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두 가 죽 이 고 싶 던 여 자
이상우
차 례
1. 프롤로그 연인과 동지
2. 저주받은 칼
3. 미운 오리새끼의 비극
4. 멀어진 마음 차가운 육체
5. 침실의 신경전
6. 시다의 노래를 부르며
7. 비극의 연인들
8. 미궁의 수수께끼
9. 달라진 세상
10. 탈선 디스코
11. 뫼비우스의 띠
12. 절망의 나날
13. 투사와 사모님
14.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
15. 젊은 아내의 비밀
16. 가진자의 세계
17. 풀리는 수수께끼
18. 뜻밖의 자백
19. 절망의 선택
1. 프롤로그 연인과 동지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
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가 오래 못 가지'
노동의 새벽이라는 노래가 청승스럽게 남녀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투쟁'이라는 리본을 단 한 떼의
노조원들이 쇠못 박힌 공장 대문 앞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
르고 있었다.
그 앞에서 구호를 선창한 뒤 격려의 말을 토하던 오민수가
재빨리 길 모퉁이를 빠져나갔다.
오민수가 빠져나간 길가 농성장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
다.
최루탄이 펑펑 터졌다.
길목 지하 다방 입구에 서 있던 설희주는 재빨리 오민수를
발견하고 시장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함성과 땀내가 섞여 북적거리는 적나라한 삶의 현장. 질퍽
한바닥을 건너 두 사람은 조그만 수제비집으로 들어갔다.
"오랫만이야. 어떻게 됐어?"
오민수가 수제비 두 그릇을 시키며 설희주를 찬찬히 살폈
다.
헐렁한 점퍼에 청바지 차림, 화장기 없는 피곤한 얼굴이
그녀의 고뇌를 피부로 느끼게 했다.
"형은 어떻게 지냈어? 같은 과 형들이 오형 체포됐다고 헛
소문 냈었어?"
"그거야 헛소문 아니라도 좋은데, 희주에 대한 소문은 진
짜 헛소문이지?"
오민수가 다그치듯 물었다. 그러나 설희주는 고개를 숙이
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이야기해 봐.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은 아
니겠지? 헛소문이지?"
설희주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오민수는 더욱 초조해졌
다.
그답지 않았다.
신라대학교 복학생. 같은 과 학생들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
아 그가 지도자로 뽑혔는지도 모른다. 학총련 전국 부위원
장이고 신라대학교 회장. 여러 차례 경찰에 연행되었다 풀
려난 역전의 투사.
그가 설희주 때문에 초조해졌다. 학총련 여학생 회장인 설
희주가 요즘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을 도피 중인 오민수도
들었다.
"말해 봐!"
오민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수제비집 아주머니가 놀라 흘
금 쳐다보았다.
"미안해, 민수형!"
설희주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그 말이 오민수
에게는 청천벽력보다 더 놀라왔다.
"뭐라고? 그럼 소문이 정말이야?
설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오민수는 자기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신음을 토했다.
충격을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을까? 오민수가 평정을 되찾고 조금 전과는 너
무도 다른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희수가 한번 결심하면 바꾸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잘 알
아. 하지만 이유나 들어보자."
오민수는 앞에 놓인 수제비 사발은 본 체도 않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쫓겨다니느라고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아 서
른도 넘은 아저씨처럼 보였다.
"우리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어. 형이 벌써 석 달이나
쫓겨다니며 한 일이 뭐야? 우리 청춘 같은 것은 몇 억번을
바쳐도 이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단 말야. 나는 지쳤어. 이
젠 방법을 바꿀 거야. 내 방식대로 해볼 거야."
설희주가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나가자!"
오민수는 설희주의 팔을 잡고 간이 음식점을 나섰다. 그들
은 시장 바닥을 걸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 이전에 합친 사람들이야. 네 마음과
내마음을 합쳤고, 네 육체와 내 육체를 합쳤어. 똑똑히 들
어. 우리는 동지이기 이전에 가족이야."
"가족? 연인? 그딴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남녀가 몸을 섞
었다고 해서 그것이 일생을 묶는 고리가 될 수는 없단 말
야. 형, 우리 유치한 이야기 그만 하고."
"뭐야?"
오민수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하여튼 희주가 딴 사람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야. 더구나 우리와 다른 세계에 있고 우리의
타기트가 되어 있는 재벌 집의 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그건 모독이야. 우리들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모독이고,
우리들 수십만 동지에 대한 모독이야. 부르조아 사회는 희
주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그쪽 사람들은 모
두가 희주를 죽이고 싶어할 거야."
오민수는 돌아서서 희주의 양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안았
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과 자기 입술을 포갰다.
"희주, 제발 생각을 바꿔 줘. 너는 나를 배신할 수 없어."
오민수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주룩 쏟아졌다. 그러나
설희주는 오민수의 얼굴을 밀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는 안 돼. 돌멩이와 최루탄의 싸움으로 세상이 바
뀌지는 않아. 내가 할 거야. 내가 바꾸고 말 거야. 형은
내 처녀를 가졌다고 감상에 젖는 따위의 유치한 생각 버려
야 해!"
돌아서서 걸어가는 설희주도 한참만에 눈물을 흘렸다.
"내가 죽더라도 복수하지 말아요."
2. 저주받은 칼
그렇게 무덥던 여름도 이제 풀이 죽었다.
강형사도 작년 가을에 보던 허름하고 때가 절은 듯한 회색
빛 점퍼를 다시 꺼내 입고 나왔다. 어쩐지 모습이 을씨년
스러웠다.
저러니까 아직 장가도 못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
를 바라보던 추경감이 히죽 웃었다.
"예, 경찰입니다."
강형사는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요란하게 목쉰
소리를 내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그의 첫마디는 언제나
'경찰'이었다. 집에서 친척들이 전화를 해도 '예, 경찰입
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예? 뭐라구요? 아니 지금 정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장난
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강형사가 갑자기 흥분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강형사, 좀 침착하게 얘기해. 도대체 방정맞기는. 쯧
쯧쯧."
그러나 강형사는 추경강의 핀잔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요? 그래 여자가 죽어 있는 것올 보고 그냥 나왔단
말이요? 당신은 누구요? 도선생이라구요? 성이 도씨면 이
름이 뭡니까? 예? 도둑씨라고? 예끼 나쁜 사람 같으니
."
강형사가 수화기를 쾅 소리가 나도록 놓았다. 상기된 얼굴
은 분을 이기지 못한 모습 그대로다.
"어떻게 된 거야?"
추경감은 대강 사태를 짐작하면서도 조용히 물었다. 흔히
있는 장난질 전화임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원 재수가 없으려니까 글쎄 도둑놈이 다 나를 놀리지
않나. 아, 글쎄 봤다는 거에요. 지가 틀림없이 두 눈
으로 봤다는 겁니다."
"뭘 봐?"
"여자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겁니다. 칼에 찔려서 안
방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말입니다."
"뭐야, 어느 집이래?"
추경감이 약간은 놀라는 듯했다.
"글세 도둑질하러 삼청동 어느 부잣집에 들어갔다가 기겁
을 하고 나와서 전화를 거는 거랍니다."
"하필이면 왜 여기로 전화를 걸어? 그 흔한 112 같은 곳으
로걸지."
추경감도 그 장난 전화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모양이었
다.
그때였다. 다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번에는 추경
감이 수화기를 집있다
"에, 시경입니다."
"보이소. 조금 전에 전화받은 사람 누군교? 사람 말이 말
같잖나."
진한 경상도 사투리가 귀를 쨍쨍 울렸다.
"댁은 누구신데 어디로 전화를 하셨나요?"
추경감은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건 알 거 없어요. 거기 시경 강력계 아잉기요? 거서 살
인사건 조사한다카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근데 조금 전에 전화받은 형사 누군기요? 시민이 살인 사
건신고하는데 그래도 되는기요? 요새 민주화된 거 모르는
기요?"
"미, 미안합니다 그런데 차근차근 다시 한번 말씀해 보십
시오. 나는 추경감이란 사람입니다."
추경감이 메모할 준비를 하며 말했다. 강형사는 미친 녀석
의 장난 전화에 그렇게 성의를 보이는 추경감이 바보스럽
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나는 똑똑한 직업이 없이 잘 사는 놈들 부정해서 번 돈
쬐끔씩 가져다 묵고 사는 사람인데요, 세상 사람들은 내보
고 도둑놈이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담장에 철조망 치고 대
문에 텔레비, 전화 달아 놓고 들앉았는 놈들이 사실은 도
둑놈이라요."
"여보세요, 간단히 이야기합시다."
느긋한 추경감도 짜증이 났다.
"알겠심더. 그래서 조금 전에 청운동 청운 빌딩 옆골목 으
리으리한 집에 슬쩍 들어간기라예. 현관문이 잠겨 있어 모
퉁이로 돌아가 창문을 열고 들어갈라고 방문을 들다 보이
말입니더.
아이고 사람 죽네. 아니, 사람이 죽어 자빠진기라예. 여자
가 가슴에 칼을 맞고. 방안은 온통 피"
"여보세요, 좀더 그 집 위치를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청
운빌딩 옆골목으로 들어가서."
추경감은 바싹 긴장했다. 어느 새 수화기를 쥔 손에는 땀
이났다.
"그 집 문패가 고봉식이라고 돼 있었십니더."
경상도 사나이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딸각 끊어버렸다.
"이봐, 강형사, 빨리 확인 좀 해야겠어. 헛소리치고는 너
무 분명해. 지금 빨리 가 보고 와."
"아니 경감님, 그 미친 녀석 말을 곧이듣는단 말입니까?"
강형사가 어이없다는 듯 점퍼 소매를 걷어붙이며 열을 올
렸다. 강형사의 괄괄한 성격 앞에는 가끔 상관도 보이지
않을 때가있었다.
추경감은 아무 말도 않고 돌아서 버렸다. 곤란한 일이 생
길때는 그 자리를 슬그머니 떠나 버리는 것이 그의 버릇이
었다.
강형사는 하는 수 없는 듯 점퍼를 벗어 아무렇게나 구겨
쥐고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채 30분도 안 돼 강형사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구겨 들고다니던 점퍼를 책상 위에 동댕이치며 추경감 들
으라는듯 큰 소리로 떠들었다.
"별 거지 발싸개 같은 놈이 전화를 해 가지고 지랄이야.
멀쩡한 사람을 죽었다고? 내 이 녀석 잡기만 하면 작살을
내버리고말걸."
추경감은 강형사의 모습을 보며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강형사, 그게 허위 신고였나?"
추경감이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형사질한 것이 하루 이틀입니까? 우리 강력계에서
그런 허튼 전화 받아 본 것이 한두 번입니까?"
강형사는 좀체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집에 가보긴 가본 거야?"
추경감은 그렇게 말해 놓고는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손으로 얼른 자기 입을 막았다.
추경감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강형사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예, 명령대로 가보았습니다. 그 녀석이 그집 위치만은 분
명하게 말했더군요. 그 집은 저 유명한 재벌인 명왕성 그
룹 고회장 집이더군요. 문패의 고봉식은 고회장의 맏아들
이구요."
"만났어?"
"물론이죠. 그 집 며느리를."
강형사가 수첩을 꺼내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 집 며느리 설희주씨를 만났지요. 이 집에 살인 사건
없냐고 물었더니 완전히 나를 미친 놈 취급 하더군요. 하
긴 내가 미친 놈 아닙니까? 멀쩡한 집에 찾아가 누가 찔려
죽지 않았냐고 하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입니까? 백배 사죄하고 도망쳐 왔지
요."
그때였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받던 강형사의 표정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예, 정말입니까?"
"무슨 일이야?"
강형사가 경비 전화를 든 채 놀라고 있는 모습을 본 추경
감이 대답을 재촉했다.
"경감님, 정말입니다."
"뭐가 정말이야?"
강형사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계속했다.
"방금 상황실 연락인데요, 그 살인 사건이 사실이랍니다.
고회장 집에서 여자 피살체가 발견된 신고가 들어왔답니
다."
"뭐야?"
추경감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참 환장할 노릇이야. 도대체."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이소, 사람 죽었다는데 와 신고받고도 묵살하는기
요?"
시체를 목격했다는 그 경상도 목소리가 다시 전화를 걸었
다.
추경감은 송화기를 손으로 막고 이 전화 거는 곳을 추적하
라는 신호를 했다. 강형사가 재빨리 경비 전화로 추적을
의뢰했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신고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당신 이름을 좀 가르쳐 줄 수 없나요?"
추경감은 될 수 있는 대로 상대방에게 말을 시키며 전화를
끊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 말 곧이들었으면 된깁니더."
그러나 그는 금방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 경상도 사투리의 두번째 전화는 사실이었다.
추경감과 강형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종로 경찰
서 형사들이 와 있었다.
피살자는 고회장의 맏며느리이며 명왕성 자동차 사장인 고
봉식의 아내 설희주였다. 그녀는 자기의 침실에서 가슴에
칼을 맞은 채 죽어 있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강형사가 처음 신고를
받고 그곳에 갔을 때 그가 만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아
니, 그 사람은 설희주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 경상도 사투리가 살인을 예고했단 말인가? 무
엇때문에 그런 전화를 했을까? 그 경상도 사투리가 경찰에
살인 사건을 예고한 뒤 강형사가 다녀간 것을 보고 이번에
는 살인을 한 뒤 다시 전화를 했다고 쉽게 추리할 수 있
다.
"그 경상도 사투리가 전화한 위치는 확인했나?"
사건 현장을 돌아보고 있던 추경감이 강형사에게 물었다.
"전기통신공사와 협의 중입니다만 워낙 빨리 전화를 끊었
기 때문에 좀."
"그 녀석이 사건의 단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추경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단서가 아니라 그놈이 범인 아닙니까?"
강형사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감식에 열중했
던 경찰관들이 돌아보았다.
"그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지금 상황부터 정리를 해
보지."
추경감이 거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4, 50평은 충분히 될 것 같은 넓은 거실에다 우람한 장식
이 재벌가의 풍모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젖혀진 커튼 사이로 열대림이 우거진 듯한 온
실이 연결돼 있었다. 높이가 3미터는 됨직한 통짜 유리로
된 창문이 벽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있다. 거실 가운데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완만하게 용트림을 한 듯한 모습
으로 놓여 있었다. 계단 바닥에는 베이지색 카피트가 깔려
있고 난간 손잡이는 은색 금속으로 되어 있있다. 정교하면
서도 우람한 모습을 풍겼다.
추경감은 벽에 걸린 고희동 화백의 유화를 보면서 50호는
충분히 될 것이란 생각을 해 보았다. 거실 계단 옆으로 들
어가면 문제의 침실이 있고 거기서 며느리 설희주가 피살
되었다.
설희주는 홈웨어 스타일에 모로 쓰러져 있었으나 얼굴은
의외로 잠든 듯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방안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반항
한것 같았다.
하얀 시트가 덮인 침상에도 피묻은 손자국이 있었다. 옅은
연두색의 원피스형 홈웨어의 앞가슴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고 두 손도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걷혀 올라간 원피
스 치맛자락 밑으로 희게 반짝이는 두 다리가 가련한 모습
을 하고 있었다.
자그맣고 에쁜 발가락들에도 핏자국이 약간 묻어 있었다.
"무엇에 찔린 거야?"
추경감이 감식하는 형사들을 보고 물었다.
"칼에 가슴을 여러 번 찔린 것 같은데 흉기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수염을 깎지 않아 턱이 지저분하게 보이는 형사가 쳐다보
지도않고 말했다.
"범인과 한참 다툰 흔적이 곳곳에 있습니다. 범인의 도주
로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방문에서 현관으로 나
가는 길 외에는 딴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강형사가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강형사가 왔을 때는 분명히 저 여자가 살아 있었단 말이
지?"
추경감이 설희주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몇번 말씀드렸습니까? 물론입니다. 저기 현관에서 나하고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이후에 저 여자가 죽은
것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강형사가 열을 올렸다.
"그때가?"
"오후 2시30분께입니다. 그리고 삼청 파출소에서 신고를
받은것이 3시40분께이니까 그 사이, 즉 1시간 10분 사이에
피살된것입니다."
"삼청 파출소에는 누가 신고했나?"
추경감이 담배를 입에 뮬고 켜지지도 않는 고물 지포 라이
터를 철거덕거리며 물었다.
"제가 신고했습니다. 뭐 잘못되었나요?"
그때 추경감 뒤에서 한 사나이가 불쑥 나타나며 불쾌한 어
조로 말했다.
추경감이 돌아서서 사나이를 잠시 훑어보았다. 지나치게
헐렁한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에 키가 1미터80은 휠씬 넘게
보이는 20대의 깡마른 사나이가 입가에 약간의 비웃음 같
은 것을 흘리며 추경감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강형사가 촉바르게 나섰다.
"고봉길. 이 재벌가의 막내지요. 하지만 나는 빈털터리랍
니다."
그는 두 손을 벌려 서양 사람 같은 제스처를 해 보였다.
어딘가 비꼬인 듯한 젊은이였다.
"내가 신고를 했습니다. 신고한 사람이 가장 유력한 용의
자라는 말이 추리 영화에 흔히 나오더군요. 저도 그렇게
보입니까?"
고봉길이 추경감 앞에 턱을 바싹 들이밀며 말했다.
"처음 시체를 발견했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좀 말해 주
게."
추경감은 고봉길의 태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이야기 못할 것도 없지요. 불쌍한 우리 형수의 마지막 비
명을 들은 것은 저뿐이니까요."
고봉길은 담배를 꺼내 손톱에 탁탁 치면서 소파 손잡이에
엉거주춤 앉았다.
"사건이 난 순간 이 집에 있었던 사람은 피살자 설희주씨
와 고봉길씨, 욕실에서 세탁기를 돌리고 있던 가정부 수원
댁, 그리고 2층에 큰딸 정혜가 있었습니다."
종로서에서 나온 형사가 설명했다.
"이 집 식구 모두였나요?"
"아닙니다. 고명성 회장님 내외는 외출 중이었지요. 그리
고 둘째딸 영혜씨, 비서실장 겸 사위 정정필씨, 그리고 운
전기사 두 사람 등이 이 집에 기거하고 있습니다만."
"도대체 이 집이 얼마나 크길래 그 많은 식구가."
강형사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예, 모두 백40평쯤 됩니다. 건평 말입니다. 대지는 한 5
백평되지요. 왜 탐나시유?"
고봉길이 강형사를 쳐다보며 빈정댔다.
"뭐야? 이 새끼가!"
강형사가 발끈해서 주먹으로 그를 때릴 태세를 취하다가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그래 다른 사람은 모두 외출 중이었단 말이죠?"
추경감이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랬다니까요. 내가 2층에서 기타 연습을 하고 있는데 갑
자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어요. 가슴을 찢는 듯한 처
절하고 날카로운 소리였어요. 나는 아이쿠, 우리 형수가
죽는가부다고 생각하고 아래층으로 뛰어내려와 형수 방으
로 가 보았지요.
그랬더니 글세 형수는 이미."
"가만, 두 가지만 물어보겠네."
추경감이 손가락 둘을 펴 보이머 고봉길을 쳐다보았다.
"첫째, 비명을 듣는 순간 형수가 죽는가부다고 생각했다는
데, 왜 그런 생각을 했나?"
"그야 이 집에서 죽을 사람이 있다면 형수밖에 더 있겠어
요? 형수는 늘 그런 위험한 방사능 앞에 노출돼 있었거든
요."
"위험한 방사능?"
"그게 꼭 방사능 같은 거죠. 우리 식구 모두가 형수를 미
워하는 눈길을 쏘았으니까요."
"더 자세히 얘기할 수 없나?"
"차차 알게 될 겁니다. 수사해 보시면."
"좋아. 그럼 두번째, 형수가 칼에 찔려 쓰러져 있는데 왜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경찰에 신고했나?"
"병원요? 병원에선 죽은 사람도 살립니까? 그래 내가 죽은
사람 산 사람도 구분 못하는 바보로 아십니까? 후후후."
고봉길은 기가 막힌 듯이 웃었다.
"전에 죽은 사람을 본 일이 있소?"
강형사가 물었다.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때였다. 초동 수사를 하고 있던 형사 한 사람이 거실로
뛰어나왔다.
"찾았습니다. 이겁니다."
형사는 칼 한 가루를 수건에 싸들고 있었다. 피가 묻어 있
는 그 칼은 보통 여염집에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박물관에서나 봄직한 골동품 칼이었다. 사극 영화에 소품
으로 나오는 고대 서양 병사들의 칼 같았다. 30센티 남짓
한 단도인데 칼날이 고딕식으로 곧게 뻗었고 손잡이에는
고풍스러운 서양식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주 정교한 예
술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칼 본 적 있나?"
추경감이 고봉길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 칼 제가 알아요."
그때 2흥 계단을 내려오던 여자가 끼어들었다.
"이 집 큰딸 정혜씨입니다."
강형사가 추경감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부스스한 얼굴을
긴 머리카락이 감싸고 있있다. 첫눈에도 오만한 모습이 배
어 넘쳤다. 손목에는 철렁거리는 보석 팔찌를 끼고 있었
다. 추경감은 그것이 꼭 수갑처럼 보여 혼자 히죽 웃었다.
오만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꽤 미인축에 들었다.
"그 칼은 우리 아버지 거예요. 위대한 고명성 회장님 말입
니다. 몇년 전 로마에서 수백만 원을 주고 구해 왔답니다.
고대 로마 전사들이 쓰던 칼이래요. 저걸로 몇 사람이나
더 죽여야 할는지. 그건 옛날부터 재앙의 칼이라고 불
렀대요."
정혜는 거침없는 말투로 칼을 저주스럽게 바라보며 말했
다.
"재앙의 칼이라구요?"
칼을 쥐고 있던 형사가 갑자기 겁이 난 것처럼 보였다.
"이태리 경매장에서 그렇게 불렀대요."
"이 칼이 어디에 있었나요?"
추경감은 볼수록 오묘하게 생긴 피묻은 골동품을 흥미롭게
살펴보며 질문했다.
"우리 회장님 박물관에 있었지요."
정혜가 소파에 털석 주저앉아 다리를 꼬았다. 늘씬한 각선
미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매혹적이었다.
"아버님은 저쪽 방 한 칸을 애장품 보관실로 정해 두었습
니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골동품이 소장돼 있습니다. 허
지만 아무도 거긴 얼씬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늘 잠겨 있
거든요."
고봉길이 설명했다.
"저주의 칼은 혼자 다니며 사람을 죽인대요."
정혜가 칼로 사람을 찌르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추경감이 정중하게 물었다.
"난 잘 몰라요. 고회장님 오시거든 물어보시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아가씨에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나 아가씨 아니예요. 옛날엔 아가씨였지만 지금은 아줌마
예요."
"시, 실례했습니다. 아주머니, 저어, 설희주씨, 즉 올케가
피살될 때 아주머니는 2층 방에 계셨댔죠?"
"그래요. 그럼 안 되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비명 같은 소리 못 들었어요?"
"아뇨."
"그때 무얼 하고 있었어요?"
"헤드폰 끼고 마이클 잭슨을 듣고 있었어요. 요즘 애들은
한물 갔다고 하지만 난 마이클 잭슨이 좋거든요."
욕실에서 세탁기를 돌리고 있던 가정부 수원댁도 비명 소
리를듣지 못한 것은 마찬가기였다.
"경감님,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강형사는 현장에서 수거한 여러 가지 증거품을 뒤적이다가
피묻은 와이셔츠 하나를 들추어내며 말했다.
그러나 추경감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3. 미운 오리새끼의 비극
재벌가 맏며느리 피살 사건은 세상에 대단한 화제가 되었
다.
여자들 두셋만 모여도 어떻게 죽었느니, 누가 죽였느니 하
면서 모두가 입방아 찧기에 바빴다.
상황이 중대한 만큼 종로 경찰서 안에 수사 본부가 설치되
고 사건은 시경의 추경감이 직접 맡게 되었다.
추경감은 우선 명왕성 그룹의 가족 상황부터 조사를 해 보
았다.
625때 고철 수집상을 하던 고명성 회장은 그것을 리어카
공장으로 키워 나갔다. 조그만 자전거 공장을 세워 손으로
드럼통을 두들겨 자전거를 만드는 일을 했었다. 그 규모가
좀 커지자 이번에는 월남 붐을 타고 일어섰다.
60년대 말 월남에 고철 수집 회사를 세우고 거의 멀쩡한
지프차의 엔진 같은 것을 고철로 수입해다가 개조하기도
하고 모터보트를 만들기도 했다.
한국의 많은 재벌들이 그렇게 했듯이, 월남 경기는 벼락
부자를 많이 만들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선 회사를 일으키고 자동차 생산 공장
도 만들었다.
작달막한 키에 코가 납작하고 못생긴 축인 그는 늘 신체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마에 있는
주름살이 임금 왕(王)자처럼 생겼다고 늘 그것을 자랑해
왔다.
"백년 전에만 태어났더라도 나는 왕이 되었을 거야."
자기의 볼품 없는 용모를 늘 이렇게 자위하고 있었다.
고회장은 마침내 그룹의 총수가 되고 그 이름을 자기 이름
자 가운데 이마의 왕주름을 넣어서 명왕성 그룹이라고 했
다.
함께 고생하던 조강지처는 7, 8년 전에 비행기 추락 사고
로 죽었다.
그 뒤 나이가 서른여덟 살이나 아래인 명문대 출신 최화정
과 재혼을 했다.
먼저 죽은 친구의 딸이기도 한 최화정을 돈으로 사오다시
피 해서 결혼을 했다.
그녀는 장남인 고봉식보다 7살이나 아래로 올해 갓 서른
살이었다.
장녀인 고정혜보다는 4살 아래, 둘째딸 고영혜보다 두 살
위이고, 막내 고봉길보다는 네 살 위였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어머니지만 너무나 자연스럽지 못한 어
머니가 된 셈이다.
최화정은 목이 길고 얼굴이 작아 미인형에 들지만 썩 아름
다운 인물은 아니었다. 귀엽게 생겨 남성들의 사랑을 듬뽁
받을 수있는 애교 넘친 여자였다.
임기응변이 빠르고 나이 많은 고회장을 잘 다루었다.
아들 딸이 되는 장녀 정혜, 장남 봉식, 둘째딸 영혜, 막내
봉길, 그리고 정혜의 남편인 사위 정정필과도 잘 어울렸
다.
올해 서른아홉이나 된 정정필은 젊을 때부터 고회장의 비
서로 일해 왔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명왕성
그룹에 들어와 필사적인 방법으로 고회장에게 접근했다.
그는 마침내 고회장의 딸을 아내로 삼는 데 성공하고 지금
은 회장 비서실장으로, 늘 고회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
다.
어머니 최화정은 모든 식구와 그럭저럭 어울려 지냈으나
며느리 설희주와는 언제나 기름과 물이었다.
"설희주를 미워하지 않은 식구는 누구야?"
그 집 가족들의 신상에 대해 내강 이야기를 들은 추경감이
강형사에게 물었다.
"글세요. 고회장과 고봉길을 빼놓고는 모두가 설희주를 눈
의 가시처럼 여겼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
"가난한 집에서 자란 여자가 연애라는 특별한 줄을 타고
고봉식을 함락시킨 뒤 명왕성가의 안방 후계자가 된 것이
모두 싫었던 모양입니다."
"고봉식은 직책이 뭐야?"
"명왕성 그룹의 한 계열인 명왕성 자동차 사장입니다."
"설희주의 친정은 어떤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머니와 오빠가 있었는데 결혼
하기 몇달 전 죽었다고 합니다. 거의 고아나 다름 없습니
다. 시집간 언니가 하나 있긴 있다고 합니다만."
추경감은 한창 동안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의 집에 뛰어들었군. 자라온 환경이
다른 사람은 어울리기 어려운 법이야. 민물 고기를 갑자기
바다에 가져다 놓으면 어떻게 되겠나?"
"예?"
강형사는 추경감의 그답지 않은 센티멘탈리즘에 어리둥절
해졌다.
"참 기묘한 가정이야. 그 남편이라는 고봉식이 말야, 어딘
가 좀 멍청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기 실속은 다
챙기는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람이야말로 전형적인 재벌가의 멍청이 장남 스타일
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누라 죽일 용기도 없어요."
강형사가 떠들었다.
"사인은 정확하게 나왔나?"
추경감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예, 가슴을 찌른 칼의 상처입니다. 네 군데를 찔렀는데
세군데는 깊이 12센티로 치명상이 아니었고 한 군데가
심장의동맥을 건드렸습니다."
"약물 중독이나."
"아뇨."
강형사가 추경감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그 외 이상은 없었나?"
"전혀. 아참 정교의 흔적은 있었습니다. 근데 질 속에서
발견된 체액으로 보아 최소 1주일 이전에 정교를 했던 흔
적만이 남아있습니다."
"혈액형은?"
"남편의 혈액형인 O형과 같은 정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세상에 O형 혈액을 가진 사람이 고봉식뿐이야?"
그 대목에서 추경감은 갑자기 신경질적이 되었다. 추경감
은 한참 동안 다시 창밖을 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다시 가 보자. 외부인의 짓일 수도 있어."
"예?"
"빨리 따라와."
그들은 청운동 고회장의 집 앞에 닿았다. 먼저 강형사가
초인종을 눌렀다.
"아! 강형사시군요."
어디에선가 젊은 남자의 목리가 튀어나왔다.
"어찌 된 거야?"
추경감이 어리둥절해졌다. 강형사가 대문 처마에 붙은 물
건을 가리켰다. 스피커처럼 구멍이 송송 뚫린 물건이 보였
다. 그 위에는 카메라 렌즈 같은 것도 있었다.
"저게 텔레비젼 초인종이란 겁니다. 여기 누가 서 있는지
집안에서 다 볼 수 있습니다."
강형사 말을 들으며 추경감은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어린 눈
으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조금 있다가 둔중한 금속성을 내면서 대문이 열렸다.
그들이 거실까지 가는 데는 상당한 감시망이 있었다.
"자외선 경보 장치, 전자 감응식 철조망 등이 이 집에 장
치돼 있습니다."
강형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거실에는 마침 여러 식구가 모여 있었다.
"형사 나으리들이 또 오셨군요. 이 분이 대명왕성 그룹 고
회장님이십니다. 회장님 뵈오러 오셨죠?"
고봉길이 여전히 비웃는 듯한 미소를 흘리며 거실 소파 중
앙에 앉아 있는 볼품 없는 중늙은이를 소개했다.
"어서들 오시오. 좀 앉으시지요."
고회장은 일어선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를 잠깐 보이고는 도로 앉았다. 볼품 없는 외모였다.
그러나 날카로운 눈과 일자로 꽉 다문 입이 보통 사람으로
는 보이지 않았다. 대그룹의 총수다운 분위기가 풍겼다.
"이거 처음 뵙습니다. 텔러비젼이나 신문에서 보던 얼굴과
꼭 같군요."
추경감이 인사로 한다는 말이 좀 이상해졌다.
"그래 범인의 윤곽은 잡았소?"
고회장은 추경감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자기 질문만 했
다.
"그게 아직."
"오늘 나한데 온 용건은 뭐요?"
"특별한 용건은 없고 그냥 몇 마디."
추경감이 우물쭈물하자,
"싱거운 사람들이구먼. 당신들 월급 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한심하구려."
고회장은 이 말을 남기고 벌떡 일어서서 안으로 들어가 버
렸다.
"미안합니다. 회장님은 원래 성격이 깔끔하셔서."
그때 커크 더글러스의 턱을 닮은 사나이가 몇번씩이나 절
을하며 말했다.
"저는 고회장님 비서실장인 정정필이라고 합니다."
사나이는 연신 절을 하며 말했다.
"동시에 우리 큰누나의 남편이구요."
고봉길이 비꼬아 주었다.
"이 분은 우리 큰형님, 명왕성 자동차 사장이죠."
추경감은 키가 크고 점잖게 보이는 고봉식에게 목례를 보
냈다.
"회장님 사모님을 잠깐 뵈었으면 하는데요."
추경감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옆방에서 젊은 여자 두
명이 나왔다.
"내가 이 집 어머니예요."
"예?"
젊은 여자의 자기 소개에 추경감은 잠깐 어리둥절해졌다.
"최화정이라고 해요. 얘는 우리집 둘째 영혜구요."
그녀는 같이 나온 여자를 소개했다. 맏딸 정혜와 많이 닮
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화정을 늙은 고회장의 부인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상당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너무 젊고 발랄하
게 보여서 둘째딸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사모님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평소에 며느님인 설희주
씨가 특별히 미워한 사람이 있습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그 반대는 있어요. 올케를 미워한 사람이 많아요."
영혜가 촉바르게 나섰다.
"영혜씨는 올케와 다툰 적이 있나요?"
이번에는 강형사가 물었다.
"한두번 다투지 않은 시누 올케 사이 보았나요?"
영혜는 소파에 앉은 채 포개 얹은 왼발을 달랑거리며 말했
다.
"그러면 다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 칼이 있던 방 열
쇠는 주로 누가 사용했나요?"
추경감은 포케트에서 사진 한 장을 내보이며 말했다. 살인
흉기로 쓰였던 문제의 로마 단도 사진이었다.
"그 칼은 항상 회장님의 골동품 진열장에 있었지요. 물론
열쇠는 늘 채워두고요."
최화정 여사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진열장이나 그 방 열쇠는 항상 회장님이 지니고 다니셨겠
죠?"
"지니고 다니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데나 내굴리지
도 않았지요."
"그러니까 이 칼을 사용한 범인은 진열장과 방 열쇠가 어
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겠군요?"
강형사가 나서자 최화정 여사가 발끈했다.
"이 분 무슨 이런 이상한 말을 해! 그 열쇠 회장님 아니면
내가 만지는데 그럼 우리 둘 중에 하나가 칼을 꺼내다 새
아기를 찔렀단 말예요?"
최화정이 설희주를 새아기라고 부른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서른 살 남짓한 여자가 같은 또래의 며느리를 아기라고 하
는게 어쩐지 어색했다.
"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강형사가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제 말은 상식선에서 추론하자면."
"꼭 사람을 죽일 생각이면 멀리서 총 같은 걸로 쏘지, 뭣
때문에 손에 피묻혀 가면서 칼로 찌릅니까? 아이 끔찍해."
그녀는 자기 손에 피라도 물은 듯 손을 흔들어 털면서 말
했다.
"저는 다만 이 칼이 이 집안에 있었다는 것만 확인하면 그
만입니다."
강형사가 풀이 죽어서 말했다.
"그 말투는 그 칼뿐 아니고 그 칼을 사용해서 사람을 죽인
사람도 이 집안에 있다는 투군요."
최화정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아, 아닙니다 그렇게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누가 들어와 우리 집안 사람을 찔렀다고
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고봉식이 말을 계속했다.
"이 집은 평범한 주택이 아닙니다. 자외선 경보 장치까지
설치돼 있기 때문에 불시에 누가 들어와서 그런 일을 저지
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들어오실 때 보셔서
아시겠지만 마당에는 맹견 두 마리까지 있지 않습니까. 하
여간 밖에서 누가 침입했다면 비명 소리보다 경보 사이렌
소리가 훨씬 더 요란스러웠을 테니까요. 그뿐입니까? 개
두 마리가 악을 써보세요. 파출소까지 들렸을 겁니다."
고봉식이 목소리를 점점 높이며 이 집의 완벽한 방범 체제
를신나게 설명했다.
"오빠는 지금 이 집 울타리 안에 살인자가 있다는 것을 웅
변하는 거예요? 나 원 기가 막혀서!"
정혜가 고봉식을 비난했다.
"너무 열올릴 건 없다. 아무려면 한 가족이 가족을 죽였다
고 형사님들이 생각하겠어?"
최화정이 어른스럽게 말했다.
"나두 새엄마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야. 범인은 외부인일
거예요. 어떻게 우리 식구를 그런 무시무시한 리스트에 올
리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할 수 있어요?"
둘째 영혜가 몸서리가 쳐진다는듯 팔짱을 끼고 목을 움츠
리며말했다.
"전 아직도 여러분들을 그런 리스트에 올리지는 않았습니
다. 예를 들어 월부 장수나 배달원 등 이 집에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드나드는 안면 있는 사람이 우발적으로 범행
을 저지를수도 있으니까요."
추경감이 흥분한 가족들을 가라앉힐 속셈으로 의견을 말했
다.
"추리소설을 보면 범인은 언제나 엉뚱한 사람이더군요. 이
번 사건도."
"그만둬요, 새어머니. 수사반장은 새어머니가 아니고 이
분이에요."
영혜가 최화정의 말을 중간에서 잘라 버렸다. 그러나 최화
정은 그만 두지 않았다.
"윈래 바둑이나 카드는 게임 당사자보다 옆에서 훈수하는
사람이 더 잘한다고 했어. 반장님, 포커 좋아하세요?"
최화정은 안 해도 될 질문까지 했다.
"하여간 우리 가족 중에서 뭔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어불
성설이에요. 범인은 안이 아니고 밖이라니까요."
정혜가 결론을 짓듯 말했다.
"꼭 그렇게만 우기지 말아요. 우리 식구 중에 형수를 미워
하지 않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라고 해! 미움, 증오, 그
것이 극에 달하면 극단적인 상황이 오는 거라고."
잠자코 있던 고봉길이 비분 강개한 듯한 목소리로 떠들었
다.
"안이고 밖이고 하여간 범인은 잡을 수 있는 거겠죠?"
비서실장 정정필이 사무적인 투로 다그쳤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강형사가 대답을 가로 맡았다.
"최선 다 안해도 좋으니 되도록 빨리 매듭을 짓는 게 좋겠
어요. 못 잡으면 못 잡겠다고 손 들면 그만 아닙니까. 이
제부터 신문 방송이 더 떠들어댈 테니. 집안도 집안이
지만 각 계열 회사, 그리고 거래선, 외국 바이어들까
지."
정정필이 사정하듯 말했다.
"매형은 어째 그래요? 사람이 죽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범인은 못 잡아도 좋다구요?"
고봉길이 발끈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솔직이 말해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이제 무슨 날벼락입니
까?"
"벼락맞은 사람은 형수예요. 근데 회사가 어쩌구 불경기가
어쨌단 말입니까?"
고봉길이 다시 악을 썼다.
"얘, 매형 말이 맞지 뭘 그러니?"
정혜가 고봉길을 나무랬다.
"누나!"
고봉길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정혜를 노려보았다. 두 눈
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그만들 둬."
장남 고봉식이 봉길의 허리춤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다.
"이 사람이 왜 좋은 인상 다 구기구 그래? 아, 누구는 칼
에 찔려 죽은 사람 두고 노래 부르고 싶은 심정인 줄 알
아? 이거 왜 이래, 정말."
정정필이 펄펄 뛰었다.
"제발, 형수님을 애도하는 마음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으면
이런 자리에서 사업 얘기는 말아 주세요, 제발. 대재벌 그
룹 만든 고회장님이 또 무슨 돈을 더 벌 욕심이 있다고 그
러세요? 하기야 우리 아버지는 돈 위에 돈 있다고 늘 말씀
하셨지만."
고봉길의 독백 같은 말은 점점 냉소적으로 바뀌었다.
"애도? 돈? 돈보다는 지금 애도를 해야지. 암!"
이번에는 정혜도 다른 방향으로 냉소적이었다.
"팔자 좋은 소리들 하고 있네요. 우리 명왕성 그룹에 목줄
을걸고 있는 사람이 십만명도 넘어요. 우리 그룹이 삐거덕
하면굶어 죽을 사람이 줄줄이 나온단 말이요. 처남댁이 죽
었다는 뉴스 나간 뒤 공장 기계가 멈출 정도로 술렁술렁
난리 났어요, 난리!"
"너무 걱정 마십시오, 매형. 그룹 회장 며느리 칼 맞아 죽
었다고 자동차 살 사람 안 사지 않아요. 빌딩 짓던 사람
안 짓지 않아요. 팔릴 물건이 안 팔릴 리도 없구요."
고봉길은 여전히 비웃음으로 차 있었다.
"넌 가서 노래나 블러라. 백날 불러도 차트에 한번 오르지
못하는 그 오지 그릇 깨지는 소리나 내!"
듣고 있던 영혜가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말했
다.
"쬐그만 게 혼자 휴머니스트인 척 표정 꾸미고 그러지 좀
마! 어른들 앞에서."
정혜도 거들었다.
"손님들 앞에서 무슨 쓸데없는 싸움질이냐? 그만들 두자."
최화정이 딴에는 어른스러운 말을 했다.
"우리는 상관 마시고 하실 말씀 다 하십시오."
골동품 보관한 방을 살피고 온 강형사는 거실의 이곳 저곳
을 계속 돌아다니며 말을 던졌다.
"저어, 실장님 누가 좀 뵙자는데유."
그때 거실로 들어선 점퍼 차림의 사나이가 쭈볏쭈볏한 모
습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추경감은 그가 회장 차의 운전
사 편기사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누구래?"
"저어 기자분들이라 하는데요. 네 분입니다."
그 말에 정정필은 표정이 굳어졌다.
"장모님, 그리고 처남 처제들, 그 자들이 오거든 무조건
아는것 없다고 입 다물어야 합니다."
"입 다물고 어떻게 아는 것 없다고 말합니까?"
봉길이 또 빈정댔다.
"봉길이 처남도 당분간 밤무대 같은 데 아르바이트 나가지
말라구."
"아이 속상해.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단체루 발리섬 같은
데나 나가 있다가 좀 잠잠해지면 들어오는 게."
영혜의 말에 정혜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오빠, 발리보다는 뉴질랜드가 어때요?"
듣고 있던 추경감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안 됩니다."
너무도 한심한 집안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 같아서는 한
바탕 훈계라도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는 말을 계속했
다.
"살인범의 조속한 검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제가 원
하는 곳에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며느리, 아내, 올케가
죽음을 당했는데, 그 원수가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겠지요?"
추경감의 제법 엄숙한 말투에 모두 조용히 있었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대단히 씁쓸한 기분으로 그 집을 나왔
다.
우선 범행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집 식구들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화까지 치밀었던 것
이다.
