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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by Casey,Riley 2021.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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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아 아스타피에프 지음 / 돌배나무
이 책은 중국인으로 변장해 차를 훔쳐온 스파이 로버트 포춘부터 아름다운 모란에 반해 씨앗을 가
져온 조지프 록……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세쿼이아를 발견한 아치볼드 멘지스 등 새로운 식물을
손에 넣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인디아나 존스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고군분투한 식물들의 놀라
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카티아 아스타피에프 지음

▣ 저자 카티아 아스타피에프
과학 교육 전문 생물학자인 카티아 아스타피에프는 그랑낭시 식물원과 로렌 대학 식물원의 부원장이다.
여행기와 청소년 소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 Short Summary
중국에 갔을 때 나는 윈난성의 한 계곡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아름다운 리장시에서 멀지 않은
위후구라는 곳이었다. 해발 5,596미터에 달하는 위룽설산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집들은 지
붕이 '원숭이 대가리'라는 별명을 가진 돌로 만들어졌다. 나시족 노부들은 파란 모자와 전통 의상을 입
고 좁은 골목길을 다녔다. 그곳은 숨이 막힐 정도로 풍광이 아름다웠다. 왜 그가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내가 위후구에 간 것은 사실 그가 살던 집, 그의 아지트를 보기 위해서였
다. 그는 엉뚱하지만 천재적이었고, 무모하지만 기품 있으며, 식물과 중국에 미쳤던 식물학자 조지프
록이다. 식물과 관련된 많은 현상을 발견했던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이 마법 같은 장소에
는 여행, 식물, 모험가라는, 내가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이 결합되어 있다.
나는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왜 떠나는 겁니까?” 답은 쉽고도 너무나 자명하다. “어떻게 떠나지 않
을 수 있나요?” 나는 그렇게 세상을 다녔다. 세상을 다큐멘터리로 보고, 추측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탐험가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 겸손한 자세로 떠났다. 그 흔적이 아주
먼 곳에 있더라도 말이다. 지도와 GPS 없이 모험을 떠나는 시대는 끝났다. 그래서 나는 중국을 횡단
하고 조지프 록이라는 특별한 식물학자의 특별한 삶을 조명하는 책을 쓸 계획을 세웠다. 그가 발견한
것 중 하나가 신비로운 양귀비였는데 그 발견 자체가 웬만한 추리소설 못지않다. 그가 양귀비를 발견
한 이야기뿐 아니라 이국적인 식물들에 관하여 잊혔거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자 한다.
아름답고 독특하며 재미있는 식물들에 나는 끊임없이 매료되었다. 식물들이 가지고 있는 적응 능력과
소통 능력은 과소평가되지만 그렇다고 식물에게 지성이 있다고까지는 말하지 않겠다. 식물에는 저마다
이야기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인 라플레시아라는 꽃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특이하고
거대한 생명체는 말레이시아의 정글 속을 힘겹게 걸어가다가 만났다. 이런 꽃 앞에서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파라고무나무는 어떤가?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하긴 더 잘 알려진 식물이긴 하다. 하
지만 이 식물과 그 발견자의 놀라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식물과 탐험하는 식물학자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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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야기는 수없이 많다. 이 책에서는 10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10개의 식물과 10명의 사람, 그리고 10
편의 탐험. 물론 식물의 대서사시는 인간의 모험, 지난 시대의 몇몇 영웅과 관련이 있다. 그 영웅들은
지식의 유목민들, 녹색 황금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진짜 모험가들을 좋아한다. 과학, 지식, 발견을 위해 세계를 누빈 사람들, 식물 탐험가들을 말이
다.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 로버트 포춘을 보라. 그는 스파이 노릇을 했고, 중국에서는 영국인 특유의
냉정함을 유지하면서도 오지를 탐험하다가 죽을 뻔했다. 스탬퍼드 래플스 경은 싱가포르를 건국한 다
음에 경이로운 자연을 발견하려고 정글을 누볐다. 찰스 다윈과 쿡 선장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고,
자연 과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칼 폰 린네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앙드레 테
베, 미셸 사라쟁이라는 이름을 누가 기억하는가?
나는 이 책에서 바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식물의 세계에 대해서 매일 새로운 것이 알려지는
요즘에 나도 10개의 식물에 관해 최근에 알려진 정보를 조금 나누고자 한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들,
짧게 쉬어가는 이야기들, 놀랍거나 새로운 과학적 사실들이 이 책 전체에 걸쳐 있다.

