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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르네상스 Renaissance

by Casey,Riley 2022.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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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Renaissance

생활과 사고방식이 중세에서 근대로 변화하는 모습을 한 마디로 묶어 표현
한 용어로서 종래에 취급되어 왔던 개념. 그러나 이것이 그러한 뜻으로 적
절한 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르네상스라는 용어의 개념] 17세기에서 18세기로 바뀔 때, A.퓌르티에르의 
<보편적 사전(제2판, 1701)>과 P.벨의 <역사적, 비판적 사전(1697)>이 <르
네상스>라는 항목을 설정했다. 전자는 <미술 르네상스>라는  말을 수록했
고, 후자에 의해 <문예 르네상스>라는 말이 정착되었다. 양자의 정의는 16
세기 인문주의자의 견해를 확인한 것이다. 16세기  중엽 이탈리아 화가 G.
바자리가 그의 저서 <치마부에의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의 저명한 건축가ㆍ화가ㆍ조각가의 전기(1550)>에서 <미술의 리나시타(재
생)>를 지적했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이탈리아 화가들의 고대미술
양식의 학습과 자연묘사훈련의 성과를 기술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
의 인문주의자 J.아미요가 플루타르코스의 <대비열전의 불역본,1559)을  앙
리 2세에게 바치는 현정문에서  <문예가 재생했다(르네트르했다)>고 언급
했다. 이 경우, 아미요는 프랑수아 1세에 의한<콜레주 드  프랑스>의 창건
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문예 르네상스> 당시의 생각은 고
전어와 고대 저술의 학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미술과 학
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미술과 학예 부흥, 이것이 15세기 
이후의 이탈리아 및 16세기 이후  북유럽의 인문주의자가 생각한 <르네상
스>였다. 그것이 18세기의 계몽주의 때에는 <르네상스>를  하나의 시대구
분으로서 생각하는 견해를 차츰 형성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중세ㆍ근세 
문제와 관련지어서 <르네상스>를 계몽적인 근대의 개시기로 보았다. 볼테
르는 기본적으로는 전 세대  이래의 생각을 답습해서 <르네상스>를  고대 
학예의 부흥을 가리키는 용어로 취급하면서 <중세>로부터의  탈출을 거기
에서 보았고, <계몽>과 <정치 사회적인 생활 향상>을 거기에 상정하였다. 
또 한가지 볼테르의 탁견은 그러한 동향에서의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걸친 이탈리아사회의 뛰어남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이윽고 시민혁명을 달
성한 19세기의 <부르주아지(시민계급)>는  <르네상스>를 근대시민사회의 
성립기로서 구성했다. 고대 학예의 학습이라는 한정된 개념으로서의 <르네
상스>가 하나의 시대개념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여기서 열리게 되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라는 말은, 이탈리아라는 공
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유럽사회 전체에 관계되는 기운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시간적으로도 또한 자유화가  진행되어 중세세계의 
깊숙한 곳까지 <르네상스>의 원천이 끝없이  탐구되고 이것을 <르네상스 
원천탐색론>이라고 한다. H.토데의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와 이탈리아 르
네상스 문화의 시작(1885)>은  이러한 맥락에서 서술되었으며  책이름으로 
그것은 명확히 밝혀져 있다. <사람은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면 벌써 르네상
스의 각인이 찍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나 움직임을 발견하려고 했다>
라고, J.호이징가는 <중세의 가을(1919)>에서 말하고 있다.  1913년에 H.샤
마르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기원을 <골(Gaul)정신>과 <궁정풍  예절의 
마음>에서 찾았다. <장미 이야기>와 <대수사가>가 중세의 <르네상스>를 
가져오는  중개역할을   하였다. <르네상스   프랑스 시가의  여러  기원
(1932)>. 또한 쿤노  프랑케의 <루터  이전의 독일문학에서의  퍼스낼리티
(1916)>는 12ㆍ13세기의 미네젱거에서 <르네상스의 퍼스낼리티>의 최초의 
발상을 찾고 있다.  샤마르나 프랑케가 중세문화와  <르네상스>의 접속을 
문제시하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중세문화 그 자체에서 <르네상
스>를 찾아야 한다. 인문주의자 이후의  <르네상스> 논쟁을 전망한 책 <
역사적 사고에서의 르네상스(1948)>의 미국의 W.K.퍼거슨은  마지막 장의 
제목을 <중세주의자의 반역, 중세의 지속으로서 설명된 르네상스>로 정했
는데, 요컨대 중세문화에 관한 것이 너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고 기술하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중세에 관한 식견이 급속히 확대되고 심
화되었다. 중세문화에서의 <르네상스>적인 동향의 적절한 평가를 위해 필
요한 만큼의 충분한 재료가 갖춰지고, C.H.허킨스로 하여금  <12세기 르네
상스(1927)>를 쓰게 하였다. 
