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니아전기 03 /카야타 스나코 /대원씨아이
백아궁의 어두운 그림자
1장
와이베커 전투 4일 뒤 낮.
추방중인 국왕을 대장으로 하는 국왕군은 잔업 처리에 쫓기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대승리를 거둬 성을 점거한 것은 좋지만 이쪽의 두 배 쯤은 되리라 생각되는 군대의 대부분이 투항해왔기 때문에 뒤처리에 보통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투항이 거짓이 아닌 듯한 자는 지휘 하에 넣었고 의심스러운 자는 일단 제쳐두었으며 끝까지 저항하려는 자에게는 경비를 붙여 감금했다. 자세한 조사는 할 수 없었다. 대략적인 선별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정리가 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실제로 패잔병의 처리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것은 일부의 장교들뿐이고 병사들은 각자 보수를 받고는 뒷일을 대비해 말과 무구巫具의 손질에 여념이 없었다.
“임금님도 제법이시지 않은가.”
“그렇구만. 이걸로 단숨에 아군이 두 배가 됐어. 하루 이틀 사이에는 코랄로 진군하기 시작하겠지. 슬슬 움직일 때니까.”
기적적인 승리에 병사들도 의욕이 가득했다. 무구 정리에만 그치지 않고 비는 시간을 이용해 몸도 산뜻하게 정리를 해두었다. 어떤 자는 수염을 깎고 어떤 자는 목욕을 즐겼다. 아직 강에서 헤엄치기엔 이른 계절이었지만 죽음과 광기의 전투를 헤쳐 나온 뒤다. 함락시킨 성 주변에서 목욕을 즐기는 병사들의 모습은 꽤 자주 볼 수 있었다. 한가로운 광경이었다. 국왕군 중에서도 이채를 띠고 있는 타우의 남자들 또한 성에서 약간 떨어진 숲에 기분전환을 위해 나가 있었다.
와이베커 성은 자연의 축복을 받은 풍경 속에 세워져 있었다. 조금만 성에서 벗어나면 짙은 녹음이 펼쳐지고 시원하니 숲속에 안겨있는 깊은 샘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목욕 말고 다른 곳에도 있는 듯했다. 전라全裸의 그들은 저마다 전쟁 중의 짧은 휴식에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젊은 간부급인 츠이르 출신의 브란이 샘에 몸을 담그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뭡니까. 코랄 녀석들, 국왕님 아버지의 목숨을 방패로 잡고 있다 이겁니까?”
“그런 거다. 백작의 목숨이 아까우면 이 이상 가까이 오지 말라는 소리겠지.”
이쪽은 타우 사내들의 수령격인 이븐이었다. 간부보다 수령 쪽이 스무 살 정도는 젊다. 사실 이븐은 그들 여덟 명 중에서 가장 젊었다. 그는 호리호리하면서도 단련된 체구를 아낌없이 드러낸 채 물의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수북하게 자라난 잡목들이 그들이 있는 샘을 숨기고 암석을 따라 흘러 내려오는 물이 작은 소리를 울리고 있는 외에는 조용하니 정숙함만이 돌아오고 있었다. 카지크의 니모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뭐냐. 그 맘에 들질 않는구만요. 그런 게 윗대가리 놈들이 하는 방식입니까.”
“그래서 국왕님은 어찌한답니까? 여기서 군대를 멈추는 겁니까?”
“그럴 수도 없어.”
물에 젖은 손으로 슥슥 머리를 문지른 이븐이었다. 짧은 금발이 두피에 뾰족뾰족 나와 있었다.
“이런 요구는 한번 들어준다고 그게 끝이 아니라 이거야. 진군을 그만두는 걸로 냅둘 거 같아. 전면 투항은 물론이고 그 녀석 혼자서 코랄에 오라고 주문해 올 걸.”
“하지만 국왕님한테 있어서 진짜 아버지 같은 사람이잖습니까?”
“진짜 아버지 이상의 아버지야. 그놈들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겠지.”
렌트의 사르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생각을 하는 건 우리들 일이 아니잖아. 우리들으느 부두목의 지시에 따르면 되는 거야.”
“사르지 말이 맞구만. 부두목 의사는 어떻수?”
“나는 월이 결정하는 대로 따를 거야. 그러려고 여기 있는 거니까.”
“그럼 국왕님 의견은 어떤데?”
“그게 말이야. 그 바보 자식이 하는 일이니 군대의 지휘는 누구 다른 사람한테 맡겨 버리고 자기 혼자 왕궁에 숨어들겠다는 소리를 하고도 남을 거란 말이야.”
다른 일곱 명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한 사람이 놀리는 눈초리로 이븐을 바라보았다.
“그쪽도 고생하시누만요.”
“정말이다.”
심각하게 대답한 이븐이었다.
“도라 장군의 노파심이 나한테 옮겨올 것 같아. 젠장맞을 놈.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말이야. 그런 부분은 신경 좀 써 주라.”
남자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코끝을 긁으며 브란이 말했다.
“다시 말해 우리들더러 국왕님이 뭐 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으라 그런 겁니까?”
“그런 거지. 뭐 이런 일은 도라 장군이나 라모나 기사단장도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낮에는 장군들이 감시할 테니까 그렇다 치고 문제는 밤중이야.”
“그렇게 덩치 큰 사람이 몰래 진영을 빠져나가려고 해봤자 분명히 누군가 눈치챌 텐데요.”
당연한 의문이지만 이븐은 고개를 저었다.
“그 자식은 말야. 그런 덩치래도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살쾡이처럼 발소리 없이 걸어다닐 수 있다고. 너희들처럼 말이야. 스샤의 숲을 걸어다니는데 필요한 기술이긴 했지만. 도시 출신 기사들은 절대 못 따라할 걸.”
“하아.”
“아깝구만요. 군대 선봉 같은 걸로 세워두지 말고 타우의 깃발 아래다 세워두고 싶은 사람이네요.”
농담이 섞인 말투였지만 이븐만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그 녀석의 목숨은 더 이상 그 녀석 혼자 게 아니야. 그런데 아직도 저 바보 자식은 그걸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주변에서 어떻게든 해줄 수밖에 없단 말이야.”
남자들은 일순 조용해졌다. 그들의 젊은 수령은 상당히 진지하게 그 국왕의 단독행동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브란이 낮게 웃었다.
“분명 국왕이 없는 국왕군 따위는 농담거리도 못되겠구만요.”
“조심하죠.”
“미안핟. 이런 일은 원래 타우의 자유민이 할 짓이 못되는 건 알고 있지만...”
“뭘요. 상대가 살쾡이라면 우리들 특기 아닙니까.”
“좀 징그럽게 크고 왕관이 붙어 있는 살쾡이라 그렇지.”
조용하던 샘에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가 잦아듬과 동시에 바위 위쪽으로부터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소꿉친구네. 잘 알고 있으니.”
전혀 기척을 느낄수 없었던 그 목소리에 남자들은 일순 긴장했지만 위를 올려다본 이븐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엿보기라니 취미가 나쁘구나 리.”
남자들의 입욕을 바위 위쪽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와이베커 전투에서 기적적 승리를 불러들인 소녀였다. 살쾡이같이 기척을 숨기고 걷는 것은 이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타우의 산적들이나 스샤의 야생아보다 이 소녀 쪽이 더 짐승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그 소녀는 벌것벗은 남자들의 무리를 발 아래로 바라보면서도 태연하게 말했다.
“왜 엿보는데? 엿본다고 해도 별로 재미있는 것도 없잖아. 나도 끼워 줘.”
“엑?”
“어이 잠....”
남자들이 당황하여 부산을 떠는 것은 곁눈으로 둔 채 소녀는 잽싸게 장화를 벗어던지고 검띠를 풀어 윗옷과 바지를 벗어 던지더니 가슴에 감았던 천마저 풀어 헤쳐 발가벗은 뒤 기세 좋게 샘으로 뛰어 들었다.
“우왁!”
당황한 것은 남자들 쪽이었다. 이쪽은 각각 서른에서 마흔 정도 되는 다 큰 어른들이고 상대는 열세살의 소녀다. 유감스럽게도 양쪽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꼬마 아가씨!”
모두가 무척이나 당황했다. 대부분 후다닥 샘물에서 뛰쳐나가 옷을 주워 들었지만 소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능숙하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기분 좋다. 더운 목욕탕 같은 것보다 이쪽이 훨씬 좋구나.”
“어이 리....”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븐이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이미 허리는 뒤로 빠져 있었다.
“그런 것보다 조금은 남의 눈도 생각해라.”
“왜?”
“왜라니 임마.”
복잡한 심정이었다. 상대는 완전 어린애다. 별로 당황할만한 게 아니라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래도 자신을 가볍게 양손으로 안아들 정도로 괴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자연스레 대응하는 입장도 미묘해져 버린다.
“너도 일단은 여자잖아. 벌거벗은 남자들이 득시글거리는데 그런 모습으로 뛰어드는 게 아니야. 싫어도 보게 되잖냐.”
“별로 보여줘도 상관없는데?”
“넌 상관없어도 우리들이 상관 있다고! 남자 몸에도 보이고 싶지 않은 게 있단 말이다!”
이젠 완전히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귀염성 있게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수면 아래 숨겨져 있는 상대의 하반신을 언뜻 쳐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별로 그런 거 희한하지도 않은 걸. 나도 바로 얼마 전까지 붙어 있었는데 뭐.”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을 잊은 이븐의 머리 위에서 다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다들 모여있군.”
“월!”
그 틈에 이븐은 급히 샘에서 기어 올라왔다. 물론 다른 남자들은 혼쾌히 국왕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뭐야 너, 회의는 어떻게 됐냐?”
이븐의 소꿉친구이자 델피니아의 국왕인 월 그리크는 남들이 보기에도 피로가 쌓여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흘 동안 잔업처리에 쫓겼던 데 대한 여파가 상당히 드러난 모양이었다. 커다란 신체에도 왠지 힘이 없고 눈 아래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일단락 된 정도랄까. 못 해먹겠다. 전투 쪽이 훨씬 편하고 좋아. 겨우 틈을 봐서 빠져 나왔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감시를 떼어놓고 혹은 들키지 않고 탈출해왔다는 소리다. 샘 안에서 소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월. 여기 기분 좋아. 수영 안 할래?”
“그렇군. 같이 할까.”
말릴 새도 없었다. 아까와 똑같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발가벗은 국왕이 샘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남자들은 얼이 빠져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언제까지고 보고 있을 수도 없는 터라 두 사람이 수영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바위 쪽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두 사람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란이 꽤나 기가 막히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국왕님, 역시 어딘가 보통이 아니에요.”
이븐은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주변이 고생하는 거라구.”
그 샘은 약간만 들어가면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이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수영에는 자신이 있는 듯 즐겁게 헤엄쳐 다니다가 바위 위로 기어올라가 한숨을 돌렸다. 젖은 머리카락을 짜면서 소녀가 말했다.
“스샤는 숲 속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그런 것치고는 수영 잘하네.”
“아아, 커다란 호수가 있어서 여름엔 언제나 거기에서 수영했으니까. 한나절 동안 계속 헤엄쳤던 때도 있어.”
올려다보자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아름다웠다. 수면부족인 눈에는 눈부시게 비쳤는지 국왕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근처에는 역시나 나체인 소녀가 바위에 앉아 있었다. 이제 와서 새삼 그 모습이 눈부시게 보였을 리도 없는데 남자는 소녀를 보려고 하지 않은 채 말을 걸었다.
“리.”
“왜?”
“코랄의 변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소녀도 남자를 보려고 하지 않은 채 위쪽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뭐어, 웃자는 소리겠지.”
“그렇겠지.”
“페르젠도 설마 네가 어슬렁대면서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거야. 그건 단순히 견제하는 거야.”
“그렇겠지.”
이쪽도 위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 군대를 전진시키면 언젠가는 견제가 아니게 될거다.”
“그렇겠지.”
마레바를 해방하고 근위병단을 타도해 코랄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백작은 교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두사람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리.”
“왜?”
“코랄의 요구를 들어줘선 안 되겠지?”
“안되지. 그건 바보짓이야.”
이 말에는 확실하게 단언한 소녀였다. 남자도 알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해봤자 쓸데없이 개혁파를 기쁘게 해줄 뿐인 것이다.
“왕이 없는 국왕군이라니 농담 축에도 못 끼어. 더구나 네가 인질로 잡히면 그걸로 끝이야. 이쪽은 전면 투항할 수밖에 없어.”
“알고있어. 나는 군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고 군대를 이곳에서 멈출 수도 없지.”
“그렇겠지.”
“하지만 아버지를 못 본 체 할 수도 없어.”
“장군들은 뭐래?”
남자는 커다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낮게 중얼거렸다.
“백작을 내버려둬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도라 장군에게 있어 페르난 백작은 오랜 친구이며 반드시 살아서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일 터였다. 하지만 대의 앞에서 공사公私를 혼동할 장군은 아니다. 소녀는 발끝으로 찰랑하고 수면을 찼다.
“당연하겠지. 백작 본인도 그럴 각오로 있을 테고.”
두 날개를 편 작은 새가 기분 좋은 소리로 지저귀면서 춤추듯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빠져버릴 것 같이 푸른 하늘에 드문드문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풀어내린 소녀의 머리카락이 거의 말라갈 때쯤 되어 남자는 겨우 입을 열었다.
“리.”
무섭게도 낮은 음성이었다.
“뭔데.”
“부탁이 있어.”
“그러니까 뭔데.”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남자는 단번에 말했다.
“나대신 코랄에 가 줬으면 좋겠다.”
“좋아.”
너무나 가볍게 말했기 때문에 남자 쪽에서 맥이 풀렸다.
“이봐 그렇게 간단하게....”
소녀는 빙그레 웃었다.
“바보네. 나흘이나 그런 걸로 고민했던 거야? 처음부터 그럴 예정이었잖아.”
만나자마자 그때부터 이 소녀는 두 사람이서 페르난 백작을 구하러 가자고 말했다. 남자의 정체가 국왕이라고 알게 되자 이번엔 남자더러 군의 지휘를 위해 남으라면서 자기 혼자서 가겠다고 공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틀려. 그때 그렇게는 말했지만 그리고 결코 너를 못 믿어서 하는 말도 아니지만 그 때는 아버지를 구출하는 건 아직 말뿐인 상태였어.”
아무래도 이 남자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는 것으로 스스로를 격려함과 동시에 행동의 자양분으로 삼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미약하나마 일군을 지휘하는 몸이 되었고 그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곳까지 왔다. 그렇다면 끝까지 군대를 이끌고 개혁파와 싸워 왕도王都를 탈환하고 질서를 다시 세우며 부친을 되찾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불릴 만하다.
“나의 생환 소식을 들었을 때엔 아직 코랄도 우습게 보고 있었겠지. 혼자서 뭘 할 수 있으랴 하고 코웃음쳤을 거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상황이 전혀 틀려. 이런 악랄한 수단을 태연하게 사용할 정도로 녀석들은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때려잡으려 획책하고 있다. 도시의 경비나 아버지에 대한 감시도 얼마나 강화되었을지 몰라.”
얼마나 위험도가 늘어났을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 했다. 그런 가운데 소녀 한 명을 보내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라며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개혁파에 정공법이 통용되지 않는 건 잘 알고 있어. 게다가 누가 어떻게 생각해도 이 일에 나 이상의 적임자는 없을 거야.”
더욱 깊은 한숨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너에게 도움을 받기만 하는구나. 정말 이런 일만 계속되니 내 자신이 한심해진다.”
“임금님은 그런 걸 신경 쓰면 안돼.”
진리였다. 그러나 솔직하게 끄덕일 수 없는 왕은 조금 짓궂게도 열한 살이나 연하인 전우에게 우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럼 뭐야. 내 대신 적지 한가운데 들어가서 아버지를 구출해오라고, 그 말 그대로 돌려서 명령하면 된다는 거야?”
소녀는 재밌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면 난 네 얼굴에 한방 날려준 다음에 코랄이랑은 정반대 방향으로 사라져 주지.”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스럭부스럭 흐트러뜨린 뒤 양손을 들어 졌다는 표시를 했다.
“알았다. 내가 졌다. 미련 없이 네 후의厚意에 기대도록 할게. 어쨌거나 지금 이대로는 움직일 수도 없으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군대는 언제쯤 움직일 거야?”
“대략적인 배치는 이미 끝났어. 원래대로라면 벌써 출발했을 참이다.”
소녀는 끄덕이고 말했다.
“오늘로 나흘, 딱 좋게 걸렸네. 백작을 구할 것인지 아니면 모른척 할 것인지 국왕이 고뇌하느라 움직이지 못했다고 그 녀석들은 판단하겠지.”
“고민한 건 맞아.”
“자기가 갈 건가 나를 보낼 건가, 그걸로 한 거잖아? 고민의 종류가 틀려.”
“그건 그렇군.”
“그렇게 생각하도록 놔 둬. 너는 이대로 마레바로 군대를 전진시켜. 다만 천천히 가는 거야. 어디까지나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 잊지 말고. 그동안 나는 코랄로 가서 백작을 구출할게.”
남자가 나지막히 웃었다.
“네가 말하면 어려운 일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들리니까 신기해.”
“어려운 일인 건 틀림없어.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 말야.”
무슨 소리인지 되물으려 했지만 그때 소녀는 기운차게 샘으로 뛰어들어 의복을 놓아둔 바위 쪽으로 향했다.
“따라와. 자세한 사항을 의논하자.”
어느 쪽이 왕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남자는 소녀의 말에 따랐다.
그날 밤 일과가 되어버린 군사회의장에서 소녀는 개인의 의지로 페르난 백작의 구출에 임하고 싶다고 발언했다. 다만 자기 혼자만으로는 무리이니 누군가의 힘을 빌려주었으면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꺼번에 놀랐지만 예전처럼 낮빛을 바꿔가며 막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도라 장군이 조용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건 폐하의 명령인가?”
“장군, 나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아.”
소녀가 단언하고 국왕도 말을 덧붙였다.
“그렇고말고. 발도우의 딸에게 감히 명령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나. 머리를 숙이고 부탁했지.”
장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난 백작은 분명히 국왕의 후견인이긴 하지만 사실은 단순한 지방 귀족이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구해야 할 정도의 가치는 없다. 물론 국왕에게 있어서나 도라 장군에게 있어서 반드시 살아남아 주었으면 하는 사람이긴 했다. 언제까지고 개혁파의 손안에 남겨두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개인적 감정과 전략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이자 같은 선상에 나란히 세울 수도 없다는 점을 용맹과감함으로 유명한 장군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옥중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페르난 백작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코랄과의 결전을 앞에 두고 구출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고 있지 않을 터였다. 도라 장군은 골치 아픈 얼굴이 되었다.
“폐하의 마음을 안다 해서 페르난이 기뻐할지 어떨지....”
국왕은 끄덕이며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큰일을 앞에 둔 몸으로 무슨 어리석은 짓을 하냐고 화내겠지.”
라고 시원하게 말해버렸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어. 백작은 지금까지 나를 위해 뼈마디가 휜 사람이다.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렇다고 그놈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지. 나는 발도우의 딸에게 백작의 운명을 맡길 생각이다.”
“그러니까 나 혼자로는 무리라니깐.”
가렌스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 난공불락의 코랄이 상대라면야 발도우의 따님도 어쩔 수 없나보군.”
“바로 그 코랄 성을 난 본 적이 없단 말이야 가렌스. 게다가 구하러 가봤자 의심만 받는다면 헛수고야.”
“의심하다니? 백작이?”
“그래. 당신이라면 어쩔거야. 주변은 전부 적 투성이인 상황에서 반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다고 하자구. 거기에 전혀 본 적도 없는, 내가 말하기도 뭣하지만, 이런 어린애가 나타나서 구하러 왔다고 말하면 믿어줄 거야? 최악의 경우 나는 백작한테 쫓겨날거라구.”
“흐음.”
가렌스의 옆에서 수염의 장군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렇구만. 그 고지식한 친구라면 그런 소리를 하고도 남아.”
“고지식해?”
“그럼. 폐하와 똑같이 앞뒤가 꽉 막힌 데다 무쇠고집에 융통성까지 없어서 말이다. 네가 말한 대로 정체도 알지 못할 자가 맞이하러 온다면 절대 감옥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버틸 게 분명한 다루기 힘든 인물이지.”
소녀는 이런이런 하며 어깨를 으쓱하고 왕을 가리켜 보였다.
“그런 사람한테 컸으니까 저렇게 골치아픈 녀석이 나온 걸까.”
“남들이 듣는 데서는 말하지 못할 일이지만 말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장군은 정말 작은 소리로 말했다. 와이베커 전투를 거친 뒤 아무래도 이 소녀를 방해물 취급하는 것보다는 한 단계 격상시켜 준 듯 했다.
“하지만 너 진심이냐?”
“뭐가.”
“단독이나 마찬가지인 인원수로 코랄에 잠입할 생각이 진심이냐고 묻는 게다.”
“세 명이서 이 성을 함락시킨 게 바로 며칠 전 일이야 장군.”
도라 장군은 다시금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어지는구만. 일단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어째서 너는 그렇게까지....”
말을 고르며 우물거렸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폐하에게 충성을 바치느냐고 보통이라면 물어볼 수 있을만한 상황이었지만 이 소녀의 태도는 충성을 맹세할 상대에 대해 자신들이 하는 것과 상당히 틀렸다. 그렇다고 호의라는 감정만으로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의 양아버지를 구출하러 갈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라 생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임무이고 이 소녀가 그 점을 모르고 있을 리로 없지만 장군은 그 이상 묻기를 그만두었다.
항상 쉽게 마음이 변하는 승리의 여신 하미아처럼 혹은 운이라는 것이 때로 공평하지 않다고 박에 생각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여 세상일을 좌우하듯이 이 소녀의 무모하다고도 생각되는 행동의 이유도 일일이 물어본다 해봤자 소용없으리라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장군은 백작 구출에 반대인가?”
국왕이 묻자 장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소녀가 단독이나 마찬가지인 수로 나서겠다는 얘기라면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소녀 한 명 빠진다고 군 전체에 지장은 없고 이 소녀의 발이라면 코랄의 성벽을 뛰어 오를 지도 모르지요. 또한 페르난 백작을 내버려두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알고 있어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허나....”
“허나 뭔가?”
“그렇다해도 위험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소녀가 나이에 걸맞지 않는 실력과 혜안의 소유자인 것은 지금에 와서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생환할 확률은 절반 이하입니다.”
국왕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욱 이 부탁을 입에 담을 때까지 나흘 동안이나 고민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나도 내 자신이 말도 못할 비겁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네만....”
그렇다해도 였다. 그렇다 해도 백작이 잡혀있는 상태로는 전쟁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저 코랄 성에 숨어 들어가서 살아 나올 가능성이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이 소녀 단 한 명뿐이었다. 회의에 참가 중인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일제히 받자 소녀는 앉아있기 껄끄럽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엄청난 이야기처럼 부풀리지 말아 줘. 나는 개혁파가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드니까 한방 먹여주러 가겠다는 거야. 그렇게 위험하다 위험하다 말하면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고 누구한테도 말하기 힘들어지잖아.”
“그것 말인데 누구를 데리고 갈 거냐?”
“백작이 아군이라고 인정해 줄 사람이면서 코랄 성에 대해 잘 알고 눈에 그다지 띄지 않는 사람이 좋아.”
한마디로 답하고 덧붙였다.
“게다가 나랑 같이 북쪽 탑까지 숨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돼. 또한번 성벽 위에서 뛰어내려야만 할지도 몰라. 그만큼 배짱이 있고 몸이 가벼운 실력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거야.”
가렌스가 즉각 손을 들었다.
“나는 어떤가. 백작과 얼굴도 아는 사이고 성에는 몇 번이나 등정한 일이 있소.”
소녀는 어렵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가렌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네가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면 못 버텨.”
“그럼 나는?”
이번엔 이븐이었다. 무슨 일이 되었건 재미있을 법한 일에는 머리를 들이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옆에서 국왕이 끼여들었다.
“네가 나타났다간 백작이 옥중에서 졸도해 버릴 거다. 백작은 스샤의 악동 시절의 네 녀석밖에 모르니까 말이야. 일단 북쪽 탑이 어디 있는지 알고는 있어?”
어깨를 으쓱한 이븐은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똑바로 도라 장군을 보면서 말했다.
“부하 중에서 누구라도 추천해주지 않을래?”
“어째서 나에게 부탁을?”
“백작이랑은 오랜 친구 사이인 것 같으니까. 장군의 부하라면 백작도 무조건적으로 신용해줄 거라고 생각해.”
낮게 웃은 장군이었다.
“그렇다면 내 몸소 직접 나서고 싶은 일이다만 그럴 수도 없구나.”
“당연하지. 그거야말로 눈에 너무 띄어. 대장이 직접 움직이거나 그러는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럼 누가 좋을까....”
그 녀석이 좋을까 저 녀석이 좋을까 하고 고심하는 장군 옆에서 조용히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제가 갈게요.”
샤미안이었다. 그 장소에 있던 전원이 아연해졌다. 라모나 기사단장이나 부기사단장도, 이븐도, 물론 국왕도 놀라서 막으려고 했지만 샤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조건에는 제가 딱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리를 제외하면 이 군대에서 가장 가벼운 것은 저일 테고 말도 검도 어느 정도는 능숙합니다. 코랄 성의 내부 구조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제가 간다면 페르난 대부님도 즉시 아버지가 무사하신 것을 아시게 될텐데다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믿어주실 거예요.”
“샤미안양! 안 되오!”
국왕이 안색이 변해가며 일어났지만 샤미안은 연하의 소녀를 향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나라도 괜찮다면 데리고 가 줄 테야?”
“정말로 위험한 일이야.”
“응.”
“반년이나 붙잡혀 있다가 이제 겨우 탈출했잖아.”
“똑같은 고통을 지금 현재 대부님조 겪고 계시는걸. 햇빛도 들지 않고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지하 감옥 생활을 반년이나.”
결의에 가득 찬 얼굴로 소녀를 본다.
“도울 수 있게 해줘”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군을 보았다.
“데리고 가도 괜찮겠어?”
다 큰 남자에게도 어려운 임무라고 알고 있을 테지만 도라장군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기쁘게 허락하마.”
“장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마시오! 그랬다간 정말로 내가 아버지께 잡아먹힐 거요!”
국왕이 창백해져서 외쳤지만 장군은 쇠귀에 경 읽기라는 식으로 대꾸했다.
“폐하, 붙잡혀 있는 국왕 후견인을 구출한다는 중대 임무를 외부인의 손에만 맡겨둘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델피니아의 문제이며 델피니아인의 전쟁이니까 말씀입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따님이잖소!”
포효하듯 비명을 지른 국왕에게 샤미안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뇨 폐하, 저는 델피니아 기사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명령이 하달된 즉시 언제라도 전투에 나설 각오는 되어있고 허락만 해주신다면 당장이라도 코랄을 향해 떠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안돼!”
겨우겨우 부탁했던 일이 이런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가자 국왕은 얼굴색이 변해버린 상태였다.
“그런 일을 시킬 정도라면 오히려 내가 스스로 가는 편이 그게 아니면 아버지를 내버려두는 편이 나아!”
소녀가 냉정하게 말했다.
“진정해 이 바보야.”
이븐이 커다랗게 웃음소리를 뿜어낼 뻔했다가 겨우 어떻게 입안에 삼켜 넣었다. 나시아스와 가렌스. 거기에 샤미안까지 세 명은 못 들은 척 하고 있었다. 도라 장군과 부관인 타르보는 그야말로 사나운 사냥개처럼 낮게 으르렁 거렸지만 어쨌든 침묵을 지키며 국왕과 소녀의 대작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반대하는 거야. 페르난 백작에게 갈 통행수단으로 이이상 가는 사람은 없다구.”
“샤미안 양은 너랑 틀려서 제대로 된 여성이란 말이다! 게다가 코랄에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얼굴도 알려져 있어. 북쪽 탑에 잠입이라니 당치도 않아!”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너 참 이상한 부분에서 상식적이군 그래. 그게 아니라면 뭐야? 중요한 일에 여자 손을 빌리는 한심스러운 왕이라는 소리를 듣는게 싫은거야?”
“그런 비난 정도라면 얼마든지 들어주지! 알겠냐 리. 너라면 아마도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샤미안 양은 보통 인간이라고!”
“그렇다면 나도 마찬가지야.”
소녀의 태연한 대꾸를 듣고 국왕은 물론 그 장소에 있던 전원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조금 몸이 튼튼하게 되어 있는 것뿐이지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불사신인 것도 아냐. 위험하다는 점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구.”
막힘 없이 흘러나온 말에 국왕이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소녀는 샤미안에게 말을 걸었다.
“밧줄 타고 기어오를 수 있어?”
“응 잘해.”
“그럼 따라 와. 벽 넘어가는 연습을 하자.”
소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고 샤미안도 국왕에게 인사하고는 뒤를 따랐다. 남겨진 사람들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국왕은 필사적인 얼굴을 하고 장군에게 따져들었다.
“도라 장군. 어째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폐하야말로 그렇게나 눈 돌릴 곳 없게 안절부절 못 하실 것 없습니다. 스스로 제안하신 것 아닙니까.”
장군은 똑바로 등을 펴고 국왕을 바라보았다.
“백작의 일은 저 아이들에게 맡겨두면 됩니다. 그런 것보다도 저희들에겐 훨씬 중대한 임무가 있습니다. 마레바 공략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하지만!”
“이 성채를 공격할 때 폐하께서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들려드리지요. 시켜봐서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수천의 군대 중 소녀 두 명입니다. 별다른 피해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틀렸습니까?”
귀여운 딸을 너무나 가볍게 사지死地로 보내버리려는 부친에게 국왕은 다시금 항의의 말을 내뱉으려 했지만 장군은 수염난 입가에 보이지 않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 녀석은 여자이긴 하지만 제가 직접 가르치고 단련시킨 수제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몸이 가볍다는 점에 있어서 남자들보다 훨씬 우수합니다.”
이븐이 납득했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리고 힘쓰는 일이라면 저 꼬마 아가씨가 해줄 거라는 소리군요.”
“그렇지. 저 소녀라면 기사 열 사람 분의 일은 혼자서 해낼 테니. 페르난이 저 소녀의 말을 믿게 만드는 역할을 샤미안이 하면 충분하네. 쓸데없는 짐을 데리고 갈 필요는 없겠지.”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주군의 시선을 눈치채자 장군은 용감한 얼굴로 성실하게 말했다.
“저도 승리의 여신을 믿어보고 싶어져서 말씀입니다.”
2장
한편 소녀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중대한 임무라며 심각하게 굴 생각도 시간을 허비할 생각도 전혀 없는 듯 했다. 코랄은 델피니아의 주요도시이지만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시내까지는 변장해서 숨어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같은 이유로 코랄 성을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성벽 중 제3성벽까지는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다.
문제는 그 뒤였다. 밤낮 없이 엄중한 경계와 견고한 문으로 지키고 있는 제2 제1성벽을 통과하여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그 사이에 펼쳐진 넓은 부지를 달려 지나가 왕궁에서도 가장 안쪽에 세워져 있는 북쪽 탑에 잠입해서 감옥안에 있는 페르난 백작을 데리고 나와 성밖까지 탈출한다.
다시 열거해 보아도 아무래도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샤미안은 금방이라도 의욕이 꺾일 것 같았지만 소녀는 겁먹는 기색도 없었다.
“북쪽 탑의 입구, 백작이 있는 감옥 입구, 그런 데에는 틀림없이 자물쇠가 걸려 있을 거야. 누구라면 들어갈 수 있을까?”
“누구라니 리. 누구라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어.”
“전혀 사람의 출입이 없지는 않을 거 아냐? 죄인에게 식사를 날라다 주는 담당이나 순찰 도는 녀석이라던가 그런건 없는 거야?”
“그래 그렇네. 확실히.”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서 나와? 본궁 안? 아니면 감옥 안에 초소 비슷한 거라도 있어?”
샤미안은 아련이 생각에 잠긴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잘 몰라. 성 내부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 방도가 없어.”
잡혀있는 몸으로선 무리도 아니다. 소녀는 곧바로 방침을 바꿨다. 포로를 잡고 조사하는 계통, 그 중에서도 근위병단의 조서를 작성하는 계통의 말단 쪽에 부탁해보기로 한 것이다.
“포로 중에서 코랄 성 내 특히 북쪽 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를 뽑아줬으면 좋겠어.”
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 소녀의 존재감 그 언동의 무게와 신용도는 국왕군에게는 단숨에 하늘을 찌를 정도가 된 상태였다. 그 어떤 취조관도 가슴을 두드리며 내일 아침까지는 연락하겠다고 받아들여 주었다. 소녀는 그 동안에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와이베커 성의 성벽을 이용하여 담을 넘는 연습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두운데 연습할 수 있어?”
라고 샤미안이 묻자
“실제 해야 할 때도 한밤중인 걸. 이건 너무 밝을 정도야.”
하고 대꾸했다. 확실히 북쪽 탑으로의 잠입은 밤중에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갔다가 돌아올 것을 생각하면 갈 때 두 번 올 때 세 번이니 하룻밤 사이에 합계 다섯 번이나 성벽을 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식사도 대충 때운 뒤 성 밖에 나가 성벽 바로 아래에 섰다. 리는 어깨에 밧줄 두릅을 얹고 있었다. 와이베커 공략 때와 똑같았다. 다른 것은 함께 있는 상대가 샤미안이고 무엇을 해야 좋은지 약간 불안한 얼굴로 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알겠어 샤미안? 벽을 등지고 손을 이렇게. 단단히 깍지 끼고 앞에서 맞춰 줘.”
“이렇게?”
“그래 나는 달려와서 네 손을 밟을 거야. 그러면 있는 힘껏 위로 올려 줘.”
“알았어.”
샤미안은 얼굴을 빛내며 끄덕였다. 그녀는 열일곱의 처녀다. 어떤 중대한 일에서도 재미를 찾아내는 것은 젊음의 특권이었다. 소녀가 걱정했던 대로 샤미안은 최초의 시도에서 소녀의 몸을 성벽 위까지 올려주질 못했다. 거구인 월과는 손도 팔도 힘이 틀렸다. 그러자 소녀는 도중에서 벽을 차고 살짝 돌더니 한번에 목적지에 뛰어오르지 못했던 고양이처럼 공중에서 몸을 틀어 멋지게 착지했다.
“될 때까지 할 거야!”
“응!”
샤미안은 필사적이었다. 다시금 보는 소녀의 다리 힘에 마음 속으로 놀라며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에 당황하면서도 필사적이었다. 샤미안도 운동신경이 보통이 아니었다. 요령을 익히는 것도 빨랐다. 리의 도약력이 인간 이상의 물건인 점도 있어 열 번 정도 되풀이하자 어찌어찌 성벽 위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올려다 본 샤미안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퍼져나갔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곧바로 위에서 가느다란 밧줄이 내려왔다.
이것이라면 샤미안도 잘하는 일이었다. 대부분이 평원으로 이루어진 로아에서 나고 자란 그녀였지만 완력을 기르는 것은 기사가 되기 위한 첫발이라고 말해도 좋다. 예전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을 때에는 팔 힘만으로 한 가닥 늘어뜨려진 밧줄을 잡고 오르는 일을 자주해야 하곤 했었다. 그에 비하면 발 디딜 곳이 있는 벽이 있으니 만큼 쉬운 일이었다. 젊은 여성이라고는 믿기 힘든 빠르기로 성벽 위에 올라서자 소녀가 곧바로 몸을 숙이도록 손짓해 보였다.
“그런 곳에 서 있다간 경비병한테 그냥 보인다구.”
진짜처럼 연습하려는 듯했다. 샤미안은 거스르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코랄 성의 밤은 얼마나 밝을까.”
“제 이곽의 우리집에서라면 여기저기에 구화가 보였었어.”
샤미안이 답했다.
“다만 코랄 성의 넓이는 일반적인 정도가 아니니까 끝에서 끝까지 밝힌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까.”
그러한 부분도 근위병단의 병사들에게서 듣고 싶은 정보였다.
“이젠 이 밧줄을 반대편으로 내리고 내려가면 되는 거지.”
“그래. 네가 먼저 내려가. 그 뒤에 이 밧줄을 들고 내가 뛰어 내릴 거야.”
“이대로 내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샤미안이 의문을 제기했다. 소녀는 밧줄 끝을 흉벽의 요철 부분에 빙 둘러서 묶어 놓고 있었다. 하나하나 풀려면 상당히 귀찮을 터였다.
“벽이 하나라면 이대로도 괜찮겠지만 또 하나 있잖아.”
“그렇다면 내가 하나 들고 올라갈께. 그쪽이 편할 테니까.”
“알았어.”
소녀는 문득 샤미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페르난 백작은 어떤 느낌이 드는 사람이지?”
당돌한 질문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보인 샤미안이었지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게 아주 훌륭하신 분이야. 차분하고 박학다식한데다 무술의 달인이기도 하시고. 하지만 조금도 그런 점을 자랑하지 않는 겸허한 분이시지.”
소녀는 고개를 젓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잠깐 따라와.”
방책의 각소에 세워진 망루 중 한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샤미안은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그 이상으로 당황한 것은 초소에 있던 병사들이었다. 망볼만한 것도 별로 없으리라 싶어 앉아서 잡담이나 하고 있던 곳에 갑자기 소녀와 샤미안이 얼굴을 내민 것이었다.
“우왓!”
그래도 샤미안의 신분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일어서서 경례했다.
“대 대체 어디로 올라오신 겁니까?”
소녀는 그런 질문은 무시하고 샤미안에게 물었다.
“이 중에서 백작하고 덩치가 비슷한 사람 있어?”
“글쎄.”
빙글 둘러선 약 다섯 명의 얼굴들을 돌아보고는 샤미안은 한 사람을 가리켰다.
“대부님 쪽이 조금 더 날씬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이 제일 비슷한 것 같아.”
그것은 20세 정도의 젊은이였다. 샤미안보다 머리 하나 정도 불쑥 솟아 있었다. 잘 단련된 장신이었지만 건장하기보다는 딱 조여진 민첩함이 두드러져 보이는 체구였다.
“잘됐네. 그다지 살찌지 않았구나.”
“응. 그건 물론이지. 검을 지니고 계실 때에도 어딘지 기사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건하고 우아한 분이야.”
소녀는 그 젊은이를 위에서 아래까지 곰곰이 뜯어보았으므로 당사자로서는 상당히 안절부절못할 만 했다.
“저기 무슨 일이신지?”
“검을 놔두고 따라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모습의 젊은이와 샤미안을 데리고 소녀는 아까 밧줄을 내려놓았던 곳까지 돌아와 젊은이에게 말했다.
“나한테 업혀볼래?”
“예에?”
“괜찮으니까 빨리.”
그런 소리를 들어도 그럼 실례합니다 하고 그 등에 넙죽 업힐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키도 작은 소녀가 아닌가. 업힌다기보다 등에 타는 형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게다가 하물며 며칠 저의 전투에서 선보인 활약에 의해 이 소녀는 지상에 강림한 발도우의 딸이라는 소문이 이미 병사들 사이에 처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숭배를 받는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경원시된다고 할 수도 있다. 젊은이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우물거리듯이 삼가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그럼 안돼. 물어뜯거나 하지 않으니까 빨리 해. 그렇지 않으면 기절시켜서 업을 거야.”
젊은이는 더욱 기겁했지만 샤미안은 소녀가 생각하는 바를 잘 알 수 있었다. 백작을 업고 이 성을 넘어갈 수 있을지 어떨지를 실험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젊은이가 조심스럽게 소녀의 등을 붙잡자 소녀는 가볍게 그 몸을 들어올려 단단히 매달리라고 이른 다음 밧줄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와 와악!”
“난리 치지 마.”
젊은이는 허공에 떠있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단단히 소녀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지면에 내려가는 모습이 통로에 있던 샤미안에게도 보였지만 소녀는 이번엔 그 상태 그대로 밧줄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등에 매달린 젊은이는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고 얼이 빠진 상태였다. 열세 살 짜리 소녀가 양팔의 힘만으로 다 큰 남자를 업으느 자신의 신체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무서울 정도의 완력이었다.
샤미안이 있는 위치까지 돌아오자 등에 타고 있던 젊은이는 황급히 소녀에게 떨어져 나오더니 그 자리에서 직립부동 자세를 취했다. 소녀는 희미하게 땀이 배인 얼굴로 웃어 보였다.
“고마워 이제 됐어.”
젊은이는 도망가는 토끼처럼 초소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녀는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건 힘드네. 한번이라면 몰라도 세 개, 게다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한다니. 할 수 있을까?”
샤미안은 소녀의 완력에 아연하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질문을 던졌다.
“리, 대부님이라면 이 정도는 스스로....”
“팔을 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말이야.”
극히 자연스럽게 소녀는 말했다. 그 의미를 생각하고 샤미안은 새파란 얼굴이 되어 말을 삼켰다. 반년 동안 햇빛도 들지 않는 지하감옥에 구속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체력은 극심하게 저하된다. 더욱이 개혁파가 백작을 고문하지 않았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백작은 걷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샤미안. 너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가 해야 돼.”
“물론.”
“잊지마. 나는 가능한 한 백작을 도와주려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목숨과 내 목숨을 바꿀 생각은 없어. 만약 어느 쪽 하나만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내 목숨을 고를 거야.”
샤미안은 횃불 빛에 밝혀지고 있는 작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건 나나 대부님이 방해가 된다면 내버리고 간다는 거야?”
“그래.”
젊은 여기사는 상당히 오랜 동안 거의 앳되다고 할 수도 있을 얼굴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두 개의 녹주석을 박은 듯한 그 얼굴은 더없이 자연스러웠고 거만함이나 불손함은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협박이나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소녀에게 있어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철학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침묵 끝에 샤미안은 끄덕였다.
“알았어. 당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게.”
“박정하다고 안 하는 거야?”
샤미안은 살짝 웃었다.
“그런 말 안 해. 그런 소리를 할 권리 같은 건 누구에게도 없는걸. 당신은 뭐라고 해야 할까. 호기심이나 그때의 기분으로 여기에 있어. 그러니까 가버릴 때에도 기분이 내키면 그냥 가버리려 하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을 비난할 수는 없어. 이곳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말이야.”
“어째서?”
“운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
진지한 얼굴로 말한 샤미안이었다. 리 쪽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굉장한 소리를 하네.”
“틀린 얘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로아의 마장에서 당신이 활을 당기는 것을 봤을 때부터 아니 흑왕을 타고 저택까지 돌아왔을 때부터 계속 그렇게 생각했어. 당신은 우리들에게 운을 가져다준 것이라고. 혹은 당신이 운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
“운은 사람의 노력으로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멈춰서라고 붙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와서 사람 손에는 결코 닿지 않는 곳에서 사물을 좌지우지하지. 그런 거야. 굉장히 애타고 억울한 느낌도 들지만 운 없이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은 없어.”
소녀는 피식 웃었다.
“이전에는 승리의 여신이라더니 이번에는 운? 나도 꽤나 이런저런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네.”
샤미안이 급하게 말했다.
“결코 당신에게만 의지하고 있다는 소리는 아니야. 당신이 있는 한 괜찮다고 생각지도 않아. 나는 전력을 다해 내 일을 할 거야.”
“그래주면 다행이지. 게다가 운이라는 건 기대고 있다보면 도망치니까 말야.”
“당신도?”
소녀가 이번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상당히 이 여기사는 얕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필요로 해준다고 느끼는 건 기쁜 일이야. 곁에 있어 달라고 하는 것도 말이야. 하지만 이용당하는 건 절대 싫어.”
거칠 것 없이 말하는 소녀 앞에서 여기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결코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지만 이 소녀에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면이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신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대부님을 구하러 코랄에 가는 거잖아?”
“응.”
“폐하와 대부님을 재회시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샤미안은 소녀의 양손을 잡고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고마워. 당신에게도 당신을 이곳에 내려준 투신 발도우께도.”
