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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현대윤리사상

by Casey,Riley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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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현대윤리사상

특징. 합리론과 관념론에서와 같이 주지주의적ㆍ이성적 반대, 현실 생활자체
를 중시.
ㆍ19세기말과 20세기에 전개된 현대 윤리사상은 이성적인  윤리사상에 반대
하고 (반헤겔사상) 인간의  현실생활 자체를  중시하였다. 여기에는 유물론, 
생철학, 실존주의, 생명존중의 윤리학이 있다.


유물론

성격 및 대두 배경: 하나의 윤리사상이기 보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나
타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과  사회구조의 모순을 비판하기  위해서 대두된 
사상으로서 당시의 경제ㆍ종교를 비판하기 위해 대두된 사상.

기본입장: 유물론에서는 우주 자연의 궁극적인 본체는 물질이라고  보고, 일
체의 정신현상은 고도로 조직된 물질의 산물이라고 본다. 따라서, 인간의 정
신ㆍ영혼ㆍ관념ㆍ의지ㆍ의식 등과 같은 현상을 물질의 부대 현상 내지는 파
생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며, 물질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정신 세계의 독자
성과 가치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깊이 파고들어가기
유물론 materialism
물질을 제1차적ㆍ근본적 실재로 보고,  마음과 정신을 부차적ㆍ파생적인 것
으로 보는 철학설을 가리킨다.  정신이 곧 물질이라고  보는 것, 물질(뇌)의 
상태ㆍ속성ㆍ기능으로 보는 것 등 여러 가지 입장이 여기에 포함된다.
[용어] 본래 철학용어로서는 세계의 본성에 관한 존재론상의 입장으로서, <
유물론>과 <유심론>을 대립시켜, 인식의 성립에 과한 인식론상의 학설로서 
<실재론>과 <관념론>을 대립시키는  것이 올바른  용어법이지만 실제로는 
<유물론>은 <관념론>의 대어로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근
세철학에서 유물론-실재론적 입장이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실체>를 바
탕으로 존재론이라는 형태로 자기주장을 펴왔던  것과는 달리, 관념론-유물
론적 입장이 <사고하는 나>를 바탕으로 인식론적으로  전개되어 왔기 때문
이라고 생각된다. <유물론>을 주장하여 19∼20세기에 걸쳐 매우 큰 영향력
을 가졌던 F.엥겔스가 용어법으로서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대어를 사용
하고 있었다는 것, 이를 계승한 V.I.레닌이 <오해를 초래하는 것>으로 보고, 
<실재론>이라는 용어를 배척했다는 사정도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물질의 
본성에 대립물의 통일을 인정하지 않는 J.O.라메트리의 입장을 종종 기계론
적 유물론이라 불렀고 K.포크트ㆍL.뷔히너ㆍJ.몰레스코트 등의 생물학적  유
물론도 이 범주에 넣는다. 
[역사] 유물론이라는 말은 18세기에 생겼지만, 그 생각은 초기 그리스철학에
서 이미 볼 수 있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따르면 원자와 공간 이외
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는 것이 없다. 세계의 모든 사물의 성질은 이 사물들
을 구성하는 원자의  형태ㆍ크기ㆍ위치와 결합된  조밀도에 따라 설명된다. 
모든 현상은 원자의 기계적 작용에 의해 생기며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다. 영혼의 작용도 원자의 작용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ㆍ플라톤 
이후, 중세를 통해서 유물론이 쇠퇴했으나 근세에  이르러 F.베이컨ㆍP.가상
디 등을 선구자로 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에서 각각  독자적인 유물론을 발
전시켰다. 독일에서는 G.W.F.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한 L.A. 포이어바흐가 있
고, 그 영향을 받은 K.마르크스ㆍ엥겔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완성시켜 현
대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징] (1) 과학주의: 유물론의 근본주장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질적이다
>라는 데 있는데, <물질>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입
장이 있다. <물질>의 특질로는 대부분  질료ㆍ불가입성ㆍ관성 등, 일반적으
로 자연과학적으로 기술되고  규정되는 것들이다.  유물론자들은 그 시대의 
자연과학적 성과를 가지고 철학적 입장의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는 <과학주
의>태도를 취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물질을 <우리의  의식에서 독립된 
객관적 실재>로 보고(물질의 철학적 개념),  물질에 관한 과학적 인식의 내
용과는 원리적으로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입장에도 자연과학의 성과에 
의거한다는 <과학주의>로 일관된다.
(2)결정론: 이 <과학주의>와  관련해서 유물론에는 일종의  <결정론>이 있
다. 즉 <모든 사물의 변화는 선행하는 물질적 조건과 그것을 포함하는 법칙
성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는 사물에  대한 인과율의 지배를 인정하는 견
해이다. 이것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혀 인정하지  않거나, 아니면  어떤 
법칙성에 따르는 것으로 본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자유란, 필연성의 인식
이다>라고 보고, 법칙적 필연성의  인식에 의거한 법칙성의  기술적 이용을 
인간의 자유라고 보고 있다. 
(3)감각론: 이러한 법칙성의 인식에  관해서 유물론에서는 감각만을  인식의 
원천으로 인정하는 감각론의 입장을 취한다.  이것은 인식내용의 원천을 물
질적 외계에서만 구하고 내적ㆍ주관적인 것의 혼입을 배제하려 하기 때문이
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지 않
는 선험적인 것의 역할은 부정된다. 엥겔스가 영국의  경험론을 평하여 <부
끄럼쟁이의 유물론>이라고 말하였듯이  유물론은 경험론과  함께 감각론의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가깝다. 그러나  경험론은 감각의 원인으로 비감각
적인 실체(유물론이 인정하는 <물질>)를 인정하는 일은 없다.
(4)무신론: 존재하는 것 모두가 물질적인 것일 때, 신이나 정령과 같은 비물
질적 존재는 인정되지 않는다. 더구나 세계의 사상이 물질적 법칙성에 의해 
결정되고 있을 때 세계의 변화를 관장하고 거기에  목적을 부여하는 신적인 
것은 설명의 편법으로서도 배제된다. 이리하여  유물론은 항상 무신론을 위
한 강력한 논거가 되어왔다. → 기계적  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유물론의 대표적 사상가

