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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스타트업 CEO 에디슨

by Casey,Riley 202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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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시대를 앞선 융합형 인재이자 혁신적 기업가인 에디슨을 스타트업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저자
들은 에디슨이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라 당시 주류였던 가스 산업을 무너뜨리며 전기 산업이라는 새 산
업을 창조한 혁신적 기업가이며, 그의 업적은 소리(축음기), 빛(백열전구), 시각(영사기)의 세계를 개척
한 것뿐만 아니라, 기업연구소와 혁신을 추구하는 실리콘밸리 문화를 일으킨 것이라고 역설한다.

스타트업 CEO, 에디슨

▣ Short Summary
지금 우리는 ‘창조적 파괴’, ‘벤처기업’, ‘스타트업’ 등으로 대표되는 혁신의 시대를 살고 있고, 그래서
기업가 정신을 깊이 새겨줄 롤 모델 또한 절실하다. 그런데 이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에디슨이
라 할 수 있다. 에디슨은 늘 파산 가능성을 안고 살면서도 뛰어난 인재 영입, 기존 발명에 관한 특허
조사, 끊임없는 실험 등을 통해 실패와 위기를 극복했다. 에디슨이 추구한 이런 방식은 기업의 규모가
크든 작든 오늘날 기업의 세계에도 여전히 적용 가능한 부분이 많다.
이 책은 시대를 앞선 융합형 인재이자 혁신적 기업가인 에디슨을 스타트업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저자
들은 에디슨이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라 당시 주류였던 가스 산업을 무너뜨리며 전기 산업이라는 새 산
업을 창조한 혁신적 기업가이며, 그의 업적은 소리(축음기), 빛(백열전구), 시각(영사기)의 세계를 개척
한 것뿐만 아니라, 기업연구소와 혁신을 추구하는 실리콘밸리 문화를 일으킨 것이라고 역설한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전 세계에서 일고 있는 에디슨 붐을 소개하면서, 단순한 발명가
아니라 기업가와 혁신가로서의 에디슨 삶을 재조명한다. 2부에서는 에디슨의 삶을 ‘에디슨’이라는 일종
의 브랜드 탄생 과정으로 보고, 그 과정에서 눈에 띄지 않지만 막대한 역할을 했던 에디슨 주변의 사
람들과 멘로파크 연구소 등을 소개한다. 3부에서는 원대한 꿈을 가진 에디슨이 빛의 제국인 전기의 세
계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고, 벤처 제국이라 할 만한 기업을 일으키는 과정을 소개한다.

▣ 차례
추천의 글
프롤로그 - 다시 에디슨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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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CEO, 에디슨

1부 부활하는 에디슨
01. 에디슨은 누구인가: 발명가에서 기업가, 그리고 혁신가로
02. 포드가 만난 에디슨
03. 산업의 왕들과 발명의 황금시대
04. 실리콘밸리의 에디슨 스피릿
2부 ‘에디슨’ 브랜드의 탄생
01. 독서광 에디슨을 만든 어머니
02. 사랑의 파트너십
03. 떠돌이 전신기사로 보낸 젊은 시절
04. 보스턴에서, 고난의 행군
05. 발명가를 넘어 경영자로 발돋움하다
06. 전화기 발명 경쟁
07. 마법사, 에디슨
08. 멘로파크 연구소, 실리콘밸리의 기원
3부 빛의 제국, 벤처제국
01. 19세기 최대의 블루칩
02. 에디슨의 필라멘트 실험
03. 백열전구 발명을 넘어 램프 공장을 짓다
04. 역사적 대전환, 전기 시스템의 창조
05. 겁쟁이 투자자들
06. 에디슨의 벤처제국 건설
07. 전기 시대의 개막: “나는 약속한 것을 모두 해냈습니다”
08. 웨스트오렌지 연구소, 미래의 산업을 위한 전초기지
에필로그 - 미국 사회의 에디슨 스피릿
부록 - ‘에디슨 DNA’를 가진 우리 기업과 연구소
감사의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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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CEO, 에디슨

