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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쇼팽의 음악과 사랑

by Casey,Riley 2023.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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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팽의 음악과 사랑

송숙영


이 책을 읽는 분에게
쇼팽 시대의 조감도
출생의 배경
유년 시절
연극과 향토음악에 도취했던 학창 시절
위대한 음악적 능력자
첫 해외 여행의 풍자도
각광받은 바르샤바의 연주회
갈등과 고뇌의 시간
영원히 조국을 떠나던 날의 이별식
비운의 시간들
우울한 빈의 생활
빈 음악계의 실정
방황하는 폴란드의 젊은 혼
악몽 속의 애도곡
파리의 풍경
스승과 제자의 편지
파리 악단에의 데뷔와 연인의 결혼 소식
파리에서의 교우
화려한 귀공자의 모습
타오르는 새로운 사랑 속에서
대중을 두려워한 천재
부모님과의 재회
또 하나의 사랑의 악장
조르주 상드의 이성 편력
다시 켜진 전설의 불꽃
아름다운 남국의 섬에서
(빗방울 전주곡)이 탄생되던 말
마르세유에서
열정의 진상
다시 파리의 총아로
쇼팽 음악의 절정기
노앙의 (전원 교향악)
파탄의 긴 항로
침묵 속의 최후
고통 속에서 요정은 약속을 지켰다
영국의 안개 속에서 고갈된 악상
다가온 사신의 발소리
죽음의 장
연표





    쇼팽 시대의 조감도
    
  쇼팽이 출생하여 생을 마치기까지의 몇십 년은 인류사상
최대의 예술가들이 거의 모두 존재하던 시대였다.
  슈만, 리스트가 쇼팽과 같은 해 또는 한 해 뒤에 출생했고
구노, 스메타나, 요한 시트라우스, 포스터, 브람스, 생상스,
비제, 부르흐, 무소르그스키, 차이코프스키, 마스네, 그리
그, 림스키코르사코프, 사라사테 등이 차례로 쇼팽의 시대에
출생한 음악가들이다. 
  쇼팽의 생존 시대에 또 한편에서는 베버, 베토벤, 슈베르
트, 벨리니, 필드, 훔멜, 파가니니, 멘델스존 등이 차례로
죽어갔다.
  음악의 천재들이 살고 있던 이 시대는 그러나 정치 사회사
적으로는 많은 격동을 겪었던 불운의 시대였다. 유럽 각국은
끊임없는 혁명의 물결로 어지러웠으며,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쇼팽의 조국 폴란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쇼팽의 나이
20세(1830년) 때 폴란드 혁명이 일어났고, 그는 21세 때 그
의 생에 있어서 영원히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떠날 무렵 폴란드는 소용돌이치는 바다 위의 난파선
과도 같았다.  그는 그 땅에 사랑하는 부모와 여자 형제들, 
그리고 첫사랑의 연인 그라드코프스카를 두고 왔다.  그의 우
수와 슬픈 사랑의 역정은 이 운명적인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그로부터 쇼팽의 나머지 반생은 파리에서 음악에 바쳐졌으
며, 폴란드는 쇼팽을 통해 영원히 죽지 않는 예술의 나라가 
되었다. 

    출생의 배경
    ―축제날의 바이올린 소리 속에서

  쇼팽은 1810년 2월 22일 저녁 폴란드 제라소바 볼라에서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과 어머니 유스티나 그지자노프스카와
의 사이에서 누이 루드비카를 위로 하고 두 번째 아들로 태
어났다.  그런데 쇼팽의 생시에는 그의 출생년이 1809년으로
알려져, 실제보다 한 살 많은 것으로 아는 이가 많았었던 것
같다.
  부친 니콜라스는 1771년 4월 15일 프랑스의 땅 로렌의 마
렌발에서 포도 농장집의 아들로 태어난 순수한 프랑스계 혈
통이다.  로렌에서 중학교까지 마친 니콜라스는 17세 때 폴란
드로 이주해 왔다.
  고향인 로렌은 폴란드인 영주 스타니스라스 레스친스키에
의해 통치되는 식민지였다.  좋은 왕(르본르와)이라 불렸던 폴란
드인 영주에 대해 강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어린 프랑스인
니콜라스는 마음속에 제 2 의 고국으로 폴란드에 대한 그리움
을 싹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성장한 소년 니콜라스는 바르샤바에 와서 냄새가
고약한 담배 공장의 부기계 직원으로 취직을 했는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폴란드의 제 2 차 분할이라는 비극과 마주쳐야
했다.  니콜라스는 국민군의 일원으로 일어섰으나 폴란드는
패망했고, 바르샤바는 프로이센 점령 하에 들어갔다.
  패전한 바르샤바 거리는 생활의 위기와 불안으로 넘쳤다.
니콜라스는 프랑스어를 가르쳐서 겨우 생활을 유지할 수 있
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제라소바 볼라의 영주 스카르
벡 백작 부인을 만난 게 인연이 되어 그녀 아들의 가정교사
로 들어가게 되었다.
  스카르벡 백작가에는 부인의 먼 친척 되는 귀족 출신
의 딸 유스티나가 가사를 돌보아 주러 와 있었다. 
  푸른 눈의 처녀 유스티나는 피아노를 잘 쳤다.  니콜라스는
시를 곧잘 지었고 바이올린과 플루트를 잘 연주했기 때문에
이들 둘은 자주 어울려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1806년 6월 2일 니콜라스(35세)와 유스티나(24세)는 제라
소바의 보르호프 교회에서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한 이듬해 4월 6일 유스티나 부인은 첫딸 루드비카를
낳았다.  이해에 폴란드는 칠지트 화약의 결과로 폴란
드의 5분의 1밖에 안 되는 바르샤바 대공국으로 새로 탄생되
었다.
  이어 1810년에는 프레데릭 프랑수아 쇼팽이 태어났고 1811
년에는 쇼팽의 누이동생 이사벨라가, 1813년에는 에밀리아가
출생하여 쇼팽 가에는 1남 3녀의 자녀들이 생겨났다.
  쇼팽이 태어나던 날 창문 밖에선 축제 때의 습관처럼 바이
올리니스트들이 썰매를 타고 와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이름은 스카르벡 백작 부인이 지어 주었다. 
  니콜라스는 아이들의 출생에 따라 늘어나는 생활비의 부담
때문에 바르샤바로 이주하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쇼팽이
출생하던 해 가을, 바르샤바 중학교 교장 사무엘 보그일 린
데의 호의에 의해 린데가 경영하는 중학교의 프랑스어 교사
직을 얻어 이사하게 된 것이다. 
  바르샤바 중학교에 부임한 니콜라스는 예상보다 수입이 적
어 상류 가정의 아이들을 개인지도하며 수입을 보충했는데,
그의 성실한 교육 태도는 바르샤바에 널리 소문이 났다.
  셋째 딸 에밀리아가 태어날 무렵인 1813년경 니콜라스는 
포병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이후로 줄곧 교직을 전전하다가
만년에는 연금을 받아 포도밭을 가꾸며 살다가 73세에 사망
했다. 
  프레데릭의 어머니 유스티나는 가정을 화목한 분위기로 만
들었고, 아이들에게 섬세하게 배려하는 자상한 어머니상의
여인이었다.  조르주 상드는 이 어머니를 일컬어 쇼팽이 진
실로 사랑한 유일한 여성 이라고 말한 바 있다.  프레데릭은
먼 타국에서 외로운 반생을 보내는 동안 어머니와의 편지를 
통해서 많은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녀는 생전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두 딸을 잃었으며, 사랑하는 외아들 프레데릭의 
임종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리고 1861년 10월 1일 79세의
노령으로 둘째 딸의 집에서 세상을 떴다.
  누나 루드비카는 쇼팽의 생애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고,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다.  만년의 프레데릭이
병고 속에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머나먼 길을 달려와 구원
의 손길을 뻗쳐 주었으며, 프레데릭의 임종을 지켜본 유일한
핏줄이었다. 
  루드비카는 철저한 가정교육을 받아 부모를 도왔으며, 여
동생 이사벨라와 협력하여 노동계급의 생활 향상에 관한 저
술을 공표하였고, 청년교육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832년 에툴제비치 교수와 결혼하여 1859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여동생 이사벨라는 머리가 총명하여 저서도 많이 남겼고,
쇼팽의 가정교사 파라친스키와 결혼하여 1881년 70세로 사망
했다. 
  막내 여동생 에밀리아는 가장 뛰어난 어린이로, 나이에 맞
지 않을 정도로 교양이 있고 기지에 넘쳐 모든 식구들로부터
아깝게도 14세(1827년)의 어린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이와 같이 프레데릭 쇼팽의 가정 환경을 보면 아버지를 제
외하곤 모두 여성들인 것이다.  프레데릭의 성격 형성기에 있
어서 강하게 풍겼던 여성적 분위기는 그에게 상당히 깊은 영
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을 깊이 간파한 코르
토(Alfred Cortot, 1877-1962, 프랑스의 피아니스트)는 그의 
누이들을 사실상의 자그마한 어머니 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적인 성격은 프레데릭의 청년기에 있어서 남성
적인 면이 강한 친구 티투스에게 동성애적인 애정을 보이는 
가 하면, 남성 같은 강함과 적극적인 성격에 모성 본능을 지
녔던 조르주 상드와의 관계에서도 특이한 애정 생활을 보여
준다. 

    유년 시절
    ―천재 소년 음악가로 데뷔

  제라소바의 스카르벡 가 저택에서 출생한 프레데릭은 바르
샤바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폐허와 같은 바르샤바에서 보냈
다.  이탈리아식 건축 양식의 궁전과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목
조건물이 기괴하게 부조화되어 혼잡한 느낌을 주는 바르샤바
거리에서 프레데릭은 자라났다.
  더러운 것과 화려한 것들이 뒤섞여서 번화한 바르샤바.
1814년, 나폴레옹 황제의 붕괴에 의해 바르샤바 대공국의 운
명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러시아 활제 알렉산더 1세는 폴
란드 완의 칭호를 받아 동생인 콘스탄틴 대공을 총독으로 위
임했다.  이 지배 체제는 자유주의는 아니었다.
  쇼팽 가의 자매들은 모두 건강하였는데 유독 프레데릭은
허약한 체질로 식사를 잘 하지 못했다.  달래서 겨우 식사를
하게 해야 했으므로 나약한 프레데릭의 몸은 늘 집안의 걱정
거리였다. 
  쇼팽의 집에선 아이들을 중심으로 자주 가정 음악회를 열
곤 했다.  유스티나 부인은 피아노를 쳐주면서 아이들의 음악
회를 이끌어 주었다.  갓난 아기 그리섹(프레데릭의 애칭)은 
이상하게도 피아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울음을 터뜨려 부모는
그를 달래느라 애썼다.
  그러나 조금씩 커가면서 프레데릭은 어머니가 치고 있는
피아노 밑에 기어 들어가 이상한 상자에서 울려나오는 음을
듣고 기뻐하였다.  조금 더 커서는 피아노 건반을 만지며 노
느라고 혼을 뺏긴 채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누나인 루드비카는 이를 보고 동생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기로 했다.  프레데릭은 놀란 만큼 빠르게 배웠다.  손의 위
치도 금세 익히고, 자기가 들은 곡을 곧 피아노로 옮겼다.
얼마 안 가서 어린 루드비카의 실력으론 프레데릭을 더 이상
가르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부모는 60세가 되는 보이체프 지브니 선생을 쇼팽
의 피아노 가정교사로 선택했다.  지브니는 술을 몹시 즐기는
호인이었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청년스러운 의기를
지니고 있었으며, 어린 프레데릭에게 음악의 혼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는 자기 스승으로부터 이어받은 요한 세바스찬 바
하와 모차르트의 음악적 천분을 프레데릭에게 가르쳤다.  이
러한 지브니 선생의 교육은 쇼팽의 음악에 매우 중요한 영향
을 주었다.
  쇼팽은 죽을 때까지 바하의 ≪평균율≫ 피아노곡집을 거울로
하여 끊임없이 연구하였고, 모찰그트에 대해 평생 애착을 보
이며 존경하고 있었다.  이것이 모두 지브니 선생의 지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브니는 자신이 달성하지 못한 음악에의 소망을 소년 프
레데릭에게 맡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브니 선생과 음악공부를 하는 동안 프레데릭은 7세가 되
었다.  기지가 풍부산 프레데릭은 음악을 제외하곤 보통애들
과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일단 피아노 앞에 앉아 즉흥 연주
를 하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지브니 선생의 지
도를 순식간에 소화하여 스승을 초월할 만큼 놀라운 창조력
을 발휘하기도 했다.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프레데릭의 솜씨는 지브니
선생의 입을 통해, 또는 스카르벡 부인에 의해 상류 사교계
에 소문이 나게 되었다.
  프레데릭은 여러 곳의 상류 가정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소문은 콘스탄틴 대공의 귀로 들어가 러시아 총
독관저 부르흐 궁에서 행진곡을 연주하게까지 되었다.
  소년 프레데릭이 이 무렵 바르샤바의 상류 사회에서 얼마
나 이름이 알려져 있었는가는 당시 이름 높은 정치가이며 저
술가였던 울진 니므셰비츠에게 초빙받은 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찍이 상류 사회에 드나들게 되었던 일은
쇼팽이 평생 예의 범절이나 신사적인 우아한 행동에 익숙하
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 것이었다. 
  이러한 프레데릭에게 주어진 명예는 한낱 교사의 아들에게
는 몹시 과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아들의 명성
을 자신들의 사교의 도락으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그로 해서
어린 쇼팽의 순진성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드디어 대중 앞에서 당시의 유명한 오스트리아
작곡가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하기에 이르렀다.  1818년 2
월 24일 자선 축제일이었다.  같은 해에 나단조 폴로네즈가
<빅토와르 스카르벡 백작의 영양에게 헌정한다>라는 헌정사
가 붙어 출판되었다.  당시 바르샤바 월보의 평은 이러했다.
  그는 음악적인 수준으로 보아도 하나의 경이스러운 천재다.
  ……그는 매우 부드럽고 우아한 취미를 갖고 있으며 아주 어
려운 곡을 피아노로 연주할 뿐 아니라 무곡·변주곡도 몇 곡
작곡했는데, 그 곡들은 전문가와 비평가들의 놀라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천재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
에게 기억시키고자 한다.
  이 1818년의 제 1 회 독주회가 열리던 날 프레데릭은 희고
큰 칼라를 단 검정 빌로도 옷에 짧은 바지를 입고 흰 양말을
신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는 넓은 무대 중앙에서 수많은 시선에 놀라고 당황했다.
그날 어머니 유스티나는 몸이 아파서 이 영광스런 아들의 무
대 광경을 참관할 수 없었다.  프레데릭은 밤늦게 피곤한 몸
으로 집에 오자마자 병상의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사람들은 프리섹의 무엇을 가장 칭찬했니 ? 
  어머니는 연주가 끝났을 때 아들에게 퍼부어진 박수 갈채
를 상상하며 물었다.
   엄마가 만들어 주신 이 하얀 칼라였어요. 
  프레데릭의 대답은 어머니의 깊은 애정에 대한 감사로 충
만한 것이엇다.
  귀족들은 프레데릭을 아끼고 사랑했다.  프레데릭이 만든
행진곡을 군악대에 연주시키게 한 것은 콘스탄틴 대공이었
다.  그가 10세 대의 일이었다.
  콘스탄틴 대공은 베르베델 궁전에 살면서 잔혹하고 난폭한
성경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폭군이라 할 수 있었는데, 그의
기분을 조용히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은 프레데릭의 연주뿐이
었다.  부관이 급하게 그를 데리러 와서 카자크 병사가 탄 네
마리의 말이 끄는 2륜마차를 타고 궁전에 도착하면 프레데릭
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해야 했다.  대공은 그의 연주를 들
으며 마음을 풀었다.
  프레데릭의 음악적 진보는 놀랄 정도로 눈부신 것이어서
지브니 선생의 생각을 초월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1821년 4월 23일에는 <A.지브니 씨를 위하여 그의 제자 프
레데릭 쇼팽이 작곡한 피아노 독주용 폴로네즈>라고 쓴 악보
를 스승에게 바쳤다.  이날은 지브니의 명명일이었고. 프레데
릭의 교사로서의 자격이 없어지는 날이기도 했다.
  프레데릭은 10세 때 유명한 대성악가 안젤리카 카탈라니
앞에서 연주하게 되었는데, 카탈라니는 그에게 금시계를 선
물로 주었다.
  12세가 되자 쇼팽은 지브니 선생의 지도를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기에 이르렀다.

    연극과 향토음악에 도취했던 학창 시절
    ―중·고등학교 시절의 연극적 재능

  1824년에 쇼팽은 전문학교(중·고 과정)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음악 때문에 아들의 보통 교육이 소홀해질까 염려했다.  작센
궁에 있던 중학교가 카지밀 궁으로 옮겨가게 되자 쇼팽 일가
도 좀더 넓은 주택으로 이사하였고, 기숙생의 수를 늘려 집
안에 사숙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엇다.  
  프레데릭이 평생 두터운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 티투스 보
이체호프스키와 보진스카 가의 형제들, 폰타나 슬로바츠키
등은 바로 중학 때부터 쇼팽 가에 기숙했던 죽마지우이며,
이외에도 상류 가정의 자제들이 그의 집에 기숙했다.
  피아노의 천재였던 프레데릭은 학과에서는 잘하는 것과 그
렇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는 폴란드 문학이나 역사에는 몰
두하였지만, 자연과학이나 그리스어, 라틴어는 지루해 하였
다.  그는 지루한 수업 시간엔 곧잘 만화를 그려 노트를 가득
채우기도 했다.  만화 그리는 것은 그의 장기였다.
  또 그는 남의 흉내를 내는 데도 재주가 비상했다.  때때로
린데 교장의 몸짓과 친구들의 흉내를 내어 급우들을 웃기곤
해싿.  이러한 그의 장난스런 성격은 뛰어난 연극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폴란드의 유명한 배우 피아제키는 쇼팽에게 위
대한 배우가 될 소질이 있다고까지 말했다고 전해진다.
  1824년 아버지의 생일날 프레데릭은 누이동생과 함께 시
형식의 희극을 만들었다.  (탄로난 사기꾼의 최후)라는 희극
의 작자 이름은 ≪스자파르니아 크리엘≫ 지(장난으로 만든
신문)의 주필 (쇼팽)과 검열관의 승삼이라 되어 있고, 에밀리아와
피숑(쇼팽의 가명)이라 썼다.  에밀리아는 누이동생 이름이고 
피숑은 쇼팽이다.  이 극은 아버지를 비롯해서 응접실의 손님
들을 매우 기쁘게 하였다.
  1824년 여름 방학이 되어 몸이 허약한 프레데릭을 생각한
부모는 기숙생 도미니크 양친의 초대를 받아들여 쇼팽을 스
자파르니아로 휴양 보냈다.
  도시에서만 자란 프레데릭에게 스자파르니아에서의 생활은
기쁨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프레데릭
은 집으로 보내는 편지 대신 지방신문 형식의 통신을 신문으
로 만들어 보냈다.
  그 주필을 <피숑 씨>라고 이름지었는데, Pichon은 Chopin
을 바꾸어 쓴 것이다.  츠이바노프스키의 딸 주이제가 쇼팽이
발행하는 신문의 검열관 역할을 맡는 등 장난기가 가득한 소
년기의 쇼팽을 연상하게 한다.  이 신문 형식의 편지는 ≪바르
샤바 크리엘≫로 신문 이름을 바꾸어 쓰고 있다.
  이 신문 중 몇 가지가 뒤에까지 남아 전해진 것을 보면,

    6월 15일
    피숑 씨는 여러 명의 성인 및 청년들로 구성된 스자파르니아
  음악회에서 솜씨를 자랑했다.
라고 씌어진 것이 있다.
  또 이때의 기사 속에는,

    8월 11일
   길이 안 든 말을 타 보았다.

    8월 12일
    암탉이 병아리를 까기 시작했고, 집오리가 거위와 싸움을 해
  서 한쪽 다리를 다쳤다.  암소는 이제 건강을 회복하여 문병을
  받고 있다.
등과 같이 그곳의 사건과 정경도 묘사하고 있다.
  또 어떤 날의 기사에는,
    피숑 씨는 자작의 <작은 유태인>을 쳤다(그것은 가단조의 마
  주르타의 처음 스케치다).  츠이바노프스키 씨는 유태인 소작인     
  을 불러 이 명연주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모시에프는 창가에
  붙어서서 방안에 그의 숭고한 메부리코를 들이밀고 귀를 곤두
  세우며 자기의 느낌을 피력했다.
     만약 피숑 씨가 유태인의 결혼식에서 연주하려고만 한다면
  매월 적어도 10에커의 수입이 있을 것이다. 
  라고
라는 내용도 있다.


  이리하여 뜻깊은 방학은 끝났다.  프레데릭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성장을 하게 되었다.  쇼팽은 이 지방에서 참
으로 크나큰 자극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민중적인 향토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폴란
드 농민은 그때 사원개기제, 추수제 등 축제일 또는 무도회, 
결혼식과 같은 모임에서 그들의 향토음악을 격정적으로 들려
주었다.  비록 예술성은 희박하다 할지라도 그 음악 속에는
관능적인 울림과 불꽃 같은 열기와 정다움이 있었다.  프레데릭은
격렬한 즐거움을 가지고 그 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에서의 향토음악에 대한 체험은 후에 쇼팽의 예술을
성장시키는 풍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1825년에 쇼팽은 바르샤바로 향차한 알렉산더 1세 앞에서
바르샤바 제일의 피아니스트로서 연주를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새로 발명된 에어로 멜로디콘이란 악기를 연주했다.  프
레데릭은 타국의 황제 앞에서,  그것도 조국 폴란드를 오랜
동안 고뇌 속에 몰라넣은 황제 앞에서 연주하게 된 것을 즐
겁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거절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었다.
연주가 끝난 뒤 황제는 프레데릭과 악기 제작자에게 다이아
몬드 반지를 하사했다. 
  이해에 쇼팽에게는 또 한 가지의 기쁜 일이 생겼다.  바르
샤바 최대의 악보 출판업자 브셰지나에 의해 베버와 훔멜의
영향을 받아 씌어진 <론도 다단조>가 출판된 것이다.  이 작
품은 쇼팽의 작품표 제 1 번이다.  이 곡을 그는 아버지의 친
구인 린데 교장의 부인에게 헌정했다.
  한편 이해의 정세는 어지러운 국면으로 치달았다.  러시아
황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은 정세를
비극적으로 몰아갔다.  바르샤바에서는 반란의 폭도들이 계속
체포되기 시작햇고 많은 폴란드인들은 항의 표시로 상장을
달고 다녔다.  위대한 애국자의 장례식에 전 바르샤바 시민이
참석했다.
  프레데릭은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열광과 충동에 들떠 참석자들은 관을 덮어놓은 포장을 찢어
서 나눠 가졌다.  나도 그 한조각을 가지고 있다. 
  중학 시절에 벌써 바르샤바 악단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각
된 그의 성공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재능 덕분이었다고 하겠
으나, 한편으로는 부모의 조심성 있는 교육과 환경이 그에게
유리하게 조성되어졌던 덕분이기도 했다. 
  프레데릭의 가정생활은 아주 행복했다.  아버지는 은근한     
생활에 기쁨을 느끼는 교양 있는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정서 
적인 인격은 프레데릭과의 오랜 서신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다.
  어머니 유스티나는 가정을 안락하게 만드는 조용한 부인이 
었다.  누이들과는 평생을 통해 친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이
처럼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질서 있는 가정 분위기는 프레
데릭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아버지 니콜라스는 자라는 자식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자극
을 주었다.  니콜라스 쇼팽은 뒤어난 학자·문필가·예술가
들과 깊은 교제를 맺고 있엇으므로 쇼팽 가의 자녀들은 집에
서 바르샤바 최고의 상류 지식 계급 인물들을 만나 볼 수 있
었고, 그것은 그들의 장래에 큰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쇼팽이 청년으로 성장해 가고 있던 이 무렵의 바르샤바는
정신문화의 발흥기에 놓여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바르샤바도 평화를 되찾고 번영의 시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예술과 학문이 이해되고 보호와 배려가 이루어졌다.
  폴란드 문학에도 눈부신 부흥기가 도래했다.  브로진스키나
미키비치 같은 시인들이 나와 고전시에서 낭만주의에로의 전
환에 크게 공헌하고 있었다.  브로진스키 등 시인과 자주 접
촉했던 쇼팽도 낭만적 예술 이념에 몰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아버지의 배려에 의해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쇼팽
은 전세대의 많은 음악가들과 같이 빈약한 학력으로 음악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던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모든 교과 과정(언어학·역사·신학·자연과학 등)을 전문
학교에서 열시히 배운 쇼팽은 그의 예술의 깊이를 한층 깊게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보통애들도 학교 과정만으로도 부담
이 컸는데, 쇼팽은 학교를 마친 뒤 밤시간에 작곡 연습까지
했다.  연약하고 어린 쇼팽에겐 너무나 과중한 신체적·정신
적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한밤중에도 깨어나 피아노를 치는 쇼팽에 대해 하인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머리가 돈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 모양이다.
  1826년에 쇼팽은 중·고 과정의 전문학교를 마쳤다.  이때
그의 몸은 쇠잔할 대로 쇠잔해져서 온천 요양을 해야 할 정
도에 이르렀다.  그의 학교 성적은 우등의 뛰어난 성적을 기
록하고 있다. 
  졸업 후 어머니는 쇼팽과 두 누이를 데리고 실레지아의 라
이넬츠로 갔다.  그들의 체재중에 있었던 일은 이곳에 세워진
기념비가 전해 준다.
    위대한 음악적 능력자
    ―음악원 시절의 청년 쇼팽과 엘스너 선생
  이제 쇼팽은 음악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쇼팽은 화
성학과 대위법을 배우기 위해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한 것
이다.  이 음악원의 원장은 요제프 크자베르 엘스너였다.  이
때 음악원에 함께 입학한 친구는 폰타나 한 사람뿐이었다. 
폰타나는 이로부터 평생 동안 쇼팽의 절친한 음악 친구가 되
고 있다.
  엘스너 선생은 쇼팽이 음악원에 입학했을 때 57세였다.  그
는 1769년 7월 1일 클로트카우에서 태어나 브레스라우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친 뒤 빈에 유학했다.  그 자신은 스웨
덴 바자스 왕가의 후손이라 말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의학 공부를 시키려 햇으나 그는 음악에만
골몰하여 브레스라우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하기도 하고, 극
장에서 가수나 바이올리니스트로 일하기도 했다.
  1792년에는 뷔륜에서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
고, 다음해 렘베르크에서는 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1854년
죽을 때까지 바르샤바에서 살았다. 
  엘스너는 순수 독일인이었는데 폴란드인들이 그를 친구로
생각할 만큼 제 2 의 조국 폴란드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바르샤바에서는 많은 음악가 중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
는 피엘의 숭배자라고 자처하였으며, 23곡의 오페라와 수많
은 미사곡과 교향곡을 작곡했다.  ≪폴란드 운율학과 율동학
개론≫이라는 저서를 남기고 있는 그는 폴란드 음악의 창조자
라고 불려진다.  상상력의 경묘함으로 인해 그의 작곡가로서
의 평가는 대단했으나, 그의 작품 속에는 독자성이 결여되어
있는 게 흠이었다.
  바르샤바 음악원장으로서의 엘스너는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존재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위대성과 불멸의 영광이 후세에까지 남게 된 것은 쇼팽
의 스승으로서 제자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에 맞추어 사려
깊은 방법으로 교육한 때문이다.
  엘스너 선생은 쇼팽을 학교 과정에 얽매어 놓지 않고 쇼팽
의 환상을 방해하지 않는 방법으로 교육했다.  쇼팽은 자신이
작곡한 것을 엘스너 선생게게 보여주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이때 엘스너 선생의 쇼팽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나는 쇼팽에게 칭찬하는 눈치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법칙에
  입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독창성을 지니고 있기
  대문이다.  그의 재주는 범상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잘못하
  지 않는다면 그는 그 독창성으로 크게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쇼팽은 3년간 엘스너의 문하생으로서 음악 연
마를 하면서 근본적으로 음악을 체득하게 되었다.  
  1827년 7월 17일의 엘스너 선생의 노트를 보면 다음과 같
이 적혀 잇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데릭 쇼팽 ―――- 유능한 학생.
또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도 적고 있다.
    프레데릭 쇼팽 ―――- 뒤어난 학생, 2학년 때 건강이 나빠 휴양
  여행을 함.
1829년 7월 20일의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프레데릭 쇼팽 ――― 3학년생, 위대한 음악적 능력자, 음악의
  천재.
  이 음악원에서는 매우 엄격한 교육이 행해졌다.  여러 면에
서 볼 때 쇼팽은 지극히 주도 면밀한 교육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쇼팽은 음악 학교 밖에서도 많은 음악을 듣는 기회에 접하
게 되엇는데, 이 무렵 음악 연주를 하기 위해 바르샤바에 온
중요한 인믈들과 교제하게 된 사실은 그의 편지들이 증명하
고 있다. 
  바르샤바에서는 이때 오페라, 콘체르토, 교회음악들이 열
렬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사람들은 독일의 대도시에서 유행
하던 모든 음악, 즉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오페라, 모차르트
와 베버의 작품, 하이든, 베토벤, 훔멜, 슈폴 그 밖의 작가
의 기악을 바르샤바에 앉아서 들을 수 있었다.
  그 중에도 모차르트의 <레퀴엠(진혼곡)>, 하이든의 <칠언>, 
세르비니의 <미사곡> 같은 것은 자주 연주되었다.  또한
당시의 인기 작곡가들로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지고 있는 작
곡가들―――프레이엘, 리이스, 칼크브렌너, 기로베츠 등과
폴란드에 있던 엘스너, 크로핀스키, 드볼츠인스기, 소리바
등의 작품이 빈번하게 연주되었다. 
  1828년에 바르샤바 극장에선 훔멜의 콘서트가 있었다.  품
멜은 당시 필트, 모슈레스 등과 함께 뒤어난 피아니스트로서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높았다.  훔멜은
많은 자작곡을 치면서도 어떤 음악회에서나 주어진 테마로
즉석에서 즉흥 연주를 해냈다.
  쇼팽은 훔멜과 친히 지냈으며, 훔멜은 전ㅁ은 음악가 쇼팽에
게 흥미를 가지고 호의를 보였다.  쇼팽이 빈에서 지내는 동
안 훔멜은 몹시 친절한 우정으로 대해 주었다.  쇼팽은 훔멜
의 음악에서 영향받은 바 컸다.  쇼팽의 연주법이나 작곡에는
훔멜 풍의 요소가 많이 가미되고 있다.  모슈레스는 쇼팽에게
엄격하면서도 즐거운 음악 정신으로 영향을 준 사람이다.
  쇼팽의 부모는 쇼팽이 자유롭게 음악 공부에 몰두할 수 있
도록 언제든지 친구들을 불러들일 수 잇는 커다란 방을 마련
해 주었다.
  1827년 쇼팽 가에는 큰 슬픔이 있었다.  그것은 앞에서 말
한 바 있듯이 에밀리아의 죽음이었다.  그너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문학적 재능을 나타냈었다.  그런데 이해 4
월에 폐결핵이 심해져 객혈을 하면서 죽어간 것이다.
  음악원의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쇼
팽은 시골 공기를 찾아 휴양을 떠났다.  그가 간 곳은 포즈나
니의 스롤지제보였는데, 이곳에는 아버지 니콜라스가 예전에
가정교사로 있던 스카르벡 백작의 누이동생인 비쇼로프스카
부인의 저택이 있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초조해져 있던 쇼팽은 오랜만에
접촉하는 아름다운 시골 정경에서 소생하는 듯한 기분을 느
꼈다.
  스롤지제보의 가까운 곳에 안톤 라지빌 공작 댁이 있었는
데, 쇼팽은 이 무렵 그분 댁을 방문했다.
  라지빌 공작은 바르샤바 귀족들과 넓은 교제를 밎고 있는
테였으므로, 1825년에 이미 쇼팽의 연주를 들은 적이 있었
다.  라지빌 공작은 괴테의 ≪파우스트≫ 제 1 부를 작곡하여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음악을 좋아하는 귀족이었다.  그의 
살롱에는 언제나 우수한 예술가들이 모여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등의 4중주곡을 연주하고, 그도 첼로 파트의 주자로 
참여하여 대단한 음악적 애호를 보였다.
  라지빌 공작 댁은 안토닝이란 곳에 있었다.  공작은 프러시
아의 페르디난드의 딸과 결혼하여 그때 실레지아에 억류되어
있던 폴란드 전쟁 포로를 석방하는 데 크게 공헌한 바 있다.
그에게는 엘리자와 반다라는 두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들도
역시 음악가였다.  엘리자는 이 무렵 피아노에 앚아 있는 쇼
팽의 초상화를 여러 장 그렸다. 

    첫 해외 여행의 풍자도

  이 여행은 쇼팽에게 처음으로 국제적인 활동 무대에 서게
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터득할 수 있는 절호
의 기회가 되었다.
  쇼팽은 베를린에서 목적했던 대로 5편의 오페라를 보았다.
그 중에서도 베버의 <마탄의 사수>에 감격했고, 헨델의 합창
곡 <성 세실리아 제일에의 찬가>에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저는 정말 저 자신을 잊고 음악을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숭
고한 음악에 대한 저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라고 가족에게 보낸 편지 속에 적어 넣었다.
  쇼팽이 야로키 교수와 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9월 14일이었
다. 그들은 클롬프린츠 여관에 들었다.  쇼팽은 베를린에서 9  
월 16일, 20일, 27일 세 차례에 걸쳐 부모에게 긴 편지를 보
냈다.
  야로키는 쇼팽을 리히텐슈타인이라는 동물학 박물관 이사
에게 소개시켰다.  쇼팽과 인사를 한 리히텐슈타인 교수는 베
버의 친구이자 보호자였다.  그는 음악 학교의 멤버들인 저명
한 음악가들을 쇼팽에게 소개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쇼팽은 그 약속대로 저명한 음악가와 직접 대면하
지는 못했다.  쇼팽은 음악 학교의 연주회에서 멘델스존, 첼
텨, 스폰티니를 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가족에게 보낸 편지
에는,
    저는 그 어른들과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만나
저 자신을 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라고 적었다.
  쇼팽은 베를린에서 수많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
만으로도 그에겐 크게 다행한 일이었다.  스폰티니의 오페라
<페르디난드 콜레스>와 빈터의 <중지된 부활제>, 그리고 치마
로자의 <비밀 결혼>과 온스로프의 <성서 판매인> 등을 그곳에
서 들었다.
  쇼팽은 동물학 박물관과 왕립도서관을 관람하면서 따분하
게 느끼고 있었으나, 술레징거 악보점에선 비상한 흥미를 느
꼈다. 
    이 상점은 여러 나라와 시대의 흥미있는 작곡 악보들로 이루
어져 있습니다.  앞으로도 술레징거를 찾게 될 것입니다.  여기
에 있는 모든 것에서 필시 무엇인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만 한다면 이곳은 젊은이에게 있
어 좋은 곳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큰 즐거움이 됩
니다. 
                                1828년 9월 16일

  풍자와 희화에 특히 흥미를 갖고 있던 쇼팽은 베를린으로
오는 도중, 그리고 베를린 체재중에 많은 자료를 얻게 되었다.
쇼팽은 야로키 교수를 따라 학자들의 빈번한 향연에 참석했다.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그 대개의 광경은 모두 제가 그린 희화처럼 보였습니다.

쇼팽은 음악 학교에서 이그나츠 후작 부인이 겉옷을 걸친
사나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사나
이는 얼핏 보아 시종같이 보였는데, 그가 곧 알렉산더 폰 훔
볼트였다.  쇼팽은 다른 편지에 그에 대한 깊은 인상을 존경
의 찬사로 적어 보냈다.
  베를린에서 두 번째로 오찬에 초대받았던 일에 대해 쇼팽
은 이렇게 적어 보냈다.
  그것은 참으로 굉장히 활기 차고 유쾌한 자리였어요.  훌륭한
식사 도중에 많은 노래가 불려졌는데 그때마다 모두가 높은 소
리로 합창했습니다.  첼터가 그들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붉은
색각대 위에, 크고 금빛 나는 높은 각배가 올려져 있는 옆에
서 있었어요.  그것은 첼터에게 큰 기쁨을 주는 것 같았으며,
위대한 음악가적 존엄의 상징으로 보였습니다.  이날 식사는
특히 호화로운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자연과
학자들의 모임에 있어서는 생선요리나 수프, 그밖에 그와 비
슷한 요리들을 완전히 갖춰 놓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호
화로운 음식이 차려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또 편지 끝에는,
    회화의 수가 늘었습니다. 
라고도 덧붙였다.
  베를린 거리에 대해서 쇼팽은 인구에 비해 도시가 너무 크
다고 말했으며, 그곳의 여인들에 대해선,
    그녀들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런 인형들을 위해 잘려지는 옷
  감들이 가엾을 지경이다.
라는 풍자적인 표현을 편지에 써 보냈다.
  역마차로 한 여행도 쇼팽은 매우 풍자적이고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쇼팽이 이와 같이 풍자를 대담하게 표현한
것이나 야유한 모습은 특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사실은 쇼팽의 특징적인 일면으로 어려서부터 나타난
경향인데, 커가면서 이런 경향은 매우 특출하게 드러난다.
  쇼팽은 남의 몸짓을 흉내내는 재능과 온갖 인물의 특색을
잘 캐치하여 재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쇼팽을
알고 있던 많은 사람은 그의 이와 같은 성미에 대해 대체로
한두 가지 이상의 일화를 알고 있다.
  2주일의 베를린 체재는 쇼팽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을
뜨게 한 동시에 폴란드인이라는 의식과 조국에 대한 민족주
의적 감정을 재인식하게 하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9월 28일 야로키와 우편마차를 타고 귀로에 오른 쇼팽은
동승한 독일인들의 떠들어대는 정치 얘기와 파이프 연기 때
문에 밤새 잠들지 못하고 괴로워해야 했다.
  그들은 취리호프와 포이제느를 지나는 도중 역에서 말을
교체하느라 잠시 시간이 나자 역사를 겸한 식당에 들어갔다.
그곳엔 뜻밖에도 낡긴 했지만 매우 훌륭한 피아노가 놓여 있
었다. 
  쇼팽은 반갑게 피아노에 다가앉아서 치기 시작했다.  주변
에 있던 삭람들은 물론 길 가는 사람들까지 쇼팽의 피아노
연주에 이끌려 숨을 죽이며 듣게 되었다.
  이 구석진 시골의 공기를 뒤흔든 훌륭한 피아노 소리에 시
끄럽게 지껄이던 독일인도 타 들어가던 파이프 불이 꺼진 것
도 모르고 넋을 잃은 채 귀를 기울였다.
  이때 그가 연주한 것은 <폴란드 민요에 의한 대환상곡>이
었다.  역사의 주인과 그의 아내, 딸들까지 피아노 옆으로 은
연중 끌려나와서 음악에 취해 있었다.  쇼팽은 여행길에 있다
는 것도 잊고 오랜만에 만지는 건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때 마부가 들어왔다.
   손님들, 떠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라는 마부의 외침에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예상
치 않은 이 방해자를 향해 화를 내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
들은, 
   계속해 주세요.  그 훌륭한 곡을 끝까지 들려주셔야 합니다. 
라고 간청했다.
쇼팽은,
   난 포이제느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라고 말했지만 주인은,
   문제없습니다.  나는 귀하를 위해 특별히 만든 마차를 내
드리겠습니다. 
라고 쇼팽의 말을 막았다.  그의 부인도 두 딸들도 덩달아 졸
라대는 바람에 쇼팽은 하는 수 없이 연주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딸들은 과자와 포도주를 내오고 주인은 프레데릭을 위해
축배를 들어 주었다.  또 그 답례로 떠나는 마차에 음식과 술
을 잔뜩 실어 주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프레데릭 쇼팽의 이름을 잊지 않겠습
니다. 
  주인은 거듭해서 이 말을 외치며 쇼팽을 전송했다.
  이 여행은 외국에 가서 자신의 예술을 공부하고 싶다는 쇼
팽의 욕망을 더욱 자극시켰다.
   시골 구석에서의 칭찬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라고 말하며 쇼팽은 속으로 자신의 장래를 생각했다.
  포이제느에서 이틀을 묵는 동안 야로키와 쇼팽은 보리키
대승정의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묵는 동안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라지빌 공작 댁에서 음악을 즐기며 지냈다.
  10월 6일 그들은 바르샤바로 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쇼팽
은 그의 평생을 통해 깊은 우정을 맺은 티투스와 편지 왕래
를 시작했다.  이 편지들은 그의 전기 저술에 많은 도움이 되
고 있으며, 쇼팽의 개인적인 체험과 작곡에 얽힌 것, 그리고
극단 및 악단에 관한 일들을 전해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28년 12월 27일에 티투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내 <크라코비악풍의 론도>의 악보가 완성되고 있네.  이 곡에
는 자네가 언젠가 말한 것처럼 마치 내가 큰 외투를 입은 것과
같은 우스광스러운 데가 있네.  트리오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
어.  부모님은 내게 현관에서 곧 계단을 올라가는 곳에 있는 작
은 방을 주셨네.  그 방엔 낡은 책상이 있어.  그것을 내 일자리
로 쓰려고 해.  내 고아, 그대의 <판타레옹 (그랜드피아노의 전신인
장방형 피아노를 그 발명자 이름인 판타레옹이라고 농담으로 이름
붙인 것)>을 위한 론도는 폰타나가 이름을 지어 주었네.
  우리들은 이것이면 그럭저럭 발표해도 된다느 생각을 하게
되었다네.  이 말은 2개의 피아노가 딱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한 말이네.  감수성이란 쓸모없는 것이지만 어려운 것이지. 자
네도 알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곡 전체의 뉘앙스를 꾸미고 있
는 것이니까.
  이 편지는 쇼팽이 음악에 대해 생각한 방향을 잘 말해 주
고 있다.  즉 풍부한 감정과 즉흥적인 억양을 지닌 쇼팽의 연
주의 특색이 이러한 그 자신의 느낌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알
게 해준다.  이때부터 쇼팽의 음악에 대한 태도는 격정적인
데로 달려가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1829년 신황제 니콜라이 1세가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바
르샤바에 당도했을 무렵, 파가니니도 마침 그것에 도착하게
되었다.
  쇼팽은 약간 악마적인 영광을 안고 있는 파가니니의 바이
올린 연주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일은 정녕 쇼팽에게
자신의 앞에 초월적인 명인의 예술 세계가 전개되고 있음을
보는 것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세계의 감지 속
에서 그의 <에튀드>가 탄생되었다.
  이 무렵 프레데릭 쇼팽은 빈으로 여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
었는데, 아버지 니콜라스는 정부에 급비 5천 플로린을 신청
하였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다.
    기금은 이런 종류의 예술가들의 여행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
을 허용치 않는다.
는 회답을 받았을 뿐이다.
  1829년 6월 쇼팽은 마침내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함으로
써 음악 연구에 바쳐진 대단원의 학창 시절을 끝냈다.
  음악가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음악의 도시 빈, 쇼팽은 1829
년 여름에 드디어 빈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여비가 마련
되자 쇼팽은 네 명의 친구들과 빈을 향해 떠났는데, 이때가
7월 13일이었다.  이 여행에 동행한 친구들은 후베, 시린스
키, 프란츠 마취요프스키 등이었다.
  그들은 도중에 크라호프에서 일주일 가량 쉬었다가 오이츠
프를 거쳐 유람하면서 새로운 친구들을 얻었다.
  7월 31일 일행은 마침내 빈에 도착했다.  빈에 도착하자 첫
번째로 낸 편지에 오이츠프에서 받은 인상을 구체적으로 묘
사했다.
  이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과 전설은 낭만적인 색채를 가지
고 쇼팽을 황홀하게 했던 것이다.
  빈의 첫인상은 베를린의 그것보다 매우 좋았다.  쇼팽은 먼
저 그곳에 사는 친구들을 찾아갔다.  친구들의 안내로 빈의
유적을 구경하고 또 오페라 극장에서 마이어베르, 롯시니,
부아엘디외 등의 가극을 관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르샤바 음악원의 교수를 역임한 바 있는 뷀페르,
학우였던 니테츠키 등은 쇼팽을 빈의 악단에 있는 저명한 인
사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여기서 소개받은 사람 중에 기로베
츠라는 사람은 쇼팽이 8세 때 데뷔 연주회에서 그의 곡을 쳤
다는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
  쇼팽은 악보 출판업자 허슬링거를 찾아갔다.  이미 앞서서
그에게 보내진 두세 편의 작품이 있었으나 그것들은 출판되
지 않은 채 있었다.  허슬링거는 <라 치 다렘 라 마노> 바리
에이션(변주곡)을 출판할 것을 약속하고 쇼팽을 위해 특별히 연
주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허슬링거는 쇼팽을 케룬트너 트루 극장의 지배인 칼렌베르
크 백작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쇼팽은 자신의 연주를 주저하
고 있었다.
    허슬링거는 칼렌베르크에게 제가 공개 연주회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했습니다.  백작은 제게 연주할 것을 간청했습
  니다.  그러나 저는 그 충고를 신중을 기하여 감사하면서 거절
  했습니다.
라고 가족에게 쓴 편지가 그 사실을 말해준다.  다음의 편지
에서도 쇼팽은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콘서트를 열 것을 권고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제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술가나 음악 애호가는
  제가 음악회를 열지 않고 가는 것을 손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저는 피아니스트 및 작곡가라는 이중의 자격으로 대중 앞에
  서야 하고, 또 너무 사양하지 말고 스스로를 위해 연주회 계
  획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허슬링거 씨는 처음에 <라 치 다렘 라
  마노> 변주곡을, 다음에 <크라코비악풍의 론도>를, 그리고 즉흥
  연주를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 자신의 선택에
  찬성한다고 합니다.  저는 여러 곳에서 연주 부탁을 받고 있습
  니다.  음악계의 아는 이도 적지 않은데, 허슬링거 씨는 카를
  체르니에게 소개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1829년 8월 8일

