만둔 뒤 워싱턴의
가필드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병원에 근무하면서 모교인 조지 워싱턴 대학에 강사로 나갔다.
  애 해, 서재필은 미국 철도 우편의 창설자 암스트롱 대령을 알게 되어 그의 둘째 딸 조지
암스트롱과 결혼을 했다.
  어느 날, 서재필은 뜻밖에 아주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헤어졌던 박영
효를 워싱턴에서 만난 것이다.
   아, 이게 누구인가?
  두 사람은 너무도 반가워 거리에서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금릉위(박영효)께서 이 곳엔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니 그것보다 고국의 소식을 들려 주
십시오.
  서재필은 10년 이상 고국 사람과 만날 기회가 없었고, 이름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어 생
활하고 있었으나 그 순간 잠자고 있던 애국심이 살아난 것이었다.



  4. 독립 협회

   지금 우리 나라에는 자네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네.
  갑신정변이 잇었던 1884년, 조선엔 미국의 의료 선교사 알렌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그는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일로 유명하다.
  이어 1885년에는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잇따라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장로교는  광혜원 을 설치하여의료 사업을 하였고, 아펜젤러는 정동에 학교
를 세웠는데 그것이  배제학당 이었다.
  또 1886년에는 역시 감리교 계통의 여학교가 세워져  이화 학당 이라는 교명이 왕으로부터
하사되었다.  또 이 해 오랫동안 탄압되던 천주교의 금지도 해제되었다.
  다시 1887년에는 정동 교회와 새문안 교회도 세워졌고  신약 전서 가 번역되었다.  산업
방면은 전환국(화폐발행소)과 기가창(병기 제조소)이 설치되고, 기선 회사도 설립이 허락되
었다.
  그리고 1894년에는  동학 농민 운동 ,  청,일 전장 ,  갑오개혁 이 잇따라 있었고,  홍범 14조
도 종묘에 보고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정말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겠군요.
   그렇다네.  나도 갑오년(1894년) 8월에 사면을 받고 서울로 돌아갔지.
   왕비마마께서 용케도 10년 전의 원한을 잊으셨던 모양이군요.
   대원군과 왕비의 세력 다툼은 아직도 여전한데 내가 왕비마마의 편을 들어 주었다네.
그래서 내무 대신을 지냈지.  고균(김옥균)은 애석하게도 상하이에서 자객에게 암살되고 말
았네.
   저의 아저씨께선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광범도 나처럼 법무 대신으로 내각에 들어갔었지.
  그는 동학란의 목표였던 조병갑, 조필영, 조병식, 민영주 등을 체포하여 엄중한 처벌을 했
다네.
  서광범의 이와 같은 공평 무사한 법 처리에 대해 당시의 사람들은  덕망 재상 이라 부르며
칭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갑오개혁 때의 갖가지 법안을 작성하는 데 적극 참여했고, 홍
범 14조는 그가 미국 망명 때 얻은 법률 지식과 의견이 많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서광범은 박영효와 함께 송파에 있는 청나라 태종의 공덕비와 서대문 밖의 영은문, 모화
관, 홍제원 등 사대 유물을 없애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삼국 간섭 이란 것이 있었다.  이것은 독일, 프랑스, 러시아 세 나라가 청,일 전쟁
결과 일본이 차지하게 된 요동 반도를 다시 청국에 돌려 주라고 압력을 가한 일이었다.
  일본은 이 압력을 당해 내지 못하여 요동 반도를 도로 돌려 주고 말았다.
   설치더니 왜놈들도 별것이 아니로구나.
  이 사건은 조선의 정치에도 곧 영향을 주었다.  왕비는 이때부터 일본보다 미국이나 러시
아에 더욱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왜국 세력을 몰아 내야 한다.
  그래서 왕비는 왜국과 덜 가까운 김홍집을 다시 총리로 앉힘과 동시에 왜국과 친한 박영
효를 몰아 냈다.  왕비로선 갑신정변을 뒤에서 조종한 일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
이다.
  그러자 일본은 대원군과 손을 잡고 마침내는  국모 시해 라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그
런 와중에 서재필은 12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것이다.
   나는 무엇부터 할 것인가?
  서재필은 갓 결혼한 미국 부인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정동에 있는 선교사 아펜젤러의 집
에 머무르게 되었다.
   자주 독립은 국민이 깨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자면 신문 발행이 가장 빠른 길이
다!
  서재필은 당시 내무 대신이던 유준길을 찾아갔다.  유길준은 서재필처럼 미국에서 공부했
고,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귀국했다.  귀국한 뒤, 그는 개화파로 인정되어 당시의 포도 대장
한규설의 집에서 감금 생활을 하였다.  7년 동안 감금되는 동안 유길준은  서유견문 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이 책은 국, 한문이 혼용으로 사용되어 있어 우리 국민을 계몽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청,일 전쟁 뒤 갑오개혁이 공포되면서 유길준은 비로소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박영효
가 내무 대신일 때 그의 비서로 일했고, 이어 김홍집의 보좌관으로 활약했다.
   우리 나라의 자주 독립은 오로지 교육, 특히 백성을 계몽하는 데 달려 있으며, 그 지름길
은 신문 발행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에서 신문 발행에 힘을 쓰는게 어떻겠습니까?
   참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지금 거기까지 손이 미치지 않습니다.
  당시 김홍집 내각은  단발령 을 공포하여 그 처리에 큰 저항을 만나고 있었다.  상투 하나
자르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생각되겠지만, 당시 국민의 증오가 내각에 집중되어 있었
다.
   김홍집은 왜놈의 앞잡이로 국모까지 시해하더니,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상투를 자르게 해!
죽일 놈이야.
  이런 생각이 일반 국민들 사이에 뿌리 깊었다.
  그러나 유길준은 신문 발행을 위해 서재필에게 5천 원의 자금 지원을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서재필은 곧 인쇄기를 주문하고, 신문사 건물도 마련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를  아관파천 이라 하는데, 이 일이 있게 되자, 국모 시해의  을미사변  책임자는
김홍집과 정병하라 하며 격분한 백성들은 그들을 때려 죽였다.  또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고향으로 달아나다가 용인에서 피살되었다.
  유길준은 정부가 무너지자, 그럴 경황이 없었지만 신문 발행 보조금 수속만은 밟아 주었
다.  그리하여 1896년 4월 7일, 순 한글과 영문판  독립 신문 이 창간되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 공사는 시일이라는 사람으로 서재필과도 친했다.  시일은 본디 미시간 대학 교
수로 곤충학자였다. 시일이 우리 나라에서 채집한 나비 표본 1천여 종은 지금도 미시간 대
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미국 공사가 서재필에게 말했다.