마르크스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1818∼1883
독일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창시자.  라인란트팔츠주 트리어 출생, 
1835년 트리어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본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다시 베를린 
대학으로 옮겼다. 베를린에서 법률ㆍ역사ㆍ철학을  공부하고 헤겔철학을 접
하게 되어 급진적 성향을 가진 헤겔좌파에 가담하였다. 41년 대학과정을 마
치면서 <데모크리토스의 자연철학과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졸업논문을 발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42년  10월 쾰른으로 이주하여 급
진적 신문 <라인신문>의 주필로 취임, 혁명적 민주주의 입장에서 프로이센
의 절대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시기를 통해 관념론적 견지에서 벗어나 유물
론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고, 혁명적인 민주주의자에서 과학적 공산주의자
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43년 3월  <라인신문>이 프로이센정부에 의해 폐간
되자 10월 파리로 이주하여, A.루게와 함께 <독불연감>을  발간, 이 잡지에 
<헤겔의 법철학비판> <유대인 문제>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44년 9월 파
리에서 F.엥겔스를 처음으로 만났으며, 이때부터 그들의 평생을 두고 이어지
는 공동투쟁이 시작되었다. 45년 프로이센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도 추방
된 마르크스는 2월 브뤼셀로 이주하였으며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당시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청년 헤겔파의 거두인 B.바우어를 비판하여 
<신성가족>을 저술하였으며, 독일고전철학과 영국ㆍ프랑스의  경제학, 프랑
스 사회주의 등 19세기  학문적 성과인 3대 유산을  계승ㆍ발전시켜 과학적 
사회주의의 세계관, 즉 변증법적 유물론의 토대를 밝힌 <독일 이데올로기>
를 완성하였다. 47년 브뤼셀에서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인 P.J.프루동의 <
빈곤의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의 빈곤>을 발표하였다.  이듬해 봄 마르크
스와 엥겔스는 비밀선전단체인 <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하였으며, 47년 11
월 런던에서 개최된 이 동맹의 제 2차 대회에 참가하여 대회의 위임을 받고 
<공산당선언>을 작성, 48년 2월 발표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
라!>라는 구호가 담겨져 있는 이 문헌은 과학적 공산주의의 첫 강령적 문헌
이다. 48년 베를린에서 <3월혁명>이 일어나자 쾰른으로 돌아가 노동계급의 
의사를 대변하는 유일한 신문인  <새라인신문>을 창간, 그  주필을 지냈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하자 마르크스는 재판에 회부되었다가  파리로 망명하였
으며, 49년 6월 13일 시위후  프랑스정부에 의해 추방당하여 런던으로 건너
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49년 말 공산주의자동맹은 런던에서 활동을 재
개했으나 50년 가을에 분열하여 마르크스파는 중앙위원회에서는  다수를 차
지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수파로 전락하고, 결국 <쾰른공산당재판>으로 조
직은 궤멸하였다. 그는 이에 한동안 조직적 활동을 떠나, 미국에서 발행되는 
재미독일 상대의 진보주의 신문에  시사ㆍ정치ㆍ경제평론을 기고하며, 경제
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48년∼49년의 혁명의 경험을  정리하여 <1848년에서 
50년까지의 프랑스의 계급투쟁(1850)>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852)>을 집필하였다. 이  두 작품은 유물사관으로  역사적 사건을 분석한 
최초의 시도로 평가되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상호관계, 국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태도문제를 밝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형태론을 
발전시켰다. 마르크스의 런던 생활은  매우 어려웠으며, 엥겔스의  끊임없는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마르크스는 몇 해 동안 그의 
대표적 저작 중 하나인 <자본론>을 집필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59
년, 여러 해에  걸친 정치경제학 연구의  최초의 수확인 <정치경제학비판> 
제 1분책을 완성하였다. <자본론> 제 1권은 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되었으
며, 72년 제2판이  출판되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잉여가치법칙이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이며 자본주의적 생산의 절대적 법칙이라는  것을 밝혔
는데, 잉여가치법칙의 발견과 그 본질 및 자본주의 발전에서의 역할을 밝힌 
것은 후세에 그 오류를 지적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공적으로 꼽히
고 있다. 50년대 말부터 60년대에 걸쳐 노동운동이 다시 강화되자 마르크스
는 노동자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하여  64년 9월 28일 <국제노동자
협회(제1인터내셔널)>를 창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기치 아래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연대성을 강화하기  위해 힘썼다. 오언주의ㆍ프루동주의ㆍ바
쿠닌주의ㆍ라살레주의 등 각종 유파의 사회주의자와 영국의 트레드유니언주
의ㆍ차티즘ㆍ급진공화주의 등 사회주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유형의 노동운
동 단체까지 망라된 세계적  노동조직을 위해 창립  선언ㆍ규약을 기초하고 
그 주도권을 잡았다. 71년  마르크스는 <프랑스 계급투쟁>에서 파리코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형태의 하나라는  것을 밝혔다.  75년 <고타강령>을 
발표하여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하여 노동자의 계급투쟁의식에 <필승의 신념>을 고취
시킴으로써, 그 결과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병존하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빈궁 속에서 학구적 정열을 불태워, 건강을 해치면서도 <자본론>
체제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83년 3월 14
일 런던의 자택에서 종양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하이게이트 묘지에 안치되었
다.

유물론적 인간관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보람이나 기쁨을 얻게 되고 자아를 실현해  갈 수 있
음.
→사회주의적 인간관으로 체계화. 노동은 가치↑

인간소외론
소외의 원인: 자본주의 제도의 모순→ 사유재산 제도와 자본가에 의한 노동
력 착취.
   소외의 해결방안: 혁명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해야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
다고 봄.

유물사관 : 물질에 의해 역사가 바뀐다
물질적 생산이 사회발전이 원동력→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해
나간다고 주장.