  쇼팽은 허슬링거 가에서 빈의 일류 신문의 비평을 담당하
고 있는 브라페트카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쇼팽의 연주를 듣
고 모슈레스, 헬츠, 칼크브렌너에 필적하게 될 것이라고 평
햇는데, 쇼팽은 그것을 과찬으로만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쇼팽은 여러 사람의 설득에 의해 1829년
8월 12일 케룬트너 트루 극장에서 콘서트의 막을 올리게 되
었다.
  콘서트를 열기 얼마 전에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칼렌베르크 백작은 제게 보수를 요구하라고 했으나, 저는 요
  구하지 않았어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습니다.
  베토벤의 서곡 <프로메테우스>, 저의 변주곡 <라 치 다렘 라
  마노>, 베르트하임 양의 독창, 저의 크라코비악 <론도 알라 마
주르카(작품5)>, 마지막에 소발레.
                                           8월 12일
  연주회 날 밤이 되었다.
  연습이 부족했는데도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부모에게는 음악회 광경을 침착하게 연주한 것으로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런데 친구 티투스에게는,
    피아노 앞에서 새파랗게 질려 죽을 힘을 대해 연주했네.
라고 적어 보냈다.
  연주회의 제2부에서는 즉흥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주제는
부아엘디외의 오페라 <백의의 귀부인>이었다.  쇼팽은 이에
도하여 조국의 노래를 부주제로 넣었다.  그는 폴란드의 음악
정신을 청중 앞에 드러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청중들은 쇼팽의 즉흥 연주에 취해 마침내 리듬에 맞춰 춤
을 추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에 이르렀다.
    이런 종유의 향기 높은 곡조에 젖어 보지 못한 청중은 마치
  감전된 듯이 황홀해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모습을 쇼팽은 가족에게 이렇게 전했다.
  쇼팽의 친구들은 휴식중에 청중들의 비평을 귀담아 들어
두었다가, 
   이 청년은 아깝게도 박력이 그리 훌륭하지 않다. 
고 말한 것이 가장 나쁜 평이었을 뿐 모두가 칭찬하는 말들
이었다고 전해 주었다.
  전문적인 비평가 중에는 쇼팽의 연주가 너무 섬세하고 나
약하다는 평을 한 사람도 있었다.  쇼팽은 이러한 평을 예상
하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피아노 밑바닥을 두들겨 부수는 것 같은 이곳
  음악가들의 연주만 들어 온 사람 중엔 나의 연주는 너무도 가
  냘프고 힘없게 생각하는 청중도 있었던 것 같다.
고 쇼팽은 전하고 있고,
    누구라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때문에 나는 너
  무 힘을 많이 주어 연주한다고 비난받는 것보다 지금처럼 평가
  되는 것이 좋다.
라고 자신의 연주에 자신감 있는 설명을 전했다.
  빈에 쇼팽의 명성이 널리 퍼졌다.  그는 각계 명사들로부터
잇달아 초대를 받았다.  베토벤의 제자인 체르니는 쇼팽과 2
대의 피아노로 연주했는데, 그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냈다.
  베토벤의 친구였던 모리츠 리히노프스키 백작의 살롱에서
도 대단한 친찬을 받았다.  백작은 쇼팽의 피아노 음이 여린
것을 피아노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귀머거리가 된 베토벤을
위해 만들어졌던, 콘소리가 나는 피아노를 제공하겠다고 제
안하기도 했다.
  제1회 연주회에서 신세를 많이 진 브라헤트카의 딸 마리
레오폴리느와는 자주 그의 집에서 만나 연주를 하며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기도 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 8월 18일에 제2회 연주회를 갖게 되었
다.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보수를 받지 않았다.
  쇼팽이 2회 연주를 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질 사람들의 평
판을 고려해서였던 것 같다.
   그는 빈에서 단 한 번의 음악회를 가졌다.  아마 평판이
나빴던 게지. 
라고 말하여질 것이 두려워 다시 연주회를 한 것이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이번에도 연주는 대성공이었다.
  쇼팽은 전보다 훨씬 침착한 태도로 연주를 했으며, 어마어
마한 박수 갈채와 함성을 받았다.
  브라헤트카는,
   자네가 그런 대단한 정도의 연주와 작곡을 바르샤바에서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야. 
라고 비평가다운 일침을 섞어 극찬했다.
   아무리 큰 당나귀라도 지브니 선생이나 엘스너 선생 밑에
서라면 이런 정도의 것은 배울 수 있엇을 겁니다. 
  쇼팽의 대답은 모든 공을 스승에게 돌린 것이었다.
  쇼팽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제가 보수를 거절한 것은 칼렌베르크 백작과 친밀해지는 결
  과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제3회 콘서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열
  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적었다.  
  8월 19일자 편지에는,
    저는 저의 곡 론도로 모든 음악가들을 매혹시켯습니다.  지자
  라하나에서부터 조율사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저의 곡을 찬미했
  습니다.  기로베츠는 힘차게 소리를 지르며 브라보를 외치곤 했
  습니다.
라고 썼다.
  신문의 비평도 성공한 연주회에 대해 크게 보도했다.  쇼팽
의 두 차례의 연주회에 대한 상세한 비평이 예술, 문학, 연
극 및 일반 잡지에, 또 음악 신문 같은 곳에까지 실렸다.
  빈에 머무르는 동안 쇼팽은 특히 브라헤트카 양과 가까이
지냈음을 그의 편지 속에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녀는 제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그녀는 아
직 스무 살도 채 안 된, 정서가 풍부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입니다.
  2회 연주가 끝난 다음날인 8월 19일 밤 9시에 출발하는 역
마차를 예약하고 쇼팽은 서둘러서 여장을 잦추었다.
  이때의 이별 파티는 극장 맞은편의 카페에서 기로베츠, 크
로이차, 라하나 등과 열었다.
    감동적인 이별 후――그것은 정말 감동적인 이별이었습니다
  ――브라헤트카 양은 기념으로 자신의 작곡에 서명을 해주었
  고, 그녀의 아버지 브라헤트카 씨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자랑스
  런 아들을 둔 것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 포옹한다고
  말햇습니다.  피아노 공장의 슈타인 씨 아들은 울었고, 슈판치
  히와 기로베츠 등 모든 예술가들은 감도에 싸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족에게 이별의 광경을 설명한 편지다.
  일행은 돌아오는 길에 프라하를 통과했다.  이곳에서 일행
은 마취요프스키의 소개장을 가지고 국립박물관의 문헌학자
인 벤체로 한카를 만났다.  또한 프라하에서 쇼팽은 바이올리
니스트이며 프라하 음악원장인 픽시스와 작곡가 크렌켈과도
알게 되었다.
    내가 알게 된 예술가들 중에서 특히 나를 기쁘게 한 사람은
  프라하에서 만난 픽시스와 크렌켈이라네.  크렌켈은 자작의 둔
주곡을 쳐주었네(그는 바하의 계승자라 할 수 있음).  그와 체르
니와는 어떻게 그렇게 다를까.
라고 타투스에게 적어 보냈다.
  프라하에서 3일 정도 머무른 다음 일행은 다시 테프리츠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많은 폴란드인과 귀족들의 회합에 참석
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쇼팽은 크라리 후작 댁에서 쇼
테크 백작 부인으로부터 연주 요청을 받았다.
  쇼팽은 숙녀들이 준 테마로 즉흥 연주를 했다.  쇼팽은 연
주중에 감격하는 숙녀들의 속삭임 소리를 들었다.
  8월 26일 쇼팽은 드옥크스의 브렌슈타인 성을 방문한 뒤
드레스덴에 도착했다.  쇼팽은 시내를 구경하고 공원과 화랑
그리고 극장을 찾아봤다.
  쇼팽은 당시 지휘자로서 드레스덴 음악계의 제1인자였던
모르라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편지를 가족에게 보냈다.
    오늘 아침 일찍이 저는 모르라키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
  었습니다.  그와 함께 페히베르 양의 집으로 가기 위해서였습니
  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제가 그의 집으로 간 것이
  아니고 그가 제게로 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요.  그렇고
  말고요.
  쇼팽이 모르라키와 함께 페히베르 양을 만나러 가게 된 것
은 크렌켈이 그의 애제자 페히베르 양을 쇼팽에게 소개하고
싶어 그 뜻을 모르라키에게 전했기 때문이었다.
  쇼팽은 드레스덴에서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았다.
  그는 이 극에 대해,
    무서운, 그러나 위대한 환상입니다.
라고 간단한 평을 했다.
  드레스덴에서 낸 편지에는 브레스라우로 갔다는 사실을 적
고 있으나 별다른 일은 없었다.
  9월 12일에 쇼팽은 바르샤바에 돌아와 있었다.

    첫사랑의 초상들

  1829년 9월, 2개월 만에 쇼팽은 바르샤바로 돌아와 자기
집 다락방에 틀어박혔다.  빈에서 돌아온 후 그는 바르샤바
생활이 단순하여 자극을 느끼지 못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
당시 작곡을 시작한 피아노 협주곡 2번 바단조의 감미로운
아다지오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쇼팽은 친구 티투스에게 적
어 보냈다.
  1829년 10월 3일자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이 겨울에 하려는 일을 자네에게 말하겠네.  나는 운명
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 모르겠어.  라지빌 공작과 그 친
절한 부인은 나를 베를린으로 초대하였고, 그의 저택에서 묵으
라고까지 말해 주었어.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빈으로 다시 가야겠어.
  자네는 아마 그렇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브라헤트카 양을 사
모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 줘.  실은 내게 있어 그건 불행한 일
이겠지만 나에겐 이상의 여인이 있어.  나는 그녀와 한 번도 이
야기를 나눈 적이 없지만, 반년간이나 무언중에 그녀를 충실히
사모해 왔어.  나는 밤마다 그녀를 꿈꾸고 있어.
  그리고 나는 그녀를 생각하며 피아노 협주곡 아다지오를 만
들었어.  또 자네에게 보내려 하는 이 작은 왈츠(내림 라장조 작품
70의 3)도 오늘 아침 이런 생각에서 영감을 얻은 거야.  ×표가
붙은 곳을 특히 주의해 주게.  이것은 자네 외엔 아무도 모를 거야.
  내가 지금 바르샤바에 살고 있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자네는 모를 거야.  만약 가정에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는
이곳에 머무르지 못할 거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잇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얼마
나 가혹한 일인가.  또한 마음에 압박을 느끼고 있는데도 그 괴
로움을 말할 수 없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자네는 이런 말
을 들으며 내가 무엇을 고백하려 하는지 알아챘겠지?
  젊은 쇼팽의 비통에 넘치는 이 고백은 그의 소극적인 성격
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환상에 지나지 않는 사소한 일로
도 쇼팽은 고뇌와 우울에 빠지곤 했다.
    나는――아마 내 불행의 원인이 되겠지만――이미 내 이상
  의 사람을 발견했네.  나는 그 살망르 성실하게 그리고 솔직이
  존경하고 있어.  이미 반년이나 계속되엇어.  그 이상의 사람을
  밤마다 꿈속에서 보면서 나는 아직 한마디도 말을 걸어 보지
  못하고 그 여성을 생각하고 있어.
  쇼팽이 이렇게 애태운 이상의 여성은 바르샤바 오페라의
가수 콘스탄티아 글라드코프스카였다.  콘스탄티아는 음악 학
교를 졸업하고 학교 기숙생과 때때로 음악 연습을 하곤 했는
데, 쇼팽의 내성적인 성격은 그들과 합류하지 못했다.  그는
타오르는 정열을 품고 오직 다락방에서 작곡에 열중했다.
  쇼팽은 모든 면세서 주위의 존경을 받았으나 자기가 생각
하는 것처럼 사랑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친구 티투스에게 자신의 이성 문제를 숨김없이 얘기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잇을 것 같다.
  티투스는 쇼팽의 눈에 이상적인 남성으로 보이고 있다.  티
투스는 쇼팽의 사랑을 고백받는 존재이기도 햇으나, 티투스
자신이 쇼팽의 사랑의 대상이라 해도 좋았다.
  티투스에 대한 쇼팽의 감정에는 우정 이상의 애정이 섞여
있었다.
  내가 자네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는 모를 것이네.
내가 바라는 것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자네를 힘차게 호옹하
는 일이네.  나는 자네와 여행을 하고 싶네.  우리 두 사람이 이
국에서 처음으로 만나 포옹하는 그 순간에야말로 나는 마음속
으로 기쁨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네.
  나는 자네의 편지를 모두 가느다란 리본으로 묶어 놓았다네.
그것들은 일찍이 내게 이상을 심어준 것이기 때문에.
  자네가 보내 준 한 통의 편지.
  이 편지 속에 감춰진 내 심중을 자네가 느낄 수 잇을 것인가
는 나도 모르네.  내가 믿고 잇는 바는 내가 언제나 자네 곁에
있어 내 생애의 마지막까지 자네를 잊지 않으리라는 것이라네.
  이런 글을 보면 우스우리만큼 동성인 티투스에게 짙은 애
정을 표현하고 있다.  쇼팽은 이와 같이 동성인 친구들에겐
애정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면서 사랑하는 이성
인 여성게게 접근하는 데는 극도로 겁내고 있는 것이다.
  콘스탄티아는 쇼팽과 동갑으로 3개월 아래였다.  그녀는 왕
궁 관리인의 딸로 음악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국비를 받으며
음악원에서 기숙했다.  그 때문에 쇼팽은 그녀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음악원 시절부터 갖게 되었다.
  콘스탄티아와의 교정은 어디까지나 쇼팽의 환상으로
끝났다.
  이해 가을의 끝 무렵, 쇼팽은 안토닝에 체재하고 있는 라
지빌 공작 댁을 방문한 일이 있다.  라지빌 공작의 저택에서
일주일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쇼팽은 티투스에
게 이렇게 편지했다. 
나는 공작의 저택을 떠나기가 무척 괴로웠네.  나의 작곡일,
특히 아직 완성하지 못한 협주곡의 끝 부분을 생각하여 겨우
그 낙원을 떠나기로 했네.  난 쫓겨날 때까지 머무르고 싶었는
데……
  그 저택에는 사랑스럽고 음악을 좋아하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네.  공작 부인은 인간의 값어치가 가문의 여하에 관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지.  존경할 만하고 귀부인다우
며 구누게게나 애교가 있는 분이야.
  공작은 내게 자작의 <파우스트>를 들려주었는데, 아름다운 곳
이 많이 있고 두서너 군데는 매우 희귀한 재능을 보여주는 것
이었네.  나는 이런 음악이 영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
각되지 않아.
  나는 공작의 저택에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알라 폴라카
(작품 37로 출판됨)>를 작곡했네.  이것은 귀부인 취향의 살
롱용 소품에 불과해.  나는 이것을 반다 양에게 연습시키려고
생각하고 있네.  그녀는 17세의 아름다운 소녀야.  그녀에게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놓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지.  그리고 그녀는 참으로 풍부한 음악적 감각을 지니고 
있어.  그래서  여기는 크레셴도  여기는 P, 이곳은 좀더 빠르게,
여기는 천천히  라는 등의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야.
  이 세밀한 묘사의 편지를 통해 보면 젊은 작곡가 쇼팽은
음악과 아름다운 아가씨에 둘러싸여 꿈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다 양에 대한 어슴푸레한 연심은 콘스탄티아에 대한 참
을 수 없는 사랑의 고통과 대치될 정도는 아니었다 해도 쇼
팽에게 일시적인 안식을 주었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아를 생각하며 지은 피아노 협주곡 아다지오나 반
다 양을 위해 만든 <알라 폴라카>는 모두 희미한 이성에 대
한 열망이 눈뜰 때 작곡된 것으로 젊은 쇼팽의 사랑이 비로
소 음악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음을 짐작케 해준다.
  쇼팽은 이 무렵의 심정을 또 이렇게 친구 티투스에게 적어
보냈다.
  어쨌든간에 나는 전재산을 걸고 미카엘 축제까지는 빈에 가
고 싶네.  나는 빈에서 영원한 한숨과 초라함에 사로잡히리라.
사람이란 누구나 자유로움을 잃을 때 그런 일을 당하는 거야.
  음악 청년이 음악의 본고장인 빈으로 가고 싶은 심정은 너
무나 절실한 것일 것이다. 
  이 글 앞 부분에도 또 한 여인에 관해 언급한 구절이 있
다.  그의 여인 항목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는 마리오르
카란 여자에 대해서이다.
    벌써 현한 시 반이네.  마리오르카가 나와 함께 오찬에 가기
  위해 기라리고 있는데도 나는 아직 외출복을 갈아입지 않고 그
  냥 앉아만 있어.  나는 여행세서 돌아온 이래 아직 그녀를 만난
  일이 없네.  내가 빈번히 내 슬름의 원인을 그녀에게 돌렸던 것
  을 자네에게 고백해야겠어.
  아버지께서는 웃고 계시며――만일 아버지께서 그 일을 알
  고 계신다면 아마 우시리라――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
  하고 계시나 내 마음은……
  이 구절은 갑자기 여기서 끊어져 있다.  마리오르카라는 여
자는 젊고 아름다운 백작 부인 알렉산드라 드 모리오르다.
  그녀의 아버지는 콘스탄틴 대공의 아들 풀의 보육자 노릇
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대공 부인의 여관이었다.  쇼팽은
알렉산드라에게 청하여 곧잘 극장 관람을 하러 가곤 했다.
백작 부인은 쇼팽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쇼팽은 자신
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 일은 쇼팽에게 남모를 슬픔을 더하게 했다.  <론도 알라
마주르타(작품 5)는 알렉산드라 드 모리오르에게 바쳐진 것이
다. 

    각광받은 바르샤바의 연주회

  1830년초 20세의 쇼팽은 바르샤바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
이 되어 있었다.  쇼팽은 이 무렵을 전후해서 상류 사회의 살
롤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바르샤바에서 조금이라도 알려
진 사람이면 누구나 쇼팽을 알고 있었다.
  살롱에서의 교제는 음악가들보다 문인들과 더 가까이 친교
를 맺었다.  폴란드 문학에 크게 이름은 남긴 브로진스키, 비
트비키, 자레스키 등이 쇼팽과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
다.  쇼팽이 이들의 시를 음악화한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
고, 그의 사후에 발표된 <샹 폴로네즈>의 대부분은 이런 과
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쇼팽이 만든 훌륭한 즉흥 소품은 이들 문학가들이 영향을
준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이며, 이들은 영속적으로 쇼팽의
정감에 영향을 미치게 했다.  쇼팽은 이들 문학가들의 낭만
정신을 동류 의식으로서 호흡하고 있었다.
  일찍이 어려서부터 싹트고 있던 쇼팽의 정신의 방향은 이
제 청년기에 이르러 확고해져 가고 있었다. 
  이때를 전후해서 바르샤바 최고의 음악가로 손꼽히며 지금
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있는 연습곡의 작곡가 케스라에의 집
에서는 매주 한 번씩 하우스 콘서트를 열고 있었다. 
  쇼팽은,
    여기서는 이곳의 거의 모든 예술가가 모여 우연히 손에 들어
  온 곡을 연주하고 있네.  어제 나는 훌륭한 슈폴의 자품 <오크
  테트>를 연주했네.
등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티투스에게 보내곤 했다.
  쇼팽은 또 리이스의 협주곡 올림 다단조와 훔멜의 트리오
마단조, 슈폴의 피아노와 취주악기를 위한 곡 <퀸테트> 등에
관한 의견을 적어 보내기도 했다.
  그가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눈을 뜨게 한 베토벤의 최후의
트리오(작품 97, 내림 마장조), 그리고 프로이센 황태자 페르난
디드의 콰르테드, 돗세크의 아리아에 대해서도 적고 있다.
  또 다른 편지에는 자기가 곧 케스라의 살롱에서 자기 작품
바리에이션(작품 2)을 연주하게 될 거라고 적은 일도 있다.  바
단조 피아노 협주곡의 한 부분인 콘체르토 아다지오에 대해
서도 적었다. 
  쇼팽은 그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바르샤바에서의 공개
연주를 미뤄 왔으나 마침내 대중 앞에서 연주회 개최를 결심
했다.
  1830년 3월 17일 쇼팽은 바르샤바 국립극장에서 제 1 회 콘
서트를 열게 되었다.  입장권은 가장 비싼 특별석까지 개최 3
일 전에 이미 매진되었다.
  연주회를 앞두고 쇼팽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원한 게 있었
다.  남모르게 가슴 태우며 연모하는 콘스탄티아가 연주회에
와서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현주회의 순서는 엘스너의 오페라 <레제크 피아티> 서곡으
로 시작하여 다음으로 쇼팽이 자작곡 알레그로 바단조 협주
곡을 독주하였다.  협주곡은 전곡이 연주되지 않고 알레그로
가 끝난 뒤 게르너의 호른을 위한 디베르티멘토가 연주되고
이어서 쇼팽의 협주곡 아다지오와 론도가 연주되었다.  이것
으로 제 1 부가 끝났다.
  2부는 크로핀스키의 오페라 <첼리아피아체지브스카>의 서
곡으로 시작하여 마이에르 부인이 파에르의 변주곡을 노래햇
으며, 마지막으로 쇼팽이 자작곡 <폴란드 민요에 의한 대환
상곡>을 연주했다.  지휘는 크로핀스키가 담당했다.
  준비가 부족했던 빈에서의 연주회와는 달리 적어도 겉으로
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연주회에 대해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제 1 회 콘서트는――이미 사흘 전에 특등석, 하등석 할 것
  없이 매진되었네――전체로 보아 내가 기대한 만큼의 인상은
  청중에게 주지 못했네.  아무에게나 이해되지 않는 바단조 알레
  그로는 브라보를 받긴 했지만, 그것은 청중들이 어려운 것을
  이해하고 평가할 만큼은 알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싶다
  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돼.  어느 나라에나 즐겨 아는 
  체하고 싶어하는 팬들이 있단 말이야.
    아다지오와 론도는 대단한 효과를 거두었지.  <폴란드 민요에
  의한 대환상곡>은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생각되네.  청중이 박
  수를 보냈으나 그것은 그들이 심심치 않았다는 것을 연주자에
  게 보여주려는 것이었겠지.
  위의 편지에서 보는 것처럼 쇼팽은 자신의 연주를 자평하
면서 청중들의 갈채에 대해 오히려 비꼬는 말투로 평하고 있
다.  이런 그의 표현은 쇼팽의 말투에 자주 나타나고 있는 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제 2 회 연주회는 5일 후인 3월 22일에 역시 같은 국립극장
에서 열렸다.
  제1회 때와 마찬가지로 극장은 초만원이었다.
  제2회 연주회에 대해 친구에게 쓴 쇼팽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제 2 회 콘서트는 노바코브스키(친구)의 심포니로써 의기양양
  하게 시작하여 내 곡인 협주곡 바단조의 알레그로를 연주하고,
  극장의 콘서트 마이스타인 비로프스키가 로데의 바리에이션을,
  이어서 나의 알레그로와 곤도를 연주했지.
    제 2 부는 <크라코비악풍의 론도>로 시작했고, 마이에르 부인
  이 소리바의 오페라 <헬레나와 마르비바> 가운데의 노래를 부르
  고 마지막으로 나의 즉흥 연주를 했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청
  중게게 대단히 인기가 있었어.
  제 2 회 연주는 1회 때 이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크라
코비악풍의 론도>의 연주를 긑내고 쇼팽은 네 번이나 무대에
불려나와야 했을 정도로 대단한 박수 갈채를 받았다.
  여러 신문은 매우 경의를 나타내는 비평을 실었다.  ≪바르
샤바 크리엘≫ 지에는 쇼팽의 소네트까지 실리고, 경배자들은
시를 써 붙인 꽃다발을 헌정했다.
  악기 상인 브르체치나는 쇼팽에게 초상화를 인쇄하여 팔지
않겠느냐고 요청해 왔다.
   나는 버터를 싸는 데 필요한 종이 쪽지가 되고 싶지 않
소. 
  쇼팽은 그의 특징적인 말솜씨로 이를 거절했던 것이다.  이
렇듯 쇼팽은 아무리 유리한 경제적 이익이 주어진다 해도 사
사로운 보잘것없는 것으로 그것을 취하지 않는 예술가적인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티투스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나는 이익을 위해 음악을 하는 게 아니야.  극장에서도 나는
  큰 보수를 받지 못했네.  내가 두 번에 걸친 연주회에서 받은
  것은 경비를 제하고 5천 플로린도 채 안 되었어.
  쇼팽은 대성공을 거두고 나서도 자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친 칭찬에 대해 항의를 표할 정도였다.
  그는 티투스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내 연주회는 많은 찬사를 신문에 싣게 했네.  관보까지 나에
  대한 기사를 쓸 정도였어.  이것은 확실히 고마운 일이지.  하나
  그 중에는 선의에서 한 것이었지만 어리석은 기사를 실은 것도
  있어서 나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것은 독일이 모차르트를 사랑한 것처럼 폴란드는 나를 사 
  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내가 현학자나 롯시니당의 손아귀
  에 빠져 있었다면(얼마나 넌센스한 말인가!) 나는 오늘의 영
  광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네.
    나는 진실로 대단한 사람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지만,
  만약 엘스너 선생 밑에서 연구하지 않았다면 그만큼의 일은 못
  했을 것이라는 그 비평가의 지적은 올바로 본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롯시니당에 대한 언급과 엘스너 선생에 대한 칭친은
  어떤 사람을 매우 격분시켰네. ≪바르샤바 바제트≫가 실은 긴 논
  설 중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씌어질 정도였어.
     왜 엘스너에게 감사해야 된다는 말인가.  그는 고치에서 제자
  를 뽑아낸 것에 불과하다.  악마라도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는 없다. 
  라고.
  엘스너는 이와 같이 대단한 제자를 두었기 때문에 늘 대립
되는 음악가들로부터 질투의 눈길을 받고 있었던 모양인데,
당시의 형편으로는 있을 법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쇼팽은
스승으로서의 엘스너에 대한 존경심을 조금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갈등과 고뇌의 시간

  1830년 5월 28일 바르샤바에서는 5년 만에 처음으로 국회
가 열렸다.  이것을 계기로하여 바르샤바 시중에는 많은 귀
족과 고급관리가 모여들었다.  티투스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바르샤바의 쇼팽을 방문했다.
  이해에는 상류 인사가 떼를 지어 몰려들었기 때문에 많은
콘서트가 열렸다.  쇼팽은 이들 연주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었다.
  프로이센 황제의 궁정 피아니스트인 어린 보르츠엘에 대해
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는 대단히 훌륭하게 연주했다.  천부적인 재능의 혜택을 받
  은 유태인이다.
  이 16세의 소년은 그 당시 유명했던 모슈레스의 <알렉산드
르 행진> 바리에이션을 연주했는데, 쇼팽은 뛰어난 연주라고
찬탄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피아니스트인 벨비트 양
은 쇼팽이  열 배 낫다 고 말했다.  그녀는 빈에서 쇼팽의 바
리에이션(작품 2)을 연주한 일이 있었다.
  위대한 여류 가수 헨리에테 존다크(당시 유럽에서 제일 미성
으로 알려짐)의 콘서트는 쇼팽으로 하여금 열광적인 찬사를 보
내게 했다.
  그는 티투스에겍 이렇게 적어 보냈다.
    그녀는 아름답지는 않으나 소리로써 모든 것을 황홀경게 몰
  아넣는 거야.  그 소리가 몹시 높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어
  딘지 훌륭하게 세련되어 있어.  그녀의 디미누엔도는 우리가 들
  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고, 그녀의 풀타멘트는 찬탄할 만해.
  그녀의 색채적인 음계는 그 중에서도 특히 높은 위치에 달해
  있었어.
  또 쇼팽은 그녀가 연주하는 메르카단테의 아리아와 롯시니
의 이발사, 세미라미데와 도적 에르스타, 수문, 로데의 바리에
이션 같은 것을 들었다.
  바르샤바의 반응은 존다크의 성공이 절대적인 것으로 나타
났다.  그녀는 집에 있어도 방문자를 위해 숨쉴 틈이 없었다.
   원로원 의원, 왕족, 영주, 대신, 장관 및 부관들은 그녀
를 괴롭혔다. 
고 쇼팽은 목격한 대로 말했다.
   그녀는 그 연주에 있어서 큰 효과를 낼 새로운 장식음부
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파가니니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양자의 차이는 그녀 쪽이 소형이란 데 있다.  그녀는 마치 신
선한 꽃향기를 회장에 뿌리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독특한
소리는 청중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하고, 그녀와 함께 놀
고 싶게 하고, 그러면서도 눈물을 짜지 않게 한다. 
  존다크에 대한 쇼팽의 찬사는 굉장했다.  그는 또한 티투스
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그녀는 야회복을 입었을 때보다도 아침에 화장을 하고 있을
  때가 휠씬 매력적이야.  그러나 그녀를 아침에 만나 보지 못한
  사람들은 밤에 그녀의 모습만 보고도 황홀해져 버리는 거야.
  쇼팽이 존다크와 함께 있던 이해 여름날의 일이었다.
  음악원의 성악 교수 소리바가 콘스탄티아와 보르코프 양을
데리고 찾아왔다.  소리바 교수는 그 유명한 가수에게 두 젊
은 여가수의 재능을 평가받을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콘스탄티아는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소리바엑 사사한 제
자 중데서도 우수한 학생으로 손꼽혔다.  이 프리마 돈나를
꿈꾸고 있는 콘스탄티아가 쇼팽을 매혹시킨 것은 사실 뛰어
난 용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즉 그녀의 음악성이 높이 평가
되어 쇼팽의 감성에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쇼팽이 그녀를  이상의 여성 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실
제의 콘스탄티아가 아니라 그의 마음에 비친 어느 순간의 콘
스탄티아가 고정된 이미지는 쇼팽의 정신적 사랑의 결실로서
마단조 협주곡의 아디지오를 만들게 했다는 것은 위에서 밝
힌 바 있다.  그가 이어서 만든 <협주곡 바단조>도 그녀의 생
각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사랑의 감정은 이처럼 예술가에게
있어 창작의 원동력이 되는 가장 강한 힘이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탄생은 순수하게 사랑의 환영에서 촉발된 것이
다.  쇼팽은 콘스탄티아에게 노래해 달라고 하고 싶은 동기로
음악원 시절부터 딱 질색이던 가곡도 몇 곡 만든 일이 있다.
시는 미키에비치, 비트비키 등 폴란드 시인의 것을 썼다.
  그의 가곡은 사후 발견되어 폰타나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17곡의 가곡 중 11곡이 이 무렵에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피
아노 곡에서 그처럼 비범한 솜씨를 보였던 쇼팽의 작품으로
서 이 곡들은 이상할 만큼 진부하다.
  어떻든 몇 번인가 콘스탄티아의 모습을 보면서도 말을 걸
지 못했던 쇼팽은 다른 친구와 함께 노래 연습을 하는 그녀
곁에 가서 반주를 담당해 줄 정도가 되었다.  그는 말로 할
수 없는 사랑의 말을 협주곡 아다지오에 담아 그녀 앞에서
연주하여 들려주었다.
  그리하여 쇼팽은 때때로 음악원 친구들과 함께 콘스탄티아
와 어울리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무렵 콘스탄티아는 파엘의 가극 <아니에스>의 무대에
데뷔했다.  쇼팽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내림 가음과 사음을 없앤다면 이런 종류의 창법으로는 그 이
  상의 진전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당시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쇼팽은 말없이 표면적으로는 음악에 대한 얘기만을
주고받았다.
  바단조 협주곡에서 성공을 한 데 힘을 얻은 쇼팽은 마단조
협주곡을 쓰게 되었는데, 이 두 곡은 씌어진 순서를 바꾸어
마단조가 제 1 협주곡, 바단조가 제 2 협주곡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콘스탄티아에게서 영감을 얻어 씌
어진 바단조 협주곡은 그와 잠깐 애정을 나누었던 포토츠가
부인에게 헌정되었고, 마단조 협주곡은 칼크브렌너(유명한 피
아니스트, 라리에서 교우함)에게 헌정했다.
  쇼팽은 제3회 연주회의 프로그램에 마단조를 넣으려고 했
던 것으로 보인다.  즉 마단조의 협주곡은 그의 긴 외유에 즈
음하여 조국 사람들에게, 더 깊이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증
정하는 이별의 곡으로 할 작정이었다고 한다.
  이 협주곡에 대해 티투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내 제2의 협주곡도 자네가 듣고 인정해 줄 때까진 나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어.  바르샤바에서 기대하고 있는 연주회는 출
  발할 무렵에야 열 것이네.  나는 아직 미완성의 새 협주곡과
<폴란드 민요에 의한 대환상곡>과 그대에게 바친 변주곡을 연주
하려고 생가하고 있어.
                                1830년 4월 10일

    새로운 협주곡은 아직 미완성이야.  나는 그것을 완성하는 데
  적당한 기분이 되고 있지 못해.  알레그로와 아다지오가 완성되
  면 피날레는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어.
                                       5월 15일

그는 또 아다지오에 대하여,
    로맨틱하고 조용하며 좀 우울한 기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봄날의 아름다운 밤과 같은 그리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느낌
  이 들어.  나는 바이올린에 약음기를 쓰는 것처럼 만들었어.  
  좋은 효과가 나올는지 모르겠어.
라고 티투스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8월 21일자 편지에는 협주곡의 끝 악장이 완성되었다는 소
식을 적어 보냈다.
  쇼팽은 그것에 대하여,
    이것을 연주해 보면 내가 피아노를 전연 알지 못했던 때와
  똑같은 상태에 서게 되는 거야.  참으로 매우 특수한 기교야.   
  나는 제대로 잘 연주하지 못하고 끝나 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이야.
라고 우려하는 심정을 나타냈다.  이는 그가 작곡가로서 전환
점에 서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파리에 갔을 때 쇼팽이 그곳의 대연주가인 칼크브렌너 앞
에서 이 곡을 연주하여 들려준 것을 보면 그 자신이 이 곡을
20대 전반까지의 대표작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바르샤바를 떠날 것을 계획하면서도 출발을 계속 늦
추고 있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의 결단
성이 부족한 우유부단한 성격에 큰 요인이 있었다고 보는 이
가 많다.
  그리고 심리적인 중요 이유는 콘스탄티아 글라드코프스카
에 대해 열중한 사랑의 마음이 그의 여행을 주저하게 한 것
이었다고 보는 이는 있다.
  그러나 쇼팽은 이제 피아니스트 및 작곡가로서 외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지고, 그 이상 발전하기 위해서는 바르샤바는 너
무 좁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여전히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어.  나는 여태 여기에
  머물러 있는 거야.  그리고 출발할 날짜도 못 잡고 있어.  나는
  바르샤바를 영원히 떠나는 것같이만 생각되어 못 견디겠어. 다
  시는 집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아아! 자기가 태어난 땅이 아닌 이국에서 죽는다는 것은 얼
  마나 괴로운 일이겠는가.
    나의 임종의 병상에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 대신에 무심한 의
  사나 돈으로 고용된 하인이 입회하게 될 것인데, 어찌 참을 수
  가 있겠는가!
    티투스! 정말 나는 무거운 마음을 풀기 위해 그대의 집으로
  날아가고 싶어.  그것도 하지 못하는 나는 다만 집밖으로 뛰어
  나가곤 해.  그렇게 해도 내 마음은 가라앉지 않아.  나는 또 한
  숨과 고독을 맛볼 거야.
    그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힘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나 내일에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을 기대하게 되는 사
  람들의 저 특수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9월 4일

  이 편지를 보면 그가 이국에서 고통 속에 외롭게 죽어간
종말을 예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
던 것이다.
  또 9월 22일자 편지에는 이렇게 적어 보냈다.
    나는 여드레가 지난 토요일에는 아무리 슬프고 울고 싶고 괴
  롭더라도 안녕을 고할 거야.  안녕이란 말도 없이.  나는 출발해
  야만 할 확고한 신념과 계획을 가지고 있어.
    콘서트가 끝나고 8일째엔 나는 결단코 바르샤바에 남아 있지
  않을 거야.   
                                       10월 5일

  이 편지들엔 미래를 향한 청년의 강한 의지와 갈등과 고뇌
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미래를 위해 가슴 아픈 모든 애정
을 던져 버리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말한 콘서트는 제 3 회의 마지막 콘서트인데, 그는
10월 11일에 열었던 이 콘서트를 끝내고도 11월까지 기다려
야 했다.