"돈 가진 사람들은 머리가 비는가 보죠. 하긴 주머니가 가
득 차면 비는 곳이 있긴 있어야지."
강형사가 입맛만 다시고 있는 추경감의 기분을 위로라도
해줄듯이 말했다.
"내가 보기엔 말야, 그 고봉길인가 뭔가 하는 시동생 걔만
그 집 식구 중 좀 어긋난 사람 같아."
"그래요, 맞아요. 뭐가 답답해서 기타 들고 술집 무대에
서서 노래 부르며 돈을 번답니까? 또라이지, 또라이."
"또라이라도 그 중 나은 사람 같더구먼."
"고봉길은 평소에 설희주와는 사이가 괜찮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문제의 로마 칼을 어떻게 그 진열장에서 꺼냈느냐 하
는게 우선 촛점인 것 같습니다."
강형사가 화제를 돌렸다.
"범행 당시 진열장이 있는 방문은 열려 있었나?"
"잠겨 있었습니다."
"열쇠는 어디에 있었는데."
"열쇠가 두 개 있었는데 두 개 모두 한 꾸러미로 되어 있
었습니다. 열쇠 뭉치는 회장의 서재 책상에 들어 있었습니
다."
"열쇠가 거기 있다는 것을 누구누구 알고 있었나?"
"그야 고회장과 최화정씨죠. 그 외 식구들은 잘 모르겠습
니다."
"범행 당시 그 방이 잠겨 있었다면 열쇠로 열고 들어가 로
마칼만 꺼내고 문을 다시 잠근 뒤 범행 후 열쇠를 그 방에
가져다 놓을 수도 있고, 방이 열려 있는 틈을 타서 칼을
훔쳐다 놓았다가 범행을 할 수도 있고, 범인이 들어왔을
때 그 방이열려 있어서 들어가 칼만 꺼내고 문을 잠근 뒤
범행했을 수도 있구먼."
추경감은 고물 지포를 꺼내 철거덕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4. 멀어진 마음 차가운 육체
아직도 범인 윤곽 못 잡아, 명왕성 그룹 며느리 피살 사
건
신문 사회면 제목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강형사는 신문을
구겨 팽개쳐 버렸다.
"옘병할, 그저 경찰만 동네북이라니까."
"무슨 얘기야?"
열심히 수첩을 뒤적이고 있던 추경감이 강형사를 돌아보지
도 않고 물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니 빨리 와보라. 그래서 내가 뛰어
갔지. 그랬더니 멀쩡해. 다시 살인 사건 났으니 와보라!
가보니 정말로 사람이 죽었어. 그럼 신고한 놈은 오대산
도사야 정도령이야?"
강형사는 여전히 혼잣말처럼 떠들었다.
"무슨 얘기야?"
"그렇잖습니까? 이건 예고 살인 아닙니까? 그 신고자를 찾
아내야 하는데."
"전기통신공사 의견은 뭐야?"
"아, 그 녀석이 전화 건 곳을 알아냈습니다. 중앙청 옆에
있는 다방에서 걸었답니다."
"용케 알아냈구먼. 그곳이면 살인 현장에서 과히 멀리 있
는곳도 아니구먼. 그날 그 시간의 목격자를 좀 찾아보지
그래."
"지금 탐문 중입니다."
"범인의 음성 감정 결과는?"
경찰국강력반 신고 전화에는 녹음 장치가 되어 있었기 때
문에 범인의 음성이 녹취되어 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되어
있었다.
"30대 초반 남자의 음성이라고 합니다. 억양은 경상도 서
헤안지역 하류 가정 출신 같더군요."
"충분히 범인일 수 있구먼. 설희주의 고향은 어디야?"
"고향은 서울입니다. 외가가 충남 서천군이군요."
"외가가 서천? 경상도와는 관계가 없군."
추경감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아냐. 그건 불가능해. 살인을 예고해 놓고 죽이고 도망가
고. 첫째, 예고를 하고 죽이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무엇
때문에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 집은 완벽한 철옹성이라서
몰래 들어가 죽이고 도망갈 수가 없어."
추경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면식범이란 게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폐쇄회로 감시 TV에 아무도 다녀간 혼적이 없어."
"이상한 점이 더 있습니다. 따지자면 설희주는 심장에
두세번 칼을 맞았습니다. 칼에 맞은 뒤 방안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혼적이 있습니다. 구석구석에 핏자국이 있었으니
까요. 그러면서 비명은 왜 단 한 마디밖에 지르지 않았을
까요?"
"그야 처음 몇번 찔린 것은 치명상이 아니니까 그냥 참고
있다가 마지막에 외마디 비명을 지를 수도 있는 일이지.
그건 이상할 것이 없어."
"가수라는 고봉길이 들었다는 비명 소리가 거짓말 아닐까
요? 더구나 다른 식구는 듣지 못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방과 가장 가까이 있었다는 가정부도 못 들었다고 하지 않
았습니까?"
"세탁기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추경감과 강형사가 입씨름을 하고 있을 때 이것 보라는 듯
이 과학수사연구소의 2차 감정 결과가 왔다.
여러 가지 잡다한 감정 결과 속에 주목할 만한 것은 와이
셔츠와 거기에 묻은 피였다.
감식과의 형사가 설희주의 일기장, 녹음기, 카세트 테이
프, 핸드백, 화장품 비밀백 등이 든 보따리와 감정서를 가
지고왔다.
"반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강형사가 그 중에서 피묻은 와이셔츠를 끄집어냈다.
"이 셔츠의 혈액이 설희주와 같은 형입니다."
"아니, 그럼 시동생 고봉길이."
"아닙니다. 이 셔츠는 남편 고봉식의 것입니다."
"현장 어디에 있던 것인가?"
"침대 밑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감추어져 있었다? 그거 참 이상한 일이군. 우연히 침실에
벗어둔 와이셔츠에 묻은 것이 아니란 뜻 아닌가?"
추경감의 얼굴이 약간 심각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 시간에 고봉식은 어디에 있었다고 했지?"
"분명히 집에 있지는 않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이 뒤집어 씌우려고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두 사람은 한참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의견이 일치되
었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두 사람은 고봉식의 사무실로 갔다. 마침 고봉식은 점심을
먹고 들어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한잠 자고 있었다.
"이거 웬일들이십니가?"
그는 눈을 비비며 아주 귀찮다는 듯이 두 사람을 맞았다.
재벌 그룹 사람이라면 흔히 상상할수 있는 미련스러운 체
구와 기름이 흐르는 살찐 목덜미를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
다. 비교적 야윈 체격에 순하게 보이는 꺼벙한 얼굴을 하
고 있었다. 특히 그의 커다란 눈은 착한 농부처럼 보였다.
"고봉식 사장님, 이거 쉬시는데 미안합니다. 그냥 지나가
다가 들렀습니다."
추경감이 권하는 자리에 엉거주춤 앉으며 말했다.
"그래 범인의 꼬리는 찾았나요?"
"꼬리는커녕 아직 그림자도 못 보았습니다. 그래서 몇 마
디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실은."
강형사의 말올 듣자 그는 얼굴색이 약간 달라졌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니까 지나가다가 그냥 들른 것이 아니군요."
"뭐 꼭 그렇지 않다고는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한 참
고사항 한두 가지만."
추경감이 겸연쩍어 머리를 슬슬 긁으며 말했다.
"그래 뭔지 빨리 끝냅시다. 말해 보세요. 난 희주 일만 생
각하면 열불 나는 사람이오."
그는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빨면서 말했다.
"저어 고사장의 와이셔츠에 설희주씨의 혈액이 묻어 있었
는데요."
강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희주와 나는 부부요. 침실에 내 와이셔츠가 있었다는 것
이 이상합니까? 그리고 칼에 찔린 사람 피가 방안 어디엔
들 튀지않았겠습니까?"
고사장은 퍽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그게 아니고 피묻은 셔츠가 침대 밑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추경감이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침대 밑에 감추어져 있다구요? 그럼 내가 그랬다는 얘깁
니까?"
고봉식 사장이 더 못 참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아,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추경감이 그를 끌어앉혔다.
"그건 그렇고. 사건 당일날 그 시간에 사장님은 대관령에
계셨다고 했던가요?"
강형사가 고사장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몇번 대답해야 합니까? 그건 확인해 보셨잖습니까?"
"대관령에서는 왜 부인과 다투셨나요?"
"부부 싸움 안 하는 가정 있습니까?"
"재벌집 아드님도 불만 있습니까?"
"뭐요?"
그것은 확실히 강형사의 실수였다. 갑자기 그런 엉뚱한 질
문을 한 것은 그가 평소 가지고 있던 재벌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같은 것이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희주씨 일기장을 보면 늘 남편인 고사장에 대한 불만으
로 차 있던데."
"그 여자는 나뿐 아니라 우리집 식구 모두에 대해 불만이
가득 찬 여자요. 아니, 우리집 식구뿐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해 불만이 가득 찬 여자랍니다. 그런데 남의 여편네 일
기장은 왜 들추고 치사하게 이러시요?"
고사장은 갑자기 부아가 치민 모양이다.
"거 유치하게 남의 여편네 일기장이나 들추어보며 떠들고
다니지 마시오."
고봉식은 강형사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화를 냈다.
"그 여자 말이요, 그게 일기장이 아니고 낙서장이요 낙서
장. 뜻도 의미도 없이 세상 원망이나 하는 그런 낙서를 하
는 게 그 여자 취미란 말입니다."
고봉식은 일기장에 대해 뜻밖에도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관령에서 다투고 따로따로 집으로 오셨다고
하셨지요?"
추경감이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요."
"대관령에는 왜 갔습니까? 뭐 꼭 대답을 하지 않으셔도 됩
니다만."
"얘기하지요. 다 얘기해도 오해를 하고 난린데 얘기 안 할
게 뭐 있습니까?"
고봉식 사장은 식은 커피를 꿀꺽꿀꺽 마신 뒤 이야기를 시
작했다.
"그러니까 뒤에 정혜한테 들은 얘기지만 걔 때문에 시작된
겁니다."
특히 사이가 나빴던 설희주와 정혜는 사사건건 충돌을 했
다.
그날도 정혜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집에 뛰어 들어왔
다.
"이 여자 이거 어디 갔어?"
정혜는 분에 못 이겨 핸드백을 거실 바닥에 팽개치면서 떠
들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가 있어? 한두번도 아니고."
설희주가 홈웨어 차림으로 2층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흥분
해서 날뛰는 시누이를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보고 있던 설희주는 한두번 당하는 일이 아니라 태연
하게 말했다.
"뭐가 잘못 되었나요? 큰 아가씨."
"뭐야? 잘못 되지 않았다구! 왜 우리 정필씨 따돌렸어? 나
까무란지 종까무란지 하는 쪽바리 회장 만나는 자리 왜 우
리 그이는 따돌렸어? 우리 정필씨가 이사대우 비서실장이
라는 것 몰라? 그뿐이야. 대명왕성 그룹 맏사위라는 것 까
먹었어? 대학 다닐 때 아바 학점 받았다며? 데모하느라 다
까먹었어?"
"아가씨, 너무 해요. 내 대학 때 얘기는 정말 참을 수 없
어요. 그리고 내가 비록 나이는 작지만 올케예요. 아가씨
의 언니란 말이에요. 언니보고 그렇게 말을 탕탕 놓아가며
야단 쳐도 되는 거예요?"
설희주가 더 참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와 정혜 앞에 마주섰
다.
희주는 분에 못이겨 가슴이 가쁘게 움직였다.
"어쭈! 웃기는 말씀 하시네. 그걸로 우리 비서실장 따돌린
이율 슬쩍 감추려 하지 마. 도대체 뭐야? 외국 최대 바이
어 만나는 자리에 정필씨 못 가게 하고 오빠 혼자 가도록
전해준 게 무슨 꿍꿍이야?"
"난 무슨 일로 그 사람들이 만나는지도 몰라요. 그냥 나까
무라 회장이 그이와 개인적으로 술 한잔 했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전해 주었을 뿐이에요. 제가 전화받은 게 죕니까?
아가씨, 너무 그러지 말아요."
설희주는 더 상대할 수 없다는 듯이 돌아서고 말았다.
"너! 끝까지 그런 식으로 나갈래?"
정혜가 설희주의 뒤꼭지에 대고 악을 쓰자 그녀도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돌아섰다.
"솔직이 나까무라씨도 정실장 만나기 싫어했을 걸. 일본
말도 못하시고."
"뭐야? 느네 남편은 얼마나 잘하니? 난 다 알아, 정필씨
몰래 오빠가 무슨 흥정 하고 다니는지."
"억측은 그만 둡시다."
설희주는 끝까지 말끝을 흩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
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참았다.
"나까무라씨와는 개인적인 술자리일 뿐이에요."
"큰오빠와 올케가 우리 정필씨를 경계한다는 것은 곧 무엇
을 뜻하는 것이겠어?"
"큰아가씨, 제발 그 심술 좀 버리세요. 난 그이가 무얼 하
고 다니는지도 몰라요. 나와 그이를 마치 공모자처럼 몰아
세우지 말아요. 정말 참기 힘들어요."
"흥! 연극 같은 소리 적당히 해둬. 우리 정필씨를 따돌리
는 것은 곧 그룹 회장한테 뭔가 숨겨야 할 사안이 있다는
것 아니겠어?"
"제발 아가씨!"
설희주는 이제 좀 살려달라는 표정이었다. 모든 것이 귀찮
아 죽겠는데 왜 너까지 그러느냐는 투였다.
"괜히 애처로운 얼굴 하지 마! 속에 시퍼런 칼을 품고 다
니는 여자가."
"큰아가씨."
설희주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설희주, 똑똑히 들어. 운동권 애들과 함께 철없는 짓 하
던 네가 무슨 흑심을 품고 이 집에 기어 들어와 머리를 굴
리는지는 모르지만 날 그렇게 우습게 보지 마! 네가 원수
처럼 여기던 부르조아 집안에 들어왔을 때에야 무슨 꿍꿍
이가 있었는지 그런 것쯤 나도 다 알아. 그리고 우리 정필
씨 어리숙해 보인다구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마! 용돈 얼마
마련하겠다고 철강 몇백 톤 몰래 삼키다가 그게 목에 걸려
결국 우리 정필씨에게 떨어질 명왕성 자동차 대표이사 자
리가 느네 남편한테로 굴러갔지만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
야. 세 끼 밥도 제대로 못 먹던 가난뱅이 집 출신이 이 집
에 들어와 보니 모두가 네 것처럼 보여? 너무 분수 넘친
짓 좀 하지 마!"
설희주는 분을 참느라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얼마
뒤 그녀는 씩씩거리는 정혜 옆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큰아가씨!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하세요? 나는 이 집에 시
집왔으니 좋든 싫든 이 집 식구예요. 아가씨가 미워한다고
해서 내가 이 집을 떠나 주지는 않아요. 그리고 회사 일에
대해서도 그래요. 아가씨나 내가 명왕성 그룹의 뭐예요?
나는 명왕성 그룹 계열회사인 명왕성 자동차 대표이사 아
내예요. 아가씨는 명왕성 그룹 회장 비서실장의 아내예요.
우리는 명왕성 그룹의 직원도 임원도 아녜요. 그리고 기업
이란 기업의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니랍니다. 아버님이 그
룹의 회장이라고 해서 그것이 그 며느리나 딸의 회사가 아
니예요. 우리는 다만."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정혜가 고함을 질렀다.
"이게 웃기고 있네. 말끝마다 우리우리 하는데 너 건방지
게 우리 속에 끼어들지 마! 천박한 가정의 빗나간 딸로 자
라 사회의 천덕꾸러기가 되었던 네가, 남자 하나 잘 꼬셨
다고 갑자기 신분이 달라지는 줄 알아? 이거 왜 이래? 얻
다 대고 우리우리하고 염불하는 거야!"
정혜는 삿대질까지 해대며 떠들었다.
"큰아가씨!"
그러나 분해서 자지러질 줄 알았던 설희주가 이번엔 뜻밖
에도 정혜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는 어
리석은 어린 동물을 바라보듯 했다.
"오빠랑 결혼해서 한 이불 속에서 배때기 비벼댄다고 너라
는 존재가 약물처럼 우리 속으로 스며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네 사타구니나 비집고 비벼대니까 네 남편이 네
것인 줄 알지만 천만에! 오빠는 우리 가족이야. 우린 말
배우기 전부터 한 식구야. 넌 무슨 소릴 해도 이방인이
야!"
차마 듣고 있을 수 없는 저질스러운 인신 공격을 거침없이
했지만, 설희주의 태도는 결심을 한 듯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혜와 싸움을 하려고 들었으나 그러기보다는 체
념을 하는 것이 속편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설희주! 너에게는 무지개빛 미래가 열리는 희망찬 결혼식
이었는지 몰라도,그날부터 우리에겐 지옥같기만한 일상이
시작되었어. 하마터면 순한 우리 오빠가 우리의 적이 될
뻔했단 말야."
"큰아가씨! 목마르실 텐데 쥬스라도 한잔 가져올까요?"
"설희주, 넌 과연 듣던 그대로 영리한 머리와 불의를 꼬집
어내는 선한 가슴을 가졌어. 아마 내가 오빠였더라도 넘어
갔을거야. 하지만 세상은 하나가 아닌 여러 입장들의 각축
장이란 걸 넌 아직 몰라. 이 집안이 네 눈에는 개선해야
하고 개혁해야 하고 거듭 나야 할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안락하고 평화로운 안식처야. 넌 광
풍을 몰고 온 야차에 불과하단 말야."
설희주는 그 동안 조용히 냉장고에서 쥬스 두 잔을 들고
와 한 잔을 정혜 앞에 놓았다.
분노로 끓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녀의 가슴과 그녀의 머리는 너무나 다른 일을 하고 있었
다.
"큰아가씨! 들면서 얘기해요."
"네가 들어온 뒤부터 우리 가족은 모두가 밤잠을 설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어. 피가 끓다 못해 당장 정수리로 터져
나와 분수를 이룰 것만 같았단 말이야. 넌 이 집이 미웁디
미운 오리야, 오리!"
마침내 설희주는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느이 남편이 비행기 특등석에 누워 오대양 육대주 누비고
다니며 백말도 타보고 흑말도 타보면서, 세계 곳곳 기집년
아랫도리에 태극기 꽂느라고 바쁠 때, 우리 정필씨는 노조
대표라는 것들하고 입술이 부르터가며, 멱살 잡이 해가며,
얻어터져 가며 싸우고 이 재산 지킨 거야. 승부란 마라톤
이지. 지금부터야. 지금부터 느이 남편과 정정필의 싸움은
시작이란 말야!"
설희주가 눈물을 보이자 정혜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지고
입이 거칠어졌다. 약세를 보았을 때 완전히 끝장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내가 모를 줄 알아? 우리 정필씨를 차차 무능력자로 만들
어 결국은 나까지 도매금으로 묶어서 이 그룹에서 쫓아내
려는음모! 그 계략을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참동안 어깨를 들먹이며 울던 설희주가 눈물을 닦고 고
개를 들었다.
"큰아가씨, 정 그러시면 우리가 나갈께요. 그 알량한 사장
자리 그이 보고 내놓으라고 하겠어요."
그러나 그 소리를 듣자 정혜는 더욱 펄쩍 뛰었다.
"뮈야? 이거 왜 이래? 이 여자 이제 보니까 점점 더 하는
군. 그 핑계로 명왕성 그룹 조각을 내겠다는 말이지? 알맹
이만 쏙 뽑아 가지고 독립하겠단 말이지? 웃기지 말아! 우
리 아버지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친네야. 허튼 수작 부리
지 말아!"
정혜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럼 도대체 절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제가 나이는 적어
도 올케예요, 큰아가씨! 손위 올케 보고 그럴 수 있어요?"
설희주는 악에 바친 듯했다.
"올케? 흥! 그래 올케로 인정받고 싶거든 행동을 똑똑히
해!
당장 전화 걸어 오빠 집에 들어오라고 하든가, 우리 정필
씨 그 일본놈 자리에 합석시키든가 하란 말야!"
"그건 어려워요."
"뭐야? 그럼 그 장소가 어딘지 대봐. 내가 당장 쫓아갈 거
야."
"몰라요."
"뭐야?"
그때였다. 두 여자의 싸움 소리를 듣고 있던 봉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이제 그만해 둬요, 큰누나!"
그러나 정혜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저리 가!"
"누나 제발 좀 그만둬요. 뭐하는 짓이에요, 이게 다 돈,
사장자리 그게 다 뭐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그리 바둥
바둥해야 돼요?"
"얘가?"
정혜는 너무나 어이 없어하며 고봉길을 바라보았다. 측은
하다는 눈빛이었다.
그때 고회장 부부가 들어왔다.
"아빠 나 분해서 못 살겠어요."
그때까지 서슬이 시퍼렇던 정혜가 갑자기 고회장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얘가 왜 이래?"
고회장은 며느리와 봉길, 그리고 아내 최화정 여사의 얼굴
을 번갈아보며 어리둥절해졌다.
"아빠,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어요? 내가 왜 저런 여자
한테 괄시를 받아야 해요? 내가 누구 딸인데요."
고회장은 사태를 짐작한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루가 빠끔한 날이 없다 없어! 또 뭘 갖구 쌈질이냐!"
"그만해요, 방으로 가."
최화정이 정혜의 팔올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은 저예요, 아버지."
봉길이 푸념을 시작했다.
"아버지, 우리 집안이 왜 이런지 아세요? 이게 모두 그놈
의 돈 때문이에요, 돈! 돈이 없었다면, 아버지가 재산을
모아두지 않았다면 우리 집안이 이 꼴이 되진 않았을 거예
요. 이게 다돈 때문이라구요. 그 놈의 돈 때문에 우리는
어느 땐가 모두 미쳐 버리고 말 겁니다."
고회장은 아무 말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봉식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강형사는 입맛을 쩍쩍 다셨
다.
"그래서 아드님과 며느님을 대관령으로 보내 쉬게 하면서
달아오른 집안 분위기를 식히려 한 것이란 말이죠?"
"꼭 아버님이 그렇게 하셨다기보다는 우리가 떠난 거죠."
"그런데 대관령에는 동생 부부와 함께 간 이유가 뭡니까?"
추경감이 수사 수첩을 뒤져보머 물었다.
"싸운 사람들이 화해하라는 뜻으로 아버님이 뒤에 동생 부
부를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관령에는 별장이 있습니까?"
강형사가 불쑥 물었다.
"회사서 공용으로 쓰는 전용 콘도가 있긴 합니다만."
"대관령에서 동생 내외와 무슨 일을 했나요?"
추경감이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5. 침실의 신경전
"우린 출발부터 따로따로였지만, 솔직이 말해 걔들 거기
온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고봉식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설희주씨와 둘만의 호젓한 여행이었는데.
재미 깨나 보았겠구먼."
"여보슈."
강형사의 빈정거림에 고사장은 불쑥 화를 냈다.
"그런데 왜 부인과 따로따로 돌아왔습니까?"
추경감의 질문이었다. 고사장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싸웠습니다. 만나면 싸우게 되었으니까요."
"그럼 새벽에 부인이 먼저 출발하고, 고사장은 언제 떠났
나요?"
추경감이 지포를 철거덕거렸다. 좀체 불이 켜지지 않았
다.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기도 싫어
나는 땅바닥에서 자고 희주는 침대 아닌 딴 곳에서 잤는데
눈을떠보니까 그 원수는 없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시계를 보니까 7시도 안 되었더군요. 나는 침대에 올라
가서 잠을 더 자다가 식당으로 내려가 더덕구이로 아침을
먹었죠. 그리고는 자동차에 기름을 가득 넣은 뒤 출발했
죠, 이거 다 확인해 본 것 아니오?"
"그때가 몇시쯤이었나요?"
"10시반? 11시? 잘 모르겠는데요."
"아무튼 부인은 그 길로 서울에 돌아온 뒤 몇 시간만에
피살되었습니다. 누가 뒤쫓아와서 죽였는지도 모르죠."
강형사가 다시 고사장의 약을 올렸다.
"이거 보십시오, 형사 나리들. 직업상으로 남을 의심하는
버릇이 몸에 배었는지는 모르시만 분명히 당신들은 헛짚은
거요.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난 아닙니다. 아까 나보고 뒤쫓
아와 죽이지 않았느냐고 아이큐 한 자리수 같은 말씀 하셨
는데, 그래 가지고 범인 잡겠수? 여보슈, 나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마누라와 좀 다퉜다고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일
것 같습니까? 내가 그렇게 멍청한 놈으로 보입니까? 자,
나 일 좀 보게 이만 끝낼까요? 그 와이셔츠는 내 것이 분
명하지만 난 아녜요! 아시겠어요들."
"한 가지만 더 묻고 끝내겠습니다."
추경감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대관령에서 왜 다투었습니까?"
"그야."
고사장은 말을 하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나요?"
강형사가 다시 빈정거렸다.
"치사하게 남의 침실 이야기까지 듣겠다 이거죠. 뭐 이야
기하라면 못한 것도 없어요. 그 여자는."
고봉식 사장은 이 지경까지 와서 못할 이야기가 뭐 있느
냐는 듯 말을 계속했다.
"그 여자는 고집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습
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은 남편과 함께 이불 속에 들어가
서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날 대관령에 도착한 날 밤
."
설희주와 고사장은 별로 다정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래
도 함께 여행을 나서 휴양지에 왔다는 기분으로 다소 마음
이 풀려있었다.
호텔 라운지에서 포도주와 함께 저녁을 먹은 두 사람은
적당히 피곤한 기분으로 호텔 침실로 들어갔다.
"먼저 샤워하세요."
설희주가 고봉식의 점퍼를 받아 걸면서 말했다.
"아냐, 희주가 먼저 해. 난 한잔 더 마실 거야."
고봉식은 들고 온 가방에서 작은 양주병을 꺼내더니 옆방
에 있는 간이 바아로 갔다. 호텔의 스위트 룸이나 딜럭스
룸 스타일로 된 이곳에는 부속실이나 바아 응접실 같은 것
도 붙어 있었다.
고봉식이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너댓 잔 마신 뒤에 설희주
가 욕실에서 나왔다.
욕실에서 갓나오는 여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상기된 뺨과
신선한 피부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타올만 걸치고 나온 설희주가 대형 거울 앞에서 하늘하늘
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모습을 고봉식은 옆방에서 열
린 문으로 곁눈질하고 있었다.
허리에 감고 있던 대형 타올을 스르르 발목으로 풀어 내
리자 눈부신 그녀의 나신이 전개되었다. 고봉식은 숨을 멈
추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 여자들의
단점인 짧은 다리와 처진 히프란 설희주의 나신에서는 흔
적을 볼 수 없었다.
가늘고 나긋한 목과 작은 어깨, 약간 굽은 듯한 등의 곡
선이 허리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는가 하면 육중한 히프가
흐르는 선을 받치고 있었다.
뒷모습을 보이며 옷을 갈아입고 있는 설희주가 처음 보는
매혹의 여자 같다고 고봉식은 느끼고 있있다.
얇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설희주가 뒤로 돌아섰다.
뒷모습 못지않게 잠옷 모습의 설희주는 매력적이었다. 물
에 젖은 채 풀어 늘어뜨린 긴 머리칼이 관능적이었다. 풍
부한 앞가슴이 걸을 때마다 얇은 잠옷 섶을 헤치고 나올
듯이 출렁거렸다.
고봉식은 먹던 잔을 내려놓고 침실로 들어섰다. 눈이 게
슴치레하게 풀렸다. 탐욕의 시선을 설희주의 전신에 뜨겁
게 퍼부었다.
고봉식이 슬그머니 다가가 희주의 허리를 껴안았다.
"갑자기 왜 이래요. 아유, 술 냄새. 샤워 좀 해요."
설희주는 감겨오는 고봉식의 팔을 풀어내며 얼굴을 찡그
렸다.
"알았어. 샤워하고 올 테니까."
고봉식은 어린아이처럼 말을 잘 들었다. 그는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라도 하듯 욕실로 들어가 옷을 훌훌 벗어던진
뒤 폭포같은 물줄기를 머리에 퍼부었다.
전신에 물벼락을 맞듯 하고는 타올로 대강 전신을 훔치고
침실로 급히 나왔다.
그 동안에 설희주는 트윈 침대의 한 곳에 얌전히 누워 눈
을 감고 있었다.
고봉식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벌거벗은 채 뜨거운 몸으
로 설희주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는 시트를 걷어내고 우악스럽게 설희주의 잠옷을 벗겨
냈다
"이거 왜 이래요?"
그러나 고봉식의 서두는 몸짓에 비해 설희주는 너무나 싸
늘했다. 그녀는 몸을 움츠린 채 고봉식을 받아들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몇 달 동안 같이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신
혼 1년을 어영부영 보낸 뒤에 그들의 마음은 멀어지고 따
라서 육체도 멀어지고 있었다.
매일처럼 대화를 나누던 육체는 1주일에 한번으로 뜸해지
다가 다음엔 한 달에 한번, 그 다음엔 거의 끊어지고 말았
다. 그들의 육체는 그들의 마음처럼 차차 무관심과 때로는
증오로까지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참지 못한 고봉식이 이성을 잃고 덤벼들
었던 것이다.
그러나 싸늘하게 얼어붙은 설희주의 육체는 좀체 고봉식
의 뜨거운 몸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고봉식은 일방적으로 설희주의 잠옷을 뜯어내다시피 벗기
고는 그녀 위에 올라갔다.
"설희주, 넌 아직도 내 아내야. 아내는 남편의 몸을 받아
들일 의무가 있어!"
고봉식이 식어 있는 설희주의 몸을 깔아뭉개며 말했다.
"이거."
꼭 붙이고 있는 설희주의 허벅지를 억지로 헤집으며 고봉
식이 신음처럼 말했다.
설희주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가만히 있었다.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겨 두었다. 고봉식은 열심히 그녀의 몸 위에
서 땀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무기력한 상
대를 공격하는 배고픈 사자에 불과했다. 아무런 감흥도 느
낄 수 없는, 생명 없는 물체와 사랑을 하는것 같았다.
"더럽고 비겁한 남자."
고봉식이 절정에 이르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몸을 팽
개쳐두었던 설희주가 냉소와 함께 던진 말이었다.
"뭐야?"
설희주는 고봉식의 밑에 깔린 채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
다.
동물적인 포만감으로 차 있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역겹고
치사해보였다. 욕설을 뱉은 설희주는 그것만으로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느글느글하고 더러운 사나이의 얼굴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여자의 감정은 손톱만치도 생각치 않고 남편이라
는 이름으로 제멋대로 동물적 욕심을 채우고 만족해 하는
모습을 도저히 참을 길이 없었다. 처음부터 고봉식을 사랑
하거나 존경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
다. 설희주는 고봉식에게 접근해 그의 관심을 끌어들이고
사랑 놀음을 하고 결혼에까지 이른 것이 완전한 자의적인
일로만 생각지는 않았다. 목적이 있는 사랑,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냐고 오민수가 타이를
때,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강력하게 부인하지 못했다.
결혼한 뒤 그녀는 한번도 고봉식을 인격적인 파트너로 생
각한 적이 없었다. 그와 섹스를 하면서도 더러운 일을 참
는다는 기분만 가지고 있있다.
그러한 감정이 마침내 폭발점에 이른 것이다.
"퉤!"
설희주는 아직 덮쳐 누르고 있는 고봉식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얼굴을 돌려 버렸다.
"이년이 미쳤구나!"
갑자기 최대의 모욕을 당한 고봉식은 금방 얼굴에 핏줄이
섰다. 눈이 사납게 치껴 떠지면서 손으로 설희주의 뺨을
때렸다.
"이게 남편 얼굴에 침을 뱉어? 하늘 같은 남편을 뭘로 생
각하는 거야? 운동권 출신 계집년들이 독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너 같은 년 첨 보겠다. 이년이 내가 더러우면 아
예 벌리고 드러눕지를 말지! 더러운 년! 퉤퉤!"
고봉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닥치는 대로 욕을 퍼붓고
얼굴을 때리며 날뛰었다.
수십 차례 따귀를 얻어맞은 설희주는 벌떡 일어나 벗은
채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문을 잠근 뒤 혼자 거울
앞에 섰다 얼굴과 목에 매서운 고봉식의 손자국이 남아 있
었다.
이제 갓 서른. 발랄한 육체와 꽃 같은 나이가 서러웠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나신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
렸다. 그녀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새우
다시피 하고 날이 밝자마자 혼자 서울로 돌아와 버렸던 것
이다.
고사장의 그날 밤 이야기는 거의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곳을 출발한 시간도 강형사가 조사한 것과 일치되었다.
"하지만 이 피묻은 와이셔츠의 수수께끼는 아직 풀린 것
이 아닙니다."
강형사가 다시 못을 박아두려는 듯이 말했다
"도대체 그 와이셔츠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고봉식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피살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곳 침대 밑에 말입니다."
추경감이 느릿하게 대답해 주었다.
"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와이셔츠 바람으로 희주를 찔
러 죽인 뒤 피묻은 그 옷을 벗어 침대 밑에 넣어두는 멍청
한 짓을 할 것 같습니까? 당신들이 정말 형사는 형사요?"
고봉식의 말이 그럴 듯하게 들렸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누군가가 고봉식 사장이 범인이라고
꾸민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죠. 그러면 자신은 혐의권에
서 벗어나니까요."
"뮈요?"
강형사의 억측에 그는 정말 화를 벌컥 냈다. 그러나 강형
사의 말이 꼭 억측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추경감은 생각했
다.
사람을 죽인 뒤 피묻은 자기 옷을 현장에 감추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강형사 말처럼 자기를 범인으
로 몰려는 진짜 범인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방법일
수 있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별수 없이 고봉식의 사무실을 나오고
말았다.
추경감은 시경으로 돌아가고 강형사는 그냥 돌아갈 수 없
다고 고집하며 혼자 고봉식의 막내동생인 고봉길을 찾아나
섰다.
고봉길은 밤에만 여는 영동 서초동의 어느 살롱에서 찾아
냈다. 침침하고 텅빈 좁은 무대 위에서 기타 연습을 하고
있었다.
밤이면 휘황한 각종 조명이 날뛰고 술 냄새, 담배 냄새,
여자의 화장품 냄새와 육욕이 얼룩져 광란의 무대가 되던
살롱 안도 대낮에는 박쥐가 나올 듯 음산하고 침침했다.
"이거 강형사가 여기를 다 찾아오고. 역시 형사는 형사시
군요."
고봉길이 강형사에게 딱딱한 연주용 의자를 권하며 인사
말을 이렇게 했다.
"재벌가의 막내 도련님이 왜 이렇게 구차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죠?"
강형사가 담배를 꺼내 물고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흥! 재벌가라구요? 하하하, 그래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
입니까? 어디에서 태어났다면 그것으로 그 사람의 운명이
정해지는 그런 게 난 제일 싫습니다. 아니, 그보다 명왕성
그룹인가 뭔가 하는 그 거추장스런 형용사가 나한테는 안
맞는단 말입니다. 형수, 불쌍한 우리 형수 설희주씨도 안
맞는 집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비극이 일어난 겁니다. 근데
범인은 어떻게 되었나요? 잡았나요? 아니지. 대한민국 형
사들이 범인 잡는 것 못봤으니까. 누가 제보나 해준다
면 모를까."
강형사는 고봉길이 대낮에 취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환각제 같은 것을 먹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의 말꼬리를 문제삼지 않았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어요. 사건 당시 혹시 비명 소리 들
은 시간을 착각한 것 아닐까요?"
"누가 말입니까?"
"당신 말이요."
"천만에요. 틀림없이 그 시간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설희주씨는 당신이 발견한 그 순간, 즉 비명을
듣고 2층서 뛰어내려온 그 시간보다 두 시간 전에 죽은 걸
로 판명이 되었거든."
"내가 착오가 있어도 2, 3분이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뭘 잘못 알고 계시군요. 2시간 전에 죽었느니 어쩌느니,
시체의 경직도로 봐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 너무 들어
귀가 따가워요. 당신네들 그 과학수사라는 것 믿을 수 있
는 거요?"
고봉길이 다시 빗나가기 시작했다.
"고봉길씨는 비명을 들은 시간에 대해 틀림없다고 확신하
는 근거가 있나요?"
"노래 연습 하다가 방송국 쇼프로 피디한데 전화 걸기로
되어있었거든요. 솔직이 피디한데 아쉬운 부탁 하는 무명
가수가 시간 약속을 어떻게 어기겠습니가? 노래 연습을 하
면서도 나의 모든 신경은 전화기와 시계에 가 있있거든
요."
그럴 때는 고봉길의 말에 조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날 방송국 피디한데 전화했나요?"
강형사가 물었다.
"전화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슈. 집안에 피투성이가 되
어 죽어 쓰러진 사람이 있는데 전화할 경황이 어디 있어
요. 아니, 전화를 하기는 했지. 경찰서에 말이요. 당신 혹
시 아이큐 두 자리 수 아니오?"
고봉길이 손가락으로 강형사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웃음 띤 얼굴은 바보스러웠고 눈은 촛점을 잃고 있었
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러는데 모르는 것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강형사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말해 봐요."
고봉길은 기타의 둔탁한 음을 크게 한번 퉁기면서 대답했
다.
"설희주씨가 죽음으로써 명왕성 그룹 안에서 가장 득을
보는사람은 누굽니까? 뭐 꼭 대답 안 해도 됩니다."
"하하하, 득을 볼 사람? 하하하, 많지요, 많아."
고봉길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득을 볼 사람이라기보다는 좋아할 사람이란 말이 옳아
요. 좋아할 사람, 그렇지 그렇고말고."
고봉길은 아주 그럴 듯하다는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몇번이나 감탄스러워했다.
"그래 좋아할 사람이라도 좋아요. 그게 누굽니까?" 강형
사가 긴장하며 물었다.
"우선 우리 형이 좋아하겠지요. 그 지긋지긋한 마누라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오매불망하는 애인 경숙이와 결혼할
수도있고."
"경숙이 누구요?"
"명왕성 자동차 사장 비서지요. 꼭 걔가 아니더라도 몸매
잘 생기고 잘 길들인 치와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 즐
길 수도 있겠지요. 그 다음 틈만 나면 응얼거리는 우리 큰
누나. 눈에 가시 같은 올케가 없어지면 얼마나 속 시원하
겠소. 다음 우리 알량한 매형 정정필 비서실장님. 또 늘
껄끄럽게 생각하는 젊은 시어머니 최화정 여사, 며느리라
기보다는 같은 또래의 여자로서, 명왕성가에 들어온 여자
로서 라이벌이 하나 없어지는 셈이니까. 또, 또 있지요.
명왕성 그룹의 총수 우리 아버님. 툭하면 재벌 그룹의 정
의를 내세우는 설익은 며느리의 충고를 듣지 않아도 되니
까요. 그뿐 아닙니다. 촌스럽고 천한 행동으로 상류 집안
의 체신을 망가뜨린다고 늘 걱정을 하는우리 둘째 누나 영
혜. 그 촌닭이 없어지면 집안 망신시킬 일 없으니 마음 편
하겠지요."
"고봉길씨는 어떻소?"
듣고 있던 강형사가 불쑥 질문을 했다.
"나요? 하하하."
그는 기타를 퉁겨 요란한 웃음 소리 같은 걸 냈다.
"내 마음은 강형사님이 알아맞혀 보기로 하지요."
"그러고 보면 온 식구가 설희주를 좋아하지 않았군요."
"그 외에도 또 있을 겁니다. 하지만 슬퍼할 사람도 있을
걸요."
"그게 누구요? 고봉길씨?"
"오민수!"
고봉길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민수? 그가 누구요?"
"오민수만은 슬퍼할 겁니다. 이 집에 시집 온 것부터 인
정 않으려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한번 찾아보시지요. 그도 명왕성 그룹의 당당한 식구니
까요. 자, 그럼 자리 좀 비켜 줄까요? 나도 이제 밥벌이
연습 좀 해야겠으니까."
고봉길은 강형사의 존재를 그때부터 무시하고 노래 연습
을시작했다. 강형사는 하는 수 없이 그 침침하고 기분나쁜
살롱을 나오고 말았다.
6. 시다의 노래를 부르며
강형사는 오민수가 명왕성 그룹 하청 회사였던 명왕성 기
계 주식회사의 생산부 직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명왕성 기
계는 원래 조양 기계라는 자동차 부품 하청회사였는데 부
도가 나는 바람에 명왕성 그룹에 흡수되고 이름도 명왕성
기계로 바꾸었다. 종업원들도 거의 함께 인수되어 오민수
도 명왕성 기계 사원이 되었다.
오민수는 설희주와 대학 시절에 함께 뛰던 동료요 연인이
었다.
강형사는 명왕성 기계의 지하 식당 모퉁이에서 오민수와
마주 앉았다.
강형사는 다시 한번 메모해 둔 수사 수첩을 꺼내 보았다.
오민수.
1958년 충남 공주생.
신라대학 재학 시절 운동권 핵심 간부로 다섯 차례 연행
된 적 있음.
과격 학생 단체인 학총련에 가입했다가 뒤에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노학총련 간부로 활약.
현재 명왕성 기계 노조 쟁의부장.
공주에서 노점상을 하는 홀어머니가 있고, 아버지는 택시
기사였으나 교통 사고로 사망.
주소는 명왕성 기계 기숙사로 되어 있으며, 조양 기계회
사에는 공채로 들어가 스스로 생산부에 배치되어 그곳의
노무 관리를 했음.
성격 온순하고 원만하나 한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내는
외유내강형의 표본. 지도력이 강하고 따르는 동료가 많음.
기성 세대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
개혁으로 노동자 해방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학생 때
부터 해옴.
강형사의 수첩에는 대강 이런 것들이 메모되어 있었다.
그것은 학생 운동 문제를 담당했던 부서에서 얻어낸 당시
의 기록과 최근 주변 사람들로부터 취재한 내용들이었다.
"바쁜 시간에 불러내서 미안합니다."
강형사가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170센티는 됨직한 중키에 알맞은 체격이 작업복과 잘 어
울렸다. 반듯한 이마와 진한 눈썹, 오똑한 코 등 이목이
선명했다.