▣ 차례
추천사 - 프랑시스 알레
프롤로그
1. 중국에서 차를 훔쳐라! 영국 스파이의 007 대작전
2. 사략선 선장이 칠레에서 구해 온 흐벅진 열매
3. 중국 모란의 로큰롤 모험
4. 캐나다산 뿌리의 흥망성쇠
5. 아마존 밀림에서 출세한 나무 이야기
6. 가톨릭 신부가 브라질에서 발견한 불경한 풀
7. 예수회 신부가 중국에서 발견한 초록색 열매의 희한한 운명
8. 추운 지방에서 온 식물에 관한 조사
9. 세상에서 가장 크고 구린 식물의 발견
10. 옛날 옛적 그곳에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나무가 있었으니
에필로그
참고문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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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카티아 아스타피에프 지음

중국에서 차를 훔쳐라! 영국 스파이의 007 대작전
차가 없다면 어떻게 영국인들을 놀릴 수 있을까? 또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차 애호가와 커피 애호가로
나눌 수 있을까? 물론 차와 커피 둘 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어떻게 모로코 식당에서 테이
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웃기지도 않고 테이블보를 더럽히지도 않으면서 주전자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까?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차나무라는 대단한 식물이 없었다면 아마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짐작
했겠지만 차나무는 키가 작은 식물인 관목이고, 차는 차나무의 잎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도 짐작했겠
지? 하지만 이건 몰랐을 것이다. 티백 형태의 차는 주로 차 가루로 만든다. 차를 선별하는 자리를 빗
자루로 쓸면 차 가루가 모이는데, 이것은 나처럼 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서양인에게 대접할 저
품질의 차로 완벽하다.
좀 더 정확하게 (그리고 유식하게) 차나무에 대해 알아보자. 차나무의 라틴어 학명은 카멜리아 시넨시
스(Camellia)이다. 사실 차나무는 집에서 자주 키우는 예쁜 동백나무와 같은 과와 속에 속한다. 차나무
가 유럽에 도입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7세기에 동인도회사가 중국으로부터 유럽에 차를 들여온 것
이다. 동인도회사는 어린 나무를 주문했지만 중국인들이 더 약삭빨랐다. 차나무가 아니라 동백나무
(Camellia Japonica)를 보낸 것이다. 영국인들은 사기행각을 알아차렸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관상용인 동백나무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워서 영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
이다.
아편의 나라에서: 차나무는 중국에서 수천 년 전에 알려졌고 중국이 유일한 재배지였다. 17세기에 포르
투갈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서양으로 들여온 차나무는 19세기 중반에 최상의 차를 얻기 위해 오랫동안
고심했던 영국이 그야말로 훔치다시피 가져갔다. 그 당시에는 두 종류의 식물이 세상을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꼭지의 주인공인 차나무와 그 누구에게도 권하지 못 할 양귀비(Papaver somniterum)말이
다. 영국은 인도에서 양귀비를 독점적으로 재배했고, 중국은 차 재배에 거의 완전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다.
약 200년 동안 동인도회사는 중국인에게 아편을 팔았고, 중국인은 아편을 사려고 동인도회사에 차를
팔았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은 셈이었다. 영국인은 양심이라고는 없는 마약 거래 전문가였고, 동인
도회사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마약 거래상이었다. 이는 중국인들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왔다. 영국
은 무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1839년에 제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은 1842년에 끝났다) 전쟁에
서 승리하면서 중국의 여러 항을 개항시킬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홍콩이라는 보너스까지 얻었다.
1845년경 영국은 중국과 무역 거래를 재개하는 데 기뻐하면서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
도에서 재배할 최상품의 차나무를 확보하고 흥차와 녹차 제조 기술을 알아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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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영국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원한 방법은 바로 스파이를 파견하는 것이었다. 중국을 잘 알고 차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용감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사람이 바로
영국의 유명한 식물학자인 로버트 포춘 (Robert Fortune, 1812~1880)이다. 그는 1848년에 중국으로
향했다. 포춘은 에든버러 식물원에서 일했고,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원예와 식물학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또 영국 왕립원예학회에 의해 처음으로 중국에 보내졌을 때의 경험을 1843년에 책으로 발표해서 유명
해졌다. 중국 북부지방에서 3년을 보냈던 포춘은 이때 이미 차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그전에 했던 여
행에서도 감귤류에 속하며 껍질째 먹는 작고 둥근 과실인 금감(Fortunella), 재스민, 국화 등 생소한 식
물들을 유럽에 들여온 적이 있었다.