포이어바흐 Ludwig A.Feuerbach 1804∼1872
독일 유물론자ㆍ종교비평가ㆍ형법학자ㆍ바이에른란츠후트   출생. 헤겔학파 
좌파의 대표자이다. 베를린대학 졸업 후  1828년 에를랑겐대학 강사가 되었
다. 전통적인 그리스도  교리를 비판한  <사(死)와 불사(不死)에 대한  고찰
(1830)>로 인해 32년 추방된 뒤 부르크베르크에서 주로 저술활동을 하였다. 
48년 하이델베르크대학 초청으로 종교의 본질을  강의하였다. G.W.F.헤겔의 
범논리주의 학도로서 철학사연구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입장에  선 철학자
연구에 다시 착수하였다. 뒤에 부르크베르크에서 대학의  강제, 일체의 외부 
간섭으로부터 해방된 후 헤겔 철학의 비판을 일삼고  분리를 선언하기에 이
르렀다. 즉 헤겔 철학을 신학적이라고 보고,  헤겔과는 반대로 자연적ㆍ개체
적ㆍ우연적 개물을 기초로 삼았으며, 정신을  자연의 타재에 불과하다고 주
장하였다. 그리스도교 비판에도 힘을 기울여 당시의 공적 세계와 대립, 독자
적으로 인간주의적 유물론을 확립하였다. 또한  인간은 그 자신이 자연물이
며, 자연물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종교ㆍ신은 인
간이 자기가 바라는 대상을 이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같은 
관점으로 현세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는  현세적 행복론을 주장하였다. 결국 
그는 헤겔과 K.마르크스ㆍF.엥겔스의 매개자로서의 위치에  섰다. 저서로 <
그리스도교의 본질(1941)>등 다수가 있다.


생철학
대두배경과 성격: 계몽철학의 주지주의와 헤겔의 이성주의적 관점을 비판하
고, 비합리적인 것과 인간의 의지, 직관을 중시→ 반이성주의, 비합리주의사

(반이성적, 반헤겔, 반주지주의(반계몽주의), 반과학적, 비합리주의)

생에 대한 관점
ㆍ생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
ㆍ직관적 비합리적 방법을 통해서 생의 의의나 가치, 본질을 파악하려함.
ㆍ충실한 삶 속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를 찾으려함.

대표적인 학자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독일 철학자. 그다니스크 출생.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
터 영국ㆍ프랑스등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했던 일이 그의 세계관ㆍ예술관에 
영향을 주었다. 또 작가였던 어머니  요한나와의 불화ㆍ대립은 그의 여성에 
대한 혐오와 멸시의 한 원인이 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1809년부터 괴팅
겐대학에서 역사ㆍ자연과학을 전공했고 또 회의주의자 G.E.슐체에게서 철학
을 배웠다. 그가 배운 플라톤과 I.칸트의  사상은 인도의 베단타철학과 함께 
그의 철학체계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틀이 되었다.  학위논문 <충족이유율의 
4개의 근거에 대하여(1813)>와 J.W.괴테의  색채론에 자극을 받은 <시각과 
색채에 대하여>라는 저서를 완성했으며, 이어서 주요 저서 <의지와 표상으
로서의 세계(1819)>를 발표했다.  20대 후반부터 30세에  이르러 완성한 이 
저서는 그 당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으나 이 저서로 인하여 쇼펜하우어
는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G.W.F.헤겔과 대결하려 했으나 실패하였
다. 그가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51년의 <여록과 보유>라는 말년의 
저서였으며 이에 대한 높은 평가는 1848년 3월 혁명의  패배에 따른 독일의 
일종의 폐색상황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사상과 영향]
"우리는 무조건 살고 있다."
삶은 비합리적인 맹목적인 생존의지. 
세계의 본질은 비합리적이다. 생의  맹목적 생존의 지이므로 생은  고(苦)이
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철저한 금욕생활 주장.
(생은 고통= 불교사상과 비슷하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세계라는 것은 <나의 표상>이며  현상에 지나지 않는
다. 즉 세계는 주관인 의지에 대응하는 객관으로서만  존재한다. 시간ㆍ공간
ㆍ인과관계의 어떤 현상에 대하여 칸트가 내세운 <물자체>는 실은 의지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살려고 하는  맹목적 의지>이며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추구하는 까닭에,  산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 시대의 변천 등 인간의 다양한  형태는 의지의 적절한 객체성인 이데
아를 간파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어서 그 자체에서는 어떻
게 되어도 좋은 것이다. 이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며 그 중
에서도 음악은 이데아라는 매개가 없이 의지를 객관화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것이다. 그러나 예술에 의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
다. 따라서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무사의 행위를 
지향, 범아일여의 경지, 즉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윤리의 차원을 추구해
야 한다.

