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계몽사상가
로크 John Locke 1632∼1704
영국의 대표적 철학자. 근대민주주의의 대표적 사상가. 명예혁명기의 시민
사회관을 제창한 자유주의자이며 경험론적 인식론의 창시자이다. 브리스틀
근교 링턴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출생하여 옥스퍼드대학에서 의학과
철학을 배웠다. 1666년 샤프츠베리의 시의 겸 가정교사가 된 후 그의 신임
을 얻어 정치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명예혁명 직전에는 왕당파의 박해로
쿠퍼와 함께 네덜란드에 망명하여 <정치론(1690)> 및 <인간오성론(1690)>
을 저술하였다. 로크는 지식을 확립하기에 앞서 지식을 만드는 능력인 오
성이 무엇을 다루는 데 적합한 것인가를 음미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스콜라학파와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을 부인하는 동시에 우리가 현재
품고 있는 모든 경험적ㆍ심리적 관념의 발생 기원을 탐구하는 경험론의 입
장을 취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갖는 이들 관념 상호간의 일치ㆍ불일
치ㆍ결합ㆍ배반작용을 지각하는 것을 가리켜 인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결과를 지식이라고 하며 관념이 서로 정당하게 결합 또는
분리한 것을 진리라고 하였다. 한편 정치적인 면에서는 시민적 자유주의자
의 입장에서 개인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의 교리를 강력히 옹호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어 절대왕정을 반박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
나 신으로부터 평등한 자기보존권, 즉 자연권을 부여받았으므로 왕정에 의
하여 자연권이 유린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평등한 자기보존권을
주장한 점에서 홉스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통치권을 법률로
창설하는 입법권, 그 법률을 집행하는 집행권, 외정을 맡아보는 연맹 또는
동맹권을 분립시켜 <3권 분립>을 역설하였다. 또한 정부에 대한 거부권의
행사와 혁명을 일으킬 권리를 인정하여 명예혁명의 도덕적 정당성을 옹호
하였다. 이러한 로크의 민주주의적 사상은 몽테스키외에게 영향을 주었으
며 그의 <사회계약설>은 J.J.루소에 의해 철저화되었다. 또 미국의 독립선
언과 영국의 공리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버클리 Geeorge Berkeley 1685∼1753
17∼18세기 영국고전경험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아일랜드 킬케니 출생. 더블린 트리니티단과대학에서 배우고, 졸업한 뒤 이
대학 연구원이 되어 초기의 중요한 작품을 세상에 내었다. 1713년 런던으
로 나와 대륙으로 외유하고 돌아온 뒤 모교의 학감이 되었다. 공공심ㆍ종
교심의 쇠퇴를 우려하고 미국 버뮤다에 이상적 그리스도교 사회와 그 정신
적 거점이 되는 대학건설을 계획하고 도미했으나 좌절당하여 귀국후 저술
에 전념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라는 근본명제로 요약되
듯이 버클리철학은 한편으로는 J.로크를 계승해 지각된 관념을 인지의 유
일한 대상으로 하고, 또 한편에서는 무력한 관념과는 대조적으로 능동적이
며, 관념을 지각하는 정신만을 유일한 실체로 인정하였다. <시각신론
(1709)>에서 시각과 촉각의 구별을 강조했으나 <인지원리론>에서 지각되
지 않는 추상관념의 존재를 부정하고 추상적 보편관념이란 복수개물을 대
표하는 기능을 부여받은 개별적 관념이라고 했다. 지각되는 관념을 유일한
대상이라고 하는 기준에서 제1성질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로크의 입장을 부
정했다. 지각관념만이 존재한다면 지각되지 않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이 된다. <세계><자아>의 인식범위를 동일시하는 <독아론>적 귀결을 피
하기 위해 <타아>와 <주관일반>의 지각에 따라서 개아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관념존재를 보증했다. 말년의 저작 <앨시프론(1732)><사이리스
(1744)>에서 그의 의도는 신흥자연과학의 유물론이나 같은 시대의 무신론
ㆍ이신론ㆍ자유사상에 대해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호교론이라 할 수 있
다. 이 밖에 <하일러스와 필로누스의 삼대화(1713)> <시각론의 변호
(1733)>등이 있다.
흄 David Hume 1711∼1776
추가설명: 주정주의자이며. 귀납법에 대한 회의 : 경험의 한계 인정.