식물학자 스파이: 혹시 식물학자 스파이였던 로버트 포춘은 기상천외한 삶을 살았다. 우리의 영웅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산업 스파이나 도둑놈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말하자면 식물을 훔치
는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쯤 되겠다. 야망에 불타고 결의에 찬 식물 애호가이자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확신에 찬 애국자로 말이다. 그는 경제 질서를 뒤흔들어서 세계를 조금 바꾸고 조국 영국을 경제대국
으로 부상시키는 데 일조한 남자라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포춘은 중국으
로 떠나면서 많은 돈을 받았다. 사실은 아주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매우 위험한 여행에 그를 뛰
어들게 만든 것은 돈이 아니라 모험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받아들인 임무는 최상급 차나무가 자라는 중국 남부에 가서 차나무와 차나무 씨앗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푸젠성의 우이산맥과 안후이성의 황산은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통행이 금
지된 지역이었고, 몇몇 예수회 수도사들을 제외하고는 그곳에 발을 들인 유럽인은 거의 없었다. 사실
포춘은 중국인을 고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가 원하는 지역의 차를 가져다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직접 현지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지어가 불가능하다는 커다란 장애물이 있었
기 때문에 혼자서 갈 수는 없었다. 그 당시에는 중국어를 가르치는 곳도 없었고, 중국어 발음을 로마
자로 표기한 한어 병음도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결국 안내인이 필요했다. 아니, 두 명이나 필요했다.
한 명은 몸종이자 통역으로 고용했고, 나머지 한 명은 쿨리(짐꾼)로 고용했다. 그런데 포춘은 이 두 사
람 때문에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먼 나라의 군주: 완벽한 스파이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남의 눈에 띄지 않
는 것이다.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포춘은 변장을 하기로 결심했다. 스코틀랜드 남자가 앞머리와
옆머리를 밀고 남은 머리를 뒤로 길게 땋아 내린 변발을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우스꽝스러울 것
같지 않나? 하지만 이 방법이 통했다. 머리를 미는 과정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서툰 쿨리가 포춘의
두피에 상처를 냈기 때문이다. 포춘은 고통에 눈물을 흘렸고, 뱃사공(뱃사공들은 포춘의 모험에서 중요
한 역할을 했다. 그 당시에 중국의 주요 교통수단이 배였기 때문이다. 배를 타고 이동하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들은 이 광경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포춘과 동행했던 두 사내는 여행을 더 힘들게 할 때도 있었다. 포춘은 그의 쿨리를 “내가 가려고 하는
지방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장점이 없는 굼뜨고 서툴고 둔한 남자”라고 묘사했다. 또 몸종인
왕에 대해서는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을 뻔한, 어리석고 고집 센 남자”라고 했다. 두 사내는 쉴 새 없
이 싸웠고 주인에게 최대한 많은 돈을 뜯어내려고 잔꾀를 부리곤 했다. 또 그들은 실수 연발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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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어쩐 일인지 포춘은 늘 위기를 극복했다. 하지만 결국 한 명은 뱃사공들에게 외국인이 타고 있다고 고
자질을 하곤 했고, 나머지 한 명은 해적과 도둑들이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얘기해 주어 주인이 맘 편
히 자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게으름을 피우기 일쑤였고, 첩첩산중에서 길을 잃은 척하거
나 뱃사공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결국 여행 내내 싸움이 끊이지 않았으니, 차라리 냉정함을 유지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도록 노력하며 낯선 사람과 말을 하다가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
다.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어오면 (“내 이름은 포춘이오.”라고 할 수는 없었으므로) 포춘의 대답은 항상 같
았다. “만리장성 너머 먼 나라에서 온 군주올시다.” 이 대답에 놀란 사람들은 포춘에게 필요 이상의 친
절을 베풀었다. 포춘은 능숙한 모험가답게 이런 상황을 벗어나는 묘안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아무 반
응도 하지 않고 일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상황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절대 냉정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여행가, 특히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말이다. 이것이 항상 최선의
길이다."
중국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영국인: 만리장성 너머 먼 나라에서 온 귀족 포춘은 어느 날 아침 여인숙에
서 벌어진 난투극 소리에 잠이 깼다. 밖을 내다보니 자신의 하인 한 명이 타다 만 장작을 휘두르며 건
장한 사내 열 명이 우르르 달려드는 것을 막고 있었다. 포춘은 방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 작은 권총을
꺼냈는데, 습기 때문에 포신이 녹슬어 총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춘은 할 수 없
이 ‘용감하고 결단력 있는 표정’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사정을 알고 보니, 자신의 하인이 다른
짐꾼들에게 300냥을 사기 치려다가 들킨 것이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날, 아무
도 포춘과 그의 하인을 위해 일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하인 싱후가 모든 짐을 지기로 했
다. 그런데 당나귀처럼 짐을 가득 지는 바람에 짐을 떠받치던 대나무가 부러지고 짐은 모두 진흙탕에
쏟아지고 말았다. 실수만 연발하는 사내 녀석에게 벌을 주고 싶었던 포춘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하
지만 그는 신사답게 발목까지 진흙에 빠진 하인을 오히려 불쌍하게 여겼다.