소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인 채로 잠자코 있었다. 자신은 신같은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이 경우 다시 생각해서 당분간은 신의 딸 역할을 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밤늦게까지 소녀와 연습을 함께 했던 때문인지 샤미안이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해가 떠오른 뒤였다. 전장의 아침은 빠르다. 지금 같은 소강상태가 계속되고 있어도 해가 뜨는 동시에 하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서둘러 몸단장을 마치고 방을 나서자 그곳에는 소녀가 서 있었다.
“리 웬일이야?”
“네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샤미안은 얼굴이 빨개졌다.
“너무해. 일어나라 그랬으면 좋았을 걸.”
“그러고 싶었는데 월이 말야. 여자 방에는 함부로 밀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하잖아. 그래서 기다렸어.”
“어머 그거야 폐하가 밀고 들어오시면 곤란하겠지만 당신이라면 괜찮아. 나한테 뭔가 볼일이라도 있었어?”
“그 전에 아침밥 먹자.”
샤미안도 이의는 없었다. 전장터에서의 식사인 만큼 사치는 바랄 수 없지만 그래도 고기와 야채를 부드럽게 끓인 스튜로 배를 채우고 있자니 이븐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들.”
“비꼬는 거야 그거?”
태연하니 소녀가 물었다. 검은 옷의 산적은 쿡쿡 웃고는 건너편에 앉았다.
“엊저녁에 결정한 건데 우리들은 오늘 낮에는 여길 출발할 거야. 물론 여길 지킬 사람들은 두고 가지만 드디어 마레바 탈환을 위해 움직이게 되는 거지.”
샤미안이 식사하던 손을 멈추고 이븐을 보았다. 그녀는 이미 한 명의 기사로서 몇 번인가 전투에 참가했던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미 이 와이베커 전투에서도 용감한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이번의 전투는 유례가 없을 정도의 격전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마레바를 간단하게 해방시킬 수 있을까요.”
이븐은 양손을 벌려 보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몸짓과 살짝 찌푸린 미간은 전도다난前途多難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와이베커에서 기습을 받아 전투에서 진 사실을 코랄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국왕의 다음 목표가 마레바라는 것도 알고 있을 터였다. 상당한 전력을 돌려주었을 게 당연했다. 소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꽤 힘들겠네.”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던 바야.”
남말 하듯 하는 말투였다. 그리고서 푸른 눈동자에 조금쯤 책망하는 듯한 표정을 띠며 소녀를 보았다.
“하지만 이 중요한 순간에 있어주지 않는다니 발도우의 딸로서는 좀 모자라는 건 아니야?”
“급소를 물린 채인 쓸모도 없는 총대장 옆에서 싸우는 거랑 어느 쪽이 좋아?”
이븐은 다시 한번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이번의 몸짓을 해석하자면 하여튼 귀여운 구석이 없는 꼬마다 라는 뜻이었다. 보고 있던 샤미안은 입가에 미소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이 소녀가 여자답지 않은 것은 그렇다치고 아무리 봐도 어린애로도 보이지 않았다. 이븐과 주고받는 수작을 보고 있자면 또래의 다혈질인 젊은이들이 기세 좋게 말싸움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븐 경 폐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당신이야말로 이 야생마한테 지나치게 휘둘리지 않도록 하십쇼. 제대로 된 신경으로는 같이 못 다닐 녀석이니까.”
일부러 밝게 말하고 일어서는 이븐이었지만 문득 이쪽을 돌아보았다.
“맞다 리. 제2동 4층 조서계가 너한테 전해달라더라. 마침 좋은 게 발견되었으니까 와달라던데.”
“그 말을 진작 해줬으면 좋잖아.”
소녀도 샤미안도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제2동 4층에는 포로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인물을 잡아두고 있었다. 그곳에 간 소녀에게 담당자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안내하러 일어섰다. 소녀의 뒤에는 샤미안과 어째서인지 이븐이 함께 있었다.
“남의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게 꽤나 취미인 모양이네.”
소녀가 놀리자
“여자들끼리만 죄인과 만나는 건 위험할 거라고 생각해서 온 거야. 감사하라구.”
라고 되받아쳤다. 소녀의 희망대로 조사관은 신분의 상하를 불문하고 포로에게 물어본 모양이었다. 그리고 용케도 이전 북쪽 탑에 근무했던 장교가 있었다는 것 같았다.
“그것이 꽤 젊었을 때의 일인 것 같아서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 어떤 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안에 들어간 소녀는 그곳에 있던 사람을 보고는 뭐야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루카난 대대장이었다. 상대 쪽은 그렇게 간단하진 않았다. 실력에 자신이 있던 자기를 무참하게 때려눕혔던 괴력의 소녀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민 것이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허리에 손을 대더니 무장해제 당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분하다는 듯이 신음소리를 냈다.
“무슨 용무냐 괴물 같은 녀석.”
소녀의 등뒤에서 이븐이 웃음을 뿜어냈다. 말 한번 잘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지만 대대장은 의심스러운 표정과 태세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대대장 정도 되면 취급도 나쁘진 않았다. 붙박이식의 침대가 있고 벽에는 무늬를 짜 넣은 장식천이 걸려 있으며 커다란 창으로는 바깥을 내다볼 수도 있었다. 소녀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감옥으로는 안 보이네.”
그 목적을 알 수 없는 만큼 불안도 컸으리라. 루카난 대장은 다시금 외쳤다.
“무슨 용무냐고 물었다 이 괴물!”
“그린다야. 너무 난리치지마 멧돼지. 기사씩이나 되면 잡힌다고 해도 보기 추하게 발버둥치지 않는 법이라고 들었다.”
이븐이 웃으면서 물었다.
“그거 그 녀석이 한 소리야?”
“아니 도라 장군이.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끝났지만 승패는 시운에 달린 것이기도 하고 결코 각자의 기량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닌 거니까 수치스러워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 오히려 깨끗하게 각오를 다지고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기사의 명예이다 라고 말야. 지금처럼 똑같이 억지부리는 포로에게 그런 말을 했지.”
루카난 대대장은 간접적이라고는 해도 억지를 쓰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무척이나 성미가 발끈한 모양이었다. 독이 올라 침대에 털썩 앉더니 소녀를 노려보았다.
“분명 지금의 나는 네놈들의 포로다. 심문의 권리는 네놈들에게있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주군에게 불이익이 될 소리는 결코 하지 않을 테다!”
“그런 게 아니야. 북쪽 탑에 대해서 조금만 가르쳐줬으면 좋겠어.”
의외의 소리였기에 이번에는 대대장 쪽이 이상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어째서 그런 걸 알고 싶어하는 거냐?”
“그곳에는 페르난 백작이 붙잡혀 있잖아.”
“그렇지.”
“구하러 가려고. 그걸 위해서는 경비체제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대장이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구하러 간다고?!”
“그래.”
“북쪽 탑에 수용되어 있는 죄인을?! 말도 안돼! 불가능하다!”
“그렇게 애초부터 결론지어 버리면 얘기가 진행이 안 되잖아 멧돼지.”
“누가 멧돼지냐! 근위병단 제1군 제2연대소속 대대장 루카난에게 그 무슨 실례되는!”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은 치료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천천히 일어서더니 대대장을 바라보는 채로 가까이 다가갔다. 상대가 움찔 물러나려는 순간 멱살을 쥐고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
“우와?!”
그대로 커다란 사내의 몸을 질질 끌고 가더니 놀랍게도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리?!”
보고 있던 샤미안이 비명을 질렀지만 소녀는 돌아보며 웃었다.
“괜찮아.”
던져버린 걸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창 밖에 늘어뜨린 것뿐인 모양이었다. 옷깃을 잡은 채 커다란 사내의 몸을 허공에 대롱거리게 두더니 이번엔 영차 하고 그 몸집을 들어올려 바닥에 내려놓았다. 대대장은 목을 누른 채로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소녀는 그런 모습을 태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불쌍하다 느꼈는지 이븐이 옆에서 끼여들었다.
“미안하지만 대대장 형씨. 이 발도우의 딸은 쬐금 그, 인간의 예의라는 것에 밝지 못해서 말요.”
“나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있어. 그런데도 전혀 남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않는 무뢰한은 바로 이 남자라고. 불가능하다고 난리를 피우려면 그 이유나 제대로 설명하지 그래.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창 밖으로 던져버릴 테니까.”
대대장은 한순간 헐떡이더니 거의 공포라고 할 수 있을만한 눈초리로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군신 발도우의 딸이라는 말을 믿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보통 소녀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이해한 듯 했다. 샤미안이 소녀를 대신해 무례를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루카난 대장님. 저는 도라의 딸 샤미안입니다.”
도라 장군의 이름을 듣고 대대장은 급히 제대로 일어나 앉았다. 선대의 국왕마저도 한 수 접어주었다는 호걸의 이름은 거짓이 아닌 듯 했다. 병사들 사이에서의 영향력에 있어서도 상당한 힘을 가진 모양이었다.
“혹시 루카난 대장님의 군율에 위배되지 않는 일이라면 가능한한 알고 계신 정보를 우리들에게 제공해주실 수 없을까요. 코랄에서 며칠 전 사자가 왔습니다. 페르난 백작의 목숨이 아까우면 투항하라고 하더군요.”
이븐도 쓰디쓴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튼 간에 조금이라도 수치를 아는 놈이라면 그런 소리는 못할 텐데 말이야.”
소녀가 결론지었다.
“녀석들의 생각대로 되는 건 상당히 신경 거슬리는 일이라 백작을 구하러 가기로 얘기가 결정 난 거야. 협력해주지 않겠어?”
대대장은 간신히 진정된 듯 했지만 그 사이에도 왠지 기분 나쁜 눈초리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됐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건 무리다. 발도우의 딸이든지 괴물이든지 북쪽 탑에서 죄인을 구해낸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는거다. 맨손으로 그 탑을 때려부술 수 있다고라도 하지 않는 한은 말이지.”
끝까지 완고한 대대장이었다. 소녀는 조금도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그 이유는?”
“우선 북쪽 탑은 제 일곽 내, 즉 왕궁의 가장 깊은 곳에 세워져있다. 그것만으로도 반 넘게 절망적이다. 들키지 않고 다가갈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럼 만약 일곽까지 무사히 갈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 다음엔 어떻게 되지?”
“북쪽 탑의 이중문이 기다린다. 강철로 되어 있어 안에서가 아니면 절대 열리지 않는 문이다.”
“안에서?”
“그렇다. 안에 들어갈 때는 엿보는 창으로 간수를 불러 직급과 성명을 고해야 한다. 그런 뒤에 간수가 안에서 자물쇠를 푼다. 설사 국왕이라 해도 밖에서 자유롭게 북쪽 탑에 들어설 수는 없을 거다.”
그리고 루카난 대대장은 북쪽 탑의 구조를 차례차례 설명하기 시작했다. 4층으로 구성되는 탑의 지상 구역에는 조명을 위한 좁은 틈이 있을 뿐 창문은 없다. 각 층은 병사들의 주거 공간이나 취사장 취조실 등으로 쓰이고 있다. 감옥으로 쓰이는 곳은 필연적으로 지하 구역이라는 뜻이 되지만 지상 구역에서 지하 구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중한 자물쇠가 걸려있는 철창을 두 군데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이 지하는 미로처럼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어 익숙한 간수가 아니면 목적하는 방까지 도달하지도 못한다. 또한 죄인들은 전부 독방에 들어가 있고 엄중을 기할 때에는 방안에서도 발에 사슬을 묶어 둘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지하의 죄수와 만나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데리고 나가려고 한다면 최소한이라도 자물쇠를 다섯 개는 열 열쇠가 필요하다는 거다. 하지만 가짜 열쇠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탑 밖에서 손에 넣으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열쇠들은 전부 북쪽 탑 내부에 수납되어 있는 데다가 가지고 나가는 것은 엄금이고 담당자조차도 혼자서 자기 마음대로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선 그 탑 자체가 특별한 이유 없이는 가까이 갈 수도 없다. 이런데 어떻게 지하에 있는 죄수를 빼낸다는 거냐?”
대대장의 어조에는 어의없다는 울림이 있었다. 듣고 있던 샤미안이나 이븐도 심각한 표정을 띤 참이었다. 상상 이상의 난관이었다.
“죄인한테 주는 식사나 순시는?”
“말했잖나. 전부 북쪽 탑 안에서 행해진다.”
“하지만 그 탑에 있는 병사들이라고 해도 설마 계속 북쪽 탑에서만 생활하는 것도 아닐 거 아냐.”
“물론. 조사관, 간수, 요리 담당, 합쳐서 열 명 정도가 일하고 있지만 교대는 하루 한번 정오에 행해진다. 죄수들의 출입이 이루어지는 것도 그때다.”
“매일 바꾸는 거야?”
“그거야 그런 곳에 며칠이고 들어가 있으면 신경이 못 버티지. 죄수들 대부분이 사형을 기다리지 못하고 발광할 정도인 곳이니까.”
샤미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곳에 페르난 백작은 반년이나 갇혀 있다.
“교대는 탑 밖에서 아니면 안에서?”
“안에서다. 북쪽 탑의 비품은 서류 한 장이라 해도 밖에 가지고 나갈 수 없어. 밖으로 나온 탑 감시병들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에 의해 신체검사를 받는다. 또한 일단 탑에 들어간 당번은 무슨 일이 있든 다음 정오까지 탑에서 나올 수 없다는 규칙이다. 어기면 엄벌에 처해진다.”
아무리 소녀라 해도 이쯤 되자 커다랗게 신음하며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이상해.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엄청나게 자기 발 밑을 경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자유롭게 놔두면 나라에 있어 실로 곤란할 악인들만 수용되어 있기 때문이겠지.”
간단하게 말한 루카난 대대장을 소녀는 희한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페르난 백작도?”
“그 사람은 일종의 본보기다. 안된 일이지만.”
별 뜻 없는 말투였지만 소녀의 눈동자는 더욱 더 희안하다는 빛을 띠었다.
“아까 주군에게 불리한 일은 결코 입에 담지 않겠다고 했지.”
“했고말고.”
“주군인 국왕에게 검을 들이대 놓고?”
위엄 있는 용모의 루카난 대대장은 처음으로 눈을 피했다. 크게 기가 죽은 모습으로 말했다.
“나는.... 명령에 따를 뿐이다.”
씁쓸한 어조였다. 소녀는 새삼스레 자신이 붙잡은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말투로 보자면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거 같네.”
“어쩔 수 없다. 나는 기사이며 동시에 군인이다. 근위대대장으로서의 의무가 있다.”
이 점이 근위병단과 지방영주군의 커다란 차이였다. 영주들은 많은 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있지만 그 관계는 그 정도로 엄격한 것이 아니다. 부하들은 그 본인들이 작더라도 성 하나의 주인이며 자기 몸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더욱 큰 주인을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인이 별 볼일 없다 생각되면 배신하는 예도 적지 않다. 그에 비해 근위병단은 전원이 직업군인이다. 병졸 한 명이라 해도 채용시에는 입대 자격을 따지고 정식 훈련을 통과한 자가 아니면 근위병의 이름을 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상관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의 원칙이고 위반했을 때의 군율도 상당히 엄하게 정해져 있다.
그러면서도 지원자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근위병단에 소속되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선택받았다는 증거이자 보다 빠른 출세의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평민출신이라 해도 연대장까지 크게 출세한 예도 있었다.
“대대장은 지금의 사령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건가?”
아무 생각없이 물은 소녀였지만
“그 상그 놈에게 충성이라고?!”
하고 엄청난 기세로 외치는 대대장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움찔 물러섰다.
“그런 염치없고 쓸모 없는 기사의 발 밑에도 미치지 못할 최저질 돼지 같은 놈에게 자주색 외투를 입혀두는 것만으로도 창자가 뒤끓는 것 같은데! 누가 충성 같은 걸 맹세할까 보냐!”
이마까지 격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험악한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세 명 쪽이 얼이 빠졌을 정도였다. 가까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샤미안이었다.
“혹시 루카난 대대장님은 지금의 사령관과 이전에 동료 관계이셨나요?”
“그렇습니다. 그 녀석은 바로 반년 전까지 저와 같은 제1군에 속해있던 대대장이었습니다.”
상대가 샤미안이기 때문에 한층 정중한 말투가 된 대대장이었지만 곧 단호한 태도로 누구라 할 것 없이 말했다.
“그때부터 출세를 위해서면 무슨 짓이든지 하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평판은 있었지만 국왕을 배신한 공적으로 근위사령관이라니!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소립니다!”
꽤나 분하거나 화가 치미는지 대대장은 부득부득 이를 갈고 있었다. 이븐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당신하고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제법 되겠구만.”
“물론이고 말고!”
“그런데도 국왕 토벌에 나서다니. 명령제일이라고는 해도 그건 좀 어떤가 싶수만?”
“달리 무슨 방도가 있나? 거부하면 나는 강등되고 대신 부하 중 누군가가 별 셋의 투구가 씌워지지. 그런 것일 뿐이다.”
내뱉듯이 말하는 대대장이었지만 딱 맞는 진리였다. 소녀의 녹색 눈동자에 흥미 깊은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럼 대대장은 가능하다면 월이 왕좌를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야?”
“국왕이 아누아 후작을 사령관으로 재임해준다면 말이지.”
“그 이름은 이전에 월에게서 들은 적이 있어. 어떤 사람이야?”
대대장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네 녀석 대체 어디 출신인 거냐? 어찌 국왕을 이름으로 막 부른다 했더니 설마 델피니아에서도 명예 높은 이름을 모를 줄이야?!”
“대대장. 나는 델피니아인도 아니고 이 세계의 인간도 아니야. 국왕도 도적도 나에게는 의미가 없어. 무엇이 가치가 있는지 무엇이 가짜인지는 자신이 판단해서 결정해.”
깊은 녹색 눈동자가 똑바로 대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꽤나 심지가 굳은 무장武將인 것 같아.”
“괴물한테 칭찬 받아도 하나도 안 기뻐.”
“나에게 덤볐을 때의 힘도 검술도 멋졌어. 가렌스에겐 좀 못 미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상대라면 힘으로 찍어누를 수가 있겠지.”
대대장은 뭐라 형용하기 힘든 얼굴이 되었다.
“가렌스라면 라모나 기사단 부단장을 말하는 건가?”
샤미안이 거들었다.
“이 소녀는 바로 그 가렌스와 힘 겨루기를 해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부관 장본인에게 들은 말이니까 틀림없어요.”
루카난 대대장은 더욱 묘한 얼굴이 되었다.
“정말이라면 네 녀석 인간이 아니군.”
“그렇다니까.”
가볍게 끄덕이고는 추가로 말했다.
“너 정도의 용사가 다시 사령관으로 모시고 싶다면 그 아누아 후작도 상당히 대단한 인품에 범상치 않은 무용의 소유자겠지.”
“물론이다.”
약간 자랑스럽다는 듯이 단언한 대대장이었다.
“이쪽 영애분의 아버님께 여쭈어봐라. 당신 자신의 무용도 불꽃같고 그 명예는 눈부시게 빛나는 별 같지만 그 장군께서도 그 외엔 사람이 없다고 일컬으실 정도의 명지휘관이시다.”
아누아 후작 외에 다른 누구에게 근위병단 사령관을 맡기겠나 하고 칭찬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국내에서도 용맹무쌍한 호걸로 알려져 있는 도라 장군이었다는 사실이 루카난 대대장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듯 했다. 자기 이야기를 하듯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이제 다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섯 개의 군단 이십 개의 연대, 팔십 개의 대대에서 수백에 이르는 소대까지 그 분을 사령관으로 모시는 것에 아무런 이의 없이 충성을 맹세해 온 것이다. 그런 분이 현재는 가짜 왕의 편을 들었다며 죄인 취급을 받고 칩거하는 신세가 되어 계신다! 그것만으로도 심한데 그 돼지가 출세를 위해서라면 동료도 찍어넘기고 부하도 내버릴 그런 녀석이 근위병단장이라니! 델피니아에 유일무이하나 자줏빛 외투는 결코 그런 놈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아누아 후작의 뒷모습을 장식하기 위해서 있는 거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돼지가 잘난 척 우쭐대면서 거만하게 나다니는 꼴을 손가락이나 물고 쳐다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럼 되찾아주면 되잖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소녀를 대대장은 다시금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자신이 있는 것 같은데 뭔가 계책이라도 있는 거냐.”
“있고말고. 원흉인 개혁파를 때려부수면 되잖아. 월이라면 분명히 그 아누아 후작을 근위병단의 사령관으로 다시 임명할 거야.”
대대장은 혀를 찼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어째서? 대대장이 그 정도로 싫어하는 남자에게 그런 명예를 부여하고 있는 개혁파야. 그렇지 않으면 월이 그 정도로 보잘것 없는 왕인가?”
“내가 하는 얘긴 말이다!”
서둘러 목소리를 크게 높인 대대장이었다. 이것은 황급한 부정이라고도 받아들여졌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의 개혁파를 상대로는 승산이 없다는 거다. 근위병단은 물론 코랄 근처의 영주들은 전부 페르젠 후작 편에 붙어 아군이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국왕이 어떤 심산으로 계신지는 모르지만 마레바 돌파는 불가능하다.”
“대대장은 불가능이라는 말을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지만 전투에는 절대라는 것도 불가능이라는 것도 없어. 우위에 서 있는 쪽이 반드시 이긴다고도 보증하지 못해. 그런 사실은 너 정도 무용이 있는 자라면 잘 알고 있을 텐데. 게다가 반드시 이긴다고 알고 있는 전투에 참가해서 아무리 활약을 보여봤자 그 수고는 거의 보답 받지 못할 걸. 이기는 게 당연하니까.”
의외인 듯한 얼굴이 된 대대장이었다.
“음?”
“반대로 열세로 보이는 쪽에 붙어서 그 세력을 승리로 이끌어준다면 대장이 고마워하는것도 보통이 아니겠지. 어떤 보상도 생각하는대로 주어질 거야. 그거야말로 기사의 명예이자 활약을 보일 무대라고 하겠지. 그렇지 않아?”
갑자기 화제가 변경된 데다 의견까지 묻자 대대장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뭐어 확실히 그럴지도.”
“월은 개혁파를 쓰러뜨리려고 해. 그러지 위새허는 우수한 아군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하다구. 물론 수고한 것에는 충분한 보상을 내려줄거야. 그렇다고 해도 뭐 아무리 활약해봤자 설마 개혁파처럼 사령관의 지위를 주겠다고는 못하겠지만. 연대장의 지위정도라면 쾌히 약속해줄 걸. 그 녀석은 그정도로 보는 눈이 없는 왕이 아니니까 말이야.”
대대장의 눈이 뚫어지게 소녀를 노려보았다.
“네놈 뭐가 목적이라 그런 아첨을 하는 거냐.”
“어째서 치켜세우는 거라고 생각해?”
반문을 당하고 이번에는 침묵에 잠겨 버린 대대장이었다.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야. 개혁파는 이대로 너를 말려 죽일 걸. 네가 마음 깊이 따르고 있는 사람은 지위도 명예도 박탈당하고 연금당한 채고 마음 깊이 경멸하고 있는 인간은 최고 지휘관의 외투를 두르고 뽐내고 있는 실정이야. 월은 달라. 돼지는 시궁창으로, 아누아 후작은 원래대로의 사령관으로. 그리고 너를 연대장으로 해줄 거야. 어느 쪽이 나아?”
대대장은 초조한 듯 무릎을 두드렸다. 어느 쪽이 나으냐고 물어봤자 답으느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소녀의 감언이설에 가볍게 넘어가도 되나 하고 불신의 표정을 보이는 대대장에게 소녀는 시원스레 말했다.
“물론 대대장이 목숨이 아까워서 안전한 길을 선택한다면 말리지 않을 테고. 그런 자를 일부러 아군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도 않겠지만.”
이 말은 상대방의 가슴을 통렬하게 파헤쳤다. 애초에 기사란 전쟁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직업이다. 이기면 커다란 명예가 되고 지면 그 치욕을 감수해야 하는 게 숙명이다. 그런 자들에게 겁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죽음의 선고와도 같았다. 대대장은 남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굴욕감에 얼굴을 붉히며 이를 갈아대고 울부짖었다.
“내가 겁쟁이라고 네가 어찌 말할 수 있는 거냐!”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알면서도 하려 들지 않아. 바라는 바를 이룰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아. 이걸 겁쟁이라고 안 하고 뭐라고 불러?”
대대장은 분노한 나머지 커다란 몸에서 김을 뿜어낼 지경이었다. 그 눈빛은 맨몸의 인간을 쏘아 죽일 수 있을 듯한 기세로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물론 소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고 있던 샤미안 쪽이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기나긴 침묵 끝에 루카난 대대장은 으르렁대듯이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물러설 수 없지.”
“그럼 어쩔 거야?”
“반드시 네놈에게 나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린다! 지옥 끝까지 따라가 주마!”
소녀는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잘 말했어. 당장 그 지옥 끝까지 따라와 줬으면 해. 루카난 대대장.”
말하자마자 일어서더니 따라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이렇게 되면 기싸움이다.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대대장은 분연히 일어나 소녀의 뒤를 따랐다. 이븐과 샤미안 두 사람은 그 상태를 얼빠진 채 보고 있다가 잠시 후 산적 쪽이 사무친다는 듯 말했다.
“무시무시한 놈일세. 설마 저 녀석 혓바닥 하나로 군대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거 아닐까.”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네요.”
여기사는 진지한 얼굴로 끄덕여 산적을 쓴웃음 짓게 했다. 저 소녀가 대대장을 함정에 빠뜨려 불을 붙인 연유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두 사람은 흥미 깊게 그 뒤를 쫓아갔다. 아직 어깨를 들썩이는 중인 대대장을 데리고 소녀는 그 걸음으로 국왕에게 들렀다. 출입문 근처는 정신 없는 상태였지만 소녀는 쉽게 국왕앞으로 인도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마구간 지기나 국왕의 친위대나 할것없이 이 소녀를 특별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함께 있던 대대장의 긴장과 곤혹스러움은 상당했다. 지금은 유랑의 몸이라고는 해도 대관식을 거행한 정식 국왕과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돌연히 대면하게 된 것이니만큼 자기 소개를 하는 것이 고작인 상황이었다. 한편 소녀는 북쪽 탑 공략을 위한 비책이 세워졌다고 보고하고 국왕과 그 외의 용사들에게 일제히 귀를 기울이게 했다. 그 장소에는 나시아스와 도라 장군이 있었다. 범상치 않은 위세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방책이라는 것은?”
“이쪽의 대대장이 협력해줄 것 같아.”
한순간에 핏기가 빠져버린 대대장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인물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큰 소리로 고함을 칠 수도 없었다. 붉으락푸르락하느라 바쁜 대대장을 곁눈질하며 소녀는 냉정하게 말하는 중이었다.
“이쪽 대대장은 이전에 북쪽 탑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는 것 같아. 탑 내부나 경비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알아. 현재의 신분도 근위병단의 장교이니 그야말로 딱 좋지. 어떻게든 이 사람의 힘을 빌려서 안에서 문을 열도록 만들겠어.”
“자 자 잠깐 기다렷!”
겨우 비명 같은 목소리를 낸 대대장이었지만 소녀는 냉정하면서도 또한 재미있다는 듯이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기사가 두말하진 않을 테지. 아까 분명히 대대장은 지옥 끝까지 따라오겠다고 단언했어.”
“말했지! 하지만 말이다!”
우렁차게 울부짖은 대대장은 그제서야 신분이 높은 사람들 앞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태도를 고쳐 국왕에게 말을 걸었다.
“그, 이쪽 편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근위병단의 장교 중 한 사람이니만큼 본래의 주군이신 폐하께 몸바치는 것에 조금의 이견도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북쪽 탑에 침입한다는 것은 약간 사정이 틀립니다. 제가 이쪽 포로가 된 사실은 이미 코랄에서도 알고 있을 터, 그런 차에 어슬렁거리고 돌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를 높인다 해봤자 정문이 아니라 대수문마저 통과할 수가 없을 겁니다. 전투 직후 금방 돌아갔다면 또 몰라도 나흘이나 기간을 두고있어서야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제가 돌아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문은 지날 필요는 없어.”
소녀가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문을 통과하지 않고 너를 북쪽 탑 앞까지 데려다줄께. 필요한 것은 근위병단 대대장이라는 너의 그 신분이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상태의 대대장에게 국왕이 망설이듯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대장. 상당한 위험을 동반하는 일인데 그래도 가주겠다는 건가. 이런 일은 발도우의 딸이라면 몰라도 보통 사람에게 부탁할만한 성질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오 그, 저는....”
횡설수설하고 있는 대대장 옆에서 소녀가 더욱 감탄했다는 듯이 끄덕였다.
“루카난 대대장은 자신의 일보다 근위병단 본래의 사령관인 아누아 후작이 명예를 빼앗기고 감금되어 있다고 상당히 화를 내고 있었어. 자줏빛 외투였나? 사령관만이 몸에 두를 수 있다는 것 같지만 그 옷을 지닐 자격도 없는 지금의 사령관이 잘난 척 돌아다니고 있는 꼴에 마음 깊이 의분을 느끼고 있다고 그러더군. 그렇지?”
도라 장군과 나시아스가 그야말로 마음에서 우러난 칭찬을 담아 대대장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그 말대로다. 지금의 델피니아에 아누아 후작 외에 근위사령관의 지위를 임병받을 사람이라고는 누구도 없을 게다.”
“루카난 대대장. 성급하게도 자네와 같이 기개있는 기사가 아직 제1군에 남아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네. 뭐라 해도 자네 동료가 저지른 일이 지나치게 도리에 어긋났기 때문에 말이야. 용서해주게나.”
이미 대대자은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폭포처럼 식은땀을 흘리면서 그저 딱딱하게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소녀가 쐐기를 박았다.
“그 사령관을 위해서라면 북쪽 탑에 잠입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구. 우러러 볼만한 마음가짐이야. 그 용기도 충성심도 표창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국왕은 그 뒷말을 알아듣고 말했다.
“물론이지. 대대장으로 놔두기엔 아까울 정도의 기개다. 지금은 적진 한가운데인 코랄에 잠입하여 활동해주겠다는 그 용기는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지금은 이런 몸이라 어떤 형태로도 보답해줄 수 없지만 내가 왕좌를 되찾게 되는 그 때에는 귀공이 한 연대를 지휘할 몸이 되리라는 것을 이 장소에서 공식적으로 약속하겠다.”
“옛! 황공스러운신 말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대대장은 온 얼굴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은 이제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 뭐라 원망해야 할지 모르는 눈초리로 옆에 있는 소녀를 곁눈질했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만약의 경우엔 온 몸을 던져 폐하를 위해 일하리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만 폐하께서는 어떤 경우가 닥치더라도 북쪽 탑 공략을 바라고 계시옵니까.”
국왕은 웃으며 소녀를 가르켰다.
“그건 이 소녀의 머릿속에 있는 계획이다. 대대장도 잘 알고 있겠지만 이 아이는 발도우가 나에게 붙여주신 딸. 우리들의 승리도 패배도 모두 이 소녀가 하기 나름이야.”
“이야기를 거창하게 부풀리지 말라니까.”
소녀는 약간 떫은 표정이었다. 국왕은 웃으며 그 작은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해. 하지만 나는 네가 있어주는 것이 기쁜거다. 너를 보고 있으면 힘이 솟아난다. 승리를 믿고 전투에 나설 수 있게 되지. 뭐 기사인 자는 항상 그래야 한다는 점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원래 생사의 장소에 도전하는 자는 군신의 축복을 받기 시작함으로써 그러한 마음가짐이 된다고들 하지. 그런데 너는 발도우에게 기도하는 이상의 효과를 주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소녀는 의심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고마우신 모습이라고는 보이지 않지만 말이야. 만약을 위해서 진짜 발도우에게도 기도해 두는 쪽이 좋다고 봐.”
이 말엔 모두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출정은 이미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시아스도 도라 장군도 이미 차림새를 갖추었고 국왕의 친위대가 된 타우의 남자들이 말이 준비되었다고 알리러 왔다. 국왕에게 붙은 시종들은 각각 창을 들고 깃발을 든 채 준비하고 있었다. 국왕 자신도 장엄하고 화려한 전투복장을 입었고 이제 남은 건 군대의 중심에 서는 일뿐이었다. 소녀도 또한 빠르게 여행 채비를 마치고 새로이 동행하게 된 루카난 대대장에게 검을 돌려준 뒤 말을 준비해주도록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그 외에 샤미안의 수하에 있는 소대도 코랄에 동행하게 되었다.
“리.”
이제 나서려 하는 소녀에게 국왕이 말을 걸었다.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 모양은 어떻게 보아도 열세 살의 소녀였지만 양쪽 눈동자에는 아직 본 적이 없는 대도시, 지금은 적지의 심장부인 곳으로 출발하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국왕은 무언가 입을 열려다가 결국은 말없이 깊게 끄덕여 보였다. 말로 한다고 해도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전부 담은 행동이었다.
“마레바에서 만나자.”
그들은 이제부터 각각의 길을 가야 한다. 국왕은 가능한 한 천천히 진행하려 하고 있지만 무사히 마레바에 도착하리라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 그전에 개혁파가 공격을 해 온다면 그들의 운명은 거기에서 끝난다고 보아도 좋았다. 그리고 소녀가 무사히 페르난 백작을 데리고 생환할 가능성은 더욱 낮았다. 그러나 소녀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고 샤미안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어이 국왕님.”
어느샌가 바로 옆에 있던 이븐이 조금쯤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기분은 알겠지만 저 녀석만 걱정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우리들도 각오해 두지 않으면 안 돼.”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국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안 되겠군. 저 아이와 함께 행동하게 된 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는데 이렇게 떨어지는 게 이상하게 견디기 힘들어. 이래서야 의지하고 있다고 추궁해도 할 말이 없겠어.”
이븐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의 일을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 했다.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자 소녀들이 마침 밖으로 나서는 참이었다. 이 맨 꼭대기 층에서도 저 머리카락은 잘못 볼 수가 없다. 검정 일색의 친위대장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저 녀석이라면 괜찮아. 반드시 잘 해줄 거야. 그래도 걱정이라면 우리들도 기도하면 되잖아. 저 녀석의 무사와 성공을 말이야.”
“우리들의 무운도 말이지. 이번의 전투는 발도우의 딸 없이 싸워야만 하니까.”
대담한 말투였다. 이븐은 그 결의의 정도에 깊이 만족하면서도 타고난 장난기를 보이며 지금은 주군이 된 소꿉친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뭐야 뭐야 이 임금님은. 내가 있는 것만으로는 불안하냐?”
굵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커다란 주먹이 휘릭 하고 산적의 배를 치는 시늉을 했다. 물론 이쪽도 상대의 신분 따윈 사오간없이 그대로 갚아주었다. 드디어 진군 준비를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성안에 울려퍼졌다.
3장
와이베커에서 일어난 정부군 참패의 소식은 그날로 코랄에 도달했다.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은 각각의 영지로 도망친 뒤였다. 근위병단은 대부분이 포로가 되었고 따라서 코랄로 보고를 가지고 온 것은 전황을 보고하기 위한 전령병이었다. 그들은 전투에 말려들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상황을 본다. 이번 경우에도 성이 있는 중앙의 삼각주를 건너지 않고 있었던 덕에 붙잡히지 않은 듯 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본 사실을 감정을 빼고 객관적으로 구술했다. 자신들은 압도적인 우세에 있었다는 점, 그러나 성 내부에서 불이 치솟아 오른 것을 계기로 노도같이 적이 습격해왔다는 점, 최선을 다해 반격하려 했지만 대대장이 두 사람이나 붙잡혔다는 점, 게다가 연대장은 아무래도 야밤을 틈타 살해당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 각지 영주들 세력은 여기까지라 보고 투항했다 하는 점들을.
이 보로를 어떻게 판단하는가는 들은 자의 역량에 달려있었다. 코랄을 지배하고 있는 개혁파는 그 대표인 페르젠 후작으로부터 군량미를 관리하는 관리에 이르기까지 적은 이쪽을 내부에서 붕괴시키기 위해 성 안에 내통자를 두고 배신하게 만든 뒤 기습을 걸어온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달리 생각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와이베커의 패전. 포로가 된 근위 2연대. 게다가 연대장의 전사. 그것들이 코랄을 지배하는 개혁파에게 있어 어느 정도의 타격이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러나 그 이상으로 임시변통에 불과한 전략을 쓴 국왕군에 대한 분노가 일어났다. 이 승리에 기세를 탄 국왕은 더욱 진군을 거듭해 틸레든 기사단의 총본산인 마레바로 향해 기사단을 해방하려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이상 우리들은 적이 마레바에 도달하기 전에 맞받아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페르젠 후작은 태연하게 관료들에게 이후의 방침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는 느낌은 전혀 없는 듯한 침착함이었다.
“역시 안정성이 없는 영주들로선 그 남자의 말재간에 이길 수 없는 것 같군요. 벽이 되어줘야 할 성 안에서부터 내통자가 나와서야 어쩔 도리가 없지요. 이번에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조심해서 단속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괜찮겠지요.”
듣고 있는 관료들 쪽은 태연하다 할 처지가 아니었다. 안달하고 초조해하고 화도 내고 있었다. 그 남자가 로아에서 도라 장군과 합류했다고 들었을 때 그들의 대부분은 불안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와이베커를 중심으로 하는 대부분의 영주들이 이쪽 편을 들겠다는 연락을 보내왔고 총세력이 국왕군의 두배까지 늘어났다고 보고를 듣자 크게 안심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이상하게도 바로 얼마 전까지 느끼고 있던 불안감은 유랑 중인 국왕 따위가 무슨 일을 하겠냐고 하는 경시로 변했고 자신들이 적에게 이기고 있다는 자신감도 생격났으며 이번 전투도 반드시 이기리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실전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는 관료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몰고 간 페르젠 후작의 솜씨도 있겠지만 싸우기 전부터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와이베커 전투 후에는 가짜 국왕을 포함한 반란군이 완전히 진압되거나 혹은 밀려서 투항하게 되리라고 자만하고 있었던 점도 있었다.
그만큼 이 ‘사소한 반격’은 그들의 신경을 거슬렀다. 이곳에서 져버린다면 아직 불쌍하다고도 여겨주려 했던 심산이 있었던 만큼 모두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노여움이 보이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쳐두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그 기분은 전원이 일치하고 있었다. 특히나 기염을 토하고 있는 것은 현재 근위병단의 전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상그 사령관이었다.
“이젠 일각의 여유도 없소. 근위병단 전군을 내보내서 국왕의 이름을 사칭하는 역적들을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오!”
“사령관 말씀대롭니다.”
견원지간인 타뮤 남작도 즉시 동의를 표시했다. 뭐라해도 적은 오합지졸. 이쪽은 코랄을 포함한 귀족층 대부분이 아군이 되기로 약속한 상태다. 그 수는 2만이나 3만에도 달할 터였다. 크게 그 수가 늘어났다 해도 총 세력 수천에 지나지 않는 군세 따위는 한줌 거리도 되지 않았다.
“여러분들의 의견 모두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견을 말씀드리자면 우리들은 이미 한번 참패를 맛보았습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도 또한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그 남자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면 사령관이 직접 출정해서 적을 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준비해둔 것 같은 페르젠 후작의 질문에 사령관은 결연히 가슴을 펴 보였다.
“말씀하실 필요 없소. 설사 누가 말린다 하더라도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그 뒤에는 근위병단의 세력이 있기에 하는 발언이었지만 상당히 용감무쌍했다.
“그렇다면 한시 바삐 마레바로 출정해 주십시오.”
타뮤 남작이 빠르게 말했다. 남작은 금품 감정이라면 뛰어났지만 전투에 대해서라면 관할 밖이었다. 이런 것은 특기로 하는 자들, 하고 싶어 안달하는 자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령관. 이쪽에서 공격해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 쪽에서 어슬렁거리고 다가오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상그 사령관은 혀 차는 소리를 흘렸다.
“그런 미적지근한 짓을. 이쪽에서 단숨에 달려가 때려부숴 버리면 되네.”
이 의견에는 페르젠 후작이 부드럽게나마 이견을 표시했다.
“전투에 능숙하신 사령관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무래도 부끄럽습니다만 내통자를 이용하는 자들이니 말입니다. 섣불리 선공을 하면 어떤 계략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굳이 서두를 일은 없겠지요. 확실하게 승리를 낚으면 되는 겁니다.”
제나 제사장도 말을 보탰다.
“그렇고 말고. 녀석들이 마레바를 향해 다가오는 것은 틀림없는 일. 틸레든 기사단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도 그 눈앞에서 그들이 아직까지 왕이라 받들고 있는 남자의 목을 걸어주는 편이 좋겠지.”
후작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사제직에 있는 자 치고 꽤나 피비린내 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성직자 따위는 대부분이 이런 것이다. 신의 권위라는 것을 침범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살생도 태연히 해치운다. 그 신의 권위라는 것도 바꿔 말하면 자신의 권위에 지나지 않지만 본인에게는 그런 자각이 눈곱만큼도 있을 리가 없다. 듣고 있던 다른 관료들도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제장 말씀대로입니다. 요컨대 그 남자의 숨통만 끊을 수 있다면 만사가 해결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그 남자가 나타났을 당시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관리 중 한 명이었다.
“그렇지요. 이 이상 전투가 계속된다면 내란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근 마을 중에는 그 남자가 대군을 이끌고 돌아왔다는 말도 안 되는 풍문도 나돌고 있습니다. 지금 이때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강한 어조로 말한 사람은 후작 밑에서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내무차관. 그 남자의 통치 중에는 깊은 신뢰를 받아 남자가 몇 번이나 조언을 구했던 인물이었다. 그 외에도 이 회의에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어했던 인물이 몇 명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와서는 눈빛을 바꿔가며 어떤 자는 귀찮기 그지없다는 듯 어떤 자는 분통이 터진다는 듯 그 남자의 명줄을 끊으려 들고 있는 것이다.
부드럽게 그들에게 동조하면서 페르젠 후작은 속으로 조소했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어차피 이런 것이다.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러기 위한 선택으로써 그 남자를 잘라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이것을 죄라고는 나무랄 수 없다. 그런 정도의 일을 어째서 그 남자는 알지 못하는가. 뭘 믿고 돌아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자의 힘이 되어줄 것은 이미 이 나라에는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은데.
후작이 사색에 잠겨있는 동안에도 관료들의 군사회의는 계속 이어졌다. 사령관이 몸소 출정한다는 점에 대해서 이의는 없지만 근위병단 전군을 출정시키는 데에는 난색을 표명하는 중이었다. 그렇게까지 하면 체제에 금이 가지 않겠냐는 의견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상대는 고작 가짜 국왕을 비호하는 반란군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부가 정색을 하며 상대해야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고말고요. 무엇보다 코랄을 비워두는 건 곤란합니다.”
아무래도 언제 어디에서 모반의 연기가 올라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요즘 세상 분위기였다. 자신들의 몸을 지킬 최소한의 수단만큼은 근처에 두고 싶다고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반란군이라 해도 5천을 넘어서는 세력으로 늘어나 있소. 이것에 대항할 수 있을만한 전력을 끌고 가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지 않소.”
관료들의 핑계도 맞는 말이라고는 생각하면서도 사령관은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후작은 처음으로 대화에 끼여들었다.
“상그 사령관. 여러분들의 말씀대로 근위병단을 전부 움직여서는 우리들이 부자유스럽게 되어버립니다. 그 점에 대해선 일단 검에 익숙지 않은 자들의 두려움이라 받아넘기시고 몸을 지킬 갑옷 정도는 남겨두고 가셨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아니 그렇지만 후작.....”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마레바로 향하는 김에 미리 전령을 내서 사령관이 직접 출정하신다고 알린다면 어떤 영주라도 앞다투어 모여들 겁니다. 코랄 주변에는 메디오라 군郡의 페레 경을 필두로 국내에서도 굴지의 대영주들이 지붕을 맞대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우리들에게 호의적임과 동시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으니까요. 그들에게 한마디만 한다면 동東 델피니아가 그대로 움직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물며 상대가 그 이름도 높은 로아와 라모나 기사단이라 한다면 이름을 떨치는데 이 이상의 기회도 없을 겁니다. 활약 여하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약속해주면 일개 병졸에 이르기까지 용맹하게 뛰어 나오겠지요. 그리하여 반란군을 훌륭히 제압하게 된다면 그건 모두 지휘관이신 당신의 공적입니다 사령관.”
