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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by Casey,Riley 2021.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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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문화재 반환 문제는 세계 모든 국가가 당사자로 이 문
제에서 자유로운 국가는 없다. 어느 국가이든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는 당사자이거나 문화재 반환을 저지하
는 입장에 서 있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문화재 반환 청
구국과 문화재 반환 반대 국가로 양분되어 치열한 외
교 전쟁을 치르며, 자국의 문화재 수호에 전력을 다하
고 있다.
김경임 지음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 Sho rt Summa ry
필자는 외교관으로 30년간 재직하면서 주로 문화외교를 전문분야로 다루어 왔다. 문화외교 중에서도
특별히 관심을 가진 분야는 문화재 반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90년대 파리 유네스코 주재 한국대표부에 근무하면서다. 이때 필자는 국제사회가 문화재
반환 청구국과 문화재 반환 반대 국가로 양분되어 치열한 외교 전쟁을 치르며, 자국의 문화재 수호에
전력을 다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문화재 반환 문제는 세계 모든 국가가 당사자로 이 문제
에서 자유로운 국가는 없다. 어느 국가이든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는 당사자이거나 문화재 반환을 저
지하는 입장에 서 있다. 우리의 경우, 일제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문화재를 철저히 약탈당한 나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간 문화재 반환 문제에서 초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나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965년 일본과의 수교 당시 문화재 반환 협상에서 약간의 문화재를 반환받은 이후 문화재 문제는 끝
났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된다. 일본에 대한 청구권 소멸이라는 대전제 하에 더 이상의
문화재 청구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후 문화재 반환 문제는 정부의 관심사에
서 밀려났고, 이러한 분위기가 외규장각 도서 반환 교섭의 결렬로 연결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국제적으로도 과거 제국주의 시대나 식민통치 하에서 저질러진 문화재 약탈을 다루는 국제법은 없다.
전시 약탈을 금하는 국제 관습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이 관습법에 의해 과거 약탈된 문화재를 돌려
받은 사례는 없다. 이 때문에 과거에 약탈된 문화재에 관한 문제는 현실적으로 해결의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재를 잃은 국민들은 그 문화재의 소유권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법
이 없다. 그 때문에 법도 관행도 없는 상황임에도 문화재를 잃은 국민들의 반환 운동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약탈의 경우, 그 불법성과 비윤리성 때문에 반환 운동에 도덕성이라는 강인
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오늘날 문화재 반환 문제는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
전 직후 러시아에 의해 대량의 문화재를 빼앗긴 후 문화재 약탈의 피해국 진영에 서게 되었다. 문화
재 반환 문제에서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대립적 구도가 흐려지게 되었다. 또한 최대의 문화재 피해
국이지만, 그간 잠잠했던 중국이 문화재 반환 운동의 국제무대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화
재 반환 문제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가 국제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문
화재 반환 동향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이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 교섭을 계기로 약탈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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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재 반환 문제는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약탈 문화재 환수 운동에 사회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또
한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우리의 문화재 환수 운동은 활기를 띠고 있다. 이러한 계기를 잘 살
려 문화재 환수 운동을 효과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약탈 문화재 반환은 우리의 숙제이다.

▣ 차례
제1장 / 문화유산, 제왕들의 탐욕에 짓밟히다
1. 함무라비법전 비문 - 세계 최초의 문화재 약탈로 기록되다
2. 키루스 칙령 - 바빌로니아에서 태어난 인류 최초의 인권 문서
3. 오벨리스크 - 제국주의에 바쳐진 고대 문명의 상징