또 한 번은 남자 네 명이 포춘이 타고 있던 배의 선장에게 달려드는 일이 벌어졌다. 선장이 쌀가마니
를 훔쳤기 때문이었다. 쌀을 도둑맞은 사람은 포기를 모르고 돈으로 싸움꾼들을 사서 선장에게 보냈다.
가뜩이나 술에 취해 있던 선장이 돈을 내지 않겠다고 버티자 사내들은 돛을 가져가버렸다. 갈 길이 멀
건만…….
포춘은 여행 도중에 아편을 피우는 사람들도 당연히 만났다. 아편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양
귀비보다 동백을 더 좋아했다. 그가 묘사한 아편 중독자들을 보면 《땡땡의 모험》에서 푸른 연꽃의 나
라 중국에 간 땡땡의 처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진다. “아편을 무분별하게 취했을 때 중독자에게
나타나는 효과는 씁쓸하다. 중독자는 얼굴이 수척하고 낯빛은 창백하며 얼이 빠져 있다. 피부가 매우
칙칙해서 피부 상태만 봐도 아편 중독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는 죽을 날을 받아놓은 것
이나 마찬가지이다.”
정기적으로 아편을 피우는 사람은 5~6년 이내에 사망했다. 아편을 태우면서 나는 연기도 꺼림칙하지
만 중독자 옆에서 자면 그밖에도 불편함이 있었다. 포춘도 늙은 관료가 머무는 방의 윗방에서 자다가
그런 경험을 했다.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깬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의 코에서는 끔찍할 정도로 불
협화음인 소리가 났고, 뿐만 아니라 그가 아기 같은 울음소리를 내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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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차의 나라 중국을 여행한 그에게는 불행만 닥쳤던 듯하다. 중국을 여행하며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싶
은 사람은 아편만은 피하라. 차라리 취두부나 개고기를 먹어 보는 게 어떨까? 적어도 해롭지는 않을
테니.
녹차 vs 홍차: 하인들의 농간에도 불구하고 포춘은 여행을 즐겼다. 중국의 광활한 자연 앞에서 입을 다
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중국에 온 이유를 잊지 않았다. 그는 차에 대한 모든 걸 알아내야 했
다. 차나무는 중국 전역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때로는 아주 가파른 산비탈에도 차밭이 있었다. 포춘은
원숭이를 차밭에 풀어 찻잎을 따오게 한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중국인들은 원숭이를
훈련시키는 게 아니라 돌을 던져 원숭이의 화를 돋우었다. 화가 난 원숭이는 차나무의 가지를 꺾어서
인간을 향해 던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마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일 것이다.
포춘은 그가 과거에 중국을 여행하면서 봤던 것을 확인시켜주는 흥미로운 발견을 했다. 홍차와 녹차가
똑같은 나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그때까지 유럽인들은 발효 과정이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몰랐다. 찻잎을 따서 짧은 산화 과정을 거치면 녹차가 완성되고, 홍차는 더 긴 산화 과정을 거
친다. 포춘은 영국인 중국 학자였던 존 프랜시스 데이비스가 쓴 책 『중국인 The Chinese(1836)』에서
다양한 종류의 차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떠올렸다. 그 책은 다양한 품질의 차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
중 페코차는 처음 난 찻잎을 따서 흰 솜털처럼 부드러운 맛을 낸다.
차나무는 공식적으로 학명 카멜리아 시넨시스를 얻기 전인 1712년에 중국과 일본을 여행했던 독일인
의사 엥걸베르트 캠퍼(Engelbert Kaempfer)에 의해 테아 야포니카(Thea japonica)로 명명된 적이 있다.
유명한 스웨덴 식물학자인 칼 폰 린네(1707~1778)가 다시 테아 시넨시스(Thea sinensis)라고 명명했
다. 그러나 포춘이 그의 저서에서 언급했듯이, 홍차와 녹차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차나무에서 만들어
진 것이라는 혼동이 생겼다. 그래서 녹차는 테아 비리디스(Thea viridis), 홍차는 테아 보헤아(Thea
bohea)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1887년에 독일의 식물학자 칼 에른스트 오토 쿤츠 (Carl Ernst Otto
Kuntze, 1843~1907)가 차나무를 동백나무속으로 분류하고 현재의 학명으로 명명했다.
포춘은 반갑지 않은 발견도 했다. 중국인들이 수년 동안 영국인들에게 독을 먹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크게 증가한 차의 수요를 감당하고 돈을 벌기 위해 중국인들은 오래된 홍차를 짙은 파란색 염
료로 물들여 녹차로 탈바꿈시켰다. 어차피 영국 야만인들은 맛도 없고 독성까지 있는 차를 구분할 줄
도 모를 테니까 말이다.