얼굴의 인상은 온화하게 보였으나 한일자로 다문 얇은 입
술이 범상하지 않은 의지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피우지 않습니다."
오민수는 약간 미소를 띠며 담배를 사양했다.
"설희주씨가 죽은 건 아시죠?"
강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신문을 자주 보시나요?"
"자주는 보지 않습니다만, 민족신보만은 가끔 봅니다."
"설희주씨와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관계라뇨?"
오민수가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어떤 사이였나 하는 그런
일반적인 뜻입니다."
"말씀드릴 게 별로 없습니다."
오민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이였나요?"
그러나 오민수는 묵묵부답인 채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
고있었다.
"최근에 만난 적 있어요?"
그러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말을 해요. 최근에 만난 적 있어요, 없어요?"
강형사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한참 시선을 떨어뜨리
고있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언제야?"
강형사 입에서 금방 반말이 튀어나왔다.
"대답해! 솔직이 말하자면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이 오민수 당신이야! 젊은 날을 깡그리 바쳐 임
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며 데모 대열에 섰던 설희주와
오민수! 그러던 설희주가 어느 날 돌연 변절하여 당신 곁
을 떠났어! 명왕성 그룹 고회장의 장남한테로 시집 갔어.
졸지에 오리알 신세가 된 당신!"
"야비한 말 삼가합시다."
오민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러나 자제하는 모
습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설희주를 잊을 수 없었어. 달아난
말을 죽이고 싶었겠지. 운명의 신은 묘한 장난올 했지. 당
신을 명왕성 그룹의 계열 회사로 끌어다 놓았어. 사랑하던
옛 애인이요 이념의 동지가 사장 부인으로 있는 그 회사의
사원으로 말이야."
"노동자는 노동 현장이라면 어디든지 갑니다."
"이 소설 같은 슬픈 러브 스토리를 어떻게 설명하지?"
강형사가 훙분해서 삿대질까지 하며 말을 계속했다.
"사랑은 마침내 증오로 변하고, 도저히 더 참을 수 없던
오민수는 마침내 저주스런 로마의 칼, 복수의 칼을 들
고."
"오래 되었습니다."
강형사의 억양높은 억측을 잠재우려는듯 오민수가 차분하
게 그의 말을 끊었다.
"뭐가 오래야?"
"희주를 잊은 지 오래 됩니다."
"거짓말 말아. 당신이 명왕성 그룹 안에 있는 한 잊을 수
가없어. 사랑하는 옛 애인이 노동자의 적인 착취자의 어부
인이 되어 고급 승용차의 쿠션에 묻혀 백화점으로 쇼핑을
갈 때, 발리행 비행기를 타러 갈 때, 솔아 솔아 푸른 솔아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를 부르던 당신의 기분이 어떻겠어.
난 다 알아."
강형사는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훅 뿜어냈다. 왜 내가 이
렇게 흥분했냐고 후회하는 것 같았다.
"전 희주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민수는 여전히 차분한 목리로 말했다.
"처절한 미련 부스러기를 부여 안고 소주잔 기울이며 울
지는 않았겠지. 때로는 분을 삭이는 노래도 불렀겠지. 사
랑도 미련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핑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
세."
강형사는 갑자기 운동권 노대를 외우며 오민수를 건너다
보았다.
"전 희주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거짓말 말아요. 당신은 스스로 자청한 참혹한 자학을 음
미하며 증오를 매일매일 키웠던 거야. 그것은 마침내
."
"그렇지 않아요."
오민수가 더 참을 수 없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거짓말! 당신의 가슴은 중오로 불탔어. 단결투쟁가를 부
르며 복수의 칼을 갈았어."
"너무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오랜 시간 연구했어, 가장 혹독한 복수의 방법
을. 그리고 마침내 그 집에 있는 저주의 칼을 설희주, 아
니 부르조아의 노리개 가슴에 꽂았던 거야. 꽂았지, 그렇
지? 당신이죽인 거지?"
강형사는 이성을 잃고 오민수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식당에서 간식을 하고 있던 사원들이 이쪽으로 슬슬 다가
왔다.
강형사는 주위의 시선을 느끼며 슬그머니 멱살을 놓고 그
자리에 앉았다.
"어때? 당신이 죽인 거지?"
그러나 오민수는 이제 빙그레 비웃음 같은 것을 얼굴에
띠며더 대답하지 않았다.
"설희주씨를 최근에 만난 것이 언제였죠?"
강형사는 다시 평온한 감정으로 되돌아가 조용히 질문했
다.
"희주가 죽기 1주일쯤 전인 것 같습니다. 확실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겠구요."
오민수도 차분하게 대답했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봐요."
강형사가 다시 담배를 권하자 이번에는 오민수가 받아들
었다. 강형사가 라이터를 켜대자 그는 불을 붙여 깊이 한
모금 빨아들였다.
"전화를 했더군요. 노조 사무실로."
오민수가 무겁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영등포 지하철역 입구의 어느 다방에서 만났지요. 그리
긴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핼쓱해진 얼굴이 그
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더군요."
그는 연민의 정을 느끼는 듯 다시 눈을 밀으로 내리감았
다.
"자기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그러더군요. 난 그냥 담배
만 피우고 있었어요. 별로 할 말도 없고. 그뿐이었어
요."
"용서? 용서해 달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오민수는 묵묵부답이었다.
"당신이 혐의권에서 벗어나자면 낱낱이 이야기를 해야 돼
요. 당신이 이야기 안 하더라도 우리는 다 알게 된단 말입
니다."
강형사가 다시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못할 것도 없지요."
오민수는 결심한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시각에서 말
하는 그들의 관계는 비교적 진실에 가깝다고 강형사는 느
꼈다.
그들은 그날 영등포역 입구의 허름한 지하 다방에서 만났
다.
그들이 노동운동을 할 때 몇번 만난 적이 있는 곳이었다.
퀴퀴한 소독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리 기분좋지 않은 다
방이었다. 야한 옷을 입고 야한 화장을 한 레지가 껌을 딱
딱 씹고 히프를 유난히 흔들며 차 주문을 다니는 그런 곳
이었다.
마주앉은 두 사람은 한때 아무 말도 없었다.
수수한 원피스 차림에 구찌 가죽 백을 든 설희주는 퍽 핼
쓱해보였다. 머리를 짧게 깎은 오민수는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다. 그가 1년에 한두 번 하는 차림이었다.
"어떻게 지내요?"
설희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오민수는 그냥 약간
웃어보일 뿐이었다.
"월급은 괜찮게 주나요?"
오민수는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였다.
"결혼 안 하세요?"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한참만에 오민수가 입을 열었다.
"제가 뭐 도와줄 게 없나요?"
그러나 그 말이 오민수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사모님 도움을 안 받아도 저 혼자 잘 살아갑니다."
"제발 민수씨."
"그래 사모님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가요? 꿈이 잘 익어가
나요?"
오민수의 눈은 갑자기 불타기 시작했다.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군요. 용서를 빌지는 않겠어요.
나는 내가 택한 일이 결코 잘 되었다고는 생각치 않아요.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밖에 할 수가 없었어요."
설희주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녀는 그녀가 일생 일
대의 결단을 내리고 고봉식의 아내가 되던 순간을 생각했
다.
오민수도 설희주를 측은하게 생각하며 4년 전 그녀가 자
기곁을 떠나던 때를 생각했다.
그들은 공윈 벤치에서 어둑어둑해질 무렵 마지막 만났었
다.
"그래 잘 생각했는지 몰라. 아니, 아주 잘 생각했어. 나
라는 인간은, 오민수라는 이 인간은 희주한테 처음부터 역
시 어울리지 않는 놈이야."
어둠을 뚫고 오민수의 눈은 불타고 있었다.
"미안해요, 민수씨. 하지만 이건 또 하나의 투쟁 방법일
뿐이야."
"또 하나의 투쟁 방법? 하하하. 정말 그럴까? 그건 도피
일지도 몰라. 도피도 때로는 필요하지. 하지만 이 말 한
마디는 꼭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어.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진실을 외면한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것이 파멸된 인생에서 무슨 가치를 찾아내겠
어?"
"나두 그런 전 모르는 건 아녜요. 우리가 함께 진실과 민
주의 탑을 쌓던 많은 날들을 내가 왜 가치 없이 생각하겠
어요? 노동 현장에서 목숨을 바치며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
로부터 왜 돌아서겠어요? 하지만 그게 왜 우리 사이를 가
로 막는 장애물이 되어야 하죠? 우리는 왜 결혼하면 안 되
죠? 투쟁과 해방은 정의고 남녀의 사랑은 불의인가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오민수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몰라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런다고 뭐가 이루어지나요? 나
는 무슨 짓인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요."
설희주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동료들 앞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우리 승리하리라'
를 선창하던 투사 설희주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희주,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를 지금까지 잘 따라
주었잖아! 솔직하게 이야기해 봐? 이제는 가난이 지긋지긋
하게 싫다든가, 안정되게 살고 싶다든가."
그러나 설희주는 더욱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만 했다.
"난 누구보다 희주 마음을 잘 알아. 나 역시 우리 둘만의
보금자리를 구축해서 남들처럼 아기를 가지고 나른한 일상
의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직 그렇게 안주해서는 안 되는 거야! 우리들 귀
에는 아직도 쟁쟁하지 않아? 저들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아? 십만원도 안되는 임금을 받으며 밤을 새워 일하는
어린 동생들의 눈망울이 보이지 않아? 가난해서 못 배운
설움만도 뼈 아픈데 걸핏하면 교양 없다 무식하다 쥐어박
고, 부모님이 나에게 지어 주신이름 있건만 공돌이 공순이
개 부르듯 불러대네."
오민수는 투쟁할 때 부르던 노래 귀절을 외쳐댔다.
"그만."
"그 애들의 한숨 소리가 들리지 않아?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오민수는 혼자 나직하게 '시다의 꿈'을 불렀다. 그의 눈
에도어느덧 이슬이 맺혔다.
설희주도 울음 섞인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것
은 과거 학창 시절 그들이 좌절할 때 힘을 주던 곡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이 이별가처럼 슬펐다.
"알아요. 나도 알아요. 하지만 돌멩이를 던지고 구호를
외치고 공장에 뛰어든다고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무슨 도움
이 돼요? 난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어요. 우리가 결혼해
서 함께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설희주는 노래를 그치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래 재벌 2세의 어부인이 되면 여러 가지 방법이 생기
겠지. 하하하, 고급승용차를 타고 골프장을 드나들면서 재
봉틀 앞에서 고사리 손으로 졸음 오는 눈을 비비는 어린
노동자를 생각한다? 그거 아주 기가 막히는군! 아주 기막
힌 드라마야!"
오민수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해서 큰 소리로 말했
다.
그러나 설희주는 냉정을 되찾은 듯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했다.
"용서하세요."
추경감에게 강형사는 그가 조사해 온 내용을 샅샅이 보고
했다. 주로 오민수라는 용의자에 관한 내용이었다.
"오민수, 그 녀석은 대학 다닐 때부터 이름난 꾼입니다.
구제불능이죠. 그 녀석이 처음 대학 들어갔을 때는 무림파
의 영향을."
"가만 있어, 무림파가 뭐야?"
강형사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던 추경감이 갑자기 질문
을했다.
"학생 운동의 한 계파라고 할 수 있지요. 70년대 초의 학
생운동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도와 학업이 끝난 뒤 사회 참
여를 해야 한다는 측, 또 조직 같은 것은 만들지 말고 하
자는 둥 갖가지로 갈라져 있었죠. 그 중 두 가지 큰 세력
이 있었는데 그 첫째가 학림파(學林派)이고 둘째가 무림파
(霧林派)라는 거였죠. 학림파는 조직을 피하지 않았지만,
무림파는 말 그대로 안개 속에 묻혀 운동을 했기 때문에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웠죠. 그 중 노동 운동에 더 관심을
가진 것이 무림파였지요.
그들은 위장하여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잠든 노동자를 깨
어나게 하는 일을 했지요. 뒤에 공단마다 문제가 된 도산
같은 것도 그 유형입니다."
"자네는 언제 그런 걸 그렇게 알았나?"
추경감이 마냥 훙미가 있다는 듯이 되물었다.
"오민수 때문에 좀 알아보았지요. 무림파는 뒤에 PD파의
뿌리가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정설은 아닙니다."
"PD파?"
"예, 방송국의 피디라는 PD가 아니구요, 피플스 데모크라
시라는 약자입니다. 즉 민중 해방, 혹은 민중 민주주의라
고 할까요. 그와 대칭되는 운동권으로는 NL이라는 것이 있
지요. 내셔널 리볼루션이란 말의 약자인데, 민족 해방 혹
은 민족주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최근의 학생 운
동은 대체로 이 두 파가 주도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말이야."
추경감은 담배를 꺼내 물고 고물 지포 라이터를 철거덕거
리며 질문했다.
"주사파라는 것은 어디 속하는 거야?"
"어디 속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로 NL파에 많이 있다
고 보아야 하겠지요. NL의 슬로건은 민족통일, 민족해방에
있으니까요. 대체로 학생 운동의 기저에는 우리 사회를 반
봉건 식민지 사회로 보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따라서 독재
니, 군사 정부니 하는 것은 반봉건의 규범 속에 있는 것이
고, 식민 사회는 미국이나 여타 강국의 종속을 뜻하는 것
이지요. 따라서 다른 표현으로는 반파쇼, 해방을 주장하게
되지요. NL파가 요줌학생 운동의 주류이고, PD는 그보다
약세라고 보여집니다.
노동 운동을 주도하는 운동권은 주로 PD 쪽에 많습니다.
따라서 오민수는 무림파와 PD에 뿌리를 둔 운동권 출신으
로 분류됩니다."
"흠!"
추경감은 몹시 흥미있는 듯 무림, PD라는 말을 여러 번
되뇌었다.
"하긴 45년 해방을 전후해서 우리 선배들이 뭔가 잘못 이
끌어간 점이 많긴 많아. 그 결과가 오늘날 운동권을 잉태
하게 했지. 그래 오민수는 요즘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거
야?"
"물론입니다. 입장은 좀 달라졌지만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를 위한 투쟁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설희주는 함께 그 길로 달리다가 방향을 바꾼 셈이군."
"두 사람은 동지이면서 연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다
가 행동이 달라진 것이지요."
"설희주가 왜 생각을 바꾸어 재벌 2세와 결혼을 하게 되
었을까? 말하자면 오민수에게는 배신자가 된 셈이지. 오민
수를 배신한 것은, 즉 운동권을 배신한 것 아니겠는가?"
추경감이 강형사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각도로 볼 수도 있지요. 설희주는 원래 가정에서부
터 한이 서린 여자였습니다."
강형사가 알아낸 설희주의 가정은 흔히 볼 수 없는 비극
의 집안이었다.
아버지가 철도청 선로원으로 다닐 때는 비록 가난하게 셋
방살이를 했지만 단란하게 자랐다. 아버지, 어머니와 공부
잘 하는오빠, 언니, 그리고 설희주 등 다섯 식구가 오손도
손 살면서 희망 어린 장래를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뜻밖의 사고로 죽으면서부터 불행의 태
풍은 이 집에 휘몰아쳤다. 그때만 해도 시원찮게 주는 보
상금 문제때문에 철도청 높은 사람들과 싸움이 시작되었
다.
그러나 본인 잘못이 더 컸기 때문에 규정상 어쩔 수 없다
는 냉정한 주장 때문에 돈이라고 할 수 없는 형식적인 보
상만을 받았다.
사람의 목숨값이 이렇게 허무할 수 있는가 하고 설희주는
분노의 눈물을 흘린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세 남매가
어머니를 끌어안고 통곡을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학에 다니던 오빠는 더 이상 학비를 댈 수 없어 휴학하
고 군에 입대했다. 언니 설명주는 구로동 공단의 어느 봉
제 공장에 들어가 고달픈 시다 생활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봉천동 시장에서 과일 노점상올 벌여 놓고 단속
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설희주도 학교를 집어치우고 집안 살림에 보탬을 주려고
했으나 어머니와 언니가 극구 반대했다.
"희주 넌 머리가 아까와. 나야 아무리 공부해도 두각 나
타내기가 어렵지만, 너는 반에서 수석을 하는 머리가 아깝
지 않니. 내가 힘껏 벌어 뒷바라지해 줄 테니 넌 끝까지
공부를 해야돼. 대학까지 가서 우리 집안의 한을 풀어야
해."
언니 명주는 이렇게 희주를 격려했다.
"네 언니 말이 맞다. 넌 아무 걱정 말고 공부나 계속해
라."
어머니도 이렇게 말했다. 하루 종일 시장 경비원에게 쫓
겨다니며 숨바꼭질하느라 정갱이에 시퍼렇게 멍이 든 어머
니는 고단한 줄도 아픈 줄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의 가정은 이 정도에서 일어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언니는 고달픈 시다 생활을 견디다 못해 자포자기
해 버렸다. 희주가 대학 2학년이 되자마자 언니는 공단 주
변의 한 건달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쥐꼬리만한 월급과
밤을 낮처럼 새우는 공순이 생활을 더 이상 참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은 그뿐이 아니었다. 행상을 하던 어머니는
과일 바구니를 머리에 인 채 이곳 저곳으로 쫓겨다니다가
도시락 배달하는 오토바이에 치어 뇌진탕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홀어머니와 함께 시장 주변에서 도시락을 만들어 팔아 입
에 풀칠을 하는 소년은 무면허 오토바이 운전사였다.
물론 한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다. 어머니의 한 서린 시신
을 화장터로 싣고 가면서 군에서 갓 제대한 오빠와 희주는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희주야, 용기를 내라. 이 불행은 우리만 겪는 것이 아니
다. 이 나라에 태어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알아? 그래도 고문 당해 사지를 찢기거나
죽어 나오는 것보다는 얼마나 나으냐?"
오빠는 이렇제 말하며 희주를 달랬다.
그러나 그 오빠가 먼저 허물어지고 말았다.
제대한 뒤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일거리를 찾으려고 했
다.
그러나 고등학교 중퇴의 실력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공사판 여기 저기를 찾아다니며 막일을 하기 시작
했다.
그러나 그렇게 이를 악물고 견딘 것도 몇 달뿐이었다.
어느 날 다시는 오빠를 찾지 말라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그는 사라져 버렸다.
희주는 울부짖으며 오빠를 찾으러 온갖 노력을 했으나,
한강에 투신자살했을 것이란 확실치 않은 소식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가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겨울의 일이었다.
희주는 학총련의 여학생 부장으로 노동 운동을 하고 있었
다.
회장인 오민수와 함께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암울한 겨울
의 일이었다.
"설희주는 절망의 끝에 서 있었던 겁니다. 자기 자신을
묶어놓은 현실의 매듭을 풀 재주도 기력도 없었다고 보아
야죠. 그 극한적인 상황에서 그녀가 무슨 행동을 취했다고
한들 이땅의 누가 그녀를 나무라겠습니까? 재벌의 며느리
가 아니라 독재자의 첩이 된들 누가 이의를 달겠습니까?"
이것은 오민수가 강형사에게 한 항변이었다.
"거참, 드라마 같은 비극이군, 쯧쯧."
추경감은 혀를 차면서 강형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시대에 그 여자 같은 비극을 혼자만 겪는 것은 아
니란 말야. 625 전쟁통에는 그보다 더한 비극이 얼마든
지 있었단말야!"
추경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경감님, 설희주가 학총련에 가담하여 돌멩이를
들고 최루탄과 맞선다든가, 공순이로 위장해서 배부른 사
장님과 말다툼을 한 동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강형사가 항변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 말고도 사회를 바꾸는 노력은 얼마든
지 할 수 있어. 그것은 파괴적인 방법일 뿐이야."
추경감은 강형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철석 같은 이념으로 뭉친 설희주가 왜 오민수를 차
버리고 그들의 적인 재벌 집안으로 뛰어들었을까?"
추경감이 다시 담배를 물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지는 않
고 필터를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재벌이 무조건 운동권의 적은 아닙니다."
강형사가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이 사람 운동권 공부를 좀 하더니 이상해진 것 아냐?"
추경감이 강형사를 보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
지만 전 설희주의 엉뚱한 행동에 이해되는 구석이 있기도
합니다."
"오민수가 설희주를 어떨게 생각하고 있느냐도 문제일 수
있어."
"말은 설희주를 이해한다고 했지만 속으로야 배신자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중의 배신자인 셈이지요. 이념의
배신자, 사랑의 배신자."
"오민수와 설희주가 애인 사이였음은 틀림없는 거야?"
"글쎄 그렇다니까요."
"괜한 사람들 그렇게 모함하지 말고 다시 잘 알아봐. 만
약 그것이 확실하다면 오민수가 설희주를 죽일 동기가 성
립되는거야."
"동기는 성립되지만 실현한 흔적은 아직 아무것도 없습니
다."
7. 비극의 연인들
강형사는 설희주의 과거에 정정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더 캐기 시작했다. 오민수가 설희주를 죽인 범인일 것이라
는 수사관의 시각이라기보다는 이 시대의 불행한 젊은이들
의 고뇌와 갈등이 그를 움직인 것이다. 그는 아무래도 자
기는 추경감의 세대보다는 오민수의 세대에 가깝지 않느냐
고 반성해 보기도 했다.
불행하면서도 주위로부터 모든 증오를 한 몸에 지니고 있
던 설희주는 점점 불가사의한 여자로 강형사에게 부각되어
왔다.
그는 설희주의 학교 시절 친구들로부터 그녀가 고영혜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뿐 아니라 재벌 그룹
의 둘째딸인 고영혜가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선배인
오민수를 흠모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아냈다.
"그러고 보면 뒤에 시누 올케 사이가 된 고영혜와 설희주
는 오민수를 사이에 둔 3각의 라이벌이 아닌가?"
강형사의 설명을 들은 추경감이 상황을 정리해서 말했다.
"그뿐 아니라 고봉식, 즉 오빠를 소개해서 설희주와 알게
한 것도 고영혜였답니다."
강형사는 고영혜를 만나 그때의 상황을 다시 확인했다.
"새 언니, 설희주 선배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지요,
물론. 그러나 인간이 궁극에 달하면 가장 이기적인 돌파구
를 찾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 여자지요."
고영혜는 설희주를 나쁜 여자로 치부하는 발언을 서슴없
이 했다.
고영혜와 설희주가 학교 앞 카페에서 싸우던 이야기를 그
녀의 옛날 친구가 강형사에게 들려주었다.
그날은 설희주가 고봉식과 걸혼식을 올리기 전날 밤이었
다.
오민수와 설희주가 마지막 작별의 말을 나누던 자리였다.
"극적인 자리군요. 내가 우연히 목격을 해서 미안해요."
고영혜가 가시돋친 말을 앞세우고 두 사람 테이블 앞에
다가섰다. 고영혜로서는 이 장면에 착잡한 심경을 느껴야
만 했다. 라이벌인 한 여자가 딴 곳으로 떠나 안도했지만
그 라이벌이 자기 집안으로 들어온다니 심사가 편할 리 없
었다.
두 사람은 뜻밖의 목격자 앞에 말을 잃었다.
"설희주씨, 아니 이제 새언니, 결혼식 전날 밤 옛 애인과
의 마지막 밀회! 어때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슬퍼 그런
표정을하고 있어요?"
"웬일이야? 영혜가 여기에."
설희주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못 올 데를 왔나요? 여학생 회장님! 그 고고하고
총명하신 모습은 어디 가고 이렇게 나약해지셨나요?"
"영혜!"
설희주가 나직하지만 위엄 있는 목청으로 불렀다.
"위선자! 뭐? 노동자 착취하는 악덕 재벌 자폭하라? 노동
자 농민이 주인 되는 민주화 이룩하자? 내 사랑 내 젊음
노동의 전사되어 장엄한 역사의 불꽃으로 타오르다? 살아
춤추는조국, 노동자 해방 위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
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그래서 재벌 그룹
의 며느님되셔?"
고영혜는 흥분한 목소리로 설희주에게 피부었다. 그녀가
인용한 말은 데모 현장에서 피맺히게 절규하던 노동가의
노래 가사였다.
"영혜! 그만, 제발 그만!"
설희주는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민주 사회의 젊은이는 피를 먹으며 성장하는 것이라고
우리를 일깨운 게 엇그제 같은데, 이제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군요. 무엇이 우리
의 투사 설희주씨를 이렇게 놀랍게 변화시켰는지 참으로
궁금해요."
고영혜의 흥분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불안해할 건 없어요. 당신과 오민수씨와의 관계,
오빠나 집 식구들에겐 비밀로 해 드리겠어요. 노동 투사
후배의 의리예요. 나는 단지 당신의 카멜레온 같은 그 변
신을 조용히 지켜보겠어요. 시누이와 올케라는 이름의 돌
계단 위에 앉아서."
"영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오민수가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고영혜는 들은 척도 않고 돌아서서 카페를 나가 버렸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강형사는 참으로 묘한 심경에 빠졌
다.
어쩌면 소설과도 같은 얼키고 설킨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
단 말인가? 세상에는 이와 같은 일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이번처럼 살인 사건 같은 것이 나지 않으면 걸
코 세상에 노출되지 않고 묻힐 것이 아닌가?
설희주의 행동이 1백80도 회전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자기대로 좌절을 헤치는 방법의 하나로 고봉식을 택했는지
모른다는생각이 강형사에게 들었다.
"그렇다고 희주가 가난이나 좌절감 그 자체 때문에 애정
없는 결혼을 했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녀가 젊은날의 이데
올로기는 포기했더라도 재벌 2세와의 걸혼으로 그 차선책
을 나름대로 모색했을 것입니다. 설희주는 적어도 그런 여
자였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허망의 파도 저편으로 스러져
갔지만요."
강형사가 오민수를 다시 만났을 때 그가 고개를 떨구며
비탄의 목소리로 들려준 말이었다.
강형사는 오민수가 설희주를 마지막 만났을 때 그녀의 심
경이나 주변의 일을 들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설희주씨가 죽기 1주일 전에 만나고는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이오?"
강형사가 수십번도 더 들은 질문을 또 했다.
오민수는 더 이상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
다.
"설희주를 아직도 증오하고 있소?"
"전 다만."
오민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뭡니까?"
"왜 그날 좀 편한 마음을 갖도록 해서 그녀를 보내 주지
못했나 하는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땐 의지 약한 여
자는 할수 없다는 생각과 배신이라는 원망도 했습니다
만."
오민수는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희주는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저는 그녀의 가정의 피눈
물나는 비극을 그녀가 고사장에게 시집간 뒤에야 알았던
것입니다."
오민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괴로운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우리는 왜 이런 시대에 이 나라에 태어나야만 했습니
까?"
그러나 그 대답은 강형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추경감은 가장 용의점이 많다고 생각되는 고봉식의
사생활을 깊이 캐들어가고 있었다.
고봉식은 부잣집 맏아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약
간 모자라는데다 낙천주의자이고 낭비벽과 바람끼 등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와 가까운 여자는 그의 성적
노리개가 된 비서 양경숙이었다.
그들의 동물적인 사랑 유희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
다. 처음에는 정혜의 친구라고 하던 양경숙이 어느 새 그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아니, 변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
랬는지도 모른다.
"왜 그래요? 여기서 뭐 한두 번이었나요?"
고봉식 사장의 집무실. 푹신한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워
소커트를 걷어붙이고 육중하게 실려오는 고사장의 체중을
즐겁게 받치고 있던 양경숙이 주춤해진 고사장을 올려다보
며 말했다.
"도무지 정신 집중이 안 돼서 말이야."
고봉식은 갑자기 하던 짓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닫긴
했으나 커튼 사이로 들어온 강열한 햇살이 허옇게 드러난
양경숙의 아랫배와 허벅지를 비추었다. 중심부 비너스의
숲이 더욱 까만 윤기를 내었다.
그러나 고봉식은 이미 경숙에게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일어나. 도무지 집중이 안 돼."
"집중? 이제 마누라 생각할 것두 없어졌는데 왜 이래요?"
"목소리 죽여!"
양경숙의 앙칼진 앙탈에 고봉식이 주의를 주었다. 그는
바지춤을 올리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장님!"
그러나 양경숙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하반신
을 소파 위에 허옇게 다 드러내놓은 채 꼼짝도 않고 더욱
앙칼지게 불렀다. 여자는 잠자리에서 버림받았을때 가장
비참해지는 것이다.
그녀는 휴지처럼 버려진 자기의 육체를 수습할 생각은 전
혀 않고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돌아서서 담배 연기를
뿜고있는 고봉식의 뒷등을 그녀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고봉식이 돌아서서 천한 자세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양경
숙을 흘깃 보았다.
쇼커트 자락은 가슴께로 말려 올라가 있고 유난히 깊게
파인 배꼽 밑으로 꽤 탄력 있어 보이는 조그만 아랫배가
희게 빛났다. 왼쪽 다리는 소파에 약간 구부린 채 얹혀 있
고, 오른쪽 다리는 정갱이부터 소파에서 느러뜨려져 바닥
에 발바닥이 닿고 있었다. 그 발목에는 손바닥만한 흰 팬
티가 벗겨지다 말고 걸려 있었다. 짙은 비너스의 숲과 자
색 소파의 색깔, 거기에 흰 그녀의 넓적다리는 대단히 육
감적이었다.
그러나 고사장의 눈에는 권태롭고 추잡한 여자의 하반신
으로만 보였다.
"빨리 일어나지 못해."
고사장은 조금 미안했던지 양경숙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사장님, 또 경찰서 불려 갔댔어요?"
양경숙은 생각난 듯 부시시 일어나 앉아 팬티에 왼발을
끼어넣으며 말했다.
그러나 고봉식은 묵묵부답인 채 벽에 걸린 아버지 고회장
의 초상화를 뭍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었다.
"지금 혐의자가 식구 중에도 있어요?"
양경숙은 분이 풀어진 듯 옷매무새를 고치며 조금은 걱정
스럽게 물었다.
"우리 식구 몽땅."
고봉식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나두?"
그러나 고봉식은 그 말에 대답을 않고 책상 서랍을 열면
서물었다.
"적금이 얼마라구? 그 구멍 맨날 쑤셔 넣어도 끝이 없
어."
"백80만원이던가."
고봉식은 책상 서랍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집어 던지다
시피 양겅숙에게 주었다.
"3백이야."
"어머! 고마와요. 근데 따져두고 넘어갈 게 있어요. 그
구멍 끝이 없다는 야비한 말 취소하세요."
고봉식이 양경숙을 흘깃 보았다. 농담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알자 얼른 대답했다.
"그래, 취소다. 취소."
"그리고, 또 한 가지 따져둘 게 있어요."
양경숙은 내친 김이라는 듯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또 뭐야?"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사모님도 없어졌으니까 이
제 사장님도 핑계댈 게 없어졌잖아요? 예식장 날 안 받아
요?"
"뭐? 예식장은 왜?"
"왜라뇨? 나 면사포 안 씌우고 이대로 둘 거예요? 난 싫
단 말예요. 밤낮 사장님 소파에서 스커트나 걷어올리고 누
가 들어올까봐 도둑질하듯 끝내는 그런 사랑 이젠 싫어
요."
"왜 우리가 이 방 소파에서만."
고사장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스스로 생
각해도 치사한 변명 같았던 모양이다.
"그래요. 대관령 콘도 별장, 제주도 호텔, 그런 데도 몇
번 갔지요. 하지만 그건 우리 가정이 아니란 말이에요. 나
도 가정을 갖고 싶어요. 이렇게 숨어서 도둑 사랑을 하는
게 벌써 2년도 넘었어요. 나도 화장대 앞에서 입술 그리
며, 화려한 잠옷 입고 당신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고 싶어
요. 부엌에서 맛있는 찌게 끓이며."
"당신?"
양경숙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말에 고봉식은 섬한 거부
감을 느꼈다. 그녀가 고사장을 당신이라고 부른 것은 처음
이었다.
양경숙은 설희주가 죽고 나자 부쩍 고사장을 조르기 시작
했다. 이제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때로 자기 서방 다루듯
하는 태도가 점점 노골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고봉식은 꽁무니를 뺐다. 마침내는 그녀
와 사랑 놀음도 제대로 끝낼 수 없는 처지에까지 오고 말
았다.
"언제까지 이러구 기다려야 해요?"
양경숙은 당신이라고 의식적으로 써 보았는데 그 반응이
의외로 나쁘다고 생각했는지 톤을 조금 낮추었다.
"지금 희주 죽은 지 며칠 되었어? 사람이 왜 그렇게 성미
가 급해? 지금도 우리 식구들은 수사 대상이 되어 있단 말
이야.
그런데 뭐 걸혼식 날짜를 잡자고? 우리가 지금 얼씨구나
하고 덜컥 걸혼을 해봐.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또 형사
나부랭이들은 어떻게 보겠어? 옳다구나, 너희들이 설희주
를 죽였구나. 그리고 죽이자마자 결혼을 해? 이렇게 밖에
더 생각하겠어?"
고봉식이 자기딴에는 차근차근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그럼 우리 멀리 날랐다가 와요."
양경숙은 자기가 경솔했다고 생각한 듯 엉뚱한 말을 했
다.
"날라?"
"우리 프랑크푸르트 가기로 했잖아요. 사장님이 먼저 떠
나고 나는 휴가 얻어서 뒤따라 가기로."
그랬었다 몇달 전에 세운 고봉식의 계획이었다. 고사장
출장을 이용해 양경숙과 해외에서 만나 한 2주일쯤 보내고
그녀가 먼저 귀국한 뒤 고봉식은 일본을 거쳐 천천히 들어
올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거 당분간 중지야."
"예? 여권까지 다 내놓았는데."
양경숙은 크게 실망했다. 그녀는 소파에 털석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봄쯤에나 가자구."
"왜요?"
"수사 끌날 때까지 금족령이야. 우리 식구 모두 꼼짝 말
래."
"무엇이라구요? 누가 그래요? 명왕성 그룹이 어떤 재벌인
데 형사 새끼들이 그 따위 소릴 해요?"
"이놈의 사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고봉식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들의 대낮 정사가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기는 처음이었
다.
설희주가 없어져 주면 얼마나 홀가분하고 재미있겠느냐고
생각해 온 두 사람의 모습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양경숙이 혹시 용의자가 아닐까고 그녀의 뒤를 추적하던
추경감은 그녀의 부도덕한 여러 면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예쁘고 젊고 학식 높은 여자가 도덕적으로 이렇
게 타락할 수 있는가 싶었다.
나이 스물네 살. 일류 대학 연극영화과를 나왔고 학교 다
닐때는 미스 유니버시티라고 불릴 정도로 미인이었다. 성
격이 대담쾌활하고 집안도 꽤 유복한 편이었다.
그런데 양경숙은 대학 다닐 때부터 두세 명의 보이프랜드
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대학 3학년 때 학교 근방에 살
아야 된다는 핑계로 아파트를 얻어 혼자 나와 살았다. 그
때부터 생활이 불규칙해졌고 두세 명의 남학생과 번갈아
동거를 하다시피 했다.
양경숙은 능란한 말솜씨와 뛰어난 미모로 고봉식을 사로
잡는 일쯤은 식은죽 먹기였다.
고봉식은 쉽게 그녀에게 포로가 되었다. 양경숙은 돈도
뜯어내고 인사에도 관여해 자기 단짝 친구인 희정의 남편
을 계속 승진시켜 명왕성 자동차의 기획실장에까지 오르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괴로운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질 나쁜
건달들이 그녀와 고사장의 관계를 알고 계속 용돈을 뜯어
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타가는 곗돈이라는 것은 거의
그런 건달들 호주머니에 들어가고는 했다.
양경숙의 유일한 희망은 고봉식과 결혼을 하는 것처럼 보
이지만, 그녀의 속셈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고봉식의
재취로 들어간다고 하면 집에서도 맹렬히 반대할 뿐 아니
라 그녀의 자존심도 용납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고봉식으로부터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받아낸 뒤
그에 상당하는 재산을 울궈내고 물러설 생각 같았다.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기만 하면 자기 또래의 멋진 남자
를 골라 결혼하겠다고 그녀의 단짝 친구들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8. 미궁의 수수께끼
"반장님, 이것 좀 보세요."
강형사가 이마의 땀을 찌든 손수건으로 훔치며 봉투에 든
것을 내놓았다.
"이 사람아, 무엇을 하고 다녔기에 한여름도 아닌데 땀을
그렇게 흘려."
추경감은 강형사가 내놓은 봉투를 집어들었다.
"몸이 허해서 그렇습니다. 밤낮 그놈의 고물차 타고 이곳
저곳 헤매다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하니까 그렇잖습니
까?"
"왜 밥을 제대로 못 먹나?"
"경감님도 참, 제 봉급이 얼만지나 아십니까? 호텔 같은
데가서 밥 한 끼 먹자면 6만원 한답니다."
"쯧쯧."
추경감은 더 상대 않고 봉투에서 열쇠 하나를 털어냈다.
"아니, 이게 뭐야?"
"그게 보시다시피 열쇱니다."
"근데 왜 이렇게 조잡해. 가짜 열쇠 같은데?"
"헤헤헤, 열쇠가 가짜 진짜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반
장님 말씀이 틀린 건 아닙니다. 그 열쇠는 본을 떠서 만든
모조품입니다."
강형사가 열쇠를 집어 모서리의 거친 부분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고회장집에서 나왔습니다. 그 골동품 로마 병정
칼이 있던 방의 열쇱니다."
"뭐야? 그게 어디 있다가 이제 나왔단 말이야?"
추경감이 다시 열쇠를 뺏다시피 쥐고는 살펴보았다.
"그것은 회장과 최화정 여사가 쓰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본
떠 만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미테이션이라는 거죠. 누군
가가 필요할 때 그 골동품 보관소로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그 열식를 만든 사람이 로마 병정 칼을 홈
쳐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죠."
강형사는 왼팔을 허리에 짚고 서서 아주 자신 있는 말투
로 설명했다.
"그래 이게 어디 있었단 말인가?"
"그게 어디 있었느냐 하면 놀라지 마십시오. 고정혜
와 정정필의 방에서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데가
있어서 그 집을 다시 찾아가 그들이 거처하는 방에 들어가
보았지요. 이것이 그들의 침실에 있는 스탠드 밑에 있었습
니다. 감쪽같이 숨겨두었다고 생각했겠죠."
"뭐야? 아니, 그럼 강형사가 영장도 없이 그 집 침실을
뒤졌단말야?"
"예."
"이거 큰일 났군. 또 국장님에게 야단맞게 생겼네. 어쩌
자고 그래 쯧쯧. 또 인권 침해니 어쩌니, 이게 몽둥이
경찰이냐 민주 경찰이냐 하고 시끄럽게 생겼어. 아니 강
군, 그 집이 뉘집인가?"
"뉘 집은요, 돈으로 도배를 한 명왕성 그룹 회장님 댁이
지요."
강형사가 능글능글하게 대답했다.
"지금 농담하는 것 아니야!"
"반장님, 염려 마십시오. 국장님 전화는 안 올 겁니다.
내가 고정혜 여사, 즉 방주인한테 양해를 얻고 수색을 한
것이니까요."
"정말이야?"
그제야 추경감도 얼굴을 펴면서 누그러졌다.
"그래, 이게 그 침실 스탠드 밑에서 나왔단 말이지?"
"내 처음부터 그 부부가 수상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이
골동품방 열쇠 모조품을 만들어 놓고 기회를 본 거죠. 마
침내 D데이. 집으로 돌아온 정혜, 아니면 정정필이 골동품
방에서 로마 칼을 꺼내다 설희주를 살해하고, 마치 자기
오빠가 한 것처럼 하기 위해 와이셔츠에 피를 묻혀 침대
밑에 처박아두었지요."
"근데 왜 하필 로마 칼을 꺼내다 그랬을까?"
추경감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강형사의 말을 액면 그
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골동품방 열쇠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고회장과 최화정 여사 밖에 더 있습니까? 아
버지를 범인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을 것이고, 최화정이 범
인인 것처럼 하기 위한 수작 아니겠습니까?"
"그럴까?"
추경감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똑 떨어진 장이야 아닙니까? 고정혜와 정정필은 그게 외
통수라고 생각했겠죠."
"그렇다면 그 열쇠는 다시는 못 찾는 곳에 버리지 왜 자
기방 스탠드 밑에 감추어 두었을까? 강형사가 찾아내라고
그런거야?"
추경감이 아픈 곳을 찔렀다.
"반장님, 그야 그럴 수 있지요. 늘 그곳에 숨겨 두었으니
까 사람을 죽인 뒤도 당황해서 원래 있던 곳에 가져다 두
게 되죠. 습관적으로 말입니다."
"습관치고는 고약하군. 후후후."
추경감은 혼자 웃었다. 그러나 강형사는 사뭇 진지한 얼
굴이었다.
"아무튼 그 열쇠를 찾아낸 것은 중요한 일이야. 강형사
말이 맞는지 어썬지 좀 조사를 해 보자구."
추경감은 열쇠를 다시 비밀 봉투에 넣은 뒤 그것을 호주
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강형사도 뒤따라 나갔다.
그들은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고정혜와 정정필이 63빌딩
스카이 라운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고정혜와 정정필은 양주 칵테일을 한 잔씩 놓고 창가에
앉아있었다. 부부가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정경이지만 그리 보기 싫지는 않았다. 무슨 이
야기인지 고정혜가 열심히 말을 하고 있고, 정정필은 몸을
느긋하게 뒤로 젖힌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가
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기도 했다.
"이거 오붓하게 한잔 기울이는데 미안합니다. 방해꾼이
나타나서."
추경감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며 그들 옆의 빈 자
리에 앉았다. 강형사도 꾸벅 인사를 한 뒤 엉거주춤 따라
앉았다. 뜻밖의 두 기습자를 본 두 사람은 놀라는 것 같았
다. 그러나 곧 표정을 감추고 아주 불쾌하게 고정혜가 쏘
아붙였다.
"왜들 이러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선량한 사람을 괴롭히
는 거에요?"
"이거 미안합니다."
추경감이 다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이며 사과를 하고
앉았다.
"당신들 이거 못쓰겠구먼.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오라, 우리를 미행하고 다녔군. 여보슈,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수?"