    영원히 조국을 떠나던 날의 이별식

  이 무렵 바르샤바의 정세는 일촉 즉발의 위기에 놓여 있었
다. 
  1830년 여름 7월 혁명의 영향은 폴란드의 자유의 지사들에
게 파급되었다.  청년들의 흥분은 나날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
다.  이 혁명 소동은 쇼팽의 출발을 또다시 늦추는 원인이 되
기도 했다.
  그는 신작 마단조 협주곡의 마지막 마루리를 하고 관현악
을 합친 연습 준비에 착수했다.  바르샤바의 관현악단은 빈이
나 베를린의 그것과 비교하여 매우 촌스러웠다.  쇼팽은 관현
악단의 배려까지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약음기의
효과를 노린 제 2 악장의 로만체에서는 일일이 악사들에게 약
음기를 붙였는지 어떤지 다짐하면서 돌아다녀야 했다.  그 위
에 입장권의 판매나 회장의 교섭까지 직접 해야 했으므로 절
박한 여행에서의 준비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에게 제3회의 연주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기쁨이 되
었다.  콘스탄티아가 특별 출연을 하기 때문이었다.  소리바는
합창 지휘를 승낙해 주었다.
  입장권 판매는 순조로워서 연주회날까지 남김없이 매진되
었다.  프로그램도 쇼팽 스스로 만들었다.
  제 1 부와 2부로 나뉘어 제1부에서는 게르너의 교향곡이 연
주되고, 다음에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마단조가 두 번으로
나뉘어 연주되었다.  그 중간에 보르코프 양이 소리바의 아리
아를 합창에 붙여서 노래했다.
  제2부는 롯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으로 시작되어 콘스탄
티아의 독창으로 롯시니의 <돈나 테르 라고>의 <카바티나>가
노래되고, 끝으로 쇼팽의 <폴란드 민요에 의한 대환상곡>이
연주되었다. 
  연주회는 흠잡을 데 없는 대성공이었다.  이 광경에 대해
쇼팽은 다음과 같이 티투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어제 음악회는 대성공이었어.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집
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연주했어.  회장은 초만원이었지.
    맨 처음은 게르너의 교향곡, 이어서 본인이 마단조 알레그로
  를 연주하셨지.  스트라이하 피아노로 해서 저절로 잘 치게 되
  었지.  귀를 찢을 것 같은 박수 갈채.  소리바도 만족한 듯했어.
  그는 합창을 붙인 자작곡의 노래를 지휘했고, 보르코프 양이
  그것을 멋지게 노래 불렀지. 
    그녀는 파란 옷을 입어서 천사같이 보였어.  이어서 아디지오
  와 론도를 쳤네.
    제1부와 2부 사이엔 휴식.
    청중들이 모두 휴게실로부터 돌아오고, 전반부에서 받은 좋
  은 인상을 내게 알려주려고 무대 위로 올라왔던 사람들이 내려
  갔어.
    <윌리엄 텔> 서곡으로 제 2 부가 시작되었지.  소리바는 이 곡
  을 재치 있게 지휘하여 대단한 효과를 거두었어.
    이어서 소리바는 콘스탄티아 양의 독창 반주를 지휘했다.
    그너는 전신을 하얀 드레스로 휘감고 머리에는 장미꽃을 꽂
  고 있었는데, 그것은 신성할 만큼 돋보였네.
    그녀는 <돈나 테르 라고>의 <카바티나>를 노래했는데 <아그네
  스>의 아리아 때를 제외하고 그녀가 그렇게 훌륭히 노래한 것
  은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었어.
    자네는 <오 콴트 라지므 뻬르 테 베르사이>를 알고 있을 거
  야.  그너는 그 중의 <투토 데스테스토> <내림 나>의 부분을 훌륭
  하게 불렀지.  치에린스키는 그것만으로도 1천 다가트의 가치가
  있다고 단언했네.
    콘스탄티아 양이 무대에서 내려간 뒤 나는 <폴란드 민요에
  의한 대환상곡>을 연주했어.  나는 열광적인 갈채에 여려 번이
  나 무대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지.  나는 브란트가 가르쳐 준
  (빈에서 받은 무대에의 태도에 대한 비평을 생각하고 배워 두
  었던) 거드름 피우는 인사법으로 절을 했네.
    만약 소리바 씨가 내 악보를 일단 검토하기 위해 집으로 가
  져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열중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연
  주하지 않았더라면 지난밤의 나의 연주는 어떤 모양으로 되었
  을지 모르겠어.  그는 이만큼 훌륭하게 관현악단과 협연한 일이
  없을 만큼 기분 좋게 지휘해 주었어. 
  쇼팽은 드디어 바르샤바와 고별할 시간에 임박하고 있었
다.  이제 떠남을 앞에 두고 쇼팽은 친지들을 방문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의 마음은 출발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울적해져 있었다.
  떠나는 주일이 되자 그의 울적함은 더욱 깊어졌다.  사랑하
는 콘스탄티아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그를 더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때로 나는 나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낄 만큼 산란해져 있어.
    우리 그리스도의 눈에 바라보이는 교회에 앉아 있을 때나 황
  혼의 시간이 될 때쯤이면 나는 급히 거리로 뛰어나가 다시 제
  정신이 돌아오 때까지 15분쯤 거리를 방황하다가 돌아오곤 해.
  쇼팽은 드디어 11월 2일의 역마차표를 샀다.  준비는 모두
끝나고 친구들과의 이별식만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아들의 외유만을 기뻐하고 있던 아버지도 이별의
날이 되니 슬픔을 참기 어려웠다.  전유럽을 휩싸고 있는 혁
명의 불안이 떠나  보내는 아들에 대한 근심을 더하게 했던
것이다. 
  출발하기 전날 오후 쇼팽은 작은 공원의 가로수가 있는 조
용한 길에서 코느탄티아와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
  콘스탄티아는 그에게 리본을 선물했고 (이것은 나중에 티투스
에게 편지를 묶어서 보내는 데 썼다) 쇼팽은 반지를 주었다. 
그들은 서로 만났지만 쇼팽은 어떤 약 속의 말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친구인 야스 맛신스키를 통해 겨우 서로 교통할 약속이 이
후부터 이들 두 사람을 맺는 가느다란 실마리가 되었을 뿐이
었다. 
  출발하기 전날 밤 쇼팽의 친구들은 그의 울적한 기분을 달
래 힘을 내게 하려고 될 수 있는 대로 호화로운 송별회를 베
풀었다. 
  송별회는 라인슈피트의 집에서 열렸다.  모임 중간에 친구
카라소프스키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은 일동을 대표한 송별의
말을 했다.
   우리가 자네에게 바라는 것은 운명이 자네를 어디로 데려
가든 결코 조국에 대한 애정을 잃지 말라는 것이네.  폴란드
를 기억해야 해.  자네가 속하는 민족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많은 동포를 생각하게.  그들은 자네가 큰일을 할 것으로 기
대하고 있어.  그들의 희망과 기원은 언제나 자네와 함께 있
을 거야. 
  그리고 친구들은 폴란드의 추억의 재료가 되는 것으로 가
지고 가라며 쇼팽에게 폴란드의 흙이 담긴 커다란 은배를 증
정했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조극 폴란드를 잊지 못해 하던
쇼팽에게 위로물이 되었던 귀중한 선물이었다. 
  쇼팽은 식사중에 폴란드의 가요의 하나인 비트비키의 <프
랑카>를 작곡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놀라운 환송식이 쇼팽을 위해 준
비되어 있었다.
  11월 2일 마침내 출발일이 되어 쇼팽 일행이 바르샤바를
떠난 지 한 시간 가량 지난 뒤, 바르샤바의 교외 카리츠 가
도에서 가까운 제라소바 볼라에 이르렀을 때 합창 소리가 들
려 온 것이었다.  제라소바는 쇼팽의 출생지인 것이다.
  노 엘스너가 음악원생들을 대기시키고 있다가 역마차가 볼
라에 다달았을 때 이별의 노래를 합창하게 한 것이었다.  그
노래는 엘스너가 폴란드를 떠나는 쇼팽을 위해서 작곡해 두
었던 칸타타였다.
  엘스너의 회상록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기타 반주가 붙는 혼성 합창의 칸타타는 나의 문하생 쇼팽과
  의 결별을 기회로 하여 음악원 작곡과의 동급생들이 볼라의 주
  막에서 연주하게 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쇼팽은 감동으로 떨리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어서 가라, 친구여 !
    폴란드의 흙으로 키워진
    그대의 영예,
    세계에 울리기를 바라노라.
  이것은 조국이 그에게 보낸 최후의 부르짖음이 되었던 것
이다. 
  쇼팽은 그의 여행 가방 속에 2개의 협주곡을 비롯한 자작
곡의 악보를 넣어 가지고 가면서 콘스탄티아로부터 받은 리
본도 소중하게 꾸려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다짐하면서 그는 엘스너의 노래를
뒤로 하고 프로이센 국경 근처의 카리츠에서 만나 동행하기
로 한 티투스와 합류하기 위해 볼라를 출발했다. 

    비운의 시간들

  쇼팽의 모험이 시작되는 인생 여행의 막은 올려졌다.  쇼팽
은 이제 조국 폴란드의 무대를 떠나왔다.
  첫사랑 콘스탄티아의 얼굴은 이제 그의 무대에 다시 오래
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 속으로 서서히 흐려져 가는 아름다
운 콘스탄티아의 얼굴이 얼핏얼핏 그의 갈길 위에 비쳐지곤
했다.
  그녀가 진정 쇼팽을 사랑했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
니었다.  적어도 쇼팽에게서 빼낼 수 없는 사랑했던 여인이었
음이 더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좀더 강한 사랑을 보여주었더라도 쇼팽은 그
녀를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에 있었고, 그녀 때문에 음악
에의 외유길을 포기할 만큼 쇼팽의 마음이 사랑에 빠져 있었
던 것이 아님은 확실했던 것 같다.
  브레스라우에서 쇼팽 일행은 1830년 11월 6일에서 10일까
지 머무르며 금거위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앞서서 쇼팽은 지휘자 슈나벨을 알고 있었으며, 그는 슈나
벨을 존경하고 있었다.
  이제 브레스라우에서 다시 만난 슈나벨은 쇼팽을 활발한
음악 클럽에 안내했다.  때마침 거기에선 아마추어 음악가 헤
르비히가 모슈레스의 <내림 마장조 협주곡>을 연주하는 연습
이 한창이었다.
  쇼팽이 피아노를 쳐 보이자 이 젊은 아마추어 음악가는 갑
자기 자신을 잃어 그날 밤의 연주를 쇼팽에게 넘겨 버리고
말았다.  쇼팽은 로만체와 마단조 종악장과 <폴 티치의 벙어
리 아가씨> 중의 테마에 의한 즉흥 연주를 했다.
  이때 브레스라우에서 쇼팽이 알게 된 음악가 중에 주목할
만한 이는 오르가니스트인 케레르와 그 문하생이며 뒤에 명
성을 떨친 오르가니스트 프리드리히 헷세를 손꼽을 수 있다.
  11월 12일 티투스와 쇼팽은 드레스덴에 도착하였다.
  쇼팽은 전부터 알고 있는 페히베르 양의 안내로 음악 야회
에 나와 있던 추밀원 고문관 크라이치히에게로 갔다.  그때
일을 가족에게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다.
    그 댁의 주인은 한 무리의 숙녀들이 여덟 개의 큰 탁자에 둘
  러앉아 있는 살롱으로 저를 인도했어요.  다이아몬드의 광채가
  번뜩였지만 제 눈을 뚫고 있었떤 것은 오히려 그녀들의 손 안
  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금뜨개바늘 빛이었어요.
  쇼팽은 식당에서 유명한 소프라노 가스 사사로리 탈퀴니오
가 노래하는 모르라키의 미사곡을 듣고, <비할 데 없는 로
라>를 켜는 바이올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또 다른 날엔
이탈리아 가수들의 노래와 첼리스트인 돗트바체과 큼멜이 빛
나는 미르티츠의 미사곡을 들었다.
  크렌게르는 쇼팽을 꾀어 어떤 콘서트에 갈 것을 마음 먹었
는데, 쇼팽은 정중히 그의 청을 거절했다.  그는 이에 대해
가족에게 직업적인 음악가의 냄새를 풍기는 편지를 썼다.
    저는 믿습니다만 드레스덴은 제게 대해 영예도 돈도 주지 못
  할 거예요.  게다가 저는 시간도 여유가 없잖아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1주일간 할일없이 소일하며 많은
유력 인산들에게서 소개장을 받았다.  그는 포란드인 친구들
과 특히 자주 만났다.
  그는 아우구스타 대공비의 여관장 드볼리카 백작부인이
있는 곳에서 맥시밀리안 대공비와도 만났다.  이 두 여인은
그의 연주에 매혹되어 나폴리와 시실리아의 여왕, 로마의
우라시노 후작 부인에게 소개장을 써 주는 등 호의를 보였다.
쇼팽은 속으로 계획하고 있던 이탈리아 여행을 위하여 그 
밖에도 세심하게 마음을 써서 루카 왕비와 밀라노의 여섭정,
그리고 유명한 가수 루빈에게도 소개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곳의 미술관도 관람했는데,      
   음악을 듣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그림이 있다. 
고 감격하여 말했다.
  매일처럼 폴란드인 동포의 집에 초대받은 쇼팽은 코마 백
작 부인 집에서 아름다운 세 딸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미에치스라프 백작과 결혼하였다가 얼마 전에
이혼한 그 댁의 장녀 델핀느 포토츠카 부인은 특히 매혹적인
부인으로 유명했다.
  포토츠카 부인은 뒤에 쇼팽과 연인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들의 첫대면은 바로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 명사와 만날 수 있었는데, 전에 만난 적이 
있는 크렌게르와 친근하게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이 특히 기
쁜 일이었다.
  쇼팽은 크렌게르에게 2개의 피아노곡을 연주하여 들려주었
다.  이것을 듣고 크렌게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의 연주는 필드와 비슷하네.  또한 자네의 터치는 참
으로 개성적인 것이어서 유례가 없는 것이네.  자네에 대해선
전부터 소문을 많이 듣고 있었지만 나는 이렇게 명수인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 
  무텩대고 찬사만 거듭하는 일반 사람의 평이 아니라 음악
전문가의 이 성의 있는 찬사에 쇼팽은 감격하였다.
  드레스덴을 떠나서는 프라하에서 하룻밤을 묵고, 11월 23 
일 아침에 빈에 도착했다.
  쇼팽은 빈에서 몇 차례의 콘서트를 가진 다음 이탈리아 여
행을 떠나고 싶었다.  그가 빈에 도착하여 보니 빈의 광경은
전과는 매우 많이 달라셔 있었다.
  물가는 높아지고, 거리에는 전부다 융성하게 요한 시트라
우스나 란너의 빈 왈츠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의 예
술적인 질은 떨어져 있었다.
  쇼팽은 빈에 도착하여 전번에 와서 친근하게 지내던 친구
들을 찾았다.  그러나 윌펠은 폐결핵에 걸려 집에 누워 있었
고, 브라헤트카는 슈투트가르트로 이사하고 없었다.
  장담하던 출판업자 허슬링거는 아직도 쇼팽의 다단조 소나
타나 <독일 가곡에 의한 변주곡>도 출판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장삿속만으로 인세 없는 출판을 강행하려는 계획을 세
우고 있었다.
  쇼팽과 티투스는 우선 고향에서 송금되어 온 송금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전에 가이뮐러라고 하는 유태인 은행가의
집으로 갔다.  쇼팽은 이 사람에게 연주회를 열기 위한 약간
의 자금을 미리 청하였다.
  그 유태인은 처음에 쇼팽의 이름을 듣고 이렇게 고명한 예
술가와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하면서, 돈을 차용해 달라
는 쿠탁을 하자 이 도시에는 고명한 피아니스트들이 구름처
럼 몰려 있기 때문에 대단한 명서어이 없는 한 연주회의 성공
은 어렵다고 하며 완곡히 거절의 표시를 했다.  경기가 형편
없이 나쁘게 때문에 자기로선 빌려 주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유쾌한 대접을 받은 일이 있기는 했지만, 한 번은
국왕의 시의였던 마르파티 박사의 따뜻한 알선에 감격하기도
했다.  체르니를 다시 만나서도 따뜻한 격려의 말을 들었다.
  이리하여 쇼팽의 빈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는 앞으로의 일
에 희망을 가졌다.  빈에서 전에 거둔 성공을 되풀이하고 싶
은 마음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고, 그 뒤에는 이탈리아·프
랑스 등을 여행할 꿈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희망과 꿈은 일순간에 불안 속으로 사
라지게 되었다.
  11월 29일, 빈에 온 지 1주일 만에 돌연 바르샤바에 혁명
의 불길이 타올랐다.  비스툴라 강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비
어홀에서 화재가 일어나면서 그날 밤부터 바르샤바의 혁명은
시작되었다.
  콘스탄틴 대공은 베르베델 궁으로 피신을 했으나 그 대신
반도들은 한 명의 장군을 살해했다.
  혈기 왕성한 청년 티투스는 한시라도 빨리 조국에 돌아가
서 바르샤바로 진격을 개시한 러시아군을 맞아 싸우겠다고
열망하였다.  쇼팽도 티투스와 함께 총을 들 결의를 적어 집
으로 보냈다.  아버지 니콜라스는 돌아와선 안 된다는 답장을
보내 왔다.
  쇼팽의 몸은 도저히 병정으로서의 근무에 견디기 어렵다는
것, 조국에 대한 봉사는 단지 총검을 잡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술에 의해서도 가능하다는 것, 쇼팽을 외국으로 보
낸 것은 비운의 조국을 영원히 지키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
등의 내용을 적어 간곡히 타이르는 답장이었다.
  쇼팽은 끓어오르는 비통을 참으며 아버지의 말에 따랐다.
  티투스는 할수없이 친구를 홀로 남기고 바르샤바행 귀국
마차에 올랐다.  쇼팽에게 마음의 기둥이었던 티투스와의 이
별은 너무나 큰 타격이었고 절망이었다.
  친구를 보내고 혼자 자기 숙소로 돌아온 쇼팽은 다시 마음
이 변하여 급히 역마차 정류장으로 달려가서 급행 마차를 전
세내어 티투스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하나 다음 역에 도착
했을 때 친구는 이미 휠씬 멀리 달려가 버린 뒤였다.
  쇼팽은 다시 길을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옛날
아버지 니콜라스가 고국인 프랑스 로렌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운명이 그를 방해했던 것처럼 쇼팽이 조국으로 돌아가려
는 것을 그의 운명은 방해했던 것이다.  이 이후 끝내 쇼팽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만 것이다. 

    우울한 빈의 생활

  빈에 혼자 남게 된 쇼팽은 티투스와 함께 거처하기 위해
빌린 방을 어느 영국인에게 양도하였다.
  홀로 남게 된 쇼팽은 비운의 고국에 있는 부모와 형제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사랑하던 많은 친구들과 연인 콘스탄티아를
걱정하면서 고뇌의 1830년과 1831년 사이의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다가온 크리스마스 직전에 쇼팽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는 고뇌의 그림자가 가신 내용이었다.
  그 편지에 쇼팽은 많은 지인들과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것처럼 쓰고 있었으나, 실은 양친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그렇ㄱ 썼을 뿐이었다.
  그 며칠 후인 1831년 1월초에 친구 야스 맛신스키에게 보
낸 편지에는 쇼팽의 심정이 숨김없이 고백되고 있다.
    나는 아버지의 무거운 짐이 되려고 하지 않아.  그랬더라면
  벌써 바르샤바로 돌아갔을 거야.
    나는 왜 그리운 집을 떠났을까 하고 저주스런 생각이 들 때
  가 자주 있어.  자네는 내 처지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걸세.  티
  투스가 떠난 뒤 나의 마음은 더욱 갈피를 못 잡게 되었어.
    내가 할수없이 참석하는 무수한 만찬회, 교회, 음악회, 무도
  회는 벌써 나를 지루하게 하고 있어.
    나는 쓸쓸하게 내버려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못 견디겠
  어.  또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의 생활을 할 수가 없네.
  살롱에서는 기분 좋은 얼굴을 억지로 만들어야 해.  그리하여
  나의 방으로 돌아오면 나는 그 긴장을 풀기 위해 마음껏 피아
  노를 쳐대지.
    빈에서 가장 친근하게 생각되는 친구는 이것저것 모두 이야
  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네.  여기서는 마음을 탁 털어놓고 이야
  기할 만한 친구가 없어.  그러면서도 누구나 친구인 것처럼 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조국 폴란드에서는 혁명전이 날로 더하여 갔다.  오스트리
아는 폴란드 분할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빈 사람
들의 폴란드에 관한 감정은 악화되어 갔다.
  1차 방문 때 두 팔을 벌려 환영해 주었던 빈의 귀족들은 
등을 돌렸다. 
  음악가 중에서 쇼팽의 재능을 아는 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우정을 보였지만 이 비상한 천재가 빈에 정주하여 자기들의
위험하기 그지없는 경쟁 상대가 되는 것을 은근히 못마땅하
게 생각했다. 
  한 번은 쇼팽이 이탈리아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식사
를 하고 있는데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내가 큰소리
로 야유를 했다.
   폴란드인을 만들어낸 건 조물주의 실책이었어.  폴란드에
서는 어떤 가치 있는 것도 얻을 수가 없지. 
  이 말은 쇼팽에게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과 곤란에 대처하여 싸워 나가기엔 쇼
팽은 너무나 연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내 용기를 잃었다.  어떤 사소한 일에도 실망했고
실패감을 느꼈다.  친구 맛신스키에게 이렇게 써 보낸 일도
있었다. 
    자네는 내가 결단성 없는 사람임을 알고 있을 거야.
  쇼팽의 심정은 날로 불안과 혼란으로 절망적인 상태가 되
어갔다.  1831년초에 맛신스키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나는 어쩌면 좋은가, 제발 말해 줘.  바르샤바에서 내게 그렇
  게 강한 힘을 주었던 사람에게 찾아가 그의 의견을 들어 적어
  보내 줘.  나는 그에 따라 내 태도를 정하겠어.
  여기서 강한 힘을 주었던 사람으로 표현된 그 대상은 곧
콘스탄티아 글라드코프스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새삼스
레 사무치는 연인의 마음을 알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 당시
의 고통에서 벗어나 매달릴 수 있는 정신적인 대상은 사랑하
는 사람뿐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는 젊은이의
심정인 것이다. 
    나는 어쩌면 좋은가.  부모님은 내 의사에 맡기고 있는데, 자
  네의 의견과 지시를 기다리겠어.
    파리로 갈 것인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여기에 그냥 머
  무를 것인가.
    이곳의 아는 사람들은 여기서 때를 기다리라고 하지만…….
    자살을 할까.
    아아! 이제 다시는 자네에게도 편지를 쓸 수 없을 것인가.
  쇼팽의 흥분과 격정은 극에 달했다.  이때 가장 그의 감정
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콘스탄티아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어디까지나 쇼팽 자신의 상황이 절망 속
에서 의지할 데 없는 처지에서 흔히 매달리는 환상적인 그리
움이었던 것이다.
  그의 풀 길 없는 우울감이 가득한 다음의 편지를 보자.
    삶이나 죽음이나 내게는 같은 것일 뿐이야.  부모님께는 내가
  그저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해 주게.
    그리고 만일 그녀가(콘스탄티아) 나를 조소하거든 나는 아무런 부
  족 없이 살고 있고 외롭지 않다고 전해 주게.
    그러나 만일 그녀가 내 생활을 친절히 묻거든 그렇게 염려할
  것 없다고 말해 줘.  덧붙여서 내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
  어서 외로워하고 불행해 한다고도 말해 주게.  내가 죽고 난 뒤
  내 뼛가루는 그녀의 발 아래 뿌려져야 한다고도 전해 주게.
  그러면서도 쇼팽은 당자인 콘스탄티아에겐 직접 대해서 말
할 용기를 갖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직접 편지를 쓰고 싶네.  그래, 정말 나는 벌
  써 오래 전부터 내 괴로움을 풀어 보려고 애쓰고 있었어.
    그러나 만약 그녀에게 보낸 편지가 잘못되어 남의 손에 들어
가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명성에 흠을 내게 될 게 아닌가.  그러
니 자네가 중간에서 잘 전해 주기 바라네.
  하지만 쇼팽은 다른 이유 때문에 직접 마음을 털어놓는 것
을 우려했었는지도 모른다.  애인에게서 직접 냉정한 말이나
절교의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워서 간접적인 방법을 썼던 것이
다.  그래서 그는 친구를 사이에 끼고 간접적으로 그녀와의
교신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불안과 동요와 괴로움을 떨쳐버리고 강렬하게 애정의 결실
을 맺을 수 있는 확실한 상태에 이르지 못한 채로 쇼팽의 고
통은 계속되었다.
  그의 격정적인 고통의 흔적을 보이는 이때의 편지는 동시
에 부모에게 보내진 것과는 매우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가족
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늘 밝은 표정만을 보였다.  부모에겐
콘스탄티아에 대한 감정을 비밀에 붙였던 것이다.
  쇼팽은 빈에 머무르는 8개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사교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콘서트, 오락, 소풍 같
은 일에 자연스레 참석해 온 것을 보아 온 주변 사람들은 그
가 그렇게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것을 눈치챘다해도 감수성이 예민한 그가 사소
한 일을 가지고 크게 흥분해서 생각했던 것이라 보았을 것이
다.  실제로 그에겐 그런 면이 있기도 했다.
  그의 감정은 너무나도 걷잡을 수 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저는 빈번히 거리로 뛰어나가서 한스 혹은 티투스를 닮은 사
  람을 보고 좇아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어제는 분명히
  티투스의 뒷모습을 보고 뒤쫓아가서 만나 보았습니다만, 그는
  어이없게도 프로이센 놈이었어요.
  독일인이나 프로이센 사람들은 쇼팽에게 늘 좋은 느낌을
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8개월 동안 빈에서 머물렀던 쇼팽의 생활을 살펴보자.
  빈에 와서  처음에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는 온갖 사소한 일
들을 재미잇게 적고 있다.
  처음에 쇼팽은(물론 이때 그는 티투스와 함께 있었다)  야
인 이란 음식점에서 굉장한 식사를 한 것에서부터 빈의 아가
씨들이 아름답다는 말까지 늘어놓았다.
    저는 마치 사자처럼 건강합니다.  모두들 저더러 살이 쪘다고
  할 정도예요.
    하지만 저는 마르파티(오스트리아 국왕의 시의이며 베토벤을
  마지막으로 본 의사)가 저를 살리기 위해 찾아오기를 빌고 있습니다.
    오오 훌륭한 마르파티!
    그가 오면 저의 상태는 매우 좋아질 거예요.
  마르파티와 특히 가깝게 지냈던 쇼팽은 1831년의 봄이 될
무렵 그의 장려한 교외 별장에서 즐거운 때를 보낸 일도 있
었다. 
  가족에게 보낸 쇼팽의 편지에는 별장에서 맞이한 마르파티
의 명명일의 축사가 씌어 있다.
  처음에 쇼팽은 마르파티에 대해서 롯시니의 <모제>의 콰르
테트에 의해 놀라게 되었다.
    그 집의 테라스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서서 우리들의 콘서트
  를 들었습니다.  달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고, 분수는 흡사 진
  주 기둥처럼 솟아오르고 있었어요.
    근처에는 오렌지 향기가 가득 풍기고 있었고요.  한마디로 말
  해 그것은 매혹적인 밤이었습니다.  굉장히 호화로왔어요.
    그때 우리들이 있었던 살롱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테라스로 통해 있는 활짝 열린 창, 거기서는 빈 전체가 한눈
  에 보였습니다.  벽에는 큰 거울이 걸려 있었는데, 창에서 쏟아
  져 내리는 부드러운 달빛을 받아 강렬한 빛을 뿜었습니다.  살
  롱 왼쪽엔 방 하나가 있었는데, 그 집에서 가장 크고 넓은 방
  이었습니다.  그 방은 특이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 집 주인은 풍부한 정서를 가지고 밝고  전아하며 천부적인
  성격으로 사교회를 이끌어 갔습니다.  모두에게 과분한 대우와
  밝은 대인 태도, 그리고 훌륭한 식사는 우리들이 오랫동안 잊
  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쇼팽은 빈에서 티투스가 돌아간 이후 친구들과 함께 마르
말크트로에 있는 4층의 특실 세 개를 얻어서 기거했다.
그는 매달 50플로린이란 거금(당시 50플로린이면 매우 비싼
집세였다)을 내고 세들어 있었는데 집세가 싸다고 말하고 있
었다.
  그의 앞 방에는 영국 제독이 세들어 있었다.  집주인은 아
직 젊은 미망인으로 폴란드에도 오래 산 적이 있다는 남작
부인이었다.
  이 무렵의 쇼팽의 생활은 맛신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적어
보내졌다.
    오후에는 마무도 안 만나고 ―
    그 대신 나는 자네들을 생각하며 자네들 가운데 나를 끼워
  넣어 환상에 잠기곤 하지.
    아침엔 눈치없는 미련한 하인에 의해 일찍 깨워진다네.  일어
  나자마자 커피를 마시는 데로 가지.  커피는 때때로 식을 경우
  가 많고.
    연주에 열중하기 위해 아침밥을 잊어버리고 커피를 마시는
  거야.
    오전 9시에는 독일어 교사가 시계처럼 정확하게 찾아온다네.
  그 뒤에는 대개 편지 같은 것을 쓰지.
    그러고 나선 니데키(폴란드의 피아니스트)가 나의 협주곡을 
  배우러 오고, 그 사이에 대개는 나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 
  훔멜(대 피아니스트의 아들)이 찾아오지.
    정오경까지는 쾌적한 실내복 차림을 하고 있어.  12시쯤이 되
  면 부드러운 독일 사람 라이벤프로스트 박사가 찾아오네.  그는
  이곳의 재판소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우리는 날씨가 좋으면 함
  께 글라시스까지 산책을 한다네.  이 강 언덕을 산책하는 것은
  기막히게 좋은 일이지.
    산책이 끝나면 우리들은 아카데미의 모든 청년들이 드나드는
   베멘의 여자 요리사 라는 이름의 식당에서 식사를 해.  그리고
  식사 뒤엔 이곳 습관에 따라 고급 커피 집으로 간다네.
  그 후 사람들을 방문하고, 집에 돌아올 때는 석양이 되지.
  집에 돌아와선 곧장 야회복의 정장으로 갈아입고 어딘가의
야회에 참석해.
  밤 11시나 12시(그보다 늦어지는 일은 거의 없어)에 집에 돌
아오면 피아노를 치고 농담을 나누거나 책을 읽거나 하다가 잠
자리에 들어.
  침대에선 자네들의 꿈을 꾸지.
  이 편지를 쓴 날자에 즈음하여 가족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
과 같이 씌어 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코를 치료받는 일로 꼬박 집에 있었습니
  다.  오페라와 클럽의 방문도 하지 못했어요.  오후에는 언제나
  굳어진 손가락을 풀기 위해 피아노를 칩니다.
    금주엔 아주 새로운 오페라를 세 개 들었습니다.  어제는 <프
  라디아볼르>를, 사흘 전에는 <티토(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를,
  그리고 오늘은 <윌리엄 텔>을 말입니다.
  앞에서도 잠깐 마르파티에 대한 편지를 소개한 일이 있지
만 쇼팽은 코가 부풀어올라 마르파티의 치료를 받았었다.  쇼
팽은 불행히도 부풀어오른 코 때문에 상류 사회의 사교 모임
에도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빈 음악계의 실정

  빈에서 쇼팽은 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혼자만의 콘서트를 열 수는 도저히 없었다.
  빈에서 머무른 뒤 4개월이 지나 비로소 쇼팽은 여류 가수
가르치아 페스트리스의 콘서트에 여덟 사람의 다른 음악가와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이보다 훨씬 뒤에 쇼팽의 콘서트도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의 신문들은 별로 좋은 기사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의
이와 같은 실패의 요인은 당시의 정세 탓이기도 했지만 그가
전과 같이 우미하게 연주하는 것을 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케룬 투너 극장의 지배인이며 한때 무용가였던 듀
폴트와 재연주의 협정을 맺지 못했다.  칼렌베르크 백작(전
극장장)은 파산을 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배인은 쇼팽과 깊
은 관계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었던 데 원인이 있기도 했을
것이다.
  허슬링거는 훔멜의 작품으로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쇼팽의 작품 출판을 거절했다.
  허슬링거는 1830년초에 쇼팽의 작품 <파 치 다렘 라 모노>
바리에이션을 발행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인세
는 치르지 않았다. 
  쇼팽은 가족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허슬링거는 교활합니다.  그는 제 작품을 무상으로 내려고 저
  에게 친절하고 가볍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가 저의 작품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그렇
  게 꾸며서 대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인쇄만 되어도
  제가 기뻐할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그러나 그냥은 안
  돼요.  이제는 보상 없이는 안 됩니다.
  그리고 1830년 12월 1일자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허슬링거는 언제나 친절한 사람입니다만 출판에 대해선 말이
  없어요.
  허슬링거는 이때 쇼팽의 소나타 작품 4의 초고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을 출판한 것은 그의 사후였다.  1845년 10월
죽기 4년 전에 노앙에서 허슬링거에게 보낸 편지에 이 소나
타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쇼팽은 빈의 음악 생활에서 관객으로서는 매우 활동적이었
다.  그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주 오페라를 들으러 갔다.
  첼리스트 멜크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내가 정말 존경하는 제 1 급의 첼리스트다. 
  쇼팽의 <작품 3>은 멜크에게 바쳐진 것이다.
  또 다른 사람으로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와 관계를 맺었던
빈의 뛰어난 피아니스트 카르 마리아 폰 브크레트와 가까이
지냈다.  그밖에 당시 교회 작곡가로 이름이 잇던 슈타트라
승정, 음악 저작가며 비평가인 프란츠 칸드라와도 교제가 있
었다.  이런 사실은 음악사가 키제비타 댁에 있는 묵은 가작
에 대한 명세서에 기록되어 있다. 
  출판업자인 디베리, 체르니, 알타리아와도 쇼팽은 가까이
사귀었다.
  빈이 위대한 음악의 도시이던 시대는 이미 지나 있었다.
  일찍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천재들
이 활동하던 자리에 이제는 평범한 재능의 음악가들만이 날
뛰며 횡행했다.
  빈에는 2대 콘서트단이 있었는데, 하나는  콘체르토스
슈러리츠에르스 이고 또 하나는  음악의 벗 이란 회합이었다.
그들의 수준은 현학적인 데 머무는 정도였다.
  물론 기로베츠, 바이글, 크로이츠아라하나, 슈타트라 등
2·3류의 음악들이 그 무렵에 와서 1류가 되어 손꼽히고 있
기는 했다.  하지만 쇼팽은 피아니스트에 대해서 흥미를 가졌
던 것이다.
  피아니스트 아로이스 슈미트에 관해서는  뛰어난 연습곡 에
의해 유명해진 인물이라고 호의적인 평을 하면서 쇼팽은 그
에 대해 부모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그는 여덟 대의 피아노와 열 여섯 사람의 연주자를 위한 프
  렐류드에 대해 몇 번이나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몹시 행복해 보입니다.
  또 얼마 후에는 이렇게도 적어 보냈다.
    아로이스 슈미트는 이미 40세를 넘은 나이인데도, 그리고 80
  여 곡이나 작곡을 한 사람인데도 비평에 대해서 몹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아직 명성이 나 있지는 않았지마, 후에 리스트의 경쟁자가
된 타르벨크에 대해서 쇼팽은 맛신스키엑 이렇게 적어 보
냈다.
    그는 뛰어난 연주를 하지만 내 마음엔 안 들어.  그는 나보다
  젊고 숙녀들에게 인기가 있지.  <벙어리 아가씨>라는 잡곡을 만
  들고, 손 대신 페달을 가지고 약음을 쳐내.
    내가 옥라아브를 잡으면 그도 교묘하게 데시머를 잡지.  그는
  샤쓰에 다이아몬드 단추를 달고 있네.
    그는 모슈레스를 칭찬하지 않아.  그러니 내 작품에서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곤 협주곡 중에서 투티뿐인 것도 당연한 일
  이지.  그도 협주곡을 쓴다네.
  쇼팽은 타르벨크와 복음 교회에 한 번 간 일이 있다.  브레
스라우에서 온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헷세가  선택된 빈의 청
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 무렵 쇼팽은 엘스너 선생게게도 빈 음악계의 상황과 자
신의 견해를 적어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는 왈츠가 예술 작품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도곡의 연주 때는 제 1 바이올린을 담당하는 란너나 시트라우
  스가 최고의 악장 칭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일반적인 칭호로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들을 경멸하는 사람도 많이 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모르나,
  역시 이곳에선 왈츠 이외의 것은 거의 출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순수음악의 쇠퇴와 빈 왈츠의 이상한 유행은 향락
저인 기분을 부채질함으로써 빈의 시민 계급이 정치적인 관
심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려는 메테르니히의 문화정책에 의
한 결과라고 전해진다.
  어쨌든 모차르트 시대로부터 음악의 정통성을 고수했던 빈
음악의 주류가 쇠퇴해 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러한 악조건이 겹쳐서 엘스너 선생이 제자에게 기대하는
빈의 연주회를 빨리 열지 못하는 쇼팽의 괴로운 심정은 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고국의 비참하기 그지없는 사건을 들은 뒤 저는 동포들에 대
  한 걱정과 동경 외에는 아무 생가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르파티 씨는 모든 예술가는 코스모폴리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저를 설득하고 있습니다만 제겐 소용없는 일입니다.
    폴란드인으로서 조국에 대한 감정으로 힘을 얻어 연주회에
  전념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는 저를 선생님께선 꾸짖지 말아
  주십시오.  나날이 더해 가는 이곳의 곤란한 사정이 그것을 방
  해하고 있습니다.
    청중의 취미를 해롭게 하는 끊임없는 연주회 때문에 청중의
  흥미라는 것을 예측할 수 없는 사정에 있습니다.
    바르샤바에 일어난 사건이 만일 제가 파리에 있을 때 일어났
  더라면 저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곳에선 제 위를 매우 난처하게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
  나 사육제절이 오면 윌펠 씨가 좋아하는 제1협주곡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쇼팽은 란너와 시트라우스와 같은 왈츠 음악가와 왈츠광으
로 되어가는 빈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안타깝
게 한탄하고 있었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빈에도 봄이 왔다.  1831년 5월이 되
자 쇼팽은 빈을 떠나 파리로 가야 한다고 마음 먹기 시작했
다.  폴란드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는 빈보다는 폴란드
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지지하는 프랑스 파리가 쇼팽에겐 휠
씬 유리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바르샤바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  그리고 이곳에서 되지
않았던 일들이 파리에 가면 잘될지도 모르지. 
  쇼팽은 빈을 떠나야 한다는 마음을 차츰 굳히고 있었다.
빈에서의 쇼팽은 콘서트 연주자로서의 성공도 보잘것없었을
뿐더러 작곡가로서도 8개월 동안 아주 근소한 작품밖에 쓰지
못했다.
  그가 빈에서 작품에 대해 써 보낸 소식은 불과 몇 번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작곡이 느리다는 얘기를 자주 했고, 신
작에 대한 언급은 두 번밖에 하지 않았다.
  그 하나는 가족에게 보낸 1830년 12월 21일자의 편지에 언
급되어 있다.
    제가 작곡한 왈츠를 곧 보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
  금 그것을 베낄 여유가 없습니다.  마주르카도 곧 베껴야 하겠
  습니다――하나 이 마주르카는 춤을 위한 것이 아니예요.
  다시 빈을 떠날 무렵인 1831년 7월에 가족에게 보낸 편지
에는 이렇게 적어 보냈다.
    저는 폴로네즈를 쓰고 있습니다.
  그 외에 쇼팽은 실현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지는 작곡 계
획에 대해 맛신스키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슬라비크의 연주를 들으며 나는 내 집에 돌아가 베토벤의 테
  아에 의한 바리에이션을 소묘하는 즐거움을 가졌네.  그건 피아
  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거지.
    나는 지금 그 숭고한 테마로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그 눈물
  이 자네에게 보낼 이 편지를 적시고 말았네.
  또한 쇼팽의 협주곡을 배우고 있는 폴란드인 니데키에 대
해 쓴 편지에는 이렇게 적었다.
    만일 내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충분히 만족할
  만큼 만들게 된다면 곧 그것을 무대에 올리고 싶네.
  이와 같은 정도가 쇼팽의 빈에서의 작곡 생활의 단면을 보
여주는 전부다.  그러나 이때의 그의 작곡은 남은 것이 거의
없다. 

