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이 류이치로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이 책은 ‘커피와 커피 하우스가 없었다면 프랑스 대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에서
커피가 홍차에게 밀려난 원인이 여성을 배제했기 때문이라고?’,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독일 혁명
의 트리거를 당긴 것이 커피였다는데?’ 등 이슬람 수피교도들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도구로 마
시던 ‘검은 음료’가 역설적으로 상업 자본가와 정치 권력자의 ‘검은 욕망’을 자극하며 아라비아와
유럽, 나아가 전 세계를 제패한 이야기를 다룬다.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우스이 류이치로 지음
▣ 저자 우스이 류이치로
도쿄대학 명예 교수. 1946년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났다. 1972년 도쿄교육대학 독일문학과를 졸업하
고 1974년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니가타대학 교양부 조교수를 지냈으며, 도쿄대학 교양학부
교수, 테이쿄대학 외국어학부 교수를 지낸 후 2014년에 퇴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네티 라드바니에서 안
나 제거스로』, 『바하오펜론집성』, 『빵과 와인이 돌고 신화가 돌고』, 『말라버린 나무의 언어』, 『기
억과 기록』, 『고해정토론』, 『카를 슈미트와 현대』, 『아유슈비츠의 커피』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이슬람 수피교도들이 ‘욕망을 억제하고 수행에 정진하기 위해’ 즐겨 마셨던 독특한 ‘검은 음료’, ‘커피’
라는 이름의 이 음료는 역설적으로 17세기 유럽 상업 자본가와 정치 권력자의 욕망을 자극하며 유럽
과 전 세계 문화를 바꿔 놓기 시작했다.
아라비아의 커피가 바다 건너 영국에 전해진 것은 ‘커피 하우스’를 통해서였다. 1652년, 런던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그 역사적인 커피 하우스의 주인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출신의 파스
카 로제였다. 그는 레반트를 무대로 활약하던 상인 대니얼 에드워즈의 시종이었는데, 매일 아침 주인
을 위해 커피를 끓이던 습관이 커피 하우스 창업으로 이어진 셈이었다. 그렇게 출발한 런던의 커피 하
우스는 우여곡절 끝에 폭발적으로 성장해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연 지 30여 년 만인 1683년에
3,000여 곳, 1714년에는 8,000여 곳으로 늘어났다.
17세기 후반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영국은 ‘없는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
다.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한 커피 하우스는 영국의 이러한 시대 상황, 니즈와 절묘하게 맞
아떨어졌고, 그 결과 커피 하우스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커피 산업이 급성장했다. 커피 산업과 커
피 문화의 급성장으로 이어지며 커피와 커피 하우스는 시민의 일상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까지 런던 시민 생활의 중심을 차지하던 커피 하우스는 18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급격히 쇠락한다. 실제로 1714년에 8,000곳을 넘어섰던 런던의 커피 하우스가 1739년에는
551곳으로 줄었다는 통계가 발표될 정도였다. 한때 영원할 것처럼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던 영국의 커피
하우스 열기는 왜 갑자기 시들해졌을까? 그리고 그 열기는 왜 홍차와 티 하우스로 옮겨 붙었을까?
그것은 영국의 커피 하우스가 사회적 기능을 다했다는 점을 중요한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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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미롭고도 인상적인 요인을 한 가지 더 들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애초에 영국 커피 하우스가 여성을 철
저히 배제하며 탄생하고 성장했기에 결국 ‘여성 청원’ 등 거센 반발에 부닥치며 직격탄을 맞아 쇠락의 길
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영국의 커피와 커피 하우스의 운명을 바꿔 놓는 데 그치지 않고, 홍차를
매개로 한 중국과의 아편 전쟁으로까지 비화하며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
이 책은 “‘커피는 원래 와인이었다’라는 말의 숨은 의미는?”, “커피가 ‘니그로의 땀’이라는 섬뜩한 별명
으로 불리게 된 은밀하고도 잔혹한 이유는?”, “‘커피는 포르투갈 말을 한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
까?”, “커피 문명과 전쟁은 왜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일 수밖에 없는가?” 등 커피를 둘러싼 근원적 의
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날카롭게 통찰한다.