정정필이 칵테일잔을 든 손으로 삿대질을 했기 때문에 술
이 찔끔찔금 흘렀다.
"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냥 여기 들
렀다가 마침 두 분이 계시기에 인사나 하고 가려고."
추경감이 변명했다.
"그건 오햅니다. 우리는 정실장님을 미행한 것이 아닙니
다."
강형사도 거들었다. 그들이 미행하지 않았다고 딱 잡아떼
자 고정혜와 정정필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그러시다면 뭐 한잔 하시지요."
정정필의 태도가 변했다. 추경감은 진토닉을, 강형사는
싱가폴슬링을 각각 주문했다.
"범인은 잡았어요?"
고정혜가 물었다.
"아직. 좀 도와주십시오."
추경감이 재빨리 말꼬리를 잡았다.
"우리가 뭘 도와줍니까?"
고정혜의 말을 강형사가 되받았다.
"그 열쇠 말입니다. 골동품방을 열 수 있는."
"이봐요, 그건 몇번이나 말해야 곧이 들어요. 그게 우리
방에서 나온 건 인정해요. 하지만 우린 그것과 아무 상관
이 없다고 그랬잖아요. 우린 아녜요."
갑자기 그녀가 신경질을 냈다.
"이 사람들 고약하군. 선량한 사람들이 한잔 즐기는데 나
타나 협박하는 거야 뭐야!"
정정필도 다시 펄쩍 뛰었다.
"아아, 흥분 가라앉히세요, 우린 다만."
"다만 뭡니까? 우리는 그런 열쇠가 있는지조차 몰랐어
요."
"그래요! 누군지 우리에게 혐의를 씌우려고 함정을 판 거
예요. 전혀 당치도 않아요!"
부부는 번갈아 펄펄 뛰었다.
"이 열쇠에 대해 모르신다니 더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그날, 사건이 있던 날 두 분은
대관령 호텔에 있었다고 하셨죠?"
추경감이 딴 문제를 꺼냈다. 그들이 너무나 펄쩍 뛰면서
떠들었기 때문에 방향을 바꾸려고 한 것이었다.
"그래요. 거기 있었어요. 그것은 조사해 보세요. 우린 대
관령 콘도에 가라고 아버지가 말씀했지만 설희주 보기 싫
어 호텔에 있었어요. 설희주는 뒤늦게 우리가 그곳에 간
것도 몰랐을 거예요. 거짓말인지 조사해 보세요. 대관령
호텔에 하루 종일 있은 사람이 서울 와 있는 설희주를 어
떻게 찔렀는지."
고정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이야기했다.
"이미 조사해 보았습니다. 당신 부부는 그날 새벽에 그곳
을 나왔더군요. 그것도 프런트에 열쇠를 맡기지 않고 말입
니다. 뒷문은 널찍하던가요?"
강형사가 비꼬아 주었다.
"프런트 직원이 졸고 있어서 깨우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
리가 현금 계산 하면서 그런 곳에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은
아시겠죠?"
고정혜의 말이었다. 고회장네 가족쯤 되면 그들이 드나드
는 곳에서는 월말 단위로 청구서가 가지 일일이 지불을 요
구하지는 않았다. 로열 패밀리에 대한 예우였다.
"그리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곧장 서울로 오시지 않았다
면?"
"아, 뭐 이왕 놀러 간 것 이곳저곳 좀 돌아다니며 놀았지
요."
정정필이 머리 뒤통수를 슬슬 긁으며 말했다. 말을 마치
자 입을 꽉 다물어 보였다. 두툼한 턱 한가운데 깊은 보조
개가 패였다.
추경감은 그의 턱이 유명한 미국 배우 커크 더글러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알리바이 만들려고 그렇게 하신 건 아니겠지만, 송어횟
집, 오골계탕집 등을 들르셨더군요."
강형사가 두 사람의 표정을 날가롭게 관찰하며 말했다.
"보신탕, 아니 사철탕 잘 하는 집도 있었는데 이 사람이
싫다고 해서 그만두었지요."
정정필은 강형사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급히 나갔더군요. 송어횟집에선 회
만 먹고 매운탕을 끓이는 시간에 계산을 치르고 나갔더군
요. 맞습니까?"
"이 양반 별 시비를 다 거네. 남이야 매운탕을 먹건 말건
그게 무슨 문젭니까? 솔직이 송어 뼈다귀 매운탕 그거 뭐
맛이 있습니까?"
"비린내나는 기름이나 둥둥 뜨고."
고정혜도 콧잔등을 찡그려 보였다.
"하기야 출출할 때는 한번쯤 먹을 만하기도 하지요."
정정필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앞이야기를 뒤집는 말을
계속 했다.
"먹을 만은 한데. 아, 매운탕이야 소주가 있어야 하
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소주 대작할 상대가 있어야 말이
죠."
"왜, 부인께선 술을 못 하시나요?"
추경감이 물었다.
"마누라랑 무슨 재미로 대작을 합니까? 대낮부터."
정정필이 추경감을 향해 귀엣말처럼 했다.
"이 이가."
그러나 귀밝은 고정혜가 가만 있지 않고 핸드백으로 정정
필의 등을 툭 건드렸다.
"우리집 사람은 실은 양주 체질이 되어서 소주는 잘 못
마십니다."
"횟집에 양주는 없었나요?"
추경감이 부부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술 논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소
주면 어떻고 양주면 어떻단 말입니까."
강형사가 불평했다. 그 불평은 두 부부가 노닥거리고 있
는데 추경감이 왜 거들고 있느냐는 항의의 뜻이 담겨 있었
다.
"사실은 집사람이 가끔 운전을 하거든요. 요즘 음주 운전
했다간 큰일 나지 않습니까? 저는 10년 전에 운전면허를
땄습니다만 지갑에는 주민등록증밖에 없습니다. 집사람한
테 압수당했거든요."
"운전수는 어떻게 되었나요?"
"요즘 부부끼리 놀러 가는 데까지 기사 달고 갔다간 노조
한테 얻어맞기 꼭 알맞죠. 운전은 집사람이 했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무슨 자동찹니까?"
"그랜졉니다."
"노클러치입니까?"
추경감이 입을 헤 벌리고 물었다. 선망의 눈을 가늘게 뜨
고 있었다.
"반장님, 이제 또 자동차 논쟁 하시려는 겁니까? 그런 건
우리 수사하고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강형사가 울화통을 터뜨리며 정면으로 추경감을 비난했
다.
"노클러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클러치차는 운전할 때
손이 심심해서 재미 없다고."
정정필이 강형사의 핀잔은 아랑곳하지 않고 추경감을 바
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러나 중간에 고정혜가 그 이야기의
허리를 끊어버렸다.
"모르는 소리 마세요. 노클러치가 얼마나 편한지 아세
요?"
"나 참!"
강형사가 더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는
추경감을 흘깃 보고는 도로 앉았다.
"나도 빨리 운전을 배워야겠는데."
추경감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당신들은 그 횟집을 나와서 그 담에 어딜 갔어요?"
강형사가 나서서 다그치기 시작했다.
"다 조사했다면 말해 보세요. 틀리면 고쳐 드릴께요."
"좋아요. 내가말하죠. 당신들은 그 길로 고속도로로 나와
서울에."
"틀렸어요."
정정필이 말을 받았다.
"거기서 고속도로로 곧장 가지는 않았어요. 집사람이 요
전번에 우리가 사다 드린 무공해 조선 상추를 회장님이 잘
드신다고해서 우리는 용계리로 갔지요. 거긴 비닐 하우스
재배 단지가 있거든요."
"상춘지 뭔지는 모르지만, 당신들은 하여간 서울로 온 뒤
에 우선 설희주가 집에 와 있는지를 전화로 확인한 후 곧
장 집으로 갔지요. 식구들마다 가지고 있는 비상 키로 대
문을 열고 들어갔지. 현관 문은 버튼식 키니까 문제 없이
암호 숫자를 눌러 들어갈 수 있어요. 가수는 노래하느라
바쁘고, 가는 귀 먹은 가정부 수원댁은 세탁기 돌리느라
바빴고 말이죠."
"말도 안 돼요!"
"개도 밤낮 드나드는 식구니까 짖을 턱이 없고, 전자 감
응장치도 가족에겐 삑삑거리지 않지요. 두 사람은 간단히
설희주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지요. 아니, 침실로 가서
스탠드 밑에있는 로마 병정 칼을 가지고."
"재미있군요. 강형사님, 혹시 학생 시절에 연극반 하시거
나 소설 공부 안 하셨어요?"
고정혜가 조금도 질리는 기색 없이 말했다.
"그냥 해본 이야깁니다. 설마 그렇게야 했겠습니까?"
강형사가 슬그머니 발뺌을 했다. 자기도 너무 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더 계속해 봐요. 그래 가지고 우리가 이 사람 올케, 아
니 처남댁을 찔렀다 이겁니까? 각본은."
"아니지요. 내가 그 연극 대본을 쓴다면 대뜸 찌르게 하
지는 않죠. 그러면 비명 소리가 나고 식구들이 달려오면
곤란해진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일단 설희주에게
적의를 감추고 무언가 부드러운 구실을 붙여 안심시킨 뒤
에 수건같은 것으로 한 사람이 입을 틀어막고 또 한 사람
이 가슴을 찔렀지요. 칼잡이 출신이 아니니까 몇번 연거푸
찌르는 중에 어느 한번이 치명상을 입힌 겁니다. 그리고
큰처남 고봉식의 와이셔츠에 피를 묻혀 침대 밑에 넣은 뒤
로마 병정 칼의 지문을 닦아내고."
"호호호, 재미있군요."
고정혜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약간 공포에 질린 듯
했다.
"그런데 작은 처남이 들었다는 비명은 무슨 비명입니까?
그리고 그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 내려왔다는데 우리는 그
때 아라딘의 램프로라도 들어갔단 말입니까?"
정정필이 의문을 제기했다.
"도망갈 수도 있지요."
강형사가 자신 없이 말했다.
"여보슈, 소설 쓰시려면 좀 똑똑하게 쓰시요. 방금 와이
셔츠에 피를 묻히고 어쩌구 했지 않습니까? 처남댁이 비명
을 지른 것은 죽기 전일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뒤에 피
를 묻히고어쩌구 할 텐데 언제 도망을 갑니까? 봉길이가 2
층에서 뛰어 내려오는 데 몇분이나 걸렸답디까?"
"그 비명이 문제입니다. 설희주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는
지도모릅니다. 아니면 범인들이 고봉길씨와 짜고 한 일이
거나?"
강형사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정실장님 부부가 의심스럽다는 것은 아닙니다. 강형사가
답답하니까 한번 헤본 소리에 불과한 겁니다. 뭐 오해하지
는 마십시오."
추경감이 수습을 하느라 온갖 말을 다 했다.
"조용히 즐기시려는 데 죄송합니다. 자, 강형사, 우리는
그만가지."
추경감이 강형사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고 다른 좌석으로
옮겨갔다.
"왜 자신도 없는 말을 함부로 하는 거야?"
정정필 부부와 멀리 떨어진 좌석에 자리를 잡은 추경감이
은근히 나무랐다.
"틀림없어요. 저 남녀가 죽인 것이 틀림없단 말입니다.
아니,그 열쇠가 확증 아닙니까? 다만 비명 소리가 좀
."
"확증은 무슨 확증이야. 사람 찔러 죽이는 데 쓴 열쇠를
자기 방에 가져다 감추어 둔단 말인가?"
"얼마는지 그럴 수 있지요."
그때였다.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요청했다.
"여기 뭘 팔지요?"
추경감이 미소진 얼굴로 웨이터를 쳐다보았다. 웨이터는
별 촌스런 사람도 다 보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뭐든지 있습니다. 위스키, 스카치, 꼬냑."
"칵테일 있나요?"
강형사가 물었다.
"얘, 거기 메뉴를 보시죠."
웨이터는 테이블 위에 있는 두툼한 메뉴 책을 가리켰다.
"난 레이디 핑크!"
강형사가 자신 있게 말했다.
"예?"
웨이터는 다소 의외란 듯이 쳐다보았다.
"난 진토닉 한 잔 주게."
추경감이 점잖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안주는 말야, 비프 스테이크를 잘게 썬 것 있지?
아니, 그것 말고 야채 사라다 한 접시."
"알겠습니다."
웨이터는 더 상대를 않고 가버렸다.
"이봐 강형사, 핑크 뭔가 하는 것은 여자가 마시는 술이
야."
추경감이 나직하게 말했다.
"뭐, 칵테일 이름이라고는 그것밖에 모르는데 그럼 어쩝
니까?"
"그 어려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추경감이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작년 반포 사건 수사할 때 그 집 사모님과 스카이 라운지
로갔죠. 수사하려고요. 근데 맥주 한 병을 청했더니 그녀
는 못마땅한 얼굴로 레이디 핑크 하지 않겠어요."
"후후후."
추경감이 목소리를 죽이고 웃었다.
"경감님, 웃지 마세요. 지금 우리가 시킨 술값이 얼마나
비싼지나 아세요?"
강형사가 추경감의 기를 죽일 셈으로 술값을 꺼냈다.
"걱정 마. 나 어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 냈단 말
야."
"아이구, 그까짓 보통 카드요? 골드 아니면 여기선 챙피
당하기십상이죠."
"골드야 골드. 걱정 마!"
"아니, 경감님 봉급이 얼마라고 걔들이 골드를 준단 말입
니까? 허허, 그것 참. 나나 경감님이나 쥐꼬리는 마찬가진
데. 나만 골드 안 준 건가."
강형사의 말 끝은 불평으로 흐려졌다.
추경감은 진전 없는 수사를 계속하는 동안 고봉길이 들었
다는 그 비명이 아무래도 걸린다고 생각했다. 고봉길이 거
짓말을 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리저리 맞추어 보
았으나 영 알 길이 없었다.
고심하던 추경감은 수사의 교훈을 다시 되뇌어 보았다.
막힐 때는 '현장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지금은 현장이 보
존되어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남의 집 안방을 함부로 드
나들 수도 없었다.
추경감은 몇번 벼르다가 마침내 고봉식의 허가를 얻고 그
침실을 다시 방문했다.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방안은 그때와 별다른 것이 없었다. 화려한 조각 장식이
달린 더블 베드, 추상화가 그려진 나지막한 고급 전기 스
탠드, 나무무늬가 제대로 살아 있어서 우아하게 보이는 화
장대, 그리고 그 화장대 위에 얹힌 수많은 크고 작은 화장
품들은 그대로였다.
침대 위 벽에는 르노와르의 무희 그림이 걸려 있었다.
"저건 진짭니까?"
추경감이 물끄러미 마주앉아 있는 고봉식을 보고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옛날부터 집에 있던 그림인데."
고봉식은 정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저 오디오 세트는 비싼 겁니까?"
침대 발치께에 있는 검은색 스피커와 턴 테이블 등을 보
고 물었다. 앰프와 녹음 테이프, 플레이어 등이 연결되어
있었다.
"아마 싸구려일 겁니다. 마란츤가 뭔가라고 하던데."
고봉식은 그것도 별로 흥미 없어하는 표정이었다.
"스피커는 제이 비 엘이군요."
추경감이 유심히 살폈다.
"그게 좋은 겁니까?"
"그날, 사건이 나던 날말입니다, 여기서 노래가 나오고
있었던가요?"
추경감이 눈을 반짝였다.
"글쎄요. 그날 이후로 나는 이 방에 한번도 들어와 보지
않았어요. 어쩐지 그 여자 혼이 아직 여기 남아 있는 것
같은 섬찝한 생각이 들어서."
고봉식은 정말 겁이 난 듯 몸을 약간 움츠려 보였다.
추경감은 오디오 세트에서 녹음 테이프 하나를 꺼냈다.
다 돌아간 뒤 자동으로 작동이 중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초동수사를 할 때 누군가한테서 오디오가 켜져 있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렇지.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고 했지."
추경감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얘? 가야금이라구요? 그래요. 그놈의 청승맞은 가야금이
뭐 좋은지 맨날 그걸 틀었거든요."
고봉식이 신물난다는 듯이 말했다. 테이프에는 '황병기
제 3 작품집, 가야금 황병기, 목소리 홍신자. 미궁'이라고
쓰여져있었다.
"이것 좀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아니, 여기서 틀어봐도
되겠습니까?"
추경감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테이프를 집어넣었다.
"이것 어떻게 작동합니까?"
추경감이 이것저것 단추를 눌러 보다가 잘 안 되니까 고
봉식을 쳐다보았다.
"글쎄요. 나도 잘 모르는데."
고봉식이 마지못해 다가와 파워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나
빨간불만 켜졌다 꺼질 뿐이었다.
"걔를 불러야지."
고봉식이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봉길아. 일루 와봐."
조금 있다가 고봉길이 들어왔다. 진달래빛 티셔츠에 청바
지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에는 검은 글씨로 '민주전공'이라고 쓰여 있었다.
진달래빛은 북쪽의 나라 색깔이라 하여 운동권 학생 중에
통일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더러 입던 옷이었다는 것을
추경감은 알고 있었다.
"아, 경감님, 안녕하세요?"
고봉길이 꾸벅 절을 했다.
"그 티이 봉길씨 거요?"
추경감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요. 학교 다닐 때 입딘 꽈티이예요."
"꽈티이?"
추경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학과에서 공통으로 입는."
"음, 알겠어. 그러니까 그 '민주전공'이라는 것은 '민주
전자공학과'란 뜻이겠구먼."
추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 이 오디오 좀 틀어봐라."
고봉식이 얼른 일을 끝내고 이 귀찮은 불청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거 테이프가 다 돌아갔잖아."
고봉길이 테이프를 다시 되감은 뒤 오디오를 작동시켰다.
생음악 같은 생생한 가야금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건 황병기씨가 75년에 처음 발표해 우리 음악계에 큰
충격을 준 작품 '미궁(迷宮)'이란 겁니다. 가야금의 최저
현을 활로 때려서 진동하는 신비로운 소리를 내지요. 그뿐
아니라 그 신의 목소리는 무용가 홍신자의 목소리와 잘 어
울려요. 여기선 가장 인간다운 인간 한 여류 무용가와 신
이 대화하는 듯한 그런 착각을 일으키게 하지요."
고봉길의 해설을 듣고 있는 동안 가야금 소리는 점점 숨
이 가빠지다가 마침내 빠른 걸음으로 절정의 음계를 치닫
고 있었다. 처음부터 들리던 웃는 소리 같은 것은 마침내
우는 소리로 바뀌고 있었다.
"으악!"
바로 그때였다. 문득 여인의 비명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니, 바로 저 소리다!"
고봉길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비명은 곧 그치고 가
야금의 정적인 톤이 흘러나왔다.
여인의 비명은 연주의 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이고 고음
이었다. 누군가가 노래 속에 비명을 녹음해 넣어둔 것이
분명했다.
"저거에요. 저건 형수의 비명입니다. 내가 그날 들은 것
이 저 비명입니다."
고봉길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아니 정말입니까?"
추경감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틀림없어요. 저 처절하고 가슴을 찢는 듯한 목소리 저겁
니다! 형수의 비명이 저기 녹음된 거예요."
고봉길이 미친 듯이 떠들었다.
"플레이 중에 어떻게 녹음이 됩니까?"
추경감이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저 가슴을 찢는 소리."
고봉길은 양 귀를 움켜싸고 나가 버렸다.
"저 테이프를 내가 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추경감이 고봉식에게 청했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필요하시면 가지고 가십시오. 아니,
다시는 듣기 싫으니 경감님이 가지시죠."
추경감은 그것을 가지고 시경으로 돌아와 이 궁리 저 궁
리를 하기 시작했다.
"반장님, 다시 한번 틀어봅시다."
강형사가 포터블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고 왔다.
"아무리 틀어봐야 그게 그걸세."
"그러나 혹시 압니까?"
강형사는 부득부득 카세트 테이프를 집어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귀에 익은 가야금 소리, 홍신자의 육성, 그리고 문제의
비명소리.
"아, 꼭 6분 걸리는군요."
"뭐가 6분이야?"
"이 테이프가 스타트한 지 6분만에 비명이 나옵니다. 그
렇다면 죽이고 나서 이 스위치를 넣고 도망갈 시간이 충분
히 있지요. 6분이면 달아나고도 남고 말고요."
강형사는 위대한 것을 발견한 듯 오른손을 허공에 대고
흔들며 떠들었다.
"살인은 이 테이프에서 비명이 나오기 훨씬 전에 이루어
졌다고 봐야 돼. 6분은 아무 의미가 없단 말야. 법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6분의 오차는 가려낼 수 없는 거야."
"그거 영 안 풀리네요. 2시간 전에 죽었는데, 발견되기 6
분전 카세트가 작동하고, 6분 뒤 비명이 들리고."
"그보다 누가 그런 장치를 해두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
야."
"그거야 범인이 한 거죠. 그걸 알면 벌써 범인 잡았게
요."
"그 테이프 지문부터 조사해 보라고 해. 지문 채취 끝나
면 과학수사연구로에 보내 음성 등을 분석해 보라고 해."
"이 노래 끝나면 하죠."
"어때, 출출한데 쐬주 한잔."
추경감이 빙그레 웃으며 오른손으로 술잔 기울이는 시늉
을 했다.
"좋죠. 저 길모퉁이에 포장마차 근사한 것 생겼습니다."
"포장마차는 지난 주에 다 철거하지 않았나?"
"헤헤헤, 실내 포장마차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들은 퇴근길의 한잔을 위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경을
나섰다.
9. 달라진 세상
며칠 동안 두 사람은 그 '미궁' 테이프에 매달려 있다가
마침내 몇 가지 결론을 얻어냈다.
첫째, 그 테이프는 원래 공테이프였는데 레코드판의 '미
궁' 곡을 녹음한 것이다. 라벨 자리에는 손으로 '황병기의
미궁'이라고 써 넣었는데 그것은 고봉길의 글씨였다.
둘째, 비명의 목리는 성문(聲紋)으로 보아 설희주의 것에
가깝다. 그러나 100프로 설희주의 목소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세째, 카세트 테이프에서는 여러 명의 지문이 나타났다.
설희주, 고봉길, 고봉식, 정혜와 영혜, 그리고 추경감과
강형사, 그중 추경감과 강형사의 것은 뒤에 만진 것이지
만, 고봉식은 사건 전에 만졌는지, 추경감이 그 집에 다시
가서 그 테이프를 가져올 때 만졌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네째, 그 테이프에 최초의 녹음, 즉 '미궁'을 녹음한 것
은 고봉길이었고, 설희주가 특히 그 곡을 좋아해서 주었다
는 것을 알아냈다. 따라서 비명은 원래 곡을 녹음할 때 들
어 있는 것이 아니고 뒤에 삽입한 것이 분명했다.
"반장님, 나는 처음부터 고정혜와 정정필 부부가 수상하
다고 보았는데, 이 테이프에까지 고정혜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 로마 칼, 지문, 살인 동기 등 그
여자가 가장유력한 용의자 아닙니까? 어때요, 다시 한번
연행해 올까요?"
강형사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곧 사건이 끝날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그것 가지고는 약해. 강형사가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들 부부에 대한 방증을 더 조사해 봐."
강형사는 추경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다시 그들 부부
의 그날 행적을 더 세밀하게 더듬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요, 젊은이. 걔들은 그럴 위인, 아니지 악인이
못돼요. 미운 사람을 죽이고자 할 때는."
고회장은 큰 기침을 두어번 해서 목에 걸린 가래를 뱉어
낸뒤 말을 계속했다.
"강형사라고 했나?"
"예."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자 할 때는 그만한 용기와 결단력
이 있어야 하는 걸세. 정혜와 정필이? 허허허, 걔들은 내
가 잘 알아요. 비겁하고 교양 없고, 결단력 없고 소견머리
없는 애들이요. 누굴 죽일 만한 위인들이 못 돼요."
고회장의 이상한 논리가 그럴 듯하다고 강형사는 생각했
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살인범들을 보아 왔는데,그들은 그
들대로 범인으로서의 특징이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게
지금 고회장이 말하는 결단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회장님 말씀에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설희주가 살해되는 바로 그 시각, 즉 그날 오후 4시경 정
혜씨와 정실장은 회장님과 같이 있었다고 주장을 하는데
맞습니까?"
강형사가 벼르고 벼르던 질문을 했다. 추경감이 절대로
그런 직설적인 질문은 하지 말고 방증을 수집하라고 했지
만 이게 더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인정머리없는 애들이에요. 남들은 딸자식이 더 자상하다
고 하던데, 우리 딸년들은 애비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도 자주 들여다 보지도 않는단 말야."
고회장은 강형사 질문에 답변은 않고 엉뚱한 불평을 했
다.
호텔 브이아이피 룸에 거처를 마련하고, 침실, 거실, 부
엌에 비서방까지 딸린 곳에서 호화 생활을 하면서 '이 고
생'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한 끼에 수만원씩
하는 식사를 하면서 임시로 가설한 직통 전화 두 대로 업
무 지시를 하고 있었다.
"왜 이 호텔에 계십니까? 저택이 더 편하실 텐데. 살
인사건이 났기 때문입니까?"
강형사가 내친 김에 더 물었다.
"말도 마쇼. 미친 놈들이 일은 안 하고 모두 서울로 기어
올라와 본사 건물을 애워싸고 지랄을 하고 있으니 사무실
에 갈수도 없고."
"댁은."
"사무실에 오는 놈들이 집엔 안 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런 답답한. 당신도 공무원이요? 지금 빨갱이 비스
무리한 놈들이 사방서 설치는 것 모르시오? 물론 우리 회
사 노조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믿지만. 애들이 뭐 철
이 있어야지. 꼭 떠드는 소리가 625 때 완장 찬 놈들 하
는 소리 같아."
"요구 조건이 무엇입니까?"
"늘 하는 얘기지 뭐. 임금을 두 자리 숫자로 올려라, 족
벌 경영 그만두라, 식당 메뉴 개선하라, 뭐 그런 건 다 좋
아요. 아, 이익 나는데 두 자리 아니라 세 가리 숫잔들 왜
못 올리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지.
우선 대기업하는 사람들이 물가 걱정해야 하고 나라 경제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니유? 대기업에서 돈 좀 번다고 임금
을 펑펑 올리면 경제가 어떻게 될 거요?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해결해야지. 가령 노총에서 말하는 도시민 최저 생
계비에 근거한다든가, 금년도 소매 물가상승률을 참고한다
든가 하는, 어떤 사회적 공적 책임 하에 임금이 이룩되어
야 하거든. 받는 사람이야 많이 받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길게 보면 결국 자기 꼬리 잘라 먹는 결과가 되지. 또 족
벌 경영 그만 두라 아우성이지만 그건 자본주의 사회의 특
징 아닌가. 솔직이 말해 자기 자식이 다 똑똑해서 사장감
되는건 아니야. 하지만 나도 아들딸 넷에 사위, 동생, 처
남 등 수십 명의 친척이 있지만 회사일에 관여하는 건 큰
놈과 사위뿐이야. 큰놈은 내 가업을 이어야 하니까 장차
대주주가 될 것이고, 사위야 내가 비서로 데리고 있는데
뭐가 족벌 기업이야? 솔직이 말해 이 그룹 종업원 모두 합
치면 8만명은 될 거야.
그런데 아들하나 사위 하나 관여한다고 그게 족벌 기업이
야? 친척 중 똑똑하고 적성 맞는 사람 있으면 데려다 써야
지 어떻게 할 거야? 식당 개선하라? 우리 식당에서 밥 먹
어 보았소? 원가가 점심 한 끼에 1천2백30원 들어요. 장삿
속으로 하는 무교동 식당 가면 3천5백원짜리요. 그런데 반
찬 나쁘다 밥맛 없다 트집이거든. 나도 2주에 한번씩은 계
열회사 돌아다니며 밥 먹어 본다구. 그런데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자기 여편네까지 부사장으로 나오고 사돈의 팔
촌까지 친척이면 모두 한자리씩 하는 우리나라 다른 재벌
에 비하면 뭐가 그리 나쁜가 나쁘길! 솔직이 말해 젊은 시
절부터 허리끈 졸라매고 피땀 흘리며 이룩한 회사야, 이
게. 근데 자기네 회사처럼 어제 그저게 들어온 놈들이 설
쳐대? 덮어 놓고 파업이다, 작업 거부다, 회장은 나와서
해명하라, 이거 뭐하는 짓들인지 모르겠어. 솔직이."
회장은 계속 솔직이란 말을 넣어가며 기염을 토했다. 자
기 말대로라면 노조가 떠들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노조 농성이 겁나 사무실에도 못 가고 호화판 호텔 룸에
숨어 있는 것은 어쩐지 그의 말과 괴리된 무엇이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요즘 젊은이의 사고방식은 회장님 같은 분과 다른 게 많
지요."
강형사는 동조도 거부도 아닌 말을 했다.
"다르면, 사원이 하루 아침에 사장 되고 사장이 죄인 되
는 세상인가!"
"그런 말씀이 아니고. 하여튼 그건 그렇고, 제가 질
문한 것은."
"알고 있어. 며늘아이가 죽는 시간에 딸년과 사위가 나하
고같이 있었다는데 그게 맞느냐는, 말하자면 알리바이를
확인하려는 거지!"
"그렇습니다."
강형사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정확하게 며늘아이 당한 시간이 그날 몇시인가?"
"오후 5시께입니다."
"정확한가?"
"검시 의사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다소 오차는 있을 것
입니다만."
고회장은 한참 동안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다가 입
을 열었다.
"그것들이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해가지고 나한테 달려와
보라고 아우성이었어요. 그날 5시반부터 사장단 회의가 있
었는데 그때가 바로 그 시간이었거든."
"댁에서 여기까진 얼마나 걸립니까?"
"아마 4, 50분 걸리지."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요?"
"그게 뭔고 하니 비디오 테이프였지. 자기들이 찍은
."
"무엇을 찍었습니까?"
"괘씸한 것들 같으니라고."
고회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이왕 집안 망신한 거 다 얘기하지. 이것들보다 더 한심
한 건 오래비 고봉식 사장이란 놈이요. 죽은 제 마누라 화
해하라고 보냈더니, 화해는 커녕 밤새도록 쌈박질하고 새
벽에 며늘아기 서울로 쫓다시피 보낸 뒤 뭐 한 줄 아시오?
건너편 호텔에 서울에서 미리 와 있는 비서년하고."
"양경숙씨 말입니까?"
"경숙인지 앙숙인진 몰라도 그년을 불러다 놓고, 나 이거
야 원 낯이 뜨거워서. 제 마누라는 칼에 찔려 죽는 시
간에 그년하고 둘이서. 그 짓 한다고 옷이 나와 밥이
나와? 그건 또 약과요. 딸년 내외도 올케 내외와 화해 좀
하라고 뒤딸려 보내 놨더니 이 물건들은 거기서 뭐한 줄
아시오? 무비 카메라 메구 제 오라비 비서년하고 놀아나는
것 졸졸 졸졸 따라다니며 몰래 비디오 촬영하느라 바빴어
요."
강형사는 입을 딱 벌렸다.
"그것도 한두 장면이 아니고 두 연놈이 오골곈지 지랄인
지 먹는것부터 밥 떠먹여 주는 거 하며, 껴안다시피 해서
자동차 모는 장면 하며, 하여간 찍은 테이프가 몇 통인지
몰라요. 더 낯 뜨거운 장면이 얼마든지 있어요. 무슨 포르
노 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했는지 그렇게 많이 찍어댔더군.
하여간 인간 말짜들아니오? 내 자식 딸 사위지만 이렇게
더러운 인간 쓰레기들이오. 그것도 남도 아닌 제 오라비며
처남 일을 그렇게 한단 말이오!"
고회장은 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강형사를
한참 쳐다보고 있더니 냉수를 한 컵 따라 꿀꺽꿀꺽 마셨
다.
"근데 그걸 왜 회장님께 가지고 왔나요?"
"글쎄 그것들이 그런 쓰레기들이라니까. 이때까지 뭘 들
었소? 오래비 고봉식이 이렇게 계집질이나 하고 다니는 형
편 없는 사람이니 삭탈관직하고 쫓아내라는 거지. 그리고
이 명왕성 그룹 후계자는 인품 좋고 똑똑한 정정필이 돼야
한다는 거야. 암, 인품 훌륭하고말고. 도둑 촬영이나 고양
이처럼 하고 다녀서 그렇지!"
고회장은 아무래도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벽 쪽으로 갔다. 골프 퍼터를 쥐고 공을 굴려 구멍
에 넣는 연습을 했다. 실내용 퍼터 연습기였다.
"따귀부터 한 대 올려 붙이려다가 마침 사람들이 들어와
참았지만, 나이 들고서 처음으로 비통한 기분을 느꼈소.
어쩌면 형제자매간인데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강형사는 고회장의 말에 거짓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
다.
"그래 놓고 사위녀석 하는 말이, 저희는 어디까지나 처남
을 깨우쳐서 진보토록 하기 위한 충정에서였다나요. 이놈
들 너희나 진보 많이 하라고 소리를 질러 주었지. 아마 이
러다가 내가 눈이라도 감게 되면 시신에 흙 덮기도 전에
저희끼리 재산 차지하겠다고 개처럼 물고 뜯고 싸움질할
거요. 그런 걸 유식한 말로 골육상쟁이라고 하던가. 그런
걸 생각하면 회사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요. 저
못난 놈들 모두 실업자 만들어 쫄쫄 굶게 하고, 회사 재산
은 모두 장학 재단 같은 데다 내놓아 버리고 말이야."
그 말도 거짓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강형사는 호텔을 나오며 몇 가지 정리를 했다.
고회장이라는 사람은 사회에 대한 인식, 노사관 등에 자
기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재벌의 총
수라고 해서 무조건 욕심장이 부도덕한 인생관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느꼈다.
둘째는 고정혜와 정정필이 그 시간에 거기 갔다면 알리바
이가 성립된다는 것이었다.
10. 탈선 디스코
"강형사, 그 고봉식의 비서는 조사해 봤어?"
추경감이 대뜸 문을 들어서며 강형사를 찾았다.
"헤헤, 제가 뭐 한두 살짜리 어린앱니까? 벌써 비디오 테
이프 나왔을 때 다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강형사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참, 그 테이프에서는 뭐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게
있어?"
"아니오. 그 테이프엔 뭐 신선한 장면은 하나도 없던데
요, 뭐."
"신선한 장면이라니?"
추경감이 고개를 갸웃했다.
"반장님도, 참."
강형사가 겸연쩍게 웃었다.
"왜 그런 것 말입니다, 국산 에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 말이죠."
"아이구, 사람하곤."
추경감이 핀잔을 주다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아니, 고회장이 더 낮 뜨거운 장면도 많다고 했잖아?"
"노인네가 요즘 영화롤 본 게 뭐 있겠습니까? 그저 60년
대식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거지요."
"그럼 내가 봐도 볼 만하겠는데?"
"예에?"
추경감의 말에 강형사가 푸웃하며 웃음을 삼켰다.
"그건 그렇고, 그 여자하고는 어떤 관계래?"
추경감이 안색을 고쳐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저 일반적인 관계지요. 돈 많은 유부남과 골빈 여자하
고의 만남이지요."
"골빈 여자라는 표현은 좀 지나치지 않아?"
"왜요?"
강형사가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꽤 좋은 대학 출신이던데?"
추경감이 끈덕지게 강형사의 말에 의문을 표시했다.
"좋은 대학이요? 하, 그렇지요. 하지만 무슨 과를 나왔는
지 아십니까? 비서직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과라고요.
좋은 대학이라고 해도 머리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학
과가 어디 한둘인 줄 아십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면 어떻게 비서가 되었지?"
"특채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비서실에 사람들이 하나 둘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 여자 하나 일할 줄 모른다고 업무
에 무슨 차질이 생기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하긴 어디
를 보면 안 그렇습니까? 기생충처럼 남에게 붙어서 먹고
사는 사람 같잖은 게 너무나 많은 세상 아닙니까?"
"자네 굉장히 비판적이 되었네 그려."
추경감이 새삼스럽다는 듯 강형사를 바라보았다.
"이번 건을 조사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강형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같이 30을 저만치 넘고도 장가는 커녕 여자 손목도 제
대로 못 잡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거리에서 여자를 줍
듯이 하고 척 월급까지 주면서 첩으로 고용하는 놈들도 있
는 세상이라니."
"그러니까 자네의 불만이라는 게 그거로구만."
"그거요? 여자?"
강형사는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천만에요."
강형사는 손을 내저었다.
"하긴 그런 이야기도 있지요. 예쁜 여자는 모두 강남의
디스코텍에서 춤을 추고 있다나요. 허 참."
"자네 신세 타령이나 듣자는 게 아냐."
추경감이 쓴웃음을 지으며 강형사의 말을 가로 막았다.
"신세 타령이라고요? 에, 신세 타령이라고 해도 좋습니
다.
아무튼 맨입으로는 이야기를 못할 것 같으니, 반장님, 어
디 가서 한잔 하시지요."강형사는 추경감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점퍼를 집어들고 일어났다.
"퇴근 시간도 벌써 두 시간이나 넘었잖습니까?"
멍해서 바라보는 추경감에게 강형사는 그렇게 채근했다.
"빨리 일어나세요. 제가 한잔 살 테니까요."
추경감은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허허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자, 자, 갑시다."
강형사는 추경감의 등을 떠다밀었다.
거리는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성급한 네온사인들도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보세요, 이게 서울입니다."
강형사가 투덜거렸다.
"향락 지대."
"자넨 벌써 취한 것 같군."
추경감이 기가 막혀서 말했다.
"미희들의 서비스, 가라오께, 사랑의 룸살롱이라."
강형사는 눈에 띄는 대로 간판 몇 개를 읽어냈다.
"무리한 생각 말게."
"무리라니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뿌린 대로 거두리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저런 데를 가야 괜찮게 머리가 빈 여자를 잡을 수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월급 줘 가며 고용하려고?"
"순경으로요?"
강형사는 말을 내뱉고는 스스로도 우습다는 듯이 마구 웃
어 제끼기 시작했다. 추경감도 같이 웃었다. 둘은 눈물이
나도록 허리를 꺾어대며 웃어댔다.
웃음이 좀 진정되자 강형사가 말했다.
"그건 도저히 안 되겠군요. 어디 근사한 포장마차나 찾아
갑시다."
"그거 요즘 단속 기간 아닌가?"
"그거야 강력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죠."
둘은 다시 읏으며 뒷골목에 늘어서 있는 포장마차 중 하
나로 들어갔다.
"그럼 이야기를 해봐. 취해서 헷갈리게 되기 전에."
추경감이 한 잔 따라주며 물었다.
"아이고, 반장님, 목이라도 축인 다음에 시작합시다."
강형사가 한 잔 마시고 잔을 바로 추경감에게 건넸다.
"요즘은 술잔 안 돌리는 게 예의 아냐?"
"예의가 아니라 불신이지요. 반장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간염도 에이즈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맘 놓고 드십시오, 까
짓 거."
그렇게 잔이 오가며 술이 서너번 돌자 강형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건 이해할 수 있어요."
"어떤 것?"
강형사의 뚱딴지 같은 말에 추경감이 당황해서 말했다.
"뭐 찢어지게 가난하여 도저히 먹고 살 길이 없어서 말입
니다."
"그래서?"
"인당수에 팔려가 몸을 내던진 심청이 같은 건 이해할 수
가 있다고요."
"이 사람아, 그건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이해하는 거잖
아?"
"그래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건 없다고요. 그건 70년대
식 이야기예요."
"무슨 뚱딴지 같은 이야기야?"
추경감이 황당한 얼굴로 강형사를 바라보았다.
"70년대의 영화를 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꽤 있잖아요? 가
난해서 몸을 파는 여자들이라든가 또는 남자의 학비를 대
주다가 배신당하는 이야기라든가 말이에요."
"그랬지."
"그런데 왜 요즘은 그런 영화가 없는 겁니까?"
"그거야 영화 감독한테나 물어봐."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그런 것 찍어야 영화가 안 되거
든요. 말이나 됩니까? 요즘 세상에."
"그래서?"
"요즘 애들은 말입니다, 부담 없이 즐기자 이 타입이다
이겁니다. 결혼은 해서 뭘 합니까? 살 만큼 살 수 있는데
요."
"그러니가 경숙이라는 고봉식의 비서도 그타입이다 이거
지?"
"예, 그렇습니다."
이제야 이야기가 궤도에 올랐나 하면서 추경감은 슬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전형적인 관계지요."
강형사는 소주 한 잔을 들이부었다.
양경숙이 고봉식을 만난 것은 영동의 나폴레옹이라는 디
스코텍에서였다.
그때 양경숙은 대학교 4학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는 2년
전의 일이었다.
"어유, 이게 뭐야?"
경숙의 친구 희정이 짜증을 내며 친구들이 기다리는 카페
에 들어왔다.
"에취!"
희정이 들어서자 카페 여기저기서 갑작스레 재채기가 시
작되었다.
"밖에 데모하니?"
경숙이 물었다.
"응, 그 자식들 땜에 길이 막혀서 난리야 난리."
희정이 툴툴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좀 털고나 들어오지. 이게 뭐야?"
상임이 코를 막으며 말했다.
"원 턴다고 털리냐?"
"그래, 오늘은 무슨 일 때문에 저런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뭐 온통 물러가라, 어쩌고 하는
소리밖에 안 들리던데."
희정이 볼멘 소리로 말했다. 카페 안에는 여전히 재채기
소리가 요란했다.
"아이, 창피해."
희정은 자신이 그 재채기의 원인임을 알고 있었다.
"완전히 기분 잡치게 하네."
"이거 기분도 그렇지 않은데 스트레스나 해소하러 가자."
경숙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길 막혔다니까."
희정이 경숙을 다시 앉혔다.
"사방이 다 막혔어?"
"그럼, 하지만 금방 끝나겠지 뭐."
"하여간 웃기는 애들이야. 기왕 하려면 정말 화끈하게 붙
어 보든가 말이야. 그게 아니면 찍소리 말고 자빠져 있기
나 할 것이지 맨날 되지도 않는 짓을 왜 해?"