영국 철학자. 스코틀랜드 에드버러 출생. 에든버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
였지만, 문학ㆍ
철학을 지향하여 J.로크ㆍI.뉴튼 등의 신학문 및 다방면의 학문 서적을 탐
독하였다. 한때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1734∼37년 프랑스에 체재하였다. 44
년 에든버러대학, 51년 글래스고대학에서 교수직을 구하였으나 무신론자라
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1748∼49년 빈ㆍ토리스에 궁정사절로 활동하였고,
52년 에든버러 변호사도서관에서 일하였으며 63년 파리주재 영국대사비서
관이 되었다. 67∼69년 국무차관을 지낸 뒤 에든버러에 정착하였다. 프랑스
에 머무른 뒤 에든버러에 정착하였다. 프랑스에 머무를 때 <인성론>을 집
필하여, 1739년 제1권 <지성론>과 제2권 <정념론>을, 40년 제3권 <도덕
론>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당시에도 악평을 받았으나 오늘날에는 그의 주
저로 꼽히고 있다. <도덕ㆍ정치론(1741∼42)>을 간행, 호평을 받은 뒤 48
년 악평을 받았던 <인성론>의 제1권을 개작한 <인간 오성에 관한 철학논
고(1748)>를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개정판 제목인 <인간오성에 관한 연구
>로 널리 알려져 있다. 51년 <인성론>의 제3권 <도덕론>을 개작한 <도
덕원리에 관한 연구>, 52년 <정치론>을 출판하였고 54∼62년 <영국사(6
권)>를 출판,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은퇴 후에는 이미 출판된
저서들을 다듬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그는 로크, G.버클리와 더불어
18세기 영국 경험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 영향은 J.벤담의 공
리주의와 J.S.밀에게서 나타난다. 또 독일에서는 I.칸트의 비판철학이 그에
게 큰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기 때문에 흄을 중요한 철학자로 평가한다. 그
의 인식론은 인간본성 및 그 근본법칙과 그것에 의존하는 여러 학문의 근
거를 해명하는 일이었다. 그는 인간정신의 기본적 단위를 <인상>과 <관념
>으로 보았고, 지식은 관념의 연합에 의해 성립한다 하였다. 따라서 이 연
합의 3개의 관계인 유사관계ㆍ접근관계ㆍ인과관계 또는 7개의 철학적 관계
(유사, 동일, 공간ㆍ시간관계, 양 또는 수, 성질의 정도, 반대, 인과)를 중요
하게 고찰하였다. 특히 인과관계에서는 <원인>에서 <결과>로의 이행을
습관에 의하여 확립된 신념에 근거한 것이라 하여 그 객관적 필연성을 부
정하였다. 그의 실천철학은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는 유명한 구절이 대
표하듯이, 감정은 오성ㆍ지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며 그것이 인상ㆍ관념
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만 인식론에 관계된다고 보았다. 또 도덕론
에 있어서는 인간의 특별한 도덕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자연주의적
이며 사회생활과 개인의 행복의 근본원리를 공감이라 한 점에서 공리주의
적인 성격을 띤다. 정치ㆍ법사상에도 T.홉스의 <자연상태>의 가정과 계약
설을 비판하고 만인에 공통된 <이익>의 감정에서 법의 근거를 구하는 공
리주의적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 그의 자연주의는 20세기 들어 특히 분석
철학자들 사이에서 주목받았는데, 철학적 정당화가 오직 자연세계의 규칙
성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였다.
홉스 Thomas Hobbes 1588∼1679
영국 철학자, 정치사상가. 잉글랜드 윌트셔주 출생. 옥스퍼드대학에서 스콜
라철학을 배우고, 대륙에서 수학, 자연과학을 연구하였으며, F.베이컨의 영
향을 받아 유물적, 기계론적 세계관을 세웠다. 그는 운동을 유일한 실재로
보았는데, 인간계도 자연계와 같은 원칙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하였으며, 이
탈리아에서 알게된 G.갈릴레이의 물리학상의 업적을 정치학에 적용시켜 이
른바 사회물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스튜어트 왕조를 지지하
는 왕당파로 지목되어 청교도 혁명 직전에 프랑스로 망명, 유물론자 R.가
상디, 철학자 R.데카르트 등과 친교를 나누었다. 그 뒤 크롬웰 정권하의 런
던으로 돌아와 정쟁에 개입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 힘썼다. 왕정복고
후에는 J.블렘홀 등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며 그의 사상이 무신론이라 하
여 금압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찰스 2세의 사부가 되어 그의 비호하에 여생
을 보냈다. 그는 베이컨과는 달리 귀납법이 아니라 기하학을 모델로 하는
연역법을 채용하였는데, 양자의 상즉적 관계에 의하여 이성의 올바른 추리
인 철학이 성립된다고 생각하였다.