   지금 왕께서 러시아 공사관에 계신데 이것은 매우 옳지 않은 일이오.  필립, 당신이 가서
전하를 만나 뵙고 잘 건의를 하여 그 곳에서 나오시도록 하시오.
  서재필은 곧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을 찾아갔다.
  고종은 서재필을 기억하고 있었다.  왕은 반갑게 맞이하며 물었다.
   과인은 장차 어떻게 하면 좋을꼬?
  서재필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폐하, 어서 대궐로 돌아가십시오.  이 나라 강산도 상감마마의 강산이요, 이 나라 백성도
상감마마의 백성입니다.  이 나라와 백성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어 서재필은  독립 협회 를 만들었다.  독립 협회는 독립문, 독립관 및 독립 공원을 만드
는 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처음에 30명 남짓으로 시작되었는데, 안경수, 이완용, 김가
진, 이상재, 이채연, 남궁억, 오세창, 정교 같은 사람들이 힘을 모았다.  실제 주동 인물은 서
재필이었으나 그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드디어 11월에 독립문이 기공되었고, 1897년 3월에는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 협회 간판
을 달았다.
  독립 협회는 자주 독립 사상을 높이 부르짖었다.
  1) 자주 국권 사상
   우리는 무엇보다 독립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자주권을 똑바로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국권의 사상입니다.
  그러면 자주 국권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외국에 대해 어떠한 이권도 주어선 안 되며,
스스로의 산업과 자원을 개발하여 지켜야 합니다.
  2) 자유 민권 사상
   우리 독립 협회는, 국권이 강해지려면 민권이 또한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독립 협회는 양반과 관리의 착취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권리로 생명과 재산의 자유권을,
백성의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을 주장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 평등의 원칙으로 신분
제도 폐지와 남녀 동 등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주인은 백성이고 국가의
주권은 백성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자강 개혁 사상
   스스로 강해지는 게 자강입니다.  그러자면 행정과 재정 제도를 근대화시키고, 국가의 재
정을 신교육과 공장 설치에 투입하여 자라나는 세대와 백성을 새로이 교육하는 게 자강의
기초입니다.
  이런 사상을 가진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를 열어 외국 자본을 공격했고, 부패 관리를
공격했다.  그런 결과, 차츰 정부의 미움을 받게 되어 1898년 5월 서재필은 다시 아내와 딸
을 데리고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늘 고국을 잊지 않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의 우렁찬 소리는 태평양을 건너 전미국에까지 들렸다.
  서재필은 이런 내용이 실린 신문을 읽자, 메스와 시험관을 던지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즉시  이브닝 레저 라는 신문의 베니틱트 기자와 의논하여 한국 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
기로 결심했다.  조선에 오랫동안 체류했고, 친일파로 몰렸었던 게일 박사도 흥분된 목소리
로 서재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한국 민족의 용기와 애국심을 이제야 똑똑히 보았습니다.  나는 이제껏 그릇된 편
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하느님께 사과하겠습니다.  그리고 신문에 그런 내용의 글을
발표할 에정입니다.
  서재필은 이 때 필라델피아의 큰 극장에서 3일간 계속하여 대연설회를 열었고, 여러 미국
친구들과  한인 친구회 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4월 15일과 16일 양일에는 필라델피아
시에서 한국 독립 운동을 기념하는 대시가 행진을 벌였다.
  여기에는 200명 남짓의 우리 교포와 수천의 미국 시민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참가
했다.
  미국의 대도시에서 이런 행사가 있기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기념 행사는 전
미국에 보도되어 더 많은 미국 친구를 얻게 되었다.
  이 때, 워싱턴에서는 이승만 박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대한 국민회  대표로 이대위가
필라델피아로 왔다.  서재필과 이승만, 이대위 세 사람은 밤을 세워 가며 독립 운동 추진 방
법을 토의했다.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독립 운동에는 무엇보다 민족의 단결이 절대 필요합니다.  미국에 선전부를 두어 신문을
발행하고, 순회 강연을 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서재필이 이 주장은 두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좋아. 그렇다면 나 혼자서라도 한국 독립 운동의 선전 사업을 계속하겠다.
  1919년, 상하이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1920년 3월, 상원 의원 토머스는 의회에서 이
렇게 연설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아일랜드를 독립시킬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는 바입니다.
  이 결의안은 많은 의원의 찬성을 얻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일로 한국은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비록 부결되기는 했지만 한국 독립 문제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진 것
만은 큰 성과였다.
  이 때, 토머스 등 국회 의원을 움직이는 데 있어 서재필은 많은 활약을 했다.  경비도 많
이 들어갔는데, 샌프란시스코의 대한 국민회가 보낸 700달러와 국내의 한 애국자가 선교사
를 통해 보낸 7천 달러를 제외하고, 들어간 경비는 전부 서재필이 부담했다.  그때 7천 달러
나 되는 큰 돈을 누가 보냈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
  또 서재필은 상하이 임시 정부로 편지를 보내어 독립 운동 방법에 대해 건의하기도 했다.
   우리가 아직도 노령파, 서북 간도파, 한성파, 미국파 등으로 나뉘어 당쟁을 일삼는다면
우리의 독립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단결해
야 합니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강의 군축 회의가 열렸다.  서재필은 토머스 상원 의원을 통해
이 회의에 한국 독립을 보장하라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또 휴스 국무 장관을 방문하여 일
본의 만행을 폭로하면서 긴급한 대책을 세워 달라고 청했다.
  서재필이 국무 장관을 방문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하루는 노리스 상원 의원이 한국의
실정을 설명해 달라고 서재필에게 요청했다.
  노리스는 서재필이 써 준 설명서를 바탕으로 상원에서 연설했다.
   한국을 비유해서 말하면, 가정에 들어앉은 노부인과 같습니다.  노부인은 가정에만 틀어
박혀 있어 세상 물정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도둑이 평화로운 노부인의 가정에 침입
했습니다.  이 때, 노부인은 벌벌 떨며 구조를 청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받은 한국은 이
노부인과 같습니다.  한국은 동양의 한 모퉁이에서 평화롭게  은자 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미국에 구조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
국을 구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노리스의 연설은 감동적이어서 의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하딩이
1920년의 선거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노리스의 소개로 서재필은 하딩 대통령과 만나게 되었다.  한국을 아는 하딩 대통령은 서
재필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서재필의 한국 원조 요청에 대해 지나칠 만큼 겸손하
게 대답해 주었다.