스타트업 CEO, 에디슨
부활하는 에디슨
에디슨은 누구인가 - 발명가에서 기업가, 그리고 혁신가로
남들보다 일찍 세상으로 나가다: 에디슨은 1847년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호
기심이 지나치게 많았고, 학습부진아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평준화된 공교육의 문제점
을 간파하고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좋은 책을 읽히며 직접 교육했고, 또 에디슨
스스로 유용한 책을 골라낼 수 있도록 독서법을 가르쳤다. 그런 어머니의 지도 덕분에 에디슨은 독서
의 세계에 빠졌고, 문학, 역사, 과학 등 폭넓은 지식을 섭렵했으며, 책을 통해 더 큰 세상을 보았다.
12세가 된 에디슨은 가난한 살림을 돕고자 남들보다 일찍 세상으로 나갔다. 13세 때부터는 신문팔이를
하고 기차역에서 과자를 팔며 사업 감각을 익혔다. 그런 어느 날 기차 안에서 신문을 팔던 그는 기차
의 화물칸을 빌려 화학 실험을 하다가 화재 사고가 발생해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다행스럽게도 그의 주변에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는 인연이 있었다.
에디슨은 우연히 기차역장의 아들을 구해준 덕분에 그에게 전신 업무를 배웠는데, 그 시절의 전신 기
술은 새로운 트렌드였다. 오늘날로 치면 인공지능에 비유할 정도의 기술이었다. 전신 기술의 기초를
배운 에디슨은 미국 중서부 지역을 방랑하며 전신 현장에서 차근차근 경험을 쌓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신기사 중 최고 베테랑만 맡을 수 있는 업무인 뉴스를 다루는 ‘전신기사’ 자리까지 올라갔다.
에디슨은 1864년부터 1868년까지 약 4년 동안 전신기사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매사추세츠 보스턴
에 자리를 잡았고, 1868년 에디슨은 잘나가던 보스턴의 ‘웨스턴 유니온’이라는 전보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웨스턴 유니온은 오늘날의 구글이나 애플처럼 대기업으로 빠르게 성장 중인 기업이었다. 하지
만 원대한 꿈을 품은 에디슨은 직업발명가의 길을 선택했다. 에디슨의 첫 발명품은 1868년에 완성되
었는데, 국회의원들을 위한 ‘전기투표기록기’였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새로운 기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에디슨의 첫 번째 발명품 사업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발명가’ 에디슨은 이런 식으로 그 후로
도 몇 차례 실패를 거듭했다. 결국 파산에 이른 에디슨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뉴욕으로 이주해 길거리
를 헤매다가 우연히 일자리를 만났다. 그러나 그 일자리도 오래가지 못하고 해고를 당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869년 마침내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특허를 매각하며 처음으로 5,000
달러를 벌었다. 월급 100달러로 살아가던 그에게 이 돈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를 종잣돈 삼아 연구
를 거듭했고 그 결과물로 또 특허를 냈으며, 이것을 5만 달러에 웨스턴 유니온 사에 매각했다. 그리고
그 매각 대금으로 연구와 생산 시설을 갖춘 회사를 뉴저지주의 산업도시 뉴어크에 설립했다.
뉴어크는 당시 기계 산업이 발달했던 지역으로 독일ㆍ스위스ㆍ영국 출신의 실력 좋은 기술자가 많았다.
에디슨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모았고, 전신기사로 일하면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
하여 전신 기술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그렇게 하여 1875년에 한 번에 네 개의 전신 메시지를 보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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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CEO, 에디슨

수 있는 발명, 즉 ‘사중전신기’를 발명했고, 이 특허를 3만 달러에 매각했다. 참고로 이 특허는 훗날
전신 산업의 창시자 새뮤얼 모스의 전신기 발명 다음으로 중요한 발명으로 평가받게 되며, 그 가치는
당시 가치로 1,000만 달러(오늘날 가치로 2억 2,6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이었다.
‘전기 제국’의 제왕: 1876년 에디슨은 연구와 제조를 겸하는 부산한 기업가의 삶을 관두고 일대 전환을
시도한다. 뉴욕과 그리 멀지 않은 한적한 시골 마을 멘로파크에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소를 설립한 것
이다. 당시 언론은 이 연구소를 ‘발명공장’이라 불렀다. 에디슨은 이곳에서 ‘전화기 개량’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전화기의 최초 발명자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다. 하지만 그의 전화기는
완벽하지 않아서 소리가 잘 안 들렸다. 에디슨은 벨이 만든 전화기를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진짜 전
화기로 개량했고, 이 전화기 개량 특허 또한 웨스턴 유니온 사에 매각했다.
에디슨은 언제 어디서나 발명을 했으며, 여러 가지 발명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전화기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축음기’ 아이디어를 떠올린 에디슨은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전기’ 못지
않게 생애 최고의 발명을 완성한다. 축음기 발명으로 에디슨은 미국과 유럽에서 명성을 얻고 미국의
‘국민 영웅’이 되었다. 드디어 미국 사람들도 에디슨이라는 존재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1878년 여름, 미국 서부에서 개기일식을 관찰하고 돌아온 에디슨은 ‘전기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이때부터 ‘전기’에 관심을 갖게 된 에디슨은 멘로파크 연구소 동료들과 함께 ‘백열전구’
개발에 온 열정을 쏟는다.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영입해 연구에 힘쓸 뿐 아니라, 이 거대한 개발 프로
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월가의 투자자들을 설득한다. 그리하여 2년간 39만 5,000달러가 투자되었고,
1879년 12월에 에디슨은 40시간 동안 꺼지지 않는 빛을 내는 백열전구를 대중 앞에 선보였다. 그리고
1881년부터 에디슨은 전기 산업을 태동시키기 위해 발전소, 발전기, 전선, 전구, 전기 소켓 등을 제조
하는 관련 기업을 연이어 설립하며 벤처 기업가의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1882년 가을, 뉴욕 맨해튼에
전기 공급용 발전소를 완공함으로써 진정한 전기 시대를 열게 된다.
에디슨의 전기는 획기적이었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전기의 안전성 확
보를 위한 발명을 계속했고, ‘전기가 안전한 것’이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전기
를 지하에 묻어 눈에 보이지 않도록 했으며, 전기 램프를 활용해 길거리 홍보를 펼쳤다. 그런데 전기
가 안전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자 그대로 모방하는 기업도 생겨났다. 에디슨은 이들 후발 기업을 상
대로 다수의 특허 소송을 제기했고, 후발 기업들은 그들대로 에디슨의 특허를 무효화하고자 했다.
10여 개의 후발 기업 중 대표 주자가 ‘웨스팅하우스 전기’다. 이 회사는 에디슨이 개발한 직류의 약점
을 파고들면서 에디슨의 아성을 무너뜨리려 했다. 에디슨과의 특허 소송에서 궁지에 몰린 웨스팅하우
스는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와 손잡고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에 도전장을 내민다. 인류 최초의 표
준전쟁은 그렇게 포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 표준전쟁에서 에디슨은 실패한다.
‘교류 전기는 위험한 것’이라는 인식을 세간에 퍼뜨리기 위해 전기충격을 이용한 동물생체실험, 전기를
이용한 사형 집행 제안 등 끔찍한 일까지 감행했으나, 그런 극단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교류가 전
기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 후 에디슨의 전기 회사 및 계열사들은 오늘날의 제너럴 일렉트릭
(GE)으로 통합되었으며, 10여 년에 걸친 특허 소송도 종결되었다. 웨스팅하우스와 GE는 특허권을 맞
교환하면서 미국의 산업을 2강 구도로 재편했고, 특히 소송에 패배한 후발 경쟁회사들은 시장에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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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CEO, 에디슨