4. 솔로몬 성전 - 1천 년의 약탈과 흩어진 유대 성물
5. 폭군 살해자 조각상 - 제2의 시민이 된 문화재
6. 크니도스 비너스 - 비너스의 탄생, 예술로서의 문화재
7. 키케로의 문화재 약탈범 재판 - 식민지에서 문화재를 약탈한 식민지 총독을 벌하다
8. 기독교 성물 - 십자군 전설과 사라진 성물
9. 가나의 혼인 잔치 - 예술품 약탈의 황제 나폴레옹, 문화재 반환의 문을 열다

제2장 / 문화유산, 박물관의 탐욕에 울다
10. 로제타석 - 제국주의 문화재 약탈의 신호탄
11. 파르테논 마블 - 민족의 유산인가, 인류 보편의 유산인가
12. 네페르티티 왕비 흉상 - 독일은 어떻게 이집트 파라오의 아내를 빼앗아 갔을까
13. 베닌 브론즈 - 아프리카 약탈 문화재, 현대 예술의 길잡이가 되다
14.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 약탈된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영국 여왕의 왕관에 장식되다
15. 실크로드 문서 - 제국주의 학자들, 문화재 약탈의 전면에 나서다
16. 토이 모코 - 박물관을 장식한 인간의 유해

제3장 / 걸작 예술품, 전리품으로 흩어지다
17. 하나님의 어린 양 - 성당 제단화는 어떻게 흩어지고, 어떻게 다시 모였을까
18. 호박방 - 사라진 세계 최대의 보석 예술품, 그 뜨거운 추적
19. 화가의 아틀리에 - 화가 지망생 히틀러가 가장 집착했던 미술품
20. 트로이 유물 - 전설의 문화유산, 누구의 소유인가
21. 베르링카 컬렉션 - 폴란드 수중에 떨어진 독일의 문화유산

제4장 / 그들은 어떻게 문화재를 돌려받았을까
22. 아이슬란드 고문서 - 식민지 문화재의 반환, 역사적 정의가 실현되다
23. 영국왕의 대관식 바위 - 스코틀랜드로 되돌아간 야곱의 바위
24. 성 스테픈 왕관 - 동서 냉전 게임에서 문화재의 운명
25. 호텐토트 비너스 - 인간 유해, 제국주의의 잔악상을 상징하다

제5장 / 빼앗긴 우리 문화재는 언제 돌아올까
26.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 - 15년간의 반환 교섭, 원점으로 돌아가다
27. 몽유도원도 - 천하의 명품, 꿈처럼 사라지다
28. 이토 히로부미가 대출해간 규장각 도서 - 베레느를 단죄하라
29. 헨더슨 컬렉션 - 문화재 수집인가, 약탈인가, 돈벌이인가
30. 인류 보편의 박물관 선언 - 세계 최고 박물관들의 문화재 반환 반대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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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제1장 문화유산, 제왕들의 탐욕에 짓밟히다
함무라비법전 비문 - 세계 최초의 문화재 약탈로 기록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의 법 원칙은 용서와 관용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정서로 볼 때 잔인한
형벌의 상징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법 원칙은 더 큰 복수를 금지시키고 비슷한 보복
을 허용한 점에서 절제 있고 온정 있는 법이기도 하다. 이 법 원칙이 처음 기록된 함무라비법전(Code
of Hammurabi)'은 원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 최초의 법전으로, 모세의 십계명보다 3백여 년 앞서
반포되었다. 282개조로 구성된 이 법전은 고대 바빌로니아 왕조(지금의 이라크)의 제6대 왕인 함무라
비가 공포했는데, 모든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거대한 비석에 새겨져 바빌론의 한 신전에 세워졌다.
그런데 이 비문은 6백 년 후인 기원전 1158년에 엘람 왕국(지금의 이란)에 약탈당함으로써 세계 최초
의 약탈 문화재로 기록되었다. 이 비석은 이란에 3천 년 동안 머물다가 1901년에 이란에서 유적을 발
굴하고 있던 프랑스 발굴팀에 의해 발견되어 곧바로 프랑스로 옮겨졌고, 오늘날 루브르박물관이 소장
하고 있는 세계 최고 보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림과 문자로 이루어진 이 비문은 신과 왕 그리고 법이라는 강력한 이미지와 텍스트가 결합된 뛰어
난 예술품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백성들에게 법을 선포하는 통치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류 최초의
그림이라는 점에서 고대 문명이 낳은 최고의 문화재임이 틀림없다. 신으로부터 법을 하사받는 함무라
비 왕은 법을 통해서 신의 중개자가 되려는 겸손한 제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99%가 문맹이던 당
시 비록 백성들이 법전을 읽을 수는 없을지라도 신의 가호 아래 법을 선포하는 제왕의 모습을 보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범죄와 악의 차가운 현실 세계에서 정의와 온정의 세계로 이끄는 효과를 낳았다.
함무라비법전은 서문, 법조문, 맺는말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은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
려는 함무라비 왕이 신에게 행한 엄숙한 기도문으로 시작되는데 오늘날 대다수 국가들의 헌법 서문과
별 차이가 없다. 본문은 282개조의 법조문으로 민사, 형사, 경제, 행정, 가족, 의료 등 일상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있다. 이는 4천 년 전 고대사회의 관례와 전통, 일반 국민의 생활상을 설명하는 다시 없
이 귀중한 자료이다. 맺는말은 후세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함무라비 왕의 염원을 기록하고 있는
데 그 염원은 이루어졌다. 기원전 1750년대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하여 세계 최초의 제국을 이
룬 함무라비의 이름은 군사적 제왕만이 아니라 법을 선포한 제왕으로 후대에 길이 남게 되었다.