▣ 차례
서문 커피와 권력이 서로를 갈망하고 이용하며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다
01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검은 음료’ 커피
02 커피의 상업적 가치를 간파하고 이익을 극대화한 이슬람과 유럽 상인
03 영광의 자리를 홍차에게 빼앗긴 영국 커피
04 프랑스 혁명의 인큐베이터가 된 커피와 카페
05 커피를 원하는 권력, 권력을 원하는 커피
06 19세기 후반, 식민지 정책을 통한 동아프리카 커피 플랜테이션에 광적으로 몰입한 독일
07 바이마르 공화국의 숨통을 끊어 놓은 브라질의 ‘커피 대량 폐기 사건’
08 자국의 식민지이자 커피 생산지인 나라에 ‘극단적 모노컬처’를 강요하는 유럽 강대국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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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우스이 류이치로 지음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검은 음료’ 커피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 수피교 수도사들은 왜 ‘커피’에 매료되었을까
커피가 맨 처음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전해졌을 때 난생처음 이 독특한 상품을 만난 유럽인들은 단숨에
매료되었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콩처럼 생긴 알맹이를 갈아 만든 검은색 음료에는 아득히 먼 땅 아
라비아 저편이 지닌 이국적이고도 낭만적인 행복감이 스며 있었다. 커피의 기원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에티오피아의 산양치기 칼디의 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칼디는 새 목초지를 찾아 산양 무리를 몰고 갔다가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한
데 웬일인지 낮 동안 배가 부르도록 실컷 풀을 뜯어 먹은 양들이 흥분한 채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당황한 칼디는 가까운 수도원의 스키아들리 수도원장을 찾아갔다. 스키아들리 수도원장은 면밀한 조사
끝에 산양들이 어느 작은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결과 일어난 사태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호기심이 발
동해 그 열매를 잔뜩 따다가 온갖 실험을 해 보았다. 그러다가 급기야 그걸 물에 넣고 끓여서 마셔 보
았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밤새도록 침상에서 뒤척이던 중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
디어가 떠올랐다. 젊은 수도사들에게 그 열매를 끓인 음료를 먹여 보자는 생각이었다. 밤에 정기적으
로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수도사들이 몇 명씩 있었다. 수도사들에게 나무 열매 끓인 음
료를 마시게 한 결과 저녁 예배에서 조는 수도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에 스키아들리 수도원장은
크게 기뻐하며 저녁 예배 때마다 수도사들에게 그 음료를 마시게 했다.
이 밖에 여러 가지 커피의 기원 전설에는 예외 없이 이슬람의 수도사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수
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슬람 신비주의의 수도사들이다. 수피교 수도사들이 동아프리카를 원산지로
하는 커피나무에서 커피라는 이름의 독특한 음료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커피의 상업적 가치를 간파하고 이익을 극대화한 이슬람과 유럽 상인
17세기 전 세계 커피 시장의 유일한 공급원이던 국가, 예멘
『구약성서』에 전해져 오는 대홍수가 지나간 후 노아가 방주에서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은 어디일까? 오
랫동안 터키의 아라라트산을 비롯한 몇몇 장소가 주요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런데 아라비아에도 노
아가 방주에서 첫발을 디딘 곳으로 꼽히는 산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멘의 오래된 도시 사나 옆에 우
뚝 선, 해발 3,660미터로 아라비아반도에서 가장 높은 나비수아이브산이다. 이 산기슭에서 커피 재배
가 시작되었다. 대홍수가 잠잠해진 뒤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흥미롭게도 와인을 만
들기 위해 포도를 심었다고 한다. 이 점을 생각하면 나비수아이브산 기슭은 ‘이슬람 와인’ 카와의 재배
지로 매우 적합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커피나무는 연중 서리 내리는 날이 전혀 없을 정도로 온난한 기후와 연간 1,200밀리미터의 강우량을 필
요조건으로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계곡이나 비탈은 아무리 ‘행복한 아라비아’ 예멘이라고 해도 상당
히 제한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도 2,000미터를 넘으면 서리가 내릴 위험이 있고 고도 1,000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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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여름에 열기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최적의 장소는 남서 아라비아의 서쪽 비탈, 마나하를 중심
으로 하는 해발 1,100~2,200미터 지점을 꼽을 수 있다. 계곡의 풍부한 비탈이 커피 생육에 필요한 일
정하고 따뜻한 기온을 보장해 주었으며, 홍해에서 올라오는 구름이 습기를 제공해 주었다.
예멘의 커피 재배는 대부분 목가적인 가정 농원에서 소규모 형태로 이루어졌기에 최고 성수기에도 연
간 1만 톤을 넘지 못했다. 커피를 재배하자면 우선 밭을 개간해야 하고, 제대로 된 관개 시설을 갖춰
야 한다. 그리고 너무 강한 햇빛이나 해충을 막기 위해 커피나무 주위에 키 큰 나무도 심어 주어야 한
다. 커피 생산 과정은 복잡한 데다 돈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커피나무를 심은 뒤 열매를 맺기까지 5
년쯤 걸리는데, 그때까지는 수익이 전혀 없다. 따라서 커피 재배는 일정한 자본 축적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커피라는 상품은 애초 든든한 자본이 뒷받침되어야만 시도해 볼 수
있는 만만치 않은 산업이다.