포춘은 차가 어떻게 운송되는지도 설명했다. 중국인들은 차를 상자에 넣고 그 상자를 대나무로 엮어
고정시킨 다음에 상자가 절대로 땅에 닿지 않도록 했다. 포춘은 차나무 외에 다른 식물들도 채집했는
데, 그 식물들을 그저 잡초라고만 생각한 중국인 짐꾼들에게 운반하라고 설득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
다. 그는 멋진 당종려를 발견하고 영국에 있는 식물학자인 조지프 돌턴 후커(Joseph Dalton Hooker,
1817~1911)에게 보내기도 했다. 찰스 다윈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후커는 당종려를 카마이롭스 엑
스켈사(Chamaerops excelsa)라고 명명했다. 그러다가 당종려가 다른 속으로 분류되면서 트라키카르푸
스 포르투네이(Trachycarpus fortunei)로 다시 명명되었다(어려운 학명 때문에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정
확성을 따지는 꼼꼼한 독자들에게는 필요한 정보일 것이다. 식물학자들은 라틴어 학명에 엄격하다).
포춘은 한 여인숙 마당에서 멋들어진 측백나무를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벽을 타고 올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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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나무 열매를 따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렀다. 영국 스파이 포춘은 신사답게 행동하며 식물 사냥꾼의
충동을 자제할 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족인양 행세한 사실을 들키지 않아야했다.
그는 아름다운 매자나무를 보고도 황홀해했다. 이후에 그는 유럽에 매자나무를 들여왔다.
포춘은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열심히 일했다. 1848년에 인도로 처음 차를 보냈는데, 운송 도중에 차가
거의 썩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더 좋은 운송 방법을 알아냈다. 휴대용 미니 온실이라고 할 수 있는 '
워드의 상자'에 종자를 보관하는 것이었다. 3년 뒤에 포춘은 임무를 완수했다. 차나무 2만 그루가 목적
지에 도착해서 인도의 산자락에 심어졌다. 게다가 나무만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포춘은 차나무 재배
와 차 제조를 잘 아는 일꾼들도 데려왔다.
오늘날 차가 누리는 인기는 부정할 수 없다. 세계에서 물 다음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음료가 바로
차이다. 맥주나 커피보다 앞선다. 사람들이 프랑스 와인보다 차를 더 많이 마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예전처럼 차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의 차가 인도에서 재배된 고급품질
의 차라면 만리장성 너머 먼 나라에서 온 귀족 행세를 했던 식물학자 스파이를 떠올릴 수 있을까?

사략선 선장이 칠레에서 구해 온 흐벅진 열매
세상을 바꾼 식물을 거론하지 않고 이 책을 쓴다는 것은 아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은 식도
락가들의 세상을 바꾼 것이지만……. 이 식물이 없었다면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향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디저트에는 가장 중요한 재료가 빠질 것이고, 우리의 삶은 무미건조해질 것이다. 그
식물은 바로 딸기다. 딸기잼, 딸기 타르트, 딸기 아이스크림이 빠진 삶을 상상해 보라! 얇게 썬 딸기
위에 칠면조의 고환을 올린 요리법도 있다고 하지만 이쯤에서 멈추자.
딸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딸기를 들여다보기 전에 딸기의 학명은 프라가리아
(Fragaria)이고 장미과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두자. 딸기는 볼록한 모양의 꽃받침, 5개로 갈라진 엽신,
측면으로 자란 암술대, 1개의 암술머리, 이실의 꽃밥, 세로 열개 등이 특징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앗, 너무 어려웠나?
더 쉬운 설명을 원한다면 프랑수아 로지에(Fran ois Rozier, 1734~1793)가 1796년에 발표한 『식물학
기본 설명서 (D mons trations

l mentaires de botanique)』를 읽으면 된다. 이 책에는 '딸기는 거의

모든 백성에게 이로운 식품이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 어찌 기쁜 소식이 아니겠는가! 비싼 가리게트
품종의 딸기 한 팩에 눈이 멀었다면 딸기가 얼마나 몸에 좋은지 생각하고 욕구를 충족시켜라. 칼 폰
린네도 딸기를 많이 먹어서 통풍 재발을 막았다고 한다. 로지에는 딸기가 신장산통에도 좋다고 적었
다.