"그러게 말야."
상임이 맞장구를 쳤다.
"그까짓 돌 몇개 던지고 화염병 던지고 한다고 세상이 바
뀌겠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애들이야."
"맞아. 공연히 애꿎은 사람들이나 다치기 일쑤지."
"오늘 상호는 안 만나?"
희정이 물었다.
"내가 골볐냐? 만날 걔랑 무슨 재미로?"
경숙이 짜증스런 말투로 말했다.
"그럼, 오늘 괜찮은 남자 하나 물기로 하자."
상임이 반색을 하며 말했다.
"참, 밖에 내 차가 있는데."
경숙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빨리 다른 쪽으로 빼야겠다, 얘."
세 친구는 우르르 빠져나왔다.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지만 다행히 데모대는 보이지 않았
다.
"얘, 끝났나 보다."
희정이 경숙의 어깨를 툭 쳤다.
"좋아, 잘 됐어."
경숙도 덩달아 좋아하며 차에 올랐다. 그런데 시동이 걸
리지않았다.
"어머, 이거 왜 이러니?"
핸들을 툭툭 치며 경숙이 신경질을 부렸다.
"연료가 없잖아?"
옆자리에 앉은 희정이 계기판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오늘 아침에 넣고 집에서 학교 온 것
밖에 없단 말야."
경숙이 머리를 갸웃했다.
"원 애도. 그럼 기계가 거짓말을 한단 말야?"
희정이 말하자 경숙도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료가 새나?"
경숙은 중얼거리며 차에서 나와 보닛을 열었다. 그러나
워낙에 자동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열어보아야 뭐가 뭔
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도로
에 배어 버린 최루탄 냄새에 짜증만 돋궈졌을 뿐이었다.
그 냄새에 경숙은 갑작스레 깨달아지는 생각이 있있다.
데모대가 화염병을 만들려고 연료를 뽑아간 것이다. 이런
개자식들! 경숙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짜증난
경숙의 마음과는 상관 없이 보닛을 열고 다리를 쭉 뻗어
살피고 있는 경숙의 모습은 미니 스커트의 효과와 더불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희정과 상임은 차 안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모르겠다는 생각에 보닛을 쾅 내리닫았을 때 뒤쪽에서 경
적 소리가났다. 경숙이 돌아보자 건니편에 차가 한 대 주
차하더니 회사원 같은 사람이 내리는 게 아닌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직 30대도 안 되었을 것 같은 청년이었다. 그가 길을
건너오며 대뜸 물어오는 것이었다.
"별일 아니에요."
경숙은 그다지 맘에 들어보이지 않아 차갑게 대답했다.
그리고 차문을 열고 희정에게 말했다.
"얘들아, 내려라. 택시를 잡아야겠다."
"어머, 이 근처에 주유소가 없니?"
희정이 호들갑을 떨었다.
"연료가 떨어지신 모양이군요?"
청년은 다시 말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래요. 좀 도와주시겠어요?"
희정이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만 둬."
경숙이 낮은 소리로 희정에게 주의를 주었다.
"얘는, 괜찮아."
희정은 그러는 경숙의 옆구리를 가볍게 찌르고는 청년에
게말했다.
"그러면 좋은 일 해주는 셈치고 저희 좀 태워 주세요."
"그런 일이라면 언제나 좋은 일을 하고 살고 싶군요."
청년이 빙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럼 평소에는 나쁜 일만 하시나 보지요?"
희정의 농담에 청년은 함박 웃음을 터뜨렸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냅니다. 자, 다들 올라타시
죠."
청년은 과장된 제스처를 쓰며 차문을 열었다.
"너, 왜 이래?"
경숙이 희정을 나무랬지만 이미 옆질러진 물이었다.
"어제 이 똥차가 무슨 좋은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미인들을 태우다니."
청년이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가 좋은 꿈을 꾸신 게 아니고요?"
"아저씨라뇨?"
희정의 말에 청년은 펄쩍 뛰었다.
"아직 30도 안 된 총각입니다."
"피, 차 빌려타 보먼 예순된 할아버지도 총각이라고 그러
더라."
희정이 낼름 혀를 내밀었다.
"아이고, 정말입니다."
청년은 그러며 능숙한 솜씨로 차를 몰면서 명함을 꺼냈
다.
명왕성 물산의 대리 홍길수라는 이름이었다.
"아유, 출세도 빨리 하셨네? 벌써 대리예요?"
희정의 말에 길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 제 형님이 뛰어난 탓이지요."
"헝님이 누군데요?"
"홍길동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차 안에는 금방 웃음이 출렁였다. 냉랭하게 앉아 있던 경
숙도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어디로 모실까요?"
"우리는 한바탕 춤추러 갈 작정이었어요."
희정이 대답했다.
"멋진 생각이군요. 하지만 아직 너무 이른데요? 이제 5시
밖에 안 됐어요."
"그럼 근사한 식당 앞에 내려 주세요. 뱃속을 채우고 놀
도록 하는 거지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요."
"그럼 그 저녁을 제가 사도 될까요?"
"어머나, 무슨 말씀을!"
희정이 과장스럽게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짧은
미니스키트가 더 올라갔다. 홍길수가 자신의 허벅지를 바
라보는 것을 그녀도 눈치챘지만 그대로 이야기를 계속했
다.
"차를 태워 주신 댓가로 저녁은 응당 우리가 사야지요.
안 그러니?"
희정은 뒤를 놀아보며 경숙과 상임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럼."
경숙은 가만 있었지만 상임이 선수를 쳐서 대답했다.
11. 뫼비우스의 띠
"얘기하다가 해 뜨겠네. 고봉식이는 언제 나오는 거야."
추경감이 비워진 5병의 소주를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겁니다. 사실 그 홍길수라는 친구는
애당초 양경숙을 보고 차를 세운 거고 흑심은 온통 그 여
자한테 쏠려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식사 도중에도 계속 추
근댔지요. 그리고 나폴레옹이라는 디스코텍에까지 간 건데
말입니다."
강형사는 말을 끊더니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그런데 애시당초 양경숙은 그런 풋내기하고는 어울릴 맘
이 없었다 이겁니다. 그런 젖비린내나는 총각들하고의 시
작은 피곤과 경제적으로의 어려움까지 있고, 거기다가 귀
찮게 하는습성도 있다나요? 왜 노래에도 있잖습니까? 남자
는 여자를정말로 귀찮게 하네."
강형사는 갑작스레 노래까지 한 곡조 뽑아내는 것이었다.
"아이고, 됐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 나폴레옹이라는 디스코텍에서 문제가 생긴 겁니다.
거기는 그냥 젊은 애들이 모여서 춤만 추는 데가 아니라
쇼도 하는 성인 나이트 클럽인데 말입니다."
첫 블루스타임에는 희정이 얼씨구나 좋다 하고 홍길수와
춤을 추었다. 춤을 춘 건지 부둥켜 안고 몸을 비벼댄 것인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번째 블루스 타임이 돌아오자 홍길수는 경숙에게 춤을
권했다.
"저는 블루스 같은 건 싫어요."
경숙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골고루 추어야 뒷말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홍길수는 물러서지 않고 넉살 좋게 들러붙었다.
"난 하여간 싫어요."
경숙은 여전히 간단하게 거절을 표시했다. 그러자 홍길수
도 일단 한 걸음을 양보하여 상임에게 춤을 권했고 상임은
쾌히받아들였다.
"너 왜 그러니?"
희정이 맥주를 들이키며 말했다.
"난 저런 능글거리는 타입은 딱 질색이야. 나이도 너무
어리고. 못 되도 서른 다섯은 되어야지."
텍 안은 블루스 타임으로 잔잔한 음악이 깔리고 있었지
만, 방금 전까지 시끄러운 음악이 나갔던 관계로 귀가 멍
멍했던 경숙은 음량 조절을 하지 못해 그 소리는 꽤나 크
게 나왔다.
"영광입니다. 그럼 저와 한 곡조 추실 수 있겠습니까?"
문득 뒤에서 한 소리가 들렸다. 경숙이 깜짝 놀라 돌아보
았다.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멋장
이였다.
"올해로 꼭 서른 다섯이올습니다."
사내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아요."
경숙은 간단히 그 제안에 응했다. 그 사내가 꼭 마음에
든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홍길수에게 정신차리라는
의미에서 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블루스 타임에는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지 않는다.
그때문에 홍길수도 곧 경숙이 어느 남자와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속이 당연히 편할 리가 없었다. 홍길수는
디스코 타임으로 넘어가며 그대로 춤을 추는 두 사람에게
어느 새 뛰쳐나온 인파를 헤치며 다가갔다.
"블루스 같은 건 싫으시다더니?"
경숙의 우윳빛 팔을 사납게 잡으며 홍길수가 말했다.
"어머나, 왜 이래요? 나 좋은 사람과 내가 추겠다는데?"
경숙이 발칵 화를 내며 팔을 비틀어 빼내려 했다. 그러나
홍길수가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잘 빠져 나오지를 않았다.
"아파!"
경숙이 비명처럼 고함을 뻑 질렀다. 사람들이 흘끔 돌아
보았다가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고개를 돌리고는 춤을 계
속 추었다.
"이것 봐, 팔을 놓아 드려."
경숙과 춤을 춘 사내가 홍길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당신은 상관 말아."
홍길수가 화를 내며 사내를 돌아보았다.
"나와 춤을 같이 추시는 분인데 왜 상관을 말라는 게야."
사내가 한 마디 하자 홍길수는 갑자기 얼어붙기라도 한
양 옴짝달싹을 하지 못했다.
"팔을 놓으라니까?"
그 말이 사내 입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홍길수는 팔을 놓
았다.
"재있게 지내십시오."
홍길수는 인사까지 꾸벅 하더니 슬금슬금 사람들 속으로
자신을 감추었다.
"이상한 놈이구만."
사라지는 홍길수를 보며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여기서 나가요."
경숙은 갑자기 사내가 한껏 좋아졌다. 경숙은 그의 팔깡
을 끼고 말했다.
"난 양경숙이라고 해요. 유는?"
"고봉식."
사내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뭐 그래요? 뭐하는 사람인지도 말해야지요."
고봉식은 차문을 열며 다가오는 기사를 손짓으로 보내 버
렸다.
"그쪽도 말 안 하기는 마찬가지잖아."
"난 여자잖아요? 하지만 그럼 좋아요. 난 대학생이에요."
"음, 그래? 난 사장이지."
고봉식은 반대쪽 문을 열어 경숙을 태웠다. 경숙은 요염
하게 다리를 오므리며 차에 올랐다.
"알겠어요. 명왕성 그룹하고 관계가 있는 자리에 있군
요."
"어, 그걸 어떻게 알았지?"
고봉식은 깜짝 놀랐다.
"아까 그 남자, 명왕성 그룹의 직원이거든요. 그래서 그
렇게 꽁지가 빠져라 하고 달아났던 거예요."
"아하, 그랬었군."
고봉식은 감탄하는 척하며 경숙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스타킹도 신지 않은 맨살이었다. 고봉식은 손을 떼지 않은
채 그냥 얹어 놓았다.
"기어는 여기가 아니에요."
경숙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을 떼어낼 동작은 전혀 취하
지 않았다.
"상관 없어. 이 차는 자동 변속이야."
고봉식은 경숙이 저항하지 않는 것을 알자 좀더 대담하게
미니스커트 속으로 손을 들이 밀었다. 경숙은 잠깐 놀란
듯이 다리를 오므렸다가 이내 포기한 듯 살며시 벌려 나가
기 시작했다.
"나도 자동 변속에 속한다고요."
경숙의 목소리에는 어느 새 물기가 어려 있었다.
"어디로 갈까?"
"근사한 호텔로 가요."
"둘이 만난 첫날부터 호텔로 갔단 말야?"
추경감이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바로 80년대식, 아니 90년대식 사랑입니다. 그저
즐기겠다는거지요. 고급 매춘입니다. 오히려 난 돈 받고
팝니다 하는 그런 데 여자들이 솔직하고 솔직한 만큼 더
인간다운 겁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강형사는 얼굴이 벌갛게 되어 열변을 토했다.
"그래 즐기면 그만이지, 어떻게 비서실에 취직까지 되었
어?"
"여자한데 놀리면서 돈을 주느니 공금으로 화대를 주자는
고봉식의 천재적인 계산 덕분 아니겠습니까? 거기다가 비
서실에 있다고 해도 경리 따위의 일에는 문외한이라 무슨
약점을 잡힐 염려도 없고요. 심심하면 사장실 문 잠가 놓
고 한바탕 몸을 풀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여자는 결혼을 원한다든가 하는 일이 있지 않을
까?"
추경감이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것도 다 남자가 기력이 쇠퇴해서 영 만족을 시킬
수가 없게 되었을 때나 하는 이야깁니다. 고봉식은 이제
30대 중반입니다. 정력이 펄펄 할 땐데 여자 하나 만족 못
시킬 것 같습니까?"
"그래도 여자는 먼 미래를 내다봐야지?"
추경감이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성인군자다우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이 어디
그렇습니까? 여자라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남자한테 기
대지 않고 잘 살수 있다 이겁니다. 나이 차가 지는 것도
아니고 세컨드라고 경숙이 꿀릴 게 뭐 있겠습니까?"
"그 집안에서는 이런 내막을 아나? 모르면 선이라도 보라
고 할 텐데?"
"집에서는 그러겠지만 싫다는 소 물 먹일 수야 없지요.
그냥 세월 가는 데로 보고 있는 거지요."
"그럼 고봉식의 생각은 어떤 거야? 어차피 마누라하고는
벌써 예전에 사이가 틀어졌던 게고."
"그걸 경숙도 눈치를 챘지요. 그래서 이 기회에 아예 자
리를 꿰차고 들어가겠다고 고봉식을 조르기 시작했더랍니
다."
"그래? 고봉식은 거기에 뭐라고 답을 했었대나?"
"이혼을 생각 중이다, 이제 곧 이혼한다, 위자료 절충 중
이다, 이혼 수속을 밟기로 했다, 기타 등등."
"계속 거짓말을 했단 말야?"
"그렇죠. 나라도, 치마만 보면 환장하는 이 강형사도 그
런 여자 트럭채 가져오면 트럭만 갖고 여자는 내다 버립니
다. 고봉식이 환장이라도 하기 전에는 절대로 경숙이라는
여자와는 결혼을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상은
경숙도 딱히 결혼할 맘은 없는 모양입니다. 만나는 남자들
도 따로 있는 형편이고, 이 기회에 돈이나 우려내겠다는
생각인 모양입니다. 한 마디로 무서운 세상이지요."
"이번 사건에 대해서 알리바이는?"
"그 희정이라는 친구 집에 있었더군요. 하지만 위증일지
도 모릅니다. 둘은 워낙 가까운 사이니깐요."
"그 여잔 뭘 하는데?"
"홍길수의 아내가 되었지요. 그리고 홍길수 그 자는 실장
으로 앉아 있습니다. 역시 빽이 좋으니까."
"능력이 좋은 건지도 모르지. 너무 나쁘게만 생각치는 말
게."
"물론이지요. 능력도 좋았겠지요. 이부자리에서 말이에
요."
강형사가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러니까 남편의 지속적인 출세를 담보로 거짓 알리바이
를 대줄 수도 있다, 이건가?"
"그날 대관령에서 사람들 눈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먼저
출발을 했지요. 그래서 범행 시간 전에 서울에 도착한 것
은 아주 확실합니다. 그런데 오자마자 집, 혼자 사는, 그
래서 알리바이가 없을 집이 아니라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
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는 있어도 부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대목이지요."
강형사는 다시 술을 한 잔 했다. 마지막 잔이었다.
"그만 일어나지. 늦었네."
"반장님, 뫼비우스의 띠라는 말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
까?"
"뫼, 뭐라고?"
"뫼비우스의 띠. 안과 밖이 없는 희한한 띠지요. 잘라도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이상한 띠, 이 사건은 바로 그런 모
습입니다. 다들 한통속이에요. 다들 한 여자를 죽이고 싶
어했지요. 다들 하나, 자르려 해도 둘이 되지 않아요."
강형사는 비틀거리며 근처 쓰레기통에 엎어졌다.
12. 절망의 나날
귀를 찢는 듯한 디스코곡이 실내를 꽉 채워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담배 연기에 젖은 실내 공기가 고영혜의 눈을 따
갑게 만들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 다섯 병이 그들의
지금 상태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 신나게 디스코나 한판 더 추어요."
고영혜가 담배만 피우고 있는 오민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
다.
"이제 집에 들어가 봐야 하잖아?"
민수는 영 생각이 없었다. 그의 평소 실력으로 보아 맥주
다섯 병을 혼자 다 마셨더라도 몸 가누기 어려운 상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따라 모든 게 시들했다. 마지못해 영혜와 몇
번 무대에 올라가 허리를 흔들기는 했으나 그곳에 더 머물
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요. 우리 밖에 나가 걸으며 얘기 좀 해요."
영혜가 잡았던 민수의 손을 그대로 끌고 나왔다.
"얼마예요?"
카운터 앞에서 영혜가 민수를 뒤로 제끼며 말했다.
"이러지 마. 이거,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라니까."
민수는 정말 화가 난 듯 영혜를 거칠게 잡아당겨 문 쪽으
로 밀고는 계산을 치렀다.
두 사람은 네온도 없는 공원 담 옆으로 걸었다. 한동안
서로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희주 생각하는 거야?"
한참 동안 말없이 걷던 영혜가 돌연 걸음을 멈추며 물었
다.
"지금 와서 그런 걸 따지는 건 무의미하지만."
"뭔데? 따질 건 따져야죠."
"희주를 고사장에게 소개한 장본인이 영혜였잖아?"
"아녜요."
"그럼?"
"희주 걔는 아닌 척하면서 실은 계획적으로 큰오빠에게
접근했던 거예요. 그 방향으로 나가기로 한 것 같았어요.
돌멩이들고 뛰어다니며 전경들하고 실랭이 쳐 보았자 노동
자 주인 되는 세상은 애당초 글렀다고 본 거죠. 그래서 자
기가 공장 주인 되어 공돌이 해방시킬 생각한 거지."
"그럼 희주 쪽에서 먼저 고사장에게 접근했단 말인가?"
"꼬리를 친 건 아니예요. 우연한 기회가 왔던 거죠."
"우연한 기회?"
"신라대학 앞에서 시위하다가 내가 머리를 다쳤을때 그
희주가 나를 병원까지 데리구 갔어요."
"올케를 그렇게 늘 부른 거야?"
"올케 이전에 내 친구였으니까. 걔가 우리집으로 연락을
했는데 그때 큰오빠가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아버지나 다
른 식구들은 내가 데모하다 다쳤으니까 죽게 내버려 두라
고 화를 벌컥냈대요. 거기서 희주와 오빠가 인사를 나눈
거죠 뭐. 그 후로 우리 오빠가 첫눈에 반해서 희주를 쫓아
다녔죠. 바람둥이 재벌 2세의 장난인 줄 았았는데."
"그 얘기를 왜 그때 나한테 숨겼지?"
민수가 영혜의 팔을 잡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화난 얼굴 같았다.
"흥! 그런 신나는 사건을 내가 왜 형한테 한단 말이에요?
오히려 설희주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라구?"
"정말 한심한 여자로군. 귀띔도 해 줄 수 없있어?"
"그런 소리 말아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형이 언제
나한테 고운 눈길 한번 보내 준 일 있어? 언제나 나를 재
벌의 앞잡이로만 보았지. 그래요, 우리 아버지가 재벌이지
만 내가 그렇게 행동한 일 있었어? 난 언제나 희주나 형
편이었어."
"거기 대해서 난 견해가 달라. 영혜가 그때 한 일은 진심
에서 우러난 절실한 일이 아니었어. 목구멍에서 피를 토하
는 절규가 아니었어. 피흘리며 고문당하다 죽어간 동료들
의 참뜻에 동조하는 게 아니었어. 재벌의 딸이니까 저렇게
한다는 비아냥이 듣기 싫어 운동권을 돕는 척했던 거야."
민수는 말이 좀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영혜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헝이 뭐 오빠와 설희주 관계 귀띔해 주도록 자리 한번
만든일 있었어요?"
영혜는 이야기의 촛점을 계속 딴 곳에 두고 있었다.
"그 당시는 구속된 후배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
"솔직이 말해 설희주는 아름다운 여자였어요. 두 가지만
빼고는."
"두 가지가 뭐야?"
민수는 가로등 밑에 돌벤치를 발견하고 영혜를 그곳에 앉
히며 말했다.
"형, 우리 한잔 더 할까?"
영혜가 갑자기 앞에 있는 카페 간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가 좋아. 별도 잘 보이고."
정말 하늘에는 유난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밝
은 가로등이 수은 불빛을 기를 쓰고 쏘아댔지만 멀리서 오
는 별빛을 이길 수 없었다.
"난 설희주가 오빠에게 넘어가 주길 바랐지만 그럴 여자
가 아닐 것이란 걸 믿었어."
"근데 아까 말한 두 가지 빼놓은 건 뭐야?"
민수가 이야기의 촛점을 되돌렸다.
"천한 집에 태어나 어쩔 수 없이 몸에 밴 매너, 비굴해
보이는 듯하고 자신 없어 보이는 태도. 둘째는 저 혼자 세
상을 다 건질 듯이 운동권 리더가 된 것."
"영혜처럼 상류 사회의 냄새를 풍기는 것은 품위가 아니
고 오만이야. 가진 자의 어쩔 수 없는 자만심. 그러나 설
희주는가장 민중다운, 이 나라 보통 집안의 딸다운 매너를
가진 학생이었어. 그걸 지금 와서 나무라진 말아요."
민수는 멀리 별만 바라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어쨌든 희주는 큰오빠 같은 돈 많고 바람 많은 멍텅구리
한테 무너질 여자는 아니란 생각을 했어. 그때 희주가 오
빠를 차지하려는 음흉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어요. 결국 설희주는 우리 집으로 시집을 오고 말았
지. 난 처음엔 속으로 오빠 보고 설희주는 그런 애가 아니
니까 냉수 먹고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희주와 오빠 일이 잘 되어서 걔가 민수씨
곁을 떠나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어. 결국 그렇게 되
자 처음엔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왔는지몰라. 적어도 민수
씨의 나에 대한 감정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말예요."
민수는 아직도 별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위인 설희주는 우리들의 선배이면서 친구
였어요. 우리 모두가 존경하고 따르는 무사였지. 나의 속
셈은 좀 달랐지만 말야. 설희주의 변절은 우리에게 커다란
절망을 안겨 주었어. 모두가 너무 큰 충격에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어요. 난 기쁜 면도 있었지만 한켠에선 분
노 같은 것이 자꾸 고개를 쳐들어 혼났어요. 어쩜 난 민수
씨보다 걔를 더 사랑했는지 몰라요. 민수씨보다 인간적 실
망이 더 컸는지 몰라요. 개인적으로는 기쁘고, 뭐랄까 공
적으로는 슬프고."
"난 고봉식 사장을 더 이해할 수 없어. 왜 자기 집안에
걸맞지 않는 그런 여자를 아내로 택했을까? 일시적 노리개
감이라면 오히려 그다운 일이야. 그런데 재벌은 장차
관집이나 재벌끼리 혼인하는 것 아니야? 소위 상류 사회끼
리 말이야."
"큰오빠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그렇게 몸이 달아 쫓아다녔으면 적어도."
"처음부터 두 사람은 물과 기름이었지요. 잘못된 출발 아
니에요? 어쩌면 두 사람은 그것을 알고 결혼했는지도 몰라
요. 설희주는 오빠의 재산과 위치를 이용했고, 오빠는 설
희주의 미모와 우리 집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충격
에 반한 거겠지요."
"신혼 한 시절은 사이가 좋았다고 그러지 않았어?"
민수는 여전히 고개를 하늘로 향한 채 영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한 시절이 아니고 한 순간이라고 해야 옳겠지요. 육체를
탐험하는 한 순간 말이에요."
"더러운 상상은 하지 맙시다."
"불행한 결혼의 전형이라고 보아야지요."
"오빠가 설희주씨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은 뭔가? 보잘
것없는 집안 출신에, 상류 사회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 그
런 것인가?"
오민수가 돌벤치에 다시 앉으면서 말했다.
"홍! 오빠가 그런 형이상학적 문제로 올케를 싫어한 줄
아세요? 그런 게 아녜요. 오빠는 설희주의 치장부터 우선
싫었던 겁니다. 입술에 루즈를 바르지 않는 것부터 촌티나
는 옷차림까지."
영혜는 설희주와 고봉식의 사이가 금가기 시작한 부분을
극히 사소한 것에 두고 있었다.
설희주는 모든 의식 있는 여학생들이 그랬듯이 지극히 수
수한 매너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화려한 재벌집 맏며느
리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맞지 않았다. 늘 고봉식으로부터
핀잔을 받았다.
"뭐야, 여자가 그게. 우리집에 초상이라도 났어! 생머리
를 풀어 너울거리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푸르죽죽하
고, 옷은 그게 꼭 한강 다리 밑 구걸꾼 여편네 모습이군.
흥! 배운 여자는 그렇게 차리는 거야? 머리에만 고상한 생
각 들어 있으면다야?"
늘 그랬듯이 술 한잔 들고 들어오는 고봉식은 아내 설희
주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희주는 화장을 싫어했다 입술을 빨갛게 바르고, 푸르죽죽
한 아이새도우, 그린 눈썹, 그리고 요란하게 지지고 볶은
머리, 손가락 사이에는 수천만원짜리 다이어 반지, 화사한
홈웨어, 그런 것들이 딱 질색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재벌 집에 시집와 동료를 배신했다는 자책
감때문에 늘 괴로워하는 그녀가, 외모로도 그렇게 타락해
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난감처럼 예쁘게 치장하고 애교를 떨면서 남편을 맞이
하고, 침대 위에서는 날렵한 창녀가 돼 주어야 된다고 생
각하는 고봉식에게 그녀의 모습은 지극히 못마땅했다.
"설희주, 너 버릇 고치지 못한다 이거지? 생과부나 된 것
처럼 엄숙하고 거지 같은 그 모습 끝까지 고집하겠다 이거
지? 좋아. 오늘 밤도 침실에 들어올 것 없어. 그런 꼬락서
니로 명왕성 그룹 황태자 수청들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 같은 침실을 쓰는 날이 드물었다. 어쩌다가 인사
불성이 되도록 마신 날 옷이라도 벗져줄 양이면 느닷없이
희주를 때려눕히고 짐승처럼 제 욕심을 채우는 경우가 있
었다. 희주의 감정은 아예 짓밟아 버리고 아랫도리 옷만
끌어내린 채, 사랑의 말 한마디 없이, 얼굴 한번 쳐다 봐
주지 않고 황급하게 제 욕심만 채우고는 옆으로 나 뒹굴어
져 코를 곯았다. 그럴 때 학대받은 하체를 오므릴 생각도
않고 내버려둔 채, 희주는 남 모르는 눈물을 흘렸다. 이것
이 결혼 생활인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이런 꼴로 버
림받은 짐승이 되어 허송 세월만 헤야 하는 것인가? 최루
탄 연기 속에서 함께 눈물 흘리며 함성을 지르던 동료들이
이 모양을 보면 무엇이라고 한까? 설희주는 참으로 지옥
같은 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무슨 파티가 그렇게 많은지 파티에 동부인해서 갈 때마다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하잘 것 없는 차림새 때문이라
고 희주는 생각했다. 그러나 고봉식은 그것이 아주 중요한
사업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옷이야 아무려면 어때요. 정신이 문제 아녜요? 이 차림
이 어때요. 우리 민족이 가장 줄겨 입던 흰 저고리, 그리
고 실용적인 검은 치마. 화장올 해야한다구요? 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입술에 색칠은 하지 않았어요. 제가 화
장 안한 것 같아요? 연지 곤지 대신 크림 바르고 분단장했
으면 됐지 않아요?"
"아이구, 나 못 살아. 어떻게 저런 촌뜨기를 내가 여편네
라고 얻어 가지고 이 고생인지. 빨리 그 피양 여자 동
무 같은 옷 벗어 던지고 양장 하지 못해? 1천5백만원짜리
밍크 코트는 공연히 사준 줄 알아? 여편네가 반사업가 돼
야 사장 사모님 노릇 한다는 소리 못 들었어!"
고봉식 사장이 펄펄 뛰었다.
"밍크 코트 없앴어요."
"뭐라고? 그거 아버님이 사준 혼순데 맘대로 없앴어?"
"팔았어요."
"뭐야?"
고봉식은 어이없어 하며 발로 거실을 굴렀다.
"돈 몇푼이 없어 배를 곯아 가며 야간 학교에 다니는 애
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내 후배들이 하는 야학에 학
용품과 간식 비용으로 그 돈 썼어요. 얼마나 보람 있는 일
이에요? 내가 그 밍크 오바 입고 다니면 이 나라가 부자가
돼요? 가난한 노동자들이 따뜻해져요?"
"아이구, 두야."
고봉식이 통탄을 하며 머리를 싸맨 것이 한두 번이 아니
었다.
설희주도 꼭 그렇게 어긋지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고
봉식의 태도가 너무 미워 마구 쏘아불였다.
처음 시집 왔을 때는 그런 대로 사람 대접을 받았으나 시
간이 갈수록 설희주는 이 집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나중에
는 용돈 한푼 챙겨 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재벌집 맏며느리가 친구들과 만나도 점
심 한끼 낼 돈이 없었다. 그러나 돈 쓰지 않고 사는 버릇
이 몸에 밴 그녀는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시집 올 때 받은 반지며 온가지들은 밍크 사건이 있은 후
한점도 건드리지 않았다. 치사해서 그것 팔아 쓰지 않겠다
는 생각을 단단히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남편인 고봉식이 설희주에게 빨리 분단장에 파티
복 입고 회사로 나오라고 했다. 외국 바이어와 함께 저녁
을 먹기로했는데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 대신 양경숙이하고 가면 안 될까요?"
설희주는 그런 자리가 제일 싫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한
말이었다. 남편이 양경숙과 죽이 맞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물적인 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희주가 아니었
다. 그러나 희주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참으로 이상
한 일이지만 희주는 아내로서의 위치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고봉식이 그런 식으로 나돌면서 자기를 침
실에서 괴롭히지 않는것이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경숙이는 비서야."
"그럼 전 뭐예요?"
"이런 쯧쯧."
"저보다 경숙이가 아내 역할 더 잘하잖아요?"
"이 바보야, 그 바이어는 사무실에 자주 들락거려 경숙이
가 마누라 아닌 것을 다 알고 있단 말야."
"또 입술 연지 발라야 되나요?"
"바르든 지랄하든 맘대로 하고 다섯시까지 여기 나와. 박
기사 지금 집으로 갔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경숙이 명왕성 자동차 사무실로 들
어갔다. 사무실은 넓은 공장 마당을 거치고 작업장을 돌아
언덕 위로 가야 했다.
13. 투사와 사모님
설희주가 막 차에서 내려 사무실 계단을 오르려고 할 때
였다.
"고사장은 즉각 단체 교섭장에 나오라!"
옆 건물에서 머리에 띠를 두른 공원 수십명이 우르르 몰
려나와 주먹을 높이 들고 구호를 외쳤다.
"나오라, 나오라!"
한 사람의 선창에 따라 수십명이 구호를 외쳤다.
"이게 뭐예요?"
설희주가 박기사를 보고 물었다.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괜히 저러는 거죠, 뭐."
박기사는 설희주를 빨리 사무실 안으로 데리고 가려고 애
를썼다.
"지금 파업 중이에요?"
그러나 설희주는 발걸음을 옮길 생각은 않고 물었다.
"단체 교섭 중인데, 잘 안 돼서 중지했걸랑요."
박기사가 마지못해 설명했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노조 집행위원들이 빨리 단체 교섭 진행하자고
농성 투쟁, 아니 농성인가 뭔가 한다고 작업장에 죽치고
앉았다가."
"며칠 되었어요?"
"나흘짼가? 회사 간부들이 본 척도 안 하니까 떨쳐나왔군
요."
설희주는 건성으로하는 것 같은 박기사의 설명을 들으며
사태를 짐작했다.
"저기 사장 사모님이다."
"왕년의 노동 투사 설희주!"
그때였다. 갑자기 일행 중 두 명이 소리를 지르며 설희주
를가리켰다.
"설희주!"
여러 사람이 구호처럼 외쳤다.설희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뜻밖에 당한 일이었다.
"사모님, 우리 호소를 좀 들어주십시오. 저희들은 사모님
이 누구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나이 좀 들어 보이는 남자가 손짓으로 일행을 조용
히 하게 한 뒤 설희주 앞으로 와서 공손하게 말했다.
"댁은 누구세요?"
"난 명왕성 기계 노조위원장 정준홉니다. 쟁의부장한데서
사모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쟁의부장?"
"오민수씨 말입니다."
설희주는 순간 아쩔함을 느꼈다. 그제야 집행위원들이 자
기 이름을 부르는 까닭을 알았다.
설희주는 그들을 눈여겨보았다. 머리에 두른 흰 띠에는 '
투쟁'이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모두가 수염이 꺼
칠하게 자랐지만 눈동자는 불타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이
루고 말겠다는의지가 보였다. 서너 명의 여자들도 표정은
같았다. 모두 서른명쯤 되어 보였다.
설희주의 가슴이 뛰었다. 몇년 전만 해도 저들과 같은 목
적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앞장 서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구실로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설희주의 가슴에선 질책 같은 파도가 일었다. 지
금이야말로 저들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내가 사장님께 얘기하갰어
요. 안 되면 회장님에게도 호소하겠어요."
"모두 조용히 앉아."
정준호가 손짓을 하자 모두 앉았다. 그 앞에 설희주가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여선생님이 운동장에 한 반 아이들을
앉히고 훈시를 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우리들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최저의 인간 대접을 받자
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봐요."
정준호가 호주머니에서 유인물 같은 것을 꺼내 보며 말했
다.
"첫째, 임금 인상입니다. 우리들의 최저 임금은 노총이
밝힌 도시 근로자 최저 임금에도 미달합니다. 그러면서 회
사는 작년에 3백억원이 넘는 흑자를 냈습니다. 금년에는
최저 13프로는 올려 주어야 합니다. 둘째, 휴일 수당의 지
급입니다. 법정 휴일 수당까지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통상
임금의 5프로는 지급해야 합니다. 셋째, 인사 문제입니다.
회사는 툭 하면 노조 간부를 지방으로 발령을 냅니다. 그
뿐 아닙니다. 품질 관리하는 사원을 도금부로 발령내 아무
일도 못하게 하고 끝내는 실적 나쁘다고 정계위에 회부해
내쫓고 맙니다. 그래서 노조 간부를 징계 또는 이동할 때
는 노조의 동의를 얻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
사위원회에는 재심을 청구할 수 있게 하고, 징계위원회에
는 노동자들도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회사측과 노조측이
동수로 징계 위원을 두면 해결됩니다. 넷째는 회사의 기강
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 회사에는 여사장이 있다고
합니다.비서실에 있는 양경숙이 여사장이라고 합니다. 사
장은 자기 할 일을 왜 철부지 여비서에게 다 맡기는지 모
르겠어요.
온갖 유언비어가 다 떠돕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믿습니다만. 또 승진 인사의 편파성올 없애야 합
니다.
노조보에서도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물산에 있던 홍길수
란 사람을 무엇 때문에 벼락 출세를 시켜 우리 회사의 기
획실장으로 데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거기서도 유언비어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회사측 교섭 대표로
내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답니까?."
"무엇보다도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자면 화사측 대
표가 협상 테이블에 나와야 합니다. 오늘까지 협상 테이블
에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쟁의 발생 신고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희주는 그들의 요구가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임
금인상 요구도 크게 무리하지 않은 것 같았다. 더구나 양
경숙의문제는 경영진의 도덕성에 관한 일이라, 노조가 떠
들기 이전에 처리되었어야 할 일이었다.
"여러분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나에게 이 회사 일에 관
여할 권한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회사 경영인의 아내라는 입장에서 여러분의 뜻이 관철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 뜻을 이해하시면 경솔하게 행
동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싸우십시오."
설희주의 말끝이 조금 격앙되어 웅변조로 나왔다. 말이
끝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자, 우리 다 함께 합창합시다."
정준호의 선창에 따라 모두 일어서서 주먹을 흔들며 노래
를 부르기 시작했다.
"살아 춤추는 조국,
노동자 해방 위해."
설희주는 노동조합가를 귓전으로 들으며 사무실로 올라갔
다. 설희주가 사장실로 들어섰을 때 경숙은 보이지 않고
고봉식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녀을 쏘아보았다.
"잘하는군, 잘해. 누가 왕년의 투사 아니랄까봐. 아예 저
놈들과 한패 되어 쳐들어오지 왜 혼자 왔어? 내가 여기서
창문으로 그대 설희주 투쟁 선동하는 모습을 다 보았단 말
야."
"그럼 그들 요구 조건도 다 아셨겠군요."
설희주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 설희주! 똑똑히 들어. 너는 명왕성가의 맏며느리
야. 동시에 이 명왕성 자동차 사장의 여편네야. 네가 지금
어디에서 있는지는 잘 알겠지?"
고봉식 사장은 몇 마디 하지 않고 흥분해서 침을 튀겼다.
"잘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재벌가의 맏며느리 자격으로,
사장의 아내 자격으로 말씀드리겠어요. 저 노동자들 이야기
들어주어요. 돈 남기면서 왜 봉급 올려주지 않아요? 그리고
공정한 인사, 징계하시려면 노동자 참여시키세요. 그리고
양비서, 걔 딴 데로 전근시켜요. 공연한 오해 받으실 것 없
어요."
"저 여자가 미쳤군. 봉급을 걔들 요구대로 13프로나 올려
주라고? 누구 망하는 꼴 보려고 그래? 봉급 13% 올리면 1년
에 2백억원 이상 들어가."
"작년에 3백억원 흑자 냈잖아요? 그 돈 뭣에 쓰는 거예요?
결국 임금 착취했다는 얘기밖에 더 듣겠어요?"
"아이구 답답해. 저년이 완전히 미쳤군! 이 회사 재산이
얼만지 알아? 이 회사 재산이 1조원도 넘어. 1조원도 넘게
투자한 이유가 뭐야? 이 회사는 주식회사야. 영리를 추구하
는 것이 제1의 목적으로 되어 있는 주식회사란 말이야. 1조
원씩 투자해가지고 제놈들 먹여 살렸으면 됐지 은혜도 모르
고 남는 돈 다 내놓으라고? 계산상으로야 3백억 남았지만
그중 악성 미수금 80억 빼고 법인세 백억 빼고 시설 투자
벡억 넣고, 남는 게 뭐 있어? 주주들 가질 돈은 제놈들
봉급의 몇백분의 1도 안 돼. 그런데 어떻게 하라구? 거기다
가 휴일 수당 또 내라고? 아예 이 회사 집어 먹으라고 그
래. 지들 보고 사장 전무 뽑아서 하라고 그래. 당신 정신
똑똑히 차려. 여기는 철없는 여학생들 가투하는 데가 아니
야. 죽고 살기 하는 경영 전선이야. 내가 발 한 번 잘못 디
디면 이 회사로 해서 먹고 사는 3만명이 밥줄 끊어지게 된
단 말야."
설희주는 바보 멍청이로만 알았던 남편이 자기딴에는 조리
있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사장 노릇도 오래 하면 언변이
느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 생각의 근본은 역시 부르조아적 발상을 벗어
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 거대한 재산이 마치 당신 재산인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처음부터 당신이 1조원 돈 가져다 이 회사
차렸어요? 은행돈 끌어다가 노동자 임금 덜 주고 일으킨 공
장 아니예요? 이제 노동자 위해 쓸 때란 말입니다."
"아이구 두야. 저런 걸 내가 왜 마누라라고 들여 놓았지.
저런 걸 내가 여자라고 침대에 눕혀놓고 씩씩거린걸 생각하
면 어이구, 두야!"
"좌우간 회사 살리려면 도망치지 말아요. 단체 교섭 테이
블에 나가요. 노동자 그 사람도 다 피가 있고 양심 있는 인
간이에요. 나한테는 몹쓸 짓 해도 좋지만 노동자는 불쌍해
요."
"썩 꺼지지 못해. 너하고 나하고는 근본이 달라. 나온 구
멍부터 다르단 말야. 너 같은 년이 어떻게 잘못돼 이 집으
로 들어와 이 지경이 되었나? 아이구, 두야!"
고봉식은 정말 머리가 아픈지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고 밖
으로 나갔다. 파티고 뭐고 다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설희주는 그날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서 착잡한 생각에 사
로잡혔다. 처음부터 자기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고봉식과
결혼했던가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가난한 핍박이 지겨워 낙원을 찾아 도피한 것인가? 가투와
공장 현장에서의 싸움으로는 아무것도 이를 수 없으니, 가
진 자 속에 뛰어들어 세상을 바꾸어 보자고 한 것은 풍요
속에 안주하기 위한 핑계는 아니었던가? 자기를 속이기 위
한 논리가 아니었던가를 몇번이나 되뇌이며 따져 보았다.
재벌가의 맏며느리로 화려한 변신을 하고 자기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고 싶었다든지, 허영을 한껏 채
우며 오만해지려는 여성의 본능이 투쟁이라는 핑계를 만든
것은 아니엇던가?
설희주는 몹시 괴로웠다. 그녀는 시아버지의 사무실로 달
려갔다.
"아버님, 제 의견을 꼭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이에
요."
설희주가 시집 온 이후 시아버지에게 이렇게 비굴할 정도
로 사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에 하던 노동자
들의 절규가 귀에 쟁쟁했다.
"회사가 조금 덜 벌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그만 행복을
줄수 있어요."
고회장은 기가 막히다는 듯 담배만 뻑뻑 빨다가 입을 열었
다.
"아가, 네가 학교 다닐 때 노동 운동인지 학생 운동인지
하는 철없는 짓을 했다는 것은 알지만 생각이 거기까지밖에
안 가는데는 크게 실망했다. 네 같은 식으로 집안을 운영하
고 회사를 운영하고, 나아가 나라롤 운영하면 얼마 가지 않
아 모두 거덜나고 말 거야."
