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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제37장 떠나는 이의 뒷모습
"이선생, 계십니까?"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며 일부러 점잔을 뺀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게 자신을 찾고
있는 목소리란 걸 얼른 알아듣지 못한 채 신문을 뒤적이고 있던 명훈은 대문이 요란스레 흔
들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누구십니까?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명훈이 방문을 열고 그렇게 묻자 나무 대문 너머 번질거리는 대머리만 보이는 사내가 반
갑게 맞았다.
"저 이웃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명훈 선생을 찾아뵈여고 왔습니다만..."
그 대답에 명훈은 마당으로 나가 대문을 열었다. 대머리 때문에 얼른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낯선 사내가 명훈을 보고 서둘러 자기 소개를 했다.
"저는 저쪽 12호헤 사는 임장수올시다. 반장님의 소개로 이렇게 이선생을 찾아왔습니다."
"전 반장님을 잘 모르는데... 몇 번 뵙기는 했지만."
"실은 소개라기보자 일반적으로 부탁을 했지요. 우리 동네에서 남 앞에 나서서 말마디라
도 할 수 있는 분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대학물을 먹은 분이라도 이선생을 소개해주시더군
요. 사모님도 교원이시고."
"반장님이 무얼 잘못 아신 것 같은데요. 잠시 대학을 다닌 적은 있지만 하마 십 년 전의
일이고, 더군나 남 앞에 나서서 말 같은 걸 해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
를 찾아오셨는지요?"
명훈이 그같이 묻자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고 은밀해졌다.
"그건...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말씀 좀 나눌 수 없을까요? 큰길가 장미다방도 좋겠습
니다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집에서는 안 되겠습니까? 마침 혼자 있는 터라... 여기
도 조용해서 얘기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곳입니다만."
어머니와 인철이 서울로 나가고 경진은 출근을 해 밖으로 나가자면 문을 잠그고 나가야
했다. 그게 귀찮다기보다는 왠지 그 사내의 용건이 시답잖을 것 같은 기분에 명훈이 그렇게
받자 사내는 몸까지 꼬며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초면에 실례가 될까봐서."
명훈은 그런 사내를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처음에는 거실 삼아 쓰는 마루에서 몇 마디
얘기나 들어보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나이든 사람 대접하는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안방으로
안내했다.
"이거 방안이 어수선합니다. 집사람이 없어 차 한잔 대접도 못 하고..."
명훈이 방바닥에 펼쳐져 있던 차렵이불과 베개를 한쪽으로 밀며 방석을 내놓자 사내가 방
안에 들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그대로 방바닥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그러자 사내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몇 모금 빨아들이며 뜸을 들인 뒤에야 대답했다.
"저... 분양지 전매 금지 조치에 대한 서울시의 결정을 들으셨습니까?"
"원분양자들한테는 큰 문제가 없고, 전배자들에게는 시가에 일시불로 땅을 분양하겠다고
한 것 같은데..."
명훈이 들은 풍문대로 받자 사내의 얼굴이 금세 벌겋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소심하면서도
성미가 급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 그 시가란게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그건 아직 자세히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4단계로 구분하는데, 최저가가 평당 팔천 원이고 최고가는 만육천
원까지 간다고 합니다."
사내가 거기까지는 전상젓인 목소리로 말했으나 곶 성미를 못 이겨 목소리를 높였다.
"죽일 놈들. 땅장사를 해도 유분수지. 그래, 평당 백 원에 수용한 땅을 만 원에 넘기겠다
니 도대체 이 년 만에 볓 배 장사야?"
그 말에 명훈도 후끈 달아올랐다. 명훈도 작년 7월에 전매 금지 공고를 듣고 있었고 어
느 정도는 추가 지출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원분양자가 내야 할 금액의 두
배는 넘지 않을 거라고 믿었는데 사내의 말을 듣고 보니 너무도 엄청나 터무니없기까지 했
다.
"뭘 잘못 들으셨겠지요. 아무렴 서울 시내에서도 가장 좋다는 남산 주면도 평당 이만 원
이 안 될 텐데요. 그건 차라리 전매자에게서 분양 자격을 아예 박탈하는 것보다 더하지 않
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이선생을 찾아온 겁니다. 그 조치는 틀림없어요. 서울 시청에서 확인한 거
란 말입니다. 곧 공고가 나불을 거라구요."
그래도 명훈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평당 만 원씩만 쳐도 20만원을 다시 내야 대지
를 불하받을 수 있는데 그들의 형편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거액이었다. 어머니와 경진의
저축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짓고 살림을 차리는 데도 모자라 오히여 얼마간의 빚을 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혹시 팔백 원, 천육백 원을 잘못 들으신 거 아닙니까? 그래도 전매가는 원분양자보다 땅
값을 두곱 세곱 무는 꼴이 되는데..."
"틀림없다니까요. 오죽했으면 그 소리 즞고 하늘이 다 노랗게 보였겠습니까?"
사내가 그렇게 소리치듯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도 전매잡이다. 댐 건설로 고향이 물에 잠겨 받게 된 쥐꼬리만한 보상
금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좋다는 소문만 듣고 이리로 오게 된 겁니다. 딱지 한 장 사
집이라고 얽고 나니 시장에 좌판 벌일 밑천도 안 남아 눈앞이 캄캄한데, 이게 무슨 날벼락
입니까?"
"좀 전 말씀하신 서울시의 분양가 책정이 정말이라면 저희도 사정은 마찬가집니다. 누가
부동산 투기 얼마나 해 빼간지는 모으지만 우리 같은 실수요자들은 다르게 취급해줄 줄 알
았는데..."
"바로 그겁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 철거 이주민이나 다를 게 뭐 있습니까? 잡으려면 딱
지 팔고 떠난 원분양자들이나 투기꾼들을 잡아야지..."
사내의 번들거리는 눈길이나 다시 담배를 붙이는 손길의 떨림이 점점 더 그가 가져온 정
보의 신뢰도를 높여 명훈의 가슴에서도 천천히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게 사실이라면 집을
지켜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3만 원 남짓인 경진의 월급만으로는 20만 원이란 새로운 빚
을 감당해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당장 그만한 돈을 빌릴 수 있을까조차 의심스러웠다. 겨
우 마련한 근거지를 잃고 또 도회의 밑바닥을 떠돌아야 하는가- 명훈이 암담한 기분으로
말을 잃고 있는데 사내가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를 비벼 끄며 결연히 말했다.
"그래서 힘고 없고 배운 것도 적지만 제가 이렇게 나선 겁니다. 우선 전매자들의 수를 파
악하고 그 중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골라 어떻게든 싸워보려구요. 알아보니 다행히 다른 동
네에서도 이 같은 움직임이 있다는 겁니다. 아직은 풍문이라지만 무슨 대책위원회 같은 것
도 구상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선생도 한번 나서보지 않겠습니까? 이건 단순
히 이선생 집 한 칸 지키는 일이 아닙니다. 무식하고 힘없는 대중을 도와준다는 대의도 있
단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오히려 명훈의 가슴속에서 은은히 일고 있던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효과
를 냈다. '싸운다' '대책위원회' '무식하고 힘없는 대중,' 그런 말들이 연상시킨 아버지의 행적
때문이었다. 아버지으 월북 이후 다중의 힘으로 국가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명훈이 상
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기기에다 서울시가 또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요. 그것은 전매자의 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인데, 한번 생각해보십쇼. 우리 주위만 해도 세 집에 한 집은 전매자 아
닙니까? 여기 인구 15만이라고만 해도 5만이란 말입니다, 5만. 자칫하면 피땀으로 얽은 집을
송두리째 날리게 되는 사람이 어른 아이 합쳐 5만이나 된다는 겁니다."
사내가 다시 열을 올렸다. 지난 겨울 황석현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가난의 권리화란 말이
전혀 터무니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명훈은 움츠러들었다. 나는 아니다- 그
런 단정적인 기분이 들며 오히여 찾아온 사내에게 엉뚱한 의심까지 품었다.
'혹시 나를 떠보기 위한 정보 기관 끄나풀이 아닐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어째 시골에서 농사지던 분 같지 않으시군요. 실례인지 모르겠
습니다만 전에도 혹시 이런 경험이 있으습니까?"
명훈이 그렇게 묻자 사내가 펄쩍 뛰듯 말했다.
"전에 고향 있을 때 이장 노릇을 좀 한 적이 있을 뿐입니다. 중학교 나왔다고 떠맡기는
바람에... 더군다나 이번 일은 이놈의 나라에서도 처음 있는 일인데 어떻게 경험이 있겠습니
까? 그저 이대로 당하고만은 있을 수 없다 싶어서..."
하지만 명훈의 마음은 이미 닫혀버린 뒤였다. 그가 수상쩍어서라기보다는 시간이 흐를수
록 그런 일에 관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더욱 뚜렷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더 길게 끌
어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그런 마음이 들어 짐짓 정색을 하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찾아온 뜻은 고맙지만 저는 남 앞에 나설 처지가 못 됩니다. 말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시고 달리 사람을 찾아봐주십시오."
사내는 명훈의 거절을 의례적인 겸양 정도로 받아들일 듯했다. 정색하고 있는 표정조차
살피는 둥 마는 둥하고 자신의 말만 이어갔다.
"우리가 해봐야 당장 무얼 하겠습니까? 그저 우리 동네만이라도 말마디 할 사람들을 대표
로 뽑아 다른 동네와 손을 잡을 수 있도록 해두는거지요. 마침 전체 대책위원회 말도 나오
고 하니 미리 준비해둔다는 정도루다..."
"그래도 제가 나설 수 있는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름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명훈은 그의 눈치 없음이 약간 성가셔 더욱 목소리를 차갑게 했다. 그제서야 사내도 명훈
의 의중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나 쉽게 단년하지는 않았다.
"이거 나만 잘되자고 하는 일 절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탄 거란
말입니다. 너나없이 고향 잃고 쫓겨나 서울 밑바닥을 헤매다 여기까지 밀려난 것도 서러운
데, 그나마 마련한 집칸 뻔히 눈뜨고 날리게 되었으니... 그런게 어떻게 가만히 손 처매놓고
나리님들 처분만 기다립니까?"
그렇게 명훈을 달래보려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향 잃고 쫓겨났다는 표현이 명훈에게
는 수상쩍기 그지없게 들렸다.
"댐으로 물에 잠겨버렸으니 고향을 잃었다고 할 수는 있겠습이다만 쫓겨났다는 말은 영
이해가 안되는데요. 아까 보상금을 받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듣기로 그런 보상은
통상으로 시가보다는 높다고 하던데요. 그걸로 인근 에서 토지를 사면 전보다 땅을 넓힐 기
회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명훈이 슬며시 떠보는 기분으로 그렇게 받자 사내의 얼굴이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건 실정 모르고 생색만 내는 공무원들 소립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원래보다 후한
값으로 보상을 받은 사람도 있지요. 하지만 수몰 지구가 생기면 인근의 땅값이 솟는 것은
정한 이치 아닙니까? 땅은 그대론데 갑자기 살 사람이 늘어나면 말입니다. 거기다가 규모란
게 또 있지 않습니까? 땅이 많다면야 그 보상금으로 인근에 눌러앉을 수도 있고 막말도 도
회지에 나가 장사를 해도 한 밑천 넉넉하게 시작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 몇이나
되겠습니까? 천둥지기 논 몇 마지기에 비탈밭 몇 백평으로 남의 땅을 겨우 빌려서야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게 대부분의 우리네 농가 실정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은 근처에 눌러앉
고 싶어도 눌러앉을 수가 없어요. 인근 땅값이 올라 농사지을 땅은 오히려 줄어들지, 지척이
천리라고 낯선 곳이라고 남의 땅 빌리기도 쉽지 않지... 어디 꼭 등 떼밀어 쫓아내야 쫓겨나
는 겁니까? 할 수 없이 떠나야 하면 그게 바로 쫓겨나는 거지."
그래놓고는 더욱 격해진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나 별로 배운 것은 없지만 이눔의 정부가 왜 농님을 못살게 내모는지응 압니다. 이게 다
그눔의 공업환지 산업환지 때문이라구요. 잘살아보자는 구호밖에 내걸 게 없는 군사 정권이
계획적으로 우릴 내몬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죠? 계획적으로 내몰다니..."
돌내골에 있을 때부터 많이 들어본 소리지만 명훈은 본능적으로 섬뜩해져서 물었다.
"이선생,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총칼로 정권을 잡은 놈들이 그것도 하마 이승만이만큼
이나 해먹은 놈들이 국민들한테 내놓을 게 뭐 있겠습니까? 그래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잘
살아보자'란 구호를 틀어놓고 그걸 위해 공업화다 뭐다 하고 있지만, 그게 잘 되겠어요? 우
리한테 뭐가 있습니까? 사들인 원료에, 꾸어온 자본에, 역시 사들인 기술로 물건 만들어봐야
선진국들과 경쟁이 될 리 없어요. 꼭 경쟁하려면 헐값으로 떠앵기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니 원가를 줄일 수 있는 길은 낮은 임금뿐이다, 이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싼 노동자를 대
량으로 얻는 길뿐이지요. 그런데 인구의 태반이 농사레 묶여 있으면 어디서 싼 노동자를 구
해냅니까? 결국 그들은 농촌에서 못살게 도회로 내쫓는 길밖에 더 있겠어요? 결국 여기 와
있는 우리는 대부분이 바로 그 희생자라 이겁니다."
그런 사내는 명훈에게 그 방면의 전문가 같은 인상까지 주었다.
'이건 자연 발생적인 반발이 아니다. 어쩌면 알지 못할 불온한 조직의 일부가 이 사태를
이용하려 들고 있는디 모른다...'
그런 생각이 퍼뜩 들어 명훈은 더욱 경계심을 돋우었다.
"아무려면 설마..."
"보니까 이선생도 본적이 경북 지방이고 그것도 산골이던데,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당하고도 아직 그 이치를 모르십니까? 따지고 보면 이 정도
집터는 정부가 공짜로 주어도 아깝지 않은 거란 말입니다. 자기들 정책에 희생이 된 사람들
에게 당연히 해야 할 보상일수도 있지요. 그런체 거꾸로 우리를 상대로 열 배도 아닌 백 배
땅장사를 하려고 들어? 죽일 놈들..."
그러자 명훈은 점점 더 궁지로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더 끌려가다가는 무슨 소리가 나올
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자신이 가진 마지막 수단을 서둘러 동원했다.
"듣고 보니 그러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인 불운과 실수가 겹쳐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전매가 금지된 철거 이주민의 분양증을 산
것도 저희 불찰이고... 그리고 앙우러 밝히고 싶은 것은 이 일에 선뜻 나설 수 없는 저으 처
집니다. 저는 여러분에세 전혀 도움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를 끌어들이는 게 오히려
여러분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명훈의 목소리가 워낙 가라앉고 차가워서인지 그제서야 사내도 살피는 눈길이 되어 명훈
을 보았다. 하지만 한참을 살피도 나서도 여전히 명훈을 단념하지는 못했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요? 혹 제가 알면 안 되겠습니까?"
"꼭 들으셔야겠다면 말씀드리지요. 제 아버님은 월북한 골수 빨갱이입니다. 지금도 북쪽에
서 상당한 고위직에 있는 걸로 알고 있구요."
명훈이 그렇게 말하자 사내의 얼굴빛이 알아보게 변했다. 그리고 다리를 움찔하는 게 자
신도 모르게 일어서려다 주저앉은 듯했다. 명훈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더욱 차갑게
보탰다.
"휴전 이후 우리는 주욱 경찰의 감시 아래 있었습니다. 한때는 피해다닌다고 피해다녀보
기도 했지만 68년 주민등록법이 생기고부터는 그것도 틀려버렸습니다. 의심스러우시면 지금
이라도 광주경찰서나 성남지서에 가서 제 이름을 대고 알아보십시오. 대공 형사 중에 누군
가 제 담당이 있을 테니."
"그건 이선생 죄가 아니고..."
사내가 물러나면서도 한번 뱉은 말을 일시에 거두지 못해 어정쩡하게 받았다. 명훈이 그
를 풀어주듯 말했다.
"도움은 못 돼도 애매한 누명을 쓰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끼어들면 사상적으
로 의심받기 십상입니다. 정당한 권리 주장이 빨갱이의 선동으로 몰려서는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사내도 마음놓고 물러났다.
"하긴 그렇군요. 이선생께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내가 나가고 난 뒤 명훈은 새삼스런 분노로 자신의 처지를 곱씹어보았다. 사내
가 한 말아 사살이라면 어렵게 얽은 집을 지켜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집을 짓기 위해 들
어간 본전도 찾아낼 길이 없어질 판이었다. 계산만으로는 집을 팔아 분양 대금을 치르고 남
는 돈에서 본전을 찾으면 되지만 실제는 그렇지가 못했다. 대부분의 전매 입주자들이 명훈
네와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아, 매물이 쏟아지면 집값은 형편없이 떨어질 게 뻔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헐값으로도 넘길수 없어 경매로 고스란히 집을 날릴 수도 있었다.
'도시 빈빈들이 정부의 억지스런 산업화 정책의 희생이란 말까지는 믿지 않는다 쳐도 과
연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이 개인적인 불운이고 실수 탓인가. 난곡동이나 봉천동에서
도 분양지 전매 금지 규정은 틀림없이 있었지만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지켜지
지 않을 거라고 믿고 어머니다 분양증을 사들인 게 애써 장만한 집 한 채를 고스란히 날려
야 할 만큼 큰 실수인가. 그리고 이 분양가 책정은? 공공 사업을 구실로 헐값에 수용한 황
무지와 야산을 서울 시내의 대지값이나 진배없는 고가로 전매자에게 강요할 수 있는가. 그
런 당국의 불합리한 정책에 걸려든 게 과연 개인적인 불행일 뿐인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문득 그 사내의 요청이 없어도 당연히 나서서 지켜야 할 권리였는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줄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다시 밖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
다.
"주인 계세요? 안에 아무도 안계세요?"
명훈이 은근히 성가셔하며 대문께로 나가보니 문을 두드린 것은 낯선 소년이었다.
"무슨 일이냐?"
겨우 짜증을 감춘 목소리로 명훈이 그렇게 묻자 소년이 재빨리 주위를 살피다가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저... 이 집에 이명훈씨란 사람 있어요?"
"내가 바로 이명훈인데- 어디서 왔지?"
"누가 쪽지 한 장을 전해달라고 해서요. 정말 이명훈씨 맞으세요?"
그러는 소년은 중학교 다닐 나이 같았지만 학생은 아니었다. 허름한 차림이나 세상살이에
깎이고 찌든 티가 그러나는 얼굴이 음식점이나 여관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는 녀석 같았다.
"그렇다니까. 그런데 쪽지를 준 사람이 누구냐?"
"예분 아줌만데요- 이 쪽지 보시면 알 거래요."
소년이 그러면서 양면괘지를 접어 만든 쪽지를 내밀었다. 면훈이 받아서 펴니 눈에 익은
필체였다. 그게 누구의 것인지를 알아보자 명훈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왔다.
'이 여자가 무슨 일로? 아니...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결혼 뒤 몇 달 명훈은 가끔씩 모니카가 찾아드는 악몽에 시달렸다. 식장에서 그처럼 맵시
있게 자리를 수습해준 것은 감동을 넘어 감격스럽기까지 했지만 그 같은 방식은 명훈이 알
고 있는 모니카의 방식이 아니었다. 떼어내기 힘든 끈끈한 운명 같은 느낌이랄까? 그녀는
결코 그렇게 산뜻한 모습으로 자신의 삶에서 떨어져나갈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여러 가지
악몽의 형태로 명훈의 꿈자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어떤 때는 자신을 중혼죄로 고소해 경
찰과 함께 나타나고, 어떤 때는 어린아이를 안고 쳐들어와 안방을 차지하고 눕기도 했다. 그
러다가 반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자 조금씩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결국은 다시 찾아온 것
이었다.
명훈씨에게
이제 달콤한 신혼은 끝났는지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나무라실 줄 알면서도 이렇게 만나
러 왔어요. 사거리 성남여관 206호실에 있으니 다녀가셨으면 해요. 기다리겠어요.
모니카 올림
쪽지에 쓰여진 내용은 그랬다.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그녀의 말투가 공연히 명훈
의 가슴을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그녀 특유의 철저
한 둔감, 혹은 마비가 그날따라 섬뜩하게 느껴졌다. 쪽지를 다 읽고 다시 무언가를 물으려고
보니 심부름 온 소년은 제 할 일 다 했다는 듯 건들거리며 저만치 골목을 벗어나고 있었다.
명훈은 그를 소리쳐 부르려다가 그만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식장에서부터 자신이 품고
있는 고정관념을 깬 그녀라 그렇게 찾아온 의도 또한 얼른 짐작이 가지 않았다. 명훈은 한
동안 대문께에 붙어서서 생각에 잡겼다. 당장은 가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조차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어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애증이
뒤섞인 것이기는 해도 그녀와 자신 사이를 얽어온 십 년 세월의 무게가 그의 감정을 짓누른
탓이었다.
"오셨군요. 고마워요."
명훈이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여관방으로 찾아들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맞았다. 마치
어제 집 나갔다 돌아오는 사람을 맞이하는 듯한 태도였다.
'내가 알고 있던 여자가 아니다...'
틀림없이 신파조의 원망과 넋두리가 먼저일 것이라 각오하고 있던 명훈은 거기서 다시 섬
뜩한 기분을 맛보았다.
"언제 왔어? 집은 어떻게 알고?"
명훈은 되도록이면 태연하려고 애쓰며 심부름 온 소년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먼저 물었
다. 그녀도 예전과 다름없는 억양으로 대답했다.
"오늘 아침에요. 그리고 명훈씨 계시는 곳을 제가 모르면 어떻게 해요?"
그 말이 다시 까닭 모르게 섬뜩했으나 명훈은 내색하지 않고 받았다.
"그랬어? 그런데 웬일이야?"
그러자 그녀가 가만히 눈을 들어 명훈을 살폈다. 감정이나 원망의 빛은 조금도 없는 탐색
의 눈길이었다. 오히려 눈을 마주치는 게 두려워 눈길을 피하는 것은 명훈 쪽이었다.
"너무 오래 저를 찾아오지 않으셔서. 설마 절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죠?"
그 말에 명훈은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쭈욱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 철저하게 황폐한 영혼,
혹은 순진한 영혼... 모니카가 그런 명훈에게서 무슨 느낌을 받았는지 황급히 덧붙였다.
"제가 너무 빨리 찾아왔나요? 여섯 달이면 신혼으로 충분핟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명훈은 자신이 애써 벗어났다고 생가가한 질척한 수렁으로 다시 빠져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결국 이 여자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이 여자가 변했다고 생각한 것은 한낱 오해개 지
나지 않았다. 이 여자가 그날 식장에서 그토록 세련되게 자리를 수습해준 덕은 결혼의 의미
를 제대로 이해해서가 아니라 전혀 이해 못 해서였다. 결혼을 나를 잠시 경진에게 빌려주는
것쯤으로 여겼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모니카에 대한 예전의 자심감이 짜증과 함께 되살아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니카의 특이한 의식 구조가 은근히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다시 찾아올 거라구 기다렸달 말이지?"
"네. 한 달 뒤부터요. 명훈씨 비슷한 발소리만 들려도 대문께로 달려나가 봤어요."
그말에 명훈은 다시 한번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졌다. 자심 아연해질만큼 대처가 막막했
다. 그런 명훈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이번에는 자랑하는 투로 이었다.
"저두 쉽진 않았어요. 언젠가는 다른 여자에게루 떠날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눈앞에서
명훈씨 결혼식을 보게 되니 잠시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그뒤에도 그랬어요. 시간을 드려야
한다구 다짐을 했지만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산다는 것 뻔히 알면서도 여섯 달을 참아내기
는 힘들었어요."
'그렇지, 너에게 그런 일면도 있었지. 그렇지만 네 말을 믿어줄 수가 없구나.'
"그런 내가 결혼한 것은 당연하단 말이지?"
"네. 말없이 떠나버리신 게 조금은 섭섭했지만 그렇다고 끝내 저와 함께 있으리라고는 믿
지 않았어요."
그 말에 명훈은 희미한 자책과 감동 같은 것까지 느꼈다.
"그런 처음부터 나와의 결혼까지는 바라지 않았다는 뜻인데, 그건 왜지? 어쩜 점에서 그
랬어?"
"사람이 다르니까요. 사람이..."
그런 그녀의 말에 어딘가 비꼬는 듯한 말투가 있는 것 같아 명훈이 다시 물었다.
"사람이 다르다구? 다 같이 진창을 뒹굴었는데 다르긴 뭐가 달라? 더구나 이런 민주 세상
에..."
"종자부터가 다르죠. 명훈씨는 어쩌다 잘못돼 밑바닥에 떨어진 명문가의 공자님이고 저는
전쟁 미망인으로 술집 마담이 된 거리의 여자 딸이고... 공부도 그래요. 저는 고등학교까지는
가방 들고 오락가락했지만 에이, 비, 씨도 몰라요. 만화책 외엔 책 한 권 끝까지 읽어본 것
도 없고... 그런데 명훈씨는 대학까지 다녔고 책도 많이 읽으셨잖아요? 또 있어요. 더 큰 거
요. 그게 제 잘못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명훈씨를 처음 만날 때 이미 제 몸은 더럽혀진 뒤
였어요. 요새는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나같이 함부로 몸을 굴린 년, 정식으로 결혼해 살기는
틀렸다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어요."
거기까지 듣자 명훈은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왔다.
'너와 내가 다른 점이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네가 말한 그것들이 아니야. 우리는 그 점에서
오히려 비슷하지. 오십보 백보 차이일 뿐만 아니라 그렇더라도 네가 책임져야 할 일도 아니
야.'
그런 생각이 일자 그녀를 다시 안게 될 때마다 자신을 변명해주게 되는 연민의 감정이 일
시에 되살아났다. 하지만 또한 경계심도 함께였다. 이 착하고 때묻지 않은 혼은, 그러나 철
저하게 망가지고 문드러진 의식의 겉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번의 결혼 사진 소동은 뭐야?"
명훈은 그전의 화해 때처럼 연민에 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추궁하듯 물었다. 그녀가 강경
한 부인의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때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그냥 눈에 보이는 걸루 명훈씨와의 인연을 증명하는 걸 남기
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머니다 괜한 욕심을 부려서 그랬지, 전 그 이상 아무런 딴 생각이 없
었어요."
그나마 추구할 게 없어지자 명훈의 마음은 처음 방에 들어설 때와 달리 눅진해져갔다. 세
월이 지나도 변하지 못하는 영혼, 싫어하고 미워하면서도 끝내 떨쳐버릴 수는 없는 특이한
개성...
"그래, 이렇게 새삼 찾아온 까닭은 뭐야?"
"이젠 제 몫까지 되찾을 때가 되었다 싶어서요. 돌아와주세요. 다시 옛날처럼 지내요."
모니카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아무런 거리낌없는 그 요구가 녹아내리던 명훈의 마을을 다
시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네게로 돌아가?"
명훈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되묻자 그녀가 겁먹은 눈길로 재빨리 말했다.
"돌아가자는 건 예전처럼 함께 살자는 게 아니에요. 이제 가정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
럴 수 있겠어요? 다만 틈을 보아 한 번씩 들러달라는 말이에요. 일주일에 한 번도 좋고 열
흘에 한 번도 좋고..."
그녀의 그 말은 새로운 기습과도 같았다. 거부의 여지가 없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강요처
럼 들렸다. 어떻게 그 말을 받아야 할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 일순 말문까지 막힐 정도였
다. 그런 명훈의 침묵을 자신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서인 걸로 잘못 이해한 그녀가 덧붙였
다.
"제 뒤에 명훈씨가 있다는 것만 알게 해주세요. 실은 요즘 동네 건달들도 눈치가 달라요.
명훈씨가 오래 보이지 않자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외상술은 예사고 자칫하면 자릿세까지 내
놓으라고 나설 판이에요."
그녀 딴에는 좀더 현실적인 필요성을 밝힌 것이었는데 그게 실수였다. 그 말을 듣자 명훈
은 비로소 돌아가자는 말의 의미가 섬뜩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변두리 싸구려 요정의 마담
기둥서방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며,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끈질기고 맹목적인 그녀와의
치정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며, 경진과 새롭게 설계한 밝고 성실한 삶에 배신의 그늘을 드리
운다는 뜻이었다.
"그건 안 되겠어. 그럴 수는 없어."
명훈이 짐짓 목소리를 차게 해 잘라 말했다.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래졌다. 경우
에 따라서는 금세 슬픔으로, 그녀 특유의 줄줄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변할 수 있는 놀라움이
었다.
"왜요? 그게 왜 안돼요?"
"결혼이란 그런 게 아니야. 그건 엄숙한 약속이고 예의야."
"제가 뭐랬게요? 금방 이혼하고 돌아서서 제게로 오란 것도 아니잖아요? 틈을 보아, 일주
일 만이고 열흘 만이고간에 한번씩 들러달라는 것 뿐이었잖아요? 아니, 그것도 곤란하면 한
달에 한 번만이라도 좋아요. 그냥 저와 이어져 있기만 하면 돼요. 그런데 그게 왜 안된다는
거예요?"
그 사이에 그녀의 두 눈에 어려 있던 놀라움의 기색은 어느새 슬픔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이를 먹고 술과 육욕에 찌들어도 탁해질 줄 모르는 그녀의 두 눈 가득 고인 맑은 눈물이
금세 두 볼을 타고 내릴 듯했다. 그게 먼저 마음을 적셔왔으나 명훈은 굳건히 저항했다. 이
세상에서는 이제 끝나야 할 인연- 무슨 결의를 다지는 사람처럼 명훈은 그녀와의 관계를
그렇게 단정했다.
"그것도 안되겠어. 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너를 위해서도. 이젠 너도 이 저주스러운 운명
에서 벗어나야 돼. 너와 나의 인연은 서로가 애써 벗어나지 않으면 끝내는 함께 죽을 수 밖
에 없는 악연이야."
명훈은 자신이 듣기에도 신파조가 되어 그렇게 말했다. 말해놓고 나니 어조에서 시작된
과장이 감정 전반에 번진 것인지 자신도 무언가 의미심장하면서도 신비로운 운명을 얘기하
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모나카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 반대일수도 있어요. 거기서 벗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적어도 저에겐 명훈씨
가 그랬어요."
약간 감동적이기는 해도 그때껏 알아온 그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었다. 명훈은
그녀가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조차 의심스러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믿지 않으셔도 좋지만 제가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명훈씨 때문이었어요. 저라도
혼이 없는 줄 아세요? 저도 세상이 허망하고 지겨울 때가 있다구요, 그만 내팽개치고 딴세
상으로 훌훌 떠나고 싶을 때가... 거기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이 땅과는 다른 곳으
로 달아나고 싶을 때가 있다구요. 그때 무엇이 나를 잡아줬는지 아세요? 그래도 여긴 명훈
씨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버리고 떠날 마음이 싹 가셨다구요."
그러는 그녀의 두 볼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명훈은 잠시 무엇에 홀린 기
분이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까닭 모르게 섬뜩하기까기 했다. 하지만 이번
에는 지난날 그토록 그녀를 혐오하면서도 그녀와의 질척한 관계 속으로 되끌려들어가게 만
들던 그 눈물이 그의 감동을 가로막았다. 너도 나이를 먹으니 말을 배우는구나, 하지만 네
눈물에는 더 이상 속지 않겠다- 이내 그런 기분이 되어 자르듯 말했다.
"그래도 안 돼. 너와 나의 이 세상에서의 인연은 이제 끝났어. 내가 오고 싶지 않으면서도
여기 온 것은 아무래도 이 말을 해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가 정말로 신파극의 주인공처럼 명훈의 다리를 끌어
안고 매달렸다.
"잠깐만요. 조금만 더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그러면서 명훈은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눈물로 번들거렸다. 그게 명훈을 더욱 짜증나
게 만들어 그도 신파극의 배우처럼 과장된 동작으로 그녀를 뿌리쳤다. 그녀 특유의 친친 감
기는 듯한 느낌도 소름끼칠 만큼 과장되게 전해왔다.
"이거 놔. 더 들어볼 말도 없어."
그러자 그녀가 전과 달리 순순히 다리를 감고 있던 두 팔을 풀었다. 그녀가 스스로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절로 힘이 다해 스르르 풀리는 것같은 그 느낌이 명훈의 기분을 묘하게
헝클어놓았다.
"뭐야? 말해봐."
방문 쪽으로 몇 발자국 옮겨간 명훈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아무래도 그대로 떠나
서는 안 될 것 같은, 뭔가 수상쩍은 느낌 때문인지도 몰랐다. 모니카가 흐르는 눈물을 닦으
려고도 않고 그윽이 명훈을 올려보다가 말했다.
"정말 절 다시는 모지 않으시겠어요? 이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는 건가요?"
"그래. 그럴 수도 없구, 그래서도 안 돼."
"불편하게 해드리지 않을게요. 한 달에 한 번도 어려우면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찾아주실
수 없어요? 이 근처에는 얼씬도 않고 기다릴게요."
거기서 명훈의 마음은 다시 흔들렸다. 하지만 새파란 눈길로 파들거리는 경진의 얼굴을
떠올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안됐지만 이쯤에서 끝낼 것은 마땅히 끝내야 한다.
"잘 들어둬. 이건 불편하다거나 시간이 없고의 문제가 아냐. 관계 그 자체의 문제야. 이젠
너와의 악연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 세상에서는 다시 너와 얽히고 싶지 않단 뜻이야."
명훈은 다소간 위악적인 기분마저 느끼면서도 한마디 한마디를 자르듯 차갑게 말했다.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일순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 한참이나 명훈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제서
야 절망적인 진상을 알아차렸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도 모두 진심인데 그럼 어떡해야지..."
명훈에게라기보다는 혼자만의 중얼거림 같은 그 말에 명훈은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뒤이
어 처연한 넋두리가 쏟아질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방을 나오는 명훈의 귓전에
들리는 말은 마구잡이 넋두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한번은 더 생각해봐주세요, 네? 전 여기서 내일까진 가만히 기다릴게요."
역시 별로 경험이 없는 그녀의 차분함이었다. 그게 일껏 무거운 짐을 벗어던졌다는 기분
으로 방문을 나서던 명훈에게 새롭고 이상한 무게로 느껴져왔다. 아무것도 벗어던진 게 없
다는 기분까지 들게 할 정도였다. 명훈의 그 같은 기분은 아무도 없는 빈집으로 돌아와 홀
로 생각에 잠기면서 더해갔다. 분명 그럴 권리가 있음에도 작은 원망의 기색조차 없던 그녀
의 태도가 먼저 마음에 걸려왔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보고 지난 세월을 냉정히 따져보
면 그녀가 실제적으로 자신에게 해악이 되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불행으로 비뚤어
진 그를 맞아 베풀 수 있는 한의 위로와 도움을 베풀려고 애썼다는 편이 옳았다. 처음부터
그녀 쪽에서 일방적으로 다가왔고 자신은 언제나 탐탁지 않은 마음으로 맞아들이기만 했지
만 십 년 세월에 고인 정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특히 안광에서의 일 년과 지난해의 열
달은 생활 공간을 함께한 것이라 사실상의 혼인 관계나 다름없는 세월만도 이 년이 넘는 셈
이었다. 스스로는 마음 한구석으로 끊임없는 경멸과 혐오를 품고 있었다고 주장해도 엄밀히
따져 그 경멸과 혐오가 실효 있는 감정일 수는 없는 듯했다. 다만 그녀의 사랑을 받나들이
는 점 특이한 감정 양식일 뿐이라는 편이 옳았다. 거기다가 남의 눈에 비치는 삶의 방식이
야 어떻든 그녀가 명훈에게 드러내보인 애정과 헌신은 돌이켜보기엔 새삼 애처로울 지경이
었다. 그 자신으로 보면 치를 떨고 돌아섰을 인간적인 모멸을 가한 뒤에도 손만 벌리면 환
하게 웃으며 다가들던 그녀였다. 그걸 정말 주인의 휘파람 소리에 달려오는 개, 혹은 백치의
영혼 없는 사랑으로 단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이 세상에서의 인연은 끝났다고 단정해서인지 홀로 앉아 돌이켜볼수록 명훈의 감정
을 그녀에게 우호적으로 변해갔다. 정말로 싫었으면 처음부터 얽혀들지 않았어야 하고, 한번
받아들였으면 무언가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감정의 실체를 인정했어야 했다. 그런데
도 나는 처음의 감정만을 무슨 권리처럼 고집하여 인간적인 모멸을 계속해서 가해온 것은
아닌가. 더욱 나쁘게는 비뚤어진 욕정을 발산하는 손쉬운 수단으로 그녀를, 그녀의 치정을
이용해오지는 않았는가... 하지만 그것도 무슨 운명인지 명훈의 그 같은 감정의 변화가 견딜
수 없는 죄의식으로까지 번지게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날따라 일찍 퇴근한 경진이 더 이상
의 감상적인 전개를 차단한 탓이었다.
"웬일이세요? 무슨 걱정 있으세요?"
그때 명훈은 문득 모든 걸 경진에게 알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출산이 임박한
그녀의 부른 배와 거북한 거동이 그 유혹을 떨쳐버리게 했다. 모니카의 일이라면 웬만한 것
은 다 알고 있는 그녀라지만 또다시 그들 주의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려 가뜩이나 힘
든 그녀를 더 힘들게 만들 까닭은 없을 성싶었다.
"아니, 응. 조금..."
명훈은 그렇게 얼버무리고 낮에 다녀간 사내의 얘기로 둘려댔다. 경진도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거절해 보냈으면 됐네요. 잘하셨어요. 우리집 문제는 형편 돌아가는 걸 보아 정하죠, 뭐.
우리다 감당할 수 있으면 어떻게 건질수 있도록 힘써보는거구, 정히 안 되면 셋방 나가는
거죠."
그렇지만 명훈은 끝내 아무런 내색 없이 그날 밤을 넘길 수는 없었다. 저녁상을 물리기
바쁘게 집을 나간 그는 술이 거나해서야 돌아왔는데 그때까지도 여관방에서 우두커니 기다
리고 있을 모니카의 모습이 눈에 밟혀왔다.
다음알 아침 전날과 비슷한 시간에 명훈은 다시 어제의 소년으로부터 모니카가 보낸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전날과는 달리 꽤나 두툼한 편지였다.
명훈씨에게.
날이 하얗게 밝도록 오시지 않는 걸 보니 이제 내가 떠나야 할 때가 된 모양이군요. 명훈
씨는 언제나 나를 영혼이 없는 여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좋은 시 한 구절쯤은 나도 기
억할 수 있답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어떤 손님이 외던 시사 생각나네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때는 정말 이상한 시도 다 있다 싶었고, 그래서 더 잘 기억하게 됐는지도 모르지만 이
제 와서 보니 절실한 시였네요. 아시지요? 일생 내가 얼마나 명훈씨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
어했는지를요. 하지만 또한 잔인한 시네요. 세상에는 떠날 수 없는 사람도 있잖아요? 떠나서
는 살 수 없는 사람 말이에요. 그 사람에게는 떠나는 것은 죽음이고, 보여줄 수 있는 뒷모습
도 죽은뿐인데, 그것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영혼이 없는 여자에게는 고통도 없을 것 같
지만 꼭 그렇지도 않을 거예요.
이 세상 사는 고통을 이런저런 이치나 구실로 추슬러줄 영혼이 없어 거욱 고통스러울 수
도 있어요. 그런레 왜 그리 되었는지 모르지만 명훈씨는 한번 만난 뒤로 내가 이 힘들고 추
잡스런 세상을 참고 살아가야할 구실이 되어주었어요. 명훈씨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고, 만
날 기약조차 없는 사람일 때도 대가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명훈씨가 있기 때문이
었다면 믿어주실는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때처럼 미련스러운 믿음조차 품을 수 없게 되었으
니 억지스레 살아야 할 구실도 없어진 셈이지요.
그리고 또한 명훈씨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저는 틀림없이 많은 남자를 겪었어
요. 그게 무엇보다도 명훈씨에게 무시당한 원인이었겠지만 그래도 이건 알아주셔야 해요. 애
가 안기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건 명훈씨 한 분뿐이었어요. 이 마당에 무슨 구구한 소린가 싶
으실 테지만 그래도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명훈씨. 그래도 원망하지
는 않겠어요. 스물아홉이란 나이, 결코 길게 산 것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나마 명훈씨마저 없
었다면 내 삶에 무엇이 남겠어요? 부디 행복하세요.
1971년 4월 28일
인순 드림
다 읽고 난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섬뜩해져 몸을 떨었다. 도대체 그녀가 이렇게 긴말을
이토록 조리 있게 할 소 있다는 게 놀랍다 못해 어떤 초월적인 힘까지 느끼게 했다. 죽음을
앞둔 영혼의 마지막 고양이었을까, 엉망이던 그녀의 맞춤법도 신기하리만치 가지런하기만
했다. 세례명을 모독하는 줄도 모르고 평생을 멋삼아 본명처럼 써오던 모니카란 이름 대신
원래의 촌스런 이름을 쓴 것도 예사롭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영혼이 없는 여자도 자살할 수 있구나. 이여자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명훈은 그런 두서
없는 생각에 내몰리듯 대문을 잠그는 것도 잊고 집을 뛰쳐나갔다. 아직 아침나절이어선지
여관은 조용했다. 접수 창구에서 졸고 있던 아주머니가 명훈이 올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
일러주었다.
"그 손님 반시간 전에 나갔어요. 밤새 잠 안 자고 기다리던 눈치던데."
명훈은 다시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나가보았다. 그어나 거기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자 이제 두번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단순한 예감 이상의 확신으로 명훈을 섬뜩하게 하면서, 떠나는 그녀의 귓모습을 지켜보아주
지 못한 자신의 비정을 자책하게 만들었다.
명훈이 모니카의 죽음을 안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한편으로는 그녀를 찾아볼 엄두
가 나지 않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예감이 미련에서 비롯된 기우이기를 빌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명훈이 잘 아는 색시 하나가 거침없이 집으로 찾아들었다. 모니카
와 언니 동생, 하면 지내는 사이로 개업할 때부터 죽 그 술집에서 일해온 나이든 아가씨였
다.
"아저씨,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시면 잠자코 따라오세요."
그녀는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는 어머니와 인철을 전혀 아랑곳 않고 명령조로 차갑게 말했
다. 함께 있을 때는 상냥그럽기 그지없던 아가씨였다. 그녀가 명훈을 데려간 곳은 변두리 시
립병원 영안실이었다. 모니카다 그 분별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은 전날이었던 듯, 시신은 이미
입관된 채 영구차에 올려져 있었다. 낯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아가씨 몇과 넋 나간 듯한
모니카의 어머니가 기묘한 침묵으로 명훈을 맞았다. 영구차는 명훈이 오르자마자 화장터로
향했다. 차가 시가지를 벗어날 무렵 모니카의 어머니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4,19 나던 해 우리 애와 뚝섬에서 뱃놀이한 적 있어?"
"그런... 것 같습니다. 네. 그랬어요."
아무래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걸 난감스러워하던 명훈이 부옇게 안개라도 낀 듯한 머릿속
을 더듬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재는 거기에다 뿌려달래. 자네 손으로."
모니카의 어머니가 여전히 덤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놓고 한숨 섞어 덧붙였다.
"내 인생은 전쟁이 망쳤지만 이 아니는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지..."
"..."
"정말 착한 아이였지. 일생 남에게 죄진 적 없어. 언제나 남이 얘한테 죄를 지었지. 내 딸
이라고 하는 소리가 아냐."
"..."
"그런데 내가 지금 왜 이리 점잖은 줄 아나?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이 속을 어째서 이
리 누르고 있는지 아나? 바로 인순이의 유서 때문이야. 살았을 때 남에게 큰소리 한번 해본
적 없는 게 나보고는 갖은 악담으로 협박했어. 만약 내가 한마디라도 자네에게 막말을 하는
날이면 죽어서 악귀가 되어서라도 찾아와 그 원수를 갚겠다는 거야."
제38장 모천 회귀
"내가 배지로(공연히) 니를 여다 뿔들어논 게 아인가 몰라. 장터 국밥집에라도 밥을 부치
게 했으믄 멀건 소뼈다구 국물이라도 자주 얻어먹을낀데. 참말로 니 이래 먹고 공부 해낼
라? 여사(예사로) 힘든 공부가 아니라 카든데."
아침 밥상을 치우면서 주계 할매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예순은 넘긴 나이지만 생기 바
르기뿐만 아니라 수다로도 동네의 어떤 젊은 새댁네에 뒤지지 않는 할머니였다. 그러나 그
날은 그저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치우고 있는 밥상이 인철의 열중과 소
모에 비해 부실하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보리와 쌀이 반반 섞인 밥에 된장뚝배기와 김치
보시기, 그리고 산나물국이 모두인 밥상이었다.
"또 씰데없는 소리. 아니, 그래믄 큰집 아아들이 이 돌내골 와서 장터 것들한테 밥을 부쳐
먹어야 한단 말가? 지하만 해도 몇 집인데... 장캉 밥캉이라도 당연히 여다서 먹어야지. 여러
소리 말고, 오늘 장이니쎄는 임고기쟁이한테 가가주고 고등어나 한 손 사온나."
일을 나가려던 주계 할배가 눈을 흘기며 그렇게 타박을 주었다. 옛날보다 기세는 많이 죽
었지만 가장으로서의 권위는 잃지 않겠다는 결의는 살아 있었다. 주계 할매가 따발총 같은
수다로 받아쳤다.
"저 신농씨 같은 양반 머라 카노? 세상이 어떤 세상이라꼬, 안죽고 굶지만 않으믄 단 줄
라는 모양이제. 새마을 노래도 못 듣고 오개년 계획도 모리나? 앰프 소리 귀동냥망 해도 그
만 거는 알따마는, 요세 서울 세상에 우리맨치로 꽁보리밥에 장캉 먹는 집이 어딨노? 서울
은 집집이 쌀밥에 고깃국이라 카더라. 자도 거다서는 그래 먹고 지냈을 게고 모리믄 가마이
있기나 하지, 짤아빠진 재고등어 한 손 사오는거 가지고 개나 잡아구는 거맨치로..."
그러자 주계 할배가 해진 조끼 주너미에서 꼬긋꼬깃한 백원짜리 한장을 꺼내놓았다.
"그래믄, 화산이한테 가가주고 돼지 잡았거든 육고기나 한 근 끊어온나."
여전히 성난 사람처럼 말을 그렇게 해도 6년 전 인철이네가 돌내골에 살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양보였다. 대단한 게 아닌 줄은 알지만 어쨌든 자신 때문에 생긴 시비라 인철
은 공연히 미안해졌다. 주계 할배를 따라 일어나면서 진심으로 제안해보았다.
"할머니, 먹는 건 이만하면 충분해요. 하지만 정히 마음에 걸리시면 제 돈 좀 드릴까요?
집에서 하숙비로 받아온 존 그대로 있어요."
그러자 주계 할매가 말 그대로 펄쩍 뛰었다.
"야가 머라 카노? 참말로 환갑 진갑 다 지내고 친정으로 쫓개가는 꼴 볼라 카나? 저 영감
쟁이 저래도 꼬꾸장한(꼬부라진) 소가지는 안죽 살았데이. 요새는 기운이 떨어져서 옛날처럼
고래 괌(고함)을 못 지르이 한분씩 나대(덤벼들어)보기는 하지마는, 한푼이라도 니 돈 받았
다가는 이 집에 괴변난다, 괴변나."