라지는 운명을 맞는다. 물론 에디슨은 GE의 출범과 함께 그 회사의 주식과 현금 수당, 그리고 이사직
을 제안 받았다. 하지만 그는 GE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실리콘밸리 문화’의 아버지: 전기 산업에서 승승장구하며 전성기를 누리던 1887년, 에디슨은 운영하
고 있던 멘로파크 연구소보다 10배나 규모가 큰 연구소를 뉴욕 외곽 웨스트오렌지에 설립했다. 에디슨
은 최신 시설과 장비를 갖추기 위해 당시 금액으로 18만 달러(현재 금액으로 490만 달러)를 투자했다.
에디슨은 웨스트오렌지 연구소에서 축음기 개량과 사업화, 영사기 발명과 영화 시장 진출, 철광석 사
업 등을 추진했다. 참고로 그는 전기 사업에서 물러난 이후 철광석 산업에 200만 달러를 투자하였으나
수익을 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철광석 사업 과정에서 채취한 광물에서 쓸모없거나 가치가 낮은
것을 골라내는 선광 기술을 시멘트 생산 공정에 적용하여 그나마 일부 투자금을 회수했다.
에디슨은 1891년에 영사기를 최초로 발명하여 대중 앞에 선보였다. 그리고 1918년 에디슨은 음향ㆍ영
상 산업을 성공시키며 철광석 산업의 실패를 만회했다. 하지만 콘텐츠는 경시하고 기술에만 치중한 탓
에 그의 멀티미디어 사업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편 에디슨은 배터리와 시멘트의 발명 및 사업화에
도 도전하여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는데, 이 과정에서 ‘에디슨 제조’, ‘에디슨 배터리’, ‘에디슨 시멘트’
등의 회사를 설립하였고, 이들 기업과 공장이 웨스트오렌지 연구소의 부속 기관으로 확장되면서 자연
스럽게 그 주변에 대규모 산업단지가 형성되었다. 1차 대전(1914~1918) 기간 동안 에디슨의 웨스트오
렌지 연구소와 부속 공장에서는 1만 명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으며, 주변 산업단지의 일자리는 4만
개에 이르렀다. 에디슨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1931년까지 1,093개의 미국 특허를 취득했다. 전기조명
및 전력에 관한 특허 389건, 축음기에 관한 특허 195건, 통신에 관한 특허 150건 등이었다.
정리해 보면, 에디슨은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가로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발명 활동에 몰두하였으
며, 동시에 특허제도를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을 펼쳤다. 당시 어떤 기자가 에디슨에게 당신의 최대 발
명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백열등 전력 시스템”이라고 대답했듯, 에디슨의 발명 활동 중 백열전구의
발명과 전력 시스템 연구는 그의 발명 건수에서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요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에디슨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어쩔 수 없이 그도 연구실에서 멀어져야 했고,
1931년 10월 18일, 여든네 살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미국이 ‘개발도상국’으로 취급받던 그 시절, 에디슨은 단순히 발명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발명을
제품화하는 사람, 즉 기업가가 되고자 했다. 그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에디슨은 현대적 개념의 ‘연구
소’를 창시했으며, 혁신에 대한 강력한 보상을 통해 더 나은 발명과 산업화를 이끌어냄으로써 오늘날
의 ‘실리콘밸리’ 문화를 태동시켰다. 백 년 전을 살아간 혁신가로서 그가 겪은 어려움은 오늘날 우리가,
그리고 창업의 꿈을 꾸는 기업가가 직면한 고민과 다르지 않다. 어떤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가. 어떻게
제품을 디자인하고 제조해야 하는가. 어떻게 연구개발비를 조달해야 하는가. 어떻게 변화하는 시장에
대응하고 경쟁기업과 맞서야 하는가. 신제품을 소비자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는가. 혁신가 에디슨의 삶
이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에디슨을 혁신가로서 우러르는 것은 그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한 발 한 발 전진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에디슨을
통해 실패를 용인하고 혁신을 장려하며 도전을 격려하는 문화를 익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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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CEO, 에디슨

