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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by Casey,Riley 202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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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근대 유럽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생을 프로테스탄티
즘, 특히 칼뱅주의 교리 하에서 금욕과 근로에 힘
쓰는 종교적 생활태도와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근대 사회과학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논쟁
적인 저작 중의 하나이다. 특히 베버의 역사해석
의 문제, 사회학적 인과관계의 문제 등과 관련하
여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막스 베버 지음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 tantis c he Ethik und de r Ge is t des Kapita lis mus )
막스 베버 지음
▣ 저자 막스 베버
독일 에르푸르트 출생.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걸쳐 활동한 사회과학자로서 해박한 지식과 투철한
분석력으로 법학ㆍ정치학ㆍ경제학ㆍ사회학ㆍ종교학ㆍ역사학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또 예리한 현실감각으로 당시 뒤져 있던 독일 사회와 정치를 비판하고, 그 근대화에 힘썼다.
그의 업적은 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가치자유(몰가치성)의
정신과 이념형 조작(操作)이 뒷받침된 사회과학 방법론의 확립, 종교적 이념과 에토스(사회적인 습관)
의 역사 형성력에 입각한 유물사관 비판, 근대 서구세계를 일관해서 흐르는 합리화와 관료제적 지배
의 현대적 의의의 지적 등이다.
베버의 학설은 그 후의 사회과학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으며, 가치자유, 이념형적 파악, 이해적(理解的)
방법에 바탕을 둔 학문론은 독일역사학파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의 행위론이나 관료제론, 종교사회학적 연구는 마르크스이론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극적인 의의를 잃지 않고 있다.

▣ S ho rt S umma ry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의심할 바 없이 근대 사회과학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논쟁적인 저작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1904- 1905년에 걸쳐서 『사회과학과 사회정책 잡지(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에 두 부분으로 된 논문으로 처음 발표되자 곧 비판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여기에 베버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베버는 이 책을, 진지한 학술작업이 불가능했던 대략 4년간의 우울증에서 벗어난 직후인, 자신의 지적
경력의 핵심적인 시기에 썼다. 그는 이 저작에서 자본주의의 기원을 칼뱅주의의 직업윤리에서부터 설
명했다. 계속적인 노동과 소비에 대한 금욕, 절약, 계산되고 미리 계획된 행동, 수익을 다시 기업에 투
자하기, 수익을 가져올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변화에 대한 개방성 등,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적 경제질
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청교도들은 돈을 가능하면 눈에 띄는 옷을 사 입는 데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결코 흥청대는 축제를 벌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실제로 투자할 수 있는 자본을 모았던
역사상 최초의 자본주의 부자들이었다. 그들이 투자한 대상은 학교나 대학이었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였다. 자본주의 정신은 이렇듯 종교적 확신에서 출발했다.

▣ 차례
저자 서문
Ⅰ. 문제
1. 종파와 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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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2. 자본주의 「정신」
3. 루터의 직업개념ㆍ탐구의 과제

Ⅱ.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
1. 현세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
2.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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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 tantis c he Ethik und de r Ge is t des Kapita lis mus )
막스 베버 지음
저자 서문
보편적 문화사의 어떤 문제를 연구하든, 근대 유럽 문명의 산물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자문하게 만든
다. 즉 (우리가 보통 그렇게 생각하듯이) 「보편적」인 의의와 가치를 지닌 발전선상에 놓여 있는 듯
한 문화적 현상이 서구 문명에서 그리고 오직 서구 문명에서만 나타난 사실은 어떤 일련의 환경들에
귀속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오직 서구에서만 우리가 오늘날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발전단계에 오른 과학이 존재한다. 이
는 우리의 근대적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획득에의 충동, 이윤
과 화폐, 가능한 한 많은 양의 화폐에 대한 추구 그 자체는 자본주의와 관계가 없다. 아마도 이 충동
은 그것의 객관적 가능성이 있는 혹은 있었던 곳이라면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 그리고 모든 시대에 모
든 종류와 조건의 인간들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획득을 위한 무제한한 탐욕은
결코 자본주의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 정신과는 더욱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지
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에 의한 이윤추구, 그리고 영원히 「재생되는」 이윤의 추구와 동
일한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경제행위를 교환기회의 사용에 의한, 즉 (형식적으로) 평화적인 이윤기회의 사용에
의한 이윤기대에 의존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사고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원시적인 형태로나마 경제행위를 화폐소득과 화폐지출의 비교에 적응시키는 일이 일어나
야 한다는 점인데, 이런 의미에서의 자본주와 자본주의적 경영은 자본주의적 계산의 상당한 합리화를
갖춘 식으로 이미 지구상의 모든 문명화된 나라들에 존재했었다. 근대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바빌론,
이집트, 고대 지중해, 중세에도 존재했었다. 즉 어떤 경우든 자본주의적 경영과 자본주의적 기업가, 즉
일시적인 기업가가 아니라 상시적인 기업가는 모두 매우 오래된 것이며 또 매우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서양은 자본주의를 양적인 정도로 그리고 (이 양적 발전과 더불어) 이전에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나타난 적이 없었던 매우 다른 형태로 발전시켰다. 즉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노동」의 합
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가 그것이다. 이윤을 위한 정치적 기회나 비합리적 투기적 기회에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은 서구 자본주의에만 독특한 것이다. 자본주의
적 경영의 근대적인 합리적 조직은 그 발전에 있어 다른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근대적 경제생활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가사와 사업의 분리, 그리고 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합리적 부기가 그것이다.