저서 <리바이어던(1651)>에서는 사회계약설의 입장에서 절대주의를 이론
화하였다. 즉 자기보존을 위해서 자연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이기적인 개
인집단인 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장이기 때문에 오히려 개인
의 안전을 상실할 수도 있는 결과가 되므로 이성은 보편적인 자연법의 실
현을 요구하게 된다. 이리하여 자연권을 주권자에게 위양하고 주권자는 이
계약을 강행하기 위하여 계약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주권력은 절
대적인 것이라 하였으며, 국가를 거대한 괴물 <리바이어던>으로 비유하였
다. 그 밖의 주요 저서 <철학원리>는 제1부 <물체론(1655)>, 제2부 <인간
론(1658)>, 제3부 <시민론(1642, 47>으로 나뉘어져 있다. 또 <법의 원리
(1640)>에서 인간은 절대적인 주권에 종속될 때 평화적인 공동생존이 가능
하다는 사상을 구체화하였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 Voltaire 1694∼1778
프랑스 계몽사상가ㆍ작가. 본명은 Francois Marie Arouet. 파리출생. 예수
회 계통의 명문교 루이 르 그랑에서 공부하였다. 재학시절부터 문학분야에
서 조숙한 재능을 나타냈다. 아버지는 그를 후계자로 삼을 작정이었으나
문학 쪽으로 깊이 기울었다. 1717년 그 무렵의 섭정 오를레앙공을 야유한
풍자문을 쓴 죄목으로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완성시킨 비극 <에디프
(1718)>가 성공을 거두어, 그 뒤부터 볼테르로 필명을 바꾸고 극작의 성공
으로 얻은 자금으로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그 무렵 시민계급 출신인 그가
문단에 이름을 떨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한 귀족과 언쟁을 하고,
다시 투옥되었다. 이와 같이 특권계급만 우대받는 프랑스 사회를 단념하고,
26년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자유의> 나라 영국으로 건너가 2년 7개월간
머물렀다. 그 사이에 W.셰익스피어 작품을 직접 관람하고 그 무렵의 영국
작가 H.볼링브로크ㆍA.포프ㆍJ.스위프트 등과 교류하였다. 또 영국으로 건
너간 목적의 하나였던 서사시 <앙리아드(1728)>를 출판하였다.
[실러 체재 10년]
1729년 귀국하자 셰익스피어극의 영향으로 극작 <자이르(1732)> 등을 발
표하는 한편, 영국견문기라는 명목으로 프랑스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 <철
학서간(영국서간)>을 간행하였다. 영국을 극단적으로 예찬한 이 책의 진의
를 간파한 당국이 즉각 분서처분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볼테르는 애인
뒤 샤틀레부인과 함께 부인의 저택이 있는 실레로 도피, 약 10년간 머물렀
다. 그는 이 사이에 뒤에 집필되는 역사작품과 철학콩트를 위한 방대한 독
서와 자료수집에 몰두하였다. 실레시절에는 문학작품으로 <이 세상 사람
(1736)>, 극작 <마호메트(1741)><메로프(1743)>, 철학작품으로 <인간론
(1738)> <뉴턴 철학입문(1738)>등을 집필하였다. 45년의 수사관 임명에 이
어서, 4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회원이 되었으나 설화사건으로 다시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이 무렵 명성과 실의 사이를 오가는 자신을 테마로 한 철
학콩트 <자디그(1747)>를 썼다. 애인 뒤샤틀레 부인의 사후 볼테르는 프로
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초청으로 포츠담으로 가, 그곳에서 역사서 <루이
14세의 세기(1751)>와 철학콩트 <미크로메가스(1751)>를 발표하였으나, 프
리드리히 2세와의 불화로 프로이센을 떠났다. 루이 15세왕의 불화로 파리
에 돌아갈 수 없던 볼테르는 한때 제네바 근교에 주거를 정하지만 자작 연
극의 상연을 둘러싸고, 제네바당국과 알력을 일으키는 한편, 55년 11월 1일
에 리스본을 덮친 대지진을 다룬 시로 J.J.루소와 격렬하게 논쟁하였다. 이
대지진을 계기로 59년에 G.W.라이프니츠와 포프의 낙천주의를 야유한 철
학콩트를 익명으로 출판하여 대성공을 거두게 되는 데 이것이 볼테르의 최
고 걸작으로 지목되는 <캉디드(1759)>이다. 그는 철학적으로는 깊은 사상
을 표명하지 않았으나, 이 콩트의 명문구 <우리들의 뜰(밭)을 일구지 않으
면 안 된다>가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인지가 미치지 못하는 신의
섭리와 존재에 깊이 들어가는 어리석음을 꾸짖고, 인간정신이 권위와 종교
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정신은 문명사로 생각되는 대저
작 <풍속사론(1756)>에도 일관되고 있다.