‘에디슨’ 브랜드의 탄생
멘로파크 연구소, 실리콘밸리의 기원
멘로파크 연구소를 만든 핵심인재들: 에디슨은 평생 동안 1,093개의 특허를 보유했는데, 그중 약 600
여 건을 멘로파크 연구소에서 확보했다. 에디슨은 멘로파크에서 전화기 개량(말하는 전신기), 축음기,
백열전등, 전력전송 방법 등을 발명했다. 에디슨이 멘로파크 연구소에서 이뤄낸 가장 큰 업적은 역시
나 ‘전기 산업의 창조’라 할 수 있다. 그는 이곳에서 백열전구 필라멘트를 비롯해 전기 산업에 필요한
시스템을 창조해냈다. 이곳에서 에디슨이 놀라운 창조와 혁신의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유능한
동료들이 그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멘로파크 연구소에는 유럽에서 온 기능공, 특히 독일 출신이 많았
다. 이들은 도구 제작, 기계 조작, 기계 설계 방면에서 탁월함을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인 기계 조작 전문가 지크문트 베르크만은 독일에서 온 이민자로, 영어를 거의 못했으나
최고의 기술자였다. 하루는 연구소의 한 직원이 에디슨에게 베르크만이 영어를 못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며 그와는 일을 못하겠다고 했지만, 에디슨은 베르크만의 결과물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며 그를
품었다. 훗날 베르크만은 전화기 개량 사업에서 에디슨의 공동 발명자로서 큰 공헌을 하는 한편, 에디
슨이 전기 산업에 뛰어들 때 벤처기업 설립에 동참하며 에디슨의 숨은 조력자 중 한 사람이 된다.
이처럼 에디슨은 능력 있는 인재들을 곁에 둠으로써 자신의 ‘원대한 꿈’을 차근차근 실현해나갔다. 찰
스 배철러는 그런 인재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에디슨의 오른팔이자 놀이 친구이기도 했다. 배철러
는 영국 맨체스터의 복잡한 방직 기계를 다룬 경험을 가진 직공 출신으로 꼼꼼하고 참을성이 많아 에
디슨의 성급한 성격을 잘 보완해주었다. 또한 숙련된 제도공이기도 해서 에디슨의 다듬어지지 않은 아
이디어나 막연한 생각을 구체적인 설계로 바꾸어주었다. 예리한 시각을 가졌으며 손재주가 좋고 실험
을 이끌어가는 능력과 안목이 좋았다. 에디슨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제나 배철러였다.
존 크루에시는 스위스 출신으로 방직 기계와 자물쇠 제작, 기계 운전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자
였다. 그는 당시 잘나가던 기업 ‘싱거 재봉틀’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입사 제안을 받고도 ‘뉴어크의 유
망한 발명가 에디슨’을 선택했다. 그 역시 뉴어크 시절부터 에디슨과 운명을 같이했으며, 멘로파크에서
는 기계제작소를 담당했는데, 멘로파크 연구소의 기계제작소는 실험에 필요한 도구와 기계를 제작하는
곳이었다. 그런 점에서 크루에시의 역할은 매우 컸다. 그도 배철러처럼 에디슨의 암호 같은 스케치와
업무 지시를 조수들이 실행으로 옮길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완벽한 도면과 디자인으로 바꾸어놓는 능
력자였다. 한마디로 에디슨이 ‘아’하면 ‘어’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계공 존 오트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데, 그는 에디슨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친구로 지냈다. 즉,
50년 동안 에디슨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근무하며 생사고락을 같이한다. 한편 에드워드 존슨은 지금으
로 치자면 영업과 마케팅 전문가다. 1882년 가을 에디슨이 맨해튼의 밤을 백열전구로 밝히자, 존슨은
곧바로 백열전구를 이용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발명하고 뉴욕에서 최초로 시연 행사를 열어 ‘크리스마스
트리의 아버지’로 통하기도 한다. 그리고 축음기가 발명되자 이 놀라운 기기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도
그가 맡았다. 그는 훗날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의 초대 부사장이 된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만 더 이야기해보자면, 프랜시스 업턴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업턴은 배철러와 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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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CEO, 에디슨