온화하니 설득력 있는 후작의 어조였다. 그 수완에 명예심과 공명심을 자극받아 상그 사령관은 근위병단 대부분을 코랄 주변에 놓아둔 채 일개 대대에 해당하는 정도의 군사만 이끌고 출정했다. 반란군을 토벌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며 실시한 행군이었다. 이러한 명분은 영주들 사이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왔다. 기사란 전쟁이 직업이다. 또한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를 얻음으로써 이름을 떨치게 되는 점은 일개 병졸이나 영주나 마찬가지이다. 커다란 전투라면 더욱 그렇다.
의기양양하게 참전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수많은 영주들의 대부분은 개혁파가 궤변을 펼쳐 실권을 빼앗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권유에 응하지 않은 자도 다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권유에 응한 자가 많았다. 이번의 선봉은 근위병단이다. 누구도 그 의의를 인정치 않는 사령관이었지만 관군의 최고봉을 의미하는 이름 자체는 매력적이었다. 함께 싸워 승리를 얻는다면 커다란 명예를 약속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 대적하는 상대를 보자면 용사로 알려진 추방중인 국왕과 용맹무쌍함으로 일컬어지는 도라 장군, 국내 굴지의 전투집단 중 하나인 라모나 기사단이었다.
이름을 떨치고 영토를 넓히려는 욕망을 가진 자에게 있어 바라마지 않는 상대였다. 운 좋게 그 수급首級을 거둘 수 있다면 나라 제일의 용사라는 이름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더구나 이쪽에 가담했을 때의 보상은 영주들의 마음을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전국시대에 있어서는 승리야말로 정의다. 이곳에서 승리를 거머쥐면 개혁파의 정권은 튼튼한 반석에 올라앉게 되며 아군이었던 자신들 또한 평안해지리라 생각했다 해도 무리는 아닌 이야기였다.
후작의 예상대로 사령관의 출정과 함께 그 깃발 아래 달려온 영주들은 저마다 이름을 대면서 줄줄이 끊임없이 늘어섰다. 의기양양한 사령관이 마레바를 등지고 진을 취할 즈음에는 참전해온 영주 세력의 수는 2만에 가까울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평원에 눈 닿는 곳까지 펼쳐져 있는 막사들, 무수한 개미같이 바쁘게 움직이는 병사들, 태양빛에 용맹스럽고 아름답게 빛나는 창날과 갑옷들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상그 사령관은 입맛을 다시며 만족해 있었다. 이젠 불운한 사냥감이 덫에 걸려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4장
최근의 코랄 제일의 화제는 뭐니뭐니해도 살아 돌아온 국왕의 동향이었다.
물론 지금의 실력자인 개혁파는 국왕이라는 화제를 시민들에게 금기시하고 있었지만 못하게 말리면 더욱 하고 싶어진다고 점점 더 열중하는 무리가 늘어나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었다. 극적인 등장 이후 일년 뒤의 즉위, 더더욱 극적인 퇴진, 국왕의 신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오명을 얻은 채 도망, 그리고 기적적인 생환, 이런 것들만 늘어서다 보면 시민이 그 동향에 주목하지 않는 쪽이 이상하다. 더구나 개혁파가 아무리 숨기려 한다 해도 이러한 일은 반드시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요즘에는 어디까지나 구석에서 수군거리기만 했지만 지금 시민들은 개혁파에게도 그 손발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근위병단에게도 경멸과 증오 이외의 어떠한 감정도 느끼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최근에는 근위병의 가족과 그 외의 시민 사이에서 불화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 쪽 입장의 시민이라 해도 하루라도 빠른 국왕의 귀환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개혁파를 추방해 주었으면 하고 절실히 바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말이야.”
그라이아의 등 위에서 몸을 흔들거리던 소녀는 어이없어 말이 안 나온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 사람들이 일치단결해서 월을 왕좌에서 추방한 것은 바로 반년 전이었잖아?”
똑같이 말등에서 흔들리더 루카난 대대장이 씁쓸한 얼굴로 대꾸했다.
“사람의 입이라는 건 그런 거다. 국왕 통치중에는 전혀 반대되는 소리를 주워섬기고들 있었지. 그런 서자庶子를 섬기지 않으면 안 되다니 근위병단도 땅에 떨어졌다느니 선택받은 이름이 운다느니 하고 병사들 사이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으니까.”
그런 일에는 하나하나 새삼 놀랄 것도 없다고 대대장은 말하고 싶은 듯 했다. 얼굴을 찌푸린 소녀가 이번에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모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은 근위병단은 개혁파가 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걸까. 일만이나 되는 대군이라면 개혁파의 관리나 배신자인 상그의 대대나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소녀의 의문에는 마찬가지로 말을 타고 있던 샤미안이 말하기 껄끄러운 듯한 대대장을 대신해 설명했다.
“근위병단의 다섯 개 군단은 결코 사이가 좋지 않아. 당연하지만 각자가 경쟁의식이 있는 거야.”
“다시 말해 이 위기에 일치 단결할 정도의 결속력이 없다?”
“그래. 상하 관계는 견고하지만 수평의 연결이 의외라 할 정도로 희박해. 병사들에겐 어느 군단의 어느 연대, 어느 대대에 속해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소속이 다르면 같은 근위병사가 아니냐는 말은 통하지 않지. 어느 쪽이 더 우수한지 어느 쪽이 좋은 전적을 남기는지 항상 경쟁중인 상대를 동료라고 여기긴 힘들겠지? 즉 각각 독립된 군단이 다섯 개 모여있는 무리가 근위병단이라는 거야.”
소녀는 감탄한 듯 또한 납득한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사령관의 책임이 막중하네.”
“물론 그렇고 말고. 웬만한 사람은 맡을 수 없지. 신분이나 가문 실적은 물론 다섯 명의 군단장이 존경해서 따를 정도의 인격이 없으면 안돼. 어울리는 인물이 없을 때엔 국왕이 겸임하는 일도 있을 정도로 요직이야.”
루카난 대대장이 그 말이 맞다며 끄덕이고 있었다. 각자 독특한 특성을 가진, 명예욕과 경쟁의식이 강렬한 군대를 잘 다뤄야만 하는 자리였다. 개인의 무예와 용맹성보다 사람을 다루는 관리 지도 능력과 통솔력이 강하게 요구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누아 후작은 대귀족들의 총사령관이면서도 일개 소대장으로서 근위병단에 입단, 그 이래 20년의 세월을 거쳐 무리없이 착실하게 승진을 거듭해 갔다. 그 사이에 수평적인 연결고리가 희박하다는 근위병단의 각 부서들과도 먼저 나서서 관계를 가지며 다른 군대의 병사들도 살갑게 취급해주었다. 부하를 아끼기도 하거니와 공로에 대한 보상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되었을 때엔 힐책을 각오하고 국왕에게 포상 집행을 다시 해야 한다고 진언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제1군단의 군단장에서 사령관으로 승진한 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국왕 부재 중에도 국내를 평온한 상태로 유지시킨 것은 페르젠 후작의 정치수완과 함께 아누아 후작이 이끄는 근위병단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정부를 보조했기 때문이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루카난 대대장이 아니더라도 다시금 자신들의 지도자로서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대대장이 소녀의 말재간에 걸려들어 무슨 인연인지 페르난 백작 구출의 동지가 되어버렸지만 처음엔 크게 난색을 표시했다.
무리인 게 당연하다느니 살아 돌아올 수 있을 리가 없다느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열셋과 열일곱인 소녀 두 사람이 틀림없는 진심으로 성공을 믿고 이 어려운 일에 도전한다 하니 아무래도 남자의 자존심과 기사의 명예에 걸고 물러설 수가 없게 된 모양이었다. 물론 성공한 경우의 보상도 매력적이었던 것이 틀림없지만 일단 그런 기색은 숨겨둘 정도의 신중함은 있는 듯 했다. 출발 전 소녀가 분명히 대대장에게는 푸른 안감의 외투가 어울릴 것이라 야유했을 때에도 무사하게 돌아왔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낙담한 얼굴로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소녀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잘 모르겠어.”
“뭐가?”
“다시 말해 이전의 근위병단과 개혁파는 사이가 좋았다는 말이잖아.”
“겉으로는 말이지.”
가라앉은 태도로 루카난 대대장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밀월은 개혁파가 국왕을 추방할 때까지였다. 이 폭거에 대해 아누아 사령관은 가장 먼저 엄중한 태도로 개혁파의 대표인 페르젠 후작을 비난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근위병단이 자신들의 적으로 돌아설 것을 염려한 페르젠은 사령관을 체포했고 다섯 명의 군단장도 개별적으로 구속했다. 그렇게 되면 그 뒤엔 근위병단이라는 이름뿐인 오백 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20개의 연대가 남는 것뿐이다.
당연히 대혼란이 찾아왔다. 자신들의 지휘관을 해방시키기 위해 움직여야 좋을지 그렇지 않으면 개혁파에게 복종해야 좋을지 그런 기본적인 방침마저도 결정할 수가 없어 우왕좌왕하는 것뿐이었다 한다. 당황하고 있는 사이 다섯 명의 군단장과 개혁파 사이에 상담이 이루어져 그들은 개혁파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복직했지만 아누아 후작만은 단연코 거부, 현재까지 자택에 연금되어 있다고 했다. 소녀는 더욱 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해. 그 후작이 말을 안 들으니까 사령관 직위에서 끌어 내려서 연금시켰어. 여기까진 좋다구. 하지만 어째서 그런 훌륭한 사람 대신 모두가 실허하는 상그 대대장을 데려다 놓은 거야? 좀더 제대로 된 인물도 얼마든지 있을 것 같은데.”
“내 정말, 그 말 그대로라 아니할 수 없고 말고!”
깨진 종과 같은 소리로 울부짖은 대대장에게 그라이아가 찌릿 하고 곁눈질을 했다. 말의 눈동자이긴 해도 이것 역시 어이없기 그지없다는 시선이었다. 대대장은 눈치채지 못했다. 혼자서 분연하게 떨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 아니 정직하게 말하지만 그때까지 국왕의 추문에도 개혁파의 행위에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권력자들의 윗대가리 갈아치우기야 얼마든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人事인사만큼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납득할수없어! 분개하고 경악한 나머지 몸이 폭발하는 줄 알았다!”
“그 폭발 원인 중에도 질투도 들어있는 거 아닐까나?”
소녀가 놀렸다. 그 남자에게 사령관직을 줄 정도라면 나에게 달라고 생각한 건 아닌지? 대대장은 확 하고 붉어져 그런 주제 모르는 생각은 진짜 한순간 밖에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당당하게 반론했다. 이 말에는 리나 샤미안, 그리고 그녀의 종기사들도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들은 지금 코랄을 향해 산길을 서둘러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다려가면 말이 쓰러져 버리기 때문에 이렇게 가끔가다 발을 쉬게 해주었다.
와이베커에서 코랄 혹은 마레바까지 가는 데는 두 종류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파키라와 기르취 산맥 사이를 지나가는 평범한 길. 다만 이것은 상당히 돌아가는 길이었다. 또 한가지는 파키라 산맥을 구성하는 산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길. 이쪽이 거리로 치면 훨씬 가깝지만 사냥꾼이 밟아서 다져놓은 정도에 지나지 않은 험한 길이었다.
국왕이 이끄는 군대는 지금쯤 평범한 길로 천천히 전진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늦는다 해도 6일이나 7일이 지나면 마레바에 도착해 버린다. 일단 도착하게 되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저 국왕도 일군의 수장으로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을 하게 되리라.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도 이쪽에서 백작의 신병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총 열다섯 명 정도인 그들은 갈아 탈 말을 여럿 끌고 말 한 마리에 걸리는 부하를 최소한으로 하면서 갈 길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그라이아만은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계속해서 달렸고 산길에서도 발이 느려지지 않았다. 루카난 대대장이 찬미와 감탄의 눈으로 소녀가 타는 거대한 흑마를 바라보았다.
“나도 오랜 세월 기사로 일했지만 이 정도로 훌륭한 놈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군.”
샤미안의 종기사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무리도 아니죠. 그 말은 로아의 흑왕. 도라 장군님마저도 길들일 수 없었던 명마중의 명마입니다.”
“호오?”
그런 대단한 말을 어째서 이런 소녀가 하고 말하고 싶은 듯한 대대장이었지만 예전처럼 괴물이라 부르진 않았다. 국왕이 이 소녕게ㅔ 범상치 않은 신뢰를 두고 있고 무척 중요하게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네놈, 나에게 뭘 시킬 셈이냐?”
“우선은 코랄 성을 보고 나서. 앞으로 얼마나 걸려?”
샤미안이 대답했다.
“내일 낮에는 대륙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견고한 성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야.”
소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은 가장 흉악한 녀석들에게 점령당한 불쌍한 성의 모습 말이지.”
5장
코랄은 항구가 언제나 그렇듯 또한 대도시가 언제나 그렇듯 국적과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여러 종류의 인종들이 모여있었다. 북쪽에서는 색소가 옅은 거한들이, 남쪽에서는 갈색 피부를 가진 민첩한 몸매의 어부들이 모여들어 서로의 모국어를 교환해가며 싯사의 여러 음식점에서 도박에 흥겨워하고 있었다. 멋지게 빼입은 귀부인이 마차를 타고 시내 중심가를 달려가고 그러너 행차의 끝자락에는 거지가 모여들었으며 흙 같은 건 만져본 적도 없는 도시 여성의 부엌으로 가까운 마을에서 온 흙내 나는 농가 여인이 알을 팔았다.
커다란 귀족의 저택에는 비단이나 벨벳으로 장식한 부인이나 아가씨들로부터 멍석 따위를 걸치고 맨발로 일하는 청소부 소녀까지 있었다. 시내가 이 정도로 색채가 풍부하므로 코랄 성 정도가 되면 마치 귀천이 마구 뒤섞인 도가니와도 같았다. 현 국왕의 어머니도 이 왕궁의 제3곽에서 일하는 마구간지기였다고 하지만 3곽은 왕궁 내에서도 신분이 낮은 자들의 모습이 두드러지는 곳이었다. 잡다한 사람들이 각자의 일에 열심히 임하는 열의와 활기로 가득했다.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의 기백이 있었다. 올려다보면 본궁은 머나먼 저편의 산 둔치에 작게 빛나고 있어 마치 별세계의 건물처럼 보였다.
3곽에는 시민들도 많으느 수가 들어온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병사의 가족들이 면회를 오거나 차입물을 들이기 위해 들어오며 출입하는 상가의 주인이나 점원, 거기에 농가의 주인이나 그 처가 물건을 모아 오는 일도 있었다. 이 정도로 사람의 출입이 많다보면 하나하나 검문을 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대수문을 제외한 4개의 문은 입성할 때의 감찰도 필요없다.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각문 곁에는 감시인이 서 있었지만 사람이 지나가는 대로 내버려둔채 실로 한가할 뿐이었다. 그래도 가끔가가 일하는 척은 해 보여야만 했다.
“기다려. 너 본적 없는 얼굴이다?”
다섯 개의 문 중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하는 문을 지키던 병사가 저도 모르게 말을 건 것은 가볍게 인사하며 지나가려던 젊은 처녀였다. 나이는 열일곱이나 열여덟 정도였으며 깜짝 놀란 듯 돌아보는 얼굴은 화장기도 없고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손으로 빗어서 묶었고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은 여러 번 빨아 색이 바랜 것을 고쳐 입은 痲마옷이었다. 가까이에서 캐온 것인지 풀을 하나 가득 커다란 바구니에 담아서 안고 있었다. 보아하니 가난한 농가의 딸네미 같은 차림이었지만 감시병은 젊은 남자로서의 후각에 무언가가 호소해오는 것이 있다는 걸 느꼈다.
“저 저어... 뭔가 볼일이 있으신가요?”
처녀는 조심조심 말했다. 무언가 심문 당할 일이라도 했나하고 겁을 먹은 듯 했다.
“아니 별로 본 적이 없는 얼굴이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이 근처에 사나?”
“아 예. 성에 오는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어머니 대신 요리에 넣을 야채들을 가져다 드리러 온 거라...”
서둘러 변명하느느 처녀를 관찰하며 병사는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역시 그렇군. 조금 더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부드러운 피부에 얼굴 생김새도 단정했다. 씻고 난다면 상당히 볼만해질 처녀였다. 그 병사는 싱글싱글 웃으며 처녀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오는 거라면 부엌 쪽도 잘 모르겠군. 여기는 넓다고. 안내해 줄께.”
“그런... 괜찮아요.”
“사양하지 말라니까. 어디까지 가는 거야? 여기서부터 간다면 제7기숙사인가 아니면 경비대의 검문소인가?”
“저기. 정말로 괜찮으니까.”
처녀는 울 듯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마 성의 병사들 따위에게 수작을 걸며 접근해 올 틈을 주지 말라고 그 녀석들은 젊은 여자라면 보자마자 눈빛이 변하는 녀석들이라고 어머니가 위험이라고 해두었던 것이리라.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다. 경비를 보던 병사는 임무 따위는 잊어버린 채 어떻게든 경계심이 가득한 이 처녀를 달래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근래 한동안 비번도 없는 상황이 지속되는 중이었다. 잘만 다룬다면 오랜만에 즐길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자아 아가씨. 그렇게 무서워 할 필요 없어. 별로 뭔 짓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서 잽싸게도 아가씨의 손을 잡으려던 병사였지만 그곳에 누군가가 달려와 처녀의 바로 앞을 가로막았다.
“누나한테 뭐 하는 거야!”
어린애였다. 역시 빛 바랜 조잡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모자 대신 낡은 천을 감았으며 작은 등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말먹이용 풀더미를 지고 있었다. 이쪽 역시 어디에나 있는 농가 소년다운 차림이었다. 소년은 처녀의 손을 쥐고 재빨리 말했다.
“가자 누나. 병사 같은 거 상대하고 있으면 늦는다구.”
“으 으응.”
처녀는 곤혹스러운 듯이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지만 소년은 처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경계하는 눈초리로 병사를 노려보았다.
“아버지가 말했잖아. 이 녀석들하고는 서서 얘기만 해도 배가 불러온다고.”
색골 취급을 당한 병사는 분노하며 외쳤다.
“뭐라고 이 쬐끄만 놈이!”
“그렇잖아. 꼬시려고 해도 소용없어. 우리 누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여자가 아쉬우면 마을에 내려가서 싸구려 여자나 상대하는 게 어때?”
“이 발랑 까진 소리를!”
“어라라? 경비하는 병사님이 문에서 떨어져도 돼? 높은 사람한테 이른다?”
그 말에 병사는 제정신을 찾았다. 아무리 할 일이 없다 해도 맡은 부서에서 무단으로 이탈하면 직무태만이라고 힐책을 당해서 할말이 없다. 서둘러 문으로 돌아갔지만 소년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두고 보자 이 빌어먹을 놈!”
소년은 깔깔 웃으면서 뒤로 돌아서 혀를 내밀어 보였다. 이 정도 되니 정말로 열을 받아 문을 내버려두고 쫓아오려 했지만 그 순간 소년은 황급히 처녀를 밀면서 도망쳐 버렸다. 투덜투덜 중얼거리면서 병사는 원래 장소로 돌아갔다. 드디어 교대 시간이 되고 밤도 깊어져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병사는 그 농가의 남매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못 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문은 여기 외에도 있다. 그 장난꾸러기 꼬맹이가 자신과 다시 마주치기를 피했다고 해도 아무런 이상할 게 없었다. 오랜만에 비번이 되어 하룻밤의 위안을 찾아 마을로 내려갈 때쯤에는 이미 그 남매의 일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참이었다. 낮 동안에는 가지각색의 시민들이 오가는 코랄 성도 날이 저무는 것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사람 그림자가 끊긴다. 그것은 밤의 성이 가지는 일종의 특이한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고 용무도 없이 밤중에 성에 다가가는 자는 즉시 불순분자로 찍혀 검문을 받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심야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성은 조용히 잠들고 성내에서 움직이는 자는 야경꾼 노릇을 하는 병사들뿐이었다. 각개소에는 구화가 지펴지고 때때로 졸음을 참으며 병사들이 천천히 순찰하고 있었지만 뭐라 해도 광대한 성이다. 어둠 속까지는 눈이 닿지 않았다. 그 어둠 사이에 몸을 숨긴 소녀와 샤미안이 3곽의 한쪽에서 전투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주변을 살피며 샤미안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풍성한 마직 스커트 아래에는 바지와 승마화 차림이었고 풀이 잔뜩 들었던 바구니 안에는 던지기용 단검을 산더미처럼 숨겨둔 채였다.
“그럴 때에는 뻔뻔스럽게 행동하느 쪽이 나아.”
소녀 쪽은 지고 있던 말먹이용 풀더미 속을 헤쳐 그 안에서 자신과 샤미안의 검을 꺼내는 중이었다. 풀더미를 묶고 있던 가느다란 밧줄은 조심스레 풀어서 어깨에 걸쳤다. 두 사람은 준비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바람의 속삭임처럼 목소리를 죽인 채였다. 물론 주변을 향해 최대의 경계도 펴고 있었다. 그들이 코랄에 도착한 이래 오늘로 벌써 사흘째였다. 처음 근처에서 코랄 성을 보았을 때 소녀는 저도 모르게 신음 비슷한 목소리를 울렸다. 넓다 넓다 들었지만 이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성벽 밖에서 보자면 본궁은 마치 산중턱에 얹힌 작고 하얀 장난감 성처럼 보였다. 북쪽 탑은 그것보다 더욱 안쪽에 있다니 루카난 대대장이 아니더라도 거기까지 갈 수 없다고 판단할 만 했다. 그러나 소녀가 노렸던 대로 이 성의 견고한 수비는 대군에게는 효과적이지만 작은 것에 대해서는 구멍이 있었다. 경비하는 군대도 설마 이 성에 숨어 들어오는 자가 있을 리 없다고 애초부터 자신만만한 상태였다. 그 부분에 상당히 틈이 생길 듯 했다. 그들은 코랄에서 약간 떨어진 농가에서 머물기로 하고 필요한 소도구들을 사서 모았다. 근처의 농민들에게 부탁한 것이다.
가능한 한 가늘고 튼튼하게 물을 먹인 짚으로 밧줄을 꼬아달라거나 마을 처녀나 소년의 오래된 옷가지를 나눠 달라거나 하는 것은 당연히 기묘하게 들리겠지만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변덕에는 이미 익숙한 계급의 사람들이었다. 무엇에 쓸지 묻지도 않은채 잠자코 협력해 주었다. 샤미안은 던지기에 좋은 단검을 야채 바구니 밑에 숨겼고 소녀는 검을 말먹이에 쓸 풀들 안에 숨기고 줄로 묶었다. 마지막으로 리와 샤미안 두사람은 그날부터 얼굴도 씻지 않고 가능한 한 더러워질 수 있도록 했다.
소녀 쪽은 의외로 연극에 끼를 발휘해 농가의 소년이라 잘못 볼 정도의 말투로 술술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귀족으로 나고 자란데다 여기사이기도 한 샤미안이 농가의 처녀로 변신하기란 어려웠다. 근처의 농가 처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하루동안 바깥 일손도 도우며 열심히 그들의 언동을 흉내냈다. 그동안에도 소녀는 샤미안과 대대장의 기억에 의지하여 왕궁의 약도를 만들어 진로를 점검했다. 어째서인지 코랄 성을 잘 알지도 못하는 소녀가 이 작전의 전권을 쥐고 있었지만 로아의 사람들은 누구도 그 점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루카난 대대장이 탐탁치 못하다는 모습으로 있었던 것 정도였다.
“우리들은 농가 사람들로 변장해서 3곽까지 들어간다고 하고 루카난 대대장님은 어떻게 하지?”
“성벽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시간하고 장솔르 맞춰서 내가 안에서 밧줄을 내릴 거야. 그걸 타고 넘는 거지.”
“그렇다면 대대장님도 변장해서 같이 3곽까지 잠입하는 쪽이 시간 단축이 되지 않을까.”
리는 고개를 저었다.
“농민으로 변장한 대대장은 안 돼. 어디까지나 대대장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구.”
다시 말해 루카난 대대장은 하룻밤 사이에 성벽을 세 개 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제안을 들은 대대장은 복잡기괴함을 넘어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제정신으로 하는 짓이 아니라고 도저히 같이 못 있겠으니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그러나 리도 샤미안도 매우 진지했고 샤미안의 종기사들도 진지 그 자체였다. 문제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시간이었다. 대수문을 지나서 곽문, 정문을 지나 본궁에 도달할 때까지 도보로 간다면 1시간 가까이 걸린다. 이것은 오로지 본궁이 경사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밤의 어둠을 타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비밀리에 이동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마도 통상의 곱절에 가까운 시간이 걸리리라.
그러나 달리 방법은 없다. 어떻게 해서든 하룻밤 사이에 갔다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지금 소녀와 샤미안은 적지 한 가운데에 몸을 숨기고 있다. 대대장의 말로는 경비가 서 있는 위치나 순회하는 시간도 결정되어 있다고 했다. 그것만 조심한다면 샤미안은 내부구조를 잘 알고 있으며 소녀는 낮처럼 사물을 볼 수 있다. 자유로이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이다.
“가자.”
소녀가 낮게 말했다. 샤미안이 끄덕였다. 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인 채 밤의 어둠 속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루카난 대대장은 건장한 몸집을 식은땀으로 적시면서 예정된 위치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에는 3곽의 성벽이 있었다. 낮 동안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던 이 근처도 밤이 되자 가까이 다가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대장도 성의 경비에게 들키지 않도록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조금 더 기다리면 저 성벽에서 밧줄이 내려온다지만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목소리가 떠올랐고 호랑이 굴로 일부러 뛰어드는 이런 어리석은 놈이 어디 있냐는 야유의 목소리도 떠오르고 무슨 죄로 이런 무모한 일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한탄하는 목소리도 마으므 속에 떠올랐다.
몇 번이나 이대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소녀도 여기사도 대대장의 협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종류의 강한 힘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힘과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힘이 몸 안에서 서로 싸워 때때로 도망치고 싶다 생각하는 힘쪽이 갑자기 강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대대장은 열심히 그 힘과 싸웠다. 진짜 전투에서조차 이런 고전을 경험한 일은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혼자만의 마음 속에서만 일어나는 격렬한 전투가 대대장을 흠뻑 땀으로 적시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뿐인데도 숨이 차서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대체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이마의 땀을 훔쳐냈을때 짐승관도 닮은 소리가 작게 났다. 깜짝 놀라 얼굴을 들자 성벽 위에서 스륵 하고 밧줄이 내려왔다. 눈을 의심하면서도 대대장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곳은 성벽 각개소에 설치되어 있는 초소와 초소의 중간 정도 위치였지만 주변을 충분히 경계하면서 밧줄을 쥐었다. 강하게 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는 감촉이었다.
“전능하신 야니스. 검의 발도우. 계약의 오리고. 에에잇 그것 말고 모든 신들에게 맹세코! 저 꼬마는 돌아버린 게 틀림없어.”
지리멸렬한 소리를 읊조리면서 대대장은 밧줄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것이라도 그렇지만 바깥쪽에 아름다움이나 청명함이 늘어서 있으면 있을 수록 그 안쪽에는 깊고 어두운 추한 부분이 숨겨져 있다. 그 점에서는 대륙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평판의 코랄 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쪽 탑은 대표적인 그 상징이었다. 본궁에서 떨어져 거의 인적도 없는 안쪽에 조용히 세워져 있었다. 섣부른 접근은 금지되어 있는 듯했지만 설사 금지되어있지 않더라고 좋아서 가까이 가는 인간이 있을까 하는 것은 큰 의문이었다.
건물 자체는 깔끔하고 늘씬한 탑이었지만 누구라도 한번 보기만 해도 그 주변에 떠도는 이상한 공기, 뭐라고도 표현할 수 없는 기분나쁜 분위기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 탑에 갇혀 고통과 괴로움을 맛본 끝에 목숨을 빼앗긴 죄인들의 분함과 원한이 그대로 눈에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낮에도 이 탑 주변만큼은 음울하게 짓눌리는 느낌에 휩싸여 있는 것에 더해 그 등뒤는 늑대가 우글거리는 파키라 산이었다. 밤이라도 된다면 그야말로 누구도 접근하지 않는다. 그렇다기보다 접근할 수가 없었다.
당번인 병사들마저도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한다면 몸서리를 친다. 두터운 벽으로 막혀 있어도 지하의 죄수들이 부르짖는 신음소리가 괴롭고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신경이 여린 자라면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에도 저도 모르게 싸울 태세를 취했다.
그만큼 상당히 간이 큰 자가 아니라면 북쪽 탑의 간수는 할 수 없었지만 이 날은 급히 사람 수가 모자라게 되어 아직 나이 어린 병사가 이중문 사이에 세워진 초소에 들어가 있었다. 입구의 초소는 각각의 문 안쪽에 세워져 있었다. 하나를 통과해도 안쪽의 문을 지날 때에는 또 한번 신분을 확인하고 안에서 자물쇠를 열어줄 필요가 있었다.
“소문으로는 듣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어쩐지 기분이 나쁜 곳이군요.”
오늘 처음으로 바깥문의 초소에 들어간 병사는 불안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함께 있는 병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이봐 너무 겁먹지 마. 늑대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이 탑에까지는 못 들어오고 지하의 죄수들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탈옥할 수 있을 리도 없으니까.”
“알고 있어요 그 정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젊은 병사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감시창으로 밖을 살피는 중이었다. 선배 병사는 이것 참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은 임마, 탑 안에서도 가장 편한 장소라고. 뭐하면 이번에 지하 순시 한번 해볼래? 죄수들의 신음 소리가.... 그렇지. 한 삼일 동안은 귀에서 떨어지지 않게 될 걸.”
“봐 봐주세요.”
젊은 병사가 황급히 손을 젓자 선배격인 병사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뭐어 맘 편하게 있어. 어떤 의미에선 여기야말로 한가함 그 자체지. 정오에 들어와서 하룻밤 지내고 다음 날 정오에 나간다. 그거 하나니까 말이야.”
“하지만 지하 순찰이나 죄수를 심문하게 될 날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건 전문적인 놈들이 하는 거야. 우리들 같은 일반병하고는 관계없어.”
선배격인 병사는 등뒤를 흘낏거린 뒤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도 여기 지하에 내려가 본 일은 없어. 설사 들어가라고 해도 절대 싫지만 말이야.”
“헤에. 그럼 안에 들어가는 녀석들은 어떤 녀석들입니까?”
연상의 병사는 어깨를 으쓱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죄수의 심문, 혹은 고문을 전문으로 하는 자들이다. 일의 내용도 그 정체도 모르고 있는 쪽이 백 배 나은 것이다. 세상에는 귀를 막고 눈을 돌리는 쪽이 나은 일도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젊은 병사는 그런 처세술은 알지 못햇다. 다시금 물어보려고 했을 때 문 밖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발소리였다. 그것도 상당히 황급하게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소리였다.
“뭐냐?”
연상도 병사도 이렇게 되자 긴장했다. 오랜 초소 근무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감시창에 눈을 가까이 대자 바로 바깥에 숨을 몰아쉬는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나타났다.
“왁?!”
저도 모르게 창 안쪽에서 뛰어오른 병사였다. 놀란 것을 떨치고 누구냐고 물으려는 것보다 먼저 바깥의 그림자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근위병단 제1군 제2연대 소속 대대장 루카난이다. 즉시 문을 열어주기 바란다!”
“대 대 대대장?”
초소의 병사들이 당황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서둘러 감시창을 통해 찬찬히 상대를 바라보았지만 확실히 근위장교의 복장이었다. 무엇보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붉은 안감의 외투와 옆구리에 끼고 있는 별을 박은 은빛 투구는 잘못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연상의 병사는 서둘러 바깥의 통화구에 입을 갖다대고 바쁘게 물었다.
“대 대대장님. 이런 밤중에 무슨 용건이십니까?”
“너희들 아직 모르는 거냐?!”
다시 큰소리로 외치며 대대장은 진저리나는 듯이 혈르 찼다.
“아니 그렇군. 네놈들은 오늘 낮부터 여기에 틀어박혔을 테니 듣지 못했어도 무리가 아니지. 와이베커에서 우리 군이 국왕군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만 바로 조금 전에 그 국왕군에서 사자가 와서 붙잡힌 근위병단의 용사와 페르난 백작의 신병을 교환하자고 제안한 거다. 때아닌 시간에 소동을 피워 미안하지만 나는 제1군단장의 명령을 받아 백작의 신병을 인수하러 왔다. 열어다오!”
“하 하지만.”
“규율 위반이라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경우가 경우, 사정이 사정이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늦는다면 국왕군은 근위병단의 용사를 한 사람씩 본보기로 처형하겠다고 말해왔단 말이다! 군단장이나 페르젠 후작 각하도 알고 계신 일이다! 그렇잖으면 네놈들 개혁파 정부에 거역하겠다는 거냐!”
대대장의 일각에 두 사람의 병사는 펄쩍 뛰어 허둥지둥 열쇠를 꺼냈다. 원래대로라면 이 열쇠를 사요하기 위해서는 뒤쪽에 있는 제2초소의 허가를 얻고 나서가 아니면 안 되지만 상대는 다급하기 그지없는 모습과 현 정부에게 충성의 의사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끌려 움직여버린 형국이 되었다.
“지 지금 당장 열겠습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시간이 없다. 제2초소에도 연락해서 즉시 문을 열어다오!”
“예 옛!”
젊은 병사가 반사적으로 문과 문 사이를 달려 제2초소에 뛰어들었다. 바깥문과 안쪽 문의 간격은 10미터 정도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제2초소의 경비병들도 대대장이 직접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황했다. 정규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근위병단의 장교가 이 북쪽탑에 나타났던 일은 거의 없다. 시간 외에 문을 개폐하는 것은 물론 엄하게 금지되어 있지만 밖에 있는 인물은 자신들보다 월등하게 신분이 높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이런 시간에 이렇게나 황급히 전달된 명령이 오히려 사태의 심각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였다. 바깥문이 열리고 거대한 몸집의 대대장이 들어섰을 때에는 안쪽 문도 반쯤 열리고 먼저 달려갔던 젊은 병사가 돌아보며 경례하려 하고 있었다.
“수고 많다.”
묘하게 딱딱한 낮은 목소리로 대대장은 말했다. 그 뒷모습을 배웅하던 병사가 바깥문을 닫으려 했을 때 바깥에서 무언가가 소리도 없이 날아 들어왔다.
“뭐?!”
그 무언가는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의 배를 일격에 치고 대대장을 따라 잡아 안쪽 문으로 향했다. 사람의 다리라면 켤코 낼 수 없는 속도로 두 개의 문 사이에 놓인 거리를 한순간에 줄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도 못한 젊은 병사를 날려버렸다. 안쪽 문의 경비가 얼이 빠졌으면서도 황급히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때에는 대대장이 전력으로 달려들어 이것을 저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안쪽 문으로 돌입한 작은 그림자는 그곳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병사를 순식간에 쓰러뜨리고 있었다.
남자들에게 소리를 지를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솜씨였다. 보고 있던 대대장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네 명을 쓰러뜨린 소녀는 한숨 돌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샤미안이 신중하게 바깥문을 잠그고 있었다. 발밑에 뻗은 두 사람의 병사를 확인한 뒤 소녀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소녀도 마주 끄덕였다. 기절한 병사들의 손을 뒤로 돌려 묶고 재갈을 물린 뒤 초소에 던져둔 다음 그들은 조용히 북쪽 탑 내부로 침입했다.
두 개의 튼튼한 문을 지나자 천장이 높은 강당이 나왔다. 왼쪽에는 상층부로 향하는 계단, 정면에는 작은 문이 두개, 그 사이에 안쪽으로 통하는 통로, 오른쪽에는 좁은 통로가 있었다. 대대장이 미리 준 정보에 의해 오른쪽 통로 끝에는 부엌이 정면 두 개의 문 안쪽에는 죄수를 출입시킬 때의 기록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하감옥으로 가는 입구는 정면 통로의 앞쪽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다. 우선 열쇠를 손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열쇠는 일층에 있는 방의 지정된 위치에 걸려 있을 터였다.
지금의 소동으느 다행히 2층에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북쪽 탑에서는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행동하는 것이 원칙이며 2, 3층마다 각각의 병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도록 정면의 문을 열고 숨을 죽인 채 방을 들여다 본 세 사람이었지만 그곳에 열쇠는 없었다. 빈 열쇠걸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런 순회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시간에?”
“그래. 이곳에 열쇠가 없다는 건. 이전에는 밤중엔 순회 같은걸 하지 않았는데.”
소녀도 작은 소리로 혀를 찼다. 이러고 있는동안에도 2층에서 병사가 내려온다면 자신들의 잠입이 알려져 버린다.
“그 지하 입구를 한번 봐보자.”
소녀가 말하자 세 명은 안쪽을 향했다. 문제의 지하 입구는 돌을 깎아 만든 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계단의 가장 아래쪽에는 두터운 철창이 가로막고 있다. 저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대장도 모른다. 다만 지하감옥까지는 상당히 깊이가 있다는 것. 그 사이에 또 한개의 철창이 있다는 것 정도는 소문으로 들은 일이 있었다.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면 자물쇠가 열려있지 않을까?”
소녀의 의문에 대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내인 없이는 어떻게 해도 목적하는 방까지 갈 수가 없어. 무엇보다 백작이 갇힌 감옥의 열쇠도 없잖아.”
대대장은 식은땀을 흠뻑 흘리고 있었다. 소녀가 말했던 대로 심야의 북쪽 탑에 숨어 들어오게 되었지만 지하 입구에서 움직일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할거야?”
긴장 때문에 경직된 얼굴로 대대장은 질문을 던졌다. 이런 소녀에게 방침 결정을 맡기는 것에 대한 노여움도 분함도 지금은 느낄 여유가 없었다. 소녀도 금방 방침을 결정할 수 없는 듯 했지만 갑자기 고개만을 뒤로 돌렸다. 짐승 같은 몸짓이었다. 발소리를 죽여 입구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샤미안과 대대장 두 사람은 이유도 모른 채 급히 그 뒤를 쫓았다. 소녀의 귀는 부엌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나타난 것은 병사가 아니라 여윈 몸집을 한 초로의 남자였다. 휘사담당인 듯 했다.
문의 초소에 들어가 있는 병사들에게 야식이 다 되었다고 알리러 왔는지도 몰랐다. 소녀는 즉시 그 취사원에게 덤벼들었다. 비명을 지를 여지도 없었다. 다 큰 남자를 상회하는 괴력으로 상대의 신체를 벽에 밀어붙여 허리의 단검을 뽑아 들고 목줄기에 갖다댔다. 상대는 전투훈련도 받지 않은 보통 노인이다. 완전히 제압당해 소녀가 하는 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난리 치지 않으면 아무 짓도 안 한다.”
이것이 굵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였다면 몰라도 부드러운 소녀의 목소리이다 보니 취사원도 상당히 놀랐으리라. 그래도 목줄기에 닿은 검날의 감촉은 충분한 위협이었던 듯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샤미안과 대대장도 다가와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소녀는 붙잡은 노인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지하에 순회하러 들어간 건 언제지?”
“예....”
“언제 들어가서 언제쯤 돌아와?”
“아아 그러니까 예.”
취사원은 몇 번이나 기침을 하더니 횡설수설하면서도 곧바로 돌아올 거라고 설명했다.
“언제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순회를 도나?”
“아 아닙니다요 그러니까 오늘 순회는 두 번째 도는 거라서.”
“왜?”
“죽은 사람이 나온 바람에 예. 어제 막 들어왔던 젊은 남자입니다만 낮의 순회 때 죽어있는 걸 발견해서 그 뒤처리고 뭐고 이것저것 있어서 예. 그래서 다시 한번 지하에 내려가 있는 겁니다요.”
죽은 사람이 나왔다고 들은 샤미안이 숨을 삼켰다가 백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부엌에는 당신 혼자?”
“아 예 예예.”
“밥 먹었어?”
“예?”
“지금 배 안 고파?”
“아 예.”
“미안하지만 당신을 묶어두지 않으면 안 돼. 내일 정오까지 그대로 있어야 할 테니까 뭐하면 지금 먹어둘래?”
“아 아 아니오. 그러니까 괘괘 괜찮 괜찮습니다요 예.”
“알고 있겠지만 소란 피우지 않고 얌전하게 있어준다면 우리는 여기서 금방 떠날 테니까 말이야.”
“아 예예.”
그 노인은 소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병사들의 다툼에 휘말려드는 건 싫다고 생각했는지 기꺼이 묶여진 데다가 얌전히 부엌에 틀어박히기까지 했다.
“대대장. 샤미안. 지하의 입구를 보고 와 줘. 순회병이 돌아오면 그 장소에서 제압해.”
“당신은?”
“위쪽의 병사들을 기절시키고 올게.”
대대장이 말을 걸었다.
“맨 꼭대기층에서는 조심해라. 그곳에는 비상용 종이 있어. 한번이라도 울렸다간 본궁에 그대로 알려진다.”
“알았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더니 소녀는 계단을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전혀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림자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대대장은 다시 한번 이마의 땀을 훔친 뒤 샤미안에게 말했다.
“저 녀석. 정체는 뭔지 모르겠지만 잘만 쓰면 대단한 전력이군요.”
“아뇨 대장님. 그건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써주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녀는 우리들을 내버리고 떨어져 나가겠지요.”
승리의 여신 하미아처럼. 샤미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희들도 가지요. 그녀에게만 의지하고 있을 수 없으니까요.”
“예.”
두 사람은 서둘러 지하감옥의 입구로 달려가 그림자에 숨어들었다. 지하에서 사람이 올라온다면 즉시 뛰어나가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소녀가 위에 있던 병사들을 한사람 남김없이 쓰러뜨리고 소리도 없이 돌아왔을 때에도 아직 지하로 연결된 쇠창살은 닫힌 채였다. 한밤중이라 시간 감각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샤미안에게 있어서나 대대장에게 있어서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시간이 흐른 것 같이 느껴졌다.
샤미안은 몇 번이나 불안해져 그 때마다 소녀의 모습을 살폈지만 소녀는 녹색 눈을 한 곳에 모은 채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고양이과의 맹수가 한번 사냥감을 기다리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듯 결코 긴장을 풀지 않고 꼼지락 한번 하지 않은 채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샤미안은 그럴 때마다 자신의 초조함을 창피하게 여기면서 숨을 고르고 침착함을 되찾도록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며 계속해서 기다렸다. 이윽고 소녀가 움찔 움직여 샤미안의 팔을 잡았다.
여기사는 깜짝 놀라 긴장이 담긴 끄덕임으로 대꾸하고는 대대장을 보았다. 세 명이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철창 건너편에서 자그마한 불빛이 보였다. 천천히 올라오고 있다. 손잡이가 달린 작은 촛대를 든 두 사람의 간수는 쇠창살을 지나 엄중하게 다시 문을 잠근 뒤 갑작스러운 순회 때문에 지친 모습으로 계단을 올라왔지만 그곳에서 갑자기 수상한 자들이 둘러싸더니 칼을 들이밀었다.
“움직이지마.”
간수는 두 사람 모두 중년의 묵직한 체격이었지만 아무래도 일순 말문이 막혀 얼어붙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웨 웬놈이냐 네놈들은?!”
샤미안이 날카롭게 말했다.
“누구라도 상관없어.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지하로 내려가 줬으면 한다.”
“뭐라고?”
“목적은 뭐냐?”
간수들은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저마다 질문을 던졌다. 시간을 끌어서 동료들의 도움을 기다리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소녀는 온화하게 말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도록. 동료들이 구해주기를 기다려도 소용없어. 이 탑에서 지금 움직이고 있는 건 너희들뿐이니까.”