  휴스는 일본 대표 도쿠가와 이에타스 등과의 회담 석상에서 한국 내의 독립 운동을 무법
탄압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도쿠가와는 진정서에 서명한 이승만, 정한경 두 사람이 한국인의 대표가 될 자격이 없다
는 이유로, 미국의 경고를 회피하려 했다.  도쿠가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두 사람은 이미 조선을 떠난 지 수십 년이 되었고, 조선인 가운데 이들을 아는 사람
도 없어 대표로 선정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휴스는 서재필에게서 받은 한국 내 370여 단체가 서명한 대표 위임장을 주머니에
서 꺼내어 도쿠가와에게 보내며 반박했다.
   이 문서는 위조가 아니오.  내가 사사로이 권하는 것은 인도적 입장에서 한국의 무모한
양민을 학대하지 않기를 희망하기 때문이오.  일본도 이제는 일등 국민이 된 이상 일등 국
민으로서의 도량과 관용을 보여야 할 것이오.  일등국의 명예를 더럽혀서는 안 될 것이오.
오늘은 이렇듯 비공식 권고에 그치지만, 만일 일본이 한국의 통치 방식을 고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미국의 교회와 미국의 여론이 격분하게 되어, 미국 정부는 부득이 공식 조치를 취
하게 될 것이오.
  이 때, 도쿠가와는 놀란 나머지 얼굴이 창백해지며 넉달 동안의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귀국하면, 조선 총독에게 지시하여 선후책을 강구할 것을 약속했다.  이 결과로서 이
른바  무단 정치 가  문화 정치 로 바뀌었던 것이다.
  1925년, 범태평양 회의가 호놀룰루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태평양 지역과 극동의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 서재필, 신흥우, 송진우,
백관수 등은 조선 대표가 되어 당당히 일본 대표와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 때, 신흥우는
조선대표로서 연설을 했다.
   일본은 조선을 합병한 이후로 농토의 70퍼센트 이상을 점령하였습니다.  일본은 머지않
아 조선의 농토 전부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조선의 숱한 농민은 농토를 잃고 서북 간도
와 연해주로 쫓겨 갔습니다.  조선에 남아 있는 농민도 생활을 유지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
에 대한 대책을 우리는 연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어 서재필이 일어나서 연설을 했다.
   조선 대표의 말에 의하면, 일본은 조선을 합방한 이후 15년 동안에 걸쳐 적지 않은 비인
도적 행위를 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한쪽 말만 듣고는 재판을 할 수 없다는 말처럼 조선
대표의 설명만 듣고는 사실의 정확성을 알 수 없는 터이니, 이에 대한 일본 대표의 답변을
요구합니다.
  일본 대표는 어물어물 하느라 제대로 답변을 못 했다. 마침내 한 사람이 일어나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외쳤다.
   거짓말이다! 우린 그런 거짓말에 대답할 수 없다.
  이 대회에서 일본 대표들이 보인 추태는 현지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그들은 창피만 더했
을 뿐이었다.



  5. 조국의 해방

  3.1 운동이 있고 나서 2년 동안, 서재필은 거의 혼자 힘으로 독립을 위해 뛰었다.  말로,
글로, 전세계를 향해 일본의 횡포를 폭로하고 조선 독립에 대해 외쳤다.
  서재필은 당시 미국인 친구 디머와 문방구점을 공동 경영하여 생활이 넉넉한 편이었다.
그러나 2년 동안 독립 운동 경비로 자기 재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7만 6천달러를 썼고, 사
업을 돌보지 않아 가게가 파산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서재필은 다시 펜실베이니아 대학
으로 돌아가 연구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에게 2천 달러를 빌려, 이것으로 2년간의 연구비와 가족 생활비로 썼다.  그 동안 그
들 부부와 두 딸은 끼니를 거른 일도 한두 번이 아닐 만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연구를 끝낸 뒤, 서재필은 암치료로 유명한 진즈 병원에서 근무했
다. 이어 존스 홉킨스 병원, 성 요셉 병원, 요크 병원 종두 연구소 등 의료방면에서 활동했
다.
  1942년 3월 1일, 미주와 하와이 거주 교포들이 워싱턴에 모여 전승 기원 기도회를 열었다.
서재필도 물론 여기에 참석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 제국주의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여 멸망했다.  조국이
광복된 것이다.
  1947년 7월, 서재필은 여든다섯 살의 고령으로 다시 해방된 조국의 땅을 밟았다.
  그 이전인 1946년 8월경, 미국 장교 한 사람이 필라델피아로 서재필을 찾아와 하지 중장
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지금 조선에는 많은 지도자가 있으나 서로 분열되어 다투고 있습니다.  당신이 한 번 조
국에 돌아와 그들을 설득하고 타협의 길로 나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서재필은 이런 제의를 받고 나서 곰곰이 생각했다.   지도자의 단결 .  이것은 그가 젊어서
부터 주장했던 신념이었다.
   이것이 조국에 대한 나의 마지막 봉사다.  내 힘껏 노력하리라.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망설임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47년 3월, 워싱턴에 온 하지 중장이 이번에는 직접 서재필을 찾아와서 간
청했다.
   한국 사람들은 당신의 귀국을 몹시 바라고 있습니다.
  당신은 한국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쳐 왔고, 더구나 한국 사람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으니 당신의 말은 누구든지 잘 들을 것입니다.
  당시,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이승만을 누를 수 있는 인물은
그보다 훨씬 선배인 서재필 박사가 적임자라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한국에는 서재필의 귀국을 이리저리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래서 서재필의 귀
국은 한참 뒤인 1947년 7월에야 이루어졌던 것이다.
  서재필은 귀국하는 즉시 미군정 고문과 과도 정부 최고 정무관으로 임명되었다.
  서재필은 귀국하여 라디오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나라 사람 대다수의 소원대로, 민주주의 방법으로 선거된 정부를 가질 날도 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가 독립되고 통일되어 민주 국가가 되는 그날을 바라는 우리
는 민주주의 원칙을 이해하고 실천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 사회가 되면, 우리는
민주주의 나라에서 가질 수 있는 자유와 안전과 모든 개인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특권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책임은 우리의 특권을 구속하는 것이 아
니라 그것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저마다의 책임을 다할 때 이웃의 특권도 존중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당시, 민주주의를 그만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리라.