사부아 출신의 스파이: 토실하고 맛있는 딸기의 모험은 아메데 프랑수아 프레지에(Am d e-Fran ois
Fr zier, 1682 1773)라는 프랑스의 특출난 탐험가의 모험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어로 딸기를 프래즈
(fraise)라고 하는데, 이와 발음이 비슷한 프레지에(Fr zier)가 탐험가의 이름인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
이다.
그래도 프레지에의 이름과 딸기가 관련이 있는 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그의 먼 조상인 쥘리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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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드 베리가 916년에 프랑스의 국왕 샤를 3세의 연회가 끝날 무렵 산딸기로 만든 요리를 내놓은 공으로
프래즈라는 이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래즈는 나중에 영국으로 건너가 ‘프레이저(Fraze)'가 되었고,
그 가문의 후손이 16세기 말에 프랑스 사부아 지역에 정착하면서 다시 프레지에가 되었다.
우리의 모험가 아메데 프랑수아 프레지에는 1682년에 사부아 지역의 샹베리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이미 산딸기를 먹고 있었다. 산딸기(Fragaria vesca)는 야생 딸기 또는 일반 딸기로 불렸고,
유럽과 북아메리카, 아시아의 온대 지역이 원산지이다. 산딸기 재배가 최초로 기록된 것은 14세기의
일이다. 1368년에 1만 2,000그루가 루브르궁 정원에 심어졌다. 그전까지는 숲에서 야생 딸기를 따먹
었다. 딸기를 무척 좋아했던 루이 14세에게 어의는 딸기를 먹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한다면 하는 성
격이었던 루이 14세는 어의의 충고를 무시하고 걸신들린 듯 딸기를 먹었다.
16세기에는 독일과 벨기에에서 야생 딸기를 대체 할 수 있는 사향 딸기(Fragaria moschata)가 등장했
다. 가리게트보다 모양은 예쁘지 않지만 더 크고 향도 더 짙다. 과일도 사람처럼 아름다움이 내면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물론 사향 딸기에만 해당하는 얘기니 이쯤에서 넘어가자. 16세기
말이 되자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가 북아메리카에서 버지니아 딸기(Fragaria virginiana)를 들
여왔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우리의 탐험가 영웅 프레지에에게 이른다. 프레지에의 아버지는 지금으로 치면
검사라고 할 수 있는 왕의 대관이었고, 그도 아버지처럼 법조계로 진출하려 했다. 하지만 법학은 지루
하기만 했고, 천문학과 지리학이 훨씬 재미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건축을 공부하기도 했고, 의학
이나 신학을 배워 과학자가 될까도 했다. 결국 그는 군대를 선택했고 공병 장교가 되었다. 그의 우상
은 요새 설계의 천재였던 세바스티앵 르 프르스트르 드 보방이었다. 이후 프레지에는 생 말로에서 도
시 확장 사업에 참여했다.
1711년에는 모험을 꿈꾸었던 그에게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에스파냐의 요새화된 항구 도
시들을 비밀리에 연구하기 위해 칠레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포춘에 이어 또 한 명의 스파이라니! 프레
지에도 칠레의 천연자원, 지도, 풍습 등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가져오라는 임무를 받았다.
1712년 1월 6일, 프레지에는 마침내 생 말로에서 칠레를 향해 출항했다. 먼 바다 여행길은 순탄치 않
았다. 프레지에의 선원들은 다른 배가 침몰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하룻밤 만에 배는 산산조각이 났고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사략선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위험 속에서 그의 여행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몇 달 동안 다른 배들을 피해 운항 중이던 배는 출항 5개월 뒤인 1712년 6월 16일에 칠레의
콘셉시온에 도착했다. 자연학자로 변신한 하록 선장 같았던 프레지에는 현지 지도자와 친분을 맺었고
현지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칠레 딸기의 발견: 프레지에의 여행기 초반부에는 그가 얼마나 탐험과 발견에 빠져 있는지 나와 있다.
“우리가 당연히 감탄해 마지않는 우주의 구조는 늘 내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지식을
넓힐 수 있는 모든 것을 좋아했다. 나는 지구의나 천체의, 지도, 여행기들에 빠져들고는 했다.”
프레지에는 여행기에서 언제나 기력을 북돋워 주는 덩이식물을 언급한다. 그는 대자연이 이 식물을 만
든 것은 잘한 일이라고 말한다. “콘셉시온 부근에 사는 칠레 원주민들의 양식인 '파파'는 맛이 밋밋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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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감자, 즉 돼지감자 (taupinambou)r이다.” 이로써 프레지에는 '감자'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돼지감자를 뜻하는 ‘topinambour’를 ‘taupinambour’라고 적었는데 아직 프랑스어 철자법
이 정해지지 않은 때였으니 그의 실수를 용서하자. 하지만 그가 감자와 돼지감자를 혼동한 것은 용서
가 안 된다. 감자는 감자속(Solanum)에 속하고, 돼지감자는 해바라기속(Helianthus)에 속하는 것을 모
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있다고? 저런!