보편적 문화사에서 우리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순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상이한 문화에서
단지 형태적으로만 다른 - 모험가적 유형, 혹은 이윤의 원천으로서 무역, 전쟁, 정치, 행정상의 자본주
의- 자본주의적 활동 자체의 발전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를 갖춘 착실한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기원이 문제가 된다. 혹은 문화사의 용어로 말하자면 문제는 서구 부르주아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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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급과 그 독특성의 기원에 대한 것이다.

Ⅰ. 문제
종파와 계층
여러 종파가 혼합되어 존재하는 지방의 직업통계를 보면 특히 한 가지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가톨릭계 신문이나 문헌에서 자주, 그리고 독일의 가톨릭 회의에서 활발히 논의된 현상이다.
즉 그 현상이 자본 소유자와 경영자층, 상급의 숙련 노동자층, 특히 근대적 기업에 있어 높은 기술적,
또는 상인적(商人的) 훈련을 받은 구성원들이 매우 현저한 프로테스탄트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프로테스탄트는(특히 나중에 특별히 다루게 될 그들 중의 몇몇 분파가) 지배층으로서든 피지배층으로
서든, 다수로서든 소수로서든 경제적 합리주의를 향한 특수한 경향을 보였고, 가톨릭은 어느 경우든
간에 그러한 경향을 보이지 못했고 현재도 그러하다. 이러한 행동상의 차이에 대한 피상적인 관찰과
몇 가지 근대적인 인상에 입각해서 가톨릭의 강한 「비세속성」, 가톨릭의 최고 이상인 금욕적 성격
이 신자들로 하여금 현세에 재물에 대해 보다 강한 무관심을 보이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이러한 견해를 가톨릭적인 삶의 영위가 갖는 (실제로건 아니면
말뿐이건) 금욕적 이상에 대한 비판에 이용하며, 가톨릭측은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한 삶의 세속화 결과
로 주장되는 「물질주의」에 대한 비난으로 답한다.
그러나 영국, 네덜란드, 미국의 청교도들에게는 주지하다시피 「현세적 쾌락」과는 정반대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이러한 엄숙함과 생활에서의 종교적 관심의 강력한 지배를 「비세속성」이라 부른다면
프랑스의 칼뱅주의자들은 적어도 지구상의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톨릭교에 열렬
한 북부 독일의 가톨릭만큼 비세속적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즉, 이러한 평행관계가 극명하게 보여주
는 것은 (소위!) 가톨릭의 「비세속성」이나 프로테스탄티즘의 유물론적인 「세속성」 따위처럼 애매
한 표상으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아무런 출발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표상은
과거에 대해서나 현재에 대해서 조금도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루터, 칼뱅, 녹스(Knox), 보에(Vo t) 등의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은 오늘날 「진보」라 부르는 것과는 전
혀 무관한 것이었다. 오늘날 가장 극단적인 종교가들도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인정하는 근대적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해 초기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정면으로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초기 프로테스탄트 정신
의 일정한 특징과 근대의 자본주의적 문화 사이에 어떤 내적인 친화성이라는 것을 찾으려 한다면, 우
리는 좋건 나쁘건 간에 그러한 친화성을 (소위) 그것의 다소간 유물론적인 혹은 반금욕적인 「세속
성」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순수한 종교적 성격에서 찾아야만 한다.
자본주의 「정신」
본 연구의 제목에는 약간 야심적인 듯이 보이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 개념
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 개념에 대한 확정적인 파악은 (역사적 현실의 복합적인 관련으로 역사
적 현실에서 취해질 개별적 구성요소로부터 점차로 합성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탐구의 시초가 아니라
탐구의 마지막에 얻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자리에서 자본주의 「정신」으로 뜻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가장 잘 - 즉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갖고 있는 관점에 가장 적합하게- 정식화될 수 있을
까 하는 것은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그리고 그 논의의 본질적인 결과가 지적하는 바에 따라 정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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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것이다.
화폐취득은 - 그것이 합법적 방법으로 얻어진 것인 한- 근대적 경제질서 안에서 직업상의 유능함의 표
현이며 이 유능함은 쉽게 알 수 있듯이 프랭클린 도덕의 실질적인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즉 돈을 벌
고 더욱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이 「윤리」의 「최고선」이다. 그것도 모든 적나라한 향락을 엄격히
피하면서 행복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모든 요소들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 돈 버는 것을 그저 자기
목적으로 여기므로 개인의 「행복」과 「효용」에 대립되는, 전혀 초월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
일 정도이다. 즉 인간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것이다.
「윤리」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규범부여적인 일정한 생활양식이라는 의미에서 자본주의 「정신」이
우선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적수는 전통주의라 부를 수 있는 관점과 태도였다. 근대적 기업
가가 그가 고용한 노동자로부터 가능한 한 극대의 노동성과를 올리기 위해, 즉 노동강도를 증대시키
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인 기술적 수단 중 하나인 성과급의 경우, 성과급의 비율을 향상시키면 동일
시간 안의 노동성과는 증대되는 것이 아니라 감소하는 결과가 뚜렷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성과급의 인상에 대해 하루 노동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소시키는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잉여수입보다는 노동을 적게 하는 것이 보다 직접적으로 그에게 작용하는 것이다. 즉 노동자
는 자신이 노동을 극대화시키면 매일 얼마를 벌 수 있는지를 묻지 않고 자기가 지금까지 벌었고 또
자신의 전통적 필요에 알맞던 그 액수를 벌려면 하루에 얼마나 일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통주의」라 불리는 태도의 한 사례이다. 즉 인간은 「그 본성상」 더 많은 돈을 벌려는 것
이 아니고 단지 자신이 살아온 대로 살고 그에 필요한 만큼만 벌려고 한다. 이러한 전통주의적 구습
을 극복하고 노동을 자기 목적, 즉 자본주의가 요구하듯이 「직업(소명)」으로 파악하는 최선의 기회
는 종교적 교육의 산물이다.