커피를 마시는 습관은 순식간에 아라비아, 페르시아, 터키 등 이슬람 세계를 넘어 퍼져 나갔다. 커피
하우스도 아라비아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는 동시에 차츰 유럽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1652년에는 런던,
1666년에는 암스테르담, 1671년에는 파리, 1683년에는 빈, 1686년에는 뉘른베르크, 프라하, 1687년에
는 함부르크, 1694년에는 라이프치히……. 이런 식으로 유럽 각 도시에 생긴 최초의 카페가 꼼꼼히 기
록되어 있다. 커피 수요는 갈수록 늘어나는 데 반해 커피 원료의 유일한 공급 국가는 예멘뿐이었다.
예멘은 세계 커피 시장을 독점하는 국가로 위세를 떨쳤다. 커피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
며 예멘은 미증유의 풍요를 구가했다. 당시는 ‘행복한 아라비아’의 낙원 시대였다.
생산자에게 구매한 커피는 최종적으로 티하마 평원에 위치한 마을 베이트알파키에 집결했다. 베이트알
파키는 예멘에서 가장 큰 것은 물론 세계 최대 커피 시장으로도 유명했다. 이집트, 시리아, 이스탄불,
모로코, 페르시아, 인도, 그리고 유럽 각지에서 온 커피 상인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커피를 출하하는
곳은 모카, 호데이다 등 홍해에 접해 있는 항구였다.
‘아라비아 모카’라는 명칭은 커피 문명이 갖는 독특한 문제를 명확히 보여 준다. 아라비아에서 생산된
커피가 출하되는 항구 이름을 따서 ‘모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딱히 이상할 것이 없다. 모카는 17세
기 중반 무렵 이미 연간 8만 포대(1포대는 약 60킬로그램)를 출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커피 출하가 모
카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호데이다나 그 밖의 항구에서도 양적으로 따지면 모카보다 더 많
은 물량을 출하하고 있었다. 모카가 예멘 커피를 대표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유럽 중심주의 사관에 따
른 현상이다. 모카항의 특수성이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유럽 선박이 오직 이 항구에서만 직접
기항을 허락받아 커피를 매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커피 교역은 처음부터 거창한 국제성을 띠었다. 초기 커피 교역을 주도한 이는 모카나 아덴을 비롯한
아라비아 소도시의 상인들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아라비아인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옛날부터 아라
비아에 살면서 상업 활동에 깊이 관여해 온 유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가장
오래된 커피에 대한 노래로 『카트와 커피』가 있다. 17세기 예멘의 유대 상인들 사이에서 불린 이 노
래는 아라비아 문자로 기록된 히브리어 노래다.
커피 교역 독점권을 남아라비아 상인에게서 빼앗은 카이로 거상들
커피 교역에는 수많은 중소 상인이 관여했다. 그런데 커피가 이슬람 세계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고 여러
대도시에 1,000곳이 넘는 커피 하우스가 들어서게 되면서 커피 교역은 이전과 달리 막대한 이익을 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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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는 사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카이로의 거상들이 이러한 커피 교역을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할 리 없
었다. 그들은 곧바로 남아라비아 상인들에게서 커피 교역 독점권을 빼앗았다. 이는 약삭빠른 이익 계
산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카이로의 거상들은 커피를 그들 교역 활동의 중심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역사적 필연에 쫓기고 있었다.
카이로는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한 살라흐 앗딘이 건설한 도시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
를 정복한 이후 카이로는 제국의 엄청난 위력과 결합해 한층 더 강성한 상업 도시로 발전에 발전을 거
듭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카이로의 거상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대륙을 아우르는 특권적
위치를 점한 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유럽인의 인도양 진출이 본격화됨에 따라 카이
로의 거상들은 오리엔트 교역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그 손실분을 메우기 위한 대응책을 찾느라
고심했다. 그때 신이 내려 준 선물처럼 갑작스럽게 출현한 신상품이 바로 커피였다. 그리고 커피는 17,
18세기에 그들의 대표 상품으로 우뚝 서게 된다.
카이로의 창고는 예멘에서 재배된 커피가 수납되는 주요 장소였다. 경로는 두 가지였다. 예멘에서 육
로로 북상하면 이슬람을 상징하는 도시 메카가 있다. 메카는 이슬람인의 성지일 뿐 아니라 당시 세계
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메카를 찾는 성지 순례자의 카라반 부대가 자
연스럽게 거대한 수송 기관이 되었다. 예멘 커피는 이들 카라반 부대를 통해 카이로로 운반되었으며
1720년 무렵 그 운반량은 연간 2,000여 상자(1상자, 185킬로그램)에 달했다. 그러나 그것은 홍해 바
닷길로 운송되는 양의 고작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커피는 예멘 연안 항구에서 홍해를
건너 카이로로 옮겨졌다.