[오늘날의 르네상스 논의]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는 그 일부였으나, 또
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또한 매우 중요한 부분이
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1975년에  나온 <이탈리아의 이티네라리움>이라
는 논문집은 착실한 작업의 보고서로서 이탈리아인문주의의 연구로 알려진 
석학 P.O.크리스텔라에게 헌정된 것으로 <유럽의 변모라는 거울에 투영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프로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
럽의 변모>를 넓은 뜻의 <르네상스>로 취급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중세
에서부터 근대로의 지속과 변화의 양상을 그려낸 도면이다.  거기에서 <이
탈리아의 이테네라리움>을 볼 수가 있다. 즉 그것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의 발자취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럽의 변모>를 넓은 뜻으로 <르네상스>
라고 이해하는 종래의 관행은  중요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의 
정신적 상황에 관하여 최근에 <마니에리슴>이라고 하는  개념이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집에 기고한 드레스덴의 논고
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프랑스에의 수용 프로필>이라고 하였고 주로 프
랑스의 16세기 인문학자나 문학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라블레ㆍ롱사
르 또는 몽테뉴 등 종래에 <르네상스문학>의 테두리 안에서  소개되는 일
이 많았던 저술가들의 정신을 해명하는데. <나투라(자연)><아르스><이미
타티오(모방)>, 또는 몽테뉴가  그의 저술의 타이틀로  취했던 <에세(시행 
또는 훈련)>, 즉 <마니에라>라고 한 용어가 유효하다고 그는  논의하였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마니에리슴>이라는  개념 쪽이 16세기의  정신상태를 
해명하는 키워드로서 적절하다고 했다.  이를테면, M.세르반테스도 그러한 
개념으로 비추어 보는데 적합한 대상이라고 말했다. <마니에리슴>은 원래, 
미술사의 용어로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미술이 바로크미술로 이행해  가는 
과도기의 미술로서 사용되어 왔다.  그러한 범위 내에서는  <마니에라>란, 
미적 표현형을 뜻하지만, 이미 G.바자리는, 이 말을 단순히  그러한 뜻으로
서만이 아니라 적어도 예술가의 표현행위의 전체와 관계되는, 말하자면 예
술가의 생활방식이라는 듯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16∼17세기의 <유럽
의 변모>라는 사태를 관찰함에 있어서는  <르네상스>라는 용어뿐만 아니
라 <마니에리슴>이라는 개념에도 충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말
하자면 <르네상스>개념을 스스로 보정함으로써 용어의 풍요성를 찾으려는 
시도이다. 또한 과학사의 입장에서 보는 <르네상스>비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미 부르크하르트의 책에서 함축된 이래, 자연과학적 인식과 
지식의 전개가 <르네상스>의  커다란 노획물로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1929년에 과학사가 G.사턴은 <과학의  고나점에서 보는 경우,  르네상스는 
그 어떠한 르네상스도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사턴 외 편<르네상스 
문명> <르네상스에서의   과학>. 또한  <마술과 경험과학의   역사(전6권, 
1923∼41>의 저자 L.손다이크는 15ㆍ16세기를 과학의  불모시대라고 했다. 
이 전망 가운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17세기의 과학혁명>이다. 오늘날
의 <르네상스>논쟁은 거기까지 꿰뚫을 수 있는 시력을 요구하고 있다.


종교개혁
중세 가톨릭교회를 분열시키고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수립한 16세기의  교회
개혁, 중세가톨릭교회는 14세기의 교회분열로 인하여  보편적 권위를 잃고 
보헤미아에서는 J.후스에 의하여 교회개혁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콘스탄츠
공의회(1414∼16)는 분열의 해결 즉 교회 전체의 통일과 후스 처리에 일단
은 성공하였으나 교회전체의 개혁에는 실패하였다.  그 뒤 신학자ㆍ신비주
의자를 비롯해서 각 방면으로부터 개혁요구가 제시되었으나  가톨릭교회는 
세속적 영화와 권세를 추구하여 교의의 형해화, 성직자의 부패를 쇄신하지 
못하였다. 이때 M.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은 새로운 신앙원리에 바탕을 둔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를  분열시키고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수
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종교개혁운동은 J.칼뱅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
를 보이며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 무렵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중앙집
권적 국가가 형성되는 단계여서, 그 과정에  종교개혁운동이 끼어 들게 되
었다. 각국의 정치사정에 따라 그 전개양상은 여러 가지  변화를 보였는데, 
국왕권력의 절대화에 이바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국가의 독립운동의 사상
적 근간이 되는가 하면 양심의 자유도 낳게 하여 근대화에  이바지하는 측
면이 나타났다.(루터의 개혁,  츠빙글리의 개혁, 칼뱅의  개혁 등의 자세한 
개혁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 중세의 신 중심의 윤리사상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적
인 삶을 중시하는 인간 중심의 윤리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인간성 회복
- 과학 발달
- 인간 중심
- 문학 발달
- 근대적 사고의 확립
*근대자연과학발달의 사상적 의의
형이상학적ㆍ신학적 자연관ㆍ우주관ㆍ세계관탈피 → 과학적ㆍ합리적인  인
식과 사유법칙형성
*근대의 서양윤리사상의 시대별 전개양상
 근대초기. 르네상스, 종교개혁
 근대중기. 근대적 사고유형, 경험론, 합리론, 계몽사상의 시민. 사회윤리
 근대후기. 공리주의, 관념론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른 근대적 사고유형
                   귀납법                연역법
사유ㆍ지식의 근원:  경험,                  이성
지식의 획득과정  : 경험적 관찰ㆍ실험, 과학적 논리ㆍ추리
영향             : 경험론,                 합리론
유행지역         : 영국,                  유럽대륙
참된 지식        : 물리적 지식,          수학적 지식



경험론
*근대초기에 경험을 중시한 사상
감각과 지각형태의 경험이 지식의 유일하게 합당한 원천이자 검증기준이라
고 주장하는 인식론상의 철학적 전통이다.