고회장은 더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회전의자를 돌려 버렸
다.
"명왕성 그룹의 오늘이 있기까지 수많은 불쌍한 노동자들
이 피땀을 흘렸어요. 이제 이만큼 되었으니까 과일을 조금
나눠가질 권리가 있는 것 아내요? 운영하는 데 좋은 아이디
어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것 아네요? 공정한 인사 위해 한
마디 할 권리가 있는 것 아네요? 그들이 회사를 내놓으라든
지 들어먹자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러나 설희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회장이 벽력 같은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네가 지금 나를 훈계하는 거냐?"
"죄송해요, 아버님. 하지만."
"내 몇 가지만 가르쳐 줄께, 똑똑히 들어."
고회장이 벌떡 일어섰다.
"임금 13프로 올려 달라. 좋지. 임금은 그야말로 다다익
선. 오를수록 좋지. 하지만 자기들만 몇푼 더 받는 걸로 끝
나지않아. 우선 회사 재원이 거기까지 못 미칠 뿐 아니라
자동차 종업원들만 올릴 수는 없어. 다른 24개 계열회사 수
만 명을 다 올려야 하는 연쇄 파동이 일어나. 다행히 명왕
성 자동차는 작년에 이익을 좀 냈지만 전자, 기계 회사들은
모두 적자야.
근데 그 회사 노조는 가만 있대? 아니, 설사 회사가 재원
이 있다고 쳐도 그렇지. 지금 정부에서는 인플레 잡느라고
한자리 숫자 한자리 숫자 타령을 하는데 우리만 불쑥 올려?
그래서 정부에 밉보이고 인풀레에 앞장서란 말야? 그렇게
하면 물가가 26프로 올라 결국은 근로자들이 더 못 살게 되
는 이치를 왜 몰라? 그렇다고 임금 안 올리자는 것은 아니
야. 올려 준다고."
고회장은 설희주와 달리 노동자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종
업원 혹은 근로자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뭐 인사위원회에 들어오겠다고? 징계위원을 회사
와 동수로 하자고? 미친 놈들. 아예 사장을 노조서 투표로
뽑지 그래. 하긴 그렇게 한 회사도 있기 있더라만. 그
것은 엄연한 경영권의 침해야. 법을 깨뜨리는 일일 뿐 아니
라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자는 일이야. 자본주가
무엇 때문에 돈을 대는거야? 경영권, 인사권 가지자는 거
야. 근데 제놈들이 인사권 휘두르겠다고? 그걸 원하면 지들
이 돈 거둬 회사 차리면될 것 아냐. 회사는 법에 보장된 해
고권이 있어. 그런 식으로 하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나
알아? 철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안에 들어가 살림이나 살
아."
"그건 아버님의 일방적인."
"듣기 싫어 !"
고회장은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고는 옆방으로
갔다. 설희주는 고회장이 욕심만 가득 찬 위인인 줄 알았는
데 제법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
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진 자, 기득권자의 자기 보호 논리
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싸움이 참으로 어렵
게 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희주는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막막한 절망에 부딪혔을
거예요. 최루탄 냄새 피해 재벌 옷자락에 뛰어들면 뭐가 풀
릴 줄 알았겠지요. 천만에. 더 큰 절망이 있을 뿐이지요."
영혜의 제벗대로 하는 해석을 듣고 있던 오민수는 머리를
싸매고 말았다.
"희주를 욕하지 마. 넌 희주를 욕할 자격이 없어. 너희들
모두가 희주 죽기를 바랬지?"
강형사의 머리에는 설희주라는 한 인간의 모습이 그림처
럼 그려졌다. 처음엔 허영에 들뜬 한 가난한 집 여자가 돈
에 홀려 앞뒤 재보지 않고 재벌 아들을 유혹한 여자로 비
쳤으나, 그녀에 대한 조사를 하면 할수록 그녀의 모습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강형사는 그녀에게 평소 가장 호의적이었던 유일한 고씨
네 식구인 고봉길을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고봉길이 그렇
다고 해서 혐의권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강형사가 캐
낸 것은 고봉길과 설희주가 이상한 의심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설희주가 딱 한번 낙태 수술을한 일이 있는데, 그것이 고
봉길의 씨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 남편 고봉식으로부터
심한 추궁을 당했다는 것이다.
고봉길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펄쩍 뛰었다.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그런 적이 있긴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요. 나를 형
수와 사통한 패륜아로 보지 마세요. 그건 형의 오해였어
요. 아니, 오해라기보다 뻔히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형
수를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그런 거였어요. 그때 형은 어
떻게 해서든지 형수를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싶어 했으니까
요."
"설희주씨는 왜 낙태를 했나요? 애기가 있어야 그 집안에
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할 텐데요."
강형사가 담배를 권하며 말음 재촉했다.
"싹이 노오랗다고 본 거죠. 골빈 식구들 틈에서 골빈 2세
나 만들어 줄 골빈 여자는 아니니까요. 난 정말 우연히 말
려들었어요. 어느날 야간 업소 일을 끝내고 아침 10시쯤
집에 들어왔더니 형수가 거실 소파에 엎드려 울고 있더군
요. 나는 무어라고 할 말이 없어 한참 지켜보고 서 있었지
요. 형수는 내가 온 줄을 알고는 눈물을 닦고 옷매무새를
고치더군요. 그러더니갑자기 돈 10만원만 있으먼 빌려 달
래요."
"아니, 설희주씨는 그만한 돈도 안 가지고 있단 말입니
까? 재벌의 맏며느리며 사장의 사모님이."
"만들려면 만들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꼭 필요한 돈은 크
레디트 카드를 써서 형한테 자동 결재를 받았어요. 그리고
밍크코트 사건 이후 보석이나 패물은 절대로 팔거나 남을
주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현찰이 갑자기 필요할 경
우엔 빌릴 수밖에 없지요."
"알 만하군요. 그래서요?"
"그래서 마침 야간 업소에서 일당으로 받은 돈이 있어 주
었지요. 그랬더니 형수는 대강 옷을 걸쳐 입고 화장도 하
지 않은채 외출을 하더군요. 나는 무심히 보고 있다가 갑
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일을 저지르지 않나?
어디 가서 자살이라도 한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 뒤를 밟
았지요. 그랬더니 뜻밖에 동네 앞에 있는 산부인과로 들어
가더군요. 나도 따라 들어갔더니 간호원과 실갱이를 하고
있었어요. 먼 발치서 보고 있었더니 낙태 수술올 요구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일이 성사되었는지 형수가 수술실로 들
어 가더군요. 나는 거기서 몇 시간을 착잡한 심정으로 보
냈어요. 형수는 핼쓱한 모습으로 나오다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더군요. 부축해서 나오던 간호원이 나를 보고 아저씨
되십니까? 아저씨가 동의하셨다면서요? 하고 물었어요. 나
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죠. 그리고 결혼식장의 신랑처
럼 형수를 내가 인수받아 부축해서 집으로 왔어요. 우리는
집으로 오는 동안 한 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근데 이것이
소문이 난 거예요. 마침내 형 귀에 들어가고."
"주둥이 닥쳐 ! 더러운 여자."
고봉식은 펄펄 뛰었다. 그러나 정말 자기 아내가 부정한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정말 동생과 무슨
일이 있었다고 믿는다면 그 정도로 끝나지 않고 주먹으로
때려서 설희주를 죽이고 말았을 것이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결백해요. 그건 당신 아기예요."
"그런 거짓말 누가 믿을 줄 알아? 그럼 왜 봉길이하고 같
이 병원에 들락거려.두 연놈이 만든 씨 아니면 왜 두 연놈
이 함께 긁으러 다녀? 할 말 있어?"
"당신이 더 잘 알듯이 나는 이 집에서 현금 한푼도 만질
수 없잖아요. 그래서 도련님한테 도움을 청했을 뿐이에
요."
"둘러대려면 제대로 둘러대. 고봉식의 마누라가 돈 10만
원 없어 빌려 썼다면 개도 웃는다 웃어. 너 나하고 언제
같이 잔적 있어? 최근 대여섯 달동안 한번도 널 건드린 적
없어. 그렇다고 그게 그렇게 하고 싶어 봉길이 놈한데 벌
려 줘?"
고봉식은 방에 있는 베개며 시계를 마구 집어던졌다.
"그래 몇번이나 벌려 줬니, 더러운 년!"
"당신은 술 취했을 때마다 나한데 짐승처럼 덤벼들었어
요. 마치 밤거리에서 돈 주고 산 여자처럼 애정 한 줌 없
이 덤벼들어서 잉태된 죄 많은 씨앗을 낳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당신처럼 오만하고 인간답지 못한 2세를 이 세상
에 또 나오게 할 수 없었어요. 그것은 공해예요. 인간 공
해!"
"그래도 거짓부렁일 계속하고 있어. 떳떳한 아이였으면
왜 뗐겠어? 네 말을 믿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당
장 이집에서 나가."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설희주는 더 이야기를 해 보았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던지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가서 길을 막아 놓고 물어봐! 하늘 같은 남편의 허락은
커녕 눈치 한번 안 보고 덜렁 아기를 지웠다고 그래 봐!
잘 했소 하는 미친 놈 있나. 하긴 남편 허가 맡고 가랭이
벌려준 건 아니니까."
우리가 언제 마주 앉아 이야기 한번 나눈 적 있어요? 당
신은 나를 아내로 취급한 적 한번이라도 있어요? 당신 눈
치 볼 틈이라도 준 일 있어요?"
"여자 하기 나름이야. 왜 남편을 그렇게 못 만들어? 솔직
하게 말해서 네가 나를 진짜 남편으로 생각하니? 한번 가
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넌 날 사랑한 게 아니고 가진
돈을 사랑했잖아. 내가 아니고 돈 보따리, 사장 사모님 자
리 보고 시집은것 아냐!"
드디어 고봉식은 가장 모욕적인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설희주는 오히려 담담했다.
"그런 여자랑 왜 결혼했어요?"
"내가 미친 놈이지. 눈깔이 멀었었지. 반반한 얼굴에 씌
워서 순간적으로 판단력을 잃었다고 할까? 저 마귀 같은
얼굴을 좋아했다니. 저 거울 앞에 서서 화냥년의 꼬락서니
가 어떤지 잘 봐!"
설희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려는 듯 돌아앉았다.
"이제 내 몸에서 풍기는 건 증오의 냄새뿐이야. 화약 냄
새야, 화약. 얼마 안 가 그 화약은 터지고 말걸. 화약 터
지기 전에 죽어 없어지든지, 내 앞에서 꺼지는 게 좋을
걸!"
"당신은 증오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에요."
"하하하, 그래도 오기는 살아 가지고. 하지만 달라.
널 증오하는 것은 네게 증오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야. 설희주, 넌 나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었어. 내가 얼
마나 무능력하고 멍청한 인간인지 깨우쳐 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 ! 하지만 난 너에게 허수아비가 될 수는 없었어.
넌 나와 결혼하고 얼마 못 가 통곡을 했지만, 이제 나를
짓밟은 그 알량한 우월감을 한탄하게 될 거야. 이혼해 달
라고 눈물로 애원하면 이혼해줄 거야. 하지만 일확천금의
망상은 버려야 해! 넌 처음 들어올 때처럼 빈 손으로 이
집에서 나가야 돼. 한 가지 달라진게 있다면 더럽혀진 네
밑구녕을 그대로 차고 가는 일이야!"
고봉식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러나 설희주는
모멸감을 더 견딜 수 없었는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형수는 몇 달 동안 그렇게 당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정
혜 누나나 영혜 누나, 시어머니까지 뻔히 알면서 한 마디
씩 거들어 형수를 괴롭히고는 했지요."
강형사는 고봉길의 이야기를 들으며 설희주가 얼마나 어
려운 처지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14.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
"근 40년이나 차이가 져요. 그게 뭘 뜻하는지 젊은 양반
이 알기나 할까요?"
최화정은 자신을 방문한 강형사에게 한탄조로 이야기했
다.
그러나 강형사는 그 말에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나이는 갓 서른. 강형사보다 어린 나이인 것이다.
"저승꽃이 피고 죽음의 비린내가, 벌써 오장의 어느 부분
이 썩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살을 부빈다는 것이 뭘 뜻하는
지 알기나 하냔 말이에요."
"그거야 제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고."
강형사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 내 알리바이 증명이나 빨랑 하라는 거지요? 하하
하."
최화정은 강형사를 쳐다보며 깔깔 웃었다.
"그래요. 그 얘기를 하려는 거예요. 성질 급하게 굴지 말
아요."
그녀는 푹신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난 그녀
의 동그란 엉덩이 자국이 금새 봉긋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거실 한 쪽에 마련된 바아로 몸을 옮겼다.
"뭐 한잔 하실래요?"
그녀는 위스키를 집으며 강형사를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공무 중에는 술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이건 꽤 비싼 술들인데."
최화정은 아쉽다는 눈치로 손에 들고 있는 술병을 바라보
았다.
"이건 스코틀랜드산이에요. 스카치 위스키란 말이에요."
최화정은 중얼거리며 얼음 잔에 위스키를 부었다.
"이걸 가지고 바위 위에 붓는다고(on the rocks) 하니 과
장이 참 심하죠?"
강형사는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그저 빙그
레 웃었다.
"난 칵데일을 싫어해요. 불분명하거든요. 뭐든지 화끈한
게 좋지요."
그녀는 잔을 들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스코틀랜드인은 굉장히 인색하대요. 유대인, 일본인과
더불어 3대 장사꾼으로 불린다나요? 스카치 테이프 아세
요? 그 테이프도 스코틀랜드인처럼 조금씩 찔금찔금 잘라
쓴다고 스카치라는 관형사가 붙었다나요."
"부인, 말씀 도중에 죄송하지만 제가."
강형사는 다시 최화정의 말을 가로막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군요."
최화정이 새침하게 말했다. 그녀 정도의 위치에서는 말이
그렇게 거푸 중단된 경험이라고는 거의 가져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요. 궁금한 게 대체 뭐예요?"
"이미 말씀드린 것이지만, 사건이 나던 날 최여사께서는
수영읕 하고 볼링을 가셨다고 증언했습니다."
강형사는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래요."
얼굴이 약간 붉어진 그녀는 태연하게 대꾸하며 소파 위로
다리를 올렸다. 자연스럽게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양새가
되면서 갈라진 치마 사이로 뽀얀 허벅지가 보일듯 말듯 한
뇌쇄적인 모습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수영장에 계셨던 것은 확인이 되었지만 볼링장에
서는 한 게임밖에 치지 않으셨던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강형사는 고혹적인 그녀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낮시간이라 볼링장이 붐비지 않았고, 또 설령 붐볐다 하
더라도 최여사 같은 브이아이피(VIP)의 등장을 종업원들이
놓칠리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셨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 말은 그 시간에 내가 며느리를 죽이러 집에 왔을 것
이라는 말로 들리는군요."
"그거야 최여사님의 생각이지요."
"난 어떤 점에서는 그 애를 동정한 사람이에요."
"세상에는 속박에서 구해 준다는 의미로 살인을 행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단 그런 성인군자가 아닌 게 죄송하군요."
"날 때부터 도덕을 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강형사는 끝까지 이죽거리며 말을 잇고 있었다. 최화정이
라는 여인이 풍기는 모든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돈 많은 여편네의 사치와 방탕에 젖어 있는 전형적인 모델
로 생각되었다.
"난 이날까지도 도덕을 논한 적이 없어요."
최화정은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잔을 비웠다.
"난 그저 도박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해요. 그리고 내 패
는 썩 괜찮아요. 나와 있는 판돈을 모두 긁을 수는 도저히
없어도."
최화정은 빈 술잔을 바라보다가 아쉽다는 듯이 얼음을 오
도독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조용한 집안에 얼음 부서지는
소리만이 요란히 들렸다.
"자자, 본론을 말해 주시지요."
강형사는 위압적인 목소리로 최화정을 채근했다.
"볼링 한 게임."
최화정은 중얼거리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볼링을 쳐 보신 적이 있나요?"
"그런 사치를 즐길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아 죄송하군요."
"어머, 사치라니요?"
최화정은 까르르 웃었다.
"고스톱은 치시나요?"
"물론이지요. 억대로 해본 적은 없습니다마는."
"점 백으로는 치시겠지요. 그러면 다만 몇만원이 깨지겠
지요? 볼링은 그보다 훨씬 돈이 적게 든답니다."
"하여간 그 점은 됐습니다."
"좋아요, 좋아."
최화정은 단념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강형사님이 알고 싶은 문제는 벌써 답을 한 거나 마찬가
지예요."
강형사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처음에 묻지 않았나요? 이미 저승에 한 발 들여
놓은 영감과 살을 부비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느냐고요."
그녀는 히스데리컬하게 웃었다.
"한번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요. 강형사님이 돈 많
은 68세의 할머니와 산다면요?"
"전 최여사와 말장난을 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
다."
"오, 물론 나도 형사 나리와 말장난을 하고 있올 만큼 한
가롭지는 않아요."
최화정은 과장된 제스처를 쓰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난 일방적으
로 데스데모나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아요."
"저도 스스로를 이달고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형사의 답변에 그녀는 놀람의 표정을 지으며 홍소를 터
뜨렸다.
"대단하시네요, 부라보!"
데스데모나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델로'에 나오는 혹인
장군 오델로의 아내이다. 오델로는 부하인 이달고의 모함
으로 정숙한 아내인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고 끝내는 목 졸
라 죽이고 만다. 최화정은 이 이야기에 빗대어 자신의 이
야기가 고회장에게 와전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비준
것이고, 강형사는 고자질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 것
이니 척척 손발이 맞았다고 할것이다.
"강형사님 이제 보니 문학적인 센스가 대단하네요?"
"아무렴, 영문과를 나오신 최여사님만 하겠습니까?"
강형사는 슬그머니 꼬리를 뺐다.
"옛일이지요. 대학을 나오면 여자들이란 다시 원시 시대
로 돌아간다고 우리 교수님은 늘상 얘기하셨는데, 나도 예
외가 아니에요. 남은 것이라고는 내가 그곳을 나왔다는 싸
구려 자존심과 추억을 먹고 사는 동창회 모임뿐이지요."
최화정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시절은 좋았어요. 낭만이 있었지요."
"지금도 대학생들은 낭만이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럴지도 몰라요. 지나간 사람들은 지나간 잣대밖에 갖
지 못했으니까요."
최화정은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풍만한 가슴의
윤곽이 살짝 드러나 강형사의 시선을 어지럽게 했다.
"대학을 나온 지 벌써 8년이나 되었다는 것이 정말 믿기
지 않는군요. 아직 결혼도 안 한 친구들도 많은데."
"괜찮은 분이 있으면 소개나 해 주시지요."
강형사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글쎄요?"
최화정은 빙긋 웃었다. 그 의미가 짐작되자 강형사도 쓴
읏음을 머금었다. 언감생심 재벌집 여편네와 어울리는 여
자를 형사 나부랑이가 소개시켜 달라고 했으니.
"내가 어디 있었는지 알고 있지 않나요?"
최화정은 어투를 돌변하여 강형사에게 직공을 가했다.
"예, 옛?"
"그날 말이에요, 그날."
최화정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형사가 칼바람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닐 거에요. 아마 상대방이 누군지도 알고 있겠지요?"
"상대방?"
"호호. 정말 모르는 척하실래요?"
최화정은 가지러지게 웃으며 바아 쪽으로 다시 몸을 옮겼
다.
"그 남자는 제법 성실한 편이었어요."
최화정은 다시 위스키를 따르며 말했다.
"그리고 화끈한 편이었구요."
강형사는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대학생치고는 정말 경험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호호
."
최화정은 바아에 몸을 기댄 채 술을 홀짝거렸다. 강형사
는욕지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요?"
"호호호, 생각보다는 순진하네요?"
강형사의 어투에 묻어 있는 노기를 느끼고 최화정은 술잔
을 내려 놓았다. 그러나 말투는 여전히 오만했다.
"디스코텍에서 만났지요. 블루스 한번 추고 귓바퀴에 바
람 한번 불어넣었더니 얼이 빠진 듯이 쫓아오던데요? 호호
호, 강형사님, 성인군자 같은 얼굴을 하지 마세요. 왜 난
그런 기회가 없었을까 통탄하고 계시는 것 아니에요?"
강형사는 속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것을 다시 밀
어넣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수사가 먼저였
다.
"그럼 가신 곳 은 어디지요?"
"강남의 파라다이스 호텔인데, 숙박부 따위는 쓰지 않았
으니까 정말 내가 그곳에 있었는지는 재주껏 확인해 보세
요."
"그 남자의 연락처는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두번째 만남이었는데, 그걸로 끝인 만남이었지
요. 그런 관계는 오래 끌어야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 학생도 나에 대해선 아는 게 없을 거에요. 하지만 찾으
려면 찾을 수는 있을 거예요. 청산 대학교 불문학과 학생
이라고 했으니까요. 뒤져 보세요."
"예, 물론 뒤져 보겠습니다"
강형사는 노기어린 목소리로 대꾸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봐요, 강형사님, 날 이상한 여자로 보지 말아요. 이미
말했잖아요. 저승길에 오른 노인."
"그런 결혼이라면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나요?"
"그런 얘길 할 줄 알았어요. 그래요. 잘못된 결합이지요.
하지만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최화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니요?"
강형사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이야기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네요. 그래도 그
때는 회장님이 60밖에 안 됐던 때지요. 신라의 김유신이
김춘추의 딸 지소와 결혼할 때의 나이도 예순하나나 됐다
는 사실을 알고 계세요?"
"금시초문입니다."
"아마 그 여자의 심정도 나하고 별다를 게 없었을 거예
요. 청춘을 바쳐 가며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여자니까요."
최화정은 한탄조로 지난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최화정의 집안 역시 작지만 알찬 사업을 해 나가고 있었
기에 그녀는 어린 시절 유복스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더
구나 아버지는 굴지의 대기업인 명왕성 그룹의 총수 고회
장과 죽마고우의 사이라 사업에는 그다지 걸리는 바도 없
이 날로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
업의 기반이 어느 정도 잡히기 무섭게 아버지는 무리한 사
세 확장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거의 1인 경영 방식으로 전문적인 경영 브레인의 도움도
없이 독자적인 결정으로 투자를 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브
레이크가 걸린 것은 최화정이 대학 2학년 때였다.
자금 유통이 막히자 아버지는 또다른 무리한 방법으로 사
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평소 고회장의 이름을 팔아 안면을
익혀 놓은 은행으로 가서 불법적인 대출을 요구했고, 그
대출은 성공했지만 곧 사정반에 걸리게 되어 쇠고랑을 차
고 말았던 것이다.
부자 망하면 3년은 간다는 말도 이제는 옛말인 듯, 재산
은 모두 채권자와 근로자들의 밀린 월급으로 충당되고 졸
지에 단칸방 신세로 밀려나고 말았다.
"난 지금도 어렵다라고 말하는 경영자들의 이야기를 왜
노동자들이 믿지 않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렵다면 어려운
거지요."
최화정이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실제로 어렵지 않은 사람들도 많지요. 안된 이야기지만
최여사의 아버님도 그런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하지 않았다
고 생각했다면 재산을 싹 정리해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셨
을걸요."
강형사가 이죽거렸다.
"그랬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그래도 공장은 잃어버리는
것 아니겠어요? 노동자들은 임금을 잃고. 모두 손해 보는
판에 낀 게 잘못이지, 뭐 어쩌겠어요?"
"그것이 경영자한테는 다 같은 손핼지 몰라도 노동자 입
장에서는 당장 끼니를 걱겅하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도 당장 끼니를 걱정했어야 했어요. 아버지는 수감
되어 있었고, 그 변호사비만 해도 엄청난 부담이었으니까
요. 그래서 나도 수를 내기로 했던 거예요."
"무슨 수를?"
"고지식한 우리 엄마는 영 생각을 할 수 없는 방법이었지
요. 난 고회장을 찾아갔어요."
고회장은 친구의 딸이라고 의외로 쉽게 최화정을 만나 주
었다.
아버지는 늘상 자신이 고회장과 고향 친구라고 자랑했지
만, 한번도 고회장이 놀러온 적이 없었기에 집안 식구들조
차 그 사실을 긴가민가하던 참이라 그와의 만남은 최화정
에게 어느 정도는 충격적이었다.
첫 대면에 최화정이 느낀 것은 그가 상당히 젊다는 것이
었다.
아버지와 친구이므로 당연히 60줄에 들어선 노인을 연상
했는데, 고회장은 50대도 채 안 돼 보이는 멀쑥한 신사였
다.
"그 친구 곤란한 이야기는 내 듣고 있었지. 그 문제로 온
건가?"
고회장은 최화정과 인사가 끝나자마자 대뜸 본론을 들고
나왔다.
"염치 없는 대답이지만 그렇게 되었어요."
최화정도 이 마당에 뺄 것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허허, 염치 없는 대답이라? 그럼 염치 있는 대답은 어떤
것이지?"
"최소한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인사를 드렸어야 오늘 염치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허허허, 그래 그건 맞는 이야기야."
고회장은 껄껄 웃었다.
"그래 최양에게 내가 뭘 할 수 있지?"
"취직을 시켜 주세요."
"응?"
고회장은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돈이나 좀 달라는
정도의 요구가 나올 줄 예상했던 모양이다.
"취직?"
"집에 노는 입 하나라도 줄여야겠기예요."
"음, 어디 대학을 다닌다고 한 것 같은데?"
"지금 영문과 2학년이에요. 정식으로 하자면 아무데도 들
어갈 곳이 없어서요."
"영문과라? 그럼 영어는 좀 하나?"
"이제 2학년이 하면 얼마나 하겠어요?"
최화정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고회장의 모습을 살짝 살폈
다.
고회장은 빙그레 읏었다.
"젊은 시절에는 배워야 하지. 배우는 것에는 때가 있어.
때를 놓치면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지. 학비와 용돈
을 내가 대줄 테니 학업을 계속 하도록 하라구."
"하지만 그건."
"됐어. 난 사업가야. 학점은 B 이상을 유지해야 하고 졸
업을 하고는 무조건 우리 그룹에 들어오는 거야. 그때 월
급에서 계산을 새로 할 테니까."
"그래도 그건"
최화정은 끝까지 그 제안을 거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
회장은 인터폰을 눌렀다.
"미스 배, 손님 돌아가시는데 차 준비시켜."
"아니, 아니"
최화정은 당황한 채로 일어나 인사를 하고 황급히 나왔
다.
"확실히 회장님은 나보다 고수였어요."
최화정이 킥킥 웃었다.
"하긴 비교가 안 되는 얘기죠. 갓 스물짜리가 노희할 대
로 노회한 대기업가와 맞먹으려 든다면 말이에요."
"그래, 돈은 꼬박꼬박 왔나요?"
"물론이지요. 그리고 난 아주 열심히 공부했지요. 회장님
은 B학점 이상이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있겠어요? 난 그
이후로 늘 올 A의 성적을 유지했어요. 그래야만 할 것 같
았지요. 덕분에 대학 후반기의 그 숱한 시간들의 대부분은
도서관 안에서 녹아 버렸어요. 난 축제 때에도 도서관 안
에 틀어박혀 있다가어스름이 짙어지면서 소란스런 소리들
이 도서관 안에까지 밀려들면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지요.
복에 겨운 연놈들을 속으로 욕하면서요."
"그래도 옛날 대학엔 낭만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죠."
최화정은 시무룩하제 말했다.
"날 좋아하던 남자가 있었어요. 바싹 마른 데다가 얼굴도
핼쓱한 애였죠. 철학과 학생이었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도
서관 안에서만 지내는 아이였지요. 자연히 얼굴을 하도 여
러번 부딪치게 되어 이름은 몰랐지만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저럼 여겨졌어요."
최화정은 말을 해 나가며 정점 활기를 띠어 갔다.
"하루는 종로에서 둘이 부딪쳤어요. 책방 안에서였는데
서로 필요한 책을 사러 나온 길이었지요. 그런 데서 아는
얼굴을 만난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인사를 했
지요."
"안녕하세요?"
최화정의 느닷없는 인사에 그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도 곧 따라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웬일이세요?"
"책을 좀 보러 나왔어요. 책방에 뭐하러 오겠어요?"
"아, 참, 그렇겠네요."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럼 사실 책은 골랐나요,"
"아뇨. 절판이래요."
"저런, 나도 지금 찾는 책이 절판이라고 하던데."
그는 책의 절판이 기쁘기라도 한 일처럼 말했다.
"그럼 우리 둘 다 굳은 돈이 있네요? 어디 가서 커피나
한잔해요."
최화정이 먼저 제의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린 이름도 서로 모르네요."
계단을 내려오며 최화정이 말했다.
"그렇군요.난 김성식이라고 합니다. 철학과 3학년이에요.
복학생이지요."
"아하, 그래서 늘 도서관에만 있는 거군요. 방위 나오셨
지요?"
최화정이 깔깔거리며 물었다.
"예."
김성식이 다시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친구 분들은 현역으로 군대에서 아직 나오지 않고, 외로
운 대학 생활, 쯧쯧. 성식이형, 난 최화정이라고 해요. 영
문과 3학년이에요."
"도서관에만 있어서 목석 같은 학구판 줄 알았더니 의외
로 화통하신 측면이 있군요."
김성식은 정말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둘의 사이는 그 일을 계기로 급속도로 가까와졌다.
"말씀 도중에 죄송하지만."
강형사가 최화정의 말을 막았다.
"고회장님과 가까와진 것은 언제지요?"
"역시 관심이란 그쪽뿐이시군요. 낭만이라는 건 그래
요, 좋아요. 난 성적표가 나오면 그걸 가지고 회장님에게
직접 찾아갔지요. 그저 우송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난
그럴 수는 없었어요. 찾아가면 회장님은 무척이나 좋아했
어요. 자기 딸들보다도 더 날 좋아했지요."
"왜 그러셨지요?"
"별 이유는 아니었어요. 사업이 바쁠 때 자식들은 이미
다 커버렸기 때문에 아버지한데 곰상맞은 딸들이 아니었던
게지요. 난 선천적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는 데 소질이 있
어요. 귀여움을 받는 스타일이죠."
"좋으시갰습니다."
"물론 내가 원하는 상대에게만이지요."
최화정은 강형사에게 반박하듯 답했다.
"그래서 한두번 만나다가 가까와져서 결혼에 골인했다는
이야깁니까?"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말씀이 애매합니다."
"집안을 다시 한번 일으켜 보려고 내가 회장님을 유혹했
어요. 왜 이렇게 말하니까 분명하나요?"
최화정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럼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어느 남자요? 아, 성식이?"
최화정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보다는 현실이지요. 그 남자, 한번 우연히 본 적이
있어요. 무슨 회산가 영업부에 있다더군요. 철학은 배워서
무엇에 쓴다는 건지, 원."
최화정은 혀를 한번 찼다.
"잘 봐줄 테니까 명왕성으로 오라고 했는데 싫다고 하더
군요. 그래서 한번 엔조이하고는 헤어졌지요."
"예? 엔조이요?"
"예. 왜, 그 말뜻을 모르세요? 남녀가 서로 즐겼다 이거
예요."
강형사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원, 형사님도. 생각보다 순진하시네."
최화정이 다시 까르르 웃었다.
"아버님은 그 뒤에 어떻게 되셨지요?"
"회장님이 힘을 좀 쓰셔서 보석으로 나올 수 있었지요.
하지만 곱게 자라신 분이 그 안에서 겪은 고초가 커서 병
석에 누우셨다가 돌아가신 지 3년 되었어요."
"잘 돌아가신 셈이군요."
강형사가 비꼬는 투로 말했다.
"무슨 뜻이죠?"
최화정의 눈꼬리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아, 별 뜻 아닙니다."
강형사도 순간 실언을 느끼며 황급히 정정했다.
"그날 행적에 대해서만 듣고 싶습니다."
"그 얘긴 이미 했잖아요? 나는 희주를 죽일 시어머니가
아니에요. 밉긴 했지만."
"아참, 그러셨지요.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강형사는 몸을 일으켰다.
"회장님도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까 고자질을 하시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세요."
"수사상의 비밀은 꼭 지켜 드립니다."
"그런 말은 기자들한테나 하시지요."
그녀의 말투가 여전히 냉랭했다.
"우리 가족들의 온갖 사사로운 이야기들이 잡지며 주간지
마다 훈장처럼 번쩍이고 있으니까요."
최화정은 그 말을 끝으로 집을 나서는 강형사의 뒷모습조
차 쳐다보지 않았다.
15. 젊은 아내의 비밀
날이 무척이나 좋았다.
휴일이기도 했으니 어디 가까운 산에라도 놀러 갔으면 좋
겠다는 것이 강형사의 솔직한 심정이 있다. 하지만 실천에
옮길 수없는 이유는 그 첫째가 애인이 없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명왕성 그룹의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도 수사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워낙에 대기업에서 일
어난 살인 사건인 만큼 연일 비상이 걸린 것이나 진배 없
었다.강형사는 추경감이 회의에서 나오기를 초조한 마음으
로 기다리며 줄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어이, 강형사"
드디어 기다리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반장님, 오늘 날씨도 좋은데 이게 뭡니까?"
강형사는 추경감을 보자마자 투덜거렸다.
"그래? 그럼 우리도 오늘 야외로 나가 보도록 하지, 뭐."
추경감은 이미 강형사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이
선수를 쳤다.
"아니, 정말이십니까?"
강형사가 반문했다.
"이 사람이 속아만 살았나? 상사가 하는 말을 안 믿어?"
추경감이 짐짓 역정을 내는 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을! 어디까지나 확인일 뿐입니다."
강형사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럼 어디로 모실까요? 북한산이나 관악산도 괜찮고, 도
봉산도 괜찮습니다"
"산은 무슨."
"그럼 인천에라도 갈까요? 바다 구경이나 하게?"
"바다는 또 무슨."
추경감은 계속 시큰둥하게 말했다.
"반장님, 금방 어디로 나가자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했지."
"그런데 왜 자꾸 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야외로 가자고 했잖아? 돈 안 드는 고수부지나 가자고."
"돈이 들기는 다 마찬가지잖아요? 제 기름값 나가는
데."
"그 똥차 기름값 줄여 주려고 가까운 곳으로 가자고 그러
는것 아닌가."
추경감이 강형사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예, 예, 좋습니다. 아무튼 이 회색 건물로부터 탈출을
하자구요."
강형사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앞장섰다.
고수부지는 신선한 마람이 불고 그 속으로 다시 따뜻하게
만 느껴지는 햇볕이 쏟아지고 있있다. 강형사는 두 팔을
벌려 바람을 한껏 맞았다.
"유후,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멋진 일일 줄이
야!"
"허허, 자네는 그래도 방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잖아? 난
그 안에서 삶은 통닭이 되는 줄 알았네 그려."
그런 강형사를 바라보며 추경감도 허허로이 웃었다.
" 그 주름살이 모두 닭살로 되었으면 볼 만했겠는데요?"
"예끼 ! 이 사람!"
강형사의 농담에 추경감이 슬쩍 팔을 올리는 시늉을 하
자, 강형사는 순식간에 저만치 달아난다. 바람이 다시 그
들의 읏음소리를 백사장 위에 흐트러 놓았다.
"반장님,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은 법이더군요."
"뭐가?"
"그 최화정이라는 여자 말입니다."
"명왕성의 안주인?"
"예."
"그 여자가 어때서"
강형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강변을 떠다니는 유람선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고 말입니다, 그것을 남편인 고회장도 알고 있다는 사실
이 보통은 아니잖아요?"
"음, 그리고?"
"그런데도 둘 사이가 원만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얼
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세컨드나 내연의 처도 아니고 엄연
히 본댁인데 한국 굴지의 명왕성 그룹의 안주인이 바람을,
그것도 수시로 아무하구나 눈만 맞으면 놀아난다는 사실,
정말 쇼킹한 뉴스가 아닙니까? 이런 것이 신문에라도 한번
때려지면 어떤 사단이 나겠습니까?"
"그래, 정말 우스운 일이지."
추경감도 한심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고회장을 만났을 때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들었네."
"그랬습니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앞부분의 이야기는 자네가 해준 것과 다름이 없었지. 그
런데 고회장이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어떤 면도 이야
기가 되더군."
추경감은 지포 라이터를 철컥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고회장이 처음 최화정을 보았을 때만 해도 친구의 딸로서
예쁜 아이라고만 생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그녀가 단
지 친구의 딸로 아름답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녀를 도와주
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확신할 수 없는 일이기
는 했지만.
그 도움을 준 이후로 그 자신은 그녀의 일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코 끝이 매운 2월 어느 날 그
녀가 회장실로 찾아온 것이었다.
"최화정이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인터폰을 통해 비서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최화정?"
그는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선약이 되어 있는 분인가?"
"아닙니다."
"그럼, 돌려 보내."
뭔가 더 말을 하려는 비서의 말끝을 잡아채며 그는 딱 부
러지게 말했다.
그는 인터폰을 내려놓으며 다시 한번 그 이름이 누구인가
생각올 떠올리려 해보았다. 하지만 기억은 텅빈 어둠뿐이
었다. 나도 늙었나 보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번쯤
들어본 이름일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살며시 문이 열리며 앳
된 얼굴의 여인이 들어섰다. 회장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식한 여인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어요? 학비를 받고 있는 최화정입니다."
고회장이 최화정을좋은 인상으로 보게 된 것은 첫마디에
서부터였다. 전일의 만남은 그녀의 당돌함도 당돌함이었지
만 고회장으로서 불운에 빠진 친구의 딸을 보았을 뿐 그
이상의 어떠한 면모도 파악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소개뿐만 아니라 상대
방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까지 알려주는
센스 있는 말이었다.
"오, 그랬군. 내가 하마터면 그냥 돌려 보낼 뻔했구먼.
이리앉아."
고회장은 최화정에게 자리를 권했다. 잠시 후 비서가 차
를 두 잔 가지고 들어왔다.
"미스 배, 그렇더라도 인터폰은 다시 누를 수 있도록."
고회장은 직원에게 간단하게 말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말이 길어야 번거로울 뿐이고, 짧게 하든 길게 하든 일할
놈은 하고 안 할 놈은 안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비서 역시 예 한 마디만 하고 방을 나섰다.
"그래, 학교 공부는 어떤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최화정은 고개를 15도 가량 숙인 상태에서 말하고 있었
다.
밖의 날씨가 꽤 추운지 귀 끝이 빨갛게 얼어 있는 것이
보였다.
"밖이 추운 모양이구나!"
"예, 영하 15도나 된대요."
최화정은 고회장의 말에 미리 준비나 하고 있었던 것처럼
거침없이 척척 대답했다.
"아버지는 나오셨던가?"
"예, 덕분에."
최화정의 얼굴은 여전히 숙여진 상태였는데, 고회장은 불
현듯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어머니가 일을 나가서 그럭저럭 먹고 살 만은 합니다."
"허허, 아버지는 뭘 하시고?"
"몸이 많이 상하셔서 누워 계세요."
"저런, 한번 인사를 가야 할 것인데."
최화정은 그 말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사무실이 참 넓으시네요?"
"그저 쓸모도 없이 넓기만 하지."
"잠깐 구경해도 되겠지요?"
"응, 좋을 대로."
고회장의 응낙이 떨어지자 최화정은 몸을 일으켜 외투를
벗었다. 몸에 딱 맞는 원피스를 입고 있어 외투를 의자에
놓자 동그란 엉덩이가 고회장 앞에 고혹스럽게 노출되었
다.
"밖과 이곳은 서로 다른 별천지인 것 같아요."
최화정은 배시시 웃으며 고회장을 돌아보았다. 고회장은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며 사춘기 소년 같은 설레임이
잠시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최화정은 자기가 유혹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고회장도 응큼한 속셈이 있었던 거로군요?"
강형사가 추경감의 이야기를 끊고 물었다.
"그런데 그건 꼭 그렇지도 않아. 고회장은 그 정도는 컨
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었거든. 그 자제의 선을 최화정이
무너뜨린거야."
"어떻게요?"
"이런! 갑자기 눈빛이 달라지는군."
추경감이 혀를 끌끌 찼다.
최화정은 그 이후로 가끔 고회장에게 들렀다. 대부분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들렀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약간씩 도발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그것이 타고난 색기인
지, 철저히 계산된 작전이었는지는 아직도 고회장에게 확
신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모 잡지의 인터뷰에서 고회장이 포커를 줄긴다는
것을 알게 되자 때로는 포커를 둘이서 치게도 되었다. 최
화정의 포커 솜씨는 일품이어서 고회장이 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어리광 섞인 그녀의 희망 사항을 들어주어야 했
다.
그것은 악세서리에서 옷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여자가 꾸
밀때 쓰이는 물건들이 있으나 어떤 경우에는 기상천외의
요구가 있기도 했다.
"나, 쓸 만한 남자 친구 하나만 구해 주세요."
한번은 최화정이 이런 영뚱한 요구를 해왔다.
"응? 남자 친구?"
"그래요. 맨날 도서관에만 톨어박혀 사니까 남자 친구도
하나 없잖아요."
"허허, 여기도 하나 있잖아?"
"회장님은 친구가 아니잖아요?"
"어? 그래?"
"그럼요, 좋은 직원 있으면 하나 소개해 주세요. 저도 4
학년이라고요."
그 말에 고회장은 그저 웃기만 했지만 속으로는 일종의
질투를 느끼며 자신이 주책이라고 스스로 나무랐다.
"그럼 남자 친구가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그럼요, 없어요."
최화정은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듯 방글방글 웃으며 고회
장을 바라보았다. 고회장은 슬며시 그 눈길을 피했다. 그
녀는 좀더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검정 블라우스의
앞섶이 살짝 열리며 풍만하면서도 탄력이 있어 보이는 그
녀의 가슴이 반쯤 엿보였다.
최화정이 무어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하다가 고회장의 뜨거운 눈길이 자신의 가슴에 머무는 것
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가슴을 가릴 생각은 커녕 좀더 몸을 기울
여 가슴이 거의 노출될 정도로 만들었다. 고회장은 온 몸
에 참을 수 없는 욕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나이가 비록 있다고는 해도 규칙적인 운동으로 아직 젊은
이들 못지 않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도발적인 그녀의 모습
은 이미 모든 것을 허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화정아."