아프리카 대륙과 아라비아 대륙 사이에 있는 좁고 긴 바다 홍해는 바닷속 해조 때문에 물빛이 붉은빛을
띠곤 해서 홍해로 불리게 되었다. ‘행복한 아라비아’와 ‘루주 빛 바다’ 같은 모카커피에 스며 있는 이국적
정서는 유럽으로 확산되는 커피의 이미지를 이상 행복감(Euphoria, 감정의 흥분성 장애로 근거 없는 병
적 행복감에 젖는 것)의 흥취로 물들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루주 빛 바다’는 그 우
아한 닉네임과 달리 역풍과 저류, 얕은 여울 등의 변수가 많은 난항 지역이었다.
커피는 처음부터 투기성이 강한 상품이었다. 커피콩의 생육 상태는 물론이고 홍해를 건너는 선박의 행
운과 불운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지다와 수에즈에서 카이로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 커피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1732년에는 강풍으로 커피 3,000상자를 실은 배 12척이 침몰하는 사고
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커피 가격은 순식간에 50킬로그램에 35.5피아스터까지 치솟았다.
이런 가격 불안정 문제를 해결하려면 카이로 상인들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여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우선 홍해는 난코스 지역이므로 획기적인 항해술 개량이 뒤따라야 한다. 좀 더 성능 좋은 나침반과 좀
더 정확한 지도가 필요하고 승선 여건도 질적인 개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상품으로서의 커피는 기상
조건에 크게 좌우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터라 날씨를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런 점이 오히려 커피가 지닌 재미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커피는 저장이 수
월한 상품이다. 실제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창고에 넣어 두어도 그다지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어찌 된 일인지 쥐들이 다른 곡식을 다 건드려도 커피만은 건드리지 않는다. 이는 저렴할 때
잔뜩 사서 쌓아 두었다가 커피가 흉작일 때 방출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바로 이 점을
파고들어 투기적 매입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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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역사상 최초로 커피 플랜테이션을 운영해 이익을 극대화하고 커피 산업의 메커니즘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네덜란드 상인
동지중해 연안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통일된 이후 안정된 정세를 기반으로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
어졌는데, 그곳에서 활약한 유럽 각국 상인을 ‘레반트 상인’이라고 불렀다. 레반트 상인은 외국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다. 동지중해에서 싸게 사들인 상품이 커다란 이익을 남기면서 유럽 각국에
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간 덕분이었다. 커피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상인에게 커피는 막대한 수익을
보장해 주는 상품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레반트 상인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커피 교역에 참가한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네덜란드의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 출신 상업 자본가들이었다. 예멘 커피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할 당시
홍해는 이슬람 세계와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력이 접하는 지점으로, 국제 상업 전쟁의 격전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17세기 전형적 자본주의 국가 네덜란드의 활동에는 독특한 점이 있었다.
모카커피가 암스테르담에 정기적으로 수입된 것은 1663년의 일이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그 이전부터 이
미 본격적으로 커피 교역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인이 사고파는 커피는 사실 네덜란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커피는 배에 실려 다른 이슬람권 지역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메카와 메디나에서 형성되기 시작
한 커피에 관한 지식과 습관은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이슬람권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그런데 과연
누가 인도와 인도네시아 시장으로 커피를 싣고 갔을까? 우선, 메카 순례자 무리에 끼어 사막을 가로지르
는 카라반 부대를 꼽을 수 있다. 그 밖에 바닷길로 커피를 나르는 방법도 있었다. 그 동인도 항로를 마치
주머니 속 제 물건인 양 마음껏 활용한 주체가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42년에 커피 3만 2,000킬로그램을 인도의 캘커타에 들여
왔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왜 그토록 커피 교역에 열의를 쏟았을까? 그것은 모카에서 싸게 구매한 상품
이 인도에 가면 비싸게 팔리는 ‘가격 차’가 주된 이유였다. 커피 소비량은 날로 늘어 가는 데 반해 커
피 산지라고는 예멘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상인은 마침내 커피 원두를 사서 파
는 것보다 직접 생산해서 파는 것이 훨씬 이익이 크다는 것을 간파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식민
지에 커피 플랜테이션을 구축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다.
첫 시도는 실론, 즉 오늘날의 스리랑카에서 이루어졌다. 1658년의 일이다. 그러나 네덜란드 커피의 대
표 산지가 된 곳은 스리랑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이다. 바타비아(자카르타가 네덜란드의 식
민지일 당시의 이름) 총독은 자바섬에서 커피를 재배하기로 계획을 세운 뒤 모카에서 커피 묘목을 들
여왔다. 1680년 즈음의 일이다. 향신료의 섬이던 자바는 머지않아 온통 커피나무로 뒤덮였다. 이것이
자바 커피의 탄생 배경이다.