[페르네의 장로시대]
1760년에는 스위스국경에 가까운 페르네에 정착하였다. 근교의 농민에게
호소하여, 농촌개혁에 착수함과 동시에, 빈민구제를 위한 시계공장도 만들
었다. 그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장로의 칭호를 받으면서 자작극을 상연
하고, 유럽 각지로부터 문학자ㆍ지식인을 맞아들였다. 카랄스사건ㆍ시르방
사건ㆍ바르사건에 날카로운 메스를가하여 그는 그들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
해 독자적인 조사를 하고, 그 명예회복에 공헌하였다. 이렇게 판명된 여러
사실에 독자적 종교관을 함께 담아 관용의 정신을 역설한 <관용론(1763)>
도 이 무렵에 집필하였다. D.디드로ㆍJ.R.L.달랑베르편의 <백과전서(1751∼
72)>에도 처음부터 적지 않은 관심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역사
를 중심으로 많은 항목을 집필, 협력하였다. 뒤에 자신이 수정, 편집하여
그 자신의 이상이었던 <철학사전(1764)>을 간행하였다. 오랫동안 대립관계
에 있었던 루이 15세의 사후, 파리귀환을 결의한 볼테르는 시민의 열광적
인 환영 속에 78년 2월 1일 파리에 개선하고, 자작희곡 <이렌(1778)>은 코
메디프랑세즈에서 상연되었다. 긴 여행의 피로와 연일 대환영이라는 극도
의 흥분으로 그해 5월 30일 파리에서 죽었다.
몽테뉴 Michel Euquem de Montaigne 1533∼1592
프랑스 사상가ㆍ철학자. 남프랑스 몽테뉴출생. 1554년부터 페리괴와 보르도
법원에서 근무하였다. 71년 관직에서 물러나 독서생활을 하면서, 감상ㆍ논
고를 써 모아 80년 2권 94장의 <수상록>을 출판하였다. 그 무렵 신장결석
치료를 위해, 동프랑스ㆍ스위스ㆍ독일ㆍ이탈리아의 온천지 등을 거쳐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였는데, 이때의 이야기는 <이탈리아 여행기(1774)>에 기록
되어 있다. 81년부터 4년간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어, 가톨릭 입장에서 국왕
앙리 3세 편에 서면서도 보르도시가 신구급진파의 항쟁의 도가니가 되지
않도록 초당파적 방책을 강구하여 그 안전을 도모하였다. 그 뒤 집필을 계
속하여 88년 3권 107장의 <수상록> 신판을 간행하고, 독서와 글을 쓰면서
지내다 자택에서 사망했다.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인간성의 공통보편이
라는 논거에 입각하여 그 자신의 성격ㆍ행동ㆍ체험ㆍ주장을 솔직하게 적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독자는 저자가 제기하는 문체와 직접 부딪쳐 인간성
일반에 대해 고찰하도록 이끌고 있다. 또 자연과 사회의 사물ㆍ사실을 병
립 또는 대비시켜 고찰케 함으로써 회의와 판단전환을 도입하여, 선입견을
물리치고 객관적인 견지에서 진실을 발견하도록 하는 사고법을 택해 독자
들 스스로가 검증과 탐색의 길로 들어서도록 이끈다. 몽테뉴는 지식을 체
계화하지 않고 그 집적을 자만하지 않으며 사고와 판단력의 자유로운 활동
만을 중시, 그 실현을 매력 있는 문장표현으로 이루어냈다.
몽테스키외 1689∼1755
프랑스의 법학자ㆍ정치사상가. 보르도 출생. 일찍이 법률교육을 받았고
1714년 보르도 곧 법원의 변호사가 되었다. 21년에 프랑스를 정치적으로
풍자하는 <페르시아의 편지>를 익명으로 제네바에서 출판해서 커다란 반
응을 불러일으켰으며, 거기서 프랑스의 전제정치를 자유주의적 견해로서
철저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승려주의도 비판하여, 문학적ㆍ사회비판적인 면
에서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에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프랑
스 아카데미회원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루이 15세가 이를 거절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오스트리아ㆍ이탈리아ㆍ헝가리ㆍ독일 등 유럽 각국을 여행한 뒤
미국에 머물다가 31년 파리로 돌아와 유럽 여행과 영국에서의 경험, 그리
고 장기간에 걸친 로마사 연구 등을 토대로 해서 <로마흥망원인론(1734)>
을 출판했다. 이 책은 로마가 공화제로부터 제국을 거쳐 멸망하기까지의
과정을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론>에 따라 논술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일
생 동안 연구 결과는 <법의 정신(1748)>으로 모아져, 이 책은 법률학의 고
전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학ㆍ정치학ㆍ지리학 등의 고전으로 간주되고 있
다. 또한 그의 입헌정치로의 개혁론은 미국헌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디드로 Denis Diderot 1713∼1784
프랑스 계몽사상가. 샹파뉴지방 랑그로 출생.
성직자가 되기 위해 출생지의 예수회 계통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파
리에 유학해 1732년 파리대학에서 교양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약 10년
동안 고학을 계속하여 수학과 영어를 공부하면서 가정교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43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A.T.샹피옹과 비밀결혼을 했
다. 이 때부터 영어의 해석능력을 살려 그리스사(史)ㆍ의학사전 등을 번역
하고, 45년에는 초기의 자신에게 막대한 영향을 준 영국 철학자 샤프츠버
리 백작의 <인간의 진가와 덕에 관한 시론(1699)>을 프랑스어로 번역ㆍ출
간하였다.