"그럼 저 신경쓰지 마시고 늘 해드시던 대로 해드세요. 그래야 제가 편하죠. 아니면 정말
어디 하숙이라도 구해야겠어요."
"아이다, 그것도 그양 해본 소리라. 니 쪼매도 맘쓰지 마라. 말이사 바른말이따마는, 너어
할배가 원체 오랜만에 들따보는 너어 아제들한테도 닭 한 마리 못 잡아주게 하는 숭악한 구
두쇠 아이라? 요새 밥에 그만큼 쌀 섞는 것도 니가 우리집에서 밥 먹는 덕이라."
그렇게 대답하는 주계 할매의 말투에는 어딘가 장난기가 느껴졌다. 인철은 좀 전의 시비
가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진정한 까닭을 알고 싶었다.
"그럼 왜 일 나가시는 할배를 그렇게 몰아대셨어요?"
인철이 그렇게 묻자 주계 할매는 숨김없이 장난기를 드러내 웃으며 말했다.
"야야, 그게 참 이상트라. 요새는 늙어가면서 왜 너어 할배 젊을 째 내 속 쎅인 일만 자꾸
떠오르노? 그래고 그게 왜 인제 와서 도로 다시 분하노? 그래다 보이 일마자 어예믄 저누
무 영감쟁이 허패를 한분 뒤집노, 하는 궁리뿌이라."
"할배가 젊을 때 할매 속을 썩였어요? 아니, 할배가 어떻게?"
인철은 그들에게도 젊은 날이 있었다는 게 도무지 상상이 안 돼 그렇게 되물었다. 네 속
내가 다 안다는 듯 주계 할매가 악의 없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자가 우리도 젊을 때가 있었다 카이 영 못 믿겠는 모양이제? 그카지마라. 너어 할배 지
금은 저래 쪼그랑망탱이가 됐는마는 젊을 때는 억시기 참했디라. 하얀 명주 바지저고리에
옥색 두루마기 걸쳐놓으믄 그양 하늘오 폴(포르르) 날라갈 듯했니라. 뿐이가? 풍정도 있고
재물 뿌릴 줄도 알았제."
처음부터 늙은 주계 할배밖에 본 적이 없는 인철로서는 더욱 상상이 안 닿는 말이었다.
"그래이 열 기집이 마다하겠노? 한번은 야학 선생으로 온 신식 여자를 꼬와(꾀어) 만주까
지 달라뺀 적이 있었디라. 셋째아재 이름이 왜 중태가 됐는동 아나? 그때 너어 할배 찾을라
고 팔삭 잉부(임부)가 만주까지 갔다가 거다서 낳아 중국이라 카는 중자를 써서 그래 된 게
라."
그렇게 시작된 주계 할매의 얘가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주계 할배가 이백 석은 착실하
던 윗대 살림을 다 난리도 뒷날의 인색하고 고집스런 농부로 눌러앉게 되기까지의 경위였
다. 그러다가 갑자기 인철이 하고 있는 공부를 떠올렸는지 급하게 말을 끊었다.
"참, 내 정신 함 봐라. 바쁜 아 뿌뜰고 수다시럽기로... 니 얼근 정자 나가봐라. 우리도 오
늘 모판 붓는 날이따."
그러고는 부엌으로 내려가 급하게 설거지를 했다. 주계 할매가 그렇게 몰아대듯 하니 인
철도 공연히 늦었다는 기분이 들어 급하게 주계댁을 나왔다. 정자가 있는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벼랑처럼 가파른 개울 쪽에서 등성이를 덮고 있는 참나무붙이의 잎새들이 눈부실 만큼
푸르렀다. 대개가 수령 몇백 년이 되는 아름드리라 한창 피어난 잎들과 어울려 더욱 장관을
이루었다. 돌내골에 살 때가 어렵고 힘들어서였을까, 인철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언덕은 언
제나 썩고 뒤틀린 고목 등걸과 쓸쓸하게 휘날리던 낙엽들뿐이었다.
'같은 언덕이라도 보기에 따라서는 이렇게 다르구나. 정말로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할 뿐인가...'
인철은 오감의 부실함을 새삼 절감하며 길섶 바위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사법 시험 쪽으로 마음을 정한 뒤 인철이 처음 부딪친 것은 응시 자격
문제였다. 상식만 믿고 누구든 응시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시험 요강을 보니 그게 아니었
다. 일반 대학을 졸업하거나 법대 3년을 수료해야 응시 자격이 있었다. 대학 2년도 F학점투
성이로 겨우 채운 인철은 잠시 당황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그 시험에 응시하는 게도
검정고시와 같은 성질의 자격 고시가 있다는 점이었다. '사법 및 행정 요원 예비 시험'이라
는 긴 이름으로 바뀐 이전의 보통 고시가 그랬다.
인철이 급하게 알아보니 공교롭게도 그해는 5월 초순으로 이미 시험일자 공고가 나와 있
었다. 남은 날을 계산해보니 50일이 채 안 됐다. 달리 길이 없는 인철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그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전공에 마음이 없어 강의실과 강의실 사이를 배회하던 시절에 법
학통론이나 경제원론 같은 것들이 요긴하게 도움이 되었으나 워낙 시간이 모자랐다. 그런데
그것도 운명의 한 변형일까, 가망 없는 기분으로 시험장을 나섰는데도 한 달 뒤 신문에 난
합격자 공고에는 인철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때까지도 몽롱하기 짝이 없던 인철의 삶을
더욱 예측할 수 없는 국면으로 몰아넣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운 좋은 합격은 여
러 가지 이득을 주었다. 그 첫째는 인철 스스로 받게 된 이득이었다. 명확한 목표가 생김으
로써 대학 진학 후 줄곧 그를 괴롭혀온 정신적인 반항에서 벗어나게 된 일이 그랬다. 그 다
음은 식구들의 지원이었다. 인철의 사법 시험 응시를 걱정스럽게만 보아오던 형도 그 신속
하고 명확한 결과를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고시를 옛날의 대과로 보면 이건 초시다. 이초시, 잘해봐. 내 등골이 다 빠지더라도 장원
급제할 때까지 뒤를 대보지. 판,검사로 임용되고 안 되고는 다음 문제야."
그러면서 뒤늦게 사법 시험에 열을 올렸다. 인철의 이름이 들어 있는 신문의 합격자 공고
를 찢어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기회만 있으면 꺼내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그 한 달 무
슨 일인가로 축 처져 있건 사람같지 않은 활기였다. 그저 믿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걱정까
지 하던 어머니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각을 바꾸었다.
"이왕 벌인 거이 원이나 없거로 되기나 해봐라. 혹 아나? 그 사이 세월이 바뀌믄 니도 판,
검사 자리에 처억 앉을 수 있을지."
그리고 전에 없던 비원까지 걸었다.
"하기사 니가 고시 되믄 할매가 말하던 삼대 불하당(삼대안에는 당상관이 나온다는 뜻)까
지는 못 돼도 양반집 면체면은 할따. 아무리 요새 세상이라 카지마는 벼슬 귀한 거야 다리
겠나(다르겠나)."
그 덕분에 인철은 이제 아무런 거리낌없이 시험 준비에 들어갈 수 있었다. 형수도 그 일
에는 반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법률 서적을 갖추는 데도 앞장서주었다. 어떵 때는 아직 1
차도 합격하지 못한 인철에게 2차 때 필요한 서적을 구해 내밀기도 했다. 인철이 돌내골로
내려오게 된 것도 그런 식구들의 격려 때문이었다. 열흘 전이었다. 대낮같이 벌겋게 취해 들
어온 형이 새로 시작하는 자의 열정으로 법률책에 빠져 있는 인철의 방에 들어와 말했다.
"여, 이초시. 이대로 공부가 되겠어?"
"이대로라니요? 이대로가 어때서?"
"내가 보니 고시 공부는 절에 가서 많이 하던데. 여긴 길갓집이라 시끄럽고... 이런저런 집
안일로 신경써야 하는데 괜찮겠냔 말이야."
그때만 해도 인철은 집에서 공부하는 데 별 불편이 없었다. 오래 집을 나가 떠돌면서 어
렵게 공부해온 터라 세 끼 걱정 없이 차려주는 밥 먹으면서 혼자 방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
도 너무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할 만해요. 넉넉지도 못한데 집 나가봤자 돈만 들고..."
그러자 형이 호기롭게 말했다.
"바로 그거야. 형이 놀고 있으니까 네가 청승 떠는 것 같아서 물어보았는더니... 돈 문제면
걱정 말아. 공부가 더 잘될 곳으로 옮기라구. 까짓 절 밥값 한 달에 얼마 한다구."
"그래두 제가 나가 공부하게 되면 한 달에 만 원 부담은 거 생길 거예요. 지금 우리 형편
에..."
"나 오늘 일자리 얻었어. 만 원 아니라 그 이상두 필요하다면 대줄 수 있으니까 더 능률
적인 환경으로 바꿔봐."
"취직을 하셨다구요?"
"그래, 겉보기엔 일 같잖지만 월에 이만원은 보장받았어."
그러자 인철의 생각도 달라졌다. 학숩의 능률을 높이는 환경 자체도 매력적이었지만 자신
의 지향을 대외적으로 공표해 물러서려 해도 물러설 수 없도록 하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었
다. 이유가 된다면 집을 나가 사법 시험 한 방향으로 힘을 집중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
다. 그날부터 인철은 공부하기에 마땅한 산사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평소 그쪽으로는 별로
발길이 없어 갈 만한 곳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몇 군데 이름만 들어 하는 큰 사찰이 있
어도 고시생을 받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고향 돌내골은 그러다가 우연히 떠올린 대안이었
다. 조용하고 공기 맑은 곳을 찾다 보니 고향에 있는 정자가 떠올랐고, 그곳이 항상 비어 있
었던 게 기억났다.
"돌내골로? 하필이믄 왜 거기..."
무엇 때문인지 어머니가 먼저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형은 어머니와 달리 찬성이었다.
"아니, 그거 괜찮겠다. 경치 좋고 조용하기로 치믄 어느 절 못잖고 장터에 밥집을 정하면
부실한 절 음식보다도 나을 수도 있지."
형은 그렇게 찬성의 이유를 밝혔으나 속뜻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곧 어머니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어머님은 돌내골에서 우리가 망했다는 것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그럴수록 더
그곳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그곳에서 옛말하며 살 수 있도록 해야지요. 당장도 그렇
습니다. 우리가 아직 망하지 않고 재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거기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도 괜찮습니다. 인철이게도 낯선 절보다는 자극이 되는 게 있을 거구요."
그리고 형은 인철을 따라와 작은 잔치까지 벌여주고 갔다. 또래의 친척 아저씨들과 옛날
따라다니던 건달들을 불러모아 술을 사주며 이미 나달나달해진 신문 공고를 내보이고 인철
이 금세라도 고시에 합격할 것처럼 허풍을 치고 돌아간 것이었다.
정자는 인철이 아침밥을 먹기 위해 나설 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정자 마루로 오르는 댓
돌에 멈춰서서 새삼스럽게 정자를 올려보았다. 먼저 '동악정'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건
물은 근년에 손을 봐 서까래와 회벽은 깨끗했으나 현판은 3백 년 전 그대로라 바탕이 되는
목판은 뒤틀려 있고 자획도 약간 어그러져 있었다. 인철이 알기로는 숙종조에 대사헌과 이
조판서를 지낸 조상 한 분이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지은 정자였다. 신발을 벗
고 마루로 올라선 인철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시 마루에 걸린 현판들을 돌아보았다. 목
판에 각자된 '동악정기'가 둘인데 하나는 참판인 권아무개였고, 하나는 인철도 그 이름을 들
어 아는 대산 이상정이라는 선비가 쓴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순씨팔룡'에 비유되던 조상
여덟 부자의 시들이 각자된 현판이 있고. 마지막으로 중수기가 걸려 있었다. 철종 연간에 중
수가 있었던 모양으로, 기를 쓴 사람은 바로 인철의 5대 할아버지였다. 전에도 인철은 그것
들을 훑어본 적이 있었다. 열 평 남짓한 정자에 지나친 말의 사치란 생각이 들었으나 그날
은 왠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 현판들에 더께 앉은
세월의 무게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철은 정자 난간에 기대 한참이나 앉았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바깥과는 달리 거기에는
현대적인 공부방이 펼쳐졌다. 앉은뱅이책상 위 이층 책꽂이에는 법전과 법률학 책들, 그리고
1차 시험을 위한 객관식 문제집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책상에 펼쳐진 것은 어울리지 않
게도 영어 사전과 그 무렵 영어 독해력을 기르기 위해 읽고 있던 펭권판 <인간의 굴레>였
다. 그 곁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가 있어 책상 위의 어지러움을 더했다. 방바닥
도 어지렵혀져 있기는 책상 위와 다름없었다. 쓰러져 있는 빈 물주전자와 두 개의 물컵, 빗
자루와 쓰레받기, 그리고 개지 않은 이부자리... 인철은 어질러진 방안을 들여다보다 문득 자
신이 무슨 큰 불경스러운 죄라도 짓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일주일째 청
소를 하지 않은 방이었다. 인철은 먼저 널부러져 있는 이불부터 개고 재떨이를 비웠다. 그리
고 다시 장바닥을 비로 쓸고 있는데 무언가 나무 막대 같은 것으로 돌을 두드리는 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가 정자 쪽으로 다가왔다. 이어 정자 마루 위로 똑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래 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나?"
인철이 빗자루를 든 채 문을 열어보니 집안 할아버지 한 분이 지팡이에 기대 숨을 헐떡이
고 있었다. 동곡 할배였다. 6년 전인가, 인철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해소로 숨을 헐떡이
고 있어 그리 오래 사시지 못할 것 같았는데, 거의 변함없는 모습으로 찾아온 걸 보자 인철
은 까닭 모르게 신비한 기분이 들었다.
"네에..."
인철이 무어라 응대할 줄 몰라 그렇게 우물거리자 동곡 할배가 왠지 흘기는 듯한 눈빛으
로 인철의 아래위를 훑어보다가 말없이 방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제서야 인철은 황급히
빗자루를 놓고 큰절을 올렸다.
"니가 큰집 둘째라? 이름이 뭐라 캤제?"
"인철입니다."
인철이 공연히 죄진 기분이 되어 무릎은 꿇은 채 대답했다. 동곡 할배가 이제는 못마땅함
을 완연히 드러내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방금 주계장(주계 할배)아 찾아 머라 카고 오는 길이따. 니 여기 온 지 얼매 되노?"
"아제 한 일주일 됩니다."
"그럼 요놈아, 니는 아도 없고 어름도 없나? 명색이 어른인데 내가 똑 이래(이렇게) 찾아
와 니를 봐야 될라?"
"죄송합니다. 미처 생각을 못해..."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인철이 절로 떨려오는 목소리로 사죄했다. 잡안의 가장
나이드신 분이면 마땅히 찾아뵈어야 하는데 잊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이래 한심타. 집안이 짜가리짜가리(조각조각)나디 인제는 아, 아른도 없어졌구나.
하기사 주계장이까지 그 모양이니 철없는 니를 나무래 뭐 하겠노? 글치만 아이다. 아무리
세상이 망해도 인사를 폐해서는 안 된다."
동곡 할배는 한숨까지 내쉬며 그렇게 한 번 더 나무라놓고서야 목소리를 풀며 물었다.
"그래, 큰집 종부는 잘 있나?"
이어 서울의 가족들 소식은 묵는 그 목소리에는 끈끈한 정이 배어 있었다. 인철은 그 정
에 더욱 당황해하며 어머니와 형의 근황을 공손히 답해주었다. 그런 마음가짐과 태도가 어
느 정도 전해졌는지 동곡 할배도 곧 노여움을 풀었다.
"하기사 내가 너무 오래 살았제. 상고머리 아가 헌헌장부가 됐으이 이기 몇 년 만이로?
그때도 헐떡헐떡하던 내가 안죽 살아 있는 줄 니가 어예 알았겠노? 글치만 원래 해소란 게
수(수명)하고는 관계없다는 말이 있니라. 편작이 숙부도 해소가 있었지만 수를 감할까봐 편
작이가 고쳐주지 안 했다 카이께는."
그렇게 자신이 오래 산 탓으로 인철의 잘못을 덜어준 뒤에 다시 부드러운 타이름으로 그
일을 모두 풀어버렸다.
"그래도 그게 누구든동 집안 어른들 인사는 잊지 마라. 내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닭실 아
재와 천전이도 하마 칠십객이 다됐으이 딜따(들여다)봐야 된데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동곡 할배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니 고시 준비한다꼬?"
"네. 한번... 시작해보았습니다."
"그게 옛날 과거 같은 거라믄 들은 말이 생각난다. 여암 할배 그리 되신 뒤로 우리 집안
에사 과거를 보러 가믄 노론 시관들이 그 시관을 깔쥐뜯고(집어찢고) 저끼리 눈짓하며 '안
리! 안리!' 캤다 안카나?"
하지만 인철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어려운 가운데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안리안 우리 안릉 이씨를 가르키는 말이라. 노론이 얼매나 여암 할배한테 시껍했으믄(호
니 났으면) 그랬겠노?"
그래도 인철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노론이 혼이 나다뇨?"
"야가, 니는 역사도 안 배왔나? 니 우암(송시열)이 남인 때메 죽은 거는 알제? 그런데 노
론은 그걸 모도 우리 여암 할배 탓으로 돌리고 그래는 게라."
그제서야 인철에게도 잡혀오는 역사의 구도가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이란 역사적인 거목
과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안 할아버지처럼 느껴지는 여암 할배 사이에 가로놓인 거
리감 때문에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저도 들은 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째 통..."
조금 마음을 놓은 인철이 솔직하게 자신의 기분을 드러냈다. 인철에게는 문중이 앉으나
서나 내세우는 여암 선생의 전설이 어쩐지 몰락한 토반의 자위로만 느껴졌다. 동곡 할배가
왠지 다시 엄해진 눈길로 인철을 보며 물었다.
"뭐가 말이로?"
"도무지 제가 배운 역사에는 여암 할배가 전혀 나오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늘 우암 송시
열과 나란히 놓고 말한다는 게."
그러자 동곡 할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우암 선생, 그분 큰사람이제. 저어끼리는 송자라꼬까지 높이는 모양이더라마는, <
우암문집>을 <송자대전>이라 칸다든강... 그러이 여암 할배가 그런 큰사람하고 맞서 싸왔다
는 게 영 안 미덥단 말이제?"
"역사뿐만 아니라 이 지방 떠나면 도무지 여암 선생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요. 대사헌
이조판서 했다는 말도..."
"그거사 당연하제. 남인이 조정에 못 들어간 게 하마 몇 년이로? 삼백년이따, 삼백년. 영
조 때 번암 선생하고 몇몇이 탕평책으로 쪼매 빛을 봤지마는 그것도 기호 남인 얘기고 대원
군 때 낙동 대감이 잠시 좌의정 지낸 게 삼백 년 만에 유일하게 벼슬살이다운 벼슬살이랬
다. 그래고는 모도 노론이 잡고 있었으이 어예 됐겠노? 임금까지 죽인 그 숭악한 놈들이 무
슨 짓인들 못 할로? 여암 할배를 의리 죄인으로 몰아 동서남북 귀양 보내 죽여놓고도 모자
래 돌아가신 뒤까지 문자록에 그양 푹 파묻어놨디라. 니 <여암집> 봤나?"
"아직..."
"니 요새 흔한 거 보고 그 책 아무따나(함부로) 생각하지 마래이. 순조때까지 그저 찍는
사람은 목숨을 걸어야 했고 읽는 사람까지 성찮았데이. 요새 말로 불온 서적이라도 그런 불
온 서적이 없었제. 뿐이가? 여암 할배가 죄적에서 풀리고 시호 도로 찾은 게 겨우 고종 때
라. 그때까지 만고에 대역죄인이 돼 있었단 말이따. 참말로 눈알이 빠져도 그만하기 다행이
제, 그대로 합병돼 조산 망했으믄 어옐 뿐 했노? 박정희한테 가서 풀어달라 칼 수도 없고..."
인철에게는 그 감정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으나 동곡 할배의 얼굴에는 정말로 천만다행이
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 철저하게 파묻어놨으이 우가 여암 할배를 알고 역사책에 올리겠노? 글치만 니 생각
해봐라. 서로 싸웠다는 거는 그만큼 제배(상대)가 되어 싸운 거 아이라? 다른 사람은 몰라
도 자손된 너는 그래믄 안 된데이. 조상 내력은 알아야 된데이."
동곡 할배는 그렇게 말해놓고 인철에게도 어느 정도 귀에 익은 여암 할배의 전설로 들어
갔다.
"참말로 너어는 알아야 된데이. 여암 할배가 얼매나 대단한 분인동. 미수 허목 선생이 천
거해 임금께서 불렀는데 그 사자를 위해 안동부에서 우리 돌내골에서 새로 길을 닦았디라.
처음 내린 벼슬은 이조좌랑이었지마는 여기서 서울까지 가는 동안에 어예 됐는동 아나? 재
하나 넘을 때마자 품계를 올려 광주에 이르이 이조판거가 돼 있었는 게라. 임금의 기대가
얼매나 컸으믄 그랬겠노?"
동곡 할배는 그렇게 열을 올렸으나 인철에게는 여전히 그리 실감나지 않았다. 그저 미수
허목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있어 생판 만들어낸 얘기는 아닐 거란 짐작이 갈 뿐이었다.
동곡 할배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옛 영광을 되새기다가 갑자기 쓸쓸한 어조가 되어 문중의
몰락사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뒤 우리 문중에서 지 발로 과장에 걸어들어간 적이 없다는 말은 실은 그래서 나온게
라. 가보이 뭐 하노? 언놈이 씨게조야(시켜줘야) 하제. 그래도 양반 행세하고 지낸 거는 학
문 덕이따. 실직으로 조정에는 못 들어도 앉은봉개(명예직)눈 뻔드르르해 족보사 그럴듯하
제. 그래다가 겨우 노론세도 끝나는강 싶으이 조선 망하고... 해방 뒤에도 글타. 새 세상은
온다꼬 우리도 우리대로는 준비했디라. 이런 꼴티기(골짜기)에 우리만큼 동경 유학생 많이
키운 말(마을)도 드물 께라. 하지만 그러이 뭐하노? 모도(사상적으로) 밸갛게(빨갛게) 돼와
가주고 맞아죽고 북으로 내빼고..."
그래놓고 헐떡이는 숨결을 잠시 가다듬은 동곡 할배가 말을 끊고 인철을 쳐다보았다. 늙
고 힘없는 눈길이었지만 무언가 뜨거운 열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중의 짐작이지만 간절
한 기대 같은 것이었다.
"그런게 니가 고시를 한다 카이 감회가 새롭다. 니 재주 있단 말은 들었다마는 그 고생하
며 컸는데 어예 그 공부할 여력이 남았노? 장타. 장하고 기특하다. 이거는 니 일신 영달을
위한 게 아이고 문중을 위하는 일도 된다. 우리 일가 모도 니를 쳐다보고 있을 테이께는 열
심히 해라. 내 살아 니 합격하는 거 못 보믄 죽어서하도 빌어주꾸마."
이윽고 동곡 할배는 그런 말로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들어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그 말이 주는 감동이었다. 동곡 할배는 촌수로도 열 촌이 넘고, 고히는 철저하게 왕조 시대
의 과거와 동일시되고 있었으나. 인철은 강한 전류에라도 닿은 것처럼 찌르르한 감동을 느
꼈다. 동곡 할배가 쿨럭거리며 돌아간 뒤에도 인철은 한동안 전자 마루에 걸터앉아 자신이
받은 감동의 원인을 따져보았다. 그 동안 억지스런 강요로만 느껴지던 문중이란 개념이 갑
자기 실감나는 인간 관계로 다가들고, 몰락한 토반의 자위로만 느껴지던 그 옛 영광이란 것
도 반드시 회복돼야 할 기득권의 일종으로 의식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다분히 감정적이
고 애매하기 짝이 없던 사법 시험 응시에 구체적인 당위성이 더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이곳
으로 돌아오길 잘했다. 비록 낡은 권력 지향일지 몰라도 저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제39장 발돋움
"이여사, 정말 시집 한번 잘 갔더만, 그참."
정사장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면서 별로 빈정대는 기색 없이 말했다. 억만이나 시집을 말
할 때는 언제나 가시 돋친 말을 곁들이던 그라 영희로서는 좀 뜻밖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웬일이세요? 정사장님. 오늘은 제 시집까지 비행기를 다 태우시고... 그래, 도시 계획 알
아보시니 어땠어요?"
"당장은 야산 등성이 배밭이지만 대단한 데더구먼. 제3한강교로 연결된 큰 길 있지? 성남
가는 큰길, 그게 지금은 그래도 알고 보니 10차선대로더라구. 강남대로라던가. 그리구 그 배
밭 앞으로 난 큰 길 있지? 그것도 8차선이더라구. 바로 남부순환도로하는 건데, 말하자면 서
울시 외왁을 한바퀴 빙 도는 도로야. 그대로 된다면 엄청난 요지가 되겠던데."
그것만으로도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배밭과 야산, 그리고 사이사이 농가가
띄엄띄엄 들어선 그 동네를 떠올리자 영희에게는 도무지 그런 도시 계획이 실감나지 않았
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계획이잖아요? 지금은 서울 축에도 못 끼는 말죽거리 한구석이
고, 그것도 그 유명한 싸리재 넘어선데..."
"아무리 조변석개하는 게 이 나라 도시 계획이라지만 이건 달라. 이렇게 큰 도로는 쉽게
안 바뀐다구."
"그렇지만 어느 세월에..."
"그럼 사대문 안은 생길 때부터 도심이었어? 흑석동 물건 되는거 봐. 중앙대 들어설 때만
해도 벌건 산등성이 밑에 판잣집 몇 채가 고작이었어."
"하지만 그게 하마 언젠데요? 벌써 이십 년이 다돼간다구요."
"사당동, 봉천동 쪽은 또 어쩌구? 그거 동네 같아지는 데 십 년 더 걸렸어? 거기다가 앞
으로는 더 빨라질 거라구. 인구는 나날이 불구, 강북쪽은 갈수록 휴전선에 가까워지니 결국
갈 데는 강남밖에 더 있어? 더도 말구 신사동 사거리 변하는 것만 봐. 그 배밭 있는 곳 도
로 계획 모양으로 봐서는 몇 년 전 신사동 사거리야. 그러데 그거 얼마 주겠다구?"
"평당 오천 원이랬지만 일, 이천은 더 내놓을 수 있다는 눈치 같았어요."
"도둑놈들, 내 보기에는 만 원도 싸. 보나마나 도시 계획 다 알아보구 덤빈 놈들일 텐
데..."
"하지만 실제 근처 농지 시세가 그 정도예요. 그런데 삼천 영이나 되는 큰 덩어리니까."
말은 짐짓 땅을 사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편들고 있었지만 그때 이미 영희의 마음은 결정
되어 있었다.
'시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하건 그 값에 배밭을 넘기지는 않으리라.'
"그거야 쪼개 팔면 되는 거지. 지적도 보니 지금도 몇 필지가 되던데."
정사장이 영희보다 더 열을 올리며 배밭의 값을 올렸다.
"그래도 이왕 팔 거라면 한꺼번에 사주겠다는 사람 있을 때 파는 게 낫잖겠어요? 아무리
요샛돈이라지만 삼천만 원 그거 작은 돈 아니라구요. 은행 이자만 받아도 어지간한 월급쟁
이 열 배 수입이 넘잖아요? 그렇게 목돈을 쥐어야 뭐든 해보지."
영희가 다시 그렇게 어깃장을 놓아보았다. 그제서야 정사장도 영희가 짐짓 해보는 소리란
걸 알아차리고 같은 어깃장으로 나왔다.
"하긴 오천 원에 팔아도 얼마야? 천오백만 원이 넘으니까 한 달에 십만 원씩 써대도 십
년은 걱정 없겠네, 그럼 팔라구. 그거 떨어지면 다른 땅도 있잖아? 성남에서 먹은 것도 있
고."
정사장이 그렇게 나오자 영희가 비로소 정색을 했다.
"실은 말예요, 처음부터 그들이 주는 대로 받고 팔 생각은 없었어요. 그해서 정사장님께
알아봐달라고 한 거예요. 하지만 정말 목돈으로 삼천만 원 쥘 수 있지만 팔아보는 것도 괜
찮지 않겠어요? 그걸로 다시 오를 만한 곳을 사들이는 수도 있으니까요."
"글쎄- 하지만 만만치는 않을걸. 결국 땅장사하겠다는 건데, 이여사는 아직 재미만 봐서
그거 어려운 줄 몰라. 거기자가 돈이란 거 뭉텅이 돈으로 들어오면 지키기 어려워. 우선 사
람들이 달라지거든. 부군 되시는 강억만씨 그 양반만 해도 그래. 그 드는 솜씨에 그냥 구경
만 하고 있을까? 내 보기에는 그 땅 그냥 지키며 버티기만 하면 십 년 안에 큰 쇼부 한번
올 것 같은데..."
정사장도 어깃장을 빼고 그렇게 받았다. 처음 거래를 시작할 때만 해도 뒤틀린 심사가 남
아 있어선지 정사장도 가끔씩 그런 속을 드러냈다. 그러나 한 일 년 오가는 사이에 이제는
제법 오라버니 같은 정을 보일 줄도 알았다. 지금도 나이든 사람의 신중함으로 영희를 생각
해서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럼 절반 정도는 팔아서 움직여보는 것은 어떻겠어요? 강남이 개발된다지만 어차피 한
꺼번에 어려울 거 아니겠어요? 아직 말죽거리까지 가려면 한찬 남았을 텐데 마냥 기다리고
있기보다는..."
"그게 쉽지 않으니까 그렇지. 이익이 큰 데는 위험도 많은 법이야. 하지만 하기에 따라서
는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 될 것 같네."
정사장도 거기까지는 말리지 않았다. 영희는 집에서 기다릴 시아버지를 생각하고 그쯤 하
고 일어나기로 했다.
"어쨌든 고마웠어요. 실은 그래봤자 땅주인은 엄연히 시아버님이니까... 가서 말씀드려봐야
어떻게 결정이 알지 알겠네요. 그런데 수고비는 모자라지 않으셨어요?"
"그거야 나두 사업상 알아야 하는 거니까. 실은 그 돈 안 받아야 하는 건데... 어쨌든 그걸
로 넉넉했어. 같은 일이라면 다음에는 따로 사례할 것 없이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정사장이 다시 그렇게 인정을 썼다. 역시 입으로만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다. 영희는 정사
장과 헤어지자마자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를 잡았다. 오후에 중개인이 오게 되어 있어
그전에 시아버지와 의논을 맞출 일이 급했다. 그런데 동네 어귀에서 차를 내린 영희가 시집
으로 들어가는 골목길로 접어들 때였다. 길모퉁이 구멍가게에서 억만이 쑥 나와 길을 막았
다. 들에 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억만이었다.
"어머, 당신이 웬일이세요? 어머님 점심 가지고 가지 않으셨어요?"
영희가 심상찮음을 느끼면서도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러자 억만이 아무 말
없이 영희를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좁은 가게 마루에 억만이 마시던 것인지 병에 남
은 사이다와 유리컵이 놓여져 있었다. 그걸로 미루어 억만이는 진작부터 영희를 만나려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듯했다.
"여기 앉아봐. 할말이 있어."
영희를 마루 끝에 앉힌 억만이 전에 없이 권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참 별일이네. 할말이 있으면 집에 가서 하면 되지, 남의 가게에서..."
영희가 좀 어이없어하며 그렇게 말끝을 흐리자 억만이 다시 한껏 위엄을 실은 목소리로
받았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할 수 없는 말이 있는 법이야."
그래놓고 안방 쪽을 살폈다. 방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주인은 억만이 동네 사람이라
미더운 탓인지 원하는 물건만 내주고 뭔가 다른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억만은
드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도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정사장이 뭐래? 배밭에 뭐 특별한 게 있었어?"
그 말에 영희는 한 번 더 섬뜻해졌다. 집을 나갈 때 누구에게도 정사장을 만나러 간다고
한 적이 없었는데 억만은 만나서 한 얘기까지 알고 있는 듯이 물어온 까닭이었다.
"정사장?"
영희는 먼저 정사장을 만나고 온 일을 잡아떼려 하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어 물었다.
"당신 내가 정사장 만나러 간 거 어떻게 알았어?"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구, 내가 누구야? 그저께 땅장사들 왔다 간 뒤 쑥덕거리
는 거 보고 감 잡았지. 그래, 뭐랬어?"
거기서 영희는 뜻밖의 복병을 만난 기분으로 잠깐 대답을 미루고 생각에 잡겼다.
'이 인간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지? 냄새를 맡긴 맡은 모양인데...'
그렇게 자문하다가 문득 그 속셈부터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 알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 전에는 시아버님하고 조하고 무얼 하든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 이번엔 웬일이세요?"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야. 그냥 없는 척했을 뿐이지. 그런데 이번에는 달라. 둘이서 쑥덕
거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지."
"그건 왜 그런데요?"
"첫째로 이건 덩치가 너무 커. 우리 땅 중에서 가장 크고 노른자위야. 둘째, 이런 기회도
흔치 않아. 그걸 한꺼번에 사겠다는 작자가 나선 건 이게 처음이야. 아무리 못났고 해도 집
안의 장남이 돼서 이번 일까지 아버지와 네가 쑥덕거려 결정하도록 내버려둘 수 는 없어."
억만이 눈을 처억 내리깔고 제법 조리 있게 말했다.
'이게 아주 등신은 아니었구나.'
영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대신 차갑게 반문했다.
"그래서?"
"내 말 못 알아들었어? 나도 좀 끼어야겠단 말이야. 그래, 도시 계획 알아보니 어땠어? 까
짓 거, 나도 알아볼 수는 있지만 이왕 정사장이 수고한 거니 나도 한번 들어보자구."
"서울이 지금처럼 발전해나간다면 한 이십 년 뒤에는 우리 배밭에 사거리가 나겠다더군
요. 10차선과 8차선 도로가 만나는 곳에서 멀지 않대요."
"그건 지금 봐도 감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거야. 달리 뭐 특별한 건 없었어? 이를테면 근
처에 관공서나 학교 같은 게 유치된다든가."
어쭈, 싶었으나 영희는 이번에도 내색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미안하게도 우리 도시 계획이 그리 상세한 것 같지는 않대요. 그런데 당신 생각은 뭐예
요? 당신이 나서봤자 들어주실 아버님도 아닌데..."
"그래서 이렇게 당신을 기다린 거 아냐?"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 이번에 그 땅 팔자. 들으니까 한 삼천만 원 쥐게 될 모양이던데."
"잘못 들었어요. 내민 값은 평당 오천이고 뻗대도 팔천에 넘기기는 어려워요."
"그러니까 삼천만 원 가까이 되잖아? 배밭 그거 일 정보에 귀가 달렸을걸."
"그 돈으루 뭘 하시려구요?"
"몰라서 물어? 언제까지 돈도 안 되는 농사 주무르고 있으라는 거야? 이 기회에 그거 팔
아서 좀 품위 있게 살자. 사람같이 좀 살아보자구."
"어떤 게 품위 있게 사는 거죠?"
"그 돈이면 신사동 쪽에 작은 빌딩 하나 지을 수 있잖아? 아래층은 우리가 점포 하나 큼
지막하게 열고 나머지는 세 주면 배밭농사 몇 배는 나올 거야."
"그러니까 사장님이 되어서 손에 흙 안 묻히고 편안히 사시겠다, 이 말이세요?"
"왜 이 강억만이는 그렇게 좀 품위 있게 살면 안 되나? 언제까지 냄새나는 거름이나 주무
르며 살아야 되는 거냐구?"
"하지만 장사 그거 아무나 하는 거예요? 당신 장사한다구 나서서 재미본 적 한 번이라두
있었어요? 게다가 미안하지만 그 돈으로는 신사동 빌딩 만져보지도 못해요. 자칫하면 목돈
들고 우왕좌왕하다가 뿌스럭돈 만들어 날리고 만다구요. 우리한테는 가장 큰 몫인 배밭만
날아가고 만단 말예요. 더군다나 당신 그 솜씨에..."
"그 얘긴 또 왜 꺼내..."
억만이 그렇게 목청을 높이다가 문득 생각이 바뀌었는지 제법 참을성 있게 나왔다.
"그럼 당신은 어떡할 작정이야."
"아버님께 좀더 기다려보자구 할 작정이예요. 이십 년이라구 했지만 요즘은 도시 개발 속
도가 전보다 훨씬 빨라졌으니까- 잘하면 몇 년 안에 큰 쇼부 날 것 같아서요."
"큰 쇼부라면?"
"정말로 사대문 안에 번듯한 빌딩 하나 살 돈이 나오거나- 바로 그 당에 빌딩을 지어도
수익이 날 만하게 되는 경우죠."
"그게 언제야? 그리구 빌딩을 짓는다면 무슨 돈으로 지어?"
"그때 가서 절반만 팔면 되죠. 그래도 대자기 천 평이 넘는 빌딩이에요. 당신이 지금 신사
동 쪽에 꿈꾸고 있는 코딱지만한 빌딩하고는 종류가 다르죠."
"그 여자 꿈 한번 거창하네. 야산 배밭에 발등을 짓는다구? 야, 듣는 개가 웃겠다. 싸릿재
넘어 야산 배밭에 지은 빌딩 천 평 아니라 만 평이면 뭘 해?"
억만이 그렇게 빈정거려놓고 다시 말투를 바꾸어 간곡히 말했다.
"여보- 그러지 말고 아버님께 말씀드려 이번 기회에 그 땅 팔도록 해요. 나도 이제는 더
못 기다리겠어. 기러기 한 백년 기다리다가 우리 좋은 시절은 다 가구 만다구. 적게 먹더라
두 편하게 살자."
"그럼 아버님께 직접 말씀드려보세요. 저는 이 집을 위해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만
말씀드릴 테니..."
영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화가 나 씩씩거리는 억만을 보고 나직
이 한마디 했다.
"여보- 이게 마지막 고비예요.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당신이 말하는 그 품위있는 삶도
가능해진다구요. 여기서 서두르면 정말 아무것도 안 돼요. 절 믿구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
요."
"언제가지 더 기다리란 말이야? 좋아, 알아서 해. 나두 이젠 참을 만큼 참았어."
억만이 그렇게 위협조로 나왔으나 영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왔다. 좀 불안하
기는 했지만 더 얘기해봤자 달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영희가 집에 돌아오니 시아버
지가 일을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어떻다든?"
영희가 방안에 들어와 앉기 바쁘게 시아버지가 물었다. 영희는 정사장에게 들은 대로 간
단하게 도시 계획을 전해주었다.
"나는 통 짐작이 안 간다. 8차선, 10차선이 뭔지 모르지만 그토록 큰 신작로가 나고 서울
이 여기까지 밀려온다니... 그건 그렇고 네 생각은 어떠냐? 그래도 땅값으로는 제법이고, 더
구나 무더기로 사겠다는데..."
한평생 농부로 살아왔고 땅이라면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겨왔지만 그새 영희에게서 보세
된 사고 파는 재미 때문일까, 시아버지도 이번에는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그러자 영희도
따라서 마음이 흔들렸다.
'맞아, 삼천원 만이면 무얼 해도 적은 돈이 아이냐. 한없이 기다릴 게 아니라 이쯤 해서
끝을 보고 말까-'
영희는 퍼뜩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음속으로 세게 도리질을 쳤다.
'아니야. 이렇게 해서 평생 밥술 걱정 않게 되는 것만으로는 안 돼. 그것만으로는 내가 세
상에서 받은 것을 더 갚지 못해.'
"하지만 아버님, 그 돈 당장은 커 보이지만 실은 어중간한 돈이예요. 물론 그걸 은행에만
넣어둬도 농사짓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그러나 요새같이 돈값이 덜어지는 때는 아무 보장도
못 돼요. 그렇다면 장사라도 나서야 하는데, 아버님이 안 해본 장사를 하시겠어요? 아니면
억만씨를 시키실래요? 거기다가 그 배밭은 우리 전재산이나 다름없어요. 만약 잘못되면 우
리는 그대로 알거지가 되는 거라구요."
영희가 억만을 들먹이자 시아버지는 당장 얼굴빛이 변했다. 갑자기 격한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장사를 왜 억만이를 시켜. 하면 어멈 네가 해야지. 정히 안 되면 다른 땅으로 사두었다가
다시 팔 수도 있을 텐데..."
"그것도 쉽지 않아요. 제가 지금 조금씩 하고 있는 것은 그럭저럭 재미를 본 셈이지만 몇
천만 원씩 하는 큰 덩어리는 자신 없어요. 거기다가 어떤 땅을 사든 결국 땅값 오르기를 기
다려 차액 따먹는 건데 그 차액이라면 우리 배밭에서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나아요."
"그럼 아직도 더 오른단 말이냐?"
"그러니까 더 기다려보자는 거예요. 만약 서울이 이쪽으로 발전해내려오면 평당 만 원, 이
만 원 문제가 아녜요."
"그래? 거 참 묘한 조화 속이다. 야산 배밭이, 그것도 나무가 늙어 이재는 배도 시원찮은
데, 그게 일등답보다 몇 배는 더 나갈 거라니, 아무리 서울이 그리로 온다 해도 거기 사대문
이 옮겨오는 것도 아닐 텐데..."
시아버지는 그러면서도 이미 팔 마음은 거두어들인 듯 했다. 농부답지 않은 의뭉스러움으
로 부동산의 이치를 더 알아보기 위해 짐짓 해보는 소리였다. 영희도 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는 없었으나 행여라도 시아버지의 마음이 변할까 겁나 자신없는 전망을 덧붙였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거기가 종로보다 더 북적거릴 수도 있대요. 특히 그런 사거리
는..."
"그럼 이따가 땅 사러 올 사람들은 그대로 돌려보내야겠구나."
그때 갑자기 마당에서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억만이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었다.
시아버지가 허옇게 눈을 흘기며 물었다.
"이가 웬일이냐? 약은 다 줬어?"
억만이 대답 없이 신을 벗고 들어오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이러시는 거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좀 실수를 했기로서니..."
그러는 억만의 숨결에는 진하게 소주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새 급하게 한잔 들이켜고 온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말 한마디 똑바로 못 하는 그 주변머리가 영희의 속
을 긁어놓았다. 그러나 영희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시아버지의 영정 섞인 목소리가 먼저
억만을 몰아세웠다.
"저놈 말하는 거 봐라. 내가 뭘 어쨌다구?"
"며느리도 자식이라고는 하지만 하마 성이 다릅니다. 아버님 아들은 이 강억만이라구요.
막말로 내가 좀 장사하다 좀 말아먹었다 칩시다. 밭떼기 장사하다가 한 이백만 원 말아먹었
다고 부지지간 천륜까지 끊어진 게 아닙니다아."
억만이 전 같잖게 뻗댔다. 시아버지가 어이없어하면서도 조금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입 꾹 다물고 있어도 알 건 다 압니다. 압구정동 논 판 돈 가지고 둘이서만
수군거려 처리할 때도 섭섭했는데 이거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배밭이라면 우리 남은 전
재산인데, 그걸 파는 데 나는 쏙 빼놓고 남의 성 가진 며느리만 믿는 거 말입니다. 이 집에
명색 맏아들이 누굽니까?"
그제서야 평소의 기세를 되찾은 시아버지가 호통으로 나왔다.
"저게 찢어진 입이라고 어디서 떠들어? 대낮에 술까지 마시구. 너 시방 나한테 야료 부리
는 거야 뭐야? 그래 지 새끼 안 믿어주는 애비는 섭섭하구, 지 새끼 못 믿어 며느리하고만
쑥덕거려야 하는 애비 속 터지는 거는 몰라? 믿게 해 봐라. 내가 왜 너를 빼돌리겠어? 작년
에만 해도 저 아이 아니었으면 이 배밭 벌서 넘어갈 뻔했는데, 지금 그 말이 입으루 나
와?"
"그건 저 여자가..."
억만이 속이 상해서인지 그때 부렸던 영희의 술책을 털어놓을 기세였다. 영희가 급하게
끼여들었다.
"당신 지금 무슨 얘기 하시려는 거예요? 정말 여기서 세상 끝장 다 보시려구 그러세요?
할말 있으면 할말이나 하세요."
그러면서 매섭게 쏘아보자 억만이 움찔했다. 그때 다시 시아버지가 가소롭다는 듯 물었다.
"그래, 좋다. 끼워주마. 니 말대로 배밭 사자구 하는 작자가 나섰는데, 어쨌으면 좋겠냐?
값도 평당 육, 칠천은 줄 모양이더라. 삼천 이백 평 한꺼번에 몽땅 받고..."
"그럼 파셔야지요. 값은 평당 한 팔천까지는 올릴 수 있을 테니 삼천만 원이란 큰돈을 한
꺼번에 쥘 수 있는 기횝니다."
"그래서 뭐 하려구?"
그때가지만 해도 시아버지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투였는
데, 술 탓인지 억만은 서슴없이 제 속을 털어놓았다.
"우리도 이제 이만큼 고생했으면 한번 편하게 잘살아보자 이겁니다. 그 돈 말입니다. 아
정히 제가 못 미더우시면 그냥 은행에 넣으셔도 이자만 한 달에 오십 가까이 받을 수 있다
이겁니다. 웬만한 월급쟁이 열 배가 훨씬 넘는 수입이라구요."
"이눔아, 당장은 달지만 돈값 떨어지는 건 어쩔래? 돈 백만 원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데, 우리 돈이라구 맨날 그래로일 것 같아? 한 달에 오십만 원, 지금이야 네남없이 큰돈이지
만, 십 년도 안돼 우리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돈 되구 말아."
시아버지가 그렇게 대답해놓고 갑자기 지난 일이 떠올랐는지 새삼 목청을 높였다.
"내가 네놈 속을 모를 줄 알구. 앞일이야 어찌 되든 당장 쓰고 보자는 주의 아냐? 왜, 한
일 년 전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니 좀이 쑤시냐? 애비 속이고 이백만 원이란 큰돈 울궈내
아래윗주머니에 척척 갈라넣고설랑 조선 갑부 흉내 혼자 내고 다니던 시절이 그립냐?"
억만이도 지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러시는거 아닙니다. 젊어 한번 실수한 거 가지고 일생 사람을 병신 만드실
겁니까? 나두 머리 굵을 대로 굵고 세상일도 알 만큼 압니다. 만만한 게 원산 돼지라구, 이
래도 억만이 저래도 억만이 하던 시절을 지났다구요. 아버지는 영영 뭐 늙지 않을 줄 아십
니까?"
그러자 예순을 넘겨도 성깔은 살아 있는 시아버지가 기어이 억만에게 따귀를 올려붙였다.
"이눔이, 가만히 보자 하니, 어디 애비 앞에 눈을 흡뜨고..."
"때리십시오. 그렇지만 이번 일을 맘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반이라도 팔아주십쇼. 어차피
저한테 넘기실 땅 아닙니까? 저도 제 청춘 가기 전에 사업이라도 버젓하게 한번 벌려볼랍니
다. 이제 더는 못 참겠다구요!"
억만은 마음을 먹어도 단단히 먹은 것 같았다. 순해빠지고 속없는 위인으로만 보았던 영
희로서는 그런 억만이 은근히 놀랍기까지 했다. 시아버지다 처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영
희였으나 그렇게 되자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둘 사이에 끼어들며 치켜든 시아버지의 팔
목을 잡았다.