염세주의 pessimism
매일매일 죽음을 꿈꾸는 삶을 살 것을 주장하는 사상.
생의 참다운 행복이나 의미를 얻는 것에 절망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
는 생각. 비관주의라고도 한다.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고 있고 살아  있는 
한, 사람은 이를 극복할 수 없다고  보며 종종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사상으로 발전해 간다. <최악>을 뜻하는 라틴어 페시멈에서 유래된 말로서 
낙천주의와 상대되는 개념이다. BC 6세기 그리스의 시인 테오그니스는 <인
간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밝은 빛을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일이
다. 그러나 태어난 이상  빨리 죽음의 신의 품으로  가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은 일이다>라고 노래했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2가지의 실재를 극
단으로 대립시키는 이원론적 신앙은 필연적으로 염세주의로 인도된다. 지상
에서의 육체적 생존 그 자체가 악이고 더러움인 이상, 인간은 이 세상에 사
는 한 구원되기 어려워진다. 육체가 이 세상에 있는 한 인간은 생식과 죽음
이라는 법칙에 예속되고, 암흑의 세계를 벗어 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구원
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뿐이다. 죽음에 의해서만 탄생의 죄가 갚아지고, 그의 
영혼이 되살아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염세사상은 영육분리를 주장한 
오르피즘(신화상의 시인 오르페우스가 창시했다는 고대  그리스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인정되었다. 근대에 들어 염세철학을 주장한 
사람은 A.쇼펜하우어인데, 그에 따르면 <세상은 불합리이고  맹목적 의지가 
지배하고 있다. 인생은 괴로움이고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쾌락추구의 허무
함을 깨닫고 무욕의 상태, 즉 완전한  의지부정에 의해 현상세계가 무로 돌
아가는 니르바나(열반)의 경지에 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니체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의 철학자ㆍ시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5살 때 아버지가 죽자 어
머니, 여동생과 함께 나움부르크로 이사하였다. 포르타 김나지움시절에는 음
악과 그리스ㆍ로마 문화에 심취하였고, 1864년 본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
학을 배웠으나 A.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시절동
안 A.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고, R.바그너와 음악을 통해 깊은 관계를 맺었
다. 69년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스승  리츨의 추천을 받아 스위스 바젤대학
의 교수가 되었다. 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이  터지자 위생병으로 종군하
였으나 병에 걸려 제대한 후 평생 병고에 시달리는 몸이 되었다. 당시 유명
한 작곡자로 알려졌던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으며, 특히 비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듣고 매혹된 나머지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 (1872)>을 저술하였
다. 이 저서는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비극의 정신이 진실한 
문화창조의 원천임을 인식하고,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의 두 가지 
원리로 그리스비극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 정신을 현대에서 
부흥시킨 것이 바그너의 음악임을 논하여 그의 신예술운동을 지원하려 하였
다. 뒤이어 발행된 <반시대적  고찰(1873∼76> 4편은 프로이센-프랑스전쟁
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독일  국민과 문화에 통렬한 비난을  가하는 한편 
유럽문화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고 천재를 위대한 창조자로서 문화의 이상으
로 삼았다. 1편은 헤겔학파의 신학자 D.F.슈프라우스의 <교양을 가진 속물>
에 대한 공격으로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2편은 역사를 기념비적ㆍ골
동품적ㆍ비판적인 3종류로 구분한 역사주의에 대한 비평이었다. 3편은 쇼펜
하우어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니체 자신의  실존적 결의의 표
명이기도 하다. 4편은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서 공연한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에 관한 찬사이다. 그러나 이  저술을 계기로 바그너와 절교하였으며, 
이리하여 천재적인 재질에 의하여 새로운 게르만적 헬레니즘 문화를 세우려
고 한 낭만적 이상은 무너졌다.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79년 대학에서 
퇴직하고 알프스 산과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해변을 전전하는 투병생활을 하
면서  사색을   계속하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80)><서광
(1881)><기쁜 지혜(1882)>등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들은 잠언과  사상의 단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속에서 종래의 낭만주의를 파괴하고 실증주의적
ㆍ심리적 요소를 드러내고 있다. 83∼85년에  걸쳐서는 전에 알프스 산중에
서 깨달은 <영원회귀>사상을 기반으로  한 <초인>의 이상을  그린 철학적 
서사시인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91)>를 저술하였다.  이 저
서에 니체의 사상이 상징적으로 모두 표현되고 있으나, 이 추상성에 불만을 
품고 구체적 논문식으로 해설한 <선악의 피안(1886)>을  저술하였다. 이 저
술에서는 고귀한 정신적 귀족의  육성을 주장하고 장래의  위대한 입법자를 
암시하는 한편 퇴폐적인 근대의 여러 현상과 단순히  객관에만 치우치고 있
는 과학정신, 동정에 기반을 두었다는  그리스도교적 도덕, 역사의식의 과잉 
등을 예리하고 독특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 후 <도덕계보(1887)>가 유럽 윤
리사상의 비판서로서 출판되었으며, 이 때 이미 <권력에의 의지>가 준비되
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사망 후에 유고만이 수집되어 출판되었다. 
88년에는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안티  그리
스도> <니체와 바그너>등이 저술되었다. 그 중 <이  사람을 보라>는 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89년 1월 정신착란 증세에 빠져 바이마르에서 세상 
떠날 때까지 여동생의 간호 아래 여생을 보냈다. 니체는 근대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일체의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그리스도교적 신의  죽음, 즉 <신은 
죽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적 공백
상태를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 전환시켜  사상적 충실을 기했다. 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원회귀를, 선과 참 대신 권력에의 의지
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  대신에 심연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 
살므로 가치를 전환시켰다. 그의 사상은 원숙한 문장과 함께 주로 문학자들
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시대 변천과 함께 사상적 영향을 끼치면서 오
늘날의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그들의 선구자로 불리게 되었다.

요점 노트 정리
권력에의 의지→  일체의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을 인간이  지향하는 목표로 
제시. 
"신은 죽었다."... 쇼펜하우어의 부정적 생철학을 반대하고, 비합리적 생을 비
합리적인 그대로 인정하였다. 그도 세계의 본질을  의지에 두었으나, 쇼펜하
우어의 의지가 맹목적 의지인데  비하여, 니체는 부단히  큰 힘을 추구하며 
성장ㆍ강화하려는 '전력에의 의지'를 강조.