신과 왕, 그리고 법이라는 신성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이 비문은 바빌론 민족의 대단한 성물이
고 문화재였다. 그러나 6백년 후인 기원전 1158년 바빌로니아를 침략한 엘람 왕국의 왕 슈트르트 나
훈테가 이 비석을 전리품으로 약탈해갔다. 400km의 험악한 산악지대를 가로질러 4톤에 달하는 이 비
석을 가지고 갔던 것이다. 엘람 왕은 왜 비문을 파괴하지 않고 힘들여 끌고 갔을까? 그것은 신이나
왕이 그려진 비석이나 동상을 약탈하는 것은 적국의 신이나 왕을 포로로 잡아간다는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념비 약탈은 적국에게는 정복을 상징하고 본국 국민에게는 값비싼 전쟁에 대한 전승 기
념 선물이 된다. 엘람 왕은 이 비문의 일부를 지우고 자신의 승전 사실을 새겨 넣었고, 그 뒤 함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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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비법전 비문은 엘람 왕국의 전승 기념비가 되어 3천년 동안 신전에 전시되었다. 전시 약탈은 고대사
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끈질긴 관행이었다. 그것은 정복자의 절대적 권한이었고 무제한의
약탈이었다. 약탈물은 왕의 전쟁 수행 능력이나 다른 세계에 대한 지식을 증명하기 때문에 국가의 권
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 바빌로니아의 문화재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했다는 사실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바빌로니아 문명의 소유자이며 계승자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오늘날 유럽의 박물관들이 제국
주의 시대에 약탈해온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의 고대 문화재를 전시해 놓고 고대 문명의 계승
자를 자처하는 현실과 다를 것이 없다.
19세기 초의 유럽 제국은 서구 문화의 뿌리를 찾아 비유럽 지역을 샅샅이 뒤져 고대 유적지를 발굴하
는 것이 대유행이었고 이러한 문화재 획득은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상징하는 만큼 문화재 쟁탈전
은 총칼에 의한 전쟁만큼이나 치열한 제국주의 경쟁이었다. 이때 프랑스는 이집트에서 발견한 로제타
석을 영국에 빼앗긴 치욕을 만회하고자 근동지역에 많은 공을 들였고 1895년 페르시아에서 독점적
발굴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엘람 왕국이 약탈한 바빌로니아의 문화재들은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드
모르강의 지휘 하에 엘람 왕국의 수도였던 수사에서 발굴되었다. 함무라비법전도 이때 세 토막으로
파손된 채 발굴되어 루브르박물관으로 옮겨진 후에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이란의 국립박물
관에는 프랑스가 기증한 함무라비법전 비문의 복제품이 있다.
그렇다면 함무라비법전은 누구의 문화재인가? 바빌로니아의 후예인 이라크의 문화재인가? 엘람 왕국
의 후예인 이란의 것인가? 아니면 프랑스의 것인가? 1980년 프랑스 수상 레이몽 바레가 이라크를 방
문했을 때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비윤리적 약탈을 문제삼으면서 함무라
비법전 비문의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로서는 이란에서
합법적으로 발굴해온 비문을 내놓으라는 이라크의 요구가 가당치 않게 들렸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는 그것을 창조한 민족의 소유이거나 최초로 발견된 영토의 국가에 소속된다. 과거
에는 약탈에 의해 외국의 문화재를 합법적으로 획득하는 게 국제사회의 관행이었지만 이러한 전시 문
화재 약탈 관행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폐지되었고 약탈 문화재는 반드시 반환해야 한다
는 국제 관행이 성립되었다. 그렇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진행된 유럽의 제국주의 시대에 그
들이 비유럽 지역에서 약탈해 간 문화재는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들은 비유럽 지역에서 가
져간 문화재는 약탈한 게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폐허에서, 불타는 전쟁에서의 파
괴나 현지인들의 무지로부터 문화재를 구출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들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외국의 문화재는 합법적으로 구매하거나 발굴하여 자기 나라의 문화재로 만들 수 있는데, 함무라비법
전 비문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발굴 계약이 아무리 불평등한 협정이었다 해도 그것이 시대의 관행
이었고, 소유권이 합법적으로 넘어갔다는 주장이다. 프랑스로서는 함무라비법전이 이란과의 협정에 의
해 합법적으로 발굴한 취득물이기 때문에 이라크에 내어 줄 이유가 없다. 함무라비법전 비문과는 아
무런 관계도 없는 현대의 이슬람 국가인 이라크가 이를 요구할 근거는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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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제2장 문화유산, 박물관의 탐욕에 울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 약탈된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영국 여왕의 왕관에 장식되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한때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였다. '빛의 산'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다이아몬드
는 원래는 793캐럿으로, 백색의 작은 달걀만 한 크기였다. 전 세계 인구를 이틀간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한 가치를 지녔다는 평을 들었다. 그런데 18세기에 인도에서 세공을 잘못하는 바람에 793캐럿이
186캐럿으로 줄어들었고, 1852년에는 영국 왕실이 다시 세공을 하여 오늘날의 105캐럿이 되었다. 모든
유명한 보석이 대개 그렇듯이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에도 전설과 저주의 역사가 뒤엉켜 있다. "이것을
소유한 자는 세상을 얻을 것이나, 또한 모든 불행을 맛볼 것이다. 오직 신이나 여성만이 해를 입지 않
고 소유할 수 있다." 전설 그대로 이 보석을 소유한 자들은 예외 없이 왕들이었고, 거의 예외 없이 암
살, 정변, 근친 살해, 유배, 배신, 복수 등 온갖 잔혹함으로 얼룩진 액운을 맞았다.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인 펀자브 지역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인도, 페르시아, 아랍, 터키, 아프간 민족
의 교차로였다. 1849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두 차례의 전쟁 끝에 펀자브를 정복하고, 오래전부터 눈독
을 들여왔던 펀자브 왕실의 보물을 약탈했다. 그곳엔 수천 년 동안 쌓인 막대한 보석과 보물이 있었
고,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진귀한 보물이었다. 당시 체결된 영국과 펀자브 사이의
평화조약에서 이 다이아몬드를 영국 여왕에 양도한다고 규정되었다. 그때 인도 총독 달루지는 펀자브
의 마지막 왕인 달리프싱을 런던으로 보냈다. 다이아몬드를 영국 여왕에게 직접 진상시키기 위해서였
다. 그리하여 1851년에, 14세의 어린 왕은 런던에서 32세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코이누르를 바쳤고, 펀
자브 왕의 수모를 통해 약탈의 영광은 더욱 커졌다.
