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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니아전기 01 - 카야타 스나코

by Casey,Riley 2022.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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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니아전기 01 /카야타 스나코 



서장


꿈을 꾸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차갑게 뺨을 에이는 바람. 풍성한 털가죽, 날카로운 이빨, 기다란 꼬리의 친구들. 비교해볼수록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여 싫었다. 이빨도 꼬리도 털가죽도 없으니. 어째서냐고 물으면 멋진 검정 털가죽을 가졌던 아버지는 커다란 입을 열고 웃었다. 너는 두 발을 가진 짐승이니까 라고.
좀더 크면 자신에게도 꼬리가 생기고 이빨이 생기며 네 발로 달릴 수 있게 되는 거냐고 묻자 부친은 너는 계속 두 발로 있게 될 거라 말했다. 달갑지 않았다.

아름다운 선을 그리는 동료들의 몸이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동료들에게 뒤지지 않게 달릴 수 있었고 사냥감을 잡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도 너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말해주었지만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실망할 필요 없다고 위로해 준 것은 단 한 명의 두 발 달린 친구였다. 자기자신을 포함해 두 발 달린 것들은 좋아하지 않았고 볼품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친구만은 별개였다. 아버지와 같은 풍성한 검은 머리털, 바다색 눈동자, 언제나 상냥하고 아름다운 친구.

두 발 달린 자에게는 두 발 달린 자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렇게 말하곤 손을 이용한 싸움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싸운다는 것은 그때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친구가 가르쳐 준 검의 움직임에는 흥미가 생겼다. 다섯 살에는 단검을 쥐었고 여덟 살에는 지금의 검을 쥐고 있었다. 싸우는 것을 좋아했던 데다 강해지는 것은 즐거웠다.
조용히 뻗어 누운 몸 아래로 푹신한 지면을 느끼고 있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팔다리를 부드럽게 눈을 틔운 풀이 받아주고 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따사로운 햇빛이 온 몸에 내려쬐고 달콤한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뺨을 쓰다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분좋은 졸음에 몸을 맡긴 채 문득 이상하게 생각했다.
지금은 겨울일 텐데.

말라버린 들판을 눈보라가 하얗게 물들여 하늘은 무겁고 태양은 좀더 나약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상태일 터이다. 그런데 대자로 뻗어 누운 온 몸으로는 농후할 정도로 달콤한 향기와 따듯한 공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다. 북쪽 황야에 피는 꽃은 좀더 시원하다. 쨍하니 얼음과도 닮은 날카로운 향기가 난다. 눈이 있는데 이렇게 부드럽게 풀이 자라고 꽃이 피어 있을 리가 없다. 이것은 꿈인 거다.
봄이 된 꿈을 꾸고 있는 거다.

반 이상 잠에 빠진 채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움직여 허리 근처를 찾는다. 딱딱한 금속이 손에 닿았다. 현실의 감각이었다. 어쨌든 몸을 지킬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듯 하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무서울 건 없다. 조금 더 있으면 두 발 달린 친구가 깨워주러 올 것이다. 안심하고는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이 꿈 속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1장

그 남자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호흡은 거칠었고 주변을 돌아보는 눈초리는 험악했으며 검을 쥔 손과 자세에도 여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볕에 탄 건장한 장신에는 여기저기 상대방에게서 튄 피가 묻어 있었다. 이쪽을 습격하고 있는 적을 보자면 족히 열 명은 되는 집단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강했다. 검을 잡은 방식에도 실제 전투 방식에도 상당한 연룬이 쌓여 있었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살기를 뿜어내며 남자의 퇴로를 끊으려 하고 있었다. 강도짓이라 해도 혹은 복수라고 해도 무서울 정도로 대담한 행동이었다.

인적 없는 산길이라고 해도 봄의 태양은 아직 중천에 있었다. 어디에서 누군가에게 목격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어떤지 습격하는 무리는 남자를 도망치지 못하게 통제하면서도 신경질적일 정도로 주변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베어 쓰러뜨리려고 하고 있는 남자의 기량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이 수상한 자들은 실은 열다섯 명 이상의 대인원으로 습격해 왔었다. 일반적인 검사라면 한순간에 말 없는 시체가 되었겠지만 고군분투 끝에 다섯 명을 쓰러뜨린 데다가 한 번은 호위를 빠져 나가기도 했었으니 대단한 실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남자는 여행용 복장이었다. 그것도 장거리를 여행해 온 듯 했다. 건장한 장신을 감싼 기죽의 의복도 외투도 상당히 상해 있었다.

나이는 젊다. 이십대 중반 정도였다. 그 훌륭하다 말할 수 있는 검 기굴과 실용적인 의복으로 미루어 당장 필요한 상대에게 이리저리 고용되어 일하는 용병을 직업으로 하는 자인 듯 했다. 그 단 한 사람을 비겁하게도 집단으로 포위해 죽이려 하고 있는 자들을 보자면 모두 사슬갑옷에 문장이 새겨진 긴 상의, 간이 투구에 손목 보호대, 장식이 붙은 장화, 손에 들고 있는 검과 허리띠도 모두 하나로 맞춰진 것이었다. 이건 불량배일 리가 없다. 자유전사도 아니다. 어딘가의 성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종기사從騎士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백주대낮에 주인을 가진 기사들이 일개의 자유전사를 습격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해도 저물은 인적 없는 산길에서 산적 무리가 여행자의 배낭을 노리고 덤벼드는 것과는 이야기가 틀리다. 이런 비겁하고 비열한 행위로 손을 더럽혀서는 기사로서의 명예도 긍지도 당에 떨어질 터였다. 
격한 검놀림이 벌어지고 있는 한쪽 옆에는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키가 작은 꽃들이 아니다. 어른의 다리까지 덮어버릴 정도의 높이였다. 옅은 노란 색의 꽃이 햇빛을 받아 활짝 피어 있었다. 쫓길 대로 쫓긴 남자는 그 꽃밭으로 뛰어 들었다.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그곳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명한 노란 색깔의 한가운데를 검소한 색의 외투가 달려갔다.

“놓치지 마라!”

뭐라해도 수적 우세는 압도적이었다. 습격자들은 꽃을 짓밟으며 달려가 곧 둥글게 남자를 포위해 버린 것이었다. 떨쳐버릴 수 없으리라 각오한 남자는 발을 멈추고 자객 집단을 둘러보았다. 조금이라도 숨을 고르려 하면서.
여기까지 쫓겨오면서도 남자의 태도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눈높이에 칼끝이 닿도록 똑바로 검을 고쳐 잡으며 한 사람이라도 많이 길동무로 삼아 같이 죽겠다는 각오로 자객 집단을 마주했다. 도합 열 자루의 시퍼런 검날이 나란히 늘어서서 한 남자에게 향했다. 가련한 꽃밭에겐 어울리지 않는 불길한 빛이 일제히 남자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한두 사람을 쓰러뜨린다 해도 거기까지다. 남은 칼날은 반드시 그를 갈갈이 찢어발길 것임이 틀림없다. 고립무원의 남자가 수상한 자들의 흉도凶刀에 쓰러질 그 찰나. 남자의 눈앞, 꽃밭 안에서 누군가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키가 큰 꽃들 사이에서 낮잠이라도 자고 있었던 듯 했다.

남자는 놀랐다. 자객들도 놀랐다. 가장 놀란 것은 꽃밭 안에서 자고 있었던 듯한 그 그림자였다. 열두 살 혹은 열세 살 정도의 소년이었다. 작은 몸에는 약간 별난 풍의 소매 없는 옷을 입고 모다 대신 하얀 헝겊으로 머리를 감고 있었다.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아채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꽃밭에 앉은 채로 멍한 표정으로 남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위험해! 도망쳐!”

살해당할 처지의 남자가 소리쳤다. 예상대로 목격자마저 남겨서는 안 되는지 자객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눈짓을 했다. 처리해라 라는 신호였다. 그 자객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직 주저앉은 채인 소년에게 살기를 담아 달려갔다. 혼자서 싸우고 있던 남자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이것을 막으려 했지만 다른 자들이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옆에서 다른 자가 재빨리 앞으로 막아서며 진로를 방해했다.
남자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까지 죽일 셈이냐!”

격노의 외침이었다. 이런 어린아이가 자신 때문에 희생된다는 것에 대한 비통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구해줄 수가 없었다. 자객은 검을 감추듯 하면서 용서 없이 소년에게 덤벼들어 베어 넘겼다. 아니 정확히는 베어 넘기려 했다. 위쪽으로 들어 올렸던 검날은 정확히 소년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고 누가 보아도 다음 순간 그 작은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 그자의 검이 소년의 머리에 내리쳐진 순간 이미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뭐야!”

자객들도 남자도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돼! 어디로 간 건가!”
소년은 지면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도망치려 했어도 시야 밖으로 움직일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당황하는 자객의 머리 위로 번쩍하고 검이 빛났다. 아마도 그 남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얼굴에 남긴 채 비틀하고 기울어지더니 꽃밭에 쓰러져 버렸다. 쓰러진 남자의 몸으로부터 독기에 넘치는 색이 흘러 내려 꽃밭을 물들였다. 남자들은 싸우는 것도 잊고 아연한 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순간의 동작으로 하늘 높이 뛰어올라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객을 눈 깜짝할 사이에 반격해 쓰러뜨린 소년은 적당히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검을 쥔 손이나 자세는 확실하게 자리잡혀 있다. 가늘고 여려보이는 소년의 몸인데도 그 검은 이미 팔의 일부가 되어있는 듯 했다. 몇 년이나 검을 다뤄온 숙련자가 아니면 이렇게는 되지 않는다. 사람을 하나 베어서 죽였으면서도 그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긴 커녕 지금 칼부림을 벌이려던 남자들을 기분 나쁜 듯이 보더니 콧방귀를 뀌며 말했던 것이다.

“한 사람을 상대로 다섯 여섯....열명? 기막힌 얘기군. 무슨 이유인진 모르지만 맘에 안들어. 게다가 문답무용으로 나까지 죽이려 하다니 대체 뭔 생각들이야.”

말을 던지곤 살해당할 뻔한 남자를 향해 태연하니 말을 걸었다.

“도와주지.”

이 말에는 남자 쪽이 놀랐다. 멍하니 소년을 바라보게 되어 버린다. 결코 애들의 말투가 아니다. 도와주겠다고 말해도 싸울만한 연령이 아니다. 그러나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은 장난감류의 단검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전사가 사용하는 장검長劍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런 나이의 아이로서는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어야 했다. 말투와 외모가 주는 인상과 오른손의 검이 너무나 제멋대로 어긋나 있었다.

소년은 그런 남자를 뒤로 한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적이 밀집해 있는 곳에 눈길을 주더니 아무렇지 않게 근접해 순식간에 두 사람을 베어 넘겼다. 무서울 정도의 실력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발에 마치 짐승 같은 몸놀림이었다. 남자에게 있어서는 갑작스러운 원군이었지만 안도하기보다는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12, 3세밖에 안되었을 어린아이가 큰 검을 한 손에 쥐고 정예의 기사들을 베어 넘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강하다. 적도 이렇게 되자 어떻게든 버티고 서더니 여럿이서 달려들어 소년을 쓰러뜨리려 했지만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쓰러뜨리긴 커녕 단 한 명이서 호각의 싸움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 황당한 일에 일순 지금의 상황마저 잊고 가만히 서 있었지만 이 남자 역시 평범하지 않은 검사였다. 순식간에 자세를 잡고 검을 세웠다.

“조력에 감사한다!”

아군을 얻은 남자의 움직임 역시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았다. 방어전에 치중했던 자세에서 공격으로 전환해 종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2대 7의 싸움이었지만 여행자와 소년은 순식간에 다섯 명을 쓰러뜨리자 남은 두 사람은 아무래도 상대가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동료를 버린 채 도망쳐 버렸다. 뒤에 남겨진 것은 무참하게 짓밟힌 꽃밭과 선명한 노란 색을 기분 나쁘게 물들이고 있는 여덟 구의 시체. 그리고 여행을 하는 남자와 검을 든 소년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남자는 검을 털어 검집에 넣고는 숨을 고르며 갑작스러운 아군을 쳐다보았다. 움직임을 멈춘 상태에서는 그야말로 완벽히 어린애로 보였다. 남자의 가슴 아래 정도에 겨우 머리가 닿는 작은 몸집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 작은 소년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시했다.

“위험하던 차였는데 신세를 졌군 고맙다.”

검을 집어넣은 소년은 주변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너 여기사람?”

어지간히도 희한한 아이였다. 어른에 대한 어법 정도는 그 나이가 되면 알고 있을 텐데 마치 같은 나이의 친구한테 쓰는 것 같은 말투였다. 한참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 표정이 굳어있었다.

“아니, 나도 이 근처에 대해선 그다지 잘 안다고 할 수 없어.”
“가르쳐 줬으면 좋겠는데 여기.... 어디야?”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꽤나 묘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있는 위치를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소년은 분명히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미아迷兒라기보다는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렸다.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어딘가 먼 곳으로 와버렸다. 그러한 느낌이었다. 검을 차고는 있지만 귀족 자제라고 할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엷은 등나무빛의 무지천으로 만든 윗옷과 같은 색의 바지, 허벅지를 그대로 드러낸 채 가죽 단화를 신고 있었다. 범상치 않게 수려한 외모로 놀랄만했다. 피부는 장밋빛 대리석과도 같은 데다 깊은 녹색 눈동자는 마치 보석 같았다. 농가의 아이처럼 보이지도 않거니와 수렵을 직업으로 하는 쪽도 아닌 듯 하여 남자는 잠시 그 차림새가 어떤 종류에 속하는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소년이 고개를 모로 했다.

“도와준 대신 이라고 말하기도 뭣하지만 여기가 어딘지 좀 가르쳐 주지 않을래?”
“이런 미안. 그렇군. 로쉐의 가도에서 꽤 벗어나 있긴 하지만 모자이 근교다.”
“모자이?”

남자는 놀랐다. 어디에서 온 건진 모르지만 복장으로 봐서는 그리 먼 곳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근처에서 가장 큰 대도시의 이름을 모른다니.

“모자이는 파라스트의 지방도시 중 하나야. 세네레이와의 국경에도 가까우니까. 커다란 성체가 있지. 바로 이 근처다.”
“파라스트?”

이번에야말로 남자의 표정에 경악스러움이 드러났다.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거야! 중앙을 크게 삼분하고 있는 대국 중 하나잖아!”

이번은 소년이 놀라서 남자의 말을 막았다.

“잠깐 기다려? 설마 설마 여기 폰쥬이가 아닌거야?”
“뭐야 그 폰쥬이 라는 건?”

남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반문했따. 다른 사람들보다는 다소 많은 지리를 머리 속에 집어넣고 있어야 할 이 남자의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듣는 지명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역시 아닌거야? 그럼 어디야!”
“그러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모자이 근교야. 파라스트에서 좀더 서쪽에 있는 중앙의 입구라고.”

소년은 커다랗게 신음소리를 냈다. 다급히 몸의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허리의 검을 확인하고 머리에 손을 대고 옷을 만져본다. 마지막엔 양손을 펼쳐 보고는 소년은 절망적인 신음소리를 흘렸다.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소년이 무엇에 대해 한탄하고 있는는 것인지 남자는 알 수 없었다. 그것보다는 좀 더 신경 쓰이는 문제가 있었다. 방금 전의 두 사람을 놓쳐버렸던 것이다. 더구나 이 장소에는 꽃밭을 흉측하게 뒤덮은 시체가 몇 구나 흐트러져 있었다. 황급히 말을 건넸다.

“여기에 있으면 위험해. 너 갈 곳은?”
“갈곳?”
“그래. 어디 사는 아이인지 모르지만 집이 근처라면 어서 돌아가서 절대 밖으로 나오지마라.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면 한시라도 빨리 여기에서 떠나. 아까 그 녀석들이 돌아온다면 분명 너를 노릴거다. 아 그렇지만 동쪽으로는 가지마라.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목숨을 구해줬는데 공교롭게 아무런 보답도 할 수가 없구나. 최소한의 정성이라고 생각하고 이거라도 받아다오.”

남자는 품속을 뒤져 은화 한 개를 꺼내서는 소년에게 내밀었지만 소년은 손을 내밀려는 기색이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남자를 쳐다보았다.

“너는?”
“뭐?”
“네가 갈 곳은?”
“나는.... 동쪽으로 간다. 델피니아에 말이야. 가지 않으면 안돼.”
“그럼 같이 가지 뭐.”
“이봐!”
“갈 곳이 없는 걸.”

소년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게다가 남한테 동쪽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 걸 보면 뭔가 위험한 게 있는 거겠지? 그런데 자기는 그쪽으로 가려고 하다니 어쩌자는 건데?”

남자는 반쯤 기가 막힌 눈동자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머리통 하나 이상 작고 어디 기댈 구석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데도 그윽하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가 똑바로 자신을 마주보고 있다. 그 진지한 눈빛에 그만 기가 죽었다.

“갈 곳이 없다고?”
“응.”
“신세 질 곳은?”
“없어.”

남자는 상대방을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골머리가 아파졌다. 동행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앞으로도 방금 전과 같은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소년은 피바다가 된 꽃밭을 둘러보고는 남자에게 덧붙였다.

“빨리 도망가는 편이 낫지 않아?”

그 말에 제정신이 돌아왔다. 소년의 정체도 지금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도 어쨌거나 뒤로 미루기로 했다.

“알았다 가자.”

남자와 소년은 급히 살인현장을 떠났다. 가도에서 떨어진 들판이라 해도 언제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이 보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소년은 그렇다 쳐도 남자는 얼굴이나 몸에도 피가 튀어 굉장치도 않은 모습이었다.

“아까 그 녀석들은 대체 뭐야?”
“나도 알고 싶어.”
“살아남은 놈들이 다시 습격해 올까?”
“아마도.”

남자는 근처에 말을 숨겨놓고 있었다. 훌쩍 뛰어올라 안장 앞쪽에 소년을 태우려 했지만 고개를 젓더니 발을 올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됐어. 뛰어갈래.”
“바보 같은 소릴. 빨리 여기에서 떠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단 말이다.”
“적어도 난 그 말보단 빨리 달릴 수 있어.”

안장 위에서 남자는 깜짝 놀라 반문하려고 했다. 이 꼬마 머리가 이상한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다. 한쪽으로 펼쳐진 들판 저쪽 멀리 보이는 언덕 위에 나무가 한 그루 서있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그 나무를 똑바로 가리켰다.

“저 나무까지 누가 더 빠른지 경주하자.”
“이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말에 타 라고 말하려 했던 남자였지만 그 순간 소년은 뛰어나가고 있었다.

“기다려!”

남자는 고삐를 잡고 말의 배를 찼다. 조금 달리게 한 것만으로 가볍게 뛰어가고 있는 소년의 뒤를 바싹 따르게 되어버렸다. 남자는 말 위에서 옆을 달리고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했잖아. 앞에 타.”

그러나 소년은 달리면서 말 위의 남자를 올려다보곤 빙긋 미소를 지었다.

“채찍 갖고 있어?”
“어이 곤란하게 만들지 마.”
“쓰는 쪽이 좋을 걸.”

말하자마자 소년의 속도가 휙하고 올라갔다.

“뭐라고!”

놀란 것은 말 위에 있는 남자 쪽이었다. 상체를 낮게 숙인 그 모습이 보고 있는 사이에 멀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도 안돼.”

저도 모르게 채찍을 휘둘렀다. 밤색의 말도 다시금 속도를 올렸다. 남자를 태운 말은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발굽의 울림이 땅을 흔들고 기세 좋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남자의 뺨을 바람이 가른다. 경치가 어느 사이엔가 뒤쪽으로 멀어져갔다. 그런데. 그 정도의 기세로 말을 달리게 하고 있는데도 앞을 뛰어가고 있는 작은 몸집을 어째서 쫓아갈 수가 없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간이 낼만한 속도가 아니다. 사슴이나 여우같은 네 발 달린 짐승 종류가 아니고서는 낼 수 없는 속도였다. 하지만 이 순간 남자에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만한 여유도 없었다. 잘 훈련된 말이 이렇게까지 완전히 뒤처져 버렸다는 것에 놀라면서 땀투성이가 되어 계속 채찍을 휘둘렀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가 보고 있는 동안 점점 커져왔다. 밤색의 말은 거품을 물면서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남자도 마술馬術을 있는 한껏 발휘해 소년의 뒤를 쫓았지만 그래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소년은 지상을 낮게 날아가는 듯한 속도를 유지한 채 질풍처럼 언덕을 올라 커다랗게 공중제비를 돌고는 멈춰섰다.

“이겼다아.”

아무래도 가볍게 땀은 흘리고 있었다. 남자 쪽도 곧이어 말을 멈췄다. 말의 심장은 계속해서 세차게 고동치고 있었다. 말 위의 남자는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대낮부터 꿈이라고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년은 그런 남자의 생각 따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기쁜 듯 웃었던 것이다.

“내가 뭐랬어?”

그런 소리를 들어도 금방은 대답할 수 없었다. 말보다도 빨리 달리고도 태연한 얼굴의 소년을 보며 남자는 드디어 의심이라고 할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네 다리는....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건가?”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해?”
“뭐?”
“두 발 달린 내가 말보다 빨리 달리면 이상할까?”
“당연하잖아.”
“그럼 이제 안 할래.”

무슨 의미로 하는 소리인지 남자 쪽에 오히려 의문이 생겼다. 소년은 언덕 반대편을 보더니 기쁜 듯한 소리를 올렸다.

“냇가가 있어.”

남자도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에서 내렸다. 살육의 현장을 빠져나온 직후라 목도 말라 있고 온 몸이 뚜렷한 핏자국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모습인 것이다. 남자는 고삐를 잡고 냇가에 내려와 물을 마시게 하고는 자신도 목을 축였다. 아직은 막 봄이 된 직후인데도 여름같이 강한 햇살이었다. 전력 질주를 한 소년에게 그 더위가 덮쳐 온 모양이었다.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었다.

“잠깐 몸 좀 씻어도 돼?”

여기에서 목욕이라고 할 심산인 듯 하다. 바로 방금 전에 생사가 갈리는 전장을 뚫고 나온 참인데 배짱 한번 대단했다.

“대담한 녀석이로군. 벌거벗고 있어서야 응전하지도 못할 텐데.”

남자가 기가막혀 말하자

“그쪽이야말로 몸을 씻는 게 좋을걸. 피냄새 때문에 목이 메일 것 같다구.”

라고 대답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러나 이 소년은 대체 어디 출신인지 남자는 다시금 의문스럽게 생각했다. 그냥 보기엔 보통 소년처럼 보인다. 그러나 커다란 성인 남자를 가볍게 베어 넘길 정도의 실력을 가졌고 말과 나란히 달려 당당하게 승리를 선언할 정도의 다리를 가지고 있어서야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상대할 재간이 없다. 그런 점은 거듭 잘 알고 있었지만 남자는 그 이상의 탐색은 하지 않았다.
소년은 잽싸게 신발을 벗고 허리띠 채로 검을 내려놓고 있었다. 대강 주변을 확인하긴 했지만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남자 역시 소년을 따라 검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바지마저 벗어 알몸이 되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보자면 대담한 행동이었지만 피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은 더욱 곤란했다. 다행히 갈아입을 옷은 말에 실려 있었고 이런 날씨에 밖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투명한 냇물에 들어서자 허벅지 위까지 물이 올라온다. 아직도 차가웠다. 그것이 오히려 기분 좋았다.

“야 좋다아....”

가까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새삼스레 소년이 있었다는 걸 깨달아 돌아보곤 남자는 놀라서 냇물 가운데서 굳어 버렸다. 저도 모르게 눈을 의심했다. 소년도 남자도 당연히 몸에 두른 것은 전부 벗어버린 완전한 나체가 되어 있었다. 머리에 두르고 있던 하얀 천도 풀어버리고 양손으로 물을 담아 목을 축이며 얼굴을 씻고 있었다. 그 얼굴 주변에는 당연하게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목덜미 정도까지 오는 곱슬머리라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귀족 자제가 아닌 이상 이 정도 연령대 소년의 머리모양이란 대충 그런 것이니까. 그런데 남자의 눈에 비친 것은 물결치듯 태양처럼 빛나는 긴 머리카락이었던 것이다.

햇살이 그대로 비추는 것이가 생각했을 정도로 순금의 휘황찬란함이 넘치는 머리카락이었다. 금발을 가진 사람을 몇 명알고 있긴했지만 이 정도로 순수한 황금빛 머리는 본 적이 없었다. 그 머리가 폭포처럼 몸 위로 흘러내려 살짜기 매혹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얀 엉덩이 부근까지 선명하게 채색하며 장식해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것이나 다른 무엇보다.... 남자는 멍하니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이봐.”
“왜?”
“그 너어....”
“뭔데.”
“즉 그러니까 나이도 먹은 여자애가 그렇게 막 벗어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나이도 먹은 여자애라니? 누가?”
“너 말야.”

소년 아니 금발의 소녀는 녹색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남자는 신음소리를 내며 얼굴을 가렸다.

“너, 자기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는 거냐?”

소녀는 아직 의심스러운 듯 했다. 가만히 남자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 이마에 눈동자와 같은 색의 푸른 보석이 빛나고 있는 것을 남자는 눈치챘다. 머리띠를 겸한 은세공의 머리 장식이었다. 슬쩍 보기만 해도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민이 가질만한 것은 아니라고 문득 생각했지만 소녀 쪽은 아직도 냇물 속에 태연하게 서 있었다. 결국 남자가 거짓말이나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소녀는 진중하게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을 내려다보고는 사랑스럽게 부풀어 있는 가슴에 손을 대고

“에에?”

하고 눈이 완전히 동그랗게 돼버렸다.

“뭐야아 이거?!”



2장

중앙지역, 봄의 태양이 저물었다. 남자와 소녀는 완만한 들길을 걸어 들어간 뒤 지금은 강변의 숲입구에서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있었다. 모닥불에는 껍질을 벗긴 토끼고기가 걸려 향기어린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 토끼는 소녀가 잡은 것이었다. 남자는 돈을 내고 근처 농가에서 식료를 나눠받으려 했지만 소녀가 그것을 말렸던 것이다. 

“누가 목숨을 노리고 있다면 별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게 좋아.”

라고 말하면서

“맞는 말이긴 하지만 동물을 잡을 활이나 덫 같은 것도 없다고.”
“필요없어 그런건.”

그 말대로 소녀는 남자로부터 빌린 단검을 던진 것만으로 사냥감을 쓰러뜨렸던 것이다. 일류 사냥꾼이라 해도 이정도로 깔끔한 솜씨를 보일 수 있을지 어떨지 의심하는 동안 받침으로 괴일 돌을 모으더니 단검을 능숙히 이용하여 익숙한 솜씨로 토끼의 껍질을 벗기고는 불에 올려 놓았다. 
지금 이 별난 소녀는 어둠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면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쓴웃음을 띠고 있었다.

“아무래도 큰일인데.”
“왜그래?”
“말해도 절대 믿어주지 않을 거겠지만.”
“음?”
“방금 전까지 난 남자였어.”

남자는 커다랗게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바보같은 소리를, 이라고 말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언뜻 녹색의 눈동자가 움직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겠지.”
“당연하잖아. 그런 이야기를 믿으라고 하는 쪽이 무리야.”
“나라고 해도 믿을 수가 없다구. 어쩐지 괜히 몸이 이상하다 했어.”

소녀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있어도 그리 심각하게 곤란해하는 것도 아닌 듯 했다. 쓴웃음을 떠올리고는 있지만 그 말투에 고뇌라던가 경악이라던가 하는 것은 흔적도 없었다. 남자는 의심스러운 듯이 상대방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네가날 때부터 그런 모습이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 어떻게 봐도 여자애 얼굴이잖아. 우선 그 머리는 뭐야. 그것도 갑자기 길어졌다는 거냐?”
“이건 원래 그래. 게다가 이 얼굴도 옛날부터 이렇고.”
“그 얼굴에 그 머리에 어디가 남자야. 그렇지 않으면 목부터 아래쪽만 다른 사람의 몸이 되어버렸다는 소리라도 할 셈이냐?”

농담반 진담반의 말이었지만 소녀는 심각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 몸이야. 평소처럼 달릴 수 있었고 싸울 수도 있었어. 봤잖아? 남의 몸이라면 그렇겐 안 된다구.”
“그럼 너는 여자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성장해왔다는 것이 되겠지. 그걸로 설명이 다 되잖아.”

소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고집 센 몸짓이었다.

“네가 아까 말했잖아. 내 다리에는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게 아니냐고.”
“아아.”
“다리에가 아니야. 내 발은 원래 빨라. 몸에 걸린 거야.”

남자는 기가 막힌 듯 했다.

“누군가가 너한테 마법을 걸어서 남자인데 여자모습으로 변화시켰다는 거냐?”

그렇게 말하긴 했어도 어떻게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게 된 것인지가 오히려 신기했다. 보통 때의 그라면 한 마디에 웃어넘겼을 것이고 귀를 기울여줄 마음도 없었을 테지만 소녀의 표정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거기에다 낮에 보았던 소녀의 신비한 힘이 남자에게 일단 생각은 해볼 정도의 양보하는 마음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하지마. 그런 마법은 누구도 못 쓴다. 그것은, 주술도 그렇지만 만능처럼 여겨진다 해도 실제로는 단순한 눈속임을 하는 정도일 뿐이지. 방향을 점치거나 승산을 예측하거나 조금 거창한 곳에서 남을 저주하거나 효과가 있는지 어떤지도 의심스러운 것이지만 말이다.”
“여기에선 그럴지 몰라도 내가 있던 곳에서는 자기 의지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마법사가 여기저기 굴러다녔다구.”
“모습을 바꿔?”
“그래. 남자가 되었다가 여자가 되었다가 눈이나 머리색깔까지 변화시켰다가, 그 중엔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맨날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놈들도 있었어. 멀리서 보는 정도론 절대 알아볼 수 없었지.”

하하하. 하고 재밌다는 듯 웃고는 갑자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설마 내가 그런 꼴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해봤어. 내 의사로 변한 게 아닌 건 분명하니까 틀림없이 누군가가 장난을 친 걸 거야.”

남자는 의심스러운 꺼림직한 것을 보는 느낌으로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소녀였다. 늘씬한 팔다리를 간단한 웃옷으로 감싸고 긴 금발을 꼭 묶어 올려 보석이 박힌 은제 머리장식을 얹은 채 원래대로 하얀 천으로 둘둘 말고 있었다. 겉모습은 평범했다. 눈빛도 천천히 말하는 품새도 일단은 제정신으로 보였다. 그러나 말하는 소리 대부분을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 잘생긴 머리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불꽃에 가려진 녹색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빛난 듯한 느낌이 들어 남자는 마른 침을 삼켰다.

“네가 있었다는 곳은 어딘데?”
“아마 이 지상의 어디에도 없는 곳.”
“너는....”

남자의 검은 눈동자에 진지한 빛이 떠올랐다. 꿀꺽하고 침을 삼키고 차분하게 말한다.

“너는....뭐냐 인간인가?”
“아니야.”

하늘에는 가득한 별이 빛나고 대지에는 붉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의 기척도 없었다. 봄바람이 사락사락 나뭇가지를 울리고 있었다. 나무에 묶어둔 남자의 말이 차분하지 못하게 낮은 울음소리를 내고 멀리서 짐승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허리에서 풀어 지면에 놓아두었던 검을 끌어당겼다. 끌어당겼지만 다시 손을 떼었다.

“인간이 아니라면 뭐냐?”
“뭘로 보여?”

소녀는 진지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역시 진지함 그 자체의 얼굴로 소녀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가. 요괴 같은 부류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 정도로 아름다운 요괴라면 속임수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5년 정도만 있으면 이 미모는 한 나라를 움직일 정도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천이 아쉬웠다. 이런 볼품없는 것으로 가리지 말고 길게 늘어뜨려 바람에 휘날리게 한다면 저 머리카락은 황금의 베일을 두른 것처럼 보일 텐데.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그 표정에는 예리한 무언가가 있었다. 어리면서도 긍지 높고 기가 센 영혼의 소유자라는 것을 금방 알수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소녀 쪽이 문득 모닥불로 시선을 옮겼다.

“고기.”
“음?”
“고기가 타.”

딱딱한 나뭇가지로 찔러둔 고기를 집어 들어 덥석 물면서 남자에게 웃어보였다.

“먹지 않으면 못 쓰게 될 거야.”

귀염성 있는 말투였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같아 남자는 크게 숨을 내뱉고 고깃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못돌아가니까 곤란하다구.”
“왜 못 돌아가?”

소녀는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고기를 먹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돌아갈 방법을 모르겠어.”

자신의 의사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고 소녀는 말했다. 그리고 돌아갈 길을 모르겠다고 말한다 순탄치 못한 이야기였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는 것과 동시에 소녀가 문득 물었다.

“파라스트는 중앙을 삼분하는 대국의 하나. 그렇게 말했지? 다른 하나가 델피니아?”
“그것도 모르는 거냐? 그래.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탄가지.”
“파라스트, 탄가, 델피니아....”

소녀는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치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는 듯이.

“역시 난 완전히 미아가 된거네. 그것말고도 나라가 여려 개 있어?”
“물론이다.”

저도 모르게 끌려들어가 대답해 놓고 남자는 왠지 바보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이런 시골 촌구석에 사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어린애라도 알만한 지식인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어느 순간 태양은 동쪽에서 뜨는 거야? 라고 묻지 말란 법이 없다.

“너 여기 와서 얼마나 지난 거냐.”
“반나절.”
“뭐?”
“정신이 들고 보니 아까 그 꽃밭에 있었고 좀만 더 있으면 네가 살해될 상황이었어.”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는 이런 상황이긴 하지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 그런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갑자기 날 구해준 건가?”
“이쪽 식으로는 한 사람한테 떼거지로 달려드는 건 비겁하다고 안해?”

소녀가 대꾸했다. 

“일대일의 승부였다면 방해 같은 거 안하고 구경하고 있었을 거야.”
“그건 다시 한번 고맙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성심껏 고개를 숙이는 남자에게 이번엔 소녀 쪽이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가만히 남자를 뜯어보다가 다시금 홍두깨 같은 소리를 물어왔다.

“여기 말야, 인간은 얼마나 있어?”
“얼마나 라니?”
“그러니까 그 한 나라라고 하는 건 얼마나 큰 거냐 하는 거야. 예를 들면 나라끼리 전쟁할 수 있을 정도로 많아?”

참으로 묘한 것에 대해 묻고 있었다.

“나라가 크면 사람도 많이 있지. 특히 이 파라스트는 탄가나 델피니아와 마찬가지로 대륙 내에서도 굴지의 대국이다.”
“그런 것치고는 꽤나 촌스러운 것 같은데?”
“사람이 없는 것은 여기가 시골이기 때문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모자이나 수도인 아비용에 가면 질릴 정도로 사람이 많아.”
“아비용이 파라스트의 수도야?”
“그래. 파라스트에서 제일가는 도시이지. 오론 왕의 궁성도 그곳에 있어. 로쉐의 가도街道도 이어져 있으니까. 굉장히 번화한 도시야.”
“거기에 왕이 있어서 정치를 하는 거야?”
“아아. 최소한 파라스트에서는. 오론은 엉덩이는 무겁고 사치를 좋아하는 왕이라 말이야. 아비용에서 움직이는 일은 드물지.”
“왕이라는 건 높은 사람이야?”

남자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아니 높은 건 알겠지만 그러니까 얼마나 권력이 있는 걸까나.”
“얼마나고 뭐고 나라에서 제일가는 권력을 쥐고 있는게 당연하잖아.”
“정말로?”

소녀는 어딘가 장난스럽게 반응을 살피는 듯이 남자의 눈빛을 엿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그래보여도 의외로 실제 권력을 쥐고 있는 건 제일 가까운 측근이라던가 하는 때도 있고 좀더 안좋은 경우엔 왕은 완전히 장식품일 때도 있고 때로는 명목상만 제일 높은 사람이고 모두의 의견을 듣고 조정하는 역할뿐일 때도 있잖아. 제일 건전한 경우라고 해도, 그래 힘이 있는 강한 왕이라면 자기들의 나라를 풍족하고 살기좋게 만들어 주니까 따르고 있다는 그런 게 솔직한 마음일 테고. 거꾸로 말하자면 임금님이 어떤 바보짓을 하던 어떤 폭정을 하던 모든 사람이 왕이 무서워서 입 다물고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데?”

남자는 멍하니 소녀를 보았다. 나이도 제대로 차지 않은 소녀가 할만한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하급 귀족이라면 성인이라도 말하기 힘든 내용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국왕이라고 하는 권위에 대해 때때로 불평을 하고 때로는 야유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높은 사람’이라고 하는 점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생각도 못해볼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물이 모래에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물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시민보다 더욱 국왕에 가까운 귀족계급이라 해도 웬만큼 총명한 자가 아니라면 말하지 못할 내용임에 틀림없다.

“너, 그런 건 함부로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좋아.”
“하하아? 섣불리 말하면 벌이라도 받아?”
“그것도 있어. 그것도 있지만 틀림없이 이단시될 테니까. 국왕은.... 국왕이라고 하는 것은 존경받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다. 그래 귀족에서 농민까지 나라가 하나가 되어있는 그 의식 자체가 왕을 왕으로서 있게 한다 말해도 좋아. 그렇기 때문에 국왕은 자신의 권위를 열심히 나타내려고 하고 그 보좌를 맡는 귀족들도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국왕을 보호하는 거다. 국민에게 얕보일 정도의 왕이라면 나라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아니 애초에 왕의 힘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많은 수의 인간이 그 왕을 지지하는 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야. 즉....”
“속내용은 어떻든 간에 겉보기라도 높은 사람으로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남자는 거의 경악하여 이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 소녀, 정체가 뭐길래 하고 생각하게는 된다.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는 녀석이로군.”
“그쪽이야말로 제법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고 있잖아. 차근차근 설명이나 하고 있고. 보통 이런 때라면 상식적인 사람은 화를 내던가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거라구.”

자기가 물어봐 놓고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다. 남자 쪽을 보자면 달변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해 자조섞인 쓴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여행을 다녀서 이런저런 나라들을 보고 왔기 때문이야. 왕이라고 하더라도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것이나 결국은 한 사람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남들이 들으면 곤란하니까 입에 담진 않지만 말이야.”
“그럼 나도 그러지 뭐.”

하고 소녀는 끄덕였다. 남자는 남자대로 흥미롭게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소녀는 ‘다른세계’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 방금 전까지 남자의 몸이었다고 한다. 어디까지 정말로 받아들여야 좋을지 알 수 없지만 남자는 그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문제가 생각한다고 해결될 리는 없다. 요컨대 쓸데없는 짓이라는 거다. 남자는 오랜 습관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자신의 오감과 직감을 믿기로 해두고 있었다. 이 소녀는 자기의 신념과 정의감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다소 이상한 구석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불길한 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너 그럼 이제부터 어쩔 거냐?”
“너랑 같이 갈 거야. 방해만 안 된다면.”

남자는 다시 웃음을 흘렸다. 쬐그만 꼬마 여자애인 주제에 제 몫을 하는 전사처럼 입을 놀리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그만두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야.”
“왜?”
“당연하잖아. 위험하니까다.”

이번에는 소녀 쪽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설득력 없네요. 나는 대부분의 위험 따위는 나 혼자서도 어떻게 할 수 있다구. 최소한 방해는 안될거고 게다가 널 도와줄 수도있어.”

실제 그 말대로였기 때문에 남자는 다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이야 내 목숨을 노리는 녀석들은 꽤나 집념이 강한 것 같아서.”

소녀는 이상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거 말인데 그렇게나 원한을 가질만한 짓이라는 거 대체 뭘 한거야?”

남자는 크게 웃었다.

“글세 말이다. 나는 아무 짓도 한 기억이 없는데 그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모양이다. 어떻게 해서든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 같아.”

아무짓도 한 기억이 없는 것치곤 아까의 습격은 집념이 깊게 담겨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이 남자의 사정에 끼어들어봤자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 지도 모른다.

“그럼 또 습격받는 거야?”
“아아 아마 그러겠지.”
“알면서도 혼자 갈 생각?”
“그렇게 되는군.”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으니 이 남자도 엔간히 익살스러운 성격이다. 그래도 끝끝내 질린 모습의 소녀를 내버려두는 것은 곤란하다 생각했는지 웃으면서 변명했다.

“나도 가볍게 살해당할 생각은 아니야. 그걸 위해서 델피니아로 향하고 있어.”
“거기에 같은 편이 있어?”
“글세 어떨까 아군도 있지만 적도 있지.”
“위험한 곳인 거지?”
“꽤나.”
“그래도 가는 거야?”
“그래. 가지 않으면 안돼.”

소녀는 한번 끄덕였다.

“그럼 결정했어. 나라도 괜찮다면 같은 편이 되어 줄게.”

무슨 말을 해도 쫓아올 생각인 듯 했다.

“사람 좋은 녀석이군.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를 편들다니 말이야.”
“남의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야. 낮에 있었던 일만 해도 그래. 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 거라고 생각해? 앞으로도 습격받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면 거기다 죽고 싶지도 않은 거라면 뭔가 수단을 강구해야 할 거 아냐.”
확실히.“

남자는 쓴웃음이 섞인 말투였다.

“아까 있었던 일은 내가 방심해서였다. 적이 이 정도로 빨리 그 정도의 수를 모아서 덤벼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말야. 습격받는다고 해도 조금 더 동쪽으로 간 뒤에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마침 잘 됐잖아. 넌 같은 편이 필요하고 나는 어쨌든 이쪽 세계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고. 누가 마중나올 때까지 여기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말야.”
“마중?”
“응. 여기는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니고 내 힘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그렇게 되면 누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잖아. 초조한 얘기지만.”
“언젠가 마중이 오는 건가?”
“그건.”

소녀는 끄덕이고는

“왜 이런 곳에 떨어지게 되었는지 난 전혀 모르겠어. 어째서 이런 몸이 되었는지도 몰라. 덤으로 이 세상에 대해선 좌우도 분간 못하겠다구.”
“.....”
“그러니까 같이 가.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데다 갈 곳도 없어. 게다가 여기에 떨어지자마자 너랑 만났잖아. 네가 무엇과 싸우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도와줄게.”

열심히 설명한 덕분인지 남자의 마음도 어느 정도 기울었지만 뭐라해도 상대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아군으로서 의지하기엔 저항감이 있는데다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도 벌어지면 안 되지 않냐고 물러나게 되는 기분도 있었다.

“하지만 내 편이 되어준다 해도 아무러너 득도 없을 거라고 생가해.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 지도 모르고.”

녹색의 눈동자가 휘릭 움직였다.

“같은 편이 필요하지 않아?”
“그건 필요해. 필요하지만 대가도 없이 남의 검을 빌릴 순 없어.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일이니까. 네가 나를 위해 자신의 검을 써준다는 건 고맙지만 나는 그 대가로서 줄만한 걸 지금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 그래도 상관없는 거냐?”

그러자 녹색의 눈동자가 다시금 장난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좋은 걸 가르쳐줄까?”
“음?”

소녀는 앳된 얼굴을 최대한 따딱하게 하고 연극에 가까운 엄숙한 말투로 가르치듯 말했다.

“보수를 바라는 아군처럼 믿을 수 없는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마음을 허락하지 말 것이며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도구로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이 그 이상의 보수를 제시하면 간단히 배신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공부가 됐지?”

남자는 눈을 둥글게 떴다. 그리고는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두운 숲속에서 실로 즐거운 듯한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와 경쾌한 소녀의 웃음소리가 이중창이 되어 울렸다.

“확실히, 아니 분명 그 말대로군.”

겨우 숨을 고른 남자가 말하자 소녀는 성실하게 끄덕이고는

“그거야. 보수를 약속하지 않으면 동료 따위 모을 수도 없긴 하지만말야. 그런건 진짜 우리 편은 되지 않는 법이라구.”
“알만하군. 그럼 어떤 것이 든든한 아군인 걸까?”

완전히 재미있다고 느끼면서도 이쪽도 진지하게 묻자 소녀는 말했다.

“첫째로는 자신과 같이 적을 강하게 증오하고 있는 자. 둘째로는 이익이 일치하는 자. 그 적이 쓰러지는 것으로서 상당한 이득을 얻던가 쓰러져 주지 않으면 커다란 손해를 입는 이유가 있는자. 이 두 가지라면 최소한 적을 쓰러뜨릴 때까지는 배신할 걱정이 없지. 쓰러진 후에 어떻게 될 지는 잘 모르지만 말야. 그 다음엔 당시의 뜻에 감동했다던가 하는 멋들어진 이유를 붙여서 오는 자들인데 이것도 지나치게 과장된 건 생각해 봐야겠지.”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하나하나 올바른 말이었지만 그것을 이런 나이의 소녀가 말한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결국은 이제 어쩔 수 없으니 도와줄까 하는 정도가 신용할 수 있지 않아? 물론 때에 따른 거지만.”
“그럼 넌 어쩔 수 없으니 날 도와준다는 거냐??”
“그래. 기껏 구해줬잖아. 그런데 금방 다시 죽어버리면 꿈자리가 사납지 않겠어?”
“맞는 말이다.”

수긍하면서도 고개를 모로 꼬게 되었다. 아무래도 묘한 흐름에 의해 의기투합하여 이야기가 성립해버린 셈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쩔 수가 없다. 남자도 이 이상 말리려고는 하지 않았지만 단 한 가지 느끼고 있던 의문점을 입에 담았다.

“너 검을 쥔지 얼마나 되었지?”
“여덟 살 때 검을 받았어.”
“그럼 지금까지 몇 명이나 죽여왔지?”

녹색의 눈동자가 깜빡임을 멈추고 남자를 의심스레 바라보았다.

“기억하지도 못해. 그쪽은?”
“나도 기억은 못하겠군.”
“그럼 물어볼 것도 없잖아.”
“하지만 그 나이에 그 정도로 검을 쓸 줄 알다니 범상한 일은 아니야. 너 같은 나이의 여자애가 어째서 그 정도로 적확하게 검을 휘두를 수 있지?”
“적확?”
“그래. 검을 쓰는 것에 대한 주저도 흥분도 없이 피를 보는거에 대해서 조금도 저항감 없이.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기량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고. 너무나 냉혹하게 그 녀석들을 쓰러뜨렸지 않나.”

소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거 듣기 안 좋네. 그럼 뭐? 생글생글 웃으면서 싸우기라고 하라는 거야?”
“그런 말은 아니야. 다만 지금의 너와 아까 검을 휘두르고 있던 때의 너는 상당히 틀려보이기 때문에 말이다. 어느쪽이 너의 진짜 얼굴인지 하고 생각한 것뿐이야.”
“별로 의식해서 하고 있는 짓은 아니야.”
“호오?”

붉은 입술에 조금은 비꼬는 듯한 미소를 띠며 소녀는 말했다.

“검을 쥐면 사느냐 죽느냐니까. 나는 절대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면 상대를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어. 결과적으로 자기 손이 피에 물들었다 하더라도 언젠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쓰러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남자는 놀라서 소녀를 보았다. 언제나 자기도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남자도 아직 죽을 수 없는 이유를 갖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덤벼오는 자들이 있다면 설사 죽인다 하더라도 격퇴할 수밖에 없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그렇게 다른 자의 생명을 빼앗아 온 ‘업보’가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싸우는 길을 선택한 자의 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업을 견딜 수 없는 자는 처음부터 검 따위를 들어선 안 되는 것이며 더욱이 장난삼아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 따위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쯤은 납득했지만 이 소녀가 거기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고는 가볍게 책하는 듯한 눈초리를 보내보았다.