베르그송

베르그송 Henri Louis Bergson 1859∼1941
생명에의 비약
프랑스 철학자. 파리출생.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했으며 지방학교 교수를 지낸 뒤  파리로 돌아와 1888년 <의식의 직접
적 여건에 관한 시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사범학교  강사를 거쳐 
1900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취임했으며 22년  이 학교의 명예교수가 
되었다. 교직 이외의 공적 활동도 활발히 하였는데, 특파시절로 미국에 가서 
T.W.윌슨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28년 노
벨문학상을 수상했고, 30년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 유심
론의 집성자이며 I.칸트ㆍ신칸트파 관념론에 대입하는 실재론으로 20세기 사
상을 준비한 독창적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철학적 관심은 독일철학
에서 볼 수 있는 <제개념의 유희><내용이 공허한 단어의 집합>에 대한 의
심으로부터 출발한다. 또한 실재의 분절에 따라 사유한다고 본다. 또한 실재
의 분절에 따라 사유한다고  본 H.스펜서의 진화론도 시간관념에서  실재의 
인위적 왜곡을 면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그는 철학은 이러한 구
성적 의식과 그 소산인 기서의 언어ㆍ개념에 의해 실재를 해석하는 것이 아
니라, 이들 <기호>의 저편에 있는 실재를 인식하고, 그것과 <합체>하는 것
에 있다는 독자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다. 칸트가 말하는 <인식의 상대성>좋
은 시간관념에서 나온 잘못된 견해이다. 우리가 시게와 달력에 의하여 이해
하고 있는 시간, 수로 환원되어  양적ㆍ등질적인 길이ㆍ크기로 귀착되는 시
간은 실생활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허구이며 진실한 시간은 절단될 수 없
으며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상호 침투하는 되돌릴 수 없고 약분할 
수 없는 질적 변화를  전개하는 하나의 생동체이다.  이러한 시간을 우리는 
내적 체험으로 전인격적으로 파악하는데, 이때 맛보는  자유ㆍ충족감은 <절
대자와의 접촉>이고 이런 의미에서 실재, <적어도  그 일부>는 인식가능하
다. 더구나 나의 내적 세계와  실재와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이기 
때문에 나는 단순한 내관을 뛰어넘어 한편으로는 만물을  실재화 하는 형이
상학적 실재의 직관으로  향한다. 이러한  현전하는 실재계는 R.데카르트와 
칸트가 전제하는 등질평면적이고 무기력한 성질의 확장이 아니라 무한히 다
양한 뉘앙스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속의 편제로서의 <생성의 대양>이다. 
여기서 생겨난 여러 존재자는 모든  실재의 시원에서 약동하는 <창조적 진
화력>에 대하여 진화 또는 퇴화의 여러 방향을 나타내고, 높이와 깊이로 실
재계를 계층화한다. 인간이 만든 여러 학문은  이러한 여러 층을 각층에 어
울리는 방법과 기호ㆍ이미지를 창안하면서 인식하려는 시도이다. 이때 지성
과 과학은 물질계의 해명에 유효하며 직관과 철학은  정신계의 탐구에 전렴
하는 것으로 양자는 가치의 우열 없이 상호보조적이다. 단순한 지속을 넘어
서 순수창조 자체인 형이상학적 실재는 동물의 본능은 물론 인간의 지성, <
보통사람>의 직관으로 파악할 수 없고 <특권적 개인>의 <초지성적 직관>
을 요한다. 이 인식은 플라톤적인 <죽은 영원>의 관조에 그치지 않고 과거
ㆍ현재ㆍ미래의 완벽한 상호침투에 의한 지고의 <시간적 종합>으로서의 <
살아 있는 영원>과의 합체이다. 실재인식의 불가능성 때문에 윤리를 정립한 
칸트에 대하여, 베르그송은 실재인식 그  자체가 가치론적 행위를 직접적으
로 성립시킨다고 보았는데, 존재ㆍ인식ㆍ행동의  이러한 삼위일체화는 베르
그송철학의 완성인 동시에 고대존재론과 근대인식론에 대한  초극을 시도한 
것이다. 베르그송철학은 그 뒤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대두로 청년층의 인
기를 잃었지만, 그의 철학이 드러내는  세계사의 생생함과 다채로움은 오늘
날에도 철학자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물질과  기억
(1896)><웃음<1900><창조적 진화(1907)><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
등이 있다.

실존주의

실존주의
스스로 삶의 목적을 설정해서 주체성 있게  살아가는 존재. (비합리주의, 생
철학)
배경: 산업혁명이후의 기계문명과 대중사회의 비인간화  현상 및 전쟁의 불
안해소
     →개인의 주체성 회복강조

실존주의의 성격 및 핵심 내용 
생철학과 같은 반이성주의ㆍ비합리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나, 개인적이
고 현실적이며 결코 상대화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 문제를 중시하였다. 특
히, 산업 혁명 이후에 기계 문명이나  대중 사회에서 나타난 비인간화 현상
과 전쟁으로 인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각 개인의 주체성 회복을 강조하
였다.
 실존주의의 흐름은 대체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적  입장과 부정하
는 무신론적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마
르셀 등이, 후자에는 니체(생철학자로  분류하기도 함), 하이데거, 샤르트르, 
카뮈 등이 있다.

실존의 개념
실존이란, 인간만이 가지는 존재 방식을  의미한다. 이는 본질에 대한 '현실
존재'라는 뜻이다. 본질은 '무엇이냐?'를 문제삼지만, 실존은 '가능성'을 문제
삼는다. 실존은 사물의 경우에는 상대적이지만, 인간의  존재에 있어서는 절
대적이다. 즉, 사물은 서로 바꾸거나 대신할 수 있지만, 인간은 남과 대신할 
수 없다. '나'라는 존재는 남과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유일 무이한 존재이며,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독자이다.  최초의 실존 철학자인 키에르
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은 합리적 체계 속에서는 해소될 수 없는 구체적ㆍ개
별적 단독자로서의 존재이다. 실존이란 그러한 현실 존재 또는 참된 진실존
재로서의 참된 본래적 자기를 가리킨다.

대표적 사상가

키에르 케고르

키에르케고르 Soren Aabye Kierkehaard  1813∼1855

불안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고 참된 실존을 회복하기 위해 '신 앞에 선 단
독자'로서 인간의 주체적 결단을 강조.(기독교주의적 실존주의)