보석에 얽힌 저주의 전설 탓에 빅토리아 여왕이 보석을 반환할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여왕은 지
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를 소유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여왕은 액운을 피하기 위해 코이누르를
다시 세공했고, 소유권이 왕위 계승자의 부인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이후 코이누르는 186캐럿에서 105
캐럿으로 세공되고, 대관식에 왕비가 쓰는 왕관 꼭대기에 장식되었다. 처음 이 보석을 박은 왕관을 쓴
사람은 1901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때 그의 부인 알렉산드라 왕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37년
조지 6세의 대관식 때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왕비가 썼다. 2002년, 엘리자베스 왕비가 죽자 코이누르
가 박힌 왕관은 관 위에 놓여졌다. 현재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다른 왕실 보물들과 함께 런던타워에
있는 보물의 방에 보관되어 있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크기로도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복잡한 약탈의 역사로도 유명하다. 역사
적으로 소유했던 나라를 보면 인도 - 무굴 제국 - 페르시아 - 아프가니스탄 - 펀자브(파키스탄) - 영
국이다. 최초의 발견은 인도로, 이미 5천 년 전의 산스크리트에도 '샤만타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1304년 인도 말와 왕국의 소유였다는 게 최초의 기록으로 나온다. 그 후 1526년, 터키인
바부르가 델리를 정복하고 무굴 제국을 세우면서 이 보석을 손에 넣었다. 17세기에 타지마할을 세운
황제로 유명한 샤자한이 이 보석을 자신의 왕관에 박아 넣었고, 그때부터 보석은 2백 년간 무굴 제국
에 머물러 있었다. 1739년, 페르시아 왕 나디르 샤가 델리를 점령하고 이 보석을 손에 넣었다. 그는
다이아몬드에서 쏟아지는 빛이 거대한 산과 같다고 경탄하며 '코이누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7년 동안
코이누르를 소유했던 나디르 샤는 암살당했다.
보석은 그의 경호원이었던 아메드 칸이 탈취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으로, 이 보석을 가지고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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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불로 가서 사도자이 왕조를 세우고는 코이누르를 왕조의 정통성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코이누르는 80
여 년간 아프가니스탄에 머물렀다. 1830년, 피비린내 나는 정변 끝에 아프가니스탄 왕조가 무너지고,
왕은 코이누르와 함께 펀자브로 피신했다. 그를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펀자브 왕 란지트싱이 코이
누르를 손에 넣었고, 얼마 안 있어 그가 죽자 5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은 막내아들 달리프싱에게 상속
되었다. 그는 코이누르를 소유했던 마지막 인도인이었다. 코이누르는 1849년 영국에 약탈당할 때까지
펀자브에 19년간 머물렀다.
1947년에 오랜 식민지 생활을 벗고 독립한 인도는 영국에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의 반환을 요청했다.
원래 인도 왕국의 소유였으며, 마지막 영국에 약탈당할 때도 인도왕국의 소유였다는 게 그들의 주장
이었다. 펀자브는 1947년 인도에서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파키스탄에 속하게 되었지만, 그 직전까지는
인도에 속해 있었다. 1976년에는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가 영국 총리 앞으로 코이누르의 반환을 요청
하는 공한을 보냈다. 보석의 마지막 소유자가 펀자브 왕이며, 전쟁을 통해 약탈한 것이라는 게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그때, 이란 언론들도 들고일어나 코이누르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코이누르라는 이름
을 지은 사람이 페르시아 왕 나디르 샤였기 때문이다.
또한 2000년 11월 7일 BBC뉴스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의 반환을 영국에 요구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 정부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다른 어떤 나라에도 반환
하지 않겠다고 확인해 주었다. 영국의 입장은, 법적 소유권이 영국 왕실에 있다는 것이었다. 약탈물이
아니라 펀자브 왕으로부터 정식으로 기증을 받았다는 게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였다. 그러나 펀자브를
정복한 후, 항복 조약에 이 보석의 양도를 규정한 점에 비추어 영국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나폴레
옹도 항복 조약에 수많은 문화재를 양도할 것을 규정했지만 이렇게 양도된 예술품은 모두 약탈물로
간주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대적인 반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약탈 문화재 반환
운동을 처음부터 주도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코이누르의 역사가 너무도 복잡한 것은 영국에 유리하다. 반환대상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돌려주려
해도 돌려줄 수가 없다. 더구나 인도와 파키스탄은 앙숙으로 그들은 절대 상대 나라에 코이누르를 넘
겨주지 말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 어느 쪽에도 반환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코이누르는 영국 왕실의 보물로 150년 이상 존속되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영국 왕실과 주권을 상징하
는 최고의 문화재가 되었다. 따라서 코이누르의 반환은 어려울 것이라는 게 보편적인 시각이다.