"아버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억지로 지어낸 울먹임으로 그렇게 시아버지를 말린 영희는 이번에는 억만을 노려보았다.
"당신 정말 이럴 거예요?"
그러나 그 표정은 일생 연마한 표독스러움을 최대로 이끌어낸 것이었다. 억만이 그런 영
희의 표정에서 무얼 상기했는지 움찔하면서 수그러들었고, 시어버지도 마지못한 듯 멱살을
놓고 물러앉았다. 영희가 다시 애처로운 울먹임으로 돌아가 둘 모두에게 호소했다.
"모두 왜 그러세요? 결국 오랫동안 가난하고 무식하다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우리 식구 좀
더 대접받으며 잘살아보자는 의논인데... 아버님, 아범 말도 무턱대고 억누르시지만 말고 들
어주세요. 저이도 옛날 저이는 아니에요. 딴에는 이번이 놓치기 어려운 기회하고 낮술까지
마셔가며 없는 용기 낸 거라구요. 아까 아버님도 마음 흔들려하셨잖아요?"
그래놓고 다시 억만을 쳐다보며 이번에는 간절한 호소를 담은 눈길로 억만을 바라보았다.
"당신 힘든 거 알아요. 진즉에 배워두지 않은 농사 나이들어 느닷없이 하자니 고생스러울
거예요. 하지만 조금만 더 참아요. 지금 성급해서는 안 돼요. 당신 정말 앞뒤 없이 흥청거리
지 못해 이러는 거 아니죠? 우리 아기도 있고 모셔야 할 아버님 어머님도 있는데... 당신 말
마따나 사람답게 살아보려면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세 끼 밥 안 굶는다고 사람답게 사는거
아니잖아요? 재벌까지는 안 돼도 번듯한 사업 한번 벌려봐야 남자 아니겠어요? 정말 큰 기
회는 아직 남았어요. 우리 보다 큰 걸 위해 힘들지만 한번 더 발돋움해요."
"시끄러! 이젠 더 못 참아. 그거 다 날 농투성이로 잡아두려는 수작인 거 알아. 까짓 변두
리 야산 배밭 한 뙈기 가지고 무슨..."
움찔했던 억만이 다시 기세를 살려 소리쳤다. 영희는 이게, 싶었으나 꾸욱 참고 호소와 설
득을 번갈아 했다.
"아녜요. 저두 그 동안 쓸데없이 나다닌 거 아녜요. 뻔하잖아요? 공업화든 선진화든 그거
결국은 더 만들어내고 더 많이 벌어들이자는 거 아녜요? 정부 선전 다 믿지 않아도 수출 많
이 하고 돈 많이 벌어들이는 건 어쩌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땅은 더 만들어낼 수
없잖아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땅은 그대로고 돈은 더 많이 들어오면 땅값이 오를 수밖
에 없잖아요? 게다가 들은 말두 있어요. 어느 시기까지는 빌려오든 벌어오든 외국돈이 들어
오지만, 그 다음에는 우리끼리 서로 파먹게 되는 때가 곧 올 거래요. 그리고 그때는 부동산
이 우리끼리 뜯어먹는 데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 될 거래요."
영희가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한 논리까지 끌어대가며 달래자 다시 억만의 기세가 좀 수
그러들었다. 시아버지도 눈을 껌벅이며 영희가 한 말을 속으로 곰곰이 되새겨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영희는 틈을 보아 시아버지 몰래 다시 한번 억만에게 위협적인 눈짓을 한 뒤 입으
로는 여전히 애절하게 호소하듯 말했다.
"당신 일이라면 꼭 배밭을 팔지 않아도 길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 이번에는 아버님 결정
대로 따르세요."
억만이 잠시 혼란된 눈으로 영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영희로부터 한 번 더 위협적인
눈짓을 받고서야 거칠게 일어났다.
"제길, 이거 뭐가 꺼꾸로 돼도 한참 꺼꾸로잖아. 자식놈은 믿지 않고 시집온 지 얼마 안
되는 며느리 말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 판이니."
입으로는 그렇게 투덜대고 있었지만 영희를 은근히 믿는 것 같았다.
"저놈이 저거, 애비 앞에서..."
시아버지가 다시 소리를 높였으나 억만이 방을 나가버리자 그걸로 끝이었다. 담배 한 대
를 붙여물고는 곧 의논조로 나왔다.
"배밭 일은 네 말대로 다음에 보기로 하면 된다만 저놈 일이 더 걱정이구나. 어째 잘 견
딘다 싶더니... 그래, 너 아까 아범 일 달리 의논하자구 그랬는데, 무슨 생각해둔 거라두 있
냐?"
그러는 말투가 정말로 억만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 자린고비 영감도 이제는 늙는구나,
영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며 앞으로 억만을 다룰 일이 새삼 걱정되었다. 그때껏 시아버지
가 유지해온 권위가 억만을 다루는 데 적잖이 도움이 되어 왔는데, 머잖아 그쪽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당장이야 무슨 수가 있겠어요? 아범이 바라는 거야 다시 장사 나서는 거지만 아직은 믿
을 수가 없고.. 제가 그냥 어떻게 달래볼 게요."
영희는 그렇게 얼버무려 의논을 끝냈으나 당장은 어떻게 억만을 주저앉혀야 할지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달래는 수밖에 없다. 저 인간이 정말 화를 내 시아버지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들면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게 마련이다. 아깝지만 사탕값을 좀 비싸게 물어야겠구나.'
영희가 억만의 일을 그렇게 결론지은 것은 저녁 설거지를 마칠 무렵이었다. 마음이 일단
그렇게 정해지자 영희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억만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내처
술 한잔을 거 하고 낮잠에 떨어졌던 억만은 그새 일어나 있었다. 아직 초저녁인 것을 보고
나가서 한잔 더 할까, 그냥 자리에 들까를 망설이는 것 같았다. 영희가 그런 억만 곁으로 다
가앉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일어나셨어요? 상 차려올까요?"
그러자 영희를 보자 생각났다는 듯 억만이 바로 그 일을 꺼냈다.
"아까 아버지하고 내 일 의논한다구 그랬지? 그래, 어떻게 됐어?"
그렇게 묻는 품이 상당한 기대를 내비치고 있었다. 영희는 준비한 대로 한없는 다정함과
자상함을 담아 달래듯 말했다.
"그건 당신이 공연히 아버님 화를 돋우어 다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 될까봐 그랬어요, 하
마 신용 잃을 대로 일은 당신에게 아버님이 다시 뭘 내놓으시겠어요? 그치만 제가 어떻게
해볼게요. 조금만 더 참으세요. 길어도 삼 년만요. 우선은 한 달에 이만 원하고 사흘을 드릴
게요. 그걸로 무얼 하든 간섭하지 않을 테니 한 삼 년만 숨통으로 삼고 참아보세요. 이 방에
여자를 데려와 자도 암 말 않을 게요. 대신 나머지는 지금처럼 아버님 따라 열심히 일하기
예요. 제 말대로 해주세요. 이대로만 따라주면 당신 늙기 전에 호강다운 호강 해볼 수 있을
거예요. 모두 당신을 위한 일이에요."
제40장 길 위에서 길 찾기
"저그가 전상헌 목사님이여. 전에 공보처장이라던가 어쨌든 높은 관리를 했는디 그래도
갔으면 지금 장관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랐을 거라 그러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목사가
되었다는디, 역시 하나님하고 직거래를 하는 분이라 그런지 다르더만. 다름 목사들은 교인
들 머릿수나 세고 연봇돈이나 헤아리는디 저분은 우리하고 한편이 되어 나선 거라고..."
임장수씨가 명훈의 허리를 쿡 찌르며 방금 연단 앞에서 무언가를 얘기하고 LDt는 중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넓지 않은 가건물 교회지만 사람들이 꽉 들어찬 데다 임장수씨처럼 저희
끼리 수근거리는 사람이 많아 그가 하는 말의 내용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명훈은 그
새 실내의 조도에 익숙해진 눈으로 가만히 사방을 돌아보았다. 한 서른 평이나 될까말까 한
교회 안은 발 들이밀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와 있었다. 명훈의 짐작과는 딴판
이었다. 정말로 수진리, 탄리, 단대리, 상대원리 같은 원래의 단지 내 지역에다 희망촌, 우마
차꾼 동네 같은 외곽 지역의 대표가지 다 모여든 듯했다.
"저분 동생이 서울시장하고 학교 동창이라 면담을 주선해 주민 대표 두엇하고 서울시장을
만나러 갔는디, 하마 싹수가 노랗더라는 거여. 그렇게 간절히 우리 어려운 얘기를 했는데도
시장은 들은 척 만 척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란 말이시. 아무래도 모진 변을 당해야 알아들
을 사람들이란 겨..."
다시 임장수씨가 명훈의 귀에 대고 수근거렸다. 전목사에게서 직접 들은 서울시의 반응을
들어보고 싶었던 명훈은 그런 그의 알은체에 짜증이 났다.
"좀 조용히하세요. 저분 말씀 좀 들어봅시다."
명훈이 핀잔처럼 그렇게 말하자 임장수씨가 실쭉해진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마침 앞쪽에
서도 명훈과 같은 기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지 임장수씨가 입을 다물 무렵 앞쪽도 조용
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여기저기 웅성거림이 남아 전목사의 목소리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 하나는미약합니다. 그러나 모두 힘을 합치면 큰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싸릿가지는
연약하여 누구나 꺽을 수 있지만 싸릿단이 되면 아무리 힘센 장사라도 꺾지 못하는 법입니
다. 더구나 그리스도께서도 분명 여러분 곁에 머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언제나 낮은
곳에 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로 미루어 서울시장을 면담하러 갔던 전말 보고는 이미 다 지나간 모양이었다. 그나
마도 무엇 때문인가 가시 인 웅성거림에 그의 목소리가 묻혀버렸다. 그 웅성거림을 대변하
듯 임장수씨가 중얼거렸다.
"시방 설교할 때가 아닌디. 그래서 워쨌다는 거여. 워쩌자는 거냔 말여..."
전목사도 그 뜻을 알아차렸는지 곧 무어라 말을 맺고 옆으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자 그
보다는 점 젊어 보이는 양복 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목소리부터가 전목사보다는 강
하고 또렷했다.
"여러분, 사담은 중지해주십시오. 좀 조용하십시오. 먼저 우리끼리 의사 소통이 되어야 힘
을 모으든지 투쟁 단체를 만들던지 할 것 아닙니까?"
그는 그렇게 말해놓고 말없이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에 드러나게 웅성거림이 줄어
들었다. 그래도 그는 한동안이나 말없이 발언대를 점거하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작은 목소리
로 말해도 교회 구석구석까지 들릴 만큼 조용해진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장로 일을 보고 있는 박종하입니다. 저는 철거민도 아니고 전매 입주
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려고 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미 여러
분과 이해를 함께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방금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제 서울시
에 대해서는 이대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해졌습니다. 높게는 하나님의 뜻
이 있지만 때로는 세상이 이치에 따르는 게 곧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바가 될 수도 있습니
다. 옛부터 관리들이란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들고일어나야 겨우 그들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있어날 수 있음을 저들에게 경고해줍시다. 필요하다면 저들에게 맞서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
님께서 허락하신 우리 몫을 주장합시다. 마침 각 단지에서 관심 있는 분들이 모두 모여주신
것 같으니 저는 여기서 제안드립니다. 우리 모두 흩어져서 불평 불만만 하고 있을 게 아니
라 하나의 구심점을 가진 단체를 만드는 게 어떻습니까? 서울시와 협상을 하든 투쟁을 하든
조직과 체계를 갖추고 함께 대책을 세워 나갑시다."
그런 그의 구체적인 제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들떠 호응했다.
"옳소!"
"좋습니다아-!"
"당장 투쟁위원회를 만듭시다!"
개중에는 벌서 터질 듯 불만에 차 있는 사람 외에 불콰하게 낮술까지 마시고 온 사람들이
섞여 있어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다. 박종하 장로가 그런 사람들을 진정시키듯 차분한 목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무슨 단체를 만들든 대표성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그 단체는
단지 내 주민들로 이루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나머지 주민들로부터 그들의 대표로 인정받
고 지지받아야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오신 분들은 아마도 우리 단지 안
의 각 지구에서 오신 분들이겠지만 아직도 그 지구를 대표할 자격을 얻지는 못한 분들로 여
겨집니다. 따라서 이 단체를 만드는 일은 먼저 각 지구에서 대표 자격을 가진 사람들을 모
으는 일에서 출발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교회 안이 다시 웅성거리며 여러 가지 반론들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그런 대표들을 어디서 물러모아?"
"지구는 어떻게 나누고 대표는 어떻게 뽑아?"
"지구마다 투표를 할 거야? 임명을 할 거야?"
박장로의 말에 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에 관해 미리부터 많은 걸 생각해둔 사람
같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그들로부터 구속력 있는 공론을 이끌어내
려 했다.
"바로 그 점입니다. 먼저 어떻게 단지 내 각 지구를 조직하고 대표상을 가진 대표자를 확
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좋은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기탄 없이 말씀해주십
시오. 그럼 외람되나마 제가 임시로 사회를 맡을 테니 하실 말씀이 있으실 분은 먼저 제게
발언권을 청해주십시오."
그러자 몇 사람이 손을 들어 저마다 발언권을 요청했다. 박장로가 그 중에 한 사람 말숙
한 신사복 차림을 지목했다. 그가 말언대로 나와 자기 소개로 말을 시작했다.
"저는 단대리에 사는 전매 입주자 김찬석이라고 합니다. 오래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몇
년 전에 퇴직하고, 그 동안 푼푼히 모은 돈에 퇴직금을 보태 서울 가까운 곳에 싸게 집 한
칸 마련한다는 게 그만 투기꾼으로 몰리고 말았습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 전매
입주자들은 서울시의 고지서대로라면 서울 도심지보다 저 비싼 땅값으로 이 야산 비탈을 사
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마 서울시가 책정한 그래로 분양가를 물면 우리 전매 입주자
대부분은 집을 내놓아야 할 겁니다. 하지만 광주대단지의 문제는 저희들 전매 입주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철거민들은 분양금 납입 방법에 관한 서울시의 약속 위반
과 경기도의 부당한 세금 징수에 시달리고 있을 겝니다. 일터를 마련해주겠다는 선거 공약
은 그야말로 공약아 되었고, 날품팔이 일터에서 너무 먼 주거 때문에 고통받고 계살 것이며,
영세민 보호 대책도 말뿐이라 지난 겨울에는 여러 끔찍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세입자로 이
곳까지 밀려오신 분들도 저희 전매 입주자나 철거민들보다 형편이 그리 낫지 않을 성싶습니
다. 철거민이 받고 있는 여러 고통에다 서울시지 무원칙한 분양 정책 때문에 분양권 자체까
지 위협받은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 그 점에서는 원래부터 이곳에 사시던
분들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몇 분이나 오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원주민들도 서울시
의 무책임한 행정과 신도시 개발 정책에 희생이 되기는 매일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결정해야 할 문제는 이제 결성하려고 하는 단체의 범위와 역할입니다. 곧 하나의 단체의 만
들어 이 지역의 모든 문제를 총괄해 다룰 것인가, 아니면 각 집단을 대표하는 개별 단체를
만들어 서로 연대할 것인가를 먼저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차림이나 말투로 보아 그도 그런 일이 생판 처음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명훈에게 인
상지어진 그 단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바람에 명훈은 앞의 박종하 장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마뜩지 못한 혐의를 걸었다.
'둘 다 남의 일에 나서고 있다. 저들이 이 일에 앞장서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다음에 발언권을 얻어 나온 사람은 그렇지가 않았다. 자신을 철거민으로 HRO한
그 사십대는 생김과 차림부터가 명훈이 상정한 전형적인 도시 빈민이었다. 얼굴은 막노동에
그을고 주름졌으며, 그런 곳에 오면서도 후줄근한 작업복을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어디서
막일을 하고 있다가 그럼 모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대로 달려온 사람같았다. 말투도 달
랐다.
"미리 의논해봐야 할 거는 또 있심더. 바로 그 단체를 만드는 방법인데요, 대가리부터 맹
글어 꼬리까지 맞출랍니까? 아이믄 고리부터 시작해 대가리를 맞출랍니꺼? 다시 말하자믄
말입니더. 먼저 적당히 모예 똑똑한 사람들로 중앙집행부부터 짜고 대표는 중앙에서 알아
적당히 임명하든동 해서 모양을 갖추는 기 있는데, 이래 하믄 단체를 짜는 데 시간이 안 걸
리고 중앙이 힘이 있어 좋심더. 글치만 중앙이 잘못되믄 저쪽게 넘어가뿌거나 저그끼리 해
먹고 말 위험이 있지예. 반대로 먼저 지번같은 걸로 단지 내에 지구부터 공평하게 가르고
먼저 대표자를 뽑은 뒤 그 대표자 중에서 다시 중앙집행부를 뽀는 깁니더. 이거는 요새말로
아주 민주적이고 확실하지마는 시간이 마이 걸리고 또 그 과정에서 되기(매우) 말썽시러불
낍니더. 그라이 우리 형편에 어느 쪽이 좋은지 그것도 미리 결정해야 안되겠습니꺼?"
그러자 용기를 얻었는지 그 비슷한 사람들이 잇달아 발언권을 얻어 한마디씩 했다. 암장
수씨도 빠질세라 발언권을 청해 별로 긴하지도 않은 제안을 하나 보탰다. 그러다 보니 분위
기는 다른 방향으로 고조되어 처음에는 도대체 어우러지지도 않을 것 같던 모임이 제법 진
지하고 깊이 있는 시민대책회의 모양을 띠어갔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명훈은 신기한 기
분이 들었다.
'박장로나 김찬석이란 사람,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대학물을 착실히 먹은 것 같은 청년은
스스로 철거민이라고 소개한 저 사십대나 임장수씨, 그리고 방금 쌍욕을 섞여가며 떠들어댄
더 중년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그들에게 공통된 것은 경제적인 상황, 그 중에서도 일부
이익뿐이다. 그런데 모두 처음부터 거기에 그 일을 논의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계층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논의에 열중하고 있다. 어느 쪽인가 자신의 계층을 잊고 다른 계층에 동
화된 것일 텐데 도무지 어색하지가 않구나. 저들을 묶고 있는 끈은 무엇일까.'
그러다가 의문은 자연스럽게 그 자신에게로 옮겨졌다.
'아무리 나를 후하게 셈해도 박장로나 김찬석씨, 그리고 저 지식인 청년 이상은 아닐 것이
다. 그런데도 나는 선뜻 저들에게 손을 내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아버지 때문이라고는 하
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일에는 그와 전혀 무관하면서도 애게는 절박한 이익이 걸려 있
다. 그런데 나의 진실이 아니라 아버지와 관련된 의심이나 무고를 받게될 것이 두려워 이
절박한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저들보다 많이 배우고 정연한 논리와 세
련된 어휘를 사용하는 계층에 거는 내 의심도 그렇다. 분명히 저들에게서는 선동의 혐의가
가고 무언가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른 이익을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의 저 열정과 진지함이 허위이고 가식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저 자연
스러운 어울림을 야심가와 어리석은 대중이 만들어낸 허위 의식 혹은 유사 의식의 집합이라
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사이에도 논의는 구체적으로 진행되어 수십만의 이익을 대변할 단체의 준비위원회다운
성격을 띠어갔다. 명훈은 그 회의장 한구석에 끼여 서서 점점 더해가는 이상한 흥미로 그들
을 관찰했다. 그날 그 자리에서 결정된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결성할 단체의 범위와 명칭이었다. 결성될 단체가 대변할 이익의 범위는 광주대단
지 내의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전매 입주자 대책위원회' '철거민 보호
위원회' '세입자 보호위원회' '원주민 대책위원회' 등의 분할 설립도 강력히 주장되었으나 번
거롭고 당국의 이간 정책에 말려 힘이 분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부결되었다. 단체의 명
칭은 용의주도하게도 '분양지 불하 가격 시정위원회'로 결정을 보았다. '대정부 투쟁위윈회'
란 과격한 명칭을 제안한 사람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으나 쓸데없이 당국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끝내 채택되지는 못했다. 둘째는 단체 결성 날짜와 방식이었다. 시정위원회의
결성 일자는 7월 19일로 결정되었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정한 각종 분양 대금이나 세금 납
입의 시한이 7월말이어서 다소 졸속이더라도 그 이상은 단체 결성을 미룰 수가 없었기 때문
이었다. 결성 방식은 중앙집행부와 지역위원회를 병행시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곧 그
날까지 지역위원회가 구성되는 곳의 대포들이 모여 우선 집행부를 출범시키고 나머지 지역
위원회는 차차 조직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셋째는 지구의 설정과 그 구성 방식이었다. 대단지
는 인구수에 따라 대략 삼백 개의 지구로 나누고, 각기 지역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을 보
았다. 각 지구는 지역위원장을 두어 중앙집행부의 결정을 전달하고 집행하는 일을 맡게 되
는 한편 대표 한 사람을 따로이 두어 지구 주민즐의 의사를 대변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밖
의 집행위원장을 지구의 실정에 맞게 별도의 보조 조직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명훈의 감정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모임과 그것을 이끄는 의식의 진정성에 믿
음이 가고, 얼핏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이들이 어우러져 형성한 새로운 계층에도 호
감이 갔다.
"자, 그럼 오늘 여기 오신 분은 각기 거주하는 지구의 임시 대표라 생각하시고 지역위원
회 설립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는 19일에는 되도록 많은 지역 대표가 시정위원
회 설립에 참가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박장로의 그 같은 당부와 함께 회의가 끝났을 때는 자신이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과 하나
가 되지 못한 게 은근히 불안하고 후회스럽기조차 했다. 임장수씨가 그날 저녁 임시 지구
회의 소집을 제안했을 때 명훈이 반승낙을 한 것도 그런 기분에서였을 것이다. 임장수씨는
자신이 벌써 시정위원회의 간부라도 된 듯 기세가 올라 떠들었다.
"봐. 이형도 들었제? 그러니께 이제 더는 뒤로 빠질 생각 말고 앞장서서 일할 생각을 혀.
까짓 거, 우리 지구는 오늘 저녁 당장 지역위원회 회의를 소집하더라고. 집집마자 돌며 사람
을 모으는 일은 내가 할 틴게 이형은 그저 나오기만 하면 되는 겨."
명훈이 집에 돌아가니 돋보기를 낀 어머니가 방금 들어온 듯한 석간을 정신없이 들여다보
고 있었다. 명훈이 방문을 열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을 정도의 열중이었다.
"어머니, 뭘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보세요? 특별한 일이라도 났어요?"
평소에 흔치 않을 일이라 명훈이 물었다. 어머니가 놀란 눈길로 명훈을 돌아보더니 다시
읽던 곳을 마저 읽고야 고개를 들었다. 안경을 벗는 어머니의 콧등에 자국이 남을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신문을 읽고 있었던 듯했다.
"야야, 그런데 이게 우신 일이고? 여기 말이라."
어머니가 신문을 내밀며 읽던 곳을 가리켰다. 명훈이 보니 '북적 남측 제의 수락'이란 제
하에 며칠 전에 있었던 남한 적십자 총재의 제의에 북한 적십자측이 평양 방송을 통해 응답
을 보낸 사실이 실려 있었다. 이산 가족 재회를 알선하자는 남한 적십자의 제의에 북한 적
십자는 한술 더 떠 '가족들뿐만 아니라 친적, 친우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자유 왕래'를 실현
시키자고 나온 것이었다. 읽고 난 명훈도 은근히 놀랐다. 남한 적십자가 그 제의를 할 때만
해도 명훈은 그저 해보는 소리겠거니 했는데 북에서 전에 없이 그렇게 구체적인 응답이 온
까닭이었다. 명훈은 21년 전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을 새삼스런 그리움으로 떠올리며
가슴 뭉클한 감회에 젖었다.
"열둘이면 어린아이가 아니다. 아버지 없는 동안 할머니, 어머니 잘 모시도 어린 동생들도
잘 돌봐주어라. 너를 믿는다."
밤새 잠들지 못해선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명훈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해놓고 갑자기 끌
어안아 꺼칠한 수염을 불에 부벼대시던 아버지- 그런데 어머니의 감회는 명훈과 사뭇 달랐
다. 무엇엔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소리 죽여 말했다.
"야야, 암만캐도 뭔 일이 터질라는 갑다. 난데없이 이기 무신 소리고? 김일성이하고 막정
희가 함꺼번에 미치지 않았다믄 이거는 틀림없이 뭔일이 터질 징조라."
그때까지도 자신만의 감회에 빠져 있던 명훈이 얼떨떨해서 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남한 적십자 제의도 여삿일 아이지만 그 숭악한 북쪽 것들까지 이렇게 나오는 거는 더
심상찮다."
그제서야 명훈은 어머니의 걱정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하지만 아
무래도 지나친 것 같아 핀잔처럼 말했다.
"어머니두 참. 자꾸 의심을 해서 그렇지, 하마 전쟁 끝난 지 이십 년이잖습니까? 이제 서
로 그만 일쯤을 할 만한 시대가 되었다구요."
"아이다. 글찮다. 나는 아무해도 뭔가 기분이 안 좋다. 6,25 날 때 어옜는 줄 아나? 북쪽에
서 난데없이 남한이 간첩으로 잡아놓은 김삼룡, 이주하하고, 저가 뿌뜰고 있는 조만식이를
바꾸자꼬 안캤나? 그때도 할 만한 일이라꼬 세상이 떠들썩했제.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아
침에 조만식이를 죽이고 남으로 쳐내려온 게 바로 6,25 아이가?"
"에이, 또 그 말씀.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어요. 그때처럼 어두운 세상이 아니라구
요. 남이든 북이든 서로 이익이 맞으면 그만한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구요. 어머니, 쓸데
없는 걱정 마시고 아버지 만나실 꿈이나 꾸세요."
명훈은 그렇게 대답했으나 갑자기 '서로 이익이 맞으면'이란 말에 걸리는 게 있었다. 제국
의 변경들이 제국을 제쳐놓고 서로에게 이익이 맞는 일을 할 수가 있을까, 또 그런 이익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불쑥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강하게 머리
를 저으며 말했다.
"글찮다 카이. 인제부터 이게 뭔지 알 때까지는 정말로 조심조심 살아야 한데이. 계란 위
에 닭 가듯이, 얇은 얼음 우에 섰듯이..."
그러다가 갑자기 무얼 생각했는지 명훈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건 글코- 니 지금 어데 갔다 오노? 아까 임씨라 카등강 그 사람하고 나갔다 왔제?"
"녜. 좀 가보자는 데가 있어서..."
"그 사람하고 자꾸 어불랬지(어울리지)마라. 왠지 기분 안 좋은 사람이라. 옛날에 장씨라
꼬 아부지 따라댕기미 좌익도 같잖은 활동을 한 사람이 었었디라. 그래다가 경찰에 뿌뜰랬
자(붙잡히자) 홱 돌아서가주고는 아는 거 모리는 거 다 오아(일러)바치고는 모자래 아부지
한테 없는 죄까지 덮어씌우더라 카이. 그런데- 내 보기에는 임씨가 왠동 그 장씨하고 비식
한(비슷한) 상이라. 눈동자가 안정치 못하고 매부리코 기운이 있는 게."
"그건 미신입니다. 요새 세상에 상이 어딨어요, 상이. 그리고 나도 임장수씨를 좋게 보지
는 않습니다. 다만 몇 번 겪어보니 내뜨기를 좋아해도 악기는 없는 사람 같더군요. 기껏해야
러디 가도 제 몫 뺏기지 않을 악착스러움 정도죠."
"그래, 그 사람하고 어디 갔었드노?"
어머니가 다시 그렇게 물었다. 그런 어머니의 표정이 좀 전보다 풀려있어 명훈은 별생각
없이 보고 온 그대로 대답하고 말았다.
"여기 사람들이 모여 무슨 위원회를 만들 모양입니다. 토지 분양가고 세금이고 나라에서
달라는 대로 내줄 수는 없다는 뜻이지요. 동네마다 대표들이 나왔던데요. 제법 의논도 어우
러지고."
"뭐시라? 그럼 힘으로 나라하고 싸와보겠다는 말 아이가? 분양가고 세금이고 다 나라에서
정한 겐데, 위원회 아아리 우 위원회라도 나라에서 하는 일을 어예 말린단 말이고?"
"하지만 아무리 나라라도 잘못한 게 있으면 고쳐야지요. 게다가 이 사람들도 처음부터 무
턱대고 싸우자는 뜻을 아닌 거 같습니다. 먼저 시정위원회를 만들어 건의를 해보고, 서울시
나 경기도가 정히 들어주지 않으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보자는 정도였어요."
"그게 그 소리따. 니 해방 뒤에 좌익 운동 어옜는지 아나? 이름은 연맹이니 동맹이니 해
서 달랐지만 시작은 똑 그랬데이. 뭐든지 말로 평화적으로 하자 캐싸며 시작하지마는 그게
이미 싸움의 시작이라. 10,1 폭동때도 처음부터 낫하고 깔구리 들고 나온 사람은 없다. 골골
(골짜기마다)에서 쏟아져나올 때만 해도 앞세운 거는 깃발에 깽까리(꽹과리)하고 북뿐이랬
다꼬. 더러 취한 사람이 있기는 해도 소리나 지르고 노래만 불렀다꼬. 그랬는데도 순사만 얼
씬거리믄 어디서 나왔는지 깔구리가 먼저 깨춤을 추더라 카이. 첨에는 어예다가 그리 됐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이 바로 그기 운동 원리라. 별거 아인 일맨치로 사람들을 어불아(어
울리게 해)놓고 다른 한머리에서는 뭔동 엄청난 일을 저질러 결국은 한번 어불린 사람들은
아무도 거게서 빠져나올수 없게 맹그는시끼라꼬."
"그렇지만 이건 달라요. 모인 곳이 교회고 주동자고 목사하고 장로던데요."
"그럴 택이 없다. 그거는 그 사람들이 목사님하고 장로님을 쏙인 게라. 옛날에 좌익하던
사람들이 이승만이 여운형이 앞세우드키."
"아닙니다. 그 목사님과 장로님은 틀림없이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구요.
더구나 그 목사라는 사람은 전에 차관급까지 했던 관리였다던데요. 벌써 여기 문제를 가지
고 서울시장을 한 번 만나고 왔답니다. 모임 장소도 마로 그 목사임 교회였구요."
"글타믄 그 목사님하고 장로님이 쏙은 게따. 여운형이맨치로. 그래, 니는 거다 가서 뭐 했
노?"
어머니가 갑자기 다급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서야 명훈도 공연히 할 얘기 안 할 얘기
다 했다는 기분이 들어 적당히 얼버무렸다.
"제가 하긴 뭘 해요? 그저 구경만 했습니다."
"임씨 그 사람은?"
"마찬가지죠 뭐. 자기나 나나 그런 데 나서고 떠들 처지가 됩니까?"
"알일 껜데. 그 사람 그거 그런 게 가서 안 나서곤 못 배길 사람 같던데. 억지로 니를 끌
고 간 것도 글코."
"아니라니까요."
"니 참말로 내 말 잘 들어래이. 니 말이따-"
어머니가 갑자기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이 되어 목소리를 깔았다.
"허뿌(허투루) 그런 게 나가 앞뒤 없이 나서지 마래이. 도대체 너어는 그런 데 나설 수가
없는 사람들이아. 까딱하믄 니 죽고 내 죽는 꼴 본데이. 참말로 글타. 그런 일이라 카믄 너
어 아부지 때문에 겪은 일만도 언성시럽다(끔찍하다). 인제 이 나이 먹어 니 때문에 또 그런
꼬라지 겪는 거 죽으믄 죽었지 나는 가시 못 견딜따. 단디(단다히) 새겨듣거래이. 그리고-
곧 세상에 나올 너어 아(아기)도 쫌 생각해라. 식구들 미게(먹여)살린다꼬 당월이 되도록 군
소리 한마디 없이 학교에 나가고 있는 새사람도 생각하고."
"제가 뭐 어쨌다고 이러십니까? 어머니. 그런 걱정은 마십쇼.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
다."
어머니의 지나친 걱정이 성가셔 명훈은 그렇게 말을 자르고 신문을 든 채 안방으로 건너
갔다. 경진은 아직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명훈은 빈방에 길게 누워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먼
저 머릿속에 얼마 전의 모임이 떠오르고, 거기서 느꼈던 묘한 감동이 되살아났다. 사람의 계
층 형성이란 게 실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며 새로 설립될 그 시정
위원회가 한층 더 큰 유혹으로 다가왔다.
'내가 서 있을 자리는 거기가 아닐까...'
하지만 상념이 다시 그날 평양 통신으로 발표된 북적의 수락에 이르자 그 유혹은 이내 된
서리를 맞은 듯 시들고 다시 한번 남북 적십자간에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이 심상찮은
의미로 다가들었다.
'황석현에게 들은 대로라면 이런 변경에서는 제국의 의지가 유일한 이데올로기고 남북의
정책 결정은 그 의지의 집행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의 국제 적십자를 매개오 한 남북 두 변
경의 극적인 접근도 그 뒤에 있는 두 제국의 의지를 집행한 것에 지나지 않아야 한다. 하지
만 남북의 통합은 결국 이 땅을 한 제국의 변경으로만 기능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도 어쩌
면 그 통합 과정의 출발일 수도 있는 이번의 이 접근을 용인하는 그들 두 제국의 의도는 무
엇일까. 그들도 이 변경의 긴장에 지쳐 도박을 시작한 것일까. 다 얻든가 다 잃기로 작정하
고...'
하지만 그 같은 추론은 거창한 세계 구도에서 이끌어낸 담론에 바탕한 것이라 그런지 별
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남북의 변경 정권 독자의 이익을 바탕으로 한 어머니의
의심 쪽이 더 실감 있고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그 바람에 명훈은 던져두었던 신문을 펼쳐
해설란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해설은 약간 들뜬 어조로 북한의 전례 없이 즉각적인 반응을
환영하고 앞으로의 전개를 낙관하고 있었다. 그전에 있었던 남한 적십자의 제의는 2차에 걸
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에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난해 8,15 제
의를 구체화시킨 것이며, 북한 적십자의 반응은 철의 장막에 한계를 느낀 김일성의 영단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 해설 어디에서도 남북의 배후에 있는 두 제국의 의지에 대한
배려는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심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곱씹어졌다.
'남북 각자의 이익, 특히 제국의 의지와 무관한 두 변경 정권의 이익- 과연 그런 게 있을
수 있을까.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어떤 형태로 추구되고 실현될 수 있으며 그 통치 아래 있
는 원주민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직감으로는 거의 틀림없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명훈의 논리와 지식으로는 그 이상의
구체적인 추론은 이어지지 않았다. 남한과 북한의 권력 담당자들이 소련과 미국의 의지에
반해 접근해야 할 이유를 명훈으로서는 아직 짚어낼 수가 없었다. 대신 그날 보고 듣고 생
각한 것들로 피로해진 탓일까, 그때부터 아슴아슴 졸음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넓은 광장이었다. 자, 빨리 들어가 자리를 잡자. 명훈은 낯설지만 자신의 자식들임에 틀림
없는 아이들의 손을 잠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었다. 아내 경진이 어머니을 부축하며 따
르고 있고 인철과 옥경도 함께 있었다. 광장은 이미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
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차림만 다를 뿐 지친 표정과 힘없는 몸짓은 비슷했다. 그들도 하나
같이 우왕좌왕라며 명훈처럼 자리를 찾고 있었다. 형님, 저리루 가시죠. 인철이 한곳을 가르
키며 말했다. 광장 한 모퉁이에 표나게 무리지어 앉은 사람들 쪽이었는데 명훈에게는 아무
래도 그 자리가 어제 곧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게 되어 있는 광장의 중심에서 너무 멀어
보였다. 아니다, 가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자. 거기에 사람들에게 가장 귀중한 것
이 있게 마련이다. 명훈이 그렇게 말하자 옥경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다수가 미덥고 안
전해요. 거기가 진작부터 우리가 있어야 했을 자리라구요. 아이다, 거기는 않좋다. 머리 터래
기(터럭) 검은 짐승 대가리 수가 마이(많이) 모이기만 하면 꼭 무신 탈을 낸다. 우리는 달리
한쪽진 데로 가서 우리끼리 앉자. 어머니가 경진의 부축을 벗어나며 말하고 옥경이 뾰족하
게 받았다. 그건 안 돼요. 그건 밀려나는 거라구요. 그래도 사람들 틈에 있어야 해요.
그때 광장이 수런거리며 무언가가 시작되는 기색이었다. 명훈이 보니 어떤 사람들이 광장
한복판 양쪽에 수십 명은 둘러앉을 수 있는 듯한 큰 상을 차리고 있었다. 상은 두개가 마주
보고 있는 형국으로 따로 차려졌다. 상을 차리는 사람들은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저마
다 외쳤다. 이건 여러분들을 위한 상입니다. 힘드시더라도 상을 차리는 데 적극 협조해주십
시오. 여러분이 앉을 자리는 협조한 정도에 따라 결정될 겁니다. 그러자 광장 바닥에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상 주위로 몰려들었다. 곧 광장은 두 개의 상을 중심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나누어졌다. 명훈도 그 상 중에 하나를 골라 다가가려 했다. 너어는 가마
이 있거라. 너가 끼옐 살리 아이다. 잘못 끼옜다가는 피탈만 본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자리
는 영 나지 않아요. 기집애야, 꼭 그런 것도 아냐. 멋도 모르고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가 거
기 코가 꾀면 어쩔래. 좀더 살펴보자. 맞아요, 도련님 말이 옳은 거 같애. 우리 여기서 그냥
살피다가 일이 돼가는 걸 봐가며 결정해요. 그때 손 잡고 있던 아이들이 말끄러미 명훈을
쳐다보며 주른다. 아빠, 빨리 가요. 어디든 빨리 가서 자리잡고 앉아요. 그래, 가자. 어쨌든
저 상 부근에 가서 보자.
그 사이에도 음식은 날라져오고 상은 빠르게 차려졌다. 자세히 보니 음식은 광장의 바깥
에사 날라져 오는 것이 아니라 상 주위에 아우성치며 몰려 있는 사람들의 저마다의 짐보따
리에서 꺼내다 바치는 것이었다. 나 이거 냈어요. 나중에 내 자리는 좋은 것이어야 해요. 나
는 저걸 냈어요. 내 자리는 저쯤으로 해주세요. 명훈은 다급해졌다. 우리도 뭘 내야겠는데.
우리한테 뭐가 있지. 아니, 뭘 내려면 상 가까이 가야 하는데 이미 둘러싼 사람드리 두터워
상 가까이 갈 수가 없구나. 택도 없다. 저기 자리 함 봐라. 거다가 몇 명이나 앉겠노. 그런데
저러쿠름 마이 몰리드이. 뻔하다 저기 앉을 사람들은 따로 있다. 인제 와서 몰리가봤자 말캉
헛거라. 그때 상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다 차려진 상을 보고 거기 끼여 앉을 자리를 차지
하려고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한 탓이었다. 그런데 알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껏 사람
들이 내미던 것을 거둬 상을 차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몸 안에 감추고 있던 채찍과 몽둥이를
꺼냈다. 그리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저리 가. 이건 너희들의 자리가 아니
야. 여기 앉을 분들은 따로 계셔. 그들은 상을 에워싸며 다가드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후려
쳤다. 몰려들던 사람들이 채찍과 몽둥이에 겁먹은 눈길로 물러나자 상 주위에는 제법 넓게
공간이 생겼다. 상 곁으로 다가가려던 명훈도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거 봐라. 내 뭐
라 카드노. 앉을 사람을 따로 있다 카이. 아녜요.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밀고 들어 저 상 모
퉁이에 끼여 앉아야 해요. 아닙니다. 형님, 어차피 상에 끼여 앉지 못하게 될 바에야 차라리
한쪽으로 비켜섭시다. 공연히 이 사람들 사이에 끼여 밀리다가 식구들 다치게 하지 말구요.
명훈은 혼란스러웠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때 다시 광장 한구석이 술렁거렸다. 누군
가 외쳤다. 오신다. 그분들이 오신다. 그러자 상 주위를 지키던 사람들이 밀려난 사람들을
향해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물러서. 길을 열어드려. 겁먹은 사람들이 한편으로 길
을 열고 그리고 생판 낯선 사람들이 몇 명 줄지어 들어왔다. 그들은 당연한 듯 식탁을 둘러
싸고 앉아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마주보고 차려진 다른 식탁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건 우리들의 것이다. 왜 너희들만 먹느냐. 누군가 소리쳤다. 식탁을 차지한 채 먹고 마시
던 자들이 험한 눈길로 그쪽을 노려보자 채찍과 몽둥이를 든 자들이 소리친 자를 마구 후려
치며 말했다. 저분들은 너희들을 위해 일하는 분들이시다. 어차피 이 상에는 너희 모두 앉을
수가 없고, 음식도 모두가 먹기에 모자란다면 너희들은 저분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 저
분들이라도 힘을 내어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너희들에게는 따로 적당한 먹이가 주어질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그건 아니다. 그래서는 안된다.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자 몽둥이와 채찍을 든 자들이 일제히 그를 노려보았다. 그 험한 눈길에 명훈은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 그들은 노려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일제히 상 주위를 떠나 명훈에게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손에는 어느새 시퍼런 칼과 날카로운 창이 쥐어져 있었다.
내가 공연한 짓을 했다. 저들에게 맞서는 게 아니었다. 달아나야겠다. 명훈은 아이들의 손을
이끌며 어머니와 경진에게도 소리쳤다. 가자. 달아나다. 인철이, 옥경이 너희도.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어 길을 막는 바람에 한 발짝도 뚫고 달아날 수가 없었다. 칼
과 창을 든 자들은 벌써 저만치 다가오고 있다. 놓아줘. 제발 놓아달란 말이야. 너희들은 아
니잖아. 너희들도 나와 같이 성내고 맞서야 할 사람들 아냐. 그런데 왜 나를 저들에게 넘기
려고 하는 거야...
"이것 봐요. 이봐요."
누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명훈은 악몽에서 놓여나 눈을 떴다. 방금 퇴근해 온 듯한 경
진이었다. 날이 더운 것인지 몸이 무거워 그런 것인지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으응. 왔어?"
"무슨 낮잠을 그리 깊이 자요? 가위눌려가면서까지... 나쁜 꿈이라도 꾸셨어요?"
경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명훈에게 다시 물었다. 명훈은 공연히 겸연쩍은 기분이 되어
받았다.
"아니, 그냥 좀..."
"낮에 꾸는 꿈은 개꿈이래요. 오늘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경진은 그렇게 말해놓고 서둘러 허드레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무언가를 떨
그럭거리고 있는 부엌 쪽에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경진이 방을 나가버리자 명훈은 담배
에 불을 붙인 채 가만히 좀 전의 악몽을 떠올려보았다. 개꿈이라고 지나쳐버리기에는 너무
선명한 꿈이었다. 내용도 그 의미가 뚜렷하지 않은 대로 뭔가 암시적인 데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끼워맞춰봐도 그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어떤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끝내 알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남한 적십자의 선전적인 제의에 북한 적십자의 역시 다분히 체제 선전을 의
식한 그 반응은 당시의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심각한 일로 비쳐지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또 정치적으로 날카로운 통찰역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래서 열리게 될 적십자 회담이 이듬
해의 기습적인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발전하고, 나아가서 남쪽에서는 시월유신, 북쪽에서
는 부자 세습이라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권력의 치욕'을 연출하게 될
줄은 결코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불행에 되풀이 상처입어온 사람들
은 그 방면의 조짐에 유달리 예민해지는 법니다. 남븍 두 변경 권력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정치 행태에 20여 년을 시달려온 어머니와 명훈에게는 그때 이미 적십자 회담 이후의 전개
가 한 불길한 예감으로 의식에 닿아왔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일부는 명훈에게서 그 같
은 악몽으로 반영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임장수씨가 명훈을 찾아온 것은 저녁상을 물리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아직 날
이 환해 저녁의 모임을 잊고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명훈을 그가 나무라는 투로 재촉
했다.
"아니, 일곱시가 넘었는데 아직 이렇게 태평으루 앉았으며 워쪄? 싸게 가보더라고. 우리
지구 사람들을 벌써 다 모였을 거여."
"장소는 어디로 했습니까?"
명훈이 마지못해 따라나서며 물었다. 그런 명훈과 임장수씨를 보는 어머니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워디긴 워디여. 우리집이제. 달리 마땅한 장소도 없고, 그냥 우리집 마당으로 해버렸어."
임씨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명훈은 그런 장소 선정에서 지역위원
회를 주고하고 싶다는 그의 야망을 짐작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래도 명훈이 못 미더운지 가
는 길에 다시 한번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
"이거는 우리끼리 말인디, 지역위원장은 내가 한번 해버면 워떨까? 따지고 보면 이번 일
은 나만큼 앞장서 일한 사람도 없잖여? 중앙하고 선이 닿는 것도 그렇고. 그라고- 지역 대
표는 이선생이 맡아보는 게 워뗘? 내가 가만히 봉게 말여, 우리 지구에서는 이선생 빼고는
남 앞에 나가 말 한마디 똑똑히 할 만한 사람도 없더라고."
홈 그라운드의 입장에다 이제는 사전 담합까지 하자는 거로구나- 명훈은 속으로는 쓴웃
음을 지으면서도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어 좋을 말로 대답했다.
"위원장은 그 동안 들인 공만 해도 당연히 아저씨가 하셔야죠. 하지만 저는 대표구 뭐고
생각 없습니다.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임씨는 그걸 겸양으로만 받아들인 듯했다. 든든한 동맹군을 얻었다는 생각에서인
지 기세 좋게 그의 집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임장수씨의 말대로 그 집 좁은 마당에는 벌써
여남은 명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개중에는 아주머니들도 서넛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모임이 낮의 모임과 다른 것은 모여든 사람의 동질성이었다. 차림부터 말투까지 누가 보
아도 잘 어울리는 이웃들로 마당 가득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낮의 모임은 다양한 계층의 사
람들이 모여 논의를 진행해가는 동안 동질성을 획득해나갔다. 거기에 비해 그곳은 한눈에
같은 계칭임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구구각색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동질
성이 명훈에게는 강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흠- 전매 입주자 두 집이 안 오셨구만. 돈으루 떼워도 될 만큼 부잔개 벼. 그리고 서울로
일 나갔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집이 몇 집 있고- 아니, 아주머니들이 대신 나오셨나... 어쨋
든 이만하면 과반수 성원은 된 듯하니 임시 지역위원회를 개최하겠습니다."
임장수씨는 그렇게 개회를 선언하고 과장되게 그날 낮에 있었던 임시 회의를 소개함과 아
울러 분양지 불하 가격 시정위원회 결성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런게 여기에서도 명훈의 이
질감을 자극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모인 사람들의 지식 수준이었다. 임장수씨가 제법 조리
있게 말하는데도 대부분은 말귀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누리의 단합된 힘을 과시하고..."
위원회 결성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임장수씨가 그렇게 말하는데,
"옳소, 나가 싸웁시다!"
하고 주먹을 흔드는 막노동자가 있는가 하면,
"평화적인 건의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힘으로 맞서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란 가정에 벌써
"니미, 그래자꼬. 까짓 거, 출장소고 파출소고 확 때리뿌사뿌자꼬!"
하며 마당 구석에 세워진 각목을 집어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논의라기보다는 중구난
방으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명훈은 더욱 마음을 굳혔다.