아무튼 기적의 덩이식물 이야기에서 프레지에는 친구인 앙투안 파르망티에(Antoine Parmentier)를 앞섰
다. 파르망티에는 감자와 고기로 만든 그라탱 요리 아시 파르망티에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프레
지에보다 유명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파르망티에는 대기근이 들었을 때 감자로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프레지에는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딸기는 맛있으라고 먹는 과일이니까 말이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프레지에에게 성공을 안겨다 준 식물은 딸기였다. 그가 처음 딸기를 봤
을 때의 반응은 딸기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었다. 빈약한 프랑스 딸기에 비하면 말이다. 프레지에는
칠레의 딸기가 “달걀만큼 크고 호두만큼 탐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잎은 둥글고 더 두꺼우며 털이 많
다.”고 묘사했고, 열매는 “희멀건 붉은색이고 맛은 프랑스의 야생 딸기보다 조금 떨어진다.”고 평가했
다.
남아메리카에 도착한 지 2년이 지날 무렵 그의 임무는 방해를 받게 되었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임무가 종료되는 바람에 프레지에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그때부터 그는 밀수업자로 취
급되었다. 그는 딸기나무 몇 그루를 가지고 프랑스로 귀국길에 올랐다. 뱃길은 6개월이나 걸렸다. 안
타깝게도 딸기나무는 대부분 죽어버렸고 겨우 5그루만 남았다. 그는 3그루를 왕의 정원을 돌보던 식물
학자 앙투안 드 쥐시외(Antoine de Jussieu)에게 보냈고, 나머지는 브레스트의 요새 담당관과 자신이
각각 보관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프레지에는 튼튼한 나무를 고른다고 골랐지만 수술이 없어 혼
자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암나무만 골라 가져온 것이다. 이를 어쩌나...….
딸기의 결혼: 이 이야기는 (우리의 혀에는) 비극이 될 수 있지만 아무튼 좋은 면도 있다. 새로 들여온
칠레의 딸기는 버지니아 딸기와 결혼했고 (교배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흔히 먹는 양딸기(Fragaria
xananassa)를 낳았다. 칠레 딸기처럼 크고 버지니아 딸기처럼 맛있는 딸기가 탄생한 것이다. 거꾸로였
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콩알만 한데 맛도 없는 딸기라니! 아나나사(ananassa)라고 해서 파인애플과
교배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딸기의 학명은 가벼운 파인애플의 향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양딸기는 최초의 딸기 교배종이다. 아마 가까이 심은 딸기나무들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교배가 이루어
진 것 같다. 양딸기의 학명을 지은 사람은 양딸기를 심고 연구하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맛있게 먹는 즐
거움까지 누렸던 앙투안 니콜라 뒤셴(Antoine Nicolas Duchesne, 1747~1827)이다. 뒤셴이 직접 교배
를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확인이 불가능하다. 아무튼 뭣이 중한가!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 것을.
뒤셴은 겨우 열아홉 살이었던 1766년에 흥미로운 주제 덕분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었을 책 『딸기
의 박물학 (Histoire naturelle des fraisiers)』을 발표했다. 베르사유궁의 채소밭을 담당했던 그는 사부아
의 스파이 프레지에가 가져온 딸기를 정성껏 돌보았다. 11권으로 발간된 《딸기의 박물학》에도 나와 있
듯이 그것은 단순히 정원사의 열정이 아니었다. 뒤셴은 베르나르 드 쥐시외의 제자인 과학사학자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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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었고, 《호박의 박물학에 관한 시론(Essai sur histoire naturelle des courges)》을 발표했다. 또한 그는 분
류 체계에 혼동이 있었던 여러 딸기의 명칭을 정리했다. 예를 들어 ‘초록 딸기’는 사향 딸기, 프라가
리아 비리디스, 버지니아 딸기를 모두 가리킨다.
보다시피 딸기와 박과 식물의 애호가였던 뒤셴은 호미와 괭이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그는 칼 폰 린네
와 과학적인 논쟁까지 벌였다. 위대한 찰스 다윈의 선구자였던 뒤셴은 딸기의 생식을 관찰한 뒤에 종
의 불변성을 의심했다. 식물에 암수의 구분이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은 자명하게 받아들여지지만 뒤셴
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식물의 생식기를 분류했던 린네도 식물에 암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받아
들였지만 식물 생식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린네와 토론을 벌인 것은 뒤셴이 베르사유궁
의 채소밭에서 소엽이 1개뿐인 딸기나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딸기의 소엽은 3개이다.