    방황하는 폴란드의 젊은 혼

  쇼팽은 조국으로부터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어쩌다
겨우 입수된 것을 읽을 때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곤 했다.
  티투스, 빌헬름, 콜베르크, 폰타나 등의 친구들이 속속 군
에 입대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콘스탄티아와의 유일한 통
로가 되었던 맛신스키도 군의로서 전선으로 떠난다는 편지를
보내 왔다.  쇼팽의 초조감은 더욱더 쌓여갔다.
  어느 날 밤 쇼팽은 절망 끝에 성 스테판 대성당을 찾아가
독백을 하며 기도를 드렸다.
   나의 머리는 음울한 하모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때
처럼 고독한 때는 없었습니다. 
  <스케르초 라단조(작품 20)>는 이런 벅찬 감정을 표현한 작품
이다.  쇼팽은 바르샤바를 떠나온 데 대한 후회와 자기가 빈에
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공포와 친구들 곁에 있
지 못하고 조국을 구하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수치심 속에
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얼마 후에 쇼팽은 같은 집의 5층으로 거처를 옮겼다.
두세 사람의 영국인이 80플로린을 쇼팽에게 내고 세든 것이
다.  쇼팽은 5층에서 20플로린만 내면 되게 되었다.
  그는 부모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80플로린을 벌게 된 것은 적은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필시
  이런 말들을 할 것입니다.  지붕 밑에 사는 가난한 룸펜이라고
  말이에요.  하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 방 위에는 또 한 층이
  더 있어요.  그런대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후살체프스키 백작가
  지 이 높은 데를 찾아 올라온답니다.
  쇼팽이 교유하게 된 사람들은 굉장한 숫자였다.  그는 부모
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어제는 훔멜 씨가 그의 아들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 아들
  은 지금 제 초상화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어요.  이 그림은
  누가 보나 이 이상 그릴 수 없을 만큼 조와 흡사합니다.
    저는 실내복 차림으로 영감에 넘치는 표정을 하고 앉아 있습
  니다.
    화가는 왜 저를 이런 모양으로 그리려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초상화는 아마 붓으로 4절판 크기에 그려졌는데, 꼭 동판화
  처럼 보입니다.  노 훔멜이 몹시 기뻐하고 있어요.
  이 편지로 그 유명한 대 피아니스트 훔멜이 이제 20세의
젊은이를 5층까지 방문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쇼팽이 이 무렵 젊은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한
사람은 베멘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슬라비크였다.
그는 맛신스키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그의 연주는 파가니니를 제외하곤 아무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나에게 감동적으로 생각되었네.
    슬라비크는 정말 위대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야.
  더 나아가면 그는 파가니니를 능가하게 될지도 몰라.
    슬라비크는 청중을 매혹시키며 눈물을 흘리게 해.
    그는 활을 한 번 켜서 96음의 스타카도를 내는 거야.  거
  의 믿지 못하겠지……
  그런데 불행히도 이 유능한 젊은 예술가는 1833년에 27세
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한편 쇼팽은 여전히 마음속으로 조국에 대한 아픈 심정을
맛신스키에게 써 보냈다.
    아, 나로서는 얼마나 슬픈 날들이겠는가.  나의 부모는 얼마
  나 고생하고 계실까.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나는 왜
  혼자 쓸쓸하게 버려져서 이곳에 머물러야 되는가.  그것은 벌인
  지도 몰라.  나는 피아노를 향해 울고 있어.  자네도 전투에 참
  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네.  대령쯤 되어서 돌아오게.  어
  떻게든 모두 무사하기를……
    나는 북치기라도 될 수 없을까?
  1831년 6월말경 고향으로부터 날아온 소식은 어둡기만 한
것이었다.  지휘 체제가 약했던 의용군의 승리는 순간적인 것
이었을 뿐이었다.  쇼팽 일가는 제라소바 볼라로 옮겨갔고 콘
스탄티아 가족은 라둠으로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1831년 한여름 쇼팽은 오래 망설여 온 끝에 드디어 빈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그가 계획해 오던 이탈리아 여행도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이탈리아에도 반란이 일어나 예술가가 거
기서 무슨 기대를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이와 같은 불안한 정세는 쇼팽의 출국에 필요한 여권의 교
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쇼팽은 매일 여권 관계로 뛰어다니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
하고, 마침내 여권이 분실되었다는 담당 계원의 차디찬 말을
들어야 했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빈에 체류하는 폴란드인은 이런 식으로 누구나 냉대
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7월도 거의 반이 지나서야 쇼팽은 간신히 여권 재발급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 빈에는 러시아 병정이 묻혀 왔다는 콜레라가 폴란드
를 거쳐 빈에까지 위협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과일을 먹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아직 의학의
발달이 미비했던 당시의 일이라 빈 같은 대도시에서도 콜레
라를 쫓는다는 부적이 날개 돋힌 듯 팔렸다.
  쇼팽은 어리석게도 떠들썩한 사람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빈을 떠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그도 사태가 중대
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여행 도중 바바리아 국경을 통과하려면 건강 증명서가 붙
은 통행증이 필요하다고 해서 또다시 쇼팽은 크메르스키와
발이 아프도록 뛰어다닌 끝에 겨우 그것을 입수하게 되었다.
  여비는 쉽게 마련되지 않았다.  친구로부터 돈을 빌릴 수는
아예 없는 입장이었다.
  빈에서 쇼팽은 생활해 나가는 데 많은 돈을 소비했었다.
콘서트나 작곡에 의한 수입도 없었고 문하생으로부터 사례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생활비를 받아서 지
냈던 것이다.  이 무렵의 아버지의 편지를 보면 쇼팽에게 두
가지의 훈계를 되풀이하고 있다.  즉 무엇보다도 건강에 유념
하라는 것과 절약하라는 것이다.
 지나칠 만큼 되풀이하는 훈계에 아들이 괴로워할까봐 아버
니는 또 따뜻한 말로 달래기도 했다.
    내가 되풀이해서 네게 절약하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이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자꾸만 사정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란다.
  이미 늙어지고 있는 니콜라스의 재정 상태는 넉넉지 못했
던 것이다.  게다가 정국은 어지럽기만 했다.
  쇼팽은 경제적인 문제에는 늘 무관심했다.  그는 자기가 몹
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편지를 자주 했고, 아버지에
게 종종 돈을 청구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사랑하는 아버님께서
  정해 주신 이상의 돈을 저는 은행가 피이터 씨에게서 찾아 써
  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아주 절약을 합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빈손으로
  이곳을 떠나야만 할 정도입니다.  신이 이미 아는 바입니다.
    신은 저를 병에서 구해 줍니다만 만약 제가 뜻밖의 재난이라
  도 만난다면, 그땐 아버님 어머님께서도 제가 돈을 더 끌어내
  쓰지 않은 것을 꾸찢을 것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벌써 5,
  6, 7 3개월 동안 그 돈으로 생활했다는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점심 식사에 이때까지보다 더 많은 돈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주셔야겠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턱 낸다는
  것은 남의 호의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여태까지도 저를 위해 많은 돈을 쓰셨는데 또
  이런 일까지 말씀드리자니 저로서도 마음에 걸립니다.
    게다가 저로서도 아버님이 얼마나 괴로우신 마음으로 돈을
  내주시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제게 돈을 내주시는
  이상으로 저의 마음도 괴롭습니다.
    사랑하는 신께서 그동안 도와 주실 것입니다.
  신서간집 제 1 부에 있는 1831년 6월 29일자의 편지를 보
면, 쇼팽의 아버지는 여비로 1천 8백 플로린을 보내 주고,
다시 1천 2백 플로린을 쇼팽에게 보내 주었다.  결국 3천 플
로린의 여비를 받은 셈이다.
  쇼팽은 진실로 착실한 생활을 했지만, 계획했던 연주회도
적자로 끝나서 연로한 아버지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빈에서의 생활은 쇼팽을 그 도시의 공기에 익숙하게 하지
못했다.
    저는 빈 사람의 습관이 마음 깊이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이
  를테면 저는 댄스를 위한 왈츠는 연주할 수가 없습니다.
  쇼팽은 빈에 익숙해지려 하기보다 폴란드인답게 보이려고
폴란드의 독수리 마크가 붙은 카우스버튼을 달고 의용군의
마크를 수놓은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다.
  또한 쇼팽은 친구들과 폴란드 기사들이 잠들어 누워 있는
옛 전장 칼렌베르크를 방문하여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다.  그
리고 그곳의 나무 잎사귀를 따서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속
에 넣어 보냈다.
  빈을 출발하기 얼마 전 어느 날 쇼팽은 당시 폴란드의 일
류 시인 비트비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귀하는 폴란드 가극의 창시자가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나는
  귀하가 폴란드의 국민적 작곡가로서 무한히 풍부한 분야를 개
  척하여 훌륭한 명성을 얻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귀하가 폴란드 국민이라는 걸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것은
  범인에겐 쓸데없는 충고이지만, 귀하와 같은 천재에게는 그렇
  지가 않습니다.
    자기 나라에 고유한 풍토가 있는 것처럼 고유한 가락도 있습
  니다.  자연은 모두 자기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프레데릭 군.
    나는 귀하가 슬라브 가락의 훌륭한 보고에 찾아 들어가는 최
  초의 인물이 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모방은 다른 범용한 사람들에게 맡겨 두고 귀하는 독창적이
  고 국민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항시 잊지 말아 주십
  시오.
    빈에서 초조하게 계신 모양인데 참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조
  국의 흥망이 걸려 있는 이때 폴란드인이라면 누구나 다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귀학 고국을 떠난 것은 귀하의 예술을 완성함으로써 일가
  와 조국에 영광을 가져오게 하기 위한 것임을 항시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편지는 쇼팽에 대한 조국 사람들의 기대를 대표한 것처
럼 그의 가슴을 흔들어 주었다. 



    악몽 속의 애도곡

  1831년 7월 20일 쇼팽은 드디어 빈을 떠났다.  그의 여행에
동반한 사람은 크메르스키였다.
  그는 다뉴브 강을 따라서 린츠를 지나 잘츠부르크를 거쳐
서 뮌헨에 도착했다.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는 몇 장의 편지
뿐이어서 이 여행에 관한 상세한 과정은 알 수가 없다.
  뮌헨에서 얼마간 체재하면서 그는 빈에서 별로 반응을 못
보았던 연주회를 열 수 있었다.  이 연주회에 대한 신문의 비
평은 다음과 같았다.
    쇼팽 씨는 자작의 마단조 협주곡을 연주하여 훌륭한 명수라
  는 것을 증명하였다.  극도로 세련된 테크닉도 그랬지만, 특히
  사람들이 감복한 것은 연주의 섬세함과 그 작품의 주제가 매우
  유창하게 전개되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작품 자체에 대한 것을 말하자면 전체적인 흐름이 유려하고
  또 정확학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론도를 빼고는 특히 새롭고 유례가 없는 깊이를 의도하고 있
  었다.  론도의 주제나 그 중간의 삽입부는 우울과 들뜬 기분의
  기묘한 혼합 속에 참으로 특수한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비평 기사는 쇼팽 음악의 특질을 매우 잘 간파한 것이
라고 음악 비평가들은 말하고 있다.  음악회가 끝난 며칠 후
쇼팽은 슈투트가르트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쇼팽을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는 무서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9월 8일에
드이어 바르샤바가 함락되어 적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이
었다.
  이것은 쇼팽의 생애 중에서 가장 아픈 상처를 준 것이었
다.  그는 이때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었다.
  이날 밤 그는 치밀어오르는 공포와 싸우면서 긴 수기를 썼
다.  그것이 바로 잘 알려진 <슈투트가르트 일기>다.  고뇌로
점철된 여러 장의 일기였다.
  젊은이로서 고국을 떠나 있던 쇼팽은 마치 유서라도 쓰는
기분으로 일기를 썼던 것이다.
    내가 누워터스 자려고 하는 이 침대에는 많은 시체가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밤엔 그런 일들조차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시체들도 지금의 나만큼 불행하였을까!  그들은 내 부모
  나 자매들, 그리고 티투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
  이다.  그 입은 벌써 주위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시체는 나처럼 창백하고 모든 것이 냉담하고 차가운
것이다.  그들은 이미 산다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나는 지
금 살아 있다.
  왜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시체로 변화시키기 위해 이런 비참
한 인생을 지내고 있는 것일까.  슈투트가르트의 시계는 밤이
깊었음을 알린다.  이 순간에 몇 구의 시체가 더 생길까.  엄마
를 잃은 아이들, 얼마나 많은 것이 허무하게 끝나고 얼마나 많
은 한단이 사라 위에 쏟아질 것인가.
  사악한 사람도 선량한 사람도 시체가 되면 마찬가지이다.  그
러므로 죽음은 인간의 최상의 행위이다.  그럼 무엇이 최악인
가.  그것은 탄생이다.  그것은 최상의 것에 대한 정반대이기 때
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을 저주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어째서 나는 생이 없는 세계에 머무를 것을 허
용받지 못하는가.
  교외는 파괴되고 불타버렸다고 한다.  요한과 빌헬름은
참호 속에서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마르셀이 포로가 된 것이
보인다.
  성실한 영혼의 소빈스키, 그는 모히레프에서 온 악당들과 야
수 같은 러시아인에게 잡혀갔을까?  한 마리의 개와 같은 러시
아인이 유럽 제일의 왕국에서 왕좌를 빼앗아 갔다.
  신이여.
  당신께선 계시지 않습니까?
  왜 존재하면서 복수를 해주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아직도
러시아인의 범죄자들을 싫증내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당신은 러시아인이었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굶주리고 계실 것이고, 어머니는 아마 빵을
살 수도 없는 형편이실 것이다.
  나의 자매들은 아마 광포한 러시아 병정에게 욕을 본 것이나
아닌지?
  아아, 아버지, 연로하신 아버지.
  어머니!  불쌍한 어머니.
  당신들은 딸들이 러시아인들에게 뼈까지 할퀴는 것을 보시려
고 아이를 낳으셨습니까?  우리들이 학대받는 것을 보시기 위
해 우리들을 낳으셨습니까?
  콘스탄티아는 어찌 되었을까.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러시아
인들이 욕보이고 죽엿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러시아인들이 납
채해 갔을 것이다.
  아아, 나의 생명이여!
  나 여기 혼자 있는데, 나에게로 오라.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
고 상처를 치료해 주리라.
  나는 지나간 나날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여기에 있다.  나는 신음하고 한
숨만 쉬며, 비통한 회의와 절망을 피아노에 쳐댄다.
  신이여!
  땅을 흔들어 천지가 사람들을 삼키도록 하라!
  길고 긴 독백이요 비참한 상상이요 가슴 저린 함성 같은
쇼팽의 일기다.
  이 참담한 기분은 슈투트가르트에서 작곡한 그의 다단조
에튀드, 라단조 프렐류드에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 곡들은
얼마나 격정적인 외침이고 얼마나 통렬한 슬픔이며, 또 얼마
나 미움에 넘치는 저돌적인 것인가!
  그리고 또 잔잔한 가단조 프렐류드에서는 기막힐 정도로
둔중한 무력감과 그렇게도 느린 템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유명한 곡이며, 조국에
의  애도곡 이기도 하다.

    파리의 풍경

  1831년 9월 중순에 쇼팽은 파리에 도착했다.
  쇼팽이 파리로 갔을 무렵을 전후해서의 파리 사정은 이러
했다.
  1830년대초 파리에는 커다란 정신사적 변동이 생활에 맥동
치고 있었다.  독일은 위대한 바이마르 시대 이후 침체 상태
에 빠져 있었다.  빈에서는 손꼽을 만한 음악가는 이미 사라
져 갔고, 천박한 예술가들이 발호해 있었다.
  조형 미술계에 있어서도 독일은 침체 상태에 있었다.  모든
것이 침체되어 있는 독일은 가는 곳마다 반란이 일어났다.
독일 예술가들은 이때 과연 누가 무엇을 하고, 어떤 일에 몰
두하고 있었을까.
  그와 반대로 파리는 거대한 문화의 집중지가 되어 있었다.
파리에서는 세찬 정신문화의 힘이 약동했다.  낭만적인 새로
운 정신의 물결이 쉴 새 없이 밀려들어 광범위하게 펴져갔
다.  사람들은 모두 다 제도나 정신적인 사슬에서 해방되려고
했다.
  예술의 방법론에 있어서도 딱딱하고 평범한 고전주의에 대
해 반항하고 나왔다.  셰익스피어가 높이 평가되고, 중세의
영광을 회복하려 했다.  먼 이국 정서나 괴상한 것에 탐닉하
였으며 환상적인 풍조가 짙어져 유행을 이루었다.
  모든 예술은 격한 움직임을 보였다.
  문단에선 빅토르 위고가 지도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작 희곡의 서경에 파리 생활에서 일어난 사건
을 취했다.  뮈세, 라마르틴, 드 비니, 생트뵈브, 알렉산드르
뒤마, 발자크, 으젠느 수우 등은 모두 당대의 낭만파의 거장
이었다.
  화단에서도 마찬가로 신시대의 개화가 시작되었다.  쇼팽
의 친구 들라크루아가 크게 부각되고 오라스베르네, 아니세
프, 데캄프, 들라로슈, 그 밖의 화가들이 그 이전처럼 선에
집착하지 않고 색채에 보다 주력하였다.
  음악계에서는 베를리오즈가 새로운 음악의 기수였다.  1830
년에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의 첫 구도가 씌어졌다.  다
른 음악도 그랬듯이 이 교향곡도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있었
다.  마이어베르나 아레비이도 낭만파로 손꼽혔다.
  그러나 한편 젊은 예술가들의 열중을 제외하면 아직 파리
에는 유력한 구세대 음악가의 일군이 자리잡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고전음악가의 일인자라 할 수 있는 케르비니, 그랜드
피아노의 명수 보아르 뒤, 오벨, 에롤드 등이었다.
  대중의 열렬한 지지자 롯시니도 파리에 있었다.  그는 이탈
리아 오페라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1829년에는 롯시니의 최
후의 오페라 <윌리엄 텔>이 무대에 올려졌었다.
  1830년을 전후해서 파리에는 전유럽의 뛰어난 가수나 이름
있는 천재 음악가들이 몰려들고 있었고, 이때부터 파리는 예
술의 본고장으로 그 모습을 굳혀갔던 것이다.
  쇼팽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바로 위와 같은 상황 속
에 몸을 던진 셈인 것이다.
  당시 파리에선 1830년 7월 혁명에 의해 루이 필립 왕이
 민중의 왕 으로서 군림하고 있으면서 민중의 의사를 존중한
다는 국시 아래 정치를 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
에 따르지 못하고 곧 동요의 물결이 보이기 시작했다.  쇼팽
이 파리에 도착해서 바로 적어 보낸 파리의 인상은 다음과
같았다.
  여기는 최대의 영광과 최대의 비열이 있네.  도한 최대의 덕
과 최대의 악이 있는 곳이야.  한걸음마다 성병약의 광고가 붙
어 있어.
  이곳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잡음, 혼란, 혼잡 그리고 질퍽
거리는 곳이 있지.
  사람들은 이 낙원에서 고아가 돼.  쉽게 고아가 되지.  왜냐하
면 그들은 서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거든.  사람
들은 거리를 걸을 때 누더기를 입고 있는 게 보통이며, 그런
차림으로 상류 사교계를 드나들 수도 있지.
  어느 날은 금빛의 가스등이 빛나고 거울이 있는 요리집에서
호화로운 만찬을 32수우로 먹을 수 있는가 하면, 다른 날은 겨
우 새가 먹을 만큼의 양에 세 배나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네.
또 쇼팽은 티투스에게 이렇게 적어 보내기도 했다.
    파라는 온통 욕망에 불타는 도시라네.  파리에서는 즐기거나
  울거나 웃거나 할 일이 없다거나 해도 상관하지 않아.  누구나
  무엇이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되지.
    아무도 남의 일에 신경을 쓰거나 시선을 보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마음대로 자기 일을 하고 있어.
    자, 이제부터 나는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안 되네.  마차를
  타고 라모리노와 론쥐망을 위하여 베풀어지는 연회에 참석해야
  만 해.
    연회는 파리에서 가장 큰 레스토랑인  로세 드 캉칼 에서 열
  린단네.  수백 명의 손님들이 모이게 되어 있어.
쇼팽은 이곳에서 무엇보다 지도적인 예술가들에게 소개되
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빈에서 받은, 출판업자
에게 소개될 수 있는 소개장을 가지고 있었다.  또 마르파티
에게서 전에 궁정 지휘자로 있었던 오페라 작곡가 페루 (아탈리아인,
레르난디드 페루)에게 소개된 소개장을 받은 것도 가지고 있었다.
  페루는 쇼팽을 높은 지위의 유명한 음악가들에게 소개했
다.  케르비니, 롯시니, 피아니스트인 칼크브렌너, 바이올리
니스트 베이요 등에게 소개한 것이다.
  쇼팽은 또한 젊은층의 사람들과도 쉽게 가까운 사이가 되
었다.
  또 그때 파리에는 멘델스존이 머무르고 있었는데(그는
1831년 2월부터 1832년 4월까지 체재했다) 그와도 이따금 모
임에서 만나곤 했다.
  당시 파리에는 폴란드로부터의 망명자도 적지않게 득실거
렸다.  바르샤바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병정, 정치 운동에 관
여했다가 혁명전 때 의용군이 되었던 의원, 공무원, 문필가
등도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가 폴란드를 동정하여 구제를 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푸아소니에르 가 27번지에 있는 쇼팽의 발코니에 서면 몽
마르트르로부터 팡테옹까지가 한눈에 바라보였다.
  파리 시내는 전면이 바리케이트로 둘러쳐져 있고, 물건을
사러 나선 사람들의 물결이 서민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
었다.  그는 파리 시를 내다보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 라고 감탄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가 파리 시를 바라보고 있을 때 참으로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이탈리아의 장군이며 탄느 원수의 사생아
인 라모리노가 폴란드를 위한 지원병을 인솔하는 일에 경의
를 표하는 시민들의 데모 행렬을 본 것이다.
  라모리노는 쇼팽이 거처하고 있는 집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시테 베르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창문을 통해 자세히
데모 광경을 바라볼 수 있다.
    마치 폴란드의 축제 때처럼 창문마다 구경꾼들이 꽉 찼네.
  이 행사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11시가지 계속되었어.  나는 무
  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슴을 조이고 있었네.
    오후 11시에 드디어 <일어서라, 조국의 아들들이여!>라는 대
  합창으로 끝났어.
    모여든 시민들의 함성을 들으며 내가 어떠한 인상을 받았는
  지 자네는 상상할 수 없을 거야.
  쇼팽은 가족으로부터의 편지를 받고 그들이 무사함을 알게
되자 차츰 침착해져 갔다.  그 편지들은 때로는 콜레라 예방
소독제로 더럽혀져 있기는 했지만 너무나 반갑고 기쁜 것이
었다.
    스승과 제자의 편지

  쇼팽이 파리에 와서 처음 사귄 사람 중에 가장 중요한 인
물은 칼크브렌너였다.  그는 파리 일류의 피아니스트며 피아
노 교사로 당시에 그를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독일 태생이면서도 그는 파리 음악계에서 결정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43세였던 그는 혈기 왕성한 나이에 고집이 세어 때때
로 적을 만들기도 했지만, 연주는 유려하고 매혹적이었다고
한다.
  쇼팽은 티투스에게 칼크브렌너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적어
보냈다.
    내가 헬츠나 힐러의 연주에 얼마나 흥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
  네는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그들도 칼크브렌너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야.  난 헬츠만큼은 연주할 수 있어.  그러나 내가 칼
  크브렌너와 동등하게 연주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파가니니와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칼크브렌너는 파가니니만
  큼 완벽하다고 할 수 있어.
    그의 마법과 같은 터치, 그 침착성, 유례가 없는 균제 등은
  이루 여기에 다 표현할 수가 없어.  한 음 한 음에서 보여주는
  교묘함은 참으로 거장을 느끼게 하는 대가의 솜씨지.
    그는 나를 비롯해서 모든 예술가를 두렵게 하는 거인이야.
    내가 그에게 소개되자, 그는 무엇인가 쳐보라고 했네.  나는
  용기를 내서 바바리아인 앞에서 몇 번이고 연주한 마단조 협주
  곡을 연주했지.
    칼크브렌너는 그것을 듣고 놀란 듯이 물었네.
     자네는 필드의 제자인가? 
    그는 내 스타일은 크라며의 그것과 같으며, 터치는 필드를
  연상시킨다고 했어.  나는 매우 기뻤다네.
    더욱 나를 기쁘게 한 것은 그가 나를 위해 연주하다가 틀려
  서 중단한 사실이야.  그러나 다시 연주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자네에게 들려주고 싶었어.  나는 그런 연주를 상상할 수도 없
  었던 거야.
  쇼팽은 칼크브렌너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
하고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칼크브렌너는 승낙을 했지만
3년간 자기 문하생으로 공부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러나 쇼팽은 냉정하게 생각하여 3년간은 너무 길다고 대
답했다.  그는 이에 대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신서간집 2부에 보면, 쇼팽의 아버지나 어머니는 물론 누
이들까지 쇼팽의 이 편지에 대해 격한 답장을 보냈다.  그들
은 쇼팽이 칼크브렌너에 의해 인정받은 것을 기뻐했으나, 칼
크브렌너의 제안에 응하지 않도록 훈계했다.  그것은 엘스너
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엘스너는 이 얘기를 듣고 화를 내면서 고함쳤다.
   그런 제의는 그의 질투에서 나온 것이다.  3년간이라니!
말도 안 돼. 
  그리고는,
   나는 프레데릭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어.  그는 선량하
고 아무런 야심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곧잘 따르지.  내가 직접 그에게 편지를 써 보내겠어. 
라고 말했다.
   그는(칼크브렌너) 프레데릭의 재능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추월당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천재를 
죽이기 위해 프레데릭을 자기 수중에 넣어 두려고 하는 거야. 
라고 말하기도 했다.
  엘스너는 쇼팽에게 길고 긴 충고의 편지를 썼다.
    나는 제 1 급의 피아니스트 칼크브렌너 씨가 자네의 능력을
  기꺼이 인정해 준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만족하고 있네.
    나는 1805년에 파리에서 그의 부친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의 아들인 칼크브렌너는 어린 나이에 훌륭한 예술가
  로서 이름이 나 있었네.
    나는 그가 자기 예술의 비밀을 자네에게 가르치려는 것을 듣
  고 매우 기쁘게 생각했네.
    그러나 3년이라는 긴 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에 대해선 놀
  랍게 생각되네.  그는 자네 음악을 듣고서 왜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겠나.  그는 자네의 악재를 피아노에만 국한
  시켜서 피아노 작곡에만 한정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네.  만약 그
  가 자기의 예술 전반의 경험을 가지고 자네에게 가르치려 한다면
  자네는 그의 제자가 되어도 좋아.
    작곡 공부에 있어서 교사는 너무 엄격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
  네.  특히 재능이 분명한 학생에겐 더욱 그래선 안 되지.  제자
  들에게 교사는 그들 자신의 길을 찾도록 도와 주어야 하네.
    훌륭한 재능을 가질 때에는 스승은 제자를 동등하게 취급해
  야 하며, 오히려 그 이상으로 넘어가야 하는 것일세.  아직 발
  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 스승은 제자들에게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있게 도와 주어야 하네.
    대체로 악기 연주는 ―― 이를테면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있어
  서 바이올린이나 칼크브렌너에게 있어서 피아노처럼 완벽한 것
  이라고 할지라도 ―― 음악 예술의 방법임과 동시에 목적인 것
  이네.
    피아니스트로서의 모차르트 및 베토벤의 공적은 이미 잊혀져
  버리고 그들의 피아노 작품은 의심없이 고전작품이 되었네.  그
  런데 이제는 근랭 작곡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피아노곡의 변화 
  있는 작곡에 대해서 머리를 숙이게 되네.
    그러나 이처럼 어떤 특정한 하나의 악기를 위해 만들어진 것
  이 아닌 작품, 즉 오페라, 교향곡, 4중주곡 등은 아직도 생명
  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어떤 작품도 어깨를 겨룰
  수가 없는 것이네.
    그러므로 음악도는 하나의 방법 또는 한 사람의 기호를 연구
  하는 데 너무 오래 걸려서는 안 된다네.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모방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천재성과 결부된 감성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네.
    예술의 유일하고도 완전한 본질은 신성한 것이며, 예술은 한
  사람의 인간이나 한 국민을 모방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닐세.
  어떻든 (끊임없이 주위의 것에서 배우고 있는) 예술가가 동시대
  인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 예술가 자신이 자신을 통해서만 완
  전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네.
    현재에도 미래에도 예술가의 명성의 근본이 되는 것은 그 사
  람의 작품에 재현된 자신의 천분 있는 개성 이외에는 달리 없
  는 것이라네.
  이 장문의 편지는 쇼팽에게 음악의 도를 가르쳐 주는 데
충분했으며 감격을 금치 못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다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고는 존경하는 스승에게 장문의 회신을 보냈다.  이들
의 편지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애정 어린 마음도 잘 드러나
있지만, 특히 음악가로서의 태도에 대한 올바른 스승의 지도
와 생각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쇼팽의 긴 편지와 앞의 엘스너의 긴 편지를 소개하는 것은
그런 점에게 큰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엘스너 선생님.
    선생님의 편지에서 저는 아버지 같은 깊은 관심과 사랑의 정
  을 발견하였습니다.  1830년에 저는 빈에 머무르면서 저의 능력
  이 미숙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정도의 수준에 이르기
  까지는 아직도 먼 길을 가야 한다고는 알고 있었으나 저는 감
  히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나의 두뇌는  큐피트 는 아니더라도 스핀들레쉥크(바르샤바 음
  악원 교수)는 될 수 있겠지. 
    그런데 이제 저는 희망을 모두 잃고 피아니스트로서의 앞길
  을 개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편지에 제시하신 높은 예술에 대한 목표는 좀더 뒤로 미루어
  두어야 되겠습니다. 
    위대한 작곡가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지식이 필요하며, 그
  것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남의 작품을 듣는 것보다는 자
  기 자신의 작품을 듣는 데서 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입니다.
    파리 음악원만 하더라도 재능 있는 젊은 음악가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들은 모두 팔짱을 낀 채 자신들의 오페라, 교향곡,
  칸타타가 연주되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형편입니다.  체르비니나
  르쉬외르 정도만이 신문에 이름이 날 뿐입니다.  (물론 소극장
  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극장에서의 연주도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만, 또 레오폴드슈타트 극장에서 토마스처럼 실제로 연
  주가 된다고 해도 재능은 대단할지 모르지만 예술적인 면에서
  는 중요성이 없습니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10여 년 동안이나 이름이 잘 알려진 마이
  어베르도 <악마 로베르>를 겨우 공연하게 되기까지 3년이나 걸
  렸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파리에서 대단한 갈채를 받고 있습
  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작곡가
  인 동시에 배우가 되는 행운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독일의 곳곳에 피아니스트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음악 잡지들은 저의 연주회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가 가장 탁월
  한 피아노의 명인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을 충족시킬 수 있
  는 좋은 기회를 발결했습니다.  제가 왜 그 기회를 붙잡지 않겠
  습니까?  적어도 독일에서는 저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만한 사
  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게 부족한 점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도 그
  점이 무엇인가를 말하지 못합니다.  저 자신도 더 높은 음악을
  소망하는 데 장애가 되는 제 결함을 발결하지 못했습니다.
    3년간은 정말 너무나 긴 시간입니다.  칼크브렌너 씨도 저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이 평가는 자신의 명성에 부족함이 없는 진정한 명인은 질투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줍니다. 
    만일 3년이라는 세월이 저에게 큰 진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고 생각되었다면, 저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그 시간을 보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칼크브렌너의 복사판이 되지 않기로 결정
  했습니다.  이제 그 어떤 것도 저의 이상과 욕망을 좌절시킬 수
  는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당돌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적어도 웅지이며, 저 자신을 위해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
  조하려는 이상과 욕망입니다.  열심히 연구한다면 좀더 확고한
  명성을 이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831년 12월 14일
  이와 같이 칼크브렌너도 자기의 처음 생각이 지나쳤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한층 친근하게 오가며
대등한 의견을 교환하는 친구처럼 사귀면서 두 대의 피아노
에 의한 연주를 즐기곤 했다.
  칼크브렌너는 <쇼팽의 마주르카에 의한 변주곡(작품 120)>을
쇼팽에게 헌정하였고, 쇼팽은 마단조 협주곡을 그에게 바쳐 답
하게 된 것이다.
  바르샤바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은(도한 헝가리의 리스트 같
은 이도) 쇼팽이 칼크브렌너에게 레슨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
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바르샤바에서 온 루드비카의 편지는 또 이러한 걱정을 담
고 있었다.
    너의 위치는 이제 롯시니, 모차르트 같은 대가 사이에 함께
  들어가 있다.  하늘이 네게 주신 천부의 재능은 단지 연주회를
  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니야.  오페라에
  있어서도 불멸의 작품을 남기지 않으면 안 돼.
  엘스너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가족들도 오페라나 칸타
타, 교향곡 등에 크게 가치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쇼팽은 그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피아노에만
열중하였다.

    파리 악단에의 데뷔와 연인의 결혼 소식

  1832년 2월 26일에 쇼팽은 파리에서의 첫 연주회를 열었
다.  뒤에 발견된 그 연주회의 프로그램에는 1월 15일의 날짜
가 박혀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연주회가 열리기 전에 연기
되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처음 연주회를 계획
했던 것은 1831년 12월 15일이었고 다시 1832년 1월 15일로
정했다가 결국 2월 26일에 열게 된 것이다.
  1831년 12월의 편지에다 그는 연주회 때 자기의 <바단조
협주곡>과 <내림 나장조 바리에이션>을 치고 싶다고 썼다.
    그 밖에 나는 칼크브렌너와 함께 그의 <네 대의 피아노 반주
  에 의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폴로네즈>를 연주하네.  이것은
  완전히 미치광이 같은 착상이 아닐까.
    다른 대형 피아노는 힐라, 오스본, 스타마티, 소빈스키가 연
  주해.
  연주회는 가데 가 9번지의 프레이엘 주악당에서 열렸다.
  멘델스존의 편지에 의하면, 한 폴란드인이 콘서트를 열었
는데 그 폴란드인은 칼크브렌너와 힐라 등 6명을 위한 곡을
쳤다고 적고 있다.
  이 연주회에선 베토벤의 슈트라이히 퀸테트도 연주되었다.
또한 남녀 가수와 바이올리니스트 베리오(벨기에 바이올린 주법의
시조), 유명한 오보이스트 브로드 등이 협연했다.
  10프랑의 입장료를 받았는데도 연주회는 적자였다.  청중은
태반이 폴란드 망명객들이었으며, 파리의 일반 시민은 별로
없었다.  폴란드인 중에는 폰타나, 그시마라, 비트비키 등도
참석하고 있었다.
  청중들은 그다지 감동하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의 비평은 감
탄에 차 있었다.  쇼팽의 파리 데뷔로서는 성공적이었다.
  리스트는 이 연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많은 청중들의 갈채도 이 천재에 대한 우리들의 환희를
표현하는 데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적 감정
속에 예술의 형식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었다.  혁신적인 예
술의 새로운 전개에 의한 연주에 대하여 우리는 도취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리고 페티스는 3월 3일자 예술 잡지에 다음과 같은 경의
에 찬 전망을 적고 있다.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악상이 충만
  했다.
    쇼팽의 속에는 형식의 혁신이 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피아
  노에 의해서 씌어질 장래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
  이다.
  또 올로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친애하는 프리섹이 연주회를 열어 대단한 평판과
약간의 영예를 얻었다.  그는 모든 나라의 피아니스트를 죽여
버렸다.  파리 전체가 기절당해 버릴 정도였다. 
  바단조 협주곡에 대한 페티스의 전문적인 평은 다음과 같
았다.
    청중은 한결같이 이 곡에 놀라고 또 기뻐했다.  가락에는 넋
  이 있었고, 피큐레이션은 상당히 풍부하여 모든 것이 독창적이
  었다.  그러나 조바꿈의 과잉이나 악절의 접속에 좀 질서가 없
  는 것이 오래 작곡한 작품이 아니라 즉흥 연주곡임을 짐작케
  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적 결함은 그가 아직 젊은 예술가이기 때
  문에 있는 것이다.  앞으로 경험을 쌓으면 소멸될 성질의 것이
  다.  이번 초연의 기대에 따르게 된다면 그는 당연히 굉장한 명
  성을 얻을 것이 분명하다.
    이 젊은 예술가는 또 연주가로서도 칭찬받을 가치가 있다.
  그의 연주는 우아하고 자유로우며 매력과 정감이 풍부하고 섬
  세하며 화려하다.
  페티스의 비평은 쇼팽 음악을 평한 글 중에 각별히 훌륭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모든 찬사들도 쇼팽을 만족시키지는 못한 것
같다.  그 무렵 쇼팽은 콘스탄티아의 결혼 소문을 들었따.
  쇼팽은 속으로 이렇게 한탄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무감각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아름다운 저택이 그렇게 큰 매력의 근원이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았다. 
  바르샤바로부터 누이동생 이사벨라가 콘스탄티아의 결혼
소식을 구체적으로 적어 보낸 것도 소문을 듣게 된 때와 엇
비슷했다.  쇼팽은 크게 낙심하지는 않았다.
  콘스탄티아는 부호인 지주 요제프 그라보프스키와 결혼하
여 다섯 아이를 낳았으나, 35세에 실명을 하고 1889년에 죽
었다.
  그녀가 만년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과부가 되고 장님이 된 그녀에게 친구가 카라소프스키의
<쇼팽전>을 읽어 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전기는 콘스탄
티아에 대해 쇼팽이 열렬한 사랑을 품고 있었던 사실을 적고
있는데, 쇼팽은 자기의 그런 심정을 그녀에게 전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콘스탄티아의 말은 이러했다고 한다.
   어쨌든 쇼팽은 필시 나의 솔직한 요제프만큼은 좋은 남편
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쇼팽은 1832년에 콘스탄티아의 결혼 소식을 듣고 크게 낙
심하지 않은 채 그녀를 잊을 수 있었지만, 1831년 12월 크리
스마스 무렵까지는 그녀를 생각하며 괴로워한 흔적이 드러나
있다.
    우리들은 언제나 재회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재회하지 못하고 마는 게 아닐까?  내 건강이 이렇게
  나빠져 있으니 말이야.  나는 폴란드인들 사이에 있을 때는 쾌
  활한 척해 보이나 마음속으로는 무언가 시끄럽고 무거운 예감
  과 불안, 불면, 꿈과 동경,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 생에의 즐
  거움과 죽음에의 기쁨들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어.
    나는 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이따금 느끼며, 천국 같은
  평정을 느끼기도 해.
    나는 떠나지 않는 그 사람의 그림자를 머리 속에 그려 보지.
  그것은 한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어.
  그리고 이 편지는 이어서 격렬한 기분의 변화를 보이고 있
다.  이 글의 끝 부분에 가서는 한 마리가 끄는 2륜마차 얘기
를 꺼냈다가 또 금방 이웃집 여자를 꾀어낼 계획을 얘기하고
이어  그러나 나는 그런 모험에 기쁨을 느끼지는 않는다.  게
다가 그녀의 남편 브르겔 씨가 언제 돌아올지 알 게 뭐야 
하고 자신이 한 말을 장난기 있게 묵살해 버리기도 했다.
  쇼팽은 이제 완전히 콘스탄티아에 대한 상념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는 파리 생활에 벌써 익숙해져 있었고, 사교 범위
도 넓어져서 이미 콘스탄티아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
어져 버린 상태였다.

    파리에서의 교우

  파리 악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쇼팽은 분주한 시간을 보냈
다.  그는 많은 예술계의 친구들과 교우 관계를 맺으며 바쁜
생활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는 음악 야회에서 노름판에 참여하거나 또는 여러 사람
들과 사귀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테오필 고티에, 알렉산드르 뒤마, 알프레드 뮈세는 각자 자
  기들의 신작 시를 낭송하고, 리스트와 쇼팽은 주어진 테마에
  의한 즉흥 연주를 하고, 비얄드 가르치아와 으제느 가르치아
  같은 숙녀들도 자기의 부채(노름에서 진)를 멜로디로 지불하도
  록 했다.
  예술가들의 노름빚이 그들의 작품으로 갚게 되어 있다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물질만능 시대에 비하면 얼마나 순수한
것으로 생각되는가.
  당시 파리에선 이탈리아류의 대스타들의 음악을 거의 들을
수 있었다.  라브랴슈, 르비니상치스, 파스타, 마리브랑, 슈
레다 데브리앙이 롯시니가 지휘하고 있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랜드 오페라로서는 프랑스의 명성 높은 가수 누리, 르봐
스르, 다모레아우 진치 부인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쇼팽은 이 무렵 롯시니의 <세빌랴의 이발사>와 오셀로 오
베르의 <프라디아볼르>, 에롤드의 <츠안바> 등의 오페라를 들
었다.  주목할 만한 오페라 <브랑비르 후작 부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녀는 루이 14세 시절의 유명한 독살자였다.  이 악극에
는 세르피니, 페루, 에롤드, 오벨벨톤, 바톤, 브랑지니, 카
라파 등 여덟 작곡가의 음악이 쓰였다. 
  그런데 쇼팽이 들은 음악 중에서 특수한 인상을 준 것은
마이어베르의 <악마 로베르>였다.  쇼팽은 이에 대하여 다음
과 같이 말했다.
   로베르는 악마가 전성관을 통하여 울부짖어 사자를 무덤에서
일어나게 하는 새로운 악파의 수작을 만들었다. 
  쇼팽이 파리에 와서 특히 가깝게 지낸 사람은 힐라와 리스
트였다.  힐라는 프랑크푸르트 태생의 독일인으로 훔멜에게
사사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슈만의 다윗동맹에 참가한
사람이다.
  리스트는 격정의 피아니스트로서 천성의 미모를 가지고 사
교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쇼팽과 정반대의 격정적인 면을 가
진 천재가 서로의 본성을 이해하며 친밀하게 사귀게 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쇼팽은 리스트의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
<연습곡 10번>을 바쳤으며, 리스트는 그 작품의 독창성에 크
게 감격했다.
  힐라의 친구 멘델스존과도 쇼팽은 친하게 되었다.  그는 즉
흥 연주에 능숙하고 우아한 기품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이 사람들은 연령이 거의 비슷하며 피아노의 명수라는 점
에서 일치되고 있다.  그들은 쇼세 당탕 가 5번지에 있는, 독
일의 학자이며 음악 애호가인 헤르만 프랑크의 살롱에 모여
서 예술론에 불꽃을 튀겼으며 장기를 두곤 했다.
  고통스런 1832년의 여름이 왔다.
  파리에도 콜레라의 위험이 닥쳐왔다.  부유한 사람들의 가
족은 지방으로 떠나가고 파리의 예술가들은 빈궁 상태에 빠
졌다.
  쇼팽은 연주회에서 얻은 수입으로 약간의 목돈이 생겼지만
그것은 그의 생활에 보탬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생활
은 아직도 아버지가 부쳐 주는 돈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쇼팽의 심정은 티투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
나 있다.
    나는 외견으로는 명랑하네.  그러나 나 자신 깊숙이엔 무엇인
  가 정체 모를 것이 있어.  가슴 설렘, 악몽, 괴로운 향수 등이
  나를 몸부림치게 해.  살고 싶은 욕망과 죽고 싶은 욕망을 동시
  에 느끼지.  때때로 전신마비 상태에 들어가기도 하고, 원망,
  쓸쓸함, 불건강한 마음이 끔찍스러우리만큼 뒤섞여서 나를 피
로에 지체게 하는 거야.
  이 상태는 폴란드의  우수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쇼팽
특유의 육감적인 우수이며, 그의 음악의 내적 연속의 숨결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쇼팽 음악의 특징이다.
  폴란드로부터의 소식은 러시아인의 횡포에 관한 것뿐이었
다.  파리에 모여 있는 폴란드 망명자들은 신천지 미국으로
도항할 것을 수군거렸다.  쇼팽도 가족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미국으로 갈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어느 날 쇼팽은 파리의 번화가 부르바르에서 우연히 라지
빌 공작을 만났다.  쇼팽은 공작에게 도항할 계획을 말했다.
공작은 깜짝 놀라면서 쇼팽에게 좀더 참고 견뎌 보라고 타일
렀다.  공작은 쇼팽을 그날 밤 로스차일드 남작의 저택으로
데리고 갔다. 
  남작의 소아레 저택 살롱에서 쇼팽은 피아노를 쳤다.  리셉
션에 참석했던 대공들의 부인은 젊은 폴란드의 예술가가 발
산하는 매력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쇼팽은 친절한 귀족들
의 호의를 얻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된
셈이었다.