덴마크 철학자. 코펜하겐 출생.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엄한 수
련을 받았고, 17살에 코펜하겐대학에 입학해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여 1841
년 <아리러니 개념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 사이 1837
년, 14살된 레기네 올센과의 사랑ㆍ파혼 등의  정신적 갈등은 뒷날 미적 저
작의 주제가 되었다.  그 뒤 베를린으로  가서 당시  이름을 떨치던 철학자 
F.W.J 셸링의 강의를 들었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저작생활로 들어갔다. 43∼
46년의 짧은 기간에 <이것이냐 저것이냐:  삶의 단상(1843)><반복(1843)><
두려움과 떨림(1843)><불안의  개념(1844)><인생행로의 여러  단계(1845)> 
등 미적 저작과 <철학적 단편(1844)><단편후서(1846)> 등  철학 저작을 모
두 익명으로 출판하고, 그밖에 그리스도교에 관한 많은 교화적 강화를 발표
하였다. 그 뒤 저작활동에 허무감을 느껴  시골 목사로서 조용한 생활을 원
하였으나 풍자신문<해적>에 그의 작품과 인물에 대한  오해와 중상이 가득 
찬 비평이 실려, 그에 맞서 싸우는  동안 다시 그리스도 교도로서의 새로운 
정신활동과 저작에 대한 의욕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신문의 희평이나 세간
의 조소에 굴하지 않고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성을  혹독하게 비판하였으
며, 절망 속에서도 단독자로서 신을 간절히   찾는 종교적 실존의 이상적인 
자세를 <죽음에 이르는 병(1849)>과 <그리스도교의  수련(1850)>에서 추구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비판은 다시 기성  그리스도교와 교회 본연의 
자세에까지 미쳐 <순간(1855)>등으로 극렬한 공격을 하였다.  G.W.F.헤겔식
의 범논리주의에 맞서 불안과 절망에서 개인의 주체적 진리를 찾는 그의 사
상은 20세기 초까지 덴마크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09년 독일
에서 번역 전집이 발간되어  K.바르트ㆍM.하이데거ㆍK.야스퍼스 등 변증법 
신학자와 실존 철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때부터 키에르케고르의 이
름은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 및 실존사상의 선구자로 세계에 알려졌다.

하이데거

하이데거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의 철학자.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메르키르히 출생. 수공업자 집안에서 태
어나 가톨릭신앙에 의거한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1909년 프라이부르크대학
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다가 철학으로  전환, 수학ㆍ자연과학ㆍ역사 등의 
강의를 통해 상대성이론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 형성에 처음부터 영
향을 끼쳤던 것은 중세 아리스토텔레스 해석과 관련된 가톨릭의 신스콜라철
학과 바덴의 신칸트주의였다. 이어 E.후설의 <논리학 연구>를 읽고  결정적
으로 계발되었으며 15년 프라이부르크대학 강사로 임명됨과  동시에 후설의 
조교가 되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상학적 해석에  몰두하였다. 이 철학사를 
깊이 연구해 가는 동안 후설의 초월적 관념론과 결별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속에 있는 초기 그리스사상의 존재경험의 경향을 심화시켰으며 이
로써 R.데카르트에서 비롯된 근대적 사유의 한계를 돌파하는 데 힘썼다. 23
년 마르부르크대학에 초빙되었으며 29년 프라이부르크로 돌아와  후설의 후
계자로서 정교수가 되었다. 1927년 <존재와 시간>을 발표하면서 그의 고유
한 철학적 입장을 표명하였는데 이것은 K.야스퍼스의 실존철학과 밀접한 관
련을 맺고 동시에 후설의 현상학과 F.E.D.슐라이어마허와 W.딜타이의  해석
학을 기초로 삼고 있었다. 이  밖에도 F.W.니체ㆍS.A.키에르케고르ㆍF.W.셸
링ㆍG.W.F.헤겔ㆍF.휠덜린ㆍR.M.릴케ㆍF.M.도스토예프스키ㆍG.트라클과 고
대ㆍ중세 철학사의 영향을 받았다.  그 뒤 나치스당원이  되었고 33년 모교 
총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강단에서 추방되어 
슈바르츠발트의 산장에서 은퇴생활을 하면서 <존재와 시간>의 문제를 재고
하는 데 몰두하였으며, 특히 휠덜린의 시와 니체의 형이상학과 비판적 체득
이라는 작업 속에서 전향을 준비하였다. 50년  프라이부르크대학 복귀, 후기
사상으로 평가될 만한 논구의 출판이 이루어졌다. 35년 무렵부터 뚜렷한 형
태를 취하기 시작한 그의 사상적 전향은 <존재와 시간>의 단계에서 다루어
진 기초존재론의 주관적 관념론적인 관점에서 객관적 관념론적인 존재철학, 
즉 신비적 존재철학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는 50∼60년대에 이러한 후기 
철학적 입장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유럽사와 세계사를 관념적ㆍ정신사적으로 
고찰, 1953년∼69년에 걸친 방대한 양의해석과  논술을 통해 더욱 확장시켰
다. 그는 존재를 존재자의 존재, 즉 현존재로 규정하고  존재를 이해하는 통
로를 자각적 존재인 자신에게 찾았다.  인간은 현존재요, 현존재는 <세계내
존재>이므로 세계와의 관련성과 시간성에서 인간존재를 분석하고 인간존재
의 근본적 구조가 관심이요 불안이며 인간은  죽음에의 존재, 즉 무에의 존
재임을 밝혔다. 특히 언어는 인간의 현존재를  대표하며, 존재이해의 원천이 
된다고 하였다. 말년에는 시연구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의 사상은 O.베커, 
T.발라우프, W.슐츠 등의 철학자와 새로운 수정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
다. 또한 70년대 중반 이후  미국ㆍ일본ㆍ라틴아메리카 등에서 하이데거 철
학에 큰 관심이 일어났다. 저서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1947)><휠덜린의 
시의 해명(1950)><니체(1961)>등이 있다.
기본입장.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해명.
ㆍ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자각.
  (죽음을 인식하는 존재)
ㆍ죽음을 직시함으로써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회복.

인간관
인간을 상당히 좋게 본 철학자로 성실할 것을 강조
ㆍ'세계에 던져진 현존재'로써 자기를 개인적 주체로 발견
ㆍ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공동존재로서 자기의 존재를 실


하이데거의 '현존재'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세계 내 존재'이므로, 사물과 인간에 대한 염려ㆍ관심
ㆍ불안을 갖고 살게 마련이다. 즉, 현존재의 존재 양식은 염려이며, 이는 현
존재의 유한성과 시간성을 말해준다.