1712년 자바 커피 894파운드가 바타비아에서 암스테르담과 미델뷔르흐로 보내졌다. 아라비아 상인이
개입하지 않은 최초의 ‘식민지 커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커피 재배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의 막대한 수입원이 되어 주었고, 바타비아 총독은 본국 정부로부터 유능함을 인정받았다. 또한 자바
커피의 독특한 풍미와 빛깔, 아로마는 전 유럽에서 호평받았으며, 순식간에 스탠더드 커피 자리를 차
지해 버렸다.
바야흐로 커피는 유럽의 식민지주의 역사를 검게 물들이는 상품으로 자리 잡아 갔다. 또한 커피는 글
자 그대로 지구 위의 자연과 인간을 개조하는 근대 대표 상품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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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네덜란드 상인이 예전처럼 커피를 아라비아 상인에게 최대한 싸게 사들인 뒤 다른 상인들과 경쟁하면
서 되도록 비싸게 팔던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커피를 생산하는 방식을 취하면서부터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였다.
자바섬은 오랜 옛날부터 쌀을 재배하는 지역이었다. 그곳에 어느 날 갑자기 서구인이 몰려와서는 주식
인 쌀농사를 커피 재배로 바꿔 버렸다. 이처럼 유럽 시장을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 발생하는 제
3세계의 식량 부족 상황은 구조적인 모순이 되어 버렸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 혈안이 된 토지 소
유주는 유럽 상류층이 부럽지 않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반면 빈곤층은 먹을 쌀이 없어서 한 지
역 전체가 굶어 죽는 참극이 일어나곤 했다. 이는 제3세계의 기본적 생산 구조가 유럽의 소비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형성돼 있음을 말해 준다. 게다가 그 상품이 내수보다는 세계 시장에 지나
치게 의존했기 때문에 국가의 자율 경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제3세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질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유럽을 화려하게 물들인 커피와 커피 문
명을 위해 커피콩을 제공한 생산자의 실제 모습이었다.
커피는 ‘자연적’ 음료라고 말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그냥 두어도 개나 고양이가 마시는 그런 음료가 아
니라는 의미다. 실제로는 창고에 쌓아 둔 커피콩을 굶주린 쥐조차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다.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 커피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이는 수피교 수도사와 신도다. 그들은 왜 커피를 마
셨을까? 그들의 특수한 인간적, 정신적 욕구가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커피를 좋아하
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이들도 당연히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커피가 대량으로 유통되고 소비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업 자본은 인위적으로 사람들의 커피 욕구를 만들어 내야 했다. 상
업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내재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장치다. 커피라는 신종 음료 소비
를 늘리기 위해 상당한 재력을 가진 상인은 호화로운 커피 하우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
서 커피 마시는 방법을 보여 주면서 커피 욕구를 돋우고 정착시켰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내적 욕구’로 정착된 상품이 이번에는 ‘외적 자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
나 새롭게 생겨난 인간의 욕구는 점점 커져 가는 데 반해 외적 자연은 친절하게 대응해 주지 않았다.
외적 자연은 커피 생산을 위해 전면적으로 재편성된 것이다. 결국 커피 문명의 발전은 선진 자본주의
제국에서 조달된 자본과 서인도 제도, 중남미, 아프리카 대륙 등의 대지가 결합해 인간과 자연의 전면
개조를 추진하게 된다. 한편 커피 생산에 종사하는 대다수 농민은 흑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과
가족에게서, 자신의 언어에서, 인간의 자연적 요소 일체로부터 뿌리 뽑힌 채 머나먼 곳으로 보내진 노
예들이었다.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이 내려섰다고 전해지는 예멘의 산비탈에서 시작된 역사
는 구원의 역사가 되지는 못한 셈이다.
영광의 자리를 홍차에게 빼앗긴 영국 커피
17세기 후반, ‘없는 것을 계속 만들어 내야 하는’ 영국에게 유용한 도구가 되어 준 커피 하우스
1652년 런던의 한 모퉁이에서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런던의 첫 번째 커피 하우스는 허름한 가
게로 출발했다. 런던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탄생한 경위는 비교적 상세히 전해진다. 레반트를 무대로
활약하던 상인 대니얼 에드워즈는 터키에서 귀국할 때 파스카 로제를 시종으로 데리고 왔다. 로제는
주인을 위해 매일 아침 커피를 끓였는데, 그 신기한 습관이 친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다가 에
드워즈는 로제에게 커피 하우스를 열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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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그런데 뜻밖에도 로제에게는 ‘선구자의 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경쟁 상대가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번창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인근의 술집 주인들이 상부에 커피 하우스를 폐쇄해 달라고
진정서를 낸 것이다. 그들의 로제를 공격한 주된 논거는 로제가 공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
다. 시의 참사원 가운데 예전에 레반트 상인으로 활동했던 호지스라는 인물이 자신의 마부 크리스토퍼
보먼을 로제의 공동 경영자로 앉힘으로써 사건을 무마하려고 나섰지만 결국 로제는 ‘괘씸죄’로 런던을
떠나게 되고, 커피 하우스는 보먼의 소유가 되었다. 보먼은 6,000펜스를 들여 가게를 새롭게 단장했다.