근대 자본주의의 추진력에 대한 문제는 우선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화폐재고의 원천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의 발달에 대한 문제이다. 그 정신이 개화하여 작용하는 곳에서는 그 정
신이 화폐재고를 자신의 작용수단으로 변형시켰던 것이며 그 거꾸로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정신
의 도래가 대체로 평화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방식」의 기업가들이 냉정한 자제심을 잃지
않고 도덕적 경제적 파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비상하게 굳건한 성격을 필요로 했으며, 그러한 혁
신과정에 불가결한 고객과 노동자로부터의 신뢰를 얻도록 해주고 무수한 저항의 극복을 위한 활력을
유지시켜 주며, 특히 이제부터 기업가에게 안락한 생활향락과는 결합될 수 없는 것으로 요구되던 무
한히 집중적인 노동능력을 가능케 한 엄격하고도 단호한 「윤리적」 자질이 명석한 시야와 추진력 못
지 않게 필요했었다.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과거의 전통에는 맞지 않는 특별히 다른 방식의 윤리적
자질이었다.
「자본주의 정신」의 발달은 합리주의의 전체적 발전의 부분현상으로 간단히 이해될 수 있고 또 궁극
적인 삶의 문제에 대한 합리주의적 원리의 입장에서 도출되어야 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게 되면 프로
테스탄티즘은 단지 그것이 순수한 합리주의적 인생관의 「설익은 결실」 따위의 역할을 행한 한에서
만 역사적인 고찰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탐구를 해보면, 그러한 단순한 문제설정은 합리주
의의 역사가 결코 여러 생활영역에서 평행적으로 진전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부적절한 것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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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즉시 드러난다. 순수한 세속적인 합리적 철학은 18세기에 단지 자본주의적으로 매우 발달한 나라에서
만 발생한 것이 결코 아니며 주로 그런 나라에서 발생한 것도 아니다.
「합리주의」란 무수한 대립적 내용을 안고 있는 역사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탐구해야 할 것
은 우리의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적 구성요소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러한 요소인 「직업」사상과 - 앞
서 말했듯이 순수한 행복주의적인 개인적 이해관계에서 보면 그토록 불합리한- 직업노동에의 헌신을
낳은 구체적인 「합리적」 사고와 삶의 형식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 우리의
관심대상은 모든 직업개념에 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특히 이 직업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그 비합
리적 요소의 근원이다.
루터의 직업개념ㆍ탐구의 과제
루터의 직업개념은 전통주의적인 것에 머물렀다. 즉 직업은 인간이 신의 섭리로 받은 것이며 그 섭리
에 「순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색이 직업노동은 신이 부여한 임무, 아니 유일한
임무라는 그의 또 다른 사랑을 가려 버렸다. 더욱이 루터에 있어 - 그리고 루터교회에 있어서는 더 심
하다- 합리적 직업윤리에 대한 심리적 토대가 신비가들보다 상당히 불안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루터주
의는 신비가들보다 퇴보한 것을 의미하며, 특히 루터가 금욕적 자기연마의 경향에 위선이라는 혐의를
두었고 따라서 루터 교회에서는 그것이 더욱더 뒷전에 밀렸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루터주의적인 의미에서의 단순한 「직업」사상은 - 이 점만은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야 한
다.- 현재 알려진 한에 있어, 우리가 탐구하는 것에 대해 기껏해야 불확실한 중요성밖에는 갖지 못한
다. 그렇다고 종교생활을 루터주의적 형태로 재편성한 것이 우리의 고찰 대상에 아무런 실천적 중요
성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이다. 단지 이 중요성은 분명 세속적 직업에 대한 루
터와 그의 교회가 갖는 태도에서 직접적으로는 도출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파
에서 가능할지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쉽게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생활
실천과 종교적 출발점과의 관련을 루터주의보다 쉽게 탐구할 수 있는 형태의 프로테스탄티즘을 고찰
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자본주의 정신」(물론 이 책에서 잠정적으로 사용된 의미에서)은 종교개혁의 일정한 영향에
따른 결과로만 발생할 수 있었다든가, 경제체계로서의 자본주의는 종교개혁의 산물이라는 등의 어리
석은 공론적 테제는 결코 옹호될 수 없다. 이미 종교개혁 훨씬 이전에 몇 가지 중요한 자본주의적 영
리기업의 형태가 있었다는 주지의 사실은 그러한 견해를 단적으로 부인한다. 오직 다음과 같은 것들
만이 확인될 필요가 있다. 즉 그 「정신」의 질적인 규정과 세계로의 양적인 팽창에 있어 종교적 영
향이 함께 작용하였는지, 작용하였다면 어느 정도인지 하는 점과, 자본주의적 토대에 입각한 문화의
어떤 구체적인 측면이 종교적 영향에 의한 것인지 하는 점이다.

Ⅱ.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
현세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
16세기와 17세기에 자본주의적으로 가장 발달한 문화국가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 위대한 정치
투쟁과 문화투쟁을 수행했던 것이 칼뱅주의였고 따라서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할 신앙은 칼뱅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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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그 당시에 그리고 대체적으로 현재도 예정설은 칼뱅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교리이다. 물론 예정설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교리인지 아니면 「부차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
을 수 있다.