'당신들을 진심으로 동정하기도 하고 현실로도 당신들과 이해 관계가 일치하는 데가 있지
만, 그래도 나는 당신들이 아니다. 결코 당신들과 하나일 수는 없다...'
고향이 수몰되기 전에 이장 노릇을 한 적이 있다는 게 정말인지 임장수씨는 그런 그들을
잘 다뤄냈다. 낮에 스스로 임시 대표 노릇을 한 일을 은근히 과시하기도 하고, 일제 때 구제
중학교를 졸업한 학력을 내세우기도 해서, 거의 만장일치로 지역위원장 자리를 얻어냈다. 그
리고 그 동안 충실하게 보증을 서준 명훈에게 되갚음이라도하듯 지역 대표 선출에 개입했
다.
"에,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을실랑가 모르지만 여기 이 이명훈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
면 우리 지구에서 유일하게 대학물을 먹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부인께서도..."
임장수씨가 명훈을 대표로 밀기 위해 그렇게 서두를 꺼냈다. 명훈이 얼른 그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제발 부탁입니다만 저는 그럴 만한 처지가 못 됩니다. 힘 닿는 대로 뒤에서 도울 테니
다른 훌륭한 분을 찾아보십시오."
그래놓고는 진작부터 눈여겨보아두었던 주민 하나를 추천했다. 일이 바빴거나 단지 내의
흐름에 둔감해 그날 중앙위원회 임시 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바람에 지역위원회에서의 주도
권을 놓쳐버린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는 듯한 사십대 초반의 사내였다.
하지만 그 모임이 끝나고 밤길을 더듬어 집으로 돌아오는 명훈의 가슴은 왠지 다시 허전
하고 불안해졌다. 여기서도 국외자로 남아야 하는 나는 누군가...
제41장 타자로부터의 신호들
인철에게
어제 나트랑 항에 내렸고, 곧바로 사단 보충대로 옮겨져 지금은 분류 대기중이다. 한형에
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이국 정취랄까, 어쨌든 그 땅에서는 전혀 경험하지 묘한 낯선 느
낌은 배가 월남땅에 닿기 전부터 충분히 맛볼 수 있었다. 강렬한 햇살과, 찜통같다는 말로도
후텁지근하다는 말로도 적적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기후만해도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
철조망 밖으로 보이는 주위 풍경에서도 낯익은 것은 하나도 없다. 가까운 숲의 나무들뿐만
아니라 연병장에 돋은 잡초들까지도 이렇게 우리 것을 닮은 것이 없을까. 한형이 말하던 우
리와의 유사성은 월남인들의 피부 색깔 정도지만 그것도 백인 미군과 나란히 섰을 때뿐이
다. 그나마 그들의 왜소한 체구와 남방계 특유의 들창코에 퀭한 눈길을 종합하면 적어도 어
릴 적부터 미군들을 보아온 우리에게는 어느 쪽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지 솔직히 단언하기
어렵다. 월남에 관한 한형의 기억은 어쩌면 우리의 순진한 동경을 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
로 과장된 게 아니었나 싶다.
너는 어떠냐? 이제쯤은 고시생으로서의 티다 좀 잡혀가냐, 아니면 그 죽 끓듯 하는 변덕
으로 아직도 헤매는 중이냐? 논산훈련소에서 받은 편지에는 무슨 시험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건 어찌 됐냐? 오음리(육군 월남 파병 부대가 있던 곳)에서는 편지 못해 미안하
다. 교육이 보름뿐이라기에 네 답장을 받을 여유가 없을 것 같았을 뿐만 아니라 공연히 기
분이 스산스러워서 그랬다. 덜컥 자원하기는 했지만 참전 고참인 교육병들이 전하는 현지
상황에 일찌감치 주눅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승선하기 이틀 전에 쓴 편지는 받았는지
모르겠다. 내 감상에 심란해졌다면 미안하다. 고백하자면 나도 단순한 심상에서가 아니라 실
제로 꽤나 심란해하며 썼다. 내 주소를 안 쓴 것은 네 답장을 기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
었기 때문이다. 하기는 지금도 답장을 기대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오늘내일 연대가 결정
되면 다시 그리로 옮겨가서 실전 적응 훈련이 보름 정도 더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러니 네
답장이 찾아올 수 있는 내 주소는 아직도 한 스무 날은 더 지내야 확정될 듯싶다.
그런데도 문득 네게 글을 쓰고 싶어진 것은 아마도 알 수 없는 기억의 고집 탓일 게다.
왠지 내게는 아직도 네가 앞뒤 없이 소설에 빠져 있는 문학 청년으로만 기억되고, 그런 네
게 월남이 준 첫인상을 전해둬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네가 모처럼 마음잡고 법을 공부하
는 중이라면 쓸데없는 짓이 될지 모르지. 하지만 앞으로 그런 쓸데없는 짓을 계속하더라도
너무 성가셔하지는 마라. 어쩌면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쓰고 싶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 오늘은 이만 쓴다. 무얼 하고 있든 부디 자중 자애하고 건강해
라.
1971년 7월 3일
월남에서 광석
인철에게
일주일 전에 연대로 왔고 지금은 실전 적응 훈련에 들어갔다. 훈련이란 언제나 긴장된 분
위기를 조성하게 마련이고, 내가 이제 정말 전선 가까이 왔다는 섬뜩한 느낌도 감상에 젖을
겨를이 없게 한다. 그러나 국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내무 생활이 주는 일과 후의 여유에
다 오늘 훈련에서 받은 인상이 너무 강해 너에게 몇 자 적어본다.
나는 선인장이란 게 서부 영화의 배경이나 멕시코 사막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로 알았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선인장으로만 덮인 야산으로 나가 훈련을 받았다.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손바닥만한 선인장이 관목처럼 메마른 바위 언덕을 덮고 있는 사이사이 기둥 같은
선인장들이 솟아 있는 곳이었는데, 참으로 눈부신 것은 그 꽃들이었다. 나는 선인장에 그토
록 화려한 꽃이 피고, 그것도 무리지어 산을 뒤덮을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봄철 골짝마다 뒤덮는 진달래처럼 선인장꽃이 한창이었다. 어쩌면 월남 사
람들은 우리가 진달래꽃을 바라보는 심경으로 선인장을 바라보고 추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든다. 물론 이곳 선인장에도 가시가 있다. 오히려 화분에 옮겨 심어진 손바닥만한 선인장
의 연약한 가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억센 가시이고, 오늘 내가 받은 훈련의
고통스러움은 태반이 그 가시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훈련이 끝나고 내무반으로 돌아와 누운
지금 그런 고통의 기억보다 더 선명한 것은 선홍빛의 선인장 꽃잎들이 낯선 이국의 정경들
과 어울려 내뿜던 현란스런 색조이다.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나도 이곳을 떠나 내 중대를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실제 작전에도
투입될 것이다. 그런데도 꽃타령이나 하고 있는 내가 이상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왠지 나는
아직도 내가 피 흘리는 싸움터로 가고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파리에선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미국과 베트콩과의 평화 협상을 믿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늘은 이만 써야 할 것
같다. 본국에 비하면 한량하기 그지없는 내무 생활이라지만 훈련중이라선지 취침 시간을 엄
한 규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럼 잘 있거라. 틈나는 대로 다시 편지하마. 너를 위해서든
나를 위해서든.
1971년 7월 8일
월남에서 광석
각각 다른 봉투에 들어 한꺼번에 전해진 세 통의 편지 중에서 보낸 날짜에 따라 두통을
먼저 뜯어 읽은 인철을 거기서 잠시 숨을 돌렸다. 미친 자식, 기어이 월남으로 갔구나. 입으
로는 그렇게 중얼거려도 먼저 인철을 사로잡은 감정을 까닭 모를 부러움 같은 것이었다. 하
지만 편지의 문면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인철은 이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하지만 작년 이맘때만 해도 사상 연구 서클의 주도적 맴버였고 종당
에는 그 일로 구속까지 경험한 광석이 아닌가. 거기다가 광석의 사회주의도 인철이 보기에
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을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경력이 있는 의심스런 선배에게 이끌린 것
이라지만 그들이 검거 작전에 이르렀던 지점은 이미 순정한 마르크시즘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가장 뚜렷한 증거가 그들의 모임방 벽에 물감으로 그려 붙여놓았던 인공기일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광석의 그 같은 경도는 다분히 감정적인 데가 있었다. 별생각 없이 따라나
선 데모가 집안의 석연찮게 사상적 배경 때문에 과장되게 해석되어 주동자로 고생하고 나온
첫번째 구속이 '적의적'이란 단순 논리로 사회주의에 호감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논리적
인 설득에 바탕하지 않은 만큼 결별도 쉬웠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가 보여준
태도도 어떤 내면적인 굴절을 짐작케 하는 것이었다. 이미 한 이념가 혹은 직업적 운동가를
자처하던 시절의 그와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사상 문제로 전쟁을 치
르고 있는 월남까지 가서도 이국 정취나 말하고 선인장꽃의 아름다움에나 감탄하는 것은 아
무래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녀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인철은 그렇게 중얼
거리며 가장 최근의 소인이 찍힌 편지를 뜯었다.
인철에게
어제로 월남에서의 내 주소가 확정되었다. 듣기로 겉봉에 적힌 주소는 아제 내가 일 년
뒤 이 땅을 떠날 때까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바뀌지 않을 거라고 한다. 아직 하루밖에 되
지 않았지만 이곳의 내무 생활을 한국에서와는 아주 다르다. 우리가 별로 실감나지 않게 보
았던 미국 영화에서의 내무 생활이 실제 일어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어제 같이 더블백을
메고 온 새까만 신병이지만 졸병이라기보다는 전우란 개념을 앞세우려는 고참들의 태도가
내게는 오히려 어색하기가지 하다. 지금 이 느긋한 편지도 다만 퇴근을 막사로 했을 뿐인
듯한 후의 여유 덕분이다. 하지만 그 여유는 또한 의식적으로 접어두었던 사념들을 다시 이
끌어내기도 한다. 특히 이 여유가 한국에서와 달리 그만큼 죽음 가까이 갔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면 그 죽음을 바로 나의 것으로 만들지도 모르는 이 전쟁의 의미에 대해 생각지도 않
을 수 없게 한다. 비로소 내게도 이게 그 대표적인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우리 시
대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현장에 내가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성급하지 않을 작정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난 일 년은 그 성급한 결론 때문에 좀 위험스
럽고 심각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놀이처럼 떠오른다. 목숨이 걸린 일
을 다시 그런 놀이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내가 이렇게 신중해진 것은 어쩌면 귀국을 얼마
앞두지 않은 고참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대여섯 번씩은 치누크(작전용 대형 헬리
콥터)를 타보았다는 그들은 귀국 연장을 신청한 하사관들이나 장교들과는 달리 무언가에 크
게 상처받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봐서인지도 모르지만 우울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허탈해 있는 것 같기도 한 눈빛과 말수 적음이 그들의 특징이다. 내 목숨을
걸고 남의 목숨을 노려본 사람들의 영혼에 드리워진 지울 수 없는 흔적인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든다.
이곳은 지금 건기라고 한다. 날씨는 이미 말했듯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찌는 듯한 더위
지만 작전하기에는 우기보다 지금이 더 낫다는구나. 거기다가 파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평화 협상이 여기서는 이상한 형태의 영향을 주고 있어 작전은 더 잦아진다니 나도 곧 작전
에 투입되겠지. 그러나 가까운 날을 아닌 듯싶다. 나도 작전을 다녀오면 말이 달라질지 모르
겠다만 아직은 이국 정취에 아무것도 실감나는 것이 없다. 답장에는 그곳 소식 좀 많이 적
어 보내라. 학교와는 완전히 절연하겠다고 했지만 한형과는 연결이 있겠지. 지금은 무슨 일
로들 데모를 궁리하고 있는지, 명동에는 무엇이 유행하는지, 무엇이든 아는 대로 적어 보내
라. 학교와 서울을 떠난 지 이제 겨우 넉 달인데 몇 년은 되는 것 같구나.
1971년 7월 20일
월남에서 광석
그 편지에서는 희미하게 광석의 옛모습이 떠오르는 데가 있었으나 인철에게는 여전히 석
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거기다가 월남전이 가지는 국제적인 성격과 한번도 국외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인철에게 느껴지는 그곳까지의 거리감이 광석의 편지를 아무런 현실감 없는
작문처럼 느껴지게 했다. 읽기를 마친 인철은 편지지를 찾았다. 얼마 쓰지 않은 양면괘지 묶
음이 나왔다. 인철은 볼펜을 찾아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홀로 있는 상태가 점점 길어질수록
더욱 절실해지는 게 외부와의 소통이었다. 하지만 인철과는 달리 학교에 남아 있는 아이들
의 답장은 그대만큼 성의가 없었다. 대부분을 한두 번의 의례적인 답장으로 끝나 그무렵 정
기적인 편지 내왕은 한형과 용기뿐이었다. 그것도 한형은 장편소설에 매달려 짤막한 엽서로
대치되기 일쑤였고, 용기는 또 무슨 일인가로 벌써 두 달째 편지가 없었다.
광석에게
네가 월남에서 쓴 편지 세 통을 오늘 한꺼번에 받았다. 나는 지난 6월 초순 성남 집을 떠
나 이곳 고향으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조용한 절을 생각했으나 이곳 정자도 그에 못지않을
것 같아 이리로 왔는데 아직은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다. 네 편지가 한꺼번에 전해진 것은
그 과정에서 형님이 좀 늑장을 부리신 것쯤으로 알면 된다...
인철을 거기까지 써내려가다가 문득 쓰기를 그만두었다. 자신의 근황을 일러주는 부분에
서 광석의 당부가 상기된 까닭이었다. 광석은 되도록 많이 국내 소식을 전하라고 당부하고
있지만 그 자신도 바깥 세계와 격리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원래도 세상의 움직임에 그
리 민감한 편을 못 되는 데다 새로 시작한 공부가 더욱 그 방향의 눈과 귀를 막아 지난 3월
이후에는 신문 한 장 제대로 읽은 게 없었다. 그 바람에 인철을 쓰던 편지를 중단하고 새삼
스레 세상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담 안에 갇힌 것처럼 바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터에 나가 지난 신문이라도 며칠 치를 읽고 써야겠다. 이윽고 인철은 그렇게 마음
을 먹고 편지지를 덮었다. 그러고 보니 이발을 미뤄 머리도 많이 길고 수염도 제법 텁수룩
했다. 인철은 먼저 이발소로 가 이발을 하면서 신문을 구해보기로 하고 정자를 나섰다. 그런
데 그날을 참으로 이상한 날이었다. 언덕길을 미처 다 내려오기도 전에 저만치 낯익은 사람
의 형상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막 마을을 벗어나 정자 쪽으로 오르고 있어 얼굴을 알아
볼 수는 없었으나 틀림없이 자신을 찾아오고 있는 사람이었다.
'용기다. 틀림없이 용기 녀석이다...'
오래잖아 인철을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체할 수 없는 반가움으로 언덕길을 뛰어내려갔다.
그때만 해도 그가 어떻게 알고 거기까지 찾아왔는지, 또 무슨 일로 와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용기도 그를 알아보았는지 걸음을 빨리해 다가오고 있었다.
"야, 너 임마..."
말을 주고받을 거리가 되자 인철이 참지 못하고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용기가 손짓으
로 경계의 뜻을 나타내며 대답 없이 다가왔다.
"너무 떠들지 말라꼬. 남의 눈에 튀이께는(튀니까)."
한 발자국 앞까지 다가온 용기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
이 어두운 데다 차림도 어딘다 평소답지 않게 궁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인철을 반가운 마
음이 앞서 같이 심각해질 수가 없었다.
"근데 너, 여기는 어떻게 찾아왔어?"
"느그 형님한테 물었다 아이가. 갤차주는 대로 찾아오이 되데."
"그럼 집에 갔다 왔어? 언제?"
"어제. 그래고 청량리에서 열차 타고 오는 게 이뿌이라."
"방학이기는 하지만 네가 올 줄은 몰랐네. 그런데 오려면 주소 보고 밀양에서 바로 찾아
오면 되지 서울까지 들를 건 뭐 있어?"
"그게 그래 됐다. 그건 글코 사람들 다 쳐다보는 언덕배기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어서 니
공부한다는 정자로 가자."
용기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발걸음도 몹시 지쳐 보였다.
거기다가 단순히 지친 것이 아니라 어딘가 쫓기고 있는 듯한 인상이 있어 인철을 긴장하게
했다.
"너 무슨 일이 있구나. 무슨 일이야?"
인철이 비로소 목소리를 가라앉혀 그렇게 묻자 용기가 손바닥으로 가볍게 인철의 어깨를
밀며 말했다.
"우선 방안으로 들어가자. 들어가서 말하자."
그리고는 정자에 이르러 공부방으로 들 때가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인철도 공연히 으스스해져서 평소 열어놓고 있던 방문까지 닫고서야 다시 용기에게 물었
다.
"실은 나... 쫓기고 있다. 지금 수배받고 있는 중이라."
"뭐? 수배? 네가?..."
인철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말이 이어지지 않을 지경이였다. 언제나 논리 정연하고 현
실적이던 용기였다.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취직 시험 걱정이나 하던 그였는데 경찰에 쫓기
고 있다니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넌 데모도 안 했잖아? 원래 이공계고... 그럼 일반 형사 사건?"
"나도 그랬으믄 좋겠다. 그런데 이건 경찰도 아이고... 중정이라 카이, 중정."
"중앙정보부? 아니, 무슨 일인데?"
"니 강이 알제? 최강이. 왜 내 고등학교 동창 말이라."
그러나 인철은 그 이름을 용기와의 사적인 관련으로보다는 과격한 데모 주동자로 더 잘
기억했다. 지난해 교련 반대 데모를 정치적인 방향으로 이끈 혐의가 뒤늦게 드러나 봄부터
요란하게 수배받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극좌 성향으로 북한과도 연계가 있다는 혐의까지
받고 있다고 했다.
"으응, 참, 걔가 네 동창이라 그랬지? 부산 있을 때도 아도 한번 만났던가?"
"제4두부에서 우리 함께 뻗도록 마신 적이 안있나? 3학년 때, 길가에 막 토하고..."
"아, 그래. 그런데 그때는 그냥 멋쟁이로만 보였는데. 술도 대단했고..."
"5월달이라. 하루는 글마한테 전화가 왔더라꼬. 함 만나자 캐서 으스스하면서도 나가봤디
술 한잔 하다 카드라. 그래서 한잔 했제. 그라고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하숙집에 와 자고 갔
제. 지 말로는 내하고 친한 거는 절마들이 전혀 모르이 젤 안전하다 카등강. 여인숙이나 여
관은 불심검문이 나뿌고 친척이나 알려진 친구는 잠복이 겁난다던강... 하기사 첨부터 나는
망설였제. 너도 알다시피 내가 겁 많은 놈 아이가? 거다가 아부지는 공무원이고. 그런데 그
게 이상터라. 글마 만나고 시간이 갈수록 겁이 없어지는 거라. 나중에는 적당한 팡계대 낯만
내고 일라설라 캤던 내가 실실 부끄러워지기까지 하더라이까. 그래서 데리고 가 재우고 아
침에 글마 갈 때는 돈까지 있는 대로 좄뿌랬다꼬. 그때 마침 아르바이트해 받은 게 쪼매 있
었는데... 기분 같으믄 하숙집 아주무이한테 빌려서라도 넉넉히 조 보내고 싶더라꼬."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 녀석의 무엇이 그렇게 네 마음에 들었어?"
"이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이라꼬. 최소한의 지성 내지 양심의 문제라꼬."
"뭐가?"
용기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는 게 약간 어이없어 인철이 다시 물었다.
"니는 요새 아무치도 않나? 하기사 심산유곡에 들어앉아 체제 중심부에 끼여들 궁리나 하
고 있는 니한테 뭐가 비겠노? 글치만 그래는 게 아이다. 그래도 우리는 명색 지식인이고 또
예비 소시민 아이가?"
이번에는 제법 설득조에 평소 그가 잘 쓰지 않는 생소한 용어가 끼여들자 인철은 조금씩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 녀석에게 정말로 무슨 일이 있구나.
"하긴 진작부터 세상에 담 쌓은 내가 뭘 알겠어? 그런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대의라고
해두자. 촤강이 걔 대의의 어떤 게 너를 그렇게 자극했어?"
"자극이 아니라 눈뜨게 해준 거지."
"네가 눈감고 있었던 게 뭔데?"
"우리 생존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환경. 우리가 방치하는 동안에 갈수록 악화되는 정치
상황 같은 거 말이라."
"너두 군사 독재 얘기냐? 군부 파쇼에 의해 말살되고 있는 민주주의..."
"그런 되풀이되는 구호 같은 말오는 다 설명 한 된다꼬. 니, 놀라운 얘기 하나 해주까? 지
금 말이라, 대만과 스페인에 박정희 정권이 보낸 연구팀이 있다 안카나? 총통제 연구한다
꼬..."
"총통제? 그걸 연구해 뭘 해?"
"니 참말로 몰라서 묻나? 그 깽판 처가미 삼선 개헌까지 했지만 인제 남은 임기가 얼매
로? 글타꼬 다시 사선 개헌, 오선 개헌 할 끼가? 글카믄 그 소동 안 부리고 영구 집권하는
길이 뭐겠노? 종신 대통령- 총통제밖에 더 있나?"
"아무려면... 지금 같은 세상에 총통제라니, 근거 없는 풍문이겠지. 아니면 반정부 활동하
는 사람들이 지어낸 역선전이거나."
"니 그럴 줄 알았다. 글치만 함 생각해봐라. 아무리 사람이 다르다 카지만 뚜디리맞고 징
역가는 게 좋은 사람 천지에 어디겠노? 최강이 글마 머리 좋은 거는 우리 동기들이 다 아는
얘기라. 아매 글마가 고시 준비 했으믄 벌써 돼도 여러 번 됐을 꺼로. 그런데 그 좋은 거 다
놔뚜고 집도 절도 없이 쫓아댕기는 거 그거 좋아서 할 놈이 어딨노? 어느 골빠진 놈이 헛소
리 듣고 운동하로 댕기겠노?"
"이미 버린 몸이란 얘기도 있잖아. 어두운 열정이란 것도 있고... 그건 그렇고 그 총통제
얘기 정말이야? 도대체 그게 가능할 것 같기나 해?"
"안 될 건 또 뭐꼬?"
"첫째로 우리 국민들이 가만히 있겠어? 4,19가 뭐야? 이승만이 12년 장기 집권 가지구도
목숨 내놓고 덤빈 거 너도 알잖아? 재작년 삼선 개헌 때는 또 어땠어? 그런데 종신 대통령
을 한다고? 정말로 그런 꿈을 꾼다면 박정희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4,19? 니 그게 참말로 지대로 된 혁명인줄 아나? 그건 말이따, 학생들의 환상과 늙은 독
재자의 감상이 잘 맞아떨어진 한바탕 정치적 희미극이라꼬. 아이, 용케 맞아떨어진 복권이라
카는 게 차라리 나을끼라."
그 말로 미루어 최강에 대한 용기의 기울어짐은 옛정에 못 이겨 지명 수배자를 하룻밤 재
워 보낸 정도가 아닌 듯했다. 인철은 그런 용기가 갑자기 낯설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4,19가 옆으로부터의 혁명이란 정의는 들어도, 어쩌다 맞은 복권이란 말을 또 첨이군. 좋
아 그건 그렇다 치고 미국은? 명색 세계 민주주의의 보루를 자임하고 있는 미국이 그냥 보
아넘길까?"
인철이 그렇게 묻자 용기는 거기에도 준비가 있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5,16도 어물쩍 추인했던 미국 아이가? 물론 반공을 국시로 내건 군부의 약삭빠름도 있기
는 했지마는..."
"하지만 독재 정권의 붕괴는 곧 적화로 나타나는 걸 쿠바에서 쓰게 경험한 미국이야. 월
남에서 치르고 있는 곤욕도 고 딘 디엠이란 독재자의 몰락에서 비롯된 거 아냐? 그런데 미
국이 한국에서 그들보다 훨씬 노골적인 총통제를 허용할까?"
"나는 오히려 니가 든 예가 지금 은밀히 진행되는 총통제 음모의 실현 가능성을 높여주는
근거로 보이는데.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독재자인줄 빤히 알면서도 저그들 이익에 맞기만 하
믄 그 몰락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원하는 게 미국이라는 거 말이라. 로마가 헤롯을 키우드키
로..."
용기는 그래놓고 힐끗 인철을 보더니 갑자기 득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니 전에 변경이라 캤제? 단순한 주변이 아이라 변경 저 건너에 또 다른 제국의 경계가
와 있는... 이기 바로 그 변경의 비극이라."
"변경의 비극?"
"그래, 니 하마 이자뿟나? 변경에서는 제국이 잃는 것도 얻는 것도 꼽배기라며? 단순히
하나를 잃는 게 아니라 그 하나가 적대 제국에 보태짐으로써 실은 두 개를 잃는 격이라는
거 니가 한 소리 같은데. 만약게 말이라, 박정희가 미국에 악심을 품으믄 지 갈 데가 어디겠
노? 그래서 저쪽으로 넘어갔뿌믄 미국은 그저 단순히 남한을 잃는 게 아니라 소련에다 남한
을 하나 보태준 꼴이니 잃는 효과는 그 두 배라꼬. 그런데 그런 짓을 멀라꼬 하겠노? 그게
박정희가 마음만 먹으총통이 아이라 왕이 된다 캐도 미국이 우째해볼 수 없는 이유라. 실권
만 쥐고 있으믄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꼬. 그게 이 땅이 바로 니가 말한 변경이기 때문이라.
소비에트 제국의 변경과 아메리카 제국의 변경이 맞물려 있는..."
황석현을 만난 뒤 인철은 어떤 술자리에서 용기에게 그의 변경 논리를 말해준 적이 있었
다. 그때는 그냥 지나쳐 듣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듯했다. 인철은 빌려준 칼에 자신
이 찔린 기분이 되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 남북한 적십자 회담 한다꼬 난리 피워쌌제? 내 눈에는 그것도 수살시러븐 기라. 우
째 보믄 남한 사람들 얼을 빼놓을라 카는 거 같기도 하고, 우째 보믄 미국놈들한테 은근슬
쩍 공갈치는 것 같기도 하고..."
용기가 더욱 기세를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남북 적십자 회담 얘기는 인철도 묵은 신문에
서 읽은 기억이 났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뿌리깊은 불신이 어느새 인철에게도
한 고정관념이 되어 그 진전에 별로 기대를 갖지 않았다. 속은 따로 있으면서 저희끼리 백
지로 찧고 까부는 기라. 두고 보래이, 내리온 눔 올라산 눔 저한테는 모도 밉상시러븐 놈들
인데 그 밉상이들 좋으라꼬 장히 상봉 잘 시킬따... 그런데 그 진정성에 대해 용기가 제기하
는 또 다른 의문은 인철에게는 엉뚱하면서도 흥미가 있었다.
"설마 하니..."
"안 그러믄 글케 반공, 반공 캐쌌든 글마들이 난데없이 왜 저 난리겠노? 당사자들은 남북
으로 갈라선 부모 현제 참말로 만나게 되는가 부품해(부풀어) 정신이 없을 게고, 골수 빨갱
이나 하양이들은 이레다가 먼일 나는 거 아이라 싶어 정신이 없을 게고, 그래 되믄 글마들
이 뒤로 멀하는동 딜따볼 생각을 몬 할 거 아이가? 미국도 글타. 봐라, 우리끼리도 이래 의
논 맞출 수 있다, 수틀리믄 우리끼리 합천장이 돼 너한테 맞설수도 있단 말이라, 대강 이런
공갈이제."
"그것도 최강이에게서 들은 소리야?"
인철은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전에 그 같은 결론의 근거를 알아보기 위해 그렇게 물었다.
용기가 약간 불만스런 표정을 내비치며 말했다.
"눈을 감고 있으이 글체 눈만 뜨믄 다 빈다. 촤강이 글마가 내 눈을 뜨게 했다믄 몰따마
는 글타고 날 그쪽으로 세뇌시켰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글마한테는 총통제 음모밖에 들을
게 없다."
그리고는 비로소 방안을 한번 휘 둘러보더니 빈정거리는 어조로 화제를 바꾸었다.
"방꼬라지 보이 제법 고시생 티가 난다. 그래, 공부는 쫌 돼가나?"
"아니 그저... 시작한 일이니까 한다고 해보기는 하지만 아직은 뭐가 뭔지 모르겠어."
인철은 왠지 자신의 몰두와 진전을 바로 밝히기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그렇게 말끝을 흐
렸다. 그러나 용기는 다시 책상 위를 세심히 살피다가 인철이 짜둔 일과표를 집어들고 읽으
면서 말했다.
"이거 보래이. 이거 하루에 열여섯 시간짜리 시간표 아이가? 이기 참말로 법 공부에 재미
를 붙여도 단단히 붙인 모양이네."
"그냥 짜둔 거야. 절반도 못지켜."
인철이 더욱 쑥스러워하며 일과표를 빼앗아 서랍 속에 구겨넣었다. 머쓱해진 표정으로 인
철을 바라보던 용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근데 말이라- 내가 여기 잘못 온 거 아이가?"
"그건 무슨 소리야?"
" 니 판, 검사 하기로 단단히 마음묵은 모양인데, 나는 생각이 거꾸로 가이 잘못하믄 니가
날 잡으로 댕기는 꼬라지 나는 거 아이가? 아이, 당장도 내가 여다 온 거 이거 너 나중에
판, 검사 되는 데 문제 안 되까?"
그 말에 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제발 그렇게 될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둘 다 전혀 가망 없어 보이는데."
"하기사 직업 혁명가 조용기는 택도 없는 소린지 모리겠다마는 판, 검사 이인철이는 왜
안 되노? 이래 물이 붙었는데."
"그랬잖아. 지금같이 엄격한 연좌제 아래서는 안 되는 거라고. 변호사라도 시켜주면 다행
이라는 게 지금 내 형편이야."
"아참, 그랬제. 하지만 글타 카믄 멀라꼬 머리 싸매고 이 고생이고?"
"합격만 되면 이것저것 다 안 돼도 평생 확실하게 할 일 하나는 생기겠지. 국가와 헌법을
상대로 평생 소송, 소원이나 걸며 보내는 거지뭐."
인철을 그래놓고 나니 새삼 막막한 기분이었다. 용기가 말없이 인철을 바라보다가 어두운
얼굴이 되어 물었다.
"니도 참 어려운 놈이다. 돼뵜자 기분 하나뿐인데, 길은 또 얼매나 첩첩산중이고. 한참 붙
어볼 만한데 덜컥 총통제가 됐뿌믄 말캉 새로 공부해야 안 되나."
"또 그놈의 말도 안 되는 소리. 걱정 마. 네 말대로 총통제가 되어봤자 바뀌는 건 헌법과
공법 일부야. 또 나 혼자 새로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그때 갑자기 정자 밖 참나무 잎에 후두두 빗발 듣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흐리건 날
이 기어이 한 줄기 해대는 모양이었다. 그 빗소리가 이상하게 인철의 감상을 건드려 오랜만
에 술생각이 나게 했다. 돌내골로 내려온 뒤로는 의식적으로 억제해온 술이었다.
"야, 그 되지도 않는 소리 그만 하고 장터 거리로 내려가자. 날고 축축한게 낮술 마시기에
는 안성맞춤이야."
그러자 용기는 다시 긴장한 얼굴이 되어 머뭇거렸다.
"그렇게 나다녀도 괜찮을까. 나는 며칠 조용히 숨어 지내다 갈 생각이었는데."
"임마, 그게 더 이상해. 무슨 죽을 죄를 지어 지명 수배가 된 것도 아니잖아? 그냥 방학
맞아 찾아온 친구로 며칠 놀다 가면 되는 거야. 그게 훨씬 남의 눈에 안 띄는 길이야."
인철은 용기를 억지로 끌다시피 해서 장터로 내려갔다. 농번기는 아니지만 대낮에 손님이
있을 리 없는 시골 면 소재지 중국집에서 그들은 곧 두루치기로 막걸리로 낮술을 시작했다.
<<이제 이 땅에서도 브린턴이 말한 '지식인 탈주' 혹은 '충성의 전이'가 시작된 듯하다.
반체제 지식인 혹은 대항 엘리트는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인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이 땅
의 지식인 사회에 점차 번져가는 한 현상이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반체제 지식인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체제가 길러낸 지식인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일제가 길러냈고 나머지는
스스로 자랐거나 식민지가 된 이땅에서 요행으로 벗어나 다른 나라에서 지식을 키워간 사람
들이다. 따라서 반드시 이 체제의 지배 계급 출신이 아니고 이 체제에 충성을 서약한 적도
없는, 해방 공간이나 6,25를 전후해 활동한 대항적 지식인들은 엄밀히 말해서 탈주한 지식인
들이 아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체제에서 기른 지식와 충성심을 가지고 새로 형성된 체제
안에서 자신의 지분을 키우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
4,19에서는 얼핏 보면 지식인의 탈주와 비슷한 현상이 있다. 위로부터도 아니고 아래로부
터도 아닌, 굳이 표현하자면 옆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 혁명을 주도한 학생들
은 지식인의 범주에 넣을 수 있지만 그들은 틀림없이 남한 체제가 길러낸 지식인들이다. 그
들 중 가장 연장인 대학교 4학년생조차도 국민 형성 교육의 일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세운
나라에서 받았고, 아버지 교육 과정은 온전히 이 체제 안에서 치렀다. 그 과정에서 명시적은
아니지만 이 체제에 대한 충성을 되풀이 서약하였을 것이며, 또 그들에게 고등 교육까지 박
을 수 있게 해준 출신도 지배 계급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그들이 거
리로 쏟아져나온 것은 결코 지식인의 탈주이거나 충성의 전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반독재의
대의에 일시적으로 합의하고 실천했을 뿐 이 체제로부터 이탈하거나 그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목적이 달성되자 그들 대부분은 다시 흩어져 체제 안에 안주했다. 아주 소수
가 남아 체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그것도 5,16으로 왜곡된 체제 이념이나 그 실현
방식에 관한 항의였을 뿐 체제 자체로부터의 이탈이나 전복을 기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시작되고 있는 지식인의 탈주는 전과는 전혀 질을 달리 한다. 무엇보다도 그
들을 이 체제의 산물이다. 이들은 지식 축적의 출발을 이 정부와 같이하고 있다. 이 정부가
세운 국민학교에 입학해 국민 형성의 기초를 닦고, 그 중들 교육 과정과 고등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충성심을 길렀다. 그들의 출신은 지배 계급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개는 이
체제의 주도적인 계층이었다. 이들의 이탈 동기도 앞선 세대와는 다르다. 앞선 세대는 대개
체제 밖에서 습득하거나 주입된 이데올로기에 의지한 반면 이들은 체제 내부의 모순에서 출
발한다. 검증 안 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
에 펼쳐진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모색한다. 탈주 후의 행태도 달라 보
인다. 이들은 일시적인 반발이나 저항이 아니라 한 이념으로 자신들의 신념을 길러간다. 물
론 나중에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거나 연대할 수도 있지만 자생적 성격이나 주체적
지향으로 봐서는 앞세대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행태를 보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이
주도적인 세력이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연출되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
용기가 며칠 머물고 떠난 뒤 인철의 일기에는 그런 구절이 보인다. 그 뒤 용기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돌아오고 말지만 인철이 그를 통해 감지했던 '지식인의 탈주' 현상은 결코 과장
되거나 섣부른 단정 같지만은 않다. 정통성도 정당성도 확보하지 못한 권력이 경제적 보상
을 목적으로 무리하게 진행시킨 산업화가 대량으로 생산한 도시 빈민과 어울려 요란한 80년
대를 열게 되는 지식인의 탈주는 틀림없니 유신 전야의 그 암울한 날들에서 시작되기 때문
이다.
제42장 변경에 부는 바람
하늘이 잔뜩 흐린게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듯했다. 라디오에서 태풍 폴리호가 북상중이
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일기예보를 믿지 않는 명훈에게는 그 같은 하늘을 보고서야 우산을
찾았다. 베우산은 경진이 들고 나가버려 집 안에 남은 것은 비닐우산 하나뿐이었다.
"가더라도 어예튼동 조심하거래이. 백지로 앞서 나대지 말고... 니 처지가 처지 아이가?"
어머니가 부엌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다보며 새삼 당부했다. 그때 마당에서 굵직한 임
위원장 목소리가 들렸다.
"준비되셨으면 갑시다아. 모두들 기다릴 팅게."
명훈은 어느 편에도 대답 없이 집을 나왔다. 임위원장이 따라오더니 양복 윗주머니 이름
에다 핀으로 리본 하나를 달아주었다. '살인적 불하 가격 결사 반대!'라는, 며칠 전부터 귀에
익은 구호가 적힌 리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팔에는 지역위원회위원장이라고 씌어진 완
장까지 둘러져 있었다. 며칠 전 중앙위원회가 '분양지 불하 가격 시정'에서 '투쟁'으로 이름
을 바꾸자 거기에 따라 이름이 달리진 지역위원회였다. 주민궐기대회는 무슨 병원 부지라는,
공터가 크게 비어 있는 산등성이에서 열리고 있었다. 가는 길에 보니 새벽녘에 투쟁위원회
에서 뿌린 전단이 습기 머금은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그날 대회를 위한 전단으로
는 처음 보는 것이라 명훈은 그 중에 한 장을 집어들었다. '모이자 뭉치자 궐기하자, 시정
대열에!'란 구호를 앞세운 전단에는 지난 한 달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주민들의 요
구 조건이 다섯 가지로 정리되어 실려 있었다.
1. 백 원에 매수한 땅 만 원으로 폭리 말라.
2. 살인적 불하 가격 결사 반대.
3. 공약 사업 약속 말고 사업하고 공약하자.
4. 배고파 우는 시민 세금으로 자극 말라.
5. 이간 정책 쓰지 말라, 단지 주민 안 속는다.
그러고 보니 궐기대회 장소로 가는 사람들 중에는 미리 준비한 듯한 플래카드를 들고 가
는 청년들도 보였다. 거기에는 현안과는 좀 거리가 있는 '허울 좋은 선전 말고 실업 군중 구
제하라!'란 구호가 적혀 있었다. 검은 글씨 사이에 섞인 붉은 글씨가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
다.
"근데 이시, 서울시장이 정말 오까아? 오기만 오면 우리 말 안 들어주고는 못 배길 틴
디..."
말없이 걷는 명훈에게 공연히 주눅들어하는 기색으로 붙어 걷던 임위원장이 전단을 읽는
명훈을 보고 말했다.
"오겠죠. 어제 제2부시장이 와서 약속했다면서요? 시간까지 정했는데."
"어제 부시장이란 사람이 하도 개 몰리듯 하고 가서 말이시."
임위원장이 그렇게 말해놓고 명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명훈은 그의 말을 더는 받아
줄 수 없었다. 궐기대회장으로 가는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고 싶어서였다. 풍문
대로 분양지 전매 금지 조치에 따른 토지 매각이 강행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부터였다.
그러나 은근히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철거민 분양지의 지가 산정과 전매 입주자의 분양가는
전혀 기준은 달리했다. 곧 철거민의 분양가는 원래의 취지에 맞게 원가에 가까웠으나 전매
입주자는 그 얼마 전에 임위원장이 예고한 그대로였다. 단지 내의 대지는 시장 부지 1만 6
천 원으로부터 4단계로 구부냈는데 소방도로, 막장에 있는 가장 싼 대지의 분양가가 평당 6
천 원이었다. 대지가 별로 실속도 없는 도로를 끼고 있다는 이유로 명훈에게 날아든 분양
대금 납입 고지서는 평당 만 원에 총액 20만 원이였다. 집터로는 가장 노른자위라던 남산
주변이 평당 1만 6천 원 전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고가였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애써 지은 집을 내놓지 않으면 감당 못 할 고지서가 날아들자
명훈은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그나마도 명훈네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아 설령 집
을 내놓는다 해도 분양가를 떼면 집을 짓는 데 들어간 원가조차 손에 남을 것 같지 않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면 단칸 셋방에 들기조차 어려울 게 뻔했다. 거기다가 어렵사리 얻은
경비 일자리마저 잃어 일가의 생계를 오직 경진의 박봉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자 명훈의
절망감을 서서히 분노로 바뀌었다. 서울시 당국의 분양가 결정에 대해 분노를 느끼기는 다
른 전매 입주 분양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투기로 들어왔던 사람들은 미리 샌 정보에 따
라 진작에 손을 털고 떠나, 남은 것은 거의가 투기와는 거리가 먼 실수요자들이 대부분이었
다. 자신들이 살 집터를 철거민 이주 지역에서 골랐다는 사실 자체가 실수요자인 전매 입주
자의 형편을 잘 말해준다. 비록 서울을 벗어난 곳이지만 내 집 마련의 꿈 하나로 철거민의
딱지를 산 중영세민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딱지를 사고 집을 얻는 데 가지고 있던 돈들을
다 써버려 정부가 다급하게 몰아치면 헐값에라도 집을 내놓는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았
다. 그런데도 당국은 투기꾼에게 물을 책임을 그들에게 물어 땅값이라기보다는 벌금에 가깝
게 터무니없는 분양가를 책정한 것이었다.
나중으로 보아서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분양 정책을 서울시가 그처럼 강행하게 된 게는
부정확한 통계 조사도 한몫을 한 것 같았다. 서울시는 전매 입주자의 수를 실제보다 반도
안 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전매 입주자의 성격뿐만 아니라 숫자까지도 엉터리로 파
악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원래의 권리자인 철거민들도 당국의 분양가 산정에 만족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격 자체는 매입 원가 정지비를 감안하면 그리 무리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들에게는 그것마저도 감당할 힘이 없었다. 거기다가 시장 부지나 노른자위 유보지에서 예상
되는 엄청난 차익은 서울시 당국이 자기들 철거민을 팔아 수지맞는 땅장사를 하는 것으로밖
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밖에 주민 모두에게 공통된 보다 근원적인 분노도 있었다. 그것은 신
도시 개발 행정의 미비와 미숙으로 지난 2년 동안 단지 내 이주민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임시 주거 시설과 상하수도를 비롯해 전기 통신 등의
부대 시설 미비로 겪어야 했던 고통들이 점차 당국을 향한 분노로 자라가고 있었다.
철거와 이주를 설득하기 위해 내보인 무책임한 신도시 개발 청사진도 이주민들의 보이지
않는 분노를 키워간 원인이 되었다. 단순한 서울의 위성 도시나 베드 타운이 아니라 독립된
생활 공간으로서의 신도시는 그 내부에서의 일자리를 약속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단순 막노
동에 생계를 의지하고 있던 철거민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설득력 있는 이주조건이었다. 그
런데 약속한 산업체나 공단은 조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외지 투기꾼들에 의해 주도되던
개발 붐도 지난해 전매 금지 조처와 함께 내려앉고 말았다. 더러는 손쉬운 대로 포장마차를
열어 그 자리에서 생계를 유지하려고 애썼으나, 워낙 경쟁자가 많은 데다 구매력이 없는 수
요자들뿐이라 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능력이 되지 않는 나머지는 당국에 대한
불신을 분노로 키워가며 멀리 서울까지 다시 막노동을 찾아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
다가 7월에는 은근하게 타오르는 그들의 분노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은 조처가 경
기도에 의해 내려졌다. 이른바 가옥 취득세 고지서란 게 그러잖아도 허덕이고 있는 단지 내
의 집집마다 뿌려진 일이었다. 열 평 지분으로 평균 3천 원 정도의 의례적인 것이었으나 출
구를 못 찾아 꿈틀거리는 그들의 분노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하였다. 아직도 도시 빈민 문제
에 정면으로 맞닥뜨려본 적이 없는 개발 행정의 안이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조치였다.
산업화가 강력하게 추진되면서 그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나 자신들에게 강요되는 희생
과 억압에 대응할 만한 선례나 기준을 가지지 못하기로는 도시 빈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지
난 2년 때로는 생존 자체를 위협받을 정도의 악조건 아래 살면서 이렇대 할 집단 항의 한번
해보지 못한 광주대단지 이주민들도 그런 점에서는 전형적인 산업화 초기의 도시 빈민이었
다. 하지만 그래도 먼저 깨어난 것은 보다 절박한 이주민들쪽이었다. 먼저 모두에세 공통된
불만을 바탕으로 '분양지 불하 가격 시정위원회'란 일종의 시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단
지 내 한 교회의 목사인 전상헌이란 사람을 고문으로 하고 같은 교회 장로인 박종하란 사람
을 위원장으로 세워 구심점이 형성되자 각 단지는 그 하부 조직을 결성하여 거기에 호응했
다. 그들은 먼저 전단을 뿌려 서울시에 네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대지 불하 가격을 평당 1천 5백 원 이하로 해줄 것.
둘째, 불하 대금의 상환을 10년 간 분할 상환토록 해줄 것.
셋째, 향후 5년 간 각종 세금을 면제해줄 것.
넷째, 영세민 취로장 알선과 그들에 대한 구호 대책을 세울 것.
"공업 단지를 만듭네, 산업체를 유치합네 하고 무슨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떠든 것
도 실은 도시 미관을 위해 삶의 터전의 내준 우리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보상이라구. 일자
리 내놓으라고 하는 구호도 얼핏 들으면 억지 같겠지만 적어도 우리에세는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란 말이시. 몇 년 간 세금 면제를 해주겠네, 분양가를 단지 조성 실비로 하겠
네, 토지 분양가는 3년 거치 후 5년 분할 상환으로 해주겠네, 하는 것도 마찬가지여. 자기들
의 정책에 협조해준 우리에게 마땅히 해주어야 할 배려인데도 무슨 큰 선심이라도 쓰듯 생
색낸 거 아녀? 그래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해? 도대체 우리를 뭘루 보는 거여? 언제까지
고 고리짝 관존민비 사상에 젖어 국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거여? 가난이 권리일 수는
없지만 죄도 아니여. 특히 즈이들이 짠 판으로는 이렇게 밀려날 수밖에 없어서 밑바닥을 기
게 된 우리 같은 인생들은 말여... 그러니 한번 나서봐주더라고. 여긴 말이여, 이형이 걱정하
듯 그런 고상한 사상 놀음이 아녀. 살기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이라구."
그 시정위원회 준비 모임이 있던 날 재빠르게 지역위원회를 결성해 집행부를 움킨 임위원
장이 명훈에게 지역 대표를 맡기를 두번 세번 권하면서 그렇게 설득조로 말했다. 그 말이
명훈을 온전히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몽마와도 같이 의식을 짓누르는 사상 문제
에서 놓여나게 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그래, 이건 생존의 문제다. 여기서 더 밀리면 정말 갈 곳이 없어지는 도시 빈민들의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나도 들어 있다...'
하지만 그래도 명훈은 표면적으로는 끝내 나서지 못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갑자기 활발
하게 진행되는 남북 적십자 회담이 준 묘하게 불길한 예감이었지만 나머지 다른 이유도 만
만치는 않았다. 그것을 바로 아직 확실하지 않은 자신의 법률적 신분이었다. 시간이 지났다
고는 하지만 사찰 폭력에 관계된 기소 중지가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고, 그보다 앞선 여
론 조사소 시절의 혐의도 공소 시효가 소멸될 만큼 오래되지는 못했다.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대표로 나서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달리 사람을 찾아보
시지요. 대신 저는 뒤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또 뒤에서여? 도대체 먹물 든 사람들 왜 그래? 그것도 힘이라고 좀 빌리려 들면 한다는
소리가 그저 뒤에서나... 한따니께. 그러들 말고 화끈하게 나서보더라고. 이 일이 옳고, 해야
한다면 말이시..."