“하지만 죽일 필요까진 없었던 것 아닌가. 너의 그 정도 실력이라면 부상을 입히는 정도로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소녀의 녹색 눈동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열 명이서 한 명한테 덤비는 짓거리나 하는 녀석들, 그런 목숨을 아껴줄 필요가 어디에 있어.”

무서운 소리를 간단하게도 내뱉었다. 그리고서 확실하게 단언했다.

“짐승이건 인간이건 재미삼아 죽인 일은 한 번도 없어. 앞으로도 하지 않아.”

이상할 정도의 차분함을 보이는 소녀에게 남자는 입가를 올리며 미소지었다.

“너는 확실히 훌륭한 아군이 되어줄 것 같군.”
“그쪽도야.”
“그럼 내가 델피니아에 들어갈 때까지는 같이 가는 걸로 하지.”
“델피니아의 어디로 가는 거야?”
“코랄. 수도인 코랄이야.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게 최종 목적인 거야?”
“아아. 지금으로선.”
“그럼 나는 네가 무사히 코랄에 도착하는 것을 당면 목적으로 할께.”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생각지도 못한 아군을 얻게 된 것이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던 것이다.

“아직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 나는....”

망설였지만 이 별난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인하고 싶어져 남자는 오랜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본명을 댔다.

“나는 월 그리크 로우 델핀.”
“긴 이름이네.”

놀랍게도 소녀는 그 이름을 들어도 아무런 감상도 없는 모양이었다.

“어디를 부르면 돼?”
“월이라고 불러라. 옛날엔 모두 그렇게 불렀지.”
“지금은 아니야?”
“그래.”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끄덕였다. 이 소녀가 다른 세계로부터 왔다는 것은 의심스러울지 몰라도 최소한 중앙지역의 주민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졌다. 그리고 중앙에 온 이래 결코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것도 확실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이름을 듣고 이렇게까지 무반응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너는?”
“리.”
“그것뿐이야? 너무 짧군.”
“친구들은 다들 그렇게 불렀었어.”
“하지만 그것뿐일리는 없잖아?”

남자는 캐물었다. 농가나 마을의 아이라면 그런 것이 보통이지만 이 소녀는 아닐 것이다. 되돌아온 물음에 소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긴 이름 말이지. 그린디에타 라덴.”
“호오.”

남자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 상상이상으로 훌륭한 이름이었다. 라덴이라는 지명도 집아도 들어본 일은 없지만 중앙지역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리도 아니고 혹시 이 소녀가 말하는 대로 다른 세계의 이름이라면 들어본 기억이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남자는 소녀의 말을 전면적으로 신용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름을 알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린디에타. 좋은 이름이군. 하지만 그걸로 리가 되는건 묘한데? 보통 부르려면 그린다겠지.”

보기좋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렇지만 그렇게 부르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
“어째서?”

소녀는 살짝 입을 내밀었다.

“그건 여자애 이름이잖아. 그렇잖아도 여자애 같은 얼굴인데 이름 부를 때마다 여자애로 착각되잖아. 못 참겠다구.”
“.......”

뭐라고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막힌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표정에 겨우 사태를 파악한 듯 했다. 소녀는 -뭐라 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 되어 심각하게 머리를 감싸 안았다.

“누가 한 짓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미치겠네. 얼마동안 이 몸으로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있어야만 하는 거 아닐까? 게다가 그렇게 비관할 것만도 아니잖아. 꽤 잘 어울리는 몸과 이름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야.”

농담 섞인 말에 소녀는 원망스런 눈초리로 커다란 체격의 파트너를 보았다.

“기왕 다른 모습으로 만들 거라면 너 같은 몸으로 해줬으면 좋잖아.”

진심으로 심각하게 말하는 소녀 앞에서 남자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3장
기묘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한 사람은 조악한 전사의 의복이면서도 젊고 당당한 체구를 가진 사나이. 한 사람은 그 전사의 가슴께에 겨우 머리가 닿을 정도의 소녀. 마찬가지로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조악한 데다가 빛나는 황금머리카락을 무식하게도 꽉 묶어 올려 하얀 천으로 감추고 있지만 어리면서도 향기가 나는 것 같은 미모였다.
누가 봐도 눈을 둥글게 뜰 것이 틀림없는 이색적인 조합이었다. 남자는 말을 풀어주고 도보로 로쉐의 가도를 따라가고 있었지만 이런 일행이 붙어 있어서야 싫어도 남의 눈을 끌 수밖에 없었다. 나란히 걸으면서 국왕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소녀가 물었다. 방책이라도 세워져 있는 거냐는 질문이었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파라스트와 델피니아의 국경은 테바 강의 흐름이 갈라놓고 있다.”
“강이 국경? 알기 쉬워 좋네.”
“전부 그런건 아니지만 평햐 부분에선 그래.”
“그럼 내륙에서는?”
“여기에선 보이지 않지만......”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정면을 가리켰다.

“5일 정도 걸으면 왼쪽을 일자로 가로막는 산맥이 나타나. 타우라고 하지. 중앙을 분단하는 대산맥인데 그 반대편이 탄가다.”
“헤에?”

남자는 지면에 간단한 지도를 그려 삼국의 위치관계를 설명해 주었다.

“탄가와 파라스트는 대부분이 타우에 의해 나눠지고 델피니아와 파라스트의 사이에는 테바강의 흐름이 있다. 탄가와 델피니아의 사이에는 역시 타우가 가지를 뻗치고 있지.”

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모로 했다.

“산 너머하고 이쪽인데 세 개를 하나로 묶어서 부르는 거야?”
“그래. 국력과 위치를 생각한다면 그렇겠지만 토지의 성격에는 꽤나 차이가 있어서 말이야. 파라스트의 국토는 대부분이 평원이지만 탄가는 대부분이 산지이니까.”
“델피니아는?”
“산도 평원도 바다도 있어.”
“그럼 세 나라 중에서 가장 풍요롭게 번영한 게 델피니아 아니야?”

남자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렇겠지.”

소녀는 약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일반적이 아니게 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입으로는 다른 것을 묻고 있었다.

“강이 국경이라 해도 넘어갈 때는 검문 같은 게 있는 것 아냐?”
“물론. 자국민을 그렇게 간단하게 외국으로 내보낼 수도 없는거고 타국민을 그렇게 간단하게 받아들여서도 안 되니까. 나라를 나가기 위해서는 출국허가증이 필요하고 입국할 때에는 출신이나 이름 그리고 신원을 보증할 수 있을만한 통행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요새를 통과할 수 없어.”
“그거 가지고 있어?”
“아니.”

남자는 빙긋 웃었다.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네 신원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는걸.”

소녀는 우웅하고 신음소리를 내고는 옆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남매라고 하면 안될까?”
“상당히 무리가 있지.”

성실하게 대답하는 남자였다.

“뭐 똑바로 요새를 향해 갈 생각은 없어. 이런 일에는 얼마든지 개구멍이 있는 법이니까.”
“그런거야?”
“그렇고 말고. 정직하게 요새를 향해 가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땅이 이어져 있다면 길을 피해 몰래 지나가면 되는 것이고 테바강에는 파라스트, 델피니아 양쪽의 어부들이 배를 내고 있으니까. 무리를 해서라도 헤엄쳐 건너면 돼. 너 수영은 할 줄 아나?”
“달리는 정도로 자신있지는 않지만 괜찮아.”

남자는 흥미있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이 소녀는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 그리고 어떤 자인지를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녀의 지식의 빠진 부분들은 단순히 중앙지역의 주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던 밤에도 느끼고 있었지만 어떤 어린애라고 해도 이정도 나이가 되면 자기가 사는 나라의 이름과 국왕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게 당연하고 신분제도 등의 사회구성도 알고 있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은 누군가에게 가르침 받지 않아도 자신이 어떤 계층에 속해있는가를 세상 이치와 함께 깨달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녀는 자신이 농민의 자식인지 귀족의 자식인지 그야말로 전혀 자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어느 쪽으로 보여?”

하고 진지하게 물어보기도 했다. 

“고향에 돌아갈 때까지는 어쩔 수 없지. 적당히 둘러대기엔 어떤 역할이 좋을까나?”

라는 것이다. 남자는 기가 막혀 대답했다.

“그건 내가 더 알고 싶다.”

농가의 자식이라 하기엔 모습에서 품격이 넘친다. 그렇다고 귀족의 자식으로선 태도가 약간 조아하게 보인다. 허리엔 대검을 차고 있지만 이런 나이에 자유전사일 리는 없고 그렇다고 도시쪽 아이라고 하는 것은 아예 논외이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수가 없었다.
소녀 쪽은 남자에게 열심히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 여행을 통해 정보를 얻으려 하는 듯 했다. 남자쪽도 알고 있는 만큼은 질린 태도도 조금은 있었지만 일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중앙에는 대화삼국大華三國. 북방에는 몇 개의 왕국. 중앙하부에서 남쪽으로는 소공국과 남방제국. 아벨도룬 대륙 전체에서 정확하게 알려진 것만으로도 20개국이 있다. 작은 섬나라나 지도에 나오지 않은 미개척지까지 따지자면 삼천 개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 전부에는 정점에 서는 왕이 있지.”
“대륙은 이것 말고도 있어?”
“아니. 사람이 사는 대륙은 이것뿐이다. 해안선 부근에 섬나라가 몇 개인가 흩어져 있지만 대륙은 없어.”
“그럼 이 대륙을 끝에서 끝까지 전부 걸어본 사람은 없는거야?”
“뭐라해도 무리지 그건.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대체로 사람은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을 쉽게 떠나거나 하지 않는 법이다.”

이 말을 듣고 소녀는 약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월은 이렇게 여행을 하고 있잖아?”
“나는 자유전사이니까. 고용해주는 상대가 있다면 어디라고 가는 거야.”
“자유전사라니?”
“영지도 주군도 없고 신분도 없는 병사를 말해. 검 실력만으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거지. 요컨대 용병이라는 것이 되겠군.”

깊은 녹색의 눈동자가 가볍게 움직였다.

“이상하잖아. 그런 일개 병졸을 왜 그렇게 심각하게 노리고 있는거야?”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까.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을 만한 건수는 얼마든지 있어.”
“그런 걸로 치기엔 그 녀석들 불량배 같은 것도 아니었고 월이 말한 그 주군이라는 것도 있는 녀석들로 보였는데?”

남자는 저도 모르게 순간 소녀를 보았다. 이 소녀는 열세 살이 막 되었을 뿐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지나친 ‘몰상식함’에 제정신인지 의심할 정도였지만 바보는 아닌 것 같았다. 상식은 아예 없다고 해도 될 정도였지만 속내나 정신의 성숙도는 상당한 것이었다. 관점도 날카롭다. 지금까지 아이들을 상대로 이야기했던 것들을 되새겨보면 그러한 점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이정도 나이의 어린아이가 제대로 된 대화상대가 되었던 적은 없었다. 자신이 어릴 때도 그랬던 것처럼 아무래도 어른쪽이 적당히 눈높이를 맞춰주게 된다. 그러나 이 소녀에게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주군이 있는 기사들이 그렇게 습격해온다고 하는건 그들의 주인이 월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거 아냐. 그렇잖으면 기사라고 하는건 주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맘대로 여행하는 전사를 덮치거나 해도 야단맞지 않는 거야?”
“아니 야단맞겠지. 주인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

머리를 갸우뚱하는 소녀에게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기사에게 체면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야. 어리석은 행동이나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은 주군의 이름을 더럽힐뿐 아니라 자신의 명예도 떨어뜨리는 짓이 되지.”
“그럼 기사들을 책임지고 있는 영주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여행자를 괜히 습격시키거나 해도 벌 받지 않는 거야?”
“그렇군. 국왕의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엄중히 죄를 묻게 되겠지만 이미 그 전에 자신의 영주민들에게 경원시 되지 않을까?”
“그럼 왕이나 마찬가지로 신분은 높아도 그다지 마음대로 굴 수 없다는 거네.”
“그렇지.”

맞장구는 치고 있었지만 남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세간에서 말하는 일반상식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신분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며 권위를 등에 업은 기사들, 영주들의 횡포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귀족의 횡포는 폭로할 수만 있다면 국왕이 벌한다. 그럼 국왕의 횡포는 누가 벌할 것인가. 
남자는 저도 모르게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정말은 그런 때야말로 왕의 곁에 있는 측근들이 나설 때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재자와 같은 편이 되어 권력을 쥐고 자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하들이 결속해서 자기들 마음에 맞지 않는 왕을 없앤다던가 하는 일도 있을까?”

덜컹했다.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출 정도였다. 소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뭐 이상한 소리라도 했어?”
“아니......없는 이야긴 아니야. 다만 네가 말하는 건 어느 쪽이지? 신하들이 자신들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악에 물들은 왕을 추방하는 것과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정신없는 신하들이 정의를 주장하는 돌머리 왕을 쫓아내는 것, 두 가지 경우가 있잖아.”
“대체로 나라의 성장기에는 전자 안정기에는 후자가 늘어날 테지.”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되겠군.”

남자는 혀를 내둘렀다.

“이 파라스트 같은 경우엔 어떨까? 대화삼국이라고 말할 정도이니까 역시 안정되어 있을까?”
“뭐어 그렇겠지. 풍요롭고 번영하고 있는데다가 탄가와의 분쟁이 있다고는 해도 나라가 곤란할 만큼 커다란 피해를 입은 적도 없지. 국왕인 오론은 호걸도 영웅도 아니지만 뱃속에 구렁이가 몇 마리는 들어앉은 너구리이니까 말이야. 견고한 국가 기반을 쌓고 있지.”
“흐응.”

왕이라고 하는 것이 나라에 대해서 수행해야 할 역할은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좋은 왕이라면 그 나라는 번영할테고 나쁜 왕이라면 주변의 신하들이 다른 왕을 준비한다는 건가.”
“그런 거지.”

진지하게 끄덕이는 상대방을 향해 소녀가 이상하다는 듯 눈을 돌렸다.

“왠지 동정심이 생기는 것 같지만 월네 나라의 왕은 어떤 사람이었어?”

남자는 살짝 미소를 흘렸다.

“자유전사에겐 주군이라고 할만한 왕은 없어. 지금의 나에겐 나라도 없고.”
“그럼 나랑 똑같네.”

하고 소녀는 웃었다. 신세질 곳도 없고 보호해 줄 나라도 없는데 조금도 불안한 낌새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편해서 좋다는 듯한 투였다. 이 소녀의 희한한 점은 사고방식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싸우는 방식으로 보았을때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 능력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것이었다.
단거리라고는 해도 말과 나란히 달려 당당하게 이기는 것은 물론이요 눈도 귀도 이상할 정도로 예리했다. 날아가고 있는 새를 슬쩍 본 것만으로 그 날개의 색깔과 부리의 색깔을 대고는 무슨 새야? 라고 물은 것이다. 불면 날아갈 것 같아 화사한 몸인 주제에 커다란 사내와 함께 가면서 조금도 걸음이 뒤쳐지는 법이 없고 하루 종일 걸어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보통 성인 여자의 여행이라 할지라도 남자보다 2할 정도는 뒤쳐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경이로운 다리였다.

게다가 그 다리는 튼튼한 것만이 아니라 상당한 순발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함께 여행하게 된 이래로 식료의 조달은 일절 소녀가 맡아하고 있었다. 기척을 지우고 사냥감의 접근을 기다려 단검을 던진다. 혹은 -보고 있던 남자는 눈을 의심했지만- 전력으로 달리는 사냥감을 쫓아가 덮쳐서 쓰러뜨린 일도 있었다. 남자의 신장과 비슷할 정도 높이의 생울타리를 가볍게 뛰어 넘은 일도 있다. 그럴때마다 약간의 오한을 느끼면서도 남자는 자조하듯 웃으며 말했다.

“될 수 있다면 나한테도 너 같은 다리가 있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소녀는 남자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나는 너같이 커다란 몸집이 갖고 싶었다구.”

이상한 소리였다. 이런 소녀가 커다란 남자의 몸집을 부러워하는 것이 희한하여 남자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이 정도로 크면 움직이기 불편하다고. 개구멍도 못 드나들고 말이야.”

이번에는 소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데굴데굴 구르며 웃기 시작했다. 새의 지저귐 소리 같은 높은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재미있는 소릴 다 하네. 여기 사람들은 월처럼 재미있어?”
“글세 어떨까? 나는 네가 살던 곳의 사람들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왜 그렇게 커다란 몸집을 갖고 싶어하는 거냐?”

소녀는 곤란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럴것이 이런 얼굴에 이런 몸으론 전혀 강해 보이지 않잖아.”
“무슨 소리야? 너는 실제로 강하니까 보이기에 어떻든 상관없잖아.”
“그건 월이 그렇게 크고 존재감이 느껴질 정도로 강해보이는 남자인데다 누군에게도 얕보인 적이 없으니까 그런 소리 하는 거야.”

약간은 억울한 듯한 약간은 지긋지긋한 듯한 그런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던 나는 전사란 말야. 그런데 이런 외모 때문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질 않아. 단지 나이가 모자라고 얼굴이 이렇다는 걸로..... 지독하게 차별한다구.”

무뚝뚝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남자는 처음으로 이 소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옛날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충분히 잘 움직이고 검의 취급에도 능숙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게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이가 적다는 것만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아득한 소년 시절.

“별로 서두를 필요는 없어. 네 검술은 상당한 것이고 심성도 똑바르니까. 곧 네 힘을 보여줘서 머리가 딱딱한 놈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가능할 거야.”

소녀는 자조하듯 웃었다.

“보여주면 보여준 대로 또 뭐라 뭐라 얘기할 걸.”
“어떤 소리를?”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여행은 순조로웠다. 가도를 따라가는 다른 여행자들의 모습도 가끔 보였지만 그들은 남자와 소녀의 두 일행에게 이상한 듯한 시선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

“뭐가 이상한 걸까?”

소녀가 묻자

“한 가지는 네 신원이 어떤 것일까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자유전사치곤 나이가 너무 어리고 내 시동이라고 하기엔 보이는 모습이 너무 잘났으니까.”

소녀는 짜증난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역시 여기에서도 머리는 묶어두지 않으면 안 되겠군.”

이 소녀는 무서울 정도로 자신이 소녀라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말투도 태도도 개구쟁이 소년의 그것이었다. 때로 머리를 골라 다시 땋는 것이 유일하게 소녀다운 행동이었다. 소녀에게 물어보면 그 긴 머리카락은 ‘필수품’이라는 듯 했다.

“첫째는 방한용, 둘째로는 의식제 전용....일까?”

그렇게 말했다. 이 소녀가 자신의 세계로부터 가져 온 것은 자기 자신과 허리춤의 검, 머리에 얹어둔 은 머리장식 뿐이었다. 한번 보여달라고 했지만 박혀 있는 녹색 보석은 남자가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녹주석과도 비취와도 달랐다. 무척이나 깊고 말할 수 없는 투명함을 가진 돌이었다. 소녀의 눈동자와 꼭 닮은 색의 보석인 것이다.
둥근 테 부분에는 이것 역시 멋지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세공이 들어가 있고 안을 뒤집으면 아무래도 문자같이 보이는 무언가가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다만 어느 나라의 문자인가는 남자로서도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느느 이런 걸 별로 잘 알진 못하지만 상당히 가치가 있는 물건같군. 호사가들이 본다면 눈이 뒤집힐 만큼 갖고 싶어 할 게 틀림없어.”
“안돼. 그건 내 전용이야.”
“이건 어떻게 해서 갖게 된 거냐?”
“친구가 만들어 줬어. 부적으로 쓰라고.”
“호오?”

남자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

“대단하군. 네 친구란 사람은. 이정도 실력의 세공사는 펜타스에도 그다지 없을 걸.”
“펜타스?”
“작은 도시국가이지만 문화예술에 대해선 대륙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나라다. 여기저기 아무데나 있는 세공사들로는 근처에도 가지 못할 그런 실력자들만 잔뜩 있지.”
“응. 자기가 봐도 잘 만들었다고 말했었어.”
“그렇겠지. 이 은은 네 황금빛 머리카락과 정말 잘 어울려. 이돌은 네 눈동자를 그대로 보석으로 만든 것 같은 것이고. 네 이마에 끼워지는 것이야말로 어울리게 만들어진 명품이야.”
“그러니까 내 전용이라구.”

남자의 손으로부터 돌려받아 원래대로 머리에 쓰고는 잽싸게 머리를 묶어 올린다. 그 위를 다시 하얀 천으로 둘러싸는 것을 보고 남자는 약간 아쉬운 듯이 말했다.

“일부러 숨기는 건 아깝다고 생각하지만.”
“숨기지 않으면 이것저것 귀찮은 일이 생긴다구.”

무슨 이야긴가 했지만 곧 알 수 있게 되었다. 밤이 되면 야숙을 밥 먹듯 하는 그들이지만 어느 날 밤 갑자기 폭풍우로 토사가 쓸어내려오는 바람에 남자는 소녀를 데리고 가도 근처에 세워져 있는 여관으로 도망쳤다.
로쉐의 가도는 중앙을 횡단하는 상업행로商業行路였다. 이 계절이라면 여행객들의 발이 끊기는 일이 없었다. 가도의 요지에는 숙박마을이 생기고 번창하지만 중간에도 불의의 여행객이 묵을만한 여관이 있다. 대부분은 비바람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오두막 수준이고 때로는 커다란 농가가 남는 방을 여행자가 묵을 수 있도록 해두는 것도 있지만 이 때의 여관은 도중에 있는 것치고는 제법 괜찮은 것이었다.
멋진 석조로 만들어진 이층 건물이었다. 입구에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급한 비로 손님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듯 입구에는 일하는 아이들이 여행객의 시중에 난리가 나 있었다. 가도 근방이라면 이 정도의 가게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속 야숙을 해온 소녀는 멋진 건물에 놀란 듯 했다.

“여기에 들어가는 거야? 돈이 많이 들것 같은데....”
“이 정도는 가지고 있어. 이대로라면 델피니아에 들어가기 전에 감기로 죽을 지도 몰라.”

들어가 보자, 일층은 술집을 겸해 커다란 홀로 되어 있었다. 끝쪽에는 커다란 난로에 불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들 외에도 몇 명인가도 비에 쫓겨 들어온 듯 했다. 탁자에 둘러앉아 담소하고 있는 자들 혹은 난로를 쬐고 있는 자들, 여러 종류였다.
완전히 젖어 뛰어들어온 소녀와 남자를 일행이라고는 생각지 않은 듯 했다. 난로 근처에서 의복을 말리고 있던 남자들은 리를 소년이라고 착각한 듯 난로 근처로 불러들여 옷을 말리라고 권해주었다.

“어이 꼬마. 아무리 여기가 따듯해도 그대로 있으면 감기 걸려. 빨리 입은 거 벗고 여기에 걸어둬라.”

온화한 표정의 여행자들이 그렇게 말하며 장소를 비워주었다. 리는 솔직하게 고맙다고 말하며 검을 빼고 옷을 휘릭휘릭 벗어제쳤다. 아련하게 빛나는 하얀 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나마 그 가슴이 하얀 붕대로 감춰져 있었던 것이 다행이랄까. 여자의 몸은 움직이기 힘들다면서 일부러 그렇게 해두었지만 덕분에 상반신을 나체로 드러내는 꼴을 피할 수 있었다. 물을 머금은 머리의 천도 풀어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쳐 불에 쬐었다. 흥건하게 젖어있다 해도 순금과 같은 긴 머리카락을 직접 보고 남자들은 멍청해졌다.
이런 연령의 소녀가 혼자서 비오는 술집에 들어온다는 것은 이상하기 때문이다. 남자가 말했던 것처럼 보통사람들의 행동범위에서는 상당히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젊은 여자라면 대부분 집 근처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놀랬다. 아가씨구만?”

물어보는 여행자에게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은.”

이라고 답했다. 뭔 소린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꺄우뚱거리는 것을 남자는 집주인에게 숙박비를 내면서 쓴웃음을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좀 쬐끄마하긴 하지만 꽤 괜찮잖아.”

긴 금발을 바라보며 주점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중년 남자가 훌쩍 일어서더니 난로에 가까이 다가왔다. 매끈매끈한 소녀의 피부를 보며 입꼬리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너, 예능인 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거냐? 아니면 도망친 거냐? 몸 팔아서 영업중이면 값 잘 쳐서 사주마.”

술냄새가 풀풀 나는 숨을 내뱉으며 소녀의 어깨를 안으려고 했지만 그 손을 소녀가 찰싹 때렸다.

“헤에.... 대가 센 꼬마로구만.”

소녀의 반응을 그 남자는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아까의 여행객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그만두시오, 이런 어린아이 상대로 무슨....”
“시끄러. 이런 년은 혼쭐을 내줘야 돼.”

상대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가는 몸집의 소녀이다. 억지로라도 손을 댈 생각으로 붙잡으려 했지만 소녀는 이번엔 주먹을 쥐더니 자세를 잡고 반격 태세로 남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 이 꼬맹이가!”

상당한 힘이었다. 남자는 쓰러지진 않았지만 커다랗게 비틀거렸던 것이다. 그것도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귀여워해주겠다 했더니 뭔 짓을!”
“웃기지마.”

이건 소녀의 대사였다. 시비를 걸어온 남자도 여행객도 멍청해졌다. 그리고 월은 다음 전개가 어떻게 될 것인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난 말이지. 너같이 이 얼굴하고 몸만 보고 접근해오는 바보자식들한테는 짜증이 있는 대로 쌓여 있다 이거야. 딴 데나 알아보셔.”

커다란 사내라도 무색해질만한 위협이었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소녀의 입으로부터 이런 단어들이 차례차례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듯 하다. 남자는 눈과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월은 슬그머니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검에 손을 대려 띠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검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강하게 쥐면 부러질 것 같은 가는 팔로 커다란 사내를 상대할수 있을지 어떨지 의문은 남았다. 그 순간이었다.

“이 이 애새끼가! 어른을 바보 취급하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주마!”

외치며 덤벼드는 남자의 손을 간단하게 빗겨내고 소녀는 그 배를 있는 힘껏 무릎으로 쳐올렸다. 귀엽게 생긴 둥근 무릎임에도 불구하고 강철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우엑 하고 내뱉고 몸을 둥글게 한 목덜미를 손날로 내리쳐 그 남자를 완전히 바닥에 뻗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 순간의 일이었다. 주점 내부의 사람들이 아연하게 되어 바라보는 가운데 소녀는

“입만 살았네.”

하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긴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월이 진심으로 말했었다.

“신 중에서도 현명하다는 야니스도 이번만큼은 일을 잘못 처리한 거야.”
“뭐야 그건? 이쪽의 신?”
“그래. 존재하는 모든 생물을 만들고 혼을 불어넣으며 지혜를 준다는 신이지. 대체 야니스는 어째서 네 혼을 어울리는 몸에 집어넣지 않았던 걸까? 누구나 귀엽다고 생각할 그런 얼굴에 그런 모습인데 안에 있는 건 용맹한 전사의 혼이니 말이다. 너도 달갑지 않겠지만 그래서야 보고 있는 이쪽도 어째야 할지 모른다구.”

소녀는 다시 바짝 마른 머리카락을 풀어두고 머리에 은테를 끼우고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여관 안의 한 방이었다. 원래는 각자 다른 방을 잡으려고 했었지만 갑작스런 비 때문에 그 정도의 여유는 없다고 했다. 소녀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하나밖에 없는 침대를 보고는 골치 아픈 얼굴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지금 말해두겠는데 월. 이상한 생각하거나 하면 가만 안둘 테니까.”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라.”

남자는 기가 막혀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너 같은 꼬마에게 집적대는 취미는 업어. 게다가 말 자체가 이상하잖아. 그런 걱정은 여자애나 하는 거다. 그런데 너, 지금까지는 소년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남자를 견제하는 거냐?”
“나라고 이런 꼴사나운 소리하고 싶은 줄 알아.”

소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이상한 놈들이 많단 말야. 남자의 몸으로 있을 때도 제법 집적대는 놈들이 있었으니까.”
“아까 같은 일말인가?”

입을 다문 채 끄덕였다.

“그런 일이 지금까지도 자주 있었던 건가?”
“지겨울 정도로 말야.”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이 정도의 미모이다. 소년의 몸이라고 해도 그런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들이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 뭐냐. 안좋은 짓이라도 당했던 거냐?”
“누가 당하고 있을 것 같아. 한 놈도 남김없이 때려눕혔지.”

분연하게 말하는 소녀에게 남자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아무 문제도 없잖아. 내가 너에게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한다면 똑같이 때려눕히면 되는 거다. 너라면 할 수 있을 테지.”
“......”
“첫째로 너 같은 녀석을 좋다고 집적댈 정도로 난 정신없지 않아. 사람인지 아닌지 소녀인지 소년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녀석을 어떻게 손대보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어?”

좋은 단어가 아니었어도 장난스럽고 가벼운 말을 들은 덕에 소녀도 웃었다. 길게 풀어놓았던 금발을 훑어 올렸다.

“하튼 이 머리카락이 안 좋은 거야. 남자는 죄다 이런 반짝반짝하는 머리카락을 좋아하니 말야. 갈색이라던가 회색이라던가 아예 검은 머리카락이었다면 좋았을 걸.”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라. 아깝잖아.”

진지한 얼굴로 반론한 남자의 말에 소녀는 폭소를 터뜨린다. 침대의 끝에 무릎을 안고 앉아 있다가 잠시 동안 데굴거리며 웃어버렸던 것이다. 겨우 다시 일어나서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월은 이상한 녀석이야.”
“내가?”
“응 이상해. 정말로 인간이야?”
“뭐라고오?”

굉장치도 않은 목소리가 흘렀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나는 너랑 틀려서 말 그대로 확실한 인간이라고. 그 이외의 것이 되었던 기억도 될 생각 같은 것도 없어.”
“그런 걸 엄청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게 이상하다는 거야.”

소녀는 개구쟁이 같이 웃으며 그리고는 처음으로 온화한 표정이 되어 무릎을 감싸안았다.

“하지만 제일 처음 만난 게 너 같은 사람이라 다행이야. 이제부터 어찌해야 되나 하고 생각했거든.”

남자는 그제서야 겨우 지금까지 이 소녀가 얼마나 긴장해있었나 하는 것을 눈치챘다. 정말로 다른 세계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 사정이 있어 알지도 못하는 땅에 단 혼자서 떨어졌다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인간 같지 않은 힘을 지녔다 해도 아직 열세살의 아이인 것이다. 화사한 하얀 손발에 어느 정도의 힘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곳에 있는 것은 의지할 사람 한 명 없는 어린아이로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 느꼈다.

“너 부모님은 계시냐?”
“없어. 그렇다고 했잖아.”
“여긴 안 계신다 해도....원래 있던 곳에는?”
“없어. 아홉 살 때 죽었어.”

남자는 가련하게 생각하는 마음 반, 이상하게 생각하는 마음 반이 되었다. 그런 어린 아이가 혼자서 살아나갈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 지금까지 누가 널 돌봐준 거지”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역시, 여기에선 아홉 살이라는 건 아직 어린아이인가 보네.”
“뭐?”
“이 세계에서 어린아이는 대체 어느 정도 부모랑 같이 사는 거야?”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꺼번에 말하긴 그렇군. 도시의 아이라면 빠를 경우 11, 12살에 바깥에 나가지. 농가의 아이라면 좀더 어릴적부터 부모를 도와 일하기 시작할 거야. 기사의 아이라면 15세 정도에 첫 전투를 해보게 되겠지만.”

소녀도 똑같이 고개를 모로 했다.

“우- 빠르다고 하면 빠르네. 하지만 늦다고 하면 늦은 걸까.”
“뭐가?”
“그럴 것이 내가 부모님이랑 헤어진 건 네 살 때라구.”

남자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소녀를 바라보고 말았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생각했다. 그런 나이의 아이가 육친에게서 떨어져 나와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뭐 혼자서 살기 시작했던 건 아냐.”

남자의 의문을 느낀 것인지 소녀는 그렇게 말을 이었다.

“다만 그때까지는 집보기였지만 같이 사냥을 하러 나가게 된게 네 살 때부터라는 거야.”
“네 살 때 사냥에?”

이 소녀가 범상치 않음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나친 이야기였다.

“응. 그때쯤에야 겨우 동료들에게 지지 않게 달릴 수 있게 되었어. 그러니까 사냥에 나가서 같이 사냥감을 잡았지. 그때부터는 제 몫을 하는 걸로 취급받았고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어. 그랬는데....”

소녀는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너희들 사이에선 그런 얘기가 안 통하니까. 나는 지금도 어린아이인 거지.”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네가 있던 곳이 어떤 식인지는 모르지만 그 나이에 자기 몫을 하라는 것은.... 확실히 무리야 보통이라면.”
“역시.”

소녀도 알고 있는 듯 반론은 하지 않았다.

“장소가 변하면 물건도 변한다는 거네.”

약간 의미는 다른 말이었지만.

“하지만 리. 이전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어쨌건 간에 그 몸으로 있는 이상은 조금 조심하는 쪽이 좋은거다. 남의 눈에 너는 열세살의 아이인 것이고 덧붙이자면 아름다운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야. 아까처럼 갑자기 맨살을 드러내거나 하면 누구라도 이게 무슨 일인가 한다고.”
“그거야말로 이쪽 사람들 감각으로 난 완전 어린애잖아? 그런데도 벗으면 안된다는 거야?”
“소년이라면 몰라도 소녀라면 말이야. 그만두는 게 좋아. 거기서 3년만 있으면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니까.”

여기에는 소녀가 고개를 꺄우뚱했다.

“열여섯에 결혼? 되게 빠르네.”
“네가 있던 곳에선 틀리나?”
“인간의 결혼적령기는 잘 모르겠지만 16살은 좀 빠른 거 아냐?”
“이쪽은 빠르면 16, 17살이고 보통리라면 20살 정도가 적령기다. 여자의 경우지만.”
“남자는?”
“별로 안정해져 있어. 빠르면 17, 18 늦으면 40이 되어서 아내를 맞는 남자도 있다. 빠른 것은 귀족의 자제이거나 왕족일 경우. 늦은 경우는 주변을 제대로 만들어 놓는데 시간이 걸리는 상인이나 농가의 경우지.”

소녀는 눈을 빙글 돌려 남자를 보았다.

“월은?”
“나는 아직 독신이야.”
“몇 살인데?”
“스물 넷.”
“헤에.”

소녀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놀래라. 그런 것치고는 겉늙었네. 삼십은 넘었을 줄 알았는데.”

남자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입도 험한 놈일세. 삼십이 넘었다는 건 심하군 그래.”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은 생명력이 넘치는 정후한 매력에 가득 하 있었다. 분명히 젊은 부분은 젊다고 하겠지만 소녀는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꼬고 있었다.

“그러네. 보기엔 젊은데 말야. 뭔가 그래 태도가 굉장히 아저씨 같지 않아? 좋게 말하면 관록이 있달까?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전부터 생각해 온 거지만 그다지 돈 받고 검을 타는 경호원으로는 안보이거든.”
“칭찬으로 받아도 되는 거지?”
“그럴 생각으로 했어.”

남자는 더욱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너도 그러고 있으면 사랑스러운 소녀 그 자체인데 말이야.”

다시 얼굴을 찌푸리는 소녀르르 보고 말했다.

“여자아이라면 얌전히 기뻐하겠지만 말야. 얼굴로 사냥을 하는것도 싸우는 것도 아니잖아.”

소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는 오히려 방해된다구.”

연애하는 데에는 편리할 텐데 라고 말해주었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를 쉽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얼굴이야. 그렇게 싫어해도 별 수 없잖아.”
“싫은 게 아니야. 그냥 이 얼굴 때문에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구. 게다가 최근엔 불쾌한 일만 잔뜩 있었고.”

이 화제가 되면 소녀의 말투는 상당히 냉소적인 것으로 변한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열세 살의 소녀가 용모를 칭찬받고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정도로 냉랭한 반응을 보이다니.

“사람들이 전부 불순한 목적으로 널 칭찬할 리는 없잖아. 나 역시 너의 그 머리카락도 외모도 전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데다 언젠가는 얼마나 멋진 아가씨가 될까 기대하고 있다고.”
“난 전혀 기대 안돼.”

거의 억양이 없는 말투로 말하고 침대에서 내려서서는 방구석까지 가서 기기에 앉았다.

“어이 리.”
“그 침대 너 혼자로도 꽉 차잖아. 그러니까 됐어. 여기에서 잘래.”
“그거라면 내가 바닥에서 자지. 네가 여기서 자.”

이런 소녀를 바닥에 재우고 자신이 침대를 점령하는 짓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소녀도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런 날시에 바닥에서 자는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니야. 엄동설한에도 눈 속에서 잤었으니까. 맨바닥 정도야.”
“나도 마루가 아니라 딱딱한 바위 위에서도 나무 위에서도 잘수있다고. 네가 여기서 자.”

잠시 동안 서로 노려본 뒤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설마 여기에서 묵자고 했던 거 나 때문이었어?”
“태풍이 부는 가운데서 자서 감기라도 들면 어쩌나 생각했으니까.”

소녀는 녹색의 눈을 크게 뜨고는 피식 웃었다.

“이런 이런. 돈을 그냥 버렸군.”
“뭘. 가끔은 지붕 아래에서 자는 것도 좋아. 특히 이런 밤에는.”

밖에는 무섭게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봄의 태풍이었다. 사람도 동물도 이런 때에는 가만히 틀어박혀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델피니아의 국경까지 얼마 안남았군....”

바닥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 지는 나도 몰라. 그것이야말로 목숨을 잃는 원인이 될 지도 모른다. 돌아가려면 지금뿐이야.”
“어디로?”
“.......”
“이 땅위에 어딜 찾아도 내가 있을 곳은 없어. 어디로 돌아가라고?”
“.......”
“달리 뭔가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야. 그럴 때야말로 가끔은 이런 일도 해도 괜찮은 거야.”

역시나 바닥에 앉아 있는 소녀가 대답했다. 침대는 비어있는 채로 내버려 둔 채 두 사람은 방구석에 각각 진치고 앉은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녀는 델피니아가 어째서 위험한 것인지 어째서 위험하다고 말한 남자가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남자도 소녀가 어떤 자인지 지금까지 어디에서 있었는지 자세히 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남자는 혼자 있도록 강요당했고 소녀는 갑자기 혼자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함께 있을 만한 상대를 찾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런 식으로 기묘하게 이상하게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두 사람은 인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4장
다음날 아침은 거짓말같이 맑은 날씨였다. 여행객들은 아침 일찍부터 출발했지만 남자는 진로를 오른쪽으로 바꿨다. 지금까지의 넓은 가도에서 벗어나 그 지방 사람들이 쓰고 있을 만한 작은 길로 들어섰다.

“여기부터 더 가면 로쉐 가도는 북으로 꺾어진다. 그대로 나아가면 아비용에 들어가게 되어버리니까 말이야.”

라고 남자는 말했다.
어쨌든 동쪽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니 근처의 샛길이 동쪽을 향해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계속해서 진행해 갈 수 있었다.

“지금 어디 근처를 가고 있는 건지 알겠어?”
“전혀. 하지만 이대로 계속 가면 다시 가도가 나올 거야.”

그 말대로 태양이 중천을 지나갈 때 쯤 두 사람은 가도를 알려주는 표지판을 보고 있었다. 이 근처까지 오면 꽤나 사람 모습도 보이게 되었기 때문에 소녀는 눈을 둥글게 떴다. 다시 보게 된 가도는 파라스트의 각지로 나아가기 위한 분기점이 되어있는 듯했다. 여행자들이 잠시 쉬어가기 위한 술집이나 여관이 여러 개 주재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걸어왔던 것도 있고 해서 남자는 그런 가게 중 하나를 보고

“잠시 쉬었다 가자.”

하고 말을 꺼냈다. 익숙한 풍으로 가게 안에 말을 걸고 노천에 만들어진 의자에 적당히 앉았다.

“럼주를 한잔. 그리고....”
“같은 걸로 줘.”

잽싸게 옆에서 소녀가 말했다. 남자는 눈짓했지만 접대하러 나온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돌아갔다.

“이봐. 어린애가 마실만한 게 아냐.”
“뭐든지 시험해 보는 게 남는 거야.”

소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싹이 나기 시작한 녹음에 따듯한 봄햇살이 내려 쬐고 있었다. 생활하기 좋은 계절이었다. 짐을 지고 두 사람의 눈앞을 급한 걸음으로 지나가는 상인이 있었다. 그런가 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근처의 마을까찌의 심부름인지 마차를 끈 농부가 한명 또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길에서 마주친 농부들이 서로 아는 사이인지 인사를 교환했다.

“좋은 날씨구만요.”
“예예 덕분에 살겠습니다. 모르 씨가 하시는 일이니까요.”
“뭣보다 좋은 일이죠.”

그런 회화를 나눈 뒤 지나쳐가는 농부들을 보며 소녀는 작은 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모르씨가 뭐야?”
“정식 이름은 라이모르라고 하지. 날씨와 풍요의 신을 말하는 거다. 농민에게는 말 그대로 수호신이야.”
“신을 보고 모르 씨? 재미있네.”
“농민에게는 무엇보다 친근한 신이니까 말이야. 그들은 날시가 생각한 대로 와주지 않으며 라이모르에게 빌고 좋은 날씨에 때맞춰 비가 내려와주면 라이모르에게 감사하지. 게으른 자에게 라이모르는 다소 짓궂게 굴지만 부지런히 일하면 반드시 풍작을 약속해 주지.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어.”

소녀는 감탄한 듯 말했다.

“백성을 기분좋게 일하게 만드는 데는 딱 좋은 신이로군.”

굉장한 어투의 말이었다. 어이없어 하면서도 지배자에게 있어서의 종교의 일면을 남자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맞장구를 쳤다.

“뭐어 그런거지. 전사를 기분좋게 일하게 하려고 발도우가 승리와 명예를 약속하는 것과 같은 거지.”
“멋지게 되어 있네.”

그렇게 말하면서 가져와진 럼주를 소녀는 조금 맛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훌쩍 마셔버렸기 때문에 남자는 더욱 기가 막혀하며 말했다.

“맛있냐?”
“나쁘지 않은데? 마시기 쉽고.”

그럴 리가 없었다.

“너한테 걸렸다간 싯사스의 화주火酒도 마시기 쉬운 게 될것같군 그래.”

중얼거리고는 이쪽도 단숨에 들이켰다. 가게에는 그들 외에도 여행자들이 몇 명인가 쉬어 가기 위해 들어와 있었다. 우연히 두 사람의 등 뒤에 앉은 남자들의 회화가 들으려 하지 않았어도 쉽게 귀에 들어왔다.

“그런데 코랄은 어떤 상태인 겁니까?”

한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자 다른 한 사람이 당황한 듯 손을 흔들었다.

“그야 뭐 왕이 도망가버렸다고 해서야 얘기가 안 되지요. 지금이야 페르젠 후작의 위세가 보통이 아닙니다.”
“그렇겠네요.”
“반대로 왕을 편들었던 사람들은 완전히 죄인 취급입디다. 왕의 충신이었던 도라 장군이나 아누아 후작은 칩거하는 중인 듯 하고 왕의 후견인이었던 페르난 백작은 옥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 같아서.....”

남자가 움찔 반응한 것을 소녀는 놓치지 않았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회화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그것 참 세상 시끄러운 이야기구만요.”
“예 뭐 그렇죠. 그것만이 아니라 최근 페르젠 후작은 선왕의 조카인 왜 그 아에라 공주의 자손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는 것 같습디다.”

듣고 있던 여행자에게서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아무리 지금의 왕이 행방불명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굉장치도 않은 얘기죠. 하지만 페르젠 후작으로서는 어떻게든해서 그 왕이 가짜였다고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거겠죠.”
“아항. 그래서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 이쪽이 진짜라고 못박겠다는 생각인 거군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은근히 비난이 섞여있는 말투였다. 말하고 있는 쪽도 동의하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원숭이 놀음이지만요.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짓이라해도 요즘 페르젠 후작이 하는 짓에 대놓고 반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코랄에서 아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소녀는 뒤에서 흐르는 세상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국왕이 나라에서 추방되다니 그것도 그 국왕이 살아 있는데 새로운 국왕을 만들려 하다니 드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여행자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대놓고 말입니까. 실제로는 왕의 편이 되는 사람도 아직 있다는?”
“예 물론이죠. 그것만이 아니라 코랄시민들의 대부분은 왕이 돌아오길 학수고대하고 있답니다.”
“그건 또 뻔뻔스럽구만요. 한번은 자기들 손으로 쫓아냈던 거 아닙니까?”
“예. 그쪽 사정은 외부인인 저느느 잘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코랄 사람들은 그 왕이 정통을 잇는 왕이 아니니까 왕관을 줘서는 안 된다라는 후작의 말에 놀아났던 게 아닐까요.”
“확실히 첩실이었지요.”
“예. 그게 말이죠. 델피니아 정도의 대국이 말하자면....그 왜 문제가 조금이라도 있는 왕을 올리고 싶진 않다라는 논리인 거죠.”
“하지만 말입니다. 그 외에 선왕의 피를 이은 사람은 한 명도 없잖았습니까. 잘못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요.”
“아뇨 그러니까 여러 가지 이상한 소문이 퍼졌던 거죠. 뭐라던가 그 왕이 상당히 못된 놈이라 왕위에 앉으려고 다른 왕자를 몰래 암살했다던가 뭐라던가. 남들 듣는 데선 못할 얘기지만요.”

온건하지 못한 내용에 여행자는 아무래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나 듣는 쪽의 여행자는 질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흘렸다.

“그런 세상에 정말입니까?”
“예. 아무리 일반적인 궤범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죠. 분명히.”
 
두 사람의 여행자는 이 소문의 신빙성에 분명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 정도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다소는 맞는 소리로 들렸던 모양입니다. 왕은 결국 그 소문에 휘둘려서 왕궁에서 쫓겨났으니까요. 하지만 왕이 없어진뒤 코랄에 무슨 일이 벌어졌냐 하면 결국은 단순한 머리 바꾸기에 지나지 않았죠. 후작과 그 동료들이 자기들 좋을 대로 정치를 하기 위해 왕을 쫓아냈다 그걸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누구도 후작을 대두로 하는 개혁파에 거스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뭐 그런거죠.”
“알만하군요.”
“왕은 지금도 행방불명이지만 개혁파는 왕에게 막대한 상금을 걸어두었답니다. 한시라도 빨리 왕을 발견해서 통보하는 자에게는 보르김 금화 백장을 보수로 준다던가.”
“금화 백장!”

놀란 목소리였다.

“그것 참 돈 아까운 줄 모르는 짓을. 진짜로 왕이 돌아왔다간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걸로 보이는구만요.”
“그러게 말입니다. 알아서 소문거리를 만든다는 게 참 말 그대로 이런 겁니다.”

두 사람의 여행자는 살그머니 재밌다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 뒤에 개혁파가 한 짓이라고는 그야말로 어떤 것도 평판 좋은 게 없어서요. 지금 돌아온다면 아무리 안 된다 해도 꽤 많은 시민이 왕을 환영할 테죠. 무사할 때의 이야기입니다만서도.”