그는 손을 뻗쳐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최화정은 주
인의 손길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얼굴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녀 자신도 처녀는 아니었고 오랜 시간을 남자를 느끼지
못하고 지냈다. 비록 아버지 뻘의 사람이라도 남자의 체취
가 느껴지자 점차 흥분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고회장은 계속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켜 그
녀의 옆자리로 옮겨갔다. 최화정은 그의 손길이 얼굴 구석
구석에 미치도록 얼굴을 뒤로 젖힌 상태에서 거의 무아지
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고회장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손을 서서히 블라우스 안으로 집어넣었다. 최화정
은 입에서 단내가 나기 시작했다.
최화정은 노브라로 있었기 때문에 고회장의 손은 아무런
저항없이 두 젖 무덤 사이를 오가며 맘 내키는 대로 가슴
을 주무를 수 있었다. 손 안에 보드랍게 잡히는 가슴의 감
촉에 그의 감정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인터폰이 울리지 않았다면 두 남녀의 유희는 어디까지 미
쳤을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회장님, 재무부 장관님이 떠나셨다는 연락입니다."
언제나 아름답게 들리던 미스 배의 목소리가 오늘만큼 듣
기 싫은 적도 일찌기 없었다.
최화정도 순식간에 옷매무새를 고치고 다시 새침한 표정
으로 돌아가 있었다.
"자기 딸만한 여자한데, 자기도 딸이 있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건가요?"
강형사가 화를 내며 말했다.
"후후후, 자네가 그런 위치,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면 자
네는안 그럴 자신이 있어?"
추경감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럼 경감님은 기회가 있으면 그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강형사는 '나미 같은'이라는 말을 넣으려다가 꿀꺽 삼켰
다.
나미는 추경감의 딸이었다.
"이봐, 나쁘게 해석만 하지 말아요. 사랑에 나이가 무슨
문제야. 고회장은 배우자를 고르고 있었단 말야."
"그럼 고회장이 그 당시에 독신이었으니까 괜찮은 것이었
다 이겁니까? 내가 한번 고회장한네 물어보고 말겠어요!
영혜라는 애가 60대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지 말이에요."
"후후, 그건 경우가 틀려."
"튿리긴 뭐가 들려요? 삼베 바지에 방구 빠져나가는 것
같은 그 웃음 좀 치우십시오."
강형사가 투덜거렸다.
"자네 질투하는 것 아니야?"
"질투라니요? 마른 하늘에 벼락맞을 소립니다. 고회장 같
은 경우는 미성년자 강간범이나 똑같은 거라고요."
"적당히 해 두게. 늙은이의 순정을 그렇게 매도해선 안
되네. 고회장은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야!"
추경감이 계속 웃으면서 말하자, 강형사는 공연히 혼자
흥분한 꼴이 되어 열적어했다.
"하여간 그 둘은 그 이후에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
지."
"흥,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볼 것 다 보고 만질 것
다 만지고 안 가까와지면 그게 이상한 것이죠."
"이상하건 안 하건 그렇게 됐어. 내 말 좀 참고 들어."
추경감은 자꾸만 삐딱하게 말하는 강형사를 달래듯이 말
을 계속했다.
"그런데 바람은 언제부터 핀 것을 알았답니까?"
"고회장도 머리가 빈 사람이 아닌 바에야 결혼을 하려면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소홀히 취급했겠나? 그녀의 뒷
조사를 한 것은 물론 기우는 집안과의 결혼이란 소리 듣지
않으려고 아예 그 집안의 회사를 다시 찾아주었다 이거
야."
"어휴, 난 그런 처가 하나 못 가져 보나?"
"어렵쇼. 그게 부러워?"
"농담입니다."
강형사가 속을 내보인 것 같아 손을 흔들면서 변명했다.
"아무튼 조사에서 최화정은 수상한 점이 하나도 나타나지
를 않았던 거야."
"사람은 살아봐야 안다니까요."
"그런 셈이었지. 일단 손 안에 든 것은 귀해 보이지 않는
다는 말도 있지. 신혼의 단꿈 같은 시절이 지나자 고회장
은 사업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다시 찾기 시작했더란 말
야."
"자연 가정에 소홀해지고, 안 그래도 불만이 점차 쌓이던
신부는 그 보상 심리로 길을 나서게 되었다는 신파조의 이
야깁니까?"
"바로 맞혔어. 자네 강력계가 아니라 민원계 쪽으로 자리
를 옮겨야겠구만."
"어이구, 그거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제발 그래 주십시
오."
강형사가 추경감의 농담을 재치있게 받아치자, 추경감은
말을 못 잇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한참 바라보았
다.
"자네, 그거 진정인가?"
"원, 천만에요. 농담입니다. 기동도 불편하신 반장님을
두고 제가 어디로 갑니까?"
"뭐, 기동이 불편해?"
추경감이 쌍심지를 돋웠다.
"기동이 불편하지요. 제가 가버리면 차도 한 대 없는 것
아닙니까?"
"허, 그건 그렇네."
추경감이 졌다는 표시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
"바람 피우게 된 사건으로 돌아가지요?"
강형사가 채근하자 추경감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집안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나자 최화정도 집안의 분위기
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
다는 것이 가장 이상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생각하기
에 따라서는 운신하기에 그지없이 편안한 것이었다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도 누구 하나 챙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전처의 소생들, 그중에는 최화정보다 나이가 많은
이도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가 집안의 새로운 안주인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표시하지 않았다.
그것이 아버지에 대하여 층성심을 표시하는 것으로써 유
산 분배에 있어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에 서려고 하는 철
저한 계산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그녀가 안 것은 조
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고회장과 갖는 침실 속의 관계도 괜찮았다. 그녀 자신은
불만족스러웠지만 고회장은 최소한 그 순간만은 그녀의 치
마폭에서 행복한 것 같았다.
"아, 이게 뭐예요!"
그녀가 최초로 침실의 문제를 가지고 화를 낸 것은 2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몸만 잔뜩 달아오르게 해놓구요."
그녀는 뾰루퉁하게 말하며 고회장으로부터 등을 돌려 누
웠다. 그러나 고회장은 그녀를 끌어 안으려는 기미도 보이
지 않았다. 이미 그는 지칠 대로 지쳐서 눈만 멀뚱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다.
"혼자 그러고 지내요!"
최화정은 벌컥 소리를 지르고 손님이 오면 묵는 다른 방
으로 옮겨갔다.
고회장은 그제서야 상반신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그녀를
부르지는 않았다. 으레 부리는 투정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다.
그러나 그 냉전은 생각보다 오래 갔다. 식구들 앞에서는
웃으며 말을 하고 있었지만, 밤이 되면 각 방을 쓰는 생활
이 몇 달이나 계속되었다.
그것은 고회장이 직접 찾아가서 사정을 해도 영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던 하루 그녀가 고회장의 침실로
건너왔다.
둘은 말이 필요 없이 격렬한 정사를 나누었다. 고회장으
로서는 자기가 최화정을 만족시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자신은 무아경을 몇번이나 오르락거렸던 멋진 정사였
다.
그러나 무슨 일로 그녀의 마음이 돌아섰는지 고회장은 벌
컥 의심이 들었다. 대기업가의 날카로운 직감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뒷조사를 시켜 보자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
다.
"그런데 그대로 내버려 두었단 말입니까?"
강형사는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다.
"문제를 삼으면 치부가 외부로 드러나게 되지. 고회장은
그런 일로 세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보다 자신이 암덩어
리를안고 사는 길을 택한 것이지"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범인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
추경감도 동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 양반은 다르게 생각했다는데 어쩌겠나? 그리
고 최화정이 비록 바람을 피운다 해도 그것이 자신이나 가
족에게 누로 작용하지 않고, 또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처
리하고 있으니."
"정말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군요."
강형사가 한강을 바라보며 심난하게 대꾸했다.
16. 가진자의 세계
"지금까지 수사한 것 정리해 볼까?"
추경감이 책상에 앉으며 강형사에게도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들고 불이 켜지지 않는 지포 라이
터를 몇번이나 철거덕거렸다.
"말하자면 수사회의를 하자는 것입니까?"
강형사가 따라 앉으며 담배를 꺼네 물고는 보란 듯이 가
스라이터를 척 켜대고 담배 한모금을 들이마신 뒤 보기 좋
게 연기를 뿜어댔다.
"2인 수사회의라는 거지."
"좋습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리지요."
강형사는 때 절은 수사 메모장을 들치며 말을 시작했다.
"설희주 피살 사건 용의자는 대부분 그 집 식구들입니다.
그집 식구들은 거의 설희주를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남편
고봉식, 시누이 고정혜, 시누 남편 정정필, 계모 최화정,
시아버지 고회장, 시동생 고봉길, 둘째시누이 고영혜."
"외부에는 전혀 없단 말이지?"
추경감이 말허리를 잘랐다.
"아닙니다. 전 애인이며 운동권 동지인 오민수, 그리고
살인을 목격했다고 수수께끼의 전화를 해준 그 경상도 사
투리의 사나이, 고사장의 비서겸 정부인 양경숙."
"고봉길과 고영혜, 그리고 새어머니 최화정은 혐의가 없
는것 아냐?"
추경감이 지포 라이터 켜기를 포기했는지 불 붙지 않은
담배 필터만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반장님, 담배 필터를 그렇게 걸래로 만드는 것은 욕구불
만인 사람이 하는 짓이랍니다."
"예끼! 어른보고 짓이라니?"
"미, 미안합니다. 하여튼 욕구."
"그래, 범인을 못 잡아 지금 욕구불만이다."
"고봉길은 설희주에 대해 지금까지는 가장 동정적인 인물
입니다. 자기 집안이나 부모 형에게 반항적이었지요. 자기
가 재벌 집에 태어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할
까요. 하지만 형수에 대한 동정심, 그게 동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형인 고봉식이 의심하듯 동정심이 애정으로 변
하고, 이루지 못하는 애정은 살인을 낳고."
"잘 논다.지금 여기서 삼류 신파극 하자는 거야?"
그러나 추경감의 말투는 나무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음 최화정 여사도 동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며느리
가 똑똑하고 또 맏이니까 집안의 주도권이 멀지 않아 그녀
에게 갈 것을 두려워했다고 볼 수 있죠. 자기는 정통 사모
님이 아니잖아요. 또 고영혜. 그렇죠, 가장 동기가 없어
보이지요. 하지만 두 가지 야릇한 동기가 있습니다"
"두 가지?"
"예, 첫째는 오민수를 그녀가 짝사랑했습니다. 오민수로
부터 설희주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좋아했었죠. 하지만 설
희주가 올캐로 남아 있는 한, 올케의 옛 애인과 결혼한다
는 것은 거북한 일이죠. 둘째는 설희주의 천민 출신다운
품위 없는 매너가 챙피하고 싫다고 늘 말해 왔지요."
"첫번째 동기는 있을 수 있겠으나, 두번째 동기란 것은
말도 안 돼. 매너가 촌스럽다고 사람 죽이는 일이 어디 있
어?"
이번에는 진짜 핀잔을 주었다.
"하아, 반장님, 코 곤다고 사람죽인 것 못보셨어요? 얼마
전에는 공중전화 빨리 끝내지 않는다고 20대가 40대 여자
때려 죽인 것 못 보셨어요? 신문에도 났는데."
"하여튼 그 세 사람보다는."
"그렇습니다.다른 사람 중에 범인이 있는지 모릅니다. 첫
째, 고정혜와 정정필이 공동 정범일 수 있습니다. 그들 부
부는 늘 같이 행동하니까요. 아니, 같은 사고방식 안에 갇
혀 있다고 봐야 하지요. 자기 방 침대에서 모조 열쇠가 발
견된 것이 결정적 증거입니다. 살인을 할 시간도 층분히
있었구요. 더구나 그들은 평소에 설희주 때문에 정정필의
출세에 지장을 받고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제일의 용의자
들입니다. 둘째는 고봉식 사장입니다. 그는 평소 설희주와
결혼한 것을 후회해 왔을 뿐 아니라, 피묻은 와이셔츠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그러나 설희주에게서 1주일 된 고봉식의 정액이 발견되
었어. 그것은."
"예, 압니다. 애정이 있어서 몸을 섞은 건 아닙니다. 술
취해서 들어온 고봉식이 동물적인 감정으로 덤벼들어 성교
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후후후, 총각이 그런 건 어떻게 알아?"
"미, 미안합니다. 그냥. 세번째는 양경숙입니다. 그
녀는 고봉식이 설희주를 미워하고는 있지만 영 이혼을 할
것 같지는 않아 조급해진 것입니다. 그녀의 알리바이는 성
립되지 않습니다. 다음은 시아버지 고명성 회장입니다. 그
는 며느리 하나 잘못 들어와 집안 망치고 회사 망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설희주가 명성기계 노조 집행부 앞에서 행
한 연설에 큰 충격을 받고있었습니다. 그는 70년대 '도산'
이 공장에 침투했을 때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니까요."
"오민수는?"
"물론 강력한 용의자입니다. 알리바이가 전혀 성립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으니까요."
"복수의 칼?"
"예, 그렇지 않고서야 왜 설희주 남편이 사장인 명왕성
기계에서 쟁의부장 노릇을 하며 노조의 대부가 되어 있겠
습니까? 그는 집념이 강한 청년이기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종밥 먹으러 다섯 번이나 들낙날락한
놈 아닙니까?"
"강형사 이야기가 일리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다
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어. 오민수가 노조운동올 끈길
기게 벌이고 있는 것은 그의 신념이라고 해석해야 돼. 인
간적 복수보다는 차원이 높아. 그리고 최화정이 크게 혐의
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 오히려 여자로서
의 위치 다툼, 질투심 같은 것이 엄정난 일을 저지를수 있
어. 더구나 문제의 녹음 테이프에서는 고봉실, 설희주의
지문과 함께 최화정의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나? 그 수수께
끼가 좀처럼 안 풀린단 말야. 다음 양경숙은 충분히 의심
이 가는 용의자야. 그 엉터리, 경상도 목소리와 관계가 있
는지 몰라. 미리내 다방서 전화건 사나이 수사는 어떻게
댔어?"
"그건 박형사가 맡아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빨리 그 녀석 좀 찾아내."
추경강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뱉고는 횡하니 사무실을 나
가버렸다.
강형사는 며칠 전 고영혜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그
녀는 추경감처럼 오민수를 높은 위치에 두고 있었다. 하잘
것 없는 사랑 때문에 여인에게 복수하는 그런 통석적인 위
인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민수에게 약 오르는 이야기를 했지요. 하지만 그
는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오히려 설희주에게 연민의 정
같은 것을 보였어요."
고영혜의 말이었다.
"뭐라고 약을 올렸기에?"
강형사가 슬그머니 호기심이 생겼다.
"설희주를 치켜 세웠지요."
그녀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봐요, 민수형, 설희주는 지독한 자기 운명만큼이나 노
력도 하고 신념도 있는 여자였어요."
"불쌍한 여자지. 그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 너무 무거
웠던 거야."
오민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리 아빠만 해도 그래요. 여자들한데 까다롭기로 이름
난 우리 아빤데. 설희주를 처음엔 아주 잘 봤어요. 희
주 자신이 귀엽고 싹싹하게 행동한 것도 아닌데, 아빤 그
렇게 보았거든요. 희주가 처음우리 집에 들어올 무렵엔 사
정이 좀 이상했어요. 오빠는 무기력한 장남으로 낙인 찍혀
아버지 눈 밖에 나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무렵 새로 인수
한 명왕성 자동차 사장 자리에 형부 정정필 실장을 앉히려
하고 있었어요. 그런네 설희주 때문에 아빠 마음이 변한
거지요. 보잘 것 없는 집안의 엉덩이에 뿔난 운동권 여자
로 보진 않았어요. 오히려 가난하게 자랐지만 민첩하고 영
리한 며느리로 보았지요. 그녀가 처음엔 오빠를 잘 다루었
어요. 그래서 오빠가 마치 숨은 경영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거든요. 덕분에 오빠는 벼락출세를 해서 사장님
이 되고, 언니 내외는 오빠와 설희주를 타도 목표로 삼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건 희주의 얕은 꾀에 불과해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간도 내주는. 마음에 없는 짓을 예사
로 했으니까요. 아빠도 나중에 그걸 알게 되었지요."
"함부로 없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 설희주는 미스 고가
생각하듯 그런 여자가 아니야. 희주는 이 시대의 희생자
야. 그릇된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몸부림 치던 희생양!"
"그렇다면 더 잘 했어야지요. 이왕 변절할 거면. 흙
탕물 속에 몸을 담갔으면 더 철저하게 흙탕물에 빠져야지,
더 타락해야지 그게 뭐예요?"
"설희주를 비난해선 안 돼요. 우리는 그녀의 몸부림 앞에
반성해야 돼."
강형사는 고영혜가 전해 주던 오민수의 모습을 조금은 알
것같았다.
강형사는 추경감이 평하던 최화정 여사를 다시 곰곰 생각
해보았다. 가장 혐의점이 적은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유력
한 용의자일지 모른다는 추경감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
았다.
강형사가 최화정 여사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녀는 거실에
혼자 앉아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이거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
강형사가 짐짓 미안한 척했다.
"아녜요, 잘 됐어요. 술은 원래 대작이 없으면 맛이 반감
되는 거예요. 잘 왔어요. 같이 한잔 하시지요. 뭘로 하실
까요?"
최화정은 정말 대작할 사람이 와서 반가운 모양이었다.
"전 그거 스트레이트로 한 잔만 하지요."
"스트레이트는 몸에 해로워요. 내 온더 락스 한 잔 해드
릴테니 드세요."
최화정은 자기 마음대로 메뉴를 정했다.
"회장 영감은 매일 노조하고 싸움질하느라 코빼기도 보이
지 않지요. 애들은 며느리 죽고 난 뒤 이 집이 무슨 귀신
씌인 집인지 붙어 있질 않아요. 나이 서른에 생과부 된 나
는 술이라도 한잔 해야."
최화정은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70을 눈앞에 둔 영감 모시고 사는 젊은 여자 생각해 봤
수?"
그녀는 의미 있는 말을 하며 강형사를 지그시 건너다 보
았다. 강형사는 그녀의 정결하지 못한 눈길이 거슬려 얼른
말을 돌렸다.
"며느님이 평소 노조 일 때문에 고회장과 다툰 적이 있다
구요?"
"회장님의 노여움만 산 건 아니지요. 나도 야단깨나 쳤으
니까요."
그녀는 칵테일 잔을 홀짝 비우고는 설희주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걔가 갑자기 이 집
에 들어온 뒤에. 그러니까 쉽게 말해 신분의 수직 상
승 현상이 일어난 이후."
강형사는 그게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최여사가 대학 영문과 출신이라고 하던 추경감
의 말을 되새기며 이야기를 들었다. 교양 없는 집안에 경
우는 다르지만 똑똑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문제였을 거라
는 생각도 들었다.
"외출할 때 옷 한 가지 품위 있고 맵시 있게 입을 줄 모
르지, 음식 한 가지 제대로 차릴 줄 모르지. 제 손으로 하
는 일도 아닌데 뭘 알아야지요. 매너에서는 시골 무지렁이
나 꼭 같았어요. 대갓집 며느리로는 제로였지요. 하지만
노사 문제만 나오면 기를 쓰고 나서더군요. 그 덜 떨어진
사고방식으로 우겨대는 데는."
그녀는 입에 거품을 물고 설희주를 비난했다.
"노동자 입장을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 역지사지(易地思
之)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명왕성 자동차가 총파업에 들어갔을 때 설희주가 최여사
에게 한 말이었다.
"뭐야? 너 배웠다고 문자 좋아하는구나. 누구 앞에서 문
자야 문자가."
"죄송해요, 어머님. 하지만."
"걔들이 지금 무슨 요구를 하고 있는 줄이나 아냐? 미친
놈들이 상여금을 50프로나 올리라고 한다는 거야. 법정 근
로 시간주 44시간 지키라고? 미친 소리 하고 있더군. 지금
이 어느 땐데 잠꼬대야 잠꼬대가. 너희 시아버지 고회장님
은 625때 껌팔이, 구두닦이도 해본 분이야. 주린 창자
움켜쥐고 일으킨 기업이야."
"어머님, 그건 그때 이야기입니다. 시대가 달라졌어요.
지금은 1950년대가 아니란 말입니다. 국민 소득이 그때보
다 수십 배나 늘어났어요. 사람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에요. 지금은 노동자들이 제 권리 찾으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단 말입니다. 지금은 소수의 가진 자
만이 행세하며 사는 세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너 툭 하면 가진 자 가진 자 하는데 그 말버릇 어디서
배운 거야? 존 스타인백이 그러든? 아니면 마르크스가 그
러든? 쯧쯧쯧."
최화정은 못마땅해서 견디기 어렵다는 듯 안달했다.
"고회장보고 아침에 내가 소리 좀 질렀지. 노존지 나발인
지 지들 하구 싶은 대로 하라구. 부모가 주는 밥이나 처먹
고 곱게 자란 철없는 대학생들 지껄이는 소리에 부화뇌동
돼서 정신 못 차리는 그런 세대들 하고 이날까지 대화를
해온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라구. 뭐야? 그래, 지들 하구
싶은 대로 해보라고 그래. 지들 요구대로 임금 올려 주면
석 달도 못 가서 회사 문 닫게 되고, 문 닫으면 지들 실업
자밖에 더 돼? 그때 어디가서 하소연할 거야? 막말로 회사
문 닫아도 우리 식구 밥 굶지는 않아. 하지만 지들은 밥
굶게 돼. 누가 더 답답한 일이야. 쯧쯧쯧, 철이 없어서 그
래. 지들이 회사 경영 해보면 알게될 거야!"
"새어머님은 회사 경영 해보셨어요?"
"해보나 마나지. 서당개 풍월인데 곁에서 보면 모르니?
너 지금 말하는 것 보니까 나하고 시비 좀 붙어 보자는 소
리 같은데."
최화정은 더욱 펄펄 뛰기 시작했다.
그 이후 시간이 갈수록 젊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사이가
벌어져 증오의 늪은 더욱 깊어졌다.
그뿐 아니었다. 고봉길을 통해서 들어본 설희주와 정정필
의 사이도 고부간 이상으로 어색했다. 어떻게 보면 두 사
람 다 고씨 가문 출신은 아니다. 각각 다른 목적이 있어서
밖으로부터 고씨 가문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어느 조용한 저녁 무렵, 정정필이 곤드레가 되어 들어섰
다가 거실에 앉아 있는 처남댁을 발견하고는 시비를 걸었
다.
"흥, 물 먹었군, 물 먹었어."
설희주는 상대가 시누이 남편이란 것을 알자, 일어서서
외면했다.
"이봐요, 처남댁, 아니 설희주씨! 어쩌면 당신이나 나는
닮은 데가 많단 말야. 재벌 2세라는 낚싯밥에 걸려 마음에
도 없는 결혼을 했지."
설희주가 듣다 못해 2층으로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정
필은 비틀거리며 다시 그녀 앞을 가로 막았다.
"당신과 내가 닮은 점은 마음에 없는 걸혼식을 올린 뒤
설렁설렁 돈이나 세면서 한 세상 편히 살아 볼까 하고 꾀
를 낸 거지. 헌데 나는 저런 드센 여자 치마폭에 휘휘 감
겨 끄윽. 그래, 어쩜 우리는 동지인지도 몰라. 끄윽!"
그는 손으로 휘휘 감는 시늉을 해가며 주정했다.
"하지만 아냐! 설희주씨, 그렇지 않아요? 이무기 두 마리
가, 암수 두 마리가, 후후후, 그렇지 암수 두 마리지. 그
두 마리가 한 우물 속에 있으면 둘 다 용이 못 된단 말이
야. 둘 중 하나는 우물 밖으로 나가야 돼. 아니, 나갈 용
이 없지. 그러면 한 마리는 죽어야 돼. 서로 싸워 상대를
물어 죽여야 된단 말야. 앙! 이렇게"
정정필은 설희주를 물어 뜯는 시늉을 해 보이며
비틀거렸다.
"이거 왜 이래요? 취하셨어요?"
설희주는 그의 손 설레를 피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도 부귀영화를 위해 애인을 버렸다니? 나도 입신영
달을 위해 3년간이나 동거하며 학비를 대주던 여자를 헌신
짝처럼 버린 일이 있지. 하지만 난 살아야겠어. 당신을 물
어뜯어 연못 밖으로 내쫓든지 아니면 칼로 심장을 찔러 죽
여야만 한단 말야!"
정정필이 그런 말을 했다는 데에 대해 강형사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실장이 분명히 칼로 찔러 죽인다고 했단 말이지?"
강형사가 고봉길의 이야기를 듣다가 다그쳤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건 술취한 사람의 횡설수설이지
요."
"취중진담이란 말도 있어. 하여튼 정정필이 설희주를 죽
일만한 이유는 있었던 것 같아. 죽일 이유라기보다 미워한
것, 아니 이해가 엇갈린 것은 틀림없지."
강형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고봉길을 보고 다시
물었다.
"설희주는 결혼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아니, 후회
라기보다는 오민수를 못 잊어한다든지 오민수와 밀회를 자
주 했다든지."
"오민수를 자주 만난 건 아닌 것 같았어요. 결혼 전 오민
수와 함께 학생 운동을 한 것은 형수가 오민수를 사랑했기
때문에 한 것은 아니었던가 봐요. 형수는 어느 날 형과 결
혼한 것은 착각이었다고 하더군요. 내가 우리 형 같은 사
람과 왜 결혼했느냐고 물어보았거든요."
"형이 어떤 사람이길래?"
강형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형? 좋은 사람이지요. 하지만 깨어나지 못한 사람
이지요."
"그래, 왜 결혼했다고 그러던가요?"
"그랬더니 아주 달콤한 착각이었다고 하더라니까요."
고봉길은 눈을 지그시 감고 설희주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도련님, 난 그때 큰 오산을 하고 있었어요. 고봉식씨는
내 앞에서 영원히 꼼짝 못할 줄 알았어요. 형님은 결국 나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나는 형을 대
신해서 부르조아의 집행인이 될 것이란 생각을 했지요. 머
리 나쁜 여자들이 흔히 빠지는 미망의 늪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형수가 왜 머리가 나빠요?"
고봉길은 그녀의 이야기를 더 끌어낼 속셈으로 말을 걸었
다.
"난 그때 고봉식씨를 내 포로로 만들 자신에 넘쳐 있었어
요.그렇게만 된다면 그의 돈, 그의 권력, 모든 풍요의 도
구들은 다 내 것이 되니까요. 그것은 곧 애정 없는 결혼의
댓가일 뿐 아니라 내가 목적한 것을 이루는 길이 될 거라
고 생각했지요.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잘 모
르겠어요. 세상살이가 그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늦게 알았거든요. 기득권자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 썼지요.
기성 세대는 개혁해야된다는 말도 썼지요.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기득권자는 그들대로
의 존재 이유가 있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난 그 게임의
승자가 되리라는 꿈은 이제 버렸어요.엉망이 된 거예요.
다시 순수한 개혁 세력의 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지요. 나같이 흙탕물에 발 들여 놓은사람을 옛 동료들
이 받아주겠어요?"
"옛 동료라뇨? 아직도 오민수를 잊지 못하는군요."
고봉길이 곁눈으로 설희주의 표정을 살폈다.
"그건 그건."
설희주는 말을 못하고 한참 있었다. 눈에 어느덧 이슬이
맺혔다. 회한의 눈물인지도 몰랐다.
"결과는 도련님이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초라한 패배자가
되고 말았어요. 형님의 뜨거웠던 마음은 한때의 정열이었
지요. 정열이라기보다는 취향이 다른 한 여자에 대한 추악
한 정욕에서 나온 정열이었지요. 그런 남자는 여자에게서
금방 싫증을 느끼게 되지요. 몇 번의 잠자리로서 그의 호
기심은 막을 내리게 된 거죠. 형님에게서 멀어지자 나는
무기가 없어진 거죠. 이 살벌한 고씨의 성 안에서 무장해
제당한 여자에 불과하죠. 그건 벌 받은 것인지도 몰라요."
"형수, 그렇게 생각한다먼 지금이라도 형과 헤어져요. 형
과 형수는 도저히 커플이 될 수 없는 분들입니다. 지금부
터라도 새 출발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이 집에 더 붙어
서 형에게 증오의 화살을 퍼부어야 할 이유가 없다면 말입
니다."
설희주는 돌아서서 혼자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미안해요, 형수.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시지 않겠어요?
경비는 내가 준비해 드릴께요. 내겐 이 집 돈 아닌 것 있
어요. 아르바이트로 번 돈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설희주는 고봉길의 권유를 귀담아듣지 않았다고한
다.
17. 풀리는 수수께끼
추경감은 처음 설희주의 죽음을 알려 주던 경상도 사투리
의 사나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수수께끼가 이 사건의
열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구들 중에 누군가가 설희주를 죽였다면 그 경상도 사나
이를 조연으로 내세웠는지 모른다는 추리를 쉽게 할 수 있
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나이가 거짓으로 설희
주가 죽었다고 전화를 해야 할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범인의 심부름을 맡은 경상도 사나이가 시간을 잘못 들어
채 죽이기도 전에 신고부터 먼저 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
었다.
추경감은 그쪽 수사를 맡았던 박형사로부터 받은 적선동
미리내 다방에 드나드는 3040대의 리스트를 가지고 그곳
으로 갔다.
박형사가 준 명단에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두 사람과,
그 동네를 배회하는 전과자 몇 명이 있었다.
조치건. 31세.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 전과는 없고 적선
동 일대에서 라이터, 만년필, 선글라스 등 신사 용품을 가
지고 다니면서 파는 행상이었다. 미리내 다방에는 하루에
대여섯 차례씩 드나든다는 것이었다.
또 한 사나이는 그곳을 무대로 한 주먹패로 전과 3범의
박민재. 특히 칼을 잘 써서 박사시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세번의 전과도 칼로 사람을 찔렀다가 얻은 별이었
다. 성질이 포악하지만 의리가 있어 인근의 조무래기들이
잘 따른다고 했다.
세번째는 얼굴이 살짝 얽은 차상사라는 사나이. 본명은
차명준인데 공군 상사를 지냈다고 해서 차상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이는 42세. 원래 서대문 쪽에서 주먹을 휘둘렀
으나 독립해서 효자동 쪽으로 나온 뒤 적선동도 가끔 드나
들었다. 부모의 고향은 북쪽이고 피난 와서 인천에 있었다
고 했다.
추경감은 이 세 명의 건달 중에 경상도 말을 쓰는 조치건
을 먼저 만났다. 두어 시간 다방에 버티고 앉았으니까 선
글라스를 손에 든 조치건이 나타났다.
추경감이 손짓으로 부르자 그는 얼른 다가와서 행상 상자
를열어 펼쳤다.
"아저씨, 좋은 물건 있습니다."
그는 추경감의 표정을 슬쩍 보고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경찰관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않는 것 같았다. 추경감의
행색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둥그스럼하고
순진해 보이는 얼굴,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많은 잔주름
살, 후줄근한 옷차림, 꼭 복덕방의 마음 좋은 할아버지 스
타일이다.
"좋은 게 뭔데?"
추경감이 가만히 묻자 그는 옆자리에 슬그머니 앉더니 박
스에서 포장된 약품 같은 것을 꺼냈다.
"이건 스웨덴서 들어온 건데. 아주 그만입니더."
"뭐가 그만이야?"
"두 시간도 좋고 세 시간도 좋은 기라예. 여자를 아주 쥑
여주는기라요."
"이게 여자 죽이는 약이야? 죽여 봤어?"
추경감이 빗나간 질문을 했다.
"아이구, 나야 뭐 젊은데 약 힘 빌려가 여자 쥑입니꺼?
생짜로 조져도 얼마든지라요."
"이걸 어떻게 쓰는데?"
추경감이 그것을 받아들고 짐짓 흥미가 있는 척했다.
"시작하기 전에 살짝 바르모 되는 기라예. 너무 많이 바
르모 안 되는 기라요."
조치건은 심한 사투리로 이야기했다.
"값이 얼마야?"
"아저씨한테 특별히 싸게 하지요. 오늘 마수거린데."
"마수?"
"예, 첫 손님을 마수거리라 안카는기요?"
"그래서."
"5만원만 주이소. 특별인기라요."
"5만원. 너무 비싼데."
추경감이 얼굴을 찌푸려 보이자, 조치건은 얼른 값을 다
시 불렀다.
"2만원."
추경감은 그를 더 붙들어 둘 셈으로 2만원의 거금을 투자
했다. 경감 월급으로는 가벼운 돈이 아니었다. 더구나 수
사비 같은 것을 청구할 수는 없었다.
"당신 고향이 경북이야? 문경? 상주?"
조치건은 빙그시 웃으며 돈을 재빨리 호주머니에 넣었다.
"상줍니더. 우째 그리 잘 마칩니꺼?"
"내가 사람을 좀 찾는데. 당신은 이 일대 다방에 다
다니지?"
"여기가 내 직장인기라요."
"혹시 설희주라는 여자 이 다방에 자주 오지 않았나?"
"설희주가 누군기요? 탤런트인기요?"
"아니, 명왕성 그룹 며느리."
"아아, 그 칼에 찔려 죽은 여자 말하는기요?"
조치건이 갑자기 당황하며 일어섰다.
"본 일 있어?"
추경감이 조치건의 팔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아저씨는?"
조치건은 그제서야 상대가 형사라는 것을 눈치챘다. 추경
감은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분명 설희주와 관계가 있
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설희주씨의 먼 친척인데 걔가 죽기 전에 이 다방에서
누구한테 거액의 돈을 빌려준 일이 있어. 죽고 나니까 돈
갚을 생각을 않치 뭐야. 그래서 설희주에게서 돈 빌려간
남자를 찾고 있는 거야."
추경감은 급한 김에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둘러댔다.
"설희주와 자주 만나던 남자 본 사람만 찾으면. 내가
크게 사례할 텐데."
조치건은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다.
"난 그런 사람 모릅니더."
조치건은 일어서더니 슬그머니 딴 자리로 가버렸다. 추경
감은더 붙들지 않았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오자 품속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이봐! 강형사, 이 목소리 그때 전화 신고한 목소리와 비
교해 봐."
"예? 이게 누구 목소립니까?"
"조치건이라는, 미리내 다방 일대에 다니는 선글라스 행
상 목소리야."
추경감은 호주머니에서 2만원이나 준 약통을 내보였다.
"이거 자네 가져."
강형사는 추경감이 주는 약통을 영겁결에 받아들었다.
"이게 무슨 약입니까? 저 아픈 데 없는데요."
"그게 여자 죽이는 약이래."
"예?"
강형사가 눈을 크게 떴다. 추경감은 빙그레 웃으며 밖으
로 나갔다.
추경감은 다시 다방 주변을 훑으면서 두사나이 박민재와
차명준에 관해 알아보았다.
그러나 사건이 날 무렵 차명준은 서울에 있지 않았고, 박
민재만 그 다방을 드나들었다고 증언들을 했다.
"혹시 박민재가 경상도 사투리를 가끔 쓰지 않나요?"
추경감은 이미 자기 신분을 알고 있는 미리내 마담에게
물어보았다.
"박사시미는 고향이 충청도라고 하던데. 경상도 사투
리는 쓰지 않는 것 같았어요."
추경감은 박민재의 고향이 설희주의 외가와 같은 충남 서
천이라는 것이 자꾸 걸렸다. 그래서 출생한 마을까지 추적
해 보았는데 공교롭게도 설희주의 외가와 같은 마을이었
다.
추경감은 박민재와 설희주가 분명히 알고 지내는 사이라
고 단정했다. 그는 박형사를 시켜 그것을 집중적으로 조사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은, 박민재가 경상
도 사투리로 살인 사건 신고를 한 사람은 아니란 것이었
다. 추경감의 그런 생각은 적중했다.
"반장님, 그놈입니다. 그놈! 이제 사건 해결되었습니다."
추경감이 출근하자마자 강형사가 흥분해서 떠들었다.
"좀 정신차리고 차근차근 이야기해 봐. 뭐가 그놈이란 말
야?"
"설희주 피살 사건의 범인은 적선동 라이터 행상 조치건
입니다."
"뭐야?"
"그놈의 목소리가 그놈의 목소립니다. 이런 죽일 놈!"
"그놈의 목소리가 그놈의 목소리?"
추경감은 무슨 뜻인지 알면서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성문이 같아요, 성문(聲紋)! 신고할 때 녹음해 놓은 목
소리 무늬와 전번 반장님이 떠온 목소리가 동일인이라고
과학수사연구소에서 통고해 왔습니다. 이제 사건은 해결된
것입니다. 박형사가 묶으러 갔으니 곧 올 겁니다!"
강형사는 춤을 추듯 사무실을 한 바퀴 돌면서 신이 나서
어쩔줄 몰라했다.
"공연히 그 집 식구들만 의심했군 그래."
신나 하는 강형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추경감이 입
을 열었다.
"쯧쯧쯧. 전화 건 녀석이 범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 집 식구들은 아직도 강력한 용의자들이란
말이야."
추경감의 신중론에 강형사는 코읏음치고 싶있지만 참았
다.
조치건을 잡으러 간 박형사는 퇴근 무렵이 훨씬 넘어 맥
빠진 모습으로 들어왔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강형사가 아래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헛수고했어. 벌써 토끼고 없어. 눈치를 챘나 봐. 어제
아침부터 적선동 일대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답니다."
"뭐야? 내가 당장."
성미 급한 강형사가 점퍼를 걸쳐 입었다.
"날뛴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집은 알아보았나?"
추경감이 침착하게 말했다.
"예, 하숙하고 있는 집에 가 보았습니다만, 이틀째 들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연고지는?"
"그게 아직."
"반장님, 저한테 맡기십시오. 아이구, 이 독 안에 든 쥐
를!"
"자, 서둔다고 될 일이 아니야. 내일 알아보기로 하고 오
늘은 늦었으니 쐬주나 한잔 하지."
추경감은 그의 평소 성미대로 느긋하게 말했다. 바쁠수록
천천히 해야 실수가 없다고 그는 늘 선배답게 말하곤 했
다.
그러나 그 이튿날도 조치건의 행방은 묘연했다. 의도적으
로 종적을 감춘 것이 분명했다. 시경에서는 전국 경찰에
전통으로 지명 수배령을 내렸다.
조치건의 하숙방은 수색영장을 가기고 가서 뒤졌지만 아
무단서도 찾지 못했다. 외설스런 포르노 책자와 엉터리 정
력제같은 것만 잔뜩 나왔다.
다시 허송 세월이 며칠이나 흐르던 어느 날이었다.
"반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강형사가 진주 목거리 하나를 들고 들어오면서 떠들었다.
비닐봉지에 넣은 목거리는 첫눈에도 굉장히 비싼 물건으로
보였다.
"그게 뭐야? 자네 장가 들려고 장만한 거야?"
추경감이 농담으로 말했다.
"예? 제가 이렇게 비싼 걸 혼수로 줄 만큼 부자라면 벌써
여우같은 마누라에다 토끼 같은 아들딸을."
"넋두리 그만두고 이야기부터 해봐!"
"이것이 죽은 설희주의 물건이라면 어쩌겠습니까?"
강형사는 비닐 봉지에 든 목걸이를 흔들면서 말했다.
"뭐? 정말이야?"
추경감이 정말 놀란 듯 목걸이를 받아들면서 눈을 동그랗
게떴다.
"이걸 영등포역 앞의 금은방에서 찾아냈습니다."
"누가 어떻게 거기 있는 걸 알아냈지?"
"영등포서에서 절도범을 한 놈 잡았는데 그놈의 장물을
추적하다가 보니까 이게 발견된 겁니다. 이게 설희주의 것
이란 것은 고봉식이 확인했습니다. 여길 보십시오."
강형사는 진주 목걸이의 이음 부분을 가리켰다. 백금으로
된이음 부분에는 조그만 글자 같은 것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거기 무어라고 쓰였나?"
글씨가 너무 작아 벌써 노안이 된 추경감은 읽을 수가 없
었다.
"HJ.S라고 쓰여 있습니다. 희주 설의 이니셜입니다. 고봉
식이 결혼 1주년 기념일에 사준 것이라고 하더군요."
"흥! 그때까진 깨가 쏟아진 모양이군. 결혼 선물도 다 사
다주고 말이야."
"첫해 1년이야 어떤 부분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떤 잡
지를 보니까 부부가 권태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3년째부
터이고, 이혼을 가장 많이 하는 위기의 해는."
"됐어. 총각이 알아 보았자 얼마나 알겠나. 그쯤 해 두고
이 목걸이가 그 금은방에 간 경위나 말해 보게."
"한 달쯤 전 30대의 남자가 가져와서 팔고 갔다고 합니
다.
날짜를 확인해 보았는데 설희주가 피살되기 하루 전이었
습니다."
"뭐야? 하루 전?"
"예, 그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 30대 사나이는 누구야?"
"인상착의나 말투 등으로 보아 박민재가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들었습니다."
"박민재?"
추경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었
다.
"박민재와 설희주는 아는 사이인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박민재의 고향은 충남 서천, 설희주의 외가와 같은 마을
입니다. 설희주가 어린 시절 외가에 자주 가서 살다시피
했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 가기 전에는 입 하나 던
다고 외가에서 자라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같은 또래인 동
네 개구장이 박민재와 알개 된 것은 당면하지요."
"음."
추경감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고 했으나 불이 켜지지 않았다. 계속 불꽃만 튀기고
있었다.
추경감이 생각에 잠길 때 하는 버릇이었다.
"저번 사모님이 사다 주신 새 라이터 어떻게 하셨어요?"
강형사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추경감은 들은 척도 하
지 않았다.
"박민재의 사진을 가지고 그 금은방으로 가서 확인해
봐."
추경감이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박민재 사진이 어디 있습니까?"
강형사가 두 손을 벌려 보았다.