칼뱅의 경우 이른바 「가공할 신의 결정(decretum horribile)」은 루터에 있어서처럼 체험된 것이 아니
라 안출(案出)된 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만 쏠리는 그의 종교적 관심의
방향에서 사상적 철저화가 진전됨에 따라 그 이론의 중요성은 더해 갔다. 신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
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위해 있는 것이며, 모든 것 - 따라서 칼뱅이 결코 의심치 않았던,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부름을 받는다는 것도- 은 오직 신의 위엄을 영광케 한다는 목적의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
질 수 있다. 신만이 자유롭고, 즉 아무런 법칙에도 종속되지 않고, 신의 결단은 당신이 그것을 우리에
게 알려서 좋다고 생각하시는 한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상의 「정의」
의 척도로 신의 지고한 섭리를 측정하려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신의 위엄을 침범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진리의 이러한 단편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그 밖의 모든 것 - 우리의 개인적 운명
이 갖는 의미- 은 어두운 비밀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것을 탐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도 외람된 것이
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인간의 일부는 구원받고, 나머지는 저주받았다는 사실뿐이다. 신의
은총은 그 은총을 받은 자가 잃을 수 없고, 그 은총을 거부당한 자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이론이 그 격앙된 비인간성을 통해 그 장엄한 결론에 몸을 맡긴 한 세대의 감정에 낳은 결과는 무
엇보다도 전대미문의 개인적인 내적 고립감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인간들에게 결정적이었던 삶의
관심사, 즉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인간은 태초로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을 향해 홀로 길을 가는 수밖
에 없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다. 모든 피조물이 신과 무한히 멀리 있고 또 무가치하다는 단적인
이론과 결합되어 이러한 인간의 내면적 고립은, 한편으로 문화와 주관적 종교성에 내재하는 모든 육
체적ㆍ감정적 요소에 대한 청교도주의의 절대적인 부정적 태도의 근거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청
교도주의적인 과거를 가진 민족의 「국민성」과 제도에서 오늘날에도 작용하고 있는 저 비환상적이고
비관주의적인 색조의 개인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세계는 (오직) 신의 영광에 봉사하도록 정해져 있고, 선택된 기독교는 (오직) 신의 율법을 집행하여 세
계에 신의 영광을 각자의 몫만큼 증대시키도록 정해져 있다. 그러나 신은 기독교도의 사회적 실행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신은 삶의 사회적 형성이 자신의 율법에 맞게 이루어져 그 형성이 자신의 목적에
일치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칼뱅 교도들의 사회적 노동은 오직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한」 노동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의 현세적 삶에 봉사하는 직업노동도 역시 그러한 성격을 갖
는다. 「이웃사랑」은 - 그것이 피조물의 영광이 아니라 신의 영광에 봉사할 수 있을 뿐이므로- 우선
자연법에 의해 주어진 직업임무의 이행에서 표현되며, 그 경우 이웃사랑은 본질적으로 사물적이고 비
인격적인 성격, 즉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우주의 합리적 형성에 이바지한다는 성격을 띠게 된다.
성서(聖書)의 계시에 따라 그리고 자연적 통찰에 따라 인류의 「효용」에 봉사키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이 우주의 놀라운 합목적적 형성과 질서는, 이러한 비인격적인 사회적 효용을 위한 노동이 신
의 영광으로서 장려되고 또 그러한 것으로 신이 의욕한 것임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칼뱅주의 윤리의
공리주의적 성격의 근원은 이렇게 종교적 사항에 있어 모든 결정권을 개인에게 일임함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윤리」간의 분열이 없었다는 점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칼뱅주의적 직업개념의 중요한
특성이 그로부터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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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그렇다면 나는 선택되었는가? 선택되었다면 나는 그 선택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문제
에 대해서 모든 신자들은 궁금해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칼뱅 자신에게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즉 신의 결정에 대한 지식과 참된 신앙을 통해 결과된 그리스도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신뢰
에 만족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각자의」 구원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한 지칠 줄
모르는 신앙이 은총의 표시를 나타내는 자기증거라는 칼뱅의 입장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경우 구원의 선택을 달리 해석하고 완화시키고 근본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이상 특히 두 가지 상호
결부된 목회적 권고가 특징적으로 부각된다.
첫째는 자신을 선택된 자로 여기고 모든 의심을 악마의 유혹으로 여기고 거절하는 것이 단적으로 의
무화되었다. 왜냐하면 자기확신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불충분한 신앙의 결과이고 따라서 은총이 불충
분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르심을 받았음을 「확실히 하라」는 사도의 권고가 여기서는 일생
의 투쟁에서 자신의 선택됨에 대한 주관적 확신과 증명에 도달하라는 의무로 해석되었다. 루터가 은
총을 약속했던, 죄를 회개하고 신을 믿는 참회하는 죄인 대신에 우리가 자본주의의 영웅적 시기의 강
철같이 굳건한 청교도 상인에게서 볼 수 있고, 현재에도 개별적인 사례에서 재발견할 수 있는 자신감
넘치는 「성도(聖徒)」가 육성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자기확신에 「도달키」 위한 가장 탁월한 수단으
로 부단한 「직업노동」이 엄명되었다. 이러한 노동만이 종교적 회의를 씻어 버리고 구원의 확실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칼뱅주의자들에게는 우호적이고 인간적인 위안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가톨릭과 루터주의자들처럼 결
함과 경솔의 시간을 다른 시간의 고양된 선의지로 보상한다는 것을 바랄 수도 없었다. 칼뱅주의의 신
은 신도에게 개별적인 「선행」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체계로 끌어올려진 선한 생활을 요구했다. 이
처럼 일상인의 윤리적 실천은 그 무계획성, 비체계성을 벗어 버리게 되었고 전 생활방식의 일관된 방
법으로 발전되었다. 「메서디스트(방법주의자)」라는 명칭이 18세기 청교도 사상의 마지막 위대한 부
흥에 붙여졌고, 또 17세기의 그 정신적 선구자에게 철저히 같은 종류의 의미를 지닌 「엄격주의자」
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매순간 모든 행동에서의 근본적 변화를 통해
서만 인간을 자연상태에서 은총의 상태로 고양시키는 은총의 작용이 보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
도」의 삶은 오직 초월적 목적인 구원을 향해 있으며 오히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세의 과정에서
철저히 합리화되고 오로지 한 가지 관점, 즉 지상에서 신의 영광을 더한다는 관점에 의해 지배된다.