제3장 걸작 예술품, 전리품으로 흩어지다
트로이 유물 - 전설의 문화유산, 누구의 소유인가
트로이 전쟁의 발단은 트로이 왕자를 따라 도망친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였다. 호메로스가 쓴 서사
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기원전 8세기의 눈먼 시인이 쓴 이 서사시
는 단순히 먼 옛날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일 뿐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19
세기에 트로이 유적지가 발굴됨으로써, 트로이가 전설 속의 왕국이 아니라 역사 속에 실재했던 도시
임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그리스 역사는 수백 년 더 올라가게 되었다.
트로이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은 독일 출신으로 크리미아 전쟁과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큰돈을 벌
게 되자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온 전설상의 왕국 트로이 발굴에 나섰다. 그때가 1871년으로, 그의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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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49세 때였다. 우선 그는 러시아 부인과 이혼하고, 호메로스에 통달한 17세의 그리스 처녀와 재혼했다.
그 뒤, 슐리만은 《일리아스》에 묘사된 전투 지역을 세밀히 연구했다. 그 결과 다다넬스 해협 남쪽
끝에 있는 히사를리크(현재 터키의 카나칼 지역) 언덕을 지목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지만 이 언덕에는
청동기 시대에서 로마 제국 시대에 이르는, 즉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후 600년에 걸쳐 많은 시대의
유적지가 층층이 묻혀 있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직감에 의존하여 트로이 유적지라고 생각되는 층
을 두 차례 발굴했다. 여기서 쏟아진 유물은 바로 트로이 왕국이 실재한 도시임을 생생히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슐리만의 트로이 유적지 발굴 소식은 유럽 사회에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트로이 왕국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에게 전설상의 조상을 찾아준 것이나 다름없는 일
이었다. 슐리만은 일약 유럽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슐리만은 발굴 과정에서 금관, 금귀고리, 금가락지, 금단추 등 9천여 점 이상의 금붙이가 들어 있는
은 항아리를 발견했는데, 그는 이것이 트로이 전쟁에서 프리아모스 왕이 약탈을 피해 숨겨놓은 것이
라고 해석했다. 실제로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그는 이것들에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 보물들 중 보석 장신구는 '헬레네의 보석'이라고 이름 붙였다. 트로이 전쟁의 여주인
공 헬레네가 실제로 착용했다고 여겨서 붙인 것인데, 그야말로 멋대로 해석하고 멋대로 붙인 명칭에
불과했다. 그는 발굴 유물로 치장한 아내의 사진을 '헬레네의 보석'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발표해서
고대 그리스 유물을 소장하고 싶어하는 유럽 박물관들의 대대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뒤늦게 언론
을 통해 보물 발굴과 밀반출 사실을 알게 된 터키 정부가 슐리만을 고소하자, 슐리만은 프리아모스의
보물 중 절반을 터키에 넘겼고 오늘날 터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나머지 반은 1880년부터 슐
리만의 조국인 독일의 베를린 제국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라졌다. 종전 후
동베를린을 점령했던 소련군이 실어간 것으로 추측될 뿐이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에 의해 총150만 건으로 추정되는 막대한 문화재를 약탈당하고 파
괴당했다. 전쟁이 끝나자, 소련 정부는 소련 점령지 내에서 연합군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독일의 모든
문화재를 실어갔다. 이때 가져간 독일 문화재는 예술품 250만 점과 서적 및 서류 1천만 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에는 슐리만이 찾아낸 트로이 유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독
일에서 사라진 문화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1996년에는 푸시킨 박물관에서 '트로이의 금'이라는 전시회
가 열림으로써 사라진 독일 문화재가 러시아에 있음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들 문화재가 나타나자 독일과 러시아 간의 험악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언론은 이 싸움을 '제 2의 트
로이 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독일은 즉시 무조건 반환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에 의한 막대한 문화재 피해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러시아 국민들은 독일 문화재 반환에 결
사반대했다. 그 결과, 2003년 러시아 의회에서는 독일 문화재를 국유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이로써
이들 문화재는 정식 등록된 러시아 문화재가 되었다. 러시아의 국유화 조치에 대해 독일은 당연히 반
발했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 조치를 비난했다. 우선 러시아가 가져간 문화재는 개별 품목이 아니라
독일 문화재 전 재산 중 일부를 떼어간 것이다. 민족의 유산 중 한 덩어리를 통째로 가져간 것이다.