이후 런던의 커피 하우스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해 1683년에는 3,000여 곳, 1714년에는
8,000여 곳에 달했다.
그렇다면 영국 런던에서 커피 하우스 문화가 그토록 번성한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대영 제
국은 일곱 군데 바다에서 네덜란드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업 자본주의 국가였다. 상인들은 인도 저편
의 향료 제도, 서인도 제도, 남북아메리카 대륙 등과의 원거리 무역을 추진하면서 중상주의 시대를 활
짝 열었다. 상업 활동은 기본적으로 세계 각지의 상품 가치 차이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세계를 무대
로 활동하는 상인이라면 무엇보다 세계 각지의 다양한 정보에 밝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보를
얻고자 해도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17세기 중반 영국에는 왕의 정부에서 발행하는
신문밖에 없었으며 그 정보는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유럽과 전 세계에서 새
롭게 들어온 신선한 정보가 실린 신문이 필요했다. ‘신문을 만들자!’ 그러나 신문을 만들기에 적절한 장
소가 없다. ‘그렇다면 커피 하우스에서 하자!’
새로운 정보를 얻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우편’이다. 하지만 변변한 우편 제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1678년 영국에서 국가 우편 제도가 비로소 만들어졌으나 배달 시스템이 엉망이었다.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우편 제도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금융업자 로버트 머리가 ‘1페니 우편 제도’를 만들
었다. 1680년의 일이다. 이는 사적인 우편 제도이자 커피 하우스를 기반으로 편지, 신문 발송 및 배달
을 조직화한 시스템이었다. 어딘가로 편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은 커피 하우스에 걸려 있는 자루에 편
지를 넣고, 편지가 어느 정도 모이면 배달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상인들은 돈을 융통해야 하고 할 수만 있다면 주식을 팔고 싶어 했다. 하지만 주식 거래소가 없
었다. 1690년 무렵 왕립 거래소인 로열익스체인지에서 주식 거래가 가능해졌지만 주식 거래와 관련된
모든 일을 처리하기에는 공간이 충분치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의 커피 하우스가 부족한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또한 해외 활동은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확하고 신속한 정보와 원거리 교역 관련 사고 보
상 등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그 시작 역시 커피 하우스에서 출발했다. 1688년 무렵 에드워드 로이드는
런던 타워 스트리트에 커피 하우스를 열고 선원과 여행자를 상대로 장사를 시작했다. 1691년 자신의
커피 하우스를 금융가인 롬바드가로 옮긴 후 고객 서비스의 일환으로 발행한『로이즈 뉴스』는 보험 가
입을 희망하는 선박 리스트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당시 보험은 주로 개인 보험 사업자가 담당했기 때
문에 리스크가 컸고, 그런 만큼 좀 더 정확한 정보를 필요로 했다. 그 연장선에서 로이즈가 직접 작성
한 ‘영국 및 외국의 선박 일람’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는 훗날 신뢰할 수 있는 정확한 뉴스
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 보험 회사를 탄생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이후 『로이즈 뉴스』는 『로이즈 리스트』가 되었다. 영국 주요 항구에 배치된 로이즈 통신원은 입항
한 선박의 수하물 정보를 정확히 기재한 리스트를 보내 주었다. 리스트는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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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하우스의 메신저에게 전달되었다. 로이즈 커피 하우스 고객은 다른 사람들보다 몇 시간 더 빨리 귀한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전달된 리스트를 기반으로 발행된 신문 《로이드 리스트》 덕분
이었다.
17세기 후반 다른 나라에 비해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던 영국은 ‘없는 것’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커피 하우스를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해 급성장을 이룬 셈이 되었다.