흥분할수록 더 뚜렷히 남도 사투리를 드러내며 임위원장이 말했다. 그게 지식인의 교활함
을 지적하는 것 같아 명훈이 변명조로 받았다.
"저도 뭐 제 몸 다치는 거 겁나 이러는 거 아닙니다. 사정이 있어요."
"아, 그 춘부장님 일? 그것과 이번 일은 상관없다니께 그러네. 다시 말하지만 여긴 그런
고상한 사상놀음이 아니라고."
"그런 뜻이 아니라 제가 좀 복잡한 일에 얽혀 있는 게 있어서..."
자신이 받고 있는 혐의까지 차마 밝힐 수 없어 명훈이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그제서야
임위원장도 짐작가는 방향이 있는지 한 발 물러섰다.
"하기사 말못할 사정도 있겄제. 젊은 사람이 여기까지 밀려오다 보면 애맨 죄도 덮어쓸
수 있고- 좋소, 그럼 이렇게 합시다. 대표는 못 맡더라도 힘이 필요한 때는 언제든 팔 걷어
붙이고 나서주는 거요, 잉."
"아이구, 누님도 정말 극성이셔. 이 빗속에 서울서 여기까지..."
영희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김상무가 벙글거리며 맞았다. 도무지 걱정할 게
없다는 표정이요, 말투였다.
"내가 그냥 있게 됐어? 잘못하면 사기꾼으로 고발당하거나 생돈을 백만 원 이상 물어야
할 판인데..."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요? 이미 단장이 구속되었으니 전매자인 누님이 사기로 고소당할
리는 없고요. 하기야 전매해간 사람들이 울며불며 달려들면 귀찮기는 하시겠지..."
"귀찮은 게 아니라 물어줄 수밖에 없다구. 나 이래뵈도 층층시하에서 시집살이하는 사람
이야. 우리집에 떼로 몰려들어 행패를 부리면 안 물어주고 당해낼 재간 있어?"
영희는 그러면서도 새삼스런 후회로 모자란지 딱지에 손댄 일을 후회했다. 김상무의 권유
도 있고 워낙 전망도 있어 보여 스무 장을 모았으나 아무래도 일이 돌아가는 게 미심쩍어
거의 본전에 팔아넘겼는데,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그 요란스럽던 기공식이며 화려하던 개
발위원 명단에도 불구하고 모란단지 개발은 결국 아무런 행정적 근거 없는 사기극으로 끝나
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휴지나 다름없이 된 이른바 '사딱지'를 사들인 사람들이 가만히 있
을 리 없었다. 특히 사들인 딱지를 다시 전매하지 않은 실수요자들은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영희에게 덤벼들었다. 또 한 번 전매가 된 딱지들은 언젠가는 전매된 선을 따라 영희를 찾
아올 것임에 틀림없었다. 모두들 아직은 경황이 없어 당국의 눈치만 보고 가만히 있지만 머
지않아 시집으로 들이닥칠 것이고, 그리 되면 영희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누님이 여기 온다구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오늘 서울시장과 담판짓는 건 철거민
들과 그 전매 입주자들인데..."
"아냐, 다 한 끈에 묶인 일이라구. 아무리 개인이 벌인 일이라지만 피해자가 8천 가구라면
미이 그건 개인에게 맡겨둘 수 없는 거야. 이쪽 처리 방식을 보면 모란단지 쪽의 해결방식
도 가닥이 잡힐 테지."
"그거야 누님이 오시지 않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제 보니 김상무 정말 속 좋은 사람이네. 나보다 몇 배는 더 험하게 얽혀 있으면서 남
의 일처럼 말을 하니... 하긴 나 하나 나서봐야 별 것 없지만 그래도 머릿수로나마 이쪽에
힘을 실어줘야 할 거 아냐? 여기서 힘을 보여줘야 저쪽도 함부로 나오지 못할 거 아니냐
구."
"그럼 데모하러 서울서 예까지 오신 거예요?"
"데모해서 될 일이라면 데모라도 해야지."
"하, 정말 대단하시네. 그렇지만 그거라면 걱정하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없는 사람
들 뭉친 힘이라면 오늘 서울시장 신물나도록 맛보게 될걸요."
그래놓고 김상무는 책상 위에 널려 있는 전단들을 한줌 집어보이며 이었다.
"이게 다 투쟁위원회에서 뿌린 삐란데요, 아침에 보니까 단지마다 허옇게 뒤덮였더라구요.
벽보도 좀 빠안한 곳은 왼통 도배를 하고... 모르긴 하지만 이따가 주민궐기대회 때도 눈코
달린 사람들은 다 나올 겁니다."
그러는 김상무는 느긋하기만 했다. 문득 그게 이상해 영희가 물었다.
"이제 보니까 천하태평이라나서 그런 게 아니라 무슨 정보가 있는 모양인데- 어디 좋은
소식 같은 거라두 있어?"
"그런 거 없어요. 실은 나도 속으로는 콩을 볶는다구요. 다만 내가 설쳐봤자 될 일이 아니
라 그냥 보고 있는 거죠. 언젠가 누님이 말씀하신대로 물불 안 가리는 8천 가구만 믿고..."
김상무가 비로소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실토했다.
"그럼 김상무도 함께 가. 몇 시랬지? 궐기대회가?"
"열시라고 했지만 함 꽤나 몰렸을걸요. 열한시에 서울시장이 올 때쯤은 단지 전주민이 다
몰려 있을 겁니다."
"그럼 우리도 지금 가자구. 티끌 모아 태산이라구, 우리 둘이라두 힘을 보태야 돼."
영희가 일어나며 우산을 집어들었다. 그러면서 힐끗 시계를 보니 시간은 9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설거지도 미뤄놓고 택시로 오기를 잘했다는 기분이었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그 동
안 키워 온 내 몫릉 태반이 날아가게 된다...
"바쁠 것 없어요. 어차피 시장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끼리 악 쓰는 것밖에 안 될 테니까.
게다가 모란단지 사람들을 낄 자리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와 있겠지. 그 사람들에게도 우리 힘을 보여줘야 돼. 어쩌면
서울시장보다 그 사람들이 떠들어주는 게 더 빠른 해결을 가져올지도 몰라."
그러자 김상무도 마지못한 듯 우산을 찾아들고 따라나섰다. 궐기대회장으로 알려진 곳은
무슨 병원 부지 뒤의 산등성 이 공터였다. 벌겋게 깎아놓은 야산에 아침부터 비가 뿌려 마
땅히 앉을 만한 것조차 없었으나 벌써 사람들이 공터를 허옇게 덮고 있었다. 저마다 우산을
들었는데 개중에는 아예 시위라도 하듯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궐기대회를
주최한 시정위원회 쪽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는지 단상은 아직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집행부 일부는 와 있는 듯, 성능 좋은 마이크를 통해 격앙된 목소리로 구호가 반복되고 있
었다.
"백 원에 매수한 땅 만 원으로 폭리 말라!"
"서울시는 각성하라!"
"정부는 철거민의 현실을 직시하라!"
그 소리에 못지않게 격앙된 목소리로 화답하는 군중들도 있었다. 주먹 하나로 복덕방을
빌붙어 살다 갈 데 없는 실업자가 된 건달들은 벌써 술에 취해 건들거리며 시빗거리만 찾고
있는 눈치였다. 다시 비가 쏟아졌다. 모였던 사람들이 빗발을 피하기 위해 저마다 주위를 둘
러보았으나 허허벌판이라 기댈 곳이 없었다. 우산을 준비해온 사람들을 빼고는 고스란히 쏟
아지는 빗발에 몸을 맡겨야 했다. 그러나 빗줄기가 굵어져도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영희는 김상무가 내준 우산을 받고 있었으나 태풍에 겹친 비라 젖지 않은 곳은 머리칼과
가슴께 정도였다. 금세 휘몰아친 빗발로 스커트가 민망하게 몸에 달라붙었다. 김상무가 그런
영희를 힐끗 보다가 권했다.
"누님, 들어가시지요. 보니, 누님까지 청승 떨지 않아도 되겠어요. 아무도 꼼짝 않잖아요?"
"아냐. 그런 마음으로 하나 둘 빠지기 시작하면 여기도 잠깐이야. 서울시장 올 때까지라도
함께 있어."
영희는 그렇게 말하며 단상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궐기대회가 시작되려는지 단상에
희끗희끗한 사람들이 오르기 시작했다. 투쟁위원회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웬걸, 오겠어요? 와봤자 골치만 아플텐데... 비 핑계대고 안 오기 십상일 겁니다."
"이 사람들 보니 그랬다간 정말 일날걸. 저 봐. 저 사람들 눈길... 그냥 넘어가겠어? 또 그
냥 넘어가서도 안 되고..."
그 사이 군중들도 좀더 조직적이 되었다. 단지별로 모여서고 그 앞에는 준비해온 플래카
드가 깃발처럼 펼쳐졌다.
'허울 좋은 선전 말고 실업 군중 구제하라!'
'빈민 구제 핑계대고 땅장사가 웬말이냐!'
그런 구호들이 비에 젖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단순한 궐기대회라기보다는 잘 조직되고
치밀하게 준비된 시위였는데, 쏟아진 비가 분위기를 기대 이상으로 비장하고 격앙된 양상으
로 끌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궐기대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방이 터진 공터인 데다 배선
에 이상이 있는지 확성기 성능도 좋지 않아 주최측의 상황 보고는 잘 들리지 않았다. 영희
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연설과 낭독 사이에 끼어드는 구호뿐이었다.
"백 원에 매수한 땅 만 원으로 폭리 말라."
"배고파 우는 서민 세금으로 자극 말라..."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일체감의 확대였다. 약간의 이해 관계가 걸려 있기는 해고 원래
영희에게는 그들과의 일체감이 없었다.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향배를 살피다가 꼭 필
요하다면 함께 움직일 수 있다는 정도였으나, 그들의 비분은 곧 영희에게도 감염되었다.
'나나 저들이나 다를 게 뭐 있어. 애초에 관청에서 이런 짓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민간인들
이 모란단지를 어떻게 생각해냈겠어. 피해도 그래. 나는 물론 더 벌기 위해서 시작한 거지
만, 이 마당에 와서 보면 저들과 다를 게 없어. 산 딱지 다 물어주고 나는 빈털터리가 되고
말아. 우리는 한 배를 탄거야.'
어디까지나 구경꾼의 태도를 보이던 김상무도 차츰 달라졌다. 처음에는 영희가 구호에 화
답하는 것을 빈정거리는 눈길로 보던 그였으나 이윽고는 팔까지 들었다 내렸다 하며 구호를
외쳐댔다. 11시 가까이 되어 서울시장이 좀 늦을 것이란 예고가 있었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
만 실제로 양택식 시장은 빗속에 길이 막혀 늦은 것이었으나 이미 감정이 격앙돼 있는 군중
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열한시가 넘었다. 시장이 오지 않는다!"
갑자기 앞줄에서 누군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이어 더 많은 성난 목소리들이 그 말을
받아 소리소리 질러댔다.
"시장이 시간을 어겼다!"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무슨 불씨라도 되듯 그러잖아도 불이 댕겨지기만을 기다리던 수만의
군중이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장이 안 온다면 대단지 사업소로 가자!"
"사업소 직원이라도 족쳐 다짐을 받아내자!"
그러자 무슨 홍수가 밀려가듯 사람들이 한곳으로 몰려갔다. 모두 비에 흥건히 젖어 있어
정말로 무슨 칙칙한 물결 같았다. 영희도 덩달아 그들을 따라갔다. 질퍽한 흙바닥에 신고 있
던 구두가 목까지 빠졌으나 별로 개의치 않았다. 대단지 사업소는 궐기대회장에서 그리 멀
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앞장선 청년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곡괭이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우를
사업소로 뛰어들어가고 얼마 안 돼 그곳 직원인 성싶은 사람들이 쫓기듯 나오는 것이 보였
다. 이어 더 많은 군중들이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유리창이 깨어지고 사무 집기들이 부서지
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으로 선풍기며 전화통이 내던져지고, 서류들이 진흙바닥에 허옇게 흩
뿌려졌다. 본격적인 난동의 시작이었다. 직접 끼여들지는 못해도 영희는 시원스럽기 짝이 없
는 기분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군중의 일부는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성남 출장소
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서울시 차량 번호판이 붙은 검은 관용 지프가 보이자 그리로 우를
몰려가 유리창을 부수더니 그래도 둘러엎었다. 몇 사람 들러붙지 않은 것 같은데 차가 성냥
갑처럼 뒤집히는 게 신기했다. 그들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차를 몇 바퀴 굴려 개울
바닥에 처박고야 다른 곳으로 몰려갔다.
'맞아. 혼이 나야 돼. 저렇게 돼도 싸.'
영희는 딱히 누군에겐지도 모를 분노에 차 그들의 난동에 성원을 보냈다. 아니 그 이상
자신도 그들 속에서 함께 행동하고 있는 듯한 착각까지 느끼며 눈길로 그들을 좇았다. 김상
무도 이제는 영희를 말리지 않았다. 그런게 그런 영희의 눈길에 문득 낯익은 모습 하나가
잡혀왔다. 방금 대단지 사업소를 뒤집어엎고 또 다른 공격 목표를 찾아나서는 청년들 틈이
었다.
'오빠, 오빠아!'
영희는 하마터면 그렇게 소리칠 뻔했다. 가장 격렬하게 앞장선 청년들 틈에서 언뜻 명훈
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은 확인이 되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헤체고
사업소 쪽으로 다가갔다. 그제서야 작년 가을 단대리 언덕 쪽에서 오빠를 본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뒤로는 그곳에 올 때마다 눈여겨 살펴도 오빠가 보이지 않길래 역시 인부로 일하
다 떠났는가 싶었는데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었다.
'결국 오빠도 여기까지 밀려온 것이었구나. 철거민의 한 사람으로 여기까지 밀려와 있었던
것이로구나...'
그렇게 추측이 가자 영희는 공연히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슬픔이 일었다. 그들 남매가
세상을 돌고 돌다가 결국 만난 곳이 또 다른 세상 끝이나 다름없는 그것이이서였는지도 모
를 일이었다. 그래, 그렇게 된 것이라면 만나야지. 만나서 무엇이든 함께 헤쳐나가야지.
"오빠! 오빠, 나에요. 영희가 왔어요"
영희는 진작부터 그럴 줄 알고 명훈을 응원이라도 나온 기분이 되어 그렇게 소리치면서
거칠게 사업소의 집기들을 들부수고 있는 청년들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사람들의 성난
외침과 집기가 부서지는 소리가 아니더라도 불러서 들릴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영희가 몇
번이나 소리쳐 불렀는데도 명훈은 영희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꼭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청
년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사무소를 뒤엎었다가 다시 흥분한 군중의 선두가 되어 다른 곳으
로 밀려갔다.
"출장소로 가자!"
누군가 다시 그렇게 외쳤고 거기에 호응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문둥이 콧구멍에서 마늘을 빼먹지, 우리한테 뭐 취득세를 내라고?"
"서울시나 똑같은 새끼들이야, 본때를 봬줘야 해!"
그 길로 보아 선두는 이제 좀 전에 지나쳐온 성남 출장소를 덮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영
희는 이제 그들에게 세력을 보태준다는 것보다도 오빠를 만나기 위해 그리로 몰려가는 군중
들을 뒤따랐다. 진창을 걷는 데 굽 높은 구두가 몹시 걸리적거렸다. 맨발에 구두짝을 벗어쥔
채 영희가 성남 출장소 마당에 이르렀을 때 이미 출장소 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 사
이 더욱 과격해진 사람들을 사무실에 있는 서류를 불까지 질렀다. 하지만 그래도 어떤 선은
지켜지고 있는 듯했다.
"민원 사무실은 손대지 마시오. 호적 서류는 태우지 마시오."
그 혼란 속에서도 그렇게 군중을 유도하는 소리가 있었다. 그때껏 영희와 다름없이 군중
을 따르던 김상무가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영희를 붙들었다.
"누님, 이젠 정말 돌아가시지요. 더 따라다닐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희의 귀에는 그런 김상무의 말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뒷날 곰곰히 떠올려봐도 자신이 언제부터 과격한 청년들과 한 패거리가 되어 움직이기 시
작했는지 명훈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다. 빗속에서 한 시간이 넘게 서울시장을 기다릴 때만
해도 명훈은 전보다 좀 절실해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문제가 서울시의 선심에 의해 풀리기를
기다리는 평범한 군중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굳이 의심가는 대목이 있으면 거기서
몇 명의 동내 건달들을 만난 일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명훈의 전력을 냄새 맡고 명훈 주위
를 아첨기 섞인 눈빛으로 어슬렁거리던 그들은 그날 명훈을 보자마자 반색을 하며 몰려들었
다.
"어이구, 나오셨군요. 잘 나오셨습니다, 형님."
"시장 새끼, 트릿하게 나오면 골통을 까버립시다아."
"우리 젊은 사람들이 본때를 봬줘야 한다 이겁니다아."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그들의 입에서는 이미 진한 술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처음 명훈은
평소처럼 그들을 성가시게 여겼다. 그래서 차갑게 인사만 받고 자리를 옮기려는데 그 중 하
나가 명훈의 우산 밑으로 기어 들어왔다.
"이거 한잔 받으십쇼, 형님."
명훈이 뿌리치지 못하고 보니 손아귀에 감추고 있었던 듯한 플라스틱 소주잔이었다. 이어
다른 녀석이 품안에서 사 홉들이 막소주 한 병을 꺼내 한 잔을 따랐다. 명훈은 웃는 얼굴에
침 못뱉겠다는 기분으로 그 한 잔을 받았다. 그런게 그게 시작이었다. 잔을 비우고 자리를
옮기려는데 녀석들이 척척 들러붙어 다시 두어 잔을 더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 저희도 다 압니다. 아무리 맘잡고 들어앉으셨다지만 이 막장까지 밀려와 꼴같잖은
일 당하시려니 속에서 천불 나시지요?"
처음 술잔을 건넨 친구가 제법 친숙한 어조로 불쑥 그렇게 말했다. 큰 길 어귀에 유일하
게 남은 복덕방에 빌붙어 지내는 친구였다. 명훈은 왠지 그냥 해보는 소리 같지 않아서 물
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창호 형님한테 다 들었습니다. 전에 동대문 쪽에서 잘 나가셨다구요."
"창호? 그게 누구지?"
"거, 왜 늘 라이방 끼고 있는 형님. 왼팔에 일심 먹물 넣고..."
그제서야 명훈은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전매자 처리 문제가 궁금할 때마다 명훈은
그 복덕방에 다서 묻곤 했는데, 거기 있던 건달 중에 가장 나이 든 친구였다. 어딘가 낯익다
싶었으나 그 마당을 다시 아는 척 하기 싫어 못 본 체해온 터였다.
"그랬군. 하지만 그런 소리 다 믿을 건 못 돼. 너희들도 알겠지만 야쿠자판이 원래 그래.
저를 높이기 위해 공연히 남을 띄우는 수가 있지."
애써 덤덤하게 받아도 그때 이미 명훈의 가슴속에는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새까만
후배 녀석들이지만 이미 나를 알고 있다면 더는 무시하고 떠날 수가 없구나. 필요하다면 한
때의 '간다'답게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우리 여기서 이럴 개 아니라 어디 가서 엉덩이나 좀 붙이죠. 아직 판이 제대로 어울리려
면 좀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셋 중에서 비교적 낯선 녀석이 완연히 술기운이 돈 얼굴로 제안했다. 명훈이 시계를 보니
10시가 다돼가고 있었다. 단상이 수런거리는 게 곧 궐기대회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시간 다 됐어. 궐기대회가 단합된 힘을 보여주기 위한 거라면 한 사함이라도 더 모여 있
어야 하는 거 아냐?"
명훈이 그런 말로 거절을 대신했다. 그새 받아마신 석 잔의 술로 속이 짜르르해오는 걸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때 술병을 들고 있던 녀석이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을 흔
들어보이며 은근히 제 친구를 도왔다.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술이 모자랄 것 같은데... 아직 판은 시작도 되기 전인데 말야."
그래놓고는 공손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명훈에게 다시 한번 권했다.
"땜통 저 새끼 말이 맞아요. 대회야 곧 시작되겠지만 우리끼리 떠들어봤자 뭐 합니까? 사
업소고 출장소고 여기 있는 공무원들이야 이 대회 안 봐도 우리 사정 빤히 아는 거고. 요는
서울서 오는 나랏님인데, 아직 오려면 멀었어요. 장관보다 높다는 서울시장님이 웬걸 제 시
간 맞춰 오겠습니까?"
굳이 따지면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명훈이 피하고 싶은 것은 자리를 떴다
가 대회를 보지 못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시답잖은 친구들과의 낮술이었다.
"그냥 기다려. 분위기란 것도 있으니까."
그러자 땜통이란 불리는 녀석이 다시 솔깃한 제안을 했다.
"그렇다고 뭐 대낮부터 술집에 죽치자는 건 아닙니다. 저기 가서 비나 그으며 몇 잔 걸치
자는 겁니다아."
녀석이 손가락질하는 곳을 보니 공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비탈에 원래 거기 있었는지 아
니면 그날의 행사를 바라 누가 끌어다둔 건지 제법 넓은 차양을 펼친 포장마차 한 대가 보
였다. 그때껏 별로 끼여들지 않고 있던 또 다른 녀석이 거들었다.
"마이크 소리가 다 들리는 곳임다, 형님. 일 터지면 후딱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구요."
그 바람에 명훈도 마지못해 따라갔다. 내심으로는 뭔가를 별러대고 있는 그들의 속셈이
궁금하기도 했다. 명훈이 알기로 신개발지에 기생하고 있을 뿐인 그들에게 철거민이나 전매
자 같은 이해 관계가 있을 리 없었으나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결저을 앞둔 전사 같은 데
가 있었다.
"낮술에 소주는 좋지 않아. 막걸리로 하지. 아저씨, 여기 막걸리 한 대포씩 주십쇼."
막상 포장마차에 이르고 보니 아무래도 얻어먹을 입장이 아니다 싶어 먼저 명훈이 술을
시켰다.
"그래도 네가 피해입은 건 없잖아? 넌 딱지를 사지도 않았다며?"
"딱지를 날려야먄 피햅니까? 그보다 더한 건 밥줄이 끊긴 겁니다. 하기 좋은 말로 깡패지,
형님, 사실 깡패 씨가 따로 있습니까? 나 여기서 창호 형 만나 복덕방 밥 얻어먹기는 했지
만 처음부터 깡패질로 나설 건 아니라구요. 신개발지로 발전 가망도 있고 일거리도 않을 거
라는 말 듣고 찾아왔다 이겁니다. 그런데 개발 공약을 공갈 중에도 순 공갈이고 다시 서울
바닥으로 기들어가지 않으려면 그 길뿐이더라구요. 그래서 창호 형 잔심부름이나 하며 밥이
나 얻어먹은 거란 말입니다. 몹쓸 짓 한 것도 없고요- 그저 좀 껄끄럽긴 해도 어디까지나
일자리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새끼들이 오락가락하며 다 죽여놨어요. 그것도 저희 장살
하려고..."
"저희 장살 하다니?"
"저게 장사가 아니고 뭡니까? 다 아는 이곳 땅값에 까짓 개발비 얹어봐야 분양지 원가 얼
마 멕히겠어요? 손바닥에 장에 지져도 오백 원 안 넘어요. 그런데 그걸 만 원씩 내놓으라니
그게 명색 국민의 공복이라는 공무원들이 할 짓입니까? 그것두 없는 사람 상대루다. 장사라
두 도둑놈 심보가 아니면 못 해먹을 장사라구요. 아무리 남의 일이지만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져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렇지만 그건 법을 어기고 전매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이잖아? 또 처음부터
전매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고..."
그러자 이번에는 형대란 젊은이가 벌겋게 달아 받았다.
"전매 금지라는 소리 어디서는 안 했습니까? 그런데 이번만 유독 칼을 뽑고 덤비는건 뭡
니까? 철거민만 이 나라 백서이고 우리는 남의 나라에서 온 원숩니까? 투기꾼한테 물리는
벌금이라지만 솔직히 지금 전매 딱지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투기꾼이 어디 있딨습니까,
투기꾼이? 미리 전매 금지 정보 슬슬 흘려 그것들은 다 날라버리고, 지금은 싸게 집 한 칸
마련해보겠다고 서울서 밀려나온 가난뱅이들뿐이잖습니까? 그걸 빤히 다 알고 있으면서 이
제 와서 그런 수작을 해요? 투기꾼들이 몇 배씩 튀겨먹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그것들 다 빠
져나간 뒤에야 힘없고 쥔 거 없는 우리 서민들을 상대로 다시 장살 하려고 들어요?"
그런데 묘한 것은 명훈에게도 형대의 말이 더는 어거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얼른 속
을 드러내기 싫어 나머지 태두란 녀석에게 슬몃 물었다.
"자넨 여기 토박이라며? 보상이 괜찮았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야?"
"케케묵은 옛날얘기 하지 마십쇼. 보상이 괜찮았다는 건 몽땅 땅 많은 사람들 얘기고, 우
리 아버지같이 밭 몇 뙈기에 소작으로 살던 사람들에게는 하루아침에 밥줄을 끊어놓은 거나
다름없는 게 이곳 대단지 개발이었다구요. 몇 푼 받은 돈은 이걸루 뭘 해야 먹고 사나, 벌벌
떨다가 다 날리고 철거민들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는 데 일 년도 안 걸리더라구요. 그래도
오래 정든 땅이라 어떻게든 한 귀퉁이에 기여 살아보려고 발버둥인데 서울시 새끼들이 이제
그마저 어렵게 만들었다구요. 이 개발지를 깡그리 죽여놓으려고 한다 이겁니다."
그때 목이 마른 듯 남은 대폿잔을 비운 형대가 안주도 집지 않고 잇대어 열을 올렸다.
"이대로 두면 다 죽어요. 전매자들뿐만 아니라 철거민들, 영세농 출신의 원주민들... 이번
기회에 뭔가 있어야 합니다. 이건 이제 어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대단지에 터잡고 살
려는 모든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구요. 아니, 도시에 살 만한 사람 축에 끼여들지 못
한 모든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야 할 문제란 말입니다. 개깡다구 부리자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명훈은 그들과 행동을 같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억지쓴다는 기분 없이 처우 개선을 요구할 당당함이 생긴 정도였다. 그런데 그
무렵 해서 거기가지 들린 대회장의 마이크 방송이 묘하게 그들을 자극했다.
"알립니다. 양택식 서울시장님께서는 예정보다 한 삼십 분 늦으시겠답니다. 서울시장이 올
때까지 자리를 뜨지 마십시오. 기다려서라도 우리의 사정을 알리고 담판을 짓도록 합시다."
대강 그런 내용의 방송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녀석들의 눈길은 대뜸 험악해졌다.
"늦긴 뭘 늦어. 안 오는 거지."
"내 이럴 줄 알았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구먼."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그렇게 내뱉고는 남은 잔을 급하게 비우더니 명훈에게 말했다.
"올라가봅시다, 형님. 아무래도 그냥 있다가는 개 몰리듯 내몰리고 말겠슴다."
그때도 명훈도 술이 좀 올라 있었다.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
도 포장마차에 그냥 죽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기분은 들었다. 그들이 대회장으로 돌아와
보니 군중들도 눈에 보이게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들도 서울시장이 늦는다는 방송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눈치가 아니었다. 서울시장은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
다.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굳은 얼굴들은 그런 결의를 다지는 듯했다. 일은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터졌다. 잠시 무겁고도 음울한 침묵이 이어지더니 누군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서울시장이 시간을 어겼다! 시장이 우리를 속인다!"
그러자 더 크고 우렁찬 목소리가 그 외침을 받았다.
"시장은 오지 않는다!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 한다!"
그런데 두번째 목소리의 어디가 그렇게 선동적이었던지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리놈들은 꼭 무슨 일이 터져야 잘못을 안다! 그냥 있어서는 안돼!"
"본때를 보여주자!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 어떤 건지 놈들에게 보여주자!"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그 목소리들이 주는 느낌이었다. 광주대단지로 내려와 힘들게 끼
여 살면서도 명훈이 그들에게서 동료 의식을 느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어쩌다 한 구덩이
에 빠지기는 했어도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 때가 오면 나는 너희들과 무관한 곳으로 떠난다,
그들의 한탄이나 고통의 호소를 대하는 명훈의 느낌을 그랬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들
의 목소리는 바로 자신을 대신한 절실한 외침으로 들렸고, 비에 젖은 초라한 행색들도 진정
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래 맞아. 저게 바로 나다... 그런 느낌이 들자 스스로도 짐
작 못한 분노가 가슴속에서 천천히 불씨를 피워올렸다.
"형님, 갑시다. 이제 시작된 거라구요"
"이 새끼들 정신이 홱 돌아오게 본때를 봬줍시다."
"우리가 나서자구요. 우리 같은 것들이 나서서 깃대를 잡아주지 않으면 또 슬그머니 주저
앉고 만다구요."
가름 젖은 헝겊에 불이라도 댕겨진 듯 세 녀석이 금세 눈빛이 달라져 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훈에게는 아직도 한 가닥 주지가 남아 있었다. 막상 움직이려 하자 무슨 음흉한
상처처럼 의식을 건드려오는 공포였다. 만약 이것은 불온한 사상으로 선동된 난동으로 몰린
다면...
"형님, 정말 구경만 하실 거요? 찍, 소리 못 하고 밟혀 터지는 지렁이같은 꼰대들에게 맡
겨둘 거냐구요?"
형대가 제법 눈까지 홉뜨며 명훈의 소매를 끌었다. 어느새 군중의 일부가 움직이고 있는
데 앞장은 정말로 녀석들 또래의 청년들이었다.
"사업소로 가자! 이 새끼들부터 먼저 손보자구."
조금 나이든 사내가 그렇게 외치며 그들을 유도했다. 생김이나 차림은 후줄근했지만 눈빛
하나는 남다른 게 취한 사람같지 않았다.
"그래, 가자. 이렇게 당할 수야 없지."
명훈이 가슴속에 남은 마지막 주저를 지워 없애며 세 녀석과 함께 내몰리듯 그들 속에 섞
였다. 그래, 이건 내 일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스스로 지켜야 할 이익이다, 그렇게 이를 사려
무는 순간 이전의 소심과 사려들은 깨끗이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명훈이 대단지 사업
소로 뛰어들었을 때는 먼저 뛰어든 사람들로 사무실 안이 난장판으로 변한 뒤였다. 욕설과
함께 책상이 뒤엎어지고 유리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내렸다. 처음에는 어떻게 맞서
보려던 직원들도 그때는 이미 저항을 포기하고 저마다 사무실 밖으로 피하고 있는 중이었
다. 그것도 기세일까, 직원들이 달아나버리자 군중들은 한층 더 과격해졌다. 처음에는 부수
는 소리만 요란하고 중요하지 않은 집기들만 부수고 뒤엎었던 그들이 차츰 업무와 관련된
중요한 기기와 서류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선풍기와 전화통이 박살나더니 서류함이 뒤엎
어지고 서류들이 허옇게 쏟아졌다.
"형님, 이걸 쓰십쇼."
태식이 어디선가 서너 자 되는 각목을 하나를 쥐어주었다. 자신은 굵은 몽둥이 같은 것을
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의 난동이 온전히 우발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앞장선 청년
들은 저마다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곡괭이나 철봉같이 미리 준비하지 않고
서는 지니고 있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옮겨붙기 쉬운 열정 중의 하나가 파괴와 전복의
열정이다. 명훈이 철들면서 줄곧 경원하고 기피해온 것이 그 방향의 열정이었지만 한번 옮
아붙자 그것은 그 누구에서보다 보다 치열하게 타올랐다. 어느새 명훈은 세 녀석과 헤어진
채 난동의 선두에 서서 들부수고 뒤엎는 데만 열중했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열정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성남 출장소로 가자!"
"맞아, 그 새끼들도 손봐야 돼!"
누군가가 외치자 명훈은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들과 함께 출장소 쪽으로 달려갔다.
대단지 사업소의 질척한 마당은 내팽개쳐진 서류함과 집기들, 그리고 찢기고 짓밟힌 서류들
로 허옇게 뒤덮여 있었다. 가는 길에 보니 성남지서는 벌써 텅 비어 있었다. 지서라도 근무
자가 서른 명이 넘어 웬만한 산골 경찰서에 못잖은 곳이었는데, 워낙 많은 군중이 들고 일
어나자 모두 겁을 먹고 피해버린 것 같았다. 그 사이 난동은 완연히 폭동의 기세를 띠었지
만 군중의 수는 줄지 않고 움직임을 오히려 과격하고 거침없어졌다. 경기도 성남 출장소로
몰려간 군중은 대단지 사업소보다 휠씬 철저하게 들부수기 시작했다. 방화가 그때 처음 시
작되어 서류와 집기들이 불탔고, 조금이라도 저항의 기색이 보이면 폭행마저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보이지 않는 통제는 있었다. 본관 건물을 뒤엎은 군중의 선두가 별관인
민원 사무실로 몰려갈 때였다. 무슨 지령처럼 그들을 말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주민등록은 태우지 마라!"
"민원 서류는 손대지 마라!"
이미 눈들이 뒤집힌 선두의 청년들도 그 말에 주춤했다. 막 그들을 따르려던 명훈오 정신
홱 드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세상 오늘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 바람에 민원 사무실은 유리
창만 몇 장 깨지는 걸로 내부는 상하지 않았다. 그 무렵 무슨 풍문처럼 서울시장이 도착했
다는 말이 군중 사이를 떠돌았다. 그러나 그 말은 군중을 가라앉히기보다는 더욱 흥분시켰
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서울시장과 그를 따라온 간부들을 인질로 잡는 것이 되어 확실치
않은 정보에 따라 이곳저곳을 뒤지며 몰려다녔다.
실제 서울시장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통보된 대로 약속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어진 11시
반경이었다. 그어나 군중은 이미 그 10분 전에 움직이고 있었다. 시장은 하는 수 없이 대회
장에서 한참 떨어진 제1공업단지 내에 있는 어떤 업체의 회의실에서 투쟁위원회 간부들을
만났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이미 다른 선택이 없어진 시장은 가능한 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터이니 난동부터 중지시켜줄 것을 당부했다. 위원회 간부들도 거기에 동의했다. 하지
만 그들이 합의 내용을 가지고 난동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어 있었다. 서
울시장과 투쟁위원회 합의 내용조차 전하기 어려울 만큼 군중은 난폭했다. 그들은 이제 미
래의 처우 개선을 넘어 과거의 분풀이, 한풀이까지 요구하며 서울시장과 간부들 및 대단지
사업소 직원들을 찾는 데만 혈안이었다. 12시가 넘어 성남소방서의 소방차 두 대가 동원되
고 다시 광주경찰서 기동대 백여 명이 지원을 나왔으나 성난 군중을 막을 길이 없었다. 성
난 군중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관공서를 부수고, 눈에 띄는 관용차는 모두 불태웠다. 그러
다가 나중에는 민간인 차량까지 빼앗아 타고 서울로 가자고 외쳐댔다. 서울경찰서에 파견된
기동대 수백 명이 그들의 서울 진출을 막기 위해 달려오고, 이어 광주경찰서에서도 수백 명
의 기동대가 실려왔다. 군중들은 그래도 움츠러들지 않고 그들과 돌팔매와 욕지거리로 맞서
며 제법 장기전의 태세까지 갖췄다. 그러다가 서울시가 모든 요구 조건을 들어주겠다는 것
이 명백해지고서야 흩어졌는데 그 최후의 순간까지 명훈은 그 선두 그룹에 섞여 있었다.
'두 제국을 가진 이 특이한 세기의 변경이기에 성립되는 논리에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주
눅들어왔다. 터무니없는 원죄 의식에 억눌려 무슨 일이든 반공의 부적만 내밀면 소스라쳐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내 몫을 다 치렀다. 너희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더 이상 바닥이 없는 곳까지 내 삶을 낮추었고 요구를 억눌렀다. 어떤 죄도 최소한의 생존
조차 요구할 수 없을 만큼 크지는 않다. 하물며 그 죄가 단지 피로 물려받은 원죄임에랴.'
처음 군중의 선두로 내닫는 명훈을 지배하는 것은 그런 일종의 해방감이었다. 그러다가
영희를 만나면서 그 해방감은 전투적인 의식으로 변해갔다. 명훈이 영희를 알아본 것은 성
남 출장소를 나와 새로운 공격 목표를 찾고 있을 때였다. 진작부터 무슨 환영처럼 누가 자
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들었는데 그때서야 영희를 알아본 것이었다. 비에 젖어 추레해 보
이는 옷차림에다 화장이 지워져 얼룩진 화장은 영희가 확보한 천민자본주의의 과일을 감추
고 의심 없는 도시 빈민으로 위장시켰다. 그런 영희를 쓸어안고 명훈은 속으로 외쳤다.
'그래, 너도 드디어는 와야 할 곳에 왔구나. 이게 바로 이 사회가 일찍부터 우리에게 편입
되기를 요구해온 계급이었다. 좋다. 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하겠다.
이제부터는 가차없이 싸우고 요구하겠다. 우리를 여기로 내몬 자들에게 우리도 결국은 자신
들의 일부임을 상기시켜주겠다. 여기 단지를 허옇게 덮고 있는 불행한 삶의 동지들과 함께.'
제43장 백조의 꿈
"무슨 일이야? 무슨 일로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해?"
자리에 앉으면서 짐짓 쾌활한 목소리를 지어 물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전화를 받은 뒤
줄곧 불안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니, 그냥 널 꼭 한번 만나고 싶어서..."
혜라가 전화 때와 다름없이 메마르고도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새 찬찬히 뜯어본 그
녀의 얼굴도 영희가 까닭 모를 불안을 키웠다. 혜라의 화장이 옅어지기 시작한 것은 벌써
여러 달 되었지만 눈썹을 그리고 옅게나마 루주는 발랐다. 그런데 섬뜩한 느낌이 들 만큼
맨얼굴이었다. 오랫동안 화장해온 탓에 맨얼굴로 있으면 어두운 그림자처럼 보이던 일종의
화장독은 그새 거의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윤기 없는 희기만 한 피부는 스물일곱까지도 여
대생 티를 낼 수 있었던 그녀의 얼굴을 완연히 제 나이로 되돌려놓았다. 거기다가 진짜보다
더 자연스럽던 인조 속눈썹이며 멋있게 그려올렸던 눈썹이 없어진 맨송맨송한 핏기 없어 푸
른 기운까지 도는 엷은 입술은 방금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온 젊은 미망인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 기집애야. 별일 없으면 화장이라도 좀 하고 다녀라. 얼굴이 그게 뭐냐? 남이 보면 방
금 남편 잡아먹은 과분 줄 알겠다."
영희가 점점 더해가는 마음속의 불안을 달래려고 이번에는 농담조로 바꾸어보았다. 그 말
에 혜라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얼마나 힘없고 쓸쓸해 보이는지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더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래? 내가 정말 그래 보이니?"
"그 정도가 아냐. 거기다가 흰 소복이라도 입고 나서면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처녀 귀
신인줄 알겠다. 정말 너 왜 그래? 그것두 결혼을 보름밖에 안 남긴 신부가..."
그러자 그녀가 애써 밝은 웃음을 지었다.
"너 잘 알잖아? 그분이 화장 싫어하시는 거. 그래도 이게 옛날보다 열배는 더 이쁘다는
데..."
그럴 때는 정말로 행복에 겨운 미소가 반짝 피었다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옅은 홍조
를 보고 비로소 가슴을 쓸은 영희가 이번에는 은근히 화가 나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
다.
"미친년. 나는 깜짝 놀랐잖아. 니네 신랑이 갑자기 맘이라도 변한 줄 알고. 그래서 울고짜
고 하려고 날 부른 줄 알고..."
"목소리 낮춰. 남들이 보잖아."
혜라가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그 조신스러움이 숙녀라
도 그런 숙녀가 없었다. 영희에게는 왠지 그게 고깝기보다는 가엾게만 느껴졌다. 무엇이 너
를 이렇게 변하게 만들고 있는 거야...
"네 신랑감 이상한 사람 아냐? 자신을 이쁘게 가꾸고 싶어하는 것은 여자의 본능이고 남
자들도 이쁘게 꾸민 여자를 더 좋아하게 마련인데- 혹시 의처증 같은 거라도 있는 거 아니
냐구?"
"걱정 마. 누구보다 이성적인 사람이야. 그냥 취향이 좀 다를 뿐야."
"너도 그래. 너 아직 결혼도 안 한 게 그렇게 쥐어살아 어떡할래? 상대가 좋아하지 않는
다고 화장까지 포기하는 거, 그거 너무 심한 거 같은데."
그러자 혜라가 다시 한번 밝게 웃으며 도리질을 했다.
"이해할지 모르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나도 이제는 정말 이렇게 지내는 게 편해."
"미친 기집애. 너 정말 사랑에 폭 빠졌구나. 하지만 정신차려라. 너 나이가 몇이냐? 열일
곱 순정도 아니고 배알도 쓸개도 다 빼주는 거 아니다. 남자라면 너도 알 만큼 알 텐데..."
영희는 이번에는 희미한 질투까지 느끼며 심술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혜라는 소리없
이 웃기만 했다.
"우리 그인 달라. 그럴 분 아냐."
"그럼 뭐야? 왜 사람을 이런 곳까지 불러내..."
그러면서 영희는 비로소 주의를 둘러보았다. 오륙 년 저쪽 백운장에 있을 때는 더러 외박
을 나와본 적이 있는 워커힐이었다. 그러나 바로 객실로 들어가 밤만 새우고 나온 터라 커
피숍이나 식당에는 들러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새삼 둘러보니 동양 제일이라던 당시의 선전
이 그저 과장이었던 것 같지만은 않았다. 시원하게 뺀 창으로 한강이 푸르게 굽이쳐 흐르는
데, 특히 멀리 미사리 쪽은 한폭의 잘 그린 동양화처럼 아름다웠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우선 여기서 차 한잔 하고, 저기 식당으로 내려가자. 너한테 제대
로 된 밥 한번 사고 싶었어. 그리고- 얘기는 그 다음에 해."
갑자기 혜라의 목소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메마르고 풀죽은 것으로 돌아갔다. 일껏 맑
아졌던 얼굴도 어느새 어두운 그늘이 덮였다. 이 기집애한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어...
"너 자꾸 사람 겁줄래? 유명한 짠돌이 윤혜라가 갑자기 사람을 불러내 워커힐에서 저녁을
산다? 그것도 영동 배추장수네 집에 시집가서 펑퍼짐하게 눌러앉은 아줌마한테..."
"그럴 일이 있어. 당장은 더 이상 묻지 마. 여기서 조용히 자 한잔 즐기고, 시간 되면 내
려가 식사해. 이 호텔 일식부야. 오전에 예약해뒀어."
혜라가 그래놓고 마침 차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커피 두 잔을 시켰다.
"어쭈, 이젠 지 맘대로야. 나 이래뵈도 층층시하에서 시집살이하는 사람이야. 얼른 너 만
나고 밥하러 가야 하는 거 몰라? 시아버지, 시어머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날 노려보고 있
다는거."
"그러지 마. 나 지금 몹시 피곤하고 혼란돼 있어. 쓸데없이 사람 수선스럽게 하지 말고 얘
기나 좀 하자."
혜라가 여전히 나직하고 조심스런 목소리로 그렇게 받았다. 얼굴에는 정말로 곤혹스러워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얘기는 저녁 먹구 하자며?"
이번에도 영희는 특별히 어깃장을 놓은 기분 없이 말했다.
"넌 요즘 어때? 접때 성남 일 어떻게 됐어?"
혜라가 갑자기 물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성실해 화제를 바꾸기 위한 물음 같지만은 않았
다.
"그거 돈 안 물어주고 끝났다고 얘기했잖아? 모란단지 사 딱지도 서울시에서 인정해주기
로 한 거. 그날 거기 사람들과 함께 험한 꼴로 악을 좀 쓰기는 했지만."
"결국은 없는 사람들한테 묻어서 네 몫을 지켜낸 셈이로구나."
전혀 빈정거리는 투가 아닌데도 묘하게 영희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었다. 영희가 전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비뚤어져 받았다.
"없는 사람들한테 묻어서...라니, 그런 넌 내가 없는 사람들 등에 없고 사기라도 쳤다는 거
야?"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야? 하지만 말야, 그날 내가 뛴 건 나나 그들이나 똑같다는 기분 때문이었어. 사
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뭐 있어? 모란 딱지 잘못돼 그거 다 물어주면 나도 빈털터리
나 다름없어, 그 동안 성남서 먹은 거 다 게워내고 겨우 내 원금이나 남게 될까."
"그래도 그렇지 않지. 넌 그 사람들하고는 달라. 오히려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중이잖아?"
"그건 무슨 소리야?"
"나도 들은 얘긴데, 어느 시대든지 중심이 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게 마련이래. 예를 들
면 지금 같은 시대는 돈을 가진 사람과 그 밑에서 일해주고 벌어먹는 사람, 두 종류라는 거
야.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시작된 지 그래 오래되지 않아 아직 그 둘 중 어
느 쪽으로도 확정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대. 농사짓는 사람들이나 구멍가게 주인이나, 옛날
잘살던 양반집 자손들처럼- 그리고 어쩌면 너와 나도 그 속에 들어갈거야."
"얘가 사람을 더 정신없게 만드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그런데 너는 지금 거의 확정되어가고 있는 거야. 성남에 사는 철거민들이 거의 확정되었
듯이 말야,"
"그것두 잘난 너희 교수 신랑이 말해준 거니?"
"꼭 그이한테 들은 소리만은 아니구- 너 우리 카페에 먹물 든 손님 많이 드나드는 거 알
잖아."
"그래, 좋아. 어디서 들었던 말해봐. 어째서 나와 그 사람들의 방향이 다르다는 거야? 누
구나 돈 많이 벌어 잘살구 싶은 거 똑같지. 그리구 확정되긴 뭐가 확정돼?"
"물론 희망이야 비슷하겠지. 하지만 구조라는 게 있대. 어떤 사회가 한번 그렇게 짜여져버
리면 이 부류에서 저 부류로 넘어가는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거야. 그런데 서울
서도 판잣집에서 살다가 성남까지 쫓겨간 사람들, 그 사람들은 이미 확정된 사람들이래. 가
진 것 없이 품만 팔아 먹고 살아야 할 부류로."
"그럼 나는? 나는 가진 게 뭐 있어? 이제 겨우 한 삼백만 윈 쥐었다고 무슨 큰 떼부자라
도 되었단 말야?"
다시 혜라의 말에 무언가 심사가 뒤틀린 영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혜라가 민망한 듯 얼굴
까지 붉히며 사정하듯 말했다.
"제발 목소리 좀 낮춰. 지금 중요한 건 지금 네가 얼마나 가졌는가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정한 방향과 그걸 뒷받침할 조건들이야. 너는 네가 전한 방식대로 돈을 불려 겨우 일 년 남
짓에 가지고 있던 돈의 세 배를 만들었어. 아마 너희 시집 돈도 배는 불렸을 거야. 그게 뭔
지 알아? 바로 네가 남는 자금이 있었다는 것과 우리나라의 특별난 사정이 땅값을 올려가고
있기 때문이야."
"우리 쉽게 말하자. 그래, 나 땅투기해 돈 좀 벌었다. 그런데 그게 뭐 잘못된 거니?"