그 규모와 가치가 막대하다는 사실과 불법적인 전시 약탈에 해당된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입장은 달랐다. 국제법상 인정되는 '전쟁 배상 성격'이라는 것이다. 국유화 조치는
적법하며, 따라서 독일에 반환할 의무는 전혀 없다는 입장이었다. 독일은 러시아가 가져간 문화재가
독일 민족의 문화유산이라는 점에 호소하여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 주장은 국제사회의 동정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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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고 있기는 하지만, 명백히 말해서 트로이 유물은 독일의 문화유산이 아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수많은
윤리적 문제점을 야기하면서 힘없는 나라에서 약탈해 온 것들이다. 이러한 문화재는 민족의 유산이나
문화재와 영토의 관련성과는 무관하고, 대개는 비윤리적인 문화재로 민족 문화유산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 문화재가 민족의 유산이라는 점을 과도하게 호소할 경우, 스스로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재의 개념은 민족의 문화유산만은 아닌 다른 요소가 있는 게 사실이다.
독일 문화재를 둘러싼 독일과 러시아 간의 싸움은 정치적 판단에 따라 또는 상응하는 대가를 받고,
러시아가 돌려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트로이 유물만은 돌려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제2
의 트로이 전쟁'이 해결된다면, 문화재 분쟁에 관한 국제적 지형을 새로 만들만큼 획기적 사건이 될
것이다.

제4장 그들은 어떻게 문화재를 돌려받았을까
성 스테픈 왕관 - 동서 냉전 게임에서의 문화재 운명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직후, 오스트리아의 점령 지역을 순찰 중이던 미군이 수상한 헝가리인들
을 검문했다. 이들은 텅 빈 철제 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검문 결과, 그들은 전쟁 중에 헝가리 왕실의
경호원으로 일했던 사람들로 철제함은 헝가리 왕관을 보관했던 케이스였다. 미군은 이들을 추궁하여
왕관을 포함한 헝가리 왕실의 보물을 반출하여 오스트리아에 피신시켰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에 따
라 수색에 들어간 미군은 오스트리아 시골의 진흙 밭에 묻혀 있던 석유 수송관 안에서 보물을 발견했
다. 내용물은 헝가리 왕이 대관식 때 사용하는 왕관을 비롯해서 천구, 지휘봉 등이었다. 헝가리 왕실
경호원들은 소련군의 진군이 임박하자 황급히 왕실의 대관식 보물들을 오스트리아로 피신시켰던 것이
다. 미군은 비밀리에 이 보물을 미군 점령부대로 옮겼다가 1953년에 미국 본토로 다시 옮겨 켄터키
주에 있는 포트녹스 미 연방 금괴 보관소에서 보관해왔다.
'성 스테픈 왕관'이라는 명칭의 이 왕관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만큼 권위와 상징성, 그리고 역사성
이 깊은 보물이다. 서기 1000년 1월 1일 헝가리 초대 왕으로 즉위한 이슈트반 1세가 교황으로부터 하
사받은 것으로 그는 1083년 성자 칭호를 받은 왕이기도 하다. 성 스테픈은 즉위식에서 이 왕관을 성
모 마리아에게 헌정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왕관은 헝가리의 국권과 왕권의 상징일 뿐 아니라 종교
적인 성물이다. 헝가리 왕들은 대관식에서 항상 이 왕관을 써야 했고, 오직 이 왕관을 씀으로써 비로
소 왕으로 인정되었다. 그때까지 이 왕관을 쓰고 즉위한 헝가리의 왕은 50명이 넘었다.
1965년, 미국의 한 신문이 특종을 터트렸다. 헝가리 왕관이 미국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
다. 이에 미국 정부는 왕관이 포트녹스에 보관되어 있음을 인정했지만 헝가리에 공산 정권이 존재하
는 한 절대 반환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얼마 후, 헝가리 정부로부터 반환 협상을 시작하자는 제
안이 들어왔다. 이 시기는 미국 정부의 공산 정권에 대한 반감이 거셌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헝가리
의 제안을 일축했다. 그러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과 헝가리의 외교 관계가 조금씩 호전되었고
1976년, 미국에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왕관의 반환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공산 헝가리 정부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헝가리 국민들에게 친미 감정을 확산시키는 효과가 기대되었다. 1977년, 카터 대통령
은 중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왕관은 반환되어야 한다. 헝가리 국민들은 민족의 상징인 왕관을 잃은
지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것을 돌려받아야 한다." 그리고 1978년 헝가리 국회 의사당에서 미국 정
부의 사절단과 헝가리 국가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 스테픈 왕관이 반환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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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결과적으로 헝가리 국민들의 품에 돌아온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헝가리 국민들에게
너무나 상징성이 큰 문화재이므로 미국이 언제까지 갖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 고려와는 달리, 이 일은 법적으로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나고, 점령국이 점령지
에서 문화재를 반출하는 것은 국제법에 위반된다. 전시 문화재 보호를 규정한 국제 협약은 점령국이
문화재를 반출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어기고 반출된 문화재는 전쟁이 끝나면
즉시 '무조건 반환'을 명시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배상 명목으로 잡아둘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이 점령
지에서 헝가리 왕관을 비밀리에 반출하여 20년 이상 갖고 있었던 일은 국제 협약에 위배된다. 이 규
정은 오늘날 거의 국제 관습법이 되었다.