    화려한 귀공자의 모습

  귀족들은 앞을 다투어 아이들을 쇼팽에게 맡겼다.  이제야
쇼팽은 1시간에 20프랑이나 되는 레슨비를 받아 생활의 안정
을  찾게 되었다.
  이 무렵의 생활을 알리는 쇼팽의 편지를 보자.
    이곳 예술가들과 사귀기 시작한 지 채 1년도 못 되었지만 상
  당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네.  그들은 자기들의 작품을 헌정하고
  있지.  아주 굉장한 명서을 가진 사람들도 내가 작품을 헌정하
  기도 전에 내게 작품을 바치고 있어.
    픽시시는 최근작인 <군대 변주곡>을 나에게 헌정하였지.
    파리 음악원의 학생들과  모슈레스, 헬츠, 칼크브렌너  등 명
  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제자들도 나에게 레슨을 받고
  있다네.
    내가 만일 좀 어리석다면 이제 음악가로서 정상에 올랐다는
  자만심을 가질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나는 완벽한 성취를 하
  기 위해선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 잘 인식하
  고 있네.
    일류급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지내기 때문에, 또 그들의 결함
  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의 부족함을 항상 잊지 않아.
    이런 바보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게 부끄럽네.  마치 어린애
  같이 자랑을 늘어놓고 공격당하기도 전에 방어하려고 서두르는
  사람같이 말했군.
    이 편지를 찢어버리고 다시 쓰고 싶지만 새로 편지를 쓸 만
  한 시간이 없네.  어쨌든 자네는 내 성경이 어떻다는 것을 예전
  부터 잘 알고 있겠지.
    내게 있어서 달라진 점이라곤 한쪽 뺨에 수염이 났는데 다른
  쪽에는 아직 나지 않았다는 것뿐이야.
  이것은 도무스(도미니크, 학창시절 친구)에게 적어 보낸 편지다.
  또 다른 부분에는,
    나는 대사나 후작 또는 각료들 같은 상류 사람들과 교제하고
  있네.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나는 결코 나
  자신을 내세우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야.
    그러나 내게 있어선 이런 환경이 필요하다네.  이러는 가운데
  서 좋은 취미를 배울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라고 씌어 있다.
  이렇게 되어 쇼팽의 생활은 차차 편해지고, 그의 기분도
매우 호전되어 갔다.
  그는 또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 나는 5시간을 가르쳤네.  자네는 틀림없이 내가 상당한
  돈을 벌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카브리오레트(2륜마차)와 흰 장갑 따위에 나의 수입은
  모두 소비되고 만다네.  이곳에서는 그런 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세련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나는 카를로스다을지지
  하며 필립당은 싫어하네.  바로 나 자신이 혁명 지지자이기 때
  문이지.
    나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고 우정이야.  우정보다 더 값
  진 것은 없다고 생각해. 
  이렇게 하여 쇼팽의 파리에서의 본격적인 사회 생활이 시
작되었다.
  그의 눈동자는 생기로 충만해 있었고, 그의 감미롭고 섬세
한 미소는 고통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이 보였다. 그
의 피부는 부드러움과 토명함으로 넘쳐 있어서 사람들으리 눈
을 매혹시켰다.
  비단결 같은 금발과 개성 있는 코는 귀족적인 기품을 나타
내고 있어서 사람들은 때로 그를 왕족으로 착각하는 수도 있
었다.
  쇼팽은 누구보다도 빈번히 파리 귀족들의 초대를 받았고,
그가 참석해야만 연회가 성공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때의 쇼팽의 모습을 친구 몰로스키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쇼팽은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여성의 주목을
  받고 있고 모든 남성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렇게 되리라고 예견하고 있었조.  쇼팽은 참으로 당대의 행운아
  입니다.  쇼팽 스타일의 장갑이 유행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늘 향수에 젖어 있습니다.
  쇼팽의 옛친구 맛신스키도 이때 파리에 와서 의학을 연구
하고 있었다.  맛신스키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쇼팽은 몰라볼 만큼 살이 쪘습니다.  그는 이제 파리에서 제1
  급의 피아니스트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20
  프랑 이하의 수업료를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작곡도 많
  이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즌이 되었을 때 쇼팽은 이미 음악계의 최고봉에
있었다.  그는 많은 기회에 공동 무대에 올랐다.
  1832년 12월 15일 힐라의 콘서트에서는 힐라와 리스트와
함께 바하의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중 1악장을 연
주했다.
  그 뒤 곧 리스트와 함께 훗일 베를리오즈의 아내가 된 아
일랜드의 여배우 스미손 양의 구원 콘서트에 참가했다.  베를
리오즈의 메모에는 그녀의 슬픈 상태가 잘 나타나 있다.
  1833년 4월 3일에는 헬츠 형제의 콘서트가 있었는데, 쇼팽
은 힐라 형제와 리스트와 함께 협연했다.
  1833년 6월 20일자의 편지 (리스트, 쇼팽, 프랑숌의 합동
편지)를 보면 쇼팽의 사교에 대한 당시의 형편을 잘 알 수
있다.
  예술가를 좋아하는 은행가 레오의 저택에 자주 출입하게
된 쇼팽은 그로부터 평생 레오와 친교를 맺게 되었다.  레오
는 이따금 쇼팽에게 돈을 빌려 주기도 하고 쇼팽의 뒤를 돌
보아 주곤 했다.
  레오 외에는 오스트리아 대사 앗포니 백작, 바르디 승정,
멘델스존, 하이네 등과도 가깝게 사귀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깝게 지낸 사람은 프라텔이었다.  그의
집에는 어린애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드나들었다.  그의 집에
선 쇼팽은 어떤 농담도 할 수가 있을 만큼 프라텔의 신용을
받았다.  힐라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쇼팽은 피에로가 되어
이 집 살롱에서 한 시간 이상이나 뛰고 춤추고 하다가 한마
디 인사도 없이 가버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쇼팽은 이 무렵 시테 베르젤 4번지에서 잠시 지내다가 쇼
세 당탕 가 5번지로 거처를 정했다.  이 집에 그는 매우 세련
된 가구들을 사들여 장색해 놓았기 때문에 친구들은 이곳을
 올림포스 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한 대의 마차까지 사고, 비서와 사환을 두었다.  그리
고 비비앤느 가의 양복점 드트르몽에서 엷은 회색의 양복과
푸른 프록 코트를 맞춰 입었다.  그는 또 실크 넥타이를 매고
흰색의 마직 하의를 입었는가 하면 에나멜 칠을 한 반장화를
신고 회색 비단으로 안감을 댄 검은 망토를 걸치고 다녔다.
  그리고 향수 가게, 구두 가게, 모자점에서 그는 일류 고객
대우를 받았다.  그는 또 부유한 부르주아의 자제들과 카페에
드나들게 되었다.
  바르샤바의 아버지로부터는 쇼팽을 걱정하는 편지가 왔다.
사람은 현혹되기 쉽다는 생각 때문에 아버지는 불안해졌던
것이다.
    쇠는 달았을 때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네가 두
  드려야 할 때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너는 늘 너의 수중에
  돈의 여유를 가지고 있도록 노력해라.  지금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또 다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네가 병에 걸리지 않기를 기도한다.  만약 네가 객지에
  서 병에 걸린다면 레슨도 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객지에서
  생활도 곤란해질 게 아니냐.  그리고 네가 만약 누군가와 함께
  거처한다면 사람을 잘 선택해야 한다.  어느 곳에나 양의 가죽
  을 쓴 이리가 있게 마련이란다.
  또한 아버지는 현금이 있으면 수표로 바꾸어 두었다가 필
요할 때 현금으로 찾아 쓰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는 아들에
게 르 페르시에 가 14번지의 루이 데쉬탈이나 아돌프 은행에
예금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쇼팽은 화려한 생활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 생활이
그의 창작력에 일종의 균형을 유지하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타오르는 새로운 사랑 속에서

  1833년 무렵 쇼팽은 델핀느 포토츠카 부인과 연애에 빠지
게 된다.  포토츠카 부인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빈 여행
중 드레스덴에서 만난 적이 있다.
  폴란드의 귀족 코마 백작의 큰딸인 그녀는 남편의 조야한
성격에 참지 못하고 이혼을 전제로 하고 친정집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10만 프랑의 연금을 받고 있었
기 때문에 화려한 사교계의 생활에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유럽 각지를 여행한 뒤, 1833년에 파리에 정착해
왔다.
  그래서 쇼팽은 파리에서 다시 포토츠카 부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초상화를 보면 포토츠카 부인은 육체가 풍만하고 매
혹적으로 보인다.  많은 예술가가 그녀에게 열을 올렸고, 그
녀의 사랑을 얻으려 격투까지 한 공작도 있었다.  어떤 시인
은 그녀의 요염한 매력을 악마에 비유한 적도 있었다.
  쇼팽은 포트츠카와 자기와의 사이에 아이가 탄생되기를 희
망했다고 한다.  그가 그런 희망을 표시한 것은 이 여인 한
사람에게뿐이었다고 한다.
  포트츠카는 노래를 훌륭하게 불렀다.  그녀는 쇼팽을 자기
반주자로 청함으로써 접근했다.  쇼팽은 그녀를 육체적인 매
력 이상으로 음악에 대한 감수성을 발견하여 자기의 음악 상
담의 상대자로서 보았다.
  쇼팽은 텔핀느의 이름을 바꾸어  핀델카 라고 애칭을 지어
서 불렀다.
    핀델카.
    나의 연인, 나의 유일한 사람이여!
    나는 다시 당신에게 내 영감과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
  습니다.  당신은 귀찮게 생각하겠지만, 이건 모두 당신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영감과 창작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만에 겨우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감과 새로운 상념은 언제나 내가 당신과 떨어져 있을 때
  솟아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과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는 영
  감이 내게서 도망쳐 버리고 내 속에선 상념이 솟아오르지 않습
  니다. 
    그것은 얼마나 기묘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와 같은 영감과 창작력을 어린애를 수태시키기 위
  하여, 즉 아이를 만들기 위하여 쓰고 또 예술을 만들기 위해
  쓴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부여하는
  힘입니다.  남성은 그 두 가지 면에서 그 순간의 쾌락을 위해
  자신을 소비합니다. 
  이것은 쇼팽이 음악과 육욕에 대해서 언급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쇼팽은 델핀느와의 연애 시절에 애정면에서나 정신적, 육
체적, 물질면에서도 가장 행복한 때를 가졌다.  그녀와 만나
고 있던 이때의 쇼팽은 모든 면에서 가장 최선의 모습을 하
고 있었다.
  쇼팽은 즉흥 연주의 천재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즉흥곡은 실은 매우 면밀한 필치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을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쇼팽이 어떤 식으로 작곡을 하고 있었는가를 델핀느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아보자.
    나는 내 작곡의 하나하나에 대해 매우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작에 있어선 천분이 없으면 안 됩니다.  천분이 없다
  면 누구도 그에게 그것을 줄 수 없고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내가 작곡한다는 것은 당신들 부인들이 해산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치명적인 고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앵
  두씨를 내뱉는 것처럼 쉽게 아이를 낳습니다.  나는 대단한 고
  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낳을 수 없습니다.
    늘 그렇게 느끼는 일입니다만, 나의 머리 속에서는 아름다운
  환상이 준비됩니다.  나는 그것을 줄줄 흘려 적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결함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악절은 나쁘고 다른 악절은 종이 위에서 전혀 틀린 것
  으로 되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
  는 실망에 빠지게 되며, 그래서 자신의 기억을 괴롭히게 됩니
  다.  르렇지 않으면 5,6개나 되는 주제에서 어느 것을 택해야
  될지 모르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에 나는 이와 같은 여럿의 갓난 아기를 한 구석
  에 버려두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상의 방법이지요.
  그러면 잠시 후 하나늬 주제가 갑자기 푸른 하늘로부터 내려오
  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한 주제가 되는 것
  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주제, 그리고 다음 다음으로 주제들을 마치
  결이 맞지 않은 나무 토막을 잘 연결시켜서 보기 좋은 모양으
  로 만드는 것 같은 세공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전체가 완전
  히 짜여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틀린 것입니다.  내가 최
  후의 완성을 하기까지에는 무서운 괴로움과 한탄과 많은 눈물
  과 잠 못 이루는 무수한 밤을 참아야 합니다.
  이러한 작곡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곡은 제
작 연대가 확실한 것이 매우 드물다.
  또 그의 작품이 완성되었다 해도 출판되기까지엔 오랜 시
간이 걸렸고, 출판시에도 많은 손질이 가해지는 게 보통이었
다.  그는 작품에 대해  만들어진 고뇌 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쇼팽은 이 무렵부터 파리 사교계에서
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도 실제로 가슴을
툭 터놓은 친구는 옛친구 티투스와 맛신스키 정도뿐이었다.
  그의 내면의 은폐, 즉 남이 자기 내면을 엿보는 기회를 차
단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 리스트는 나중에 자신의 저서에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리스트는 쇼팽의 그러한 면을 슬라브적인 국민성 때문이라
고 했다.  겉으로는 예의상 기막힌 애교를 보이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게 하면서 진실한 감정은 마냥 감추고 있다고 했
다.  이는 폴란드인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뚜렷한 경향이
라고 말했다.
  그런데 또 리스트에 대한 쇼팽의 의견은 이러했다.  쇼팽은
작곡가로서의 리스트에 대해 그렇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델핀느 부인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는 리스트에 대해서 이
렇게 쓰고 있다.
    내가 리스트를 생각할 때 눈에 떠오르는 것은 새빨갛게 상기
  되어 호언장담하는 모습이며, 포르팃시모와 피아닛시모로 멀리
  퍼져 나가도록 나팔을 부는 장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모습입니다.  창조의 본질과 방법에 대해
  얘기하는 그의 의견은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작곡가로서의 리스트는 전혀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이나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작품 속에 타인의 알맹이를 집어넣는 손재주 있는
  사람입니다.
    리스트만큼 재미있는 음악가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모자라는 영감을 기묘한 세공으로 꾸미는 교묘한 페인트공입니
  다.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그를 천재적인 예술가로 생각하게 하
  는 아슬아슬한 기예를 부려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그렇지만 리스트는 그의 재능으로 남의 악상이나 작곡을 복
  제하여 자기 독창력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사람입니다.
  쇼팽은 이처럼 독일 로망파의 현학 취미나 감정의 풍요와
과잉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리스트와 슈만과는 가까
이 지내면서도 마음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우정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점은 쇼팽 음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시종 바하와 모차르트의 음악을 최고의 표본으로 생각했던
점과 함께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 시기에 쇼팽은 또 베를리오즈와 알게 되었다.  베를리오
즈는 1832년 12월 12일에 파리 음악원에서 콘서트를 열어 획
기적인 연주를 했다.  그때 리스트가 쇼팽을 베를리오즈에게
소개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쇼팽은 베를리오즈
의 애인 스미손 양의 구원 콘서트에 조연해 준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평생 쇼팽의 찬미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쇼
팽 쪽에서는 후년에 그를 예술가로서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베를리오즈는 이 무렵의 쇼팽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마주르카에는 여러 가지의 섬세함이 있다.  쇼팽은 최고
  도의 연약함을 가지고 연주하기 때문에 청중들은 피아노 가까
  이에서 듣고 싶어할 정도다.  쇼팽은 피아니스트들의 작은 요정
  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이것은 물론 편견적인 판단이었다.

    대중을 두려워한 천재

  1832년부터 1835년 사이에 걸쳐 쇼팽의 작품집은 7권이나
나왔다.  영국에서, 독일에서, 프랑스에서 그의 작품집은 열
렬한 찬사를 받으며 출판되고 있었다.  이들 작품집에 수록된
것 중 많은 분량이 바르샤바에서 혹은 빈에서 쓴 것들이었
다.  그는 파리에 와사 그 작품들을 많이 손질해서 출판했던
것이다.
  쇼팽의 작품들에 대해서 예외적인 찬사가 잇달았다.
  음악 잡지의 기사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이라고 높은 평가를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누구도 아직 이들 작품의 개성적인 성격과 장기를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어째서 쇼팽의 작품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1834년 봄 쇼팽은 아헨에서 열리는 라인강의 음악제에 참
석하기 위해 힐라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헨에서 그들은 멘
델스존을 만났다.
  아헨에서는 페르난디드 리이스의 지휘 아래 헨델의 <다보
리>, 모차르트의 <루피터 심포니>, 베토벤의 <나인(9) 심포니>
등이 연주되기로 되어 있었다.
  쇼팽은 여행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출판업자 술레징거에게
내림 마장조 왈츠곡집을 5백 프랑을 받고 팔았다.  이 당시의
일은 뒤셀도르프의 교향악단 지휘자였던 멘델스존의 편지에
의해 알려졌다.
  멘델스존은 그 편지에 쇼팽의 빛나는 피아노 연주와 쇼팽
이 내는 새로운 음의 효과에 대해서 적고, 쇼팽의 작곡에 나
타나는  절암에의 시도와 격정적인 외침 을 적고 있다.
  멘델스존과 힐라와 쇼팽은 아헨에서 뒤셀도르프로 가서 천
재적인 조각가 샤도프와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이때의 일은 힐라가 전하고 있다.  그는 샤도프가 자기의
문하생들 앞에서 예언자처럼 활보하며 한몸에 외경을 모으고
있었던 일이라든지, 또 쇼팽이 표면적으로 얼마나 공손하게
샤도프를 대했던가 하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날 샤도프의
집에서 저녁에 멘델스존과 힐라의 연주가 있은 다음 교팽의
피아노 연주가 있었는데, 청중들은 경탄해 마지않았다.
  1834년부터 쇼팽은 어릴 때부터 친구이며 의사인 맛신스키
와 함께 거처했다.  이 두 사람은 당탕 가 25번지에서 공동
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1834년 9월 엘스너 선생은 다시 쇼팽에게 오페라로 돌아갈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프레데릭, 사람들이 전하는 모든 소식들은 나를 기
  쁘게 하고 있네.  그러나 기탄없이 말하자면 이제까지의 모든
  것은 아직도 내 마음을 만족시키기엔 불충분하네.
    나는 자네에게 충분한 힘이 되지 못했네.  그러나 나는 자네
  에게 하모니 선율 작법을 가르쳤고, 최선의 벗이 되어 주었으
  며 존경자가 되었었네.
    이제 나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다시 자네의 오페라가 상연
  되는 것을 보고 싶다네.
  이 편지를 받고 쇼팽이 오페라 계획에 몰두했다는 자료는
없다.  쇼팽은 평생 변함없이 자기의 독특한 피아노 음악의
영역에 머무르면서 동요함이 없이 그 영역을 지켜 나가고 그
에 만족했다.
  또 이해 9월 집으로부터 온 편지를 보면 아래와 같은 소식
이 전해졌다.  그것은 루드비카가 보낸 것(신서간집 9부)이었
는데, 그 내용은 쇼팽이 전에 친교를 맺고 있던 스카르벡이 죽
고, 그의 전재산은 어린 아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니콜라스는 2만 프랑의 돈을 스카르벡에게 빌
려 주었으나 채권 증서가 없어 받지 못하게 된 형편이라 재
정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1834년 12월 7일 파리 음악원에서 베를리오즈의 제3회 콘
서트가 열렸다.  쇼팽은 여기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안단테를
연주했다.
  12월 25일에는 독틀 스테블의 자선 콘서트에서 쇼팽은 리
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 에룬스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을 연주했다.
  1834년 겨울과 1835년 봄 사이에 쇼팽은 비교적 많은 콘서
트에 참가했다.
  1835년 3월 22일에는 헬츠, 오스본, 힐라, 라이샤, 스타마
티와 라베르, 르로이 등 두 부인과 같이 프레이엘 주악당에
서 연주회를 가졌다.
  1835년 4월 5일에는 폴란드 망명객의 구원을 위해 개최된
콘서트에 참가했다.  여기서 쇼팽은 바단조 협주곡(자작)을
쳤고, 힐라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을 리스트와 함
께 연주했다.  테너 가수 누리는 리스트의 피아노 반주에 맞
춰 슈베르트의 리이드를 노래했다.  오케스트라는 하베네크의
지휘 아래 오베종의 프렐류드와 <윌리엄 텔>을 연주했다.
  기타 별로 유명하지 않은 예술가들도 이 콘서트에 협력했
다.  그러나 청중의 몰이해는 여전히 극심해서 이후로 쇼팽은
공개 연주에는 별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쇼팽은 공개 연주에 대해 극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리스트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공개 콘서트는 열고 싶지 않네.  대중들이 나를 두렵
게 만들기 때문이지.  그들의 호흡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어.
그들의 호기심에 찬 시선 때문에 나는 어깨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지.  그 보이지 않는 얼굴들 앞]
에서 나는 벙어리처럼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쇼팽은 연주회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데
도 될 수 있는 대로 연주회를 열지 않으려고 했다.
  쇼팽은 예술가들이나 친구들만 모이는 저녁때의 작은 연주
가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저녁때 램프불이 켜지고 몇 시간
이고 앉아 즉흥 연주를 하고 있을 때가 쇼팽에겐 편하고 안
정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1835년 4월 26일에 이탈리아 극장에서 열린 소시
에테 데 콘시에르 주최의 연주회는 홀의 음향적인 효과에 도
움을 받아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 연주회에서 쇼팽은 이미 출판된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폴로네즈>를 하베네크의 지휘에 의한 관현악단과
협연했다.
  당시의 인상을 귀스타프 쉬케의 평으로 알아보자.
    1835년에 리스트는 대단한 재치로 명인기를 대표했으며, 쇼
  팽은 시적인 연주를 했다.  리스트는 모든 효과를 미리 예상하
  고 있는 듯했으며, 피아노의 파가니니와 같았다.
    그러나 쇼팽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효과로 오직 내면의 소리
를 듣도록 했다.  그는 일단 영감이 그의 마음을 잡았을 땐 말
로 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피아노를 쳤다.
  이런 칭찬을 듣고도 쇼팽은 이로부터 약 6년 이상이나 대
중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 앞으로의 6년간 쇼팽은
연주보다 창작에 절정기를 이루게 된다.
  이 무렵 쇼팽은 빈센트 벨리니와 만나게 되었다. 
  벨리니는 쇼팽보다 9년 연상으로 시칠리아 태생의 이탈리
아인이다.
  그의 가극 <노르마>가 파리에서 상연되었을 때 쇼팽은 눈
물을 글썽거리면서 감동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모차르트의 음악에 끌려서 아름다운 가
락에 애착을 갖는다는 점에서 음악상의 상통된 기호를 갖고
있었다.
  벨리니는 1835년 9월 24일 30세가 조금 넘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1835년초 고향의 누이 루드비카는 이런 편지를 보내 왔다.
    우리들의 하우스 콘서트에서 동생의 곡이 연주되었어.
    아버님은 제 1 바이올린을 켜시고 발츠인스키(나중에 이사
  벨라의 남편이 됨)는 제 2 바이올린을 맡았지.  할머니(쇼팽
  의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시고 아이들(루드비카의 자녀들)은
  타크트를 잡았어.
    붐, 붐, 붐의 제3부에서 동생의 마주르카가 밤새 연주되었
  지.  동생의 마주르카에 여러 사람들이 감격했나봐.
    이 마주르카는 이즈음 어디 가서나 들을 수 있고, 일반의 유
  행이 되어버렸어.
  오랜 파리 체재중 쇼팽은 폴란드인(망명객) 동포들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가.
  쇼팽은 재파리 폴란드 클럽과 폴란드 문학인회의 회원 이었다.
그는 뒤에 프랑스 대학에서 슬라브 문학 교수가 된 미키비츠의
강의를 청강한 적도 있다.
  폴란드 망명객을 위해 쇼팽은 몇 번의 콘서트에 참가했다.
그는 언제나 폴란드인으로 행세했다.  외국에서 이주한 사람
들이 종종 보여주는 동화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쇼팽은 음악가로서는 고립되어 있었으나 정신적으로는 폴
란드 문학가의 동지였다.  폴란드 문학가들에게 있어 중요한
테마는 언제나 조국에 대한 애도였다.  이 점에서 쇼팽도 적
극적인 폴란드인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폴로네즈나 마주르카 같은 작품뿐 아니라 거의 모든 쇼팽
의 작품에는 폴란드의 애수가 물결치고 있다.
  쇼팽은 미키비츠와 슬로바키 등의 문학 작품에 의해서 많
은 창작에의 자극을 받았다.  쇼팽의 어떤 작품과 미키비츠의
시에는 주목할 만한 연관성이 있다.
  이들의 정신적 일치는 서로 독립되어 있으면서 무의식적으
로 나타나는 밀접한 정신적 혈연성 같은 것이었다.

    
    부모님과의 재회
 
  1835년 6월 쇼팽은 아직까지 관계를 맺고 있던 델핀느와
피서지 엥기엥에서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 이후
델핀느는 다시 남편에게 돌아가고 일단 이들의 관계는 끝나
게 된다.
  여기에서 쇼팽은 고국의 부모님이 칼스파트로 요양 온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양친과 만나기 위
해 칼스파트로 갔다.
  1835년 8월 15일 칼스파트에 도착한 쇼팽은 마침내 5년여
동안이나 떨어져 있던 부모님을 만났다.
  부모님과 만난 쇼팽은 8월 16일에 가족에게 편지를 썼는
데, 이 편지는 아버지와 함께 쓴 것이다.
  아버지가 먼저 프랑스어로 쓴 다음에 쇼팽은 폴란드어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것은 아버님과 제가 함께 쓰는 최초의 편지입니다.  우리들
  의 기쁨은 펜으로 다 적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들은 그저 포옹하고 또 포옹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
  외에 더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가족 모두가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이 유감입니다.
    그저 즐겁고 기쁘고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냥 저는 무엇이든
  적겠습니다.
    지금은 일일이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오늘의
  재회를 위해 부모님이 지금까지 살아오신 것을 기뻐할 따름입
  니다.
    조금도 변함없으신 아버님 어머님, 연세가 조금 더 드신 것
  외엔 옛날과 똑같습니다.
    우리들은 산책을 했고, 어머님의 팔을 잡고 가족의 일을 이
  야기하며 서로 얼마나 그리워했는가를 이야기했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서로 어루만지며 훈계받기도 했습니다.  저
  는 행복의 절정에 있습니다.
    제가 그분들 밑에서 자랄 때와 똑같은 모양과 몸짓, 그리고
  제가 오랫동안 입맞춤하지 못했던 똑같은 손, 그렇습니다.  저
  는 행복의 절정에 있습니다.
    저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 순간에
  행복하다는 것, 제가 그렇게 갈망하고 있던 것이 지금 현실이
  되어 실현되고 있다는 것, 행복하고 행복하다는 것 외에는 아
  무것도 쓸 수가 없습니다.
  오랜 동안의 전란과 콜레라의 위협 등으로 다시 살아서 만
날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부모님과의 재회에 쇼팽은 이
처럼 뛸 듯이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한 꿈 같은 3주일이 지나자 쇼팽은 또다시
만나게 되기를 빌면서 이별했다.
  그러나 쇼팽과 부모님은 이것으로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
하고 말았다.
  쇼팽은 돌아오는 길에 드레스덴에 있는 보진스카 가를 방
문했다.  여기서 일주일 가량 머무르고 돌아오면서 잠깐 라이
프치히를 방문했다.
  1835년 10월 14일 라이프치히에서 쇼팽은 슈만과 클라라
등과 만났다.  슈만의 장인이며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
히 비크는 쇼팽에 대해 묘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비크가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쇼팽에 대해 갖고 있었던
인상을 알 수 있다. 
    내일이나 모레 드레스덴으로부터 쇼팽이 이곳으로 오는데 음
  악회는 열지 않을 계획이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정력이 부족
  하기 때문이지.  게다가 달갑지 않은 폴란드인이라서 라이프치
  히 음악계는 그의 접근을 꺼려하고 있어.
    이런 일이 없었으면 그는 오래 체재하게 될지도 모르네.  그
  는 드레스덴에서 독일에 자기 작품을 연주할 수 있는 여성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한 모양이야.  하지만 클라라의 솜씨에 곧
  놀라게 될 걸세.
  쇼팽에겐 이때 대단한 헛소문이 붙어 다녔던 것 같다.
  라이프치히에 도착한 쇼팽은 먼저 멘델스존의 집을 방문했
다.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는 쇼팽이 라이프치히에 왔으면서
도 자기를 먼저 찾지 않고 멘델스존을 찾아가 그에게 인도되
어 자기에게 온 것에 대해 분개했다.  그는 쇼팽과 인사도 나
누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쇼팽은 옆방에서 클라라와 슈만과 함께 비크의 문하생들을
만났다.
  클라라는 마침 그때 완성한 <올림 바단조 소나타>를 쳐서
들려주었다.  쇼팽은 자작의 <내림 라장조 녹턴>을 쳐서 들려
주었다.  듣는 이들은 모두 도취되었다.  비크도 약간 열린 문
틈으로 이 곡을 듣고 있었다.
  멘델스존은 쇼팽이 방문했을 때의 일을 뒤에 여동생 판니
에게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다.
    쇼팽은 내가 만든 오라토리오를 전부 연주하여 들려 달라고
  했어.  그것을 내가 연주하고 있는 사이에 식견 높은 라이프치
  히 사람들이 쇼팽을 보려고 슬쩍 방안으로 들어왔지.
    1부와 2부 사이에서 쇼팽은 나와 교대하여 피아노 앞에 앉아
  그의 신작 연습곡과 피아노 협주곡을 돌연 연주하기 시작했단
  다.  사람들은 그의 연주에 기뻐했어.
    그는 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신작 녹턴을 연주했지.  나는
  동생 파울에게도 그것을 기쁘게 들려주려고 그의 곡을 거의 암
  송했단다.
    그는 만일 내가 새 교향곡을 만들어 자기를 위해 연주한다면
  겨울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해 주었어.
  1835년 10월 16일자 음악 신문에는 슈만의 평이 이렇게 적
혀 있다.
    쇼팽의 연주 스타일은 그의 작곡과 같은 듯하다.  즉 절대 유
  일의 것이다.
  또한 슈만은 그 유명한 말로 쇼팽에 대한 평문을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여러분, 탈모하라.  천재다.
    나는 이 천재에게, 이 큰 희망에게 그리고 이 거장에게 머리
  를 숙인다.
  이것은 쇼팽의 <라 치 다렘 변주곡>에 대한 열광적인 찬사
이다.
  그런데 쇼팽은 알지도 못하는(당시엔) 독일인의 열광에 내
심 기뻐하면서 티투스에겐 농담처럼 돌려 말하고 있다.
  쇼팽은 슈만의 작품 이해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다.  슈만은 <라 치 다렘 변주곡>의 제 2 변주에서는 돈 조반
니가 레포렐로 도망친다고 하고 제 3 변주에서는 체를리나가
팔에 안겨지고 그동안 왼손은 그것을 보고 화를 내는 마젯토
를 나타낸다고 했으며, 아다지오인 다섯째 마디의 내림 라음
에서는 체를리나가 드디어 돈 조반니에게 몸을 맡긴다고 해
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쇼팽은 이 해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
던 것이다.  쇼팽은 음악이 문학적인 해설에 의해 이해되는
것은 좀 낮은 수준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쇼팽의 독창성에 감격하고 문학적 찬사를 바친 슈
만에게 우리는 독일인으로서 최초로 쇼팽의 천재를 간파한
명예를 주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시인 하이네의 찬사에 의하면, 쇼팽은 한마디로 천재
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유명한 시인 하이네가
쇼팽을 시인이라 칭한 것도 재미있는 찬사이다.

    또 하나의 사랑의 악장

  위에서 말한 것처럼 쇼팽은 양친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에 드레스덴의 보진스카 일가를 방문했다.  이로부터 쇼팽에
겐 또 하나의 사랑의 악장이 열리게 된다.
  보진스카 일가는 옛날 학교 시절부터 잘 알고 있는 처지였
다.  즉 쇼팽은 음악원 시절에 보진스카 백작의 영지 스롤지
제보로 휴양을 간 일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보진스카 가
의 3형제는 쇼팽의 친구였다.
  전에 제네바에서 쇼팽에게 편지를 보내고 초청한 일이 있
던 백작 부부는 쇼팽의 돌연한 방문에 놀라움과 호의로 그를
맞이했다.
  쇼팽은 1834년 7월 18일에 당시 제네바에 체재하고 있던
펠릭스(보진스카 가의 아들이며 쇼팽의 친구, 마리아 보진스
카의 오빠)에게 편지를 띄워 어릴 적 함께 놀았던 마리아에
대해 회상하고 그녀의 변주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19세의 마리아는 기억 속의 소녀가 아니라 한 사람의
훌륭한 숙녀로 성장해 있었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피를 약간 받아서인지 콘트랄토 음성을
갖고 있었다.
  피아노도 치고 작곡도 하며, 그림에도 소질이 있고 외국어
에도 능한 총명한 처녀가 되어 있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악, 서
정시 등을 관장한 여신의 이름을 따서  에우르페의 갈색 머
리의 처녀 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고 전한다.
  쇼팽과 마리아는 함께 거리 구경을 하며, 브뤼르 궁과 미
술관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매일 엘베 강가를 산착하
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가로수 늘어선 길을 오래
걷기도 했다.
  살롱에서는 매일 밤 늦게까지 쇼팽의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렸고, 마리아의 아름다운 알토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쇼팽에겐 마리아에 대한 사랑의 감
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마리아에 대한 사랑은 평온한 장래를 원하는 마음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결혼 상대자로
알맞은 사람과 만난 기분이 되었다.
  쇼팽은 이때 현란한 파리 사교계로부터 벗어나 바르샤바
근교에 집을 정하고 평온한 미래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이
러한 꿈은 오랜만에 부모와 재회하고 또 마리아를 만나게 된
그가 갑자기 마음의 동요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싹튼 것이
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바르샤바 근처에 학교나 세우고 조용하게 자기 예술에 정
진하며, 항상 따뜻하게 자기를 도울 마리아를 아내로서 곁에
두고, 연로한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고 싶은, 그런 평온한 인
생에 대한 꿈이 쇼팽을 사로잡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마리아와의 사랑을 눈치 챈 보진스카 백작 부인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 쇼팽은 새로운 왈츠를 마리아를 위해
연주해 주었다.  그리고 역마차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마리아는 한 송이의 장미꽃을 쇼팽에게 주고, 앨범에  아무
쪼록 행복하세요 라고 적어 그에게 선물했다.
  드레스덴을 떠나온 지 1주일 후 쇼팽은 마리아의 집에서
연주했던 왈츠곡(작품 69의 1 <고별>과 <녹턴 내림 마장조
(작품 69의 2)>를  잊어버리기 위하여 라는 문구와 함께 적어
서 마리아에게 보냈다.
  이 왈츠는 초고에  마리아 양을 위하여 라는 헌사가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서정적인 왈츠는 생전에 출판되지 않고 사
후에 친구 폰타나가 출판하였다.
  그의 사후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이 곡이 발표되지 못했던
것은 불행한 사랑의 추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왈
츠 끝에는  1835년 10월 드레스덴에서 라고 적어 넣었다.
  쇼팽을 전송한 마리아는 파리로 긴긴 편지를 써 보냈다.
    토요일 당신이 우리를 남기고 떠나신 뒤 우리들은 슬픔에 눈
  물을 지으면서 몇 분 전까지 우리들과 함께 당신이 앉아 있었
  던 응접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잠시 후 아버님도 우리들과 함께 앉아 당신에게 이별의 인사
  를 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눈에 눈
  물을 담뿍 머금은 어머님은 우리들에게 넷째 아들로 부르던 당
  신의 농담을 상기시키려고 하셨습니다.
    펠릭스는 아주 슬퍼하고 있었으며, 카시미르는 광대놀음을
  하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11시에 성악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레슨은 뜻대로 되지 않았
  습니다.  우리들은 당신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펠릭스는 당신의
  왈츠를 연주하라고 졸랐습니다.
    우리들 곁에 남겨진 당신의 것, 우리 모두가 그 곡을 맘에
  들어합니다.  저는 그 곡을 연주했고, 모두들 듣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떠나가신 당신을 상기시켰습니다.
    아무도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당신이 앉아 계시던
  자리를, 그  프리섹의 자리 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작은 의자는 아직 거기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집에
  머무르는 동안 거기에 그대로 놓여 있을 것입니다.
    밤에는 당신과 함께 있지 못하는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
  두들 숙모님 집으로 갔습니다.  아버님도 마찬가지로 그날 밤
  집에 계시기 싫다고 하시며 우리들을 따라 나서셨습니다.  우리
  들은 너무도 당신을 생생하게 상기시키는 장소를 떠나와서 조
  금 슬픔을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제 편지가 너무 길어졌군요.
    저의 산만한 글을 읽어 주시느라 당신의 시간이 낭비될까 죄
  가 되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런 것을 전부 읽어 주시
  지 않을 것입니다.
    조그만 마리아의 편지를 몇 줄만 읽으시고 한쪽 구석에 버려
  놓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당신의 시간을 빼앗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안녕히.
    어머님의 정다운 입맞춤을 당신에게, 아버님과 오빠들의 정
  다운 포옹을 당신에게.
    아니, 이것으론 충분치 못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무엇을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안녕히.
                                    1835년 드레스덴에서
  쇼팽은 이제 마리아의 마음은 완전히 자기의 것이라는 확
신을 하게 되었다.
  1836년 1월 9일 쇼팽의 아버지는 보진스카 가와의 결혼 문
제를 의논하기 위해 어머니를 드레스덴으로 보내려 한다는
편지를 쇼팽에게 썼다.  그러나 어머니는 드레스덴에 가지 않
았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돈과 건강인데 너는 늘 이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라고 아버지는 적고 있었다.
  쇼팽은 이 무렵 병을 앓고 있었다.  지난번 여행에서 무리
를하여 얻은 것이었다.
  이리하여 1836년 여름(7월) 쇼팽은 보진스카 일가가 체재
하고 있는 마리엔바드로 만사를 제치고 떠났다.
  1년의 세월은 두 사람의 마음을 더욱 가깝게 하고, 재회의
기쁨에 취하게 했다.  두 사람의 친밀도는 이미 끊기 어려운
정도가 되어 있었다.
  여름의 나날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주위 사람들의
눈길도 두 사람의 미래를 축복하는 듯이 훈훈했다.
  8월 24일 보진스카 일가는 마리엔바드 별장을 떠나 드레스
덴으로 가게 되었는데, 쇼팽도 그들과 헤어지기 어려워 드레
스덴으로 가서 9월 8일까지 머물기로 했다.
  그리고 드레스덴으로 떠나기 전날 황혼 무렵 (폴란드의 풍
습대로) 쇼팽은 비로소 마리아에게 정식으로 구혼하였다.
  여기서 황혼에 구혼한 사실은 뒤에까지 상징적으로 씌어진
말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마리아는 승낙했고 그녀의 어머니도 동의했다(신서간집에
확실히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게
다가 보진스카 백작의 형도 그들의 결합을 못마땅하게 생각
했다.
  쇼팽은 라이프치히를 잠시 방문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 뒤 2,3개월에 걸쳐 편지가 오갔다.  10월 2일자 마리아
의 편지는 쇼팽에게 부쳐 준 오버 코트에 대한 것과 털양말
에 대해 적고 있었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그들의 결합을 위
해 기도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마리아의 또 다른 추신에는,
    늦어도 5월 아니면 6월까지는……
하고 결혼에 대한 초조한 기다림을 적고 있었는데, 이 1837
년 6월이 되기도 전에 그들의 약혼은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약혼은 이렇게 서서히 깨져 간 것으로 보인다.
  쇼팽에게는 재산이 없었다.  고향에서의 보조도 어려웠고
문하생의 사례와 작곡이 유일한 수입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양가집 딸과의 신분에 알맞은 사치스런 생활을 하기가 어려
웠다.
  마리아 쪽에서도 아버지가 크게 지지하지 않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지참금도 제대로 내어주지 않을 형편이었다.
  마리아의 애정 역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기엔 정열이
모자랐다.  자유로운 가정 분위기의 울타리에는 엄격한 가장
주의가 강하게 버티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것에 반항할 생
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적극적인 애정의 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되어가
는 마리아의 편지를 보며 쇼팽은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렇게 해서 끝나갔고, 쇼팽은 마음속 깊이
상처를 입었다.  쇼팽은 마리아에게서, 그리고 보진스카 가에
서 온 편지를 묶어서  모이아 피에타(나의 슬픔) 라고 쓴 봉투
에 넣어 죽을 때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쇼팽과 연애를 함과 동시에 폴란드의 시인 슬로
바키와도 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쇼팽과의 결렬이
있자 곧 슬로바키에게로 기울어져 함께 제네바로 가 있었다.
  슬로바키는 마리아에 대해 <스위스에서>라는 아름다운 시
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와도 헤어져 1837년 요
제프 스카르벡 백작과 결혼했으나, 결국 만족하지 못하고 마
침내 이혼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다시 결혼을 했는데, 두 번째 남편은 결핵에 걸려
서 오랫동안 고생을 하였고, 그 결혼에서 얻은 아들도 건강
이 좋지 않았다.
  그 뒤 마리아는 슬픈 운명 속에 살면서 이따금 쇼팽을 생
각하고 있었다.  쇼팽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유행성 감기에
객혈까지 하는 병을 얻어 슬픈 인생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
때부터 쇼팽에게 있어 상사의 연애와 분별을 모르는 처녀들
에게 지배당하던 사랑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조르주 상드의 이성 편력

  1836년 가을 쇼팽은 보진스카 가에서 돌아온 뒤 파리의 쇼
세 당탕 가 38번지로 거처를 옮겼다.
  파리에서 쇼팽은 다시 리스트와 친교를 맺었다.  이때 리스
트는 연인 다그 백작 부인과 동거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연
애가 사교계의 중심 화제가 되었다.
  라파엘과 같은 장발을 늘어뜨리고 미모를 자랑하는 리스트
는 화려한 연주로 살롱가 여성들의 넔을 빼앗았다.  그때 아
름다운 다그 백작 부인이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리스트에
게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해 여름 리스트는 그의 측근들과 함께 스위스의 산중 별
장으로 놀러 갔다가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그때 그들은 파
리에서 함께 어울려 지내기로 약속했다.
  파리에 와서 그들은 공통된 살롱을 가지고 많은 친구들을
초대했는데, 이 초대에는 생트뵈브, 시인 하이네, 마키에비
치, 화가 들라크루아와 쇼팽 등이 참석했다.  다그 백작 부인
은 그 살롱을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로 만들려고 했
다.
  다그 백작 부인의 살롱에서 얼핏 조르주 상드를 보았을 때
쇼팽은,
   상드라는 여자, 왜 저렇게 꼴불견이지?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라고 친구들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그녀는 아들 모리스와 딸 소랑주와 함께 참석하고 있었는
데 세 사람이 모두 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귀족 취미의
쇼팽에겐 살롱에서 여자가 남장을 하고 있다는 게 못마땅하
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때 얼핏 만나 보았던 조르주 상드와 쇼팽은 1837년부터
10년이란 세월을 함께 살게 되었다.  처음에 그토록 나쁜 인
상을 받았던 조르주 상드라는 여인은 실제로 사교계에서 많
은 염문을 뿌린 여자로 알려지고 있다.
  상드는 1836년에 서른 셋의 나이였고, 남편 카시미르 뒤팡
과는 14년간의 부부 생활 끝에 이미 이혼해 있었다.
  그녀는 1831년에 남편을 노앙에 두고 파리로 뛰쳐나와 문
필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했다.  본명 오르라 뒤팡을 버리고 조
르주 상드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녀는 곧 문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1834년에는 시인
알프레드 뮈세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는데, 그들의 교제는
유명했다.  뮈세는 치열한 격정을 보였으나 수개월 후에는 가
라앉아 있었고 그 뒤엔 그녀를 증오했다.
  그녀는 눈부신 모험을 지칠 줄 모르고 계속했으며, 그 사
이에 남편과 마지막으로 이혼 서약을 하기 위해 몇 차례나
노앙으로 찾아갔다.
  이혼 후 그녀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파리에서 살았고, 정
식 이혼한 지 1년 만에 쇼팽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유명한 여류 문필가 상드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녀의 가
계의 피가 유전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앙드레 모루아는 <조르주 상드>라는 저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떠한 가계에도 한두 사람의 기이한 인물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조르주 상드의 경우는 그 조상의 모든 사람들이 비범
  했던 것이다.
    왕이 수녀와 놀아났고 장군이 댄서와 결합했던 것이다.  여자        
 
  라는 여자는 모두 오로라라고 불리고, 그 여자들은 연인을 가
  지고 아들과 연인 관계를 가지며, 연인보다 아들을 휠씬 좋아
  하는 것이다.
    사생아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고, 그 아들들은 당당히 인정
  받고 칭찬받으며 길러진다.  그들은 누구나 매력이 있고 무정부
  주의자며,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잔혹하다.
    조르주 상드는 그 조야하고 거센 가계의 육체적 특질을 두서너
  가지나 가지고 있다.  그녀의 굳센 생활력, 생을 영위하기 위한 
  뻔뻔스러울 정도의 간악함, 그리고 욕망의 행위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육욕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상드의 가계를 더듬어 보는 일은 매우 흥미를
끄는 것이다.
  음탕함과 호화로운 사치를 엿볼 수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
는 귀족적이고 또한 문학이나 음악에 교양이 있는 현란한 가
계이다.
  상드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의 미남 장교이고 어머니는 아
버지가 모시던 장군의 정부이며 다른 장군의 딸이었다.  아버
지가 죽은 뒤 상드는 노앙의 시골 집에서 사이가 나쁜 어머
니와 할머니 사이에서 양육되었다.
  그녀는 고정과 그 밖의 교양을 교육받는 한편 남장하고 승
마하는 거친 소녀로 길러졌다.  그녀의 가계가 지닌 귀족성과
서민성의 상극은 그녀를 철저한 반역 정신의 소유자가 되게
했다.
  그녀는 카시미르 뒤팡이라는 시골 귀족과 결혼하였는데 몇
년이 지나 주르 상드라는 문학 청년과 도망쳐 파리로 왔다.
그녀의 펜네임인 조르주 상드라는 이름은 여기서 딴 것인데,
주르 상드는 문명이 떨어지고 조르주 상드의 문명이 크게
높아졌다.
  그로부터 스 청년은 떠나가고 메리메, 뮈세 등과 정사를
벌였다.  상드를 리스트에게 소개한 사람은 뮈세였다.  그녀는
본래 조모의 교육에 힘입어 본능적으로 음악에 대한 이해력
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리스트와는 연인 관계가 이루어지
지 않았는데, 다그 백작 부인은 두 사람에 대해 때때로 격렬
한 질투를 했었다.
  리스트의 격렬한 사내다움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는 했으
나 사람의 대상으로까지는 되지 않았다.  그녀가 열중하는 상
대는 어딘지 모르게 가냘픈 것을 가지고 있어야 했던 것이
다.  주르 상드의 나태, 뮈세의 방탕, 쇼팽의 병약함 등이 그
녀에게 매력의 포인트였다.
  상드는 언제나 그림자같이 정부를 필요로 했다.  쇼팽과 만
날 무렵 그녀의 정부는 아들의 가정 교사인 펠리시안 마르퓌
유였다.  상드는 늘 자기 신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을 정부로
택하는 습관이 있었다.
  거의가 남자 쪽에서 그녀에게 열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새로운 정부를 만들면 그들은 버려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때마다 조금도 미련을 남기지 않았고 죄책감도 갖지 않았다.