   남의 특권을 서로 존중하는 게 민주 사회의 특징이고, 또 이 때문에 모든 사람은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주 국민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정직하고 진실하여 남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사람입니다.  정직하게 노력하여 일용의 양
식을 버는 사람입니다.  민주 국민은 자기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법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
법이 국민 대다수에게 불공평하거나 고난을 줄 때에는 적법한 방법에 의해 이를 고칠 수 있
습니다.
  또 민주 국민은 평화 시대나 전시를 막론하고, 항상 국가에 대해 충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대의와 동포의 복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민주
국민이라면 남과 협력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서재필이 방송을 통해 강조했던 민주 국민의 책임과 마음가짐에 대한 연설은 많은 국민에
게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국민들은 실제로 민주주의 원칙을 이해하고 지키는 데 힘썼다.
  어느 날, 조선 호텔로 김규식이 서재필을 찾아왔다.  김규식은 외국 사람보다 영어를 잘
한다는 사람으로, 동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고, 언더우드 목사의 도움으로 미
국에 건너가 대학 공부를 마친 뒤 귀국하여 경신 학교 교감, 기독 청년회 총무, 연희 전문학
교의 교수를 지냈다.
   박사님, 박사님은 미군정 최고 고문으로 계시니까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하지 중장의 속셈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글쎄요, 사람의 속은 알 수 없지만, 국제 회의의 결의대로 실행하려는 굳은 결의를 가진
것만은 틀림없겠지요.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  그러나 우린 지금 연합국에 의해 해방
되었으니, 그 연합국의 결의를 반대하고선 아무 것도 될 것 같지가 않소이다.
  이 말은 매우 중요했다.  당시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한국을 신탁 통치하자는 결의가
있어, 이것의 찬성이냐 반대냐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좌.우익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었다.
  다시 김규식이 물었다.
   지금 서 박사님 말씀대로라면 우선  찬탁 부터 하고 들어가라는 것인가요?
  서재필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얻으려는 우리 나라 독립은 그렇게 안이하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소.  그러니 내
생각은 연합국이 하는 대로 당분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오.  그렇지 않고서는 미국과 소련
세력으로 이 나라가 영영 두 동강으로 갈라지고 말 것 같소이다.  우리는 끝까지 통일을 위
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소? 지금 국론이 분열되어 나라의 장래가 근심되는구려.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한국 문제는 유엔으로 넘겨졌다.  하지만 소련의 방해로
유엔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리하여 1948년 5월
10일,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 대표를 뽑는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국회가 열리고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각계의 사람들이 모여
정일형을 회장으로, 서재필을 최고 고문으로 추대하는 독립 협회가 재건되었다.
  최능진, 백인제, 안동원, 김붕준, 이용설, 노진선, 어행렬, 정인과, 윤석진 등 30여 명의 인
사들은 1948년 6월 17일, 회의를 열고 서재필에게 보내는 탄원물을 채택했다.
   존경하는 서재필 박사, 조국과 국민은 박사를 지도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조국이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은 국민의 뜻을 알아서 이에 충실히 따르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
입니다.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성울을 비롯하여 차츰 지방에도 번져 나갔다.
당황한 것은 이승만 진영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나섰다.
  그러나 정작 서재필은 아무런 야심이 없었다.  그는 7월 4일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는 각지로부터 대통령에 입후보해 달라는 편지를 받고 또 많은 요청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애당초 정치에 관심이 없고,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서재필은 말로서만 아니라 행동으로서도 자기의 뜻을 보였다.  그는 7월 10일, 하지 장군
을 방문하여 말했다.
   장군,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난 것 같습니다.
  서재필은 사표를 제출한 뒤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 갔다.
   이 박사, 나는 미국으로 떠나려 하오.  다만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을 하리다.  그것
은 김 박사(김규식)나 김 주석(김구) 같은 인물과 더불어 협력하고 화합해야 한다는 것이
오.
  1948년 9월 11일, 서재필 박사는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그가 늙은 몸으로 미국으로 돌아
가는 것을 말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빨리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정치
적 야심을 가진 사람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것이다.
  미국에 돌아간 서재필은 펜실베이니아 주 미디아에서 작은 병원을 경영했다.  그러나 그
의 가슴에는 늘 조국이 담겨져 있었다.
  1950년 6월 25일의 한국 전쟁 소식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뒤로 서재필 박사는
병석에 누워 시름시름 앓다가 1951년 1월 5일, 여든아홉 살의 나이로 사랑하는 조국을 가슴
에 담은 채 일생을 마쳤다.



  제목 : 우장춘(1898∼1951)

  일본 도코에서 일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농학자이다.  도쿄 대학 농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들어가 육종학 관계의 연구로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
한국에 귀국하여 한국 농업 연구소 소장에 취임한 뒤 학술원 추천 회원이 되기까지 육종학
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씨없는 수박, 벼의 일식 이수작(한번 심어 두 번 거두기) 등을 연
구하여 공로를 세운 세계적인 농학자였다.


  1. 아버지 생각

  우장춘은 1898년 4월 8일,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인 우범선, 어머니는 일
본인 사카이였다.
  장춘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몹시 추웠던 어느 날이었다.
  장춘은 아버지 등에 업혀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졸고 있다가 어머니의 말에 번쩍 잠이 깨
었다.
   여보! 수상한 사람이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어요!
   누군가 집을 찾고 있는 사람이겠지.
   아녜요.  당신과 같은 한국 사람이 틀림없어요! 무서워요.
  우범선은 담력이 있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때의 나이는 아마
도 마흔다섯 살쯤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범선은 고려 때의 학자 우탁의 후손으로, 1881년에 벌써 왜별기의 참령(지금의 소령)으
로 있었다.  왜별기는 일본인 교관의 훈련을 받는 당시의 신식 군대였고, 이 때문에 그는 개
화당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 때에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국내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아 중요한 일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범선은 등에 업었던 장춘을 아내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말아요, 내가 나가서 알아보고 올 테니.
  장춘은 이 때 여섯 살이었다.
   엄마, 아버지는 왜 돌아오시지 않지?
  범선은 나간 뒤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밖에선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고 있었다.
이 곳은 도쿄에서도 변두리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둑방 동네였다.
   너무 걱정 말고 자거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지만, 얼굴의 불안한 빛은 감추지 못했다.
  우범선은 1895년에 훈련대 대대장으로 있었다.  이 당시, 서울에 있는 일본 무력으로는 수
비대와 영사관 경찰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 군대로 훈련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청,일 전쟁
뒤의 일본 세력에 완전히 빌붙어 있었다.  다만 대궐을 지키는 시위대만이 왕실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가 일본 세력의 습격을 받았다.  이것이  을미사변 으로 이 때 명성 황후가 살해
되었다.