야스퍼스

야스퍼스 Karl Jaspers 1883∼1969
독일 실존철학자. 올덴부르크 출생.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대에 입학했으나 
곧 의학부로 옮겨 베를린 등 3개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학위를 취득
한 뒤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정신과 조교를 지냈으며,  1913년 <정신병리학총
론>을 저술하여 정신병리학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 동안 M.베버와 
친교를 맺으면서 철학에 대한 관심도  더욱 깊어졌다. 16년부터 하이델베르
크대학 심리학 교수로 있으면서 <세계관의 심리학(1919)>을 발표했으며, 21
년 철학교수가 된 후  철학적 사색에 몰두, <현대의  정신적 상황(1931)>에 
이은 주요 저서 <철학(3권,1932)>을 발표함으로써 실존철학자로서의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아내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33년 나치스의 방해로 대학운
영에서 제외되고 37년 교수직에서  추방되었다. 38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했던 강연을 <실존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45년 4월 미군의 하
이델베르크 점령으로 교수직에 복귀하여 대학  재흥에 힘썼으며, 또한 전쟁 
중에 독일인들이 범한 죄를 반성한 <죄의 문제>를 강의했다. 제2차 세계대
전 중에도 계속되었던 사색활동은 제2차  세계대전 뒤에 더욱 왕성해져 M.
하이데거와 함께 전쟁 뒤의 독일 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48년 하이델
베르크를 떠나 스위스로 가서  바젤대학 교수가 되고,  61년 퇴직한 후에도 
바젤에 머물렀다. 대전 뒤의 철학적 저작으로는 <진리에 대하여(1947)><철
학적    신앙(1948)><철학입문(1950)><셸링(1955)><위대한   철학자들(제1
권,1957)><계시와 철학적 신앙(1962)>등이 있다.

[저작과 사상] 야스퍼스의 실존사상 전체를  나타내는 대작인 <철학>에 의
하면, 철학의 과제는 존재의식을 변혁시키면서 세계로부터 초월자에게로 초
월해가는 데 있다. 즉, 제1권 <철학적 세계정위>에서는 세계지에 대한 반성
의 결과 <세계가 전부이며 과학적 인식이 확실성의 전부이다>라고 하는 세
계 내재적인 태도를 포기하고 존재의식  변화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어서 
제2권 <실존조명>에서는, 세계존재에서 해소되지 않는 인간의 실존이 내부
로부터 비추어져 나와 그것이  결코 자족된 존재가 아님을  지적하였다. 즉, 
실존은 죽음ㆍ고뇌ㆍ다툼ㆍ죄라고 하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직면해서 스스로의 유한성에 절망하지만, 그와  동시에 실존은 초월자가 주
재하는 올바른 현실 쪽으로 눈을 돌려 존재의식을  변혁시키면서 본래의 자
기존재로 되살아난다. 제3권 <형이상학>에서는 초월자가 실존에 대하여 스
스로를 어떤 형태로 나타내는가가 질문되며 초월의 최종단계 <암호해독>에 
도달한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초월자의 암호로 되어, 실존은  이들 암호의 
해독이라는 형태로 초월자의 현실을  확인한다. <철학>이후 그는 실존으로
부터의 철학은 또한 이성에  의한 철학이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제2의 주요 
저서인 <진리에 대하여>는 이성 쪽에 역점을 두고 존재  그 자체를 포괄자
로서 파악하여 여러 양태를 해명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전체적으로 개인
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휴머니즘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는 이 입장에서 또한 
역사ㆍ정치ㆍ종교문제에 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이 방면의 저작으
로 <역사의 기원과 목표(1949)><원자폭탄과 인간의 미래(1958)>등이 있다.

[야스퍼스/야스퍼스 철학의 기본개념]
사랑하는 가운데의 투쟁 
실존은 교제 속에서 비로소 실존의 가치가 나타난다. 이러한 실존의 상호교
제가 <사랑하는 가운데의 투쟁>이다.  투쟁은 인간의 한계상황이어서 인간
은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투쟁을 상호부정
적인 폭력적인 투쟁에서 서로 남을 인정하는  <사랑하는 가운데의 투쟁>으
로 전환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승리에 의한 우월 대신 자타에 공통되는 진
리가 나타난다. 실존간의  내적 평화는 <사랑하는  가운데의 투쟁>에 의해 
가능하며, 이내적 평화는 외적인 세계평화를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실존조명
M.하이데거에 의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에 해당되는 것이 K.야스퍼스의 
<실존조명>인데 이는 그의 저서 <철학> 제2권의 표제이기도 하다. 실존조
명이란, 실존을 대상으로 하여 외부에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내부
에서 비추어내면서 그 내적 구조를  밝혀내려는 시도이다. 교제와 역사성에 
있어서의 <자아자신>의 조명에서 시작하여, 이어서  <자유로서의 자기존재
>가 밝혀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제약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유한한 존재
인 실존이 여러 가지 상에서 조명된다. 실존의 무제약적인 자유는 초월자에
게 계박된 운명적 필연성과 하나여서, 이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실존의 존재
의식이 변혁되어 초월자가 주재하는 참된 현실이 실존에 개시된다.

*암호해독 
<철학> 제3권의 <형이상학>에 나오는  용어이다. 실존의 존재의식이 최종
적으로 변혁됨으로써 여러 가지 사상은 초월자의 <암호>가 되고, 세계는 <
암호의 세계>가 되는데, 실존은 이들 참된 현실을 확인한다. 암호는 실존이 
알아듣는 초월자의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야스퍼스에 의하면 암호 가
운데에도 한계상황에서의 좌절 경험이  <결정적인 암호>여서, 이에 대해서
는 이미 어떤 해석도 불가능하며 다만 침묵에 의해서만 대답할 수 있다.

*포괄자 
야스퍼스의 <철학적 논리학>의 용어이다. 여러  가지 존재가 그 가운데 현
상하고, 따라서 그러한 지가  그 가운데 처음으로  성립하게 되는 포괄적인 
지평을 가리킨다. 즉 포괄자는 본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이며, 주체와 
객체는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나, 우리들이  이를 확인하려고 하면 즉시 주
객으로 분열하여 <존재 그 자체인  포괄자(세계, 초월자)>와 <우리들이 그
것인 포괄자(현존재, 의식일반, 정신, 실존)>로 나뉜다.