또 여러 금욕주의적 종교공동체가 개별적으로는 매우 상이했고 우리의 결정적인 관점에 대해 갖는 비
중이 매우 다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종교적 토대가 그들 모두에게 존재하면서 작용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찰에 결정적인 것을 다시 요약하면, 모든 종파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것은
종교적 「은총상태(Gnadenstand)」를 피조물의 타락과 「세속」에서 인간을 구별짓는 일종의 신분
(Stand, status)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신분의 획득 - 각 해당 종파의 교리에서 그 획득이 어
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서로 다르지만 어쨌든- 은 어떤 마술적 성례적 수단이나, 참회에 의한 사면이나,
개인적인 경건한 공적 등을 통해서 보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자연적」 인간의 생활방식과
는 분명히 구별되는 특수한 성질의 품행에 의한 증명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
라서 각 개인은 생활방식 안에서 자신의 은총상태(구원)를 방법적으로 검사하고, 그에 따라 그것을 금
욕주의적으로 관철시키는 동인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금욕적 생활방식은 자신의 전존재를 신의 뜻에 맞추어 합리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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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다. 그리고 이 금욕은 더 이상 과외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요구
되는 행위였다. 내세를 바라보면서 세상 안에서 생활방식을 합리화한 것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사상이 낳은 결과였다.
처음에는 세속을 벗어나 고독으로 도피했던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세속을 단념한 상태에서도 이미 수
도원에서 나와 세계를 기독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그 금욕주의는 대체적으
로 세속적 일상생활에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성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금욕주의는 닫
아 버린 수도원의 문을 뒤로 하고 삶의 시장에 걸어 나와 현세적 일상생활에 자신의 방법을 침투시키
기 시작했고, 일상생활을 세속 안에서 - 그러나 세속에 의해서나 세속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합리적
생활로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이하의 서술은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
박스터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었던 것은 재산을 갖고 휴식하는 것, 부를 향락하
여 태만과 정욕을 낳고 특히 「거룩한」 삶에 대한 추구에서 이탈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산이 죄
악시된 것은 오직 그것이 이러한 안주의 위험을 수반하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성도의 영원한 안
식」은 내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세에서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낮 동안은 자신
을 보내신 이의 일을 행해야」 한다. 태만과 향락이 아니라 오직 행위만이 분명하게 계시된 신의 뜻
에 따라 신의 영광을 더하는 데 봉사한다. 따라서 시간 낭비는 모든 죄 중에 최고의 중죄이다. 인생의
기간은 각자의 부르심을 「확인하기」에는 너무나 짧고 소중하다. 사교, 무익한 잡담, 사치 등을 통한
시간 낭비 그리고 건강에 필요한 만큼을 상회하는 수면시간에 의한 낭비는 도덕적으로 절대적인 비난
을 받는다. 물론 프랭클린의 경우처럼 「시간은 돈이다」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 말도 정신적인 의
미에서는 어느 정도 적용된다. 즉 시간은 무한히 귀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낭비된 모든 시간은 신의
영광에 봉사하는 노동에서 감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스터의 주장에는 엄격하고 부단한 육체적 또
는 정신적 노동에 대한 재차 반복되고 때로는 열정적이기까지 한 설교가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박스터에게서 특별히 청교도적인 성격은 자신의 설명 맨 앞에서 다음과 같은 주제를 제시할
때 나타난다. 확실한 직업이 없는 경우 인간의 노동은 불규칙한 우연적 노동에 불과하며 노동보다는
태만에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설명을 맺고 있다. 그리고 그(직
업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규칙성을 부여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자는 끝없는 혼란에 빠져 자신의 일
할 장소와 시간을 알지 못한다. ⋯⋯ 그러므로 확고한 직업(「certain calling」, 다른 구절에서는 일정
한 직업(「stated calling」)이라 되어 있다)은 모든 사람에게 최선의 것이다. 인간의 직업생활은 금욕
적 덕을 철저히 실행하는 것이며, 그는 자신의 직업에 전념하면서 취하는 배려와 방법에 작용하는 자
신의 양심에서 구원을 증명하는 것이다.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합리적 직업노동이 바로 신이 원하는
바이다.
청교도적인 직업사상에서는 루터에 있어서처럼 일단 신이 배당해 준 운명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직
업적 금욕의 이러한 방법적 성격에 강조점이 놓여진다. 그러므로 여러 개의 직업을 가져도 되는가하
는 질문은 무조건 긍정적인 답을 받는다. 단, 그것이 일반의 복지나 자신의 복지에 유익하고 누구에게
도 해가 되지 않는 경우에, 그리고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짐으로써 비양심적(「unfaithful」)이 되지 않는
경우에 그렇다. 그뿐 아니라 직업의 변경도, 그것이 경솔한 것이 아니라 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인
경우, 그리고 보다 유용한 직업에 종사하라는 일반적 원리에 따르는 것일 경우 결코 그 자체가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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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할 만한 것이라고는 간주되지 않는다.