  그 뒤, 임금이  아관 파천 을 하자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일본 사람 사카이를 아내
로 맞이했던 것이다.
  어린 장춘은 요 며칠 동안 너무도 급변한 일에 어리둥절했다.  어머니는 어딘가 급히 갔
다가 돌아왔는데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말없이 아들을 끌어안았다.
   엄마, 왜 그래?
  장춘은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이윽고 어머니는 흐느껴 울며 물었다.
   장춘아, 아버지는 돌아가셨단다.  넌 사내 대장부니까 지금부터 엄마가 무슨 말을 하더라
도 울지 않겠지?
   응.
  장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간의 분위기로 그는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이미 짐작
하고 있었다.
  우범선은 그 날 밤, 밖에 나갔다가 본국에서 보낸 고희근이라는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던
것이다.  사카이 부인은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과 더불어 뱃속에 아기까지 가지고 있어 눈앞
이 캄캄했다.
   그래서 엄마는 너하고 함께 살 수 없게 되었단다.
  장춘의 눈은 단번에 휘둥그레졌다.  아버지의 죽음은 꿈만 같아 슬픔도 막연했지만, 어머
니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충격이 컸다.
  어머니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장춘을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장춘아, 그렇지만 엄마와 아주 헤어지는 것은 아니란다.  너도 아는 이 마을 절의 주지
스님이 친절하게 너를 맡아 주시겠다는구나.
  장춘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절이라면 어머니를 따라 몇 번 참배한 일이 있었다.  스
님은 얼굴이 늘 붉고 배가 불룩 나온 사람인데, 언제나 싱긍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아이들
을 귀여워해 주는지 절에 아이들이 많이 몰려와 놀고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장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 때는 절에 많은 아이들이 있다
는 데 별 의문이 없었다.  다만 어머니가 열심히 비는 불화를 보고 물었다.
   엄마, 저 그림의 여자가 누구지? 보살님이야?
   카시보(우리 말로 귀자모신)란다.
   카시보?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귀자모신은 나찰녀의 이름이었다.  자식을 500명이나 낳았지만, 남의
집 아이를 잡아 먹는 귀신이라 석가모니가 그의 가장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감추었다.  나찰
녀는 이 때,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비로소 깨닫고 잘못을 뉘우쳤다.
그 때부터 귀자모신은 아기의 점지, 순산 등을 비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장춘의 어머니도 임신한 아기를 위해 열심히 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귀자모신을 받들고 있어, 그 절은 고아원처럼 부모 없는 가엾은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었다.
   엄마 말대로 절에 가 있겠어.  하지만 가끔 와 주어야 해!
  엄마의 말을 다 듣고 난 장춘은 그렇게 외쳤다.  장춘의 두 눈에는 이슬 같은 눈물이 맺
혀 있었다.
  어머니도 울고 있었다.  장춘은 그런 어머니를 더 이상 슬프게 하지 않으려고 외쳤던 것
이다.
   장춘아, 그렇게 자주 들르지는 못한단다.  그러나 그대신 무슨 일이 있어도 1년만 지나면
너를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겠다.
   꼭이야?
   그래
   그럼, 약속해.
  장춘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사카이 부인은 매우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어머니
로서도 새로운 용기가 났는지 엷은 미소마저 지었다.
   그래그래, 약속하고 말고!
  이라하여 장춘은 고아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 곳에는 자기와 같은 또래도 있고, 자기
보다 나이가 적은 아이도 있었다.  똑같이 불쌍한 처지인데도 아이들은 장춘에게 몹시 심술
궂게 굴었다.
   야, 네 엄마가 너를 버리고 도망갔지?
   아니야! 1년 후에 데리러 온다고 약속했어.
   거짓말, 어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야.
  장춘은 그 곳 에서 처음 며칠 동안은 어머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
른 짖궂은 아이들의 말처럼 어머니가 영영 자기를 버리고 데리러 와 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고 불안해했다.
  장춘은 차츰 말수가 적어졌다.  다른 아이와 함께 어울리기가 싫었고, 혼자 있고만 싶었
다.
  이 때는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서 우리 나라와  을사조약 을 맺
은 무렵이었다.  그런 탓인지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을 무조건 무시하며 차별했다.
   야, 너는 조센징이지? 네 아버지는 러시아의 스파이 였대!
  아이들은 본디 텃세가 심하다.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버릇도 있다.  쓸데없이 뱀을 돌려
때려죽이든가, 새알을 꺼내어 가지고 놀다가 금방 버리는 것도 그 한 가지 보기이다.
  조센징이란, 조선 사람을 멸시하며 부르는 일본말로, 일본인의 차별을 가장 많이 받았던
사람이 우리 조선 사람이었다.  이것은 불행히도 오늘날까지 그 뿌리가 남아 있다.
  장춘은 이런 아이들의 놀림을 받을 적마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혼자 가슴을 쥐어
뜯었다.
   우리 아버지가 정말로 나쁜 사람이었을까?
  장춘은 혼자 외롭게 먼 산을 바라보며 곧잘 중얼거렸다.  그러다가는 고개를 세게 흔들었
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나를 늘 업어 주고 맛있는 사탕도 사다 주었잖아!
  아이들은 자기들을 상대하지 않고 늘 혼자만 있는 장춘이 미웠고, 그래서 더 약이 올랐다.
   우리, 저 녀석을 때려 주자!
   응.
  아이들은 살금살금 장춘의 뒤로 다가갔다.  장춘은 날씨가 맑은 날이면 멀리 보이는 후지
산을 바라보며 어머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가까이 다가온 고아원 아이들은  와!  하며 소리를 질렀다.  한 아이가 발을 들어
장춘의 등을 힘껏 걷어찼다.
   야, 조센징.  너 요즘 건방져.  뭘 믿고 그러지?
  장춘은 아픔을 참으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이 녀석 혼을 내 주자.  다시는 까불지 못하게!
   음, 좋아.  그러나 이 녀석이 땅바닥에 꿇어앉아 우리한테 절하면 용서해 주자고!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찬성했다.  그 순간, 장춘은 분노로 눈에 아무 것도 보
이는 게 없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죽더라도 맞붙어 싸우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때,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 녀석들! 또 약한 사람을 들볶는 게냐?
  주지 스님의 호쾌한 목소리였다.  개구쟁이들은 주춤했다.  주지 스님은 장춘에게 말했다.
   하루짱(장춘의 애칭), 어머니가 오셨다.