-> 인식이나 지식의 근원을  경험에서 찾는 철학적 입장ㆍ경향.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초월적 존재, 본유 관념이나 칸트의 직관ㆍ오성의 선천적인 
능력보다도 감각이나 내성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체적인 사실을 중시하고, 
전자도 후자에 의해 설명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역사와  입장에 따라 
다음과 같은 유형이 있다. 
1. 고대ㆍ중세 : 고대그리스의 소피스트ㆍ원자론자ㆍ소(小)소크라테스파 가
운데의 키니코스파나 키레네파ㆍ에피쿠로스파등은  그 선구이며, 플라톤ㆍ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주의ㆍ초월주의의 경향과 대립했다.
2. 근세초기 : 경험론의 경향이 유력하게 된 것은 과학발전에  따라서 경험
적 사실이 중시되고, 또 인식론이 철학의 중심과제가 된 근대 이후이다. 특
히 영국은 베이컨을 중심으로 한 경험론 전통에서 대륙의 이성론이나 독일 
관념론 등과는 대조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3. 영국고전경험론 : 위의 경향은 홉스를 거쳐 로크에 이르러  선천적인 본
유관념의 비판, 전인식의 경험에 의한 설명이 되어 명확해졌다.  로크에 의
하면 마음은 백지 또는 암실이고, 전  지식은 감각과 반성이라는 2개의 창
구를 통하여 외적으로부터 주어지는  문자이며 빛이어서 복잡하고  숭고한 
지식도 경험적 소요인 단순관념이 복합한 것으로 설명된다. 로크의 방향은 
버클리, 흄이 이어받았다. 그들은 경험적 개물을 초월한 추상관념의 비판에
서 개념론, 더 나아가 유명론의 입장에 섰으며, 또 경험의 배후에 상정되는 
실체개념을 부정하고 그것들을 인상이나 관념의  집합체로 간주했다. 특히 
흄은 초월적ㆍ이성주의적 입장에서는 절대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어  있던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계기하고 접근하여 항상적으로 결합되는 2대상의  경
험에 기인하는 습관과 마음의 결정에서 찾았다. 이것이 칸트를 <독단의 겉
잠>에서 깨어나게 했음은 유명하다. 흄 이후, 경험론의 계보는 공리주의자
인 밀에게 계승되었다. 
4. 경험론의 문제점 : 그러나 이상의 고전경험론에도 경험론 고유의 문제점
은 드러나고 있었다. 예컨대, 이성론의  철학이 인정하는 선천적인 계기는, 
경험론이 그것을 경험에서의  발생ㆍ구성으로 설명하고자 할  때, 실은 그 
설명 안에 문제의 계기가 암묵리에 선취되며 순환을  형성한다는 형태로서 
경험론의 <걸림돌>이었다. 일례로, 복수의 개물간에 유사를 인지하여 추상
개념을 경험적으로 형성한다고 할 때, <유사>란 이미 개물보다 타입이 관
계의 추상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사정은 경험론이 비
판적으로 본 실체ㆍ인과 등의 전통적인 개념의 대부분에 대해 지적된다.
5. 현대경험론 : 독일관념론의 붕괴와 함께 그 반동으로서의 유물론이나 실
증주의의 움직임과 관련하여 경험론은  부활하여 유럽과 신대륙으로  퍼졌
다. 현대경험론은 전술한 경험론의 난점에 대처하기에 부심한다. 예컨대 논
리실증주의에 대해, 한편에선 경험명제는 직접소여에 관한 보고에 전부 환
원ㆍ검증된다고 생각하고, 또 한편에선 전통적으로  선천적 인식으로 생각
되어 온 논리나 수학 등의 필연성은 위의 경험적 소여를  설명하는 이론에
서의 언어ㆍ기호의 용법 결정에  관한 약정적 구속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도리어 고전경험론의 결함을 계승한다고 보고, 프래그
머티즘은 이 2원론을 비판한다. 즉,  선천적 계기도 경험설명에 유효한  한 
타당한 개념 조직이며, 수정ㆍ개량ㆍ폐기의 가능성이  생각되는 이상 넓은 
뜻의 경험에 기인한다고 본다.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
영국 철학자. 르네상스기 이후의 근대철학. 특히  영국고전경험론의 창시자
이다. 런던에서 국새상서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에서에서 트리니트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밑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다. 또한, 제임스 1세밑에서 사법장관, 이어서 
아버지와 같은 영예직을 맡았다.  그는 뒤의 D.흄이나 I.칸트  등의 규범이 
된 <학문의 대혁신> 전6부의 집필을 구상하고 그 계획을 대규모로 전개할 
생각이었으나 실현된 것은 3부인데, 특히 제1부 <학문의 진보(1605)>, 제2
부 <노붐 오르가눔(1620)>에서  그는 먼저 인간의 지성이 진리에 접근하
는 것을 방해하는 편견으로 4개의 이돌라(idola:우상 또는 환상)를 들고 있
다. 첫째는 자기의 편견에 맞는 사례에 마음이 동요되는 인류 공통의 종족
의 우상, 둘째는 이른바 동굴에 갇혀 있어서  넓은 세계를 보지 않기 때문
에 개인의 성향, 역할, 편벽된 교육 등으로 인하여 생기는 동굴의 우상, 셋
째는 무대위의 요술,허구에 미혹되듯이, 전통적인 권위나 잘못된 권위나 잘
못된 논증, 철학설에 미혹되는 경우인 극장의 우상, 넷째는  시장에서의 조
심성 없는 언어의 교환에서 생기는 시장의  우상이다. 그는 이러한 편견을 
일소함으로써, 지식의 확대에 기여하지 못하는 연역적  삼단논법이 아니라, 
실험과 관찰에 기초를 둔 귀납적 방법을 중시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 <
자연은 그에 순종함으로써만 정복할  수 있다> 등의  그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목적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방법의 확립이다. 그러
나 그의 본질은 역시 중세적 <형상>이라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
고 있고, 자연법칙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있지 않으며, 수학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자연 속의 보편적 법칙을 양적 관계로 파악할 수단을  가지지 못했
다는 점에서 위의 시론은 불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과학 방법의 중
요한 일면을 확실하게 강조하고  있다. 베이컨의 실천철학은  그의 문필의 
재능을 나타내는 <수필집(1597)>에  비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기적 충동 외에도 사랑이라는  지고한 덕목에 의한 인간  전체에 
대한 배려의 존재를 확인하고, 사랑에 의한  실천적 활동의 중요성을 이야
기한 점은 중요하다. 저서로 <학문의  진보와 권위(1623)> <뉴아틀란티스
(1624)> <숲 그리고 또 숲(1627)>등이 있다.