소녀는 모르는 척 하면서도 뒤쪽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관심한 척 하면서도 옆에 앉은 남자가 비슷한 정도로 열심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왕도 뭔가 나라에서 쫓겨나 혼자 도망갈 만한 일을 한 거겠죠.”
“그게 페르젠 후작이라는 사람의 무서운 점입니다. 완전히 왕을 못된 놈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요.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극악무도한 짐승 같은 놈이라고 퍼뜨렸으니까요.”
“그런 걸 어째서 델피니아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들었답니까?”
“글쎄요. 당시의 분위기라는 것도 있었겠고 그때는 또 갑자기 등장한 첩실 소생의 왕이라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겠죠.”
“그럼 지금은?”
“그것이 참 변덕 죽 끓듯 한다고 이런 일인 줄 알았다면 후작을 지지하는 게 아니었다고 최소한 지금의 후작보다는 첩실의 왕쪽이 아았다고 몇 번이나 그런 소리를 들었지 뭡니까.”
“어이구 어이구.”
“뭐어 자주 있는 일이지만요. 게다가 개혁파 중에서도 겨우 협력해서 왕을 쫓아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댓가가 별로였다는 거라. 내심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도 꽤 있는 모양입니다. 이대로 가면 대체 어떻게 될런지.”
“훠이 훠이. 당분간 동쪽에는 가지 않을게 낫겠구만요.”

말로는 무서워하는 척 하고 있지만 두 사람은 즐거운 풍으로 웃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일인데다가 윗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구경거리로 이 이상의 소재는 없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의 여행자가 일어서서 가도를 따라 서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녀가 그 뒤를 따랐다. 남자는 묘하게도 무뚝뚝하게 발을 옮기고 있었다. 소녀는 총총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저기.”
“.......”
“페르난 백작이라는 거 아는 사람?”
“아버지다.”

소녀는 놀라서 그 자리에 서버렸다. 남자는 고뇌하는 표정이 되어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페르젠. 거기까지 생각했나.”

결의를 숨긴 채 남자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소녀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월은 그럼 아버지를 구하러 가는 거야?”
“당연하잖아. 내버려둘 수 있을 것 같나.”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 코랄에서 가장 높은 사람에게 적이라고 여겨지고 있잖아? 전 왕하고 같은 편이었다는 이유로. 그 한가운데를 혼자서 돌파해 들어가서 구해낼 생각?”
“따라오라고는 안했다. 말했을 텐데 적도 많다고.”
“그쪽이야말로 안 듣고 있네. 도와주겠다고 말했잖아?”

월은 지금 현재 단 한 명의 별난 풍의 안군을 바라보았다. 몸집도 작고 손발도 가늘다. 사랑스러운 외모에 매끈하고 하얀 피부,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이 소녀는 할 생각이다. 녹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비책은 세워뒀어? 뭐라해도 나는 이쪽 세계에서 뭐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전혀 모르니까 말이야. 그 코랄이라는 곳의 지형도 모르고. 아버지가 어떤 곳에 잡혀 있고 어떤 식으로 보초가 세워져 있을지 경비체제는 어떻게 되어 있을지 정도는 알지 못하면 구하려고 해도 아무런 방법이 없다고.”
“분명히 그렇지. 그것보다 먼저 어떻게 코랄에 들어갈 것인지가 문제다.”
“앞으로 얼마나 걸려?”
“국경까지는 앞으로 2일. 하지만 거기에서 코랄까지 순순히 길따라 들어간다 해도 7일이다. 그것까진 좋다고 해도 이미 얼굴도 알려져 있는 내가 어떻게 시내에 잠입할까가 문제지.”
“얼굴이 알려져 있어?”
“그래. 지금은 어쨌든 델피니아에 들어가면 말이야. 명찰을 걸고다니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지.”
“이런 이런. 그래서야 먼저 변장이던 뭐던 해야 할 거 아냐.”
“문제는 아직 있어.”

남자는 골치 아픈 표정이었다.

“잡혀 있는 장소라고 생각되는 곳은 코랄 성 밖에 없다. 하지만 코랄 성은 남모르게 잠입하기엔 최악의 장소야. 뒤로는 파키라 산맥을 두고 전방에는 삼중의 성벽이 있지.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어떤 공격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이름높은 난공불락의 성이니까 말이야.”
“그래? 의외로 그런 곳일수록 작은 걸 놓치기 쉬운거야. 대군으로 함락하긴 힘들다고 해도 안들키고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을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남자는 여기까지 와서도 조금의 주저도 보이지 않는 소녀에게 다시 한번 놀람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너 정말 코랄 성에 숨어들어가겠다는 거냐?”
“아버지가 죽어도 상관없어?”

소녀가 되받아쳤다.

“페르젠이 무섭지 않은 거냐.”
“모르는 사람인데 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쉽사리 말했다. 이런 걸 보면 순진한 어린애 그대로의 모습이다. 하지만 아무리 짧은 시간동안 알고 지냈다 해도 이런 것에 속아넘어가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델피니아는 중앙의 꽃이라고 불리며 대룩 전토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강국이다. 페르젠은 그 나라의 지금 사실상 최고권력자라고. 델피니아 그 자체를 적으로 돌리게 돼.”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델피니아가 어느 정도 커다란 나라인지 모르니까 별로 안 무서운걸.”

소녀는 가뿐하게 말하고는 남자를 보며 빙긋 웃었다.

“난 말야. 여기에서 무성르 하면 좋을지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어째서 이런 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무언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 이렇게 온 이상 누가 마중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한다는 것도 재미없고 말이야. 이건 의외로 너를 도우라고 하는 것이었을지도 몰라.”

남자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한 번 목숨을 구해주었다. 애가 탈 정도로 강력한 아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누가 널 보냈다는 거냐?”
“이쪽 세계의 운명의 신이라던가 뭐 그런 거 아냐?”

전혀 믿고 있지 않다는 투로 소녀는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네가 믿는 신이라도 좋지 뭐.”
“나는.... 어떤 신도 믿지 않아. 단 하나 투신 발도우가 예외지만. 검을 쥐는 자라면 누구나 믿고 기도를 바치는 신이니까.”
“승리를 비는 거야?”
“그래. 처음 전투에 나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빠트린 적은 없다.”
“그럼 무사히 아버지를 구해낼 수 있게 해주세요 하고 그 신한테 부탁하고 빨랑 강을 건너자.”

너무나 낙천적으로 말하는 바람에 남자는 일순 이 소녀를 과대평가하고 있던 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일의 중대함을 알고 있는 거냐 너?”
“알고 있어. 하루라도 빨리 구해내지 않으면 너네 아버지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말야.”

남자는 말을 잃었다. 그 말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틈이 있으면 코랄까지 안전하게 닿을 방법이나 생각해. 뭔가 좋은 방법이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남자쪽이 오히려 놀라 대체 어떻게 할거냐고 물으려 했을때 소녀가 급히 몸을 긴장시켰다.

“뭔가가 와.”

남자도 몸을 숙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이 소녀의 귀가 평범하지 않음은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은 잡목림과 언덕의 경계인 곳이었다. 사이에는 동물이 밟고 지나간 것 같은 가느다란 샛길이 나 있었다. 봄의 햇살이 부드럽게 녹음에 내리쬐고 작은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평화 그 자체의 광경으로 보였지만 소녀는 허리춤에 손을대고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조용히 그 뒤에 서 있었다. 잠시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드디어 잡목림 안에서 완전무장을 한 병사가 몇이나 달려나왔던 것이다. 소녀는 가볍게 혀를 찼다.

“확실히 너 상당히 얼굴이 팔려있는 것 같구만.”

다시 어조가 거칠게 변해버린 소녀에게 남자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리, 너 정말로 자각증상이 없는 거냐?”
“멋대로 떠들어. 너야말로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방랑하는 자유전사 하나 덮치는 것치고는 공을 너무 들이잖아.”

낮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나타난 병사들은 방심하지 않고 두 사람을 감시하고 있었다. 여덟 명 정도였다. 모두가 같은 모습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정연한 몸놀림이었다. 같은 주군을 모시고 있거나 같은 조직에 속해있다는 증거였다. 그 중에서도 지휘관 같이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서 남자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뵙겠습니다. 델피니아 국왕 월 그리크 폐하이시지요?”

소녀는 놀란 눈동자를 일행인 남자에게 돌렸지만 말로 하진 않았다. 입다물고 듣는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었다.

“아예 왕가를 집어삼키려던 역적 소인배님이시군요 하고 묻는 건 어떠냐.”

겸손한 질문에 대해 남자는 야유가 듬뿍 담겨있는 말로 대답했다.

“여기에서 만나뵙게 된 것은 진실로 행운입니다. 폐하께서는 이제부터 어느 곳을 향하려는 예정이시온지?”
“어디고 자시고 없다. 델피니아에 돌아간다.”

삼십대 전후의 그 남자는 사뭇 곤란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가는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곤란하옵니다. 폐하께서 돌아오신다면 겨우 안정되기 시작한 시내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고 말 테니까요.”
“그 혼란을 부추기고 있으면서 무슨 소리를. 페르젠의 음모에 가담하고 있는 무례한 놈이 감히 할 말이냐!”

일갈에도 자객들의 집단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폐하, 폐하께서도 국내에 돌아오시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은 소링만이 아니옵니다. 다름 아닌 델피니아 그 자체가 당신의 귀환을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국내는 페르젠 후작님의 통치하에 평온하며 근시일 내 새로운 국왕도 탄생하실 것입니다.”
“오호 재미있군. 국왕이 뻔히 살아있는데 그런 짓이 가능하다면 어디 한번 해보지 그러나.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해도 오리고의 제단 앞에서 왕관을 쓰는 가짜 왕만은 자신이 광대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광대는 어느 쪽이십니까?”

사람들 앞에 나서서 월과 대화하고 있던 중년의 지휘관의 말투에 냉소가 섞여 들었다.

“마摩의 5년간이 지나고 왕관을 계승할 분도 정해지고 이제야 원래대로의 풍요로운 델피니아가 돌아오리라 우리들이 안도하고 있을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나타나 왕관을 훔쳐간 무례한 도적은. 자격도 없는 몸으로 잘도 왕관을 쓰고 국민 모두를 속여넘겼던 것은 어디의 어느 분이시던가요?”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왜....”

남자는 대담하게 웃었다.

“느물스럽게 굴 틈이 있었으면 빨리 용건이나 말해라.”
“그럼 말씀드리죠. 지금 즉시 이 땅에서 나가 북쪽의 황야던 남쪽의 군도던 어딘가에 몸을 숨기시길. 두 번 다시 델피니아에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호오?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이 반년 동안 끈질기게 내 목숨을 노린 데다가 상금까지 걸었으면서.”
“이것도 그것도 모두 당신이 델피니아에 돌아오셔서는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은 누구도 당신의 일 따위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당신의 즉위는 무효처리가 끝났으며 남은 것은 진실된 국왕의 즉위를 기다리는 것 뿐. 그렇다면 이 이상 당신의 목숨을 노려도 소용없는 일이지요.”

남자는 낮게 웃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너 것이라면 환영받지도 못하는 모국에 굳이 돌아갈 필요도 없겠지. 리 가자.”

남자는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고 소녀도 그뒤를 따랐다. 지금까지의 진로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국경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된다. 돌연 나타났던 집단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배웅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무래도 긴박해진 목소리로 소녀가 물었다. 등을 꿰뚫리는 것 같은 시선을 느끼면서도 두 사람은 일단 의연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다. 남자는 잡목림 안으로 들어섰가. 그곳은 사람의 출입이 있는 듯 조악하지만 넓게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돌연 나타난 병사들의 집단은 곧 나무그림자 사이로 보이지 않게 되고 충분히 떨어졌다고 판단되었을때 소녀는 진지한 말투로 물었던 것이다.

“월 정말로 진짜로 왕인 거야? 델피니아의?”
“뭐 그런 셈이지.”
“그런데 아까는 페르난 백작이 아버지라고 말했잖아.”
“말 그대로야. 진짜 아버지 이상의 나에게 있어선 아버지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지나쳐 온 길을 살폈다. 소녀도 같은 식으로 기척을 살피고 있었다.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 녀석들 포기했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

소녀는 고개를 저었고 남자는 끄덕였다.

“그렇겠지. 내가 진심으로 나라를 버리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테니까. 다시 올 거다.”
“알고 있으면 도망치던가 어쩌던가 해야 할 거 아냐.”
“그럴 수도 없어.”

남자는 깊은 숨을 내쉬고는 소녀를 끌고 길에서 벗어났다. 가까운 곳에 있는 잘린 나무둥치에 가서 앉았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코랄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해도 한 번 싸워야 한다면 지금 격파해 둬야겠지.”

소녀는 남자의 정면에 서서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명이 올지 모르는데?”
“도와주겠다고 안했었나?”

하얗고 작은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남자는 웃었다.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아이를 상대로 이런 것을 묻다니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소녀는 골치 아픈 얼굴로 팔짱을 끼었다.

“아까 여행자들이 얘기하고 있던 거 정말이야?”
“어느 부분이?”

소녀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쨌든 네가 정의고 문제의 후작이 악이라고 치자. 그런 가정하에 묻겠어. 그 후작이 어떤 나쁜 계략을 썼는지 모르지만 네가 정말 델피니아의 왕이고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면 어째서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갔던 건지. 그리고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단 혼자서 나라에 돌아가려는 바보 같은 짓을 하려고 하는지. 그런 것 말이야.”
“어쩔 수가 없었어. 다른 누구도 아군이 되어주지 않았으니까.”
“그거야. 아무리 정쟁에서 졌다고 해도 왕은 왕이잖아? 왕좌에서 쫓겨나는 일이 생긴다 해도 같이 떠나는 사람이 여러 명 붙게 되어있는 거 아냐. 보통이라면?”

감정적이 되는 일도 없이 하나하나 주의깊게 짚어가는 소녀에게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분명 그 말대로야. 보통이라면 말이지.”
“또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것은 너와 페르젠 후작 중에 옳은 것은 어느 쪽인가 하는 거야.”

남자는 가볍게 말했다.

“세간의 평가로는 압도적으로 옳은 것이 페르젠이고 나는 왕좌를 빼앗으려 한 대악당이라는 걸로 되어 있다.”

소녀는 팔짱을 낀 채로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분개하고 있지 않으면 아무 죄도 없이 나라에서 쫓겨난 억울함이라는 걸 표현하고 있지 않으면 이러저러해도 뭔가 하기가 힘들었다. 이거야 누명이 씌워진 상황을 재미있어 하고 있는 상태 아닌가. 그렇게 소녀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남자도 이해한 듯 했다.

“뭐 일단 앉아. 다음 녀석들이 올 때까지 조금은 시간도 있다. 그동안 사정을 설명해 둘까.”
“그래 줘.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

가까운 바위에 털썩 앉아서 소녀는 고개를 모로 하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상한 얘기야. 높은 데에서 위세 떠는 게 직업인 왕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거든.”

남자도 웃음소리를 냈다.

“그 말대로야. 아까 그 병사가 말했듯 나는 원래 왕관하고는 인연이 없는 남자였어야 해. 바로 2년 전까지 페르난 백작의 아들로서 백작의 영지 델피니아 북부의 스샤라는 곳에서 지내고 있었어. 도회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촌스러운 시골이란 말이야. 거기가 고향이지.”

소녀는 납득한 듯 끄덕였다.

“그렇구나. 계속 왕궁에서 지내온 것치곤 이상하다 했어. 나무위에서건 폭풍 속에서건 잠들 수 있는 왕이라니. 웃기잖아.”
“그렇겠지. 스샤에선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었지. 그런데 궁정에오니 특히 국왕의 생활이라는 게 되니 이건 말할 수 없이 바보같도 쓸데없는 일뿐인거다. 한번 목욕하는 데 시녀가 다섯 명이나 따라올질 않나. 몸을 닦은 천은 한번으로 처분되질 않나. 식사를 하게 되면 주방에서 식당까지 오는데 완전히 식어서 먹을 것이 못되질 않나. 거기다 어디엘 가도 시종들이 줄줄이 따라오질 않나.”
“입이 험한 왕이네.”

소녀가 놀리듯이 말했다.

“나 같은 왕만 있는 건 아냐. 특히 선대의 뒤르와 왕은 말이야. 지금에 와선 명현왕明賢王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확고한 왕으로서 델피니아에 군림해서 수많은 전쟁을 치러낸 위대한 국왕이었지.”

선대라고 하는 것은 이 남자의 부친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페르난 백작이라고 말했다. 의문을 느낀 소녀였지만 가만히 상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선왕이 갑자기 서거하신 것이 지금부터 7년 전의 일이다.”
“7년전? 그럼 그때 월은....”
“열일곱이었지.”
“그래서 뒤를 이어 왕이 된 거야?”
“아니. 뒤르와 왕에겐 제대로 된 왕자가 두 명이 있었지.”
“응.”
“그 당시 스무 살이었던 레온 왕자와 여덟 살이었던 에리아스 왕자다. 웬만한 일이 없어서는 왕관은 빨리 태어난 자가 우선이니까. 당연히 연장자인 레온 왕자가 계승하여 델피니아의 국왕이 될 터였지.”
“응.”
“그런데 선왕의 상도 벗고 준비도 끝나고 대관식을 치르기 바로 그 한달 전의 일이었다. 레온 왕자가 사냥 도중 낙마해서 그 부상이 원인이 되어 죽게 되었지.”
“어라라. 그래서 월이....?”

“아니. 그 다음은 에리아스 왕자였다. 나이가 어리던 애기이건 간에 직계의 남자라는 사실은 흔들릴 수 없는 거니까. 원래 8세의 소년왕으로는 내외적으로 문제가 많기 때문에 왕으로서는 짐이 무거운 것이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페르젠 후작이 방패가 되어서 정치 쪽은 문제가 없는 것이 되었지.”
“응.”
“그런데 에리아스 왕자는 원래부터 병약한 사람이었는지 레온 왕자가 죽은 뒤 불과 반년 후에 병으로 죽게 된거다. 때마침 레온 왕자의 장례가 끝난 직후의 일이었지. 이걸로 겨우 대관식을 기대할 수 있었던 국민은 다시 물먹게 된 셈이었던 거지.”
“거참 잘도 불행이 계속되네. 그래서 겨우 월 차례가 돌아온 거구나.”
“아니야. 뒤르와 왕에게는 공주도 두 사람 있었지.”

“헤에? 여왕이라도 되는 거야?”
“그래 중요하나 것은 혈통이니까 말이야. 직계의 아이들이 없는 이상은 여자라고 해도 방계의 남자보다는 높은 계승권을 가진다. 다만 국왕에게 성인이 된 형제라도 있다면 얘기가 틀리게 되지만.”
“한 사람도 없었던 거야?”
“그래. 대군이 한 명 계셨던 듯하지만 뒤르와 왕보다 일찍 돌아가신 상태였지. 그쪽의 자식들은 아가씨들뿐이었고 말이야. 그렇다면 진짜 딸 쪽이 계승권이 있다고 인정되는 거지.”
“응.”
“그 시점에서 국왕 부재가 2년이 지속된 상태였으니까.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국왕을 탄생시키겠다고 델피니아는 나라 전체르 다 바쳐서 이 여왕을 환영하려고 했지만.”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싫다는 표정으로 소녀가 끼어들었다.

“그 왕녀도 죽었다는 건 아니겠지.”

남자는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끄덕였다.

“그때도 그때마저도. 언니 쪽 공주가 죽은 뒤 얼마 안되서였지. 단 한 명 남아있던 동생 공주도 쓰러져 일 년 뒤 병석에서 그만....”
“죽었어?”

소녀는 녹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 그게 언제 이야기야?”
“선왕이 돌아가신 뒤 3년째였다.
“그렇다는 건 뭐야? 아버지인 왕이 죽고나서 3년동안 레온 왕자랑 에리아스왕자랑 왕녀가 두 명? 네 명이나 죽었다고?!”
“그것이 델피니아의 마魔의 5년인거야.”

남자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국민 모두에게 있어서 악몽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나날이었다. 왕이 서거하고 왕위를 이어야 할 자식들이 전원 그 뒤를 따라 죽어버린 것이었다. 아연해 하면서도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째서 5년? 3년이 아니야?”
“선왕의 자식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것이 3년. 그 뒤 2년, 다음 국왕으로 누구를 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지.”
“그동안 계속 왕은 없음?”
“그래.”
“잘도 내전이 안 일어났었네.”

남자도 끄덕였다.

“그 위험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페르젠의 공적이었지. 국내의 귀족들을 잘 통솔해서 내전은 커녕 탄가, 파라스트까지 완전히 제어해 허튼 소리가 나오는 걸 용서치 않았지. 그 후로 제후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던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소녀는 사랑스러운 얼굴에 노골적인 혐오의 표정을 띄워 올렸다.

“아니 땐 굴뚝이 아닌 거 같은데?”
“굴뚝 정도가 아니라 불난 집처럼 연기가 나지. 풀풀 말이야.”
“응.”
“항간에선 이 나라는 저주받았다던가 왕관을 손에 넣는 자는 모조리 죽게 된다던가 하는 소리마저 떠돌았지. 나는 별로 그런건 믿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야말로 네 말대로 아무리 뭐래도 이런 게 우연일 리가 없었어. 무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당시의 나는 촌구석 스샤에 있었고 멀리 떨어진 수도의 이야기로밖에 듣지 못했지만 자기 나라의 일이니까. 신경이 안쓰일래야 안쓰일 수 없었지.”
“응.”
“왕국에 왕이 없어서야 그거야말로 말이 안되는 소리니까 말이야. 그리고 직계의 자손들이 모조리 불온한 죽음을 맞이한 이상 가까운 친척 중에서부터 차례대로 다음의 왕을 뽑게 되었던거다.”
“뭐 당연한 거네.”
“가장 먼저 후보에 오른 것이 아까 여행자들이 말하고 있었지만 뒤르와 왕의 여동생인 아에라 공주의 아들, 정확히는 공주가 국내의 귀족과 결혼해서 낳은 아이였지.”

소녀의 천으로 감싸둔 머리가 약간 기울어졌다. 생각해 보건대 이 근방의 사회구조에 따르자면 혈통에 의한 신분이나 계급이 중요시 될 터였다.

“옙 질문. 원래는 왕가의 공주님이라고 해도 귀족에게 시집간거라면 그 아이는 혹시 왕족이 아닌 거 아냐?”
“맞아. 아에라 공주는 귀족에게 시집갔다 해도 국왕의 동생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언제나 왕족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수 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되면 그렇게는 안 되지. 피가 이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왕족으로는 인정받지 못해. 어디까지나 공주가 시집을 간 공작가의 아이가 되는 거지.”
“저기 그럼 역으로 평민의 여자가 왕족이랑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남자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일단은 있기 힘든 일이지만 그 여성 본인에게는 왕족으로서의 자격이 주어지겠지.”
“다시 말해 남자쪽 집안이 기준이 된다는 거네.”
“그리고 정식으로 결혼을 했느냐 아니냐도. 오리고에서 축복 받았는지 아닌지로 커다란 차이가 생기니까 말이다. 애첩이나 그 아이는 주인의 총애를 받는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그런거지.”
“알았어. 좋아 얘기 계속해.”
“음.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에라 공주의 자식이 차기 국왕 후보로 올랐지만 계승권으로는 좀 희박하더라 하는 이야기까지.”
“그래. 그것이 문제가 된 거야.”

공작가의 영식이라고는 해도 단순한 귀족의 자식을 국왕으로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모험임과 동시에 국가에게 있어서는 중대한 발걸음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그 외에 가까운 왕족은..... 왕의 동생의 딸들. 죽은 왕에게는 조카가 되는 아가씨들이지? 그뿐이었던 걸까?”
“꽤나 이해가 빠르군. 그 말대로야. 그것도 아직 어렸지. 비교해보자면 발로는.... 아에라 공주의 자식은 유능한 기사로서도 나라에 충실한 인물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하앙. 지명도가 있었다 이거군.”
“그렇게 간단하겐 되지 않았지. 선왕의 조카인 어린 영애들을 왕으로 옹립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는 세력도 있었으니까.”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랄까 이거 정말 귀찮네.”
“이것만큼은 말이지. 어쨌든 적당히 이야기할 수도 없는 것이니까.”

국왕이라고 하는 존재가 한 나라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말수는 적어도 남자의 진지함 그 자체인 말투가 무엇보다 나타내고 있었다.

“나도 기사 발로에 대해서는 제법 알고 있었다. 그 무용담과 충성심은 유명했으니까. 좋은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델피니아에 내려진 의문의 저주도 그 기사에게만은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응.”
“마의 5년 간이 지나고 기사 발로가 델피니아의 국왕이 될 것이 거의 정식으로 결정되었던 어느 날의 일이었지. 아버지가....페르난 백작이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실은 당신은 뒤르와 왕의 친자식입니다 하고 말한 거다.”
“하아?!”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누르고 있었다.

“무슨 농담인가 했다. 농담 같은 건 하는 법이 없는 아버지라는 사실은 그때까지의 22년간 뼈저릴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설마 그때까지 몰랐던 거야?”

남자의 웃음은 무척이나 복잡한 것이었다.

“몰랐었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진짜 어머니라고 그때까지 믿고 있었으니까.”

소녀는 침묵했다. 괜한 위로 같은 걸 입에 담아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의 자기 자신이 신기루처럼 되어버린 남자의 심경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뒤르와 왕이 장난삼아 손을 댔던 시녀가 낳은 아이가 바로 나였다고 하더군.”
“그렇지만 말야. 보통 왕의 아이라고 하면 첩의 자식이건 뭐건 제대로 왕자님으로서 자라는 거 아니야?”
“그렇지. 국왕에게는 애첩 같은 건 몇 명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하지만 뒤르와 왕의 경우엔 얘기가 틀렸다. 평생동안 공표된 애첩을 한 명도 두지 않았던 왕이었으니까.”
“그거 드문 일 아니야?”
“드물 정도가 아니라 이상할 정도야. 예를 들어오론은 지금 당장 다섯 명의 애첩이 있지. 아무리 그래도 확실히 상하 자격의 차별을 둬서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있긴 하지만 다른 왕도 비슷한 식이고 남쪽 나라의 왕 중에서는 좀더 성대하게 그 뭐냐.”

상대가 소녀인 만큼 주저했지만 소녀 쪽이 뒤를 이었다.

“후궁을 만들어서 여자들을 잔뜩 거느리고 있어?”
“잘아네.”
“인간은 그런거 좋아하니까. 특히 지위 높은 인간 남자들은 말야. 하나 있으면 또 하나, 질리지도 않나봐.”

조롱하는 말투였다. 특별히 혐오라던가 수치심이라던가 동경이라던가 하는 감정은 없는 듯 했다. 이 연령의 소녀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월은 어때? 왕이 되었을 때 역시 여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어?”
“바보같이. 그럴 여유가 어디 있냐.”
“아 당황하는 폼이 수상해. 숨기지 않아도 괜찮잖아. 별로 이상한 것도 아니고. 대체로 인간 남자란 다 그런 식이잖아.”
“너 말야. 사람을 발정난 개 취급하지 말아줄래.”
“내 쪽에서 보자면 마찬가진데 뭐. 어느 쪽도 24시간 발정난 건 똑같으니.”

냉소적인 말투였다. 어른스러운 척 하는 것도 딱 잘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소녀 특유의 결벽성에서 오는 남자의 성적 경향에 대해 못참겠다는 식으로 느끼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보다 통렬한 보다 엄격한 깊은 곳을 예리하게 후비는 비판이었다. 남자는 다시 한번 새로운 것을 보는 양 소녀를 바라보고 말았다.
깊은 녹색의 눈동자. 남자가 알고 있는 소녀나 소년과는 완전히 다른 빛을 띄우고 있는 눈동자. 왠지 당황해서는 자기도 잘 알수 없는 변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그 왜 발정이라는 것은 물론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게 아니지만 누군가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말이야.”
“당연하잖아.”

쉽사리 말하는 바람에 남자는 이마를 짚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열 받아 할 필요도 없잖아.”
“별로 화내고 있는 건 아냐. 다만 인간 남자들의 그 되는 대로 장소 상관없이 무절제하게, 추가로 무신경하게 구는 건 절대 좋아할 수 없다는 것 뿐이야.”

잘도 거기까지 늘어놓을 수 있는 셈이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엔간히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고 말고. 그쪽이 맘대로 발정해 놓고 ‘너도 좋잖아’ 라던가 ‘귀여워해 주마’ 라던가 하는 말 들어봐. 이빨 한두 대쯤 부러뜨리지 않으면 성이 안 찬다고.”

자업자득이라고는 해도 여태까지 이 소녀의 외모에 속아넘어 갔던 남자들에게 마음 깊이 동정심을 느꼈다.

“부탁이니까 내 이빨은 부러뜨리지 말아 달라고.”

약간 가벼운 오한을 느끼며 말하자

“그쪽이야말로 나한테 이빨 부러뜨려질 짓 하지 마.”

라는 대답이 나왔다.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안심해도 되겠군. 뭐라해도 나는 옛날부터 그쪽에는 둔했으니까 말이야. 친구들에게도 자주 그 일로 놀림받았지. 더욱이 궁정의 여관들하곤 도무지 상대도 안됐지.”
“그럼 이전의 왕도 둔해서 애첩이 한 명도 없었던 거야?”
“아니 달라. 두고 싶어도 둘 수가 없었던 거야. 뒤르와 왕에게는 두 명의 왕비가 있었거든.”

눈짓만으로 어떻게 된 건데? 하고 물어 온다.

“물론 동시에 둔 건 아니야. 처음의 왕비는 이곳 파라스트의 왕녀였지. 레온 왕자와 루피아 공주를 낳고 사별해 선왕은 탄가의 왕녀를 두 번째 왕비로 맞았고 그 왕비가 에리아스 왕자와 에베나 공주를 낳았던 거야.”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탄가와 파라스트는 견원지간이야.”

남자는 단언하고 덧붙였다.

“사이에 델피니아를 두고 노려보고 있는 형패지. 뒤르와 왕이 두 번째 왕비를 탄가에서 맞아들이기로 결정했을 때는 파라스트에서 정식 문서로 항의가 날아왔을 정도니까.”
“하하앙....”
“반면 후계자인 레온 왕자가 죽었을 때 탄가는 춤이라도 출 듯 기뻐한 모양이야.”
“즉 에리아스 왕자가,자신들의 피를 이은 왕자가 델피니아의 왕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지.”
“하지만 그 왕자까지 죽어버렸다는 건.”
“그래. 어느 쪽 나라에서도 자신들의 계획이 멋지게 깨져버렸다는 뜻이지.”
“하아.”

“원래 얘기로 돌아가자면 당시의 델피니아는 양국의 사이에 끼어 중립을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지. 어느 쪽 나라와도 곤란한 일은 벌이지 않도록 하는 상태라서 말이야. 선왕은 양쪽 나라의 눈치를 봐서 한 사람의 첩도 들이지 못했을 정도이니까.”
“또 하나 질문. 그 삼국의 역학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야? 가장 강한 건 어디?”
“선왕 시대에는 델피니아였어.”
“그런데 왜 신경을 쓴 거야?”

“그렇기 때문에 선왕이 명군이었다는 거다. 정치 군사만이 아니라 외교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인물이야. 내가 태어난 것은 마침 선왕이 탄가 왕녀와의 약혼을 하기 직전의 일이었지. 아마도 선왕은 이 이상 문제가 일어날 만한 일은 피하자고 생각한 거겠지.”
“아무리 왕이라고 하지만....”

소녀는 기분나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안 좋아해. 그러면 완전 귀찮은 걸 내버린 거나 마찬가지잖아.”
“어떤 의미에선 그래.”
“.......”
“하지만 선왕은 선왕 나름대로 나의 미래를 걱정하셨다고 아버지가 말했어. 궁정에서의 보기싫은 권력투쟁에 휩싸이기보다는 느긋하게 성장해주길 바랬다고. 어느 날 아버지는 선왕에게 조용히 불려가 나를 맡았고 진짜 자식처럼 키워달라는 명을 받았다고 하더군.”
“그럼 성 안에서도 월이 태어난 것은 아무도 몰랐던 거야?”
“두세 명의 심복을 제외하면. 선왕은 어떤 것이 있어도 내 출생의 비밀을 가르쳐줘선 안된다고 엄하게 아버지에게 지시했던 모양이야. 어디까지나 페르난 가의 자식으로서 자랄 수 있도록....”
“하지만 그러면 어째서?”

20년간 지켜왔던 그 비밀을 어째서 하필이면 혼란이 한창인 가운데 밝힐 생각을 한 것일까. 남자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무릎을 꿇은 채 이 일은 평생 가슴에 묻어둘 자거정이었다고 말했어.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 탄생하려고 하는 국왕은 혈통에 있어서 나에게 너무나 뒤떨어졌지. 돌아가신 뒤르와 왕의 명령을 배신하는 일이 되지만 나라고 하는 직계의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카에 지나지 않은 국왕의 탄생을 맞이하는 것은 델피니아 국민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더군. 너무나도 우리 아버지다운 소리였지.”
“복잡한 일이네. 그래서 월은 어떻게 했어? 코랄에 들어가서 왕이 된거야?”
“말도 안돼. 나는 왕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았어. 대체 말이지 이십 수년동안 시골귀족의 자식으로 자라왔다고. 이제와서 갑자기 고귀한 피가 어떻다니 평범한 신분이 어떻다니 소리를 들어도 그게 나한테 하는 소리로는 안들려.”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녹색 눈으로 가만히 상대를 살펴보고 미소를 띠었다.

“그럴까? 다른 왕이라면 몰라도 말야. 점수는 괜찮게 딸 수 있다고 봐. 관록 있겠다 사람 툭 터있겠다, 조금 서민적일진 모르지만 그건 생각하기에 따라서 일반 시민에게 좋게 비치겠고말야. 대체로 왕이라는 건 아까 그 페르젠 후작은 아니지만 말야 어떻게든 하고 싶다는 사람한테 맡겨놓으면 그걸로 기만 살고 제멋에 빠져서 제대로 된 일은 하지 않는다구. 그럴 정도라면 차라리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사람한테 시키는 쪽이 결과적으로 열심히 하게 되서 좋은 왕이 되는 게 아닐까.”
“재미있는 역설이군.”

남자는 웃었다. 이 소녀와 함께 있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라앉게 된다. 지금까지 누구도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솔직한 시선을 보내준 일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말이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라고 나에게 말했다. ‘기사로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뒤르와 왕의 남은 단 한 사람의 아들로서 무엇을 하셔야 좋을지 이 나라에 지금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알고 계시겠지요.’ 라고.”
“알았어?”
“알게 된 거지. 청천벽력이었지만 말이야. 아버지의 말이 정말이라면 나로선 돌아가신 선왕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설사 지금까지의 아버지와 타인이 되는 일이 된다해도 말이지.”

소녀는 어려운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런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큰 소도이 일어나겠지.”

남자는 질렸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얌전한 말로 표현될 게 아니었다고. 페르젠을 시작으로 대귀족들은 졸도할 표정이 되었지, 아에라 공주는 사기꾼이니 강도이니 공식장소에서 부르고 다니지, 궁정의 부인들은 내가 시골출신인 것을 지독하게 갖고 놀지. 귀부인에 대해 품고 있던 환상이 그걸로 보기좋게 산산조각 났지.”

소녀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남자는 말하는 것만큼 지쳐있진 않았다. 역경에 강한 인간인 것이다.

“하지만 그 국왕 후보라는 사람은 어땠어?”
“나를 환영해준 적은 수의 사람 중에서도 특히 호의를 갖고 날 맞아준 것이 바로 그 발로였어.”

남자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온화한 빛을 띄웠다.

“그 기사 발로가 어찌어찌 나와 사촌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랐는데 말이지. 그 사촌만이 나를 보고 즉위해야 당연하다고 단언해 주었지. 내가 뒤르와 왕의 직계 아들이라면 설사 적자 출신이 아니더라도 조카에 지나지 않는 자신보다 계승권이 높다고 말이야.”
“꽤나 인간이 된 사람이네.”
“인간이 되었다고 할지 고지식하다 할지. 아에라 공주는 자식의 발언에 얼굴이 새파래진 모양이었지만 완강하게 태도를 바꾸지 않았던 모양이야.”

아에라 공주가 보자면 자신의 아이에게 왕관이 주어질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인 아들에게서 필요없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니 분명 지독히 억울했음이 틀림없었다.

“또 그 발로에 대해 말하자면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던가, 페르젠 후작이 이렇게 말했다던가 하는 것을 전부 나한테 고해바쳤거든.”
“하아?”

녹색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남자는 목 안쪽으로 웃고 있었다.

“국가를 집어삼키려는 불충한 인간들이 매일같이 시끄럽게 굴어 못살겠습니다 하고 가뿐하게 말했었으니까. 사랑해줘야 할 사촌님이지. 나는 형제가 한 명도 없엇으니까 동생이 생긴 것처럼 기뻤었다고.”
“그래서 대관식은 치뤘어?”
“그래. 1년전에 옥신각신 끝에 말이야. 지금의 나는 누가 뭐래도 정식의 델피니아 국왕이다.”
“그럼 왜 도망친 거야?”
“페르젠의 음모야.”

남자의 말투가 변했다. 명백히 노여움이 섞여 있었다.

“아까 그 여행객들도 말하고 있었지만 음모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수법이었지. 그런 일이 있었겠다 레온 왕자를 비롯해서 뒤르와 왕의 왕자와 공주를 차례대로 암살한 것이 나라고 아니 나를 왕좌에 앉히기 위해 페르난 백작이 한 일이 틀림없다고 소문을 퍼뜨렸어.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딱 좋을 시기에 전왕의 서자가 나타날 리가 없다고 하는 거였지. 바보 같은 소리야. 그 당시의 아버지는 거의 스샤를 떠나는 일도 없이 가끔 궁정에 등정할 때가 있을진 몰라도 왕자나 공주한테 접근할만한 기회 같은 건 전혀 없었어.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 선왕 때부터 일해온 페르젠인데 잘도 나와 아버지를 죄인취급 한 거지.”
“그만큼 네 존재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단 소리네.”
“그렇겠지. 하지만 그럴 거였으면 나한테 왕관 따위 주지 않으면 될 것을.”

확실히 그렇다. 정치를 하는 자에게 있어서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일은 가장 큰 어리석음이다. 그것도 선왕 시절부터 종사해왔던 후작이 그런 초보적인 것을 모를 리가 없다. 페르젠은 처음 이 남자를 잘 구워삶아 생각대로 움직이려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반기를 들어 국외로 추방할 정도의 폭거를 저질렀다는 것은 가능성으로 두 가지가 있었다.

“월.”
“왜.”

소녀는 천천히 말을 만들었다.

“너하고 아버지하고에 대한 후작의 말은.... 완전히 후작이 만들어 낸 거지?”
“그 이상 지어낼 수 있는 게 있을까.”

남자의 검은 눈동자 안에 노여움이 달려갔다.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나한테 말했어. 오늘부터 저는 당신의 신하, 충실한 하인에 불과합니다 라고. 무엇이던 명령해주십시오 라고. 이십 년간 진짜 아버지라고 생각해왔던 사람이 그랬단 말이다!”

남자의 분노는 소녀에게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페르젠 후작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아버지인 백작에 대한 것도 뒤르와 왕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부자 사이를 갈라놓은 운명에 대한 분노였다. 조금 숨을 진정시킨 뒤 말했다.

“그 사람은 야망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야. 그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아버지, 고집 세구나.”
“그래. 옛날부터 굉장한 똥고집이지. 한번 이렇다고 결정하면 뭐 무슨 짓을 해도 꿈쩍도 안해.”
“하지만 너의 그러니까 왕의 후견인이었잖아.”
“그렇지 않으면 즉위 같은 거 절대 안하겠다고 응석을 부렸으니까.”

응석을 부리다 라는 말에 소녀는 의심스럽게 남자를 살폈다.

“그 몸집으로?”
“아아 완벽하게 떼썼지. 보고 있던 시녀장이 나중에 똑 닮은 고집통 두 부자간의 싸움이었다고 놀렸을 정도니까.”

남자는 무엇인가 떠올린 듯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폐하’라고 하고 나는 ‘아버지’라고 하고. ‘그렇게 부르시면 안됩니다!’ 하고 아버지가, ‘제 아버지는 아버지 단 한 분뿐입니다!’ 하고 내가 그랬지. 드디어 아버지도 인내심이 끊겼는지 ‘이 바보자식 내가 널 언제 그렇게 가르쳤냐!’ 하고 화를 버럭 냈다고.”
“아이고.”

백작은 분명히 자신의 실언을 아뿔사 하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남자는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기뻤었다. 정말 오랜만에 야단맞아서. 그래야 아버지지.”
“응.”
“뒤르와 왕에 대해선, 위대한 분이었으니까 말이야. 물론 존경하고 있었어. 그 분이 국왕으로 계신 것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자랑스럽기도 했었지. 이 몸에 그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물론 자랑스럽게 생각해.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내 자신은 스샤의 페르난의 월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다면 왕 같은 거 하기 싫은 거라면 그 발로 발로 씨에게 넘겨주면 됐잖아.”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델피니아 국민으로서 그건 못할 말이야. 가능한 한 혈통이 바른 국왕을 모시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까. 방계의 국왕으로는 이 앞으로 다른 나라와의 외교에도 여러 가지 장애가 생기게 되고 애초에 서자에 지나지 않는 나나 귀족의 신분밖에 못한 발로나 어느 쪽의 혈통이 더 좋다 말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지만 말이야. 그것에 대한 토의로도 꼬박 일년을 소비했고 그 결과 이례적이긴 하지만 선왕의 유언도 있고 하니 그렇다면 나로 결정하기로 하자는 게 된 거야.”
“헤에.”
“무슨 일이던 나라를 위해. 그렇게 생각해서 오히려 인신공양을 하는 기분으로 왕관을 쓴 건데. 페르젠 놈. 왜 그렇게 날 눈엣가시로 여기는 건지.”
“.......”

“반년 전 페르젠은 가짜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대의명분을 새워서 성을 공격해 왔다. 왕궁의 경비에 해당하는 자도 시내의 주인이었던 부대도 이미 페르젠의 지휘하에 있었지. 그런 움직임이 있으리라는 것도 난 매일매일 공무에 쫓겨서 눈곱만큼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위험천만하게 붙잡힐 뻔 한 것을 아버지와 발로 그리고 궁정 안의 얼마 없는 내 편들이 몸을 던져가며 탈출시켜 줬다.”
“.......”
“이번엔 내가 그들을 구할 차례야.”

그 넘치고도 남을 결의는 소녀에게도 충분히 전해졌지만 두 번 세 번 침착하게 질문을 계속했다.

“페르젠 후작은 네 사촌동생을 왕으로 만들고 싶은 것 같은데 그 발로라는 사람은 어떤 거야? 왕이 될 생각이 있는 걸까?”

남자는 확실하게 부정했다.

“그 녀석은 내가 살아있는 한 절대로 왕관을 쓸 리 없는 인간이야.”
“그럼 발로라는 사람은 페르젠 후작하고 사이가 좋아?”
“개와 고양이 정도 관계는 되겠지.”

얼굴을 맞댈 때마다 싸움을 시작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가는 차치하고 소녀는 질문을 계속했다.

“월은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라니?”
“그 페르젠 후작이 너를 쫓아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
“델피니아야.”

남자는 단언했다.

“그녀석이 노리고 있는 것은 자기 멋대로 하고 싶다고 사악한 욕망을 불태우고 있는 대상은, 대국인 델피니아 그 자체다. 왕관을 쓰는 건 못하더라도 이름보단 실리를 취하려는 속셈이겠지.”
“거기가 이상하잖아. 그럴 것이 그 페르젠 후작이 너를 쫓아내고 자기 생각대로 델피니아를 움직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그래도 자기가 왕이 될 수는 없는 거니까 자기 대신 왕을 세우려면 가능한 한 사이가 좋은 사람이던가 얌전하게 말하는 걸 듣는 사람을 고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않아?”

그 지적에 남자는 고뇌하는 표정이 되었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게 그거다.”
“무슨 말이야?”
“새로운 국왕이 탄생한다고는 말하지만 또 무언가 불행한 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말이야.”

그 말이 의미하는 것에 소녀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다시 말해 월은 델피니아의 불행한 일련의 사건 뒤에는 언제나 페르젠 후작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언제나인지는 몰라. 게다가 페르젠 한 사람이 저지른 짓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선왕의 붕어 이래 마의 5년간을 지내오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왕 선택에는 계속해서 대귀족들의 이해가 엮어져 있었으니까. 자기 처지에 좋은 왕을 세우려고 생각하는건 정치를 하는 자들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

여기까지 오자 소녀는 완전히 어이없는 얼굴이 되어 한숨을 쉬었다.

“저기 말야.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혼자서 싸움을 거는 거야? 네가 왕좌를 되찾을 만한 조건은 충분하잖아. 그런데 정말로 달리 월의 편이 되어줄 사람은 없는 거야?”
“같은 편은 코랄에 있어. 페르젠이 무서워 침묵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시민이 다수 있지. 따르는 척 하면서 기회를 보고 있는 귀족도 있을 테고. 나는 그들의 궐기를 부추기기 위해 돌아가는 거다.”
“하지만 혼자서 똑바로 코랄을 향해 가다니 후작도 분명 기다리고 있을 거라구.”
“위험한 건 각오하고 있어.”

남자의 결의에 흔들림은 없었다.

“나에겐 정의를 증명할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이건 이미 나의 감에 지나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코랄에 돌아가는 거다. 페르젠이 켕기는 짓을 하고 있는 거라면 네가 말한 대로 어떻게 해서든 나를 저지하려 할 것이고 살려둘 수 없을 테니까. 반드시 꼬리를 드러낼 거다.”

거의 자폭 작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될 대로 되라라는 거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월 알고 있어? 그걸 위해선 네가 살아남아야 한다구. 후작은 네 입을 막아서 자기 좋을 대로 마구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도 가능하단 말이야.”
“요 반년 동안 나에게 덤벼온 자객들은 질로서도 수로서도 제법 되는 놈들이었다고.”

남자는 태연하게 웃었다.

“스샤에 있을 때엔 매일같이 산야를 달리고 무술에 정진했던 나다. 이런 생활은 궁정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성에 맞아. 뭐 너한테 도움을 받았을 때엔 나도 조금 실수를 했을 때였지만 말이야. 고마웠다.”
“지금은 괜찮아?”
“그래.”

소녀가 지적할 필요도 없이 남자도 알아차리고 있었다. 앉은 채로 빙그레 미소를 보였다.

“마침 딱 이야기가 끝난 참이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잡목림 안에 사람의 기척이 있었다. 가능한 한 소리를 죽이고 다가와 두 사람을 포위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옆의 소녀가 이 상황에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는 것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러한 침착함이 단순한 위세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남자 정도의 전사가 되면 설사 검을 부딪쳐 보지 않아도 그 기척이나 아무 생각 없는 움직임 하나로부터 상대의 역량을 추측하는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감은 이 황금의 머리카락을 지닌 녹색 눈의 소녀가 상당한 실력의 전사라고 가르쳐 주고 있었다. 외모가 아무리 화사하고 연약해 보여도 남자는 자신의 감을 믿기로 했다.

“포위됐네.”

침착하게 소녀가 말했다.

“그런 것 같군.”