소련이 독일 점령지에서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실어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점령지에서 깨끗했
다. 물론 미국도 한때는 전승국으로서 문화재 약탈의 유혹에 빠진 적이 있었다. 1945년, 워싱턴의 미
군 본부가 독일 주둔 미군에게 프리드리히 황제 박물관 소장품을 미국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것
이다. 여기엔 걸작품 202점을 명시한 리스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명령은 나치의 약탈 문화재 반
환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특수요원에게 떨어졌다. 이들은 즉각 반발했지만 본부의 명령이라 어쩔 수
가 없었다. 리스트에 명시된 미술품 202점은 미국으로 반출되었지만 상자 안에는 특수 요원들의 항의
서가 동봉되어 있었다. 요원 25명이 전부 서명한 '비스바덴 메니페스토'였다. 워싱턴에 도착한 독일 미
술품은 3년 동안 뉴욕, 시카고, LA를 돌며 전시되었는데, 이들의 항의서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여론의
비판이 드세게 일었다. 국무성은 이러한 미술품 취득이 미국의 대외적 위신에 커다란 손상을 가져온
다고 판단했고 결국 3년 만에 미술품 전량이 독일로 돌아왔다.

제5장 빼앗긴 우리 문화재는 언제 돌아올까
몽유도원도 - 천하의 명품, 꿈처럼 사라지다
'한국 미술의 금자탑', '우리 회화 사상 최고의 걸작', '조선 전기 최고 화가의 현존하는 유일한 진본
그림' 등 이토록 극찬을 받고 있는 <몽유도원도>는 한국에 없다. 꿈같이 사라진 그림이다.
이 그림은 어느 이른 봄날, 젊은 왕자의 꿈을 그린 것이다. 1447년,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박팽
년과 함께 복숭아 꽃나무들 사이로 첩첩산중 무릉도원으로 들어갔다가 뒤따라온 신숙주, 최항과 함께
시를 지으며 거닐다 잠에서 깼다. 안평대군은 화가인 안견을 불러 이 꿈의 내용을 화폭에 담게 했다.
안견은 세종 때부터 성종 때가지 여섯 왕을 모신 왕실 화가로, 화가로서는 최고위직인 정6품을 넘어
정4품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단 사흘만에 안평대군의 꿈을 그려냈다. 무릉도원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이는 조감도법으로 묘사되었다. 정교한 세부 묘사와 영롱한 채색으로 현실과 이상향을 동시에 잡아
낸 걸작 중의 걸작으로, 제작 연대가 알려진 현존하는 조선 시대 산수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
기도 하다.
<몽유도원도>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든 것은 안평대군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사회적 명망가 21명의 찬
문이 더해진 것이다. 그림 제작 3년 후인 1450년에 안평대군은 그림의 제목을 직접 쓰고, 감색 바탕의
비단 위에 붉은 글씨로 6행의 시를 적어 넣은 다음 그림 제작의 배경을 쓴 발문을 더했다. 그림은 원
래 38.6센티미터 X 106.2센티미터의 크기였으나 찬문이 더해지면서 20여 미터가 되었다. 이로써 한국
전통문화 최절정기의 시 - 서 - 화가 삼위일체로 어우러진 대작이 탄생했다. 최고의 대작 회화에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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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고의 시와 서 23점이 들어 있는 이 그림의 가치는 유례가 없다.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도가적 이상향
을 노래한 조선조 사대부들의 정신세계를 투영한 이 작품은 예술과 문화, 정치와 사회상을 반영한 천
하의 명품이자 한국 최고의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몽유도원도>, 그 위대한 문화재가 그 주역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림을 주문하고, 제목, 발문,
찬시를 쓴 안평대군은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에 일어난 계유정난에 휩쓸려 35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
고 죽는다. 그의 글씨도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그림의 찬문을 지은 이들도 대부분 계유정난 때 희생
되었지만 안견은 살아남았다. 안견은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 역시 모두 사라졌다. 오늘날
그의 작품으로는 58점이 추적되었지만, 진품은 <몽유도원도> 외에 남아 있지 않다.