특히 어떤 직업의 효용성과 그에 대응하는 신의 만족은 물론 첫째로는 도덕적 척도에 따라, 그리고
다음에는 거기서 생산될 재화가 「전체」에 대해 갖는 중요성의 척도에 따라 평가되지만, 세 번째로
실천적으로는 보다 더 중요한 관점인 사경제적 「수익성」에 따라 평가된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이 삶
의 구석구석에 작용하고 있다고 본 신이 그의 신도들 각각에게 하나의 이윤의 기회를 준다면 그것은
신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는 그 기회를 사용하여 그러한 부르심에 따
라야만 한다. 「만일 신이 너에게 너의 영혼이나 타인의 영혼에 해를 주지 않고 다른 방법보다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는 합리적 방법을 지시하는데, 네가 이를 마다하고 보다 적은 이익을 주는 방법을
따른다면, 너는 네 소명(calling)의 목적 하나에 역행한 것이며, 신의 대리인(집사)이 될 것을 거부한 것
이며, 신의 선물을 받아 신이 요구할 때 그 선물을 그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한 것이다.
당연히 육욕과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신을 위해서라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동해도 괜찮다.」 이
렇게 부는 게으른 휴식과 죄 많은 삶의 향락에 대한 유혹으로서 위험시된 것이며, 부의 추구도 그것
이 나중에 근심 없이 안일하게 살기 위한 것일 경우에만 위험시된 것이다.
반면에 직업의무의 행사로서의 부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명령된 것이기까지 하다.
빈곤해지려는 것은 빈번히 논증되었듯이 병들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바람은 위
선이자 신의 영광을 해치는 것으로 비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능력이 있는 자가 구걸하
는 것은 나태이므로 죄일 뿐 아니라 사도의 말씀에 따르더라도 이웃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다. 확고한
직업의 금욕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근대적인 전문직업을 윤리적으로 신성시했듯이, 이윤 기회에 대
한 섭리적 해석은 기업가를 신성하게 만들었다. 영주의 고상한 방종과 벼락부자의 과시적 허세는 모
두 금욕주의가 증오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정직하게 자수성가한 부르주아는 대단한 윤리적 평가를
받았다.
이제 특히 청교도적 직업관과 금욕적 생활방식의 요구가 직접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한 점들을 밝혀보자. 앞에서 말했듯이 금욕주의가 전력을 기울여 반대한 것은 특히 쾌
락과 거리낌없는 향락의 추구였다. 오락은 합리적 목적, 즉 육체적 활동력을 위해 필요한 기분풀이를
위해서만 사용되어 했다. 무절제한 충동의 방자한 충족수단으로서의 오락은 위험한 것이며, 오락이 순
수한 향락수단이 되거나 경기에서의 공명심, 조야한 본능, 비합리적인 내기욕구 등을 일으킨다면 분명
거부되어야 할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논리에 따라 극장은 청교도에 있어 배척되어야 할 것이었고, 문
학과 예술에 있어서 에로틱한 것과 나체를 엄격히 불허하는 점에서도 그보다 더 과격한 견해는 있을
수 없었다.
이 모든 방향에 대한 청교도주의의 영향에 대해서 깊이 들어갈 수는 없으나 다음 한 가지 사실은 지
적할 수 있다. 순수하게 심미적인 향락이나 스포츠의 향락을 제공하는 문화재에 대한 애호의 허용에
는 언제나 하나의 특징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지출해서는 안 된다
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은총을 통해 그에게 주어진 재화의 관리인일 뿐이며 성서에 나오는 종처럼
단 한푼의 위탁된 돈이라도 보고를 올려야 하며, 그 중의 얼마를 신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향락의 목
적으로 지출하는 것은 어느 정도 위험한 일이다. 재산이 커지면 커질수록 신의 영광을 위해 그 재산
이 감소되지 않도록 보존하고 부단한 노동을 통해 증대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은 더욱더 무거워진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방식이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에서 비로소 그 철저한 윤리적 토대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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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했던 것이다. 이 생활방식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해 갖는 중요성은 자명한 것이다. 즉, 현세적인 프
로테스탄트의 금욕은 전력을 다해 재산낭비적 향락에 반대해 왔고 소비, 특히 사치재 소비를 봉쇄해
버렸다. 반면에 이 금욕은 재화획득을 전통주의적인 윤리의 장애에서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았
으며, 이익추구를 합법화시켰을 뿐 아니라 (앞서 말한 의미에서) 직접 신의 뜻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이
익추구에 대한 질곡을 뚫고 나왔다.
이와같이 부단하고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세속적 직업노동을 최고의 금욕적 수단이자 동시에 거듭난
자와 그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증명이라고 간주한 종교적 평가는, 우리가 이
책에서 자본주의 「정신」이라 부르는 생활관의 확장을 위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말한 소비의 봉쇄를 영리추구의 이러한 해방과 관련시킨다면, 그
외적인 결론, 즉 금욕주의적 절약강박을 통한 자본형성을 쉽게 얻을 수 있다. 벌어들인 것의 낭비를
막는 것이 투자자본으로서의 생산적 사용을 야기시킨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거리낌없이 소박하게 삶을 즐기는 것과 엄격히 통제되고 억제된 자기 규제와 관습적인 윤리적 구속,
이러한 인생관은 모든 상황에서 - 그리고 이는 물론 단순히 자본형성을 조성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인
데- 부르주아적이고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생활방식으로의 경향을 부추겼다. 이러한 인생관은 결국 근
대적 「경제인」의 요람이었다.