뒤셴은 《딸기의 박물학》에 자신이 품었던 의문을 적었다. “그때 나는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독립적인 종인가? 그러니까 새로운 종이 나온 것이다. 아니면 변종일 뿐일까? 그렇
다면 다른 속에서는 종으로 간주한 변종들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오랫동안 궁지에 빠져 있었다(…)
고정관념에서 고쳐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이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에 동일
한 용어를 사용해서 혼동이 일어났다.”
뒤셴이 얼마나 적절한 생각을 했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몇 줄 더 읽어 내려가면 린네도 소름이 돋을
정도의 혁명적인 문장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서 종의 불변하는 고정된 특징들을 계속 변하는 작은 차
이들과 구분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내야 한다. 어떤 종의 불변성과 어떤 종의 변이성에 관
해서 말이다.”
뒤셴은 겨우 열아홉 살에 이미 선견지명이 있었다(이때가 계몽시대의 정점이었음을 상기하자). 그는
종이 반드시 불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선구자였다. 뒤셴은 린네에게 표본을 보냈고, 린네는 이
를 잎이 1개인 새로운 종으로 보고 프라가리아 모노필라(Fragaria monophylla)라고 명명했다. 위대한
자연학자였던 린네가 작은 실수를 했다는 점은 당연히 용서해야 할 것이다. 한편 그는 젊은 뒤셴을 입
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600여 개에 이르는 교배종: 남태평양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던 프레지에는 프랑스로 돌아와 루이 14세
의 축하와 약소한 상여금을 받았다. 그후 프레지에는 1719년에 엔지니어 자격으로 산토도밍고에 갔고,
그 이후에는 독일에 들렀다가 1740년에 브르타뉴 지방에 돌아와 요새 담당관이 되었다. 은퇴 후에는
플루가스텔에 정착해서 신조어들이 가득한 건축학 관련 책을 집필했다. 그는 식물학자인 루이 피예
(Louis Feuill e,1660~1732)와도 사이가 틀어졌다. 프레지에가 피예보다 뛰어난 엔지니어였지만 식물
학자로서는 그보다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각자 소질이 다르니까.
피예가 프레지에를 공격한 동기는 질투심이었다. 프레지에의 여행기가 자기 책보다 더 많이 팔린다는
이유였다. 또한 칠레에 처음 간 사람은 피예 자신이었는데 딸기나무를 가지고 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피예는 프레지에가 조사한 경도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했다. 프레지에와 피예
같은 사람들이 싸우면 말다툼이 대선 후보 토론 수준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피예는 자신의 한
저서에서 프레지에에게 멋지게 한방 먹였다. 40쪽에 가까운 길고 긴 서문에서 프레지에를 신나게 두들
겨 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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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프레지에는 아흔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로는 장수를 누린 셈이다. 딸기는 플루가스텔의 성공
아이템이 되었고, 런던에 수출된 뒤에는 영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탐스런 과일 딸기의 모
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딸기는 여전히 시장을 점령하고 있다. 딸기의 점령은 클론의 습격이라고 할
수 있다. 딸기나무의 주요 생식 방법이 기는줄기를 많이 만드는 무성 생식이기 때문에 클론이 나오는
것이다.
현재 딸기나무는 20여 종이 있고, 변종의 수는 600여 개에 이른다. 변종의 이름은 하나같이 독특하다.
‘시플로레트’나 ‘파베트’처럼 귀여운 이름도 있고, ‘계곡의 여왕’처럼 우아한 이름, ‘마에스트로’ 처럼 화
려한 이름도 있다. 옛 변종들은 '에리카르 드 튀리 자작부인'처럼 귀족 이름을 가졌다. 디저트로 적격
인 이름 아닐까? “식사는 ‘에리카르 드 튀리 자작부인’ 몇 점을 맛보는 것으로 끝내겠습니다.” 얼마나
멋지게 들릴지는 듣지 않아도 알 만하다. 개량된 ‘사계’라는 딸기도 있다. 비발디의 《사계》보다 낫지
않나! 프레지에가 발견한 칠레산 흰 딸기는 300년 뒤에 우리에게 다시 찾아왔다. 몇몇 열정에 찬 농부
들이 2003년에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흰 딸기를 개량한 것이다. 요즘 파인베리(파인애플과 유사한 향
이 나는 흰색 딸기)는 사람들에게 다시 사랑받고 있다. 비싸지만 희귀하니 말이다. 빨간 딸기만 보다가
파인베리를 보고 유전자 조작을 해서 하얘진 게 아닐까 생각한 사람들은 안심하시길. 칠레의 옛 흰 딸
기가 컴백한 것뿐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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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여행한 식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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