간수들은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이 탑에 침입하려고 하는 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두 사람은 여자이고 게다가 하나는 어린애였다. 그러나 간수들의 경악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즉시 제 정신을 되찾고 한 사람이 묘하게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아이 장난치고는 심하군 그래. 지금이라면 아직 죄를 묻지 않고 도망시켜주마. 소동이 일어나기 전에 빨리 도망치는 게 널 위한 일이다.”
역시 북쪽 탑의 간수 노릇을 하는 만큼의 배짱은 있었다. 샤미안은 딱딱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간수 중 한 명에게 들이댄 검에 힘을 주었다.
“페르난 백작의 독방은 어디냐? 안내하라.”
간수들은 대답하지 않았따. 말없이 샤미안을 바라볼 뿐이었. 촛불의 밝기만으로 비춰지고 있는 어둠이었지만 그 어굴을 본 샤미안의 등골에는 차가운 땀이 흘렀다. 사람의 눈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 감정도 없는 파충류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소용없는 일이지.”
“뭐가 소용없다는 거냐!”
“북쪽 탑에서 죄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포기하고 돌아가는 게 나아.”
샤미안은 격렬한 초조감을 느꼈다. 이곳까지 와서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하고 얌전히 돌아가야 하다니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간수들은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꿈짝도 않는 심지인 것이다. 대대장이 허리춤의 검에 손을 대고 외쳤다.
“백작이 있는 곳까지 얌전히 안내해준다면 좋고 아니면 그냥 베어버리겠다!”
위협해 보았지만 간수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가벼운 미소마저 띠어 보였다.
“우리들을 죽이고 어찌 목표하는 방을 찾을 생각인지. 이 지하는 안내 없이는 두 번 다시 지상에 돌아올 수도 없는 미로요. 그래도 죽이시려나.”
대대장도 샤미안도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저도 모르게 소녀를 보았다. 이런 때에 가장 의지가 되는 것이 가장 연하인 리라니 아무래도 이상한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사실이었다. 이때 역시 소녀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골치 아픈 표정으로 잠자코 있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 사람에게 들이댔던 검을 허리춤에 도로 집어넣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소녀는 있는 힘껏 그 남자의 얼굴을 주먹질했다. 피를 토하며 남자가 바닥으로 쓰러지자 이번엔 놀랍게도 발로 걷어찼다. 이것이 복부에 정면으로 들어갔다.
“우헉!”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간수는 배를 부여잡고 차가운 돌바닥을 굴러다녔다. 소녀는 그렇게 해서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더니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오른손을 제멋대로 쥐고 힘을 넣었다.
“으아악!”
절규가 울렸다. 새끼손가락의 뼈가 부러진 것이다.
“리?!”
샤미안이 비명을 질렀지만 소녀는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별로 보지 않는 쪽이 좋다고 생각해. 그 쪽 사람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있어.”
“하 하지만.”
“안내는 한 사람만 있으면 돼. 이 사람들은 약간 아픈 꼴을 좀 보여줘야 안내할 기분이 될 모양이니까. 이쪽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지 뭐.”
기분이 나쁜 듯한 어투였다.
“하여튼 바보같군. 우리들의 목적은 백작 한 명이야. 안내해준다고 너희들 책임도 아닐텐데. 나서서 아픈 꼴을 당하겠다니 말이야. 너무 시간을 들일 수도 없으니까 우선 양손 손가락을 정부 부러뜨리고 그래도 안 되면 귀를 자르고 코를 날리고 그래도 기분 좋게 안내해 주지 않겠다면 죽지 않을 정도로 살짝 껍질을 벗겨주지. 적당히 하면 출혈과다로 죽을 때까지 제법 많이 벗길 수 있거든. 핏덩어리가 됨에 따라서 몸이 두 배 정도로 부풀어오르긴 하지만 말이야.”
샤미안은 창백해졌다. 대대장과 그 손에 잡혀있던 간수가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소녀는 어디까지나 태연한 표정을 거두지 않은 채 귀찮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아 그런 짓은. 사람의 피 냄새 같은 건 쬐끔도 달갑지 않은 데다 커다란 사내가 울고 발버둥치는 꼴을 보는 것도 싫으니까. 내 친구는 그런 짓 잘 하지만서도. 빙글빙글 웃으면서 손가락을 쥐고서 뽀득, 팔을 쥐고서는 뿌득, 어라 아직도 말할 생각이 안 들어? 곤란하네 자 그럼 이 눈알 내가 가져도 될까나. 뭐 이러고 말야. 친구 하기가 쬐금 싫어질 정도로 즐기면서 고문하거든. 그래도 포기 못하고 도망쳐 다니는 걸 붙잡아서는 몸뚱이 끝에서부터 보금씩 비틀어서 잘라버리니까 결국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다구. 그런데 그러고 나서는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를 낼름 먹어치우고 입맛 다시고 하니까. 대체 어떤 신경구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간수는 손가락 하나 부러진 것뿐이었지만 어른 남자인 자신을 가볍게 갖고 노는 힘도 이 소녀의 모습도 무척이나 불길하게 보였으리라. 몸을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
“자 잠깐 기다려....”
“못 기다려. 이쪽도 이래뵈도 목숨 걸고 온 거라구. 몇 번이나 말하지만 안내는 한 명만 있으면 돼. 너는 본보기 삼아 피투성이로 만들어 죽여줄 테니까. 물론 부러뜨릴 뼈는 다 부러뜨리고 얼굴부터 사소한 것들은 전부 잘라내 줄게. 귀랑 코랑 눈알이 빠진 사람 얼굴 본 적 있어? 그거 참 멍청해 보인다구. 공교롭게도 넌 자기 얼굴을 못 보겠지만 친구가 옆에서 잘 감상해 줄거야. 덤으로 발끝에서부터 조각조각 썰어서 인간인지 뭔지 모를 정도로 물컹물컹해진 네 시체를 보면 이 친구 아마 기쁘게 지하까지 내려가 줄 걸.”
“안내하겠다!”
저도 모르게 외친 간수였따. 끝까지 사무적으로 이야기하는 이 소녀에게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 것과 어째서 자신이 그런 험한 꼴을 당하는 쪽이 되어야 하냐고 생각한 끝의 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샤미안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올릴 지경이었다. 대대장마저도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 모두 정직히 말해 눈살을 찌푸리며 소녀의 언변을 듣고 있었지만 이 소녀는 일부러 이런 상태로 몰고 가 너는 내버리는 역할이라고 생각하게 꾸며서 간수가 목숨이 아까워지도록 만들어 협력을 얻어낸 것이다. 소녀는 그래도 뒤처리를 적당히 하지 않았다.
“못 믿겠는걸. 우리를 전혀 엉뚱한 데로 데리고 갈 지도 모르잖아.”
간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입 속에 배인 피 맛과 오른손과 배의 아픔이 공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맹세코 백작의 감옥으로 안내할께! 정말이다!”
대대장에게 붙잡혀있던 다르느 한 명의 간수가 화를 내며 외쳤다.
“이 멍청한 놈이! 아무 생각 없이 저 놈들의 술책에 빠지면 어쩌라는 거냐! 이런 일이 위에 알려지면 엄벌에 처해진단 말이다!”
틀림없는 正論정론이었지만 이 정론은 동료의 공포를 치료하는 데 아무런 효엄도 발휘하지 못했다. 소녀는 화내고 있는 간수를 슬쩍 쳐다보고는 발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고 허리에 손을 올렸다.
“저런 소리나 해쌓고 있으니. 역시 팔 한두 개 잘라주지 않으면 솔직해지지 않을 것 같네.”
그 남자는 비명을 올리며 동료를 마구 욕하더니 백작이 있는 독방의 열쇠는 그자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해바쳤다.
“바보자식!”
노성을 올린 간수였지만 이미 늦었다. 샤미안은 가능한 한 피가 머리 끝까지 오른 기세를 지어내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넣고 열쇠를 내놓도록 간수에게 덤벼들었다. 여기에서 거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나 하는 짓이다. 상대는 자신의 목을 베어버리고 그 뒤에 몸을 뒤질 수도 있으니 솔직하게 따르는 쪽이 목이 붙어 있는 만큼 이득이다. 간수는 마지못해서이긴 했지만 열쇠를 내놓았고 대대장이 그 남자를 묶어버렸다. 소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들은 바빠. 알았지?”
간수는 오른손을 붙잡으면서 필사적으로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면서도 지하 입구를 향했다. 촛불은 샤미안이 들었다. 그 얼굴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당겨져 있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 북쪽 탑의 지하에 이제부터 내려간다. 더구나 이미 일년 이상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과 드디어 만날 수 있다. 전하지 않으면 안될 말이 산더미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사람을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돌계단을 스무 단 정도 내려가니 최초의 쇠창살이 나왔다.오른손이 부자유스럽게 된 간술르 대신해 소녀가 자물쇠를 열었다. 그래도 자신이 먼저 들어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간수를 먼저 들여보냈다.
한 발짝을 지하통로에 내딛자 갑자기 습기가 많아졌다. 동시에 햇빛이 닿지 않는 장소 특유의 곰팡이 냄새가 지긋이 코를 찔렀다. 간수를 선두로 해서 그들은 일렬로 나란히 지하 통로를 나아갔다. 사람 세 명이 나란히 서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통로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번갈아 나타났다. 통로의 각 곳에는 벽에 구멍을 내서 만든 촛대에 촛불이 커져 있었다. 환기는 충분히 되고 있는 듯 했지만 이 냄새와 기운이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다.
계단의 아래쪽 입구나 위쪽 입구에는 반드시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발을 헛디디게 되고 만다. 흘과 돌로 만들어진 벽은 빛을 전혀 통과시키지 않는다. 이곳은 밤낮을 통해 먹칠이라도 해버린듯한 암흑인 것이다. 아마 순회할 때마다 촛불을 갈겠지만 그래도 손에 든 촛불로 발 밑을 비출 필요가 있었다. 계단 아래쪽은 깊이 뚫려 있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하로 지하로 내려감에 따라 루카난 대대장이 무의식적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마치 지옥 아래로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특히 더 긴 계단을 내려간 곳에 또 하나의 쇠창살이 있었다. 이것도 열쇠를 사용해서 지나갈 수 있었다. 기름칠을 해둔 것이리라. 매우 굵고 무섭도록 무거워 보이는 쇠창살은 소리도 없이 열렸고 그곳에 살아서 돌아간 자가 아무도 없다는 북쪽 탑의 지하 부분이 펼쳐져 있었다.
조명을 내밀어 살펴보자 굽이굽이 통로가 뻗어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통로는 앞쪽에서 몇 번이나 갈라지고 때로는 막히거나 때로는 교차되며 그 사이에 독방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리라. 그야말로 지하의 미로였다. 간수의 등에 붙어 한시라도 빨리 백작이 있는 곳으로 가려 한 그들이었지만 소녀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이 되어 그 자리에 섰다.
“리? 왜 그래.”
샤미안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출 정도로 이곳은 기분 나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
“그건 알겠지만.”
“아냐. 굉장히 이상한. 생물이 산 채로 썩어가는 것 같은 그런 냄새야.”
“.......”
꿀꺽 하고 샤미안의 목이 울렸다. 귀를 기울이자 미약하게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다. 그 중에는 확실하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는 목소리도 있었다. 낮도 밤도 알 수 없는 이런 땅 속에 갇혀 있어서야 무리도 아니다. 샤미안도 험악한 표정이 되어 간수에게 들이댄 검에 힘을 담았다.
“이상한 짓 하지 마. 똑바로 백작이 계신 방까지 안내해라.”
간수는 당황하며 끄덕였다. 그곳에서부터 그들은 결코 해가 비치지 않는 암흑의 세계로 저벅저벅 서둘러 갔지만 그것은 다 큰 남자인 루카난 대대장조차 저도 모르게 치를 떨 정도로 꺼림칙한 행보였다. 습기와 곰팡이 냄새에 섞여 때로 구토를 일으킬 것 같은 강렬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소녀가 말했던 바로 그대로 생물이 부패하는 냄새가 강렬하게 떠돌았다.
이 지하에 감금된 죄수들이 건강한 인간의 체취를 잃은 채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미친 것이 분명하다고 알 수 있는 째지는 괴성이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가 싶으면 고통을 이기지 못한 신음소리가 기분 나쁘게 어둠의 밑바닥을 훑고 갔다. 샤미안은 덜덜 떨고 있었다. 이런 곳에 갇힌다면 자신은 아무래도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으리라.
‘대부님 부디 무사히!’
기도하는 듯한 마음으로 걷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어떻게 걸어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문득 내미는 열쇠를 받아 자물쇠 안에 집어넣으려 했지만 손이 떨려서 잘 들어가질 않았다. 그래도 문이 열리자 곧바로 뛰어들어갔다.
“대대장. 이 사람을 망보고 있어.”
소녀도 말을 던져놓고는 샤미안의 뒤를 쫓았다. 방 안에는 작은 촛불이 하나 타고 있을 뿐 대부분이 암흑에 가려져 있었다. 통로에 떠돌던 악취가 더욱 강해진 것 같았다. 샤미안은 열심히 촛불을 내밀었지만 보이는 것은 텅 빈 공간뿐이었다.
“페르난 대부님!”
달려나갈 듯한 샤미안을 소녀가 뒤에서 붙잡았다.
“위험해. 발 아래를 비춰 봐.”
들은 대로 해보자 그들이 서 있던 것은 아주 작은 발 디딜 곳뿐이었다. 아래로 계단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내려선 곳도 사람 하나를 넣어두기엔 상당히 넒었다.
“대부님! 페르난 백작님!”
필사적인 모습으로 절규하면서 샤미안은 촛불을 비추었지만 먹물 칠한 듯한 농밀한 어둠이었다. 둔중한 불빛에 의해 가까스로 비치는 것은 돌로 된 사방 벽들뿐이었다. 그러나 문득 방의 한쪽 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말라붙은 힘없는 목소리였다.
“대부님!”
들이밀 듯이 촛불을 향했다. 바닥 근처에 눈부시듯 눈살을 찌푸린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소녀는 처음으로 그 남자의 양부인 페르난 백작의 얼굴을 보았다. 그 사람은 오랜 기간의 옥살이로 인해 피부는 땀과 때로 더러워지고 빰은 쑥 들어가 여위었으며 눈 주변에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뺨에서 턱까지는 깎을 수 없었던 지저분한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믿음직스럽지 못한 촛불빛에 비춰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 사람의 눈에는 불굴의 빛이 머물러 있었다.
“대부님.....”
그러나 그것은 여기사가 익숙하던 사람관느 너무나 멀리 떨어진 너무 변해버린 모습이었다. 샤미안은 울 것 같은 목소리를 흘리며 자신의 얼굴을 조명으로 비추었다.
“저예요. 알아보시겠나요 샤미안이에요!”
“샤미안양?”
중얼거리면서 백작은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쇠사슬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운 사람과 만났다는 환희에 빛나던 샤미안의 얼굴에 노여둠이 섞여들었다. 백작의 양손은 쇠사슬이 붙은 수갑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로 엄중한 지하감옥에 가둬놓고 그러고도 다시 묶어둔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금방이라도 풀 수 있다. 샤미안은 촛불을 놓고 무릎을 꿇은 뒤 흥분이 섞인 어조로 백작의 손을 잡았다.
“대부님! 드디어 드디어 만나 뵐 수 있었네요. 이런 사슬 따위 지금 당장 풀어드리겠어요.”
백작 쪽은 사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심스럽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면서 초조함이 담긴 모습으로 급히 물어보았다.
“샤미안양. 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게요? 지금 바깥은 낮인 거요?”
“아뇨. 한밤중입니다. 저는 대부님을 구출하러 온 거구요.”
백작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옛친구의 딸을 바라보았다.
“샤미안양. 도라는 아버님은 어떻게 되었소? 그대는 아버지와 함께 붙잡혔다고 들었는데.”
“아버지는 무사합니다 대부님.”
샤미안은 다른 사람처럼 여위어버린 백작을 바라보며 가장 중요한 사실을 고했다.
“폐하도 무사하십니다!”
백작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푹 패인 눈구멍 안에서 그 눈동자가 이상한 빛을 더했고 수갑이 채워져 비쩍 말라버린 손이 샤미안의 팔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으로 움켜쥐었다.
“폐하께서?!”
“예! 아버지는 지금 폐하와 함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라모나 기사단이 폐하와 행동을 함께 하여 현재 마레바를 향해서 진군중입니다!”
백작은 천장을 바라보며 환희의 음성을 울렸다. 신에 대한 감사의 기도인 듯 했다.
“폐하께서는 대부님의 안부를 무척이나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런 때 마침 개혁파가 대부님의 목숨과 교환하여 투항하라는 협박을 폐하께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리 온 것입니다.”
백작의 안색이 변했다. 여위고 초라해진 얼굴이 무서운 예감에 일그러졌다.
“설마 샤미안 양. 그대는 불법으로 이 탑에 침입해 온 것은 아니겠지?”
“맞습니다.”
여기에는 백작도 분명하게 신음소리를 냈다. 쉰목소리에 최대한의 노여움을 담아 백작은 젊은 여기사를 야단쳤다.
“무슨 위험한 짓을 하는 거요! 위에는 병사들이 눈을 빛내고 있는데!”
“병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기절했어요.”
“뭐라고?”
“이 소녀가 기적을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본 샤미안이었지만 소개는 나중으로 미뤘다.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자세한 일은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이 사이에 빨리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샤미안양. 그런 소리를 듣고서 이 자리에서 움직일 수는 없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여기에서 탈출할 만한 힘이 없소. 발견된다면 그대마저 한꺼번에 휘말리게 되겠지. 그렇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도라에게 면목이 없소. 폐하가 무사하시다 그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오.”
“그런 말씀을! 폐하께선 이제부터 코랄 탈환을 위해 전투에 임하실 겁니다. 대부님의 조언이 필요하실 겁니다!”
“샤미안양. 그 불빛으로 내 다리를 비춰보시오.”
들은 대로 촛불을 비춰본 샤미안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지하의 어둠을 찢어발기는 듯한 비명이었다. 불빛에 비춰진 백작의 양 다리는 그 무릎 아래쪽의 대부분이 검게 타버려 원래의 모양을 잃은 형상이었다. 단순한 화상이 아니다. 피부는 녹고 타버린 살점이 벗겨져 나가 괴저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샤미안은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 방에 강하게 떠돌던 악취의 원인을 멍청하게도 이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본 대로요.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검을 들고 싸울 수도 일어나 걸을 수도 없다오.”
나직한 목소리였다. 너무나 부드러운, 현실을 분명하게 받아들인 사람의 말이었다. 이 자하에 들어왔을 때부터 두 번 다시 햇빛을 볼 수 없으리라고 또한 사지가 멀쩡하게 죽을 수도 없으리라고 각오했음이 분명했다. 샤미안은 돌바닥에 주저앉아 심하게 어깨를 떨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을 들 수도 없었다. 무슨 짓을 당한 것인지 어떤 고문을 당한 것인지 상상하기조차 끔찍했다. 겨우 백작을 다시 보았을 때 그 얼굴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린 눈물로 젖어있었다.
“대부님.”
그러나 백작은 미소마저 떠올리며 말했다.
“울것없소. 이제는 아픔마저 느끼지 않으니. 하지만 이런 짐짝을 데리고 도망칠 정도로 코랄의 경비가 허술하진 않소. 나를 두고 도망가시오.”
샤미안은 격렬하게 흐느꼈다.
“대부님. 누가 누가 이런 심한 짓을. 너무해요!”
백작은 몸을 떨면서 울고 있는 샤미안의 어깨를 수갑이 채워진 부자유스런 손으로 상냥하게 토닥여 주었다.
“자아 가시오. 지금 이렇게 그대와 만나 도라가 무사하다는 소식과 폐하의 건승을 알수 있었으니 나는 이걸로 충분하오.”
“미안하지만 요만큼도 안 충분해.”
백작은 수상쩍다는 듯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았다. 소녀는 백작에게 주어진 고문의 흔적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정중하게 첫 대면의 인사를 했다.
“반가워 페르난 백작. 나는 그린다. 긴 이름은 그린디에타 라덴. 당신 아들네미의 친구야.”
“무슨 이상한 소리를. 나에게 아들은 없다.”
“저쪽은 그렇게 생각 안해. 지금도 자기는 스샤 출신 페르난의 월이라고 말하고 있어.”
이렇게 되자 백작도 놀라 이 소녀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혹시 네가 폐하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친구라니 무슨 소리냐.”
“정말이니까 할 수 없지. 알겠어 백작? 당신이 아무리 싫다고 말해도 이 감옥에서 데리고 나갈 테니까 말이야. 우리들은 이제부터 코랄을 상대로 결전을 벌여야 하는데 당신이 여기에 붙잡혀 있는 한 이길 승산은 없다구.”
“나 같은 건 내버려두라고 폐하께 전해라.”
“도라 장군 이하 전 용사들이 전부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걸.”
작은 소리로 혀를 찬 백작이었다.
“그분은 언제까지 쓸데없는 정에 묶여 계실 심산이신 거냐.”
“남의 일이라고 해서 맘대로 말하지 말아.”
쐐기를 박으며 소녀는 계단을 올라서서 말했다. 백작은 눈앞에서 벌어졌던 슬픈 장면도 잊은 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샤미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꽤나 이상한 태도의 소녀이오만 어떤 자인지?”
“그녀는 발도우가 내려주신 소녀입니다.”
눈물을 닦아낸 샤미안이었다. 지금은 비탄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다. 그런 것보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었다. 열쇠 꾸러미를 뒤져 백작의 수갑에 맞는 열쇠를 찾아야 한다.
“샤미안양. 나는 신경쓰지 말고 가시오.”
“아니 싫습니다. 저희들은 대부님을 구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렇지 않더라도 이런 잔혹한 처사를 본 이상 하루라도 대부님을 이런 곳에 계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봐요 샤미안양.”
“무엇보다 여기까지 왔으면서 대부님을 내버려두고 돌아간다면 저는 그대로 아버지 얼굴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확실하게 잘라 말한 여기사에게 백작은 마음을 졸이며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그때 소녀가 계단을 내려왔다. 팔에 무언가 천 두루마기를 안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것은 간수에게서 벗겨낸 듯 햇다. 일단 모조리 벗게 한 뒤에 옷 중에서 쓸만한 부드러운 천을 하나하나 빼앗은 것이다. 소녀는 솜씨 좋게 천을 찢어 썩은내를 풍기고 있는 백작의 양다리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능숙하게 즉석 붕대를 감았다.
“열쇠는 어때 샤미안?”
“안돼. 아무래도 맞는 걸 잘 못 찾겠어. 정말 이 열쇠 꾸러미가 맞는 걸까.”
소녀는 귀찮다는 듯이 일어섰다.
“비켜봐. 부숴 버리게.”
말하자마자 소녀는 우선 수갑과 벽을 잇고 있는 쇠사슬을 때려부숴 끊었다. 그 다음엔 백작의 양손을 고정하고 있는 나무테 사이에 칼끝을 들이밀고 가볍게 벗겨내 버렸다. 그리고는 백작을 벽에 기대어 세우사시피 겨우 세워놓은 뒤 자신의 등에 엎어지게 해서 업어 올렸다.
“이 이봐라.”
“됐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하지만 내가 있으면 너희들까지도 도망칠 수 없게 된다.”
“다친 사람한테 이런 소리 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 이상한 소리하면 기절시켜서 맘대로 옮긴다?”
백작은 여윈 얼굴에 놀라움을 가득 띠고 있었다. 소녀 쪽은 업어 올린 몸이 너무나 가벼운 것에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있었다. 이 상태로 잘도 태연하게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생물이라는 것이 본래 가지고 있어야 할 힘이 마치 하나도 없는 양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반년간의 옥중 생활과 과도한 고문이 백작의 몸에서 생기와 활력을 남김없이 빼앗아 버렸던 것이다. 강인한 의지의 힘으로 백작은 한 마디도 고통스럽다는 소리를 흘리거나 약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일상적인 언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결코 낙관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 순간 소녀는 깨달았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독방을 나서자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대장이 백작을 보고 경례를 올렸다. 소녀의 등에 업힌 페르난 백작도 그곳에 있던 거한을 보고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분명 루카난 경이셨던가?”
“예!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딱딱한 인사치레는 나중에 해. 가자.”
간수는 거의 맨몸인 채 떨고 있었다. 손이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벗겨진 옷을 다시 한번 입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인정사정 없이 간수를 재촉해 걸어가도록 명령했다.
“고작 그 정도 갖고. 양 다리가 구워진 사람의 아픔에 비교하면 그까짓 게 대체 뭐라고 그러는 거야.”
위협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떨면서 일어난 간수는 앞장서서 그들을 출구까지 안내했다. 출구를 확인하자 소녀는 간수를 지하광에 내버려둔 채 쇠창살의 자물쇠를 잠갔다.
“가끔은 하룻밤 여기에서 지내보는 것도 괜찮겠지. 죄수의 기분을 잘 알 수 있게 될거야.”
계단을 올라가 지하통로를 빠져나가 지상 구역에 나오자 돌바닥 위에 묶여있던 간수가 어떻게든 자유의 몸이 되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런 간수를 소녀는 무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데리고 갈께.”
라는 말을 던지고 북쪽 탑을 뒤로했다.
밖에 나오자 주변에는 아직 깊은 어둠의 장막이 내려져 있었다. 소녀에게 업혀있던 페르난 백작은 자유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름다워.”
“네?”
“태어나 처음으로 별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구료.”
샤미안은 그 말에 새삼스레 백작이 놓여있던 잔혹한 환경을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 지하는 완전한 암흑에 뒤덮여 있었다. 그것뿐인가. 백작은 기사에게 있을 수 없는 굴욕을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교외로 나가면 좀더 잘 보여. 지금은 횃불 빛이 방해되니까.”
소녀가 말했다. 샤미안도 끄덕였다.
“서두르지요. 제3성벽 밖에서 종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소녀는 백작을 업은 채 일행의 선두에 섰다. 어둠 속에서 사용하는 이 소녀의 눈이 정확하다는 것은 국왕이 실제로 확인한 사실이었지만 샤미안이나 대대장도 이제까지 전면적으로 이 눈과 귀에 의지하고 있었다. 일곽은 완전히 산 속에 위치해 있다. 주요한 건물 주위, 혹은 그 건물들을 이어주는 부분에는 토지 정리가 행해지고 포석이 묻혀 정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약간만 떨어지면 자연 상태 그대로가 펼쳐져 있다. 길 따위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소녀는 귀를 기울이면서 가능한 한 걷기 쉬운 곳을 골라서 걸어나갔다.
페르난 백작은 자신을 업고 있는 데다가 이런 어둠속에서도 확실하게 걸음을 옮기는 소녀의 발놀림에 놀란 듯 했지만 제1성벽에 도착하여 그들이 왕복에 사용했던 가느다란 밧줄을 보자 탄성을 올렸다.
“대체 어떻게 이런 것을....”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대부님.”
샤미안도 긴장감에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살폈다. 성벽을 넘어갈 때가 가장 큰 난관인 것이다. 밧줄은 벽 하나에 하나씩 밖에 준비할 수 없었다. 즉 세 명이 일단 성벽 위에 올라가 반대측에 밧줄을 다시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였다.
“샤미안 먼저 올라가. 그 다음엔 대대장. 내가 가장 나중에 올라가고 가장 먼저 내려갈께.”
“안된다. 나를 두고 가라.”
끝까지 완고한 페르난 백작이었다. 소녀가 살짝 웃었다.
“정말 월하고 똑같이 고집불통이네.”
“이녀석. 폐하의 존함을 막 부르다니 무슨 짓을.”
“딱히 월한테만 그러는 거 아냐. 나시아스나 가렌스도 이름으로 부르는걸.”
그러는 사이에도 샤미안은 성벽 위에서 몸을 낮추고 불빛을 피하고 있었다. 대대장도 같은 식으로 밧줄을 올랐고 소녀는 등에 업힌 백작에게 말했다.
“내 목을 꽉 잡아.”
무리라고 말하려고 한 백작이었지만 그 때엔 이미 소녀가 밧줄을 잡고 올라가기 시작한 중이었다. 반사적으로 백작은 뼈만 남은 팔로 소녀에게 매달렸지만 다음 순간에는 놀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마르고 쇠약해졌다 해도 어른 남자의 몸을 등에 업은 채로 소녀는 쑥쑥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성벽 위에 도찾하자 이번엔 밧줄을 반대편으로 늘어뜨리고 곧바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대대장과 샤미안이 이어서 내려왔다. 이것을 위해 세 명 모두 미리 손에 끼는 튼튼한 보호구를 준비해둔 참이었다. 이제부터가 2곽이었다. 근위병만이 아니라 각각의 귀족들의 저택에서 일하는 사병이나 기사들도 많은 곳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저택에도 다들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으로 적을 위압해 자신의 위용을 떨쳐보이는 것이 전투의 상식인 이치와 같다. 전투가 일어날 곳에서는 서로가 지지 않게 구화를 피워 올리는 것이다. 무인의 마움가짐이라고 한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만 사람이 일어나 있는 기척은 거의 없었다. 극히 드물게 경비병이 나와보는 듯 했지만 그것도 졸음을 참으며 돌아보는 형식적인 순찰이었다. 난공불락의 코랄 성의, 말하자면 두 번째 구역이다. 어떠한 자라도 밀고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녀가 미소조차 띠지 않은 채 말했다.
“이 성이 난공불락이라니 별 웃기는 농담도 다 있어. 여기서부터 한 부대로 밀어붙이면 한입 거리로 충분하군.”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는 아이구나.”
소녀의 등뒤에서 페르난 백작이 웃었다.
“전술로서는 재미있군. 하지만 여기까지 어떻게 군대를 유도하겠나? 등뒤에는 본궁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잊고 있는 게 아닐까.”
“그 뒤는 파키라 산이야. 반년 전 월은 혼자서 넘어갔지. 그렇다면 군대가 넘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혼자니까 넘을 수 있었던 거다. 굳이 덧붙이자면 스샤의 숲속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던 폐하니까 가능했던 일이지. 파키라는 무장한 다수의 병사들이 넘을 수 있을만한 산이 아니야. 게다가 폐하를 막 불러대면 안 된다.”
“공교롭게도 백작. 나는 친구는 이름으로 부르는 주의라서 말야.”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은 어둠에 섞여 조심스레 길을 내려갔다. 거의 하산로에 가까운 경사였다. 대수문에서 정문까지 나 있는 大通路대통로 근처는 경사도 완만하니 평평했고 귀족들의 저택도 정연하게 늘어서 있지만 그들이 지금 내려가고 있는 곳은 2곽에서도 외곽 쪽 부분이었다. 대대로 섬겨온 신하라 해도 그다지 재산이 많지 않은 귀족들의 저택이 늘어서 있는 듯 각각의 저택은 다른 저택의 지붕을 내려다보는 혹은 다른 저택의 현관을 올려다보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한번 지났던 길이기도 하고 내리막길이기도 해서 갈 때에 비교하면 상당히 짧은 시간만 들여 제2성벽까지 도달할수 있었다. 그리고 아까와 같은 식으로 담을 넘었다. 남은 것은 최후의 하나 제3성벽뿐이라고 생가하는 순간 예상치도 못한 장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 서 있던 소녀가 숨을 멈추며 마구간의 그늘에 숨었다. 성벽은 바로 앞이었다. 그런데 살짝 보니 성벽 위나 아래로도 횃불이 몇 개나 밝혀져 기분 나쁘게 웅성대고 있었다. 샤미안이 숨을 삼켰고 대대장은 작게 혀를 찼다. 늘어뜨려 두었던 밧줄이 발견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3곽을 경비하는 병사가 우연히 발견했는지 혹은 -전시 중이 아닌 이상은 하지 않는 일이긴 했지만- 성벽 위를 순회하던 병사가 발견했는지도 몰랐다. 조금 소동이 벌어진 참이었다. 대대장이 낮은 목소리로 탄식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샤미안도 심한 초조감을 느꼈다. 모여있는 횃불 수는 열이 넘었다. 이제 한 발자국이다. 바로 눈과 코앞에 안전하 자유가 기다리고 있다. 남은 시간도 얼마 없다. 이곳까지 지나치게 순조롭게 왔다고 할 정도였지만 날이 밝기까지는 결코 얼마 남지 않았을 터였다. 소녀가 말했다.
“대대장. 이 사람을 부탁해.”
백작을 받아달라는 소리였다.
“리. 어쩔 생각이야?”
“어쩔 수 없지. 강행수단으로 갈께. 저 병사들을 해치우고 오겠어.”
“하지만!”
“너희들이 하게 되면 같은 성에서 일하는 동료 사이야. 나중에 곤란해질 지도 몰라. 내가 하는 쪽이 별 문제가 안 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소녀는 허리띠에 찼던 단검을 잡아 뽑았지만 샤미안이 고개를 저엇따.
“아니 안돼. 내가 가겠어.”
“이쪽 병사는 직접 전장에 서 있는 적이 아니야. 그냥 관계없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죽일 수 있어?”
“그건 기사에 대한 모욕이라고 판단하겠어 리.”
역시 목소리를 낮추고 있으면서도 확실하게 단언한 샤미안이었다.
“당신이 말했잖아. 다른 사람의 목숨보다 자기 목숨을 우선시하겠다고. 그 말대로야. 지금의 우리들은 설사 동포 살해란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무사히 탈출하는 게 우선이야.”
여기에서 머뭇거리면 그들은 붙잡히고 아마도 처형되리라.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무관한 병사를 몇 명이고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을 밀어내고 제거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쓰러진다. 냉혹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규칙이었다. 소녀는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럼 방책 위의 병사들은 내가 단검으로 해치울께. 아래 있는 녀석들을 부탁해.”
“응.”
“잠깐 기다려. 샤미안님 그렇다면 제가 가겠습니다.”
대대장이 서둘러 말했다. 자신이 남고 소녀 두 사람이 특공을 맡는다니 탐탁치 않았던 것이리라. 그러나 샤미안은 고개를 젓고 대대장을 말렸다.
“안 됩니다. 루카난경은 당당하신 근위장교이시죠. 성의 경비병들과는 소속은 틀려도 뿌리는 같습니다. 북쪽 탑에 침입한 것만으로도 죄송스럽게 생각하는데 이 이상 성 경비병들을 베어버리게 된다면 더욱더 곤란한 문제가 될 겁니다.”
“아니요 하지만.”
“샤미안이 말하는 대로야. 백작 미안하지만 저쪽으로 옮겨줘.”
등을 대대장에게 향했다. 백작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대장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지. 등을 빌려주겠나 루카난 경.”
“예.”
백작을 대대장에게 맡긴 뒤 두 사람은 각각 무기를 들고 허둥대고 있는 횃불들을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달려가면서 소녀가 단검을 던졌고 직후에 방책 위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보다 약간 늦게 샤미안이 아래에 있던 병사를 한 명 베어 넘겼다.
“뭐야?!”
한마디를 외치는 사이에 소녀의 단검은 방책 위에 있던 네 명 정도의 병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샤미안도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있던 탓도 있고 기습이라는 이점도 있어 아래에 있던 세 명을 차례차례 베어 넘겼다.
“이 틈에 빨리!”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대장은 백작을 업은 채 달려들었다. 밧줄은 다행히도 내려진 채였다. 이런 경우에 섣불리 손을 대지말고 현장을 유지한 대로 상관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 일반병의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그 연락을 받은 증원이 달려온다면 이야기는 끝이다. 소녀는 쓰러진 병사 중 한 명이 지니고 있던 활과 화살을 빼앗과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벽을 올라갔다. 그리고 성벽 위에 똑바로 서더니 손짓을 했다. 샤미안은 검을 든 자세를 취한 채 대대장에게 말했다.
“먼저 올라가세요.”
“아니 샤미안님.”
“어서!”
벽의 위아래를 소녀들이 보호하는 가운데 대대장은 백작을 업은 채 밧줄을 기어올라 흉벽의 안쪽 망보기 용 통로에 섰다. 일단 백작을 내려놓고 방책 위에서 이곳저곳을 눈에 불을 켜고 살폈다.
“어딘가에서 마중이 기다릴 텐데.”
“샤미안 빨리! 사람이 와!”
소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여기사는 급히 밧줄을 오르기 시작했지만 거의 동시에 횃불들과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급속도로 가까워져 왔다. 소녀는 혀를 차더니 활을 등에 메고 샤미안이 매달려 있는 밧줄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사람 하나를 업고도 자신의 몸을 확실히 이동시키던 팔이다. 순식간에 샤미안은 성벽 위로 끌려 올라갔지만 병사들 쪽도 확실히 빨랐다.
“저기있다!”
“놓치지 마라! 죽여도 좋다!”
“활은 어디 있냐!”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발각되었다. 어찌어찌 성벽 위에 올라온 샤미안이었지만 발 아래에는 차례차례 병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소녀는 다시 한번 활을 재고 순식간에 速射속사를 시작했다. 한발을 쏘면 동시에 아래에서 비명이 울렸다. 그 사이에 샤미안은 감아 올린 밧줄을 성벽 바깥으로 늘어뜨렸다.
“왔다!”
대대장이 외쳤다. 샤미안의 종기사들이 이 소동을 눈치채고 말을 달려 나타난 것이다.
“리! 대부님을!”
“안돼. 손을 놓을 수가 없어! 대대장!”
“알았다!”
루카난 대대장이 다시 백작을 들쳐업고 흉벽을 넘어 가려고 등을 돌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말 한순간 대대장의 등이 즉 백작의 등이 성안에 있는 병사들 쪽을 똑바로 향했다. 맹세코 단 한순간의 일이었다. 주변은 아직도 어두컴컴했다. 노려서 쏜다고 해도 맞을 리가 없었지만 어떤 우연이 작용했는지 혹은 어떤 악의가 작용했는지 그 한순간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여명의 어둠을 찢으며 날아온 화살이 백작의 등에 꽂혔다. 샤미안이 비명을 질렀다. 대대장은 세상의 모든 저주를 다 퍼부으며 백작을 감싼 채 밧줄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뒤에 샤미안이 따라갔다. 소녀 차례가 되자 활을 던져버리며 뛰어내렸다.
“백작!”
“대부님 정신차리세요!”
달려온 종기사들도 상처를 입은 백작의 모습에 당황하여 어쩔줄 몰랐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오른 어깨가 얕게 찔린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뽑아 버린다 해도 출혈은 없겠지만 지금은 그런 처치를 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소녀가 부르짖었다.
“그라이아!”
그에 답해 단 한 필 하늘 같은 안장을 싣고 있는 흑마가 달려왔다.
“비상사태다. 이 사람도 태울게.”
말의 검은 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보고 있던 인간들에겐 긍정한 것인지 부정한 것인지 알 방도가 없었으나 소녀는 우선 자신이 뛰어 오른 뒤 부상당한 백작의 몸을 뒤에 태우도록 시켰다. 두 사람을 태우고 나서도 발이 느려지지 않는 말은 그리 많지 않다. 로아의 흑왕이라면 그에 안성맞춤이었다. 샤미안도 말에 올라타며 외쳤다.
“모두들 미리 준비한 대로, 알고 있겠지!”
날카롭게 대답하고 종기사들은 서너명씩 조를 짠 채 나뉘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일제히 흩어졌다. 소녀와 대대장 그리고 샤미안도 백작을 보호하듯 하고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는 드디어 병사들이 나타나 선 채로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댔지만 그 때쯤 그들은 이미 화살이 닿지 않는 곳까지 거리를 벌린 뒤였다. 대성공이어야 했다. 살아서 돌아온 자는 아무도 없다는 북쪽 탑의 심층부까지 들어가 포로가 되어 있던 백작을 구한 뒤 난공불락인 코랄 성을 멋지게 빠져나온 것이다. 그러나 소녀의 등에 기댄 채 겨우 버티고 있는 백작의 모습에 샤미안도 대대장도 심한 초조함과 자책감, 그리고 불길한 예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6장
세명은 코랄 교외로 나온 뒤 일단 말을 멈추었고 샤미안이 백작의 상처를 응급치료했다. 이런 일은 전장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다. 익숙해진 일이었다.
“대부님. 부디 정신을 똑바로 차리셔야 해요.”
백작은 힘이 없으면서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대수로운 상처도 아닌데.”
“이제부터 폐하가 계신 곳으로 갈 겁니다. 죄송하지만 대부님. 아직 한동안 말 여행을 견뎌주세요. 이곳은 아직 위험합니다.”
끄덕인 백작이었지만 호흡이 거칠었다. 그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이미 태양은 높이 떠올랐고 주변은 내키는 대로 훤하니 보였다. 이미 밤의 어둠은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는 것이다.
“가자 리.”
재촉하듯 말하며 말에 올라타려 한 샤미안이었지만 소녀는 가만히 백작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하고 있어. 서두르지 않으면 추적자가 올 거야.”
“샤미안 잠깐 와 봐.”
대꾸를 허용치 않는 어조였다. 대대장은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백작 곁에 남았고 소녀는 샤미안을 나무 그늘 쪽으로 데려갔다.
“무슨 일이야.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잖아?”
한시라도 빨리 국왕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서두르는 여기사와는 달리 소녀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샤미안 잘들어. 저 사람은 이제 못 움직여. 말 같은 걸 태웠다간 틀림없이 죽을거야.”
여기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숨이 넘어가려고 하고 있어. 이대로 가만히 둬도 오래 못 버틸거야.”
“리!”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샤미안이었다. 그 비명 속에는 언뜻 노여움도 섞여 있었다.
“그만둬! 대부님은 강한 분이야. 저런 화살 상처 같은 것에 지진 않으실 거야. 반년이나 감옥에서 생활하시고 그런 고문을 받고도 견뎌내셨다고?!”
“그러니까야. 보통 인간이라면 벌써 죽었어. 저 사람도 이제 금방 죽겠지.”
“리.”
개암나무빛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오는 샤미안이었다.
“너무해.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온 거지? 전부 대부님을 구하기 위해서잖아.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겨우 저 감옥에서 대부님을 해방시켜드릴 수가 있게 된 건데?!”
“샤미안. 믿고 싶지 않은 것과 진실을 똑같이 취급하면 안 돼.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소녀는 똑바로 샤미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정말 강한 사람이야. 이렇게 되어서도 아직 한 마디도 아프단 소리를 안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도 반년간의 감옥 생활을 한 데다 아마 몇 번이고 반복되었을 고문이 백작의 몸을 안팎으로 괴롭혀서 엉망진창으로 만든거야. 저 다리의 썩는 냄새만 아니었다면 좀더 빨리 눈치챘을 텐데.”
“뭘 눈치챈다는 거야?”
“저 사람 몸에서 나는 죽음의 냄새.”
소녀는 끝까지 냉정했다.
“몸은 간신히 움직이고 있어도 생명의 냄새가 나지 않아. 오히려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게 이상할 정도야. 게다가 저런 부상까지 입었다. 얼마 안 되나마 남아 있던 힘도 다 써버린 거지.”
“그런.”
샤미안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소녀의 말을 의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잔디 위에 주저앉아 있는 백작을 돌아본다. 어깨가 늘어진 그 사람은 아버지와 동년배여야 할 텐데 아버지보다도 훨씬 키도 큰 사람일 텐데 마치 노인처럼 조그마해 보였다.
“그런, 너무해....그건 너무해.”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린 소녀시절부터 자신을 귀여워해 주었던 페르난 백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의 상냥했던 저 사람이 대체 무슨 짓을 했다는걸가. 무슨 대가를 받아서 이런 비참한 죽음을 맞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까. 완전히 의욕이 꺾여 버린 샤미안의 팔을 소녀가 쥐고 살짝 흔들었다.
“잘 들어. 저 사람은 이제 못 움직여. 그러니까 너는 지금 당장 국왕군의 진영으로 달려가서 월을 여기로 데리고 와.”
“폐하를?!”
“그래. 저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면 월을 이쪽으로 데리고 올 수 밖에 없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여기는 아직 적지 한 가운데라고!”