"잘못되었다기보다는- 그게 바로 천민자본주의적 방식이지."
"천민자본주의? 그게 뭔데?"
"쉽게 말하자면 돈을 가지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불려나가는 거."
그 말에 영희는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화가 났다. 혜라가 너무나도 말짱한 얼굴로 따지듯
이 말하고 있는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투기꾼이란 말이지. 남이야, 세상이야 어찌 되건 저만 돈 벌면 된다는 이야기
지. 그렇지만 이 기집애야 잘난 척하지 마. 너도 바로 거기에 돈을 질러 작년에 곱장사로 빼
가지 않았어?"
영희가 다시 목소리를 높이자 혜라는 거의 애원조가 되었다.
"제발 조용히 얘기하라니깐. 그래 네 말마따나 나두 그래왔어. 돈을 버는 일이라면 못 할
것 없다고 생각했고- 몸까지 팔았어. 또 지금도 그래. 그렇게 하는 것도 이 험한 거친 세상
을 살아가는 방법 중에 하나라구 믿어. 다만..."
"다만 뭐야? 이제는 착실한 신랑 만나 걱정 없이 살게 됐으니 그런 짓 안 하겠다는 거지.
교수 사모님 되어 돈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우아하고 품위있게 사시겠다 이거지."
"너 어쩜 그렇게 사람을 몰아대니? 나 안지 하루 이틀오 아닌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서 그런다. 그 소리가 아니라면 그럼 뮈야?"
"어떤 방식으로 살든지 그게 뭔지는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말하는 거야. 오래된 친구에
게..."
그녀가 힘주어 말하는 친구라는 말이 영희의 화를 가라앉혔다. 돌이켜보면 혜라는 오래된
친구를 넘어 영희에세는 하나뿐인 참되고 좋은 친구였다. 모니카 때문에 우연히 알게 된 지
7년, 그것도 첫 일 년은 친구라기보다는 앙숙에 가까웠다. 영희가 나름대로는 기세 좋게 세
상에 버텨나갈 때 혜라는 그저 시건방지고 비뚤어진, 그리고 친구의 친구인 계집애일 뿐이
었다. 그러나 영희가 절망적이 되어 손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미덥고
다정한 친구로 다가왔다. 바로 창현이 그녀를 산부인과에 내팽개치고 집세를 빼 달아나버린
때가 그랬다. 그때 혜라가 없었다면 영희는 아마 다시 일어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 그뒤 6년, 혜라는 영희에세 세상의 모든 소중하고 정다운 이름을 아울러 가진 단 한 사람
이었다. 그녀는 친구였고 자매였으며, 유익한 충고자이자 고해사였다. 좀 과장해 말하면 때
로는 삶의 지표이기까지 했다. 영희가 갑작스런 옛 생각으로 멈칫해 있는 사이 혜라가 차분
하게 덧붙였다.
"나는 말이야- 네가 너무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는 듯싶어. 어쩌면 지금 네가 잡을 길을
권한 게 바로 나일수도 있잖아. 그래선지 요즘은 문득 걱정스러울 때가 있어. 자칫하면 네
정신이고 육체고 돈 속으로 흐물흐물 녹아 없어질까봐..."
"기집애두. 아무렴..."
영희가 자신도 모르게 풀어진 목소리로 받았다. 혜라가 그런 영희를 물끄러미 건너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네 미움과 원한은 안다만, 이제 조금 거기서 자유롭고 싶지 않니?
너희 어머니와도 화해하고 싶지 않아? 실은 작년만 해도 바로 내가 진창이니 뭐니 해서 가
족들을 외면하라고 권한 적도 있지만..."
"걱정마. 실은 성남에서 그 난리 있고 집을 찾아가본 적이 있어. 아직 큰 힘이 없어 도움
은 못 됐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했고..."
그러면서 영희는 문득 한 달 전을 떠올렸다.
그날 성남 출장소 앞의 성난 군중들 틈에서 짧게 마주친 뒤로 영희는 두 번 다시 오빠 명
훈을 만나지 못했다. 그녀가 맨발로 절뚝이며 일반 군중들을 뒤따른 데 비해 명훈은 성난
청년들의 선두에 서서 과격한 난동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서울시가 단지
주민들의 모든 요구 조건을 다 들어주기로 해 소동이 가라앉은 뒤에도 영희는 친정집을 찾
아가 볼 수가 없었다. 명훈을 만나지 못해 집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데다 날이 저물어와 시
집으로 돌아갈 일이 급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식구들과 만날 때가 아니라는 마음속의 자제
도 영희가 냉정히 발길을 돌리는 데 한몫을 했다. 하지만 시집으로 돌아가 하루 이틀을 지
나는 사이에 영희의 마음은 달라졌다. 우선은 '난동 청년 30여 명 구속'이라는 신문 기사가
오빠 명훈의 안위를 걱정하게 했다. 명훈이 바로 그들의 선두에 서서 달려나가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하게 영희의 발길을 끈 것은 그날 오빠 명훈을 통해서 느
낀 친정집의 어떤 본질적인 변화였다. 전에도 영희는 오빠의 성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대개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과장된 몸짓에 지나지 않았고, 더러 행동으로 옮겨져
도 최소한으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데 그쳤다. 그런데 그날은 아니었다. 오빠의 얼굴은 진
정으로 성난 사람의 그것이었고, 부수고 깨는 행동도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는 것이
었다. 오빠가 변했다- 영희는 아수라장 같은 철거민의 난동 속에서도 섬뜩한 느낌으로 중얼
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빠의 전체적인 인상도 달라져 있었다. 그전에는 어떤 거칠고 천한 환경에
떨어져 있어도 오빠는 주위 사람들과 뚜렷이 구분되었다. 안광의 통일역 주변에서 목판장사
를 할 때에도 비슷한 목판에 비슷한 차림으로 버스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또래가 많았지만 오
빠는 그들과 달라 보였다. 어색함, 어울리지 않음을 넘어 무언가 환한 빛무리 간은 것이 오
빠를 감싸 그들과 구분짓는 듯 느껴졌다. 미군 부대 보일러맨으로 일하면서 따라지 고등학
교를 다닐 때도 그랬다. 그 실질이 공허하기 짝이 없다는 걸 잘 아는데도 오빠와 비슷한 사
람들 가운데 있을 때는 한눈에 그들과 다른 무엇이 있다는 걸 느꼈다. 돌내골에서 갈 데 없
는 농투성이 되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는 스스럼없이 농부를 자처하고 밭을 갈고
땔감을 해왔지만, 영희에게는 그게 오빠 나름의 멋부림으로 느껴질 만큼 다른 농부들과는
구별되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렇지가 않았다. 차림이나 표정뿐만 아니라 그 불같은 분노나
무엇에 취한 듯한 난폭함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청년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
려 오래 그들과 함께 살아온 듯한 자연스러움과 조화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무엇이 오빠를 그렇게 달라지게 만든 것일까.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어쩌면 명훈의 그 같은 변화는 도시 빈민과의 동일시에서 비롯된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
그 원인일는지도 모르겠다. 명훈 자신의 규정대로라면 오래 '떠돌던 자'가 드디어 자신이 있
을 자리를 찾았다고 믿는 순간의 자포자기적인 열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마
르크스식으로 표현한다면, 이 아시아적 전체 국가의 폐허위에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봉건 지주의 후예로 오래 주변 계급을 떠돌다가, 그제서야 겨우 기본 계급으로 스스
로를 편입시킨 자가 몸으로 외친 출발의 노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의미를 알 길 없는
영희에게는 그게 그저 불길한 변화로만 느껴졌다.
'혹시 오빠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려고 하는 것이나 아닐까. 어쩌면 내가 떠나 있는 사이
우리집은 아버지와 다시 연결된 것을 아닐까...'
불안이 그런 짐작으로 바뀌자 영희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참지 못한 그녀는 소
요가 있고 사흘 뒤 다시 성남으로 갔다. 기억을 더듬어 그 전해 가을 오빠가 집짓는 인부들
과 함께 일하던 곳을 찾아간 영희는 그 자리에 들어선 집의 대문부터 두드렸다. 집 안에 아
무도 없는 것 같았는데 재차 대문을 두드리자 한 젊은 여자가 소리없이 나와 대문을 열었
다. 자심보다 몇 살 어려 보였는데 해산한 지 얼마 안 되는 지 아직 얼굴이 푸석푸석한 산
부였다.
"저어, 사람을 찾아왔는데요. 혹시 이명훈씨라고 모르십니까? 전에 이 집 지을 때 여기서
일하는 걸 본 적이 있어서요."
대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하도 낯설어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설명조가 되어 물었다. 자신
을 바라보는 힘없으면서도 해맑은 눈길이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지만 그녀가 바로 올케가 된
다는 것은 짐작조차 못했다.
"그런데... 왜 찾으시는데요?"
명훈을 찾자 반짝 경계의 눈빛을 보내던 그 젊은 여자가 이내 침착을 회복해 되물어왔다.
그녀가 명훈을 알고 있다는 게 반가워 영희는 조심성을 잃고 대답했다.
"저는 영희라고 하는데요- 이명훈씨 동생 되는 사람이에요."
그러자 그녀가 움찔하더니 이내 손아랫사람의 공손함이 담긴 어조로 대답했다.
"어머, 그럼 바루 큰아가씨... 어서 들어오세요. 여기가 바루 우리집이에요."
하지만 말의 의미와는 달리 표정에는 놀라움도 반가움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지루하고 심드렁하다는, 그런 막막한 표정이었다.
"그럼 새댁이 바로..."
"네. 지난 시월에 결혼했어요. 결혼식 때 못 뵈어서 섭섭했어요."
이번에도 표정 따로 내용 따로인 대꾸였다. 그런 그녀가 금방 쓰러질 것같이 보여 영희는
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서둘렀다.
"오빠 안에 계세요?"
영희가 집 안으로 발길을 떼어놓으며 그렇게 묻자,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
다.
"그럼 역시 그날 일루... 경찰서에?"
"그건 아녜요. 그날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그런 그녀를 영희는 얼른 부축하며 다시 물었다.
"어머니는요?"
"네. 저 방에... 요즘은 기도만 하고 계세요."
그 사이 거실로 쓰는 듯한 마루방에 들어선 그녀가 건넌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머니가
거기 있다는 말을 듣자 영희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갑자기 오빠가 없다면 굳이, 하는 생각
이 들며 발길을 돌리도 싶은 마음조차 일었다. 하지만 나이 젊은 올케에게서 감지된 집안의
심상찮은 분위기가 먼저 영희를 붙들었다. 이어 핏줄로 이어지는 어쩔 수 없는 정회가 가세
했다. 벌써 못 본 지 6년이 넘었구나. 악귀든 저주든 그래도 나를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가
아닌가- 그렇게 시작된 자기 설득은 희미하게마나 자기 반성으로 이어졌다. 나도 꼭 잘했다
고 볼 수 없지 뭐. 나야말로 애물단지 원수덩어리 딸인지도 몰라. 영희가 방문을 열자 어머
니는 어두운 방안에 엎드려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저 기도 속에 나는 한번이라도 들어가
본 적이 있을까, 싶자 묵은 상처가 도지듯 가슴 한구석이 쑤셔왔으나 영희는 애써 참고 어
머니의 머리맡에 앉았다. 그걸 보고 올케가 그림자처럼 안방으로 사라졌다. 분명 인기척을
느꼈을 터인데도 어머니는 한동안이나 기도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수십 년을 그렇게 간절히
빌었지만 한번도 응답이 없었던 저 기도, 싶자 이번에는 대상을 알 수 없는 울화가 치밀었
다. 하지만 영희는 한동안이나 더 참고 기다렸다.
"어머니, 제가 왔어요."
희미하게 '아멘'이란 소리를 들었는데도 몸을 일으키지 않는 어머니를 보다 못해 영희가
나직이 말을 걸어보았다. 어머니가 화들짝 놀란 듯 몸을 일으키더니 묘한 표정으로 영희를
쳐다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영희는 철들고 처음 느껴보는 어떤 따뜻함을 그 표정에
서 읽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게 미처 감동으로 변하기 전에 어머니의 얼굴을 옛날의 그
섬뜩한 엄격함을 회복했다.
"어머니라니? 내 딸을 하마 옛날부터 옥경이 하나뿌인데..."
목소리도 옛날의 그 비전함 뒤틀림으로 돌아가 있었따. 그게 악몽과도 같은 옛날과 함께
거기 대응했던 자신의 감정을 되살려내 영희도 하마터면 고함으로 맞받을 뻔했다. 하지만
영희는 이미 옛날의 영희가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집과의 연결이 끊어진 뒤의 6년은
결코 심상할 수 있는 세월이었다. 몇 번이나 죽은 언저리까지 내몰리면서 도시의 밑바닥 중
에서도 가장 끔찍한 매음의 현장을 온몸으로 관통해온 영희에세는 그 세월이 그대로 이 세
상에 펼쳐진 연옥이었다. 어떤 불길보다도 더 뜨겁고 매서룽 그 불길에 단련된 감정은 어느
세 미움도 사랑고 조절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어머니의 옛날의 그 꺾을 수도 없
고 휠 수도 없던, 그리고 아직은 삶의 활력으로 충만해 있는 그 비정한 개성은 아니었다. 그
사이 반나마 희어진 머리에 살이 빠져 등마저 둥그스름하게 휜 듯한 느낌을 주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정신도 몸만큼이나 쇠약하고 기력이 떨어져 안감힘을 다해 버티고는 있어도
그녀의 비정과 적의에는 진작부터 내부적인 동요가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다가 영희에게는
근년의 득의로 생긴 여유가 있었다. 그래, 이제 져주어도 된다. 악귀였던 저주였던 어머니는
어머니다...
"어머니, 아직도 절 용서하지 못하시겠어요? 그 동안 제가 잘못했어요. 이젠 용서하세요."
영희는 특별이 감정을 과장하고 있다는 기분 없이 그렇게 울먹이며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참 별일일세.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니가 다 잘못했다는 소리를 하고... 촤라, 고마.
이거 못 놓나?"
어머니다 그러면서 세차게 뿌리쳤으나 영희는 놓아주지 않았다. 이내 어머니는 저항을 멈
추고, 가는 떨림만이 영희의 두 팔에 전해져왔다. 그 떨림이 묘하게 영희 감정을 자극해 눈
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지금은 어머니가 시키신 대루 다 하고 있어요. 시어머니, 시아버지에 시누이,
시동생 층층시하에서 며느리 노릇 제대로 하려고 애쓰고 있다구요. 잘할게요. 앞으로는 어머
니가 가르쳐주신 대루 살 거예요. 그러니 이제 맘 푸세요."
"어디가 어늘(말솜씨)은 늘어가주고- 째진 악바리(아가리)라고 말이사 철철..."
어머니가 여전히 그렇게 가시 돋친 말로 받았으나 이미 딸로 인정조차 않으려는 매몰참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한은 다 풀지는 못했지만, 세상 사는 것도 더는 어머니를 욕되게 하지 않을게요. 남
에게 몹쓸 짓은 않을게요. 아니, 몹쓸 짓 한 거 있으면 그것도 다 갚아가며 살게요."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 어머니와 집을 떠나 세상 바닥 진창을 뒹굴면서 온갖 비참과 고통
이 새삼스런 슬픔으로 눈물을 짜냈다.
"이기 어디서 못 먹을 거를 먹고 왔나? 당최 왜 이래노? 놔라. 보자, 이거 쫌 놓고 말해
라."
영희가 긴장이 슬픔으로 풀어진 틈을 타 어머니가 기어이 자신을 안고 있는 영희의 두 팔
을 떨쳐버렸다. 그러나 그래놓고 다시 영희를 뜯어보는 눈길을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대로
어김없이 한 어머니의 눈길이었다.
"그래, 오늘은 무신 바람이 불어 여까지 다 왔노?"
제 서러움과 한에 겨워 울고 있는 영희를 한참이나 말없이 살피던 어머니가 이윽고 덤덤
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가 걱정돼서요. 아무래도 집안에 무슨 일이 난 거 같애서..."
"안 보고도 잘 아네. 그래서?"
"실은 그 난리가 있던 날 오빠를 만났어요. 깡패 같은 청년들과 앞장을 서서 뒤엎고 때려
부수기에 걱정했는데..."
"그랬구나. 그래놓고는 집에도 못 들어오고 그 길이(그 길로) 달라뺐구나."
"그럼 경찰을 피해 달아났어요?"
"그것도 모리겠다. 두번 시(세)번 찾아오는 걸로 보아 경찰이 잡아간 거 같지는 않고- 이
번 나불(차례, 판)에 죽은 사람은 없다 카이 죽은 것도 아이겠고오- 그래서 답답으이(하니)
캐보는 소리라. 그날 아침 무신 위원장인지 뭔지 하는 햇영감하고 나간 뒤로 안죽까지 소식
이 없다. 참말로 어예 됐는동..."
"그럼 알아보시지 않았어요?"
"황머시기라고 대동일보에 기자로 있는 친구한테 알아봐달라꼬 전화했디라. 그런데 모리
겠단다. 경찰에 잡히지 않았다는 것만은 틀림없다는 말뿌이라."
"숨어다니려면 돈이 필요할 텐데, 돈은 가진 게 좀 있었대요?"
"몇백 원이라면 모리까, 큰돈은 없었을 께라. 그케, 고마 죽은 듯이 구경만 하라 켔디- 그
것도 피라꼬 아무데나 주척주척 나서기는..."
드디러 어머니의 대답이 오빠를 향한 푸념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피라는 말이 갑자기 영
희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머니, 무슨 일이 있었어요? 오빠가 집을 나가기 전에. 아니, 이 근래에..."
"일은 무신 일. 취직이라꼬 몇 뿐 박도 나가던 데가 있었지마는 막노동이나 다름없는 경
비 일이라, 쫓게(쫓겨)나왔다꼬 상심할 일동 없고... 오히려 이제 삼칠 나는 재준이 놓고 어
예튼동 살아볼라꼬 뻐둥거리는 중이었는데."
"혹시 아버지라고 무슨 연결이 있었던 건 아녜요?"
"이기 무신 소리를 하노? 오래비 자아(잡아)먹을 일이 있나? 아부지라이, 아이 아부지라
이..."
어머니다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덤벼들 듯 몰아냈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어렵게 이루어
져가던 모녀간의 화해가 깨어질 뻔했지만 이번에도 영희의 참을성이 파국을 막았다. 영희가
얼른 사죄와 함께 자신이 한 말을 거둬들이고 화제를 바꾸었다. 먼저 돌내골을 떠난 뒤 가
족들이 겪은 풍상을 듣고, 이어 오빠 결혼하게 된 일이며 성남에 집을 짓게 된 경위를 들은
뒤에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인철이하고 옥경이는 어디 갔어요?"
"인철이는 고시 공부하러 돌내골에 내리갔따. 절에 가라 캤디, 거기 있는 정자도 공부하기
좋다 카미. 그런데 가아한체 이 일을 알래야 할지 어옐지 모리겠다. 며칠 더 기다려보고 그
래도 소식이 없으믄 지라도 불러들라야지. 옥경이는 아까 안카드나. 내 식모살이 갈 때 공장
드갔다꼬. 첨에는 쪼매 고생했는데 인제 한 이 년 되이 기술도 늘고 이력도 붙어 지낼 만한
모양이라. 지 오래비가 하마 언제부터 공장 치앗뿌고 집에 들어오라 캐도 영 말 안 듣는다."
지난 6년 가족들의 살이를 듣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쓰였던지 거기까지 주고받고 나니
벌써 시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어머니. 제가 뭐 도와드릴 일 없겠어요?"
영희가 서둘러 일어서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의 얼굴이 다시 험하게 굳어졌다.
"그것도 핏줄이라꼬 울미불미 달가드이 내 집에서 내쫓지는 못했다나믄 그눔의 주제넙적
한(주제넘은) 소리 좀 하지 마라. 도와주기는 뭘 도와조? 지발 니나 잘 살아라."
어머니는 그렇게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러나 영희는 미리 준비해간 십만 원을 어머니 몰
래 올케에게 쥐어주었다.
"언니, 오빠에게 갑자기 연락이 와도 그렇고- 정히 쓸 데 없으면 인철이 책값이라도 보태
요."
"그랬니? 역시 그랬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은 모양이네. 난 그것도 모르고 이
말을 꼭 해주고 떠나려고 그랬지. 가족은 피해가야 할 진창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에 붙들어
매는 끈 같은 거라고. 우리가 이 고통스런 세상을 굳이 살아야 할 많은 이유 중에 가장 확
실한 하나라고..."
영희가 띄엄띄엄 늘어놓은 말을 다 들은 혜라가 무엇 때문인지 가볍게 가슴을 쓸며 그렇
게 말했다. 영희는 갑자기 감상적이 된 자신을 다잡듯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렇지만 세상에 대한 내 받아치기 방식은 바뀌지 않을 거야.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충분하다고 여길 때까지 이대로 밀고 나갈 거라구. 나는 아직 세상에 대해 잔인하고 비정할
권리가 있어. 누구도 내 방식을 나무랄 수 없어."
그래놓고 나니 문득 혜라의 말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여운이 다시 떠올라 급하게 물었다.
"그런데, 너-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떠나다니? 떠나긴 어딜 떠나?"
"아, 그거. 그거야 시집을 가니까."
혜라가 흠칫하며 그렇게 얼버무렸다. 혜라답지 않은 그런 태도에 영희는 더욱 살피는 눈
길이 되었다.
"시집간다구 아주 이 나라에서 뜨기라두 하는 거니? 꼭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정말 너
오늘 이상해. 말해봐. 무슨 일이야?"
"아냐. 그런게 아니고..."
혜라가 그러면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이 기집애에게 무슨 일이 있다- 영희는 그런 확신에 차
혜라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궁금해서 안되겠다. 말해줘. 니 결혼 뭐가 잘못되고 있는거지?"
"그게 아니라니까. 오히려 모든 게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그저께는 시부모님들 찾
아가 뵙고 거기서 밥가지 얻어먹었는걸."
눈은 옅게 눈물에 젖어 있었지만 혜라는 고개까지 저으며 강하게 부인의 뜻을 나타냈다.
"그럼 왜 그래? 무엇 때문에 그리 힘이 없고 슬퍼 보여?"
"내가 그렇게 보이니?"
"그래, 이 기집애야. 너 왜 점심 잘 먹고 편안히 늘어져 있는 사람 불러내 내 가슴 아프게
만들어? 이상한 소리나 하구."
"하긴... 네가 바루 보았는지두 몰라."
혜라가 희미하게 웃으며 무언가를 망설이는 눈치더니 이내 마음을 정한 듯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런데 정말 내 기분 왜 이러니?"
"뭐가 또 이상해?"
"어제는 우리가 살 집까지 보구 왔어. 서른두 평 새 아파튼데, 내게는 그저 과분하다는 느
낌뿐이었어. 가구도 맞췄지. 보르네오 원목으로 만들었대나 어쨌대나. 웨딩드레스도 벌써 가
봉했구..."
"그럼 하늘에 둥 떠 있는 기분일 텐데- 뭐가 문제야?"
"너 옛날에 <미운 오리 새끼> 얘기 잘했지? 안데르센 동화 말이야."
영희는 까마득한 기억을 되살리듯 <미운 오리 새끼>의 줄거리를 떠올려보았다. 스스로
미운 오리새끼를 자처하며 백조의 꿈을 꾸던 그 시절도. 그러자 정체 모를 아픔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게 심사를 건드려 영희의 목소리가 다시 퉁명스러워졌다.
"갑자기 그 얘긴 왜?"
"동화 속에서 백조가 된 미운 오리 새끼는 행복해진 걸루 끝나지? 그런데 말야. 나는 그
렇지 못했을 것 같애. 어렵게 백조의 호수를 찾아가긴 했지만 그 미운 오리 새끼는 결코 행
복한 백조는 되지 못했을 거야. 아니, 오래잖아 외로움 속에 죽어갔을 거야."
"이 기집애가 정말... 너 갑자기 시인이라도 된 거야? 백조가 되었는데 왜 행복하지 못해?
뭣 때문에 외로움 속에 죽어가?"
"들어봐. 우선 그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의 호수까지 찾아가는 데 너무 많이 자신을 소모
했어. 아마 행복이 주어졌다 해도 그걸 누릴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을 거야."
"그건 소모가 아니라 단련이었을 수도 있어. 다른 백조보다 더 기력이 왕성하고 그래서
훨씬 많이 누릴 수도 있지."
"아냐. 소모였을 거야. 거기다가 이제 백조로 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은 어떤 절망
까지 느꼈을 거라구."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왜냐하면 길을 잘못 든 그 백조 새끼가 그때껏 살아온 방식이 오리로서였기 때문이야.
못생겨 오리들에게 구박을 받아도 더 익숙한 것은 오리의 삶이고 오리의 문화야. 그런데 이
제 생판 낯선 백조로서 살아가야 하게 된 거지. 다시 말해 낯선 삶, 낯선 문화에 새롭게 자
신을 맞춰가야 한다는 뜻이라구. 생각해봐. 그때껏 알고 있던 세계로부터 온전히 단절되고,
지나온 세월도 아무런 참고가 못 되는 어떤 새로운 삶이 있다면 그 얼마나 가혹한 것이겠
어?"
"기집애, 정말 시 쓰고 있네."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어도 가슴속에는 자시 날카롭게 후비고 드는 아픔이 있었다.
삶이 그녀의 의도대로 가닥이 잡혀가면서 단속하고 단속해도 조금씩 되살아나는 감상 탓이
었다. 너는 정말로 백조가 되어가는구나. 알 듯하다. 네 피로가 무엇인지. 네 외로움과 불안
이 무엇인지- 그런 기분이 들자 영희는 이제 부러움보다는 어떤 섬뜩함을 느끼며 혜라의
특이한 결혼을 되씹어보게 되었다.
혜라의 화장이 눈에 띄게 엷어지기 시작한 지 제법 지난 어느 날이었다. 어렵게 시간을
내 찾아간 영희에게 그녀가 불쑥 말했다.
"나 어쩌면 결혼하게 될 것 같애."
"뭐? 누구하고?"
하도 난데없는 말이라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녀를 알게 된 뒤
영희가 늘상 감탄해온 것 중에 하나는 사랑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였다. 틀림없이 그녀도 때
때로 이런 남자 저런 남자와 사랑 비슷한 관계에 빠져들기는 했지만 한번도 거기에 자신을
내맡기는 일은 없었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매음의 변형에 지나지 않았
다. 어느 정도 정서가 가능하고 둘 사이의 관계도 독점적이었지만 경제적 보상과 관련한 냉
정한 계산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는 틀림없이 매음이었다. 따라서 그런 관계가 끝나도 상처
받아 울고불고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영희는 혜라의 남자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넌 모르는 사람이야."
"그래? 중매야? 연예야?"
"어느 쪽도 아냐. 그냥 이 카페 단골이었어."
"뭘 하는 사람이야?"
"대학교수. 좀 뜻밖이지?"
실은 그랬다. 대학교수는 당시만 해고 뒷날처럼 드러내놓고 값을 매기는 일은 없었지만
정신적으로는 휠씬 더 존경받았던 직업이었다. 그런데 그런 대학교수가 요정 색시 출신의
작은 카페 여주인하고 결혼을 한다니, 영희에게는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지극히 상식
적인 물음을 이끌어냈다.
"그 사람 나이가 얼마야? 초혼이래?"
"나보다 세 살 위야. 적어도 법적으로는 초혼이고."
그거야말로 더욱 뜻밖이었다. 영희의 그런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혜라가 설명처럼 덧붙
였다.
"하지만 깊이 상처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야. 미국에서 공부할 대 귀국해서 결혼하기로 하
고 함께 산 여자가 있었던가 봐. 그런데 어떻게 깨어지고 혼자 돌아왔대."
"그럼 실연해서 단골로 드나드는 술손님하고 카페 여주인이 연애한 거네. 그렇잖아?"
"글쎄, 실은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오해와 오해가 얽혀 어떻게 그 비슷하게 된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부분도 많아."
"오해와 오해가 얽히다니?"
"너도 화류계 생활 오래 해봤으니깐 이 기분 알겠지만 왜 갑자기 남자가 심드렁해지는 느
낌이 들 때가 있지? 남자가 이런 거라면 남자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겠다는 기분. 아마
도 그 동안 너무 그들의 분별 없는 욕망에 벌거숭이로 시달려온 탓이겠지만... 그런데 재작
년 내가 그 생활 때려치고 여기서 카페를 열 때가 바로 그랬어. 갑자기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했다는 기분이 들며 남자와 살을 맞대는 게 끔찍할 만큼 싫어지데. 그래서 남자는 이
카페 안에서 영업 시간에만 손님으로 만나기로 했지. 그래놓고 나니 그것도 꽤나 괜찮더라.
밤늦게 빈집에 돌아가 홀로 드는 잠자리가 약간 쓸쓸했지만, 한편으로는 묘하게 편안하고
자족한 느낌도 들더라."
"그 기분 짐작은 가. 그런데 그게 오해하고 무슨 상관이야?"
"이교수가 내 카페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작년 봄부터야. 미국서 학위 받고 돌아와 처
음 전임이 되었다나 어쨌다나 하며 동료 교수들하고 지나는 길에 들렀다 갔지. 술은 많이
취해도 예절바른 귀공자 같아 잘 대접해 보냈어. 그런데 무엇에 끌렸는지 다음부터는 혼자
서 찾아오더라구. 너 잘 알지만 이런 데 혼자 찾아오는 손님, 미혼의 안주인한테는 부담스럽
잖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기도 하구. 거기다가 하루는 공연히 퍼마시며 늑장을
부려 통금을 넘기고 내게 매달리데. 이제 네 정체를 알겠다는 기분으로 쌀쌀맞게 내쫓았지.
그때 한창 말썽 많던 팔공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인 지위와 반반한 이력을 앞세운 독신
난봉꾼 정도로 알았거든. 그런데도 그는 계속 단골로 우리 카페를 드나들더라구. 그런 남자
라면 신물이 난다는 기분으로 나는 오히려 더 쌀쌀맞게 대했고. 그때까지는 내 오해가 만즐
어낸 이상한 진행이었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오해가 시작되더군. 하도 조르기에 그에
게 내 전화번호를 주었는데, 얼마 안 돼 그의 전화질이 시작됐어. 내가 집으로 돌아와 잠자
리에 들게 되는 열두시 십오분쯤 해서 어김없이 전화가 오는데, 그건 나도 별로 싫지 않더
라. 어차피 홀로 잠들어야 할 밤인 데다, 그는 말솜씨가 좋은 편이라 나중에는 나도 은근히
그의 전화를 기다리게 되었지. 그래서 매일 밤 전화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그게 그에게 이상
한 오해를 준 거 같애. 몇 달이고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제 방으로 돌아가 홀로 자는 카페
여주인에게서 일반 여자들에게서 느끼는 것보다 더한 어떤 정숙미를 느낀 모양이야. 바로
그게 그쪽 편 오해의 시작이었어."
화류계를 돌다 보면 그야말로 신물나게 듣는 게 이런저런 사랑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날
혜라의 얘기는 왠지 새롭고 색다르게 들려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었다. 그래서 정신
없이 듣고 있다가 혜라가 스스로 말을 끊은 뒤에야 건성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오해야?"
"남자들은 사랑을 시작할 때 그 상대에게 소중하게 거는 것이 하나씩 있게 마련이야. 이
교수에게는, 그게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내게서 바로 그걸 찾았다고 오해
한 것 같애. 짐작으로는, 순전히 우연이었고 또 한시적인 그 정숙함을 내 값지고 특이한 개
성으로 이해한 거야. 거기다가 내 근년의 어쭙잖은 자숙이 그 오해를 확신으로 키웠어. 이유
야 무엇이든 내게 지금 남자가 없는 건 너도 잘 알잖아? 또 어쩌면 그건 불행일 수 있지만,
네겐 그를 위해 정숙하게 살아야 할 과거의 남자가 없는 것두 사실이구..."
"내가 알기로 너는 한번도 정말루 사랑해보지 않은 여자지."
"실은 그게 사실일는지도 몰라. 내 처녀는 이혼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복수로 대학에
입학해 첫 축제 때 처음 만난,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남학생에게 주어버렸지. 그
리고 그뒤 아버지와 젊은 계모의 집을 뛰쳐나온 나를 만남 수많은 남자들도 그래. 그들은
나와 사랑을 하거나 섹스를 나눴다고 생각할는지 몰라도 나는 언제나 무언가에 복수하고 있
었을 뿐이었어. 정말이야. 화대도 그래. 돈은 틀림없이 내게 요긴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아무래도 채워지지 않는 그 복수감을 달래는 일이었어."
"그랬었니..."
영희는 혜라와 알게 된 뒤 처음으로 애틋한 연민을 느끼며 엷은 화장으로 갑자기 시들어
버린 듯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언젠가 술자리에서
만난 문인들 중에 하나가 외던 시구가 새삼 떠올랐다. 혜라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옛날의
뒤틀리고 너무 강해 시건방져 보이던 그녀의 면모가 잠깐 피었다 사라졌다.
"나도 여지간히 감상적이 된 모양이지. 아무에게도 안 한 꼰대들 얘기에 처녀성까지 주절
거리다니..."
혜라가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차분하고 조심스런 표정으로 돌아가 이었다.
"어쨌든 이제야말로 찾고 있던 사람을 찾았다는 식으로 다가드는 그가 이번에는 다른 의
미로 부담스럽데. 내게 기분 나쁜 오해는 아니지만, 그를 위해서는 빨리 풀려야 한다고 생각
했어. 거기다가 내 지난 오해도 죄스럽고. 그래서 다시 내 진상을 보려주려고 험했던 과거를
몇 가지 더 들춰보였는데 이제 보니 그게 또 오해를 더한 것 같애. 그것도 그에게는 자신의
유, 불리를 따지지 않은 솔직함을 넘어 천사 같은 순진함으로 비친 모양이야. 최근 들어서는
내가 한번도 남자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정중함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더니, 어제는 정식으로
청혼해왔어. 서양식으루 장미까지 사들고- 일 년 동안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내게 거의 황
송하다는 눈길로... 취했다고 덮어씌워 그의 말을 바로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고 돌려보냈지
만, 나는 알아. 그건 틀림없이 그의 진심이야.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그녀가 그러면서 호옥, 하고 한숨까지 내쉬었다. 진정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절
반은 친구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절반은 부러움으로 듣고 있는 영희는 그녀의 그 같
은 고민을 보자 갑자기 심술이 났다.
"어떠하긴 어떡해? 이 기집애야, 오늘이라두 다시 찾아오면 얼른 받아 들어야지. 그야말로
호막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거 아냐? 요새 세상에 그만한 신랑감이 어딨어? 내가 들은 것만
으루두 너한테는 과분해도 한참 과분하네. 내 친구니까 그렇지, 솔직히 넌 뭐 있어? 네 얼굴
예쁜 것 나도 인정하기만 하마 6년이나 술살머리에 앉아 팔아먹은 거구, 이 카페두 겉보기
야 빤지르하지마는 내놓아 이백만 원이나 제대로 건지겠니? 공연히 복 까불지 말고 못 이기
는 척 받아들여."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이렇게 심란한거야. 그분이 내게 과분하다는 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실은 나도 그분을 사랑하거든. 그래서 그분이 손해보는거, 속는 거, 그게 싫어. 아무리 그
상대가 나일지라도... 나는 진정으로 그분이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어."
"너, 그 사람하고 아직 손도 한번 제대로 잡지 않았다며? 그런데 그런 사랑이 생겨? 너보
다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구?"
"글쎄, 그것두 혼란스러워. 난 원래 그런 거 믿지 않았잖아? 세상에 우스운 게 말만 가지
구 하는 사랑이라구 생각했는데- 이렇게 됐어. 정말이야. 이게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적
어도 지금은 그분이 행복해진다면 나는 천조각 만조각이 나도 후회 없을 것 같은 기분이
야."
"어이구, 여기 춘향이 났네. 춘향이 났어. 감옥에 들어앉아서도 제 죽을 줄 모르고 이도령
만 생각한다너니. 그만 해. 이 의뭉스런 기집애야."
영희는 여전히 그렇게 퉁을 주었으나 가슴은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미어질 듯하였다. 혜라
에게 좋은 신랑감이 나타난 것보다 아직까지 그런 심성이 살아 있다는 게 부러운을 넘어 그
런 슬픔을 자아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에게도 나보다 상대를 더 생각해주는 저런 사람이
있었던가...
"하긴 그건 내 몫이겠지. 어쨌든 그리 됐어."
혜라도 영희에게서 무얼 읽었던지 그쯤에서 이야기를 덮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전
날과는 달리 밝은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아 그분 뜻을 따르기로 했어. 내게 잘못된 거, 모자라는 거는 살면서 고치고 채워가지
뭐. 딴 거 다 그만두고 그것만 힘쓴다면 꼭 안된다는 법도 없잖아? 나 정말 좋은 아내 한번
되어볼래."
하지만 그녀의 흔들림은 그뒤에도 한 번 더 있었다. 한 보름 전인가, 어느 날 밤늦게 그녀
가 전화해 호소하듯 물었다.
"나 정말 이분하고 결혼해도 되는 거니? 그래도 벌받지 않을까?"
"또 왜 그래? 이 기집애야."
막 잠자리에 들었던 영희는 머릿속에 엉겨붙는 듯한 졸음을 털어내며 성의 없이 받았다.
그런데 다시 들려오는 혜라의 목소리는 간곡하다 못해 애절했다.
"그 동안 알아보니 생각보다 훨씬 엄청난 분이야. 교수나 박사니 하는 것보다 더 큰 걸
가지신 분이더라구. 시아버님 되실 분은 옛날에 도지사까지 지내셨고, 집안은 연안 이씨 중
에게도 떠르르한 가문이야. 우리 앞으로는 벌써 집도 한 채 마련되어 있대. 새 아파트루."
"이 기집애가 정말 자는 사람 깨워 약올리는 거야, 뭐야? 너 우리 남편 알지? 무식하고
병신 같은거. 또 어떻게 결혼했는지두 잘 알지? 양가 부모도 안 온 결혼삭에 코딱지만한 월
셋방에서 살림차린 거. 정히 복에 겨워 못 견디겠으면 소주나 한병 사다 마시구 엎어져 자.
괜히 복 없는 년 심사 건드리지 말구."
영희는 그렇게 퍼붓듯이 핀잔을 주어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으나 그날 밤은 왠지 편히 잠
들 수 없었다. 전 같은 부러움이나 거기서 비롯된 고까움이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옮아오는
정체 모를 불안때문이었다.
그날 영희가 혜라를 만날 때부터 느껴온 불안이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낸 것은 식사를 마
치고 다시 마주앉게 된 라운지에서였다. 시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지는 게 마음에 걸
렸으나 아무래도 저녁만 얻어먹고 그냥 헤어질 수 없어 혜라를 라운지로 이끈 영희는 결론
삼아 혜라를 달랬다.
"턱걸이 결혼을 하게 되니 여러 가지로 불안하고 답답하겠지. 그건 나도 이해한다. 하지만
이겨내야 해. 결국 너희 결혼은 할 수 있으니까 하게 된 거야. 너무 주눅들지 마라. 옛날의
그 당차고 무엇에나 자신만만하던 윤혜라는 어디 간 거야?"
"나도 그러려고 해. 하지만 너무 힘이 들어."
저녁을 먹을 때의 쾌활함이 억지로 꾸민 것이나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혜라가 다
시 메마르고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금방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꾸 감정을 과장하지마. 무엇으듬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생각해."
"그게 더 어려워. 현실적으로 냉정해지는 것- 실은 말이야..."
혜라가 그래놓고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영희가 까닭 모르게 섬뜩해져 다음 말을 재촉했
다.
"말해봐. 망설이지 말고."
"오늘 너하고도 작별 인사를 하러 나왔어."
"뭐, 그럼 정말로 어디 외국에라도 나가 살 작정이야?"
"그게 아니라- 너도 단절해야 될 과거의 사람이야. 우리는 참으로 좋은 길동무였지만, 그
래서 진창 같은 삶을 여러 해 함께 헤쳐왔지만... 이제 헤어져야 돼."
혜라가 거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호흡을 가다듬어 또렷하게 이었다.
"이게 내가 시작할 새로운 삶이야. 그래서 이렇게 외롭고 슬픈 기분이 드는 거야."
그러나 영희에게는 뒤엣말은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것이었구나. 줄곧 나를 불안하
게 만든 것은 이것이었구나...
"결혼식에도 나오지 말아줘. 그리구- 앞으로는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영희가 슬픔이나 분노보다는 그저 막연한 암담함에 빠져 대꾸를 못하고 잇는 사이에 혜라
가 거의 매몰차게 들릴 만큼 또박또박 말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말을 듣자 오히려 영희
으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알았어. 네가 원한다면. 그게 너를 위하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그래줄게"
영희는 조금도 뒤틀림 없는 어조로 그렇게 대답했다. 까닭은 모르지만 진심도 그랬다.
"부디 그분은 의심하지는 마. 이건 그분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결심한 거야. 힘들
고 외롭지만 이렇게 해야만 온전히 과거와 단절될 수 있을 것 같아서..."
혜라가 그러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영희도 갑자기 눈시울이 화끈해왔다.
"잘 생각했어. 너는 정말로 우아한 백조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미운 오리
새끼 시절을 잊어야 하고말고. 게다가 나는 아직 얼마나 더 미운 오리 새끼로 세상을 뒤뚱
거리고 헤집고 다녀야 할 지 몰라. 그래, 잘 가."
그래도 영희는 목 한번 메는 법 없이 이 세상에서 단 한 번 가졌던 진정한 친구와 작별을
했다.
제44장 마지막 장미
아무도 없는 무대애 사냥꾼 차림의 사내가 다시 등장한다. 프로그램에 나온 줄거리로 보
아서는 힐러리다. 그가 주의를 살피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루이스의 오두막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때 새로운 음악이 울리며 한 기품 있는 젊은 여자가 귀족이 여러 사람들에 둘
러싸여 나타난다. 아마도 바틸데 공주와 그의 부친 클랑 공이 신하들과 함께 나타난 장면일
것이다. 놀라 마중을 나온 지젤과 그 어머니에게 클랑 공이 마실 것을 부탁하며 잠시 쉬어
가기를 청한다. 바틸데 공주의 눈길이 지젤에게 머무른다. 무엇에 이끌린 듯 지젤에게 다가
간 공주가 자신의 목걸이를 지젤에게 걸어준다. 지젤은 공손하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자신이
일가 춤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곧 연인 로이스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것 따위를 이야기한
다. 오래잖아 공주와 클랑 공은 지젤의 집으로 들어가고, 신하들과 쉬기 위해 흩어진다. 힐
라리온이 로이스의 오두막으로부터 검과 망토를 가지고 나온다. 질투와 의심으로 달아 있는
동작이다.
거기서 인철은 잠시 발레의 줄거리에서 빠져나왔다. 지젤이 없는 무대여서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진 탓이었다. 처음 대하는 세계지만 아름다운 세계다. 어렵게 더듬어가며 알아듣
고는 있지만 아름다운 언어다- 재작년 명혜네 학교 연습실에서 훔쳐보았던 그 동작 언어가
인철에게 심어주었던 육감적이란 편견은 그새 많이 지워지고 있었다. 지젤이 그를 긴장시키
는 것도 그녀가 명혜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서사 구조 속의 배역 때문이라는 편견에 가
까웠다.
그 사이 무슨 축제와 같은 여럿의 춤이 있더니 화관을 쓴 지젤이 혼자 남아 춤을 춘다.
수확제의 여왕으로 뽑힌 대목인 것 같았다. 이어 로이스가 나타나 지젤의 솔로는 두 사람의
파드되로 바뀐다. 감미로운 플루트 선율에 맞춘 두 사람을 한껏 고조된 사랑을 나타내고 있
었다. 거기서 묵은 상처가 건들린 듯 인철의 가슴이 쿡쿡 쑤셔왔다. 로이스 역을 맡은 무용
수가 여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에 대한 시기와 선망을 억누를 수가 없다. 하지만 못 견딜 만
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내게는 한번도 너와 걸맞는 대역이 주어지지 않았
다. 언제나 너는 아득한 곳에 있었고 이제 그 거리를 영원히 줄일 수 없는 것이 된 듯하다...
그 사이 무대는 두 사람의 파드되에 지젤의 친구들이 마을 사람들이 가세해 군무로 변해
있었다. 한창 고조된 축제의 분위기다. 그때 갑자기 힐라리온이 나타나 로이스가 귀족이라는
것을 폭로하며, 그 증거로 자신이 훔쳐두었던 로이스의 칼과 망토를 내보인다. 로이스가 그
걸 뺏으려 하자 칼이 칼집에서 빠져 땅에 떨어진다. 힐라리온이 화난 동작으로 뿔피리를 들
어 분다. 그 소리에 불려나온 듯 클랑 공과 바틸데 공주가 나타난다. 흩어져 쉬고 있던 신하
들도 몰려든다. 공작과 공주는 농민 차림을 하고 있는 로이스를 보고 놀라움과 의혹을 나타
낸다. 정체가 드러난 로이스도 놀라고 당황스러워한다. 지젤도 이내 그 상황을 알아차린 듯
하다. 로이스가 공주에게 입맞춤하러 다가가려는 것을 가로막고, 그가 자신의 손에 끼워준
약혼 반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공주의 손에도 같은 약혼 반지가 빛나고 있다. 그때 인철은
순박한 사냥꾼으로 동정해온 힐라리온에게 갑작스런 혐오와 분노를 느꼈다. 진정으로 그녀
를 사랑했다면 비록 거짓된 것일지라도 그 행복한 꿈속에 지젤이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해주
었어야 했다.
놀라움과 슬픔에 제정신이 아닌 지젤은 공주가 걸어준 목걸이를 잡아떼고 기절하듯 쓰러
진다. 사람들이 놀라 굳어 있는 사이 다시 몸을 일으킨 지젤은 처절한 느낌을 주는 동작으
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로이스와 사랑했던 지난날의 행복과 기쁨을 표현하는 춤이다. 그러
다가 땅에 떨어져 있던 로이스의 칼을 들어 주저 없이 자신의 가슴을 찌른다. 지젤은 고통
을 참아가면서도 로이스에게 두 손을 내밀며 그의 사랑과 평안함을 구하는 춤을 추다가 어
머니의 팔에 쓰러지며 숨이 끊어진다. 그걸 비통한 눈길로 보고 있던 로이스가 다시 칼을
들어 자신을 찌르려한다. 클랑 공이 그것을 막자 로이스는 돌연 거칠고 격렬한 동작으로 자
신의 비탄과 고통을 드러낸다. 마음 착한 바틸데 공주는 그 사이 마을 처녀들과 함께 불행
한 지젤의 시체를 들어 옮기고, 미친 듯한 로이스도 사람들에게 끌려나간다. 무대에 남은 사
람들은 울먹이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그때 인철은 다시 묘한 동일시를 경험했다. 불행하게 죽은 것이 지젤이 아니라 명혜인 것
처럼 여겨지며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안 돼. 안 돼. 너는 결코 그렇게 불행
해져서는 안 돼... 하지만 곧 극장 안에 불이 켜지고 곁에 앉았던 사람들이 저마다의 볼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인철도 현란한 동작 언어가 표현한 불행한 사랑의 감동에서 깨어나기 시
작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왜 여기 있는가.