홉스 Thomas Hobbes 1588∼1679
영국 철학자, 정치사상가. 잉글랜드 윌트셔주 출생. 옥스퍼드대학에서 스콜
라철학을 배우고, 대륙에서 수학, 자연과학을 연구하였으며, F.베이컨의 영
향을 받아 유물적, 기계론적 세계관을 세웠다. 그는 운동을  유일한 실재로 
보았는데, 인간계도 자연계와 같은 원칙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하였으며, 이
탈리아에서 알게된 G.갈릴레이의 물리학상의 업적을 정치학에 적용시켜 이
른바 사회물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스튜어트 왕조를 지지하
는 왕당파로 지목되어 청교도 혁명  직전에 프랑스로 망명, 유물론자 R.가
상디, 철학자 R.데카르트 등과 친교를 나누었다. 그 뒤 크롬웰 정권하의 런
던으로 돌아와 정쟁에 개입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 힘썼다.  왕정복고 
후에는 J.블렘홀 등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며 그의 사상이 무신론이라 하
여 금압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찰스 2세의 사부가 되어 그의 비호하에 여생
을 보냈다. 그는 베이컨과는 달리 귀납법이  아니라 기하학을 모델로 하는 
연역법을 채용하였는데, 양자의 상즉적 관계에 의하여 이성의 올바른 추리
인 철학이 성립된다고 생각하였다. 
저서 <리바이어던(1651)>에서는 사회계약설의  입장에서 절대주의를 이론
화하였다. 즉 자기보존을 위해서 자연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이기적인 개
인집단인 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장이기 때문에 오히려 개인
의 안전을 상실할 수도 있는 결과가 되므로 이성은 보편적인  자연법의 실
현을 요구하게 된다. 이리하여 자연권을 주권자에게 위양하고 주권자는 이 
계약을 강행하기 위하여 계약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주권력은 절
대적인 것이라 하였으며, 국가를 거대한 괴물 <리바이어던>으로 비유하였
다. 그 밖의 주요 저서 <철학원리>는 제1부 <물체론(1655)>, 제2부 <인간
론(1658)>, 제3부 <시민론(1642, 47>으로  나뉘어져 있다. 또  <법의 원리
(1640)>에서 인간은 절대적인 주권에 종속될 때 평화적인 공동생존이 가능
하다는 사상을 구체화하였다.

흄 David Hume 1711∼1776
영국 철학자. 스코틀랜드 에드버러 출생. 에든버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
였지만, 문학ㆍ
철학을 지향하여 J.로크ㆍI.뉴튼 등의 신학문 및  다방면의 학문 서적을 탐
독하였다. 한때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1734∼37년 프랑스에  체재하였다. 44
년 에든버러대학, 51년 글래스고대학에서 교수직을 구하였으나 무신론자라
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1748∼49년 빈ㆍ토리스에 궁정사절로 활동하였고, 
52년 에든버러 변호사도서관에서 일하였으며 63년 파리주재  영국대사비서
관이 되었다. 67∼69년 국무차관을 지낸 뒤 에든버러에 정착하였다. 프랑스
에 머무른 뒤 에든버러에 정착하였다. 프랑스에 머무를 때 <인성론>을 집
필하여, 1739년 제1권 <지성론>과 제2권  <정념론>을, 40년 제3권 <도덕
론>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당시에도 악평을 받았으나 오늘날에는 그의 주
저로 꼽히고 있다. <도덕ㆍ정치론(1741∼42)>을 간행,  호평을 받은 뒤 48
년 악평을 받았던 <인성론>의 제1권을 개작한 <인간 오성에 관한 철학논
고(1748)>를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개정판 제목인 <인간오성에 관한 연구
>로 널리 알려져 있다. 51년  <인성론>의 제3권 <도덕론>을 개작한 <도
덕원리에 관한 연구>, 52년  <정치론>을 출판하였고 54∼62년  <영국사(6
권)>를 출판,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은퇴  후에는 이미 출판된 
저서들을 다듬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그는 로크, G.버클리와 더불어 
18세기 영국 경험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 영향은 J.벤담의 공
리주의와 J.S.밀에게서 나타난다. 또 독일에서는 I.칸트의  비판철학이 그에
게 큰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기 때문에 흄을 중요한 철학자로 평가한다. 그
의 인식론은 인간본성 및 그 근본법칙과 그것에 의존하는 여러  학문의 근
거를 해명하는 일이었다. 그는 인간정신의 기본적 단위를 <인상>과 <관념
>으로 보았고, 지식은 관념의 연합에 의해 성립한다 하였다. 따라서 이 연
합의 3개의 관계인 유사관계ㆍ접근관계ㆍ인과관계 또는 7개의 철학적 관계
(유사, 동일, 공간ㆍ시간관계, 양 또는 수, 성질의 정도, 반대, 인과)를 중요
하게 고찰하였다. 특히  인과관계에서는 <원인>에서  <결과>로의 이행을 
습관에 의하여 확립된 신념에 근거한 것이라 하여 그 객관적  필연성을 부
정하였다. 그의 실천철학은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는 유명한 구절이 대
표하듯이, 감정은 오성ㆍ지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며 그것이 인상ㆍ관념
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만 인식론에 관계된다고 보았다. 또 도덕론
에 있어서는 인간의 특별한 도덕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자연주의적
이며 사회생활과 개인의 행복의 근본원리를 공감이라 한  점에서 공리주의
적인 성격을 띤다. 정치ㆍ법사상에도 T.홉스의 <자연상태>의 가정과 계약
설을 비판하고 만인에 공통된 <이익>의 감정에서 법의 근거를  구하는 공
리주의적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 그의 자연주의는  20세기 들어 특히 분석
철학자들 사이에서 주목받았는데, 철학적 정당화가  오직 자연세계의 규칙
성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였다.