에시보다 뒤늦게 멘로파크 연구소에 합류했으나, 에디슨의 대표 업적인 ‘전기 프로젝트’ 분야의 일등공
신이다.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업턴은 에디슨에게 과학지식에 기초해 기술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방
법을 코치했으며, 에디슨과 주변 동료들에게 전기공학의 기본지식(전기저항ㆍ전압ㆍ전류)을 가르쳤다.
또한 전기 프로젝트의 상업적ㆍ경제적 가치를 고려한 전력전송 시스템을 기획하고 그것을 수학으로 이
론화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발전기 개발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에디슨의 곁에는 기술적 배경, 학력, 국적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적어도 멘로파크 연구소에 있는 동안은 에디슨을 향한 충성심이 매우 강했다는 점이
다. 이들은 에디슨과 함께 일하면 원대한 꿈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바로 이런 충성심과 믿
음이야말로 멘로파크 연구소를 생산성 높은 연구소로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에디슨의 젊은이들 / 에디슨의 방식 -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기: 에디슨의 명성을 듣고 야심 찬 청
년들이 계속해서 멘로파크의 문을 두드렸다. 에디슨이 멘로파크로 이주할 당시 연구소 직원은 12명이
었는데, 전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던 1878년 10월에는 30명이 되었다. 그리고 1880년 봄으로 접어들
무렵에는 무려 64명에 이르렀다.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일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연구소 초기에는 거의 모든 발명과 작업을 에디슨이 지휘했다. 연구원 모두가 에디슨에게 물었고, 에
디슨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구체적 해법을 제시했다. 이후 에디슨은 64명의 연구소 직원을 관리하기
위하여 일을 쪼개어 특별 팀을 만들거나 개인 단위로 업무를 배정했다. 에디슨은 이들 팀이나 개인에
게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법을 가르쳐줄 뿐 구체적 해답은 제시하지 않았다. 업무를 맡은 팀은 에디슨
이 제시하는 방침에 따라 연구를 하되 세부 사항은 자율적으로 진행했다. 에디슨의 이런 방식이 연구
소 내부에 축적되면서 점차 직원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해서 해법을 찾아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에디슨은 종종 낚시를 하거나 연구소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주었다. 참고로 멘로파크 연구
소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은 별도의 출퇴근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에디슨은 자유로운 근
무환경을 유지하면서도 실험일지 작성에서는 철저했다. 1880년으로 접어들면서 전구 필라멘트 실험,
진공 펌프 실험 등 프로젝트 단위로 실험일지를 체계적으로 작성하도록 했는데, 이를 위해 여섯 명의
보조직원을 배치했다. 이들은 각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비용, 재료, 사람 등을 주의 깊게 기록했다. 에
디슨은 이런 자료를 활용해 연구 진행 상황에 대하여 전체 윤곽을 잡았다.
젊은 직원들은 멘로파크 연구소를 아주 재미있는 곳으로 여겼다. 에디슨은 그들 젊은 직원들이 입는
옷과 거의 같은 차림이었다. 오늘날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사장이나 직원이나 하나같이 헐렁한 청바지
에 알록달록한 티셔츠를 입는 것처럼 말이다. 연구소 직원들은 열심히 일했다. 한편 에디슨의 연구소
는 산업과 기업 문화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산업 시대 이전의 전통 도제 문화도 남아
있었다. 수동 발전기를 가지고 누가 더 높은 전압을 발생시킬 수 있는지 겨뤄보자며 근육 자랑을 하고,
늦은 밤이면 다 같이 모여 고기와 맥주, 채소, 커피, 디저트 등 정성이 담긴 음식을 즐겼다. 이름하여
‘한밤중의 야식’ 이벤트였다. 야식 시간에 에디슨이 피아노를 치면 직원들은 노래를 불렀다. 과중한 업
무에 시달리는 직원들이 조금이나마 스트레스를 해소하도록 해준 것이었다. 에디슨 본인도 새벽까지
일했다. 그러다 연구소의 아무 곳에서나 입은 옷 그대로 신문지더미 위에서 잠을 청했다.
능력에 따른 보상과 복지 정책: 에디슨은 급여는 다소 인색했으나 성과 보상에는 후했다. 이를테면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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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CEO, 에디슨

철러의 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자신이 발명으로부터 벌어들이는 모든 특허권 수익과 기타
이익의 10퍼센트를 그에게 배분해주었다. 또 전기펜 사업에 공헌한 한 직원에게는 그 사업의 이윤 중
일정 비율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전기 사업에서 공로가 큰 업턴에게도 백열전구 관련 주식 지분의 5퍼
센트를 주었다. 그리고 무급이나 낮은 보수로 시작한 젊은 직원들이 경력을 쌓아 능력을 인정받으면
더 많은 급여와 높은 직급으로 대우를 받았는데, 이들 다수가 나중에 전기 산업의 개척자로 이름을 남
겼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에디슨의 멘로파크 연구소는 오늘날로 보면 기업가 교육센터, 전기공학
엔지니어 양성소, 그리고 벤처기업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멘로파크 연구소에서 일하는 독신 남성이 점점 많아지자 에디슨은 이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자
기숙사 건물도 마련했다. 기숙사 운영은 에디슨의 장인의 의붓딸로 미망인이 된 새라 조던이 맡았는데,
조던 부인이 만들어 내놓은 신선한 채소와 따뜻한 커피를 직원들은 아주 좋아했다. 참고로 19세기 후
반 미국인들에게 주거와 식사 문제는 중요한 것이었는데, 에디슨은 이 두 가지 중요한 당면 문제를 해
결해준 것이다. 또한 에디슨은 자신의 오른팔 배철러와 그의 아내 그리고 두 딸도 멘로파크 연구소 근
처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에디슨의 최측근 중 한 사람으로 막 결혼한 크루에시도 신혼집을
이곳에 차렸다. 멘로파크는 점차 연구와 주거 공간이 어우러진 복합 단지로 변신했다.