평연하게 남자가 답했다. 소녀는 남자를 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를 의지하고 있는 거야? 아니면 혼자서 이 포위망을 뚫고 나갈 생각이야?”
“너는 어때. 혼자서 빠져나갈 생각이냐. 아니면 나를 전력으로서 치고 있는 거냐.”

자객의 그림자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소녀는 어째서인가 곤란한 듯 웃었다.

“월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내 어디가 그렇게 이상한데?”
“날 무서워하지 않잖아.”

단정적인 소녀의 말에 남자는 그만 입가가 온화하게 올라갔다.

“정말로 굉장히 이것저것 보여줬는데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잖아. 이상해.”
“뭐어 쓸데없는 남자의 체면이라는 거야. 이 체격에 너같이 작은 여자애를 무서워해서야 그야말로 볼품없지 않겠냐.”

적들의 수는 아마도 열을 넘어서고 있었다. 더 많을 지도 모른다. 나무 그늘 사이에서 잠깐씩 보이는 걸로는 확실히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살기가 차츰차츰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소녀는 문득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델피니아 사람들은 의외로 바보네.”
“왜?”
“어째서 페르젠 후작이 거짓말을 늘어놓아서까지 너를 쫓아냈는지를 모르고 있으니까 말이야.”
“나도 모르겠는데?”

소녀는 재밌다는 듯 입안에서 웃었다.

“페르젠 후작은 바보가 아닐 거 아냐. 오히려 꽤나 머리가 좋을거야. 바보한테는 한 나라를 휘어잡는 일 따위 불가능할 거고 사실상 델피니아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리까지 왔으니까 머리가 나쁠 리는 없어. 그 후작이 이렇게까지 절대적으로 널 싫어한다는건 굉장히 의미가 깊잖아.”
“그래?”
“뒤에서 실권을 쥘 생각이라면 이론적으로는 누가 왕이어도 상관없는 거 아냐. 자기 말대로 움직여주는 인형이라면 누구라도 똑같으니까. 보통이라면 널 회유해서 모양뿐인 왕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페르젠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야.”
“흠 분명 그렇군.”
“그런데 페르젠은 널 내쫓았어. 즉 네가 장식품으로 놔두는 것조차 불가능한 완벽한 바보이던지 그렇지 않으면 후작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진짜 왕인 거야. 그 어느쪽인가라는 소리라고.”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뚫어지게 소녀를 바라보았다.

“완벽한 바보일지도 몰라.”

소녀는 그때야말로 의미깊게 웃더니 녹색의 눈동자에 실로 장난스러운 빛을 띄우며 발아래를 보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너 같이 굉장히 멋진 왕이 싫다싫다 말하면서도 왕이 되어주라 이 말씀이야. 일부러 자신들이 내쫓거나 하다니. 바보같은 짓이야 정말.”

소녀는 발 근처의 흙을 뒤적이며 작은 돌을 주워올리고 있었다. 남자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명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소녀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지금 들은 말을 반추해 본다. 페르젠이 어째서 자신을 쫓아내려고 꾸몄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단순히 자신이 방해가 되니까 쫓아냈으리라 생각했지만 소녀가 말하는 바는 정확했다.

이름보다 실권을 잡고 싶다면 모양새뿐인 주군은 누가 되어도 상관없었을 터이다. 재미있는 소녀라고 생각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은 말했다. 그러나 마성의 생물도 아니다. 더구나 사악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 영혼은 깨끗하고 맑았다. 그렇게까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남자는 단순히 이 소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소녀도 마찬가지였던 듯 했다. 자객의 무리가 숲 속에서 흩어져 두 사람을 완전히 포위한 듯했다. 그것과 동시에 충분히 태세를 잡은 자객 한 사람이 대검을 뽑아 들고 비겁하게도 앉은 채로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남자의 뒤를 노려 베어 들어왔다.
그러나 그 순간 “으악!” 하는 비명과 함께 검을 떨어뜨렸다. 소녀의 손으로부터 날아간 돌이 습격한 자의 오른쪽 눈에 멋들어지게 명중한 것이다. 그 비명이 신호라도 되는 듯 그늘 속에 숨어 있던 자객의 무리가 일제히 뛰어 나왔다.




5장
두 명의 별난 전사가 한 숨 돌렸을 때 발 밑에는 이미 열네 구의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정도 되니 소녀도 남자도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전혀 상처가 없는데다가 꽤나 여력도 남아 있었다. 가볍게 숨을 고르며 소녀가 말했다.

“강하네.”

남자에게 하는 칭찬이었다. 솔직하게 본심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남자는 남자대로 기가 막힌 듯이 소녀를 보고 있었다.

“누구를 보고 말하는 거야?”

그러는 너는 어떠냐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덤벼오는 걸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자객이 뛰어 드는 것과 동시에 나무 둥치에서 훌쩍 떨어져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끝쪽에서 베어 넘겼다. 남자가 바위처럼 강하고 흔들림 없다면 소녀는 변화무쌍했다. 비인간적인 다리힘과 도약력으로 자객들을 희롱하며 가볍게 그들을 베어 쓰러뜨렸다. 시간을 따지자면 고작 십 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한 사람이 다섯 명을 상대하는 것과 두 사람이 열 명을 상대하는 것을 비교하자면 2대 10의 경우가 살아남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물론 그것은 두 사람 모두의 기량이 매우 뛰어나다는 조건이 필수적이다. 이 때의 두 사람은 자세한 작전을 세운 것도 아니면서 서로가 해야 할 일 하지 않으면 안될 일에 대해 완벽하게 호흡이 맞고 있었다.
만약 둘 중에 한 명뿐이었다면 아무리 뭐라해도 이 많은 수를 상대로 살아남는 것은 힘들었으리라. 남자도 소녀도 눈앞의 상대가 생명을 맡겨도 좋을 만한 발군의 기량을 가진 전사라는 것을 서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남자 쪽은 그때 보았던 소녀의 실력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럼 임금님 이제부터 어쩔거야?”
“그게 문제다. 이런 정도라면 어떤 샛길에도 병사가 매복해 있을지 몰라.”

슬슬 해가 지기 시작했다. 파라스트는 평야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남자가 말했지만 이 근처는 다랐다. 구릉도 많고 숲도 있었다. 기복이 있는 지형이었다. 그런 만큼 통과할 수 있을만한 길도 한정되어 있었다.

“멀리 돌게 되지만 산을 넘어갈 수밖에 없겠어. 리 등산은 자신있나?”
“물론. 뭐하면 밤을 타서 넘어갈까. 그쪽이 사람 눈에도 덜 띄어서 좋으니까.”

소녀는 머리를 더듬어 하얀 천을 풀어내렸다.

“후우 계속 이런 걸 두르고 있으면 역시 너무 더워.”

싸운 것 때문에 어딘지 묶인 상태가 나빠진 듯 했다. 머리를 묶고 있는 가는 실을 풀자 멋들어진 금발이 흘러 내려 햇빛에 반짝였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틀림없는 소녀였다. 그뿐 아니라 남자 같은 옷을 입혀두기엔 아까울 정도의 모습이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금발과 하얀 팔다리, 깊은 녹색의 눈동자와 이마에 두른 은 머리장식.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그림이 된다. 그 외엔 옷만 어떻게든 할 수 있으면 금은의 자수를 놓은 긴 옷이나 바람 같이 가벼운 비단이라도 입히고 우아하게 머리를 묶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미소녀가 될 터였다.

그만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던 남자였지만 함부로 칭찬이라도 했다간 또 이 소녀의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베어넘긴 시체들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남자는 걷기 시작했고 금발을 팔랑팔랑 나부끼며 소녀도 뒤를 쫓았다. 급히 산길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 순간 세 번째의 방해가 들어와 버렸다. 먼저 눈치를 챈 것은 언제나처럼 소녀 쪽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들려. 둘. 굉장한 기세로 이쪽으로 오고 있어.”

발만이 아니라 이 귀도 마법이라도 걸어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고 생각하면서 남자는 물었다.

“또 목적은 난가?”
“아마도. 어떡할래?”
“죽이지 않고 넘길 수 있다면 더 좋은 건 없겠지만 말이야. 지나쳐 보낼 수 없을까.”

하지만 그 주변은 나무들이 성기게 자라 있는 숲이었다.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말에서 떨어뜨리고 나무에 묶어 버리는 건 어때?”
“되겠나?”
“저쪽도 두 사람이잖아. 한 사람씩 맡자.”
“좋아.”

그러나 달려온 말 두 필에 그들이 덤벼들 시간은 없었다. 기사들은 서서히 말을 멈추더니 남자의 모습을 확인함과 동시에 말에서 내려 지면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국왕폐하.”
“너희들은?”
“예. 윈저의 다르 경 밑에 있는 자들입니다. 방금 전 이 근처에서 폐하의 모습을 뵌 자가 있다는 소식을 받고 모시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런가. 다르는 무사했군.”
“예. 주군은 폐하의 귀환을 하루가 백 년처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젠 금방이라도 코랄로 나아가 병사를 일으킬 수 있을 겁니다. 자 부디 함께 해 주십시오.”

소녀는 슬쩍 질문이 섞인 눈초리를 남자에게 던졌으나 남자는 간단하게 기사들의 말에 따랐다.

“말에는 너희들이 타라. 나는 이런 모습이다. 호위전사인 척하고 가겠다.”
“예 하지만....”
“윈저 성에 닿기 전에 의심을 사서야 어떡하나. 이곳은 아직 파라스트다.”

파라스트와 델피니아가 적대관계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후작에게 빚을 지워두기 위해 유랑하는 국왕을 잡아다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 수선스러운 일을 벌일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 남자는 소녀를 돌아보고 웃어보였다.

“잘 됐구나 리. 내일은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잘 수 있어.”
“나한테는 들판 쪽이 더 제대로 된 침대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녀는 남자를 따라갔다. 기사 두 사람은 국왕 곁에 있는 이상한 일행에 대해 동요도 보이지 않은 채 원래대로 말에 타고는 고삐를 잡았다. 

“조금 전 페르젠 수하의 녀석들과 문제가 있었다만 윈저는 괜찮은가?”
“예. 다행히 윈저가 코랄에서 떨어져 있다는 점도 있고 다르 경의 힘은 페르젠 후작에게 이기진 못해도 떨어지진 않습니다. 영지 내에 있는 한은 페르젠 후작이 무슨 소리를 해도 폐하의 신변은 안전하실 겁니다.”
“그거 믿음직스럽군.”

네 명이 된 일행은 그 밤에 가까운 민가에서 집을 빌렸고 다음날 기사 두명의 인도로 능란하게 주된 길목을 피하면서 국경에 접근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곳은 파라스트령인데도 델피니아의 기사들이 이렇게나 쉽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니까 출입국의 검사도 별다를 게 없을 듯 했다. 가는 도중에도 소녀는 산의 이름, 지금부터 지나가려는 지역의 이름, 길목 너머에 있는 것들에 대해 계속해서 옆에서 남자에게 질문해 댔다.

특히 소녀가 알고 싶어 한 것은 대화삼국을 분단하고 있다는 타우 산맥에 대해서였다. 이 진로라면 왼쪽에 있게 된다고 남자는 말하지만 아직 한참이나 거리가 있기 때문인지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전체 길이가 어느 정도 될 것인지 상상도 가지 않는 거대한 산맥이라고 했다.

“그럼 그 산은 대체 어디까지가 파라스트고 어디까지가 델피니아야?”
“어려운 질문이군.”

남자는 가볍게 말했다.

“일단 등선을 기준으로 국경이 나눠져 있긴 하지. 하지만 실제로는 어디까지가 탄가이고 어디까지가 델피니아인지 또 어디까지가 파라스트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잠자는 호랑이는 건드리지 않는달까.”
“산적이라도 나오는 거야?”
“네 말 대로야. 원래 타우는 일부 고개를 제외하고는 가기 힘든곳뿐이라. 주요 도시에서도 멀리 벗어나 있는 데다 수렵을 생계로 하는 산악민이 살고 있을 뿐인 벽지였으니까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각국의 범죄자나 무언가 사정이 있어 나라에서 살지 못하게 된 자들이 타우를 향해 도망쳐서 하나의 세력이 되게 되었다. 지금은 뭐 무법지대라고 말 할 수 있겠지.”

소녀는 가볍게 의문을 표시했다.

“그거 내버려 둬도 되는 거야?”
“안 되는 것이지만 특별히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라서 말이야. 뭐 가끔 여행객으로부터 통행료를 뺏는다던가 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피해를 입는 것이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들뿐이고 퇴치하려 한다 해도 지형적으로 그쪽이 유리한데다 소문으로는 산속에 몇 개인가 촌락이 있어서 그곳 사람들은 모두 승마술이나 무술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더군. 괜히 손을 댔다가는 이쪽이 오히려 혼이 나게 된다는 건 확실하다. 어느 나라도 지금으로선 보면서도 못본 척하고 있지.”

어느덧 태양이 그들의 등 뒤로 가라앉으려 할 때 즈음, 그들의 앞에 넓은 강이 나타났다. 흐름은 조용하고 수면은 어둡게 가라앉아 상당히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테바 강이었다. 소녀가 물었다.

“반대쪽이 델피니아야?”
“그래. 그리고 저것이 윈저 성이다. 파라스트에 대치하는 서쪽의 견제 역할이지.”

남자가 가리킨 성은 강변에 세워져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보였다. 거리도 있고 각도도 나빠서 아무리 소녀의 예리한 눈이라고 해도 그 이상의 정보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명의 기사가 준비한 작은 배를 타고 가까이 가 보자 그 성은 강변 정도가 아니라 수면 위에 세워져 있는 듯한 형상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기초는 반대편 땅에 세워져 있는 것이지만 윗부분, 정확히 말하자면 성의 한 부분이 완전히 물 위로 튀어나와 있는 것이었다. 소녀는 반쯤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것 혹시 자칫 잘못하면 국경침범죄가 되는 거 아냐?”

남자는 낮게 하지만 흐뭇한 듯 웃음소리를 흘렸다.

“어떤 식으로 자라면 너 같은 소녀가 되는 건지 정말 알고 싶구나. 내가 열세 살 때는 하루 종일 무술을 연마하던가 친구들과 노느라 하루해가 지는 줄 몰랐고 그 외의 것에 대해선 생각도 해보지 않았는데 말이야.”
“농담하지 말고. 내가 파라스트 사람이라면 절대 항의할거야. 그게 아니면 강 한가운데가 국경인 거야?”
“아니. 강의 이쪽 편은 파라스트. 반대편은 델피니아. 테바는 양쪽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아. 그렇게 되어 있어.”
“그럼 저 성은?”
“반대편에 만들어져 있는 건 틀림없지. 위쪽이 아무리 물 위로 나와있다 해도 그것이 국경침범이 되진 않는다는 핑계인 것 같아.”
“굉장한 합리화군.”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소녀는 처음 보는 커다란 성을 꼼꼼히 관찰하고 있었다. 한 부분 튀어나와 있는 걸 제외하면 정사각형 상자와 같은 형태였다. 벽은 조잡한 석조였다. 창은 철조鐵條가 박힌 것으로 운치도 없는데다가 장식적인 기능이라고는 좋게 봐줘도 하나도 없는 그런 곳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드는 기술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방어기능을 우선하기 위한 것인가.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해답은 명확해 졌다.
강 위에 튀어나와 있는 부분에는 기묘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창은 아니다. 겨우 밖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좁고 긴 구멍이었다. 그것이 종 2열로 구역의 위에서 아래까지 균등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활 쏘는 구멍이었다. 만약의 경우에 이곳에서 강을 향해 화살을 쏟아부을 수 있도록 준비해둔 것이다. 소녀는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멋진 성이네.”
“그런가?”
“꽉 짜여있는데다 창에도 전부 철조가 박혀 있고 3층 4층인가? 옥상은 전부 평평하게 되어 있네.”
“중앙 4층. 그 주변이 3층으로 되어 있지. 왜 저런 형태가 되었는지 알겠어?”
“한 층 높게 되어 있는 중앙부의 방이 작전 사령탑이고 주변에 낮게 되어 있는 부분에서 뭔가 하는 거지?”
“그래. 위급 상황에 병사들을 배치하기 위한 거다.”
“그럼 역시 전투용 성이구나.”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하지만 여기가 전장이 된 일은 한 번도 없어. 아마 이제부터도 없을 거다.”

남자는 그렇게 단언했지만 소녀는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물었다.

“여기에서 아비용까진 얼마나 걸려?”

갑작스런 질문에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대답했다.

“빠른 말로 간다면 한나절 정도일까?”
“그리고 코랄까지는 7일이었지?”
“걸으면. 말을 빨리 달리면 대체적으로 3일정도의 거리가 되겠지. 왜?”

그 질문에 소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순진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윈저 성의 사람들은 델피니아보다 파라스트 쪽을 더 가깝게 느끼겠네.”

남자는 입을 다문 채 소녀를 보았다. 소녀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작은 배의 선두에서 키를 잡고 있는 두명의 기사쪽에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던졌다. 이 성은 델피니아 본국의 의향보다는 파라스트의 의향을 알수 있게 되어있는 입장이었다. 훨씬 영향을 받기 쉬운 위치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자유자재로 파라스트 영내에 들어갈 수 있고 말로 질주할 수 있는 것도 혹시.... 하고 소녀는 지적한 것이었다.
남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 안에 칭찬의 빛이 어려 있다는 것을 소녀는 알고 가볍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남자도 웃음으로 답했다.

“언젠가 내가 만약 이루어진다면 하는 가정에서의 말이지만 일군을 통솔하여 싸우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꼭 너 같은 측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농담두.”

조각배 위에서 그런 대화를 하면서도 남자는 강 건너편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쫓겨서 도망쳐나온 조국에 반년만에 들어가는 것이다. 감개무량할만했다. 기사 두 명은 그들의 회화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드디어 배가 성 근처에 닿았고 두 사람을 맞아들이기 위해 도개교가 내려왔다. 기사들과는 여기에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고 두 사람은 안에서 나타난 자의 안내로 성 안으로 들어갔지만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소녀의 눈을 휘둥그레졌다.

밖에서 보면 전투용의 멋없는 성이었는데 내부는 일급 수준의 문화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바닥은 연마하여 만들어 낸 모자이크식 목세공이나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두터운 직물을 벽지 대신 넓게 쳐두었으며 화려한 액자에 담긴 그림이 몇 점이나 걸려 있었다. 커다란 복도에는 천사나 여신의 부조를 새겨놓은 대리석 기둥이 나란히 늘어서 막이 쳐진 곳까지 세워져 있었다. 성의 겉모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현란한 모습이었다. 단순히 문화적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상당히 사치스러운 구조였다.

“굉장해.”

문화예술을 잘 알리 없는 소녀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었을 정도였다. 남자도 같은 식의 감상을 느낀 듯 했다.

“내부만큼은 코랄 성보다도 화려하게 되어 있군.”
“수도의 성보다도?”

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앞을 걸어가는 신하를 경계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는 델피니아에서도 꽤 시골이잖아? 그런데 수도의 성보다 내부가 더 멋지다니 그래도 되는 거야?”
“글세 말이다. 나도 몰랐다.”

남자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말이야. 멋지다는 점에서는 코랄성 쪽이 한수 위야. 물론 그래도 다르가 사는 곳이 이 정도로 화려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화려한 것과 멋진 것이 어떻게 틀린 것인지 소녀는 생각했지만 그것은 말하지 않았다.

“여기 전에는 온 적 없어?”
“없어. 코랄 주변 시찰만으로도 바빴으니까.”

두 사람은 마중나온 신하의 안내로 널따란 거실에 안내되어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되었지만 그 넓은 방도 무척이나 화려한 것이었다. 입구는 천정이 높게 올라가고 반짝반짝 연마된 바닥에는 먼지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벽 전체에 화려한 그림들이 그려지고 가구 모서리에는 금장식이 둘러져 있었다. 반짝이는 조개껍질이나 귀금속을 박아 꽃모습을 그려둔 원탁 위에는 세밀의 극치를 넘어선 은제 과자상자와 물그릇이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있었다. 격이 다르게 커다란 난로위에는 여러 가지 풍물을 그려둔 작고 큰 접시들이 걸려 있었다. 기가 막힌 듯 입을 벌리면서도 소녀는 문득 중얼거렸다.

“여기 정말 전투용 성이야?”
“그렇긴 해야 되는데 말이야.”

남자의 목소리도 질려 있었다. 야숙을 계속해온 두 사람의 모습은 이 방에서는 붕 뜬것처럼 튀어보였다. 소녀는 기분 나쁜 듯 몸을 움직여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잣집에 온 거지의 심경이라는 거 이런 걸까.”
“너도 뭔가를 싫어할 때가 있었냐.”
“이런 번쩍번쩍하는 곳은 영 아니라구. 언제 망가뜨리거나 더럽히거나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무 생각 없이 맘대로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대체 이 방만 해도 얼마나 돈이 들었을까?”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 난로 위의 접시 말이야.”
“응.”
“가장 작은 걸로 금화 15장은 할 걸.”

남자는 검은 눈동자에 껄끄러울 정도로 진지한 빛을 띄우며 말했다.

“금화 한 장만 있으면 서민 한 가족이 일년은 먹고 살 수 있지.”

소녀는 푸하고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잠깐 기다려봐? 그런 게 저렇게나 줄줄이 있다는 건....”

남자는 가볍게 끄덕이고는 말했다.

“곤란해. 출신이 천한 탓인지 돈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걸로 보인단 말이야.”
“나한테도 그렇게 보이는걸 뭐.”

소녀 쪽은 쓸데없는 데 돈을 바른다는 것에 마음 속 깊이 질려있었지만 남자 쪽은 이 성의 사치스러운 면을 조롱하고 있는 듯 했다. 입가는 웃고 있어도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성의 주인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몇 명의 시종들이 갈아입을 옷을 들고 나타났다.

“폐하, 송구스러우나마 이쪽에서 의복을 새로이....”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한 것은 나이가 제법 들은 시녀였다. 아마도 이 성의 시종장이겠지만 목소리처럼 얼굴에도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구렁이 같은 표정이라 해야 할까. 그러나 태도는 무척이나 공손하게 남자의 검을 받고 옷 갈아입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목욕하는 데만도 다섯명이 시중든다고 했지만 옷 갈아입는 것도 그런 모양이었다. 소녀는 약간 옆에 떨어져서 그 상황을 보고 있었지만 시녀 중 한 명은 그런 소녀에게 불만을 느낀 듯 했다.

“이봐요 무엇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까. 그대도 폐하의 시중을 어서 도우세요.”

소녀의 녹색 눈동자가 휘둥그레 벌어졌다.

“그 여자아이는 시종이 아니다. 신경쓰지 마라.”
“예, 하지만....”
“그것보다 그 아이에게도 무언가 어울릴만한 것을 가져다주지 않겠나.”
“됐어. 이렇게 팔이 긴 것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고.”
“이봐! 폐하께 무슨 무례한....”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눈빛이 변하는 시녀에게 부드럽지만 엄한 어조로 남자가 명령했다. 나이가 있는 시녀는 약간 물러섰지만 명확히 불만이 떠올라 있었다.

“리, 정말 새 옷은 필요 없는 거냐? 그 옷은 꽤 낡았잖아.”
“하지만 여자가 입는 옷은 필요없어. 이런 펄럭펄럭한 거 절대로 밟고 넘어질 걸.”
“곤란한 녀석이군.”

국왕과 대등하게 입을 놀리는 이 소녀와 그것을 책하지도 않는 국왕에게 그 장소에 모여있던 시종들은 곤혹스러운 빛을 숨기지 않았다. 주인에 대해서 하물며 국왕이라는 최고 권력자에 대해서라면 더욱 이런 태도는 어떻게 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종의 손을 빌어 의복을 갈아입은 남자는 잘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졌다. 20년 이상 시골에서 자라왔다고는 하지만 훤칠한 장신도 그렇고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관록도 그렇고 넋을 잃고 말 정도로 멋진 모습이었다. 소녀가 약간은 감탄한 듯 말했다.

“역시 그런 걸 입으니까 그럭저럭 볼만하네.”
“그럭저럭이냐?”
“응. 배경도 멋지고 입은 모습도 괜찮고. 이젠 너한테 머리 숙이고 있는 신하들만 한무리 있으면 말할 필요도 없이 임금님으로 보이지 않을까?”

남자는 그것 재밌다는 식으로 소리를 내어 웃었지만 시종들은 소녀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의 촌닭인지 모르지만 신분 높은 사람에 대한 어법이 전혀 되어먹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듯 했다. 그리고 젊은 시종 중 한 명은 그 눈빛을 국왕 자신에게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혈통이 제대로 된 왕이라면 이런 무례를 내버려둘 리가 없으며 고귀한 피를 잇고 있다고 해도 역시 출신이 출신인만큼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듯 했다.
그곳에 희색이 만면한 상태로 이 성의 주인이 들어왔다.

“이거 이거 국왕 폐하, 무사하셔서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오 자네도 별 일이 없어 다행일세.”

다르 경은 40대 중반 정도의 연령으로 월 정도는 아니지만 당당하고 멋진 체격이었다. 매우 기뻐하면서 월과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지금까지의 노고를 듣고 눈물을 글썽였지만 역시 소녀에 대해서는 기이하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지금의 소녀는 머리카락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성 안에 들어왔을 때 자신이 천을 풀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는 기분이 들은 듯 했다.
정돈하여 꽉 묶어 올린 머리카락과 은 머리 장식이 드러나 있었다. 발군의 미모와 짙은 황금색 머리카락, 이마에 빛나고 있는 녹색의 보석, 소년처럼 팔다리를 드러낸 의복, 거기에 허리에 차고 있는 대검. 누구의 눈에도 어울리지 않게 보일 것이 틀림없다. 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에게 물었다.

“폐하 이 소녀는.....”
“그린다다. 내 일행이지.”

단 한 마디 설명을 듣고 경은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유랑의 국왕과 가냘픈 소녀와의 관계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차치하고 두 사람을 만찬의 자리로 안내했다. 조미를 하여 차갑게 식힌 새의 간, 물고기의 감로자 등 그곳에 늘어놓아져 있는 것은 도시에서밖에 볼 수 없을 사치스러운 진미밖에 없었지만 소녀는 그다지 입에 맞지 않는 듯 했다. 막 잡아올린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음식 쪽이 식욕을 자극하는 듯 했다. 특히 식후에 나온 사탕과자에는 크게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먹지 않는 거냐?”

이상하다 생각해 남자가 묻자

“이걸? 이런 이빨이 녹아버릴 것 같은 걸?”

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너 정도 나이의 아이라면 모두 단 맛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보통 여자애라면 말이야.”

꽤나 인간의 여자애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러나 일단 성 안에 들어와 여기에서는 신분 차이에 대해 시끄러울 정도로 규율이 잡혀 있고 그 이상으로 상식이라는 단단한 벽이 이질적인 것을 즉각 튕겨 내리라는 것을 민감하게 느낀 것이 분명했다. 지독하게도 분방한 소녀였지만 가능한 한 얌전하게 있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도 불편하게 하는 것도 모두 월의 행동에 달린 셈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곁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다르 경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다르, 수도탈환을 위한 준비는 어떻게 되어 있나? 나는 오늘 밤 내로 코랄을 향하고 싶네만.”

경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폐하. 그것은 안됩니다. 불민히 그런 행동을 일으켜서야 그것이야말로 페르젠 후작이 노리는 바가 됩니다.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제 부하들은 명령이 있는 즉시 언제나 코랄으로 진격할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 때가 될 때까지 폐하의 건재하심을 숨겨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페르젠 후작은 폐하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딜레든 기사단장에게 왕관을 쓰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발로 말인가. 그러나 그 돌머리가 간단히 왕관을 받아들일까?”

“딜레든 기사단장은 요지부동의 인물임에 동시에 열렬한 애국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후작은 그야말로 단장의 그 약점을 찌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대로 국왕부재의 상황이 길게 이어진다면 우리 델피니아는 재건불가능한 상태까지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심하면 타국의 침입을 허용하는 틈을 보여주게 될 지도 모른다고 그것을 위해서는 확실한 군주가 필요하다고 암묵적으로 압력을 넣고 있는 겁니다. 이 협박에 대해서는 아무리 기사단장이라고 해도 저항하기 힘듭니다. 언젠가는 왕위를 이을 것을 허락하지 말겠지요. 그때야말로 폐하께서 나서실 때입니다.”
“분명 자네의 말대로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폐를 끼치도록 할까.”

“물론입니다. 폐하께서는 일체의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편히 지내주십시오.”
“고맙네. 또 하나 부탁이 있네만.”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십쇼.”
“이 아이에게도 나와 같은 배려를 해주기 바라네.”
“예. 그것은 상관없습니다만 이 소녀는 대체?”
“두 번이나 위험한 상황에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다. 내 침소 가까운 곳에 방을 만들어 주도록.”
“예. 지금 즉시 준비를.”

월과 다르경은 방 준비가 될 때까지 지금 현재 코랄의 상태나 페르젠 후작의 세력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녀는 그 동안 입을 열지 않은 채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르경은 이 소녀의 존재를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방의 준비가 끝나고 두 사람은 각각 시종의 안내로 폭이 넓은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복숭아빛 주단이 깔려 있는 계단은 사람이 올라서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천장에는 눈부실 정도로 촛불을 밝혀둔 화려한 샹들리에가 몇 개나 걸려 있었다.

계단을 다 올라가자 그곳은 성의 최상층이었다. 눈앞에는 똑바로 넓게 펼쳐진 복도가 나타났고 복도 끝에는 창문이 있었다. 둥근 모양으로 테둘러진 그 형태로 미루어 아까 밖에서 보았던 위로 올라와있던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최상층은 원래 감시소를 겸하여 사령탑으로 만들어 진 것이지만 지금은 고귀한 손님을 재우기 위하여 한쪽이 개조되어 있는 듯 했다. 
바닥에는 묵직하니 두께가 있는 주단이 깔려 있고 벽에도 천정에도 아까의 거실에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장식이 가득했다. 시종들은 긴 복도의 거의 끝에 와서 막다른 오른쪽 방의 문을 열어 월을 안내했다. 리가 따라서 들어가려 하자

“당신은 이쪽입니다.”

하고 복도를 끼고 반대쪽의 방을 가리켰다. 어깨를 으쓱하고 소녀는 시키는 대로 했다. 월 쪽은 방에 들어가자 시종에게 무러가도록 지시했다.

“혼자 있게 해다오.”
“하지만 의관을 바꾸시는 시중을....”
“아니 됐다. 혼자 하겠다.”
“알겠습니다. 무언가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시종들이 물러남과 동시에 월은 수면용 의복을 내버려 둔 채 실내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넓은 침실이었다. 내장도 화려했다. 입구에서 봐서 정면에 뚫린 창문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 밖을 보자 바로 아래 중정 같이 한 단 낮은 지붕이 있었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얼마 안 되는 차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자 꽤 높이가 있었다.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왼쪽에는 테바 강이 여유있게 흐르고 있을 것이었다. 근심에 빠져 있을 때 뒤쪽에서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관없다 들어와.”

살짝 얼굴을 들이민 소녀는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고 있었다. 허리의 검도 그대로였다. 주변을 돌아보면서 가까이 다가와 커다란 침대에 풀썩 앉았다.

“왜 그래. 잠이 안 오나?”
“그런 건 아니지만.”

머리를 갸우뚱하며 왠지 걱정스러워보이는 남자를 살피는 모습이 작은 동물처럼 귀여웠다.

“이게 네가 말했던 제대로 된 침대?”
“글쎄.”
“나한텐 전혀 제대로 된 걸로 안 보이는 걸. 이런 곳에서 잔다면 등뼈가 어떻게 되어버릴 거야 절대루.”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뭐 너무 부드럽다는 건 맞는 말이군. 스샤에 있는 아버지 성의 침대는 좀더 딱딱해서 딱 좋지만.”
“정말로 여기서 당분간 지낼 거야?”
“글쎄.”
“그 다르 경이라는 사람 신용할 수 있었어?”

대놓고 이런 소리를 듣게 되자 남자는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던 차다. 남들 듣는 데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남자도 허리에 검을 늘어뜨린 모습 그대로 소녀와 나란히 침대에 앉았다.

“다르는 분명 윈저의 영주이지만 그리고 윈저는 분명 서 델피니아에서도 광대한 영지이지만 지금에 있어 사실상의 권력자인 페르젠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 수 있을 정도의 기개를 갖고 있다는 건 의외다.”
“남의 일같이 말하지 말고 제대로 생각하라구. 이 성 무너가 이상해. 그렇게 생각지 않아?”
“그래. 나도 그게 신경쓰인다.”

주인인 다르 경의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그들 두 사람을 마중나온 두 명의 기사도 그렇고 이 성의 시종들의 태도도 그렇고 겉으로는 상냥하게 대하고 있었지만 압제에 분개하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굴욕을 딛고 진실된 왕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환희 같은 것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그들이 정말로 페르젠 후작의 짓에 분개하여 자국自國의 정통한 왕을 맞이하려는 비원을 가지고 있었다면 월에 대해 좀더 폭발적인 기쁨을 나타냈어도 좋을 것이었다. 소녀도 이상한 점을 느낀 듯 했다. 그 녹색의 눈동자는 밤을 맞이한 고양이와 같으면서도 크고 둥글게 떠져 있었다.

“대체 말이야. 한 번 길목을 차단당했잖아? 완전히 후퇴해줬더니 이번에 암살자가 잔뜩 덤벼왔지. 이걸 퇴치했더니 즉각 이 성의 마중이 나왔다. 뭔가 좀 이상하잖아?”
“이상하지. 누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저기 말야.”

소녀는 지겹다는 듯 이마를 눌러 보였다.

“알고 있는 거면 어째서 어슬렁어슬렁 따라온거야?”
“다르가 무언가 꾸미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하지만 이 상태로 내 편이 될 생각이 없다고 해도 페르젠에게 갖다 바칠 생각도 아닌 것 같다.”
“실망한 것 같이 들리는데?”

남자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알고서 하는 건지 모르고서 하는 건지 아무 생각 없이 간단하게 핵심을 찔러 온다. 이쪽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녹색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뭔지 모를 묘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성적인 것도 아니며 물론 공포심도 아니다. 그저 뭐라 할지, 이 소녀의 말을 전면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남과 이야기하고 있는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이다.

“희한한 꼬마다 너는.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기라도 하는건가.”
“설마. 다르 경이 적이었던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내가 진정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남자는 생각 끝에 말을 이었다.

“페르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돼. 그러나 지금까지 그 녀석의 말들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건 어렵다. 말로만 반론해 봤자 탁상공론이 되어버릴 뿐이야.”
“그렇겠지.”
“그렇다면 그 녀석의 악행을 증명할 수밖에 없으니까. 왕족의 자격도 가지지 못한 자가 권력을 쥐고서 사리사욕에서 지배자를 자처하고 자신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려 하는 것을 쉽게 용서할 정도로 민중은 관용적이지 못해. 만약 다르가 페르젠과 공모하고 있다면 무언가 캐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온 것이지만.”
“빗나갔어?”
“그래. 모두 잠들어 조용해지면 여기에서 나가는 쪽이 좋겠지. 무슨 목적 때문에 날 환대해 보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무어 좋은 이유일 리는 없어.”

소녀는 잠시 심각한 표정이 되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저기 월.”
“응?”
“너네 사촌은 네가 살아있는 한은 절대 왕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지?”
“아아.”
“그리고 페르젠이라는 사람은 일단 무슨 짓을 해서든 발로를 왕으로 만들고 싶은 거지?”
“일단은 말이지. 어쨌든 그 외에 왕족 중 성인이 된 자는 없으니까. 발로의 어머니인 뒤르와 왕의 동생 아에라 공주는 예외지만. 그분이 왕이 된다는 건 국민이 찬성하지 않겠지.”
“즉 페르젠 후작은 어떻게 해서든 네가 죽기를 바라는 거네.”
“그렇다고 했잖아. 실제로 요 반년 간 나는 몇 번이나 습격을 받았다고.”

기가 막혀 대꾸했지만 소녀는 딱딱한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잠깐 생각 좀 해봐 월. 그럼 그냥 암살로는 곤란하다구. 역효과란 말야.”
“뭐?”
“그럴 것이 발로 씨는 페르젠하고 사이가 나쁜 거잖아? 게다가 발로 씨는 너랑 사이가 좋아서 너의 왕권을 주장하고 있고. 그렇다는 건 페르젠 후작이 한다고 해봐. 널 암살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방랑중의 월 왕의 사망이 확인되었으니까 왕위를 이어주시기 바란다는 소리를.”

남자는 핫 하고 놀랐다.

“발로 씨는 어떻게 할까? 그것 참 불쌍하게 됐군요 라면서 간단하게 왕이 될까?”

녹색 눈동자가 빤히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분명 그렇군.”
“그렇지?”
“그런 열혈한인데. 내 시체를 직접 볼 때까진 절대 믿지 않겠지. 아니 본다고 하더라도....”
“몸에 베인 자국이라도 남아있다면 곤란하겠지.”
“이잡듯 뒤져서라도 범인을 찾아낼 것이고 산채로 불에 던지라는 정도는 해주겠지.”
“페르젠에게는 끝까지 달갑지 않은 상황이지.”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의외인 면에서 나는 안전했다는 거로군.”
“글세 어떨까. 몇 번이나 습격을 받았다는 건 그런 생각을 못했던 것일지도 몰라. 최소한 지금까지는 말이야.”
“리.”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소녀를 보았다. 지금에 와서는 이 이상한 풍의 소녀는 남자의 피보호자가 아니라 그 실력과 두뇌로서 충분히 믿을만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냐?”
“생각해 봤어.”

소녀는 천천히 말했다.

“혹시 내가 페르젠이었다면. 그리고 어떻게든 새로운 왕을 옹립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다만 널 죽이는 것만으로는 안돼. 코랄에는 너를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 섣부른 짓을 했다간 자기 쪽이 외려 위험하게 돼.”
“그럼 어떻게 하지?”
“네 평판을 떨어뜨리면 돼.”
“.......”
“네가 직접 말했잖아. 나쁜 놈이라고 증명하면 된다고. 똑같은 식으로 페르젠도 생각할 수 있어. 페르젠의 경우엔 네가 나쁜 놈이었다고 하면 되는 거니까. 좀더 간단하지.”
“.......”

“벌써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한 번은 잘도 너를 코랄에서 쫓아냈지. 하지만 왕위찬탈을 꾸몄다고 퍼뜨리는 걸로는 모자랐던 거야. 코랄의 사람들은 왕족의 자격도 갖지 못한 후작에게 지배되는 걸 싫어하기 시작했고 개혁파의 제멋대로의 행동에도 짜증을 느끼기 시작했지. 일시적 흥분상태가 진정되고 머리가 식고 나면 당연한 일이야. 그리고 페르젠에게 있어 그 상황이 달갑지 않은 건 물론이고.”
“.......”
“그렇다면 월 그리크라는 임금님은 왕관을 가질 자격이 없는 못말릴 정도로 최저의 인간이라는 걸 증명하면 돼. 발로 씨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야.”
“예를 들면?”

남자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춰 단정한 얼굴에 긴장감마저 떠올리며 물었다. 소녀의 표정도 또한 진지함 그 자체였지만 약간 망설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싫지만, 게다가 어느 정도의 중죄인지도 모르지만 아마 제일 가능성이 높고 효과적인 건 이거라고 생각해.”
“리.”

말해 달라는 무언의 압력이 들어있었다. 소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쪽에 있는 내 방, 침대가 없어.”
“뭐라구?”
“몇 개인가 가구는 있지만 그냥 거실로 보여. 물론 나는 그걸로도 상관없어. 이런 침대보다는 바닥에서 자는 쪽이 훨씬 기분좋으니까. 하지만 말야. 네가 그 정도로 나한테 같은 배려를 해달라고 했는데도 주인인 다르 경도 손님으로서 대접하겠다고 잘라말했는데도 이상하지 않아?”

분명 이상했다. 상대가 아무리 신분이 낮은 자라고 해도 하룻밤 숙식을 제공하는데 침대가 없는 곳으로 안내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쪽 방을 들여다보니까 이렇게 멋진 침대가 놓여 있어. 그렇다는 건 너랑 나를 같이 재우려고 했다고 밖에는 생각할수 없어.”
“리, 대체....”
“원래 화제로 돌아가서 네 평판을 땅에 떨어뜨릴 방법. 이런 소리하고 싶지 않지만 가정하자는 거야. 예를 들면, 어디까지나 예라구. 너는 사실은 나이도 차지 않은 여자애를 -그러니까 나 말인데- 억지로 침대에 끌어들여서 갖고 노는 것을 즐기는 등의 왜곡된 성적 취향의 소유자였다 라는 건 어때? 게다가 결국엔 그런 짓을 하는 도중에 죽었다면?”

남자는 숨을 삼켰다. 소녀도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얼굴로 천천히 끄덕였다.

“죄가 되지 않을지는 몰라. 하지만 칭찬받을 일도 아니겠지. 모두에게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 왕의 임무이자 최소한의 의무라고 한다면 말야. 너의 명예도 평판도 개박살이야. 설사 헛소문이라고 해도 너와 나의 시체가 이런 곳에서 함께 나왔다간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뭐하면 복상사腹上死로 만들어 버려도 되고. 왕실이 시작된 이래 최대의 추문이 될 게 틀림없을 걸. 게다가 여기라면 발로를 데려와서 자기 눈으로 확인시키는데 절호의 장소잖아. 델피니아 영내이지만 코랄에는 가깝지 않아. 그리고 여자아이와 국왕이 정사 도중 죽었다는 건 공표할 수도 없고 말야. 국왕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나 델피니아의 평판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도 월 왕은 여행 도중 사고로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어. 증인은 기사 발로라고 하는 이 이상 없을만한 사람이 있고. 너의 불명예를 덮어주기 위해서라면 발로 씨라도 그 정도는 입을 맞춰 줄 테고 결국엔 포기하고 왕위를 이을 수밖에 없겠지.”

소녀가 말을 끊어도 남자는 아연한 상태로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페르젠에게 자신이 눈엣가시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악독한 수단을 사용할 리가 없다. 경악하면서도 남자는 제대로 돌지 않는 혀로 그렇게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소녀는 엄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권력욕에 붙잡힌 인간에게 상식 같은 건 통용되지 않아. 어떤 미친 짓이라고 해도 아무렇지 않게 해버리지. 내 친구가 자주 그렇게 말하곤 했어.”

차분하고 안정된 목소리였다. 현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온화하게 보듬어 주고 있는 것이다.

“리, 대체 네 머리 속은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거냐?”

그 목소리는 어렴풋이 떨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상대가 생각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뿐 아니라 때로는 공포마저도 느끼게 만들 때가 있다. 지금 이 남자가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쨌든 저쪽 방을 한번 봐봐. 손님이 묵는 데 어울릴만한 곳인지 어떤지 난 잘 모르겠거든.”

남자는 무서운 듯한 얼굴로 소녀를 의심스레 쳐다보았지만 일어서서는 문을 향했다. 그러나 문손잡이에 손을 댄 남자의 입에서 카다란 외침이 튀어 나왔다.

“갇혔어!”

소녀는 들릴 정도의 소리로 혀를 찼다. 달려가서 문을 조사했다. 아무래도 바깥쪽 손잡이 사이에 빗장을 채워둔 것 같았다.

“예감 적중이네.”
“하지만 하룻밤 우리를 안에 가둬둔다고 추문의 증거가 될 리가 없잖아?”

남자는 순식간에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뜻밖에도 소녀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 이렇게나 빨리 증명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열세 살의 소녀로선 절대 말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생각조차 할만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전부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렇네. 그거야말로 뭘 생각하고....”

말하려던 소녀의 안색이 순간 바뀌었다.

“비켜!”

외침과 동시에 검을 뽑아 문틈으로 찔러 들어갔던 것이다. 보통의 검이라면 부러져버렸겠지만 소녀의 검이 철제 걸쇠를 양쪽으로 갈라버렸다. 그곳에 몸을 부딪쳤다. 한발 복도에 나가서 두 사람은 금방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을 눈치챘다. 소녀가 외쳤다.

“불이다!”
“에에잇! 달려!”

긴 복도를 두 사람은 즉시 빠져나갔지만 그보다 먼저 날름거리는 불꽃이 계단을 기어 올라왔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소녀는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다니!”

자신을 책하는 것 같은 외침이었다.

“기름을 뿌렸나. 네 이놈 다르!”

남자도 격노한 외침을 올렸다. 그 사이에도 불을 계단을 올라와 복도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복도를 뛰어 돌아와 테바 강을 마주하고 있을 터인 막다른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밑을 내려다보고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분명 바로 눈앞에 강이 있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아래는 아까 보았던 방과 같이 한 층 낮은 곳의 지붕으로 되어 있었다. 이래서야 도움닫이를 해서 달린다 해도 강에는 닿지 못한다. 밑에 보이는 지붕 쪽에 격돌할 것이 눈에 보였다. 월은 무예의 달인이었다. 계단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지만 이 성의 한층은 일반 민가의 3층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뛰어내린다 해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창문 쪽에 몰린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았지만 이곳은 성의 최상부이다. 계단은 아까 올라왔던 한 군데 밖에 없고 그곳은 이미 지독한 연기로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

“다르 녀석, 우리를 여기서 태워죽일 생각인가!”
“그런 도중 네가 돌아버려서 날 데리고 일을 벌였다고 할 셈인거야 이 변태!”

침대의 장식천을 찢어 줄을 만드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시간 걸리는 작업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일단 불꽃의 연기가 바로 코앞까지 와 있는 것이다. 남자는 창문에 몸을 기대면서 절망적인 표정으로 외쳤다.

“이 빌어먹을 석조 바닥만 없었다면 물 안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을!”

그 옆에서 소녀가 끼어들면서 같은 식으로 몸을 기대고 아래를 보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해볼 수밖에 없을 것 같군 윌!”

자신보다 두 배의 체중은 나갈 것 같은 남자를 올려보며 소녀는 말했다.

“내가 먼저 뛰어내린다. 받아 줄테니까 너는 날 보고 뛰어내려.”

남자는 눈을 둥그렇게 했다.

“무....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런 높이에서?!”

실내에 만들어져 있는 계단 위아래와는 얘기가 틀리다. 아무리 무예에 뛰어난 달인이나 재주꾼이라도 이런 곳에서 뛰어내렸다간 절대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확고하게 단언했다.

“이런 높이 정도 나에겐 아무 것도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까지 끌어안고 뛰어내릴 수는 없다. 그러면 할 수 없잖아.”

아까까지의 말투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검을 뽑았을 때라고 하기보다는 감정이 격해지면 이렇게 되는 듯 했다. 남자를 보는 눈빛마저 변해있었다. 짙은 녹색의 눈동자에 떠올라 있는 것은 틀림없이 용맹한 전사의 안광이었다. 남자는 멍해져서 창문 아래와 날씬하고 화사한 소녀의 몸을 번갈아 보았다.

“이 높이를?”
“나라면 뛸 수 있어. 괜찮아. 너 한 명이라면 받아줄 수 있어.”
“하지만!”

소녀는 혀를 차며 남자의 몸에 손을 뻗었다. 허리의 혁대를 붙잡더니 놀랍게도 남자의 몸을 휘릭하고 들어올린 것이었다. 커다랗게 끄덕였다.

“가볍군.”
“.......”