“샤미안.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우리들 대체 뭣 때문에 지금까지 노력해 온 거야?”
짙은 녹색 눈동자는 진지함 그 자체였다.
“저 사람하고 월을 다시 한번 만나게 해주기 위해서. 그런 거 아니었어?”
“.......”
“나는 여기 남아서 저 사람을 지킬께. 네 승마 솜씨에 모든 걸 맡기고. 어떻게 해서든 오늘 내로 월 혼자만 여기로 데리고 오는거야.”
“폐하만을?”
샤미안은 입을 딱 벌렸다.
“그런! 무리야! 아버지도 나시아스님도 폐하가 그런 일을 하시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전면전을 바로 눈앞에 둔 정세였다. 적지에 잠입한다는 것만 해도 용서하기 힘든데 국왕의 단독행동이라니 말도 안된다. 충실한 부하들은 필사적으로 막으리라.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에겐 아무 말도 하면 안돼. 아직 북쪽 탑에 잠입할 방도가 보이지 않아서 잠깐 황급히 돌아왔다거나 뭐 어떻게든 둘러대고 이 상황을 월에게 전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그 뒤엔 그 녀석이 알아서 잘 할 거야.”
“하지만! 대부님과 만나고 싶은 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셔. 그런데 아버지께 거짓말을 하라고?”
“샤미안 부탁이니까 월을 생각해줘.”
이 말은 푹 하고 여기사의 가슴을 찔렀다. 외부 사림인 이 소녀에게 델피니아 사람인 자신이 이런 소리를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무슨 소리야?”
“내 상상일 뿐이지만 만약 도라 장군이나 주변 사람들이 잔뜩 있으면 월은 절대로 아버지와 만날 수 없어. 만나는 것은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해준 그저 신하 한 명에 불과할 거야. 페르난 백작은 무척이나 완고한 사람이라 남이 없는데도 월을 폐하라고 부르면서 태도를 바꾸지 않았어. 그런데 남들이 잔뜩 둘러싼 임종이라면 월에게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알겠지?”
소녀의 말투에도 긴박한 울림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냉정하게 사실을 전하고 있다.
“지금이 최후의 기회란 말이야. 저 살마과 월을 아버지와 자식으로 만나게 해줄 수 있는 건 지금 밖에 없어. 그러지 위해선 다른 사람이 있으면 절대 안돼. 도라 장군한테는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장군도 백작하고 오랜 친구 사이고 월을 자기 아들처럼 귀여워해 줬던 사람이잖아. 사정을 이야기하면 분명히 이해해 줄 거야. 그러니까 샤미안 부탁이야.”
샤미안은 진지한 표정을 띠고 있는 짙은 녹색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이 소녀가 걱정하고 잇는 것은 이런 형태로 아버지를 잃게 될 국왕의 슬픔이며 어떻게 해서든 그 마음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깨달았다. 소녀의 말은 옳았다. 아버지나 나시아스가 있으면 페르난 백작은 그 남자에게 아들다운 발언을 절대 시키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도 아버지다운 말은 무엇 하나 해주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끝까지 신하로서의 예의와 분수를 지키며 죽어가리라. 아비와 자식의 헤어짐이 그런식이 되어서 좋을 턱이 없었다. 샤미안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자신을 힐책하며 의연한 여기사로서 일어섰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나중이었다. 아직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었다.
“알았어 리. 어떻게든 해볼께.”
“고마워.”
샤미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소녀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쪽은 자신이었다.
“다시 만날 장소를 정하자. 대부님께 안전한 휴식 장소를 찾아 마련해 드려야 해.”
코랄 주변이라면 뭐라 해도 루카난 대대장이 잘 알고 있다. 상담을 하자 곧 생각나는 곳이 있다고 해서 그들은 백작을 말에 태우고 근처의 작은 마을까지 나아갔다. 도착한 곳은 자그마한 사원이었다. 참배하는 것은 마을사람들뿐인지 아담한 구조였다. 대대장은 이 사원 사람과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부탁도 있고 해서 당직은 쾌히 별채를 빌려주었다. 이것도 창고 쪽에 가까울 구조였지만 그래도 정갈하고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부상자가 있다고 소식을 들은 사원의 시동들이 서둘러 침상을 준비해 주었다. 바닥에 지푸라기를 쌓아 올리고 천을 덮은 데 불과한 간단한 것이었지만 차가운 돌 바닥의 지하감옥보다야 훨씬 나은 장소라고도 할 수 있었다.
“대부님 여기에서 일단 잠시 쉬고 계세요.”
드러누운 백작에게 그렇게 말하고 샤미안은 바깥으로 나갔다. 그곳에서는 리가 곤혹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샤미안. 그라이아에게 널 태워달라고 부탁했지만.”
이런 상황이라 가장 발이 빠른 흑왕을 샤미안에게 빌려주려고 했지만 당사자인 말이 난색을 표시한 모양이었다. 샤미안은 이런 때였지만 살짝 웃었다.
“아니 그라이아는 당신의 친구인 걸. 괜찮아 내 말도 상당한 준마야. 흩어진 종기사들과도 합류할 수 있을 테니 반드시 오늘내로 폐하를 모시고 올게.”
그때로부터 나흘이 지났다. 국왕군이 어디까지 진군했는지 그것이 문제였다. 지금에 와서는 가능한 한 마레바에 가까이 와 있을 것을 빌 수밖에 없었다. 코랄에서 마레바까지는 왕복 육십 카티브였다. 말로 달려간다면 당일 내로 왕복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지만 국왕군을 찾아 해맬 시간을 생각하면 아슬아슬했다.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저도 함께 가지요.”
대대장이 말했지만 샤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대대장은 이곳에 남아서 대부님을 돌봐주세요.”
“아니 같이 가는 편이 나아.”
소녀가 말했다.
“대대장은 이런 농촌에서 눈에 너무 띄어. 나 혼자서도 어떻게든 될 거야.”
“하지만.”
샤미안은 일순 망설였다. 혼자서 위험한 것은 이 소녀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움직이지도 못하는 백작이 있다. 그러나 그런 샤미안에게 소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샤미안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을 맡길 수 잇는 사람도 이 소녀뿐이었다.
“가능한 한 서두를게. 기다리고 있어.”
우물쭈물 거릴 시간이 없엇다. 샤미안과 대대장은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리고 말에 채찍을 가했다.
혼자 남은 소녀는 오두막 안에 재워둔 백작 곁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상당히 진정되었지만 역시 말라 떨어지기 직전의 낙엽 같은 모습이었다. 반년 동안 강한 습기와 곰팡내 속에서 살아온 백작에게는 그 냄새가 배어있었다. 소녀는 사원의 시동이 준비해준 손수건으로 때에 찌든 이마와 뺨을 닦아주었다. 샤미안은 이 사람을 단정한 얼굴에 온화하고 우아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이렇게나 마르고 야윈데다 지저분한 수염에 뒤덮여 있어서야 본래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조차 굉장히 어려웠다. 얼굴에 손길이 느껴지지 백작이 약하게 눈을 떴다.
“아팠어?”
“아니. 얼굴을 씻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라서 말이다. 놀란 것뿐이다.”
반년 만이니 무리도 아니다.
“이곳은 어디냐.”
“나도 몰라. 이근처는 잘 모르거든.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아니.”
백작은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바로 곁에 다가온 죽음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자유를 되찾은 실감이 나지 않은 것인지, 매우 안쓰러운 그러면서도 깊은 안도감이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햇빛이 닿는 곳에서 죽을 수 있다니. 충분하고도 남지.”
“아직 안돼 백작.”
목소리에 힘을 넣어 소녀는 말했다.
“아직 죽으면 안돼. 지금 샤미안이 월을 부르러 갔어.”
백작은 순간 눈을 번쩍 떴다.
“뭐라고?”
“오늘내로 늦어도 오늘 밤 내로 월이 올거야.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도 살아있어야 돼.”
“이 이런 어리석은 자야!”
빈사상태로 바닥에서 구르면서도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외친 백작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당장 그마두게 해라! 이곳은 적지 한 가운데란 말이다!”
소녀는 흥분한 나머지 일어나려고 하는 백작을 달래서 원래대로 눕도록 했다.
“안돼. 월도 분명히 백작과 만나고 싶을거야. 여기에서 알리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월에게 원망을 사게돼.”
“바보녀석! 내일 따위에 신경써도 될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거냐! 그 분은 국왕이시다. 국왕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첫 번째로 생각하시지 않으면 안된단 말이다!”
단숨에 외치고 그 반동으로 가늘게 숨이 흐트러진 백작을 소녀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백작은 남겨진 사람의 기분을 생각한 적이 있어?”
“뭐라고?”
“그렇잖아. 어제부터 가만 듣고 있자니 자기를 내버려라, 그거 하나 아니야. 하지만 월에게 있어서는 지금도 아버지라고.”
마르고 여윈 얼굴에 희박한 고뇌가 달렸다.
“그런 소리를 입에 담는 건 이제 허용되지 않는다. 그 분도 그 정도는 알고 계실 거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말이야.”
소녀는 백작의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아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이렇게 되지 않았다.”
갑자기 남자처럼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의 말투를 흉내내는 소녀를 보고 백작은 눈을 크게 떴다.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나와 관련되지만 않았다면 아버지는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다, 스샤의 영주로서 평안하게 행복하게 살아갔을 거다. 백작에겐 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야? 나한텐 계속 들려왔어.”
소녀는 말을 자르고 진지함 그 자체인 표정으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도 또한 깊은 눈빛이 되어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나?”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월은 그런 소리 안해. 하지만 분명히 속으로 생각하고 있어. 나는 알수있어.”
“너는 남의 마음 속까지 들여다 볼수있는거냐.”
“아니야. 경험했으니까 아는 거야.”
그 목소리에 스며있는 무언가가 백작에게 그 이상의 질문을 못하게 만들었다. 이 별난 소녀의 마음 속에도 무언가 남이 닿아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고 민감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소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백작. 지금 자기 꼴을 좀 봐봐. 지독하다구. 얼굴은 뺨이 푹 들어갔지. 몸은 살이 빠지고 뼈만 남았지. 온 몸은 전부 상처투성이지. 덤으로 양 다리는 썩어 무드러지는 중이지. 월이 이 광경을 본다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자기 탓이라고 슬퍼하고 한탄하다 아무 짓도 못하게 되어 버릴 거야.”
“인정사정 없는 소리를 하는 아이로군.”
저도 모르게 신음하듯 말한 백작이었다. 그러나 곧 죽을 사람에게 섣부른 위로 따위 하지 않고 가차업이 있는 그대로 현실을 말하는 소녀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입가에 미약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누구 탓도 아니다. 운명이라는 거겠지. 그분이 자기 짐으로 생각하실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그 얘기를 본인 앞에서 해주라고.”
소녀는 다짐했다.
“이게 최후야.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신하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이제부터 어떡해야 하는지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안돼. 월은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돌아왔어. 누구에게도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만 분명히 그것만을 위해서였어. 하지만 당신은 여기에서 죽어. 그 녀석은 목표를 잃게돼.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걱정말아라. 그분은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잘 알고있다.”
분명히 완고함 그 자체인 백작이었다. 이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심할 정도로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리고 뒷일을 생각한다면 소녀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알 텐데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생각인 듯 했다. 죽음에 임박한 인간의 결의를 뒤집는 일은 누구도 할 수 없다. 하물며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더욱.
소녀는 가벼운 초조함을 느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백작의 아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문득 이 사람은 몇 살 정도일까 하고 의문을 가졌다. 지금은 야위고 쇠약해져 노인처럼 늙어보이지만 도라 장군의 친구라면 사십을 얼마 넘지도 않았을 터이다. 그 남자가 24세라는 것은 20세가량 혹은 십대에 저 남자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계산이 된다. 선대의 국왕도 상당히 극단적인 결단을 내린 셈이다. 그만큼 이 사람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백작이 문득 고개를 돌려 소녀를 보았다.
“샤미안 양은 너를 보고 발도우가 내려주신 소녀라고 말했다만.”
“당신 아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어. 다만 공교롭게도 내 아버지는 발도우라는 이름이 아니었지.”
“그렇겠지. 그럼 너는 뭐 하는 자이고 어디에서 온 것이냐?”
“나도 잘 몰라.”
진지하게 대답한 소녀였다.
“이곳은 내가 나고 자란 세계가 아니야. 알수있는건 그 정도뿐. 어째서 내가 이곳에 있는 건지 어째서 전쟁의 여신이니 군신의 딸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런 커다란 동란에 관련되어 있는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흐음. 그거 참 어려운 일이로구먼.”
“정말 그래.”
죽억는 병자와 이세계에서 떨어진 소녀 사이의 대화는 묘하게 느긋했다. 서로가 이 세계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데 네가 가진 말은 혹시.”
“로아의 흑왕이야. 지금 이름은 그라이아. 내 친구야.”
“그 이름은 네가 붙인 거냐?”
“그래. 자기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여위고 쇠약한 몸인 데도 백작은 무엇이 재미있는지 입안에서 웃음을 흘렸다.
“그렇구먼. 로아의 흑왕을 친구로 삼을 수 있었다면 델피니아의 왕도 손쉬운 일인가.”
소녀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금방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렇구말구. 가뿐하다구.”
백작의 눈도 웃고 있었다.
“도라가 꽤나 머리에서 불을 뿜어냈겠구먼?”
“뭐 장난 아니었어. 내가 처음으로 그라이아를 타고 돌아왔을때엔 턱은 빠지고 눈알은 튀어나오지 않나 했었다니까. 타르보도 그렇고. 또 그 옆에선 월이 얼마나 열심히 웃음을 참았는지.”
누운 채로 백작은 다시 한번 웃음을 흘렸다.
“눈에 보이는 것 같구나. 아아 기쁜 일이다.”
소녀는 나시아스나 가렌스 등 다른 국왕군의 용사들의 모습도 이야기하고 얼마 전 와이베커에서 거둔 승리도 이야기했다. 이븐에 대해 말하자 백작은 약간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어허 그녀석 꽤나 악동이었는데. 이젠 좀 쓸모있는 놈이 되었는가 보구나.”
“강해. 연대장을 잡을 정도니까 말이야. 자 이젠 좀 쉬어. 너무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쪽이 좋아.”
“그렇겠다.”
한숨을 내쉰 백작은 무언가 보이는지 머리맡에 있는 소녀의 눈동자 안쪽까지 들여다보고 싶다는 듯 똑바로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왜 그래?”
“모르는 사이에 겨울이 어디론가 가버렸군.”
지하의 벽은 일년 내내 기온을 거의 일정하게 유지한다. 백작이 옥에 들어간 때는 바야흐로 겨울을 맞이하려던 계절이었다. 지금은 이미 봄이 한창이었고 곧 초여름이 될 시기였다.
“엊저녁엔 몰랐지만 네 눈동자는 그리운 색깔이로구나.”
“그리워?”
“그래. 고향의 5월의 숲을 떠올리게 한다.”
부드럽게 웃고는
“스샤에서는 말이다. 오월의 숲을 보석 같은 녹음이라고 부른단다. 오랜 겨울이 끝나면 사람들은 무거운 외투를 벗고 초목은 억눌려있던 우울함을 떨쳐버리듯 새순을 틔워 대지와 나뭇가지를 신선한 녹색으로 칠해나가지. 다른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그리운 색이야.”
그렇게 말하더니 마르고 여윈 손을 소녀에게 내밀었다.
“구해준 데에 고맙다는 소리도 아직 못했구나.”
“아직 일러.”
소녀는 절박한 어조로 말하며 백작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직 안돼 백작.”
“뭘. 걱정하지 마라. 폐하의 용안을 뵐 때까지 죽지는 않는다.”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7장
샤미안과 대대장에게 인도되어 국왕이 달려온 것은 그날 해가 저물려던 즈음이었다. 대강의 사정을 샤미안에게 들었으리라. 이미 안색이 변한 채였다. 점차 저무는 석양과 점차로 약해지는 백작의 용태를 번갈아 바라보며 한순간 약한 마음이 되었던 소녀는 말발굽의 울림을 듣는것과 동시에 뛰어나가 남자를 맞이했다. 양쪽 모두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창백해진 국왕의 얼굴과 긴박한 소녀의 얼굴에 서로는 대화할 필요조차 없었다.
지금 백작은 사원의 시종들이 옆에 붙어서 간병을 해주고 있었다. 소녀와 남자는 그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교대해서 병상의 백작 옆에 무릎을 꿇었다. 고대하던 재회의 순간이어야 했다.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는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실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게 된 백작의 상태에 말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백작 자는 거야?”
소녀가 살짝 물었다. 얕은 호흡을 계속하고 있던 페르난 백작은 약해진 상태에서도 눈을 뜨고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또 한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얼굴 가득 떠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아버지...”
“본의 아니게 보기 괴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변함없이 건강하신 폐하의 모습을 뵐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남자가 비명처럼 외쳤다. 이런 때에 이르러서까지 어디까지나 신하로서 죽어가려고 하는 부친에 대한 비난의 외침이었다. 소녀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자신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일어서서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백작이 말을 걸었다.
“작은 전사여 있는가.”
“있어.”
반사적으로 대답한 소녀였다.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 생각할 틈도 없었다.
“이 병자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겠는가?”
“그럴게 뭔데?”
“참회를 들어줬으면 한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다. 아니 죽을 때까지 입에 담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얘기지만 들어줬으면 한다.”
“상대가 틀리잖아. 그건 당신 아들한테 말하라구.”
백작이 깊은숨을 들이마시었다.
“나에게 아들은 없다.”
남자도 소녀도 저도 모르게 소리지를 뻔한 순간 백작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점을 살피셔서인지 이 세계의 신이라고도 생각되던 분이 아들을 주셨다.”
남자는 멈칫했다. 소녀도 진지한 얼굴이 되어 백작의 머리맡에 제대로 돌아가 앉았다. 백작은 핏기가 사라진 입술에 그야말로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었지. 어째서 그 분이 나를 선택해주셨는지 어째서 내 아이로 키우도록 바라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전혀 모르겠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놀라고 당황할 뿐이었지만 아내는 몸이 약하고 아이는 바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만큼 기쁨도 컸단다. 다만 어디까지나 아내가 낳은 걸로 해두기가 좀 어려웠지만 말이다. 다행히 아내는 별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여자였고 한참이나 침대에 누워있기도 했었기 때문에 영지쪽에서는 어찌어찌 잘 설명할 수 있었지. 다만 친구들한테는 말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인지라 특히 도라에겐 아들이 태어났다고 밖에 알리지 못했기 때문에....”
후후 하고 웃더니 백작은 오랜 예전의 일을 떠올렸는지 그리운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석, 안색이 변해 가지고 뛰어왔지. 다 들지도 못할 정도의 선물을 안고 말이야.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면서 처의 몸을 걱정해 주었지. 반대로 나는 부인이 임신한 사실도 알리지 않다니 무슨 짓이냐고 꽤나 야단 맞았단다.”
백작의 뇌리에 떠오르는 광경이 소녀나 남자에게도 보이는 듯 했다. 아직 젊고 머리도 새까만 도라 장군이 친구를 축하하러 숨차게 뛰어와 침대에 누운 백작부인과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며 그 옆의 아기를 미소지으며 바라보는 모습이. 그리고 박정한 친구에게 얼굴만은 잔뜩 찌푸린 채로 시끄럽게 설교를 해대면서도 무척이나 기뻐하며 그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이.
“도라에게만은 말이다 몇 번이나 사실을 밝힐까 하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내 아들이라 생각하고 키워달라 하신 건 그 분의 명령이자 부탁이기도 했지. 결과적으로 속이게 되어버렸다. 그것만이 생애 단 한 점의 후회로 남아 있구나. 지금에 와서는 사과도 못하겠지만 기회가 있다면 전해다오.”
도라 장군은 그런 것으로 하를 내진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은 옛날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받았다고 하지만 신과 같은 분의 아들이신데 어찌 함부로 취급하겠나. 그렇다고 내 아이인 이상 어리광을 받아줄 수도없지. 나는 그 아이를 전력을 다해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인물로 만들려고 생각했다. 아는 지식은 전부 전하고 무술을 가르치고 무엇보다 기개와 성품을 단련시켜서 어디에 내놓아도 창피하지 않을 남자로 만들겠다고 맹세했다.”
한숨 돌린 백작의 눈에는 고향 스샤의 숲과 남자의 소년 시절이 교차하며 비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말라버린 입술에 상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아이는 훌륭한 아이였단다. 아내와 단둘만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들이 오고 나서부터의 생활은 정말로 즐거웠다. 눈깜짝할 사이에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17년이 지났을 때 그 분이 돌아가셨지.”
마음에서 우러나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던 백작의 음성에 처음으로 괴로움이 섞여 들었다.
“어찌될 것인가 생각했다. 레온 왕자는 분명 그분의 적자이시고 정통한 왕위계승자이기도 하지만 그 품격이란 지독했었지. 그분의 자식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분이 영웅이라면 레온 왕자는 둔재라고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은 여자와 도박뿐. 게다가 그것들을 취미로서만 둘 정도의 사리분별도 없었지. 왕국 재산을 전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써버리고 남을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래서야 이 나라의 미래도 밝지 못하겠다고 걱정하고 있던 차에 그 사고가 일어났다.”
왕관을 손에 넣는 일은 좀더 사치스러운 놀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만 인식하고 있던 방탕한 왕자는 그 즐거움을 맛보기도 전에 낙마해 죽었던 것이다.
“이런 소리를 입에 담아선 안되지만 죽기 직전에 체면 차려 뭐하겠나. 나는 솔직히 말해 이쪽이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뒤에 남은 에리아스 왕자는 병약한 여덟살의 소년이었지만, 무용은 없어도 사리분별은 있는 국왕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다.”
거기서부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소녀도 남자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에리아스 왕자의 죽음, 추가로 남았던 공주 두 사람의 잇따른 사망.
“마지막 공주가 돌아가셨을 때 나라안이 전부 탄식했다. 델피니아 왕가의 피가 끊겨버렸다고. 왕관을 이을 자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고 왕국의 미래를 걱정했다. 나만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아들이 사실은 그분의 아들이니까. 분명히 적자는 아니다. 어머니의 신분도 낮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분은 왕자 두 사람보다 훨씬 더 왕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알릴 수가 없었다.”
백작은 거기에서 말을 끊었다. 침묵이 오두막 안을 채웠고 소녀는 역할을 알고 조용히 물어보았다.
“어째서?”
“나는 아들이 아까웠던 거다.”
자신을 저주하듯 낮은 음성이었다.
“처는 이미 세상을 떠나 나에겐 아들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아들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태어나서 자란 영지를 사랑하는 스샤의 숲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언젠가는 성격 좋은 처녀를 골라서 며느리로 맞이하고 아들 부부와 함께 손자들에게 둘러싸여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그런 한심한 꿈을 꾸고 있었던 거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양 무릎을 꽉 붙잡고 있었다. 무엇이 한심스러울까. 남자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람으로서 당연하고도 소박한 꿈이 아닌가. 그러나 백작은 그런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왕궁이 붕괴의 위기에 빠져있는데도 나는 그런 현실에서 눈을 돌렸다. 에리아스 왕자가 돌아가셨을때도 루피아 공주, 에베나 공주가 돌아가셨을때에도 말이다. 좀더 빨리 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건데...”
자신을 책하는 분노의 목소리였다.
“왕자와 공주가 모두 돌아가시고 나서도 2년이나 나는 시간을 허비했다. 王弟왕제이신 전 공주님을 비롯하여 왕위를 이을 자격을 가진 사람은 그 외에도 있다. 거기에 적자도 아닌 아들이 나타나도 혼란만 부를 것이다. 그런 무리한 소리를 자신에게 들려주며 안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 하지만 혼란은 언제까지고 수습될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그러긴 커녕 페르젠 후작을 중심으로 하는 일파가 점점 힘을 불려서 이 델피니아를 마치 자기 것처럼 휘두르기 시작하고 게다가 자기들 사정에 맞는 국왕으로서 발로님을 옹호하려고 획책했다. 농담이 아니지. 그건 다시 말해 사보아 공작가와 그 친족들에게 왕권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행으로 끝나지 않는거다. 완벽한 왕조의 교체다. 공작가의 친족은 개혁파 이상으로 왕국의 권리를 무턱대고 차지하고 싶어하는 자들뿐. 게다가 아들에게 왕관이 주어진다고 들려주면 아에라님은 펄쩍 뛰며 좋아하실 테지. 다행히 발로님이 개혁파를 싫어하여 이 안은 난항을 겪고 있었지만 그래도 발로님이 왕관을 쓰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될 지경까지 이르렀을때 나는 한가지를 깨달은거다.”
“뭘?”
다시 소녀가 물었다. 백작은 진지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분이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소녀는 뭐라 말해야 할지 일순 망설였고 남자도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지만 백작은 진지했다. 소녀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믿어지지 않는 소리라고 하겠지?”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의 모습이 있을 리가 없는 기척이 느껴진거네.”
“바로 그랬지.”
백작은 끄덕이고 말했다.
“그야말로 그 말대로였다. 어느날 분명히 그분의 시선을 등뒤에서 느꼈다. 돌아보았을때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분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수있었다. 아니 이미 훨씬 전부터 그분은 나를 보고 계셨다. 네가 행동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내게 말하고 계셨던 거다. 너무 늦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고 그리고 각오했다. 아들을 나에게 주신 것은 이때를 위해서였다고, 주시겠다 말한 것은 일시적으로 맡기겠다는 의미였다고.”
“.......”
“나는 무서워졌다. 동시에 깨닫는 것이 너무 늦었다는 죄의식에 짓눌렸다. 좀더 빨리 아들을 그분에게 돌려드렸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최소한 공주들의 목숨은 구할수있었을 텐데 하고 형용할 길 없는 寒氣한기에 휩싸였다. 그런 후회중에 나는 맹세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아들을 그분께 돌려드리자고. 두 번 다시 아들이라고는 부르지 않겠다고.”
백작은 한번도 월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맡에 앉아 있는 남자는 계속해서 백작의 얼굴을 직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천장을 쳐다본 채로 백작이 중얼거렸다.
“내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거다.”
월은 반사적으로 몸을 내밀 뻔했다. 그것을 소녀가 가로막았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작은 괴로운 숨을 내쉬며 열심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작은 전사여 그대는 폐하가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말했지.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아들은 상냥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결코 폐하의 책임이 아니야. 왕궁에 나아가 그분의 유언을 들었을때 나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알았다. 그분은 역시 明賢王명현왕이라고까지 불렸던 분이셨다. 자기 자식들의 소질을 누가 왕관에 가장 어울리는지를 아주 잘알고 계셨던 거다. 그런데도 나는 자신의 한심스러운 꿈에 사로잡혀 아들을 잃을 것을 아까워한 나머지 시간을 허비하고 거리낌없이 두명의 공주를 죽게 만들어 왕국의 황폐화를 초래했으니까 어떤 엄벌에 처해진다고해도 부족할 정도인 게다.”
“.......”
“두 번 다시 아들이라고는 부른지 않겠다. 자신에게 맹세한 이상 기사로서 그것을 깰 수는 없다. 하지만 말이다 작은 전사. 물러 터졌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될 수만 있다면 아들이라고 부르고 싶었단다.”
이 말은 소녀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또 한 명의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분은 국왕이다. 뒤르와 폐하가 남겨주신 마지막 아들이다. 싫어도 나와는 인연을 끊지 않으면 안된다. 그분이라면 아바마마의 뒤를 이어 누구보다도 훌륭한 국왕이 되실 수 있겠지. 나는 이제 그 모습을 뵐 수가 없겠지만.... 역대의 왕 중 누구보다도 훌륭한 국왕이 되시리라고 믿고 있단다. 작은전사 자네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네는 폐하의 친구라고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제발....”
“알고 있어 백작.”
백작의 호흡은 갑자기 절박해지고 있었다. 소녀는 이 이상 이야기를 시키지 않으려고 제지하려 했지만 페르난 백작은 띄엄띄엄 말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부디.... 폐하를 부탁....”
“약속할게.”
힘차게 끄덕이며 백작의 손을 꽉 쥐었다. 그것으로 만족했는지 깊은 숨을 내쉰 백작은 몸의 힘을 뺐다. 말해야 할 것을 모조리 남길 수 있었던 사람답게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저 지하에서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죽는 것이 당연한 응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니.”
소녀를 올려다보는 백작의 얼굴에 편안하게 기쁨의 미소가 퍼져나갔다.
“고맙다.”
거의 힘이 없는 잦아드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죄를 범했다고 백작은 말하지만 백작에겐 백작 자신의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죽은 선대의 왕에게 한없는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것도, 그 반면 지금의 국왕에게 친부모 이상의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는 것도 이해했다. 소녀는 살짝 일어섰다. 이젠 자신이 나설 무대가 아니다. 자신의 맹세를 지키며 죽어가려는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의 문제였다.
8장
페르난 백작은 새벽녘에 숨을 거두었다. 아들에게 간호 받으며 잠든 것처럼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 얼굴이었다. 국왕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백작의 死地사지가 된 사원에 정중하게 예를 취하고 백작의 장례를 치른 뒤 그날내로 진영으로 돌아갔다. 가는 도중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소녀도 샤미안도 대대장도 지금은 국왕에게 뭐라 할 만한 말을 찾을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녁이 되기 전에 국왕은 전영에 도착했다. 국왕군은 예상외로 행군을 진행시킨 뒤였다. 마레바까지 앞으로 이십 카티브 남은 근거리까지 접근했던 것이다. 마레바에는 이미 2만 이상의 정부군이 집결해있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갈 수는 없다. 정부군은 상그 사령관을 총대장으로 맞이하여 말, 사람, 무기, 갑주 할것없이 모두 용맹한 모습이었다. 밀고 들어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국왕의 단독행동에 꽤 화를 낼 것 같았던 도라장군은 그러나 국왕과 소녀의 안색을 본 것만으로 사태를 파악한 듯 했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말고 그대로 삼키고는 입술을 꽉 다문채 주먹은 핏기를 잃을 정도로 꽉 쥐고 떨고 있었다. 그러나 공사를 혼동할 수 없는 정세였다.
“앞으로 이러한 일은 다시 없도록 해주십시오.”
억누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국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군을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천막으로 향했다.
“폐하!”
장군은 뒤를 쫓아갔다.
“잔혹하게 들리겠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일국을 짊어지고 계신 군주이십니다. 신하 한 사람을 잃었다고 해서 자신의 책무를 방치하시는 일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방치할 생각은 없다.”
그 목소리에 장군은 숨을 삼켰다. 바로 뒤에 있던 샤미안도 저도 모르게 안색이 변했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음성이었다.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다. 원수를 갚겠다.”
“폐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인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혀선 안되는 겁니다! 하물며 그런 목적을 위해 군을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허용되지 않습니다!”
“도라 장군. 방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누구도 내 천막에 접근시키지 마라.”
장군은 할말을 잃고 그 자리에 섰다. 국왕이 틀림없이 진심이라는 것 한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것도, 그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나시아스도 가렌스도 국왕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이븐마저도 그 얼굴 표정을 본 것만으로 말을 삼키고 길을 양보했다. 국왕의 갑작스런 군대 이탈과 돌연한 귀환도 그다지 주목을 끌지 않고 지나간 듯했다. 다만 장군 휘하의 부하들만이 걱정스러운 듯이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샤미안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죄송해요. 대부님께선....”
도라 장군은 상냥하게 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아니 너는 잘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너도 뭐라도 먹어야만 하겠지.”
장군은 눈짓으로 나시아스 일행도 물러나 식사를 하도록 지시했다. 이야기는 밤이 된 뒤 진영에 정숙한 분위기가 찾아든 뒤에 나누자고 한 것이다. 그들도 역시나 역전의 용사다. 즉시 알아듣고 각자 막사로 돌아갔다. 가렌스는 자신의 심복에게 국왕의 천막 주변 호위를 맡기고 어느 누구도 통과시키지 않도록 명령했다. 밤이 깊고 병사들이 교대하여 잠이 드는 시간이 되자 국왕군의 용사들은 차례차례 도라 장군의 천막에 모여들었고 샤미안, 대대장, 그리고 소녀도 그쪽을 향했다. 어느 얼굴도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다. 괴로울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그 장소에 떠돌고 있었다.
“샤미안양 그리고 리.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들려주십시오.”
나시아스가 말하자 이븐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끄덕였다.
“백작은 죽은거지. 그건 알겠어. 하지만 나는 저렇게까지 화가 난 녀석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
“네 그래요. 폐하께서 화가 나신 것은 당연합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니까요.”
대대장은 초라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제 책임입니다. 면목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루카난 경에겐 죄송스러울 정도의 조력을 받았습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닙니다. 대부님을 돌아가시게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입에 담는 것만도 더러운 개혁파 놈들입니다!”
분노의 목소리였다. 이 여기사가 이 정도로 격하게 적을 증오하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백작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함에 따라 국왕군의 용사들에게서도 차례차례 분노의 음성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오히려 저주의 음성에도 가까웠다. 백작에게서 지위와 명예를 빼앗아 구속한 것까지는 양보할 수 있다. 적의 유력자를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고 자신들이 같은 입장이었더라도 역시 똑같은 일을 했으리라. 그러나 유폐에도 투옥에도 방법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대로 이름이 알려진 기사에 대한 행위로서는 너무나 비열하고 잔혹한 처사였다.
“양 다리의 상처만이 아닙니다. 유체를 정결히 하는 과정에서 보니 가슴이고 등이고 할것없이 채찍 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대부님은 그래도 한마디도 고통스럽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은채 폐하를 만나뵌 것을 기뻐하며 돌아가셨습니다.”
샤미안의 눈에서 새로운 눈물이 흘러 넘쳤다. 도라 장군은 험악한 표정 그대로 깊은 침묵에 잠겨있었다. 그 부관인 타르보가 신음을 흘리듯 말했다.
“이건 조금 곤란해지겠군요.”
“동감이다.”
마찬가지로 신음하듯 말한 도라 장군이었다.
“폐하는 즉위 후에도 페르난을 따르고 의지해오셨다. 그후견인이 이 정도로 지독한 죽음을 맞이했다면 노여워하시지 말라고 진언하는 쪽이 무리겠지. 하지만 그래도 여기에선 억눌러주시지 않으면 안된다. 저 정부군을 향한 정면 돌격만은 피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다.”
지금의 국왕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그것은 일동이 은밀히 느끼고 있는 불안이었다. 아니 불안이라고 하자면 좀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폐하는 지금 어쩌고 계신가?”
“천막에 틀어박혀 계시기만 합니다. 부하를 붙여두긴 했습니다만 식사시간이라고 말씀을 드려도 대답이 없고 들여다보는 것도 허용치 않으신다고.”
“하룻저녁 정도 굶어도 죽진 않소. 지금은 괜히 접근하지 않는쪽이 나아요.”
이븐이 말했다.
“저 녀석은 엔간한 일이 있어도 하룻밤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녀석입니다. 언제나 그랬죠.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찌될지....”
언제나 표현한 그답지 않게 언짢은 표정이었다. 도라 장군도 지금만큼은 그 말투를 고쳐줄 기력이 없었다. 대대장이 말했다.
“내일 행동에 대한 군사 회의는 벌써 끝난 겁니까?”
“아니 폐하가 저런 상태이셔서야 어떻게 될 리가 없지. 게다가 적 측에서는 이쪽으로 밀고 들어올 기척이 없네. 한가닥 흔들림도없이 이쪽이 덤벼오기만 기다리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장군은 국왕이 앞뒤 보지 않고 달려나갈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격노한 나머지 자신을 잃고 저렇게 정연하게 준비를 갖춘 적에게 정면으로 돌격하겠다는 판단을 내린다면 병사들에게 총대장으로서 실격이라는 인상과 함께 실망을 안겨주는 것으로 끝날일이 아니다. 호랑이 굴로 스스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평상시라면 그런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을 남자라는 사실을 장군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분노이던 슬픔이던 격한 감정은 인간의 판단력을 망쳐버린다. 그 이상 두려운 점은 저 남자의 왕으로서의 자격에 영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코랄 해방은 즉 부친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미 없다. 이러한 때 일군의 지휘관으로서의 기력이 과연 버텨줄 것인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심기가 어떠신지 문안하러 가시겠습니까?”
타르보가 눈치를 보듯 주인에게 물었지만 수염 난 장군은 고래를 저었다.
“오늘밤은 그냥 계시도록 하지. 다행히 지금 당장 어떻게 될 정도로 긴박한 상황도 아니니까. 내일이 되면 억지로라도 일어서시게 하지 않으면 안될테니 말일세.”
다른 용사들도 이 의견에 찬성하여 각자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리는 이야기를 샤미안과 대대장에게 맡긴 채 계속 침묵하고 있다가 가장 마지막으로 일어섰다. 천막 안에는 도라 장군만이 남아 있었다. 언제나 옆을 떠나지 않는 충실한 심복도 자신의 수하에게 지시를 내리러 나간 뒤였다. 소녀는 장군을 바라본 채로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이쪽을 보지 않고 도라 장군이 물었다. 그 뒷모습은 소녀에게 싫을 정도로 익숙했다. 그때 보였던 저 남자의 뒷모습과 똑같았다.
“백작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해서 미안해요. 샤미안에게 내가 말하지 말라고 그랬어.”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신경쓰지마라. 너는 폐하에게도 페르난에게도 좋은 일을 해준거다. 우리들이 있었다면 그 녀석 성격이니 끝까지 신하로서의 태도를 버리지 않았겠지.”
얼굴을 들고 소녀를 본다.
“페르난은 마지막에는 폐하의 마음을 헤아려 드렸더냐.”
끄덕인 소녀였다.
“사실은 언제나 아들이라고 생각했었다고.”
“음 그랬겠지.”
“도라 장군. 페르난 백작은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
“.......”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별을 올려다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했어.”
“.......”
“내 눈을 보고 말야. 보석 같은 녹색이라고 칭찬해줬어. 고향의 5월의 숲의 색이라고.”
진지한 얼굴이 되어 소녀를 바라본 장군이었다.
“그건 그 녀석이 무엇보다 사랑하던 것이지.”
“.......”
“내가 몇 번이나 왕궁에서 일해보라고 권유해도 웃으면서 거절했지. 이곳을 떠나기란 견디기 힘들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녀석은 도시의 화려함보다 입신출세나 명성보다 고향의 숲과 사계절을 사랑하고 있었다.”
소녀의 눈동자에서 정말로 고향을 보았던 것인지 아니면 감옥에서 구해준 상대를 백작 나름대로 최대한의 찬사로서 칭한 것인지 그것은 이제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장군에 대해서도 얘기했어. 월을 받았을 때의 일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는데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후회된다고 말했어.”
도라 장군은 살짝 웃어 보였다.
“최후의 최후까지 바보 같은 놈이군. 어째서 내가 그런 일로 화를 내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페르난 하여간 네 녀석은 바보 같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얼굴에는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백작을 잃은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은 저 남자만이 아니다. 도라 장군도 또한 격렬한 노여움과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청년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이다. 오래된 옛날 일도 알고 있는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신의 젊은 시절을 알아주는 친구는 적어진다. 장군이나 백작처럼 전쟁에 몸을 맡기고 있는 자라면 더욱 그렇다. 장군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친구를 보내왔다. 그러나 그렇다고해도 죽는 방식이라는 것이 있다. 소녀도 낮게 말을 덧붙였다.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 그런 식으로 죽을 사람이 아니었어.”
“그렇고 말고.”
강한 어조로 단언했따. 돌아보는 장군의 눈에는 이미 슬픔의 빛깔은 없었다.
“그런 죽음을 맞을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 꼴을 당해도 될 리가 없다. 그건 신도 잘 아실 게다. 폐하께서도 말이다.”
소녀도 역시 끄덕이고 장군의 천막을 나섰다.
도라 장군의 천막을 나서자 소녀는 똑바로 국왕의 천막으로 향했다. 경비로 서있던 것은 라모나 기사단 중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기사들이었다. 물론 소녀와는 이미 얼굴을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통과시켜 달라고 부탁한 소녀에게 그 기사는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통과시키지 말라는 엄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것만은 안됩니다.”
“그렇다면 힘으로라도 통과하겠어.”
상대는 더욱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제발 부탁입니다 그린다. 왕명으르 거역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괜찮아. 내가 나쁜 놈으로 돌변해서 너를 때려눕히고 들어갔다고말해. 월은 너를 야단치거나 하지 않을거야.”
“아니 하지만....”
“끝까지 안 보내준다면 정말로 그렇게 할 거야.”
열세살짜리 소녀가 정식 기사에게 하기엔 어딘지 어긋난 듯한 문구였지만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 기사는 속으로 상당히 격렬한 갈등을 겪은 듯 했지만 결국은 소녀의 말에 딸랐다. 이대로 이곳에서 고집을 부려봤자 이 소녀는 자신을 치워버리고 통과하리라. 무엇보다 왕의 명령이라면 모든 인물에게 유효하지만 이 소녀만큼은 예외였다. 사람이 아니라 신의 딸이니까. 그런 묘한 이유를 대며 스스로를 납득시킨 것 같았다. 주변을 돌아보고는 살짝 길을 비켜주었다. 천막 안은 거의 새카맸다. 촛대에도 램프에도 불이 없었다. 천막 기둥에 걸린 촛대에서 작은 촛불만이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글자도 읽을 수 없을 듯한 어둠 속에서 국왕은 간이 침대에 앉아 깍지낀 양손에 얼굴의 아랫부분을 얹은 채 깜빡이지도 않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소녀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들어왔다는 사실마저도 눈치채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움직이지도 않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윽고 낮은 짐승 소리처럼 말했다.
“위로하는 말이라면 필요없다. 나가다오.”
“그런거 아니야.”
소녀는 입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려 들지 않는 남자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라 장군이 걱정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어떤 설득이나 간언도 그리고 어떠한 위로도 지금의 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노여움과 동시에 무력감과 허무함이 남자의 가슴을 점령하고 있는 듯 했다. 지친 듯이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너도 날 보고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라고 하려는 게지?”
이 남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비꼬는 듯한 어조였다.
“걱정하지 말라. 지금뿐이다. 내일이면 왕으로서 군대 앞에 선다. 싫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테니까.”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한 것치고는 무기력한 울림이었다. 좋아서 하는 짓이 아니라는 듯이 들려왔다. 소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입구에서 떨어져 남자 앞에 섰다.
“월은 어쩌고 싶어? 백작의 원수를 갚고 싶은 거야, 그렇잖으면 뭐가 어찌 됐던 여기에서 다 내팽겨쳐버리고 싶은 거야.”
“양쪽 다야.”
내던지듯이 남자는 말했다.
“내가 왕이 되는 것이 옳다고 그것이 왕국을 위해서라고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믿고 있었다. 그 유지에는 응하고 싶어. 하지만....”
낮게 신음한다.
“네 말대로야. 이젠 뭐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
지금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그 말이었다. 자신과 관련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이런 비참한 죽음을 맞을일은 없었을 것이다. 훌륭한 왕이 되어달라고 백작은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지금에와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걸까. 애초에 왕관 따위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전혀 없는데. 그런 남자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어땠는지 소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도 혈연관계 없는 키워준 부모였다.”
변한 말투였다.
“나를 구하기 위해 내 눈앞에서 죽었지.”
남자는 처음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녀를 보았다. 소녀의 얼굴에는 특별히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와 동료를 도망시키기 위해 아버지는 일부러 달려나가 미끼가 됐다. 추적자는 몇이나 덤벼들어 아버지를 가지고 놀다가 죽였다. 나는 아버지가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광경을, 피투성이가 되어 숨이 끊어져 가는 것을 그저 숨어서 볼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아무말로 하지 못한 채 놀란 표정으로 소녀를 보고 있었다. 아직 앳된 얼굴에 그 입술에 장절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자신의 무력함을 저주했는지 얼마나 그놈들을 저주했느지 너는 알수있을까?”
알 수 있다 라고 말하듯 남자는 끄덕였다.