벤담 Jeremy Bentham 1748∼1832
영국 법학자ㆍ철학자. 런던출생. 12세에 옥스퍼드대학 퀸스칼리지에 진학하
여 1763년 15세에 졸업하였다.  그 뒤 모교에서 문학  석사를 목표로 하는 
한편(18세에 취득). 런던의 링컨 법률학원에서 법률실무를 익히고, 72년 변
호사자격을 취득하였다. 그러나 변호사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법개혁
ㆍ법전화 문제에 몰두하였다. 76년 W.블랙스턴의 <영법석의> 서론의 일부
를 비판한 <통치론단편>을 익명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사회계약
론ㆍ자연법론을 비판한 동시에 D.흄ㆍC.A.엘베시우스  등으로부터 받은 <
공리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이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은 최대다수의 최
대행복이다>라고 하는 공리의  원리를 논리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입법의 
분야에 적용한 것이 주요  저서인 <도덕과 입법의  제원리서설,1789>이다. 
행복을 쾌락 및 고통이 없는 상태로  보고, 쾌락ㆍ고통의 종류, 계산 방법, 
법으로 금지되어야 할 유해한 위반행위, 위반 행위와 벌과의 평형 등이 고
찰되었다. 82년 집필된 속편 <법일반론>에서는 법 및 법체계의 구조적 특
징, 각 법부문의 구별, 법전화의 문제  등이 검토되었다. 이상과 같은 입법
의 기초이론에 의거하여 형법ㆍ민법ㆍ소송법ㆍ증거법ㆍ국제법ㆍ헌법 등 각 
법부문의 입법원리의 고찰로 나아가, 최종적으로 어느 정도 수정을 가하면 
어느 나라에서나 응용할 수 있는 <완벽한 법전>의 구축을 목표로 하였다. 
그는 자기의 입법론이 실천될 수 있는 나라를 찾아서 러시아를 여행하기도 
하고, 프랑스의 의회제도ㆍ사법제도의  개혁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이 대륙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스위스인 E.뒤몽의 협력, 
특히 벤담의 초고를 정리하여 프랑스어로  번역한 <입법이론(1802)>에 의
한 바가 크다. 1809년  <의회개혁문답집>을 집필하여 17년 <의회개혁안>
을 공표하였고, 24년  철학적 급진파의 기관지인  <웨스트민스터 평론>을 
창간하였으며, 30년 정치개혁에 대한 관심의 집대성이며 <완벽한 법전>구
상의 마지막 과제였던 <헌법전>을 간행하였다. 헌법전에서는 국민주권, 일
원제 의회, 매년 개선, 평등선거구, 비밀투표, 보통선거(여성ㆍ문맹은 제외)
를 골자로 하는 대표민주제를 주장하였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영국의 중앙과 지방의 행정제도ㆍ사법제도의 모든 개혁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벤담주의가 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는 2가지로 
평가되고 있으나, 그의 업적은 근대법ㆍ근대국가의  본연의 자세를 공리주
의의 원리에 입각한 구체적인 개혁안을 통하여 제시하고  실천하고자 한데 
있었다. 또한, 그의 집필활동은  법학관계뿐만 아니라 폭넓은 분야에  미쳤
다. 철학ㆍ윤리학에서는 <행위의 동기표,1817>, J.보링 편 <의무론(1834)>
등이 있다. 경제학에서는 A.스미스의 영향을 받아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
한 <고리변호론,1787>과 식민지론ㆍ화폐론 등에 대한 논고가 있다. 정치학
에서는 빙엄 편 <오류론, 1824>이 있으며, 이밖에도  교육론ㆍ종교론에 대
한 논고가 있다. 벤담의 저술은 J.S.밀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저술 전반에 
걸쳐 핵심이 되는 것은 행복이며, 그 촉진을 가로막는 정책ㆍ법률ㆍ제도에 
대한 비판, 또한 행복의 촉진을 저해하는 관념ㆍ사상에 대한 비판이었다.