런던은 세계 무역의 중심이었다. 대영 제국 선박은 동인도로, 서인도 제도로, 일곱 군데 바다를 분주히
돌아다녔다. 그렇다면 본국에서 세계 무역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커피 하우스로 모여들었다. 커피
하우스는 여러 장점을 갖고 있었다. 우선, 한 잔의 커피값만 지불하면 커피를 마시면서 몇 시간이고
머무를 수 있었다. 또 매일 커피를 마신다고 해도 사무실 임대료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임대료를
지불하며 사무실을 얻을 필요도 없었다. 또한 커피 하우스에는 최신 정보가 가득 실린 정기 간행물,
우편물 등 업무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그런 터라 주식 중개인, 각계 정보통과 런던의 내
로라하는 엘리트들이 커피 하우스로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한 것이 커피 하우스의 전부는 아니다. 17세기 말 즈음 런던의 커피 하우스를 특
징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론 형성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원거리
무역은 이익은 크지만 늘 다양한 리스크에 골치를 썩게 마련이고, 그런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강력한
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법이다. 힘센 군대를 조직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곧 국가의 조세 조직
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왕과 거대 독점 상인의 강고한 결합을 바탕으로 근대 국
가가 정비되어 가고 있었다.
런던에 뿌리내린 커피 하우스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공론의 장이 되었고, 점차 모반과 정치적 허위 선
전, 인신공격의 온상이 되어 공권력에 치명타를 안길 수 있는 요소를 품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정부
도 커피 하우스가 대중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방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국 정부
는 커피 하우스를 폐쇄했다. 그러나 이는 상황을 오판한 처사였다. 모든 당파가 이 ‘꺼림칙하고 불법적
인 행위’에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금세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정부의 갑작스러운 조
치로 생계를 위협받은 커피 하우스 주인들은 ‘향후 가게에서 불온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유의하
고 만전을 기한다’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후 대영 제국의 커피 하우스는 이전보다 더욱 번성하게 된다. 커피 하우스의 번영은 정부 입장에서
도 세수 측면에서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커피 1갤런(약 4.545리터)당 4펜스의 세금이 국고로 들어
갔고 커피는 국가의 중요 재원이 되었다. 국가를 비판하는 자유로운 토론장으로서의 커피 하우스와 국
가가 서로 호흡을 맞추며 2인 3각 게임을 시작한 셈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인큐베이터가 된 커피와 카페
커피와 카페가 없었다면 프랑스 계몽주의 운동도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빵 1파운드 가격이 1761년 1수에서 1788년까지 7수로 폭등했다. 당시 전 유럽을 통틀
어 곡물을 수입해서 빵 가격을 유지하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감당할 수 있는 나라는 대영 제국밖에 없
었다. 그런데 상품 가격이 제멋대로 상승할 리는 없었다. 시장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농
민은 빵값이 올라가는 데는 누군가 악의를 품은 검은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농민 폭동이 자
주 일어났다. 1787년 프랑스 전역이 흉년으로 몸살을 앓았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 전체 인구의 85퍼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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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트가 농민이던 시대였다. 그런 농업이 치명적 타격을 입은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이듬해인
1788년에는 더 극심한 흉년이 닥쳤다. 그리고 그해 겨울, 모든 것을 끝장내기로 한 듯 사상 초유의 강
추위가 몰아닥쳤다.
농업이 받은 타격은 프랑스 경제 전반으로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파리 공산품의 지방 판로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마른강과 센강에는 화물선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었다. 맹추위로 센강에 얼음덩어리가 빙
하 조각처럼 떠다니는 바람에 선박 운항이 불가능해졌고, 흉년으로 인해 식료품을 운반하는 배가 사라
지더니 건축 자재를 실어 나르는 배마저 자취를 감춰 버렸다.
프랑스 혁명에 앞선 몇 년간 파리에서는 건축 붐이 일어나서 많은 토목 노동자가 파리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1788년 유례없는 강추위가 몰아닥쳤고 사람들은 봄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1789년 마침
내 봄이 왔지만 경제 위기로 인해 공사 현장은 그대로 방치되었고 파리 시내에는 실업자가 넘쳐 났다.
그런데 엄동설한과 끔찍한 불황이 겹친 파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가 넘쳐흘렀다. 1788년 8월 8일
루이 16세가 삼부회 소집을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1789년 1월 24일에 선거 규칙이 공표되고 드디어
선거가 시작되자 파리 전역에 묘한 흥분이 감돌기 시작했다.