    다시 켜진 전설의 불꽃

  처음에 인상이 좋지 않았던 조르주 상드와 쇼팽이 어떻게
깊은 관계를 가지게끔 발전되었는가를 알아보는 데는 확실한
자료가 부족하다.
  리스트의 말에 의하면 상드가 쇼팽과 가까이하고 싶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표명했다고 한다.  상드는 지금까지의 연애
보다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상드의 <나의 생애>에 보면 쇼팽과 관계를 맺으려 했던 무
렵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쇼팽이 마리아와의 관계를 아직 끝내지 않고 있다고 생각
한 그녀는 그 여성이 쇼팽에게 순수하고 진실한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또한 쇼팽이 그녀에게 전념하고 있다면 그
를 잊도록 하겠지만, 만약 마리아와의 결혼이  쇼팽의 예술
가적 영혼을 파괴 한다면 쇼팽과 관계를 계속하려 한다고 적
었다.
    우리들은 매일 만나지 않아도 좋습니다.  매일매일 신성한 정
  화를 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아름다운 맑은 불길이 
  타오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쇼팽과의 관계에 대해 그의 친구 그시마라에게 조
언을 청한 상드의 편지이다.
  상드는 여기에 자기의 마음을 전나라하게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분명히 합시다.  이 문제에 대하여 귀
  하의 회답이 제 장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전력을 필요로 할 때 자
  기의 일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 말을 잘 듣고 명쾌하고 솔직하고 똑똑한 회답을 주세요.
  상드는 메리메와 사귀는 동안 건강한 남자들에게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몸이 건강한 남자들은 나에게서 멀리 물러나 있어 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예술가들과 만나고 싶어.  리스트, 들라크루아,
  베를리오즈, 마이어베르 같은 사람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나
  는 남자가 되는 거야.
  상드는 실제로 그들과 만나고 있었고, 그녀는 만족했다.
  그리하여 젊은 폴란드의 음악가 쇼팽에게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다.  어린애처럼 항상 슬픔에 잠겨 있는 귀여운 천사
같은 쇼팽이었다.
  1837년 3월 노앙에서 상드를 만났던 발자크는 그녀를 이렇
게 표현했다.
    나는 상드가 아무도 없는 넓은 방에서 난로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붉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있는 남자는 드물 것이다.
  1836년말 이미 마리아와 인연이 끊겨진 쇼팽은 상드의 사
랑의 표현에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쇼팽의
마음이 상드에게 완전히 기울어진 것은 아니었다.
  1837년 3월 28일 상드는 리스트에게 편지를 보내 쇼팽을
노앙으로 초청했다.
    제가 쇼팽은 노앙으로 모시고 싶다는 걸 그분에게 전해 주세
  요.  저는 그분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쇼팽은 노앙으로 오라는 초대를 거절해 버렸다. 그
는 이때 카뮈 프레이엘로부터 런던을 여행할 것을 권유받고
있었다.  그는 런던으로 가기 위해 그녀의 초대를 거절한 것
이다.
  쇼팽이 런던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1837년 여름이었다.
  상드는 그해 여름 노앙을 떠나 파리로 쇼팽을 찾아왔다.
마리아와의 결정적인 단절을 위로해 줄 상대가 필요했던 쇼
팽은 상드를 만나자 이제는 더 주저할 것이 없었다.
  상드는 넘치는 성애로 그를 위로해 주었다.
  1837년 10월의 쇼팽의 일기를 보면 상드에 대한 감정을 잘
알 수 있다.
    그 여인과 세 번 만났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동안 눈
  속까지 깊이 뚫어 보는 것이었다.
    다뉴브의 전설이 담긴 슬픈 음악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다뉴브의 전설의 나라에서 춤을 추었다.
    내 눈은 그녀의 깊고 기묘한 눈이 속삭이는 것을 보았다.  피
  아노로 다가와서 불타는 눈동자가 나를 둘러쌌다.
    우리들 둘레의 불꽃, 나는 넋을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만났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오로라, 아름다운 이름이다.
  상드와 쇼팽은 이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지만, 그
들 앞에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1837년 겨울, 쇼팽은 감기로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갔다.
상드는 걱정을 하며, 그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
다.  그러나 쇼팽의 건강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1838년초 더욱 악화된 쇼팽의 건강 때문에 그들은 남쪽 지
방으로 요양을 떠날 것을 생각했다.
  쇼팽은 따뜻한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상드에게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누가 당신의 시중을 들지요? 
  상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따뜻한 곳으로 가기만 하면
곧 회복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혼자서도 얼마든지 자신이
있어. 
  그래서 그들은 말료르카 섬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들은 또한 비난과 질투로 떠들어대는 파리를 빠져나간다
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1838년 10월 15일 상드는 먼저 모리스, 소랑주 두 자녀와
하인을 데리고 파리를 떠났고 5, 6일 뒤에 쇼팽이 그들을 따
라가 팰피니앙에서 합류했다.
  그들의 여행 계획은 처음부터 비밀에 붙여졌다.  단지 가장
가까운 친구 폰타나에게만 어렴풋이 알려줬다.
  그는 폰타나에게,
    이 여행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아무말 하지 말아주게.  귀찮게
  물어 오는 사람이 있으면 얼버무려 그들의 입을 봉해 주기 바
  라네.
라고 당부했다.
  쇼팽이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한 것은 당시 파리 사교계가
무수한 스캔들을 뿌리는 상드와 쇼팽의 화제를 즐기게 될 것
을 우려해서였다.  쇼팽은 상드 같은 여자와 동행함으로써 그
들의 비웃음을 살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여비는 프레이엘과 출판을 약속한 전주곡집의 계약금 5백
프랑과 친구들로부터 빌린 1천 프랑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
레이엘은 또 그에게 피아노를 보내 줄 것을 약속했다.
  팰피니앙에서 만난 쇼팽과 상드 일행은 봥들 항구로 가서
배를 탔다.  다음 기항지인 바르셀로나에서는 이 마을 저 마
을을 구경하고 다녔다.
  그들은 꽤 오랜 시일을 보내고 말료르카의 주도 팔마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남국의 섬에서

  1838년 11월 쇼팽 일행은 말료르카 섬의 팔마에 도착했다.
그때 이곳은 한여름 날씨처럼 더웠다.
  팔마에는 여관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메스 씨의
별장을 빌렸다.  쇼팽은 말료르카에 도착하여 제 1 신을 폰타
나에게 띄웠다.
    나는 지금 야자나무와 사이프러스, 샤보덴, 감람나무, 올리
  브, 오렌지, 시트론과 석류나무에 둘러싸여 식물원과 같은 팔
  마에 와 있네.
    하늘은 터키석처럼 빛나고 바다는 유리알 같으며, 산은 에메
  랄드 빛깔로 빛나고 있어.
    공기는 천국에 와 있는 것같이 느껴지고, 온종일 태양이 내
  리쬐어 날씨가 뜨거워.  여기서는 지금 여름 옷을 입고 있다네.
  밤이면 여기저기서 기타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 와.
    포도 덩굴로 뒤덮인 발코니, 무어인의 성벽 등 모든 것이 거
  리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쪽으로 향하고 있어.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와서 살고 있는 기분이야.
                                    1838년 11월 15일
  이와 같이 쇼팽은 팔마에 대해 좋은 첫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설비도 되어 있지 않은 두 개의 방
에서 지내야 했고, 거친 음식과 쓰레기와 독충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한 끝에 프랑스 영사를 찾아
가 꽤 쓸 만한 별장 하나를 얻었다.
  그 집은 꽤 높은 지대에 있는데다 발코니가 있어서 한눈에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거기엔 또 가구와 장식품과 뜰이 있
었다.  한 달 집세는 50프랑이었다.
  이 손벤 별장은 교외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말료르카
의 적막이 그대로 쌓여 있고, 적막을 깨는 것은 나귀의 방울
소리와 파도 소리뿐이었다.
  쇼팽은 정말 떠나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산책
을 하거나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건강을 회복
시키고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접촉한 자연에 만족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말료르카에 우기가 닥쳐왔다.  소낙비
가 내리고 비바람이 쳐대며, 습기와 한기가 난방 설비도 되
어 있지 않은 방 벽으로 스며들었다.
  집안엔 습기가 찼고, 비는 쉴 새 없이 퍼부어댔다.
  쇼팽은 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사정을 그는
폰타나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이 2주일 동안 나는 마치 개처럼 앓았다네.  기온은 18도 정
  도이고 장미, 오렌지, 야자, 무화과가 살고 있는 이 섬에서 나
  는 감기에 걸렸어.
    유명하다는 세 명의 의사가 와서 한 사람은 내가 뱉은 담을
  보고 놀랐고 두 번째 사람은 담이 나오는 곳을 진찰했으며, 세
  번째 사람은 내가 어떻게 담을 뱉는가를 물었네.
    한 사람은 내가 지쳐 있다고 말했고 두 번째 사람은 내가 죽
  어가고 잇다고 말했으며, 세 번째 사람은 죽을 것이라고 말했
  어.  그런데도 오늘 나는 죽지 않고 있네.  이렇게 되어 계약된
  전주곡을 언제 쓸지는 신만이 알고 있네.
                                    1838년 12월 3일
  쇼팽의 병을 보고 그곳 사람들은 미신적인 극도의 공포를
나타내며 그들 일행을 기피하게 되었다.  의사를 부르기도 곤
란했고, 약국에서 약을 구하려 해도 비밀리에 해야 했다.
  집주인은 쇼팽의 병이 집에 전염된다는 구실로 그들에게
별장을 비워 달라고 통고해 왔다.
  그들은 즉시 집을 비워야 했다.  시중에서는 거처를 구하기
가 어려운 형펀이라 그들은 발데모사의 낡은 수도원에 있는
빈 방을 구했다.
  마침 그 수도원에 숨어 살고 있던 스페인 망명객이 정치적
인 이유로 갑자기 그곳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그는 기꺼이
쇼팽 일행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들은 1천 프랑을 주고
수도원 안의 방을 구해 들었던 것이다.
  위치는 험한 암벽이 있는 산이었다.  비가 심하게 내리면
길은 하천으로 변해 버렸다.  그래서 귀찮은 마을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남떠러지 위에 지어진 사원에선 먼 바다가 바라다보이고,
눈 아래엔 거목들이 밀생하고 있었다.
  사원에는 수년 전까지 수도사가 살고 있었으나 이때는 집
지기와 약제사, 여자 요리사 등 3명이 살고 있었다.
  폰타나에게 쓴 편지에 보면,
    나는 마치 나를 위해 버려져 있는 것 같은 발데모사의 낡고
  황폐한 큰 수도원에서 살게 되었네.
    팔마에서도 가까우며, 이 이상 아름다운 곳이 없어.  마차간
  이 있고 시정이 풍부한 묘지가 있네.  나는 이곳에서 행복해질
  걸세.  그런데 나에게 아직 피아노가 없다네.  나는 프레이엘에
  게 편지를 냈네.  알아봐 주게.
    처음엔 몸 상태가 나빴지만 이제 좋아졌다고 알려주게.
    어떻든 나에 대해서나 작곡 원고에 대해서나 너무 말하지 말
  기를 바라네.
                                           12월 3일
라고 씌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12월 3일 이후에 이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쇼팽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발데모사의 수도원과 방에 대
해 폰타나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벼랑과 바다 사이에 위치해 있는, 반쯤 썩어가는 첼트
  지니 교파의 수도원 안에서 파리 성문보다 더 큰 문이 달린
  방에 살고 있다네.
    머리에 빗질도 않고 흰 장갑도 끼지 않고, 언제나 창백해 있
  는 나를 상상해 보게.
    방은 관 모양으로 천장이 높고, 먼지투성이의 거대한 둥근
  천장과 작은 창이 있다네.  창밖에는 오렌지, 야자, 사이프러스
  마누가 있지.
    창이 있는 맞은편에 무어풍의 금은으로 세공된 꽃장식이 있
  고, 그 아래쪽에 바퀴가 달린 나의 침대가 놓여 있다네.  침대
  옆에는 별로 쓸모없이 보이는 네모 난 책상이 있고, 그 위에는
  대단히 사치스런 납촛대에 양초가 꽂혀 있어.
    책상 위에는 바하의 작품과 나의 곡상이 적힌 스케치, 그리
  고 내 것이 아닌 낡은 종이쪽이 놓여 있다네.  이것이 나의 전
  재산이지.
    정적, 아무리 소리쳐도 여기서는 누구에게 들리지 않아.  나
  는 참 기묘한 장소에서 자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거야.
    여기 자연은 아름답기는 하나 사람과는 교섭이 없고, 길은
  일정하지 않아.  나는 때때로 팔마에 갈 때 말을 직접 모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다른 길로 다닌다네.
    여기서는 물줄기가 길을 만들어 놓고 또 뒤이어 세찬 빗물이
  길을 부숴 놓는다네.  어제는 길이 있었는데도 오늘 아침에는  
  불통이 되고, 지금은 밭이 되었어.  어제는 마차를 타고 갔는데
  오늘은 당나귀를 타고 나가야 하게 되었어.
    자네 편지는 주소가 잘못 씌어 있어.
    여기 자연은 좋으나 사람들은 도둑놈 같아.  그들은 외국인을
  못 보아서인지 일정한 알맞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네.  예를
  들면 오렌지는 공짜로 먹을 수 있지만, 바지 단추 하나에 바가
  지를 씌우는 거야.
  발데모사에서의 생활은 쇼팽 일행에게 차츰 큰 고통을 주
었다.  음식물도 시중에서 운반해 와야 했고, 생활 필수품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쓸모 있는 하인이 없었으므로 집안
일도 엉망이었다.
  상드는 그런 가운데서도 방안을 장식하고 일상 생활을 즐
겁게 유지해 갔다.  그녀는 강한 생활력과 넘치는 정력을 지
니고 있어서 지극히 유쾌해 보였다.  그런 현상은 그러나 쇼
팽에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쇼팽의 병은 보통이 아니었다.  쇼팽은 병자용의 음식이 필
요했는데, 그런 것은 구하기도 어려웠다.  건강의 위기에 있
는 쇼팽은 불편한 생활 여건 때문에 초조와 우울 속에 빠져
들었다.  섬 주민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을 속여 금품을
빼앗아 갔고, 악평을 내어 교회에 오는 것까지 막았다.

    <빗방울 전주곡>이 탄생되던 날

  어느 날 저녁에 상드는 아이들과 팔마 거리에 내려갔다가
억센 비를 만났다.  마차가 잘 움직이지 않아 그들은 옷을 적
시며 길을 달렸다.  이때의 일을 상드는 그녀의 저서 <나의
생애>에 이렇게 적었다.
    비가 쏟아져 마차 지붕에 넘쳤다.  3마일을 되돌아오는 데 6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홍수의 한가운데 있었다.  신발도 벗어
  버리고, 마부는 달아나고, 너무나도 무서운 어두운 밤길의 위
  험을 무릅쓰고 달렸다.
    우리들은 환자가 걱정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재촉했다.
    그는 정말로 생생하게 앉아 조용한 절망 속에서 눈물을 머금
  은 채 기막힌 자작의 전주곡을 치고 있었다.
    우리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
  로 외치며 일어섰다.  그리고 흐트러진 얼굴과 기묘한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아아, 너희들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정신을 차려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가 우리들이 위험
  에 빠져 있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머리가 이상해져 있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그 뒤에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는 환상 속에서 그런 위험한
  장면을 보고 꿈과 현실을 구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피아노 앞에서 자신을 진정시켜 위안하고, 자기도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호수 속에 빠지는 것으로 착각했다.  무겁고 얼
  음장 같은 물방울이 일정한 속도로 자기의 가슴 위에 떨어진다
  고 했다.  나는 실제로 물방울이 일정한 속도로 지붕 위에 떨어
  지고 있다고 하며, 그에게 들어 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런 음을 듣지 못했다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음을 의음적 화음이라고 표현했더니, 그는 매우 기
  분 나빠 했다.  그리고 전력을 대해 항의했다.
    귀로 듣는 이들 의음을 그가 유치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연 속에는 불가사의하고 기묘한 화음이
  가득 차 있지만, 그 화음은 자기의 악상 속에 있는 것과 같은
  가치 있는 숭고한 음으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고 했으며, 외부
  의 음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날 밤의 전주곡은 빗소리에 넘친 것이었고, 그 음이 사원
  의 지붕에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였다 할지라도
  그의 작곡은 그의 환상의 음악 속에서 그의 가슴 위로 떨어지
  는 눈물로 바뀌어진 빗방울이었던 것이다.
  이때 쇼팽이 쓴 곡이 유명한 <빗방울 전주곡>이라 일컬어
지는 <제 6 번 나단조>, <제 15 번 내림 라장조>이다.
  그런데 쇼팽의 창작 태도는 여기서부터 변하고 있다.  전에
는 외부 사람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태도였다면
이때부터는 자기 마음을 향해 음악으로 묻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제 쇼팽은 폴란드의 혼을 밖을 향해 들려줄 상대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상드는 곁에서 그를 열심히 돌보며 헌신
적인 사랑을 쏟았지만, 핏줄의 연결이 없는 프랑스 여인이었
을 뿐이다.
  상드는 쇼팽이 가졌던 조국의 음악에 대한 물음에 대답하
여 줄 상대는 될 수 없었다.
  쇼팽과 상드의 예술에 대한 의견은 크게 차이가 있었다.
상드는 예술을 그 시대의 목적으로 사용했고, 쇼팽은 예술은
예술로서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쇼팽은 일체의 것을 초월
하여 예술을 발전시켰다.  두 사람의 사고방식은 끝내 상반되
어 급진전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생각 때문에 서로 충돌을 하지는 않았
다.  쇼팽은 상드의 문학 세계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말하지
않았고, 상드도 쇼팽의 음악에 깊은 이해를 보이면서도 감상
자의 입장 이상의 태도를 취하진 않았다.
  말료르카에서 만들어진 그의 전주곡집은 주로 자연에서 얻
은 영감으로 이루어졌다.
  수도원의 생활은 계속되었다.
  상드는 활기에 찬 생활을 이어갔다.  쇼팽과 아이들을 보살
피는 것으로 삶의 보람을 느꼈으며, 자연은 그녀를 만족시키
기에 충분했다.
  하이킹을 가기도 하고 무너녀가는, 십자로 된 복도와 수도
원의 방들과 무덤들을 살펴보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사원의
방이나 복도, 무덤들은 무어풍의 특수한 장식과 조각으로 꾸
며져 있었다.
  축제일에는 민중놀이를 구경할 수 있었다.  남녀 농민이 악
마로 가장하여 저녁 무렵엔 함성을 지르며 사원에 몰려와서
춤을 추는 가장 무도회 같은 것이었다.  무도회는 기타, 바이
올린, 캐스터네츠 등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루었다.
  무너져가는 사원에서는 놀라운 미사춤이 아라비아풍의 특
수한 음악에 의해 기묘한 모양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
상드 일행은 대단한 매력을 느꼈다.
  상드는 맹렬히 일을 했다.  아이들에게 매일 학습을 시켰
다.  모리스에겐 투키디데스 영웅전을 읽어 주었고, 소랑주에
겐 문법을 가르쳤다.
  또한 쇼팽의 시중을 들고 자신의 작품도 열심히 썼다.
  그러나 쇼팽은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상드가 돌아
다니는 동안 그는 너무도 허약한 몸 때문에 사원에 혼자 남
아 있어야 하는 때가 많았다.
  사원의 분위기는 그를 기분 나쁘게 했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렸고, 환상 속에 빠져 신경은 더욱더 피곤해졌다.
  이때의 쇼팽을 상드는 이렇게 표현했다.
    가엾은 대예술가는 사람들이 멀리하는 환자였다.  그는 완전
  히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는 병 속에서 자기의 환상에 불안하
  게 동요했으며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다.  사원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으나, 그에게 있어선 환영의 축일일 뿐이었다.
    그는 침묵을 지켰지만, 나는 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아이들과 저녁 산책에서 이 페허로 돌아오면 그는 밤 열 시가
  되었는데도 피아노 앞에서 창백한 눈을 치켜 뜨고 머리카락을
  곤두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럴 때 그는 우리들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정신이 들면 그는 억지로 크게 웃어젖히며 막 작곡한 숭고한
  작품을 연주하였다.  그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고독과 애수
  와 공포에 사로잡혀 심장이 찢어질 듯한 생각으로 작곡한 것이
  었는데, 그는 미친 듯이 그 곡을 쳐대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런 나날에 그를 가만히 모셔 두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사교계에서는 친절하고 쾌활하며 매력적이던 쇼팽도 병이 드
  니 자기 속에 틀어박혀서 다른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고 사람들
  을 절망시켰다.
    그의 정신은 상한 장미 잎사귀 하나에도, 조그만 곤충의 그
  림자에도 상처를 받고 피를 흘렸다.
    그는 나와 아이들을 제외하곤 스페인(말료르카) 하는 밑의
  모든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바라보기도 싫어했다.
    이제 더 이상 머무르는 것이 불편하여 그는 어서 이곳을 떠
  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라고 당시의 상황을 적고 있다.
  쇼팽은 건강이 극심하게 악화되어서도 피아노를 치지 않고
는 하루도 지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빗방울 전주곡>을
비롯해서 24곡의 전주곡을 작곡했다.
  이곳에서 쇼팽은 <빌라드 바장조(작품 38)>와 < 폴로네즈
다단조>와 <가장조(작품 40)>를 완성하여 프레이엘에게 보냈
다.  돈이 떨어졌기 때문에 서둘러 보낸 것이었다.
  더 이상 작곡을 할 수도 없고, 병세가 악화되어 회복될 기
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파리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1839년 2월이 되니 비가 멎고 봄의 징조가 보였다.  쇼팽은
떠날 기회를 엿보며 곡을 추고하면서 며칠을 보냈다.
  드디어 바르셀로나로 가는 배편이 재개되었다는 소식이 들
려 왔다.
  1839년 2월 12일 쇼팽 일행은 마차를 타고 숱한 추억이 담
긴 사원을 떠나 팔마로 내려갔다.  동요가 심한 마차를 탔기
때문에 쇼팽은 마차 속에서 많은 피를 토했다.  하지만 출발
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들은 엘 말료르카 호를 타고 마르세유로 향했다.  이 배
에는 백 마리의 돼지가 실려 있어 그 울어대는 소리와 악취
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날 밤 쇼팽은 한잠도 못 자고 심하게 객혈을 한 나머지
빈사 상태에 이르렀다.  쇼팽은 바르셀로나에 닿자 영사의 도
움으로 프랑스 전함 메레아글 호로 옮겨져 군의관의 치료를
받았다.
  1주일 동안 치료를 한 끝에 쇼팽은 조금 차도가 있었다.
그들은 페니시앙 호를 타고 마르세유로 향했다.

    마르세유에서

  1839년 2월 25일 마침내 쇼팽과 상드 일행은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2월 26일자 상드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쇼팽은 참으로 좋아졌어요.  리용 만을 36시간이나 흔들리며
  항해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 항해는 때때로 바람이
  불었으나 순조로웠어요.
    이제 쇼팽은 기침도 하지 않고 피를 토하지도 않고 잠을 잘
  자요.  무엇보다도 프랑스에 있다는 것이 안심됩니다.
    마음 놓고 침대에서 잠잘 수 있으며, 환자가 사용했다고 해
  서 침대를 태우는 일 같은 것도 없을 테지요.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도 거부하는 사람이 없지요.  훌륭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어떤 의사의 치료도 자유롭게 받고 있어요.
  그리고 이어서 상드는 자신의 기분을 털어놓았다.
    한 달만 더 그곳에 있었더라면 쇼팽이나 나나 틀림없이 죽었
  을 거예요.
    그는 우울 속에서 짜증을 내고 나는 화가 나서 분개하고……
  쇼팽은 명의의 진단을 받고 그렇게 위험한 상태가 아니라
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의사는 파리로 가는 것을 반대
하고 그곳에서 정양할 것을 권했다.
  마르세유에서는 고명한 두 사람의 예술가를 보려고 사람들
이 호텔까지 찾아왔다.
  그들은 인간 세계로 돌아왔따는 느낌을 받았다.
  조르주 상드와 쇼팽은 마르세유에서 5월까지 머물렀다.  이
사이에 일어났던 일로는 5월 25일에 가수 누리의 추도식에
쇼팽이 참석하여 오르골을 친 것을 들 수 있다.
  테너 가수 아돌프 누리는 쇠퇴해 가는 자신의 명성에 대해
몹시 초조해 하던 끝에 나폴리의 집 창에서 투신 자살을 했
다.  그의 아내는 망부의 유해를 파리로 데리고 가는 도중 마
르세유에서 추도식을 가졌던 것이다.
  상드는 쇼팽의 연주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쇼팽은 외치는 듯한 조잡한 악기로 슈베르트의 <성좌>를 부드
  럽게 연주했다.  그것은 누리가 리이드를 노래할 때처럼 열광적
  인 것이 아니라 마치 아득한 세계에서 들려 오는 합창 같은 것
  이었다.
    참석자들은 크게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격렬한 연주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했다.
  마르세유에서 쇼팽은 폰타나에게 많은 편지를 띄웠다.  그
내용은 주로 출판업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이때 돈이 몹시 궁했으므로 작곡료에 대해서 심한 독
촉을 했으며 되도록 현금을 받고 원고를 내놓았다.

    열정의 진상

  1839년 5월 20일 쇼팽은 조르주 상드의 별장이 있는 노앙
으로 갔다.  전에 한 번 초청받은 일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
던 쇼팽이 이제 처음으로 노앙에 간 것이다.
  상드는 새로운 생활을 꿈꾸며 행복해 하였다.  쇼팽도 노앙
의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넓디넓은 전원으로 둘러싸인 마을
이 정적 속에 파묻혀 있었다.  쇼팽에겐 더할 수 없이 편안하
고 아늑한 요양지였다.
  마을 사람들도 곧 쇼팽을 좋아하게 되엇다.  쇼팽은 명랑함
과 순진성을 되찾았다.  상드는 쇼팽을  내 아이 라고 불렀다.
그녀는 6세 연상이었으나 그 이상의 모성애를 가지고 쇼팽을
보호하고 있었다.
  쇼팽은 상드를  나의 주인  혹은  이 집의 주인 이라고 불렀
다.
  아직 건강체가 아닌 쇼팽은 상드나 애들과 산책을 즐기지
못하고 집안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상드는 그녀대로
헌신적으로 그를 보살폈다.
  말료르카 섬에서 쇼팽과의 사이에 생긴 틈을 메우기 위해
상드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쇼팽이 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일하는 동안 상드는 그의 방
에 들어가거나 이야기를 거는 일을 삼갔다.  간혹 먹을 것을
들여 보내고 방안 공기를 조절해 주는 등 그가 되도록 신경
을 쓰지 않도록 도와 주었다.
  쇼팽이 작곡을 하는 동안 상드는 자기의 작품을 쓰면서 시
간을 보냈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저녁 식사 때가 되어 마주앉으면 상드
는 서로의 일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의견을 나누며 이것저것
일어났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쇼팽이 자신이 작곡한 곡을 상드에게 들려주며,
   오로라, 이 곡이 어떤지 들어봐요.  그리고 기탄없이 평을
해주오. 
라고 말하면 상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프레데릭, 빨리 들려줘요.  어떤 곡인지 궁금해요. 
  쇼팽이 피아노를 치고 있는 동안 상드는 조용히 연주를 들
어주었다.  상드는 훌륭한 음악적 감수성을 갖고 있었다.
  이때의 상드의 심정을 적은 글을 보면 그녀가 어떻게 육체
적 욕망을 누리고 쇼팽에게 헌신적인 봉사를 했는가 하는 심
리적인 근거를 잘 나타내고 있다.
    나는 격정 때문에 타오르는 듯한 적이 없었다.  나는 매우 따
  뜻한 모성애와 결백으로 일종의 어머니 같은 감정을 이 예술가
  에게 바쳤다.
    나는 혼자서 격정을 참기에는 너무나 젊었다.  그러나 침착하
  게 생각한 뒤 격정의 위험을 내게서 소멸시켜 버렸다.  이제 나
  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게 되었다.
    괴로움으로 가득 찼던 나의 생활에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가
  지고 자신을 일종의 종교적인 경지로까지 끌어올리는 진실성을
  가지게 된 좋은 기회였다.
  이때의 쇼팽의 마음이 담긴 일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1839년 10월 12일
    나는 건강이 좋아졌다고 한다.
    기침도 통증도 없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이 좋지 않다.
    오로라의 눈이 흐려져 있다.  그녀의 눈은 내가 피아노를 칠
  때밖에 빛나지 않게 되었다.  그때에는 세계가 맑고 아름답다.
    내 손가락이 건반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갈 때, 그녀의 손
  은 종이 위를 달려간다.  그녀는 음악을 들으면서 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의 머리 위에도 옆에도 음악이 있다.
    달콤한 사람의 말처럼 맑은 나의 음악이 그녀 곁에 언제나
  있다. 
    오로라,
    그대를 위하여 나는 땅바닥을 기어도 좋다.  무엇을 하든지
  그대를 위해선 지나치지 않다.  모든 것을 그대에게 바치리라.
    내가 지쳤을 때 그대의 눈길이, 그대의 애무가, 그대의 미소
  가 있다면 나는 그대를 위해서만 살고 싶다.  그대를 위해서만
  정다운 음악을 울리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대의 흐린 눈으로 너무 잔혹하게 되지 말라.
  여기서 잔혹하게 되지 말라는 말은 상드가 쇼팽의 건강을
염려하여 육체적 접촉을 냉정하게 뿌리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쇼팽 쪽에서 오히려 이 무렵 더 강한 육체적 욕구를
느끼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앞에서 말한 상드의
기록으로 보아 상드는 자신의 정욕을 될수록 억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1847년 5월 12일에 쇼팽과 상드의 공동의 친구 그시마
라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상드는 사람들의 비난에 대해 이렇
게 변명하고 있다.
    7년 전의 일입니다만, 그 무렵 저는 쇼팽이나 그 밖의 사람
  들과도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고 처녀처럼 살았습니다.
    저는 나이보다 늙어 보였기 때문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정
  욕을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저는 정욕에 지쳐 환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만약 쇼팽에게 가장 절대적인 보호를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러나 쇼팽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비난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
  떤 사람은 제가 격력한 정욕으로 그를 아주 고갈시켰다고 말하
  고, 또 어떤 사람은 제가 엉터리 행위로 그를 망절시켰다고도
  말합니다.  그렇지만 귀하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쇼팽은 제가 금욕시켰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하여 저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만약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저는 그를 정말로 죽였을 것입니다.
  상드의 잔혹성이란 이만큼 강하게 자신의 욕정을 절제하였
다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쇼팽은 그의 고통을 음악으로 달랬다.  상드가 쇼팽의 작곡
광경을 기록한 것을 보면 쇼팽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작곡에
몰두했는가를 알 수 있다.
  노앙에서의 정양을 끝내고 파리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
쇼팽은 1839년 10월 서둘러 폰타나에게 아파트 방을 구해 달
라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집을 장식해 달라는 부탁에서는
아주 세심한 주의를 써 보냈다.
    내가 전에 있던 방에 사용했던 것과 같은 밝은 비둘기색의
  빛나는 벽지를 골라 주게.  암록색의 가느다란 선이 둘러쳐져
  있는 것이 좋겠어.
    현관용으로는 묵직하고 고상한 느낌이 드는 종이가 좋을 거
  야.  나는 흔히 있는 강한 색보다 단조롭고 가라앉은 단색을 취
  하고 싶네.  그러므로 내겐 진주빛이 맞을 것 같아.  그 색은 눈
  을 찌르지 않으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색이거든.
  그리고 이런 사소한 부탁까지 덧붙였다.
    당탕 가의 뒤포르 가게에서 내 모자를 사 주게.  그 가게 주
  인은 내 모자 사이즈를 잘 알고 있고 내가 얼마나 가벼운 것을
  사용하며 어떤 형을 좋아하는지도 알고 있네.  올해 유행에 맞
  아야 하겠지만 너무 모던한 것은 곤란해.
    그리고 가로수가 있는 거리의 도틀몽 양복점에 가서 회색 바
  지를 두 개 주문해 주게.  어두운 색의 겨울 천으로 골랐으면
  좋겠어.  천은 유연하고 가장자리 선이 없고 탄력성이 있으며
  부드러운 것이 좋아.
    또한 검은 빌로도의 상의도 부탁하네.  단 아주 드물게 무늬
  가 있는, 그러면서 강하지 않은 빌로도, 뭐랄까, 좀 고상한 것
  으로 말이야.  재봉사를 재촉해서 금요일 아침까지 완성해 주면
  내가 파리에 돌아가 입을 수 있지 않겠는가.
  또 한 통의 긴 편지에는 상드의 집에 대한 걱정을 잔뜩 하
고 있다.
    제발 부탁하네.  사랑하는 친구, 자네는 이 일에 흥미를 가져 
  주기 바라네.
  폰타나는 조금도 불평없이 쇼팽이 지시한 대로 준비해 놓
고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시 파리의 총아로