밀 John Stuart Mill 1806∼1873
영국 철학자ㆍ정치학자ㆍ경제학자. 런던 출생.  공리주의 사상가 J.밀의 아
들로서 아버지의 유별난 조기교육으로 3세 때  그리스어를, 8세 때 라틴어
를 배우고 이를 기초로 역사와 문학 서적을 널리 섭렵하였다. 12세 경부터
는 그 범위가  철학ㆍ논리학ㆍ정치학ㆍ경제학에까지 확대되었으며, 사상내
용에까지 이르는 깊이 있는 토론이 아버지와의 사이에 계속되었다고 한다. 
14세 때 1년 남짓 도불하여 스포츠를 즐기고 자연을 벗삼아 지낸  적이 있
는데, 후자는 그에게 자연을 일생에 걸친 취미가 되었다. 15세에 귀국한 후 
일생에 걸친 취미가 되었다. 15세에  귀국한 후 벤담주의의 저작인 P.뒤몽
의 <입법론>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공리주의 사상가가  되기로 결심하
였다. 1822년에는 벤담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동지들과 <공리주의자협히>
를 결성하고 <모닝 크로나클>지와 <웨스트민스터평론>지 등에 많은 기고
를 하였다. 다음해인 23년에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동인도회사에 입사하여 
회사가 해산될 때까지 35년간  근무하였다. 그러나 공리주의  사상 보급을 
위한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밀  자서전>에 의하면 20세 되던 해 
가을, 그는 어떤 일에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공리주의적 개혁에도 열정
을 가질 수 없게 되는 등 정신적 위기를 체험한다. 이는 영국 사교계의 저
급한 도덕수준을 전혀 알지 못하고 고전파 경제학의 사익추구 개념을 너무
나 성선설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었으므로, 종래
의 공리주의사상을 수정할 필요를 통감하게 되었다. 그는 낭만주의의 계보
에 서 있는 S.T.콜리지와 T.칼라일의 저작을 열심히 읽고 정치제도의 상대
성과 역사성을 주장한 논리에 반면의 진리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또한 프
랑스의 생시몽파와 A.콩트 등과의  교류를 통하여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 또는 사유재산제도와 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고전파 경제학
의 학계를 깨닫게 되었다. 이는 후에 그가 영국 사회주의의 아버지로 불리
기도 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30년. 새로운 사상 추구를 향한  모색을 계
속하고 있는 그는 후에 아내가 된 테일러와 만났다. 테일러는 미모와 지적 
교양으로 밀의 그 후의 인생의 지주가  되지만, 밀의 사상내용에까지는 영
향을 끼쳤는지의 여부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어쨌든 그의 새로
운 사상은 <런던평론>과 <런던웨스트민스터평론>에 기고한  글들로 나타
났는데, 특히 <벤담론(1838)>과 <콜리지론(1840)>은  그의 사상전환을 일
단 총결산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벤담주의를 18세기 계몽사상의 
전형으로 평가하면서도 그에 대한 19세기적 반동인 콜리지에도  일정한 평
가를 부여하는 공리주의수정의 입장을 확립한 것이다. 43년에는 <논리학체
계>를 완성, 사회고학은 벤담주의가 이용하는 직접적 연역법만  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관찰로부터 경험법칙을 도출하고 그것을 인간성의 법칙에 기
초한 연역에 의하여 검증하는 역의 연역법도 널리 이용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더 나아가 혁명운동이 유럽을  휩쓴 48년에 출판된 <경제학원리>
에서는 사유재산제도와 경쟁에 입각한 경제체제를 당연한 전제로  삼아 온 
종래의 경제학에 대해서 분배형태는 인위적ㆍ역사적인 것이라는 등의 문제
를 제기하였으며, 또한 경제적 진보에 국민성의 차이라는 요인을 도입하는 
등 고전파경제학을 대담하게  수정하고자 하였다. <자유론(1859)>은  모든 
개인의 자유의 보장으로서 꿈꾸어진 민주주의가 결과적으로는 다수자의 전
체를 가져오고, 모든 개인은 평균화하고 몰개성적이 되며 자유는 압박되고 
인간성의 위기시대가 도래한다는 경세의 책이었다.  이렇듯 그는 인간정신
의 자유와 개성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였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학
원리>도 저술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급속한 경제발전의  시기보다도 사람
들이 여가를 향수할 수 있는 정지 상태 쪽이 바람직하며, 또한 공산주의와 
사유재산제도의 시비도 어느 쪽이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보장하는가로부터 
판정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말년의 밀은  하원의원(1866∼68)으로서 
선거권의 확장운동에 몰두하였으며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참정권을 제
안하였다. 의원직을 물러난 후 집필활동을  계속하며 남프랑스의 자연속에 
살면서 곤충학자 J.H. 파브르와 교유하며 지내다가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
다. 그 밖의 저서로는  <대의정체론(1861)><공리주의론(1863)><콩트와 실
증주의(1864)><사회주의론(유고,1879)>등이 있다.