“그게 일대일의 결투였다면 나는 그정도로 상대를 증오하진 않았을거다. 게다가 만약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버지가 무언가 죄를 지어 그 대가로 목숨을 빼앗겼다면 슬픔에 탄식하는 일은 있어도 포기할 수가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놈들은 반쯤 장난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그 시체를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
“나는 아홉 살이었어. 싸우는 법을 가르쳐줬던 친구에게 걸고 여덟 살 때 받은 검에 걸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맹세했다. 그놈들을 반드시 죽이겠다고.”
“.......”
“동료들은 말렸다. 그런짓을 해도 아버지는 기뻐하지 않을 거라고. 그 다섯 놈에게도 가족이 있다고 말하면서 말렸다. 그런 정도는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렇다면 왜 그놈들은 아버지를 죽여도 좋고 나는 그놈들을 죽이면 안 되는 거지? 어째서 아버지는 쓸데없이 목숨을 빼앗겨도 좋고 그놈들에겐 목숨을 건질 권리가 주어지는 거지?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가 어디 있나. 날 키워준 어버이의 목숨은 반쯤 재미로 빼앗았는데 그 댓가를 치르게 하는게 뭐가 나쁘지?”
남자는 잠시 잠자코 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너는 복수는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군.”
소녀는 섬뜩하게 웃었다.
“그런 설교는 말이지. 눈앞에서 육친이 굴러다니다 죽은 일도 없고 근거도 없는 죄로 고문 받은 끝에 죽어버린 가족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무기를 버리라거나 자기의 적을 용서하라거나 지껄이는 건, 닭살이 돋을 것 같은 말들을 남에게 밀어붙이는 머리가 어떻게 된 놈들한테나 시키면 돼.”
남자도 끄덕였다.
“부디 우리들과 같은 꼴을 당한 다음에나 말해주면 좋겠다.”
“그렇고말고. 그런데도 아직도 적을 용서하라고 말한다면 나는 무조건적으로 그 녀석을 존경해주겠어.”
소중한 것을 억지로 빼앗긴 아픔을 모르는 자들의 허울좋은 말 따위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너는 그래서....아버지를 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준거냐.”
“네가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백작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야.”
소녀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천천히 타이르듯이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너에겐 백작의 원수를 갚을 권리가 잇다. 그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줄 의무가 있어. 여기에서 적을 놔줘버린다면 백작의 무참한 최후가 일생 네 마음속에 끈질기게 남을 거다. 백작을 죽인 놈들은 네 마음마저 죽이는 거지. 다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말해주마. 아무 말도 못하고 죽임 당하지 마라. 쓰러뜨릴 상대를 찾아내서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그렇게 자기 주변을 적의 시체로 뒤덮은 뒤에야 그때서야 비로소 복수 같은 건 공허한 거라고 말해도 되는거다.”
앉아있는 자신과 눈높이가 맞을 정도로 자그마한 모습을 남자는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는 깊고 가라앉은 빛이 돌아와 있었다.
“너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거로군.”
소녀는 끄덕였다.
“지금은 허무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나.”
겨우 13세의 소녀는 뻔뻔스럽게 웃었다.
“나는 평생 후회하지 않아. 언젠가 그놈들의 자식들이 나타나 아버지의 원수라고 덤벼온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목숨을 슬데없이 버릴 것인지 아비의 죄를 인정하고 살아갈 것인지는 그때 그 녀석들이 스스로 결정하겠지.”
남자는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너 정말로 대체 몇 년을 산 거냐?”
“똑바로 세서 올해로 13년째다.”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니까 물어보는 거지만 말이다.”
남자의 말에는 약간이지만 평소의 어조가 섞여 있었다. 깊게 숨을 토해내고 진지한 얼굴이 되어 소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햇다.”
“뭐가?”
“아버지를 구해줬는데 나는 고맙다는 말도 않고 있었어.”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사과해야 할 건 내 쪽이다.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했으니까.”
“아니야. 너는 아버지를 북쪽 탑의 암흑에서 구해 준 거다.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라는데 말이다. 미안했다.”
일어서서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금 소녀를 보았을 때에는 범상치 않은 결의와 격렬한 투지가 남자의 얼굴을 선명하게 채색하고 있었다.
“나도 맹세한다 리. 원수가 누구든 몇 명이 있든 나는 결코 놓치지 않겠다. 아버지에게 그런 지독한 죽음을 맞이하게 한 그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하겠다.”
소녀도 끄덕였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허리의 검을 뽑아 거꾸로 잡아들었다. 검날을 기울게 하여 아래로 향한다. 남자도 곧 알아들었다. 같은 식으로 겁을 뽑아 소녀의 검과 마주치도록 검날을 아래로 향했다. 전사가 맹세를 할 때에는 神像신상이 아니라 그 생명줄이라고도 할 검에 맹세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걸고.”
불과 한마디였지만 천금의 무게가 실린 말이었다 소녀도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이 거모가 전사로서의 혼에 걸고 그린디에타 라덴은 월 그리크가 그 맹세를 성취할 때까지 이 검과 조력을 그에게 부여할 것을 이곳에서 맹세한다.”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소녀의 말이 상쾌하게 귀에 흘러 들어왔다.
“이 검과 전사로서의 혼에 걸고, 멋진 말이다.”
“그것을 위해선 어쨌거나 마레바부터 시작하는 거야. 알고있겠지.”
“아아 알고있어.”
“그런데 총대장이 내일에 대한 군사 회의도 방치하고 처박혀 있으니까 말이야. 도라 장군이 곤란해하고 있었다고.”
남자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 소녀의 존재가 이 정도로 고맙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좋겠지. 마침 생각난 것도 있다. 다른 자들도 모이게 하지.”
“부르러 갔다올께. 아참 그렇지. 경비병한테 화내지마. 억지로 협박해서 들어온 거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국왕의 천막을 나서서 주요 인물들을 불러모으러 가려던 소녀였지만 나온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경비를 하던 병사는 이미 어딘가 사라져버리고 입구 바로 옆에는 이븐이 기척을 숨기고 숨어있는 데다가 가렌스의 커다란 몸집이 삐죽 엿보이고 있으니 당연히 그 상관 되는 자도 있을 터였다.
덤으로 반대쪽 수풀을 보자니 이쪽엔 또 나서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하는 분위기의 도라 장군이 등을 돌리고 있는데다 샤미안도 조심조심 얼굴을 내밀어 소녀를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 외에도 타우의 사내들이나 라모나 기사단의 용사들, 로아사람들의 대표격 등 이리저리 기척들이 모여 있었다. 천막 입구에 우뚝 서버린 소녀에게 이븐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먼저 새치기하다니 치사하잖아 리.”
“뭐 하고 있는거야?”
“뭐라니 임마. 그런건 물어보는게 아니지. 보면 모르냐?”
오늘밤은 가만히 내버려두자고 의견일치를 보고도 신경이 쓰여 여기까지 살피러 와버린 것 같았다. 뭐라 할 것도 없다. 모두가 새치기인 셈이었다.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부르러 갈 수고가 줄었네. 나시아스, 가렌스. 도라 장군하고 샤미안 들어와. 지금부터 작전회의를 할 테니.”
9장
그 다음다음날의 이른 아침, 마레바 공방전의 뚜껑이 열렸다. 해돋이게 가까운 시각의 옅은 어둠이 주변을 찰랑거릴 듯 가득 채우고 있었고 2만의 정부군은 각각 엄중하게 진영을 짜고 경비를 세운 채 쉬고 있었다. 그곳에 돌연 함성이 들려왔다. 정부군은 적의 몇 배나 되는 세력이라고 완전히 안심해 있었다. 상대는 이쪽의 고작 4분의 1. 그것도 그 진영은 한참 앞쪽에 있었다. 설마 돌격해올 일은 없으리라 얕보고 있었다. 완전히 한대 얻어맞아 버린 것이다.
국왕군은 깊게 돌격해 온 것도 아니었다. 아군을 각각 백 명 정도의 소수로 나누어 적의 진영을 얇게 떠나가는 형태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번에 돌파했다. 정부군의 진영은 대혼란에 빠졌다. 달려지나가면서 국왕군이 천막에 차례차례 불화살을 쏘아 넣은 것도 혼란에 박차를 가했다.
정부군은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 반격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국왕군은 병사 하나 남김없이 바람처럼 사라졌고 그 뒤에는 있는대로 유린당한 정부군의 참상만이 찬란히 드러난 것이다. 인적 피해는 물론이고 불화살이 꽂힌 진영의 이곳저곳에 아직도 불이 붙어 있었다.
“경비병들은 뭘 하고 있었던거냐!”
다리에 갑옷을 부착하면서 격노한 형상으로 외친 사령관이었다.
“녀석들은 옆에서 쳐들어 왔단 말이다! 정면의 적이 거기까지 이동할 동안 눈치채지 못하다니. 어디에 눈알을 붙이고 있는 거냐!”
경비병은 밤중의 망보기는 매우 어렵고 사람을 망보는 것이 아니라 불빛의 움직임을 보고 소리를 듣는 것이며 이쪽에 다가오는 불빛이나 말발굽 소리 같은 건 어떤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고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바보자식! 밤에 기습해오는 놈들이 정중하게 조명 들고 소리를 내면서 이동해 온다는 거냐! 이런 바보 천치 같으니!”
경비병은 만신창이가 되어 사령관 앞에서 끌려나갔다. 기습적으로 야밤습격을 감행한 국왕군에 대한 분노는 싫던 좋던 정부군을 뒤집어 놓았다. 무엇보다 사령관의 격정에 불을 당겼다. 이렇게 된 이상 武人무인으로서 해야할 일은 한가지뿐이다. 즉시 유력 영주들과 사령관 사이에 군사회의가 열리고 전원 일치로 공격을 결정했다. 마레바 통제를 위해 남겨둔 수천 기를 제외한 2만의 정부군은 국왕군을 노려 대대적인 이동을 개시했다.
선봉에는 궁병대, 이어서 기마병, 그 뒤에 석궁병대, 그 수십 배의 보병으로 편성된 대열이 나란히 늘어선 모습은 보기만 해도 웅장했다. 게다가 이것은 선봉대일 뿐이었다. 그 뒤에는 대영주의 군세들이 그대로 늘어서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내로 전투를 벌이려는 의욕에 가득한 군대는 용맹스럽게 행군을 계속해 정오전에 국왕군을 올려다보는 분지의 움푹 들어간 지역에 서게 되었다.
거리로는 1카티브도 남지 않았다. 국왕군은 작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었다. 막사나 천막이 몇 개나 세워지고 로아의 깃발과 라모나 기사단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정작 중요한 국왕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준비할 시간이 없었으리라고 정부군은 판단했다. 국왕군은 관례대로 진지를 등에 지고 정연하게 병사를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전력의 차는 역력했다. 국왕군은 총세 5천. 이쪽은 그 몇 배는 되었다. 더구나 이쪽의 등뒤에는 마레바라는 성체 요새가 있는 것에 비해 국왕군은 맨몸으로 들판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번 밀어붙이면 즉시 흩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전력을 보여주면서도 정부군은 함부로 돌진하지 않았다. 전투에는 그 나름대로의 법칙과 작전이 있다. 우선은 궁병대를 내세워 활을 쏜 뒤 창을 들고 잠시 대치하고 그리고 나서야 기마 군단의 돌격이 이루어지는 것이 전법의 기본이다. 그 전에도 밟지 않으면 안되는 수순이 있었다. 정부군의 선봉은 남부 피오니 郡군의 대영주 쟝센 경이었다. 그 명령을 받은 전령이 달렸다.
국왕군에게 투항을 권고하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로 전력에 격차가 있으면 승산이 없다는 사실 정도는 그쪽도 알 터였다. 같은 나라 사람들이 서로 괜한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 괴로움은 있겠지만 일군의 장수로서 옳은 판단을 하면 어떻겠느냐 하고 권고하느느 것이다. 받아들일 턱이 없다고 알고 있어도 그것이 일단 예의였다. 기대했던 대로 전령은 준엄한 거부의 답변을 가지고 돌아왔따. 우리들이 투항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으며 끝까지 전투를 통해 자신들의 정의를 관철시킨다는 방침이라 했다.
“이런이런. 기세만큼은 하늘을 찌르겠군.”
경은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된 이상 원래 이기는 것이 당연한 전투다. 그냥 승리하는 것만으로는 재미가 없겠지. 우리 세력만으로 숨통을 끊어 보이자. 사령관각하께도 전해라. 피오니 기사가 싸우는 모습을 똑똑히 관람하시도록 하라고.”
主將주장의 기세는 그대로 병사의 기세이기도 하다. 전투 개시의 뿔나팔과 함께 피오니 군대는 국왕군에게 덤벼들었다. 우선은 화살이 날았다. 피오니 세력은 견고한 화살받이용 방패를 세워 나가면서 슬금슬금 국왕군의 본진을 향해 나아가 그 사이에 차례차례 화살을 쏘았다. 바로 뒤쪽에서 창이 연속으로 나아갔다. 상대의 세력이 조금이라도 쇠퇴하면 아군이 화살받이를 밟고 넘어 돌격하기 위해서였다.
국왕군도 다시금 화살받이와 창을 세우고 결코 격파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지만 열세를 어쩔 수는 없었다. 그 화살받이에는 피오나 군의 화살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고 반격을 할 수도 없었다. 국왕군의 화살받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고슴도치 같은 형상이 되었다.
“이야아아앗!”
“우오오!”
바로 지금이다 라고 화살받이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병들이 손에손에 자신 있는 무기를 쥐고 사냥개의 무리처럼 용맹하게 울부짖으며 돌진했다. 그야말로 옆도 돌아보지 않는 맹공이었다. 틈을 두지 않고 그 창끝이 국왕군의 선두를 먹어 들어갔다. 국왕군도 필사적으로 응전하여 열심히 짓밟히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미 패색이 짙었다.
언덕 위의 본진에서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쟝센 경은 기다렸다는 듯 지휘봉을 휘둘렀다. 이 신호를 받고 그가 자랑하는 수 없는 단련을 거친 피오니의 기사대가 일제히 돌격했다. 한시라도 빨리 참전하고 싶어 안절부절하던 기사대였다. 전투 함성을 울리며 둑을 무너뜨린 물처럼 국왕군을 덮쳤다. 이 돌격을 상대방이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굴복할 것인가. 승패는 거기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장한 기사군단이 한 덩어리가 된 돌격은 옆에서 보고 있어도 웅장했다. 중장갑으로 몸을 고정한 기사들의 일격은 방패 따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뚫고 철제 말굽은 미처 도망치지 못한 병사들을 뼈째로 짓밟았다. 그 파괴력과 굉음은 그야말로 人馬인마에 의해 만들어진 살아있는 우레였다. 그것도 이 우레는 언덕을 달려 올라간다. 이때 피오니 군의 수는 대략 천명. 갖가지 색깔로 무장한 인마의 집단은 지축을 울리며 먼지를 피워올리고 대지 그 자체를 흔들 듯한 기세로 돌격했다. 이 무시무시한 모습에 그냥도 열세인 국왕군이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가까스로 버티고 서있던 전장도 내주고 병사들은 저마다의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하는 듯 보였다.
“졸병들에겐 신경쓰지마라! 본진을 뚫어라! 국왕을 붙잡은 자에게는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겠다!”
승리가 눈앞이라 여기고 쟝센 경도 박차고 일어섰지만 정부군의 환호성이 경악의 비명으로 바뀐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화살받이 뒤에 숨어있던 그들은 손에 손마다 활을 들고 다 질수없을 정도의 화살을 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즉시 활을 들고 언덕을 달려오르려던 기마대를 향해 차례차례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돌격해 임했던 피오니 군은 살마도 말도 무거운 갑옷에 몸을 감싸고 있는데다 오르막에 있었다. 아무래도 기민하게 움직일수가 없었다. 쏘는 측에서 보자면 경사 아래쪽의 표적이다. 실로 잘 날아갈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피오니 기사들이 싸락눈 같은 화살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이놈들 또다시 이런 간계를!”
보고 잇던 쟝센 경은 이를 갈며 분해했다.
“기사라면 당당하게 이름을 대고 덤벼올 것이지! 국왕군이란 이름만 난 비겁자들의 군대인 것이 틀림없도다! 밀어라 밀고 밀고 밀어서 뒤집어 버려라!”
야습에 이어서 또다시 허를 찔린 것이다. 쟝센 경이 격노하는 것도 무린느 아니었지만 지휘관으로서는 약간 경솔한 판단이었다. 적이 준비하고 기다리는 곳에 정면으로 돌격하라고 명령한 것이기 때문이다. 쟝센 경으로서 보자면 상대는 소수, 그것도 맨몸에 가까운 궁병대들 뿐이므로 중장기병대의 압도적인 돌격을 받으면 반드시 무너지리라 확신해서 한 일이었겠지만 국왕군으로서는 이리 될 것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
정부군의 선두는 궁병대와 창병이 함께 적당히 활약한 다음 충분하다고 여긴 채 퇴각한 뒤였다. 지금 달려오는 것은 기마병뿐이다. 그렇다면 그것대로 대처할 방도가 있었다. 언덕 위에서 타르보가 이때다 하는 듯이 외치고 있었다.
“알겠나. 오늘이야말로 평소 훈련의 성과를 보여줄 때다. 중앙 전토에 이름 높은 로아인의 활 솜씨를 적 대장님에게 듬뿍 맛보여드려라! 갑옷 틈새, 투구 눈 사이, 쏠 곳은 얼마든지 있다! 어떤 무거운 갑옷으로 몸을 가리고 있어도 우리들의 활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거다!”
활에 있어서는 범상치 않은 실력들을 자랑하는 로아 사람들이다. 타르보가 지시한 대로 실행할 정도의 힘들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완전무장을 한 인마가 자신들을 목표로 언덕을 달려 올라오는 것이다. 몸을 지킬 방패도 없다.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타르보는 목소리를 높여 병사들을 격려했다.
“낙마시키면 적은 철제 갑옷으로 꽁꽁 묶인다!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 말을 노려라!”
기마대는 역시나 대군이었다. 어떤 공격도 이런 기세를 억누를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로아 사람들의 사격술도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전후 3열로 나뉘어 대열을 짜서 전위는 한쪽 무릎을 꿇고 중간은 그 어깨 너머로 후진은 다시 그 어깨 너머로 화살을 쏘는 삼단 구성의 공격이었다. 그래도 적은 쓰러뜨리고 쓰러뜨려도 계속해서 넘쳐났다.
활을 쏘고 있는 병사들은 미쳐버릴 것 같은 공포를 피부로 느끼며 그저 계속해서 활을 쏘기만 했다. 두렵고 괴로웠지만 그 심정은 돌격해오는 정부군의 기사들도 같을 것이다. 동료들이 차례차례 쓰러지는 것은 눈앞에서 목격하는 것이다. 공포가 없을 리가 없다. 망설이게 되었다. 공격에 틈이 생겼다. 그 가운데에는 분명히 낭패감을 드러내고 지휘관인 쟝센 경을 돌아보며 이대로 돌격해도 좋은가 묻는 듯한 기사들까지 나타났다.
“영차!”
타르보가 기다렸다는 듯이 지휘봉을 흔들었다. 이것을 신호로 언덕 위에서 몸을 내밀 듯이 활을 쏘고 있던 로아인들이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뭐 뭐냐?!”
입을 딱 벌린 것은 정부군 쪽이었다. 바로 지금까지 다소 피해가 있긴 해도 우위에서 전투를 이끌어 가고 있었을 상황인 군대가 전장을 방치하고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순식간에 흩어져 도망친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전후 3열이 즉시 양쪽으로 흩어져 엄중하게 화살받이를 늘어세우고 있었다. 오른쪽이 후퇴할 때는 왼쪽이 남고 오른쪽이 경계할 동안에는 왼쪽이 빠졌다. 교차하여 멋들어지게 밧줄을 말 듯이 후퇴하는 식으로 언덕 너머를 향해 사라져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경의 부관이 신음했다. 적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는 초조함이 섞이 음성이었다. 추격을 하기엔 이 이상 없는 호기였지만 방금 무참하게 화살을 얻어맞았던 직후였다. 섣불리 쫓아 들어간다면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수가 없다며 의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적을 쫓지 말고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말도 없는 궁병대에게 엉망진창으로 패배하여 그것도 싸운다면 승리가 틀림없을 대군을 거느리고서 한번 이기지도 못한 채 물러나게 된다면 기사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다. 도망친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어도 한 마디도 변명할 수가 없다. 쟝센 경이 신음하고는 용맹하게 잘라 말했다.
“적은 정면 전투를 꺼리는 것이다. 제대로 부딪힌다면 승산이 없으니 약삭빠른 계책만 세우는 거다. 그렇다면 재정비할 시간을 주어선 안된다. 아군은 족히 적의 몇배. 게다가 비겁하게 도망치는 기술만 써대는 상대가 뭐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적이 잔재주로 나온다면 우리들은 힘으로 적을 굴복시켜 주겠다!”
무거운 공기가 단숨에 날아갔다. 여기저기에서 용맹한 함성이 오르고 곧 이어 전군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기력을 되찾았다. 전면전에 돌입하기만 하면 이긴다. 그 일념으로 피오니 군은 다시금 전진을 개시했다. 방금 전의 실패를 봐서 방어를 굳히고 화살방패를 세운 채 신중하게 나아가 아까까지 국왕군의 본진이 있던 언덕 위까지 올라가서 보자 국왕군은 이미 훨씬 저쪽으로 후퇴한 뒤였다.
이 이상 선두만이 나아갈 수도 없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을때 후진이 달려와 붙을 수 없다면 군대를 짜는 의미가 없다. 간격이 벌어진 바로 그 부분이 노려지기 때문이다. 선두와 본진의 간격 사이를 쉴 새 없이 전령이 달렸다. 적의 상황을 살피는 척후도 잔뜩 내보냈다. 그자들이 달려 돌아와 보고했다.
“적은 앞에 있는 산기슭 쪽 평지에 집결해 있습니다. 그 장소를 본진으로 정한 듯 합니다.”
“그 근처의 산은 이미 파키라 산맥의 입구가 아니었던가?”
“예. 여기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만 정면에 있는 것이 女山여산, 오른쪽이 男山남산인데 남산 뒷뿌리의 저편이 파키라 산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산맥이 가까워지는 복잡한 지형이었다. 여산의 왼쪽에는 잡목들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산이 있다. 그 산과 여산 사이는 완만한 길이었다. 산 사이의 길이므로 폭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이곳을 빠져나가면 기르취 산맥의 둔턱으로 나가 북상할 수 있다. 실제로 국왕군도 이 길을 통해서 왔다. 반대로 말하자면 국왕군의 응원군이 오는 것도 이 길이라는 소리였다. 쟝센 경은 껄껄 웃음소리를 냈다.
“배수진이 아닌 배산진인가. 잘알았다. 끝까지 제대로 된 전투는 할 생각이 없다는 게로군. 그렇게 해줄 수야 있나.”
약간 덤볐다가는 도망치고 또 약간 덤볐다가는 도망친다. 이런 맥빠지는 전술과 마주하기란 처음이지만 국왕군의 의도는 읽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아군을 기다리기 위한 시간 끌기다. 저 길을 통해 곧 응원군이 온다는 술책을 미리 마련해 놓고 있는 것으로 그때까지 싸우지 않고 기다린다는 것은 武名무명에 관계되는 일이니 일단 체제를 바로 해둔다는 계산. 또 하나의 목적은 그렇게 귀찮게 건드려서 이쪽의 병력을 조금씩 소진시킨다는 계산.
건방진 짓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계산에 지금까지는 멋지게 빠져주었다. 어젯밤의 야습, 방금 전의 돌격 실패는 상당한 악재였다. 그런만큼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승리를 거머쥐어야 한다고 선봉의 장수인 쟝센 경은 생각했다. 물론 후방의 각 장수도 그렇게 생각했다. 상그 사령관에 이르러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적은 장군을 기다려 전투를 할 생각이라고 듣고는 이를 갈면서 중얼거렸던 것이다.
“역시 그랬군. 그런 겁쟁이를 한번이라도 왕이라 칭했다고 생각하니 속이 다 거북해지는구나.”
그 겁쟁이를 상대로 이 이상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했다. 병사와 병사들을 맞부딪게 하고 검과 검을 겨루어 서오가를 거두지 않으면 안된다. 적의 패주를 확이하거나 산처럼 시체더미를 쌓아 올리거나 이름난 무장을 포로로 잡거나, 좀더 이상적으로는 적의 수장인 국왕을 붙잡거나 아예 그 首級수급을 받아 오던가 어쨌든 이겼다는 명목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자줏빛 외투를 자신만만하게 나부끼면서 사령관은 어떻게 국왕군과 싸울지 생각했다.
적은 이미 야습과 방금 전의 활싸움에 의해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섣불리 자극한다면 이대로 슬금슬금 후퇴를 계속해 뒤로부터 달려오는 응원군과 합류하리라. 그렇게 되면 조금은 귀찮아져버린다. 적어도 기세가 붙고 이쪽의 사기가 떨어지리라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유력 영주들도 저마다 의견으르 냈다.
“요컨대 적을 이 이상 퇴각시키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눠서 둘은 양옆에 배치하여 정면과 때를 맞춰 삼면에서 동시에 들어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글세 어떨지. 놈들은 의외로 빠르오. 도망치는 것만큼은 우리들보다 빠르니 도망칠 수 없도록 해둔 상태에서 싸우면 되는 겁니다.”
야전에서 적에게 포위되는 것은 그 군대의 패배를 의미했다. 그만큼 어떤 전투에서도 이것만은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장의 의무였다. 그러나 전투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 주의 따위 통용되지 않을 만큼의 세력을 가지고 밀어버리면 된다. 정부군은 전력을 투입하여 결전을 기다리기로 했다. 뭐라해도 전력의 차이는 상당했다. 세 방향에서 공격한다면 이쪽의 몇 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군세 따위 한줌도 되지 못한다. 전령이 날았고 2만의 군세 중 5천씩이 본대에서 떨어져 좌우로 산개하기 시작했다.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엄숙하게 진행하는 부대의 움직임은 대지를 기어가는 거대한 뱀과도 같았다. 오른쪽에서 한 마리, 왼쪽에서도 한 마리,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며 떨어지더니 질서정연하게 나아갔다. 한 부대는 남산을 향했고 또 한 부대는 산 사이의 길을 향했다. 특히 후자의 부대는 잡목산을 등지고 산 사이의 길을 막는 형태로 진형을 정비했다. 이렇게 하면 설사 국왕군의 응원군이 온다 하더라도 즉시 맞받아 칠 수 있다.
사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뱀은 점차로 축소되어 고정되고 이윽고는 창이나 활 공격에도 꿈쩍하지 않으르 사람의 철벽으로 변화했다. 드높이 걸려 휘날리는 깃발, 초여름의 햇빛을 반사하여 날카롭게 눈을 찌르는 창의 빛, 선명한 복장을 한 기사들의 무리, 발을 맞춘 군대가 일으키는 건조한 흙먼지. 국왕군의 본진은 여산을 등지고 조금 올라간 높이에 있었다. 그런 상황을 모두 바라볼 수 있었다. 루카난 대대장은 중진에 있었지만 아까부터 그 등에는 북쪽 탑에 침입했을 때 이상의 식은땀이 끊임업이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절대절명이었다. 전방에 나가있는 병사들은 아마도 살아있는 기분이 들지 않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도 당연하다. 이 상황에서 겁먹지 말라고 말하는 쪽이 무리였다. 도라 장군은 타르보가 함께 전위에 서 있었다. 이미 말을 탄 채로 창을 든 종자들을 이끌고 있는 모습에는 미동도 없었다.
루카난 대대장도 식은땀을 손바닥에 숨긴 채 어디까지나 평소의 표정을 유지하며 국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군대를 이끄는 자의 마음가짐이다. 지휘를 담당하는 자는 자신의 두려움을 결코 부하들에게 보여선 안 되는 것이다. 살짝이라도 밖으로 내보였다간 그 불안은 곧바도 가까운 병사들에게 옮아가고 즉시 군대 전체에 전염된다. 그렇게 되면 이미 전투고 자시고가 없다. 싸우지도 못하고 도주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중진의 대부분은 루카난 대장이 지휘하는 근위병대가 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최소한 대장의 명령에는 따르도록 훈련되어 있는만큼 루카난 대대장이 태연하게 대기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자는 없었다. 전위에 나가 있는 병사들이 때때로 불안에 사로잡혀 돌아보아도 그곳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잡고 있는 도라 장군과 한점 흐트러지지 않은 침착한 근위대장이 있기 때문에 꽤나 믿음직스러운 동시에 그만큼 적들이 다가온다는 공포에도 이길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에도 한도가 잇다. 본진에서도 나란히 늘어선 국왕 측근의 용사들이 굳은 표정을 펴지 않고 잡아먹을 듯 적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겐 그들의 생각이 있다. 정확하게는 국왕의 생각이다. 시험해볼 가치가 있는 작전이라고 생각했기에 바로 이렇게 일부러 자신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눈 앞에 날카로운 칼이 불쑥 나타나 천천히 목줄기를 눌러오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었으므로 손도 발도 내지 못하는 형국과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긴장감이 국왕군 전체에 떠돌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검은 옷차림을 한 이븐이 굳게 주먹을 쥐고 하염없이 적군을 노려보고 있었다. 열심히 자신을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적의 위용과 전력의 차이에 때때로 이빨 속에 전율이 달려갔다. 암운에 숨어 덤벼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버리고 싶은 충동에 강하게 시달린다. 아까부터 한 마디도 않고 있는 나시아스, 가렌스도 같은 상태이리라. 샤미안에 이르러서는 그저 국왕을 바라보는 것으로 공포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들마저도 이런 식이다. 다른 병사들이 겁먹지 않을 리가 없다.
긴장이 가득한 공기 안에서 태연하게 대기하고 있는 것은 총대장인 국왕과 그 참모라고도 할 수 있을 금발의 소녀뿐이었다. 국왕은 가슴에 사자의 문방을 수놓은 전투복을 몸에 두르고 긴 외투를 펄럭이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소녀는 드물게 머리를 꽉 묶어 올리고 언제나처럼 은 寶冠보관을 쓴 뒤 국왕의 옆에 서 있었다.
세 방향으로 나눠진 군세가 일제히 움직이는 것은 전술상 있을수없다. 우선 어딘가 한 군데가 움직이고 그것에 의해 이쪽 진형이 흐트러진 부분을 눌러 감싼다. 이것이 기본이다.
“어디에서 올까 오른쪽 왼쪽, 아니면 정면.”
소녀가 중얼거리자 국왕은 나직하게 웃었다.
“정면은 아니야. 정면 공격이 된다면 우리들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그 정도는 적도 알고 있어.”
그렇다면 좌우 중 어느 한쪽이다. 왼쪽의 남산을 등진 부대, 오른쪽의 잡목산을 등진 이쪽을 증원을 막는 형상으로 퍼진 5천. 어느 쪽도 지금이라도 기치를 올리고 돌격해 들어올 것 같았다. 문득 국왕이 말했다.
“좌우 중 어느 쪽에서 올지 내기할까?”
아무리 소녀라 해도 말문이 막혀 국왕을 보았다. 그러나 곧 작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나는 왼쪽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나는 오른쪽이다.”
“뭘 걸지?”
국왕은 뻔뻔스럽게 웃었다. 예전 이 남자를 놓고 사자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이븐은 말했지만 지금의 국왕에겐 그야말로 사자의 품격과 위엄이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를.”
말없이 소녀는 앉아있는 국왕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불안한것인지 의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반드시 이겨.”
“그렇고말고. 우리들은 반드시 이긴다. 그 승리를 너에게 바치도록 하지.”
침착한 목소리였다. 초조함이나 불안은 한 조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녀는 안심하고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그렇게 되면 내기가 안되잖아. 승리는 대장의 것, 다시 말해 네 것이다. 그렇게 결정되어 있는 거야.”
정부군의 공격은 그 직후에 시작되었다. 전형을 정리하고 국왕군을 완전히 포위한 정부군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으리라. 남산을 등진 5천 군사가 전진을 개시했다. 전열에는 이중 삼중의 화살받이용 방패를 세운 참으로 견고한 태세였다. 자신의 우위를 확신하고 있는 만큼 기세도 좋았다. 즉시라도 돌격하여 단숨에 짓밟아주겠다는 열의가 가득했다. 그 5천을 지휘하는 것이 피오니 郡군과 인접해있는 메디오라 郡군의 유력 영주 페레 경이었다.
“피오니의 군대는 이상한 전략에 휘말려 기막히게 당해버렸지만 우리도 똑같은 짓을 당할 것 같으냐. 병법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이 몸이 똑바로 보여주도록 하지.”
자신만만한 페레 경이었다. 영주들은 저마다 전쟁에 대비하여 수하에 있는 병사들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 서오가를 라이벌에게 보여줄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메디오라 군의 병사들은 발을 맞춰 엄숙하게 나아갔다. 행군하는 발소리와 갑옷 부딪히는 소리만이 긴박한 진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국왕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끝까지 맞아칠 태세를 유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정신이 빠져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페레 경은 국왕군의 전투를 길게 끌려 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빠르게 외쳤다.
“쳐라!”
병사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의 목소리와 동시에 5천의 군세는 일제히 떨쳐 일어나 움츠리고 있는 국왕군을 향해 달려들려했다. 그런데 그때 바로 메디오라 군대의 뒤쪽에서 함성이 울렸던 것이다.
“아니?!”
장수 병사 할 것 없이 당황하여 돌아보았다. 수풀에 덮여 있던 남산의 중턱에서 일제히 기치가 오르더니 말 그대로 눈사태처럼 몰려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백이나 이백이 아니다. 千騎천기를 넘어서는 대군이었다. 경의 얼굴에서 일시에 핏기가 사라졌다. 主將주장이 창백해졌을 정도였다. 병사들의 당황과 공포는 더욱 심했다. 당장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전방에는 국왕군이 있다. 그리고 뒤에는 천 명의 적이 나타나 덮쳐온 것이다. 이러한 때에 냉정하게 맞설 수 있는 군대는 거의 없다.
애초에 진형이란 정면에서 들어올 공격에 대비하여 짜는 것이다. 전방이 견고하더라도 배후는 무방비 상태에 가깝다. 부드러운 뱃살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군대에게 있어 배후를 찔리는 것처럼 싫은 일은 없으며 퇴로를 끊긴다고 느끼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침착해라! 진형을 재정비한다!”
부르짖는 페레 경이었지만 이것도 그리 간단하게 되지는 않았다. 보병, 궁병, 창병, 기병 등을 효과적으로 짜는 것이 진형이자 이렇게 짜여진 진은 전방이라면 자유자재로 전개시키고 움직일수가 있지만 백 팔십 도 방향을 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습격해온 국왕군은 적에게 방향전환을 할 여유 따위 주지 않았다.
이 천명의 군대은 와이베커에서 국왕군과 합류한 포트남과 민스 혼합군이었다. 와이베커에서는 활약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이 국왕군으로서의 첫 전투였다. 본진에서는 국왕이 이 싸움을 남김없이 관전하고 있을 것이다. 선동하지 않더라도 병사들의 전의는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이번이 첫 임무다! 충분히 움직여라! 폐하가 보고 계신다!”
포트남의 영주 세리에 경이 외치며 스스로 말을 몰아 돌진하자 뒤이어 기사들도 잡목림을 헤치고 가지를 부러뜨리며 중량에 모든 것을 맡기고 돌진했다. 그에 호응하여 이제까지 단연히 대기하고 있던 국왕군의 전위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창을 휘둘렀다. 메디오라 병사의 투지는 이로 인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이젠 공격이고 뭐고 할 때가 아니다. 목숨이 붙어있어야 그 다음도 있다. 가장 먼저 하급 병사들이 무너져 후퇴하려 했다. 이어서 기사들까지도 도망치는 태세로 돌아섰다.
이렇게 되면 이미 군대라고 부를 수가 없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공포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생각지도 못한 국왕군의 기습과 선재공격, 정부군의 본진이나 잡목산을 등진 채 대기 중이던 부대도 얼이 빠져버렸다. 그리고 신음했다. 감쪽같이 끌려들었다는 사실을 정부군도 드디어 깨닫게 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남산의 메디오라 군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武將무장들이 열심히 병사들을 진정시켜 태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습격해온 천 명의 기세도 또한 무시무시했다. 분명하게 이쪽이 불리했다.
“놈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군의 패배를 눈앞에 둔 병사는 가진 힘이 열이면 다섯도 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섣불리 구출에 나설 수는 없다. 잡목산의 부대 쪽에서 보자면 그러기 위해서는 국왕군의 정면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고려할 문제가 아니었다. 본진도 같은 식으로 생각햇지만 여기에서 내버려둔다면 전투에는 진다. 대단한 기세로 전령이 뛰어다니는 한편 정연하게 대기하고 있던 본진의 왼쪽 끝에서 한 부대가 떨어져 나와 고전하고 있는 메디오라군을 구하러 달려가려 했다. 국왕군의 본진에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국왕이 그때까지의 태도를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서더니 전군에 들릴 듯이 외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돌격!”
기다리고 기다리던 명령이었다. 지금까지 억지로 참고 있던 국왕군의 병사들은 쏜살처럼 전군이 하나가 되어 우측 위쪽, 잡목산의 군대를 향해 돌진했다. 입을 벌린 것은 그 목표가 된 영주군이었다. 여기까지 계속해서 기습을 당하고 패배를 맛보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전체가 동요하고 있었다. 그곳에 투지를 만면에 분출하는 군대가 흙먼지에 뒤덮일 정도의 기세로 돌진해 오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곳에서 영주세력에게는 쐐기가 박혔다. 악몽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겠지만 그들의 등뒤에서 일제히 함성이 올랐던 것이다. 핏기를 잃은 채 돌아보자 등뒤의 산에 적의 깃발이 어느 사이엔가 2백 개 이상이나 세워져 용맹스럽게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복병이다!”
“당했다!”
“협공 당한다!”
바로 지금 남산 안에서 적병이 대군을 몰고 밀려드는 광경을 본직후였다. 대혼란에 빠졌다. 한 사람이 공포에 떨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양옆의 병사도 즉시 똑같은 상황이 되었다. 그러한 두려움은 순식간에 전체에 전달된다. 무장격의 인간이나 기사들이 열심히 격려하며 멈추라고 말한다 해도 애초에 하급병사다. 그리 간단하게 바로 잡힐수가 없었다.
졸병들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기사급도 동요하고 있었다. 그 주인인 영주들도 마찬가지였다. 현 정부의 꼬임으로 이쪽에 붙는쪽이 득이 된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온 것이다. 은혜도 의리도 없다. 하물며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바치는 것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다. 이긴다는 말을 들었기에 나왔다. 이런 곳에서 죽을 만한 의리는 없는 것이다.
무장으로서는 등을 보이는 행위에 저항감이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병사들은 협공의 공포에 빨리도 도망치지 시작해 진형은 완전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빠져! 빠져라! 일단 후퇴한다!”
오래 생각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협공을 받은 것과 거의 동시에 지휘관이 외치고 있엇다. 바라마지 않던 명령이었다. 장병들은 뒤도 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도망치려 해도 정면도 뒤도 막힌 채였다. 유일하게 열린 방향, 즉 국왕군의 권군이 올 것이라고 여겼던 산 사이의 길을 향해 5천의 군대는 열심히 도주했다.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그라이아의 등에서 그 상황을 확인한 소녀는 몰래 생각했다. 저 잡목산의 부대는 가짜였다.
2백개의 깃발이 용맹스럽게 휘날리며 지금도 산을 달려 내려올 것처럼 보이지만 좌우로 군세를 나눌 정도의 여력은 국왕군에겐 없다. 그래서 근처의 농민들을 긁어모아 만약을 위해 50명 정도의 병사를 붙여 지금 이때 일제히 기를 올리도록 미리 일러두고 배치해 두었던 것이다. 소녀는 이 작전에 약간 회의적이었다. 조금씩 자극하면서 정부군을 이 위치까지 끌어들이면 된다. 그렇게 되면 아마 적은 세 방향으로 나눠져서 이쪽을 포위하려 할 것이다. 그것도 좋다. 그러나 남산 쪽에서 공격해 줄 거라고는 쉽게 생각할 수가 없다. 만약 이쪽 산의 공격이 최초로 행해진다면 등뒤에 기가 펄럭인다고 해도 영주 세력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게 아닌가. 그러나 국왕은 웃으며 말했다.
“리.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돼.”
소녀는 무슨 말인지 알수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는 특별한 용기와 범상치 않은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협공을 받게 된다고 알면서도 용감무쌍하게 각오하고 싸우겠지. 하지만 그 정도 배짱은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나 가질 수 없는거다. 틀림없이 그들은 겁을 먹겠지. 예를 들어 깃발만 보아도 동요할 거야. 하물며 그 바로 옆에는 도주하기 딱 좋은 길이 있다구. 도망치지는 않더라도 주춤거리며 물러나겠지. 그걸로 충분하다. 그걸로 이미 전력으로 칠 필요도 없어지는 거야.”
그렇게 잘 될까 하고 소녀는 의문을 가졌지만 역전의 무장인 도라 장군도 국왕의 의견에 찬성했다.
“발도우의 딸은 군대를 맞부딪게 하는 전쟁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군. 그렇다면 가르쳐 주겠네만 전투를 하는 것은 대다수의 병사들이지. 물론 우리들과 의지를 같이하며 최후까지 운명을 함께 하는 정예병도 다수 있지만 그 열배를 차지하는 것은 우리들의 이념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병사들이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생활이 있지. 그런 병사들을 어떤 때는 보상을 약속하고 어떤 때에는 의리로 묶어. 또 어떤 때에는 명령으로 전장에 세우는 거지. 상황이 나빠지면 내 몸 아끼게 되는 건 당연한 거니까 말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도 도망치는 일도 드물지 않지.”
다시 말해 질 것 같은 싸움을 하는 대장이 나쁘다는 얘기다. 도라 장군은 이어서 말했다.
“전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아군의 사기를 올릴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해서 적을 두렵게 만들 것인가. 여기에 달렸다. 아군의 기세를 충분히 올린 데다가 두려워 떨고 있는 적을 향하면 어떤 어려운 적이라고 해도 물리치지 못할 것은 없는 법이지. 기습이나 선수필승이 무엇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아도 분명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점 너에게는 감사하고 있다.”
도라 장군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며 의미를 묻자 장군은 웃으며 말했다.
“너의 존재는 우리 군에 있어서 크다. 네가 있어주면 병사들은 공포를 잊을 수가 있는 거지. 우리에게는 발도우의 딸이 붙어 있다. 그녀는 틀림없이 우리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다. 병사들은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용기를 북돋우는 거다. 알고 있었느냐?”
소녀는 놀랐다. 자신은 아무래도 모르는 사이에 국왕군의 상징적 존재가 되어 버린 듯 했다.
“그건 곤란한데.”
“곤란할까?”
“그럴것이 내가 발도우의 딸이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다 사실을 알게 되면 모두들 화를 내진 않을까.”
“무슨~ 신경쓰지 마라. 승리를 의미하는 것, 그 상징으로서 그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은 승리의 여신이라고 하고 싶은 참이지만 말이다.”
장군은 말을 덧붙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너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일 게다. 하미아는 젊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덤으로 이상하게 질투심까지 많은 여신이니까 말이다.”
“하항.”
소녀는 왠지 모르게 납득하여 끄덕였다.
“다시 말해 월이 예전에 말했듯이 이 얼굴이 상당히 좋은 광고가 된다는 게로군.”
“그렇지. 그 모습에 그런 실력이니 더욱 효과적이지.”
반드시 틀림없다며 보증한 장군이었다.
“그럼 이번 전투에서도 거창하게 난리를 쳐두는 쪽이 낫겠네.”
국왕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도지지 않을 정도로 헤집어 놓을 생각이지만 말이다.”
돌격해 들어간 국왕군의 기마대는 잡목산의 영주군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자 방향을 바꿨다. 그렇다해도 가속도가 붙어 있는 군대다. 급한 방향전환은 할수없다. 호선을 그리듯이 깨끗하고 완만하게 진로를 왼쪽으로 변화시켰다. 그 앞에 있는 것이라면 하나밖에 없다. 유일하게 남은 정부군의 본대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적의 기마대가 하나가 되어 측면을 돌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맞받아쳐라!”