*한계상황
한계상황이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상황=내(內)=존재>로서  항상 상황 속에 
있음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싸움이나 고민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어쩔 
수 없이 가책을 받아들이고 죽어야만 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인간은 일상 
속에서 눈을 감고 이 상황을 회피하려고 하나, 실존에 눈뜬 인간은 이 상황
을 직시하여, 좌절을 통해서 오히려 참된 자기로 희생하는 것이다.



생명윤리, 환경윤리

대두배경: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 인구증가와 전쟁→ 자연환
경의 급속한 파괴           → 인간생명에 대한 위협증가
성격:  생명에 대한 신비와 존엄성을 강조하는 사상.

신윤리학(New Ethics)의 대두
ㆍ과거와 현대에서 미래를 위한 윤리
ㆍ나와 너의 단계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위한 윤리.

생명존중윤리사상

슈바이처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 1875∼1965
독일 신학자ㆍ사상가ㆍ음악가ㆍ의사. 오버알자스의 카이저스베르크 출생. 태
어난 지 얼마 후 귀스바흐로 옮겨, 그곳이 평생의  공향이 되었다. 스트라스
부르대학을 졸업하고, 1899년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이곳의 성니콜라이
교 부목사, 1900년 신학박사, 1902년 스트라스부르대학 강사가 되었다.

[의료사업과 노벨상] 1905년 이후, 학창시절의 결의를 실현하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여, 13년 의학박사가 되었다. 같은 해 파리 복음 전도회의 파견의사로
서 적도아프리카 프랑스령 콩고(지금의 가봉)  랑바레네로 가서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포로로 억류되어 사업은 좌절되고, 유럽
으로 송환되었다. 전후에는 문필활동ㆍ강연 등과  20대에 명성을 떨쳤던 파
이프오르간 연주로 자금을 마련하여 26년 다시 랑바레네로  가서 병원을 열
고 의료사업을 확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계속 랑바레네에 머물면서 
체력의 한계와 약품ㆍ물자의 결핍을 무릅쓰고  의료에 전념했다. 5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때 감사의 강연을 오슬로방송국에서  하였는데, 그는 세
계평화를 호소하고, 원자력에 의한 세계위기에  대해 인류가 이성을 가지고 
대처할 것을 역설하였다. 병원은 가봉정부의 소관으로 옮겨져 슈바이처평화
기념병원으로서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고향 귄스바흐에 자료관이 만들어져 
있다.

[신학자ㆍ사상가ㆍ음악가로서] 슈바이처의 훌륭한 생애는 다방면에 걸친 이
념의 생활실천을 통해 나타난다. 신학자로서 슈바이처는 교회적 신학으로부
터 조금 과격한 자유주의라고 위협시되었다.  슈바이처가 이해한 사실의 예
수는, 유대교 묵시문학의 종말론에 따라 가까운 장래에 우주의 대전환이 일
어나고, 자신이 구세주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
워진 종말에 대비하여, 사랑의 <과도기적 윤리>를 역설했다. 이후의 그리스
도교 역사는 실현되지 못한 예수의  철저한 종말론의 수수께끼를 사색하고, 
정신화ㆍ윤리화해 가는 과정이다. 이 정신화의 극한에서 발견한 것이 <생명
에 대한 외경>이다. 이것은 신의  사랑 속에 묻혀 살아가면서  삶의 의지를 
자기와 자기 주위에서 발견하고,  사변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  살며, 살려는 
의지의 연대를 강화 촉진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슈바이처는 또 사색을 동양
사상과의 비교로까지 확대하여 생명에 대한 외경을 보편화하는 것을 시도했
다. 
주요저서에 <예수생애 연구사(1906)>  <문화철학(1923)>등이 있다. 오르가
니스트로의 명성뿐 만 아니라, 대저서 <J.S.바흐(1905)>는  오늘날 바흐연구
의 고전이며, 바흐 오르간  곡집의 편집 출판, G.질버만이  제작한 오르간의 
보존과 수복도 슈바이처에게서 힘입은 바가 크다.

생명외경사상
우리는 살려고 하는 생명들로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생명. 도덕의 기준은 
생명이며, '생의 외경으로 나를 최고의  가치로 만든다'로 현세 긍정적인 세
계관이 바탕이 된다.

슈바이처의 생명외경사상은 예수, 쇼펜하우어,  니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슈바이처에게 있어서 도덕의 기준은 생명에의 외경이다.  즉, 생명을 보존하
고 촉진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그것을  파괴하고 억제하는 일은 나쁜 일이
라고 본다. 또한, 그는 윤리란 '내가 나 자신에게 보이고 있는 바와 같이 동
일한 외경을 다른 모든 생명에의 의지에 대해서도  보이고자 하는 의무감을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명에의  외경사상은 현세  긍정적 세계관이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건실한 애정이며,  삶에 대한 건전한 열망이다.  생의 외경으로 
인하여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최고의  가치로 끌어올리게 되고, 그것을 세
계에 제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생에의 외경은 자기 완성의 윤리이다.

생명존중의 윤리사상
자기 자신의 생명은 물론 다른 모든 생명을 염려하고 존중.
생명을 지키고 그것을 촉진하는 것이 선이며, 생명을 죽이고 그것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악.

생명존중의 윤리사상은 근대 이후 급속한 과학 기술의 발달과 인구증가, 전
쟁 등으로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인간 생명의 위협이 증가하게 되자, 생명에 
대한 신비와 존중을 강조하게  된 사상으로 슈바이처가  대표적인 사상가이
다. 슈바이처는 인간의 생명은 물론 다른 생물의 생명을 염려하고 존중하는 
생명 외경 사상을 주장했는데 이는 생명을  지키는 것이 선이고, 그 반대는 
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존중 사상은 환경윤리학과  생명윤리학의 이론적 토대가  되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살인, 강도, 각종 사고, 어린이 유괴, 
낙태, 자살, 마약 사용, 생태계파괴  등과 같은 수많은 생명경시현상을 극복
하는데 매우 유익한 인식근거 및 실천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동서양의 생명존중사상
슈바이처나 간디 등의 생명존중사상은 동양의 유학, 불교, 도가사상, 한국의 
홍익인간 사상 등과 공통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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