듀이 John Dewey 1859∼1952
미국의 철학자ㆍ교육학자. 버몬트주 벌링턴 출생. 버몬트대학을 졸업하고 3
년 동안 고등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1882년 존스홉킨스대학에 입학, 철학을 
전공했으며 이때 헤겔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84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시간ㆍ미네소타대학을 거쳐 시카고대학ㆍ컬럼비아대학의 주임교
수를 역임하면서 교육ㆍ철학ㆍ심리학 등을 강의했다. 그는 W.제임스에  의
해서 발전된 프로그머티즘을 바탕으로 보편적 교육학설을 세워  세계 사상
계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과거의 개념적인  철학용어를 씻어내고 시민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풍부한 철학내용을 쌓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철학적 진리만을 추구했던 고대, 중세의 전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던 주지
주의적 전통으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하였다. 동시에 그는 지식을 과 기술에 
연결시킴으로써 사회와 인생 속에 살아 있는 지식을  불어넣으려는 합리주
의적 입장을 추구했다. 또 사회의 개조를 커뮤니케이션, 즉  토론과 대담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그의 철학이 교육학을  통해서 형성되어 간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외적인 활동  또한 활발하여 미국의 제2대 정
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의 상대에 대립하는 제3정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민의 자유를 위하여 수 차례에 걸친 투쟁도 하였다. 그는 또 <뉴욕 교원
조합>을 창립하였으며 제1차세계대전  후에는 S.O.레빈슨과  함께 전쟁법 
추방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그의 철학사상과 
관련성 없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의 근본적 입장을 시현했다고  보는 것
이 타탕하다. 그의 철학은 인간의 인식을  환경에 적응시키는 과정으로 파
악하며 개념ㆍ판단ㆍ추론을 그 과정의 도구 혹은 기구로  보는 실험주의적 
논리를 기반으로 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그와  같은 입장을 도구주의 혹은 
기구주의라고 이름했다. 그는 사회에  관한 지식을 철학에서 찾고,  경험을 
통한 관념의 갱신을 찾는 실험주의 원칙을  교육이론에 적용하고 있다. 사
회개혁의 수단을 인간 지성의 향상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에  대한 
낙관을 제시해준다. 주요저서로는 <학교와 사회(1899)> <민주주의와 교육
(1916)><경험으로서의 예술(1934)>등이 있다.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독일철학자. 쾨니히스베르크 출생.  18세기후반 서유럽 계몽사상의  성숙과 
프랑스혁명시대에 있어, 이전의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여 근
대인의 사상과 행동을 규제할  <이성>의 기본적 윤곽을 제시하였으며  그 
뒤 낭만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철학적 사색을 위한 길을 열어 놓았다.
[생애와 시대적 배경] 1724년 4월 22일 동프로이센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에
서 마구장인 아버지와 경건하고 신앙심이 돈독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
다. 김나지움을 거쳐 4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여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47년 졸업하여  쾨니히스베르크 부근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55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형이상학ㆍ논리학 담당 강
사로 있다가 70년 교수가 되었으며, 96년 은퇴까지 5차례 학부장을 지냈다. 
그동안 형이상학ㆍ논리학ㆍ윤리학ㆍ자연지리학ㆍ인간학을 비롯한 여러  학
과의 강의를 하였으며 많은 저서를 내놓았다.  칸트가 자신의 사상을 형성
하고 학문적으로 활동한 시대는 1740∼86년의 프리드리히대왕  치세기간이
며, 베를린을 중심으로 G.E.레싱  등이 활동하였던 독일계몽주의시대 최전
성기의 자유스러운 분위기는 칸트를 진정한 <세계시민적>철학자로 길러냈
다.
[철학체계로의 지향]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원리(1786)>및<법론의 형이
상학><덕론의 형이상학>을 각각 제1부와 제2부로 포함하는 <인륜의 형이
상학(1797)>은 제각기 제1ㆍ2비판서에 의하여 제시된 인간학적 철학의  기
초 위에 새로운 철학적  체계를 확립하려는 칸트의  의도였다. 1780년대에 
쓴 역사철학에 대한 소론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이성적  입장에서 해석하려
고 시도한 <단순한  이성적 한계 안에서  종교(1792)>는 역사에서의 신의 
섭리라는 종래의 <목적론적>인식에 관련되는 문제에 새로운  비판적 전망
을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 여러 해에 걸친 <통속강의>를 모아 출판한 <인간한(1789)>과 <자
연지리학(1802)>은 근세 시민적  자각으로서 칸트철학 밑바닥에  감추어진 
생생한 인간적 관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세에 미친 영향] 칸트철학은 그가 지녔던 유한주의 입장을 버리고, 인간
주체를 무한한 우주를  구성하거나 산출하는 주체,  유한한 감성을 무한한 
예지적 직관 등으로 확대시키는 형태로서  J.G.피히테ㆍF.W.J.셸링ㆍG.W.F 
헤겔 등으로 이어진 낭만주의  세대의 이른바 독일관념론철학에  계승되었
다. 그 영향은 영국ㆍ프랑스의  이상주의 여러 조류에까지 미쳤다.  독일의 
신칸트학파 철학은 19세기말부터 학문적인 문제상황에 부응해 칸트의 비판
주의를 부흥시키려 한 것이다.  신칸트학파가 퇴조한 뒤  나타난 오늘날의 
여러 철학 조류도 대부분 직접ㆍ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따
라서 칸트철학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인식비판
적ㆍ초월론적 철학의 영향은 E.후설의  현상학으로부터 J.하버마스의 비판
적 합리주의, L.비트겐슈타인과 P.F.스트로슨 등의  언어분석철학에까지 미
친다.
[칸트철학의 기본개념]
(많은 것이 있지만(엄청나게 많더라..)