발이 완전히 허공에 떠있었다. 그런데도 소녀는 전혀 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벼운 짐을 들어 올리는 정도로 쉬운 것처럼. 말 앞을 달려가던 소녀를 보았을 때와 같은 감각이 남자를 덮쳤다. 전신에 오싹하고 차가운 것에 뒤덮이는 것 같은 한번에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그런 감각이었다. 공포라고는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무언가 정체 모를 이질의 물건과 접하고 있다는 실감이 스물스물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표정이 그래?”

남자는 몸을 바닥에 내려놓고 소녀는 커다랗게 웃었다.

“나는 이런 곳에서 죽는 건 싫어. 너도 그럴 테지. 나에 대한 탐색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일단은 살아남는 걸 생각해라.”

사랑스러운 소녀의 목소리인데 그 말투는 어른 남자도 위축될 정도의 기백이 담겨 있었다. 맹렬한 불꽃의 조명에 비춰진 소녀의 얼굴을 남자는 숨을 삼키며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대체.... 승리의 여신인가? 아니면 마성의 것이냐?”
“나중에.”

멍한 상태의 남자를 내버려둔 채 소녀는 휘릭하고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

“리!”

창백해져서 몸을 뻗었지만 그 때에 소녀는 이미 바로 밑의 옥상에 깨끗하게 착륙해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빨리!”

그런 소리를 듣고도 남자는 꼼짝할 수 없었다. 즉사하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 아무 상처 없이 끝날 리 없는 높이다. 어렸을 때부터 산천을 뛰어다니며 몇 번이나 나무에서 떨어진 경험이 있는 남자라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소녀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나 공포보다도 이 높이 자체가 오히려 문제였다.

“뭘 하고 있는 거야! 통구이가 되고 싶은 거냐!”

이런 상황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뒤쪽에서 다가오는 뜨거운 불꽃의 숨결을 느끼면서 운명을 맡긴 상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금빛 머리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자신을 이끌어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은 이미 눈앞이다. 하려고만 마음먹으면 혼자서 도망갈 수 있는데도 이 소녀는 남자와 함께가 아니면 절대 움직이지 않으려는 태세였다. 마음을 다잡았다. 허리에서 검을 풀어 밑으로 던졌다. 소녀는 예상하고 있던 듯 한손으로 받아 주었다. 빨리 내려와 라고 손짓을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 순간 망설였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건 확실했다. 하늘을 보고 기도하는 말을 읊조린 뒤 남자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 공중에 던져졌을 때 느끼는 특유의 상하 감각 상실. 그러면서도 무언가에 억지로 끌어당겨져 내장이 거꾸로 올라가는 것 같은 강렬한 불쾌감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과거에 몇 번인가 있었던 듯한 충격과 아픔은 오지 않았다. 아직 발이 땅에 닿기 직전 다시 한번 공중에 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무언가 부드러운 것 위로 풀썩 떨어진 것이었다.
충격으로 몸이 다소 저렸지만 그것뿐이었다. 아무데도 심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놀람과 함께 머리를 흔들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분명히 1층 아래의 옥상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몸 아래에는 소녀가 깔려 있었다.

“리!”

황급히 그 몸을 안아 일으켜 가볍게 뺨을 때렸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분명했다. 소녀는 그 몸으로 남자를 받아준 것이다.

“리, 정신차려!”

남자는 이때 처음으로 소녀의 몸에 닿은 것이었다. 양손으로 붙잡은 어깨는 가늘며 힘없이 늘어져 있는 팔은 하얗고 안아올리면 깃털처럼 가볍다. 한심해졌다. 이런 소녀에게 커다란 남자인 자신이 보호받고 게다가 그것 때문에 소녀는 지금 기절해 있다. 뼈나 몸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불꽃은 이미 창문에 닿아 있었다. 위기일발이었다. 이곳 이층 건물의 옥상에도 불씨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검을 주워들고 작은 몸을 어깨에 멘 채 똑바로 옥상의 끝까지 달렸다. 바로 아래에 테바 강의 검은 흐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뒤 남자는 망설임없이 몸을 던졌다.




6장
테바 강은 부드럽게 흐르는 강이다. 남자는 정신을 잃은 소녀를 안고 익숙한 헤엄으로 천천히 강을 따라 내려갔다. 충분히 떨어진 강변에 올라 뒤를 돌아보니 성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리?”

흠뻑 젖은 몸을 잔디 위에 눕혔다. 정신을 잃은 덕에 물은 마시지 않은 것 같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리 그린다?”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작은 어깨를 흔들며 뺨을 두들겼다. 소녀는 조그맣게 기침을 하며 눈을 떴다. 안도하며 물었다.

“정신 들었어?”
“....거워.”
“뭐라고?”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어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직 멍하니 있던 소녀가 남자의 얼굴을 찰싹하고 때렸다.

“네 녀석 무겁다구.”

축 늘어져 있으면서도 독설을 내뱉는 소녀를 보고 안도했다. 

“그 정도 기운이 있으면 괜찮겠군.”
“여기는?”
“강을 내려온 곳이야. 보이나?”

불에 타서 무너지려 하고 있는 성을 가리켜 보였다. 밤의 어둠 속에서도 그 빛은 충분하고 남을 정도로 밝았다. 여기까지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고 불똥이 붉은 색의 눈처럼 수면위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녀는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굉장한 짓을 하는군.”
“그야말로 바보짓을 한 거지. 저만큼이나 돈을 쳐바른 성을 홀랑 태워버리다니 말야. 그러고도 우리들을 놓쳤다고 한다면 다르 녀석 땅을 치며 분해할 거다.”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역시 페르젠의 사주인가?”
“글쎄? 어쨌든 간에 이걸로 내가 귀국한 것은 코랄에 훤히 알려진거지.”
“어째서?”
“여기서부터 코랄까지는 차례대로 요새가 세워져 있어. 무언가 이변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서 말이지. 이 불은 아주 멀리서도 보여. 다르도 가까운 요새로 파발을 보냈겠지. 봉화를 이용한다면 오늘밤 안에는 윈저 성이 소실되었다는 사실이 코랄에 도착한다 뭐 이런 이야기야.”

신변의 위험이 한층 커졌음을 알고 있을 텐데도 남자는 웃고 있었다.

“기뻐할 상황이 아니잖아.”
“나쁜 점난 있는 건 아니야. 페르젠의 움직임이 화급해지면 결과적으로 내 아군들의 귀에도 소식이 들어가게 된다는 거니까 말이야.”

어차피 존재를 감춘 채라면 왕위 탈환 같은 일이 가능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제 7일 정도만 지나면 페르젠의 부하에다 너의 부하까지 뒤범벅이 되서 이곳 윈저로 향하게 된다는 거로군.”

소녀는 아직 전사의 기백을 농후하게 감싼 상태 그대로였다.

“그때 맞이하는 것이 국왕의 시체라면 재미없겠군.”
“리?”

온 몸이 흠뻑 젖어 웅크려있는 상태 그대로 소녀는 가볍게 턱을 들어 숲을 가리켰다. 멀리서 성대하게 타오르는 빛을 제외하면 주변은 어둡고 깊은 숲이다. 갑작스러운 화제로 동물들도 허둥대고 있긴 하지만 그 외에도 무언가 어수선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성과 함께 불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챈 듯 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바쁜 밤이로군.”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밤은 통구이가 될 뻔하기도 하고 하늘을 날아보기도 한 데다 물에 빠진 생쥐꼴까지 되었다. 게다가 칼부림까지는 피하고 싶었다.

“상당한 수야. 30명은 돼.”
“알았다. 도망치는 게 좋겠군.”

윈저성의 기사들에게 이 부근은 앞마당과도 같을 것이다. 반대로 두 사람은 전혀 지리를 알지 못한다. 게다가 30명이나 되는 인원수다. 좁은 길목으로 끌어들여 한 명씩 처리해 간다면 몰라도 이 상황에서 이런 인원수를 상대해서는 이길 수가 없다. 소녀는 머리를 흔들면서 일어났지만 다리가 약간 비틀거린 것을 남자는 놓치지 않았다.

“어이 괜찮아?”
“괜찮지 않아. 네가 내 위로 쓰러질 때 있는 힘껏 팔꿈치로 쳤단 말야. 가만히 있기만 해도 큰 덩치잖아. 좀더 생각해서 떨어져 달라고.”
“미안.”

생각해서 떨어지라는 어려운 일을 강요당한 남자는 웃음이 터져 나올 듯 했으나 솔직하게 사과했다. 숲 안으로 들어서려 했던 소녀는 갑자기 발을 멈추고 서둘러 남자를 손짓으로 불렀다. 숨을 죽인 채 큰 나무 그늘에 숨은 약간 뒤 조금 전까지 두사람이 있던 부근에 누군가 달려온 듯 했다. 몇몇 개의 횃불 빛이 어두운 숲 속에서 춤을 추며 이곳저곳에서 살기등등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이 근방인가?!”
“조금 더 앞 아니야?!”

그런 대화들이 들려왔다. 다르 경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바보 같은 놈들! 이 만큼이나 사람을 써도 발견하지 못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설마 최상층에서 탈출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가 없어서 방심을 했습니다.”
“에잇! 무엇보다 탈출을 했다는 게 정말로 확실한 것이냐? 날개도 없이 사람의 몸으로 어떻게 테바로 도망쳐 들어갔다고 하는거냐?”
“아니요 틀림없습니다. 저희들은 모두 정문으로 나왔기 때문에 눈치채는 것이 늦었습니다만 확실히 물에 뛰어드는 소리가 났었습니다.”

남자와 소녀는 병사들이 이런 대화를 조금 떨어진 큰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듣고 있었다. 무엇보다 어두운 숲 속에 횃불의 불빛이 산더미처럼 빛나고 있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 가 없었다.

“주인님. 아무 데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수면을 헤엄쳐 반대편 기슭으로 건너간 것은 아닐까요?”
“어리석은 소리! 테바를 건너 왔었는데 또 다시 파라스트로 돌아갔다는 거냐?”

영주는 단언하 후 노성을 질렀다.

“그 남자가 코랄에 들어가게 되어 봐라! 내 입장은 엉망이 된다! 생사는 묻지 않겠다! 어떻게 하던 잡도록 해라!”
“옛!”
“알겠습니다!”
“민가로 도망쳐 들어갈지도 모른다. 병살르 총동원하여 감시하게 해라! 강에도 배를 띄워라! 강가를 탐색하는 거다!”

주인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일제히 흩어져갔다. 대단히 엄격한 모습이었다. 주변이 약간 조용해지자 소녀는 조그마하게 남자에게 속삭였다.

“굉장히 미움받는 것 같군.”
“저 녀석이 악당이라는 훌륭한 증거지.”

이쪽도 조그마하게 묘한 변명을 했다. 하지만 곤란해지고 말았다. 주변은 병사들로 가득하고 게다가 근처의 농촌이나 영지에까지 연락이 갈 것임이 틀림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할 거야? 넌 어느 쪽으로 가고 싶어?”
“이상적으로는 동쪽으로 가는 것이긴 한데.”

남자는 어려운 표정이 되었다. 한때는 왕이라고 불리웠던 몸이다. 코랄까지의 주요한 여로는 머릿속에 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적도 알고 있을 터였다.

“어쨌든 쉽게는 코랄에 들어가지 못해. 강을 따라 일단 남쪽으로 내려가자. 멀리 돌아가게는 되지만 어쨌든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야.”
“알았어.”

강을 ㄸ?간다고 해도 말 그대로 강변 녹지대를 따라간다면 강에서 훤히 보이게 되고 만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숲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곧바고 남자의 걸음이 느려졌다. 가볍게 혀를 찼다. 예상 이상으로 발 밑이 불안정했던 것이다. 숲에는 잘린 나무도 있고 풀숲이 있으며 돌도 굴러다니고 있다. 패인 곳이 있는가 하면 튀어나온 곳도 있다. 땅위로 솟아나온 나무뿌리도 있다. 낮이라면 몰라도 어둠 속에서 남자는 이런 것들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밤엔 달도 없었다.
별빛만으로 모르는 숲 속을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밤짐승들 뿐이다. 사람의 눈은 그만큼 좋지는 않다. 그렇다고 발 밑을 비추기 위해 불을 켠다면 나는 여기에 있다고 추적자에게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자의 속도가 떨어진 것을 눈치채고 소녀가 뛰어 돌아왔다.

“뭘하고 있는 거야? 서두르지 않으면 따라 잡혀.”

그 말대로다. 뒤돌아보니 꿈틀거리는 횃불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어두운 물감이 칠해져 있는 듯한 숲을 둘러보았다.

“곤란해. 이 어둠 속에선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태양이라도 떠있다면....”
“그럼 우리들의 모습이 훤히 보이게 돼. 도망치려면 지금이야.”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아무래도 생각만큼 달릴 순 없어. 난 이 숲에 전혀 익숙지가 않아. 여기가 스샤 숲이라면 밤중이라도 어느 정도는 움직일 수 있지만 여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소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전혀 안 보여?”
“당연하지. 불빛도 없이....”

말하려던 남자의 팔을 소녀가 잡았다. 빙글 하고 등을 돌려 업어치기의 요령으로 남자의 몸을 들어올려 가볍게 등에 떠메었다.

“리!”
“떠들지마. 달린다.”

업혀있다고는 해도 상대는 월의 가슴 정도 키밖에 안 되는 소녀인지라 남자의 발은 지면에 닿을 듯 했다. 황급히 내려서서 자기 발로 서보려 했지만 그때 이미 소녀는 기운차게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였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소녀의 등에 달라붙었다. 자기 발로 걸을 때는 제대로 갈 수조차 없었던 숲이었는데 지금은 바람이 뺨을 스치고 있었다. 소녀는 멈추어 서지도 걸려 넘어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남자를 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틀거리지 조차 않았다. 교묘하게 잘린 나무를 피하고 나무뿌리를 피하며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도 불안정한 돌기가 많은 지면을 소녀는 나는 듯이 달려갔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남자가 외쳤다.

“너 보이는 거냐?!”
“별빛이 이만큼 있으면 말이지.”

놀랍게도 횃불의 빛도 불에 타 무너지는 성도 점점 멀어져 간다. 사람의 목소리나 기척도 사라져 간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간신히 구별할 수 있는 풍경이 계속해서 등 뒤로 사라져 간다. 잘 고른 준마라면 몰라도 사람의 등 위에서라고 한다면 결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남자는 자기 눈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어느 정도 그렇게 달렸는지 소녀는 드디어 속도를 늦추고 약간 열린 장소에 와서 멈춰섰다. 지면에 내려지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이 남자는 서둘러 뛰어내려 거리를 두었다. 금발의 소녀도 역시나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결코 가벼운 짐은 아니었다. 작은 어깨가 크게 상하로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 쪽을 보자면 경탄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 등에 업혀 있었기 했지만 자신이 달라붙어 있던 작은 어깨나 등 아래엔 도대체 무엇이 달려 있는 건지 갑자기 두려워지고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주변엔 사람의 기척도 없었다. 깊은 어둠에 묻혀 있는 울창한 숲이었다. 때때로 나뭇가지가 술렁이고 밤새가 낮게 울었다. 그것이 한층 더 불안감을 불렀다.

“무슨 표정이 그래?”

뺨에 흐른 땀을 닦으며 소녀가 말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커다란 녹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입술은 혹시 당장이라도 귀까지 찢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망상이 몰려왔다. 그런 남자의 표정에 소녀의 붉은 입술은 빈정댐이 섞인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나를 괴물이라고 부를 거냐?”

남자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단지.... 그, 네가 있던 곳엔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너 같은 생물인가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랬더라면 괴물이라고 불리진 않았겠지.”
“.......”
“나는 어디에 있어도 ‘비정상’이었지. 이 외모 외에도 뭐든지 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데도 인간이라는 것들은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내 외견만 보고 기뻐하고는 주절주절 칭찬하면서 건드리고 싶어하지. 그런 주제에 조금이라도 내가 나답게 행동하면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괴물이라며 대합창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접근해 오지 않으면 되잖아.”
“.......”
“나는 나다. 아무리 이상한 것으로 보여도 이런 생물이다. 그게 어째서 그렇게 나쁜 거지?”

남자는 소녀가 우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분연한 노여움에 가득 찬 말투였지만 그 이면에는 어찌할 수도 없는 분함과 슬픔이 느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리.... 그린다, 너에겐 한 명도 네 편이 없었나?”
“......”
“열이면 열 모두 너를 괴물이라고 부른 거냐? 정말 단 한 면도 빠짐없이?”

크게 흔들리는 소녀의 표정에 남자는 질문의 답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토라지거나 슬퍼하거나 하진 마라. 확실히 넌 평범한 사람은 아니야. 나도 네가 보통 소녀라고 이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말이다. 너의 그 얼굴과 모습은 여자라면 누구라도 마음속 깊이 원하는 것이고 그 다리와 검 실력은 남자라면 누구라도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야. 그 정도의 선물을 차례차례 받았으면서 야니스에게 감사도 하지 않고 저주의 말을 내뱉고 있다니 사치스러운 소리라고 해야겠다.”

무서울 정도로 잘라서 말하는 것을 듣고 소녀는 눈동자를 크게 떴다.

“너 저엉말로 이상한 녀석이구나.”
“너에게만큼은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군. 무엇보다 이걸로 그 소리 세 번째다.”

소녀는 멈칫하고는 표정을 풀었다. 남자도 싱긋하고 웃었으나 곧 얼굴을 굳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너를 조금도 무섭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겠지. 스샤나 코랄에서도 아마도 다른 어떤 땅에서도 너 같은 생물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어. 마주하고 있는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리, 상상이상으로 두려운 일이다.”
“.......”
“하지만 그래도 말이다. 너는 나의 생명을 구해줬다. 몇 번이나 말이야. 특히 지금은 네가 없었다면 나는 그야말로 불타서 무너지는 성에 남겨졌을 것이고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겠지. 설사 네가 어떤 존재라고 해도 그 은혜를 잊고 생명의 은인을 괴물이라고 부를 정도로 내가 수치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믿어지지 않는다면 맹세를 해도 좋다. 절대로 너를 괴물이라고는 부르진 않겠어.”
“쉽게 그런 맹세를 하지 않는 쪽이 좋아.”
“아니 하지만...”
“맹세는 필요없어. 그렇게 말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말야. 너 같은 경우는 인간 중에서도 소수파겠지?”

아주 상당히 이 소녀는 타인에 대해 꺼리는 부분이 있는 듯했다.

“그럴까?”
“그래. 다르 경 같은 경우가 표준일 텐데. 그런 종류라면 잘 알지. 어디를 가도 썩어 넘칠 정도로 있는 인간이니까 말야.”
“그런 이간이 썩어 넘칠 정도로 있다고 하면 참을 수 없는데.”

진심으로 중얼대는 일행에게 소녀는 짓궂은 미소를 보였다.

“너 그런 소리나 하고 있으니까 왕관을 벗겨갈 때까지 눈치채지도 못하는 멍청한 일이 벌어지는 거다. 사람의 정체란 건 대체로 저런 거야.”
“꿈도 희망도 없는 소리를 하는 녀석이군.”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쓸모가 있는 것 같은데. 다르는 페르젠의 심복인 것도 아니고 그 위세가 두려워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에 불과해. 어찌 보면 그 대상이 나로 바뀌어도 마찬가지인 거다. 내가 왕위를 되찾아 나라 전체에 호령하는 입장이 된다면 다르는 가장 먼저 달려나와 충성을 맹세하겠지. 설득할 수고가 줄어든다는 거다.”

소녀는 물끄러미 남자를 보고 있었다.

“또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자를 그렇게 간단하게 용서해줄 셈인가?”
“모양만이라고 해도 나를 따르고 고개를 숙여주는 자를 용서해주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어?”

장난치는 식으로 남자는 대꾸했다.

“상대의 마음속에 배신의 뿌리가 남아 있다고 알고 있으면 돼.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틀려지니까. 뒷일은 그 때가 되면 생각하고 뭐라 해도 나는 적당히 된 국왕이니까 말이야. 갑자기 존경하라고 한다고 해도 뭐 무리라고 할 수 있는 거겠지.”

잠시간 묵묵히 있던 소녀는 끝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군.”
“음?”
“꼭 너에게 왕관을 씌워 줘 보고 싶어졌다.”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임금님이었다. 이 소녀가 전혀 어린애답지 않다는 점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말투도 그렇고 기백도 그렇고 마치 뛰어난 책사나 검호가 크게 웃으며 동료가 되어주겠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박력이었다.

“그거 믿음직스럽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맞장구를 쳐버리고 말았다. 소녀 쪽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곳에 떨어져서 가장 먼저 너 같은 남자를 만난 것도 그야말로 무언가의 인연일 테니까 말이야. 심심풀이로는 딱 좋지.”
“어이어이,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라고. 심심풀이 취급받으면 곤란해.”
“배부른 소리는 하지 마. 자 가자. 어쨌든 이 숲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다.”

밤눈이 좋은 소녀의 안내로 두 사람은 그날 밤 안에 숲을 벗어났고 숲에서 나온 곳에서 진로를 약간 동쪽으로 바꾸었다. 그렇다고 해도 정동쪽은 아니다. 남동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는 어딘지 짚이는 곳이 있는 듯 했다. 태양의 위치를 확인하고 주변의 지형을 확인해가며 여행을 계속했다. 여전히 어깨를 나란히 한 행군이었지만 옆에 걷고 있는 소녀를 보는 남자의 눈이 완전히 변해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그 전까지도 평범한 소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정말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반쯤은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소녀 쪽도 남자를 보는 눈이 바뀐 듯 했다. 그렇다고 해도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상한 녀석’으로 인식한 듯 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칭찬하는 말이다.”

라고 소녀는 말했다. 

“공교롭게도 전혀 칭찬 받는 기분이 안 들어.”

라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숲을 벗어나 얼마쯤 지나 언덕 위였다. 막 사냥한 새고기를 소녀가 솜씨좋게 처리하여 점심 식사를 하려던 무렵이었다. 갓 구워낸 고기에 지나던 길에 만난 사냥꾼에게서 얻은 소금을 뿌린다. 야외에서의 식사로서 이 이상의 것은 없다. 두 사람 다 비길 데 없는 성찬에 입맛을 다셨다. 중앙의 권력 분쟁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 근처에도 소문이 나 있는 듯 했다. 도중 로쉐 가도를 횡단했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가 두 사람의 귀에 날아 들어왔다.

가까운 장래에 새로운 국왕의 대관식이 열릴 것 같다는 이야기부터 그것을 저지하려고 월 왕이 국왕군을 결성해서 이미 코랄을 향해 진군중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어 남자는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짓기도 했다. 군대는커녕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몸뚱아리 하나를 제외하고는 동료가 되어주겠다고 말해주고 있는 별난 소녀 한 명뿐인 것이다.

“이야기가 커지기도 했군 그래. 국왕군이라니. 사람의 입이라는건 해이해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 같다.”
“재미있네 확실히.”

소녀는 흥미진진한 듯 끄덕였다.

“여기는 코랄에서는 상당히 멀 텐데, 모두들 역시 기대하고 있다는 거야.”
“그럴까?”
“그래. 소문이 그렇게 된 거니 잽싸게 국왕군을 결성해 버리는건 어때?”

너무도 간단하게 게다가 진지한 얼굴로 그런 소리를 듣자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어떤 신도 믿지 않지만 너는 정말 발도우가 보내준 자인지도 모르겠군.”
“나도 신은 안 믿어.”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허리에 찬 검에 손을 대었다.

“믿는 것은 이 검과 자신의 실력. 감. 그 다음엔 전력을 다하고 운을 하늘에 맡긴다. 괜찮아 잘 되게 되어 있어. 정의는 나에게 있으니까.”
“호오. 그럼 너는 내 쪽이 옳다고 생각해 주는 건가?”
“나는 페르젠도 개혁파도 몰라. 하지만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그렇다면 엄청난 거짓말을 하는 악당은 자동적으로 페르젠 쪽이었다는 것이 되지. 간단한 논리야.”

확실히 간단명료하기 그지없다.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비르그나로 향한다.”

남자는 단언했다.

“지금의 나는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지만 틀림없이 아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력도 있다. 비르그나 요새도 그 중 하나다.”
“만약 그 요새가 적으로 돌아서 있다면?”
“내 운명도 거기까지지. 왕좌탈환 따위는 어차피 불가능한 거라고 포기할 거야.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의 구출도 단독으로 행할 수밖에 없겠지.”
“단독은 아니라니까.”

자신을 계산에 넣는 것을 잊지 말라고 소녀는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비르그나 요새를 지키는 것은 라모나 기사단. 딜레든 기사단과 함께 델피니아에서도 굴지의 전력 중 하나다. 특히 두 기사단은 각 단장들을 포함해 두터운 결속을 맺고 있어.”

다시 말해 라모나 기사단과 접촉할 수 있다면 국왕이 건재하다는 소식은 곧 딜레든 기사단에, 즉 국왕의 사촌동생인 기사 발로에게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중요지점을 페르젠이 내버려둘까. 가장 먼저 누르려 하지 않을까?”
“아마도. 하지만 비르그나의 힘을 누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은 그다지 없어. 딜레든 기사단장 발로는 실수로라도 비르그나 제압의 명령 따위는 내지 않을 것이고 개혁파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1만명의 근위병단은 가까이에 두지 않으면 안될테지.”
“그 외에 쓸만한 전력은?”

“각자의 대귀족과 영주군이겠지만 이것도야. 섣불리 제압하러 보냈다가 비르그나에 합류하게 되면 곤란할 테니까.”
“하항 의외로 적과 아군의 식별이 어려워?”
“그건 그래. 다르 같은 자가 표준이라고 넌 말했지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정확한 의견이다. 겉으로는 델피니아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개혁파이지만 진심으로 따르고 있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글쎄, 어느 정도나 있을지.”

대다수의 영주나 귀족에게 있어서 개혁파의 코랄 장악은 청천벽력이었으리라. 
드러내고 반항하는 영주는 한 명도 없었으나 보신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것이다. 개혁파는 왕국의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는 수도 코랄과 근위병단을 제압하고 있었으니 반항하는 것은 거의 자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비르그나도 개혁파에 대해 대놓고 반항은 하지 않았다. 적극적인 지지로 돌아서지도 않았지만 아버지의 모략설을 일단은 긍정하고 개혁파에 찬동의 의사를 표시했을 거다.”
“그런데 비르그나를 믿는 근거는?”

남자는 고개를 약간 모로 꼬았다.

“나는 그 기사단을 알고 있다. 단장의 인품도 잘 알고 있어. 그뿐이다.”
“그뿐인 거네.”

소녀는 무언가 놀리는 듯이 그 말을 반복했다.

“좋아. 그런거 아주 좋다고.”
“바보취급하는 거지?”
“설마. 칭찬하는 거야.”

장난스러운 미소가 향해지자 남자도 마주 웃었다. 열한 살이나 연하인 소녀인데도 그 정신구조도 그렇고 마음가짐도 그렇고 자신과 많이 닮은 무언가를 느끼는 것은 기분 탓일까. 델피니아 사람도 아닌데도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고 한다. 게다가 무언가를 바래서인 것도 아니다. 보수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말하듯 단순한 변덕인가 심심풀이로 협력을 제안해 온 것이다.
그것도 좋지 라고 남자는 생각하고 있었다. 파격적인 것은 남자 자신의 특징이기도 했다. 숲을 벗어난 근처부터 고지高地가 계속되고 있었다. 전체가 초록으로 덮인 완만한 구릉지대였다. 산이라고 할 정도로 험하지는 않으나 평지를 걷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보통 인간이라면 진즉에 발이 느려졌을 테지만 두 사람은 쉽게 경사면을 넘어 갔다. 조금 높은 언덕에 올라서니 멋진 전망이었다.

“공기 좋다.”

깊이 숨을 들이쉬며 소녀가 말했다.

“초록이 좋으냐?”
“응. 윈저 성같이 번쩍번쩍거리는 쪽보다 훨씬 좋아해. 이쪽이 편안해져.”
“그건 그래.”

남자도 웃었다.

“나도 이런 공기가 성미에 맞아. 스샤의 녹음은 더 짙지만 말이야.”
“산속인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숲속이야. 기후도 거칠지. 지금쯤이라면 아직 눈도 남아 있어.”

남자는 감개가 깊어 보였다.

“스샤는 델피니아에서도 상당히 북쪽에 위치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우기 바로 눈앞이지. 무서울 정도의 모습이었어. 아무 것도 없고 살기 힘든 시골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소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나도 알아.”

남자가 조용히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말투로 보아 그 소녀가 익숙했던 곳도 상당히 험한 지역이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코랄은 어떤 곳이야?”
“그건 뭐, 이 주변의 경치가 거짓말로 보일 정도로 집들이 늘어서 있지. 어떤 의미에서는 윈저보다도 번적거린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무엇보다 누를래야 누를 수 없는 문화적 일등지역이니까 말이야.”

소녀는 곤란한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거북한데 말야. 그런건.”

비범하게 튼튼한 다리의 두 사람이 비르그나 요새에 도착한 것은 윈저에서 탈출한 지 3일째의 일이었다.




7장
문제의 요새는 윈저 성과 같이 장식도 없고 운치도 없는 모습이었다. 다른 점은 딱 하나 높은 탑이 우뚝 솟아 있는 것과 그 거대함이었다. 언뜻 봐도 배는 넘는 듯 했다. 뭐라 해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크게 틀렸다. 탑 위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경비병이 눈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조금 더 접근하자 성벽으로 보였던 외벽 부분은 아무래도 거대한 방책인 듯했다. 그 방책의 이곳저곳에는 화살 쏘는 구멍이 있고 정문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접근하는 자를 확인하기 위한 검문소도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은 진정한 전투용 요새였다. 똑바로 다가오고 있던 두 사람을 경비하는 병사가 즉시 발견하여 커다란 소리로 물었다. 정문 옆의 2층 창문에서의 질문이었다. 단 두 사람을 상대로는 지나친 일이었지만 그만큼 이 요새의 규율은 엄격하다는 뜻이 된다. 남자는 그 병사를 올려다보며 커다란 소리로 대답했다.

“라모나 기사단장에게 전해라! 주군이 만나러 왔다고 말이다!”
“뭐라고?”

그 병사는 순간 의심스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긴 여행을 해왔다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소녀를 한 명 데리고 있는 자유전사가 어째서 자신들의 지휘관을 신하 취급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이 들개 같은 놈이! 세상 어지럽히는 소리하지 마라! 우리 라모나 기사단에게 델피니아 국왕 이외의 주군은 없다!”
“그 왕이다! 이 바보 녀석?!”
“히 히익?!”

경악한 나머지 그 병사는 이층 창문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황급히 중심을 잡고 바도 아래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눈을 의심하면서 검사했다. 남자는 반년의 유랑생활로 머리가 길어 있었다. 윈저 성에서 옷을 갈아입긴 했지만 그 뒤 곧바로 강에 뛰어들었다가 야산에서의 행군을 계속해 온 것이므로 의복도 꽤나 낡아 있었다. 이 모습으로 왕이라고 말해봤자 믿어달라는 쪽이 무리였다. 하지만 경비병은 뚫어지게 남자의 얼굴을 뜯어본 뒤 감격스러운 절규를 터뜨렸다.

“트 틀림없는 국왕 폐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어찌 무사히....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아아 이런 고마운 일이!!”
“그 왕을 언제까지 길 위에 세워둘 생각이냐! 다리를 내려라!”
“아 예엣! 즉시!”

내부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국왕귀환의 보고가 요새의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소녀가 살짝 말을 걸었다.

“역시 관록이네.”
“놀리지 마.”

요새 입구는 도개교식으로 되어 있었다. 사람이 들어갈 때마다 한 번 열었다 닫기에 꽤나 노력을 들여야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면 이 요새는 그야말로 실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윽고 다리가 내려지자 가장 먼저 뛰어나와 국왕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라모나 기사단장 나시아스였다.

“폐하! 월 그리크 국왕폐하! 얼마나 이 날이 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 목소리에도 남자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도 진정이 넘쳐흐르고 있다. 나시아스는 남자보다 두 셋 정도 연상으로 보였다. 요새를 맡고 있는 책임자로는 꽤나 젊었다. 게다가 부드럽고 온화해 보이는 외모나 호리호리한 체형은 기사단장이라고 약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시인이나 학자라고 한다면 오히려 납득이 갔다. 거의 눈물을 흘릴 지경의 나시아스에게 월도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걸었다.

“고생시켰다 나시아스.”
“아니오 아닙니다. 소인이 겪은 어려움 따위는 폐하께서 겪으신 고초에 비하면, 게다가 맹우인 딜레든 기사단장이 겪은 난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발로가 어떻게 되었나?”

라모나 기사단장은 크게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다.

“실은 코랄에서는 이미 폐하를 돌아가신 것으로 하고는 딜레든 기사단장을 억지로 왕위를 잇게 하려는 움직임이 더욱 급격해지고 있습니다. 아니 물론 제 친구인 기사 발로는 폐하의 소유이신 왕관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생각 따위를 할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이것저것....”

본인이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지금의 세론은 발로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의 말로는 기사단장이 마치 인질과도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중 삼중으로 감시를 당하고 탈출도 할 수 없이 국왕대행의 서류를 결재하도록 강요받고 있다합니다. 이대로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면 델피니아는 파멸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협박에 그 기사 발로조차 어쩔 도리가 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걱정마라 나시아스. 그 동생님이 하는 일이니 아무리 인질상태라 하더라도 그 독설과 야유하는 버릇이 바뀌었을 리도 없어. 페르젠에게는 꽤나 다루기 힘든 인질일 것이야.”

나시아스의 입술에 동의하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틀림없습니다. 제 친구이자 폐하의 사촌동생인 노라 발로는 그정도로 약한 인간이 아니지요.”

그리고는 가벼운 말투를 일신하여 다시 깊이 머리를 숙였다.

“폐하, 본래라면 폐하의 귀환을 축하하는 종을 울리며 성대한 축연회를 열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오나 이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없습니다. 경의를 제대로 표하지 못하는 것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런 짓을 하면 국왕이 여기에 건재하다는 것을 큰소리로 떠들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것보다 묻고 싶은데....”

남자는 나시아스의 어깨를 감싸 일으키고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페르난 백작이 투옥되었다고 들었는데.”

기사단장은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백작은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개혁파들을 따르는 것을 완고히 거부했습니다. 아마도 페르젠은 아직도 폐하를 따르는 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백작을 붙잡은 것이겠지요.”

남자는 낮게 신음했다. 가까이 있던 기사가 기세 좋게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폐하께서 돌아오셨으니 개혁파의 횡포를 그대로 놔둘 순 없습니다. 페르젠은 델피니아 전토를 다스리고 있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장악하고 있는 것은 코랄을 비롯한 그 주변 일대일 분. 대부분의 영주는 중립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알았다. 우선은 무언가 식사를 하고 싶군. 그 뒤에 코랄의 사정을 자세히 들려다오.”
“맡겨주십시오.”

라모나 기사단장을 비롯한 주요 기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국왕을 맞이하러 나온 것이었지만 왕의 옆에 서 있던 소녀에게 주의를 돌리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사소한 시중을 들게 하는 시동이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하얀 천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강에 뛰어든 뒤 꼬박 3일을 걸어와서 빛나는 듯한 미모가 꽤나 색이 바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소녀에게 손짓을 하고 자신보다 먼저 다리를 건너도록 지시했을 때에는 모두가 아연해 했다.

“폐하 그 아이는?”

물어온 나시아스에게 남자는 시원하게

“이쪽은 그린다. 내친구다.”

라고 소개했다.

“친구.... 분이라고요?”
“아아 그래.”

그런 소리를 해도 기사들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젊은 기사들은 명확한 의혹의 시선으로 소녀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었다. 나시아스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실례입니다만 어떤 신원의 소녀인지요?”
“나도 잘은 모른다.”

그 장소에 있던 자들은 웅성하고 소란스러워졌고 젊은 기사 중 한 명이 의기좋게 주군에게 달려들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국왕폐하께 여쭙습니다. 설사 작은 소녀 한명일지라도 출신이 불명확한 자를 곁에 두시는 것은 어쩔까 하여... 뭐라고 말씀드려도 지금의 폐하께서는 왕좌탈환을 목표로 하시는 중대한 옥체.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칠 일은 없을 듯 아옵니다.”

단장인 나시아스가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말입니다. 이 소녀의 정체와 그리고 주소가 어디인가 정도는 확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보아하니 평민의 아이인 듯한데 그런 것치고는 그 검은 어떤 물건인지요? 이런 아이에게는 다룰 수 없는 물건일 텐데.”
“실은 대단히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무어 들어 둬. 이 소녀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국왕인 자가 받았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도 안될 일이니까 말이야. 두텁게 보답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기사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만약 태생이 천한 자라면 어찌하실 겁니까? 폐하의 주변에서 모시기 위해서라면 그에 상응하는 명예로운 가문 출신이어야 합니다. 신분 낮은 여자아이를.... 그것도 검을 허리에 차고 있는 천한 소녀를 폐하의 곁에 가까이 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월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소녀를 보았다. 소녀 역시 어깨를 으쓱이는 것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왜 그러느냐 꼬마? 주소는 어디인가? 부모님 이름은?”

소녀에게 묻는 젊은 기사의 태도에는 아무리 작은 소녀 한 마리라고 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왕의 곁에 둘 수 없다는 결의가 나타나고 있었다. 소녀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자자 기다려라. 이 소녀는 꽤나 나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신원은 모르지만 이 앞에 있을 수도탈환을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인재다. 수상한 자가 아니라는 것은 내가 보증하마.”

정말인지 아닌지는 자신도 몰랐다. 말과 경주하여 이길 수 있는 다리에 커다란 남자를 가볍게 들어올리는 힘을 가지고 별빛 정도의 조명으로도 짐승처럼 자우 자재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다. 그런 자가 수상하지 않을 리가 없지만 남자는 생명을 구해준 상대에 대해 성의를 다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국왕의 말에 기사들도 불만스러우면서도 물러섰다. 하지만 그래도 소녀를 내버려둘 수 없는 듯 말을 걸어왔다.

“이봐 꼬마. 너는 폐하를 위해 어떤 일을 했던 거냐. 과분한 말씀이시지 않느냐.”
“음. 너 같은 꼬마 여자애가 폐하의 생명의 은인이라니. 분에 넘치는 명예로구나. 약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만.”
“탐색은 그만둬라. 폐하께선 이 아이가 충실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아군이 필요한 때이다. 지금부터도 성심성의껏 일해다오.”
“내 참.”

둘러싼 채 서로를 보며 끄덕이고 있던 기사들이었지만 소녀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 무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요새와 월에게 등을 돌린 채 걸어가기 시작했다.

“리!”

나이아스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월이 눈치채고 큰 소리로 외쳤다.

“리! 무슨 일이냐?!”

들리는 것이 분명한데도 소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점점 멀리 떠나가려고 한다. 남자는 서둘러 뒤를 쫓았다.

“폐하!”
기사들도 줄줄이 뒤를 따랐다. 보통 걸음으로 걷고 있는 소녀를 따라잡는 데에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녀는 그래도 발을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 남자는 어깨너머로 바쁘게 말을 건넸다.

“리 무슨 일이야. 코랄과도 방향이 틀리잖아. 그쪽이 아니라고.”

금발의 소녀는 발을 멈추고 돌아보더니 똑바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에서 헤어지자. 너는 코랄에 가도록 해. 나는 다른 곳으로 간다.”
“리?!”

남자는 놀랐다.

“어째서야. 나와 함께 오겠다고 한 것은 도와주겠다고 한 것은 네 쪽이잖아.”
“월이야말로 자유전사라고 말했었어.”
“.......”
“모실 주인도 없고 영지도 없고 검 하나로 세상을 헤쳐 가는 자유전사. 그렇게 말했을 텐데.”
“그것은 그때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나도 자유전사다.”

소녀는 딱 잘라 말했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했던 것은 내 검을 써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같은 전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에 대해서였어. 남에게 명령을 내린다든지 충성을 요구한다든지 자기를 위해 이용하려고 강제하는 그런 녀석을 위해서가 아니야.”
“리 그건.”
“이 검과 전사로서의 명예에 걸고 나는 누구에게도 명령받지 않는다. 그런건 용서못해. 더구나 누군가에게 충성을 바친다든지 모신다든지 황송하게 칭찬 듣고 기뻐한다는 그런 짓은 딱 질색이다.”

녹색의 눈동자에는 분노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뒤를 쫓아온 기사들은 소녀의 말투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진지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맹세코 너를 신하취급 할 생각은 없어.”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도 주변이 허락해주질 않아. 어디서 굴러온 말뼈다귀인지 알 수 없는 꼬마 여자애가 국왕에게 이런식의 말투를 쓰고 친한 척 친구 취급 받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할거다. 나인지 네 신하든지 결국 넌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거야. 코랄 탈환을 위해서도 나 혼자보다는 다수의 병사가 너에겐 필요한 거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헤어지자.”
“리 기다려.”

소녀가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어떤 상황에서도 그랬다. 그러니까 더욱 지금 여기에서 이 소녀와 헤어지는 일은 할 수 없었다. 핑계도 아니고 계산도 아니었다.

“네가 말한 대로 어디까지나 내가 국왕이야. 그렇다면 신하들에게는 내가 하는 방식대로 따라오게 하겠다. 너는 내 친구야. 누구든지 불평은 못하게 만들 테다.”

확실하게 단언했다.

“만약 너를 친구로서 대우하는 것 때문에 부하들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겠다면 할 수 없지. 너와 둘이서 아버지를 구하러 코랄을 향하자. 로쉐의 가도에서 네가 말했던 대로.”

결의에 가득 찬 남자의 어조에 소녀의 마음은 조금 움직인 듯 했다. 남자는 약간 입가를 올려 보였다.

“우선 너 말야. 어디도 갈 곳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이 근처 지리도 모르고. 그렇다면 여기 있어라. 이제와서 다시 나처럼 세상물정에 밝은 일행을 발견하기란 하늘에 별따기라고.”
“밉살스럽게 말할래 너!”

즉시 대꾸한 소녀였지만 약간 홍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정곡을 찔린 것인지도 몰랐다. 소녀에게 있어 이곳은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상대가 이 별난 남자였기에 그 정체에도 의문을 품지 않고 쓸데 없는 탐색도 하지 않은 채로 말상대가 되어주었고 소녀의 몰상식한 부분을 채워주었던 것이지만 그 밖으로 한 발 잘못 내딛으며 이단아로 쫓겨날 가능성도 충분했다. 소녀는 자신이 말했던 대로 그 외견 말고도 사고방식이나 능력이나 모두 비정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이 소녀는 얌전하게 꺾이거나 하진 않았다. 10년도 더 나이차이가 나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분연하게 소리쳤다.

“뱅뱅 돌려말하지 말고 옆에 있어줬으면 하는 거라면 그렇다고 말하는 게 어때!”
“그럼 부탁할게. 옆에 있어 다오.”

진지하게 말하는 남자에게 소녀는 순간 다른 말을 뱉을 수 없었다. 나시아스를 비롯한 기사들도 멍하니 정신 빠진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게 아니면 무릎이라도 꿇고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냐?”

소녀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에게 그런 짓을 시킬 수는 없었다.

“리, 나에겐 더 이상 선택의 자유도 없다. 코랄을 되찾고 왕권을 수복하는 것말고는 다른 길이 없어. 지금에 와서는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네가 있어주었으면 하는 거다. 신하로서가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친구로서의 힘을 빌려다오. 애시당초 너는 나의 목숨을 세 번이나 구해주었는데 나는 아직 그 은혜에 아무런 보답을 해주지 못했단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뭘 하면 좋을지 네가 명령해 줘도 좋을 정도야.”

“.......”
“나는 이 이상의 신하는 필요 없어. 왕좌에서 쫓겨났다고는 해도 충실한 부하들이 나에게는 이렇게 많이 있다. 그들은 페르젠을 쓰러뜨리기 위해 나에게 힘을 빌려주겠지. 하지만 말이다 리. 어렸을 때처럼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건 이젠 단 한 명도 없어. 예전의 친구들은 모두 나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설사 개인적인 자리에서도 폐하라든가 국왕이라든가 하고 딱딱한 태도를 결코 버리지 않아. 아버지도 그럴 정도다. 한 사람 정도는 월이라고 그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단 말이다. 너에게 그런 걸 바라면 안 되는 거냐?”

소녀는 잠시 동안 가만히 곱씹고 있었다. 남자도 조용히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소녀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임금님인 로우 델핀 같은 사람은 몰라.”
“그래.”
“지금까지처럼 소리 지르기도 하고 열내기도 하고 그런다?”
“꼭 그렇게 해줘.”

머리 하나 이상 키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은 서로의 눈과 눈을 들여다보고는 동시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로 이상한 왕이야.”
“칭찬하는 걸로 들어줄게. 와주겠지?”

소녀는 끄덕이고는 아연해하고 있는 기사단 일동에게 눈길을 주었다. 불쌍하게도 눈앞의 광경이 절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다사다난할 앞날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아 소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떻게 되든 난 모르니까 말야.”
“신경 안 쓴다. 만약 너한테 신분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한다면 그래. 내가 적당한 신분을 주면되지. 모두가 납득해서 네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의 신분을 말이다.”
“맘대로 그런 아전인수격인 행동을.”
“왕이라는 건 그런 것만큼은 편리한 거야. 그래. 아예 델피니아 왕녀인 그린디에타 라덴이라고하는 건 어때?”

녹색의 눈동자가 똥그래졌다.

“뭐라고?”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발상이 마음에 들은 듯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내 생각이지만 좋군. 그렇게 하면 민중들도 귀족들도 너를 도외시하지 못할 거야. 싫어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거지. 나는 지금까지 독신이었고 아이도 없는데다가 왕국의 계승자는 반드시 필요한 거니까 그렇게 하자.”
“그렇게 하자 라니 잠깐.... 월!”

몇 번이나 끄덕이면서 발걸음을 돌려 요새로 향하는 남자의 뒤를 소녀는 황급히 쫓아갔다.

“잠깐 기다리라니깐! 농담이 아냐 그런 거!”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웃으면서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뒤에 남겨져 있던 라모나 기사단은 얼이 빠진 채 주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월! 이봐! 임금님이 그런 막 나가는 소리를 하면 안 되잖아!”

숨가쁘게 쫓아온 소녀에게 남자는 그제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안 되는 건가?”
“당연하지! 대체 왕자이건 왕녀이건 갑자기 그렇게 튀어나올 수 있을 거 같냐!”
“그건 아니야. 이미 몇 대인가 전의 왕은 사랑하던 평민의 소녀를 그대로는 신분이 맞지 않는다 하는 바람에 일단 귀족의 양녀로서 들었다가 왕비로 맞았다는 상식을 넘는 짓을 한 일도 있고 그 전에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 것을 걱정한 왕이 친척의 아이를 양자로서 입양했다는 사실도 있어.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다고.”

다시 항의하려 하는 소녀를 제지하며 남자는 짓궂게 웃었다.

“무사히 코랄을 탈환 가능하다면의 이야기야. 지금 당장 어쩌겠다는 게 아니라고. 나는 말이다. 그때까지 네 활약에 따라서는 틀림없이 내가 가만히 있어도 모두가 너에 대해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 참내.”

소녀 쪽이 피곤한 듯 기가 막힌 표정이 되었다.

“어차피 나는 제대로 된 왕이 아니니까 말이다. 포기해 달랄 수밖에.”