인철이 돌내골에서 성남의 집으로 불려온 것은 지난달이었다. 어머니의 편지에서 형 명훈
이 성남 폭동에 휘말렸다가 집을 나간 지 두 달이 넘었다는 말을 듣고 인철은 아무 미련없
이 짐을 쌌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먼저 안광에 들러 한낮이나 머물며 여기저기 수소문
했으나 거기에는 형이 다녀간 흔적이 전혀 없었다. 돌내골에서 어머니의 편지를 읽을 때만
해도 성남에서 그토록 놀라운 일이 있었고, 또 형이 그 일로 경찰에 쫓겨야 할 만큼 주동적
인 역할을 했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도 날짜 지난 신문에서 주먹만한 활자로 난 광
주대단지 사건을 읽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과는 무관한 도시 빈민들의 난동일 뿐
이었다. 따라서 그느 오히려 형이 그 소요를 핑계로 자신의 떠돌이 기질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하며 형이 돌아올 때까지 남자가 아무도 없는 집을 지켜준다는 기분으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형의 자취를 추적하기 위해 먼저 알아본 그날의 소요는 인철의
상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민간인이 관청을 습격해 불사르고, 파출소를 들부스는 것은 어머
니의 끔찍한 기억 속에서나, 멀리 남의 나라의 혁명사에서밖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로 알아
온 인철이었다. 민간인들이 한 지역을 몇 시간이나 힘으로 점거하고, 관청으로부터 무조건적
인 항복을 받아냈다. 그런 일이 실제 이 땅에서 일어났다. 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지
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을 준 것을 그날 형의 한 역할이었다.
"정말 대단하더만. 이명훈씨의 어디에 그런 힘과 분노가 숨어 있었던지 몰라. 우리 지역위
원회 대표 맡아달라는 것도 한사코 마다하더니- 그날 나하고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구경이
나 하겠다는 투였는데... 하지만 막상 일이 터지자 정말 무섭데. 나는 명색 지역위원장이라
늦게 도착한 서울시장하고 담판짓는 중앙위원회 근처에 있느라고 다 보지는 못했지만, 먼빛
으로 보니 하마 대단지 사업소를 덮칠 때부터 앞장이더랑께. 들은 얘기로는 경찰 기동대 밀
어붙이고 그대로 서울까지 쳐들어가자고 한 것도 이명훈씨였다는구먼. 서울시가 알아서 기
는 바람에 그만 했지, 힘으로 뻗대고 들었으면 정말 무슨 일이 났을지 몰러. 거기다가 함께
몰려다니던 친구들은 이번 난동의 책임을 일체 묻지 않겠다는 서울시의 약속만 믿고 여기서
그대로 어물거리다가 옴싹 묶여간 데 비해 명훈씨만 잽싸게 몸을 뺀 거 하며... 틀림없이 진
작부터 먹은 마음이 따로 있었던 사람이여."
그날 아침 형과 함께 궐기대회에 나갔다는 임장수씨란 사람은 찾아간 인철에게 그렇게 그
때 일을 전해주었다. 인철로서는 전혀 상상 못 한 형의 갑작스런 변모였다. 따지고 보면 인
철이 사로잡혀 있는 원죄 의식이란 것도 태반은 형에게 원인이 있었다. 인철의 이념 혐오
록은 이념 거부의 감정은 틀림없이 어머니의 생생한 체험에서 전이된 것도 있었지만 하나의
의식 형태로 자리잡게 된 것은 오히려 형의 논리화 때문이라는 편이 옳았다.
"어떤 사회든 자기를 방어할 권리가 있다. 이 사회는 연좌제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그 방
어권을 행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사회의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된 셈이며 기독교
식으로 표현하자면 원죄를 지고 태어난 셈이다. 따라서 네게 있어 데모는 결코 죄 없이 태
어난 아이들의 신나는 놀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저들의 잠재적인 적 개념을 현실적인 적
개념으로 바꾸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우리 주위에 몰려든 사람까지 확대된
적 개념에 피해를 입게 한다. 그러니 데모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사소한 정치적인 행위에
도 너는 끼여들지 마라. 이 사회의 권력 행사에는 우리 몫이 전혀 없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
해라."
작년 교련 반대 데모가 한창일 때 형은 그렇게 넌지시 충고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뜻밖
에도 형 자신은 격렬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철은 그런 형에게서 어떤 돌연
하고도 심각한 심경의 변화를 짐작했다.
'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무엇이 형을 그 같은 결의로 이끌었을까. 혹시 아버지하고
어떤 연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철은 스스로 소스라치면서도 그런 의심까지 했다. 하지만 몇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온 인
철에게 충격적인 것은 형의 일만이 아니었다. 그 못지않게 느닷없고 놀라운 것은 옥경의 때
이른 결혼 선언이었다.
"오빠, 큰오빠가 없어 집안이 어수선한데 이런 얘기 하기 안됐지만, 나 결혼하기루 했어."
인철이 집으로 돌아온 일주일 만인가, 예고 없이 집으로 돌아온 옥경이 그렇게 통고하듯
말했다. 어머니에게 말하기에 앞서 둘만의 자리를 만들고 한 소리지만 표정이나 말투는 차
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처음 그 말을 듣는 순간의 인철에게는 그 뜻하는 바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옥경은 벌써 스물한 살이었고, 좀 이르기는 해도 결혼 못
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인철에게는 여전히 보호해야 할 어린 동생이었고, 스물한 살이
란 나이도 결혼에는 어림없어 보였다.
"뭐야? 니 맘대루? 누구하고?"
인철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옥경은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지석 오빠. 짐작했겠지만 아 지석 오빠 벌써부터 좋아했어. 지석 오빠도 날 좋아한 지 오
래된대. 갈릴리 시절부터래. 그때부터 나를 자기가 돌보고 보살펴야 할 사람으로 생각해왔
대. 정수원 목사님도 반가워하며 허락하셨어. 주례를 서주시겠대."
"결혼이 무슨 어린애 장난일 줄 알아? 도대체 너희들 나이가 몇이야?"
"응. 우리 나이가 좀 어린 줄은 알아. 그렇지만 구로동 근처에는 우리보다 어린 애들도 결
혼해 사는 일 많아."
"그게 어디 결혼이야? 공돌이 공순이 동거 생활이지."
"오빠, 그리 정 없이 말하지 마. 특히 그 공돌이 공순이란 말- 그거 오빠 같은 지성인이
쓰기에는 너무 야비하고 잔인한 말 아냐? 어쨌든 언제까지고 여유 만만하게 삶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분인 오빠 같은 사람들은 모르는 게 있어. 세상에는 오빠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일찍 삶이 결정되어버리는 사람도 많아. 나나 지석 오빠도 그래. 우리는 어떤 휘황한 삶을
꿈꾸려 그걸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삶 그 자체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 그런 사
람들에게는 결혼이 여러 효용들이 보다 일찍 요구될 수도 있어."
"그 말 잘했다. 너 정말 그렇게도 빨리 삶을 확정짓고 싶니? 왜 집으로 돌아와 진학을 하
거나 보다 값진 기술을 배워 네 삶을 개선시킬 생각은 하지 않아? 형수가 몇 번이나 돌아오
라고 그랬다면서? 비천한 노동자로 평생을 울고짜며 사는 게 그렇게 소원이야?"
거기서 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된 인철이 한층 더 목소리를 높였다. 옥경의 눈길에 무언
가 예사롭지 않은 불길 같은 것이 언뜻 비치다가 사라졌다. 목소리도 맞받아치기보다는 다
분히 설득조였다.
"오빠, 아직도 몰라? 그건 내가 확정짓는 게 아니고 이 사회 구조가 확정지은 거야. 진학
이라고? 스물도 넘은 나이에다 겨우 중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기집애에게 그게 가능하다구
봐? 그 중학도 태반은 시골 고등공민학교에서 때운 주제에... 값진 기술도 그래. 그게 어떤
건지 모르지만 학력도 없는 기술만으로 뭐가 크게 달라질 것 같애? 우리하고 여기서 거기
야. 이건 지석 오빠 얘기지만 우리집은 그게 큰일이래. 자기 소속을 모르는 거."
"그런 그 잘난 자식 말 한번 들어보자. 도대체 우리 소속은 어디야? 그 자식 수작대로 하
면 무슨 계급이래?"
"지금 이 시대는 두 개의 기본 계급이 있대. 자본가와 무산자. 그리고 그 밖에 몇 가지 주
변 계급이 있는데 우리는 그 중에 하나일 거래. 뭐라드라- 그래, 몰락한 봉건 지주 계급. 그
런데 그 주변 계급들은 결국 그 두 기본 계급 중에 하나도 변해가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걸 못 하고 있대. 하마 길이 뻔해 보이는데도 시대에 뒤떨어진, 소멸하는 계급의 감상에만
빠져 있다는 거야. 뭐라더라..."
"알았어, 이 기집애야.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이며 통상으로는 비판론적이지만 때로는 목적
낙관론적이 되는..."
인철은 문득 그 유별난 기억력으로 노광석이 한창 사상 서클에 미쳐 있던 때에 떠든 적이
있는 말을 상기해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 갑자기 옥경의 그런 의식
을 불어넣고 있는 지석에게 섬뜻한 의심이 일었다. 결국 거기까지 가고 말았구나. 어떤 경로
로 그런 계급관과 용어를 듣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건 레닌의 것이라고 들었는데...
"맞아. 맞아. 그럼 오빠도 알고 있겠구나. 결국 우리가 두 기본 계급 중 어디에 속하게 될
지를. 그런데 왜 우리 계급에 그렇게 비정하고 비판적이야?"
옥경이 신기한 듯 눈을 빛내며 그렇게 눈치 없이 반감을 드러냈다. 그게 인철을 화나게
해 이제는 거의 고함쳐 옥경을 나무라게 했다. 내용은 전에 노광석을 반박한 그 내용이었다.
"시끄러, 이 멍청한 기집애야. 그리구 잘 들어. 첫째로 우리 시대가 그런 계급들로 구성되
어 있다고 보는 것 자체도 일방적인 허구야. 거기다가 모든 주변 계급이 결국은 그 두 기본
계급 중에 하나로 편입되어가야 한다는 것은 빨갱이들의 희망 사항일 뿐이야. 모든 주변 계
급을 자기 계급으로 끌어들여 부르주아를 타도하는 힘으로 쓰려는... 정말로 우리 시대의 사
회 구조가 그렇다 해도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주변 계급의 역할이야. 그들이 건전하게 살
아 있어야 자칫 극단으로 내닫기 쉬운 두 기본 계급을 비판하고 그들의 비극적인 충돌을 완
충 조절할 수 있는 거라고. 어디서 케케묵은 빨갱이들 선전 몇 마디 듣구 와선. 안 되겠어.
정히 좋은 사람 있으면 나이가 어려도 결혼을 허락해줄 순 있지만 지석이 그 자식하군 안
돼. 무식한 게 어디서 지각해도 한참은 지각한 빨갱이 수작을 배워..."
그러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야들이 왜 이래 시끄럽노? 오랜만에 만낸 남매가 삼 이웃 사 이웃 다 듣거로 소리소리
질어대미. 그래고- 인철이 니, 빨갱이가 뭐 어쨌다꼬?"
그렇게 되면 이념과 관련된 다툼은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인철은 그러잖아도 형 때문에 근
심에 빠져 있는 어머니에게 새로운 근심을 더하기 싫어 과장된 목소리로 일러바치듯 말했
다.
"어머니, 세상에 저 기집애가 결혼하겠대요. 머리에 쇠똥도 벗어지지 않은 게... 거기다가
상대가 누군지 아세요? 중학교도 겨우 나온 공장 일꾼이라구요. 옛날 밀양에서 같이 고아원
에 있었던 고아고..."
그러자 이번에는 모녀간의 종류를 달리하는 한바탕의 소동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무엇보
다는 옥경이 인철이 말한 그런 조건의 남자와 결혼한다는 걸 못 견뎌했다. 옥경이를 설득도
하고 애원도 해보다가 그래도 안 되자 마지막에는 위협 반 넋두리 반으로 나왔다.
"오이야. 정 그렇다믄 나는 이제 니 안 볼란다. 까짓 거, 딸년이란 거는 첨부터 안 놨다고
치믄 된다. 글치만 이기 무신 팔자고? 영희 그년 그래 미쳐 집 나가고 딸이라꼬는 니 하나
남았디..."
하지만 착하고 순하게만 보아온 성격 어디에 그런 모진 구석이 었었던지 옥경은 끝내 뜻
을 굽히지 않았다.
"엄마두 오빠두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와도 좋아. 엄마 말마따나 날 죽은 사람으로
쳐. 하지만 결혼식 날 잡히면 알리기는 할게. 장소는 아마도 정수원 목사님의 천막 교회가
될 거구."
눈물을 줄줄이 흘리면서도 옥경은 또박또박 그렇게 말하고 집을 나갔다.
누나 영희와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일도 인철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처음 집으
로 돌아온 날 어머니는 뒤틀린 어조로 누나가 다녀간 일을 말해주었다.
"그년 그게 안 죽고 또 찾아왔디라. 뭔 바람이 불었는동 그년도 그날 그 난리판에 끼옜다
가 어예 재준 애비를 만내 우리집을 알게 된 모양인게- 싱갱이(승냥이) 꼬리 삼 년 묻어놓
는다고 개 꼬리 되겠나마는, 옛날하고는 마이 달라졌드라. 지 말대로라믄 어디 농사꾼 집에
시집가 산다는데, 하는 행신이나 채려입은 꼬라지로는 그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하여
튼 술내미(냄새), 분내미, 썩은 내미는 안 나드라. 제법 지 잘못했다 소리도 할 줄 알고. 글
치만 억대구(억대우) 같은 속은 그대로라. 건청(시건방) 떠는 것도 글코. 또 뭐를 도와주겠
다꼬 주척거리고 나서더라마는 내사 돌따도 안 봤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어머니의 표정에는 어딘가 한시름 놓은 듯한 데가 있었다. 그 말을 듣
는 순간 인철도 묘한 자괴감과 아울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그것은 참담한 지경
에 빠져 있는 걸 보고 헤어졌으면서도 그뒤 한번도 근심이나 연민으로 누나를 그려본 적이
없었다는 데서 비롯된 복합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그 누나가 다시 집을 찾아왔다. 출산 휴가가 끝나 형수가 출근을 시작하
고 시도 때도 없는 기도에서 깨난 어머니가 다시 허드레 바느질을 시작하면서 일거리를 받
으러 집을 나가 인철 홀로 집을 보고 있는데 누가 대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보니 뜻밖에
도 누나였다. 헤어진 지 6년 만인데도 누나는 이전과 많이 달랐다. 고치고 덧붙이고 그리거
나 칠한 것이 더 많던 얼굴은 그런 것들이 줄어선지 옛날 어렸을 적에 본 누나의 모습으로
많이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서른이란 나이가 험난했던 삶의 이력이 남긴 자취들과
더불어 화류계 여인들 특유의 색기를 거의 지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이 변한 것은 성
격이었다. 남자 같은 꿋꿋함은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그것과 겹을 이루고 있던 격정은 어디
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 같으면 먼저 끌어안고 한바탕 울고 보았을 누나가 별로 놀라운
기색도 반가워함도 없이, 덤덤하기 그지없게 말을 건넸다.
"네가 와 있었구나. 언제 돌아왔어? 벌써 어른이 다됐네."
그런 누나에 비해 인철은 목부터 메어왔다. 그녀가 그뒤 겪었을 삶의 유전이 절로 짐작이
가서였다. 와락 쓸어안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누리며 어른스레 받았다.
"어머니한테 말을 듣긴 했어도 왠지 실감이 안 나더니- 정말 누나가 돌아오긴 돌아왔구
나. 나는 누나의 마지막 쪽지 속 구절을 늘 마음 아파했는데... 우리 남매 살아서 다시 만나
게 될지, 란 구절 말이야.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리구 지금은 어디 살아?"
"내가 서울을 떠나 어디서 살 수 있겠니? 어쨌든 들어가자. 어머니는 안에 계셔?"
"아니, 좀 전에 시장에 나가셨어. 형수도 출근했고..."
방안에 들어와서도 누나는 헤어져 산 세월에 대해 별다른 감회를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정신에서 감정적인 부분을 송두리째 드러내버린 사람 같았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인
철이 6년 전의 그 갑작스런 파국과 그뒤를 넌지시 물어보았으나 그녀는 한마디로 잘라 대답
했다.
"다 살아가게 되어 있는 거야. 너두 이렇게 훌륭히 자라지 않았어."
"지금은 어떻게 지내?"
"역시 사람 살이야. 지금 열심히 받아치기를 하고 있어."
"받아치기?"
"그래. 무엇이든 내가 세상에서 받은 걸 모두 되돌려주려고. 돈만 있으면 멋있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지금은 앞뒤 돌보지 않고 그 돈을 키워가고 있는 중이야. 방법은 중요
치 않아."
그리고 바로 화제를 바꾸어버렸다.
"오빠 소식은 아직 없어?"
"아직. 몇 군데 갈 만한 곳을 수소문했지만 전혀 나타난 적이 없대."
"뭐야, 재준이랬나? 우리 조카는 잘 커?"
"그럭저럭. 형수님 맘 고생 더하지는 않을 만큼."
"드디어 우리집도 한 세대가 지나갔구나. 벌써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잠깐 감회 어린 어조가 되었던 그녀가 이내 그걸 털어버리듯 현실적이 되어 물었다.
"너 고시 준비중이라며? 다음 시험이 언제야?"
"별일 없으면 또 내년 정월이겠지."
"그래봤자 석달도 안 남았잖아. 그런데 이렇게 집에 내려와 있어도 돼?"
"형님도 안 계시고- 여기서 그냥 시험 준비할 생각이야."
"이 어지러운 데서 잘도 공부가 되겠다. 그러지 말고 절이든 어디든 집중이 잘되는 데로
옮겨. 네가 여기 와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 아무것도 없어. 게다가 오빠 일을 너무 걱정하
지마. 생각해봐. 어떤 오빠야? 어디 가 있는지 모르지만 잘하고 있을 거야.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라구."
그때 안방에서 재준이 우는 소리가 나더니 어느새 왔는지 어머니가 아이를 어르며 인철의
방으로 건너왔다.
"누가 왔나? 낯선 신이 비노."
"어머니, 저예요. 제가 왔어요."
어머니가 방안으로 들어설 때 인철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악연이래도 좋을 그들 모
녀의 오랜 불화가 상기된 까닭이었다. 그러나 저번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 생각보다 어머니
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시집살이 한다 카이 그것도 빈말(거짓말)이라? 시집 사는 게 어예 또 집을 비우고 이래
펄럭거리며 댕기노?"
"오빠 일이 어찌 되었나 싶어서요. 경찰에서는 요새도 오빠 찾으러 와요?"
"글쎄, 그게 이상타. 직접 찾아오지는 않는데- 어딘가 잠복하고 있는 기분이라. 맘에 낑한
게... 글치만 그게 바로 재준 애비가 아직은 경찰한테 뿌뜰랬지 않았다는 뜻도 되이 쪼매 위
로도 되고."
"맞아요, 그렇게 마음 편이 잡수세요. 오빠도 잘할 거예요. 공연히 애매한 의심 받기 싫어
피하는 거지, 조용해지면 곧 돌아올 거라구요."
"또 주척대고 나서기는. 씰데없이 숨어댕기다 있는 죄 없는 죄 다 덮어쓰는 거는 어예
고?"
아슬아슬하게 이어가기는 해도 모녀 어느 쪽에서도 전같이 격렬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
다. 이것도 세월의 힘인가, 싶으면서 인철의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런데 인철이 쟤 그냥 집에 붙들어두실 거예요?"
"그러이 어예노? 집에 남자가 하나도 없으이. 거다가 좀 수선스럽기는 해도 지 공부할 방
도 있고..."
"안 돼요. 한번 결심했으면 바짝 죄어 빨리 끝장을 봐야죠. 절이든 고시원이든 어서 보내
세요. 여기서는 집중이 안 돼요. 이렇게 어슬렁거려 될 시험이 아니라구요."
"주척대지 마라 카이. 니가 멀 안다꼬? 그거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이 이래 펄렁거리
고 댕기지 말고 니 시집살이나 잘해라."
어머니는 그렇게 면박을 주었으나 누나의 말을 마음에 담아둔 듯했다. 저녁에 형수가 형
에게서 전화 연락이 왔다는 말을 소곤거림으로 알려주자마자 그 일을 꺼냈다.
"어디서 전화를 했는동 몰따마는 잘 있다이 됐다. 그래믄 우리도 본대(원래)대로 돌아가
자. 인철이는 다시 공부하로 떠나고."
실은 인철이 그 극장에 들어오게 된 것도 그 의논 끝에 서울로 나오게 된 게 발단이었다.
서울 가까운 절에서 공부하기로 결정을 본 인철은 필요한 책 몇 권을 사기 위해 서점에 들
렀다가 명혜가 출연하는 발레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명혜네 모교 출신들이 주축이 된 발레
단의 <지젤>이었는데, 지젤 역을 맡은 명혜를 선전하는 글귀에 '고별 공연'이란 말이 인철
의 발길을 그곳으로 끌었다. 극장에서 파는 프로그램을 보니 명혜는 그 공연을 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고 되어 있었다.
다시 사람들이 자리로 돌아오고 불이 꺼지면서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환상적인 분위기
를 자아내는 선율에 이어 천천히 막이 올랐다.
작은 호숫가의 숲이다. 어둡고 습기차 보이는 땅에는 야생화들이 활짝 핀 채 우거져 있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김이 피어오르는 호수를 희게 비추고 있는 한켠의 측백나무 아래 지젤의
무덤이 보인다. 그녀의 이름이 씌어진 십자가가 쓸쓸하기 그지없다. 힐라리온이 한 패의 사
냥꾼을 이끌고 나타난다. 그들은 떠들썩하고 활기에 차 있으나 얼마 안 돼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호숫가에 도깨비불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공포에 질린다. 생전에 만족스럽
게 추어보지 못했던 춤에의 열정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품게 된 이성에의 복수심으로
무덤 속에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요정 '빌리'들 때문인 듯하다. 밤반 되면 무덤을 빠져나온
그녀들이 숲을 배회하며 춤을 추다가 그곳을 지나는 젊은이는 유혹하여 숨이 끊어질 때까지
춤을 추게 만든다는 전설에 겁을 먹은 사냥꾼들을 급하게 흩어져 무대네서 사라진다.
하프 반주의 느리면서 아름다운 선율에 이어 빌리의 여왕 마르타가 갈대숲 사이에서 그림
자같이 나타난다. 날개가 달린 신비한 의상을 걸친 여왕을 꽃과 꽃 사이, 나뭇가지와 나뭇가
지 사이를 날 듯이 오락가락하며 마법의 지팡이에 불려나온 빌리들은 여왕을 에워싸며 환상
적인 군무를 시작한다. 이윽고 춤을 멈추게 한 여왕이 빌리들에게 오늘밤 새로운 자매가 들
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린다. 이어 여왕이 지젤의 무덤을 마법의 지팡이로 가리키자 얇은
수의에 싸인 지젤이 걸어나온다. 여왕의 지팡이가 그런 지젤에게 닿자 그녀는 이내 빌리로
변신하며 환상적인 날개를 펼치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아아, 너는 사랑의 원혼으로 되살아
났구나- 인철은 애처로움으로 가슴 저려하며 중얼거였다. 이제 명혜는 지젤 속에 완전히 녹
아 사라지고, 인철을 차츰 순수한 예술적인 감동 속에 자신을 잊어갔다.
다른 빌리들이 따라 춤추어 한바탕 빌리들의 아름답고 고혹적인 춤이 펼쳐진다. 그때 떠
들썩한 인기척이 나며 축제에서 돌아가는 동네 젊은이들이 숲으로 들어선다. 빌리들은 황급
히 춤을 멈추고 몸을 숨긴다. 들떠 있던 젊은이들이 갑자기 춤추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춤추기 시작하고, 숨어있던 빌리들이 살며시 그런 그들을 에워싼다. 그때 한 늙은이가 나타
나 젊은이들을 일깨운다. 그제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젊은이들이 겁먹은 얼굴로 흩어져 달
아난다. 빌리들이 화를 내며 쫓아가보지만 이미 홀림에서 깨어나버린 젊은이들을 춤으로 되
돌리지는 못한다.
텅 빈 무대. 오보에의 서글픈 선율이 울리며 이제는 귀족 알브레히트로 돌아간 로이스가
나타난다. 백합꽃 다발을 들고 지젤의 무덤을 찾는 알브레히트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다.
시종 윌프레드가 위험하다며 말리지만 알브fp히트는 오히려 그를 쫓아버리고 지젤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때 한 줄기 빛이 비치며 지젤의 환영이 솟아오른다. 알브레히트가 그
환영을 쫓아가면 사라지고, 멈추어서면 다시 나타난다. 그러다 마침내 알브레히트는 지젤의
환영을 따라잡고 빌리가 된 지젤과 알브레히트는 재회의 기쁨으로 춤춘다. 오래잖아 다른
빌리들이 돌아오는 기척이 나고, 놀란 지젤을 알브레히트에게 숨어 있기를 간청한다. 그때
빌리들이 길을 잃은 힐라리온을 붙잡아 춤으로 홀리다. 힐라리온은 정신을 잃고 춤을 추다
가 발을 헛디어 연못에 빠져 죽고 만다...
저건 아니야. 그의 순진한 사랑을 저렇게 잔인하게 다룰 권리는 없어- 인철을 일막에서와
는 달리 힐라리온에게서 묘한 동일시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차리리 슬픔과 절망으로 죽게
하는 게 나아. 힐라리온을 죽인 빌리들이 더욱 고조된 춤에의 열정과 복수욕으로 활발하게
춤추며 새로운 희생을 찾아나선다. 끌려온 그에게 여완 미르타가 마법의 지팡이를 대려 한
다. 그때 지젤이 나타나 여왕에게 그의 목숨을 애걸한다. 그러나 여왕은 그를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지젤을 알브레히트를 자신의 무덤가로 이끌어 십자가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여
왕이 마법의 지팡이를 그에게 대지만 십자가의 힘 때문에 지팡이는 부러지고 만다. 분노한
여왕과 빌리들이 무덤가를 돌며 자신들의 희생물을 되찾으려고 애를 쓴다. 마침내 여왕이
지젤에게 유혹의 춤을 명령한다. 빌리 세계의 질서를 어길 수 없는 지젤은 하는 수 없이 춤
을 춘다. 슬픔과 두려움에 잠겨 있으면서도 우아하기 그지없는 춤이다. 알브레히트는 그 춤
에 매혹되어 십자가를 버리고 지젤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자 여왕의 마법이 회복되어 그도
지젤을 따라 춤추기 시작한다. 이윽고 지친 알브레히트가 그 자리에 쓰러진다. 그래도 여왕
은 지젤에게 명해 춤으로 그를 일으켜 원기를 북돋게 한다. 사랑의 주제가가 슬프고도 감미
롭게 무대를 채우고, 다시 일어난 알브레히트는 미친 듯한 열정으로 지젤과 춤을 춘다. 거기
서 다시 인철의 감상이 개입했다. 그개, 저게 사랑일지 모른다. 죽을 때까지 미친 춤을 멈추
지 않는 것. 그러나 나는 알브레히트가 아니다. 처음부터 나는 무대 밖을 서성거렸고, 아직
도 그리로 가는 길을 굳게 닫혀 있다. 명혜, 너는 너의 알브레히트를 찾았느냐...
지젤과 함께 춤을 추던 알브레히트가 다시 힘이 다해 쓰러진다. 지젤이 여왕에게 다시 한
번 그의 목숨을 애걸하지만, 여왕을 냉정하게 거절한다. 다른 빌리들도 여왕에게 동조하며
지젤의 복수욕을 돋우려는 춤을 춘다. 알브레히트가 다시 깨어나고 빌리들이 그의 마지막
숨결을 끊어놓으려는 유혹의 춤을 펼친다. 휘청이며 일어난 알브레히트가 빌리들과 어울리
려는 순간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날이 훤히 밝아온다. 빌리들이 지배하는 밤이 끝
나고, 그들은 꽃들이나 나뭇잎 속을 황급히 사라진다. 하지만 지젤을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
고 머뭇거리다 정신이 돌아온 알브레히트의 품에 쓰러진다. 그녀를 보낼 수도 없고, 이 세상
으로 끌어낼 수도 없는 알브레히트는 지젤을 끌어안고 비탄에 빠진다. 그때 관악기의 장중
한 울림과 함께 클랑 공과 바틸데 공주가 알브레히트를 찾아 숲으로 들어온다. 그들을 본
지젤이 알브레히트에게 그의 사랑을 공주에게 바쳐달라고 염원하면서 영원한 이별을 고한
다. 지젤이 다른 빌리들처럼 꽃숲 속으로 사라지자 슬픔과 허탈에 빠진 알브레히트는 마팀
다가온 바틸데 공주에게 손을 뻗으며 정신을 잃고 만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사람처럼, 혹
은 지젤의 마지막 염원을 받아들이듯이...
언제부터인가 옆에서 연신 눈물을 찍어대는 어린 여고생에게 감염된 것일까, 막이 내릴
무렵 해서 인철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느닷없지만 걷잡을 수도 없을 만큼 뜨겁고 속
깊은 눈물이었다. 인철을 허둥대며 손수건을 찾아 두 눈을 눌렀지만 눈물은 커튼 콜이 끝나
고 극장 안이 다시 환하게 밝아질 때까지 계속 쏟아졌다. 인철이 겨우 눈물을 수습하고 민
망해져서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관객들이 자리를 뜬 뒤였다. 그제서야 좌
석 밑에 놓인 꽃다발을 떠올리며 그걸 어떻게 명혜에게 전하나 막막해져 있는데 아직 몽롱
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는 그 여고생이 눈에 들어왔다.
"얘."
인철이 가만히 꽃다발을 내밀며 그 여고생을 불렀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인철을 쳐다
보았다. 약간 충혈되어 있기는 했지만 맑고 예쁜 두 눈이었다.
"우리 이 꽃다발을 지젤에게 보내지 않을래?"
"우리...가요?"
경계라기보다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가 그렇게 반문했다.
"그래, 무대 뒤로 가서 네가 전하고, 누가 보냈느냐고 묻거든 힐라리온이 보냈다고 해다
오."
"힐라리온?"
"못 알아듣거든- 분홍 무지개를 좇던 소년이 마지막으로 보낸 장미라고 하면 된다."
그 역시 명혜가 알아들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걸 알면서도 인철은 태연스레 말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 여고생이었다. 그새 모든 것을 다 알겠다는 듯 인철이 내민 꽃
다발을 받아들며 차분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전해드릴게요."
그로부터 20년쯤 뒤에 인철은 잠시 어떤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는 데, 거기서 한 동료
로 그 여고생을 다기 만나게 된다. 그날 본 '지젤'에 매혹되어 발fp리나로 자란 뒤 명혜와
비슷한 유학 과정을 거쳐 그 대학 무용과의 교수로 와 있던 그녀는 한눈에 인철을 알아보았
다.
"왠지는 모르지만요, 어쨌든 꼭 전해드려야 할 꽃다발 같았어요."
그때 그 꽃다발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는 인철의 질문에 그녀는 살풋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날 그 여고생과의 만남은 그녀가 꽃다발을 전하기 위해 무대 뒤로 가는
것을 끝이 났다. 이게 네게 바치는 마지막 장미다. 이제 내가 사랑하게 될 여자는 피와 살을
가진 여자다. 나와 같은 욕망과 약점을 가진 살아 숨쉬는 여자다. 길고 치열했던 관념의 터
널은 이제 나는 벗어난다- 인철은 한없이 쓸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달콤한 상실감까지 느
끼며 그렇게 명혜의 환상에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그녀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극
장을 빠져나왔다.
제45장 시작이면서 끝인 노래
저는 오늘 광주대단지 사건(세칭 성남 폭동)의 주동자이자 배후의 좌경 이념 제공자란 혐
의를 가지고 추적하던 이명훈에 대한 수사를 종결지으면서 착잡한 심경으로 이 보고서를 올
립니다. 지난 8월 12일 처음으로 이명훈의 추적을 전담하게 되었을 때 저는 치안 유지와 국
가 보위의 신성한 책무까지 느끼며 그의 신상 기록을 검토했습니다. 여러 목격자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앞장서 난동 청년들을 이끌었고, 긴급 출동한 광주경찰서 기동대에게도 격렬한
저항을 시도한 주동자급이었습니다. 또 신원 조회로 드러난 것은 월북한 남로당 간부 이동
영의 장남으로 요시찰 대상이었으며, 이번 소요의 사상적 배후였을 가능성이 농후했습니다.
그를 본 수사관에게 전담시킬 때, 대북 접촉 여부를 특히 엄밀히 수사하라고 하신 별도 지
시도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날 오후 일차 수색한 이명훈의 집에서 받은
인상도 다른 난동 청년들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그의 처는 국민학교 교원이었고, 어머니는
일제 때 여학교까지 다닌 인텔리였으며, 그의 아우는 이 나라 제일이라는 국립대학교를 자
퇴하고 사법고시를 준비중이었습니다. 이번 난동의 주류인 단지 내의 주민들과는 처음부터
질을 달리하는 가족 구성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 자신도 대학 중퇴의 학력이었고, 또 정신
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나이에 아버지 이동영과 헤어져서, 우리가 걸고 있는 사상적인
혐의는 지극히 온당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입수한 상세한 이명훈의 신상 정보는 본 수사관에게 혼란을 일으키게 하였
습니다. 그에 관한 우리측의 기록으로 처음인 것은 기묘하게도 소매치기 방조 혐의로서였습
니다. 열여덟 살 때 그의 연고지인 안광경찰서 기록으로, 아직 미성년인 데다 무혐의로 처리
되었으면서도 어찌 된 셈인지 기록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뒤 서울로 옮겨온 그
는 누군가의 배려와 지도로 미 8군 영내의 보일러맨으로 취직해 뒤늦게 고등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이때 중학교를 그냥 건너뛴 그의 전학증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휴전선 이북에 있는
옹진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닌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는 당시의 정비되지 못한 교육 행정
이 그런 전학증을 유효할 수 있게 해준 듯 합니다. 그가 두번째로 우리 기록에 나타나는 것
은 서울로 올라온 이듬해 가을입니다. 시경 대공 부서에 남아 있는 임의 동행 기록이 그것
입니다. 이동영의 남파가 의심되는 첩보가 있어 접선 여부를 수사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
건은 이동영의 남파 자체가 무근한 첩보였음이 드러나 귀가 조치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음 정식 기록은 아니지만 그가 우리측 문건에 남아 있는 것은 자유당 말기의 정치 깡패
계보 속입니다. 미군 부대를 그만둔 그는 어떤 연고가 있었는지 동대문파의 중간 보스인 배
석구의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과는 전혀 없고, 오히려
그 시기에 삼류대지만 어쨌든 대학에 진학합니다. 그러다가 4.19가 나던 날 다시 흥미있는
반전이 보입니다. 그는 정치 깡패 계보상 그날 고대생 습격에 가담했을 것으로 강하게 추정
되는데, 그 날짜로 의거 부상자 명단에 올라 있는 것입니다. 서대문 이기붕 자택 근처에서
경미하지만 왼팔에 관통상을 입고 통원 치료를 받은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
름 민의원 선거 때는 공명 선거 대학생 계몽반으로 경남 어디로 내려가 활약하기도 했습니
다.
그의 군대 기록도 극적인 데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울 근교 사령단에 배치되어 5.16을 맞
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속한 부대는 혁명 진압을 위해 출동했다가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형
명군으로 바뀐 바로 그 부대였습니다. 그가 병역 의무를 마친 뒤 고향으로 내려가 보낸 몇
년은 거의 감동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는 흩어져 있던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그곳으로 모
아 거의 맨손으로 황무지 3만 평을 개간합니다. 그 기간의 그는 성실하고도 억척스런 개척
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해 경상북도 지정 '상록수상'을 수상했으며, 그
곳 지서의 정기적인 동향 보고도 아주 호의적입니다. 하지만 그 기간에도 그는 다시 한번
우리 기록에 오릅니다. 바로 64년도의 '안동, 의선 거점 간첩단 사건'에서 주요 포섭자 대상
으로 올랐다가 경북 도경의 조사를 받은 일입니다. 그때 그는 무슨 낌새를 느꼈던지 포섭하
러 간 인척 김말동을 말조차 꺼내보지 못하게 하고 돌려보내 다시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그뒤 그는 한동안 우리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전전은 여전히 흥미롭습
니다. 개간지를 팔아 서울로 올라온 그는 그 돈을 어떤 기업체에 사채로 넣고 그곳에 일자
를 얻어 제법 안정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다가 사채로 넣은 돈을 태반이나 떼이고 일
자리까지 잃자 스스로 생업을 가져보려고 몇 가지 시도해본 모양입니다. 하지만 결국 경험
부족이나 현실성 결여 따위로 추정되는 이유로 결국은 그 나머지 돈마저 날리고 다시 우리
기록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는 안광에서 여론 조사소란 사설 단체의 조사원으로 있으면서 공갈 협박 등의 혐의로
수배된 적이 있고, 다음에는 사찰 폭력에 개입해 다시 기소 중지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러다가 일 년 가량의 공백이 있고, 결혼해 성남에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는 다소 연
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지시나 치밀한 사전 계획에 따른 것 같지는 않
습니다. 본 수사관을 혼란시킨 것은 도무지 그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게 하는 이와 같이 복
잡하고 모순된 이력이었습니다. 얼른 보면 변화 많고 역동적인 삶을 산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선택의 의지도 없어 보이는 그저 내몰리고 팽개쳐진 삶이었습니다. 뿌리뽑
혀 떠도는 삶이며 밀려나고 내쳐진 삶이었습니다. 적어도 본 수사관에게는 그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고, 어떤 믿음도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같아 보였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가 과격한 난동을 부린 패거리에 끼여 있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
을 듯합니다. 틀림없이 그는 그들과 이해 관계를 같이하는 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
로 그 난동의 주동자였다고는 아무래도 믿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의식의 결코 그들
에 속해 있지 않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동영의 아들이라는 것만 보면 사상적인 감
염이나 그 이상 북측과의 직접적인 연계를 추정하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닙니다. 북측도 그
가 빠져 있는 상황을 알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를 이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 난동의 배후에서 불온한 이념을 제공했다고는 결코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
냐하면 그에게는 어떤 이념을 지속적으로 품고 갈 정신의 바탕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본 수사관의 이 같은 추정이 그리 틀린 것이 아님은 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더욱 뚜렷해
졌습니다. 모든 연고지에서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을 통해 확인한 그의 의식은 추상적이면서
도 맹목적인 상승 의지와 삶의 순간순간에 대한 열중뿐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를 체
포함으로써 이번 사태가 우리 내부의 모순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 북측의 책동과 사주에
의한 것임을 밝혀 국면을 전환시키는 상부의 의도가 거의 무망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거기에 은신함으로써 마지막 연고지가 된 사북에서 이명훈의 삶을 전혀 낯선 전개를 보여주
었습니다. 다섯 달이나 끈질기고 세밀하게 추적했음에도 자취를 알 수 없던 그의 소재를 신
고의 형태로 알려준 것은 그 지역 사항(개인 탄광)의 관리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연고지를
외면하고 처음부터 탄광촌으로 숨어들었던 것입니다. 이명훈이 탄광촌으로 숨어든 까닭을
본 수사관은 외지인의 출입이 잦고 신원을 까다롭게 따지지 않는 그 지역 특성 때문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조사한 바로는 여론 조사소 시절에 그는 여론 조사, 혹은 실태 조사란 명목으
로 탄광촌을 돌며 금품을 갈취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분명 그 지역의 그 같은 특
성에도 밝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명의 보도 요원과 함께 이명훈이 일하고 있는 개인 탄
광을 덮친 본 수사관은 뜻밖의 사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죽어 있는 그를 인
근 석공병원 영안실에서 인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탄광 광부들의 패싸움에 말려들었
다가 누군가에게 둔기로 후두부를 강타당해 현당에서 숨졌다는 게 관할서 수사과장의 말이
었습니다.
이명훈의 복잡한 이력으로 보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본 수사관은 그의 죽음
에 인간적인 연민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지향이 애매하고 그 도달을 향한 시도들이 혼란
스러울 만큼 다양하기는 해도 그 삶의 치열성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가 있었습니다. 그런
데 그런 삶이 이렇게 허망히 끝날 수도 있는 것입니까. 거기자가 이명훈의 죽음은 단순한
폭행 치사로 처리되기에는 처음부터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습니다. 본 수사관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에게 그를 거동 수상자로 신고한 게 그 개인 탄광의 사용자측이었다는 점에 유의
했습니다. 아직까지는 사용자측이 노동자를 노사 관계와 관련 없는 혐의로 고발하거나 신고
하는 일이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조사를 진행시킨 결과 이명훈의 죽음은 모살의 혐의가 점
점 짙어지고 있습니다. 그 개인 탄광은 상당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아직 노조가 없었다고 합
니다. 광부들의 패싸움이라고 하는 것도 노조 설립을 주장하는 측과 사용자측에 매수된 일
부 광부들의 충돌이었으며, 이명훈은 바로 그 노조 설립을 주장하는 쪽에 서 있었습니다. 사
용자측이 그를 우리 쪽에 거동 수상자로 신고한 것도 바로 그가 주동자 중에 하나였음을 간
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도 사용자측에 매수된 광부들의 의도적이고 집중된 공격에 의한 것이란 심증이
강하게 듭니다. 왜냐하면 그날의 패싸움에서 다른 광부들은 경미한 부상에 그친 데 비해, 그
만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를 공격한 광부들 중에 일부는 그 며칠
사이 사용자측이 급하게 채용한 폭력 전과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더 이상
의 수사는 제가 아니라 관할서의 몫입니다. 제가 다섯 달 이상 전담해 이명훈을 추적해온
그 혐의는 이제 그에게 물을 수도 없거니와 다른 방법으로 입증된다 해도 무의미해졌습니
다. 죽은 양은 희생양으로 쓰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의로 수사를 종결하면
서 감히 아래와 같은 소견을 덧붙이는 바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그에게 걸었던 혐의는 거의 무근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성남 소요는 우
리 내부의 모순에 의해 자연 발생적으로 터진 도시 빈민의 어쩔 수 없는 자기표현이지 외부
로부터 조종받거나 책동된 폭동이 아니한 것입니다. 굳이 도시 빈민적이 아닌 책동이나 조
종을 찾는다면, 오히려 투기로 표현된 천민자본주의 쪽을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이
명훈의 의식과 추리가 수상쩍게 여길 것이 있다면 그것을 기른 것은 북쪽의 공작과 지령이
아니라 그가 처해 있던 그 철거민 단지의 현실, 그가 휩쓸려들었던 그날의 상황이었을 것입
니다. 봉건 지주의 한국적 변형 중에 하나인 재지사족의 몰락후 후예답게 새롭게 형성된 어
떤 계층에도 쉽게 편입될 수 없어 주변을 떠돌기만 하던 그는, 거기서 드디어 자신의 참다
운 모습을 보았고 소속을 확정지은 듯합니다. 셋째로 그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의식은 우리
자유민주주의, 혹은 자본주의 체제의 수호 조직으로 봐서는 충분히 의심하고 위험하게 여길
종류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보고드린 바처럼 어이없게도 그것은 시작하자마자 끝난
노래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유의해 경계해야 할 것은 앞으로 수없이 태어날 또 다른 이
명훈이지 지금 시체로 누워 있는 그는 아닙니다.
1972년 2월 3일
한 대한민국 경위
제46장 천민들의 거리
살림채에서 여섯 평 남짓을 잘라내 만든 방이었으나 내부는 억만의 허영에 맞게 제법 고
급스런 사무실 분위기를 풍겼다. 출입구 정면으로 관공서에서 쓰는 큰 나무 책상이 놓여 있
고 그 위에는 역시 관공서에서 잘 쓰는 번쩍이는 옻칠 명패와 전화기 한 대, 그리고 지어
있는 결재 서류함이 비치되어 있었다. 명패의 검은 옻칠 바탕에 자개로 새겨진 것은 '상무
강억만'이란 직함과 이름이었다. 이사도 전무도 감사도 없는, 아니 법인 자체가 없는 이상한
상무였지만 우선은 그럴 듯해 보였다.
"당분간은 더도 덜고 말고 이 건물 관리소장이라고 생각하세요. 여유가 생기면 사채 쪽은
당신에게 맡길게요. 말죽거리 배밭이 처분되거나 여기서 뭉쳐지는 돈이 있으면요. 그때는 진
짜 상무가 되는 거예요. 아니, 언젠가는 영동금고 사장 강억만이 되는 거라구요."
전날 방을 보여주며 억만에게 그렇게 말할 때만 해도 영희는 그가 반발하고 나설까봐 은
근히 걱정했다. 재작년 배밭 매매를 둘러싼 소동 이후 벌써 이 년 가까이나 군소리 없이 지
내온 그였다. 갖은 수단으로 억눌러오기는 해도 영희는 그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처
럼 불안하게 지켜봐오고 있었다. 그런데 억만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갑자기 영희의 손은 움
켜잡은 그가 결혼 뒤 처음 보는 진지함으로 말했다.
"고마워. 정말 잘해볼게. 그동안 미안했어."
그에게도 광대 기질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 순간만은 진심으로 보였다. 아마
도 그 방이 드러내보이고 있는 품위만큼 영희가 자신을 생각해주었다고 믿은 데서 온 감격
때문인 듯했다. 영희는 억만의 책상을 뒤를 돌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은 휑하게만 느껴
지는 8차선 도로 건너 띄엄띄엄 새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사이 사이로 한강 강둑이
보이고 왼편으로는 들어선 지 몇 해 안 되는 제3한강교가 눈에 들어왔다. 번화한 대로변 건
물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기보다는 교외의 한갓진 별장에서 주의 풍경을 감산하는 기분이
들어 영희는 공연히 가슴이 무거워졌다. 정말 이곳이 종로나 명동처럼 커갈 수 있을까- 그
때 정사장의 자신있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정말 잘한 거야. 힘들어도 내가 인수해보려고 했는데 이여사한테 양보한 거라구. 두고
봐. 지금은 썰렁해 봬도 앞으로 이 대로변 땅값 금싸라기가 될 거야. 장담하지만 십 년 안
가. 그런데 평당 십만 원이면 건물은 공짜나 다름없어. 잘해봐. 잘만 하면 이것만으로도 한
평생 먹고 사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
영희는 다시 한번 창밖을 내다보았다. 상상 속에서 공터마다 큰 빌딩들을 세우고 먼지만
펄펄 나는 8차선 도로 위로 물결 같은 자동차의 행렬을 끌어들이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래, 강남은 앞으로도 계속 개발될 것이고 이곳은 그 입구다. 기죽지 말자. 믿음을 가지
고 기다리자.'
정사장이 그 건물을 들고 온 것은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세상이 한창 들끓었던 그 여름
이었다. 집 가까운 다방으로 영희를 불러낸 정사장이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이여사, 전에 말하기를 이제는 치고 빠지는 식의 불안한 들락거림이 싫다고 그랬지? 물
건 될 만한 듬직한 놈으로 골라 지그시 기다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지난 여름 성남에서 한바탕 곤욕을 치른 뒤에 영희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뒤 반
포 쪽에 한번 더 들어갔다 나왔으니 재미는 전 같지 않은면서 마음만 졸여야 하는 게 싫어
그랬는데, 그렇다고 무슨 확고한 결의나 계획이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게 뭔데요?"
"바로 이여사가 말한 그런 거야. 덩치가 커서 좀 버겁겠지만 거둬만 두면 틀림없이 물건
이 될..."