  이 말에 다른 아이들은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2. 어머니 사랑

  어머니는 약속대로 1년 만에 아들을 데리러 왔던 것이다.  사카이 부인은 앞에서도 말했
지만 의지가 강했다.  장춘이 아이들에게 설움을 받을 때 어머니도 그에 못지 않은 설움을
받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다시 시집을 가는 게 어때요?
  자못 친절한 듯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닙니다.  저는 남편의 핏줄을 이어받은 두 아들을 키울 책임이 있습니다.
   흥, 조선 사람에게 시집을 가더니 고집은 세졌군그래.
  사카이 부인은 1년 동안 이를 악물고 고생한 보람이 있어 생활의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장춘과 헤어진 뒤 히로시마에 갔다.  이 곳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덕분에 발전
한 도시였다.  대륙으로 가는 군대는 물론이고, 군수품도 모두 이 곳에 모였다가 나가기 때
문에 일자리가 많았다.
   엄마!
   오, 하루짱!
  일 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얼싸안았다.  장춘을 괴롭히고 들볶던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격스런 이 모자 상봉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나 이제 이 곳을 떠나는 거야?
   그래, 약속대로 너를 데리러 왔다.
   아이, 좋아라.
  장춘은 그제야 여유를 되찾고 어머니 등에 업혀 있는 아기를 보았다.  아직 젖먹이인 그
아이는 장춘을 보자 싱글벙글 웃었다.
   네 동생 홍춘이란다.
  어머니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장춘에게 이 때처럼 기뻣던 일은 아마 없었
으리라.  어머니를 다시 만나고, 게다가 귀여운 동생까지 만났으니!
  1905년, 여덟 살 때 장춘은 히로시마 구레 소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구레는 히로시마 남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일본 해군의 근거지로 군항 도시였다.
   어머니, 전 공부를 열심히 하여 반에서 꼭 1등을 하겠어요.
   그래, 열심히 하거라.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장춘은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하듯 말했다.
   엄마가 나와 한 약속을 지켜 주셨으니까 나도 약속을 지키겠어요.
  장춘은 자라면서 약속을 무엇보다 중하게 여겼다.
  장춘은 학교 생활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장춘이 한국인이라고 학교 아이들이 괴롭혔
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눈치챈 어머니는 장춘에게 일렀다.
   일본 아이들이 놀리고 괴롭힌다고 해서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일본 아이들이 괴
롭히고 업신여길수록 너는 힘을 내야 한다.  그리고 일본 아이들을 앞질러야 한다.  알겠
니?
  장춘은 소학교(초등 학교)에서 늘 1등이었다.  차별이 있었다고는 하나 공평한 사람도 있
었다.  특히 그의 담임 선생님은 늘 장춘을 칭찬하며 격려했다.
   너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는 이제껏 보질 못했다.  반드시 상급 학교에 진학하여 훌
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910년, 장춘은 소학교(초등 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이듬해, 장춘은 열네 살의
나이로 구레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특히 수학 과목에서는 천재로 알려졌다.
그가 받은 수학 점수는 학교 역사상 최고의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놀라며 입에 침이 마르
도록 그를 칭찬했다.
   우리 학교의 큰 자랑이다.
   공부도 좋지마는 너무 열중해서 건강이 나빠질까 염려되는구나.
  어머니는 오로지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그러면 장춘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에겐 특수한 건강 법이 있답니다.
  그 특수한 건강법이란 식물과 벗하는 일이었다.  어릴 때 가난과 차별 속에서 자란 장춘
은 들의 이름 없는 풀이나 꽃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런 것들은 그의 마음에 평
화를 주었다.
  마침내 장춘은 중학교 5년을 한 번도 결석하는 일 없이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식 때에
는 졸업생을 대표하여 상장을 받았다.
  어머니 사카이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아버지가 지금껏 살아 계셔서 오늘의 네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니?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어머니의 보살핌이 없었던들 오늘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선생님들도 진심으로 그의 졸업을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중학교 공부만 갖고서는 훌륭한 학자가 되기 어렵네.  다시 상급 학교에 진학하
게.
   하지만 선생님…….
  장춘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중학교 졸업만 하더라도 어머니가 공장에 다니며 뒷바라지
를 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상급 학교 진학을 더 바랄 수 있을
것인가!
  그러자 담임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의 진학 문제에 대해선 교장 선생님과도 의논이 있었다네.  방법이 있으니 너무 염
려 말게.
   네? 방법이 있다니 그게 정말입니까?
  장춘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있지.  자네의 아버지는 조선의 혁명가가 아니었나.  조선 총독부에는 그런 사람들의 자
녀를 위한 관비 장학금 제도가 마련돼 있다네.
  그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불단(일본인 가정마다 신주를 모셔 둔 시렁)에 합장했다.
  장춘은 곧 절차를 밟았다.  극빈자 증명서와 호적, 그리고 성적 증명서와 학교장의 추천서
가 총독부 학무국으로 보내졌다.
  2주일쯤 뒤, 총독부에서 회답이 왔다.  농과 계통이라면 장학금을 대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장춘이 중학교를 졸업한 1916년은 조선에서도  고등보통학교 라는 5년제 중등 교육을
처음으로 허락한 무렵이었다.  그리고 총독부는 쌀 생산을 위한 정책으로 농업기술자
양성을 장려하고 있었다.
  원래 장춘이 희망한 대학은 공과였다.  그러나 농과 지망이 아니면 장학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농과도 훌륭한 학문일세.  무엇을 망설이는가.
  장춘은 화가 치밀었지만, 학비를 얻으려니까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1916년 4월, 장춘은  도쿄 제국 대학 농학과 에 응시하여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농과는 농업, 축산, 원예, 산림 등 범위가 넓다.  장춘은  육종학 에 흥미를 가졌다.
이것은 당시 새로운 학문으로, 1917년에야 비로소 그런 이름이 생겼다.
  육종학은 쉽게 말해서 품종 개량을 말한다.   학문 발전에 따라 품종 개량은 식물뿐
아니라 동물에도 응용되고 있지만, 이 때는 아직 그런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장춘은 1919년에 4년의 대학 과정을 마쳤고, 그 해 8월에, 일본 농림성(농수산부) 농업
시험장에 취직이 되었다.  신분은 고작 고원(임시 직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일하는
한편, 육종학의 기초 공부를 계속했다.
   육종학을 나의 천직으로 삼자.
  장춘은 육종을 목표로 무, 배추, 양배추와 같은 식물학 분석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품종의 개량은 무한한 끈기가 필요했다.