남자는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나도 이 검에 맹세하지. 코랄을 되찾게 되면 그 때엔 너에게 누구라도 존경하고 나에 대해서 어떤 말을 사용하던 처벌하지 않을 정도의 지위를 주겠다고.”
“필요없다고 하잖아. 그래서야 내가 지위가 탐나서 네 편을 들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고.”
“네가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단순히 내 기분 문제야.”

이때 남겨져 있던 기사들이 겨우 경악에서 벗어나 황급히 주군의 뒤를 쫓아왔다.

“폐하!”
“나시아스 들은 바대로다. 나는 이 소녀를 친구로서 대우할 것이다. 너희들이 어떻게 생각하던 그건 자유지만 나에 대한 태도나 말투에 일일이 주문하지 말도록. 화나면 무서운 아이니까.”
“아니 하지만....”

기사단장은 단순히 놀라고 있는 듯 했지만 다른 기사들은 명백하게 떫은 표정으로 그래서야 아랫것들에 대한 기준이 되어주지 못한다고 너도나도 말했다. 남자는 이런 항의에 고개를 모로 하며

“역시나 왕녀라고 하는 걸로 해둘까.”

라고 말하자 숨돌릴 틈도 없이 소녀가 말했다.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럴까.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보지만.”
“맞을래?”

이 협박을 들은 기사단 일동은 오싹하고 몸을 떨고 말았다. 그러나 남자는 기분이 나쁜 기색도 없이 오히려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알았다 알았어. 어쨌든 코랄을 되찾고 나서 생각하자.”

웃으면서 소녀를 데리고 요새의 다리를 건넜다. 들어가자마자 있는 것은 광장이었다. 그 광장을 감싸듯 몇 개인가의 건물이 드문드문 위치하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마구간이 있었다. 그 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것은 가축을 키우는 작은 집인 듯 했다. 정면보다 약간 우측에는 탑이 달린 훌륭한 건물이 있고 그것이 요새의 중심인 듯 했다. 그곳에서 지붕이 이어진 복도가 뻗어 나와 오른쪽의 건물에 이어져 있었다. 이 건물은 일층으로 입구는 구멍이 뚫려있을 뿐이었다. 부엌인 듯 했다. 안에서는 젊은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외에도 병참 같은 건물, 예배당 같은 건물이 넓은 부지 안에 정연히 늘어서 있었다. 이 요새는 깔끔한 사각형이 아니라 불규칙한 다각형을 그리고 있는 듯 했다.

“윈저성과는 완전 틀리네.”

소녀가 놀란 듯 말했을 정도였다. 윈저성은 정방형의 건물이었다. 내부에 이런 빈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우선은 그거야. 윈저성과는 달라서 이 비르그나에서는 우선 물의 확보가 문제가 되지.”

남자가 가리킨 오른쪽에는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

“이 광장은 마장馬場도 될 뿐 아니라 기사들의 수련장도 된다. 무엇보다 위급시에는 근처의 농민들이 이곳으로 피난해 오지.”
“아아 그런 거군.”

소녀는 납득한 듯 끄덕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제대로 된 기사단이 있으면 위험한 일 같은건 안 생기는 거 아냐?”

이것에는 두 사람의 뒤에서 쫓아오고 있던 나시아스가 어흠하고 환기하여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야. 바다에서는 멀리 떨어진 비르그나이지만 드물게 해적이 마을을 습격하는 일도 있으니까.”
“해적이 있어?”

소녀는 약간 눈을 크게 뜨며 연령도 체중도 두 배는 될 것 같은 기사단장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자기 소개를 아직 하지 않았군. 그린디에타 라덴, 리라고 불러.”
“라모나 기사단장 나시아스다.”

어쩌다보니 통성명을 나누었지만 뭐라 할 수 없는 표정이 된 나시아스였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결코 석연치 않은 표정들이 되어 있는 가운데 남자와 소녀는 요새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국왕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비르그나였지만 극비를 요구하는 이상 화려한 연회 같은 것은 열리지 않았다. 단장 나시아스를 비롯하여 제한된 인원수였지만 그날 밤 국왕과 식사를 함께 하며 코랄 탈환의 방책을 비밀리에 검토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소녀가 당연하다는 듯 섞여 있었다.

남자는 자라고 말하지 않았고 소녀 쪽도 화제에서 떨어져 있을 생각은 없었다. 여기까지 오자 단장인 나시아스만은 평연함을 유지했지만 다른 주요한 기사들은 여전히 껄끄러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런 것은 모두 잊어버렸다. 문제가 너무나 중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뭐라 해도 일만 명의 근위병단. 이것이 큽니다. 본래라면 폐하의 관할에 들어가 있어야 할 병력입니다만 페르젠의 직속이 되어있는 상태로서 이것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코랄 탈환은 아무래도...”
“하지만 비르그나를 뒤에 하고 있어도 일만의 근위병단을 상대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믿을 수 있는 딜레든 기사단은 발로님을 인질로 붙잡혀있기 때문에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수 없고 또한 핸드릭 백작, 아누아 후작, 도라 장군 등의 가신들도 주인에게 만일의 사태가 있어서야 움직임을 비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기댈만한 건 지방영주들이라는 게 되겠군.”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어떤 영주도 지금은 앞으로 나서서 페르젠에게 반기를 들 용기는 없는 듯 합니다만 폐하께서 돌아온신 것을 밝혀 폐하야말로 정당한 델피니아의 국왕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면 그들의 생각도 변하겠지요.”
“흐음, 하지만 말이다. 나는 선대 국왕이 남기신 자손들의 암살을 기도한 악인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말이야.”

이 의견에는 나시아스를 시작으로 한 기사들이 열심히 반론했다.

“분명 페르젠은 그렇게 주장하여 폐하의 명예를 훼손하려 꾸몄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임을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현재의 개혁파를 자칭하는 자들의 행위 자체가 폐하의 결백을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소녀가 감탄한 듯이 말했다.

“상황은 너한테 유리한 것 같은데.”
“그렇군. 최소한 사람들의 심중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말이야.”
“잘 됐잖아. 이젠 아예 똑바로 코랄을 향하는 건 어때. 이곳에 국왕이 있다 하고 소리 높여 진군하는 것만으로도 코랄에 닿을때엔 이 삼천의 군대가 만들어져 있는 거 아니야?”
“나도 그건 생각해 봤다. 하지만 말이다. 섣불리 접근하면 페르젠이 어떤 수단으로 나올지 알 수 없어.”
“페르난 백작 말이야?”
“그래. 더욱이 백작은 내게 방해가 될 정도라면 죽음을 선택할 사람이라니까 말이야.”

남자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소녀는 조금 생각하더니 코랄성의 구조에 대해 물었다.

“코랄 성은 옆에서 보면 제법 경사면 위쪽으로 세워져 있다. 좀 더 낮은 곳은 시가지 좀더 높은 곳은 이미 산맥 안쪽이다.”
“산의 중간부분에서부터 산기슭을 따라 만들어져 있다는 거네. 계단이 잔뜩 있겠군.”
“그렇지도 않아. 땅을 고르는 것도 만전을 기해놓았고 경사도 완만하니까. 뭐어 계단이 많은 건 분명하지만 문제는 그 입지다. 왕궁의 뒤쪽에는 갑자기 경사가 심해지는 파키라 산맥이 벽을 이루고 있지. 자세가 험할 뿐 아니라 늑대가 대량 서식하고 있으니까. 넘어가는 것은 우선 무리다.”
“수호에는 딱 좋다는 거군. 뒤쪽에서가 안 된다면 정면은?”
“더욱 안 좋아. 그 성은 정면도 측면도 삼중구조로 되어 있어.”

남자는 간단한 그림을 그리며

“가장 외측에 있는 대수문大手門. 시가지와 성과의 경계다. 그 다음이 곽문廓門, 가장 위에 있는 것이 정문.”

이라고 말했다.

“문은 전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어?”
“그래. 즉 외벽을 통하면서 성의 중심에 닿을 때까지 두 개의 관문이 있는 것과 같은 거다.”

남자는 설명을 계속하면서

“대수문에서 곽문까지의 사이를 3곽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곳에는 병참, 마장, 가축실, 식량저장고 등이 드문드문 있지. 곽문에서 정문까지가 2곽, 가신들의 집 외에도 무기고 물론 병참도 있지. 정문 안이 1곽으로 왕성의 최상부분이기도 하면서 중심이기도 하지. 집무실을 비롯하여 본궁에 보물창고, 왕족을 위해 만들어진 몇 개이 별궁, 원로원, 예배당 등이 있다.”
“그렇다면 꽤 크겠네.”
“물론이지. 코랄 시 전체의 삼분의 일을 점유하고 있어.”
“사람의 출입은 어떻게 되어있어? 일반시민이 성 안에서까지 들어갈 수 있는 거야?”

“감곽까지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아. 대수문을 시민이 통과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외벽에는 그 외에도 네 개의 통용문이 만들어져 있으니까 말이야. 낮에는 모두 마음놓고 드나들 수 있지. 병사들의 가족이 물건을 들고 오거나 무언가 곤란한 일이 일어났을때의 진정소도 삼곽에 있으니까. 그러나 웬만해서는 곽문을 통과할 수 없어. 더욱이 정문이라면... 대단한 이유가 없다면 무리겠지.”
“대단한 이유인가.”

소녀는 고민스러운 얼굴로 끄덕이면서

“백작이 붙잡혀 있는 건 어느 근처라고 생각해?”

라고 물었다.

“틀림없이 일곽의 북쪽 탑일 거다.”
“껄로 다른 장군이나 후작은 자신의 집에 즉 이고가에 갇혀 있다는 거군.”
“아마도.”

소녀도 남자도 생각에 잠겨 버렸다. 함부로 공격해 들어가면 그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렇다고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회담에 참가하고 있던 나시아스도 심각한 사태에 어려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저희들이 코랄에의 진군을 지금까지 생각만 하고 그만두었던 것도 그것이 원인입니다. 아마도 페르젠은 암묵적으로 딜레든 기사단장 외에도 중진들의 목숨을 방패로 삼을 거라 생각됩니다.”

또 한사람의 기사가 역시 분하다는 듯 말했다.

“저희들 중 희생을 두려워하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 라모나 기사단이 전력을 다해 공격해 들어간다면 상대가 근위병단이라 해도 대등한 승부도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예상 피해는 거대하고 더욱이 다수의 피를 흘린 결과 외려 승리를 거두었다 해도 그런분들의 생명을 잃는 일이 된다 하면...”
“의미가 없겠네.”

소녀가 말했다.

“코랄을 되찾는다 해도 수도는 반파, 아군이 전멸이라면 월은 벌거벗은 임금님이지.”

나시아스의 부드러운 얼굴에도 이정도 되자 괴로운 표정이 떠올랐고 그 옆에 있던 부관 같은 강건한 기사가 그야말로 얼굴을 붉히며 몸을 내밀었다.

“이봐라 꼬마.”
“뭐야 어른.”
“어른이 아니야. 가렌스다!”
“리야, 가렌스.”

양손을 움켜쥔 가렌스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가 후의를 내리신다면 어쩔 수 없다. 나는 그에 따른다. 너에 대해서도 행동의 자유를 보장하지. 하지만 어디 송구스럽게도 폐하를 그러니까 존명으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지 않나.”
“가렌스,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거야.”

진지한 얼굴로 말한 소녀에게 가렌스는 떨리는 손을 자신의 머리카락에 거칠게 집어넣었다. 그 옆에서는 기사단장이 아무래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런 상대를 소녀는 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기 말야. 날 여자아이라고 생각하니까 열 받는 거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쪽이 좋지 않을까?”

너무나 친절하고 정중한 소녀의 의견에 두 사람 다 이번엔 어깨를 늘어뜨렸다. 역시나 먼저 회복한 것은 라모나 기사단장 쪽이었다. 나시아스는 상당한 미남자로 멋을 부리는 자이기도 했다. 의복도 머리카락도 잘 손질되어 있고 아마도 감정의 흐트러짐이나 받은 충격을 그대로 밖으로 내보이는 것에는 저항을 느끼는 종류의 인간인 듯 했다.

“그럼 묻겠는데 너는 어째서 코랄 탈환에 반대하는 거지?”
“오해하지마. 강경한 수단 쪽을 반대하는 거야.”
“어째서?”

상냥하게 재미있다는 듯 묻는 나시아스였다. 어린아이를 달랠 때의 어른의 얼굴이었다. 소녀는 그것을 눈치챘는지 어쨌는지 일부러 더 어린아이 같은 말투가 되었다.

“그럴 것이 성에 잡혀 있는 건 갑자기 시골에서 떨어져 내려온 사생아 임금님한테 충성을 맹세할 정도의 귀중한 인물들이잖아? 어떤 의미에선 굉장히 사람 좋은 거지만.”

나중에야 가렌스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버릴 뻔했다고 친한 친구에게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 뒷사정을 알고 있는 건지 어떤지 소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거꾸로 말하면 사실은 보는 눈이 있는 사람들이야. 페르젠에게 따르는 쪽이 안전하고 득이 많은 데도 월 쪽이 몇 배나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어. 즉 델피니아의 재건에는 아무래도 그 사람들이 필요하게 될 거야. 죽게 놔둘 수는 없어.”

나시아스는 약간 눈썹을 올리며 가벼운 놀라움을 표시했다.

“너는 벌써 코랄을 되찾은 뒤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당연하잖아.”
“꼬맹이 계집애가. 무슨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가렌스가 거친 목소리로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는 거냐. 적은 정예로만 모아둔 일만의 근위병단이다. 그것도 중앙의 진주라고 일컬어지는 코랄이다. 자칫하면 반 년이나 일년은 가볍게 농성할 수 있는 곳이란 말이다.”

라고 말했다.

“어라? 비르그나의 전력이라면 그 근위병단과 호각으로 싸울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

가렌스는 움찔 말을 멈췄다. 소녀는 빙긋 웃었다.

“정면으로 부딪히라는 소리는 아니야. 코랄을 상처 입혀서야 아무런 의미도 없어. 간단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고. 하지만 말야 여기에 제대로 진짜 임금님이 있는 이상 왕관을 씌워 주는게 도리라는 거잖아.”

예의 임금님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녀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거 황송하군.”
“별 말씀을. 추가로 말하자면 씌워주는 것만으론 안돼. 중요한 건 그 다음이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돼. 누구든지 월이 진짜 왕이라고 인정하고 우러러 보게 하지 않으면 안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제2 제3의 페르젠이 나올 거야. 그걸 위해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새허도 성에 잡혀 있는 사람들의 협력은 절대 필요할 거야. 안 그래?”

틀리지 않다. 소녀는 아연한 상태의 가렌스를 옆 눈으로 보며 월을 향해 말했다.

“국왕군의 결성은 내버려둔다 해도 어쨌든 상태를 보러 코랄까지 가보면 어떨까? 뭐하면 내가 마을 아인 것처럼 해서 가봐도 좋아.”

남자는 입가만 올려 약간 웃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갑자기 대군을 이끌고 가는 것은 나도 어떨까 싶다. 근위병단에 확실하게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이 모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더욱 그렇지. 지금의 코랄의 상태를 우선 확인하고 싶군.”
“그럼 내일 당장 코랄을 향해 출발하자. 어떡할래? 너랑 나랑해서 둘이만 갈가?”
“아니 폐하. 그것은....”

아무리 나시아스래도 말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눈에 띄지 않게 코랄까지 접근한다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사람수는 적은 쪽이 좋다. 하짐나 국왕의 곁에 있는 것이 이 소녀 한 명뿐이라고 한다면 승복할 수 없는 사태였다.

“제발 저희 기사단 중에서 최소한 일개 소대라고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코랄에 가까이 가면 폐하의 용안을 아는 자들도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 의해 페르젠의 귀에 들어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폐하의 옥체를 지키기 위해서도 호위대는 필요합니다.”
“그건 상관없지만.”

남자는 말하면서 곤란한 표정으로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건 상관없지만 이 기사단에 나보다 강한 검사가 몇 명이나 있을까?”

가렌스가 그야말로 튀어 올랐다.

“네 이놈, 꼬마 계집애가! 폐하의 어전이라 참고 또 참았지만 이젠 못참는다! 그 근성을 뿌리채 두들겨 주마!”
“정말 모두 짠 것처럼 똑같은 소리를 하네.”

소녀는 웃고 있었다.

“이래서 내가 너를 쓰러뜨리고 나면 역시 모두가 짠 것처럼 ‘이건 인간이 아니야’ 라고 합창할 거야.”
“누가 그런 소리를 할 것 같으냐! 에에이, 이런 입만 살아잇는 꼬맹이 주제에!”
“그럼 가렌스 내기하자.”
“뭐라고!”
“하나하나 소리지르지 마. 머리가 울려. 오늘은 벌써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 너랑 나랑 시합을 하자.”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소리치고 있던 가렌스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시합이라니 무슨?”
“당연히 검 시합이지.”
“뭐라고오?”

덩치좋은 사내인 가렌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을 것 같은 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라. 너 같은 꼬마애를 상대로 검을 향할수 있을 것 같으냐.”
“아니 해 봐주지 그래.”

그렇게 말한 것은 아까부터 구경만 하고 있던 델피니아 국왕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가렌스. 미안하지만 나는 그 소녀 쪽의 승리에 걸겠어.”
“폐하!”

이것에는 무척이나 상처받은 표정이 된 가렌스였다. 추가로 얼굴이 새빨개진 것은 꽤나 분하고 한심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그것은 지나친 말씀입니다. 폐하는 폐하께서는 이 가렌스를 그 정도로 멸시하시고 가볍게 여기고 계셨단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인 상태였다.

“무슨 그런 말을. 나시아스 다음으로 라모나 기사단에서 용맹을 떨치는 투사의 이름을 어떻게 내가 그 정도로 가볍게 취급하겠는가. 그대의 무용도 그 충성도 한 점이라도 의심할 정도라면 왕관 따위는 던져버리는 쪽이 훨씬 낫다.”

최대급의 찬사가 내려지자 거한의 전사는 온 얼굴이 환희에 가득 차 감동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가렌스. 그대의 무용도 상대가 인간이 아니어서야 운이 나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말보다 증거겠지. 내일 검을 겨뤄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 소녀는 그야말로 승리의 여신의 화신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자다. 약간 외모적인 면에서 너무 뛰어나다는 것만 제외한다면의 이야기지만.”

이것에는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이쪽의 승리의 여신은 별로 미인이 아닌 거야?”

대답하는 남자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살며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굉장한 추녀야. 그것도 굉장한 질투심의 소유자라 남편인 발도우도 꼼짝 못할 정도의 여신이지.”
“우헤.”

소녀는 목을 움츠렸다.

“이상한 여신님이네. 그래서야 숭배할 가치가 없는 거 아냐?”
“음. 다시 말해 승리라는 것은 발도우를 믿고 전력을 다하면 자연스럽게 미소지어준다는 그런 사고방식에서 온 것 같다. 처음부터 승리만 쳐다보면 성격 나쁜 여신이기 때문에 그쪽을 외면해 버린다는 거지.”
“하항. 이것저것 큰일이네.”

진심으로 말하는 소녀에게 남자는 쓴웃음을 금하지 못했다.

“나시아스, 괜찮다면 이 소녀와 둘이서만 코랄로 향하고 싶다. 물론 그럴 필요가 있다면 라모나 기사단의 힘을 빌리는데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지금 군대를 이끌고 접근하게 되면 페르젠이 방어를 강화하고 인질의 목숨을 방패삼아 우리들의 행동을 저지하려 하겠지. 그것만은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길게 끌면 진지가 없는 우리측이 불리하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나시아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국왕이 친히 정찰의 임무를 맡아 나서신다는 것은 전례가 없습니다. 도라 장군의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어째서 그런 일을 시켰냐고 제가 벼락을 맞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첩실 후사의 왕도 전례가 없지.”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내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 너희들의 순서는 그 다음으로 해 두지. 그 다음은 이 소녀의 실력이지만....”

나시아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폐하의 말씀대로 보통의 소녀와는 어딘지 틀린 것 같습니다. 만약 이런 모습으로 실제 가렌스를 상대할 수 있을 만한 검술을 익히고 있다고 한다면 경이적인 것입니다.”
“나시아스님. 말도 안 되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이런 꼬마에게 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가렌스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기사단장은 약간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 자네는 폐하의 말씀을 신용할 수 없다는 건가?”
“아니 그것과 이것은...”

황급히 가렌스가 말했다.

“그것과 이것은 이야기가 틀립니다.”
“뭐 좋아. 내일이 되면 알 수 있겠지. 그건 그렇고 아가씨.”
“리야 오라버니.”

살짝 미소지어버린 단장이었다.

“그렇게 불리는 것은 동생이 시집간 이래 처음이로군.”
“.......? 동생은 시집가면 오빠라고 못 부르게 되는 거야?”
“아니. 먼 곳으로 시집간 덕에 그 이후 만나지도 못하고 있어. 벌써 3년인가? 내 동생도 꽤나 말괄량이였지만 그래도 리에게는 질 것 같군.”
“그거 고맙군.”
“그래서 말인데 욕탕의 준비를 해 두었는데 어떻게 하겠어? 먼저 폐하께서 입욕하도록 하겠지만 너도 씻고 있다면 불을 끄지 않도록 해두지.”
“욕탕?”

소녀는 깜짝 놀란 듯 했다.

“아니 됐어. 물로 씻을래.”
“그건 무리일 걸.”

월이 말했다.

“이 주변에는 몸을 씻을 정도의 샘도 강도 거의 없어. 식수로 사용하는 게 겨우일 정도니까.”
“그럼 어째서 여기에 욕탕이 있는 거야?”
“폐하께서 반년만에 돌아오셨으니까다. 그 정도의 대접도 해드리지 못해서야 어떻게 하겠냐?”

기가 막히다는 듯 가렌스가 말했다. 요컨대 이곳에서 욕탕은 상당한 사치이면서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국왕이 이 소녀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는 듯하니 나시아스가 이런 제안을 한 것이리라. 하지만 소녀는 복잡기괴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 기껏 호의를 보여줬는데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그 뜨거운 물로 몸을 씻는다는 건 굉장히 거북해서 사양하고 싶지만....”
“리?”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소녀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나시아스쪽도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리. 너도 꽤 지저분해진 것 같고 씻어서 개운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욕탕을 사용해 본 일이 없는 건가?”

신분이 낮은 자라면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소녀는 아무래도 원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기분이 나쁘다구 그거. 게다가 어차피 다시 여행해서 더러워질 거구. 일부러 씻는다고 해도 의미 없잖아.”
“아냐 그건 아니라고 봐.”

남자가 짓궂게 웃으며 나섰다.

“분명 우리들 지금 상태는 지독한 상태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몸을 깨끗이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부랑자로 오인받아서는 곤란하니까 말이다.”

잽싸게 결정해버리더니 욕탕으로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싫어하고 있는 소녀의 뒷덜미를 잡아끌 듯 해서 데리고 갔던 것이다.

“자아 체념이 늦구만. 전사가 목욕을 무서워해서 어쩔 거야?”
“전사가 하나하나 몸치장에 신경 써서 어쩔 건데.”

소녀가 대꾸했지만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됐으니까 빨리 와라. 뭐하면 내가 씻어주지. 고향에서는 말이나 개를 자주 씻어줬었다고.”
“사람을 말 취급하지 말란 말야.”

그런 이야기를 투덜투덜 해대면서도 소녀는 어쩔 수 없이 남자를 따라 안내역의 기사들과 함께 방을 나서고 있었다. 주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라모나 기사단장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고 부단장은 괴로운 표정으로 그런 상관을 바라보았다.

“나시아스님 웃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부족하나마 이 비르그니에 계신 마당에 폐하께 저런 식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자를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저 꼬마에게는 조금이라도 예의라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로 그 폐하께서 괜찮다고 하시는 거야. 자네도 그렇게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지 말고 조금은 보는 눈을 바꿔보면 어떤가?”
“보는 눈이고 뭐고 성질을 돋운다는 생각뿐입니다.”
“그걸세. 애초에 머리 속에서 적의를 가진 채 바라봐서야 나쁜 인상밖에 주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나시아스는 제법 유연한 성격인 듯 감개 깊이 턱을 만지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했나 가렌스. 저 아이는 한 번도 코랄 탈환이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우리들조차도 가능할 것인가 어떤가를 이 반년 동안 몇 번이나 의논만 거듭했었는데 말이야.”

그러나 가렌스는 여전히 불쾌한 표정이었다.

“어린아이의 생각이란 그런 정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가벼운 소리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것치고는 코랄 성의 구조를 제법 열심히 묻고 있었다고 생각지 않나? 그 정도로 물어본다면 쥐꼬리만한 지혜밖에 갖지못한 자라도 숨어드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성이라는 정도는 알 수 있을 걸세.”
“나시아스님. 설마 나시아스님까지 폐하처럼 저런 꼬맹이를 믿고 전쟁을 시작하겠다 하시는 겁니까?”

가렌스는 젊은 사내가 아니었다. 사십은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고지식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검이라는 확실한 것만을 믿고 세파를 헤쳐온 자의 습성인지 아무래도 이 소녀의 가치를 볼 수 없는 듯 했다.

“나는 그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네. 폐하께서는 우리 라모나 기사단을 버린다 하더라도 그 소녀를 선택하겠다 말씀하셨지. 왕위찬탈자들을 수도에서 추방하고 다시 왕관을 받아들겠다 결의하고 계신 분이 2천의 병사보다도 한 명의 소녀를 택했다.”

그 병사들을 단장과 함께 통솔하는 입장에 있는 사나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점이 가렌스에게는 달갑지 않은 것이다.

“외람되지만 폐하가 아니셨다면...”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생각했겠지. 이 나조차 말이야.”

쉽사리 말하고는

“그러나 폐하는 진정으로 그 소녀를 동맹자로서 의지할 생각이신 듯 하네. 폐하가 그 정도까지 하시도록 만드는 무엇이 그 소녀에게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싶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델피니아 국왕의 신하이니까. 폐하가 믿고 계신 것을 믿지 못해서야 곤란하다.”
“나시아스님....”

가렌스는 아직도 기가 막힌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드디어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명령이시라면 어쩔 수 없지만 정말로 제게 그 소녀와 싸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폐하의 의지라네. 나도 어떻게 될지 알고 싶기도 하고 말이야.”

나시아스는 진지한 얼굴이 되어

“가렌스 어찌됐던 폐하는 무사히 돌아오셨네. 그 내란의 밤, 오로지 혼자서 파키라를 넘어가신 이래 묘연히 행방을 알 수 없었던 분이 말이야.”
“예, 다행히 무사하셔서...”

가렌스의 목소리에는 감개무량의 울림이 섞여 있었다. 나시아스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옅은 물색 눈동자에 깊은 감동과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뇌의 색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이 반년간 델피니아 최후의 국왕이 늑대에게 습격당하는 악몽을 몇 번 보았는지 알 수 없다. 폐하를 돕는 것도 못한 채 부끄럽게도 코랄을 빼앗기고 게다가 발로를 비롯한 델피니아의 충신들을 구하지도 못하고 유유낙낙하게 페르젠의 주장에 따르는 굴욕을 강요당하고... 아니 내 경우 따위보다 지금 현재 저 발로가 완고한 페르난 백작, 도라 장군 일행이 어떤 굴욕을 받으면서 지내고 있을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끓는다네.”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아니 최소한 폐하가 무사하시기만 하다면 하고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고말고. 폐하는 돌아오셨네. 그것도 승리의 여신과 함께말이야.”
“나시아스님!”

충실한 부하의 항읠르 나시아스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넘겼다.

“나는 믿고 싶은 걸세. 진실된 왕에게는 왕관을 씌워져야 마땅하다고 잘라 말했던 그것도 조금의 두려운 기색도 없이 진심으로 코랄을 탈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저 소녀를 말이야. 만약 그것이 진정 이룰 수 있는 일이라면... 만약 그것을 저 소녀는 할 수 있다 한다면.”

나시아스는 거기에서 말을 끊었다.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포기하고 있던 차였다. 연하의 맹우는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오지만 왕궁내의 사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문구를 볼 때마다 개혁파의 눈이 이런 곳까지 닿아있는 것인가 하고 분노와 초조함을 동시에 느꼈다. 비밀리에 권유를 보내보아도 각지의 영주들은 일만의 근위병단에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보증이 없는 한 참여할 기색은 보여주지 않았다. 왕족도 아닌 일개 기사단장의 제언이어서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젠 무리인가 이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고 절망하고 있던 때에 그들은 나타났다. 그것도 지극히 명랑하게 당연하다는 듯 코랄을 향한다고 말했다.

“나는 믿고 싶다.”

다시 한번 라모나 기사단장은 말했다.


그 즈음 요새의 목욕탕에서는 두 사람이 말 그대로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곳의 욕탕은 한증식으로 되어 있었다. 더운물을 부글부글 끓여 그 수증기가 보내지는 나무로 된 작은 방에 들어앉아 땀과 함께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다. 소녀는 보자마자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곳에서도 남자에게 끌려서 투덜대면서도 한증막에 들어갔던 것이다. 욕탕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 땀을 흘리기 위한 한증막과 물을 끼얹어 몸을 씻을 수 있는 세면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증막 아래에는 커다란 병이 있어 계속해서 뜨거운 물이 보내져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의 준비를 하는 데에는 우물에서 물을 날라오는 사람들, 불을 지피는 사람들, 합쳐서 네 명은 필요한 것이니 분명 커다란 사치였다.

“어때. 더러운 게 깨끗이 씻겨 나가지.”

세면장 쪽에 있던 남자가 한증막 안으로 말을 걸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막에는 두 사람이 같이 들어가도 충분할 공간이 있었지만 자욱하게 수증기가 가득 차서 상당한 온도가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소녀가 여기까지 들고 들어온 검을 어찌 해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아무래도 들고 들어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소녀는 그 어수선한 도구를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놔둘 생각은 절대 없는 듯 했다.

“여긴 안전한 데다 별로 검을 들고 목욕탕에 들어올 필요도 없잖아.”

그렇게 남자가 말했지만 소녀는 그런 남자에게 오히려 기가 막히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게 자유전사가 할 말이냐.”

라는 것이다.

“넌 벌써 임금님 직업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자기 목숨을 지킬 필요도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어디든지 만약의 경우엔 즉시 검을 뽑아들 수 있는 상태로 있을 필요가 있어. 그 검이 내 명줄인 건데 생전 알도 보도 못한 상대에게 맡겨놓고 태평스럽게 목욕 같은걸 할 수 있을 것 같냐.”

라고 말한 것이다. 남자도 반론은 하지 않았다. 쓴웃음을 짓고 자신도 일단 뇌두었던 검을 들어 올렸다.

“네가 말한 대로 나도 지금은 자유전사이니까. 코랄을 되찾을때까지는 내 몸은 내가 지킬 필요가 있지.”

그래서 교대로 땀을 흘리기로 하고 남자는 지금 소녀의 검을 맡아둔채 세면장에 있는 것이다.

“안되겠다. 찜구이가 되어버릴 것 같아.”

진이 빠진 얼굴의 소녀가 나타나 남자와 교대했다. 나시아스는 두 사람이 각각 입욕하도록 할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그만큼 시간이 걸리게 된다. 필요한 물의 양도 두 배가 된다.“
“비경제적이지.”
“맞는 말이다.”

이런 논의로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한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깔끔히 옷을 벗어버리고 멀쩡한 얼굴로 욕탕에 들어간 것이지만 부지런히 물을 나르던 시동들이 이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 버렸던 것이다.

“설마 너네 고향에서는 말이나 개도 이렇게 목욕탕에 집어넣는건 아니겠지.”

때밀이 수건으로 몸을 문지르면서 한증막 안의 남자에게 말을 걸자 커다란 웃음소리가 욕탕 안에 울렸다.

“그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동물이 불쌍하잖아. 제대로 물로 씻겨 줬었어.”
“나도 그런 게 좋다는 건데.”

세면장도 수증기가 흘러 들어와 꽤나 덥다. 한증막 안쪽에서 꽉 막힌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이런 욕탕은 몸에도 좋다고. 오래된 피가 씻겨 나가고 새로운 피가 돌기 시작해. 내 고향에서는 아팠던 사람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도 썼었지.”
“농담이 아냐. 오히려 병이 심해질 거다.”

소녀에게는 그런 식의 고마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듯 했다. 잽싸게 몸을 닦고 물을 뿌리고 남자의 검과 자신의 검을 끌어안은 채 욕탕에서 뛰어나갔다.

“저 저기, 여보세요 갈아입을 옷을....”

소녀와 동년배 정도의 소년이 당황하여 마로 만들어진 옷을 내밀었다.

“필요없다니까. 정말 푹푹 쪄서...”
“하지만 저기,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니시는 것은 그러니까...”

소년은 새빨간 얼굴로 안절부절하며 말했다.

“왜?”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녀였다. 세면장에 나온 남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해주었다.

“리. 그 아이를 곤할하게 하지 마라. 이 기사단령에는 남자들뿐이라고. 가릴 곳은 가려 줘.”
“아 그런가.”

전라의 상태로 뛰어 나갔던 소녀는 깨달았다는 듯 끄덕이고는 옷을 받아들었다.

“여자아이란 이것저것 귀찮구나. 하지만 월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인데. 이상하잖아.”
“나한테는 네가 여자로 안보일 뿐이야.”
“좋은 취미네. 웬만하면 모두들 그래주면 좋겠는데 말야.”

불평을 늘어놓으며 흠뻑 젖은 머리를 묶고 머리에서부터 옷을 뒤집어썼다. 흘러내린 금발과 방금 목욕을 끝낸 피부에 기사 견습생 소년은 아까부터 새빨개져 있었다.

“저 그러면 폐하의 새 옷은 이쪽에 놓아두고 물러가겠사오니 달리 시킬 일이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당황하여 총총히 물러났다. 소녀 쪽은 웃옷에 검을 찬 채로 문 밖에 나가 밤바람을 맞고 있었다. 밤도 깊어 요새 안은 조용했다. 탑의 위쪽에는 경비가 서 있는 것이 보였지만 대부분은 잠이 들어 있는 듯 했다.

“되살아났군 그래.”

소녀와 같이 씻은 몸 위에 옷을 입은 남자가 밖으로 나와 말을 걸었다.

“이상한 걸 다 좋아하네.”

질렸다는 듯이 말하고 한 손에 들고 있던 남자의 검을 건네주었다.

“성에 있는 욕탕은 좀 더 대단하다고. 뭐라 해도 헤엄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욕조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거, 그 안은 전부 뜨거운 물인 거야?”
“당연하지.”

무섭다는 듯이 몸을 떠는 소녀였다.

“성에 가도 절대로 그 목욕탕만은 사양할 테니까 말야.”
“그렇군. 성에는 호수도 있어. 파키라의 산에는 샘도 있고 냇물도 있다. 욕조에 들어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몸을 씻을 수는 있을거야.”

남자는 검을 한 손에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쪽의 하늘이다. 소녀도 심각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외에도 잡혀있는 사람이 잔뜩 있는 거지.”
“그래. 도라, 아누스, 핸드릭. 모두 진정으로 델피니아를 사랑하고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다. 내가 나타나기 전부터 페르젠의 방식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이지.”
“예전부터?”
“그래. 왕자공주가 모두 죽은 뒤부터 페르젠은 왕궁의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었으니까. 핸드릭 같은 경우는 페르젠 후작은 델피니아의 지배자가 되고 싶은 모양이라고, 야유하듯 말하고 있던 듯해. 그때 내가 나타난 것이니까 그들이 나를 편들어 페르젠에 대항할 태세를 굳힌 것도 당연하겠지.”

녹색 눈동자가 휘릭 움직였다.

“그럼 뭐야? 그 사람들은 단순히 페르젠이 세력을 늘려가는 게 달갑지 않으니까 너한테 붙었다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면 그들은 내 쪽의 상황이 나빠졌을 때 나를 버리는 것도 가능했을 터야. 페르젠은 가짜왕으로부터 델피니아의 해방을 제창하여 병사를 일으킨 것이었고 자신에게 항복하는 자들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수하에 두겠다고 방침을 취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페르젠에게 구속되어 있지.”

남자는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겠지. 안그래?”
“그러네.”

소녀도 끄덕이고 남자를 보며 웃었다.

“너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왕이지만 진짜 아군만큼은 꽤나 갖고 있는 것 같네.”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지. 나도 의외였어.”

차분이 말했지만 남자의 눈에는 감동의 빛이 어려 있었다. 아직 머나먼 목적지에는 자신을 기다려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고 돌아갈 의의가 있었다.

“자 슬슬 자도록 할까. 내일은 코랄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 전에 가렌스와 대결이야.”

그들의 침상은 시동들이 정리해 둔 듯 했다. 바로 옆방으로 각각 주어진 방으로 그들은 들어가 각각 내일의 일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8장
대화삼국의 하나로 중앙의 진주라고 불리는 델피니아의 수도 코랄은 유통도시로서도 문화도시로서도 대륙에서도 견줄 곳이 없는 도시였다. 파라스트의 아비용은 문화 수준은 떨어지지 않지만 교역을 하기에는 약간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고 탄가의 케이파드를 보자면 로쉐 가조의 종점, 중앙에서 떨어진 위치에 해당하므로 어차피 코랄에 견줄 곳은되지 못했다.

토레니아 항을 감싸는 싯사스 항구는 항해의 계절이라면 언제나 외국 국적의 배들로 넘쳐났고 각지의 신기한 물품이나 생산품이 성황리에 거래되고 있었다. 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고 상하수 설비도 구석까지 펼쳐져 시민은 공공의 배수장에서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생활용수를 길 수가 있었다. 신분이 높은 귀족의 저택에는 배관이 설치되어 집에 있으면서도 마실 물에 부족함을 느끼지도 않고 시시때때로 더운물을 사용한 욕실에 휴식을 취하는 것도 가능했다.

왕궁 내는 특히 더 훌륭했다. 오랜 세월 동안 살기 좋고 쾌적하게 개량을 계속한 결과 지금은 왕궁만으로 하나의 도시처럼 되어 있따. 한눈에는 우아하게 하얀 자태를 산중턱에 얹어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코랄 성이지만 실제로는 라모나 기사단이 체념한 것처럼 반년이나 1년 정도는 간단하게 농성을 할 수 있는 요새였다. 태양이 저물어도 각소에 설치된 보오하불이 밝게 그 모습을 비추어 코랄 전역을 바라보며 위용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자금 완전히 해가 진 성의 최상부분, 본궁의 최심부에서 약간은 때에 벗어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설마 그 남자가 무사히 돌아오리라고는. 이건 좀 곤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뚱뚱하게 살찐 얼굴을 고민스럽게 일그러뜨린 채 말한 것은 제나 제사장, 페르젠 후작과 함께 개혁파의 중심인물이었다.

“윈저에 끌어들여 놓고도 놓치다니 다르 경도 말만 앞서는 자로군.”

경멸의 울림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말한 것은 근위병단을 부하로 두고 있는 상그 사령관. 불그스레한 얼굴의 억세고 힘이 세 보이는 거한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될까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남자의 목소리지만 묘하게 상냥하고 비위를 맞추는 듯한 목소리였다. 타뮤 남작이 아들 치폰, 아직 20대 중반의 젊은이였다. 남작의 가문은 적당히 마구 만들어진 거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지만 타뮤 남작은 지금은 국내의 귀족을 총괄하는 입장에 있다. 치폰은 그 후계자로 이 중요회의에도 출석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는 그 외에도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델피니아를 가짜왕으로부터 해방시켜야한다며 목소리를 높여 민중을 선동하여 왕궁을 점거한 주모자들이었다. 그런 만큼 ‘그 남자’의 귀환에 긴장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 안 된다면 발로님의 즉위를 서두르는 쪽이 좋지 않을런지요. 그렇게 한다면 그 남자가 돌아와 나타난다고 해도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게 되니까요.”

라고 제나 제사장이 말했다. 찬성하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나왔지만 단 한 명, 부드럽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지금 서둘러 왕위교환의 암시를 주게 된다면 도리어 민심을 자극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일제히 그 사람을 향했다.

“하지만 후작.”

제나 제사장이 불만스러운 얼굴이 된다. 개혁파의 필두에 서는 페르젠 후작이 어째서 이 제안을 반대하는 것이냐고 말하고 싶은 듯 했다. 페르젠 후작은 오십대 전후로 보였다. 하얗게 세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자르고 보기 좋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젊을때부터 문무겸비를 신조로 하는 남자인 만큼 단단해 보이는 커다란 체구는 지금도 쇠약해 보이지 않았다.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임은 물론 인품도 온후하고 교제에도 능했다. 실제로 주장이 서로 다른 개혁파를 통제하고 있는 것은 이 사람의 힘인 것이다. 그 후작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발로님 쪽은 어떻게든 됩니다. 일단은 그 남자의 행방을 찾는 일입니다만. 윈저에서 도망쳤다고 하면 자연히 알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라고 하시면?”

상그 사령관이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반쯤은 바보 취급하는 듯한 웃음을 보인 것은 치폰이었다.

“이런 이런. 곤란하군요. 사령관님께서는 그 정도의 일도 알 수 없으신 겁니까?”

무뚝뚝하게 사령관은 입을 다물었다. 회의의 참가자들 중에서도 가장 젊은 치폰을 보는 눈에는 어딘가 증오의 빛마저도 있었다. 그런 거한이 우스운 것인지 아니면 이쪽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치폰은 일부러 놀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 남자는 지금도 자신이 국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니 당연히 코랄을 되찾으려고 계획하고 돌아온 것이겠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먼저 군대를 모으려고 할 터입니다. 자기 몸 하나만을 가지고야 이 코랄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윈저에서 지독하게 배신을 당했다고 한다면 갈만한 길 따위는 뻔히 정해져 있지요. 만약에 그 남자가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후작님에겐 의외의 일이겠죠.”

그쯤 되자 사령관도 알아챈 듯 했다. 치폰은 덧붙여 즐거운 듯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남자에게는 동정적인 데다가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속으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라모나 기사단장입니다. 어쩌면 그 남자의 말에 쉽사리 넘어가서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될 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하군. 우리 근위병단이 직접 비르그나로 향해 그 남자를 붙잡도록 하지.”

의기양양하게 말한 사령관이었지만 남은 자들은 이 제안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치폰은 분명하게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무인武人이란 자들은 이래서 안된다고 말하고 싶은 듯 했다.

“부탁드릴 테니까요 사령관님. 조금은 머리를 써 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어마어마하게 군대를 끌고 갈 때까지 그 남자가 비르그나에 가만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대로 라모나 기사단을 침묵시키면 되는 것 아니겠나?!”

울부짖듯이 말하자 이번에는 제나 제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 남자를 숨겼다는 것을 비르그나는 인정할 리가 없네. 인정하면 자신의 파멸이지. 나시아스는 그 정도 일도 모를 정도의 남자는 아니야.”

완전히 소외받은 듯한 상그 사령관은 짜증난 듯이 책상을 쳤다.

“여러분들은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그럼 그 남자가 멀쩡히 델피니아로 돌아와서 게다가 라모나 기사단을 이끌고 이 코랄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점잖게 입성시켜 주라고 말할 셈인가?”
“자아 자아 상그 사령관. 우리들은 누구도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쓸 필요가 있는 것은 틀림없지요.”

페르젠 후작이 뒤를 수습을 했다.

“문제는 말입니다. 그 방법입니다. 알겠습니까? 라모나 기사단은 딜레든 기사단과 더불어 델피니아의 자랑거리라고 할만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델피니아를 대표하는 입장에 있는 근위병단, 어느 쪽이던 용맹과감한 이름을 타국에까지 떨치고 있는 정예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양자가 무익하게 다투는 것은 바람직한 사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비르그나는 지금 현재 우리들에게 찬동의 의사를 표명하고 있으니까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 말에는 의심스러운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올라왔다. 겉보기만의 복종인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 신용해도 될 것인지.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 했다. 후작은 그런 소리를 한 손으로 제어하며 말했다.

“중요한 것은 체면 문제입니다. 근위병단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군인 비르그나를 공격해 갔다. 그런 추문에 휩싸이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정벌을 하던 싸움을 걸던 그 나름대로의 명분이란 것이 필요하게 됩니다. 게다가 조금 전 치폰 경이 말했듯 그 남자가 언제까지고 비르그나에 가만히 있으라고도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몸뚱이만 가지고 여기까지 올 것이라고?”
“글쎄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조금 더 그 남자의 행동을 기다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후작이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듯 했다. 현재 재무나 내정을 맡고 있는 중요 인물들이 이 장소에 집결해 있엇지만 모두 한결같이 초조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상그 사령관은 물론 제나 제사장, 그리고 치폰도 거기까지 안온하게 버티지는 못하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심의 변화는 명백했다.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코랄 사람들은 그들에게 정이 떨어져 국왕이 돌아오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치폰은 비꼬듯이 제사장을 바라보았다.

“하여튼 민중이라는 건 곤란한 것입니다. 처음엔 우리를 해방자라고 부르면서 칭송하기에 바쁘더니 지금은 그 남자를 원한다고 합니다. 지조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요. 신의 힘으로 천벌이라도 내주실줄 수 없을까요.”
“아쉽지만 치폰 경. 어리석은 영혼에는 백만 번의 기도보다도 한 장의 금화가 우선하는 것이야. 아무리 내가 정의를 가르치고 진실된 지도자를 따르는 행복을 가르쳐도 생활이 나빠질 뿐이고 그들은 반박하지. 물품을 주어도 대금을 받지 못하고 급료는 몇 개월이나 체납되고 최근에는 있지도 않은 빚 대신으로 아내나 딸을 빼앗겼다고 울면서 호소하는 자까지 있다네. 도대체 누구 때문에 민중이 이렇게까지 곤경에 처해 있는지 내 쪽이 알고 싶을 정도야.”

젊은 남작가의 대표는 목을 움츠렸다. 중앙의 진주, 영관과 번영의 도시 코랄의 분위기는 날이면 날마다 나빠지고 있었다. ‘그 남자’의 통치시대, 민중에 대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귀족들이 지금은 제 세상 만났다는 듯이 시민들에게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즉 그것은 귀족 계급을 관리통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타뮤 남작의 과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지요. 저희는 최소한 시민에 대해 폭력 등을 휘두르지는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어??? 분은 상당한 원한을 사고 있는 듯 합니다만?”

힐끔 바라본 쪽에는 상그 사령관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비꼼에는 사령관도 거창하게 응수해 보였다.

“지금까지 폭동 하나 일어나지 않은 것은 누가 시민을 관리하고 개혁파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서인지 치폰 경은 모르겠다고 말하는 건가?”
“천만의 말씀을. 물론 당신의 근위병단의 공적이지요 사령관님.”

하지만 힘으로서 언론통제를 했다고 해도 원래부터 자유로운 기풍의 코랄이다. 표면상으로는 조용히 참고 개혁파를 따르는 것으로 보여도 저 안으로는 어느 정도 불만의 불꽃이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을 것인지. 보이지 않는 만큼 더욱 무섭고 심각하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치폰은 무언가 생각하면서 페르젠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후작. 그 남자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만.”
“들어봅시다.”
“그 남자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자를 비르그나에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무리 그래도 페르난 백작은 어려울 듯하니까 그렇군요. 도라 장군에게 그 남자를 정벌토록 명령하는 것입니다.”
“무슨 어리석은 이야길!”