빛의 제국, 벤처제국
에디슨의 필라멘트 실험
백열전구 상용화는 고난도 기술을 요했다. 필라멘트, 유리구 제작, 유리구 내부를 진공으로 만들기 등
다양한 기술을 적용해야 했으며, 이 기술들이 적절히 상호 작용을 해야 했다. 또한 백열전구가 완성된
다 하더라도 도시 전체에 불을 밝히려면 그에 알맞게 발전기도 새로 만들어야 했다. 에디슨은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실험을 동시에 추진했다. 그렇지만 그중 백미는 단연 필라멘트 기술이었다. 에
디슨은 특유의 꾸준함으로 실패와 반복을 거치며 한 단계씩 나아갔다.
1878년 9월 중순 에디슨은 전자석과 스위치를 이용하여 전류를 조절하는 장치를 만들면서, 또 한편으
로는 높은 온도에도 녹지 않는 필라멘트 소재를 찾아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융점이 높은 물질로는 오
스뮴, 이리듐, 백금, 팔라듐 등이 있었다. 그런데 필라멘트 제조를 위해서는 융점도 높아야 하지만 가
늘고 길게 잘 늘어나는 성질, 즉 연성도 좋아야 했다. 그래서 에디슨은 백금을 선택했고, 백금 필라멘
트를 이용한 실험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실험이 진행될수록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명확해졌
다. 그래서 백금을 우선순위로 고려하면서도 이리듐, 백금-이리듐 합금 등이 실험되었다.
아크등에서 사용되는 탄소 재료도 주목했다. 9월 말부터는 크롬, 알루미늄, 실리콘, 텅스텐, 몰리브덴,
팔라듐 등으로 실험 대상을 확대했다. 그리고 10월이 되면서 실험 대상은 애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어지고 있었다. 백금 필라멘트의 모양과 전류조절기의 구조를 바꾸고, 실험 장치의 기계 부품, 심지
어 받침대까지 교체했다. 그러나 길고 긴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실험은 나날의 수렁으로 빠져들
었다. 10월 5일 에디슨은 그의 인생 중 전구와 관련된 첫 번째 특허이자, 그의 인생 148번째 특허를
신청했다. 하지만 이 특허 기술이 사용된 필라멘트는 모두 타버리거나 녹아버렸다.
‘특허 조사’, 한 줄기 빛이 되다: 투자자들도 에디슨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로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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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CEO, 에디슨