  시험장 소장 데라오 박사는 장춘의 근무 태도가 남보다 성실하고 꾸준한 것을 알고 그를
칭찬했다.
   우군, 학문은 외로운 길이고, 그것을 해 나가자면 참을성이 중요한데 자네는 꼭 안성
맞춤일세.
  이리하여 장춘은 취직한 지 1년 만에 정식 직원  기수 가 되었다.  기수가 되면서
장춘에게 중매를 서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 때, 장춘은 스나가라는 일본인 소학교
선생과 사귀었고,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
  그러나 이런 이민족끼리의 결혼은 부모의 반대가 있게 마련이다.  스나가의 부모도
장춘이 한국 사람이라는 데 반대했다.
  이들은 1921년, 장춘의 나이 스물세 살 때 결혼했다.  스나가는 이 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들의 결혼은 마치 당신의 육종학 연구와 같네요.
  육종학의 육종 방법은,  유전 변이 를 만들어 내는 방법과 만들어 낸 변이 중에서 우량
변이를 가려 내는 2단계로 되어 있다.  그리고 유전 변이를 만들어 내는 방법도 갖가지이다.
  1) 도입 육종법:다른 나라의 품종을 들여 와 만드는 방법으로, 보통 가축에 이용된다.
  2) 분리 육종법:유전적으로 잡종인 것 중에서 순수한 것을 분리시키는 방법인데, 벼,보리
등의 품종 개량에 많은 성과를 올렸다.
  3) 교잡 육종법:두 가지 품종을 교배시켜, 어버이가 갖는 뛰어난 형질만 짝지운 유전
변이를 가려 내는 방식, 현재의 작물 육종은 대개 이 방법이다.
  4) 잡종 강세 육종법:두 가지 품종, 또는 계통의 잡종 제1세대에 잡종 강세가 나타나는
것을 이용하는 방법.  옥수수,양파,시금치,누에,닭 등의 품종 개량에 응용하여 큰 효과를
본다.
  이밖에 배수성 육종법, 돌연 변이 육종법이 있다.  장춘의 첫 연구는  종자로서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 으로 1926년에 발표했다.  그 뒤 몇 년 동안은 피튜니아와
나팔꽃의 변이, 돌연 변이 등 화훼의 유전연구를 계속했다.
  특히 피튜니아에 대한 연구로 그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피튜니아는 정원용
또는 장식용으로 많이 쓰이는 꽃으로, 홑꽃과 겹꽃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홑꽃은 크기도 작고 볼품이 없었으나, 겹꽃은 크고 화려하며 빛깔도 다양했다.
  우장춘은 잡종 강세 육종법을 이용하여 홑꽃을 피우는 피튜니아 꽃을 겹꽃이 필 수 있는
종자로 육성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 연구 결과는 일본의 종묘 회사에 큰 이득을 보게 했을 뿐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학자들에게도 자극을 주었다.
  우장춘은 1931년에 다시 놀라운 연구를 해냈다.   우채 품종의 특성 조사 를 발표하여
새로운 유채를 만들어 냈다.
   또 우장춘의  종의 합성 은 이 영역의 학문을 새로 개척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때까지
있었던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고 보충하는 혁명적 이론이었다.
  1936년, 장춘의 모교인 도쿄 제국 대학에서는 우장춘의 업적을 인정하고 농학 박사
학위를 주었다.
  일본이 지배하고 있는 조선, 그 조선의 우장춘에게 농학 박사 학위를 주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은 일본만 못할 것이 없고, 우장춘은 일본 사람만 못할
것이 없었다.  떳떳한 조선 사람, 자랑스런 조선사람이 되었다.
  어머니는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장하다,내 아들!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저승에 게신 네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실
게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을 쌀쌀했다.
  1937년, 일본은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침략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럴 무렵, 우장춘은
기사로 승진했다.
   축하하네.  만년 기수이던 자네가 기사가 되다니 놀랐는걸.
  동료들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우장춘은 늘 당하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박사 학위도 받고 세상에 이름도 좀 알려졌으니 내 체면보다 자기네 체면을 위해 승진을
시켰겠지.
  그런데 며칠 뒤 경찰에서 우장춘을 호출했다.
   당신이 조센징 우장춘이오?
  당시 일본엔 이미  특별 고등 경찰 이 있었다.  우장춘은 가슴에 뜨거운 것이 올라왔으나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것을 잘 읽어 보고 일 주일 이내로 결정하시오.
  경찰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읽어 보니 일본인으로 귀화하는 데 쓰는 신청서였다.
귀화하지 않으면 일본 공공 기관에서 일할 수 없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우장춘은 농사 시험장으로 돌아와서는 당장 사표를 써냈다.   이런 우장춘의 태도에
놀라거나 만류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여보, 아이들이 걱정되지 않아요?
  아내는 걱정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자 우장춘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나를 위해서 나라를 배신하고, 아버지를 배신할 수는 없소.
  때마침 교토 부근에 있는 다키 종묘 회사가 이 사실을 알고 자기네 농사 시험장 책임자로
와 달라고 요청했다.  우장춘은 다키 농장을 세계적인 농장으로 만들었다.
  1941년 12월에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은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그 해 8월에
끝났다.
  이윽고 8.15 해방을 맞게 된 것이다.
   이제야 조국을 위해 일할 때가 왔다.!
  우장춘의 가슴은 벅찼다.  어머니도 함께 기뻐해 주었다.
   얼마나 기쁘냐? 일본 사람인 나도 기쁘구나.  이제 조국에 돌아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해라.  우장춘은 그 때부터 일본에서의 모든 활동을 중지했다.  다키 농장도
그만두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선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무렵, 그는 국적이 없는 사람으로 불편이 많았다.  스웨덴에서 열린 국제 식물 유전
학회의 초청을 받고도 여권을 낼 수 없어 가지 못했다.  그는 한국에도 호적이 없었다.
  우장춘은 4년 반 동안이나 그런 고통을 참아 냈다.  이 때도 일본인으로 귀화만 했다면
명예와 재산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귀화하지 않았다.
  결국 국적이 없는 우장춘은  오무라 수용소 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1950년 3월 8일,
송환선을 타게 된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 2남 5녀의 자녀를 남겨 두고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어머니는 목이
메이도록 외쳤다.
   부디 잘 가거라.  너의 조국은 대한 민국이다.  그 곳에서 네가 할 일은 너무도 많을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가 일본 사람이기 때문에 함께 돌아오지 못하고, 혼자서만 배를
타야 했다.  우장춘의 마음은 슬픔과 기쁨이 뒤섞였다.