파리는 항상 대도시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려고 지방에서 막 올라온 젊은 지식인으로 북적댔
다. 문인, 변호사, 예술가, 의사, 학생들이 파리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1789년에는 특히
더 일거리가 없었다. 그들 대다수는 교외 소시민이나 노동자의 집 다락방에 살면서 루소, 볼테르, 몽테
스키외 등의 계몽사상에 고무되어 길에서 구한 정치 팸플릿의 혁명 사상에 열광했다. 읽고 쓰지 못하
는 사람들이 80퍼센트를 넘는 시대였던 터라 20퍼센트에 속하는 사람들이 나머지 80퍼센트에게 팸플
릿 내용을 읽어 주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파리와 그 교외까지 합쳐 6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는 예전부터 겪어 보지 못했던 거대한 정치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산책로와 광장, 교통 요지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모여서 뉴스를 듣고, 서로
이야기 나누며 토론을 벌였다. 소용돌이의 중심은 거대한 장방형 팔레루아얄 광장이었다. 그곳에는 아
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군중에 둘러싸인 연설자가 신문, 팸플릿을 읽은 다음 정치
동향을 설명해 주었고 자신의 요구 사항에 좀 더 탄탄한 논리를 붙여 나갔다. 팔레루아얄 광장 근처에
는 프랑스 계몽주의의 ‘검은 섬광’을 내뿜는 카페가 줄지어 늘어섰다. 삼부회 소집이 공표되는 시점부
터 그들 카페는 그 공공적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기 시작했다.
자국의 식민지이자 커피 생산지인 나라에 ‘극단적 모노컬처’를 강요하는 유럽 강대국
유럽 강대국이 자국 식민지이자 커피 생산지인 나라에 ‘극단적 모노컬처’를 강요한 이유
상품 페티시즘과 자연과 인간 사이의 착취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속성을 지닌다. 지구를 하나의 동
전으로 가정한다면 커피는 화려한 페티시즘과 음산한 착취를 반복하면서 확산해 간 근대의 전형적인
상품이다. 유럽이 커피 생산지에 일관되게 강요한 것은 ‘극단적인 모노컬처’였다. 그 결과로 이들 나라
는 경제적으로 커피 수출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 예로 1979년 아프
리카 대륙의 상황을 짚어 보자. 커피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우간다 98퍼센트, 부룬디 82퍼
센트, 에티오피아 75퍼센트, 르완다 71퍼센트의 극단적인 수치를 보게 된다. 이렇듯 커피 문명의 세계
사적 결과는 적도 근처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커피 벨트를 형성하는 커피 산출국과 주로 북반구에 위
치한 커피 소비국과는 지리적인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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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그런 터라 서로 멀리 떨어진 커피 생산지와 커피 소비지를 이어 주기 위해 커피를 실은 배가 전 세계
바다를 부지런히 오갔다. 커피의 연간 수출 총액은 얼마나 될까? 대략 120억 달러다. 이는 세계 무역
전체에서 원유에 뒤이어 제2위를 차지하는 엄청난 규모다. 공교롭게도 둘 다 ‘검은 액체’지만 원유와
커피의 차이는 확연하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석유는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원료의 하나다. 그
에 반해 커피는 사치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호 식품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바로 이
점이 석유 산출국은 과거 식민지 지배국에 대해 강력한 대항력을 발휘하는 데 반해 커피 산출국은 여
전히 커피 소비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문제는 정치적인 부분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커피 모노컬처의 부자연스러운 생산 시스템은 해
당 국가의 생태계를 무너뜨렸다. 커피라는 상품 생산의 역사는 ‘행복한 아라비아’ 예멘 이래로 ‘무슈
자본과 마담 대지’의 결혼의 역사였으나 이들이 반드시 행복한 부부는 아니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슬
픈 열대』는 한편으로는 ‘슬픈 커피 벨트’의 기록이기도 하다.
내가 서 있는 곳 주변은 오랜 침식으로 토지가 황폐해졌고 미처 일구지 못한 곳은 울퉁불퉁한 채로 버
려졌다. 이 혼란스러운 경관에 책임이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경작을 위
해 무성한 숲을 파헤치고 파괴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양분을 죄다 빨린 뒤 비가 씻겨 내려간 대지는
다시는 커피나무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 탓에 농장은 더 멀리, 아직 인간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비옥한 땅으로 옮겨 갔다. 오래전 세상에서는 인간과 토지 사이에 천 년의 친밀한 결합이 만들어
졌고, 그 속에서 인간과 토지가 서로를 갈고 닦은 배려 깊은 호혜 관계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더는 그런 관계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곳의 토지는 능욕을 당한 뒤 철저히 파괴되었다. 강탈에
다름 아닌 농업은 부를 움켜쥐기 위해 몇 푼 안 되는 이득을 억지로 빼앗고 난 후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이른바 개척자라고 불리는 자들은 개간하는 일과 거의 동시에 토지를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이쪽에서는 처녀지를 헤집고, 저쪽에서는 황폐한 땅을 버려둔 채 옮겨 가기 때문에 띠 모양 토
지밖에 차지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모든 것을 불태우면서 오직 앞으로만 나
아가는 들불처럼 농업의 불꽃은 백 년 동안 상파울루주를 뚫고 지나갔다.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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