그 말에는 상그 사령관 이외의 사람들에게서도 일제히 노한 목소리가 나왔다.

“고립무원의 사자에게 일부러 원군을 보내 주자고 말하는 건가?!”

이때다 하고 말하는 사령관의 반박에도 치폰은 뻔뻔한 표정이었다.

“그렇습니다. 도라 장군이 그 남자에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습니다. 비르그나도 그 남자도 그리고 우리들도 말입니다.”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왜 이러십니까. 총명한 사령관님이라면 그 정도는 아실 수 있으실 텐데 말입니다.”

방금 전에 조금 더 머리를 쓰라고 말해 놓고는 이런 식이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상그 사령관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해서 말을 건 것은 후작이었다.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이로군요 치폰 경.”
“감사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도라 장군을 보내겠습니까? 칩거를 풀고 그 남자를 정벌해 달라고 명했다고 얌전히 나갈 장군은 아니잖습니까.”
“그럴까요? 반 년간이나 갇혀만 있었으니까 어쨌든 자유의 몸이 되어 그 남자 곁으로 가라는 것만으로도 외려 기뻐하면서 출진해 주지는 않을까요. 그래도 불안하다면 장군의 외동딸을 인질로 잡는다던가.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흐음.”

제나 제사장이 짜증나는 듯이 물었다.

“두 사람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즉 이런 겁니다 제사장님. 도라 장군이 마지막까지 그 남자의 편을 들고 그 때문에 칩거를 명받은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미 그 남자의 귀에도 들어갔겠지요. 그런데 가신들을 데리고 자신을 편들러 와 준다. 이것은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그 남자는 기뻐한다기보다 먼저 어떻게 이 엄중한 코랄 성에서 도망쳐 왔는가 하고 의심을 가지게 되겠지요. 당연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군이 되는 척 하고 자신을 잡으러 온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 남자는 지금 적과 아군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실제로 처음엔 아군으로서 받아들여준 윈저에게 배신을 당했다. 다음은 당연히 의심하게 될 것이라고 치폰은 말하는 것이지만 제나 제사장은 불만스럽게 반론했다.

“하지만 아무리 인질을 잡고 협박을 한다 해도 상대는 바로 그 도라 장군이오. 여차하면 딸의 목숨 따위는 내주겠다라는 정도는 말할지도 모르지.”

시원스럽게 끄덕인 치폰이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장군은 틀림없이 그 정도의 각오로 그 남자에게 향하겠지요. 귀여운 외동딸을 죽게 한다 해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님.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그 남자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다시 말해 말입니다. 여기에 잡혀있어야 할 도라 장군이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편을 들러온다면 아무리 그 남자라고 해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치폰은 실망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에게 알아듣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피곤하다고 말하고 싶은 듯 했다.

“혼란을 틈타 도망쳤던 그 남자 때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중삼중으로 감시당하고 있었더너 것이니까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의 몸이 되어 달려왔다고 한다면 이건 뭔가 뒷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그 남자는 의심하겠지요. 의심하는 게 당연합니다. 자 여기서 탄탄한 주종관계에 금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남자는 장군을 의혹의 눈으로 보게 될 것이고 장군은 장군대로 자신을 그런 남자라고 생각했었나 하며 그 남자에 대한 충의를 후회하겠지요.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거야 시도해 보고 나서의 즐거움이죠.”

사령관도 제사장도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즉 이간질을 하겠다고 치폰이 말하고 싶은 듯 했다.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그 남자와 도라 장군의 사이를 찢고 그 남자를 더욱 고립무원으로 밀어 넣겠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잘 될지 어떨지. 장군이 딸을 인질로 잡히고 출진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그 남자에게 밝혀 버리면 거기까지 아닌가?”
“말할 수 있을까요?”

심술궂은 미소였다.

“무인의 거울과도 같은 도라 장군이 그런 집안의 수치를 주군에게 창피도 모르고 밝힐 수가 있을까요?”

지당한 이야기였다. 장군은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폐하는 믿어줄 것이다. 딸을 버리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각오를 받아들여줄 것이다 하고 기대할 것이다. 남자쪽은 반대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장군을 의심할 것이다. 뭔가 뒤로 켕키는 점이 있을 것이라고 의혹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생각되었다.

“흐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후작?”

페르젠 후작은 잠시 생각하고 있다가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찬성할 수는 없군요.”

치폰이 상처받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후작님은 저의 제안이 맘에 드시지 않습니까?”
“아니요. 묘안입니다. 역시 재기로 이름 높은 치폰 경이라고 감복했습니다.”

티나지 않게 치켜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금발의 소녀는 이 사람을 바보는 아니라고 평했지만 실제로 이 사람이 없었다면 개혁파는 진작에 분해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당신의 그 제안은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일반적인 인간을 상대로 했을 경우를 상정한 것입니다. 그 남자에게는 과연 통용될지 어떨지.”
“후작.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어쩌나?”

기가 막힌 듯 상그 사령관이 말했다.

“그 남자는 국왕의 이름을 사칭한 무뢰한 아니 대역죄인일세. 그런 남자를 칭찬하는 듯한 말을 지금의 재상인 당신이 가볍게 입에 담아서는 안되네.”

이 비난에 페르젠은 옅은 웃음을 띠며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상그 사려관. 잘못 받아들이셔선 곤란하군요. 나는 재상 같은 송구스러운 지위에는 부적합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그 이름에 어울리는 지위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명칭은 후작 그대로이지만 지금의 델피니아는 군무는 물론 내정, 재무, 사법에 이르기까지 이 사람의 결재 없이는 가능할 수 없게끔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후작이 재상의 이름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 한 사라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되지 않게 하려는 배려 때문이었다. 정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혁파’이지 특정의 개인이 아니다. 그런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페르젠 후작을 중심으로 내각이 이루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후작이 그 남자를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렇지요, 그 남자는 왕가의 이름을 사칭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짜왕이라고 해도 한때는 델피니아 국왕이라 불렸던 남자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우리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가 홀홀 단신으로 파키라를 넘어 종국에는 돌아온다는 짓을 평범한 남자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치폰이 열이 오른 듯 몸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 남자에게 지지 않을 정도의 역량을 가진 자를 정벌에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완벽한 시골 촌놈이라 특별히 따로 할 일도 없었겠지요. 무술의 실력만큼은 누구라도 인정할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확실히 상그 사령관도 아니 당신에는 일개 대대장이셨습니다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반박하는 것 같지만 그 남자는 당시에는 ‘국왕’이었다. 치폰경. 진심으로 검을 겨눈다는 따위는 아무리 뭐래도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할 일은 아니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결국 그 남자와 비슷한 정도의 승부를 했던 것은 딜레든, 라모나 두 기사단의 단장. 창의 핸드릭 백작 그리고 투장 도라 장군. 분명 어느 인물이고 한 성격들 하여 국왕을 국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니까요. 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지금은 모조리 그 남자의 편을 들겠다고 합니다. 못말릴 이야깁니다.”

치폰은 어깨를 으쓱이고 있지만 자신의 제안에 집착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제나 제사장도 상그 사령관도 치폰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후작, 나는 치폰 경의 의견을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네만 어떠신지.”

제나 제사장이 말하자 상그 사령관도

“도라 장군이 다루기 힘든 존재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 주군이라고 추앙하고 있는 그 남자의 손에 의해 처리된다면 우리들의 수고도 줄어드오. 뭐라 해도 우리 근위병단 중에도 장군을 따르는 자들이 다수 있다고 할 정도이니까. 혹은 만에 하나 도라 장군이 그 남자를 해결해 준다면 만만세가 아닌가.”

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하게 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도라 장군이라도 의외로 딸의 목숨은 소중할지도 모르고...”
“그렇겠죠. 정벌은 무리라고 해도 최소한 잡을 수만이라도 있다면 딸의 목숨과 교환한다고 하면 그 정도는 장군도 받아들여주지 않을까요?”
“그렇고말고요. 게다가 설령 장군이 딸을 버리고 그 남자와 화해하여 함께 코랄을 향해 진군해 온다면 그때야말로 근위병단의 힘으로 반역자를 정벌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제안에 상그 사령관은 뒤숭숭한 미소를 띠었다. 바라 마지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치폰도 끄덕이고 열심히 후작을 설득했다.

“어떻습니까 후작님. 그렇게 되면 저희들은 그 남자와 함께 도라 장군도 장사지낼 수 있는 절호의 구실을 손에 넣을 수가 있습니다. 장군들이 무력으로 유혈 참사까지 부르며 강경하게 코랄을 함락시키려 음모를 꾸몄다. 따라서 우리들은 왕도를 전장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근위병단을 보내 이것을 제압했다고 한다면 멋지게 상대방을 악당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보게 치폰 경.”

제나 제사장이 꾸짖었다.

“말을 조심하게. 나쁜 것은 처음부터 그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편들어 끝까지 우리들에게 거역한 도라 장군 일파이니까 말이야. 하여튼 딜레든, 라모나 기사단장은 둘째치고 아누아 후작, 핸드릭 백작까지 그 남자를 지지하다니. 제 정신으로 한 행동이라고는 여겨지질 않아.”
“그렇다면 가장 제정신이 아닐 것은 코랄 사람들이겠죠. 자신들이 쫓아내 놓고는 지금은 다시 그 남자가 좋다고 합니다. 어차피 또 곧 질려 버릴 것을 뻔히 알면서 말입니다.”

페르젠 후작이 온화하게 입을 열었다.

“이럴 리가 없었다면서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민중의 특기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해도 반드시 그런 말을 합니다. 일일이 신경써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치폰 경.”
“알고 있습니다 후작님. 그런 자들은 살리지도 죽이지도 말고 반항하지 않게끔 움직이게 하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죽여서는 남는 게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자유스럽게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들이 그 남자에게 은근하게 기댈르 하고 있다고 한다면 역시 그 싹은 뽑아 두어야겠지요.”

은근히라고는 하지만 후작의 동의를 얻고 치폰은 완전히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자아 그러면 도라 장군에게 할 마음이 들지 않는 임무를 내리는 역할은 사령관님께 부탁합니다. 목적지는 비르그나. 내용은 그 남자를 산 채로 잡아올 것이라고요.”
“맡겨 두게.”

회의는 거기서 끝이 났다. 단 한 사람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페르젠 후작이었으나 그 외 일동 전원이 이 안을 찬성한다고 하니 이의를 주장하는 것도 안 좋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시 명령서가 작성되어 다음날 밤에는 즉각 비르그나로 향하여 월 그리크를 잡아오라는 정부 명령이 도라 장군에게 제출되었던 것이었다.


“제군들은 머리가 어떻게 된 듯 하군.”

자택 내의 거실에서 도라 장군은 확고하게 말했다. 그 무용을 존중하는 의미로 누구나 이 사람을 ‘장군’이라고 부르지만 실제의 신분은 성내에 훌륭한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명문으로 이름높은 백작이었다. 본인은 이제 사십을 막 넘었고 중간치에 중간 체구의 몸 전체에는 멋들어질 정도로 단련된 근육의 갑옷이 덮여 있었다. 표정은 엄하게 당겨져 있고 작은 안광은 날카롭게 빛나 그야말로 호걸다운 용모였다. 나이에 비해서는 머리숱이 옅고 이마는 살짝 벗겨져 있었다. 대신에 풍성하게 수염이 나있어서 입다물고 있으면 어디가 입인지 알수없었다. 
아까서부터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군이 마침내 뱉은 것이 방금의 한마디였다. 이야기를 하고 있던 탸뮤 남작은 곤란한 듯이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예상대로 말씀하시는군요 도라장군.”

이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은 무척 부드러운 어투였다. 상당히 곤란해하는 듯한 표정을 띄우고 있으나 눈은 달랐다. 경멸의 웃음을 보이지 않게 숨기고 있었다. 원래는 재정에 관련되어 작은 일을 맡았던 그는 상당히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고리대금을 시작해 부를 축적하고 작위를 손에 넣어 풋내기 귀족이라고 업신여김을 당하면서도 재력을 무기로 귀족 계급에 파고들어 현재는 개혁파의 두령 페르젠 후작으로부터도 커다란 신뢰를 얻고 있다. 혁명의 성공은 이 사람의 재력에 의한 부분도 컸다.
다시 말해 개혁파 중에서도 실력자라는 것이었다.

“알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빠르구만. 돌아가주게.”
“자아 자아 장군님. 시작부터 그렇게 결정할 일도 아닙니다.”

남작은 아들 치폰에 비한다면 인내심이 강하고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상황을 조용히 진행시키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강요이기는 해도 온화하게 이야기를 진행해 가서 반감을 가지기 힘들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옆에서 상그 사령관이 말을 꺼냈다. 이쪽은 미적지근한 데는 아주 약했다. 용건을 질러 말했다.

“우리들은 굳이 그 남자의 목숨을 빼앗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오. 정식적인 재판에 회부하고 싶어 붙잡아 와주었으면 하고 부탁하는 것이오. 그것이 가능한 자가 있다면 도라 장군, 델피니아 전국을 뒤져봐도 당신 이외에는 없소.”

장군의 작은 눈이 흘깃하고 대담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상그 경은 눈을 뜬 채로 잠꼬대를 하고 있는 것 같군. 이런 곳에서 밤을 샐 여유가 있다면 빨리 돌아가서 쉬는 게 어떤가? 잠꼬대는 자면서 하는 것이라고 상황이 정해져 있는 게야.”

붙들고 늘어질 구석도 없다. 지난 반년 검을 빼앗기고 말도 빼앗겨 자택에 유폐되어 가신들과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는 굴욕적인 환경에 있었어도 장군의 투지는 건재했다. 지난밤에 회의에서 마침 제나 제사장이 말했던 것처럼 아직도 주군이라 모시고 있는 그 남자에게 검을 향한다는 행위 따위는 눈곱만큼도 생가하지 않는 것이다. 예상대로의 전개에 타뮤 남작으느 더더욱 교활한 웃음을 띠었고 사령관은 귀찮은 수속을 빼고 서둘러 용건에 들어가면 좋을 것을 하며 떫은 얼굴로 남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곤란하군요 장군. 이것은 재상 각하의 명령입니다.”
“누구를 이야기하는 건가? 이 델피니아에 재상이라고 하는 건 없네.”

쓴웃음을 띠운 타뮤 남작은 이번엔 확실하게 의미가 담긴 말투가 되었다.

“실례지만 도라 장군. 그렇게 고집을 계속 부리시면 자신을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좋지 않은 결과를 빚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만.”

장군의 눈썹이 꿈쩍하고 올라갔다. 남작은 자신있는 비위맞추는 목소리로 덧붙여 이야기했다.

“저희들도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끝까지 당신이 이 명령을 거부하고 왕궁에 대한 반역의 입장을 계속 취한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나름대로의 벌칙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말입니다. 가문 주인의 잘못은 가족 전원에게 미칩니다. 이 점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장군은 침묵한 채로 응하지 않았다. 단지 남작을 바라보는 눈이 더더욱 날카로운 빛을 띄울 뿐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남작은 혼잣말처럼 계속했다.

“확실히 장군님의 영애는 17세. 매우 젊고 아름다우며 게다가 아직 미혼이시지요. 이렇게 되기 전에는 틀림없이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겠지요. 명문 도라 백작가의 외동딸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여성으로서의 멋진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 것을 자신은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부친에게 휘말려 정부를 배반한 모반자라고 불리는 것은 너무도 잔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수염의 장군은 무뚝뚝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상그 사령관이 이어서 말했다.

“이것은 명령이오 도라장군. 당신에게 거부할 권리는 없소. 만약에 끝까지 이 명령을 거부한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여기서 당신의 딸을 체포해 북의 탑으로 연행하겠소.”
“당신의 친구이신 페르난 백작도 말상대가 생겨 기뻐하시겠지요. 애초에 묘령의 아가씨에게 지하의 옥중 생활이 어느 정도 쾌적한지는 보증할 수 없습니다만 말입니다. 하루 종일 태양은 비치지 않고 항상 습기와 냉기에 차 있는 데다 보기 싫은 해충도 있지요. 거기는 상하수의 구별조차 모호한 병의 소굴입니다. 배급의 식사도 가축의 먹이와 어디가 다를 것인지. 그런 생활을 영애께서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저택에서 편하게 독서나 자수를 하고 있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장군은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잡아먹을 듯이 남작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타뮤 남작은 진심으로 곤란해하는 듯이 또 마음 깊이 동정한다는 듯이 장군에게 물었다.

“생각하기에도 무서운 일 아닙니까? 도라 장군. 젊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부인에게 이 얼마나 가엾고 지독한 처벌입니까? 저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영애의 일생을 부수어 버리는 일 따위는 예에 정말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장군은 무서울 정도로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작을 노려보던 안광은 괴로운 듯 자신의 무릎으로 떨어져 있었다. 양손은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색이 벗겨질 정도로 강하게 쥐고 있었다. 남작은 덧붙여 다짐했다.

“몇 번이나 말합니다만 정벌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에게 주군을 죽이라는 무례한 일을 부탁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은 그 남자와 가까운 관계이십니다. 그런 당신의 입으로 그 남자를 설득해서 여기까지 데리고 와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저희들의 정의를 믿고 있으니까 당신이 폐하라고 부르는 그 남자도 똑같이 자신의 정의를 믿고 있다면 공공의 장소에서 당당하게 논의하자고, 거기까지 양보해서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끄덕여 주시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장군님 정도 되는 분께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좁은 생각이 아닐까요?”

긴 달변을 듣고 있던 상그 사령관이 기다림에 지쳐 못 견디겠다는 듯이 덧붙였다.

“장군에게는 가신 10명과 말을 사용할 것을 허락하오. 도중에 장군 자신의 영지에 들린다면 적어도 500명의 가신은 모일 거요. 그 수를 이끌로 서둘러 비르그나를 향해 출발해 주시기 바라오.”

장군이 나직하게 말했다.

“로아와 비르그나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먼저 대화를 하는데 어째서 오백명이나 되는 수가 필요한 것이지?”

남작은 과장되게 눈을 크게 떳다.

“그거야 아무렴 그렇지요. 오랜 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가신들도 장군을 뵙고 싶어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만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지요? 그렇다면 이 저택의 가신들만으로 비르그나로 향하신다고 하셔도 저희들은 전혀 상관없습니다.”
“아니 그렇군. 오랫동안 영지를 비웠었다. 들리도록 하겠네.”
“그러면 출발해 주시겠습니까?”
“어쩔수 없지.”

벌레를 씹은 듯한 아니 신음하는 듯한 장군의 말이었다. 미워서 어쩔 줄 모르는 적에게 덤벼들기 직전의 사냥개를 생각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남작도 사령관도 그런 살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마주대하고 있는 것 같아도 이 용맹한 사냥개와 자신들의 사이에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튼튼한 망이 있었던 것이다. 일단 얌전하게 하는 것에는 성공한 듯 했다. 그렇다면 이 이상 오래 머무를 이유도 없었다. 남작은 마음속 깊이 안도한 듯한 얼굴로 일어섰다.

“다시 생각해 주신 것을 마음속 깊이 감사드립니다 장군. 영애의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저택에 있는 한은 부자유스러운 일은 일체 없도록 할 테니까 말입니다. 만일 외로워 보이신다면 제 아들놈을 대화상대로 보내 드리도록 하죠.”
“필요없다.”

짧고 간결한 말이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용무가 끝났으면 돌아가라고 표시했다. 두 사람은 그 난폭한 손짓에 조용히 따랐다.

“장군 반드시 생각을 바꾸어 주실 것이라 생각해 당신의 무구와 검을 운반해 왔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주십시오.”
“내일 아침 맞이하러 오겠소. 그 때까지 준비를 마치도록.”

두 사람은 일의 전말에 만족하며 성내에 있는 도라 백작저를 뒤로 했다.


불청객이 물러가자 장군은 벌떡 일어나 하인들이 대기하고 있던 다음 방으로 향했다. 타뮤 남작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증거로 거기엔 반년동안 개혁파에게 빼앗겼던 장군의 검과 장비 일체가 놓여 있었다. 백금빛의 투구와 박차. 오랫동안 애용해 왔던 사슬갑옷과 수갑手甲. 백작가의 문장을 선명하게 수놓은 상의. 그리고 장군의 조부 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훌륭한 모양의 대검. 장군은 지난 반년동안 꿈에도 그립던 감촉과 무게를 바라며 떨리는 손을 검으로 향했다. 현실의 감각이 거기에 있었다.

자그마한 감사의 말을 뱉으며 손에 검의 손잡이에 입을 맞췄다. 재회를 기뻐하며 상대의 무사함을 감사한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도구이긴 했지만 장군의 조부와 부친, 장군 자신의 목숨을 몇 번이나 지켜주었는지 모를 무엇보다도 믿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다른 방어구들도 일일이 확인하고는 장군은 기운차게 방에서 뛰쳐나가 저택의 안쪽으로 움직였다.

“샤미안!”

일어나 있는지 어떤지도 확인하지 않고 갑자기 뛰어들어온 아버지에게 장군의 외동딸은 놀란 듯 돌아보았따.

“아버지 무슨 일이십니까?”

17세가 되는 샤미안은 밝은 귤색의 머리카락과 영리한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였다. 쉬려고 했던 참인지 맵시 좋은 몸에는 잠옷을 입고 머리는 풀어내리고 있었다. 도라 장군은 딸의 어깨를 잡고 거의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가 돌아오셨다.”

샤미안은 숨을 들이쉬고는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의 팔을 잡고는 바삐 물었다.

“폐하께서 무사하신가요?”
“그렇고말고. 현재 비르그나에 계신 듯 하다.”
“비르그나에? 그러면 나시아스님 곁에?”
“그렇고말고.”
“아아 아버지! 그분은 반드시 무사히 계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답니다!”

감격한 듯이 목소리를 높인 샤미안이었으나 아버지의 상황을 보고는 미심쩍어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
“샤미안. 나는 내일 아침 폐하를 붙잡기 위해 비르그나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수치를 모르는 것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를 잡아다 북쪽 탑으로 보낸다고 하는 거다. 귀여운 딸을 그런 일을 겪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사람의 도리에도 친구인 페르난에게도 등을 돌리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장이 끊어지는 심정으로 이 말도 안 된느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너무도 아버지의 애정이 넘치는 감동적인 광경이었으나 샤미안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얼굴이 둣고 계십니다.”
“알겠느냐?”

말 그대로 도라 장군은 만면이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까부였다. 타뮤 남작이 비위 맞추는 목소리로 장군을 협박하고 있는 도중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 뒤로 웃어젖히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던 것이다.

“그 멍청한 것들. 그걸로 나를 협박할 셈인 듯하다. 아니 정말로 당장이라도 가겠다고 말할 뻔한 것을 참느라고 혼났다. 어떻게 간신히 네가 지하감옥으로 보내지는 것은 참을 수 없으니 억지로 출진한다는 모습을 지어냈지만 말이다.”

개혁파가 생각하고 있는 것쯤은 손에 잡을 듯이 알 수 있었던 도라 장군이었다. 자신과 월과의 사이를 벌어지게 할 셈이겠지만 그런 수법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더욱이 자신에게 오백 명의 부하를 허락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비르그나의 병력과 합쳐 이 코랄로 진군을 하게 만들려는 것이며 그때 일망타진을 노리려는 것인가 하고 백전노장인 장군은 거기까지 순간적으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계략상 누구라도 좋았을 이 역할을 잘도 자신에게 넘겨주었다고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샤미안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 축하드립니다. 이것으로 드디어 코랄을 해방시키기 위해 진실된 국왕을 받들기 위해 일하실 수 있으시겠군요.”
“그래.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대신에 너를 인질로서 이곳에 두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진지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는 샤임안이었다. 장군도 이때만큼은 침통한 얼굴로 딸을 내려다보았다. 샤미안을 낳은 장군의 아내와는 일찍이 사별했다. 현재 장군의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샤미안 뿐이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라 장군은 커다란 손으로 딸의 귤빛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따.

“샤미안. 이 아버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너는 알겠지?”
“예에.”

확실하게 끄덕이는 샤미안이었다. 반년 전 국왕을 구하지 못했던 것을 더 이상 분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해했던 것도 여차하면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그분을 위해 싸울 결의를 하고 있다는 것도 샤미안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너에게도 너의 어머니에게도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용서해다오.”
“아닙니다 아버지. 사과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할 것인지도 아버지라면 아실 것입니다.”

수염의 장군이 눈가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용맹과감한 아버지의 피를 이은 딸도 마찬가지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아버지를 배웅한 샤미안에게 그날 손님이 찾아왔다. 타뮤 남작의 아들 치폰이었다. 도라 백작가에 젊은 영애에 신경이 쓰이는 듯 유폐생활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도 이러저런 이유로 모습을 보이고 선물을 보내고 하긴 했으나 호랑이가 없는 틈에 본격적으로 친해지려고 하는 셈인 듯 했다. 연정이라고 하기보다는 타산적인 행동이었다.
뭐라고 해도 타뮤 남작의 지위는 돈으로 손에 넣은 것에 불과하다. 돈으로 출세했다는 이름을 어떻게든 하고 싶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격식 있는 작위를 손에 넣는 가장 빨느 수단은 신분이 높은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샤미안은 독신이고 공적이 대단한 장군 가문의 딸이다. 지금은 모반자에게 가담했다고 하여 폐문 취급을 받고 있지만 그 정도의 흠이 없다면 적당히 만들어지 남작가 따위는 돌아보지도 않았을 테니 딱 좋은 조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샤미안님.”

만면에 희색을 담고 나타난 치폰이었지만 샤미안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부친이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방패로 마음에도 없는 임무를 위해 출발한 뒤다. 무리도 아니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의 샤미안을 보고 치폰은 신경을 써주는 듯임 ?을 걸었다.

“샤미안님. 그런 표정을 하고 계시면 안됩니다. 그 아름다움이 바래 보이지 않습니까. 뭔가 기분 전환이라도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당신이 읽고 싶어하시던 책도 가져왔고 저와 함께라면 성내를 산책하실 수도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치폰님. 저 같은 것에게 항상 친절히 대해주시는 마음은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그럴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샤미안님.”

치폰은 마음에 걸리는 모습으로 선물로서 가져온 꽃다발을 책상 위에 놓고는 어깨를 떨구고 샤미안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당신께서 그렇게 계시면 장군도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정말로 뭔가 하시고 싶은 일은 없으십니까? 제게 무언가 당신을 도와드릴 만한 것을 시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열심인 태도에 샤미안은 쓸쓸한 미소를 띠었다.

“있다고 하면 있지만... 인질의 몸으로서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과장스럽게 양손을 펼쳐 보이는 치폰이었다.

“인질이라니 그런 어수선한 말씀을. 당신의 자유는 제가 완전하게 보증하겠습니다. 성내에서는 물론 성밖에서도.”
“성 밖에?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오오 분명 샤미안님 혼자를 내보내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제가 함께 하겠습니다. 저와 함께라면 성의 병사들도 아무 말 할 수 없을 겁니다.”
“치폰님.”

샤미안은 개암나무빛 눈동자에 감사의 빛을 띄우며 젊은 귀공자를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제가 원하는 것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말을 타고 싶습니다.”
“말을?”

놀란듯한 표정이 된 치폰이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당신의 댁은 군마의 명산지였지요. 아버님의 기마술도 뛰어나십니다. 그러면 샤미안님도 말을 가까이 하셨습니까?”
“예에. 저는 말 등에서 자랐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계속 저택 속에서 지내고 있다 보면 이유 없이 말을 달리던 것이 그리워져서...”
“그런 것이라면 간단합니다. 이 성내에 산책로를 저와 함께 말로 거닐지요. 마침 오늘은 날씨도 좋고 승마에는 딱 좋겠습니다.”
“아니요 치폰님. 그런 게 아니에요.”
샤미안은 서둘러 상대의 말을 가로막고 애원이 담긴 눈으로 말했다.

“저는 여자의 옷을 입은 채로 미리 정비된 보도를 산보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승마복을 입고 망을 든 시동 따위 없이 마음껏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싶은 겁니다.”

이 말에 치폰은 꺼림칙한 얼굴이 되었다.

“실례입니다만 그것은 귀부인의 취미로는 약간 너무 조야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만? 당신 정도로 아름다운 분이라면 그런 남자 같은 일을 하지 않고도 음곡音曲이라던가 유희라던가 그 외에도 얼마든지 가까이할 일이 있으실 텐데요.”

이 말을 들은 샤미안은 실망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역시 들어주실 수는 없는 것이로군요.”
“아니 샤미안님.”
“그렇겠지요. 정말로 창피한 일이에요. 전 시골에서 자랐으니까 아무래도 도회지의 화려함에는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가까운 친구도 없고 적어도 쭉쭉 달릴 수라도 있다며 이런 답답함도 멎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용서해 주세요.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드렸네요.”
“샤미안님 샤미안님. 그런 말씀은 그만두십시오. 저는 당신을 슬프게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까요. 좋습니다. 어떻게 해 보도록 하죠.”

샤미안의 얼굴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정말이세요 치폰님?”
“맡겨주십시오. 단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버지와 상담하여 상세한 것이 결정 나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치폰은 어디까지나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샤미안의 앞에서 떠나갔다. 한편 샤미안의 희망을 들은 탸뮤 남작은 의외의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말달리기를 하고 싶다니 독특한 영애로군.”
“정말입니다. 어떻게 그만두게 하려고 해봤습니다만 다른 걸로는 기분전환이 도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떨까요 아버지? 허락해줘도 크게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흐음. 하지만 말이다. 장군가의 영지는 대대로 군마의 명산지였다. 그 영애도 상당히 잘 타는 게 아니냐?”
“그럴지도 모릅니다. 말 등에서 자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자신이 이야기했으니까요. 그게 뭔가 문제가 있나요?”

치폰은 대단할 것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지만 남작은 어디까지나 신중한 자세였다.

“무엇보다 이런 중요한 때다. 함부로 성밖으로 내보내 아버지의 뒤를 쫓게 해서는 곤란하니까 말이다.”
“저도 그 정도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도망쳤다고 해도 여기서부터 로아까지 여자의 몸으로 달려갈 수 있을 리가 없겠지요. 물론 감시는 충분히 붙이겠습니다. 게다가 샤미안님의 말에겐 충분히 물을 먹여 놓겠습니다. 오래는 달릴수 없게 말이죠. 생각해보면 그 영애도 불쌍합니다. 아비가 잘못을 저지름과 동시에 관저로 불려진 이래 인질 생활이니까 말입니다. 젊은 아가씨가 반년간이나 집안에 갇혀 있게 되면 그야 기분도 가라앉겠지요. 이쯤에서 조금은 숨통을 트이게 해줘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친해질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도 되고요.”
“흐음.”

잠시 생각하고 있던 남작이었으나 결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정색을 하고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니까 말이야.”
“그렇지요.”

도라 장군은 아마도 무사하게 돌아오지는 못하리라고 그들은 예측하고 있었다. 그 남자에게 제거되던가 함께 쓰러지던가. 그렇지 않으면 무력으로 코랄을 탈취하기 위해 돌아오던가. 어느 쪽이던 장군은 희생양이 된다. 거기에 남은 샤미안은 아주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도라 장군가 정도의 명문의 혈통을 끊는 것은 피하고 싶은데다 마침 잘 되었으니 우리들이 돌봐주어야겠다고 탸뮤 부자는 생각하고 있다.

다루기 힘든 아버지가 없어지고 난다면 남는 것은 17살의 소녀 한 명이다.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 것이고 어떤 의미로는 그야말로 올바른 판단이었다. 굳이 그들이 틀린 점이 있다고 한다면 타뮤 남작도 치폰도 장군가의 영지에 대해 말의 산지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더불어 샤미안 본인에 관해서도 유폐생활을 시작하게 되어서 처음으로 마주했을 뿐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백작가의 영애라고 하니까 음악과 춤과 시가詩歌를 즐기는 관저의 부인들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길을 떠나고 이틀 후의 아침, 말달리는 것을 허가받은 샤미안은 머리를 묶어 올리고 승마복을 몸에 걸친 채 마중 나온 치폰 앞에 섰다. 지금까지의 가라앉아 있는 얼굴과는 다르게 기쁜 듯한 표정이었다.

“고맙습니다 치폰님. 이런 제멋대로인 부탁을 들어 주시다니, 치폰님은 정말로 상냥한 분이세요.”
“무슨 말씀을. 여성의 부탁이라고 한다면 특히나 당신의 부탁이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던지 상관없습니다.”

이쪽도 애교 있게 받아 들였다. 하지만 사실 치폰은 성품이 강직한 여자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바지와 짧은 옷의 승마복도 흥을 깬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얼굴에는 나타내지 않았다. 
오늘도 맑은 좋은 날씨였다. 샤미안을 위해서는 훌륭한 백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다른 호위병사가 열 명, 말로는 그래도 결국 감시였지만 샤미안은 그래도 밖에 나올 수 있는 것이 기쁜 듯 했다. 오랜만에 샤미안의 웃는 얼굴을 보고 치폰도 좋아져 말을 걸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갈까요?”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치폰님이 정해 주셨으면 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눈을 크게 뜬 샤미안이었지만 조금은 생각을 해 보더니

“그러면 파키라 산맥을 빙 돌아 폴리시아 평원 쪽까지 가보면 어떨까요? 약간은 멀어지지만 해질 녘까지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좋습니다.”

끄덕인 치폰은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비르그나와도 백작가의 영지와도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알고서 말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총명한 영애라고 생각했다. 고삐를 잡고 말에 오르려 했던 시폰이었으나 샤미안이 미안하다는 듯이 말해왔다.

“저.... 치폰님. 괜찮다면 치폰님의 말과 저의 말을 교환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백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이런 실례했습니다. 취향을 여쭤 볼 것을 그랬습니다.”

탈 말이 무슨 색이던 큰 차이는 없을 텐데도 여심이라고 하는 것은 묘한 것이다. 이런이런 하고 생각하면서도 치폰은 말을 바꾸어 주었다. 이 백마는 별로 오래 달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을 이야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도회에서 자란 그는 별로 말에 익숙지가 않았다. 물론 타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잘 훈련된 말 외엔 상대한 일은 없었다. 그것도 평지를 천천히 달리게 하는 정도가 최고였다.

도시를 벗어날 때까지는 그것으로 괜찮았다. 늦어질 것이라고 해서 도중에 만난 농가에서 점심용으로 말린 고기와 과실주를 조달하고 사이좋게 웃으면서 말을 나아가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가를 벗어나 숲과 산에 둘러싸인 듯한 경관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자 샤미안은 참을 수 없어진 듯 했다. 눈을 반짝이며 치폰을 돌아보았다.

“산도 녹음도 정말로 오랜만이에요. 전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실례하고 한발 앞서 가겠습니다.”

샤미안의 승마술을 상당한 것이었다. 줄을 다시 잡고는 거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험한 길임에도 상관없이 단숨에 말을 달리게 했다.

“샤미안님! 너무 달리시면 위험합니다!”

당장 뒤쳐지면서도 치폰이 외치자 샤미안은 돌아보면서 “괜찮아요!” 라고 대답해 왔다. 황급히 쫓으려 했으나 백마는 일찌감치도 다리가 늦어져 있었다.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하여튼 무슨 저런 아가씨가 있나. 이봐! 너희들은 먼저 가라. 샤미안님을 놏치지 말아라. 그리고 너, 나와 말을 교환해라!”

일단 고삐를 잡힌 뒤 시종 중 한 명과 말을 바꾸고 치폰은 험한 길을 고생해가면서도 열심히 말을 달렸다. 하지만 먼저 보낸 종자들을 겨우 따라잡아 보니 그들은 뭔가 곤혹스러운 모습으로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데려왔던 열 명의 시종들 중에서 치폰을 맞이한 것은 겨우 두 명이었다.

“무슨 일이냐? 다른 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한 명이 목소리를 낮춰 주인에게 속삭였다.

“그것이, 영애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 찾으러 갔습니다.”
“뭐라고?”

그곳은 이미 파키라 산맥의 산자락이고 울창한 녹음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도시와는 다르게 거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다. 계곡도 있고 바위도 있으며 어딘가에서 냇물 소리도 들려왔다. 주변은 짙은 가지를 펼친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몸을 감출 수 있는 곳은 무수하게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었느냐? 놓치지 말라고 말했을 터인데!”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요. 절대로 다른 데 정신을 팔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애님의 발이 너무도 빨라서 저희들이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치폰은 심한 초조감을 느꼈다. 만약 놓치게 된다면 큰일이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 초록의 그림자에서 샤미안이 가벼운 말발굽 소리를 내며 나타난 것이다.

“죄송합니다. 혼자서 너무 가버려서. 너무도 즐거워서요.”
“아니요. 이쪽이야말로 면목 없습니다.”

순식간에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샤미안님의 실력에는 놀랐습니다. 남자들인 저희들을 이렇게나 확실히 떼 놓고 가시게 되리라고는, 대단하십니다.”

칭찬의 말이기는 하지만 호의적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수치를 준 것을 은근히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부인으로서 남자를 띄워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고 싶은 듯 했다. 하물며 치폰은 상대의 기량을 솔직하게 존경할 수 있을 정도의 도량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어떤지 샤미안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제 고향에서는 누구라고 이 정도는 탄답니다. 아버지의 부하같은 경우는 언제나 도시의 기사들과 겨루어도 달리기라면 절대로지지 않는다고 호언해 왔었지요. 설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정말로 도시 분들은 별로 말에 익숙하지는 않은 것 같군요.”

샤미안이 너무나 솔직하게 의외라는 말투를 하고 있어서 치폰은 기분이 나빠졌다. 평상시에는 검을 들고 하는 무용 따위는 한푼의 가치도 두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가볍게 보여진 것 같아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확실히 말로 달리기를 한다면 당신의 고향의 분들에게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무기를 든 승부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요.”
“어머 그럴까요?”
“그럼요. 뭐니뭐니해도 코랄의 근위병단은 그 실력을 타국에까지 알리고 있습니다. 지방의 병사와는 실력이 다릅니다.”
“그럼 시험해 봐도 될까요?”

무슨 의미인가 하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샤미안은 재빨리 말을 붙여 순식간에 종자의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뭘 하시는 겁니까 샤미안님!”

치폰이 외치는 것도 상관 않고 샤미안은 검 손잡이로 종자의 뒷덜미를 쳐서 때려눕히고 또 한 명의 가슴을 검집 끝으로 강타했다. 양쪽 다 일격에 기절한 듯 말에서 떨어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대 대체 무슨 짓을!”

그 뒷말을 샤미안은 하게 두지 않았다. 대답 대신 검으로 치폰의 말의 줄을 끊었다.

“샤미안님!”

줄이 끊어져서는 말의 조종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치폰으로선 절대로 불가능했다. 이래서는 말 위에 있으면서도 움직임을 봉쇄당한 것과 같았다. 하지만 치폰의 놀라움은 계속되었다. 귤색 머리카락의 영애는 굳은 얼굴로 치폰에게 검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말에서 내려 주십시오 치폰님.”
“바 바보같은 짓은 그만두십시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도대체 뭐가 되겠습니까. 저의 배려를 당신의 아버님의 노력을 헛되이 할 셈이십니까?!”

하지만 치폰보다도 10살이나 연하인 백작영애는 너무도 냉정했다.

“제가 익숙한 것은 말만이 아닙니다. 검술은 5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그 배는 맛을 당신 몸으로 시험해 볼까요?”

상대방이 진실임을 안 치폰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말에서 내렸다. 샤미안은 빨랐다. 아무도 없어진 말안장에서 식량을 꺼내고는 기세 좋게 채찍을 두들겨 달리게 했다. 다른 두 필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지면에 내려진 치폰은 증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할 수도 없었다. 마상의 상대에게 도보로 덤벼들기에는 적어도 채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와 백전 연마의 싸움 기술이 필요했다. 치폰에게는 어느 쪽도 없었다. 샤미안의 행동을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상대의 노력을 비웃어 주는 것 정도뿐이었다.

“그렇게 해 봐도 소용없습니다. 남은 자들이 반드시 당신을 잡을 겁니다.”
“아니오 치폰님. 저는 잡혀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그 분에게로 가겠습니다.”
“그런 남자!”

확실하게 노성을 울린 치폰이었다.

“전 국왕의 피를 이었다고 할 뿐인 사생아! 저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런 남자를 편들었다고 해도 당신들에게 승산은 없습니다. 언젠가는 모두 붙들려 처형당할 겁니다. 그 남자만이 아닙니다. 당신도 당신의 아버님도 말이죠. 당신의 그 목에 사형집행인의 도끼가 내려쳐지는 날이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다가올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그렇게까지 말하게끔 하는 무언가가 그 남자에게는 있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그 가짜 왕은 여성을 다루는 데만은 뛰어난 것 같군요!”

샤미안은 남자의 매도를 잘 견뎌냈다. 약간 창백해지기는 했지만 초연하게 대답했다.

“저는 여자이긴 합니다만 동시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델피니아를 위해 싸우는 기사입니다. 그 분에게라면 저의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제정신으로 하는 행동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말 위의 샤미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줄 수 없다는 부분에 당신과 저의 신념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종자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삐를 잡고 샤미안은 말을 돌렸다.

“안녕히 치폰님. 당신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너무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저를 용서해 주세요.”
“너무도 어렵기 그지없는 말씀이군요! 이 상황에도 여성의 무기를 쓰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으로 제가 당신을 봐주기라도 한다고요? 안이한 생각이군요!”

그런 남자의 태도를 보고 샤미안은 조금은 불쌍하게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당신에게 자신의 적을 알려고 하는 마음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자신의 척도로 나를 쟀고 마지막까지 저를 알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백마에 내가 얌전히 타리라고 진심으로 생각했습니까?”

치폰은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고 장절한 얼굴로 말 위의 샤미안을 노려보았다.

“오래 달리지 못하는 말인지 눈치채지 못하고 말에 타는 자는 저의 고향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조용하게 샤미안은 말하고 말 위에서긴 했지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남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럇!”

시종으로부터 빼앗은 검을 뽑은 채로 승마복의 허리띠에 차고는 가볍게 말의 배를 찼다. 높은 울음소리와 함께 말이 달려나간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겨우 치폰의 종자들이 왔다. 쓰러져 있는 동료와 말을 잃은 주인에게 놀란 눈길을 보낸다.

“치폰님 도대체 이것은?!”
“바보놈들이! 뭘 우물쭈물 하고 있는 것이냐! 당장에 샤미안을 쫓아라. 쫓아서 붙잡아라!”
“영애님을 말입니까?”
“그래 그렇다. 그 반역자 계집애를 말이다!”

치폰은 샤미안이 말했던 것의 의미를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남의 친절을 쓰레기처럼 밟아버린 샤미안에 대한 분노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긍지도 신념도 치폰에게는 이해 범위 밖에 있었다. 그런 남자에게 반해 버리다니 바보 같은 계집애라고 속 터지게 생각할 뿐이었다.




9장
“그런데 최근에는 만나 뵙지 못했는데 도라 장군은 어쩌고 계신지?”

현재 사실상 국왕 대행의 일을 하고 있는 노라 발로는 서명하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올해 나이 22세. 왕국에서 이름난 기사로서 알려지기 시작한지로 벌써 몇 년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이렇게 젊은 나이였다. 얼마나 어렸을 때부터 무술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것인지를 살피게 해준다. 
단련되어 늘씬한 장신은 건강 그 자체의 정기와 힘에 넘쳐 눈도 머리도 칠흑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 외견적인 특징을 보자면 그 남자와 닮기도 했지만 분위기는 꽤나 틀렸다. 그 남자의 몸에 배어 있는 자연스러운 관록도, 미워할 수 없는 솔직함도 이 사람과는 인연이 멀었다. 같은 검은 눈동자라도 발로의 그것은 항상 빈정댐이 섞인 교활한 미소를 띠고 있는데다 똑같이 볕에 탄 얼굴이라도 훨씬 야성적이고 굳세 보였다. 활발하고 용맹하며 향락적이고 사나운, 한마디로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신분 높은 젊은이로서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이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지위와 명예가 주어져 있었지만 본래의 신분을 말하자면 델피니아에서도 굴지의 대귀족, 사보아 공작 바로 그 인물이었다. 선대 공작인 그의 아버지는 수년 전 세상을 떠났고 단 한 명의 자식이었던 발로가 작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명함이었다. 발로 본인도 사보아 공작이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하고 딜레든 기사단장, 혹은 간단하게 기사 발로라고 불리는 쪽을 좋아했다.

실제로 이 남자는 어떻게 보아도 실전 타입이었다. 공작의 칭호도 책상 업무도 그야말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발로에게 있어 현재의 국왕대행이라는 명함이 얼마나 고통에 찬 것인지는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글쎄요. 저도 최근에는 만나보지 못해서요.”

질문을 받고 역시나 멀쩡한 얼굴로 대답한 것은 페르젠 후작이었다. 계속해서 가져오는 서류를 분류하면서 건성으로 한 대답이었다. 얼굴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 반응은 이미 예상하던 것이었는지 발로는 끝까지 태연한 얼굴로 날카롭게 찔러 말했다.

“희대의 투장이라고 불리는 분이 반년도 넘는 칩거생활이시라니. 근시일 내 문병이라도 가고 싶군요.”

페르젠 후작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이신지 모르겠군요 발로경?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그 정도까지 신경을 쓰시는 건 처음 보는군요.”
“별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저 장군도 저와 마찬가지로 어딘가 갇혀 있거나 감시당하는 것은 질색인 분일 테니 말입니다. 하물며 뜻에도 어긋나게 모반자라는 소리까지 들어서야 그것 참 의분에 떨지 않을 수 없을 거 아닙니까.”

한껏 빈정댐이 담겨있는 말에도 후작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온화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을 뿐이었다. 얄미울 정도의 침착한 행동이었다.

“모반자라니 듣기 거북하군요 발로경. 저는 장군의 심지를 의심한 일 따위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도라 장군이 열렬한 애국투사인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발로는 검은 눈에 야유와 노여움이 혼합된 빛을 띄우며 방의 입구에 서 있는 무장병들을 돌아보았다.

“그런것치고는 대우가 뭐하나 좋은 게 있나.”
“오오 그것은 당신이 잘못하신 겁니다. 당신도 장군도 뭐라 말해야 할까, 조금 더 친구를 선택할 때 주의를 해주셨다면 이런 일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저로선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번에는 감탄한 듯 눈을 치켜 뜨며 양손을 벌려 보인 발로였다.

“역시나 대정치가께서 하시는 말은 어딘가 틀리군요. 문제의 핵심을 돌리는 게 아주 선수십니다.”

이곳은 대낮의 집무실이었다. 즉 일을 하던 중에 이런 야유를 주고받고 있다는 소리다. 공사에 관계없이 이 두 사람의 듣기 거북한 말다툼은 언제나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더욱 심했다. 커다란 덩치를 갑갑한 듯 의자에 앉은 채 뻗으며 발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 그것도 얼마 안 남았지. 곧 내가 이런 책상에 앉아있을 필요도 없을 테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발로 경?”
 
검은 눈동자에 빙그레 부드럽지 못한 빛을 띄웠다.

“곧 왕궁의 진정한 주인이 돌아오실 테니까. 그렇게 되면 전 맘놓고 은퇴니까 말입니다.”
 
페르젠 후작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극비정보이자 결코 이 남자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해두었었다. 어디에서 새어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귀가 빠른 것만은 인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처음부터 계속 숨겨둘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후작이었다. 제사장 등은 엄하게 금구령을 내려둔 것 같았지만 이런 종류의 일은 아무리 막아도 새어나가기 마련이었다. 