  1839년 10월 중순경 쇼팽은 1년 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말
료르카, 마르세유, 노앙 등을 거친 정양 여행을 끝내고 그는
파리에 온 것이다.  연인 사이로 떠났던 상드와 쇼팽은 이제
부부처럼 되어 돌아왔다.
  파리 사교계 사람들은 이들의 연애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화제거리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의 가족들에게는
쇼팽은 물론 알리지 않았다.  정양 가 있는 동안 쇼팽은 집에
편지도 거의 보내지 않았다.
  파리에 와서 쇼팽은 트롱세 가 5번지로 이사했고, 상드는
약간 늦게 와서 피가르 가 15번지에 들었다.  쇼팽의 방은 어
둡고 습기가 많았다.  그는 매일 상드의 피가르 가의 집을 드
나들었다.
  파리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쇼팽은 모슈레스를 만났다.  그
들은 처음에 은행가 레오의 집에서 만났었다.  그런데 쇼팽이
파리에 오자 모슈레스가 그를 찾아왔다.
  모슈레스와 쇼팽은 이때 루이 필립의 부관 드 펠토스 백작
의 추장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어전 연주를
했다.  이 연주에 대해서 모슈레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장려한 방을 지나 왕족과 귀족이 모여 있는
  흥겨운 살롱으로 들어갔다.  원형의 의자에는 바느질 그릇을 앞
  에 놓고 앉아 있는 전아한 화우의 모습이 보였고 그 옆으로는
  아데레 부인과 오를레앙 공주와 여관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
  었다.
    쇼팽은 먼저 녹턴과 에튀드를 연주했는데 대단한 박수를 받
  았다.  이어서 나도 신구의 에튀드를 연주하고 쇼팽과 같은 박
  수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에는 둘이 함께 한 대의 피아노에 앉아 내림 마
  장조 소나타를 연탄했다.  사람들은  디봥 테리시(신비롭고 기
  막히다)!  라고 외쳤다.  우리는 이 때문에 잠시 중단했다.
    안단테가 끝나자 황후는 여관에게 감탄의 소리를 속삭였다.
  우리의 연주가 끝나니 앙코르의 명이 내렸다.  우리는 고조된
  분방함으로 연탄을 했다.  피날레에서 우리는 음악적인 황홀경
  에 빠졌다.
  이를 뒤이어 두 사람은 각기 즉흥 연주를 했다.  쇼팽은 그
리사르의 담시 <라포르>를 주제로, 모슈레스는 모차르트의 
테마에 의해서 즉흥 연주를 했다.  (이에 대해선 1839년 11월
12일자 음악 신문의 기록이 있다.)
  황제는 콘서트가 끝난 뒤 쇼팽에겐 황금잔과 접시를 하사
했고 모슈레스에겐 여행용 상자를 주었다.
  이 일이 있은 바로 뒤 쇼팽은 토롱세 가의 집을 정리하고
상드의 집으로 가서 동거했다.
  상드는 <나의 생애> 속에서 그와의 동거에 대한 동기를 설
명하고 있다.  쇼팽의 걱정스런 건강 상태, 그를 간호해야 한
다는 의무, 그리고 안정된 가정 생활 등이 상드가 말한 동기
이다.  그 후 쇼팽은 피가르 가의 상드 집에서 1841년까지 살
았다.
  1840년엔 쇼팽은 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음악
활동을 개시하여 문하생을 가르치며 사교계에도 빈번히 드나
들었다.
  상드의 집은 그 무렵 파리의 정신적인 아지트였다.  발자
크, 들라크루아(모리스의 스승), 라만네 승정, 철학자 피에르
레로우 등이 그녀의 집에 출입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생트
뵈브, 하이네, 리스트, 라마르틴 등 많은 예술계의 인물들도 
그들과 교우 관계를 가졌다.
  1840년초에 조르주 상드는 그녀의 희곡 <코시마>를 프랑세
즈 극장에서 상연했다.  이 초연에 상드는 여배우 들봐르를
등장시켰는데, 그녀를 데려오는 데는 물론 극연습에 많은 비
용을 들였으나 연극은 전면적인 실패로 끝났다.  이 일은 쇼
팽에게도 영향을 미쳐 적지않은 마음의 동요를 가져오는 원
인이 되었다.
  1840년의 봄은 그들에게 있어 어두운 날들이었다.  다그 백
작 부인은 상드를 끊임없이 질투하여 결국 둘 사이에는 우정
의 금이 가고 말았다.
  다그 부인은 상드를 보고  설탕을 뿌린 굴조개 라고 했다.
이 무렵 다그 부인은 리스트에게 다음과 같은 예견을 적어
보냈다.
    쇼팽 부부는 이제 곧 갈라서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의 친구들은 쇼팽이 병적인 질투를하여 애욕으로 파멸해 버릴
  사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르주는 쇼팽을 귀찮아 못 견뎌 하지만 그를 버리게 되면
  쇼팽이 타격을 받아 죽지나 않을까 그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다그 부인의 이런 의견은 억측에 불과한 것
이었다.  그런데 다그 부인은 이 무렵에 리스트와 헤어지는
처지가 되었다.
  1839년부터 1841년 사이에 쇼팽의 지도를 받았던 프리데리
케 뮐러(슈트라이헬 부인)양의 회상기에 보면 이 무렵의 쇼팽을
잘 그려 주고 있다.
    나는 일요일 오후 한 시쯤 쇼팽의 집에서 피아노를 쳤다.  네
  시나 다섯 시쯤 수업은 끝났다.  그리고 쇼팽 자신이 곡을 쳤는
  데 얼마나 아름다왔는지 !
    어느 날 아침 쇼팽은 <프렐류드 14>와 바하의 <둔주곡>을 악보
  없이 쳤다.  내가 즐거운 감탄의 소리를 지르자 그는,
     칭찬은 일러. 
  라고 하면서 슬픈 웃음을 띄우며 그 다음을 계속했다.
    나는 가끔 그가 비상하고 황홀한 모습으로 전주곡을 치고 있
  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한 번은 그가 모든 것을 잊고 연주에
  몰두하고 있을 때 하인이 들어와 편지 한 장을 악보대 위에 올
  려놓았다.  그때 쇼팽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고 머리카락을 곧
  두세우며 치는 것을 중지했다.
  그런데 프리데리케 뮐러 양은 쇼팽의 집에서 상드와 마주
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쇼팽은 세심한 배
려로 자기의 젊은 여제자와 상드가 마주치지 않게 했을 것
이다.  
  쇼팽의 제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쇼팽이 어떤 음악가들에
게 관심을 가졌고 좋아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쇼팽은 바하의 피아노곡에 매우 큰 관심을 가졌으며, 제자
들에겐 모차르트, 훔멜, 필드, 베버, 모슈레스 등을 가르쳤
다.  그는 베토벤에 대해선 극히 한정된 곡에만 애정을 가지
고 있었고, 슈베르트의 것도 아주 소수의 것에만 관심을 가
졌다.
  쇼팽은 베토벤의 작품에서 보이는 격렬함을 싫어했다.  특
히 베토벤의 <다단조 심포니>에서 보이는, 하늘 높이에서 갑
자기 지상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싫어했다.  이와 같은
작열은 그에겐 비참하고 혹독한 것이었다.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절대로 싫어했다.  벨리니와 롯시니는
인정했으나, 마이어베르의 곡은 참을 수 없어 했다.  슈만의
곡은 많이 알고 싶어하지 않았고, 반면 멘델스존의 음악은
좋아했다.
  쇼팽은 이와 같이 대체로 자기류에 가깝거나 자신의 느낌
에 직접 와닿는 것은 좋아했으나 그 외의 것은 일체 손을 저
어 멀리했다.
  1839년 10월 파리로 돌아온 이후 1842년 무렵까지 쇼팽의
창작력은 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의 거작들은 거의 다 이 시
기에 쏟아져 나왔는데 이 시기에 출판된 작품이 그의 전 생
애를 통해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피아니스
트로서도 이 무렵이 명수였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쇼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쇼팽은 피아노의 숙달자로서 기술적인 면에서만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작곡가로서도 최고의 것을 창조했다.  그는
  제1류의 인간이다.  쇼팽은 최고의 정신의 만족을 음악에서 구
  하려 했다.  그의 영광은 귀족주의적인 것이다.
    그가 피아노를 치거나 작곡을 하거나 할 때면 나는 사랑하는
  조국에서 찾아온 동포가 들려주는, 고향집에서 일어난 기묘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에게 이런 질문
  을 했다.
     어떻게 당신은 초록빛 잔털 둘레에 은빛 면사를 그렇게도
  아름답게 맺을 줄 아는 요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당신은
  이제 남다른 애정으로 흰 수염 달린 해신을 쫓아가려는가?  
  우리들 나라에는 장미가 또 그렇게 자랑스런 빛으로 피어 있
  는가?  나무들은 아직도 그렇게 아름다운 달빛 아래서 노래하
  는가?
  리스트는 또 쇼팽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쇼팽의 수많은 왈츠와 발라드, 스케르초는 아주 극히 순간적
  인 시간에 불려 나온 것 같고, 관 속에 넣어진 것 같은 순간적
  인 시적 숨결을 연상시킨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여 너무나 섬세하고
  부드럽고 가냘프게 짜내었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마의 세계에 가까이 간 듯이 느껴지
  게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운디넨니나 치타니아스, 마리르 혹은 마브
  여왕의 세차고 우울한 오베롱의 비밀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준
  다.  그리고 우리들의 절망과 참을 수 없는 권태마저 해소시키
  는 공기와 물과 불의 전능의 신과 같은 것이다.
    그는 모든 것에서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색채와 안개 같
  은 모습과 발랄한 맥박의 고동을 전해 주었다.  그럴 때 거기에
  는 소재적인 요소는 없어지고 헤아릴 수 없는 대상의 본질이
  작용하는 것이다.
    쇼팽의 손가락은 듣는 이에게 현신한 바이런의 <아코프 포스
  카리>를 눈앞에 보는 듯이 조국에 애정 깊은 주인공이 끝내 살
  아서 베네치아 라 베라를 탈출 못 하고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슬프고 구할 길 없는 회의를 유로시킨다.
  또 많은 사람들은 쇼팽은 그 특유의 페달 밟는 방식을 가
지고 놀라운 뉘앙스와 전혀 새로운 효과를 거두었다고 말한
바 있다.
 
    쇼팽 음악의 절정기

    1840년 무렵의 쇼팽의 음악이 절정기에 이르렀다고들 말하
  고 있는데, 이것은 조르주 상드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임
  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이때 애정적으로는 만족 상태에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전에 델핀느 포토츠카 부인에게 말한 바 있는 것처럼
  이성의 애정에 만족하고 있을 때는 작곡을 할 수 없는 상태
  가 되어 버렸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사랑의 환희에 넘쳐
  있을 때는 노래하지 않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는 사랑의 환희는 노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이 무
  렵 그렇게 많은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상드와의 애정
  면에서 깊은 환희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이라고도 할 수 있다.
    1840년 11월 19일에 쇼팽은 다시 델핀느에게 편지를 보냈
  다.  델핀는 이 무렵 또 남편 곁을 뛰쳐나와 파리에 와 있
  었다.
    쇼팽은 델핀느와의 재연을 몹시 바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써 보냈는데,
    상드 부인과 나와의 애정은 1년도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그
  것은 내가 말료르카 섬에서 앓고 있을 때 이미 끝났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 쓴 애정이란 육체적인 것을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분명히 나는 그녀에게 충분하지는 못했습니다.  내 병은 그녀
  의 거부의 구실에 도움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대단히
  논리적인 말로써 내 건강이 정사에 허용될 수 없다고 증명했습
  니다.
    그때 이후 상드가 내게 주는 것은 모성애에 지나지 않았습니
  다.  그녀는 헌신적으로 나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나에게 상드
  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당신은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친절을 받아들였습니다.  내게 얼마나 많은
  정다움과 보호가 필요했는지는 당신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계속해서 내가 상드의 애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거짓입니다.  노앙의 사람 누구라도 그녀와 나에 대
  한 일은 잘 알고 있습니다.  또 파리에서도 누가 그녀의 마음에
  드는 연인이었는지 잘 알고 있는 터입니다.
    억누를 수 없는 그녀의 열정은 참으로 병적인 것이며, 이해
  되고 허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녀와 서로 애정적인 면에서
  결합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며 그녀에 대해 열정
  을 가지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내가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것은 우정이며 대단히 큰
  감사입니다.  그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그녀를 사
  랑하고 있습니다.
    상드와 애정적인 결합을 하지 않은 그동안 몇 가지 사소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애정이 없는 열정이며 이야기할
  만한 것도 못 됩니다.  혹시 내가 바람둥이라는 헛소문을 듣더
  라도 믿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은 옛날에 나를 그토록 잘 이해해 주었습니다.  나는 조
  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마음을 준 것은 상드와 당신뿐이며, 당신은 상드 이상
  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 보다 이상적인 애정을 느끼고
  있고, 당신은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이해해 주기 때문입니
  다.  나는 상드에게는 나 자신의 영혼을 열지 않았습니다.  상드
  는 타국인으로서 나를 알아주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들이(델핀느와) 함께 살고 있었을 때는 다만 낡은 앨범
  속의 작품을 수정하거나 버려 두었던 작품을 출판사를 위해 준
  비하거나 하는 정도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신작을 만
  들었을 때는 당신이 오랫동안 곁에 있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나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작품을 만들고
  있는가를.  그리고 상당히 좋은 것을 만들고 있음을 보십시오.
  애정이 아닌 예술이 내 생활력을 향상시키고 있는 것이 확실합
  니다.
  쇼팽에게 있어서는 애정이나 행복은 예술의 적이 되고 있
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작품을 잘 쓰고 있다는 점을
들어 자기가 상드와 애정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
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한편 쇼팽은 바르샤바의 가족에게도 조르주 상드와의 관계
는 단순한 우정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아버
지는 때때로 쇼팽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 왔다.
    네가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기뻤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의 그 친구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
  1841년 4월 26일, 쇼팽은 몇 년 동안이나 공개석상에 오르
지 않다가 다시 프레이엘 주악당에서 공개 연주회를 열었다.
청중의 거의가 쇼팽의 친구와 숭배자였다.
  이 연주회는 관현악단이 동원되지 않고 순전한 독주가로서
의 쇼팽의 연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는 말료르카의 생활의
숨결이 담겨진 전주곡, 연습곡, 발라드(작품 38), 스케르초
(작품 40) 등이 연주되었다.
  오랜만의 연주회에 예약권은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이 연
주회에는 리스트도 참석했다.
  이 연주회가 있기 전 무렵에 리스트는 쇼팽이 부재중인 그
의 방에서 한 여인과 정사를 벌인 일이 있었다.  뒤에 이 사
실을 안 쇼팽은 절교를 선언할 만큼 크게 화를 냈었다.
  그런데 리스트는 쇼팽의 연주회에 참석하고 있다.  레규브
는 이때 쇼팽에게,
   당신들 두 분은 훌륭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요. 
라고 말했다.
  쇼팽은 이 말에 대해,
   네 음의 나라에서는 그렇겠지요. 
라고 대답했다.
  얼마간 쇼팽과 리스트의 관계가 소원했던 것이 이 무렵에
약간의 밝은 전망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쇼팽의
기분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한때는 리스트에 대해 큰 친밀감을 갖고 교제하였으나,
1840년을 전후해서부터 그들의 관계는 점차 나빠져 간 것이
다.  그 원인은 다그 부인과 상드의 시기심에 많이 기인되고
있었다.
  아버지 니콜라스의 편지를 보아도 쇼팽과 리스트가 이때
원만하지 못한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너의 현명함을 알고 있다.  평소 너는 그렇게 장담하면
  서도 리스트와 아직 절교하지 않았단 말이냐.
                                    1842년 10월 16일
  쇼팽은 리스트가 자기에게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신문에
까지 자기에게 불리한 기사를 써서 대단히 불쾌하다고 말했
다고 한다.  이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쇼
팽은 확실한 이유도 없이 자주 불안해 했고 초조한 기색을
보였으며, 의심을 잘 품었다고 한다.
  4월 26일의 연주회에 대해 리스트는 음악 신문 ≪가제트 뮤
지컬≫에 이렇게 비평을 썼다.
    프랑스에 와서 약 10년, 쇼팽은 각지에서 몰려든 피아니스트
  들 중에서 제1위 또는 제2위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툰 일은
  드물다.  그는 대중 앞에서 연주한 일이 별로 많지 않다.  그의
  훌륭한 시적 재능이 그를 대중에게 접급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마음속에서 숨쉬고 있는 가락의 보배를 자유롭게
  충일시키기 위해서 평화롭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필요로 한다.
  한밤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향기 높은 꽃받침을 펴는 꽃과
  같은 음악, 그것은 그의 언어이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언어,
  그 언어에 의해서 그는 몇 사람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감정의
  세계를 표현한다.
    그와 동국인이며 친구인 시인 마키에비치처럼 그의 수많은
  노래에 폴란드의 슬픔은 신비적인 시를 빌려 주는 것이다.  그
  리고 이 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특이한
  것을 느끼게 한다.
    연주회에서 쇼팽은 고전적인 형식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자신의 작품을 선택했다.  그는 협주곡이나 소나타, 환상곡, 변
  주곡을 연주하지 않고 전주곡, 연습곡, 녹턴, 마주르카 등을
  연주했다. 
    대중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어느 그룹을 향하여 그는 태연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비극적인 깊이가 있는 순결한 시인으로
  서 보여주었다.  그는 놀라게 하려 하거나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불타오르는 듯한 열광보다는 섬세한 공감을 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은 만족할 만하게 주어졌다.
    처음 화음부터 그와 청중 사이에는 긴밀한 교감이 이루어
  졌다.  연습곡 2곡과 발라드 1곡에 대해 앙코르가 요구되었다.
    그는 벌써 창백한 안색에 피로가 역력히 나타나고 있었다.
  피로를 더하게 할 것을 고려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그의 프
  로그램의 전곡을 하나하나 앙코르해 줄 것을 요구했을지도 모
  른다.
  또한 쇼팽의 전주곡에 대하여 리스트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쇼팽의 전주곡은 참으로 독자적인 작품이다.  제목은 전주곡
  이라고 하지만 다른 작춤에 대한 서곡처럼 연주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의 대시인의 것과 같으며, 황금의 꿈속에
  있는 혼을 조용히 흔들어 깨워 이상의 영역까지 이끌어 올리는
  시적인 전주곡인 것이다.
    그 다양성은 감탄할 만하여 거기에 존재하는 노작의 흔적은
  섬세한 검토에 의해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비약이며 불의의 습격이다.  참으로 그것
  은 현대 작품의 특징인 자유와 당당한 위용을 보이고 있다.

    노앙의 <전원 교향악>

  1841년 여름 쇼팽은 상드의 노앙 별장으로 갔다.  이때부터
쇼팽은 1845년까지 매년 여름을 노앙에서 지냈다.  이해 11월
이 되어 쇼팽은 예정대로 파리에 돌아왔다.
  1842년 2월 하순에 쇼팽은 프레이엘 교회에서 다시 콘서트
를 열었다.
  음악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쇼팽은 이 연주회에서 내림 가
장조 발라드, 내림 가장조와 바단조, 다단조의 에튀드, 네
개의 녹턴, 올림 바단조와 내림 라장조 프렐류드와 사장조
임프롬츄 등을 쳤다.  쇼팽 외에는 첼리스트 프랑숌이 첼로
솔로를 켜고, 비얄드 가르치아가 헨델의 여러 작품 중의 단
장과 데스르가 아리아 <페리스 돈체라>와 작자 불명의 리이드
<잣나무와 갈대>를 노래했다.
  1842년 여름에도 쇼팽은 상드와 함께 노앙으로 갔다.  쇼팽
은 이 무렵을 전후해서 한 번은 상드를 노앙에 드고 혼자서
파리로 간 일이 있었다.  그때 상드는 친구인 마를리앙 부인
에게 알려서 쇼팽을 돕도록 부탁했다.
    제 어린 애인 쇼팽이 갑니다.  서슴지 마시고 돌봐 주세요.
  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입니다.  호남인 하인은 바
  보 같으니까요.
    저녁 식사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습니다.  여러 인사들의 초대
  를 받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아침엔 일찍부터 레슨을 하니까 초콜렛이나 수프를
  마시는 일을 잊지 않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있을 때는 언
  제나 억지로 마시게 했는데……
    쇼팽은 현재는 매우 건강하므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먹거나
  자거나 하면 돕니다.
  상드는 아울러 방의 통풍을 당부했다.  이것은 음부라고만
알려진 약간의 여성적인 면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드와 쇼팽이 노앙에 있을 때를 앙드레 모루아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도 있다.
    어느 날 밤 노앙에서 그녀는 쇼팽과 언제나처럼 전원의 평온
  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대의 말은 어쩌면 그리 아름답소? 
  라고 쇼팽이 말하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러면 그것을 음악으로 바꾸어 표현해
  보시죠. 
  라고 상드가 답했다.
    즉시 쇼팽은 전원 교향곡을 즉흥적으로 작곡하는 것이었다.
  상드는 그의 곁에서 어깨에 정답게 손을 얹고,
     용기를 가지세요.  빌로도 같은 손가락인데! 
  라고 속삭였다.
    쇼팽의 어깨 위에 상드의 손이 없었더라면 그는 그 짧은 생
  애에서 그만큼 많은 작곡을 할 수 있었을지 알 수 없다.  아니
  쇼팽이 그때까지 살아 남았을지 알 수 없다.
  모루아는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세인들
가운데는 상드가 쇼팽의 생명을 단축시켰다고 말하는 이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상드가 쇼팽을 보살피고 도운 것은 틀
림없지만, 그들은 완전한 사랑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원인은 쇼팽의 병에도 있었지
만, 어떤 면에선 상드가 쇼팽의 병을 악화시켰을지도 모른다
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
  조르주 상드는 노앙에서 굉장히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사람을 초대하기를 좋아했다.
  한 해에 수십 명이나 되는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장기
및 단기를 불문하고 노앙의 별장에서 묵어 갔다.  포리느 비
얄드, 들라크루아, 피에르 루르 같은 사람은 단골 손님이었다.
  노앙 집에는 당구장과 극장 무대가 있어 극장에선 늘 희곡
을 상연하였다.  손님들은 완전히 자유로왔다.  손님들은 자주
앙들 강가와 이 지방으로 하이킹을 갔고 사냥, 낚시질 또는
보트놀이를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다.
  무대에서는 여러 가지 희곡이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 아
르테 형식으로 즉흥 연출되었다.  무대 좌우에는 두 대의 피
아노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가끔 리스트와 쇼팽이 이것으로
무대 음악을 탄주했다.
  상드는 이에 대해서 <노앙의 마리오네트 극장>이란 제목으
로 글을 썼다.
     모든 것은 몸짓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쇼팽의 의견이었다.
    쇼팽은 젊은 예술가들이 연기를 하거나 즐겁게 발레를 추고
  있는 동안 피아노로 즉흥 연주를 하는 것이었다.
    쇼팽은 우스꽝스런 것에서부터 진지한 것에 이르기까지, 만
  담에서 장엄한 비극에 이르기까지, 우아한 것에서 격정적인 것
  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각대로 사람들을 지도했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의상을 즉석에서 만들었다.
    쇼팽은 배우가 새 의상을 입고 무대에 나가면 놀랄 만큼 멋
  지게 새 인물에 적응되는 음악을 탄주하는 것이었다.
  1842년에 노앙 생활에 대하여 들라크루아는 재미있는 편지
를 남기고 있다.
    우리들은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이는 외네는 당구를 치고
  소풍을 하곤 한다.  그러고는 각기 자기 방에 틀어박혀 소파에
  앉아 독서를 한다.
    미풍이 일하고 있는 쇼팽의 창에서 음악을 실어 온다.  그 소
  리와 꾀꼬리의 울음과 장미 향기가 뒤섞인다.
    때로는 당구와 소풍으로 종일을 보낼 때도 있다.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발자크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더욱
  그를 기다린다.  그는 내가 여기서 무료해 하는 하모니를 떨쳐
  버리게 하는 요설가다.
    나는 내가 몹시 사랑하는 훌륭한 인간인 쇼팽과 한없이 친밀
  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내가 이때껏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진실한 예술가다.  그는 가장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소수의
  탄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집앞의 뜰에서는 농민 무용이 벌어지고 있다.  뛰어난 파리장
  이가 거기 맞추어 피리를 분다.
  여기에선 그러나 전원 취미를 맛보며 지내는 것만은 아니
었다.  쇼팽은 파리에서의 레슨 생활에서 해방되어 작곡에 몰
두할 수 있었고 상드는 집필에 열중하였다.  상드는 쇼팽의
창작 방법에 대해 정확한 묘사를 남기고 있다.
    그의 창작은 자연스럽고 경탄할 만했다.  그는 언제나 고민에
  가득 싸여 일을 시작한다.  주제의 일정한 세부를 잡는 데 그는
  초조하고 주저하기 쉬운 시도를 한없이 계속한다.  그때마다 그
  는 마음의 귀를 기울여 이것을 엿듣는다.
    대강 구도가 이루어지면 초고를 몹시 상세하게 분석한다.  그
  리고 그것을 잘 정리하지 못하면 깊은 비애에 사로잡히거나 어
  떤 회의에 빠지곤 한다.
    그는 종일 자기 방에 틀어박혀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거위
  깃털 펜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러곤 그것을 다시 집어 들어 한
  박자를 백 번이나 고쳐 쓰고 썼다가는 또 지우고, 이튿날 아침
  에 다시 괴로움과 회의에 찬 인내를 가지고 이런 일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수없는 되풀이 끝에 최초로 구상
  한 스케치를 다시 택한다.  한 번은 6주일이나 요하는 노작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상드가 옆에서 보고 자기가 느낀 것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  쇼팽은 끝없는 추고를 거듭함으로써 자신의 음악
을 완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1842년말 쇼팽과 상드는 피가르 가에서 오를리앙즈 구시가
로 이사했다.  그 부근에는 잔디 둘레를 꽃밭과 분수로 장식
한 집이 많았다.  주위는 고급 주택가로 위치가 좋아서 예술
가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5번지에는 상드의 집이, 4번지에는 상드의 친구 마를리앙
부인의 집이, 그리고 3번지에는 쇼팽의 집이 있었다.  쇼팽의
이웃에는 여류 가수 비얄드 가르치아, 피아노 교사 침멜망,
조각가 당탕 등이 살고 있었다.
  쇼팽의 집에는 고아한 가구들이 놓여진 많은 방이 있었다.
파리 상류 계습의 친구들이 보낸 수많은 선물, 로스차일드
부인과 츠알트리스키 후작 부이니의 수예품, 루이 필립이 선사
한 프레이엘 피아노, 그리고 각국 황제의 선물 등 수많은 것
들이 쇼팽의 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는 또 2천 프랑이나
주고 하인을 두었는데, 이 하인은 노앙에까지 데리고 갔다.
  1843년엔 별다른 일이 없이 노앙과 파리를 오가며 전과 같
은 생활을 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쇼팽의 유일한 외교 담당 친구 폰타나가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다.
  쇼팽은 이제 스스로 출판사와의 교섭에도 뛰어다니게 되었
는데, 다행히 친구 그시마라가 그 일을 맡아 주어서 잡사에
손대지 않고 작곡에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
  
    파탄의 긴 항로

  1844년 봄 쇼팽은 건강한 상태여서 음악회에도 찬조 출연
할 정도였다.  그런데 5월이 되어 뜻밖에도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받았다.
  효자였던 쇼팽은 아버지 가까이에서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에 크게 죄책감을 가지고 슬퍼하였다.  그는 정신적인 충격
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다.
  상드는 처음으로 쇼팽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내어 자기 이
름을 밝혔다.  누나인 루드비카에게도 편지를 보내 쇼팽의 상
태를 숨김없이 알렸다.
  상드는 그들 오누이가 재회할 것에 대비하여 상세한 주의
를 적어 보냈다.
    당신은 프레데릭과 만나면 사랑하는 동생이 많이 쇠약해져서
  변해 버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병에 대해서 너
  무 걱정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최근 6년 동안 내가 매일 보고
  있는 프레데릭은 별로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침에는 상당히 심한 기침 발작을 합니다.  겨울 동안에는 2,
  3일씩 계속되어 아주 위험한 상태가 될 때도 있습니다.  때때로
  약간의 안면신경통이 일어나 고생합니다. ―― 그러나 이것은 
  그의 보통 상태입니다.  그 밖에 가슴은 양호하며, 가냘픈 체격
  인데도 별로 나쁜 곳은 없습니다.
    지금은 깊은 고통의 감정이 뒤섞여서 약해져 있습니다만, 당
  신과 만나는 기쁨은 그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분 모두 꼭 오도록 하시고 아무쪼록 내가 동생처
  럼 당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믿어 주십시오.
  루드비카에게 보내진 상드의 편지에는 요설이 퍽 불쾌하게
넘쳐 있었다.  이때는 그녀의 애정이 많이 가시어진 시기였다
는 것을 이 편지로도 잘 알 수 있다.
  1844년 8월 쇼팽은 14년간 떨어져 있던 루드비카와 눈물을
흘리며 재회하여삳.  루드비카 부처와 쇼팽은 파리에서 2주일
을 보내고 상드와 함께 노앙으로 갔다.  그들은 노앙에서 즐
거운 시간을 보낸 다음 10월초에 이별했다.  루드비카 부처는
바르샤바로 돌아갔고 쇼팽은 파리로 왔따.  상드는 떠나간 루
드비카에게 이렇게 편지를 띄웠다.
    당신은 쇼팽에게 있어서 최상의 의사였습니다.  그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쇼팽이 인생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
  는 데 충분했습니다.
  1845년 쇼팽은 본 시에서 있었던 베토벤 기념비 제막식에
초대를 받았는데 참석하지 않았다.
  1845년 7월에 쇼팽은 노앙으로 가 있었다.  이때 노앙에선
앙들 강이 범람했다.  7월 20일자 그의 편지에는,
    나는 시골을 좋아하지 않지만 맑은 공기는 몸에 좋습니다.
라고 씌어 있다.  쇼팽은 실제로 시골에 자주 가 있었지만,
그것은 건강 때문이었다.  그가 도회지를 더 좋아한 사람이었
음을 상드의 기록에서도 잘 알 수가 있다.
    쇼팽은 늘 노앙을 그리워하면서도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했다.  그는 봄만 되면 노앙으로 가려는 생각으로 기뻐했으나
  여름이 되어 그곳에 가려고 하면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쇼팽은 노앙의 상드 집에서 자주 문학가들과 만났다.  리스
트에 의하면 노앙에서 상드와 어떤 손님과의 거동이 쇼팽을
몹시 거슬리고 마음 상하게 햇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상드는 가끔 쇼팽을 불쾌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녀의 집에는 라만네 승정 같은 열광적인 다변가와 때를 못
벗은 민족주의자, 무신론자, 혁명가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살롱에는 대예술가들과 상류 사교계의 인사
들, 정치가, 연주 팬들 등 천차만별의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방대하게 혼합되어 있었따.  뿐만 아니라 선정적인 호흡이 그
혼잡한 가운데 맴돌고 있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소극적인 쇼팽은 상드라는 불꽃이
사방팔방으로 튀는 것을 도저히 참고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상드가 기록하고 있는 쇼팽에 대한 비난은 어떤가.
    쇼팽의 음악은 때때로 청중의 영혼을 구할 길 없는 비수 속
  으로 끌어들인다.  그것은 즉흥 연주를 할 때 더욱 현져해진다.
    쇼팽은 때로 우울증과 답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갑작스레
  거울 앞으로 가서 가발과 넥타이를 벗고 마치 실의에 맥빠진
  영국 사람처럼 되어버리기도 하고 또 덮어놓고 웃기만 하는 영
  국 여자가 되는가 하면 추잡한 유태인 노신사가 되기도 한다.
    이런 여러 가지 모습은 언제나 슬프고 우스꽝스럽게도 보였
  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라도 그는 보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곤 하는데, 그는 그만큼 갖가지의 인물의 성격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기 대문이다.
    그가 만들어낼 수 있었던, 그 숭고하고 기막히게 매혹적인
  모습은 그들로 하여금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
  의 빼어난 품성, 무아, 자기 집념, 하찮은 허영, 대담한 항의, 
  독실성과 대단한 광휘에 찬 그의 대인 방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믿음직한 친구로 생각하게 했다.
  조르주 상드의 이런 기록은 약간 과장된 듯하고 조롱 섞인
말투가 숨겨져 있으나, 이와 같은 단면적인 표현을 통해 우
리는 쇼팽의 연극적인 재질의 한 모습을 역력히 느낄 수가
있다.  그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음악 외의 천부
적인 재질이었던 것이다.
  또한 쇼팽의 성격의 일면을 나타내 주는 글 중에서 그의
사후에 씌어진 베를리오즈의 회상문을 보아도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쇼팽은 자기의 연주를 꼭 듣고 싶어하는 오붓한 청중들 앞에
  서만 연주를 할 마음을 갖는다.  그럴 때 그는 사람들을 얼마나
  흥분시켰던가!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얼마나 작열하는 우울의
  몽상 속으로 끌어들였던가!
    쇼팽은 정치적인 시국 문제가 토론되고 난 뒤나 말많은 여러
  부인들의 잡담이 끝난 뒤나 사람들의 교활하고 불신스런 행위
  들에 싫증이 난 뒤인 밤 12시쯤이 되어야 비로소 생기를 회복
  하고 아름다운 두 눈으로 조용히 기도드리며, 마음의 귀를 기
  울이고 마침내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비
  애의 세계 속에 있는 주인공의 사랑을 노래하고 기사풍의 기쁨
  을 노래하며, 언제나 승리를 준비하면서 패배하고 있는 아득한
  조국 폴란드에 대한 슬픔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를 모르고 그에게 연주를 강권하는 것은 전혀 무의
  미한 짓이다.
    나는 어느 날 밤 쇼팽이 그를 초대한 집주인에게 연주를 딱
  잘라내는 듯한 말로 거절하는 것을 보았다.  그 집주인은 아직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을 때 쇼팽에게 다가가 아무쪼록 연주를
  들려주었으면 한다고 부탁의 말을 했다.  쇼팽은 연주를 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로 변명을 했다.
    그런데 주인은 거의 모독하는 듯한 태도로 연주를 거듭 부탁
  했다.  주인의 태도는 마치 그날 밤의 만찬이 연주에 대한 대가
  로서 충분하다는 듯한 것이었다.  그러자 쇼팽은 그 자리에서
  입씨름을 끝내 버렸다.  그리고 작고 쉰 목소리로,
     어험, 훌륭한 어르신네들, 나는 아직 요만큼밖에 먹지 못했
  는걸요. 
  라고 조롱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1844년 이후 아버지와 가깝던 친구 맛신스키가 죽음으로써
쇼팽은 좋지 않던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갔다.  이때의 격렬
한 감정의 흥분은 그의 병세에 몹시 나쁜 영향을 미쳤던 것
이다.  그는 정신착란적인 괴로움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상
드는 이 무렵의 그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가톨릭적인 독단과 죽음에 대한 심한 공포는 더욱 증대
  되었다.  그는 슬라브적인 시문의 모든 미신적인 환상을 자기의
  죽음의 관념과 결부시켰다.  그는 폴란드인으로서 조국의 옛이
  야기 속에 속박되어 살아왔다.
    그의 몸 안에는 환상이 달리고 있었다.
    아버지와 친구가 천상에서 웃음짓는 것을 보는 대신 자신의
  병상 옆에서 아버지와 친구의 해골이 얼음장 같은 차가운 손으
  로 자기를 붙들려고 한다고 하며 그것을 뿌리치려 했다.  이런
  모습은 마치 지옥도를 연상케 했다.
  상드의 이런 표현은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폴란
드의 피가 섞이지 않은 여인의 눈에는 쇼팽의 향수 따위는
조금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잔혹한 여인과의 결렬
이 이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상드는 몸이 쇠약하여 신경이 날카로와진 쇼팽에 대해서
이제는 따뜻한 애정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노여움으로 대해
갔다.  더구나 이 무렵 그들을 결렬시키는 사소한 사건이 있
었다.  그것은 쇼팽과 성숙해 있는 상드의 아들 모리스와의
다툼이었다.
  1846년 여름 쇼팽은 노앙에 가 있었다.
  상드의 아들 모리스는 커감에 따라 왠지 쇼팽을 싫어하고
있었다.  쇼팽과 상드의 애들 사이에는 일꾼들을 둘러싸고 미
묘한 갈등이 있었다.  즉 쇼팽의 방에만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잔심부름을 하던 폴란드인이 아이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좇기고 말았던 것이다.  이 일은 쇼팽을 기분 나쁘
게 했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상드가 자신을 무시하고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한다고 생각되었다.
  1846년 11월 쇼팽은 노앙을 떠나서 혼자 파리로 돌아왔다.
상드와 아이들은 베리 지방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 이후 쇼
팽은 노앙으로 다시는 가지 않았다.
  1846년 10월 11일자 편지를 보면 쇼팽의 그 무렵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저는 끊임없이 자신의 일에 대해 만족하기도 하고 불만을 가
  지기도 합니다.  저는 악기를 방구석에 내팽개치기도 하고 다시
  그것을 집어 들기도 합니다.
    한 개의 작품을 작곡하다가도 또 다른 작품을 쓰면 그것은
  그 이상 쓰지 않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곧 반성을
  하고 처음 작품을 좋아하게 됩니다.  시간은 최고의 심판자이고
  인내는 최고의 선생입니다.
  이 글을 보면 쇼팽은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불안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인내로써 견디려고 한 흔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1846년 6월 상드는 ≪프랑스 통보≫에 <푸크레치아 프로리아
니>라는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하이네는 그 소설을 보
고,
    그녀는 마치 신과도 같은 기교로써 써 나가는 소설 속에서
  나의 친구 쇼팽을 난폭한 방법으로 비난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상드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해
철저히 변명하고 자기를 여배우의 풍모처럼 묘사하고 있다.
  <루크레치아 프로리아니>라는 소설은 폴란드 이름으로 카
롤이라고 하는 로스왈드 공작과 루크레치아 프로리아니라고
하는 여배우의 로맨스로 엮어져 있다.
  카롤의 성격은 쇼팽과 아주 똑같이 닮았고 루크레치아는
상드와 비슷하다.  이탈리아의 대여배 루크레치아는 어린애
들을 기르기 위해 시골에 틀어박혀 살면서 희곡을 써 성공하
며 수없는 연애를 한다.
  루크레치아는 결코 창녀는 아니고, 자기를 연인에게 바칠
뿐 결코 빼앗지는 않는다.  그녀는 영원한 사랑을 꾀하지 않
고 순간적인 정열에 일생을 바칠 생각을 갖고 있다.  루크레
치아는 마침내 야위고 천사와 같은 미모의 청년 공작 카롤과
만나게 된다.
  카롤은 상상 속에서 만든 여인의 환상을 사랑하고 있다.
그는 많은 애인을 가진 미망인 루크레치아보다 6세 연하이
다.  그는 자기 생애에 단 한 번의 진실한 정열을 루크레치아
에게 바친다.
  이리하여 두 사람으리 사랑은 틀에 작힌 것처럼 진행되다.
그런데 카롤은 에고이스트적인 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루
크레치아에게 질투를 느끼며 속좁은 사나이로 변해간다.  소
설 속의 구절에서 상드는 사실과 같은 묘사로 이렇게 쓰고
있다.
    카롤은 어린애들에 대해서까지 질투를 하였다.  여기서 나는
  특히 어린애들까지라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카롤에겐 프로리아니 같은 어린애만이 실제로 연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롤은 자기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상드
는 또 카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 무렵 그는 참으로 참을 수 없는 사나이가 되었다.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생활은 자기의 원칙대로 하고 따르
  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는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허위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비꼬는 사람이 되고 잘난 체 으스대며 모든 것을 혐오
  하였다.  그는 부드럽게 상대를 물어뜯으며 마음속 깊이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만약 반대하고 희롱할 용기가 없으면 침묵을
  지키며 경멸하거나 비통하게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끊임없는 싸움 끝에 루크레치아는 비탄에 견딜
수 없어 갑자기 죽어버리는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대강 위와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밤 상드
는 들라크루아가 방문했을 때 이 소설의 일절을 낭독했다.
그때의 일을 들라크루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낭독하는 동안 괴로웠다.  사형 집행인과 그 희
  생자를 보는 것 같은 그들 두 사람에 대해 나는 놀랐다.  상드
  부인은 아주 침착하게 보였고 쇼팽은 이야기를 계속 칭찬했다.
    밤중이 되어서 우리들은 각기 자기 방으로 물러갔다.  나는
  쇼팽이 나와 함께 있고 싶어하였으므로 그의 생각을 탐지해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는 나의 궁금증을 알지 못했으며, 그 소설을 열심히 칭찬
  할 뿐이었다.
  이는 쇼팽의 냉담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글이라 할 수 있
다.  이런 태도는 주인공 카롤의 태도와 아주 똑같은 것이다.
  상드는 루크레치아를 통해 카롤을 이렇게 묘사했다.
    카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추측조차 하지 못했다.  분노
  가 쌓이면 쌓일수록 카롤의 태도는 냉정하게 되어간다.  타인은
  그의 분노의 정도를 얼음과 같이 차가운 정중함의 정도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카롤에겐 이 순간이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때
  인 것이다.
  이것은 상드의 마음에 비친 쇼팽의 모습인 것이다.
  상드는 실제로도 10년에 가까운 쇼팽과의 교제에 대해 이
렇게 말하고 있다.
    그동안의 생활 중에 쇼팽은 내적인 생활을 뚜렷이 말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고뇌를 입밖에 내어 표현한 적이 한 번
  도 없고, 오직 신비적이고 불가해한 작품을 통해서만 나타내고
  있었다.
    그 사람만큼 변하기 쉬운 기분파도 없고 그만큼 음울하고 소
  박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도 없으며, 또 그만큼 만족을 주기 어
  려운 신경도 없었다.
라고 상드는 말했다.
  상드는 마침내 위와 같은 말을 해야 할 만큼 쇼팽을 싫어
하게 되었고, 그와의 지속적인 관계는 확실히 그녀에겐 괴로
운 일일 뿐이었다.
  그녀는 아무리 사랑의 팔로 포옹을 해도 내심을 열지 않는
쇼팽에 대해 분노하였고, 그것을 비난하기 위해서 그런 소설
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심정을 쇼팽에게 알
리려고 원고를 그의 책상에 올려놓기도 했지만, 쇼팽은 결코
성내지 않고 냉담하게 자신을 닫아버렸을 뿐이다.  오히려 소
설 속의 카롤처럼 더욱 냉정하고 정중하게 자신을 변하게 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쇼팽은 모리스와의 싸움에서 아들 편을 드
는 상드에게, 
   당신은 이미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 
라고 결정적인 말을 하고 말았다.  상드는,
   무슨 모독을! 
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절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겐 더욱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일이 결정적으로 그들
의 파국의 원인이 되어 아주 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쇼팽이 상드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난받을
사나이였으며 상드를 사랑하지 않고 있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상드는 우울하고 내성적인 쇼팽에 대해 조
금씩 불만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원인은 쇼팽이 이 무
렵 더욱 나빠진 건강 상태(아버지 사망 이후) 때문에 말이
적어지고 신경이 예민해졌던 데 있었던 것이다.
  오랜 병 간홍 시달린 상드는 이제 그에 대한 사랑이 완
전히 식어 있었으므로 모든 쇼팽의 외면적인 성격이 싫어진
것이고, 쇼팽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 무렵의 쇼팽이 말이 적어지고 침묵 상
태를 많이 나타내고 있었던 것에 상드는 못 견뎌 한 것이다.
  쇼팽은 쇼팽대로 상드가 잔혹하게 대해 가고 있는 것에 불
만이었고 고통스러워했으며, 그래서 더욱더 말을 하지 않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침묵 속의 최후