에디슨에게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백열전구 발명을 시연해야 한다고 했다. 에디슨은 완벽한 백열전구
발명을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며 차일피일 미루었다. 투자자들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그사이
에디슨과 백열전구 발명 경쟁을 하고 있던 윌리엄 소여와 앨본 맨이 에디슨의 투자자를 만나 소여와
맨은 자신들이 상업화할 수 있는 백열전구를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을 듣고 에디슨은 매우 화
가 났지만, 자신이 완성된 백열전구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로리는 에디
슨에게 이사회에서 전구에 관한 최근 특허 동향을 조사해보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
조사를 진행할 사람으로 발전기와 아크 조명 전문가인 월리스와 파머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이 적임
자인지 물었다. 연락을 받자마자 에디슨도 자체적으로 특허 조사에 착수했다.
자신의 전담 변리사에게 백열전구에 관한 모든 특허를 조사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또한 ‘에디슨 전
구 회사’ 이사회 이사 중 한 사람인 G&S의 대표 하워드 R. 버틀러가 주관해 백열전구 특허를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이사회는 에디슨의 의견대로 즉각 조사 작업에 착수했다.
버틀러는 독일 유학파 출신으로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프랜시스 업턴에게 특허 조사를 맡겼다.
11월, 에디슨과 멘로파크 연구소의 직원들은 자신들이 깊은 수렁에 빠졌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고 있었
다.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에디슨은 백열전구에 관한 모든 자료를 조사하는 데 에너지를 쏟
아부었다. 11월 12일 그는 버틀러에게 뉴욕에서 업턴과 만나고 싶다며 문의했다. 특허 등 문헌 조사가
어느 정도나 진척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11월 중순, 막다른 골목에 이른 멘로파크에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업턴이 조사한 특허 내용 중 백열전구 상용화를 위한 단서가 있었다. 11월 22
일 업턴은 에디슨이 알아야 할 특허 번호를 정리하여 제출하면서, 자신의 견해도 덧붙였다.
수학자 업턴의 합류, 발상의 전환: 1878년 가을을 보내면서 에디슨은 백열전구 발명에서 직면한 문제
들은 이전에 축음기, 전화기, 전신기 발명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다. 수백 수천 개의 백열전구에 전기를 공급하기에 기존의 아크등에
서 사용하는 직류 발전기는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 직류 발전기가 제대로 작동한다
하더라도 전기를 먼 거리에 있는 전구까지 전송하려면 새로운 전력 전송 시스템이 필요했다.
또한 전구 개발에 있어, 고온에서도 녹지 않는 필라멘트 소재를 찾는 것도 긴급한 과제였다. 이 어려
운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에디슨은 문제 하나를 붙잡고 있기보다는 시스템 전체를 꿰뚫어보
는 방식으로 구체적 해결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지식을 흡수
하고 현장에서 바로바로 적용해볼 정도로 지식과 역량을 갖춘 인재를 채용하는 것이었다.
에디슨이 이 시기에 채용한 연구원들 상당수는 대학 졸업자였다. 이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앞서도 언급
한 업턴이다. 에디슨은 업턴의 특허 조사, 과학적 지식, 그리고 수학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에디슨
이 업턴에게 멘로파크 연구소 합류를 제안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의 보수를 받는지도 모른 채 승낙
했다. 멘로파크 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한 업턴은 이내 에디슨의 최측근이 되었다. 동료들은 그를 ‘수학
자’라고 불렀다. 업턴과 배철러와 에디슨 세 사람은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일을 했다. 낮
동안은 손님들을 만나야 해서 연구나 실험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어 1879년이 되자 에디슨이 연구에 ‘실패했다’, ‘파산할 것이다’ 등 나쁜 소문이 나돌았다. 이
소문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으나, 업턴이 실험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면서 연구는 다시금 활기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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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CEO, 에디슨

업턴은 초기 3개월 동안은 영국과 미국의 특허 문헌 조사를 통해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고,
에디슨과 동료들에게 ‘옴의 법칙(Ohm's law)’과 ‘줄의 법칙(Joule's law)’ 등 전기의 기본 이론을 가르쳐
주었다. 업턴으로부터 과학 법칙을 체계적으로 학습하면서 에디슨과 연구소 직원들은 당시 여타 발명
가들이 접근하는 방법과는 다른 방향으로 연구를 다시 진행해나갔다. 즉 기존의 발명가들은 전기저항
을 낮추고 전류를 키우는 방식으로, 이를테면 1~2옴(ohm) 정도의 전기저항을 가진 재료 실험을 하고
있었으나, 에디슨의 실험실은 200~300옴의 전기저항을 가진 재료를 사용했다. 한편 전류를 작게 하고
저항을 키움으로써 에디슨의 실험실은 재료로 쓰이는 구리 구입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여 경제적 효과
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에디슨의 연구 방법이 이렇게 바뀌면서 그의 실험실은 전기저항과 전류
등의 측정이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되었다.
멘로파크 연구소를 밝힌 전구 불빛들: 에디슨이 아직 풀지 못한 최대의 난제는 전구의 필라멘트였다.
오랫동안 녹지 않고 불을 밝히는 필라멘트 소재는 에디슨의 백열전구 발명에서 핵심이었다. 그는 필라
멘트의 조건으로 높은 저항 값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후, 기존에 실험해본 이리듐, 백금이리듐 합금 등 희귀 금속을 다시 실험해봤고 또다시 백금을 선택했다. 백금이 다른 금속보다 상대적
으로 융점이 높고 필라멘트로 제조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철러와 업턴 그리고 업턴의
조수 프랜시스 젤 등이 팀을 이루어 실험을 진행했다. 에디슨은 전기저항을 높이기 위해 백금 필라멘
트의 구조를 나선형, 말굽 모양 등으로 바꾸어가면서 실험했다. 그러나 문제는 가격이었다. 업턴이 계
산해본 결과, 백금 필라멘트로 전구를 생산할 경우 전구 가격은 무려 98달러나 되었다.
필라멘트 소재에 대한 발상의 전환과 함께 1879년 10월부터 탄소 소재를 이용한 실험도 재개되었다.
초기에도 탄소 소재로 이용해 실험해보았으나, 전류를 흘리면 너무 쉽게 타버렸던 탓에 일단 배제해두
고 백금 소재로 실험을 했던 터였다. 그러다 다시 탄소 소재에 대한 실험으로 돌아온 것인데, 이는 가
격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유리구 안을 진공으로 만드는 것이 이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구의 필라멘트가 녹아내리지 않고 오랫동안 점등하도록 하려면 유리구를 진공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에디슨은 유리구 제작 및 유리구 내부를 진공으로 만드는 작업을 해줄 진공 펌프 전문가
를 초빙하는 구인광고를 신문에 냈다. 그리고 1879년 1월경 에디슨은 유리구의 진공기술 전문가 루트
비히 뵘을 채용했는데, 이를 보면 에디슨은 특허 조사 과정을 통해 ‘유리구의 진공 조건’이 백열전구를
만드는 데 필수조건이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뵘의 멘로파크 연구소 합류로
진공 유리구 제작이 탄력을 받았다. 이렇게 뵘의 거의 완벽한 진공 유리구 제작과 ‘높은 전기저항’이라
는 발상의 전환으로 필라멘트 실험은 더디기는 해도 조금씩 진전을 보였다.
에디슨과 동료들은 필라멘트 소재를 하나씩 둘씩 바꿔가며 실험을 진행했다. 1879년 10월 21일, 배철
러가 탄화 무명실을 필라멘트로 바꾸어 실험했는데, 전구는 두세 시간 동안 빛났다. 백금을 사용했을
때와 비교할 때 상당히 개선된 것이었다. 이후 배철러는 에디슨이 지켜보는 가운데 탄화 무명실 필라
멘트를 유리구에 설치했고, 22일 오전 1시 30분에 그것을 배터리에 연결했다. 부드러운 백열 빛이 어
두운 실험실을 밝히며 선반에 놓인 병들에 반사되었다. 전등은 밤새도록 밝게 빛났으며 아침까지도 탄
화 무명실 필라멘트는 끊어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지나도 빛을 잃지 않았다. 그날 오후 4시가 되어
서야 유리구가 깨지고 빛이 꺼졌다. 열세 시간 반! 촛불 30개 밝기에 버금가는 빛이었다.
11월 4일 에디슨은 자신의 인생에서 170번째 특허, 그리고 자신을 가장 위대한 발명가로 만들어줄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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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CEO, 에디슨