영희가 봉투를 열어보니 등기부등본과 지적도, 건축 허가서 따위의 서류였다. 땅의 소재지
는 신사동 사거리에서 멀지 않은 영동대로변이었고, 대지 평수는 2백 3십 평에 건평은 지하
합쳐 3백 평이 넘었다. 한눈에 보아도 자신의 힘에는 넘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한 3년 부
동산을 쫓아다니며 익힌 대로 영희는 되도록이면 자신의 내심을 드러내지 않고 물었다.
"얼마에 나왔는데요?"
"준공 허가 얻어주는 조건으로 2천 5백이야. 어때, 한번 해보겠어?"
"그럼 아직 준공도 안 된 건물인데 왜 그리 값이 쎄요? 혹시 무슨 문제 있는 물건 아녜
요?"
영희는 여전히 그렇게 묻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이미 틀렸다 싶었다. 지난 3년 그렇게 아
등바등 키웠지만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시아버지의 금고까지 털어도 천만 원을 크
게 넘지 못했다.
"문제 있는 거면 이여사한테 권하지를 않지. 실은 내 친구 거야. 나하고 같은 복덕방 출신
인데, 빨리 놀구 먹구 싶은 바람에 과욕을 부렸어.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털어 대로변 땅 구
필지 어우른 것까지는 좋았는데, 건축이 너무 성급했어. 제딴은 빌린 은행돈으로 시작만 해
놓으면 그 건물 전셋돈으로 나머지는 메워나갈 줄 알았는데 그게 잘못되어버린 거야. 대로
변이라지만 보다시피 압구정동 넘어가는 언덕 쪽이라 아직 제대로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 곳
이잖아? 전세들 사람은 없는데 건축비는 자꾸 나가지, 먼저 빌린 돈 은행 이자 있지... 사채
를 빌려 막고는 있지만, 하마 틀렸어, 이미 건물 전세가 다 나가도 빚을 안고 가야한가는 계
산이야. 그나마 이대루 간다면 건물 준공될 때는 껍데기만 남을 판이구. 그래서 땅값이라도
좀 건지고 내던지려구 하는 거야."
정사장이 길게 설명했다. 언제부터인가 그에게서 똑똑한 제자를 보는 스승의 흐뭇한 눈길
같은 것 느끼고 있었다. 예전의 치정이 남긴 마뜩지 못한 흔적은 벌써 오래 전에 가시고 없
었다. 그런 그가 그토록 열올려 말하는 것이라면 믿을 만한다는 생각이 든 영희가 비로소
속내를 드러냈다.
"실은 제게 그만한 자금이 없어요. 너무 어림없는 것이라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심경
으루... 하지만 저 정사장님 말씀은 다 믿어요."
영희가 진지하게 받자 정사장도 열기를 가라앉혔다. 조금 있다 새로 한 수 가르쳐준다는
듯한 표정으로 차분히 말했다.
"치고 빠지는 조무래기 판은 현찰 박치기가 원칙이지. 그러나 부동산도 판이 커지면 현찰
박치기만으로는 안 돼. 지금 재벌들 대로변마다 지어올리는 빌딩, 그거 다 땅값, 건축비 현
찰로 거머쥐고 하는 줄 알아? 아냐. 잘해야 일 할이나 현찰로 지를까, 나머지는 다 남의 돈
이야."
"남의 돈이라니? 누가 재벌들에게는 돈을 거저 줘요?"
"거저 주는 게 아니라 은행돈이지. 땅값 치솟는 데 비해 까짓 은행 이자 몇 푼 돼? 서민
들처럼 재깍재깍 받아들이지 않고 이래저래 한없이 대부 연장해주면 손해볼 부동산 장사 없
어. 적어도 이눔의 나라에서는."
"하지만 전 재벌이 아니잖아요? 지금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천만 원 남짓이에요.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은행에서 끌어내야 하는데, 그게 되겠어요?"
"이미 이쪽에서 5백 내쓴 거 있으니까 그거 인수 받으면 천만 더 끌어내면 돼. 그런데 남
의 재산 말하는 거 아니지만, 이여사네는 담보도 충분하잖아? 말죽거리 배밭만 해도 이젠
그만한 값은 나갈 텐데. 시아버님 아직도 이여사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
주는 눈치구..."
사실 그 새로운 부동산 투기 방식은 영희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었다. 근년 들어 조금씩
이용하게는 되어도 영희에게는 아직 은행이란 문턱 높은 관공서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은행이 담보 있다구 아무에게나..."
"다 사람이 하는 일이야. 우리도 재벌들 하듯 몇 푼씩 떼어주면 돼."
하지만 그날만 해도 영희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도 시아버지나 남
편에게 말조차 꺼내보지 않고 있었는데 다음날 듣게 된 뜻밖의 소식이 영희에게 용기를 주
었다.
"흠흠, 어멈 좀 보자."
그날따라 들에서 일찍 돌아온 시아버지가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는 영희를 들여다보
며 말했다. 함께 부엌에 있다가 시아버지에게 무시당해 실쭉해진 시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영희가 거실로 들어서자 시아버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이 동네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우리는 집, 땅 다 내놓고 쫓겨
나게 되는 거냐?"
"아녜요. 그럴 리 있어요? 어디서 세우는 아파튼지 모르지만 주공이라도 우릴 함부로 내
쫓지는 못해요. 정당한 보상을 하고 동의를 받아야죠."
영희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별로 걱정이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다.
"보상이라고? 그거라면 또 그냥 땅 뺏기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말만 요란했지, 보상치
고 제대로 되는 거 내 평생 한번도 보지 못했다. 토지 개혁 때부터 말죽거리 배밭 큰길로
짤려나간 것까지."
"그렇지만 아파트 단지는 달라요. 잘하면 시가보다 훨씬 낫게 받는다구요. 잠실, 반포 가
보시면 알거예요. 그런데 우리 잠원동에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대요?"
"그런 말이 있어. 오다가 반장을 만났는데 오늘 저녁에 그 일로 반상회를 연다는구나. 네
가 한번 나가봐라."
그런데 그날 저녁 반상회에서 아파트 업자측의 제의가 평당 2만 원에서 시작한다는 얘기
를 듣고 영희는 다시 정상장의 권유를 떠올렸다. 집터 백이십 평과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있
는 농지 3백여 평을 합치면 5백 평에 가까워 업자들 제의대로만 해도 천만 원은 절로 확보
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영희는 다시 정사장을 만나 직접 건물을 찾아가보았다. 건물은 마
감을 앞두고 공사가 중단된 채였다. 그때로는 드물게 지하 일층에 지상 삼층 건물이었는데,
정사장의 말대로 위치는 영희가 보기에도 애매했다. 신사동 사거리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
는 상권에도 못 미치고, 그렇다고 다음 사거리의 덕을 볼 것 같지도 않은 위치였다. 건물도
마감을 앞두고 공사가 중단되어 겉보기에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다만 건물의 구조가 여
러 가지 용도로 활용 가능하게 되어 있는 그 점은 마음에 들었다.
"지하층하고 일, 이층은 업소에 세를 주고, 삼층은 절반만 갈라 조용한 사무실 같은 걸루
빌려주면 될 거야. 나머지 반은 살림집으로 쓰고..."
영희의 마음을 읽은 듯 정사장이 그렇게 용도까지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세는 나가겠어요?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루 없는데."
"그건 걱정 마. 이 친구처럼 급하게 세들 사람을 구하니깐 그렇지. 기다리면 다 오게 돼
있어. 지금은 이렇게 한심해 봬도 여기가 바로 강남 입구야. 두고 봐. 십 년 안에 사대문 안
보다 더 번화해질걸. 사거리에서 떨어져 있다 해도 그때는 거기가 거기야. 더군다나 저기 빈
땅 있지? 거기 바루 일류 호텔이 들어설 거라구."
정사장이 자신 있게 말했다. 정사장을 믿고 있는 영희는 그제서야 간밤에 있었던 일을 말
해주었다. 듣고 난 정사장이 제 일처럼 기뻐했다.
"봐. 이게 인연이라는 거야. 그말 들으니 이 건물은 바로 이여사네 거네, 뭐. 그럼 바루 계
약하도록 해. 워낙 물건이 좋아 끌다 보면 눈 밝은 친구들이 채갈 우려가 있어. 우선 천만
원만 주고 이전받은 뒤, 그 돈으로 건물 다 지어 준공 허가 얻어내면 잔금 천오백을 치르고
건물까지 등기 이전받는 거야. 그때까지 아파트 단지 보상 나오지 않으면 은행은 내가 책임
지고 알아보지."
정사장의 그 같은 말에 비로소 영희도 마음을 정했다. 하지만 워낙 일이 커서인지 시집
식구들을 설득하는 게 전 같지 못했다. 시아버지는 마지막 농토를 없앤다는 것과 전혀 경험
이 없는 임대업에 온전히 생계를 맡겨야 한다는 데 불안과 주저를 나타냈고, 억만은 당장은
별전망이 없어 보이는 건물의 위치를 불평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전재산을 건다는 데
본능적으로 겁을 먹었다. 그들을 설득하는 데 영희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아버님, 농토는 아직 말죽거리 배밭이 있잖아요? 그리고 이 집 내놓게 되면 어차피 살
집은 따로 마련해야 하는 거구요. 정히 마음내키지 않으시면 좀 큰 집 마련한다구 생각하세
요. 삼층을 우리집으로 쓰면 되니까요. 그리고- 그 건물 집세 여기 하우스 벌이 보다 못하
면 그건 제가 물어드릴께요. 저희 집안을 위해 흔치 않은 기회예요. 더도 말고 제게 오 년만
시간을 주세요. 정히 안 되면 그때 다시 팔아 시골 가서 살아요. 지금보다 곱은 받을 자신있
어요. 한 번만 더 믿어주세요."
시아버지에게는 그렇게 빌었고, 억만은 달콤한 말로 달랬다.
"여보, 내가 전에 약속한 거 있죠? 이게 시작이에요. 일단 이렇게 농사에서 벗어나고 다시
다음 기회를 기다려요. 나도 당신이 머슴처럼 추레한 꼴로 아버님 따라 농사에 매달려 있는
게 마음 아파요. 그 건물 겉보기는 그래도 쉽지 않은 거예요. 어쩌면 땅값 오르는 것만 해도
지난 삼 년 내가 미친년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뛴 것보다 나을지 몰라요. 날 믿어요. 거길 거
쳐야만 우리에게 보다 나은 내일이 있는 거라구요."
그리고 시누이에게는 그녀의 소박한 물욕에 호소했다.
"아가씨, 이 기회에 아가씨 양장점 하나 가지세요. 그 건물 일층 번듯한 점포 넷은 나올
거예요. 거기다 아가씨 양장점을 여는 거예요. 지금은 좀 사람이 뜸한 거리지만 집세도 안
내는데 아무렴 남의 집살이만이야 못하겠어요?"
그래도 얼른 마음들을 정하지 못해 계약이 미뤄지고 있는데 마지막 휴가를 나온 시동생이
팔을 걷어붙이고 영희는 지지해주었다.
"아버지 어머니, 뭘 망설이십니까? 어차피 이 집하고 땅은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거구...
그렇다고 다시 땅 사고 초가삼간 지어 농사지으러 들어가실 겁니까? 그러지 말고 형수님 말
대로 해봅시다. 솔직히 말해 자금까지 형수님 하자는 대루 해서 우리집 안 된 게 뭐 있어
요? 더구나 조카까지 낳았는데. 우렁이 각시가 따로 없다구요. 휴가 나올 때마다 달라지는
우리집 다 형수님 덕 아닙니까? 형수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저요, 내일이라도 당장 장가갑
니다."
그렇게 어렵게 결정이 나자 그 다음은 영희가 생각하기에도 신통하리만치 일이 잘 풀려갔
다. 무엇보다도 영희를 마음 편하게 해준 것은 대금 지급 과정이었다. 원래 민간 아파트 단
지 부지 조성은 공공 수용과는 달리 지가 산정을 둘러싸고 말썽이 많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영희네 동네는 오래 밀고 당기고 할 것도 없이 평단 2만 5천 원으로 매듭이 지어져 석 달
뒤 잔금을 지불할 때 따로이 은행 신세를 질 필요가 없었다. 그 담은 영희를 편하게 해준
것은 임대 문제였다. 영희에게서 받은 중도금으로 다시 공사가 시작되어 외장이 마감되자
정사장의 힘을 빌릴 것도 없이 인근 복덕방을 앞세운 업자들이 찾아와 지하와 이층에 세들
었다. 지하는 생맥주홀을 열고, 이층에는 당구장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이사에 집치
장에 필요한 경비를 쓰고도, 급하면 작은 것은 손대볼 수 있는 자금이 남았다. 원래는 인수
받은 은행빚을 줄일 생각이었으나 남은 점포들의 세가 나간다면 그때 꺼나가도 늦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피로하지. 이미 세상에서 할 일을 다해버린 사람처럼. 이제 겨우 시작
인데... 혜라 그 기집애가 느낀 피로도 이런 것이었을까.'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억만의 빈 의자에 앉아 하품을 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실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 보기에도 엄청난 일을 해낸 셈이지만, 달리 보면 이
제부터는 그전의 경험에 없는 새로운 날들의 시작이었다. 그런데도 알지 못할 자족감과 함
께 나른해져 그 며칠은 그저 한없이 쉬고 싶기만 했다.
'고사 준비는 잘 되어가는지 몰라. 다섯시에 입주식을 시작하기로 했지. 이제 내려가봐야
하는데.'
영희는 그러면서도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일어날 줄 몰랐다. 알지 못할 자족감과 나른함
이 이상하게 사람을 회고적으로 만들었다.
'옛날에도 언젠가 이 비슷한 느낌에 젖어 보낸 날들이 있었지. 이제 더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느낌으로 그저 피곤하게 늘어져 있었던 날들이... 그게 언제였더라.'
영희는 멍하니 그렇게 중얼거리며 옛날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듯 몸을 일으키
며 머리를 저었다.
'그래, 바로 그 무렵이었어. 박원장과 갈라선 뒤 창현과 보낸 첫 달. 사랑도 넉넉하고 돈도
넉넉하고 그래서 아무것도 바랄 것 없다는 기분이었지. 마냥 창현의 품에 안겨 자고만 싶었
지. 그런데- 그래서 어찌 됐지...'
그러다 갑자기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지면 한가롭게 앉아 있을 기분이 싹 가셔버렸다. 그
때 때맞추어 방문이 열리며 시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여기서 뭐 해? 벌써 다섯시가 다돼가. 오신 손님들도 있어."
"손님?"
"응, 관할 소방서에서 오셨대. 또 뭐라드라? 무슨 용역 회사에서 오신 분도 있던데."
"그래? 알았어요. 곧 내려갈게."
시누이를 뒤따르듯 방을 나서면서 영희는 걸치고 있던 웃옷 속주머니를 새삼스럽게 더듬
었다. 진작에 준비한 두 종류의 봉투가 만져졌다. 하나는 고액권으로 채운 이만 원짜리 봉투
였고, 다른 하나는 천 원짜리로 불룩하게 한 만 원짜리 봉투였다.
'소방서라, 그럼 만 원짜리면 되겠지. 그런데 용역 회사는 또 뭐야.'
영희가 일층으로 내려가니 시누이가 양장점으로 쓸 스무 평 외에는 칸막이가 되지 않은
넓은 홀에 고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커다란 호마이카상에는 돼지머리를 중심으로 고사상이
모양을 갖추어 차려져 있었고, 시아버지와 억만이도 한복 차림으로 나와 서 있었다. 개업식
을 겸하려고 지하 일층에 세든 업소 사람들도 떡시루와 함께 고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
는 중이었다. 영희가 일층에 들어서는 걸 보고 억만이 불콰하게 술기운이 있는 중년 사내를
데리고 왔다.
"소방서에서 나오신 분이래."
"이 지역 담당입니다. 입주 축하드립니다."
사내가 넉살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소방법이 공연히 까다로워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주는 소방 공무원에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들었지만 영희는
공연히 심사가 틀려 짐짓 그가 찾아온 목적을 모르는 척했다.
"고맙습니다. 여기 계시다가 고사떡이나 좀 드시고 가세요."
그러자 그가 웃음기를 거두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직 근무중입니다. 오늘은 늦었고- 일단 서로 들어갔다가 점검을 다음에 나오죠."
그러면서 위협적으로 돌아섰다. 그제서야 영희가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으며 따라가 봉
투를 내밀었다.
"이거 멀리 오셨는데 약소하지만 대포라두 한잔 하세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밀어서인지 그가 한번 사양하는 법도 없이 봉투를 받았
다. 건들거리며 건물을 나서는 그를 배웅하는데 다시 누군가 영희에게 다가와 자기 소개를
했다.
"사장님, 인사드리겠습니다. 강남용역에서 나온 박부장입니다."
이번에는 이십대 후반의 젊은이였다. 정확하게 그가 어디서 온 줄 몰라 영희가 조심스럽
게 물었다.
"용역이라면... 무얼 하시는데요?"
"여러 가지 합니다만 저희들은 특히 청소 대행업체오 이 일대에 알려져 있습니다. 작지
않은 건물인데, 혹시 청소 대행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전체 건물 관리도 해드립니다."
그제서야 그가 왜 왔는지 알아차린 영희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저희들은 그런 거 필요없어요. 삼층에 식구들이 입주할 거고, 나머지 건물은 또 층마다
나누어 세를 줄 거니까. 관리고 청소고 세든 사람들 각자가 알아서 할 거예요."
그런데도 그 청년은 꽤나 끈질긴 데가 있었다. 성심 성의와 실비 할인을 따발총처럼 쏘아
대며 늘어붙다가 영희의 짜증스런 면박을 듣고서야 물러났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날 영희네
입주식에 찾아오는 사람은 바로 그런 두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하나는 쥐꼬리만한 권력이라
도 있어 그걸 휘두르며 뜯으러 왔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 아쉬운 것이 있어 영희에게 빌러
왔다. 5시에 고사가 시작되면서 더 많은 그런 이들이 찾아왔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
은 경찰과 이웃 공사장의 인부들이었다. 영희네가 초청한 파출소장은 오지 않았으나 그를
대신해 온 차석은 영희가 내민 봉투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고기와 술을 파출소로 보내지 않
을 수 없게 했다. 이웃 공사장의 인부들도 두번 세번 찾아와 행패에 가까운 구걸로 끝내는
봉투 하나에다 남은 돼지머리와 고사떡을 쓸어가다시피했다.
오래 그래온 대로 영희는 한동안 그런 그들을 오직 혐오와 경멸로만 대했다. 그 천막, 그
비굴, 무례, 탐욕, 나약- 그런 그들의 악덕과 약점을 마음속으로 헤아리며 그들과 결별하게
되는 삶이 빨리 펼쳐지기를 기원했다. 나는 너희들이 아니다. 언젠가 때만 오면 나는 너희들
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높이 솟아오르리라. 그런데 그런 영희의 심경에 갑작스런 변화를 일
으키는 일이 생겼다. 고사가 끝나고 영희가 한창 각다귀같이 몰려드는 그들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입구 쪽이 수런거리더니 두 명의 꽃집 배달원이 큰 화환 하나를 옮겨
왔다. 여러 가지 꽃으로 잘 꾸민 화환이었는데,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니 뜻밖에도 윤혜라였
다.
'기집애, 그래도 나를 아예 잊은 건 아니었구나...'
처음 영희는 그런 감동으로 그 꽃다발을 받았다. 이어 그것이 보내져온 우아하고 예절바
른 세계가 영희에게 새삼스런 조급을 불러일으켰다. 나도 빨리 저리로, 저 사람들이 있는 곳
으로 가야겠다. 그러다가- 진저리라도 치듯 그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였다. 시집 식구
들의 곱지 않은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먹고 마시기에 여념이 없던 그들 중에 몇이 그런 영희
의 눈길에서 무엇을 느꼈던지 움찔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흘금흘금 눈치를 보더니
무슨 죄라고 지은 사람처럼 일어나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 그들의 어떤 점이 영희에게 그
토록 세찬 충격을 주었을까. 영희는 갑자기 콧마루가 시큰해올 정도의 연민과 아울러 핏줄
과도 같은 애정을 그들에게 느꼈다.
"아니, 왜 벌써 일어나세요? 거기 앉아 더 드시고 가세요."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쳐 그들을 잡아놓고 다시 시누이를 향했다.
"아가씨, 위에 고기하고 떡하고 더 남은 거 없어요? 남은 거 있으면 모두 가져오세요. 술
도 더 시키고."
어떤 사람은 영희의 그 같은 심경 변화를 값싼 부르주아의 자선심으로 이해하려 들지 모
른다. 하지만 영희가 그때 내심으로 중얼거린 말을 음미해보면 꼭 그렇게 해석할 수 만은
없을 듯하다.
'천민자본주의라고 했던가. 내가 부를 움키는 방식을. 그건 아마 내 방식이 저들과 비슷하
다는 뜻이겠지. 어쨌든 좋아. 하지만 그래서 뜻대로 부를 움켜쥐게 된다 해도 저들을 떠나지
는 않겠어. 나는 바로 저들이야. 저들의 방식으로, 어쩌면 저들의 것을 훔쳐 홀로 고귀하고
우아한 세계로 달아나지는 않겠어. 저들의 거리에 남겠고, 내게 그럴 힘이 주어진다면 언제
든 기꺼이 저들을 먹이겠어.'
그날 정사장이 그곳에 나타난 것은 그나마의 잔치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무엇 때문
인지 급한 걸음으로 뛰어들어온 정사장은 늦은 변명을 하기 바쁘게 영희를 보고 소리쳤다.
"이여사, 이 집에는 라디오 같은 거 없어? 있으면 빨리 가져와봐."
"왜 그러세요?"
"오다가 들으니 일곱시에 무슨 중대 발표가 있대. 무슨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나봐."
예사롭지 않은 정사장의 표정에 덩달아 놀란 억만이 시누이를 재촉해 라디오를 가져왔을
때는 이미 정부 대변인의 긴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1.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등의 정치 활동을 중단시키는
등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킨다.
2. 효력이 정지된 헌법의 일부 조항의 기능은 비상 국무 회의가 수행하며, 비상 국무 회의
기능은 현행 헌법의 국무 회의가 수행한다.
3. 비상 국무 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며 이 개정안은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 국민 투표로 확정한다...
"이게 무슨 소리죠?"
다 듣고 난 억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정사장에게 물었다.
"글쎄, 공화당하고 박정희가 뭔가를 꾸민다더니 그건 모양인데... 도대체 저 소리만 듣고는
뭘 어쩌겠다는 건지 통 알 수가 없네."
그때 좀체 그런 일에 끼여들지 않는 시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그래도 전쟁나지 않았다니 대행이네. 나는 여름부터 요란스러운 그 눔의 남북 회담이란
게 당최 불안해서. 한쪽으로는 총력 안보, 비상 사태에 난데없는 민방공 훈련까지 끌러내 왜
정 시대 못지 않게 사람을 몰아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뭐라드라? 그래, 남북 공존, 평화
통일을 남북이 합창으로 외쳐대니 우리 같은 백성들이야 정신 사나워서 원."
하지만 영희는 그런 그들에는 아랑곳없이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을 먹이는 데만 정신을
쏟았다. 그게 무어든 우리와는 상관없어요. 그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끼리 따져보라구 하세
요- 얼핏 보면 속으로는 그렇게 소리치고 있는 듯도 했다.
제47장 변경의 한낮- 인철의 편지
부주전 상서
열흘 전 이 아메리카 제국의 변경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변경의 정권 담당자
가 제국의 정치 이념에 '한국적' '토착화'란 수식어를 붙여 오래 전부터 그 이념을 갈고 닦아
온 제국의 이상주의자들에게는 상상도 못 할 제한과 변조를 감행한 것입니다. 이름하여 시
월 유신입니다. 오늘 제가 헤어진 지 22년이 넘는, 얼굴도 기억 못 하고 생사도 알 수 없는
아버님께 이 글을 올리는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이 세상의 시비와
당부에서 떠나 고요히 우리를 굽어보고 계신다는 가정 아래 이 그를 쓰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분유하시게 된 아버님의 전지에 제가 몇 밤을 고심하여 해
독한 그 일의 의미를 검증받음과 아울러 몇 가지 문의를 드리고자 합니다.
원래 이번 사태는 이미 두어 해 전부터 남쪽의 예민한 지식인 사이에서 번져가던 우려이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게 그 일이 처음으로 실감 있게 다가온 것은 이번 여름의 그 요란
스런 남북 공동 성명 때였습니다. 두 변경의 통치자들이 제국의 사전 승인이나 양해를 구함
도 없이 민족의 자주와 평화 통일 원칙에 합의한 것, 동로마 제국 변경 정권의 제2 부수상
과 서로마 제국 변경 정권의 정보 책임자가 서울과 평양을 오락가락하며 협력과 우의를 다
짐했다는 그 소식은, 도식적인 변경 논의에 갇혀 있던 저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어
떻게 보면 그날 발표된 남북의 합의문은 이상적인 민족 통일의 밑그림을 보여주는 것이었으
며, 우리 통치자들에게 그러한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역량이 있다는 것은 놀랍고도 감격스럽
기까지 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흔쾌하게 놀라고 감격하지 못했을뿐더러, 갑자기 시대의
짙고 불길한 안개에 휩싸인 듯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먼저 궁금했던 것은 그러한 합의를 가능하게 한 남북의 이익이었습니다. 어떤
전능한 신이 있어 남북의 통치자들을 하루 아침에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로 바꾸어놓지 않았
다면 이러한 정책 결정의 동기는 남북 두 정권의 정치적 실익에 문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외부적으로는 제국의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 행위로 간주될 위험이 있고, 내
부적으로는 군부 기타 강경파 혹은 분단 체제의 기득권 세력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
으킬 수도 있는 이 합의로 남북의 정권이 얻게 될 것은 무엇일까- 그게 그때의 제 솔직한
의문이었습니다. 그 의문은 문득 지난 여름 저를 찾아왔던 옛 친구의 단정을 섬뜩하게 떠올
리게 했습니다. 그때 그는 겨우겨우 시작된 남북 적십자 회담을 제국에 대한 변경 정권의
공갈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수틀리면 우리끼리 하나가 되어 너희들에게 저항할 수 도 있
다. 섣불리 나서면 너희들 중 하나는 우리 둘 모두를 잃게 된다- 그런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턱없이 앞서가는 지식인의 어림없는 기우로 들었으나 거기서 결국
남북 공동 성명이 나오자 저는 그것을 날카로운 예측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그걸 받아들이자 제 사고는 비약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이 사태를 그렇게 해
석할 수 있다면 남쪽 정권의 월남전 참전을 변경에서 제국에 가해지는 또 다른 종류의 압력
일 수도 있다. 감히 당근과 채찍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남북 공동 성명은 채찍이
고 월남전 참전은 당근이다. 보아라. 그래도 나만큼 충성스런 제국의 분봉왕이 어디 있는가.
나말고 어떤 분봉왕이 그 고뇌스런 제국의 전장에 전투 병력을 파견해주던가- 대개 그런
전개였습니다.
만약 이 정권이 꿈꾸는 것이 아메리카 제국 변경의 헤롯 대왕이라면 7.4남북 공동 성명은
내부적인 설득 장치로도 유효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정권은 정통성과 정당성의 결여를
경제적 보상으로 메워왔습니다. 듣기로 작년의 8.15 선언은 경제적 자신감의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정권은 자랑스레 경제적 보상을 내
세우지만 아직은 겨우 보릿고개를 없앴다는 정도일 뿐, 보다 호소력 있는 이념적 설득, 혹은
위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여름의 그 공동 성명은 그 두 기능을 한꺼번에 수
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정권이 내세우는 민족주의의 이상을 믿는 사람들에
게 그 세부적인 조항은 단순한 감동을 넘어 이념적인 지지까지 얻어낼 수 있을 것이고, 한
편 그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실현 불가능한 그 공동 성명의 그림 같은 이상들이
오히려 무시무시한 위하의 기능을 수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가을, 마침내 시월유신이 왔습니다. 어제 발표된 비상 국무 회의 초안을 보면
일찍이 남쪽의 지식인들이 우려하던 것들이 그대로 성문화되었습니다. 이것이 국민 투표를
통해 확정되면 남쪽 변경에는 아메리카 제국의 판도 내에서는 일찍이 유례가 없던 특이하고
도 끔찍한 권력의 치욕이 제도화될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제 해석이 맞다면 이 정권의 구
상이나 그 추구 방식은 자못 치밀하고 비상한 데마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지
는 않습니다. 그것은 근년 들어 현저해진 지식인의 탈주 현상과 도시 빈민의 양산 때문입니
다.
경제적 보상의 방책으로 추진해온 급속한 산업화는 다수의 도시 빈민을 만들어냈고, 그들
이 전통적인 빈농층과는 성질을 달리함은 이미 지난 광주대단지 사태가 보여주었습니다. 그
런데 앞으로 이들은 더욱 늘어날 것이고, 그 어떤 물리력으로도 통제하기 어려운 세력으로
자라갈 것입니다. 거기다가 지난 몇 년 사이에 한 사회 현상을 이룰 만큼 두드러진 지식인
의 탈주는 그들이 바로 남쪽 체제가 길러낸 지식인들이어서 이 정권에 더욱 부담을 줄 것입
니다. 왜냐하면 이 정권이 그들을 잡기 위해 쓸 바로 그 이념의 칼로 자신들을 방어할 것이
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 두 대항 세력이 결합되는 날, 다시 말해 그들 탈주한 지식인
들이 다수의 도시 빈민들을 의식화시키면 이 남쪽 변경은 지금껏 경험에 없는 새로운 전통
과 비극적인 소모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 제국의 논리로 왜곡되어버리는 변경의
특성 때문에 상대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원용하지 못해 의식의 이중 구조와 말의 혼란이 일
어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첨예하게 충동할 이익 때문에 그 싸움은 한층 가열되
고 잔혹해지겠지요. 이미 책과 지식을 떠나 살 수 없게 결정돼버린 듯한 제 삶은 그날에 치
러야 할 전통과 소모의 예감에 떨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너무 비관적이고 닫혀 있는 구조
로 이 사회를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빛나는 진보의 여명을 소심과 나약으로 그릇
해석에 떨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아버님께 묻습니다. 이러한 남쪽에 대
응해서 북쭉의 변경에서 꾸며지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요. 제가 읽기로는 그곳의 구조가 이
곳보다 휠씬 쉽게 권력의 치욕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걸로 보았는데, 그 역시 제가 잘못
읽은 것입니까. 이미 이십 년이 넘는 장기 집권을 실현하였고, 앞으로도 좀체 그 권력 기반
이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그곳의 집권자에게도 7.4 남북 공동 성명 같은 남한과의 적대적
의존 관계로 확보해야 할 어떤 정치적 실익이 남은 것입니까.
이 년 전 제가 대학을 떠나기 전 어떤 식자는 남이든 북이든 그 권력 담당자들이 자주나
주체, 자기 정체성 같은 덧을 정치 전면으로 들고 나오는 날이 그 원주민에게는 정치적 재
앙의 날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남쪽은 '한국적' 혹은 '토착적'이란
표현으로 자주와 주체성을 전면에 내세웠고, 거기에 바탕해 출범할 이 유신 체제는 아메리
카 제국의 변경에 사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재앙으로 기능하게 될 공산이 큽니다. 그
렇다면 그 쪽의 주체와 자주는 어떻게 추구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그곳 주민들에게
가져다줄 정치적 재앙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1972년 10월, 변경의 한낮에
불초 인철 올림
형주전 상서
형님. 중부의 산사는 벌써 가을이 깊습니다. 단풍 종류는 잎이 모두 지고 참나무붙이의 일
부만이 메마른 잎을 달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니 형님의 유체를 선산 발치에 모시고
돌아선 게 며칠 전 같은데 벌써 여덟 달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자주 문안드리지 못해 죄송
스럽습니다. 무언가 말씀드리려 하다가도 그 허망한 떠나가심을 떠올리면 가슴부터 먹먹해
와 하릴없이 한숨만 짓다가 끝내는 다음으로 미루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제는 길게 말씀
드려야 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 전에 먼저 집안 근황부터 알려드려야겠지요. 지난 추석
에 집에 내려가보니 재준이는 벌써 걸음마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건강하고 영리하게 생긴
아이라 작은 위안으로 삼으셔도 되겠습니다. 형수님도 뜻밖으로 꿋꿋하게 출근하고 계셨습
니다. 머리칼이 더 희어지시고 돋보기의 도수가 높아졌지만 어머님도 건강해 뵈셨습니다. 요
즘은 재준이나 돌보시며 조용히 지내고 계십니다. 부디 마음 편히 쉬십시오.
형님께서 상심하실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오늘 이렇게 길게 서두를 풀고 나가는 저
의 글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로 사법 시험 공부를 그만두고 산을 내려갈까 합니다. 물론 형
님과 어머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작한 지 겨우 2년 만에 이렇게 그만두는 저도 마음 편
치는 못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여기서 미련을 떠는 것은 실효성이 없을뿐더러 제 주관적인
만족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실효성이 없다는 것은 옛날처럼 합격해도 판사나 검
사로 임용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그런 멋진 구실이 아니라 실제 이 시험에 합격할 가망이 별
로 없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형님께서도 알아보고 계실 줄 모르지만 이미 저는 두 번이나 1
차에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게 제가 시험 운이 없다거나 노력을 게을리했다
는 정도로 성명될 성질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아마도 이 시험에 끝내는 합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첫번째 근거는 이
미 뒤틀려버린 제 의식 구조에 있습니다. 왜 저는 언제나 다수설보다는 소수설에 더 흥미있
고, 심할 때는 부연되거나 각주 처리된 소수 의견에 더 감동되는 것입니까. 정연한 논리 구
조보다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설에 제 주관적인 감상을 보태 흠뻑 젖어드는 것입니까. 이
를테면 사회적 긴급 피난이나 저항권 문제 같은 것은 참고로 소개된 몇 줄만으로도 제 하루
를 잡아놓기에 충분합니다. 두번째로 말씀드려야 할 것은 갈수록 뚜렷해지는 제 지향입니다.
다시 혼자 헤쳐가는 길에 오른 뒤로 저는 마치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고향을 떠난 사람처럼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리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면 저는 영원히
그 향수를 모진 병처럼 앓게 되리라는 예감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 고향 같은 것은 바
로 문학입니다. 그 또한 잘못든 길로 단정하고 훌훌히 떠날 때만 해도 제 정신이 그토록 문
학의 깊이 침윤되어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길로 든 것은 대
학에 간 뒤였고, 그나마 거기서 헤맨 것은 일 년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
에도 새로운 길에 접어든 지 석 달도 못 돼 저는 애틋한 그리움으로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되
었습니다. 참고로 금년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지난 1월 시험에 떨어진 뒤부터 이 여름이 다
할 때까지 그저 잡학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런 저런 책읽기로 시간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의식 밑바닥에는 언젠가 그것들이 제 문락에 소용되리라는 확신이 있었음을 부인하
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찬바람이 들어서야 겨우 법학책으로 돌아왔는데, 아마 남은 시간을
밤낮 없이 시험 준비에 매달린다고 해도 이번 시험 역시 어려울 것 같은 예감입니다. 거기
다가 더욱 나쁜 것은 이런 형태의 세월 낭비가 계속 될 것 같다는 우려입니다. 만약 그렇다
면 저는 길을 돌아도 너무 멀리 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제가 문학으로 돌아가는 이유로 정작 힘주어 말씀드려야 할 것 은 아무래도 이
제서야 확정된 제 삶의 층위 혹은 역할 때문입니다. 그들의 세계관에 전면적으로 찬동하지
는 못한다 할지라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 계급을 기본 계급과 주변 계급으로 분류한 것
은 온당해 보입니다. 이 시대의 기본 계급으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든 것도 부인하
기는 어렵습니다. 또 몰락한 봉건 지주나 수공업자나 영세 농민을 주변 계급으로 분류한 것
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변 계급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나아가서는 언
젠가 기본 계급으로 편입되어가야 할 존재로까지 암시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전략적으로 보
입니다. 그것은 결국 모든 주변 계급에게 자기들 계급으로 편입되어 함께 부르주아 타도에
나서자고 제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는 수도 많지 않고 주변
계급이 그들에게 편입하기도 용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다수 속에 안주하려는 경
향 때문인지 사람들은 쉽게 그 암시에 밀려드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남매도 일찍부
터 그 암시에 말려들었고 저를 제외하고는 이미 자신이 편입될 기본 계급을 결정한 것인지
도 모르겠습니다. 형님과 옥경이는 아마도 프롤레타리아쪽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신 것
같고 누나는 부르주아를 향해 천민자본주의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면 지나친 단언이 되겠
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진작부터 주면 계급의 역할에 주목해왔습니다. 주변 계급은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국외자나 일탈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칫 극단으로 치닫기 쉬운 두 계급 가운데서
그들을 비판하고 조정하는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주변 계급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많
은 역사적 비극이 그 두 기본 계급의 극단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그런데 문학을 접하게
되면서 나는 곧 문학에 주변 계급적 요소가 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다만 그때는 문학을 계
급적으로 분류하기를 거부했을 뿐입니다. 처음 사랑에 빠진 자의 맹목과 거기서 비롯된 도
저한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문학이 계급적으로 분류되는 것을 승인합니다.
나는 그 문학으로 주변 계급에 머물러 있겠습니다. 저 쉽고 미치고 절망하고 잔인해지는, 그
래서 일쑤 끔찍한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내는 두 기본 계급 사이에 위엄 있게 머물러 그 욕망
을 조장하고 이해를 조화시켜보겠습니다. 제게 그럴 힘이 있는지 모르지만 문학이 그런 것
이라면 한 남자로서도 꿈꾸어볼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제가 특별하게 세월을 낭비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습니다. 시작할 때
의 의도처럼 법을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제 문
학을 위해서는 몇 가지 쓸 만한 도구를 장만했다는 느낌입니다. 그 하나는 언어를 정확히
사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산을 내려가
기는 해도 어디서 어떤 길로 그런 제 문학을 향해 가게 될는지는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또 이제 더듬어 보아야겠지요. 어쩌면 자수해 병역부터 치르고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씀드
릴 수 있는 것은 다만 제가 법 공부를 그만두었다는 것과 이제 공공연하게 문학을 제 일생
의 추구 대상으로 확정했다는 것뿐입니다. 끝내 실패한 시인으로서- 죄송하게도 저는 형님
의 시작 노트들을 훔쳐보았습니다- 형님께서 문학에 좋지 못한 선입견을 가지고 계신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실제로도 문학이 삶을 채워가는 데는 그리 신통치 못한 수단이
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걸 선택한 것은 어쩌면 끝내 도망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미리 굴복한 것일지도 모르지요. 불행으로 단정하지 마시고 그렇다고 대단한
성취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다만 이해와 연민의 눈빛으로 지켜보아주시기만 해도 제게는 그
보다 더한 격려가 없을 것입니다.
1972년 10월 30일
인철 올림
한형께
삼무거사 문안이오. 내 일찍이 아비를 잃고 자라서는 스승을 저버렸더니 이제 나라까지
없어져서 삼무거사로 자호하게 되었소. 주수구방 기명유신이 어찌 이 나라의 시월에 가당이
나 하겠소. 언젠가 선배 식자 중에 하나가 갈고 닦아 제게 전수한 개념으로 변경이란 것을
떠들어댄 적이 있었지요. 제3세계 이론에서 말하는 주변이란 개념과 역사주의적 제국 이론
을 얼어무려놓은 것 같은 얘기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어째 그 변경이란 상황 개
념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진 것도 같소. 미국은 기왕에도 제국 변경의 여러 독재자들의 마음
에 있지도 않은 왈츠를 추어왔소. 그들이 그 지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그것은 반동
가리 제국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오. 설건드려 그들을 잃게 되면 단지 그들 하나가 아
니라 그것이 소비에트 제국에 보태어짐으로써 실제로는 두 개를 잃는 꼴이 나기 때문이오.
이번 우리 유신도 그 예에 따라 마침내는 미국의 승인을 받게 되겠지요.
산 위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옛날과 달리 유신의 배경도 훤히 내려다보이는 기분이오. 정
통성도 정당성도 결여한 권력이 일쑤 받게 되는 유혹은 보상적 정권의 길이오. 그리고 그
보상은 일쑤 경제적 보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오. 지난 60년대 우리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잘살아보세'란 노래는 바로 그런 그들의 구호일 것이오. 어떻게 보면 그들의 경제적
보상은 공업화 또는 산업화란 이름으로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할 만하오. 하지만 기술도
자본도 원자재도 없는 후진국에서 이만한 성취가 가능하려면 그 무리는 얼마나 크며 부조리
는 또 얼마나 쌓였겠소. 개발 독재의 필연성은 틀림없이 거기서 싹트고 자랐을 것이오. 한일
회담이나 월남 파병은 대외적인 무리수들의 예일 것이고, 외자 도입을 둘러싼 잡음들이나
군사 정부의 여러 의혹 사건은 내부적인 무리수들의 예가 될 것이오. 작년에 있은 광주대단
지 사건 같은 것은 그 무리수와 부조리의 후유증일 것이며, 앞으로도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불거지겠지요. 각설하고 내가 뒤늦게 아는 척, 눈 밝은 척, 이 나라의 정치 상황을 논하고
있는 게 한형에게는 매우 기이하게 비쳐질 것이오. 하지만 까닭이 있소. 나는 그 와중에서
다시 길을 잃고 이제 산을 내려갈 생각이기 때문이오. 바꾸어 말하면 사법 시험 준비는 이
제 때려치우고 옛 님을 찾아 떠날 생각이오.
한형이 그처럼 남아 함께 사랑하기를 권하던 그 님, 문학 말이오. 내가 이 노릇을 집어치
운 표면적인 이유는 아마 헌법을 새로 공부하고 거기에 맞게 이로를 비트는 일이 귀찮다거
나, 더욱 허세를 부리면 자유민주주의 이념 때문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적
어도 한형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소. 이제 진정한 동도로 돌아가는 길에 거짓이나 허세가 무
슨 소용이겠소. 그보다는 그야말로 허심탄회하게 이 시월 유신이 내게 갖는 의미를 밝히는
게 내 이런 결정을 이해하는 데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을 거요. 의식이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나는 국외자 혹은 일탈자의 견지에서 우리 정부, 우리 사회를 보아왔소. 그리고, 어쩌면 짐
작하시겠지만, 그런 내 의식의 밑바닥에는 아버지로 인한 원죄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소. 내
가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이 체제에 내 지분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이런 말 내게서
들어보신 적 있으시지요? 하지만 근년 들어 나는 조금씩 국외자, 일탈자로서 살아가야 할
앞날이 아득해지기 시작하였소. 더 솔직히 말하면 시대의 주류에서 벗어나 외롭고 고단하게
살아야 할 남은 살이가 슬슬 고통으로 실감되기 시작한거요. 그때 문학이 나타났소. 나는 거
기서 한 구원을 본 듯한 느낌을 받았소. 국외자, 일탈자이면서 시대와 절연되지 않고 살아갈
길이 거기 있다고 본 것이오.
그러나 순수한 감동의 시기를 지나자마자 나는 거기 또한 내 원죄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
진 걸 보았소. 기억하시오? 문학회의 합평회때 민주나 자유 같은 말만 나오면 움츠러들던
내 태도를 말이오. 한사코 낭만주의의 주제들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던 내 주제들을. 더
욱 일탈되고 소외받거나 아니면 보다 적극적으로 이 체제 속에 편입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런 결의가 익어간 것은 아마도 그 곤혹스럽던 합평회 때가 아니었던가 싶소. 그러다가 적
극적으로 체제 편입을 선택하고 결행한 것이 사법 시험 준비였소.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느
냐 않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이 체제의 이데올로기와 나를
일치시키고 싶었던 거요. 설령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더라도 거기 의지해 시대를 향한 목소
리를 높일 수 있는 어떤 근거를 마련하고 싶었던 것이오. 그런데 시월에 찾아온 유신이란
사태는 내게 실로 묘한 당혹감을 주었소. 이 시험을 준비하면서 닦아온 논리로 보면 이 특
이한 변경적 상황은 내가 편입을 시도했던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거의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오. 10월 17일, 유신 선포를 들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애써 긍정하려고 한 체제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내리는 걸 보는 황당함이었소.
단순 논리로 보면 적의 적은 동지이고,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될 수도 있소. 완전히 위압
될 때까지는 은근히 적 개념으로 대했던 지금까지의 남한 사회였던 만큼, 그 부정인 이 유
신 체제는 마땅히 환영될 수도 있을 거요. 그런데 기묘한 자존심이 그걸 완강히 반대하는구
려. 한형은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해 칼을 들고 있다가 아버지가 이미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와디푸스의 낭패를 아시오? 정확한 비유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게 시월 유신은 꼭
그렇게 들렸소. 그리고 나름의 짐작이긴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의 와디푸스는 이번에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다시 칼을 갈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애가 대단치도 않은 일을 그만둔 까닭을 너무 허풍스럽게 떠벌리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걱
정이오. 뿐만 아니라 내가 문학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아직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소.
하지만 오늘 이쯤에서 글을 끝내고 싶소. 문학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길게 다시 할 날이
있겠지요. 지금 내가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있었던 곳이니 우선 그리로 후퇴하는 것이란 정
도로만 짐작해주시오. 헤롯의 하관 되기를 포기한 변경의 얼치기 지식인에게 남은 길은 열
심당이 되거나 성정조차 어려워하지 않는 장사치가 되는 길밖에 없겠지만, 이도저도 못 해
하는 선택이라고 해도 좋소. 다만 이번 회귀의 진정성만은 믿어도 될 것이오. 그럼 다시 뵙
게 되는 알까지 안녕히 계시오
1972년 10월 30일
삼무거사 재배
언제나 아득한 그대에게
이제 이리 늦어서야 그대를 향해 떠납니다. 지난날 나는 여러 형상으로 그대를 그리워하
였으나 아직도 그대를 만나지는 못하였고, 여러 이름으로 애타게 불렀으나 그대는 한번도
대답해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한때는 그대가 이 세상에는 계시지 않은 것으로 단정지은 덕
도 있었지요. 그러다가 재작년에야 언뜻 그대를 먼빛으로 뵈었습니다만 다가갈 용기는 없어
진정으로 내가 찾던 분인지는 속속들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뜬소문만 믿고 그곳을 떠나온 지 이 년, 이제는 믿음을 가지고 그대를 찾
아 돌아갑니다. 어떤 이는 이 믿음을 '믿기 위한 미신'으로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어
쩔 수 없습니다. 그대 있던 자리를 떠나는 순간부터 자라난 이 그리움은 그때 그 자리, 그대
를 먼빛으로나마 뵈온 그곳이 아니고는 세상 어디서도 달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거
기다가 드디어 내 날이 다했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아무리 소중한 당신을 찾는 일이라 할지
라도 더는 이길 저길을 헛되이 헤맬 시간이 내게 남은 성싶지 않습니다. 또 다른 뜬소문에
들떠 새로운 길로 나서기보다는 마지막으로 그대의 자취를 느낀 그곳으로 돌아가보렵니다.
거기 그대가 없을지라도 돌아가 그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대를 향한 내 노
래가 짝사랑의 노래로 끝날지라도 그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부디 그때처럼 화안하게, 따뜻하게 그곳에 머물러 계십시오. 다시 아득한 그대에게.
스물넷의 어느 가을 새벽 돌아가는 길에
[끝]
카테고리 없음
이문열 변경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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