  1845년 이후 더욱 약해진 쇼팽이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하
고 있을 때 상드는 쇼팽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점차로
냉정해져 가는 상드를 쇼팽은 비통에 싸여 괴로워하면서 바
라보게 된 것이다.  쇼팽은 아직도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 여
인에 대해 아무말도 못 하고 괴로워하기만 한 것이다.  쇼팽
은 상드처럼 가혹한 말로 상대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으며,
다만 극도의 냉담한 태도로 상대방을 당혹하고 답답하게 했
던 것 같다.
  상드와 쇼팽을 결정적으로 결렬시킨 소랑주의 결혼 사건은
이러하다.  소랑주는 처음에 어머니가 선택한 어느 귀족과 약
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병 출신의 젊은 조각가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순식간에 조각가 클레징거에게 마음
을 빼앗겨 좋아하게 되었다.
  상드는 보헤미안 같은 예술적인 정열로 뽐내는 그 청년을
몹시 싫어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랑
주는 클레징거와 결혼을 약속해 버렸다.  상드는 마침내 딸과
클레징거를 쫓아내 버렸다.
  그들은 노앙 근처의 라 샤틀에 가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
내 확실한 약속을 요구하고 만약 끝까지 반대하면 소랑주를
데리고 떠나버리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상드는 이 요구를
거절했다.  상드는 딸이 괴로워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녀
는 만약 클레징거를 버린다면 노앙의 집을 약속대로 주겠다
고 말했다.
  그리고 쇼팽에게 소랑주를 돕지 말라는 편지를 내고 만약
약속을 어기고 그들을 돌보기만 하면 쇼팽과의 관계를 완전
히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도 쇼팽은 자기가 좋아
하는 소랑주의 편을 들었다.
  소랑주는 쇼팽에게 신뢰로 가득 찬 편지를 보냈고, 쇼팽은
그녀를 도와 5백 프랑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힘을 잃고
쓰러질 듯이 보이는 클레징거를 위해 이미기(구약 성서의 계
열편)를 종종 읽어 주곤 했다.  클레징거와 쇼팽과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클레징거가 존경과 온정에 찬 편지를 쇼팽에게 
보낸 것이 남아 있다.
  상드는 마침내 결별의 편지를 보냄으로써 쇼팽과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어제 험악한 날씨에 신병으로 몸이 무거운데도 불구하고 나
  는 당신의 상태를 알기 위하여 당신의 마차도 찾아놓고 파리로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당신의 침묵으로 당신의 건강이 나쁜 것은 아닌가 하고 매우
  마음이 아팠습니다.  당신의 답장은 아주 침착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좋습니다.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본능을 당신
  의 양심의 소리라고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나는 잘 알고 있
  습니다.
    내 딸의 일은……
    그애는 어머니의 사랑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애는 무서운 이야기로 집안을 상처 냅니다.  그런 이야기를
  당신은 아주 지뻐하며 들었을 것이고 믿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성질의 아이와 다툴 생각은 없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내 배를 아프게 하고 내 젖으로 기른 아이를 적으로부터 지
  킨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적의 손에 당신까지 넘어가는 것
  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애를 소중하게 여겨 주십시오.  당신은 몸을 바쳐 그애를
  사랑한다고 했으니까요.  당신을 탓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내가
  어머니로서 모독당한 것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 주십
  시오.
    기만당하고 희생되는 것은 이제 싫습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
  할 것이고 이제부터는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것은 당신의 고백에 성의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놀라기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좀더 마음이 편하게 되고 자유롭게 된다면 나는
  당신의 불가사의한 변모를 괴롭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내 친구, 신병이 빨리 쾌유되시기를, 지금은 그것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9년간의 우리들의 우정과 불가사의한 종말을 하느님
  께 감사드립니다.  가끔 소식 전해 주십시오.  그 밖의 것은 모
  두 쓸데없습니다.
  상드의 마지막 편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영원히 대화를
끊고 침묵했다.
  1847년 12월 크리스마스 이브에 쇼팽은 누이 루드비카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기와 상드가 헤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상드와 소랑주가 적대시하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의 딸과 제가 성가셔서 우리 둘을 모두 처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딸과는 편지를 주고받을 것이
  고, 그녀의 모성은 얼마 후면 풀어질 것이며, 그녀의 직성도
  마침내 뿌리 뽑히게 될 것입니다.
    단지 자기 딸과 결혼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미워하는 사위,
  그 사위를 편들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
  며 저를 원수로 부를 것입니다.
    그녀는 일종의 특수한 존재입니다.  어떤 광기에 찬 이념이
  그녀를 사로잡고, 그녀는 그것으로 자신의 생활을 파괴하고 딸
  의 생존마저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기를 믿고, 자기에게 예
  의를 잃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어떤 결점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양심 때문에 아무래도 그녀에 대해서 참을
  수 없게 됩니다.
    그녀가 이제 제게 어떤 말도 하지 않게 된 것은 제가 양심대
  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이번 겨울(1847년)에 파리로
  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며, 자기 딸에게 아무말이 없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8년간에 걸친 그녀의 인생의 어려운 시기, 즉 딸과 아들을
  키운 그 시기에 저는 여러 가지로 고민을 참으면서 그녀를 도
  와 준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신이 괴로움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후회하지 않
  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딸, 많은 폭풍우로부터 지켜져서 소중
  하게 길러진 가냘픈 식물이 어머니늬 손에 꺾여졌다는 것은 탓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경솔과 부주의는 20대 여인이
  라면 용서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40대의 여자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현명치 못한 일입니다.
    만일 훗일에 가서 상드 부인이 이 일을 돌이켜 생각할 때가
  있으면 마담 S라도 저에 대한 좋은 회상만은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그녀는 모성만을 앞세운 기묘한 발작으로 정당화하여
  좋은 어머니로서의 역을 다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저 이상에 찬 환상적인 그녀의 두뇌로써는 비탈
  길을 미그러지기가 무섭게 빠져드는 구할 수 없는 열병입니다.
  이 편지로서 쇼팽의 전심은 이제 확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쇼팽은 아직도 상드를 완전히 떠나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그
녀를 좋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병으로 앓는 쇼팽을 상드 혼자만이 보호
하고 도운 것으로 알아 왔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쇼팽이
이혼한 상드를 도와 그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아 주었고 경제
적인 면에서도 많은 작곡료와 레슨비로써 가정을 꾸려갔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
처럼 상드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쇼팽이 살아간 것은 아니었
다.  오히려 쇼팽이 많은 면에서 당드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
이 사실이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쇼팽은 상드의 강렬한 성격
에 안정감을 주었던 반면에 그녀의 잔혹한 성격에 의해 예민
하고 연약한 쇼팽은 신경이 많이 손상되었던 것도 사실인 것
이다.  그런데 마침내 그녀 쪽에서 냉혹하고도 차디찬 결별의
선언을 한 것이다.
  그렇게 긴 세월을 함께 살고 나서 냉정하게 끊을 수 있다
는 것은 상드 같은 성격으로나 가능한 일이지 쇼팽 같은 연
약한 성격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1848년 2월 10일 쇼팽은 연주회를 며칠 앞두고 루드비카에
게 편지를 썼다.
    저는 이번 일(결렬)로 아직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무엇을 시작했는가, 무엇에 열중하고 있는가
  를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무엇인가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
  요?  아무것도 쓰지 않는 편이 나을까요.
    우리들(상드와 저)은 싸우거나 소동을 일으키거나 하지도 않
  고 이렇게 오랫동안 별거하고 있습니다.
  상드의 한 통의 편지로 결별을 하고 말았던 상드와 쇼팽은
그 이후 서로  침묵했다.
  그들이 다시 얼굴을 마주한 것은 1848년 3월 벨리니 부인
댁에서였는데 그때도 그들은 별다른 대화 없이 차갑게 헤어
졌을 뿐이다.
  상드는 그때 일을 이렇게 적었다.
    그 사람과 1848년 3월에 잠깐 만났습니다.  떨며 얼어 붙은
  것과 같은 그 사람과 악수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
  지만 그는 달아나 버렸습니다.  나는 이미 사랑하지 않고 있다
  고 말해 주려 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괴로워할 것을 생
  각해서 그만두었습니다.  모든 것을 신의 섭리와 미래에 맡겼습
  니다.  이제 그 사람과 두 번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냉담한 상드의 글이다.
  이때 그들이 잠깐 나눈 얘기는 소랑주가 아이을 낳았다는
것과 상드가 가장 궁금해 했던 한마디였다.
   그 후 건강은? 
   좋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만
나지 않았고 대화하지 않았다.  쇼팽은 성급히 문지기에게 출
구를 묻고는 총총히 상드의 곁을 떠나 버렸던 것이다.
  1847년은 쇼팽에게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의 시기였고,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무기력한 1년이었다.
  1847년과 1848년 사이에 쇼팽은 종종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1847년 5월에는 드 크로보느 부인의 야회에서 연주한 일이
있다.  그때 쇼팽은 그의 여제자 카뮈 오마라 양에게 제2피아
노를 맡아 자신의 <마단조 협주곡>을 치도록 했다.

    고통 속에서 요정은 약속을 지켰다

  1848년 2월 16일에 쇼팽은 파리에서의 최후의 콘서트를 가
졌다.
  2월 11일에 루드비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연주회에 대한
경위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
    어느 날 아침 친구들이 찾아와서 연주회를 한 번 하라고 말하
  더군요.  그들은 저에게 가만히 앉아서 연주를 하는 것 외엔 아
  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1주일 전부터 입장권은 모두 팔렸습니다.  전석이 모두 20프
  랑입니다.  문제는 연주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따름입니다.
  저는 전에 없이 하수가 된 느낌입니다.
    저는 프랑숌과 아라르드와 함께 모차르트 3중주곡을 한 곡
  연주합니다.  프레이엘은 저를 격려하기 위해 계단을 꽃으로 장
  식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집에 있는 듯한 기분으로 연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연주하게 될 것입니다.
    황제, 황후, 오를레앙 대공, 몽팡쉐 대공은 슬픔 속에 있어
  서 나올 수 없는데도 각각 좌석을 10개씩이나 예약했습니다.
  쇼팽은 심한 기침의 발작과 정신적 타격 속에서 연주회에
임한다는 것이 몹시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없어했고, 친구들은 그를 격려하여  앉아서 연주 하기
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그를 허탈로부터 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마침내 연주회날이 되자 6년간이나 대중 앞에 서지 않았던
쇼팽을 맞이하여 회장은 들끓었다.  회장에는 최상의 청중이
넘치고 있었다.
  연주회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아라르드, 첼리스트 프랑숌,
여류 가수 앙토니아 모리나 드 몽디, 가수 로저가 협연했다.
  첫 곡목은 모차르트의 3중주곡, 이어서 쇼팽의 독주로 녹
턴, 바르카롤라, 베르쉐즈, 에튀드, 프렐류드, 마주르카 등
이 연주되었다.  제 2부에 들어가서 쇼팽의 신작 첼로 소나타
(1악장 없음)가 프랑숌과 공동으로 연주되었고, 가곡들이 불려
진 다음 마지막으로 쇼팽의 왈츠 내림 라장조(작품 64의 1)가
연주되엇다.  왈츠 연주 때는 청중들의 갈채가 절정에 달하여
앙코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연주가 끝나고 휴게실로 돌아온 쇼팽은 숨이 끊어질 정도
로 지쳐 있었다.
  신문에서는 대대적인 비평 기사를 실었다.
    요정은 약속을 지켰다.  대단한 성공, 대단한 열연으로 지켜
  진 것이다.
    이 지상에서는 비유할 데 없는 그의 연주의 신비성을 말한다
  는 것은 그가 받은 환영이나 황홀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이런 열광적인 찬사와 6천 프랑이나 되는 경제적인 도움이
주어졌기는 하지만 쇼팽의 육체적·정신적인 피로는 대단히
컸다.
  제2회 연주회를 3월 10일에 열기로 결정하고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는데, 2월 22일에 파리에서 2월 혁명이 발발하여
루이 필립 왕의 정권이 무너졌다.  2월 24일엔 신정부가 수립
되었고 시내에는 여전히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물론 쇼팽
의 연주회는 중지되었다.  그의 파트롱 중의 일부로 혁명을
피해 영국으로 간 사람이 있었고, 대부분의 친구들은 혁명에
열중했다.
  상드는 혁명가 중에서도 좌익에 속하여 자신을 공산주의자
라고 하며,  복음은 공산주의의 참 법전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파리의 혁명은 결코 행복한 것만을 가져다 주진 않았
다.  정부는 혼란에 빠지고 혁신파는 민중의 지지를 잃고 있
었다.
  쇼팽은 생활을 위해 부득이하게 영국행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쇼팽은 허수아비와 같은 생활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이제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속에서
불안과 고독을 뼈저리게 느꼈다.
  모든 것은 이제 절망 상태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아아, 이제는 절망이다! 
  쇼팽은 피아노 앞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그러던 중 영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쇼팽
의 여제자 제인 스털링이 그를 초청했다.  그는 될 수만 있으
면 이번 영국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고 연주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제인 스털링은 당시 44세로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치는 미
인이었다.  그녀는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상드와 이
별한 쇼팽에 대해 그녀는 제자로서의 숭배 이상의 애정을 가
지고 있었다.

    영국의 안개 속에서 고갈된 악상

  1848년 4월 20일 쇼팽은 스털링 자매의 마중을 받으며 런
던에 도착했다.
  이 무렵 런던에는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많은 예술가들이
넘치고 있었다.  그들은 혁명을 피해 런던으로 모여든 것이었
다.  그 중에는 쇼팽의 친구들도 많이 있었다.
  베를리오즈, 칼크브렌너, 탈베르크 등도 런던으로 와서 연
주회를 갖고 있었다.  비얄드 가르치아를 비롯한 성악가들도
몰려와서 훌륭한 오페라로 경쟁하고 있었다.
  쇼팽은 필하모니로부터 관현악단과의 협연을 요청받았는데
용감히 거절해 버렸다.
    여기에서는 모차르트나 베토벤, 멘델스존의 곡을 택하지 않
  으면 안 됩니다.  제 협주곡을 연주하게 해준다고 보증하고 있
  지만, 저는 기권하고 싶습니다.
    연주는 잘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현악단은 로스 비프
  나 자라 수프 같은 것입니다.  영양분은 충분하고 단단하지만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시간은 돈이다 라는 생
  각으로 꼭 한 번밖에 연습하지 않습니다.  그 연습이 바로 공연
  입니다.
  쇼팽은 공개 연주는 거절하였지만 살롱 연주는 거절할 수
가 없었다.
  1848년 5월 15일에는 서덜런 공작 저택에서 연주를 하였
다.  이때 연주회에는 빅토리아 여왕, 알버트 전하, 프로이센
황태자, 웰링턴 공작 등이 참석했고 80여 명의 인사가 자리
를 메우고 있었다.
    여왕은 다정한 분이었다.  내게 두 번 말을 걸어 주셨다.  알
  버트 전하는 피아노 가까이 오셨다.  사람들은 이런 일은 드문
  일이라고 말해 주었다.
  쇼팽은 필하모니로부터 재차 초청을 받았으나 다시 거절했
다.  그는 피로에 지쳐 있었다.  매일 밤 늦도록까지 사교 모
임에 참석했고, 게다가 런던의 날씨는 음산했다.  이런 일들
은 그의 건강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돈이 궁하
여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쇼팽의 편지는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만약 나에게 객혈하지 않는 며칠인가가 주어진다면, 만약 내
  가 좀더 젊었다면, 그리고 만약 도망치고 싶은 교제의 의무에
  지쳐 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다시 한 번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라고 안타깝게 외쳤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친절한 부인들(스털링자매)은 그녀의 친척들을 
  모두 방문해 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저는 지금 살아 숨쉬는 
  것초자 힘겨운 상태입니다.
    폴란드의 20년, 파리의 17년 동안에도 그랬지만, 런던에서
  마음 편하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는 않습니다.
  7월이 되자 사교계의 시즌도 끝나갔다.  그는 이 무렵의 사
정을 친구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스코틀랜드의 숙녀들(스털링자매)은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
  지만 때로 나를 견디기 어려울 만큼 지루하게 한다네.  내 건강
  은 하루하루 변하고 있어.
    아침에 기침을 하면 기침 속에 내 혼까지 토해 버리지 않을
  까 하고 생각되는 때도 있어.  내 혼은 참 슬프다네.  나는 마음
  을 안정하려고 노력하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위하여 혼자
  있지 않으려고 해.  여기서 오래 앓아 누워 있으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주머니도 두둑하지 않으니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좋
  을지 모르겠어.  만약 이 시즌이 6개월만 게속된다면 좀 사정이
  좋아질 텐데……
  그는 사교계의 생활로 피로하였지만 외로움은 면할 수 있
었다.  바이런 부인(시인 바이런의 미망인), 칼 라일, 디킨즈 등과의 
교제는 그에게 즐거운 일이었다.  바이런 부인, 제니 린드 같은
여인들은 아주 매력적인 여성들이었는데도 그는 아직까지 상
드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상드의 대신
으로 생각하려 하지는 않았다.
  1848년 8월 쇼팽은 런던에서 스코틀랜드로 갔다.  스털링
부인의 백부가 되는 토피켄 경이 초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토피켄 경의 저택은 에든버러 근교의 영지에 있는 코르다 하
우스였다.  이 저택은 역사가 있는 아름다운 고성이었다. 
성안의 이곳저곳에는 문이 있었고 잔디가 깔린 큰 정원
이 있었다.
  한 편지에 쇼팽은 스털링 성(코르다하우스)에 체재하는 동안의
일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창밖에는 비할 데 없는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다네.  여기는 자네도 알고 있듯이 로버트 프
  로스트에게 생기를 던져주는 산과 바다와 아름다운 공원이 있
  어.  그 아름다운 조망이 지금 내 눈앞에 전개되어 있는 거야.
  태양이 안개에 가린 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이 성의 주인은 두 스털링 부인의 백부님이시고, 그 가문의
  우두머리 되는 분이라네.  나는 런던에서 그분과 알게 되었어.
  그는 부유한 독신자이며 화가야.
    그는 스페인 거장들의 작품이 소장된 이름난 화랑을 갖고 있
  고, 현재는 현대 스페인 회화에 관한 매우 흥미있는 책을 편찬
  하고 있다네.
    그는 또한 대여행가요 뛰어난 지식이라네.  스코틀랜드를
  찾아오는 모든 저명한 영국 인사는 그를 방문하는 것이 보통으
  로 되어 있지.  그는 언제나 집을 개방하여 놓고 있으므로 하루
  평균 30명이 여기서 점심을 먹는다네.  요즘 여기서는 영국의
  많은 상류 사회 인사들을 볼 수 있어.  여왕 폐하가 스코틀랜드
  에 와 있기 때문에 대공, 백작, 경들을 전보다 더 많이 볼 수
  가 있지.
  쇼팽은 오랜만에 평안하고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
만 이곳 역시 조용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는 노귀족이 낮
게 노래 부르는 스코틀랜드 민요에 반주를 해주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악상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가슴 아파하는 내용의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나는 여기에서 흡사 콘트라베이스에서의 궤도에서 벗어난 바
  이올린 줄과 같아.  똑바른 악상 하나 떠오르지 않아.  나는 가
  면 무도회에 나온 당나귀와 같아.
    내 방에는 브로드우트의 피아노가 있고 살롱에는 프레이엘의
  피아노가 있지.  종이나 펜도 멀쩡하게 여기 있어.
  8월 28일에 쇼팽은 맨체스터에서 연주했다.  쇼팽은 이 연
주로 60파운드의 사례를 받았다.  이 연주회에서는 여류 가수
시그노라 알보니, 시그노라 콜바니, 시그노라 사르비 등과
협연하였다.
  맨체스터에서 쇼팽은 사리스 스와브 부처의 초대를 받은
바 있다.
  9월 27일에는 글라스고우에서 연주했다.  이곳에서 연주를
마친 다음 쇼팽은 알렉산더 츠알트리스키 후작의 초대를 받
아 그의 영지인 존스턴 성으로 갔다.  이때 일을 그는,
    나는 이 경에게서 저 경에게로, 이 대공에게서 저 대공
  에게 끌려다녔네.  가는 곳마다 나는 친절에 가득 찬 접대를
  받았어.  도한 굉장히 훌륭한 피아노와 아름다운 그림과 양서가
  꽂힌 서가를 보았다네.  그리고 나는 별로 흥미가 없는 사냥에
  서 말과 개를 보았고 끝없는 만찬회의 주서에도 참석했다네.
라고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알리고 있다.
  10월 4일에는 에든버러에서 자작만 연주했다.  이에 대해서
쇼팽은 고향 집에 장문의 편지를 내어 자신의 생활을 알리고
있다.
    10월 상순에 에든버러에서 연주해 달라는 청을 받았습니다.
  얼마만큼의 수입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건강이 허용한다면 기꺼
  이 할 것입니다.  이번 겨울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르기 때문
  에……
    기후가 나쁜네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제가 이 겨울을 런던에
  서 지내도록 바라고 있습니다.
    런던이 그렇게 음울하지 않고 사람들이 답답하지 않다면 그
  리고 안개나 매연의 냄새가 없다면 저는 영어를 배웠을 것입니
  다.  영국인은 프랑스인과 달라서 무엇이든 금전과 관련시켜 생
  각합니다.
    여기 사람들은 친절하기는 하나 융통성이 없습니다.  마치 기
  계처럼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제가 좀더 젊었다면 저는 체념하
  고 기계가 되어 여기에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젠 늦었습니다.
  이 편지는 아직 초가을에 씌어진 것인데 겨울 걱정을 하고
있다.  그는 그 겨울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크게
불안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좋지 못한 건강으로 영국인을 대상으로하여 음악을
가지고 생활을 꾸려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
고 있었던 것이다.
  에든버러에서 스털링의 백부 댁에 머물러 있던 무렵 그는
미국에 이주해 있던 폰타나가 런던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오랜만에 폰타나에게 편지를 썼다.
    만약 내가 좀더 건강하면 내일이라도 런던으로 가서 자네를
  만나 포옹할 수 있을 텐데.  아마도 그리 빨리는 만나질 것 같
  지 않아.
    지금 나는 우울한 트레몰로를 연주하는 쳄발로 같아.  그래,
  나는 2개의 낡은 쳄발로야.  자네는 이러한 친구를 싫어할 텐
  가.  그러나 아름다움과 품위는 잃지 않고 있다네.  건반은 건재
  한데 줄이 끊어지고 헴머가 떨어져 있어.
  쇼팽은 스코틀랜드에 머물러 있을 무렵 하인의 부축을 받
아 어린애처럼 침실로 인도되어 가기도 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을 정도로 쇠약해 있었다.  기침, 천식, 심한 두
통, 불면이 그를 괴롭혔다.
  레슨을 하기가 곤란했던 쇼팽은 작곡과 연주회를 하여 생
활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작곡은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고, 연주회만을 여러 곳에서 열어 겨우 돈을 벌 수가 있었
다.  하지만 이때의 연주는 그의 상태에선 참으로 무모한 것
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일과도 같았다.
  스코틀랜드의 가을은 몹시 추웠다.  쇼팽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10월말이 되어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은 쇼팽과 스털링이 결혼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쇼팽은 런던에서 그시마라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서
이 일을 설명했다.
    스코틀랜드 부인들은 친절하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지루하게 해.  그들은 내게 매일 편지하고 있으나 난 답장이 한
  번도 내지 않았어.  그들은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
  녔지.  그래서 사람들에게 나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
  게 했을 거야.
    하지만 결혼하려면 육체적 흡인력이 필요해.  그리고 미혼인
  그 한 사람은 나와 너무도 비슷하다네.  어떻게 내가 나 자신에
  게 입맞춤할 수 있겠는가.
    우정은 대단히 고맙지만 그 이상은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는
  그 일을 분명히 말해 주었다네.  만약 내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랑한다 하더라도 결혼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쇼팽은 영국 여성들의 음악에 대한 몰이해에 크게
실망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찬사를 받았으나, 그 자신은 그
들에게나 그 나라에 대해서 공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이를테면,
   당신의 또 다른 한숨을 들려주세요. 
   나는 당신의 음악이 좋아요. 
라고 피상적인 칭찬만을 늘어놓았다.  또는 쇼팽이 자작곡을
연주해 들려주면 한결같이,
   물과 같이 부드럽습니다. 
라는 감탄사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는 또 영국에서 악상의 고갈을 심하게 느꼈다.  그시마라
에게 보낸 편지에도,
    내 예술은 어디로 도망쳐 버린 것일까.  내 가슴은 어디에 다
  소모되어 버린 것일까.  폴란드에서 부르던 노래가 어떤 것이었
  는지조차 생각해 낼 수 없을 정도야.  세상은 나를 목조로 만들
  어 버린 것 같아.  나는 모든 것을 망각했고 힘을 잃어 버렸어.
  조금 일어섰다가도 전보다 더욱 낮게 쓰러지고 말아.
    나는 풀이나 나무처럼 멍청하게 하루해를 보내고 있다네.  나
  는 이제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야.
    나는 아직 런던의 공기에 익숙해지지 못했다네.
라고 쓰고 있다.
  또한 그는 마지막으로 비꼬는 말투의 일언을 적어 넣었다.
    나는 내가 신혼의 방보다는 관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야.
  런던에서 쇼팽은 의사의 질료를 받았다.  그리고 좀 건강을
회복한 뒤 무리인 줄 알면서도 폴란드 피난민을 위한 자선
음악회에 출연했다.
  이 때문에 신병을 망쳐버릴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조
국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11월 16일에 있었던 이 연주회는 쇼팽 생애의 최후
의 연주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예술적으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회후의 연주를 조국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에겐 큰 보람이며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사람들은 거의 그를 이해하지 못
했다.
  이 음악회에서 돌아온 쇼팽은 신경통이 병발했다.
  이때를 전후해서 그시마라에게 보내진 편지에는 조르주 상
드에 대해 언급된 구절이 있다.  극도의 괴로운 상태에 있었
던 쇼팽은 상드를 저주할 만큼 그녀에 대한 기억으로 몸부림
쳤던 것이다.
    나는 이전에 어떠한 사람도 저주한 일이 없다네.  그런데 지
  금 나는 나의 괴로움을 참을 수 없어 루크레치아(상드)를 저주
  하고 있어.  나는 그만큼 인생에 싫증나고 괴로워 견딜 수가 없
  다네.
    그녀도 되로워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녀의 괴로움은 그녀
  자신의 악의 속에 있으므로 시간이 갈수록 한층 더할 거야.
                                    1848년 11월 17일
  그시마라는 그동안의 상드의 상황을 다음의 구절에 자세히
적어 보냈다.
    마담 S는 노앙에 가서 농민들의 심한 대접을 받았다네.  그녀
  는 온갖 비천한 일까지 했던 거야.  그녀는 그 때문에 토루로
  도망쳐야 했지.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반역의 기치를 보이며
  따가운 선언을 써 보냈어.
  쇼팽은 마지막으로 런던을 떠나기 직전에 그시마라에게 이
렇게 적어 보냈다.
    하루 더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미치거나 죽고 말 거야.
  그리고 파리에 방을 정해 줄 것을 부탁했다.

    다가온 사신의 발소리

  1848년 11월 24일 쇼팽은 파리로 돌아왔다.
  처음에 파리로 와서는 오를리앙 가 9번지에 집을 얻어 들
었다.  그런데 그가 파리에 와 보니 그에게 각별히 마음을 써
주던 모리앙 박사가 죽고 없었다.  그 의사만이 쇼팽의 치료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약 2년 전에도 쇼팽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의사는 열성으
로 그를 살려 냈었다.  쇼팽은 더없이 슬펐다.  그 의사는 과
학적이면서도 정신적인 힘으로 쇼팽을 이끌어주던 자비스런
사람이었다.  쇼팽은 병이 악화되어 아무리 고통스럽다기도
모리앙 박사 앞에만 가면 아늑한 기분으로 마음이 안정되었
다.  쇼팽이 서둘러서 파리에 오려고 한 것도 그 의사 때문이
었다.
  쇼팽은 모든 주위 사람들이 하나하나 떠나가고 있다고 생
각하면서 더할 수 없는 고독을 느꼈다.  그는 소랑수에게 긴
편지를 써 보냈다.
    나의 병을 고치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시던 모리앙 박사는 이
  제 가고 없다.  이제 나도 멀지 않아 영원한 안식, 평안한 안식
  을 가질 것이다.  아마 그날이 멀지 않았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죽음이 자기 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이렇게 빨리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쇼팽의 생활은 영원한 안
식처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1848년말부터 1849년초에 걸친 파리의 겨울은 혹독하기만
했다.  쇼팽은 수중에 있던 돈이 점차로 떨어져 갔으나 건강
이 나빠 레슨을 할 수가 없었다.  생활의 불안은 그의 건강을
끝없는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더 이상 작곡도 연주회도 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이제
그가 멀지 않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병실에는 문
병객이 끊이지 않았다.
  1849년 6월 쇼팽은 샤이요 가 74번지로 옮겼다.  의사가 좀
더 조용하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이 이사를 권유한 것이다.
  샤이요 가의 아파트는 2층으로, 그의 병실에서도 파리 시
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 방은 가슴이 탁 트일 것 같은
좋은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쇼팽은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니 방세가 너무 비쌌다.  친구들은 쇼팽이 신경을 쓰는
것을 염려해서 그 방세의 대부분을 오브레스코프 백작 부인
이 지불한다는 것을 숨겼다.
  그의 치료비는 스털링이 대주었다.  스털링은 쇼팽의 궁핍
한 사정을 듣고 2만 5천 프랑의 돈을 부쳐 왔다.  그런데 이
돈은 쇼팽에게 직접 들어가지 않고 문지기가 받아서 책상 서
랍에 넣어두고 있었다.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고 이상히 여
겨 거금의 행방을 알아본즉 크레르 보이앙 알렉시스라는 관
리인이 가지고 있다가 힐문에 못 이겨 내놓았다.  그래서 쇼
팽이 그 돈을 받은 것은 4개월이 지난 뒤였는데, 그것도 돈
의 일부는 이미 없어져 일부밖에 받지 못했다.
  그동안 쇼팽은 병문안 온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그러나
만나고 싶은 단 한 사람은 끝내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
사람은 조르주 상드였다.
   다시 한 번 만날 수는 없을까?  그 누구보다도 만나고 싶
은데…… 
  쇼팽을 자주 찾아오는 친구들은 들라크루아, 그시마라, 프
랑숌이었다.  그들은 변함없는 우정으로 쇼팽을 위로했다.
  6월 21일 쇼팽은 다시 객혈을 하였다.  그는 마지막 희망으
로 누이 루드비카가 와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는 가족들에
게 지금까지 거의 신병의 정도를 알리지 않았었다.
  6월 25일에 드디어 루드비카에게 편지를 썼다.
    맑게 갠 날입니다.
    저는 방안에 앉아서 창밖으로 파리의 거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즐기고 있습니다.
    수많은 탑들, 튈르리 궁전, 국회의사당, 상 제르망 록세르와
  교회, 상 티엔느 뒤몽 교회, 노트르담, 팡테옹, 상 시르피스
  교회, 발 드 그라스 교회, 앵발리드……그리고 그 건물들과
  저 사이에는 다만 정원이 있을 뿐입니다.
    올 수만 있으면 어떻게든 와주십시오.  저는 지금 앓고 있습
  니다.  여비가 모자란다면 얼마라도 빌어 와주십시오.  만약 제
  가 나으면 무엇이든 일을하여 갚겠어요.  현재 저는 한푼도 없
  어서 보내 드릴 수가 없군요.  제가 만약 회복되면 누님과 함께
  귀향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 편지를 쓴 뒤 그는 며칠 동안 망설이다가 우체통에 넣
었다.
  그는 여전히 회복에 희망을 갖고 있었고, 활기 있는 내용
으로 편지를 썼다.
  이어서 그는 루드비카의 남편 앞으로 이렇게 썼다.
    그러니 여권을 준비하십시오.  루드비카 모녀에겐 뜨개질 바
  늘을 가지고 오라고 전하십시오.  저는 그녀들에게 자수용 손수
  건과 실을 드리겠습니다.
    당신네들은 이곳 신선한 공기 속에서 옛날의 동생과 외삼촌
  과 함께 2, 3개월 사십시오.  저는 제가 왜 이렇게 루드비카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들이 오기만 하면 아
  주 좋은 상태에 놓여질 것 같습니다.
    저는 가족 회의에서 당신들이 이곳으로 올 수 있도록 결정되
  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모두 포옹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은 아직 머리칼도 그대로
  있고 이빨도 있으니까요.  아내는 언제나 남편을 따르는 것이니
  먼저 당신에게 아내를 보내 주도록 부탁드려야겠습니다.  그래
  서 이렇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부디 빨리 서둘러 주십시오.  카라상테 님, 저는 당신에게 굵
  고 좋은 시가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시가를 피울 수 없는 사람
  입니다. ――저는 그런 걸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저는 흥분해 버립니다.
  쇼팽의 편지는 간절하면서도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8월 9일이 되어 루드비카가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도착
했다.  쇼팽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누이는 동생을 보고 생각했던 것보다 쇠약하다는 것을 알
았다.  누이는 쇼팽이 숨을 거둘 때까지 곁에서 간호했다.
  루드비카를 만나 본 다음 쇼팽은 못내 그리워하던 친구 티
투스가 보고 싶어졌다.
    티투스!  그리운 티투스!
    나는 지금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빠져 있다네.  어떻게 하면
  자네를 만나 볼 수 있을까.
    자네가 내 곁에 와준다면 약보다 나으리라.
    티투스, 이 편지는 아마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이제 영영
  자네를 만나 보지 못하고 죽어간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
  없네.
    티투스, 부디 건강하게 잘 살아주기 바라네.
  쇼팽은 끝끝내 티투스를 만나 보지 못했다.  처음엔 파리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여권의 교
부가 허가되지 않아서 오지 못한 것이다.
  티투스는 오스테에 살고 있었는데 폴란드가 망해 버린 뒤
그곳이 러시아 국적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여권을 발급받
을 수 없었다.
  9월 1일에는 상드가 루드비카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파리에 오셨는가 하고 알아보았지만 그동안 오셨다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에게 프레데릭의 진상을
  알려주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떤 분은 심상치 않다고 하는 나쁜 소식을 전해 주었고 또
  어떤 분은 늘 보고 있는 바와 같이 쇠약하여 고생하고만 있다
  고 전해 주었습니다.
    아무쪼록 진상을 알려주십시오.  당신에게 이런 일을 몰어볼
  자유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어린애를 계속 사랑하고 있으나 그 어린애로부터
  잊혀지고 버려지는 일이 있는 법입니다.  아무쪼록 당신 자신의
  소식에 대해서도 알려주십시오.
    당신과 만난 이후 나는 하루도 당신의 친절한 추억을 생각하
  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나에 대해서 당신은 마음이 상해 버렸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러나 나는 지금까지 내가 겪은 모든 일에 내가 관련되지 않았
  던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 편지에는 확실히 후회하는 상드의 모습이 역력하다.  그
녀는 쇼팽을 조금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비에르진스키는 이 편지가 1년 전에만 왔었다면 쇼팽의 생
명은 좀더 오래 지탱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편지는 현명한 누이에 의해 쇼팽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상드도 더 이상의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며
찾아오지도 않았다.  쇼팽의 임종에도 장례식에도 상드의 얼
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죽음의 장
 
  9월이 되어서 쇼팽은 다가오는 겨울에 대비하여 남향의 방
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를 받았다.  루드비카는 수
소문하여 플라스 방돔 광장에 있는 방을 얻어 9월말에 그곳
으로 이사를 시켰다.
  이사한 후 얼마 안 되어 쇼팽에겐 드디어 최악의 사태가
다가왔다.  10월초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쇼팽은 죽음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쇼
팽의 생질녀인 루드비카의 딸은 쇼팽이 이해 겨울을 남국에
서 지낼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거의 숨을 거두기
까지 많은 사람들과 만났고, 죽기 며칠 전에야 절망하고 희
망이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때 그는 루드비카에게 미리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제가 죽은 뒤에 만일 쓰다 만 작품이 발견되거든 불에 태
워서 없애버려 주세요.  저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노력은 깨끗하게 끝을 맺어야 합니다.  한데 저
는 이제 그것을 마저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제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작품을 남겨
두었거나, 또 그런 작품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합니
다.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람받고 싶습니다.  저를 사랑하
는 모든 사람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
의 이 부탁을 꼭 들어주세요. 
  10월 15일에 쇼팽은 아주 중태에 빠지고 말았다.
  니스에 있던 델핀느 포토츠카 부인이 그의 중태 소식을 듣
고 달려왔다.  빈사 상태의 환자는 얼굴이 빛났다.
   하느님이 저를 부르시는 것을 연기하여 당신을 만나게 해
주었군요. 
  그리고 무엇이든 자기의 최후를 위해 노래해 달라고 부탁
했다.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옆방에서 피아노를 옮겨왔다.
  포토츠카 부인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트라델라
의 <성모의 찬가>와 마르첼로의 <찬송가>를 불렀다.
   아! 이 아름다운 노래…… 
  쇼팽은 이렇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과 고별을 아쉬워하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10월 16일 쇼팽은 임종의 성찬을 받았다.  폴란드의 승정
알렉산드르 에로비키는 그동안 세 번이나 거부하였음에도 불
구하고 쇼팽을 찾아왔던 것이다.  쇼팽은 이 수년 동안 참회
를 하지 않고 종교를 떠나 있었다.
  쇼팽은 승정에게 참회를 마친 다음 그를 끌어안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나도 돼지처럼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쇼팽의 병간호로는 루드비카와 츠알트리스키 후작 부인의
친어머니와 같은 정성스런 시중을 손꼽지 않을 수 없다.
  친구들은 이제 조용하게 연도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쇼팽은 마지막으로 무엇이든 음악을 듣기를 원햇다.
   그럼 당신의 소나타를…… 
  프랑숌이 말했다.
   아니, 내 것이 아니고 더욱 순수한 음악을…… 내 맥박이
멈추기 전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모차르트의 곡을 쳐주시오. 
  쇼팽의 최후의 소원이었다.
  10월 17일 오전 2시경 쇼팽은 별다른 고통을 보이지 않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 전에 쇼팽은 최후로 이렇게 외쳤다.
   마토카!  모이아 비엔다 마토카(어머니! 불쌍하신 나의 어머니)! 
  드디어 그는 영원히 떠났다.
  죽은 쇼팽의 모습은 파스칼과 비슷했다고 전한다.  파스칼
도 39세에 죽었다.  그의 죽은 얼굴에는 평정과 순결과 밝은
표정이 넘쳐 있었다.
  10월 17일 낮 클레징거가 쇼팽의 데드 마스크를 떴다.  크
이아트코프스키는 연필로 쇼팽의 두상을 스케치했다.
  사인은 폐결핵과 후두결핵이라고 진단되었다.
  장례식은 10월 20일에 마드레느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굉장한 사람이 나왔다.  파리의 저명 인사와 이
름 있는 예술가는 거의 모두 참석했고 일반 사람들까지 3천
여 명에 달했다.  그의 생애에 있어 대중과의 접촉은 그리 많
지 않았는데, 그의 장례식은 파리 제일의 장례식이 되었다.
  장례식은 처음에 쇼팽의 <장송행진곡>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승정의 독경 대신 가수들의 노래가 불려진 게 특색이
었다.  파리 음악원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대가 지가르의 지휘
아래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했다.
  솔로는 비얄드 가르치아, 카스테랑 양(쇼팽의 생질녀), 라브
라케씨가 노래했다.  고별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쇼팽
의 작품(<장송행진곡>, 프렐류드 등)이 연주되었다.
  쇼팽의 유해가 페르 라 셰즈 묘지로 운반되어 갈 때는 츠
알트리스키 후작 부인과 마이어베르가 맨 앞줄에 서고, 츠알
트리스키 후작과 들라크루아와 프랑숌이 뒤따랐다.
  관을 무덤 속에 앉히고 하관식을 할 때 친구들은 폴란드의
흙을 담은 은배를 기울여 관 위에 조국의 흙을 뿌렸다.
  쇼팽의 심장은 그의 유언에 따라 황금의 항아리에 담겨 조
국으로 보내졌고, 그것은 바르샤바의 성 십자 교회에 안치되
었다.
  쇼팽은 작곡 원고에 대한 상속 유언을 하지 않았다.  그리
고 그의 작품은 유언대로 없애지지 않고 사후에 작품 번호를
붙여 출판되었다.
  페르 라 셰즈 묘지에서 쇼팽의 유해는 벨리니케르비니, 비
르디니의 옆자리에 안치되었다.
  쇼팽이 죽은 뒤 들라크루아를 중심으로 기념비건립위원회
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주기 때(1850년 10월 17일)
그의 묘지에서 기념비를 제막했다.  이 기념비는 클레징거가 
설계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쇼팽의 기념비와 
기념석반이 바르샤바 성 십자 교회와 출생지 제라소바 볼라에
세워져 있다.  또 크라코우, 라이넬츠와 최후에 숨을 거둔 
플라스 방돔 12번지에도 그의 기념비가 있다.
  쇼팽은 모차르트 특별히 좋아한 음악가다.  그는 실제로
모차르트와 참으로 흡사하다.
  쇼팽은 그러나 고전주의를 벗어나 낭만주의 음악에 속해
있었다.  낭만주의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를 인정하고 있다.
  쇼팽의 생애는 많은 영광과 비애로 점철된 것이었다.
  8세 때에 이미 음악적 천재성을 발휘하여 공식 무대에 데
뷔했던 그는 바르샤바의 총아가 되었지만 20세에는 조국을
등져야 하는 운명이었다.
  20세 이후 반생을 쇼팽은 여행자로서 살았으며, 병에 시달
리는 비극적 최후를 마쳤다.  그는 그동안 무수한 여인들로부
터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으나 상드로부터는 버림받은 애인이
기도 했다.  생전에 한 번도 결혼을 하지 않았고, 10년 가까
이 조르주 상드와 동거했을 뿐이었다.
  그의 음악의 본질은 언제나 우수였고 사랑은 비극만을 선
사했다.  너무나 선량한 그의 인간성은 어느 때나 배신할 줄
을 몰랐으므로 거꾸로 그는 여인들로부터 여러 번 배신을 당
했다.
  이제 진실로 음악적인 영혼을 지녔던 쇼팽은 14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서 그의 음악
으로 가슴을 울리고 있다.  운명은 그에게 너무 가혹했었고,
그 때문에 그는 많은 좋은 음악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아쉬
운 것은 그의 손가락으로 직접 울리는 피아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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