[백과전서의 간행]
샤프츠버리의 <인간의 진가와 덕에 관한 시론(1699)>을 프랑스어로 번역
ㆍ출간할 즈음 영국에서 호평을 받은, E.체임버스 편찬의 백과사전 <사이
클로피디어(초판 1728)>의 프랑스어역 간행을 기획한 A.르 브르통의 의뢰
로, 그는 친구이자 유명한 수학자인 J.L.R. 달랑베르와 함께 그 일에 착수
하였다. 당초에 두 사람은 책임편집인 아래에서 일하였으나, 감수자의 경질
과 기획변경에 따라 둘이서 프랑스인에 의한 독창적인 백과 사전 간행에
착수하였다. 1751년 제 1권을 시작으로 72년 본문 17권, 도판 11권 등 모두
28권을 간행하기까지 <백과사전>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여, 디드로는 그의
일생의 반을 문자 그대로 세기의 대사업에 바쳤다고 할 수 있다. <백과전
서>의 책임편집을 계속하는 한편 철학적으로는 유신론에서 무신론으로 기
울어졌으며, 49년에 익명으로 간행한 <맹인에 관한 서간> 때문에 위험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 하여 파리 교외의 뱅센감옥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철학적 저작으로는 언어기능과 미학의 여러 문제를 다룬 <농아자에 관한
서간(1751)>, 사변논한 <자연의 해석에 관한 사색(1753)> 등이 있으며, 그
의 유물론으로의 전환은 연작 <달랑베르의 꿈(1769)> 및 <생리학의 기초
(1778∼84)>에 이르러 정점에 달하였다.
[문학작품]
문학작품으로 초기에는 소설 <경솔한 아이들(1748)>을 남기고 있으며, <
수녀(1760)>를 계기로 작가로서의 자신감이 커진 디드로는 걸작 <라모의
조카(기고 1762)><숙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기고 1773, 간행 1830)>등을
썼다. 소설작품 외에도 극작에도 의욕을 보여 희곡 <사생아(1757)><가장
(1758)>을 집필하였다. 이 분야에서는, 그가 표명한 극이론, 즉 고전극의
비극과 희극의 중간에 설정한 <진정한 장르>의 제창에 의해 이른바 시민
극 이론가로 알려지고, 이것은 독일 극작가 G.E.레싱에게 계승되어 이웃나
라에서 꽃피었다. 그리고 독자적인 견해를 표명한 <배우에 관한 역설(기고
1773, 간행 1830)>도 있다. 미술과 관련된 것으로는 <회화론(1765)>을 섰
으나, 친구 F.M.그림이 주재하는 <문예통신>에 관전평 <살롱>을 기고하
여 근대 미술평론의 형식을 구축하여 C.P.보들레르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만년에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레닌그라드)로 은인인 예카테리나 2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방문하였다. 그의 필생의 관심은 도덕문제로 <세네
카론(1778)>의 완성에 몰두하였으며, 84년 7월 31일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프랑스 사상가ㆍ소설가. 제네바 출생. 프랑스계 스위스인 시계직공의 아들
로 태어나서 출생과 동시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아버지는 자식을 기르는
데 별로 열성이 없었다. 1728년, 루소는 제네바에서 나와 바랑부인의 비호
를 받아 칼뱅파의 신교도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그 후 42년 파리로
나갈 때까지 자립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동안 노력한 흔적으로는 자연과학ㆍ교육 분야의 논문ㆍ시ㆍ음악ㆍ연극
등이 남아 있다. 50년 <학문예술론>이 디종 아카데미의 현상공모에서 입
상할 때까지, 43∼44년 베네치아 주재 프랑스대사의 비서로 재직한 것을
제외하고, 파리에서 비서와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음악 활동을 계속하는 동
시에 D.디드로ㆍE.B.콩디야크 등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최신 사상
에 접근한, 디드로ㆍ달랑베르가 계획하는 <백과전서>의 음악항목의 집필
을 담당하게 되었다. 음악과의 관계는 평생 계속되었지만, 대표적인 작품은
52년 풍텐블로궁전에서 루이 15세와 퐁파두르부인 앞에서 공연된 <마을의
점장이>이다. 45년, 일생의 반려가 되었으며, 68년에 결혼한 테레즈와의 사
이에 5명의 자녀가 출생했는데 모두 고아원으로 보냈다. 당시 이러한 일은
흔했지만, 이 사건은 루소의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었다.