“안돼. 시간이 모자라! 돌격이다!”
돌격형의 진형을 취하고 있었던 그들이다. 횡으로 이동하려면 곤란해도 앞으로의 진격에는 충분한 태세였다. 국왕군에게 측면을 뚫리는 것보다는 먼저 상대의 측면을 뚫어버리면 우위에서 전투를 전개할 수 있다. 정부군의 기마대가 전속력으로 돌진을 개시했다. 물러설 수는 없었다. 고작 5천에 지나지 않는 국왕군에게 양 날개를 격파 당하고 2만의 병력을 가졌으면서도 한번도 이기지 못한 채 퇴각한다면 무인으로서 그들의 명성은 땅에 떨어진다.
본진에는 그래도 역시 유능한 무장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기마대에게 맡겨두고 거의 무너질 뻔했던 병사들을 추슬러 사령관을 보호하면서 우선 진지를 뒤로 물렸던 것이다.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밀려나온 것에 대해 사령관은 이를 갈 듯이 분해했다. 격노한 모습으로 외쳤다.
“수는 이쪽이 우세하다! 포위하라!”
국왕군은 영주군의 배를 뚫고자 비스듬이 달렸고 영주군은 국왕군의 배를 뚫고자 또한 전력으로 달렸다. 두 군대가 깨끗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전력으로 계속 달렸다. 마치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먼저 물어뜯으려 이빨을 부딪히는 두 마리의 용과 같았다. 먼저 일격을 가한 것은 수에서 뒤지고 있는 국왕군이었다. 그 안에는 말에 있어서는 중앙 최고를 자부하는 로아인들이 있다. 역시 대단한 움직임이었다. 말의 다리에 모든 것을 맡기듯 달려 적을 원형 안으로 몰고 몰아서 넣고 비 오듯 화살을 쏘아댔던 것이다.
“웃기지마라!”
정부군의 기사들도 화살을 쳐서 떨어뜨리며 응전했다. 그러나 몇 명이나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무거운 갑옷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뒤를 이어오는 말에 무참하게 밟혀버렸다. 창을 맞부딪치고 서로 스쳐 지나가며 싸운 것은 라모나 기사단의 용사들이었다. 기마전은 사람의 기량만이 아니다. 말끼리의 싸움이기도 하다. 거대한 몸을 흔들며 격하게 서로 부딪힌다. 기사들도 필살의 일격을 되풀이하며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리려고 한다. 피하지 못하고 낙마해 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기사가 낙마하는 것은 패배를 곧 죽음을 의미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하는 공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무시무시했던 것은 돌격하는 가운데를 달려가는 국왕과 소녀였다. 탄탄한 가슴에 선명하게 채색된 문장은 남자가 누구인지를 무엇보다도 웅장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저 자다! 저 자가 국왕이다! 잡아라!”
작은 수장만 쓰러뜨리면 하고 달아올라 차례차례 습격해 왔다. 국왕 곁에 붙어 있던 이븐 일행이 즉각 맞서려 했지만 국왕은 말없이 그들을 제지하고 스스로 앞으로 나섰다.
“폐하 기다려주십쇼!”
이븐이 황급히 막았지만
“물러나있어. 이름을 대며 도전하는 거라면 기사로서 남에게 맡길 순 없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습니다. 뭣보다 폐하가 직접 움직여서야 우리들이 할 일이 없다구요!”
“상관없어. 구경하고 있어라.”
이븐이 추가로 뭔가 말하려 했지만 포기했다. 지금의 저 남자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혀를 차면서 동료들에게 말을 걸었다.
“알겠냐. 비겁한 짓을 하는 놈이 있다면 상관하지 마라. 등뒤에서라도 베어버려!”
그럴 걱정은 없었다.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마음가짐을 잡고 우선 최초의 一騎일기가 나서 정식으로 이름을 고했다.
“갑니다!”
“언제라도.”
살기를 뿜은 목소리에 국왕은 침착함을 포함한 음성으로 답했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승패는 한순간에 결정났다. 국왕에게 덤벼들 정도였으니 그 기사도 실력엔 자신이 있고 武名무명도 있는 자였으리라. 그러나 맞선 것은 어디에 이런 용사가 숨어 있었더냐며 나라에서도 굴지의 영웅들이 저마다 일컬었던 실력이다. 정부군의 기사가 국왕의 말을 노려 창을 꽂으려 했을 때에는 이미 국왕의 창이 상대의 몸통을 뚫은 뒤였다.
“귀찮다. 한꺼번에 덤벼라.”
방금 쓰러뜨린 기사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국왕은 상황을 살피고 있던 정부군의 기사들에게 말했다.
“음!”
“상대해 드리겠소!”
저마다 외치며 열 몇 명 정도가 한 무리가 되어 달려들었다. 동시에 국왕이 말의 배를 찼다. 단신으로 말에 탄 채 거의 표정 변화도 없이 늘어선 기사들을 차례차례 창에 꿰어 올렸다. 전신에 무시무시한 기백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거의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을 정도로 국왕은 강했다. 한편 작은 체구에 長創장창을 들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흑마에 올라 탄 소녀의 움직임도 대단했다. 거창하게 난리를 피겠다더너 선언대로 엄중하게 무장한 기사들을 상대로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말의 다리로 승부하겠다는 듯 달려드는가 하면 일합도 제대로 겨루지 않고 말에서 떨어뜨렸다.
거의 갑옷도 입지 않은 작은 몸에 황금 관처럼 묶어 올린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커다란 사내들을 접근시키지도 않은 채 만난 게 행운이라는 듯 속속 때려눕히는 것이다. 싫어도 눈에 띨 수밖에 없었다. 물러서서 구경만 하고 있던 정부군 사이에서도 놀란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저건 어떤 자냐?”
“몸집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는데 설마!”
압도적인 강함과 격차를 보고 적의 기세는 급격히 쇠퇴했다. 국왕군의 강력함도 그렇지만 일당백의 싸움을 보여주는 국왕과 이 의문스러운 적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야 승부가 되지 않겠다고 보고 앞에 나섰던 기사들은 차례차례 본진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국왕군도 일단 군세를 물리며 태세를 바로 잡았다. 男山남산의 영주세력을 격파한 포트남, 민스군軍도 이것에 가세하여 아까의 진지보다 훨신 나아간 곳에 돌격형 진형을 만들고 정지했다.
계속된 전투 뒤였다. 병사들은 모두 지친 상태였지만 연이은 승리에 대단히 기분이 고양되어 있었다.
“훌륭한 안배이셨습니다.”
도라 장군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자신도 상당히 활약한 듯 했다. 이곳저곳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것은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돌격 한 가운데에서 종횡으로 창을 휘둘렀던 것이다.
“아군의 피해는?”
“장수 병사 합쳐 3백 정도입니다.”
“지금 적의 세력은?”
“8천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좋아. 다시 한번 겨뤄주지.”
장군은 조금쯤 놀랐다. 이런 경우엔 여기에서 손을 떼는 쪽이 좋다. 우세로 전투를 진행했다 해도 상대에겐 아직 8천의 병력이 남아있고 또 전장에 발을 붙이고 있었다. 도망친 영주군처럼 주눅든 상태도 아니었다. 이것을 격파할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이 아군에게 없다고는 못하지만 그래도 아슬아슬할 정도였다. 함부로 손을 내밀었다 까딱 잘못하면 어려운 일이 된다.
그것보다도 이쪽의 강함을 충분하게 보여주고 적은 수로 멋진 승리를 거머쥐어 보였으니 이곳에서는 그만 접는 쪽이 나았다. 하루 이틀 지나감에 따라 가운데에서도 이쪽으로 투항해오는 자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장군은 그러한 것들을 국왕에게 고하려 했지만 국왕은 한바퀴 장병들을 돌아보고는 부드럽다고까지 여겨질 목소리로 말했다.
“적은 집중해서 이쪽을 지켜보는 것 같지만 저것은 허세다. 내심으론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며 벌벌 떨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도 생각하겠지. 국왕군은 예상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고 전투에 지쳐있을 테니 이 이상 습격은 없을 게 틀림없다고. 그렇게까지 기대하고 있다면 기사로서 응해주지 않으면 안되지 않겠는가.”
환성이 올랐다. 두 번째 전투에 불평을 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도라 장군도 웃는 얼굴이 되었다. 지금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병사들에게 있어 그 이상의 흥분제는 없는 것이다. 국왕은 통찰은 옳았따. 정부군은 어찌 간신히 태세를 다시 바로잡았을 뿐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할 기회만 보고 있는 것이다. 국왕군도 이겼다고는 하지만 적은 수로 전투를 치렀으니 이 이상 공격해 오지는 않으리라 판단하고 각부에 연락을 취해 퇴각 준비를 시작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국왕군이 함성을 지르며 맹렬하게 돌격해 왔다. 정부군은 경악했다. 설마 하고 생각했다. 상그 사령관이 부하들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외쳤을 정도였다.
“정신이라도 나갔나 국왕!”
그 남자가 들었다면 미안하게도 지극히 정상이라고 대꾸해주었으리라. 그 국왕은 군세를 이끌고 돌격하면서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본진을 뚫어라! 자줏빛 외투가 표적이다! 다른 것엔 눈도 주지마라!”
소녀가 그 옆에 있었다.
“목적은 사령관인가.”
“그래. 그 녀석만큼은 지금 잡겠다.”
“좋아. 네 원수 중 한 명이다. 협력하지!”
이 전장에 있는 몇 백 필의 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준족이 소녀가 타는 그라이아다. 국왕 및 그 부하들을 내버려둔 채 순식간에 뛰어나갔다. 대단한 다리였다. 소녀는 고삐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말에게 완전히 맡기고 있었다. 그 말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적의 사수가 겨눌 틈도 주지 않고 화살받이를 밟고 쓰러뜨려 보병을 흐트러뜨리며 누구보다도 빨리 적 진영에 뛰어들었다.
“네 이놈!”
이 불손한 적에게 덤벼든 병사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말 위의 소녀에게 뼈아픈 일격을 당했다. 작은 손이 휘두르는 창의 날카로움은 준열함을 더해 거한들을 창 끝에 걸어 가볍게 던져버렸다. 애초에 도망갈 태세였던 군대였다. 가볍게 침입을 허용했다. 소녀는 홀홀단신으로 적진을 똑바로 달려 올라갔다.
“뒤따라라!”
국왕의 호령이 날았다. 말하지 않아도 주변에 있는 자들은 손꼽힐 호걸들이다. 소녀의 뒤를 쫓아 둑이 터지는 기세로 돌진했다. 정부군의 병사들은 한 사람 남김없이 전율했다. 칠흑의 준마에 탄 작은 전사의 돌격을 계기로 아군은 두동강나려 하고 있었다. 혹시 정부군에게 투지가 남아있었다면 양쪽으로 갈라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양측에서 중앙의 적을 포위하려 했겠지만 그들에게 그런 기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쫓겨난 병사들은 이거 다행이라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국왕은 그런 적들에겐 눈도 주지 않았다. 우두머리만 때려잡으면 되는 것이다. 노도 같은 공격을 해오는 국왕군에게 상그 사령관은 간이 졸아 붙었다. 국왕이 일단 승리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결정적인 승리를 바라고 있다는 점은 명백했다.
“안되겠다 후퇴!”
사령관의 주변은 예전부터 부하였던 근위대대가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 백여 명이 한 무리가 되어 도망치려 했지만 국왕군이 맹돌격을 해왔다. 특히 소녀는 도망치는 근위병대를 즉시 쫓아가 커다란 사내들을 강아지라도 되는 듯이 쳐 날리며 청명한 목소리로 늠름하게 외쳤따.
“말이 안 되는군! 이름하여 근위병단이란 것이 고작 이 정도인거냐!”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은 심경의 병사들이었지만 소녀의 목소리로 이런 말을 들은 만큼 그 치욕은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다리가 둔해졌다. 소녀는 덧붙여 말했다.
“거기 지휘관! 보자 하니 아까부터 동료들에게 보호받으면서 쳐박혀있기만 하는데 그 외투는 뭐 하자는 거냐! 자주색을 두르는 것은 근위병단에서도 단 한 명이라고 들었는데 설마 근위사령관이라고 하진 않겠지! 배신의 보수로 영예를 얻었다고 들었지만 알만하다. 기가 막힌 겁쟁이 짓이로구나!”
“네 이놈!”
이마까지 새빨개진 사령관이었다. 대원들도 분노했다. 무시하고 퇴각해야 함은 싫어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냥 들어 넘길 수 없었다. 전체가 발을 멈추고 빙글 돌아섰다.
“건방진 놈!”
“웬 놈이냐! 우리들을 겁쟁이라고 부르려면 그만큼의 武名무명은 있으니 하는 짓이리라!”
“나는 그린다. 투신 발도우의 딸이다! 그렇게 알고 실력에 자신이 있는 자만 덤벼라!”
“뭐라고!”
너무나 대담한 발언에 병사들은 아연했지만 동시에 주저한것도 부정할수 없었다. 이름을 댈 때 다소 치장을 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투신의 딸이라니 웬만큼 자신있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거대한 흑마에 탄 소녀는 홀홀단신으로 종기사도 거느리지 않고 전장에 서서 도주하는 근위병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에에이 뭘 하고 있나! 상대는 꼬마 계집애다!”
그 목소리가 방아쇠가 되어 상그 대대의 기사들은 일제히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라이아의 등에서 소녀는 준엄한 안색으로 얼굴을 긴장시키며 창을 고쳐쥐었다.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런 것은 리 본인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도 적의 도주를 막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녀와 상그 대대가 부딪히기 전 국왕군의 용사들이 뒤쫓아서 나타났다. 증오스러운 상대를 지척에서 확이하고 뛰어 오른 것은 루카난 대대장이었다.
“상그! 이 짐승 같은 놈! 사람 거죽을 쓴 돼지새끼!”
대대장의 부하들도 격앙했다. 상그 대대는 이전에는 그들의 동료였지만 반년 전부터 사령관 직속의 병사로서 특별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것을 좋다고 그들은 있는 대로 잘난척하며 콧대를 세웠다. 같은 근위병사일 텐데로 무시 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몇 번이나 억울한 눈물을 삼켰는지 모른다. 원한은 뼛속까지 달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 루카난 대장은 상그 대대에 덤벼들었다.
이렇게 되면 양쪽 모두 전력투구로 부딪힐 뿐이다. 기병과 보병이 섞여든 대혼전이 되었다. 국왕도 또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덤벼드는 기사들을 차례차례 반격해 쓰러뜨렸지만 그 혼전 가운데 중요한 근위사령관의 모습을 일순 놓쳤다.
“칫!”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이곳에서 우두머리를 놓치면 무엇을 위해 돌격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곁에 있던 이븐이 목소리를 높였다.
“월!”
가리키는 쪽을 보자 소녀가 사령관의 호위병과 격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사령관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소녀는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아직도 사령관을 보호하는 자들을 하나하나 베어넘기고 때려눕혀 사령관을 전장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보는 쪽이 홀려버릴 듯한 범상치 않은 용맹함과 기백이었지만 다수를 상대로 이쪽은 혼자다. 점점 소녀 쪽이 밀릴 듯 보였다.
“리!”
말의 배를 차며 국왕은 전력으로 소녀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 소녀는 사령관의 종기사들과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남자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노성을 질렀다.
“늦었잖아! 네가 할 일이야! 빨리 처리해버려!”
사령관을 빨리 처치하라는 말이었다.
“미안하다.”
남자는 웃으며 소녀와 나란히 종기사들을 해치우며 맹진했다. 델피니아 제일의 호걸과 발도우의 딸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두 사람이었다. 종기사 정도가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에도 선명한 자줏빛 외투를 두른 사령관은 어떻게 해도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이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종자로부터 창을 받아들고 아마도 절망적인 용기를 뽑아내어 국왕에게 돌진해왔다.
“가짜왕이!”
남자는 입꼬리만으로 어렴풋이 웃엇다. 상대의 말이 우스워서가 아니다. 적이 드디어 달려나왔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감사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고맙군.”
말을 달리면서 낮게 중얼거렷다. 실제로 고마웠다. 이것으로 이 전투의 결말이 난다. 한쪽은 자줏빛 외투를 한쪽은 복숭아빛에 검은색 외투를 바람에 날리며 양쪽은 똑바로 격돌했다. 전속력으로 스쳐지나가며 사령관은 미친 듯이 창을 휘둘러댔다. 날이 허공을 가르는 둔탁한 음이 울렸다. 그러나 사령관의 혼신의 일격을 국왕은 가볍게 흘려버렸다. 자신의 심장을 노란 창을 두 쪽으로 절단하고 받아치는 창날로 사령관의 목을 날려버렸다. 사령관을 태웠던 말은 그래도 한동안 계속 달려갔다.
말 위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자줏빛 외투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안장 위에 있었던 몸이 비틀 흔들리더니 땅을 울리며 지면에 떨어졌다. 그때엔 사령관은 이미 절명해 있었다. 이 광경을 보자 최후의 힘을 짜내고 있던 상그 대대의 기세는 급속히 쇠퇴했다. 다른 정부군에 섞여 옆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대의 겁먹은 모습을 보고 국왕군은 용기백배했다. 도망치는 적을 쫓고 또 쫓아 순식간에 마레바까지 밀고 들어갔다. 정부군은 성문을 닫아 겨우 막아냈지만 반격할 힘이 없는 것은 명백했다. 그 문 앞에서 국왕군은 용맹한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국왕군의 대승리였다.
10장
마레바 전초전에 있어서 정부군 대패의 보고가 코랄에 도달해올 즈음 본궁의 일각에서는 극비리에 회홥이 열리고 있었다. 개혁파의 관료들에게도 비밀로 열린 회의였다. 그도 그럴것이 그 진용은 -사보아 공작 발로를 비롯하여 전 근위사령관이던 아누아 후작, 명문 핸드리 백작, 시종장 브룩스, 그 외에도 추방된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며 현재에는 연금당해 있었을 터인 사람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이질적이고 무거운 분위기가 그 장소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느 얼굴도 깊은 고뇌로 일그러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이 회합을 주최한 것은 그들의 숙적인 페르젠 후작이다. 그 후작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충격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동정과 공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발로는 크게 얼굴을 찌푸린 채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핏기를 잃은 그 얼굴은 그가 받은 충격의 크기를 무엇보다 잘 설명하고 있었다.
선대국왕의 조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두 명의 영웅, 아누아 후작과 핸드릭 백작도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전 근위사령관인 아누아 후작은 지금 45세. 무골의 군인이 많은 가운데 이 사람은 학문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애초에 출신이 국내에도 굴지의 대귀족이다. 우아한 취미도 있다. 유폐 생활을 하는 사이에도 흥이 나면 악기를 퉁기며 음유를 즐기기도 했다. 풍모도 그에 어울리게 늘씬하고 멋진 체격을 가진 남자다운 미남자의 얼굴로 누구나 인정하는 품격이 있었다.
그 단정한 안면에 지금은 고뇌가 배어 있었다. 핸드릭 백작은 후작보다 10세 연상이었다.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되었지만 깊은 주름이 새겨진 풍모, 날카로운 안광은 지금도 투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호걸이라는 명칭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자는 많을 터이다. 젊었을 적에는 쾌남아로 알려지고 50대 중반이 되어서도 굽히기와 비겁을 싫어하며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질 게 뻔한 싸움이라도 창 한 자루 안고 달려들어갈 수 있을 사람이기도 했다.
그 백작이 일자로 입술을 짓씹고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참으며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사태의 심각성에 머리를 감싸쥐고 한숨을 쉬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아누아 후작, 핸드릭 백작, 그리고 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 장소에 잇는 사람들은 모두 이 세명을 각각 편들어 국왕 옹호의 입장으로 돌아섰었다. 상관과 부하의 관계는 아니지만 저사람이 그런 판단을 했다면 하고 행동을 함께 했었다. 이번에도 그들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들의 행동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시선이 새삼스레 그들을 괴로운 입장에 몰아넣고 있었다. 국왕파의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가진 또 한 사람의 실력자, 시종장 브룩스도 뭐라 말하기 힘든 마음을 안고 무거운 긴장에 가득찬 이 방에 있었다. 누구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방 안에서 페르젠 후작이 살짝 일어나 대기실에서 커다란 은쟁반을 떠받들어 가져왔다.
이 장소에는 그런 잡무를 할 시종마저도 동석하지 않은 상태였다. 후작이 얼마나 이 회합을 중요시하고 극비로 취급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정중한 손놀림으로 후작은 그 은쟁반을 아누아 후작의 눈앞에 놓았다. 의외의 것을 보고 놀란 나머지 후작의 눈이 크게 열렸다. 아누아 후작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그곳에 얹혀 있는 것은 아누아 후작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반년 전까지 항상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것. 그러나 지금은 마레바에서 피에 물들어 땅에 떨어졋을 바로 그것이었다.
“다시 한번 이것을 걸쳐주시겠지요?”
깔끔하게 정리된 금색 술과 잠금쇠가 아름다운 자줏빛 외투를 가리키며 페르젠 후작이 조용히 말햇다. 이 상황에서 아누아 후작 이외에 이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십년간 후작과 함께 했던 근위병단 지휘관의 표식이었다. 그러나 후작은 잠시 침묵한 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페르젠 후작.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의외라는 얼굴이 된 페르젠 후작이었다.
“아누아 후작. 그것은 또 어째서.... 사태를 고려해주시지 않는 겁니가.”
“아니오. 무언가 손을 서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이 옳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구식 인간입니다. 그분에게 한번은 주군이라 불렀던 분께 검을 들이대는 일만은 사양하고 싶군요.”
“그러나.”
“예. 당신의 말씀대로 함락 직전의 마레바를 방치해둘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후작은 동료 중 한 사람에게 부드러운 눈매를 향했다.
“핸드릭 백작.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이 외투를 저 대신 입어주지 않겠습니까.”
“그 그것은 후작. 곤란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당황한 백작이었다.
“당신이 아니라면 어찌 병사들이 납득하겠습니까 하물며....”
하물며 지금 이런 때에. 백작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을 터인 후작이었지만 이 사람에게 있어서 드물 정도로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사태를 어떻게든 해달라고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아니 하지만.”
“백작에겐 건방진 말씀입니다만 제가 나간다면 더욱 사태가 곤란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무리한 이야기라는 것은 잘 알지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깊게 고개를 숙이는 후작을 보고 핸드릭 백작은 말을 삼켰다.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일시적이나마 제가 맡아두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지금 이 때뿐이라는 걸로.”
“예.”
그렇게 결정해버리자 역시 그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도 두 사람에게 맞추듯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누아 후작은 은반 위의 외투를 들어올려 일어선 백작에게 스스로 입혀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시게 만들어서.... 아무래도 천벌을 받을 것 같습니다.”
백작이 낮게 중얼거리자 후작 쪽이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백작. 부하들에게는 저도 잘 말해두겠습니다.”
“그럼 당신은 이제 어쩌실 생각이신지.”
“페르젠 후작이 허락해주신다면 시녀장과 면담을 하려합니다. 상관없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허가고 뭐고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가 고맙습니다. 그분도 아누아 후작이라면 사실을 밝혀 주실지도 모르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후작은 아직 앉아있는 발로를 향해 동정과 애원이 섞인 어조로 말을 걸었다.
“발로경 라모나 기사단을 맡기겠습니다.”
발로는 나직하게 신음했다. 달리 대꾸를 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엔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일어섰다. 국왕파의 사람들이 무겁게 자리를 일어서 나가자 그 뒤엔 페르젠 후작과 브룩스만이 남아있었다. 후작은 이 회합의 결과에 깊이 만족한 듯 했다. 시원해진 표정으로 정중하게 브룩스에게 머리를 숙였다.
“협력 감사합니다 시종장. 제 말만으로는 저분들을 설득할 수 없었겠지요.”
감사를 받아도 브룩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똑바로 후작을 바라보더니 대꾸했다.
“멋지십니다.”
“네?”
“당신은 감쪽같이 저를 이용하셨습니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후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있었다.
“발로님이나 다른 분들이나 당신이 무슨 말을 하던 아무리 정확한 조사결과를 내던 아마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제 말이라면 믿어둘 것이다. 당신은 그렇게 짚으셨던거지요.”
“이용했다니 과격한 말씀이군요. 당신은 자신의 조사를 토대로하여 진실이라 생각되는 바를 그대로 서술하신 것이 아닙니까.”
“분명 그렇지요.”
브룩스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스스로 조사해 보는 게 좋으리라는 후작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예전부터 수하에 두었던 가장 신용할 수 있는 자들을 일제히 이 조사에 참여시켰다. 만에 하나의 기적을 바라고 한 일이었다. 그런데 조사하면 할수록 후작의 주장이 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심 머리를 감싸쥐었다. 페르젠 후작은 그런 브룩스를 안타깝다는 듯 살펴주면서도 국왕파의 사람들 앞에서 그 조사 결과를 밝혀달라고 재삼 요구해왔다. 자신의 입으로는 아무래도 말하기 힘들다는 브룩스와 어떻게 해서든 당신이 직접 말해달라는 후작과의 사이에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던 차에 정부군의 대패와 마레바 함락 직전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던 것이다. 더 이상 여유는 없었다. 브룩스는 애를 끊는 심정으로 후작의 주장을 받아들여 오늘밤의 회합에 나섰던 것이다.
“실로 대단하십니다. 마레바가 빼앗기리라는 상황이 되면 발로님이 움직이시지 않을 수 없지요. 라모나 기사단이 상대가 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또한 로아의 도라 장군을 상대로 이야기를 나눠 설득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아누아 후작이나 핸드릭 백작 두 분 중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분들을 효과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제가 필요했던 거지요. 아닙니까.”
후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종장. 지나친 생각입니다. 저는 단순히 제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당신이 밝혀주시는 쪽이 그분들이 받을 충격을 가볍게 할수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부탁드린 겁니다.”
그러나 브룩스는 그런 궤변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딱 잘라 말했다.
“상그 경도 불쌍하시지. 근위사령관이라고 들떠서는 총대장으로 추켜진 결과 제물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이런이런 시종장. 과격한 말씀을.”
“시치미 떼는 건 그만두시지요 후작. 정부군이 패배하고 사령관이 전사한 것은 바로 몇 초 전의 일. 보고가 막 들어왔을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두 벌이나 있을 리 없는 자줏빛 외투가 새롭게 생겨나 이곳에 있는 겁니까?”
“아아 그것은 만일의 사태를 위해 준비해두었던 겁니다. 당연한 조심성이지요.”
“그럴까요?”
흔치않게 야유하는 어조의 시종장이었다.
“당신은 알고 있었지요. 상그 경이 지휘관인 한 또한 도라장군과 라모나 기사단, 무엇보다 그분이 있는 한 전력에 어떤 격차가 있다해도 마레바의 정부군이 패배한다고. 최소한 이길 수는 없으리라고.”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눈이 가만히 브룩스를 마주보았따.
“2만의 정부군이 완전히 격파 당했다는 것은 예상 외였습니까. 아니면 그것마저도 계산에 있었을까요? 우리들에게 위기감을 갖게 하여 그분을 없애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으니 말입니다.”
“.......”
“당신은 숨겨두었던 진실을 밝혀서 여태껏 적대했던 상대를 아군으로 끌여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아군이 사리사욕으로 당신에게 가담했던 사람들이 방해가 되겠지요. 오랜 세월에 걸쳐 공적을 쌓아온데다 몇 대의 충신이기도 한 분들이 갑자기 출세한 배신자들인 현재 당신의 아군들과 타협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다 또한 당신의 아군들도 겨우 얻은 지금의 지위를 내놓으리라 해도 들을 리가 없으니까요. 처음부터 때가 왔을 때 교대시키기 위한 사령관이었겠지요. 누구라도 상관없엇꼬. 아니 오히려 커다란 실수를 저질러 줄만한 인물 쪽이 좋았겠지요. 언제라도 좋은 때에 파면시킬 이유를 만들수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부디 그분께 감사하시지요. 패배의 책임을 지울 수고를 덜어 주셨으니까요.”
후작은 낮게 웃었다.
“시종장은 더 이상 저 남자르르 폐하라고는 부르지 못하시는군요.”
통렬한 비꼼이었다. 시종장도 되받아쳤다.
“다른 사람들은 어쩌시려는지. 상그 사령관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다른 전장에 보내어 죽이실 겁니까?”
페르젠 후작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뇌물수수의 혐의가 몇이나 있으니까 그쪽으로 추궁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직무 비리로 손을 물들일만한 재무장관이라면 국가 경제가 파산해버리니 말입니다.”
“제사장은?”
“그 사람은 애초에 해가 없습니다. 조금쯤 신의 권위라는 것에 취해 계신 것뿐이지요.”
“버릴 필요는 없다는 겁니까.”
내뱉는 듯한 브룩스의 말에 미소를 띤 후작이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만 저의 주장 중 어디 틀린 데가 있습니까?”
“.......”
“저는 언제나 델피니아를 위해 생각하며 움직이고 국가를 위해 보다 좋은 방법을 선택하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사리사욕 때문에 국가의 내정에 관여했던 일 따위는 한번도 없습니다. 이번 일만해도 그렇습니다. 이대로 왕가의 핏줄을 지니지 못한 자가 국왕 자리에 되돌아오는 일이 생겨서는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한정된 분들에게만 밝혔던 것입니다. 그래도 저를 비난하시겠습니까.”
“국가의 중대사가 된다는 의견에는 찬성하겠습니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서임과 동시에 당신을 위해서이기도 했겠지요.”
후작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꽤나 제가 싫으신 모양이군요.”
브룩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피했다. 그에 비해 페르젠은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알수가 없군요. 그렇다면 어째서 저를 편들어 주신 겁니까?”
“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에 거짓이 없었던 이상 묵살할 수 없었을 뿐, 그뿐입니다.”
다시 온화하게 후작은 웃었다.
“쉽게 가지기 힘든 신념이군요. 그러나 감사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제 아군이 되어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브룩스는 끄덕였지만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금은 말이지요.”
11장
마레바까지 접근한 국왕군은 일단 공격을 중지하고 진지의 건설에 들어갔다. 아직 해도 높기 때문에 이 기세 그대로 마레바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했지만 국왕은 진군 정지를 명령했다. 도라 장군이 생각했던 대로 시간을 두는 작전으로 나간 것이다. 영주군 중에도 근성 있는 자가 있는지 마레바의 성문은 아직까지 굳게 닫혀있었지만 어차피 겉으로만 아무렇지 않은 채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룻밤 지나는 사이에 점점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 이쪽으로 귀순을 청해오는자가 나타날 것이 틀림없었다.
“내일 아침은 성을 공격한다. 그럴 생각으로 부상자는 상처를 치료하고 건강한 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 두도록.”
국왕은 그렇게 명령했지만 승리를 눈앞에 두고 국왕군의 병사들은 흥분 상태였다. 태양이 기울고 밤이 되어도 아무래도 조용히 잠들 것 같지 않았다. 모두 국왕의 안배에 감복하고 무용에 감탄하며 훌륭한 활약을 보인 이븐과 타우의 사내들을 칭찬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들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자랑하는 이야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내일이면 틀림없이 마레바에 들어갈 수 있다. 특히 라모나 기사단의 병사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레바를 본거지로 삼는 틸레든 기사단과는 가볍다도 할 수 없는 친교가 있었다. 이미 잘 아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이 성체 요새 안에서 감시를 받고 있다. 마레바는 비르그나와는 달리 본동, 2동, 3동으로 나뉘어 外庭외정까지 갖춘 거대한 요새였다. 아마도 기사단원들은 무장해제를 당한 뒤 개혁파의 감시하에 놓여 있으리라.
나시아스도 또한 내심의 흥분을 다 억누르지 못하고 구화에 붉게 비치는 마레바의 성벽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이 때를 꿈에서조차 보곤 했었다. 아무리 늦더라도 내일 밤에는 마레바를 함락시키고 그리운 얼굴들을 여럿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그들과 함께 예전 몇 번이나 그러했듯이 서로의 문장을 나란히 세우고 한 덩어리가 되어 코랄로 진군할 것이다.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게 억지로 치장하고 어울리지도 않게 국왕대행 따위를 맡고 있는 친구를 반드시 구해낼 것이다. 혼자서 그렇게 서 있자니 문득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나시아스님이십니까.”
긴장한 젊은 목소리였다. 돌아보자 본 적이 없는 병사가 서 있었다. 아예 천진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이 어린 병사였다. 그는 민스의 니체리 경을 섬기는 병사라고 성명을 댄 뒤 전갈을 부탁 받았다고 말했다.
“전갈? 누구로부터?”
“성함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굉장히 당당하고 신분이 높은 기사분이셨습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니 수고스럽지만 혼자서 이 앞의 루다라 마을 입구까지 와주셨으면 하는 내용입니다.”
호오 하고 생각햇다. 기묘한 전언이었다. 루다가 마을이란 마레바에서 북쪽으로 난 길 하나를 따라가면 있는 곳이다. 약 1카티브 정도의 거리였다. 이 마레바에서 전투가 시작될 것 같아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피난해 있을 터였다. 병사의 모습은 순박함 그 자체였다. 영웅으로 이름 높은 사람을 눈앞에 두고 비밀스런 용무를 전달하게 된 것이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듯 했다. 그에게 들은 그대로만을 복창하고 있다는 것을 잘알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일군의 지휘관에게 혼자서 나오라는 것은 극히 의심스럽다.
“그리고 이것을 전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누구인지 나시아스님이라면 아실 수 있을 거라고요.”
젊은 병사가 생각났다는 듯이 내민 물건을 보고 나시아스의 안색이 변했다. 손바닥보다 약간 긴 정도의 단검이었다. 무기보다는 장식으로 또한 예능의 하나로서 기사들이 언제나 휴대하고 다니는 물건이다. 납빛을 한 칼집에 백금의 입구를 가진 평범한 모양이었다. 특별히 희귀한 물건은 아니었따. 그러나 나시아스가 잘못 볼 리는 없는 물건이었다. 조급하게 다시 물었다.
“그 기사가 이것을?”
“예. 무언가 은밀한 이야기를 하시려는 듯 반드시 혼자서 오시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알았다 고맙다.”
신음하듯 나시아스는 말하고 이 일에 대해선 누군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 병사를 입막음했다. 설마하고 생가했다. 사실이건 어쨌건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색이 바뀌어 말고삐를 잡은 나시아스였지만 진지를 빠져나가려던 참에 리와 마주쳤다.
“나시아스. 지금 뭐하고 있었어. 월이 오지 않을 거냐고 물어보던데.”
“아아 미안. 급한 용무가 생격서 말이야. 폐하께는 금방 돌아오겠다고 전해 드리겠어?”
그 말만을 하고 얼이 빠진 소녀를 내버려둔 채 나시아스는 성급한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며 말을 걷게 했다. 진지 안에서 말을 달리면 필요없는 주목을 끌게 되기 때문이다. 진지를 빠져 나가자 나시아스는 있는 힘껏 말에 채찍을 가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2천의 군세를 지휘하는 몸이면서도 단신으로 진지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의 의미는 물론 생각했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에는 달이 있었다. 조명이 없어도 길은 잘 보였다. 순식간에 마을 입구까지 달려갔다. 말에서 뛰어내려 고삐를 맬 때에도 허둥대며 상대의 모습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애써 찾을 필요는 없었다. 상대는 나시아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말을 묶는 것과 동시에 나무 그늘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이 비친 그 얼굴을 확인했을 때 나시아스는 뭐라 말하기 힘든 안도감과 터질 것 같은 환희를 느꼈다.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어쩔 줄 모르는 듯한 어쩐지 울어버릴 것 같은 그런 얼굴로 나시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발로. 대체 어떻게 해서.... 어떻게 코랄을 빠져나온 거야?!”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친구가 얼마나 엄중한 감시에 놓여있는지 나시아스는 충분을 넘어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틀림없는 진짜다. 재회의 인사를 하고 나서 나시아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상태로 오랜 친구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상한 녀석이로군. 어째서 나 혼자만 불러내는 거야. 자 가자. 네 얼굴을 보면 폐하가 얼마나 기뻐하실지.”
“나시아스 기다려줘.”
“마침 잘 됏다. 내일은 틀림없이 마레바를 해방시킬 수 있어. 네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기사단도 다들 패기가 용솟음치겠지. 그 기세로 한번에....”
“나시아스!”
발로는 외치고 흥분을 식히지 못하는 연상 친구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시아스 잘 들어. 이 내가 하는 일생 일대의 부탁이다.”
나시아스도 웃음을 지웠다. 상대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언제나 활달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끊이지 않던 친구가 지금은 안색을 잃고 남이 보기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일이지?”
발로는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시아스의 어깨를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발로.”
다시 재촉을 당한 틸레든 기사단장은 겨우 얼굴을 들었다. 나시아스가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는 비통한 표정이었다.
“무리인 줄 알지만 말한다. 지금 당장 기사단을 정리해서 비르그나로 돌아가줘.”
나시아스의 물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곧 이어 그 눈은 급히 가늘어져 딴 사람처럼 기가 꺽인 친구의 모습을 엄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습지도 않은 농담이군 발로.”
“그렇고말고. 이런....이런 말도 안 되는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가 어디 있겠어!”
억누르고 또 억누르고 있던 것이 한꺼번에 분출되는 듯한 절규에 초조함을 느낀 나시아스였다.
“진정해. 무슨 일인지 처음부터 제대로 이야기 해봐.”
“이게 어떻게 진정할 일이라는 거야!”
달래듯이 내민 나시아스의 손을 뿌리치며 발로는 울부짖었다. 더욱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시아스는 심한 위기감에 쫓겨 서둘러 고쳐서 질문했다.
“발로. 어쨌거나 이유를 말해. 네가 말한 건 이 중요한 때에 폐하를 버리라는 것과 똑같은 소리야. 어쨌건 국왕이시자 너의 사촌형이 되시는 분에 대해 그게 무슨....”
“아니야!”
발로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혼을 쥐어짜고 있는 듯한 비장한 외침이었다.
“틀렸어 나시아스.”
“뭐가 틀렸다는 거야?”
“그 사람은 내 사촌형이 아니었어.”
나시아스는 입을 딱 벌렸다 귀를 의심했다.
“무슨 바보같은 소리를!”
“정말이다. 나라고 해서 믿을 것 같아. 믿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사실이야. 그 사람은 백부님의, 뒤르와 왕의 핏줄이 아니었단 말이다!”
월은 검은 눈동자를 크게 뜨고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잘 이해할수 없다는 모습으로 핸드릭 백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줏빛 외투를 입은 백작은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지 못하고 있었다. 땀마저 흘리며 아무 말 없이 똑바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국왕군의 본진은 엄중하게 사람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지금 이 장소에 있는 것은 월 외에는 도라 장군 분이었다. 도라 장군은 1카티브 떨어진 곳에서 나시아스가 한 말과 완전히 똑같은 내용을 조용히 입에 담았다.
“우습지도 않은 농담이시오 백작.”
“도라장군. 그렇게 말씀하시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온 것이오.”
백작은 남자와 도라 장군을 향해 말했다.
“저도 똑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역할을 맡아 오게 되었지만 이곳에 올 때까지 다리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또한 어째서 이런 말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한심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입니다.”
고뇌에 가득한 얼굴의 핸드릭 백작이었다.
“저라고 해도 이것이 페르젠 후작이 하는 말이었다면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며 코웃음쳤을 겁니다. 하지만 브룩스 경이 조사한 결과입니다. 듣고 흘려 넘길 수 없었습니다. 아마 시종장도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철저하게 조사하셨겠지요. 물 샐 틈 없는 조사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보고서였습니다. 웨트카 마을의 과거기록부를 비롯하여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 여러 명의 증언, 당시 3곽에서 일하고 있었던 자들의 증언, 그 어느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고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싫어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기다리시오 백작. 그렇다면 백보 양보하여 이분이 뒤르와 왕의 자손이 아니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대체 이분은 어디의 누구시라고 말씀하실 생각이오.”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마도 시녀장 뿐일 겁니다. 시종장도 상당히 노력하여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습니다만 그 부인도 완고하여 저 분은 뒤르와 폐하의 자손이시라는 그 말 밖에 안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걸 믿지 못하겠다는 말씀이시고.”
“당신이라면 믿어지시오 도라장군.”
되묻는 말에 장군은 낮게 신음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과거기록부의 기재 사항에 의하면 알크의 딸 폴라는 24년 전 1월의 하순에 사망. 향년 20세. 생후 2개월의 남자아이와 함께 사망. 한겨울에 익사하는 바람에 장례식에 나왔던 마을사람들도 금방 기억을 떠올려 주었다.
“아이는 틀림없이 함께 이장했는지 묻자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모양입니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갓난아기를 왜 모친과 따로따로 묻어야만 하는 거냐고.”
야무진 처녀였지만 눈이 많이 내려 발 밑이 보이지 않았던 거겠죠. 너도 모르게 물가로 가까이 가서 땅이라고 생각한 채 그대로 밟고 호수에 떨어졌을 겁니다. 젊은 몸인데 가여운 일입니다. 애아버지하고는 같이 못 있게 된 모양이었지만 그만큼 어린애를 얼마나 귀여워했는지.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해준 듯 했다.
“이분의 신변에 대해서는 확실히 불명입니다만 지금 아누아 후작이 열심히 시녀장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려 하고 있스빈다. 어쨌거나 어떻게 해서든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왔습니다.”
“핸드릭 경.”
다시금 숨을 들이쉰 장군이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인 게요. 말씀해 주시오.”
“도라경. 당신은 내가 무얼 말씀드리고 싶은 건지 이미 알고 계실거요.”
두 영웅은 불꽃을 튀기며 노려보았다.
“아누아 후작은 설사 어떠한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한번은 주군이라 불렸던 분께 검을 겨누는 일만은 용서해 달라고 말씀하셨소. 그런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이렇게 머리를 숙이러 온 것이오. 이 이상 소동이 커지지 않게 이 군대를 각각의 영지로 돌려보내 주시오.”
“싫다고 말한다면 어쩌하시겠소 핸드릭경.”
“도라경. 그 말을 나보고 하라고 하시는 거요. 무엇을 위해 후작이 이 외투를 나에게 입혀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그 의미를 당신이 모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소. 그 이상의 일은 묻지 말아 주시오.”
국왕 자격을 지니지 못한 인물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접근하는 것은 이 이상 용인할 수 없다. 거부한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저지하겠다는 것이 백작의 말이었다. 도라 장군은 분연히 일어섰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페르젠의 계략에 감쪽같이 속아서 그 녀석에게 나라를 팔아 넘기겠다고 말하는 거요!”
“도라경! 나나 아누아 후작이 좋아서 페르젠 후작에게 넘기려 한다고라도 생각하시는거요!”
서로 필사적인 표정이었다. 바로 이때 그때까지 계속 침묵하고 있던 국왕이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낮은 웃음소리였다.
“폐하.”
도라 장군의 초조함과 염려도 무시하듯 남자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입 속에서 맴돌던 웃음이 이윽고는 소리나는 웃음으로 결국에는 얼굴을 가리고 우스워서 견딜 수 없다는 식으로 큰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나는 제정신이다 도라장군.”
남자는 겨우 호흡을 골랐지만 얼굴에도 목소리에도 아직 웃음이 남아있었다.
“다시 말해 이런건가 핸드릭 백작. 뒤르와 왕이 자신의 아들이라 믿고 있던 아기와 어린 내가 어딘가에서 바꿔치기당했다는 거로군.”
“바로 그렇습니다.”
“진짜 뒤르와 왕의 아들은 동북의 작은 마을에서 죽고 이 나는 어디의 누군지도 모르는 놈이라는, 그렇게 되는 이야기로군.”
“진실을 따지면 그렇게 됩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오로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백작이었다. 한편 남자는 겨우 웃음을 거두고 상대에게 미소를 보였다.
“고맙네 백작.”
“예?”