허를 신청했다. 바로 전구 필라멘트 특허였다. 이 특허는 몇 년 뒤 있을, 19세기의 가장 치열한 특허
소송에서 쟁점이 되기도 한다. 공기를 제거한 진공 유리구 안에서 빛나는 탄화 무명실로 된 필라멘트
가 그 핵심이다. 이후에도 에디슨의 탄화 무명실 필라멘트 실험은 계속되었다. 뵘과 멘로파크 연구진
은 12월까지 진공 펌프 개선 작업에 매달렸다. 12월 말 드디어 그들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뵘
이 주도한 진공 펌프는 유리구 내부를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진공 수준인 100만 분의 1 수준(0.000001)
의 대기압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11월 중순 마분지를 오븐에서 구워 탄화 필라멘트를 만들었다. 부서지기 쉬운 이 탄화 종이 필라멘트
를 전구 회로에 조심스럽게 끼워 맞추고 진공 펌프를 이용해 공기를 전구 바깥으로 빼냈다. 마침내 40
시간 동안 전구는 환한 불을 계속 밝혔다. 에디슨은 탄화 종이 필라멘트가 이렇게 불빛을 낸다면 분명
100시간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후에도 에디슨과 멘로파크 연구진은 더 오랫동안 전깃불을 사용할
수 있는 다른 탄소 필라멘트를 찾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여전히 갈 길은 멀었다. 11월과 12월 내내
멘로파크 연구소 사람들은 분주했다. 이제 이들은 자신만의 전구와 발전기를 갖고 있었다. 늦은 밤 멘
로파크에서 새나오는 전깃불을 보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새로운 빛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뉴욕에서도 소문이 퍼졌고 이내 미국 전역으로 번졌다.
1879년 12월 31일, ‘빛의 제국’을 열다: 백열등의 공개 시연회는 1879년 12월 31일에 이뤄졌다. 그날
은 큰 눈이 내리고 추운 날씨였지만, 3,000명에 이르는 사람이 이른 저녁부터 멘로파크로 몰려들었다.
전국 곳곳에서 온 구경꾼들이었다. 멘로파크라는 지명조차 낯설던 시절, 이 조그만 마을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농민, 노동자, 기차로 온 은행가, 마차를 타고 온 자본가, 말을 타고 온 관광객, 새로운 사업
을 찾아 나선 기업가 등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었다. 해가 완전히 져서 깜깜해졌을 때 사람들은 갑자
기 눈앞에 나타난 빛을 보며 정신이 혼미했다. 눈이 휘둥그레졌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껏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전기’가 만들어낸 빛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추위도 잊은 채 자정
이 넘도록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군중의 외침이 들렸다. “에디슨 만세!”
『뉴욕해럴드』는 에디슨과 멘로파크 연구소 직원들이 백열전구를 소개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에디슨과 그의 조수들은 백열전구를 설명했고 다양한 실험을 즉석에서 보여주었다. (중략) 근엄하고
우아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잘난 체하며 어려운 기술 용어로 떠들어대리라는 기대와 달리, 그들은 쉬운
말로 설명하는, 수수한 옷차림의 보잘것없는 젊은이가 바로 에디슨이라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 12 –

스타트업 CEO, 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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