[저작활동]
루소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학문예술론>은 우연한
계기로 집필하게 되었다. 뱅센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디드로를 면회하러
가던 도중 잡지에 게재된 현상논문의 제목 <학문예술의 진보는 풍속의 부
패에 기여했는가, 아니면 순화에 기여했는가>를 보고 나서 시작했다. 훗날
루소는 이 때의 일을 <별난 세계를 보았고 별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 <학문예술론>에서 취한 루소의 입장은 그 때까지의 루소의 생활방
식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54년 제네바에 귀국하여 후에 시민권을
회복하고 신교도로 되돌아 왔다. <학문ㆍ예술ㆍ기술의 진보는 인간을 타락
시키고 불행하게 만든다>라는 루소의 <학문예술론>의 주장은 디종 아카
데미의 현상논문 응모작품으로 55년에 출판된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
류 역사의 발자취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 같은 해 <백과전서> 제 5권에 <
정치경제론>으로, 58년에 독립해서 출간되었다. <학문예술론>과 <인간불
평등기원론>에서의 주장은 진보를 구가하는 당시의 시대사조나 백과전서
파의 사상과 대립하는 것이며 루소 자신의 생활 방식을 되묻는 것이 되기
도 한다. 악보의 사보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56년에는 파리에서 떠났다. 파
리 북쪽 교외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동안에 <연극에 관해서 달랑베르씨에
게 보내는 편지(1758)><신(新)엘로이즈(1761)><사회계약론(1762)><에밀
(1762)> 등을 집필했다. <연극에 관해서 달랑베르씨에게 보내는 편지>는
<백과전서> 제 7권에 포함되어 있는 <제네바>항목에서 집필자인 달랑베
르가 제네바에 극장 건설을 제안한 데 대해서 루소가 반론을 전개한 것인
동시에 그 <서문> 중에서 절친한 친구였던 디드로와의 결별을 공표한다.
<사회계약론>은 <인간불평등기원론>이 불평등을 그 존속기반으로 삼는
사회 및 그곳에서의 인간의 생활방식을 고발한 것과는 달리 인간평등을 기
반으로 한 사회를 어떻게 해서 창출해내느냐를 논한 것으로서 그의 영향은
프랑스혁명에서 현대의 가스트로에 의한 쿠바혁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
다. <에밀>에는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인간이 자립해서 살아나가려면 어
떠한 교육으로 길러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사회계약론>과 <에밀>
에서 루소의 관심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전자의 착상이 <인
간불평등기원론>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후자 쪽은 파리를 떠난 이후
의 루소의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도망자]
<사회계약론> 및 <에밀>은 발간 후 파리ㆍ제네바 등지에서, 사회질서를
혼란하게 하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금서처분을 받
았고, 루소 자신에게도 체포장이 발부되자, 그는 스위스ㆍ영국ㆍ프랑스 등
각지를 헤매었으며, 도망자로서의 방랑생활을 하였다. 깊어가는 고독과 피
해망상에 시달리면서 세상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65년경
부터 <고백론>의 집필을 시작했으며 70년 완성과 동시에 비밀리에 허가를
받아서 파리에 돌아와, 낭독회를 가졌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 때문에 다시 자전적인 대화체 작품 <루소, 장 자크를 재판하다
(1772∼76)>를 썼으며, 미완의 작품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1776∼48)>에
고독한 자기 자신을 확인하였고, 과거의 행복했던 시기를 회상하면서 우아
즈주 에름농빌에서 죽었다.
독일 계몽사상가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 철학자ㆍ수학자ㆍ자연과학자ㆍ법학ㆍ역사ㆍ신학ㆍ언어학 등 여러 방
면에 업적을 남겼으며, 외교관ㆍ실무가ㆍ기술자로도 활약했다. 도덕철학 교
수의 아들로 태어나, 1661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며, 이
때 철학과 역사에도 흥미를 보였다. 66년 스위스의 알트도르프대학으로 옮
겨 법률학 학위를 획득했고, 졸업 후에는 뉘른베르크에서 마인츠 후국 국
정에 관계, 법전 개혁 등에 종사하였다. 이 때 역학논문을 작성해서 런던ㆍ
파리의 학계에 이름이 알려졌다. 72년부터는 외교사절로 파리에 체재, 여기
서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며, 당시의 첨단 학문과 접할 기회를 가졌으며, 특
히 수학 등의 연구에도 힘썼다. 76년 하노버공작의 도서관장 고문관이 되
어 하노버집안 가계사 편찬의 일을 하였다. 1700년 베를린과학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초대 원장을 지냈다. 철학상의 대표저작은 <형이상학 서설><변
신론><단자론>이다. 이와 같은 학술적인 연구활동과 베를린과학아카데미
창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의 통일 시도 등의 외적 활동은 한편으론 산만
하게도 보이지만, 그 근본에는 일관된 자세가 있었다. 즉 그것은 신을 배경
으로 모든 것에서 조화를 찾아내고자 하는 사상적 노력이었고, 조화에 대
한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다원론적인 조화의 철학체계에서 뚜렷
이 나타났다. 그의 철학체계(단자론)에서는, 우선 단자(모나드)라는 새로운
실체 개념이 도입되어 세계는 무수한 단자로 성립되어 있다고 보았다. 단
자란 불가분하고 단일적인 것이지만, 원자와는 달라서 비연장적이고, 표현
이라는 비물질적인 작용을 본질로 한다. 여기서 표현이란 단자가 그 단일
성을 유지하면서도 단자 자신의 내적 소질에 기초하는 자발적인 전개에 의
해 그 단자에 있어서의 외적 세계와 대응한다는 사실이며, 결코 외적 세계
와의 인과적인 상호관계 같은 것은 아니다. 즉 단자는 이 표현이라는 작용
형태로 다(多)를 자기 안에 포함하는 하나라고 할 수 있어서, <우주의 살
아 있는 거울>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세계를 구성하는 무수한 단자는 똑
같은 것은 없고, 모두 서로 다르지만, 크게 3종류로 나눌 수가 있다. 즉 혼
란한 표현을 하는 물질단자, 의식과 기억을 갖는 동물적 영혼단자, 보편적
인 것을 인식하는 정신단자이다. 그리고 어떤 단자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서 물질ㆍ동물ㆍ인간ㆍ신 등의 존재가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것들은 서로 인과관계가 없는 무수한 단자로 이루어지는 세계에도 질서와
조화가 성립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단자활동의 총체로서의 현실세계는
신에 의해 조화와 통일에 최선적인 것으로 선택되었다고 한다.