  우장춘은 한국 농업 과학 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연구 시설은 커녕 전기와
수도조차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긴 내 조국이다.! 내가 할 일은 이제부터다.
  당시 한국은 일본과 정식 국교 관계가 맺어 있지 않아 우장춘은 가족을 데려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관사에서 자취를 했다.  월급도 변변치 않아 좋아하던 담배도 줄여야만 했다.
또 언제나 초라한 점퍼 차림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녀  고무신 할아버지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관청 출입은 물론이고, 경무대(청와대)로 귀국 인사를 갔을 때에도 우장춘은 점퍼
차림이었다.  이를 보다못한 부하 직원이 말했다.
   대통령을 만나러 가시는데, 양복은 입으셔야죠.
   아냐.  나는 조국에 일하러 왔지, 양복 입고 인사다니러 온 게 아닐세.
  얼마 뒤, 일본의 아내로부터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 사망, 급히 돌아오기 바람.
  그러나 우장춘은 가지 못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되어 정부에서 여권을 내 주지
않아서였다.  다만 부하 직원들이 찾아와서 위로하고 조위금을 전했다.
  장춘은 그 돈으로 어머니를 기념할 만한 것을 남기고 싶었다.
   그렇다, 우물을 파자!
  당시 연구소엔 물이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동래에 있는 이 연구소 근처에는 땅 속에
바위가 많아 우물을 팔 수 없었다.
  드디어 작업이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땅 속에 바위가 나타났다.  우장춘은 바위를 깨고
더 깊이 파라고 지시했다.  그랬더니 그 곳에서 맑은 물이  콸콸  샘솟는 게 아닌가.
  그 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우장춘도 기뻐하며
외쳤다.
   이 물은 어머니가 주신 우물이다.  아니, 어머니의 젖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우물 이름을  자유천 , 즉 자비로운 어머니의 젖샘이라고 지었다.
  여기서 우장춘의 배수성 육종법을 알아본다.  이것은 식물의 염색체 수의  배화 를 이용한
방법이다.  그는 앞서 일본 재래의 유채(염색체 수 10) 와 양배추(염색체 수 9)를 교배하여
 한국 유채 (염색체 수 19)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우장춘은  게놈  분석을 했다.  게놈이란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염색체 단으로, 양배추를 예로 들면 이것의 단수 염색체 수는 9개로, 이것이 한덩어리(단)가
되어 일배체를 이루고 있다.  다시 배수적으로 증가하며 이배체, 삼배체, 사배체가 된다.
그리고 삼배체는 씨가 생기지 않는다.   씨 없는 수박 도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우장춘은 이미 일본에 있을 때 채소의 육종 기술에 대해 많은 연구 발표를 했었다.
약삭빠른 일본의 종묘상들은 이런 기술을 응용하여 좋은 종자를 생산했고, 그것을 세게
각국에 팔아서 큰 돈벌이를 하였다.
  그런데 우장춘이 귀국한 뒤, 일본에서는 새로운 품종이 개발되지 않자 그들은 비명을
질렀다.
   큰일났군! 앞으로는 한국에 씨앗을 팔아먹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 사다 써야
할 판이야.
  그들은 그제야 우장춘 박사를 푸대접한 것을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우장춘의 육종에 관한 논문은 종자의 보존, 교배 품종의 선정 시험, 교배 재료의 처리,
제웅 기술, 수분의 기술, 영양체의 포기 보존, 잡종 초기 및 후기 세대의 처리, 격리 채종,
염색체의 변환 또는 증가, 자연 또는 인위적 변이를 이용하는 방법, 육성 연한을 단축시키는
법 등 수없이 많아 세계적인 육종학 대가들 중에서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채소 개량에 이어 우장춘은 감자도 개량했다.  이렇듯 연구 성과가 있게 되자 우리
정부에서도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정부의 예산도 많아졌고, 각종 표창이 쏟아지듯
주어졌다.
  우장춘은 귀국하여 임시 농업 지도 요원 양성소 부소장, 중앙 원예 기술원 원장, 원예
시험장 소장 등의 공직을 맡으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평생을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았지만, 성격은 곧고 명랑했다.  직원들과 농담도 곧잘
했고 우스갯소리를 잘 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파티를 열겠네.  가족 동반으로 하루를 즐겁게 노세.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채소만으로 만든 음식을 먹고 감탄했다.
   대체 누가 이런 요리를 만들었습니까?
   바로 날세.
   설마 소장님께서……?
   이 사람들, 채소를 연구하는 내가 요리도 못 하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모두들 웃었다.  그는 흘러간 명곡도 잘 불렀다.  이런 우장춘이었으나 연구와
실험에 있어서는 엄격했다.
   나한테 기술만 배우겠다고 온 사람은 하루바삐 이 곳을 떠나게.  과학이나 기술을 알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하네.
  우장춘은 마지막으로 청정 야채 재배와 벼 품종 개량에 힘을 기울였다.
   지금 유엔군은 일본 등지에서 채소를 사다 먹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야채를 물로
재배하도록 하여 그들의 관념을 고쳐야 한다.
  또 우장춘은 해마다 막대한 외화를 써 가면서 식량을 수입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벼
품종 개량으로 한 번 심어 두 번 거둘 수 있는 품종을 만들어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런 벼 연구를 하면서 그는 너무나 과로했다.  이미 환갑의 나이라 체력이 정신력을
따라 주지 않았고, 자리에 눕는 날이 많았다.
  1959년 5월 20일. 이 날은 원예 시험장 창설 기념일이었다.  우장춘은 직원들과 함께
야유회를 갔다.  그런데 갑자기 몸에 예사롭지 않은 통증이 느껴졌다.
   잘들 놀다가 오게.  나는 마침 급한 볼일이 좀 있어서…….
  부하 직원들의 흥이 깨질까 염려한 그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보이며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뒤, 우장춘은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일어나지 못했다.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그를 서울에 있는 중앙 의료원에 입원시켰다.  병명은 위궤양,
복막염, 당뇨병 등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스나가 부인이 달려왔다.  우장춘은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에겐 고생만 시켜 면목이 없소.  그러나 이제 고국에 돌아왔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절대로 죽지 않소.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설마 죽기야 하겠소?
  그러나 우장춘의 병세는 더욱 나빠졌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정부는   문화 훈장 을 그에게 수여했다.  우장춘은 이 때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중환자였으나 침상에 일어나 앉아 이를 받았다.
  1959년 8월 3일, 육종학의 마술사, 우장춘 박사는 예순두 살을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수원 여기산(농촌 진흥원 뒷산)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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