“누구에 대해 말씀하시는 건지 저는 전혀 모르겠군요. 이 왕궁의 진정한 주인이라면 그래....최후의 왕은 칠 년전에 붕어하셨지요. 당신의 백부이시자 위대한 뒤르와 왕 그분이십니다만. 선왕이 떠나신 이래로 이 왕궁은 거대한 빈집과 같은 것. 이렇게 빈자리를 지키는 우리들도 쓸쓸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저로서야 하루라도 빨리 정통한 주군을 맞이하고 싶다고 바라마지 않고 있습니다만 어쩌시렵니까. 발로 경?”
“그 궤변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분명하게 적의를 드러내며 후작을 노려본 발로였다.

“어디 보자고. 형님은 네놈 따위에게 당하고 있을 분도 이런 불의를 보고만 계실 분도 아니니까.”
“아무래도 주군이 되실 장본인은 무언가 약간 잘못 생각하고 계신 듯 해 이래저래 어렵군요.”

완전히 다른 사람 이야기처럼 말하고 있었다.

“형님이라. 글쎄요. 그런 분이 계시다면 오랜 세월 델피니아에 봉사하고 있는 제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만? 기묘한 일이로군요. 아무래도 기억에 없으니.”

통렬하게 혀를 찬 발로였지만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페르젠 후작의 술책이었다. 제대로 말싸움을 하려 해 봤자 이리저리 돌려서 빠져나갈 뿐이다. 후작도 그 이상 발로의 상대를 할 생각은 없는 듯 깔끔하게 서류를 정리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둘까요. 내일의 예정은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만 탄가와 파라스트의 대사와 각각 만나셔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건 그쪽에서 적당히 처리하면 될 텐데.”
“그럴 수는 없지요. 우리나라의 정세에 옆나라가 흥미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들에겐 특히 우리나라의 왕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그럼 기다리라고 말씀하시죠. 델피니아 국왕은 여행 중이시니.”

서류를 들고 일어난 페르젠 후작은 기품 있는 안면을 약간 찡그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백부님이시자 적의 단 한 분의 주군, 뒤르와 왕께서는 그야말로 훌륭한 분이셨습니다만 단 한 번 총명하신 그 분께 어울리지 않는 실수를 저지르신 일이 있습니다. 시녀가 될 예정이었던 농민의 딸에게 손을 내밀어 성은을 내려주셨던 것이지요.”

발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저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을 뿐이었다.

“국왕의 아이라면 그것이 남아이든 여아이든 지위와 명예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저 따위가 일부러 참견할 일 못되는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 경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말씀드리자면 그 여식은 국왕을 직접 모시는 시녀도 아니고 궁내에서 일하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남자 손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마구간에서 일하고 있던 하녀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쨌다는 거요. 아무리 모친의 신분이 낮다고 폐하의 자식이 아닐 리는 없지 않나.”

발로가 말했지만 어딘가 빈정대는 듯한 미소를 띠고 있는 후작이었다.

“그러니까 폐하의 자식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
“멀리 시찰에 나가셨을 때 성은을 입었다고 그 여식은 주장했고 폐하는 그 일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식이 폐하 한분만을 알고 지냈는지 어떤지 같은 시기 다른 남자와 관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여러 의문이 남는 일이었습니다. 그 여식은 달리도 얼마든지 여러 남자들과 만나는 일이 가능했으니까요. 같은 마구간에서 일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요. 군대 안에서 정을 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친에게는 말할 수 없는 아이를 배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은 쏙 빼놓은 채 폐하의 성은을 입었다고.... 내 참.”

후작은 멋들어진 수염을 경멸의 형태로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적당히 지어내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죠. 사기꾼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그 여식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발로는 빈정대듯 웃고 있었다.

“이상하기도 한 변명이군요.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언합니까?”
“젊은 여식들의 도덕심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정도 믿지 못할 것인지 발로 경은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후작이야말로 조금 더 여자라는 것에 대해 공부해야 하겠소. 분명 엉덩이가 가볍다고 말할 수 없는 여자들도 많이 있지요. 젊었건 늙었건 관계없이. 그러나 한 사람의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다른 곳에는 결코 눈을 돌리지 않는 여자도 많이 있소.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실제의 그 여식을 모르십니다.”

후작은 어디까지나 온화하게 말했다.

“나는 그 여식을 직접 심문했습니다. 신분도 교양도 없는 천한 시골 여식이었지요. 마치 바보가 딱 한 마디 외우는 듯이 그저 폐하의 아이라고 되풀이 말할 뿐. 그래서야 믿을래야 믿을 수 없지요.”
“알만하군. 후작은 그 여자가 후작 정도의 변설을 늘어놓고 어떻게 해서 자신이 폐하로부터 사랑받게 되었는지를 구구절절 늘어놓지 못했기 때문에 그 여자가 말하는 것을 거짓말이라 하시는 거요?”

발로는 감탄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럼 후작은 민중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신다는 거군. 그들은 진실을 말할 때 그 이유 같은 것을 늘어놓지 않소. 오히려 의심받으면 놀라지.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어째서 거짓말이라는 소리를 듣는지 이상하다 생각하기 때문이오. 그들은 당신처럼 앞으로의 사혹思惑이나 이득을 생각해서 말하지 않으니까. 시시한 거짓말을 할 때는 있어도 말이지. 아마 그 여자도 당신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자기 말을 의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겠지. 진실이니까 고집 세게 주장했고. 그것을 무리하게 지어낸 일이라고 결론짓는 쪽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후작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완고한 분이로군요. 어머님께 지나치게 걱정을 끼쳐드리는 건 안 좋습니다.”
“후작이야말로 의외로 질투심을 불태우고 계시는 듯 하군요.”
“제가 뭘 한다고요?”

발로는 의자에 앉은 채 쿡쿡 거리며 웃었다.

“후작은 요컨대 그 여자와 같인 신분도 지위도 없는 비천한 것이 뒤르와 왕의 남아를 출산한다는 최대의 명예를 받게 된 것에 대해 격렬하게 질투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형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고. 아닙니까?”

그 남자가 뒤르와 왕의 피를 잇는 남자라는 것은 이미 의회에서 인정된 일이었다. 그것을 이제 와서 혈통이 의심스럽다고 페르젠 후작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서 그 남자의 존재 그 자체를 말소할 수 있다고 하는 정치적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발로의 지적도 그다지 벗어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뭐라고해도 신분이 높은 자들이 주군에게 가까이 접근해 주군을 독점하려고 들이는 노력은 눈물날 정도이다. 당연히 자신들보다 신분이 낮은 자가 주군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는 일 같은 건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인정할 수 없다. 반드시 없애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페르젠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발로를 보는 눈동자에도 특별한 감정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뒤르와 왕의 왕자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조용히 말하고 인사한 후 방에서 나가고 있었다. 남겨진 발로 역시 가볍게 혀를 차고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체 일곽 내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 반년, 경비 없이는 외출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택에서만은 자유롭게 있을 수 있었다.
원래 저택에서 일하는 시종들도 여러 가지로 주인의 불운에 대해 동정하고 있는 자도 있는가 하면 모친인 페라 공주에게 충실하여 오히려 발로의 감시역으로서 눈을 빛내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결국 어디에 있어도 자유라고는 할 수 없다. 자기 방에 돌아간 발로는 시동조차 쫓아내고 혼자가 되어 좋아하는 술을 따르고는 깊은 숨을 내뱉었다.

개혁파의 계략이라고는 해도 도라 장군이 비르그나에 출진하였고 외동딸인 샤미안도 또한 치폰의 손에서 벗어나 도주했다고 한다. 강한 초조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술잔을 쥔 발로의 손에는 힘이 들어간 나머지 약하게 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문 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늦은 술은 몸에 해롭습니다.”
“카사. 도련님이라는 건 관둬. 이게 첫 잔이다.”

집사인 카사는 벌써 육십 세였다. 발로가 태어나기 전부터 공작가에서 일하고 있는 심복이자 신분은 틀려도 발로에게 있어서는 가족과 마찬가지인 ‘할아범’이었다. 그 카사는 가까이 다가와서는 책상 위의 술병을 들어올렸다. 젊은 주인이 불만스러운 시선을 향하자 카사는 거의 무표정인채로 부드럽게 말했다.

“술로 어지러워진 머리로는 폐하의 힘이 되어드릴 수 없지요.”

혀를 찬 발로는 손에 들었던 술잔을 가지고 놀면서 잠시 동안 잠자코 있었지만 드디어는 내리치듯 술잔을 놓고 창가로 다가갔다.

“날개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카사는 아무 말 없었다. 젊은 주인의 기분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발로는 차라리 증오스럽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이 정도로 자신의 무력함을 저주한 일은 없었다. 델피니아에 정통한 주군이 돌아오셨는데. 여자인 샤미안조차도 멋지게 자유의 몸이 되는 데 성공했는데! 나는 이런 곳에서 썩고 있는 일밖에 못한다니!”

이 저택은 도라 백작의 처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중한 감시 아래 놓여 있었다. 하물며 발로는 정문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개혁파가 보자면 발로는 귀중한 장기말이었다. 결코 잃어서는 안 된다며 경계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거의 울 정도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발로는 신음하듯 말했다.

“나시아스가 부럽다. 형님과 어떤 식으로 대화하고 어떤 방법으로 코랄을 공략할 것인지 어떤 작전을 세우고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제길. 페르젠은 아니지만 질투로 타버릴 것 같아.”
“도련님.”

카사는 어디까지나 부드럽게 주인을 꾸짖었다.

“한시모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너는 모른다. 그야말로 국왕 존망의 위기인 이때에 말에도 타지 못하고 검도 들지 못한 채 있는 인질 생활이란 말이다! 도라 장군은 그래도 나아. 나와 같은 굴욕을 맛보고 있다 하더라도 여차할 때는 움직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무얼 할수 있는가?! 이 중요한 때에 집안에 갇혀서 바보들의 상대나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다! 에에이 나시아스 녀석. 용서할 수 없어! 혼자서 좋은 일만 독차지하고!”

카사가 커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도련님. 지금 그 말씀 다음 번 나시아스님을 만나실 때에 제입으로 정확하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뭐라고?”
“자신을 내버려두고 폐하와 친해지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으며 실로 열 받는 일이다. 뭐라 해도 용서하기 힘들다. 조금은 나눠줘야 할 것이 아니냐고, 도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다고 전달해 드리지요.”
“카사!”

입을 딱 벌린 발로였다.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어!”
“요약하자면 그런 거였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애 애초에 그런 소리가 나시아스의 귀에 들어가 봐!”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외치는 주인에게 카사는 살짝 고개를 모로 했다.

“나시아스님은 상냥하신 분입니다. 저 같은 노인에게까지 굳이 신경을 써서 편지를 보내주시는 데에다 도련님의 일에 대한 깊은 심려가 넘치는 그 문구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분은 도련님의 어려운 일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고 마음아파하고 계신 겁니다.”
“그건! 그건 분명 그렇지만 상냥하기만 한 남자가 라모나 기사단장을 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녀석은 여차하면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적을 찔러 죽일 녀석이라고!”
“오오 그것도 같이 전해드리지요.”
“카사!”

발로는 비명을 질렀다. 애원의 표정이 되어 말했다.

“부탁이니까 기다리라고. 나보고 죽으라는 건가? 그런 소리가 그 녀석 귀에 들어갔다간 나는 그 자리에서 찔려 죽을 거야. 우선 지금 말했던 건 그냥 가벼운 소리야. 괜히 말해 본 거라고. 내 본심이라고 나시아스가 생각하는 건 절대 못 참아.”

오랜 세월동안의 보호자역은 그제서야 겨우 용서해줄 요량이 생긴 듯 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저 카사, 친우의 마음을 가볍게 여기고 부러운 나머지 질투심을 가지는 한심한 주인을 뫼시고 있던 기억은 없으니까요.”

발로는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내쉬면서도 조금은 분하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주인을 협박하는 집사를 두었던 기억은 없는데.”
“지금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아무 것도 아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해도 이길 재간이 없는 ‘할아범’이었다.

“도련님. 성급함은 금물입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나시아스님을 부러워하시는 기분은 알겠습니다만 남과 같은 것을 바라는 건 안이한 길입니다. 그것보다는 도련님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십시오.”

자조가 섞인 웃음을 지은 발로였다.

“붙잡혀 있는 몸으로 무얼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고말고요. 나시아스님이나 도라 장군이 밖에서 폐하를 지키면서 이 왕궁에 모셔오는 것이라면, 도련님께서는 안에서 폐하를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뒷짐 지고 있다면 그거야말로 도련님답지 않습니다. 안쪽과 바깥에서 동시에 힘을 합치면 나시아스님이나 폐하께도 도움이 될 터이고 난공불락의 코랄 성도 조금은 약해지게 되겠지요.”

놀란 듯 듣고 있던 발로였지만 다 듣고 난 뒤에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작금의 노인들은 무서운 소리를 하는군. 이 코랄 성에 구멍이라도 뚫으라는 소린가?”
“이 경우엔 어쩔 수 없겠죠. 구멍을 뚫어드리지 않는다면 폐하는 성벽 바깥에서 선 채로 당하시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식의 시시한 전투는 내 성미에 안 맞아.”

한쪽 눈썹을 약간 치켜올린 카사였다. 조건 반사로 발로는 목을 움츠렸다.

“도련님. 눈을 자알 뜨시고 왕국의 현재 상황을 보십시오. 그런 사치스러운 말씀을 하실 때인지 어떤지. 자알 생각해 보십시오. 애초에 유폐된 굴욕이라 말씀하시지만 당신은 어디 모자란 곳도 없고 건강하십니다. 그 정도로 큰 소리로 떠들어댈 수 있다면 된 겁니다. 그러나 현재 시내 각지에서는 훌륭한 젊은이들이 괴로워하며 자신의 몸과 생명을 필사적으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치열한 전투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힘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싸움인지 얼마나 승산이 없는 절망적인 싸움인지 알 수 있으십니까?”

발로는 대답하지 못했다. 소년시절부터 검을 쥐고서 신날 정도로 적과 싸우며 쓰러뜨려온 발로로선 약자의 마음 같은 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만큼 권력자에게 짓밟히는 약자들의 모습은 비참함이 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사실 모친인 페라 공주가 들었다면 졸도할 일이지만 유폐되기 전의 발로는 자기가 나서서 소위 말하는 ‘나쁜 곳’에 드나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은 본래라면 카사에게 엄하게 야단맞고 금지될 일이었지만 이 노인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별생각도 없을 때에 거대한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었으니 만큼 아래 있는 자들의 상황에대해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여 젊은 주인님이 벌이는 다소의 행각은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그 카사가 지금은 엄한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젊은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명이 위험해 질 정도로 박해받고 짓밟히고 있는 그들의 싸움에 비해 사자 몸 안의 벌레가 되는 일 정도가 어떻다고 하시는 겁니까?”
“우리 집사의 나쁜 말버릇은 영영 못 고칠 듯 하군.”

중얼거리면서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카사. 시내의 치안이 그 정도로 나빠져 있는 건가? 개혁파의 바보녀석들이 드디어 시민들에게까지 손을 대게 된 건가?”
“어느 시절에도 가장 먼저 희생이 되는 것은 힘없는 약한 자들입니다.”

보통 때와 다를 바 없이 가볍게 카사는 말했지만 깊은 주름이 잡힌 얼굴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고뇌의 빛이 있었다.

“도련님. 자포자기하시면 안됩니다. 섣불리 일을 만들면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끝날 뿐입니다. 폐하를.... 당신의 사촌 형님을 믿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친구도 말이지.”

발로는 쓴웃음을 짓고 다시 창문의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 왕궁의 진정한 주인은 발로가 누구보다 믿고 있는 친구와 함께 있고 누구보다 그 무용을 인정하고 있는 장군이 응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지는 바로 이곳 발로가 있는 왕궁인 것이다. 다시 돌아섰을 때의 딜레든 기사단장은 언제나의 빈정댐이 섞인 명랑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네가 말한 대로야 카사.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형님을 위해 일하도록 하겠다.”
“그러셔야 저희 도련님이시죠.”

시종 무표정인 카사가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은 듯 했다.




10장
가렌스는 아연한 표정으로 떨어진 자신의 검을 보고 있었다. 승부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운이라는 말대로 실력으로 우세하다 해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 시합에서 자신이 지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검은 그의 손을 떠났고 손목에는 둔한 고통이 남아 있었다. 눈 앞에는 금발을 묶어 올린 소녀가 가볍게 목을 갸웃거리며 망연자실한 가렌슬르 살피고 있었다.

승부는 일순이었다. 나시아스를 비롯한 기사단원의 주된 기사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가렌스는 귀찮은 듯 이런 어린아이와 시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니 한심스럽다는 태도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은 채 소녀와 마주했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가렌스의 검은 그의 손을 떠나 있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역전의 용사였다. 곧바로 다시 일어섰다.

“다 다시 한번 부탁한다!”
“몇 번을 해도 똑같아.”

소녀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건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

가렌스도 물러서지 않았ㄷ. 이런 소녀에게 진다면 기사의 긍지도 명예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 좋아. 조금은 쓸만한 놈인 것 같군. 그 나이치고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내가 방심했다. 다음은 진심으로 가주마!”
“진심 말이지. 부디 그렇게 해 줘.”

소녀는 빈정댐이 섞인 미소를 흘리며 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가렌스도 이번에는 진지함 그 자체의 표정이 되어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월은 조금은 쓴웃음을 짓고 나시아스를 비롯한 라모나 기사단원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가렌스의 실력을 잘 알고 있다. 검술로서는 나시아스에게 약간 뒤질 정도이고 그 완력은 대단할 정도이다. 특히 육탄전에 있어서는 열 명이 한꺼번에 습격해도 되받아 칠 수 있을 정도다. 신기에 가까운 검술을 자랑하는 나시아스와 함께 문자 그대로 라모나 기사단의 영웅이었다.

그런 남자가 그들의 눈앞에서 키도 덩치도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소녀에게 가볍게 농락당한 것이다. 어쨌든 움직임의 솓고 자체가 너무 틀렸다. 말과 겨뤄서 이길 정도의 다리이다. 인간의 가렌스가 쫓아가지 못한다고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리의 속도만이 아니다. 검날의 빠른 움직임, 그리고 목표를 명중시킬 때의 저오학도도 소녀 쪽이 위였다.

진검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거짓말인 듯 했다. 지극한 자연스러움으로 휘릭휘릭 검을 휘두른다. 그것만으로 가렌스는 수갑手甲을 베이고 검띠가 잘려지고 외투마저도 조각조각 잘려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남자의 몸에는 상처 하나 입히지 않았다. 체중이 없는 것 같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상대를 어떻게 해도 붙잡지 못한 채 가렌스는 결국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얼굴에 떠올리고는 발을 멈추고 있었다.

“뭐야. 벌써 끝인가?”
“아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러나 그 도망치기만 해서는 승부가 안 되잖나!”
“진 쪽의 변명으로 들리는데.”

진지하게 말한 소녀였다.

“그럼 발을 멈추고 서로 베어내길 하면 될까?”
“그럼! 힘이라면지지 않는다.”

듣고 있던 월이 과연 그럴까 하고 중얼거린 것을 가렌스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럼 귀찮으니까 이렇게 하자. 나는 이대로 움직이지 않겠어. 넌 내 정면에서 베어 들어와. 그 일격을 받아 내면 나의 승리 내 검을 날려보낼 수 있다면 네 승리. 좋지?”
“좋다! 바라던 바다!”

가렌스는 자신을 듬뿍 담아 말했다. 그의 정면에서의 참격은 사람 하나를 그대로 종단縱斷하는 것마저도 가능한 것이었다. 라모나 기사단이 크다고 해도 그런 거친 기술을 받아 낼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니 소녀 한 명의 검을 쳐내는 따위는 장난 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래야 했다. 실제적으로 어떻게 되었냐 하면 소녀는 어쩔 수 없이 양손을 사용했지만 머리를 노리고 들어온 가렌스의 검을 정확하게 받아 내었던 것이다.

승리를 확신했던 덩치 큰 사나이의 얼굴이 경악으로 변하고 그것은 다음 순간 공포로 변해있었다. 얼굴이 새빨개 질 정도의 혼신의 힘을 넣어 열십자로 맞부딪힌 형세의 소녀의 검을 쳐내려고 했지만 어떤 큰 병사의 검이던 이 공격에 굴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소녀의 팔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아니라 가렌스가 잠시 호홉을 이으려는 사이를 노려 손목을 돌려 단 일격으로 검과 함께 가렌스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불의의 일격을 받은 가렌스는 커다랗게 중심을 잃고 그만 지면에 엉덩방아를 찧어 버렸다.

“내가 이겼네.”

그렇게 말해도 가렌스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말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황을 지켜본 기사들도 부단장의 모습을 비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창백해진 표정이 되어 가렌스의 심경을 대변했다.

“이 이건 인간이 아니야!”

어젯밤 소녀가 말한 그대로 된 것이었다. 나시아스도 똑같이 경악의 표정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은 채 주군을 돌아보았다.

“폐하 이것은 대체.... 저 소녀는 대체 어떤 자입니까?”

그 국왕폐하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몇 번을 말했나. 저건 사람이 아니라고. 말 그대로 진정한 승리의 여신이라고 말이야.”

소녀는 가렌스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려 하고 있었다. 그 손이 자신에게 닿으려 했을 때 가렌스는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 뒤로 물러나려 했다. 호흡은 크게 거칠어져 있고 믿어지지 않는 것을 보는 눈으로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벌써 그런 태도를 창피하게 여긴 듯 했다. 몸을 떨더니 양 볼을 철썩 소리가 나게 때리고는 점잖게 소녀의 손을 잡았다. 일어서자 두 사람의 신장 차는 상당한 것이었다.

“또 할래?”
“아 아이 실례. 이 이젠 충분하다.”

소녀를 보는 가렌스의 눈을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처음으로 진지한 눈으로 소녀를 내려다본 라모나 부기사단장은 목에서 막히고 있으면서도 이름난 기사가 무장武將에 대해 쓰는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대 대단한 실력이었다. 가 감탄 했다.”
“그쪽도야.”
“그 그러니까.... 전사여.”
“리야.”
“그 그럼 그러니까, 리.”

가렌스는 우왕좌왕하면서도 아직 떨리고 있는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작은 소녀에게 딱딱하게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그 그러니까.... 어젯밤부터의 나의 태도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무엇보다 그 당신의 말을 의심한 것을 사과한다. 이거야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건 바로 이걸 말하는 거군.”

무서울 정도로 솔직한 태도에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바로 지금 싸웠던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내 쪽도 하나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겠네.”
“무엇을?”
“널 얕봤던 것. 네가 이 정도로 순수한 검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설사 진다하더라고 끝까지 진 걸 인정하지 않고 추하게 발버둥치지 않을까 생각했었으니까.”

이 말에는 가렌스가 새빨개져서 반론했다.

“그런 놈은 인간쓰레기지!”
“그렇고 말고.”
“그런 녀석에게는 검을 쥘 자격도 기사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도 없어!”
“그 말대로야. 그러니까 서로 마찬가지지.”

가렌스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그만 뚫어지게 소녀를 바라보고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도 즐겁게 웃고 있었다. 라모나 기사단의 주요 기사들이 놀람에 젖은 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가렌스는 소녀와 함께 주군의 앞에까지 걸어왔다. 쑥스러운 듯한 얼굴로 머리를 긁고 있었다.

“이거 면목 없습니다 폐하. 어젯밤 큰소리 친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뭘. 그대에게 잘못이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아. 보통이라면 이런 소녀와 그대가 승부가 될 리가 없으니. 좌우지간 상식이 통용하지 않는 녀석이라서 말이야.”
“말씀대롭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지금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뭐라 해도 이런, 바로 이런 가늘고 심약한 팔로 제 상대를 할 수 있다니.”

가렌스는 감탄과 외경이 섞인 듯한 얼굴로 소녀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렌스와 검을 맞대기 전에는 명확한 쓴웃음과 놀림이 섞인 차가운 시선을 띄고 있었는데 지금은 무언가 특이한 것, 일종의 신성한 것을 보고 있는 눈으로 변해있었다.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공포로 성장하는 감정이었지만 잘 될 경우에는 경외심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물론 그 원인의 대부분은 그들의 주군이 무조건적으로 소녀의 무용을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월은 이미 한껏 놀라 공포마저 느끼는 정검을 지나쳐 있었다. 그 뒤에는 솔직히 상대를 평가하고 칭찬할 뿐인 유연한 정신을 이 남자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국왕으로서는 별나다고 할 수 있는 남자는 웃는 얼굴로 충실한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어떤가 나시아스. 자네도 이 아이와 시합이라도 해보겠나?”
“바라는 바입니다만 이쪽의 승리의 여신께서는 받아들여주실까요.”
“리 라고 부르라니까. 진짜 승리의 여신이 들었다간 기분이 나빠질걸.”

소녀의 말투는 딱 잘라 말하고 있었다. 지금의 일에 대해서도 특별히 만족스럽다거나 자랑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있는 일이라고 하는 듯 했다. 그런 소녀에게 가렌스가 열심히 권했다.

“내 쪽에서도 부탁한다. 꼭 단장님과 한 시합 겨뤄주기를 바래. 내가 이길 수 없었으니 나시아스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상대가 될 수 없을 테니까.”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래도 생각되지 않지만 말이야.”

당사자인 나시아스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너만 좋다면 한 번 겨뤄보고 싶군. 검의 시합은 몇 십번이나 보았지만 이번과 같은 대결은 처음 보았어. 이렇게 되면 한 사람의 검사로서 나도 검을 교환해보고 싶어지는데 어떨까?”

소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지만 이런 솔직함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쪽 사람들은 정말 재미있어.”

그런 말을 하곤 이번에는 라모나 기사단장과 맞서게 되었다. 소녀는 알지 못했지만 나시아스의 검술은 그 화려한 전투 방식, 승리 방식에 의해 미기美技라고까지 불릴 정도의 것이었다. 힘으로 압도하는 가렌스와는 달리 상대가 능숙하면 능숙할수록 자신도 힘을 발휘하는 그러한 형의 검사인 것이다. 구경하고 있는 기사들도 이번에는 아까처럼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가렌스의 때와는 달리 격렬한 검격이 검극劍戟이 펼쳐졌던 것이다.

두 사람의 발놀림 검놀림은 눈이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대범하고 온후하게 보였던 나시아스가 검사로서의 모든 피와 정렬을 바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것을 받아치는 소녀도 아까와는 상당히 바뀐 진지한 표정이었다. 구경하고 있는 기사들과 견습기사인 소년들은 말도 하지 못했다. 모두 마른침을 삼키고 주먹을 꽉 쥐며 잡아먹기라도 할 듯 시합에 빠져들어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정적이 찾아든 라모나 기사단의 요새에는 검날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격하게 울리고 있었다. 윌도 또한 숨을 멈추며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 정도의 시합은 일생에 몇 번 볼까말까 한 것이라고 조용히 마음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소녀의 보통에서 벗어난 이상한 힘이 승패를 결정했다. 보기에는 13세의 소녀의 몸인데도 짐승같이 빠르고 유연하며 덩치 큰 가렌스도 힘으로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완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아무리 나시아스가 뛰어난 검객이고 풍부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런 전사를 상대했던 일은 없음이 틀림없다.

소녀의 발을 봉하기 위해 눈에도 보이지 않는 빠르기도 종횡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때에 맞추지 못했다. 아뿔싸 하고 느껴 갑자기 몸을 돌려 회피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나시아스의 발을 훨씬 상회하는 속도로 소녀는 거리를 줄여 방어로 돌아선 나시아스의 검을 붙잡은 것이었다. 다음 순간에는 소녀의 검이 나시아스의 가슴에 바싹 대어져있었다. 나시아스는 솔직하게 양손을 들어 항복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표정은 분하다기보다는 경탄의 빛이 어려 있었다.

이 소녀의 강함은 진짜였다. 강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상대와 몇 번이나 싸워왔던 나시아스였지만 이 정도로 깨끗하게 당해본 기억은 없었다. 당장에 나시아스가 나라 제일의 전사라고 인정한 것은 다름 아닌 국왕이었지만 어쩌면 그 왕조차도 상대하기 힘든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생겼다. 소녀는 검을 갈무리하고는 진지한 얼굴로

“굉장하네.”

하고 말했다.

“굉장하다는 것은?”
“강하다구. 너도 가렌스도. 내가 이길 수 있었던 건 그쪽들보다 내 몸이 튼튼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것 뿐이야.”
“리.”

이것에는 나시아스도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신경 써서 그런 말을 해 주는 건가?”
“아냐. 진심으로 상대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
“내가 말할 소리군. 고맙다. 좋은 공부가 되었어.”

진심어린 말과 함께 머리까지 숙이자 소녀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고 있었다. 의외인 듯한 표정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가렌스도 그렇고 나시아스도 그렇고 이런 어린 소녀인 자신에게 진 사실을 조금도 분개하지도 창피해하지 않고 솔직하게 역량을 인정해주고 있었다. 보고 있던 윌은 그것이 이 소녀에게 있어 미지의 기쁨이었던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괴물이라 불린 일밖에 없다고 소녀는 잘라 말했다. 능력을 보여주면 이곳의 사람들도 자신을 무서워하고 이단시 할 것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핫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나시아스도 가렌스도 쓸데없는 체면이나 고정관념 같은 것에 무게를 두는 인종들이 아니었다. 신분이 낮건 말건 나이가 어리건 말건, 강한 것은 강하다고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델피니아 서부 제일의 실력을 가진 집단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나시아스님도 당하셨군요.”

가렌스가 농담을 했지만 라모나 기사단장은 진지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 폐하가 말씀하신 대로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면 나의 검술 따위 통용할 리 없는 것이 당연하지. 나는 오히려 발도우의 딸과 검을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하네.”

옆에 있던 기사들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늘의 소녀는 어제와 같이 투박한 옷을 입고 있지만 잘못 본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햇빛에 빛나는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고 은으로 된 보관寶冠을 쓴 채 땀이 배인 피부는 장미색 빛으로 넘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군신의 딸이라는 것에 어울렸다. 실제로 이미 어젯밤, 몸을 씻고 머리를 말린 뒤의 소녀와 만났던 경비역의 기사는 저도 모르게 말을 삼키고 그 자리에서 멈춰서버렸을 정도였다. 소녀 쪽은 언제나 있는 일이라며 신경을 쓰지도 않았지만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 얼굴로 이득 본 일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충분히 힘이 되는 것이니까.”
“예쁜 여자들이라면 잔뜩 있잖아.”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그녀들은 남자를 매료하는 마법을 쓸수 있는 거야.”
“마법? 재미있는 소리를 하네.”
“분별도 지위도 있는 남자가 어린 소녀에게 유혹 당하는 것을 나는 몇 번이나 보아왔으니까 말이야. 그럴 때마다 여자란 무서운 것이라고 몸을 떨었었지.”
“잘도 말하네.”

소녀는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남자라고 해도 여자를 푹 빠지게 만드는 마법을 쓸 수 있을 거 아냐. 월 같으면 얼마든지 여자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한 명도 끌려온 적은 없지만 말이야.”

진지하게 대답하는 남자였다. 아무래도 이 임금님은 정말로 그런 쪽 이야기에는 연이 없는 듯 했다.

“내 이야기가 아니야. 네 이야기를 하는 중이지. 일반적인 여자라면 한 남자를 매료할 정도의 마법만 쓸 수 있으면 돼. 다른 남자에게는 무효라도 자신이 마음에 든 남자를 빠지게 할 수 있다면 되니까. 하지만 너의 경우에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좀더 강력하게 끌어당길 수 있을 거다. 틀림없이.”

그런 말을 들어도 소녀는 아무 생각 없는 듯한 모양이었지만 남자의 생각은 정확하게 맞아드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나 선연하게 기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자신들의 단장과 부단장이 보도 듣도 못한 상대에게 철저하게라고 할 정도의 패배를 얻었는데도 그들은 분개하는 일없이 주인을 가볍게 여기는 일도 없이 솔직하게 칭찬과 경외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 나랑 월, 두 사람이서만 코랄로 향해도 상관없는 거지?”

당장이라도 출발하려고 하는 소녀에게 나시아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저도 동행하고 싶습니다만....”
“그건 안 돼.”
“안 된다.”

남자와 소녀가 동시에 말했다.

“코랄은 벌써 나의 귀국에 대해 알고 있다. 윈저에서 도망쳐 나온 내가 이 비르그나를 향할 것이란 정도는 그들도 알고 있을 거야.”
“얼마 안 있으면 이곳에 코랄로부터 상황을 보기 위한 사자가 올 거야. 그때에 단장이 부재중이라면 의심해달라고 비는 거나 똑같잖아.”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두 사람의 말에 듣고 있던 기사들은 납득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나시아스도 알고 있던 일이지만 다시 한번 감탄했다. 이 소녀는 분명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 한 가지 묻고 싶은데 먼저 코랄 성에 잡혀 있는 사람들을 구출한다고 너는 말했었지만 군대도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구출할 생각인 거지?”

소녀는 대답하는 대신 둥글게 요새를 둘러싸고 있는 벽을 올려다보았다.

“윌. 코랄의 성벽하고 이 벽하고 어느 쪽이 높아?”
“글쎄. 비슷한 정도가 아닐까?”

그것은 어른의 신장의 최소한 3배는 될 듯한 높이의 벽이었다. 가까이 가서 벽을 두드리고 있는 소녀를 기사단원들도 무엇을 할 것인지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움닫이로 사용할수 있는 거리는 얼마나 돼?”
“너 말야. 뛰어 오르겠다는 거냐 이걸?”

남자는 놀랐다. 아무리 소녀의 다리라고 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는 돌아보더니 딱 잘라 말했다.

“분명 나 혼자서는 무리야. 월 받침대 해 줘.”
“받침대라니. 여기에 엎드리면 되는 거냐.”

진지하게 양손을 내민 왕을 보며 나시아스는 이마를 짚었고 가렌스는 신음소리를 울렸으며 그 외 다수의 기사들은 새파랗게 질려 당장 말리기 시작했다.

“폐 폐하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 일은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아니 제가!”

앞다투어 주군의 대신이 되려고 하는 기사들이었지만 소녀는 엎드리는 걸로는 너무 낮다고 주문을 붙였다.

“선 채로 벽 쪽을 향해서 두 손을 붙여. 어깨를 빌릴 테니까.”
“음. 도움닫기로 쓸 수 있는 건 네 다리로 세어도 기껏해야 다섯걸음 정도일 거라고 생각한다.”
“알았어.”

말하기 무섭게 소녀는 다섯 걸음을 물러나서 기세 좋게 달리더니 남자의 어깨를 밟고 뛰어 올랐다. 기사들은 모조리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다음 순간 소녀는 외벽의 위에 서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벽을 넘으려면 최소한 갈고리가 붙은 사슬이라던가 두 줄로 엮은 사다리가 필요할 터였다. 그러나 현실에선 소녀는 외벽 위에 서 있었고 거의 풀리려 하는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며 웃는 얼굴로 남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넘어갈 수 있겠어.”

라고 이번엔 가볍게 뛰어 내린 것이었다. 그날 밤 윈저성에서 남자가 목격했던 그 광경 그대로였다. 떨어진다면 무사하지 못할 높이에서 이 소녀는 자유롭게 뛰어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걸로 들어갈 순 있어. 나올 때는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하자.”
“확실히 너는 넘어갈 수 있어도 보통 사람에게 이 방법은 우선 무리야.”
“그렇겠지. 게다가 중요한 것은 페르난 백작을 구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라면 개혁파도 금방 목숨을 빼앗는 짓을 하지는 않을거라고 봐.”
“동감이다. 백작은 죄인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처형을 시킬 수 있지. 하지만 다른 자들은 모두 오랫동안 델피니아에 봉사해온 중신들이니까. 칩거한다고 둘러대는 것이 고작이겠지.”

느긋하게 대화하는 주군과 금발의 소녀를 바라보는 기사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본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기사는 정말로 군신 발도우가 딸을 보내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기사는 델피니아는 신의 영광에 빛나는 것이라고 까지 느꼈던 것이다. 나시아스 역시 작게 기도문을 읊조리고는 발도우에게 감사를 바치며 물색의 눈동자를 감동에 떨면서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폐하를 잘 부탁한다.”
“맡겨둬. 나도 보고 싶어. 코랄의 성에서 왕관을 쓴 윌을 말이야.”

나시아스도 가렌스도 모두 강하게 끄덕였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무엇보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다고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국왕에게는 발도우의 딸이 붙어 있다. 이제부터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영주들을 설득하도록 하지.”

나시아스의 말에 소녀는 귀엽게 고개를 모로 하며 웃었다.

“나는 신 같은 게 아냐. 좀 남들과 틀리긴 하지만 그냥 어린애라구. 그러니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뭐라해도 인간의 남자라는건 여자와 아이들에게 약하니까 말이야. 지금의 나는 그 양쪽 모두에 해당하는 셈이고. 코랄에 어느 정도로 군대가 있던 간에 쉽게 지나갈 수 있을 거야.”
“그럴까?”
“그렇다니까.”

소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끄덕이며

“애초부터 얕보고 방심해 줄 거 아냐? 뒤통수를 때리는 정도는 간단하다고.”

이것에는 가렌스가 복잡기괴한 얼굴이 되었고 나시아스는 납득했다는 듯이 끄덕였으며 그리고 월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11장
도라 장군의 영지, 로아는 코랄에서 북상하여 3일. 스샤까지의 여정의 반 정도 되는 곳에 있는 풍족한 영지이다.
야생마의 군생지로서 유명하며 사람들의 기질도 활달하고 소박하다. 로아의 남자들은 건장한 농부임과 동시에 타고난 기수騎手들이라고 자부할 정도이다. 그러나 코랄을 출발한 장군은 행락이라도 즐기는 듯이 천천히 기마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일부러 걸음을 늦추고 있는 듯 했다.

저택 안의 주된 가신들을 데리고 코랄을 출발해서 닷새가 지났는데도 전체의 삼분의 이를 소화해낸 정도였다. 통상 여정보다 배 이상 소비하고 있다는 계산이었다. 고향에는 가신들의 가족들이 있다. 지난 반년 간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 일각이라도 빨리 달려 돌아가고 싶을 터였지만 주인의 심경을 헤아려 가만히 참고 있었다. 그러나 시종들 중에서도 젊은 자는 주인의 태도를 의심하고 있는 듯 했다.

“주인님께서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 걸까요?”

그런 말을 조용히 상관의 귀에 속삭이는 자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잠자코 있어라. 장군님께서는 장군님만의 생각이 있으시다.”
“그렇지만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로아로 돌아가 비르그나에 계신 폐하와 합류하지 않으면 안될 터입니다. 아가씨의 일이 걱정되시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우선 군대의 준비를 정연히 하지 않으면 아가씨를 구출하지도 못할 것 아닙니까?”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정도도 알지 못하실 장군님이시라 생각하는 거냐? 쓸데없는 말을 할 새가 있다면 주변 경비라도 서고 있어라.”

경비라고 해도 이 근처에는 습격해 올만한 짐승도 업다. 그것도 녹색의 평지가 계속되는 이런 곳에서 경비라는 건 웃기는 이야기였다. 대체 무엇을 경계하고 있으면 좋은 것인지 머리를 갸우뚱거리면서 젊은 종자는 대열 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을 야단친 고참 종자는 이런이런하고 생각하면서도 다리를 움직여 주인과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수염의 장군은 충실한 심복을 옆 눈으로 보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안하군 타르보.”
“무슨 말씀을. 가끔은 말에 오른 채 천천히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이 길을 지나갈 때는 언제나 힘껏 살기를 채운 채 말을 달리고 있었으니까요.”

지난번은 바로 그 내란 때였다. 코랄에서의 이변을 눈치채고 장군도 타르보도 그들의 주군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말을 달렸었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에는 코랄은 이미 페르젠이 이끄는 개혁파에 의해 제압되어 국왕은 소식불명에 그 후견인이자 장군의 친구이기도 한 페르난 백작은 체포되었고 주된 국왕파의 사람들은 모두 권력을 빼앗기고 근신, 장군도 그 장소에서 강제적으로 무장 해제되어 왕궁 내의 저택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었다. 굴욕이라 하고도 남을 경험이었다. 그들은 로아로부터 샤미안도 불려들여 엄중한 감시하에서 인질생활을 강요했다. 장군은 지금까지 얼마나 국왕의 무사를 빌고 있었는지 모른다.

2년 전까지 그저 친구의 아들이었다. 딸 한 명밖에 두지 못했던 도라 장군은 친구 자식의 선한 성격과 뛰어난 무용을 마음 깊이 아끼고 있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에게도 저런 자식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백작에게 말한 일도 있었다. 그런 때의 페르난 백작은 자식 자랑을 하거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고맙자는 말을 할뿐이었다.

“뭔가 자네. 남이 기껏 칭찬하고 있는 거니까 좀 더 기쁜 얼굴을 하란 말이야. 하여튼 개천에서 용 났다는 건 바로 이걸 두고 하는 소리라니까.”

기운이 빠진 장군이 불만을 흘리면 백작은 온화하면서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었다.

“이보게 도라. 잘도 말하는구만. 제멋에 산다는 건 바로 이걸 두고 하는 소리군. 자네와 샤미안이 피가 이어진 부녀라고 누가 믿겠나? 부디 마나님께 감사하라고.”
“이놈 말 다했나.”

웃으면서 술잔을 나누곤 했다. 그것은 벌써 얼마나 지난 일이던가.

“하지만 페르난, 자넨 못 말릴 과보호야.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자네 자식 정도의 젊은이는 수도에도 거의 없어. 그렇고 말고. 저 기사 발로와 맞대결을 해도 하나 뒤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분명 그때의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쁜 듯 쓸쓸한 듯한 복잡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중에 그 미소의 의미를 알았을 때 도라 장군은 경악한 나머지 졸도할 뻔했었다. 페르난 백작은 오랜 친구인 도라 장군에게도 자식의 태생에대해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견인으로서 궁정에 들어간 백작과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을때 장군은 뭐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어째서 미리 밝히지 않았던 것이냐고 나무랐어야 되었을까 아니면 여태까지 참으로 잘 국왕의 자손을 지켜냈다고 말해주었어야 되었을까.

백작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 울고 난 뒤처럼 벌건 눈으로 가만히 오랜 친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상 슬픔에 잠겨있던 것이 백작의 아들이었다. 22년간 아버지라고 불러왔던 사람이 실은 전혀 타인이라는 말을 들은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자신을 주군이라고 부르며 무릎을 꿇어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그만 둬! 라고 얼마나 외치고 싶었을까. 그런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도라 장군도 또한 친구의 자식에게 무릎을 꿇었다.

아니 더 이상 친구의 자식이 아니다. 충성과 검을 바쳐야 할 주군이었다. 아버지에게 이어 ‘도라 아저씨’의 태도마저도 격변하자 당사자인 주군은 입술을 일자로 한 채 짓씹고 있었다. 그 슬픔을 떨어내려 했는지 혹은 백작의 지금까지의 애정에 보답하려 했는지 젊은 국왕은 즉위하자 무턱대고 공무에 몰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어떤 작은 진정데도 귀를 기울이고 어떤 작은 장부라고 훑어보며 스스로 허가를 내렸다.

아마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도라 장군은 생각하고 있었다. 성에 귀찮은 장식품으로서 놔둬야 했을 그 즉석 국왕은 의외일 정도로 우수하고 얕보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어떤 추문도 딛고 일어서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는 정신력과 신기할 정도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명장에 명정치가는 없다고 흔히들 말한다. 적을 쳐서 물리치는 전투의 재능과 저글 끌어들여 서로의 이득을 맞추는 정치의 재능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히 드물게 그 양쪽의 재능을 겸비한 인물이 있다. 그 왕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명정치가였던 진짜 아버지와 온후하면서도 무술의 명인이었던 키워준 아버지, 그 양쪽의 좋은점을 이어받고 있었다.

왕궁의 사실상의 지배자로 군림하려고 계획하고 있던 페르젠이 눈엣가시로 여긴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그가 쓴 방법은 너무나 지독한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친구의 이름을 부른다. 자네 아들은 살아있었네.... 라고 만날 수도 없는 백작에게 글을 보냈다. 온후하게 보여도 고집이 센 백작이었다. 어쩌면 나에게 아들은 없다고 거부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자기 이상으로 국왕의 무사를 빌고 있음을 장군은 알고 있었다.

페르난 백작은 벌써 반년째 투옥생활중이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젊은 시종이 환기시킬 필요도 없이 장군의 마음은 벌써 고향을 지나 비르그나를 향하고 있었다. 마음껏 채찍질을 하여 로아로 향하여 전력질주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와 초조함을 장군은 출발 직후부터 필사적으로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후환을 끊기 위해서도 모든 힘을 다해 그 남자를 지원하기 위해서도 지금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심각한 얼굴로 말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주인에게 타르보가 말을 걸었다.

“장군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무얼 걱정하고 있는지 알겠나?”
“공으로 곁에서 20년을 모신 것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는 일반적인 남자들과 비교해선 결코 뒤지지 않을 분입니다. 지금은 시간에 닿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혼자서 비르그나에 찾아오실 겁니다.”

거친 위안의 말에 장군은 슬며시 미소를 보이며 끄덕였다. 로쉐의 가도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방에는 반년만에 보는 타우의 거대한 모습이 있었다. 가도를 넘어서면 로아까지 하루거리였다. 여기까지 필요 이상의 시간을 들여왔지만 역시 무리였던가 하고 장군도 포기하는 한숨을 내쉬었을 때 일행의 뒤쪽에서 시종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장군님 저것을!”

말을 멈추고 지금 온 길을 돌아본 장군이었다. 똑바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말이 있었다. 말 위의 인물은 멋진 고삐 부림으로 점점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장군의 얼굴이 환해졌다. 종자들도 기수가 누군지 눈치채고는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아가씨?!”

도중에 어떻게 손에 넣은 것인지 샤미안은 말을 바꾼 모양이었다. 안장에는 물통과 식료를 담은 가방을 메고 종자에게 빼앗았던 칼집 없는 칼을 마찬가지로 옆에 묶어 놓고 있었다. 일행을 확인하고는 말을 달리면서 커다랗게 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단숨에 일행이 있는 위치까지 달려와 단 이틀만에 아버지를 쫓아온 영애는 젊은 이마를 땀으로 적신 채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부친에게 인사했다.

“늦어졌습니다 아버지.”
“잘 왔다 샤미안!”

커다랗게 웃으며 대답하는 장군은 그때까지의 울적한 태도를 벗어 던진 채 종자들에게 기합을 넣었다.

“알겠나! 이젠 일각의 여유도 필요없다! 오늘 내로 지나간다!”

타르보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활개 폈습니다 아가씨!”
“샤미안 아직 달릴 수 있겠느냐? 무리라면 시종을 한 명 두고 가마. 너는 나중에 와라.”

여태까지 달려왔을 텐데도 샤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몸의 피로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반년 간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고통에는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런 것보다는 왕국의 정당한 주인이 지금이야말로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남자를 걱정하면서 붙잡힌 몸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가지요 그 분께로!”

그에 답해 일제히 포효가 울렸다. 마중하기 위해 나왔던 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전장을 질주하듯 그들은 지축을 울리고 있었다.




- 2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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