[과학적 업적]
라이프니츠의 수학ㆍ자연과학에서의 활동은 1672∼76년 외교사절로 파리에
머무를 때 C.호이겐스와 만나고, 또 73년 런던에서 R.보일 같은 수학자와
만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뉴턴과 함께 미분ㆍ적분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
할을 한 라이프니츠의 기호법은, 이 기간에 배양된 수학연구에 의한 것이
었다. 미적분법을 둘러싸고 그 우선권이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어느 쪽에
있느냐 하는 것 때문에 학계에서 다년간 논쟁이 계속되었던 사실은 유명하
다. 라이프니츠는 특히 논리학ㆍ철학ㆍ수학 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에스파냐의 R.룰이 <진리를 발견하는 자동적 방법>을 만들고자 하
는 생각을 몇 개의 계산원리로 치환해서 합리적으로 반전시키고자 하였다.
학위논문 <Dissertatio de Arte Combinatoria(1666)>는 그 추론법칙과 양
식의 정리를 시도한 것으로 수학의 조합에 대해서도 논술하였다. 그는 또
한 인간의 사고과정을 기호화해서, 기호들 사이의 연산에 의하여 완전한
결론을 유도하는 것을 생각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명제계산 사상으로, 라
이프니츠는 이런 사고 방식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논리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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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하는 동일성원리는 라이프니츠에 의한 것이다. 또 그는 대수학이 양의 과학인 것처럼 위치에 대한 해석이 가능한 참된 기하학을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사상과 연구는 후에 선형대수와 토폴로지로 발전했다. 미적분에 과한 그의 연구는 미분법ㆍ적분법에 기초를 부여했으며, 무한소에 사용하는 기호 dx, 적분기호{{{{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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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볼프학파
철학의 한 학파. 라이프니츠 철학을 독단적으로 체계화한 C.볼프의 철학은
시대의 유행철학이 되어 여러 추종자들을 낳았다. 디들 제자들을 총칭하여
라이프니츠-볼프학파 라고 한다. 이 그룹에는 볼프철학을 비교적 충실하게
계승했던 제자들과 거기에서 어느 정도 독립된 사고를 제창한 사람들로 나
누어진다. 전자에 속하는 사람은 독일의 광범위한 독자층에 볼프철학을 보
급하는 데 공헌했던 L.P.튀미히와 G.B.빌핑거, 또 독일 미학의 창시자로 지
목되는 A.G.바움가르텐과 그의 제자 G.F.마이어 등인데 특히 비움가르텐은
볼프가 거의 다루지 않았던 미학의 영역에 대해서 볼프의 체계를 보완했
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H.S.라이마루스ㆍM.멘델스존ㆍJ.H.람베르트
등을 들 수 있다. 람베르트는 볼프적인 합리론과 로크적인 경험론의 융합
ㆍ통일을 꾀했다. 데카르트적 명석한 판명성과 볼프적 논증법도 불충분하
다고
지적, 칸트적 인식비판의 방향을 시사했다.