<몽유도원도>가 사라진지 440년이 지난 1893년, 이 그림이 일본 가고시마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고시
마에 거주하던 시마즈 히사시루시라는 사람이 소장하고 있었다. 시마즈가 어떻게 <몽유도원도>를 손
에 넣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가고시마의 영주로 임진왜란에 출병한 왜장의 후손이었
다. 따라서 이 작품이 임진왜란 때 약탈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시마즈 히사시루시 이후의 그림의 행방
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림은 시마즈에서 그의 아들 시마즈 시게오에게 넘겨졌고, 시게오는 이 그림
을 가고시마의 후지다 사츠미에게 3천 엔에 담보로 잡혔으며, 후지다는 이것을 오사카의 소노다 사이
지에게 팔았다. 1947년 소노다는 이 그림을 도쿄의 골동품 가게인 용천당에 팔았다. 이때 그림은 액자
에 있었으나, 글씨는 두루마리에 흩어져 있었던 것을 현재와 같은 2편의 작품으로 표구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 초, 이 그림은 덴리 대학의 소유가 되어 현재 중앙도서관에 있다. <몽유도원도>는 이미 1933
년에 일본의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되었고, 1939년에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골동계의 비화에 따르면, 패전 후 일본의 궁핍하고 혼란한 시기에 이 그림은 여러 사람의 손에 돌고
돌았다고 한다. 1947년에 전 국립박물관장 김재원 박사가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의 한 미술사가 이 그
림의 구입 가능성을 말했다는 일화가 있었다 한다. 이때 그림 가격은 수천 달러였는데, 우리 정부는
그만한 돈을 주고 구입할 형편이 아니었다고 했다. <몽유도원도>는 한국 땅에도 나타났었다. 1949년,
골동상 장석구가 이 그림을 들고 부산에 나타나 300만 원을 부르며 구매자를 물색했다. 당시 그러한
거금을 주고 살 만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장석구는 그림을 다시 일본으로 가져갔다. 1986년 경복궁
국립 중앙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덴리 대학에서 이 그림을 15일간 대여받아 전시한 적이 있다. 1996년
에는 호암미술관에서 '몽유도원도와 조선 전기 국보전'을 열고 두 달간 전시했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죽음과 함께 찬문에 참여한 인물들이 대거 처형을 당하면서 사라진 것으
로 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다수의 중요 인물들이 관련된 만큼 누군가가 은닉시켜 잘 보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 그림에 관해 어떠한 언급도 발견할 수 없다. 문화재는 최초로
발견된 장소에 귀속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작품은 근대 초에 제작되었고, 제작 연대와 제작 경위가
뚜렷하다. 또한 이 작품에는 한국 역사의 중요 인물들이 다수 직접 참여한 만큼 한국의 문화재로 간
주되는 것은 확실하다. 단지 제작 후 행방이 알려지지 않다가 440년이 지난 후에 일본에서 처음 발견
되었고, 발견된 지 40년 후에 일본의 문화재로 지정된 만큼 현실적으로 일본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임진왜란 때 약탈되었을 가능성도 크며, 일제 강점기 모든 문화유산이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을 때 유출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이 어떻게 일본에 건너갔는지 밝혀
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최근 해외 문화재 반환 운동을 펴고 있는 시민단체들은 <몽유도원도>의 환수
에 진력하고 있다. 이것은 온 국민의 간절한 희망이기도 하다. 일부 단체는 <몽유도원도>를 약탈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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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재로 부르며 최우선 순위의 환수 대상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어떻게 일본에 건너갔는지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일본에 유출된 경위를 모르는
상황에서 무조건 약탈 문화재로 부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한국의 역사와 문화 예술이 그토
록 깊이 투영된 그림이 외국인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더욱이 일본
은 한국의 문화재를 샅샅이 약탈해 간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에 넘어간 <몽유도원도>를 약탈 문화재로
간주하는 것은 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정확한 근거도 없이, 외국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를 약탈로
전제하고 반환 운동을 벌이는 것은 역효과만 불러올 수 있다. 더욱이 <몽유도원도>에 얽혀 있는 비화
가 사실이라면, 즉 해방 후 몇 번이나 구입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환수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기회
를 놓친 것이 분명하니 이를 약탈 문화재로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약탈 문화재는 주권이 제약된 기
간에 불가항력적으로 빼앗긴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 구입할 수 없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
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문화재의 반환이나 영구적인 대여를 법으로 금하고 있다. 이것을 우회하는 방법으
로 문화재를 단기 대여하여 기간을 연장하는 방법이 있다. 외국 박물관이 소장한 문화재를 정확한 근
거 없이 약탈된 것으로 간주하여 반환 운동을 벌인다면, 누가 그 문화재를 대여해 주겠는가? 그것은
단기간이나마 대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저버리는 처사이다. 따라서 약탈 문화재라는 전
제 하에 환수 운동을 펴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덴리 대학 측에 상응하는 문화
재를 제공함으로써 <몽유도원도>를 대여 받을 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덴리 대학
이 이 그림을 처분할 경우, 우선적으로 한국에 매각한다는 약속을 받는 경우 심정적으로 위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여이건 구입이건 이제는 아주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몽유도원도>의 막대한
가치 때문이다. 이 작품을 10억 달러 정도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몽유도원도>의 반환이 당장
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대안으로 작품을 정밀 복사를 하여 한국에서 소장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
다. 오늘날 약탈 문화재의 원래 소유국들은 대부분 복제품을 제작하여 원래 장소에 놓아두고 아쉬움
을 달래고 있다. 그렇다고 약탈 문화재 반환 운동을 단념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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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바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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