 그 중에서 고등학교 윤리교과범위에서 중요히  다루는 부분, 제가 보기에 
중요하게 보이는 부분(?)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그렇게 추려내도... 너
무 많어.. --;] )
1.근본악: 칸트는 악행의 기원을 초감성적, 무시간적 행위로서의 <근본악>
으로 보았다. 이것은 칸트철학의  입장에서 보는 원죄의 신화적  해석이고, 
단순히 이성의 한계 내에서 성격의  전승내용을 해석하는 시도 속에  특히 
잘 알려져 있다.
2.목적없는 합목적성: <판단력비판>에서 미적 판단의 특징을 해명할 때 사
용한 근본개념의 하나. 칸트는 미에서 볼 수 있는 합목적성을 대상의 속성
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여러 인식능력의 장난에 의해 생기는 쾌감에서 유
래한다고 해명하였다.
3.순수실천이성의 요청: 단적으로 의무수행을 명하는 도덕적 법칙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인간행위의 자연적 인과에서의  <자유>, 선의 달성에 이르
기까지 영혼의 <불사>, 그리고 덕에 합당한 행복의 달성을 보장하는 것으
로서 <신>의 존재, 이 3가지가 이론적으로는 증명 불가능하지만 실천적으
로는 불가결한 <요청>으로  성립되어야 한다. 이론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물자체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이 실천적으로는 성립될 수 있다는 것. <순
수실천이성의 우위>를 칸트가 주장하는 까닭이다.
4.정언명법: 정언명령으로도 번역된다. 참된 도덕의  기초를 이루는 도덕법
칙은 행복 등 어떤 목적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지시
하는 <가언명법>이 아니라, 단적으로 양심의 소리로서의 의무수행을 명하
는 <정언명법>이어야 한다. 칸트의 실천철학상의 근본개념의 하나이다.

헤겔. Georg W.F. Hegel 1770∼1831
독일 철학자. 뷔르템베르크주  슡투트가르트 출생. 신츨라톤학파의  철학과 
르네상스 이래의 근대사상을 독자적 관점에서 논리학ㆍ자연철학ㆍ정신철학
의 3부로 체계화하였다. <독일관념론>의 대성자로  알려졌으나 독일 관념
론을 창시한 J.G.피히테에 관한 계통적인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헤겔을 피
히테의 계승자로 규정하기가 어려워졌다.
[생애 및 저작활동] 경건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라나 1788년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ㆍ신학을 공부하고 J.C.F. 휠더린  및 F.W.셸링 등과 사귀었
다. 처음에는 베른ㆍ프랑크푸르트 등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독자적인 인생
철학에 바탕을 두고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1801년 예나대학의 
사강사, 1805년 언외교수가 되었고 이때 셸링의  사상에 동조하여 그와 공
동으로 <철학비판잡지>를 출판하였다. 그러나 점차 셸링의 입장을 벗어났
으며 예나대학이 나폴레옹군에 점령된 상황 아래에서 1906년 <정신현상학
>을 내놓아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예나를 떠나  밤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이 되었다. 1812년 두 번째 주저 <논리학>을 출판하였고, 16년 하이델
베르크대학교수가 되었으며 이듬해 <철학체계>를 간행함으로써 그의 사상
체계의 개략을 완성하였다. 18년  피히테의 뒤를 이어  베를린 대학교수가 
되었으며 마지막 주저 <법철학강요>를 간행하였다.  그의 저작 중에서 가
장 많이 읽히는 <역사철학><종교철학><미학>등은 죽은 뒤  제자들이 편
찬한 강의록이다.
[사상] 헤겔사상을 요약하면 변증법과 이성주의이다. 세계를 현실과 이성적
으로 추구하였다. 독일 관념론 테두리 안에서  변증법을 완결시킨 그의 영
향은 세계로 번져 헤겔학파를 이룩하였으나 P.J.A. 포이어바흐로부터 시작
되는 헤겔좌파에 의하여 논리가 정반대인 유물변증법을 만들어  내기에 이
르렀다. 또 그의 존재론은  원자론과 개체적인 요소로의 환원주의를  비판, 
생명적 존재의 일원론을 주장함으로써 현대 전체론의 효시를 이룬다. 헤겔
철학은 형이상학적 관념론으로 많은 비판과 반발을 받았지만, 역사적 의의
는 18세기 I.칸트로 대표되는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
는 의미에 중점을 두어 19세기 후반 이후 국가주의ㆍ역사주의의 길을 열었
다는 데 있다. 그는 현실이란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과정은 오히려 그 자신의 법에 의해 필연적으로  정해져있다고 판단하
였다. 따라서 사람들이 아무리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써도  역사의 법칙적 
흐름에 부합되지 않는 한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 역사
를 지배하고 있는 법칙에 대해 관념론적ㆍ형이상학적 견해를  가졌으며 역
사는 절대자나 신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 판단하였다. 그에 의하
면 절대자는 이성이고 그 본질은 자유이다. 따라서 역사는 자유가 그 속에
서 전개하여 나가는 과정이며 전제군주만이 자유이었던 고대로부터 소수의 
사람이 자유이었던 시대를 거쳐 모든  사람이 자유로 되는 시대로  옮아간
다. 그리하여 현대를 바로 이 마지막 단계가 실현되어야할  시대로 보았다. 
헤겔은 이러한 근본사상을 바탕으로 <논리학><자연철학><정신철학>의 3
불 된 철학체계를 수립하였고 이  전체계를 일관하는 방법이 모든  사물의 
전개를 정ㆍ반ㆍ합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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