볼프 Christian Wolff 1679∼1754
독일 철학자ㆍ법학자. 브레슬라우 출생. 1699년 예나 대학에서 수학하고
1703년부터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ㆍ철학ㆍ수학을 가르치다 1706년 스
승 G.W.라이프니츠의 추천으로 할레로 옮겨 17년에 할레대학 정교수가 되
었다. 그 뒤 빌헬름 1세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어 마르부르크로 갔으나, 40
년 프리드리히대왕의 부름을 받고 돌아가 귀족에 서임되었으며, 계몽주의
시대 학문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는 라이프니츠철학을 정비, 조직하고 라
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강의하는 등 그 보급에 힘썼기 때문에 곧 라이프니
츠-볼프학파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큰 세력을 떨쳤다. 인간의 지적 능력에
응해 이론적이고도 실천적 학문을 세워 수학ㆍ물리학ㆍ역사학ㆍ법학 등의
학문체계를 수립했다. 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는 이성주의이지만, 경험주의
적 사고도 간직한 데에 계몽철학으로서의 특색이 있다. 그는 <선행과 악행
>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의무, 시민의 의무로서의 자연법을 논하고, 자연
법의 구체적 표현이 현실의 법규정이라 했다. 군주와 국민의 관계도 국민
의 공동이익을 촉진시키기 위한 싸움적 의무관계라고 하고, 프리드리히대
왕에게 <군주는 신민의 제일의 공복>이라고 천명하게 했다. 93년 시행된
프로이센의 <일반란트법>은 볼트의 이러한 자연적 의무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의 법률론도 기하학적 개념의 정확성 및 기하학의 여러 개념에서
논리적 추론에 의해 자연법의 법규를 구석구석까지 완결적 체계로 구성해
야 한다고 주장했고, 법의 타당성의 근거는 엄격한 기하학적 증명에 있다
고 했다. 이러한 방법은 뒤의 판덱텐법학이나 개념법학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저작으로는 <인간오성의 여러 힘에 대한 이성적 사고(1712)><이
성철학 또는 논리학(1728)><자연법ㆍ국제법제요(1750)>등이 있다.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근대 시민관의 확립→ 자율적 존재.
독일철학자. 쾨니히스베르크 출생. 18세기후반 서유럽 계몽사상의 성숙과
프랑스혁명시대에 있어, 이전의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여 근
대인의 사상과 행동을 규제할 <이성>의 기본적 윤곽을 제시하였으며 그
뒤 낭만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철학적 사색을 위한 길을 열어 놓았다.
[생애와 시대적 배경] 1724년 4월 22일 동프로이센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에
서 마구장인 아버지와 경건하고 신앙심이 돈독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
다. 김나지움을 거쳐 4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여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47년 졸업하여 쾨니히스베르크 부근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55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형이상학ㆍ논리학 담당 강
사로 있다가 70년 교수가 되었으며, 96년 은퇴까지 5차례 학부장을 지냈다.
그동안 형이상학ㆍ논리학ㆍ윤리학ㆍ자연지리학ㆍ인간학을 비롯한 여러 학
과의 강의를 하였으며 많은 저서를 내놓았다. 칸트가 자신의 사상을 형성
하고 학문적으로 활동한 시대는 1740∼86년의 프리드리히대왕 치세기간이
며, 베를린을 중심으로 G.E.레싱 등이 활동하였던 독일계몽주의시대 최전
성기의 자유스러운 분위기는 칸트를 진정한 <세계시민적>철학자로 길러냈
다.
[철학체계로의 지향]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원리(1786)>및<법론의 형
이상학><덕론의 형이상학>을 각각 제1부와 제2부로 포함하는 <인륜의 형
이상학(1797)>은 제각기 제1ㆍ2비판서에 의하여 제시된 인간학적 철학의
기초 위에 새로운 철학적 체계를 확립하려는 칸트의 의도였다. 1780년대에
쓴 역사철학에 대한 소론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이성적 입장에서 해석하려
고 시도한 <단순한 이성적 한계 안에서 종교(1792)>는 역사에서의 신의
섭리라는 종래의 <목적론적>인식에 관련되는 문제에 새로운 비판적 전망
을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 여러 해에 걸친 <통속강의>를 모아 출판한 <인간한(1789)>과 <자
연지리학(1802)>은 근세 시민적 자각으로서 칸트철학 밑바닥에 감추어진
생생한 인간적 관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세에 미친 영향] 칸트철학은 그가 지녔던 유한주의 입장을 버리고,
인간주체를 무한한 우주를 구성하거나 산출하는 주체, 유한한 감성을 무한
한 예지적 직관 등으로 확대시키는 형태로서 J.G.피히테ㆍF.W.J.셸링ㆍ
G.W.F 헤겔 등으로 이어진 낭만주의 세대의 이른바 독일관념론철학에 계
승되었다. 그 영향은 영국ㆍ프랑스의 이상주의 여러 조류에까지 미쳤다. 독
일의 신칸트학파 철학은 19세기말부터 학문적인 문제상황에 부응해 칸트의
비판주의를 부흥시키려 한 것이다. 신칸트학파가 퇴조한 뒤 나타난 오늘날
의 여러 철학 조류도 대부분 직접ㆍ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칸트철학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인식비
판적ㆍ초월론적 철학의 영향은 E.후설의 현상학으로부터 J.하버마스의 비
판적 합리주의, L.비트겐슈타인과 P.F.스트로슨 등의 언어분석철학에까지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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