"이봐, 박민재가 전과 몇 범인지 알아? 별을 주렁주렁 단
놈인데 경찰에 사진이 없단 말야?"
추경감이 큰소리로 말하자, 강형사는 찔끔해서 목을 움츠
리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금은방 주인은 그 진주목걸이를 가지고 온 사람이 박민재
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설희주 같은 여자가 박민재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이
해하기 어려운 일이야. 신분상으로도 그렇지만, 대학까지
나온지성인이 무식한 불량배와 무슨 볼 일이 있었을까?"
추경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사무실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남녀 관계라는 것은 타인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경우
가 많습니다. 신분과 지식 정도가 초월한다고 이상할 건
하나도 없습니다."
강형사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 목거리를 설희주가 죽기 전에 가져간 것이 틀림없다
는 건 참으로 풀기 어려운 일이야."
"죽인 뒤 뺏어간 것이 아닌 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사
건현장 어디에서도 박민재의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습니
다."
"그야 박민재 정도의 별을 단 놈이라면 장갑 끼고 범행하
는 게 당연하지. 그 금은방에서 혹시 날짜를 착각한 것 아
닐까?"
"저도 그걸 여러번 다짐했습니다만, 그 금은방 장부에 분
명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착오란 있을 수 없는 것 같습
니다."
그러나 추경감과 강형사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는 싱겁게
풀려버렸다. 박민재가 자기 발로 경찰에 나타난 것이다.
"어디 숨어 있있어?"
안면이 있는 추경감이 물었다. 턱이 뾰족하고 눈이 양쪽
으로 치켜 올라가 험상궂게 보이는 박민재는 오히려 여유
있는 미소를 띠었다.
"숨긴 제가 왜 숨겠시유? 죄진 것 없어유. 흑산도 가서
리루좀 하다 왔시유."
"리루?"
"예, 바다낚시 말입니다. 우럭, 돔."
"알았어. 낚시 좋아해?"
"아이구, 말도 마이소. 공짜 좋아하고 요행 좋아하는 놈
이 낚시 좋아한다고 무식한 소리 하는 눔 있지만 그게 아
니어유. 한놈 척 걸있을 때 그 팽팽한 낚시줄에서 전달되
어 오는 손맛이란."
"됐어, 됐어. 그걸 묻자는 게 아니고, 당신 설희주 언제
만났어? 명왕성 그룹 사모님 설희주 말이야."
추경감이 단도직입적으로 다그쳤다.
"아하, 그 일 때문에 절 찾으셨어유? 후후후, 희주는 제
어릴적 친구여유. 물안골 살 때 소굽친구지유."
"그것도 알아. 근데 마지막 만난 것이 언제냐 말야?"
추경감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제가 죽이지 않았어유. 어느 눔인지 알면 제가 그냥 안
둡니다."
박민재의 언성이 높아졌다.
"얼마나 불쌍하고 착한 여잔데, 그런 여자를 죽입니까?"
"묻는 말에나 대답해."
흥분한 박민재의 얼굴을 추경감이 노려보았다.
"죽기 이틀 전이었나봐유."
설희주와 박민재는 고향에서 어릴 때 종종 만나고는 거의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몇해 전 설희주가 외가에
다니러갔다가, 이제는 장년이 된 박민재와 만나게 되었다
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을 존대할 수도 하대할 수도 없어 서먹서먹하
다가 나중에 편하게 서로 존대어를 썼다고 했다.
그 뒤 서울에서 가끔 설희주가 박민재를 불렀다.
서로 사는 형편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을 추억하
며 즐겁게 웃기도 했다.
그런데 설희주가 죽기 이틀 전날 연락이 와서 적선동의
미리내 다방에서 단둘이 만났다.
"어째 얼굴이 좋지 않은데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하는 설희주를 보고 박민재가 걱정
했다.
"걱정? 응, 걱정이라기 보다는. 민재씨,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누구에겐가 그녀는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야? 말해 봐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인지. 희
주씨같은 착한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
박민재는 무슨 일이 희주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
했다.
"아무 일도 없어.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어서 말해 봐요."
"내일 모래 말야, 내 대신 전화 좀 걸어줘."
"모래? 전화를? 왜?"
"그건 묻지 말아요. 그럴 사정이 좀 있어요."
"어디에다 무슨 전화를?"
"경찰서에다가, 아니 경찰국 범죄 신고하는 데에다 내가
죽었다고."
"뭐야? 무슨 농담을?"
처음에는 박민재도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너무나 진
지하게 이야기하기에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 정말 설희주씨가 죽는 건 아니지?"
"물론이지. 내가 죽긴 왜 죽어. 그럴 사정이 좀 있어. 누
굴 깜짝 놀라게 해서 버릇을 고치려고 해요."
박민재는 그대로 믿었다. 그래서 남편의 버릇을 고치려고
하는줄 알고 그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좀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면 살릴 수
있었는데. 어느 놈에게 속아서 목숨을 잃은 게 분명해
요."
박민재는 입술을 깨물고 분해 했다. 진정인 것 같았다.
"근데 왜 당신이 전화를 하지 않았어?"
추경감은 박민재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공교롭게 되느라고, 전화를 건 사람은 제가 아니고
조치건이란 놈입니다. 그 '경상도 쪼우'라는 떠돌이."
"뭐야? 조치건에게 시켰다고?" 추경감과 강형사는 마침
내 매듭이 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을 받았으면 당신이 직접 걸어야지 왜 남을 시켰
어?"
강형사가 삿대질을 하면서 말했다.
"그게 뭐 죄가 됩니까? 이 손 치우고 얘기합시다."
추경감이 흥분한 강형사를 손으로 제지했다.
"그래서?"
"희주는 오후 4시, 즉 16시에 전화를 하라고 했지요. 삼
청동 어디어디로 가면 여자가 죽어 있다고. 근데 내
부탁을 받은 조치건이 2시, 즉 14시로 잘못 듣고 그때 전
화를 건 겁니다."
"왜 당신이 직접 걸지 않고 남을 시켜?"
강형사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다시 다그쳤다.
"그게 말입니다, 공교롭게 되느라고. 나와 조치건이
점심을 먹고 돌아오다가 걸렸지 뭡니까. 우린 오토바이를
타고 서대문 가서 사철탕 한 그릇씩을 먹고 오다가 미리내
다방 앞에서 걸렸지 뭐유."
"뭐가 걸려?"
"오토바이는 내가 운전하고 뒤에 조치건을 태우고 오는데
건널목에서 일단 정지 안 했다고 의경이 잡지 뭡니까? 의
경도 경찰이유?"
"엉뚱한 소리 말고 얘기 계속해."
"그 빡빡한 의경이 영 놔주어야지요. 할 수 없이 경찰서
로 가게 되었지요."
"거짓말 말아. 딱지만 끊지 경찰서엔 왜 가?"
강형사가 주의를 주었다.
"하도 뿔따구가 나서 한 대 쥐어박았지요."
"폭력을 썼군. 공무집행방해."
추경감이 점잖게 말했다.
"그래서 제가 경찰서에 끌려가면서 조치건 보고 전화 부
탁을 했지요. 경찰서에 가서 내가 그런 전화 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박민재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어째서 한두 시간 뒤에 또 전화를 걸었어?"
강형사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투다.
"나는 경찰서에서 조서를 받다가 아무래도 이놈이 일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미리내 다방으로 전화를 해서 물어보
았더니 아니나 달라요. 그래서 호통을 치고 다시 전화를
하라고 했지요. 그때가 대여섯시 됐을 겁니다."
"으흠!"
추경감은 신음 같은 소리를 냈다. 수수께끼 하나가 풀린
셈이다. 그렇다면 박민재나 조치건은 범인이 아니지 않는
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18. 뜻밖의 자백
"이제 끝났습니다, 반장님! 이제 끝났다니까요!"
강형사가 사무실에 들어서며 두 손을 탈탈 털어 보였다.
꺼칠해진 얼굴에 듬성듬성 난 수염이 볼품 없이 보였다.
그러나 얼굴은 활짝 펴져 해방된 모습이었다.
추경감은 강형사의 호들갑스러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딴
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설희주가 그 전화를 부탁하면서 진주 목걸이를
박민재에게 주었단 말이지? 그러면 엉터리 전화, 아니 나
중엔 진짜 전화가 되었지만, 그 전화 걸어주는 댓가치고는
너무 비싼 물건이야. 그렇다고 사랑의 정표 같은 멜로 드
라마의 소도구도 아닐 테고. 그런데 그것을 박민재는
왜 금은방에 가서 팔아넘겨? 그것도 석연치 않아."
"반장님은 구닥다리라서 그렇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사
고방식을 이해 못하는 구닥다리 말입니다."
"예끼, 이 사람!"
추경감은 정말 듣기 싫었던지 슬그머니 돌아앉아 버렸다.
"반장님! 그게 아니고 그 사건은 이젠 진짜 끝날 겁니
다."
"또 무슨 엉터리야?"
"범인은 오민수 그 놈입니다. 틀림없습니다. 배신자에 대
한 복숩니다. 그 놈은 두 가지의 배신을 당한 겁니다. 사
랑의 배신, 그리고 이념의 배신."
"밤낮 그 레퍼토리야? 그게 살인 동기라면 증명을 해봐."
추경감이 일어서서 나가려고 했다. 뒤꼭지에 대고 강형사
가 다급하게 말했다.
"증명하지요, 반장님! 오민수와 설희주가 죽기 전전날 밤
원당에 있는 낭만장이라는 조그만 장급 여관에서 밀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그들은 심히 다투었답니다."
나가려던 추경감이 돌아섰다.
"뭐? 그거 정말이야?"
"틀림없습니다. 낭만장 종업원들에게서 확인했습니다. 사
진도 보여 주었구요. 숙박부에는 기재하지 않았습니다만
모두 증명된 것입니다."
"흠! 그건 새로운 사실이야. 하지만 그들이 이틀 전 한
여관에서 밀회를 했다고 해서 오민수가 범인이란 등식은
성립되지않아. 더 조사해 봐."
"그게 말입니다, 단순히 유부녀와 옛 애인이 밀회해서 정
사를 나누고 헤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그들은 상대방 중에
누군가가 죽어야만 일이 끝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왜?"
"종업원들 말에 의하면, 설희주는 다투면서 같이 죽든지
나를 죽이면 된다고 을부짖으며 대들었다고 합니다. 오민
수는 차라리 자기가 죽여 주는 게 낫겠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고 합니다."
"여관 종업원들은 왜 남의 방 대화나 엿듣고 그래?"
"엿들은 게 아니고 문을 열어놓은 채 말다툼을 해서 다들
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결판을 못 내고, 이튿
날 대관령에 간 설희주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오민
수가 죽인 것입니다. 그날 오후의 오민수 알리바이는 성립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감시 장치가 많은 집에 어떻게 흔적 없이 들어갈
수가 있단 말인가? 살인은 그 집 안방에서 이루어졌단 말
야."
"그야 간단합니다. 모든 비상 장치는 전원 스위치 하나로
차단됩니다. 그것만 알아낸다면 감시 TV고 뭐고 끝나는 거
죠. 일이 끝난 뒤 다시 전원을 넣어두면 감쪽같이 됩니
다."
"전원을 어떻게 차단한단 말인가?"
추경감이 흥미를 보였다.
"예, 바로 그 점입니다. 고회장의 집으로 들어가는 전선
을 원천적으로 잠시 끊는 겁니다. 길에 서 있는 전주에 올
라가 트랜스 스위치를 빼 버리면 그 집에는 전기가 못 들
어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일이 끝난 뒤 나와서 전주에 다
시 올라가 트랜스 스위치를 넣어놓으면 됩니다."
"증거 있어?"
추경감이 손가락으로 강형사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디엔가 증거가 있을 겁니다."
"그럼 그 집의 개는 어떻게 된 거야? 벙어리가 되었나,
갑자기?."
"그건 문제 없습니다. 오민수가 대학 다니며 아르바이트
할 때 농대 선배가 하는 수의과 병원에서 일당 품팔이를
한 일이있습니다. 그때 그 녀석 한 일이 주사 맞는 개를
붙잡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건 내가 조사해서 밝혀냈지
요. 그 녀석은 아무리 사나운 개라도 다스릴 줄을 압니
다."
"그럼 오민수를 만나 보았어?"
추경감은 그제야 강형사의 말을 인정했다.
"만나 보는 게 뭡니까? 틀림없는 범인인데 잡아 와야지
요."
"아직은 아니야. 회장집 근처의 그 전주라는 델 가 보가
구. 거기서 직접 알아봐야겠어. 자네 차 기름 있지?"
추경감이 앞장 서서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반장님, 수사비는 벌써 동나고, 오늘 아침에도 호주머니
긁어서 45리터 넣었어요."
강형사가 두 손을 벌려 보이며 처량한 하소연을 했다.
"거짓말 마. 그 구식 고물차에 무슨 45리터씩이나 들어가
는 기름 탱크가 있어?"
"예? 50리터도 들어갑니다! 자동차도 배가 고파 봐요."
"배가 고파? 후후후."
강형사는 언제나처럼 추경감을 태우고 백일해 앓는소리
내는 고물차를 몰았다.
고회장 집이 있는 삼청동. 고회장 집으로 전기가 들어가
는 전주 위에는 강형사 말대로 트랜스가 얹혀 있었다.
"저것 보십시오. 저기 있는 자기로 된 손잡이가 많이 있
지요. 저것 하나를 뽑으면 고회장 집에는 정전이 되는 겁
니다."
강형사는 손으로 전주 위를 가리키며 신이 났다.
"오민수가 전력회사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한 일 있나?"
추경감의 말이 무슨 뜻인지 강형사는 금방 알았다.
"전봇대에 올라가는 건 일도 아닙니다. 스파이크 구두 없
이도 얼마든지 올라가요. 그리고 반장님! 오민수가 수의과
병원서 아르바이트했다는 것 거짓말로 들으신 건 아니겠
죠?"
강형사가 다짐을 했다.
"저기 저 트랜스 스위치를 뽑으면 고회장집뿐 아니라 이
근처가 모두 정전되었을 것 아닌가. 그리고 고회장집 폐쇄
회로 감시 텔레비젼 테이프에 끊긴 자국이 있을 것이
고."
"고봉식 사장집 씨씨 티브이(CC, TV)는 녹화 장치가 없어
그건 알 수가 없구요. 이 근방 집들이 정전이 되었는
지는 알아보겠습니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몇 시간에 걸쳐 그 일대의 그날 정전
사항을 알아보았으나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동네 입구에 있는 전기 수리상에 들어
가서 물어보았다.
"날짜는 확실히 모릅겠지만 그 무렵 오후 너댓시경에 정
전이 된 일이 있습니다. 제가 텔레비젼 수리를 하고 있는
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 일을 그만두고 극장에 간 일이 있
거든요. 그날이 마지막 프로라고 했으니까."
늙수그레한 전화수리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추경감은
눈이 반짝 빛났다.
"그게 어느 극장입니까?"
"저 동네 안에 있는 쬐끄만 그 돼지극장인지 소극장인
지."
"소극장? 음, 작은 극장 말이죠. 그날 틀림없이 종영(終
映)이었습니까?"
"예? 종영이라구요? 아니예요. 최가박당 속편이었시요."
전파상 주인이 강형사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동문서답하
는 모습을 보고 강형사는 혼자 쿡쿡 웃었다.
두 사람은 그 조그만 소극장에 가서 사건이 나던 날 영화
가 끝났다는 것을 확인했다.
"거봐요, 틀림없지 않습니까? 이제 오민수를 체포하는 것
만 남았습니다. 그 녀석이 시시한 인간사 같은 것은 훌쩍
뛰어넘은 혁명 투사처럼 설쳤지만 별 수 없는 속물이었지
요. 이제야 이 강형사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이건 순전히 강형사의 상상이지
사실은 아니란 말야. 그러니까 오민수를 만나 확인해 보자
구. 그 회사 근처로 가서 불러내 저녁이나 먹으면서 이야
기하지."
추경감이 고물 프레스토에 오르면서 말했다.
"예? 그 녀석에게 저녁까지 사준단 말입니까? 반장님, 우
리 월급이 얼만데 그런 놈 저녁까지 사줍니까?"
"자네, 혼자 사는 총각이 툭 하면 돈 타령인데 그 버릇
좀 고치게. 경찰관 봉급이 얼마면 어때. 우리는 봉급을 받
고 일하는."
"알겠습니다, 경감님!"
강형사가 추경감의 입을 막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추경감
의 경찰관 사명론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기 때문에 지겨워
서였다.
명왕성 자동차 안산공장 근처의 조그만 호텔 커피숍에서
추경감이 기다리기로 하고 강형사가 공장으로 갔다.
그러나 공장은 아수라장이 되다시피 시끄러워 오민수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강형사가 공장 앞에 다다랐을 때는 소위 닭장차라는 전경
버스가 스무 대도 더 와 있고, 수백 명의 전경이 공장 입
구를 에워싸고 있었다.
공장 안에서는 수천명의 종업원들이 자동차, 집기 등으로
정문에 바리케이드를 쌓아 놓고 세상이 떠나갈 듯이 노래
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강형사가 안면이 있는 경찰 간부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
다.
"보시는 대롭니다. 파업 중이지. 파업만 하고 말면 저들
이야 볶아 먹든 지져 먹든 모르겠다고 하겠는데, 길거리로
뛰쳐 나오려 하니까 죽을 지경이지. 더러워서 못해 먹겠어
요."
강형사는 돌아가는 형편을 대강 알 것 같았다.
"저 안에 좀 들어갈 수 없을까요?"
"아니, 정신 나갔어? 저 안은 지금 해방구야. 인민재판이
라도 받고 싶어? 경찰관인 줄 알아봐요?"
사복 한 사람이 흥분해서 떠들었다.
"여보슈, 말조심해요. 해방구는 뭐고 인민재판은 뭐요?
저 종업원들이 빨갱이란 말이요? 무슨 말을 그렇데 함부로
하는거요?"
강형사가 사복을 윽박질렀다.
"열을 왜 올리시오. 지하 조직이 선동하지 않았다면 저
애들이 저렇게 되었을 것 같아요?"
사복은 여전히 빈정대는 말투였다.
"화가 나더라도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저 노
동자들도 자기들대로 사정이 있는 거란 말이요."
강형사는 공연히 혼자 화를 낸 것을 후회했다. 그는 담배
를 한 대 꺼내 사복에게 권했다.
"형씨는 어디 소속입니까?"
강형사가 물었으나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가
버렸다.
강형사는 그곳 전경 책임자에게 가서 사정을 말해 보았
다.
"강형사의 사정은 알겠는데, 지금 저 공장 안과는 아무런
연락도 할 수 없게 되었다네. 더구나 혼자 그냥 들어갔다
가는 흥분한 군중 틈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단 말일
세."
강형사는 하는 수 없이 호텔에 기다리고 있는 추경감에게
로 돌아갔다.
"그럼 오민수 집에 오늘 밤 하리꼬미하는 거야?"
하리꼬미란 숨어서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는 일본말이었다.
나이 많은 형사들은 그런 말을 자주 썼다.
다른 사건 같으면 벌써 더 버티지 못하겠다고 몇 번이나
뒤로 넘어지고 말았을 강형사지만, 이번에는 아주 열심이
었다. 더구나 오민수가 범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밤을 새워 길가에 숨어 있어야 하는 잠복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형사의 잠복 근무는 헛수고였다. 이튿날 아침
물먹은 종이 모양으로 축 처진 강형사가 어깨를 늘어뜨리
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지금 공장 파업이 절정에 올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
에 노조 핵심 간부가 한가하게 하숙집에 돌아와서 잠자게
됐어요?"
추경감이 안스러운 표정으로 강형사를 위로했다.
"오늘은 공장에 뛰어 들어가서라도 그 녀석을 꼭 잡아오
고 말겠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후후후, 수염이나 좀 깎아. 아니, 나하고 요 뒤 대중탕
에 가세. 나도 머리나 좀 감아야겠으니."
며칠이 걸려 싸우던 노조 데모대와 전경은 마침내 한바탕
불꽃튀는 전투를 벌이고야 끝이 났다.
회사에 의해 불법 파업으로 고발당한 노조는 마침내 전경
이 공장으로 들어가 해산시켰다.
그 바람에 오민수는 주동자의 한 사람이 되어 연행된 1백
80여 명 중에 끼여 있었다.
추경감은 수사 책임자들과 의논해서 오민수를 살인 용의
자로 심문하는 데 성공했다. 신병을 시경으로 옮긴 오민수
는 여전히 얌전하고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자네가 노동 운동을 하는 건 자네 소신이니까 우리가 간
섭할 일은 아니야.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가 모
른 척할 수 없단 말야."
추경감이 불이 켜지지 않는 지포 라이터를 철거덕거리며
앉아있는 오민수 주위를 걸어다녔다.
"무언가를 잘못 알고 계신 모양입니다. 누굴 죽였다는 겁
니까?"
오민수는 얄미울 만큼 침착하게 말했다. 보통 오랫동안
파업투쟁을 하게 되면 수염이 덥수록하게 자라고 지친 표
정이 되게 마련이지만, 오민수는 전혀 달랐다.
삭발을 해서 머리는 깨끗한 스님 같았고 면도를 잘 해서
얼굴이 맑았다. 오랫동안 햇별을 보지 않았는지 약간 창백
해 보이는 이마와 발그레한 뺨이 귀공자처럼 그를 보이게
했다.
"설희주가 죽기 전전날 밤 당신과 원당에 있는 낭만장에
서 하룻밤을 보낸 것을 다 알고 있단 말야."
강형사가 침착한 그에게 일격을 가할 생각으로 아픈 곳을
찔렀다. 오민수는 그 말에 약간 동요를 느끼는 것 같았다.
"흥! 그런데 여관 이름은 낭만장이지만 실은 낭만의 밤은
아니었더군! 당신과 설희주는 서로 죽이겠다고 싸웠다면
서? 왜죽이려고 했어? 그러다 안 되니까 대관령서 돌아오
는 걸 기다리고 있다가 죽인 것이지?"
강형사가 오민수의 턱을 손으로 받쳐 올리며 얼굴을 뚫어
지게 쏘아보았다.
오민수는 강형사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
렸다.
"원당에서 만난 건 사실이요. 하지만 우리는 싸우지 않았
소. 더구나 누가 누굴 죽이는 이야기 따위는 한 적이 없어
요."
"그러면 왜 지금까지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어? 당신이
설희주를 마지막 만난 것이 언제냐고 수십 차례나 물어보
았는데도 당신은 우릴 속이고 있었단 말야. 그 이유를 대
보란 말이야?"
강형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오민수는 탁자 위에 있는 담배를 집어서 입에 물었다. 강
형사가 가스 라이터를 던지다시피 내놓았다. 오민수는 라
이터를 주워 천천히 불을 붙인 뒤 담배 연기를 한숨처럼
길게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설희주는 유부녀, 남편이 있는 정숙한 가정 주부입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여자의 명예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내가 살인 혐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 사실을 숨긴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설희주의 죽음은 매
일 신문 잡지의 중요 메뉴로 되어 있습니다. 남의 목숨을
자기들 화젯거리로 삼는 그런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먹이
를 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내가 설희주와 여관방에 함
께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매스컴은 그녀를 천하의
음탕한 여자로 만들고도 남을 것입니다. 나는 설희주의 명
예를 지키는 일이라면 지금도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습니
다. 이건 진정입니다."
오민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괴로운 듯이
말했다.
그것은 진심인 것 같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그러면 그 경위를 다시 자세하게 설명해 보게."
추경감이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오민수는 입을 딱 다문 채 더 말하지 않았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그를 하루 더 붙들어 둘 수밖에
없었다.
그 이튿날, 방증 수집을 하러 다니던 박형사가 강형사의
추리에 찬 물을 끼얹었다.
"사건이 나던 날 삼청동 고회장집 일대에 정전이 된 건
사실입니다. 그 전파상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그건 한전
에서 공사를 하기 위해 한 시간 동안 전기를 끊었다고 합
니다. 그러나 고회장집은 아니예요."
박형사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고회장집은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전파상집과 고회장집은 두 집 건너에 있지만 전기가
들어가는 선은 전혀 다릅니다. 고회장집은 '삼간 2'이고
전파상은 '삼간 5' 선이랍니다."
"삼간 2는 뭐고 삼간 5는 뭐야?"
강형사가 별소리 다 듣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전기 선로를 구분하는 명칭입니다. 하여튼 고회장
집은 날 전기가 나간 사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잠깐 나간 걸 한전에서 어떻게 알 거야?"
강형사는 끝까지 자기 추리를 밀고 나가려는 심사였다.
그는 다시 오민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틀을 버티던
오민수는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19. 절망의 선택
오민수가 사건이 나기 이틀 전 원당읍의 낭만장에서 설희
주를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잠시 몸을 피해 있있습니다. 설희주와 몰래 만나기
위해 그곳에 간 것은 아닙니다. 내가 며칠 동안 그곳에 피
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설희주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민수는 벤딩 머신에서 뽑아온 종이컵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왜 거기에 피신을 하고 있었나? 그땐 자네를 잡아 넣으
려하지 않았을 텐데."
추경감이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회사 측에서 계속 저를 협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들
어가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피해 있다기보다는 집에 들
어가지 않았다는 게 옳지요."
"회사측에서?"
"예, 그것이 고사장이 시킨 일인지 혹은 자발적으로 구사
대가 생긴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노조가 계속해서 말썽
을 일으키면 모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겠다는 대자
보가 계속 나붙었어요. 그뿐 아니라 나한테도 전화로 여러
차례 협박을 했습니다."
"뭐라고? 누가?"
강형사가 성급하게 물었다.
"노조에서 빨리 손을 떼라. 병신이 되고 싶지 않으면 밤
길 조심해라. 너희는 장난으로 노조를 하는지 모르지만 우
리는 생계가 달렸다. 오민수는 노조의 대부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그런 짓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지들이 나는 잠시 피해 있는 것이 좋다는 이야
기를 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덤벼든 자동차에 치일 뻔했
습니다. 그 이후 원당의 낭만장에서 며칠을 보냈습니다.
노조 간부 몇 사람과 긴급한 연락만 했지요."
"그래서 그리로 설희주를 불러 들였구먼. 여관에 혼자 있
으니까 옛날 애인이 생각난 거야? 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남의 아내야, 남의 아내!"
강형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식으로 야비하게 이야기하지 맙시다. 그렇게 생각
한다면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오민수는 대단히 화가 났다. 마침내 꺼내려던 이야기를
중지하고 말았다.
"자, 점심이나 먹고 이야기하지."
추경감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를 썼다. 강형사를 불러내
서는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야단을 쳤다. 오민수 같은
사람들은 가장 겁내는 것이 비겁자나 부도덕한 인간이란
소리를 듣는 것이란 것을 명심하라고 이야기했다.
오후부터 오민수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 내가 설희주를 보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회사
형편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설희주가 저를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설희주가 회사에 한번 들렀다가 마침 농성하고
있는 우리 집행부 동지들을 만난 뒤."
"그때 오민수는 없었다는데?"
추경감이 물었다.
"예, 그때 저는 여기 와 있었습니다. 희주가 내가 거기
없는 것을 보고 만날 수 없느냐고 우리 동지에게 얘기했다
는 겁니다. 나는 처음에 그 전갈을 듣고 희주를 만나지 않
을 생각이었습니다. 그 일에 그녀를 끌어넣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에 걸쳐 나를 만나야
한다는 전갈을 보내 왔습니다. 마지막에는 직접 편지를 보
내 왔는데."
오민수가 기억하고 있는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그런 방법으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나도 여러 가
지로 오민수 형을 도우려고 노력해 보았는데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바쳐 이룩하려던 숭고
한 뜻은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눈 떠 있는 우리들이 모른
척하면 아직 깨지 못한 수많은 민초들이 영원히 시들고 맙
니다. 오형! 내가 동지를 버렸다고 생각치 마세요. 모든
동지가 다 그렇게 생각해도 오형만은 꼭 나를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만나야 합니다. 나를 만
나 주지 않는다면 오형이 나를 배신자로 생각한다고 믿겠
어요.'
편지를 본 오민수는 자기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직접 전화를 걸어 여관으로 오도록 이야기를 했었다.
그들은 좁은 여관방에서 마주서자 서로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 텁수룩하게 자란 수염이 오민수의 모습을
초췌하게 보이게 했다. 그러나 반짝이는 눈만은 학생 시절
의 그를연상하게 했다. 불타는 가슴으로 수십만 명의 군중
앞에 서서 사자 울음을 토하던 오민수가 아닌가.
설희주는 펄펄 뛰던 사자가 초라한 우리에 갇혀 썩고 있
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형!"
설희주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었다. 수수한 블라우스에 받
쳐 입은 블루진 스커트와 아무렇게나 뒤로 묶은 그녀의 머
리는 여학생 시절을 연상하게 했다. 거의 화장기가 없는
그녀의 얼굴은 옛날처럼 청순한 향기를 풍겼다.
"희주."
오민수는 설희주가 남의 아내라는 것을 잊었다. 옛날 동
지이며 연인 시절의 그녀를 다시 본 것이다.
오민수는 설희주를 덥석 껴안았다. 설희주도 자연스럽게
오민수의 품에 안기었다.
"우리."
설희주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오민수가 자기
의 입술로 그녀의 작은 입을 덮었다.
설희주는 까칠한 오민수의 수영을 뺨에 느끼며 눈을 지그
시 감았다. 갑자기 눈물이 펑평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유
를 분명히 알 수 없는 좌절과 슬픔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녀는 지금 자기의 위치를 어디에 두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희주, 나쁜 여자."
오민수는 설희주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신음처럼 뱉었
다.
설희주는 아무 말도 않고 계속 눈물만 쏟았다.
오민수는 설희주를 껴안은 채 침대로 넘어졌다. 오민수는
미친듯이 설희주의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설희주는 아무
말도 않고 계속 눈물을 흘리며 오민수의 뜨거운 키스를 받
아들였다. 그를 배신한 회한의 눈물인지도 몰랐다.
"희주, 나쁜 여자!"
오민수는 같은 말을 계속 되뇌이며 설희주를 껴안고 몸부
림쳤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희주의 블라우스를 벗겨냈다.
블루진 스커트의 지퍼를 열었다.
설희주는 오민수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겨 두었다. 얇은 슈
미즈도 달아오른 오민수의 손길 앞에 쉽게 벗겨져 달아났
다. 검은색 브래지어와 검은색 팬티만 걸친 설희주의 나신
이 백열등 아래 눈부셨다.
설희주는 눈을 꼭 감고 모든 것을 오민수에게 맡겼다.
갸름한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고, 뒤로 묶은 머리채
는 어느 새 풀려 풍성한 볏단처럼 그녀의 긴 목을 휘감고
있었다. 동그스름한 어깨가 한껏 수줍음을 먹은 듯했다.
가는 허리와는 대조적인 볼륨 있는 그녀의 허벅지가 놀라
을 만큼 육감적이었다.
오민수는 어느 새 자기 옷도 벗어 던진 뒤 설희주의 브래
지어를 서툰 솜씨로 잡아당겼다. 잘 벗겨지지 않았다. 설
희주가 손을 뒤로 비틀 듯이 돌려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어
주었다. 깜장 브래지어가 침대 밑으로 떨어지자 봉긋한 그
녀의 두 젖무덤이 부끄럼없이 노출되었다. 오민수는 그녀
의 유두 색깔이 화장하지 않은 그녀의 입술 빛과 같다고
생각했다.
오민수의 떨리는 손이 마지막 남은 그녀의 팬티를 움켜쥐
었다. 설희주는 허벅지를 오므리면서 본능적으로 몸을 움
츠렸다.
그러나 오민수의 손길은 집요했다. 설희주는 왼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 라이트 스위치 끈을 당겼다.
방안은 갑자기 희부연 설희주와 오민수의 맨몸만이 어렴
풋이보일 뿐 어둠으로 가득 찼다. 어둠은 두 사람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그들을 보다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조그만 창문으로 달빛이 한아름 쏟아져 들어왔다. 두 남
녀는 어둠에 익숙해짐과 동시에 포옹에도 익숙해졌다.
"희주, 사랑해!"
오민수는 그녀의 가슴 위에서 몸부림쳤다.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설희주는 눈물을 그쳤다. 그녀는 오민수의 뜨거운 가슴을
두팔로 안았다. 달빛을 가슴에 받아들이듯 온화한 감정으
로 그를 받아들였다.
"희주."
오민수가 신음을 토했다. 그 짤막한 말과 함께 설희주는
가장 깊숙한 곳에 그가 와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주
옛날 아득한 먼 곳에서 느낀 감정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풋풋한 풀냄새를 맡으며 20여년 동안 간직해 온 귀중한
보석을 오민수에게 기꺼이 주던 일을 되새겼다.
그들은 그해 여름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여주의 어느 연
수원에 엠티(MT)를 갔었다.
하루 종일 학생 운동의 장래를 위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
다.
마지막 날 밤 캠프 파이어의 불은 꺼졌지만, 그들은 더욱
굳은 투지의 불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누워서 창밖을 내다보던 설희주는 총총하게 뜬 별에 매혹
당했다. 그녀는 살그머니 동료들 몰래 밖으로 나갔다.
벌써 풀벌레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연수원
마당가 벤치에 앉아 별에 심취되어 있었다. 저 많은 별무
리 같은 우리 젊은이가 흐르는 유성처럼 자기 몸을 불태우
며 민주주의를 위해, 고통받는 민초를 위해 사라져 간다고
생각했다.
"별을 헤이는 밤이군요."
굵직하고 정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학총련 회장인 오민
수였다.
"오형도 별에 반했나요?"
설희주는 좁은 벤치에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두 사람의 몸이 옆으로 맞닿았다. 따스한 오민수의
체온이 피부를 뚫고 설희주의 심장으로 전해져 왔다.
"희주! 우리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가는거야. 우
리의 이상이이 한반도 위에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영원한 동행자야."
오민수가 가만히 설희주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그
녀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입이
열려지지 않았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희주, 사랑해!"
오민수의 무겁고 다정한 목소리가 설희주의 귓전을
스쳤다. 그녀는 그 소리가 멀리 있는 별에서부터 온
것이라고 착각했다. 자기의 보잘것 없는 힘으로는 어
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들은 일어서서 천천히 걸었다. 하늘의 별만이 내
려다볼 수있는 강변 숲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아
무 말도 하지 않고 껴안은 채 숲에 쓰러졌다. 뜨거운
남자의 입술을 느끼며 설희주는 정신이 더욱 아득해
졌다.
오민수가 서툰 솜씨로 그녀의 스커트를 벗겨 내릴
때 그녀는 그의 어깨 너머로 별을 바라보았다.
육체의 중심부에 생후 처음인 충격을 느꼈다. 그녀
가 오민수의 어깨 너머로 춤추는 별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풋풋한 풀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기분 좋
은 풀냄새는 그녀의 하반신을 가득 채우고 위로 위로
차올라 마침내 심장에까지 가득 찼다. 그녀는 춤추던
별이 갑자기 멈춘다고 느낀 순간 가슴 위에 오민수의
얼굴이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 풀냄새는 이제 설희주
를 가득 채우고 오민수의 온 몸을 적셨다.
"희주, 사랑해!"
설희주는 꿈을 꾼다. 생각했다.
그렇게 청순하고 아릅답던 그날 밤을 다시 어두운
여관방 침대 위에서 생각해 낸 것이다.
뜨거운 두 영혼은 달빛 아래서 몸부림쳤다. 그들의
사랑은차라리 육체가 아닌 영혼의 갈망이었다.
"미안해, 희주! 정말이야."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오민수는 창가의 소파에 앉아
얼굴을 숙이고 흐느끼듯 외쳤다. 조금 전의 무분별한
그의 행동을 자책하고 있었다.
설희주는 아무 말 않고 일어나 앉아 옷을 챙겨 입었
다.
"미안해, 희주. 이건 아니야! 희주는 남의 아내야.
우리 위대한 사장님의 사모님이란 말이야! 그런데 내
가."
오민수는 갑자기 외치면서 자기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오형! 비겁한."
설희주가 오민수의 뺨을 때렸다.
"내가 고봉식의 아내라는 게 그렇게도 걸려? 형네
회사 사장 아내를 범했다고 후회하는 거야? 겁내는
거야?"
설희주는 갑자기 히스테리컬한 함성을 질렀다.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나 회한의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난 죽어야 할 여자야. 죽어서 마땅한 여자야. 그렇
고말고.
오형 지금 오형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간
통, 부정 하하하, 난 누구에겐가 죽게 될 거야."
여관 종업원이 두 사람이 죽음이란 말을 밸으면서
싸웠다는 것은 이 대목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또한 설희주의 시체에서 며칠 된 남자의 정액이 발
견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고봉식과 오민수는 혈
액형이 같았기 때문에 2일 내지 1주일 전 남편과의
정사에서 남겨진 정액으로 생각한 것은 수사의 실수
였다. 혈액형이 같다고 포기하지 않고 유전자 검사를
했다면 그것이 고봉식의 정액이 아니란 것을 알아냈
을것이다.
그들은 격한 감정을 정리하고는 여관 밖으로 나갔
다. 너무나 밝은 달빛을 받으며 걸었다.
"오형,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는 지쳤나 봐요. 이
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오산이었어요. 내가
재벌집 며느리가 되면 가능할 줄 알았어요. 불쌍한
노동자의 월급부터 올려 주고 회사를 더욱 민주적으
로 운영하여 모든 이익금을 공평하게 갈라서 가지게
하고."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예요. 모든 게 엉망이에요. 세상
이 그렇게 간단히 바뀔 수가 없어요. 시간이 갈수록
나는 나를 떠나고싶어요. 어쩔 수가 없어요. 이 땅
위의 한 여자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요."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난 최루탄과 싸우는 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
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택한 길이었어요. 하지
만 그건 큰 오산이었어요.
난 이제 더 큰 절망 속에 빠지고 말았어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죽음! 그래요, 죽는 길만이 나에게
남아 있어요."
설희주는 오민수의 손을 꼭 쥐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내가 옛 동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
무것도없어요. 오직 배신자일 뿐이에요. 오형한테는
신의의 배신자임과 함께 사랑의 배신자예요. 이제 돌
이킬 수 없어요. 오형! 나를 용서해 준다면 나는 마
지막으로 할 일이 있어요.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더
가 할 수 있는 최후의 길을 택하겠어요."
"무슨 소리야?"
오민수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오민수는 심장이 터질 듯한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 그녀는 죽음을 택한 것이란 말이
지?"
추경감이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물었다. 오민수에게
도 건네주며 침통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는 세상에 대한 복수가 되지 않는
다, 불쌍한 한 여자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렸습니다.
내가 더 말려야 하는건데. 그날 집에 보내지 말
고 영원히 내 곁에 있게 해야하는 건데."
오민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
다.
"말도 안 돼!"
강형사가 누구에게도 아닌 고함을 지르고 밖으로 나
갔다.
이야기는 명백했다.
설희주는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잃은 것이었다. 연인
을 배반하고 딴 남자를 남편으로 택한 것은 그녀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 짓이었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도로에 그치는
것이다. 그녀는 연인을 배반한 죄책감에 몸부림쳤고
동지를 배신한 괴로움으로 울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세상을 뚫으려 했다. 그러나
세상사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그녀는 학생운동 시
절보다 더 두꺼운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었던 것이
다.
그녀는 마침내 회한의 세월을 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요, 내가 가진 마지막 재산, 내 목숨을 이용하
겠어요. 나는 결코 패배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설희주가 오민수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죽음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목
하도록 하고 싶었다. 왜 그녀가 죽었는가를 캐는 동
안 한 부르조아 집안의 비리를 낱낱이 세상에 폭로하
고 싶었다. 노사의 갈등에 수사의 조명을 비쳐 모든
사람들이 진실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한 젊은 여자가 자
살했다고하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선 매스컴이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재벌 집안의 돈으로
감추지 못하도록 박민재에게 진주 목걸이를 주며 부
탁해 놓았다. 그리고 그녀 시집의 모든 식구가 그녀
를 죽인 혐의자처럼 보이도록 꾸며 놓았다.
남편 고봉식의 와이셔츠에 피를 묻혀 숨겨 놓고, 시
누이 부부 고정혜와 정정필의 방에 보조 열쇠를 가져
다 놓았다. 또한 그 녹음 테이프에는 최화정의 지문
이 묻도록 했다. 고영혜는 학생 시절의 연적이고, 양
경숙은 남편의 정부니까 자연히 의심을 받게 되는 것
이다. 그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옛 애인 오민수가 수
사받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처절함이 세상에 폭로될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그리고 자살하기 직전 녹음 테이프 플레이어의 타이
머를 조작하여 자기가 죽은 지 한 시간 40여분 뒤에
비명 소리가 나오도록 해놓았다. 고봉길이 뒤늦게 비
명을 들어 사건 시간이 헛갈린 것은 이 때문이었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허탈한 기분으로 시경 문앞을 걸
어나왔다.
"반장님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자기 목숨
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칠 수 있습니까?"
강형사가 자못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아, 그건 장난이 아니야. 목숨을 건 처절한
절규야."
"예?"
"자네 혹시 추사(秋史)라고 아나?"
"예? 추사요? 성이 추시니까 경감님의 선조쯤 되시
는 분이겠군요."
"예끼, 이 사람! 성이 추씨가 아니고 아호가."
"완당이라고도 하지요. 조선조 말기 병조판서를 지
낸 명필 김정희 아닙니까?"
강형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추사의 그림 중에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라는
것이 있다네."
"제주에서 귀양살이할 때 그린 소나무 말이죠?"
"그 세한도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풍상고절(楓霜
苦節)은 참고 견뎌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시대가 잘못 되어 가고 있더라도 참고 견
디면서 고쳐야 하는 걸세. 꾸준히 끈질기게 말이야.
우리 시대는 참고 견디는 시대야. 섣불리 결단을 내
리는 젊은이들이 많아져서는 안 되지."
"어쩐지 개운치 않은 사건 종말인데요."
고개를 떨구고 걷는 강형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
며 추경감이 나직하게 말했다.
"어때, 쐬주 한잔 하면서 기분 풀자구."
끝
카테고리 없음
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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