“그렇다면 나는 이걸로 당당하게 스샤의 월이라고 말할 수 있지. 누구에게도 불평을 듣지 않고 말이야.”
“폐하?!”
도라 장군이 창백해졌다. 그렇게 간단하게 인정해도 좋은 일이 아니다. 정정을 요구하기 위해 몸을 내밀려 했지만 남자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남자는 온 얼굴이 개운해져 그만큼 기분 나쁘게도 보일 웃음을 띠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위험한 색을 띠고 백작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베어 들어가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말이야 백작. 그렇다면 어째서 좀더 빨리 가르쳐주지 않았나?”
양쪽 눈동자에서 분노의 불꽃이 솟았다.
“어째서 이제 와서야 그런 소리를 하러 왔나! 그럼 대체 아버지는 무엇을 위해 죽은건가!”
무시무시한 일갈을 뒤집어쓰고 핸드릭 백작은 움츠러들었다. 도라 장군도 숨을 삼켰다. 남자는 전신에서 화염을 뿜어내는 듯 했다.
“이제 와서야! 어째서 지금 이런 때가 되어서야! 어째서 좀 더 빨리 가르쳐주지 않았나!”
“폐하!”
도라 장군이 필사적으로 남자를 막았다. 한편 핸드릭 백작도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라면 페르난 백작 말씀이십니까. 백작이 죽었다고?”
“모른다 이 말씀이시다?”
방금 전 폭발의 여파를 억누르며 남자는 부드럽게 백작을 추궁했다.
“그렇다면 가르쳐 드리지. 아버지는 반년이나 되는 동안 북쪽탑 지하에 갇혀 계셨다. 며칠 전 내가 가장 의지하는 자가 아버지를 구해주었지. 그때 아버지의 모습, 자네에게도 꼭 한번 보여주고 싶군그래. 뼈와 가죽만 남도록 여위고 전신에 채찍 자국이 새겨져 두 번 다시 검을 쥘 수도 말을 탈 수도 일어서는 것마저도 할수없도록 끓는 기름을 붓고 숯이 될 때까지 태워져 있더군. 그런데도! 그렇게까지 고통과 치욕을 주었으면서도 거기에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양손을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고 하더군!”
숨을 삼킨 핸드릭 백작이었다. 들은 내용에도 물론이거니와 남자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몸을 뺐다.
“내가 뒤르와 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틀렸다고. 고마운 이야기다. 정말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나는 계속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 눈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부터 이건 뭔가 착오라고 그래 달라고 몇 번을 빌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길은 없는 거라고, 그것이 왕국을 위한 길이라고 지겨울 정도로 계속 말했으면서, 아버지가 저런 무참한 죽음을 맞이한 지금에 와서야 모르는 척 무슨 말을 하러 온 거냐! 그럼 네놈들은 무엇 때문에 아버지를 투옥시켰나! 무엇을 위해 고문을 가했나! 대답해 보지 그래!”
무시무시할 정도의 분노의 화염에 꿰뚫려 또한 등골이 얼어붙을 것 같은 기백에 꽁꽁 묶인 듯이 붙들린 핸드릭 백작은 한동안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남자는 번쩍이는 눈으로 그런 백작을 뚫어보고 있었다.
“코랄에 돌아가 그대의 주인에게 전해라. 스샤의 소인배는 왕좌도 왕관도 바라지 않고 있다고. 그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곳까지 갈 거라고 말이다.”
“폐하.”
핸드릭 백작은 드디어 말을 꺼냈다. 폐하라고 부르는 것에 망설임을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어째서 이 남자가 왕이 아닌지 분하게 여길 정도였다. 선명한 기질이자 훌륭한 결의였다. 이런 일만 없었더라면 양손을 번쩍 들고 맞이하고 싶은 상대였다.
“제가 얼마나 이 결과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잇는지 가능하다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이 돌아오실 그 날을 다시금 옥좌에 앉으시는 그 날을 하루가 천 년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엇습니다. 저는 당신을 폐하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마음 속 깊이 그렇게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냥도 주름이 깊은 얼굴이 한층 더 늙은 것처럼 보엿다.
“그러나 저도 델피니아 기사의 한 사람입니다. 그 의무에는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자는 끄덕이고 엄정하게 말했다.
“나도 사람의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하겠소.”
백작은 그 이상의 설득을 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말로도 이 남자의 결의를 바꿀수는 없으리라고 민감하게 느낀 듯 했다. 갑자기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페르난 백작은 젊은 시절부터 궁정을 싫어하고 名利명리를 피하며 지방에 계셨지만 인품도 공훈도 그야말로 뛰어나고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명복을 빌겠습니다.”
정중한 조문이었다. 백작은 마지막까지 남자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본진을 떠났다.
같은 시각, 발로 또한 친구를 필사적으로 설득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몰아대고 싶지않아. 그 사람에겐 아무런 죄도 책임도 없는 일이다. 이런 잘못을 저지른 관료들이야말로 벌을 받아야해. 그러니까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부탁한다. 너희들이 비르그나에 돌아간다면 그 사람도 코랄 탈환을 포기할지 몰라. 그렇다면 뭐든지 좋게 해결되는 거다.”
나시아스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였다. 결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자금에 와서야 밝혀지기에는 너무도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건 확실하겠지?”
“나도 그 정도는 생각했어! 아누아 후작이나 핸드릭 백작도 듀보도 론조도 에메리온도 윈코트까지도! 끈덕질 정도로 시종장을 물고 늘어졌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그 시종장이 페르젠 후작의 수족이 되어 우리들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핏기를 잃은 얼굴로 나시아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단순히 시종장일 뿐인 브룩스이지만 이전에는 외교의 최고 책임자인자 국왕의 숨겨둔 검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내정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풍부한 인맥, 나라와 왕가에 대해서는 융통성이 없을 정도의 충성심을 나시아스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그 남자를 다시금 왕좌에 앉히고 싶다고 마음 깊이 바라고 있을 사람일 터였다. 깊이 생각에 빠진 나시아스와는 대조적으로 발로는 격정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성격도 격렬한 남자였다.
“나는 그사람이 왕이 되어줬으면 했어. 하루라도 빨리 무사히 돌아오길 바랬다고. 젠장! 어째서냔 말이다. 틀림없이 백부님의 뒤를 잇는데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는 건가.”
“나시아스 이야길 돌리지마. 그것과 이것은 문제가 전혀 달라.”
호랑이 같은 눈의 발로였다. 아무리 뛰어난 용자라 해도 왕관에 어울리는 인품이라고 해도 이런 사실이 밝혀진 이상 왕이라 부를 수는 없다. 발로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왕이 되고 싶다는 말이 아니야. 이런 잘못을 보고 못 본체 할 수는 없을 뿐이다. 나만이 아니야. 아누아 후작도 핸드릭 백작도 시종장도 모두가 같은 생각이다.”
새파래진 얼굴로 나시아스도 끄덕였다. 델피니아의 중신들로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발로는 이어서 말했다.
“공표할 수는 없어. 하지만 공표하지 않으면 저 사람을 따라서 모여들 제후들에게 설명을 할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한번은 왕이라 불렀던 분이다. 단신으로 돌아와 분명히 열세에도 불구하고 와이베커를 함락시킨 뒤 몇 배나 되는 세력차를 물리치고 이렇게 마레바까지 밀어닥쳤으니까. 군대의 사기도 올라가 있겠지. 이 뒤로는 더욱더 저 사람에게 기대하는 자들이 모여들거다. 개혁파를 쓰러뜨릴 때까지는 좋아. 페르젠이나 그 일파 따위가 어찌 되더라고 내 알 바가 아니야. 하지만 나시아스 그 뒤엔 어떻게 되지?”
이 기세대로 간다면 저 남자는 아마 개혁파를 타도하고 코랄을 해방하리라. 시민들은 환호하며 저 남자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열광한 민중은 반드시 무어가를 형태를 추구한다. 설사 저 남자가 거부하려 한다 해도 행동을 함께 했던 제후들이나 시민들이 틀림없이 저 남자를 다시 왕좌에 세울 것이 틀림없다.
“나도 바로 며칠 전까지 그렇게 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력을 다해서 막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야. 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저 페르젠과 사이좋게 손을 잡는 꼴이 되었는가 말이다. 분별 있는 자들은 아마도 나를 개혁파에 굴복한 연약한 놈이라 욕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묵인할 순 없어.”
내뱉는 것 같은 쓰디쓴 말이었다. 발로와 같은 남자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로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보다도 힘든 각오가 필요한 선택이었으리라. 그리고 틸레든 기사단장은 다시 한번 필사적인 모습으로 라모나 기사단장에게 청했다.
“나시아스. 나는 그런 굴욕을 감히 함께 뒤집어쓰자고 이렇게 부탁하러 온 거다. 라모나 기사단이 국왕군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자연히 제후들의 기세도 쇠퇴할 거야. 도라 장군도 아마 백작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테지. 부탁한다! 지금이라면 아직 시간에 댈 수 있어!”
애원하는 친구의 얼굴을 나시아스는 고뇌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들에게 군댈르 물리게 하고 국왕군을 해산시키고, 그럼 폐하는, 그분은 어찌 되지? 반란군의 수령으로서 처벌을 받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사람에겐 잘못도 없어. 겉으로 드러나는 자리에서만 물러나 준다면 그걸로 돼. 그렇게 되면 그 사람도 무사할 수 있어.”
“일개 전사로서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어딘가로 잠적하라는 그런 말인가?”
“그래.”
힘차게 끄덕인 발로였다.
“이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아누아 후작은 다시 근위사령관에 임명될 거야. 페르젠도 약간은 너무 심하게 대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 이후로는 이쪽의 의견도 참작하여 정책을 세우겠다고 했어. 물론 지금까지 지극한 악행을 저지른 개혁파의 진용은 일소될 테지. 그 사람이 굳이 군대를 이끌고 콜랄으르 향하지 않아도 되는거야.”
“그렇지 않아. 그래서야 결국 페르젠 후작의 암약을 묵인하는채 아닌가.”
발로는 놀라서 검은 눈동잘르 크게 떴다.
“게다가 지금의 폐하께 손을 떼라고 말씀드려도 소용없다. 제후들에게 말한다 해도 이 정도의 대승리를 거머쥔 뒤다. 들을 리가 없어.”
“나시아스!”
노여움이 섞인 비명을 지른 발로였다.
“넌 대체 내 말 중에 뭘 듣고 있었던 거야! 저 사람에겐 왕관을 쓸 자격이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거냐?!”
“아니야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게 아니야!”
나시아스도 외치며 대답했다.
“네 이야기는 충분히 잘 들었다. 너의 각오도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어째서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뒤르와 왕의 자손과 지금의 폐하가 어딘가에서 바꿔치기를 당했다지만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거냐? 네 말도 시종장의 조사도 의심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납득할 수가 없어. 도라 장군도 그럴 것이 틀림없다.”
발로는 완고한 친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너, 자기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겠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발로는 두렵다는 듯한 목소리로 다시 확인했다.
“이대로 그 사람과 행동을 함께 한다는건 나를 적으로 돌린다는거야.”
나시아스는 저도 모르게 말을 삼켰다. 생각지 못할 일은 아니었지만 발로의 결의가 그렇게까지 굳다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웃지 못할 농담이로군.”
“이대로라면 농담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큰 소리로 부르짖는 발로였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까지 온 거다! 라모나 기사단이 저 사람이 반란군으로서 토벌 당하는 꼴을 누가 보고싶겠냐! 하지만 나에겐 선대 국왕의 조카라는 틸레든 기사단장이라는 의무가 있어! 왕위를 이을 자격이 없는 자가 대군을 이끌고 코랄을 향해 온다면 나는 틸레든 기사단을 이끌고 그 진군을 막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다!”
“발로. 나에게도 나의 의무가 있다. 신념도 있고. 그게 너와 엇갈린다 해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어. 나의 주군은 지금의 그분이다.”
커다랗게 눈을 뜬 발로였다. 달빛이 서로의 얼굴을 새하얗게 비추었다. 지금까지 필사적인 형상이었던 발로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독기 서린 미소를 만들어냈다.
“나시아스 그게 네 답이냐.”
심한 괴로움에 시달리면서도 라모나 기사단장은 확실하게 끄덕였다.
“아직 시간에 댈 수 있다고 너는 말했지만 이미 늦었어. 너무 늦었다. 국왕군의 존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라모나 기사단이 손을 뗀다 해도 그걸로 수습될 거라 생각되지 않아. 무엇보다 그분을 선봉으로 나는 여기까지 왔다. 이제 와서 물러날수는 없어.”
그 각오를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설득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발로는 경련하듯 긴장한 미소로 말했다.
“지독한 놈이다 너는.”
나시아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만나러 와준 친구의 마음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은 죄의식으로 가득했다. 발로는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목소리를 떨면서 천천히 말하고 있었다.
“대체 이 나를 보고 무슨 표정을 짓고 어떤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라는 거냐. 라모나 기사단을 적대시하라고? 그들은 반란군의 일파가 되었으니 이것도 전쟁인 단장 나시아스를 쓰러뜨리라고? 내 부하들을 향해 어떤 얼굴로 말하라는 거야?!”
포효하는 것 같은 비명이었다. 나시아스도 또한 비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발로. 라모나 기사단은 틸레든 기사단의 문장을 향해 공격하려들지 않을 거다.”
“그걸로 될 거라고 생각하냐.”
서슬 퍼런 검처럼 살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페르젠을 우습게 보지마. 그 녀석은 녀석대로 부리는 영주가 몇이나 있다. 영지에는 오천명이나 병력을 확보해두고 있어. 게다가 아누아 후작, 핸드릭 백작, 그리고 바로 나다. 총세력은 가히 3만에 가까운 수를 헤아리게 된다고.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너와 맞닥뜨리는 꼴이 돼.”
“.......”
“2천명의 기사단원을 반란군의 일파로서 죽일 것인지 연약한 놈이란 오명을 쓸 용기가 있는 공로자로 만들 것인지는 너에게 달렸다.”
나시아스는 그래도 끄덕이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의 그 마음은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발로 나도 폐하도 지금 이곳에서 물러설 수는 없는 사정이 있어. 네가 너의 신종에 따르듯 나의 신조를 다하고 싶다. 설사 너와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되는 일이 있다 해도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아.”
서로가 각자 믿는 길을 가자고 함축된 의미에 힘을 담았다. 생각지도 못한 결별의 말이 꽤나 타격이었는지 혹은 무척이나 의외였는지 발로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나시아스를 직시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짧게 이별을 고했다. 그 말만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런 형태로 재회하고 이런 형태로 이별을 고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참을 수 없어 얼굴을 돌리고 진영으로 돌아가려 한 그 뒤통수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오싹할 정도의 목소리였다. 돌아보자 발로의 모습이 달랐다. 뚜렷한 살기를 전신에 휘감고 검 손잡이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게 너의 답이라면 남에겐 양보 못한다. 지금 여기서 내가 끝장을 내주마.”
나시아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깔았다. 어제까지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된다. 자주 있는 일이다. 또한 모반자로 처형당하게 될 정도라면 아예 친한 사람이 나서서 손을 댄다는 선례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만두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발로의 성격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의 손에 죽게 할 정도라면 자신의 손으로 죽여주겠다고 생각할 남자였다.
“알았다.”
낮게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발로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나시아스에게 덤벼들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그 피하는 동작 때문에 충분한 태세를 취하며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크!”
내리치는 검을 겨우 막아냈지만 겹친 검의 압력에 눌려버렸다. 어떻게 쳐내고는 일단 떨어져 나왔다. 태세를 바로잡지 않으면 밀리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발로도 널리 알려진 굴지의 기사다. 하물며 나시아스의 실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노도와 같은 기세로 육박해 들어와 자세를 바로잡을 틈조차 주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완전히 방어전으로 도는 것 외에 나시아스에겐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자세로 언제까지나 받아 쳐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몇 번인가 휘둘러 온 발로의 검날이 나시아스의 검끝을 크게 쳐냈다. 그리고 빈틈이 생긴 상체를 밑에서부터 긁어 올렸다.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피하지 못했다. 왼쪽 어깨에 심한 고통이 내달렸다. 나시아스는 크게 자세를 무너뜨리며 베인 왼쪽 어깨를 감싸고 그 장소에 쓰러져 버렸다. 겨우 고개를 들자 자신을 죽이려는 남자가 검을 들어올린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검을 치울 기색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질질 끄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다. 오랜 친구의 숨통을 끊기 위해 틸레든 기사단장이 검을 내리치려한 바로 그때
“우앗!”
경악의 외침을 올리며 발로는 검을 놓칠 뻔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무언가가 강하게 팔을 때렸기 때문이다.
“누구냐!”
그 질문과 동시에 작은 사람 그림자가 둘 사이에 날아들었다. 리였다. 나시아스가 위험하다고 보고 돌을 주워 던진 것 같았다. 상처를 입고 쓰러진 나시아스를 등뒤로 감싼 채 신장 차이가 곱절으 될법한 상대와 대치했다.
“그쪽이야말로 누구야.”
상대의 의외의 모습에 발로가 놀라고 있었다. 단순한 어린애가 떡 하니 막고 서서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애가 나올 장소가 아니다. 뒤로 빠져라!”
“수상한 놈이 할 소리냐.”
“꼬맹이가!”
노성을 지르며 거침없이 베어버리려 한 발로엿지만 약간 상대가 나빴다. 일대일의 검 싸움에서 이 소녀를 이길 수 있는 자는 델피니아 전토를 찾아도 몇 명이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발로는 그런 사실을 당연히 몰랐다. 애초부터 격분하며 베려 들었으므로 허점투성이었다. 소녀에게 있어서는 목각인형을 베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휙 하니 몸을 낮추고 허리에 손을 댔다. 대검을 빼드는 동시에 상대를 베어 넘길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쓰러졌던 나시아스가 상처를 누르면서 필사적인 표정으로 외쳤다.
“리. 안돼! 베지마!”
슬쩍 놀란 눈으로 나시아스를 본 소녀는 금방이라도 뽑으려던 검을 간신히 멈추었다. 상대의 공격을 기다려 되받아쳤다.
“아니?!”
예상외의 반격에 발로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소녀는 용서가 없었다. 그 다리에 강력하게 힘을 싣고 격렬하게 칼날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단숨에 상대를 압박하여 그 손으로 검을 쳐 떨어뜨렸다.
“이 자식!”
발로는 분노했다. 개의치 않고 단검을 뽑아 들어 다시 덤벼들려 했지만 그 때에는 소녀의 검이 정확히 발로의 심장에 닿은 뒤였다. 움직이지도 못하게 된 상대를 날카롭게 바라보며 소녀는 등뒤의 나시아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시아스. 이건 누구야. 어째서 말렸지.”
“그건.... 발로야.”
아무리 소녀라도 놀란 표정이 되었다.
“월의 사촌이라는 틸레든 기사단장인가.”
“그래.”
눈살을 찌푸린 소녀는 이번엔 발로를 향해서 말했다.
“너는 나시아스의 친구라고 들었다. 어째서 친구를 베려고 하는거냐.”
“뭐 뭐 뭐냐 네놈은!”
“나는 그린다. 월의 친구이고, 그렇군. 국왕군의 승리의 여신이다. 대답해라. 어째서 친구를 베려고 했나.”
때에 맞춰 사람이 변하듯 여러 각지 표정을 보여주는 소녀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어조가 되어 있었다. 대답에 따라서는 금방이라도 오른손에 든 검으로 결론을 낼 것 같은 자세였다. 나시아스는 어깨를 누르고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리. 됐어 괜찮아.”
소녀는 잠시 나시아스와 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중이었지만 이윽고 어깨를 으쓱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발로 또한 나시아스와 돌연 나타난 소녀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발로에게 나시아스는 상처를 누르며 말했다.
“발로. 여기에선 물러나 줘. 어차피 이 상처로는 네 상대가 못돼. 너도 부상자를 상대할 생각은 없겠지. 언젠가 다시 다음 기회에 결판을 내도록 하자.”
“너는 여전히 지독한 소리를 하는군.”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린 발로였다.
“다시 한번 너를 베어야 한다니 난 싫다. 하지만 네가 어떻게 해도 그 사람을 편들겠다면 다음 번 만날 때 우리들은 적이다. 그때엔 군대를 가지고 결판을 내마.”
던지듯 말해버린 채 발로는 검을 줍고 휙 등을 돌렸다. 어딘가에 마중을 기다리게 해두었는지 한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고 나시아스는 말없이 그 뒷모습을 배웅하엿다. 소녀는 그런 나시아스를 올려다보고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들이란 귀찮군. 싸움도 목숨을 걸고 하니.”
“그것 참. 나도 그렇게 생각해.”
숨을 토해내며 주저앉아 버린 나시아스의 옷을 소녀는 재빨르게 찢기 시작햇다. 왼쪽 어깨와 머리카락 끝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다행히 찢어진 부분 그 자체는 그다지 깊지가 않았다.
“그래서 싸움 원인은 뭐야?”
“리야말로 어째서 여기에?”
“그 뒤에 본진에서 조금 소동이 일어나서 말야. 핸드릭 백작이 방문했어.”
“근위사령관 자격으로?”
“몰라. 하지만 분명히 사령관과 똑같은 자주색 외투를 입고 있었어. 도라 장군을 끼고 월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어.”
나시아스는 깊은 숨을 내뱉었다. 역시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무언가 묘하게 되어버린 것 같네. 도라 장군이 무지무지하게 무서운 표정을 하고 나시아스를 불러오라고 하더군. 그래서 쫓아왔어. 나가는 걸 본데다 길은 하나밖에 없고 말이야. 하지만 와보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살해된 것 같은 데다 덤으로 그 상대가 발로씨라니 어떻게 된 거야? 가렌스가 들엇다면 헤까닥 뒤집어질걸.”
“동감이다. 비밀로 해주겠지.”
“그럼 입막음 값. 대체 뭐야? 발로씨는 코랄에 연금당한 거 아니었어?”
나시아스는 일순 뭐라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국왕군의 존망에도 관련된 큰 사건이었다. 말을 골라야 했지만 -생각해보니 이 소녀가 국왕과 함께 비르그나에 나타났을 때부터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리.”
“왜.”
“혹시 그 폐하가 왕좌를 되찾으면 너는 어떻게 할 셈이지?”
“어떻게라니?”
“그러니까 그 뒤에 말이야. 계속 곁에 있어 드릴 수 있을까.”
소녀의 녹색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는 듯 깜박였다. 나시아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잘알수가 없다는 폼이었다.
“계속 곁에 있다니. 나시아스 나는 언젠가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야.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잘 알수없게 되었지만.”
“오래 있게 될 것 같다는 거야?”
“글쎄. 아무래도 월의 왕좌 탈환은 전도다난할 분위기니까 말이야.”
전도다난. 그야말로 전도다난이다. 응급처치를 끝내자 소녀는 말을 데리고 왔다. 나시아스는 사양하는 소녀의 말을 딱 잘라 거절하고 안장 앞에 태웠다. 그 편이 이야기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렇다해도 싸움의 이유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소녀가 고삐를 잡았고 말에 흔들리며 진영으로 돌아가는 길위에서 나시아스는 저 친구에 대하여 소녀에게 이야기했다. 들어줬으면 했다기보다 일단 입을 열자 멈출수가 없었다. 소녀도 거스르지 않았다. 등뒤에서 흘러나오는 추억의 옛 이야기를 함께 들어주었다.
“나시아스보다 다섯 살이나 어려?”
“그래. 처음 만난건 내가 열일곱, 발로는 너와 비슷할 정도였을가. 그때부터 몸집도 크고 무술에도 비범한 재능을 보였던 데다 사보아 공작가의 총애 받는 자제라는 점도 있었지. 눈에 뵈는 게 없다고 할만한 성격이었어.”
“바꿔 말하자면 건방졌다?”
“그거야 뭐. 그걸 건방지다고 하지 않으면 뭘 건방지다 할까 싶을 정도였지. 말하는 폼도 태도도 뻣뻣한 소년이었지. 무리도 아니지만 말이야. 두세살 많은 소년이라도 상대가 되는 건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시아스는 달랐지?”
“그래 나는 달랐지. 아무리 공작가의 자제라 해도 불과 열두살짜리 어린애에게 물러설 수는 없었으니까. 발로에겐 그 점이 신선했던 모양이야.”
끝도 없이 시건방진 소년은 주변 인간들이 모두 자신의 신분 때문에 물러선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느끼고 분개하고 있었다. 실력을 겨루는 데 신분이 무슨 관계가 있냐는 것이 소년의 생각이었다.
“나에게도 신선했지. 대귀족 중에는 뭐라고 해야 할까. 학문이건 언변이건 무술이건 이쪽에서 일부러 져서 체면을 세워주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말이야.”
소녀가 가볍게 웃었다.
“역시 어디에나 다 있구나. 그런 놈들.”
“그래. 어디에나 다 있어. 발로는 그 중에서 정말 드문 편이었지. 지는 것을 무엇보다 억울해했지만 일부러 져주는 것도 무엇보다 싫어했지. 그것을 굴욕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이였어. 그때문이겠지. 굉장한 노력파였어. 열다섯이 될 때쯤엔 나도 수고를 들여야 할 정도의 실력이 되어 있었지. 그렇다해도 엄청나게 자신만만하기도 하니까, 제멋대로인 망나니라는둥 너무 거만하다는 둥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 나야 그런 소리 들을 정도는 하고 있다고 평가하지만 말이야.”
즐겁다는 듯 이야기하는 나시아스 앞에서 고삐를 다루고 있던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응?”
“어째서 나시아스가 비교적 빨리 나한테 익숙해졌는지 알겠어. 면역이 있었던 거군.”
나시아스도 물빛 눈동자를 크게 뜨고는 성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의 조용한 라모나 기사단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소리로 소녀의 등에 기댈 듯이 몸을 비틀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웃으면 상처가 울려.”
소녀 쪽이 걱정이 되어 주의를 주었지만 나시아스는 듣고 있지 않았다.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아니아니. 당치도 않지. 발로에 비교하면 리는 멋진 숙녀야.”
“숙녀어?!”
무시무시하게 복잡기괴한 표정이 된 리였다. 무슨 죄로 자신이 숙녀라고 불려야 하느냐는 생각이 우선 떠올랐고 이븐에게 야생마라는 소리를 들었던 자신이 숙녀가 된다면 옛날의 발로는 미친개 정도로 취급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만약 아무렇지도 않게 함부로 친구를 베어 넘기기가 취미라면 그야말로 미친개다.
“잘도 그런 사람하고 친구하고 있네.”
“그런가?”
“위험하지 않아?”
“설마. 왜?”
“아까 같은 일이 맨날 있으면 위험할 거 아냐.”
나시아스는 깊이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아까 일은 내가 나빴어.”
발로는 감정이 격한 만큼 외곬인 남자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무엇이 보다 좋은 방법인지 아마 돌아버릴 정도로 고민했음에 틀림없다. 상처 입은 왼쪽 어깨가 실제 상처의 깊이보다 더한 고통을 전해주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렸을가. 계속되는 격한 공격 가운데 발로가 목소리로는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을 나시아스는 알고 있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반격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소녀가 막았던 것이다. 만약 발로와 같은 입장에 서게 되었다면 자신도 같은 일을 했을지 모른다.
“리.”
“왜?”
나시아스는 소녀의 등에 기대듯이 하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꾸미고 물었다.
“만약 폐하가 왕좌를 되찾지 못하신다면 어떻게 할래?”
“나시아스가 하는 말은 꼭 수수께끼 같아.”
소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달리 누구를 왕으로 한다는 거야. 나라에는 왕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민망할 정도로 무지하게 들었다고. 예전 임금님의 아이들은 모조리 죽었지. 왕가의 피가 이어진 공주님들은 아직 전부 어리지. 발로씨는 싫다고 하지. 게다가 페르난 백작이 말했지만 발로 씨에게 왕관을 준다는 건 사보아 공작가와 그 일족에게 왕관을 주는 게 된다는데. 대행으로 끝나지 않을 왕조의 교체라고 말이야.”
“백작이?”
“그래. 그것만은 안 된다고 백작은 그랬어. 얼토당토않은 일이 될 거라면서.”
나시아스는 낮게 신음했다.
“그렇겠군.”
“다행히 발로 씨가 왕관은 필요 없다고 해서 백작은 안심했던 것 같아.”
“아아 그래. 그 녀석들은 나를 완관으로 낚을 생각이라면서 꽤나 분개했지. 발로는 분명히 자신만만하고 대귀족으로 태어난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자기 분수는 잘 알고 있는 남자야.”
“그렇다면 마침 잘 됐잖아. 월은 시골 출신인데다 바보에 둔하고 앞뒤 꽉 막혔지만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능이 있으니까말야. 좋은 임금님이 될거야.”
“그래.”
대답한 나시아스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월은 가장 중요한 왕의 자격을 갖고 있지 않아싸. 시종장 브룩스가 근위사령관인 아누아 후작이 굴지의 호걸인 핸드릭 백작이, 그리고 발로가. 자신들의 적으로 돌아선다. 나시아스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강하게 입술을 깨물며 오열을 억눌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떤 추태를 보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등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텐데도 소녀는 돌아보지 않았따. 정면을 향한 채 잠자코 고삐를 붙잡고 있었다. 소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은 돌아봐서는 안 되는 때라는 사실을.
지금 뒤를 돌아본다면 또다시 보아서는 안될 것을 봐버리게 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진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걱정이 되어 어쩔 줄 모르는 상태의 가렌스였다. 언제나 냉정하고 사려 깊은 주인이 자신에게 아무 말도 없이 단독행동에 나선 것만으로도 놀랐는데 겨우 돌아왔나 했더니 부상을 입은 바람에 단번에 상황이 극치에 다다른 듯 했다.
“나시아스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부상은?!”
“미안하네. 걱정시켰군. 대단한 상처는 아니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큰일이잖습니까! 전사, 이건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소녀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나시아스를 보았다. 비밀로 해달라고 한 만큼 말하기 힘들었다. 나시아스는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미안했어. 달빛에 끌려서 나선 것은 좋았지만 혼자서 돌아다니는 건 안될 일이로군. 아마 강도였던 것 같아. 불량배가 덮쳤는데 방심하다 당했어.”
가렌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시아스님 농담은 그만두십시오. 라모나 기사단장에게 부상을 입힐 정도의 불량배가 어디 있단 말씀입니까?”
“.......”
“조금 전 갑자기 코랄에 유폐되어 있었을 터인 핸드릭 백작이 폐하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내밀한 이야기라 하여 저희들도 일체 폐하의 천막에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백작이 돌아가시나 했더니 이번엔 도라 장군이 鬼氣귀기를 펄펄 뿜으시면서 나시아스님께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가렌스 미안하네. 지금은 아무 말 할 수 없어. 도라 장군은 막사에 계시겠지?”
“예. 아....”
말하고 있는 옆에서도라 장군이 어깨로 숨을 쉬며 다가왔다. 왼쪽 어깨가 피투성이가 된 나시아스의 모습에 역시나 경악했다.
“나시아스경. 어찌 된 일인가.”
“면목 없습니다. 방심한 차에 불량배에게 당했습니다.”
“심한 출혈 아닌가. 어서 치료하도록.”
“아니 별로 대단한 상처도 아닙니다. 제 일보단 뭔가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듣겠습니다.”
“음.”
끄덕인 장군이었지만 가렌스와 소녀를 슬쩍 곁눈질했다. 소녀는 눈치채고 가렌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자. 방해하면 미안하잖아.”
도라 장군은 가볍게 인사하고 감사를 표한 뒤 나시아스를 재촉하듯 천막으로 들어갔다. 가렌스는 아무래도 불안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리를 내려다보며 물어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나도 잘 몰라. 다만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닌 건 분명해.”
엄중하게 사람을 물리치고 나시아스와 단둘이 남게 되자 도라 장군은 우선 상처의 상태를 물었다.
“보이는 것만큼 심하진 않습니다. 그냥 긁힌 정도입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나시아스경. 귀공에게 부상을 입힐 정도의 불량배란 설마....”
나시아스는 보일 듯 말 듯 끄덕이고는 말했다.
“가렌스에겐 아무 말씀 말아주십시오. 날개를 편 커다란 독수리에게 당했습니다.”
도라 장군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비약하는 거대한 독수리는 틸레든 기사단의 문장이었다.
“발로경도!”
“지금 이때 손을 떼라고 권유하더군요. 장군도?”
“그렇게 하면 이 이상 소동이 커지지 않고 끝난다는 게 핸드릭 경의 견해다. 나시아스경. 나는 그 건에 대해 귀공에게 묻고 싶네. 친우의 권유에 따를 의지가 있는지를 말일세.”
“장군. 동의했다면 이런 상처는 입지 않고 끝났을 겁니다. 리가 와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그 친우에게 목이 날아갔을 참이었습니다.”
도라 장군은 고뇌 깊은 표정이면서도 입가에 쓴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분도 의외로 순결한 성격이니 말일세.”
“저도 장군께 묻고 싶습니다. 시종장의 조사결과를 들으셨다고 생각합니다만.”
“음.”
“장군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아기가 뒤바뀌었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천막의 바로 밖에 버티고 있다 해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이루어진 대화였따. 장군은 무언가를 노려보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 답도 할 수가 없네. 다만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의문스럽게 생각한 건 확실하네.”
“폐하의 귀에도 이 일은 벌써?”
“음.”
“그래도 그분은 지금 이곳에서 군대를 해산시킬 생각은 없으시겠지요.”
“무리야. 너무 늦었어. 아마 페르난이 죽기 전이라면 폐하는 얌전히 핸드릭 경의 말에 따라 군을 해산하셨겠지만 무서울 정도로 격앙되어 계셨네.”
“역시 이대로 코랄을 향하신다고?”
“할말이 있다는 건 그것이었네 나시아스경.”
도라 장군은 말을 끊고 이 또한 두렵다는 듯한 눈매로 나시아스를 직시했다.
“폐하는 자신에게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 이상 우리들이 신하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걸세.”
눈을 크게 뜬 나시아스였다.
“그것은 저희들에게 코랄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폐하는 우리들을 의리로 묶어두고 싶지 않으신 거겠지. 분명 왕가의 피를 지니지 못한 상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따위는 어리석음의 극치야. 우리들은 델피니아 기사이자 왕가의 신하이니까.”
“장군!”
“하지만 나시아스경. 나는 지금 여기에서 손을 떼는 짓은 절대 할수없네. 그런 짓으르 해 보게. 뭐든지 페르젠의 계략대로 흘러가 버릴 테니.”
장군의 눈동자에도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놈 감쪽같이 핸드릭이나 발로 경의 충성심을 파고 들었던 게지. 이걸로 우리들이 바라는 대로 손을 떼어보게. 페르젠은 나라를 구한 공신이 되지. 아누아 후작도 브룩스도 그 녀석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고. 하물며 왕가에 가장 가까운 남자로 발로 경이 왕이 되어봐. 사보아 공작가는 뛸 듯이 기뻐하며 페르젠 놈에게 감사하겠지. 이것 또한 놈이 바라는 바야. 델피니아는 페르젠의 사유물로 전락하는 거지.”
“저도 그러리라고 느꼈습니다.”
“더욱 문제인 것은 폐하의 진퇴 문제다. 핸드릭 경은 이대로 손을 떼어 준다면 보고도 못 본 체 하겠다고 했지만.”
“발로도 그렇습니다. 일개 전사로서 잠적해준다면 폐하도 무사하실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만.”
장군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말일세. 저 페르젠이 폐하를 자유의 몸으로 내버려 두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네.”
나시아스도 끄덕였다. 홀홀단신으로 돌아와서 순식간에 군사를 모아 2만의 정부군을 격파해 보인 남자였다. 물론 그것이 저 남자 혼자의 힘은 아니다. 반 이상은 왕가의 핏줄이라는 것에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운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나 도라 장군을 비롯하여 이 사람이라면 걸어도 좋다고 생각하게 하는 무언가가 이 남자에겐 있었다. 그러한 것을 무턱대고 내버려둔다면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닌가.
이 정도는 모를 페르젠 후작이 아니다. 발로나 핸드릭 백작에겐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지만 도라 장군이나 나시아스에게 후작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가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도라 장군은 이를 갈고 있었다.
“이것은 이미 고집이다. 델피니아 기사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왕가의 신하로서 잘못된 선택이라 해도 상관없어. 설사 반역자의 오명을 뒤집어쓴다해도 페르젠의 각본대로 움직여줄 것 같은가!”
“동감입니다. 저 분은 왕이 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페르젠 이하의 개혁파를 쓰러뜨릴 수 있는 건 저 분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델피니아에 필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힘차게 끄덕였다.
“이 일에 대해서는 딸에게도 타르보에게도 말하지 않겠네. 괜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앟아.”
“저도 가렌스에게는 숨겨두겠습니다. 다만.”
“뭔가?”
“저 소녀에게는 말해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발도우의 딸 말인가? 그러나 무용은 있겠지만 그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네. 이런 비밀을 감싸안고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쓴웃음을 지은 나시아스였다.
“장군.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는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보고 싶습니다.”
“호오?”
“와이베커를 함락시키고 바로 이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반은 폐하의 힘 덕분이었지만 나머지 반은 저 소녀의 존재에 의한 것이기도 합니다. 저희 기사단의 병사들이 저 소녀를 어떠한 눈으로 보고 있는지 장군께도 보여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 말에 도라장군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심정은 내쪽에 있는 젊은 놈들도 마찬가지이긴 하지.”
“그녀는 틀림없이 우리들에게 운과 勝氣승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나시아스는 생각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한 그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판단할지 저는 흥미가 생겼습니다. 분명 큰 소리로 떠들고 다녀도 곤란합니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답을 주지 않을까요”
나시아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장군도 잘 알 수 있었다. 페르젠의 계략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거짓이 아니다. 다만 이대로 나아가는 것에도 그다지 자신이 생기질 않았다. 그것이 현재의 상황이었다. 도라 장군은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발도우의 신탁을 받는 대신 그 소녀의 조언을 받아보겠다는 게로군.”
“예.”
나시아스도 끄덕였다.
그때 소녀는 남자의 천막에 얼굴을 내미는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핸드릭 백작의 방문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천막 주변은 묘하게 조용했다. 조심성 없게도 경비조차 서있지 않았다. 별 신경 쓰지 않고 안에 들어갔다가 소녀는 깜짝 놀랐다. 남자는 이쪽에 반쯤 등을 돌린 채 탁자 앞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까진 좋지만 탁자 위에는 다섯 개나 되는 술병이 빈 채로 있었다.
“잠깐 월. 설마 이거 전부 혼자서 마신거야!”
황급히 다가가서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곤 다시금 움찔했다. 남자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몸속부터 얼어붙을 것 같은 눈매르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물어보는 소녀의 목소리도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마주 보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지시했다.
“자 마셔.”
소녀는 거역하지 않고 술잔을 받아 들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꽤 센 술이었다. 이래서야 머리 꼭대기까지 술에 절어버리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졌지만 남자는 최소한 겉보기로는 평소와 같았다. 태연자약한 상태로 꼿꼿한 채 천천히 잔을 기울인다. 얼마든지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리.”
“왜.”
“네 아버님에 대해 묻고 싶은데 괜찮겠냐.”
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고 아무 말 없이 상관없다는 시늉을 했다.
“피를 나누지 않은 아버님이라고 햇지만 어떤 분이셨나?”
어깨를 으쓱한 소녀였다.
“이상한 걸 묻는군.”
“그래?”
“그래. 그렇다면 페르난 백작은 어떤 아버지였어?”
이 말에 남자는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천장을 올려다보고 팔장을 낀 채 끙끙거리다 코 옆을 긁고 결국에는 한 손으로 턱을 감싸더니 웃어 보였다.
“좋은 아버지였지.”
“그지? 마찬가지야. 달리 말할 방도가 없어.”
소녀도 웃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 사라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다고 이렇게도 강렬하게 바라는 것일까.
“리.”
“왜.”
“만약에 말이다만.”
“응.”
취해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남자의 말은 평소보다 느릿느릿하고 억양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너 나한테 왕관을 씌워주겠다고 말했지만 만약에 말이다. 내가 국왕 자격을 갖지 못했다면 어쩌겠냐.”
완전히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어 고개를 기울인 소녀였따.
“그건 새로운 수수께끼이거나 뭔가 한 거야?”
“왜?”
“아까 나시아스도 같은 소리를 했거든.”
“하항. 도라 장군에서 들었을까?”
“뭘?”
“내가 뒤르와 왕의 자식이 아니라는 소리를 말이다.”
스르륵 흘러나온 말에 소녀는 마시려고 했던 손길을 멈추고 술잔을 상에 내려놓앗따.
“뭐라고?”
“뭐라고 라고 해도 말이야. 아니 나도 뭔 소리냐 묻고 싶지만 좌우지간 뭐 그런거란다.”
남자는 성실한 태도로 끄덕이고 있었다. 애교마저도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소녀 족은 단번에 표정이 험악해진 뒤였따. 술기운으로 치부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1년 꼬박 걸려서 네 정체를 철저하게 조사한거 아니었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야 잘못되었다고 안 모양이야. 관리들이 하는 일이란 어딘가 꼭 빠져있다니까.”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태도야말로 상당히 나사가 빠져있었다. 안색도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마시기를 계속하며 멍청한 표정을 지우지 않는다.
“나야 뭐 어느 쪽이건 상관없지만.”
“월.”
“아버지가 들었다면 꽤나 열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이건 개죽음이라고 해도 될 정도니.”
“월!”
소녀가 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남자는 나직하게 웃었다.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완전히 틀린 무척이나 위험한 웃음이었다.
“지금도 얘기한 대로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델피니아 국왕은 될 수 없는 인간인 것 같다.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말이다. 국왕군은 여기에서 해산이다.”
“도라 장군이 그렇게 말한 거야?”
“아니 내쪽에서 말했어. 그들은 제대로 된 델피니아의 신하들이니까 말이야. 반역자의 동료로 만들 순 없지.”
“그런건 혼자서 정하는 게 아니야. 게다가 군대를 해산시키면 대체 넌 어쩔 셈인데?”
남자는 다시 한번 웃었다. 틀림없이 독을 품은 웃음이었다.
“어쩔까 생각중이다. 왕좌도 왕관도 나는 더 이상 갖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 대신 뭐가 갖고 싶은데?”
냉정한 목소리였다. 남자는 웃음을 거두고 소녀를 마주보았다. 지금의 이야기는 이 소녀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야말로 그런 것 따윈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듯 깊은 녹색 눈동자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라스트의 변경에서 이 소녀가 목숨을 구해주었을 때 자신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몸이었다. 아버지를 구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길도 보이지 않는 꿈에 지나지 않았다. 왕위 찬탈이라는 오명을 쓰고 유랑하는 왕 따위를 과연 누가 편을 들어줄까 의심하며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을 수는 없으니까 돌아왔던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너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가 됐다. 나는 군대도 국왕 자격도 가지지 못한 일개 자유전사라는 거다.”
“내가 아군이 되어주기로 한건 처음부터 그냥 자유전사였어.”
대꾸한 소녀였다.
“네가 전 왕의 아들이건 아니건 나하곤 상관없다. 왕관을 씌워주겠다고 했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아니고 내 맹세는 너의 바라는 바를 들어주겠다는 것. 그것을 돕겠다는 거다.”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소녀는 다시금 말했다.
“지금의 너에겐 왕관보다 갖고 싶은 게 있는 것 아냐?”
“아아.”
신음하듯 낮게 말한 남자의 손에 힘이 모였따. 금이 갈 정도로 강하게 술잔을 움켜쥐었다.
“왕관도 왕좌도 필요없어. 나에겐 받을 자격도 없다는 걸 알았다. 기쁘게 남에게 넘겨주지. 하지만 단 한가지 양보할 수 없는게 있다.”
남자의 손안에서 두터운 유리 술잔이 산산이 깨져나갔다. 검은 눈동자에 장절한 빛을 떠올리고 전신에서 살기를 뿜어 올리며 남자는 오한이 들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바라는 것은 페르젠의 목. 그것 하나뿐이다.”
- 4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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