종교적으로 활발했던 17세기가 공리주의적 상속자에게 남겨 준 것은 화폐취득이 합법적 형태로만 이
루어지는 한에 있어 지극히 선한 양심이라는 것이었다. 「신을 만족시키기에는 지난하다」는 말은 흔
적도 없이 사라졌고, 특징적인 부르주아적 직업 에토스가 성립한 것이다. 신의 충만한 은총 안에 있고
분명한 축복을 받았다는 의식을 가진 부르주아 기업가는, 그가 형식적 정당성의 한계를 지키고 그의
도덕적 품행이 나무랄 데 없고 자신이 부를 사용하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 한 자신의 영리적 관심을
증대시킬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그 외에도 종교적 금욕의 힘은 기업가들에게 성실하고 양심적
이고 대단한 노동능력을 가진 동시에 신이 원하는 삶의 목적으로서의 노동에 매진하는 노동자들을 제
공해 주었다. 게다가 이 종교적 금욕의 힘은 현세에의 불평등한 재화의 분배는 전적으로 신의 섭리의
특수한 작용이라는 흡족한 확신을 제공했다. 이 섭리는 특수한 개별적 은총과 이러한 차별을 통해 우
리가 알 수 없는 은밀한 목적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다른 면, 즉 노동자의 경우를 보면, 노동을 직업(소명)으로,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가장 좋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유일하기도 한 수단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심리적 동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금욕은
다른면에서 기업가의 화폐취득도 「소명」이라 해석하여, 위와 같이 특별한 노동의욕을 가진 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했다. 분명한 것은 직업으로서의 노동의무의 이행을 통한 신의 나라에 대한 배타
적 추구와 교회규율이 당연시 하며 무산계급에 강제했던 엄격한 금욕은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노동
「생산성」을 강력히 촉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영리활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이 근대
기업가의 특징이듯이 노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도 근대 노동자의 특징이다.
근대적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그뿐 아니라 근대적 문화의 구성적인 요소 중 하나인 직업사상에 입각
한 합리적 생활방식 - 이것이 이 책이 증명하려던 점인데- 은 기독교적 금욕의 정신에서 탄생한 것이
다. 청교도는 직업인이기를 바랐다. 반면에 오늘날 우리는 직업인일 수밖에 없다. 금욕이 세계를 변혁
시키고 세속에 작용하기 시작하자 이 세상의 외적인 재화는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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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간에 대한 힘을 증대시켜 갔고 마침내 인간은 거기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금
욕주의 정신은 그 겉껍질에서 - 영원히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사라져 버렸다. 어쨌든 승리
를 거둔 자본주의는 금욕주의 정신의 지지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정신의 유쾌한 후계자
인 계몽주의의 장밋빛 분위기도 영원히 바래 버린 듯 하고, 「직업의무」라는 사상은 이전의 종교적
신앙 내용의 망령처럼 우리의 삶 안에서 배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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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더 깊이 있게 알기 위하여
배경
베버는 역사가 사회과학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의미의 「이해
(Verstehen)」가 인간행위의 해명에 본질적이라는 생각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행위의 해
석적 이해에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고 간주했던 「직관」, 「감정이입」 등의 개념에 대해서는 비
판적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인간행위의 「유의미」성을 인정함으로써 인과적 설명이 사회과
학에서는 시도될 수 없다는 견해를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추상적 방법의 수준에서 베버는 그가 함께
엮으려 했던 다양한 실마리들의 만족스러운 조화를 다듬어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종합을 위한 그의
시도는 다양한 문화적 의미에 대한 감수성과 역사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적」 요인의 근본적인
인과적 역할에 대한 주장을 결합시키면서 역사연구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내었다.
베버가 마르크시즘을 일련의 교의이자 실천적 목적을 추진하는 정치세력으로 간주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물론 마르크스주의를 전반적인 사상체계로서 수용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것의 혁명적
정치학으로부터도 거리를 두었다. 베버는 마르크스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그의 빼어난 동시대인이었던 좀바르트보다 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베버와 좀바르트는 모
두, 특별히 독일에서 그리고 서구 전체에서 산업 자본주의의 기원과 앞으로의 진화 과정에 대하여 공
통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발달과 미래의 변화를 결정한다고
믿었던 경제적 조건이 독특한 문화적 총체성 안에 잠겨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두 사람 모두 근대적
서구 자본주의의 이러한 「에토스」 혹은 「정신(Geist)」의 출현을 확인하는 데에 그들의 많은 저작
을 할애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라는 주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독특한 성격을 규정하기 위하여 베버는 무엇보다도 자
본주의적 경영을 이익추구 그 자체와 분리시켰다. 부에 대한 욕망은 거의 모든 시대와 장소에 존재했
으며 그 자체로는 (보통 평화적인) 경제적 교환을 통한 정규적 이윤취득에 관여하는 자본주의적 행위
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오직 서구에서만 그것도 비교적 최근 시기에 자본주의적 활동은 「형
식적으로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와 결부되었다. 여기서 베버가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
로 의미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기능하는 기업 안에서 일상화되고 계산된 관리이다.
합리화된 자본주의적 기업이란 두 가지 사실을 함축한다. 즉 훈련된 노동력, 그리고 자본의 규칙적인
투자가 그것이다. 이들 각각은 전통적인 유형의 경제적 행위와 확연하게 대조된다. 「인간은 돈을 버
는 것, 그의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경제적 취득에 의하여 지배된다. 경제적 취득은 더 이상 물질
적 욕구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베버에 따르면 이것이 근대 자본주
의 정신의 요체이다.
부를 통해 구입할 수 있는 세속적인 쾌락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부의 축적을 위한 충동을 낳
은 역사적으로 독특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베버는 그것이 전통적인 도덕의 이완에서 왔
다고 상정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고 논증한다. 즉 이 새로운 관점은 실상 유별난 자기훈련을 요구
하는 도덕적 관점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합리적 자본주의의 발전과 결부되어 있는 기업가들은 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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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의 충동을 적극적으로 검약하는 라이프 스타일과 결합시켰다. 베버는 그 대답을 「소명」개념에 초점
이 맞추어진 청교도주의의 「현세적 금욕주의」에서 찾았다. 베버에 따르면 소명개념은 고대에도 가
톨릭 신학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즉 그것은 종교개혁을 통해서 도입된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개
인의 도덕적 의무의 최고 형태는 현세적 일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칭한다. 이
것은 종교적 행동을 일상적 세계에 투사시킴으로써, 현세적 실존의 요구를 초월하려는 목적을 가진
은둔적인 삶에 대한 가톨릭적 이상과 대조되는 것이다. 더욱이 프로테스탄트의 도덕적 책임은 누적적
이다. 즉 가톨릭의 삶을 통하여 반복되는 죄, 회개, 용서의 순환이 프로테스탄티즘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
베버는 논하기를 소명개념이 이미 루터의 이론 안에 있었지만 그것은 다양한 청교도 분파들, 즉 칼뱅
주의, 메서디즘, 경건주의, 침례파 등에서 보다 엄격하게 발전되었다고 주장한다. 베버가 비록 칼뱅의
교리 자체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칼뱅주의 운동 내의 후기적 전개에 관심을 두었지만 베버의
많은 논의들은 실제로 칼뱅주의에 집중되어 있다. 베버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추출해 낸 칼뱅주의
의 요소들 중에 아마도 그의 주장에 비추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정설일 것이다. 즉 오직 몇몇 사람들
만이 저주로부터 구원받도록 선택되었으며 그 선택은 신에 의하여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칼뱅
자신은 아마도 신의 예언의 도구로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했을지 몰라도 그의 추종자들은 아무도 그렇
지 못하였으며, 그러한 고통(내적 고독감)으로부터 자본주의 정신이 출현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먼저
자신을 선택받은 자라 여기는 것은 의무적인 것이 되었으며, 세속적 활동에서의 선행의 수행은 그러
한 확신을 입증하는 매체로서 수용되었다. 그러므로 소명(직업)에서의 성공은 선택받은 자들 중의 하
나라는 - 결코 그 하나가 되는 수단이 아니라- 「신호」가 되었다. 그리고 부의 축적은 그것이 착실하
고 근면한 경력과 결합되는 한에서 도덕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즉 부가 지탄받는 것은 오직 그것이
게으른 사치나 자기 탐닉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용되는 경우뿐이다.

베버의 주장에 대한 다양한 논쟁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는 논쟁적인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베버의 주장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비판들이 쏟아졌다. 이것들은 그의 주장을 단적으로 반박하는 것에서부터 비교적 사소한 수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논의를 포함한다. 그것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관점들 중의 어느 하나 혹은 여럿을
구현하는 것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1.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베버의 규정은 잘못이다. 이 경우 비판자들이 지적하는 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베버의 접근, 청교도 분파 일반에 대한 그의 해석, 그리고 특히 칼뱅주의에 대한 그의 해석 등이
다. 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베버는 루터가 이전의 성서해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소명」개념을 도
입했다고 상정하는 점에서 실수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뱅주의 윤리가 실제로 간접적인 목적으
로라도 부의 축적을 신성화하기는 커녕 「반자본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미국
청교도주의에 대한 그의 분석과 관련하여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 핵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벤
저민 프랭클린의 사상에 대한 베버의 설명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논지를 편다. 만일 이 반론이 만
일 옳다면 어느 정도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베버는 미국에서 사업활동에 대한 청교도주의의 영
향을 그의 테제에 대한 특히 분명하고도 중요한 사례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2 . 베버는 가톨릭의 교리를 잘못 해석했다. 비판자들이 지적하는 것은 베버가 자신의 논의를, 가톨
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이 경제와 관련된 가치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인 차이라는 관념에 입각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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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불구하고 분명 가톨릭을 상세히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세 이후의 가톨릭은 「자본주의 정신」
에 적극적으로 우호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종교개혁은 실제로 자본주의 정신을 위한 토대
를 닦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 청교도주의와 근대 자본주의간의 연관성에 대한 베버의 진술은 만족스럽지 못한 경험적 자료
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지적된 점은 베버가 언급한 유일한 수적인 분석은 1895년 바덴에서의 가톨
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경제활동에 관한 연구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표의 정확성마저 의심받았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비판자들이 지적했던 것은 베버의 자료가 주로 앵글로- 색슨 쪽에 초점을 맞
추고 있으며 실제로 16세기와 17세기의 라인란트, 네덜란드, 스위스 등지에서의 경제 발전에 대한 조
사는 칼뱅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영간에 어떠한 밀접한 연관성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4 . 베버가 근대 혹은 「합리적」 자본주의와 그에 선행하는 유형의 자본주의적 활동간에 보여주
려 했던 날카로운 대비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한편으로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라
는 개념을 왜곡시켜서 자신이 포착한 청교도주의의 여러 요소에 맞추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베버가 근
대 자본주의의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이 실상은 이전 시기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는 것이다. 토니는 루터교와 이후의 프로테스탄티즘 분파들간의 차별화를 받아들이지만 청교도주의의
진화가 그에 선행하는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의 결과이지 그 거꾸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5 . 베버는 청교도주의와 근대 자본주의간의 인과관계의 성격을 잘못 파악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된 비판적 관점들 중의 하나 혹은 몇몇을 취하는 많은 저자들의 결론은 거기에 아무런 인
과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논쟁은 역사적 방법이라는 추상적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그리고 실제로는 역사에서 인과분석의 가능성 자체에 관련된 것으로 확대된다.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자들은 베버의 경우를 역사적 인과관계에 대한 「다원론적」 관점이라고 거부하며 다른 사람들은 베
버가 분석한 청교도 교리를 이전에 확립된 경제적 변화의 부수현상으로 간주하면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를 재해석하려 시도했다. 또 다른 저자들은,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닌데, 베버가 작업했
던 방법론적 틀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것이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에 관한 그의 설명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보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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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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